http://www.zoglo.net/blog/jinchanghe 블로그홈 | 로그인
김장혁
<< 11월 2024 >>
     12
3456789
10111213141516
17181920212223
24252627282930

방문자

홈 > 소설

전체 [ 487 ]

107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85) 댓글:  조회:1547  추천:0  2017-10-17
                             12. 고무신 한 짝       여름 해는 길었지만 대지를 더 데우지 못하는 것이 아쉬운 듯 서서히 넘어 갔다. 서산마루는 저녁노을에 누르스름하게 익다가 벌겋게 타 번졌다. 패용천산과 칼산은 톱날 같은 이빨로 뻘겋게 익은 해를 통채로 천천히 씹더니 꿀꺽 삼켜버렸다.       상순은 사원들에게 감자랑 멧돼지고기랑 인구별로 고루고루 나눠준 후 집에 들어왔다. 애들은 뛰놀다가 아버지 세 귀 눈을 보자 겁이 나서 벽 밑에 두 손을 가져가며 물앉았다. 한 구들 들어앉은 딸애들을 보자 상순은 신경질부터 잔뜩 났다. “이 쌍 가시나 새끼들이, 저리로 피하지 못해? 앉을 자리도 없이 한 무리나 들어앉아 있니?"      그는 명옥을 가로보았다. "낳으라는 아들은 낳지 못하고 맨 계집애들만 줄줄 낳았어. 신경질이 나 어디 살겠니!” 명옥은 남편의 독기어린 세귀눈을 보고 애들에게 나가 놀라고 가만히 손짓했다. 그녀는 남산만한 배를 뚱기적거리면서 고방에 들어갔다. 상순은 고방에 따라 들어가 드러누운 명옥을 보고 물었다. “어째 해산할 거 같소?” “양, 아마 그런 거 같소.” 상순은 아들을 보려는 일루의 희망을 품고 뒤울안에서 불쏘시개로 둔 누런 벼 짚 단을 들여다 풀어 고방 구들에 폈다. 그리고 아내를 부축해 두툼히 깐 벼 짚 우에 눕혔다. 상순이 고방에서 나와 손을 맞잡고 아들을 낳았으면 마음 속으로 빌었다. 한참 후에 고방에서 “응아, 응아.” 하고 울음소리가 났다. “뭣이오?” 상순은 고방에 달아 들어가며 다급히 물었다. 한참 후 고방에서 맥없이 나오는 상순의 입에서는 푸념질인지 감탄인지 맥없이 흘러나왔다. “점점 똑똑한 거 낳는구나.” 애 울음소리를 듣고 남동생을 낳았는가고 뛰어 들어온 순자는 아버지에게 “남동생입니까?” 하고 물었다. 상순은 “너 어미 그런 재간 있다더냐?” 하고 김빠진 공처럼 맥없는 말을 하며 집에서 훌쩍 나가버렸다. 저녁에 상순이 집에 들어왔을 때 명옥은 갓 낳은 다섯째 딸 정숙에게 젖을 먹이면서 안아보라는 말도 감히 하지 못했다. 2년 전에 금자를 낳았을 때 딸이라고 상순은 생일도 제대로 쇠지 않았다. 그런데 아들을 낳지 못하고 또 딸 정숙을 낳았으니 갓 난 딸은 태어나자마자 푸대접을 받기 마련이었다. 저녁을 대충 먹은 상순은 한숨을 땅이 꺼지게 후 내쉬면서 또 바깥으로 나갔다. (웃새집 사랑 칸에 든 스님부터 처리해야겠어! 어디서 감히 미신사상을 퍼뜨려?!) 상순은 스님한테 속힌 것 같아 생각할수록 분통이 터졌다. (이젠 마흔이 다 됐는데 아들이 어데서 생겨? 쳇, 괜히 헛소리를 해서 내 애간장만 태웠지.) 상순은 그 길로 웃새집으로 스적스적 걸어갔다. 그는 큰집 큰아버지와 새 큰어머니께 문안인사를 드리고 사랑에 든 스님을 찾아갔다. 스님은 우쭐 일어나기까지 하면서 “김 서기!” 하고 인사하였건만 상순은 어두운 그늘이 비낀 집안에서 그 놈의 빡빡 깎은 중대가리를 보기만 해도 역겨웠다. “작작 너덜거려! 이게 언제라고 미신사상을 퍼뜨려? 구 사회 낡은 물건 짝들을 가지고 꺼져!” “건 왜?” 중은 어안이 벙벙해 사랑방에서 나가려고 하지 않았다. “우리 집 여편네가 마흔이 다 됐는데 아들을 어떻게 낳는다고 미신을 퍼뜨려?” “아, 그 일 말인가요?” 중은 상순을 향해 합장하고 눈을 스르르 감더니 뭐라고 주문을 외우는 것이었다. “뭐 하는 짓인가?” 중은 천천히 눈을 뜨더니 입을 무겁게 열었다. “시주님, 관세음보살, 나무아미타불. 시주님은 꼭 몇 해 후에 금덩이 같은 아들을 얻게 되나이다.” “흥! 또 그 소린가! 내 여편네는 이젠 서른 일곱인데!” “녹태나 사슴 피 같은 보약을 쓰면 낳을 수 있느니라.” 상순은 곧이듣지 않았다. “쳇, 우리 여편네 아들을 낳으면 해 서산에서 뜨겠다.” “아니오. 몇 해 전에도 말씀 드렸지만 그 집엔 이제 천지신명을 타고 나서 황소가 밟아도 우그러들지 않을 옥동자가 태어날 게요!” 상순은 중을 삿대질하며 욕설을 퍼부었다. “네 이 더러운 중놈아, 내게 그런 요망한 소리를 쳐서 이 마을에 남으려는 건가? 작작 거짓말을 하고 이 마을에서 꺼져! 내가 민병들을 데려다 끌어내다 처단하기 전에!” 중은 보짐을 싸들고 떠나면서도 합장하더니 상순을 보고 진심에 어린 말을 했다. “꼭 명심하오. 그 집 사람에게 녹태를 사다가 대접하오. 그럼 꼭 아들을 얻을 수 있소.” 상순은 반신반의하면서도 호주머니에서 엽전 몇 잎을 꺼내 주었다. “로비로 쓰오." 그는 목소리를 낮췄다. "내 줬다고 누구하고도 말하지 마오.” “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시주는 꼭 복을 받아 아들을 받아안을 거요. 화음청주,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중은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더니 바깥을 나가더니 팔을 휘휘 활개 치며 마을을 떠나갔다. 상순은 웃새집에서 나와 토성 쪽으로 오면서도 중의 말을 생각하며 중얼거렸다. “마흔에 아들을 낳는다고? 흥! 서산에서 해 뜨겠다.” “아들을 낳으면 낳았지. 나를 보오.” 상순은 머리를 돌려 여자 목소리 나는 토성 옆의 우물을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 물동이를 인 춘실이 눈에 띄었다. 상순이 지나치려 할 때다. 춘실은 물동이에서 흘러내리는 물방울을 손으로 훔치면서 그를 불러 세웠다. “여보, 어째 우리 집 나그넨 데리고 오지 않았소?” “여보라니?!” “우리 해월이 앓는데 좀 봐주지 않겠소?” "아니, 모질 앓소?” "양, 병원에 실어가야 되잖겠는지 모르겠소." "그래 어쩌오?" “당원이란게 인민군중 곤난도 관심하잖겠소?” 상순은 가자하다가 주춤 멈춰 섰다. “난 의사도 아닌데 어쩌오? 래일 낮에 병원에 데리고 가 보이오.” “밤중에 급병이 도서면 어쩌오? 밤에 무서워 어떻게 진수해까지 혼자 앨 데리고 가오?” 상순은 마지못해 춘실을 따라 갔다. 어둠이 두툼하게 깔린 마당에 들어서니 집안은 등불도 켜지 않아 어둠 컴컴했다. 춘실이네 황둥개가 꼬리를 치며 달려오자 상순이네 검둥이가 달려와 안고 깨물고 하며 함께 끼깅거리며 뛰놀았다. 상순은 좀 주춤거리었다. 춘실은 집안 물독에 물을 부어놓고 마당에 나와 상순의 팔소매를 끌어 집안으로 들어갔다. “앓는 애는?” 상순이 윗방에 들어가면서 물을 때었다. "여기 애 있소.” 상순이 수들에 올라가려고 할 때다. 어둠 속에서 춘실은  상순을 와락 끌어안으며 뒤로 물앉는 것이었다. “왜 이래?” “내가 앓는 단 말이오. 그래 옛 정분을 다 잊었소?” 상순은 덴겁한 나머지 춘실의 손을 뿌리치며 화닥닥 일어났다. “가정이 있는 사람들이 웬 옛 정분이오?” “나가면 소릴 칠 테야!” 상순은 마구 끌어당기는 춘실을 뿌리치며 문께로 나갔다. “도적이야!” “도적을 붙잡아라!” 뒤에서 춘실의 고함소리가 울렸다. “아차! 잘 못 걸리겠다!” 상순은 함정에 빠질까봐 한 짝 신을 신지도 못한 채 후닥닥 냅다 뛰었다. “사람 살리오! 도적이야!” 춘실의 고함소리에 숱한 사람들이 꾸역꾸역 모여들었다. 사람들은 춘실이네 집에 등불을 밝히고 여기 저기 살피면서 춘실과 사건 경과를 물었다. “나도 모르오! 어떤 도적이 우리 집에 기어들지 않았겠소? 내 소리 치니 달아났소!” 마을 사람들은 웅성거렸다. “누굴까?” “글쎄. 무슨 도적이 왔을까?” “아마 멧돼지고기 욕심나 나그네 없는 집에 뛰어들었겠지.” “이게 누구 신이오? 분명 남자 신인데.” 그때 성수가 마루바닥에서 허연 고무신 한 짝을 주어들고 소리쳤다. “그게 도적놈의 신이겠소.” “옳소. 도적놈이 미처 신지 못하고 도망친게 분명하오.” “무슨 도적놈이 신을 벗고 이 집 안에 들어갔겠소?” 마을 사람들이 이러쿵저러쿵 의논이 분분했다. “아마 도적이 급히 도망치다나니 문턱에 걸려 벗겨졌겠지.” 모두들 보니 춘실이네 집 문턱이 확실히 높았다. 성수는 신짝을 들고 등불을 빌어 두루 살피면서 “이 신짝의 주인이 누군가 밝혀내면 도적을 붙잡을 수 있을 게요. 이제 김 서기한테 이 신짝을 가지고 가서 사건을 보고해야지.”라고 하며 상순이네 집 쪽으로 걸어갔다. 한편 상순은 선불 맞은 사슴처럼 춘실이네 집에서 빠져나와 저 멀리 태평강 가로 달아났다. 때마침 금옥이 맏아들 칠군과 함께 오빠네 집으로 놀라오다가 밤중에 누군가 춘실이네 집에서 와닥닥 뛰어나와 닫는 것을 보았던 것이다. 금옥은 뒤에서 “도적이야!” 하는 소리를 듣고 십중팔구 짐작이 가는지라 칠군을 오빠네 집에 보내고 자기는 춘실이네 집에 갔다가 마을 사람들의 신짝 말을 하는 것을 보았다. (저걸 어쩌나? 분명 오빠 신인데.) 그녀는 급히 오빠네 집에 가서 다른 고무신을 주어들고 오빠가 달아난 태평강 가로 남 몰래 달려갔다. 그는 아름드리 버드나무숲 속을 돌아다니면서 나직이 “오빠, 오빠-” 하고 불렀다. 그때 태평강가 버들방천에서 서성거리던 상순은 뜻밖에 조개덕의 금옥의 목소리가 나는 것을 듣고 놀랐다. 그는 달빛을 빌어 확실히 금옥인 것을 보고서야 다가왔다. “넌 어째 여기 왔니?” 금옥은 달빛 속에 고무신을 내밀었다. “이걸 신고 그 짝짝 신을 태평강에 버리오.” “음, 알았다.” 상순은 한 짝 밖에 없는 신짝을 태평강 물에 던졌다. 출렁! 고무신은 억울함과 달빛과 함께 출렁이는 강물에 실려 떠내려갔다. 상순은 고무신을 갈아 신고 금옥과 함께 마을로 들어갔다. 그때 토성 밑에서 자기를 찾아다니던 성수를 만났다. “어, 김 서기, 어디를 갔다 오오?” 상순은 짐짓 모르는 척하면서 “양, 내 조개덕 여동생네 집으로 갔다 오는 길이오. 무슨 일이 있소?”라고 되물었다. 성수는 상순의 발부터 내려다보더니 한 짝 고무신을 내밀었다. “이 신을 보오. 웬 도적놈이 집에 뛰어들었다가 신짝이 벗겨진 채 도망쳤소?” 상순은 신짝을 받아 두루 살펴보는 척 하더니 “허, 도적이라니? 뉘네 집에 도적이 들었댔소?” 하고 반문했다. “내 형네 집에 도적이 들었잖아.” “음, 그랬구먼. 내 조사해볼게. 이 신 임자만 찾으면 도둑이 밝혀질 게요. 근심하지 말고 모두 돌아가오. 동네 부산하게 떠들지 말고.” “양, 파출소에 알리던지.” “내 알아서 처리할게.” 성수는 상순의 발에 고무신이 신겨져 있는 것을 본 후 시름 놓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는 나머지 고무신짝을 부엌에 걷어 넣고 불을 달았다. (춘실이 왜 저러지? 진짜 날 함정에 빠뜨리려고 그랬을까? 부부 인연은 없어도 원수는 아닌데. 알고도 모를 일이야.) 이튿날 상순은 범바위골로 떠나게 됐다. 그는 고무신짝을 개 물어 갔는지 없다 하고 그 사건을 얼버무려 버렸다. 성수나 학수나 모두 그 말을 반신반의하면서도 어쩌는 수 없었다.       상순은 물을 길으러 우물로 갔다가 춘실과 딱 마주쳤다.       "어마나!" 춘실은 지은 죄 있는지라 주춤 멈춰섰다가 동이를 내리워 안고 집 쪽으로 발뺌하려고 했다. "서오." 춘실은 몸을 홱 돌렸다. "아이구머니, 간 떨어지겠다." 그녀는 버들잎 같은 눈섭을 치켜올리며 대들었다. "왜? 날 때려죽이겠니?" 상순은 주위를 둘럴보고 인기척이 없자 춘실한테 한발 다가서며 나직이 말했다. "어쩜 그럴 수 있소? 어째 날 바람 피웠다고 물어먹을 예산이오? 어쩜 함정을 파놓고 빠뜨리자고까지 하오? 진짜 그렇게 음험할줄은 몰랐소. 제 량심 있소? 그런다고 내 당신과 살 거 같소. 우린 둘 다 이젠 가정이 있고 자식들도 많잖고 뭐요? 이젠 내하구 살 궁리는 단념하오. 제발 날 좀 놔주오." 춘실도 할 말이 있었다. "야, 누가 너처럼 제 친아들도 모르구 가정 살림살이도 모르는 놈과 산더더니, 퉤, 더럽다, 더러워!" 상순은 "친아들"이란 말에 드레박을 잣다가 주춤 멈춰 섰다. "백준이 이젠 연길에서 중학교를 다니는데. 흥! 이때까지 해준게 뭐냐? 언제 한번 찾아가 본적이라도 있니?" 그 말에 상순은 그만 드레박 자새를 활 놓았다. 자새가 핑그르르 돌아갔다. 드레박이 우물 안에 철렁 떨어졌다. 상순도 마음이 아팠다. 백준은 그와 지춘실의 첫사랑 쓴 열매가 아닌가. 아버지 반대로 파혼하다나니  연길 백과부네 집에 주었던 것이다. 그 일을 생각할 때마다 상순은 가슴이 미여지는 것만 같았다. 상순은 우물 안을 들여다보면서 드레박을 간신히 줄에 걸어 자아 올리며 말했다. "미안하오. 백준이 이름이나 고치오." 지춘실은 새된 소릴 질렀다. "뭐라고?  안돼." "우리 아버지 벌은 다 '준'자 돌림이야. 기준, 창준, 관준..." 지춘실은 허리에 손을 찌르고 앙천대소했다. "야, 야, 내 애를 낳으면 딱딱 너네 애비벌 된다. 너네 애비 생각만 해도 악이 난다. 그 영감 아니면 백준을 남을 줬겠니?" 상순은 세귀눈을 흘겼다. "명옥이 나보다 뭐 더 좋다고 너 애비 날 막았다니?" "또, 또, 그 말 꺼내겠니?" "흥! 꺼내면 어째?" 춘실은 어글어글한 눈을 치켜뜨며 두덜거렸다. "하긴 명옥이 인물이 나보다 예쁘고 딸을 명태드럼처럼 줄줄 나아서 오죽 좋겠느냐? 호호호." 상순은 춘실을 쏘아보며 정색했다. "명옥은 못 생겼지만 너처럼 간사하고 음험하진 않아. 량심과 효성이 있고 너처럼 변덕스럽진 않아."  춘실은 억울한듯이 입을 쫙 벌리고 상순을 손가락질하며 한참동안 말하지도 못했다. 이윽고 그녀는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더니 숨을 돌려 간신히 입을 열었다. "얘, 상순아, 내 아들 낳지 않았으면 너네 영월 김씨네 무슨 개판 됐는지 아니? 대 끊어질번 했다는 걸 잊지 말라. 백준인 너네 집 기둥이라는 걸 잊지 말라. 홀대하기만 해봐라. 가만놔두지 않겠다. 명옥이 그런 떡돌 같은 아들 낳는 재간이나 있니? 이젠 마흔이 다 됐으니 모든게 끊났다. 백준이 아니면 넌 아들이나 있겠구나. 흥!" 상순도 물러서지 않았다. "싹 걷어치워. 명옥이 아들 낳는 재간없다구? 순자 우에 아들 셋이나 낳은 거 잊었느냐? 지금 생각해도 그때 일본 놈들 세상에 너무 가난해 약도 온전히 못 쓰고 굶겨 죽인게 불쌍하다. 다신 그 말 꺼내지 말라." 춘실은 깨고소해하는 표정을 지으며 입귀로 계속 횡설수설 악담을 흘렸다. "너 애비 도깨비 의사돼서 그랬다. 왜 약담배 먹여 죽였다는 말은 안해?"   "악담 그만하지 못하겠니?" 상순이 세귀눈을 부릅떴다. "에그머니!" 춘실은 저쪽에 물동이 안고 도망치려고 했다. 상순은 나지막이 부탁했다. "내 말 좀 듣소. 그 애 이름 백호라고 고쳐라." "백호?" 춘실은 동이 안고 되돌아섰다. "그래, 우리 맏아들 얼마나 좋은 이름이냐?" 지춘실이 뜻밖에 수긍했다. "'우리 맏아들'?  뭐? 백호? 호호호. 그래, 백호로 키워서 네놈새끼를 잡아먹게 하지 않는가 봐라. 호호호." 상순은 자못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 "마을에 돌아다니면서 쓸데 없는 소릴 작작 해라." "어째? 겁나니? 내 입이 터지면 넌 끝장날줄 알아라. 너 고무신짝 한짝 어쨌니? 허, 어느새 새 신 사다 싣었어?  신짝 바꿔 신고 다니면 단가 해? 마을 사람들 숱한 눈 못 속여." "쉿-" 상순도 저쪽에서 다가오는 명옥을 보자 식지를 입술에 가져다 댔다. "어째 겁나니? 흥! 당지부 서기는 고사하고 이 마을에서 쫓겨날 줄 알아라." 상순은 드레박을 우물에 드리우며 대수롭잖아했다. "내 무슨 나쁜 짓 한 것도 없는데." 춘실은 동이를 안고 우물 가에 다가와 나직이 말하며 깔깔깔 웃었다. "어쩜 어디 가나 그렇게 여자들한테 인기 높니?" 상순은 드레박을 자아올리며 물었다. "건 또 무슨 소리야?" 춘실은 입귀를 실룩거리더니 빈정거렸다. "조선에 나가 양키놈들하구 싸우진 않구. 뒤고방에서 허영희란 여자하구 잘 살았지? 배수관에 들어가 뭐 했니? 또 김치움에 들어가선 뭐 했니?" 명옥은 그들의 말을 듣다가 집 쪽으로 되돌아갔다. 아마 듣기도 싫었던 것 같다. 상순은 명옥이 사라지자 드레박을 받아쥐며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쓸데 없는 소릴 작작 하오. 아무 일도 없었다." "픽!" 춘실은 믿지 않았다. "바람 피웠지? 온 동네 소문이 짜짱한데두. 흥!" "진짜 아무 일도 없었소." 상순은 춘실의 물동이를 쥐어당겨다놓고 드레박 물을 쏴 쏟아주었다. "그런 쓸데 없는 소문 믿지 말고 작작 떠드오." 뒤이어 상순은 주위를 둘러본 후 자못 엄숙하게 춘실을 마주 보았다. "춘실이, 우리 셈 없을 때 서로 사랑했지만 부모 반대로 부부 연은 지 못했소. 그러나 서로 원수 치부는 하지 말기오." "..."       춘실은 포도알눈을 살며시 내리깔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물동이를 이었다. 그녀는 물동이를 이어주는 상순을 가로 보더니 맑은 눈물을 주루룩 흘렸다. 두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은 그처럼 맑고 쓸쓸할 수 없었다. 춘실은 볼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을 손으로 훔치며 동이를 이고 비칠거리며 떠나갔다.      물동이에서 물이 찰랑거리며 튕겨나왔다. 파도치는 그녀의 가녀린 어깨를 바라보는 상순의 가슴은  미여지는듯 때끔때끔 아파났다.      이튿날 상순은 마을 사람들과 갈라져 청년들과 함께 수레를 몰고 범바위골로 떠나게 되었다. 저쪽에서 명옥과 춘실이 애를 업고 못 박힌 듯이 서서 떠나가는 그들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춘실은 상순을 보고 해시시 웃으면서 혀를 홀랑 내밀었다가 침을 퉥 뱉었다. 상순은 춘실을 흘겨보며  수레를 몰고 무거운 발걸음으로 떠나갔다.          "변덕스런 년이라구야, 원, 어쩜 저럴 수 있어? 흥!)          삼복염천 땡볕이 아침부터 쨍쨍 내리쪼여 곡식과 버드나무잎사귀들이 축 늘어졌다. 상순은 수레를 몰고  범바위골로 길을 다그쳤다.                                                         13. 범바위골 생사박투        석양이 비낀 범바위골의 기름지고 푸르른 풀밭에서 학수의 아들 주봉과 상순의 둘째딸 금숙은 곤두뿔과 비녀뿔을 타고 버들피리를 구성지게 불었다. 푸르른 하늘아래 흰 구름이 감도는 울창한 수림 속에 우뚝 솟은 범바위산도 즐거워 반기고 산새들도 피리소리에 맞춰 푸르른 가을 하늘을 훨훨 날며 춤을 췄다.        주봉은 명옥이 젖을 먹여 키운 양아들이었다. 아들을 낳지 못한 명옥은 특별히 주봉을 친 아들처럼 사랑하고 아끼었다. 그와 금숙은 그녀의 양 젖을 한 짝씩 먹고 자라서 친 오누이처럼 다정했다. 저쪽에서 감자를 파던 상순이 호미를 쥔 채 허리를 펴고 이쪽을 두루 살피더니 입가에 손을 모아대고 소리쳤다. “얘들아, 너무 멀리 가지 마라! 범이 오면 어쩌니-” 옆에서 학수가 중얼거렸다. “범 말을 하지 마오. 자기 흉을 하면 범이 온다지 않소.” “음, 애들이 먼데 가면 어쩌오?” 주봉은 양아버지 말을 듣고 고삐를 쥐여 당겼다. 그러나 아무리 고삐를 당겨도 곤두뿔은 대가리를 흔들면서 돌아서지 않고 자꾸 멀리 달아났다. 성이 꼭뒤까지 치민 주봉은 곤두뿔의 잔등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이 놈 곤두뿔, 말을 듣지 않겠니?” 주봉은 을러메면서 고삐로 곤두뿔의 대가리며 잔등이며 쨩쨩 때렸다. 곤두뿔은 눈깔을 부릅뜨고 주봉을 당장 뜰 상을 했다. “때리지 마라!” 어느 결에 상순이 뛰어왔다. 상순은 주봉의 손에서 고삐를 빼앗아내면서 타일렀다. “얘들아, 소는 말을 하지 못하지만 이 놈도 자기를 아끼면 말을 잘 듣는다. 자기를 못살게 굴면 심술을 쓴다. 이후엔 소를 아껴라.” 상순이 바지 호주머니에서 소금 몇 알을 꺼내 손바닥을 펴 보이자 곤두뿔은 쯥쯥 핥아 먹더니 꼬리를 휘휘 휘젓는 것이었다. “오, 알았습니다.” 후에 주봉과 금숙은 아버지들과 말하고 소금이나 콩알을 조금 호주머니에 넣어가지고 가서 곤두뿔과 비녀뿔에게 먹이었다. 그때마다 곤두뿔과 비녀뿔은 친절한 눈길로 애들을 보면서 껄껄한 혀로 소금알을 핥아 먹으면서 꼬리를 휘휘 휘저었다. 황혼 무렵이었다. 갑작스레 먹장구름이 범바위산 쪽으로 몰려오더니 구불구불한 불 뱀이 범바위산 허리를 번쩍 내리쳤다. 우르릉 꽝꽝! 하늘땅을 뒤흔드는 우레 소리에 뒤이어 호두알만한 비방울이 후둑후둑 떨어졌다. 뒤이어 밤알만큼 한 우박이 수림과 감자밭을 내리 조기기 시작했다. 각일각 소낙비는 폭우로 번져 대야로 퍼붓는 듯이 억수로 쏟아졌다. 한 시간이 지나자 언제 폭우가 기승을 부렸는가 싶게 동녘하늘에 고운 칠색무지개가 척 걸렸다. 그 날 밤에 마을 사람들이 잠들려고 할 때다. 따웅~ 호랑이 울부짖는 천둥 같은 소리와 함께 바깥에서 송아지들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상순과 병수 등이 황급히 벽에 걸어 놓았던 사냥총을 벗겨 들고 뛰어나갔다. 금숙은 집구석에서 사시나무 떨듯 하면서 옹크리고 앉아 있었다. 허나 주봉은 그래도 사내자식이어서 거적을 살짝 들고 가만히 내다보았다. 검둥이와 황둥개가 먹칠한 듯한 수림 속에서 언뜰 언뜰 하는 쌍불들을 내다보며 왕왕 짖어댔다. 곤두뿔과 비녀뿔 아빠 소 어미 소들이 초가집을 중심으로 서너 마리 송아지들을 복판에 둘러싸고 호랑이들과 맞섰다. 곤두뿔이랑 대가리를 수그리고 앞발로 땅바닥을 허벼 잔등에 퍼 치면서 호랑이들과 싸울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상순과 성수는 사냥총을 들어 수림 속의 노란 쌍불들을 겨눠 쏘았다. 땅! 땅! 따-웅! 수림 속을 울리는 호랑이 울음소리와 함께 쌍불들이 사처로 흩어져 달아났다. 상순은 시름 놓지 못하고 초가집 마당에 삭정이를 모아 놓고 우등불을 피웠다. 활활 타오르는 우등불 빛을 빌어 소들을 살펴보니 송아지 한 마리가 목을 물리어 피가 흘렀다. 곤두뿔이랑 어미 소들은 송아지와 초가집을 똬리처럼 둘러싸고 대가리를 바깥쪽으로 향하고 웅크리고 앉아 온밤 우등불 빛이 비추는 수림 속을 노려보았다. 호랑이들과 승냥이들은 다시는 감히 덮쳐들지 못했다. 상순과 성수 등은 곤두뿔이랑 비녀뿔이랑 얼마나 대견스러운지 몰랐다. 서늘한 가을바람이 불어오자 만물이 누렇게 번져가고 오곡백과가 무르녹기 시작했다. 풀밭이 아무리 푸른 신록을 지키려고 부질없이 발버둥질 쳐도 날이 갈수록 누런 색깔에 물들어버렸다. 상순은 마을 사원들을 이끌고 곤두뿔과 비녀뿔이랑 소 수레에 메워 가지고 감자와 강냉이 이삭들을 초가집 마당에 실어 들였다. 부식토로 뒤덮인 땅이 어찌나 비옥한지 토실토실한 감자와 방치 같은 누런 강냉이 이삭들이 잘 열려 탐스럽게 대풍작이 들었다. 사원들은 풍작의 기쁨에 겨워 힘 드는 줄도 모르고 이른 아침부터 해질 무렵까지 감자를 파고 강냉이 이삭을 뜯어 수레에 실어 들였다. 그 숱한 낟알을 실어들이느라고 곤두뿔과 비녀뿔은 목에 피 고드름이 지기까지 했다. 상순은 곤두뿔의 피 고드름이 진 목을 매만지면서 불쌍한 나머지 가만히 강냉이 이삭을 주둥이에 넣어주었다. 곤두뿔은 맛나게 먹으면서 커다란 눈알로 상순을 정답게 쳐다보았다. 어느 날, 그들이 한창 강냉이 이삭을 뜯을 때다. “앗! 곰이다!” 금숙과 성수네 맏딸 정옥이 비명소리를 질렀다. 상순이 뛰어나가 보니 엄청 큰 곰 두 마리가 강냉이를 가로 타고 나가며 이삭을 뜯어 겨드랑이 밑에 끼며 야단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 놈 곰새끼!” 상순과 성수는 황급히 소리치며 밭머리에 세워 놓은 사냥총을 들고 뛰어왔다. 그런데 곰은 상순과 성수에게 하나씩 덮쳐들어 사냥총을 빼앗아 무릎에 대고 뚝 분질러 던졌다. 급해 맞은 상순은 밭머리로 뛰어나가 곤두뿔과 비녀뿔의 고삐를 수레 채에서 풀어놓았다. 성수와 학수랑 다른 소들의 고삐를 풀어놓았다. 곤두뿔은 모진 고함을 지르면서 앞발로 흙을 긁어 잔등에 퍼치더니 곤두뿔을 낮추며 곰에게 덮쳐들었다. 둔한 것 같던 곰은 소 무리들이 덮쳐오자 강냉이 둬 이삭을 쥐고 꼬리 빳빳해 수림 속으로 달아났다. 그러나 곤두뿔이랑 비녀뿔이랑 곰을 놓칠세라 수림 속으로 뒤쫓아 들어갔다. “염, 염, 염!” 상순이 아무리 손에 소금을 들고 불러도 소들은 계속 고함치며 곰들을 쫓아갔다. 상순과 성수는 소들이 상할까봐 다른 사람에게서 사냥총을 빼앗아 들고 수림 속으로 쫓아갔다. 그들이 단풍나무숲이 우거지고 집채 같은 바위가 우뚝 솟은 범바위골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다. 갑자기 노린내가 코를 찔렀다. 살펴보니 나뭇가지에 누런 소털과 범의 털이 묻어 선들바람에 살살 나붓기고 있었다. 후에 안 일이지만 범바위 뒤에는 범의 굴이 있었다. 허나 누구도 모르고 범바위 근처에까지 황무지를 일궜기에 범들은 죽기내기로 굴과 영지를 지키려고 “불청객”들에게 덮쳐들었던 것이다. 이때 앞에서 코로 냄새를 씩씩 맡던 검둥이와 황둥개가 대가리를 쳐들고 왕왕 짖으면서 꼬리를 흔들었다. 상순이네가 나무숲 속을 살펴보니 곤두뿔이 이쪽으로 걸어오며 꼬리를 휘휘 젓다가 우뚝 멈춰서는 것이 아니겠는가? 곤두뿔은 귀를 뻘쭉 세우고 이쪽을 의아한 눈길로 바라보더니 “음-메- 헝-” 하고 수림이 떠나갈듯이 영각하며 꼬리를 휘휘 휘저었다. 상순은 앞으로 나가며 호주머니에서 소금 알을 쥐어 손바닥을 펴 보이면서 “염, 염, 곤두뿔아, 돌아가자!”라고 했다. 허나 곤두뿔은 귀를 뻘쭉 하더니 오던 쪽으로 냅다 뛰어가는 것이었다. 이때 검둥이도 왕, 왕, 왕 짖어댔다. 상순은 수림에서 불길한 예감이 들어 두리번거렸다. 아차, 저게 뭔가? 가을바람이 불어치며 낙엽이 우수수 지는 속에 누런 이마빼기에 꺼먼 왕자를 박은 얼룩 범이 범바위 뒤에서 뛰쳐나오지 않겠는가. 그 놈은 상순이네가 사냥총을 겨누기도 전에 “따~ 웅!” 하고 울더니 사납게 덮쳐들었다. 호랑이는 앞발로 상순의 어깨를 탁 치고 날아지나갔다. 뒤이어 몽둥이 같은 꼬리로 휘파람소리를 내며 휙 휘둘러 갈겼다. 다행히 상순이 넘어지면서 맞지 않고 대신 팔뚝 같은 나뭇가지가 맞아 낙엽이 우수수 떨어졌다. 땅! 땅! 상순과 성수는 재차 덮쳐드는 호랑이의 쫙 벌린 아가리를 조준해 총을 쏘았다. 옆구리에 총알을 빗맞은 호랑이는 화약 냄새를 맡자 돛 바늘과도 같은 흰 수염을 곤두세우며 “따웅-” 하고 으르렁거렸다. 이때 어디로 간 것 같던 곤두뿔이 덮쳐와 합세하면서 전세는 역전됐다. 곤두뿔과 비녀뿔은 뿌리를 곤두세우고 호랑이한테 사납게 덮쳐들며 배때기를 들이박았다. “따-웅!” 호랑이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면서 김빠진 공처럼 쓰러졌다. 검둥이는 호랑이의 꼬리를 물어 마구 뜯었다. 따~웅! 이때 범의 굴에서 숱한 범들이 뛰어나와 덮쳐왔다. 비녀뿔과 곤두뿔은 호랑이 무리와 일대 혼전을 벌렸다. 비녀뿔은 제일 앞에서 덮쳐드는 범의 배때기를 턱 떠받아 하늘공중에 날려버렸다. 호랑이들도 자기 굴 어귀까지 몰려온 사람들과 황소들 앞에서 더 물러설 자리가 없게 됐다. 그 놈들은 단말마적으로 덮쳐들어 황소들의 잔등 위로 마구 날뛰면서 물어 재꼈다. 곤두뿔은 덮쳐드는 호랑이 옆구리를 연속 떠서 나무숲 속에 처박았다. 나머지 호랑이들은 동료들이 피를 토하며 맥없이 쓰러지는 것을 보고 수림 속으로 달아나버렸다. 그 틈에도 곰들은 강냉이 이삭을 뜯기에 여념이 없었다. 비녀뿔은 무섭게 고함치더니 비녀뿔을 곤두세우고 강냉이 밭으로 덮쳐갔다. 곰들은 배때를 들이박는 비녀뿔의 뿌리를 떡 잡아 내리누르며 목을 비틀려고 버둑버둑 애썼다. 다른 곰은 비녀뿔의 불 중태를 물어뜯으려고 뒤로 덮쳐들었다. 이때 곤부뿔이 영각하며 사납게 덮쳐들어 비녀뿔의 꼬리를 잡은 다른 곰의 엉덩이를 탁탁 박았다. 다른 곰은 질겁해 비녀뿔의 뿌리를 활 놓고 강냉이 밭을 와락와락 헤치며 도망쳤다. 뒤이어 상순이네가 곤두뿔이랑 검둥이랑 데리고 밭으로 돌아왔다. “빨리 강냉이 이삭을 담아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기요!” 사원들은 황급히 강냉이 이삭을 주어 수레에 싣고 초가집으로 내려왔다. 호랑이에게 물린 곤두뿔의 깊숙한 상처에서 뻘건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 상순은 수레를 벗긴 후 집 뒤에 끌고 가서 오줌을 싸 상처에 발라주었다. 오줌은 상순이네 조상이 물려준 묘약이었다. 소 상처에도 소염이 될지는 모를 일이지만 상순으로서는 그 외에 별다른 방도는 없었던 것이다. 어느 하루, 모두들 점심을 먹을 때었다. 허영주 향장이 사무실 주임 박청산과 함께 범바위골로 불시에 찾아왔다. 상순은 오래 동안 갈라졌던 형님을 만난 듯이 반갑게 맞았다. “허 향장, 어떻게 돼 이런 산골로 왔습니까?” 허영주는 상순의 손을 꽉 잡으면서 소탈하게 웃었다. “어제 함흥 촌에 찾아갔다가 범바위산에 부업하러 갔다는 말을 듣고 찾아왔네.” 상순은 허영주와 박청산 주임을 윗방에 모시고 올라가 앉으면서 금숙과 정옥을 보고 밥상을 새로 차려오라고 했다. 숟가락을 들고 밥상을 둘러보던 허영주는 반색했다. “허허허, 대단하구먼, 여긴 무릉도원 같군 그래.” “오시느라고 시장하겠는데 자, 막걸리나 드십시오.” 허영주와 박청산은 사양하지 않고 막걸리를 들고 안주를 짚었다. “이건 뭔가? 멧돼지 고기 아닌가?” 허영주의 말에 박청산은 우물우물 고기점을 씹으면서 “썩썩하고 쫄깃쫄깃한 게 진짜 별맛이구먼.”라고 했다. “우리 향 식당에도 없는 멧돼지 고기 아닌가?” 그 말에 상순과 청산은 머리를 숙였다. 허영주는 멧돼지고기 사발에 저로 연신 창질을 해대며 말했다. “사원들이 배불리 먹고 잘 살면 좋지. 김 서기 참 잘 했소. 합작사에서 부업이라도 해서 사원들을 배불리 먹고 살게 해야 하오. 이제 함흥 촌 합작사의 경험을 전 향에 널리 선전해서 황무지를 개간하게 해야겠소.” 허 향장은 숟가락을 놓으면서 상순을 마주 바라보았다. “향내 여러 촌 서기와 합작사 주임들을 범바위산에 청해다 황무지개간현지회의를 하면 어떻소? 김 서기가 범바위산의 황무지와 묵밭을 개간해 풍작을 거둔 경험도 소개하오.” 그런데 상상 밖으로 상순은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그러지 마십시오. 옛날부터 소문난 잔치 먹을알이 없다고.” 그 말에 허 향장은 자못 불쾌해 했다. “함흥 촌 합작사들에서만 황무지를 개간해 배불리 먹고 살겠소? 다른 마을에서도 잘 살게 도와 줘야하지.” “허 향장의 생각은 옳습니다. 그런데 소문이 나면 범바위산은 우리 향의 산이 아니기에 쫓겨날 겁니다.” 상순의 말에 허 향장은 머리를 끄덕이었다. 한참 궁리하던 허 향장은 “이렇게 합세.”라고 말머리를 떼더니 뒤 말을 이었다. “진수해에서 전 향 황무지개간사업회의를 열면 김 서기가 범바위산을 밝히지 말고 황무지를 개간해 대풍작을 거둔 경험을 소개하오.” 상순은 양미간을 찌푸리면서 한참 궁리하더니 “건 좋습니다. 전 향 인민들이 배불리 먹게 사는데 유리하다면 경험을 소개하겠습니다.”라고 했다. 그날 오후에 허영주 향장과 박청산 주임은 상순과 함께 새로 개간한 범바위산의 밭을 일일이 돌아보고 상순이네가 주는 멧돼지 고기에 감자와 강냉이 등을 가지고 범바위산을 떠나갔다… 병완과 상순은 함흥 촌 마을 사원들을 이끌어 연속 4년 동안 범바위산에 들어가 감자와 강냉이 농사를 지어 마을 사람들의 쌀독을 꼴딱꼴딱 채워 사원들로 하여금 배불리 먹으면서 살게 했다. 하여 사원들의 생산 적극성을 대폭 높였을 뿐만 아니라 사원들로 하여금 사회주의 우월성을 마음속으로 느끼게 하였다. 마을 사람들은 범바위산에서 네 번째 수확의 가을을 맞이하게 됐다. 어느 날, 쉼에 상순이 한창 숫돌에 낫을 갈 때었다. 갑자기 저쪽에서 “불이야!” 하는 고함 소리가 들렸다. 모두들 벌떡 일어나며 머리를 돌려 그쪽을 바라보았다. “아니, 저게 뭐야!” 삼단 같은 불길이 마른 풀숲을 핥으며 구렁이처럼 산비탈로 기어나가고 있었다. 동언이랑 동식이랑 허둥지둥 헤매면서 불을 끄기에 여념이 없었다. 상순이랑 모두들 낫을 버리고 그리로 뛰어갔다. 그들은 나무 회초리를 꺾어 들고 날름거리는 불을 쳐댔지만 산비탈을 핥으며 퍼져나가는 불길을 끌 수 없었다. 순식간에 한헥타르도 넘는 산비탈의 황무지가 잿더미로 돼버렸다. 산불은 야수처럼 다른 산비탈로 날아 넘어가 달렸다. “이 일을 어쩌느냐?” 상순은 풀썩 물앉으면서 가슴을 탕탕 쳤다. 주봉이 뛰어와 헐떡거리며 말했다. “저 동언이 쉼에 담배를 가만히 피우다가 그만 옷에 불을 떨어뜨렸습니다.” 학수는 주봉을 흘겨보면서 “네가 뭘 안다고 주둥이질이냐?” 하고 꾸지람했다. 그래도 주봉은 계속 말했다. “내 맞은쪽에 앉아 보니 동언이 담배를 피우다가 담뱃재가 솜옷에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동언은 솜옷에 달린 불을 끄자고 벗어서 마구 풀밭에 털었습니다. 그래서 풀밭에 솜옷의 불이 옮겨 붙었습니다.” 동언의 아버지 득호는 떽 했다. “그래 우리 동언이 산불을 달아놓았단 말이냐?!” 상순은 주봉과 고개를 숙인 동언을 번갈아 보다가 다급히 소리쳤다. “누구 때문에 산불이 났든지간에 빨리 산불을 꺼야 하오! 큰 경을 치겠소.” 상순은 초가집에 달려가 삽을 찾아들고 한 키씩이나 타오르는 산불 쪽으로 뛰어갔다. 사원들도 모두들 삽과 괭이, 빗자루, 호미를 찾아들고 산불과 생사박투를 벌렸다. 허나 설상가상으로 가을바람까지 세차게 불어쳐 산불은 벌써 산비탈을 벌거숭이 잿더미로 만들어버렸다. 산불을 또 다른 산비탈들로 사정없이 덮쳐갔다. 이때 난데없이 숱한 낯선 사람들이 깍쟁이와 삽, 괭이와 빗자루를 들고 달려와 불끄기 생사박투에 뛰어들었다. 상순이 여겨보니 그 뒤에는 초봄에 갓 범바위산에 왔을 때 만났던 헌 초가집 주인 늙은이도 있었다. 상순이 급히 뛰어가 머리를 숙여 인사하자 그 늙은이는 욕부터 해재끼었다. “내 뭐라던가? 산불을 주의하라는데.” 상순은 그저 목덜미를 긁적이면서 “어떻게 산불을 끌 방도가 없습니까?” 그러자 늙은이는 콧방귀를 뀌었다. “흥, 이제 천사람 만사람을 동원해 와보오. 이 큰 산불을 끄는가?” 늙은이는 타오르는 불길을 보더니 무릎을 탁 치더니 눈길을 상순에게로 돌렸다. “방도 있네.” 상순은 한걸음 다가섰다. “예?” “맞불을 놓아야 하네!” “예?! 맞불을?” “그렇소. 예로부터 산불에는 맞불을 놓아야만 끌 수 있다고 했소.” “그럼 맞불을 놓아 보깁소.” 상순은 늙은이와 함께 돌아다니면서 불 뱀처럼 덮쳐가는 맞은켠 산비탈 마른 풀밭에 돌아가면서 맞불을 놓았다. 한식경 맞불을 놓았더니 산불은 기적적으로 꺼지기 시작했다. 해질 녘이 되어서는 산불이 몽땅 꺼지고 여기저기서 가는 몇 가닥의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를 뿐이었다. “살았습니다. 할아버지!” 상순은 늙은의 주름살이 얼기설기 진 커다란 손을 잡아 흔들었다. 늙은이도 허연 수염을 쓰다듬으며 검댕이 칠을 한 꺼먼 얼굴에 만족한 웃음을 지었다. 셈평이 없는 동언은 주책머리 없이 재 더미로 된 산을 둘러보면서 “허허, 온 산이 말끔히 타버려 새해에 황무지를 개간하기 참 좋게 됐구먼.”라고 횡설수설 했다. 상순은 동언의 뒤통수를 손바닥으로 슬쩍 치면서 “에끼, 이 놈 자식!”하고 책망했다. 그제야 동언은 머리를 숙이며 삽으로 흙을 파 남은 불씨를 덮어 놓았다. 상순은 사원들을 이끌고 산골짜기의 샘물터에서 샘물을 길어다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연기를 찾아다니면서 샘물을 끼얹었다. 어느 결에 가을 하늘에 뻘건 황혼 낙조가 뒤덮여 잿더미로 돼버린 산비탈을 벌겋게 물들여갔다.
106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84) 댓글:  조회:1180  추천:1  2017-10-09
                                                                 10. 범바위골로 진군       기승스레 불어치는 눈보라를 무릎 쓰고 병완은 쌀 주머니를 메고 맏며느리 진달래네 집으로 갔다. 남편을 잃고 마음 속에 깊은 상처를 입고서도 이를 꼭 옥물고 가녀린 어깨에 혼자 가정부담을 떠메고 애들 둘을 데리고 사는 맏며느리가 불쌍했다.       진달래는 애들 둘을 데리고 살면서 용천한테 총상을 입은 아픈 다리를 끌고 일하러 다니다나니 아주 힘겨웠다. 그녀가 아무리 한해 동안 혼자 뼈 빠지게 일해도 양곡이 얼마 차례지지 않았다. 병완이 쌀 주머니라도 메다 주지 않으면 보릿고개를 넘기도 힘들 지경에 이르렀다.       병완은 진달래네 집에 들어가 쌀 주머니를 맏며느리에게 넘겨주고 나서 조왕 쪽에 있는 쌀독부터 열어보았다. 쌀을 나눠준지 한 달도 되지 않았는데 쌀독이 절반이나 비지 않았겠는가. “헤이, 이걸로 세 식구 보릿고개를 어떻게 넘기겠소?" 병완은 맏며느리와 답답한 속을 털어놓으려다 말고 도리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무슨 감투 끈인지 모르겠다. 개체로 농사를 지을 땐 쌀독이 꼴딱꼴딱 차지 않았고 뭐요? 그런데 지금 무리를 지어 다니면서 뼈 빠지게 일해도 쌀독이 텅텅 빈단 말이요.) 진달래는 쌀을 쌀독에 쏟아 넣으면서 한마디 께끼었다. “제 보건대요. 저처럼 혁명에 남편마저 바친 열사 유가족이거나 상순 조카 같은 제대군인 가정의 쌀독이 텅텅 비었어요. 노동공수에 따라 쌀을 주는데 집에 노동력이 없어 그런 거 같아요.” 병완은 머리를 끄덕였다. 그는 벽 밑에 앉아 무릎에 손자 경수와 경주를 앉히고 흔들거리면서도 얼굴에는 수심의 그림자가 흘러지나가고 있었다. “밭은 적고 인구는 많이 늘어난 것도 문제야. 이제 마을 사람들을 동원해 황무지를 더 일궈야겠소.” 진달래는 가마 목에 무릎을 꺾고 앉았다. “그래요. 밭이 적은 것도 문제지만 열사 유가족에게 그저 열사증이나 주고 아무런 보상도 해주지 않는 것도 문제예요.” 병완은 머리를 끄덕였다. “건국 초기 어려움을 벗어나면 장차 꼭 열사 유가족이거나 군속에게 우대 무휼 금 같은 걸 얼마라도 주겠지.” 진달래는 무릎을 안고 한숨을 땅이 꺼지게 호 내쉬었다. “정말 살기 막막해요.” 며느리 말을 들으며 병완도 한숨을 가슴이 터지게 내쉬었다. 진달래는 벽 밑의 경주를 안아다가 가마 목에 눕히고 이불을 덮어주며 불평을 털어놓았다. “소서구 밭을 누가 일궜는데 합작사에 다 들여놓고 배를 촐촐 굶으면서 살아야 돼요?” “쯧쯧, 그만 하오. 우린 당원이 아니오? 당원은 대공무사 해야 하오. 고만한 이익 때문에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에 대한 신앙이 흔들려서야 되오?” 시아버지 말을 듣고서도 진달래는 뽀로통해 했다. “전 조선에 나가 인삼 시동생을 찾아 봐야겠어요. 애 아버지가 조선인민군 연대장을 하다가 희생됐으니까 조선에서는 우대해주겠지요.” 병완은 한숨만 내쉬었다. “아가야, 그만 말해라. 용천 대장은 남조선 괴뢰군이 아니었나? 자칫, 어험, 험. 심중히 생각하고 가게나.” 병완은 손자들을 내려놓고 엉거주춤 일어나 집 밖으로 나갔다. 진달래는 그래도 년세 계시는 시아버지가 시삼촌 덕성보다 자기를 더 보살핀다는 것을 느꼈다. 병완은 자손들을 데리고 초가삼간을 지어 진달래네 들어 살게 했다. 그리고 때때로 땔나무를 해 실어다 주기도 하였고 쌀이 떨어지면 종종 자손들을 보고 가져다주게 했던 것이다. 그 친어버이 같은 사랑에 진달래는 못내 고마워 뜨거운 눈물을 흘리곤 했다.       진달래는 생활고를 겪으면 겪을수록 남편 - 성칠을 잃은 것이 마음이 더 아파났고 한없이 성칠 오빠가 그리웠다. 그녀는 낮에는 합작사에 나가 아픈 다리를 끌고 나가 일하느라고 다른 생각을 할 새 없엇지만 조용한 밤이면 애들을 재우고 머리를 매만지면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밤을 지새군 했다.      그녀는 항일유격대 중대장으로 돼 돌팔매질로 일본 놈들을 까눕힐 때부터 그 얼마나 일본 놈들이 없는 새 나라를 갈망했던가. 그 얼마나 자식들한테 풍요롭고 행복한 새 사회를 넘겨주고 싶었던가. 그러나 미제를 몰아내는 전쟁에 남편을 바치고나니 애들한테 따뜻한 밥 한그릇도 푼푼히 떠줄 여력도 없게 되였다.      (안돼, 계속 이렇겐 살 순 없어. 언제까지 시집 신세에 살겠는가. 조선 인민들은 위대한 수령 김일성 장군의 령도아래 전쟁의 상처를 재빨리 치유하고 중국과 쏘련의 국제주의 지원을 받아 새 나라를 재빨리 건설하고 있다고 하지 않는가. 경수 아빠는 조선인민군 련대장, 렬사야. 조선에서는 꼭 항일유격대 때부터 김일성 장군을 따라 싸운 렬사 유가족을 잘 보살펴줄 거야.)     외로운 진달래는 이 시각, 조선인민의 위대한 수령 김일성 장군이 령도하는 새 조선이 한없이 그리웠다... 병완은 진달래네 집을 나서자 그 길로 막내손자네 집을 찾아갔다. 그런데 가는 길에 증손녀들이 말싸움을 하는 것을 보았다. 상우네 막내딸 순애는 순자를 윽박질렀다. “네 엄마 못난데다가 키도 작달막한 게 어디 우리 삼촌 대상 되니?” 순자도 지려고 하지 않았다. “우리 엄마만큼 마음이 좋으라고 해라. 네 엄마는 그리 잘 나서? 얼마나 댕댕거렸으면 마을에서 ‘땡땡이’이라고 별명을 지었겠니?” “뭐라니?” 옆에서 듣던 동선도 기분이 상해 순자를 가로 보았다. “네 엄마는 맏며느리라는 게 어째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우리 집에 보냈니? 우리 엄마를 말할 게 있니?” 그 말에 동선과 순애는 말문이 막혔다. “얘들아, 싸우지 말라!” 병완은 애들을 말리고 나서 마른기침을 하며 상순이네 집 윗방 문을 떼고 들어갔다. 상순은 할아버지에게 윗자리를 권해 모셨다. 병완은 곰방대를 꺼내 담배를 재워 넣으면서 말했다. “너도 전선에 나가 피를 흘리며 싸웠는데 쌀독이 어떤지 모르겠다.” 상순은 아버지를 흘금 쳐다보며 “우리 집 쌀독 근심은 하지도 마십시오.”라고 했다. “보나마나 쌀독이 훌쭉하겠지.” 병완은 수리치에 부시를 쳐서 곰방대에 불을 붙여 뻑뻑 빨다가 담배연기를 후 길게 내뿜었다. “아무래도 사회주의 우월성을 백성들이 마음 속으로 느끼게 하려면 황무지를 더 일궈야 될 거 같아.” 상순은 오래 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입을 천천히 열었다. “사회주의 제도가 우월한 건 사회주의 이론에 명확히 쓰여 있습니다. 이제 온 동삼 정치사상교양을 하면 자연히 눈이 번쩍 뜨이게 될 겁니다.” 그러나 병완은 도리머리를 가로 저었다. “아니야, 맨 이론학습만 해선 절대 안 돼. 백성들 쌀독도 꼴딱꼴딱 채워 줘야 한다. 백성들이란 배가 불러야 저절로 노래도 나오고 춤도 나오는 법이야. 배고프고서는 아무리 이론이나 정신자극으로 좋다고 해도 좋다고 할 리 만무해. 봐라, 지금 자기 집 자류지는 풀 한 대 없이 알뜰히 가꿔도 합작사 밭은 대충대충 기음을 매지 않니? 어떤 밭엔 풀이 범이 새끼를 칠 지경이다.” 상순은 그 말씀에 도리 있다고 생각했다. “할아버지, 이제 봄이 되면 사원들을 동원해 황무지를 대대적으로 개간합시다.” 그쯤 동을 달고 상순은 한숨을 후 내쉬었다. “헌데 마을 부근에는 개간하기 좋은 황무지가 없습니다.” 조손삼대는 마주 앉아 담배를 풀썩풀썩 피우면서 한참 궁리했다. 방 안에는 납덩이와 같은 침묵이 흘렀다. 한참 후 상순이 먼저 입을 열었다. “할아버지, 아버지, 사원들을 데리고 범바위골에 들어가서 황무지를 개간하면 어떻겠습니까?” “거 두만강변에 있는 범바위골 말이냐?” “예. 내 약 담배 장사를 하러 조선에 드나들 때 범바위골을 지날 때가 많았습니다. 범바위산은 어찌나 높은지 산 중턱에 구름이 둥둥 떠다닙니다. 산에는 멧돼지들과 호랑이, 승냥이 같은 야수들까지 욱실거려 농사를 짓기 힘들어 무인지경이 됐습니다. 그래서 황무지와 묵밭이 아주 많습디다.” “그래?” 병완과 기준은 거의 동시에 이구동성으로 반문하며 상순의 기이한 생각에 못내 탄복했다. “예, 범바위골로 들어가서 황무지를 일굽시다.” 그러나 병완과 기준은 인차 대답하지 않고 궁리만 하고 앉아 있었다. 한참 후 병완이 물었다. “네 말은 사원들을 데리고 범바위골로 이사 가자는 게야?” “그래도 괜찮습니다. 헌데 노동력을 범바위골에 다 뽑아 가면 함흥 촌 농사는 어찌 하겠습니까?” 병완은 곰방대를 빨더니 무겁게 입을 뗐다. “네 생각은 좋긴 좋다. 황무지를 많이 일궈 사원들의 쌀독을 꼴딱꼴딱 채워 주면 모두들 사회주의가 좋다고 할 게야. 허나 진수해향 지역을 벗어나서 상급에서 알면 동의하겠는지 모르겠다.” 상순은 대수롭잖게 여겼다. “괜찮습니다. 어떤 때엔 먼저 일을 하고 후에 회보해도 됩니다. 우리가 숱한 쌀농사를 지어 사원들의 쌀독을 꼴딱꼴딱 채워주면 우에서도 잘했다고 할 겁니다.” “먼저 일을 해재끼고 후에 회보한다?” 병완이 망설일 때 기준이 나섰다. “쌀독을 빡빡 긁으면서 배를 촐촐 굶을 게 있습니까? 범바위골 황무지를 개간하고 보깁소.” 병완은 “이제 봄이 되면 범바위골로 들어가자. 이 다음 우에서 뭐라고 하면 내가 책임질게.” 하고 말하며 우쭐 일어났다. 상순은 할아버지에게 힘차게 말했다. “아니, 할아버지, 근심하지 마십시오. 제가 다 책임지겠습니다.” 병완은 한숨을 쉬면서 바깥으로 나갔다. 어느덧 여우도 눈물을 흘리는 매서운 추위로 만물이 꽁꽁 얼어붙었던 겨울은 지나가고 만물이 약동하는 새 봄이 왔다. 상순은 흥수와 성수 등 젊은 농사군들을 데리고 며칠 동안 비술나무랑 베다가 불에 달궈 후린 후 쇠보습을 박아 넣어 가대기를 만들었다. 흥수는 상순이랑 돌아온 한 달 후에야 함흥촌으로 돌아왔다. 상순은 궁금해 그간 어데 갔댔는가고 물었다. 그러나 흥수는 부대를 떨어져 헤매다가 길을 잃어 헤매다나니 늦었다고 얼버무렸다.        상순은 흥수가 가능하게 남조선 땅에서 남조선 유격대원 영수의 총에 맞아죽은 동생 창수를 묻어주러 갔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좀 섬찍한 생각도 들긴 했다.       (흥수가 동생 원쑤를 갚으려고 총으로 영수를 쏜 적도 있다. 그럼 영수를 보복살해하자고 찾아갔을 수도 있지 않은가...)       그러나 상순은 흥수가 남조선 땅에서 무슨 짓을 하고 돌아왔는지 조사할 방법이 없었다. 상순은 어디까지나 수하 전우 흥수를 좋은 쪽으로 많이 생각하려고 무등 애를 썼다. 나중에 그는 흥수가 살아서 돌아온 것만 해도 기쁘게 여기며 더 캐여묻지 않기로 했다.       (만약 흥수가 영수한테 보복하러 찾아갔댔다면 꼭 남로당(남조선 로동당) 유격대에서 조선인민군을 통해 적발이 들어올게 아닌가. 전우를 더 의심하지 말자.)       한 보름 후 상순은 흥수를 포함해 끌끌한 젊은 농사꾼들을 데리고 소 수레에 농기구랑 강냉이와 감자 종자랑 싣고 호호탕탕하게 150여리나 떨어진 두만강변 범바위골로 "진군"했다. 병완은 마을 사람들 속에서 상순의 손을 잡고 신신당부했다. “산에 가면 불하구 야수들을 조심해라. 안전이 제일이다.” “예, 명심하겠습니다." 상순은 할아버지를 안심시켰다. "빗발치는 포탄과 총알 속에서도 죽지 않았는데 그까짓 야수들을 이기지 못하겠습니까? 평안히 보내십시오.” 지춘실은 흥수 쪽으로 다가와 귀속말로 주의를 줬다. “저 나그네를 너무 믿지 마오.' 뒤이어 그녀는 상순을 흘겨보며 볼 멘 소리를 했다.  "상순이, 당신 정말 큰 일 치겠다. 내내 남의 나그네를 전쟁터 아니면 무인지경 산골로 끌고 다녀? 여인네도 나그네 없인 살기 힘들다고. 흥!” 상순은 못 들은 척 하면서 배가 남산만한 명옥을 따라 나온 딸 넷을 한 아름에 안고 뽀뽀를 해 주었다. 병완과 기준, 창준을 비롯한 마을 사람들은 상순이랑 흥수랑 몬 소수레가 조개덕을 넘어 굽인 돌이에까지 사라질 때까지 손을 저으며 바래였다. 상순이 이끈 수레 대오는 이튿날 저녁 무렵에야 범바위산 기슭에 이르렀다. 그들은 한 마을에 들려서 대충 대국 가마를 걸어놓고 밥을 지어 먹고 하루 밤 묵었다. 이튿날 아침, 범바위산을 올려다보니 굽이굽이 올리막 길은 구름 속으로 빨려 들어가 끝이 보이지 않을 지경으로 까마아득했다. 오뉴월의 소낙비는 소잔등을 다툰다고 금방까지도 맑던 하늘이 갑자기 먹장구름이 덮쳐와 시뻘건 번개가 번쩍이더니 달걀만큼 한 우박이 억수로 쏟아져 내렸다. 모두들 수레 밑에 우르르 쓸어 들어가 우박과 비를 피했다. 상순이네 검둥이와 흥수네 누렁이도 주인들과 함께 수레 밑에 들어와 꼬리를 사타구니에 차고 들어앉았다. 금숙은 검둥이 대가리를 쓰다듬어 주며 쌍까풀 청포도 눈으로 수레 틈으로 흘러내리는 빗물을 말똥말똥 쳐다보았다. 뒤이어 소낙비가 산기슭을 뒤덮으며 억수로 퍼부었다. 그 바람에 숱한 이불이 소낙비를 폭 맞아 몽땅 젖어버렸다. 한참 기승을 부리며 쏟아지던 소낙비가 멎고 먹구름이 점차 범바위산을 벗기더니 서쪽으로 밀려갔다. 뒤이어 안개가 덮쳐와 범바위산을 꼭 감쌌다. 안개는 산기슭의 굽이굽이 굽은 길을 껴안고 몸부림치며 마구 흩어지기 시작했다. 상순은 코 기러기처럼 제일 앞의 수레를 몰고 굽인돌이 길에 접어들면서 목청을 돋우어 소리쳤다. “소낙비가 멎었을 때 어서 산꼭대기로 올라가기요. 이 굽인 돌이 길을 따라 올라가면 산꼭대기에 평평한 황무지가 있소. 모두 힘을 내 올라 가기요!” “예!” 그들은 구름 속으로 빨려 들어간 굽이굽이 아흔아홉 굽인 돌이를 에돌면서 범바위산 꼭대기에 올라갔다. 모두들 구름 위에 우뚝 솟은 평평한 범바위산 산정은 정말 가관이었다. 유서 깊은 두만강을 건너 조선의 산마루가 구름 위에 바라보이고 범바위산 중턱에 하얀 양떼처럼 구름송이들이 흐르고 있었다. 상순은 개암나무와 쑥대가 키를 넘는 황무지를 바라보면서 시원한 산 공기를 한껏 들이켰다. 아, 정말 범바위산은 농사꾼들의 희망으로 차 넘치는 땅, 그들이 땀 동이를 몰 부어 힘껏 개척할 할 처녀지였다. (어쨌든 여기서 풍작을 거둬 마을 사람들이 사회주의 우월성을 피부로 느끼게 해야 한다.) 상순은 굳은 결의를 다지면서 마을 사람들과 함께 범바위산 꼭대기 평평한 황야에 큼직한 돌멩이를 들어다 놓고 가마를 걸었다. 드디어 구름 속에서 밝은 해가 나오더니 따뜻한 햇볕을 빗물에 젖은 범바위산 황무지를 골고루 비추었다. 금숙이랑 몇몇 처녀애들이 수레에서 젖은 이불을 나무에 걸어 말리었다. 처녀애들은 웃고 떠들면서 산골짜기에 내려가 샘물을 찾아내 쌀을 일어 얹고 삭정이를 주어다가 밥을 짓기 시작했다. 상순은 한창 밥을 짓는 금숙이랑 옥자랑 마을의 처녀애들한테 가서 신신당부했다. “산불을 주의해라. 산불이 나면 큰 일이 난다. 알았지?” “양, 근심하지 맙소.” 겨우 열대여섯 살 먹은 금숙은 몇 살 이상 언니들을 따라 범바위산으로 왔던 것이다. 상순은 금숙이 불쌍했다. 집에 먹을 것이 없어 공부하러 가지 못하고 소학교 4학년을 다니다가 그만두고 밥벌이를 하려고 범바위산에까지 따라 왔던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야외에서 가마를 걸고 삭정이를 주어다가 불을 지펴 점심을 대충 끓여 먹었다. 오후부터 나무를 베다가 기둥을 대충 세우고 웃갓부터 씌워 집인지 막인지 세웠다. 상순은 주위 환경을 익숙히 하려고 사냥총을 메고 검둥이를 데리고 평평한 범바위산 꼭대기를 두루 돌아보았다. 범바위산의 꼭대기는 유별나게 울울창창한 수림 속에 평평한 평지이다가도 불시에 깊은 협곡이 패여 있어 꽤나 무시무시했다. (저게 뭔가?) 상순은 한참 돌아다니다가 협곡과 협곡 사이 평지에 디귿 “ㄷ”자 형으로 앉은 허름한 초가집 세 채를 발견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집 이영이 다 날아나고 마당에는 범이 새끼를 칠 지경으로 마른 쑥대가 한 키나 자라 있었다. 집의 문짝이 다 떨어진 것을 보아 빈지 오랜 집인 것 같았다. “됐다! 이 헌 집을 손질해 들면 되겠다.” 상순이 초가집에서 나왔을 때 웬 늙은이가 지게에 광주리를 지고 마당에 들어섰다. 둘은 주춤 멈춰서 상대방을 바라보다가 얼굴 근육을 느슨히 풀었다. 늙은이는 사냥총을 든 상순의 아래 위를 훑어보며 물었다. “어데서 왔소?” 상순은 “함흥 촌에서 왔습니다.”라고 대답하며 다가갔다. “함흥 촌?” “예. 여기서 한 150리 떨어진 진수해 함흥 촌에서 왔습니다.” 늙은이는 머리를 끄덕이더니 “그 먼 곳에서 여긴 어째 왔소?” 하고 물었다. “예, 저, 쌀 고생이나 하지 말자고 감자농사나 좀 해갈가고 왔습니다.” 곧이곧대로 대답하는 상순의 대답에 늙은이는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에이고, 어떻게 고생하겠소? 우리도 여기서 살다가 달아났소.” “예? 건 왜서요?” 늙은이는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었다. “우린 일제 때 나라를 잃고 두만강을 건너서 여기 인적 없는 범바위골에 들어와 화전 농사를 지었지. 그런데 이 산골엔 범과 승냥이 욱실거리는데다가 가을이면 멧돼지들 성화에 감자농사를 하지 못하오. 허나 일제 놈들의 가혹한 철발굽 밑에서 노예로 살기보다 나아서 여기서 그럭저럭 연명하면서 광복을 맞았소. 공산당 덕분에 우린 야수들과 멧돼지들을 피해 이 무서운 산골을 떠났소. 그런데 자네들 여기서 어떻게 고생하겠소?” 상순은 머리를 끄덕였다. 늙은이는 상순을 데리고 다니면서 골짜기에 있는 샘물터와 자기들이 일궜던 묵밭을 일일이 알려 주었다. 상순은 늙은이와 갈라지면서 “할아버지, 고맙습니다.”라고 인사했다. 늙은이는 상순을 보고 “꼭 산불과 야수를 주의하오.”라고 신신당부하고는 약재를 캐면서 산비탈 쪽으로 내려갔다. 상순은 마을 사람들을 데리고 와서 그 헌 초가집 세 채를 손질해 들었다. 마을 사람들은 집이라고 드니까 마음이 놓였다.                                          11. 올감자대풍작        울울창창한 밀림에도 여름 땡볕이 쟁글쟁글 내리쪼였다. 상순이 마을 사람들을 이끌어 범바위산의 나무를 찍고 뿌리를 뽑아내고 황무지를 개간해 일군 감자밭에 연보라 빛 감자꽃이 소담하게 피어 웃음 짓고 있었다. 호미로 파 보면 포기마다 주먹만큼 한 올 감자알이 서너 개씩 달려 있어 마을 사람들의 마음은 흐뭇하기만 했다. “멧돼지야!” “저 놈 멧돼지들이 감자를 다 파먹는다!” 한 무리 멧돼지들이 저쪽 감자밭머리에 덮쳐들어 올감자를 먹고 있었다. “저 놈 멧돼지들이! 어제 저녁에도 달려 든 걸 사냥총을 쏴서 쫓아버렸는데 또 왔다!” 상순은 흥수와 병수와 함께 밭머리에 뛰어가 세워두었던 사냥총을 들었다. 상순은 전쟁터에서처럼 흥수와 병수를 보고 말했다. “멧돼지를 잡기요!” “좋소!” 그들 셋은 멧돼지들을 포위해갔다. 상순은 허리를 굽히고 감자밭에서 슬금슬금 멧돼지들 쪽으로 뛰어갔다. 멧돼지들은 감자를 파먹다가 상순을 발견하고 대가리를 돌려 도망치기 시작했다. 땅! 땅! 그러나 늦었다. 좌우에서 포위해 들어가던 흥수와 병수가 총을 쏘며 멧돼지들을 한 곬으로 몰아쳤다. 그때 제일 큰 어미멧돼지가 판가리 싸움을 할 상으로 상순에게 정면으로 덮쳐들었다. 땅! 총소리와 함께 멧돼지 대가리에서 먼지가 풀썩 했다. 그러나 멧돼지는 쇠바늘 같은 뾰족한 어금니를 빼물고 상순에게 덮쳐들었다. 상순은 미처 두 번째 탄환을 재울 새도 없이 총자루로 멧돼지 대가리를 내리 팼다. 멧돼지는 상순을 깔고 넘어가 주둥이로 상순의 목을 물려고 들었다. 허나 상순은 총 박죽을 멧돼지 아가리에 밀어 넣었다. 멧돼지가 총자루를 까득까득 깨물었다. 그 새 상순은 오른 손으로 장단지 각반에서 비수를 뽑아 멧돼지 턱주가리 밑의 요해처를 푹푹 박아 넣고 도려냈다. 어미멧돼지는 꽥 비명을 지르며 피를 울컥 토하더니 버둑거리다 맥없이 옆으로 쓰러졌다. 상순은 150킬로그램은 실히 될 어미멧돼지를 겨우 밀어내고 기어 일어났다. 그의 얼굴에는 멧돼지 발톱에 허빈 피 묻은 커다란 상처자국이 나 있었다. 그새 흥수와 병수는 사냥총으로 다른 멧돼지들을 쏘았다. 100킬로그램은 실히 될 멧돼지 두 마리가 그들의 총에 맞아 쓰러졌다. 질겁한 멧돼지들은 무리를 지어 수림 속으로 우르르 달아났다. 마을 사람들도 호미와 괭이를 들고 이쪽으로 달려 왔다. 상순은 피 묻은 비수를 멧돼지 목에서 뽑아 팔소매에 쓱쓱 닦아 장 단지 각반에 되 꽂아 넣었다. “아버지, 얼굴에 피!” 금숙은 자기 치맛자락을 쭉 찢어 들고 아버지한테 다가가 얼굴의 상처를 닦아주었다. “괜찮아.” 상순은 금숙의 손에서 천 쪼박을 받아 얼굴을 대충 닦고 나서 육중한 어미멧돼지 배때기를 발로 툭툭 찼다. 성근이랑 태연이랑 멧돼지들을 둘러보며 혀를 끌끌 찼다. “허허허. 덕분에 멧돼지 고기를 잘 먹게 됐구먼!” “이런 걸 두고 나쁜 일이 좋은 일로 된다는 게요.” “허허허. 감자를 도둑질 맞힌 대신 멧돼지 고기를 먹어도 좋지.” “허허허” “호호호” 마을 사람들은 웃고 떠들며 상순이네가 잡은 멧돼지를 초가집에 끌어다 물을 끓여 튀를 했다. 일군들은 점심밥상에 둘러 앉아 푹 끓인 멧돼지고기를 한 사발씩 놓고 맛나게 먹었다. 흥수는 큼직한 멧돼지고기 점을 젓가락으로 집어 먹으면서 떠들어댔다. “야, 거 멧돼지고기는 썩썩한 게 술 안주로 들어났는데. 그런데 이 산골에는 술이 없단 말이야.” 상순은 여러 사람들을 둘러보더니 묵직하게 말했다. “올감자하구 멧돼지고기를 마을에 실어다 나눠 주기요. 돌아오는 길엔 술도 사오구.” 모두들 멧돼지고기에 삶은 감자로 점심을 배불리 먹고 수레 다섯 대에 중돼지 두 마리에 밭에서 파온 올 감자를 실었다. 상순은 병수와 흥수를 보고 “자네들은 산에 남아서 초막과 감자밭을 지키오. 멧돼지 오는 족족 잡소.”라고 했다. 병수는 사냥총을 들어 보이면서 “김 서기, 근심하지 마오. 멧돼지고 호랑이고 오겠으면 오라지. 다 쏴 잡겠소.”라고 장담했다. 흥수는 상을 찡그리면서 “나도 집을 떠난 지 오래서 가서 딸 해월이랑 보고 싶소.”라고 했다. “어째 여편네 궁둥이가 생각나는가?” 병수가 놀려대는 바람에 흥수는 “에끼, 이 사람이, 자네와 함께 산에 남을 게.”라고 하며 초가집 안으로 훌 들어가 버렸다. 상순은 학수와 성근, 태연을 데리고 올감자를 꽉 박아 실은 소 수레를 몰고 함흥 촌을 바라고 떠났다. 그들은 중도에서 아무 마을에나 들어가 쉬지도 않고 곤하면 수레 채에 걸터앉아 꺼떡꺼떡 골면서 온밤 길을 다그쳐 이튿날 점심에야 함흥 촌에 도착했다. 상순은 촌공소 마당에 소 수레들을 세워 놓고 할아버지를 찾아 촌공소에 들어갔다. 때마침 할아버지는 점심식사를 마치고 촌공소에 계셨다. “할아버지, 그간 무사히 계셨습니까?” “오, 그래. 산에서 모두들 무사했냐?” “예.” 병완은 상순이네가 실어온 올감자와 멧돼지고기를 보고 기뻐 어쩔 줄 몰라 했다. “야, 보릿고개를 겨우 넘고 이젠 어떻게 기나긴 여름을 지내겠는가고 근심했는데 이젠 마을 사람들이 살았다. 살았어.” 마을 사람들은 주머니와 함지를 들고 와서 올감자에 멧돼지고기까지 가져가면서 기뻐 야단쳤다. 병완과 상순은 웃음꽃이 활짝 핀 마을 사람들의 얼굴들을 돌아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명옥은 배가 남산만 해가지고 두 살 밖에 안 되는 금자를 업고 와서 함지에 감자알과 돼지고기를 이고 가면서 만면춘풍이었다. 진달래는 경주와 경수를 데리고 와서 함지에 감자와 멧돼지고기를 담았다. 경주와 경수는 제법 어머니를 도와 자기 집에 차례진 감자를 함지에 주어 담았다. 상순은 진달래가 안간힘을 쓰며 이려는 함지를 훌 빼앗아 안고 진달래네 집으로 성큼성큼 갔다. 그때 옆에서 춘실이 입이 함박만 해 집으로 가는 명옥을 보고 입귀를 비죽거리며 “좋겠소. 저 잘난 나그네 와서.”라고 하더니 상순의 잔등을 흘겨보았다. “당원이란 게 자긴 여편네 보러 오면서 남의 나그네는 오지 못하게 하다니. 쯧쯧쯧, 남을 보살피지 않는게 당원이오?” 상순은 슬그머니 밸이 꼬였지만 못 들은 척 했다. 상순이 데리고 온 검둥이를 보자 춘실의 황둥개는 꼬리를 치며 좋다고 달려와 “으응”하며 매달려댔다. “지개! 더러운 개새끼! 치사하게 우리 집 암캐만 보면 매달려!” 춘실은 욕하며 검둥이를 발로 걷어 차 놓았다. 검둥이는 풀쩍 뛰어 피하며 춘실을 쏘아보며 으르렁거렸다. “검둥아! 그러지 마!” 상순은 어느 결에 진달래네 집에 감자를 가져다주고 돌아와 검둥이를 말렸다. 춘실은 상순을 핼끔 쳐다보더니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그녀는 함지를 인 채 콧방귀를 “흥!” 하고 뀌더니 몸을 홱 돌려 떠나갔다. 마을 사원들은 풍작을 거뒀다고 기뻐 야단이었다. 아낙네들이 시루에 쩌 온 하얀 김이 몰몰 나는 조 찹쌀을 탈곡장 마당에 있는 커다란 둥그런 매돌 위에 쏟아놓았다. 그러자 나그네들이 손바닥에 침을 뱉고 떡메를 쥐여 샛노란 찰떡을 쿵쿵 쳤다. 남정네들의 힘찬 떡메 질에 신바람이 난 아낙네들이 대야에 찬물을 떠 가지고 와서 떡돌 위에서 익어가는 찰떡을 이리저리 번지면서 찬물을 끼얹었다. 점심에 탈곡장 마당에서 온 마을 사람들이 모여 잔치를 베풀었다. 병완이 막걸리 잔을 들고 축배를 올렸다. “자, 올해 공산당의 영명한 정책의 혜택을 입어 올해 올감자 대풍작을 거뒀습니다. 범바위골에 간 부업대에서 이렇게 많은 올감자에 멧돼지 고기까지 실어왔습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 함께 올감자 대풍작을 경축해 마음껏 마시고 춤을 춥시다!” “예- 감사합구마!” “자, 기쁘게 한잔 마시깁소!” “옛!” 모두들 문문하게 삶은 썩썩한 멧돼지 고기를 안주로 막걸리를 쭉쭉 마셨다. 서너 잔 들어가자 학수가 막걸리 사발을 들고 상순의 앞에 다가와 내밀었다. “김 서기, 덕분에 잘 먹고 잘 살게 됐는데 막걸리 한 사발 쭉 내고 한곡 부르오.” 상순은 막걸리를 받아 쭉 굽을 내고 항상 부르던 “호미가”를 구성지게 불렀다. 동산천리 돋으신 해는 점섬 때가 되어온다 에라 에라 에라 호미야 호미 호미를 메고 가자 알뜰하게 가꾸어라 땀에서 나오는 곡식이다 에라 에라 에라 호미야 호미 호미를 메고 가자   마을 사람들은 일어나 원을 치고 돌아가면서 상순의 노랫소리에 맞춰 어깨춤을 덩실덩실 추었다. 춘실이랑 새금이랑 명옥이랑 웃새집 신옥이랑 련옥이랑 아낙네들이 치맛자락을 날리면서 도라지 춤을 너울너울 췄다. 해가 뉘엿뉘엿 서산으로 넘어가자 모두들 얼근해서 희희낙락거리면서 집으로 돌아갔다. 집집마다 아낙네들이 채칼에 감자를 싹싹 갈아 감자떡을 빚어 시루에 얹어 끓였다. 이윽고 집집마다에서 감자떡 냄새와 멧돼지고기 국의 구수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해지는 동네 골목마다 애들의 노랫소리가 울려 퍼졌다. 냄냄 맛있다 오래오래 맛있다 냄냄 맛있다 돼지고기 맛있다   다른 애들은 또 다른 노래를 불러대며 뛰놀았다. 아가리 딱딱 벌려라 영채 김치 쑤셔넣게 다른 애들은 화답이나 하듯이 맞받아쳤다. 주둥이 짝짝 벌려라 감자떡을 쑤셔넣게           마을 골목에서 애들이 떡을 먹으면서 깡충깡충 뛰놀며 부르는 노랫소리는 자장가처럼 하늘로 날아올라가 메아리쳤다. 둥근 해님은 애들이 부르는 그 자장가를 들으며 서산으로 넘어가 밤하늘의 꿈나라로 서서히 달려갔다.
105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83) 댓글:  조회:1312  추천:0  2017-09-30
                          8. 합작사 소서구 남쪽 천지꽃산에 먹장구름이 덮쳐왔다.  먹장구름을 헤가르며 불 뱀 몇마리가 혀를 날름거리면서 대지를 내리 채찍질 했다. 우르릉 꽝! 천지를 진동하는 우레 소리와 함께 대살 같은 소낙비가 창창 억수로 쏟아졌다. 한참 쏟아지던 소낙비가 갑자기 뚝 멎고 서쪽 하늘이 건뜻 들리더니 구름이 말끔히 씻겨가고 파란 하늘이 열렸다. 동녘하늘에 칠색무지개가 곱게 비끼었다. 병완은 이마에 호미를 쥔 손을 얹고 맑게 개이는 하늘을 둘러보더니 촌공소에서 나가 호미로 늙은 비술나무에 건 종을 댕, 댕, 댕 두드렸다. “일하러 나오오!” “장마가 지기 전에 기음을 매야겠소.” 상순이 제일 먼저 토성 안 촌공소에 들어갔다. 촌공소 옆집 상우 형님이 아주머니와 함께 호미를 쥐고 나왔다. 병완이 한참이나 종을 두드려서야 대여섯 사람이 마지못해 호미를 쥐고 토성 안에 들어섰다. 병완은 너무 기차서 중얼거렸다. “합작사에서 양식을 나눌 때는 너도 나도 앞장서 주머니를 들고 달려오더니 일하러 나오라고 하면 모두 자라목이 되니 어쩌겠니?” 상순은 할아버지 팔을 받치고 서서 나직이 말했다. “할아버지, 아마 사원들이 집체 일을 자기 집 일처럼 여기지 않는 거 같습니다.” 병완은 벌칵 성을 냈다. “에끼, 이 놈아, 그게 동길 녀석 말과 다를 배 뭐냐?” “건 사실입니다. 사원들이 집체 일을 자기 집 일처럼 생각하고 일하게 하려면 맑스- 레주의, 모택동 사상과 사회주의 이론으로 사상교양부터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말에는 도리가 있다고 생각했는지 병완은 상순을 쳐다보았다. (정말 막내손자 말처럼 종이나 쳐서 나오라고 해 억지로 붙들어 일을 시키는 수야 없지.) 그날 병완과 상순은 사원들을 데리고 소서구 옛날 상우네 상우지와 상길이네 밭 강냉이 기음을 맸다. 이튿날부터 마을에서 사람들이 뒤에서 쑤군거리는 소리가 귀전을 아프게 때렸다. "아침에 소낙비가 왔는데 어떻게 기음을 맨다고 이러오?" 한 사원이 호미에 찰떡처럼 들어붙은 흙을 손으로 뜯어내면서 두덜거렸다. “김 촌장은 농사군 같지 않소." "자기 자손들의 밭 자리 기음부터 맨다.” “합작사를 해도 노동력이 많은 김 촌장 자손들이나 잘 살겠는지 노동력이 적은 집은 어디 입에 풀칠이나 하겠소?” 마을에 별의별 소리가 다 떠돌아다니는 것이 아니겠는가! 병완은 마을 사람들이 참말 답답했다. (자기가 자손들을 데리고 피땀으로 일군 밭을 몽땅 합작사에 내놓지 않았는가? 마을 사람들을 이끌어 집집마다 쌀독을 꼴딱꼴딱 채워놓고 잘 살게 하려고 밤낮 헤매는데 뒤에서 통통한 말을 하다니!) 병완은 원통했다. 이튿날 아침 상순이 촌공소로 찾아왔다. “할아버지, 밤새 무사했습니까?” 상순이 호미를 놓고 구들에 올라왔다. 병완은 한숨을 후- 내쉬었다. “마을 사람들이 통 말이 아니다. 호조조 때까진 괜찮았다. 우리 집안에서 애나게 일군 소서구 밭을 수태 내놓으니 입이 함박만 했다. 그런데 합작사를 한 후부터 쩍 하면 비쭉거리거든.” 상순은 할아버지와 마주 앉아 위로해 주었다. “할아버지, 마을 사람들이 합작사에 대해 미처 이해하지 못한 탓입니다. 세세대대로 개체로 농사를 지어온 그들을 보고 하루 아침에 양 무리를 몰듯이 집체로 일하라니까 그러는 겁니다. 또 노동력이 적은 집에서는 아무리 애를 써도 가을에 차례질게 적으니까 일 할 열성이 없는 것입니다.” 병완은 상순을 힐끔 가로보면서 볼 부은 소리를 했다. “노동에 따라 분배하는 것은 사회주의 분배원칙이 아니냐? 사회주의 분배원칙도 모르는 마을 사람들이 정말 코 막고 답답하다. 너도 알겠지만 우리 이전에 저 소서구 밭을 대여섯이 달려들면 일주일 안에 다 매지 않았고 뭐니? 그런데 합작사 사원 3, 40명이 사흘 김을 매도 다 매지 못한다. 모두 날일 공만 벌자고 일축은 내지 않고 호미를 쥐고 언제 해지겠는가고 멀뚱멀뚱 하늘만 쳐다본단 말이야.” 상순은 내심하게 할아버지에게 말씀 드렸다. “그들에게 사상교양을 해서 사회주의 분배원칙과 우월성을 알게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병완은 곰방대에 담배를 재우다가 정중하게 말했다. “얘야, 넌 군정대학에 다녀서 사회주의 이론을 잘 알지 않고 뭐야? 네가 촌 당 지부 서기를 맡고 저 깨지 못한 마을 사람들에게 사회주의 사상교양을 해라.” 상순은 더는 사양하지 못했다. 며칠 후 상순은 당 지부회의에서 당원들의 민주선거를 거치고 진수해향 당위의 비준을 거쳐 정식으로 함흥 촌 당 지부 서기를 맡게 됐다. 병완은 당 지부 서기를 내놓고 촌장만 했다. 상순은 서기를 맡자마자 사원들에게 사회주의 합작화의 우월성에 대한 사상교양을 차근차근 진행했다. 상순은 사전에 맑스와 엥겔스, 레닌, 쓰딸린, 모택동주석의 초상을 촌공소 벽에 정중하게 모셔놓고 그날 저녁에 사원대회를 열었다. 사원들은 촌공소에 모여들어와 벽에 걸어놓은 도사들과 모택동 주석의 초상화에 눈이 끌렸다. 학수는 상순을 보고 “허, 김 서기 오더니 촌공소에 수염이 좋은 영감들을 많이 모셨구먼.”라고 했다. 사원들도 웅성거렸다. “정말 그래, 저 서양영감 하얀 구레나룻이 정말 멋있소.” 지군선이 제일 첫 초상화를 가리키며 물었다. “저 영감은 누구요?” “우리 혁명의 도사 맑스오.” 상순의 대답에 군선은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오, 맑스! 이름도 별나구나. 그래 성이 '맑'이고 이름이 '스'란 말이요?" "세상에 ‘맑’씨도 있소?” 상순은 속에서 치미는 웃음을 억지로 참으면서 설명했다. “혁명의 도사 맑스의 성은 맑스고 이름은 칼이오. 보통 ‘칼. 맑스’라고 부르오.” 성수가 또 물었다. “어째 이름이 앞에 있고 성이 뒤에 있소? 성이 칼이고 이름이 맑스인 걸 그러지 않소?” “서양 사람들은 우리 동양과는 달리 이름을 앞에 쓰고 뒤에 성을 쓰오.” “오~ 서양은 별나구나.” 상순은 맑스에 뒤이어 엥겔스와 레닌, 쓰딸린, 모택동 주석의 초상화를 가리키면서 일일이 소개해드렸다. 그런데 성근이 또 빈정거렸다. "에이, 난 저 네번째 령감은 보기도 무섭소." "누구기에?" "우리 쏘련 쓰딸린이요." "어째?" 사원들은 또 궁금했다. "아무래나 말할 일이 아니오." 성근은 용케도 목구멍까지 올라와 간질거리는 말을 꾹 참아냈다.        상순은 사원들한테 맑스의 “자본론” 핵심인 잉여가치학설로부터 시작해 자본주의 페단과 사회주의 제도의 우월성에 이르기까지 쭉 이야기 했다. 사원들은 흥미진진하게 듣기 시작했다.       상순이 레닌과 쓰딸린이 세운 소련 사회주의 정황을 간단히 소개하자 모두들 귀를 도사리고 들었다. 학수는 제일 앞에 앉아서 공책에 뭐라고 적으면서 상순의 연설을 도정신해 골똘히 들었다. 드르릉 드르릉 상순이 살펴보니 제일 뒤에서 박성근이 무릎 우에 세운 팔꿈치에 길죽한 번들머리를 고인 채 코를 드르렁드르렁 골고 있었다. “성근이!” 드르릉 드르릉 상순이 고함쳐 불러도 성근은 계속 구들 고래가 다 꺼질 지경으로 코를 고르고 있었다. 숱한 사람들의 눈길이 되로 쏠렸다. 그때 학수가 뒤에 대고 “성근이! 이 사람! 깨나지 못하겠는가?!” 하고 버럭 고함쳤다. “엉?! 어쨌다고?” 그제야 성근은 깨여났다. “사람이, 원, 코를 어찌나 세게 구르는지 구들 고래 다 꺼질 지경이오!” 상순이 고함쳐서야 성근은 입귀에 흐른 침을 손바닥으로 쓱 닦으면서 두덜거렸다. “난 또 무슨 큰 일이 났다고.” 상순은 무섭게 성근을 쏘아보았다. “당신 머나먼 소련에서 일가친척도 없이 함흥촌에 왔다고 불쌍해 좀 봐주니까 통 말이 아니구먼.” 성근은 마주 바라보지도 않고 게두덜거렸다. “에이고, 소련에서 날마다 막 씃고 내리 씃고 해도 쓸데없습데. 배불리 먹고 잘 살면 다요.” 상순은 공책을 내리우면서 박성근을 노려보았다. “뭐라오? 세계 혁명의 위대한 도사를 아무래나 말하겠소?” 그래도 성근은 머리를 숙이지 않았다. “내 그 놈의 정치 학습이 싫어서 소련에서 여기 달아났소. 꼴호즈 하니 영 틀렸어. 꼴호쯔라면 그 우둔한 쏘련의 소들도 가기 싫어했소. 소들도 꼴호쯔에 가면 굶어서 빼빼 여윈다는 거 아니까 말이요. 그런데 여기 중국에서 꼴호즈를 잘 모르면서 그 길로 또 가려고 하니 참 답답하오.” 상순은 눈귀를 느슨히 풀었다. 사원들이 물었다. “꼴호즈라는 게 뭐기에 그리 나쁘다고 그러오?” 박성근은 우쭐해서 올방자를 틀고 앉았다. 모두들 상순에게서 눈을 떼 성근의 쪽을 뒤돌아보았다. “꼴호즈라는 건 세상 못쓸게요. 여기서 말하는 합작사와 같은 ‘집체농장’이오. 꼴호즈를 해놓고 집체로 농사를 지으니까 모두 일을 하지 않습데. 소련 마우재들이 특별히 게으르오. 일하기는 싫고 맨날 술병을 안고 돌아다니면서 주정만 부린단 말이요. 적극성이 없어 어디 일이 축나오?. 밭에 범이 새끼 칠 지경인데도 술만 처먹구 집에서 녀편네를 껴안고 그거만 하면서 씩식거린단 말이요. 같은 밭에 같은 사람이 농사를 짓는데 개체로 할 때보다 산량도 더 나지 않고 먹을 알이 없었소. 모두 어디 자기 집 일처럼 하오?"      숱한 사원들은 상순의 강의는 제체놓고 돌아앉아서 성근의 하소연을 들었다. 상순은 강의를 그만두고 소피 보러 가는 척하고 바깥으로 나가버렸다. 그는 성근이 마음대로 말하라고 내버려두고 바깥에서 엿들었다.       성근은 어깨 어쓱해 부쩍 열을 올려 연설을 계속 해재꼈다.       "쏘련엔 묵밭이 많아 좋았소. 밭이 또 비옥해서 부지런히 가꾸면 먹을 근심이 없어서 살만했소. 마우재들은 게으르다 못해 내물에 물고기 늙어죽어도 잡아 먹지 않소."      그때 학수 령감이 끼어들었다.      "에끼, 이 사람아, 혼자 다 아는 상하지 말게. 내 들은 건 마우재들이 냇물 고기를 먹지 않는다더라이,"     "게을러 그래."      "뭘 안다고 끼어들어?"     학수도 지려고 하지 않고 목에 지렁이 같은 핏대를 세웠다.     "마우재들은 바다 고기만 먹지 냇물 고기 먹지 않는다이."  그 말에 모두들 머리를 끄덕였다.      "건 그렇다 치고 내말 들으라이. 쏘련에서 우리 조선 사람들이 일본 놈들과 비슷하게 생겼다고 일 본 놈들과 내통하는가 해서 밤중에 강제로 기차에 마구 실어서 울라부지또크에서 머나먼 내지로 실어갔소. 조선 사람들은 가지 않겠다고 울고 불고 비난사정해도 되오? 난 처자를 데리고 도망쳐 수림에 가서 납작 엎드려 있다가 겨우 소련을 떠나 중국에 달아났다니까. 야, 우리 조선 사람들이 저 훈춘 맞은켠 쏘련 해변가에 쭉 가면서 어떻게 일군 황무진데 두고 오자니 기 딱 찹데. 헌데 여기서두 꼴호즈를 할 줄은 몰랐소.” 사원들은 모두 귀 솔깃해 듣더니 머리를 끄덕였다. 상순은 성근을 그대로 내버려둘 수 없었다. “닥치지 못하겠는가! 또 횡설수설 망발하면 가만나두지 않겠소.” 성근은 콧방귀를 뀌면서 눈을 감고 억지로 입을 꾹 다문 채 묵묵히 앉아 있었다. 그 날 회의는 성근이가 빈정대는 바람에 흐지부지해졌다. “모두들 곤하겠는데 오늘 학습은 이만 하겠습꾸마.” 상순은 집에 돌아간 후 밤중이 되도록 성근의 말을 반박할 준비를 하느라고 등잔불 밑에서 동북군정대학 때 필기장을 뒤적이었다. 이튿날 기음을 매고 첫 쉼을 쉴 때다. “여러분, 여기 모이십시오.” “낮에 일하고 저녁에 곤하기에 오늘부터 쉼에 밭머리에서 회의를 하겠습꾸마.” 사원들은 상순의 눈치를 흘끔흘끔 쳐다보면서 모여들었다.  여기저기서 이런 소리가 들렸다. "깡깡 마른 이론을 말해 누가 알아듣겠소?" "글쎄 말이오. 여기 합작사지. 당학교오?"       심지어 박성근은 상순을 중심으로 빙 둘러앉은 사원들 속에서 벌떡 일어나 목에 지렁이 같은 핏줄을 세우고 말했다.       "상순이, 난 쏘련 홍군이 독일 침략군을 까부신 전쟁은 봤소. 그런데 중조 군대가 미군 놈들을 짓부신 전쟁은 보지 못했소. 조선에 나가 양키놈들을 족치던 전투얘기나 좀 해주오." 상순은 머리를 끄덕였다. "알았소. " 상순은 공책도 쥐지 않고 호미 자루를 짚고 서서 말을 시작했다. “광복 전에 우리는 나라가 망해 일제 놈들과 조선 지주들의 가혹한 착취를 받아 손바닥만 한 땅도 없어 살길을 찾아 쪽박을 차고 이 간도에 들어왔습니다. 허나 천하의 까마귀는 다 검다고 중국 지주들은 조선 지주들보다 못지않게 우리를 노예처럼 부려먹었습니다. 황무지를 일구게 한 후 소작료를 8할씩 걷어 갔습니다. 우리는 항상 뼈 빠지게 일해도 해마다 보리 고개를 넘기 힘들었습니다.” 모두들 여기저기에서 머리를 끄덕이었다. “지주들이 무엇에 의해 배 터지게 먹고 살았겠습니까? 그들은 소작료를 혹독하게 걷어가면서 우리를 착취해 잘 살았습니다. 지주들은 고이 놀고서도 배 터지게 먹고 살고 우리는 날마다 소나 말처럼 일해도 죽물마저 먹고 살기 힘들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한쪽 구석에 머리를 두 다리 새에 처박고 앉아 있는 장학산과 장충국을 쏘아보았다. 상순은 과거를 회고시킨 자기 말이 사원들의 마음에 서서히 젖어들고 있는 것을 느꼈다. “우리 위대한 중국 공산당이 인민을 영도해 일제를 몰아내고 지주를 청산해 우리 빈농들에게 밭을 나눠주었습니다. 당과 정부에서는 민족 차별이 없이 조선에서 건너온 우리에게도 한족 형제들과 마찬가지로 밭을 주었습니다.” 이때 학수가 우쭐 일어나 “위대한 중국 공산당 만세!” 하고 구호를 불렀다. “공산당 만세!” “공산당 만만세!” 사원들도 따라 구호를 불렀다. 상순은 열의가 오른 군중들에게 사기 나 연설했다. “우린 더는 지주들의 착취를 받지 않고 마음껏 농사를 짓고 살게 됐습니다. 중국 공산당은 이제 우리를 영도해 더 잘 살게 하려고 옛날에 없는 호조조, 합작사를 차리게 하였고 이제 사회주의 인민공사를 꾸려 나갈 것입니다. 우리는 중국 공산당을 믿고 합작사, 인민공사의 길로 나가야 합니다. 우린 소련 사회주의련방공화국에서 꼴호즈를 차린 경험과 교훈을 잘 섭취해 이 땅에서 남부럽지 않게 사는 지상낙원을 건설합시다. 공산당을 믿고 사회주의 길로 나가면 행복한 앞날이 있습니다. 여러분, 신심이 있습니까?” 사원들은 호미를 높이 쳐들면서 고함쳤다. “있습니다!” “좋습니다. 우린 절대 소련의 꼴호즈나 우리 나라 사회주의 합작사가 나쁘다는 말을 믿지 말고 당을 따라 사회주의 길로 나갑시다.” 모두들 박수갈채까지 보냈다. 땅땅 마른 이론보다 과거를 들어가면서 한 그의 연설은 성공하였던 것이다. 사원들 속에서 병완은 상순을 대견한 눈길로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기분이 좋아진 상순은 오후 첫 쉼에는 항미원조전쟁 때 얘기도 한 대목 하겠다고 했다. 그러자 사원들은 앞다퉈 우르르 밭머리에 모여들었다.        상순은 사원들 속에 앉아서 천천히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였다.        "우리가  따발렬을 넘어 남조선 땅에 잘못 들어갔을 때오. 갑자기 한개 대대는 될 미군 양키놈들이 괴뢰군을 앞세우고 우리 운송차대를 포위했소. 그 놈들은 비행기 폭격에 뒤이어 땅크(탱크)까지 앞세우고 우릴 공격했소." 사원들은 상순의 이야기를 귀 솔깃해 들었다. "그런데 우린 글쎄 탄알이 거덜났단 말이요." "저런!" 성근마저 신경을 곤두세웠다. "저걸 어쩌오?" 사원들은 모두 손에 식은 땀을 쥐고 하회를 기다렸다. 그러나 장충국은 젤 뒤에서 반쯤 비스듬히 누워 빈정거렸다. "또, 또, 제 자랑을 잔뜩 늘여놓는구만. 쯧쯧." 그러나 상순의 이야기는 충국의 예측과는 퍽 달랐다. "우린 육박전을 벌리며 생사결판으로 적들과 싸웠소. 그번 무명고지 육박전에서 저 병수는 연신 양키놈들을 세놈이나 찔러눕혔소. 저 병수 아니면 내 양옆에 불시에 나타난 양키놈들한테 양옆구릴 허망 찔려 죽을번 했소. 그때 저 병수가 '싸' 하고 고함치면서 그 두 양키놈들을 연속 찔러눕혔지." "병수, 참 대단하오!" 상순은 젤 뒤에 앉은 성수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저 성수 패장은 마흔대나 되는 긴 운수차대를 이끌고 적들의 포위를 뚫고 승리적으로 후방에 있는 김인섭 연대장부대와 지원군 부대를 찾아갔소. 참 큰 공훈을 세웠소."  모두들 성수랑 병수랑 태수랑  돌아보며 혀를 끌끌 차면서 여간 찬탄해마지 않았다.   그때 태수가 옆에서 끼어들어 한마디 했다. "저기, 흥수는 뭐겠소. 눈에 달이 올라서 옆에서 돌격해나가는 김영장을 마구 찌르지 않았겠소." "하하하." 여기저기서 이런 말도 들렸다. "행방이 없구만." "흥수는 말씨럭은 잘 해도 싸울줄 개뿔도 모르오." 그러자 사원들 속에서 춘실이 눈물을 흘리면서 도도거렸다. "남은 나그네 잃어버려 속태우는데. 뒤에서 흉허물 하겠소. 별, 저네만 잘 싸웠겠구만." 성수도 낯이 불그락푸르락해나 씩씩거렸다. "너거(너네) 그리 잘 싸웠어? 반장하나 주어 하지 못하고서도! 흥!"  그러자 상순이 황급히 밀어나 태수를 흘겨보며 손사래를 쳤다. "아니오. 흥수 반장도 아주 용감히 싸웠소. 그번 전투에서 병수하구 태수 탱크 기관총과 기관포로 양키놈들을 무리로 쓸어눕혔댔소. 야, 얼마나 통쾌하던지. " 그러자 태수가 손사래를 치면서 일어났다. "아니오. 상순 영장은 더 용감히 싸웠소." 뒤이어 병수와 태수가 네 한마디 내 한미디 이야기했다.     상순은 괴뢰군은  놔두고 양키놈들을 추격해 산 아래로 짓쳐 내려갔다. 갑자기 바위 뒤에서 쇠기둥 같은 놈이 상순을 나꿔채  쓰러눕혔다. 상순은 벌떡 일어나며 발길로 시꺼먼 놈의 사타구니를 걷어찼다. 그 놈이 허리를 굽히며 가달 두새를 붙잡으며 돼지 멱따는 소리를 치는 순간, 상순은 공병삽을 잡은 채 날래게  오른 팔로 그 놈의 목을 끌어안으며 원숭이처럼 잔등에 날래게 날아올라갔다. 상순은 공병 삽을 쳐들고 호통쳤다. "죽고파?! 손들엇!" "NO! NO!" "너? 너?! 뭐야?! 핸드 들엇!" 상순은 쳐들었던 공병삽을 반공중에 쳐들며 호통쳤다. "I Surrender!(난 투항하겠어.)" "뭐? 아이?!  손 아이 들겠어?! 이놈 핸드(손) 들엇! " "OK! OK! Hand! hand! My hand!" 상순은 무슨 말인지 잘 몰랐다. 그러나 그 놈이 손을 쳐드는 걸  보고 투항하겠다는 걸로 짐작했다. "세계 최강군이란 미군은 맨 이런 놈들이야?!  마이(많이) 마이 핸드 들더라. 흥!  누런 대가리나 쌔까만 놈이나 다 겁쟁이들이구나! 날창도 아니고 공병삽을 들이대도 손을 번쩍번쩍 드니까. 물알 같은 놈들, 진짜 싸울 멋도 없어!" 그는 허무맹랑해 흑인놈을 조롱하면서 공병삽으로 반공중을 가리키더니 호통쳤다. " 핸드 들엇!" 흑인놈은 목마를 탄 상순을 되돌려보며 자기 손을 쳐들어보이면서 물었다. "My hand?(내 손?)" 상순은 호통쳤다. "네 놈은 까짜로 투항하는 건 아니겠지?  핸드 들엇!" "Yes, I hands up. Den't kill me!(예, 내 손들게. 날 죽이지 마시오.)" 씨꺼먼 흑인놈은 사위를 둘러보며 두 손을 쳐들었다. "또 아이냐? 엉?! 아이 투항하겠다고?!" 상순은 공병삽을 버리고 그 놈의  잔등에서 미끌어져내려왔다. 곰 같은 흑인놈은 주위를 흘끔흘끔 곁눈질했다. 순간 주위에 지원군이 없는데다가 자기보다 엄청 덩치 작은 상순을 보고 왼눈에도 차하지도 않았다.  갑자기 흑인 놈은 상순의 목을 틀어쥐고 곰처럼 깔고 들어앉았다. 왼팔을 부상당한 상순은 곰 같은 놈에게 깔려 숨이 꺽 막혔다. 그는 오른 손으로 흑인놈의 사타구니 두새 커다란 X알을 꽉 틀어쥐었다. "A! No! No!" 흑인놈은 너무 아파 상순을 훌 놓으며 아우성쳤다. 땅! 총소리와 함께 곰 같은 흑인놈은 옆으로 스르르 너부러졌다. "흥! 양키놈들도 그저 그렇군!" 상순이 모젤권총으로 쐈던 것이다. 그는 코웃음쳤다. 세계에서 최고강군이란 자들이 이 모양이라는 것에 너무 허무맹랑해 냉소했다. 전사들은 김영장이 앞장서 용감히 싸우는 것을 보고 용기백배 돼 양키놈들을 추격해 내려갔다. 한 개 대대나 되는 괴뢰군은 한개 소대 밖에 안 되는 중국인민지원군을 남북으로 협공했다. 설상가상으로 미제 탱크와 육군마저 덮쳐 와 지원군 전사들은 용감히 싸우다가 하나하나 영용히 희생됐다. 상순은 쓰러진 전사의 옆구리에서 수류탄을 뽑아들고 태수와 병수를 돌아보며 한어로 고함쳤다. “탱크를 빼앗자! 엄호해라!” “옛!” 명사수 태수가 반자동보총으로 탱크 뒤의 양키들을 본때 나게 쓸어 눕혔다. 병수는 뛰여내려가며 연이어 양키놈들을 찔러눕혔다. 양키놈들은 무기 자랑이나 했지 육박전에는 기겁해 뒤로 비실비실 물러섰다. 그 틈에 상순은 탱크 앞으로 뛰어갔다. 탱크가 그의 옆으로 우르릉 거리며 지나갈 때다. 그는 탱크 위에 훌쩍 뛰어 올라가 탱크 뚜껑을 열고 수류탄을 뿌려 넣고 훌쩍 뛰어내렸다. 꽝! 요란한 폭파소리와 함께 탱크가 제 자리에 멈춰 섰다. 나머지 탱크는 계속 돌진해왔다. 상순은 수류탄마저 없어 주위를 애타게 둘러보았다. 그는 길에서 활활 타번지는 자동차에 눈길이 멎었다. "죽어봐라!" 상순은 불길이 이는 자동차에 뛰여갔다. 그는 바곤에 뛰여올라가 불이 반쯤 달린 군복을 안고 덮쳐드는 탱크 위에 뛰여내렸다. 그는 불타는 군복으로 부르릉거리며 연기를 내뿜는 탱크 꽁무니를 꽉 막아버렸다. 순간 탱크 안에 자욱한 연기가 들어가 양키놈들이 탱크 안에서 견디기 힘들었다. 탱크  멈춰서더니 웃덮개 훌 열렸다. 양키놈들이 비명을 지르며 기여나와 뛰여내렸다. 뚜르륵 뚜르륵 그때 태수가 돌격총을 휘둘러 쓰러눕혔다. "잘 했어!" 상순은 손을 홱 젓더니 탱크 웃뚜껑을 열고 탱크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병수와 태수도 뛰어들어갔다. 상순이 탱크를 부릉부릉 몰고 아군의 자동차대오가 도망친 쪽으로 달려나갔다. "어디로 가는가?" 병수가 의아해 물었다. "굽인돌이에 가서 뒤따르는 탱크를 없애버리자! 장탄하라!" "알았소." 그들은 삼도만에서도 손을 맞춰 탱크를 몰고 토비들을 족친 전투경험이 있었다. 병수가 장탄하고 태수가 기관포 방아쇠를 잡았다. 상순은 탱크 헤드라이트까지 켜고 달리면서 멀리 산기슭 큰 길 쪽을 쳐다보았다. 아군의 트럭대오의 헤드라이트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뒤의 탱크를 제거하지 않으면 몇참 못가 추격당하고 말 것이었다. 그는 굽인돌이를 돌자 탱크를 돌려세우더니 굽인돌이에서 몇마장 떨어진 두번째 굽인돌이에 달려가 은페해 멈춰섰다. 뒤따르던 탱크 두대는 상순이 몬 탱크를 동료 탱크인가고 무작정 뒤따라왔다. 그 놈 탱크 두대가 굽인돌이를 돌아설 때다.  "사격!" 쾅! 요란한 굉음과 함께 앞장섰던 미제 탱크는 명중탄을 맞고 웃뚜껑과 포신이 허망 날아났다. 앞의 탱크에서 화염이 충천하자 뒤따르던 탱크는 급정거하더니 도망치려고 대가리를 돌리고 있었다. "사격!"  쾅! 두번째 포탄이 날아갔다. 오른쪽 무한궤를 얻어맞은 탱크는  페철이 돼 풀썩 물앉고 말았다. 양키놈들은 탱크 웃덮개를 열고 비명을 지르며 뛰여내리었다. 태수는 탱크 기관총으로 양키놈들을 소사했다. 놈들은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뒤따르던 양키놈들과 괴뢰군은 굽인돌이에서 무 슨 일이 벌어졌는지도 모르고 도망쳤다.  상순은 한숨을 후 내쉬었다. 그는 탱크 웃덮개를 열고 산기슭에서 싸우는 전사들에게 한어로 명령했다. “우리 트럭대오가 안전하게 전이했다. 동쪽 마을로 철퇴!” "옛!"  성수와 흥수 등 십여 명 전사들이 어둠 속으로 철퇴했다.  상순과 병수 태수는 탱크를 몰고 도망치는 괴뢰군 트럭을  추격해가면서 기관포와 기관총을 갈기며 소분대의 철퇴를 엄호했다. 괴뢰군 트럭은 보기 좋게 불이 활활 일었다. 괴뢰군들의 비명소리, 아우성 소리로 일대 아수라장을 이뤘다. 이때 남쪽 하늘에서 전투기들이 아츠러운 소리를 지르며 날아왔다. 쿵! 쾅! 꽈르릉! 전투기들은 길에 늘어선 트럭을 지원군의 트럭으로 알고 폭격하고 소사해댔다. 그러나 상순이네 모는 탱크만은 자기들 탱크라고 여겼는지, 아니면 발견하지 못했는지 폭격하지 않았다. 숱한 괴뢰군 트럭들이 폭파돼 불길이 하늘로 치솟아 올랐다. “제길, 우리에게 폭탄을 던져!” 괴뢰군 병사들은 하늘에 대고 욕설을 퍼부었다. 어떤 병사들은 쌕쌔기를 사격까지 해댔다. 그 틈에 상순이네는 탱크를 몰고 좌충우돌하면서 불에 타는 적들의 자동차와 트럭을 마구 절벽 아래에 떠밀어버리고 짓뭉개버렸다.  "포탄과 기관총탄이 다 떨어졌네." 태수의 말에 상순은 한숨을 후 내쉬었다. "저놈 자동창까지 없애버리고 철퇴!" 상순은 탱크를 몰고 도망치는 괴뢰군 트럭을 쫓아가 꽝 냅따떴다. 자동차는 아우성치는 괴뢰군들을 실은 채 허망 절벽 아래로 꺼꾸로 처박혔다. 그는 병수와 태수를 돌아보며 말했다. "탱크를 양키놈들한테 넘겨줄순 없어!" "옳소! 없애버리기오!" 상순은 탱크를 돌려 오던 길로 한참 달리다가 불붙는 괴뢰군 자동차에 딱 붙여세우고 탱크(땅크)에서 내렸다. 순식간에  자동차의 불이 탱크에 옮겨 붙기 시작했다. 저쪽 뒤에서 괴뢰군과 양키놈들이 이쪽으로 덮쳐오고 있었다. 탱크가 탈 시간이 될 거 같지 않았다. 태수는 철갑모를 주어들고 자동차 휘발유통응로 다가갔다. 그는  비수를 뽑아  휘발유통을 쿡쿡 찔렀다. 휘발유가 쌕 쏘리 내며 내 뿜겼다. 태수는 철갑모에 휘발유를 꼴똑 받아 탱크 뒤꽁무니에 툭 쳤다. 조급해난 상순은 돌격총을 들어 자동차 휘발유통을 뚜르륵 갈겼다. 휘발유통이 탕 폭발하며 탱크에 불길이 더 거세게 옮겨 붙으면서 활활 타올랐다.  사원들은 너무나 통쾌해 고함치며 박수갈채를 보냈다. "야, 통쾌하다!" "미군 양키놈들 콧대를 여지없이 꺾어놨다이!" 상순은 도리머리질 했다. "세계 최강군이라고 우쭐렁거리던 미군은 종이범이오. 원자탄이나 비행기, 땅크를 믿고 우쭐거렸지. 육박전만 하게 되면 뒤로 슬금슬금 물러나 꼬리빳빳해 도망친단 말이오. 미처 도망치지 못한 놈들은 쩍하면 손을 번쩍번쩍 든단 말이오." "허허허." 박성근은 허구픈 웃음을 웃었다. "그 놈들 겁난 파란 눈 보는 거 같소. 그런데 '요 핸드, 마이 핸드' 그게 뭐라는 거요?" 상순은 웃으면서 말했다. "내 사단 비서과 과장질 할 때 우리 비서과 영어통역관과 물어보고 배를 끌어안고 웃었댔소. 난 '요 손 들어라'고 '요 핸드' 했는데 '요 핸드'란 영어로 '네 손'이란 말이라오. 그러니 '네 손 들어라'란 말이어서 그 놈 양키놈과 말이 통했단 말이오. 그러니 그 놈은 '마이 핸드' 하고 손을 번쩍 들잖겠소. 영어통역관의 말에 의하면 영어로 '마이 핸드'는 '내 손'이란 말이라오. 그런데 난 '많이 손 들더라.'라고 했지." 성근은 웃어 죽을 지경이었다. "하하하, 김영장, 참 대단하오- 보리영어에 조선말까지 섞어서 양키놈을 손 들게 했으니까." "핫하하."       사원들도 배를 끌어안고 웃었다.        조용해지자 상순이 또 이런 말을 꺼냈다.        "미군 양키놈들 이름도 참 괴상한 이름이 다 있소."        상순의 말에 박성근은 누런 말이발을 다 들여다보이게 허 벌리고 하회를 기다렸다.         "우리 비서과 영어통역이 한 양키놈들 포로들을 신문할 때오. 그 놈의 이름을 물어보니깐  '萝卜头(Lo bother :로버터)'라고 하지 않겠소. 또 한 흑인놈은 '톱(톰:Tom)"이라고 하지 않겠소."        "허허허. 성이 로고 이름이 버터라, 에이, 양키놈들은 원래 '무우대가리' 오. 개놈들은 원래 최강군은커녕 '톱'으로 '무우대가리'나 켜먹고 살 놈들이라니깐."        "허허허."        "호호호."        사원들은 배를 끌어안고 폭소를 터뜨렸다. 상순은 쉼시간마다 항일유격대 항전, 삼도만토비숙청전투,  남조선 특무와 국민당 특무 잡은 전투, 항미원조 전투 이야기를 섞어 이야기하면서 사원들에게 사상교양을 진행했다. 그러자 그 효과를 본 것 같았다. 사원들은 상순의 말을 아주 흥미진진하게 들었고 상순의 두리에 뭉쳐 하자는대로 따라 아주 잘 해나갔다. 이튿날 이른 아침에 병완이가 촌공소 마당에 걸어놓은 합작사의 종을 치지도 않았는데도 벌써 사원들은 스스로 호미를 쥐고 촌공소에 모여들었다. 밭에 나가서도 병완이나 상순이 시키지 않아도 사원들은 밭머리를 가로타고 기음을 매나가는 것이었다. 박성근도 별 군소리 없이 호미를 휘둘러 기음을 수걱수걱 매는 것이었다. 저녁노을이 붉게 타오르며 낙조가 산과 들을 붉게 태우며 밭고랑마저 벌겋게 물들였다. 허나 사원들은 흥겨운 노랫소리도 높이 계속 기음을 맸다. 병완과 상순은 코 기러기들처럼 사원들의 제일 앞에서 기음을 매나가면서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어느 하루 명옥이 집안에서 걷다가 발밑에 뭔가 물렁 밟히는 것이었다. 그녀가 구들을 보니 발에 밟힌 낡은 까래 톱에 누런 똥이 묻어있지 않겠는가? 명옥은 벽 밑에 누워 있는 시어머니를 보고 편찮은 시어머니를 몰라온 것이 마음이 안쓰러웠다. 그녀는 두 말 없이 바깥에 나가 쑥을 쥐고 들어와 똥 꼬치를 닦아 밖에 던졌다. 저녁에 남편이 돌아오자 명옥은 낮에 있었던 일을 말했다. 상순은 벽 밑에 누운 어머니 곁에 가서 이마도 짚어보고 손맥도 짚어 보았다. “어머니, 어디 편찮습니까?” “아니, 아프잖소.” 상순은 어머니 손을 잡고 눈물을 흘렸다. “내 혁명을 하느라고 사처로 헤매다나니 어머니를 잘 모시지 못해 죄송합니다. 이제라도 병원에 가깁소.” 상순은 잔등을 돌려대고 아내를 보고 “어머니를 부축해 업히오.”라고 했다. 그러나 사련은 며느리 손을 마구 밀어버렸다. “그만 두오. 없는 살림살이에 무슨 병원이오. 늙어서 그런 건데. 나를 편안히, 편안히 누워 있게 놔, 놔두오.” 사련은 말을 마치자 눈을 스르르 감고 바쁜 숨을 몰아쉬었다. 기준이가 윗방에서 내려와 보고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안되겠다. 윗방에 눕혀라.” 상순과 명옥은 황급히 윗방을 싹 걷고 누더기 이불이라도 편 후 어머니를 안아다가 모셨다. 연 며칠 상순이네 부부가 아무리 효성을 다해 모시었지만 어머니는 끝내 세상을 뜨고 말았다. 최사련은 정든 고향 개성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함경북도 명천군 상우남면의 기준에게 시집와서 아들 둘에 딸 셋을 낳았다. 그녀는 남편 기준을 따라 1925년에 간도 함흥 촌에 들어와 살자고 애쓰다가 갓 예순이 넘어 자손을 도합 스물대여섯이나 남겨두고 총망히도 세상을 떠나갔다. 상순은 죽물도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고 돌아 간 어머니가 불쌍해 “어머니-”, “어머니-”하고 부르며 목 놓아 울었다. 상우 부부와 명옥도 꺼이꺼이 곡을 하면서 눈물을 훔치었다. 동선과 순자, 금숙, 금자도 흐느껴 울었다. 사흘 후 함흥 촌 동산 마루에는 새 묘지가 하나 더 생기었다. 상순과 상우 형제는 피 눈물과 함께 어머니를 누런 흙 속에 모시고 서럽게 울고 또 울었다. 병완은 집 마당에서 서성거리면서 연신 주먹으로 가슴을 꽝꽝 치면서 한숨을 땅이 꺼지게 쉬었다. “내 죽어야 되는데. 오래 살아 별 꼴을 다 보는구나. 아들과 며느리 둘에 손자까지 앞세우고 오래 살아 뭘 하겠는가? 에이고, 불효한 자식들이 나를 외롭게 두고 먼저 가는구나.” 하얀 두루마기와 베옷이 뒤덮인 동산 마루에서는 아직도 구슬픈 곡성이 울리고 있었다.                    9. 산등성이의 쓸쓸한 무덤 매서운 동지섣달 바람이 총총한 뭇별들을 밝게 씻어놓았다. 칼바람에 밝아지는 달은 똑 마치 바람에 점점 밝아지는 숯불 쪼각 같았다. 삼태성도 온 밤 자지 않고 별빛을 뿌리느라고 곤했던지 하품을 하며 서산으로 넘어가고 동녘하늘에는 샛별이 반짝이고 있었다. 명옥은 자리에서 일어나 부랴부랴 문을 열고 바깥에 나와 서쪽 하늘을 쳐다보았다. 시계가 없어 명옥은 항상 학교로 다니는 애들이 지각할까봐 새벽에 일어나 져가는 삼태성과 샛별을 보고 시간을 맞춰 새벽조반을 짓 군 했다. (아직 일찍 하구나.) 명옥은 집식구들을 깨울 세라 살금살금 집 안에 들어와 구들에 올라가 바느실을 찾아들고 새벽 별빛을 빌어 손으로 만지며 옷을 기우면서 동녘하늘이 좀 더 밝아오기를 기다렸다. 그녀는 남편의 옷을 한 뜸 한 뜸 기우면서 미소를 지었다. 성미 급한 남편이 마을에 돌아와서 시할아버지를 도와 마을 사람들을 묶어세워 합작사 농사를 잘 지어 마을 사람들이 호평을 받자 마음이 흐뭇했다. 눈보라가 휘몰아쳐 모래알 같은 눈이 날아와 환히 밝아오는 창호지를 무섭게 두드렸다. 명옥은 이로 실끝을 물어뜯어 끊은 후 부랴부랴 부엌으로 내려가 죽을 쑤기 시작했다. 아침을 지어 놓고 명옥은 곤하게 자는 순자랑 금숙이랑 두드려 깨웠다. “일어나라. 해가 엉덩이를 다 비추겠다. 어서 아침을 먹고 학교로 가라.” 순자와 금숙은 부랴부랴 일어나 죽물을 대충 먹네 했다. 그때면 상순은 딸애들의 책보를 열고 필기장에 자대를 대고 줄을 쪽쪽 쳐 주군 했다. 순자와 금숙은 아버지 사랑에 눈시울을 붉히며 책보를 싸안고 학교로 떠났다. 명옥은 심한 쌀 고생으로 왕복 30리 통학하는 애들에게 점심 도시락도 싸주지 못하고 보내는 것이 내내 마음이 아팠다. 순자는 늘 이른 아침에 책보를 싸쥐고 학교로 반달음질 쳐 갔는데 지각을 한번 한 적이 없었다. 점심때가 되면 숙사 학생들은 모두 점심을 먹으러 숙사 식당에 갔다. 잘 사는 집 애들은 진수해 애들을 내놓고 모두 도시락을 싸가지고 와서 맛나게 밥을 먹었다. 그럴 때면 함흥 촌과 조개덕의 순자랑 경산이랑 모두 군침을 흘리면서 남들이 밥을 먹는 것을 부러워 했다. 그들은 쌀쌀해 나는 배를 끌어안고 바깥에 나가 물앉아 있다가 오후 시간이 되면 교실에 들어왔다. 점심도 먹지 못하고 오후에 시간을 보고 집으로 돌아올 때면 배고파 걷다가도 길옆에 물앉자 쉬다가 또 걷곤 했다. 가을이면 해동 굽인 돌이 길 옆 밭에 퍼런 무랑 누워 있었고 과수원에는 노란 배가 주렁주렁 달려 싱그러운 냄새를 풍겼다. 그러나 순자는 귀전에 아버지 우렁찬 목소리가 귀전을 때리는 것 같았다. “참외밭과 무밭에 가면 신 끈을 다시 매지 말고 사과 배 밭에 가 모자를 벗어 다시 쓰지 말고 수건을 다시 매지 말라. 그러지 않으면 남에게 무와 배를 훔쳐 먹었다는 의심을 사거나 말을 들을 수 있으니 말이다.” 순자는 아버지에게 무서운 매질을 당할 가봐 손을 내밀어 무를 뽑지 못했고 손을 들어 배를 뜯어 먹지 못했다. 순자는 한 마을에서 함께 학교로 다니는 잘 사는 동갑들인 성환이랑 고모사촌동생 칠군에게서 누룽지라도 얻어먹을 때도 있었다. 그때면 순자는 그 애들이 얼마나 고마운지 몰랐다. 배고파 집으로 돌아오고 나면 순자는 기진맥진해 쓰러지군 했다. 허나 저녁이라고 죽물을 마시고 쓰러졌다가도 다시 일어나 전등불 아래에서 끄떡끄떡 졸면서도 공부를 했다. 어느 날 순자는 책보를 안고 가마 목에 서서 아버지 밥상에 밥을 퍼 놓는 것을 보고 몸을 탈며 떼를 썼다. “엄마, 도시락을 싸 줍소. 다른 애들은 다 점심을 먹는데 난 항상 굶어 배고파 죽겠습니다.” “얘, 우리 집 유일한 노동력이 아빠가 아니냐? 아빠하구 할아버지 밥 잡숫지 않고 어떻게 일하러 가니? 일하지 못하면 가을에 쌀을 타지 못해.” “응, 안 돼, 나도 도시락을 싸 달라. 응~ 응, 응~” 이때 밥상에 마주 앉았던 상순이 성질을 썼다. “어서 학교로 가! 얻어맞기 전에.” 순자는 바깥으로 뛰어나가 학교로 반 달음치어 달려갔다. 그날부터 순자는 선생님이 한자를 세벌 쓰라고 하면 필기장이 없어 나무꼬챙이로 땅바닥에 다섯 번씩 쓰고 열 번씩, 지어 스무 번씩 썼다. 순자와 경산 그리고 성환은 공부를 잘해 항상 그들의 100점 맞은 모범시험지가 학교 흑판보에 나붙었다. 어떤 때 100점짜리 시험지를 집으로 가지고 오면 상순은 맏딸이 너무 귀여워 와락 끌어안고 빙빙 돌려주었다. 순자도 눈물이 글썽해졌다. 상순이네 집은 어찌나 가난했는지 먹을 쌀이 모자라 금숙이랑 봉자랑 학교를 가지 못하고 열 살도 되기 전에 벌써 벼 모 내기와 기음을 매야 했다. 소학교 문에도 가보지 못한 상순과 명옥은 자식들까지 까막눈을 만드는 것 같아 얼마나 가슴이 아팠는지 몰랐다. 허나 합작사를 한 후에 웬 영문인지 쌀독을 빡빡 긁어 먹어야 했다. 어느 날, 명옥은 밥상에 마주 앉아 공부를 하고 있는 순자를 보자 부지중 글을 배우고 싶은 충동이 생겼다. “순자야, 날 좀 글을 배워 달라.” 순자는 포도 눈이 대꾼해 물었다. “엄마, 이제 공부를 해 뭘 하겠습니까?” 명옥은 공책까지 갖춰 가지고 순자가 공부하는 밥상머리에 다가앉으면서 말했다. “순자야, 내 할아버지는 이전에 서당 방 훈장이었다. 그런데 옛날에는 여자애들한텐 글을 배워주지 않았단다. 그래서 우리 오빠랑 서당에서 공부를 할 때면 난 늘 옹이구멍으로 오빠한테 배워주는 할아버님 말씀을 듣고 천자문을 익혔다. 헌데 지금 넌 얼마나 좋니? 새 사회를 만나서 여자인데도 공부를 하고. 엄만 옛날에 공부를 하지 못 한 게 한평생 한이 됐다. 좀 배워 달라.” 순자는 포도눈알을 말똥거리더니 종알거렸다. “엄마, 그럼 내 엄마한테 글을 배워 주면 김 선생이라고 부릅소. 돈도 좀 주고.” 그러자 명옥은 순자를 쏘아보더니 공책을 식탁 안에 넣어 버렸다. “요 죄꼬만 계집년아, 내 공부를 못하면 못했지. 너를 선생이라고 부를 것 같아? 흥!” “그럼 안 배우겠으면 마오.” 순자도 틀을 차리면서 앵돌아졌다. 모녀간이 수가 틀리는 바람에 명옥은 다시는 글을 배우자는 말을 하지 않았다. 철없는 순자도 엄마한테 글을 배워 주지 않고 한뉘 후회 할 일을 저지르고야 말았던 것이다. 명옥은 순자가 배워주지 않는데 순자 옆에서 공부하는 금숙에게서라도 글씨를 배워달라고 할가고도 궁리해보았다. (에이, 그만두자. 맏이 배워 주지 않는데 둘째가 배워주겠니? 헤이, 이제 공부를 해 밥이 나온다니. 싹 걷어치우자.) 어느 날, 명옥은 사과 한 알을 얻어다가 본가 집 아버지가 짜준 궤안에 넣었다. 이튿날 일요일이여서 먼 학교로 갔던 순자까지 애들이 다 모이자 명옥은 사과를 쪼개 나눠주려고 농궤를 들췄다. 그런데 아무리 옷가지 속을 들추고 또 들춰도 없지 않겠는가? “누가 사과를 먹었니?” “응? 우린 모르오.” 명옥이 아무리 몽당비자루를 쳐들고 돌아가면서 물었다. “사과를 모르니?” 순자와 금숙은 다 “모르오.” 하고 도리머리 질 했다. 명옥이 셋째 딸 봉자에게 몽당비자루를 겨누며 “니 먹었니?”하고 바투 들이댔다. “아이, 모르오.” 봉자는 하얀 얼굴이 귀밑까지 홍시처럼 빨갛게 상기되면서 “난 먹지 않았소. 난 먹지도 않았는데 어째 나와 이럽니까?” 하고 당황해했다. 순자는 얼마간 짐작이 가서 봉자를 보고 “너 사과를 먹을 때 누가 봤니?” 하고 물었다. 봉자는 어망 간에 “내 사과를 먹는 걸 누구도 못 봤는데 뭐.”라고 얼버무렸다. 명옥과 순자는 눈길을 맞추면서 배를 끌어안고 웃고 말았다. 봉자는 자체 무안에 빠져 구들에 나뒹굴면서 “와-”하고 울음보를 터뜨리고 말았다. 명옥은 벼 짚을 주어 새끼를 꼬면서 밥상 옆에 조롱조롱 앉아 공부하는 순자와 금숙이 그리고 옆에서 구경하는 봉자를 보면서 한숨을 호 내쉬었다. 생기라는 아들은 생기지 않고 넷째 금자까지 낳다나니 이젠 딸을 넷이나 낳았으니 기막힐 일이 아닌가. 신경질이 난 상순은 넷째 금자의 생일을 쇠지도 않으려고 했다. 그때 웃새집 사랑방에 들어있던 중이 지나가다가 상순이네 집에 문뜩 들어왔다. “에헴, 이 집 넷째 오늘 생일날인 거 같은데 지나가던 중에게 시주를 좀 하지 않겠소?” 불청객 같은 중이 들어서서 하는 말에 상순은 불쾌하기도 하고 놀랍기도 했다. (이 중이 어떻게 오늘 금자 생일인 거 알가? 정말 귀신이 곡할 노릇이야.)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상순은 짐짓 왕청 같은 말을 내 뱉었다. “생일은 무슨 놈의 생일, 알지도 못하면서 남의 일에 웬 참견이오?” “생일날이 아니라고 시치미를 떼겠소? 환히 아는데 누굴 속이려오?” “어서 물러가오. 지금 공산당의 세상에 무슨 뚱딴지같은 미신사상을 퍼붓소?” 허나 중도 끈질기게 들어붙어 떠나가지 않았다. “내 그래도 한다하는 풍수쟁이라오. 이전에 말한 적이 있는 거 같은데. 으흠, 이 집 넷째 딸이 금자라던가? 저 애를 거저 애라고 보지 마오. 저 애를 잘 대접하면 이제 4년 후에 이 집에 소가 밟아도 우그러들지 않는 떡돌 같은 아들을 태여 날 거오.” “4년 후에? 쳇, 다 늙어 죽겠소. 언제 마흔이 넘어 아들을 본다고 그러오?” 상순은 곧이듣지도 않는척했지만 은근히 호기심이 생긴 것이 분명했다. “그럼 한 가지만 묻기오. 저기 내 아내가 또 임신했소. 저 배 속의 애는 아들일 거 같소?” 중 영감은 우쭐 일어나더니 “쯧쯧쯧, 내 말을 명심해 두오. 4년 후에 소가 밟아도 우그러들지 않고 세 개 신을 업은 떡돌 같은 아들애가 태어 날 거요.”라고 곱씹어 말하며 밖으로 나갔다. “4년, 4년, 또 그 말이구나. 4년 후면 내 마흔 살인데 애기를 낳을 수 있는가? 전탕 황당한 미신의 소리만 치면서.” 상순은 중의 뒤 잔등에 대고 삿대질하면서 신경질을 쓰다가 돌아서더니 명옥의 배를 쏘아보더니 횡 하니 바깥으로 나가버렸다. 명옥은 배 속에서 노는 애를 느끼며 배를 쓰다듬었다. “요 불쌍한 것아, 네가 또 아들이 아니면 난 네 애비 아들 비위 성화에 어떻게 배기겠느냐? 네가 어미 고충을 헤아려 제발 아들로 태어나렴.” 이미 생긴 애야 어떻게 딸이든 뭐든 아들로 뜯어고치랴? 괜히 중이 지나가면서 뜨거운 밥을 먹고 이빨이 부러질 식은 걱정을 해 놓아서 명옥이만 속을 태우면서 애를 낳기를 기다리게 되고 말았다. 개체농사를 지을 때엔 밭이 얼마 있으면 농사를 얼마 지으면 국가에 바치고 나머지는 다 자기 식량으로 남겨 쌀독이 꼴딱꼴딱 찼다. 허나 합작사를 한 다음 상순이네나 상우네나 숱한 밭을 집체합작사에 들여놓고 뼈 빠지게 일했는데도 쌀독이 홀쪽했다. (보리고개를 어떻게 넘긴단 말인가?) 명옥은 늘쌍 공부를 하는 애들이 학교로 늦어가 지각을 할까봐 새벽에 일어나 아침밥을 하다나니 늘 곤기에 몰려 초저녁이면 끄떡끄떡 졸군 했다. 애들은 갓 돌이 지난 금자를 업은 채 새끼를 꼬다가 끄떡끄떡 조는 엄마를 보고 입을 싸쥐고 캐득캐득 웃었다. 순자는 어머니를 깨울까봐 입에 식지를 대고 동생들에게 “쉿-” 하고 말렸다. 그러나 그 웃음소리에 명옥은 끄덕끄덕 조아리던 머리를 멈추고 곤기가 몰린 눈길로 겨우 애들을 희미하게 보고는 또 도정신해 새끼를 꼬고 또 꼬았다. 상순은 집에서 나가자 그 길로 토성안집에 가서 상우 형님을 만났다. 집에는 때마침 상우 형님과 아주머니가 있었다. “형님, 맏조카 앓는다더니 어떻소?” 상우는 울상이 돼 머리를 숙이며 한숨을 지었다. 새금이 두덜거렸다. “저 영감은 한숨만 쉬면서 아들을 죽이겠다는데. 병원에 가보지 않고.” 그때 뜻밖에도 상우가 머리를 들고 새금을 쏘아보면서 고래고래 고함쳤다. “내 가보면 어찌겠소? 병원의 의사니까 제절로 제 병원에서 의사를 보이고 치료하겠지. 날마다 가서 붙들고 앉아 있으면 죽을 게 살아나오? 이젠 세월이 바뀌어서 합작사를 한 후에는 집체 일 하러 나가지 않으면 공수를 벌지 못해 쌀도 타지 못하는 거 알면서도 그러오?” 허나 새금은 혀를 끌끌 차면서 나그네를 흘겨보면서 나무랐다. “어쩜 저렇게 몰인정할 까? 제 새끼 죽어 가는데 병원에 딱 다섯 번 밖에 가지 않고 일 밖에 모른다니까.” 아주머니가 나무라는 말에 상순은 속이 찔리는 데가 있었다. 삼촌으로서 제일 큰 조카가 앓는데 조선 전쟁터로 뛰어다니다나니 한 번도 문안을 가지 못했던 것이 못내 속에 걸렸다. “아주머니, 그래 그 새기는 어쨌소?” “누구? 벽선 말이오?” “양.” “헤이, 사돈보기까지 다 하고 올 음력설 후에 결혼식을 올리려고 했는데 이게 뭐요? 결혼이고 뭐고 살려 놔야 어쩌지. 참 답답하오.” 상순은 무릎을 탁탁 치면서 하소연하는 아주머니를 보고 너무나도 미안해 “아주머니, 함께 공학이를 보러 가기요.”라고 했다. “오늘?” “양? 조카가 앓는데 한 번도 가보지 못해 미안하오.” 새금은 그제야 바위처럼 퍼렇게 굳었던 얼굴을 좀 펴면서 단통 해시시해 했다. “그래도 항상 생원이 사리에 밝다니까.” 상순은 공부를 하는 순애를 보고 “너도 방학을 했지. 앓는 오빠를 보러 가자.”라고 했다. 순애는 공부를 하다가 좋아 퐁퐁 뛰며 다가와 삼촌의 손을 잡았다. 상순이가 아주머니와 조카 순애를 데리고 기차를 타고 개산툰병원에 가 병실의 문을 떼고 들어가 보았을 때다. 공학은 침대에서 겨우 일어나 맞이했다. 옆에서 벽선이가 그들에게 인사를 올리고서는 돌아서서 어깨를 들먹이며 흑흑 흐느껴 울었다. “어디 보자. 부스럼이 이렇게 중하단 말이냐?” “삼촌, 괜찮습니다. 이전에 영자 앓던 부스럼은 아닙니다. 치료하면 나을 겁니다.” “아니, 이 동무는 병세가 중한데도 그저 일 없소, 일 없소 합니다. 이 병원에서는 안됩니다. YB병원이거나 장춘 성병원에 가야 합니다.” 상순이 보니까 목덜미에 부스럼이 난 곳이 팅팅 붓고 고름이 질질 흐르고 있었다. 상순은 조카를 와락 끌어안고 눈물을 왈칵 쏟으면서 “얘아, 이게 무슨 일이냐? 그저 부스럼이 아니구나. 이 시골 병원에서 널 죽이겠다. 안 된다. 당장 YB병원으로 가자.”라고 했다. 공학은 “삼촌, 서러워하지 마십시오. 그래도 자기 병원에서 치료해야 보살핌도 더 받을 수 있습니다. YB병원에 가면 아는 사람도 없지 치료비나 많이 팝니다.”라고 했다. 상순은 급한 성미였다. “얘, 당장 짐을 꾸려 가지고 연길에 들어가자. 할아버지 친구의 아들 정규상이 의사질 한다. 큰집 혁내 조카도 연길에서 중의로 소문이 높은 용한 의사다. 우리 두 집에서 집을 팔고 소를 팔아서라도 너를 구해야 한다.” 벽선은 조카에 대한 삼촌의 친 혈육의 정을 가슴 깊이 느낀 나머지 뜨거운 눈물을 이불에 똑똑 떨어뜨리면서 보짐을 꾸린 후 퇴원수속까지 마쳤다. 상순은 조카를 부축해 병원 밖으로 나갔다. 공학은 조선인민군 부상병들을 구급하면서 일해 온 병원을 둘러보았다. 그때 병원의 원장과 의료일군들이 너도 나도 얼마간씩 공학에게 쥐워 주면서 치료비에 보태라고 하며 바래었다. 공학은 눈물을 흘리면서 “내 꼭 병을 치료하고 다시 돌아와 여러분과 함께 이 병원에서 일하겠습니다.”라고 답례했다. YB병원에 입원한 후 상순은 맏조카를 자기 친자식처럼 아주머니와 함께 간호했다. 그는 또 YB병원에서 수소문해 심 혈관 내과에 정규상이 있다는 것을 알아낸 후 찾아갔다. 기실 정규상은 YB의학원에서 교수를 하면서 YB병원 심혈관내과에 나와 환자들의 병도 보고 있었다. 상순이 공학을 데리고 찾아 갔을 때 정규상은 한창 곱살하게 생긴 30대 초반의 여인과 무슨 답답한 말을 하는 것 같았다. 상순이가 찾아 들어가자 정규상은 상순을 알아보고 반갑게 인사하면서 그 여인과 주고 받던 말을 뚝 끊었다. 상순은 그들의 주고받던 말을 중둥무이 할 수도 없어 옆에 조용히 앉아 기다리는 수 밖에 없었다. 그때 정규상이 그 여인을 보고 “신랑이 이름이 조철호였던가?”라고 묻는 것이었다. “예, 그때 그 집 아버지께서 우리 혼사 말을 해줘서 내 로투구로 시집가지 않았고 뭣입니까?” “그 일은 알만 하오. 신랑이 일이 정말 답답하오. 그래 부대에 연계해 보았소?” “예. 부대에서 신랑이 마지막으로 보낸 편지를 가지고 조선에 나가 아무리 찾아보아도 찾지 못했습니다. 신랑이 갔던 그 부대 한 개 사단이 몽땅 전멸하고 없어져 찾을 길이 없답니다.” 그 여인은 눈물을 줄줄 흘리며 어깨를 들먹였다. 기실 조철호는 성칠 연대장이 영솔한 사단의 정찰병이었다. 무명고지 쟁탈전 때 그는 성칠 연대장의 명령에 따라 무명고지에 가서 한국군 대대장 이병수를 혀로 붙잡아온 후 무명고지를 탈환하고 사수하다가 미군 쌕쌔기의 폭격과 탱크의 포격에 맞아 바위돌과 흙무지에 파묻혀 장열하게 희생됐던 것이다. 그 후 성칠 연대장 부대는 전멸하다 시피 돼 조철호를 비롯한 숱한 열사들이 장열하게 희생된 일을 누구도 알 수도 증명설 수도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옥선은 찾고 또 찾고 기다리고 또 기다리었던 것이다. “그래 열사증이라도 줍데?” “아니, 언제? 난 열사 증을 주려는 걸 받지 않았습니다. 난 열사증이 필요 없습니다. 신랑을 찾아내야지. 내 신랑은 꼭 살아 있습니다. 꼭 찾아올 겁니다.” 정규상은 머리를 끄덕이며 한숨을 후 내쉬었다. “참 답답하오. 이젠 전쟁이 끝 난지 반년도 넘고 해가 지났는데도 신랑이 돌아오지 않으니까.” 그 여인은 눈물을 훔치면서 하소연했다. “난 신랑이 죽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디엔가 살아만 있으면 세상 끝이라도 찾아 가겠습니다. 저녁이면 달빛이 비껴드는 빈 방에서 신랑 생각에 눈물로 베갯잇을 적시면서 밤을 새다가도 구새 목에서 쿵쿵 발자국 소리가 나면 혹시 신랑이 웃으면서 문을 뚝 떼고 들어서기나 할 것 같지 않겠습니까? 그래 후닥닥 일어나 달아가 문고리를 쥐고 바깥을 내다보면 우리 집 앞을 지나가는 동네 나그네 발걸음 소리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난 맥이 풀려 문고리를 쥔 채 물앉아 흐느껴 울군 했습니다. 흐흐흑, 흑흑흑.” 상순이가 들어도 기막힌 사연이었다. 그리하여 그들이 말을 다 주고 받기를 기다리느라고 바깥에 나가 복도에서 왔다 갔다 했다. 한참 후 그 여인이 정규상의 바램을 받으면서 복도로 나왔다. 머리 태를 땋아 늘인 어깨를 들먹이면서 옆으로 지나갔다. 상순이 그 여인을 보니 아주 젊고 예뻤는데 너무나도 불쌍했다. 정규상은 상순을 들어오라고 하면서 의사사무실로 들어가며 “에이, 무슨 쓸데없는 전쟁을 해서 숱한 여인들이 남편을 잃게 만들 게 뭐요? 그 것도 동족끼리 죽일 내기 하면서 숱한 열사와 과부를 만들었단 말이오.” 정규상이 너무 험한 말을 하는 것 같아 상순은 맞은쪽에 있는 의사의 눈치를 보니 그 의사는 보던 신문을 들어 험상궂은 얼굴을 막는 것이었다. 그런 눈치는 모르고 정규상은 “우리 아래 마을에 있는 김옥선이라고 부르는 저 예쁜 각시를 로투구에 있는 조철호란 총각에게 내 소개해서 시집갔소. 신랑이 돌아오지 못해 어찌 하오? 에이 참, 더러운 세월이란 말이오.” 하고 계속 중얼거리었다. 한참 후 정규상은 상순에게 눈길을 주었다. “참 오랜만이오. 무슨 일로 찾아 왔소?” 상순은 맏조타의 병 정황을 말하고나서 “내 큰조카를 살려 주오. 어떻게 연줄을 놓아 피부병에 용한 의사를 찾아 병을 봐게 해주오.”라고 간청했다. “오, 그런 일이오?” 정규상은 상순을 데리고 2층에 있는 피부과에 있는 한 여성의사에게 뭐라고 하더니 데리고 나와 곧추 공학이가 입원한 병실로 총망히 찾아갔다. 그 여성의사는 공학의 혹처럼 팅팅 부어오른 고름 투성이로 돼버린 덜미를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상을 찡그리는 것이었다. “어째 이제야 왔어요? 치료기일을 좀 늦추면 위험해요.” 상순은 의사의 손을 꼭 잡고 “의사선생님, 우리 큰 조카를 꼭 살려 주십시오. 예? 내 머리털로 신을 지어서라도 그 구명은혜를 잊지 않고 갚겠습니다.”라고 비난 사정을 했다. “노력해봅시다. 먼저 우리 피부과 입원 처에 입원시킵시다.” 그 여성의사의 분부대로 상순은 벽선과 함께 뛰어다니면서 입원수속을 한다, 조카를 입원실에 업어간다 하면서 채바퀴 돌듯이 맴돌았다. 정성이 지극하면 돌 위에도 꽃이 핀다던데 이건 웬 일일까? 7촌 조카 혁내도 불러 중약도 달여 먹였건만 공학의 뒷덜미 부스럼의 고름은 멎지 않고 병세가 점점 심해져 이젠 목으로부터 얼굴까지 팅팅 부어올랐고 목으로 죽물도 넘기기 어려워했다. 새금은 공학을 붙안고 엉엉 서럽게 울었다. 상순은 죽어가는 맏조카를 뻔히 보고만 있을 수 없어 여성의사를 찾아가 최대한 의료대책을 대달라고 신신당부했다. 벽선은 어머니와 삼촌이 병실을 비운 틈이면 공학의 손을 꼭 잡고 어깨를 들먹이면서 흑흑 흐느껴 울었다. 공학은 팅팅 붓긴 얼굴 속에 겨우 보이는 눈으로 벽선을 바라보면서 손을 꼭 잡았다. “벽선이, 슬퍼하지 마오. 나는 내 피를 빼서 죽어, 죽어 가는 조선인민군 전사를 구한 걸 절대 후회하지 않소.” 벽선은 공학의 손을 잡고 애타게 흔들었다. “동무, 동무 피를 뽑아 수혈하지 않았어도 동문 이런 병에 걸리지 않을 수도 있어요.” 그러나 공학은 벽선의 손을 꼭 잡고 신신당부했다. “한 가지 부탁하기요. 의학적으로 고혈압환자가 피를 뽑아 남에게 수혈하면 이런 부스럼에 걸려 사람이 목숨을 잃을 수 있는가 꼭 연구해 보오. 정말 고혈압환자가 피를 뽑으면 죽는가? 이후에는 나처럼 고혈압환자가 남에게 수혈하려고 피를 뽑았다가 사망하는 일이 생기지 말게 말이오. 나는 아마 사랑스러운 벽선을 이 세상에 홀로 남겨놓고 저 세상으로 떠나가야 할 것 같소.” “그런 말 말아요.” 벽선은 공학의 품에 와락 안기며 흑흑 흐느껴 울었다. “동무는 내 마음 속으로 제일 사랑하는 선생이요. 꼭 병을 치료한 후 저와 결혼하자요. 약한 말 말아요. 힘내세요. 우린 의사들이예요. 꼭 치료해낼 수 있어요. 으흐흑, 흑흑.” 이때 새금이 들어와 벽선을 공학의 품에서 왈 일으켜 앉혔다. “정신 있소? 아픈 사람한테 이렇게 엎뎌 있으면 어찌 하오? 숨이 막히겠소.” 그러자 벽선은 눈물범벅이 된 얼굴의 눈물을 훔치면서 한쪽 구석으로 가 돌아서서 어깨를 들먹였다. 공학은 겨우 손을 들어 벽선을 가리켰다. “엄마는 어째 내 벽선과 말하자 하면 들어와 이러오?” “응? 네 병 치료에 방해될까 봐 그런다.” 이때 상순이가 들어와 새금을 불러 복도로 나가 뭐라고 말했다. 그러자 공학은 나지막하게 “벽선이, 여기 오오.”라고 했다. 벽선이 다가가자 공학은 벽선의 손을 꼭 잡고 떠듬떠듬 말했다. “벽선이, 사랑하오. 미안하오. 난 글렀으니까 새로운 출발을 하오. 좋은 신랑을 만나 행복하게 사오.” 벽선은 손을 들어 공학의 입을 막았다. “안 돼요. 전 동무를 영원히 사랑해요. 사랑해. 어, 허헉헉.” 병실에는 벽선의 울음소리에 반죽해 공학의 하늘이 무너질 듯한 한숨소리가 가슴을 허비며 들려왔다. 복도에서는 그러는 공학과 벽선을 들여다보며 새금과 상순이 눈물을 훔쳤다. 공학은 알지도 못할 부스럼을 치료하지 못하고 끝내 이 세상을 떠나갔다. 자식을 앞세운 상우와 새금이 그리고 형님과 오빠를 잃은 동선과 순애의 마음들이야 오죽하랴.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벽선은 병실에서 기절하고 말았다. 상순은 조카의 대소변을 받아내며 정성을 다했지만 끝내 조카를 보내고 집에 돌아와 털썩 물앉았다. “야, 조카를 잃고 나니 엄마 세상 떠났을 때보다도 더 슬프다. 중이 자기 머리를 깎지 못한다고 의사 하는 공학이 제 부스럼을 떼지 못하고 삼촌보다 먼저 떠나가다니. 원, 세상에 이런 일도 있단 말인가?” 이틀 후 상우와 상순은 공학이를 함흥 촌 동산에 피눈물과 함께 묻어주었다. 공학이 생전에 애지중지하던 의서 한 궤짝도 무덤 옆에 묻어주었다. 고혈압환자가 피를 빼 수혈하면 죽을 수 있는가하는 미지의 의학과제와 함께 영영 묻어두었다. 상순은 조카의 무덤을 안고 어루 쓸며 슬프게 울었다. 함흥 촌과 계수동 사이에 솟아오른 무덤 위로 한 겨울의 매서운 눈보라가 쓸쓸히 휘몰아쳤다. 저쪽 백양나무 앙상한 가지에서 까마귀가 부리를 다시더니 까욱까욱 을씨년스럽게 울고 있었다.  
