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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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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    대하소설 진달래 소야곡(12) 댓글:  조회:1554  추천:0  2018-03-07
                           22. 소나무숲 속의 참사 가을 황혼의 락조가 철조망을 두른 높다란 담장을 빨갛고 누렇게 물들였다. 승호는 위엄있게 총을 메고 망루에서 왔다갔다 하면서 보초를 서고 있었다. 승호는 최성균 교수와 아버지 덕에 졸업 전에 저지른 패륜을 잠시나마 덮어감추고 공안국 대문으로 스리슬쩍 들어갔다. 졸업하기 전에 그는 황급히 세집에  놓았던 침대를 밤도와 들어내다 버렸다. 그 침대 우에서 어찌나 처녀들을 껴안고 삐꺼덕거렸으면  침대다리가 다  너덜거렸다. 승호는 철조망을 두른 감옥 망루에서 보초를 서다가 락조 속에 아물거리는 공원 너머 우뚝 솟은 대학교 청사를 쳐다보았다. 문뜩 은영의 걀죽한 우유빛 얼굴이 눈 앞에 보름달처럼 떠올랐다. 그는 퇴근하기 바쁘게 경찰복을 벗고 평복으로 갈아입자마자 부랴부랴 대학가로 발걸음을 옮겼다. 숱한 대학생들이 한창 식당으로 분주히 드나들었다. 성호는 멀찍이 서서  녀대생들을 참빗질을 하면서 은영을 찾았다. “승호!” 등뒤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돌아서 보니 애타게 찾던 은영이 아니고 뜻밖에도 불청객 홍희가 아니겠는가. 홍희는 둥근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승호는 별수 없이 학교 뒤산으로 따라 올라가면서 제 좋은 속궁리를 굴렸다. (슬슬 얼려보내야지.) 뒤산의 푸른 소나무숲이 서늘한 가을바람에 휴- 휴- 소리내 울면서 설레고  있었다. 소나무숲 속에는 행인의 그림자도 얼씬하지 않았다. 그들은 소나무숲 둔덕 밑에서 멈춰섰다. 둔덕 아래에는 소나무를 심으려고 파놓았던 움푹한 구뎅이가 무성한 잔나무숲 속에 쓸쓸히 누워 있었다. 그 구뎅이는 승호가 밤만 되면 홍희 아니면 은영을 갈아가며 데리고 와서 야수처럼 야욕을 채우던 은페된 장소였다. 세집에 차려놓은 지하독서실은 필경 숙사와 가까와 불편해 장소를 옮긴 것이다. 홍희는 돌아서서 손으로 눈시울을 훔쳤다. “여기 뭘 하던 곳인지 기억하지?” 찰싹! 홍희는 승호의 더러운 낯짝을 한대 갈겼다. “짐승 같은 놈!” 승호는 얼얼한 낯을 어루만지면서 초두부처럼 야들야들하던 홍희가 이렇게 날카롭게 나올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한마디만 묻겠다.” “처음부터 날 사랑하기나 했니?” “무슨 말이냐? 널 사랑했어…” “딴 소리 말라. 은영은 사랑했니?” “은영을 사랑하든말든 무슨 상관이냐?” “도대체 넌 몇을 사랑하니? 은영이냐? 경옥이냐? 이제 또 누구야?” 홍희는 격분해 따지고 들었다. “야, 이러지 말라.” 승호는 무섭게 살기 번쩍이는 홍희의 깜장눈을 피하면서 능청을 부렸다. “얘, 이러지 말라.” “이때까지 참고 또 참았다. 혹시 네가 마음을 돌리겠나 기다렸어. 이젠 끝장을 봐야겠어.” 승호는 능청스레 연극을 놀았다. “얘, 우린 아직 젊어. 아직도 갈 길이 멀다. 나도 내가 미워. 어쩜 이렇게 번져먹었는지 모르겠어. 세상 고운 녀성들을 보면 다 살아보고 싶었어. 난 짐승이야, 야수야. 아니, 개새끼야. 이런 개새끼를 잊어라. 어떻게 믿고 살겠니?” 홍희는 격분돼 내쏘았다. “이 수개야! 색마야! 숱한 처녀들의 정조를 짓밟고 엉덩이를 쓱 씃고 꼬리를 뺄 예산이냐? 하늘이 굽어본다! 네 놈이 잠시는 애비 덕에 학교 기률과 법망을 벗어났지만, 이제 천벌받을 거야. 너 같은 놈이 다 경찰 됐어? 눈깔도 멀었구나. 흥!” 승호는 홍희의 손을 잡으며 빌었다. “얘, 너무 흥분하지 말라.” “비켜!” 홍희는 승호의 손을 탁 쳐버렸다. “네놈은 날 더러운 야욕을 채우는 노리개로 여겼어. 이 개새끼야!” 그녀는 단말마적으로 달려들어 승호의 꼬슬꼬슬한 양머리를 마구 뜯어 놓았다. 승호는 미친듯이 달려들며 광기를 부리는 홍희를 뿌리면서 능청을 떨었다. “얘, 이걸 놓고 내 말 들어라.” 홍희는 색마의 낯짝을 쏘아보면서 또 덮쳐들었다. “개 주둥이에서 개 소리 밖에 더 나올 게 있어?” 성호는 뒤로 물러서면서 정색했다. “널 시내에 배치해줄게.” “듣기도 싫어! 개 낯짝이 보기 싫어 이 시내에서 살기도 싫어!” 승호는 한술 더 떴다. “기실 널 사랑했어. 이제라도 시내에서 함께 살자. 아버지하구 말해서 널 시내에 남길 수 있어.” 홍희는 너털웃음을 웃었다. “더럽다, 더러워!” 그녀는 승호 낯에 침을 퉤 뱉었다. “실련했다고 불쌍해? 이 놈아, 네놈한테 속히워 산게 분해! 억울하다, 억울해!” 홍희는 또 무섭게 덮쳐들었다. 허나 승호가 팔로 뿌리치자 저쪽에 날려가 나동그라졌다. 그녀는 소나무에 머리를 마구 쪼으면서 소나무 숲이 떠나가게 대성통곡쳤다. “야, 네놈이 어쩜 그렇게 할 수  있어. 하늘이 굽어본다. 굽어봐, 내 뭐라 했나? 날 버리면 네 놈 죽고 나 죽는다, 죽어. 꼭 천벌 받을 거야. 으~으흐흐 흑, 흑, 흑. 숱한 처녀들 악귀가 네놈 목에 올가미를 걸어 하늘에 끌고 올라갈 거야. 네놈 정수리에 숯불을 올려놓을 거야. 어~ 허허허, 헉, 헉, 헉, 네 놈은 제 명에 죽지 못할 거야!” 홍희는 갑자기 스르르 일어나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비칠거리면서 산 아래로 내려갔다. 아무리 지독한 랭혈동물이라 해도 승호는 처량한 홍희의 뒤모습을 보고 속에  걸렸다. 그는 황급히 홍희를 뒤따라달려가서 거짓말로 달랬다. “홍희, 난 은영과 언약한 것도 없어. 이제라도 우리 다시 시작해보자. 고향에 돌아가도 힘든 일이 있으면 날 불러. 내 경제적으로 힘껏 도와줄게. 정조 근심되면 미용원에 소개해줄게. 지금 성형기술이 높아서 처녀들 그거 수술해 되돌려준다고 하던데.” 홍희는 색마의 개소리를 귀등으로 흘리면서 쓸쓸히 모교 뒤산을 떠났다. 그 대학교 뒤산의 소나무숲에서 일찍 그녀는 전도를 개척할 일루의 희망을 품고 색마에게 마음과 사랑, 정조 모든 것을 짓밟히지 않았던가? 지난날 희망의 소나무숲은 치욕의 숲으로 남아 울고 있었다. 아니, 그녀를 절망에 빠뜨린 채 쓰라리게 흐느끼고 있다! 며칠 후 승호는 예전대로 감옥으로 출근했다. 그가 당직실에 가자마자 전화벨이 따르릉 따르릉 급촉하게 울렸다. “예, 당직 리승호입니다. 예, 박대장님, 곧 가겠습니다.” 승호는 송수화기를 놓기 바쁘게 부랴부랴 대대장 사무실로 달려갔다. “어디에 가서 얼굴 긁혔어?" "예. 운동하다가 그만." 기실 전날 홍희에게 허빈 흉터였지만 슬쩍 거짓말을 에둘러댔다. "큰 일 생겼소.” 승호는 황급히 박철운 대대장의 어두운 철색얼굴을 쳐다보았다. “홍희라는 처녀를 아오?” “예.” 승호는 목구멍으로 기여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하면서 박대대장의 자못 엄숙한 철색얼굴에서 대답을 찾으려는듯 살폈다. “이걸 보오.” 박철운 대대장은 서랍에서 사진 한장을 꺼내 내밀었다. (날 고발했는가?) 승호는 뇌리에서 만가지 생각이 번개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는 황급히 박대대장의 손에서 사진을 받아 보았다. “아니, 얘가?!” 그는 깜짝 놀라 하마트면 물앉을 번했다. 소나무가지에 목을 맨 녀성 시체 사진이 아니겠는가.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며칠 전에만 해도 나와 만나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했는데. 이게 무슨 일입니까?” 박철운 대대장은 또 다른 사진 한장을 내밀었다. “이걸 보오.” 승호는 사진을 받자마자 마구 찢어 호주머니에 넣으면서 머리를 툭 떨어뜨렸다. “찢어버리면 끝인가?” 박대대장은 똑같은 사진을 꺼내들었다. “이런 도리쯤은 알아야지.” 승호는 창피해 머리를 들지 못했다. “이 사진은 승호란 야수가 이른바 지하독서실 침대에서 홍희를 짓밟은 철 같은 죄증이란 말이요. 처분 기다리요.” 박대대장의 말에 승호는 낯이 새까맣게 질렸다. 승호는 용기를 내 고함을 버럭 질렀다. “무슨 죄 있다고 이럽니까? 난 홍희를 자살하라고 시킨 적도 없습니다.” 박대대장은 철색얼굴에 쓴 오이를 씹은듯이 입귀로 쓴웃음을 흘렸다. 그는 서랍을 쭉 열더니 편지봉투를 꺼내 흔들었다. “속을 거 같아? 형사수사대대에서 사건현지를 수사할 때 목을 맨 홍희의 시체 호주머니에서 이러루한 사진들과 자네의 죄악을 공소해 쓴 유서까지 나왔어. 용서할 수 없어.” 승호는 박대대장 앞에 풀썩 무릎을 꿇고 물앉았다. “제발 살려주십시오. 여기서 개처럼 쫓겨나면 어떻게 세상에서 머리를 들고 살겠습니까?” 박대대장은 자못 엄숙한 표정을 짓더니 단칼로 머리카락을 자르듯 말했다. “집법일군일수록 법을 더욱 잘 지켜야 해. 물론 자넨 홍희의 죽음에 책임이 있네. 또 숱한 녀성들과 련애를 한다는 미명하에 패륜행위를 한 건 절대 용납할 수 없네. 나와 네 아버진 20여년 동안이나 함께 공안국에서 일한 친구지만 어쩌는 수 없어. 총을 내려놓고 나가 보게.” 승호는 총을 박대대장한테 넘겨주고 김빠진 공처럼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나가려다가 되돌아섰다. “미안합니다. 그 편지를 볼 수 없습니까?” 박대대장은 복사본이 있는지라 편지봉투를 내밀었다. 승호는 편지봉투를 받아 호주머니에 넣고 어깨에 멨던몸을 돌려 나왔다. 승호는 호주머니에 넣은 편지봉투를 만지작거리면서 대학교 뒤산 소나무숲 속으로 스적스적 걸어갔다. 그날 홍희와 갈라진 곳이였다. 또 홍희가 목을 맨 비극의 지점이기도 했다. 승호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편지봉투를 꺼냈다. 편지지는 눈물로 부풀어오른 자국이 얼룩졌다.   세상 사람들은 아마 승호는 아주 능력이 있는 학생간부이고 정직한 인간으로 볼지도 모르겠다. 오늘 나는 죽음으로 만천하에 색마 승호의 죄악을 폭로한다. 야수 승호는 련애한다는 미명하에 허경옥, 최은영, 나까지 정조를 유린하고 짓밟았다. 이런 짐승 같은 놈이 감옥의 경찰로 되다니? 어떤 짓을 할지 누가 알겠는가? 이 놈이 이제도 얼마나 많은 처녀들의 정조를 유린하고 짓밟을지 누가 아는가? 또 얼마나 많은 처녀들이 야수의 함정에 빠져 고통 속에서 시달리다가 억울하게 죽어갈지 누가 알겠는가? 세상에는 도덕법정이 없는가! 이런 패덕한 놈을 법에 의해 처단하라. 정의적인 사람들이여, 나처럼 릉욕당하고 유린당하고 죽음의 심연에 빠진 억울한 처녀들의 혼을 달래주라. 만약 하느님이 있다면 꼭 이런 놈의 정수리에 숯불을 올려놓을 것이다!   편지를 읽어보고 악마 같은 승호도 몸서리쳤다. 아니, 하늘이 천벌을 내릴 것만 같아 온 몸이 떨렸다. "끝내 올 것이 왔구나. 어떻게 한단 말인가!" 승호는 유서를 쫙쫙 찢어 하늘에 훌 날려보냈다. 편지쪼박들은 가을바람에 하늘에서 쓸쓸히 날아내려 우수수 지는 락엽과 함께 휩쓸려갔다. 푸르른 소나무숲이 억울하게 죽어간 처녀가 가엾어 원혼이라도 달래주려는듯이 을씨년스런 가을바람에 몸부림치며 설레고 있었다.                                                                                                          23. 흉수의 그림자       을씨년스런 가을하늘에 흐리터분한 먹장구름이 흐트러졌다가도 뭉치면서 룡트림하며 덮쳐왔다. 구질구질 내리는 가을비가 행인들을 괴롭혔다.       성호는 광고회사에 출근한지도 어언간 두달이나 되였다. 광고회사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허굉팔 부총경리는 부영장급이느라고 개 잡은 포수처럼 우쭐렁거렸다. 참 눈꼴 사나왔다. 특히 훤칠한 허굉팔이란 부총경리 저 생김새부터 기절났다. 길쭉한 철색말상에 흰자위를 희번뜩거리며 데굴데굴 굴리는 우멍눈, 툭 튀여나온 앞이가 보기에도 좋은 사람 같지 않았다. 반면에 김범수 총경리는 너부죽한 얼굴에 부리부리한 쌍까풀눈이 첫인상에 마음이 좋아보였다. 범수 총경리는 사람 좋게 웃음지으면서 성호에게 조용히 경험을 전수해주었다. “훌륭한 광고업무원이 되려면 꿀벌처럼 부지런히 돌아다니면서 광고를 많이 얻어와야 하오. 광고수입은 바로 광고업무원의 실력이요.” “예, 노력하겠습니다.” 김범수는 성호와 나란히 앉아 관심조로 말했다. “광고를 얻어들이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요. 그러나 마음만 먹으면 광고주를 하나, 하나 얻을 수 있소. 이후에 어려운게 있으면 말하오. 내 도와주지.” “예.” 성호는 한달 동안 가을비를 무릅쓰고 시내를 헤매면서 좀 돈을 버는 거 같은 기업소와 상점을 보기만 하면 무작정 문을 뚝 떼고 들어가 명함을 건네고 광고를 하지 않겠는가고 동원했다. 그러나 장사가 잘 되지 않았다. 장마당에서 물건을 사라고 하면 할수록 사지 않는 것처럼 기업주들은 광고의식이 차해 몇천원씩 내고 거리나 교량 란간에 걸어놓는 광고를 내려고 하지 않았다. 어느 날, 시내에서 헤매다가 한 식료품상점 문 앞에 이르렀을 때다. 몇 사람이 차에서 술상자를 부리워 들여가는 것을 보았다. (저 술을 광고하면 어떨까?) 그는 곧장 상점 안으로 따라 들어갔다. “술 한상자에 얼마입니까?” “양?” 상점 보스는 술을 사려는가고 환한 표정을 지었다. “한 상자에 50원이요.” “한 상자에 몇병 있습니까?” “허, 오늘 문을 열자마자 수 붙었네. 한 상자에 다섯병 있소. 몇상자 사겠소?” “아니, 사려는 건 아니고. 이 술을 간판광고를 하면 잘 팔리겠는데요. 비용도 비싸지 않습니다. 한 500원만 내면 됩니다…” “간판광고를 하나 내자구 열상자나 처넣겠소?” 상점 경리는 손을 내저으면서 축객령을 내렸다. “우린 광고를 내지 않소. 재수없이 아침부터 돈을 빼내가려고 찾아오는가?” 미역국을 마신 성호는 시내 여러 상점을 돌아다녀도 광고 하나도 걸여오지 못했다. 굉팔 부총경리는 다짜고짜 성호를 한바탕 욕설을 퍼부었다. “일주일 되도록 광고 하나 얻어오지 못해? 진짜 밥 먹고 죽벌이도 못하는군.” 성호는 머리 숙어졌다. 굉팔은 광고서류를 책상에 탕 메치며 성호를 쏘아보았다. “농부 아들은 안돼. 진짜 무능아군. 정 광고를 못하겠으면 광고회사에서 나가라구.” 범수는 굉팔을 말렸다. “신입직원을 그러지 마오. 그래도 한 반년 하느라면 얻어오겠지.” 성호는 뜻밖의 말에 스트레스를 받았다. 굉팔은 가물의 실돌피처럼 가는 허리를 의자에 기대더니 뱀의 대가리처럼 작은 머리를 쳐들고 표독스레 성호를 쏘아보았다. “여긴 무능아를 키우는 민정소가 아냐. 시장경제시대에는 눈물이 필요없어.  능력이 없으면 도태야.” 성호는 눈앞이 깜깜해났다. “이제 술공장에 직접 찾아가서 술광고를 하자고 마수걸이를 해보겠습니다. 좀 기다려주십시오.” “대학에서 밑구멍으로 법률을 배웠소? 술광고를 하는 건 비법이라는 것도 몰라? 엉?” 굉팔은 버럭 고함쳤다. “야, 너 같은 애를 믿다간 한지에 방아를 걸겠어.” 성호는 자존심이 상해 맞장구를 쳤다. “아니, 허경리, 말이면 다 합니까?” “흥! 자식, 이 광고회사에서 내 말이면 다야. 흥!” 성호는 더 할 말이 없었다. 심지어 굉팔은 성호가 물어온 술광고를 공상국에 고발해 벌금을 안기게까지 해 골탕 먹였다. 광고회사에 코를 떼운 성호는 어디로 찾아가 하소연할가 서성거리다가 대학교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최성균 교수나 정희 아버지를 찾아가야지.) 그가 공원 대문 앞에 이르렀을 때였다. “오빠, 어디로 가?” 뒤에서 귀에 익은 처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뒤돌아보니 정희가 아니겠는가. “어째 기분 좋지 않은 거 같은데.” 성호는 머리를 푹 숙인 채 걸으면서 금방 있은 일을 말했다. “난 광고회사로 가기도 싫어. 굉팔이란 경리는 인간도 아니야. 그저 큰소리치고 협박해.” 정희는 대뜸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어디서 그런 경리도 있다오?” “광고라는게 어디 가을에 지는 락엽처럼 깍쟁이로 마구 끌어 들일 수 있니?” 의논 끝에 그들은 최성균 교수를 찾아갔다. 최성균 교수는 대머리에 돋은 식은 땀을 닦았다. “그 좋은 광고회사에 배치했는데 그만두다니? 승호도 공안국에서 쫓겨나서 찾아왔댔소. 홍희는 자살했소. 야, 정말 골치 아프오.” 성호와 정희는 깜짝 놀라 서로 눈길을 마주쳤다. “아니, 홍희가 어쩜?” 모두 비통에 잠겼다. 납덩이 같은 침묵이 흘렀다. 한참 후 최교수는 머리를 들었다. “광고회사에 눌러 있소. 