104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82) 댓글:  조회:1489  추천:1  2017-09-26
                                          6. 무명고지 격전        엷은 어둠이 벌겋게 타다 남은 저녁노을 밀어내며 산기슭에 몰려왔다. 이남 땅에서 어둠조차 공포의 사자와도 같았다. 상순은 트럭대오를 정돈한 후 즉시 출발하려고 했다. 전사들은 상순이네가 가져온 밥함지에 둘러 앉아 남쪽의 이밥을 떠먹고 기분 좋게 트럭에 올라탔다. 부르릉 부르릉 그들이 금방 떠나려고 할 때다. 뚜루룩 뚜루룩 푱! 푱! 푱! 기관총이 산마루에서 불을 토하고 남에서 트럭들이 불시에 들이닥쳤다. “빨갱이들을 생포해라!” “어서 투항해!” 땅! 쿵! 땅! 쿵! 박격포 탄알이 우박처럼 날아와 폭발했다. 상순이 피뜩 보니 괴뢰군들이 철갑모를 번뜩이며 새까맣게 덮쳐왔다. 사태가 아주 위급했다. 벌써 몇 대 트럭에 불길이 삼단같이 일고 여기저기에서 전사들의 비명소리가 처량하게 들렸다. “성수 패장, 트럭을 몰고 따발령 쪽으로 철퇴하라!" "옛!" "2패와 3패는 저 동쪽고지를 점령하라!” 상순의 명령에 따라 전사들은 전투에 유리한 동쪽고지로 돌격해 올라갔다. “트럭을 몰고 오던 길로 빠져나가라!”  성수는 운전수들에게 고함치며 트럭 운전실에 올라탔다. 군복을 만재한 트럭들은 일제히 꽁무니를 빼기 시작했다. 고지를 점령한 상순은 눈 위에 엎드린 채 오던 길로 달아나는 트럭을 바라보며 욕설을 퍼부었다. “양키놈들, 하늘에서 떨어졌는가? 잘 왔어. 뒈질 놈들!" 그는 이제야 양키놈들에게 본때를 보여줄 시각이 닥쳐왔다고 이를 악물고 윽윽 벼르며 속으로 시퍼런 칼을 갈았다. 흥수는 다가와 엎디더니 “저 숱한 군복을 버리겠소?” 하고 물었다. “아니야? 적들이 트럭을 쫓아가면서 불질하면 어쩌는가?” 상순의 말에 흥수는 머리를 끄덕였다.  “빨리 전호를 파고 저격준비 하라!” “옛!” 전사들은 공병삽을 휘둘러 재빨리 전호를 파기 시작했다. 허나 댕그랑댕그랑 삽날이 돌에 부딪치는 소리만 날뿐 언 땅이 잘 파지지 않았다. 전사들은 돌을 주어다 대충 쌓아놓고 엎드렸다. 그때 괴뢰군 트럭들이 미제 탱크 앞에서 쫓아왔다. 양키놈들은 항상 독전태세로 뒤에 물러서고 괴뢰군들을 탄알받이로 앞장세웠다. 상순은 경기관총을 둔덕에 걸어놓고 성수네 트럭을 쫓아가는 괴뢰군 트럭을 조준해 사격했다. 뚜르륵 뚜르륵 성수네가 몰고 달아나는 트럭대오는 상순이네가 점령한 고지를 안고 서쪽으로 굽이돌아 북상하고 있었다. 그들을 추격하는 남조선 괴뢰군 트럭들이 상순이네 점령한 고지 북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상순은 허리춤에서 신호총을 꺼내 밤하늘에 대고 쏘았다. 씽- 탕! 포화에 그은 어두운 밤하늘에 빨간 신호등이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올라갔다가 제일 뒤에서 달리는 성수 트럭 앞으로 해 떨어졌다. 성수는 불길이 활활 타 번지는 트럭을 세우고 고지를 올려다보았다. 상순은 남조선 괴뢰군이 알아듣지 못하게 한어로 고함쳤다. “성수! 불 달린 트럭으로 길을 막앗! 고지로 철퇴!” 성수는 트럭 운전실 문을 열고 고지를 올려다보며 버럭 성을 냈다. “트럭을 버리다니!” “트럭으로 길을 가로 막앗! 괴뢰군 트럭이 쫓지 못하게!” “알았소!” 성수는 전사를 시켜 불이 활활 붙는 군복을 마구 뒤에 내리뿌리게 했다. 괴뢰군 트럭은 휘발유통에 불이 당길가봐 이리저리 피하면서 쫓아왔다. 성수는 산 중턱 제일 좁은 굽이돌이에 이르자 불이 활활 타오르는 트럭을 가로 멈춰 세워놓았다. 그는 운전실에서 내려 뒤로 달려가더니 휘발유통 덮개를 열고 불이 활활 타오르는 군복을 내리워 훌 덮어놓았다. 불길 속에서 성수가 산 아래로 굴러내려가는 것이 얼핏 보였다. 쿵! 삽시에 자동차 휘발유통이 폭발하며 불길이 하늘을 찔렀다. 불이 달린 군복이 자동차 파편과 함께 하늘로 날아올랐다가 여기저기 어지러이 떨어졌다. 뒤따라온 괴뢰군의 트럭들은 불타는 트럭에 막혀 북으로 도망치는 지원군의 트럭들을 바라보면서도 용빼는 수가 없어 꽥꽥 고함만 쳤다. 상순은 기관총으로 괴뢰군 트럭의 휘발유통을 조준해 사격했다. 뚜르륵 뚜르륵 쾅! 쾅! 트럭 휘발유통들이 폭발하면서 화염이 하늘 높이 치솟아 올랐다. 금방 고지에 달려 올라온 성수는 상순을 손가락질하며 놀란 소리를 쳤다. “왜 트럭을 쏘오?! 놈들 트럭이라도 빼앗아 몰고 도망쳐야지.” “트럭을 거저 세워 놔 되니? 완전히 추격을 따돌려야 해!” 그제야 성수는 뒷덜미를 긁적거렸다. “빈 통이 소리 더 높다더니 개뿔도 모르면서 큰소리만 꽝꽝 쳐!” 상순은 욕설을 퍼부었다. 괴뢰군과 미제 양키놈들은 남북으로 고지를 에워싸고 진공했다. 이때 흥수는 상순을 힐끔 곁눈질하면서 두덜거렸다. “이상해! 분명 아까 그 집에서 물어먹은 거야!” 번쩍이는 화광을 빌어 흥수의 눈과 입가에 증오가 번뜩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헛소릴 치지 말라!” 상순은 전사들에게 명령했다. “탄알을 아껴! 적들이 십여 미터까지 오면 사격하라!” 상순이 한어로 명령하는 바람에 괴뢰군은 알아듣지 못했다. “아까 김영장은 삼촌이고 뭐고 하더구먼. 여기 남조선에 무슨 친척이 있소?” 상순은 귀찮게 구는 흥수를 흘끔 가로 보았다. “잔말 말고 전투준비해!” 이때 모진 엔진소리를 내면서 4대 탱크까지 덮쳐왔다. 미군 탱크는 불붙는 괴뢰군 트럭과 중국인민지원군 트럭을 길옆에 밀어 버렸다. 길이 열리자 탱크들과 트럭은 북으로 도망친 트럭대오를 추격해갔다. 나머지 미군과 괴뢰군들은 고지로 엉금엉금 기어 올라왔다. 상순은 한어로 전투명령을 내렸다. “사격!” 전사들은 일제히 불을 토했다. 간사한 미군은 뒤에서 뭐라고 독전했다. 괴뢰군은 진두에서 앞 병사가 쓰러지면 뒤 병사가 시체를 넘어 맹사격을 가하면서 돌격해 올라왔다.   괴뢰군들은 미군 탱크 지원을 받으며 고지에로 파죽지세로 덮쳐 왔다. 괴뢰군들은 미군의 대포밥이 돼 기를 쓰고 덮쳐들었다.  벌써 몇몇 지원군 전사들이 흉탄을 맞고 쓰러졌다. 상순은 경기관총 탄알이 다 떨어져 사격을 멈췄다. “탄알이 다 떨어졌다!” “나도 탄알이 없다!” 상순은 여기저기서 절망에 가까운 소리가 들렸다. "중공군이 탄알이 다 떨어졌다. 돌격!" 괴뢰군들은 그 소리를 듣고 허리를 펴고 꿋꿋이 선채 무명고지에로 달려들었다. 상순은 모젤권총과 공병삽을 들고 병수와 태수 등 전사들을 돌아보면서 비장하게 고함쳤다. “트럭대오를 엄호해야 해. 이 무명고지에서 결사전을 벌리자!” 상순은 공병삽을 틀어쥐더니 벌떡 일어났다. “총창을 꽂앗!” 전사들은 상순의 명령에 따라 모두 총창을 꽂으며 따라 일어섰다. “싸(杀)!” 상순은 공병삽을 휘두르며 제일 앞에서 뛰어 내려갔다. 머리 누런 양키놈이 상순의 옆에서 짓쳐 내려가는 흥수한테 총을 겨누었다. 눈치 빠른 상순은 흥수를 옆으로 밀어재끼며 공병삽을 휘둘러 양키 놈 목을 탁 찍었다. 땅! 양키 놈은 쓰러지면서 총을 쏘았다. 상순은 몸을 기우뚱하더니 공병삽을 쥔 손으로 왼팔을 붙잡으며 몸을 비틀며 간신히 가누었다. “김영장!” 병수가 뛰어나가면서 총을 쏜 양키를 총창으로 찔러 눕혔다.      상순은 아픔을 참으면서 일어나자마자 또다시 공병삽을 무섭게 휘두르며 머리 누런 양키놈들을 덮쳐내려갔다. 세계최강군이노라고 우쭐렁거리던 미군 양키놈들은 야수처럼 덮쳐들며 날치는 상순이랑 병수랑 보며 뒤로 비실비실 물러섰다. 양키놈들은 무기나 믿고 우쭐렁거렸지 육박전엔 얼음판에 들어선 소눈깔을 해가지고 무서워 부들부들 떨며 뒤저참했다. 그 놈들은 큰 덩치를 믿고 줄곧 지원군 전사들을 깔보아왔지만 생사결단으로 덮쳐드는 지원군 전사들 앞에서 손을 들지 않으면 뒤로 도망쳤다. 상순은 삼검불 같은 누런 머리털을 흩날리며 도망치는 한 양키놈을 뒤쫓아가 공병삽으로 목을 탁 내리쳤다. 그 놈은 목을 옆으로 비틀어 피하면서 애걸했다. "NO! Den't Shoot!(아니, 쏘지 말라!)" "너?! 뭐라고 개소리야!" 상순은 타오르는 전장의 화염을 빌어  양키놈의 파란 눈에서 애원의 빛이 가련하게 판들거리는 것을 보았다. "손 들엇!" 상순은 공병삽으로 손을 가리켰다. “요 핸드 들엇!" 상순은 요 손을 들어라고 말했다. 그런데 양키놈은 손을 쳐들어보이면서 이렇게 중얼거렸다. "Your hand(요 핸드: 너의 손)?" "응, 요 손 들엇!" 양키놈은 자기 손을 쳐들어보이며 비명 같은 소리를 쳤다. " My hand?!(마이 손: 내 손?!OK, OK!)" 상순은 공병삽을 쳐들고 귀동냥해 들은 보리영어로 호령했다. "응! 요 핸드(요 손) 들엇!"  "Yes, yes!" 양키놈은 용맹한 상순 앞에 무릎을 털썩 꿇더니 총을 든 채 두 손을 머리 위에 번쩍 쳐들었다. 파란 눈은 공포에 판들거렸다. "흥! 네놈들도 세계 최강군이냐? 너네 양키놈들은 마이(많이) 핸드 들더라(많이 손 들더라.). 날창만 들이대면 손을 번쩍번쩍 들어?!. 흥! 맨 물알 같은 놈들, 뭐? 세계 최강군! 퉤!" 상순은  코웃음치며 그 놈의 총을 빼앗아냈다. 양키놈은 개목숨을 구했느라고 연신 "OK, OK!" 하고 상순한테 살려달라고 두 손을 싹싹 비볐다.  갑자기 두 양키놈이 양옆에서 총칼을 번뜩이며 동료를 구하려고 상순한테 덮쳐들었다. 상순은 로획한 돌격총으로  연신 두 양키 놈을 쏴 넘겼다. 그 틈에 무릎을 꿇었던 누런 머리가 벌떡 일어나 상순의 돌격총을 잡아 꽉 눌렀다.  상순은 무쇠주먹을 휘둘러 양키놈의 대갈통을 서리맞은 박처럼 까부셨다. 그 놈이 주춤 하는 틈에 상순은 머리로 연신 양키 놈의 대가리를 들이받았다. 양키 놈은 건뜩 쳐들린 코마루가 분질러지고 코피 툭 터졌다. 그양키 놈은 비명을 지르며 네각을 쭉 뻗고 뒈진 돼지처럼 쓰러졌다. 상순은 코피범벅이 된 양키놈 누런 머리털을 틀어쥐여 내리누르며 무릎으로 대가리를 연신 걷어찼다. 양키놈은 목마저 분질러져 까딱하지 못했다. 떵! 떵! 그러고도 성차지 않아 상순은 무쇠주먹을 휘둘러 양키 놈의 콧대를 여지없이 까부셨다. 뒤이어 벌떡 일어나 발로 양키놈의 피범벅이 된 부러진 콧대를 짓밟아 뭉개며 너털웃음쳤다. "허허허! 끝내 양키놈들 콧대를 분질러 놨구나!" 병수가 뒤쫓아와 맞장구를 쳤다. "하하하! 통쾌해!" 퉤! 상순은 쓰러진 양키 놈의 납작해진 피범벅콧대에 침을 뱉었다. 뒤이어 그는 양키놈의 손에서 돌격총을 빼앗아내 몰사격하며 무리로 쓰러지는 양키 무리 속을 돌진했다. "돌격!" "싸!" 죽음을 각오하고 총창을 휘두르며 단말마적으로 덮쳐 내려가는 중국인민지원군 장병들을 보자 괴뢰군은 산 아래로 내리 뛰며 눈 먼 총을 쏘아댔다. 태수는 쫓아내려가면서 연신 괴뢰군 병사를 찔러눕혔다. 그는 "싸!" 소리치며 또 한 놈의 뒤 잔등을 찔러 눕혔다. 괴뢰군들도 장탄해 총을 쏠 새 없어 태권도를 날렸다. 어떤 괴뢰군 병사는 몸을 날려 지원군의 머리를 발길로 차 눕히고 무쇠주먹으로 머리를 까부셨다. 어떤 괴뢰군 병사는 지원군의 멱살을 틀어쥐고 헤딩을 해댔다. 상순은 왼팔을 쓰지 못하자 오른 손으로 공병삽을 휘두르는 척 하다가 발길을 날려 병수에게 덮쳐드는 양키를 차 눕혔다. 그는 공병삽으로 쓰러진 미군 흑인병사를 마구 찍어 죽였다. 이때 흥수는 눈에 달이 올라 적이고 아군이고 눈앞에 뛰어만 들면 총창으로 마구 찍어댔다. 그는 옆에서 자기를 보호하며 짓쳐나가는 상순을 보자 적이라고 총창으로 들이 찍었다. 뜻밖의 총창 질에 상순은 공병삽으로 날아드는 총창을 쟁그랑 막으며 황급히 소리쳤다. “흥수!” “누구야?!” “상순이다!” “김영장! 어두워서 통 보이지 않네!” 흥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산아래로 괴뢰군을 추격해내려갔다. "죽어봐!" 갑자기 바위 뒤에서 한 괴뢰군이 몸을 날려 흥수를 독수리가 병아리 채가듯 했다. 그 놈은 흥수를 깔고 들어앉아 비수로 내리 찌르려고 했다. "난도 남조선 사람이야!" "뭐락꼬?" "내 고향 전주야!" "뭐래?" 그 놈은 비수를 들고 산마루에서 타번지는 불길을 빌어 흥수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깜짝 놀라 물러앉았다. "아니, 이꺼 흥수 히야(형) 아닌가베!" "너거(네가) 막내 창수 아니가?" "그래." 상순은 덮쳐나가면서 흥수 위에서 몸을 일으키는 괴뢰군 놈을 총탁으로 내리치려다가 반공중에서 멈췄다. 그들이 주고받는 말소리를 들었던 것이다.  흥수는 육박전에서 만난 창수를 붙안고 옆에 아가리를 쩍 벌린 무덤의 관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해골을 한쪽으로 밀어내고 동생을 흔들며 다잡아 물었다. "아빠캉 젬마(엄마)캉 어떠래(어떻냐)?" "다 미공군 폭격에 즉살했어!" "아빠! 젬마!" 흥수는 어린애처럼 동생 창수를 붙안고 울었다. "누가 울어? 소대장 목소리 같은디." 이때 관 안으로 누군가 철갑모를 쑥 들이밀었다. 분명 괴뢰군이었다. "에끼, 이 놈!" 흥수는 총칼을 쓱 뽑아 철갑모를 푹 찔렀다. "아걋!" "관둬!" 창수가 흥수의 총칼을 빼앗아냈다. "뭔 짓거리야?!" "내 수하라니께." 창수가 철갑모 쓴자를 끌어당겨 관 안에 들어왔다. 부자집 무덤인지 관이 꽤나 컸다. "중대장, 누군데?" "히야(형)야!" "오- 그래?" "어서 나가 중공군 오나 살펴!" "넷!" 철갑모는 다시 무덤에서 나갔다. 흥수는 창수 얼굴을 매만지면서 말했다. "히야 따라가자! 성수 형이랑 다 나왔어." "히야는 그간 어데 갔댔어?" "만주에 갔던 거야. 널 얼마나 찾았는디." "중공군에서 뭐 하는디?" "반장 해." "반장? 뭔 급인디?" "분대장이야. 성수는 패장이야." "패장이면 더 높은디?" "그래, 소대장이지." "관둬, 히야, 내캉 따라 가! 난 중대장이야. 고향에 돌아가!" "글쎄. 건데 성수는 어쩌나? 우린 중공군인디 남조선 괴뢰군이 살려주겐?" "내 잘 말하지. 우린 포로를 죽이잖으니께." "안돼! 날 따라가자!" "중공군이 괴뢰군 중대장을 살려줄까?!" "우린 포로를 우대해!" 이때 밖에서 철갑모가 불렀다. "중대장! 빨리 부대따라 가자니께!" "오- 그래!" 형제간의 만남도 잠간, 그들은 서로 상대방을 설복시키지 못하고 관에서 나왔다. 그들은 아무 말도 없이 다시 자기 부대로 돌아가 적수로 돼 총부리를 맞대고 싸워야 했다. "몸조심해!" "히야도 그래! 총소리 나면 도망치락꼬!" "그래!" 창수는 철갑모와 함께 무덤을 빠져나가 어둠이 두텁게 깔린 수림에 사라졌다. 흥수는 머리를 툭 떨어뜨리고 어정어정 걸으며 사위를 살폈다. 상순을 찾아야 했다. 그는 어쩐지 옆에 상순이 었어야 마음이 든든한 것을 어쩔 수 없었다... 상순은 괴뢰군은  놔두고 양키놈들을 추격해 산 아래로 짓쳐 내려갔다. 갑자기 바위 뒤에서 쇠기둥 같은 놈이 상순을 나꿔채  쓰러눕혔다. 상순은 벌떡 일어나며 발길로 시꺼먼 놈의 사타구니를 걷어찼다. 그 놈이 허리를 굽히며 가달 두새를 붙잡으며 돼지 멱따는 소리를 치는 순간, 상순은 공병삽을 잡은 채 날래게  오른 팔로 그 놈의 목을 끌어안으며 원숭이처럼 잔등에 날래게 날아올라갔다. 상순은 공병 삽을 쳐들고 호통쳤다. "죽고파?! 손들엇!" "NO! NO!" "너? 너?! 뭐야?! 핸드 들엇!" 상순은 쳐들었던 공병삽을 반공중에 쳐들며 호통쳤다. "I Surrender!(난 투항하겠어.)" "뭐? 아이?!  손 아이 들겠어?! 이놈 핸드(손) 들엇! " "OK! OK! Hand! hand! My hand!" 상순은 무슨 말인지 잘 몰랐다. 그러나 그 놈이 손을 쳐드는 걸  보고 투항하겠다는 걸로 짐작했다. "세계 최강군이란 미군은 맨 이런 놈들이야?!  마이(많이) 마이 핸드 들더라. 흥!  누런 대가리나 쌔까만 놈이나 다 겁쟁이들이구나! 날창도 아니고 공병삽을 들이대도 손을 번쩍번쩍 드니까. 물알 같은 놈들, 진짜 싸울 멋도 없어!" 그는 허무맹랑해 흑인놈을 조롱하면서 공병삽으로 반공중을 가리키더니 호통쳤다. " 핸드 들엇!" 흑인놈은 목마를 탄 상순을 되돌려보며 자기 손을 쳐들어보이면서 물었다. "My hand?(내 손?)" 상순은 호통쳤다. "네 놈은 까짜로 투항하는 건 아니겠지?  핸드 들엇!" "Yes, I hands up. Den't kill me!(예, 내 손들게. 날 죽이지 마시오.)" 씨꺼먼 흑인놈은 사위를 둘러보며 두 손을 쳐들었다. "또 아이냐? 엉?! 아이 투항하겠다고?!" 상순은 공병삽을 버리고 그 놈의  잔등에서 미끌어져내려왔다. 곰 같은 흑인놈은 주위를 흘끔흘끔 곁눈질했다. 순간 주위에 지원군이 없는데다가 자기보다 엄청 덩치 작은 상순을 보고 왼눈에도 차하지도 않았다.  갑자기 흑인 놈은 상순의 목을 틀어쥐고 곰처럼 깔고 들어앉았다. 왼팔을 부상당한 상순은 곰 같은 놈에게 깔려 숨이 꺽 막혔다. 그는 오른 손으로 흑인놈의 사타구니 두새 커다란 X알을 꽉 틀어쥐었다. "A! No! No!" 흑인놈은 너무 아파 상순을 훌 놓으며 아우성쳤다. 땅! 총소리와 함께 곰 같은 흑인놈은 옆으로 스르르 너부러졌다. "흥! 양키놈들도 그저 그렇군!" 상순이 모젤권총으로 쐈던 것이다. 그는 코웃음쳤다. 세계에서 최고강군이란 자들이 이 모양이라는 것에 너무 허무맹랑해 냉소했다. 전사들은 김영장이 앞장서 용감히 싸우는 것을 보고 용기백배 돼 양키놈들을 추격해 내려갔다. 한 개 대대나 되는 괴뢰군은 한개 소대 밖에 안 되는 중국인민지원군을 남북으로 협공했다. 설상가상으로 미제 탱크와 육군마저 덮쳐 와 지원군 전사들은 용감히 싸우다가 하나하나 영용히 희생됐다. 상순은 쓰러진 전사의 옆구리에서 수류탄을 뽑아들고 태수와 병수를 돌아보며 한어로 고함쳤다. “탱크를 빼앗자! 엄호해라!” “옛!” 명사수 태수가 반자동보총으로 탱크 뒤의 양키들을 본때 나게 쓸어 눕혔다. 병수는 뛰여내려가며 연이어 양키놈들을 찔러눕혔다. 양키놈들은 무기 자랑이나 했지 육박전에는 기겁해 뒤로 비실비실 물러섰다. 그 틈에 상순은 탱크 앞으로 뛰어갔다. 탱크가 그의 옆으로 우르릉 거리며 지나갈 때다. 그는 탱크 위에 훌쩍 뛰어 올라가 탱크 뚜껑을 열고 수류탄을 뿌려 넣고 훌쩍 뛰어내렸다. 꽝! 요란한 폭파소리와 함께 탱크가 제 자리에 멈춰 섰다. 나머지 탱크는 계속 돌진해왔다. 상순은 수류탄마저 없어 주위를 애타게 둘러보았다. 그는 길에서 활활 타번지는 자동차에 눈길이 멎었다. "죽어봐라!" 상순은 불길이 이는 자동차에 뛰여갔다. 그는 바곤에 뛰여올라가 불이 반쯤 달린 군복을 안고 덮쳐드는 탱크 위에 뛰여내렸다. 그는 불타는 군복으로 부르릉거리며 연기를 내뿜는 탱크 꽁무니를 꽉 막아버렸다. 순간 탱크 안에 자욱한 연기가 들어가 양키놈들이 탱크 안에서 견디기 힘들었다. 탱크  멈춰서더니 웃덮개 훌 열렸다. 양키놈들이 비명을 지르며 기여나와 뛰여내렸다. 뚜르륵 뚜르륵 그때 태수가 돌격총을 휘둘러 쓰러눕혔다. "잘 했어!" 상순은 손을 홱 젓더니 탱크 웃뚜껑을 열고 탱크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병수와 태수도 뛰어들어갔다. 상순이 탱크를 부릉부릉 몰고 아군의 자동차대오가 도망친 쪽으로 달려나갔다. "어디로 가는가?" 병수가 의아해 물었다. "굽인돌이에 가서 뒤따르는 탱크를 없애버리자! 장탄하라!" "알았소." 그들은 삼도만에서도 손을 맞춰 탱크를 몰고 토비들을 족친 전투경험이 있었다. 병수가 장탄하고 태수가 기관포 방아쇠를 잡았다. 상순은 탱크 헤드라이트까지 켜고 달리면서 멀리 산기슭 큰 길 쪽을 쳐다보았다. 아군의 트럭대오의 헤드라이트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뒤의 탱크를 제거하지 않으면 몇참 못가 추격당하고 말 것이었다. 그는 굽인돌이를 돌자 탱크를 돌려세우더니 굽인돌이에서 몇마장 떨어진 두번째 굽인돌이에 달려가 은페해 멈춰섰다. 뒤따르던 탱크 두대는 상순이 몬 탱크를 동료 탱크인가고 무작정 뒤따라왔다. 그 놈 탱크 두대가 굽인돌이를 돌아설 때다.  "사격!" 쾅! 요란한 굉음과 함께 앞장섰던 미제 탱크는 명중탄을 맞고 웃뚜껑과 포신이 허망 날아났다. 앞의 탱크에서 화염이 충천하자 뒤따르던 탱크는 급정거하더니 도망치려고 대가리를 돌리고 있었다. "사격!"  쾅! 두번째 포탄이 날아갔다. 오른쪽 무한궤를 얻어맞은 탱크는  페철이 돼 풀썩 물앉고 말았다. 양키놈들은 탱크 웃덮개를 열고 비명을 지르며 뛰여내리었다. 태수는 탱크 기관총으로 양키놈들을 소사했다. 놈들은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뒤따르던 양키놈들과 괴뢰군은 굽인돌이에서 무 슨 일이 벌어졌는지도 모르고 도망쳤다.  상순은 한숨을 후 내쉬었다. 그는 탱크 웃덮개를 열고 산기슭에서 싸우는 전사들에게 한어로 명령했다. “우리 트럭대오가 안전하게 전이했다. 동쪽 마을로 철퇴!” "옛!"  성수와 흥수 등 십여 명 전사들이 어둠 속으로 철퇴했다.  상순과 병수 태수는 탱크를 몰고 도망치는 괴뢰군 트럭을  추격해가면서 기관포와 기관총을 갈기며 소분대의 철퇴를 엄호했다. 괴뢰군 트럭은 보기 좋게 불이 활활 일었다. 괴뢰군들의 비명소리, 아우성 소리로 일대 아수라장을 이뤘다. 이때 남쪽 하늘에서 전투기들이 아츠러운 소리를 지르며 날아왔다. 쿵! 쾅! 꽈르릉! 전투기들은 길에 늘어선 트럭을 지원군의 트럭으로 알고 폭격하고 소사해댔다. 그러나 상순이네 모는 탱크만은 자기들 탱크라고 여겼는지, 아니면 발견하지 못했는지 폭격하지 않았다. 숱한 괴뢰군 트럭들이 폭파돼 불길이 하늘로 치솟아 올랐다. “제길, 우리에게 폭탄을 던져!” 괴뢰군 병사들은 하늘에 대고 욕설을 퍼부었다. 어떤 병사들은 쌕쌔기를 사격까지 해댔다. 그 틈에 상순이네는 탱크를 몰고 좌충우돌하면서 불에 타는 적들의 자동차와 트럭을 마구 절벽 아래에 떠밀어버리고 짓뭉개버렸다.  "포탄과 기관총탄이 다 떨어졌네." 태수의 말에 상순은 한숨을 후 내쉬었다. "저놈 자동창까지 없애버리고 철퇴!" 상순은 탱크를 몰고 도망치는 괴뢰군 트럭을 쫓아가 꽝 냅따떴다. 자동차는 아우성치는 괴뢰군들을 실은 채 허망 절벽 아래로 꺼꾸로 처박혔다. 그는 병수와 태수를 돌아보며 말했다. "탱크를 양키놈들한테 넘겨줄순 없어!" "옳소! 없애버리기오!" 상순은 탱크를 돌려 오던 길로 한참 달리다가 불붙는 괴뢰군 자동차에 딱 붙여세우고 탱크(땅크)에서 내렸다. 순식간에  자동차의 불이 탱크에 옮겨 붙기 시작했다. 저쪽 뒤에서 괴뢰군과 양키놈들이 이쪽으로 덮쳐오고 있었다. 탱크가 탈 시간이 될 거 같지 않았다. 태수는 철갑모를 주어들고 자동차 휘발유통응로 다가갔다. 그는  비수를 뽑아  휘발유통을 쿡쿡 찔렀다. 휘발유가 쌕 쏘리 내며 내 뿜겼다. 태수는 철갑모에 휘발유를 꼴똑 받아 탱크 뒤꽁무니에 툭 쳤다. 조급해난 상순은 돌격총을 들어 자동차 휘발유통을 뚜르륵 갈겼다. 휘발유통이 탕 폭발하며 탱크에 불길이 더 거세게 옮겨 붙으면서 활활 타올랐다.        상순이랑은 자동차 옆에 쓰러진 괴뢰군과 양키놈들의 시체에서 돌격총을 서너개씩 주어 어깨에 메고 흥수랑 전이한 무명고지 동쪽 마을에 도망쳐 갔다. 뒤에서 탱크가 활활 타오르는 불길 속에 쿵 폭발하는 굉음이 들렸다.       한편 상순과 전사들은 마을 사처에 흩어져 숨었다. 성수와 병수는 돼지우리에 들어가 북데기를 들쓰고 숨었다. 태수는 소 우리에 뛰어 들어가 소구유에 들어가 소먹이를 들쓰고 숨었다. 상순은 무작정하고 건치를 두른 명호 삼촌네 집으로 뛰어 들어갔다. “누구야?!” “상순이오. 삼촌, 날 살려주오.” “상순이라고? 내 불을 켜마.” 정지와 위방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불을 켜지 마시오. 우린 지금 괴뢰군에게 추격 받고 있소.” “여기 들어와도 안 되겠고. 옳지. 가자.” 명호는 위방에서 내려와 상순을 데리고 바깥에 나가더니 김치 움 덮개를 열고 손짓했다. “여기 들어가 함지를 쓰고 있어!” “양.” 상순은 권총을 들고 김치 움에 뛰어들었다. 김치 움 덮개가 꼭 덮였다. 이때 발자욱소리 쿵쿵쿵 들렸다. "난도 지원군이여, 상순 영장 수하제." "그래? 얼른 김치 움에 들락꼬." 김치움 덮개가 훌 열리더니 검은 그림자가 쿵 뛰어내렸다. "김련장! 흥수락꼬." 상순은 손 더듬으로 흥수를 끌어안아 앉혔다. "함지를 머리에 이라고." "알았다니께." “양키 놈이 날 쏘는 걸 김 련장이 옆으로 밀쳤으니께 말이제이. 난 남조선 고향 땅에 뼈를 묻을 번했제라.” “쉿-” 상순과 흥수는 말소리를 딱 죽이고 쿵쿵 높뛰는 가슴을 눅잦히면서 바깥동정에 귀를 기울였다. 이윽고 바깥에서 꽥꽥 거리는 소리에 뒤이어 김치 움 위로 발자국 소리가 쿵쿵쿵 울렸다. 한 괴뢰군 군관이 꽥꽥 고함쳤다. “그 놈들이 분명 이 마을로 숨어들었어!” 병사들이 명호네 집 안에 뛰어들었다. “중공군을 못 봤어?” 명호가 위방에서 나오면서 시치미를 땄다. “몰라요. 중공군이라니?” “이 놈들, 중공군을 숨겨두는 날엔 대갈통이 날아날 줄 알아라!” “밤중에 홍두깨라더니 웬 소리여?” 명호는 능청을 떨면서 입귀로 말을 흘렸다. 괴뢰군들은 온 마을을 발칵 뒤집었다. 한 놈은 김치 움 덮개를 열고 전지불을 비췄다. 상순과 흥수는 숨을 딱 죽이고 김칫독 사이에 숨어 함지를 이고 있었다. “김칫독 밖에 뭐가 있다고 이러는 기여?” “냄새 더러운 경상도치들 김치독이야.” 병사가 김치 움 덮개를 훌 던지자 김치 움 안이 다시 어두워졌다. 명호가 덮개를 꼭 덮어놓으면서 “괜히 남의 김치 독이 얼겠어. 흥!”라고 두덜거렸다. 한 병사가 돼지우리를 지나가다가 굴암돼지가 우는 소리를 듣고 전지 불을 비췄다. 굴암돼지가 자기 자리를 성수와 병수에게 빼앗기고 주둥이로 북데기를 마구 뚜지면서 꿀꿀 울어댔다. 그 바람에 그만 성수와 병수의 다리가 북데기 바깥으로 삐죽이 드러나고 말았다. “제끼제끼(빨리빨리) 와! 돼지우리에 빨갱이들이 있어!” 제주도치는 돼지우리에 대고 총을 쏘았다. 돼지우리에서도 맞불질하며 뛰어나왔다. 성수와 병수는 제주도 치를 쏴 눕히고 어둠 속으로 도망쳤다. 뒤미처 달려온 한국 병사들은 총을 쏘며 성수와 병수를 추격했다. 마을에서 들통 난 지원군 전사들은 마구 총질하며 어둠 속으로 도망쳤다. 상순은 김치 움 안에서 명호 삼촌과 영수 때문에 살아남은 일을 생각하자 고모오촌 삼촌에게 걸리는 것이 있었다. 병수 형이 함흥 촌에서 나포된 일이었다. 명호 삼촌이 맏아들이 죽은 줄도 모르고 애타게 죽을 때까지 기다릴 걸 생각하니 가슴이 아팠던 것이다. 그는 호주머니에서 공책과 꽁다리연필을 꺼내 어둠속에서 손 더듬질 하면서 “삼촌, 병수는 간도 함흥 촌에서 체포됐소. 미안하오.”라고 썼다. “뭘 하오?” 흥수의 물음에 상순은 “아무 것도 아니야.”라고 한 후 버스럭거리며 종이쪽지를 접어 함지 안에 넣고 돌로 짓눌러 놓았다. 바깥동정을 살펴보니 쥐 죽은 듯이 잠잠해졌다. 멀리에서 간혹 총소리가 들릴 뿐이었다. “우린 여기서 날이 밝기 전에 빠져나가야 하오.” “가기요.” 상순과 흥수는 김치 움 덮개를 열고 바깥으로 고양이처럼 살금살금 기어 나왔다. 이때 집안에서 명호와 영수가 나왔다. 상순은 그들을 와락 그러안고 통곡을 쳤다. “삼촌, 동생, 이렇게 갈라지면 언제 다시 만날까?” “살아 있으면 만나겠지.” 명호의 말에 영수도 동을 달았다. “나라가 통일되면 또 만나겠지. 난시에 몸조심하라니까.” “양, 잘 있소.” “에이, 죽일 놈의 함경도 말투를 봐라. 정 떨어진다.” 명호는 그 판에도 농담을 하며 상순의 잔등을 툭툭 쳤다. 영수는 보꾸러미를 들고 나와 상순에게 내밀었다. “형, 쌀이 막대라고 밥 가지고 가.” “고맙다. 동생, 언제 다시 만날까?” “혹시 병수 형 소식이 있으면 알려 달라.” 상순은 할 말이 없어 머리만 숙이었다. "섯거라! 이 놈들!" 갑자기 괴뢰군 서너놈이 울안에 뛰여들었다. "너거 창수 아니가. 나야, 나, 히야!" 흥수가 말하면서 앞에 나섰다. 저쪽에서 따발총을 내리며 한발 나섰다. "히야, 아직도 몬 달아났시우?" "그래, 이쯤 해서 헤어지자." 땅! 땅! 명호와 영수가 집 안에서 나오며 괴뢰군을 사격했다. 창수와 한 병사가 쓰러졌다. "창수야!" 흥수가 창수한테 달려갈 때다. 괴뢰군이 총질했다. 란전이 벌어졌다. 상순은 몸을 날려 괴뢰군병사를 차넘기며 오른 손으로 총을 빼앗아 갈겼다. 푱! 푱! 나머지 두 괴뢰군은 도망치다가 어둠 속에 구새목에서 쓰러졌다. "흥수, 어서 피하자!" 그러나 흥수는 창수를 끌어안고 가려고 하지 않았다. "안돼, 난 고향 전주에 얘를 묻어주고 갈래. 엉~ 엉~" 상순은 오른 손에 총을 잡고 총상을 입은 왼팔로 흥수를 끌고 갈 수 없었다. "영수, 이 자식을 좀 끌고 가자!" "예, 히야(형)." 영수는 흥수를 마구 뜯어 끌고 상순을 따라갔다. "놔! 이놈, 네놈이 내 막내동생 쏴죽였어." 갑자기 흥수는 날창으로 영수의 옆구리를 푹 찔렀다. 영수는 잽싸게 피했다. 그러나 날창에 빗찔렸다. "어더럭해? 닌도 죽고 싶어?" 영수는 따발총을 흥수한테 겨눴다. "닥쳣!" 상순은 영수의 따발총을 하늘에 쳐들었다. "우린 혁명동지야! 자기 동지를 죽여선 안 돼!" 영수는 이를 악물었다가 말았다.  땅! 그 틈에 흥수가 보총으로 영수를 쏘았다. 영수는 총을 맞고 쓰러졌다. 상순은 흥수의 손에서 보총을 빼앗아냈다. "이놈, 양키놈과는 어쩌지 못하고 제편을 쏘는덴 꽤나 솜씨 있군! 흥!" 영수를 살펴보니 허벅다리에 총알을 빗맞았던 것이다. 그래도 영수는 흥수를 욕할 뿐 더 반격하지는 않았다.   명호가 집안에서 뛰어나오며 흥수를 노려보았다. "아버지, 오해라니께." "오해? 네놈이 내 동생 죽였는디. 개놈새끼!" 그래도 명호가 어른스러웠다. 그는 오히려 동생을 잃은 흥수를 위로했다. "됐네. 전쟁판엔 적아나 혈육이나 따로 있나? 동생 잃어 섭섭하겠지만. 널리 양해하게나. 어서 가게나." 명호가 말렸다. "저 무명고지를 넘으면 인삼 련대장이 영솔한 조선인민군을 만날 수 있어." "네? 잘 됐소." 상순은 명호를 보고 "흥수 동생을 잘 묻어주오."하고 부탁했다. 명호는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흥수는 이를 뿌득뿌득 갈았다. "내 언제든 동생 원수를 갚고야 말겠어!"       상순은 명호에게 영수를 맡기고 흥수를 간신히 뜯어말리며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명호는 흥수를 쏘아보며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더니 영수를 업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벌써 새벽닭이 “꼬끼오-” 울더니 동녘하늘이 푸름푸름 밝아오기 시작했다.                           7. 한 많은 압록강      우뚝우뚝 치솟은 산마루와 하늘이 화가가 그린 듯이 선명하게 갈라지더니 동녘하늘에 전쟁의 포화에 그은 뻘건 해가 불끈 솟아올라 차디찬 햇빛을 몇 가닥 비추었다. 밤새 억수로 쏟아진 소낙비를 맞아 함초롬한 버드나무 잎사귀는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잎사귀 사이에 햇빛이 비껴들어 유난히 윤택이 났다.       상순은 조춘성 사단장의 통역으로 돼 찌프에 앉아 최전선에서 달아 다녔다.      몇 달전에 무명고지 최전선에서 상순은 인삼 삼촌을 만났다. 그 무명고지는 큰아버지 성칠이 장렬한 최후를 마친 피에 물든 고지였다. 큰아버지 유체는 인삼 삼촌이 잘 거둬 마천령고개 양지바른 곳에 잘 묻어주었다고 하였다. 상순은 무명고지를 무심히 바라볼 수 없었다. 그는 미군의 폭격에서도 억세게 살아남은 무명고지 절벽의 진달래꽃들을 바라보며 머리를 숙였다. 그는 영수 등 남조선 유격대와 인삼 련대장이 영솔한 조선인민군의 엄호를 받으며 마천령 부근에서 이동작전하는 조춘성 사단장의 부대를 만나 동복을 넘겨주었던 것이다.      인삼 련대장은 상순을 와락 끌어안고 대견스레 마주 바라보았다.     "야, 어제 짜개바지 입고 달아다닌 거 같은데 벌써 영장까지 됐구나."     "삼촌!"      상순은 전선에서 만난 삼촌을 보자 큰아버지 생각이 나서 목이 꺽 멨다.       조춘성 사단장이 다가오더니 상순을 보고 엄지를 내둘렀다. "김영장은 싸움만 잘하는가 했더니 한어도 변설이군. 우리 사단 비서과 과장을 하면서 내 통역을 서오."     처음에 상순은 잘 납득되지 않았다. 그는 미군 양키 놈들을 통쾌하게 족치기 위해 조선 전선에 나왔던 것이다. 허나 미군 양키 놈을 통쾌하게 족쳐 보지도 못했다. "통역이라니? 난 아직 양키놈들 콧대를 제대로 꺾어놓지 못했습니다." 조춘성 사장은 상순의 어깨를 다독였다. "허허허, 김영장은 탱크를 빼앗아몰고 양키놈들 탱크와 군용트럭을 통쾌하게 족치지 않았소? 그만하면 됐지." 상순은 특별히 조선 하늘을 횡행하며 아군과 민간인들을 마구 폭격하며 미쳐날뛰던 미군 공중날강도가 제일 눈에 거슬렸다. "조사장, 아직도 세계 최강공군이느라고 우쭐거리는 양키비행기를 통쾌하게 쏴떨구지 못한게 한입니다. 날 고사포부대에 보내주십시오. 통쾌하게 미제 공중날강도들을 족치고 싶습니다." "하하하. 미제 비행기는 우리 영용한 공군 비행사들에게 맡기면 되오. 그들은 이미 숱한 날강도들을 격추했소. 이젠 미제 날강도들은 감히 청천강 이북 하늘엔 다신 얼씬하지도 못하지 않소?" 상순은 그랠도 전선에서 싸우고 싶지 조사장 옆에서 입방아나 찧기 싫었다. 사실, 조선전선에 나온 지원군들은 통역이 없이는 한 발자국도 내딛기 힘들었다. 조 사단장은 왼팔에 총상을 입은 상순이 한어를 잘 하기에 전선에서 싸우기보다 자기 통역을 하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상순은 조사단장과 함께 찌프에 앉아 달리면서도 몇달 전에 있은 일들이 영화처럼 눈앞에서 돌아갔다. 그는 성수, 병수와 태수 등 30여명 전사들을 데리고 영수가 이끄는 유격대의 엄호를 받아 괴뢰군의 포위토벌을 피하면서 북으로 퇴각해 천신만고 끝에 접응부대와 트럭대오를 찾았다. 상순이 거느린 두개 소대는 인삼 련대장의 부대를 만나 몇 명의 대가를 내고 트럭 28대에 실은 동복을 최전선부대에 넘겨주었던 것이다. 그런데 흥수가 주의하지 않은 틈에 대오에서 어디론가 사라진지 사흘이 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상순은 잃어진 흥수를 두고 별의별 궁리를 다 했다. 북으로 들어가는 도중에 그들은 미군 트럭을 습격해 양키 두 놈을 본때 나게 처단한 일도 있었다. 어느 날 밤중에 그들은 길에서 남으로 도망치는 미군 트럭을 발견했다. 상순은 반자동보총으로 운전실을 조준해 사격했다. 비명소리가 들리더니 운전수가 죽었는지 트럭이 덜컥 멈춰 섰다. 한 흑인 놈이 운전실에서 뛰어내려 어둠속으로 허둥지둥 도망쳤다. “서라!” 상순은 권총을 뽑아들고 추격하면서 공중에 총을 쏘았다. 땅! 흑인 놈은 두 손을 들고 주춤 멈춰서며 되돌아보았다. 흑인군관이었다. 상순은 다가가 절구통 같은 흑인군관의 허리춤에서 권총을 뽑아냈다. 순간 흑인군관은 주먹을 날려 상순의 턱을 탁 쳤다. “아이야!” 불의의 습격에 상순은 기우뚱하더니 푹 꼬끄라졌다. 손에 쥐였던 권총이 몇 미터 밖으로 날려갔다. 흑인군관은 권투자세를 취하더니 쓰러진 상순에게 덤벼들었다. 상순은 곤두박질쳐 벌떡 뛰어 일어나 오른 팔 굽으로 덮쳐드는 흑인 군관의 배를 들이박았다. “억!” 흑인군관은 비명소리와 함께 배를 끌어안으며 허리를 굽혔다. 상순은 발길을 날려 그 놈의 사타구니 두새를 걷어찼다. "앗!" 그 놈은 요해처를 채워 뺑뺑 돌며 비명을 질렀다. 상순은 무쇠주먹으로 흑인군관의 관자노리를 걷어쳐 올렸다. 흑인군관은 김이 빠진 공처럼 풀썩 물앉았다. 뒤따라 덮쳐온 태수는 총창으로 흑인군관의 잔등을 푹푹 찔렀다. 그새 상순은 권총을 주어 들어 흑인군관을 쏘았다… 상순은 조선전쟁터에 나와서 양키 놈들을 더 죽이지 못하고 조선전쟁이 끝나게 된 것이 아쉬웠다. 그는 찌프에 앉아 조춘성 사단장을 따라 최전선으로 나갔다가 개성을 거쳐 평양으로 돌아갔다. 평양 시내는 조선 전쟁기간에  미군 폭격기의 수십번의 폭격에 잿더미로 됐다. 그러고도 모자라 미제 공중날강도들은 정전협정을 체결하기 전 2시간 전까지도 마지막으로 수십대 폭격기와 전투기로 평양시내를 폭격하고 무고한 백성들을 소사해 살해하였다. 온 평양시내는 산더미 같은 불길이 치솟았고 순식간에 잿더미로 새까맣게 타버렸다. 박살 난 벽돌장들이 무더기로 널려 있을 뿐 성한 집이라고는 하나도 찾아 볼 수 없었고 시꺼먼 재가루가 흩날렸다. 적지 않은 평양 시민들은 전쟁의 포화에 그은 벽돌장들을 쌓아놓고 나무와 양철기와 쪼각을 얹어 막을 지어놓고 살고 있었다. 그래도 뭘 끓여 먹는지 그런 오두막들의 양철연통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목숨이 긴 게 사람이야. 고향이 뭐 길래 저런 잿더미도 떠나지 않고 살까?) 상순은 전쟁의 포화에 그은 평양 시내를 보면서 마음이 아팠다. 다행히 미군과 괴뢰군이 함경도 남쪽 지역에 쳐들어갔을 뿐 상순의 고향 명천까지는 쳐들어가지 못 했다. 상순은 고향 명천으로 가 보고 싶었지만 부대에서는 한시각도 마음대로 몸을 뺄 수 없었다. 찌프는 평안도까지 들어가 어느 산마루에 올라가 멈춰 섰다. 상순은 찌프에서 내려 조춘성 사단장과 함께 폭탄구덩이가 벌집처럼 펑펑 뚫린 산마루와 산비탈들을 둘러보며 정중히 말했다. “조 사장, 이젠 미제와도 전쟁이 끝났는데 난 함흥 촌에 돌아가겠습니다. 두번째고향 연변조선족자치주는 저를 수요합니다. 전 참군하기 전에 지방당조직에 약속했습니다. 전쟁이 끝나면 꼭 귀향하겠다고 말입니다. 전 마을 사람들을 배 불리 먹고 잘 살게 사회주의 새 농촌을 건설하고 싶습니다.” 조춘성 사단장은 머리를 돌리더니 세귀눈을 번쩍이는 상순을 보고 엄숙하게 말했다. "아직 미제는 남조선에서 물러가지 않았소. 그 놈들이 남조선에 있는 한 정전한 조선반도에서 언제든지 다시 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소. 우린 아직 대만을 해방하지 못했소. 부대에는 김과장 같은 군사인재가 대량 수요되오." "전 고향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제2고향건설에도 제가 할 일이 많고도 많습니다. 만약 전쟁이 재발하면 그땐 꼭 부대로 돌아오겠습니다." 조사장은 머리를 끄덕였다. “정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면 별 수 없군.” 그는 한숨을 길게 내쉬는 것이었다. “난 원래 상순 동무를 참모장이라도 시키고 싶었소. 이 몇달 동안 김 과장은 통역뿐만 아니라 전략전술 참모역할도 아주 잘 했소. 동무에게는 남달리 일정한 군사지략이 있다는 걸 보아냈소. 부대에 계속 남아 있으면 장차 훌륭한 지휘관으로 성장할 수 있다고 보는데. 참.” 그는 상순을 똑바로 마주 바라보았다. “그래도 촌으로 돌아가겠소?” “예. 이젠 미제를 38선 이남에 몰아냈으니깐 전쟁도 다 끝나게 됩니다. 전쟁이 없는 평화연대에 부대에 남아서 뭘 할 게 있습니까? 저는 평화년대에는 부대보다 백성들을 배불리 먹게 하는 일이 더욱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조 사단장은 머리를 끄덕이더니 상순의 두 손을 꼭 잡고 흔들다가 와락 끌어안았다. 그의 눈가에는 뜨거운 이슬이 맺혀 반짝였다. 상순은 조사장의 품속에서 나오자 물었다. "조사장님, 옛날 복자공장 소식은 있습니까?" 조사장은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었다. "옛날 복장공장은 대만특무놈들한테 발각됐다는 정보를 받았댔소. 그래서 미제를 38선 이남까지 밀어낸 후 상부의 지시에 따라 복장공장을 강변에서 남쪽으로 한 백킬로메터 떨어진 협곡에 전이했소." "3련장이랑 허영희 부공장장이랑 모두 무사합니까?" 조사상은 머리를 숙였다. "복장공장은 이전하기 전에 미제 공중날강도 폭격을 맞았댔소.' "예?!" 상순은 깜짝 놀랐다. 그는 자기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미제 공중날강도들이 기습폭격 할 당시 허영희는 김치움으로 피신하려고 뛰여갔다오. 3련장은 자기 몸으로 허영희 부공장장의 몸을 뒤덮으면서 구하려다가 장렬희 희생됐소. 그 덕에 허영희  부공장장은 목숨은 구했지만 한쪽 다리를 잃고 말았다오." "뭐라구요?!" 상순은 당장 허영희를 찾아가보고 싶었다. "허영희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후방병원에 호송됐다던데 지금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소." "하, 이거 참." 상순은 애타 발로 땅바닥을 구르더니 두 손을 마주 치면서 서성거렸다.         며칠 후, 상순은 조춘성 사단장과 전우들과 고별하고 귀국하는 지원군부대와 함께 귀국렬차에 올랐다.        귀국렬차가 압록강과 점저 가까워졌다. 순간 상순은 옛날 복장공장에 찾아가보지 못하고 한 많은 압록강을 건너는 것이 한이였다.          그는 쌀을 얻으러 강을 건너가다가 미제 공중날강도 폭격을 맞아 허영희와 함께 도관 속에 갇혔던 정경이 아직도 눈앞에 선희 떠올랐다.       그들이 깎아지른 절벽 밑의 산굽이를 에돌아 금방 강바닥에 들어섰을 때다. 갑자기 하늘에서 얭- 요란한 소리와 함께 미 전투기가 네 대나 날아왔다. “적기다! 빨리 트럭에서 내려 피신하라!” 상순은 고함치며 옆에 앉은 허영희의 손을 쥐고 트럭에서 뛰어 내렸다. 한참 달리다가 언제의 커다란 콘크리트도관 안에 들어가 납작 엎드렸다. 폭탄이 강바닥에 떨어져 작렬하며 폭음이 귀청을 째지게 때렸다. 파편이 쌩쌩 날아와 도관 벽을 쳤다. 상순은 허영희를 품속에 꽉 끌어안고 위에 엎드렸다. 꽈르릉! 꽝! 꽝! 요란한 굉음과 함께 언 흙덩이들이 도관 앞뒤 구멍을 꽉 막아 버렸다. 순간 도관 속은 칠흑처럼 온통 새까맣게 돼버렸다. 상순은 몸을 벌떡 일으키며 손 더듬을 해보았다. 그런데 뜻밖에 그만 영희의 뭉글뭉글한 젖가슴이 손에 닿았다. 상순이 덴겁한 듯 황급히 손을 빼려는 순간 영희가 상순의 손을 꼭 잡았다. 상순은 전기에라도 붙은 듯이 황급히 손을 빼갔다. 그런데 이번에는 영희가 상순을 꼭 껴안고 놓지 않았다. “허 주임, 허 주임!” “예.” “상한데 없소?” “예. 김 공장장이 몸으로 뒤덮어준 덕분에. 김 공장장은 저의 구명은인이죠.” “우린 여기서 빨리 나가야 하오. 오래 있으면 공기가 희박해 위험하오.” “예.” 상순은 어둠 속에서 몸을 돌려 영희를 뒤로 물리고 들어오던 쪽을 손으로 흙덩이들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한참 단말마적으로 파고 또 파니 시원한 냉기가 도관 속으로 불어 들어왔다. “이젠 살았소. 이제 한참 파노라면 바깥이 나지겠지.” 그런데 영희는 뒤에서 상순을 꼭 껴안으면서 “좀 쉬십시오.”라고 했다. “뭐 하는 거요?” “누가 보는가요?” “보지 못해도 그렇지. 난 처자가 있는 나그네란 말이오.” “누군 처녀구먼요.” 상순은 영희의 팔을 뿌리쳤다. “그럼 더욱 근신해야지. 우린 당원이 아니오?” “당원은 사랑도 모르는가요? 전 첫눈에 사내다운 당신한테 반했는데요.” 상순은 흙을 파헤치면서 두덜거렸다. “나를 어떻게 보고 이러는 거요?” “우린 여기서 죽을 수도 있어요? 난세에 언제 죽을지 어떻게 알아요? 후회 없이 살지요. 전 당신과 함께라면 여기서 죽어도 괜찮을 거 같아요.” “허 주임, 정말 천만뜻밖이오. 남편 보기 미안하지 않소?” “저의 남편은 전선에서 희생됐어요. 자기 수하의 생활을 좀 관심해주면 안 돼요?” “…” “영웅도 미인관을 넘지 못한대요. 음충한 눈길로 노리다가도 정인군자인 척 하긴. 호호호.” "입 다물지 못해?” "픽!" "이 흙덩이나 받아 뒤에 쌓으라고." 상순은 어처구니 없어 피씩 웃었다. 어디 그뿐인가. 허영희는 김치움에서도 상순을 꼭 끌어안고 사랑을 호소했다. " 군중들 생활 좀 관심해주면 안돼요? 언제 죽을지 어떻게 알아요?" 상순이 그녀를 뿌리치고 김치움에서 훌 나가버리자  허영희는 울면서 야단쳤다. "당신은 꼭 후회할 거예요. 차례진 김치도 먹지 않고. 흑흑흑."       허영희는 상순이 동복을 싣고 최전선에 떠나갈 때도 김치꾸러미를 주면서 그윽한 눈길로 상순을 바라보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김치를 가지고 가서 생각나면  잡수세요. 김치 생각나면 찾아오세요.”   허영희의 간절한 목소리는  아직도 귀전을 간질이는듯 했다. 순간 상순의 눈앞에는 보름달 같이 복성스러운 영희의 얼굴이 선히 떠올랐다. 상순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는 허영희 짝사랑한테 미안했고  다리를 잃은 그녀에게 문안 한마디 못하고 떠나오는 것이 죄송해 속으로 외웠다.  (영희, 미안하오. 영희한테 해준 건 하나도 없이 김치와 돼지고기점만 넙적넙적 받아먹지 않았소? 참 미안하오. 그대의 짝사랑을 받아주지 못해서 정말 미안하오. 날 용소하오. 조직의 몸이어서 그렇게 할 순 없었소.)          그렇다. 당원도 사람이였다. 당원도 칠정육욕이 있었다. 그러나 특수강철로 만들어진 공산당원은 절대 그런 불륜에 빠져선 안되였다.         (영희, 용서하오. 강철기률을 가진 당원은 영원히 그렇게 할 수 없소. 래세가 있다면 ...) 그러나 그는 인차 허구픈 웃음을 웃었다.         "허허허, 영희, 래세라는게 있소?"        상순은 속으로 천번만번 되뇌이며 한 많은 압록강을 서서히 건너고 있었다. 그는 덜커덕거리며 달리는 렬차 등받이에  잔등을 비스듬히 대고 눈을 스르르 감고  착잡한 생각에 잠겼다.       순간 남편을 전선에서 잃은데다가 한쪽 다리마저 잃은 허영희가 한없이 불쌍했다. 만약 허영희가 살았다고 해도 한쪽다리를 잃고  살아갈 일을 생각하니 한없이  막막하게만 생각되였다.        상순은 달리는 렬차 차창으로 휙휙 뒤로 밀려가는 새 압록강철교 옆 미제 공중날강도들의 야만적인 폭격에 끊어진 옛 압록강철교 단교를 바라보며 치를 떨었다.  미제 공중날강도들의 하늘에 사무치는 죄악을 공소하며 압록강물에 서 있는 단교 교각과  너덜거리는 단교 란간을 바라보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일제 철발굽 아래에서 수많은 평안도 황해도 조선 백성들이 살길을 찾아 건넌 한 많은 압록강이였다. 그 압록강을 건너면서 상순은 3련장의 묘지에도 찾아가보지 못하고 귀국하는 것이 마음아팠다.  군복을 운송할 때 무명고지에서 희생된 10여명 전우들을 묻어주지도 못하고 남조선 땅에 두고 오는 것이 죄송스러웠다.      상순은  압록강 중간에 끊어진 옛철교(단교)를 바라보며 긴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었다.       미제 공중날강도들은 중조 변경에까지 날아와 민가를 폭격해 재가루로 만들었고 수많은 무고한 백성들을 살해하였다. 미제는 그것도 모자라 쥐와 파리까지 동원해 생물화학무기를 조선반도에 뿌렸다. 미제는 제2차 세계대전 시기 일제가 중국 동북 할빈 교외 731부대 생물화학무기자료와 기술자들을 몽땅 걷어다가 전세계에 200여개 생물화학세균무기연구소를 세우고 계속 생물화학무기를 연구해왔다. 미제 침략자들은 심지어 중조 변경과 평양에 원자탄까지 쓸 것까지 모의한적이 있다고 하지 않는가. 그러나 세계 여론이 두려워 원자탄을 쓰는 것을 보류했고 나중에 남조선에 원자탄을 배치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미제의 핵공갈과 야만적인 생물화학세균무기도 중조인민들 불굴의 정의의 투쟁정신을 굴복시키지 못했으며 백기를 들고 나와 정전협정에 싸인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미제 공중날강도들은 중조친선의 뉴대, 항미원조 동맥인 압록강 철교를 폭격해 끊어버렸다. 그러나 압록강 그 단교(끊어진 철교) 옆에 중조인민들은 단시일내에 새 철교를 놓고 숱한 고사포진을 포치해 방공화력을 강화해 지키고 있었다. 그후부터  미제는 다시는 철교 상공에 얼씬도 하지 못하였다. 미제 침략자들은 16개 나라 유엔군과 이승만 괴뢰군까지 추종해가지고 "인천에서 아침 먹고 평양에서 점심을 먹고 압록강가에서 저녁밥을 먹겠다."고 떠벌여댔지마 3년 전쟁 결과 어떻게 됐는가? 미제는 영용한 중조인민군의 반격 앞에서 흙보살이 황하를 건넌 격이 되지 않았고 뭔가?     상순은 조선 백성들을 수없이 폭격, 살해한 미제 공중날강도를 하나도 쏴 떨구지 못한 것이 한이었다. 미제 침략자 승냥이 놈들을 남조선 땅에서 완전히 몰아내지 못한 것이 한이었다.  쪼개진 조선반도를 보고 마음이 아팠고 통일된 조선을 후대들에게 넘겨주지 못하는 것이 마음에 내려가지 않았다. 미제가 남조선 땅에 남아 있는 한 언제든지 전쟁이 재발할 수 있다. 그 력사적 한이 약소민족의 가슴에 맺힌 피엉어리로 돼 가슴을 아프게 했다.       "미제 놈들이 뭐가 돼서 태평양 천만리 건너와 조선반도에 들어와 주인행세, 국제경찰행세를 하는가? 네놈들이 뭐가 돼서 남조선을 식민통치하면서 우리 조선민족을 쥐락피락 하는 거냐? 약소민족이 약하면 제국주의 렬강들에게 얻어맞게 된다. 약소민족일수록 더 강해야 된다. 꼭 사회주의 새 중국을 잘 건설하고 국방을 강화해 제국주의 침략을 막고 나라를 튼튼히 보호해야 한다."      상순은 어깨가 무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달리는 차창으로 압록강 철교를 되돌아보며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8. 벼슬을 초개같이 여기고      상순이 집에 돌아와 보니 초가삼간 지붕이 용마루가 푹 꺼지고 밭고랑처럼 홈이 패여 있었고 여기저기 비가 새 간장 물 같은 것이 벽에서 흐르고 있었다. 집안에 들어가 보니 윗방에 아버지가 옆구리 아파 누워 있었고 정지에는 열살난 맏딸 순자가 동생들을 데리고 공부하고 있었다. “아버지!” 순자가 제일 먼저 아버지를 알아보고 두 팔을 벌리며 뛰어왔다. 상순은 순자를 그러안고 금숙과 봉자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나서 위방에 올라가 아버지께 큰절을 올리며 문안인사를 드렸다. “아버지, 그간 무사히 계셨습니까?” “응, 그래. 무사히 돌아왔으니 다행이다. 너 아내는 이런 젖먹이들을 데리고 네게 무슨 일이 생길까봐 얼마나 속을 태웠는지 모른다. 밭으로 나간 게 좀 있으면 올 거야.” 한참 후 상순은 할아버지를 비롯한 일가친척들을 찾아뵈려고 집에서 나갔다. 그런데 토성 밑에서 한손으로 물동이를 붙잡아 이고 물 길으러 나오는 춘실과 딱 마주칠 줄이야. 춘실은 입귀를 비쭉거렸다. “전쟁터에 가겠으면 혼자 갈 게지. 남의 나그네를 데리고 갈게 뭐요? 왜 데리고 오지 않고 혼자 왔소? 남의 나그넬 죽일 잡도린가?” “무슨 소리요?” " 보오, 성수, 창걸, 태수, 병수, 희수, 창욱, 다 돌아오지 않았소? 왜 딱 흥수만은 데리고 오지 않았소? 흥수 죽으면 씨원하지. 나까지 데리고 살게스리." 상순은 세귀눈을 부릅뜨고 춘실을 쏘아보았다. "무슨 생벼락 맞을 소리오? 흥수 대오를 떨어져서 어데 갔는지 모르오. 꼭 돌아오겠지." 춘실은 상순의 세귀눈이 무서워 물동이를 팔에 끼고 달아나며 핼끔 뒤돌아보더니 계속 빈정거렸다. “중놈이 제 머리를 깎지 못한다고 국제 혁명을 하고 돌아온 나그네 저 지붕 보오. 비물이 왈왈 새는 걸. 저런 나그네를 만난 여편네도 고생문이 열리겠다. 흥!” "춘실이, 좀 보기요." 춘실은 우물에 가서 드레박을 잣아올리며 도도거렸다. "뭘? 남편 없다고 업신여기지 마오." 상순은 개의치 않고 다가가 드레박을 잣아 올려 물동이에 물을 부어주면서 말했다. "미안하오. 흥수를 데리고 와야 하는데." "그래, 죽었소?" "아니오. 막내동생이 피살된 후 정신이 나간 상하던게 밤중에 부대에서 떨어져 어디로 사라졌단 말이오. 혹시 막내동생 시체를 걷어주자고 그러잖았는지 모르오. 아버지와 엄마 사망했다니까. 고향엔 아무도 없잖소? 여기 처자하구 동생 성수가 있으니까 돌아올 수도 있소. 내심하게 기다리오." "말이 쉽지. 내 누굴 믿고 살라오?" 춘실은 눈을 흘기더니 물동이를 이고 자리를 떴다. 비틀거리며 겨우 걷는 그녀의 머리 위에서 물이 철렁철렁 쏱아져 질질 흘렀다. 상순은 흥수가 일어져 마음이 아팠다. 란시판에 그를 데리고 오지 못한 것이 한스러웠고 춘실한테는 한뉘 사람 빚을 지고 살아야 할 것 같았다. 상순은 이 마을에 불쌍한 녀인이 한둘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특히 남편을 조선전선에서 잃고 홀로난 큰어머니가  더없이 불쌍했다.  그는 한숨을 후- 내쉬더니 큰아버지와 형님네 집을 찾아가 죽 인사를 드리고 나서 웃새집 사랑방에 있는 큰어머니를 찾아갔다. 울안에서는 경주와 경수가 말다툼을 하고 있었다. "우리 아버진 렬사야! 너네 아버진 나쁜 놈이야!" 경수가 턱을 쳐들고 덤벼들자 머리 하나는 더 큰 경주는 경수를 활 밀어놓았다. "흥! 우리 아빤 유격대 대장이야!" 경주가 으시대자 경수는 발딱 일어나 손가락으로 경주의 콧대를 삿대질하며 욕했다. "너네 아버진 남조선 특무야!" "뭐라니?! 이 새끼!" 경주는 경수를 깔고 들어앉아 마구 때렸다. "경주! 그만 두지 못해!" 집 안에서 진달래가 달려나왔다. 그녀는 경주를 뜯어말렸다. "엄만 항상 경수 편을 들면서. 씨, 흑흑, 난 엄마 아들이 아니야? 씨," 진달래는 상순을 보자 애들을 한팔에 하나씩 품에 안고 먼 남쪽 하늘을 쳐다보며 눈물을 펑펑 쏟았다. "큰어머니, 그간 애들 데리고 고생 많았습구마." 진달래는 저고리 동전으로 눈물을 닦았다. "괜찮소. 시아버지랑 시동생들이 돌봐줘서요." 상순은 경수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면서 말했다. "귀국하기 전에 인삼 삼촌을 만났는데. 큰아버지 유체를 팔달령 양지바른 곳에 잘 안치했더구만요. 엄마를 모신 소서구에 모셔와야 되는건데." 진달래는 도리머리를 저었다. "아니오. 경수 아빠는 조국보위전에서 장렬히 희생됐는데요. 조국 강산에 묻힌 것을 영광으로 생각할 거요." 그 말에 상순도 머리를 끄덕였다. "큰어머니, 무슨 힘든 일 있으면 나한테 알려줍소." "그래요. 남정네 없으니깐. 살기 힘들어요. 종종 부를게요." 진달래는 삽작문을 나서는 상순의 떡돌 같은 뒤잔등을 미더운 눈길로 바라보며 마음이 든든해 한숨을 호 내쉬었다. 뒤이어 상순은 토성 안의 촌공소에 가서 할아버지에게 문안인사를 드리고 나서 그간 전쟁터에서 있은 일을 죽 이야기했다. 그는 충청남도 서천군 한산 면에서 명호 삼촌을 만난 이야기를 하고나서 한숨을 후 내쉬었다. “김치 움에서 병수가 함흥 촌에서 죽었다는 쪽지를 써서 함지 안에 남겨 놓고 왔습니다. 그걸 보면 명호삼촌이 얼마나 마음이 아파하겠습니까?” 허나 병완은 마른 기침을 깇을 뿐이었다. “ 우리가 괴뢰군에 포위됐을 때 명호 삼촌은 우리가 지원군이란 걸 뻔히 알면서도 김치 움에 숨겨 주었습니다. 삼촌과 영수는 괴뢰군을 쏘아눕히고 우릴 엄호해 빼돌려 주기까지 했습니다. 영수는 유격대를 이끌고 우리한테 인삼 삼촌부대를 찾아주었습니다. 병수 형이 잘못 된 걸 알면 삼촌이 얼마나 가슴아파하겠습니까?” 병완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니야, 우린 계급립장을 분명히 해야 한다. 공산당을 반대하는 자들과는 친척이라고 해도 한 하늘 아래 살 수 없다." 뒤이어 그는 상순의 세귀눈을 바라보며 물었다. “이제 공안국으로 돌아갈 예산이냐?” “아닙니다. 내 조선에 나갔을 때 진작 조직에선 천용구를 나 대신 국장으로 임명했을 겁니다. 마을에 돌아와서 할아버지와 아버지께 효성을 하고 처자를 돌보면서 혁명사업을 할 예산입니다. 딱 공안사업을 해야만 혁명하는 겁니까?” “그래. 난 이젠 늙었어. 네가 함흥 촌의 당 지부 서기에 촌장을 했으면 좋겠다.” 상순은 손사래까지 치며 확실하게 말했다. “할아버지께서 계속 촌장사업을 하시오. 난 할아버지를 도와 일하면 됩니다.” 병완은 정색해서 말했다. “그래도 명색이 지원군 영장과 복장공장 공장장에 사단 비서과 과장까지 한 네가 지방에 돌아와서 촌장이나 서기마저 하지 않아서야 되니?” 그러자 상순은 허리를 펴면서 가슴을 쭉 내밀며 말했다. “당원이 언제 벼슬을 바라고 혁명합니까? 밭고랑을 가로 타고 사회주의화 공산주의를 위해 일하면 됩니다.” “그래도 잘 생각해 봐라.” 상순은 오래 동안 마음을 굳혀온 듯했다. “나라와 마을 백성들의 쌀독을 책임지고 농사를 잘 지어 쌀독들을 꼴딱꼴딱 채우는 일만큼 더 중요한 사업이 어디에 있습니까?” 병완은 곰방대에 담배를 재워 넣으면서 벼슬을 초개와도 같이 여기는 막내손자를 대견하게 바라보았다. “하긴 백성들이 배불리 먹고 잘 사는 게 중요하지!” 성수는 집에 들어서며 손벽까지 치면서 “옳습니다. 잘 먹고 잘 살아야 한다는 말이 옳습니다!”라고 했다. 병완은 상순에게 그간 고충을 말했다. “지금 호조조를 하다가 합작사를 차리자니 저애가 많다. 제일 머리 아픈 게 저 아래골 집 동길이다. 정미소를 합작사에 바치자고 하니 내놓지 않겠다고 생 떼를 다 쓴다. 네가 좀 가서 설복해보렴.” “에이, 그 동생은 호조조를 할 때도 제 집끼리 농사를 지으면 좋다고 말썽이더니. 이번에도 그럽니까?” 병완은 성수랑 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동길은 쩍 하면 이런다. 같은 면적의 밭에 집체로 심으면 어떻고 개인으로 심으면 어떤가? 집체로 농사를 지으면 자기 집 일처럼 하지 않는다면서 집체생산을 반대하지 않겠니?” 상순은 벌떡 일어났다. “할아버지, 근심하지 마십시오. 내 가서 설복하겠습니다.” 그가 토성안집에서 나와 정미소 쪽으로 가는데 왁작 떠드는 소리가 났다. 가까이 가보니 동길이 한창 손으로 삿대질해대고 있었다. “이 정미소는 웃새집 할아버지와 성남집 큰아버지, 우리 아버지 함께 지은 거요. 우리 집안 개인 정미소나 한가진데 왜 합작사에 들여놓으라는 게요? 우리 무슨 지주요? 부농이요? 지주와 부농을 청산하듯이 정미소를 빼앗아 가면 되오?!” 그때 숱한 사람들 속에서 지춘실이 상순이 다가오는 것을 발견하고 고의로 팔을 걷고 떠들어댔다. “그 집은 원래 부농성분을 줘야 하오. 헌데 상순과 병완영감이 친척이라고 상중농으로 매겨놓아 그렇소. 이 정미소를 보오. 옛날 지주도 이렇게 큰 정미소가 없었소.” 그러자 마을 사람들은 여기저기서 이구동성으로 “옳소. 정미소를 합작사에 들여놔야 되오.”라고 떠들어댔다. 동길은 외사촌형 상순이 온 것을 보고 바다에서 지푸라기라도 붙잡을 양이었다. “형님, 말해 보오. 우리 정미소인데 왜 합작사에 들여놔야 하오? 이 사람들이 도리 있소?” 그러나 동길의 기대에 찬 눈길과는 상순의 말은 달리 엇나갔다. “이 정미소는 우리 아버지네 삼형제가 꾸린 건 사실이오. 허나 사회주의는 다 함께 잘 살아야 하오. 우리 몇 집이 이 큰 정미소를 차지해서는 안 되오. 그렇게 되면 사회주의 사회에서도 새 지주와 부농이 나오면서 빈농들과 빈부차이가 엄청나게 생기게 되오. 때문에 우리는 정미소를 헐값으로 쳐서 합작사에 들여놓고 집체로 이 정미소를 운영해야 하오. 자본주의 싹은 아예 자라지 못하게 뿌리 채로 싹싹 뽑아 버려야 하오.” 마을 사람들은 상순의 말에 우레와 같은 박수를 쳤다. “에이 씹에! 형님도 한가지구먼.” 동길은 성이 날대로 나서 목에 지렁이 같은 피 줄을 살구면서 고래고래 고함쳤다. “아무리 한 피 줄을 타고 나지 않은 형제라고 이렇게까지 못 살게 굴게 뭐요? 이젠 외할아버지고 외사촌형님이고 모르겠소.” 사실 김동길은 김범호의 후처의 맏아들이었다. 김범호의 첫째 처 곰순은(상순의 고모) 딸 하나만 달랑 낳고 애를 더 낳지 못하자 범호는 후처를 맞아들여 동길과 명길 등 아들 다섯이나 줄줄 낳았던 것이다. 범호의 후처가 낳은 숱한 아들은 기실 상순이네와 피를 나눈 형제는 아니었지만 형제취급을 했던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별의별 소리를 다 쳤다. “당신이 운들 어찌 하겠소? 사회주의는 혼자 잘 살라는 법이 없소.” “정미소는 사회주의 합작사 거요.” “정미소를 합작사에 들여놔야지.” “생떼를 쓰지 말라!” 상순도 동을 달았다. “동생, 별 수 없소. 우리 집과 큰집에서는 정미소를 들여놓기로 했소. 마을 사람들의 여론이 무섭지 않소?” 그러자 성이 꼭두까지 치민 동길은 주먹코를 벌름거리면서 퉁방울눈을 부라리며 고래고래 고함쳤다. “그럼 형님네도 우리 마을에서 제일 좋은 황소 곤두뿔을 합작사에 들여놓소.” 그 말에 상순은 두 말 없이 대답했다. “당장 들여놓겠다.” 그때 어느 새 왔던지 병완이 나서면서 한마디 보탰다. “우리 공산당원들은 대공무사하다. 나도 우리 집 황소 비녀뿔을 들여놓겠다.” 그러자 동길은 더 떼쓸 수 없었다. 씩씩거리던 그는 숱한 사람들 앞에서 괴춤을 까더니 그걸 빼들고 마을 사람들을 향해 오줌을 쏴 갈겼다. “이거나 먹고 다 썩어져라!” 지춘실을 비롯한 아낙네들은 아우성을 지르면서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돌아섰다. 동길은 그 길로 마을을 떠나 의란구로 가버렸다. 그 후 동길의 부모와 처자 그리고 형제들은 웃새집과 성남집 형제들이 아무리 말리여도 동길을 따라 의란구로 떠나갔다. 병완의 딸 곰순은 별 수 없이 의란구로 따라갔다. 그들 온 집안 식구들은 다시는 함흥 촌에 발길을 돌리지 않았고 웃새집과 성남집과 발길을 끊고 살았다. 다만 곰순만은 자기 낳은 딸 계월을 데리고 드문드문 놀러 오군 했다. 실로 피란 물보다 진한 것이어서 참말로 무서운 것이었다. 말썽이 많던 그 날, 상순은 외양간에서 곤두뿔의 고삐를 풀어 쥐고 마당에 나섰다. 기준은 낮에 있은 일을 풍문에 들었기에 상순이가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알아채고 마당에 나왔다. “얘, 기어이 합작사에 끌어가겠니?” 상순은 애지중지하던 곤두뿔의 턱을 쓰다듬어주면서 말했다. “아깝지만 합작사에 들여놔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 당원인 내가 어찌 마을 사람들을 이끌고 합작사로 나가고 인민공사를 꾸리고 사회주의 길을 따라 나가겠습니까?” 기준은 도리머리를 흔들며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며 곤두뿔의 넓적한 잔등을 어루 쓸었다. “참 아깝구나. 개체농사를 지을 때부터 이제껏 우리 부자간과 함께 소서구로 장개골안으로 숱한 밭을 갈던 곤두뿔이 아니냐? 우리 목숨과 같은 소야.” 상순은 아버지가 곤두뿔을 목숨처럼 아끼고 아까워하는 것을 알고도 남음이 없었다. “저 뒤에 진달래 큰아주머니랑 소도 없이 어떻게 농사를 짓겠습니까? 합작사에 소를 바치면 소가 없는 집들에서도 농사지을 근심이 없을 거 아닙니까?” 기준은 애 둘이나 데리고 과부로 사는 진달래네와 같이 어려운 사람부터 생각하는 아들이 대견스러웠다. 상순은 빗자루로 소잔등과 배, 엉덩이를 썩썩 씨원하게 쓸어주면서 정중하게 말했다. “저 모아선 너머 전국노동모범 김시룡동지는 전국에서도 앞자리를 차지하는 호조조를 꾸리고 고급합작사를 꾸렸습니다. 그는 사원들을 이끌어 집체농사의 모범을 보이면서 부유의 길로 힘차게 나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부터 공산당을 믿고 우리 집의 모든 것을 다 바쳐서라도 마을 백성들을 이끌어 모두 다 쌀독을 꼴딱꼴딱 채워놓고 배불리 먹고 사는 사회주의 새 마을을 건설해야 합니다.” 아들의 설득력 있는 말을 들은 후에야 기준은 몸을 돌리더니 가져가라고 손을 뒤로 휘저었다. 명옥은 문 앞으로 끌려 지나가는 곤두뿔을 보고 치맛자락을 들어 눈 굽을 찍었다. 이때 웃새집 병완도 비녀뿔을 끌고 합작사 외양간으로 오고 있었다. 숱한 마을 사람들이 병완과 상순의 대공무사한 거동에 혀를 끌끌 찼다. “당원들이 다르긴 다르오.” 며칠 후 진수해향에서 당위 서기 허백호와 향장 허영주가 함흥 촌 촌공소에 찾아왔다. 때마침 촌공소에서 병완과 상순이가 한창 뭔가 의논하다가 놀라운 눈길로 맞아주었다. “찾아가 인사하지 못해 미안합니다.” 상순은 뒤덜미를 극적거렸다. 그러자 허백호 서기는 빈정거렸다. “제 언제 상급을 존중한 적이 있소? 세상은 넓고도 좁소. 이거 보오. 제 또 내 아래서 일하게 되지 않았소?”  상순은 속으로 대들었다. (내 언제 당신 밑에서 벼슬하려고 기를 썼소? 흥!) 그런 속내를 모르고 허백호 서기가 자리에 앉자마자 희죽이 웃으면서 병완과 상순을 보고 말했다. “이렇든 저렇든 상순 동무는 내 오랜 수하요. 게다가 항미원조 전쟁에서 복장공장 공장장과 영장, 사단 비서과장까지 한 동지요. 상순 동지는 실전경험도 풍부하고 무예가 뛰어나오. 나는 허영주 향장과 토론하고 김상순 동무를 진수해 파출소 소장으로 임명하였소. 당장 이불짐을 싸가지고 진수해로 가기요.” 병완은 반가와 자리에서 일어나기까지 했다. “감사하오. 허 서기.” 허나 상순은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저를 잘 봐줘서 고맙습니다. 허나 파출소 소장을 사양하겠습니다. 제가 파출소 소장을 할 게면 영월구 공안국 국장을 내놓았겠습니까?” 병완은 상순을 욕했다. “이 놈아, 너를 관심하는 서기 앞에서 무슨 망발이냐? 한뉘에 이런 좋은 기회 몇 번 있을 거 같냐?” 허영주 향장도 상순의 손을 붙잡고 사정하듯이 말했다. “상순이, 파출소 소장을 하오. 자넨 이후에 우리 현 공안국 국장으로 제발될 수도 있네.” 허나 상순은 바로 앉더니 똑똑히 말해 두었다. “감사합니다. 저는 벼슬을 초개와 같이 여깁니다. 시골 마을에서 부모를 모시고 효성을 하면서 이 마을 백성들을 이끌어 사회주의 새 농촌을 건설하겠습니다. 농민들이 쌀독에 쌀을 꼴딱꼴딱 채워 놓고 배불리 먹으면서 살게 하겠습니다.” 허백호 서기는 도리머리질 했다. “제 하지 않아도 소장을 할 사람이 쌔고 버렸소. 몸값을 작작 올리오. 영월구 공안국에 있는 허영호나 성우 동무도 있소.” 상순은 좋아라고 찬성했다. “그러십시오. 그 동무들에게 소장을 시키십시오. 전 함흥 촌에서 혁명을 하겠습니다.” 허영주 향장은 너무나도 안타까와 야단쳤다. “이보게, 상순이, 당 조직에서 다년간 자넬 배양한 게 아깝네. 나라 기둥감을 이런 시골에서 호미를 휘두르게 할 순 없네. 그럼 시내에 가서 향 공급판매합작사 주임을 하오.” “합작사 주임이라니 무슨 말씀입니까?” 상순은 세귀눈을 치켜뜨며 물었다. 허영주 향장은 상순을 믿음에 찬 눈길로 마주보았다. “함흥 촌 촌장과 당 지부 서기에는 자네 할아버지가 있잖소? 상순 동무는 진수해로 내려가 우리 유력한 조수로 돼주오. 현에서도 상순동무를 상응한 직위에 사업배치를 할 거요.” 허백호 서기는 눈귀에 안타까운 빛을 흘리며 말했다. “상순이, 촌 합작사와는 달라. 향 합작사를 진수해 시내에 차리게 됐네. 향 합작사에서 주임 겸 당 지부 서기를 하오.” 그러자 병완은 제꺽 상순을 권고했다. “상순아, 합작사 주임을 해라. 시내에 가서 공호가 되면 얼마나 좋니?” 상순은 세귀눈을 내리깔고 한참 생각하다가 한숨을 후 내쉬었다. “제 마음은 이미 정해졌습니다. 두 분이 저를 양성해주고 봐 주는 성의는 백골난망입니다. 초야에서 나라와 백성의 쌀독을 책임지는 일만큼 위대한 일은 없습니다. 시내에 가서 합작사 물건을 팔면서 안일하게 살 궁리는 꼬물만치도 없습니다.” “상품과 돈을 다루는 일엔 자네와 같이 청렴하고 철저한 관리일군이 필요하네.” 허영주 향장의 목소리에는 간절한 애정이 배여 있었다. 허나 상순은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더니 나지막하나 아주 똑똑히 말했다. “정치를 하는 사람이 합작사에 들어앉아 과자나 팔아 뭘 하겠습니까? 저를 놔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허백호 서기는 한숨을 후 내쉬더니 도리머리 질 하며 일어났다. "그럼 내 대신 향당위 서기를 시키면 하겠다는 말이오?" "아니, 이건 무슨 말씀이오? 절대 그런 뜻이 아니오." 기실 허백호와 상순은 나이도 별로 차이 없었고 경력도 비슷했다. 허백호가 민주련군 련장할 때 상순은 련 지도원을 했고 나중에 영장에 임명됐지만 하지 않았다. 허백호가 영월구위 서기를 할 땐 상순은 영월구공안국 국장에 뒤이어 현 공안국 국장을 하지 않았는가. 상순은 항미원조전쟁에 참전해 영장에 사단 비서과장까지 했기에 기실 허백호보다 더 높은 경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상순은 허백호를 항상 존대하였다.     그러나 허영주 향장은 자기 련장할 때 상순이 기관총반장을 한 적이 있다고 항상 상순의 상급으로 자처하면서 우쭐거렸다.    그는 장탄식했다. “사람이, 파출소 소장이라도 시킬 때 하지 않고. 참, 꼭 후회할 거오.” 향 령도들이 떠나간 후 병완은 연 며칠 상순에게 파출소 소장을 하라고 재삼 권했다. 하지만 상순의 마음은 패용천산처럼 끄떡 움직일줄 몰랐다.      패용천산 절벽은 퍼런 이끼를 들쓴 채 세월의 세찬 풍파에도 끄덕하지 않았다. 패용천산 꼭대기에서 산새들이 훨훨 자유로이 날아예고 있었다.  
103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81) 댓글:  조회:1662  추천:1  2017-09-19
                      4. 군복을 운송 군복공장의 식당에는 경사가 났다.식당 문으로 김이 물물 나오고 돼지고기 끓는 구수한 냄새가 식당 밖에까지 풍겨 나왔다. 허영희 주임은 전에 없이 열정이 나서 웃고 떠들며 식당에서 돌아쳤다. 그때 상순이 마른기침을 하며 들어섰다. 그녀는 웃음을 뚝 끊고 불자연스레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 오히려 상순은 아주 자연스럽게 영희 앞으로 가서 멈춰 섰다. “첫 땐데 재봉공들을 돼지고기국을 배불리 먹이오.” 영희는 생글방글 웃으면서 머리를 끄덕였다.       전사들이나 재봉공들은 식당에서 처음으로 돼지고기국에 새하얀 이밥을 배불리 먹으면서 웃고 떠들었다. 그들은 돼지고기랑 입쌀은 상순 공장장과 허영희 주임 등이 미군 전투기 폭격을 무릅쓰고 얻어온 것이라고 혀를 끌끌 찼다.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상순과 허영희 주임을 여간 칭찬하지 않았다.      "군중들 생활을 잘 관심하는 분들이야."     " 좋은 책임자들이야.” 어떤 재봉공들은 “우리 군복을 더 많이 만들어 그들에게 보답하자.”라고까지 했다. 허영희는 재봉공들에게 시원한 김치를 대접하려고 대야를 들고 김치 움으로 사뿐사뿐 다가갔다. 그때 상순이 식당을 돌아보다가 바깥에 나오는 것이 눈에 띄었다. 그녀는 김치 움에 들어가면서 상순에게 맑은 눈길을 보냈다. “김치를 받아주겠어요?” 상순은 머리를 끄덕이며 영희를 따라 김치 움으로 갔다. 이윽고 영희가 김치움에 들어가더니 대야에 김치를 담아 올려 보냈다.  상순은 김치대야를 받아 움 옆에 놓고 서성거렸다. “빨리 손을 좀 당겨주세요.” 김치움에서 영희의 목소리가 들렸다. “에이고, 고까짓 김치 움에서 혼자 나오지 못해? 쯧쯧.” 상순은 꺼먼 김치 움 아구리에 손을 들이밀었다. 그런데 허영희는 손을 잡고 올라오는 것이 아니라 상순을 김치 움 안에 잡아 당겼다. 쿵덩! 아무런 준비도 없은 상순은 김치움에 쿵 떨어지면서 영희 몸 위에 넘어졌다. 이윽고 누군가 김치움 덮개를 닫아버렸다. “숱한 재봉공들이 김치를 먹자고 기다리는데 이게 뭐요?” “정인군자인 척 하지 말아요. 이후엔 김치 잡숫겠어요? 하면 이 김치 움으로 따라 들어오세요.” “저 김치는 어쩌오? 눈보라에 흙먼지 들어가겠소.” 그러자 영희는 김치 움 덮개를 열고 머리를 바깥으로 내밀고 두리번거리더니 김치 대야를 되들여왔다. 영희는 김치 움 덮개를 살짝 덮는 것이었다. “됐어요.” 영희는 말을 마치자 상순한테 다가와 품에 와락 안겼다. 상순은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깜짝 놀랐다. 풍만한 영희의 가슴이 밀착해오며 압박하면 할수록 숨조차 상순은 거칠어지고 아랫배가 찡해나는 것을 금치 못했다.  "안되오. 난 중공 당원이오." 상순은 영희를 떠밀어 버리었다. 영희는 상순을 더 꼭 끌어안으며 종알거렸다. "또, 또,  당원은 사람이 아닌가요?" "중공 당원은 특수강철로 만든 사람이오." 상순은 말을 마치자 영희를 밀어내고 김치 움 덮개를 열고 훌쩍 바깥으로 뛰어 나갔다. 김치 움 안에서는 영희의 울분소리가 들렸다. “당신은 꼭 후회할 거예요. 언젠가는 제 발로 김치 움으로 올 거예요.” 상순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김치대야를 안고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전사들과 재봉공들은 김상순과 허영희가 입쌀밥에 돼지고기국까지 대접한데 고마워 낮에 밤을 이어 더욱 정성들여 군복을 지었다. 그리하여 군복공장에서는 군복 짓기 임무를 앞당겨 완수했다. 상순은 식당에서 밥을 먹으면서 한숨을 후 내쉬었다. (이젠 동복을 다 생산했으니 한 시름 놓게 됐어.) 이때 허영희가 식당아줌마와 뭐라고 말하더니 돼지고기 장국과 밥그릇을 들고 와서 상순과 마주해 앉았다. 이윽고 영희의 분부를 들은 아줌마가 돼지고기 장국 그릇을 들고 상순의 앞으로 다가와 앉았다. 그녀는 주위를 흘금흘금 곁눈질하더니 상순의 국그릇에 돼지고기를 골라 덧놓아주었다. “감사하오.” 아줌마가 가자 상순은 영희를 빤히 들여다보며 국물을 맛나게 후룩후룩 들이켰다. 영희는 상순에게 맑은 눈길을 보내며 밥숟가락으로 자기 장국 사발에서 돼지고기 점을 떠서 상순의 그릇에 담아주었다. 상순은 남들이 보는 거 같아 그대로 받아먹으면서 영희를 곁눈질해 보았다. 보름달 같은 얼굴에 복숭아 이마, 버들잎 같이 짙은 눈썹, 이글이글 반짝이는 봉이 눈, 오똑한 코, 애교 섞인 평안도 말을 쏟아내는 조그마한 입. 인물체격이나 어디를 보아도 함흥 촌에 있는 명옥 보다, 지어 춘실 보다도 훨씬 뛰어난 여인이었다. 순간 상순은 아랫배로부터 찡 치밀어 오르는 정욕을 금할 수 없어 마른 침을 꼴깍 삼키며 숟가락을 놓았다. 그 모든 것을 다 꿰뚫어 본 듯이 영희는 상순에게 눈짓하더니 머리를 다소곳이 숙이면서 나직이 속삭였다. “김치 생각이 나는가요?” 허나 상순은 땅이 꺼지게 한숨을 짓더니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아니, 돼지고기를 잘 먹어 배부르오.” 영희는 앵돌아지면서 입귀를 삐쭉했다. “김 공장장은 입 안에 다 들어온 시원한 김치도 잡숫지 않을래요?” 상순도 능글스레 재담을 엮어댔다. “돼지고기를 배불리 먹었는데 찬 김치를 먹고 배탈이 나면 어쩌오?” “따로 따로 먹으면 배탈이 날 리 있어요?” “따로 먹어도 배 안에 들어가면 한데 합쳐지지 않소?” “그 놈의 배는 김치도 먹지 못하는 멍청이 배구먼.” 상순은 밥그릇을 들고 일어나면서 굳은 마음을 보여 주었다. “당원은 특수재료로 만들어졌으니까.” 영희는 상순의 밥그릇과 숟가락, 저를 와락와락 걷어가지고 가면서 두덜거렸다. “김 공장장, 당원은 먹고 싶은 김치도 못 먹는 사람인가요?” 영희는 주방으로 들어가면서 상순에게 눈을 흘기었다. 숱한 재봉공여인들이 상순과 영희를 흘금흘금 곁눈질했다. 어느 날 오후, 퇀 참모장이 성수가 모는 자동차에 앉아 군복공장 울안에 들어섰다. 상순은 급히 마중 나가 손을 내밀었다. “참모장, 안녕하십니까?” 참모장은 상순의 손을 굳게 잡으면서 “김 공장장, 수고 많았소.”라고 하며 공장장 사무실 문 앞으로 갔다. “어서 들어갑시다.” “김 공장장이 먼저 들어가십시오.” 상순과 참모장은 서로 사양하다가 나중에 그 좁은 문으로 둘이 거의 동시에 비비닥거리며 들어갔다. 그런데 참모장의 배가 어찌나 다이아처럼 뚱뚱한지 숨을 헐떡거리며 겨우 비비며 들어갔다. 아줌마들이 그 모양을 보고 식당 안이 떠나가게 깔깔깔 웃어댔다. 참모장은 사무실에 들어가자마자 상순을 보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김 공장장은 전선으로 군복을 실어가는 임무를 맡아야 하겠소.” “예?!” 상순은 적이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나 인차 굳어졌던 얼굴근육이 느슨히 풀리며 싱글벙글 웃기까지 했다. “잘 됐습니다. 이제야 전선에 나가 양키 놈들과 통쾌하게 싸울 수 있게 됐군. 이 놈 골 안에서 아낙네들과 신경질을 쓰면서 지긋지긋해 어디 살겠습니까?” 상순은 기뻐 어쩔줄 몰라했다. "전선에 나가 미제 양키놈들 콧대를 분질러놔야지. 흥!" 참모장은 혈기 넘치는 상순을 보고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개성에서 정전담판을 하고 있소.” “그럼 난 양키 놈들을 잡아치울 기회도 없겠구먼.” 그러나 참모장은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아니오. 이 전쟁은 싸우다가 담판하고 담판하다가도 싸우는 판이오. 언제까지 걸릴지 누구도 예측하기 어렵소. 우리 부대는 지금까지 후방을 지켰지만 이젠 후방의 군수물자를 싣고 직접 최전선에 나가 양키 놈들과 싸워야 하오.” “거 잘 됐구나.” “음, 우리 운송대는 지금까지 후근총사령부 교통운송과 조남기 과장의 3단계 운송전략전술 지시에 따라 군수물자를 운송했소. 이전 같으면 우린 군복을 자동차로 철도연선에까지 운송하면 되었소. 이전엔 기차로 조선반도 중부까지 실어가면 거기서 다시 트럭으로 전선에 운송하고 그 다음 다시 인력과 축력으로 최전선으로 운송했지. 그런데 며칠 전 미제 날강도들의 폭격에 철길이 여러 구간이 끊어져 철로운송을 잠시 할 수 없게 됐소. 겨울이 닥쳐와서 전선에선 동복이 급히 수요되오. 전선의 장병들이 어떻게 겨울에 홑옷을 입고 싸우겠소. 철로운송을 잠시 할 수 없는 정황에 근거해 김 영장은 2련장과 함께 40대 운송자동차대대를 최전선으로 직접 호송해야겠소. 요즘 미군 전투기 봉쇄가 너무 심해 도로운송도 힘든 판이오.” 상순은 권총집을 뒤로 돌려 메면서 자리에서 우쭐 일어났다. “오늘 떠나랍니까?” “아니, 이 사람아, 급하긴 우물에 가서 숭늉을 달라 할 지경이구먼. 저녁이나 든든히 먹고 날이 어두워져 적기 공습이 적을 때 감쪽같이 공장 울안을 벗어나가게.” “옛! 알았습니다.” 상순은 공장을 돌아보며 근심했다. "복장공장은 어쩝니까?" "근심하지 마오. 3련장한테 공장을 맡길 예산이오." "예." 상순은 머리를 끄덕이고나서 말했다.  "조선 여성들을 잘 지도할 여성책임자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음. 누굴 시키면 좋겠소?" 상순은 참모장을 쳐다보며 엄숙하게 거천했다.  "허영희를 부공장장으로 시키면 어떻습니까?" "허영희?" "녜. 허영희는 지금  식당 주임을 하는데 령도재능은 있는 것 같습니다." 참모장은 통쾌하게 대답했다. "알았소."      그들은 한참 동안 이 말 저 말 하다가 해질 무렵에 공장장 사무실을 떠나 식당으로 들어갔다. 참모장은 허영희 주임을 불러 뭐라고 한참 말하더니 상순이 쪽으로 다가왔다. 허영희 주임이 울먹한 표정으로 다가오자 밥을 먹으며 웃고 떠들던 재봉공여인들은 웃음소리를 딱 죽이며 밥을 먹었다. 영희 주임은 주먹밥 한 꾸러미에 새파란 싹이 돋아난 무우 네 개를 넣어 들고 상순의 앞으로 다가왔다. “전선에 나가면 목이 마르고 배고플 거예요.” 영희는 머리를 다소곳이 숙이며 울먹울먹해 말하는 것이었다. 상순은 주먹밥꾸러미를 받으며 허영희 주임을 바라보았다. “이제껏 허주임 수고 많았소. 감사하오. 내 돌아올 때까지 복장공장을 잘 령도하오." "네-" 허영희는 머리를 끄덕였다. 그는 허영희 주임에게 분부했다. "주먹밥꾸러미 40개 더 만드오. 트럭마다 한 꾸러미씩 올려놔야겠소.” “알았어요. 김영장.” 허영희는 두 손을 맞잡고 머리를 수깃하고 식당으로 걸어갔다. 상순은 주먹밥꾸러미를 성수가 모는 제일 앞의 트럭 운전실에 가져다 넣고 음식점으로 되돌아왔다. 허영희는 식당 아줌마들과 함께 주먹밥을 꾸러미에 한창 넣느라고 여념이 없었다. 상순은 영희를 불러 쌀독 쪽으로 다가갔다. 영희는 다소곳이 숙였던 머리를 들더니 상순을 마주 바라보며 아주 진지하면서도 나직이 물었다. “김치 생각이 나는가요?” “아니, 군복을 싣고 전선으로 나가야 하는데 언제 김치 생각을 다 하겠소?” “전선에 나가면 김치가 없을 게 아닌가요?” “…” 허나 상순은 쌀독을 손수 일일이 열어보더니 영희한테 머리를 돌렸다. “명심하오. 숱한 재봉공들의 운명을 책임진 허 주임은 김치 생각을 하기보다도 쌀독과 물독을 꼴딱꼴딱 채워놓고 살림살이를 잘 해야 되오.” “예. 갈라지면서도 사업 말 밖에 할줄 모르는구만요.” 영희는 나직이 대답하며 돌아서더니 어깨를 들먹였다. 이윽고 그녀는 보꾸러미를 하나 상순에게 내밀었다. “뭐요?” “김치예요. 자동차에 싣고 가다가 생각 날 때면 잡수세요.” “?” 상순은 보꾸러미를 되돌려주면서 핀잔했다. "정말, 입만 열면 김치, 김치오?”  그때 옆에서 무슨 감투끈인지도 모르는 참모장이 영희를 보고 끼여들었다. “가져오오. 내나 가져다 먹기오.” "네." 영희는  머리를 끄덕이더니 상순을 힐끔 곁눈질하더니 김치보꾸러미를 들고 참모장한테로 다가갔다. 상순은 머리를 다소곳이 숙인 그녀의 어깨가 세차게 파도치는 것을 보았다. “참, 그간 허 주임이 김영장한테 정이 폭 들었구먼.” 참모장은 영희가 옆에서 뜯어주는 김치 한 잎을 저로 집어 먹으며 중얼거렸다. “김치가 너무나 맛있구먼. 김영장은 왜 호송 가는 길에 안 먹어?” 상순은 개의치 않고 어떻게 미군 전투기의 폭격을 피해 봉쇄선을 꿰뚫고 군복운송 임무를 완수할 것인가를 골똘히 궁리하고 있었다. 저쪽에서 흥수가 외까풀눈으로 상순한테 질투의 눈길을 보내며 남북골을 절레절레 저었다. (쳇, 저깟 놈 뭐가 대단해? 허주임이 왜 꼬리를 쳐?) 그는 이해되지 않았다, 춘실도 그렇고 허주임도 그렇고 왜 상순을 그렇게 따르는지. (저 놈 거기에 뭐 엿이라도 붙었나? 아님... 흥!) 얼음 쪼각 같은 겨울 해가 압록강 저쪽 산 너머로 꼴깍 넘어갔다. 부르릉 부르릉 트럭 엔징 소리가 공장 울안에서 요란하게 들리며 헤드라이트가 어지러이 여기저기 비추더니 멈춰 섰다. 상순이 참모장을 따라 울안에 나갔다. 운전수들은 트럭에서 뛰어내리자마자 세개 패로 나뉘어 자동차 앞에 줄지어섰다. 참모장은 운전수들 앞으로 나갔다. “동무들은 김영장의 지휘아래 이번 동복운송전투임무를 훌륭히 완수하리라고 믿습니다. 아래에 김영장으로부터 몇 마디 지시하겠습니다.” 운전수과 전사들은 열렬한 박수갈채를 보냈다. 상순은 전체 운전수들과 전사들에게 우렁차게 고함쳤다. “운전수들은 몽땅 식당에 들어가 저녁식사를 든든히 한 후 내 말을 들으라.” “옛!” 운전수들은 먼 길을 달려와 자기들을 염려하는 김영장이 고마웠다. 그들은 질서정연하게 줄을 지어 식당에 들어가 밥상에 마주 앉았다. 허 주임은 식당의 십여 명 아줌마들을 이끌어 치마에서 비파소리 나게 맴돌며 밥상을 차려 올렸다. 그때까지 상순은 운전수들의 밥상을 둘러보며 살피다가도 허주임에게 말해 모자라는 채나 돼지고기 국을 더 올리게 했다. 옆에서 상순의 거동을 보던 참모장은 패기 있으면서도 세밀한 상순의 사업 작풍에 여간 감탄해마지 않았다. 한참 후 상순은 2련장을 한쪽 구석으로 불러 나직이 말했다. “우린 통일지휘에 따라 군사행동을 해야겠소. 내가 총지휘를 맡고 2련장은 호위를 맡소. 운송패 운전수들은 희수 패장과 성수 패장이 맡아야겠소.” 2련장은 차렷 하고 거수경례를 올렸다. “옛!" "견결히 완수하겠습니다!” 희수와 성수는 한 마을에서 왔지만 전선에서는 상급이기에 특별히 존대를 써서 대답했다. 상순은 그들 둘의 손을 굳게 잡아주면서 물었다. “좋소. 무슨 어려운 건 없소?” 그때 성수가 나직이 말했다. “김영장, 운송 임무를 완수하는데 제일 위험한 건 그 놈 적기들 폭격과 기관총소사오. 이 많은 트럭이 한꺼번에 장사진을 치고 봉쇄선을 넘어간다는 건 정말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제일 먼저 미군 전투기와 폭격기가 날아오면 어떻게 대처하겠는가 하는 것부터 준비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상순은 유심히 들은 후 또 물었다. “미제의 지상군이 운송트럭대오를 습격하는 경우는 없는가?” “지금까지 그런 일이 없었습니다.” 상순은 머리를 끄덕이더니 머리를 숙인 채 한참이나 무슨 생각을 굴리었다. “흥수 반장은 할 말 없소?” 흥수는 능글거리면서 중얼거렸다. “우린 김영장 명령을 트럭 위에서 듣지 못할 가봐 걱정이지.” 상순은 머리를 끄덕였다. “음. 또 무슨 문제는 없소?” “이제 생각나면 다시 말하겠소.” 흥수는 입버릇처럼 상순에게 존대를 쓰지 않았다. 옆에서 그들을 지켜보던 참모장은 그들 셋을 둘러보면서 말했다. “이젠 출발하오.” 운전수들과 호위병들이 벌써 마당에 나와 줄지어 섰다. 그새 여재봉공들은 군복을 자동차에 다 실어 놓고 마당에 몽땅 줄을 지어 서 있었다. 미군 전투기의 폭격이 두려워 전등불과 등잔불마저 몽땅 꺼놓아서 공장 울 안은 까만 나라였다. 다만 땅바닥에 깔린 허연 눈만이 발밑에서 보일 뿐이었다. 상순은 운전수들과 호위병들 그리고 여재봉공들을 둘러보며 소리 높이 말했다. “그간 군복공장 여재봉공들은 동복생산전투임무를 훌륭히 완수했습니다. 동무들은 조선전쟁의 승리를 위해 위대한 업적을 창조했습니다. 최전선의 전사들은 동무들이 지은 동복을 든든히 입고 미제 승냥이들을 호되게 족칠 것입니다. 동무들, 수고했습니다!” 허 주임이 목멘 소리로 고함쳤다. “김영장과 호위병 아저씨들 수고했어요.” 여재봉공들이 따라 고함쳤다. “수고하겠어요.”   상순은 손을 들어 군례를 척 올렸다. “감사합니다. 그간 수고 많았습니다.” 상순이 운전수들과 호위병들한테 연설하는데 재봉공들 속 여기저기에서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군복운송 임무를 맡고 최전선으로 나가게 됐습니다. 미군 전투기와 폭격기의 폭격을 맞받아 봉쇄선을 꿰뚫고 군복을 제때에 최전선 장병들에게 운송해야 합니다. 우린 통일된 지휘아래 통일 지시와 신호에 따라 군사행동을 해야겠습니다. 나와 운전수들을 책임진 성수 패장은 제일 앞 트럭에 앉아 나가겠습니다. 적기가 날아오면 신호탄이거나 권총 두 방을 쏘아 적기경보신호를 보내겠습니다. 운전수들은 적기경보신호가 울리면 헤드라이트를 몽땅 끄고 달려야겠습니다. 적기가 기수를 숙여 내려오며 폭격하기 시작하면 절대 트럭에서 뛰어내려 숨지 말고 원래 달리던 속도보다 더 늦게 혹은 빨리 달리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그래야만 적기 폭격에 명중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운전수들은 김영장의 말을 듣고 속으로 여간 감탄해마지 않았다. “2련장과 흥수 반장은 제일 뒤 트럭에 앉으십시오. 군복을 실은 트럭 바곤마다 호위전사들이 3명씩 앉아 경기관총으로 적기를 조준 사격합시다. 헤드라이트를 끄고 달리는 트럭을 가파로운 굽인 돌이에서 인도하시오. 우린 목숨으로 우리 여재봉공들이 눈에 피발이 서게 지은 동복을 우리 장병들에게 전달해야 하겠습니다.” 상순은 군복공장 울안의 어두운 그림자들을 둘러보며 목청껏 외쳤다. “전체 동지들, 우린 나라를 보위하기 위해 조선전선에 나왔습니다. 이번 운송임무는 우리 숱한 장병들의 생사와  관계되는 관건적인 임무입니다. 나는 동지들이 훌륭히 해내리라고 굳게 믿습니다. 동지들, 동복운송 임무를 훌륭히 완수할 신심이 있습니까?” “있습니다!” 장내에서는 우레와 같은 함성소리가 울렸다. “출발!” 상순은 참모장과 3련장 그리고 허영희 부공장장 등과 일일이 악수하며 석별의 정을 나누었다. 상순이 영희 앞에 다가가 손을 내밀자 영희는 손을 꼭 쥐며 눈물이 글썽해 반쯤 외면하였다. "그간 수고 많았소. 허 주임. 아니, 이젠 부공장장이지." "저에 대한 관심 감사해요. 무사히 갔다가 돌아오세요." 그녀는 손으로 눈을 가리더니 돌아서서  어깨를 들먹였다.  순간 상순도 코마루가 시큼해남을 어쩔 수 없었다.  그는 작별인사를 마치자 부랴부랴 제일 앞 트럭에 가서 운전실에 들어가 성수 옆에 앉았다. 숱한 헤드라이트가 공장 울안을 벗어나자 두텁게 뒤덮인 칠흑 같은 어둠속을 누비며 남쪽으로 쏜살같이 달렸다.                                            5. 한 많은 따발령 차디찬 겨울해가 내리비추는 대낮에는 미군 전투기가 자주 덮쳐 오지 않았다. 하여 상순은 40여대 트럭대오를 거느리고 쏜살같이 남으로 달릴 수 있었다. 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했다. “이제 얼마 달리지 않으면 굽인 돌이 많은 따발령에 도착하게 되오. 미군 쌕쌔기는 항상 따발령 부근에서 우리 운송차량을 폭격하군 했소.” 성수의 말을 듣고 상순은 즉시 트럭 바곤에 나가 앉았다.  "뒤따르는 자동차마다 전할 것! 방공사격준비!" 뒤따르는 자동차가 뒤의 자동차에 대고 상순의 명령을 전달하며 고함쳤다. "뒤따르는 자도아마다 전할것! 방공사격준비!" 마지막 자동차에까지 전투명령이 전달됐다. 자동차마다 고사기관총을 운전실 위쪽에 걸어놓고 하늘만 살폈다. 땅! 이때 남쪽하늘에 파란 신호탄이 하늘로 날아올라갔다. 따발령 길을 닦으며 지키던 2련에서 적기 공습을 알리는 신호탄을 쏘아올렸다. 아니나 다를가.  구름 속에서 얭얭 요란한 소리와 함께 한 떼의 쌕쌔기가 날아왔다. 상순은 인차 허리춤에서 신호총을 빼 뒤쪽 공중에 쏘았다. 땅! 빨간 신호탄이 하늘에 날아올랐다가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졌다. 뒤따라오던 트럭의 전사들은 모두 고사기관총과 반자동보총으로 하늘을 겨누었다. 미군 쌕쌔기가 전투편대를 지어 뒤로 날아 지나갔다. 이윽고 기수를 돌린 미군 쌕쌔기들은 흩어지더니 뒤로 덮쳐들어 운송트럭을 향해 미친 듯이 소사하며 덮쳐들었다. 성수 등 운전수들은 사전에 상순이 포치한대로 쌕쌔기가 트럭을 조준해 소사하려는 순간 차들을 후퇴시켰다. 쌕쌔기는 트럭 앞에 헛사격을 해댔다. 상순은 경기관총으로 쌕쌔기들에게 한 배짐 맹사격을 가했다. 다른 트럭의 전사들도 공중에 대고 일제히 불을 토했다. 화력망을 헤가르며 쌕쌔기들이 겨끔내기로 덮쳐들어 후퇴하는 트럭을 조준해 기수를 숙이며 사격했다. 순간 트럭들은 상순의 지휘대로 이번에는 앞으로 쏜살같이 달렸다. 쌕쌔기는 또 트럭의 뒤꽁무니를 갈기고 말았다. 악이 날대로 난 쌕쌔기들은 트럭을 따라가며 소사했다. 그러나 해가 꼴깍 넘어갔다. 게다가 트럭들이 헤드라이트마저 꺼버리고 굽인 돌이 많은 따발령으로 달리는 바람에 조준해 소사하기 힘들었다. 이때 쌕쌔기들은 따발령 상공으로 날아지나가며 조명탄을 줄줄이 늘여놓았다. 순간 따발령이 대낮같이 환해졌다. 트럭이 아니라 개미가 기어가는 것마저 환히 볼 수 있었다. 미군 쌕쌔기는 제일 앞에서 굽인 돌이를 돌며 영마루로 달려 올라가는 성수의 트럭을 조준해 소이탄을 투하했다. 꽝! 꽈르릉! 요란한 굉음과 함께 소이탄이 폭발하면서 트럭이 달리는 굽인 돌이 길에 삼단 같은 불길이 치솟았다. 길바닥에도 폭탄구덩이가 벌집처럼 뚫려 트럭들이 앞으로 한발자국도 달려 나가기 힘들었다. 뒤에서도 폭발굉음이 울렸다. 뒤따라오던 트럭 주위에서도 불길이 활활 치솟아 올랐다. 상순과 전사들은 트럭에서 뛰어내려 쌕쌔기들을 향해 맹렬한 사격을 가했다. 그때 따발령을 지키던 2련 전사들도 고사기관총으로 미제 공중날강도들을 향해 밀집사격을 가했다. 질겁한 쌕쌔기들은 남쪽으로 도망쳤다. 상순이 살펴보니 제일 앞에서 달리던 성수의 트럭이 멈춰선 채 불이 달렸고 산기슭에 들어선 트럭 몇 대에서도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상순은 굽인 돌이를 꿰질러 나가 성수의 트럭에 뛰어갔다. 성수가 뛰어와 우는 소리를 했다. “아이고, 이걸 어쩌오?” “어째?!” “다이아 터졌단 말이오!” 상순이 뛰어가 다이아를 보니 폭탄파편에 맞아 터져 주저앉아 있었다. 뒤의 트럭들은 벌집 같은 폭탄구덩이들과 불붙은 성수의 트럭에 막혀 따발령을 넘을 수 없었다. 2련 련장이 황급히 달려왔다. "2련장 보고!" 상순도 거수군례를 올리며 명령했다. "2련장,  빨리 폭탄구덩이를 메꾸라!" "옛!" 2련장은 2련 전사들을 령솔해 폭탄구덩이를 메꾼다, 자동차에 달린 불을 끈다 하면서 맴돌아쳤다. 상순이 영마루에 올라가 두루 살펴보니 폭탄구덩이들이 파인 길을 내놓고 옆에 자그마한 호박길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 갈림길을 따라 올라가면 영마루를 넘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살았다, 살았어!" 그는 무릎을 탁 치더니 돌아와 소리쳤다. “성수, 군복을 뒤 트럭에 싣소.” “트럭은 어쩌겠소?” “길 옆으로 모오. 적기가 덮쳐오기 전에 우린 저 작은 길로 따발령을 넘어가기요.” “트럭을 버리겠소?” “옆에 몰아놓고 빨리 다이아를 바꾸오!” “알았소.” 성수는 운전실에 들어가 트럭을 겨우 길 옆으로 몰아갔다. 공기가 다 빠진 다이어 때문에 트럭은 요란한 엔진 소리를 내며 힘겹게 길옆으로 나갔다. 상순은 령마루 둔덕에 올라서서 손을 연신 휘둘러댔다. “쌕쌔기들이 덮쳐오기 전에 빨리 따발령을 넘어야 하오!” 몇몇 전사들이 성수의 트럭 바곤에 뛰어 올라가 불이 붙은 군복을 길옆에 던지고 너머지 군복을 제일 뒤에서 달려온 트럭에 옮겨 실었다. 상순은 전사들을 지휘해 폭탄구덩이에 자동차에 싣고 온 통나무를 부리워 임시다리를 놓았다. 뒤이어 그와 2련장은 굽인 돌이에 전사들을 배치해 트럭이 안전하게 갈림길 목을 벗어나 따발령을 넘게 손짓으로 지휘하게 했다. 다른 트럭의 운전수들은 환한 조명탄의 불빛을 빌어 트럭을 몰고 폭탄구덩이들과 성수의 차 옆으로 빠져나가 갈림길로 부르릉부르릉 달려 겨우 따발령을 넘어 달아났다. 성수는 숙련된 솜씨로 다이아를 바꾸고 운전실에 들어가 앉았다. “군복을 그만 옮겨 싣소. 이젠 우리 트럭도 달릴 수 있소.” 군복을 흥수네 트럭에 옮겨 싣던 전사들은 트럭에 앉으면서 반자동보총을 잡고 하늘을 살폈다. 상순은 2련장과 전사들과 작별하고 제일 마지막에 선 성수의 트럭에 올라갔다. 그는 고사기관총을 운전실 위에 걸어놓고 밤하늘을 살폈다. “빨리 이 자리를 피하기오!” 부르릉 소리와 함께 성수는 발동을 걸었다. 성수와 흥수는 트럭을 고속으로 몰아 따발령을 넘어 산 아래로 내려갔다. 이때 남쪽 하늘에서 또 쌕쌔기들이 덮쳐왔다. 그런데 하늘도 상순이네를 돕는지 조명탄이 하나 둘 꺼져버려 따발령은 새까만 나라로 돼버렸다. 그 틈을 타서 성수는 헤드라이트를 끈 채 트럭을 몰고 산 아래로 굽이굽이 쏜살같이 달렸다. 성수의 날랜 운전솜씨에 상순은 못내 혀를 끌끌 찼다. 쌕쌔기들은 또 하늘에 조명탄을 줄줄이 늘여놓았다. 하지만 그때는 상순이네 제일 마지막 트럭마저 따발령을 넘어 몇 킬로미터나 달아난 뒤였다. 쌕쌔기들은 따발령을 몇 바퀴 선회하더니 상순이네 트럭대오를 찾지 못하고서도 불 붙는 군복무지에 폭탄을 내리 던졌다. 2련 장병들은 고사기관총 맹사격으로 쌕쌔기 폭격에 화답했다. 꽈르릉! 꽈르릉! 따발령 쪽에서 우레와 같은 굉음이 울렸다. “하하하! 그 놈들이 헛수고를 잘 하는구나!” “폭탄을 아무데나 다 던져야 가볍게 돌아가지!” “상전한테 욕도 먹지 않고!” “허허허!” “하하하!” 상순이네는 한바탕 통쾌하게 웃으며 어둠을 헤가르면서 달렸다. 상순은 트럭대오를 영솔해 온갖 간난신고를 거치면서 달려 어느 산기슭에 도착했다. 북에서 떠날 때와는 달리 날씨가 꽤나 풀려 기승스레 불어치던 눈보라도 멎고 산과 들에 뒤덮인 눈도 찾아 볼 수 없고 드문드문 잔설이 보일뿐이었다. 이제 맵짠 추위가 서서히 물러가면 훈훈한 봄날을 맞으려고 만물이 살금살금 태동하고 있었다. 상순은 트럭대오를 산기슭 길옆에 멈춰 세우고 2련장을 보고 전체 대원들을 집합시키라고 했다. 이윽고 상순은 전우들을 돌아보면서 엄숙하게 말했다. “동무들, 우린 이미 최전선 남조선 땅에 도착했습니다. 이제부턴 하늘만 살펴서는 안 됩니다. 하늘과 길 주위를 몽땅 살펴야 합니다. 마을 백성이라고 해서 경각성을 늦춰선 안 됩니다. 우린 돌연습격을 방지하기 위해 여기서 잠시 쉬고 해 지면 다시 떠납시다.” 모두들 웅성거렸다. 상순은 트럭을 길에서 피해 산기슭 쪽에 세우게 한 후 전사들을 시켜 나무를 끊어다 트럭을 위장하고 군복 위에는 눈을 날라다 덮어놓았다. “모두들 자기 트럭에 올라가 눈을 좀 붙이오. 여기 어딘지 알아보고 운송노선을 결정하겠소.” 전사들은 모두 트럭에 올라가자마자 코를 드렁드렁 구르기 시작했다. 뒤이어 상순은 보초까지 세운 후 성수와 흥수를 데리고 산마루에 올라가 주위환경을 둘러보았다. 산 넘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밥을 짓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마을 하나가 보였다. 전쟁이 포화에 맞고 그을은 마을에는 온전한 초가집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었다. 대충 문짝을 달고 가마니를 처맨 타다 남은 집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어 한산해보이기 그지없었다. 상순은 성수를 돌아보며 “차대에 가서 쉬면서 만일을 대비하오. 난 흥수와 함께 저 마을에 가서 먹을 걸 좀 얻어 오겠소.”라고 했다. “그럼 언제쯤 돌아오겠소?” 성수의 물음에 상순은 “순조로우면 어둡기 전에 돌아올게.”라고 대답하고는 산 너머로 성큼성큼 걸어 내려갔다. 성수는 상순을 따라 가는 흥수를 보고 “형님, 남조선이오. 매사에 주의하오.”라고 했다. 흥수는 돌아보며 “트럭을 잘 지켜라.”라고 당부하고는 산 너머로 넘어갔다. 상순과 흥수는 산기슭의 마을 어귀에 이르러 한참이나 두리번거렸다. 마을에는 괴뢰군의 그림자도 얼씬하지 않았다. 상순은 흥수를 보고 손을 앞으로 휙 휘저었다. 둘은 아무 거리낌 없이 마을 제일 서쪽 집에 다가갔다. 굴뚝에서는 연기가 사랑스럽게 무럭무럭 피어오르고 있었다. 흥수는 군침까지 꼴깍 삼키면서 문 꼬리를 쥐어 당겼다. “주인님, 계시오? 에헴, 헴.” 집안에서 대답하기도 전에 흥수와 상순은 집안에 들어섰다. 젊은이가 부엌아궁이에 불을 때다가 와닥닥 일어서며 그들을 쏘아보았다. 가마 목에서 애를 업은 젊은 색시가 쌀 함박으로 쌀을 일어 가마에 얹다가 깜작 놀라 물앉았다. 윗방에서 웬 허리구부정한 늙은이가 기침을 쿨룩쿨룩하며 남자애를 안고 정지를 내다보다가 후들후들 떠는 것이었다. “겁나 마십시오. 우린 중국인민지원군입니다. 절대 백성들을 해치지 않는 인민의 군대입니다.” 상순은 젊은이 쪽으로 다가가면서 흥수에게 바깥으로 머리 짓을 했다. 흥수는 머리를 끄덕이며 신을 신은 채 윗방으로 올라가 늙은이 외에 다른 수상한 자가 없는가를 살펴보고 바깥으로 나가 울바자 안에서 망을 보았다. 상순은 젊은이의 눈길이 곱지 않은 것을 보고 다가가 말을 걸었다. “젊은이, 이 마을 어느 군에 속하오?” 젊은이는 머리를 숙이고 다시 물앉아 아궁이에 땔나무를 쑤셔 넣으면서 입 안의 소리로 대꾸했다. “충청남도 서천군이랑께.” “오- 우리가 밤중에 길을 잃어 이렇게 깊숙이 남조선으로 진군했군. 서천군 어느 면인가?” “한산 면이랑께.” “한산 면?” “예.” 상순은 무릎을 꺾더니 젊은이 옆에 쪼그리고 앉으면서 나직이 말했다. “아니. 한산 면은 경상남도 통영 한산 섬에 있어. 누굴 속이려고 드는가?” “누굴 속이긴 속여?” 상순은 대수로워 하지 않는 젊은이에게 물었다. “자넨 성이 뭐요?” "이씨." "본은?" “한산 이씨.” “한산 이씨?” “예.” 젊은이가 옆에 쪼그리고 앉은 상순을 이상한 눈길로 힐끔 곁눈질했다. 상순은 윗방에서 정지에 나온 머리 허연 늙은이와 젊은이를 번갈아 보았다. 어쩐지 그들이 남이 돼 보이지 않았다. “내 할머니 성씨와 같군.” “그래요?” 늙은이가 엉거주춤 일어나며 놀라했다. 젊은이는 믿어지지 않는지 콧방귀를 뀌며 아궁이에 땔나무를 뚝뚝 끊어 쑤셔 넣었다. 상순은 늙은이를 쳐다보며 물었다. “여기 한산 면에 한산이씨 많습니까?” “그럼. 우리 마을은 한산 이씨 마을이라지.” 늙은이의 말에 상순은 한숨을 후 내쉬었다. “우리 할머니 고향은 경상남도 통영 한산 면이라던가. 이 마을에 한산 이씨가 많을 줄은 몰랐습니다.” 늙은이는 두 눈을 크게 뜨고 상순의 아래위를 훑어보며 물었다. “혹시 자넨 간도에서 나온 거 아냐?” “그렇습니다.” “간도 어데서 왔어? 혹시 함흥 촌이라고 알아?” 상순은 뿌리를 드러낼 수 없어 반문했다. “그걸 물어 뭐 해요?” “아니, 거 별 일 아니야. 우리 고모가 광복 전에 명천에서 간도 함흥 촌으로 갔댔어. 헌데 찾을 길이 없어 그래.” “예? 그래 당신 고모가 명천 어느 마을에 있었습니까?” 상순은 적이 놀라며 늙은이를 뜯어보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본 것 같은데 기억이 나지 않았다. “명천 상우남면 운주동이였어.” “예? 우리 집도 명천 운주동에서 간도 함흥 촌에 이사 갔는데. 고모 명함 뭐요?” “혹시 이성희라는 할머니 알아?” “예?” 상순은 적이 놀랐다. “저의 할머니가 바로 이성희입니다.” “뭐라고?” 늙은이는 상순에게 다가섰다. “아니, 그럼 자넨 혹시 기준형님의 아들 아닌 기여?” “옳습니다. 난 막내입니다.” “너 그럼 상순이던가?” “예. 맞습니다.” 상순도 일어섰다. 늙은이는 “할머니 조카 명호인 기여.”라고 하며 일어났다. “아니, 여기서 만나다니?” 그는 상순을 와락 끌어안고 엉엉 대성통곡을 쳤다. “널 보면서 별로 기준 히야(형)처럼 생겼다 했지. 어쩜 부리부리한 세귀눈이 형을 신통히도 빼 닮았을까.” “아, 삼촌! 할머니는 생전에 오빠 일가를 얼마나 그렸다고. 흑흑흑.” 상순은 명호를 그러안고 섧게 울었다. 그는 명호 일가에게 간단히 할머니가 고향과 친척을 몹시 그리다가 돌아간 일을 얘기했다. “그랬구나. 끝내 고모는 고향에 돌아와 보지도 못하고 돌아가셨구나.” 명호는 눈물을 하염없이 흘리면서 머리를 끄덕이었다. 드디어 그는 우두커니 서 있는 젊은이 부부를 인사시켰다. “얘, 영수야, 형이야. 내 항상 외우던 고모님 막내손자야!”  “상순아, 이 놈은 내 둘째아들 영수야. 며느리도 시형을 인사해.” 영수는 땔나무를 놓고 일어나 어두커니 서 있었다. “이 놈아, 어서 인사해.” “형.” 영수는 겨우 목구멍으로 기어드는 소리로 난생처음 보는 상순을 “형”이라고 불렀다. 상순은 영수의 둥실한 어깨를 툭툭 쳤다. 뒤이어 머리 숙이며 인사하는 영수의 아내와도 인사했다. 명호는 상순의 손을 잡고 구들로 끌어당겼다. “어서 올라오게나. 바깥에서 얼었겠는데.” 상순은 구들에 올라가 앉으면서 명호의 무릎에 앉은 애 머리를 쓰다듬어주면서 물었다. “이 애는?” “오, 얘는 간도로 들어간 맏아들 병수네 아들애야. 장손 말뚝이지.” 명호는 장손 말뚝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중얼거렸다. “우리 아버지 계시면 이 놈 증손들을 보고 얼마나 반가와 했겠어? 오래 계셨더라면 저 작은며느리 잔등에 업힌 둘째 증손 쇠뚝이까지 봤겠는데 말이야.” 상순은 한숨을 후 내쉬며 물었다. “그래 병수형님네 아주머니는 잘 계십니까?” “에이고, 저거 남정 찾는다고 용천 연대장을 찾아갔어. 헌데 용천 연대장을 어데 가 찾아? 부대에서 용천 연대장이고 병수고 통 말 안 해 줘. 혹시 나 해 허 사단장을 찾아간다고 서해안전선에 떠난 지도 이젠 달포도 됐는데 종무소식이야. 이 난세에 여자 몸으로 총알이 빗발치는 싸움터에 찾아가 헤매는 기여. 우리도 위험하지만 혹시 여기 오면 병수를 찾을까 해서 헤매는 기여.” 명호는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었다. 상순은 의아해 한마디 물었다. “아니, 고향이 살기 좋은 통영 한산 섬에 있다던데 여긴 병수 형을 찾으러 왔다는 말입니까?” 그러자 나이와는 달리 허리마저 구부정하게 휜 명호는 간신히 허리를 펴면서 말했다. “그래. 아들 찾으러 싸움터 근처에 온 거야. 이전에 내 아버지와 함께 명천에 갔었다. 그런데 고모가 간도로 갔더라. 후에 아버님이 항상 고모를 외우다가 오누이의 생리별의 한을 품고 돌아가셨지. 맏이는 또 국군에 나갔지. 이전에 우리 일가도 간도로 가려고 했던 기여. 헌데 이 난시가 터져서 여기서 물앉은 기여. 이 마을에 와보니 우리 한산이씨 종친들이 많은 기여. 인심도 무지무지 좋고. 글케 이 마을에 물앉아 사는 기야. 아마 다시 고향 한산 섬에 돌아가야겠어. 여긴 조선인민군이 들어왔다 국군이 들어왔다 하면서 어찌나 톱질 하는 지 살기 어려워? 봐라. 너 중공군도 들어오지 않았나? 에이, 원 참.” 명호는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상순은 가마에서 쌕 김이 뿜기는 것을 보고 군침을 꼴깍 삼켰다. 명호는 땅이 꺼지게 한숨을 후 내쉬었다. “병수 그 놈은 무명고지에서 싸운 후 서울에 올라갔다는 말을 듣고는 이태 째 종무소식이야. 이 난세에 자손들을 건사하기도 힘들어. 그 놈이 어디에 살아 있으면 편지 한통이라도 보낼 거지. 자식을 기다리는 부모 맘 하나도 몰라. 불효자식 같은 놈.” 상순은 마음 한 구석에 병수 형을  붙잡아 총살당하게 한 일이 결리었다. 그러나 공산당원은 특수자료로 만든 강철전사라는데서 대의멸친한 처사를 후회하지 않게 됐다. 그는 숙였던 머리를 들고 바깥에서 흥수의 마른 기침소리가 나는 것을 보고 우쭐 일어났다. “삼촌, 내 인차 떠나야 하겠습니다. 밥이나 한보자기 싸줍소.” “그래. 이래 갈라지면 언제 또 볼가? 봐라. 넌 중공군이 되고 우리 병수는 한국군이 되지 않았나? 총부리를 마주 대고 싸울지도 누가 알아. 한심한 세월이지. 형제간에도 피를 봐야 하는 이 놈 전쟁? 에이구, 형제간에 맞불질하다  누가 죽겠는지 어떻게 알아?” “밥이 적어 어쩔까요? 더 지어드리지요.” 영수 아내가 행주치마에 손을 닦더니 쌀 함박을 들고 고방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아니, 제수, 그럴 새 없소. 밥을 얼마 지으면 100여명 배를 불리겠소?” 그 말에 영수는 “많이 왔군 그려.”라고 하며 아버지를 힐금 곁눈질하는 것이었다. 명호는 며느리에게 눈짓했다. “쌀독에서 인심이 난다고. 이 난세에 쌀독이 푼푼해야 밥도 많이 지어주지. 있는 밥을 먼저 줘 보내라.”       영수 아내는 함지에 밥을 퍼서 상순에게 주었다. 그러자 상순은 사양하지 않고 밥을 불룩하게 담은 함지를 안고 바깥으로 나왔다. 영수는 바깥까지 따라나와 말했다. "내 형은 국군이지만요. 난 유격대에 들어 싸우고 있어. 근심하지 말고 가요." "그래, 병수한테서 들었어." 상순은 이렇게 말하려다가 병수 일이 속에 걸려 목까지 올라온 말을 삼켜버렸다. 그런줄도 모르고 영수는 뒤따라오면서 계속 말했다. "이 부근에는 미군과 괴뢰군들이 득실거려요. 혹시 그 놈들캉 맞붙을 수도 있는기여. 유격대를 불러다 엄호해줄가보다." 상순은 손사래를 쳤다. "아니야. 우리 근심하지 말라. 괜히 신분을 폭로할게 있니?" "괜찮아요. 형을 위해서라면 까짓 신분이겠어요?" "그만둬라. 우린 곧 북상해 지원군 부대를..." 상순은 혀끝을 얼버무렸다. (내가 어찌 영수를 믿고 이런 말까지.) 그는 후회하면서 명호 삼촌 일가와 석별의 정을 나누고 어둑어둑해진 바깥으로 나갔다. 흥수는 못 마땅한 눈길로 상순을 가로보더니 뒤따라 나온 명호네 일가를 경계심에 찬 눈길로 매섭게 쏘아보았다. 순간 명호도 반자동보총을 든 흥수를 노려보았다. 상순은 집안에서 있은 일이 드러날가 봐 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밥함지를 안고 바삐 자리를 떴다. “젠장 밤중에 따발령 갈림길에 잘 못 들어서서 왕청 같은 데로 달려 왔군. 빨리 되돌아가야겠어.” 산을 넘는 그들의 뒤에는 석별의 정과 어둠이 반죽해 따르고 있었다.  
102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80) 댓글:  조회:1759  추천:1  2017-09-11
                               2. 압록강을 건너 어느 결에 동녘하늘이 희붐히 밝아왔다. 검푸르던 하늘이 어둠을 밀어내며 누름한 색을 띠기 시작하한다. 불그스럼한 고기비늘구름이 제법 은빛을 띠더니 먼 동산에 커다란 홍시 하나가 불쑥 떠올라 하늘가 산마루에 걸렸다. 그 빨갛게 타오르는 홍시 하나를 뜯어먹으려는 듯 빨갛게 타오르는 숱한 산마루들이 키 돋음을 하며 하늘로 치솟아 오르는 상 싶었다. 상순은 와닥닥 이부자리를 차고 일어났다. “아야, 어느 새 날이 밝았군.” 명옥도 옆에서 금자를 안고 누워 있다가 일어나 금자를 업으면서 눈물이 글썽한 눈으로 남편을 마주 바라보았다. “울지 마오. 여보, 아버지를 잘 모시고 애들 잘 키우오. 난 미제를 조선에서 다 몰아내면 마을에 돌아올 거요.” “양, 천번만번 무사히 갔다가 돌아오오.” 명옥은 한 고향 동갑친구여서 남편과 항상 대등의 말투를 썼다. 상순은 그것이 허물이 없어 좋았다. 상순은 명옥이 업은 너부죽한 금자의 볼에 뽀뽀 해주었다. “에이고, 이게 아들이면 얼마나 좋겠니?” “다음엔 내 꼭 떡돌 같은 아들을 낳아 줄게.” 상순은 머리를 끄덕이었다. 사람의 팔자는 타고 난 것인가? 금자를 낳을 때 명옥은 이상한 태몽을 꾸었다. 한번은 명옥이 마을 회의에 갔다가 모범이 되어 고운 꽃 한 송이를 탔다. 그녀는 그 고운 꽃송이를 가슴에 안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집에 와서 보니 이상하게도 꽃이 네모 번듯한 숫돌이 아니겠는가. 그 이상한 태몽을 꾼 후 금자가 품속에 날아들어 임신됐다. 그해 1952년 5월에 낳으라는 아들은 낳지 못하고 딸을 낳았던 것이다. 다음에는 꼭 아들을 낳으라고 상순은 넷째딸의 이름은 금자라고 지었다. 상순은 금자를 아들 대신 난 딸이라고 그리 고와하지 않았다. 그때 한 중이 지나가다가 상순이네 집에 와서 냉수 한 그릇을 얻어 마시고 상순과 명옥의 관상과 손금을 보고 이제 5년 후이면 이 집에 소가 밟아도 우글지 않고 하늘, 땅, 천재 신을 세 개나 업은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예언했다. 기준은 그 말을 듣고 억이 막혔다. “5년 후이면 며느리 마흔이 다 되는데 어떻게 애를 낳아? 손자를 보긴 다 틀렸구먼.” 명옥은 아들을 낳지 못한 죄책감에 가마 목에서 머리를 숙였다. 아들이 참군하는 날이 돌아오자 기준은 윗방에서 기침을 쿨룩거리면서 일어나 나왔다. 그는 생사를 기약할 수 없는 먼 길을 떠나가는 아들 앞에서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애썼다. “장하다. 사내란 골기 있어야 해.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버릴 수 있어야지. 이 놈의 전쟁이 언제면 끝나겠는고. 후-” 상순은 아침을 대충 먹 네하고 숟가락을 놓기 바쁘게 일어나더니 아버지에게 큰 절을 올렸다. “예로부터 충신은 효자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허나 저는 충신은 효자로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효성도 할 줄 모르는 사람이 어찌 나라를 위해 충성하는 충신이 될 수 있겠습니까? 이 아들은 전쟁에서 승리한 후 마을에 돌아와 효성을 다해 아버지를 모시겠습니다. 편안히 계십시오.” 기준은 가슴이 아파 그저 머리만 끄덕이며 목이 꾹 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상순은 머리를 홱 돌리더니 바깥으로 나갔다. 촌공소 앞에는 벌써 마을에서 참군하는 청년들을 실을 트럭이 서 있었다. 상순은 성수, 흥수, 조개덕의 병수, 희수, 명사수 태수, 창걸, 창욱 등 청년들과 함께 트럭에 탔다. 지춘실은 트럭 위의 흥수를 쳐다보다가 마을 사람들에게 손을 흔드는 상순에게 눈길을 돌리면서 욕설을 퍼부었다. “정말 호박 쓰고 돼지 굴로 들어간다. 야, 그 좋은 공안국장도 하지 않고 참군해 뭐 하니? 또 가겠으면 저 혼자 갈 게지. 남의 남편까지 끌고 생사를 모를 전쟁터에 갈 건 뭔가?” "흥! 여편네라고. 원, 뭘 알아 떠들어대?" 흥수가 도리머리를 젓자 춘실은 버들잎 눈섭을 치켜올리며 눈까지 흘겼다. "바보라구, 상순 밑에 졸개나 하나 더 보태줬지." 그러나 흥수는 춘실을 내려다보며 솟삿대질하며 고함쳤다. "작작 두덜거려! 내 무슨 한뉘 상순이 졸개 될락꼬?" 춘실은 눈을 흘겼다.  "별 상순보다 더 큰 벼슬 차례질 거 같소?" 흥수는 춘실이 아무리 두덜거려도 개의치 않고 딴 생각을 했다. (쳇, 내 이제 전선에 나가 전공 세우고 상순보다 높이 승급해서 본때를 보여줄테야!) 그는 또 다른 엉뚱한 생각도 했다. 참군해 남으로 쳐나가다가 고향에 들러 헤어진 지 오랜 부모를 찾아보려고 들었던 것이다. 병완과 창준, 기준, 그리고 상길이, 상우, 상훈이, 설봉이, 동선이 몽땅 마을 사람들 속에 끼여 상순에게 손을 흔들며 환송했다. 트럭이 상순이네를 싣고 부르릉 하더니 앞으로 서서히 움직여 나갔다. 명옥은 금자를 업고 봉자와 금숙의 손을 잡고 먼지를 일구며 달려나가는 자동차 뒤를 따라 달렸다. 그녀는 금숙의 손을 놓고 눈물을 닦으며 멈춰 서 어깨를 들먹였다. 춘실도 해월의 손을 잡고 뒤따라 달려가며 흥수에게 손을 마구 흔들었다. 상순이네는 진수해에서 며칠 동안 신병교육을 받게 됐다. 그때 이계삼 부서기와 허영주 부현장이 진수해 신병훈련소에 와서 상순을 찾았다. 상순은 한창 신병들을 훈련시키다가 그만 두고 반갑게 맞이했다. 혀영주 부현장은 상순의 손을 잡고 아쉬워했다. "상순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소. 공안국장을 그만두고 참군하다니. 참,  원." "남조선과 대만 특무들까지 싹 다 잡았기에 여기서 제가 할 일은 없습니다. 이제 우리 사회주의 조국을 지키고 조선인민들의 항미전쟁을 지원하러 나가야죠. 전선에 나가 미제 콧대를 꺾어놓고 싶습니다. 뭐? 세계에서 젤 강한 미군? 흥! 우리 조선 사람들의 매운 본때를 보여주겠습니다.." 이계삼 부서기는 상순이 이미 마음을 먹은 이상 어쩔 수 없었다. 그는 호주머니에서 종이쪽지를 하나 꺼내 상순에게 주었다. "이걸 가지고 가오. 부대에 가면 상부에 바치고 조직배치를 받소." 상순이 받아 펼쳐보니 소개신이었다. 항상 자기를 돕는 입당소개인들이었다. "감사합니다. 꼭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싸워 공훈을 세우겠습니다." 이계삼과 허영주는 대견하게 상순을 마주보며 두 손을 굳게 잡아주었다. 상순은 전선으로 떠나기 전에 아내와 순자를 데리고 순자를 데리고 큰누님 어금이네 집으로 찾아갔다. 매형 경인과 누님 일가는 그들 세 식구를 반갑게 맞았다.  경인은 맏손자 일웅을 보고 순자를 인사시켜야 하겠는데 어떻게 인사시켰으면 좋을지 몰라 망설였다. 순자와 일웅은 다 1944년생 동갑이었다. 그러나 일웅의 할머니는 순자의 큰고모여서 할머니 쪽으로는 순자가 일웅의 고모(아재)벌이었다. 그러나 할아버지 쪽으로는 순자의 어머니는 근덕(봉순)의 사촌누나이기에 순자와 일웅은 고모육촌오누이벌이 됐다. 나중에 어금이 나서서 애들이 부르기 편리하게 오누이로 치고 인사를 나누게 했다. 그런데 순자는 해옥을 아재라고 인사해야 했는데 어금은 어처구니 없어했다. “순자야, 우리 해옥이 아홉 살이나 이상이니까 아재라고 해도 되고 언니라고 해도 돼. 이래라. 아버지 쪽 친척들 앞에서는 언니로 인사하고 외가 친척들 앞에선 아재라고 불러라. 얘들 촌수도 원, 쯧쯧쯧.” 상순은 처녀티가 완연한 해옥을 보면서 큰누나에게 물었다. “해옥이 올해 몇 살이오?” “열아홉 살이다.” “오래잖아 시집가야겠구먼.” 어금은 생글방글 웃음 짓는 해옥을 가리키며 웃었다. “저애 어렸을 때 어쨌는지 아니?” 해옥은 어머니 팔을 잡아 흔들며 어린애처럼 응석을 부렸다. “엄마, 또 그 말을 하겠습니까?” 그러나 어금은 오래비 앞에서 계속 말했다. “한번은 저 애를 보고 감자를 파오라고 했더니 어쨌는지 아오? 글쎄 호미를 가지고 가서 감자를 뿌리 채로 뽑아 들고 감자를 뜯어낸 후 되 심어놓지 않았겠소? 호호호.” “엄마, 그만 말하오.” 해옥은 손으로 어머니 입을 마구 막았다. 어금은 머리를 뒤로 물리면서 계속 말했다. “난 감자 밭에 가보고 깜짝 놀랐소. 집에 돌아와 난 ‘어떤 놈이 우리 감자를 뿌리 채 다 파갔다고 욕했지.” 어금은 하나 밖에 없는 딸의 볼을 살짝 꼬집는 시늉을 하면서 “요 놈 계집애 소행인 것도 모르고. 호호호.”라고 하며 웃었다. 그때 경인도 한마디 했다. “에고, 한번은 저 애가 함박으로 쌀을 이는 게 너무 많이 흘린다고 쌀을 다 돼지 굴에 쏟아 던지라고 욕했지. 그런데 정말 쌀 함박을 들고 나가서 쌀을 돼지 구유에 쏟아 던지지 않았겠소. 허허허.” “하하하.” 상순이네 내외간도 우스워 웃고 말았다. 그러나 해옥은 홍당무로 된 얼굴을 두 손으로 싸쥐고 고방에 들어 가 숨어버렸다. 그들 오누이는 온밤 이왕지사를 얘기하면서 밤이 가는 줄도 몰랐다. 이튿날 오전에 상순은 진수해역에 나가 부대를 따라 떠나게 됐다. 큰누님 어금과 큰매형 경인은 눈물이 글썽해 상순을 전선에 내보냈다. 어금은 막내오라버니 손을 꼭 잡고 “아무튼 조심해 무사히 돌아오너라.”라고 하며 뜨거운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상순은 역에 나가 순자를 꼭 안고 뽀뽀 해주면서 “엄마 말을 잘 듣고 공부를 잘 해라.”라고 당부했다. 순자는 두 볼에 눈물을 흘리면서 머리를 끄덕였다. 상순과 신병들은 벼 짚을 깐 낡은 화물차에 하나둘 올라갔다. 명옥과 순자는 눈물을 흘리며 화물차를 눈이 뚫어지게 여겨보며 손을 자꾸 흔들었다. 그러자 상순은 종이를 둘둘 말아서 훌 내뿌리더니 손을 저었다. 명옥과 순자가 그 종이를 주어 보는 사이에 화물차 문을 사정없이 쓰르륵 쿵 닫히더니 상순과 처자들의 시선을 가로막아버리었다. “아버지!” 순자가 목 놓아 울며 손을 저었다. 화물차는 숱한 중국인민지원군 전사들을 싣고 처자들과 사정없이 갈라놓고 쿵쿵쿵 지심을 울리며 칙칙폭폭 전선으로 떠나갔다… 상순이 떠나간 후 마을에서 집 추녀 밑에 “영광스러운 군속”이란 패쪽을 걸어주었다. 허나 나그네 없는 상순이네 집은 말이 아니었다. 초겨울에 발라놓은 벽이 말이 아니었다. 기실 소똥과 흙이 벽에 얼어붙었다가 갈라 터져 하얀 서리 끼고 동기가 들어왔다. 집이 어찌나 추운지 명옥은 애들을 자기 배 위에 올려놓고 잘 지경이었다. 낮이면 기준과 명옥은 물을 끓여 흙을 이겨 집안에서 갈라터진 벽 틈을 바르고 또 발랐다. 그런데 금자가 오줌똥을 싸서 속내복도 입지 못하고 광목치마 바람인 명옥의 잔등은 오줌 똥물에 다 젖다 못해 얼음고졸이 질 지경이었다. 기준은 그 추운 겨울에 눈 덮인 소서구 골안에 올라가 쑥이랑 땔나무를 해 지고 돌아와 부엌에 내려가 불을 땠다. 그런데 구들 이곳저곳에서 연기가 어찌나 나오는지 온 집 식구들이 쿨룩쿨룩 콜록콜록 했다. 정말 추운 고생, 내군 고생까지 하면서 온 집 식구들은 언제면 추운 겨울이 지나가고 따뜻한 봄이 올까하고 고대했다. 어느 날, 너무 추워 불을 너무 많이 땠기에 그만 나무구새에 불이 달렸다. 다행히 기준이 제때에 발견하고 며느리와 함께 물독의 물을 퍼다 쳤기에 집에 불이 달리지 않았다. 한편 상순이네는 진수해에 가서 기차를 타고 심양에 가서 부대 편성을 받았다. 신병부대 수장은 상순이 바친 현당위 소개신을 받고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며 상순의 아래위를 훑어보았다. "상순동지는 참 대단하구만, 항일전쟁 때 벌써 기관총을 잡고 일제와 싸웠고 해방전쟁 때 탱크를 몰고 토비들을 쓸어눕혔구만. 련지도원, 영장, 현공안국 국장까지 했구만. 우리 부대 영광이오." "과분한 치하입니다. 이제 전선에 나가 꼭 새로운 공훈을 세우겠습다." "좋소." 부대에서는 상순의 뛰여난 전투경험과 령도능력에 근거해 그에게 지원군 모부 영장으로 임명했다. 그런데 흥수는 까짓 반장을 임명했다고 입에 따발을 걸 지경이 돼 뒤에서 투덜거렸다. "상순이 뭐 그리 내보담 대단해 영장을 시켜? 흥!" 이튿날, 상순은 신병영 장병들을 거느리고 기차를 타고 압록강 안에까지 달려갔다. 미군 비행기가 앵앵 날아와 압록강 바닥에 폭탄을 우박처럼 쏟아댔다. 꽈르릉 꽝꽝! 압록강 바닥의 얼음이 폭탄에 맞아 커다란 구멍이 벌집처럼 펑펑 뚫렸다. 흥수는 떡 서서 처음 흐릿한 하늘에서 날아다니는 미군의 쌕쌔기를 희구해 쳐다보며 구경했다. "야, 저 무거운 쇠뭉치가 어떻게 하늘을 날아다녀?" 얭- 그때 미군 전투기 한 대가 아츠러운 소리를 내며 날아와 기관총 소사를 했다. “엎뎌!” 상순은 달려나가며 흥수를 콱 밀치며 고함쳤다. 픽, 픽, 픽! 상순은 흥수의 몸을 덮으며 엎디었다. 그 바람에 흥수는 오른 팔에 부상당했다. “흥수, 괜찮소?! " "아니, 밀치긴 왜 밀쳐?! 그 바람에 몸뚱이에 구멍 날 번했잖아!” 상순은 흥수의 팔을 붙잡고 물었다. “어디 상하지 않았소? 비행기 날아오는데 언제 비행기를 구경할 새 있소? 죽이자고 미쳐 날뛰는 적기 아니오? 에이, 참! " 그는 전투경험이 없는 흥수에게 내심하게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이 답답한 친구야, 비행기나 포탄이 날아오면 엎뎌야 덜 상하오.” "흥! 엎딘다고 안 상해? 죽을 놈은 죽어! 쳇!" "아니오. 이후엔 비행기나  폭탄이 날아오면 꼭 엎디오. 폭탄은 땅에서 터지면 하늘로 올라가면서 더 넓게 퍼지오. 때문에 서 있으면 파편에 맞을 면적이 더 커지오." 상순은 흥수가 조선 땅을 밟기도 전에 오른 팔을 상한 것을 보고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위생원! 위생원!” 이윽고 위생원이 뛰어왔다. “빨리 상처를 처치하오.” “옛!” 이때 또 전투기 한 대가 미친 듯이 기관총 소사를 하면서 덮쳐들었다. “개 같은 양키 놈 새끼 어디 덤벼라!” 상순은 옆에 엎드린 사수의 손에서 경기관총을 빼앗아 들더니 벌떡 일어나 덮쳐드는 전투기를 사격했다. 픽, 픽, 픽! 상순의 옆에서 얼음 쪼각이 툭툭 튕겼다. 상순은 아랑곳 하지 않고 전투기에 경기관총을 퍼부었다. 그 바람에 전투기는 날개가 벌집이 돼 꼬리 빳빳해 도망쳤다. 상순이 전사들과 함께 일어나 몇 걸음 걷지 못했을 때 또 전투기 몇 대가 편대를 지어날아 왔다. 저쪽에서 고사포와 기관총이 불을 토했다. 이때 상순은 우렁찬 목소리로 명령했다. “적기를 향해 사격!” 중국인민지원군 전사들은 얼음판에 반드시 누워 기관총과 보총까지 하늘에 대고 불을 토했다. 적기 한 대가 꽁지에서 시꺼먼 연기를 뿜으며 남쪽하늘로 도망쳤다. 쿵 요란한 소리와 함께 적기는 먼 산에 처박혔다. 다른 전투기들은 동료가 추락하는 것을 보고 남쪽으로 도망쳤다. “어, 내 원수를 갚았다!” 흥수는 오른 팔을 쳐들고 고함치다가 상처가 아파 오만상을 찡그리며 오른팔을 내리워 붙잡았다. “빨리 도강하라!” 상순은 대안을 향해 팔을 휘둘렀다. 전사들은 은폐할데라고는 하나도 없는 강바닥을 재빨리 건너 조선 땅을 밟았다. 강 언제에 올라서자 상순은 한숨을 후 내쉬었다. 겨울의 토끼꼬리만한 해는 서산에 매달린 채 전운이 감도는 하늘에서 마지막 차디찬 빛을 뿌리더니 꼴깍 넘어갔다. 이튿날 이른 아침에 부대 장병들이 금방 아침 식사를 마치고 출발 준지를 할 때다. 찌프 한대가 먼지를 쌔뽀얗게 흩날리며 달려오더니 주둔지 마을에서 멈춰섰다. 찌프에서 뚱뚱한 수장과 경호원들이 내렸다. 알고보니 조춘성 사장이 상순을 찾아왔던 것이다. 그는 상순을 찾아낸 후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김영장, 새로운 임무를 주겠소.” “무슨 임무입니까?” 헌데 조 사장은 단도직입으로 말하지 않고 자꾸 에둘러 말했다. “김영장은 지방에서 공안국장을 했고 항일전쟁 때부터 지하당원이었으니깐, 각오가 높다고 보오.” 상순은 심상찮은 감을 느끼면서 조 사장의 입에서 무슨 임무가 떨어질지 몰라 조급하기만 했다. “무슨 임무인지 명령만 하십시오. 꼭 완수하겠습니다.” 조 사장은 상순의 어깨를 툭툭 치면서 말했다. “난 김영장을 믿소. 사실 겨울이 닥쳐왔는데 전선에서는 겨울군복이 많이 수요되오. 상급에서는 김영장에게 후방 군복공장 공장장을 맡기기로 했소.” “예?!” 상순은 자기 귀를 의심할 정도였다. “나는 미군 양키 놈들과 통쾌하게 싸우자고 몇 천리 떨어진 이곳까지 달려왔습니다. 그런데 왜 군복공장에 있으라고 합니까?” 상순은 단통 머리가 텅 빈 듯이 뗑 해났다. 허나 그는 군인으로서 명령에 복종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상순은 조사장을 보고 두덜거렸다. “그래 군복공장에서 아낙네들이나 영도하란 말입니까? 건 아낙네들이나 할 일이지.” 조 사장의 표정은 청석처럼 굳어 있었다. “김영장은 한개 련 전사들을 영솔해 군복공장을 보위하고 재봉침을 수리하고 군복을 지어야 하오. 그리고 두개 련으론 군복을 전선에 호송해야겠소. 군복공장의 여성들이 재봉침으로 군복을 짓는데 워낙 동복은 두터워서 마선이 자주 고장 난다오. 동복을 전선에 제때에 보내는 사업도 최전선에서 싸우는 것보다 못지 않은 전투 임무요. 전선에서 우리 지원군 전사들이 동상을 입고 얼어 죽는 것을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소. 지금 미제와 남조선 괴뢰군들은 이른바 '교살전'을 벌리면서 날마다 밤낮 숱한 비행기를 파견해 우리 후방공급선을 폭격하고 있소. 그 놈들은 우리 후방에서 전선에 량식과 군복과 무기, 탄약을 제때에 공급하지 못하게 해 우리 지원군과 조선인민군을 굶어죽고 얼어죽고 무기와 탄약도 없어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몰살당하게 하려고 망녕되게 시도하고 있소. 그리하여 후근사령부 교통운송과 과장 조남기동지의 지시에 따라 우리 사에서는 특별히 동무네 영에 이 간고한 전투임무를 맡겼소. 김영장은 전투지휘경험도 있기에 군복호송임무를 훌륭히 완수하리라고 믿소.”      상순은 새로운 임무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조 사장, 난 정말 총을 들고 싸우는 게 소원입니다. 허나 명령에 복종하고 새 임무를 꼭 완수하겠습니다.” 상순의 말에 조 사장은 머리를 끄덕였다. "좋소. 김영장은 전선에 나가도 훌륭한 지휘관이 될 수 있지만 후방에서도 뛰어난 공장장으로 될 수 있다고 믿소.” 상순은 한숨을 후 내쉬었다. 한참 후 그는 조 사장에게 물었다. “그래 우리 사는 몽땅 후방에 남습니까?” 조춘성 사장은 아주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 “양. 우리 사는 먼저 후방에서 군복도 짓고 군수물자를 전선에 수송하고 운송선을 지켜야 되오. 강을 건너면서 보지 못했소? 미군 비행기는 군수물자수송선을 차단하려고 여기까지 날아와서 무차별폭격을 감행한단 말이오. 지금 중국인민해방군 공군 비행대가  미제 적기를 혼빵내고 있소. 우리 공군 조선족비행사 리영태(리영태동지는 후에 중국인민해방군 공군 부총사령원, 중장으로 됐음.) 동지는  미군 비행기를 세대나 격추했다오." "참 대단합니다!" 상순은 엄지를 내밀었다. 조사장은 손을 내흔들면서 뒷말을 이었다. "미제는 2차 세계대전 때 독일과 일본 비행기를 수태 격추한 이른바 '왕패비행사'들을 우리 조선 상공에 파견해 폭격했소. 그 놈들은 천여시간씩 전투비행한 풍부한 비행기술을 가진 왕패비행사놈들이기에 개 잡은 포수처럼 우쭐거리면서 저공비행해 우리 군 수송선을 폭격하고 심지어 초가집도 놔두지 않고 폭탄을 내리전져 재더미로 만들었지. 그런데 우리 공군이 조선전쟁에 참가한 후부터 정황은 달라졌소.  리영태 등 나젊은 비행사들은 몇십 시간 밖에 비행한 경험하지 못한 비행사들이오. 그런데 안하무인이던 미공군 왕패비행사들이 글쎄 '햇내기" 비행사 리영태동지랑한테 련이어 격추당했소. 그후부터  미 USA  적기는 청천강 이북엔 드물어졌소. 아직도 드문드문 미제 공중날강도들이 여기까지 날아와 폭격을 감행하긴 하오. 그러나 그 놈들은 이전처럼 저공비행하지 못하다나니깐 폭탄명중률이 훨씬 낮아졌소.  여긴 아직도 전선이나 다름없소.” 상순은 머리를 끄덕이더니 점차 정서가 안정돼갔다. 조 사장이 돌아간 후 상순은 흥수가 든 집으로 찾아가 팔의 상처를 오줌으로 찜질을 해주었다. 그날로 조개덕의 창걸과 병수는 1련을 따라 전선으로  길닦이를 나갔고 한 마을에서 간 희수, 태수, 성수 등은 자동차를 몰줄 알았기에 2련과 함께 전선에 군복과 쌀을 운송하러 떠나갔다.  흥수는 팔을 상했기에 3련과 함께 상순을 따라 군용복장공장에 남게 됐다.        흥수는 원래 참군해 전선에 나가 높이 승급해 상순과 춘실한테 본때를 보이고 싶었다. 그런데 상순이  참근하자마자 영으로 돼 300여명이나 지휘하는 걸 보고 맥이 탁 풀렀다. 그는 그제야 자기아 상순은 천양지차라는 것을  느끼기 시작한 것 같았다. 질투가 나도 별 수 없었다.     (난 근본 상순의 적수가 아닌가베. 흥!)     흥수는 원래 기회를 봐 고향에 나가 부모형제를 찾아보려고 작심했었다. 그런데 조선 땅을 밟기 전에 팔을 상하는 바람에 생각을 바꿨다. 그는 전선에 나가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생각했다. 지어 군복공장이고 뭐고 인차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에라, 고향이고 뭐고 다 몰라. 후방에 남아 살아남는게 요긴해. 글케야 함흥촌에 돌아가 처자캉(와) 만나지.)        이튿날 상순은 한개 련 전사들을 데리고 산골에 자리 잡은 군용복장공장으로 갔다. 절벽 밑에 자리 잡은 학교 자리 군복공장 둘레에는 가시철조망이 촘촘히 늘어섰고 전사들이 대문 어귀에 삼엄한 경계를 서고 있었다. 군견 두 마리가 보초병들을 따라 공장 주위를 돌아다니면서 코로 흡흡 냄새를 맡고 있었다. 상순 일행이 군복공장 안에 들어가 보니 수십 명 조선 여성들이 동복을 짓느라고 숱한 마선 앞에서 눈을 뗄 새 없이 돌아갔다. 상순은 전사들과 군복공장의 여성들을 몽땅 공장 마당에 집합시켰다. 조선 여성들은 군인들처럼 줄을 맞춰 섰다.  상순은 높직한 둔덕 위에 올라서서 간단히 연설했다. “난 군복공장의 공장장으로 새로 부임돼 온 중국인민지원군 영장 김 상순입니다. 조선 여성동무들은 이제까지 전선보다 못지않은 동복 짓기를 했습니다. 이제부터 동무들은 나의 통일적인 지휘아래 재빨리 동복을 지어 전선에 보내야 하겠습니다. 동복을 전선에 제때에 보내는 사업도 최전선에서 싸우는 것보다 못지않은 전투임무입니다. 동복을 전선에 제때에 보내지 못하면 우리 전사들이 동상을 입게 됩니다. 총을 들고 전선에서 적들과 싸우는 것도 전투지만 동복을 짓는 것도 역시 아주 중요한 전쟁입니다. 여러분, 제때에 완수할 수 있겠습니까?” “있습니다!” 뒤이어 조선 여성들은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를 보냈다. 어떤 여성들은 미목이 청수한 상순을 보고 쑤군거렸다. "새 공장장은 미남이야.” 상순은 못 들은 척 하고 목청을 돋우어 고함쳤다. “이후에 마선이 고장나거나 무슨 어려운 일이 있으면 나에게 보고하십시오. 우린 제때에 어려운 문제를 해결해 줄 것입니다.” 그 말에 여성들은 박수를 보냈다. 동원연설이 끝난 후 상순은 먼저 전사 둘을 시켜 마선 몇 대를 공장장 사무실에 가져오게 했다. 그날부터 공장의 기술자를 불러 전사들에게 마선 수리기술과 군복짓기기술을 배워주게 했다. 상순은 후에 마선수리를 잘 지도할 목적으로 전사들과 함께 학도공이 돼 마선수리기술을 참답게 배웠다.       대부분 전사들은 인차 마선으로 동복을 짓는 일과 마선수리에 달라붙게 되였다. 그리하여 세개 조로 나눠 한개 조에서 8시간씩, 밤낮 24시간 교대해 재봉침(로어로 마선)을 세우지 않고 동복을 지었다. 그리하여 창고에는 그들이 지은 동복이 눈에 뜨이게 산더미처럼 쌓여갔다. 상순은 전사들을 데리고 수시로 공장주위를 돌면서 검사했고 전시이기에 밤이면 항상 등불관제를 강조했다. 등불이 환하게 켜지면 미군 전투기의 폭격을 당할 수도 있었다. 허나 전선에서 동복이 급히 필요 됐기에 미군 폭격기가 오지 않으면  전사들과 여성들이 낮에 이어 온 밤 석유등잔불을 밝히고  동복을 지었다.  상순은 전사들을 데리고 고장 난 재봉침을 손질했다. 밤장막은 절벽아래 공장을 두텁게 뒤덮어주었고 공장안에서는 바깥과는 달리 희미한 석유등잔불 밑에서 밤중까지 마선이 돌아가는 소리가 고르롭게 들리었다.                                           3. 군복공장     동녘하늘이 희붐히 밝아오자 상순은 일찍이 일어나 전사들과 함께 식전 군사훈련을 했다. 식당 아줌마들은 밥 지으러 식당으로 가면서 쑤군거리었다. “저 김 공장장은 세귀눈에 독살이 있어.” “너무 미남자야.” “반했어?” “호호호.” 그녀들은 깔깔거리며 웃다가 그만 쏘아보는 상순의 세귀눈을 보자 혀를 홀랑 내밀고 선불 맞은 노루들처럼 황급히 식당에 달아 들어갔다. 상순은 식당에 들어가 쌀독과 물독을 일일이 열어보고 누르스름한 입쌀을 한줌 쥐었다 스르르 쌀독에 쏟아 넣으면서 중얼거렸다. “이런 묵은 쌀을 먹고 어떻게 열 몇 시간씩 일해? 흥!” 상순은 식당 주임 허영희를 불러 물었다. “어디서 이런 쌀을 가져 왔소?” 허영희는 앞치마에 손을 싹싹 닦으면서 “그저 군부대에서 실어오는 대로 받아 두었어요.”라고 대답했다. 상순은 세 귀 눈을 부라리면서 호통쳤다. “식당 주임이면 쌀을 잘 검사해보고 받아놔야지. 재봉공들이 위탈이 나면 어쩌오? 철 모르내기는 살아도 때 모르내기는 못 사오.” 허영희는 눈뿌리 빠지게 비평받고 몸 둘 바를 몰라 쩔쩔 맸다. 이때 밖에서 부르릉부르릉 엔진 소리가 났다. 상순이 바깥으로 나와 보니 때마침 성수가 쌀을 트럭에 싣고 왔다. 상순은 성수의 옆 좌석에 앉은 책임자에게 눈길을 돌렸다. “쌀을 검사하고 부리겠소.” 식당에서 허 주임도 나와 동을 달았다. “전번에 어쩜 그런 쌀을 가져 왔어요? 재봉공들이 그런 쌀을 먹고 배탈이 나면 어떻게 해요?” “어쨌다고 오자마자 이 야단들이오?” “우리 공장에 새로 온 김 공장장이오.” 책임자는 깐깐한 상순에게 불쾌한 눈길을 보냈다. 상순은 어느 새 트럭 바곤에 올라가서 쌀 주머니를 풀고 쌀을 쥐여 보았다. 또 어떤 마대에는 또 누런 쌀이 들어 있었다. 상순은 전사들을 시켜 쌀 마대를 일일이 풀어보면서 좋은 쌀만 부리어 식당에 들여갔다. 후근 책임자는 눈이 동그래졌다. “아니, 절반 넘어 되돌려 보내면 우리 몇 번 더 실어 와야겠소?” 그 말에 상순은 “누가 이런 쌀을 실어 오라던가?”라고 하며 가라고 손을 바깥쪽으로 내흔들었다. 책임자는 난처해 뒷덜미를 긁적거리었다. “전선에서는 그런 쌀은커녕 물도 제대로 마시지 못하는데 후방에서 배부른 타령을 하다니?” “뭐라오?” 상순은 트럭에서 뛰어내려 책임자의 멱살을 틀어쥐고 흔들었다. “너 이놈, 군부대나 집안이나 흥하려면 쌀독과 물독을 꽁꽁 좋은 걸로 채워야 해. 공장에 썩은 쌀을 보내 항미원조 전쟁을 파괴할 예산인가?” 그제야 책임자는 머리를 숙이며 연신 “알았습니다. 다음부턴 좋은 쌀을 여기에 보내겠습니다.”라고 했다. 상순은 그래도 눈알을 데굴데굴 굴렸다. “아직도 내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어? 전선에나 여기나 나쁜 쌀을 공급해선 안 돼!” 상순은 성수에게도 사정 두지 않고 독기어린 세귀눈을 흘겼다. “자식, 다음번에 뜬 쌀을 가져와봐라. 아줌마들을 시켜 바지를 벗길 테야.” 허영희와 식당 아줌마들이 손으로 입을 가리며 키득거렸다. 운송 책임자는 트럭에 올라 성수를 보고 빨리 차를 몰아라고 했다. 성수는 가면서 차창 밖으로 손을 흔들었다. “상순아, 너 좋겠다. 꽃밭에 들어앉아서.” 성수는 트럭을 몰고 새뽀얀 먼지를 일구며 달아났다. 그 후부터 성수와 운송책임자는 다시는 식당에 나쁜 쌀을 실어오지 못했다. 식사 때마다 상순은 병사들과 재봉공 여성들이 먼저 식사하게 하고 제일 마지막으로 해 식당에 들어서곤 했다. 진짜 고생은 앞장서 하고 향수는 제일 마지막에 하는 당원다웠다. 허나 김 공장장이 온다 하면 허영희 주임은 눈치를 흘금흘금 보다가도 그의 사발과 접시에 밥과 채를 넘치게 푹푹 퍼주었다. 상순이 세귀눈으로 피끗 곁눈질해 보면 허영희는 새하얀 이발이 다 드러나게 웃으며 맑은 눈길을 보내군 했다. 상순은 밥을 먹으면서 어쩐지 자꾸 허영희 해말쑥한 얼굴과 풍만한 가슴에 자꾸 눈길이 가게 되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제길, 남들은 전선에서 목숨 내걸고 싸우는데 후방에 들어앉아 쓸데없는 궁리를 하다니.) 그는 자기도 모르게 쓴 웃음을 지으며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여성들은 모두 하얀 이밥을 먹게 된 후부터 상순을 존경하게 됐다. “이전에 뜬 쌀밥이 얼마나 맛이 없었니?” “야. 지금 밥은 정말 풀이 있는 게 맛있어.” “다 저 미남자 덕분이야.” 여성들은 상순을 칭찬하다 못해 나중에 인물 평가까지 해댔다. “우리 김 공장장 진짜 미남이야.” “얼마나 사내답게 생겼냐.” “저런 신랑 만난 색시도 꼭 예쁠 거야.” “두 말 하면 잔소리죠.” 그때 흥수가 “에헴!” 마른기침을 하며 뒷짐을 지고 다가갔다. 여성들은 힐끔힐끔 곁눈질 해보더니 말을 뚝 끊었다. “사담 작작 하고 부지런히 동복을 지어.” 흥수가 지나간 후 여성들은 턱을 쳐들고 혀를 한발씩이나 내둘러댔다. 그녀들은 작달막한 흥수는 상순과는 달리 별로였다. 힐끔거리는 외까풀 눈만 봐도 싫어했다. 물을 뿌린 듯이 조용하던 직장이 또 여기저기서 보글보글 끓기 시작했다. “저 이 반장 색시 꼭 미울 거야.” 이때다. “일하지 않고 뭘 하오?” 어데서 날아 내려온 듯이 상순이 나타났다. “범이 자기 흉을 하면 온다고.” 처녀애들은 혀를 홀랑 내밀더니 머리를 폭폭 숙이었다. 공장안이 다시 조용해지고 대신 마선을 돌리는 소리가 절주 있게 들렸다. 공장장 사무실에 돌아온 상순은 턱을 고이고 양미간을 찌푸리더니 번개같이 속궁리를 돌렸다. (감독만 해선 안 되겠어. 재봉공들의 사상교양을 해야지.) 쉼 시간에 상순은 200여명 재봉공여성들을 10개 반으로 나누고 10명의 반장을 선출했다. 상순은 반장들과 하나하나 개별담화를 한 후 반장회의를 열고 엄숙하게 말했다. “반장 동지들, 동지들은 모두 우리 복장공장의 골간들이오. 우리 군복공장의 여중호걸들입니다. 동지들, 자기 반의 학습과 노동, 기율을 책임지고 잘 관리할 것을 명령합니다. 잘 관리할 수 있겠습니까?” “옛!” “좋습니다. 난 여기 있는 10명 반장 동지들을 믿습니다. 이제 우린 달마다 생산총화를 짓고 우수한 자는 표창하고 후진들에게는 사상공작을 해야 하겠습니다. 어떻습니까? 신심이 있습니까?” “있습니다.” “좋습니다. 전체 회의를 합시다. 몽땅 마당에 집합하십시오.” “옛!” 여성노동자들은 10개 반으로 나뉘어 군인들처럼 줄을 지어 섰다. 공장장 상순은 그녀들 앞에 나서더니 다음과 같이 사상동원을 했다. “군복공장 전체 동무들, 정말 수고 많습니다. 전선에서 우리 장병들은 목숨 걸고 미제 양키 놈들과 싸우고 있습니다. 전선에서 우리 전우들은 소대가리도 얼어서 탁탁 틸 추운 겨울에 동복을 급히 입어야 됩니다. 우리가 하루 빨리 동복을 보내면 우리 전우들이 하루 덜 얼고 미제를 더 호되게 족칠 수 있습니다. 우린 총포성이 들리지 않는 전선에서 싸우고 있습니다. 언제 뉘네 남자가 어떻고 색시가 어떻고 잡담을 할 새 있습니까?” 이때 여성들 속에서 키득키득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때 반장들이 매서운 눈길로 그녀들을 쏘아보자 손으로 입을 가리고 머리를 숙였다. 상순은 계속 연설했다. “동무들은 나라와 인민군대가 부여한 사명감을 안고 분초를 다퉈 동복 한 벌이라도 더 빨리, 많이 지어야 합니다. 상급 후근부문에서는 동무들의 수고를 알고 새하얀 햇입쌀과 맛 나는 채소도 보내왔습니다. 우린 대소한이 돌아오기 전에 동복생산전투임무를 완수해야겠습니다. 완수할 수 있습니까?!” “있습니다!” 그녀들의 대답소리는 우레와 같이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나는 동무들이 꼭 완수하리라고 굳게 믿습니다.” 우렁찬 박수소리가 울려 퍼졌다. 대회가 있은 후 복장공장은 눈뜨이게 기율이 짜이고 생산열정이 하늘을 찌를 듯이 올라갔다. 상순은 재봉공들의 생활을 개선해 줘야겠다고 생각하고 허영희와 흥수를 불렀다. 영희는 상순의 세 귀 눈과 마주 칠까봐 머리를 다소곳이 숙이고 공장장 사무실에 들어섰다. “모두 거기 앉소.” 흥수와 허영희가 맞은편에 자리를 정하고 앉자 상순은 세귀눈으로 그들을 마주보며 말을 꺼냈다. “재봉공들이 하루에도 열대여섯 시간씩이나 일하는데 좀 영양보충을 시켜야겠소. 재봉공들이 쓰러지면 이제 일주일 안에 군복생산임무를 어떻게 완수하겠소?” “예? 거 참 아량 있는 생각인데요.” 상순은 마른기침을 “에헴.” 했다. 그러자 영희는 상전 앞에서 실례한 것 같아 혀를 홀랑 내밀었다. “강 건너에 가서 식량과 고기붙이라도 얻어 와야겠소.” “예?” 상순은 대답 대신 머리를 끄덕이었다. 상순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이 일은 우리만 알아야 하오.”라고 했다. “예. 알았습니다.” 이윽고 흥수와 허영희가 전사 넷을 데리고 들어왔다. 그날 오전 아홉시쯤 되자 성수가 트럭을 몰고 와서 입쌀과 생 배추를 부리었다. 상순은 흥수와 전사들을 데리고 계획대로 성수가 모는 트럭에 앉아 강 건너로 달려갔다. 상순은 비위장판이었다. 강 건너 마을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쌀을 동냥 하듯이 얻어냈다. 다른 마을에 가서는 금방 건립한 초급합작사 돼지우리에 돼지가 우글거리는 것을 보고 200근은 실히 될 돼지까지 얻어 트럭에 실었다. 점심때 그들은 웃음주머니가 흔들흔들해 성수가 모는 트럭에 앉아 귀로에 올랐다. 그들이 깎아지른 절벽 밑의 산굽이를 에돌아 금방 강바닥에 들어섰을 때다. 갑자기 하늘에서 얭- 요란한 소리와 함께 미 전투기가 네 대나 날아왔다. “적기다! 빨리 트럭에서 내려 피신하라!” 상순은 고함치며 옆에 앉은 허영희의 손을 쥐고 트럭에서 뛰어 내렸다. 한참 달리다가 언제의 커다란 콘크리트도관 안에 들어가 납작 엎드렸다. 폭탄이 강바닥에 떨어져 작렬하며 폭음이 귀청을 째지게 때렸다. 파편이 쌩쌩 날아와 도관 벽을 쳤다. 상순은 허영희를 품속에 꽉 끌어안고 위에 엎드렸다. 꽈르릉! 꽝! 꽝! 요란한 굉음과 함께 언 흙덩이들이 도관 앞뒤 구멍을 꽉 막아 버렸다. 순간 도관 속은 칠흑처럼 온통 새까맣게 돼버렸다. 상순은 몸을 벌떡 일으키며 손 더듬을 해보았다. 그런데 뜻밖에 그만 영희의 뭉글뭉글한 젖가슴이 손에 닿았다. 상순이 덴겁한 듯 황급히 손을 빼려는 순간 영희가 상순의 손을 꼭 잡았다. 상순은 전기에라도 붙은 듯이 황급히 손을 빼갔다. 그런데 이번에는 영희가 상순을 꼭 껴안고 놓지 않았다. “허 주임, 허 주임!” “예.” “상한데 없소?” “예. 김 공장장이 몸으로 뒤덮어준 덕분에. 김 공장장은 저의 구명은인이죠.” “우린 여기서 빨리 나가야 하오. 오래 있으면 공기가 희박해 위험하오.” “예.” 상순은 어둠 속에서 몸을 돌려 영희를 뒤로 물리고 들어오던 쪽을 손으로 흙덩이들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한참 단말마적으로 파고 또 파니 시원한 냉기가 도관 속으로 불어 들어왔다. “이젠 살았소. 이제 한참 파노라면 바깥이 나지겠지.” 그런데 영희는 뒤에서 상순을 꼭 껴안으면서 “좀 쉬십시오.”라고 했다. “뭐 하는 거요?” “누가 보는가요?” “보지 못해도 그렇지. 난 처자가 있는 나그네란 말이오.” “누군 처녀구먼요.” 상순은 영희의 팔을 뿌리쳤다. “그럼 더욱 근신해야지. 우린 당원이 아니오?” “당원은 사랑도 모르는가요? 전 첫눈에 사내다운 당신한테 반했는데요.” 상순은 흙을 파헤치면서 두덜거렸다. “나를 어떻게 보고 이러는 거요?” “우린 여기서 죽을 수도 있어요? 난세에 언제 죽을지 어떻게 알아요? 후회 없이 살지요. 전 당신과 함께라면 여기서 죽어도 괜찮을 거 같아요.” “허 주임, 정말 천만뜻밖이오. 남편 보기 미안하지 않소?” “저의 남편은 전선에서 희생됐어요. 자기 수하의 생활을 좀 관심해주면 안 돼요?” “…” “영웅도 미인관을 넘지 못한대요. 음충한 눈길로 노리다가도 정인군자인 척 하긴. 호호호.” "입 다물지 못해?” "픽!" "이 흙덩이나 받아 뒤에 쌓으라고."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상순은 갈구리 같은 손으로 흙덩이와 돌덩이를 억척스레 파서 뒤로 넘겼다. 뒤에서 영희는 그 흙덩이들을 또 자기 뒤에 쌓아올렸다. 또 한참 지났다. 도관 밖에서 부르짖는 소리가 들렸다. “김영장! " "허 주임!” “살았소. 허 주임, 우린 살았단 말이오.” 상순은 중얼거리다가 높이 고함쳤다. “우리 여기 갇혔소!” “아, 여기 있구만. 김영장, 허주임도 그 안에 있소?” “양, 흥수, 빨리 우릴 파내오.” “양, 빨리 파 낼게!” 바깥에서 왁작거리며 흙덩이를 치우는 소리가 들렸다. 한참 후 바가지만한 구멍이 펑 뚫렸다. 눈보라 치는 압록강 바닥이 내다보였다. "살았구나!" 상순과 허영희는 끝내 도관 속에서 기여 나왔다. “야, 우린 당신들이 잘 못 됐는가 했소.” 흥수와 성수는 상순을 끌어안고 어린애들처럼 풍풍 뛰었다. 상순은 사위를 두리번거리더니 트럭이 없는 것을 보고 황급히 물었다. “트럭은? 쌀과 돼지는 어쨌소? 상한 동무들은 없소?” 성수는 강 건너를 손가락질 했다. “누구도 상하지 않았소. 트럭은 내 저 강 건너 안전한 곳에까지 몰아다 피신시켰소.” 상순은 손을 홱 저었다. “빨리 강을 건너기오. 또 적기가 날아오겠소.” 그들은 재빨리 뛰어 눈 덮인 강바닥을 건너가 쌀과 돼지를 실은 트럭을 몰고 쏜살같이 군복공장으로 질주했다. 돼지가 트럭 위에서 겁기 띤 껌정눈깔로 전사들을 쳐다보며 꿀꿀 울어댔다.  
101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79) 댓글:  조회:1669  추천:1  2017-09-02
                                        12. 일망타진       얼음 쪼각 같은 겨울 해가 벌겋게 타오르는 저녁노을 속으로 숨으면서 마지막 찬 빛을 뿌리더니 서산으로 뉘엿뉘엿 넘어갔다. 어둠의 장막이 내리덮인 함흥 촌에 자동차 한 대가 헤드라이트로 마을을 누비더니 촌공소에 들어섰다. 천룡구 부국장이 로야령에 내린 특무들을 몽땅 생포하고 그 길로 민경들을 데리고 함흥 촌으로 달려왔다. 그는 자동차에서 내리자마자 상순에게 경례했다. “보고! 김 국장, 우리 현 공안국 민경들이 특무 잡으러 왔습니다.” “천 국장, 들어가기요." 상순은 자기가 양성한 천룡구 부국장을 대견하게 바라보았다. 그는 천룡구를 데리고 촌공소 안으로 들어갔다. 상순은 기둥에 매놓은 용천과 병수를 가리키면서 천용구 부국장에게 생포과정을 이야기하고 잔당을 나포할 작전방안을 얘기했다. “참 좋습니다. 허나 충국의 집은 위험합니다. 제가 거기에 가고 김 국장은 여기서 전투를 지휘하면 어떻습니까?” 분명 천용구는 위험한 특무잡이에 여기에서 수장인 상순 국장을 보낼 수 없었던 것이다. 천용구가 하는 말에 상순은 도리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안 되네. 내가 그래도 자네보다 충국이네 토성안집 형편을 더 잘 아네. 내 보건대 적들은 대낮의 총소리를 듣고 삼도만이나 다른 곳에 도망쳤을 수도 있소. 전소광은 삼도만과 이 지역을 손금 보듯 하네. 절대 소홀히 대적해선 안 되오. 내 소서구에 가고 자넨 여기서 쥐휘하게나.” “알았습니다.” 천용구는 상순 국장의 포치에 따라 민경들을 분조를 나눠 포치했다. 동산 쪽의 계수동쪽과 소서구 쪽으로도 수색하라고 명령했다. 또 한 개 분조는 함흥 촌 촌공소를 위주로 지키면서 용천과 병수를 구하러 올 수 있는 적들을 나포하기로 했다. 모든 작전을 다 포치하자 상순은 허영호 과장과 민경 둘을 데리고 소서구 어귀 충국이네 집 북쪽으로 가서 토성 밑에 난 구멍으로 들어갔다. 상순이 민경들을 데리고 집안에 불쑥 들어가자 장학산 부부는 깜짝 놀랐다. 충국은 손을 베개 밑으로 넣다가 멈췄다. 리국은 그만 두라고 충국의 옆구리를 툭툭 쳤다. 상순은 눈치를 채고서도 구들에 뛰어 올라가며 물었다. “권총은 어쨌는가?” 충국은 베개 밑에서 권총을 꺼내 자루 쪽을 공손히 내밀었다. 허영호 과장과 민경은 충국을 쏘아보며 권총집에 손이 갔다. 상순은 권총을 받아 탄창을 빼보았다. 놀랍게 촘촘히 박힌 싯누런 탄알을 보고 상순은 세 귀 눈으로 충국을 쓸어보았다. “탄알은 어데서 났니?” “전번에 전소광이 준 게다.” “왜 전번에 바치지 않았니?” “탄알이 없는 총으로 어떻게 전소광을 대적하니?” 상순은 머리를 끄덕이더니 권총을 되돌려줬다. “너를 믿는다. 전소광이 오면 가차 없이 쏴.” 충국은 머리를 끄덕였다. 상순은 집안을 둘러보면서 물었다. “왔다 간 놈이 없는가?” “오늘 저녁에 먹을 걸 가지러 올 날이네.” “음. 등잔불을 켜라.” 상순의 호령에 충국은 이상해 했다. “특무 놈들이 혹시 집안을 들여다보고 김 국장을 발견하고 달아나면 어쩌자고?” 상순은 코웃음 쳤다. “개뿔도 모르는 놈. 평소처럼 등잔불을 켜지 않으면 무슨 일이 생겼다고 특무들이 놀라 달아날 게 아닌가?” “오~” “장탄했니?” 그제야 충국은 머리를 끄덕이며 등잔불을 켠 후 권총에 장탄했다. 상순은 허영호를 보고 한 민경을 데리고 주방에 나가 숨어 있게 하고 한 민경은 북쪽 구들에 이불을 덮고 누워있게 했다. 자기는 남쪽 구들에 펴놓은 미련의 이불 속으로 들어가 누워 머리만 내놓고 동정을 살폈다. 미련은 부끄러워 키득거리었다. “오빠, 내 이불 속에 들어가면 난 어디에서 자오?” “옆에다 이불을 펴고 누워라. 딴전을 부렸다간 죽을 줄 알아.” “오빠한테 몇 번 죽었는지 모르겠소. 쩍 하면 죽인다고 해?” “시끄럽다. 어서 누워!” 미련은 별 수 없이 상순의 옆에 누웠다. 상순은 충국을 보고 “혹시 특무들이 들어와 옆에 누운 게 누군가 하면 미련의 신랑감이라고 해라.”라고 했다. 미련은 키득거렸다. “웃지 마라.” 충국은 이불을 덮고 누워 베개 밑에 권총을 넣고 매만지면서 착잡한 생각에 잠겼다. (전번에 전소광은 나를 보고 지주들로 유격대를 조직해 장백산에서 유격전을 벌리자고 했다. 국민당 천하를 되찾으면 우리 땅을 다 찾아 주겠다고 했다. 이 권총으로 상순을 쏴 죽일 순 있다. 하지만 건너 방의 민경 둘이 인차 덮쳐 올 거야. 안돼. 대만에 쫓겨 간 국민당 군이 언제 대륙으로 되돌아온다고 그래? 몇몇 특무들이 와서 유격전을 해서야 언제 공산당군의 천하를 뒤엎을 수 있겠는가? 800만 대군을 가지고서도 200만도 안 되는 공산군을 이기지 못해 대만에 도망친 주제에 유격전을 해? 봐라, 전소광이 온지 며칠이 안 돼 벌써 상순까지 와서 천라지망을 치지 않는가? 괜히 잘 못 서둘러서 보석된 내가 목이 댕강 날아나라고? 상순의 말대로 로실히 국민당 특무 잡이에 협조해 주고 관대처리나 받으면서 연명하는 수밖에 없다.) 한참 후 마당에서 바스락바스락 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미련이가 자꾸 이불 밑으로 발을 내밀어 상순의 허벅다리를 툭툭 치며 지껄이었다. 상순은 미련의 발을 이불 밑에서 밀어내고 바깥 동정에 귀를 도사렸다. 창 밖에서는 눈보라가 윙윙 휘몰아치며 모래알을 쥐여 뿌리는 듯이 창호지를 마구 두드리는 소리가 들릴 뿐이었다. 한참 후 바깥에서 눈을 밟는 빠드득빠드득 소리가 급촉하게 나다가 집 앞에서 잠간 멈추는 것 같았다. 이윽고 방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상순은 이불 밑에서 권총 안전띠를 풀고 문에 겨눴다. “왕형이 왔구만.” 충국은 상순을 들으라고 소리쳤다. 상순은 눈을 슬며시 뜨고 이불귀 밑으로 문어귀에 선 놈을 쏘아보았다. “초저녁부터 자는가?” “혼자 왔소?” “응, 전 퇀장이 나보고 먹을 거 가지고 오라고 했네.” 상순이 충국을 보니 베개 밑을 더듬는 것이었다. “남쪽 구들에 왜 두 사람이야?” “오, 내 매부감이 왔네.” “오, 그래?” 충국은 불시에 베개 밑에서 권총을 꺼내 특무에게 총을 겨눴다. “꼼짝 말라!” “자네 무슨 장난이야?” 그때 상순이가 이불을 젖히며 뒤에서 총을 겨누었다. “꼼짝 말라!” 왕발은 사태가 틀린 것을 알고 되돌아 도망치려고 했다. 그때 주방 문 뒤에서 허영호 과장이 총을 들고 막아섰다. 허나 왕발은 최후발악을 하려고 권총을 뽑아 들었다. 땅! “억!” 상순이 쏜 총소리와 함께 왕발이 허벅다리를 틀어쥐고 털썩 쓰러졌다. 그 놈은 땅바닥에 누워 총으로 맹호와 같이 덮쳐나가는 상순을 겨눠 방아쇠를 당겼다. 땅! 총소리가 울리며 천정이 펑 구멍 뚫렸다. 상순은 덮쳐들어 발로 왕발의 손을 꽉 밟고 총을 빼앗아냈다. 왕발은 권총을 들고 멍청히 서있는 충국을 보고 고함쳤다. “이놈아, 빨리 빨갱이들을 쏴! 안 그러면 넌 한평생 후회할 거야! 아이고, 저 멍청이야.” 허영호와 상순은 충국의 눈치를 살폈다. 충국은 부르르 떨리는 손으로 총을 구들바닥에 내려놓았다. 허영호 과장은 충국의 총을 몰수했다. “김 국장, 어떻게 돼 저 놈의 손에 권총이 있습니까?” “고험했어. 탄창에는 탄알이 없어.” 허영호가 탄창을 뽑아보니 빈 탄창이었다. 충국은 상순의 놀라운 솜씨에 놀라 축 늘어뜨린 머리를 쳐들지도 못하고 구들에 풍덩 물앉아 한숨을 후 내쉬는 것이었다. 상순은 미리 빈 탄창을 가지고 가서 충국의 장탄한 탄창을 검사할 때 제꺽 바꿔 넣었던 것이다. 다른 민경도 뛰어 들어와 바로 왕발을 꽁꽁 묶었다. 상순은 민경을 보고 나가 바깥에서 보초 서라고 한 후 왕발을 심문했다. “우린 네놈들의 계획을 다 알고 있어. 로실하게 탄백하면 관대하게 처리하고 항거하면 호되게 징벌할 테다.” “장관, 죽여 달라! 고달프게 굴지 말고 빨리 죽여라!” "남조선 특무 용천과 병수도 다 잡혔다. 전소광과 장광우는 지금 어데 있는가?” 왕발은 충국을 쏘아보았다. “네 놈이 우릴 팔아먹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구나.” “너도 전소광을 불어야 살아남을 수 있다. 목숨을 내놓겠는가? 탄백하겠는가?” 상순은 권총으로 왕발의 대갈통을 툭툭 찔러댔다. 죽음 앞에서 굴복하지 않을 놈은 없었다. “김 국장, 총살해 버립시다.” 허영호 과장(소장)이 재촉했다. 상순이 바깥으로 나갔다가 들어오더니 한족말로 “저 동쪽 계수동에서 적정을 알리는 신호탄이 하늘로 날아올라갔소. 이젠 이 놈이 필요 없게 됐소.” 라고 하더니 권총을 왕발의 대갈통을 겨눴다. 왕발은 황급히 새된 고함질을 쳤다. “제발 살려주오. 장관, 탄백하겠소. 탄백해!” 그제야 상순은 권총을 거두었다. “말해라. 쓸데 있는 말인가 보자!” 왕발은 머리를 툭 떨어뜨리더니 탄백했다. 원래 아침에 함흥 촌에서 총소리가 울리자 대만특무 전소광은 대뜸 용천이네가 잘 못 됐겠다고 짐작하였다. 그는 왕발을 보고 장충국이네 집에 가서 밥과 이불을 가지고 계수동 막바지 도가집 부근에서 만나자고 했던 것이다. “거짓말을 한마디라도 하면 넌 죽어!” 상순이 을러메자 왕발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비굴하게 빌었다. “장관, 내 어찌 목숨을 가지고 장난하겠습니까?” 상순은 계수동 쪽에서 적정을 알리는 신호탄이 올라간 적도 없었지만 기민하게 꾸며대 왕발의 속을 뽑아 보았던 것이다. 그는 민경을 보고 촌공소에 대만 특무 왕발을 끌어가게 하고 허영호 과장과 함께 쏜살같이 동쪽 계수동쪽으로 달려갔다. “김 국장, 나도 가겠네.” “집에 돌아가지 못할까?” 장충국은 권총을 쥐고 달려 와서 숨이 차 헐떡거렸다. “아니. 왕발이 가지 못하면 전소광이 의심할게요. 내라도 가면 그 놈이 마음 놓아서 체포하기 편리할 거 같소.” “음, 그게 그럴 법 하구나. 가자.” 상순은 계수동 막바지에 있는 도가 집으로 향해 올라갔다. 그들은 도중에서 계수동 골 안을 수색하던 천용구 부국장을 만나 작전방안을 꾸몄다. 그들은 인차 왕발 대신 충국을 앞세우고 포위 습격해 전소광과 장광우 두 대만특무를 체포하기로 했다. 민경들이 상순과 천용구의 지휘아래 충국을 앞세워 도가 집 부근을 거의 포위해 올라갔을 때었다. 도가집 부근 어둠 속에서 웅글진 목소리가 들렸다. “왕발인가?” “예.” “왜 사람이 그렇게 많은가?” “당지 지주들을 데리고 오오.” “먹을 건 푼푼히 가져 왔는가?” “예. 한 가마 밥을 다 가져 왔소.” 이때 도가 집 부근에서 한 놈이 앉아 송수하기를 걸고 무전기를 삑, 삑, 삑 치는 것이 보였다. 이윽고 동남쪽 하늘에서 비행기가 신호등을 번쩍이면서 날아왔다. 새로운 정황이었다. 상순은 인차 천용구와 귓속말을 주고 받았다. “즉시 전소광을 체포해야 하오.” “예.” 상순이 손을 홱 앞으로 휘둘렀다. 숱한 민경들이 쏜살같이 도가 집으로 짓쳐 올라갔다. “뭐 하는 짓이야?” 전소광은 놀라하며 허리춤에서 권총을 빼들었다. 허나 그때는 늦었다. 숱한 민경들이 덮쳐들었다. “충국이, 뭐 하는 거야?” “네 놈을 생포하러 왔다!” “아야, 마야(어머니!)” 전소광은 황급히 권총으로 충국을 쏘았다. 충국은 어깨를 붙잡고 쓰러졌다. “사격!” 민경들은 전소광을 향해 사격했다. 전소광은 숱한 총알을 맞고 즉살했다. 무전기를 치던 특무 장광우는 천용구와 상순의 씨꺼먼 총구 앞에서 두 손을 쳐들었다. 그런데 밤하늘에서 날아오던 적기는 장광우의 무전을 받고 황급히 기수를 건뜻 쳐들더니 황망히 고도를 높여 동남쪽으로 날아가는 것이었다. “에끼, 이 놈새끼, 그새 도망치라고 무전을 쳐? 어서 무전기로 저 비행기를 돌아오라고 하지 못할까?” 허나 장광우는 무전기로 자기들은 이미 몽땅 나포되었으니 다시는 연변에 특무를 파견할 궁리를 하지 말라고 무전을 쳤던 것이다. 상순은 즉시 명령을 내렸다. “사격!” 천용구 부국장이 거느리고 온 민경들은 고사기관총으로 꽁무니를 빼는 비행기를 조준해 불을 토했다. 상순은 성차지 않아 손수 고사기관총으로 멀어져가는 비행기를 사격했다. 따당 땅땅 땅땅땅! 불줄기가 적기를 향해 날아갔다. 허나 비행기는 어느 결에 어둠 속으로 멀리 사라져버렸다. 비행기가 사정거리를 벗어났던 것이다. 천용구와 김상순은 장광우 놈의 손에서 무전기를 빼앗아 냈다. “네 놈은 사형을 면치 못해.” 상순과 천용구는 자동차를 불러 전소광의 시체를 싣고 장광우를 압송해 가지고 함흥 촌으로 개선가도 높이 돌아갔다. 한차례 인심을 격동시키는 특무잡기전투는 승리로 끝났다. 모두들 총을 높이 쳐들며 승리의 희열로 차 넘쳤다. 어둠 속에 잠긴 함흥 촌 상공에는 구호소리가 밤늦게까지 높이 울려 퍼졌다. 이튿날 천용구와 상순은 민경들과 함께 자동차에 용천과 왕발 등 특무들을 꽉 박아싣고 승리도 개선가도 높이 영월구로 귀로에 오르게 됐다. 함흥촌을 떠나기 전에 상순은 허영주 서기와 할아버지께 허리를 굽혀 경례를 드린 뒤 자동차에 뛰어 올라가 공안국을 대표해 간단히 연설했다. “여러분, 우리는 공산당의 영도아래 미제의 훈련을 받은 남조선과 대만 특무들을 몽땅 나포했습니다. 보십시오. 특무 놈들이 비행기를 타고 하늘에서 날아 내리든지, 땅 속에서 기어 나오든지 모두 우리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상순은 격앙된 목소리로 고함쳤다. "일체 반동파와 지주악당, 반혁명분자들에게 엄중히 경고한다. 네 놈들이 감히 사회주의 조국과 우리 두 번째 고향 연변조선족자치구에 침략해 온다면 우린 인민무력의 강철의 힘으로 네 놈들을 견결히, 철저히, 모조리, 깡그리 소멸할 것이다!" 그는 뒤이어 군중들을 향해 우렁찬 목소리로 연설했다. "우린 중국 공산당의 영도아래 재빨리 사회주의 개조를 진행하고 모두 다 함께 잘 살 수 있는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사회를 건설해야 합니다.” 군중들은 “와-” 고함치며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를 보냈다. 용천은 무릎을 꿇고 앉아 상순을 쳐다보며 통사정했다. “나는 항일 유격대 대장 출신이여. 내 아들 경주를 데리고 대한민국 고향에 돌아가게 놔 달라.” 용천은 사람들 속에서 진달래와 경주를 찾았으나 보이지 않았다. “쳇, 이 놈이. 주둥이만은 살아서 목숨을 구걸하는가?” 상순이 욕지거리하며 용천의 죄악을 폭로했다. “네 놈은 조선인민군 연대장, 내 큰아버지 김성칠 동지를 살해한 철천지 원쑤놈이야. 우리 사회주의 조국을 뒤엎으려고 침투해 들어온 악질특무 놈이다. 백번 죽여도 마땅하다!” 군중들도 죽어 마땅하다고 했다. 이때 병수가 병완을 보고 고함쳤다. “할아버지! 살려 주세요! 우린 한국 서울에서 용천 연대장과 함께 친일주구 한철주와 한선주 형제를 처단했어요. 입공속죄했으니 관용을 베풀어 주세요.” 병완은 병수를 되돌아보지도 않았다. (자식, 누가 널 남조선 특무질하라고 했느냐?) 허나 그의 몸이 조금 비틀거리는 것이었다! 병수는 자동차 위에서 두리번거리더니 눈보라 휘몰아치는 천지꽃산 중턱의 이성희 할머니 산소를 찾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할머니! 할아버지! 아버지!” 병수는 미친 듯이 고함치더니 머리를 돌려 상순을 쳐다보고 말했다. “상순아, 내가 고향에 돌아가 부모를 모시지 못할 바엔 네가 후에 내 고향에라도 가면 아버지와 동생 영수한테 내가 여기서 죽었다는 거나 알려라.” 그 말에 상순은 기 딱 차서 한숨만 길게 내쉬었다. 병수의 말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내가 죽으면 저 천지꽃산 왕고모 산소 옆에 묻어 달라. 할머니한테 구천에 가서라도 육친도 모르는 네놈들을 공소할테야!” 상순은 병수를 욕했다. “내 할머니를 업고 똥구덩이에 뛰어들지 말라!” 옆에서 용천이 병수를 나무랐다. "이제야 알겠어? 병완이랑 상순이랑 다 그래. 빨갱이들은 육친도 몰라. 혁명하다 필요하면 제 처남 손자도 마구 잡아먹어.허허허."  병수는 머리를 툭 떨어뜨렸다. 뭔가 이제야 알렸는가? 용천은 계속 지껄여댔다. "날 봐라. 항일유격대 대장이였잖아. 저놈들과는 전우였어. 그러나 항일유격대 대장도 죽인다니까." 그때 병완이 용천의 앞에 다가가 고함쳤다. “용천아, 넌 이전에 항일투사였고 성칠의 전우였다. 허나 오늘은 우리 철천지원수로 됐다! 네놈은 성칠과 사촌동생마저 살해하지 않았느냐? 네놈은 용서할 수 없는 죄를 졌어. 또 우리 나라에 침투한 남조선 특무 죄를 졌다. 우리 인민정권이 절대 용서할 수 없다!” 용천은 결박당한 채 자동차에 끌려가면서도 머리를 쳐들고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남쪽 하늘을 하염없이 쳐다보았다. 그때 용천이 노래를 불러댔다.        " 동해물과 백두산이..."      정신을 차린 병수는 이제야 자기가 남조선 특무라는 것을 알았는지 중얼거리기 시작하였다.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노랠 부르지 말엇!"       흥수가 꽥 고함치면서 씽드르 자동차 위에 뛰여올라가 장총으로 용천과 병수의 주둥이를 마구 쑤시었다.        "그만둬!"       상순이 급히 흥수가 휘두르는 총을 밀막으면서 말렸다.       "우린 인의 지사야! 절대 이러질 말아야 해!"       상순이 말리자 흥수는 마지못해 총을 거두고 자동차에서 내려갔다.      "남조선 특무놈들을 죽여라!"       "죽여라!"      군중들은 주먹을 쳐들며 격노해 고함쳤다.     용천은 이제 당장 총살받을지도 몰라 사람들 속에서 재차 진달래를 찾았다. 그러나 아무리 눈뿌리 빠지게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절망에 빠져 흐리멍텅한 하늘을 쳐다보며 허무맹랑하게 웃어버렸다.        (세상은 얼마나 허무한가. 저렇게 무정한 진달래를 안해라고 얼마나 발바닥이 다슬게 조선 팔도를 다 찾아헤맸던가! )        순간 그의 눈 앞에는 돌팔매질로 자기 머리를 까던 진달래, 이를 악문 질달래가 떠올랐다. 그는 도리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래, 넌 근본 날 사랑하지 않았어. 뭐? 너거 첫사랑은 성칠이라고? 그럼 내캉 결혼은 왜 했어? 왜?!)     용천은 전쟁으로 인해 사랑이 원한으로 뒤바뀐 것에, 사랑과 원한이 뒤엉킨 세상을 애절하게 한탄했다.  죽음을 재촉하는 저승사자의 북소리가 둥둥 요란하게 울린다. 그의 눈에는 염라전이 어슴푸레 보이는 상 싶었다. 전쟁 악마의 보이지 않는 갈퀴 같은 검은 손이 하늘에서 길다란 올가미를 내려보내 서서히 용천의 목을 휘감았다. 전쟁 악마가 없었더라면  용천은 진달래와 함께 경주를 키우면서, 아니, 아들딸을 한구들 낳아 기르면서 행복하게 살 수도 있었을 것다. 그러나 용천의 그 아름다운 꿈은 전쟁이란 악마에 의해 풍비박산나고 말았다.       어디 그뿐인가! 전쟁 악마는 용천으로 하여금 사촌동생 칠백이, 전우 성칠과 총칼을 비껴들고 생사결판으로 싸우게 내몰지 않았던가! 그들을 죄악의 손으로 총칼을 들고 살해하지 않았던가.         용천은 사람들 속에서 피뜩 덕성을 발견하고 목청껏 고함쳤다. "작은아버지! 경주를 보우해 주시예!" 그는 진달래를 보지도 못했지만 어데라 없이 하늘에 대고 고함쳤다.  "진달래야! 장차 경주를 남조선에 보내달라!” 상순은 용천을 쏘아보며 호통쳤다. "주둥일 다물지 못해?!" 뒤이어 상순은 정책을 말해주었다.  "너희들 친일주구 한철주 형제를 사살하고 똘만을 나포하는데 공이 있어. 때문에 우리 정부에서는 가능하게 관대하게 처리할 수도 있다. 특히 용천은 항일에도 공이 있어 고려할 거야. 그러나 이건 내 생각이지 국가 공안부문의 결정이 아니야." 용천은 머리를 툭 떨어뜨리며 뭐라고 중얼거렸다. 눈보라 소리에 사람들은 그가 자동차 위에서 뭐라는지 똑똑히 들을 수 없었다. 용천은 자동차에 실려가면서도 머리를 돌려 원망에 찬 눈길로 누구를 찾는 듯이 사람들 속을 누비었다. 그러나 진달래는 끝내 보이지도 않았다. 덕성은 자동차에 실려 끌려가는 조카를 차마 보기 힘들어 머리를 숙였다. (아, 처자를 만나자고 얼마나 찾아 헤맸는가? 진달래 사랑을 찾기는 고사하고 원수치부할 줄은 몰랐제이, 헤이, 내 끝장 이렇단 말인고? 얼마나 그리던 진달랜데. 얼마나 사랑한 진달랜데?  마지막길일 수도 있는데, 머리도 내밀지 않어? 경주라도 보이지 못하고. 헛참, 진짜 몰인정한 빨갱이야.)       그는 진달래가 원망스러웠다. 진달래와 자기를, 아들과 자기를 갈라놓은 전쟁이 원망스러웠다. 자기를 만주 사지에 특무로 보낸상관 허군호 사단장과 미군을 원망했다. 진달래와 같은 무정한 여자를 아내라고 이런 불구덩이에 뛰여든 것을 후회했다. 아니, 이제 누굴 원망한들 무슨 소용 있으랴. 백번 후회한들 무슨 소용 있겠는가!         병수는 천용구 부국장과 공안전사들이 압송하는 자동차에 실려가면서도 눈이 푸실푸실 내리는 흐리멍텅한 남쪽하늘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머리를 홰홰 저었다. 그러는 병수를 보고 상순은 천지꽃산 중턱에 모신 할머니 산소를 올려다 보며 머리를 숙였다.       구경 무엇이 전우였던 그들로 하여금 총창을 비껴들고 서로 생사결판으로 싸우게 했던가? 구경 무엇이 사촌형제끼리, 친혈육끼리 총창을 비껴들도 맞붙어 서로 찔러 죽이게 했는가. 구경 무엇 때문에 항일유격대 전우끼리 서로 총부리를 겨누고 결투하게 하였던가! 구경 무엇이 그렇게 그리워 찾아헤맨 부부를 서로 원수로 만들었는가!       바로 미제의 참혹한 침략전쟁이 그렇게 만들었다. 미제가 인천에 등륙하지 않았더라면  조선 인민들이 자기 조국의 문제를 자체로 해결했을 것이며 통일된 조선을 후대들에게 넘겨주었을 것이다. 미제가 남조선을 식민통치하지 않았더라면 전쟁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 아닌가. 미제 침략전쟁은 인류 역사에서 제일 큰 범죄자였다. 바로 참혹한 침략전쟁이 부부도, 사촌형제도, 전우도 서로 원수로 되여 싸우게 만들지 않았던가!  아, 이 땅에 다시는 침략전쟁, 동족상잔전쟁이 일어나지 말고 평화가 깃들기를 두 손 모아 기도한다. 평화란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       휘몰아치는 눈보라 속에 몸부림치는 버드나무 가지 위에서 까마귀떼들이 꽁지를 달싹이며 까욱까욱 무섭게 울어대며 발톱으로 부리를 닦으며 먹이를 쪼을 준비를 했다.      용천이 자동차에 실려 갈 때 기실 진달래는 다리 총상을 오줌찜질을 해 지혈시키고 있었다. 이윽고 그녀는 양손에 경주와 경수의 손을 잡고 아픈 다리를 끌면서 마을 동구에까지 나가 눈보라 속에 멀어져가는 자동차를 바래였다. 자동차가 어두워 가는 하늘 아래 눈보라 속에 시야에서 사라지자 그녀는 경주를 꼭 끌어안고 한없이 서럽게 통곡쳤다.       하루 밤 부부도 만리장성을 쌓는다고 비록 항일전재시기 밀림에서 한해도 함께 살지는 못했지만 필경 그들은 부부였다. 그럼 그녀가 용천을 동정해서 통곡칠까?      아니다. 그보다도 애비 없이 살 경주가 불쌍해 우는것이리라.       그날 밤이였다. "여보, 내 왔어. 경주 얼마나 보고 싶은지." 밤중에 용천이 장백산 밀림의 통나무집, 그들이 결혼해 첫날 밤을 보내던 그 통나무집에 찾아오지 않았겠는가! "당신 어떻게 돼 왔는가요? 당신은 남조선 특무 아닌가요? 어떻게 살아 돌아왔는가요? 어서 나가요!" "그래, 또 날 붙잡아 중공군에 보낼 예산인기여?" 용천은 두덜거리며 구들에 나란히 누워 쌔근쌔근 자는 경주의 얼굴을 매만지였다. 뒤이어 경수의 얼굴에 갈퀴 같은 검은 손을 뻗쳤다. "손 떼라!" 성칠의 고함소리가 들렸다. 용천과 진달래가 돌아보니 장소는 어떻게 돼 장백산 통나무집 아니고 함흥촌 촌공소인데 어떻게 돼 성칠이 유령처럼 나타나지 않았겠는가! "이 양심 없는 놈아! 어째 내 아내 빼앗아 살았어! 조 쥐새끼까지 낳기까지 했잖어?!" 용천은 욕설을 퍼부으며 성칠의 멱살을 틀어쥐고 흔들더니 머리로 떵 들이받았다. 성칠도 주먹으로 반격했다. 애들이 깨나 어른들 싸우는 걸 보고 엄마 품에 와락와락 안겨 엉엉 울었다. 진달래가 새된 소릴 지르며 뜯어 말렸다. "그만하지 못해요? 진짜 죽어서 귀신 됐어도 싸워요?" "염라전에 가도 저 놈 용서할 순 없어! 흥!" 용천이 입귀의 피를 손으로 쓱 닦으며 주먹 쥐고 덮쳐들며 계속 야단쳤다.     성칠은 용천의 주먹을 손으로 막으며 진달래를 가리켰다. "진달래한테 물어봐라. 널 사랑하기나 했겠구나." '뭐라고?" 용천은 주먹을 내리고 진달래를 돌아보았다. "그래요. 전 근본 용천 대장을 사랑하지 않았어요." "그럼 왜 내캉 결혼했어?" 진달래는 차마  "저의 첫사랑은 성칠 오빤데요." 하고 입을 떼기 힘들었다. 그는 자기 첫사랑을 받아주지 않고 자기를 용천한테 떠밀어보낸 성칠 오빠가 한없이 원망스러웠다.       기실 통나무집에서 번개식 결혼한 첫날 밤에  진달래는 사랑하지도 않는 용천한테 강간당하는 기분에 잠겼다. 그녀는 성칠 오빠 얼굴을 련상하면서 육체와 마음의 아픔을 간신히 참아냈던 것이다. 진달래는 용천과 우연히 갈라져 조선에 나가 성칠 오빠와 재혼해 산 5년 동안이 얼마나 행복한지 몰랐다. 그러나 죄악의 전쟁은 성칠 오빠를 빼앗아갔다. 아니, 남북 분단의 비극적인 마수가 그들의 단란한 가정을 산산 박산나게 만들었다. 아니, 저게 뭔가요? 글쎄 성칠은 경수를 안고  용천은 경주를 안고 서로 진달래를  바줄당기기를 하듯 밀고 당겼다. "여보, 날 따라 조선에 가기오!" "여보, 당신은 내 본처야, 날따라 남조선에 가자!" 진달래는 그들 둘의 사이에서 각이 다 빠질 지경이었다. "이걸 놔요! 놔!" 진달래가 아무리 고함치며 발악해도 그들 둘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녀는 마구 대성통곡치며 몸부림쳤다. "엄마!" "엄마!" 애들의 울음소리에 진달래는 벌떡 일어났다. 깨고 보니 괴이한 꿈이 아니겠는가!  진달래는 꿈을 깼는데 딱 꿈 같지 않았다. 아직도 용천과 성칠한테 꽉 붙잡혔던 두 손이 얼얼하게 아파났고 가슴마저 미여지는듯이 아파났다. 그녀는 자기 팔자가 안타깝고 용천과 성칠 오빠가 너무나도 원망스러워 울었다. 아마 용천과 성칠은 구천에 가서도 그녀 때문에 서로 싸우며 빼앗을내기 하면서 그녀를 놓아줄 것 같지 않았다. 그것에 마음이 아파났다. 그녀는 고사리손으로 눈을 부비며 엉엉 우는 애들이 불쌍해 한손에 하나씩 품에 꼭 껴안고 눈물을 하염없이 흘렸다.        아, 미제의 침략전쟁과 동족상잔전쟁으로 인해 그 얼마나 많은 부부가 헤여지고 심지어 원수로 돼 싸웠던가. 그 얼마나 많은 가정이 풍비박산났는가! 그 얼마나 많은 초가삼간이 미제 공중날강도들의 폭격을 맞아 재더미로 되였던가!        진달래는 밤이면 밤마다 악몽을 끊임없이 꾸었다.           어느날 밤 진달래는 또 무서운 악몽을 꾸었다.      글쎄 남조선에 도망쳐 괴뢰군이 된 경주와 조선인민군 경수가 서로  퉁사발눈을 부릅뜨고 서슬푸른 총칼을 맞대고 죽기내기로 육박전하며 싸우지 않겠는가! 금강산인가, 설악산인가. 깎아지른 누런 절벽 위에서 경수가 서슬푸른 총창으로 경주를 찌르며 고함쳤다. "이 놈, 네 애비 내 아빠를 살해했어!" 경주는 날창을 비껴치우며 총창으로 찔렀다. "원수놈 새끼야, 네 애비 엄마를 빼앗아갔어. 어디 죽어봐!" "닥쳐라!" 진달래는 황급히 고함쳤다. 그녀는 절벽 위로 쫓아올라가며 연신 돌멩이를 날렸다. 쟁강! 돌멩이가 날아가 서로 얽힌 총창에 맞아 불꽃을 튕겼다. 경수와 경주는 어머니가 뛰여올라온 것을 보고 주춤 날창질을 멈추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간이였다. 또다시 이를 악물고 죽기내기로 육박전을 벌렸다. "그만두지 못해?!" 진달래가 고함치며 두 아들 중간에 뛰여들어 두 손으로 두 총창을 틀어쥐여 허공에 쳐들었다. "얘들아, 너희들은 친형제야." 그러나 동시에 이런 고함소리가 절벽을 아프게 때릴줄이야. "친형제는 무슨 친형제?!." "원수야!" 두 아들이 또다시 퉁방울눈을 부릅뜨고 날창질을 하였다. 진달래는 마음이 너무 미여지는듯해 두 아들을 뜯어 멀리면서 눈물을 팡팡 쏟았다.         "너희들  둘 다 엄마 한배로 배아프게 난 아들들이야.  친형제간에 계속 싸울래? 엄마 죽는 걸 보겠어?! 친형제간에 서로 애비 죽인 원수치부를 해서야 되느냐?" 그 말에 두 아들은 총창질을 멈췄다가 또다시 날창질을 했다.  진달래 힘으로는 둥글소처럼 싸우는 억대우 같은 아들들을 뜯어말릴래야 말릴 수 없었다.       다섯살이나 이상인 억대우 같은 경주가 글쎄 경수의 날창을 비껴치우고 날창으로 푹 찔렀다. 경수가 가슴에 피를 내뿜으며 비칠거릴 때였다. 경주가 발길로 경수 아랫배를 걷어찼다. 경수는 뒤로 자빠지며 절벽 아래로 떨어져 죽지 않았겠는가 "경수야!" 진달래는 만신창이 돼 죽은 경수를 보고 경주의 멱살을 틀어쥐고 흔들며 고함쳤다. "이 지독한 놈 새끼야, 친동생을 죽여?!" 그러나 경주는 눈깔을 뚝 부릅뜨고 시퍼런 총창으로 엄마를 겨눴다. " 엄마도 배신자야! 아빠하구 결혼해가지고 왜 경수 애비캉 바람 피웠어?!" "뭐라고? 어떻게 돼 내 경수 아빠한테 재가했는지 알기나 하고 이래?" 경주는 이를 악물며 고함쳤다. "다 알아! 엄만 배신자야! 죽어도 싸!" "맞아!  배신자야!" 뜻밖에 용천이 구름 속에서 절벽 위에 날아내려오지 않겠는가! 그는 진달래한테 총을 겨누며 지껄여댔다. "너거 엄만 돌멩이로 내 머리를 까 빨갱이들한테 붙잡아 바쳤어!" "닥쳐!" 아니, 성칠이 절벽에 기여올라오며 고함치지 않겠는가. "진달랜 날 사랑했지. 널 사랑하지도 않았어!" 용천은 총으로 진달래를 먼저 쏘았다. 뒤이어 절벽에 기어오른 성칠을 쏘았다. "여보!' 진달래가 손을 뻗쳐 절벽에서 떨어지려는 성칠의 손을 잡아끌어당겼다. 그때 용천은 한발에 성칠과 진달래를 절벽 아래로 차 떨어뜨렸다. "앗!" 진달래는 성칠과 함께 떨어지면서 경주의 종아리를 붙잡았다. 그런데 글쎄 경주는 발길로 진달래를 걷어차며 너털웃음을 쳤다. "배신자는 죽어야 해! 허허허." 성칠은 절벽에서 떨어졌지만 아무 일도 없었다. 그는 권총을 뽑아들더니 용천과 경주를 쏘았다. 용천과 경주는 절벽에서 허망 떨어져내려왔다. 진달래는 경주를 받아안으려고 두 팔을 벌리고 절벽 밑에 뛰여갔다. "경주야!" 그러나 경주는 절벽에서 떨어져내려오면서 고함쳤다.  "배신자야!" 그 고함소리에 꿈에서 깨난 진달래는 와닥닥 일어났다. 그녀는 쌔근쌔근 자는 애들의 얼굴을 매만지면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것이 꿈만 같지 않았다.         죄악의 38선악마에 의해 남북으로 분단된 나라에서 휴전해 숨고르기를 하는 한 소국의 약소민족은 항상 형제간, 부부간, 전우간에도 원수로 돼 생사결판으로 싸우는 전쟁악몽은 끝없을 것이 아닌가!        지구촌에서 국제경찰행세를 하는 패권주의자 - 미제  호전광들이 남조선 땅에 있는 한 항상 전쟁의 불씨는 남아 있을 것이 아닌가! 나라가 남과 북으로 쪼각나 있는 한,  작은 나라,  약소민족의 비극은 끝없을 것이 아닌가!                                              제23장 충신과 효자                                                                                                                                                                                       1. 귀향 눈보라가 기승스레 불어치더니 맵짠 겨울의 추위가 뼈 속까지 스며들었다. 박달나무가 얼어 탁탁 터질 듯하고 여우가 추워서 눈물을 흘릴 맹추위가 성큼 다가왔다. 병완은 촌공소 바깥에 나가 마루 위에 서서 눈보라치는 산과 들을 바라보며 이 추운 겨울에 성칠은 어느 무명고지 눈 속에 파묻혔는지? 승냥이가 물어 갔는지? 근심이 태산 같은 돼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었다. 조선에서 배불리 먹으면서 살자고 간도에 와서 중국 공산당의 덕분에 일본 놈을 몰아낸 후 광복을 맞았다. 친일주구와 지주들을 청산하고 땅을 분배 받아 쌀독에 쌀을 꼴딱꼴딱 채워놓고 잘 살까 하니 애를 먹이는 놈들도 많았다. 장개석 국민당 반동파들이 못살게 굴었고 토비들이 성화를 부렸다. 국민당 잔여세력과 토비들을 숙청하고 전국을 해방하고 강대한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워 이젠 근심 없이 살겠다고 발편잠을 자게 됐다. 그런데 이번에는 미군이 파견한 특무 놈들이 성화를 부렸다. 맏아들마저 미제를 몰아내려고 조선 전쟁에서 희생됐다. (저 어린 손자 경수를 어쩌겠는가? 경수와 경주는 이부동복 형제간이지만 장차 서로 원수의 아들이라 서로 복수하려고 하지 않을까?) 병완은 이일 저일 근심이 태산 같았다. (주책없이 오래 사니 맏아들을 다 앞세웠구나. 어지러운 난시야. 전우와 형제가 원수로 돼 서로 죽여야 되는 전쟁! 이 놈의 전쟁이 언제 끝날까?) 병완은 저도 몰래 밭고랑처럼 파인 이마 쌀을 찌푸리더니 주름살이 조글조글한 두 볼에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이때 상순이 찾아왔다. “할아버지, 원수를 다 갚았는데 너무 상심하지 마십시오.” “백발머리 늙은이가 검은머리 아들을 앞세운 비길 데 없는 마음을 누가 다 알겠느냐?” 병완은 막내손자에게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손바닥으로 눈귀에 글썽한 눈물을 쓱 닦으며 몸을 돌려 촌공소로 들어갔다. “할아버지, 내 공안사업을 그만두고 조선 전선에 나가 큰아버지 원수를 갚겠습니다.” “뭐라니?” 병완은 자리에 앉았다가 벌떡 일어났다. “너 공안국장을 하지 않고 전선으로 가다니?” “여기 미군 특무도 다 잡아냈지. 할 노릇이 있습둥? 미군이 여기까지 쳐들어오기 전에 총을 메고 미군 양키놈들과 통쾌하게 싸워 봤으면 좋겠습니다.” 병완은 한참 궁리하다가 말했다. “그래도 전도를 잘 생각해봐라. ” 상순은 대수롭잖게 말했다. “할아버지, 미제를 몰아내고 제가 퇴대하면 이 마을에 돌아와서 할아버지와 함께 백성들이 쌀독과 물독을 꼴딱꼴딱 채워놓고 잘 사는 사회주의 새 마을로 건설하면 안 됩니까? 이젠 할아버지와 아버지도 연세가 계시는데 제가 옆에서 조석으로 보살펴드려야겠습니다.” “아니야, 아니야. 예로부터 충신은 효자 아니야.” 상순은 정중하게 말했다. “할아버지, 저는 혁명사업을 잘하는 나라의 충신이 될 뿐만 아니라 할아버지와 부모를 효성을 다해 모시는 효자로 되겠습니다.” 병완은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아니야, 아니. 충신과 효자 다 될 수 없느니라. 어느 한 가지는 버려야 한다. 우리 근심하지 말고 공안국장을 그만두겠다는 생각을 버려라.” 그러나 상순은 이미 마음을 먹은 것 같았다. “내 하루 이틀 생각한 게 아닙꾸마. 혁명사업과 효성을 위해서라면 난 벼슬도 초개같이 여깁니다. 마을에 돌아와 혁명사업과 효성을 모두 잘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습둥? 딱 공안사업만 사업입둥? 마을에 와서 사회주의 건설을 잘 해 마을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 잘 살게 해도 역시 혁명을 하는겝꾸마.” 병완은 촌공소에서 나가는 너부죽한 상순의 잔등을 보며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어쩌자고 낮은 돌을 밟아? 효자로 되려는 걸 보니 큰 일 하긴 틀렸구나.” 상순은 집에 돌아가자마자 명옥을 보고 물을 끓이라고 하였다. 그는 괭이와 삽을 들고 바깥으로 나가 마당 눈 밑에서 흙을 꺼 버치에 담아 정지에 들여왔다. 기준은 옆구리가 아파 상을 찡그리면서 윗방에서 일어나 앉았다. “뭐하려고 그래?” 상순은 바가지로 가마 안에서 김이 물물 나는 뜨거운 물을 퍼서 흙에 부었다. “벽을 발라야겠습구마.” “야, 어떻게 겨울에 언 벽을 바르니?” 상순은 삽으로 흙을 이겼다. “지금 바르지 않고 어떻게 추워서 이 겨울을 나겠습둥?” 기준은 눈을 치켜떴다. “참군할 예산이야?” “예. 미국 놈들이 우리 연변에까지 특무를 보내는 거 봅소. 어디 여기서 마음 놓고 살게 합둥? 조선 전선에 나가 통쾌하게 미군 놈들을 쓸어 눕히겠습꾸마. 그간 아버지 아픈 몸으로 수고하겠습구마. 조선전쟁이 끝나면 마을에 돌아와서 아버지를 조석으로 모시겠습꾸마.” “뭐라고? 공안국장은?” “근심하지 맙소. 마을 혁명도 혁명입꾸마. 아버지와 처자들을 굶게 할 순 없습꾸마.” 기준은 흙에 뜨거운 물을 쳐 주면서 조용히 말했다. “얘, 네가 국장인데 우리 이 기회에 영월구로 이사 가면 안 되니? 대대손손 농사를 짓고 살았는데 아들 덕에 시내 사람으로 살면 좀 좋니?” 상순은 흙을 이기던 삽을 짚고 서서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 “아버지, 내라고 어째 아버지와 처자들을 시내호구로 올리고 시내에서 편안히 잘 살게 하고 싶지 않겠습둥? 허나 공산당원은 권력을 빌어 사심을 챙겨선 안 됩니다. 더구나 조직에 손을 내밀어 부담을 끼쳐선 안 됩니다. 내 마을에 돌아오면 모든 게 다 풀릴 겁니다.” 기준은 완전 다른 사람이 돼버린 상순을 보고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었다. "큰형님을 조선 전쟁에 잃었는데 또 너를 생사를도 모를 전쟁터에 내보내? 정말 근심스럽구나.” “근심하지 맙소. 난 항일유격대원 때부터 일본 놈과 국민당 군, 토비, 미군특무들과도 싸웠습꾸마. 내 전투경험과 무예면 얼마든지 미군 양키 놈들을 까부실 수 있습꾸마.” 상순은 외양간에 들어가 소똥을 퍼내 진흙에 이겨 구새 목으로부터 돌아가면서 벽을 발랐다. 허나 인차 흙이 얼어 바르자마자 인차 떨어졌다. 그리하여 상순과 기준은 더운 물을 끓여가지고 흙을 이겨 얼기 전에 벽을 발랐다. 원래 기둥을 세우고 수수대로 에를 대충 엮어놓고 흙을 대충 바른 얇은 벽이어서 겨울에 집안이 이가 덜덜 떨릴 지경으로 추웠다. 쑥대 같은 마른 풀대로 불을 때서 밤중은커녕 초저녁도 되기 전에 구들이 얼어들기 일쑤였다. 그런데 눈보라 치는 초 겨울에 언 벽에 소똥을 바른들 제대로 붙겠는가? 바람을 어찌 막으랴? 허나 상순은 그렇게라도 벽을 발라놓아야 조금이라도 시름 놓고 집을 떠나 부대에 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이때 앞마당이 대성통곡치는 소리 들렸다. 시끌벅쩍 시끄러워졌다. “누가 저래?” 아버지 말에 상순이 앞마당에 나갔다. 윗집 덕성이 주먹으로 벽을 쿵쿵 쳐대며 대성통곡을 치는 것이었다.  그는 상순을 보자 씽 덮쳐들어 멱살을 틀어쥐었다. “야, 이 놈 새끼야, 죽고 살고 해 보자. 네 놈이 내 조카를 죽였어! 난 이젠 아들딸도 조카도 없어. 아내도 손자도 없어! 무서울 거 없어!” 상순은 덕성 영감을 콱 밀쳤다. 덕성 영감은 울바자 굽에까지 뿌리어나가 엉덩방아를 쿵 찧었다. 다행히 뒤에 울바자에 걸려 뒤 골은 깨지 않았다. “영감! 적반하장이라고 누가 할 소리를 합둥? 용천은 우리 성칠 큰아버지를 쏴 죽였어!” “병수가 말하지 않던? 그들 둘은 진달래 때문에 깨끗한 결투를 했다고! 성칠은 용천의 경호원이 쐈더랬어.” “결투? 이 놈 영감 정말 정신 있어? 어째 남조선 특무 둘이나 영감네 집에 들었댔어? 영감도 남조선 특무를 도운 혐의가 있어!” 상순은 세 귀 눈을 부릅뜨고 고래고래 고함쳤다. 마을 사람들이 울바자 밖에 와 웅성거렸다. 지군선은 때를 맞났다고 지껄여댔다. “공안국장질을 하더니 개 잡은 포수처럼 우쭐거리긴. 흥! 이 마을이야 병완 영감과 상순이 쥐락펴락 하는 세상이 아니고 뭐요?” 상순의 세귀눈에 독기가 서리었다. 덕성은 머리를 상순의 가슴팍에 들이대고 떠밀었다. “이 자식아, 그 권총으로 날 죽여! 내 남조선 특무여. 죽여라! 죽여! 이 놈아!” 상순은 뒤로 몇 발자국 물러서며 참다못해 손바닥으로 덕성 영감의 머리를 콱 떠밀었다. 덕성 영감은 밑둥 잘린 썩박나무처럼 나가 쓰러졌다. “영감, 한 고향 영감이라고 놔두는 줄 아오.” 상순의 말에 덕성은 비실비실 뒤로 물러서더니 울바자 밖으로 나가며 하늘을 향해 두 손을 펼치며 소리쳤다. “아들 딸이 다 죽고 없어. 누굴 믿고 살아야 하나? 어허허!” 상순은 마을 사람들이 쑤군거리자 안 되겠다 싶어 고함쳤다. “칠백은 용천이 죽였소! 사촌형제가 총창으로 육박전 하다가 찔러 죽였소!” 처음 듣는 상순의 그 말에 덕성 영감은 천천히 돌아섰다. “너거 어찌 알아?” “병수 형님에게서 다 들었어!” “그래? 맞다! 알고 보니 너도 특무의 동생이라. 병수 특무를 너 형이라면서? 허허허. 이 특무 동생 놈아, 너도 특무야!” 기준은 듣다못해 한발 나섰다. “형제끼리 총부리를 맞대고 서로 죽이는 이 놈의 난세에 용천은 남조선을 지키느라고 우리에게 총을 겨눴고 우린 우리 중국을 보위하기 위해 용천을 나포했소.” 사람들 속에서 흥수 옆에 선 춘실이 빨간 입술을 앵두 알처럼 쫑긋했다가 입귀를 씰룩거렸다. “픽! 권총을 찼다고 우쭐거리긴!” 상순은 가까이에 있었으면 춘실의 귀쌈이라도 한 대 찰싹 갈겨주고 싶었다. 그는 마을 사람들이 흩어져 간 후 아버지와 함께 벽을 대충 한 벌 발라 놓았다. 오후에 공학과 벽선이 상순이네 집으로 찾아왔다. “큰조카, 얼른 올라오라.” 상순은 그들을 반갑게 맞았다. 상순은 딸을 넷이나 줄줄 낳으면서 아들을 보지 못했다. 그래서 다섯째 애는 아들을 보려고 넷째 딸의 이름을 금자라고 지었다. 그는 조카들인 공학과 동선을 자기 아들처럼 귀해 하면서 각별히 아꼈다. “무슨 일이냐?” “삼촌, 벽선과 결혼해야겠습니다.” 벽선은 조왕칸 쪽으로 앉아 머리를 다소곳이 숙인 채 손가락으로 까래 톱을 매만졌다. “그래, 내 입대하기 전에 너희들 사돈보기도 해주고 결혼식을 올려주면 시름 놓겠다. 아버지하구 엄마는 어쩌더냐?” 공학은 너부죽한 얼굴에 만면춘풍이었다. “부모들은 우리 둘의 약혼을 동의했습니다. 삼촌과 함께 사돈인사를 가면 어떻겠는가고 합디다.” “좋아. 내 사돈인사를 하러 가지 뭐.” 공학은 그저 좋아서 싱글벙글 웃었다. 벽선은 얼굴에 수심의 그림자가 스쳐지나갔다. “김 동무, 그 뒷덜미 부스럼이나 잘 치료하오.” “어째? 무슨 부스럼이기에 결혼을 미뤄?” 공학은 머리를 숙이면서 손가락으로 자기 뒷덜미를 가리켰다. “전번에 조선인민군 한 부상병에게 내 피를 뽑아 수혈했는데 부스럼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상하게 부스럼이 점점 더 커지면서 띠끔띠끔 아픕디다.” 상순은 공학에게 다가가 부스럼을 들여다보며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병원에 있는 게 자기 병도 소홀히 하지 말고 제때에 치료해라.” 그러나 공학은 대수로워 하지 않았다. “언제 부스럼을 치료할 새 다 있겠습니까? 생사를 다투는 부상병들이 수태 들어오는 때.” 상순은 공학이가 병원에 있으니까 후에 잘 치료하리라고 믿고 화제를 돌렸다. “새애기 고향이 어데요?” “국자가에 있습니다.” “음, 시내 처녀구만.” 뒤이어 상순은 벽선의 가정정황을 죽 물어 보고 아버지를 보고 사돈보기와 결혼 택일을 해 형님한테 보냈다. 조카들이 돌아가자 상순은 명옥과 함께 마당에 나가 도리깨를 휘둘러 콩 타작을 했다. 이튿날 상순이 정미소에서 벼를 찧어 수레에 실을 때다. 영월구에서 천룡구 부국장과 허영호 과장이 찾아왔다. “김 국장, 어서 공안국으로 돌아갑시다.” 상순은 겨 먼지가 묻은 손을 탁탁 쳐 털고 손을 내밀었다. “천 국장한테 정식으로 말하자 했는데 잘 왔소.” 뒤이어 상순은 권총집을 벗어 천룡구 국장에게 내밀었다. “왜 이럽니까? 김 국장.” 천룡구는 놀랐다. 허영호도 깜짝 놀랐다. 허나 상순은 아주 태연자약한 표정을 지었다. “국장을 하지 않고 항미원조 전선에 나가겠소.” 천용구 국장은 입을 헤 벌렸다. 이해되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아니, 여기도 전선입니다. 여기서도 미제와 싸우고 있지 않습니까?” 상순은 정미소 안에서 큰아버지랑 사촌형님이랑 내다보자 천룡구와 허영호를 한쪽으로 데리고 가서 나직이 말했다. “난 혁명을 위해서라면 벼슬 같은 건 초개같이 여기네. 전선에 나가 미제 대부대와 통쾌하게 싸워보고 싶소.” “공안국 사업은 어쩝니까?” “난 동무들이 꼭 공안사업을 잘하리라고 굳게 믿소. 내 상급 공안부문에 이미 제기했소. 내 대신 천 국장을 국장으로 제발하고 허영호 과장을 부국장으로 제발시켜달라고.” “안됩니다! 김 국장!” “못갑니다. 김 국장!” 천룡구와 허영호는 이구동성으로 상순을 말리었다. 상순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난 이미 마음을 먹었으니 돌아가 허백호 서기와 전 현 공안일군들에게 전해주오. 바쁜데 다신 나를 찾아오지 마오. 난 인차 마을의 청년들과 함께 참군해 전선에 달려 나가야겠소.” 그래도 천룡구는 상순의 팔을 잡고 눈물이 글썽해 말리었다. “왜 이럽니까? 그래도 난 김국장이 집 근심을 할까봐 김국장네 집식구들을 영월구에 모셔가자고 했는데. 왜 이럽니까?” 그러나 상순은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아니오. 절대 안 되오. 난 조직에 부담 끼치지 않겠소.” 천룡구 부국장은 손사래를 쳤다. “우리 공안국엔 김국장의 지도가 필요합니다. 김 국장이 아니었더라면 우리 오늘이 있었겠습니까?” “김 국장, 우리와 함께 영월구로 돌아갑시다.” 허영호가 쌀 마대를 수레에 싣는 사이에 천룡구는 상순을 한쪽으로 끌고 가서 나지막이 뒷말을 이었다. “허백호 서기도 이젠 진수해향당위 서기로 전근해 간답니다. 근심 말고 돌아갑시다.” “허 서기 때문이 아니요. 갓 일떠선 우리 중국을 지키기 위해 조선 전선에 나가려는 거요.” 천룡구는 한숨을 후 내쉬었다. 허영호도 쌀 마대를 수레에 실어다 상순이네 집에 부리어 주고 나서 돌아가자고 극구 권고했다. 허나 상순의 마음은 바위처럼 움직일 줄 몰랐다. 상순은 조왕간 쪽에 죽 세워놓은 쌀독을 열어 보이면서 말했다. “보오. 내 서른이 넘도록 우리 집 쌀독에 이렇게 새하얀 입쌀이 꼴딱꼴딱 찬적은 없었소. 난 우리 온 마을 나아가서 우리 중국 조선족들이 배불리 먹는 사회를 목숨으로 지키고 싶소.” 상순은 천룡구의 어깨를 다독이며 부탁했다. "소서구 장리국이 사라졌소. 혹시 대만특무들과 련관되지 않았는지 면밀히 주시하오." "예, 꼭 잘 감시하겠습니다."         후에 안 일이지만 장리국은 대만특무들과 함께 휩쓸려 특무활동을 하다가 대만특무들을 데리러 온 비행기에 앉아 대만으로 도망쳤던 것이다.         한편, 천룡구 부국장과 허영호는 민병이던 자기들을 공안전사로, 공안간부로 양성, 제발시킨 은사님인 상순과 차마 리별하기 어려웠다. 그들은 팔소매로 눈물을 닦으며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간신히 떼놓으며 영월구로 돌아갔다.         산과 들에는 스승과 제자들이나 다름없는 그들 리별의 눈물로 하얗게 바래진 눈보라가 윙윙 기승스레 불어쳤다.        저자 주: 천룡구 부국장은 김상순(당시 실재한 공안국장 김진임.)의 제발을 받아 김상순의 후임으로  안도현공안국 국장으로 제발됐으며 선후하여 왕청현공안국 국장, 왕청현인민검찰원 검찰장으로 오래동안 사업하다가 정년리직휴양한 력사적으로 실재한 리직로간부임.  