시내에서 자란 정희도 천수해중학교에 갔을라니 농민의 아들인 성호는 그만하면 배치를 잘 받은줄 아오.” 그 말에 성호는 발끈했다. “예~ 알았습니다. 농민의 아들이기에 농촌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원래 난 시내 사람들이 딱 질색입니다. 교활하고 간사하고 리기적이고. 인정미라곤 하나도 없는 놈들이 득실거려서 딱 질색입니다.” 정희는 성호에게 면박을 주었다. “야, 말 같은 말 해라. 누가 널 따라 호박을 쓰고 돼지굴로 들어간대?” “오지 않겠으면 말아!” 성호는 발끈 화를 내더니 문 밖으로 나와 쥉쥉 시내로 내려갔다. 뒤에서 정희가 쫓아오면서 불렀다. “야, 내 말 좀 들어.” 그녀는 성호의 손까지 잡고 애원했다. “다 우리 앞날을 위해서야. 이제 농촌으로 떨어지면 시내에 들어오기 더 애난다. 어떻게 하나 광고회사에 있어야 해.” 성호는 정희의 손을 꼭 잡으면서 한숨을 후~ 내쉬였다. “우리 아빠도 옛날 공안국장을 했어. 아빠 옛날 수하들 속에는 국장도 있고 과장도 있어. 그들을 찾아가 청탁하면 난 공안국에도 들어갈 수 있어.” “엉? 진작 찾아갈게지.” 정희는 새파랗게 질렸던 얼굴에 화색을 띠더니 성호의 손을 꼭 잡았다. 성호는 정희를 보내고 나서 그 길로 이모부네 집으로 찾아갔다. 성호의 이모부 강운룡은 원래 교통경찰대대 민경이였다. 당시 공안국장인 리상진은 강운룡이 특수정찰부대 출신인데다 날랜 걸 보고 형사경찰과에 전근시켰고 처제 수옥까지 중매를 서서 결혼시켰던 것이다. 어려서 성호는 녀자애처럼 몸이 허약해 애들한테 놀림을 당했다. 어떤 때에는 애들한테 얻어맞아 항상 얼굴에 흉터가 났다. 강운룡이 처형 초가집으로 놀러 왔다가 그런 정황을 안 후 성호에게 특수정찰부대 권투를 배워주었다. 그후부터 성호는 애들 속에서 허리를 펴고 살 수 있게 됐다. 성호는 마음 속으로 이모부를 존경하고 따랐다. 성호가 찾아갔을 때 운룡은 창문에 비닐박막을 대다가 넉가래 같은 손을 내밀어 악수까지 했다. “이젠 졸업했겠구나. 어데 배치받았니?” 이모 수옥은 대견하게 조카를 바라보았다. 성호는 머리를 푹 숙이면서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였다. 성호에게서 사연을 들은 운룡은 소발쪽 같은 주먹으로 벽을 쿵 치면서 도리머리를 홰홰 흔들었다. “허굉팔? 그자가 뭐 대단해서 그렇게 훈계한다니?” 성호는 이모부한테 단도직입으로 지청구를 들이댔다. “제가 이모부네 공안국에 들어가면 어떻습니까?” “응?” 운룡은 한참 궁리하더니 무겁게 입을 열었다. “넌 성격은 공안일군을 하면 될 거 같애. 그런데 수사실무를 잘 모르고선 한쪽으로 밀려. 시내에 중대한 형사사건이 생기면 수사대원은 가장 짧은 시간 내에 범죄자를 수사해내야 한다. 수사사업은 사회 책임감과 사명감이 아주 높은 특수사업이야. 제때에 사건을 해명하지 못하면 아주 큰 사회압력을 받게 되고 한쪽으로 밀려.” “배워서 하면 안 되겠습니까?” “글쎄, 쉽지 않아. 첫 3, 4년 내에 사건을 척척 해명하지 못하면 한쪽으로 밀리는 거야.” 운룡은 성호의 손을 매만지면서 말했다. “요즘 권투를 연습했니?” “못했습니다.” 운룡은 “계속 연습해라. 수사일꾼으로 되겠는지 아니? 무예는 수사대원의  밑천이야.” 하고 말하더니 한가지 상식을 배워주었다. “목을 조일 때면 한 손으로 조이는 게 아니야.” 운룡은 구들바닥에 대고 두엄지손가락을 한데 겹쳐 내리누르는 시범을 보였다. “이렇게 두손으로 눌러야 파악이 있는 거야.” 성호도 운룡이 시범한대로 엄지손가락을 겹쳐 눌러보더니 머리를 끄덕였다. 운룡은 서재에 들어가 가죽가방을 들고 나왔다. “요즘 대학생들 말이 아니야. 이걸 봐라. 녀대생이 소나무숲 속에서 륜간당했어.” 그는 성호 앞에 서류를 내보였다. “이번에 사건해명을 견습해보겠니?” “예, 좋습니다.” “이게 신고인과 피해자 녀대생 진술이다.” 성호는 서류를 들여다보고 깜짝 놀랐다. 재삼 보아도 피해 녀대생은 은영이 아니겠는가! “아니, 얘가 어쩜 이런 일을 당해?!” 운룡은 주먹으로 메부리코를 쓱 닦으면서 물었다. “아는 애냐?” “예. 아래학년 앤데. 스케트랑 달리기랑 잘해 소문난 앤데요.” “그래?” “우리 주관 부시장 최웅봉네 무남독녀야. 지금 우린 사회 압력을 얼마나 받는지 몰라. 인차 해명해야겠는데.” 성호는 신고자의 진술보다 먼저 은영의 진술을 펼쳐보았다. “1983년 10월 16일 오후 3시, 제가 학교 뒤 소나무숲  속에서 책을 보는데 갑자기 괴한 셋이 뛰여와 나를 륜간했다. 당시 나는 정신을 잃고 까무러쳤다. 그후 정황은 하나도 모른다. 내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병원 구급병실에 누워 있었다...” “얘가 어느 병원에 입원했습니까?” “YB병원에 있다. 네가 면목을 잘 알면 피해과정을 좀 알아주면 좋겠는데. 피해녀대생은 입을 꼭 다물고 말하지 않고 울기만 한다. 정신타격이 심해. 몇번이고 자살하려고 해서 가정과 병원 측에서 밤낮 지키는 판이야.” 성호는 못된 은영이 자기 앞에서는 더욱 말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는 서류에서 사건 신고자의 진술을 상세히 보았다. “그날 나는 해가 진 후 약(오후 8시 반 좌우) 아무도 보지 않는 학교 뒤산 소나무숲 속에 권술을 연습하러 갔습니다. 그런데 마른 풀속 구뎅이에서 웬 신음소리를 들었습니다. 가까이 다가가보니 웬 녀인이 피못 속에 알몸뚱이로 누워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급히 학교 무장부에 가서 알려 학교 차로 병원에 호송했습니다. 나는 인차 접수실의 전화로 110에 사건을 제보했습니다.” 서류에는 은영의 하신에서 부동한 네개 DNA가 든 정액이 검출됐다고 똑똑히 적혀 있었다. “이모부, 의문이 있습니다.” 운룡은 성호한테 예리한 눈길을 돌렸다. “은영의 진술을 보면 분명 세 강도가 나타났다고 했는데 질에서 검출된 DNA는 네 사람의 거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강도 셋을 내놓고 또 한 사람이 있을 가능성이 있잖겠습니까?” “그게 수상해. 은영은 평소에 소나무숲 속에 홀로 가서 공부하니?” “은영은 보통 열람실에 가서 공부합니다. 이 추운 늦가울에 혼자 소나무수림에 책을 보러 갈 순 없습니다. 혹시 소나무숲 속에서 누군가와 련애하다가 당하지 않았을가요?” “음-” 운룡은 한참 궁리하더니 성호의 예리한 분석과 추측에 놀랐다. “어떤 남자와 소나무숲 속에서 련애하다가 세 강도에게 당했다? 그거 비슷한 추측이야.” 성호와 운룡은 정탐추리소설의 한 대목을 공연하고 있는 것 같았다. 순간 성호의 눈 앞에는 피뜩 승호가 은영을 데리고 소나무 밭에 가서 련애하는 장면, 아니, 그가 그 소나무숲 구뎅이에서 은영과 련애하다가 세 강도에게 당한 그런 가상이 떠올랐다. “가능합니다!” 성호는 자기 직감을 죽 이야기했다. 운룡은 머리를 끄덕이더니 “우리 사건현장으로 가서 자세히 재검사해보자.” 라고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날 수사대원들이 초보적으로 현지수사를 했지만 어두운 밤 수사여서 재수사가 필요했다. 게다가 성호를 견습시키려고 운룡은 현장을 재수사하기로 했다. 그들은 형사경찰대대의 찌프에 앉아 대학교 뒤산 소나무숲 속으로 달려갔다. 사건 현장에서 아직도 피가 질벅한 구뎅이를 둘러보는 순간 성호는 마음이 아팠다. 은영이 강도들에게 륜간당한 구뎅이에는 저항하느라고 발로 버둑거리면서 긁힌 흔적이 이리저리 오려져 있었다. 또 피 묻은 종이쪼박과 은영의 운동화 같아 보이는 녀성의 신 한짝이 어수선하게 널려 있었다. 분명 세 강도들은 이 구뎅이에서 나약한 은영을 짓밟았을 것이다. 운룡이 시키는대로 성호는 종이쪼박과 운동화를 가방에 주어넣었다. 운룡은 가방에서 자를 꺼내 구뎅이에 박힌 흉수들의 커다란 발자욱의 크기를 일일이 재였다. 그는 구뎅이에서 나와 발과 키의 비례를 재는 원형자를 돌리면서 흉수의 키를 추산했다. “다 키꺽다리놈들이구나. 대개 1.73, 1.75, 1.78, 아니, 한 놈은 키가 1.80메터나 되는구나. 분명 네 놈의 발자국이야.” 사건현장에는 어지러운 발자국이 찍혀 있었다. 소나무 밑에 미끌고 뻗치고 한 발자국을 보아 별로 싸운 흔적 같았다. 소나무 밑에는 피 묻은 헝겊바줄이 널려 있었다. 바줄을 주어들던 운룡은 바줄 밑에서 수술 칼 하나를 주었다. (이 수술 칼로 바줄을 끊었을까? 피해녀를 여기 묶어놓고 강간했을까?) 성호는 카메라를 꺼내 소나무에 묻은 피 흔적을 사진 찍은 후 착잡한 생각에 빠졌다. (이건 뭔가? 네 놈에게 당한 은영의 피해는 상상해봐도 불 보듯 뻔해.) 성호는 마음을 칼로 에이는듯 아팠다. (내 미치게 사랑한 은영을 어떤 놈들이 해쳤을가? 꼭 해명해 은영의 원쑤를 갚아야 해.) “이걸 봐라!” 운룡은 구뎅이에서 피 묻은 수술칼을 주어들고 보면서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피해녀 몸에는 근본 수술칼에 찔린 상처가 없었는데. 이 수술 칼은 뭐지? 1차 사건현장수사에서 이봐라. 빼놓은게 얼마나 많니? 리과장이 한 수사는  이렇다. 항상 사건현장엔 제일 먼저 달려가지. 수사는 이렇게 대충 하고. 사건해명을 하기만 하면 소식 공개회의에는 항상 먼저 나서지.” 그들 둘은 사건현장을 샅샅이 살폈다. 운룡은 풀숲에서 검퍼렇게 변질한 귀두를 발견했다. 장갑을 낀 손으로 그걸 들고 찬찬히 보니 비스듬히 썩둑 잘린 귀두는 썩기 시작해 진물이 줄줄 흐를 지경이였다. “흉수건가? DNA검사를 하면 흉수는 밝혀낼 거 같아.” 운룡은 그걸 비닐봉지에 싸서 서류가죽가방에 넣었다. “가자, DNA검사를 해봐야겠어.” 그들은 황급히 공안국 형사수사대대 사무실로 돌아갔다. 성호는 운룡한테 자기 생각을 털어놓았다. “은영한테 직접 알아보는게 좋을 거 같습니다. 그날 승호와 함께뒤산에 련애하러 갔는가? 승호한테도 알아보는게 좋을 거 같습니다.” “승호라는 앤 우리 리과장네 아들이 아니냐?” “걔네 아버지가 공안국에서 과장을 한답디다.” “리과장 아들과 관계되면 큰 일인데.” 운룡은 한참 생각하더니 이런 수사방안을 내놓았다. “넌 사인정탐 신분으로 승호의 그날 행적을 알아봐라.” “예, 알겠습니다.” 똑, 똑, 똑! 노크소리와 함께 리철갑 과장이 들어왔다. 그는 성호한테 눈길이 갔다. “안녕하십니까?” “아니, 승호네 동창생 아닌가? 지금 어디 배치받았소?” “예, 광고회사에 배치 받았습니다.” “아, 그래? 지금 세월에 시내에서 직업을 찾기 그리 쉽겠소? 저는 농민의 아들이 아니고 뭐요?” 성호는 자존심을 건드리는 리과장이 눈에 거슬렸다. 허나 허무한 웃음을 지으면서 “승호는 계속 감옥에 있습니까?” 하고 물었다. “양? 뭐 어느 회사에나 가겠는지?” 리철갑은 대충 얼버무려 대답했다. “요즘 뭘합니까?” “입원했소. 누구하구 싸웠는지 얼굴과 가슴마저 비수에 찔렸습데.” “예?” 성호는 이모부와 의미심장하게 눈길을 마주쳤다. “어느 병원에 입원했습니까?” “YB병원 급진외과 109호.” 성호는 자기 추측이 맞는 것 같아 기뻤다. (만약 승호가 그날 은영과 련애했다면 꼭 흉수를 밝혀낼 수 있을 거야.) 성호는 흉수의 그림자가 눈 앞에 보일듯 말듯 했다. 그는 일루의 희망을 품고 안개가 자오록이 잠긴 병원으로 총총히 반달음쳐갔다.
126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93) 댓글:  조회:1046  추천:0  2018-02-28
                  3. 원대한 설계도 어느덧 만물이 기지개를 쭉쭉 켜며 돌아눕는 봄이 왔다. 고향 태평강의 곧게 쪽쪽 뻗은 참버들 가지들에 물기가 파랗게 올랐다. 덕돌은 애들과 함께 낫을 가지고 태평강가 버들방천에 가서 물기 오른 참버들가지를 베다가 버들피리를 만들었다. 덕돌은 애들과 함께 버들피리를 입에 물고 온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삘리리삘리리 불어댔다. 비록 알아들을 수 없는 버들피리 소리일망정 참 귀맛을 돋우었다. 봄바람에 바자에서 울리는 대자연의 음악소리를 반주로 삼아 버들피리를 신나게 불었다. 어떤 때에는 집의 코 깜쟁이 암소를 몰면서도 버들피리를 삘리리삘리리 재미나게 불었다. 저녁노을이 비낀 황혼 무렵에 무지개 비낀 패용천산과 칼산을 배경으로 소잔등을 타고 버들피리를 부는 목동, 생각만 해봐도 한 폭의 아름다운 수채화를 보는 것 같지 않겠는가! 덕돌은 애들과 함께 놀 놀음 감이 없었다. 궁리 끝에 아버지를 보고 놀음감을 만들어달라고 했다. 허나 상순은 “언제 놀음 감을 만들 사이가 다 있겠느냐?”라고 퉁명스럽게 대답하고는 생산대 일을 하러 떠나갔다. (어쩜 아버진 저렇게 무뚝뚝할가?) 덕돌은 하는 수 없이 애들과 함께 또 세찬 봄바람에 연을 띄우면서 하늘높이 날아예는 연을 바라보았다. 다행히 뒤 집 정갑의 할아버지가 애들을 데리고 놀음 감을 잘 만들었다. 그러자 덕돌은 성욱이랑 동림이랑 정갑이랑 함께 정갑의 할아버지를 따라 수수대로 제법 그럴듯한 물레방아를 만들었다. 정갑이랑 순희랑 우리 애들은 정갑의 할아버지를 따라 태평강 모래톱에 갔다. “얘들아, 여기에 물도랑을 파라.” “예.” 덕돌 등은 정갑의 할아버지가 가리킨 모래톱에 물도랑을 파고 강물을 끌어들였다. 그새 정갑의 할아버지는 물도랑에 물레방아를 고정시켜놓았다. 실폭포처럼 쏟아지는 맑은 시내 물에 뱅글뱅글 돌아가는 수수대물레방아를 보고 애들은 환성을 질렀다. 그렇게 재미나는 놀음은 세상에 둘도 없었다. 덕돌이랑 성욱이랑 모래 언덕에 구불구불 길을 닦았다. 새알같이 반들반들하고 조그마한 조약돌들을 주어다가 구불구불한 언덕길 양쪽에 촘촘히 박아놓고 고무신에 모래랑 조약돌이랑 실어 언덕길로 밀며 입으로 “붕붕” 소리를 내면서 자동차놀음이랑 놀았다. 모래에서 곤두박질을 하면서 재미나게 놀기도 했다. 정말 금싸라기 같은 모래알을 사박사박 밟으면서 놀기란 참말 재미났다. 그뿐이 아니었다. 한 여름이면 덕돌이랑 성욱이랑 더운 줄도 모르고 참새들이 재잘거리는 고향 태평강 버들방천에 가서 버들모자를 만들어 쓰고 버드나무숲속에서 배를 모래불 둔덕에 붙이고 숨어 있다가도 “봤다, 꿍!” 하면서 전투놀음도 놀았다. 덕돌은 풀꽃모자를 쓰고 버드나무가지를 쥐고 숨은 순녀를 뒤로 가서 “봤다 꿍!” 하고 소리쳤다. “어마나! 놀라라.” 순희가 몸을 돌리면서 눈을 곱게 흘기었다. 덕돌은 “헤헤” 하고 헤벌쭉 웃으면서 지껄여댔다. “뭐? 놀을 났다고?” “야, 놀랐다 했지 언제 놀을 났다고 했니?” "금방 놀을 낳았다 해놓고서도. 헤헤헤." 덕돌은 여자애들을 깜짝 놀래우던 개구쟁이 시절이 즐겁기만 했다. 아, 버들피리를 불고 고향 태평강 강물에 물레방아를 돌리면서 놀던 천진난만한 소꿉시절이 아름답기만 했다. 대자연의 품 속에 안겨 원시적인 놀음을 놀던 애들의 소꿉시절이야 말로 대자연을 알게 되는 황금시절이었다. 덕돌이랑 동림이랑 애들은 한 여름에 달아다니면서 전투놀음이랑 놀다가 너무 더워 태평강가 큰 물도랑에 뛰어들어 목욕을 하군 했다. 그런데 그 큰 물도랑에서 큰 일이 생겼다. 어느 하루 이른 아침, 사원들이 밭일을 나갈 때었다. 5대의 최학철은 삽을 둘러메고 논물을 보러 나가다가 그만 큰 물도랑 물에 둥둥 떠내려 오는 거머스름한 떼목 같은 것을 몇개 발견했다. “저게 뭘까? 떼목인가? 건져다 불이나 때자.” 워낙 최학철은 시력이 좋지 않은데다가 날이 아직 시퍼래 어둑시그레 한 물속에서 보일락말락하게 떴다 가라앉았다 하면서 떠내려오는 거머스름한 물체를 잘 분간하기 힘들었다. 그러나 물에서 “푸, 푸.” 하는 숨소리를 듣고 깜짝 놀랐다. 찬찬히 여겨 보니 황소만큼 한 곰 서너마리 물도랑을 따라 헤염치며 떠내려오는 것이 아니겠는가! “아, 이 놈 곰 새끼들이, 이전에도 물도랑으로 가만히 내려오더니 또 왔구나!” 최학철이 소리치자 곰들은 가만히 밭으로 나오는 사람을 접근하다가 수면으로 몸뚱이를 드러내더니 곧추 학철에게 덮쳐들었다. “곰이야! 곰이야!” 학철은 고함치며 반사적으로 삽으로 곰을 내리찍었다. 그런데 곰은 학철이 찔러댄 삽을 척 받아 무릎에 대고 툭 끊어버렸다. 그때 다른 곰이 최학철을 덮석 안아 내동댕이쳤다. “곰이야! 곰이야!” 최학철은 모진 고함을 치며 단말마적으로 곰에게 덮쳐들어 메치려고 기를 썼다. 이때 논밭으로 나오던 숱한 사람들이 고함소리를 듣고 삽이며 걸이대며 괭이며를 들고 이리로 달려왔다. 최학철은 덮쳐드는 곰을 이리 저리 날래게 몸을 날려 피하면서 곰에게 드센 주먹을 날렸다. 곰은 학철을 가지고 고양이처럼 양공질을 하고 있었다. “이 놈 곰 새끼!” 상순은 고함치며 당년에 전쟁터에서처럼 걸이대를 비껴들고 곰에게 덮쳐들었다. 그는 먼저 학철의 머리를 부둥켜안은 곰의 뒤로 에돌아 덮쳐들어 걸이대로 목을 콱 찔렀다. 그러자 곰은 학철을 놓고 몸뚱이를 홱 돌리더니 상순에게 덮쳐들었다. “싸(杀)!” 함성소리와 함께 상순은 시퍼런 걸이대끝을 곰의 턱밑에 콱 박아 넣고 푹푹 찔러댔다. 곰은 모진 소리를 치더니 비칠거리다가 푹 꺼꾸러졌다. 