100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78) 댓글:  조회:1515  추천:1  2017-08-26
                                                10. 검은 그림자         해가 서산으로 그물그물 져갈 때 공학과 벽선이 공안일군들의 트럭에 앉아 함흥촌 촌공소에 들어섰다. 상순이 황급히 마주 나가보니 천룡구 국장이 보이지 않고 대신 허영호 과장이 공안일군 대여섯을 데리고 오지 않았겠는가. 상순은 허백호 서기와 관계를 윤활하게 처리하려고 허영호를 현공안국 정철과 과장에 진수해파출소 소장을 겸임시켰던 것이다.  “보고, 김 국장. 명을 받고 달려왔습니다. 전투임무를 맡겨주십시오.” 허영호가 군례를 척 붙였다. 상순은 인차 답례하고 나서 허영호 일행을 데리고 촌공소 안에 들어가 할아버지한테 인사시켰다. 서로 인사를 끝내고 자리에 앉자마자 상순은 영호과장에게 물었다. “어째 천 국장은 오지 않았소?”  “천 국장은 로야령 일대에 또 미제 남조선 특무들이 날아내려 현 공안국의 대부분 공안일군들을 데리고 간다고 알리라고 합디다.” 상순은 허영호의 대답에 머리를 끄덕였다. 이젠 천용구는 오래잖아 국장으로 제발될 것이었다. 상순은 자기가 제발시킨 천용구의 발전에 마음 속으로 얼마나 기쁜지 몰랐다. 상순은 눈길을 옆에 서 있는 공학과 벽선에게 돌렸다. “인차 저 트럭에 앉아 도문과 개산툰 병원에 가라. 요즘 조선에서 병원에 들어온 조선 부상병들에게 용천과 이병수라는 조선인민군 군관이 왔는가 알아보고 오너라.” “용천 대장이 의심스럽습니까?” 떡 서서 자기를 바라보는 공학을 보고 상순은 여럿을 둘러보며 의심되는 몇 가지를 말했다. “용천 대장이 찬 권총은 조선인민군 소련제 권총이 아니고 미제 모젤권총이었다. 그들이 신은 군화는 남조선괴뢰군이나 미군이 신는 군화인 거 같아. 내 소서구에 숨어서 볼라니 그들 둘은 조개덕 뒤 한족묘지에 숨어서 망원경으로 우리 마을을 한참 살피다가 들어왔다.” 그제야 공학은 황급히 바깥에 뛰어나가 트럭에 올라탔다. 바깥에서 트럭이 급히 떠나는 엔징 소리가 요란히 들리더니 점점 멀어져갔다. 이윽고 진수해파출소에서도 공안일군들 넷이 찌프에 앉아 동선의 안내를 받으며 달려왔다. “난 영월구 공안 분국 국장 김상순이오. 마을의 민병들까지 합세하면 이 병력으로 이 부근에 날아 내린 특무들을 붙잡기는 문제없소.” 상순은 자기 작전방안을 내놓았다. “지금 용천과 병수가 특무라는 확실한 증거를 쥐지 못한 형편에서 풀을 건드려 뱀을 놀래지 말아야 하오. 그물을 좀 더 넓게 쳐 큰 고기를 낚아야 하오.” 그 말에 모두들 머리를 끄덕였다. 상순은 좌우를 둘러보며 뒷말을 이었다. “먼저 우리 마을에 뛰어든 불청객들을 면밀히 감시하는 한편 가능하게 바깥에 있을 다른 특무들을 수색해내야 하겠소.” 그는 뒤이어 민경들에게 이리이리 하라고 지시했다. 민경들은 상순의 지시대로 분조를 나눠 어둠이 깔린 산으로 수색하러 올라갔다. 병완은 마을의 흥수와 상진, 보준, 한봉 그리고 외손자들인 동길, 명길까지 불러 민병들을 조직해 전투를 포치했다. 민병들은 분조를 나눠 먼발치에서 용천과 병수가 들어있는 덕성이네 집을 물 샐 틈도 없이 에워싸고 감시했다. 자정이 돼 공학과 벽선이 민경과 함께 트럭에 앉아 웃새집 앞 큰길에 들어섰다. 그런데 병완은 어데 갔는지 집에 없었다. 공학과 벽선은 황급히 상순 삼촌의 집으로 뛰어갔다. 그때 상순은 마당의 울바자 안에 숨어서 서쪽 덕성이네 집을 살피고 있었다. “그래, 알아 봤느냐?” “예.” “집에 들어가 얘기하자.” 상순은 어둠이 두텁게 덮인 주위를 둘러보더니 윗방으로 들어갔다. 공학은 목소리를 낮춰 정황을 알렸다. “도문과 개산툰 병원에 가서 알아봤습니다. 그런 군관 온적이 없답니다. 부상병을 호송한 간호사들과 전사들, 심지어 부상병들도 용천과 병수라는 군관은 전혀 들어본 적도 없다고 합디다.” 상순은 별로 놀라지도 않았다. “내 그럴 줄 알았다. 부상병은 간호사들과 병사들이 호송하는 게 상례지. 용천과 같은 군관이 전선에서 싸우지 않고 후방으로 부상병이나 호송할 순 없다. 별로 이상하다 했더니. 흥!” 상순은 무슨 궁리를 하더니 숙였던 머리를 들었다. “할아버지한테 가자.” “노할아버지가 어디로 나가고 계시지 않습디다.” “이 밤중에 어디로 갔을까? 병수도 보이지 않고. 아차, 할아버지가 위험하다.” “웃새집 큰어머닌 소서구 쪽으로 올라갔답디다.” “뭐라고?” “넌 윗집 용천의 동태를 살펴라.” 상순은 공학에게 부탁하고 권총을 빼들고 후닥닥 뛰어나갔다. 그는 쏜살같이 태평강을 건너 천지꽃산 비탈로 오르기 시작했다. 할머니 산소로 거의 올라갈 때 할아버지가 대성통곡 치면서 하는 말소리가 어둠을 타고 울렸다. “여보, 노친~ 내 오래 사니 별 일을 다 보겠소~ 으흑흑, 자식을 앞세우고 내 무슨 멋에 산단 말이오? 황소 같던 맏아들을 조선 전쟁터에서 미군 비행기 폭격에 잃었소. 그 놈이 이 추운 겨울에 어느 산에서 어는지? 승냥이들이 물어갔는지 알 길이 없, 없소~ 저 애비 없는 장손 경수가 불쌍하오.” 상순은 할아버지가 맏아들을 그리며 할머니 산소에서 대성통곡치고 계시는 것을 보고 마음이 칼로 에이는 듯이  아팠다.       그가 산소로 달아가려고 할 때다. 갑자기 나무숲 속에서 버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상순은 멈칫 멈춰서며 허리를 굽히고 어둠속의 나무 숲속을 살피며 귀를 도사렸다. “할아버지!” 나무 숲 속에서 누군가 나오며 소리쳤다. “누구야?” “손자 이병수예요.” “손자?” “그래요. 전 할아버지 손자벌 돼요. 기억나요? 한산섬의 이성군 할아버지 말이예요.” “큰 처남 말인가?” “예. 제가 바로 이성군 할아버지 맏손자예요. 기억나죠. 이전에 제가 할아버지랑 아버지랑 함께 명천 운주동에 갔죠.” “아, 그래. 기억난다. 네가 그럼 큰처남의 손자란 말이냐?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병완은 병수를 와락 끌어안았다. “그래, 네로구나. 정말 꿈만 같구나.” 병완은 병수를 끌어안고 노친의 산소에 대고 울면서 말했다. “여보, 노친, 보았소? 이게 꿈이오? 생시오? 당신이 그렇게 보고 싶어 하던 본가집 손자 병수가 왔소. 으흐흑, 오래 살아야 할 당신이 가고 내 이렇게 오래 살아 뭘 하오?” 병수는 권총집을 잔등 뒤로 돌려놓고 넓적 엎드려 큰 절을 올렸다. “할머니, 고향에서 이제야 찾아온 손자의 절을 받으세요. 왕고모할머니― 어허헉, 할아버진 생전에 할머니를 얼마나 찾으셨다고 그래요. 허헉헉, 헉헉.” 상순은 그제야 병수가 바로 이전에 운주동에 와서 자기와 놀던 형님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형님, 나 상순이오.” 상순이 다가가자 병수는 일어나 팔소매로 눈물을 닦으면서 상순을 와락 끌어안았다. “진작 알았어. 네가 바로 성칠 큰아버지가 외우던 공안국 국장 동생인 걸 진작 알았다.” “헌데 왜 이제야 말하오?” 병수는 상순을 끌어안고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 뒤이어 그는 병수와 함께 할머니 산소 옆에 나란히 앉았다. 병수는 거짓말 절반 정말 절반 꺼냈다. “성칠 큰아버지는 우리 조선인민군 연대장이죠. 난 저 용천 대장과 함께 성칠 큰아버지네 조선인민군에 입대했지. 그때 성칠 큰아버지는 조선인민군을 영솔해 경남에까지 쳐들어갔어요. 후에 용천 대장은 전선에서 큰아버지 연대의 부연대장을 했고 난 큰아버지가 봐줘서 대대장으로 됐어요. 전 잘 몰랐던 건데요. 왜 용천과 성칠 큰아버지가 진달래 어쩌고 경주와 경수 저쩌고 하면서 고양이와 쥐처럼 싸우는지 영문을 정 몰랐댔는데요.  지금에야 알 것 같아요. 원래 진달래 아주머니 때문이야. 서로 자기 아내라고 아귀다툼한 거지.” 욱 하면 벽도 마구 차고 나가는 성미인지라 상순은 길게 늘여놓는 병수의 말을 중둥무이를 시켰다. “그래 대체 어쨌단 말이오? 성칠 형님은 확실히 미군 폭격기 폭격에 희생됐소?” “바로 그거 때문이야.” 어둠 속인지라 병수의 표정은 볼 수 없었지만 말만은 아주 똑똑했다. 병수는 한숨을 후 땅이 꺼지게 내쉬었다. “난 누가 큰아버지를 살해했는가를 알려주자고 이 곳에까지 용천 대장을 따라 온 거예요.” “그래 누가 우리 큰아버지를 살해했소?” “저 용천이란 놈이 죽였어.” “뭐라고?” “내 말 들어요.” 병수는 산소 주위를 둘러보더니 끝내 큰마음을 먹고 무거운 입을 열고야 말았다. “왕고모 돌아가신 걸 알고 모든 걸 무덤에 가지고 가려고 했던기여. 허나 할아버지께서 할머니 산소에서 대성통곡치실 때 내 마음 비길데 없어졌어. 저 용천이 무명고지에서 큰아버지 가슴에 총을 놔서 살해했던게라.” “사실인가?” “그래.” “절대 그럴 수 없어. 큰아버진 어떤 명사수 사냥꾼이라고. 용천에게 다 당해?” “사실이라니께. 무명고지에서 성칠 큰아버진 산 위에서 달려 내려가며 총을 쏘았지. 용천은 산 아래에서 올리쏘았지. 용천은 어깨에 관통상을 맞고 쓰러졌어. 허나 큰아버진 가슴에 총을 맞고 눈 덮인 무명고지에 쓰러졌어. 가슴에서 뻘건 피가 쿨쿨 쏟아져 허연 눈을 뻘겋게 질벅하게 물들였지.” “넌 조카라는 놈이 왜 용천을 죽여 버릴 게지. 놔뒀어?” “개인 원수를 어떻게 갚아? 조선인민군은 강철 같은 기율이 있어요.” “네 놈이 가슴에 피가 흐른다면 친혈육을 살해한 원수를 갚지 않는단 말이냐?” 병수는 자기 멱살을 틀어쥐어 마구 흔드는 병완의 손을 풀면서 중얼거렸다. “그런 형편이 있었어요.” “뭐야?” 상순은 반말이 나갔다. “용천의 힘을 빌려 한국군에 혼입한 친일주구 한철주와 한선주 형제를 처단했던 거야.” “뭐라고?!” “천천히 들어봐.” 병수는 잔등 뒤에 돌려갔던 권총집을 앞으로 끌어 돌려오고 뒷말을 이었다. “용천 연대장은 친일주구를 한없이 증오했어. 서울에서 한철주와 한선주 형제를 발견하자 우린 조선인민군에 입대한 사실을 속이고 한국군에 입대하는 척 하면서 그 놈 형제들의 군부대에 잠입했댔어.” “그래서?” 상순은 대뜸 경각성을 높이며 사위를 둘러보았다. “우리 둘은 기회를 노리다가 눈 내리는 날에 그 놈 형제 뒤를 밟아 쇠파이프로 대갈통을 까서 죽여버렸던 거야. 우린 적정까지 정찰해 가지고 자기 부대로 돌아왔어. 그래서 우린 무명고지와 508고지를 몽땅 점령했어.” “우리 마을에서 간 칠백이랑 최동욱이랑 잘 알겠구만.” “알다뿐이겠어? 다 죽었어. 칠백 대대장은 한국괴뢰군과 육박전을 벌려 여섯 놈이나 찔러 죽이고 장렬히 희생됐어. 용천 연대장은 사촌동생을 잃고 대성통곡쳤지.” 병완은 믿어지지 않았다. “무슨 말이야? 용천 대장이 자기 사촌동생 칠백을 죽였다니?” “에이, 처참했어요. 무명고지 백병전에서 용천 연대장이 총창으로 칠백의 총창을 막는 새 다른 한국군 병사가 칠백을 찔러 죽였어요.” “그랬구나.” 병수는 횡설수설 말도 많았다. “난 함흥촌에 와서 할아버지랑 친척들을 찾아보려고 부상병을 호송한 후 여기 왔제이. 용천 연대장은 아마 진달래 아줌마와 경주를 고향에 데려 갈락꼬 왔죠.” 상순은 병수의 그럴듯한 말에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병완은 병수의 어깨를 다독였다. “너 잘 왔어. 아무튼 남조선은 가난한 사람이 살 고장이 아니야. 여긴 가난한 사람이 살기 좋은 세상이야.” 상순도 병수를 꿰뚫어보면서도 할아버지를 따라 눅잦혔다. “와 보니께 함흥 촌은 확실히 살기 좋아요. 빈부차 없이 모두 평등하게 사는제(지)라.” 병수는 아주 그럴듯하게 엮어댔지만 숱한 의문을 누설했던 것이다. 경주에서 조선 인민군에 입대했다는지, 조선인민군 신분으로 서울에서 한국군 연대장을 하는 한철주와 한선주 형제 뒤를 밟아 쇠파이프로 때려 죽이었다는지, 한국군에 입대하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변복하고 뒤를 밟아 권총으로 한철주와 한선주를 죽일 수 있지 않는가? 그런데 하필 우둔하게도 파이프로 때려 죽여? 한국 괴뢰군에 거짓 입대했다는지 용천은 조선인민군이라면서 진달래와 경주를 한국 고향 경주에 데려가려고 왔다는지 하여간 빈틈이 벌집처럼 숭숭했다. 상순은 아직 다른 특무의 꼬리를 밟지 못한 형편에서 소홀히 풀을 건드려 뱀을 놀래지 않으려고 했다. 허나 나라의 적일뿐만 아니라 성칠 큰아버지를 참살한 원수 용천은 처단해야 했다. 상순은 한숨을 땅이 꺼지게 후― 내쉬었다. “형님, 잘 알았소. 큰아버지를 살해한 원수는 용서할 수 없소.” “그래 될까? 당 조직에도 기율이 있잖아?” “전우를 죽인 원수 놈은 죽어 마땅하오. 그 놈은 큰아버지를 살해한 죽을 죄를 졌어.” 병수는 산 아래로 내려가기 전에 왕고모 이성희의 산소에 엎드려 큰 절을 올렸다. “할머니, 고향을 떠나 이 머나먼 간도 땅에 묻히다니오? 내 어떻게 아버지한테 말해라우? 흑흑, 할머니 왜 우리 가문은 이렇게 사처에 흩어져 살아야만 해요?” 병수의 흐느낌 소리는 병완과 상순의 코마루를 시큼하게 만들었다. 병수는 혈육의 정으로 될 수 있는 한 자기를 은폐하고 보호를 받고 싶어 별로 정도 없는 할머니 산소에 이마가 깨지게 조아리며 절을 꾸벅꾸벅 하면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원래 병수는 용천의 명에 따라 마을 동정을 살피다가 수림 속에 가서 다른 특무들에게 밥을 전해주기로 했던 것이다. 그런데 병완의 동정을 살피러 갔다가 뒤를 밟아 산소에까지 왔고 뒤에 상순이네가 따르는 인기척을 느끼고 산소에 나왔던 것이다. 그는 언제든지 용천이 큰아버지 성칠 연대장을 살해한 진상을 까밝혀주려고 했지만 자기 정체도 누설될 가봐 주저하고 있었던 것이다. 허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그렇게 찾던 할머니 산소 앞에서 대성통곡치는 할아버지 병완을 보고는 더는 참을 수 없어 거짓말 절반 진짜 절반 섞어 용천이가 성칠을 살해한 진상을 반이나마 밝히고 말았던 것이다. “얘들야, 돌아가자. 지금 사처에 남조선 특무들이 널려 있어 위험하다.” “예? 특무라니오?” 아닌 보살을 하는 병수를 보고 병완은 코웃음이 나왔다. 그는 상순을 따라 산 아래로 내려가는 병수의 비틀거리는 잔등을 보다가 일부러 뒤로 떨어져 걸었다. “먼저 집으로 내려가라.” 병완은 일부러 한어로 말했다. “내 충국이네 집에 가봐야겠다. 남조선과 대만 특무 놈들은 이 곳 지주들과 내통할 수도 있어.” “아닙니다. 제 가 보겠습니다.” 병완은 머리를 끄덕이더니 민경과 함께 병수를 데리고 마을로 내려가고 상순은 충국이네 토성안집으로 다가갔다. 11. 대의멸친(大意灭亲)         자정이 퍽 넘었는지라 골짜기 어귀를 지키며 순라하던 민병들도 집으로 가버리고 없었다. 토성 안은 너무 조용했다. 다만 토성 밖의 벌거숭이비술나무들이 초겨울 바람에 무섭게 윙윙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쳤다. 상순은 권총을 빼들고 슬금슬금 장학산이 든 몸채에 들어갔다. 서쪽에는 지금 마을의 한족집이 들어 살고 있었다. 그는 불시에 동쪽 방문을 떼고 불쑥 들어갔다. “불을 켜!” “이 밤중에 누구요?” 버스럭 바스락 어지러운 소리에 뒤이어 등잔불이 희미하게 켜지면서 남쪽구들에서 장미련이 이불로 가슴을 가리며 놀란 눈길로 쳐다보고 있었다. 상순은 권총을 빼든 채 북쪽구들에서 옷을 주섬주섬 주어 입는 장학산과 장충국을 쏘아보았다. “무슨 정황이 있으면 알려라! 까딱 대만특무들과 한바지를 입고 춤췄다간 용서 안 할테다!” “형님!” “또, 또. 형님은 무슨 놈의 형님이야!” 충국은 입을 헤 벌리고 상순을 쳐다보았다. “너희들은 우리 할아버지가 담보를 서고 지방 관제를 한다는 거 잊지 말라.” 충국은 피씩 쓴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장학산은 김이 빠진 공처럼 주저앉아 중얼중얼 입귀로 이런 말을 흘리었다. “너네 할아버지야 정말 감사하지. 옛날 너희들 집에서 조선에서 올 때 엉덩이를 들여놓을 초가집도 없었고 손바닥만한 땅도 없었지.  우리 집에서 묵으면서 밭도 붙이게 했어. 그 은정을 깡그리 잊지 않고 우리를 감옥에서 꺼내준 게지. 자초에 국민당이 이기지 못할 걸 알았더라면 충국이 뭐 삼도만으로 갔겠니? 토비질 하러 간 건 정말 잘못한 일이지. 허나 우리가 항일유격대를 도와주고 충국도 항일유격대에 들어 너와 함께 일본 놈들과 싸우지 않았느냐? 그 공적은 잊지 말아야지. 너네 할아버진 아주 좋은 공산당원이야. 옛날 배은망덕하지 않는 진짜 땅을 밟고 하늘을 떠인 사내대장부야.” 상순은 권총을 잡고 장학산이 하는 푸념 질을 들으면서도 희미한 등잔불을 빌어 여기 저기 살폈다. 그는 충국이 이불을 이상하게 왼손으로 꽉 누르고 있는 것을 보았다. 상순은 구들에 후닥닥 뛰어 올라갔다. “이게 뭐야?”  그는 이불을 홱 젖혔다. 순간 이불 밑에서 인민페 한 묶음이 드러났다. “어데서 난 돈이냐? 로실히 탄백해라!” 상순은 돈을 쳐들고 권총을 충국에게 들이댔다. 충국은 장학산의 눈치를 살폈다. “얘야, 발편잠을 자면서 살자.” 허나 충국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네 놈이 말하지 않아도 다 안다. 대만특무들이 왔다 간게 분명해. 너희들이 무보수로 노동개조를 하면서 어디에서 이렇게 많은 새 돈이 생길 수 있겠는가?” 상순은 그들 부자가 벴던 베개도 들고 보았으나 총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여기 저기 살펴보아도 북쪽구들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리하여 상순은 남쪽 구들에로 시선을 돌렸다. (이 놈들이 돈을 미처 치우지 못한 걸 보면 금방 누군가 왔다 갔구나.) 상순은 남쪽 구들에 몸을 날려 건너갔다. 장미련은 고의적으로 그때까지 웃옷을 입지 않고 이불로 가슴을 가리며 살 냄새를 풍겼다. 상순은 바들바들 떠는 장미련을 보고 수상해 이불을 활 들어 젖혔다. 미련의 허연 허벅다리로 누르고 있는 담요 밑에서 뻘건 수시 드러났다. 요대기를 활 젖히니 그 밑에서 권총 한 자루가 나왔다. “이게 뭐야?” 상순은 요 밑의 권총을 제꺽 잡고 충국을 겨누었다. 충국은 그때까지 멍해 앉아 있다가 입을 뗐다. “상순아, 대만특무들을 잡게 협조할 게. 제발 목숨만 살려다구.” “이 놈아, 비굴하게 놀지 말고 입공속죄하면 과거를 묻지 않을테야.” 그제야 장충국은 금방 대만 특무들이 왔다간 일을 낱낱이 탄백했다. “삼도만 토비 두목 전 소교는 길림 신개령 전역에서 죽었다. 전소교 동생 전소광이 료심전역 때 영구로 해 대만으로 도망쳤댔다. 이번에 그가 ‘왕발’과 ‘장광우’ 라는 대만특무를 데리고 금방 우리 집에 왔댔어. 그는 우리 부자를 보고 이 부근의 지주들로 유격대를 조직해 장백산 원시림 속에 들어가 유격전을 하자고 했다.” 상순은 저으기 놀랐다. 그러나 그런 내색을 내지 않고 따져 물었다. “그 놈들이 어디로 갔어? 三道弯 小虎한테 갔는가?” "전소광이 삼도만에 갔댔어. 그런데 조소호랑 모두 다 망해빠진 국민당 특무질을 하기 싫어하더란다." "왜  제때에 보고하지 않았어?" “내일 날이 밝으면 너를 찾아가 보고하자고 했다. 그런데 돈묶음이 아까워서. 에헴.” 상순은 세 귀 눈을 굴리면서 적정을 파고들었다. “이제라도 이실직고해라. 전소광이 남조선 특무들은 오지 않았다더냐?” 장충국은 입을 연바하고는 살자고 다 불어댔다. “우리한테 남조선 특무들도  왔으니 신심을 가지고 지주유격대를 조직하라고 하더라.” “어디에 있다더냐?” “이름은 모르겠는데 남조선 특무 셋이 함흥촌에 갔다더라.” 상순은 머리를 끄덕였다. “우린 특무 놈들의 정체를 다 알고 있어. 네 놈이 정녕 살고 싶으면 아는 대로 이실직고해라. 뉘네 집에 들었다더냐?” “거 김덕성이네 집에 들거라고 하더라. 너도 알지만 덕성이 조카는 용천대장 아니고 뭐냐? 용천은 이전에 장백산 항일유격대에 있다가 북만으로 가지 않았고 뭐야?” “알았다.” 상순은 미련의 요대기 밑에서 들춰낸 권총 탄창의 탄알을 다 빼내고 빈 탄창을 맞춰 충국에게 뿌려 주었다. “잠시 빌려 줄테니 대만 특무들이 오면 티를 내지 말고 우리한테 기별해라.” “할 수 있느냐?” “그럴게. 꼭 립공속죄할게.” “이번에 대만특무를 잡는데 공을 세우면 너희들도 반혁명 모자를 벗는데 좋을 거야.” 장학산과 장충국은 머리를 끄덕였다. 미련은 그제야 옷을 주섬주섬 주어 입으면서 상순에게 추파를 던졌다. (더러운 년, 미쳐두 한 두 가지 아니야. 내가 누구라고? 공산당원은 강철의 전사라는 것도 모르고 추파를 던져? 쳇!) 상순은 충국에게 물었다. “특무들이 언제 또 오겠다더냐?” “그자들은 먹을 게 없어 이틀 후면 또 오겠다더라.” “미군 비행기는 오지 않는다더냐?” “미군 비행기 한 대가 격추된 후 미군 비행사들이 질겁해 차일피일 미루면서 잘 오지 않아 먹을게 다 떨어졌다더라.” “그 놈들이 무전기가 있는 것 같더냐?” “있는 것 같더라.” “전소광은 삼도만에 재차 가서 당지 지주와 옛 토비들을 긁어모으러 가겠다고 하더라.” "조소호랑 지금도 평강촌에 있다더냐?" "아니야, 그는 지금 삼도만향 소재지에 내려와 산다더군." 상순은 머리를 끄덕였다. 후에 상순이 사람을 파견해 조사해봐 안 일이지만, 조소호는 확실히 망해빠진 국민당에 절망을 느꼈기에 두번 다시는 국민당 따라 특무질하지 않으려고 작심하였다. 그는 전소광 등 대만 특무들이 재차 찾아올가봐 삼도만 소재지에서 살다가 어느 산골에 은신해버렸다고 하였다.  한편 상순은 혹시 특무들이 충국이네 집에 들이닥칠 가봐 근심되였다. 그는 충국을 데리고 사랑방에 가서 한족농민 진씨를 시켜 할아버지와 허영호 과장에게 기별해 민경들을 데리고 충국이네 집 주위를 포위하라는 명령을 전달하게 했다. 약 20분 후에 허영호 과장이 민경 셋을 데리고 달려 왔다. 상순은 허영호에게 장충국에게서 들은 적정을 알려준 후 충국이네 집에 특무들이 들어가기를 기다려 포위 습격해 특무들을 생포하라고 했다. 어느 결에 동녘이 희붐히 밝아왔다. 상순은 허영호 과장에게 자기 할머니 산소 부근에 높은 유리한 지형의 나무숲 속에 숨어 장충국이네 집을 감시하게 하고는 함흥 촌으로 내려와 곧추 촌공소로 가서 할아버지를 만났다. 상순은 구들에 올라가자마자 엊저녁에 발견한 일을 알린 후 “할아버지, 용천과 병수를 즉시 체포합시다.”라고 했다. 병완은 한참 궁리하다가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지금 시기상조야. 혹시 전소광이랑 삼도만에 가는 척 하고 우리 마을 주변에 숨어 있으면 어찌니? 용천과 병수가 나포된 것을 안다면 그 놈들이 달아날 수도 있어. 될 수 있는 대로 동시에 잡으면 좋아.” 상순은 머리를 끄덕였다. “예, 그게 좋겠습니다. 그럼 이틀 후에 충국이네 집에 나타날 놈들을 먼저 나포한 후 총을 쏘아 신호를 보내면 용천을 나포하면 어떻습니까?” “좋을 거 같다. 그 새 아무런 티도 내지 말고 용천과 병수를 잘 감시해야 한다. 좋기는 덕성이를 시키면 좋겠지만 자기 조카라고 그럴 거 같지 않다. 용천이가 그 나그네를 보고 고향 경주에 가자고 해서 붕 들떴더라.” 노련한 할아버지를 감탄하며 상순은 “진달래 아주머니를 시켜 용천을 감독하면 어떻습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병완은 바깥에 나가면서 “아예 용천을 우리 촌공소에 데려다 얘기를 하면서 감시하자.”라고 했다. “범을 굴에서 끌어내 연금이라도 하려는 겝니까?” 병완은 머리를 끄덕였다. “경수는 내 손자야. 용천이 경수를 해치지 못하게 해야 한다.” 상순은 “근심하지 마십시오. 내 진달래 아주머니한테 침을 놓겠습니다.”라고 하며 바깥으로 나갔다. 집에 돌아가 대충 아침을 먹은 상순은 윗집으로 씽 하니 곧추 찾아갔다. “용천 대장 있소?” 상순은 경각성을 높이며 권총집에 손을 대고 집안에서 대답도 하기 전에 윗방문을 뚝 떼고 쑥 들어갔다. 그러나 용천은 윗방에 없고 다만 병수가 곤해서 쿨쿨 자다가 손으로 눈을 비비면서 일어났다. 정지를 내다봐도 용천은 보이지도 않았다. "용천 대장은 어디로 갔소?" 덕성은 조왕칸 쪽으로 돌아앉아 설거지를 하며 어물거렸다. “진달래네 집으로 갔어. 경주를 데리고 놀겠다고 하더라.” 상순이 바깥으로 되나가다가 경주 손을 잡고 울바자 안에 들어서는 용천과 딱 마주쳤다. 그들 둘은 모두 반사적으로 권총집에 손이 가다가 멈췄다. “허허, 난 또 누구라고?” 상순은 어색하게 웃는 용천을 보고 말했다. “할아버지가 전쟁터 이야기를 듣자고 촌공소로 오라고 합데다.” “그래? 곧 가지.” 이때 뒤에서 진달래가 경수를 업고 오다가 상순을 쳐다보았다. 상순이 피뜩 보니 어째 진달래의 철색얼굴에 복잡하고 검은 그림자가 스쳐지나가는 것 같았다. 용천은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경주 손을 잡고 상순을 따라 촌공소로 갔다. 그는 아직도 상순을 몇해전 애숭이로 보았다. (네놈이 공안국장이면 뭐라나? 까짓, 네놈들 몽땅 잡아치워 후환을 없앨테야. 흥!) 용천은 원래 함흥촌에는 병완이나 민병들이나 있는가 하고 들어섰댔다. 그런데 군복차림의 상순이 나타나자 저으기 긴장했다. 그러나 자기들 특무동료들을 생각하자 차츰 침착성을 회복했다. 상순은 용천을 촌공소에 들여보내고 뒤에 떨어졌다. 그는 진달래 아주머니를 불러 집 서쪽모퉁이를 돌아가 나직이 말했다. "용천은 남조선 특무입니다. 용천은 성칠 큰아버지를 살해했답니다." "뭐라고?" 진달래는 그 충격적인 말에 깜짝 놀라했다. 그러나 그는 처음에는 반신반의했다. "아니, 용천과 성칠 오빠는 항일전쟁 시기 생사전우인데. 아무리 전쟁판이라도 그렇지. 용천이 차마 전우를 살해까지 했겠느냐? 넌 용천이 성칠을 살해했다는 걸 어떻게 알았어?" 상순은 병수에게서 들은 진실내막을 쭉 이야기해주었다. "오빠!" 진달래는 풀썩 물앉으면서 경수를 끌어안고 서럽게 울었다. "큰어머니, 우리 함께 큰아버지  원수를 갚읍시다." 진달래는 경수를 놓고 천천히 일어나며 이를 옥물었다. "용천, 그 워수놈 절대 용서할 수 없어!" 그러나 그녀는 경주를 떠올리는 순간 마음이 약해졌다. 용천은 불쌍한 아들 경주의 친아버지 아닌가. (경주 아버지를 어찌 내 손으로 죽여야 해?) 그녀는 차마 손을 쓸 수 없을 것 같았다.        아, 구경 무엇이 항일유격대 전우였던 그들 부부를 원수로 만들어놓았는가. 계급립장문제인가? 용천은 지주 아들, 진달래는 빈고농 사냥군의 딸, 아, 그렇지. 무산계급과 지주계급 투쟁의 산물인 것 같았다.  계급투쟁은 출신이 다른 그들을 다른 길로 갈라놓았다.  또 부동한 향토애는 그들 부부를  남조선 사람과 북조선 사람으로 갈라놓았던 것이다. 몇년 후 남편은 남조선 특무로 등장하였고 안해는 조선인민군 연대장의 안해로 나타나지 않았던가. 남과 북의 전쟁으로 그들은 철천지 원수로 되여 서로 죽이지 않으면 안될 생사결판의 길에,  운명의 관두에 처박히게 만들었다.        진달래는 그 어떤 비장한 결의를 다진듯이 머리를 쓰다듬더니 상순과 갈라져 경수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는 장농에서 그의 탄알- 조약돌을 하나, 둘 꺼내 호주머니에 주어담았다.  그리고 용천을 놀래우지 않으려고 경수는 웃새집에 맡겨두고  경주만 데리고 촌공소로 향하였다.   진달래는 촌공소에 들어가 철색 얼굴에 긴장한 빛을 띠우더니 깜장 눈으로 상순을 빤히 바라보며 머리를 끄덕이었다. 한편 병완은 촌공소에서 용천을 보자 눈에 불이 일었다. 허나 진작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억지로 웃음을 지으면서 맞이했다. “김 연대장, 밤새 무고했소?." "예, 덕분에 대접 잘 받았시우." 용천은 병완에게 눈길도 보내지 않고 경주한테 손을 내밀었다. "에이구, 내 아들 경주 왔구나.” 병완은 애비를 잃은 막내손자를 생각하자 불쌍해 저도 몰래 코마루가 시큼해났다. 그는 불의 상황에 경주를 보호하려고 들었다. “그래 지금 조선 전쟁형세는 어떻소?” 용천은 진달래 표정을 살피며 대충 대답했다. “지금 대치상태라. 아마 오래잖아 정전협정을 조인할 거 같아요.” 용천도 어제 병수가 나갔다 온 후 이상한 조짐을 얼마간 눈치 챘다. 그는 경주를 꼭 끌어안았다. 그는 병완과 상순을 쏘아눕히고 경주를 방패로 삼아 촌공소에서 빠져나가려고 작심했다. 그는 병완과 상순의 눈치를 흘끔흘끔 살폈다. “그래 언제 부대로 돌아갈 예산이오?” “요 놈 아들애한테 정이 폭 들어 부대로 천천히 돌아갈 예산인데이.” 철없는 경수는 이제 어른들한테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르고 고사리손으로 아빠 코 밑 흰 수염을  매만지면서 놀았다. 병완은 용천을 마주 보며 권고했다. “그럼 우리 촌공소에 들어와 있소. 어떻게 홀애비 삼촌이 손님 둘이나 치겠소? 우리 마을에서 사람을 내서 밥을 지어 드리게 하지.” “허허허, 김촌장, 감사한데요. 난 그래도 작은 아버지 집이 좋은데이.” “사양하지 마오. 오늘 점심부터 촌공소에서 삼촌까지 데리고 와서 식사하오. 이 널직한 윗방에서 쉬오.” 용천은 자기에게 그물이 서서히 덮씌워져 독안에 든 쥐처럼 연금되고 있음을 느끼었다. 그러나 용빼는 수 없어 병완의 권고를 거절할 수 없었다. 그는 그날 점심부터 덕성과 병수를 데리고 촌공소에 들어와 유숙했다. 그런데 병완은 밤낮 용천의 곁에서 한 발자국도 떨어지지 않고 지키는 것이었다. 딱 진절머리 나게 무서웠다. 밥을 짓는 30대 초반의 아줌마가 촌공소에 들어와 밥을 지어줘 먹을 근심은 없었다. 그런데 대문 밖은 민병들이 총을 쥐고 번갈아 보초를 서고 있어서 외계와 련계가 단절된데다가 경주까지 데리고 도망 칠 방법이 없게 됐다. 사실상 강제연금되나 다름없었다. 용천은 자기들이 이젠 꼼짝 달싹 하지 못하게 촌공소 안에 갇히게 됐다는 것을 느꼈다. 진짜 빤질빤질한 독안의 게처럼 갇혔다는 것을 잘 알았다. 진달래는 상순의 부탁대로 경수를 데리고 웃새집으로 간 후 머리도 내밀지 않았다. 다행히 경주만은 제 애비 옆에서 놀게 했다. 이튿날 저녁에 미군 비행기가 오기로 된 날이 돌아왔다. 상순은 종전처럼  촌공소로 일찍이 들어섰다. 그는 술병까지 들고 왔다. 이윽고 진달래도 홀로 들어섰다. “오늘 술이나 한잔 하기요.” 상순은 아침 밥상에 술병까지 척 올려놓았다. “자, 남조선 특무들이 오겠으면 오라지. 우린 여기서 술이나 마시면서 태평성대를 누리기오.” 남조선 특무라는 말에 용천은 적이 속이 띠끔해났다. 그러나 위기일발의 시각에도 용천은 인차 노련하게 냉정한 표정을 지었다. “아침부터 술을 마시는기여? 온 하루 띵 하겠는제라.” “용천 연대장, 온 하루 경주나 데리고 놀면 되겠는데 뭘 그리 근심하오? 무슨 일이 있소?” “아, 없시우, 없어.” 용천은 황망히 도리머리를 흔들며 손사래를 쳤다. 병완은 술상에 다가와 술병 마개를 열고 용천과 병수 앞의 사발에 소주를 쭈르르 붓고 자기 사발에도 부었다. “자, 들게. 이 난세에 사람의 일은 모르오. 그 먼데서 왔는데 술을 푹 마시고 쉬게나.” 용천은 간도의 술이 독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쭉쭉 들이켰다. 병수는 옆에서 할아버지가 오늘은 맏아들의 원수를 갚으려고 한다는 것을 눈치 채고 별로 마시지 않았다. 용천은 대개 눈치를 챘으면서도 개의치 않았다. (네깐 놈들이 증거 없이 체포해?) 용천은 취하지 않고서도 취한 척 했다. “어, 중국술이 독하긴 독하다. 나 좀 누워야겠당께.” 그는 잠꼬대처럼 중얼거리더니 스르르 드러눕는 것이었다. “허, 사람이. 술을 고거 마시고 취하다니.” 병완은 용천을 쏘아보더니 병수를 보고 분부했다. “저 권총집이나 벗겨 건사하게나. 배겨서 어떻게 자는가.” 병수는 인차 “예.” 하고 용천의 허리에서 권총을 빼내려고 했다. (아니, 이 놈, 친척한테 반변했어?) 그때 쓰러진 척 하던 용천이 와닥닥 일어나면서 권총을 빼들어 병완과 상순을 번갈아 겨눴다. “이 시골 놈들아, 내가 누구야? 항일전쟁 때 일제 놈들과 목숨 걸고 싸우던 김 대장이야. 네깐 놈들이 왜 나를 의심하고 지랄인기여?!” 병수가 불시에 덮쳐들어 용천의 권총을 잡은 손을 꽉 눌렀다. 땅! 총소리와 함께 총알이 술상 위 술 사발을 박산 냈다. 유리쪼각이 사처에 튕겨났다. 그때 상순이 권총을 뽑아 용천의 머리를 겨누었다. “꼼짝 마라!” 허나 용천은 병수를 발길로 걷어차 넘기고 권총으로 머리를 내리까 눕혔다. “퉤! 역적놈!” 병수는 쓰러졌다. 그의 머리에서 뻘건 선지피가 흘러 넘쳤다. 용천은 엉엉 우는 경주를 끌어안아 방패로 삼았다. “애를 내려놔!” 진달래는 새된 소리를 지르며 경주를 빼앗으려고 달려들었다. 상순은 진달래나 경주가 상할 가봐 사격하지 못했다. 용천은 경주를 끌어안고 뒷걸음질 치며 문 밖으로 나가 마루 위에 섰다. “경주야!” 진달래는  통곡하며 따라 나갔다. 경주도 엉엉 울었다. "엄마!" “여보, 애를 내려놔요!” “애를 데리고 가자!” “어디로 간다고 그래요?” “남조선에 가자!” “갈테면 당신이나 가! 경주를 내려놔!” 이때 민경들과 민병들이 토성 문 안으로 총을 들고 달려 들어왔다. 그러나 경주와 진달래 때문에 쏘지 못했다. 이때 진달래가 호주머니에서 돌멩이를 주어 휙 날렸다. 딱! 용천은 머리를 맞고 비칠 했다. 그는 진달래가 돌멩이를 재차 날리는 것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멍해 서서 진달래를 쏘아보았다. "네년, 차마 내캉 돌멩이질 해?!" 용천은 돌멩이를 날리며 덮쳐드는 진달래를 멍해 쏘아보며 권총을 뽑아들었다.  위기일발의 시각에도 진달래는 달려나가 용천의 권총을 쥔 손을 꽉 잡아 내리 눌렀다. 땅! 총알이 진달래 허벅지를 꿰뚫고 나갔다. "아니, 내 당신 쐈어?" 용천은 그 권총으로 성칠도 쏴눕히지 않았던가. 그는 권총을 쥔 자기 손을 내려다 보았다. 그 죄악적인 손으로 사촌동생 칠백도 총창으로 찔러눕혔다. 이젠 자기 사랑하는 아내도 쏘았다. 허나 살기 위해선 아내고 뭐고 쏴눕히고 촌공소에서 도망쳐야 했다. "이걸 놔! 이 가시나새끼!" 용천은 진달래를 발길로 차넘겼다. 그러나 진달래는 용천의 총을 놓지 않았다. “더러운 남조선 특무 놈아! 네 놈은 성칠 오빠를 살해한 원수놈이야, 악당 놈이야!” 부처간이 싸우는 걸 흐리멍텅한 하늘도 멍해 내려다보며 도리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덕성은 어쨌으면 좋을지 몰라 두 팔을 벌리고 말뚝처럼 어정쩡 서 있었다. 위기일발의 시각에 어느 결에 병완이 씽 호랑이 양을 덮치듯이 덮쳐들어 용천의 아랫배를 탁 걷어찼다. 용천은 경주를 탈싹 떨어뜨리고 허리를 굽혔다. 상순이 뛰어 들어오면서 권총으로 용천의 머리를 내리 깠다. 용천은 권총을 절컥 떨어뜨리며 풀썩 무릎을 꿇으며 쓰러졌다. 상순이 땅바닥의 권총을 주어 들었다. “빨리 이 놈을 촌공소에 끌어들여가오.” 민병들이 달려들어 용천을 촌공소 안에 끌고 들어가 바로 꽁꽁 묶었다. 상순은 할아버지에게 한어로 물었다. “병수는 어쩌겠습둥?” 병완은 눈을 질끈 감고 손을 홱 휘둘렀다. “대의멸친(大意灭亲)!” 상순은 권총을 쥐고 정신을 잃었다가 겨우 깨여나 안간힘을 쓰며 일어나려는 병수의 허리춤에서 권총을 뽑아냈다. 뒤따라 온 민병들이 손수 바로 병수를 결박해 꽁꽁 묶었다. 병수는 놀란 눈길로 병완을 쳐다보았다. “할아버지! 왜요?” “너 같은 남조선 특무 손자가 없어!” “빨갱이들이 정말 인정머리도 없어. 육친불인(六亲不认)이군.” 병완은 병수를 쏘아보았다. “우리 공산당원은 강철전사야. 우린 혁명을 위해 대의멸친한다!” “대의멸친? 속았구나. 날 잡아 바치고 현장 벼슬이나 해먹구려.” 병수는 어이없어 촌공소 천정을 쳐다보며 한탄했다.        저 소서구 남산에 묻힌 이성희도 자기 오빠 손자를 잡아묶는 영감을 보고 욕하고 있었다. "몰인정한 영감! 진짜 지독하구려. 어쩜 내 친정집 맏손자도 잡아 먹어요. 그 놈은 오라버니 씨붙이 장손이야. 하늘도 무심하지." 그러나 병완은 노친의 욕설을 념두에 두지도 않았다. 그는속으로  중얼거렸다. (여보, 노친, 널리 양해하오. 나라 안정을 위해선 남조선 특무는 남김없이 붙잡아야 하오.  남조선 특무놈에겐 절대 털끝만한 인정도 베풀어선 안 되오.)  용천은 정신을 차리자마자 병수를 흘겨보며 이를 뿌드득 갈았다. “비루한 배신자! 배신자 끝장은 그래!” “아버지!” 경주는 결박당해 대들보에 매달린 용천의 다리에 매달리며 대성통곡 쳤다. “얘야, 아빠 원수 잊지 말라. 네 어미가 아빠를 붙잡아 빨갱이들한테 바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어.” 용천은 저쪽에 멍해 서 있는 삼촌을 쳐다보며 말했다. "삼촌, 미안하이, 칠백은 내 손으로 죽였소. 난 천번만번 죽어도 마땅한제라. 절대  섭섭해하지 마세요." 덕성은 결박당한 용천한테 한발 다가섰다. "웬 소리냐? 네가 칠백을 죽이다니?" "네,  칠백인줄 모르고 날창으로 찔렀시우, 아이구, 난 동생도 모르고 찔렀어. 이 손으로 찔렀시우." 덕성은 무릎을 꿇더니 아예 펑덩 물앉아 애들처럼 두 다리를 버둥거리며 통곡쳤다. "아이고, 이게 웬 세상인고? 사촌형제끼리 서로 죽이다니? 아이고, 원통해라. 흐흐흑, 흑흑흑..." 진달래는 절룩거리며 다가가 애비 다리를 붙잡고 엉엉 우는 경주를 뜯어내며 팔소매로 뜨거운 눈물을 닦았다. “누가 당신 보고 남조선으로 가라고 했어요? 누가 당신 보고  적군으로 되라고 했어요? 누가 당신 보고 남조선 특무로 되라고 했어요? 누가 당신 보고 성칠 연대장을 살해하라고 했어요?” 그러나 용천은 껄껄 웃었다. “나와 성칠 형님은 깨끗하게 결투를 했어. 내가 형님을 죽이지 않으면 그가 나를 죽였어. 나도 그가 쏜 총에 어깨에 관통상을 입어 한해 반이나 부산 육군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아 겨우 살아남았어. 누가 그보고 내 아내를 빼앗아 살아서 경수까지 낳으라고 했어? 당신도 더러운 화냥년이야! 퉤! 다만 경주와 삼촌을 데리고 고향 경주로 돌아가지 못하는 것이 한일 뿐이여. 상순아, 어서 죽여라! 나를 더는 괴롭히지 말라.” 병완과 상순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급변사태에 따라 병완과 상순은 임기응변해 원 작전방안을 포기하고 용천과 병수를 생포했다. “총소리를 듣고 전소광은 충국이네 집으로 오지 않을 거야. 혹시 놈들이 멀리 달아났을 수도 있다.” 병완이 상순을 보고 말하는데 용천은 천정을 쳐다보며 냉소했다. “이제 우리 동료들이 와서 내 원수를 갚을 거야!” 상순은 세 귀 눈을 부릅뜨고 호통을 쳤다. “저 놈 주둥아리를 수건으로 틀어막아라!” “옛! 김 국장!” 민병들은 상순의 명령에 따라 용천과 병수의 입을 수건으로 틀어막고 바로 입을 마구 휘감아 동여매놓았다. 용천과 병수는 이젠 입이 있어도 말을 할 수 없게 됐다.       촌공소, 아니, 함흥촌에는 일촉즉발의 팽팽한 기운이 감돌았다.
99    중편과학환상소설 조왕돌의 모험기 김장혁 댓글:  조회:2009  추천:3  2017-08-23
      중편과학환상소설            조왕돌의 모험기                           김장혁                                                                                  1       기원 5019년에 지구촌에서 금이야 옥이야 하는 보배 아들 조왕돌이 태어났어요. 그런데 조왕돌은  부모 기대와는 달리 공부하는데는 빼돌이요, 컴퓨터게임을 노는 데는  악돌이였죠. 그 애는 싯누렇게 싹은 이발을 드러내고 게임을 논다하면 컴퓨터에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았어요.     조걸 보세요, 조 조왕돌이 게임을 노는 모양을.     조왕돌이 컴퓨터 마우스로 클릭하자 우주비행선로봇이 항공모함에서 하늘로 날아올랐어요.      “야호!”     조왕돌은 사기 나서 로봇우주비행선을 몰고 구름을 뚫고 별들이 반짝이는 태공으로 높이 치솟아 올라만 갔어요.      갑자기 로봇우주비행선 앞에 괴상한 얼룩 뱀 비행물이 나타났어요. “사격!” 조왕돌이 줄포건반을 누르자 줄 포탄이 날아갔어요. 얼룩뱀들은 날아와 조왕돌의 우주비행선을 휘감아 태공에서 내리 뿌리려고 했어요.     조왕돌은 감전건반을 눌렀어요. 순간 로봇우주비행선에서 시퍼런 불티가 번쩍이었어요. 얼룩뱀비행물은 비명을 질렀어요.  그 놈은 태공에서 대기층 아래로 뚝 떨어져 내려가지 않겠어요.     이번엔 독수리비행선이 날아왔어요. 줄 포탄을 쏘았지만요.  독수리비행선은 교묘하게 피하더니 이쪽에 맞불질을 했어요. 우주비행선에 불이 확 일었어요.    우주비행선이 태공에서 아래로 떨어져 내려갔어요.    “이걸 어쩌지?”                         2       이때 독수리비행선이 날아왔어요. 독수리비행선에서 대머리 서양인이 나타나더니 불이 붙는 우주비행선로봇에서 조왕돌을 빼내 독수리비행선에 싣는 것이 아니겠어요.      “선생님은 누군가요?”      “난 크롱 박사야.”       “어느 나라 사람인가요?”       “이딸리아 노르망디 사람이야. 난 클론기술로 숱한 클론바우를 재생시켰던 거야.”      그런데 독수리우주비행선은 코치아 쪽을 벗어나 서쪽으로 날아가는 것이 아니겠어요.      “아니, 어디로 가는 건가요?”      “가 보면 알아.”     독수리우주비행선에 앉아 몇 시간을 달렸어요. 이젠 파도가 출렁이던 검 푸르른 바다는 보이지 않고 별들이 총총 내려앉은 것 같은 불야성이 보였어요.     독수리우주비행선은 비행장에 서서히 내렸어요. 조왕돌이 우주비행선에서 내리자 노랗고 파란 눈들이 판들거리면서 이상한 눈길을 보냈어요. 허나 그는 공포감을 억지로 털어버리면서 크롱 박사의 마차에 올랐어요.     “어째 승용차를 두고 마차를 타는가요?”     크롱박사는 대머리에 난 땀을 살진 손으로 닦으면서 말했어요.     “환경오염을 줄이려고 그래. 사람마다 승용차를 타지 않으면 그만큼 온실가스가 적게 배출될 거 아니야?”     조왕돌은 일리가 있다고 여겨 머리를 끄덕였어요.     때는 동녘이 희붐히 밝아오는 때어서 딸까닥딸까닥 절주 맞게 달려가는 마차에 앉아서 뾰족하고 높다랗게 치솟은 서양식 건축물이 신화처럼 보였어요. 진짜 잉글랜드 여왕이 탄 금빛마차를 탄 기분이었어요.                              3     한참 후 마차는 별장 같은 집 앞에 가 멈춰 섰어요.    저쪽에서 갑자기 숱한 노랑머리와 깜둥이들이 쓸어 달려왔어요.    “톰, 이후에 이 애와 싸우지 말고 잘 놀아야 해.”    크롱 박사의 말에 제일 꺽다리 깜둥이가 어깨를 으쓱했어요.    “예쓰(예)”    깜둥이는 벌건 입술 속에서 허연 이발이 다 드러나게 씨물 웃어보였어요.    크롱 박사는 한시름을 놓더니 한쪽에 오도카니 서 있는 조왕돌을 데리고 집안에 들어갔어요.     그는 주사기로 조왕돌의 팔에서 뭔가 뽑아가지고 지하실험실로 들어갔어요.     한참 후 손 벽 소리와 함께 글쎄 조왕돌과 심통히 똑 같이 생긴 애가 지하실에서 걸어 나와 조왕돌을 보고 쌔물쌔물 웃는 것이 아니겠어요.    “아니, 넌 누구냐?”    그 애가 말하기도 전에 크롱박사가 소개했어요.    “이 앤 널 클론기술로 복제해낸 조왕돌 1호야.”    “예?”    조왕돌은 눈이 똥그래졌어요.   그는 그 애 손을 정답게 잡으면서 물었어요.   “그럼 얘는 내 동생인가요?”    “아들도 동생도 아니야, 그저 조왕돌 1호라고 부르자꾸나.”    “조왕돌 1호야!”    조왕돌은 조왕돌 1호를 꼭 껴안았어요.    크롱박사는 조왕돌의 눈과 귀에 미형시청각전자뇌를 장치하고 크롱 박사의 컴퓨터와 무선으로 연결해놓았어요. 그리고 그 전자뇌에 조왕돌의 부모와 학교 사생들의 정황을 상세히 입력해넣었어요.                 4     이른 아침이 되자 크롱 박사와 조왕돌은 조왕돌 1호를 우주비행선로봇에 앉혀 집에 돌려보냈어요. 조왕돌1호에게 장치한 시청각전자뇌를 통해 수시로 감시하고 지령을 보냈어요.     크롱 박사의 집 컴퓨터 현광판에는 조왕돌 1호가 탄 우주비행선로봇이 푸르른 바다 위로 날아 어느 새 조왕돌의 집인 만장굴 앞 우주비행장에 서서히 날아 내리는 것이 보이었어요.     아버지와 어머니가 직접 자외선방지 우산을 쓰고 우주비행장에 마중 나왔어요.    어머니는 우주비행선로봇에서 내린 조왕돌 1호의 머리 위에 우산을 펼쳐 들어주면서 물었어요.    “얘야, 어디로 갔다가 이제야 돌아왔니?”     조왕돌 1호는 능청스레 아버지를 쳐다보면서 희죽이 웃었어요.    보아하니 아버지와 어머니는 조왕돌 1호가 조왕돌이 아닌 것을 눈치 채지 못한 것 같았어요.    조왕돌 1호는 조왕돌을 대신해 숙제를 하기 시작했어요. 옆에서 어머니가 지켜보면서 새물새물 웃고 있었어요.    이튿날 조왕돌 1호는 책가방을 메고 학교로 갔어요. 선영과 보름 등 애들의 부러운 눈길이 머리를 쳐들고 교실로 들어가는 조왕돌 1호를 보고 입을 비쭉거렸어요.    조왕돌 1호가 교실에 들어가 앉자 옆에 앉은 보름은 다른 애들과는 달리 조왕돌을 보는 척도 하지 않고 동화책을 보고 있었어요.    이상했어요. 이전 같으면 조왕돌은 까불면서 보름의 옆구리를 톡톡 치면서 누룽지를 내놓으라 하지 않았겠어요? 허나 오늘 따라 얌전했어요.    보름은 너무나도 이상해 동화책을 보다가 말고 조왕돌을 핼끔 곁눈질 해보았어요.   생각 밖으로 공부시간이 되자 장난도 하지 않고 선생님의 강의도 귀담아 듣고 열심히 공부를 하는 것이 아니겠어요?   (참, 며칠 보지 못했더니 해가 서산에 두둥실 뜨지 않을까?)   그런데 보름의 속을 어떻게 알았는지 조왕돌이 무슨 쪽지를 건넸어요.      얘, 보름아, 해가 서산에서 뜰 때도 있어. 난 보름달 같은 네 얼굴에 옴폭 패는 보조개가 귀여워!     그 쪽지를 보고 꾸겨 호주머니에 넣는 보름의 홍조가 어린 보름달 같은 얼굴에는 놀라운 기색이 파도치고 있었어요.   조왕돌 1호는 입을 비쭉해 보이었어요.   보름은 머리를 폭 숙였어요. 그의 귀 밑으로 빨간 물감이 칠해 올라가고 있었어요.   한편 서유럽 노르망디 크롱 박사의 집에서 컴퓨터에서 눈을 떼지 않고 지켜보던 조왕돌은 폴짝폴짝 뛰었어요. “참 묘해요. 옆에 앉은 보름도 조왕돌 1호를 나로 여기는 걸 보세요. 이젠 여기서 전자유희를 마음껏 놀아도 되겠죠?” “그럼, 마음껏 놀아라. 근심할게 있니?” “야-호!” 조왕돌은 좋아서 깡충깡충 뛰더니 전자유희를 놀기 시작했어요.                         5     어느 날 사달이 생겼어요.     조왕돌이 한창 재미나게 전자유희를 놀 때었어요. 난데없는 흑인애들이 모여와서 조왕돌을 툭툭 쳐 밀어내고 자기들이 들어앉아 놀았어요.      “이 깜둥이 새끼들, 못 피하겠나?”      조왕돌은 톰을 쾅 밀쳤어요. 덩치뿐인 톰이 허공 엉덩방아를 찧었어요. 손으로 엉덩이를 만지면서 상을 찡그리던 톰이 벌떡 일어나 조왕돌의 귀 쌈을 불이 나게 찰싹 갈겼어요.     조왕돌은 지려하지 않고 톰의 면상에 주먹을 날렸어요. 그때 흑인 애들이 왁 덮쳐들어 조왕돌을 치고 박았어요.    물매를 맞은 조왕돌은 분해 두 다리를 바둑거리면서 엉엉 울었어요.      크롱 박사가 황급히 꽥 소리 쳐서야 톰이랑 도망쳤어요.     “크롱 박사님, 난 형제도 없고 친구도 없어 맞기만 해요. 분해서 어디 살겠어요.”     “근심 말아.”    크롱 박사는 조왕돌의 귀에 대고 뭐라고 수군거렸어요.     “예- 옳아요. 톰, 어디 두고 보자.”     이튿날 큰 일 났어요. 크롱 박사님의 앞마당에서 조왕돌이 뽈을 찰 때었어요. 톰이랑은 자기들의 힘을 믿고 조왕돌의 뽈을 저 멀리 차버리고 조왕돌을 탁 밀쳤어요. 조왕돌은 슬쩍 피하면서 안걸이를 걸었어요. 톰은 제 힘에 앞으로 쿵 넘어졌어요. 성난 흑인 애들은 욱 쓸어와  또 전날처럼 조왕돌을 치고 박았어요.      “꼼짝 말라!”     야무진 소리와 함께 갑자기 조왕돌과 똑같게 생긴 숱한 애들이 덮쳐 나왔어요.     순간 조왕돌이네 애들이 톰이랑 흑인 애들을 포위하고 주먹으로 치고 박고 걷어찼어요. 두 말할게 있나요? 흑인 애들이 엉망진창이 되게 얻어맞았지요. 여기저기서 신음소리와 아우성소리가 처참하게 들렸어요.     이때 경적소리 요란하더니 숱한 경찰차가 달려와 양쪽의 애들을 몽땅 잡아 경찰국에 실어갔어요.    광장 같은 큰 칸에 갇힌 애들은 머리를 푹 떨어뜨리고 섰지요. 털보경찰이 전기곤봉을 휘두르면서 톰과 조왕돌을 보고 고래고래 고함쳤어요.     “어느 녀석이 두목이냐? 썩 나서지 못할까?” 흑인 애들 무리 속에서는 톰이 나섰지요. 그런데 이쪽에서 조왕돌이 나서자 조왕돌 2호, 3호, 4호, 5호… 10여 명이 몽땅 나섰지요. 그런데 그 애들이 다 똑 같게 생겨 분간하기 힘들었어요.    이때 톰이 털보경찰에게 뭐라고 소곤거렸어요. 그러자 털보가 꽥 소리쳤어요.    “난 다 알아. 너희들 두목은 조왕돌이지. 나와!”     “내가 조왕돌이예요.”     “나예요.”     털보경찰은 퉁사발눈이 휘둥그래졌어요. 그는 자기 눈을 의심할 정도였어요. 그는 이제껏 쌍둥이는 보았어도 생김새가 똑같은 애들이 이렇게 많은 건 처음 보았던 거예요.     도리머리 질 하던 그는 경찰국에 알려 전 세계에 이름을 날린 영국의 유명한 정탐가 홈스를 모셔왔어요.     높다란 중절모를 쓴 홈스는 지팡이를 휘두르며 조왕돌들을 하나하나 여겨보았어요. 허나 그의 예리한 눈길로도 똑 같이 생긴, 동양의 황색피부에 남북골에 눈 확이 쏙 꺼져 들어간 애들을 분간하지 못했어요.    홈스는 도리머리 질 하더니 털보에게 뭐라고 쑤군거렸어요. 그러자 털보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도리머리를 흔들었어요. 그는 애들을 한바탕 훈계하더니 놓아 주었어요.                               6     조왕돌은 크롱 박사의 클론기술의 위력을 알고  별의별 요구를 다 제기했어요.     “박사님, 빵과 우유가 먹기 싫어요. 클론기술로 클론 입쌀과 바나나를 만들어주세요.”     크롱 박사는 대머리를 만지더니 “되고말고.” 하고 선선히 대답했어요.     이듬해 봄, 크롱 박사는 비행기로 동방과 아메리카 중부에서 실어간 벼와 빠나나 유전자와 세포를 분리해 대 면적 온실에 심었어요.     어느 날 밤, 창밖에서 하얀 싸락눈 같은 것이 쏟아져 내리는게 아니겠어요.     조왕돌이 바깥에 나가 보니 희읍스름한 구름이 낀 하늘에서 싸락눈이 쏟아져 내리는가 했더니요. 저게 뭐예요? 글쎄 하늘에서 새하얀 입쌀이 쏟아져 내리는 것이 아니겠어요.     그 후 크롱 박사는 조왕돌의 요구에 따라 클론호박, 클론도마도, 클론물고기, 클론 양 지어 클론 소, 클론 토끼까지 수태 복제해냈어요.     (클론기술이 있으면 뭐든 요구하면 복제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한번은 크롱 박사가  자리를 비운 틈에 가만히 크롱 박사의 실험실에 들어가서 컴퓨터를 열고 떨리는 손으로 건반을 톡톡 쳤어요. 그는 클론기술파일을 전부 복제해 내려고 했어요. 그런데 몽땅 영어여서 보기 힘들었어요.     “에라, 모르겠다. 컴퓨터의 모든 파일을 복제해 내자.”     복제가 끝나자 조왕돌은 클론기술을 익히려고 노르망디를 떠나 영국 켐프리치대학으로 갔어요. 그제야 조왕돌은 공부의 중요성을 알게 된 거죠.    원래 총명한 조왕돌은 하나를 배워주면 둘을 아는 총명 영리한 애여서 인차 영어를 배워냈어요. 그리하여 그는 크롱 박사가 오기 전에 벌써 클론기술을 다 장악했던 것이죠.    “2천 년 전의 기술이 아직도 이렇게 좋을 줄은 몰랐지.”    조왕돌은 조왕돌 2호랑 10여 명을 데리고 독수리우주비행선에 올라 고향 코치아의 밤하늘로 날아올랐어요.    코치아에 돌아온 조왕돌을 보고 아버지와 어머니는 아주 대견스레 바라보았어요.    내외간은 조왕돌이 공부하기 싫어하는 것을 보고 크롱 박사를 파견해 클론기술을 전수하게 미리 작전을 꾸몄던 것이죠.    조왕돌은 어머니 심정을 알기나 한 듯 기적을 낳기 시작했어요. 클론기술로 클론소와 클론양, 클론입쌀, 클론호박을 생산해냈던 것이죠. 그것도 클론 소랑 어찌나 큰지 옛날 소의 열배씩 컸어요. 클론호박은 어찌나 큰지 집채 같았어요. 집채 같은 호박 속을 파 삶아 먹고서도 맨 껍데기는 집으로 쓸 수도 있었어요.     조왕돌은 클론백마를 생산해 보름에게 선물했어요. 보름은 백마의 볼을 살살 어루만져주면서 조왕돌에게 포도 알 같은 눈을 깜짝해 보였어요.     “조왕돌아, 고마워.”     조왕돌은 어깨를 으쓱하면서 빈정거렸어요.     “네가 원하면 클론호랑이도 생산해 줄 테야!”     허나 보름은 도리머리를 흔들었어요.      “호랑이는 싫어. 난 백마가 곱다!”     조왕돌은 보름에게 또 클론토끼와 클론암탉을 복제해 한 마리씩 선물했어요.     보름은 입이 뽀로통해졌어요. “싫다! 고작 암탉과 토끼냐?”     조왕돌은 안 됐다 싶어 “네가 원하면 클론코끼리를 줄게.”라고 했어요.     “네가 코끼리까지 만들어?”     “그래. 기다려라.”     조왕돌이 떠나가려고 하자 보름은 다급히 외쳤어요.      “가만!”     조왕돌이 돌아섰어요.    보름은 두 손을 모아 쥐고 머리를 숙이더니 허리를 비꼬며 겨우 말했어요.    “얘, 기린을 만들어줄래?”     “엉? 그래. 내 만들어오지.”     이윽고 조왕돌은 목이 기다란 클론기린을 끌고 왔어요.     “자, 가져라!”    기린은 어찌나 큰지 지붕 위의 대나무 잎을 뜯어 먹는 것이 아니겠어요.    “와! 좋다.”    보름은 기린을 보고 환성을 질렀어요.    조왕돌은 사다리를 가져다 놓고 보름을 데리고 기린의 잔등에 올라가 타고 온 연화시를 돌아다녔어요.                          7     조왕돌이 클론기술로 뭐나 다 만든다는 소문이 퍼지자 코치아의 백성들은 이젠 살 때를 만났다고 야단쳤어요. 그들은 놀고도 이밥에 호박을 배불리 먹을 수 있어 손과 발바닥에 털이 날 지경이었어요. 그 특대뉴스가 지구촌에 방송되자 제일 부러워하면서도 속으로 질투한 나라는 이웃에 사는 뱀 섬나라의 나까아멘 왕이었어요. 그는 속으로 당장 코치아를 먹어치우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웠어요.      조왕돌은 온종일 침대에 누워 먹고 싶은 걸 컴퓨터 건반을 톡톡 쳐서 클론기술로 생산해 마음껏 먹고 자기만 했어요. 그런데 몸을 너무 움직이지 않고 진종일 침대에 누워 날마다 음식 서너 근씩 먹기만 해 사지가 퇴화되기 시작했어요. 팔과 다리가 가늘어지고 배는 기름개구리처럼 똥똥해졌어요.     실로 조왕돌은 해뜩 번져져 네다리를 바둑거리는 거부기 같았어요. 이젠 입도 놀리기 싫어 집에 둔 보모들이 량쪽에서 손으로 턱을 받들어 올렸다 내리었다 해줘야 돼지고기와 밥을 먹을 수 있게 됐어요. 공부도 하지 않고 머리를 쓰지 않아 머리가 주먹만큼 작아졌고 뭐나 보기도 싫어해 눈마저 빈대 눈이 돼버렸어요.      그런데 뱀섬나라 도적들이 뛰어들어 클론기술을 훔쳐가려 하였어요.     조왕돌은 고향 만장굴을 떠나 더 깊숙한 시골 동굴에 숨어 혼자 클론기술을 가지고 잘 살고 싶었어요. 적어도 클론기술을 코치아 백성들이 아닌 뱀 섬나라에 전파되는 것은 싫었던 것이죠.      허나 아버지와 어머니는 조왕돌의 전도가 근심스러웠어요. 지어 코치아의 미래가 근심스러웠어요.      이게 웬 일인가요?      조왕돌은 시골로 낙향해야 하겠는데요. 침대에서 일어나기도 힘들어 했어요. 자기 몸을 이기지 못한 거예요. 별 수 없이 조왕돌 1호랑 6호랑 여섯이서 침대 채로 들어 만장굴에서 나가 우주비행장으로 나갔어요.    아버지와 어머니는 눈물로 조왕돌과 이별했어요.    “얘야, 아빠 고향에 가면 신체단련에 주의해라.”    조왕돌은 겨우 손을 들어 저었어요.    조왕돌은 우주비행선에 올라가자 조왕돌 1호를 보고 우주비행선을 조종하게 하고 자기는 입으로 지령을 내렸어요.    우주비행선은 간신히 하늘로 솟아올랐어요.    갑자기 반짝이는 별천지 속에서 이상한 비행물이 날아왔어요.    “넌 누구야?”    조왕돌의 물음에 앙칼진 목소리가 확성기에서 들려왔어요.    “우린 크롱 박사 1호와 톰 1호야! 크론 복제기술을 훔쳐간 도적놈아, 어디 미사일 맛을 봐라!”    씽-    뻘건 불줄기가 날아왔어요.    “빨리 피해!”    조왕돌이 명령했어요. 허나 우주비행선은 미처 피하지 못했어요.     꽝!     우주비행선은 한쪽 날개가 날아나 아래로 내리 곤두박질 쳤어요.      “앗-!”     조왕돌은 깜짝 놀라 비명을 지르며 벌떡 일어났어요. 그런데 그건 게임을 놀다가 걸상에 앉은 채 꾼 꿈이 아니겠어요.     “호- 크론 복제기술을 안다면 얼마나 좋을까?"              
98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77) 댓글:  조회:1532  추천:5  2017-08-16
                                                        8. 수림 속의 통조림깡통        가을바람에 수림의 누런 낙엽이 후루루 날아 떨어지고 드문드문 서리가 내리기 시작했다.        상순은 함흥 촌에 있는 아버지와 아내가 가을걷이에 눈 코 뜰 새 없이 바삐 보내리라 생각되자 근심이 태산 같았다. 어느 날, 그는 부국장 천용구에게 청가를 맡고 함흥 촌으로 돌아왔다. 해가 거의 질 때 집에 들어서니 집에는 맏딸 춘자가 숙제를 하다가 봉자를 데리고 놀고 있었다. “아버지, 엿 사탕을 사왔습니까?” 춘자는 봉자와 함께 두 팔을 벌리고 달려오면서 쌍까풀눈을 똑바로 뜨고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상순은 한 아름에 춘자와 봉자를 와락 끌어안고 뽀뽀를 해주었다. 애들을 구들에 내려놓고 진짜 미리 준비한 엿 알을 호주머니에서 꺼내 주었다. 애들은 엿 알을 입에 넣고 오물거리며 기뻐 퐁퐁 뛰었다. “할아버지 엄마 어데 갔니?” 춘자는 엿 알을 넣어 볼이 볼록해 종알거렸다. “저 소서구에 가을 하러 갔습니다.” 상순은 봉자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춘자야, 봉자를 데리고 놀아라. 아버지 밭에 가서 할아버지와 엄마를 데리고 올게.”  춘자는 머리를 끄덕였다. 상순은 벽에서 낫을 벗겨가지고 소서구로 줄달음쳐 갔다. 해는 서산으로 맥없이 기울어져 산 그림자가 태평강 가에까지 가로 누워 있었다. 상순은 소서구 막바지에 있는 밭으로 헐금씨금 올라갔다. 그때까지 아버지는 허연 구레나룻을 흩날리면서 강냉이 단을 날라다 쌓느라고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지주 지학사에게 괭이에 찍혀 늑골이 세대나 끊어난 옆구리가 아픈지 기준은 허리를 짚고 서서 만지다가도 계속 일하는 것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상순은 불효의 죄책감을 느끼었다. 명옥은 잔등에 난지 서너 달 밖에 안 되는 물 애기 금자를 업고 강냉이 단을 이어다가 무지고 있었다. 둘째딸 금숙은 흰 콧물을 폴락거리면서 그래도 엄마를 돕느라고 강냉이 대를 하나하나 들어 모아 놓았다. “아버지, 그간 얼만 바빴겠습니까?” 상순은 아버지 손에서 강냉이 단을 빼앗아 날라다 쌓았다. “아빠!” 금숙은 포도 알 쌍까풀눈을 동그랗게 뜨고 두 팔을 벌리고 달려와 안겼다. 상순은 금숙을 안아 한바퀴 돌려주고 뽀뽀 해주고 내려놓았다. 그는 호주머니에서 엿 알을 꺼내 둘째 딸의 입에 밀어 넣어주었다. “우리 귀여운 둘째딸아, 할아버지와 엄마한테도 먼저 권해라. 응?” “예-” 금숙은 엿 알을 쥐고 할아버지한테 내밀었다. “할아버지, 엿을 잡수세요.” “오, 귀여운 내 손녀야.” 기준은 금숙의 발갛게 상기된 볼을 매만져 주면서 엿 알을 밀어 주었다. “네나 먹어라.” “안됩니다. 잡수시요.” 금숙은 기어이 엿 알을 쥐여 할아버지 입에 넣어주었다. 그리고 몸을 돌려 엄마 입에도 넣어주고서야 자기 입의 엿 알을 오독오독 깨물어 먹는 것이었다. 상순은 금숙이 귀여워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기준은 허리 쉼을 하면서 이상한 눈길로 물었다. “얘, 어째 또 집으로 왔니? 옛날부터 효자는 충신으로 될 수 없다고 했느니라. 네가 공안국장을 하면서 자꾸 집 근심을 하다나면 어찌 사회 일을 잘 하겠니? 집 근심은 하지 말고 국장이나 잘 해라.” 상순은 일어나 강냉이 단을 와락와락 주어 쌓아 놓으면서 말했다. “전선 같으면 내가 목숨을 걸고 싸우겠습니다. 그런데 후방에서 어디 내 재간을 쓸 데 있습니까? 집에 돌아와 아버지나 잘 모시면서 마을의 일을 하는 게 옳지 않은지 모르겠습꾸마. 괜히 아버지와 애 어미만 고생시키기나 했지.” 그 말에 기준은 강냉이 단을 왈 둘러메치면서 버럭 고함쳤다. “얘, 이놈아, 누구나 다 하는 공안국 국장이냐? 집일은 그만두고 당장 공안국에 돌아가라.” 허나 상순은 대수로워 하지도 않고 중얼거렸다. “공안국 일도 이젠 내 모집한 천용구 부국장이 잘 처리합구마. 근심할게 별로 없습구마." 그는 근엄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 조선족들이 어떻게 세운 연변조선족자치구입니까? 우리 1만여명이나 되는 조선족렬사들의 피로 바꿔온 조선족자치구입꾸마. 동북해방전쟁 때로부터 제4야전군 백만대군에는 우리 조선족장병들이 15만명이나 들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동북을 해방하고 북경을 해방하고 장강과 황하를 뛰여넘어 해남도까지 해방했습니다. 그때 우리 동북군정대학 선배 조남기동지랑 조선족 백성들을 동원해 동북해방전쟁 할 때 중국인민해방군 제4야전군에 쌀을 만여킬로그람이나 실어갔습니다. 홍학지 장군은 조남기를 자기 부대 후근부 간부로 채용했습니다. 지금 조남기 는 중국인민지원군 후근사령부 교통운송과 과장을 한답디다. 우린 선렬들의 피로 바꿔온 우리 조선족자치구를 목숨으로 지켜야 합꾸마.” 그 말을 듣자 기준은 밭고랑 같은 주름을 조금 폈다. "그런 도리를 잘 알면 계속 공안국 국장을 하는게  우리 연변조선족자치구를 지키는데 낫지 않겠느냐? 뭐나 앞뒤를 잘 고려해라." 상순은 땅이 꺼지게 한숨을 후- 내쉬었다. "잘 생각해보겠습구마. 여기서 미제와 남조선, 국민당특무를 잡는 후방보위공작도 중요합구마. 하지만 전선에 나가 미제를 몰아내야 합꾸마. 그래야 조선도 지키고 우리 연변, 아니, 중국을 지키는데 낫을 거 같습구마. 여기서 특무 오기를 기다리기보다 조선전선에 나가 미제와 남조선 놈들과 판가리싸움을 하고 싶습구마." 이때 패용천산 쪽에서 다급히 고함치는 소리가 쩌렁쩌렁 메아리쳤다. “사람 살려요!” “아이유, 곰이 사람을 물어 죽입니다.” 상순과 기준이 패용천산 쪽을 바라보니 강냉이 밭에서 울리는 애절한 여성의 비명소리였다. 상순과 기준은 낫을 쥐고 그쪽으로 황급히 달려갔다. 산비탈 강냉이 밭에서 곰 한 마리가 김창욱이네 처를 쫓아다니고 있었다. 창욱의 처는 진작 곰한테 엉덩이를 물려 피가 치맛자락 밑의 허벅다리를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상순은 “이 놈 곰 새끼!” 하고 고함치며 낫을 휘두르면서 곰에게 달려들었다. 곰은 창욱의 처를 뒤로 빼돌리면서 달려드는 상순을 보자 성이 날대로 났다. 곰은 강냉이 대를 마구 가로 타고 “끼깅!” 무서운 소리를 지르며 상순에게 덮쳐들었다. 곰은 상순이 휘두르는 낫을 잡아 훌 빼앗아 무릎에 대고 뚝 분질러 던졌다. 기준이 뒤에서 달려오면서 창욱의 처가 무를 뽑느라고 쓰던 삽을 쥐여 휘두르며 곰을 막아 나섰다. 곰은 기준의 손에서 삽마저 빼앗아 뚝 분질러 내던졌다. 상순과 기준은 곰을 당할 수 없어 돌멩이를 쥐어 뿌렸다. 그 새 창욱의 처는 저 멀리 산 아래로 달아났다. 상순은 진작 권총을 쏘려다가 그만 두었던 것이다. 괜히 권총을 쏘아 곰 무리를 놀라게 해 몽땅 이쪽으로 덮쳐들어 더 큰 화를 당하게 할 가봐 서였다. “아버지, 됐습니다. 창욱의 처를 구했으니 달아 나깁소.” “응.” 상순과 기준은 곰을 이리저리 피해 강냉이 밭에서 달아났다. 곰도 숱한 사람이 몰려오는 것을 보고 강냉이 밭에서 달아나 칼산 쪽 골짜기 수림 속에 우둔한 몸뚱이를 숨겼다. 곰을 쫓고 나니 해가 뉘엿뉘엿 칼산 쪽으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어둑어둑 할 때까지 일하고 상순은 저녁에 강냉이 단을 수레에 싣고 아버지와 처자들과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저녁 숟가락을 놓기 바쁘게 상순은 먼저 토성 안 집에 들어가 형님과 아주머니 그리고 여조카 순애를 만나보고 웃새집에 가서 할아버지와 큰아버지 등 웃어른들을 일일이 뵈었다. 특히 사랑방에 가서 조선에서 피신해온 새 큰어머니 진달래와 막내동생 경수와 용천 대장의 아들 경주도 일일이 만나보고 엿 알까지 주었다. 병완은 상순을 데리고 토성 안의 촌공소에 갔다. 그러자 집안 웃어른들과 마을의 숱한 사람들이 낮에 일하고 곤한 것도 잊고 촌공소에 모여왔다. 그들은 조선전쟁터 무명고지에서 성칠이 희생된 일은 아직 모르고 상순의 곁에 모여 앉았다. 병완은 막내손자를 대견스레 바라보았다. “얘야, 요즘 듣자니까. 미군과 장개석 국민당이 우리 연변에 특무를 많이 파견했다가 붙잡혔다고 하더구나. 네가 공안국을 비우고 여기 와서 되겠니?” “괜찮습니다. 이젠 안도현 공안국이 서면서 내 공안국에 모집해 들여온 천용구가 부국장으로 됐습니다. 오래잖아 국장으로 올라갈 겁니다. 미군 특무들도 여기 와서 맥살도 못 추고 하나하나 잡혔습니다. 근심하지 마십시오.” 진달래는 경주와 경수를 양 무릎에 올려놓고 끌어안으면서 상순에게 물었다. “미군 특무를 붙잡던 이야기를 좀 해 줘요.” “옳소. 얘기해주오.” 그리하여 상순은 그간 연변에서 특무 잡이를 한 주요한 이야기만 하기 시작했다. “지난번에 송강에서 있을 일입니다. 송강여관에 한 ‘지원군’이 숙박하러 와서 둔전개간판사처에서 내준 소개신을 내보이더랍니다. 송강파출소의 민경이 어디로 가는 길인가고 물으니 그자는 송강에서 료동성 무송까지 가는 길이라고 하더랍구마. 민경은 길림에서 무송으로 가자면 기차를 타고 가면 쉽겠는데 이렇게 에돌아 험한 수림 속 산길로 가려 한 것에 도리머리를 흔들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자가 수상했습니다. 그래서 문 밖에 보초를 세웠습니다. 이튿날 그 자는 현장을 찾아가겠다고 하더랍니다. 옛날 광복 전에는 안도현 소재지가 송강이었지만 지금은 아니 잖고 뭣입니까. 그래서 민경은 수상하다고 계속 심문을 들이댔습니다. 드센 정치공세에 결국 그자는 미군이 파견한 남조선특무 이군영이라고 탄백했습니다.” 모두들 웅성거렸다. “에이, 허수아비 같은 특무 놈이야.” 이윽고 모두들 상순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계속 재미나게 들었다. 일찍 1952년 6월에 미군과 한국이승만 국군은 비행기로 “문대”로 부르는 5명 무장간첩소조를 로야령에 낙하시켰고 무송에도 “심대”라는 무장간첩소조를 낙하시켰던 것이다. 이군영은 문대와 심대의 특무들의 활동을 감독하고 순찰하라는 명령을 받고 장백산에 비행기를 타고 와서 낙하하였던 것이다. 그해 9월 중순에 그는 먼저 문대를 순찰하고 그 다음 무송에 가서 “심대”를 순찰하러 로야령으로 들어가려고 하였다. 그러나 갓 일떠선 연변조선족자치구 서기 주덕해와 공안국 책임자 요흔, 무장부 부장 풍립신의 령도 아래 연길현과 화룡현, 안도현 공안국에서는 숱한 병력을 투입하여 산을 봉쇄하고 수색했다. 그 바람에 그는 특무들과의 연계가 끊어진 바람에 송강려관에 들었다가 나포됐던 것이다. 이군영의 탄백에 근거해 공안부문에서는 미군 비행기와 문대, 심대의 연락시간은 하루 건너 기수일이며 연락지점은 로야령과 화라자라는 단서를 잡게 됐다. 안도현 공안국에서는 천용구 부국장의 인솔하에 공안일군들이 삼도백하로부터 로야령으로 수색하고 화룡현에서는 공안국장 강성만이 대오를 인솔해 청산리로부터 로야령 방향으로 수색해나갔으며 연길현에서는 공안국장 이창엽의 인솔하에 와룡골과 갑산을 거쳐 로야령으로 수색해 들어갔다. 주요 연락지점인 로야령과 화라자에 숱한 공안일군들을 매복시켰으며 일부 전사들을 나무꾼처럼 가장시켜 산에 올라가 관찰하게 했다. 나무꾼으로 가장한 전사들이 나무를 하는데 수상한 놈 둘이 산에서 내려와 화라자로 가는 길과 산 아래 정황을 물었다. 그자들이 매복 권에 들어가자 매복했던 전사들은 일제히 사격하여 당장에서 한 놈을 격살하고 문대의 대장 장대문이라는 놈을 생포했다. 천용구 부국장은 공안일군들을 이끌고 장대문을 앞세우고 화라자에 쳐놓은 초막을 기습하여 한창 공급물자를 보내라고 무전을 치던 특무 우송림을 나포했다. 원래 우송림과 두 특무는 밭 전(田)자로 삭정이에 불을 지를 준비를 해놓고 서울에서 날아온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우송림이 나포되자 나머지 두 놈은 수림 속으로 달아났던 것이다. 이윽고 비행기가 날아오자 공안일군들은 네 무지의 삭정이무지에 불을 질렀다. 이윽고 비행기는 낙하산 7개나 투하했다. 낙하산과 함께 떨어진 보따리를 헤쳐 보니 먹을 것과 옷이었고 위조한 돈과 소개신 따위였다. 그 후 달아난 두 특무 중에 한 특무는 도망치는 길에 한 아주머니를 보고 먹을 것을 달라고 빌었다. 그 녀성은 특무에게 먹을 것을 가져오겠으니 기다리라고 한 후 마을에 내려가 민병들을 데리고 와서 나포했다. 다른 한 특무는 너무 배고파 한 개인 집의 김치 움에 들어갔다가 주인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이렇게 문대와 심대의 특무들은 몽땅 붙잡히었던 것이다. 연변자치구 공안부문 책임자들인 요흔은 우송림을 설득하여 자기네 특무 본부에 무전으로 비행기를 보내 안도현 삼도구의 벌판에서 이군영을 데려가며 신호는 3발의 신호탄으로 하기로 했다. 동북공안부대 반 사령원이 거느리고 온 고사기관총으로 무장한 한 개 영은 미리 수림 속에 은폐해 미군 간첩비행기를 격추할 만반의 전투준비를 다했다. 원시림에 어둠이 깃들고 약정한 시간이 됐다. 과연 동북쪽으로부터 비행기가 우릉우릉 날아왔다. 우송림은 공안일군들이 시키는 대로 메가폰을 가지고 영어로 비행기에 대고 고도를 낮추라고 고함쳤다. 비행기는 점점 지면에 다가왔다. 이때 반사령이 팔을 홱 저으며 명령했다. “사격!” 고사기관총이 불을 토했다. 비행기는 불길한 징조를 눈치 채고 고도를 높이면서 도망치려고 했다. 허나 때는 늦었다. 고사기관총의 밀집사격에 비행기는 불길을 뒤집어 쓴채 내리 꽂혔다. 꽝! 요란한 소리와 함께 비행기는 산산 쪼각이 나고 말았다. 미군 비행기조종사 둘은 즉살하고 나머지 도널과 픽터우는 비행기가 폭발되려는 찰나에 자동장치를 눌러 기체 밖으로 튕겨 나왔다. 공안전사들이 덮쳐나가 그들 둘을 생포했다. 그런데 “도널, 픽터우 사건”이 발생한 후 미국 국방장관 델레스는 성명을 발표했다. 그는 “격추된 비행기는 상인들의 무역비행기로서 중국 영공 장백산 림해에 잘못 날아들어갔다. 중국정부에서 도널과 픽터우를 즉시 석방해야 한다.”고 억지주장을 했다. “도널과 픽터우는 중국인민군사법정에 의해 이제 우리 나라 영공에 침투한 간첩죄로 무기징역에 언도될 것입니다.” 상순의 말에 병완은 머리를 끄덕이었다. “설마 했는데. 미국 놈들이 확실히 여기 연변까지 쳐들어올 궁리를 했구나.” 창준도 한숨을 후 내쉬었다. “해방이 나서 좀 잘 살까 하니 그 놈들이 개지랄이구나.” 마을 사람들도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는 것을 둘러보고 상순은 손을 내저었다. “여러분, 근심하지 마십시오. 우리 공안일군들이 변방부대 전사들과 함께 미국과 한국, 중국 대만 특무들을 몽땅 잡아치우니까 근심하지 마십시오. 누구나 다 경각성을 높여 인민전쟁의 넓은 특무잡이 그물을 늘여 놓는다면 하늘에서 날아 내린 특무들도 용빼는 수가 없을 겁니다. 혹시 그 놈들이 우리 지방의 지주들이거나 국민당 악질들의 가족들과 악랄한 반 중화인민공화국 음모를 꾸밀지도 모릅니다. 만약 의심스러운 일이 있으면 나한테 알리십시오.” “그래야지.” 병완도 마을 사람들한테 특무들의 행적을 발견하면 촌공소에 보고하라고 일일이 신신당부했다. 이튿날 이른 아침에 상순은 숟가락을 놓기 바쁘게 아버지를 쉬라고 한 후 소 수레를 메워 몰고 명옥과 함께 소서구 밭으로 올라갔다. 이게 웬 일인가? 강냉이 단을 싣다가 보니 강냉이이삭을 거의 다 따가지 않았겠는가! “이걸 보오. 강냉이 이삭이 하나도 보이지 않소.” 명옥도 강냉이 단을 살펴보다가 맥없이 물앉았다. “초겨울이 되도록 제때에 실어가지 못해 이렇게 됐소. 남들처럼 남정이 있는가? 온 산에 뉘 집 곡식 단이 널린 게 있소?” “곰 소행인가? 도둑놈들 소행인가?” 상순은 강냉이 단 옆에 난 발자국을 피뜩 보다가 무릎을 꿇고 앉아 자세히 살펴보았다. 깊이 푹푹 찍힌 구두 발자국을 보자 그는 혹시 특무들의 소행이 아닌가는 생각이 피뜩 들었다. 상순은 하얀 서리 살짝 깔린 옥수수 밭에 난 발자국을 따라 가보았다. “여보, 빈 강냉이 대라도 싣구 가기요. 어디로 가오?” “당신 혼자 싣고 가오.” 상순은 권총집에서 권총을 뽑아들고 어지러운 발자국을 따라 천지꽃산을 넘어 패용천산과 칼산 사이 골짜기를 따라 내려갔다. 아침 해가 뜨자 서리발이 녹으면서 발자국을 찾을 길이 없었다. 그는 조심스레 가둑나무가 우거진 수림 속을 둘러보았다. 갑자기 나무숲 속에서 무슨 바스락바스락 소리가 들리었다. 상순이 허리를 숙이면서 바스락 소리 나는 쪽을 살피었다. 누런 마른 나무 잎 속에서 다람쥐가 뛰어다니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머리를 돌려 가려다가 주춤 멈춰 섰다. 다람쥐가 노는 누런 마른 나무 잎 무지 옆에 통졸임 깡통과 강냉이 알을 다 뜯어 먹다 남은 강냉이 이삭이 눈에 띄었다. 그리고 삭정이를 주어다 불을 피웠던 것 같은 자리에 재무지가 있었다. 그는 버스락 버스락 마른 나무 잎을 밟으며 다가가 불에 구워진 마른 강냉이 이삭을 쥐어 보았다. 사람이 뜯어 먹다가 버린 것을 다람쥐가 뜯어 먹다 남은 것 같았다. 통졸임 깡통은 영어가 들어박힌 게 아닌가. 기민한 상순은 이 근방에도 미군이 아니면 남조선 특무들이 내려 왔다는 예감이 들었다. (무장간첩?) 상순은 인차 슬금슬금 나무숲을 헤치고 골짜기를 벗어났다. 그는 권총을 허리춤에 차고 아무 것도 모르는 척 하면서 강냉이 밭에 가서 명옥과 함께 강냉이 단을 소 수레에 싣고 소서구에서 내려왔다. 그는 집 울안에 들어서자 인차 소 수레를 벗겨 놓고 정미소에 가서 할아버지를 찾았다. 병완은 겨 먼지를 툭툭 털면서 상순을 따라 촌공소로 갔다. 상순은 할아버지한테 금방 발견한 일을 죽 이야기했다. “할아버지, 우리 지방에도 특무들이 활동하고 있는 거 같습니다. 마을에 소문을 내지 말고 암암리에 민병들을 무장시켜 천지꽃산 주위를 포위해 특무를 붙잡아야 하겠습니다. 밤이면 마을에 보초를 서고 이상한 놈이 있으면 체포해 심문해야 하겠습니다. 특히 금방 감방에서 나온 장충국과 장학산 같은 당지 지주들을 주의해야 하겠습니다.” 병완은 머리를 끄덕였다. “그러자. 밤이면 무슨 비행기가 자꾸 서남 쪽으로 날아갔지만 우리 비행기인지 특무들이 침투하는 비행기인지 구별할 수 있어야 어쩌지.” “건 우리 변방부대와 공안부문에서 할 일입니다. 특무들이 하늘에서 얼마 내려오든지 우린 몽땅 체포해야 합니다.” 병완은 막내손자를 대견스레 바라보았다. “넌 공안국에 돌아가렴.” “아닙니다. 여기 특무들을 내 손으로 잡아야겠습니다. 이 일을 인차 천용구 부국장에게 알려 사람을 보내라고 하겠습니다.” 병완은 머리를 끄덕였다. 할아버지 병완과 손자 상순은 한참이나 특무들을 붙잡을 계획을 면밀히 토론했다. 상순은 촌공소에서 나오다가 금방 위생학교에서 돌아온 촌공소 옆집에 있는 큰조카 공학을 만났다. 공학의 옆에는 얼굴이 보름달같이 환한 처녀애가 서서 웃고 떠들다가 생글거리는 눈길로 쳐다보는 것이었다. “벽선이, 인사하오. 내 삼촌이오. 영월구 공안국 국장을 하오.” 공학은 인사시키면서 싱글벙글 웃었다. 벽선은 허리를 구십도로 굽히면서 인사를 올렸다. “안녕하십니까? 삼촌님.” “엉? 오.” 상순이 놀라 하는데 옆에서 너부죽한 공학이 싱글벙글거렸다. “용정위생학교 여동창생 김벽선입니다. 부모와 삼촌의 허락을 받고 약혼식을 할까 해서 데리고 왔습니다.” “그래? 거 참 좋은 일이구나. 먼저 할아버지와 노할아버지께 인사해라.” 그리하여 상우네 부처간과 상순은 촌공소에 들어가 병완에게 벽선을 인사시켰다. 병완은 깎듯이 인사를 올리는 활발한 증손비감을 보고 수염을 어루 쓸었다. “새 애기 올해 나이 어떻게 됐소?” “열여덟 살입니다.” “그래? 음, 맏증손자 공학이 올해 스무 살이니까 나이도 맞구나. 우리 집안에 공학이 의학공부를 하니까 또 의사 증손비가 들어서는구나. 내 오래 사니까 증손비도 다 보는구나. 허허허.” 병완은 반가와 어쩔 줄 모르면서 벽선과 이것저것 물었다. “요즘 의학공부 바쁘지?” 벽선은 머리를 다소곳이 숙이었다. “맨 공부만 하면 괜찮아요. 조선에서 숱한 부상병들이 들어와서 치료해 주다나니 공부할 새도 별로 없습니다. 우린 요즘엔 도문과 개산툰에 가서 부상병들을 구급합니다.” “그래? 부상병들을 구급하는 게 좋은 의사공부지. 허허허.” 한참 후 상우는 공학과 벽선을 데리고 상순이네 집으로 찾아가 아버지께 인사시켰다. 기준과 명옥이 반가와 한 것은 두 말할 것도 없었다. 상순은 공학을 조용히 불러 천지꽃산에서 발견한 일을 말해주고 나서 벽선을 데리고 유람하는 셈 치고 영월구에 가서 천용구 부국장에게 정황을 알리고 민경들을 데리고 오라고 기별하게 했다. 한편 길림에 기관사 기술을 배우러 갔던 둘째조카 열대여섯 살 밖에 안 되는 동선을 시켜 진수해파출소와 용정 공안국에 가서 함흥 촌 부근의 적정을 알리라고 했다. 특무들을 놀라게 하지 않으려고 상순은 아무 일도 없는 듯이 소 수레를 몰고 명옥과 함께 소서구로 강냉이 단을 실으러 느릿느릿 올라갔다.                 9. 함흥 촌에 나타난 용천 대장 초겨울의 싸늘한 해가 중천에 걸렸을 때다. 범이 자기 흉을 하면 온다고 진짜 남조선 특무 세놈이  조선인민군 복색을 하고  핳흥촌에 접근해 오고 있었다. 그 놈들이 칼산을 넘어 령길을 타고 천지꽃산 기슭에 이르러 함흥촌에 다가갈 때다. "아니, 함흥촌으로 가 뭘 해요?" 뒤에서 따라오던 뱁새눈이 주춤 멈춰섰다. 용천은 깜짝 놀랐다. (이 놈 뱁새눈이 어떻게 함흥촌을 알지?) 용천이 뒤돌아보니 뱁새눈은 똑 마치 얼음강판에 들어선 황소 눈깔 같이 부릅뜨지 않았겠는가.. 그 뱁새눈에는 당황함과 공포의 그림자가 스쳐지나가고 있었다. 하긴 똘만은 함흥촌은 살아남기 힘든 사지로 기억됐던 것이다. 항일전쟁시기에 함흥촌 동쪽에 있는 늙은 비술나무 밑에서 밤중에 기준과 딱 마주쳤다. 제딴에는 빨리 반응해 권총으로 기준을 제압했다. 그러나 진달래가 날린 돌멩이에 맞아 권총을 떨어뜨렸다. 뒤이이 날아온 돌멩이에 머리를 맞았다.  그 틈에 기준도 홱 돌아서  무쇠주먹으로 똘만의 대가리를 썩은 호박 치듯 했다. 똘만은 밤중에 들이닥친 홍두깨에 얻어맞고 당장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함흥촌에 들어가는 날엔 기준과 병완이 날 알아볼텐데 살아남을 수 있어? 안간다. 안가.) 뱁새눈은 친일주구 신분이 드러날 위험도 무릅쓰고 생떼질 썼다. "함흥촌에 가지 말깁소." 용천이나 병수나 다시 한번 놀랐다. (이 놈이 황해도 놈이라더니? 함경도 사투리를 써?) 병수는 외까풀눈을 가슴츠레 뜨고 뱁새눈을 쏘아보았다. (점점 더 수상해. 이 놈도 분명 한철주와 한 고향 친일주구인 거 같아.) 병수는 어떻게 처치할가 궁리했다. 그는 용천을 한쪽 구석에 데리고 가서 저쪽에 멀쩡히 서 있는 똘만을 쳐다보며 나직이 말했다. "저 놈 뱁새눈이 분명 한철주가 김연대장을 암살하려고 파견하겠다던 놈인 거 같아요." "그래? 나도 의심했어." 땅! 총소리와 함께 용천이 왼팔을 붙잡고 쓰러졌다. 자기를 의심하는 눈치를 챈 똘만이 선손을 썼다. 용천은 쓰러져서도 번개같이 권총을 꺼내들었다. 그때 병수가 권총을 뽑아 똘만을 쏘았다. 똘만이 손목을 붙잡으며 권총을 툭 떨어뜨렸다.  병수가 재차 쏘려할 때다. "잠간!"  용천이 말렸다. 그는 천천히 일어나 권총으로 똘만을 겨누며 다가갔다. "왜 날 쏘았어?" "네놈은 한철주 형제를 암살한 놈이야. 죽어 싸다." "넌 누구냐? 어떻게 함흥촌까지 알어?" 똘만은 뱁새눈을 무섭게 부라렸다. "한사단장 생전 명을 받고 네놈들을 죽이러 따라왔다.  한사단장 형제 원쑤를 갚지 못하고 죽는게 한일 뿐이야," "똘만?" 용천과 병수는 놀라며 서로 눈길을 맞추었다. 크나큰 충격이었다. 그 찰나 똘만은 발길을 날려 용천의 손목을 걷어찼다. 권총이 저만치 날려갔다. 똘만은 어데서 그런 힘이 생겼을가. 머리로 병수를 헤딩해 쓰러넘어 뜨렸다. 그리고는 곤두박질쳐 산골짜기로 데굴데굴 굴러내려갔다. "서랏!" 병수가 똘만을 추격했다. "관둬!" 용천은 병수를 불러세웠다. "왜?" 병수는 의아해했다. "저 놈을 살려뒀다간 우리 당해요." 용천은 똘만이 떨어뜨린 권총을 주어들고 허구픈 웃음을 지었다. "그 놈이 빈손으로 어쩐다고? 흥! 저 놈은 함흥촌 민병들한테 맡기고 우린 함흥촌으로 간다."  용천은 아픔을 참으며 권총을 허리춤에 찼다. "어서 마을에 내려가자구."  "아니, 총소리를 듣고 숱한 놈들이 포위할 텐데." "민병들이 왁작거리며 저 놈을 포위하는 틈에 우린 마을에 내려가 배터지게 밥이나 먹구 봅세." 용천은 병수를 돌아보며 대수롭잖게 말했다. "남조선 특무캉 싸우다 부상당한 조선인민군인데 뭐가 두려워?" "오- 알겠어요." 병수는 로련한 용천한테 머리를 숙이었다. 용천은 진달래와 아들을 만나는 것이 우선이었다. 병수는 또 혼자 삼촌 성칠을 살해한 용천을 처단해버리긴 힘들다는 것을 알고도 남음이 있었다. 격투나 사격이나 다 용천에 비해 열세였기 때문이다. 그는 마을에 내려가면 친척들의 힘을 빌어 용천을 죽이기로 작심하고 용천을 따라 나섰다.  용천은 병수를 데리고 태평강 버들숲속으로 달려가 숨어들어갔다. 뒤이어 번개같이  함흥촌 남쪽에 있는 한족 묘지에 이르러 마른 풀 숲에 숨어서 망원경을 들고 마을 안의 동정을 꼼꼼히 살폈다. 마을 사람들은 마당에서 도리깨질을 하다가 그만두고  종소리나는 토성안 촌공소로 달려갔다. 뒤이어 민병들이  총을 들고 우르르 쓸어나왔다. 그들은 금방 총소리 울린 서쪽 천지꽃 산쪽으로 달려가는 것 같았다. "때가 왔어. 마을엔 무장민병들이 나나가 텅  비었을 거네." 용천은 멜가방에서 붕대를 꺼내 왼팔을 싸매 어깨에 처매었다. 그는 뒤에 엎뎌 있는 병수를 돌아보면서 머리를 끄떡 하더니 마을 어귀로 스적스적 걸어갔다. 원래 용천은 늦가을에 장백산에 날아와 내린 후 인적이 없는 원시림을 이용해 유격대를 확대하고 유격전을 벌리려고 했다. 갓 연변에 날아와 내렸을 때에는 가을이기에 그래도 밭에서 강냉이랑 고구마랑 감자랑 구워 먹으며 기상과 적정을 정찰해 무전으로 무난히 도꾜 미군 본부와 서울의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고할 수 있었다. 맥아더 장군은 장백산에서 보낸 군사정보를 도꾜 안방에서 속속들이 보고 받고 나서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나 장백산 일대에서 공안부문과 변방부대에 숱한 특무들이 붙잡히고 장백산 일대에 대한 봉쇄와 토벌이 심해지자 더는 장백산 일대에서 활동할 수 없었다. 게다가 서울 본부와 왕복 비행기와의 연계도 잘 되지 않아 압축과자와 동복을 제때에 공중투하해주지 않은데다가 설상가상으로 초겨울에 들어서면서 산에서 추워 견딜 수 없었다. 그리하여 용천은 울며 겨자 먹기로 절벽 끝 전술을 써서 대담히 삼촌 김덕성과 진달래가 있는 함흥 촌으로 침투해 잠복해 있으면서 정보를 제공하고 삼도만과 왕청 로야령을 거쳐 자기가 활동하던 북만까지 손을 뻗칠 생각을 했다. 그는 먼저 대담히 이병수를 데리고 함흥 촌으로 슬금슬금 다가왔던 것이다. 그는 꼬리가 밟힐 것 같으면 삼촌과 진달래와 경주를 데리고 남조선으로 날아가려고 마음먹기까지 했다. 그들은 먼저 곰과 범이 무리를 쳐 다녀 마을 사람들이 별로 다니지 않는 패용천산과 칼산에 숨어 있으면서 진수해와 함흥 촌 일대의 정황을 살폈다. 아무리 망원경으로 살펴 보아도 진수해에 옛날처럼 유격대나 군부대가 들어 있지 않는 것 같았고 함흥 촌에는 집단부락 때거나 토비숙청 때처럼 경계가 삼엄하지 않았다. 이전에 마을에 세웠던 망루도 보이지 않았으며 둘레에 세운 목책은 수레를 몰고 드나들기 편리하게 드문드문 끊어나 있었다. 정말 경각성은 흐지부지하고 평화로운 분위기에 푹 빠져 있는 시골 마을로 보였다. 용천은 네 특무를 데리고 패용천산과 칼산 사이 깊숙한 골짜기에 숨어 낮에는 까딱하지 않고 나무 잎을 들쓰고 숨어 있었다. 밤이면 강냉이 밭에 가서 마른 강냉이를 뜯어다가 삭정이로 불을 피워놓고 구워 우두둑 우두둑 뜯어 먹으면서 주린 배를 달래고 추위를 물리치면서 견디었던 것이다. 불도 너무 오래 피우면 발각될 거 같아 추운 대로 과수원의 농막에 들어가 우둘우둘 떨면서 윤번으로 자거나 나무 숲속에 들어가 나뭇잎을 덮고 새우잠을 자군 했다. 기아와 추위에 허덕이던 나날을 생각만 해도 진절머리났다. 용천은 마을에 들어가 인차 토성 안 집 앞에 자리 잡은 삼촌 덕성이네 집 마당으로 스적스적 다가갔다. “아니, 이게 누구냐? 용천아...” “쉬-” 용천은 식지를 입술에 대며 아래 위 집을 살피더니 황급히 삼촌의 팔을 잡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집집마다 마당에 수수대바자를 높이 해 세워 그들을 본 것 같지 않아 다행이었다. 윗방 구들에 올라가자마자 용천은 눈물을 줄줄 흘리며 삼촌에게 넙적 꿇어 앉아 절을 올렸다. “삼촌, 그간 잘 계셨어요?” “오, 그래, 넌 고향에 갔나? 어떻게 돼 여기까지 왔어?” 용천은 구들에 앉으면서 병수를 인사시켰다. “내 전우예요. 이 대대장 인사하게나. 내 작은아버지야.” 병수도 속으로 살려 주십사하고 넙적 큰절을 올렸다. “어떻게 한 입으로 말하겠어요? 진달래와 경주를 찾아 조선 팔도를 다 돌았어요. 개성에도 가서 돌아보았지만 끝내 찾지 못했어요.” 덕성은 용천의 손을 잡고 물었다. “그래, 조선에서 칠백을 만났어?” “만났어요.” 용천은 “칠백은 죽었어요.” 하고 말하려다가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응어리진 마음의 어혈과 함께 겨우 꿀꺽 삼켜버리었다. 그는 작은아버지 갈망에 찬 눈길을 피하며 머리를 툭 숙이었다. “그래 그 자식 지금 어디에 있어?” “우리 조선 인민군은 우리 고향 경주를 점령하고 부산을 향해 마구 밀고 나갔어요. 그때 칠백은 부대를 따라 경주를 거쳐 부산에 나가다가 미군의 폭격에 막혀 북으로 철퇴했지요. 그때 칠백은 산에 갇히었다가 당지 유격대와 함께 경주에까지 철거해왔다가 고향에서 나를 만났던 거예요.” “그래 그 자식 지금 경주에 있어?” “예. 경주에서 작은아버지 오기를 기다리고 있어요.” “이 난장판에 어떻게 그리 먼 곳에 가?” 덕성은 너부죽한 얼굴에 수심의 그림자가 흐르고 있었다. “지금 가지 않으면 3.8선이 가로 막히는 날엔 못 나가. 아무뜨므(아루래도) 이 내 조카 방법을 대 보지라.” “저 뒤 웃새집 성칠 대장을 만났댔어?” 그 말에 용천은 옆에 앉은 병수의 눈치를 힐금 곁눈질해 보았다. “만나지 않고요.” “그래 용천은 다 잘 있나?” “에이, 이 난시 판에 미군 놈들의 폭격에 즉살했어요.” “음, 그랬구나. 그런데도 진달래 조카며느린 성칠 대장이 살고 네가 죽었다고 했어.” “말도 안 돼요. 이렇게 펀펀히 살았구먼요. 진달랜 지금 확실히 함흥 촌에 있어요?” “저 뒤 창준이네 사랑방에 있는 기여.” “경주는 잘 있는기오?” “그래, 진달래캉 잘 있어.” 용천은 머리를 끄덕이더니 덕성을 쳐다보았다. “건 왜 삼촌 집에 있지 않고 그리로 갔어?” “너를 기다리다가 죽었다고 성칠 대장한테 재가 가서 경수라는 애까지 낳았어. 자기 시집에 간 거야. 병완 영감은 새 맏며느리를 얼마나 귀해 한다고.” 그 말에 병수는 속으로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비롯한 친척들이 이 마을에 살고 있다는 것을 대뜸 알게 됐다. 허나 그런 내색을 내지 않고 덕성 앞에서 연극을 심통하게도 노는 용천을 속으로 웃으며 얄미운 웃음을 지었다. “삼촌, 내캉 왔다는 말 누구한테도 알리지 말라우. 가만히 웃새집에 들어가서 진달래캉(진달래와) 경주만 조용히 데리고 오시라우.” “음, 그래. 뭐 훔친 색시냐? 원래 네 색신 걸.” 덕성은 그 자리로 일어나 웃새집으로 들어갔다. 병수는 따라 가고 싶었지만 용천의 눈치가 무서워 생색을 내지 못했다. 한참 후 진달래가 경주의 손을 쥐고 경주를 업은 채 덕성을 따라 허둥지둥 집안에 들어섰다. “어떻게 된 일이예요? 그렇게 애타게 기다려도 나타나지 않던 당신이 귀신처럼 나타났어요?” 용천은 진달래를 와락 끌어안으려고 했다. 허나 진달래가 경주를 안겨주면서 밀막았다. “경주야, 아빠야.” "아!" 용천은 왼팔 총상이 아파 상을 찡그리며 경주를 받아안았다. "어머! 팔 다쳤어요?" "오. 남조선 특무캉 싸우다가 다쳤어. 서산에서 총소리 나는 걸 듣지 못했어?" "그래요. 그래 특무놈은 어떻게 됐어요." "그 놈도 손목 다쳤어. 노루보담 더 빨리 도망쳐 버렸어." "그 놈이 도망치면 어데 도망쳐? 상순이 서산에 있는데. 숱한 민병들도 포위하러 갔는데. " 경주는 용천에게 안겨 말똥말똥 쳐다보다가 몸부림치며 진달래한테 되돌아가려고 했다. “얘가 경주지? 맞지?” “어떻게 이름까지 알아요?” 진달래는 철색얼굴에 이상해하는 그림자가 언뜻 비치었다. “성칠이 알려주었지.” “그래 성칠 연대장은 어떻게 됐어요?” 용천은 얼렁뚱땅 얼려넘기려고 엮어댔다. “무명고지에서 미군 폭격기에 폭사했어.” “진짜예요?” 용천은 머리를 무겁게 끄덕였다. “그래, 무명고지에서 처참히 희생됐지라우.” "아니야, 저 놈이 죽였어." 병수는 이렇게 까밝히고 싶었다. 그러나 억지로 참았다. 진달래는 잔등에 업혔던 경수를 내리워 끌어안고 엉엉 대성통곡 쳤다. “경수야, 불쌍한 경수야, 으흐흑, 흑흑.” 진달래는 등에 업었던 경수를 품에 돌려 안고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불쌍해 울었다. 어머니가 울자 경주와 경수도 덩달아 잉잉 울었다. 셈이 없는 경수는 울며 어머니의 얼굴을 고사리 손으로 매만지면서 “엄마, 금방 형님 보고 아빠 왔다 해놓고. 경주 아빠 내 아빠 아냐?” 하고 종알거렸다. 그 말에 진달래는 더욱 슬피 엉엉 울었다. 그때 용천이 경주와 경수를 한 품에 와락 끌어안았다. “그래, 난 너희들 아빠야. 젬만(어머닌) 아빠를 만나 기뻐 이러는기여. 울지 마.” 병수는 진달래와 용천 그리고 애들을 둘러보며 오리무중에 빠졌다. (도대체 무슨 갈래 판이야? 할아버지를 만나면 진상과 내막을 다 알 수 있겠지.) 진달래는 한참 후에야 울음을 그치고 용천과 마주 앉았다. 경주는 어머니 잔등에 매달려 아버지라는 용천을 말똥말똥 쳐다보고 경수는 어머니 무릎에 앉아 어머니 볼을 고사리 손으로 매만지면서 놀았다. 진달래는 저고리 고름으로 눈물을 훔치면서 병수를 곁눈질해 보더니 용천에게 물었다. “그래, 그간 어디 갔댔어요?” 용천은 그제야 꺽꺽거리며 병수에게 찔끔 눈짓했다. “부상병을 함께 데리고 들어온 내 수하 병수야.”  진달래는 병수에게 눈인사를 했다. 그러자 병수는 “사모님, 천천히 얘기하세요.”라고 하고는 권총집을 뒤로 하며 윗방으로 올라가 미닫이문을 꾹 닫고 덕성과 한담했다. 용천은 진달래 손을 덥석 잡았다. “여보, 당신을 찾아 조선 팔도를 다 헤맸어. 여기 있는 줄도 모르고.” 용천은 진달래를 찾아 헤매던 얘기를 죽 했다. 그러자 진달래도 용천을 기다리던 얘기를 죽 이야기하고 나서 울먹이며 뒷말을 이었다. “당신을 기다리다 못해 전 장백산 밀영에서 희생됐다고 여기고 성칠 오빠한테 재가했던 거예요. 용서해요. 그래 성칠 오빠와 한 부대에 있었어요?” “아니야, 난 혹시 당신 경주에라도 올까 해 고향에 갔다가 철퇴하던 조선인민군 속에서 성칠 형을 만났던 거야. 그런데 만난 날이 장날이라고 그간 지난 이야기를 듣다가 그만 미군 폭격기 공습을 받아 무명고지에서 성칠 형이 폭사당한 거야." (아니야, 성칠 삼촌은 저 놈이 죽였어요.) 병수는 방에서 듣다가 몇번이고 성칠 삼촌이 피살된 진상을 까밝히고 싶었다. 진달래와 함께 삼촌을 살해한 원수놈을 당장 척살하고 싶었다. 그러나 둘이선 용천을 당할 것 같지 못해 억지로 꾹 참았다. 용천은 그럴듯하게 엮어나갔다. "지나간 일은 어쩌겠나. 난세에 이런 일이 기수부지니까. 이젠 성칠 히야(형) 잊고 날 따라 가자. 애들을 어떻게 하겠나? 며칠 후 기차에 앉아 가지.” 땅! 갑자기 서산쪽에서 총소리 울렸다. 땅! 땅!  용천은 습관적으로 허리춤에 손이 갔다. "허허. 상순이 특무 잡는 모양이군 그래." 사실 그때 상순이 똘만과 싸우는 시각이 맞았다. 용천은 자꾸 바깥 동정에 귀를 기울이곤 했다. 급촉한 발걸음 소리가 나도 자꾸 말을 중단하는 것이었다. 진달래는 유격대 노련한 중대장의 예민한 눈길로 수상한 감을 느꼈다. 그녀는 짐짓 아무 것도 눈치 채지 못한 척 하면서 물었다. “그래 가면 어디로 가요?” 용천은 진달래의 눈치를 흘금 보다가 중얼거리었다. “부상병 호송임무는 완수했으니까. 시름 놓고 돌아가야제. 지금 전쟁은 한국군, 아니, 남조선 괴뢰군과 조선인민군이 대치상태에 처했어. 아무리 생각해 봐도 3.8선이 꽉 막히기 전에 고향 경주를 돌아갔으면 좋겠는디. 작은아버지도 모시고 가야제.” 진달래는 도리머리를 보일락 말락 흔들었다. “이 난세에 어디로 가요? 황차 당신의 고향 경주는 남조선인데 우리 같은 빨갱이출신이 어떻게 가요?” 그 말에 용천은 진달래의 손을 놓았다. “우리 모두 이념을 버려야제. 내 고향 경주에는 경주와 경수한테 물려줄 수십 헥타르 땅에 고풍스런 팔간 집 몇 채 있어. 내 고향에 돌아가자.” 진달래는 한숨을 후 내쉬었다. “이 난세에 여기 함흥 촌에 있다가 전쟁이 끝나자마자 나가면 어때요?” “안된다니까. 전쟁 끝나면 3.8선이 꽉 막혀버려. 지금 한창 정전담판중이야. 지금 같은 난시에 나가지 않으면 못 나가. 이번만 내 말 들으라니께.” 진달래는 마음이 한 곬으로 달리지 못하다가 나중에 틈이 깊숙이 벌어지고 있음을 직감했다. 그렇다. 남북 갈등이 최고조에 이른 시절에 그들 부부는 이념의 높은 장벽을 넘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애들을 사이에 놓고 매만지면서 한참이나 이 이야기 저 이야기 했다. 진달래는 권총을 벗어 벽에 걸어놓고 부엌에 내려가 점심을 지었다. 쌀을 가마에 앉혀놓고 부엌에 내려가 아궁이에 불을 지피자 풍무를 웅웅 돌리는 진달래의 내심은 복잡하기로 비길 데 없었다. 그는 부상병호송임무를 맡고 왔다는 용천이 혹시 남조선에서 파견한 특무가 아닌가고 의심하기 시작했다. 허나 경수가 이미 애비를 잃었는데 경주마저 애비를 잃게 할 수는 없었다. 순간 내심에서 화산이 폭발할 듯이 마음이 아프고 머릿속에서는 격렬한 사상투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용천과 병수는 오랜만에 진달래가 지은 새하얀 이밥에 따뜻한 장국을 배불리 먹었다. 대뜸 눈이 툭 불거져 나오는 듯 했다. 용천은 나머지 밥이 한 대야나 되는 것을 보고 산골짜기 수림 속에서 우둘우둘 떨며 주린 창자를 달랠 대만 특무들이 생각나 자꾸 바깥을 내다보았다. “언제 돌아가요?” 진달래는 설거지를 하면서 피뜩 용천을 돌아보며 물었다. “한 열흘 후에 가면 어떨 가? 작은아버지 타작이나 다해 낟알을 팔아 가지고 가면 좋을 거 같아. 작은아버진 영월동에서 일본 놈들에게 칠석과 옥녀를 잃었는데 이번에 칠백도 잃었어. 의지가지 없는 작은아버지도 모시고 가야제이.” 용천은 한숨을 후~ 땅이 꺼지게 내쉬었다. 그도 기실 빨갱이 물에 폭 젖은 진달래를 데리고 간다는 것은 식은 죽 먹기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도 남음이 있었다. 다만 어린 경주가 가는 뉴대로 돼 높은 장벽 양쪽에 있는 자기와 진달래를 억지로 한데 묶으려고 하고 있다는 것을 깊이 느꼈다. (더러운 년, 안 갈라면 말라지. 경주만 빼 가면 다야.) 진달래는 경수를 둘 쳐 업더니 물었다. “저 뒤에 성칠 오빠네 아버지를 만나보러 가지 않을래요?”  용천은 가지 않으면 진달래와 병완의 의심을 받을 것 같아 마지못해 우쭐 일어났다. “병수, 함께 성칠 연대장 아버지를 만나보러 갑세.” “예.” 용천은 경주의 손을 잡고 병수와 함께 진달래를 따라 눈에 익은 토성 안 집을 지나 웃새집으로 들어갔다. 그때 뒤에서 귀에 익은 우렁우렁한 목소리가 울렸다. “며느리, 보기요.” 용천과 병수가 본능적으로 권총집에 손이 갔다가 내리웠다. 억대우 같은 병완이 토성 안에서 나오며 그들을 이상한 눈길을 보는 것이었다. 병완과 용천은 거의 동시에 놀란 눈길을 보냈다. “할아버지, 그간 무사했어요?” “아니, 이게 몇 해만이오?” 그들 둘은 서로 굳게 악수를 나누었다. "용천 대장은 금방 서산에서 남조선특무하고 싸우다가 놓쳤대요." 진달래는 시아버지를 보고 금방 들은 말을 쭉 했다. “오, 그래? 왼팔을 그래 다쳤겠구나. 어서 들어가서 천천히 얘기하기요.” 병완은 용천을 데리고 토성 안 촌공소로 들어갔다. 병수는 자기 눈 앞에서 걸어가는 분이 바로 자기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그렇게 찾던 할아버지라는 것을 알고 놀랍기도 하고 반갑기도 했다. 그러나 자기 신분을 밝히기 어려운 형편에서 할아버지를 인사할 수도 없는 것이 너무나도 안타까웠다. 이때 상순이 소 수레를 몰고  민병들과 함께 토성 안에 들어섰다. 수레 우에는 군복을 입은 자가 실려 있었다.        모두들 놀라운 눈길을 보냈다.        특히 용천과 병수는 상순을 보고 깜짝 놀랐다. 마을에 군복을 입은 공안이 마을에 있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똘만이 끝내 당했구나.)         용천은 가까스로 진정하며 수레에 다가갔다. 아니나 다를가. 똘만이 가슴에 피 랑자한 채 쓰러져 있었다.                원래 똘만은 용천과 병수의 마수에서 벗어나 산꼴자기로 굴러내려갔었다. 그는 손목 상처를 붙잡고 천지꽃산을 넘어 소서구 쪽으로 도망쳤다.그런데 원쑤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칼산 쪽으로 도망치려고 하다가 소서구 골짜기에서 상순과 맞딱드릴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상순은 총소리를 듣자 명옥과 함께 수수를 싣다가 권총을 빼들고 이쪽으로 달려왔었다. 그가 천지꽃산 중턱에서 볼라니 조선인민군 복색을 한 두 사람은 골짜기에  굴러들어간 자를 추격하다가 말고 태평강 쪽으로 내려가는 것을 보았다. 그는 나무숲 속에 엎드려 소서구 쪽으로 올라오는 자를  기다렸다. 그런데 가까이이 온 걸 보니 역시 조선인민군 복색을 하지 않았겠는가. "헛참, 조선인민군끼리 싸워? 혹시 남조선 특무?" 번개처럼 뇌리를 치는 생각에 상순은 권총을 단단히 틀어쥐고 버스럭거리는 쪽을 주시했다. 한참후 한 자가 손목을 붙잡고 씩씩거리며 다가왔다. "꼼짝 말엇!" "억!" 그 자는 주춤 멈춰섰다. 뱁새눈으로 나무숲 속을 두리번거렸다. "손 들엇!" 똘만은 손을 들었다.  상순이 천천히 나무 숲속에서 나왔다. (에크! 저게 기준이 아닌가!) 그는 기준과 똑같이 생긴 상순을 알리 없었다. "헤헤헤. 장관님, 난 조선인민군입구마. 총을 거둡소." 상순은 총으로 겨누며 물었다. "왜 마을로 내려가지 않고 이런 델 숨어 다니오?" 똘만은 잘도 둘러댔다. "헤헤. 금방 남조선 특무들과 만나 싸웠소. 그 놈들은 둘인지라. 총도 있는데 난 맨손으로 혼자 어떻게 당하오? 부상도 당했지." 상순은 금방 본 정황과 맞아떨어진다고 여겼다. 그가 권총을 거두며 다가갔다. "가이오. 함께 남조선 특무를 붙잡으러 가기오." "그러기오." 똘만은 상순이   경각성을 늦추는 틈을 타 발길을 날려 상순의 아래배를 걷어찼다. "억!" 상순은 허리를 굽혔다. 똘만이 재차 무릎을 쳐들어 턱을 걷어올리려고 할 때다. 땅! 상순은 허리를 굽히며 권총을 뽑아 갈겼다. 똘만은 본능적으로 옆으로 몸을 피했다. 총알이 빗나갔다. 상순은 재차 덤벼드는 똘만을 향해 련발 사격했다. 땅! 땅! 똘만은 아무리 특무훈련을 받았지만 상순의 총알을 피하지 못했다.     몇십년 친일주구로 개처럼 뛰여다니다가 몇번이고 죽을 고비를 넘긴 똘만이였지만 끝내 영용한 공안국장 상순의 손아귀를 벗어나지 못하고 만주 땅에서 개죽움을 명하지 못하고  말았던 것이다.  수수단을 널린 산기슭에서 민병들이 총을 겨누고 몰려들었다. 그들은 상순의 지휘 아래 특무 똘만의 시체를 수레에 싣고 마을로 내려 왔던 것이다.          병완은 소수레에 와서 시체를 이리저리 보더니 깜짝 놀랐다. "이놈이 우리 고향부터 따라다니던 친일주구 똘만 놈이구나." 용천과 병수는 서로 눈길을 마주쳤다. (똘만놈 맞구나.) 병수는 권총을 찬 상순이 뒤따라 들어오는 것을 보자 등곬이 싸늘해 주춤 멈춰 서며 자연히 허리춤에 손이 갔다. 그러자 상순도 멈칫하며 손을 권총집에 가져갔다. 그때 병완이 뒤돌아보며 손짓했다. “상순아, 누가 왔는가 봐라!” “아, 용천 대장!” 상순은 뛰어나가며 환성을 질렀다. 그러나 세귀눈만은 용천의 아래위를 무섭게 살폈다. 금방 특무를 붙잡은 시점에 불쑥 마을에 나타난 불청객이 아닌가.  “아니, 이거 우리 꼬마 유격대원 상순이 아닌가?” 용천은 상순을 와락 끌어안고 아닌 보살을 떨며 잔등을 툭툭 다독였다. “야, 상순이 벌써 이렇게 컸어. 너거 공안국장을 한다더니 왜 여기 함흥 촌에 있어?” “공안국장을 그만두자고 그러오. 이젠 미제와 남조선 괴뢰군 특무들도 다 붙잡았지. 할 노릇이 있습니까? 괜히 아버지께 효성도 하지 못할 거 같아 공안국 국장을 그만둘 예산입니다.” 상순은 박성우가 다른 현 공안국으로 전근돼가 일하기 편리해졌지만 집 근심만은 마음 속에서 내려놓을 수 없었다. 그는 잠시 함흥 촌에 돌아와 효성도 하고 사회주의 제2고향 건설 위업에도 힘쓰는 길을 가면 좋다는 결단을 내렸던 것이다. 또 기회를 보아 조선전선에 나가 제 손으로 미제와 이승만 괴뢰군을 까부시려고 마음 먹었다. 그는 공안국 국장이고 뭐고 자기  벼슬 같은 건 초개같이 여겼다. 오직 제2고향 연변조선족자치구와 새 중국을 보위하는데 낫으면 국장이고 뭐고 다 팽개치고 전선에 나갈 각오가 돼 있었다. 병수는 부리부리한 세귀눈에 예지와 독살이 번쩍이는 삼십대 초반의 이 사내가 성칠이 말하던 공안국장을 하는 상순 형님이라고 단정했다. "어떻게 돼 여기 왔습니까?" "오- 부상병을 호송해 개산툰에 왔댔어." 상순은 용천이 왼팔을 어깨에 처맨 걸 보고 의아해했다. "전선에서 상했습니까? 피가 아직도 흐르네." 용천은 오른 손으로 상순의 어깨를 다독였다. "금방 저 놈과 싸우다가 다쳤어." 그제야 상순은 짚이는 데 있어 머리를 끄덕였다. "금방 저도 서산에서  저 놈하구 싸우는 걸 다 봤어요." 그 말에 용천과 병수는 등곬이 다 싸늘해졌다. 병완은 촌공소에 들어가 자리를 정하고 앉자마자 용천과 진달래 그리고 병수가 있는 것도 관계하지 않고 상순을 꾸짖었다. “어떻게 공안국장 자리까지 올라갔다고 하지 않겠다고 하느냐? 너를 배양한 당 조직에 미안하지 않니? 너를 입당시킨 이계삼 부장과 허영주 서기에게 미안하지도 않니?” 상순은 머리를 수기고 듣더니 무겁게 입을 열었다. “옆구리를 괭이에 찍힌 아버지가 상한 몸으로 늘그막에도 기음을 매는 걸 보니 죄송스럽습디다. 아무데서나 효성을 하면서 혁명을 하면 됩니다. 조직에 몇 번이나 천용구를 국장을 시키라고 했습니다. 천용구를 현공안국 부국장으로 제발시켰는데 아주 전도가 유망합니다. 오래잖아 국장으로 될 겁니다. 현공안국은 근심할게 없습구마. 이제 조선전선에 나가 미제와 남조선 괴뢰군과 생사결판을 내러 갈가 합꾸마.” 병완은 마지막으로 상순에게 나직이 말했다. “예로부터 충신은 효자로 될 수 없다고 했다. 혁명을 하려면 너무 부모한테 뒷다리를 묶이워선 안 된다. 내일 당장 공안국으로 돌아가라.” 상순은 찍 소리 못하고 세 귀 눈으로 용천과 병수를 흘끔 곁눈질했다. 자꾸 눈이 용천과 병수가 땅바닥에 벗어놓은 군화에 갔다. 목이 긴 가죽군화였다. 병완은 허리를 펴고 용천과 병수를 번갈아보면서 물었다. “어떻게 돼 김 대장은 여기까지 오게 됐소?” 용천은 또 한바탕 연극을 놀았다. 병수는 옆에서 웃음을 지으면서 용천의 연기에 속으로 감탄했다. (빨갱이들 속에서 절어 난 놈 다르긴 달라. 어쩜 빨갱이들이 욱실거리는 마당에서 저렇게도 연극을 잘 놀아?) 병완은 성칠이 무명고지에서 미군 날강도비행기 폭격에 비참하게 희생됐다는 대목을 듣자 한숨을 후~ 땅이 꺼지게 내쉬더니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는 것이었다. “끝내 전선에서 영광스럽게 희생됐구나. 충신은 효자가 아니지.” 그는 주름진 두 볼로 뜨거운 눈물을 주르르 흘리었다. 이윽고 떨리는 손으로 곰방대에 담배를 재워 넣더니 우쭐 일어나 바깥으로 나갔다. 상순은 불쌍한 동생 경주를 안고 대성통곡쳤다. “큰아버지! 큰아버지!” 그때라고 용천은 병수에게 눈짓하더니 스르르 일어나 바깥으로 나가더니 덕성이네 집 쪽으로 걸어갔다. 병수는 측은한 눈길로 토성안집의 진달래와 상순을 되돌아보며 나갔다. 상순은 뒤따라 나가면서 먼발치에서 세귀눈으로 용천과 병수의 허리에 찬 미제 권총을 바라보았다. 또 그들이 발에 건 토색군화를 보며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황차 용천과 병수는 똘만과 똑 같은 군화를 신지 않았겠는가. (이전에 도문이나 개산툰이나 국자가에 들어온 조선인민군 부상병들은 저런 목이 긴 군화를 신은 것을 보지 못했는데..." 상순은 도리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개산툰에서 오는 길이라는데 왜 천지꽃산 부근에서 똘만과 총싸움을 벌렸을까?  아무래도 수상해!)