그 틈을 타 최학철은 곰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 이때 최국선이랑 박성근이랑 이병수랑 뛰어왔다. 그들의 손에는 소총이 들려 있었다. 상순은 걸이대를 버리고 성근의 손에서 소총을 빼앗아 쥐었다. “조개덕 민병들은 명령을 따르라!” “옛!” “사격 준비!” 당년의 퇴대군인들은 상순의 명령에 따라 총을 들고 곰을 겨냥했다. “쐇!” 탕! 탕! 탕! 요란한 총소리와 함께 곰 세 마리가 쓰러졌다. 나머지 곰들은 흥수랑 학수랑 숱한 사람들이 끊임없이 몰려오자 쓰러진 동료들을 놔두고 도망쳤다. 흥수는 달려오자마자 삽으로 죽은 곰을 두들겨 패면서 고함쳤다. “죽여라! 이놈 곰 새끼들아! 분명 큰 물도랑에서 목욕하는 덕돌이랑 우리 미선이랑을 잡아먹으려고 왔는기여!” 흥수가 다 죽은 곰을 삽으로 찍으면서 고함치는 그 장면, 개 잡은 포수처럼 우쭐거리는 장면은 삶은 소대가리도 웃다가 꾸러미 터질 지경이었다. 상순은 매부 최학철의 피 흐르는 얼굴을 팔소매로 닦아주다가 놀라 소리쳤다. “아니, 또 곰에게 낯을 허비었구만. 빨리 위생 소에 가봐야겠소.” 상순은 일없다고 팔을 뿌리치는 학철을 데리고 대대 위생소로 떠나갔다. “처남이 아니면 난 곰의 밥이 될 번했소.” 학철의 말에 상순은 “이후에는 너무 일찍 밭에 나오지 마오.”라고 했다. “곰들이 칼산의 남포질에 다 달아 난 것 같던게 또 나타날 줄을 누가 알았겠소.” 한편 곰과 용감히 싸워 잡은 상순과 학철이 위생소로 간 후였다. 흥수는 마치 자기가 사원들을 지휘해 곰을 잡은듯이 자처했다. “내 제때에 갔으니 말이지 하마터면 학철이 죽을 번했소.” 그때 조선족 말을 조금 알아듣고 4대의 치해풍이 눈을 흘기면서 두덜거렸다. “흥! 제길 할, 내랑 곰의 발톱에 코를 긁히면서 싸워 학철을 구한 걸 자기 구한 척 한다. 원, 더러워서.” 숱한 사원들도 코웃음쳤다. 그러나 저러나 낯이 두껍기로 소 엉덩짝 같은 흥수는 사원들을 시켜 곰을 수레에 싣고 마을로 돌아갔다. 조개덕 세개 마을에서는 곰 고기로 큰 잔치를 차리었다. 상순은 곰에게 물린 학철과 제해풍을 위생 소에 데리고 가서 상처를 처치한 후 점심에야 마을로 돌아왔다. 상순이 조개덕의 원래 식당에 들어가니 흥수가 상순이 없는 틈을 타서 한창 연설하고 있었다. “여러분, 오늘 우리는 집단의 힘을 빌어 곰을 네 마리나 잡았는기여. 이건 모두 내캉 제때에 큰 물도랑에 나가 힘을 합쳐 싸운 덕분인기오. 세상에 독불장군이라고 학철이나 상순인들 혼자서야 어찌 그 많은 곰들을 당할 수 있겠는기여?” “뭐라고?” 모두들 흥수 말은 귀등으로 흘리어 보내면서 곰의 고기를 먹다가 출입문을 되돌아보았다. 머리를 흰 붕대로 딜딜 감은 최학철과 코를 싸맨 제해풍이 눈을 뚝 부릅뜨고 흥수를 쏘아보고 있었다. 최학철은 흥수를 손가락질 하면서 노발대발했다. “우리 없는 틈에 곰을 제 잡은 상하는가? 원, 더러워서. 내 곰하구 씨름할 때 넌 물도랑에 오기나 했니? 남이 곰을 다 잡은 후에야 화서 죽은 곰을 삽으로 찍어놓구 제사 곰을 잡은 양 하면서...” 허나 상순은 학철의 팔소매를 툭 쳤다. “이제 구구히 더 말해 뭘 하겠소. 여러분들도 사실을 다 알고 있는데.” 그제야 학철과 제해풍은 퉁사발 눈을 히번떡거리며 으르릉거리다가 밥상을 마주 앉았다. 상순은 구들에 올라가 잔을 들고 목청껏 소리쳤다. “자, 우리 모두 힘을 합쳐 곰을 잡은 승리를 경축해 한잔 들기오!” 그러자 흥수는 상을 찡그리면서 밥상 앞에 물앉았다. “한잔 들기요!” 모두들 상순의 제의에 따라 한잔씩 쭉 굽을 냈다. 허나 곰을 잡은 일등공신인 학철과 제해풍은 상처 때문에 술 한잔도 내지 못하고 곰 고기국만 둬 사발 먹었다. 온 마을 사람들이 오랜만에 술이 거나해지자 상순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러분, 오늘 온 마을 사람들이 배불리 먹으니 얼마나 좋소. 당중앙에서는 지금 류소기동지와 등소평동지가 제창한  ‘3자’ ‘1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이때 우리는 대담히 황무지를 개간하고 농사를 잘 지어 집집이 쌀독마다 쌀을 꼴딱꼴딱 채워놓고 살기요.” “좋소!” “그럼 얼마나 좋겠소.” 사원들이 호응해나서자 상순은 사원들이 배불리 먹고 기뻐하는 분위기를 빌어 동원까지 해나갔다. “우리는 이전에 범바위골에 가서 황무지를 개간해 감자와 강냉이를 심었소. 또 범바위골로 들어가는 게 어떻소?” “좋소. 우린 김서기 말만 따르겠소.” 그때 흥수가 벌떡 일어나 손사래를 쳤다. “안 돼. 이제 몇 해 지나면 또 우의 정책이  어떻게 바뀔지 어떻게 알고 그러는기여. 또 김 서기가 저 허백호 서기처럼 투쟁받자고 그러는기오?”       허백호 서기는 한쪽 구석에 김빠진 공처럼 물앉아 주는 밥이나 먹으면서 사원들의 눈치를 흘끔흘끔 보았다. 모두들 노동개조를 하는 허백호 서기를 흘끔흘끔 곁눈질했다. 상순은 여러 사원들을 올바르게 리드해나갔다. “여러분, 우리 이 좋은 때 황무지를 개간해 배불리 먹고 살지 않고 뭘 하겠습니까? 이것저것 눈치를 보다나면 항상 배를 곯으면서 살게 아닙니까?” 흥수가 냉수를 치는 바람에 푹 식어져버린 썰렁한 식당 안의 분위기는 다시 오르기 힘들었다. 병완은 더 말하지 말라고 상순의 무릎을 툭툭 쳤다. 이윽고 여기저기에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에이구, 몇 해라도 배불리 먹고 살다가 죽었으면 얼마나 좋겠소.” “그렇찮고.” “우에서도 집체식당을 하구 집체로 하니 잘 살수 없다는 걸 알고 이번에 다시 개인에게 밭을 떼맡기는 거겠지.” “우에 눈치만 볼게 있소? 개체로 농사를 지어 잘 살 수 있으면 개체로 농사를 지을 판이지.” “황무지도 마음대로 개간해서 배불리 먹고 살면 좋은게지. 무슨 두갈래 노선을 자꾸 말해 뭘 하오?” 상순은 자기 말을 한단락 매듭지었다. “그럼 좋소. 황무지를 개간하는걸로 하고 유관 부문과 잘 토론해야 하겠소.” 학수가 끼어들었다. “이보, 그 좋은 범바위골을 두고 또 어디에 가서 헤맨다고 그러오?" 그러나 상순은 소홀히 결정을 내릴 수 없어 그 자리에서는 그만두었다. 범바위골은 남의 공사 지역에 속하는데다가 거리가 너무 멀어 이러저러한 문제가 생길 수도 있었던 것이다.   해가 어슬어슬 지자 상순은 자기 집에 차례진 곰의 고기에서 몇 근 떼 들고 함흥 촌의 웃새집에 들어가서 할아버지를 찾아갔다. 병완은 더부룩한 흰 수염이 가슴에까지 흘러내리고 얼굴에 밭고랑 같은 주름이 잡힌데다가 허리마저 구부정해갔다. 로쇠해진 할아버지를 보는 순간 상순은 가슴이 뭉클해나고 코마루가 시큼해났다. “할아버지, 몸은 어떻습니까?” 그러자 병완은 기침을 쿨룩쿨룩 깇으면서 “이젠 늙어서 그러려니 하네.”라고 하며 상순에게 자리를 권했다. 상순은 할아버지를 보고 “ ‘야’, ‘자’ 하지 않으니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라고 말씀드렸다. 그러자 병완은 “이젠 마흔고개도 넘었는데 어찌 계속 어린애 취급을 하겠소?”라고 했다. “할아버지, 몸조심 하십시오. 오래 앉으셔서 손자가 하는 일을 돌봐주시고 사원들이 배불리 먹고 사는 날을 오래오래 지켜 봐줍소.” “그래? 에이유, 자손들을 대여섯이나 앞세우고 주책없이 오래 살아 뭘 하겠소?” 상순은 자리를 잡고 앉아 문안이 끝나자 본론으로 들어갔다. “할아버지, 사원들을 이끌고 다시 범바위골로 들어가 감자농사를 지어 올가 하는데 었떻습니까?” 그러자 병완은 상순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눈길은 상냥하면서도 이전과는 달리 맥이 없어 보였다. “범바위골에 들어갈 예산이오?” “예. 거기 가서는 통일적으로 이전처럼 집체생산을 해서 가져다가 노동공수와 인구 비례에 따라 나눌 예산입니다.” 한참 궁리하던 병완은 머리를 끄덕이며 한숨을 후 내쉬더니 무겁게 입을 열었다. “정치에 삐치지 마오. '범의 꼬리는 놓치면 죽는다.' '가혹한 정치는 범보다 무섭다.'고 옛날 성인들이 말했느니라. 지금 우의 정책이 자꾸 이랬다저랬다 하면서 좌우경 기회주의분자요, 뭐요 하면서 두갈래 노선투쟁이 얼마나 심하오? 자칫 잘못 발을 내딛였다간 우파가 아니면 좌파로 몰려 투쟁받지 않겠소? 보오, 허백호 서기랑 허영주 부현장이랑 다 노선투쟁에 휘말려들어 투쟁받았잖소? 매사에 주의하오.” “사원들을 배불리 먹이려고 범바위골로 들어가는 건 괜찮을 거 같습니다. 뒤근심도 좀 있습니다.” 그 말에 병완은 머리를 끄덕였다. “옳소. 뭐나 심사숙고한 후에 결단내려야 하오. 범바위골은 남의 공사 지역인데다가 멀기에 확실히 운송이랑 노동력이랑 문제 많소. 더구나 이전에 그 일 때문에 얼마나 말을 많이 들었소? 가만, 우리 날씨도 좋은데. 마을 주위를 두루 나가 돌아보면서 얘기하면 어떻소?” “좋습니다.” 병완은 지팽이에 몸을 의지해 구부정한 허리를 펴면서 상순과 함께 계수동과 소서구, 장개골을 일일이 돌아보았다. 이젠 두만강을 건너온지 50여년 동안 조선족들이 가파른 산기슭의 황무지까지 다 개간해 뙈기밭을 일굴 곳은 없었다. 다만 밭머리에 조금 더 개간할 수 있을 뿐이었다. 병완은 지팽이를 짚고 걷기 힘들어했다. 눈치챈 상순은 오후에는 할아버지를 수레에 모시고 패용천산과 칼산 골짜기를 돌아보았다. 그는 골짜기를 내려가면서 할아버지에게 말씀드렸다. “마을에 인구는 점점 불어나지 밭은 더 없지. 이 일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사원들이 배를 곯지 않게 하려면 제가 말을 듣더라도 발 벗고 나서야 될 것 같습니다.” 병완은 백성을 생각하는 손자의 착한 마음과 비범한 담력에 속으로 못내 감탄했다. “그래야지. 지금 세상에서 편안히 살려면 눈치만 살피면서 아무 일도 하잖으면 그만이지. 허나 백성들을 생각하려면 더러 말도 들을 각오를 해야 되오.” 상순은 “이것저것 눈치를 보다나면 언제 사원들의 굶은 배를 채우겠습니까?”라고 하며 굳은 마음을 내보였다. “그래, 장하오. 마음먹은 대로 해야네.” 병완은 칼산과 패용천산 사이의 골짜기를 내려가다가 갑자기 소리쳤다. “수레를 멈춰라!” 상순이 뒤돌아보니 할아버지는 바위돌이 가득한 골짜기를 두루 살피더니 무릎을 탁 쳤다. “됐소. 이 골짜기 황무지를 개간하오!” “예?” 상순은 눈이 휘 둥글해졌다. “아니, 이 가파로운 산골짜기 말입니까?” “음.” 병완은 수레에 앉아 하얀 수염을 쓰다듬었다. “바위돌도 가득한데 말입니까?” “그래. 난 이 골짜기를 보는 순간 내 고향 명천군 상우남면의 돌각담밭을 보는 것 같았소. 우리 고향에 이런 황무지가 더 있어도 여기 간도로 들어왔겠소?” 그제야 상순은 소고삐를 수레채에 매놓고 두루 살폈다. “여기다 뭘 심으면 될 거 같습니까?” 병완은 수레에서 내려 지팡이로 이곳저곳 가리키며 말했다. “산세가 가파른 이 산골짜기에 과수원을 개척하면 좋을 거 같소.” “예? 당장 사원들이 배고픈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데 과수원부터 차린단 말입니까?” “그래, 배나무를 심고 배나무 사이는 밭으로 개간해 콩이나 감자, 고구마를 심으면 되오.” 병완은 수염을 흩날리면서 허리를 굽히더니 흙을 한줌 쥐여 멀리감치 들고 여겨보았다. “보오, 모래가 많이 섞인 이 땅에는 콩이나 고구마, 감자를 심으면 잘 열릴 게요.” “예~ 거 참 좋습니다.” 상순은 가파른 산비탈에 눈길을 멈추었다. “할아버지, 이 가파른 산비탈에 소낙비라도 쏟아지면 모래밭이 다 씻겨가지 않겠습니까?” 병완은 흰 수염을 슬슬 쓸며 한참 궁리하다가 “여기에 다락 밭을 만들면 될 거 같소.”라고 했다. “다락밭이라니오?” 병완은 상순에게 머리를 돌리면서 말했다. “이전에 우리 고향 산비탈에도 소잔등 같은 바위돌이 가득 했지. 그때도 우린 숱한 돌을 주어내서 토성처럼 쌓고 그 우에 흙을 펴서 평평한 다락밭을 만들고 메밀이랑 심어 먹었지.” “예- 알았습니다.” 상순은 오래도록 머리를 끄덕이면서 할아버지의 원견과 고견에 탄복했다. 상순은 수레를 몰고 패용천산과 칼산 골짜기를 내려와 산 앞에 이르렀다. “이전에 내 저 지개틀과 이펑거지에 논밭을 풀었지. 지학사네 배추밭 옆으로 물도랑을 파면서 보니까. 부르하통하 강변에 버두나무가 우거진 모래밭이 있더라. 거기로 가보자.” “예. 가봅시다.” 상순은 비녀뿔이 끄는 덜렁거리는 수레에 할아버지를 모시고 부르하통하 강변으로 갔다. 아름드리 버드나무가 우거진 강변에는 모래로 뒤덮인 백사장이 펼쳐져 있었다. 아름드리 버드나무들이 무서운 소리를 지르면서 봄바람에 몸부림쳤다. “어떠냐? 여기에 논밭을 푼단 말이다.” 그러자 상순은 대번에 동의해 나섰다. “저의 생각과 똑 같습니다. 저도 언제부터 여기에 눈독을 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해마다 큰물이 지면 논밭이 밀려갈까봐 논밭을 풀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병완은 희죽이 웃으면서 강변을 지팡이로 가리켰다. “모래밭에 높은 돌 제방을 쌓는단 말이다. 홍수가 덮쳐들어도 끄떡하지 않는 제방 말이야.” “품이 많이 먹어야 하겠습니다.” “그만한 품이야 들어야지. 여기에 강물을 막아 제방을 한 일리 되게 쌓으면 서 너 헥타르 논을 풀 수 있잖겠소? 여기에 논밭을 일구기만 하면 천추만대로 우리 생산대 사원들이 배불리 먹고 살게 아니요?” “예, 예. 맞는 말씀입니다. 곧 지부대회를 열고 의견을 통일한 후 인차 제방을 쌓고 논을 풀겠습니다.” 병완은 머리를 끄덕이면서 주름 잡힌 얼굴에 흡족한 웃음을 지었다. 그들 조손은 그번 걸음에 6헥타르나 되는 과수원과 4헥타르나 되는 논을 풀 원대한 구상을 익히면서 수레에 앉아 5 리나 떨어진 마을로 돌아왔다. 이튿날 상순은 그 원대한 계획을 지부대회에 내놓았다. "좋소!" "동의하오!" 모두들 이구동성으로  동의해 나섰다. “참 상상 밖의 좋은 계획이오.” 그러나 흥수와 학수는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흥수는 조개턱을 쳐들고 도리머리를 저었다. “이보, 김 서기, 괜히 우리까지 말을 듣겠수.” 학수도 반기를 내들었다. “그래도 우에 청시한 후 일하기오.” 그때 함흥촌에서 노동개조를 하던 허백호도 한마디 했다. “매사에 주의하오. 이전에도 범바위골에 갔다가 말을 들어가지고 또 황무지개간이오?” 허나 상순은 가슴을 쭉 펴고 당당하게 말했다. “백성들이 굶지 않게 하려고 황무지를 개간하는데 무슨 착오란 말입니까? 사원들이 배불리 먹을 수만 있다면 난 투쟁받아도 괜찮습니다.” 그러자 흥수와 학수 형제는 더 말이 없이 동의했다. 허백호 서기도 입을 다물었다. 그는 점차 상순의 인간됨에 머리를 숙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상순은 노동개조를 하러 온 허백호를 날마다 투쟁할 대신 이전의 당위 서기로 존경하면서 매사에 그와 청시하거나 토론했고 당지부 회의에도 참가시켰던 것이다. 그러나 회의 때마다 흥수는 허백호 서기를 소 닭 보듯 하면서 아니꼬와했다. 지어 허백호 서기 앞에서 상순이 노동개조대상을 당지부 회의에 참가시켰다면서 조직원칙과 당성 원칙이 없다고 비평했다. 그때마다 상순은 단마디로 반박하군 했다. “허 서기는 잠시 착오를 져서 사상개조를 할 뿐이지 의연히 중국 공산당 당원이오. 왜서 당원회의에 참가하지 못한단 말이오?” 그 장면을 보고 허백호는 흥수를 속으로 비할 데 없이 증오했다. (어떤 때는 나한테 찰싹 들어붙어 술까지 대접하면서 당지부 서기를 시켜달라고 애원하더니. 흥! 이젠 헌 신짝 차 버리듯 하는구나. 내 눈이 멀었지. 배은망덕하는 저런 놈을 다 화선입당을 시키다니.) 그는 이전에 병완과 상순을 잘못 대한 것을 못내 후회했다. (상순이야 말로 양심적인 인간인데 내가 눈이 멀었지.) 허백호는 속으로 별의별 궁리를 다 했다. (이제 나한테 다시 한번만 기회 있어봐라…) 이튿날 상순은 함흥대대 200여명 사원들을 이끌고 패용천산과 칼산으로 줄지어 진군했다. 대자연을 정복하려고 진군한 상순을 비롯한 사원들 앞에서 패용천산도 머리 숙이고 칼산도 길을 피해주기 시작했다. 패용천산과 칼산 사이의 골짜기에서 남포 소리가 연이어 일어났다. 범과 곰들은 겁을 집어 먹고 슬금슬금 마개동을 넘어 도끼봉 쪽으로 도망쳤다. 상순은 사원들을 이끌어 돌을 캐 수레로 날라다 언제를 쌓고 시꺼먼 부식토와 모래개흙을 편 후 애어린 사과배나무를 심었다. 이때 공사당위 사무실 주임이 헐레벌떡거리면서 산비탈로 올라와 상순을 찾았다. “김 서기, 우리 박서기 산 아래에 왔습니다. 내려오랍니다.” 허백호가 상을 찡그리면서 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날 또 투쟁하려는 건가?) 상순은 대수로워하지 않으면서 퉁명스럽게 말했다. "일하는 거 보지 못했소? 어째 박서기를 보고 여기 올라오라 하지 않았소?” 그러자 사무실 주임은 난처한 기색을 보였다. “사실, 찌프가 가파른 산비탈로 올라오기 힘들어서. 에헴.” 