97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76) 댓글:  조회:1643  추천:1  2017-08-07
                                                           6. 동족상잔        공포에 휩싸인 어두운 장막이 포화에 그은 해를 서서히 삼키더니 무서운 비명을 지르는 하늘에 아기별을 하나, 둘 낳기 시작했다. 천진란만한 아기별들은 동족끼리 피를 말리는 결투를 벌리는 전장을 내려다보고 깜짝 놀라 공포에 바르르 떨며 피로 얼룩진 먹장구름 속으로 숨어버렸다.         눈보라 휘몰아치는 무명고지에서는 우리 민족의 전통민요 멜로디에 뒤이어 성칠 연대장의 우렁우렁한 목소리가 산악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어리석은 괴뢰군 장병들아, 난 영용한 조선인민군 연대장 김성칠이다. 당신들의 연대장 김용천은 일찍 간도에서 나와 어깨 겯고 일본 놈들과 싸우던 전우이다. 그도 우리와 똑같은 빨갱이었다. 그래 그에게 속아 우리와 싸워 볼 테냐? 우린 다 같은 피가 흐르는 동족이다. 진정 평화를 희망하는 정의적인 사람들은 동족의 피를 보려고 하지 않는다. 그래 총부리를 동족에게 겨누겠는가? 총부리를 당신들을 대포 밥으로 내몬 미제 놈들에게 돌려라! 남조선 인민들을 식민지 노예로 만들려는 미제 양키놈들과 싸우라!” 성칠의 말소리를 확인한 이병수는 망원경으로 무명고지를 올려다보았다. 조명탄을 대낮같이 밝힌 환한 무명고지 절벽아래 지휘소에 확실히 성칠 삼촌이 고음확성기 옆에서 고함치는 모습이 보였다. 두번 다시 보아도 김성칠 삼촌이 틀림없었다. 이병수 대대장은 권총을 쥔 채 용천 연대장한테 돌아왔다. “김 연대장, 성칠이 508고지에 있다더니 진짜 저게 뭔가요? 진짜 삼촌과 총을 맞대고 죽기내기로 싸워야 해요?” 그 말을 들은 병사들은 어리둥절해 용천 연대장과 병수 대대장을 번갈아 쳐다보며 한걸음도 전진하려고 하지 않았다. “흥! 빨갱이 놈들의 이간책이 참 고명하구나. 대대장까지 전의를 상실하다니. 이걸 어쩌노(어쩌지)?” 용천 연대장은 병수 대대장과 웅성거리며 몰려오는 병사들을 멍하니 바라보며 도리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난도 몰라, 왜 이북과 싸워야는지.)      용천은 자기 피 묻은 손을 들어 보며 도리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난 이 악독한 손으로 하나 밖에 없는 사촌동생 칠백의 옆구리에 총칼을 박았다. 한철주 놈이 동생 가슴에 총을 쏘는 걸 뻔히 보면서도 난 멍청히 서 있었다. 동생한테 총을 쏜 경호원을 아직도 내 곁에 살려두었다. 나도 사람인가?)       그는 무명고지를 바라보며 착잡한 생각에 잠겼다. "이제 또 성칠 형과 총칼을 싸워야 하는가?  성칠 형은 내가 명천에서 유격대에 끌어들인 항일유격대 전우가 아닌가. "      이렇게 중얼거리는 용천의 눈 앞에는 눈보라치는 장백산 기슭 원시림에서 성칠과 함께 일제와 최후격전을 벌리던 정경이 떠올랐다. 그때 그들은 어깨겯고 장백산 협곡 근처 갱도에서 일제와 싸우다가 포위됐다. 그들은 두개 소조로 나뉘여 갱도에서 포위를 돌파해나갔다. 그후 서로 생사를 모르고 갈라졌다. (건데 5년 만에 총칼을 맞대고 전쟁터에서 만나다니? 금방 이 더러운 손으로 사촌동생을 죽였는데 또 친형제와 같은 전우마저 죽여야 한단 말인가? 아, 전쟁이란 무엇인가? 그래 성칠은 진짜 죽어야 할 대적이란 말인가?) 그러나 그는 이대로 성칠한테 장병들이 흔들려서는 목숨도 건지기 힘들다는 것을 직감했다. 살기 위해선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선 안됐다. 용천도 할수 없이 고음확성기를 들고 무명고지를 향해 목청을 가다듬어 고함쳤다. “성칠아, 나 용천이야. 이 빨갱이 놈아, 입방아를 그만 찧고 군인답게 한번 통쾌하게 붙어보자! 우리 한 개 사단과 세계 최강군 미군의 공군과 탱크대대가 이제 무명고지와 508고지를 불바다로 만들 거야. 우린 이제 마천령을 넘어 두만강까지 돌진할 테야. 어서 투항들 하지 못해?!” 고지에서도 성칠 연대장의 고함소리가 들려 왔다. “우리 항일유격대 출신 조선인민군은 일당백의 용사들이다! 네놈들이 정 미제 양키놈들의 강박에 못 이겨 강제로 전장에 끌리어 나온 걸 다 안다. 불쌍하구나. 허허허. 싸우겠으면 어디 덤벼봐라! 죽음이 네 놈들을 기다릴 뿐이야.” 기침소리가 좀 나더니 또 성칠의 걸걸한 목소리가 우렁차게 울렸다. “용천아, 우린 네가 죽었는가 했어. 오랜 만에 만나 기쁘구나. 허나 총을 맞대고 죽기내기로 싸우려고 전장에서 만날 줄은 꿈에도 몰랐구나. 진달래가 네 아들 경주를 데리고 간도 함흥촌에 피신했다. 난 진달래와 재혼해 아들 경수까지 보았다. 절대 오해하지 말라. 네가 죽은 줄 알고 그렇게 됐어. 이것도 운명의 조화야. 우리 둘 중 누가 살아남든 간에 진달래와 경수, 경주는 근심할 게 없다.” “뭐라고? 진짜 내 아내를 빼앗아 살았어? 더러운 놈!” 무명고지에서 고함소리가 울렸다. “용천아, 오해하지 말라. 내 진달래를 빼앗은 건 아니야. 네 죽은 줄 알고 그렇게 됐어.” (뭐? 내 죽은줄 알고 그렇게 됐다고? 흥! 거짓말. 작작 구실을 대. 가령 내 죽어도 그치. 어찌 그럴 수 있어? 어찌 제수 데리고 살아 애까지 낳아? 내 눈 펀히 뜨고 살아 있는데. 내 얼마나 진달래를 찾았는데.  발바닥이 다 다슬어 떨어지게 조선 팔도 서캐훑듯 찾아 헤맸는데. 헛참, 기막혀!) 용천은 온 몸의 피와 분노가 꼭뒤에 치솟았다. 그는 확성기를 들어 고래고래 고함쳤다. “개소릴 작작 쳐. 내 없는 틈에 남의 아내를 빼앗아? 양심 없는 승냥이놈아! 도적놈은 살려줘도 내 안해 빼앗은 놈, 형제 신의를 저버린 놈은 살려둘 수 없어!" 용천은 한참 모르고 있었다. 진달래의 첫사랑이 성칠이라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네 죽든 내 죽든 생사결투하자. 대갈통을 콩가루 내줄테야!”     옹천은 격분해 거친 황소숨을 씩씩 내쉬며 무명고지 지휘부를 노려보았다.    (내 손으로 짐승보다 못한 배신자를 처치할 테야. 저 놈이 죽으면 진달래가 나한테 돌아올 거야.) 용천은 돌아서서 권총을 빼들고 고함쳤다. “돌격!” 허나 병사들은 서로 눈치를 보며 수군거리면서 전진할 궁리를 하지 않았다. 분명 성칠 연대장이 쓴 심리전술이 효과를 본 것이었다. 황차 이병수 대대장은 자기 오촌숙과 싸울 생각이 없었다. (제밀할, 성칠 삼촌이 무명고지에 없다더니. 나를 고의로 삼촌과 싸우라는 건가?) “이 대대장! 뭐라고 꾸물거려? 빨리 무명고지로 전진하라!” 허나 병수는 권총마저 권총집에 찔러 넣으면서 용천을 쏘아보는 것이었다. “당신은 빨갱이들이 보낸 간첩 아냐? 돌격? 흥!” 용천은 성칠의 이간책에 놀아나는 병수가 답답했다. 이때 고음확성기에서 허 사단장의 명령이 울렸다. “용천 연대장! 뭘 꾸물거려? 빨리 무명고지를 점령하지 못해? 이제 더 질질 끌면 총살할테다!” "옛! 곧 진공하겠습니다." (성칠 놈을 죽여야제이!) 용천 연대장은 권총을 휘두르며 제일 앞장서 돌격했다. “자랑찬 나의 장병들이여, 돌격!” 장병들은 우왕좌왕하다가 권총을 들고 돌격하는 용천을 따라 “와!” 고함치며 무명고지를 향해 돌격했다. 절벽에서 쏘아대는 기관총 소리와 함께 남조선 병사들은 산비탈에서 무리로 쓰러졌다.        남조선 괴뢰군 장병들은 진짜 쓰러진 동료들의 시체를 밟고 넘어 산마루로 전진했다. 진짜 피어린 발자욱마다 동족상잔의 참극이 밟히고 있었다.       조명탄이 하늘로 날아올라가 불길이 내뿜는 산비탈을 대낮같이 환하게 비추었다. 조명탄아래 무명고지에서 번쩍번쩍 번쩍이는 섬광이 몇이 되지 않는 것이 보이었다. 용천은 인민군이 몇 십 명에 불과하다는 것을 눈치챘다. 무명고지에서는 조선인민군 여전사의 노래 소리가 폭탄이 작렬하는 굉음 속에서 들릴가 말가 하면서도 용케도 간간히 가냘프게 울려 퍼지었다. 때마침 미군 전투기들이 편대를 지어 날아와 무명고지를 향해 맹렬히 폭격했다. 탱크들도 미친 듯이 무명고지를 향해 포격하며 덮쳐 올라갔다. 꽝꽝! 쿵! 쾅! 절벽이 쿵 무너져 내렸다. 돌과 흙덩이들이 무너져 내려 지휘소를 덮어버렸다. 여 전사 순희와 고음확성기도 파묻혀 버렸다. 다시는 여전사의 노래 소리가 들리지도 않았다. “순희!” 조철호는 흙덩이들을 마구 파헤치며 여 전사를 애타게 불렀다. “순희! 순희!” 그가 순희를 흙더미 속에서 파냈을 때 그녀는 머리에서 뻘건 피에 흥건히 젖은 머리를 들지도 못하고 마지막 숨을 할딱할딱 몰아쉬고 있었다. “우린 살아서 고향에 돌아가야 해.” “오빠, 고, 고향은 어, 어디?” “영월구 차조촌이오. 동무 고향은?” “안, 안보촌.” “우린 한 고향 전우구만.” “예~” 여전사는 머리를 끄덕이더니 가는 목소리로 물었다. “결, 결혼했소?” “결혼한 지 반년이오.” “새, 색시 이름 ...?” “김옥선-” “오~ 이, 이름 고, 곱구나.” "동문 결혼했소?" 여전사는 피를 머금은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도리머리를 천천히 힘겹게 저었다. 그들은 피로 물든 손을 맞잡고 서로의 고향과 이름을 되뇌었다. 전쟁판에서는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화에서 이런 일이 종종 있었다. 혹시 누가 살아남으면 고향에 소식이라도 전하게 하려는 불쌍한 바램이었다. 꽈르릉 꽝꽝! 절벽이 탱크의 포격에 와그르르 무너져 내렸다. 조철호는 자기 몸으로 떨어지는 암석을 막으며 쓰러졌다. 여전사 순희를 구하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무정한 바위돌은 순희마저 사정없이 파묻어버렸다. 성칠은 산비탈로 둔중한 엔징 소리를 내며 아득바득 덮쳐 올라오는 탱크를 쏘아보며 주먹으로 전호 벽을 꽝 쳤다. 이때 억복이 수류탄묶음을 안고 전호에서 뛰쳐나갔다. 뒤이어 데굴데굴 뒹굴어 달려오는 탱크 앞으로 덮쳐갔다. 꽝! 수류탄 폭발굉음이 하늘을 찔렀다. 제일 앞장서 달리던 탱크가 화염 속에 멈춰 섰다. 탱크 웃뚜껑이 열렸다. 활활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몇몇 미군 탱크병사들이 뛰어내리는 것이 보였다. 희생된 줄 알았던 억복이 어둠 속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탱크 병사들에게 반자동보총을 휘둘렀다. 뚜르륵 뚜르륵 억복이 한 배짐을 풀자 숱한 미군 탱크병사들이 쓰러졌다. 땅! 이병수 대대장이 쏜 총탄에 억복이 푹 꺼꾸러졌다. 땅! 용천의 경호원이 쓰러졌다가 기여 일어나려는 억복에게 재차 권총을 쏘아 끝장을 내줬다. 미제의 전투기들이 산등성이 뒤로 날아 가버리자 무명고지에서 탄알이 빗발치듯이 산비탈로 날아왔다. 괴뢰군은 공군의 우세를 빌어 철갑모를 번쩍이며 산마루를 향해 슬금슬금 기어 올라갔다. “우리 저 놈들을 죽이지 않으면 저 놈들이 우릴 죽인다! 형제들, 돌격!” "죽여라!" 용천이 돌격해 올라가면서 뒤돌아보며 총을 휘둘렀다.  이병수 대대장도 뒤따라오는 것이  피뜩 보이었다. (그래. 따라오지 않을 수 있어?! 군법에 의해 총살해버릴 테야.) 허나 이병수는 다른 궁리를 하면서 뒤따라오고 있었다. 그는 망원경으로 절벽 밑의 지휘소 자리를 자꾸 살폈다. 성칠이 한창 권총을 휘두르며 전투를 지휘하는 모습이 보였다. 인민군 전사들은 목숨을 내걸고 결사적으로 고지를 사수하며 맹사격을 가했다. 갑자기 산 위에서 총소리가 뜸해졌다. “김 연대장! 탄알이 떨어졌습니다.” “돌멩이로 까라!” “옛!” 산 위에서 총소리 대신 소 대가리만큼 한 돌멩이가 마구 날아 내려왔다. 몇몇 괴뢰군 병사들이 돌멩이에 철갑모와 어깨, 다리를 맞고 비명소리를 지르며 쓰러졌다. 이때라고 용천 연대장은 고함쳤다. “놈들이 탄알이 떨어졌어. 돌격!” “돌격!” 남조선 군 장병들은 사기를 높여 산마루 절벽 밑에까지 돌격해 올라갔다. 이때 성칠 연대장이 권총으로 몇 놈을 쏘아 눕히며 고함쳤다. “육박전! 고지를 사수하라!” 성칠 연대장이 쓰러진 괴뢰군 병사의 손에서 총창을 빼앗아들고 전호 속에서 제일 먼저 맹호와 같이 뛰어 나갔다. 인민군 장병들은 그를 뒤따라 조명탄 불빛과 활활 타오르는 불빛에 서슬푸른 총창을 번뜩이며 돌격해 내려갔다. 산마루에서는 일대 혼전이 벌어졌다. 총소리와 아우성이 뒤섞여 어지럽게 울렸다. 여기저기에서 죽음의 비명소리도 울렸다. 용천은 앞장서 총창으로 연신 몇몇 병사들을 찔러 눕히며 달아내려오는 성칠을 똑똑히 보았다. 용천은 이를 옥물고 권총을 들어 성칠을 겨누었다. 성칠이 총창으로 용천의 가슴을 푹 찔렀다. 땅! 총소리와 함께 쓰러진 것은 성칠이 아니라 용천이었다. 용천은 황급히 뒤로 벌렁 드러누우면서 총을 쏘았다. 땅! 땅! 뒤따라오던 병수가 용천의 손목을 쏘았다. 그 바람에 성칠은 어깨에 흉탄을 빗맞았다. 성칠이 총창으로 재차 들누운 용천을 찌르려고 할 때다. 용천의 경호원이 뛰어나가면서 성칠을 쏘았다. 땅! 총소리와 함께 배에 흉탄을 맞은 성칠은 총창을 툭 떨구더니 산비탈에 푹 꺼꾸러졌다. 그때 용천이 황급히 경호원을 보고 고함쳤다. “누가 죽이라 했어? 저 놈은 생포해야 해!” 용천은 권총을 주어들고 산비탈로 올라가면서 고래고래 고함쳤다. “성칠, 이 놈, 내 아내를 빼앗은 날강도야! 내 손에 죽여야제!” 성칠은 쓰러져 선지피가 쿨룩쿨룩 솟구치는 가슴을 높뛰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허나 용천이가 권총을 휘두르며 다가오는 순간 스르르 기어 일어났다. 그의 손에는 권총이 쥐어져 있었다. 그의 권총이 천천히 쳐들리었다. “죽어라!” 땅! 땅! 야무진 총소리와 함께 둘 다 눈 덮인 산비탈에 쓰러졌다. 성칠과 장 꼬마가 용천을 쏘았고 용천이 성칠을 쏘았다. 눈보라치는 장백산 밀림 속에서 어깨 겯고 일본 놈들과 싸우던 항일유격대 두 전우, 그들 둘은 총부리를 맞대고 싸우다 동족의 피로 얼룩진 눈 덮인 산비탈에 쓰러졌다. 장꼬마도 따발총으로 마지막 끝까지 싸우다가 몸을 휘청하더니 총을 툭 떨어뜨리며 푹 꺼꾸러졌다. 무명고지를 사수하던 영용한 조선인민군 전사들은 마지막 한 사람이 남을 때까지 총창으로 싸우다가 하나하나 쓰러졌다. 임호는 날창으로 찌르고 치고 하며 혼자 남아 고지에서 싸웠다. 그가 어찌나 힘껏 총창으로 찔렀는지 총창이 괴뢰군 병사의 늑골 사이에서 빠지지 않았다. 발로 병사의 시체를 탁 차서야 겨우 빠졌다. 그새 한 병사가 총창으로 임호의 가슴을 찔렀다. 임호는 날아드는 총창을 옆으로 피하면서 총창으로 찔러 눕혔다. 뒤에 쫓아온 두 병사가 총창을 채 빼지 못한 임호의 양옆구리를 푹 찔렀다. 임호는 슬쩍 피하면서 두 총창을 양손에 쥐여 홱 나꿔채 옆으로 휘둘렀다. 두 병사가 거꾸로 박히며 곰 같은 임호의 괴력에 질겁해 뒤로 비실비실 엉덩이걸음을 쳤다. 임호는 일어나려는 두 병사의 목덜미를 쥐여 대가리를 맞쪼아 놓았다. 두 병사는 서로 머리를 맞부딪혀 쓰러졌다. 열이 부쩍 오른 한국 병사들은 셋이 동시에 덮쳐나가면서 적수공권의 임호를 총창으로 찔렀다. 배와 옆구리, 허리를 총창에 찔리운 임호는 비칠거리다가 피로 뻘겋게 묻은 눈 위에 쓰러졌다. 악이 날대로 난 괴뢰군 병사들은 총창으로 임호의 가슴을 벌집처럼 찔러댔다.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처절한 참경이었다. 무명고지는 언제 총포소리가 우레 울듯 했는가 싶게 조용해지기 시작했다. 드디어 무명고지 절벽 위에는 성조기와 태극기가 펄펄 휘날렸다. 미군 탱크 병사들은 무명고지를 발로 쾅쾅 구르다가 절벽 밑 돌무지에서 조철호와 바위돌의 시체 밑에서 여전사 순희를 발견했다. 그녀는 아직도 숨이 붙어있어 간간히 신음소리를 냈다. “오케이(OK)!" 미군 병사들은 희죽거리며 달려들어 순희의 옷섶으로 털이 부스스한 손을 넣어 젖가슴을 어루만지었다. 한 양키 놈은 순희의 바지를 벗기고 짐승처럼 죽어가는 순희를 강간하려고 들었다. 땅! 쓰러졌던 용천이 왼손으로 총을 들어 쏘았다. 한 미군 놈이 팔을 맞고 뒤로 벌렁 엉덩방아를 찧었다. 미군 탱크병사들이 총을 꼬나 들고 뒤로 물러섰다. 그 놈들은 눈깔을 희번뜩거리며  용천을  겨누었다. 땅! 용천은 총을 쏘아 고통스레 신음하는 순희의 숨을 거둬주었다. 그제야 양키 놈들은 상을 찡그리면서 부상당한 놈의 상처를 싸매주고 산비탈 중턱의 탱크 쪽으로 내려갔다. 경호원과 병사들이 용천 연대장을 끌어안아 일으키었다. 용천 연대장은 손목과 어깨에 관통상을 당하였었다. 그는 피못 속에 쓰러진 성칠을 보더니 주먹으로 뜨거운 눈물을 훔치었다. 그는 경호원과 병수를 돌아보더니 나직이 말했다. “잘 묻어줘.” 그는 뒤이어 바지가 벗겨진 여전사 순희를 보더니 외면하며 명했다. “인민군 여전사 바지를 입혀 주고 잘 묻어줘라.” 병사들은  인민군 여전사에게 피 묻은 바지를 춰입혀주고 공병삽으로 구덩이를 대충 파고 여전사를 절벽 밑에 묻어주었다. 병수는 피눈물을 흘리며 경호원과 함께 성칠을 묻을 구덩이를 팠다. 용천은 자기 총에 맞은 성칠의 가슴에서 아직도 시뻘건 피가 쿨쿨 솟구치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피눈물을 흘리면서 중얼거리었다.   “히야(형), 용서해. 내 살아 남으려니께, 내 팔간 집과 처자를 지키려니께. 히야(형)도 죽여야 했어. 친일주구 한철주 형제는 내 손에 뒈졌어. 시름 놓고 잘 가. 구천에 가면 우리 진짜 친형제처럼 살제(살지).” 화광 속에서 성칠은 하늘 어디 한 곳을 쏘아보며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개마고원에서 맨 주먹으로 호랑이마저 때려 잡은 천하장사, 장백산 림해설원에서 일본 놈들과 영용히 싸우던 김성칠 대장, 그는 동족상잔 전쟁터에서전우의 손에 처참히 희생되였다. 그것도 총탄이 빗발치는 항일전쟁 때 그를 항일빨찌산에 이끌어준 전우- 용천의 흉탄에 맞아 억울한 죽음을 맞이했다. 아, 이런 동족상쟁, 형제와 전우 상잔의 비극이 세상에 또 어디 있을까?! 참말로 가슴 아픈 일이었다. 온 겨레가 통탄할 일이 아닌가! 용천은 속으로 피눈물을 흘리며 성칠의 뚝 부릅뜬 눈을 피 묻은 손으로 스르르 쓸어 감겨주었다. 그는 시어미 역정에 개 배때기 차기하듯 경호원을 닦아세웠다. "개자식! 어데다 총질이냐? 이 놈을 심문해 알아볼 거 많고도 많아!" 용천은 성칠을 붙들고 진달래와 자기 아들의 신상을  묻고 또 묻고 싶었다.  왜 자기한테 진달래를 붙여놓고 자리를 몇해 비운 틈에 빼앗아갔냐고 따지고 싶었다.        그러나 성칠이 죽는 바람에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갔다. 순간 경호원을 죽여치우고 싶었다.       경호원은 용천이 허리춤에 손이 가는 것을 힐끔 곁눈질하였다. 그는 머리를 뚝 떨어뜨리며 너무 당황해 발끝으로 땅바닥을 긁으며 어쩔줄 몰라했다. 뒤이어 용천은 눈물이 글썽한 눈길로 성칠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희야(형아), 아무리 형제라도 글치(그렇지). 색시와 돈은 분명해야 해.” 용천은 그런 말로 전우, 형을 잃은 공허함을 스스로 위로하려고 드는 것 같았다. "용천이, 진달래의 첫사랑은 나야! 내란 말이야. 내가 언제 자네 색시를 빼앗았어? 난 진달래 첫사랑을 돌려준 것 뿐이야!" 웬 일인가? (어데서 울리는 우렁우렁한 소리야?) 용천은 성칠의 시체를 내려다 보았다. 어둠컴컴한 하늘 어느 한 곳을 쏘아보는 쌍까풀눈, 그 쌍까풀눈에는 원망과 원한, 쓸쓸한 기운이 얼기설기 어리어 있었다.  성칠의 가슴에서는 아직도 뻘건 선지피가 쿨쿨 솟구치고 있지 않는가? 용천은 먹구름이 지지누르는 하늘을 둘러보며 아픈 가슴을 꽝꽝 쳐댔다.      이병수 대대장이 권총으로 용천을 겨누었다. “개새끼, 너거(네가) 내 삼촌 죽였어. 씹할!” 용천의 경호원이 덮쳐들어 이병수의 권총을 빼앗아냈다. 이병수의 경호원이 용천의 경호원을 탁 밀쳤다. “누구한테 손을 대?!” 병수는 꿇어앉아 아직도 온기 있는 성칠의 몸을 끌어안고 대성통곡 쳤다. “삼촌, 만나자마자 생이별, 이거 웬 말이우? 어~ 헉헉, 헉헉.” 처량한 울음소리가 산마루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괴뢰군 장병들은 인민군 장교를 끌어안고 대성통곡치는 이 대대장이 제 정신인가 해 눈이 휘 동그래 흘겨보며 쑤군거렸다. “묻어줘.” 용천의 말에 정신이 펄쩍 든 병수는 손으로 피 즐벅한 돌을 마구 파내기 시작했다. 호위병과 용천도 거들었다. 구덩이라고 파놓고 대충 성칠의 피가 랑자한 시체를 눕히고 돌을 들어다 덮어주었다. “삼촌, 잘 가!” 병수는 피눈물로 삼촌을 무명고지 돌무지에 묻어놓고 목 놓아 대성통곡쳤다. 그 통곡소리 무명고지 절벽에 부딪쳐 슬픔으로 부서지며 오래도록 메아리치며 흐느꼈다. 그 처참한 정경을 보는 용천의 마음도 처량하기 그지없었다. 이 때다. 참모장 겸 대대장 김인삼의 지휘아래 산아래 개활지대에서 매복습격전을 벌리던 조선인민군 한 개 대대 용사들이 동족의 피로 뻘겋게 물든 무명고지로 돌격해 올라왔다. 용사들은 산비탈의 괴뢰군의 뒤통수를 호되게 쳤다.  또 피비린 일대 혼전이 벌어졌다. 치열한 공방전은 엎치락뒤치락 하며 새벽까지 벌어졌다. 인민군의 세배나 되는 괴뢰군은 미군의 전투기와 탱크의 엄호를 받으면서 무명고지와 508고지를 재탈환했다. 태양이 포화에 그은 어둠을 서서히 삼키며 동녘이 희붐히 밝아 올 때다. 중국인민지원군이 피로 물든 무명고지와 508고지에 앞사람이 쓰러지면 뒷사람이 이어나가면서 덮쳐들었다. 평안북도에서 중국인민지원군에 혼쌀 난 미군은 질겁해 괴뢰군을 떨궈놓고 꼬리빳빳해 도망쳤다. 한 시간 좌우 치열한 공방전 끝에 고지에는 진 붉은 오성붉은기가 훨훨 휘날렸다. 하루 밤 사이에 무명고지와 508고지는 주인이 세 번이나 바뀐 셈이었다. 인삼 참모장이 나머지 병력을 점검해보니 성칠 연대장을 비롯하여 최동욱 대대장과 억복 중대장, 임호 중대장, 조철호 소대장, 바위돌 소대장, 장꼬마, 여아나운서 김순희 등 300여명 장병들이 희생됐던 것이다. 용천 연대장은 찌프에 누워 후퇴할 때에야 이병수 대대장에게서 한개 대대 병력을 손실보고 미군이 탱크 세대나 손실 보았다는 보고를 받았다. 용천 연대장은 머리를 돌려 옆에서 자기를 지키는 병수에게 나직이 말했다. “내캉(나와) 성칠 대장은 항일전쟁 때 친형제와 같은 전우였네. 우린 이번에 사내답고도 군인답게 결투를 벌였어. 자넨 날 욕하지 말게. 서로 자기 살작코(살자고)  벌린 결투였네. 바꿔놓고 내 너거 색시 뺏앗아 살면 닌도(너도) 날 죽이자고 달려들었을 거야. 맞지?” 병수는 머리를 숙인 채 한숨을 후 내쉬며 중얼거리었다. “내 살작코(살자고) 전우끼리 원수로 돼 생사결판으로 싸워야 되나요? 형제캉(형제와) 숙질 간도 적이 돼. 도리어 친일주구캉 전우로 되다니요? 이 놈 세상 대체 어떻게 된기우?” “난세에 무슨 수 있어? 헤이,” 용천 연대장은 병수를 쳐다보면서 비통한 표정을 지었다. “오랜만에 만난 성칠 히야캉(형과) 할 말도 많았는데. 만나자마자 총질해 죽이다니? 어참," 그는 도리머리를 절레절레 저으며 쌍까풀눈을 딱 감았다. "성칠 연대장의 시체는 잘 묻었지?” “인민군이 가져간 거 같시우.” “그랬어?” 순간 용천 연대장은 머리를 끄덕이며 들썩이는 찌프에 맥없이 드러눕더니 두 눈을 스르르 감았다. 그의 눈귀에서는 뜨거운 맑은 눈물이 주르르 흘러 귀밑으로 두르르 굴러 들어갔다…                        7. 장백산 원시림에 공중낙하 어느덧 전쟁의 포화에 그은 봄도 가고 무더운 여름도 흘러 지나갔다. 선들선들한 가을 바람이 창문으로 불어 들어와 육군병원 창문발이 흐느적이었다. 어깨에 관통상을 입은 용천은 다행히 부산 육군병원에서 일년 반 남짓이 치료한 덕에 팔과 다리 상처도 완전히 치료됐고 다리와 팔, 어깨에까지도 다소 힘이 오기 시작하는 감각이 왔다. 용천은 침대에서 일어나 창문 밖을 내다보았다. 포탄에 잿더미로 된 주둔지는 볼품 없었지만 부산 육군병원에서는 전방처럼 귀청을 째는 폭음을 들을 수 없었다. 드문드문 전투기들이 북으로 날아가는 하늘을 바라보며 용천은 아직도 전방은 전투가 아주 치열하겠다고 추측했다. 용천은 상한 왼쪽 팔에 힘을 주어 주먹을 휘둘러보았다. 괜찮았다. 어깨를 으쓱 올렸다 내리웠다 해보아도 괜찮았다. (전쟁터에 나가야 해. 북으로 쳐들어가 마천령을 넘고 두만강을 건너 함흥 촌에 가서 내 처자를 찾아와야 해.) 그의 귀전에는 무명고지에서 울리던 성칠의 목소리가 귀전을 때렸다. “네가 죽은 줄 알았어. 그래서 내가 진달래와 재혼해 아들 경수까지 보았다. 우리 둘 중 누가 살아남든 간에 진달래와 경수, 경주는 근심할 게 없어.” “용천아, 네 아내를 빼앗은 게 아니야. 네가 죽은 줄로 알고 그렇게 된 게야. 이게 다 운명의 조화야!” 용천은 주먹으로 벽을 꽝꽝 치며 노호했다. “아니야, 아니. 절대 아니야.” 그가 미친 듯이 고함칠 때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허군호 사단장과 경호원이 병수를 데리고 들어왔다. “용천 연대장, 새 전투임무 내려왔네.” 용천은 허연 회가루가 묻은 주먹을 손바닥으로 어루만졌다. “허 사단장, 난 마천령을 넘고 두만강을 건너 곧추 간도에까지 쳐들어가겠어요. 꼭 내 처자를 데려와야 하겠어요.” “좋아.” 허 사단장은 용천의 어깨를 다독여 침대에 앉혀놓고 침대 옆의 걸상에 앉아 용천을 응시했다. “육군을 영솔해 쳐들어가서야 언제 마천령을 넘어 두만강을 건너겠는가? 아직도 항일유격대 사유를 해?” 그 말에 용천은 허군호 사단장의 네모진 얼굴을 마주 보았다. 허군호 사단장은 기대에 찬 눈길로 용천을 마주보며 두툼한 입술을 열었다. “전번 전투에 성칠 연대장을 비롯한 숱한 빨갱이들을 소멸한 공훈을 세웠어. 때문에 자네와 병수 대대장이 한철주 형제를 암살한 죄를 용서해달라고 상부에 보고했네. 계속 입공속죄하게나.” 용천과 병수는 서로 눈길을 마주쳤다. 그들의 살기 띤 얼굴에는 얇은 미소가 스치고 지나갔다. 용천은 벌떡 일어나면서 두 손을 펼쳐 보이며 떠들었다. “친일주구 놈은 죽어 마땅해요. 허나 우리 죽인 건 절대 아니랑께.” “됐네. 변명 필요 없네. 별동대를 데리고 간도로 가게나. 자넨 장백산 밀림의 지형이나 사람들을 잘 알지 않나. 그 곳에 가서 두만강 변경의 기상을 관측해 수시로 무전기로 보고하게나. 그럼 미군 공군은 자네가 제공한 기상정황에 근거해 두만강 지역 후방에 날아가 폭격할걸세.” “기상자료를 제공하는 일 같은 건 여자들을 보내도 될 건데요.” “잔말 말고 듣게나. 지금 전선은 대치상태에 들어갔네. 중공군의 후방을 교란하고 파괴하고 차단해야 우린 조선반도 전쟁에서 이길 수 있네. 후방공급을 차단하는 일은 아주 중요한 전투임무네.” 용천은 그제야 벌떡 일어나 군례를 붙였다. “꼭 전투임무를 완수하겠습니다.” 허 사단장은 용천을 앉으라고 손짓했다. “또 있네. 멀쩡히 기상만 관측하지 말고 자넨 간도, 아니, 연변의 지주들로 유격대를 조직해 적들의 후방인심을 교란시키고 후방병원과 후방공급을 파괴하게나. 유격대를 잘 조직해 연변, 나아가서 길림과 장춘, 심양에까지 손을 뻗치란 말일세.” 그 말이 용천의 마음에 쏙 들었다. “좋아요. 사내대장부가 그쯤은 싸워야제이, 걸케(그렇게) 해야 우리 대한민국을 위해 싸운 보람이 있죠.” 허 사단장은 가까이 다가와 용천의 어깨를 다독였다. “자넨 일제의 철 발굽 아래에서도 장백산 일대 독립군으로부터 항일유격대를 조직했잖아. 충분히 해낼 수 있다고 보네.” 용천은 허리를 펴고 가슴을 내보내며 길게 숨을 들이 그었다. “자신 있어요. 헌데 그 곳까지 가려면 이북을 경과할 일이 태산 같습니다. 이북은 빨갱이들 점령구이죠. 자칫 두만강을 넘기도 전에 체포될 수도 있잖아요?” “근심 말게나.” 허 사단장은 제자리에 가서 앉으면서 용천의 쪽에 얼굴을 돌렸다. “미 공군이 자네들 싣고 밤중에 안전하게 장백산 원시림에 날아가 내려놓는다네.” “예- 알았어요.” 용천은 당장 처자를 만날 것 같아 만면춘풍이 됐다. “언제 출발해요?” “오늘 밤일세. 병수 대대장도 함께 가게나."  그 말에 용천은 상을 찡그렸다. (병수는 성칠과 5촌 숙질간이 아닌가. 함흥촌에 가서 혹시 병수가 병완과 상순 앞에서 딴전을 부리면 어떡하노?) 여기까지 생각하자 용천은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병수 대대장은 여기서 싸우는게 나아요. 간도를 잘 모르는 병수를 데리고 가면 되려 짐이 돼요." 그러나 허 사단장은 함경도 말투로 무뚝뚝하게 딱 잡아뗐다. "안되오. 데리고 가라면 가야 해. 이건 상부의 명령이야." 용천은 자기네를 간도 죽음의 구렁텅이에 보낸다고 여기면서도 찍 소리 못했다. 그는 도리머리를 절레절레 젓다가 문뜩 멈췄다. (혹시 병수 친척들의 도움을 받아 우릴 은페할 수도 있잖을까? 병수를 잘 이용해 병완과 상순 따위들을 스리슬쩍 얼려넘겨야제. 흥!) 여기까지 생각하자 극구 병수를 따돌리려고 하지 않았다.  허 사단장은 용천의 속내를 꿰뚫어본 듯이 계속 뒷말을 이었다.  "간도에 가면 자네들 인맥을 잘 이용해야 하네. 진달래라던가, 당신 아내 말이야. 글구 병수네 친척들 말이야. 이게 얼마나 큰 인맥 재산인가." 그는  계속 말했다.  "이전에 간 특무들은 모두 대만 국민당 특무 아니면 동북지구에서 도망친 국민당세력이었지. 건데 그 곳에 뿌리를 내리기는커녕 임무도 제대로 완수하지 못하고 빨갱이들에게 체포됐네. 이번에 자네한테 병수 대대장이하 특수훈련을 받은 꼴꼴한 특공인원 3명을 함께 보내겠네.”      조선전쟁이 터지자 장개석은 중국 대륙을 반격해들어갈 좋은 챤스라고 여기고 국민당군을 조선반도에 파견해 중국인민지원군과 싸우려고 했다. 그러나 당시  백악관에서는 장개석의 참전청구를 반대했다. 그러나 암암리에 국민당특무들을 대륙 장백산 지역에 파견해 후방을 파괴하고 교란하게 하였다.  국민당군 특무들은 대거 파조선반도 전선에도 기여들어 중국인민지원군에 대한 회유악선전도 감행하였다. 당시 일본 군국주의자들도 조선반도에 기여들어 참전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번엔 남조선 이승만 괴뢰대통령이 반대해나섰다. 그는 조선반도에 일본 제국주의 욱일기가 재차 휘날리는 것을 보기 싫었고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이다. 용천은 머리를 끄덕이다가 멈추었다. “장백산 원시림에 들어가면 은폐하긴 좋은데 먹을 양곡이 제일 문제죠.” “우린 자네들이 무전기로 연락하면 며칠에 한 번씩 비행기로 먹을 걸 공중 투하할 예산이네. 오늘 밤 날씨도 좋으니까 당장 출발하게나.” “충성!” 용천은 일어나 두 발뒤꿈치를 척 붙이고 군례를 붙였다. “승리의 희소식을 기다리겠네.” 허군호 사단장은 용천과 병수의 두 손을 굳게 잡았다. 그는 장백산 원시림의 낙엽이 지기 전에 용촌 일행을 보내야 은페하기 좋을 것  같다는 미군 8군단 사령부와 대한민국 백선엽 장군의 의도에 따라 급히 서둘렀다.      상부에서는 조선 함경도 출신 백골부대 장병들보다도 만주에서 항일투쟁을 하면서 장백산 일대 지리를 잘 알고 인맥이 있는 용천과 똘만이 등을 파견하기로 했던 것이다. 특히 용천은 만주에서 항일할 때 이른바 "빨갱이"들과 휩쓸렸다는 전과를 감안해 그의 천적이었던 일제 특무출신 똘만이를 파견해 감시하게 하였다. 한편 허사단장은 친일주구 똘만이를 만주에 보내 용천과 병수 손에 죽게 만들려고 들었다. 그도 용천과 똘만이네가 만주에 가면 불귀객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친일주구를 눈에 든 가시처럼 생각하는 허군호 사단장도 이번이야 말로 똘만 같은 친일주구를 처단할 절호의 기회라고 여겼던 것이다.      똘만은 친일주구 한철주가 허사단장한테 별동대에 추천한 인물이기도 하였다. 똘만은 일제가 망하자 부랴부랴 만주에서 도망쳐 곧추 명천을 거쳐 서울에 도망쳐왔었다. 그는 서울바닥에서 권총으로 강도질하면서 돌아다니다가  한선주네 파출소 경찰로 돼 사울 바닥을  횡행하던 건달이오, 꺼먼 경찰놈이었다. 특수임무를 맡은 똘만은 이번 기회에 철천지 원수 용천을 없애버리기로 작심했다.  허 사단장의 명을 받은 용천은 환자복을 활활 벗어 침대에 던지고 병수가 주는 군복을 갈아입었다. 그는 자기 신변에 검은 그림자가 따라붙는 것도 모르고 성큼성큼 복도로 나갔다.  용천과 병수가 병원에서 나가자 바깥에는 찌프 한 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 둘은 허군호 사단장에게 마지막 군례를 척 올리고 찌프에 앉아았다. 그런데 뒤좌석엔 캡을 딱 눌러쓴 뱁새눈이 앉아 있었다. 용천은 똘만을 몰라보았다. 그러나 병수는 자주 병영에 찾아와 한선주를 만나던 똘만을 알아보고 저으기 놀랐다.  (이자는 어째 왔지?) 병수는 똘만의 과거를 잘 몰랐다. 그러나 한선주네 파출소에서 경찰을 했다는 것만은 잘 알고 있었다. 찌프는 먼지를 뽀얗게 일구며 쏜살같이 비행장으로 달려갔다. 허군호 사단장은 이제 가면 다시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는 그들의 뒤모습을 바라보며 도리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군인은 총살당하기보다 전쟁터에서 용감히 죽는 것이 낫지.) 용천 일행은 부산비행장에서 비행기를 타고 하늘 높이 날아갔다. 한 시간도 되나마나 해 내린 곳은 중국 연변 장백산이 아니라 일본 오끼나와 미 공군기지였다. 그들 둘이 비행기에서 내리자 선글라스를 낀 코 큰이 미군 장교 서넛이 마중 나왔다. 미군 장교는 그들에게 군례를 척 붙이고 어깨를 으쓱하더니 서툰 한국말로 인사하며 악수했다. “환영해요. 미스터 킴, 미스터 이. 나는 클라크대좌.” 용천과 병수도 군례를 올리고 그들의 손을 굳게 잡았다. 클라크를 비롯한 미군 장교들은 그들 둘을 다시 밀봉군용자동차에 태운 후 어디론가 쏜살같이 달려갔다. 한참 달린 후 자동차에서 내려 보니 사면이 바다인 무인도이었다. 섬에는 철조망 속에 자그마한 판자 집 몇 채 있고 경계가 삼엄했다. 순간 용천과 병수는 서로 공포에 질린 눈길을 주고받았다. (혹시…?) 우두커니 서서 사위를 둘러보는 그들 둘을 보더니 미군 장교 클라크 대좌는 판자 집에서 나오는 동양인들을 가리키면서 한국말로 지껄였다. “대만에서 온 당신들의 교관들이오. 이제부터 당신들은 이 무인도에서 특무훈련을 받아야 하네.” “교관?” 그제야 용천과 병수는 안도의 한숨을 후 내쉬며 서로 미소가 담긴 눈길을 마주쳤다. 그날로부터 한 달 동안 용천과 병수는 대만에서 온 중국 동북적 특무들과 함께 기상과 지형지리 관측, 비행과 낙하 상식, 격투, 무전기 사용 등을 체계적으로 배웠다. 격투연습을 할 때다. 교관은 용천과 똘만을 불러냈다. 맞대결을 시켰다. 용천은 처음에는 작달막하고 똥똥한 똘만을 업신여겼다. 용천은 주먹을 쳐들고 팔자를 그리며 날아들어가며 똘만의 머리를 노리고 주먹을 연신 날렸다. 똘만은 이리저리 머리 숙여 옆으로 피했다. 그는 틈새를 노리다가 발길을 날려 용천의 아랫배를 걷어찼다. "억!" 용천이 허리를 굽히는 순간 똘만이 무릎으로 재차 턱을 걷어올렸다. 꺽다리 용천은 맥없이 뒤로 쓰러졌다. 입귀에서 피 터져 흘렀다.똘만은 덮쳐들어가며 용천의 머리를 걷어찼다. 용천은 홱 몸을 움츠리더니 발길로 달려드는 똘만의 종아리를 걷어찼다. 똘만은 허공 넘어갔다. 용천이 훌쩍 뛰여일어나며 발길로 똘만의 배를 걷어찼다.    "스톱(그만)!"   교관은 용천과 똘만에게 엄지를 내 휘둘렀다.    사격연습을 할 때다. 똘만은 용천한테 뒤지고 뒤더수기를 긁적거렸다. 하긴 똘만은 일제 수하에서 특무질하면서 격투는 많이 배웠기에 용천을 당할 수 있었지만 사격은 근본 용천의 적수가 아니었다.      그들은 교관에게서 먼저 파견한 숱한 특무소조가 실패해 체포된 경험과 교훈도 상세히 들었다. 아마 하루속히 장백산 원시림에 잠복해야 된다고 판단된 것 같았다. 미군 특무조직에서는 단기 훈련을 끝내고 용천과 병수에게 대만 특무 셋을 주어 급급히 비행기로 중국 장백산 지구에 잠입시키기로 결정했다. 미군 특무기지 장교 클라크 대좌는 용천을 단독으로 만났다. “미스터 킴, 우린 당신을 믿네. 당신은 일찍 2차 대전 때 장백산 원시림을 중심으로 동북 만주벌에서 유격대 대장으로 일본 놈들과 유격전을 벌렸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곳 지형과 사람들을 잘 아는데다가 능숙한 한어회화능력 참 좋아요.” “아니, 과찬에 황송하구먼. 전 북만에서 위주로 싸웠는데요.” 용천의 말에 클라크 대좌는 어깨를 으쓱하며 두 팔을 펴보이었다. “NO, NO! 당신 장백산 일대 파견 O-K! 당신들은 제때에 연변과 두만강 지역의 기상과 적정을 우리들에게 제공하시오. 우리 미 공군은 이제 당신들이 제공한 기상 정황과 적정에 근거해 두만강 연안 중공군의 후방을 여지없이 폭격해 군사물자공급을 차단할 것입니다.” 용천은 허군호 사단장에게서 다 듣던 말인지라 지루한 감을 느꼈다. 그 눈치를 차리고 클라크 대좌는 될 수 있는 한 짧게 말하려고 애썼다. “김 조장은 유격대 대장이고 유격전 전문가라고 들었네. 연변에 가면 그 곳 지주들로 유격대를 조직하고 중공 간부들을 암살하십시오. 당신이 유격대를 연변뿐만 아니라 전 동북에 확장해 중공군의 후방을 교란하고 파괴한다면 우리 미군과 이승만 대통령은 당신의 공훈을 잊지 않을 거네.” “충성!” 용천은 발뒤꿈치를 딱 붙이며 군례를 척 붙이었다. 클라크대좌 일행은 용천 일행과 굳게 악수를 나누었다. 용천은 무전기와 건량과, 통졸임, 권총을 차고 그들과 작별하고 비행기에 올랐다. 먹칠한 듯한 어둠 속에서 고공비행하면서도 용천은 다른 궁리를 굴리고 있었다. (유격전이고 낫자루고 난 몰라. 비행기가 왔다 갔다 할 수만 있다면 진달래와 경주를 싣고 돌아와야지. 될 수 있다면 삼촌도 싣고 와야지. 칠백을 잃은 거 알면 삼촌이 얼마나 슬프고 마음 아파하겠는가?) 비행기를 타고 어둠이 끝없이 두껍게 뒤덮인 하늘로 날아올라 북상하면서도 용천은 계속 속궁리를 굴렸다. (경수는 어쩌지? 그 놈의 할배한테 떼놓아야지. 성칠을 내가 쏘아 죽였다는 거 알면 병완 영감이 날 용서할까?) 용천은 기실 장백산 유격대 조직이나 기상관측이나 적정수집이나 모두 크게 관심이 없었다. 그는 미군이나 허군호 사단장이나 모두 자기를 총살하지 못해 이용할 뿐이라는 것을 알고도 남음이 있었다. 육군 연대장을 특무소조 조장으로 내리쓰는 짓을 봐도 그 속내가 빤히 들여다보였던 것이다. 어둠 속을 고공비행하여 그들은 어느덧 장백산 원시림 상공에까지 날아왔다. 저 멀리 밭 전자로 우등 불이 피어오르는 것이 내려다 보이었다. 미군 비행사는 중공군에 격추될까봐 겁나 비행고도를 낮추지도 못하고 용천이네를 보고 낙하하라고 명령했다. 비행고도가 높을수록 낙하특무들은 중공군에 발각될 위험이 컸던 것이다. 용천은 조수자리에 앉아 자기네를 돌아보는 미군 장교를 보고 고도를 낮추라고 손시늉 했다. 허나 미군은 뛰어내리라고 손시늉 했다. 용천은 권총을 뽑아 미군 비행사를 겨누었다. “비행고도를 낮춰!” 그제야 비행기는 천천히 고도를 낮춰 우등 불 근처로 날아가 선회했다. 땅땅땅! 꽝! 꽝! 꽝! 원시림에서 숱한 불줄기가 날아왔다. 비행기 날래 좌우에서 포탄이 작렬했다. 고사기관총알이 날개에 와 맞으면서 무서운 죽음의 노래를 불렀다.      당시 길림성 공안총대에서는 벌써 장백산 원시림에 기관포부대를 매복시켜 특무들을 대기하고 있던 중이었다.      자지러진 기관포 소리에 특무들은 깜짝 놀라 기내에서 두 손으로 대갈통을 싸쥐고 목을 움츠려뜨렸다. 용천은 병수 등 특무들을 돌아보며 명령했다. “낙하!” 세 대만특무들이 먼저 뛰어내렸다. 용천과 병수는 군수물자를 투하한 후 마지막에 뛰어내렸다. 미군 비행기는 질겁해 동북 쪽으로 고공비행해 꽁무니를 빼다가 일본해에로 날아갔다. 용천 등이 낙하하자 지상에 있던 한국 백골부대 특무가 황급히 용천 네를 마중했다. 백골부대는 대부분 함경도 혹은 동북에서 남조선으로 도망친 지주나 불량배들로 정치보복을 하려고 조직된 부대로서 목숨을 내걸고 싸우는 대단히 악질들이었다. “보고!” “멍청한 놈! 왜가리 목을 달았어? 목소리를 낮춰! 주위에 중공군이 있으면 어떡해?” “옛.” “당장 우등 불부터 꺼버려!” “예.” 특무들은 밭전자로 피운 우등 불부터 꺼버렸다. 용천은 낙하산을 잘 개여 큰 멜 가방에 넣어 둘러멨다. 용천이 허리를 굽히고 떠나려고 할 때다. 뱁새눈이 등뒤에서 허리춤의 권총을 빼드는 것이 아니겠는가. "뭘 해?" "네? 에, 헤헤헤." 똘만은 뱁새눈에 간사한 눈빛이 어리었다.  그는 권총을 허리춤에 되찼다. (개자식, 아무때건 내 총에 죽을줄 알아라. 흥!) 땅딸보 똘만은 원래 서울 한 거리의 경찰서에서 서장을 하는 한선주와 극진한 사이었다.  친일주구 한철주 형제와 그는 거의 주일마다 만나 기생집을 나들면서 술판을 벌리고 사향의 정을 나누군 하였다. 항일시기 철천지 원수, 항일유격대 대장 용천이 서울에 있다는 것을 안 후 친일주구 한철주 형제와 똘만은 처음에는 용천을 서울에서 제거하려고 꿍꿍이를 꾸몄다. 그러나 친일주구 한철주와 한선주 형제가 암살당하자 똘만은 크나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자기도 언젠가는 친일주구라고 처단당할 것을 직감하였다.  그는 한선주와 한철주 형제의 사전 거천에 의해 천재일우의 기회를 붙잡고 장백산 지역에 파견될 특무조직에 기어들었다. 그는 한선주 형제의 부탁대로 만주에 기여드는 특무조직에 가입해 만주에 들어오는 기회에 용천을 암살하기로 작심하였던 것이다.      그는 금방 용천이 락하산을 거두는 기회에 손을 쓰려고 하였다. 그러나 용천이 경계심을 늦추지 않자 발톱을 감추었던 것이다. “빨리 이 곳에서 떠나야 해.” “옛.” 대답소리는 높았지만 특무들은 모두 동상이몽이었다. 용천은 만주에 들어와 진달래와 아들을 데려가려는 일념 밖에 없었다. 다급해진 그의 속은 뿌지직뿌지직 애타기만 했다. 그는 똘만의 신분을 몰랐기에 자기 신변에 위협이 어둠 속의 이새끼츠럼 스물스물 기어와 붙어 있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병수는 왕고모 할머니 일가(성칠 일가)를 만나뵙고 싶었고 성칠 삼촌을 살해한 원수 용천을 이번 기회에 제거하려고 작심했다. 그러나 친일주구와 딱 붙어다니던 뱁새눈한테 용천이 잘 못되기를 바라지는 않았다. 병수도 똘만이 일찍 만주를 휩쓸고 다니던 친일주구, 특무 출신이라는 것까지는 몰랐다. 하긴 똘만과 이름이 뭔가고 물을 때마다 "똘만"이라고 제대로 안대고 "허극호"라고 주어대고 고향이 어덴가 하니 황해도라고 얼렁뚱땅 속여넘긴데야. 그러나 병수는 어쩐지 요놈 땅딸보의 음침한 뱁새눈에 음흉한 눈빛이 어리어 있는 것을 보아냈다. 그리하여 줄곧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한편 용천은 어둠침침한 수림을 누벼보며 자기 좋은 생각을 했다.  (진달래, 내 왔어. 이제 너거(너)와 아들놈을 만날 때 왔어. 흐흐, 너거 모자를 얼마나 찾았는데. 이번에 꼭 데려갈 거야.)  용천은 특무들을 끌고 재빨리 낙하지점에서 어둠 속에 쏴쏴 몸부림치는 원시림 속으로 사라졌다. 어둠 속에서 낙엽이 우수수 지면서 장백산 원시림은 무시무시한 공포에 떨고 있었다. 주먹으로 낯을 쥐여쳐도 보지 못할 어둠은 허둥지둥 잠복하는 용천 등 남조선과 대만 특무들을 삼켜버렸다. 
96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75) 댓글:  조회:1680  추천:2  2017-08-01
                                   4. 서울에서 친일주구를 처단   맑고 파란 가을 하늘을 본지도 오래다. 어느덧 낙엽이 우수수 지는 늦가을은 흘러 지나가고 전쟁의 포화에 그은 먹장구름이 몰려오더니 벌거숭이 산발에 눈을 펑펑 내리 쏟아 부었다. 남으로 진격해 나가던 성칠의 연대는 508고지와 무명고지를 사수하다가 이북의 어디로인가 가뭇없이 철퇴하여갔다. 허군호 사단장과 한철주 부사단장이 영솔하는 괴뢰군은 페허로 된 서울 교외에 철퇴해 휴식정돈하면서 북진을 준비하게 됐다.       용천은 지난번 전투에서 5년만에 만난 칠백을 잃은 것으로 해 마음이 아파 지휘소 침실에서 연 며칠 고민에 빠졌다.       (전쟁이 뭐관대? 오래만에 만난 사촌형제 서로 총창을 비껴들고 찔러 죽여야 했는가? 이제 무슨 낯짝으로 작은아버질 보지? 뭐라고 말해야지? )      그는 눈보라 휘몰아치는 북녘 산발을 멍해 바라보며 숱한 물음표를 떠올렸다.      (칠백과 난 형제이자 전우 아닌가. 명천 산꼴에서부터 만주에서 한 전호에서 어깨 겯고 일본 놈들과 싸우던 생사전우가 아닌가? 그런데 우린 왜 미군의 손아귀에 쥐워 놀아나 형제간에 서로 참살해야 했는가.)    용천은 여기까지 생각하자 당장 군복을 벗어버리고 만주로 도망치고 싶었다. 만주에 가서 처자와 작은아버지를 남에 있는 고향 경주에 모시어오고 싶었다. 고향에서 농사짓고 감이나 따먹으면서 편안하게 살고 싶었다. 그러나 군영을 도망치는 시각부터 도주병으로 간주돼 총살당할 수도 있었다. 진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신세였다. 아니, 전쟁은 자기 운명을 자기절로 장악해 운전해나갈 수 없게 만들었다.     용천은 아직도 전번 전투 때 사촌동생 칠백과 날창을 비껴들고 맞부닥쳤던 참극이 눈앞에 선했다.          조선인민군 꺽다리군관 칠백이 용천 연대장 앞에서 뒤로 물러서는 1대대 대대장을 푹 찔러 눕히고 발로 시체를 차며 총창을 빼냈다. 순간,  용천 연대장이 총창으로 꺽다리 옆구리를 푹 찔렀다. 허나 그 꺽다리 군관은 재빨리 옆구리를 탈아 용천의 총창을 피하며 총창으로 용천을 찔렀다. 용천이 총창으로 찔러 들어오는 총창을 탁 쳤다. 쟁강! 총창과 총창이 마주쳐 불찌가 튕기며 무서운 저승사자 쇠소리를 냈다. "개새끼, 죽어 봐!' 꺽다리가 용천을 찔렀다. 용천이 비껴쳤다. 허나 날창은 허벅다리를 빗찔러나갔다. 용천도 꺽다리를 푹 찔렀다. 꺽다리 날창으로 올리 쳤다. 허나 창끝이 꺽다리 가슴을 빗 찔렀다. “아차!” “이거 누구야?!” 갑자기 서로 이를 악문 상대방 낯을 쳐다보는 순간 총창 질을 멈췄다. “칠백아!” “용천 히야(형님)!” 그 틈에 용천의 경호원이 권총을 휘둘러 칠백을 쏘았다. 땅! 야무진 총소리와 함께 칠백은 가슴에 흉탄을 맞고 총창을 진창에 툭 떨어뜨렸다. “닥쳐!” 땅! 땅! 뒤따라온 한철주도 총을 쏘았다. 칠백은 가슴을 붙안고 빙그르 몸을 비틀더니 밑 둥이 잘린 썩박나무 넘어가듯 풀썩 쓰러졌다. 한철주가 다시 권총으로 쓰러진 칠백을 겨눌 때다. “관둬!” 용천은 총창으로 한철주와 경호원의 권총을 탁탁 쳤다. 그는 다급히 물앉으며 칠백을 끌어안았다. “아우야! 이게 어쩐 일이여?” 한철주와 경호원은 눈이 휘 동그래져 권총을 쥐고 비실비실 뒷걸음질 치다가 총창을 꼬나들고 덮쳐드는 다른 인민군 전사를 쏘았다. 칠백의 가슴에서 선지피가 쿨쿨 솟구쳐 뻘건 빗물과 함께 땅바닥을 뻘겋게 물들이며 흘렀다...        용천은  피뜩 칠백이 피 흐르는 가슴을 부둥켜안고 마지막으로 하던 말이 떠올랐다.                 “형, 형님, 쿨룩, 진, 진달래캉 경, 경주는 함흥 촌에 갔소.” “칠백아!” 칠백은 감겨지는 실눈을 겨우 뜨고 손으로 자기 뒤를 가리키었다. “성, 성칠캉 재혼했어. 저, 저 뒤에 성칠이…” “아우야! 칠백아!” 용천은 칠백을 끌어안고 흔들며 대성통곡 쳤다. 허나 칠백은 빗물이 흐르는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눈을 스르르 감았다. 다시는 형님의 피타는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아, 아니야. 아우야!” 용천은 칠백을 끌어안고 풍덩 물앉아 얼굴에 얼굴을 미친 듯이 비벼댔다...        여기까지 생각한 용천은 칠백이 마지막 말이 뇌리에서 아프게 메아리쳤다.       " “형, 형님, 쿨룩, 진, 진달래캉 경, 경주는 함흥 촌에 갔소.”        “성, 성칠캉 재혼했어. 저, 저 뒤에 성칠이…”             "뭣이?"     용천은 주먹으로 사무상을 꽝 쳤다. 물주전자가 땅바닥에 떨어졌다. 순간 뜨거운 물이 사무상에서 주르륵 흘렀다. 전화기마저 놀라 김이 물물 나는 뜨거운 물에서 뒹굴었다. "재혼했어? 성칠캉(성칠과)?" 용천은 이를 뿌드득 갈았다. (성칠아, 닌도 히야까(너도 형인가)?! 아우 색시마저 빼앗아?!" 용천은 진달래와 성칠의 애틋한 사랑을 모르고 복수심으로 피 끓어번졌다. "꼭 함흥촌까지 쳐들어가 진달래를 찾아와야지." 용천이 어찌 진달래의 첫사랑이 성칠이란 걸 알았겠는가! 그저 한마을 남녀라고만 이해하고 있었을뿐이다.         어느 날, 군사훈련이 끝난 후 용천은 예전처럼 지휘소에 들어와 맥없이 털썩 주저앉아 상념에 잠겼다. 그때 이병수 대대장이 지휘소에 찾아왔다. 병수는 우울해 있는 용천을 보고 “산에 나가 산보나 하지 않을래요?” 라고 했다. “그래?” 경호원이 따라 나서려고 하자 병수는 “우리 잠간 나갔다 오겠어. 푹 쉬게나.”라고 했다. 경호원은 용천 연대장을 쳐다보았다. “글케 하라고.” 용천 연대장은 사촌동생 칠백을 잃은 후 경호원을 보기도 싫었다. 경호원이 바로 칠백을 쏴죽이었기 때문이었다. 비록 경호원은 상관을 보호하려고 날창으로 찌르는 칠백을 쏘았지만 연대장을 볼 면목이 없게 됐다.  바깥세상에는 하얀 눈이 뒤덮이고 여기 저기 벌집처럼 폭탄 구덩이가 파인 허연 산발에 눈보라가 휘몰아치며 기승을 부렸다. 귀신의 무서운 저주소리가 울리듯이 윙-윙- 무섭게 울부짖기까지 했다. 사위를 둘러보아도 낯익은 병사들이 보이지 않고 낯모를 군인들이 이동하는 대열이 보일뿐이었다. 병수는 용천한테 얼굴을 돌렸다. “김 연대장, 누구도 없으니께 하는 말이지만요. 전번 전장에 이북의 삼촌이 왔더래요.” 용천의 철색얼굴에는 삽시에 놀라움이 감돌았다. “뭐라고? 삼촌?” “얘. 전번에 알고 보니 성칠 연대장은 저 고종 오촌숙인 기여.” 병수는 포로됐을 때 정형을 죽 이야기했다. “그래? 성칠도 왔어? 음-” 용천은 머리를 끄덕이더니 뒤짐을 짓고 왔다갔다 하면서 구레나룻을 슬슬 어루만지었다. “얘. 성칠은 김 연대장을 잘 안다는 기여.” 병수의 말에 용천은 사색을 주춤 멈추고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알다 뿐이겠나? 우린 어깨 겯고 일본 놈들과 싸웠더랬지. 장백산 밀림에서 한철주 부사단장과도  싸웠던기여. 잠간!” 용천은 의아한 눈길로 병수의 아래위를 훑어보았다. “너거(넌) 어더래 걸케 잘 아노?” “난도(나도) 귀동냥을 했는지라. 저 한철주 부사단장은 친일주구라던데요.” “닌도 알어?” 용천은 병수를 의심하기보다 성칠의 등장에 더 신경이 갔다. “우린 성칠 대장의 유인술과 매복습격전으로 저 한씨 친일주구 놈의 한 개 연대나 되는 일본 놈들을 일망타진했던게라.” 이병수는 “그랬군요.” 하고 감탄하며 연신 머리를 끄덕였다. “세월이 어떻게 돼 이렇게 됐는지 몰라. 나라를 찾으려고 어깨 겯고 섬 오랑캐놈들과 싸우던 전우와 형제들이 총칼을 서로 맞대고 싸우고 죽여야 하니 말이여. 한선주 그 놈이 내 사촌동생을 쏴 죽였어. 이놈 동족상잔전쟁이 언제 끝날까?” “글케 말인기여(그러기에 말이요). 다 미국과 소련 짓인기여. 일본 놈들을 몰아내 줬으면 됐지. 남의 나라 허리를 분질러 이북은 소련이 영지처럼 가져가고 이남은 미군이 지배하니 어디 말인기여?” 이병수가 치를 떨자 용천도 속심을 털어놓았다. “모두 자기 고향을 보호 할락꼬 그래. 전우와 형제도 죽여야 하는지라. 허참, 가슴 아프게 됐어.” 병수가 중얼거렸다. “성칠 삼촌 말 들어보니께.  공산군은 사람마다 평등하고 똑같이 벌어 똑같이 나눠 먹으면서 똑같이 잘 산다는기여. 압박과 착취가 없고 이젠 지주도 없다고 해.” “에끼, 이 놈, 공산군에 포로되더니 빨갱이 물에 폭 물들었어?” “그렇찮은기여? 우리 가난한 사람 살기 좋은 세상이구면도.” “너거(넌) 당장 총 놓고 네 동생 꼬리 잡고 빨지산에 가지 그래?” 눈보라가 어찌나 기승스레 부는지 그들 둘은 숨이 헉헉 막혀 더는 산기슭으로 올라가지 못하고 발길을 돌렸다. 용천은 한참 후에야 무거운 입을 열었다. “3.8선이 무너진 기회에 이북으로 쳐들어가 처자를 찾으려고 했어. 건데 씨팔(씹할), 한 전호 속에서 어깨 겯고 일제와 싸우던 전우들캉(전우들과) 싸울 줄은 몰랐어. 그들은 한국군이 전에 쓰지 않던 전술에 혼났을 거야. 먼 곳에서 걔들이 오느라고 지쳤지. 508고지와 무명고지에 발을 붙이기도 전에 들이 쳤지 뭐야. 또 그들이 퇴각해 산골짜기 마을에서 피곤해 자려고 할 때 숨 돌릴 새도 없이 신새벽에 기습해 일망타진했는기여. 헌데 결국 내 사촌동생 칠백을 죽일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어. 동생이 숨지기 전에 내 처자가 간도 함흥 촌에 있다는 기여.” “그 멀리로 어떻게 가요? 성칠 삼촌도 함흥촌을 잘 아는기여?” “알다 뿐이겠나? 너거 고모할머니 할배 다 거게 있어. 아차, 잊을 번했어. 칠백이 숨지기 전에 ‘성칠형님이’ 하고 겨우 말하면서 피 묻은 손가락으로 자기 머리 뒤를 가리키더라. 아마 전번에 싸울 때 성칠 형님도 왔다는 네 말 맞아. 단정할 수 있어. 그때 우리 무명고지를 진공할 때 우리 배후를 우회해 들이 친 거 있잖노? 딱 성칠 형님이 이전에 일제를 유인해 매복습격을 하던 그 전술이었으니까. 그 부대는 성칠이 이끌던 장백산 유격대로 된 부대인 거 같아. 저 놈들은 유격전술과 매복전술에 능한데. 허나 난 기어이 508고지와 무명고지를 넘어 마천루를 타고 명천을 넘어갈 거야. 이제 간도까지 쳐들어가 처자를 찾아야겠어. 경주도 이젠 일여덟살 됐겠는데. 참, 애비가 이건 뭐야?” 허나 이병수는 발로 길가의 눈을 툭 차면서 맥 빠진 소리를 했다. “부대를 끌고야 언제 성칠 연대장이 이끄는 부대를 넘어 간도까지 쳐들어가요?” 용천은 무서운 눈길로 병수를 돌아보았다. “우리 한국군이 쳐들어가지 못하면 내 혼자라도 간도에 가서 진달래와 아들을 꼭 찾아오겠어.” 병수는 머리를 끄덕이다가 화제를 바꾸었다. “한철주 형제는 다 친일주구라는데요. 개 턱처럼 쳐들고 뻔뻔스레 장교를 해먹네요.” “우리 한국에는 전쟁경험이 있는 군인이 없잖아? 그래 그런 친일주구 장교나 경찰서장도 우리 한국군 장교로 된 거야. 난 일제와 싸우는 것도 아니고 미군과 한바지를 입고 춤추면서 이북 겨레들과 싸우기 싫어. 허군호 사단장이 그때 연대장을 할 때 교관을 해달라는 것도 그만두고 고향으로 내려왔던 기여. 그런데 인민군 장갑차가 우리 경주까지 쳐들어와 횡행하는 걸 보았을 때 부득불 총을 들게 됐어. 3.8선이 무너진 틈을 타서 명천에 북진해 이북에 두고 온 처자를 찾으려고 한 기여. 허나 싸우다나니 처자를 찾을 새 어디 있어.” 용천은 후 한숨을 내쉬었다. “그 놈 친일주구 형제를 볼 때마다 뒤에서 쏴 죽이고 싶어. 전번 전투에 내 사촌동생까지 죽였어. 저 놈들 음흉한 눈길을 보았지. 친일주구 형제들이 우리 독립군 출신 허군호 사단장이나 항일유격대 출신 장교인 나를 죽이려고 벼를지도 몰라.” 그때라고 병수는 주위를 살피더니 용천대장 옆에 바짝 다가서며 나직이 말했다. “연대장, 그 놈들이 우리를 죽이려고 칼을 뽑기 전에 선손을 쓰면 어때요?” “선손?” 용천 연대장이 머리를 끄덕이는 병수를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상관을 죽인 죄로 총살당할 거야. 전번에도 네가 한철주를 쏘았지?” 병수는 속이지 않고 머리를 끄덕였다. “예, 쥐도 새도 모르게 해치우면 누가 알아요?” 용천 연대장은 자기 귀에 손을 대고 나직이 하는 병수의 귀속 말을 들으면서 윙윙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산발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눈보라는 산발을 타고 산정에까지 달려 올라가서는 저 멀리 어디론가 허둥지둥 도망치고 있었다. “그래, 그 놈들이 간도에 갔던 옥설이 차린 술집을 드나든단 말이지?” “예.” “알았어.” 용천은 권연을 꺼내 권연지갑에 툭툭 쳐 붙여 물었다. 그의 입에서는 쌔 뽀얀 연기가 뿜겨 나와 눈보라에 흩날려 갔다. 어느 날, 해질 무렵에 한철주 부사단장은 동생 한선주 연대장과 함께 군용 찌프에 앉아 오랜만에 용산 부근의 자그마한 술집으로 발길을 돌리었다. 전쟁으로 형편없이 됐어도 조선 인민군이 서울에서 철퇴하자 피난민들이 하나, 둘 되돌아왔다. 전쟁의 포화에 잿더미로 된 서울에서 술집들도 문을 다시 열기 시작했다. 가열처철한 전쟁판에 그래도 술집이 제일 잘 됐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전쟁의 공포에 시달리던 군인들이 술집에 젤 자주 찾아왔다. 그것도 내노라는 한철주 형제 같은 장교들이 단골이었다. 술집이 마주 서있는데 주인들은 서로 자기 집에 들어오라고 허리를 구십 도로 굽히면서 아양을 떨었다. “아니, 장교님들, 어서 들어와요. 우리 집에 새로 온 야드르르 한 예쁜 아가씨들도 많아요.” 그러자 맞은쪽에서는 아예 하얀 살이 드러난 옷을 걸치고 짤막한 치마를 입은 아가씨들을 내 보내 팔을 마구 끼고 들어갔다. “장교님들, 잘 모셔드리겠어요.” “우리 빨 심이 죽여 줘요.” “그래, 딱 조이면 죽여 주겠구나. 핫하하하. 오늘 어디 한번 죽어보자.” 한철주는 이쪽 집에 아가씨들에게 끌리다 싶게 들어가면서도 맞은 켠 문어귀에 서 있는 야드르르 한 아가씨들에게서 아쉬운 눈을 떼지 못했다. (다음엔 저 집에 가서 저 아가씨들을 몽땅 재껴버려야지.) 아들 영호가 이젠 장가까지 들었건만 한철주의 색마 본성은 퇴색하지 않았다. 한철주와 한선주는 애비에게서 물려받은 주색재간을 피우러 술집에 부랴부랴 들어갔다. 길 하나를 더 가면 한선주의 처 남복금이 차린 기생집이 있었다. 그들에게 들통 나는 날이면 집안 불화가 생길 것은 빤한 일이었다. 광복 전에 선주는 자기 관할 구역에 복금에게 술집을 차려주어 돈을 무더기로 벌었었다. 허나 전쟁의 포화에 주색영업이 잘 되지 않았다. 한철주는 간도에서 장백산 밀림에서 성칠과 용천을 매복습격하려고 갔다가 도리어 호되게 포위습격을 받았던 것이다. 광복이 되자 그는 도망하는 일본 놈들을 따라 조선에 도망친 후 명천의 고향 영월동에 피뜩 들렸다. 그러나 일본 놈들이 달아나면서 불을 질러 놓아 잿더미로 된 토성 안 집을 보고 그는 그 이튿날로 남으로 서울을 바라고 도망쳤던 것이다. 다행히 동생 한선주가 서울에서 파출소 경찰을 하면서 자기 관할구역 뒷골목에 기생집을 차린 덕에 엉덩이를 들이밀고 숨을 자리가 있었던 것이다. 후에 한선주가 허군호 연대장에게 줄을 놓아 한철주를 항일유격대에서 부연대장을 했다고 거짓말로 속이고 한국군에 혼입시켰던 것이다. 헌데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뜻밖에도 용천이 우연하게 선주를 만났던 것이다. 그때 한선주는 급히 형에게 알렸다. 한철주는 등곬이 싸늘해져 동생을 시켜 용천을 암살해버리자고 했다. 허나 용천이 스스로 친일주구들과 한 부대에 있으면서 한가마 밥을 먹기 싫어 부대의 교관을 하라는 당시 허군호 연대장의 요청을 거절하고 고향 경주로 돌아갔던 것이다. 황차 용천은 한철주가 그 부대에 있는줄도 모르고 한선주만 보았다. 그런 연고로 한선주는 두루뭉실하게 용천이 사람을 잘못 본 것으로 얼리어 넘겼다. 허나 용천이 뜻밖에도 5년 만에 경주에서 되돌아왔다. 그는 곧추 갓 사단장으로 승급한 허군호를 찾아갔다. 한선주는 허군호 사단장을 보고 기어이 용천이가 나이 많다는 구실로 따돌리려고 들었다. 허군호 사단장은 실전경험과 지휘능력이 있는데다가 무예가 출중한 용천을 기어이 군부대에 받아들여 연대장 겸 교관을 시켰던 것이다. 용천은 독립군 출신인 허군호 사단장한테 한철주와 한선주는 친일주구였다고 계속 검거했다. 특히 간도에서 장백산 항일유격대를 포위 토벌하고 흥기촌에서 감행한 대학살 등 만행을 일일이 검거했다. 허군호 사단장도 용호쟁투를 말릴 수 없었다. “한 집에 용과 호랑이를 둘 순 없는데.” 허군호 사단장은 조용히 혼자 남으면 항상 권연을 꺼내 피우면서 고민에 빠지곤 했다. 허나 6.25전쟁이 발생한 후 허군호 사단장은 한철주 형제와 용천을 각각 불러 내리 눌렀다. “나라가 위기에 빠졌는데 개인의 원수를 잊으라. 우리 적은 조선인민군이야. 우린 일심단결해 인민군을 막아야 해.” 허군호 사단장은 용천을 불러 타일렀다. “자네나 내나 다 독립군 출신이네. 항일전쟁 때는 확실히 저 한철주 형제가 우리 적이었네. 허나 일본 놈을 몰아내고 나라를 찾은 후에는 빨갱이들이 주적이네.” 용천은 대뜸 얼굴을 붉히었다. “그 말에 도리 있긴 있시우. 빨갱이들은 간도에서 토지개혁을 할 때 우리 같은 부자, 지주를 몽땅 총살하고 집과 땅을 가난뱅이들에게 나눠 줬어요.  허나 친일주구도 적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해요. 그 놈들은 독립군 출신인 우리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어요.”        허군호 사단장은 머리를 끄덕이었다.       (이 사람들 진짜 한 굴에 두기 어려워!)      허나 전시라 별수 없어 한선주와 용천 두 연대장을 따로 한 개 연대씩 맡겼던 것이다. 한철주나 한선주나 다 일맥상통한 친일주구이었다. 그들은 항일유격대 출신인 용천 연대장을 계속 눈에 든 가시처럼 여기면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려 모해하려고 꿍꿍이를 꾸몄다. 이날도 그들 형제는 용천을 암해할 꿍꿍이를 꾸미려고 술집에 기신기신 기어들었던 것이다. 그들 형제가 아가씨들의 옹위를 받으면서 근사한 방으로 들어섰다. 축음기에서 은은한 노래 소리가 귀맛을 돋우었다. 전쟁으로 뻣뻣하던 신경이 느슨하게 풀리는 순간이었다. 한철주와 한선주는 아가씨들을 끼고 한창 술을 마셨다. 그러다가 한철주가 아가씨들을 둘러보면서 우멍한 눈을 찔끔 했다. “얘들아, 우리 형제 조용히 할 말이 있으니까. 너희들은 좀 나갔다가 부르면 오너라.” “얘-” “얘가 뭐야? 어른들을 얘라니?” 한철주의 말에 아가씨들은 입귀를 비쭉 하더니 입을 싸쥐고 웃으며 나갔다. 뒤에 나가는 살맛나는 아가씨는 허벅다리와 엉덩이를 배틀거리면서 코를 싸쥐고 나갔다. “함경도 도둑놈들이 왔어.” “그래. 촌스러운 놈들, 우리 서울 아가씨들의 부드러운 말이 통 귓구멍에 들어가지 않는가베.” “호호호.” 아가씨들은 웃고 떠들었다. 한철주는 술잔을 내려놓고 안경을 벗어 닦아 끼더니 정색해 말을 꺼냈다. “김용천 놈을 우리가 선손을 써서 제거하지 않으면 안돼. 저 놈이 우리 형제를 허군호 사단장한테 고발하는 걸 여러번 엿들었어.” 한선주는 이를 악물었다. “까짓거 내 수하의 건달들을 시켜 때려죽이면 단걸.” “안돼. 일단 발각되면 우린 군법에 목이 댕강 날아나.” 한선주는 김이 빠진 공처럼 어깨를 축 늘어뜨리었다. “그럼 무슨 수로 해치우겠소?” 한철주는 미닫이문을 꼭 닫고 안경을 건 우멍한 눈에 음흉한 빛을 띠며 나직이 귓속말을 했다. “군부에 말해 용천을 간도로 보낼까 한다.” “양?” 한선주는 눈이 휘둥그래졌다. “지금 중공군이 한반도에 쳐나왔어. 군부에서 장백산 일대에 우리 유격대를 파견해 중공군 적정을 정찰하고 후방을 교란하고 파괴할 예산인 거 같애. 군부에서는 꼭 장백산 일대 정황을 잘 아는 용천이나 나를 보내자고 할 게야. 내야 부사단장이니깐 당연히 수하인 용천을 보낼게 아니야?” “오. 참 묘하구만.” 선주는 형의 묘책에 연신 혀를 내둘렀다. “중공군의 칼을 빌어 용천을 없애 버린다. 거 참 묘수요, 묘수!” “무인지경 장백산 일대는 천연지형이 복잡하다. 이전에 일본 통치 때에도 장백산 밀림에 포위 토벌하러 간 일본 별동대와 우리 관동군이 전멸당하다 싶게 됐다. 지금 중공에서 동만 지구를 해방한 5년 사이에 막강한 군사방어체계를 구성했을 게다. 개미 한 마리 장백산 일대에 얼신해도 손금 보듯 할 거야. 그럼 용천이 아무리 유격대 출신이라고 하지만 영락없이 중공군에 나포될 거야.” “허허허. 형님, 참 묘수오. 허허허." 한철주는 한술 더 떴다. "전번에 허사단장한테 똘만이를 용천한테 딸려 보내라고 추천했어." "네? 가 형님이 우리 파출소에 알선해준 그 똘만 말이지?" "그래, 똘만이 칼을 빌어 용천의 목을 썩뚝!" 한철주는 손을 펴 손날로 목을 치는 시늉을 했다. "흐흐흐. 어때?" "참 묘하오. 남의 칼을 빌어 용천을 제거한다. 허허허." 한선주는 맞장구를 치며 술잔을 쳐들었다. "자, 용천의 승천할 날을 기대하면서 술이나 마시기오.” “허허허. 이 일을 늦출 수 없다. 전번에 허사단장과 말해 놨는데 군부에서 비준했는지 모르겠어..” “용천이 아무리 날고 뛰여도 이젠 죽었어. 핫하하..” 선주는 기분이 도도해 미닫이문을 드르륵 열고 고래고래 고함쳤다. “아가씨, 어서 오라니까.” “얘-” 뒤이어 복도에서 신을 짝짝 끄는 소리가 들리더니 아가씨 둘이 호들갑을 떨면서 들어왔다. 그들 형제는 예쁜 아가씨들을 끌어안고 용천을 암해할 궁리를 익히면서 기분 좋게 술을 마시었다. 그들은 해가 넘어 가는 줄도 모르고 폭 취토록 마시고 또 마시었다. “너희들, 아까 뭐 꽉 조이는 힘이 죽여준다고 했지?” “얘- 한번 맛볼래요?” “그래, 조선인민군과 밤낮 싸우다나니 서울 아가씨를 맛본지도 오래. 난 그 중간다리만은 힘이 세. 금방 시들었다가도 또 머리를 쳐들거든. 히히히.” “그럼 좀 좋아서요.” “호호호.” 아가씨들은 두 사내를 갈라 모시고 나갔다. 방 안에서 아양을 떠는 소리가 간간히 들렸다. “어서 시작해요. 꽉 조여 죽여 줄 터이니깐요.” “그래?” “허허허.” 그들 형제가 일을 끝내고 나와 또 술잔을 기울였다. 그들이 게트림을 하면서 바깥에 나왔을 때는 바깥이 어둠에 두텁게 감싸여 있었다. 어둑씨그레한 골목길에는 행인들도 별로 보이지 않았다. 그들 형제가 타고 온 찌프를 버린 채 비틀거리며 작은 골목에 굽어들려고 할 때다. 맞은 켠 술집에서 어두운 그림자 둘이 나왔다.  검은 그림자 둘이 눈 덮인 골목길을 비틀거리며 그들 형제를 슬금슬금 따라 갔다. 그들 형제가 길을 건너 한선주네 술집을 바라고 비척비척 걸어 갈 때었다. 뒤따라가던 검은 그림자들이 쇠파이프를 휘둘러 한철주의 뒤대가리를 여지없이 내리깠다. 딱! 딱! “앗!” 비명소리와 함께 한철주는 쓰러졌다. “형님, 이 놈들이!” 한선주는 권총을 뽑아들고 자기 형을 때려눕힌 검은 그림자를 쏘았다. 탕! 검은 그림자는 슬쩍 허리를 굽혔다. 다른 검은 그림자가 뒤로 덮쳐들어 쇠파이프를 휘둘렀다. 한선주는 대가리를 싸쥐고 몸을 비틀며 빙그르 돌면서도 방아쇠를 당겼다. 땅! 총알은 허공으로 날아갔다. 투닥! 투닥! 검은 그림자들은 쓰러진 한철주 형제의 대가리를 연신 개 패듯 했다. 이때 술집에서 누군가 얼음이 진 골목길에 뛰어 나와 소리쳤다. “강도야!” “사람 살려라!” 탕! 탕! 타당! 탕! 골목 가게들에서 사람들이 뛰어 나와 구경했다. 검은 그림자들은 아랑곳 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쓰러진 그들 형제를 놓치지 않고 쇠파이프로 연신 내리쳤다. 뒈지는 비명소리가 점점 가늘어지다가 잠잠해졌다. “뒈졌어!” “뛰자!” 그들은 어두운 골목길을 꺾어들어 도망치었다. 호각소리에 뒤이어 경찰들이 뛰어왔다. 허나 바람결처럼 사라진 검은 그림자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한선주 여편네가 술집에서 뛰어나와 피투성이 된 남편을 안아 일으켰다. 한선주는 마지막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여보, 웬 술에 취해 이렇게 당해? 어~허헉, 흑흑흑. 여보~” 더러운 술 냄새를 풍기면서 옆에 쓰러진 한철주의 피투성이 된 머리도 된서리 맞고 짓밟힌 호박대가리처럼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 친일주구 형제들은 서울에서 물매를 맞아 뒈지고 말았다. 어둑시그레한 골목에는 더러운 피자국들을 지우려는 듯이 함박눈이 푸실푸실 쏟아져 내렸다. 눈송이들은 춤추며 날아내려 싸늘해진 친일주구 형제 시체를 뒤덮었다. 귀신이 곡 하듯 한 여편네가 피투성이 된 시체를 붙안고 장송곡을 애처롭게 불렀다.                      5. 고지쟁탈전         눈풍설이 일면서 친일주구 형제가 맞아 죽으면서 흘린 피자욱을 새하얗게 덮어버렸다. 친일주구 시체는 찌프에 실려 갔다. 허나 한선주의 여편네 복금은 찌프에 앉아 군부에까지 찾아가 울고 불고 야단쳤다. 한철주의 어미 월선은 두 아들이 하루 한시에 맞아 죽은 골목에서 깨진 안경알을 더듬어 쥐고 대성통곡쳤다. 그때 용천과 병수는 옥설이네 술집에 스며들어갔다. “왔어요?” “음, 그래.” 용천과 병수는 금방 친일주구 철주와 선주 형제를 때려죽인 쇠파이프를 쓰레기무지에 버리고 맨 손으로 술집에 들어섰던 것이다. 옥설은 그들 두 사람을 안방에 모셨다. 사실 옥설은 만금과 함께 고향 김해로 돌아갔었다. 만금은 고향 명천에 돌아갔지만 부모형제가 다 일본 놈들의 가혹한 압박과 착취 밑에 어디로 살길을 찾아 갔는지 찾을 길이 없었다. 게다가 그녀가 명천 바닥에서 창기를 하다가 종군위안부로 끌려 간 것을 알고 있는 마을 사람들의 눈길이 곱지 않았고 뒤통수에 손가락질이 심했다. 그녀는 울며 겨자 먹기로 고향을 떠나 옥설을 따라 김해로 나갔다. 그런데 옥설의 부모형제도 만금의 부모형제처럼 어디로 살길을 찾아 갔는지 찾을 길이 없었다. 옥설은 만금과 함께 부산에서 잡일을 하다가 용천을 만난 후 그를 따라 서울로 올라왔던 것이다. 용천이 가게를 차리라고 돈을 대줬더니 옥설은 사내들의 돈을 벌려고 여기에 술집을 차렸던 것이다. 며칠 전에 병수는 철주와 선주가 휴식일이면 부대 숙영지에서 그리 멀지 않은 옥설이네 술집에 자주 드나든다는 것을 정찰해냈던 것이다. 용천은 옥설을 보고 한철주나 한선주가 술집에 오면 알리라고 했다. 사건이 발생한 날 오후에 옥설에게서 친일주구 한철주와 한선주가 맞은 켠 만금이네가 차린 술집에 왔다는 기별을 받았다. 용천과 병수는 옥설이네 집에서 술을 마시면서 기다리다가 만금에게서 그자들이 술집에서 나갔다는 기별을 듣자마자 바깥으로 뒤쫓아나가 쇠파이프로 때려 죽였던 것이다. 맞은 켠 술집에서 만금이도 건너 왔다. 그러다나니 용천과 병수는 두 술집의 여 보스들인 옥설과 만금과 함께 제일 조용한 안방에서 술자리를 같이 했다. 옥설은 미닫이문을 꼭 닫더니 술병을 들어 용천과 병수의 술잔에 찰찰 넘칠 정도로 술을 부었다. “자, 원수를 갚았으니 시름 놓고 한잔 들어요.” “통쾌하게 마시자. 허허허.” 만금도 술잔을 들었다. “한길성 영감은 일본 놈들을 등에 업고 이전에 우리를 어디 사람취급 했소? 개놈들, 씨, 잘 없애 버렸습니다.” “허허허. 만금인 아직도 그 함경도 말투구나.” “호호호.” 그들 넷은 속이 시원해 술을 들었다. “자, 후에 다시 마시기로 하고 오늘 돌아가야겠어.” 용천은 일어나기 전에 신신당부했다. “오늘 일을 입 밖에 내선 안 돼!” “알았어요.” 옥설과 만금은 머리를 끄덕였다. 용천과 병수는 다른 골목에 세워놓은 찌프를 타고 부대로 급급히 돌아갔다. 군부대에서는 한철주 부사단장과 한선주 연대장 형제가 서울 골목길에서 맞아 죽자 인차 헌병들을 파견해 현지수사를 했다. 그들은 두개골이 마사지고 뇌장이 흘러나온 한씨 형제의 시체를 보고 둔기에 맞아 죽었다고 판정했다. 게다가 피해자의 호주머니에서 지갑도 빼가지 않은 것을 보아 재물을 탐낸 강도들의 행위가 아니라 원수를 진 자들이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살해했다고 인정했다. 헌병들은 눈 덮인 사건현지 골목과 부근 가게를 발칵 뒤졌다. 그들은 부근의 쓰레기 무지에서 한씨 형제를 때려죽일 때 쓴 흉기로 보이는 피 묻은 쇠파이프와 범행 당시에 입은 것 같은 검은 가죽 옷 두벌을 들춰냈다. 허군호 사단장은 대뜸 한씨 형제에게 원한을 품은 용천을 의심했다. 황차 사건발생 당일에 용천과 병수가 서울 시내에 들어가서 술을 밤중까지 마시고 돌아오지 않았던가! 허사단장은 짐작됐지만 고민 끝에 눈을 감아버리기로 작심했다. (어차피 실전경험이 있는 한철주가 죽었는데 이제 용천 연대장마저 처벌받으면 내 양팔이 다 떨어지게 돼. 그럼 어떻게 대부대작전 경험이 많고 유격전술과 매복습격 전에 능한데다가 용감하기로 무쌍한 인민군을 대적한단 말인가!) 여기까지 생각한 허군호 사단장은 용천 연대장을 지휘부에 불러들이었다. 용천 연대장은 여느 때처럼 태연자약하게 지휘소에 들어서자마자 군례를 붙였다. “충성! 사단장님! 새 전투임무 떨어졌어요?” 허군호는 아닌 보살하는 용천이 우스웠다. “있어. 앉게나.” 허군호는 사무상에 앉아 함구무언하고 용천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마치 용천의 속내를 꿰뚫어 보려는 듯이 책망하는 눈길로 유심히 보는 것이었다. 한참 후에야 허사단장은 천천히 무거운 입을 열었다. “사람도 원, 큰 그릇이 아니구먼.” 용천은 그 말의 의미를 알아들었다. “내 눈이 멀었어. 항일유격대에서 대장 했다니까 큰 재목인가 했지. 그저 개인 원수나 갚는 옹졸한 졸장부.” 용천은 한보도 물러서지 않고 떳떳이 나왔다. “허 사단장, 한씨 형제의 죽음 내캉(나와) 관계없어요. 허나 친일주구 한씨 형제는 죽어 마땅해요.” 꽝! 허군호 사단장은 사무상을 꽝 치며 벌떡 일어났다. “아직도 시치미를 딸 예산인가!” 허나 용천은 머리를 쳐들고 허사단장을 노려보았다. 이제 용천 연대장은 무슨 일을 벌릴지 모를 형편이 됐다. “됐어, 됐어! 이 일 이만해서 덮어두겠네. 중공군과 조선인민군이 코앞에까지 덮쳐오고 있어. 우린 일심협력해 주적을 막아야 해. 과거 원수청산에 다리를 묶이어 대적을 막지 못한다면 비극이 아니겠어?” 용천도 내심을 실토했다. “사람이 사는 거요. 앞만 보고 살순 없어요. 민족도 마찬가지죠. 과거 친일주구 한철주 형제 놈들은 나라와 민족을 팔아먹었죠. 일본 관동군 장교와 경찰 질을 해먹으면서 우리 독립군과 인민을 얼마나 참혹하게 학살했는가요? 그런 놈들 살려 둘 순 없시우.” “그만 해!” 허군호 사단장은 꼿꼿한 눈초리로 용천을 쏘아보았다. “일본 놈들을 몰아내고 나라를 찾은 후에는 친일주구고 뭐고 다 똘똘 뭉쳐 조선인민군을 대적해야 하네. 빨갱이들이 고향을 짓밟는 거 차마 눈 뜨고 볼만 해?!” 용천은 바깥을 내다보면서 허무한 웃음을 지었다. “허 사단장은 빨갱이들을 제대로 보지 못했어요. 그 놈들은 지주를 청산해 집과 땅을 가난뱅이들한테 나눠주는기여. 한씨 형제가 먼저 우리 유격대 출신이라고 암해하려고 짜고 들었는지라.” 허군호 사단장은 언성을 좀 낮췄다. “무슨 근거로?” “만금과 옥설이 술집에서 그 놈들이 꿍꿍이를 꾸미는 거 다 들었대요.” 허군호 사단장은 한숨을 후― 내쉬었다. 뒤이어 그는 용천의 옆에 다가와 어깨를 다독였다. “용천 연대장, 자네와 난 다 조선의 독립과 민족의 해방을 위해 일본 제국주의 침략자들과 친일주구들과 싸워왔네. 다 빨갱이들을 증오하네. 이 점은 털끝만치도 의심하지 않네. 이젠 모든 것이 끝났네. 빨리 북진해 밀물처럼 덮쳐오는 빨갱이들을 막을 준비나 하게나.” 허군호 사단장은 제 자리로 스적스적 돌아갔다. “백의종군해 입공속죄하게나. 아무리 궁리해도 자넨 아까운 군사지휘관이야. 군법에 의해 네놈에게 깜장콩알 한 알을 먹이기보다 무명고지와 508고지를 찾아와야지. 전번에 무명고지에까지 내려왔던 인민군이 지금 무명고지와 508고지를 점령하였네. 인민군은 중공 지원군의 지원하는 파죽지세로 우리 군을 모래성처럼 무찌르고 남으로 덮쳐오고 있네. 우리 사단은 북으로 진군해 그 놈들을 막으라는 명령을 받았네. 자넨 병수 대대장과 함께 선봉을 서서 무명고지와 508고지를 빼앗고 장차 마천령을 넘어 함경도에 진군할 준비를 하게나.” “충성!” 용천은 두발을 척 모으면서 군례를 올렸다. 허군호 사단장은 용천의 뒷모습을 믿음에 찬 눈길로 전송했다. 그는 조선독립군 총사령관 홍범도 장군과 김좌진 장군 등을 따라 일본 놈들과 시병년 싸우면서 수많은 장병을 다뤄왔지만 용천과 같이 영용무쌍한 수하장관은 처음 보았다.  용천은 연대지휘부로 돌아오자 장병들을 이끌고 눈보라를 무릅쓰고 508고지를 향해 진군했다. (이번 전투에서 아예 성칠 놈을 죽여버려야 해. 그 놈을 살려두곤 진달래를 완전히 차지할 수 없어.) 성칠은 한 전호 속에서 함께 일본 놈들과 싸우던 생사 형제, 전우라는데 미치는 순간, 용천은 주춤 멈춰섰다. 그러나 성칠과 재혼한  진달래를 떠올리자 인차 도리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허리춤의 권총에 손이 갔다.       "쳇! 히야(형이)고 전우고 몰라. 진달래를 빼앗아간 놈은 내 손에 죽여야 해!"      용천은 여기까지 생각하자  무명고지 앞에 이르러 표독스런 눈길로 절벽 아래 조선인민군 지휘부를 쏘아보았다. 그는 손을 쳐들어 대오를 멈춰 세웠다. (혹시 저 절벽아래 성칠놈이 있을 수도 있어. 내 손에 죽었다. 네놈, 남의 색시 빼앗고도 살기를 바라? 흥!) 용천은 주먹을 으스러지게 틀어쥐며 이를 뿌드득 갈았다. 토끼꼬리만한 겨울 해는 얼음 쪼각마냥 싸늘한 빛을 뿌리다가 서산에서 마지막으로 벌겋게 불타오르며 서서히 지고 눈보라가 윙윙 기승스레 휘몰아쳤다. 용천 연대장은 땅땅 얼어붙은 강 건너 무명고지를 망원경으로 살피며 번개같이 속궁리를 돌렸다. (만약 저 인민군이 확실히 성칠이 이끄는 부대라면 꼭 유인 술과 매복 습격 전을 위주로 전술을 쓸 거야. 그렇다면 동쪽의 저 무명고지와 북쪽의 508고지와 마천령, 저기 서쪽의 미군과 마주 선 랑아산은 범의 아구리와 같아. 저 복판 개활지대에 들어서는 날엔 성칠의 매복습격을 받게 될 거야.) 이때 무선전 전화가 왔다. “허 사단장 전화예요.” 용천이 송수화기를 들자 허사단장의 욕설이 귀청을 때렸다. “왜 진군을 멈췄는가? 글케 꾸물거리고서야 언제 마천령을 넘어?!” 허나 용천은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허사단장님! 빨갱이들의 유인 술과 매복습격을 당해 보지 못해 그래요?” “빨갱이 소릴 작작 쳐. 우린 빨갱이출신이 아니야?! 어둡기 전에 무명고지를 뽑아버려! 내일 508고지를 빼앗아내고 모레는 마천령을 넘어야 해!” “옛! 조선인민군이 전화를 도청하기에 구체적으로 보고하지 못하겠는데요. 저를 믿으세요.” 저쪽에서 수화기를 덜컥 놓아버렸다. 용천은 병수 대대장을 불렀다. “우리가 정면으로 치는 척 해 인민군을 이쪽으로 끌어올 때 이대대장은 어둠을 타서 한 개 중대 병력을 데리고 무명고지 북쪽으로 우회해 놈들의 뒤통수를 치게. 난 직접 한 개 대대를 거느리고 508고지 뒤로 우회해 가서 성칠 연대장의 뒤통수를 치겠네.” 삽시에 병수는 얼굴에 검은 그림자가 꽉 차 흘렀다. “왜 중공군과 싸우지 않고 우리 삼촌과 싸워요? 뭐 칼 쥔 원수인가 베?” “난 나라를 위해 작은집 사촌동생마저 죽였어. 이 놈 전쟁은 원래 애초부터 동족상잔의 전쟁이야. 빨갱이들이 쳐 들어와 우리 지주들을 총살하고 집과 땅을 빼앗아 가난뱅이들에게 나눠 주는 꼴을 보겠는가? 대의멸친해야 돼.” “부자 놈들이 평소에 가난한 사람들이야 굶어 죽든지 얼어 죽든지 관계하지 않고 자기 욕심만 차리지 않았어요? 그 놈들 보고 가난한 백성들을 돌봐주라고 자선 사업을 하라고 해도 어디 일전 한 푼 내놓았어요? 그런 놈들은 총살하고 집과 재물을 빼앗아 가난한 백성들에게 나눠 주는 게 옳아요. 세상 사람들이 다 같이 땅을 나눠가지고 다 같이 일하고 똑같이 나눠 먹고 똑같이 살면 얼마나 좋아요?” “얘, 이놈, 며칠 빨갱이들 속에 갔다 오더니 속까지 빨갛게 물들었어?” 용천 연대장은 이병수의 멱살을 틀어쥐고 나직이 귀속 말로 훈계했다. 병수는 한숨을 후 내쉬었다. “난 내 삼촌과 싸울 자신이 없어요.” 그러자 용천 연대장은 병수 대대장의 어깨를 툭툭 쳤다. “근심 말게. 무명고지에는 성칠이 없네. 508고지에 있을 거야. 우린 무명고지와 508고지를 빼앗아 와야 살아남을 수 있어. 군법이 우릴 용서하지 않네.” 병수는 꼿꼿한 눈초리를 치켜 올렸다. “어떻게 알아요?” “성칠 대장은 항상 자기가 제일 큰 미끼로 되어 유인 술을 써왔네.” “무명고지가 미낀지 508고지가 미낀지 어떻게 알아요?” “난 직감적으로 508고지가 제일 큰 미끼라고 보네. 508고지에 유인해야 범의 아래 윗 이발 같은 무명고지와 랑아산 사이에 우릴 끌어들여 포위섬멸하지.” “참 그럴듯해요.” “충성!” 병수는 군례를 척 붙이고 군사를 거느리고 출발하려고 했다. “잠간!” 병수는 돌아서면서 이상해 철갑모를 춰올리며 용천 연대장을 쳐다보았다. “이 대대장, 날이 어둡길 기다려 출발하게나. 지금 진공해서 저 놈들의 주의력을 이쪽으로 끈 후 배후로 우회해도 백설 우의 콩알처럼 다 보일 거네.” “알았어요.” 총공격이 시작됐다. 미군의 전투기가 떼를 지어 무명고지와 508고지에 덮쳐들었다. 전투기들은 전에 없이 어둡기 전에 개활지대를 따라 날아오다가 무명고지와 508고지를 스칠 듯이 낮게 덮쳐들어 기관총 소사를 하고 폭탄을 투하하고는 기수를 들어 하늘로 날아 올라갔다. 날새와도 같은 전투기들은 겨끔내기로 반시간 동안이나 맹폭격했다. 공군에 배합하여 탱크 10여대도 포아구리를 열고 불을 토했다. 쿵! 쾅! 꽈르릉 꽝꽝! 무명고지와 508고지는 삽시에 화염에 휩싸였다. 돌과 흙덩이들이 마구 난무하며 날아올랐다가 산마루를 뒤덮었다. 눈 덮인 산비탈 여기저기에서 화광이 끊임없이 번쩍였다. 나무들은 뭉청뭉청 끊어져 날아났다. 산마루가 낮아질 지경으로 맹폭격과 포격을 가했다. “돌격!” 탱크들이 맹렬히 포격하며 산비탈을 향해 돌진하고 그 뒤에 한국 괴뢰군 장병들이 딱 붙어 사격하며 돌격했다. 전투기 편대가 폭탄을 투하한 후 어디론가 사라지자 무명고지와 508고지의 조선 인민군 장병들은 전호에서 잔등의 흙을 털고 일어나 전투준비를 했다. 괴뢰군이 산중턱에까지 돌격해 올라갔을 때다. 꽝! 제일 앞에서 돌격해 올라가던 탱크가 요란한 폭음과 함께 무한궤도가 툭 끊어져 쯔르륵 멈춰 섰다. 뒤에서 돌격해 올라가던 탱크들은 질겁해 더 올라 갈 염을 하지 못하고 선 자리에서 맴돌면서 포격하고 있었다. 보병들이 산마루에서 50미터 가까이에 덮쳐들었다. 그제야 인민군은 맹렬한 사격을 하기 시작했다. 산마루에서 수류탄 폭발음과 총성이 콩 볶듯 했다. 이병수 대대장은 인민군의 주의력이 정면으로 왔겠다고 생각되자 한 개 중대를 거느리고 어둠을 타 슬금슬금 무명고지 뒤로 우회하여 들어갔다. 동시에 용천 연대장도 두 개 중대 병력을 영솔해 508고지 뒤로 우회해갔다. 그런데 이게 뭐야? 그들이 산 뒤로 우회해 채 가지도 못했을 때다. 개활 지대 눈 속에 매복해 있던 인민군 전사들이 불쑥불쑥 나타나 맹렬하게 사격하는 것이었다. “이 놈들아! 여기서 기다린 지 오래다!” 뚜르륵 뚜르륵! “젠장! 빨갱이들이 진짜 신출귀몰하는구나!” 이병수 대대장은 깜짝 놀라 병사들을 돌아보며 명령했다. “겁나 말아! 포위를 돌파하라!” 한국 괴뢰군과 조선 인민군은 개활 지대에서 치열한 공방전을 벌렸다. 개활지대 정황을 알게 된 용천 연대장은 우회작전을 멈추지 않을 수 없었다. (유인 술과 매복습격 전략전술을 서로 잘 알기에 수가 잘 통하지 않는구나. 저 놈들의 유인 술과 매복습격전술에 대비해 내가 우회작전을 펼치리라는 걸 알고 성칠 대장은 미리 방비하였구나.) 조선인민군은 괴뢰군이 후퇴하는 것을 보고 맹사격을 퍼부으면서 추격하다가 멈춰 섰다. 이때 난데없는 고음확성기에서 조선인민군 여전사의 유유한 노래 소리가 화광이 충천하는 눈 덮인 산과 들에 울려 퍼졌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오 아리랑 고개를 넘어 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임은 십리도 못 가서 발병 난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오 아리랑 고개를 넘어 간다   뒤이어 조선인민군 여전사의 대적공작방송이 시작됐다.   “괴뢰군 장병 여러분, 우리는 반만년 피 줄을 이어온 백의겨레입니다. 우리는 간악한 일본 놈들의 식민통치 밑에서 망국노의 설음을 안 피눈물을 흘리며 살아온 동포입니다. 우리는 어깨 겯고 싸워 일본 제국주의 식민통치를 뒤엎고 나라를 되찾아 왔습니다. 허나 오늘 또 남조선 인민들이 미제 침략자들의 식민통치를 받아야 합니다. 더는 승냥이 같은 미제 침략자들과 이승만 괴뢰도당의 탄알받이로 되지 마십시오. 무기를 놓고 우리 조선인민군에 항복하십시오. 투항하면 살 길이 있을 것입니다…”   괴뢰군 속에서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그때 용천 연대장이 권총을 하늘 공중에 쏘며 고함쳤다. “빨갱이들의 적화선전을 듣지 말라!” 수하 병사들이 모두 용천 연대장을 쳐다보며 모여들었다. “우린 저 눈앞의 무명고지와 508고지를 점령하고 마천루를 넘어 압록강 변에 우리 태극기를 꼽아야 해!” 그제야 겨우 뒤숭숭해 하던 병사들이 내렸던 총을 들고 용천 연대장의 명령을 기다렸다. 용천 연대장은 눈알을 데굴거리며 속궁리를 번개같이 굴렸다. (저 놈들은 내가 반 유인책과 반 매복전술을 쓰리라는 것을 알고 미리 우리 우회작전을 타파할 작전을 꾸몄어. 성칠은 꼭 508고지에 있을 거야. 허나 우회작전에 많은 병력을 포치하고 고지에 놈들이 많지 않을 수 있어. 으흠, 이 놈아, 죽어봐라!) 용천은 무전 수에게 다가가 송수화기를 빼앗아 쥐고 고함쳤다. “허 사단장, 미군 공군과 탱크부대에 증원을 요청해요. 우린 날이 밝기 전에 무명고지와 508고지를 점령하겠시우. 형제 연대에서 협력해 주게 명하세요.” 허 사단장의 느릿한 목소리가 들렸다. “좀 시간이 걸릴 거 같아.” 용천은 화났다. “제기랄, 교활한 양키 놈들, 번마다 최전선엔 우리 국군을 내몰고 뺑소니 칠 땐 젤 앞장서면서 비행기캉(하구) 탱크마저 제때에 못 보내 줘?! 흥! 망한 놈의 미국 놈들 믿고 어떻게 작전해?” 뒤이어 용천 연대장은 권총을 빼들고 병사들에게 고함쳤다. “나의 용감한 장병들이여, 승리는 눈앞에 보인다. 이제 미군 공군과 탱크부대가 우릴 지원한다. 재빨리 앞길을 막는 적들을 족치고 저 무명고지와 508고지를 점령하라!” 이때 미군 전투기가 밤하늘을 헤가르며 동남쪽에서 날아왔다. 제일 먼저 날아온 전투기가 무명고지와 508고지를 스쳐 지나가며 조명탄을 줄줄이 투하하여 하늘에 대낮같이 걸어놓았다. 고지의 인민군 전사들이 분주히 탄알과 수류탄을 나르다가 전호에 납작 엎드리는 것이 보였다. 뒤에서 귀청을 째며 날아온 전투기들이 무명고지와 508고지에 맹렬하게 폭격했다. 무명고지와 508고지는 우레와 같은 폭음이 진동하고 화광이 충천했다. 40여대의 탱크들이 우르릉 우르릉 무명고지와 508고지를 향해 포사격을 하며 파죽지세로 진군했다. 이때 용천 연대장은 권총을 뽑아들고 병사들에게 고함쳤다. “영웅적인 국군 장병들, 저 놈들이 개활 지대에서 매복 습격 전을 펼치느라고 고지에 병력이 얼마 없다. 곧추 고지를 향해 돌격!” 병사들은 총창을 들고 용감히 앞으로 전진했다. 전투기들이 날아지나가자 또 고음확성기에서 조선인민군 여전사의 노래 소리가 울려 퍼졌다.   태백산에 눈 내린다 총을 메어라 출진이다 눈보라는 밀림에 우나 가슴 속엔 피 끓는다 … 나가자 나가자 싸우러 나가자 용감한 기세로 어서 빨리 나가자 … 용진용진 나가며 기승스럽게 억 천만번 죽더라도 원수를 치자   …   화광이 충천하고 전운이 감도는 전쟁 분위기와는  달리 고지에서  조선인민군 여전사의 격앙된 노래 소리가  연이어 울려 퍼졌다.  귀맛좋게 노래를 부르는 여 전사에게 총부리를 돌려대고 고지로 향해 돌격해야 하는 괴뢰군 장병들의 마음은 비길 데 없었다.
95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74) 댓글:  조회:1798  추천:7  2017-07-25
           김장혁 작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                                                                               제5권                                   제22장 전우와 원수 그리고 형제 1. 첫 전투 먹장구름이 덮쳐 오더니 번개가 뱀의 혀처럼 구름층을 꿰뚫고 절벽에 내리 뻗쳐 휘감아 내동댕이쳤다. 화광이 번쩍 하며 절벽이 무너지는 상 싶었다. 우르릉 꽝꽝! 대줄기 같은 소낙비가 억수로 쏟아지었다. 하늘땅을 들었다 놓는 우레 소리와 포성이 38선을 삼켜버렸다. 산과 들에는 포성이 울리고 화광이 충천했으며 전운이 침침하게 휘몰아쳤다. 성칠은 부대를 따라 함경도에서 출발해야 했다. 그는 아침 숟가락을 놓기 바쁘게 설거지를 하는 진달래를 불렀다. 진달래는 행주치마에 손을 닦으면서 구들에 올라왔다. 성칠은 경주와 경수의 머리를 매만지며 진달래를 정색해 마주 바라보았다. “여보, 당신은 오빠와 애들을 데리고 함흥촌에 들어가오. 온 조선이 불바다로 될 마당에 안전하지 못하오.” 진달래는 철색얼굴이 돌덩이처럼 굳어져 버리었다. “이제 마음 놓고 함께 살자 하니까요…” 성칠은 도도거리는 진달래를 보고 핀잔을 주었다. “어째 유격대 중대장답지 않은 소릴 하오?” 진달래는 경수에게 옷을 입혀 주면서 뾰로통해 했다. “뭐가 두려워서 함흥 촌으로 들어가야 하는가요?” “전쟁이란 건 어떻게 될지 모르오. 미국 놈들이 인천으로 등륙했소. 우리 조선 어디나 후방이 없게 되기 쉽소. 모두 전쟁터로 될 각오를 해야 하오.” “나도 당신과 함께 부대를 따라 전쟁에 참가하고 싶어요. 미국 놈들을 몰아내지 않콘 편안한 날이 있겠어요?” 성칠은 경주에게 가방을 메워주면서 진달래를 건너다보았다. “당신 이젠 어린애 둘을 가진 40대 초반 여성이오. 두말 하지 말고 애들을 데리고 함흥 촌에 가서 동생네 집에 피신해 있소. 함흥촌의 막내조카 상순은 영월구 공안국 국장으로 됐다오.” 진달래는 놀랐다. “그래요? 상순 조카는 항일전쟁 때도 우리 유격대를 도와 숱한 쌀을 보내오더니. 당신한테서 사격과 격투를 배운 덕이 있구먼요.” 성칠은 한숨을 후- 내쉬었다. “ 애비를 닮아 욱 하는 불같은 성미 흠이지. 숱한 조카들 중 다른 놈이야. 어쨌든 아이 때부터 역빠르던 애들이 다르다니까.” 진달래는 경주와 경수를 곁눈질했다. “애들이 상순 조카를 닮았으면 좋겠어요.” “설마 경주까지 상순을 닮기야 하겠소?” 그 말에 진달래는 뾰로통해서 앵돌아졌다. “또, 또. 쪽을 놔요? 경수나 경주나 다 우리 자식이 아닌가요?” “그래, 그래. 다 우리 자식이지.” 그제야 성칠은 실수했다는 것을 알고 화제를 돌리었다. “용천 대장은 살아 있다는데 아마 남조선에 나간 거 같소. 연변에나 우리 조선에 있으면 왜 오지 않겠소?” “글쎄? 모두 다 운명이겠지요. 우리는 중국에서 나오면서 부대채로 재편성되지 못해 사처에 흩어지는 바람에 용천 대장이 찾기 힘들었겠지요.” 경주가 경수를 데리고 마당에 나가 퐁퐁 뛰며 뛰놀았다. 진달래는 애들을 희귀해 내다보면서 말했다. “이번에 전쟁 나서 잘 됐어요. 38선이 무너지면 혹시 경주 아빠를 만나겠는지 알아요?” “그래 찾으면 용천 대장한테 가겠소?” 성난 성칠의 얼굴을 보며 진달래는 혀를 홀랑 내밀었다. 그녀는 일어나 성칠을 끌어안으면서 몸을 흔들거리었다. “근심 말아요. 내가 어떻게 얻은 성칠 연대장인데 은녀한테 빼앗기자고?” “어린 애같이 놀지 마오. 쯧쯧. 명천에 가서 은녀와 경수도 데리고 연변에 들어가오.” 성칠은 권총집을 바로 잡더니 바깥으로 훌 나갔다. “알았어요. 한 고향 여동생을 떼놓을 수 있어요?” 진달래는 연변으로 들어갈 짐을 챙기느라고 궤짝을 번지고 난장판을 벌리었다. 경주는 입술을 오므리더니 어머니한테 캐고 들었다. “어머니, 아버지는 어데 갑니까?” “몰라도 돼.” “왜 전쟁 하면 경주 아버지를 만나겠는지 했어?” 진달래는 놀라 궤짝을 뒤지던 손을 멈추었다. “경주야, 너하고 경수 아버진 우리 집에 있어. 이제 전쟁 나면 언제 만나겠는가는 말이야.” “아니야. 내 이젠 여러 번 들었어. 경수 아버지, 경주 아버지 하는 말을.” 진달래는 경주를 안아주면서 타일렀다. “얘가 정말, 이후엔 다시 그런 말 하면 못써. 알아?” 경주는 입이 뾰로통해 억지로 머리를 가늘게 까딱이었다. 훈련장에는 벌써 전신 무장한 장병들이 집합해 대열을 짓느라고 구령소리 요란했다. 진달래는 보따리를 이더니 경수를 업고 경주의 손을 잡아끌고 훈련장으로 나갔다. 성칠은 다가와 진달래의 잔등에 업힌 경수의 머리를 쓰다듬더니 볼에 뽀뽀를 해주었다. (손바닥과 손등이 다르다더니 제 새끼만 뽀뽀해?) 진달래의 그런 속마음을 읽은 듯이 성칠은 진달래의 손을 쥔 경주의 볼을 매만지었다. “경주야, 엄마 함께 연변에 가 잘 있어라.” 경주는 머리를 끄덕였다. “예. 아빠.” “그래, 경주와 경수, 엄마 말 잘 들어야 해.” “예.” 애들은 머리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성칠은 진달래의 손을 잡아주었다. “애들을 데리고 어떻게 고생하겠소? 상순이 국장을 하는 영월구 공안국에 가오.” “알았어요. 함흥촌에 가든지 하겠어요. 우리 근심하지 말고 몸 조심해요.” “양, 전쟁에서 산전수전 다 겪었는데 설마 무슨 일이 있겠소? 근심하지 말고 애들이나 잘 키우오. 전쟁이 언제 끝나겠는지 그때 고향에 데리러 갈게.” “전쟁터에서 미제 공중 날강도를 주의하세요.” 성칠은 머리를 끄덕이었다. 진달래가 철색얼굴을 찡그리며 뽀로통해 중얼거렸다. "항일전쟁이 끝난지 이제 5년 밖에 안되는데 왜 또 전쟁 한대요?" 성칠은 자못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 장군의 영명한 령도아래 정의전쟁으로 미제침략자를 조선반도에서 몰아내야 하오. 미제 침략자 괴수 맥아더는 인천에 상륙한 후 무슨 서울에서 아침을 먹고 평양에서 점심을 먹고 압록강에서 저녁을 먹겠다고 했소. 미국 놈들의 침략야심이 만천하에 드러났소.  미제는 남조선을 식민지 통치를 하면서도 모자라 우리 조선인민민주주의공화국- 사회주의 조국을 먹어치우고 나아가서 사회주의 대후방인 중국을 치려고 미쳐날뛰고 있소. 우린 미체 침략자들의 콧대를 꺾어놔야 하오. 이 기회에 미제 승냥이들의 철발굽 밑에서 신임하는 남조선을 해방해야 하오." 진달래는 그제야 머리를 끄덕였다.  "미국 놈들이 염치없어요. 태평양 건너 놈들, 제놈들이 뭐간디 남조선을 통치하고 우리 조선을 먹어치려고 해요?" 이때 칠백이 걸어와 진달래의 손을 잡은 경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경주야, 삼촌이 올 때까지 잘 있어라.” “예.” 칠백은 경주를 와락 끌어안고 얼굴을 맛 비비었다. “아야, 삼촌, 수염이 꺼슬꺼슬 해. 아프다.” 경주는 칠백이 얼굴을 두 손으로 떠밀었다. 칠백은 경주를 내려놓고 진달래의 잔등에 업힌 경수의 볼을 매만지었다. “아주머니, 어떻게 고생하겠소. 혹시 전투마당에서 용천 형님을 찾을 수도…” 칠백은 성칠을 흘끔 보며 뒤 말을 삼켜버렸다. 진달래는 성칠과 칠백을 번갈아 보더니 역으로 나가면서 애처로운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도라지 도라지 도라지 심심산골에 백도라지 한두 뿌리만 캐어도 스리 살살 애간장을 다 녹인다.   진달래는 경수를 업고 경주의 손을 잡고 보꾸러미를 이고 비틀비틀 업동역으로 걸어갔다. 성칠은 진달래의 처량한 뒷모습을 보고 코마루가 시큼해났다. 저쪽에 은녀가 애를 데리고 오도카니 서서 진달래를 기다리는 모습이 눈 시리게 보이었다.  이때 장병들은 대렬을 지어서서 "김일성 장군의 노래"를 우렁차게 불르고 있었다.                          장백산 줄기줄기 피어린 자욱            압록강 굽이굽이 피어린 자욱            오늘도 자유조선 꽃다발 우에            력력히 비춰주는 거룩한 자욱            아- 그 이름도 빛나는 우리의 장군            아 - 그 이름도 빛나는 김일성 장군 노래 끝나자 칠백 대대장이 성칠이네 쪽으로 걸어왔다. “김 연대장, 출발준비가 다 됐습니다.” 성칠은 장병들의 대오를 돌아보았다. "동지들, 우린 위대한 김일성 장군의 영명한 령도아래 일제 놈들을 이 땅에서 몰아내고 이 땅에 우리 위대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건설하였습니다. 가난한 인민들은 진정 나라의 주인이 돼 사회주의 조국에서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미제 전쟁미치광이들은 우리 사회주의 조국을 침략해 우리 나라 인민들의 안정하고 행복한 생활을 빼앗아가려고 미쳐 날뛰고 있습니다. 우린  위대한 령수 김일성 장군의 령도아래 미제 침략자들과 이승만 괴뢰군을 꼭 이 땅에서 몰아내야 합니다. 우리 정의의 전쟁은 꼭 승리할 것입니다. 동지들 신심이 있습니까?“ 전체 장병들은 총을 쳐들고 우레처럼 고함쳤다. "있습니다!" 성칠 연대장은 손을 남쪽으로 홱 휘둘렀다. "출발!” 전투대오는 남으로 진군하였다.  그들의 뒤로 서늘한 가을바람이 불어왔다. 동부전선 상급부대 박송천 수장의 명령에 따라 성칠이 거느린 연대는 산을 넘고 령을 넘어 남쪽으로 진군했다. 동부전선 진군 길에서 조선인민군 부상병들을 실은 자동차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북으로 들어오는 것을 자주 목격할 수 있었다. 그들은 낮에는 미군 전투기가 두려워 행군하지 못하고 수림 속에 숨어 있다가도 밤이면 령 길을 타고 행군했다. 전선과 가까워질수록 포성이 더 요란했다. 어두운 밤 하늘에 드문드문 뻘건 화광이 번쩍이었다. 성칠이 거느린 연대는 밤중 어둠을 타서 자그마한 강을 사이에 두고 깎아지른 산봉우리에 포진해 한국군과 대치해했다. 연대지휘부는 산봉오리 깎아지른 절벽에 쑥 들어간 홈채기를 의지해 세워졌다.  성칠은 망원경을 들고 엄페호에서 희미한 달빛을 빌어 맞은켠 산에 웅크리고 있는 적진을 세심히 살폈다.  싸늘한 별이 바르르 떨고 눈썹달이 가을 밤바람에 포화에 그은 구름과 함께 동으로 밀려가면서 쓸쓸하게 산마루를 비추고 있었다. 전운에 그은 달빛이 사나운 들말 같은 먹구름을 몰고 달려지나갔다. 대지는 공포스러운 달빛에 몸살을 앓으며 흐느끼고 있었다. 쿵쿵- 쿵쿵 씩- 쾅! 꽈르릉 꽝! 삽시에 포탄이 날아와 산마루에서 연달아 폭발했다. 바위돌이 부서져 매섭게 죽음의 노래를 부르며 사처에 튕겨났다. “엎드렷!” 성칠은 연대 지휘부로 포탄이 날아오는 소리를 듣고 고함쳤다. 칠백 대대장과 성칠 연대장은 장막 밖에 달려 나가 나무 밑에 엎드렸다. 포탄 파편에 나무 허리가 뭉텅 끊어져 그들의 잔등 우에 마구 떨어졌다. “제길! 저 놈들이 우리 지휘부를 정찰한 듯이 포격한단 말이야!” 성칠과 칠백이 두덜거리며 금방 허리를 펴며 머리를 들었을 때다. “보고!” 통신원이 기어와 고함쳤다. “적들이 돌격해 오고 있습니다.” 성칠이 먹칠한듯이 깜깜한 산 아래를 아무리 내려다보아도 대체 한국군 병력이 얼마나 습격해 오는지 보이지 않았다. 다만 탱크의 엔진소리와 무한궤도가 접히는 요란한 소리가 산 아래에서 들릴 뿐이었다. “괴뢰군은 야밤전투를 하기 싫어한다더니. 웬 일이야? 야밤전투와 유격전쟁에 이골이 튼 우리 영용한 조선인민군과 감히 야밤에 싸워 볼 예산인가?” 칠백은 두덜거리었다. “우리 발을 붙이기 전에 진공하는 개수작이야.” “흥, 어림도 없어!” 성칠은 코웃음 치며 뒤를 돌아보았다. “통신원!” “옛!” “임호 중대장을 불러오라!” 이윽고 로지심 같은 임호가 달려왔다. “임 중대장은 폭파소조를 무어 적군의 탱크를 까부시라!” “옛!” 성칠은 로흑산에서 일본 보루를 까부신 전공을 세운 임호를 관건적인 전투시각에 또 내세웠다. 임호가 떠나가자 성칠은 한숨을 후 내쉬며 칠백을 돌아보았다. “1 대대장은 저 산 아래로 우회해 내려가 저 놈들의 뒤통수를 쳐라!” “옛!” 칠백 대대장은 숱한 지휘관들 앞이라 엄숙하게 군례를 척 붙이고 즉시 자기 대대로 달려갔다. “최동욱과 김인삼 대대장은 우리를 습격하는 적들을 막아라!” “옛!” 대대장들이 떠나가자 성칠은 끊어진 나무 밑에 엎드려 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미군이 코밑에까지 기어 올라왔다.희미한 달빛아래 철갑모와 총칼이 번뜩이었다. 땅! 땅! 미군이 쏜 총알이 쓰러진 나무에 박히며 나무껍질이 마구 튕기었다. “사격!” 성칠은 권총을 산 아래로 휘둘렀다. 따르륵 따르륵! 기관총 소리와 함께 한국군 병사들이 무리로 쓰러졌다. 꽈르릉! 요란한 폭파굉음과 함께 화광이 충천했다. 삼단같이 치솟는 불길 속에서 탱크 위 뚜껑이 열렸다. 온 몸에 불이 달린 몇몇 병사들이 뛰어 내려 때굴때굴 뒹굴었다. 허나 그들의 몸에 달린 불이 꺼질 줄 몰랐다. 미군은 악을 쓰고 산 위에 사격하며 덮쳐들었다. 성칠의 전사들도 산우에서 비명을 지르며 무리로 쓰러졌다. 이때 산우로 덮쳐오던 미군 장병들의 뒤에서 사격소리가 요란히 울렸다. “칠백이네 해냈군!” 성칠은 주먹으로 땅바닥을 꽝 치며 벌떡 일어났다. 땅! 난데없는 총알이 날아와 성칠의 왼팔을 꿰뚫고 나갔다. “아이쿠!” 성칠은 비명을 지르면서 몸을 한쪽으로 휘뚱거리더니 푹 꼬꾸라졌다. “김 연대장!” 호위병이 급히 성칠을 끌어안았다. 이때 미군 병사가 바위 뒤에서 머리를 내밀더니 또 사격했다. 땅! 성칠의 옆에 섰던 통신원이 가슴을 움켜잡고 쓰러졌다. 땅! 호위병이 쏜 총에 미군 병사의 머리가 박살났다. 뻘건 피가 바위에 마구 튕기었다. “군의! 김 연대장이 부상당했소!” 이윽고 군의가 달려왔다. 성칠의 왼팔은 관통상을 받아 군복에 뻘건 피가 질벅했다. 군의는 호위병이 비추는 전지 불을 빌어 성칠의 왼쪽팔의 상처를 붕대로 감았다. 드디어 나뭇가지를 꺾어 팔꿈치로부터 손목 밑에까지 대고 붕대로 동이고 어깨 넘어 붕대로 처매주었다. “철퇴!” 산 아래에서 소리치는 확성기소리가 산정에까지 울려 왔다. 미군은 숱한 시체를 남기고 산 아래로 퇴각했다. 조선인민군도 산우에 숱한 시체를 남기었다. 그들은 군의 자존심을 걸고 각기 자기 진지에서 짧은 삽으로 전호를 파고 다음 전투를 초조히 대기했다. 포화에 그은 구름이 걷히며 잠시나마 눈썹달이 대지를 내리 비추었다. 산비탈 여기 저기에서 포탄과 수류탄 파편에 잘려나간 나무 밑 둥에 불이 활활 타 번지고 있었다. 조선인민군 장병들은 먼 산길을 행군해 오면서 퍽 곤했다. 총소리가 멎고 엎드릴만한 전호를 파자마자 전호 안에 쪼크리고 앉아 코를 드렁드렁 고는 병사들도 있었다. 성칠도 임시 연대 지휘부를 절벽 밑에 판 전호로 옮긴 후 왼팔의 통증을 느끼며 눈을 스르르 감았다. (대체 적들이 얼마나 되는지 알아야 하는데.) 그는 해가 뜨기를 기다릴 수 없었다. “통신원!” 옆에서 호위병 장꼬마가 알렸다. “통신원은 희생됐습니다.” “아, 그랬지. 장 꼬마, 정찰소대 바위돌 소대장을 불러오오.” “옛!” 이윽고 바위돌 소대장이 뛰어왔다. “보고!” “석 소대장, 정찰병 둘을 데리고 가서 혀를 잡아 오오.” 씩- 쿵! 포탄 폭파 굉음과 함께 바위돌은 두 정찰병을 데리고 전호를 뛰어나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적들이 또 진공합니다.” “전투 준비!” 분명 이번에는 한국군이 진공해왔다. 그들은 미군과 함께 겨끔내기로 진공하면서 조선인민군이 쉬지 못하게 피로전술을 쓰고 있었다. 이때 하늘에 조명탄이 날아올랐다. 산마루와 산비탈을 대낮같이 비추었다. 남쪽 하늘에서 비행기 몇 대까지 쌩- 쌩- 날아왔다. 드디어 산마루에 폭탄이 눈송이처럼 떨어졌다. 조선인민군들은 악이 나 경기관총으로 전투기를 갈겼다. 전투기들은 전투편대를 지어 저공비행을 하지 못하고 일정한 고도로 골짜기를 따라 날아오다가도 기수를 쳐들면서 소사하고는 꽁무니를 뺐다. 전투기들은 겨끔내기로 20여분 동안이나 소사하고 소이탄을 내리 떨어뜨리더니 어디론가 날아갔다. 고지는 불바다로 돼 버렸다. 사처에서 인민군 장병들의 주검이 나뒹굴고 여기저기에서 비명소리가 들리었다. 괴뢰군은 미군 탱크들이 포신을 고지에 돌려 대고 맹사격을 하자 진공을 개시했다. 포성이 하늘땅을 진동치며 화광이 번쩍이는 어둠 속에서 산 아래로부터 진공해 올라오는 괴뢰군의 아우성 소리가 어지럽게 들렸다. 괴뢰군들이 철갑모를 번뜩이며 탱크 뒤에 딱 붙어 고함치며 고지를 진공해왔다. "빨갱이들을 모조리 소멸하라!”  이번에는 임호 중대장도 더는 탱크를 폭파할 수 없었다. 수류탄이 다 떨어졌던 것이다. 탱크는 맹포격을 가하면서 밋밋한 쪽의 산비탈을 타고 무서운 엔진소리를 내면서 고지를 향해 돌진해 왔다. 성칠은 코 밑에까지 기어오는 괴뢰군을 보고 “철퇴!” 하고 고함치더니 머리를 돌려 경호원 장 꼬마에게 명령했다. “각 대대에 철퇴 명령을 전하오! 빨리!” “옛!” 전 연대는 임호 중대장이 한 개 중대 병력으로 엄호하고 철퇴하기 시작했다. 성칠 연대장이 영솔한 장병들은 하루 밤도 뻗치지 못하고 무명고지를 내주고 철퇴하고 말았다. 괴뢰군은 무명고지를 점령하고 인민군 장병들의 시체를 전호에서 내 버리고 전호를 깊이 파서 정비한 후 인차 전투태세를 갖추었다. 무명고지에는 핏빛으로 그은 화염이 하늘을 찔렀다. 이따금 눈먼 포탄이 날아왔다. 요란한 굉음과 함께 돌멩이와 시체 쪼각이 자주빛 화염과 함께 하늘로 솟아올랐다가 사처로 흩어져 떨어졌다.   2. 혀를 생포 숱한 희생을 내고 무명고지를 빼앗긴 성칠은 5리나 철퇴해 진을 치고 복수의 칼을 갈았다. 성칠은 풍막 안에서 왔다 갔다 하며 이를 뻑뻑 갈았다. 김칠백 대대장은 옷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며 두덜거렸다. “항일전쟁 때와는 달리 그 놈의 전투기가 문제요. 고지에 기어 올라오는 놈들과 싸우자 하면 그 놈의 전투기가 날아와 우리 꼭뒤를 누른단 말이요.” 성칠은 대대장들에게 귀띔했다. “이번 전쟁은 세계에서 제일 강대하느라고 우쭐렁거리는 미군과 싸우는 거요. 우린  지상의 적들과 공중을 동시에 대적해야 하오.  미군 인천등륙 후 적군의 사기는 전례없이 높소. 이제 바위돌 소대장이 혀를 잡아 오면 적정을 알아낸 후 새 자전계획을 세우기오. 기어이 무명고지를 빼앗아 내야지. 미제와 괴뢰군이 절대 우리 잔등을 밟고 우리 고향 명천에까지 쳐들어가게 할 순 없어. 이제 오래지 않아 중국인민지원군까지 우리를 지원해 용맹히 싸우고 있소. 승리는 우리 것이오.” 최동욱 대대장이 근육이 울뚝불뚝한 팔을 휘둘렀다. “무명고지에서 십리도 더 들어가지 못하게 해야지.” 바깥에서는 가을비가 구질구질 내렸다. 허연 번개가 귀신처럼 풍막 안에까지 날아 들어왔다가 나가면서 천지가 맞붙을 듯이 우레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대살 같은 소낙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저 멀리 화광이 충천하던 무명고지의 불이 소낙비에 꺼졌다. 하지만 무시무시한 공포의 어둠이 더 두껍게 깔리었다. 바위돌은 정찰병 조철호와 신기출을 데리고 허리를 구부정하고 어둠의 장막을 헤치며 살금살금 한국군이 점령한 무명고지로 다가갔다. 장대 같은 소낙비가 쏟아지는 소리는 그들의 발자국 소리와 나무숲을 헤치는 소리를 감싸 감춰주었다. 씩- 씩- 하늘에 조명탄이 날아오르더니 소낙비가 억수로 쏟아지는 무명고지를 대낮같이 환하게 비추었다. 절벽 아래 뭉텅뭉텅 끊어진 나무들과 여기 저기 쳐놓은 장막 그리고 돌각 담 같은 전호도 드문드문 윤곽을 드러냈다. 여기저기 보초를 서고 있는 철갑모들이 조명등 불빛에 번뜩거리었다. 조명등이 꺼지는 순간 엎드려 기던 바위돌 네는 벌떡 일어나 허리를 굽히고 재빨리 무명고지로 살금살금 접근했다. 또 조명등이 하늘로 높이 날아올랐다. 산마루와 골짜기 그리고 산비탈에 게딱지처럼 들어앉은 장막들이 재차 잔등을 드러냈다. 바위돌은 조철호와 신기출에게 손을 홱 휘둘렀다. 그들은 일제히 질척질척한 산비탈에 납작 엎드렸다. 초가을 소낙비가 쏟아져 어디가 어딘지 분간하기 어려운 밤이지만 조명등을 빌어 무명고지 중턱에 반자동보총을 쥔 보초병이 왔다 갔다 하고 전호에 친 숱한 장막이 지척에 보이었다. 산마루 절벽 아래 연대 지휘부로 쓰던 자리에 특별히 철조망을 촘촘히 늘인 것을 보아 괴뢰군 지휘부가 설치돼 있는 것 같았다. 소낙비가 억수로 쏟아졌지만 군용비옷을 입었기에 괜찮았다. 조명등이 비추어도 군용외투가 검회색이어서 쉽게 발견되지 않았다. 황차 공교롭게도 괴뢰군의 풍막과 바위돌 네가 입은 군용비옷의 색깔이 비슷했다. 바위돌은 소낙비를 맞으면서 어떻게 하면 괴뢰군 지휘부로 접근해 장교를 잡아 갈 것인가를 궁리했다. 그는 조철호와 신기철을 툭툭 치더니 귓속말을 했다. “이제 조명등이 꺼지면 먼저 보초병을 해치우고 지휘부로 잠입해 장교를 잡기요.” 철호와 기철은 머리를 끄덕였다. 이때 조명등이 꺼졌다. 바위돌이 팔을 홱 휘두르자 조철호가 보초병이 왔다 갔다 하는 밑에까지 기어갔다. 보초병이 소나무 밑으로 왔다가 돌아설 때다. 철호가 벌떡 일어나 보초병의 목을 끌어안고 비수를 번쩍 휘둘렀다. 뒤이어 철호는 보초병의 철갑모를 벗겨 쓰고 반자동보총을 주어들고 왔다 갔다 하면서 보초를 서는 시늉을 했다. 바위돌과 신기철은 폭탄 파편에 허리가 뭉텅뭉텅 끊어진 소나무 사이로 허리를 구부정하고 연대 지휘소로 보이는 절벽 밑의 장막으로 다가갔다. 갑자기 장막 안에서 장교가 우산을 들고 불쑥 나왔다. 바위돌과 신기철은 끊어진 소나무 뒤에 몸을 살짝 숨기었다. 장교는 소낙비 쏟아지는 사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자동보총을 들고 왔다 갔다 하는 조철호를 보고 보초병으로 알고 시름을 놓았는지 절벽 쪽에 돌아서더니 괴춤을 까고 오줌을 내싸는 것이었다. 바위돌은 신기철을 돌아보며 머리를 앞으로 휘저었다. 신기철은 원 작전대로 슬금슬금 장막으로 다가가 망을 보았다. 동시에 바위돌은 비수를 뽑아들고 그 장교의 뒤에 살금살금 발끝걸음으로 다가갔다. 장교는 소낙비소리에 동정을 알지도 못하고 오줌을 누면서 추운지 우들우들 떨어댔다. 철호가 불시에 손으로 입을 틀어막으면서 시퍼런 비수를 목에 댔다. “꼼짝 말라! 까딱 하면 죽인다!” “엇! 어, 어.” 장교는 깜짝 놀라 우산을 떨어뜨리었다. 바위돌은 장교의 허리춤에서 권총을 쑥 뽑아냈다. 장교는 어깨를 툭 떨어뜨리더니 바지춤을 춰 입었다. “우릴 따라 순순히 가자!” 이때 불시에 조명등이 하늘 공중에 씩씩 솟아오르더니 대낮같이 환히 비추었다. 그제야 침착성을 찾은 장교는 손을 천천히 들면서 몸을 돌리더니 비수를 자기 목에 댄 바위돌을 쳐다보았다. 그는 억수로 쏟아지는 대줄기 같은 빗발 속에 총을 들고 이쪽을 흘끔거리는 조철호를 힐끔 곁눈질했다. (저 놈이 보초를 어떻게 서는고?) “에헴!” 장교는 보초 서는 철호가 자기 편 보초병인가고 들으라고 마른기침을 했다. “잔꾀를 부리지 마라! 걸어!” 바위돌은 장교의 잔등을 떠밀었다. 장교는 발에 뿌리가 내린 듯이 걷지 않으려고 뻗치었다. 그때 갑자기 이동 순라 병들이 억수로 쏟아지는 소낙비를 무릅쓰고 전호 속에서 척척 걸어 나와 절벽 밑으로 다가왔다. “인민군이야!” 장교가 바위돌을 뒤발로 차며 고함쳤다. 보초병들은 총을 벗어들고 이쪽에 겨누었다. 바위돌은 손으로 장교의 목덜미를 탁 쳤다. 꼬꾸라지는 장교를 제꺽 끌어안고 전호 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땅! 땅! 땅! 한국군 순라 병들이 쏜 총알이 전호 벽에 박히면서 흙꼬치 튕기었다. 이때 조철호가 순라 병들에게 한 배짐 갈기었다. 장막 안에서 괴뢰군 둘이 뛰어 나오다가 쓰러졌다. 그 틈을 타 바위돌은 장교를 둘러메고 전호 속에서 뛰쳐나갔다. 뒤이어 괴뢰군 장교를 끌어안고 산비탈 아래로 데굴데굴 굴러 내려갔다. 산기슭에 내려가자 그는 벌떡 일어나 장교를 둘러메고 산 아래로 냅다 뛰었다. 뒤에서 조철호와 신기철은 무리로 덮쳐드는 한국군 장병들에게 맹사격을 가하면서 엄호했다. 따르륵 따르륵 기관총 소리가 자지러지게 울렸다. “앗!” 신기철이 가슴을 붙안고 몸을 한쪽으로 틀더니 푹 꼬꾸라졌다. “기철이! 기철이!” 조철호는 쓰러진 기철을 흔들었다. 기철은 피가 질벅한 가슴을 붙안은 채 철호를 가라고 손짓했다. “빨, 빨리 가오. 난 글, 글렀소.” 허나 조철호는 괴뢰군에게 사격하면서 기철을 끌어안아 일으켜 업으려고 했다. “다 죽어! 어서 가, 가!” 기철은 안간힘을 다해 철호를 밀어냈다. 그는 간신히 몸 밑에서 돌격총을  빼내 괴뢰군에게 사격했다. 픽! 총소리와 함께 기철은 머리를 툭 떨어뜨렸다. 조철호가 머리를 만져보니 비참하게도 두개골이 반쪽이나 날아나 버린 채 피 범벅이 됐던 것이다. “기철이!” 조철호는 이를 악물고 소낙비 속에서 악착스럽게 덮쳐오는 괴뢰군에게 사격하면서 퇴각했다. 이때 바위돌이 개선하는 신호탄을 하늘 공중에 쏘았다. 쿵! 쿵! 쿵! 포탄이 씽씽 날아와 무명고지에 떨어졌다. 꽝! 꽝! 꽈르릉! 소나무들이 뭉텅뭉텅 날아나고 주먹만큼 한 돌멩이들이 소낙비 속에 사처로 날아났다. 숱한 한국군 장병들이 포탄 파편에 맞아 쓰러졌다. 괴뢰군은 인민군의 맹렬한 포화 속에 황급히 철퇴하여 전호 속에 뛰어 들어갔다. 그제야 조철호는 허리를 구부정하고 쏜살같이 달려 바위돌을 따라잡았다. “소대장! 내 업읍시다.” 바위돌은 장교를 내리워 놓았다. 철호가 업으려는데 장교가 정신을 차리고 장대기처럼 꿋꿋이 섰다. “이 놈! 떼질 쓰지 말고 고분고분 말 들어! 우리 인민군은 포로를 우대한다!” “걸어!” 장교는 주위를 둘러보아도 동료들이 보이지도 않았다. 그는 절벽 밑 장막에서 멀리 떨어진 산골짜기에 들어선 것을 보고 머리를 툭 떨어뜨렸다. 그제야 그는 순순히 바위돌과 조철호의 중간에 서서 따라 걷기 시작했다. “기철은?” “희생됐습니다. 다 이 놈 탓입니다.” 철호는 자동보총으로 장교의 엉덩이를 툭 쳤다. “포로를 이렇게 우대해?!” “개소릴 작작 쳐!” 그들의 뒤에서는 아직도 포탄이 폭파굉음이 요란하고 화광이 충천했다. 바위돌과 조철호는 장교를 압송해 두 시간도 안 돼 연대 지휘소 풍막 안으로 돌아왔다. 성칠 연대장은 뒤에 기철이 안 보이자 불길한 느낌을 받았다. “기철 동무는?” 바위돌은 머리를 푹 떨어뜨렸다. “장렬하게 희생됐습니다.” 조철호는 장교를 발길로 차면서 통곡했다. “다 이 놈 탓입니다. 으흐흑.” 성칠 연대장은 남포등불빛을 빌어 장교를 쏘아보다가 걸상을 괴뢰군 포로에게 주었다. “앉아. 지금부터 내가 묻는 말을 솔직히 대답해!” 허나 괴뢰군 장교는 앉으려고 하지 않았다. “난 당당한 괴뢰군 대대장이다. 빨갱이 놈들, 더 능욕하지 말고 어서 죽여라!” 성칠은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우린 포로를 우대하네. 노실이 탄백하면 절대 죽이지 않아.” 그래도 장교는 머리를 홰홰 흔들었다. “네 놈은 이름이 뭐냐?” “이병수야.” “이병수?” 이상하게 성칠은 되물었다. “맞아. 난 한국 땅을 밟고 하늘을 떠인 사내대장부여. 절대 이름 안 속여.” 턱을 쳐들고 풍막천정을 쳐다보는 이병수를 보고 성칠은 코웃음을 쳤다. “네 고향은 어디냐?” “그 따위 물어 뭘 해?”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해.”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 때 일본 수군을 족치던 한산 섬이야. 네 놈들은 아무리 발악해도 내 고향 한산섬까지 점령하진 못해. 아니, 한산 섬은커녕 서천군 한산면도 넘어가지 못해. 우리 슬기로운 한국군 백호부대는 미군과 함께 압록강에까지 쳐들어 갈 거야. 백골부대 장병들은 고향 함경도까지 쳐들어갈 거야. 이 놈들아, 내 입에서 한마디도 들으려니 말고 어서 한방에 죽여!” 성칠은 책상을 꽝 치며 고함쳤다. “주둥이를 다물지 못해! 여긴 담판석이 아니야. 우리 영용무쌍한 조선인민군은 부산을 치고 한삼 섬과 제주도까지 쳐나가 해방할 수 있다!” 이병수는 코웃음을 쳤다. 성칠은 장 꼬마와 바위돌을 돌아보더니 몽땅 나가라고 분부했다. 이젠 성칠은 이병수와 단둘이 풍막 안에 남았다. “고향은 한산, 이름은 뭐 이병수라 했느냐?” 성칠의 부드러워진 어조에 이병수는 이상한 눈길로 성칠을 쳐다보았다. “왜?” “무슨 이씨인가?” “불시에 남의 족보를 따져 뭐해?” “글쎄 알아볼 게 있어.” “난 한산 이씨야. 그 집도 이 씨인가? 이조 500년을 통치한 그 왕족 전주 이 씨인가?” “한산 이씨라?” 성칠은 중얼거리면서 이병수의 두부모 같이 네모진 얼굴과 부리부리한 눈을 훑어보았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스적스적 이병수한테 다가오더니 나직이 물었다. “혹시 네 고향 한산에서 이성군이나 이명호라는 사람을 아는가? 그 분들도 한산 이 씨라고 했는데.” “뭐라?” 이병수도 놀란 눈길로 성칠을 쳐다보았다. “당신 한산 이 씨지? 당신 누구여?” “아니야. 난 김 씨네.” “뭐라? 그럼 자넨 누구야?” “묻는 말이나 해라. 한산 이씨 이성군과 이명호라는 사람 아는가?” “몰라. 그 사람 찾아 뭘 해?” “네가 한 고향이라니 그래. 외삼촌은 대체 어디로 갔을까? 한산 섬까지 우리 군이 쳐들어간 것도 아닌데. 어디로 갔을까?” 성칠이 뒤지개를 짚고 거닐면서 나직이 중얼거리는 소리에 이병수도 일어났다. “금방 뭐라고 했어? 외삼촌을 찾는다고 했어?” 성칠은 머리를 들어 이병수를 바라보았다. “그래. 내 외삼촌을 20여 년 전에 보고 일본 놈들에게 쫓기다나니 다신 보지 못했네. 우리 군이 지난 여름 기세로 낙동강을 건넜더라면 한산 섬에까지 나가 외삼촌을 찾아봤겠는데 말이야.” “외삼촌이란 분이 이성군인가 베?” “그래, 내 외삼촌이야. 우리 엄마는 생전에 오라비와 조카 명호 그리고 손자 이병수와 이영수를 얼마나 외웠는지 모르네. 3.8선에 가로 막혀 찾지 못했어. 3.8선이 무너진 마당에 찾을 거 같아 그러는데. 난 자네가 이병수라고 하니 혹시나 해 그러네. 후- 한산에 계시지 않는다니 별 수 없군 그려.” 이병수는 그 말을 들으면서 점점 다가오니 불시에 무릎을 꿇고 풍덩 물앉았다. “이보시오. 이성군은 울 할아버지고 이명호는 아버지고요 이병수는 내라고요.” “아니, 네가 정말 이병수냐?” 성칠도 쭈그리고 앉으며 이병수를 와락 끌어안았다. “삼촌! 흑, 흑.” 병수도 성칠의 넓적한 잔등을 끌어안았다. 총을 맞대고 싸우던 적이라는 높고 두꺼운 장벽은 와그르르 무너지고 그 페허를 넘어 혈육의 피가 서로 합류했다. 장 꼬마는 풍막 문 귀를 슬며시 들고 그 장면을 보고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성칠도 눈치를 챘지만 그치지 않았다. “너를 이런 전쟁터에서 만날 줄은 정말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한참 후 성칠은 두 손으로 병수의 양어깨를 쥐고 너부죽한 얼굴을 들여다보며 장탄식했다. “엄마가 널 봤더라면 얼마나 반가와 했겠니?” 병수도 친 혈육의 정이 온 몸에 흘러넘쳐나는 감을 어찌할 수 없었다. “삼촌, 할머님의 막내손자 상순이라고 있었죠?” “그래, 그 앤 지금 간도 영월구 공안국 국장으로 됐어.” “오- 잘 됐구나. 승급하면 작은 삼촌이랑 잘 모시겠제이. 아들이 국장이면 작은 삼촌을 모셔다 호강시키겠제라. 지금쯤 농사도 짓지 않고 시가지에 모셔갔제이?” “넌 몰라. 우리 공산주의자들은 대공무사하다. 직권을 빌어 농사꾼을 시내 공호로 고칠 수 없다. 상순은 아버지를 농촌에 모시고 있다.” 병수는 삼촌을 따라 일어나면서 도리머리 질 했다. “쯧쯧, 아버지도 온전히 모시지 못하면서 국장을 해 뭐 해요?” 성칠은 병수와 나란히 앉아 어깨를 끌어안고 나직이 물었다. “그래 외삼촌은 잘 계시냐?” 병수는 울먹울먹해 하며 목구멍에 뭣이 걸린 듯이 겨우 나오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할아버지는 돌아가셨어요. 할아버지는 20여 년 전에 아버지와 나를 데리고 두 번째로 명천에 갔다가 할머니와 삼촌들이 간도에 가셨다는 말을 듣고 무너진 집터를 보고 대성통곡하였어요. 할아버진 내내 할머니캉 삼촌들을 외우셨어요. 돌아가시기 전에도 우리캉 언젠가는 38선이 무너지면 꼭 간도에 가서 할머니를 찾아보시라고 하셨어요. 흐흑, 흑흑흑.” 성칠도 코마루가 시큼해 머리를 툭 떨어뜨렸다. “그래 아버지는 무사히 계시냐?” “예. 아버진 항상 성칠 삼촌이 어떻게나 힘이 센지 곰도 부자간이 맨 주먹으로 때려잡은 적도 있다고 했어요. 아버진 또 고모부가 목수재간이 대단하고 힘도 대단해 명천바닥에 천하장사시었다고 하던데요. 할아버진 무고하셔요?” “응, 그래. 지금 마을 당 지부 서기에 촌장 일을 한다.” “그럼 할아버지도 빨갱이예요?” “그렇게 말하지 말라. 울 아버진 함흥촌의 촌장이자 서기야.” “빨갱이 해 뭘 해요? 부자를 털고 죽이고 빼앗아 나눠 가진다던데요. 빨갱이들은 사람을 죽이는 일을 밥 먹듯 한다던데요.” 성칠은 성난 눈길로 병수를 바라보았다. “넌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우린 가난한 사람들을 혹독하게 억압하고 착취하는 지주들을 청산해 가난한 사람들에게 집과 땅을 나눠 주었다. 이 세상에서 압박과 착취가 없이 모든 사람이 다 자기 밭에서 일하고 똑 같이 나눠 먹으면서 모두 행복하게 사는 새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 우리의 이상이다.” “아, 그래요. 참 좋은 일하누먼. 우리 한국에도 남로당이 거느린 빨찌산들이 그런 세상 만든다고 지리산에서 싸운다던데요. 되겠어요?” 병수는 머리를 홰홰 내저었다. “너도 남조선에 있는 조선인민군이 영도하는 빨찌산에 들어라.” “글잖아도 동생 영수가 남로당인가 뭔가 하는데 들어서 지금 지리산 일대에서 싸우고 있제이. 이게 무슨 꼴이지? 형제간에. 난 빨갱이들캉, 아니, 공산군과 싸우는데 그 자식은 빨갱이들캉, 아니, 유격대에 들어 우리 한국 국군 뒤통수를 치고 있잖노?” 성칠은 병수의 귀에 말이 잘 들어가지 않을 걸 알고 그쯤하고 화제를 돌렸다. “넌 그래 어떻게 돼 입대했냐? 아버지를 도와 물고기를 잡지 않고.” 병수는 한숨을 후 내쉬었다. “물고기 잡이도 어선이 있어야 하죠. 파도가 어찌나 센지 쪽배를 가지고 무슨 고기를 잡아요? 그런데다가 전쟁이 일어나 인민군이 부산까지 거의 쳐들어온다니까. 나는 동생과 함께 유격대를 따라 지리산에 들어가려고 했어요. 그때 용천 연대장이 군대 모집하러 부산으로부터 우리 고장까지 배를 타고 건너오지 않았겠어요? 뭐, 빨갱이군은 남한 사람들을 몰살시킨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한국군에 붙잡혀 강박으로 한국군에 입대했지요.” “가만, 뭐? 용천이?” “알아요?” 병수는 성칠을 흘끔 쳐다보다가 무릎을 탁 쳤다. “맞아. 거 김용천 연대장은 광복 전에 간도에서 유격대 대장이었다지? 혹시 알아요?” 성칠은 자기 귀를 의심하며 도리머리 질 했다. “혹시 고향이 경주라더냐?” “예, 맞아요. 고향이 경주라던데요.” 성칠은 한숨을 후- 내쉬었다. “ 보통 미군과 한국군은 낮에 싸우기 좋아하는데 이상하다 했지. 괴뢰군이 야전에 능하다니. 쳇." 성칠은 병수에게 나직이 “이제부터 삼촌, 조카란 말을 하지 말자.” 라고 했다. “왜?” “묻는 말만 대답해라.” “쳇.” 전쟁 말이 나오자 그들 사이에는 냉전의 분위기가 혈육의 정을 서서히 갈라놓으려고 아득바득 기를 쓰고 있었다.                                         3. 형제   풍막 안은 다시 화약 냄새가 풍기기 시작했다. 성칠과 병수 숙질 사이에서 보이지 않는 번개가 번쩍이고 들리지 않는 우레가 울렸다. “장 꼬마, 물!” “옛!” 장꼬마가 부랴부랴 달려 들어와 컵에 냉수를 부어 주었다. “말해! 너희들 부대는 어느 소속인가?” 성칠은 냉수를 마시면서 을러멨다. “우리 천하무적의 백호부대는 미군 인천등륙의 기세를 몰아 이제 무명고지를 깔아뭉개고 두만강과 압록강에까지 쳐들어갈 거야.” “포로 된 주제에 큰 소리를 땅땅 쳐? 흥!” 성칠 연대장은 참다못해 컵의 물을 병수의 낯에 탁 쳤다. 금방 친 혈육의 정으로 화기애애하던 풍막 안 같지 않았다. “묻는 말에 대답하지 않으면 총살해 버리겠어!” 성칠 연대장은 권총을 뽑아 절컥 격발 기를 당겨 책상 우에 탕 놓더니 세 귀 눈으로 병수를 쏘아보았다. “말해! 저 아래 들판에 병력이 얼마 있어?” 그제야 병수는 머리를 숙이었다. “한개 사단.” “무명고지 아래에는?” “한개 연대.” “연대장 이름 뭐야?” “한선주 연대장인데요.” “한선주?” “예.” 성칠은 자기 귀를 의심하며 다시 물었다. “한철주 아니고?” “아니. 우리 한철주 부사단장은 한선주 연대장의 히아(형)인데요.” “뭣이? 한철주가 부사단장이야?” “예.” 성칠 연대장은 또다시 자기 귀를 의심했다. “장 꼬마, 바위돌 소대장과 권 대대장을 불러 오라.” “옛!” 장 꼬마가 뛰어나갔다. 이윽고 바위돌 소대장과 권칠백 대대장이 급히 들어왔다. “통신원!” 장 꼬마가 뛰어 들어왔다. “통신원은 희생됐습니다.” “아, 그랬지.” 성칠은 장꼬마의 귀에 대고 나직이 “인삼 참모장과 최 대대장도 데려오오.”라고 했다. “옛!” 이윽고 인삼과 최동욱 대대장이 풍막 안에 들어왔다. 성칠은 그들을 손짓해 옆에 앉게 한 후 심문을 계속했다. “한철주 부사단장은 혹시 간도로 들어간 적이 없는가?” “있어요.” 이병수는 이상해 눈초리마저 치뜨며 성칠 연대장을 쳐다보았다. “어떻게 걸 알아요?” “알고말고. 그 놈은 일제 개다리 부연대장이었어.” 인삼과 동욱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면서 주먹을 으스러지게 틀어쥐었다. “장관은 혹시 항일 유격대 대장 출신인가요?” “묻는 말이나 대답해. 너희들 부대에는 또 간도에 갔던 장교가 없는가?” “있제이. 북만 항일 유격대 대장 출신 연대장도 있는지라.” “이름이 뭐야?” “무명고지의 김용천 연대장인제라.” “뭐라고?” 성칠 대장은 놀라 걸상에서 일어나며 칠백을 건너다보았다. “다시 말해! 누군가?” 칠백은 펄쩍 뛰어 일어나 병수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말해! 연대장이 누구야?!” “김용천 연대장이여.” 병수는 손을 들어 멱살을 틀어쥔 칠백의 손을 풀며 눈을 흘기었다. “빨갱이 놈 새끼들, 걸게 우리 한철주 부사단장이 빨갱이라면 쌍불을 켰제이. 흥!” 성칠 연대장은 장꼬마가 떠주는 냉수를 받아 꿀꺽꿀꺽 굽을 냈다. “산 아래에 미군은 없는가?” “서남쪽으로 한 십리 가면 탱크부대 있제이.” “이 놈을 끌어 내가!” “죽이는 기여?” 병수는 겁기 띤 눈길로 성칠을 되돌아보았다. 허나 성칠 연대장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머리를 숙인 채 뭔가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뒤에서 칠백이가 병수를 잡아먹을 상하며 씩씩거렸다. 바깥에서 번개가 번쩍 하더니 집안까지 환하게 비추었다. 꽈르릉 꽝꽝! 우레 소리가 풍막을 날려 보낼 듯이 울렸다. 성칠은 풍막 천을 들고 때 아닌 가을에 소낙비가 쏟아지는 을씨년스러운 바깥을 내다보았다. 어느덧 대줄기 같은 소낙비가 쏟아지는 동녘하늘이 희붐히 밝아오고 있었다. 산줄기들이 소낙비 속에서 윤곽을 천천히 드러내기 시작했다. 소나무가 우거진 산골짜기를 마주한 산비탈의 게딱지같은 초가집들이 천천히 어둠을 벗어버리며 어슴푸레 초라한 모습을 드러냈다. 그 초가집들에 성칠의 부하들이 곤하게 자고 있었던 것이다. 성칠은 인삼 참모장을 돌아다보았다. “그 놈들이 별스레 우리 전술을 알고 야밤작전을 한다 했더니. 원래 한철주 놈과 용천 대장이구먼.” 그러자 인삼 참모장은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정말, 양키 놈들과 싸워보지도 못하고 항일전쟁시기 전우와 싸워야 한단 말이오? 그것도 한 전호 속에서 어깨 겯고 일본 놈들과 싸우던 용천 대장과 말이오.” 칠백은 머리를 점점 더 숙이면서 씩씩거렸다. 이윽고 머리를 번쩍 들더니 주먹을 휘둘러대며 고함쳤다. “우리 군인은 특수 재료로 만들어진 강철전사들이오!  최전선에 나가면 용천 형님부터 죽여치우겠다! 씹할!” 성칠은 한숨을 후 내쉬었다. “용천보다도 친일 주구 한철주 형제가  더 문제오. 한철주 놈을 백두산에서 처단하지 못했는데 잘 됐소.” “우리 보다 세배나 더 되는 놈들 속에 들어박힌 한철주 놈을 어떻게 잡아치우겠소?” 인삼 참모장이 한숨을 후 내쉬었다. 성칠은 인삼 참모장에게 나직이 뭐라고 귀속 말을 했다. “양~ 거 참, 묘하오. 헌데 그 자가 말을 듣겠소?” 인삼의 말에 성칠은 풍막 안을 뚜벅뚜벅 거닐었다. “수는 쓰기에 가지. 한번 저 놈과 용천 대장을 믿어 보기요.” “그렇게 해보지. 전쟁판에서 잃어졌던 용천 형을 만나다니. 참, …”  성미 급한 칠백은 주먹으로 손바닥을 툭툭 치며 장막 안을 거닐었다. “새 날이 밝아오는구먼. 눈을 잠간 붙이기요.” 동욱이 곤해 하품을 하며 잠기에 푹 퍼진 소리를 할 때다. 땅! 따르륵 땅땅! “뭐요?!” 바깥에서 총소리가 자지러지게 울리었다. “보고!” “웬 총소린가!” 장 꼬마가 황급히 뛰어 들어왔다. “적들이 포위했습니다. 어서 피하십시오!” “뭐라고?!” 성칠의 이마에 지렁이 같은 퍼런 정맥이 살아났다. “칠백은 한 개 중대 병력으로 엄호하라! 나머지 병력은 즉시 포위를 돌파하라!” “옛!” 성칠은 칠백의 어깨를 두드렸다. “5리 밖의 508고지에서 만나자!” “옛!” 칠백은 성칠에게 군례를 척 붙였다. 그는 풍막을 홱 젖히고 권총을 빼들더니 풍막 밖에서 기다리던 경위원과 함께 자기 대대 쪽으로 절벅절벅 뛰어갔다. 성칠은 소낙비 속으로 사라지는 칠백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장 꼬마한테 머리를 홱 돌렸다. “당장 포로를 데려오라!” “옛!” 장꼬마가 나가자 성칠은 인삼 참모장과 동욱 대대장을 돌아보았다. “먼저 포위를 돌파하고 508고지로 가오.” “김 연대장은?” “포로에게 특수임무를 주겠소.” “그 놈이 말을 듣겠소?” “괴뢰군 놈들에게 심리전을 써 보겠소. 빨리 포위를 돌파하오.” “양. 인차 따라 오오.” 성칠은 풍막 안에서 떠나가는 동욱과 인삼에게 머리를 끄덕였다. 이윽고 장 꼬마가 옆 풍막에서 병수를 데려왔다. 병수는 굳어졌던 네모진 얼굴을 느슨히 풀면서 어두운 그림자가 스쳐지나가는 성칠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성칠은 장 꼬마를 나가라고 손짓했다. 장 꼬마가 나간 후 성칠은 부드러운 어조로 나직이 말했다. “널 놔줄 터이니 부탁하자.” “뭘?” 성칠은 동그래진 병수의 두 눈을 뚫어지게 들여다보았다. 그 공포에 찬 눈에는 그윽한 혈육의 정이 엿보이었다. “한철주는 친일 주구야. 그 놈은 간도에서 일본군 부연대장을 한 악질 친일주구야. 용천과 말해 그 놈들을 처단할 수 없겠니?” 병수는 간절한 눈빛을 뿌리는 성칠의 눈길을 피해 발끝에 눈길을 떨어뜨렸다. “정신 나갔어? 삼촌, 한철주는 우리 부사단장인데요.” “그 놈은 네 큰어머니를 살해한 원수야.” “진짜?” 성칠은 머리를 무겁게 끄덕였다. “그래, 눈 덮인 백두산 밀림에서 그 놈이 쏜 기관총 흉탄에 네 큰어머니가 살해됐어. 큰어머닌 머리에 관통상을 입고 처참하게 희생됐어. 그 놈을 죽여라.” 따르륵 따르륵 풍막에 구멍이 펑펑 뚫렸다. “적들이 코앞까지 왔습니다!” 장 꼬마가 풍막을 젖히고 내다보다가 황급히 소리쳤다. 허나 성칠은 아주 태연자약하게 책상 안에서 미제 모젤권총을 꺼내 병수에게 돌려주었다. “부탁이다! 빨리 우리한테 헛총질을 하면서 뛰어나가라.” 병수는 좋아라고 권총을 받아 쥐고 바깥으로 달려 나갔다. “서라! 서!” 성칠은 뒤따라 나가면서 공중에 헛총을 쏘았다. 병수는 억수로 쏟아지는 대줄기 같은 소낙비 속으로 달아나면서 풍막 쪽 허공에 대고 총을 쏘았다. 이윽고 그는 소나무 밭에 뛰어 들어가 소낙비 속에 몸을 숨겼다. 성칠은 장 꼬마의 엄호를 받으며 풍막 뒤로 빠져 나가 산골짜기에 뛰어 들었다. 병수와 한국 괴뢰군은 사격하며 왝왝 고함쳤다. 한편 야습을 당한 한국 괴뢰군은 한철주 부사단장의 명령에 따라 용천 연대장과 한선주 연대장의 영솔 밑에 새벽의 어둠을 타 불시에 기습했던 것이다. 용천 연대장은 연대 병사들에게 명령했다. “풍막에 수류탄을 뿌려라!” 병수와 병사들은 풍막에 수류탄을 연신 뿌렸다. 꽝! 꽈르릉 꽝! 풍막이 하늘로 날아났다. 풍막 천 조각이 허리가 잘린 소나무 숲속에 떨어졌다. 풍막자리에는 널판자가 어지러이 널려 있을 뿐 시체 하나 없었다. 이때 산등성이에서 고함소리가 쩌렁쩌렁 울리었다. “원수놈들에게 복수의 불벼락을 안겨라!” 한패의 영용무쌍한 조선인민군이 산등성이 바위 뒤에 숨어 이쪽에 맹렬히 사격하는 것이었다. 빗발 속에 섬광이 번쩍였다. “돌격!” 용천 연대장은 소나무 뒤에 숨어 권총으로 산꼭대기에 대고 휘둘렀다. 한국군 장병들은 산꼭대기를 향해 소낙비 속에서 용감히 진공했다. 땅, 땅! 총알이 저승사자와마냥 죽음의 노래를 부르며 날아왔다. 푱!푱! 용천이 몸을 기댄 소나무에 총알이 꼽히며 소나무껍질이 마구 튕겼다. 그가 대줄기 같은 소낙비 속을 꿰뚫고 여겨보니 숱한 병사들이 산꼭대기에 올라가다가 맹렬한 사격에 삼대 쓰러지듯 했다. 그는 주먹으로 소나무를 꽝꽝 쳐댔다. “한개 대대가 한 개 중대 빨갱이 놈들을 못 이겨!” 그는 뒤에 대고 고함쳤다. “1대대 철퇴!” 용천 연대장은 병수 대대장을 돌아보면서 명령했다. “2대대 진공!” “옛!” 병수 대대장이 장병들을 영솔해 산마루로 돌격해 올라갔다. 허나 한 개 중대가 엄호하는 새에 성칠의 대부대는 몽땅 포위를 돌파하고 쥐도 새도 모르게 소낙비가 쏟아지는 소나무숲 속으로 묘연하게 사라졌다. 철거해 내려오는 1대대 부상병들을 보며 용천은 욕설을 퍼부었다. “흥! 무골충 같은 놈 새끼들!” 대대장은 용천 연대장 앞에 와서 뒷머리를 긁적거리었다. “원체 저 놈들이 항전 때부터 큰 전장을 쏘다니던 놈들이라…” “개소릴 작작 쳐! 뒤나 잘 엄호해!” “옛!” 1대대 패잔병들은 산비탈에 기관총을 걸어놓고 산마루를 향해 맹사격을 했다. 따르륵 따르륵 용천 연대장은 산마루 쪽으로 뛰어 나가며 고함쳤다. “박격포 사격!” 쿵! 쿵! 씩- 씩- 꽝꽝! 꽈르릉 꽝꽝! 맹렬한 박격포사격과 기관총소사에 산마루의 사격하는 총소리가 드물어졌다. 산마루에서 피에 물든 뻘건 빗물이 좔좔 흘러내렸다. “돌격!” 용천 연대장은 고함치며 자기도 경호원과 함께 산마루로 진격해 올라갔다. 허나 산마루에서는 총소리가 잠잠했다. 칠백 대대장이 영솔해 엄호하던 최동훈 중대는 탄알과 수류탄이 떨어졌던 것이다. 용천이 권총을 산쪽으로 홱 휘두르며 고함쳤다. “공산군 놈들 탄알이 떨어졌어! 총공격!” “빨갱이들을 사로잡아라!” 그때다. 소낙비가 쏟아지는 산마루에 시퍼런 총창들이 삐쭉 삐죽 나타났다. “용사들! 돌격!” 꺽다리 칠백이 제일 먼저 뛰어 내려오면서 괴뢰군 병사 몇을 연신 찔러 넘겼다. 산마루에서 숱한 서슬 푸른 총창들이 덮쳐 내려오면서  괴뢰군과 일당백의 기세로 육박전을 벌렸다. 임호 중대장은 날창으로 벌써 두 놈이나 찔러눕혔다. 날창이 적의 갈비대에 걸려 뽑히지 않자 활 버리고 맨 주먹과 머리로 적들을 치고 박으며 박투했다. 그는 호랑이처럼 날뛰며 날아드는 날창을 비껴 받아안고 휘둘러 괴뢰군 놈을 쓰러뜨리고 무쇠주먹을 안겼다. 어떤 전사들은 총깨묵이 부서지자 공병삽으로 괴뢰군의 목을 쳤다.  소낙비가 쏟아지는 산비탈에서는 “싸(죽여라)!” “싸(죽여라)!” 고함소리와 아우성소리, 비명소리, 신음소리가 처량하게 들리었다. 한국 괴뢰군은 총을 쏠 새 없이 총창과 공병삽에 찔려 쓰러졌다. 간혹 괴뢰군 병사들이 쏜 총에 인민군 전사들이 총창을 떨어뜨리기도 하고 가슴을 붙안고 쓰러지기도 했다. 괴뢰군은 점차 인민군의 기세에 눌려 산 아래로 밀려 내려왔다. “제길!” 용천 연대장은 권총으로 코앞에까지 돌격해 내려온 인민군 병사를 쏘아 눕혔다. “돌격!” 용천 연대장은 쓰러진 인민군 전사의 손에서 총창을 주어들고 제일 앞에서 연신 숱한 국군을 찌르며 짓쳐 내려오는 그 꺽다리 군관을 쏘아보며 덮쳐나갔다. 조선인민군 꺽다리군관 칠백이 용천 연대장 앞에서 뒤로 물러서는 1대대 대대장을 푹 찔러 눕히고 발로 시체를 차며 총창을 빼냈다. 순간,  용천 연대장이 총창으로 꺽다리 옆구리를 푹 찔렀다. 허나 그 꺽다리 군관은 재빨리 옆구리를 탈아 용천의 총창을 피하며 총창으로 용천을 찔렀다. 용천이 총창으로 찔러 들어오는 총창을 탁 쳤다. 쟁강! 총창과 총창이 마주쳐 불찌가 튕기며 무서운 저승사자 쇠소리를 냈다. "개새끼, 죽어 봐!' 꺽다리가 용천을 찔렀다. 용천이 비껴쳤다. 허나 날창은 허벅다리를 빗찔러나갔다. 용천도 꺽다리를 푹 찔렀다. 꺽다리 날창으로 올리 쳤다. 허나 창끝이 꺽다리 가슴을 빗 찔렀다. “아차!” “이거 누구야?!” 갑자기 서로 이를 악문 상대방 낯을 쳐다보는 순간 총창 질을 멈췄다. “칠백아!” “용천 히야(형님)!” 그 틈에 용천의 경호원이 권총을 휘둘러 칠백을 쏘았다. 땅! 야무진 총소리와 함께 칠백은 가슴에 흉탄을 맞고 총창을 진창에 툭 떨어뜨렸다. “닥쳐!” 땅! 땅! 뒤따라온 한철주도 총을 쏘았다. 칠백은 가슴을 붙안고 빙그르 몸을 비틀더니 밑 둥이 잘린 썩박나무 넘어가듯 풀썩 쓰러졌다. 한철주가 다시 권총으로 쓰러진 칠백을 겨눌 때다. “관둬!” 용천은 총창으로 한철주와 경호원의 권총을 탁탁 쳤다. 그는 다급히 물앉으며 칠백을 끌어안았다. “아우야! 이게 어쩐 일이여?” 한철주와 경호원은 눈이 휘 동그래져 권총을 쥐고 비실비실 뒷걸음질 치다가 총창을 꼬나들고 덮쳐드는 다른 인민군 전사를 쏘았다. 칠백의 가슴에서 선지피가 쿨쿨 솟구쳐 뻘건 빗물과 함께 땅바닥을 뻘겋게 물들이며 흘렀다. “형, 형님, 쿨룩, 진, 진달래캉 경, 경주는 함흥 촌에 갔소.” “칠백아!” 칠백은 감겨지는 실눈을 겨우 뜨고 손으로 자기 뒤를 가리키었다. “성, 성칠캉 재혼했어. 저, 저 뒤에 성칠이…” “아우야! 칠백아!” 용천은 칠백을 끌어안고 흔들며 대성통곡 쳤다. 허나 칠백은 빗물이 흐르는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눈을 스르르 감았다. 다시는 형님의 피타는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아, 아니야. 아우야!” 용천은 칠백을 끌어안고 풍덩 물앉아 얼굴에 얼굴을 미친 듯이 비벼댔다. 한참 후 경호원이 저벅저벅 진창을 밟으며 옆에 다가와 머리를 숙였다. “연대장! 고지를 점령했어요.” “뭐라고?! 이 놈, 네 놈이 하나 밖에 없는 내 사촌동생을 죽였어.” 용천은 칠백을 천천히 내려놓고 경호원을 노려보며 권총을 뽑아들었다. “미쳤어?!” 한철주가 용천의 손목을 꽉 틀어쥐더니 권총을 빼앗아냈다. 용천이 머리를 돌려 한철주 부사단장을 노려보았다. “이 친일 주구 놈아, 네깐 놈이 내 사촌동생을 죽여?!” 한철주는 우멍한 눈을 부릅뜨더니 싹은 이발을 사려 물었다. “자네 경호원이 먼저 쐈어! 아직도 빨갱이를 붙안고 있어? 빨리 적군을 추격해야지. 명령을 어기면 군법으로 처단할 테야!” 용천은 주먹으로 한철주의 면상을 한 대 갈겼다. “친일주구 놈아, 내 네놈 동생을 쏴 죽여도 이럴 끼여?!” “네 놈이 감히 상관에게 주먹을 휘둘러? 총살해 버리겠어!” 한철주는 이를 악물며 권총을 빼들었다. 땅! 땅! 야무진 총소리와 함께 한철주가 왼팔을 붙안고 풀썩 꿇어앉았다. 소나무숲 속에서 병수가 쏜 총탄이었다. 땅! 땅! 경호원들이 소나무숲 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병수가 인민군 전사의 시체에 총을 쏜 후 교묘하게 둘러댔다. “이 놈이 한 사단장을 쏘았네.” 경호원들은 인민군 전사의 시체에 대고 총을 몇 방 더 쏘았다. 병수와 경호원들이 소나무 숲 속에서 나오자 한철주는 오만상을 찡그리었다. “병수 대대장이 아니었더라면 죽을 번했군!” 병수는 용천 연대장한테 곁눈질하더니 한숨을 후 내쉬었다. 소낙비가 억수로 쏟아져 앞을 분간하기 힘들었다. 발 밑에서는 괴뢰군과 조선인민군 장병들의 피로 뻘겋게 물든 빗물이 산비탈을 타고 요란하게 흘러 내려갔다. 가을장마 도깨비가 여울 건너는 소리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무명고지로 철퇴!” 한철주는 을씨년스런 날씨에 더 싸우기 싫었다. 한시급히 시가지에 있는 옥설이네 기생방에 가 비단처럼 부드럽고 야들야들한 기생들의 속살에 풍덩 빠지고 싶었다. 한선주는 의아해 한철주의 우묵 눈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형님, 왜 철퇴해? 이 기세 몰아쳐 진군하지 않고.”  한철주는 소나무숲 속으로 걸어 들어가면서 으시댔다. “넌 몰라. 빨갱이들은 유격전에 능해. 쩍 하면 유인술과 매복습격 전 해 뒤통수를 쳐. 이전에 백두산에서 저 놈들의 그 유인술과 매복습견전에 걸려 하마터면 목숨까지 잃을 번했어. 조선인민군 한 개 중대를 전멸시켰으니 승전고를 울리면서 개선할 만도 해.” 그제야 선주 연대장은 머리를 끄덕이며 부대를 이끌고 따라 나섰다. 용천은 휘몰아치는 빗발 속에 싸늘하게 식어가는 칠백의 시체를 꼭 끌어안은 채 물앉아 엉엉 대성통곡치며 엉덩이를 뗄 염을 하지 않았다. “저 놈을 끌고 가자!” 한철주의 경호원들이 우르르 쓸어와 용천의 양팔을 억지로 껴들고 마구 끌어갔다. “칠백아! 너한테 죽을 죄를 졌구나. 흑흑. 흑흑.” 용천은 끌려가면서도 빗물 속에 쓰러진 칠백이 쪽에 대고 팔을 휘두르면서 흐느끼며 대성통곡쳤다. "칠백아! 칠백아!" 먹장구름이 가을바람에 동남쪽으로 밀려가더니 빗발이 점점 가늘어졌다. 괴뢰군은 철갑모를 번뜩이며 무명고지로 후퇴했다.
94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73) 댓글:  조회:1558  추천:3  2017-07-11
                                                                                                                                    민심 오뉴월의 비는 소잔등을 다툰다고 이쪽 산기슭에 소낙비가 억수로 쏟아지는데 맞은 켠 산마루에는 해빛이 비쳤다.  날씨도 변덕스러웠다. 해가 바짝 뜨고 불볕이 쏟아지다가도 먹장구름이 뒤덮이면서 변덕을 부렸다. 대지는 하늘이 부리는 풍운조화에 따라 변덕스럽게 변해갔다. 농사철이 되자 용구와 영호를 비롯한 공안일군들은 대가리를 쳐드는 당지 지주들이 없어 할 일도 크게 없자 자연히 집 농사를 근심하게 되었다. 농민의 아들인 상순도 저도 몰래 함흥 촌의 할아버지와 아버지 생각이 났다. 그러나 그는 공안국 준비소조 조장이기에 공안국 새 지도부가 결정되기 전에 집으로 돌아가 농사일을 도와줄 엄두도 내지 못했다. 상순은 영호와 용구를 비롯한 일부 공안일군들에게 청가를 주어 집으로 돌아가 농사일을 도와주게 했다. 어느 날, 현 당위 조직부 이계삼 부장과 상급 공안국 부국장 손철구가 영월구공안국 국장과 부국장 후보를 고찰하러 내려 왔다. 그들은 영월구 당위에 먼저 들려 허백호 서기를 만났다. 허백호 서기는 영월구 공안국 준비소조에서 거둔 성적을 충분히 긍정했다. 그는 특히 공안국 준비소조에서 영월구 당위의 영도아래 국민당 반동파 잔여세력과 악질지주 자위대를 숙청했다는 점을 강조해 지적했다. 이계삼은 상순이 사업에서 커다란 성과를 거둔 것을 보고 아주 기뻐했다. 상순은 그가 소개인을 서서 입당시킨 농촌의 청년간부 출신이었다. 그런데 허 서기의 뒷말을 듣고 이계삼 부장은 인차 흐뭇한 미소를 짓던 얼굴에 그늘이 지나갔다. “김상순 동문 독단독행하고 안하무인입니다. 조직 관념이 차하고 영도를 존중하지 않는 악습을 고치지 않았습니다.” 이계삼은 허 서기가 헐뜯는 말을 듣다못해 물었다. “구체적으로 실례를 들어 말하십시오.” 허 서기는 열이 후끈 올랐다. “조장이 뭐 대단합니까? 큰 관직이나 얻은 것처럼 우쭐해서 공안일군들을 모집할 때도 근본 우리 영월구 당위에 청시하지도 않고 자기 눈에 드는 사람만 뽑았단 말입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우리 영월구 당위에 한마디 말도 없이 제 마음대로 과장 넷이나 임명하고 숱한 파출소 소장들까지 임명했단 말입니다." 허백호는 사심없이 말한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사촌동생 허영호를 진수해파출소 소장으로 임명한 일까지 꼬쟁이에 꿰들었다. "허영호는 내 사촌동생이 돼서 내 잘 압니다. 그는 소학교 문도 나오지 못한 농사군입니다. 그런데 허영호를 일약 파출소 소장으로 임명하다니? 쳇, 이게 어디 조직 관념이 있는 사람입니까? 전번에 내 가서 비평하니 근본 접수하지 않는단 말입니다. 이런 동무를 뭘 보고 우리 영월구 공안국에 보냈는지 모르겠습니다.” 상급 공안국 손철구 부국장은 머리를 끄덕이더니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우린 오늘 상순 동무를 공안국 국장 후보로 선정하고 지방 당위와 공안일군 가운데서 민의측험을 하고 진일보 조사하자고 왔습니다. 그런데 상순 동무가 지방 당위 반영이 좋지 않을 줄은 몰랐습니다.” 이계삼은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상순 동무는 총명하고 한어를 잘하고 사업에서도 훌륭한 성적을 따낸 훌륭한 공안간부입니다. 그런데 허서기 반영을 들은 후 잘 믿어지지 않을 정도구만. 호되게 비평해야지.” 허 서기는 한입 더 물어댔다. “말도 마십시오. 여기로 온지 반년이 넘도록 공안국을 세우지도 못했습니다. 전번에 국민당 자위대 숙청전투 총화보고자료를 쓰라고 하니 질질 끌면서 쓰지도 못하였습니다. 박성우 동무가 와서 써서야 상급 당위와 공안국에 회보할 수 있었습니다.” 상급 공안국 손철구 부국장은 한마디 께끼었다. “난 그래도 상순 동무가 쓴 겐가 했더니. 성우 동무는 일본 유학생이더구먼. 한어에 일어, 영어까지 안다더구먼.” 그러자 허 서기는 스리슬쩍 성우를 치켜세웠다. “성우 동무는 지식도 많고 조직 관념도 강하고 영도재능이 있는 동무입니다. 아예 성우 동무를 공안국 국장으로 임명하는 게 낫습니다. 난 상순 동무를 국장으로 임명하는 것을 반대합니다. 문화지식도 겨우 고급소학교 수준입니다.” 이계삼은 듣다못해 차마 더 들을 수 없었다. “허 서기도 소학교문을 겨우 나왔지만 구 당위 서기를 하지 않았습니까? 공안국 치안사업도 지식이 필요하지만 더욱이 정치사상과 지식, 군사재능 등 종합자질이 필요합니다. 말하자면 문무가 겸비돼야 합니다. 하지만 공안국 사업을 잘 하려면 문과 무에서 무예가 더욱 중요합니다. 상순 동무는 공안국 치안사업을 하기 맞춤한 동무라고 보오.” 그쯤 되자 허백호 서기도 더는 헐뜯지 못했다. 허나 이계삼 부장은 더 무서운 말뚝을 꽝 박아 놓았다. “기실 당무 공작은 무예보다도 문필이 더 중요합니다. 지식수준이 더 높아야 한단 말입니다. 아예 성우동무를 영월구 당위에 배치하면 어떻습니까?” 허 서기는 감히 조개턱을 더 널어놓지 못했다. "물론 상순 동무에겐 결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해놓은 사업성과는 착오보다 얼마나 더 크오. 상순동무는 주덕해 동지가 이름 찍어 영월구에 보낸 공안국 준비소조 조장이오. 이번에도 주덕해 동지는 김상순동무를 영월구 공안국 국장으로 임명하라고 우릴 보냈소." 이계삼 부장은 경고하듯이 말했다. " 허백호 동무는 명심하오. 동무는 삼도만토비숙청 때도 부대를 토비들 사격망에 주둔하게 해 통신원이랑 민주련군 전사들이 희생되게 했소. 그때 김상순 패장이 제때에 최퇀장한테 보고해 안전지대에 전이시키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됐겠소? 동문 최퇀장과 한 고향 사람이기에 민주련군에 가자마자 련장이 되지 않았소?  동문 군사상 무능하기로 짝이 없었소. 정치상에선 동지들과 단합을 잘 하지 못하고 사람잡이만 한단 말이오. 지금도 상순동무를 내리까는데 눈이 씨뻘개 달아다닌단 말이오. 내 말해두지. 계속 이러다간 동무는 영월구위 서기를 못할줄 아오. 안보촌에 내려가 촌서기나 할 준비를 하오. 동무에겐 촌서기도 과분하오. 영월구 공안국 준비소조 조장은 절대 영월구당위 서기 수하가 아니오. 동무는 조직관념이 있소? 없소?" 허백호는 식은 땀을 줄줄 흘리며 머리도 들지 못했다. "지금 전시 군관제를 실시하기에 현공안국 준비소조 조장, 장차 국장은 영월구 당위 서기보다 한급 더 높다는 걸 명심하오."  "예, 잘못했습니다." "내 료해에 의하면, 그래도 상순 동무는 지방당조직과 관계를 잘 처리하기 위해 매사에 허백호 동무와 토론하고 회보하면서 사업했다는 걸 아오. 그런데 동문 민주련군에서 련장질 하면서 기관총반장을 다루듯 상순 동무를 쥐고 흔들려고 했단 말이오. 기실 민주련군에서 상순동무는 허동무와 동급인 지도원을 하지 않았소. 후에 영장임명장까지 내렸댔소. 그러기에 허백호동무 상관이라고 할 수도 있소. 그만큼 상순동무는 국장 자격이 당당한 동무요. 최퇀장이  웬간하면  동무를 두고 상순동무를 영장으로 제발시켰겠소?"  "정말 잘못했습니다." "그저 잘못했다고 해선 안되오. 서면으로 조직에 검사서를 써서 바치오." 허백호는 천천히 머리를 들어 뱁새눈으로 이부장을 흘끔 곁눈질해보며 입안소리를 했다. "예, 꼭 잘못을 고치겠습니다." 이계삼 부장은  일어나면서 엄숙하게 말했다. "현당위에서는 허백호동무에게 당내 엄중경고처분을 주기로 결정했소. 이후에 착오를 잘 고치지 못하면 안보촌에 내려가게 될 줄 아오." 허백호는 머리를 툭 떨어뜨렸다. 이계삼과손철구는 허 서기가 한사코 상순을 내리까는 것이 이상하여 공안일군들을 찾아가 정황을 요해하기로 했다. 그런데 대부분 공안일군들이 농사일을 도와주려고 집으로 돌아가고 없고 사무실이 텅텅 비어 있었다. 손철구 부국장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정말 조직 관념이 없구먼. 지금 무슨 세월이라고 경각성이 없이 공안일군들을 농사일을 하러 집으로 보낸단 말이오? 이미 거둔 성적에 도취됐군!” 이계삼은 점심시간을 타서 상순을 조용한 곳으로 불러냈다. 그들은 시내를 좀 벗어나 사품 치며 흐르는 강물을 마주 하고 강가에 나란히 앉았다. “상순이, 아직 전국이 해방되지도 않았는데 공안일군들을 집으로 보내다니? 정신 있소? 동무네 주요 임무는 영월구 치안사업을 하는 것이지 농사를 짓는 게요?” 상순은 뒷덜미를 긁적거리었다. “전번 숙청을 한 뒤 지주들이 별 다른 동태가 없기에 집에 가라고 청가를 주었습니다. 지금 보니 잘 못 됐습니다.” 이계삼은 상순의 팔을 잡아당기며 나직이 귀속 말을 했다. “어째 동무는 지방 당위 영도를 존중하지 않았소? 물론 전시 군관제라 허서기 한급 낮다고 해도 그렇지. 뭐나 지방 당위와 잘 토론하고 해나가오. 남을 존중해야 자기도 존중받을 수 있소. 그에게 자주 청시하오. 사업만 잘해 될 거 같소? 상하 영도와의 관계도 잘 처리해야 되오.” 상순은 이계삼 부장의 말은 다 들었지만 이번만은 예외였다. “허 백호 서기가 원칙에 어긋나도 따라야 합니까? 난 절대 원칙을 떠나 그런 영도와 타협하지 못하겠습니다.” “무슨 말이오?” 이계삼은 눈초리를 치켰다. 상순은 강변의 조약돌을 쥐어 사품 치며 흐르는 강물에 힘껏 뿌리었다. 출렁! 상순은 조약돌에 맞아 튕겨나는 물 바래를 보더니 입당소개인을 만났는지라 속을 툭 털어놓았다. “허서기는 삼도만 토비숙청 때 일로 해 나한테 편견이 있습니다.  그때 내 영장을 했더라면 허서기 무슨 짓을 했을지도 모를 겁니다. 저도 그래서 영장을 그만두고 지방에 돌아온 것도 있습니다. 허 서기는 그저 나를 내놓고 미워하고 내리깝니다. 여기에 온 후에도 처처에서 나를 꼬챙이에 꿰들고 나무랍니다.” 이계삼은 듣기만 했다. 상순은 입을 연바하고는 속이지 않고 다 말했다. “허 서기는 사업을 잘 하는가를 보지도 않고 자기한테 아부하는 사람을 간부로 써주려고 합니다. 동무들의 말에 의하면, 허 서기는 성우한테서 송이버섯이랑 술이랑 얻어먹고 국장을 시키려고 한다고 소문이 자자합니다. 난 그런 원칙도 없고 조직 관념도 없는 서기를 존중할 수 없습니다.” 이계삼 부장은 상순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상순이, 내 말을 명심하오. 낮은 문턱에 머리를 숙일줄도 알아야 하오. 그러잖으면 자기 머리 터지는 법이오. 또 참대처럼 꼿꼿한 것도 좋지만 끊어지기 쉽소. 버들처럼  경우를 봐서 홰친홰친 후러들줄도 알아야 하오. 그래야 대나무처럼 쉽게 끊어지질 않을 수 있소." "흥!" 상순은 이계삼의 말이라면 다 들었지만 이번만은 아니었다. "머리 터지고 목이 끊어지더라도 원칙을 지키지 않고 그런 사람들한테 머리를 수그릴 순 없습니다. 사람이 빚을 지고는 살아도 어찌 시비 지고 살 수 있습니까. " 이계삼은 원칙 앞에서 강직한 상순을 속으로 못내 탄복했다. 그러나 상순의 앞날이 근심스러웠다. "동문 정치사업을 하면서 오랜 세월이 흘러가면 내 말의 깊은 뜻을 이해할 수 있을 거요," 그쯤 하고 이계삼은 하던 말에 되돌아갔다. "왜 허서기와 토론하지도 않고 과장과 파출소 소장들을 임명했소?” 상순은 세 귀 눈을 똑바로 뜨고 이계삼을 마주 보았다. “지금은 군관제시기입니다. 전시나 다름없는 시기이기에 우리 공안국은 독립적으로 간부를 모집하고 임명할 수 있다고 봅니다. 후에 허 서기한테 회보하지 않은 것도 아닙니다.” “건 동무 잘못이오. 아직 국장 임명장도 내려오지 않았는데. 아무리 전시라도 허서기하구 먼저 토론하고 임명했어야 하오.” 상순은 납득이 돼 하지 않았다. “그래 공안국 준비소조 조장이 과장과 소장도 임명할 권리도 없습니까? 아무 권리도 없이 어떻게 공안국을 세웁니까?” 이계삼은 상순의 어깨를 다독였다. “상순이, 동문 아직 사업경험이 없어 그러오. 내 말을 듣소. 물론 긴급정황에서 공안국 준비소조장은 과장을 임명하고 공안일군을 독립적으로 모집할 수 있소. 그러나 공안국을 세우는 일도 조직적 절차를 거쳐야 하오. 우리 너무 늦은 것도 있소. 먼저 상급 공안기관과 당위에서 공안국 국장과 부국장을 임명한 후 공안국 국장과 부국장이 토론하고 지방 당위에 통보해 의견을 들은 후에 과장을 임명해야 하오.” 그제야 상순은 머리를 숙이었다. 한참 후에야 상순은 목구멍으로 기어드는 소리로 겨우 한마디 했다. “잘 못했습니다.” 이계삼은 상순을 타일렀다. “동무는 아주 훌륭한 지도간부 감이오. 군사재능도 있고. 그런데 허 서기와의 관계를 잘 처리 하지 못해 영향을 받을 거 같소. 물론 허백호 서기가 다 잘했다는 건 아니오. 그러나 우린 먼저 자기 잘못부터 고칠줄 알아야 하오. 이제라도 허 서기를 찾아가 관계를 개선하오. 하급영도라도 존중할 줄 알아야 하오. 동문 허영호를 소장으로 임명해 허백호 서기와 관계를 개선하려고 한 것 같은데. 그걸로만은 모자라오. 사업만 사업이라고 하지 말고 사람과의 관계도 잘 처리하고 공부도 게을리 하지 마오. 큰 짐을 메자면 소학교 지식수준으로 되겠소? 아무리 눈앞의 사업이 다망하더라도 문화지식 공부도 좀 하오.” “예, 명심하겠습니다.” 상순은 그렇게 대답해 놓고서도 한숨을 땅이 꺼지게 후― 내쉬었다. 이계삼 부장과 손철구 부국장은 공안국 사무실에 와서 공안일군들 속에서 의견청취를 하기 시작했다. 상순은 내키지 않았지만 이계삼 부장의 포치대로 허백호 서기를 찾아가 잘못을 검사했다. 손철구 부국장이 의견청취를 했다. 그는 먼저 호구를 관리하는 “과장” 만호를 불러 왔다. 이계삼은 국장 후보 고찰의 객관성을 기하려고 나서지 않고 손철구 부국장이 주도하여 고찰하게 했다. 손철구 부국장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동무는 군정대학시절부터 김상순 동무와 박성우 동무와 동창생이니까 잘 알리라고 믿소. 동무 보건대 누가 영월구 공안국 국장과 부국장을 하면 좋을 거 같소?” 허만호도 구김 없이 뚝 찍어 말했다. “김상순 조장이 국장을 해야 한다고 봅니다.” 뜻밖의 대답에 손철구 부국장은 의아해졌다. “무엇 때문입니까?” 만호는 의자등받이에 잔등을 붙이며 자기를 여겨보는 손 부국장을 보았다. “공안국 치안사업을 지도하자면 무엇보다도 용감한 희생정신이 있어야 합니다. 전번에 국민당 자위대를 숙청할 때 상순 조장은 제일 위험한 오두막에 미끼로 들어가 매복해 적을 유인해 사로잡았습니다. 장단지에 총을 맞아 가지고도 계속 전투를 지휘해 장충국 연장 놈의 허벅다리를 쏘아 사로잡았습니다. 상순 조장은 다리를 상해 가지서도 허영호랑 데리고 눈 가슴에 자전거를 타고 안보 촌에까지 가서 직접 장부귀 놈을 체포했습니다. 모든 작전도 아주 세밀하게 짜서 전투를 승리에로 이끌어냈습니다. 이런 용감성과 희생정신이 없이 공안사업을 할 수 있습니까? 상순 조장처럼 이런 지휘능력이 없는 사람이야 어찌 공안일군들을 이끄는 국장으로 될 수 있겠습니까?” 손 부국장은 머리를 끄덕였다. “좋소. 성우 동무는 어떻소?” “우리 공안일군들은 입방아만 찧는 사람을 딱 질색입니다. 글을 잘 쓴다고 해서 공안사업을 잘 지도할 수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성우 동무는 군정대학 때 반장을 했지만 공안국 국장을 하기는 적합하지 않다고 봅니다. 군정대학에서 공부할 때는 지식이 많으니까 반장도 할 수 있었겠지만 총을 가진 계급의 적들과 싸우는 공안전선에서는 성우 동무가 상순 조장보다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성우 동무는 총도 온전히 쏘지 못합니다. 겨릅대처럼 약한데다가 낯이 새하얀게 딱 계집애 같습니다. 힘도 없어 적들과 격투하면 단매에 맞아 죽을 겁니다. 성우는 상순 조장 아래서 문서질이나 하면 합당한 사람이라고 봅니다.” 이계삼은 만족한 웃음을 지었다. 허나 허 서기는 만호를 보고 눈을 흘기었다. 만호에 뒤이어 창남이 사무실에 불리어 들어 왔다. 손철구 부국장이 묻기 바쁘게 창남은 기관총을 쏘듯이 자기 견해를 쏟아 부었다. “우리 공안국 국장은 의례히 상순 조장이 해야 합니다. 그는 항일 전쟁 때부터 일본 놈들과 기관총으로 용감히 싸웠습니다. 토비숙청 때도 기관총반 반장으로부터 지도원까지 하면서 기관총패를 지휘해 숱한 적들을 소멸한 실전경험이 있습니다. 그때도 토비들 내부 기의를 일으키게 해 토비숙청에 공훈을 세웠습니다." "픽!" 허백호는 한쪽에서 어망간에 지뿌둥해 코방귀를 뀌었다. 이부장의 눈길이 가자 머리를 떨구며 혀로 입술을 감빨았다. 창남은 뒷말을 이었다.        "이번 국민당 자위대를 소탕할 때에도 뛰어난 지휘능력과 용감성을 보여 주었고 우리 영월구 치안사업을 위해 지워 버릴 수 없는 공훈을 세웠습니다. 상순 조장은 무예가 출중합니다. 사격하면 백발백중이고 격투, 씨름, 총창 찌르기 막히는데 없이 출중합니다. 전번 총화보고자료도 상숭 동무가 부른 걸 성우가 베껴낸 겁니다. 이런 종합능력이 있는 국장이 있어야 아래 공안일군들도 마음속으로 존중하고 따르고 지휘를 들을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 영월구 치안사업도 잘 할 수 있습니다.” 허 서기는 속에 내키지 않아 마른기침을 했다. 손 부국장은 관건적인 대목을 물어 보기 시작했다. “동무 보건대 상순 동무는 그 밖에 무슨 우점이 있다고 보오?” 창남은 성미가 급한지라 묻기 바쁘게 대답했다. “상순 조장은 원칙을 지킵니다. 상급이든 하급이든 원칙에만 어긋나면 복종하지 않고 맞섭니다.” “구체 실례를 들 수 없소?” 허백호 서기는 바늘방석에 앉은듯하여 “어험.” 하고 마른기침을 했다. 창남은 후과를 두려워하지 않고 바른 말을 했다. “사실 허 서기가 자기 사촌동생 허영호를 공안일군으로 모집하지 않았다고 야단칠 때입니다. 상순 조장은 무조건 복종한 게 아니라 원칙을 지켰습니다. 만호와 저를 데리고 집까지 찾아가 직접 공안일군 소질이 있나 고찰한 후 모집해 들여왔습니다.” “잠간.” 손 부국장이 손을 들더니 물었다. “어째 영호 동무를 처음에 모집하지 않았소?” “영호 동무는  키가 작고 약하더구먼요. 그래서 적들과 싸우는 공안사업을 하기 적합하지 않다고 보았습니다. 상순 조장은 허 서기 사촌이라고 무조건 봐준 것도 아닙니다. 후에 우리가 가 보고 영호는 씨름 2등을 한적이 있는데다 작은 덩치와는 달리 벼 마대를 양옆구리에 끼고 수레에 척척 싣는 것을 보고 공안일군으로 모집해 들여왔고 과장으로 임명했습니다. 상순 조장은 원칙을 지켜 숱한 민병 연장과 패장들 속에서 군사훈련을 거치고 군사시험을 쳐서 공안일군을 모집했습니다. 정말 이렇게 원칙을 지키는 좋은 국장감은 없다고 봅니다.” 손 부국장은 머리를 끄덕이었다. 이계삼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 다음에는 허영호가 들어왔다. “동무 허영호오?” 손 부국장은 키가 작은 허영호를 보고 대뜸 짐작했다. “예, 그렇습니다.” “자, 앉소.” 손 부국장은 허백호 서기와 이계삼을 번갈아 보며 허영호에게 물었다. “영호 동무는 상순 조장을 어떻게 봅니까?” 이때 허백호 서기가 연신 “에헴, 에헴!” 마른기침을 깇었다. 영호는 허 서기를 흘끔 곁눈질하더니 입을 열었다. “김상순 조장은 지휘능력도 대단하고 무예도 뛰어나서 우리에게 사격과 권투, 총창 찌르기 지어 씨름까지 배워 주었습니다. 그러나 혼자 영웅인 척하면서 뭐나 잘 알아보지도 않고 마구 하는 건 나쁩니다.” “실례를 들어 말하오.” “내 키 작고 약하다고 업신여겨 공안일군으로 모집하지 않았습니다. 더 중요한 건 전번에 자위대 숙청할 때 그게 뭡니까? 목숨을 내걸고 총을 쥔 놈들과 싸우는데 대체 적들이 얼마나 되는지도 잘 알아보지 않고 전투를 지휘했습니다. 그는 혼자 오두막에 미끼로 들어가 매복해 있었는데 얼마나 위험했습니까? 자위대를 숙청하러 간 용구랑 얼마나 위험했습니까? 그게 혼자 영웅으로 되자는 게지 뭡니까?” 손 부국장과 이계삼은 마주 보며 희죽이 웃었다. 그러나 허백호 서기는 바늘방석에 앉은 듯 안절부절 못했다. (에이구, 어쩜 시키는 서방질도 못해? 내리깎는다는 게 되춰주고 말았어. 쯧쯧.) “동문 성우 동무를 어떻게 보오?” “에이고, 낯이 백지장 같은 선비가 어떻게 공안국장을 한다고 그럽니까? 상순 조장보다 형편없습니다. 아무리 먹물이 온 몸에 꽉 찼다고 해도 한해에 공안국에서 자료를 쓸 일이 몇 번 있다고 여자 같은 선비를 국장을 시킨다고 그럽니까?” 영호는 사촌형 허백호 서기의 눈치를 보지도 않고 생각나는 대로 내쏘았다. 진짜 멈추지 못하는 기관총질이었다. “성우는 영월구 공안국에 와서 해 놓은 일도 없습니다. 한 식경 품을 들여 전번 회보자료를 쓴 것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저 허 서기는 국장을 시킨다고 하니 우리 뒤에서 죽은 소대가리 웃다가 꾸러미 터질 일이라고 웃었습니다. 전번에 상급 공안국에 보낸 자료도 기실 상순 조장이 줄줄 말한 내용을 성우 동무가 정리했을 뿐입니다. 성우가 국장이 되면 모두 말을 잘 듣지 않을 겁니다.” 허백호 서기는 도리머리를 홰홰 흔들며 문 밖으로 나가는 영호를 흘겨보았다. 그 다음 차례로 용구가 들어왔다. 그는 손 부국장이 묻기 바쁘게 목이 꽉 메어 말했다. “상순 조장은 우리 공안국 국장을 해야 합니다. 지휘능력도 강하고 용감하고 군사재능도 있습니다. 그 분은 실전경험도 있는 유능한 지휘자입니다. 그가 우리 영월구 공안국 국장을 하면 우리 영월구 치안사업은 당과 정부에서 근심하지 않아도 됩니다.” 손 부국장은 머리를 끄덕였다. “상순 조장의 우점이 또 있소?” “예, 많습니다. 그는 우리를 한 사람처럼 단결시켜 치안사업을 하게 했습니다. 례를 들면 성우 동무가 뭐 국장이 된다고 소문이 돌았지만 우리를 보고 누가 국장이 되든지 단결해 받들어 치안사업을 잘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는 우리를 보고 성우는 당교 때 자기에게 글을 배워준 선생이라면서 누구든지 성우 동무의 허물을 하지 말라고 당부했습니다. 얼마나 사심 없이 대공무사 합니까? 그는 또 군중들을 아주 관심합니다. 농번기가 되자 우리에게 허가를 주어 집에 돌아가 며칠씩 농사일도 도와주라고 했습니다. 누구 집에 고난이 있으면 상순 조장은 늘 도와주군 하였습니다. 그는 집이 가난해 소학교 대문에도 가보지 못한 것이 한이라면서 우리를 보고 일만 하지 말고 애써 공부를 하라고 당부했습니다. 얼마나 좋은 지도자라고 그, 그럽니까?” 용구는 팔소매로 눈물을 닦으면서 목이 메어 뒷말을 더 잇지 못했다. 이윽고 손철구 부국장은 “상순 동무의 결점은 뭐라고 보오?”라고 했다. 용구는 머리를 숙이고 생각하더니 “난 더 할 말이 없습니다. 상순 조장은 이제 사업하면서 글공부만 좀 더 하면 훌륭한 국장으로 될 수 있다는 걸 믿습니다.” 손철구 부국장과 이계삼 부장, 허백호 서기가 30여명 공안일군들을 일일이 불러다 요해했다. 그들은 모두 상순은 훌륭한 간부라고 했다. 지어 박성우마저 상순을 훌륭한 국장 후보라고 하면서 후에 그를 잘 받들어 일하겠다고 했다. 민의조사가 끝나자 이계삼 부장과 손철구 부국장은 상순을 찾았다. “상순 동무 보건대 영월구 공안국에서 누가 국장을 하고 누가 부국장을 하면 좋겠소?” 손철구 부국장이 묻는 말에 상순은 망설이지도 않았다. “국장은 박성우 동무가 하면 좋을 거 같습니다. 부국장은 천용구 동무나 김창남 동무가 하면 좋고.” “허허허. 무엇 때문이오?” 손 국장은 이계삼과 눈을 맞추며 웃었다. “평화 년대에 공안국은 지식과 견식이 있는 국장이 영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처음에는 허 서기가 성우 동무를 높이 평가하는 걸 납득이 되지 않았습니다. 허나 요즘 생각해보니 도리 있는 것 같습니다. 허나 한 점만은 짚고 넘어 가야겠습니다. 공안사업은 계급의 적들과 무력으로 싸워야 하는 특수사업입니다. 아무리 평화 년대라고 해도 맨 선비들로만 공안국을 채운다면 실제 공안사업에서 힘들게 됩니다. 때문에 천용구 동무와 김창남 두 동무를 부국장으로 시켜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천용구 동무는 씨름 1등이고 용감하고 공안사업을 할 큰 재목감입니다. 전번 국민당 자위대 놈들을 숙청할 때도 아주 용감하게 싸웠습니다. 김창남 동무는 군정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여 글도 있고 무예가 뛰어납니다. 만약 박성우 반장과 김창남, 천용구 동무가 국장과 부국장을 한다면 문무가 겸비된 지도부로 구성돼 우리 현공안국 치안사업을 아주 잘 지도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만약 부국장을 두 동무 더 둔다면 누구를 시키면 좋겠소?” 손 부국장의 물음에 상순은 머리를 숙이고 한참 궁리하더니 천천히 머리를 들었다. “허영호를 시키면 됩니다. 이 동문 가정성분이 좋고 씨름재간도 있고 무예도 출중합니다…” “그만!” 손 부국장은 손사래를 쳐댔다. “상순 동무! 그게 공안사업을 책임져 하는 말이오? 허영호 동문 진수해파출소 소장으로 임명하지 않았소? 그리구 박성우 동문 지식이 있을뿐 무예가 안되고 영월구 공안국에 갓 와서 해놓은 일도 없지 않고 뭐요?” “?” 상순은 세귀눈을 키겨뜨며 손부국장과 이계삼 부장을 번갈아 보았다. 이계삼 부장은 손부국장에게 손사래를 치더니 상순에게 물었다. “그래 동무는 뭘 하면 좋을 거 같소?” “당 조직과 상급 공안국의 배치에 복종하겠습니다. 천용구 과장네 치안과에 가서 글공부를 하면서 백의종군하겠습니다.” 손 부국장은 걸상에 앉은 상순에게 다가와 어깨를 다독여주었다. “연변전원공서 주덕해동지께서 무엇 때문에 동무를 영월구에 파견했겠소?” 손부국장은 얼굴에 얇은 웃음을 짓더니 금후의 요구를 제기해주었다. “동무는 영월구에 온 후 공안사업을 아주 잘 했소. 영도능력도 있고 정치이론과 공안실무 수준이 아주 높고 실전경험과 무예도 뛰어난 훌륭한 공안간부요. 후에 지방 당위의 영도를 존중하고 인간관계를 잘 처리하고 뭐나 사전에 전면적으로 조사한 뒤 지휘하고 문화지식 공부에 힘쓰오.” 상순은 일어나 군례를 척 올렸다. “예, 꼭 명심하겠습니다.” 뒤이어 손 부국장과 이계삼 부장은 성우도 찾아 담화하고 나중에 허백호 서기를 찾아 의견을 교환한 후 저녁이 다 돼서야 기차를 타고 돌아갔다. 기차가 칙칙폭폭 달려가며 뒤에 남겨둔 영월구 산골짜기에는 연분홍 낙조가 비끼기 시작했다.                                                                 고향 행차       동녘 하늘이 희읍스름하게 밝아 오자 영월구의 삼라만상이 잔등을 드러냈다. 어둠에 짓눌려 있던 산등성이가 먼저 윤곽을 드러냈다. 뒤이어 골짜기에 길게 늘어앉은 영월구 시내에 천천히 안정된 모습이 나타났다. 상순은 아침 일찍이 조용히 일어나 물 초롱을 들고 우물에 가서 물을 길어다 숙사 식당 물덕에 꼴딱꼴딱 채워 놓았다. 창남과 만호도 옆 칸에서 일어나 도끼를 휘둘러 땔나무를 팡팡 패 무져놓았다. 용구는 장작을 안아다가 부엌에 불을 때 아침밥을 손수 지었다. 상순은 아침 밥숟가락을 놓자마자 여러 공안일군들을 둘러 보고나서 나중에 길쭉한 박성우의 얼굴에 눈길을 돌리었다. “박 반장, 내 집에 한번 갔다 와야겠소. 그간 모두 수고하오.” 성우는 황송해 하면서 손사래를 저었다.        "반장? 김 조장은 우리 공안국 책임자인데 내가어찌 계속 반장 틀을 차리겠소?”  상순은 정색했다. “박 반장은 영원히 나의 동창생이자 문화과 스승이고 반장이오. 내 조장 따위가 무슨 지도자요? 이후에 스스럼없이 보내기요. 동무들은 무슨 일이 있으면 용구 과장하구 창남 과장하구 많이 토론해서 처리하오.” 용구와 영호는 코를 벌름거리며 이쪽을 건네다 보다가 성우의 눈길이 가자 밥사발을 들어 막으며 숟가락질을 하는 척했다. 성우는 상순이 고마워 영월구 역에까지 따라 나와 바래였다. 용구와 창남이랑 멀리 뒤따라오면서 성우를 흘겨보며 뒤통수에 손가락질을 해댔다. “뒤에서는 헐뜯다가 앞에선 제일 가까운 척하는 거 봐.” “누가 보자 해 기차역까지 따라 나와?” “그러게! 오징어처럼 배때기에 먹물이 꽉 차면 전투도 잘 한답데? 흥!” 상순은 용구와 창남을 흘겨보았다. “쯧쯧, 사내들이란 입이 무거워야 해.” 혀를 홀랑 내미는 창남과 용구를 보고 상순은 “무슨 일이 있으면 함흥 촌에 와서 알리오.”라고 당부했다. 용구는 눈물이 글썽해났다. “김 조장, 일찍이 돌아오십시오.” 창남은 상순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관건적인 시각에 집으로 돌아가서 뭘 하오?” 상순은 그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고 기차에 올랐다. 공안국을 고생스레 세워놓은 상순이라고 국장을 임명하는 이때가 관건적인 시각인줄을 몰랐겠는가? 허나 그는 벼슬을 초개같이 여기고 그간 반년 넘어 부모형제를 찾아보지 못한 불효가 너무나도 속에 걸리었던 것이다. 상순이 땡볕을 맞으면서 패랑천산 앞에 이르렀을 때다. 아름드리버드나무가 꽉 들어선 들판에서 숱한 사람들이 물도랑을 판다, 버드나무뿌리를 파낸다 하면서 왁작 떠들며 일하는 모습이 보였다. 상순은 삽질에 괭이질 하는 새하얀 옷차림의 사람들 속에서 한창 괭이질하는 할아버지를 찾아냈다. 그는 권총집을 뒤로 젖혀 한손으로 누르며 그리로 달려갔다. “할아버지!” “오, 상순이 왔구나.” 병완은 괭이를 짚고 서서 놀라했다. “무슨 일로 불시에 왔니?” 상순은 할아버지 괭이를 받아 버드나무뿌리를 찍어냈다. “집으로 와 본지 오랩니다. 모두 무사히 계셨습니까?” “오, 그래.” 병완은 마을 사람들을 돌아보며 “한 쉼 쉬기요.” 하고 소리쳤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상순의 옆으로 다가왔다. 병완은 하얀 머리수건으로 목에 흐르는 땀을 닦으면서 권총을 차고 괭이질하는 막내손자를 대견스레 바라보았다. “그래, 영월구 치안은 잘 됐니? 국민당 놈들이 또 나타났니?” 상순은 버드나무뿌리를 두 손으로 뽑아내며 말했다. “이젠 전국이 해방됐습니다. 허나 장개석 국민당 반동파들은 대만에 달아나서 의연히 대륙에 기여들 꿈을 꾸고 있습니다. 평화 년대라고 해도 경각성을 늦추어선 안 됩니다. 여기 지주들도 새로운 동향이 없습디까?” “없다. 장학산과 장충국이 붙잡혀 감옥에 간 후 여기 지주들은 대가리를 쳐들지도 못한다. 장학산의 집을 청산하는 게 옳잖은지 모르겠다.” 상순은 괭이를 놓고 구덩이에서 몸을 날려 뛰어 올라왔다. “할아버지, 저쪽으로 가서 얘기합시다.” 조손 두 사람은 아름드리버드나무가 빼곡히 들어선 나무숲 속으로 들어갔다. “할아버지 생각이 맞습니다. 우리가 만약 장학산과 장충국이 항일 유공자라고 해 집을 청산해 빈농들에게 나눠 주지 않으면 개인 인정에 얽매여 철저히 지주를 청산하지 않았다는 말을 들을 수 있을 거 같습니다. 장학산과 장충국의 지금 정치표현을 보면 착취계급의 본질을 고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권총과 빚 문서를 숨겨둔 건 국민당이 쳐들어오면 기회를 타 복벽을 꿈꾸고 인민들을 계속 착취하자는 게 아니고 뭡니까? 그들 부자는 겉으로는 인민정권에 복종하는 척했지만 웃음 속에 칼을 품은 적입니다. 원수입니다. 그 놈 부자 놈들은 우리에게 밭을 청산 맞은 걸 속에 원한을 품고 있으면서 시퍼런 칼을 갈아왔습니다. 이런 안팎이 다른 놈들이 더 무서운 놈들입니다.” 상순이 삼도만에 공안일군을 파견해 조사해보니 조소호가 집으로 돌아왔다고 했다. 조소호는 토비숙청 때 기실 자기 안해을 릉욕하고 집까지 빼앗은 전보흥 소교한테 원한을 품고 원쑤를 갚자고 기의를 일으켰던 것이다. 그는 토비숙청이 끝나면 공산당군이 토비 문서질을 한 자기를 총살할가봐 도망쳤다. 그런데 장학산과 기의한 숱한 토비들이 총살당하지 않고 마을에서 편안히 사는 것을 보고 마을에 되돌아왔던 것이다. 그의 판단은 옳았다. 인민정권은 기의를 일으킨 그의 공훈을 표창하였으며 토비과거를 묻지 않고 관대하게 처리했던 것이다. 그는 말을 기르면서 가족과 함께 편안히 살고 있었다. “그럼 아예 네가 왔을 때 장학산의 집을 청산해버리자.” 할아버지 제의에 상순은 과단성있게 결단을 내렸다. “예, 그렇게 합시다.” 병완은 수척해진 막내손자를 보더니 손을 잡고 마을 사람들 쪽으로 되걸어왔다. “너 애비하구 처를 빨리 찾아봐라. 오늘 손비하구 함께 소서구에 김매러 가는 거 같더라. 너 애비는 지학사에게 찍히운 옆구리 아파 물도랑을 파는 일에도 나오지 못한다. 그러면서도 살겠다고 호미를 들고 며느리를 따라 나섰다. 막내손비는 딸애 셋을 데리고 집일을 도맡아 하느라고 허리를 펼 새 없이 맴돈다. 그러나 집 근심을 하지 말고 공안사업을 잘 해라. 넌 우리 집안의 기둥이다.” 상순은 “예, 명심하겠습니다.”라고 하며 물도랑을 손으로 가리켰다. “이렇게 긴 도랑을 파서 뭘 합둥?” 병완은 상순의 손을 놓았다. “여기에 논을 풀려고 그런다. 장차 저 아래 지학사의 지개틀이고 이펑거의 습개 구덩이를 메우고 논을 풀자면 물이 많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미리 저 멍지뫼산 앞으로부터 칼산 앞으로 해서 여기까지 큰 물도랑을 판다. 소서구나 패랑천산 비탈이나 계수동 쪽도 거의 다 밭을 일구었다. 장차 버드나무가 들어선 이 들판에 논을 풀어야 우리 마을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 살 거 같다.” 상순은 머리를 끄덕이었다. "예- 정말 원견이 있는 계획입구마." 마을 사람들은 모두 모여와 상순을 대견스레 바라보았다. “여러분, 두 번째 고향을 건설하느라고 수고 많습구마. 영월구에 가다나니 힘을 보태주지 못해 미안합구마. 정말 연세 계신 할아버지께서 아직도 힘든 일을 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불효를 저지른 죄송한 마음이 앞섭니다. 이제 당장 위대한 중국 공산당이 영도하는 강대한 나라가 이 땅에 우뚝 일떠설 것입니다. 우리 이 지구의 치안이 안정되면 두 번째 고향에 돌아와 조부모와 부친께 효성을 하면서 여러분들과 함께 두 번째 고향을 멋지게 건설해 볼 예산입니다.” 그 말에 병완과 마을 사람들은 놀라했다. “권총을 찬 공안일군이 얼마 좋다고 저래?” 사람들은 술렁거리었다. 상순은 집을 인차 들리어 보고 돌아가려고 바삐 칼산과 패랑천산 사이 골 안으로 줄달음쳐 소서구 밭으로 갔다. 저 멀리 밭에서 불볕을 맞으면서 아버지와 명옥이 긴 밭고랑을 타고 기음을 매고 있었다. 명옥은 복자를 업고 순자와 금순은 앞뒤에서 풀을 뽑으면서 나가고 있었다. 밭에는 범이 새끼를 칠 지경으로 풀이 들어섰다. “아무리 혁명을 하더라도 부모처자를 고생시키면서 불효를 저지르는 건 자식이 된 도리가 아니야. 어떻게 조부모와 부모에게 효도를 하면서 사업도 잘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이때부터 상순은 효성과 사업을 다 잘 할 수 있는 길을 궁리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순자 위로 영자, 영돌과 선돌을 잃은 후 명옥은 낳으라는 아들은 낳지 못하고 순자 아래로 금순과 복자를 줄줄 낳았다. 큰딸 순자의 태몽은 이상했다. 명옥은 어데서 생겼는지도 모르고 금가락지를 손가락에 낀 태몽을 꾸고 광복 전해에 순자를 낳았다고 한다. 둘째딸 금순의 태몽은 이러하다. 명옥이 회의하러 촌 사무소에 갔다가 모범이 돼 상품을 타서 두 손에 꼭 쥐고 집으로 돌아와 보니 금비녀가 아니겠는가. 그 태몽을 꾼 뒤에 둘째딸 금순을 낳았다. 셋째딸 복자를 임신하기 전에 웃새집 큰 시어머니는 “작은집 각시, 이번에는 무슨 태몽을 꾸었소?” 하고 물었다. 명옥은 부끄러움을 겨우 참으면서 대답했다. “큰 시어머니, 이번에는 숱한 말들 가운데 특별히 새하얀 백마가 어찌나 고운지 백마 목을 꼭 껴안고 집에 왔습꾸마.” “음, 그럼 이번에는 딸은 딸인데 고운 딸이겠구나.” 웃새집 큰 시어머니 설명처럼 백마 혼을 탔는지 살색이 새하얀 고운 딸을 낳았다. 상순은 이, 삼년에 하나씩 딸 셋을 줄줄 낳자 기막혔다. 그는 셋째 딸 뒤에는 아들을 낳으라고 셋째 딸의 이름을 복자로 지었다. 상순은 앞에서 기음을 매느라고 땀벌창이 된 아버지한테 다가갔다. “아버지, 집에서 얼마나 고생이 많았습둥? 줍소. 내 맵시다.” 그는 호미를 빼앗아 쥐고 풀을 왕왕 매며 나갔다.  “아빠!” 순자와 금순은 풀을 쥔 두 손을 높이 쳐들고 달려 왔다. 상순은 호미를 놓고 코 범벅이 된 순자와 금순을 한품에 끌어안았다. “에이, 요것들아, 이 더운데 풀을 뽑았니?” “예, 엄마 밭고랑에 풀이 영 많습니다.” 상순은 호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내 순자와 금순의 코에서 풀럭거리는 콧물을 닦아주었다. 명옥은 다가와 “영월구에서 고생하지 않았소?” 하고 인사했다. “양, 괜찮소. 애들을 데리고 고생했소.” 땀벌창이 된 명옥의 잔등에서 복자는 쌔근쌔근 자고 있었다. 상순은 “더위를 타겠소.” 그는 손바닥으로 애 얼굴을 비추는 햇볕을 가리면서 새하얀 볼을 들여다보며 매만지었다. 상순은 온 오전 기음을 매고 점심에야 집으로 내려갔다. 그는 소서구 어구를 지나가면서 높다란 토성 안 장학산의 덩실한 집을 들여다보았다. 그때 양산을 든 장미련이 토성 안에서 나오다가 상순을 보고 해시시 웃으면서 지분거렸다. “오빠, 언제 왔소? 권총까지 척 차니 세상 멋지구먼요.” “오빠? 쳇,” 상순은 누가 듣지나 않았나 사위를 두리번거린 후 욕설을 퍼부었다. “누구를 오빠라고 해. 다시 오빠란 소리를 쳤다간 주둥이를 막 막아 쳐 놓겠다.” 그 소리에 노처녀 미련은 입을 싸쥐고 토성 안으로 되들어가 버리었다. “저 집을 청산하면 누구를 주면 좋을까?” 그러자 기준은 “우리 가지자. 집에 비새서 말이 아니다.” 라고 했다. 허나 상순은 한숨을 후 내쉬더니 아버지를 말리었다. “아버지, 할아버지나 내나 당원이기에 그렇게 못합니다. 앞장서 자기 욕심만 차려서야 됩둥? 군중들이 뭐라겠습둥?” 상순은 집으로 돌아가자마자 집을 빙빙 돌아가면서 살펴보았다. 확실히 이영을 제때에 잇지 못해 간장 물 같은 것이 벽을 타고 줄줄 내린 흔적이 보이었다. 생활이 너무 궁핍해 상순과 명옥은 딸을 많이 해 쓸 데 없다고 밤이면 남에게 줄 토론도 했다. “큰딸은 남을 주지 못하오.” “그렇다고 셋째 딸을 남에게 주겠소?” 밤에 또 그 토론을 하는데 상순은 새하얗게 생긴 복자를 특별히 고와하기에 남에게 주지 못한다고 잡아뗐다. “그럼 저 둘째를 줄가?” “글쎄. 허나 제 새끼를 정작 남에게 주자니 속이 좋잖소.” “나도.” 숨을 죽이고 그 말을 듣던 애들은 이불을 쓰고 눈물을 흘리면서 흑흑 흐느꼈다. 우는 애들을 우연하게 발견한 후 상순과 명옥은 다시는 남에게 줄 궁리를 하지 못했다. 상순은 집이 아무리 궁핍해도 자기 욕심을 차릴 수 없었다. 공산당원은 언제나 군중의 이익을 첫 자리에 놓아야 하고 고생은 앞장서 하고 향수 앞에서는 뒤로 물러서야 했던 것이다. 점심 숟가락을 놓자마자 상순은 호미를 들고 먼저 촌 사무소에 가 기다리었다. 할아버지가 촌 사무소에  들어섰다. “할아버지, 장학산의 집을 청산해서 소서구에 있는 김대동과 주현경을 주면 어떻습니까? 해방됐지만 대동과 현경은 아직도 옛날 조선에서 들어와 살던 그 오두막에서 살고 있습니다.”  상순의 말에 병완은 인차 대답했다, “좋다.” 병완은 머리를 끄덕이었다. 그러나 좀 생각하더니 뒷말을 달았다. “대동과 현경은 가난한 빈고농이 맞다. 그런데 맨 조선족 빈고농민에게만 주면 한족들이 또 공산당 간부들은 한족지주의 재산을 빼앗아 조선족에게만 준다고 하지 않겠니?” “예~ 건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병완은 곰방대에 담배를 쑤셔 넣고 불을 붙여 물고 빨며 말했다. “내 생각엔 그 큰 집을 두 사람에게 주지 말고 사랑채까지 세 사람에게 주면 좋을 거 같다. 몸채를 주현경과 산동에서 온 한족농민 위수해에게 주자.” “예, 그게 좋겠습니다. 헌데 이 다음 장학산과 장충국이 개조를 잘 해 돌아오면 어데서 살게 하겠습니까?” “사랑채에서 살게 하면 되지. 뭐. 그 놈들이 공산당 천하에서 이전처럼 주인 행세를 하면서 살게 하겠니? 동서 사랑채도 쉰 평방씩이나 되는데 그들이 살긴 문제없다.” “그렇게 합시다.” 그날 점심으로 병완과 상순은 흥수랑 민병들을 데리고 소서구로 장학산의 집을 청산하러 갔다. 그때 춘실은 자기 집에 와서 남편을 데려 내가는 상순을 보고 입을 비쭉거리었다. “공안국에 가서 권총을 차더니 남의 나그넬 종 다르듯 해? 저 나그네를, 남한테 끌려 다니긴? 한족지주를 청산해 우리한테 개뿔이나 차례진다고 그래? 괜히 세상이 뒤바뀌면 한족지주들에게 목이 날아나자고? 흥!” 흥수는 춘실에게 눈을 흘기었다. “중국이 몽땅 해방됐는데 무슨 떡 대가리 같은 국민당 소릴 치오?” 흥수는 장총을 둘러메고 상순과 민병들을 따라 나섰다. 토성 안에 총을 비껴든 민병들이 상순과 병완을 따라 들어서자 미련은 집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상순은 집안에 들어가 질겁해 집구석에 쫑그리고 앉은 미련에게 호통쳤다. “미련아, 들어라. 장학산과 장충국은 공산당과 한사코 맞서 국민당 반동파와 손잡고 복벽을 꿈꿨다. 너네 집을 청산해 가난한 백성 주현경과 김대동, 위수해에게 나눠준다. 넌 짐을 싸들고 서쪽 사랑채에 나가라. 이 몸채는 주현경과 위수해에게 나눠주고 동쪽 사랑채는 김대동에게 나눠준다.” 그러자 미련은 눈물을 똑똑 떨어뜨리면서 “그럼 우린 어데서 살라오?” 라고 하며 발버둥질까지 쳐대였다. 병완은 털끝만치도 양보 없었다. “이 집도 우리 지은 집이다. 너 일가는 일을 하지도 않고 소서구의 우리 집과 김대동, 주현경, 위수해네를 착취해 이런 집을 짓고 호의호식하면서 살았다. 가난한 백성들을 착취해 얻은 지주의 재물은 몽땅 임자인 가난한 백성들에게 돌려줘야 한다.” “당장 집을 내고 나가!” 미련은 눈물방울을 똑똑 떨어뜨렸다. 그날로 오두막에서 살다가 토성 안의 덩실한 집을 분배받은 주현경과 위수해, 김대동은 기뻐 벙실벙실 웃으면서 어깨춤을 덩실덩실 추었다. 오후에 상순은 소서구 밭에서 기음을 매다가 천지꽃산 아래 상우지에서 상우 형님과 아주머니와 함께 기음을 매는 공학을 발견했다. “저 자식이 공부는 하지 않고 기음을 매고 있어?” 쉼에 상순은 상우지 밭머리에 가서 공학의 곁에 가 앉았다. “삼촌, 어째 공안국으로 가지 않습니까?” “이영이나 이어주고 갈 예산이다.” 상순은 공학의 어깨에 손을 얹고 맏조카를 대견하게 바라보았다. “공학아, 공부를 명심해 해라. 나를 봐라. 집이 가난해 어려서부터 너 엄마 앞에서 풀이나 뽑고 열세 살부터 가대기질을 하다나니 학교 문에도 가보지 못했다. 사회에서 나와 사업하자니 막히는데 많구나. 연말에 사업총화를 쓰라고 해도 쓰지 못하지 사업계획을 세우라고 해도 세우지 못하지. 그래서 전번에도 목숨을 걸고 국민당 자위대 놈들을 숙청하고서도 치하를 받기는커녕 내 해놓은 일을 남이 총결해 가져가는 꼴이 됐다. 장차 평화 년대에는 글이 없으면 큰 노릇을 못한다.” 그때 상순의 아주머니는 세 귀 눈을 흘기며 입귀로 이런 말을 흘리었다. “별 우리 일을 시켜 공부를 못한 상 한다.” 상순은 아주머니 본 병을 아는지라 풀을 뽑는 조카 순애를 희구해 보다가 머리를 숙이고 뭔가 궁리하는 공학을 돌아보았다. “용정에 되돌아가 의학을 배워라. 이전에 증조부께서 말씀하시지 않던? 네 고조부는 이씨 왕조 어의야. 큰집 형내네만 의술을 물려받아서야 죽음의 변두리에서 왔다 갔다 하는 숱한 환자를 구할 수 있겠느냐? 네가 의사로 되었다면 영자랑 영돌이랑 선돌이랑 죽었겠니?” 공학은 머리를 들면서 “삼촌, 내 꼭 의학을 배워 의사로 되겠습니다.”라고 다짐했다. “동선은 어디로 갔니?” “그 자식은 농업중학교에 가서 공부를 하는 척 하면서 조선으로 길림으로 장사를 다닙니다.” “설복인 농업중학교에서 공부를 하지?” “예, 그 애는 시랑 아주 잘 써서 학교에 소문이 자자하답구마.” 상순은 머리를 끄덕이었다. “난 몇 해 후에 의사 맏조카를 기다리겠다.” “예, 기다려 줍소.” 상순은 맏조카를 미더운 눈길로 보면서 자기 집 밭에 돌아와 기음을 왕왕 매 재끼었다. 상순과 명옥이 기준과 함께 한창 잔등이 물 자루 되게 땀을 줄줄 흘리며 기음을 맬 때다. “김 국장! 김 국장!” 산비탈 아래에서 누가 부르는 소리가 들리었다. 모두들 허리를 펴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창남과 용구가 주먹을 쥐고 비탈 밭으로 헐금씨금 달려올라 오고 있었다. “김 국장, 빨리 공안국으로 돌아갑시다.” 상순은 호미를 쥔 채 어안이 벙벙해 서 있었다. 용구가 답답한 듯 발을 탕탕 굴렀다. “현 당위와 상급 공안국에서 국장 임명장이 내려 왔습니다.” 상순은 “농담을 하지 마오. 우리 박 반장을 두고 나를 국장을 시키겠소?”라고 했다. 창남은 “성우 동무는 부국장을 해도 과분하지. 흥!” 하고 콧방귀까지 뀌었다. 옆에서 용구가 창남의 옆구리를 툭 치고 나서 상순의 눈치를 흘끔 쳐다보았다. “박 반장 허물을 절대 하지 말라는데.” 기준은 기뻐 상순의 손을 잡고 “축하한다.”라고 하며 얼싸 안아 주고 나서 창남과 용구에게 구레나룻이 더부룩한 얼굴을 돌리었다. “고맙네. 이 산골에까지 찾아오다니.” “별 말씀을요.” 창남과 용구는 기준과 명옥의 손에서 호미를 빼앗아 상순과 함께 매던 밭을 다 매주었다.                                                      석별의 정 햇볕이 숫구멍을 쟁글쟁글 쪼이었다. 기준과 명옥은 창남과 용구가 호미를 빼앗아 기음을 매자 습관처럼 낫을 들고 골짜기에 내려가 쑥대랑 다부제기랑 땔나무를 해 지고 이는 것이었다. 상순은 황급히 호미를 창남에게 주고 달려가 아버지 진 땔나무를 빼앗아 지었다. “상한 옆구리로 어떻게 이 무거운 땔나무 짐을 진다고 그럽니까? 아직 쑥대랑 젖어서 무척 무겁습니다.” 기준은 아픈 허리를 상을 찡그리며 펴면서 말했다. “예로부터 충신은 효자가 없었다고 했느니라. 집 근심을 너무 하고서야 어찌 공안국 국장을 잘 하겠느냐? 집 근심을 하지 말고 공안국 국장이나 잘 해라. 우리 집안에 네처럼 국장급을 가진 양반도 드물다.” 아버지의 그 말씀에 상순은 코마루가 시큼 해났다. 용구는 호미를 창남에게 주고 뛰어가 “아주머니, 주오.” 라고 하며 명옥의 머리 우에서 나무 단을 내리워 둘러메었다. 기준은 뒤에서 걸으면서 중얼거렸다. “난 널 공부 시키지 못한 게 한이다.” 상순은 나무 짐을 지고 아버지를 돌아보았다. “아버님,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맙소. 가난이 죄입지. 다 내 탓입니다. 장사를 해서 숱한 돈을 벌었을 때 공부를 했더라면 얼마나 좋겠습둥? 이제 공작을 하면서 짬짬이 공부를 하면 됩꾸마.” “에이고, 일이 바쁘겠는데 언제 공부를 하겠니? 쯧쯧쯧.” 기준은 뒤에서 혀를 끌끌 찼다. 상순과 창남 그리고 용구는 점심을 숟가락을 놓자마자 기차를 놓칠세라 떠나야만 했다. 상순은 간장 같은 빗물이 줄줄 흐르는 이영 밑과 얼기설기 갈라터진 바람벽을 바라보면서 한숨을 후 내쉬었다. “이영을 이어 놓고 가자고 했는데 또 잇지 못하고 가는구나.” 기준은 바깥에 나와 상순을 마구 밀어 떠내 보냈다. “작작 근심하고 가라. 내 잇지 않으리라구.” “아버지 옆구리 아파 어떻게 잇겠습니까?” “근심 말래도 그러니?” 명옥은 복자를 업고 순자와 금순을 양손에 쥐고 바래었다. 상순은 쪼그리고 앉더니 순자와 금순을 한품에 꼭 안고 뽀뽀를 해 주었다. “아빠, 이 담 올 때 엿 사탕을 사줍소. 예?” 금순이 입을 쫑긋거리자 순자가 말리었다. “아빠, 돈이 없다. 그러지 마.” “아니다. 이 담 꼭 사다줄게.” 상순은 코마루가 시큼해 남을 금치 못하고 우쭐 일어나 “아버지, 무사히 계십시오. 여보, 애들을 데리고 수고하오.” 라고 하고는 몸을 돌려 울안을 나섰다. 그때 상순의 사촌여동생 봉선이네 맏아들 성환이 순자와 함께 오후에 함흥학교로 가자고 찾아왔다. 상순은 조카들의 머리도 일일이 어루만져 주면서 “공부를 잘 해라.”라고 했다. “예. 큰아버지.” 성환은 외탁을 해서 둥글 넙적한 얼굴에 조개턱이었다. 그의 아버지 김한봉은 함흥 촌소학교 교원을 하고 있었다. 어떤 때에는 농업중학교 교원도 해 처조카인 설복을 가르치기도 했다. 함흥 촌에서 한봉의 아버지 김영진 구장으로부터 한봉까지 글이 제일 많은 선비라고 모두 떠받들었다. 한참 후에야 상순은 머리를 들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창남과 용구를 따라잡았다. 창남과 용구도 자기들의 국장이 기분이 상해하는 것을 보고 묵묵히 발걸음만 다그쳤다. 그들은 어느새 나무숲이 우거진 패랑천산 앞에 이르렀다. 하늘을 찌르며 우뚝 솟은 절벽위로 푸르른 하늘을 배경으로 산새들이 자유로이 날아예고 있었다. 창남은 절벽 밑과 버드나무숲을 둘러보더니 권총집을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리었다. “야, 이런 곳에 범이라도 나타나면 어쩌겠니?” “야, 산에 와서 범 말을 하지 마오. 범이 제 흉을 하면 온다고 하잖소.” 그 말에 창남은 입을 꾹 다물고 버드나무숲과 산을 두리번거리며 걸었다. 상순은 할아버님을 찾아보려고 패랑천산 앞의 버드나무숲 속에서 물도랑을 파는 마을 사람들 쪽으로 달려갔다. 그때다. “사람 살려라!” “범이야!” “곰이야!” 상순이네가 달려가다가 깜짝 놀랐다. 마을 사람들은 물도랑을 파다가 구덩이에 서 있었다. 버드나무숲속에서 숱한 범들이 물도랑 우의 흙 둔덕에서 왔다 갔다 하며 으르렁거리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땅! 상순은 권총을 범 무리에 쏘며 명령했다. “마을 사람들을 구해야 한다! 범을 쏘라!” 창남과 용구도 용감하게 달려 나가면서 범 무리에 총을 쏘았다. 그들 셋이 총을 쏘자 범들은 질겁해 사람들의 머리 위로 물도랑을 뛰어 넘어 꼬리 빳빳해 도망쳤다. 사람들은 그 놈 범들을 삽으로 치려고 휘둘렀다. 땅! 범 한 마리가 상순이 쏜 총에 엉덩이를 맞고 흙무지에서 깊숙한 물도랑에 뛰어들었다. “쳐라!” 병완은 삽을 둘러메고 물도랑 안에서 날치는 범에게 덮쳐들었다. 총에 맞은 범은 성이 나 날뛰며 병완에게 덮쳐들었다. 범이 씽 날아 덮쳐올 때 병완은 몸을 도랑벽에 피하며 삽날을 쳐들어 범의 아가리를 찔렀다. 퍽! 삽날이 짝 벌린 범의 아가리를 짜갰다. 상순은 권총을 더 쏠 수 없어 권총집에 넣고 물도랑 안에 뛰어들었다. 용구과 창남도 물도랑 안에 뛰어들었다. 상순은 태연의 삽을 빼앗아 돌아서며 꼬리몽둥이를 휘두르는 범에게 덮쳐들어 마구 찍어댔다. 범은 숱한 사람들이 덮쳐들자 겁을 먹고 한 키도 넘게 깊은 물도랑에서 뛰어 나가려고 몸을 날렸다. 허나 몸이 도랑벽에 걸린 채 네 발통을 버둥거렸다. 그때 병완과 용구가 범의 뒤다리를 잡아 확 당겼다. 범은 무서운 소리를 지르면서 물도랑 바닥에 떨어졌다. 병완과 용구는 놀라운 완력으로 범의 뒷다리가 불러지게 비틀어댔다. 그때 상순과 창남이 삽으로 범의 대가리를 탁탁 내리찍었다. 삽자루가 끊어지자 상순과 창남은 범의 목을 끌어안고 내리 누르며 무쇠주먹으로 대가리를 쳐댔다. 숱한 마을 사람들이 욱 몰려들어 돌멩이와 삽, 괭이로 범을 만신창이 되게 때려 끝내 범을 잡았다. “그만! 그만!” 병완은 그제야 끊어지다 싶게 너덜거리는 범의 뒷다리를 놓으면서 소리쳤다. “범은 죽으면 가죽을 남긴다지 않소. 너무 두드리면 범의 가죽을 벗겨 팔아먹지 못하겠소.” 마을 사람들은 물도랑 바닥에 쭉 늘어진 범을 발로 툭툭 건드리며 떠들어댔다. “에이고, 범이 한 무리씩 출몰하는데서 어떻게 벼농사를 짓겠소?” “글쎄 말이오. 국민당과 악질지주가 다 없어지니 이젠 또 범과 곰의 성화에 어디 농사를 짓고 살겠소?” 태연은 끊어진 삽자루와 삽날을 양손에 쥐고 어이없어 머리를 홰홰 돌리었다. “우리 황무지를 개간할수록 범들이 우리와 터 싸움을 한단 말인제라.” 흥수도 한숨을 푸 내쉬며 중얼거렸다. 병완은 어지러워지는 민심을 수습하려고 들었다. “범을 잡아 가죽을 팔고 범의 고기까지 먹으면 좀 좋아 그러오? 그까짓 범과 곰, 승냥이들이 올 테면 오라지. 안 그렇소?” 상순도 나섰다. “여러분, 총을 든 일본 놈들과 국민당 토비 놈들도 우리 살 앞길을 막지 못했습니다. 오늘 보지 못했습니까? 우리가 힘을 합치면 범 한 마리 아니라 한 무리라도 겁날게 없습니다. 후에 이 나무숲 속의 벌판에 일하러 다닐 땐 혼자 다니지 말고 꼭 여럿이 짝을 지어 다니십시오. 내 진수해 허영주 서기와 말해 민병들에게 준 총을 잠시 거둬가지 말게 하겠습니다. 범이나 곰을 만나면 총으로 사냥하십시오.” “우리 김 국장 말씀이 옳습니다. 그대로 하십시오.” 창남의 말에 모두들 머리를 들고 두리번거렸다. “김 국장이라니?" "누가?” 용구가 상순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저 분은 우리 영월구 공안국의 국장으로 됐습니다.” “와!” 모두들 상순에게 엄지를 내두르며 축하했다. 병완은 놀랍고도 반가와 상순을 꽉 끌어안고 너부죽한 잔등을 다독여 주었다. “장하다! 장해! 넌 우리 집안과 마을 사람들의 영광이다!” 마을 사람들은 손을 맞잡아 팔로 만든 가마에 상순을 앉히고 물도랑 안에서 왔다 갔다 하면서 웃고 떠들며 축하해주었다. 병완은 너무 기뻐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어깨춤을 덩실덩실 추었다. “얼씨구, 좋고 좋다!” 태연도 상진도 흥수도 춤판을 벌렸다. 상순은 손가마에서 내렸다. “할아버지, 야수들이 자주 출몰하는 이 곳에 어째 논을 풀자고 그럽둥? 조개덕 앞에다 풀면 마을도 가깝고 좋겠는데 말입니다.” 그 말에 병완은 상순의 손을 잡고 “여긴 네 애비가 논물 때문에 지학사의 괭이에 맞아 옆구리를 상한 곳이 아니냐? 우리 새 세상이 왔는데 난 기어이 여기 지학사의 지개틀을 빼앗아 논을 풀고 살 예산이다.”라고 했다. 그제야 상순은 할아버지가 여기에 논을 푸는 깊은 뜻을 알게 됐다. 그는 물도랑 옆의 흙무지 우에 올라서서 마을사람들에게 말했다. “여러분 감사합니다. 난 여러 분들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고 영월구와 진수해 일대의 치안을 잘해 여러분들이 마음 놓고 두 번째 고향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행복하게 살게 하겠습니다. 이제 영월구에 돌아가 치안사업을 하고 틈이 있으면 돌아와 국민당 토비들과 악질지주를 숙청하듯이 패랑천산과 칼산, 멍지뫼산, 천지꽃산, 계동 일대에서 야수들이 얼씬하지 못하게 쫓아버리겠습니다. 여러분들은 너무 근심하지 말고 우리 할아버지를 따라 이 벌판에 논을 풀어 풍작을 안아와 풍족하게 살 것을 바랍니다.” 마을 사람들은 머리를 끄덕이며 안도의 숨을 내쉬더니 물도랑을 파기 시작했다. 병완은 막내손자에게 “마을 근심 하지 말고 공안국 일을 잘 해라.”라고 했다. “할아버지, 무사히 계십시오.” 상순은 할아버지와 마을 사람들에게 인사하고 떠났다. 창남과 용구는 상순을 따라 성큼성큼 칼산 쪽으로 걸어갔다. 어느 결에 그들의 그림자가 물도랑을 파는 마을 사람들한테까지 길게 늘어났다. 병완은 범이 덮쳐든 사건이 있은 후 상순의 말처럼 악질지주를 잡아내듯이 산에서 범과 곰을 잡아내야 하겠다고 작심했다. 병완과 마을 사람들이 물도랑을 파고 범을 수레에 싣고 마을로 돌아 올 때 해가 이미 서산에 기울어졌다. 벌겋게 타오르는 저녁노을은 환성을 지르며 태양을 맞이했다. 지개틀과 이펑거지를 품은 아름드리버드나무숲은 바람에 흐느적이었다. 패랑천산과 칼산에서는 이리떼와 호랑이의 울음소리가 무섭게 울렸다. 그런데 마을 동구 밖에서 뜻밖에도 빨래를 이고 방치를 쥐고 태평강으로 가는 춘실과 딱 마주쳤다. “국장 어르신이 되더니 못 본 척 하오?” 춘실은 걀쭉한 얼굴에 얇은 미소를 지었다. “오, 그간 잘 있었소?” 상순은 알은체를 하며 지나가려고 했다. “이보, 내 할 말이 있소.” 춘실이 빨래를 인 채 멈춰 섰다. 흘러내린 머리카락 사이로 그녀의 입귀에 숱한 사연이 아른거리는 상 싶었다. 상순은 창남과 용구를 보고 먼저 가라 하고 춘실의 옆에 다가갔다. “무슨 일이요?” 춘실은 대답 대신 굳어진 표정으로 빨래함지를 내리워 두 손으로 안고 태평강 가로 걸어갔다. “무슨 일이오? 난 공안국 일이 바빠 영월구로 빨리 돌아가야겠소.” 상순은 춘실의 손에서 빨래함지를 빼앗아 들고 강가로 가서 빨래 돌을 찾느라고 서성거렸다. 그때 춘실은 뒤따라 가다가 불시에 방치로 상순의 뒤통수를 내리쳤다. 쉭 소리를 듣고 상순은 빨래함지를 들어 날아드는 방치를 막았다. “왜 이래?” “너도 사람 새끼야?!” 춘실은 방치로 마구 패댔다. 상순은 함지를 들어 막다가 함지를 내려놓았다. 그는 손을 뻗쳐 날아드는 방치를 빼앗아 빨래 함지에 내던졌다. “어째 이러니?” “너도 사람 새끼야? 을준이 학교로 가게 됐다. 제 새끼를 싸지르고 한 번도 찾아보지도 않니?” 상순은 저쪽 강 건너에서 기다리는 창남과 용구를 두리번거리며 소리를 죽여 말했다. “좀 작작 떠들어라. 저 동무들이 들으면 어쩌니?” “야, 들으면 어째? 네 같은 나쁜 놈을 온 세상 사람이 다 알게 해야 해. 눈이 멀었지. 네 같이 건방진 건달을 공안국 국장을 다 시키다니? 국장이면 다 사람인줄 아니?” 상순은 강 건너 쪽을 흘끔거리다가 창남과 용구가 패랑천산 쪽으로 가는 것을 보고 나직이 말했다. “야, 을준인지 뭔지 하는 애는 너와 흥수가 난 애가 아니고 뭐니? 나와 무슨 관계있느냐?” 춘실은 어이없어 머리를 홰홰 저으며 외까풀 깜장 눈으로 표독스럽게 쏘아보며 대들었다. “뭐라고? 이 뻔뻔한 새끼야. 이 태평강과 버드나무숲이 다 웃는다. 네 놈이 여기버드나무숲 속에서 그 애를 싸질러 만들어놓고 지금 와선 나눕겠니?” “떠들지 말래도. 너 정신 나갔니?” “떠들면 어째? 온 세상 사람들이 네 놈 새끼는 세상에 둘도 없는 바람둥이란 걸 알게 해얀다!” “다른 일 없으면 난 가겠다.” 상순은 발뺌을 하려고 들었다. 춘실은 상순의 팔소매를 붙잡고 이를 앙다물고 고래고래 고함쳤다. “그래 기어이 제 새끼를 한 번도 찾아보지 않을 예산이야?” 상순은 춘실의 손을 홱 뿌리치며 “흥수 찾아보면 됐지. 바쁜 사람을 붙들고 왜 이래?!” 하고 세귀눈을 부라리었다. “내 이제 영월구를 찾아가 네 놈을 온 시내에서 다 알게 떠들겠다.” 상순은 주춤 멈춰 서서 춘실을 독기서린 눈길로 쏘아보았다. “내 앞길을 막았다간 가만 놔둘 거 같아?” “그래 권총으로 쏘기라도 하겠단 말이냐? 아예 여기서 죽여라! 죽여!” 춘실은 머리카락을 날리면서 머리를 상순의 옆구리에 대고 마구 들이 받으면서 왕왕 울음보를 터뜨렸다. “춘실아, 이러지 말라. 네가 이러면 나도 가슴이 터지는 거 같다. 우리 일은 내 싫어서 이렇게 된 것도 아니지 않고 뭐냐? 다 우리 아버지 결정한 일이니 나도 별 수 없었다. 너도 흥수한테 시집가서 범순이랑 낳았으면 재미있게 살아라. 우린 이젠 다 가정이 있고 자식들이 있으니까 서로 잊고 살자. 을준이, 을준이 하는데 낸들 어쩌라니? 네가 백과부한테 준 게 잘 못이지. 너나 자주 찾아가 봐라. 낸들 어쩌겠니?” “군정대학인지 무슨 대학인지 다니더니 말재간이 꽤 늘었구나. 호호호.” 상순은 강 건너를 보면서 말하다가 입을 싸쥐고 웃는 춘실에게 이상한 눈길을 보냈다. “네 놈을 죽이고 내가 죽으려 했는데 말재간 덕에 네 놈을 살려줘야겠구나.” 춘실은 품 속에서 시퍼런 식칼을 꺼내 칼끝을 두 눈을 부릅뜨고 쳐다보다가 빨래함지에 훌 던졌다. 상순은 춘실을 꼭 껴안아 주었다. “춘실아, 자기 뜻대로 다 되지 않는 게 세상사가 아니더냐? 이제 와서 자꾸 떠들어 무슨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니? 네가 자꾸 이러면 나도 죽을 것 같이 괴롭구나.” 춘실은 주먹으로 상순의 넓은 가슴을 마구 두드리며 어깨를 들먹이고 코를 풀쩍거렸다. “이 나쁜 놈아, 무능한 놈아, 무골충아, 아버지를 이기지 못해 나를 버리니?” 상순은 춘실을 떠밀어내었다. “흥수와 잘 살아라.” 상순도 눈물범벅이 된 춘실을 보고 코마루가 시큼해나고 눈에 뜨겁고 맑은 눈물이 핑 돌았다. 그는 치마폭을 들어 눈물을 닦으며 흑흑 흐느끼는 춘실을 외면하며 돌아서서 무거운 발걸음을 떼었다.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태평강 징검다리를 건너선 후 머리를 돌려 강 건너 쪽을 피뜩 되돌아보았다. 그때까지 춘실은 반쯤 몸을 탈고 서서 치마폭으로 눈물을 닦으면서 어깨를 들먹이고 있었다. 상순이 패랑천산 쪽으로 발걸음을 뗄 때다. 뒤에서 느닷없이 춘실의 애절한 노래 소리가 귀전을 아프게 때리고 가슴을 긁어댔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 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임은 십리도 못 가서 발병이 난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 간다 … … 춘실이 부르는 애타는 노래소리는 패랑천산의 절벽에 부딪쳐 길게 길게 고패치며 메아리쳐갔다.  상순은 그 쓸쓸한 노래소리를 들으며 걷다가 저도 몰래 몸을 돌려 뒤돌아보았다. 그때까지 저 멀리 버드나무 우거진 강뚝에서 춘실이 두 손을 맞잡고 서서 이쪽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쓸쓸하게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 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 가서 발병이 난다    ...   상순은 코마루가 시큼해나 주먹으로 길 옆의 아름드리비술나무를 꽝꽝 쳐댔다. 저쪽 버드나무 제방뚝에서 남북골 흥수가 버드나무 밑에서 우멍눈으로 상순과 춘실을 번갈아 훔쳐보며 주먹을 으스러지게 틀어쥐며 거친 황소숨을 씩씩 몰아쉰다...       필자 주: 여러분은 지금까지 김장혁 작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 제4권까지 감상하셨습니다. 이제껏 홍색문학의 향연을 음미한 여러분께 경의를 드립니다.       뒤이어 제5권이 펼쳐집니다. 조선반도에 일어난 침략전쟁과 정의의 반격전쟁, 동족상잔의 전쟁에서 형제도, 전우도, 부부도 서로 원쑤로 돼 참살하는 비극, 진달래를 두고 용천과 성칠의 사랑과 원한, 생사결투도 보게 될 것입니다.         항미원조전쟁에서 보여준 중국인민과 중국인민지원군의  대공무사한 국제주의 정신과 애국주의 정신, 슬기롭고 영용무쌍한 투쟁정신을 다시 돌이켜보게 될 것입니다.      나아가서 평화란 얼마나 보귀한가를 깊이 느끼게 될 것입니다 ...    
93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72) 댓글:  조회:1482  추천:0  2017-07-03
                      8. 그리운 고향 산천 먹장구름이 걷히고 하늘의 꽃구름도 따뜻한 봄날의 햇빛을 받아 방실방실 웃었다. 며칠 후 병완은 촌 사무소 옆방에 있는 키 넘는 맏증손자 공학을 보다가 불렀다. “할아버지, 벌써 촌 사무소에 나왔습니까?” “오, 그래. 네 동생 설복과 동선을 불러오너라.” “예. 갔다 오겠습니다.” 병완은 쌍까풀에 너부죽하게 생긴 맏증손자가 얼마나 장한지 몰랐다. 그는 공학의 너부죽한 잔등을 대견스레 보며 머리를 끄덕이었다. 이윽고 공학이 동생들인 설복과 동선을 데리고 왔다. “할아버지, 편안히 계셨습니까?” “오- 그래. 어서 올라와 앉아라.” 병완은 키 넘어가는 증손자들 셋을 반겨 맞았다. 이윽고 그는 증손자들을 둘러보며 입을 뗐다. “이젠 너희들도 다 컸으니 뭔가 해야 될 때가 됐구나. 요즘 내 너희들 때문에 곰곰이 생각해보았느니라. 너희들 고조부할아버님은 궁정어의였느니라. 그런데 내 아버지는 의서를 내 맏형님한테만 물려주고 둘째인 나에게는 의학공부를 시키지 않고 목수질만 시켰다. 그래서 형님네 집은 대대로 의사를 물려받았지만 우린 목수를 물려받았다. 봐라, 큰집 식구들은 의사 질 해 얼마나 잘 사느냐? 너희들 대에 와서는 어떻게 그루를 바꿔 의사를 했으면 좋겠다. ” 그러자 그들 셋은 모두 머리를 숙이고 한참 궁리했다. 제일 먼저 동선이 외까풀 눈을 치뜨며 할아버지를 쳐다보았다. “할아버지, 형님이나 의사를 하고 난 장사를 해서 돈을 많이 벌어서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에이, 큰 노릇을 못할 놈.” 병완이 나무라자 동선은 혀를 홀랑 내밀었다. “증조부님, 난 기차를 몰았으면 좋겠습니다. 진수해역에 가서 보면 그 큰 기차를 모는 사람이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르겠습니다.” “음, 건 장사하기보다는 좀 낫다. 어째 내 말대로 의학공부를 하지 않고 장사나 기관사로 되려는 거야?” 동선은 눈을 깜빡이더니 “삼형제가 다 의사로 되면 서로 환자 빼앗기를 하면서 다투지 않겠습니까?”하고 증조부의 눈치를 살폈다. “바로 그거야. 내 아버님도 형제간에 같은 의사 재간을 배우면 다툴 가봐 의서를 맏이인 내 형님에게만 물려주고 나한테는 물려주지 않았다. 허나 지금 생각해보면 아무 일도 없어.” “예?” 을혁과 공학의 눈에 의아한 빛이 서려 올랐다. “내 전번에도 용정에 있는 의과전문학교에 가보았는데 숱한 학생들이 정성문의 아들 정규상한테서 의학을 배우더라. 정규상은 장춘에 가서, 음, 이전의 신경에 가서 일제 때 의과대학을 다닌 적이 있다. 그런데 정규상한테서 의학을 배운 숱한 학생들이 지금 제4야전군 병원에서 의사와 위생원 노릇을 한다. 그래 그 숱한 학생들이 똑같은 의학을 배워 모두 환자를 보아도 다투지 않는다. 그러니 너희 형제들 셋이 같은 선생에게서 의학을 배운들 다툴 일은 더욱 없을게 아니야?” 공학은 무겁게 머리를 끄덕이었다. “할아버지, 의학을 배우겠습니다. 용정 정규상 선생한테 연줄을 달아줍소.” “그러지.” 병완은 잠자코 앉아 있는 얼굴이 길쭉한 설복한테로 눈길을 돌렸다. “넌 뭘 하겠느냐?” “난 문학공부를 해서 장차 문학교원이 돼 시도 쓰고 싶습니다.” “에이고, 증손들 다 뜻이 다르구나.” 병완은 별 수 없다는 듯이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럼 너희들 뜻대로 해라. 공학은 오늘 용정으로 가자.” 그러자 설복과 동선은 부러워 왁작 떠들었다. “야, 형님은 좋겠다. 용정에 가서 공부하는 게.” “에끼, 이 놈들, 너희들도 공부하고 싶으면 해라. 내 너희들 어시들과 말해 공부를 시키게 할게.” 증손자들은 환성을 지르며 자기 부모의 허락을 받으러 흩어져 갔다. 그날로 병완은 공학을 데리고 용정 의학전문학교 교무처 주임으로 일하는 정규상을 찾아 갔다. 초봄 날씨가 싸늘한데 난로에 불도 온전히 피우지 못해 사무실 안은 꽤나 싸늘했다. 정규상은 아주 반갑게 그들을 맞이했다. 병완이 찾아오게 된 의향을 말하자 그는 당장에서 학교에 받아들였다. 병완은 한시름을 턱 놓고 다른 교원들이 시간 보러 갔는지 사무실이 조용한지라 정규상에게 물었다. “어째 초봄인데 벌써 난로에 불을 때지 않소?” 정규상은 한숨부터 후 내쉬었다. “말도 마십시오. 지금은 그래도 군정대학 의학학교로 됐기에 우에서 경비가 좀 내려와 괜찮습니다. 학교가 갓 섰을 때에는 땔나무가 없어서 그 추운 초겨울에 학생들을 데리고 저 해란강 강물에 뛰어들어 다리기둥을 다 뽑아다 땐 적이 있습니다.” 정규상은 한참 의학학교를 어렵게 세우던 이야기를 하고나서 이렇게 뒷말을 달았다. "우리 학교 졸업생들은 동북에서 관내로 쳐나간 제4야전군 후근병원에서 숱한 부상자들을 구해내 빛나는 전공을 세우고 있습니다. 지금 동북 제4야전군 백만대군에서 조선족 장병이 10만명도 넘습니다. 군의와 간호사는 대부분 우리 룡정 위생학교에서 입대한 조선족졸업생들입니다." 병완은 정규상 등 선생들이 중국의 해방을 위해 큰 공헌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특히 정규상은 부모형제를 따라 조선 고향에 나가지도 않고 중국 용정에 남아 민족의 철저한 해방과 중국의 해방 사업을 위해 힘쓰고 있는 것에 적이 감동됐다. 정규상은 교무처 주임사업에 바쁘면서도 그들에게 점심까지 대접했다… 며칠 후 병완은 봄밭갈이 준비를 하느라고 가대기랑 꺼내 손질했다. 그때 진수해에서 맏손녀 어금이 찾아왔다. “할아버지, 시아버님이 위태로워요.”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스치고 지나가는 어금의 얼굴을 보자 대뜸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병완은 기준과 창준까지 데리고 맏손녀를 따라 부랴부랴 진수해로 주먹을 불끈 쥐고 줄달음쳐 갔다. 사실 최구장은 조선 고향을 떠나 간도에 갓 발을 들여 놓은 후 맏사위 석은과 맏딸 죽순이네가 사는 함흥 촌에 왔었다. 허나 맏손녀 명옥이 상순과 결혼한 후 변소와 사돈집과는 멀리 떨어져 사는 것이 좋다면서 진수해에 있는 둘째아들 경인네 집에 내려가 살았다. 최구장의 맏아들 경숙은 조개덕 조덕림의 밭까지 청산받아 가졌지만 부모 옆에서 조석으로 모실 생각으로 진수해로 내려가 진수해 남산에 밭을 일구고 살았다. 셋째아들 경민은 조개덕에 밭이 얼마간 있었지만 한 팔을 잃었기에 농사를 짓기 힘들었다. 넷째며느리는 아들 근호를 데리고 국자가로 내려가 시내에서 잡일을 하면서 힘겹게 살았다. 경인의 맏아들 근덕은 조선에서 최구장의 가르침을 받아 일어와 천자문을 익힌 덕에 진수해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는데 결혼까지 하여 맏아들 길운을 보기까지 했다. 그러다나니 경인네 집에서는 근덕의 교원 로임에 경인과 어금이 삯일을 해 번 돈으로 4대가 살다나니 쌀 고생도 모질 했다. 최구장의 노친은 터 밭도 없는 마당에 식칼로 땅을 파고 옥수수 알을 심어 몇 이삭이라도 거두려고 할 지경이었다. 그렇게 어려운 형편에서도 경인과 어금은 삯일을 해 푼돈을 모아 부모를 조석으로 잘 모셨다. 병완이네가 어금을 따라 경인네 집에 황급히 들어갔다. 그때까지만 해도 최구장은 자식들이 둘러싼 누운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을 마중하려고 무진 애를 썼다. “사돈 어른, 일어나지 맙소.” 병완은 바삐 최구장의 손을 잡아주었다. 최구장은 맥없는 눈길로 그들을 둘러보며 가는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사돈, 앞길이 멀지 않은 거 같으니 고향, 개, 개성이 그리워요. 개성에는 내 조부, 증조부, 산소까지 있어요. 아, 개성은 조상들께서 대대로 살아온 고향이죠.” 최구장은 눈귀로 맑고 뜨거운 눈물을 주르르 흘리었다. 그러자 경숙과 경인, 근덕도 입귀를 씰룩이며 눈물로 두 볼을 적시었다. 어금이랑 명옥이랑 해옥이랑 옷고름으로 눈물을 닦으면서 어깨를 들먹이었다. “개성은 38선을 그을 때 한국에 들어 갔다는구먼. 그 놈 미국 놈들이 천년 력사가 살아 숨쉬는 개성을 남조선에 그어넣자고 생떼질을 썼다는구만. 쏘련도 동맹국인 미국을 어쩌지 못하고 내줬다는구만. 이젠 얘들도 개성에 있는 조상의 산소를 가 볼 수 없게 됐어요. 하, 어쩌다가 조선이 이 지경이 됐나요?” 병완은 최구장의 손을 잡고 위안했다. “사돈어른, 근심 말고 치료 잘 하십시오. 이 다음 개성이 또 북조선에 돌아오겠는지 어떻게 압니까? 아무데서나 배불리 먹고 잘 살면 다 고향입니다. 우린 여기에서 두 번째 고향을 건설하고 악착스레 살아나가야 합니다.” 최구장은 맥없이 머리를 끄덕이더니 자손들을 눈 빗질 했다. 경숙은 바삐 “아버지, 우리 여기 있습니다.”라고 하며 다가가 아버지 손을 잡았다. 최구장은 왼손을 힘없이 들어 바깥을 자꾸 가리켰다. 경인과 경숙은 아버지를 부축해 일으켜 마루에 나가 안고 앉았다. 최구장은 남쪽 하늘을 하염없이 바라보더니 입술을 실룩실룩하더니 겨우 말했다. “너희들의 고향, 명, 명천에나마 갈 수 있어 다, 다행이다. 너, 너희들 될 수 있으면 조선 고향에 돌아가 살아라. 내 죽으면 아버지와 어, 어머니 산소 옆에 묻, 묻어다오.” “아버님!” “할아버님!” 최구장은 경인과 경숙의 품에 안긴 채 눈물이 글썽한 두 눈을 스르르 감으니 영영 다시 뜨지 못했다. 며칠 후 진수해 남산의 쓸쓸한 산비탈 황야에는 옛 무덤의 아래에 새 무덤 하나가 생겼다. 생전에 조선의 고향을 지키면서 어떻게 하나 고향에서 살려고 아득바득 하던 시골 선비 최구장, 고향에 부모를 두고 떠날 수 없어 유골을 파 모시고 간도까지 들어온 최구장, 빼앗긴 나라를 되찾으려고 자손들과 마을의 애들에게 “가,나, 다, 라”에 하늘 천, 따지, 감을 현, 누른 황을 배워주며 애쓰던 한 애국선비가 타향 땅에서 영영 잠들었다. 그렇게 고향을 사랑하고 그리워하던 한 영혼이 쓸쓸히 구름을 타고 두만강을 넘고 대동강을 날아 넘어 저 멀리 남쪽 고향 산천으로 훨훨 날아가고 있었다…        9. 영월구 공안국 준비소조 조장 봄 아가씨가 날마다 산과 들을 더 푸르게 칠을 하고 있었다. 부르하통하가 굽이굽이 흘러가는 개울가에 푸른 칠을 슬슬 해 올라가더니 영월산에 연분홍 천지꽃밭을 척 그려 놓았다. 봄비를 맞은 나무 잎사귀들이 더욱 파랗게 윤기들 났다. 비단결로 얼굴을 만지는 듯한 부드러운 봄바람이 들판과 산들을 품에 안고 다독이자 영월구에는 따뜻한 봄기운으로 차 넘치고 할미꽃과 천지꽃 갖가지 꽃들이 아름다움을 자랑하며 노래하고 하늘하늘 춤을 췄다. 겨우내 잠들었던 삼라만상은 더는 참을 수 없어 봄 마당에 뛰어 나와 봄 아가씨와 어울리어 노닐었다. 상순은 창남과 만호와 함께 지주 집들을 수사하면서 새로운 동향이 없는가를 살폈다. 영월구에서 전번에 국민당 잔여세력과 악질지주들을 대거 검거하여 처단하고 감옥에 처넣었지만 지방에 남은 지주들 때문에 한시도 시름을 놓을 수 없었던 것이다. 점심때가 다 돼 그들은 사무실로 돌아왔다. “바삐 보내는구먼.” 뜻밖에도 군정대학 때 반장 박성우가 상순의 자리에 앉았다가 일어났다. “반장! 어떻게 돼 여기 왔소?” 그들 둘은 서로 끌어안고 잔등을 두드렸다. 박성우는 상순을 놓고 마주 바라보았다. “영월구는 내 고향이 아니고 뭐요? 부모형제들이 다 여기 있는데 왕청으로 가서 어떻게 시름 놓고 일하겠소? 난 조직에 말해 영월구 공안국으로 전근돼 왔소.” “양?!  잘 됐구먼.” 상순은 입이 함박만 해 걸상을 자기 책상 옆에 끌어당겨 놓았다. “앉소. 그러잖아도 현과 구에서 이번 국민당 잔여세력을 숙청한 보고 자료를 쓰라고 하는데 골치 아프오. 내나 창남이나 만호나 글을 쓰라면 얼음 강판에 나선 황소처럼 눈깔을 뒤집힐 지경이오. 이젠 일본 유학생 반장이 왔으니까. 한시름 턱 놓게 됐소.” 성우는 상순과 창남, 만호를 둘러보더니 “허허허, 난 또 동무들과 반대로 총을 쏘고 권투를 하라면 등곬에 식은 땀이 줄줄 흐른다오. 그래, 동무들은 나를 문서로 쓸 예산이오? 임무가 과중한데. 허허허.” 라고 하며 사람 좋게 웃었다. 상순은 성미가 불덩이 같고 급한지라 성우를 재촉했다. “아예 내 사업정황을 말하면 받아쓰오.” 성우는 마지못해 연필과 필기장을 꺼내 들었다.  “이 사람, 정말 우물에 가서 숭늉 달라 할 지경이구먼. 금방 온 사람 숨 돌릴 새도 없이 부려먹네.” 상순은 습관처럼 세 귀 눈을 지그시 감고 그간 국민당 잔여세력과 악질지주들을 숙청한 경과를 상세하게 죽 이야기했다. 성우는 연신 감탄하면서 상순이 말하는 대로 한어로 줄줄 적어 내려갔다.  상순은 만호와 창남을 보고 “보충할 게 없소?” 하고 물었다.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없소.” 라고 했다. 자료가 다 정리되자 박성우는 다시 한 번 소리 내 읽었다. 상순은 성우의 문필능력에 저도 몰래 감탄이 나갔다. “야, 어쩜 내 말 대로 다 적었소? 그 글재간이 정말 부럽구먼.” 그러자 성우는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난 금방 한번 읽어보고 자네 기억력과 논리성에 탄복이 가네. 어쩜 자네 말한 대로 적었는데 참 판에 박은 듯 아주 훌륭헌 서면총화보고자료로 됐단 말이오.” 상순과 박성우가 영월구 허백호 서기한테 자료를 가지고 가서 보이자 혀를 끌끌 찼다. “성우 동무가 오더니 공안국 준비소조 사업이 척척 돼가는구먼. 상순 동무를 보고 총화 보고 자료를 쓰라고 말한 지 일주일이 됐지만 한글자도 쓰지 못 했소. 그런데 성우 동무가 와서 반나절도 안 돼 벌써 자료가 내 손에 들어오다니. 성우 동무는 정말 얻기 힘든 인재요.” “아니, 상순 동무가 있는데 제가 어찌 승리의 과실을 빼앗듯이 국장자리를 바라겠습니까? 이 성우는 고향 영월구에 와서 부모형제를 보살피고 문서나 하면 만족합니다.” 성우는 허백호 서기가 국장자리 말을 꺼내지도 않았는데 귀머거리 자기 좋은 소리를 하듯이 횡설수설 늘어놓았다. 상순은 그저 머리를 숙일 뿐이었다. 허나 허백호 서기는 책임일군 답지 않게 입을 잔뜩 널어놓았다. “상순 동무는 국민당이나 일본 놈들과 싸우는 건 잘 하오. 그러나 공안공작이란 총만 잘 쏴서 되는 게 아니오. 이젠 전국이 거의 해방됐는데 평화 년대에는 싸움을 잘하지만 자료 하나 쓰지 못하고 이후에 어떻게 영월구 공안국 사업을 통솔해 나가겠소?” 성우는 바늘방석에 앉은 듯이 안절부절 못했다. “저는 유학을 갔다 와서 한어나 조선어나 일어, 지어 영어까지 문제없습니다. 허나 공안국 사업은 반동파들을 잡아내고 진압하는 것이 중점사업이기에 저는 안 됩니다. 권총 하나 방정히 쏘지 못하는 선비입니다.” “됐소. 동무들과 인사문제를 토론하는 게 아니오. 모든 건 내 머리에 딱 들어섰으니 더 의논하지 마오.” 상순은 기분이 상해 공안국 준비소조 사무실로 돌아왔다. 뒤에서는 창남과 만호가 씩씩거리면서 뒤따라 왔다. 창남은 사무실에 들어오자 문을 절컥 닫아걸고 두덜거렸다. “일은 누가 했는데 연필을 한식경 밖에 놀리지 않은 선비를 공안국 국장으로 추천하겠다고 말하지 않소? 제길할.” “공안국 국장을 시킬 거 염두에 두고 현위에 말해 성우를 전근시켰다고 하지 않겠소.” 상순은 세귀눈을 지그시 감고 한참 궁리하더니 천천히 눈을 떴다. “동무들, 누가 공안국 국장이 되든 괜찮소. 우린 영월구 치안을 위해 계속 부지런히 사업하면 되오.” “그래도 이건 아니잖소?” “허백호 서기는 사람을 너무 억울하게 구오.” 창남과 만호는 한참이나 두덜거렸다. “박씨는 얼굴마저 백지장 같은 게 여자애 얼굴 같아.” “먹물 냄새나 풍겼지 적들이 덤벼들면 어디 싸울 거 같니? 흥!” “전번에 가져 온 송이버섯을 잘 먹었다고 하는 걸 보면 허 서기는 박 반장한테서 얻어먹고 춰주는 거 같다니까.” 상순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만하오. 우린 한 마음으로 뭉쳐 원수 놈들과 싸워야 하오. 이후부터 조직의 결정에 복종하고 단결에 불리한 말을 절대 하지 마오.” 그제야 그들 둘은 다발 서너 개나 걸듯 한 입을 억지로 다물어 버리었다. “술이나 한잔 할까?” 뜻밖의 말에 만호나 창남이나 놀란 눈길로 상순을 쳐다보았다. “가기요. 내 한턱 내지. 성우를 데리고 올 테니 가서 용구와 영호도 데리고 가기요.” 상순이 우쭐 일어나더니 바깥으로 나갔다. 만호는 뒤따라 나가면서 “왜 박 반장도 데리고 가오?” 하고 물었다. 상순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박 반장이 왔는데 한 잔 나눠야지.”라고 했다. 그런데 상순이 성우를 데리러 갔을 때다. 허 서기가 한창 성우와 조직담화를 하고 있었다. 사무실 안에서 성우의 목소리가 나직이 들리었다. “상순은 무식해서 국장 감이 아닙니다. 저한테 국장을 맡기면 허 서기를 모시고 일을 잘 하겠습니다. 점심에 제가 술을 한잔 사지요.” “그래? 술 좋지. 성우 동무는 전도 있는 동무요. 사람관계를 처리하는 거랑 보면 국장감이 옳소. 허허허. 상순에 비하면 어른이거든. 허허허.” “천만에 말씀을. 하급으로서 웃어른을 잘 모시는 건 의례 예절이고 상식이지 않습니까?” 상순은 허구픈 웃음을 짓더니 발길을 돌려 사무실로 되돌아왔다. 창남은 혼자 돌아온 상순에게 물었다. “어째 그 백지장선비는 오지 않았소?” “성우는 허 서기와 한잔 하러 간다네.” 상순은 묵묵히 사무실에서 나가 시내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이윽고 그들은 밥상을 네 개 밖에 놓지 못하는 자그마한 음식점에 가서 둘러앉았다. 상순은 개고기와 소고기, 돼지고기에 물고기 각각 한 접시씩 청해 술상에 올리게 했다. “그간 거의 한해 동안 동무들은 이 조장을 따라 고생했소. 자, 오늘 통쾌하게 마셔 보기요.” 모두들 술잔을 쥔 채 마시지 않고 근심스러운 눈길로 잔을 비우는 상순을 쳐다보았다. 상순은 빈 잔을 밥상 위에 달랑 놓았다. “어서, 마시오. 그간 동무들이 술을 마시자고 해도 내가 마시지 못하게 했는데 미안해. 오늘 통쾌하게 마시자고.” 그제야 모두들 한 숨을 후 내쉬며 술잔을 비웠다. 서너 순배 술이 돌아가자 상순은 용구를 마주 보며 말했다. “용구, 자넨 정말 용감하게 잘 싸웠소. 네가 진극신을 검거했기에 우린 영월구 국민당 반동파 잔여세력을 일거에 소탕할 수 있었네. 이후에 계속 골간이 돼 영월구 치안을 잘 하기를 바라네.” 상순은 용구의 손을 잡았다. 용구는 눈물이 글썽해 울먹거리었다. “김 조장, 가르침을 잊지 않겠습니다.” 이번엔 영호의 손을 잡고 뒷말을 이었다. “영호, 자네가 장부귀를 검거했기에 이번 국민당 잔여세력 숙청이 멋진 막을 내리게 됐네. 허나 자넬 제때에 발견해내지 못해 내내 속에 걸리었네.” 영호는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김 조장, 오늘 무슨 말씀을 이렇게 합니까? 김 조장이 우리 집까지 와서 나를 찾아보고 써주지 않았습니까? 이후에 치안사업을 잘 하겠습니다.” “아, 아니야. 동무들은 우리 공안국의 골간들이오. 헌데 내가 동무들을 사업만 시키고 너무 관심해주지 못해 미안하오. 동무들은 장차 국장으로 될 박성우 동지를 잘 받들어 일해야 하오. 그는 우리 군정대학교 때 반장이고 일본 유학생이오. 그는 조선어는 물론 한어, 일어, 뭐 영어라든가? 다 안다오. 그는 군정대학교 때 내 선생이나 다름없었네. 영월구 공안국은 그와 같이 먹물이 고인 대학생이 영도해야 날따라 발전하는 국내외 정세에 맞게 공안국을 이끌어 치안사업을 잘 할 수 있네.” 상순은 취하지 않았다. 복무원을 보고 술을 한병 더 가져오라고 해 일일이 손수 한잔씩 부어주고 나서 정중하게 말했다. “동무들에게 부탁하오. 다 함께 박성우 국장을 받들어 치안사업을 잘 하오.” “픽!” 용구가 코웃음을 쳤다. “박성우가 뭐 국장이요? 우리 국장이야 김 조장이지.” “김 조장이야 말로 당당한 국장이지. 군사실력이나 연설실력이나 사업실적이나 당할 자가 누구란 말이오?” 술상이 웅성웅성 했다. “자, 자, 또 그 말이오? 단결에 불리한 말을 하지 말래도.” 상순은 더 마시면 단결에 불리한 말이 길어질 거 같아 따뜻한 개장국을 한 사발씩 청해 식사를 청했다. 이튿날 아침 상순은 사무실에 나가자마자 창남과 만호와 토론하고 새로운 결정을 내렸다. 공안국 준비소조의 십여 명 공안일군을 크게 네 개 과로 나누어 배치하고 창남과 만호, 용구와 만호를 각각 과장으로 임명했다. 상순은 차렷 자세로 서 있는 네 과장들의 손을 일일이 꽉 잡아들 주었다. “동무들은 우리 영월구 공안국의 골간들이오. 명심하오. 사업만 사업이라고 하지 말고 이제부터라도 글을 배워야 하오. 허 서기 말처럼 전쟁 때는 목숨을 내걸고 용감하게 싸우는 용사가 필요하지만 전쟁을 하지 않는 평화시대에는 먹물이 꽉 배긴 선비를 요구한단 말이오. 명심해 공부를 하오. 난 집이 가난해 어려서 공부를 하지 못한 게 후회될 뿐이오.” 상순은 문 밖에 박성우가 얼른거리는 것을 보았지만 계속 하던 말을 했다. “이후에 어떤 변동이 생기더라도 동무들은 공안사업에 충성하고 나라와 인민을 위해 치안사업을 잘 하오. 이후에 권력이 커져도 항상 마음 속에 인민을 품고 인민의 이익을 위해 일해야 하오. 절대 사심을 챙기지 말고 단결을 파괴하지 말고 창끝을 원수들에게 돌려야 하오. 내가 조장을 담임한 기간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일도, 당부도 이것 밖에 없소.” “명심하겠습니다. 김 조장!” 용구는 머리를 숙이고 팔소매로 눈물을 닦기까지 했다. “용구, 씨름 일등을 한 천하장사답지 않게 웬 눈물을? 쯧쯧.” 상순은 용구의 어깨를 툭툭 다독여주며 “일을 잘 하오.” 라고 하고나서 그들 넷을 일일이 믿음에 찬 눈길로 바라보며 한숨을 후 내쉬었다. 성우는 상순이 준비소조 조장의 직권을 행사하는 것을 눈을 뻔히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그는 불이 나게 구 당위 사무실로 달아갔다. “허 서기, 상순 동무는 구 당위 비준도 없이 사사로이 공안국 과장들을 임명하고 있습니다.” 그때 금방 출근한 허 서기는 성우의 보고를 듣자마자 성이 꼭뒤까지 치밀어 노발대발했다. 그는 주먹을 으스러지게 틀어쥐어 책상을 꽝 치었다. “보자보자 하니 안하무인이구만! 가기요!” 허 백호 서기는 박성우를 데리고 곧추 공안국 준비소조로 화살같이 뛰어갔다. 허 백호 서기는 준비소조 사무실 문을 쾅 박차고 들어가면서 목에 지렁이 같은 피 줄을 세웠다. “야! 상순아, 삼도만 토비숙청 때도 안하무인이더니 계속 지랄하겠는가?!” “뭘 잘 못했습니까?” “야, 이게. 누구 앞이라고! 내 비준도 없이 마음대로 과장을 임명하오?!” 상순은 결코 머리를 숙이지 않았다. “허 서기! 난 지위 지도자의 파견을 받고 영월구 공안국을 세우러 온 준비소조 조장입니다. 난 영월구 공안국 중층간부를 임명할 권한이 있습니다.” “지위에서 동무를 보고 지방 당위의 영도를 이탈하라고 했는가?! 당이 총을 지휘하지 총이 당을 지휘하는가?” 상순은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래 공안국은 공산당의 한 개 조직이 아니고 국민당 조직입니까? 당위만 당이고 공안국 당 조직은 당 조직이 아닙니까? 지금은 전쟁시기여서 군관제라는 걸 명심하십시오. 난 군정대학을 졸업한 당당한 중공 당원이고 영월구 공안국 준비소조 조장입니다. 나는 공안국을 건립하고 과장을 임명할 인사권이 있습니다.” “참 그럴듯한 공산당원이구나. 조직 관념이이라곤 쥐꼬리만큼도 없구먼.” “내 임명결과를 허 서기한테 회보하려고 하지 않은 게 아닙니다. 이 네 동무는 우리 영월구 공안국의 골간들입니다. 그들 넷은 모두 당당한 과장들입니다. 과장으로 임명한데는 잘 못이 하나도 없습니다.” “쳇, 고까짓 토끼 꼬리만한 조장을 시키니 우쭐해서 안하무인이구만. 삼도만 토비숙청 때도 기관총 반장을 하면서 최낙현 퇀장한테 나를 고자질 하고 부 연장을 하려고 들더니? 이번에 콧대를 꺾여 봐야 알겠는가?” 상순은 책상을 꽝 치며 일어났다. “허 서기! 생사람을 잡지 마십시오! 그때 그래 빤빤한 산비탈에 숱한 병사들을 세워 놓은 게 옳았습니까? 통신원도 바로 허 연장 때문에 총에 맞아 죽었습니다. 거기 세워 놓았더라면 우리 연의 숱한 동무들이 희생됐을 게 아닙니까! 마땅히 군법에 의해 허 연장을 처분해야 합니다.” “이 동무, 이게! 배은망덕한 놈이로구나. 기관총 사격을 잘 한다고 반장으로 승급시켰더니 오히려 길러준 개 발 뒤축을 무는구먼!” “시비 없고 원칙에 어긋난다면 상전이든 부하든 가차 없이 시비할 것입니다!” “쳇, 기고만장하기로서니! 조직원칙이 있소? 없소? 사전에 구 당위와 토론도 없이 먼저 간부를 임명해놓고 회보하다니?!” 허백호 서기는 생각 밖으로 맞서는 상순 앞에서 용빼는 수가 없었다. “어째 유능한 박성우 동무는 아무 관직도 임명하지 않았소?” “허 서기는 박 반장을 국장으로 추천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상순의 얼굴에는 비웃음이 스치고 지나갔다. “어째 자기절로 자기를 국장으로 임명하지 않았소?” “난 용구 과장이 맡은 과에서 일반 공안일군으로 일할 각오가 돼 있습니다.” 허 서기는 물론 성우나 용구 모두들 깜짝 놀라 했다. 허 서기는 꼿꼿한 눈초리로 상순을 노려보았다. “아마 그럴 각오를 해야 될 거야. 어디 두고 보자.” 상순은 사무실을 맥없이 나가는 허 서기의 잔등에 대고 코웃음을 쳤다. “난 허 서기한테 송이버섯도 줄게 없고 다만 원칙을 내세우고 시비만 할 예산 밖에 없습니다.” 용구와 창남 지어 허영호까지 허 서기 뒤에 대고 두덜거리었다. 허 서기가 사라지자 그들의 눈길은 대뜸 박성우한테 돌려졌다. 박성우는 그 숱한 증오의 눈길을 받아 당하기 어려워 바깥으로 훌 나가 버렸다. 공안국 준비소조 사무실에는 보이지 않는 팽팽한 기분이 휩싸이고 있었다.