그제야 상순은 곡괭이를 놓고 손을 툭툭 털더니 산 아래로 내려갔다. 박우성 서기는 찌프에서 내려 부채질했다. 상순이 마주 나가면서 인사했다. “무더운데 여기까지 무슨 일이오?”  박우성은 동창생의 손을 잡으면서 “더운데 고생이 많구먼."하고 인사하고나서  "그래 과수원공사는 언제쯤 끝날 거 같소.” 하고 물었다. 상순은 흐르는 도랑물에 손을 씻으면서 대충 회보했다. “사과나무는 그럭저럭 봄에 심어놓았는데 다락 밭을 만드는 일은 아마 온 여름 걸릴 거 같소. 장마 지기 전에 산비탈에 몽땅 다락밭을 만들어야겠는데 말이오. 그러잖으면 모래와 부식토에 심은 고구마와 감자가 다 밀려 갈 거 같소.” 박우성 서기는 사무실 주임을 흘끔 곁눈질하더니 상순을 데리고 한쪽으로 가서 나직이 말했다. “김 서기, 동창생이니깐 하는 말이오. 생산만 생산이라 하지 말고 혁명을 틀어쥘 생각을 하오.” “사원들이 배불리 먹게 하는 일만한 혁명이 또 어디에 있소?” 박우성은 쑥 꺼져 들어간 눈에 엄숙한 빛을 띠웠다. “어떤 사람이 자네 큰어머니 진달래 중대장이 조선으로 달아났다고 고발했소. 허나 난 이때까지 깔아두었소. 그런데 조선특무를 붙잡으라고 위에서 새로운 지시가 내려왔소. 이 일을 어떻게 하겠소? 게다가 항미원조 전쟁 때 남조선 특무 김용천의 삼촌 김덕성과 사촌동생 김칠백, 김칠석마저 특무라고 고발한 사람도 있소. 허영호 소장은 자네 둘째딸 은숙이 조선으로 달아난게 분명하다고 반영했소.” “뭐라오? 근거 없는 말. 오늘 아침까지 집에 있었는데 무슨 말이오?” 박우성은 상순의 어깨를 다독이면서 뒷말을 조용히 이었다. “허영호 소장은 농망계절에 일하지 않고 진수해에서 삼합으로 나가는 버스를 타는 걸 민경이 보고했다오. 이런 때 조선특무를 잡는 투쟁과 계급투쟁을 틀어쥐지 않고 다락밭을 만드는 데만 머리를 써서야 되겠소?” 상순은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며 호주머니에서 담배쌈지를 꺼냈다. 이윽고 그의 입에서는 속이 탄 시뿌연 담배연기가 길게 뿜겨져 나와 타래쳐 올라갔다. 꽈르릉 꽝! 꽝! 저 멀리 칼산과 골짜기에서 또 발파소리가 요란했다. 먹장구름이 패용천산과 칼산을 뒤덮고 있었다. 먹장구름 속에서 번개가 구렁이처럼 혀를 날름거리더니 요란한 천둥소리가 대지를 진동했다. “소낙비 오겠는 모양이오.” 박우성 서기는 찌프에 오르면서 상순에게 뭐라고 한마디 하고는 사무실 주임과 함께 진수해로 달려갔다.       찌프 뒤로 먹장구름이 뭉게뭉게 피여오르더니 바짝 뒤쫓아갔다. 대지에는 호두알만큼 한 비방울이 후둑후둑 떨어졌다. 드디어 밤알만큼 한 새하얀 우박알들이 와르르 떨어져 사원들을 머리를 들지 못하게 두드려댔다. 사원들은 황급히 수레와 나무 밑으로 들어가 대줄기 같은 소낙비를 피했다. 허나 수레 멍예를 목에 멘 비녀뿔이랑 코깜쟁이랑 황소들은 어디로 피할 수 없어 머리를 숙이고 우박과 소낙비를 맞았다. “은숙이 달아난 걸 어떻게 하는가? 철없는 계집애라고. 참.” 상순은 소낙비가 억수로 쏟아져 내리는 하늘을, 먹장구름이 뒤덮인 하늘을 하염없이 쳐다보며 원망했다.        “원, 하늘도 무심하지! 한창 다락밭을 만들 때 무슨 우박을 퍼부어.”                4. “북조선 특무”와 “남조선 특무”        패용천산 중턱에서 먹장구름과 안개가 흩어져 감돌고 있었다. 구름인지 안개인지 천년 이끼가 낀 바위들을 씃어 올려 더욱 기괴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패용천산 중턱의 산비탈 다락밭머리에서는 한창 이른바 남조선 특무 용천의 아들 김경주와 삼촌 김덕성 그리고 김덕성의 아들 김칠석을 투쟁하느라고 분위기가 팽팽했다. 이번에는 우파들인 오옥선과 허백호 그리고 지주 장학산과 그의 아들딸 장충국과 장미련 등은 투쟁하지 않고 남조선특무와 북조선 특무들만 투쟁하고 있었다. 이번에도 흥수가 앞장섰다. “이놈, 남조선특무 삼촌아! 대가릴 숙여!” 흥수는 나서자마자 덕성의 허연 머리를 손바닥으로 탁 치더니 내리 눌렀다. 옆에 서있던 칠석이 흥수를 쏘아보며 눈을 흘겼다. “이 놈 새끼! 눈은 왜 흘겨?!” “우리 온 집안이 어떻게 돼 남조선 특무냐?” 칠석이 머리를 들고 따지고 들자 흥수는 눈을 부라리며 고래고래 고함쳤다. “그래 모르는 척 할 테냐?” 흥수는 조개턱을 쳐들고 사원들을 돌아보더니 목에 지렁이 같은 피 줄을 세우고 호통 쳤다. “여러분들도 다 알고 있잖는기요? 항미 원조 전쟁 시기 남조선특무 김용천은 바로 이 놈들의 집에 숨어 있으면서 특무활동을 하지 않았습니꺄?” 모두들 머리를 끄덕였다. “용천이 우리 집에 들었다고 우리가 남조선 특무란 말인기여?” 덕성이 남대 치 말로 답변하자 흥수는 그의 머리를 손으로 꽉 눌러 구십도로 숙이게 했다. “이 놈, 주둥이를 다물지 못해? 무슨 말 답변 질이냐? 이 놈은 남조선 특무가 자기 집에서 활동하는 걸 공안국에 보고하지 않았지요. 아니, 특무들을 도왔단 말입니다.” “뭘? 어떻게 도왔단 말인가?” 덕성이 또 머리를 쳐들고 대들었다. 흥수는 눈을 뚝 부릅뜨고 덕성의 흰 수염이 더부룩한 턱을 쳐들었다. “이 놈, 네 놈이 특무에게 밥을 해 주지 않았는가?” “말해!” “탄백하라!” 여기저기에서 구호소리가 울렸다. “남조선특무를 타도하자!” 덕성은 두툼한 입술을 열었다. “탄백하겠어. 난 일본 놈의 통치시기에 병완 영감과 함께 우시장 일본경찰국을 무너지게 만들었다. 내 아들 칠백은 항일유격대 중대장, 대대장이었다. 그는 일제캉(와) 미제캉(와) 용감히 싸웠어. 목숨까지 바쳤어. 그래도 죄 있는 거야? 열사 아버지 대접은커녕 이건 뭐야? 투쟁해?! 너희들 누구 덕에 이밥 먹고 사는지 알기나 하고 이래?” 그 말에 흥수는 어이없다는 듯이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사원들 속에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흥수는 지지 않으려고 했다. “아들은 아들이고 넌 너야. 어찌 했든 남조선특무 김용천에게 밥을 해 먹이고 자게 했어. 이건 남조선특무를 도운 특무 죄야!” 흥수는 억지로 덕성을 특무로 몰아세웠다. “아차, 잊었어. 넌 남조선 특무자 북조선 특무야! 이중간첩, 그래, 이중간첩이야!” “북조선특무라니? 이건 또 무슨 생뚱 같은 개소리냐?” 덕성은 눈이 휘동그래졌다. 옆에 서서 투쟁받던 경주는 너무나도 억이 막혀 무서운 눈길로 흥수를 쏘아보았다. “네 아들놈이 조선인민군 대대장이 아니었어? 넌 북조선특무야.” 그러자 보다 못해 상순이 나섰다. “이보게, 그만 하오. 자네 말대로라면 나도 자네도 다 북조선특무란 말인가?” “뭐라고? 당찮은 소리.” 상순은 한술 더 떴다. “항미원조 때 자네나 내나 다 영장과  반장 하잖았는가? 여기 항미원조 전쟁에 지원군이나 조선인민군에 나가지 않은 사람들이 몇이나 되오? 그래 모두 북조선특무란 말이오?!” 흥수는 그만 말문이 막혔다. 그러나 인차 침착성을 찾고 입에서 침방울을 튕기면서 억지를 부렸다. “내야 지원군으로 나가 당신 영도 아래 팔에 부상까지 당하면서 싸웠잖아? 건데 무슨 놈의 조선 특무란기여? 김덕성 일가는 확실히 남조선특무들이지. 저자들은 모두 고향이 남조선 경상북도 경주란 말이여. 저 놈들의 마음 속에는 항상 남조선이 있는기여. 항상 남조선 고향을 그리고 남조선 위해 뭔가 하려는 놈들인기여. 용천 대장이 잡힌 후부터 입장이 바뀌어서 남조선특무로 된기여.” 그러자 허백호가 참지 못하고 나섰다. “그만 두오. 아무리 고향이 남조선 경주라고 남조선특무라는 법은 어디 있소? 우리 대부분 사람들은 고향이 남조선이 아니면 북조선인데 그래 모두 남조선 특무 아니면 북조선 특무란 말이오?” 이때 성근이 또 입술이 간질거려 참지 못해 툭 쏘았다. “이보, 흥수, 당신은 무슨 이씨요?” 흥수는 어망간에 “전주 이 씨여.” 하고 대답했다. 그러나 인차 농촌 정객의 어처구니없는 침착성과 냉정성을 회복했다. 그는 외까풀눈을 가슴츠레 뜨고 성근을 흘겨보았다. “그걸 왜 물어?” 성근은 뒷덜미를 긁적거렸다. “흥수, 당신 고향 어디요?” “나야, 고향이 이북 함경북도 경성이야. 남조선이 아니란 말이야.” “당신 할아버지 고향은 전주라고 하지 않았소?” “할아버지 고향과 내 고향이 무슨 관계 있어?” 그러나 흥수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성근은 고삐를 놓치지 않고 홱 나꿔챘다. “뿌리가 조선 땅에 박혔으면 다 같은 게 아닌가?” “저런, 우파 같은 놈, 생사람을 잡지 말어. 난 왼팔 오른팔 다 남조선 총에 맞으면서 용감히 싸운 항미원조 용사야. 내 어찌 남조선특무란 말이야?” 박성근은 상순이가 눈짓하는 것도 끈질기게 바투 들이댔다. “당신 동생 남조선 괴뢰군이라면서? 말대로라면 당신도 남조선 특무 아니고 뭔가?” “닥치지 못할까!” 흥수는 민병들이 세워 놓은 총까지 들면서 꽥 호통 쳤다. 그제야 박성근은 목을 움츠리며 입에 빗장을 질렀다. 흥수는 개 잡은 포수처럼 우쭐거리며 고래고래 고함쳤다. “이제부터 이 당지부 선전위원에게 악독하게 대드는 놈은 좋은 끝장이 없다! 반당분자와 남북조선 특무 고깔모자를 씌워 투쟁할 테야. 대드는 놈은 총살해버릴 테다!” 모두들 흥수의 손에 든 총과 독기서린 눈길을 번갈아 보면서 자기에게 불똥이 튈 까봐 눈치를 살폈다. 허나 뒤에서 일부 사원들은 쑤군거렸다. 투쟁대회는 결국 흐지부지해지고 말았다. 사원들은 다시 상순의 지휘대로 대자연을 개조하는 일에 뛰어들었다. 남포질에 맞아 금이 간 바위 돌을 괭이로 캐내 경사가 가파른 산비탈에 돌다락을 쌓고 모래와 부식토를 섞어 채워 넣었다. 가파른 산비탈에 점차 다락 밭이 생기기 시작했다. 사원들은 밭을 많이 만들어 배불리 먹고 살 욕심에 힘든 줄도 모르고 상순을 따라 억척스레 일했다. “밭이자 쌀이다.” 상순의 이 말은 사원들의 마음속에 딱 들어가는 진리였다. 상순은 천년 이끼 낀 바위 돌 틈에 긴 정을 박아 넣고 어깨를 넣어 떴다. 얼기설기 금이 쪽쪽 난 바위돌은 용케도 쩍 갈라졌다. 상순은 웃통을 벗어재끼고 용트림하는 것 같이 근육이 울뚝 뿔뚝한 두 팔로 떡돌만큼 한 돌을 “윽!” 소리와 함께 번쩍 들어 돌 언제에 쌓아놓았다. “피해라!” “돌이 굴러 내려온다!” “저걸 어쩌니?” 여기저기에서 비명소리가 울렸다. 가파른 산비탈 우에서 돌을 캐다가 그만 가마뚜껑만한 돌이 굴러 내려왔다. 그 돌은 흥수를 노리고 사납게 데굴데굴 굴러 내려왔다. “피햇!” 상순은 고함치며 흥수를 옆으로 밀어버리면서 긴 정을 휘둘러 굴러 내려오는 돌을 탁 쳤다. 돌은 불꽃을 튕기며 방향을 바꿔 굴다가 산비탈에 쓰러졌다. 모두들 안도의 숨을 후 내쉬었다. 그러나 쓰러졌던 흥수는 게두덜거렸다. “괜히 밀어놔서 무릎을 벗겼어! 씨!” 모두들 흥수가 배은망덕 한다고 쑤군거렸다. “항미원조 전쟁 때도 상순이 아니면 제 살았겠소? 압록강 바닥에서 미군 적기를 휑해서 구경하다나니 기관총에 맞아 죽을 번 했소.” 병수의 말을 이번에는 창걸이 받았다. “그때도 상순이 콱 밀쳤기에 살았지.” “어디 한두 번이오? 이전에 우리 군복을 싣고 남조선 충청남도 서현에 갔을 때오. 산에서 포위당해 유격전을 하게 됐지. 그때도 상순이 흥수를 밀어놓고 양키놈을 쳐눕히지 않았더라면 총에 맞아 죽었을 거요.” “그런데도 쩍 하면 뜨개 소처럼 김 서기를 뜬단 말이오.” “배은망덕 한 놈이지.” “길러준 개 발뒤축을 문다는 게 저런 새끼들을 두고 하는 말이지.” 나그네 귀 석자라고 오고가는 뒷말을 듣고 흥수는 손바닥을 툭툭 털며 병수와 창걸을 흘겨보았다. 해가 어슬어슬 져갔다.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사원들의 뒤로 먹장구름이 몰려오고 저쪽 칼산에는 벌써 저물어가는 하늘을 뒤덮으며 뽀얗게 소낙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사원들은 괭이랑 삽이랑 들고 집으로 부랴부랴 뛰어갔다. 상순은 저녁이라고 멀쑥한 죽물을 들어 쭉 마시고 바깥으로 나갔다. 억수로 쏟아지던 비가 멎고 서쪽 하늘에 애기 별이 하나, 둘 나타나 깜빡이기 시작했다. “아무리 봐도 흥수가 그저 일이 아니야. 제 서긴가? 마음대로 덕성을 투쟁하다니? 아무 사람에게나 우파 아니면 북조선특무, 남조선특무라고 모자를 씌운단 말이야. 그러다간 이 마을에 투쟁받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는가?” 상순은 착잡한 생각을 굴리며 곧추 함흥촌에 올라가 토성 동쪽에 있는 흥수네 집으로 찾아갔다. 창문가에 서 있던 춘실은 상순을 내다보자마자 이마쌀부터 찌푸리었다. “어떻게 나그네도 없는 집에 소리도 하지 않고 들어오오?” 상순은 윗방 문 앞에 서서 방 안을 들여다보면서 “흥수는 어디 갔소?” 하고 물었다. 춘실은 마흔이 넘었지만 상순만 보면 처녀 때 마음이 되살아나는지 입을 쫑긋했다. “없으면 어째?” “잡담할 새 없소. 어디 갔소?” “대대 사무실로 간 거 같은데.” “흥!” 상순은 콧방귀를 뀌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대대 사무실 쪽으로 휭 하니 써늘한 바람을 일구며 떠나갔다. 뒤에서 춘실이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백준이, 아니, 백호가 또 아들애를 봤다오. 제 손자도 안아 보지 않는 저런 독종놈, 저런 놈 세상 어디 또 있니?” 그 말에 상순은 주춤 멈춰 섰다가 몸을 돌리지도 않고 천천히 걸어갔다. 그의 몸이 비틀거리는 것이 보였다. (세상에 자기 자손을 고와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에 있겠니? 응준아, 백준아, 아니, 백호야, 나를 용서해라. 연길에서 애를 많이 낳아 키우면서 잘 살아라.) 그가 토성 안에 들어서는데 전기불이 환한 대대 사무실에서 뜻밖에 덕성이 한창 흥수에게 애걸복걸 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흥수, 원수 진 일이 있나? 제발 그만 투쟁하라고. 용천은 용천이지. 내 특무 노릇 한 적은 없잖나. 우리 둘은 다 남조선에서 온 남대치친구인데 왜 그래?” “아따, 이 영감이. 이거 누가 너거(네) 친군기여? 우리 당과 사회주의 조국의 안녕과 관계되는 일 아닌가? 자넨 분명 남조선 특무를 자기 집에 재우면서 밥을 지어 먹이지 않았는가? 용천처럼 처단하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인줄 알아. 두말 말고 투쟁받고 그 더러운 특무사상 개조하게나.” “흥수, 나도 중국공산당을 열애하네. 당과 사회주의에 미안한 일을 한 적 없네. 억울하게 투쟁받지 못하겠네.” “이 영감이 이게. 어째 죽지 못해 이래? 썩 나가지 못해?!” 흥수는 썩 이상인 덕성을 사무실에서 마구 떠밀어냈다. 덕성은 흥수에게 떠밀리어 마루까지 나왔다가 상순을 보자 파도가 세찬 바다에서 지푸라기라도 본 듯이 상순의 두 팔을 붙잡고 애원했다. “김 서기, 우린 한 고향 사람들이 아닌가? 자넨 어려서부터 알지 않나? 내 나쁜 행동 한 적이 없잖나? 용천 사건 때도 내 청백하다는 걸 자넨 알고 있잖나?” 상순은 덕성을 부축해 마루에서 내려가면서 말했다. “근심하지 말고 돌아갑소.” 덕성은 연신 머리를 끄덕이었다. “그럼 자네만 믿고 가겠네.” 덕성은 흥수를 쏘아보더니 토성 바깥으로 나갔다. 상순은 그를 토성 바깥에까지 바래다주었다. 토성 바깥 어둠 속에서 칠석이 아버지를 부축해 질척질척한 진창길로 절벅절벅 집으로 돌아갔다. 상순은 특무의 사촌동생이란 딱지가 들어붙어 장가도 들지 못한 칠석이 불쌍했다. 또 조선에서 피를 흘리며 싸운 덕성과 칠백 대대장이 가긍해 콧마루가 시큼해났다. 상순은 그들 부자를 바래고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대대 사무실로 들어갔다. 흥수가 오히려 성이 꼭뒤까지 치밀어 노발대발했다. “당신, 정신 있는기여? 남조선 특무와 무슨 그리 인정스레 놀아? 서기란 사람이 주책없이.” “뭐라오? 누가 할 소리를 누가 하오?” 상순은 흥수를 쏘아보며 책상을 꽝 쳤다. “앉소. 오늘 조용할 때 따져 보기요.” 흥수도 노긋노긋하게 숙어 들려고 하지 않았다. “특무하고 한 바지를 입고 춤을 추다니?” “뭐라오?” 상순은 밸 같았으면 흥수의 면상을 한매 쳐주고 싶었다. 하지만 용케도 한숨을 길게 내쉬면서 억지로 참아냈다. “무슨 근거로 어째 덕성에게 마음대로 특무 모자를 씌워 투쟁한단 말이오? 나는 당시 용천 사건을 해명한 책임자기에 증명할 수 있소. 용천은 우리 마을에 잠입한 특무지만 덕성이나 칠석은 특무가 아니란 말이오. 적아 계선을 똑똑히 나눠야 한단 말이오.” 그 말에 흥수는 풀이 좀 죽었다. 허나 자기 체면을 지키려는 듯 또 두덜거렸다. “어쨌든 덕성 영감은 특무의 삼촌이오. 칠석인 특무의 사촌동생이고.” 상순은 목소리를 낮춰 차근차근 말했다. “흥수, 특무 친척이라고 다 투쟁하면 뭐요? 우린 봉건사회 때 한 사람이 죄를 범하면 팔촌까지 련루시켜 목을 치던 작법을 그만 둬야 하오.” 