92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71) 댓글:  조회:1406  추천:0  2017-06-26
                                                                     6. 오두막의 부자간과 처녀애 이튿날부터 상순은 천용구와 허영호 등 여러 촌에서 새로 모집해온 30여명 신입공안일군들을 일렬횡대로 세워놓고 포치했다. “동무들은 고찰을 거쳐 우리 공안국 준비소조에 들어온 훌륭한 동무들입니다. 오늘부터 각 마을로 내려가 군중들을 발동해 친일주구와 국민당 특무, 악질지주들을 검거해 내십시오. 일단 정황이 있으면 즉시 공안국 준비소조에 돌아와 보고하십시오.” “옛!” 허영호는 안보 촌으로 내려가고 천용구는 흥기 촌으로 내려갔다. 다른 동무들도 모두 자기가 있던 마을로 파견돼 내려가 조사사업을 벌렸다. 상순은 또 10여명 공안일군을 진수해구, 영월구 등 전 현 각 구에 파견해 파출소 건립준비를 하게 포치하였다. 파출소 공안일군을 모집하고 사무실을 마련하는 일은 직접 상순이 책임지고 채바퀴 돌듯 돌아다녔다. 어느 날, 상순이 금방 영월구 시내에 내려가 파출소 건립준비정황을 검사하고 공안국 준비소조 사무실에 돌아왔을 때다. 천용구가 헐떡거리면서 사무실에 급급히 뛰어 들어왔다. “보고, 김 조장, 긴급정황입니다.” “무슨 일이오?” 상순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우리 마을에서 한 십여 리 떨어진 골 안에 수상한 놈이 있습니다. 이전에 마을 사람들이 나무 하러 그 골 안에 갔다가 땅굴 같은 오두막에서 열대여섯 살 난 여자애와 함께 사는 한 마흔 살 푼한 한족사내를 발견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자기 아들을 데려온 후 그 여자애를 며느리로 삼았답니다. 나무꾼들이 그 원두막에 들어가서 몸을 녹이다가 보니 이불 밑에 비수랑 보이더랍니다.” “그래?” 상순은 세 귀 눈을 떼룩거리더니 벌떡 일어났다. “창남이, 가 보기요.”  상순은 벽에서 개털 모자를 벗겨 쓰고 천용구를 따라 나섰다. 그들은 눈보라를 무릅쓰고 곧추 눈보라가 윙윙 휘몰아치는 산골 안에 있는 그 오두막으로 뛰어갔다. 그들이 오두막에 거의 뛰어갈 때었다. 때마침 눈보라 속에 웬 사람이 오두막에서 나오는 것을 발견했다. “바로 저 자입니다.” 상순은 “서라!”고 고함쳤다. 그 자는 이쪽을 내려다보더니 주먹을 불끈 쥐고 산등성이 쪽 수림으로 달아났다. 상순과 창남은 권총을 뽑아들고 쫓아가면서 고함쳤다. “서라!" "서지 않으면 쏜다!” 그러나 그 자는 죽을둥 살둥 모르고 계속 달아났다. 상순은 오두막 안을 들여다보고나서 창남과 용구를 돌아보았다. “저 자들을 잘 지키오. 내 저 놈을 붙잡을 게.” 말을 마치자 상순은 그 놈을 추격해 갔다. 그런데 용구도 뒤따라 왔다. “어째 왔소? 빨리 돌아가오!” “창남이 혼자 그 놈들을 지킬 수 있답디다.” 상순은 앞에서 도망치던 자가 계속 달아나는 것을 보고 공중에 총을 한방 갈겼다. “계속 달아나면 쏜다!” 그 놈은 수림 속에 주춤 멈춰 섰다가 또 꼬리 빳빳해 도망쳤다. 그때 천용구가 주먹만한 돌멩이를 쥐고 쫓아가다가 뿌렸다. 씽- 날아간 돌멩이가 그 놈의 종아리를 딱 깠다. “아이야!” 그 놈이 눈 우에 푹 꼬꾸라졌다. 그 놈은 다시 일어나 쩔뚝거리면서 또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때 천용구가 뛰어가 뒤에서 와락 덮쳐들어 안걸이를 걸어 메치고 오른 팔을 비틀어 대가리를 꽉 내리 눌렀다. 비틀린 그 자의 오른 손에는 시퍼런 비수가 쥐어 있었다. “꼼짝 말엇!” 상순은 쫓아가 그 자의 대갈통에 권총을 겨누고 비수를 빼앗아냈다. 천용구는 그 자의 팔을 비틀며 일어났다. 상순은 그자의 가죽 띠를 풀어내 두 팔목을 뒤로 제껴 꽁꽁 묶었다. 천용구는 그 자의 목덜미와 묶은 팔을 비틀어 쥐고 산 아래 오두막으로 내려 왔다. 오두막에 들어가 보니 만삭이 된 어린 여자애와 청년이 이미 창남에게 결박된 채 무릎을 꿇고 있었다. 상순은 오두막 안을 여기 저기 뒤번지다가 이불 밑에서 시퍼런 비수를 또 한 자루 들춰냈다. 상순은 비수를 중년 사나이에게 들이대면서 물었다. “뭐 하려고 비수를 감췄어?” 그 자는 부들부들 떨면서 상순과 창남의 권총 구멍을 흘끔거리며 떠듬떠듬 말했다. “난 살 길이 없어 여기로 와서 사는 불쌍한 류랑민이요.” “고향은 어딘가?” “산동이오.” “왜 비수는 차고 다니는가?” “산골에서 강도를 만날가 봐 그러오.” 상순은 창남을 돌아보며 조선말로 말했다. “이 놈이 흘끔거리는 걸 보오. 참 수상한 놈이오. 세 사람을 따로 따로 신문하기요.” 상순은 중년사내를 끌고 바깥으로 나가 오두막 서쪽으로 가서 심문하였다. 창남은 청년을 데리고 오두막 동쪽으로 가서 심문하고 용구는 오두막 안에서 여자애를 심문했다. 상순은 한참 심문해도 중년사나이에게서 오두막 안에 있던 청년은 그의 아들이고 여자애는 며느리라는 것 밖에 더 알아내지 못 했다. 창남도 그 이상 알아내지 못했다. 그러나 용구는 여자애한테서 다른 정황을 알아냈다. 여자애는 진사괴라는 그 중년사내에게 납치당한 후 산동으로부터 이 산골에까지 끌려와 갖은 능욕을 다 당했다고 했다. 그 여자애가 임신해 배가 불러오자 자기 아들 진극신을 데려다가 남들이 물어보면 며느리라고 꾸며 대라고 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중년사내는 낮이면 항상 비수를 차고 산골짜기 밀림 속에 가서 숨어 있고 밤이면 우두막에 돌아와 부자간이 자기를 윤간했다고 했다. 상순은 용구를 보고 중년사내와 청년을 지키게 하고 창남과 함께 여자애를 돌파구로 삼아 따로 심문했다. 그때 진사괴는 여자애를 쏘아보며 위협했다. “더러운 년, 주둥이를 조심해라.” 힘장사 천용구는 두 작자를 한손에 한 놈씩 마구 끌고 바깥으로 나갔다. 상순은 배가 뚱뚱한 여자애를 먼저 안심시켰다. “두려워하지 말고 말해라. 우린 공안일군들이다. 너를 고향의 부모에게 돌려보내 주겠다. 저 작자는 뭘 하는 사람이냐?” “딱 뭐 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허나 저 부뚜막 앞을 파면 권총이 있을 겁니다.” 그 여자애는 부뚜막에 내려가 손으로 검불을 치우고 널 쪼각을 뜯어냈다. 땅 밑에 파묻은 자그마한 상자 안에서 권총이 나왔다. 그때 바깥에서 우당탕 우당탕 하는 소리가 들렸다. 천용구의 고함소리도 들렸다. "감히 덤벼?!" 상순은 인차 창남을 데리고 와닥닥 바깥으로 뛰어나갔다. 웬 일인가! 사실 용구가 바깥에서 진사괴와 진극신을 지킬 때다. 진사괴는 적수공권인 용구가 혼자 지키는 것을 보고 불시에 와닥닥 달려들어 머리로 들이 받았다. 그러자 진사괴는 발길로 용구의 아랫배를 걷어찼다. 용구는 아픔을 참고 누워서 발길로 진사괴의 불 중태를 걷어차며 벌떡 뛰어 일어났다. 손을 뒤로 묶인 진사괴와 진극신은 용구를 걷어차고 머리로 받으며 협공했다. 천용구는 씨름재간이 있는지라 먼저 진극신을 안걸이를 걸어 땅바닥에 메쳐 놓고 무쇠 같은 주먹으로 때려 눕혔다. 그런데 진극신은 용구의 팔을 꽉 붙잡고 놓지 않았다. “아버지, 빨리 도망쳐라!” 그 틈을 타 진사괴는 용구의 엉덩이를 탁 걷어차 눕히고 와닥닥 산골짜기로 달아났다. 상순과 창남은 달아나는 진사괴를 쫓아가며 권총을 뽑아 들었다. “꼼짝 말엇!” “계속 뛰면 쏜다!” 진사괴는 붙잡히면 죽을 것을 알고 계속 수림 쪽으로 엄벙덤벙 달아났다. 땅! 상순은 권총으로 진사괴를 쏘았다. 30여메터 달아났던 진사괴는 종아리를 붙잡고 풀썩 꼬꾸라졌다. 그제야 질겁한 진극신은 대가리를 뚝 떨어뜨렸다. 상순과 창남은 천용구와 함께 진사괴와 진극신을 압송해 영월구로 내려 왔다. 돌아오는 길에 진사괴와 진극신에게 들춰낸 권총을 보이면서 탄백하라고 하였지만 입에 빗장을 지른 채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진사괴의 고향에 알아본 결과 진사괴는 무순시에 주둔한 국민당군의 영장이였는데 심양이 해방될 때 도망쳐 온 놈이었다. 상순은 영월구 당위 허백호 서기를 찾아가 진사괴를 더 심문하여 당지 배후에 동당이 없는가 파보자고 했다. “그 놈은 국민당 도주병일 따름이오. 무슨 배후가 있겠소?” “그래도 잘 심문해 보아야 합니다.” “그럼 그러오. 감옥도 온전한 게 없으니까 그 놈들을 잘 지키게나.” 상순은 “예.” 하고 공안국으로 돌아왔다. 그는 진사괴와 진극신을 따로 가둬놓고 주야로 심문을 들이댔다. 허나 진사괴와 진극신은 주둥이에 빗장을 지르고 한마디도 토설하지 않았다. 상순은 또 만삭이 된 여자애를 데려다 물었다. “진사괴를 찾아다닌 놈들이 몇이 있다던데 알만 하니? 네가 우리 묻는 말에 잘 대답하면 고향으로 돌려 보내주겠다. 진사괴와 진극신은 총살당할 놈이니까 두려워하지 말고 이실직고해라.” 그러자 여자애는 로실히 말했다. “있습니다. 장가란 사람이 여러 번 왔댔습니다.” “그래? 그 놈들이 무슨 토론을 하더냐?” 여자애는 상순을 미더운 눈길로 바라보면서 이실직고했다. “영월구에 파출소가 선다던데 없애치우자고 했습니다.” “그래? 언제쯤 손을 쓰자고 했니?” “건 진사괴와 장씨가 바깥에 나가 쑤군거려서 잘 모릅니다.” “그 외에 수상한 자가 더 없느냐?” “장씨 외에도 둘이 왔다 갔다 했습니다.” “음, 알았다.” 그리하여 상순은 창남과 토론하여 대책을 세웠다. 상순은 먼저 상급 부문과 연계하여 그 여자애에게 로비를 주어 료녕성 무순의 고향에 돌려보냈다. 진사괴와 진극신은 영월구 공안국 준비소조 감옥에 가둬 놓았다. 상순은 국민당 잔여세력을 숙청하는 한차례 전투에서 용감히 싸운 천용구를 정식으로 공안일군으로 받아들이었다. 허백호 서기도 다른 말이 없이 공을 세운 천용구를 공안일군으로 받아들이는데 동의했다. 상순은 장씨 놈을 나포하기 위해 창남과 만호 그리고 천용구까지 데리고 오두막 주위에 가서 매복 진을 쳤다. 상순은 직접 미끼로 되어 오두막 안에 들어가 숨고 창남과 만호는 오두막 주위에 눈구덩이를 파고 주위 동정을 살폈다. 허나 낮에는 아무런 동정도 없었다. 밤중이 되자 수림 속에서 무슨 두런두런 말소리가 점점 가까이에서 들리었다. 바깥의 창남이네는 그 검은 그림자들이 진사괴와 련계 있는 국민당군 비도들이 옳은지 확인할 수 없어 총을 쏘지 못하고 있었다. 상순은 오두막 문 뒤에 숨어 권총을 빼들었다. 허나 그도 적을 확인하기 전에는 사격할 수 없었다. 검은 그림자 대여섯이 희희닥거리면서 눈을 빠드득빠드득 밟으며 오두막으로 다가왔다. “장 연장, 우리가 여기서 유격전을 할 줄이야 공산군이 어찌 알겠습니까?” “그래, 알 수 없지. 나도 이전에 영월구에 온 상순 놈과 함께 이 지대에서 일본 놈들과 유격전을 한 적이 있네. 난 바로 그때 항일유격대식 유격전술을 써서 장백산 일대에서 공산군과 유격전을 하겠네. 자네들은 날 믿게나. 우리 뒤에는 국자가에 있는 왕련락원이 있다는 걸 알게나. 그가 한마디만 하면 이제 국민당군 한 개 영이나 하늘에서 락하산을 타고 장백산 일대에 내릴 걸세. 그때면 상순이네 몇몇 민병들쯤이야 개미떼처럼 짓밟아 없앨 수 있어. 허허허.” 상순은 귀에 익은 목소리에 놀랐다. (혹시 충국이? 설마?) 상순은 권총을 으스러지게 틀어쥐었다. 문을 여는 삐꺼덕 소리와 함께 검은 그림자가 들어왔다. “진영장, 불을 켜오. 장충국 연장이 왔소.” 땅! 순간 상순이 먼저 들어서는 놈에게 총을 쏘았다. 총소리와 함께 바깥 눈구덩이에 매복했던 창남과 만호, 용구가 사격했다. 세 놈이 쓰러졌다. 다른 세 놈이 살아남아 수림 쪽으로 달아났다. 상순은 오두막에서 나와 그 놈을 추격하며 고함쳤다. “충국아, 상순이 여기서 네놈을 기다린 지 오래다! 서라!” “상순이? 허허허. 잘 만났어. 이발도 나지 않은 놈이 국군 연장을 잡으려고? 내 인정을 봐서 살려주니까 더 쫓지 말라!” 땅! 총소리와 함께 상순이 종아리에 총을 맡고 쓰러졌다. “김 조장!” 용구가 달려와 자기 바지 자락을 찢어 상순의 상처를 싸매주었다. 수림 속에서 충국의 너털웃음소리가 들리었다. “허허허! 한방 맞았지. 옛정을 봐서 쫓아오지 못하게 종아리를 쏘았다. 이제 더 쫓으면 대갈통에 구멍을 내 줄 테야!” 상순은 눈 우에 쓰러진 채 달아나는 허연 눈 우의 검은 그림자를 노려보더니 총을 쏘았다. 땅! “앗!” 상순의 총소리와 함께 충국이 허벅지에 총을 맞고 쓰러졌다. 땅! 용구가 방아쇠를 당기자 또 한 놈이 쓰러졌다. 살아남은 다른 한 놈은 다리야 날 살리라고 수림 속으로 도망쳤다. 상순은 눈 우에 누운 채 허연 눈 우로 달아나는 검은 그림자를 향해 쏘았다. 땅! “앗!” 창남과 만호도 그 놈을 쫓아 수림 속으로 들어가며 총을 쏘았다. 땅! 땅! 장충국도 쓰러진 채 덮쳐가는 창남과 만호에게 총을 쏘았다. 땅! 땅! 땅! 절컥 절컥 충국은 총알이 떨어졌다. 그때 용구가 백두산의 맹호마냥 충국을 덮쳤다. 충국은 자살하려고 권총으로 자기 대가리를 마구 쳐대다가 용구에게 사로잡히고 말았다. 용구는 충국의 팔을 비틀고 권총을 빼앗아냈다. 만호와 창남은 눈가슴을 헤치며 도망친 놈을 추격했다. 허나 한참 뒤쫓다가 그 놈을 찾지 못해 되돌아 왔다. 상순은 용구에게 업힌 채 만호와 창남을 보고 충국을 압송해 오두막 안에 들어가라고 했다. 상순은 바깥에서 바지를 내리우고 오줌을 누면서 손으로 오줌을 종아리 상처에 발랐다. 상순은 등잔불을 밝힌 후 충국을 보고 오줌으로 허벅지 상처를 처치해주자고 했다. 그러자 충국은 “아무튼 죽을 목숨이니 처치할 필요 없다. 어서 한방에 죽여라.”라고 했다. 허나 상순은 용구더러 충국의 피 흐르는 허벅지에 오줌을 받아 처치하고 싸매주게 했다. 뒤이어 상순은 용구를 바깥에 보초를 서게 하고 창만과 만호를 보고 격살된 놈들의 총을 걷어 들이라고 명령한 후 충국을 단독으로 심문했다. “총을 맞대고 너를 다시 만날 줄은 몰랐다. 모두 몇 명이 왔느냐?” 충국은 등잔불 밑에서 냉소했다. “쳇, 나를 욕보이지 말고 어서 한방에 죽여라!” “내 뭐라던가? 고까짓 밭 몇무 때문에 또 국민당군에 들어가다니? 넌 삼도만에서 기의를 일으켰기에 관대처분을 받을 수 있었은데 왜  호박을 쓰고 돼지굴에 또 뛰여들었어? ” “흥! 우리 둘은 계급 이익이 달라서 한 하늘을 쓰고 살 수 없다. 너는 조선에서 건너 온 가난뱅이들의 이익을 위해 싸우지 않느냐? 나도 조상 때부터 대대로 살아오면서 물려온 우리 땅을 지키려고 싸웠을 뿐이야. 승패는 병가지상사이니 용감히 싸우다가 졌으니까 이젠 죽어도 후회 없어! 의형제의 옛정을 봐서 더 고통을 주지 말고 여기서 단방에 죽여달라! 우리 아버지에게 내 여기서 영용히 희생됐다는 말을 절대 하지 말라!" 충국은 토비들의 대세가 기운 것을 보고 마지못해 기의를 일으켰지만 야마꼬 모자를 상순에게 부탁하고는 시름놓고 수하들을 데리고 도망쳐 장춘의 국민당군을 찾아갔던 것이다. 전보흥 소교한테 기의한 일을 들키웠기에 전소교를 따라 길림에 가지 않고 장춘으로 도망쳤던 것이다.  상순은 랭소했다. "이 마당에 아비 근심돼?" "응. 난 효자야. 량심있는 사람이야. 한가지 묻자." "뭔데?" "우리 부모형제와 야마꼬 모자 무사하냐?" "허허허. 네 아버진 근심말라. 야마꼬는 일본에 보냈어." "뭐라고?" 충국은 상순에게서 야마꼬 사연을 듣고 머리를 툭 떨어뜨렸다. 기실 충국은 지학사가 죽었기에 야마꼬를 자기 데리고 살 궁리를 했다. 그런데 자기 애비때문에 야마꼬를 놓친 것을 아쉬워했다. "미안하지만 상순아, 내 아버지를 너에게 부탁하자. 그는 공산군에 미안한 일을 한 게 없잖니?” 상순은 한마디로 맺고 끊 듯했다. “네 아버지는 근심하지 말라! 항일전쟁시기 유격대가 제일 어려울 때 쌀을 대주었지. 다른 지주와는 달리 총살도 하지 않았고 밭도 남겨주고 안전하게 살게 됐다. 허나 내 개인 인정으로 널 살려둘 순 없다. 넌 장춘에서 이미 숱한 인민들의 피를 손에 묻혔기에 인민정권의 재판을 받아야 한다.” 충국은 머리를 툭 떨어뜨렸다. “허나 난 네 다리를 쏘았을 뿐. 삼도만과 길림, 장춘, 심양 그리고 여기에서 한 사람도 죽인 적이 없다.” “총 한방 쏘지 않고 연장까지 됐겠구나.” “장춘이 포위되자 진사괴 영장은 패장인 날 보고 련장을 하라고 했다. 대부대 전투를 해보지 못한 너 같은 시골 놈은 잘 모를 거야. 장춘전투 얼마나 치열했는가를.” “쓸 데 없는 말을 하지 말고 달아난 놈이 누군가를 말해라. 진사괴도 이미 체포돼 너까지 다 불었다.” 허나 충국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도리머리 질 했다. 마을에 내려갔던 용구가 둬 식경 후에 수레를 몰고 왔다. 상순과 충국은 한 수레에 앉아 산 아래 안보 촌을 거쳐 영월구로 내려가게 됐다. 충국은 안보 촌을 지날 때 한숨을 후 내쉬었다. “상순아, 이전에 너와 형내와 함께 장백산에 약을 가지고 가다가 이 마을에서 일본군을 만났던 건데.” “그게 다 옛날 일이지. 그때처럼 공산당을 따라 계속 싸웠더라면 무슨 오늘과 같은 일이 있겠는가? 삼도만에서 기의한 후 집에 돌아갔어두 이런 일 없지. 흥!” 충국은 머리를 툭 떨어뜨리더니 한숨을 후 내쉬었다. “앞날이 멀잖기에 너에게만 말하마. 나는 장춘에서 빠져나온 후 진영장을 따라 심양 부근까지 갔어. 심양이 함락될 때 나와 진영장은 영구로 달아나는 대오에서 빠져 여기에 나왔어. 부모형제와 고향을 버리고 군함에 앉아 대만으로 가긴 싫었어. 장백산 원시림에 숨어 유격전을 하려고 했어. 이렇게 네한테 붙잡힐 줄은 몰랐군.” 묻지도 않는 말을 하자 상순은 한마디 물었다. “수림 속으로 달아난 놈은 누군가?” “말할 수 없어. 다 나를 따라 온 불쌍한 애들이니까.” “그럼 자네 아버지 생사를 담보하지 못해.” 충국은 한숨을 후 땅이 꺼지게 내쉬었다. 눈보라가 눈앞을 분간하기 어렵게 윙윙 기승스레 휘몰아쳤다.                   7. 자위대를 숙청 며칠 후 안보 촌에서 조사하던 허영호가 공안국 준비소조 사무실에 헐금씨금 뛰어 들어왔다. “김 조장, 마을 애들이 한 집 이영 밑에서 새 둥지를 들추다가 권총 한 자루를 발견했습니다.” “뭐라고?” 상순은 벌떡 일어나더니 물었다. “그래 한족 집이던가?” “아니, 조선족집입니다.” “그래?” “권총은 회수하고 그 집 식구들을 조사하는 중입니다.” 영호는 권총을 꺼내 상순의 책상 우에 놓았다. 상순은 권총을 주어들고 찬찬히 보았다. “진사괴의 권총과 똑같은 미제 모젤권총이구먼. 틀림없이 진사괴와 한 무리일 거야.” “집주인은 한족이오? 조선족이오?” “한족입니다.” “수상한 점이 없는가?” “요즘 그 집 주인 장부귀란 사람은 낮이면 쿨쿨 자기만 하고 밤이면 어디엔가 자주 나다녔습니다.” “어데 상한 데는 없었소?” “손을 붕대로 동여맸는데 말로는 땔나무를 패다가 도끼에 찍혔답니다.” 상순은 대뜸 세귀 눈을 치켜떴다. “그래? 오른손? 왼손?” “아마 오른손인 거 같은데.” 영호는 머리를 갸우뚱 했다. “가기요!” 상순은 노획한 모젤권총도 허리에 찌르더니 일어서다가 상을 찡그렸다. 용구는 바삐 상순을 부축하며 말렸다. “김 조장, 다리를 상해 어떻게 갑니까? 우리 가서 잡아 오겠습니다.” 그리하여 용구와 영호가 자전거를 타고 안보 촌으로 달려갔다. 영월 구에서는 괜찮았는데 시내를 벗어나자 눈길이 나지 않아 자전거를 타고 달리기 여간만 힘들지 않았다. 그들은 몇 번이고 내려 안간힘을 다해 자전거를 밀기도 하면서 간신히 안보 촌으로 달려갔다. 그들은 안보 촌에 도착하자 다짜고짜로 그 집에 뛰어 들어가 집 주인을 체포했다. 공안국 준비소조 사무실에서 상순은 세귀 눈을 부릅뜨고 쏘아보며 심문했다. “이름이 뭔가?” “장부귀오.” “고향은 어딘가?” “료녕성 영구.” 장부귀는 뻔뻔스레 머리를 쳐들고 대들었다. “무슨 죄가 있다고 이러오?” 상순은 권총을 꺼내 책상 우에 꽝 놓았다. “이건 뭔가?!” 장부귀는 대수럽잖게 권총을 보더니 억울하다는 듯이 웃었다. “아, 애들이 우리 집에서 들춰낸 걸 가지고. 난 그 집에 이사해온지 오래지도 않소. 누가 우리 집 이영에 권총을 치웠는지 내 어떻게 아오?” 상순이 찬찬히 여겨보니 장부귀의 피로 얼룩진 오른 손이 무릎 우에서 바르르 떨고 있었다. “오른손은 어떻게 된 일인가?” “땔나무를 패다가 도끼에 찍혔소.” 상순은 책상을 꽝 치며 벌떡 일어났다. “이 놈, 아직도 이실직고하지 않겠는가? 오른 손 붕대를 풀어!” 상순의 명령이 떨어지자 용구가 장부귀의 오른 손의 붕대를 풀었다. 상순이 다가가 찬찬히 여겨보니 손바닥에 난 상처는 절대 도끼에 찍힌 일자로 된 상처가 아니었다. 찬찬히 여겨보니 분명 총알구멍이었다. 상순은 장부귀의 오른 손을 비틀며 고래고래 고함쳤다. “이 놈! 네 놈이 며칠 전 수림 속에서 총에 맞은 상처라는 걸 모를 거 같애? 살겠거든 탄백해라. 진사괴와 장충국도 우리한테 몽땅 생포돼 다 탄백했다. 네 놈도 고향에 끌고 가면 모든 게 백일하에 드러나고 말 거야.” 장부귀는 아파 바스러지는 듯이 비명을 지르면서도 요행을 바라고 입에 빗장을 지른 채 한마디도 탄백하지 않았다. 상순은 용구에게 “그 놈을 따로 가둬라.”라고 했다. 사실 상순은 진사괴와 진극신, 장충국을 각각 다른 감방에 격리해 가두었던 것이다. 놈들은 서로 탄백했는지 죽었는지 하나도 알지 못하게 됐고 서로 내통하지 못하게 됐던 것이다. 상순은 용구와 영호에게 “진사괴를 끌어오오.”라고 했다. “옛!” 진사괴는 끌려오자 왕청 같은 소리를 했다. “난 국민당 군 영장이야. 네놈들과 싸우다가 포로 됐다. 듣는 말에 의하면 공산군은 포로를 환대한다던데. 넌 무슨 계급의 놈이건대 본 영장한테 매를 들이대는 거야!” 상순은 책상을 꽝 치며 호통 쳤다. “포로? 네놈은 투항한 게 아니야. 우리한테 총을 맞고 나포된 거야.” 용구가 옆에서 상순을 가리키며 끼어들었다. “저분은 우리 공안국 준비소조 조장이다! 네놈이 탄백하지 않았다간 총살해 버릴 수도 있는 분이다.” “조장? 허허허!” 진사괴는 허무해 허구한 너털웃음을 웃었다. “조장 따위가 국민당 정규군 영장을 심문해? 자격 없어!” “이 놈, 여긴 공안국이야. 생포된 주제에 빈정거리긴?! 꿇어 앉혓!” 상순은 세귀눈을 부릅뜨고 진사괴를 쏘아보며 심문했다. “우리 공산당 정책을 알지? 로실히 탄백하면 관대하게 처리하고 항거하면 호되게 징벌한다. 말해! 네 놈들의 이른바 장백산 원시림 유격전의 구체계획이 뭔가?!” 진사괴는 코웃음 쳤다. “이 놈아, 탄백해도 죽고 탄백하지 않아도 죽을 건 뻔해! 더 괴롭히지 말고 단방에 죽여라!” 상순은 세귀눈을 치켜떴다. “정말 죽기 전엔 말하지 않겠는가?!” “두 말하면 잔소리지. 어서 총살해라!” 상순은 진사괴를 무섭게 쏘아보았다. “악질 국민당 놈! 당장 끌어내다 총살해!” 상순은 용구와 만호를 시켜 진사괴를 끌고 나가게 하고 다른 공안일군들을 시켜 장충국과 진극신, 장부귀를 간격을 두고 끌고 진사괴가 끌려간 뒷산으로 끌고 가게 했다. 산에서는 앙상한 나무를 스치며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소리가 사납게 들릴 뿐이었다. 상순은 그간 장단지에 오줌으로 찜질을 했기에 총상이 많이 나아 지팡이를 짚고 자체로 걸을 수 있었다. 충국도 상순이 억지로 오줌으로 찜질하여 많이 상처가 나았다. 허나 걷기 힘들다고 상순은 수레를 메워 가지고 충국과 함께 앉아 뒷산으로 갔다. 산기슭에 이르자 상순은 손을 들었다. “멈춰라!” 상순은 진사괴를 꿇어앉히고 쏘아보면서 호통 쳤다. “마지막으로 묻겠다. 네 놈들의 계획을 탄백해라!” “나는 군인이다. 능욕하지 말고 어서 죽여라!” 진사괴는 상순을 마주 쏘아보면서 고래고래 고함쳤다. 상순은 장충국과 진극신, 장부귀를 보란듯이 권총으로 진사괴의 뒤통수를 겨누었다. “인민정권과 맞서 로실히 탄백하지 않는 자들은 이런 끝장 밖에 없다!” 진사괴가 반동구호를 부를 때 총소리가 울렸다. 진사괴의 뇌장이 허연 눈 우에 튕기었다. 인민의 철천지 원수 진사괴는 푹 꼬꾸라졌다. “아버지!” 진극신은 고함치더니 상순을 쏘아보았다. 상순은 총구멍을 진극신의 머리에 돌렸다. “마지막으로 묻겠다. 네놈들의 행동계획을 탄백해라! 로실히 탄백하면 살려준다!” 진극신은 단말마적을 몸부림치며 고래고래 고함쳤다. “몰라! 내 살아남기만 하면 아버지를 죽인 네 놈들을 한 놈도 살려두지 않을 테다!” 땅! 상순의 권총에서 연기가 폴싹 내 쏘았다. 진극신도 피못 속에 대갈통이 박살난 채 쓰러졌다. 상순은 악이 날대로 나서 이번엔 권총 구멍을 장부귀의 눈에 들이댔다. “네 놈에게 마지막으로 묻겠다. 탄백하겠느냐? 않겠느냐? 로실히 탄백하면 관대히 처리하고 항거하면 당장에서 총살한다!” 장부귀는 풀썩 꿇어앉더니 머리를 푹 떨어뜨렸다. “장관 목숨만 살려 주십시오. 난 국민당 군 패장입니다. 심양보위전에서 패하자 우린 영구로 달아나지 않고 장충국 연장을 따라 장백산 원시림에 와서 유격전을 하자고 했습니다.” 충국은 장부귀를 쏘아보면서 “네 이 놈, 정녕 반역자로 되겠는가?”라고 하며 욕설을 퍼부었다. 상순은 장부귀를 노려보면서 “좋다! 돌아가서 탄백해라.”라고 하면서 용구와 만호에게 손을 홱 휘둘렀다. 용구와 만호는 장부귀와 장충국을 격리해 끌고 영월구 공안국 준비소조 사무실로 돌아왔다. 상순은 장부귀를 다시 심문했다. “탄백해라.” 장부귀는 상순의 무서운 눈길을 피하면서 탄백하기 시작했다. “장충국 련장은 진사귀 영장과 토론하고 고향에 돌아와 장백산 원시림에서 유격전을 벌리자고 하였습니다.” “건 다 알아! 네 놈들의 구체적 행동계획을 토설하지 못하겠는가?” 장부귀는 “예, 예. 다 탄백하겠습니다.”라고 하더니 무릎을 꿇고 풀썩 꿇어앉더니 술술 탄백했다. “장관, 제발 목숨만 살려 주십시오. 난 진영장과 한 고향 사람입니다. 이번에 우린 장충국 연장을 따라 이 곳에 와서 당지 지주들을 조직하여 반공자위대를 건립하고 동만 해방구건설을 교란하고 국민당군의 반공을 협조하려고 하였습니다. 우선 길림, 장춘과 동만을 연결한 군사요충지 영월구 공안국이 서기 전에 없애치우자고 했습니다. ” 그제야 굳어졌던 상순의 얼굴의 근육이 조금 느슨해지며 용구와 창남, 만호와 영호를 건너다보았다. “그럼 네 놈들의 반공자위대에 든 지주들은 몇 명이나 되는가? 이름을 일일이 대라!” 장부귀는 머리를 들더니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난 다른 마을 정황을 모릅니다. 건 장충국 연장과 진사귀 영장이 압니다. 그들은 모두 단선연계를 취하더나니 난 정말 모릅니다. 장연장은 이제 국자가의 왕련락원이 무전기로 련계하면 국민당군이 비행기로 무기랑 보내준다고 했습니다.” “안보촌의 자위대원 몇놈을 발전시켰는가?” “둘 밖에 없습니다. 옛날 유격대에게 살해된 십가장어른의 아들과 지게군으로 위장한 일제간첩의 아들입니다. 안보촌은 조선 마을이여서 조선 지주는 우리 말을 듣지 않아 더 발전시키지 못했습니다.” 상순은 장부귀를 쏘아보며 계속 물었다. “우리에게 격살된 네 놈은 무슨 놈들인가?” 장부귀는 질겁해 꺼멓게 질린 낯으로 상순을 쳐다보며 이실직고했다. “우린 모두 부대에 있을 때 진사괴 영장의 수하입니다.” “그 놈들이 자위대원 몇을 발전시켰는가?” “건 모릅니다. 단선연계를 취하다나니 정말 모릅니다. 단 하나만은 알만합니다. 우린 한 사람이 최저로 셋씩 발전시킬 임무를 맡았습니다. 내가 둘 밖에 발전시키지 못했다고 진영장이 나를 욕한 적이 있습니다.” “또 다른 정황을 아는 게 없는가?” “진영장은 한족지주를 위주로 발전시키라고 공작방향을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는 조선족은 빨갱이들의 물을 많이 먹어서 안 된다고 했습니다. 목이 마른데 물을 한 사발만 주십시오.” 장부귀는 영호가 떠온 물을 한사발이나 꿀꺽꿀꺽 마시고 나서 팔소매로 입귀를 쓱 닦았다. “아, 이제 떠오른 게 있습니다. 장충국은 자기 고향에 가서 한족지주들을 조직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래?” 상순은 옆에 앉은 창남과 만호와 눈길을 맞추더니 물었다. “장충국이 진수해 일대에 갔댔는가? 혹시 소서구나 조개덕이거나 패용천 촌을 말하던가?” “예. 자기 고향에 한족지주들과 그 자식들이 많기에 한 개 패도 조직할만하다고 했습니다.” “구체적으로 누구 누구란 말은 한 적이 없는가?” 장부귀는 “이펑거라던가? 지괴호라던가? 있다더구만.” 상순은 눈썹을 치키며 물었다. “또 더 없는가?” 장부귀는 도리머리 질 했다.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더 아는 거 없는가?” “잘 생각나지 않습니다.” 상순은 절룩거리며 다가와 엄숙하게 말했다. “오늘 표현 좋다. 이제 감방에 돌아가 잘 생각해 보라.” “예, 예. 이젠 살려 줍니까?” “이제도 너의 표현에 달려 있다! 영월 구 국민당자위대를 짓부시는데 공을 세우면 살려 줄 수 있다.” “아직도?” 상순의 표정은 퍼런 바위처럼 무표정하게 굳어져 있었다. 상순은 장부귀가 나간 후 두 눈을 스르르 감고 한참이나 생각에 잠겼다. 한참 후 상순은 두 눈을 번쩍 뜨더니 만호를 보고 “가서 장충국을 데려오오. 내 단독으로 그 놈을 심문해야 하겠소.”라고 말했다. 이윽고 만호가 장충국을 데리고 사무실에 들어오고 다른 공안일군들은 다 문 밖에 나갔다. 상순은 충국을 보자 책상에서 일어나 정중히 자리를 권했다. “앉소. 요즘 허벅지 상처 좀 괜찮은가?” “의제 덕분에 많이 났소. 거 오줌약이 확실히 명약은 명약이야.” “의제? 허허허.” 상순은 충국을 마주 바라보았다. “의제? 흥!” 문 밖에서 창남과 만호가 서로 눈길을 마주쳤다. “그래, 넌 내 의제가 아니냐? 전번에도 말했지만 너한테 내 아버지를 부탁하자. 아버진 맏아들을 잃게 됐다. 아버지가 불쌍하구나.” 상순은 충국한테 가까이 다가가 나직이 말했다. “아버지를 나한테 부탁하겠으면 영월 구 국민당자위대 조직구성을 탄백해라. 넌 이전에 항일유격대를 도와 쌀과 약을 가져가고 일본 놈들과 목숨을 걸고 싸운 용사였다. 이제라도 로실히 탄백하면 살려주지.” 허나 장충국은 도리머리 질 했다. “누굴 속이려고 그래? 전번에 넌 내 손에 피가 너무 많이 묻었다고 하지 않았니? 흥!” 상순은 장충국의 가슴을 주먹으로 탕탕 치며 고함쳤다. “그 착취계급의 본성을 고치란 말이야. 어째 혼자 그 숱한 땅을 차지하고 배때 터지게 살 궁리냐?” “그만 둬라!” 장충국은 목에 지렁이 같은 퍼런 피 줄을 세우면서 고래고래 고함쳤다. “우린 한 길로 갈 수 없다. 내가 살아 나간다면 또 우리 조상들이 대대로 물려준 땅을 되찾으려고 너희들과 싸울 거야. 그러기에 나한테 아무런 미련을 두지 말고 죽여라! 나도 이젠 지쳤다. 괴롭다. 막 죽고 싶다. 다만 너와 총을 맞대고 싸움 같은 싸움 한번 해보지 못하고 이렇게 죽는 게 한일뿐이다. 하하하.” 상순은 충국의 귀 쌈을 쨩 갈겼다. “이 놈, 권하는 술은 마시지 않고 벌주를 마시겠니? 네 놈이 탄백하지 않으면 소서구에 끌고 가서 네놈 애비 어미 앞에서 총살할 테다! 네 놈 일가식솔을 한 놈도 남겨두지 않고 총살해 버릴 테다! 네 애비가 밤중에 토성을 구멍 내고 도망쳐서 일성 촌 부근에서 네 놈과 내통해 함흥 촌 일대 정보를 네놈한테 제공한 걸 모른가 하는가? 네 놈을 잡기 위해 네 애비를 미끼로 남겨 두었을 뿐이다. 이제 네 놈을 잡았으니 더 이상 살려 둘 필요 없다.” 순간 충국의 정신 기둥은 와그르르 무너졌다. 이윽고 그는 머리를 툭 떨어뜨리었다. 상순은 충국의 표정변화를 놓치지 않고 계속 드센 공세를 들이댔다. “네 놈이 탄백하면 네 애비와 너를 살려 줄 수도 있다. 허나 네 놈이 제 부모형제의 목숨과 자위대 놈들의 목숨을 바꾸겠다면 별 수 없다.” 한참 후 장충국은 가련하게 상순에게 빌었다. “살려 달라. 다 탄백하겠다.” “그래, 진작 그렇게 나와야지.” 상순은 문 밖에 대고 소리쳤다. “만호, 창남이, 들어와 기록하오.” 만호와 창남이 들어와 상순의 옆 책상에 마주 앉아 필기준비를 했다. 용구와 영호는 들어와 충국의 뒤에 서서 경계했다. 상순은 따뜻한 물 한 컵을 떠다 충국에게 주었다. “각 마을에 발전시킨 자위대원들의 명단을 다 탄백하오.” 장충국은 따가운 물을 후후 불며 궁리하더니 입을 무겁게 열었다. “패용천촌의 지학사네 아들 지괴호와 이펑거네 아들 이와해, 조개덕의 제지주네 아들 제해산이네. 여긴 내 직접 발전시킨 게 없고 전날 죽은 국민당 군 영장과 당지 지주들이 모두 8명을 발전시켰네. 자위대는 모두 17명이네. 다 진사귀와 단선연계를 가지고 나는 명단만 장악했을 뿐이오.” 상순은 바투 들이댔다. "국자가에 있는 국민당군 동만 특파련락원 왕씨 거처를 말해라." "단선 련계돼서 모르오. 진영장이 혼자 알 뿐이야." "이전에 삼도만에 있을 때부터 네놈들이 왕 특파원과 무전으로 련락한 거 다 장악했어. 지금은 뭐로 련계해?" "장춘에 있을 땐 무전기로 련락했어. 그후 무전기 없어 진영장과 단선련계 한 거 같아. 무전기 소린 못 들었어. 왕 특파원은 아마 무전으로 관내로 도망간 국민당군 사령부와 련계 있은 거 같아. 그쪽에서도 진영장한테 지령이 자꾸 왔댔어." 상순은 한숨을 후 내쉬였다. 그는 인차 연변전원공서와 강신태 사령관에게 긴급정황을 회보하였다. 연변전원공서 군관위원회와 공안국에서는 세밀한 수사를 거쳐 국자가 아래개방지에서 수상하게 자주 치는 무전기 전파를 수색해냈다. 그리하여 무전기전파를 따라 수색해 끝내 국민당군 동만 특파련락원 왕씨를 나포했다. 그 자는 두 녀동생들의 집에 번갈아 거처해 있으면서 김치움에 무전기를 가설해 놓고 국민당군 사령부 본부와 연락하면서 지방 지주무장들과 국민당 패잔병들을 긁어모아 국민당자위대를 건립해 새로 탄생한 동만인민민주정권을 전복하려고 창궐하게 시도했던 것이다.  국민당군 동만 특파원 왕씨는 길림감옥에 압송돼 수감돼 있다가 1958년도에  인민정권에 의해 총살됐다. 상순은 연변전원공서 상부의 지시에 따라 장충국의 탄백에 근거하여 그날부터 즉시 공안일군들을 여러 마을에 파견하여 국민당 잔당들의 이른바 자위대원들을 몽땅 체포하고 비수와 검, 사냥총 등을 몰수했다. 영월구인민정권은 상부의 판결에 따라 자위대에 든 악질지주들을 정상에 따라 총살해 버리거나 감옥에 처넣었다. 며칠 후 상순은 창남과 용구, 만호, 영호 등 공안일군들과 함께 다리를 절룩거리면서 장충국을 압송하여 기차를 타고 함흥 촌에 돌아갔다. 충국은 함흥 촌에 들어서기 전에 슬며시 상순에게 물었다. “난 탄백할 거 다 했는데 기어이 총살할 테냐?” “아니. 우린 신용을 지킨다. 너희들을 따르던 이 곳의 무리들을 체포해야겠어. 널 보여줘야 지주들이 더는 미쳐 날뛰지 못하지.” “흥! 진짜 닭을 잡아 원숭이들을 훈계할 작정이군.” 상순은 소탈하게 웃었다. “허허허. 넌 제대로 말하지 못했어. 이건 원숭이를 잡아 닭들을 훈계하는 게야. 알았어?” 병완은 촌공소에서 막내 손자를 만나자 대견해 얼싸 안았다. “참말 장하다. 충국까지 잡아가지고 오다니. 허허허.” 기준과 명옥도 소문을 듣고 숙자와 금숙의 손을 잡고 달려왔다. 촌공소 옆에 있던 상우와 조카 공학과 동선도 뛰어 나와 반긴 것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상순은 먼저 창남과 용구 등 공안일군들을 영솔해 조개덕과 패용천 촌에 가서 지괴호와 제해산, 이와해 등 지주 아들들을 체포하고 소서구 장학산 일가도 데려왔다. 장학산은 비술나무에 결박당한 충국을 보자 울음보를 터뜨렸다. “아들아, 멀리 도망쳤는가 했더니 이게 웬 일이냐?” “아버지!” 민병들은 그들 부자간을 마구 떼 놓았다. 병완이 비술나무에 매단 종을 호미로 치자 온 마을 사람들이 촌공소에 모였다. 상순과 병완은 마루 우에 높직이 올라섰다. 상순은 마을 사람들과 지주들의 자제들을 둘러보면서 연설했다. “여러분, 보십시오. 국민당 반동파 잔여세력과 지주들은 우리 가난한 백성들이 잘 사는 세상이 온 것을 눈에 든 가시처럼 생각하고 배 아파합니다. 국민당 반동파와 악질지주 놈들은 실패를 달가워하지 않고 항상 기회를 엿보아 우리 인민민주정권을 뒤엎으려고 합니다. 허나 일체 반동파들은 우리 위대한 중국 공산당이 영도하는 인민민주정권과 인민무장력량의 일망타진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중국인민해방군은 이제 곧 황하와 장강을 뛰어 넘어 전국을 해방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승리에 자만하지 말고 시시각각 경각성을 높여 우리 인민정권을 보위하고 우리 마을을 보위하여야 합니다.” 마을 사람들은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를 보냈다. 마을 사람들 속에서 지춘실은 상순의 늠늠한 풍채를 보고 귀밑까지 자주 빛으로 붉히며 한숨을 호 내쉬었다. 허나 옆에 선 지군선은 이상한 눈빛이 번뜩이었다. 뒤이어 상순은 소리높이 명령했다. “국민당 반동파 자위대 놈들을 인민정권의 판결에 의해 자위대활동을 미친 듯이 한 제해산과 이펑거를 사형에 처한다! 자위대의 졸개 지괴호는 그 죄상에 따라 유기징역 15년에 처한다. 장충국 부자는 항일전쟁 유공자이고 이번 자위대 숙청에 공을 세웠기 때문에 잠시 총살하지 않고 감옥에 가둬 노동개조를 시킨다. 만약 그 어떤 지주와 부농들이거나를 막론하고 계속 착취계급의 본성과 사상을 개조하지 않고 완고하게 인민정권과 맞서려고 한다면 인민정권의 호된 처단을 면치 못할 것이다!” 병완은 민병들을 영솔해 태평강 가에 자위대 놈들을 끌고 나갔다. 공안일군들이 그 놈들을 한 놈, 한 놈 총살해버렸다. 숱한 까마귀들이 앙상한 아름드리버드나무 가지에 날아와 앉아 시체를 널려고 내려다 보며 까욱까욱 울어댔다. 봄날의 기운은 두 번째 고향 땅에 그물그물 피어올랐다. 훈훈한 봄 아가씨는 들로 벌로 사뿐사뿐 다가오고 동장군은 산으로 뒷걸음질 쳐 물러갔다. 허나 소서구와 천지꽃산에는 아직도 겨우내 땅바닥에 악착스레 얼어붙었던 얼음과 잔설이 여기저기 남아 있었다. 병완은 곰방대를 뻑뻑 빨며 착잡한 생각에 잠겼다. (장학산이랑 충국이랑 숙청당했지만 조개덕의 조덕림과 제지주, 패용천 촌의 손호표지주의 가족들이 무슨 꿍꿍이를 꾸미는지 알 수 없다.) 그는 상순과 토론하고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마을의 흥수랑 불러 민병들 10명을 세 개 조로 나누어 지주들의 집을 불시에 돌연습격해 수색했다. 병완은 흥수와 학수를 데리고 장학산네 집으로 갔다. 장학산의 처 충씨와 장리국, 장미련은 질겁해 낯이 새파랗게 질렸다. 병완은 다짜고짜로 그들을 쏘아보며 호령했다. “말해! 장학산이 집에다 뭘 숨겨뒀다던데 어데 숨겨뒀는가?” 충씨는 고개를 조금 들며 병완의 붉으락푸르락하는 구레나룻이 더부룩한 얼굴을 슬며시 곁눈질했다. “뭘 말이오?” “시치미를 떼겠어? 들춰내는 날엔 네년들도 감옥으로 들어가야 해.” 충씨는 오히려 제 쪽에서 노발대발했다. “참 억울하오. 내 남편과 아들을 가두고 우리 땅을 다 빼앗아 가고서도 모자라는가? 우리 집마저 빼앗아가자고 그래?”   병완은 충씨의 반발에 흔들리지 않았다. “뭐라고? 그러지 않아도 이 집을 청산해 가난한 백성들한테 나눠주지 않았다고 의견이 많다. 우리가 옛 주인을 너무 많이 봐준다고. 탄백하겠는가?” 허나 충씨는 마음대로 해라는 듯이 입을 꼭 다물고 눈치만 할끔할끔 살피었다. “수색하라!” 민병들은 우르르 달려들어 집 안 밖을 발칵 뒤집었다. 지붕 추녀 밑과 닭장, 개굴까지 다 들춰도 아무 것도 들춰내지 못했다. 집안도 부엌과 쌀독, 장독 궤짝 지어 까래 밑까지 다 들춰도 없었다. 흥수는 방바닥을 파보고 지어 구들장까지 뜯고 꼬챙이로 푹푹 찍어 보았다. 허나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장리국은 흘끔거리더니 “흥!” 하고 콧방귀까지 뀌었다. 병완은 구들에 걸터앉아 충씨와 미련을 살피다가 집안을 두리번거리었다. 그는 종이를 바른 바람벽으로부터 천정을 살피다가 별스레 천정의 누런 종이 우에 새로 덧댄 허연 종이에 눈이 멎었다. 눈을 슬며시 아래로 내리 뜨며 충씨 모녀와 장리국을 흘끔 곁눈질 해보았다. 충씨는 천정을 곁눈질하다가 병완을 흘끔거리더니 제꺽 눈을 내리 까는 것이었다. (수상해!) 병완은 바깥에 나가 사다리를 들고 들어와 벽에 기대 세워놓고 올라가려고 했다. “내 올라가 보지요.” 학수가 새다리를 타고 올라가고 병완과 흥수는 새다리를 붙들었다. “그 허연 종이를 붙인 데를 뜯어보오.” “예.” 학수는 천정에 덧댄 허연 종이를 쫙쫙 뜯어냈다. 기름종이에 싼 묵직한 봉지가 땅바닥에 떨어졌다. 손바닥만 한 물건은 땅바닥에 떨어지면서 무거운 쇠붙이소리를 냈다. 병완은 경각성을 높여 사다리를 놓고 제꺽 기름종이봉지를 주어 풀어보았다. 봉지를 찢고 보니 미제모젤권총이 나왔다. “봐라! 이 놈들이 웃음 속에 칼을 품고 있었다.” 병완은 권총을 충씨 코끝에 들이대고 호통 쳤다. “이건 뭐냐?!” 장리국과 충씨 모녀는 무릎을 꿇고 물앉더니 두 손을 발이 되게 싹싹 비비었다. “어르신님, 제발 목숨을 살려 주오. 조선에서 왔을 때 이 집에 재워준 사람 누구요? 그 은정을 봐서라도 우리 모녀 봐주오.” “흥! 진작 탄백했더라면 관대하게 처리하겠지만 늦었어!” 병완은 대뜸 호령했다. “천정종이를 몽땅 뜯어리!” 모두들 달려들어 천정종이를 다 뜯어냈지만 무엇을 더 발견하지 못했다. “벽지를 몽땅 뜯어라!” 병완의 호령소리에 이번에는 벽지를 몽땅 뜯어냈다. 부엌 쪽의 벽지를 뜯어내니 벽에서 서랍만한 구멍이 드러났다. 구멍 안에는 누런 필기장과 노랗고 번쩍번쩍하는 권총 탄알이 몇 십 발이나 나왔다. 병완은 버럭 고함쳤다. “몽땅 끌어내라!” 미련은 병완의 팔을 붙들고 발을 동동 구르며 대성통곡 쳤다. “할아버지, 난 어려서 아무 것도 모르오. 제발 날 잡아가지 마오. 흐, 흐, 흑.” “안 돼!” 병완은 쌀 주머니를 들어 구들에 쌀을 왈 쏟아놓고 주머니에 탄알과 권총 그리고 빚 문서를 주어 넣다가 남쪽 구들 궤우에 얹어놓은 비단이불에 눈길이 멎었다. 그가 다가가 왼손으로 비단이불을 훌 쥐어 들었다. 시퍼런 비수가 땅바닥에 툭 떨어졌다. “이건 뭐야?” 리국이 고개를 들며 변명했다. “밤에 날강도를 무서워서…” “개소릴 작작 쳐! 웃음 속에 칼을 품은 놈들.” 병완은 흥수와 학수 형제를 보고 “끌고 갓!” 하고 명령했다. 병완은 충씨와 미련을 촌공소 창고에 가둬 넣고 그 기세를 몰아 민병들을 거느리고 조개덕과 패용천 촌에 덮쳐갔다. 그들이 달리는 곳에 총창이 서슬 푸르게 번뜩이었다… 그들은 세 마을의 숱한 지주들의 집을 돌연 습격해 숱한 비수와 검, 사냥총을 수색해냈다. 병완은 투쟁대회를 열고 군중들을 동원하여 지주들을 투쟁했다. 장학산의 처 충씨와 아들 장리국, 딸 장미련도 지주들과 함께 군중들이 앞에 두 손을 쳐들고 섰다. 투쟁대회 집행 주석 대에는 진수해 허영주서기와 현 당위 조직부 부장 이계삼 그리고 병완 촌장이 앉아 있었다. 군중들은 지주들의 집에서 들춰낸 권총과 탄알, 시퍼런 비수, 검, 빚 문서들을 둘러보고 이를 갈며 투쟁에 목청을 높였다. 나중에 병완 촌장이 나서더니 목소리를 가다듬어 연설했다. “빈농 여러분, 보십시오. 악질지주들은 우리 빈고농민들이 자기 집과 땅을 청산해 나눠 가진 것을 뼈에 사무치도록 증오하면서 웃음 속에 칼을 품고 있었습니다. 이 놈들은 언젠가는 자기들의 천당을 찾고 우리 빈고농민들에게서 빚을 받아내려고 빚 문서까지 감춰 놓고 칼을 갈아 왔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한시도 경각성을 늦추어서는 안 됩니다. 인민민주정권의 재판에 의해 장학산의 여편네 충씨와 아들 장리국을 감옥에 보내 노동개조를 시킨다. 장학산의 딸 장미련은 권총을 치워놓은 진상을 몰랐기에 집에 남겨 금후의 태도와 표현을 고찰하기로 한다. 시퍼런 검과 비수를 숨겨둔 지주들은 몽땅 감옥에 보내며 그 가속들은 지방 관제한다.” “국민당 잔여세력을 타도하자!” 허영주서기가 일어나 주먹을 불끈 쥐고 구호를 부르자 촌공소 마당의 군중들은 따라 목청껏 구호를 불렀다. “악질지주들을 타도하자!” “계급 원쑤를 영원히 잊지 말자!” “계급투쟁을 끝까지 진행하자!” 군중들은 병완과 함께 지주들의 빚 문서 무지에 불을 콱 질렀다. 싯누런 빚 문서 무지가 타면서 삼단 같은 불길이 활활 치솟아 올랐다. 가난한 빈농들은 타버리는 지주들의 빚 문서를 보면서 우레와 같은 박수를 쳤다. 민병들은 지주들을 바로 묶어 진수해로 압송했다. 미련은 민병들에게 압송돼가는 장리국과 충씨를 보고 팔을 뻗치며 “엄마! 엄마!” 하고 목 놓아 울었다. 흥수는 달려들어 미련을 마구 떠밀어 떼놓고 장리국과 충씨를 마구 끌고 갔다. 춘실은 흥수를 보고 눈을 흘겼다. “우쭐거리긴? 언제 지주들한테 보복당하자고 그래?” 허나 흥수는 빈정거리는 춘실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까마귀 한마리가  눈풍설이 이는 하얀 서산으로 날아넘어가며 눈가루를 흩날려보냈다.  
91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70) 댓글:  조회:1589  추천:0  2017-06-15
                           4. 동북군정대학 대학생       햇볕이 쨍쨍 내리쪼이는 삼복염천에도 상순은 근본 집일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는 당장 교하에까지 쳐들어올 국민당 군을 무찌를 후비군양성에만 열성을 올렸다.        상순은 각 촌에 민병련을 건립한 토대 위에서 진수해구 민병 련장, 패장 골간훈련반을 열었다. 훈련반에서는 군사과만 가르친 것이 아니라 정치형세교육, 마레주의 모택동사상, 사회주의 리론 등 정치과도 가르쳤다. 교원은 물론 상순이 직접 맡았다. 그는 군정대학에서 배운 그대로 골간들에게 가르쳤다. 상순은 진수해에서 배양된 민병 골간들을 부단히 해방전쟁 전선으로 내보냈다.         군사과를 가르칠 때 그는 육박전, 보총과 기관총 사격, 수류탄뿌리기 등을 가르친 외에도 탱크폭파특별과도 설치하였다. 당시 국민당군과의 전쟁에서 우리 인민해방군에는 탱크가 적거나 없다싶이 했기에 주로 국민당군의 탱크를 폭파를 가르쳐주었다. 우둔한 놈이 범을 잡는다고 상순은 기발한 궁리를 했다. 당시 국자가 비행장 서쪽 7킬로메터 떨어진 곳에  일본군 비행장 기름창고가 있었다. 상순은 자동차를 몰고 기름창고에 가서 희수, 태수와 함께 지하기름창고 덮개를 열고 휘발유를  초롱에 퍼내 휘발유통에 몇통 담아 싣고 삼도만으로 달려갔다. 그는 토비숙청 때 삼도만으로부터 평강촌으로 토비를 추격하다가 휘발유 없어 버려진 탱크(땅크)를 시골길 가에서 찾아냈다. 탱크를 두루 살펴보니 어데 마사진 곳은 보이지 않았다. 시골 사람들은 괴물 같은 탱크를 감히 만지지도 못했다. 상순은 탱크 기름통 덮개를 열고 휘발유를 부어넎고 운전석에 들어가 발동을 걸어보았다.       따따땅, 따따땅, 부릉부릉      탱크 발동이 걸렸다.        "살았어."       상순은 희수와 태수를 싣고 당년에 토비를 추격하듯이 사기나 탱크를 몰고 진수해에 돌아왔다.      그날부터 그는 군사골간들에게 탱크 폭파기술도 가르쳤다. 자동차운전기술이 있는 희수와 육박전능수 병수, 명사수  태수한테는 특별히 탱크운전도 배워주었다.       상순은 이른 아침부터 민병골간들을 진수해 토성 안 마당에 불러다 훈련시켰다. 상순은 어떤 때 자기가 다망할 때면 육박전은 병수를 보고 가르치게 하였고 사격은 명사수 태수를 보고 가르치게 하였다., “앞으로 찔러!” 민병들은 상순의 명령에 따라 총창으로 앞으로 찔렀다. “싸(杀)!)” “옆으로 비껴 찔러!” “싸(杀)!)” 한창 훈련할 때다. 현당위 조직부로 올라간 이계삼이 구위서기로 올라간 허영주와 함께 마을로 찾아왔다. 그는 몇 십 명 민병들을 훈련시키는 상순을 보고 머리를 끄덕이더니 허영주 서기를 돌아보면서 말했다. “상순은 당의 참 훌륭한 재목이요. 잘 배양하면 큰 짐을 질 수 있소.” 허영주 서기도 “그렇습니다. 머리도 총명하고 민병들을 통솔하는 능력이나 무기를 다루는 재간이나 다 대단하지요.”라고 칭찬했다. 상순은 이계삼 서기와 허영주 서기를 보자 훈련을 그만두고 민병들을 보고 “해산!” 하고 명령했다. 민병들은 땀을 훔치면서 집으로 돌아갔다. 상순은 뛰어와 “안녕하십니까?” 하고 군례를 척 붙였다. 이계삼 서기는 “요긴한 일이 있어 왔소. 할아버지 있소?” 하고 물었다. “예. 촌공소에 계십니다.” 상순의 대답에 이계삼 서기는 “촌공소에 가서 이야기를 하기요.”라고 했다. “옛! 알았습니다." 이계삼 서기는 허영주 서기와 함께 촌공소에 들어가 병완을 만났다. 그들은 그간 마을 형편을 이것저것 묻고 나서 기준과 상순이 들어서자 단도직입으로 말했다. “사람마다 뜻이 다르고 갈 길이 다릅니다. 상순은 농사나 짓고 살 사람이 아닙니다.” 하고 엄숙하게 말했다. 기준은 한심해 뭐라고 말하려는데 병완이 앞질렀다. “상순은 총이나 다루면서 살면 좋을 겁니다.” 기준은 억지로 입을 다물었다. 이계삼 서기는 병완 삼대 부자를 둘러보면서 엄숙하게 말했다. “상순 동무는 전도가 유망한 간부 감입니다. 구당위와 현당위에서는 상순동무를 군정대학에 보내 학습시킬 것을 결정하였습니다.” 상순은 어찌나 놀랍고도 기쁜지 몰랐다. “감사합니다. 이서기, 허서기.” 그가 어찌 기쁘지 않으랴. 어려서부터 얼마나 공부하고 싶었던가. 그런데 소학교 문 앞에도 가보지 못한 자기를 당조직에서는 군정대학에 보낸다고 하지 않겠는가!        후에 중국인민해방군 총후근부 부장, 상장을 지낸 조남기 장군, 선후하여 연변조선족자치주 주장을 지낸 조룡호 동지도 일찍  동북군정대학에서 학습하였었다. 그 동북군정대학에 상순이 학습하러 가게 됐다. 이런 경사가 또 어디 있겠는가! 허영주는 상순을 높이 칭찬했다. “상순동무는 총명해 한어도 잘하는데다가 군사재능도 대단합니다. 그러나 새로운 형세에서 큰 짐을 지려면 정치와 문화 지식을 학습해야 합니다. 지식만 갖추면 상순동무는 큰 짐을 얼마든지 질수 있는 지도자로 될 수 있습니다.” 병완은 이계삼의 손을 잡고 인사했다. “고맙소. 이 서기, 허 서기, 우리 상순을 꼭 훌륭한 간부로 배양해 주오.” 기준도 기뻐 손'벽까지 쳤다. “내 아비 구실을 제대로 못했소. 어찌 가난했으면 저 애가 그렇게 공부를 하고 싶어 하는 것도 소학교 문 앞에도 보내지 못하고 여덟 살부터 일을 시켰겠소. 공산당 덕분에 대학에 보낸다니 아들이 과거에 급제한 것보다 정말 더 기쁘오.” 그때 허영주가 기준을 보면서 말했다. “당신은 농망기에는 맏아들 상우를 보고 좀 도와달라고 하오.” 기준은 농사말이 나오자 그저 한숨만 후 내쉬었다. 병완은 기준과 상순을 보고 말했다. “우리 조선 사람들은 예로부터 허리띠를 졸라매고 자식을 공부시켰다. 지어 자식 공부를 위해 목숨 같은 부림소마저 팔았느니라. 우린 농사일과 살림살이가 아무리 바빠도 상순을 꼭 군정대학에 보내 공부를 시켜야 한다.” 상순은 아버지와 할아버지께 꿇어앉았다. “감사합니다. 내 공부하고 돌아오면 꼭 아버지와 할아버지께 효성을 하고 당조직과 마을 사람들을 위해 일을 잘 하겠습니다.” 병완과 기준은 상순을 대견하게 바라보았다. “우리 집에 어쩜 군정대학 대학생이 다 나왔느냐?” 이계삼 서기는 상순의 손을 굳게 잡고 부탁했다. “군정대학에 가서 사회주의, 공산주의 이론과 군사지식을 잘 학습하오. 중국에서 무슨 사업을 하든지 한어공부를 잘 해야 하오. 상순동무는 한어 통역능력이 대단하기에 잘 배울 수 있을게요.” 상순은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꼭 이 서기와 허 서기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학습을 잘하겠습니다.” 이계삼 서기와 허영주 서기는 병완과 상순과 함께 마을의 목책과 갱도, 지어 전호까지 쭉 돌아보고 돌아갔다. 이튿날 동녘하늘이 푸름이 밝아왔다. 상순은 일찍이 일어나 우물에 가서 드레박을 왕왕 잣아 올려 우물을 두 초롱에 담아 들고 씨엉씨엉 집 부엌으로 들어왔다. 명옥은 몸이 남산만한 해 가지고 돌이 지난 둘째딸 금숙을 업고 밥을 짓다가 물독에 물을 붓는 상순을 보고 말렸다. “여보, 가는 날까지 물을 긷겠소? 내 천천히 긷지 않을라고.” 상순은 무던한 아내 명옥을 건너다보면서 “이렇게 가면 언제 올지 모르오? 이제껏 집 안 일을 하지 않아 아버지와 당신 고생 많았소.”라고 했다. 명옥은 바가지로 남편이 길어온 물을 퍼서 가마에 쏟아 넣었다. 가마 안에서 김이 확 풍겨 오르며 “챙―” 하고 소리 났다. 그녀는 바가지에 장을 떠 놓고 주물럭주물럭 주물러 물에 풀어 가마 안에 부었다. 그리고 칼 모태에 감자를 돔박돔박 썰어 넣고 감자장을 보글보글 끓였다. 군정대학으로 가는 남편에게 오랜 만에 감자장을 끓여 대접하려는 것이었다. 명옥이 밥을 짓는 새 상순은 물독에 물을 길어다 꼴딱 채워 놓고 장작도 가득 패 쌓아놓았다. 아침밥상에 마주 앉은 상순은 아버지를 보고 무거운 입을 뗐다. “아버지께 무거운 농사일을 다 떠밀어 놓아서 미안합니다. 이제 공부를 다 하면 마을에 돌아와 효성을 다 해 모시겠습니다.”라고 했다. 기준은 “집 근심은 하지 말고 공부나 잘해라.”라고 단마디로 말했다. 아침식사가 끝나자 상순은 위방 앞에서 낫을 가는 아버지에게 인사한 후 이불 짐을 둘러메고 마을을 떠났다. 명옥은 금숙을 업고 숙자의 손을 잡고 함흥 촌 동구 밖에까지 따라 나와 바래였다. 상순은 숙자와 금숙의 얼굴에 뽀뽀 해주고 진수해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명옥은 돌아서며 저고리 동전을 들어 눈물을 닦았다… 명옥이 텅빈 집에 돌아오니 이학수가 돌도 안 된 주봉을 안고 동냥젖을 먹이러 왔다. “주봉아, 어서 오라. 배고팠니?” 명옥은 두 말 없이 주봉을 받아 안아 젖을 물리었다. “에구, 어미 없는 주봉이 숙자 엄마 아니면 굶어 죽겠소.” 명옥은 금숙과 주봉을 한쪽 젖에 하나씩 물리고 젖을 오물오물 빨아 꼴깍꼴깍 넘기는 주봉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주봉의 아버지, 근심하지 마오. 주봉이 우리 금숙과 함께 한쪽 젖씩 먹으면 되오.” 학수는 두 손을 비비면서 속심의 말을 했다. “아예 주봉을 양아들로 삼아 주오. 혹시 이 집에 아들이 없으면 양아들이라도 있으면 든든하지 않소?” 명옥은 주봉을 내려다보면서 “그러면야 얼마나 좋겠소?”라고 했다. “그렇게 하오. 이제부터 주봉은 이 집 숙자 엄마 양아들이오.” 학수는 그래야 젖을 먹이기 시름이 놓이는 것 같았던 모양이었다. 명옥은 주봉을 쓰다듬어주면서 “그래지 않아도 내가 어련히 젖을 먹여주지 않으리라고 그러오? 어미 잃은 얘가 얼마나 불쌍하다고. 내 양아들 주봉을 친아들처럼 젖을 먹여 잘 키워줍지. 근심 하지 마오.”라고 했다. 그제야 학수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한편 군정대학 개학식 날이었다. 각지 당 조직에서 추천돼 온 백여 명 청년들이 학교 마당에 앉았다. 주석 대 위에는 주보중 장군과 주덕해 동지 그리고 군정대학교 책임자가 앉아 있었다. 먼저 주보중 장군이 연설했다. “동지들, 동지들은 연변 각지에서 온 우수한 학원들입니다. 동지들은 오늘부터 군정대학에서 군사를 배울 뿐만 아니라 맑스-레닌주의의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이론을 학습하여야 합니다. 맑스- 레닌주의와 모택동 사상으로 자기 두뇌를 무장하고 군사이론도 학습해 우리 당과 중국 인민해방군의 골간으로 돼야 합니다… 동지들은 국민당반동파를 물리치고 우리 해방구와 고향을 지킬 신성한 사명감과 의무감을 가지고 각종 학습임무를 원만히 완수해야 합니다. 동지들, 신심이 있습니까?” “있습니다!” 학원들의 우렁찬 대답소리는 장내를 떠나갈듯이 우레와 같이 울렸다. 뒤이어 연변전원 공서 주덕해동지가 연설했다. 캡을 쓴 그는 연설에서 먼저 국민당과 공산당 양당 관계와 해방전쟁 형세를 이야기 하고나서 군정대학의 학원들은 우리 중국공산당의 골간으로서 중대한 역사 사명을 짊어지고 우리 당의 사업을 한몫씩 감당해나가야 한다고 힘주어 강조했다. 다른 학원들은 모두 목책에 적는데 상순은 한자를 모르다나니 머리에 기억해두는 수밖에 없었다. 상순이네 반장 박우성은 영월구에서 온 학원이였는데 한어를 꽤나 잘했다. 그는 개학식이 끝나자 상순을 조용히 찾아 말했다. “상순동무는 어째 장군과 지도자의 연설을 필기하지 않소? 필기장도 없지 않소?” 그러자 상순은 덜미를 긁적거리면서 “급급히 오다나니 필기장과 연필을 준비하지 못했소. 난 이 머릿속에 다 기억해 두었소.”라고 대답했다. 박우성은 희죽이 웃으면서 “머리가 아무리 총명해도 어떻게 다 기억해 두겠소. 이후엔 꼭 명심해 중점을 적어두오.”라고 하더니 호주머니에서 필기장과 연필 한 대를 주었다. “옛소. 이걸 쓰오.” “아니, 인차 시내에 나가서 사겠소.” 허나 박우성은 “공산주의를 위해 분투하는 혁명동지들은 네 것 내 것 따지지 말아야 하오. 쓰라니까.”라고 하며 밀어주었다. 상순은 “감사하오.”라고 했다. 상순은 군사과에서는 사격이나 투탄이나 실력이 뛰여났다.    맑스-레닌주의의 사회주의 이론을 학습하는 시간이면 상순은 대머리를 수그리고 눈을 지그시 감고 도정신해 들었다. 그러나 선생은 교탁 앞에 서서 눈을 감고 있는 그를 보고 “상순동무, 동무는 왜 시간이면 잠을 자오?”라고 지적했다. “예?!” 상순은 눈을 번쩍 뜨며 일어나 선생님을 쳐다보았다. “자지 않았습니다. 선생님의 강의를 다 들었습니다.” 숱한 학생들은 모두 상순을 돌아다보았다. “왜 필기도 하지 않고 눈을 감고 있었소?” 상순은 진심으로 “도정신해 듣느라고 눈을 감고 있었지 자느라고 감은 게 아닙니다.”라고 했다. 선생은 자기 지적을 듣지 않고 딱딱 들이대는 것에 불쾌하여 상순을 버릇을 떼려고 들었다. “상순동무, 오늘 강의한 사회주의 이론을 한번 얘기해 보오.” 그러자 상순은 그 시간에 들은 사회주의 이론을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중이 염불하듯이 줄줄 이야기했다. 학원들은 선생의 강의를 또다시 한번 쭉 듣는 것 같아 입을 딱 벌렸다. 선생은 상순의 “강의”에 흠잡을 데 없는 것을 보고 머리를 끄덕였다. 여기저기에서 혀를 끌끌 차며 웅성거렸다. "기억력이 대단해!" "대단히 총명해!" “조용하십시오.” 선생은 손으로 교탁을 두드렸다. “상순동무, 몰라 봐서 죄송하오.” 선생은 먼저 자세를 낮추더니 상순을 꼬챙이에 꿰여 쳐들었다. “허나 상순동무는 이렇게 중요한 이론, 세계에서 하나 밖에 없는 맑스 -레닌주의 진리를 필기장에 적어두지 않았다는 것이 참말로 유감스럽습니다. 이후에는 꼭 명심해 적도록 하시오.” 상순은 대머리를 숙이면서 나직이 “예.” 하고 대답하고 자리에 앉았다. 사실 말해 그는 소학교 문에도 들어가 보지 못했다. 근근이 서당 방에서 천자문에 언문을 배우네 마네 한 그가 선생님이 강의하는 것을 조선어로도 따라 적을 수 없었다. 게다가 난생처음 듣는 숱한 정치경제학 술어를 기억할 수도 따라 적을 수 없었던 것이다. 필기하느라고 하면 강의내용을 기억할 수 없었고 강의내용을 이해하고 기억하노라면 필기를 따라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아예 필기는 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눈을 감고 골똘히 들으면서 기억해 두려고 했던 것이다. 선생의 비평을 받은 후 상순은 애써 필기하느라고 식은땀을 흘리며 공을 들였다. 그러나 따라 기록하지 못하고 대충 중요한 부분만 띄여가면서 단어식으로 적고 동그라미와 밑줄을 쳐놓았다. 그러다나니 시간에 뭘 들었던지 아리송했다. 상순은 그 날 강의가 끝나자 선생을 찾아가 자기 고충을 말했다. 그러자 선생은 도리머리 질 했다. “진수해구 당위와 현 당위에서는 어떻게 소학교 대문도 나오지 못한 동무를 추천한단 말이오? 맑스- 레닌주의 이론과 사회주의, 공산주의 이론은 최저한도로 베껴 두었다가 잘 복습해야 하오. 헌데 동무는 필기를 하지 못하니 이 다음 기층에 내려가서 어떻게 사회주의 이론을 선전하겠소?” 상순은 불쑥 한마디 했다. “이 다음 기층에 가서 꼭 선생님이 강의한대로 선전할 수는 있습니다. 다만 재료를 남기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선비 티 나는 선생은 대뜸 기분이 상해했다. “동무는 아직도 그 소리요? 어떻게 하나 명심해 필기를 하오. 이제부터라도 조선어와 한어를 잘 배우오. 그래야 이담 사업할 때 자료도 쓰고 연설문도 써가지고 사업하지.” “예, 알았습니다. 명심해 한어와 조선어를 배워 필기하겠습니다.” 선생은 멀쑥하게 생기긴 하였지만 문화지식이 차한 상순이가 답답하여 도리머리 질 했다. 상순은 숙사에 돌아와서 옆에 있는 반장 박우성과 자기 고충을 말했다. 그러자 박우성은 상순의 어깨를 다독이면서 말했다. “너무 근심하지 마오. 동무는 선생의 강의내용을 머리에 다 기억하지 않았고 뭐요? 오늘 시간에 우린 몽땅 놀랐소. 그 놀라운 기억력에 감탄하였소. 정말 총명하더구먼. 필기야 어떻게 불시에 따라 하겠소? 시간에 계속 동무가 기억하기 좋은 방법대로 머리에 기억하오. 그리고 필기는 차차 조선어와 한어를 잘 배운 후에 하오.” 상순은 너부죽하게 생긴 박우성 반장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헌데 선생님은 노여워하던데. 시간마다 어떻게 선생님의 지적을 받으면서 공부하겠소?” 하고 근심했다. “근심하지 마오. 선생과는 내 말할게. 다신 시간에 동무를 지적하지 말고 눈을 감아달라고. 선생님도 동무의 문화수준을 안 후에는 다른 동무들처럼 높은 요구를 제기하지 않을 거요. 지금은 강의시간에 먼저 머리에 기억해 두는 것을 중점에 두오. 그리고 필기는 중점이라고 생각되는 내용이거나 새로운 중점단아를 적어두오. 그리고 숙사에 돌아와서 내 필기장을 보고 다시 베껴 넣으란 말이오.” 그 말에 상순은 머리를 끄덕이었다.       “그게 그럴 듯 하구만.”      그날부터 상순은 정치이론 선생님의 강의시간이면 눈을 지그시 감고 듣다가도 중점단어나 구절을 필기장에 적어 넣었다. 그러자 선생님도 별로 상순을 눈에 거슬려 하지 않았고 상순은 강의내용을 기억도 제대로 하고 필기능역도 눈에 뜨이게 늘어 갔다. 상순은 사회공작을 하려니 자기가 공부를 못한 것을 통탄할 때가 많았다. 그리하여 모를 정치경제학 새 술어를 적어두었다가도 하학하여 시간만 있으면 박우성에게 묻거나 선생을 찾아가 물었다. 그리고 숙사에서 박우성에게서 짬짬이 한어와 조선어를 익혀나갔다. 그리하여 상순의 문화지식과 정치이론 수준은 눈에 뜨이게 높아 갔다. 상순은 다른 학원들에 비하여 한어회화수준이 높았기에 우세도 있었다. 사실 말해 당시 조선에서 이주해왔거나 조선마을에서 살아온 대부분 학원들은 한어수준이 낮았다. 허나 상순은 즉석에서 조선말 연설을 듣고 한어로 통역하고 한어 연설을 듣고 즉석에서 조선말로 통역할 수 있어 군정대학에서 소문이 높았다. 군정대학에서 시험 칠 때 상순은 과목마다 만점을 맞았다. 선생은 다른 학원들과는 달리 서면시험을 친 것이 아니라 따로 불러놓고 구두로 시험을 쳤다. 선생은 상순을 교무실에 불러다 구두로 맑스- 레닌주의와 사회주의 이론을 시험 쳤다. 그런데 상순은 선생의 질문에 얼음 우에 바가지를 밀듯이 줄줄 대답했다. 똑 마치 선생님이 강의하는 것 같았다. 숱한 이론 선생님들은 총명한 상순에게 감탄의 눈길을 보내며 혀를 끌끌 찼다. 담당 이론 선생님은 상순의 이론학습필기장을 가져오라고 번져보더니 만족한 웃음을 지었다. “좋소. 그간 애썼구먼. 명심하오. 동무가 아무리 총명해도 사람의 기억력은 제한돼 있소. 세월이 지나면 많은 혁명이론은 잊어진단 말이오. 이렇게 필기장에 중점이라도 적어두면 금후 기층사업을 할 때 기억나지 않으면 다시 들춰보고 써먹을 수 있소. 이후에도 시간을 타서 꼭 한어와 조선어 공부를 잘 하오. 그래야 훌륭한 지도일군으로 될 수 있소.” 상순은 허리를 굽혀 인사하고 나서 엄숙하게 결심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의 교육이 없었더라면 전 문화지식 공부를 소홀히 할 번 하였습니다. 꼭 선생님의 가르침대로 명심하고 한어와 조선어를 힘써 공부하겠습니다.” 교무주임과 선생님들은 상순이 교무실에서 나간 후 칭찬이 자자했다. “상순동무는 참말 총명하고 유망한 학원이오.” “한어통역도 잘하고 언변도 좋지. 훌륭한 지도일군 재목이오.” 후에 군정대학에서 대회를 열고 지도자들이 한어로 연설할 때면 상순을 내세워 당장에서 조선족학원들한테 조선말로 통역해주게 했다.       상순은 우수한 성적으로 군정대학을 졸업했다. 상순은 군정대학에서 공부를 할 때가 진짜 전쟁터에서 기관총을 쥐고 일본 놈들이나 국민당 토비들과 싸울 때보다도 더 힘들었던 것이다. 허나 그는 학습을 마치고 나니 눈앞이 환해지는 감이 났다. 앞으로 빈부차이가 없이 모든 사람들이 평등하게 사는 사회주의 나라, 압박과 착취가 없고 모든 사람들이 땅을 똑같이 나눠가지고 있는 힘껏 일하고 노동에 따라 분배하는 살기 좋은 사회주의를 건설하고 전 세계에서 공산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투쟁할 목표가 뚜렷하게 안겨 왔다.               5. 영월구 공안국 준비소조 군정대학 졸업식 때 연변전원공서 전원 주덕해동지가 연설했다. “동지들, 지금 우리 동북민주연군은 이미 인민해방군에 편성됐습니다. 영용한 중국인민해방군은 교하의 적을 격퇴하고 길림을 해방했으며 장춘과 심양, 할빈의 몇 십만 대군을 독 안에 든 쥐처럼 포위하고 있습니다. 오래지 않아 동북이 해방되고 전 중국이 해방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모주석의 지시대로 동북에 공고한 근거지를 건립해야 합니다. 지금 전쟁은 가장 관건적인 형세에 직면하였습니다. 우리는 시시각각 경각성을 높여 해방전쟁의 승리 열매를 보호해야 합니다…” 뒤이어 주덕해 동지는 다음과 같이 연설했다. “동지들은 군정대학에서 맑스-레닌주의의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이론 그리고 군사지식을 배웠습니다. 이제 동무들은 당이 가장 수요되는 지방에 가서 기층해방구 토지개혁사업과 치안사업을 잘 해야 하겠습니다. 동무들은 우리 당의 골간이기에 당에서 맡겨준 사업을 훌륭히 하리라고 우리 당에서는 믿습니다…” 주덕해동지의 연설은 열렬한 박수갈채를 받았다. 졸업식이 끝난 후 상순은 교무장의 부름을 받고 교무실로 갔다. 교무주임은 캡을 쓰고 앉아 있는 분을 소개했다. “상순동무, 인사하오. 연변전원공서 전원 주덕해동지오.” 상순은 허리를 굽히면서 “안녕하십니까?” 하고 인사를 드렸다. 주덕해는 상순과 악수를 나누면서 “앉소.”라고 하더니 상순의 아래 우를 훑어보더니 걸걸한 목소리로 말했다. “선생님들과 교무주임한테서 동무 말을 들었소. 동무는 어려서부터 항일유격대에서 일제 놈들과 싸웠고 민주연군 기관총 반 반장으로부터 련 지도원까지 담임해 토비숙청에서도 용감히 싸웠지. 지방당조직의 수요에 의해 민주련군 영장도 그만두고 진수해구 민병영 영장을 했다는데 대단하오. 벼슬도 따지지 않는 당원의 고상한 품격이 고귀하오. 이번 군정대학 학습을 거쳐 동무는 높은 이론수준도 갖췄소. 연변전원공서에서는 동무를 영월구에 보내 현 공안국 준비소조 조장을 맡기기로 결정하였소. 영월구는 장춘과 길림, 교하를 거쳐 우리 연변에 들어오는 군사요충지요. 영월구에는 국민당 특무들이 창궐하게 지하활동을 하는 곳이요. 영월구의 치안사업은 우리 전 연변의 안전에 아주 중요하오. 때문에 현 공안국을 군사요충지인 영월구에 세우기로 하였소.  동무 의견은 어떻소?” 상순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면서 조금 주저했다. “당 조직의 신임에 감사합니다. 다만 제가 소학교 문도 못 나왔고 치안사업을 해 본적이 없어 잘 할 수 있겠는가는 것이 근심될 뿐입니다.” 주덕해 동지는 소탈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동무는 잘 할 수 있소. 뭐나 어찌 처음부터 경험이 있겠소. 사업실천가운데서 배우고 경험을 쌓으면서 일해 나가야 하오. 또 서면지식만 지식인가 하오? 동무 머리는 마레주의 모택동 사상으로 잘 무장됐다는 걸 아오. 허허허.” 이전에 최낙현 퇀장이 하던 말씀과 똑같은 말씀이었다. 상순은 이전에 최낙현 퇀장이 자기를 보고 영장을 하라면서 그렇게 간곡히 부탁한 말씀을 듣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하여 이번에는 그런 유감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상순은 똑바로 서서 “당 조직에서 맡긴 치안사업임무를 꼭 잘 완수하겠습니다.”하고 당당하게 말했다. “좋소.” 교무장은 그 자리에서 영월구 당위에 보내는 소개 신을 써서 상순에게 주었다. “이 소개신을 가지고 영월구 당위에 가오. 상순동무를 영월구 공안국 준비소조 조장으로 파견하니까.  공안일군을 모집해 공안국을 세우고 국민당 특무들을 몽땅 숙청해버리오. 두 동무를 조수로 보내는데 데리고 가오. 허만호동무는 용정에서 온 당원이고 김창남동무는 태평구에서 온 당원이요. 두 동무 다 민병 연 연장을 하던 동무들인데 공안사업을 잘 할 수 있는 동무들이오. 허만호동무는 대성중학교를 졸업한 동무요.” “예, 알았습니다.” 주덕해동지는 일어나 상순의 손을 굳게 잡아주면서 신신당부했다. “현공안국과 영월구당위는 평단위오. 그러나 가서 꼭 영월구 당위의 책임자들과 관계를 잘 처리하고 모든 사업을 당지 당위와 잘 토론하여 하오. 수고하겠소.” 상순은 두발꿈치를 딱 붙이고 오른 손을 들어 군례를 척 붙였다. “예, 수장동지, 꼭 노력하겠습니다.” 상순은 가슴이 한껏 부푼 채 소개신을 깊이 간직하고 숙사에 돌아오자 이불 짐을 지고 떠나가려고 서둘렀다. 그러자 박우성은 상순에게 “어디에 배치 받아 가오?” 하고 물었다. 상순은 별로 개의치 않고 “영월구에 공안국을 세우러 가오.” 라고 대답했다. “그래? 내가 가려고 해도 보내지 않고 왕청 같은 데로 보내더니.” 상순이가 보니 박우성의 눈빛이 이상했다. “영월구가 그렇게 좋소? 그럼 우에 가서 말해 반장과 나를 바꾸면 되지 않을까?” 박우성은 손사래를 치면서 “아니, 아니오. 우린 조직의 결정에 복종해야 하오. 내 고향이 영월구여서 하는 말이오.”라고 했다. 박우성은 원래 제정 때 일본 나고야에 유학까지 갔다 와서 일어와 한어, 영어까지 아는 먹물이 꽉 찬 진짜 선비였다. 그러나 군사에 대해선 문외한이여서 상순의 상대가 아니였다.  상순은 말수가 적은 편이였다. 그는 자기에게 한어를 배워준 작은 선생이나 다름없는 박우성이 뭐라 해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길을 떠났다. 그는 속으로 박우성 반장이 영월구에 가면 고향 형편을 잘 알아서 좋을 것을 그랬다고 생각됐다. 허나 조직의 결정은 어찌 할 수 없었다. 상순이 만호와 창남을 데리고 기차에 앉아 영월구역에 도착하자마자 숨도 돌릴 새 없이 영월구 당위 사무실로 찾아갔다. 당위 사무실은 옛날 일제 때 일본 파출소 자리 옆에 새로 지은 이층집에 있었다. 이층에 올라가 당위 서기 사무실을 노크하고 들어갔다. 사무실에는 뜻밖에 토비숙청 때 허백호 연장이 있지 않겠는가! “허 연장! 그간 안녕하십니까? 전선에 나가지 않고 여기 계실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허백호 연장도 몇 해만에 만난 수하를 보고 기뻐했다. “아니, 우리 기관총반장, 반갑소.” 허백호는 상순을 아니꼬운 눈길로 흘끔 곁눈질하더니 한마디 툭 내쏘았다. "상순동무, 동문 여기 아서두 삼도만 때 상을 하지 마오. 아래 위도 없이 상관 앞에서 너덜대고, 제 설 자리도 모르고 납뜨지 말란 말이오. 난 여기 영월구 취고지도자 당위 서기란 말이오. 상순은 당년의 허연장이 영월구 당위 서기라는 것을 알고 실례했음을 느꼈다. “허 서기, 서긴줄 몰라서 그만, 미안합니다. 방조를 많이 받아야 하겠습니다.” 상순은 소개신을 꺼내 보였다. 허백혼느 소개신을 대충 보네하고 사무상 한쪽에 훌 쥐여뿌렸다. 상순은 뒤에 선 만호와 창남을 인사시켰다. “허 서기, 이 두 동무들은 모두 민병연 연장을 하던 동무들입니다. 공안국 사업을 잘 하리라고 믿습니다.” “오, 그래. 환영하오. 자, 자리에 앉소.” 때는 겨울인데 당위 서기 사무실은 난로를 피운 것도 꽤 싸늘했다. 상순은 장작을 난로에 몇 개 더 넣었다. 허 서기는 상순을 보면서 평급인 것도 상관이 수하를 대하듯 했다. “ 동무들은 알아야 하오. 우리 영월구 시내에는 조선족이 위주로 살고 주변 삼림 속에는 산동과 하북 지구에서 들어온 한족들이 많이 살고 있소. 그 한족들 속에는 관내에서나 기타 지역에서 도망쳐온 친일지주거나 국민당 군이 파견해온 특무들도 혼입해 있을 수 있소. 그 놈들을 샅샅이 수사해내 숙청해 버려야 하오. 동무들의 어깨가 아주 무겁소.” 상순은 머리를 끄덕였다. 그런데 만호와 창남은 일어나기까지 했다. “꼭 적들을 몽땅 숙청해 버리겠습니다!” 허 서기는 그들을 앉으라고 손짓하고 사무상에 앉더니 뒷말을 이었다. “지위에서 훌륭한 동무들을 보내겠다더니 상순동무를 보낼줄은 몰랐소. 그러나 저러나 이젠 시름 놓겠소.” 뒤이어 그는 그들 셋을 데리고 아래층으로 내려가 구 당위의 동지들에게 일일이 인사시키고 나서 바깥으로 나가 옆의 일제 때 파출소 자리 앞으로 갔다. 그는 상순이네를 돌아보면서 말했다. “이 벽돌집은 옛날 일제 때 파출소 자리오. 이 집에 공안국을 차리고 사업하오.” “예.” 상순은 허 서기와 악수를 하고 갈라진 후 인차 창남과 만호 두 동무를 데리고 공안국 사무실로 들어갔다. 그들은 온 하루 사무실부터 정리하고 난로를 놓고 장작을 해다 패 난로에 불을 피워 놓았다. 상순은 한참 저물어 간 창밖을 내다보며 이튿날 해야 할 사업을 궁리하고 있었다. 창밖에서는 하늘에서 눈사태가 무너져 내리듯이 큰 눈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상순은 만호와 창남과 함께 빵 쪼각이나 먹네 하고는 밤이 깊도록 공안일군 모집과 국민당 잔여세력과 악질지주들을 청산할 문제, 치안사업 계획을 토론했다. 이튿날, 아침 일찍이 상순은 영월구 당위 서기 사무실로 찾아갔다. 허백호 서기는 희죽이 웃으면서 사무상 앞의 자리를 가리켰다. “일찌기 왔구먼. 그래 사업계획이 나왔소?”   “예. 초보적으로 계획이 나왔는데 구 당위에서 많이 지도하고 도와주십시오.” 상순의 말에 허 서기는 옆에 와서 나란히 앉았다. 상순은 단도직입적으로 계획을 말했다. “현 당위에서는 우리를 영월구에 보내 공안국을 세우고 치안사업을 하라고 파견하였습니다. 먼저 공안일군들을 모집해야 하겠습니다. 제 생각엔 전 현 민병 패장과 연장들을 조직해 군사훈련을 하면서 골라내야 할 거 같습니다. 친일주구와 국민당 잔여세력, 악질지주들을 숙청하려면 군중들을 발동하여 그런 놈들을 검거, 적발하는 군중운동을 일으키는 것이 좋겠습니다.” 허 서기는 머리를 끄덕였다. “음, 참 좋소. 동무 사업계획대로 하오. 내일 우리 구 민병 패장과 연장을 다 불러 오지." "감사합니다." 상순도 자기 생각을 말했다. "제가 이계삼 서기와 허영주 서기를 통해 진수해 등 전 현 민병련장을 군사훈련에 보내달라고 하겠습니다. 진수해구는 제가 있던 곳이기에 민병련장들도 잘 압니다." 허백호는 머리를 끄덕였다. " 눈이 와서 어떻게 군사훈련을 하겠소?”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악렬한 환경에서 사람을 더 잘 고찰할 수 있습니다.” 이윽고 허 서기는 상순을 보고 이런 말을 했다. “상순동무는 계획 있게 사업하는데 좋소. 이후에는 뭐나 구두로만 사업토론을 하지 말고 서면계획서를 작성한 후 사업하기를 바라오.” 그 말에 상순은 뒷덜미를 긁적거렸다. “예, 알았습니다. 지금 돌아가서 재료를 작성하겠습니다.” 허백호 서기는 사무실에서 나가는 상순을 보고 희죽이 웃는 것이었다. 상순은 돌아오자마자 만호와 창남에게서 글자를 물어가면서 필기장에 연필로 한어와 조선어를 섞어 사업계획을 몇 줄 작성했다. 상순은 식은땀을 흘리면서 오전이 다 가서야 사업계획을 다 작성해 허 서기에게 가져다 바쳤다. 허 서기는 상순이 삐뚤삐뚤하게 쓴 크고 작은 글씨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 “됐소. 처음부터 어떻게 다 잘 하겠소. 차차 일하면서 배우면 되오.” 상순은 허 서기가 별로 만족해하는 것 같지 않아 사무실에서 나오면서도 속이 거뿐하지 못했다. 이튿날 전 현 민병연장 70여명이 영월구 공안국 준비소조 사무실 앞에 모였다. 상순은 창만과 만호를 시켜 그들을 네 줄로 줄을 서게 했다. 허 서기는 그들의 반열 앞에 나서서 상순과 만호네를 돌아보며 우렁차게 말했다. “오늘 나는 기쁜 심정으로 동무들에게 우리 영월구 공안국 준비소조 동지들을 소개하겠소.” 그는 상순의 손을 쥐어 들면서 소개했다. “이 동지는 영월구 공안국 준비소조 조장 김상순 동지입니다. 김상순 동지는 동무들과 마찬가지로 민병 연장 출신입니다. 일찍 삼도만 토비 숙청전투 때 우리 련 기관총 반 반장입니다. 그때 난 상순 조장의 상관 련장이였습니다.” 민병 간부들은 머리를 끄덕이며 웅성거렸다. "허서기 수하구만." "허서기 대단하오." 뒤이어 허 서기는 만호와 창남도 소개했다. “만호동무와 창남동무도 민병연장 출신입니다. 이들은 모두 용정 은진중학교와 동북군정대학 졸업생들로서 지식이 많고 이론수준이 아주 높습니다.” 민병 간부들은 여기저기서 또 웅성거렸다. 그때 창남이 한발 나섰다. "허서기, 민병연장 여러분, 한가지 보충하겠습니다." 그는 상순을 가리키며 뒷말을 이었다. "우리 김상순 조장은 민주련군 때 기관총반 반장으로부터 패장, 련 지도원을 했습니다. 영장을 하라는 걸 그만두고 진수해구 민병영 영장을 한 분입니다. 김상순 조장은 기관총 명사수일뿐만아니라 자동차, 탱크도 몰줄 압니다.  군사실력이 대단한 분입니다. 그는 탱크를 몰고 토비들을 족친 실전경험도 아주 풍부한 분입니다. " 그러자 연장들은 혀를 끌끌 찼다. "참 대단해!" "땅크까지 몰아!"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모두 우뢰와 같은 박수를 쳤다. 허 서기는 창남을 아니꼬운 눈길로 쏘아보았다. 만호가 웨쳤다. "아래에 김상순 조장으로부터 군사훈련 동원을 하겠습니다." 민병 간부들은 열렬한 박수로 환영했다. 상순은 민병간부들의 앞에 나서서 우렁찬 목소리로 말했다. “동지들, 우리 민주연군은 길림과 장춘과 심양을 이제 곧 해방할 것입니다. 오늘 여기에 온 우리 연장들은 영월구 후방 군사골간들입니다. 우리 영월구는 연변을 지키는 중요한 관문입니다. 이 관문을 든든히 지키자면 이 곳의 친일주구와 국민당 잔여세력, 악질지주들을 몽땅 숙청해 치안사업을 잘 해야 합니다. 영월구의 치안사업을 위해 오늘부터 동무들은 군사훈련을 하게 됐습니다. 눈이 쏟아지고 날씨가 추운데 동무들은 훈련을 잘 할 신심이 있습니까?” “있습니다!” 상순은 그들의 대답을 듣고 가슴을 쑥 내밀고 신선한 공기를 한껏 들이켜고 나서 말했다. “우리는 이제껏 민병들을 지휘해온 동무들이 꼭 고생을 두려워하지 않고 군사훈련을 잘 하리라고 믿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군사훈련을 시작하겠습니다.” 뒤이어 상순은 민병 골간들을 지휘해 대열연습으로부터 시작해 사격, 격투 등 훈련을 했다. 연 며칠 도시락을 싸가지고 군사훈련을 하면서 상순은 몇몇 골간들을 집중적으로 고찰하기 시작했다. 영월구 천용구라는 청년이 날래고 군사실력이 있고 뭐나 시키면 땡 소리 나게 완수하는 것이었다. 보름 동안의 군사훈련을 거쳐 상순은 준비소조의 만호와 창남과 내부로 토론한 후 70여명 민병골간 가운데서 천용구 등 10여명 민병골간을 남겨 계속 고찰한 후 최종 공안일군으로 확정하기로 했다. 그런데 상순이 허 서기한테 명단을 작성해 가지고 가니 대뜸 이마의 정맥마저 퍼렇게 번져 지며 펄쩍 뛰었다. “상순동무, 동무는 너무 독단독행하는구먼. 어찌 공안일군을 구당위 서기와 토론도 하지 않고 정한단 말이오. 동무는 무슨 일이나 후과를 고려하지 않고 급급히 해재끼더니 공안국을 세우는 일은 왜 그렇게 느리오? 보름동안 지내 봤으면 됐지 질질 끌어서야 언제 공안국을 세운단 말인가?! 저 안보촌의 허영호 연장도 공안일군을 하기 적합한 동문데 어째 빠졌소?” 상순은 옛 상관이건만 그 호랑이 같은 호령소리에도 얼굴색 한 점 흐트러짐이 말했다. “지금 허 서기와 토론하러 온 게 아닙니까? 허 서기 명단을 본 후 비준하십시오. 허 서기 추천한 허영호동무를 다시 조사해 보겠습니다. 군사훈련만 해서야 어찌 공안사업을 할 동무들을 제대로 골라낸다고 그럽니까?” 허백호 서기는 호랑이처럼 펄쩍 뛰며 씩씩거렸다. “동무, 지금 누구와 대꾸질이오? 허영호를 넣으라면 넣을 게지.” 상순은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공안국과 구당위는 평급 단위입니다. 군관제를 실시하는 당전 전시에는 현 공안국이 구지방당조직보다 반급 높다는 걸 아십시오. 그래 저는 자기 견해도 말하지 못합니까? 허 서기는 당의 민주 집중 제 조직원칙도 모릅니까?” 그 말에 허 서기는 성이 꼭뒤까지 치밀어 책상을 꽝 쳤다. “동무, 감히 나를 뜨겠소? 보자보자 하니 버릇없이 노는구먼. 이전에 삼도만 토비숙청전투 때도 최 퇀장한테 나를 고자질해서 꼴을 먹게 했지. 그 덕에 난 최 퇀장한테 잘 못 보여서 장춘해방전투에도 참가하지도 못하고 젊은 나이에 이렇게 다리 부러진 노루처럼 지방에 물앉았단 말이야. 동무 뭐 당장 공안국 국장이라도 된 거요? 그까짓 조장 돼가지고 우쭐거리긴? 흥, 주의하라고. 사람이 옛 상관을 존중할 줄도 모르면 어떤 끝장을 보게 되는 줄도 알아야지. 흥!” 상순은 날을 세우려다가 말았다. 그의 귀전에는 주덕해 동지와 교무주임이  떠나기 전에 영월구 당위와 관계를 잘 처리하라던 말이 귀선을 때렸던 것이다. 그는 억지로 참으면서 부드러운 말로 말했다. “허 서기, 미안합니다. 제가 공작경험이 없다보니 이렇게 됐는데 이후에는 주의하겠습니다.” 이만하면 울뚝밸이 있는 상순으로서는 많이 양보한 것이었다. 허나 허 서기는 스스로도 속을 너무 번져 보이는 것 같아 어조를 좀 바꿨을 뿐 계속 잔소리를 했다. “자네가 영월구 정황을 더 잘 알겠는가? 영월구에 탯줄을 묻은 내 말을 좀 들으라고.” 목에 지렁이 같은 피 줄을 세우는 허 서기를 보고 상순은 머리를 숙이며 당위 사무실에서 훌 나갔다. 상순은 공안국 준비소조 사무실에 돌아왔다. 그의 뒤로 차가운 바깥바람이 김처럼 서리서리 쓸어 들어왔다. 그는 눈보라치는 바깥을 내다보면서 성이 나 씩씩거리며 욱 치미는 밸을 겨우 참아냈다. 이윽고 그는 한숨을 길게 내쉬더니 창남과 만호를 데리고 안보 촌으로 가서 민병연장 허영호를 찾았다. “김 조장이 어떻게 돼 왔습니까?” 인사를 하는 허영호는 작달막한 키가 첫눈에 마음이 들지 않았다. 허나 허백호 서기가 추천한 사람이기에 소홀히 대할 수 없었다. 집에 들어가 보니 허영호의 집은 서발막대를 휘둘러도 걸칠 것이 없이 가난했다. 아버지는 일본 놈들의 포위토벌 때 비참하게 살해됐고 어머니는 다리를 살짝살짝 절고 있었다. 허영호의 출신은 빈고농이여서 별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힘도 쓸 것 같이 못해 마음에 걸렸다. (조 작달막한 게 어떻게 민병 연장으로 됐을까?) 상순은 영호네 집에서 나와 촌장을 찾아가 허영호를 조사해보았다. 박위훈이라고 부르는 촌장은 상순에게 “허영호는 품질이 좋소. 일본 놈들에게 아버지를 잃은 애기에 애증이 분명하고 공산당을 열애하고 충성할 것이오.”라고 하는 것이었다. 상순은 머리를 끄덕이었다. “치안사업을 하자면 힘깨나 써야 하겠는데 덩치가 작아서 근심됩니다.”라고 하자 박 촌장은 도리머리 질 했다. “영호는 덩치는 작아도 보기와는 다릅네. 전번에 영월구 씨름대회에서 우리 마을을 대표해 나가서 2등을 한 적도 있다오. 흥기촌의 천도깨비네 맏아들 천용구가 일등을 하고.” 그래도 상순이 미더워하지 않는 눈치여서 촌장은 목소리를 낮춰 “허영호는 허백호 서기의 사촌동생이오.”라고 한마디 덧보탰다. 상순은 머리를 끄덕이면서 만호와 창남과 눈길을 맞추고 촌장네 집에서 나왔다. 그들은 토론하고 일단 먼저 허영호를 영월구에 데려다 고찰해 보기로 하고 다시 허영호네 집으로 찾아 갔다. 그들은 집 울안에 들어서다가 때마침 집안에서 벼 마대를 안아내다가 수레에 싣는 허영호와 마주 띄웠다. (아니, 저 작달막한 양반이 보기와는 다르게 힘꼴을 쓰는데.) 상순은 다가가면서 수레에 벼 마대를 쾅 내려놓는 허영호의 가슴과 팔에 묻은 먼지를 털어주면서 혀를 끌끌 찼다. “키는 작아도 힘꼴을 꽤나 쓰는구먼.” 그러자 안에서 머리 하얀 어머니가 나오면서 말했다. “금방 벼 마대를 양옆구리에 하나씩 끼고 나가는 걸 내가 말렸소. 힘을 믿고 그러다가 상하면 어쩌자고.” “어디 한두 번 그랬다고 그럽니까?” 허영호가 하는 말에 상순은 마침 잘 됐다고 힘을 떠보기 싶어졌다. “그래, 정말 양옆구리에 벼 마대를 안아 내 올만 하오?” “예, 김 조장.” 어머니가 말리는데도 허영호는 집안에 들어가더니 벼 마대 두 개를 양 옆구리에 끼고 그 좁은 문을 비비닥거리며 나오는 것이었다. 상순과 만호는 황급히 양쪽에서 벼 마대를 하나씩 받아 수레에 올리려고 했다. 허나 허영호는 기어이 혼자 수레에 척 올려놓았다. 별로 얼굴이 붉어지지도 않았고 숨도 차서 헐떡거리지도 않았다. 영호는 숨도 돌리지 않고 벼 마대를 대여섯 마대를 실은 수레를 소처럼 끌고 정미소 쪽으로 가는 것이었다. 영호 어머니는 수레 뒤에서 따라오면서 “에이유, 난 저 애가 힘을 믿고 어찌나 날치는지 허리라도 상할 까봐 맨날 근심이라오. 저 애를 믿고 사는데 상하기라도 하면 어떻게 살겠소?”라고 했다. 그날 오전 상순이네는 영호를 도와 정미소에서 벼를 찧어 집에 실어다 주고 허영호를 데리고 영월구로 돌아오려고 했다. 그런데 영호가 생각 밖으로 사양할 줄은 천만뜻밖이었다. “내 영월구에 가면 우리 엄마는 누가 모십니까? 난 안보 촌에 있으면서 민병들을 영솔해 토지개혁을 하겠습니다. 어디서나 엄마를 잘 모시면서 혁명을 하면 한 가지 아닙니까? 딱 공안일군이 돼야 혁명을 합니까?” 상순과 창남이 아무리 설복하려고 해도 허영호는 듣지도 않았다. 그리하여 상순과 창남, 만호는 할 수 없이 영월구로 돌아왔다. 상순은 허백호 서기를 찾아가 안보 촌에 갔던 정황을 회보하고 나서 이렇게 말했다. “허 서기, 미안합니다. 작달막한 허영호 연장이 씨름 2등까지 한 힘장사인 줄 몰라 봐줘 정말 미안합니다. 우린 공안일군으로 채용하려고 하는데 허 연장이 오지 않으려고 합디다.” 허백호 서기는 희죽이 웃더니 “그 앤 김조장이 키 작다고 자기를 깔본다고 삐진 거 같소. 내 가서 설복해보지. 허허허.”라고 했다. 정말 오후에 허백호 서기가 가더니 영호를 데리고 와서 상순에게 인사시켰다. “김상순 조장의 밑에서 일을 잘 해라.” “옛!” 영호는 상순에게 군례를 척 올렸다. “김 조장, 많이 가르쳐 주십시오.” 허 서기는 영호를 한쪽으로 데리고 가서 나직이 말했다. “이후에 숱한 사람이 모인 데서 절대 형님이라고 하지 말라. 남들이 우리 관계를 다 알면 이후에 네 발전에 불편해진다. 알만 하니?” 영호는 납득되지 않아 “형님을 형님이라는데 어쨌단 말이오?”라고 하며 시끄러워 했다. 상순은 못 들은 척했다.  
90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69) 댓글:  조회:1659  추천:2  2017-06-06
                    2. 첫사랑 전운이 개여 유난히 맑은 하늘에 구리바라 같은 보름달이 두둥실 걸려 있다. 어디에서인가 뻐꾹새가 짝을 찾아 뻐꾹뻐꾹 애절하게 울고 있다. 진달래는 단잠에 빠진 경주를 꼭 끌어안고 창 밖에 걸린 달을 바라보며 한숨을 호 내쉬었다. (경주 아빠는 정말 희생됐단 말인가?) 경호는 밤만 오면 등잔불 밑에서 창 밖을 내다보며 한숨을 호호 내쉬는 진달래가 가엾어 늘 위안했다. “얘야, 용천 대장은 아마 희생됐는가 봐. 전번 아버지 산소 찾아 갔을 때 혹여나 해 용천 대장이 포위를 돌파한 동굴 어귀를 몇 자 깊이로 파 보았잖아. 그래도 없잖아? 살았으면 찾아오지 않았겠나?” 진달래는 눈물을 주르르 흘리었다. “휘영청 밝은 달밤에 쿵쿵 발자국 소리 울리기만 해도 경주 아빠가 올 것만 같아 내다보군 해요. 허나 한 달 기다리고 두 달 기다려도 안 왔죠. 또 한 해 기다리고 두 해 기다렸는데도 종무소식이예요. 경주가 이렇게 커서 막 달아 다니는데도요. 속이 곪아 터지지 않겠어요.” 경호는 진달래 손을 잡고 위안했다. “분명 잘못 된 거 같아. 어쩌겠나? 간 사람은 가고 산 사람은 살아야지 않겠어?” 진달래는 어깨를 가늘게 들먹이기 시작했다. 그녀가 어째 슬프지 않으랴. 그녀가 성칠 오빠와의 애틋한 첫사랑을 생이별하는 애 터지는 마음을 억지로 삼키며 다가간 용천 대장이 아니었던가. 번개식 결혼에 귀여운 아들을 본 마당에 시체도 찾을 수 없게 되지 않았는가! 첫사랑 성칠 오빠에게 조강지처를 버렸다는 누명을 들씌우지 않게 하려고 만난 신랑, 그 신랑은 폭파소리와 함께 종무소식이니 속이 재 가루로 되지 않겠는가! 진달래는 경주를 오빠에게 안겨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왜 이래?” 경호는 놀란 나머지 경주를 되 안겨주면서 말리었다. 진달래는 “오빠, 금심하지 마. 나가 바람을 좀 쏘이다가 올래요.”라고 했다. 그래도 등잔불 밑에 비낀 경호의 얼굴에는 근심에 찬 어두운 그림자가 비치었다. “짧은 생각 하지 마. 아무튼 죽은 사람과는 정이 멀어지기 마련이야. 이젠 경주를 봐서라도 마음을 굳게 먹어야 돼.” 진달래는 머리를 끄덕였다. “오빠, 피뜩 성칠 오빠를 만나보고 올게요.” 그제야 경호는 한숨을 후 내쉬었다. 진달래는 머리를 끄덕이며 바깥으로 나갔다. 가을 밤 하늘은 유난히 밝은 달빛으로 환했다. 진달래는 은빛 달빛을 사뿐사뿐 밟으며 성칠 대장이 든 숙사로 발걸음을 옮겼다. 진달래가 성칠의 숙사 마당에 들어서 문 꼬리를 잡았을 때다. 집 안에서 주고 받는 성칠의 걸걸한 목소리와 한 여인의 가냘픈 목소리가 들렸다. 진달래는 제꺽 문에서 손을 떼고 주춤 멈춰 섰다. “은녀야, 너와 나는 한 고향에서 살아온 오누이나 다름없다. 난 너를 내 친 여동생 곱순이나 다름없이 생각한다. 네가 남편을 잃고 경수를 업고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볼 때마다 내 가슴에는 피눈물이 흘렀다.” 그 말에 진달래는 문 옆에 김빠진 공처럼 물앉았다. 성칠의 격앙된 말소리는 계속 들렸다. “난 희생된 병수 열사가 불쌍하고 하옥이가 가엾다. 게다가 용천 대장마저 돌아오지 못하지 않느냐? 나는 희생된 열사들을 생각하면 아무 생각도 더 하지 못한다. 아직 가정을 차릴 생각은 하지도 못한다. 너나 내나 진달래나 다 아직 새 살림을 꾸릴 때는 아니야. 금방 3년제가 지나자마자 이게 뭐냐? 병수나 하옥 그리고 용천 대장에게 너무 미안하다.” “오빠, 내 잘 못이요. 흑흑흑, 허나 오빠, 내 마음만은 알아주오. 난 오빠를 어려서부터 사랑해왔소. 오빠는 한 소녀의 첫사랑을 소중히 생각하기를 바라오. 흑흑흑.” “울음을 그쳐라. 경수 깨나겠다. 이럼 나도 마음이 괴롭다. ” “경수 아빠가 희생된 후 나는 의지가지없이 됐소. 부모가 돌아가셨고 하나 밖에 없는 남동생 상호도 참살됐소. 내 누굴 믿고 살아야 하오? 흐, 흐, 흑, 흑흑.” 진달래는 더 들어 내려 갈 수 없었다. 그녀는 겨우 바람벽을 잡고 일어나 휘청거리며 마당을 나섰다. 이때 뒤에서 문이 열리는 삐꺼덕 소리가 들렸다. 뒤이어 신을 짝짝 끄는 소리가 급촉하게 들렸다. “은녀, 내 데려다 줄게. 너에게 빚을 너무 많이 졌구나. 병수나 너의 부모 그리고 상호까지 다 내 죽였구나.” 진달래는 손으로 눈물을 닦으면서 황급히 담장 굽이를 돌아 동쪽에 있는 자기 숙사로 발걸음을 옮겼다. 뒤에서 마른 기침소리가 높이 들리더니 뒤이어 은녀와 성칠이 두런두런 이야기하면서 서쪽에 있는 은녀의 숙사로 걸어가는 것이 달빛아래 희미하게 보였다… 이튿날, 뜻밖에도 성칠이 진달래를 찾아왔다. 경호는 인사하고 무슨 일을 보려고 나가는 척 하면서 자리를 피해 주었다. 성칠은 진달래의 부은 눈을 바라보면서 구들에 올라와 앉았다. 진달래는 경주를 안고 눈길을 내리깔며 성칠의 눈길을 피했다. “너 할 말이 있지?” “예, 어제 속이 답답해 찾아 갔댔어요. 허나 집 안에 은녀가 있더군요. 그래서…” 성칠은 진작 알았다는듯이 머리를 끄덕였다. 진달래는 피뜩 성칠을 쳐다보더니 수집은 듯이 머리를 숙이었다. 허나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용케 인차 삼켜 버리었다. 성칠은 한숨을 후 내쉬었다. “용천 대장 소식이 없어 정말 답답하구나. 경주가 불쌍하구나.” 성칠은 진달래 품 속에서 경주를 받아 안고 놀았다. 경주는 성칠의 검은 구레나룻을 살살 매만지면서 잘 놀았다. “이 놈이, 애비를 닮아 얼마나 용감하게 생겼느냐?” 진달래는 성칠과 경주를 번갈아 보면서 말했다. “아빠가 없는 경주가 불쌍해요. 앞으로 살아갈 일이 막막하기만 해요.” 그때 성칠은 불쑥 이런 말을 꺼냈다. “난 세월이 흐를수록 용천 대장에게 미안한 감이 드는구나.” 진달래가 깜짝 놀란 듯이 다급히 물어 보았다. “뭘?” 진달래의 깜장 눈에 이상한 빛이 반짝였다. 성칠은 경주를 진달래에게 안겨주면서 천천히 무거운 입을 떼었다. “그때 갱도에서 포위를 돌파할 때 내가 먼저 갱도에서 돌격해 나갔더라면 용천 대장이 살아남았겠는데. 그가 먼저 수류탄을 갱도 어귀 놈들한테 뿌린 바람에 일본 놈들은 용천 대장 쪽으로 모여 갔다. 참, 난 살아남고 용천 대장은 희생되지 않았느냐? 난 용천 대장에게 목숨 빚을 졌단 말이다.” 허나 진달래는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아니라요. 절대 아니라요. 그때 두 개 소조로 나뉘어 포위를 돌파하지 않았으면 갱도 안에서 몽땅 잘 못 됐을 거예요.” 진달래는 경주를 구들에서 놀게 놔두고 말했다. “저도 형님한테 미안해요. 형님을 제가 잘 보호하지 못했어요. 오빠는 이젠 용천 대장에게 미안한 마음을 버리세요.” 둘 다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었다. “용천 대장이 시체라도 있으면 3년제라도 지내 줄 텐데 시체마저 없으니 이 일을 어쩌겠느냐? 누가 희생됐다고 믿을 수 있느냐? 난 지금도 용천 대장이 어디엔가 살아서 너와 경주를 찾고 있는 거 같아.” 그러나 진달래는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오빠, 용천 대장은 이미 희생됐어요. 살아 있으면 2년 사이에 왜 명천 우시장과 불과 50리도 안 되는 이 업동에 찾아오지 않았겠어요?” 진달래는 말을 꺼낸 바 하고는 한 술 더 떴다. “이젠 더는 망설이지 마세요. 제 마음은 이미 알지 않아요. 혹시 은녀한테 마음을 둔 걸 제가 너무 다그치는지는 모르겠지만요…” 성칠은 진달래 말을 막았다. “됐다, 그만 해라. 은녀는 한 마을에서 자란 누이동생이야. 얼마나 불쌍한 앤데.” 진달래는 한숨을 호- 내쉬었다. “오빠의 마음을 알만 해요. 허나 미안해 할 거 없어요. 이제 경주를 잘 키워 주면 구천에 간 용천 대장도 감사하게 생각할 거예요. 헌데 뭣 때문에 질질 끄는 건가요?” 성칠은 손사래를 쳤다. “지금은 때가 아니다. 용천 대장을 좀 기다려 보자. 또 지금 우리 부대가 조선인민군으로 편성된 후 부대건설과 지방건설에 머리를 써야 한다.” 진달래는 한시름을 놓으면서 머리를 끄덕였다. 성칠은 진달래의 손을 잡고 진정을 토로했다. “나도 사람이다. 허나 생각해 봐라. 지금 함흥 촌에는 아버지와 동생들을 비롯한 숱한 항일 유격대 가속들이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중국 동만으로 국민당 반동파들이 수시로 쳐나올 위험이 있다. 그 놈들은 이미 길림까지 점령하고 교하를 넘보고 있다. 전운이 감도는 함흥 촌에 부모형제들을 두고 왔는데 고향으로 돌아 올 차비도 해주지 못하고 우리 둘의 일을 급급히 서두를 겨를이 있니?” 진달래는 피씩 웃었다. “오빠, 우리 둘의 일을 다그친들 함흥 촌의 일을 그르친다는 법은 없잖아요? 자꾸 미루지 말아요.” “또, 또.” 성칠은 눈을 흘기며 진달래의 손을 놓아버렸다. 진달래는 혀를 홀랑 내밀었다. “알았어요. 언제까지라도 기다리겠어요.” 성칠은 진달래를 보면서 희죽이 웃으며 말했다. “사실 은녀의 장래가 근심된다. 애를 가지고 부대에서 계속 일한다는 것도 말은 아니다. 요즘 궁리하다가 명천 우시장에 내려가 고향 운주동을 비롯한 가마골, 신흥동, 영월동 지방의 부녀위원회 사업을 하면 어떻겠는가고도 생각해보았다.” 허나 진달래는 도리머리질 했다. “은녀를 그렇게 먼 곳으로 보내지 말아요. 여기 업동 부근에 남겨 저와 함께 부녀위원회 사업을 하면 좋을 것 같아요. 어차피 저도 이젠 애를 가지고 군부대의 일을 하기 바쁜데요.” 성칠은 한참 궁리하더니 머리를 끄덕였다. “그게 좋겠다. 너와 내가 옆에서 은녀를 잘 보살펴야지.” 그제야 진달래의 철색 얼굴에 진짜 진달래꽃 같은 웃음꽃이 활짝 꽃폈다. 성칠은 우쭐 일어나 바깥으로 나가려고 했다. 그러자 진달래는 성칠의 팔소매를 잡아당기면서 말했다. “오늘 저녁부터 잠자리를 여기로 옮기세요. 제가 오늘 저녁부터 따뜻한 밥을 지어드리겠어요.” 성칠은 진달래를 꽉 끌어안아 주었다. 경주가 달려와 진달래 치맛자락을 잡고 매달리면서 “엄마, 나도 따뜻한 밥을 먹겠소.”라고 응석을 부렸다. 성칠은 진달래를 놓고 경주를 번쩍 들어 안고 “허허허.” 웃더니 뽀뽀를 해주었다. “에이유, 귀염둥이야.” 진달래는 오랜만에 “호호호.” 하고 웃으며 성칠과 경주를 한데 껴안았다. 성칠은 경주를 목매 태워가지고 바깥에 나왔다. 진달래가 뒤에서 따라 나오면서 행복에 겨워 깔깔깔 웃었다. 그들의 서쪽 집 마당에서 은녀가 경수의 손을 잡고 이쪽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어깨를 들먹이면서 집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이렇게 될 줄 알았더라면 옥설과 만금을 따라 김해로 훌 가버렸겠는 걸.) 가을 하늘에 기러기들이 줄을 지어 코 기러기를 따라 북으로 날아예며 끼룩끼룩 울고 있었다. 3. 서울 군영에서 만난 친일주구 서울의 길거리에는 미군 자동차가 먼지를 새뽀얗게 일구며 씽씽 달려 지나갔다. 올망졸망한 기와집들이 게딱지처럼 들어앉은 골목은 오불꼬불하여 꼴불견이었다. 허나 일제의 통지 하에 신음하던 서울은 나라를 찾은 기쁨으로 하여 사람들의 얼굴에는 기쁨의 꽃물결이 출렁이고 있었다. 용천은 자그마한 음식점에 들어가 육개장이나 한 그릇 달라고 하여 대충 점심을 먹네 하고 골목에 나섰다. (내 잘 못 본기여? 틀림없어. 그 음흉한 우멍눈이 틀림없어. 분명 한철주야.) 용천은 간도로부터 이태 전에 한국에까지 차고 나온 권총을 매만지면서 이를 부드득 갈았다. “친일주구 한철주 놈을 살려 둘 수 없어.” 용천은 사위를 둘러보면서 작은 골목을 벗어나 미군과 국군이 군사연습을 하는 한 군영 훈련장으로 걸어갔다. 사실, 용천은 3년 전에 간도 함흥 촌을 떠나 진달래와 경주를 찾아 먼저 진수해에 계시는 최구장의 집에 들렸다. 그러나 최구장도 그때 진달래가 따라간 성칠이네 부대가 조선 어디로 갔는지 모르고 있었다. 그리하여 용천은 기차를 타고 곧추 조선으로 나왔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성칠 대장과 진달래가 있음직한 명천과 우시장으로 다 돌아가며 찾아보았다. 하지만 그 곳에는 유격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원래 그때 성칠 대장이 이끈 유격대는 상부의 명령에 따라 함흥 쪽으로 나갔던 것이다. 허나 용천은 절대 포기할 수 없었다. 그는 밥을 빌어먹으면서 상우남면에서 운주동과 신흥동, 가마골, 영월동 그리고 지어 삼림에까지 다 돌아다니면서 수소문하였지만 헛수고를 하고 말았다. 끝내 진달래와 아들 경주를 찾지 못했다. 그래도 맥을 놓지 않고 업동으로 가보았다. 그러나 그 곳에 주둔한 부대는 간도에서 나온 부대가 아니었다. “어디 있을까? 혹시 진달래가 오빠와 함께 제대해 고향 개성으로 나가지 않았을까? 진달래는 북만과 함흥 촌에서 나를 더 기다리지 않고 성칠을 따라 조선에 나왔어. 걸 보면 내가 죽은 거로 아는 거 같아. 왜 걸케 생각하지?” 여기까지 생각하자 용천은 한없이 쓸쓸했다. 용천은 행여나 하고 아주 내심하게 반년 명천과 우시장 일대를 돌다가 3.8선에 묶이어 다시 고향으로 나가지 못할까봐 혹시나 해 눈보라를 무릅쓰고 개성으로 나갔다. 그때 성칠과 진달래는 상부의 지시에 따라 조선인민군에 편입된 후 다시 업동으로 되들어왔던 것이다. 진짜 용천을 골리기라도 하듯이 진달래네는 용천과 숨박곡질 놀았던 것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용천은 개성에서 진달래 네를 찾기 시작했다. 그 넓은 개성 땅에서 어느 골짜기가 진달래 고향인지 어떻게 알수 있겠는가. (가시아버지가 사냥을 하다가 장백산으로 도망쳐 들어갔다는 거 보면 들판에서 산건 아니야. 하마 어느 골 안에서 살았지?) 용천은 또 반달 너머 개성에서 이 골짜기 저 골짜기 헤매면서 진달래와 경호 네를 찾았지만 그림자도 볼 수 없었다. (그럼 진달래와 경호는 대체 어디에로 갔단 말인가?) 그는 개성 시내에 혹시 있을 가 하여 돌아다니면서 찾아보았다. 개성에는 개성 최씨가 한 두 집이 아니었다. 개성 최씨 최구철네 딸을 찾는다고 하니 개성 최씨 집들에서는 족보를 꺼내 들고 찾아보고 그런 사람은 자기 몇 촌이 된다고 할뿐 어디에서 사는지 몰랐다. 더욱이 최구장의 딸이 간도에 갔다가 어디에 와 있는지는 알지 못했다. (산 사람이 살아서야 만나겠지.) 용천은 개성 뒷산에 올라가 시내를 굽어보면서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었다. 고려 옛도읍이었던 개성은 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크게 상하지 않고 옛집이랑 그대로 남아 있었다. 정몽주가 태조 이방원 패거리들한테 쇠퇴를 맞고 쓰러진 다리도 그대로 쓸쓸히 누워 있었다. 고려 왕궁 옛터는 기초돌만 처량하게 덩그러니 드러나 있어 꼴불견이였다.        용천의 입에서 풍겨 나온 입김이 겨울바람에 사처로 흩어져 날아갔다. 용천은 허망 헤맬 수도 없어 후에 북으로 다시 건너가 찾아보기로 하고 먼저 고향 경주로 내려가 보기로 했다. 그는 맥없이 서울에 올라가 경부선 기차를 타고 급급히 고향 경주로 내려갔었다. 아버지와 어머니, 동생들, 온 집안 식구들이 몽땅 일본 놈들에게 살해된 고향은 쓸쓸하기 그지없었다. 허나 고향 마을 사람들은 용천을 붙잡고 울고 웃고 떠들며 반갑게 맞아주었다. 일본 놈들에게 빼앗겨 파출소로 됐던 고향 집은 높다란 토성으로 둘러져 있었고 집 안은 사무실로 마구 꾸며 놓아서 옛날 목조 팔간기와집 모습을 하나도 찾아 볼 수 없었다. “개 같은 강도 놈들, 남의 집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어?” 용천은 이를 뿌드득 갈았다. 마을에 있는 종친들의 도움으로 고향 옛집을 대충 손질해 놓고 들어 있으니 쓸쓸하고 갑갑해 죽을 지경이었다. 옛집에서 홀로 살면서 마당에 나서면 일본 놈들의 낯빤대기에 대고 손가락질 하며 ‘날강도 놈들아!’ 하고 욕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마당 앞의 감나무를 바라보니 동생들과 한가위에 감나무에 올라가 감을 따 먹던 일이 떠올랐다. 그때마다 용천은 부모형제들이 그리워 가슴을 쿵쿵 치며 눈물을 흘렸다. 어느 날, 리 이장이 찾아왔다.  “용천이, 나라에서 국군을 모집한다니께. 있제이, 너거 유격대 대장이니께 군사 지휘 잘 하자노. 한자리 하라니께.” 허나 용천은 국군 입대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는 혹시 진달래가 고향 경주에까지 어느 날 자기를 찾아 올 거 같아 고향에 한동안 물러 앉아 있기로 했다. 그리하여 고향 마을에서 친척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이태동안이나 농사를 지으며 물앉아 있었다. 언젠가는 철색얼굴에 환한 함박꽃 웃음을 지으며 진달래가 경주의 손을 잡고 자기를 찾아 고향 마을에 나타나는 날을 기다렸다. 그래도 기다리고 기다리는 처자는 나타나지도 않았다. 3.8선을 점점 넘기 힘들게 되자 용천은 버쩍 안달이 났다. “안되겠어. 3.8선이 영영 막히면 진달래와 경주는 영원히 만나지 못할 수도 있어. 영영 막히기 전에 북으로 들어가 처자를 데려 와야지.” 용천은 로비를 마련해 가지고 고향 마을을 떠나 기차를 타고 급급히 서울로 올라 왔던 것이다. 그가 광화문 앞의 큰 길을 따라 나가다가 청계천 부근에 이르렀을 때다. 한 패의 국군들이 미군을 따라 줄을 지어 어디에로 가고 있었다. 한 군관이 행렬 옆에서 미군 장교와 뭐라고 영어로 지껄이며 지나다나니 용천의 어깨를 툭 치며 지나갔다. 용천은 피뜩 쳐다보다가 어디에선가 보던 우멍눈이다고 도리머리 질 하며 지나가려고 할 때다. 그 군관이 허리를 굽신하며 “미안하오. 말하다나니 그만 실례했소.”라고 하는 것이었다. (듣기도 싫은 함경도 도둑놈의 말투!) 용천은 우멍눈에게 “괜찮아요.”라고 하고는 떠나가려고 했다. 그때 상대방도 가다가 용천을 돌아보다가 가버렸다. 용천은 우멍눈을 어디에서 보았던가고 생각하다가 피뜩 떠오르는 낯이 있어 주춤 멈춰 섰다. “혹시 저 놈이 한철주 놈인가?” 순간 용천의 눈앞에는 명천에서 일본 군복을 입고 간도로 진출하자고 마을과 공지로 돌아다니면서 연설을 퍼지르던 한철주 중대장, 간도에서 애비 원수를 갚자고 일본 놈들을 끌고 눈보라 치는 장백산 밀림 유격대 밀영을 쳐들어오던 한철주 부연대장 놈의 몰골이 눈앞에 삼삼히 떠올랐다. (그래, 한철주 놈은 쓰러진 일본 기관총사수의 손에서 기관총을 빼앗아 성칠 대장과 하옥 아주머니에게 사격하며 고래고래 고함쳤지.) 용천은 그 국군행렬을 따라 한 군영 훈련장에까지 갔다. 그런데 군사훈련을 하면서 백성들이 군영 훈련장 가까이에 얼씬하지 못하게 했다. 게다가 점심때라 군사훈련도 그만두고 국군들이 모두 식사하러 들어가는 것이었다. 용천은 훈련장을 떠나 자그마한 음식점에 들어갔다. 그가 다시 군영 훈련장으로 갔을 때는 병사들이 훈련장에서 웃고 떠들며 휴식하고 있었다. 용천이 훈련장 철조망 밖에서 군영과 훈련장을 기웃기웃 할 때다. 한 병사가 훈련장 바깥으로 걸어 나오는 것이었다. 용천은 그 병사를 마주 가면서 말을 건네었다. “여보게, 하나 물어도 되겠소?” 그 병사는 “뭔 일인데요?” 하고 무뚝뚝하게 반문했다. 용천은 그 병사한테 한 발자국 더 다가가며 나직이 물었다. “여기 혹시 한철주 군관 있소?” 그 병사는 용천의 아래 우를 훑어보더니 “건 왜 물어요?”라고 이상해 하는 눈치였다. “한 고향 사람인데 할 말이 있어 그러네." 용천은 고의적으로 함경도 말투를 썼다. 허나 그 병사는 자기 상전을 무턱 대고 낯선 사람한테 말할 수 없었다. “왜 대답하지 않겠나.철주군관이 알면 한 고향 친구를 만나지 못하게 했다고 자네를 욕할 거네.” “제가 대준 걸 아무한테도 말해선 안 돼요.” “그래, 말하지 않을게.” “저기요. 한중대장 맞아요.” “고향이 함경도 명천 맞지?” “어딘지는 몰라도 함경도 말투 쓴다고 모두들 함경도치라고 하죠.” 그 병사는 말을 시작하니 꽤나 헤펐다. “나 갈라요.” “응, 그래.” 용천은 가라고 손시늉 했다. 그는 들었던 손으로 무릎을 탁 치며 이를 뿌드득 갈았다. 그는 훈련장 옆에 있는 아파트 토성 구석에 가서 호주머니에 넣었던 권총을 꺼내 장탄하고 안전띠를 풀었다. “개 같은 친일주구 놈, 네놈이 다 우리 국군 장교가 다 됐어?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엔 네 놈의 깝질을 쫄딱 벗기어 놓아도 속이지 못해.” 용천은 이렇게 중얼거리면서 권총을 호주머니에 넣고 훈련장 가까이 다가가 한철주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그는 서울 복판에서 친일주구 한철주를 만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바깥에 나갔던 병사도 군영 안으로 돌아갔다. 그 병사는 복수심으로 이글거리는 용천의 표정에 놀란 듯이 아무 말도 건네지 않고 황급히 군영으로 들어가 버렸다. 한참 후 군영에서 숱한 병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런데 오후에는 군사연습을 하지 않는지 병사들은 대문 바깥으로 쏟아져 나오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철주의 그림자도 얼씬하지 않았다. “이자야!” “붙잡아!” 바깥으로 나왔던 병사들이 우르르 덮쳐들어 용천의 두 팔을 뒤로 비틀어 땅바닥에 쓰러뜨렸다. 뒤이어 호주머니에 넣은 권총마저 빼앗겼다. “이상하다 했더니 진짜 권총마저 있군 그려.” 병사들은 용천을 바로 꽁꽁 결박 지어 군영으로 끌고 들어갔다. 잠간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놔라! 이 놈들아, 죄 없는 사람을 왜 이러는 거야!” “보아하니, 이 놈이 우리 한중대장에게 적의를 품은 거 같아!” “심문하면 참대 통에서 콩알 쏟아지듯 할 거 아냐?” “그래, 그래. 저기 한 중대장이 온다.” 용천이 결박당한 채 머리를 들고 바라보니 우멍눈 한철주가 다가오며 쏘아보는 것이었다. “넌 누구냐? 나에겐 너 같은 한 고향 친구가 없어.” 용천은 어이없어 “하하하. 참말로 그럴듯한 국군 중대장이구나.”라고 비웃었다. “누굴 조롱하니. 넌 누구야?” 용천은 한철주의 우먹눈에 침을 뱉었다. “이 놈, 친일주구 한철주 놈아, 네 놈이 다 남으로 도망쳐 국군 장교까지 됐어? 세상에, 네 놈을 장백산에서 죽이지 못한 거 천추의 한이야.” 한철주는 깜짝 놀라면서 뒤로 물러섰다. 병사들은 한철주와 용천을 번갈아 보며 용천을 잡았던 손을 놓았다. 용천은 권총을 뽑는 한씨 놈을 보고 국군 병사들에게 고함쳤다. “저 놈은 일본 관동군 부연대장인기여. 난 장백산 유격대 대장 김용천이야. 빨리 저 놈을 붙잡아라!” 병사들은 더욱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한씨는 “허허허.” 너털웃음을 치며 너덜거렸다. “네 놈이 누군지는 몰라도 미친 듯하구나. 난 동만 항일유격대 당당한 중대장 한선주다. 네 놈이 사람을 잘 못 본 게 아니야? 생사람을 작작 물어먹어!” 허나 용천은 몸부림치며 고래고래 고함쳤다. “네 놈의 껍질을 쫄딱 벗겨 놔도 내 눈을 속이진 못해. 네놈은 분명 일본에 유학 갔다가 돌아와 함경도 명천에서 일본 관동군에 입대해 중대장, 부연대장을 한 한철주 놈이다. 네놈은 우리 숱한 항일유격대에 피 빚을 졌어!” 뒤이어 용천은 병사들을 향해 소리쳤다. “빨리 나를 풀어 놔! 친일주구를 당장 결박하라!” 한씨가 권총으로 용천을 쏘려고 할 때었다. “잠간! 웬 일이여?” 군영 안에서 한 장교가 채찍을 들고 나오더니 한씨와 용천을 번갈아 보면서 물었다. 그러자 용천은 장교를 보고 억울해 말했다. “난 북만 항일유격대 대장 김용천이예요. 저 한철주 놈은 친일주구인데요. 일본 관동군 부연대장도 했어요. 저 놈의 두 손에는 우리 항일유격대에 피 빚이 질벅해요.” “그래?” 한씨도 녹녹치 않았다. “저 놈에게서 빼앗은 권총입니다.” 병사들이 권총을 장교에게 넘겨주었다. 장교는 권총을 손바닥에 대고 탁탁 치며 용천의 아래 우를 훑어보더니 머리를 끄덕였다. “유격대 대장? 진짜 수상한 놈이구나. 빨갱이 물이 푹 스미었겠군. 좌우간 대장이라니 이렇게 예절 없이 대해서야 쓰나? 어서 결박을 풀어줘!” “예, 허 연대장님!” 병사들은 포승을 풀어 주었다. 용천과 한씨는 서로 황소눈을 부릅뜨고 마주 쏘아보았다. 허 연대장은 당장 서로 뜰 것 같은 뜨개소들마냥 으르렁거리는 그들 둘을 보고 너털웃음을 웃었다. “허허허, 보아하니 무슨 원수를 진 것 같은데 천천히 말해 보게.” 그리하여 그들 둘은 병사들의 호위를 받으면서 장교를 따라 군영 안으로 들어갔다. 군영 안은 꽤나 널찍했다. 벽에는 태극기가 정중히 걸려 있었다. 허 연대장은 태극기 아래 사무 상 앞에 가 앉더니 그들 둘을 좌우에 갈라 앉히고 병사들을 뒤에서 둘씩 붙어 지키게 했다. “먼저 유격대 대장에게 묻겠네. 이름이 뭔가?” “김용천입네다.” “김용천 대장이라? 고향은 어딘가?” “경주.” “경주? 헌데 광복 전에 그 먼 간도까지 가 유격대 대장을 했다?" “그래요. 저 한철주 놈은 일제 관동군 부연대장을 했어요. 즉시 처단하세요.” 허나 허 연대장은 피씩 코웃음 치는 것이었다. “사람 잘 못 본거 같네. 저 한중대장은 한철주가 아니라 한선주네. 한중대장은 일찍 일본 군사학교에 유학 갔다가 돌아 왔어. 친일주구면 뭐라게? 한중대장은 우리 서울에서 일본 파출소에서 줄곧 일했네. 언제 간도로 간적도 없어. 오해네, 오해.” 그 말에 용천은 어이없다는 듯이 자기를 쏘아보는 한선주를 다시 여겨 보았다. 아무리 다시 보아도 한철주와 신통히도 같은 자였다. 용천이 또 입을 열려고 하는데 허 연대장은 손사래를 쳤다. “이젠 그만하게나. 괜히 한 중대장을 억울하게 굴지 말게. 한 가지 묻겠네.” 허 연대장은 용천에게 다가왔다. “자넨 유격대 대장이라며? 왜 한국에 왔어? 이북은 빨갱이들 천하인데 한자리 하지 못하고.” 용천은 허 연대장을 쳐다보며 “고향을 찾아온 사람을 빨갱이라고 몰아붙이지 마세요.”하고 말했다. “보아하니 빨갱이들에게 밀린 거 같군. 고향이 뭐간데 고향 하나 바라보고 대장 직을 버리고 이남으로 왔어?” 용천은 버선목이라고 번져 보이지 못하는 것이 답답해 말도 나가지 않았다. 한참 후 용천은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말했다. “난 처자를 데리러 북에 갔다 와야 하겠어요. 말씨름 할 새 없어요.” “그래? 흥!” 허 연대장은 사무 상 앞에 돌아가 척 앉더니 용천을 쏘아보며 말했다. “그리 쉽게 보내주지 않을 걸. 당신 권총을 품고 다니면서 우리 한 중대장을 죽이려 한 혐의가 있어.” 그 말에 용천은 주저앉으면서 애원했다. “허 연대장, 사람을 잘못 보고 오해한 것뿐인데요. 왜 이래요? 3.8선이 꽉 막히기 전에 이북에 가서 처자를 데려오게 해 주세요. 전 일본 놈들에게 부모형제들을 다 잃고 간도에서 얻어 본 색시와 아들애 경주 밖에 없어요. 제발 저를 이북에 보내주세요.” “답답한 친구라구.” 허 연대장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김 대장, 3.8선은 이젠 마음대로 드나들지 못하게 됐네. 당신 가고프면 가는 곳인가 하는가?” “예?” “황차 자넨 살인협의가 있네. 우린 경주에까지 가서 자네 내력을 철저히 조사한 후에야 결론을 내릴 수 있네.” “그럼 다그쳐 주세요.” “그래? 그러지.” 허 연대장은 다가와 용천의 손을 잡아 일으킨 후 한선주 중대장 앞으로 데리고 갔다. “악수나 나누고 화해하게나.” 한선주 중대장은 시큰둥해 하는데 용천은 그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 “한 중대장, 죄송해. 당신 정말 친일주구 한철주와 신통히도 닮았단 말이야.” “쳇, 꽤나 싱거운 사람이군 그래. 난 한뉘 서울에서 경찰로 살았네.” “허나 일본 파출소 경찰이면 친일주구는 맞지?” “이 사람, 계속 지분거려?” “됐네, 됐어. 먼저 김 대장의 권총 솜씨를 봐야겠네. 진짜 대장 맞나 봐야겠어.” 허 연대장은 둘을 데리고 바깥으로 나가 사격장으로 갔다. 과녁과 한 오십 미터 떨어진 앞에서 허 연대장은 권총을 꺼내 절컥 장탄한 후 용천의 앞에 내밀었다. “자, 쏴 보게나.” 용천은 권총을 받아 쥐고 과녁을 피뜩 보더니 허 연대장을 돌아보았다. “제가 다섯 발을 다 명중하면 이북으로 보내겠어요?” “잔말 말고 먼저 쏘라고!” 용천은 머리를 돌리더니 권총을 들어 쏘았다. 땅! 권총으로 그렇게 먼 과녁을 쏘아 맞혔다. 땅! 땅! 땅! 땅! 연이어 네발을 연발로 쏘았다. 병사들은 모두 입을 딱 벌리며 박수갈채까지 보냈다. 한 병사가 달려가 나무판과녁을 뽑아가지고 달려왔다. 과녁을 보고 허 연대장이나 한선주는 눈이 동그래졌다. 총구멍이 세 개 밖에 나지 않았던 것이다. “세 발 밖에 명중하지 못했네.” 한선주가 말하자 허 연대장이 도리머리 질 했다. “아니야. 이걸 보게 이 구멍이 더 크지 않은가?” 허 연대장의 말에 한선주와 용천이 여겨보니 확실히 두 총구멍 보다 한 구멍은 총알이 세 개 나간 흔적이 알리게 컸다. “명사수구먼. 안 되겠어. 자넨 북으로 다 갔네.” “약속하지 않았나요? 다 명중하면 보내 주겠다고.” “허허허, 내 언제 약속했나. 먼저 쏘아보라고 했지.” 허 연대장은 소탈하게 웃으면서 뒷말을 이었다. “우린 지금 일제 때 경찰이고 유격대 대장이고 가릴 새 없네. 나도 독립군 출신이야. 김좌진 장군을 따라 간도에서 청산리전투와 봉오동전투에도 참가했네.” 그러자 용천은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난도 처음에는 독립군이었어요. 후에 독립군이 소련으로 사라지자 유격대에 들어갔어요.” “그래? 그럼 우린 통하는 데가 있군. 자넨 북으로 가지 말고 우리 연대에서 사격술 교관을 해야 하겠네.” 용천은 어이없어 너부죽한 얼굴에 그늘이 비꼈다. “허 연대장, 그럼 이렇게 하자요. 북에 가서 처자를 데리고 온 후 다시  허 연대장을 찾아오지요.” “안 돼, 건 우리가 결정할 나름이야. 자네 가려면 가고 있자면 있는 거 아냐. 자넬 아직 믿지 못해. 자네를 철저히 조사해야 돼.” 용천은 머리를 푹 숙이었다. “그래 언제까지 날 붙잡아 둘 예산인가요?” 허나 허 연대장은 벌써 저만치 가고 있었다. 그러자 용천은 옆에서 걷는 한선주의 손을 잡고 사정했다. “자네 좀 허 연대장과 말해주게나. 나 좀 이북에 가서 처자를 데려오게.” “이럴 땐 친일주구가 필요한 가 베? 흥!” “퉤! 더러운 자식, 내 네놈이 괘씸해 여기 있을란다. 어디 두고 보자.” 그 말에 한선주는 대수로워 하지도 않으면서 병사들에게 용천을 가리키며 “밀영에 압송하라!” 하고 호통을 쳤다. 용천은 먹장구름이 둥둥 떠 흘러가는 북녘 하늘을 쳐다보았다. (여보, 진달래, 내 언제 당신 모자를 만나지?) 용천은 밀영에 압송돼가면서 눈앞이 까마아득해 났다.  