그러나 흥수는 계속 고집을 썼다. “그럼 어째 빈농이고 지주고 성분을 나눴어? 그래 성분을 보지 말자는 말인기여?” “애비가 지주라고 해서 아들마저 지주로 몰아 투쟁하라고 하지 않았소. 우리 당에서는 타격면을 좁혀 적을 적게 만들기 위해 지주와 아들은 구분해 보라고 했소.” “점점 어처구니없는 말을 다 해. 그래 장충국을 투쟁하지 말래?” “아니오. 장충국은 일찍 항일도 했지만 후에 국민당에 가담해 지주 무장을 조직해 우리 사회주의 조국을 뒤엎으려고 한데다가 남조선 특무들과 야합했소. 그러나 덕성 영감네 부자는 다르오. 당지부에서 토론도 없이 당신이 마음대로 투쟁하면 되오?” “당지부 위원이 셋인데. 나와 학수 형님은 덕성을 비판하자고 토론했소.” “허나 당지부 서기인 나와는 왜 일언반구도 토론하지 않았소?” “모택동 주석께서는 소수는 다수에 복종하라고 했소. 서기든 뭐든 당신은 다수에 복종해야 하오.” “허허허. 대단하구만.” 상순은 가소로워 너털웃음을 쳤다. “내가 지부 서기인데. 토론도 하지 않고 당지부 결정이라고?! 조직원칙이 있소? 없소? 내일부터 덕성을 투쟁하지 못하오.” “소수는 다수에 복종하오! 당신 그래 당지부 서기노라고 모택동 주석의 말씀도 듣지 않을 예산이오?” “소수라고 해도 어떤 때에는 도리 있다고 모주석께서 말씀했소. 알기나 하오?” 그 말에 흥수는 입을 허 벌리고 말았다. 이론수준은 어쨌든 상순을 따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때 상순은 책상을 치면서 일어섰다. “함흥대대 당지부 대회에서 토론하고 덕성의 투쟁문제를 결정하기로 했소.” “누구하고 토론하오?” “우리 할아버지 지부 서기는 내놓았지만 아직도 당원이라는 것을 잊지 마오.” “토론을 하나 마나. 당신 할아버지 내 편을 들겠어?” 흥수는 휭 하니 사무실에서 나가면서 두덜거렸다. “이 함흥대대당지부야 당신네 집안에서 세습해오지 않았소? 누가 김씨네 집안을 이기겠소?” 흥수는 사무실 문을 쾅 닫고 가버렸다. 그 바람에 창문 유리에 금까지 갔다. 상순은 전기를 끄고 나오면서 한숨을 후 내쉬었다. 흥수는 집에 돌아가 윗방에 담배연기를 뽀얗게 피우면서 온 밤 어떻게 하면 상순을 무너뜨리고 대대 당지부 서기 자리를 뺏을까 하는 궁리를 굴리고 또 굴렸다. 창문 밖이 희붐해 올 때 흥수는 흥분된 나머지 이불을 콱 차고 벌떡 일어났다. “옳다. 옳아. 바로 그거야. 조선에 달아난 진달래와 경수, 으흐흐. 상순은 조선특무의 조카이자 사촌형이 아닌가? 으흐흐. 상순아, 서기 자리를 내놓겠어? 안 내놓겠어? 허허허.” 춘실은 나그네가 흥분된 모양을 보고 이불깃을 살며시 들면서 물었다. “웬 일이오? 남도 자지 못하게 하면서. 내일 어떻게 일하러 가오?” “작작 떠들어. 상순이 어떻게 되나 이제 보오.” 그러자 춘실은 어슴푸레 한 방안에서 입을 삐쭉해 보였다. “괜히 호랑이 코 구멍을 쑤시지 마오.” “흥! 어디 두고 봐!” 흥수는 이불을 쓰더니 이윽고 코를 드렁드렁 골기 시작했다. 쩍 하면 쏟아지는 소낙비를 보고 상순은 100여명 사원을 이끌고 멍지뫼산 앞으로 진군했다. 아름드리버드나무와 비술나무가 우거진 모래톱을 핥으며 퍼런 부르하통하가 굽이쳐 흐르고 있었다. 사원들은 모래톱과 사납게 파도치며 흐르는 강물을 보고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여기저기에서 한탄소리도 났다. “저런 감때사나운 강물을 막을 수 있을까?” “글쎄 말이오. 어떻게 저런 아름드리나무를 뽑고 논을 푼다고 저러는지 모르겠소.” “논물을 어떻게 먹이면 저 모래를 다 적실까?” 그러나 또 다른 목소리도 들렸다. “손바닥만한 논이라도 더 풀지 않으면 언제 배불리 먹고 살겠소?” “옳소.” 상순은 목청을 높여 동원연설을 했다. “여러분, 우리는 앉아 굶지 말고 우리 두 손으로 부르하통하 물곬을 바꿔 놓고 여기에 논을 풀어야 합니다. 누가 우리한테 배불리 먹으라고 쌀을 줍니까? 하느님도 신선도 주지 않습니다. 우리는 대자연을 개조해 논을 풀고 입쌀을 얻어 와야 합니다. 이제 부르하통하를 막아 물곬을 남쪽으로 돌려놓고 이 곳에 논을 풉시다.” “좋소. 배불리 먹을 수만 있다면 산이라도 옮기고 바다라도 메워야 합니다.” 어느 결에 왔는지 병완이 지팽이를 짚고 서서 상순의 말에 호응해 나섰다. 모두들 병완과 상순의 간단한 동원을 듣고 힘을 얻어 팔을 걷고 나섰다. 로촌장 병완이 상순과 허백호 앞에서 하얀 수염을 흩날리면서 서서 치수를 이리이리 하고 논도랑과 논두렁을 이리이리 하라고 지팽이로 모래에 그리는 모습을 보기만 해도 힘이 나 했던 것이다. 이젠 허백호마저 병완과 상순을 지지해 나섰다. 그는 노동개조를 하기 위한 정치수요보다도 노동개조를 하는 자기를 인간대접을 하는 병완과 상순에게 마음 속으로부터 감복되었던 것이다. 더구나 사원들은 이제껏 병완과 상순의 지휘아래 뭐든 해서 잘못된 일이 없었기 때문에 믿고 반세기동안 따라왔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병완과 상순이 설계한대로 먼저 물곬을 남쪽으로 돌리려고 제일 우로부터 시작해 동남방향으로 돌 언제를 쌓기 시작했다. 상순은 세찬 물살을 아랑곳하지 않고 진두에서 떡돌 같은 돌을 받아 물에 처넣었다. 풍덩! 커다란 돌이 물에 떨어지면서 물보라가 솟구쳤다. 사원들은 상순처럼 연이어 커다란 돌을 물에 처넣었다. 한참 역사질 끝에 부르하통하 강물에 동남방향으로 돌 언제가 서서히 솟아나오고 있었다. 사납게 덮쳐오던 강물도 점차 기세가 눌리어 머리를 숙이고 동남 쪽으로 물곬을 돌리고 있었다. 상순이 기분 나서 사원들을 이끌어 한창 바위돌을 처넣으면서 물곬을 돌릴 때었다. “북조선 특무 상순은 투쟁받을 준비를 해라!” 모두들 바위 돌을 처넣다가 머리를 돌려 보았다. 흥수가 진수해파출소의 몇몇 민경들을 데리고 달려왔다. 상순이 여겨보니 그 속에 허영호 소장과 박우성 서기도 달려 왔다. 허백호는 수레에서 돌을 부리어 물에 처넣으면서 중얼거렸다. “이거 어디 살겠니? 매일 새 사람을 붙잡아 투쟁하다니.” 상순은 허영호와 흥수 그리고 박우성을 번갈아보았다. “대체 무슨 일이오?” 흥수는 개 잡은 포수처럼 상순의 낯에 대고 삿대질하면서 우쭐거렸다. “이 북조선 특무 놈아, 그래도 너의 죄를 모르는 척 하겠어?” “내 무슨 죄 있다고 이러는가?” 상순도 뒤로 물러서지 않고 손가락질 했다. “넌 북조선특무 진달래 시조카다! 네 가문에는 숱한 북조선특무와 남조선 특무가 있다. 봐라! 너의 조카 동선도 북조선특무인 거여. 친딸 은숙마저 조선에 도망가지 않았는가? 넌 북조선 특무야! 민족우파야!” 흥수는 이를 악물고 상순의 멱살을 틀어쥐고 흔들면서 악설을 퍼부었다. “이 놈아, 당지부 서기 자리를 내놔!” 사원들은 흥수를 흘겨보았다. 그들은 속으로 진짜 길러준 개 주인의 발뒤축을 문다고 욕했다. 그러나 상순은 그저 허구픈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흥수, 당지부 서기자리 탐나오? 너무 욕심을 부리지 마오. 과욕하면 눈이 멀고 정신이 나간 짓을 하게 되오.” “뭐, 뭐라? 이 놈이 정말. 지금 조선특무를 잡으러 왔어. 쓸데없는 소리를 작작 해! 네 놈의 조카 동선과 둘째딸 은숙이 조선에서 온 편지를 읽어 줘야 정신을 차리겠어? 네놈이 조선특무들과 내통한 죄를 세상에 까밝아 놓아야겠어?” 그 소리에 상순은 조금 몸을 비틀거렸다. 저쪽에서 병완이 지팽이를 짚고 기침을 쿨럭쿨럭 깇었다. 이때 허영호가 민경들을 시켜 상순을 한쪽으로 끌고 가서 세웠다. 흥수는 호주머니에서 조선에서 온 편지 두통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이건 몇 해 전에 조선으로 도망친 조선특무 김동선의 편집니다. 여러분, 들어보십시오.”   존경하는 삼촌 삼촌을 비롯한 일가 모두 안녕하십니까? 순자랑 홍자랑 여동생들도 무사히 공부를 하고 있겠지? 하나 밖에 없는 남동생 덕돌은 이젠 컸겠구나. 네 털모자를 쓰고 와서 얼마나 고생했니? 네가 수건으로 머리를 싸매고 학교를 다닌다고 하니 마음이 아프구나. 이 다음 내가 더 좋은 모자를 꼭 사줄게. 공부를 잘 해라. 삼촌, 나는 조선 함흥에 와서 기관사로 돼 기차를 모니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습니다. 중국에서 한족들의 “꼬리빵즈”라고 놀려대는 놀림 속에서 화물차를 몰기보다 조선에 와서 기관차를 모니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습니다. 모진 마음을 먹고 어머니와 순애 그리고 노할아버지와 삼촌, 일가친척들을 간도에 남겨두고 조선에 나왔는데요. 하나도 후회하지 않습니다. 조선을 위해 벽돌 한장이라도 더 쌓는 마음으로 기관사를 몰고 조국 땅을 달리니 얼마나 성수 나는지 모르겠습니다. 노할아버지, 삼촌, 이 동선을 양해하고 동선이 잘 되는 것을 대견스럽게 생각하리라고 믿습니다.   “봐라. 북조선 특무로 나가더니 완전히 중국을 배반하고 침을 뱉았어. 이래도 북조선특무가 아닌가!” 흥수는 편지를 읽다가 고래고래 고함치더니 또 편지를 읽어 내려갔다.   나는 지난해 봄에 중국에서 나온 류정자씨와 결혼해 딸애 애숙을 보았습니다. 아내 류정자씨는 원래 중국에서 있을 때 한 신문사에서 교정을 보았댔는데 민족우파요 뭐요 하면서 반우파투쟁이 백열화되자 정치투쟁이 싫어서 조선에 나왔습니다. 그의 본가집 부모형제와 친척들은 모두 도문과 연길에 있습니다.   “봐라. 조카며느리도 중국에서 도망친 북조선 특무야. 하나하나 몽땅 붙잡아 투쟁해야 해.” 흥수는 득의양양해 편지를 내리 읽었다.   진달래 큰할머니는 조선에 나온 후 모든 일이 다 잘 풀려나가고 있습니다. 듣는 말에 의하면 큰할머니는 조선에 나온 후 성칠 큰할아버지 생전 소속부대에 찾아가 김인섭 작은 할아버지를 찾았답니다. 김인섭 작은할아버지는 항미원조 전쟁 때 김성칠 큰할아버지 수하에서 대대장을 하였고 후에 성칠 큰할아버지 대신 연대장을 했답니다. 그는 후에 사단장이 됐습니다. 이제 서부전선으로 나간다고도 합니다. 김인섭 큰할아버지 알선으로 지금 진달래 할머니는 군 녀성동맹위원회 위원장 사업을 한답니다.   “저런, 저런. 매국역적, 반동분자를 위원장으로 써? 헤이 참, 남조선 특무 녀편네 주제에 조선에 간들 오래 배길 거 같아? 제길, 이제 조선에 편지를 써서 그년의 내막을 몽땅 까밝아 놔야겠어. 어허, 이거 목이 아파 읽지 못하겠다.” 흥수는 손으로 목을 슬슬 만지더니 조개턱을 쳐들고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두 민경 사이에 서 있는 상순의 세귀눈길과 딱 부딪쳤다. “옳아. 네 놈이 읽는 게 맞아.” 흥수는 편지를 가져다 상순의 코 앞에 내밀었다. 허영호 소장은 어쨌든 옛 상전인지라 상순의 체모를 지켜주려고 쇠고랑을 채우지도 않았고 바줄로 묶지도 않았다. 옆에서 허백호가 자기 사촌동생의 귀에 대고 뭐라고 자꾸 귀띔하는 것이 흥수의 눈에 뜨이었다. (참 꼴불견이야. 저 놈들은 아직도 짜고 든듯이 의리를 지켜? 혁명하는데 무슨 봉건의리야. 저 놈 우파분자 허백호도 더 얻어맞아야 알겠는 모양이지.) 흥수는 게두덜거리면서 편지를 상순의 낯에 휙 뿌렸다. 상순은 편지를 한장 한장 주어 차곡차곡 정성껏 쥐더니 내리 읽어보았다. 얼마나 애타게 기다리던 편지인가! 흥수가 찢어버리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생각했다. 상순은 은숙의 편지를 내리 훑어 보더니 목청을 돋우어 노래하듯이 곡을 붙여 흥얼흥얼 내리 읽기 시작했다.   아버지, 엄마, 그간 둘째딸이 잃어져 근심했으리라 생각합니다. 조선으로 나올 때 부모와 말도 하지 않고 와서 미안합니다. 말하면 조선에 가지 못하게 할까봐 말하지 못하고 정옥이랑 함께 떠나왔습니다.   “어디 보기오. 제 좋은 소릴 하지 않나?” 흥수는 상순의 손에서 편지를 홱 빼앗아다 내리훑고 올리훑었다. 그러나 흠잡을 데 없었다. 그는 조개턱을 쳐들고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상순은 순순히 들이 대고 당하기만 했다. 이전에 자존심이 면도칼날 같고 독기 어린 세 귀눈을 부라리던 사내, 욱 하면 벽이라도 차고 나가던 그런 사내 성격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었다. 상순은 편지를 받아 계속 읽어 내려갔다.   지금 나는 철준 작은할아버지네 집에서 잘 지냅니다. 철준 작은할아버지는 외가집으로는 5촌 삼촌이 되기에 작은할머니(삼촌댁)도 나와 우리 친구 정옥이까지 아주 친절히 대합니다. 그런데 아직 직업을 찾지 못해 사처로 헤매고 있습니다. 철준 할아버지도 여기 저기 알아보지만 소학교 밖에 다니지 못한 우리를 받지 않는답니다. 이전에 농중이라도 계속 다녔겠는 걸 그럽니다. 정옥도 아직 직업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만! 그만!” 흥수는 바삐 편지를 빼앗아 갔다. 그러자 상순이 펄쩍 뛰었다. “이 자식, 왜 내 딸의 편지를 빼앗느냐?” 그 뜻밖의 말에 흥수도 뒤로 비실비실 물러서며 중얼거렸다. “이 놈이 되살아났구나. 네 놈이 아직도 파 속처럼 속이 새파랗게 살아 있었구나.” 상순은 와닥닥 달려들어 흥수의 손에서 편지를 빼앗았다. “애들이 살자고 자기 고향으로 찾아 갔는데 무슨 죄가 있단 말이냐?” 이때 보준도 나서서 떠들어댔다. “내 사촌동생도 회룡에 나갔기에 김일성종합대학을 다니고 지금 교장을 하오. 잘 살자고 자기 고향에 나갔는데 무슨 죄란 말이오?” 흥수는 그래도 턱을 쳐들고 보준을 쏘아보며 떠들어댔다. “사회주의 중국을 배반하고 조선에 나간 놈들은 몽땅 남조선 특무로 되지 않는가 두고 봐라.” 그는 머리를 돌려 상순을 흘겨보며 목에 지렁이 같은 피 줄을 세우면서 고래고래 고함쳤다. “당신의 조카는 북조선 특무야!" 그러자 상순도 물러서지 않고 맞섰다. “내 조카 조선에 나가 무슨 죄 있다고 그래? 그는 당당한 조선공민이자 조선로동당 당원이다.” “점점 양이 자랐구먼. 그래 당신의 조국은 어디요?” 상순은 주저하지 않고 “내 조국은 사회주의 중국이오.”라고 대답했다. 그는 외까풀 눈을 가슴츠레 뜨고 말했다. “허나 당신은 특무의 삼촌, 더 명확히 말해 조선특무 죄를 벗어메지 못하오.” 그때 상순도 맞섰다. “네 조카 정옥도 내 딸과 함께 조선에 나가지 않았는가? 그럼 너도 북조선 특무가 아니야?!” “쩌, 쩌. 쩌. 오늘 회의는 이만 하기오!” 흥수는 꼬리를 사타구니에 끼고 깨갱거리며 달아나는 개처럼 머리를 숙이고 저쪽으로 가버렸다. 사원들은 당당한 상순의 모습을 보고 머리를 끄덕였다. 박우성은 그제야 사원들의 앞에 나섰다. “우린 아무 사람이나 조선에 갔다고 다 조선특무라고 몰아붙여선 안됩니다. 중국과 조선은 친선국가입니다. 중조 친선은 피로써 맺어진 것입니다. 우리는 이 중조 친선을 귀중히 여기고 대대로 전해 내려가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자기 손으로 중조 친선에 먹칠을 하면서 반목해서야 됩니까? 여기 있는 어느 분이 조선에서 오지 않았습니까? 그래 우리 모두 북조선 특무란 말입니까? 나는 일본에 가서 대학을 졸업했습니다. 그렇다고 나는 일본 특무입니까?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우리는 친척을 찾아 조선에 놀러 갈 수도 있습니다. 놀러 간 걸 특무라고 하면 뭐가 됩니까? 이런 얼토당토 앉는 말을 하지도 마십시오. 국제공산주의 운동은 나라 계선이 없습니다. 중국과 조선은 형제국가이기에 인민들이 자유롭게 내왕할 수 있습니다. 지금 중소 관계가 복잡해졌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중조 전통적인 친선관계를 돈독히 하고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상순 서기는 조선특무가 아닙니다. 그는 우리 당의 훌륭한 농촌 기층대대 당지부 서기입니다.” 모두들 우레와 같은 박수를 쳤다. 병완은 먼발치에서 지팡이를 짚고 서서 머리를 끄덕이며 박우성과 상순을 대견하게 바라보았다. 흥수는 한쪽으로 어슬렁어슬렁 가더니 버드나무에 대고 오줌을 누는 척 하면서 외면했다. “어디 두고 보자. 박우성, 네놈도 일본 특무로 몰아 없애 버리지 않는가. 그래야 상순의 서기자리를 빼앗을 수 있겠구나.” 그는 오늘의 치욕에 백배, 천배 복수하려고 이발을 득득 갈아댔다. 상순이 강가에 가보니 그새 거센 물살이 돌 언제 밑의 모래를 파가면서 언제가 무너져 수면에서 사라졌다. “북조선 특무를 잡는다고 지랄발광 하다나니 언제가 다 무너졌구나.” 상순은 머리를 돌려 사원들을 향해 고함쳤다. “빨리 돌을 가져다가 물에 처넣소. 언제를 다 밀어가겠소.” “옛!” 사원들은 한 아름씩 되는 돌을 들어다 소용돌이치며 언제에 덮쳐드는 물에 처넣었다. 풍덩! 풍덩! 물보라가 연신 하늘로 솟구쳤다. 허나 밑 모래가 물에 패운 언제는 토대가 없어 무너져버린 채 좀처럼 다시 물 우로 솟아나지 못했다.
125    대하소설 진달래 소야곡(11) 댓글:  조회:1420  추천:0  2018-02-22
                                20. 규수와 목동 졸업을 앞두고 모두 배치를 잘 받으려고 최성균 교수를 찾아 달아다녔다. 어느 하루 점심에 뜻밖에도 연화가 숙사에 찾아오지 않았겠는가. “연화, 어떻게 돼 왔어?” 연화는 가리마를 쪽 낸 머리를 다소곳이 숙이면서 귀밑까지 빨갛게 홍조가 어렸다. 건너 편에서 승호가 비웃는 눈길을 보냈다. “따르는 처녀애들이 많아 좋겠다. 흥!” “실습하러 갔을 때 학생이야.” 승호는 연화의 아래위를 훑어보더니 “와싸, 진짜 예뻐.” 하면서 징글스레 누런 이발을 드러냈다. 성호는 색마한테 삼키울가봐 겁난듯이 연화를 데리고 바깥으로 나갔다. “얘!” 뒤에서 승호가 불렀다. 성호는 연화를 보고 먼저 가라고 하고 돌아섰다. 승호는 성호를 조용한 복도 구석으로 데리고 가서 나직이 물었다. “얘, 내 녀동생하구 어떻게 하겠니?” “그만 둬라.” “에이구, 배부른 흥정을 다 하네.” 승호는 도리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잘 생각해 봐라. 좀 좋아 그래? 선금이 얼마나 예뻐? 졸업배치도 문제없어. 아버지하구 말해서 널 공안국에 넣어줄게.” “네나 공안국에 가라. 이전에 넌 날 뭐라고 욕했니? 시내 처녀들 치마자락에 매달려 리상을 실현하려 한다는지. 뭐, ‘땅을 밟고 하늘을 떠인 사내가 규방 규수를 사닥다리로 삼아 전도를 개척하려는 건 제일 가련하다.’는지 하지 않았니? 그런데 지금 날 보고 녀동생을 미끼로 공안국에 비비고 들어가라고? 흥!” 승호는 얼굴이 대뜸 굳어졌다. “사랑은 구걸할 수야 없지. 선금이 시집 갈데 없어 그러는가 하나? 오해하지 말라. 널 생각해 그래.” 승호는 성호의 마음을 한참 모르고 있었다. 그는 자기와 함께 일하고 싫어 그러는줄도 모르고 계속 늘여놓았다. “사람이 살자면 멀리 내다봐야 해. 같은 값에 분홍치마라고 선금과 결혼하고 전도도 개척하고 좀 좋아 그래? 넌 선금을 지팽이로 삼아 짚고 다시 일어나야 해.” 성호는 정색했다. “정말 소힘줄보다도 더 질긴 놈이군. 이 일은 없던 일로 하자. 연화 기다려서 나가봐야겠다.” 승호는 성호의 뒤잔등을 쏘아보면서 중얼거렸다. “주는 떡을 먹지 않다가 꼭 후회할 거야. 이제 사회에 나가 봐라. 학교와는 달리 한 발작도 내딛기 힘들게야.” 성호는 몸을 돌려 승호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성의는 고맙다. 갈 길이 힘들어도 나름대로 갈 거야.” “이제 코피 터져 봐야 알겠니? 흥!” 승호는 저쪽 복도에서 은영이 얼른거리자 황급히 침실로 되들어가버렸다. 연화는 어글어글한 까만 쌍겹눈으로 성호를 정겹게 바라보면서 활짝 웃는 얼굴로 반겨 맞았다. “선생님, 바쁜데 찾아와서 미안해요.” “아니,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성호는 연화를 보고 “정희 선생한테서 이젠 무용을 적잖게 배웠겠구나.” 하고 물었다. 연화는 생글 웃으면서 “그래요. 헌데 오늘 엄선생님을 찾아가니 침실에 계시지 않더구먼요.” 하고 서운해했다. “그래? 어디로 갔을가?” “괜찮아요.” “?” 성호는 의아한 눈길로 연화를 돌아보았다. 연화는 새물새물 웃으면서 뜻밖의 말을 했다. “선생님만 봐도 됐어요.” 연화는 속심을 밝힌 것 같았는지 제꺽 말머리를 돌렸다. “선생님이 없으면 정희 선생을 알 수 있었겠어요?” 성호는 연화를 데리고 교수청사에 올라갔다. 화단에 흐드러지게 핀 코스모스들이 반겨맞았다. 연화는 코스모스꽃을 한잎 뜯어 코에 대고 향기를 맡았다. “야~ 정말 곱고 향기롭구나.” 성호는 희죽이 웃으면서 “연화는 그 코스모스보다 더 예뻐.” 하고 한마디 했다. 무심코 던진 한마디 말에 연화는 머리를 다소곳이 숙였다. 순식간에 두 볼에 새빨갛게 홍조를 띄였다. 성호는 어린 제자에게 쓸데없는 말을 한 것 같아 화제를 돌렸다. “정희선생은 다재다능해.” 그제야 연화는 머리를 들더니 “그래요. 피아노도 잘 치고 노래도 아주 구성지게 부르고 춤도 아주 잘 추죠. 또 인물 체격이 얼마나 예뻐요?” 하고 자랑을 늘여 놓았다. “아! 범이 자기 흉을 하면 온다더니!” 성호가 가리키는 저쪽 교수청사를 보니 정희가 이쪽으로 오고 있지 않겠는가. “엄선생님!” 연화는 어린애처럼 두팔을 추켜올리면서 앞으로 달려나갔다. “연화 왔구나. 오래 기다리지 않았어?” “아니, 금방 왔어요.” 정희와 연화는 예술을 향한 한 길에서 진짜 사제 간이 돼버렸다. 그날 정희는 연화에게 노래와 춤을 배워주고 나서 성호와 함께 점심까지 대접해 보냈다. 연화는 갈라질 때 정희를 보고 “선생님, 어디로 배치받아 가는지 기별해주세요. 제가 자주 찾아가 뵙죠.” 하고 나서 성호한테 얼굴을 돌렸다. “선생님은 어디로 배치받게 됐어요?” “농민 아들이 아마 산골에 가서 교편을 잡게 될 거 같소.” “우리 학교에 와요.” 연화는 환성을 질렀다. 허나 삽시에 어두워지는 정희의 안색을 보자 혀를 홀랑 내밀었다. 성호는 어색한 기분을 돌리려고 “그래, 나도 모교에 가서 교편을 잡고 싶어.”라고 말해버렸다. 정희는 성호에게 눈을 곱게 흘겼다. 연화를 보내고 정희는 성호를 불러 세웠다.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기요.” 정희는 성호를 데리고 자기 집으로 가는 것이였다. “집에는 왜?” “글쎄 긴히 할 말이 있소. 가면 알게 되겠죠.” “그래도 집엔 가지 말기요.” 성호는 정희를 데리고 교정의 수림 속으로 스적스적 걸어갔다. 화단에서는 꿀벌들이 꽃잎 속을 붕-붕- 날아다니면서 부지런히 꿀물을 채집하고 있었다. 정희는 주위를 둘러보더니 그윽한 정이 찰랑거리는 외까풀눈으로 성호를 응시했다. “이젠 당장 졸업해 산산이 흩어지겠는데 말이요.” 성호는 한숨을 후~ 내쉬더니 “난 아직 마음이 정리되지 않았소.” 하고 뒤말을 간신히 이었다. “저도 알겠지만 난 은영을 사랑해왔소. 은영이 비참히 짓밟힌 마당에 아직 련애할 생각이 없소.” 정희는 머리를 폭 숙였다. 그녀는 발끝으로 땅바닥을 허비다가 멈췄다. “그 심정을 알 수 있어요. 허나 졸업배치가 발등에 떨어졌지 않고 뭐예요. 금방 말하는 걸 듣고 실망했어요. 어쩜 그렇게 맥 빠진 말을 술술 해요.” “농민 아들이 무슨 용빼는 수 있소? 시골학교에 가도 난 만족이요.” “아버지께 말씀 드려서 성호의 소원을 풀어주자고 그러는데요.” “고맙소. 남의 신세에 팔자를 고치고 싶지 않소.” “왜 그렇게 말해요.” 정희 눈시울에 서운한 눈물이 고였다가 볼을 타고 주르르 흘러내리였다. 그녀는 대뜸 주먹으로 성호의 가슴을 내질렀다. “남의 마음을 털끝만치도 알아봐주지 못하면서. 정말 밉다, 미워!” 여름방학을 맞아서 교정의 수림 속은 전에 없이 한적했다. 정희는 수림 속으로 사뿐사뿐 걷다가 성호한테 머리를 돌렸다. “아직도 은영한테 미련이 남았어?” “…” “성호는 전통적인 정조파가 아니고 뭔가요? 은영한테 아직도 미련을 가지는 건 아니겠죠?” 성호는 묵묵부답이였다. 정희는 은영의 험담을 해서 괜히 남의 아픈 상처를 건드린 것 같아 그만두었다. “하루속히 어둠 속에서 나와. 널 기다리는 건 따뜻한 사랑의 품이야. 아버지와 말할게.” “뭘?” 성호는 의아해했다. “당신 졸업배치를 도와달라고 부탁할게요.” 정희는 성호의 손을 정답게 잡고 응석을 부리듯 몸을 흔들었다. “우리 집에 한번 가자. 헛일 삼아 아버지와 말해보자.” 성호는 성의를 저버릴 수 없어 정희를 따라갔다. 정희네 집은 대학가 아빠트구역 2층집에 있었다. 성호는 으리으리한 아빠트를 보고 눈이 번쩍 뜨였다. 집 안에 들어서니 객실에서 정희의 부모가 반갑게 맞았다. 성호는 인사를 마치자 소파에 가서 앉았다. 정희 아버지 엄삼기는 너부죽한 얼굴에 학자답게 풍채가 름름했다. “아버지, 전번에도 말씀드렸는데요. 성호 졸업배치 어떻게 됐는가요?” “광고회사 김경리하구 부탁했는데 일이 잘 풀릴 것 같아.” 엄삼기는 시원히 대답하고 나서 성호에게 머리를 돌렸다. “고향이 어디요?” “천수해 태평거촌입니다.” “부모는 아직도 농사를 짓겠구먼.” “예. 이제 제가 대학을 졸업하면 효도를 잘 해드려야겠습니다.” “음, 효자로구만.” 정희 아버지는 머리를 끄덕이더니 자꾸 궁금해 이것 저것 물었다. “집에 형제는 몇이요?” “열 남매입니다.” “열 남매?” 정희 아버지는 놀란듯이 아내를 마주 보았다. “예. 제가 막냅니다.” 정희 어머니는 담담히 들을뿐이였다. “부모 년세 계시겠구만.” “예. 올해 65세입니다.” “형님이 몇이 있소?” “형님 둘에 누나 여섯입니다. 형님 한분은 사망한지 오랩니다.” “오, 형님네는 부모하구 함께 있소?” 성호는 졸업배치와는 관계없는 가정형편을 꼬치꼬치 캐묻는 것이 기분이 얹짢으면서도 대답하지 않을 수 었었다. “아닙니다. 큰형님은 큰아버지네 아들이 없어서 앞을 섰습니다. 둘째형님은 조선에 나갔습니다.” “오, 진짜 대가정이구먼.” 정희 아버지는 머리를 끄덕이더니 “우린 아들도 없고 저 무남독녀 정희 하나 밖에 없소.” 하고 말하면서 딸을 건너다보았다. “아버지, 또 그 말씀인가요? ‘아들이 없어 섭섭하다.’는 말씀에 귀못이 박히겠어요.” 정희는 눈을 곱게 흘기더니 화제를 돌렸다. “이젠 호구조사를 그만하세요. 졸업배치나 구체적으로 얘기해 주십시오.” 엄삼기 교수는 안경을 벗어 손수건으로 쓱쓱 닦아 다시 걸었다. “내 최성균 교수와도 부탁해놓지. 최성균 교수는 아주 친한 동창생이요.  국가통일배치를 하기에 학교에서 광고회사에 배치하면 끝이오.” 성호는 머리를 숙이면서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성호는 어쩐지 정희 아버지 표정이 어두워지는 것을 느꼈다. 정희 어머니를 피뜩 바라보니 얼굴기색이 색바래진 감이 들었다. 성호는 더 앉아 있기 불편해 한시급히 엉덩이를 들더니 인사하고 바깥으로 나왔다. 정희는 성호를 따라 나와 “기쁜 소식을 기다리세요.”라고 했다. 성호는 별로 기대하지 않았다. “감사하오. 난 농민의 아들이기에 시골에 돌아가 교편을 잡아도 되오.” “이제부턴 ‘농민의 아들’, ‘목동’, 그런 얘기하지 마세요. 우리 아빠처럼 대학교  교수나 정부기관 간부, 광고회사 총경리 하면서 잘 살 생각만 하란 말이요. 호호호.” “어디 그렇게 쉽겠소?” “우리 함께 손잡고 찬란한 미래를 위해 열심히 노력해보자요.” “고맙소.” 정희는 성호를 대문 밖에까지 연의하면서 “마음을 빨리 정리하고 나한테 돌아와요.” 하고 정겹게 말했다. 성호는 한숨만 후~ 내쉬더니 무거운 발걸음을 뗐다. 정희가 집 안으로 들어가자 엄삼기 교수는 버럭 화를 냈다. “안돼! 귀여운 우리 무남독녀를 그까짓 농부 아들한테 줄 순 없어! 옛날부터 규방 규수와 초가집 목동은 배필이 안돼.” 정희는 울먹이며 반발했다. “아버지, 지금도 반상이 따로 있는가요? 아버지도 옛날 농민의 아드님이 아니셨던가요? 성호는 초가집 목동이 아니라 당당한 80년대 대학생이란 말이예요.” 엄교수는 눈을 뚝 부릅뜨고 호통쳤다. “걘 절대 안돼. 지금 혼사말이 문턱이 닳토록 들어오고 있어. 시장네 아들로, 국장네 아들로, 총경리네 아들로 줄을 섰어. 하필 부모를 모셔야 할 농부네 목동이냐? ” 정희는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애원했다. “아버지, 왜 딸의 마음을 몰라줘요? 성호 아니면 죽어도 시집 안가요.” 엄교수는 대뜸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얘, 무슨 일 치잖았니?” 정희는 도리머리를 저었다. “그런 건 아니지만요. 제발 안된단 말씀 하지 말아요. 이 딸은 성호를 목숨보다 더 사랑해요. 제발 빌어요. 성호와 행복하게 살게 허락해주세요. 네?” “얘, 정말?” 엄교수는 정희를 보고 어처구니없어 “일어나라.” 하고 도리머리를 홰홰 저었다. 정희는 일어나려고 하지 않았다. “아버지 허락하지 않으면 일어나지 않겠어요.” 엄교수는 정색해 말했다. “얘야, 우린 너 밖에 없어. 녀자는 시집을 잘 가야 해. 왜 숱한 좋은 혼처를 두고 하필 시골 농부네 집에 시집가려고 이래?” 정희는 아버지를 쏘아보면서 발버둥질치며 고함쳤다. “관둬요. 딸이 죽는 걸 보자고 이래요?” “얘, 다신 말하지 말라!” 엄교수는 황급히 딸을 끌어안고 눈물까지 흘리며 간곡히 타일렀다. “얘야, 네가 없인 우린 못 살아.” 정희 어머니 조혜숙도 정희를 껴안고 잔등을 두드려주었다. “정희야, 절대 짧은 생각을 하지 말고 천천히 의논하자. 평생대사를 어떻게 하루 아침에 결정할 수  있니?” “허락하는 거죠?” “천천히 잘 생각해보자.” 엄교수는 벌떡 일어나면서 안경까지 떨어뜨렸다. “그래, 정희야, 최교수한테 졸업배치도 부탁하고 성호를 잘 알아봐야겠다.” “알아보나마나. 마음씨 착하고 아주 참한 대학생인데요.” 정희는 무릎을 펴더니 두다리를 퍼더더버리고 펄렁 물앉아 기대에 찬 눈길로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아버지, 딸을 믿으세요. 4년 동안이나 한 학급에서 지내보아도 성호만한 남자는 없어요.” 혜숙은 정희의 눈물이 글썽한 눈시울을 바라보면서 머리를 끄덕였다. “천천히 보자.” “쩌, 쩌, 쩌, 걔한테 끌려가면 안되오.” “에이고, 당신은 농민 아들이 아닌가요? 올챙이 때를 잊었구만요.” “관두오. 그때는 그때지. 다 내 딸을 행복하게 살게 하려는게지.” 어느날 점심에 정희가 침실에 와서 성호를 찾았다. 성호는 정희와 함께 교정 수림 속으로 들어갔다. 정희는 생글방글 웃으면서 “성호, 아빠 최선생님과 말해서 시내 광고회사에 배치하기로 했어요.”라고 했다. “뭘? 내하구 무슨 일을 하고 싶은가 묻지도 않고 광고회사에 배치했소?” “시내서도 상직업인데요. 개혁개방을 하면서 경제시대에 들어섰는데요. 돈도 꽤나 벌고 좀 좋아 그래요?” 정희는 성호에게 눈을 곱게 흘기었다. “배 부른 흥정을 하긴? 어디 누구나 다 하는 일인가요?” “뭐라고?!” 뜻밖에도 성호가 빈정거렸다. “그래, 초가집 목동이 광고회사에 들어가면 큰 벼슬을 한게지. 흥!” 정희는 도와주고도 뺨을 한대 맞은 감이 들었다. 그러나 억지로 참으면서 물었다. “그래, 무슨 일을 하겠소?” 성호는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난 천수해에 돌아가 고향을 건설하고 싶소. 황페해지는 모교랑 보니 마음이 아픕데. 고향의 어린이들한테 글을 가르치고 싶소.” 성호는 발길로 수림 속의 자갈을 툭 차버렸다. “시골에 갈지언정 ‘농부의 아들’이라고 천시받으면서 살긴 싫소. 시골에서 교편을 잡더라도 자기 능력으로 살고 싶소.” 정희는 성호의 손을 주동적으로 슬쩍 잡았다. 성호는 어쩐지 그 따뜻하고 매끌매끌한 손이 싫지 않았다. 그들 둘은 손을 잡고 학교 뒤동산의 소나무 숲으로 걸어갔다. 송진 냄새가 솔솔 풍기는 소나무 밑은 삼복염천에도 그리 덥지 않았다. 정희는 입을 무겁게 열었다. “이제 경제시대에 들어서면 광고회사에서 돈을 많이 벌면 좀 좋아요? 옛날엔 무예가 사내대장부의 능력이였죠. 허나 경제시대엔 돈이 능력이지요. 지식이랑 사랑이랑 다 문화에 속하죠. 경제시대에 문무가 겸비되자면 돈도 있고 지식도 있고 사랑도 있어야죠.” “흥! 진짜 괴상한 론조군.” 성호는 랭소했다. “진짜 규방 규수의 철학미가 푹 슴밴 새 정치경제학 리론이구만.” “인생도 선지선각과 선택이 중요하죠.” 정희도 점점 더 정색해 진지하게 말했다. “고향에 돌아가 교원을 하려는 소박한 생각은 좋아요. 그러나 지금 자기를 부단히 승화시키면서 능력을 과시해 새 생활을 창조하는 것이 옳아요. 광고는 황금직업인데요. 한번 솜씨를 펴보세요.” 허나 성호는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돈을 주무는 일은 좋지 않은 거 같은데. 황금흑사심이라고 돈은 자칫하면  사람을 변심하게 만들 수도 있지.” “성호는 정직하고 착하고 진실한 사람이기에 돈에 유혹돼 변질할 사람이 아니라고 보오.” “믿어줘서 고맙소.” 정희는 적이 기뻐했다. 그녀는 성호의 손을 잡고 정답게 마주 바라보았다. “성호, 아직 그대한테서 뭔가 하나 받지 못했는데요.” “뭘?” 성호는 간절한 정희의 눈길에서 제꺽 깨닫고 머리를 숙였다. 정희는 성호를 기다리다못해 와락 끌어안더니 나직이 “사랑해요.” 하고 먼저 사랑을 고백했다. 성호는 정희 어깨에 두 손을 얹고 물었다.  “정희, 난 한가지 묻고 싶소.” “백가지라도 물으세요.”  “이후에 내가 초가집 농부네 목동출신이라고 업신여기지 않지?” 정희는 머리를 끄덕였다. “이후에 한평생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고생한 우리 부모를 잘 모시겠소?” “효성을 다해 모실게요.” “정희, 내 목숨을 다 바쳐서라도 정희를 사랑하오. 영원히 사랑하겠소.” 성호는 정희를 숨 막힐듯 꽉 껴안더니 한 고패 빙 돌렸다. 순간 정희는 성호의 얼굴 옆에 걀쭉하게 생긴 은영의 우유빛 얼굴이 겹쳐 떠올랐다. 허나 정희는 용케 질투심을 억눌렀다. “이제부터 다른 녀성한테 눈길을 팔면 안돼요. 이젠 싹 지워버리세요. 저한테 향한 진실한 사랑만 간직하세요.” 성호는 정색해 물었다. “뭘 보고 농부 가정의 목동을 사랑하오? 아무 것도 가진게 없는데. 후회하지 않겠소?” “또 그 말인가요? 절대 후회하지 않아요.” “난 막내지만 아마 부모를 모셔야 할 것 같은데. 전 무남독녀인데 난 데릴사위로 들어갈 수도 없소. 정희네 부모가 섭섭해하지 않겠소?” 정희는 뜻밖의 말에 대뜸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녀는 한참 후에야 간신히 입을 열었다. “어느 누가 부모 없이 자란 자식이 있는가요? 부모에게 효성을 하는 건 자녀의 신성한 의무죠. 우리 함께 효성을 다해 두 집 부모를 모시면 안 돼요?” 성호는 한숨을 후~ 땅이 꺼지게 내쉬였다. “형제 열이나 되는 복잡한 집에 와서 어떻게 시집살이를 하겠소?” 정희는 달아오른 쇠기둥 같은 성호의 몸에 살짝 기대면서 아주 결연히 대답했다. “우리 둘이 서로 사랑하는 한 모든 걸 달갑게 받아들일 수 있어요.” 성호는 돌아서는 정희를 와락 끌어안고 청춘의 더운 피가 끓어 넘치는 진지한 사랑의 감정을 토로했다. 그 한마디, 한마디 사랑은 정희를 무한한 감동을 먹게 했다. 정희는 뜨거운 눈물을 주르르 흘리면서 성호의 품에 얼굴을 사르르 파묻고 어깨를 가늘게 들먹였다. 성호는 얼굴을 정희의 눈물범벅이 된 얼굴에 천천히 가져가더니 뜨거운 입술로 그녀의 떨리는 빨간 입술을 포개고 따뜻한 키스를 안겨주었다. 정희는 세상의 모든 행복을 독차지한 것 같은 기분에 둥둥 떠서 황홀한 무지개 동산에 들어선듯이 경악할 경지에 이르렀다. 허나 그 모든 것은 성호와 정희 미몽의 시작에 불과했다. 농부의 아들 성호와 규방의 규수 정희, 그들 사랑의 현실은 아직도 넘어야 할 산이 너무나도 많고도 많았다. 산새들도 처녀총각의 열애하는 모습이 부러운지 소나무숲 속에서 이 나무가지 저 나무초리에 옮겨 앉으면서 짹짹 지저귀였다. 부나비는 연분홍 코스모스 꽃잎에서 나풀나풀 춤 추고 있었다.   21. 깍쟁이령감 늙은 비술나무 아래에서 령감들이 모여 앉아 바람을 쏘이고 있었다. 곽재령감이 사라지자 령감들이 왁자그르 끓어번지기 시작했다. 세린하에서 이사해온 땅딸보 천석령감은 대머리에 송글송글 돋은 땀방울을  손등으로 닦으면서 선코 뗐다. "저 깍쟁이 령감이 오늘부터 두부 장사를 한다는데 로친 발바닥에 털이 나겠다이." "늘그막에 무슨 두부장사를 한다고 저러오?" 천석 령감이 헐뜯기 시작했다. "아이고, 말도 마오. 저 령감은 두부콩을 가는 매돌소리만 들으면 그 집에 가 두부를 먹지 않고선 사흘 앓은 령감이라이." 천석 령감은 건 가래를 떼며 말을 이였다. "아들 혼삿말 하러 갔을 때는 어쩌겠소? 사돈집에서 때마침 두부와 돼지고기를 끓인 국을 상에 차려놓았지. 게걸에 득식이라고 저 령감은 맛도 보지 않고 한술 푹 떠 입에 넣었다오. 그런데 어찌나 따가웠는지 그 우멍한 실눈이 메워지고 혀로 바삐 입안의 걸 이볼 저볼 옮기며 따가운 김을 입귀로 씩 빼면서 식히는 판이요." 곽재 령감은 불쑥 사돈령감에게 이렇게 물었다. "이 집은 어느 해 졌습둥?" "예, 게걸년에 졌지." "예- 재목은 어데서 베왔습둥?" 사돈령감은 곽재 령감이 하는 상이 너무나도 우스워 겨우 웃음을 참으면서 놀려주었다. "예- 덴 당낙골에서 베 왔습구마." 사돈령감은 분명 게걸스레 돼지고기를 먹다가 입천정이 다 뎄다고 곽재 령감을 골려준게 불 보듯 빤한게 아니고 뭔가. "야, 이 집이 덥긴 덥다." 곽재 령감이 숟가락을 놓으면서 후후 거리는 걸 보고 사돈령감이 부채를 건넸다. 곽재 령감이 부채를 쥐여 훌훌 부채질하자 보다못한 사돈령감은 다른 부채를 쥐여 살랑살랑 흔들었다. "부채야 이렇게 부채질해야 견디지." 곽재 령감은 부채 아까워 아예 부채를 흔들지 않고 머리를 흔들었다. "에이, 전라도 깍쟁이라더니. 흥!" 곽재 령감은 눈에 거슬려 사돈령감을 따라하지 않고 부채질을 훌훌 했다. 천석 령감은 계속 곽재 령감 흉을 보았다. "저 령감은 그날 렴치 불구하고 돼지고기국을 세 사발이나 먹어줬다오. 또 한 마을에서 전라도깍쟁이 며느리 순희를 맞아들여 조수로 삼게 됐으니 그번 행차에 꿩 먹고 알 먹은 셈이지." "하하하." 