89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68) 댓글:  조회:1653  추천:1  2017-05-22
             8. 추격        민주연군은 휴식정돈을 한 후 호호탕탕하게 묘령에로 추격했다. 상순과 성수, 태수는 기관총을 메고 부대를 따라 묘령으로 강행군했다. 민주연군 선두부대가 묘령 동쪽과 서쪽 산을 점령하자 묘령에 둥지를 틀고 있던 토비들은 혼비백산해 전투준비를 하느라고 전호를 따라 올리 뛰고 내리 뛰며 들볶아댔다. 한 군관 놈이 권총을 빼들고 뭐라고 꽥꽥 고함치는 모습도 보였다. 상순은 기관총반을 령솔해 높은 둔덕에 급히 은페호를 파고 기관총 여섯정이나 걸어놓았다. 그런데 허백호 련장은 뒤에서 두덜거렸다. "김지도원은 뭐야? 사상공작이나 할게지. 항상  련장 앞에서 기관총반을 이래라 저래라 한다니까." 상순은 못들은척 했다. 적정이 긴급한데 네냐 내냐  따질새 없었다.     갑자기 말 발자국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난데 없는 수십명 기병이 먼지를 새뽀얗게 일구면서 달려왔다. 철갑모를 쓰고 록색군복을  입고 돌격총으로 무장한 것을 보아 검정솜옷에 개털모자를 쓴 토비는 아니었다. "우린 쏘련홍군이야!" 통역인듯한 쏘련 홍군이 고함쳤다.     당시 묘령에는 한개 영이나 되는 쏘련 홍군이 주둔해 있던 쏘련 홍군 기병이 토비들과 민주련군 사이에 달려왔던 것이다.     뒤이어 뚱뚱하고 엄청 훤칠한 꺽다리장교가 통역관과 몇몇 경호원을 데리고 민주련군 진지에 다가왔다.     자지러진 말 호용소리와 함께 통역관은 민주련군 진지 앞에서 말을 멈춰세우고 말에서 내렸다. "누가 최고장교인가?" 최퇀장이 진지에서 나가려고 했다. '"잠간!" 지도원 상순이 나서 막았다. "최퇀장, 위험합니다. 토비들이 총구를 겨누고 있습니다. 제가 나가 보겠습니다." "또또또, 퇀장 할 일에 앞서기를? 쯧쯧쯧," 허백호 련장이 눈을 흘겼다. "어째 사람이 앉을 자리 설 자리도 모르고 헤덤비오." 최퇀장은 진지에서 나가려다가 주춤 멈춰서더니 상순한테 머리를 돌렸다. 상순은 최퇀장한테 다가왔다. "저 뚜뚜마위치란 쏘련 홍군 장교 면목 있습니다. 항일전쟁 때 일제 거점을 칠 때부터 룡정해방때까지 쭉 친분이 있습니다." "그래?" "제 가보겠습니다." "좋소. 가보오." 상순은 경호원도 부르지 않고 단독으로 쏘련 홍군 장교한테 다가갔다. "쩨뜨라스뜨워이체(안녕하십니까)? 뚜뚜마위치 상교님.)" 상순이 군례를 올리며 서투른 로어로 인사했다. 그러자 홍군 장교는 뜻밖에 자기를 알아보고 로어인사를 하자 어깨를 어쓱하며 반색했다. "하라쇼(좋아 )!" 통역은 상순을 데리고 장교 앞에 다가갔다. 상순은 한어로 인사했다. "뚜뚜마위치 상교님, 안녕하십니까?" 통역이 통역하자 뚜뚜마위치 상교는 상순의 아래 위를 훑어보더니  "오첸 하라쇼(很好)! 에따 킴(이게 김씨구만)!" 뚜뚜마위치 상교는 반색하며 말에서 뛰여내러 두 팔을 벌리더니 사순을 와락  포옹했다. 그는 상순의 손을 잡더니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당신들 뭔가? 항일전쟁도 끝났는데 중국 사람들끼리 싸우다니? 우린 내전을 반대해!" 상순은 토비들의 만행을 말하면서 내심하게 민주련군의 전투 정당상을 설명했다. "뚜뚜마위치 상교, 우린 항일전쟁 때부터 전우입니다. 우리 일본 놈들과 싸울 때 저놈들은 낯짝도 내밀지 않고 우리 백성들을 해치고 항일전쟁 승리과일을 따먹으려고 합니다. " "건 그래. 저 토비놈들 산에 둥지를 틀고 들어앉아 우릴 도와 총 한방도 쏘지 않았어. 괘씸한 것들." 그라나 뚜뚜마위치는 두 팔을 쫙 벌리며 어깨를 으쓱했다. "우린 중립이야. 량군은 서로 싸우지 말라. 우린 전투를 말리러 왔어!" 그러자 상순은 쐐기를 콱 박았다. "우릴 도와 저 놈들을 투항하게 해주십시오. 그럼 우린 싸울 필요없습니다. 저놈들이 우리 백성들을 살해하고 략탈하며 못 살게 굴기에 싸우게 됐습니다."  "그래? 하라쇼(좋아). 량군이 담판하게나." "저놈들을 투항하라고 압박해주십시오." 뚜뚜마위치는 상순의 어깨를 툭 쳤다. "알았어." "하라쇼(좋습니다). 쓰빠시바(감사합니다)." 상순 항전시기 쏘련 홍군과 함께 북만으로부터 용정까지 쳐나간 기나긴 로정에 로어 통역에게서 배운 보리로어를 꽤나 잘 써먹었다. 그의 보리로어인사말이 아마 뚜뚜마위치와의 거리도 쭉 줄일 수 있은 것 같았다. "담판하러 오게나!" "예. 투항하겠다면 가지." "다스비따냐(다시 만납세)!" "다스비따냐(다시 만납시다).)" 뚜뚜마위치는 상순과 작별인사를 한 후 말을 타고 기병대를 이끌고 토비 진지로 달려갔다. 그는 기병대 장병들을 데리고 토비무리와 민주연군 사이에서 앞뒤로 왔다 갔다 하면서 서로 싸우지 말라고 재삼 말리었다. 그는 일본 놈들을 몰아낸 후 민주연군과 토비들이 싸우는 것에 반감을 가진 나머지 양 군이 담판하여 문제를 해결하라고 했다.      .뚜뚜마위치 상교의 노력 밑에 끝내 민주련군  간부와 토비 두목의 담판이 열리게 되였다. 량군은 쏘련 홍군의 감독하에 원 진지에서 2리씩 철거하고 담판하기로 하였다. 물론 량군 중간에는 쏘련 홍군이 막아섰다. 담판에는 민주련군 방락권 퇀장과 최낙련 퇀장, 그리고 김상순 지도원이 참가하였고 토비쪽에서는 두목 셋이 참가하였다. 쌍방은 모두 쏘련 홍군의 규정에 따라 무기는 휴대하지 못하였지만 담판 석상에서 서로 잡아먹을듯 눈을 뚝 부릅뜨고 서로 쏘아보며 씩씩거렸다.      담판석상에서 뚜뚜마위치 상교는 책상을 꽝 치더니 량군에 명령하듯 을러멨다.      "우린 중국 내전을 반대한다. 량군은 전투를 그만두고 화해하라."      그러자 토비두목은 코방귀를 뀌였다.      뚜뚜마위치는 토비두목을 쏘아보았다.      "누가 불복해 계속 싸우면  쏘련 홍군이 가만놔두지 않을 거야!"      최낙현 퇀장은 토비두목들을 보고 투항하라고 권고했다. "투항하라. 투항하면 살려준다." 뚜뚜마위치도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옳아. 토비들은 민주련군에 력량대비도 안되니깐. 너희 토비들 투항하는 게 상책이야. " 그는 엄지를 내둘렀다. "그럼 전투 안하고 평화야, 평화!"  그러나 토비 두목은 순순히 투항하려고 하지 않았다. "우리 묘령과 아주 가까운 천교령에 800여명 토비 있어. 그들이 이제 지원하러 올건데." 방락권 퇀장은 책상을 치며 위협했다. "우리 민주연군 2천여 명이 묘령을 물샘틈없이 포위했다. 네놈들은 독안에 든 쥐야." 뚜뚜마위치 상교가 벌떡 일어나 권총을 빼들고 을러멨다.  "어서 투항해라! 투항하지 않으면 우리 쏘련홍군이 네놈들 천당에 보낼테야!" 깡굴깡굴한 양머리 밑에서 데굴데굴 부라리는 새파란 눈알에서 불꽃이 튕겼다. 당장 토비두목들을 잡아먹을 상이었다. 그제야 토비 두목들은 목을 움츠러뜨리며 입장을 바꿨다. 토비 두목은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하게 뚜뚜마위치 상교 앞에 가서 굽신거리며  말했다. "우린 즉시 무장기의를 일으키겠습니다." 뚜뚜마위치 상교는  권총을 허리에 차더니 토비 두목의 낯을 쥐여 비틀며 지껄였다. "하라쇼(좋아)! 이제야 대가리 제대로 돌아가는구만. 당신들 살았어, 살아. 허허허." 그때 상순이 최퇀장한테 귀속말을 하더니 토비두목을 보고 물었다. "전보흥과 조학구 너희들 소굴에 갔지?" "누굴 그러오?" "시치미를 따지 말고 먼저 두 놈부터 내놔라. 그래야 기의성의를 보이는 거야." 토비두목은 난처해했다. "기의하면 살려준다고 해놓고 이러면 어쩝니까?" "당신들은 살려줄 수 있소. 그러나 전보흥과 지학구는 우리 김지도원과 10여명 전사들을 살해한 놈이기에 살려둘 수 없다." 토비두목은 나머지 두 놈에게 눈길을 주었다. 그러자 두 놈은 벌떡 일어나 결단했다. "그 놈들을 우리 손으로 결박해오겠수다." "히라쇼(좋아). 당신들 기의를 환영하네."  뚜뚜마위치는 량군 수장들이 서로 악수하게까지 하였다. 뒤이어 투비도목을 돌아보았다. "따스비따냐(안녕히). 허허허." 그 말에 토비두목은 깜짝 놀라 무릎을 털썩 꿇었다. "제발 살려주십시오. 금방 기의하면 살려준다고 해놓고 때려죽이겠다고 하면 어쩝니까?" 통역의 말을 듣고 뚜뚜마위치는 험상궂은 얼굴에서 웃음기를 거두었다. "뭐라고?!" 토비두목은 뚜뚜마위치 상교를 감히 쳐다보지도 못하고 중얼거렸다. "금방 장군께선  뭐? 死吧死吧(쓰바씨바.), 打死必打你啊( 따쓰비따니아)하던데..." 통역은 그 장마도깨비 너을 건너가는 소리 같은 말을 듣고 웃음보를 터뜨렸다. “핫하하.” 로어를 모르는 토비두목들은 뚜뚜마위치 상교의 말을 오해했던 것이다. 통역은 토비두목에게 일일이 해석해주었다. "'쓰빠씨바'는 '감사하다'는 말이지 '죽어라'거나 '죽이겠다'는 말이 아니네.  '따쓰비따냐'는 '안녕히'라는 말이지 "때려죽이겠다'거나 '널 꼭 때리겠다.'는 말이 아니네." 통역은 시름이 놓이지 않는지 한마디 덧보탰다. "오해말게. 뚜뚜마위치 상교는 작별인사를 한 거네."       그제야 투비두목은 천천히 일어나면서 굳어졌던 낯을 풀었다. "오- 알았소. 우린 꼭 기의하겠습니다." 토비 두목은 자기 대오로 돌아가자 토비들을 몽땅 데리고 무장기의를 일으켰다. 토비 두목들은 총상을 입어 다리를 쩔뚝거리는 지학구를 결박해 끌고 왔다. 지학구는 상순을 보자 애걸복걸했다. "상순이, 자넨 알잖나? 난 충국이랑 데리고 기의했는데. 장관과 말해 제발 살려주게나."  상순이 세귀눈을 부릅떴다. "이놈 가짜로 기의한 끝장이 뭔지 아는가?" 최낙현 퇀장이 다가와 호통쳤다. "네놈은 우리 민주련군 대부대에 겁 먹고 가짜로 기의했고 전보흥을 따라 토비굴에 재차 들어간 놈이야. 네놈은 일제 때도 해동파출소 소장질한 친일주구야. 네놈은 우리 김지도원과 10여명 전사들을 악독하게 살해한 놈이야. 천만번 죽어도 마땅하다." 지학구는 대가리를 툭 떨어뜨렸다. 그는 상순을 쳐다보며 애걸했다. "상순이, 난 그래도 사촌형 지학사가 네 할아버지 괭이로 찍어놨다고 300원을 배상하게 하잖았는가. 그 은공을 봐서라도 살려주게나." 상순은 지학구를 보자 눈에 복수의 불길이 일었다. 그러나 억지로 눅잦히며 물었다. "충국은 어디 있어?" "충국은 나와 함께 기의를 일으켰다가 마룡이란 자가 전소교한테 고발하는 바람에 들켰네. 충국은 당장에서 마룡을 쏘아죽였네. 뒤이어 그는  나와 함께 전소교를 암살하려다가 실패하자  어디로 도망쳤는지 몰라. 이만하면 날 살려줄만 하지?"  "퉤!" 상순은 지학구의 낯빤대기에 침을 퉥 뱉었다. "더러운 친일주구놈, 살기를 바라느냐! 네놈은 가짜기의해 목숨을 부지했다가 재차 전소흥을 따라 묘령 토비소굴에 도망쳐 반변했다." 최낙연 퇀장은 상순에게 손을 홱 휘둘렀다. "끌어내가 총살해라!" "옛!" 상순 지도원은 전사들에게 손을 홱 휘둘렀다. 전사들은 지학구를 진지에서 끌고 산꼴짜기로 나갔다. 상순은 허리춤에서 권총을 빼들고 고래고래 고함다. "김지도원과 전사들의 원쑤를 갚는다. 인민을 대표해 친일주구 네놈을 처단한다!" 땅!땅! 땅! 총소리와 함께 친일주구, 토비 패장  지학구는 산꼴짜기로 굴러내려갔다. 전사들이 달려내려가 생사를 확인하었다.  토비들은 지학구가 총살당하는 걸 보고 와들와들 떨며 수군거렸다. 상순은 토비들을 보고 지학구의 가짜투항한 것과 그의 죄악을 렬거하면서 진심으로 기의한 자들을 죽이지 않기에 겁나하지 말라고  하였다. 최낙현 퇀장은 토비두목을 보고 물었다. "전보흥놈은?" "그 놈, 눈치 빠릅니다. 우리 담판한다는 걸 알고 우리 셋이 없는 틈에 지학구를 쏘고 경호반 놈들을 데리고 천교령 쪽으로 도망쳤습디다." "음," 최낙현 퇀장은 머리를 끄덕였다. "또 놓쳤군." 상순이 토비두목에게 물었다. "그 놈이 무전기도 가지고 달아났는가?" "예."그랬습니다." 최퇀장이 다그쳐 물었다. "그 놈이 무전기로 누구와 련계하던가?" "뭐, 왕특파원이란 자와 자주 무전기로 련계하는 거 같습디다." "왕특파원? 그놈 어디 있는 놈인가?" "국자가에 있다던가?" 최퇀장과 방락권 퇀장은 서로 눈길을 마주쳤다. 상순은 땅이 꺼지게 한숨을 후- 내쉬었다.       극악무도한 전보흥 놈은 놓쳤지만 묘령 토비숙청은 쏘련 홍군의 방조를 받아 간단히 담판을 통해 승리적으로 끝났다. 민주연군은 숨을 돌릴 새도 없이 초봄이 돼 잔설이 깔린 길을 따라 천교령의 토비를 숙청하려고 진군했다. 상순이랑 성수랑 기관총을 마차에 싣고 천교령으로 들어가는 태평령에 이르렀을 때었다. 골짜기에서 피물로 벌겋게 물든 눈썩임물이 주절주절 흘러 내렸다. 길옆 여기저기잔설 속에 부서진 박격포와 포탄 깍지 그리고 유골들이 가득 널려 있었다. 이쪽 산비탈에는 왜소한 뼈가 널려 있었는데 그것은 일본 놈들의 유골이었다. 저쪽 산비탈의 잔설 속에는 좀 키 큰 뼈가 널려있었는데 그것은 소련 홍군의 유골인 것 같았다. 상순이랑 마차를 몰고 부대를 따라 태평령 요자구에 이르렀을 때다. 천교령의 토비 두목 류무경이 졸개를 보내 우리 민주연군 최낙현 퇀장을 찾아 왔다. 그 놈은 “우린 투항하겠소.”라고 말하면서 흘끔흘끔 여기저기 살피는 것이었다. 최 퇀장은 대뜸 이 놈이 아군의 무기정황을 정탐하려고 왔다는 것을 간파했다. “기의하겠으면 자네들의 류무경 두목이 마중 나와서 우리 잠자리나 마련해 줘야지. 날이 어두워지는데 말만 하면 되는가?” 상순도 한마디 했다. "전보흥이란 놈을 생포해 오라. 그럼 너희들 기의를 믿을 수 있다."      그 놈은 자기 두목의 음모를 들여다 본 것 같아 “예, 예. 돌아가 전하겠습니다.”라고 하며 황급히 돌아갔다. 최 퇀장은 부대에 명령을 내렸다. “적들은 기의에 성의가 없습니다. 저 놈들은 가능하게 오늘 저녁에 야습하러 올 것입니다. 요자구에 주둔하되 모두 옷을 입고 신을 신은 채로 시시각각 전투준비를 하시오.” “옛!” 부대 장병들은 모두 옷을 입은 채 요자구 개인 집들에 들어가 쪽잠을 잤다. 아니나 다를까! 밤 11시 쯤 되자 천여 명이나 되는 토비들이 대포산(포대산)에 진을 치고 요자구 마을에 포를 쏘며 기관총으로 소사했다. 쿵! 쿵! 쾅! 쾅! 따르륵! 따르륵! 포탄이 작렬하고 자지러진 총소리가 들리자 민주연군 장병들은 재빨리 마을에서 뛰어나가 산 둔덕에 진을 쳤다. 민주연군 전사들은 박격포를 걸어놓고 대포산을 향해 맹렬히 쏘았다. “딱!” “쿵!” 쾅! 쾅! 쾅!      포탄이 죽음의 노래를 부르며 적진으로 날아갔다. 뒤이어 적진에서 검붉은 버섯불길이 무수히 피요오르고 화광이 하늘을 :찔렀다.맹렬한 포화에 토비들은 무리로 쓰러졌다. 상순 지도원은 이성수와 이태수 등 기관총사수들을 영솔해 산 둔덕에 기관총을 걸어놓고 불길이 마을 쪽으로 번쩍번쩍 날아오는 곳의 적들을 향해 맹렬한 사격을 가했다. 무수한 빨간 불줄기가 적진으로 보기좋게 날아가 꽂혔다.  적들은 비명을 지르며 삼대 쓰러지듯 뒈지었다. 적들은 민주연군이 마을에서 잠을 자려니 오산하였었다. 그런데 민주연군 장병들이 신속히 산 둔덕에서 박격포와 기관총 소사를 하며 반격하자 질겁하여 싸울 마음조차 없어지었다. 박격포 탄알이 씽씽 날아와 쾅쾅 작렬하는데다가 기관총알이 비발 치듯이 날아와 숱한 토비들이 싸워도 보지 못하고 삼대 쓰러지듯 했다. 토비들은 병력이나 무기나 모든 것이 열세에 처한 것을 직감하고 밤도와 어둠 속에서 도망쳐 버렸다.       전보흥은  무전기로 왕특파원에게 천교령항거가 실패했다는 것을 회보하고는 전소광 등을 데리고 도망쳤다. 그는 그 길로 령길을 타고 돈화와 교하를 거쳐 길림에 도망쳤다. 후에 그는 신개령전투에서 중국인민해방군에 저격되였다. 그가 가지고 달아난 무전기를 로획하지 못하고 국민당 정규군 손에 들어가는 바람에 국자가에 있는 왕특파원이란 자의 단서가 잠시 끊어나  그 놈을 잠시 나포하지 못하였다.       전보흥의 동생 전소광은 패잔병을 따라 장춘을 거쳐 심양으로 도망쳤다.       천교령의 토비 패잔병놈들은 그 길로 흑룡강성 녕안현에 도망쳐 마희산을 두목으로 한 토비무리에 가담한 후 목단강을 거쳐 해림 쪽으로 도망쳤던 것이다. 민주연군 부대는 그 기세로 왕청현 로흑산 토비들을 소멸하러 출발했다. 로흑산은 라자구와 중소 국경선과 각각 150리나 떨어진 심심산골이었다. 민주연군이 영길을 타고 쏜살같이 쳐들어갔다. 그러자 300여명 토비 놈들은 싸울 념도 하지 못했다. 아마 토비 놈들은 삼도만과 묘령, 천교령 일대의 토비들이 몽땅 숙청당한 소식을 듣고 혼비백산한 것 같았다. 그 놈들은 일본 놈들에게서 빼앗은 십 여대의 자동차에 시루 속의 콩나물 대가리처럼 꽉 박아 앉아 녕안과 동녕 쪽으로 부릉부릉 엔징 소리를 내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상순은 최 퇀장의 명령에 따라 기관총 반을 영솔하여 로흑산 산마루에 기관총을 걸어놓고 맹사격을 가했다. “사격!” 뚜르륵 뚜르륵! 태수랑 성수랑 병수랑 기관총으로 자동차를 타고 도망치는 토비들을 향해 몰사격을 가했다. 기관총알은 비발 치듯 하며 날아가 자동차를 타고 달아나는 적들을 보기 좋게 쓰러 눕혔다. 순간 도주하는 자동차 우에서 토비들의 아우성소리와 비명소리가 하늘땅을 뒤흔들 지경이었다. 맹렬한기관총 소사에 자동차 한 대가 휘발유통에 불이 확 달렸다. 토비 놈들이 자동차에서 비명을 지르며 뛰어 내리었다. 그 놈들은 태수랑의 기관총 소사에 삼대 쓰러지듯 뒈지었다. 꽝! 불을 달고 달려가던 자동차가 삽시에 요란한 폭발굉음과 함께 폭파되었다. 숱한 토비 놈들이 하늘로 날아났다. 자동차 잔해에는 삼단 같은 불길이 활활 타 번졌다. 살아남은 몇몇 놈들이 몸에 불이 달린 채 자동차 우에서 뛰어내려 꽥꽥 비명을 지르며 데굴데굴 굴다가 뒈졌다. 상순은 성수와 태수를 돌아보며 “제일 앞의 자동차 휘발유통을 조준해 사격!”하고 고함쳤다. “알았소!” 그들 셋은 기관총으로 제일 앞의 자동차 휘발유통을 조준해 맹렬히 사격했다. 뚜르륵 뚜르륵 쾅! 요란한 폭발굉음과 함께 제일 앞의 자동차에 불이 활 달렸다. 토비 놈들의 아우성 소리가 어지럽게 들리었다. 어떤 놈들은 비명을 지르면서 불이 달린 채 달리는 자동차에서 뛰어내려 개죽음을 당했다. 어떤 놈들은 미처 뛰어내리지 못하고 자동차 폭발의 굉음과 함께 하늘로 날아나고 말았다. 뒤의 자동차 놈들은 앞의 자동차가 길을 막아 도망치지 못해 아우성쳤다. 이때 상순은 “1조는 두 번째 자동차를 갈겨라!‘ “예!” “2조와 3조는 젤 뒤 자동차를 사격하라!” “옛!” 기관총반의 여섯 정의 기관총은 몽땅 그 자리에서 부릉부릉 맴도는 토비들의 자동차를 조준해 사격을 가했다. 어떤 토비 놈들은 자동차에서 뛰어내려 길옆에 엎드려 이쪽에 대고 사격했다. 어떤 놈들은 자동차에서 뛰어내려 산비탈로 달아나다가 민주연군의 사격에 즉살했다. 이때 최퇀장의 명령에 따라 민주연군 박격포도 입을 열었다. “딱!” “쿵!” “쾅!” 박격포 탄알과 기관총알이 자동차의 토비들을 향해 우박 치듯 날아갔다. 토비들은 화가마 우에 오른 개미들처럼 맴 돌아치다가 염라대왕을 보러 떠나갔다. 그런데 두 번째 자동차가 불이 달린 채 제일 앞의 자동차 잔해를 마구 떠밀어 길옆에 처박고 꼬리 빳빳해 도망쳤다. 그러나 얼마 달아나지 못하고 “꽝” 하는 요란한 폭파 굉음과 함께 하늘로 날아났다. 민주연군 장병들은 통쾌해 환성을 질렀다. 토비 놈들은 숱한 주검을 남기고 서너 대 자동차 밖에 도망치지 못했다. 전투가 끝난 후 최낙현 퇀장은 상순을 불렀다. 상순이 기관총을 메고 통신원을 따라 스적스적 최 퇀장이 있는 절벽 밑으로 다가갔다. 최 퇀장은 상순의 어깨에서 기관총을 받아 내리워 놓고 말했다. “김지도원, 아주 잘 싸웠소. 전번에도 말했지만 동무는 영장을 해야겠소.” 그러나 상순은 덜미를 긁적거리면서 사양했다. “전 아직도 실전경험이 부족합니다. 지휘재간도 없는데 지도원도 너무 과분합니다. 이제 전투지휘와 대포쏘기재간을 배운 후 다시 봅시다.” 최 퇀장은 이해되지 않아 했다. “또 그 말이군. 김지도원은 이미 훌륭한 지휘재능을 발휘했소. 전쟁 속에서 전쟁을 배우라는데 왜 자꾸 그러오?” 상순은 속심의 말을 했다. “전 영장을 할 재간도 없습니다. 이젠 토비숙청도 다 했는데 부대에서 뭘 하겠습니까? 진수해 구위 서기 이계삼 동지는 저를 보고 동만의 토비를 다 몰아낸 후 함흥 촌에 돌아와 지방 사업을 하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지방 당 조직에 한 약속을 어길 수 없습니다. 마을에 돌아가 농사를 지으면서 지방 당 조직을 도와 민병공작을 할 예산입니다.” 최 퇀장은 상순을 쉽게 놓지 않았다. “상순 동무, 아직 국민당과의 전쟁은 시작에 불과하오. 삼도만의 전보흥도 나포하지 못했잖소? 지금 장개석 국민당 반동파들은 동북의 대도시를 거의 다 점령하였소. 그 놈들은 당장 교하를 친후 할바령을 넘어 우리 동만으로 쳐나올 망년된 꿈을 꾸고 있소. 중국에서 국민당 반동파를 철저히 소멸하기 전에는 우린 절대 발편잠을 잘 수 없소. 우린 계속 국민당 반동파와 싸워야 하오. 우리 부대에는 상순동무와 같은 전투지휘능력이 있는 군사인재가 필요하오.” 그러나 상순은 기어이 부대를 떠날 생각을 굽히지 않았다. “만약 국민당 반동파들이 교하를 넘어 우리 동만으로 쳐나올 때면 다르죠. 그때 다시 부대로 돌아와 본때 나게 싸우겠습니다.” 최 퇀장은 도리머리 질 했다. “참 답답하오. 동무는 후에 꼭 후회할 거요.” 그래도 상순은 자기 생각을 고집했다. 민주연군 부대는 라자구를 거쳐 왕청에 돌아와 휴식정돈하게 되었다. 상순은 최 퇀장의 비준을 받고 함흥 촌으로 돌아가게 됐다. 최퇀장은 소개신과 상부 영장임명장을 상순한테 주면서 말했다. "지방당조직에 바치오." "이건?" "꼭 바쳐야 하오. 동무는 지방에 가서도 이 직급의 사업을 해야 하오."  상순은 정이 폭 밴 기관총을 매만지면서  메고 떠나나가려고 청을 들었다. 최 퇀장은 상순이 기관총을 애지중지하는 마음을 읽은 듯이 기관총을 되 상순의 어깨에 메워 주면서 말했다. “김지도원, 지방에 아직도 국민당 잔여특무들이 있소. 이 기관총은 동무가 입대할 때 가지고 온 거니까 가지고 가오. 마을에 돌아가서 기관총사수를 많이 양성해 우리 부대에 보내주오.” 상순은 입이 함박만 해 싱글벙글 웃으면서 군례를 척 붙였다. “감사합니다. 최퇀장, 꼭 기관총사수를 수태 양성해 부대에 데리고 오겠습니다.” 최퇀장과 허련장은 아쉬운 대로 상순을 보내면서 머리를 끄덕였다. 이때 한 마을의 성수도 나섰다. “최퇀장, 나도 상순 반장과 함께 함흥 촌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최퇀장은 도리머리 질 했다. “이거 우리 퇀의 기관총사수들이 다 마을로 돌아가면 어쩌지. 성수동무는 기관총을 두고 가야겠소.” “옛!” 성수는 기관총을 내려놓고 상순을 따라 나섰다. 그러나 이태수는 최 퇀장의 눈치만 보면서 아무 말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이태수만은 계속 부대에 남아 있게 됐다. 상순은 승리의 희열에 넘쳐 기관총을 메고 성수와 함께 영길에 올라 함흥 촌으로 떠났다.                 제21장 두번째 고향 1. 첫봄 기다리고 기다리던 새 봄이 왔다. 빼앗겼던 나라를 되찾은 첫 봄이 왔다. 하늘에는 종달새가 지종지종 노래하며 날아옌다. 산과 들의 밭에는 땅의 주인이 된 농민들이 흥겹게 밭을 갈고 씨를 뿌리고 있었다.      상순은 마을에서 참군한 용사들을 데리고 마을에 돌아왔다. 마을 사람들은  왁짝거리며 집에서 뛰여나와 그들을 반겨맞았다. 그런데 상순이 야마꼬와 어린애까지 데리고 온 것을 보고 아낙네들이 쑤군거렸다.  "아니, 친일주구 일본첩년을 데려오다니?" "저런 애까지?" "정신 있소?" 상순의 무서운 세귀눈과 마주친 아낙네들은 입을 딱 다물어버렸다. "야마꼬를 들먹이지 마오. 야마꼬도 일제 침략전쟁과 지주들의 피해자오. 그를 기시해선 절대 안되오." "기생년 아니오?" "무슨 소리오? 일제 놈들한테 끌려온 일본군 위안부오. 일본 놈들의 피해자라니깐. 야마꼬는 의지가지 없는 불쌍한 여자오.절대 놀리지 말어야 하오. 언닌 토비놈들한테 참혹하게 살해됐소. 오빠 야마가와는 우리 민주련군을 도와 탱크를 몰고 삼도만토비소굴에 진공해 숱한 토비들을 소멸하고 장렬하게 희생되였소. 언니 요시꼬와 오빠 야마가와는 모두 토비들의 손에 희생돼 삼도만에 묻혔소."  그제야 마을 아낙네들은 측은한 눈길로 야마꼬를 바라보았다. 야마꼬는 돌아서서 애를 안고 어깨를 가늘게 들먹이며 눈물을 훔쳤다. 상순은 야마꼬를 충국의 부탁대로 지학사네 집에 보내지 않고 장학산네 집에 보냈다. 지학사 첩이지만 친일주구네 집에 가면 기를 펴고 살 것  같지 못했다. 그런 점을 고려해 상순이 아량있게 처리한 것이다.       그런데 상순이 야마꼬를 데리고 장학산네 토성안 집에 들어서자 장리국과 장미란이 야마꼬한테 아니꼬운 눈길을 보냈다. 상순과 장학산이 친척아주머닌데다가 의지가지 없는 여자라고 설득해서야 그들의 눈길이 겨우 좀 달라졌다. 기실 장학산이나 장충국이나 만나서 토론한 적은 없었지만 똑같이 엉뚱한 궁리를 하고 있었다. 충국은 상순을 보고 야마꼬를 자기 집에 뎌려가 기다리게 했다가 돌아가면 데리고 살 궁리를 하고 있었다. 너무 하얀 얼굴이 마음에 걸렸지만 화복치마 밑에서 비뚤거리는 터질듯이 펑퍼짐한 엉덩이가 퍽 사람을 미치게 만들었다. 장학산은 더욱 엉큼한 궁리를 하고 있었다. "그래, 충국은 어데 있느냐?" 장학산의 물음에 상순은 대뜸 장학산이 진작 충국이 토비에 들어간 걸 알고 있었음을 확인하였다. 그러나 상순은 대답하기 아주 난처한데도 별수없이 곧이곧대로 쭉 알려주었다. "평강촌에서 기의해 전보홍을 암살하려다가 실패한 후 어디로 도망쳤는지 모르겠습니다. 충국은 삼도만 토비숙청에 큰 공을 세웠습니다. 이젠 토비들이 다 숙청됐으니깐. 언제든지 마을로 돌아와도 되오."       뒤이어 상순은 장학산에게 경고했다. "당신도 이젠 구사회를 꿈꾸지 말고 로동개조에 잘 참가해 사상을 개조해야 하오. 그러잖고 다른 꿈을 꾸면 안되오."       장학산은 상순에게서 그간 충국의 이왕지사를 다 들었기에  머리를 끄덕이며 한숨을 땅이 꺼지게 후- 내쉬었다.        상순이 떠나가자 야마꼬는 장학산 일가의 눈치를 할끔할끔 보면서 불편해하였다. 그러자 장학산은  탄련있고 풍만한 야마꼬의 가슴을 노려보면서 마른 군침을 꿀꺽 삼켰다. "충국이 서른이 거의 되도록 장가도 못갔는데 일본 년이라도 마주세워야지. 흐흐흐. 좌우간 지학사는 죽었으니 우리 집안에 들어온 일본 여자를 우리 마음대지. 허허허." 그는 희죽이 웃으면서 요시꼬를 서쪽 방에 데리고 갔다. "자넨 오늘부터 우리 집 식구야. 아무 근심도 하지 말고 여기 서쪽 방에서 살게나." 야마꼬는 외씨 같은 얼굴에 희색을 띠우며  자그마한 앵두입을 쫑긋했다. "요씨!" "요씨(要死)라니? 뭐, 죽겠다고?" 장학산은 일어를 모르다나니 의아해했다. "남은 우리 집에서 잘 살라고 했는데 죽겠다니?" "호호호. 好(좋아)" 아니, 절대 죽어선 안돼. 우리 아들 오면 함께 살아. 알았어?" 야마꼬는 뜻밖의 말에 애를 안고 입을 하 벌리며 우스워했다. 그러나 그녀가 무슨 수가 있겠는가. 이젠 모자가 장학산에게 매운 목숨인데야. “아링아도 고자이마쓰(감사해요)." 장학산은 더욱더 오리무중에 빠졌다. "뭘? 이번엔.马死야? 허, 이거라구? '요쓰', '요쓰' 하더니, 자꾸 马死, 마쓰하면 어쩌느냐? 우리 집엔 말도 없는데. 흐흐흐.” 장학산은 음충한 눈길로 야마꼬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다가섰다. 그는 칡넝쿨 같이 메마른 손을 능구렁이처럼 뻗쳐 야마꼬의 허리를 슬쩍 건드리며 지껄여댔다. "넌 죽어선 안돼. 내겐 보배야." 장학산은 더는 참지 못하고 그 탐나는 요시꼬의 살진 엉덩이를 스리슬쩍 만졌다. "아이, 야라나이데 꾸다싸이(이러지 마세요)!" 야마꼬는 엉덩이를 비틀며 우는 애를 돌려대 장학산을 밀막았다. "하긴 잘해! 불여우 같은 년!" 그때 충씨와 장미란이 나타나 허연눈깔을 표독스레 희번뜩였다. "어디서 꼬리쳐!" "아니예요." 야마꼬는 어깨를 들먹이면서도 입이 열개라도 사실대로 까밝힐 수 없었다...      한편, 병완은 가래짝 같은 손으로 돌을 주어들더니 촌공소 마당 늙은 비술나무에 걸어 놓은 종을 댕, 댕, 댕 두드렸다. 함흥 촌 사람들은 촌공소의 종이 울리기만 하면 또 병완 촌장이 또 회의를 부른다는 것을 알고 모여 들곤 했다. 병완은 마루 위에 서서 마을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러분, 우리는 일본 놈들의 핍박에 의해 고향을 떠나 간도에 왔습니다. 이젠 일본 놈들을 몰아내고 나라도 되찾았습니다. 우리 고향에서도 일본 놈들이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허나 일본 놈들의 수십 년 동안 약탈적인 통치에 의해 우리 고향은 사람이 살 수 없고 밭을 개간하기 힘든 수림으로 돼버렸습니다. 그 수림을 몇 십 년 후에 채벌해 쓴다면 나라의 훌륭한 재목으로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두 번째 고향을 건설해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마을 사람들은 여기저기서 웅성거렸다. “제 고향을 두고 돌아가서 살지 못하고 어떻게 여기다 고향을 건설한다고 그러오?” “그러게 말이오. 여기 간도 함흥 촌이 어디 고향이오?” “두 번째 고향이란 말은 듣다 첫소리요.” 병완은 손을 들어 흔들고 연설을 계속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 고향을 잊으라거나 돌아가지 말라는 건 아니오. 돌아 갈 사람들은 돌아가오. 성칠과 통사정을 하면 한두 집이 돌아갈 순 있을 거요. 허나 어떻게 이 많은 사람들이 다 돌아가 살겠습니까? 우리는 다 함께 돌아가지 못할 바엔 조선에 나간 성칠이나 칠백을 비롯한 자식들과 나라에 부담을 주지 말고 함흥 촌에 정을 붙이고 삽시다. 정이 들면 아무데나 고향입니다. 우린 여기를 우리 두 번째 고향으로 생각하고 발을 붙이고 살자는 겁니다. 우리가 여기 와서 어떻게 일군 저 밭입니까? 우린 피땀을 흘려 일군 저 밭을 절대 버리고 돌아갈 수 없습니다. 우린 지주를 청산하여 집과 밭을 나눠 가지고 잘 사는 날을 맞이했습니다. 이 땅을 보호하기 위해 피를 흘리며 삼도만 등지의 토비들을 몽땅 숙청해버렸습니다. 우린 위대한 중국 공산당의 령도 아래 새 중국에서 소작료도 내지 않는 진정한 이 나라 땅의 주인이 됐습니다.” 그 말에는 모두들 머리를 끄덕이었다. 그러자 병완의 연설은 점점 격정으로 차 넘쳤다. “우리는 공산당을 따라 나라와 지역이란 비좁은 마음에서 벗어나 온 세상에서 지주와 자본가들을 때려 엎고 압박과 착취가 없는 사회주의를 건설해야 하오. 그런데 무슨 내 고향 네 고향 할 게 있소? 우린 이 땅에 정을 붙이면서 뿌리를 박고 두 번째 고향을 건설하고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세상을 건설해야 하오.” 모두들 머리를 끄덕이면서 웅성거렸다. “빨리 사회주의를 건설했으면 좋겠소.” “그렇게 좋은 세상에서 하루라도 살았으면 좋겠다이.” “어느 날엔가 그런 날이 오겠지.” 병완은 마지막으로 힘주어 연설을 마무리했다. “사회주의는 스스로 찾아오는 것이 아니요. 우리가 힘써 여기에 두 번째 고향을 건설해야 사회주의 앞날을 앞당길 수 있소. 우리 모두 이 두 번째 고향에서 힘써 황무지를 개간하고 양곡을 많이 거둬야 배불리 먹으면서 잘 살 수 있소. 우리는 농사를 잘 지어 국민당군과 싸우는 인민해방군에 군량을 푼푼히 지원해야 하오. 국민당군을 물리쳐야 우리 이 땅을 지킬 수 있소. 절대 다시 지주놈들한테 이 땅을 빼앗겨선 안 되오!” 모두들 우레와 같은 박수를 쳤다. “듣다 듣다 그래도 배불리 먹고 잘 살수 있다는 말이 제일 좋소.” 모두들 집에 돌아가 괭이를 메고 황무지를 개간하러 떠나갔다. 사람들은 한 무라도 자기 땅을 만드느라고 씨뿌리기 보다 황무지 개간에 열을 올렸다. 그런데 이젠 지주가 없다나니 누가 어느 황무지를 개간하든 말리는 사람도 없었다. 어떤 때에는 황무지를 서로 빼앗을 내기 하다가 말썽이 생겼고 지어 주먹다짐도 생겼다. 병완은 황무지분쟁을 막으려고 회의를 열고 모두들 자기가 붙이던 밭 옆의 황무지를 개간하여 밭을 만들라고 했다. 그래도 분쟁이 생기면 병완은 촌공소에 분쟁 쌍방을 불러다 정황을 알아보고 조해를 시켰다. 병완은 마을 사람들이 황무지 분쟁 없이 황무지를 개간하게 하려고 한데 몰려 황무지를 개간하지 말고 장개골안과 조개덕, 패용천산 칼산 주위 산비탈과 들판에 마을 사람들을 골고루 배치해 황무지를 개간하게 했다. 하여 무질서한 황무지개간으로 하여 생긴 분쟁이 없어졌다. 마을 사람들은 토지분쟁을 막고 제일 개간하기 힘든 패용천산 비탈 중턱 황무지를 개간하는 병완을 두고 엄지를 내둘렀다. “공산당 영감이 다르긴 다르오. 경사도가 높은 저 산비탈에 황무지를 개간하고 어떻게 곡식을 실어들이겠다고 저러오?” 득호의 말에 태연은 머리를 끄덕이었다. “그러게 말이오. 김 촌장은 다루기 좋은 황무지는 우리한테 주고 다루기 힘든 황무지를 개간하니 말이오.” 장학산은 병완이 자손들을 데리고 자기 황무지 자리를 마구 개간하는 것을 멀찍이 서서 보면서 배 아파 도리머리 질 했다. “어떻게 하다나니 세상이 이렇게 뒤바뀌었단 말인가? 저 놈들에게 내 땅을 다 빼앗기겠다.” 장학산은 염치를 불구하고 괭이를 메고 병완을 찾아갔다. “김 촌장, 나도 황무지를 개간하면 안 되오?” 병완은 괭이를 짚고 장학산을 내려다보면서 “되오.”라고 했다. 그러자 장학산은 괭이를 짚고 두루 천지꽃산을 둘러보더니 말했다. “여긴 자네들이 다 개간하는데 난 어디를 개간해야 되오?” 그 당돌한 물음에 병완이나 창준이나 모두 괭이를 짚고 서서 장학산을 쏘아보았다. 그런데도 장학산은 별 능청을 다 떨었다. “나도 사람이 아니오? 당신들이 조선에서 와서 내 땅을 다 빼앗아가니 난 밭이 없어 어디에 뭘 심어 먹고 살겠소?” 병완은 참다가 언성을 높였다. “이 지주 영감이, 옛정을 봐서 집을 청산하지 않고 놔둔 건 모르고 아무 소리나 다 하겠는가?” 장학산은 병완을 믿는 턱에 지분거렸다. “고래 등 같은 집만 있어 뭘 하오? 밭이 없어 입에 풀칠도 하지 못하겠는데.” 장학산은 희죽이 웃기까지 하면서 계속 지분거렸다. “나도 별나게 지주로 된 게 아니오. 아껴 먹고 돈만 있으면 땅을 샀지. 지금 자네들이 내 황무지를 빼앗아 숱한 밭을 일구는데 거꾸로 자네가 새 지주로 되겠어. 이전에 상순이 우리 충국이 하구 조선과 길림, 교하로 다니면서 약 담배 장사를 해서 몇 천원 번 걸로 땅을 샀더라면 당신도 영낙없이 지주로 됐을 거요. 허허허.” 병완은 그 소리에 억이 막혀 코웃음이 나갔다. “이보게나. 근심하지 말게나. 난 자네처럼 소작농사군을 하나도 두지 않고 소작료를 받아 살지 않을 거요. 우린 제 두 손으로 황무지를 개간했소. 밭이 아무리 많아도 제 손으로 농사를 지으면서 살 거네. 자네도 이제부터 자기 손으로 황무지를 개간해 농사를 지으면서 살게나.” 장학산은 눈에 이상한 빛이 번쩍이더니 물었다. “그럼 나도 자네처럼 농사를 지으면서 살면 지주가 아니지?” 병완은 도리머리 질 했다. “장 지주, 당신은 전생에 우리 집 식구와 주현경 네를 착취했기에 영원히 지주라는 모자를 벗지 못하네. 남을 착취했기에 영원히 죄를 진 지주요. 허나 이제부터 노실하게 노동개조를 잘 하면 당신은 유격대를 도와준 적이 있기에 좀 다르게 처리해줄 순 있네.” 장학산은 맥이 풀려 김이 빠진 괭이자루를 안고 황무지 마른 풀 위에 풀썩 물앉았다. 병완과 창준이 자손들과 함께 괭이로 나무뿌리를 찍어내는데 장학산은 괭이자루를 쥐고 개여 올리는 말을 하면서 자리를 떴다. “에이구, 그래도 내 전생에 어쩌다 김 촌장한테 황무지를 줘서 밭을 일궈 살게 했는지 모르겠다. 그러찮았더라면 집도 빼앗기고 총살 당했겠는데.” 병완은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틀렸네. 당신 전생에 유격대가 제일 어려울 때 양식을 대준 일이 당신을 살린 거네. 지금도 노실하게 노동개조를 하고 국민당을 돕는 일을 하지 마오. 집에 돌아가 곰곰이 생각해 보오. 우리한테 무슨 미안한 일 없었는가? 우린 손금 보듯 다 알고 있으니깐. 속일 궁리는 하지도 말게.” 그 말에 장학산은 속이 섬찍해 뒤도 돌아보지 않고 괭이를 둘러메고 비틀거리면서 허둥지둥 토성 안 집으로 내려갔다.      이튿날 이른 아침에 야마꼬가 애를 안고 부랴부랴 상순네 집으로 찾아왔다. "웬 일이오? 야마꼬." 야마꼬는 애를 안고 집에 들어서자마자 울고 불며 야단쳤다. "저 장학산네 집에서 하루도 못 살겠어요." "엉?" 상순은 야마꼬를 보고 구들에 올라오라고 했다. 그러나 야마꼬는  바닥에 선채로 장학산을 공소했다. "장학산의 처자들은 나를 밥도 온전히 안줘요. 령감태기는, 흐흑흑, 흑흑. 밤이면 내 자는 방에 뛰여들어 못살게 굴어요." 사태의 엄중성을 느낀 상순은 야마꼬를 보고 구들에 올라오라고 해 밥부터 먹으라고 했다. 꽤나 수척해진 야마꼬는 명옥의 눈치를 보면서 밥사발을 받아 게눈 감추듯 했다. (얼마나 굶었으면 저 지경이겠는가.) 상순은 야마꼬를 계속 장학산네 집에 두지 못하겠다고 생각하였다. 야마꼬가 식사를 마치자 상순은 그녀 모자를 데리고 촌공소로 나갔다. 때마침 병완이 나와 있었다. "할아버지, 내 진수해에 한반 가봐야겠습구마." "어째?" "구위 리계삼 서기랑 찾아보구 조직증명서도 바치고 야마꼬 때문에 겸사겸사해 가봐야겠습구마." 병완은 상순한테서 사연을 들은 후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었다. "가봐라." 상순은 급급히 진수해에 내려가 구위정부로 찾아갔다. "허, 우리 전투영웅이 왔구만. 들을라니 상순 동문 참 잘 싸웠더구만." 그는  리계삼 서기와 허영주 구장을 만나 최퇀장이 보낸 소개신을 꺼내 주었다. 리계삼 서기는  소개신을 받아보고 의아한 눈길로 상순을 쳐다보았다. "임명장은 어쨌소?" 상순은 뒤더수기를 긁적거리었다. "상부의 임명장도 바쳐야 하오. 이건 조직기률이오." "지방에 돌아왔는데 뭐 필요합니까?" "아니오. 이건 다 조직서류에 들어가오." 그제야 상순은 마지못해 임명장을 바쳤다. 리계삼은 임명장을 받아보더니 허영주 구장한테 넘겨주었다. 그들 둘은 상순을 대견하게 보며 환담을 했다. "보라니깐. 우리 상순동문 아주 전도 유망한 간부요." 리계삼 서기는 상순의 두 손을 잡고 말했다. "상순 동무, 우린 상부로부터 상순동무가 아주 지혜롭고 용감하게 토비숙청전투에서 수많은 공훈을 세웠다는 말을 듣고 얼마나 기뻤는지 모르오. 상급 당위의 비준을 받고 상순 동무를 우리 구정부 민병영 영장으로 임명하오." 상순은 자기 어깨가 무거운 감을 온 몸으로 느꼈다. "조직의 신임은 감사합니다. 그러나 전 영장을 할 자격이 없습니다." "또, 또, 또." 허영주 구장이 혀끝을 찼다. "민주련군 영장이 민병영장도 못하겠소? 해방전쟁은 시작에 불과하오. " 리서기도 동을 달았다. "동만의 토비는 숙청했지만 도처에 국민당 특무들이 욱실거리고 국민당군이 언제든지 할바령을 넘어 우리 동만을 쳐들어올 수도 있소. 그 놈들이 지금 교하 라법까지 쳐들어왔소. 악패 지주들은 항상 복벽을 꿈꾸오. 아차, 알려줄게 하나 있소. 김영장이 정규상한테 구해달라고 부탁한 삼도만 토비 문서 조소호 있잖소?" "예. 그가 살아났습니까?" 허영주 구장이 머리를 끄덕였다. "양, 그런데 그 자는 구해주자마자 어디론가 도망쳤소.도망치면서 쪽지를 남겼소. '기의한 지학구를 죽인 걸  다 안다. 어깨에 총을 맞고 쓰러져서 죽은 척하면서 그를 죽이려는 걸 다 들었다. 나라고 민주련군에서 죽이지 않겠는가. 날 찾지 말라. 난 반동도 하지 않겠다. 내 가족을 살려달라.' 이런 쪽지를 병원에 남기고 달아났소. 얼마나 인심은 난측이오?" 상순은 어이없어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아니, 도망치다니? 그는 기의했기에 관대처분 받겠는데. 참." 리계삼 서기가 뒷말을 이었다. "지주나 토비들은 국민당군이 쳐들어오기만 하면 또 들고 일어날 수도 있소. 지금 전시상태에서 후방의 민병공작도 아주 중요한 공작이오. 상순동무는 너무 겸손하지 말고 조직의 신임을 저버리지 말고  우리 구 민병건설을 잘 하오." 상순은 별 수 없이 군례를 척 붙이면서 우렁차게 대답했다. "옛! 꼭 임무를 완수하겠습니다."  뒤이어 상순은 야마꼬 모자의 불행한 처지를 말하고나서 해결방법이 없는가고 문의하였다. 리계삼 서기는 창밖을 한참 내다보더니 상순한테 머리를 돌렸다. "여기에 야마꼬를 두는 게 장원한 방법이 아닌 거 같소. 이제라도 일본에 보내는게 옳은 거 같소." "예? 돌아가면 좋겠는데. 돌아갈 수 있겠습니까? " "되오. 지금 조선반도 북쪽엔 쏘련 홍군이 점령해 있고 남쪽에는 미군이 점령해 있소. 건데 일본 인들을 몽땅 일본에 보내주고 있소." "그럼 잘 됐습니다." 허영주 구장이 보충했다. "우린 야마꼬 모자를 조선 인민군 측에 호송해보내면 그들의 방조을 받아 일본에 보낼 수 있소." 상순은 피뜩 성칠 큰아버지가 떠올랐다. "저의 큰아버지를 찾아가면 어떨까요?" 리계삼 서기는 희죽이 웃었다. "찾을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리 쉽겠소. 조선인민군에 위탁하면 되오. 야마꼬 오빠는 토비숙청을 위해 희생된 렬사오. 그의 일가는 모두 일제 침략전쟁의 피해자오 꼭 책임지고 일본에 보내줘야 하오." "예, 제가 꼭 책임지고 호송하겠습니다." 그러나 리계삼은 머리를 저었다. "안되오. 우리 구정부에서 무장일군을 파견하겠소. 동무는 민병영 건설을 하는게 급선무요." "옛! 알겠습니다." 이렇게 되여 야마꼬는 안전하게 일본으로 돌아가게 되였다.       쉼에 기준이 온 몸이 땀벌창이 되어 소서구 북쪽 산비탈에 있는 아버지한테로 찾아 와 볼 부은 소리를 했다. “아버지, 저 상순이 저게, 제 노릇을 하구 살 거 같지 않습꾸마. 민병 영장 해서 밥이 나옵둥? 집에 엉치를 붙힐 새 없습구마. 날마다 '싸,싸(杀,杀)해서 밥이 생깁둥? 그럴 게면 부대를 따라 국민당 군을 무찌르러 가지. 집에 노동력이 없어 죽겠는데 집일에는 근본 관심도 없습니다. 봄비에 집에 간장 물 같은 게 줄줄 흘러내리는데도 이영을 이을 궁리도 없습니다. ”       학실히 상순은 구에 민병영을 세운 후 함흥촌, 일성촌, 해동촌 등 구내 여러 촌을 돌아다니면서 민병련을 세우고 강화하고 민병들을 훈련시키느라고 집 일을 돌볼 새 없이 채바퀴 돌듯 맴돌았다.  병완은 손을 탁탁 털면서 셋째아들에게 말했다. “우리 이 지방의 토비들은 거의 숙청됐다. 허나 지금 장개석 국민당 반동파들은 8백만 대군으로 우리 공산군 해방구를 진공하고 동북에도 백만 대군이 쳐들어왔다. 그 놈들은 할빈과 심양, 장춘, 길림 등 대중도시를 거의 다 점령했다. 이제 길림의 국민당 군이 교하를 치고 할바령을 넘어 동만으로 쳐나올 위험도 있다. 우리 동만은 후비군양성기지나 다름없다. 동만을 보위하고 우리 마을을 보위하려면 상순처럼 민병들을 훈련시켜 전선에 우리 아들딸들을 많이 내보내야 한다. 한족 형제들과 함께 어깨 겯고 국민당 군을 깡그리 소멸해야 우리가 시름 놓고 살 수 있다. 그러니 네가 좀 바쁘더라도 상순을 민병훈련을 시키게 놔둬라.” 기준은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면서 두덜거렸다. “언제 전쟁이 끝나겠소. 일본 놈들을 몰아내구 토지개혁을 해서 지주를 청산하고 땅을 나눠가졌으면 잘 살겠는가 했더니. 그 많은 국민당 군을 언제 다 소멸하겠습니까?” 병완은 그간 당의 교육을 받았기에 셋째아들을 교양할 수 있었다. “우리는 사회주의를 건설할 때까지 계속 혁명해야 한다. 지금 우리 주위에는 아직도 우리에게 땅과 집을 빼앗긴 지주들과 그들의 처자들이 살아 있다. 그 놈들은 국민당 군이 쳐들어오기를 기다리면서 호시탐탐 우리를 노려보고 있다. 절대 시름 놓을 수 없지. 금방 장학산이 왔다 갔는데 우리가 자기네 밭을 빼앗아 새 지주로 되겠다고 집적거리더라. 그들은 토지개혁을 달가워하지 않고 언제든지 자기들의 세상을 복벽하려고 한다. 우린 항상 그 놈들에게 경각성을 높이고 살아야 한다.” 기준은 아버지 손을 쥐고 매만지면서 간곡히 말했다. “아버지, 아예 조선에 나가면 어떻습니까? 우리 할아버지 산소랑 어쩝니까? 여기에 엄마 산소를 두고 조선에 나간다는 것도 말은 아니지만. 국민당과 몇 해 싸워야 하겠는지 조선에 나가면 싸울 필요도 없잖습니까?” 그 말에 병완은 한숨을 후 내쉬였다. “내 전번에 너를 데리고 아버지와 엄마, 할아버지 산소에 가서 제를 지내면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지금 중국이나 조선이나 국제 공산주의 운동을 하기에 형제나라여서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지 않고 뭐냐? 장차 해마다 고향에 돌아가 부모 산소를 정성껏 모시고 제를 지낼 수도 있다.” 기준은 그 말에 머리를 숙이었다. “너네 봐라, 우린 여기 황무지를 마음대로 개간하면 아마 밭이 거의 백여 무는 나올 거 같다. 우리 여기 와서 20여 년 동안 황무지를 개간했는데 훌 던지고 가겠느냐? 고향에 돌아가서 그 수림을 채벌하고 이만한 밭을 개간하자면 또 몇 십 년이 걸리겠느냐?” 창준은 아버지 말에 동감을 표시했다. “아버지 말씀이 옳습니다. 아무데서나 배불리 먹고 살면 되지.” 상우도 동을 달았다. “내 어떻게 20여년 일군 상우지를 버리고 간다고 그럽니까?” 상길도 머리를 끄덕였다. “소서구는 이젠 장학산이 게 아니고 우리 땅이 됐는데 여기서 삽시다.” 병완은 자손들을 돌아보면서 말했다. “옳다. 우린 20여 년 동안 피땀으로 일군 황무지를 개간해 일군 이 땅을 버리고 갈 수 없다. 우린 여기서 두 번째 고향을 개척하고 건설하자. 옛날에 우리 조상들이 살아 온 걸 보면 다 그랬다. 신라 마지막왕 경순대왕 김부 할아버지도 천년 동안 살아온 경주를 떠나 개성에 왔댔고 김려생 할아버지도 단종을 보호한 죄를 쓰고 명천에 도망쳐 와서 살았다. 우리도 함흥 촌에 와서 정을 붙이고 살면 그 후대부터는 여기가 고향이 되는 게다. 전번에 기준과 함께 고향에 가서 부모와 조부모 산소에 제를 지낼 때 난 조상님들께 말씀 드렸다. 이제 불효자식은 가능하게 고향에 돌아오지 못하고 간도의 귀신이 될 것 같다고. 허나 해마다 부모님의 산소를 찾아뵙겠다고 했다. 너희들은 이후에 조선에 나가면 꼭 조상들의 산소를 찾아가 보고 제를 지내라.” 병완의 그 말에 자손들은 “예.” 하고 이구동성으로 말하면서 모두 머리를 끄덕였다. 병완은 마을의 들뜬 인심을 안정시키려면 집안부터 다져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지금 성칠한테서도 기별이 없다. 그 애도 정황이 여의치 않은 모양이다. 설사 그 애가 우리 고향 명천 우시장에서 한자리 한다고 해도 우리가 성칠을 믿고 사리사욕부터 채워서야 되겠니? 그럼 성칠한테도 불편하게 될 게 아니야?” 병완의 말에 여기저기서 한숨 소리가 들렸다. 기준은 좋다, 나쁘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훌 일어나 머리를 숙인 채 상우와 함께 천지꽃산 쪽으로 일 하러 떠나갔다. 상훈과 상길도 아버지를 따라 일어나 괭이를 쥐고 나무뿌리를 파 재꼈다. 병완은 침울해진 자손들을 돌아보면서 속으로 고함쳤다. (이 놈 자식들아, 내라고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겠느냐? 허나 돌아갈 형편이 되지 못하는 걸 어쩌겠느냐? 우린 여기를 두 번째 고향으로 생각하고 살아야 한다. 알만하냐?) 병완이가 남쪽을 내다보았다. 기준과 상우가 일하는 남산 천지꽃산에 첫봄을 맞아 연분홍 진달래가 활짝 피여 온 산을 연보라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맑은 하늘에는 까치와 제비들이 날아예고 까치들이 마른 나무 잎사귀를 물어다가 백양나무 가지 사이에 알을 낳을 둥지를 틀기에 여념이 없었다.  
88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67) 댓글:  조회:1851  추천:1  2017-05-08
                                                                   6. 담판 흐릿한 하늘이 걷히면서 하늘에 차디찬 해가 대지를 비추었다. 드디어 맵짠 겨울바람이 마을을 엄습했다. 상순은 지난 밤에 토비들이 마을을 습격해 불을 지르고 무차별사격을 가한 일을 생각하자 땅이 꺼지게 한숨을 후 내 쉬였다. “삼도만 토비들을 몽땅 숙청해 버리기 전엔 마을 사람들이 시름놓고 살 수 없어. 마을을 지키기만 해선 안돼. 언제 그 놈들의 습격을 받을지 몰라.”       그는 마을 청년들을 동원해 함께 민주련군에 참군해 삼도만 토비들을 몽땅 소멸하기로 작심하였다.  그는 마을에 나가 성수와 태수 등을 데리고 조개덕과 소서구, 패용천 촌을 돌아다니면서 조선족과 한족 청년들을 찾아가 참군하자고 동원했다. 그런데 장발래와 제해풍 한족청년들은 모두 도리머리 질 했다. “다 참군하고 우리 집 농사는 누가 짓겠소? 황차 우리 마을 청년들이 다 참군하면 우리 마을과 우리 집은 누가 지켜?” 자기 집 울타리만 지키려는 장발래랑 보고 상순은 어이 막혀 말이 나가지 않았다. “그럼 좋아, 너희들은 마을과 집을 잘 지켜라.” 그제야 장발래 등은 만면에 춘풍이 돼 엄지를 내둘렀다. 상순은 집에 돌아와 숙자를 업은 명옥을 보고 “내 부대에 갔다 오겠으니 아버지를 잘 모시오.”라고 했다. 명옥은 임신한 지 몇 달 됐다. “여보, 내 간 후 수고 많이 하오. 토비들을 모조리 소멸하면 우리 마을 사람들이 편안히 살 수 있을 거요.” 명옥은 생사를 기약할 수 없는 전쟁터에 남편을 보내기 아쉬웠지만 속으로 눈물을 흘리면서도 겉으로는 웃음을 지어 보였다. “토비를 숙청하고 무사히 갔다 오오.” 명옥은 숙자를 상순에게 안겨 주었다. 상순은 숙자를 안고 뽀뽀를 해주었다. “숙자, 에이고, 내 귀여운 딸아, 아버지한테 뽀뽀 해 달라.” 명옥은 “뽀뽀 해.”라고 했다. 숙자는 아버지의 볼에 난 구레나룻을 어루만지다가 쪽 뽀뽀했다. 이윽고 상순은 성수랑 병수랑 태수랑 마을의 끌끌한 청년들 30명을 데리고 기관총 두정을 가지고 촌공소 앞에서 부대로 떠나게 되었다. 병완과 기준 그리고 명옥과 금옥 등이 모두 바래러 나왔다. 명옥은 숙자를 업고 상순이네를 바래며 눈물을 줄줄 흘리더니 팔소매로 눈물을 닦았다. 금옥은 칠군을 업고 최학섭과 함께 나와 바래였다. “오빠, 무사히 갔다 오오.” 상순은 칠군의 볼을 매만지면서 “그래, 근심하지 말라.”라고 했다. 상순은 이계삼과 허영주, 병완 등에게 군례를 척 올리고는  마을 민병 30여명이나 영솔해 성큼성큼 진수해 쪽으로 떠나갔다. 병완은 옆구리에 권총 두자루나 차고 기관총을 둘러메고 민병들을 영솔해떠나는 상순을 대견하게 목송했다.  마을 사람들은 자기 아들들을 전쟁터에 내보내면서 눈물을 흘리었다. 여기저기에서 흐느낌소리로 울음소리로 웅성거렸다… 상순은 권총 두자루나 차고 30여명 민병들을 영솔해 기관총 두 정까지 가지고 진수해에 가서 동북 민주연군 길동군구 제19퇀에 입대하였다. 최낙현 퇀장은  이계삼 서기의 소개신을 받아 읽어보고 상순을 패장을 시키면서 기관총반까지 이끌라고 했다. 그러나 련장 허백호는 기관총반을 자기 마을에서 온 민병을 보고 령솔하게 하려고 고집했다.  19퇀이 영월구에 가서 훈련할 때다.  기관총을 다룰 줄 아는 군인은 온 퇀에 상순 밖에 없었다. 기관총반 반장도 기관총을 쏠 줄은 알았지만 기관총을 분해했다가 되조립할줄을 몰랐다. 그런데 상순은 기관총 명사수일뿐만 아니라  기관총을 분해했다가 척척 조립하는  능숙한 기술자였다. 게다가 그는 항일유격대를 따라 실전에 여러번 참가한 실전경험이 있었다. 이런 정황을 알게 된 최낙현 퇀장은 상순을 보고 기관총반도 이끌라고  하였고 이성수와 이학수, 최병수, 이태수  등 한 마을의 민병출신들을 기관총반에 귀속시켜 주었다. 그 일로 해 허백호 련장은 상순을 아니꼽게 생각하였다.  눈치챈 상순은 휴대하던 권총 한자루는 최퇀장한테 바치고 한자루는 허련장한테 드렸다. 허백호 련장은 모젤권총을 쥐고 이리저리 보며 흐뭇해했다. "어디서 얻은 권총인가?" 상순은 곧이곧대로 말했다. "최퇀장한테 바친 권총은  항일전쟁 때 일본 놈의 걸 로획한 것이고 이 권총은 함흥촌토비숙청전에서 로획한 거요."  "그래? 감사하다이." 허백호는 권총을 허리춤에 차며 다른 눈길로 상순의 세귀눈을 훔쳐보았다. (이 자식, 웬간한 놈 아니구나.)  부대에서는 삼도만토비들을 어떻게 칠 것인가는 토론회를 퇀지휘부에서 열었다. 패장 이상 간부들이 참가하였다. 1련 지도원 김명호는 선참으로 나서 호언장담했다. "저에게 한개 반을 주십시오. 그까짓 삼도만 토비들과 담판해 투항하게 만들겠습니다." 그러나 1련 허백호 련장은 반대해나섰다. "안될 소릴. 그 놈들이 몇마디 말에 무기를 놓고 투항하겠소? 담판 갔다가 괜히 목숨을 잃겠소." 김명호 지도원은 가슴까지 탕탕 생고집했다. "에이구, 백명도 안되는 고까짓 토비놈들이 뭘 대단해서. 흥! 천명이나 되는 우리 퇀이 치러 간다는 말만 들어도 벌벌 떨면서 투항할 놈들입니다. 개미굴을 치러 가는데 작두를 쓸 필요 있습니까?" 최낙현 퇀장은 한참 궁리하다가 무거운 입을 뗐다. "싸우지도 않고 투항하게 하면 좋은 일이지. 건데 누가 감히 토비굴로 담판하러 가겠소?" "제가 가겠습니다. 한개 반만 주십시오. 긍정코 그놈들을 투항하게 하겠습니다." "좋소." 그때 상순이 나섰다. "제가 비밀리에 토비놈들 소굴에 잠입해 그 놈들 내부에서 반란이 일어나게 하겠습니다." "김패장! 여기 어디라고 나서는가?!" 허백호 련장은 코웃음쳤다. "담판도 지금 성사되겠는지 모르겠는데. 그 놈들을 반란하게 해? 어림도 없는 소릴. 흥!" 상순은 세귀눈으로 허련장을 힐끔 쳐다보았다. 뒤이어 뒤더수기를 긁적거리며 자리에 되앉았다. "아니요." 최퇀장이 손사래를 치며 상순한테 눈길을 돌렸다. "1패장의 말을 다 들어보기오." 상순은 재차 일어났다. "삼도만 토비무리에는 우리 마을에서 도망간 장충국이란 자가 있습니다. 충국은 일찍 저와 함께 항일유격대에 쌀도 나르고 항일전투에도 참가한 적이 있습니다. 그자를  이용해 내부반란을 일으킬가 합니다." "쳇, 꿈이면 듣기나 좋지." 허백호 련장이 비양거리자 최퇀장이 또 손사래쳤다. "상순 패장, 그 자가 지독한 전보홍을 설복할 수 있겠소?" "전보홍을 설복시키긴 힘들지만 우리 치러 갈 때 내응하게 하면 어떻습니까?" 최퇀장마저 미심쩍어하며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충국이라던가?" "예." "그자는 혹시 반변해올지 모르겠소. 그런데 그 자 혼자 독불장군이지." "아닙니다. 삼도만토비 중에는 지학구라는 자도 있습니다. 그자는 충국의 5촌외삼촌벌 되는데 일찍 일제 때 해동파출소 소장질을 했습니다. 지학구까지 기의하게 하면 그 주위 놈들 십여명은 따라 행동하게 할 수 있을 겁니다." 최퇀장은 뒤지개를 짚고 지휘부를 왔다갔다하며 상순의 말을 들으며 궁리했다.  그는 주춤 멈춰서더니 페회를 선포했다. 모두들 헤여져 돌아갔다. 김지도원은 담판하러 떠나려고 나갔다. "상순 패장, 잠간 남소." "옛1" 최퇀장은 상순에게서 충국과 지학구란 자와 상순의 관계를 구체적으로 알아본 후 오래도록 상순과 구체작전계획을 토론하고나서 이리이리 하라고 지시했다. "옛, 꼭 임무를 완수하겠습니다." 최퇀장은 사무궤에서 권총을 꺼내 상순한테 주었다. 그 권총은 상순이 전번에 바친 것이였다. "자, 김패장, 이걸 차고 가게나." "이 권총은 제가 바친 건데..." "동문 패장이 아니오? 패장은 권총을 찰 자격이 있소. 황차  이번엔 특수임무를 수행하기에 권총이 더 필요하오." "넷, 목숨바쳐 꼭 임무를 완수하겠습니다." "아니오. 임무를 완수하고 꼭 살아돌아와야 하오." "넷!" 상순은 군례를 척 붙히고 퇀지휘부를 나왔다. 한편 김명호 지도원은 일본 놈들에게서 로획한 자동차에 10여명 전사들을 싣고 영월구를 떠나 호박길을 덜커덕 거리며 산을 넘고 영을 넘어 삼도만 평강촌에 이르렀다. 보초병한테서 민주연군이 한자동차 왔다는 말을 듣고 전소교는 충국에게 암암리에 이리이리 하라고 명령했다. 김명호 지도원은 토비들의 소굴을 둘러싼 목책 대문에서 한 300메터 떨어진 곳에 자동차를 세워 놓고 입에 손을 모아대고 고함쳤다. “삼도만 토비들은 들으라. 우린 민주연군이다. 네놈들과 단판을 하러 왔다. 우리 2천여 명 병력이 당장 네놈들을 숙청할 것이다. 네 놈들은 무기를 버리고 투항해라.” 전보흥 소교는 사합원지휘부에서 보고받고 악이 나 입술을 깨물었다. “투항하라고? 좋아, 마을에 들어와 담판하자고 햇!” "옛!" 충국이 한개 반을 데리고 목책 대문 밖으로 나왔다. "들어와 담판합시다." 그러자 김명호 지도원은 운전수를 보고 목책 안으로 자동차를 몰라고 했다. 토비들은 목책 대문을 활짝 열어 재끼었다. 운전수는 옆 좌석에 앉은 김 지도원을 보고 말렸다. “들어가지 맙시다. 놈들이 다른 마음 먹었으면 어쩝니까?” 허나 김명호 지도원은 개의치 않았다. “산골 놈들이 감히 우릴 어찌겠는가? 차를 대문 안으로 몰라. 이건 명령이야." 그들이 탄 자동차가 목책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대문이 삐꺼덕 닫기였다. 김 지도원 등은 무슨 판국인지도 알기도 전에 30여개 총구멍이 그들을 겨누었다. 장충국은 총을 휘두르면서 호통쳤다. “몽땅 총을 내려놓아!” “우린 담판하러 왔소. 무기를 해제하다니?” 충국은 김명호 지도원의 반발에 어느 결에 운전석 문을 열고 김 지도원의 옆구리에서 권총을 빼앗아냈다. “담판하러 온 놈들이 권총을 차고 와?” 뒤이어 토비들은 전후좌우에서 차 바곤에 총칼을 들이대고 민주연군 전사들의 총을 빼앗아냈다. 그때 눈덮인 수림에서 난데없는 뻐꾸기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뻐꾹, 뻑뻑꾹. 충국은 수하토비들을 보고 김지도원이랑 토비지휘부에 압송해가게 하고 소변 보는 척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겨울에 웬 뻐꾸기야?) 그는 뻐꾸기 울음소리 나는 수림속을 눈빗질하였다. (혹시 상순이?) 그때 저 멀리 하얀 눈 덮인 수림에서 하얀 그림자가 언뜰했다. 뒤이어 뻐꾸기 울음소리 났다. 항전 때부터 상순은 충국이나 춘실을 비밀리에 만날 때마다 뻐꾸기 울음소리를 암호로 썼던 것이다. 뻐꾸기 울음소리는 또 항일유격대의 암하이기도 하였다. "개자식," 충국은 욕을 하면서도 흘끔흘끔 주위를 둘러보고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총을 겨누어들고 하얀 그림자가 언뜻 움직인 곳으로 잠입해갔다. "충국아!" 충국은 깜짝 놀라 돌아서며 총을 겨눴다. 아름드리나무 뒤에서 하얀 천을 뒤집어 쓴 상순이 희죽이 웃으며 나서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놈새끼!" 충국은 방아쇠에 손을 댔다가 맨 손인 상순을 보고서야 총구를 내리웠다. 금방 뒤에 선 상순이 자기를 죽이려고 했으면 맨 손으로도 얼마든지 죽일 수 있었다는 것을 충국은 잘 알고 있었다. "어째 여길 왔어. 난 네놈을 죽일 수도 있어." 그러나 상순은 충국의 손을 잡고 무릎을 꿇고 앉았다. "내 말 들어. 이제 몇천명 민주련군이 여길 쳐서 재가루를 만들 거야. 이제라도 늦지 않아. 기의해라." 그 말에 충국은 질겁해 목을 움추려뜨렸다.  "몇천명이나 온다구?" "그래. 네놈들 몇십명이 살아남을 거 같아?" "기의한다고 살려 주느냐? 난 전번에두 지학구하구 너네 마을 쳤어." "기의만 하면 살려주고 말고. 너네 부모형제를 생각해서라도 기의해라." 충국은 상순이란 이 마지막끈을 놓고 싶지 않았다. "우리 부모 무사하냐?" "그래. 우리 공산당은 너희 일가 항일유격대에 쌀을 대준 공훈을 생각해 다룬 지학사 같은 친일지주들과는 다르게 대하잖니?" 상순은 당의 정책으로 드센 정치공세를 들이댔다. 그러고나서 뒷말을 달았다. "지학구하구 말해라. 이제라도 기의하면 과거는 묻지 않는다고." 그러자 충국은 머리를 끄덕였다. "지학구하구 토론해 우리 민주련군이 들이칠 때 기의해라. 그러고 김지도원이 위험하면 구해달라." "지학사네 일본첩과 애도 살려줄 수 있느냐?" "살려주구 말구. 그 일본 여인도 일제침략전쟁의 피해자야. 지학사는 친일주구여서 총살했지만 처자는 갈라 관대하게 처리해주지 않았어? 너희들 잘못 빼돌렸지.  네가 기의하면 확실하게 살려주지." "지시룡만 살려주면 지학구 외삼촌을 설득해 기의할게."  상순은 충국의 귀에 대고 이리이리 하라고 하였다. 충국은 머리를 무겁게 끄덕였다. "시간이 퍽 지났어. 어서 가라." "응." 충국은 황급히 장총을 주어들고 대문쪽으로 달아났다. 한편 전 소교는 토비지휘부에 끌려온  김 지도원을 노려보며 호통 쳤다. “몽땅 결박햇!” 김 지도원은 전 소교를 보고  물었다. “자네 전소교인가? 담판하러 온 우리와 왜 이러는거야?” "흥!" 전 소교는 코 방귀를 뀌더니 빈정거렸다. “담판? 하하하,  아직도 주둥이만은 여물었구나.” 김 지도원은 기둥에 결박당해 가지고서도 머리를 숙이지 않고 고함쳤다. “네놈들은 고작 5, 60명 밖에 안 된다. 우리 민주연군 2천여 명이 이제 토비 소굴을 들이칠 것이다. 지금이라도 무기를 놓고 투항하면 살려준다.” 허나 전 소교는 일어나더니 김 지도원의 귀 쌈을 찰싹 갈겼다. “우린 조선 빨갱이들과 한 하늘을 쓰고 살 수 없어. 우리 수는 적지만 네놈들을 두려워 할 것 같은가? 2천명이 아니라 2만 명이라도 오라고 해라. 우린 험산을 이용해 네놈들을 한 놈도 남겨두지 않고 이 산골짜기에 소멸해 버리겠다. 네놈이나 투항해라. 투항하지 않으면 네놈부터 생매장해버리겠다.” 그러나 김 지도원은 굴복하지 않고 계속 전 소교를 보고 투항하라고 권고했다. 전 소교는 이를 악물더니 수하들에게 명령했다. “몽땅 총살해라!” 김 지도원은 끌려 나가면서도 전 소교를 보고 고함쳤다. “네놈은 내 말을 듣지 않았다가 후회할게다. 우리 민주연군에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전 소교는 악이 날대로 났다. 그는 시퍼런 군도를 쓱 빼들었다. “잠간!” 충국이 손사래를 치며 나섰다. "전소교, 량군이 싸워도 찾아온 사자는 죽이지 않는 법이오. 이 자를 인질로 붙잡아 두면 어떻소?" 분명 상순의 부탁을 듣고 나선 것이였다. "픽! 이 놈이 뭐 사자냐?" 전소교는 바깥으로 나가더니 수하들에게 명령했다. “지패장, 이 빨갱이 두목을 생매장해라! 다른 놈들은 몽땅 총살하고 두 놈만은 쫄딱 벗겨 놔줘라! 그 놈들이 돌아가서 우리 말을 전달하게 해라!‘ “옛!” 지학구 패장은 한무리 토비들을 이끌고 김명호 지도원을 평강 촌 뒤 골짜기로 통한 길 옆의 자그마한 둔덕 아래에 끌고 갔다.        상순은 아름드리나무 뒤에 숨어 그 긴급정황을 보고 황급히 태수를 데리고 수림으로 해 뒤쫓아갔다. 토비들은 불을 피우고 언 땅을 녹인 후 구덩이를 파고 있었다. 그때 충국이 또 찾아와 지학구 귀에 대고 뭐라고 쑹얼거렸다. "닥쳐! 이 놈을 살려줬다가 우리 죽으라고?! 흥!"    토비들은 끝내 김지도원을 구덩이에 밀어넣고 생매장하기 시작했다.   김명호 지도원은  계속 고함쳤다.   “네 놈들은 꼭 후회하게 될 것이다. 우리 민주연군은 네 놈들을 이제 한 놈도 남겨두지 않고 몽땅 소멸할 것이다!” 상순은 김지도원 등을 구하려고 권총을 빼들었다. "김패장은 혹시 김지도원에게 무슨 일이 생겨도 절대 경거망동하지 마오...." 그때 최퇀장이 하던 말소리가 상순의 귀전을 때렸다.  상순은 태수의 총을 내리눌러놓고 권총을 허리춤에 되찼다.     김지도원은 생명의 마지막순간에도 구호를 높이 외쳤다. “국민당 토비들을 타도하자!” “중국 공산당 만세!” “민주연군 만세!”. 다른 민주연군 전사들도 모두 김명호 지도원을 생매장한 구덩이 옆에서 장렬히 희생됐다. 전 소교는 고의적으로 해가 지기를 기다려 민주연군 두 전사를 옷을 쫄딱 벗긴 후 호통 쳤다. “얼어 썩어지지 않으면 돌아가서 너네 빨갱이 두목에게 전해라! 우린 절대 투항하지 않는다. 네 놈들이 오기를 기다려 민주연군 놈들이 쳐들어오면 한 놈도 남기지 않고 소멸할 테다! 김 지도원의 끝장은 바로 네놈들의 끝장이다!” 전소교가 손을 홱 휘젓자 충국은 토비 둘을 데리고 여우도 얼어 죽을 맵짠 겨울밤에 두 전사를 끌고 바깥에 나갔다. “가라!" 토비들은 홀딱 벗긴 두 전사의 엉덩이를 발길로 차놓으며 을러멨다. 그들이 김지도원 등이 몰고 온 자동차 바퀴자욱을 따라 토비소굴 대문에서 몇백메터 떨어진 눈덮인 수림 속 령길에 들어섰을 때였다. 뻐꾹, 뻐꾹. 그때 충국이 별스레 뻐꾸기 울음소리를 냈다. 뻐꾹, 뻑뻑꾹. 토비 둘이 의아해 장총을 내리워 비껴들었다. 땅! 령길에서 야무진 총소리와 함께 토비놈이 푹 꺼꾸러졌다.  충국이 선손을 썼다. 나머지 놈이 충국을 겨눴다. 땅! 상순이 수림 속에서 뛰여나오면서 토비놈을 쏘았다. 토비놈은 푹 꼬꾸라졌다. 충국은 토비의 털옷을 벗겼다. "빨리, 이 놈들 옷을 벗겨 입혀가지고 달아나라!" "넌 탄로났어. 함께 가자." "아니야. 꼭 기의할게. 근심말고 어서 가라!" 상순은 충국의 어깨를 잡고 귀속말로 부탁했다, "토비지휘부 위치와 화력배치를 지도로 그려달라." "언제 오겠니?" "래일 여기 올게." "알았다. 지학구는 전소교와 권력다툼 한다. 그러나 너무 믿지 말라." 충국은 김지도원을 생매장하러 갈 때 지학구를 보고 김지도원을 구해가지고 민주련군에 도망치자고 했다. 그러나 지학구는 시기상조라며 일찌기 폭로되면 대사를 그르친다고 했다. 지학구는 기의보다는 전소교를 죽여버리고 토비두목이 되면 다라고 궁리하면서 제 안속을 챙기려 하고 있었다. "그외에 더 쟁취할만한 사람 없니?" " 조소호란 모사가 있어. 그는 전소교가 자기 집을 쥐휘부로 만들고 자기 녀편네마저 릉욕했다고  전소교하구 원쑤로 됐어. 통신병 마룡은 지학사 일본첩을 탐내 죽자 살자 해. 그들도 모두 전소교를 죽이고 일본 여인을 차지하자고 벼른다. 그들 모두 쟁취해 볼게." 상순은 머리를 끄덕이며 량미간을 찌푸렸다. "그외 지학구와 네 수하들도 더 쟁취해라. 우리 치러 오면 너희들 기의해 내응해라. 넌 전소교 어디 있는가를 잘 살펴 나한테 흰수건을 흔들어 가리켜달라." "알았다." 땅! 충국은 권총으로 자기 왼팔을 쏘았다. "앗!" 그는 권총을 툭 떨어뜨리고 왼팔을 붙잡고 토비소굴 대문 쪽으로 달아났다. 상순은 충국이 재잠입하려고 고육계를 쓰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장충국이 달려가는 뒤에 눈보라가 휘몰아쳤다. 상순은 멀어져가는 충국을 바라보며  기의가 성공하기를 빌었다. 상순은 태수와 함께 두 전사에게 토비 옷을 벗겨 입히고 권총과 장총 두자루까지 가지고 무릎까지 펑펑 빠지는 령마루 길에 올라섰다.      그때 토비소굴 쪽에서 총소리가 수림을 아츠럽게 울렸다. 분명 한무리 검은 그림자들이 추격해 오고 있었다. 상순은 두 전사를 보고 말했다. "이 총으로 호신하면서 먼저 달아나오." 그러자 두 전사는 떠날 념을 하지 않았다. "우리도 남아 함께 싸우고 싶소." "옳소. 죽어도 원쑤를 갚겠소." "빨리 퇀부에 돌아가 담판정황을 알려야 하오. 어서 가오. 이건 명령이오." 상순은 호주머니에서 언 주먹밥덩어리 몇개를 꺼내  전사에게 주었다. 태수도 언 주먹밥을 거내 주었다. "빨리 가오." "옛! 김패장!" 상순은 두 전사가 달려가는 뒷모습을 보다가 태수에게 손을 홱 저었다. 그들은 번개같이 길 옆 수림 속에 들어가 놈들을 저격할 준비를 하였다. 그런데 놈들은 토비놈들이 뒈진 자리에 달려와 시체를 보자 더럭 겁나 주춤거리며 더 추격하지 못했다.      "죽은 놈들 총 다 걷어갔군. 몇놈이 왔댔어? "     "전소교, 두 놈이 왔댔소. 여길 보오. 밀림에서 둘이 총을 쏘며 달려나온 발자국이 있잖소?"    충국의 말소리가 들렸다. "바보 같은 놈, 세놈이 두놈도 이기지 못해? 흥!" 전소교는 눈보라 휘몰아치는 수림 속을 둘러보더니 명령했다. "돌아가자!" 충국은 고의로 지껄였다. "추격해 죽여치웁시다. 내 팔 상하게 한 원쑤를 갚겠소." "관둬! 놈들이 한둘이 온 거 같잖아. 날도 어두운데  저 형제들 시체나 메고 돌아가자." "옛!" 상순 일행은 온 밤 달려 영월구로 돌아갔다. 영월구에 돌아갔을 때 벌거숭이 됐던 두 전사는 손과 발, 귀 다 얼었다. 전사 둘은 퇀 지휘소에 찾아가 최낙현 퇀장에게 담판정황을 알리고서도 토비들에게 당한 모욕감에 눈물을 흘리면서 울분을 토로했다. 최 퇀장은 성이 날대로 나서 책상을 탕 치며 고래고래 고함쳤다. “개 같은 토비 놈 새끼들, 감히 우리 김명호 지도원을 살해 해? 당장 출병해 토비 놈들을 몽땅 소멸해 버려야 한다!” 영월구의 눈 덮인 밀림은 어둠속에서 휘몰아치는 눈보라와 함께 노호했다. 상순에게서 충국과 평강촌 토비 정황을 듣고 최낙현 퇀장은 머리를 끄덕였다. "충국은 실제행동으로 기의할 진심을 보여줬소." 최퇀장은 눈보라 휘몰아치는 창 밖을 내다보며 무겁게 뒷말을 이었다. "그러나 돌다리는 두드려보면서 건너야 하오. 지학구 그 사람은 권력다툼이기에 기의할 사람은 아니오. 자칫 충국이 기의하려는 의향이 탄로나면 위험하오." 그는 상순한테 몸을 돌렸다. "임무를 초보적으로 잘 완수했소. 대부대가 평강촌 토비를 습격하기 전에 즉시 한개 반을 데리고 평강촌에 가서  충국과 련계를 달고 림기응변해 대처해야 하오." "옛!" 상순은 군례를 척 붙이고 퇀지후부에서 나왔다. 그는 밤잠을 자지도 않고 자기 패에 돌아가 끌끌한 전사들을 뽑아 기관총 두 정까지 메고 평강촌을 바라고 떠났다.                      7. 토비 소굴을 일망타진      1946년 1월 26일,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아침에 19퇀은 영월구에서 삼도만 토비숙청 전투동원대회를 열었다. 최낙현 퇀장은 높은 둔덕에 올라서서 우렁찬 목소리로 동원했다. “동지들, 극악무도한 삼도만 토비들은 김명호 지도원 등 10명을 살해하고 끝까지 인민정권과 최후발악을 하려고 미쳐 날뛰고 있습니다. 이젠 삼도만 토비들과 담판이란 없습니다. 오직 우리 민주연군의 무장 력량으로 최후발악을 하는 토비들을 모조리 소멸해야 우리 인민들은 편안한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삼도만 평강촌의 적들은 5, 60명 밖에 안 됩니다. 우린 한 개 퇀의 천여 명 무력으로 평강 촌 토비들의 소굴을 잿더미로 만들고 토비들을 깡그리 소멸합시다. 동지들, 토비를 모조리 소멸할 신심이 있습니까?!” 최 퇀장의 물음에 모두들 장내가 떠나 갈듯이 우레와 같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있습니다!” 연설을 마치자 최 퇀장은 손을 홱 저으면서 명령했다. “출발!” 민주연군 19퇀은 눈보라를 무릅쓰고 산등성이를 넘어 해지기 전에 삼도만에서도 30여리 떨어진 평강 촌 토비소굴 서쪽산에 이르러 바삐 허연 눈 뒤덮인 수림 속 산마루에 포진하였다.    그때 수림 속에 미리 매복해 있던 상순이  뛰쳐나왔다. "보고, 허련장, 1패장 김상순 이하 15명 여기서 대기중..." "1패장, 퇀부에 가보오. 최퇀장이 기다리오." "옛!" 상순은 허련장이 가리키는 퇀부 쪽으로 달려갔다.  토비 놈들은 천여 명이나 되는 민주연군 대부대가 덮쳐온 것을 보자 화로 우에 올라앉은 개미들처럼 바글거렸다. 놈들은 전소교의 지휘 아래 황급히 반격준비를 하느라고 뺑뺑 맴돌았다. 최 퇀장은 바위 뒤에 숨어서 망원경으로 평강촌 토비소굴을 내려다 보면서 적정을 살피고 있었다. "보고, 최퇀장, 1패장 김상순입니다." 상순은 차렷자세로 군례를 올렸다. "좋소." 최낙현 퇀장도 답례를 하고 상순의 손을 잡았다. "적정에 변화 있소?" "네," 상순은 웃호주머니에서 종이쪽지를 꺼냈다. "충국이 보낸 지도입니다. 토비지휘부와 화력배치가 있습니다. 건데 오늘 아침에 전소교놈이 지휘부를 문서네 집으로부터 자동차 운전석에 옮겼답니다." 최퇀장은 도리머리질 했다. "그놈 환장했군." 그는 인차 지도를 보면서 망원경을 들어 평강촌 적진을 일일이 살폈다. "누굴 속이려고? 저 놈들이 지휘부란 자동차 텅 비였소. 건데 저건 뭐지? 웬 놈이 자동차 안에서 흰 수건을 흔드오." 상순이 보니 충국인 것 같았다. 충국은 수건을 일자로 틀어 북쪽 산골짜기를 가리켰다. "충국이 신호를 보냅니다. 토비 지휘부가 북쪽 산꼴짜기에 있다고 가리키는 것입니다." "알았소. 전보흥, 네놈이 아무리 교활해도 여래불 손아귀를 벗어나지 못해."       최낙현 퇀장은 전투명령을 내렸다. “1련, 북쪽 산마루를 점령하고 토비지휘부에 적탄통을 쏘라! 기관총반에서는 엄호준비를 하라!” 명령에 따라 1련에서는 번개같이 동쪽산마루와 삼도만으로 통한 길을 점령해 토비들의 퇴로를 차단했다. 뒤이어 허백호 련장은 몇십문 적탄통(소포)을 걸어놓았다. 허백호 련장이 고함쳤다. "동지들, 김지도원의 원쑤를 갚을 때 왔습니다. 적진에 맹렬히 쐇!"  "가만! 허련장!" 갑자기 상순이 손사래를 쳤다. "뭐야?!" 허련장은 손을 허리춤에 가져가더니 권총을 뽑았다. 상순은 말렸다. "맹탕 쏘지 맙시다. 여긴 놈들의 사격거리에 들어있습니다. 먼저 은페하기 좋은 지형에 부대를 잘 은페시킨후  토비지휘부를 조준해 쏩시다." "비겁쟁이, 숨을 궁리부터 해? 어느게 지휘분지 어떻게 아는가? 먼저 한바탕 쏴서 토비놈들의 기염을 꺾어놓아야 해." "쐇!"  "가만!" 상순이 재차 손을 쳐들고 막아나섰다. "이제 내응하는 충국이 정확히 지휘부 위치를 가리켜줄 겁니다." "언제 파악도 없는 그 놈을 기다려? 명령이야. 1패장은 기관총으로 적진을 소사하라. 적탄통을 쏘는데 작작 삐쳣!" 허련장은 결이나 우멍눈을 희번뜩 부라렸다. "항명하면 이거야!" 그는 권총으로 상순을 겨누기까지 했다. 상순은 별수 없이 1패에 돌아가 기관총반을 거느리고 적진에 맹령히 사격했다. "쐇!" 허퇀장이 거느린 대부대에서도 적진에 맹렬한 적탄통 사격을 가했다. “탕!” “쿵!” “탕!” “쿵!” 적탄통은 적들의 진지에 날아가 보기 좋게 폭발했다. 굉음과 함께 적들의 진지에 자주빛이 섞인 검은 화염이 삼단처럼 솟구쳤다. 토비들의 시체조각들이 하늘로 날아올라 사처로 흩어져 떨어졌다.       토비들은 질겁해 개인 집에 뛰여들어가 창문을 열고 총질했다.        그때 충국이 전호를 따라 북쪽 산꼴짜기로 뛰여왔다. 그는 흰수건으로 산꼴자기 중턱에 구불구불한 전호를 가리켰다. 상순은 인차 그리로 조준해 기관총소사를 하라고 명령하였다. 태수와 병수, 흥수 등은 그리로 기관총을 돌려 멩렬히 사격했다. 전보흥 소교는 바삐 전호에 뛰어 들어 권총을 휘두르며 반격을 명령했다. 충국이 헐레벌떡거리며 전호로 뛰여왔다. 전보흥은 눈깔을 부라렸다. "자넨 내 안해들을 지키라는데 어째 여기 왔어?" "장관님 안전이 근심돼 왔소." 기실 충국은 혼란한 틈에 조소호네 집 김치움에 숨겨놓은 요시꼬와 야마꼬랑 토비소굴 대문 밖으로 빼돌려 상순한테 넘겨주고 싶었다. 그러나 충국은 전소교네 지휘부를 가리켜주는 것이 더 긴급한 임무라고 생각했다. 황차 아녀자들과 애를 데리고 대문 밖을 뛰쳐나간다고 해도 토비들의 마수를 벗어나지 못하고 몰삭격에 벌집이 될 수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푱푱푱! 총알이 충국의 머리 위로 날아와 전호 벽에 꽂혔다. 흙덩이와 자갈이 마구 튕겨올랐다. "흥, 지휘부 탄로난 거 같아." 교활한 전보흥은 허리를 구부정하고 전호를 따라 마을 쪽으로 도망쳤다. 그때 뒤에서 지학구가 권총을 빼들고 흘끔흘끔 사위를 살피며 뒤따랐다. 그는 전보흥 뒤대가리에 한방 갈기고 싶었다. 그러나 경호반이 뒤따라 손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상순은 한창 기관총 반 전사들을 거느리고 네 대의 기관총을 걸어놓고 충국이 가리킨 전호에 대고 맹렬히 소사했다. 적들은 전호에서 머리도 들지 못했다. “탕!” “쿵!” “탕!” “쿵!” 적탄통이 연신 날아가 토비무리 속에 날아가 폭발하면서 토비들이 보기 좋게 쓰러졌다. 통신원 오병선은 산등성이에서 허백호 련장과 나란히 서서 적탄통이 날아가 폭발하는 것을 구경하며 쾌자를 불렀다. “어허, 잘 폭발한다!” “하하, 또 세 놈이 뒈졌다!” 상순이 고함쳤다. “병선아, 위험해. 엎드렷!”  “앗!” 갑자기 통신원 병선이 비명소리와 함께 가슴을 붙안고 핑그르르 돌더니 푹 쓰러졌다. 열여덟 살 밖에 안 되는 통신원 오병선은 적탄에 가슴을 맞고 즉사했다. 금방까지 앞뒤로 뛰어다니다가 쾌자를 부르던 생기발랄한 통신원 오병선이 쓰러졌다. 상순은 기관총을 쏘다가 말고 달려가 끌어안고 애타게 불렀다. “병선아, 병선아, 눈을 떠라! 야, 이게 무슨 일이냐?” 병선의 가슴에서는 뻘건 선지피가 쿨쿨 흘러내리었다. 허나 열여덟 살 밖에 안 되는 오병선은 입귀에서까지 피를 주르르 흘릴 뿐 다신 눈을 뜨지 못했다. “병선아! 병선아!” 상순은 병선을 두 팔로 감싸 안고 총알이 덜 날아오는 바위 뒤에 끌고 갔다. 한 마을에서 토비숙청부대에 참가한 병선은 조개덕에 갓 이사해온 오국권의 외동아들이었다. 병선이 참군할 때에도 상순은 그가 외동아들이라고 동의하지 않았다. 허나 오병선은 아버지와 상순이가 말리는 것도 듣지 않고 토비를 숙청해야 편안하게 산다면서 기어이 참군했던 것이다. 그에게는 형제란 진수해중학교를 다니는 나 어린 여동생 오옥선 밖에 없었다. 상순은 집에 돌아가 병선의 아버지를 무슨 낯으로 보겠는가고 마음이 아파했다. 상순은 눈물을 쓱 닦더니 병선을 내려놓고 허 연장한테로 달려갔다. “허 연장, 여긴 적들에게 사격당하기 쉬운 곳입니다. 빨리 적들의 사격을 피해 유리한 지형 쪽에 숨읍시다.”        허 연장은 상순의 아래 우를 훑어보더니 대수로워하지도 않았다.         “네가 뭘 알아서 피하라고 하는가? 퇀장은 우리를 보고 여기서 토비들을 도망치지 못하게 차단하고 총돌격명령을 기다리라고 했다." 그는 권총을 휘두르며 명령했다. "넌 기관총사격이나 해라!” 그러나 상순은 계속 허 련장에게 권고했다. “빨리 전이합시다. 최 퇀장이 어찌 우릴 적탄에 맞을 자리에 서있으라고 했겠습니까?” 허 련장도 그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두덜거렸다.     “그 놈이 기관총수 재간 있다고 패장까지 시켰더니 이젠 련장도 눈에 안 보여?” 그래도 상순은 물러서지 않았다. "숱한 전사들의 목숨과 관계되니 하는 말입니다.” 허련장도 그 말에 일리가 있는지라 생각을 고쳤다. “그럼 네가 퇀장한테 가봐라. 퇀장이 뭐라고 하는가?” “옛!” 상순은 군례를 붙이고 나서 기관총 반에 계속 기관총소사를 하라고 명령하고는 황급히 최 퇀장을 찾아 고지로 달려 올라갔다. 최퇀장은 적탄통과 기관총에 맞아 무너지는 적진을 망원경으로 살피고 있었다. 상순은 달려가서 보고했다. “보고, 최퇀장," "김패장, 무슨 일이오?" 상순은 헐떡거리며 이마의 땀을 팔소매로 닦으며 보고했다.      "우리 련이 서 있는 곳은 적들의 눈에 환히 드러난 곳이어서 적탄에 맞기 쉬운 곳입니다. 은폐하기 유리한 지형에 피해 적들에게 사격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련 통신원이랑 몇몇 전사들이 이미 적탄에 맞아 희생되었습니다. 그런데 허 련장은 피하자는 말을 듣지 않습니다. 퇀장이 여기서 돌격명령을 기다리라고 했다면서 고집을 씁니다.” 최퇀장은 그 보고를 듣고 도리머리 질 했다. “내 언제 적탄이 날아오는 곳에 서 있으라고 하였소? 허백호 련장은 말이 아니군. 기동영활하지 못하게 숱한 전사들을 불리한 지형에 세워 두다니? 빨리 가서 그 자리를 피해 유리한 지형에 숨으라고 하오!” “옛!” 상순은 군례를 붙이고 총알이 비발 치는 고지를 쏜살같이 달려 내려왔다. 연장은 헐레벌떡 뛰어 온 상순을 보고 다급히 물었다. "퇀장이 뭐라고 하던가?” 상순은 숨도 돌리지 못하고 회보했다. “우리 련을 빨리 안전한 산 둔덕 뒤에 전이해 숨으라고 했습니다.” 바빠 맞은 허 련장은 인차 명령을 내렸다. “산 뒤로 철퇴!” 전사들은 몽땅 우박 치듯 하는 탄우를 무릅쓰고 안전한 산 둔덕 뒤에 철퇴해 은폐했다. 상순은 기관총 반을 영솔하여 기관총으로 적진에 소사하면서 전사들의 철퇴를 엄호했다. 상순의 덕분에 한차례 대량 사상을 피했다. 상순은 기관총으로 사격하면서 성수와 태수에게 명령했다. “기관총을 연발로 쏘지 말아! 적들을 조준해 서너 발씩 갈겨라!” “옛!” 뚜르륵 뚜르륵 기관총 반에서는 여섯 정의 기관총으로 연발사격으로부터 조준하여 사격하기 시작했다. 푱! 푱! 푱! 푱! 총알이 전호에서 총질하는 토비들에게 날아가 불꽃을 튕기며 토비들을 염라왕국에 보냈다. 하여 토비들은 목책 안의 전호에서 머리도 들지 못했다. 머리만 들면 묘준 사격하여 쓰러뜨렸다. 허나 무리하게 돌격했다가는 많은 사상자를 내기 마련이었다. 교활한 토비들은 고의적으로 평강촌 주위 산비탈의 나무들을 반반하게 잘라버리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시퍼런 대낮에 비발 치는 탄우 속을 꿰뚫고 하얀 눈이 덮인 반반한 산비탈 아래로 돌격해 내려간다는 것은 천만 위험한 일이었다. 평강촌 산골짜기와 산비탈에는 땅거미가 지기 시작했다. 전사들은 저녁밥을 든든히 먹고 야밤 습격을 준비했다. 밤장막이 드리우자 최락현 퇀장은 명령을 내렸다. “돌격!” 돌격 나팔소리가 온 산골짜기에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민주연군 전사들은 “돌격!”, “싸(杀)!” 고함치며 산비탈 아래 적진으로 돌격해 내려갔다. 적들은 또치까와 전호에서 전보흥 소교의 지휘아래 최후발악을 하며 맹사격했다. 교활한 전소교는 은페된 또치까와 갱도 토비들을 잠잠히 있다가 민주련군이 총돌격하자 또치까와 갱도의 총구를 열고 기관총으로 반격하라고 명령했다. 민주연군 전사들은 뜻밖에 또치까와 갱도에서 맹사격하는 바람에 새하얀 눈이 깔린 산비탈에 숱한 희생자를 냈다. 산비탈의 허연 눈은 전사들의 피로 벌겋게 물들여갔다. 허나 서너길 씩 나무 장재를 세운 토비들의 소굴에 근본 접근도 하지 못했다. 최 퇀장은 사상자가 더 나기 전에 명령을 내렸다. “철퇴! 철퇴하라!” 철퇴 나팔소리가 맥없이 울렸다. 민주연군 장병들은 숱한 사상자를 내고 평강툰을 점령하지도 못하고 영월구로 철거했다. 영월구에서 열린 련 이상급 간부들이 참가한 전투총결회의에서 최 퇀장은 허백호 련장이 유리한 지형에 부대를 매복시키지 않아 통신원을 비롯한 숱한 사상자를 냈다고 비평하였다. 그는 상순이 제때에 보고했기에 숱한 사상자를 낼 번한 것을 방지했다고 높이 평가했다. 그러고나서 상순이 충국이란 토비를 포섭해 적정을 정찰해 제때에 보고 했기에 적 지휘부와 화력망을 조준해  파괴했다고 하면서 능란한 우리 군 지휘자 후보라고 하면서 마땅히 제발시켜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허백호 련장은 반대해나섰다. "상순은 패장을 해도 과합니다. 정찰을 잘 했으면 우리 군이 수태 살상됐겠습니까? 은페된 또치까와 화력망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최퇀장도 충국이 보낸 지도에 평강촌 동쪽 산 기슭에 은페된 또치까 몇개 빠졌다는 것을 후에야 발견했다.  그 바람에 숱한 사상자를 냈다는 것도 안다.기실 내심 사상모순이 있는 충국은 이 기회에 도대체 민주련군이 토비들을 이기는가 보려고 몇개 은페된 또치까 위치를 지도에 그려넣지 않고 상순한테 넘겼던 것이다. 후에 상순은 직접 자기 눈으로 적진과 화력배치를 확인하지도 않고 충국의 지도를 소홀히 믿은 잘못을 최퇀장을 찾아가 검사하였다. 그러나 최퇀장은 모든 사람들 앞에서 상순의 경솔함을 확대해 비판하고 싶지 않았다. 이미 상순한테는 교훈을 섭취하라고 엄숙히 비평교육했기 때문에 재차 처분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건 충국의 문제지 상순한테 책임지울 수는 없지 않는가?" 최낙현 퇀장을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쳇, 상순 동무는 혀련장보다 못잖소." 그러자 허백호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럼 절 철직하고 상순한테 련장을 시키시오." 최낙현 퇀장은 책상을 탕 치며 일어났다. "시키라면 못 시킬 거 같소?" "아니, 그래, 패장을 시킨지 한달도 안돼 제발시킨다는게 말이나 됩니까? 또 충국이랑 토비들 기의를 일으켜 내응하게 한다더니 어떻게 됐습니까? " 최퇀장은 숱한 간부들의 앞인지라 언성을 좀 낮추었다. "허련장, 허허허. 절대 질투하지 마오. 동무넨 모두 같은 민병련장출신이오." 그는  허백호를 바라보며 부드럽게 뒷말을 이었다. "허련장, 조급해 하지 마오. 전번엔 기의를 일으키지 못했지만 내심하게 기다리오. 전번에 충국이 적지휘부를 수시로 흰수건으로 가리켜줬기에 전보흥을 추격사격해 대가리도 들지 못하게 하지 않았소. 이제 꼭 내응할 기회가 있을게요. 또 동무도 민병련장 출신인데 오자마자 련장을 하지 않았소? 상순동무도 민병련장 출신이오. 이번 전투를 통해 그의 전투지휘능력을 충분히 보여주었소. 허련장,  조수로 임명하겠으니 잔말 말고 잘 합작하오." 허백호는 더는 말을 못하고 반쯤 외면하며 돌아앉았다. 그날 저녁에 최 퇀장은 통신원을 시켜 상순을 퇀부에 불러갔다. 최 퇀장은 패기 있는 상순의 아래 우를 대견스레 여겨보면서 단마디에  홍두깨 내밀듯 했다. “동무를 1련 지도원으로 제발하겠소.” 뜻밖의 말에 상순은 깜짝 놀랐다. “전 김명호 지도원보다 못합니다. 전 항일전쟁 때 유격대에서 몇 차례 유격전에 참가했을 뿐입니다. 아직 전투를 지휘해본 적도 없습니다.” 최퇀장은 눈이 휘둥그래 무릎을 탁 쳤다. “무슨 소리를 하오? 동무는 지도원을 잘 할 지휘인재요. 그날 동무의 판단과 보고가 숱한 전사들을 살려 냈소. 동무가 충국을 통해 수시로 적정을 알아냈기에 아군의 공격이 아주 효과적이였소.” 허나 상순은 의연히 손사래를 치며 사양하였다. “지도원을 못하겠습니다. 이제 제가 대포 쏘기와 지휘재간을 제대로 배운 후 하겠습니다.” 그러자 최 퇀장은 내심하게 말했다.       “동무는 너무 겸손하오. 겸손한 건 좋지만 자기를 너무 과소평가해도 나쁘오. 조직에서 수요할 때 척척 무거운 짐을 메고 나가야 하오." 상순은 머리를 숙였다. 최퇀장은 상순의 어깨를 다독였다.        "상순이, 전쟁 속에서 전쟁을 배워야 하오. 언제 뭐나 다 배운 후 지휘관이 되겠소? 이계삼 서기 소개신을 보니 동문 벌써 항일전쟁과 함흥촌토비숙청 전투 때 기관총사수로 잘 싸웠더구만. 민병 련장을 하면서 100여명 민병들을 지휘해 조덕산 국민당 정규군과도 아주 잘 싸웠더군. 동문 우리 민주연군에서 당당히 지도원을 맡을 수 있는 인재요.” 상순은 허백호 련장의 발등을 밟는 것 같아 극구 사양했다. "허백호 련장의 잘못이 없습니다. 그는..." "알았소. 1련 지도원하기 불편하면 2련 지도원과 바꾸면 되오." 최 퇀장은 더부룩한 구레나룻을 매만지며 도리머리질 했다. “참 너무 겸손하고 연약하구만. 한뉘에 제발될 기회 몇 번 있다고 그러오? 동무는 지금 하지 않으면 꼭 후회할거요.” 상순은 마지못해 군례를 올리며 우렁차게 말했다. "조직의 수요에 복종하겠습니다." 최퇀장은 상순의 두 손을 굳게 잡았다. "김지도원, 허련장을 잘 협조하오." "옛! 잘해보겠습니다." 최퇀장은 밤이 깊도록 토비 내부기의를 책동하게 할 방안을 상순과 토란하고 새로운 임무룰 포치하였다...       한편, 민주연군이 영월구로 퇴각해 간 후 토비 놈들은 승전이나 한 듯이 환성을 질렀다. 전보흥 소교는 우쭐해 길죽한 상통을 비틀며 술상에 침을 더럽게 튕기며 고래고래 고함쳤다. “형제들, 우린 60여명이 천여 명 빨갱이들의 토벌을 막아냈다. 우리 국민당군 형제들은 진짜 일당백의 용사들이야. 우리는 대승리를 거두었다."     전보흥은 시퍼런 군도를 뽑아 술상에 콱 박아놓고 술사발을 높이 쳐들었다. "자, 마음껏 마시고 내일 삼도만으로 쳐내려가자!” “와-!” 토비들은 문서 조소호네 사합원 집에 설치한 지휘소 마당에 큰 술상들을 차려 놓고 돼지를 잡고 이른바 대승리를 경축하여 술을 퍼 마시었다.  요시꼬와 야마꼬는 전보흥의 양 옆에 붙어 앉아 아양을 떨며 술을 따른다, 멧돼지 고기점을 집어 전보흥의 입에 넣어준다하면서 부산하게 놀았다.        조소호는 그 가면에 찬 장면을 보고 침을 택 뱉더니 이를 쁙쁙 갈았다. 조소호는 자기 집을 차지하고 자기 안해를 릉욕한 전보흥을 보면 치떨렸다.        그날 전보흥은 그를 보고 삼도만에 가서 술을 떠오라고 해놓고 집이 빈 틈에 그의 안해를 릉욕했던 것이다. 그 일로 해 그의 안해는 뒷울안 살구나무에 올라가 바줄로 목을 매기까지 했다. 다행히 그가 제때에 돌아왔기에 살구나무에 목을 맨 안해를 풀어내 겨우 구해냈다. 후에 애들한테서 모든 사연을 알게 됐다.       충국이나 조소호는 손을 쓰자고 했지만 지학구가 시기상조라고 해 지금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런데 마룡은 천명이나 되는 민주련군이 평강촌을 어쩌지 못하고 퇴각한 걸 보고 생각이 바뀌였다. (기의했다가 국민당군을 이기지 못하면 어쩌지? 난 그저 야마꼬를 데리고 놀면 다야.) 그리하여 마룡은 마음이 갈대처럼 흔들리며 갈팡질팡했다.        이튿날 기고만장해진 토비들은 전보흥 소교의 명령에 따라 삼도만에 쳐 내려갔다. 그들은 삼도만 둘레에 서너길 되는 통나무로 장재를 둘러세우고 또치까를 구축하였다.  지어 삼도만과 평강 촌에 통하는 전화까지 가설했다. 놈들은 일단 어느 쪽에 위험사태가 생기면 서로 접응하려고 했다. 토비들은 삼도만과 평강 촌을 철통같이 지켰다. 이때 돈화의 토비 두목 마대포가 100여명 토비들을 데리고 삼도만 토비무리에 가담했다. 삼도만 주위 한족들이 대거 토비군에 가담하는 바람에 삼도만과 평강촌의 토비 무리는 무려 300여명으로 늘어났다. 며칠 후 최퇀장은 상순, 태수, 병수 등 정찰소조를 파견해 적정을 손금 보듯 정찰해오게 했다. 상순은 충국과 내통해 인차 적정을 정찰해 영월구에 돌아와 최퇀장에게 회보하였다.    평강촌의 대부분 토비들은 전소교를 따라 삼도만에 내려가고 평강촌에는 지학구와 모사 조소호 그리고 마룡 등이 지킨다는 것이였다.      변화된 적정을 회보받은 최퇀장은 무릎을 탁 치였다. "평강촌 토비들을 소멸할 절호의 기회요."   그때 민주연군 18퇀은 박락권의 지휘아래 국자가(연길) 떠나 팔도로부터 일본 놈들에게서 노획한 탱크까지 앞세우고 삼도만으로 진군했다. 탱크는 투항한 일본포로 야마가와가 직접 몰았다. 그는 민주련군 탱크 운전수를 둘이나 배양했지만 직접 탱크를 몰겠다고 나섰다. 직접 탱크를 몰고가 요시꼬와 야마꼬를  구해낼 생각이었다.  박락권 퇀장은 비준하엿다. 그리하여 민주련군 두 운전수는 조수로 돼 기관포와 기관총을 각각 잡았다.      민주연군 19퇀은 최낙현 퇀장의 지휘아래 다시 영월구를 떠나 산등성이를 넘어 평강 촌으로 진군했다. 천명이나 되는 민주연군 장병들은 량쪽으로 협공해  평강촌과 삼도만 토비들을 포위하며 조여들어갔다.      최퇀장은 평강촌 서쪽 산마루에 이르자 부대를 산등성이 뒤에 은페시키고 먼저 상순을 불렀다. "김지도원, 정찰소조를 데리고 가서 충국과 련계해 기의를 일으키게 하오," "예." 상순은 날랜 병수와 명사수 태수를 데리고 토비소굴 대문 밖에 접근해 뻐꾸기 울음소리를 냈다. 뻐꾹, 뻑꾹. 그러자 대문 안에서 뻐꾸기 울음소리 들렸다. 뻐꾹, 뻐꾹. 뻑뻑꾹. 뒤이어 대문이 삐-꺼-덕- 소리내며 천천히 열렸다. 충국이 조소호와 함께 나왔다. 충국이 다가와 조소호한테 상순을 소개했다. "조문서, 민주련군 김패장이오." "아니, 김지도원이오." 옆에서 태수가 말했다. 그러자 조소호는 상순의 두 손을 굳게 잡았다. "김지도원, 민주련군을 환영하오." 상순도 조소호와 충국의 손을 꽉 잡아 흔들었다. "당신들의 기의를 환영하오. 기의만이 당신들의 명지한 선택이고 유일한 출로요." 조소호는 그래도 시름놓이지 않는지 상순을 보고 물었다. "기의하면 내 지주라고 우리 집이랑 빼앗지 않을 수 있소?" "있구 말구. 우린 충국의 집도 빼앗지 않고 부모도 보호해주고 있소." "오-확실히 민주련군은 전소교랑 국민당군 말과 다르구만." 조소호는 상순을 보고 확신에 차 말했다. "대부대를 데리고 근심하지 말고 마을로 들어오오. 우리 기의를 반대하는 토비들을 몽땅 없애치우겠소." "알았소." 그때 대문 안에서 마룡이 언뜰 나타났다가 지휘부 쪽으로 사라졌다. 상순은 조소호랑 갈라져 퇀지휘부에 돌아가 최퇀장에게 정황을 보고하였다. "좋소." 그는 즉시 대부대를 지휘해 평강촌 대문 쪽으로 진군하였다. 충국이 몇몇 졸병들을 데리고 대문을 활짝 열어재꼈다. 총소리 한방 울리지 않고 민주련군 대부대가 대문 안으로 쳐들어갔다. 땅! 땅! 땅! "민주련군이 쳐들어왔다!" 십여명 토비들이 아군을 발견하고 총질하며 전호로 해 지휘부 쪽으로 도망쳤다. 그런데 지휘부 안에서 지학구와  조문서가 경호반을 령솔해 사격하며 덮쳐나왔다. 그 놈들은 몽땅 뒈지고 말았다. 이때 지휘부 북쪽 둔덕의 또치까에서 기관총이 불을 토했다. 지학구가 지휘부 대문에서 뛰쳐나가 권총을 휘두르며 고함쳤다.  "형제들, 우린 기의했다. 민주련군은 우릴 보호하러 왔다. 살려주니깐 모두 무기를 놓고 기의에 참가하라. 누가 거역하면 몽땅 총살한다." 그 고함소리에 또치까에서 기관총소리가 뚝 멎었다.  민주련군 대부대가 새까맣게 마을에 쳐들어온 것을 보고 대세가 이미 기울었다고 여긴 토비들은 또치까에서 기여 나와 무기를 내려놓고 두 손을 들었다. 마을 여기저기서 토비들이 나와 투항했다. 전소교한테 미혹돼 토비무리에 가담했던 마을 한족농민들은 무기를 버리고 자기 집으로 돌아가 김치움이나 수수대무지를 헤집고 들어가 숨었다.       민주련군 전사들은 토비들의 무기를 몰수하고 한쪽에 줄을 세워놓았다.        지학구와 조소호는 헤벌쭉 웃으며 상순의 안내하에 지휘부 쪽으로 오는 최탄장 일행을 마중했다. "환영합니다. 장관님!" 충국이 최탄장한테 그들을 일일이 소개했다. 최퇀장은 마주 나가 지학구 일행을 일일이 손잡아주었다. "당신들 기의를 환영하오. " 그는 포로들을 둘러보며 우렁차게 말했다. "민주련군에 투항하고 기의하는 것만이 당신들의 유일한 출로요. 우린 포로들을 환대하오." 조소호가 중얼거렸다. "우린 포로 아닌데. 기의했는데." "네, 기의군은 아군이나 다름 없습니다. 그러나 반항하는 토비는 좋은 끝장 없습니다." 지학구는 포로라는 말에 섬찍해났다. 더욱이는 민주련군 속에  권총을 차고 서 있는 상순의 무서운 세귀눈을 보는 순간  뒤잔등에 소름이 쭉 끼쳤다. "저놈이 날 살려주겠는가?" 그는 자기는 지학사처럼 친일주구이기에 총살당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번개처럼 뇌리에 번쩍했다. 그는 한참 무슨 궁리하더니 웃으며 최퇀장한테 다가가 말했다. "장관님, 전소교랑 몽땅 삼도만에 도망쳤습니다. 빨리 삼도만을 치십시오. 우리 평강촌을 지키다가 전소교가 여길 도망쳐오면  생포해 바치겠습니다. 그 놈 일본 여편네들이 여기 있어 꼭 여기 올겁니다."   최퇀장은 그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합시다. 기의한 일을 비밀로 부치겠습니다. 꼭 전보흥이 여기 도망쳐오면 생포하십시오." 말을 마치자 최퇀장은 대부대를 거느리고 삼도만을 향해 진군하였다. 그는 일부 장병을 평강촌에 남겨 지키게 할까 하다가 그만 두었다. 괜히 지학구네 불신을 살 것 같고 혹시 기의한 일이 탄로나 전보흥을 생포하는데 불리할까봐서였다.      "잠간만!" 지학구가 최퇀장네를 불러세웠다. 그는 충국을 돌아보고 말했다. "야마꼬와 시룡일 상순에게 맡겨라." 그는 그것만이 그들 모자를 구하는 유일한 출로라고 여겼던 것이다. "알았소. 외삼촌." 충국은 조소호네 김치움 문을 열고 껌껌한 안에 대고 소리쳤다. "외삼촌댁, 어서 나오오." 김치움에서 일본 여인 둘이 나왔다. 야마꼬는 우는 지시룡을 안고 나왔다. 요시꼬는 만삭이 된 배를 이기지 못해 충국이 손을 잡아 끌어서야 겨우 김치움에서 올라왔다. 일본 여인들은 낯선 민주련군 장병들을 보고 바들바들 떨었다. "겁나 마오. 우린 전쟁피해자인 일본 여인들을 보호해 일본 고향에 보내줄거요." "고향에 돌아갈 수 있나요?" 야마꼬는 공포에 찬 얼굴에 일시 활기를 띄었다. 옆에서 요시꼬가 그녀의 옆구리를 툭 치며 못미더운 눈길로 최퇀장을 힐끔 훔쳐보았다.      지학구는 야마꼬한테 다가가 부드럽게 말했다.     "아주머니, 민주련군은 인자한 군대오. 믿고 가오. 그래야 시룡일 구할 수 있소." 뒤이어 지학구는 지시룡을 안고 뽀뽀 하더니 상순한테 다가갔다. "상순이, 이들 모자를 부탁하오." 상순은 최퇀장의 눈치를 살폈다. "김지도원, 이들 모자를 어떻게 하나 보호하오." 최퇀장의 말을 듣자 지학구는 요시꼬를 보고도 권고했다. "사돈도 함께 가오. 함흥촌에 가면 살수 있소. 만약 기회 있으면 고향에 돌아갈 수도 있소." 그러나 요시꼬는 남산만한 배를 매만지며 망설였다. "전소교를 기다리지 마오. 그 놈은 당신을 놀이개로 데리고 놀지. 아내로 보지 않소. 언제든지 버릴수 있소."   충국이 끼여들었다. 요시꼬는 전보흥을 원쑤로 여겼지만 민주련군도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 황차 그녀의 배 속에는  토비두목의 애가 있는데 살려줄가는 의혹이 들었던 것이다. 그녀는 조소호를 힐끔 곁눈질해보았다. 솔직이 그녀는 조소호와 함께 있고 싶었다.       한편, 삼도만 토비들은 산골에서 보지도 못한 괴물 같은 탱크가 덮쳐오자 황급히 아우성치며 전호에 뛰여들어가 숨었다. "형제들, 겁내지 말라! 수류탄을 뿌려!" 전보흥이 군도를 빼들고 탱크를 향해 고함쳤다. 몇놈이 수류탄을 뿌리고 총을 쏘았다. 그러나 탱크는 끄떡도 하지 않고 목책 대문을 꽝 부딪쳐 깔아 짓뭉개더니 짓쳐 들어갔다. 토비들은 질겁한 나머지 아우성치며 전호에서 기여나나와 개인 집으로 도망쳐 숨는 자도 있었다.       그런데 탱크가 그만 대문을 벋치어 놓았던 원목을 타고 넘어가다가 가로 타고 말았다. 두 바퀴가 건뜻 들려 엔징 소리만 우르릉우르릉 울릴 뿐 빈 무한궤도만 빙방 돌아가면서 한발작도  더 전진하지 못했다. 그래도 두 조선인 운전수는 시뻘건 불을 토하는 적의 또치까를 향해 기관포를 쏘았다. 야마가와는 여동생을 구하려는 일념으로 너무 호위보병들과 동떨어져 너무 빨리 탱크를 몰고 진격하다나니 탱크는 고립무원에 빠지고 말았다. 야마가와는 탱크 윗문을 열고 나가려고 했다. "윗문 열지 마오." 그러나 야마가와는 들을념을 하지 않고 윗문을 열어재꼈다. "여동생을 구해야겠어! 요시꼬! 야마꼬! 오빠 너넬 구하러 왔다." 그가 탱크 웃문을 열고 나갔을 때였다. 그때 몇몇 토비들이 욱 달려들었다. 야마가와는 권총을 휘둘러 몇놈을 쏘아눕혔다. 두 운전수들은 기관포와 기관총을 쏘며 야마가와를 엄호했다. 그러나 야수 같은 토비들은 총탄이 떨어진 야마가와를 걸이대로 찌르고 도끼로 찍어 비참하게 살해했다. 사기 난 토비들은 성에 붙어 탱크를 따라 돌격하던 민주연군 전사들에게 몰 사격을 가했다. 그 바람에 숱한 민주연군 전사들이 살상되었다. 정황은 아주 위급했다. 아군의 시체가 사처에 널리고 피가 눈 덮인 길바닥을 적시었다. 18퇀은 몇시간 숱한 희생을 내면서 공격했지만 토비소굴로 쳐들어가지 못했다. 이때 서북쪽에서 19퇀이 덮쳐왔다. 두개 퇀은 양쪽으로 협공하기 시작했다.  최퇀장의 명령에 따라 상순은 기관총 반을 이끌고 강 둔덕 뒤에 기관총 여섯 대나 걸어 놓고 적진을 향해 맹렬하게 사격했다. 그들의 맹사격은 돌격하는 전우들을 유력하게 엄호했고 후퇴를 엄호했다. 이때 최 퇀장은 상순에게 다가와 명령했다. “한 곳에서만 사격하지 말고 동산과 서산, 북산 산기슭에 올라가 적들의 배후에 대고 교차 사격하라!” 상순은 기관총 반을 세 개 조로 나눠 한 개 조에 두정의 기관총을 가지고 동산과 서산, 북산으로 올라가 높은 산등성이에서 토성과 전호에서 사격하는 적들의 잔등에 대고 맹렬하게 사격했다. 뚜르륵 뚜르륵 세 곳에서 교차 기관총으로 맹사격을 하는데다가 산등성이에서 삼도만 적들의 목책안의 소굴에 대고 적탄통까지 갈겨 댔다. 그러자 토비 놈들이 보기 좋게 쓰러졌다. 그 틈을 타서 영용한 민주연군 전사들은 방락권 퇀장과 최낙현 퇀장의 명령에 따라 드센 진공을 시작했다. 민주연군 전사들이 맹호와도 같이 무너진 목책 대문 안으로 진군해 들어갔다. 뚝 터진 홍수마냥 짓쳐들어오는 민주연군 전사들을 본 30여명 토비들은 전보흥을 따라 말을 잡아타고 뒤문을 열고 서산 쪽으로 빠져 평강 촌 쪽으로 도망쳐갔다. 나머지 적들은 개인 집에 숨어들어가 평민으로 가장하고 아낙네들의 이불 속에 들어가 대가리를 파묻고 숨었다. 어떤 놈은 돼지 굴에 뛰어들어 숨고 어떤 놈은 마구간에 뛰어 들어가 말구유에 숨어 말먹이를 들쓰고 누워 있었다. 실로 대가리는 가리었으나 엉덩이는 드러나 꼴불견이었다. 아군은 함성도 드높이 삼도만 토비소굴에 뛰어 들어가 발악하는 토비를 숙청하고 여기 저기 숨은 놈들을 붙잡아냈다. 그들은 적들이 숨을 돌릴 새도 주지 않고 평강 촌 쪽으로 추격해갔다. 그런데 말을 타고 도망치는 토비들을 어쩌는 수 없었다. 그때 상순이 대문 어귀에 멈춰선 탱크를 보고 피뜩 번개치는 것이 있었다. 그는 허백호 련장과 말했다. "탱크를 몰고 추격합시다." 허백호 련장은 탱크 위문 우에 기관총을 부여잡고 쓰러져 있는 운전수를 보고 코방귀룰 뀌였다. "또, 또, 또. 되지도 않을 소릴. 흥!" "내 탱크를 몰게!" "김지도원이 탱크를 몬다구? 듣다 첫소린데. 동네집 수렐 모는겐가 하오?" 상순은 가슴을 퉁퉁 치며 장담했다. "이전에 야마가와가 탱크를 손질할 때 운전을 배웠습니다." 그러나 허련장은 도리머리질 했다. "통마무를 깔고 넘어가 끄떡 못하는 탱트를 어쩐단 말이오?" 상순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대문 어귀에 널린 통나무에 눈길을 멈췄다. 그는 전사들에게 손을 홱 저었다. "빨리 통나무를 들어다 탱크 바퀴를 받치오." 태수랑 병수랑 희수랑 왁 모여가 통나무를 들어다 양쪽 바퀴를 받쳤다. 상순은 윗문에 쓰러져 머리에 피가 랑자한 운전수를 치우고 윗문을 열고 탱크 안에 들어가며 명령했다. "태수는 기관총을, 희수는 기관포를 쏠 준비해라. " 태수와 희수는 탱크에 뛰어올랐다. 상순은 기관포를 안고 쓰러진 민주련군 조선인운전수를 보자 희수를 돌아보았다. "빨리 위생원을 부르오. 숨이 붙어 있는 거 같소." 희수와 태수는 운전수를 들어 내가려고 안간힘을 썼다. 부르릉 부르릉 요란한 발동이 걸렸다. 그 요란한 엔징소리에 운전수가 눈을 스르르 떴다. "내 운, 운전해야..." 상순은 숨이 가들가들하는 운전수를 보고 말렸다. "안되오. 그 머리를 보오. 어서 구급해야 하오." "내 방조할게." 상순은 조급했지만 텡크가 제자리에서 부릉거리며 말을 잘 듣지 않았다. "유, 유문을 콱 밟소." 상순이 유문을 콱 밟자 엔징소리가 더 요란해지며 탱크가 기적적으로 통나무를 타고 앞으로 쭉 나갔다.  "운전수를 내보내도 되오." 희수와 태수는 윗문을 열고 정신 잃은 운전수를 들어 내보냈다. 밖에서 위생원 등이 황급히 뛰여와 머리에 중상을 입은 운전수를 받았다.  상순은 탱크를 몰고 대문을 빠져나와 쏜살같이 북쪽으로 향한 울퉁불퉁한 길을 따라  토비들을 추격해갔다.   그들이 탱크롤 몰고 한참 추격해가니 말을 타고 도망치는 토비무리 꼬리가 보였다. "사격!" 뚜르륵 뚜르륵 명사수 태수는 토비들을 겨누고 기관총을 갈겼다.  몇몇 토비들이 보기좋게 말에서 퉁퉁 떨어졌다. 그런데 희수는 기관포를 어떻게 쏘는지 잘 몰라 포탄을 재우고 여기저기 마구 눌러댔다. 상순이 다급히 고함쳤다. "희수, 단추를 눌러!" 꽝! 포탄이 토비무리 옆에 날아가 폭발했다. 허연 버섯구름이 치솟아올랐다. 언 흙덩이가 마구 튕겨올랐다가 허연 눈길에 어지럽게 떨어졌다.      교활한 토비들은 탱크가 축겨하자 눈길을 버리고 산기슭을 타고 도망쳤다. 상순은 탱크를 몰고 계속  울퉁불퉁한 길을 따라 추격하였다. 태수는 기관총을 산기슭에 돌려대고 쏘았다. 그러나 탱크가 덜컥거리는데다가 교활한 토비들이 산에서 이리저리 구불구불 뱡향을 바꾸며 도망치는 바람에 명중탄을 안길 수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탱크가 맥없이 멈춰서며 발동이 꺼졌다. 휘발유가 다 떨어졌던 것이다. 상순은 조종간을 놓고 기관포로 도망치는 산 위의 적들을 겨누고 단추를 눌렀다. 꽝! 희수는 또 포탄을 재웠다. 꽝! 또 몇놈이 보기 좋게 쓰러졌다. 토비들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상순 등은 탱크 안에서 나왔다. 그들은 죽은 토비들의 말을 잡아 타고 쏜살같이 평강촌 쪽으로 추격해갔다. 전 소교는 마대포, 동생 전소광 등 20여명  잔여토비를 데리고 범에게 쫓기는 개처럼평강 촌 목책 안으로 도망쳐들어갔다. 그는 목책 대문을 꽉 닫아걸게 하고 지휘소에 뛰어 들어갔다. 만삭이 된 요시꼬가 전 소교를 반겨 맞았다. “여보, 승전했어요? 빨갱이들을 물리치고 왔지요?” 전 소교는 아양을 떠는 일본 여인이 도리어 미워났다. “우린 망했어.” 요시꼬는 뚱뚱한 배를 뚱기적거리며 대뜸 걀쭉한 낯에 당황한 기색을 띠우며 야단쳤다. “그럼 우린 어떻게 해요? 빨리 도망쳐야죠.” 전 소교는 만삭이 된 요시꼬를 데리고 달아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는 군도를 쓱 뽑아 들었다. 그는 시퍼런 군도를 요시꼬의 목에 대며 지껄였다. “널 가지지 못할 바엔 죽여버리겠다. 절대 빨갱이들한테 넘겨줄 순 없어!"” 요시꼬는 질겁해 하며 마지막으로 애원했다. “여보, 제발 목숨을 살려 주세요. 내 배속에는 당장 세상에 나올 당신의 자식이 있어요. 애를 봐서라도 나를 데리고 도망쳐요. 예?” "여보? 네 놈이 조개놈과 좋아하는 걸 다 알았어. 마룡이 다 고발했어." 악마와 같은 전 소교는 이를 악물더니 군도 자루에 침을 뱉아 단단히 쥐었다. "닥쳣!" 갑자기 조소호가 뛰여들어오며 권총을 쏘았다. 땅! 전보흥이 군도를 툭 떨어뜨리고 왼팔을 부여잡았다. "네놈이 감히?" 조소호는 전보흥을 무섭게 쏘아보며 을러멨다. "네놈은 내 집과  아내를 강탈한 원쑤야. 오늘 원쑤를 갚겠다." 그때 한무리 경호원들이 뛰여들어왔다. 땅! 그때 지학구가 들어오면서 조소호를 쏘았다.  조소호는 쓰러지며 중얼거렸다. "네놈이...?"  "이놈과 충국이랑 기의를 획책했습니다." 마룡이 뛰여들어와 고발했다. "아니야. 충국은 기의하지 않았어." 충국은 지휘소에 들어오다가 마룡의 고발소리를 듣고 권총을 뽑아들었다. 땅! 총소리와 함께 마룡의 대갈통이 박살났다. 경호원들은 총을 뽑아들었지만 어쟀으면 좋을지 몰라 전소교의 눈치만 살폈다. "충국, 네놈이? 왜 마룡을 쐈어?" "이놈과 조문서가 장관님 애첩들을 릉욕했소." 충국은 말을 마치자 황급히 문 밖으로 도망쳤다. 지학구는 내친 김에 전보흥을 쏴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전소교 주위에 둘러선 경호반 놈들을 보고 억지로 참았다. "뭐라고?"  전보흥이 권총을 뽑아들었다. 그때 지학구가 권총을 뽑아든 전보흥을 막아나섰다. "충국의 말을 믿소. 나도 직접 보았소. 저 년놈들이 노는 걸." "그래? 건데 마룡이 죽었으니 누가 무전기로 국자가 왕특파원과 련계하지?" 전보흥은 턱주가리 상처 흉터를 매만지었다. 그는 경호원을 돌아보며 명령했다. "빨리 김치움에 들어가 무전기를 가져와." "옛!" 경호원이 바깥으로 뛰여나간 후 전보흥은 바들바들 떠는 요시꼬를 쏘아보았다. 그새 충국은.눈덮인 수림 속에 자취를 감춰버렸다. 전보흥은  군도를 주어들더니 말이빨을 악물고 요시꼬한테 다가갔다. "더러운 년! 야마꼬는 어디 갔어?" "공산군이 랍치해갔어요." "그래? 네년은 왜 랍치해가지 않았어? 엉?!" 전보흥은 살인마귀처럼 을러메면서 군도를 쳐들었다. 그는 군도로 꿇어앉아 바들바들 떠는 요시꼬의 배를 푹 찔렀다. “억!” 요시꼬는 배를 끌어안고 피못속에 쓰러졌다. 극악무도한 전 소교는 군도로 요시꼬의 배를 가르고 태아를 빼 목을 쥐여 쳐들고 미친 듯이 너털웃음 쳤다. “하하하, 이게 내 자식이야! 내 자식!” 전 소교는 태아를 땅바닥에 메친 후 시퍼런 군도로 땅바닥에서 배를 끌어안고 신음소리를 내는 요시꼬의 목을 쳤다. 그 처참한 장면을 보는 마대포와 그의 동생 전 소광마저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어 외면했다. “가자! 빨리 천교령 마희산 무리 쪽으로 달아나자!” 전보흥 소교는 군도를 줴뿌리고 지휘소에 불을 콱 질러 놓았다. 뒤이어 마대포와  전소광 등 20여명 토비들을 데리고 천교령을 바라고 도망쳤다. 이윽고 민주연군이 쳐들어왔다. 상순 등은 평강 촌 토비소굴 지휘부에서 피못속에 쓰러진 조소호와 요시꼬를 발견하였다. 문어귀에 쓰러져 어느 곳을 뚫어지게 쏘아보는  마룡의 시체도 발격하였다.  상순이 찬찬히 여겨보니 조소호는 오른 쪽 어깨에 총탄을 맞았었다. 목에 손을 대보니 아직도 맥이 가늘게 뛰고 있었다. 코에 손을 대보니  가는 숨이 붙어 있었다. "위생원!" "옛!" 위생원이 황급히 달려왔다. "빨리 조문서를 구하오." "옛!" 위생원은 급히 조소호의 상처를 닦아내고 지혈제도 바르고 처치했다. 뒤이어 들어선 최퇀장은 지휘부 마당에 세우놓은 자동차에 조소호를 실어  룡정병원에 보내 구급하게 하였다.  상순은 자동차 운전수에게 당부했다. "룡정에 가면 위생학교 정규상선생을 찾아가 내 조문서를 꼭 구해달라고 하더라고 전하오." "알았소. 꼭 그렇게 하지." 상순은 창걸을 시켜 한개 반 전사들을 데리고 자동차에 올라가 조문서를 룡정에 호송하라고 명령하였다.  뒤이어 상순은 지휘부에 들어와 전사들을 보고 요시꼬의 시체를 잘 거둬 잘 묻어주라고 하였다. "일본 여자구먼." 한 전사가 두덜거렸다. 그러자 상순은 그 전사를 보고 내심하게 타일렀다. "이 일본 여자도 일제 침략전쟁과 토비놈들의 희생자오. 잘 묻어주오." 그제야 전사들은 납득됐는지 더 말하지 않고 시체를 거두어 수레에 실어 뒷산에 실어다가 묻어주었다.  민주련군 전사들은 개인 집에 숨어 발악하는 토비들을 한 놈 한 놈 붙잡아내 처단했다. 삼도만과 평강 촌에는 토비 한 놈도 없이 숙청됐다. 토비숙청전투는 우리 민주연군의 대승리로 끝났다. 민주연군 전사들은 총을 추켜들고 승리를 경축하며 환성을 질렀다.      상순은 최퇀장과 1영장 박경수, 허백호 련장 등을 데리고 김명호 지도원 등이 장렬히 희생된 골짜기 어귀로 갔다. 그들은 생매장당한 김지도원의 언 시체를 파내 관작에 넣어 양지바른 산기슭에 매장하였다. 뒤이어 전사들의 시체도 여기저기서 찾아내 관작에 넣어 김지도원 산소 옆에 나란히 묻어주었다.     최퇀장 일행은 김지도원의 묘소 앞에서 모자를 벗고 울먹이며 말했다. "김지도원, 우리 너무 늦어 왔소. 우린 그대들의 원쑤를 꼭 갚을 것이오. 고이 고이 잠드오." 허백호 련장과 김상순 지도원 등 장병들은 모두 모자를 벗고 머리를 숙이며 어깨를 들먹였다.      땅! 땅! 땅!    조총소리가 눈덮인 화약냄새나는 산골짜기에 울려퍼졌다.    흐리멍텅한 하늘에 까마귀들이 까욱까욱 슬프게 울며 빙빙 맴돌며 날아다녔다. 
‹처음  이전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