령감들이 제 나름대로 웃어댔다. 허나 동불사에서 이사해온 덕칠 령감은 뾰족한 턱을 가로 저었다. "곽재 령감이 이전에는 그렇잖았는데." 천석 령감은 침을 튕기면서 계속 말공부를 했다. "그게 양, 십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게요." "제 고뿔도 남을 주지 않을 깍쟁이라니까.” 덕칠 령감이 동을 달았다. “전라도 깍쟁이령감은 사돈령감이 울고 갈 상깍쟁이구먼.” 천석 령감은 사기나서 팔소매까지 걷어부치고나서 연설했다. “한번은 공량을 바치고 천수해 대중식당에서 소주를 마실 때였지. 불시에 매대 쪽에서 귀에 익은 울음소리가 터졌네. '아이고, 내 돈이야, 재수 없이 떨어졌구나.' 개 달려가서 살펴보니 글쎄 흰 보자기를 허리에 질끈 동여맨 깍쟁이 령감이 우멍한 실눈에 눈물이 글썽해서 하수도구멍을 들여다보면서 통곡친단 말이요. 어째 그러는가 물었더니 '두부 한근, 술 닷 돈 잃어버렸다.'고 하지 않겠소. 사실 돈을 호주머니에서 꺼내다가 오전짜리 돈이 그만 하수도구멍에 똑또그르르 굴러 빠져들어갔단 말이요. 숱한 술군들이 왁자그르 웃음폭탄을 터뜨리면서 그런 의미에서 한잔씩 들지 않겠소." "하하하." "허허허." 령감들은 무릎을 치며 박장대소했다. 훤칠한 덕칠 령감은 덤덤히 앉아 초모자로 부채질했다. "에잇, 좀스럽긴, 원, 쯧쯧쯧." "그뿐인줄 아오? 내 보다못해 5전짜리 엽전을 꺼내 주었지. 그래서 울음을 뚝 끊었던게 잠시 후에 또 운단 말이요.” “어째?” 령감들은 의아해 천석 령감을 쳐다보았다. “'아이고, 금방 잃어버린 돈이 있으면 요 거까지 합하면 10전이 되겠는 걸. 아하이고.’ 이렇게 넉두릴 하면서 또 운단 말이오. 얼마나 창피한지. 원." 모두들 어처구니없어 "허허허." 하고 웃었다. 령감들이 무릎을 치며 배를 끌어안고 웃음보를 터뜨렸다. 동불사 덕칠 령감이 턱을 만지면서 의아해 했다. "입방아쟁이 령감, 곽재 령감 원래 그런 사람 아니라니깐. 우리 아래웃집에 살 때요. 색다른 음식이나 술이 있으면 청해 대접했다이. 인심이 후한 령감이오. 쌀독에서 인심이 난다고 그때 쌀고생이랑 돈고생이랑 얼마나 했소. 그래서 그렇게 된 거요." 천석 령감은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그게 다 낡은 그루터기에서 이밥 먹던 소리요. 그 령감을 전라도 깍쟁이라고 하면 뭐라는지 아오? '흥, 난 함경북도 길주 사람이야. 굳은 땅에 물이 고인다이.’ 이러고 개 잡은 포수처럼 어깨 어쓱해서 코방귀를 뀐단 말이요. 곽재 령감은 문 밖으로 나서기만 하면 만날 뒤짐 지고 우멍한 실눈으로 땅바닥을 참빗질하면서 다닌단 말이요. 그러다가 쇠붙이, 헌투레기, 지어 지푸라기라도 보기만 하면 주어다가 제 집 마당에 쌓아놓는다니까. 그 령감네 집은 페품수구소 같아 잡동사니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지 않았겠소?" 이때 손자녀석이 천석 령감의 대머리를 짝 치더니 오이를 뜯어달라고 몸을 탈면서 응석을 부렸다. 그 바람에 천석 령감은 마지못해 입을 거두고 자리를 떴다. 천수해 령감이 송곳니만 남은 입안이 다 들여다보이게 헐헐거리며 웃다말고 의아한듯이 물었다. "어째 천석 령감 말이 믿어지지 않는단 말이요. 무슨 놈의 깍쟁이는? 쯧쯧." 여태껏 입에 빗장을 지르고 있던 덕칠 령감이 석쉼한 목소리로 말했다. "곽재 령감은 궂은 날 갠 날을 가리지 않고 고삐를 채는대로 쟁기를 말없이 수걱수걱 끄는 황소처럼 일했소. 그런데 총결 때는 어떻게 됐소? 정치대장이노라고 말공부를 하러 사처로 싸다니던 천석 령감은 백여원 탔지만 곽재령감은 5전짜리 동전 세개 밖에 타지 못했소. 손맥이 탁 풀려 어떻게 일하겠소? 보리고개를 넘기 전에 천정이 다 들여다보이는 멀건 푸성귀죽을 마시고 소똥 말똥을 다 말려 때는 신세에 깍쟁이 되잖은 수가 있겠소? 그래 답답해 투레기를 팔아 술을 먹었지." 천수해 령감과 덕칠 령감이 머리를 끄덕이였다. 덕칠 령감이 초모자로 부채질 하자 광대뼈가 튀어난 두만 령감이 입을 열었다. "저 천석 령감이 남의 말을 혀바닥이 다슬게 해도 자기는? 곽재 령감은 두부나 얻어 먹을가구바자굽에까지 콩을 쪽 심고 겹벌로 바자를 세웠단 말이오. 걸 저 땅딸보 천석령감이 당장 콩을 없애라고 우멍한 실눈을 부릅뜨고 을러멨지. 천석 령감은 뜨개소처럼 곽재 령감을 떠밀어 제치고 바자를 와락 뽑았지. 뭐, 콩을 많이 심어 먹으면 자본주의 싹이 튼다던가. 곽재 령감도 천석 령감의 아름에 든 바자 한끝을 틀어잡고 미세, 당기세를 하는 판이요. 천석 령감이 콱 당겨 제 힘에 바자를 안은채 뒤로 엉덩방아를 찧으면서 벌러덩 넘어갔다이. 그 대머리 상통을 보고 숱한 구경군들이 코 싸쥐고 웃었다이. 두부는커녕 푸성귀죽을 겨우 얻어먹으면서 곽재  령감은 벙어리 랭가슴을 앓듯 했지." "어이, 범이 자기 흉을 하면 온다더니 곽재 령감이 또 오오." 덕칠 령감이 저쪽에 대고 뾰족한 턱짓을 했다. "아직도 곽재 령감 말이요?" 천석 령감은 너럭바위에 올방자를 틀고 도고히 앉아 또 곽재 령감을 씹어쳤다. "십여년 전에 천수해 사위가 왔을 때요. 저 령감이 사위를 쫓자고 빤빤한 마당을 쓸면서 뭐랬는지 아오? '양? 남이야 량식절약공약을 어기고 사흘이 멀다 하게 가시집에 놀러 오든 말든 더운 밥 먹고 식은 걱정 할게 있소?' 힐끔 들여다보니 사위가 듣는둥 마는둥 하는 눈친지라 마당을 몇번 썩썩 쓸다가 뭐라고 했는지 아오? '뭐? 보자는 딸은 오지 않고 사위가 와서 며칠 더 노는데는 어쨌다고 그러오? 제발 량식절약학습반엔 보내지 마오. 얼마나 창피하겠소. 괜히 가시집에 와서 망신당하고 집에 돌아가 내 딸을 못살게 굴겠다이. 오늘 돈과 량표를 내고 간다이. 뭐? 우리 집에 량식공작대까지야 보낼 필요는 없소.' 공연이라도 그런 멋진 공연이 어디 있겠소? 그래서 사위는 아침도 먹지 않고 량표와 돈을 홱 팽개치고 가버렸지." 덕칠 령감이 퉁방울눈으로 쏘아보건 말건 눈치 도끼등인지 땅딸보령감은 계속 물어뜯었다. "십여년 전 곽재 령감 생일날 내 생이 두대나 상한 걸 생각하면 헤이고, 그날 아침에 곽재 령감이 정지에서 가마뚜껑을 절거덩 챵! 들었다 놨다 하면서 오뉴월에 가마에 서리치게 잔소릴 합데. '며느리, 딸이 가져온 돼지고기는 잘게 써오. 그래야 덜 축이 날게 아닌가." '예, 근심 마소서.' 함경도 깍쟁이령감하구 전라도 깍쟁이며느리 손이 척척 맞았지. '그 아까운 돼지고기를 씻은 기름물을 버리지 말라. 뒀다 먹기요.' '예- 그럴바엔 아예 돼지고기를 샘물터에 잠궈놓고 내내 그 물을 퍼다 끓여 잡숫죠. 호호호.' '그래. 뛰는 놈 우에 나는 놈 있다더니. 전라도 며느리 진짜 함경도 도둑보다 나아. 허허허. 그러나 손님들을 수태 청해 생일상에 돼지고기점도 올리지 않아서야 쓰겠어?" "호호호." 시아비하구 며느리 부르고 쓰는 판이오. "에끼, 령감, 귀를 그 집에 떼 둬서 그리 신통한 상 하오?" 바른 총인 천수해 령감이 듣다못해 한마디 툭 내쏘았다. 땅달보 천석 령감은 개의치도 않고 또 씹어쳤다. "듣기나 하오. 콩나물 대가리고 버섯채고 소금범벅인 건 둘째고 주먹만큼 썬 돼지고기를 보고 곽재 령감은 정지에 대고 며느리를 욕해대지 않겠소? 곽재 령감은 누구 저가락이 돼지고기점에 갈까봐 우멍한 실눈이 동그래서 지켰다이. 헌데 생게나 다름없는 돼지고기를 누구도 먹지 못하고 그대로 상을 물렸다이. 곽재 령감은 며느리 코에 대고 엄지를 내밀었다이. 깍쟁이 령감이 술은 또 동네 부조를 믿고 딱 한병만 달라당 올렸다이." "에끼, 령감, 남을 헐뜯어도 유분수지.” 이때까지 실말인지 옛말인지 물고 헐뜯은 천석 령감의 말을 반신반의하던 두만 령감이 세귀눈을 부릅뜨며 바른총질 했다. “당신은 온 동네를 항상 입만 달고 싸다니면서 얻어먹어주다가 무슨 남의 소리요? 곽재 령감 생일날엔 그게 뭐요? 물을 탄 술병을 가져 가고서도 남의 말을 하오?" 그러자 천석 령감은 제꺽 덕칠 령감을 업고 똥구뎅이에 뛰어들었다. "령감은 그날 용감하게 돼지고기점을 먹더구먼." "에잇, 령감, 자기는 게걸스레 먹다가 생이를 상해가지고서도 무슨 군말이요?" 덕칠 령감이 쇠소리나게 툭 쏘았다. "령감, 항상 틀만 차리지 말고 듣소. 정치대장질을 잘 했으면 그때 모두 굶을 지경으로 살았겠소? 이전에 내 바른 총질을 한다고 동불사에 쫓아보내고서도 아직도 온 한날 곽재 령감을 물어뜯소? 입이 아프지도 않소?" "저런 령감이 우환거리라이. 퉤!" 덕칠 령감은 버릇처럼 침까지 내뱉었다. 입방아쟁이 령감은 그래도 지지 않으려고 반격을 가했다. "아니, 이거 실로 랭수에 생이 부러질 소리도 한다. 당신넨 지금 나를 물어뜯지 않고 뭐요?" 천석 령감은 우쭐해 이번엔 또 남을 업고 똥물에 뛰어들었다. "우리 마을 사람들이 쌀고생을 하면서 산게 어디 내 혼자 탓이라고 이러오? 난 다 저 대대당지부 서기 상진 령감 말대로 했다이." 그 말에 모두 입을 헤 벌린채 서로 쳐다볼뿐이였다. 한참 후에 덕칠 령감이 한마디 했다. "에이, 문화대혁명 때부터 천석 령감이야 전문 남에게 똥바가지를 덮어씌우지 않았고 뭐요? 남을 업고 똥구뎅이에 뛰여드는데야 누가 당하겠소. 개 똥 먹는 버릇 고치겠소? 자기 잘못이 어디 있소? 또 상진 령감 탓이지. 흥!" “정치야 그래도 상진 령감이 제대로 하지. 예로부터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해야 한다고 하지 않았소? 상진 령감이야 우리 마을 사람들을 구하려고 한뉘 애를 쓴 령감이지.” 이때 곽재 령감이 두부를 한판대기나 실은 수레를 몰고 지나면서 소리쳤다. "어이, 령감들, 우리 집에 가서 두부에 술이나 마시기요." "보오. 쌀독에서 인심이 난다고 저 곽재 령감은 본래 그런 깍쟁이 아니라니까." "암, 그렇구말구." 령감들의 말에 천석 령감은 대머리에 송골송골 돋은 땀을 딱으면서 엉거주춤 일어났다. 커다란 의문부호가 감탄표를 껴안고 늙고 비술나무 아래의 숱한 령감들의 머리를 놀랍게 쳤다. "?!" 이때 성호가 성큼성큼 마을로 돌아왔다. “여러분, 안녕하십둥?” 한참 한담하던 마을 로인들은 성호를 보자 반가와 야단쳤다. “에이고, 우리 마을 수재가 돌아왔네.” "소를 방목하면서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더니 대학에 척 붙었지. 뭐야?” “감사합니다. 다시 뵙겠습니다.” “그래, 그래.” 성호는 마을 로인들과 갈라져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때 밭에 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던 상진은 아들을 보고 기뻐 어쩔줄 몰랐다. “그래 어디 배치받았니?” “시내 광고회사에 가게 됐습구마.” “그래? 참 장하다, 장해!” 상진은 가래짝 같은 손으로 성호의 어깨를 다독이면서 집 안으로 들어갔다. 성호는 칠순이 다 된 머리 허연 부모가 아직도 농사를 짓는 것에 마음이 아팠다. 성호의 고향은 개혁개방하면서 집체로 농사를 짓던데로부터 개체로 농사를 지으면서 농민들의 생산적극성이 전에없이 높아졌다. 그들은 하나라도 농사수입을 올리려고 자기에게 차례진 밭을 기름이 찰찰 넘치게 다루고 있었다. 점심상에 마주 앉자 상진은 "광고회사에 들어가면 무슨 일을 한다니?" 하고 물었다. "제품광고를 하는 일입니다. 말로는 광고수입의 20프로를 수고비로 준답디다." 막내아들의 말에 상진은 한참 궁리하더니 "돈은 벌겠지만 대학에서 배운 지식은 별로 써먹지 못하겠구나."라고 했다. 성호도 한숨을 후~ 내쉬였다. "아버지, 광고회사에서 돈을 잘 벌면 부모를 시내에 모셔가겠습꾸마. 한뉘 농사를 지으면서 고생한 부모를 잘 모셔보고 싶습구마." "효성이 고맙다만 우린 농촌을 떠나지 않겠다. 시내에 가서 뭘 하니? 농사군은 밭을 떠나지 말아야 해. 선렬의 목숨과 피로 바꿔온 아까운 밭을 어떻게 버리고 시내에 가니? 묵어빠지는 밭을 보면 마음이 아파서 못 산다." 이것이 농사꾼의 근본이였다. 밭을 믿고 살고 밭에 목이 얽매여 한뉘 농사를 지어야만 사는 농사군들이였다. "칠순이 넘어서 어떻게 계속 농사를 짓겠습둥?" "저 밭을 어떻게 얻어온 밭이냐? 우리 조상들이 조선에서 가마를 빼 지고 두만강을 건너 이 곳에 와서 어떻게 개척한 황무지냐? 항일투사들의 피로 바꾼 땅이야." 성호는 머리를 끄덕였다. 이때 셋째누나 은숙이 들어섰다. 그녀는 성호한테 피뜩 눈인사를 하고는 아버지를 보고 직구를 날렸다. “아버지, 이젠 그 개꼬리 같은 밭고랑을 가지고 사위하고 다투지 맙소. 동네 영상해 못 살겠습구마.” “뭐라고?” 상진은 눈을 부릅뜨며 정색했다. “그 반고랑이 네게면 네게고 내게면 내게라고 똑똑히 갈라야 해.” 성호가 물어보니 은숙은 이런 사연을 오라비한테 하소연하는 것이였다. 천지꽃산 기슭의 밭을 제비를 뽑아 나누게 됐었다. 그런데 제비를 쥐다나니 부녀간이 나란히 밭을 나눠가지게 됐다. 그런데 부녀간 밭 사이에 반 고랑짜리가 대체 누구에게 속하는지? 은숙은 아버지 거면 어떻고 자기 거면 어떻고 시비를 하지 말고 부모한테 주려고 했다. 그런데 사위 경만은 떽 했다. 그 바람에 상진과 사위는 대판 시비가 붙었다. 대장이 상진과 경만을 데리고 가서 다시 두 집에 차례진 밭고랑을 자로 재여본 결과 그 반고랑은 확실히 상진네 것이 아니겠는가! 경만은 미터 자를 활 던져버리면서 “에이씨, 이젠 가시아버지고 뭐고 모르겠다.” 하고 욕설을 퍼붓더니 쥉쥉 산 아래로 내려갔다. 그때부터 경만은 가시집이라면 코방귀를 뀌면서 등을 돌렸다. 농민들은 밭이라면 부모자식간에도 한치  양보도 없었다. 밭은 농민의 인생 전부였고 생명선이였기 때문이다. 밭 한고랑을 떼가는 것은 생명의 일부를 떼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간주됐다. 성호는 사연을 듣고 나서 “됐소. 생산대에서 나눠준대로 하오. 이제 자꾸 시비를 해서 뭘 하겠소.” 하고 눅잦혔다. 은숙은 “에이, 깍쟁이 같은 령감이, 반고랑을 사위를 주면 어떻다고 그러오?” 하고 눈을 흘겼다. 상진은 세귀눈으로 셋째딸을 마주 보면서 정색했다. “얘야, 반고랑 밭이 아까워 그런게 아니야. 옛날부터 부모 자식간에도 돈을 세서 주고 세서 받는다고 했다. 뭐나 공짜는 공짜고 주는 건 주는 거야. 그러나 시비는 명확히  갈라야 해.” “또 그 얘기군요. 빚을 지고 살아도 시비 지고 못 사는 아버지니까.” 은숙은 그저 피씩 웃고 말았다. 영옥은 성호를 건너다보면서 "이젠 대학도 졸업했는데 데려올 새애기는 없니?" 하고 궁금해했다. 성호는 한숨을 후~ 내쉬더니 "어디 맞갖은 새애기 그리 많습니까?" 하고 심드렁해했다. 영옥은 "그래도 말이 있는 처녀라도 없니?" 하고 바투 들이댔다. "있긴 한데.” 상진과 영옥은 희망에 찬 눈길로 동시에 성호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뒤말을 기다렸다. 성호는 말을 꺼낸바 하고는 몽땅 얘기해주었다. "광고회사를 들어가게 된 것두 그 처녀애 아버지 도와준 덕분입구마." 그는 겨우 뒤말을 이였다. "그 처녀애는 교수네 집 무남독녀인데 대학생입니다." “대학생? 거 좋구나.” 상진이 한마디 했다. 영옥은 한참 묵묵히 앉아 착잡한 상념에 잠겼다가 침묵을 조용히 깼다. "새애기 아무리 좋아도 짝이 기울어선 안되지. 인물이 아무리 고와도 쓸 데 없다. 사람은 마음이 고와야 한다. 인물을 뜯어먹고 산다더니?" "쯧쯧쯧, ‘흥!’ 소리도 반간이라고 무슨 말을 하오? 교수네 딸이면 좀 좋아?" 상진이 입을 틀어막으려고 해도 소용없었다. 은숙이 끼여들었다. "가문도 비슷하면 좋다. 그쪽은 교수구 우린 농부가 아니냐? 사돈도 짝이 기우면 이후에 말썽이 생긴다." 상진은 한숨을 후~ 내쉬였다. "내 잘못이 크구나. 옛날 내 현 공안국 국장을 내놓고 이 마을에 돌아오지 않았더라도 이런 일은 없겠는데. 너네 자식들한테 한뉘 농부네 아들이란 딱지가 붙어다니게 해서 미안하구나." "예? 옛날 아버지가 공안국 국장을 했습니까?" "그래, 그랬다." 아버지 대신 엄마가 말했다. "너네 아버지 집에 오지 않았으면 현장이라도 됐을 거야." 성호는 아버지를 다시 쳐다보았다. “아버지, 왜 그때 국장을 그만 뒀습둥? 그러지 않았더라면 자식들도 잘 됐겠는데. 적어도 세상 어중이떠중이들에게 ‘농부의 아들’이란 말을 듣지 않으면서 떳떳이 살겠는데.” 상진은 땅이 꺼지게 한숨을 후~ 내쉬였다. 말머리 무거운 그였지만 이번에는 자식들에게 말하지 않으면 안 되겠는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농부네 아들이라고 심지를 굽히지 말라. 넌 당당한 대학생이야. 문화대혁명이 아니래도 이 지경은 되지 않았을게야.” 성호는 듣다가 궁금해났다. “왜 국장을 그만 두고 농촌에 돌아왔습니까? 혹시 착오라도 졌습니까?” 상진은 또 땅이 꺼지게 내쉬였다. “말하자면 길다. 그때 나는 지식이 없었다. 옛날 서당방에서 배운 글을 가지고 어떻게 국장을 계속 하겠니? 문화대혁명 때 반란파들이 날 물어먹었지. 억울한 사건을 바로잡을 땐 난 벌써 퇴직나이를 훨씬 넘겨서 공안국에 되돌아갈 수도 없게 됐다.” 영옥이 보충했다. “아버진 그래도 지금 로임을 받는 농민이다.” “고향 마을에서 부모를 모신게 다행이지.” 상진의 말에 영옥이 동을 달았다. “네 아버지는 효자다, 효자.” 상진은 가슴 아픈 과거사를 간단히 말했다. “속담에 충신은 효자로 될 수 없다고 난 국장은 못했지만 부모들께 조금이라도 효성한게 다행이야.” 아버지 말을 듣고 성호는 콧마루가 시큼해났다. “그때 고향에 돌아오지 말고 국장을 계속 했더라면 부모도 잘 모시고 잘 살 수 있지 않았겠습둥?” “농촌에 있는 부모처자를 어쩌니?” “시내에 모셔가면 됐을 걸 그랬습니다. 공안국 국장이면 가족의 호구도 시내에 올리기 쉽지 않았습둥?” “후에 조직에서도 내게 정치착오 없다고 결론지은 후 부모처자를 시내에 모셔오라고 했다. 그런데 조직에 손을 내밀기 싫더라.” “토지개혁 때 간부들은 다 저 령감처럼 사상이 새빨갛다.” “난 그때 집으로 돌아오면 곁에서 조석으로 부모를 잘 모시고 처자를 돌볼 수 있다고 생각했지. 고향에 돌아와 사업해도 마찬가지로 나라와 인민을 위해 일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저 령감이 깍쟁이 돼 출세하지 못했다. 현장한테 술이라도 사 먹였으면 지금 쯤 국장이겠니?” “헛소릴 작작 하오. 술을 사 먹이고 국장을 하면 어쩌고 현장을 하면 어떻소? 그런 부패한 관리를 해서 뭘 하오?” 성호는 아버지의 순박한 사상감정에 머리를 숙어졌다. “그때는 그렇게 하면 효성도 하고 나라의 충신도 되는 거라고 생각했지. 넌 아버지 교훈을 섭취해서 전도를 개척할 때 기회를 놓치지 말라. 사람의 평생에 좋은 기회는 몇번 차례지지 않는다. 그런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성호는 아버지의 의미심장한 말씀을 마음  속에 깊이 아로새겨두었다. 영옥은 화제를 돌려 “교수집 딸이 우리 같은 농민 시부모를 좋아할가?” 하고 우려를 나타냈다. 상진은 영옥한테 눈을 흘겼다. “쯧쯧, ‘흥’ 소리도 반간이라는데 쓸데없는 말을 하지 마오.” 그는 성호한테 머리를 돌렸다. “부모 걱정 하지 말고 전도를 개척해라. 넌 농부의 아들이란 딱지를 떼버리고 이젠 당당한 대학졸업생으로 세상에 첫발을 내디딘게야. 농부네 아들이라고 심지까지 농부의 소농경제 사상의식으로 놀아선 안된다. 이제 광고회사에 들어가 솜씨를 펴라. 배필로 될 수 있다면 교수 집 딸과 약혼하면 좀 좋아 그래?” “알았습구마.” 그때 은숙이 성호를 보고 한마디 귀띔해주었다. “넌 절대 아버지처럼 살지 말라. 기실 우리 집은 농민이지만 아버지 양성한 간부들이 지금 시내 공안국에 수태다.” “양?” 성호는 눈이 떼꾼해져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지금 공안국 리철갑이란 과장이랑 이모부랑 다 아버지 수하였어.” 성호는 흠칠 놀랐다. "아니, 리철갑 과장이란 승호 아버지 아닙둥?" "어째? 리철갑 과장네 아들을 면목 아니?" “예, 동창생입구마.” “그래?” 영옥은 상진을 돌아보면서 입을 함박만큼 쫙 벌리면서 놀라했다. “걔를 압둥?” “알다뿐이겠냐?” “쩌쩌, 그만두지 못하겠소? 저 로친 말이 많아 대사야.” 상진은 황급히 눈을 부라려 영옥의 입을 틀어막았다. 영옥은 제꺽 화제를 돌렸다. “무슨 일이 있으면 이모부한테도 찾아가라. 네 이모부도 지금 공안국 형사과 부과장을 한다더라.” 성호가 쳐다보자 상진은 머리를 끄덕였다. “옳다. 내 강운룡을 제발시켰지. 네 이모 중매도 섰지.” “진작 찾아가려다 말았습구마. 이전에 이모부한테서 권투랑 배우긴 했지만 어쩐지 졸업배치까지 부담시키고 싶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를 똑 떼 닮았구나. 네 아버진 옛날부터 남의 신세를 지려고 하지 않은  위인이야. 자기 제발한 강 과장한테 신세를 지는게 싫어 그랬지.” 상진은 성호의 손을 꼭 잡았다. “네가 자기 힘으로 이 세상에 꿋꿋이 서라고 그래. 좀 힘들더라도 자기 능력으로 사업을 잘해서 한 걸음, 한 걸음 올라가야 보람찬 거야.” 성호는 “예, 명심하겠습니다.” 하고 머리를 끄덕였다. 그는 이 시각만큼 아버지가 얼마나 존경스러워보였는지 몰랐다.
124    대하소설 진달래소야곡(10) 댓글:  조회:1433  추천:0  2018-02-13
                                            18. 춘향 어디에 있나? 모두들 졸업을 앞두고 승호가 코 다쳤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며칠 지나도록 학교 측에서는 아무런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성호는 송파와 송호 형제 깡패무리 위협 앞에서도 승호와 홍희, 은영을 보호하려고 나선 것을 결코 후회하지 않았다. 그러나 승호의 첫사랑, 약혼녀 경옥이 돌층계에 머리를 쪼아 피못 속에 기절해 넘어가던 장면을 본 후에는 생각이 좀 달라졌다. 경옥은 결코 홍희나 은영만 인물체격이 못하지 않았다. 오히려 체격은 홍희보다  나아보였다. (모두들 첫사랑은 평생 잊지 못한다고 하지 않았는가. 승호는 어쩜 첫사랑을  그렇게 헌신짝 차버리 듯할 수 있단 말인가?) 순간 성호는 자기도 마음에 걸렸다. 전도와 리상을 위해 첫사랑 순희를 대학생이 아니라고 버린 일이 떠올랐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승호처럼 순희의 정조를 짓밟지는 않았다. 아니, 손 한번도 쥐여본 적도 없었다. (자식, 결혼하지 않을게면 다치지 말게지.) 성호는 승호를 한번 따끔하게 찔러주고 싶었다. 침실에 승호가 나타나자 성호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면서 말했다. “얘, 할 말이 있다.” 승호는 갑자기 성호를 와락 포옹했다. “감사해. 이번에 네가 우리를 살려냈어.” 성호는 승호의 가슴을 떠밀어냈다. “친구끼리 당연하지.” 승호는 성호의 손을 잡아끌었다. “가자, 우리 집에 가서 술이나 한잔 마시자. 엄마 두부까지 앗아놓고 기다린다.” 성호는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려고 따라나섰다. 자그마한 호수가에 자리잡은 승호네 2층 아파트는 꽤나 으리으리했다. 높다란 담장 철문을 열고 들어서자 나팔꽃, 코스모스, 백일홍이 울긋불긋 만발한 화단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승호는 집 안에 들어서면서 소리쳤다. “친구 왔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승호 어머니는 허리를 꾸벅 굽히는 성호를 반갑게 맞았다. “아이구, 정말 남자답구먼.” 성호는 승호의 어머니가 아주 깔끔하게 생긴 미인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짙은 눈썹아래 어글어글한 눈, 우뚝 솟은 큼직한 콧마루, 두툼한 입술… 어디를 보아도 젊어서 미인이였다는 느낌이 확 들었다. “어서 2층으로 올라 가오.” 벽화는 뒤따라 올라가면서 끝없이 두툼한 입술을 널어놓았다. “승호야, 속담에 부모를 팔아서라도 좋은 친구를 하나 친하라는 말이 있다.  관건적인 시각에 생사결단하고 친구를 구하는 이런 친구는 금덩이를 주고서도 바꾸지 못해.” 성호는 승호 어머니가 침이 마를 지경으로 칭찬하는 것을 들으면서 2층에 올라갔다. 2층 객실 벽에는 경복을 입은 승호의 아버지와 한복을 입은 승호 어머니 거폭의 결혼사진이 걸려 있었다. 농촌에서는 단색텔레비죤도 보지 못하는 세월에 과장님 댁에는 색텔레비죤까지 있지 않겠는가. 승호가 랭장고를 열자 줄느런히 꽂맥주병이 긴 목을 내밀었다. 승호는 성호를 데리고 2층 베란다에 나갔다. 호수에 피여난 빨간 련꽃과 실실이 넘실거리는 수양버들이 기분을 한결 돋구며 방실방실 추파를 보냈다. 이윽고 웬 처녀애가 채를 들고 올라와 밥상에 줄느런히 올려놓았다. “녀동생 선금이야.” 승호는 처녀애 쪽에 얼굴을 돌리더니 “선금아, 인사해라. 딱친구 성호야.” 꽤나 예쁘게 생긴 선금은 생글 웃으면서 인사했다. “오빠한테서 많이 들었어요. 오빠를 구해줘서 감사해요.” 성호는 어색하게 머리를 끄덕이며 웃음으로 인사를 보냈다. 밥상에는 성호가 좋아하는 푹 삶은 돼지고기보에 노르스름한 두부지짐이 올랐다. 명태국과 시원한 배추김치도 보였다. 선금은 손수 성호와 오빠의 잔에 맥주를 찰찰 넘치게 부었다. “두 분 마음껏 드세요.” “저도 한잔 마시오.” “아니, 전 마시지 못해요.” 그때 승호가 맥주병을 성호한테 주었다. “선금아, 성호 오빠 술 한잔 받아라.” 선금은 “아니, 아니.” 하면서도 술잔을 잡았다. 그들 셋은 한잔 쭉 마셨다. “그럼 전 실례하겠어요.” 선금은 머리를 다소곳이 숙이고 쟁반을 들고 조용히 내려갔다. 이윽해 승호 어머니가 올라와 성호를 보고 부산을 떨었다. “이름이 뭐라던가?” “리성호라고 부릅니다.” “오- 성호, 어쩜 우리 승호와 형제처럼 생겼소. 이름도 똑같이 범 ‘호’라. 호랑이 형제 같은 친구들이구먼. 천천히 드오.” 벽화는 내려가다가 도리머리를 흔들더니 몸을 돌려 성호를 다시 유심히 여겨보았다. “왠지 딱 누굴 닮은 것 같은데. 성호는 고향이 어디오?” 성호는 맥주잔을 내려놓으면서 “천수해 어느 산골에 있습니다.” 하고 무심히 대답했다. “오, 그래? 고향이 어느 마을이오?” “태평구촌이라고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오- 그래?” 벽화는 어글어글한 눈이 데꾼해졌다. “아버지 명함은?” “농사군인데요. 리상진이라고 불러요.” “뭐라고? 리상진?!” “예.” 순간 벽화는 손으로 입을 가리면서 놀라는 기색을 보였다. 승호는 “혹시 아는 분입니까?” 하고 물었다. “아, 아니야. 너희들 하도 쌍둥이처럼 생겨서…” 벽화는 황급히 표정을 바꾸더니 말끝을 흐리면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승호는 객실이 조용해지자 성호에게 시원한 맥주를 부어주고 물었다. “할 말이 있다더니?” 성호는 기다렸다는듯 스스럼없이 입을 열었다. “전번에 약혼녀가 돌층계에 머리를 쪼아 피를 줄줄 흘리며 대성통곡치는 걸  보고 안됐더라.” 승호는 돼지고기점을 성호 앞의 접시에 집어놓으면서 대수롭잖게 말했다. “걔 무슨 약혼녀라고? 부모 동의도 없었어.” “부모 동의도 없이 왜 다쳤니? 그 녀자애와 결혼할 생각도 하지 않으면서.” 승호는 성호를 피뜩 마주 쳐다보더니 맥주잔을 들어 성호의 잔과 마주치고는 목구멍이 미여지게 꿀떡꿀떡 들이켜더니 더러운 속심을 털어놓았다. “딱 결혼을 념두에 두고 처녀애들과 친해야 한다는 법은 없잖니? 건 다 옛날 소리야. 련애는 결코 결혼하기 위한 건 아니지.” 성호는 어이없어 도리머리를 흔들기까지 했다. “얘, 그게 무슨 소리야. 련애는 결혼대상을 고르기 위한 과정 아니냐?” “픽!” 승호는 랭소했다. “련애는 남녀가 이성을 즐기는 거야.” “뭐라고?!” 승호는 문께를 내다보더니 격분해하는 성호를 제지했다. “얘, 흥분하지 말라. 괜히 우리 둘이 싸우는가 하겠다. 자, 술이나 마시자.” 그가 술잔을 내들었지만 성호는 술맛이 없었다. “정말 말이 아니구나. 결혼할 대상이 아니면 아예 다치지 말아야지. 그게 뭐야? 너 이제도 얼마나 많은 처녀 정조를 유린할지 모르겠구나. 사람새끼, 어쩜 그럴 수 있느냐?” “야, 피곤하다, 피곤해. 딱 결혼하기 위해 련애한다는 건 진짜 피곤해. 건 그저 후대를 보려고 녀성을 얻는 봉건전통관념이야.” 승호는 오히려 제 쪽에서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넌 진짜 봉건통이야. 어쩜 개혁개방시기 신식청년이 머리채를 땋아 늘어뜨린 리씨왕조시기 봉건통이냐?” 성호는 어이없어 입을 쩍 벌렸다가 분김에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승호는 술이 얼근히 들어가자 자기 나름대로 지껄여댔다. “난 녀자 하나로는 모든 녀자들의 사랑을 다 맛볼 수 없다고 생각해. 녀자애들마다 사랑의 맛도 달라. 이것 저것 맛을 봐라. 얼마나 새로운 감이 나는가. 옛날부터 희신염구(喜新厌旧)라는 말이 있어. 난 희신염구병에 걸려서 새 걸 좋아하고 묵은 걸 싫어해. 한 녀자를 몇년 데리고 놀면 자연히 싫어진다. 그래서 끊임없이 새 녀자애를 친해 놀아야 해. 어째?” 성호는 듣다못해 중둥무이했다. “딱 숱한 녀성들을 데리고 놀아야 사랑의 참맛을 본다고 생각하니?” “그래.” 승호는 성호에게 잔을 내밀었다. 성호는 승호의 잔을 손으로 내리눌러 상 우에 내려놓게 하고 입을 열었다. “참다운 사랑은 리몽룡처럼 벼슬이 올라가도 한 녀성을 일편단심으로 영원히 사랑하는 거야. 참사랑은 청춘남녀의 피끓는 한쌍의 심장으로 변함없는 사랑의 선률을 울리는 것이야.” 승호는 술잔을 들어 혼자 쭉 굽을 내고 잔을 내려놓았다. “이 봉건통아, 아직도 뭐 ‘일편단심’이요, ‘백년해로’요냐? 지금 어디 리몽룡이나 춘향 같은 처녀총각이 하나라도 있니? 무슨 정조고 뭐고, 떡대가리 같은 소릴 작작 해라. 다 썩어빠진 옛말이야. 인생을 헛되게 랑비하지 말고 젊어서 실컷 즐기는 것이 락이야!” 성호는 밥상을 탕 쳤다. “야, 그래 동물처럼 성애가 사랑의 전부란 말이냐? 어째 처녀의 착한 마음이나 사랑보다도 몸을 더 사랑하느냐? 그래 짐승처럼 아무 녀자나  닥치는대로 얼리고 닥치고 사기쳐서 성교나 하는 걸 지고무상의 락이라고  생각하니? 건 짐승들이나  할 짓이야!” “그래 네가 말하는 사랑이란 도대체 뭐냐? 너도 들을라니 적게 련애한 건 아니더구나. 고향에 첫사랑 순희라고 있었다지 않았냐? 왜 은영이, 정희와 련애하니?” “난 련애는 해도 정조를 짓밟진 않았다. 심지어 손도 쥐여보지 않았어.” 성호는 자기 련애관을 토로했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처녀와 백년을 두고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깊이 사랑하는 거야. 진짜 사랑하는 처녀를 위해 목숨까지도 바칠 수 있는 사랑, 그런  사랑이야 말로 진정한 사랑이야! 사랑은 상대방을 점유하는게 아니야. 베푸는 거야.” 승호는 허구픈 웃음을 입귀로 흘렸다. “누가 사랑에 사심이 없다고 했니? 로실히 말해 사랑은 자사자리해. 너도 은영을 좋아하면서도 정희와 가만히 련애하지 않니? 사랑은 성생활을 떠나 운운할 수  없는 거야. 아, 고조에 올라 머리가 붕 뜨고 온 몸이 둥둥 하늘로 날아올라가는 것처럼 황홀한 경지에 이를 때, 아, 그 때야만이 사랑의 절정인 거야. 또 한 녀성에게서 모든 녀성을 맛볼 수 있니? 련애를 할수록 녀성들마다 사랑의 향기가 각각이야. 마치 꽃마다 생김새가 다르고 향기가 다른 것처럼. 야~ 녀성들 진짜 날 죽여준다, 죽여 줘. 그 육체미에 진짜 미칠 거 같아!” 승호는 진짜 황홀한 경지에 올랐을 때처럼 흥분돼 지껄여댔다. “생각해봐라! 가슴이 밋밋한 경옥이 몸 하나로 어찌 녀성의 육체미를 다 대체할 수 있어? 녀성들 육체마다 그 미와 향기가 각각인거야. 이 멍청아, 너도 빨리 재미를 봐라.” 성호는 점점 더 어이없어 도리머리를 홰홰 저었다. 그때 승호 어머니가 문을 삐쭉 열고 들어섰다. 성호는 억지로 어색한 웃음을 지어보이며 오이쪼각을 집어 입에 넣었다. 벽화는 맛있게 구운 고등어를 담은 접시를 성호  앞에 놓으면서 나직이 말했다. “이제 주고받는 말을 다 들었소. 성호라던가. 제 말에 도리는 있소. 허나 저 승호도 그럴만한 사연이 있어 그 애와 헤여졌소.” “엄마!” “아니야. 너희들 이후에 의좋게 보내려면 말하는게 옳아.” 승호가 말려도 벽화는 기어이 두툼한 입술을 열었다. “경옥이 엄마가 저 애를 뭐라고 욕했는지 아오? 항상 '바람둥이네 새끼'라고 욕했소. 내 어떻게 키운 아들인데. 그렇게 욕지거리를 한단 말이요? 바꿔놓고 성호라면 그렇게 악다구니질하는 집 딸과 약혼하겠소? 그런 앙칼진 년을 가시엄마로 모시고 살 만하오?” 그녀는 너무 격분해 손까지 부르르 떨렸다. “경옥의 에미는 나와 중학교때 동창생이요. 그런데 어찌 우리 불쌍한 승호를 그렇게 입에 담지 못할 쌍을 한단 말이요? 자기는 그렇게 정파다운가? 검정개 돼지 흉을 한다고 하오.” 승호는 듣다못해 말렸다. “엄마, 그만 하십시오.” 성호는 승호 어머니와 경옥의 어머니가 중학교 동창생들이라는데 갈등이 심한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꾹 참고 승호 어머니 말을 듣다가 한마디 물었다. “부모들이 반대해도 둘이 좋아서 그런 관계까지 벌였으면 끝까지 책임져야지 않습니까?” 승호는 쓴 오이를 씹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 애를 사랑해?” 성호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자초에 사랑하지 않으면서 왜 다쳤니?” “그런 건 아니야. 사실 경옥은 내 첫사랑이야. 그런데 걔네 엄마 날 ‘과부네 새끼’라고 욕하니까 복수하려고 다쳤다.” 성호는 더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승호를 뚫어지게 쏘아보았다. 벽화는 보다못해 “자, 이젠 경옥이 말을 그만하고 맥주나 마시오. 채 다 식었구나. 내 데워올가?” 하고 어색한 기분을 돌려세우려고 했다. 성호는 손사래를 쳤다. “됐습니다. 술맛이 없어 더 마시지 못하겠습니다.” 벽화는 일어나 나가면서 “괜히 다투진 마오. 술이나 포근히 마시오.” 하고 억지로 웃어 보였다. 성호는 자리에서 일어나기까지 하면서 “감사합니다.” 하고 인사했다. 이윽고 성호는 승호에게 통장훈을 쳤다. “네 카멜레온처럼 이랬다저랬다 천변만화하는 그 더러운 련애관을 버리지 않는 날엔 함께 술도 마시지 않겠다. 날 찾지도 말라.” 승호는 성호를 손가락질을 하면서 피씩 웃었다. “참 답답하구나. 정말 철학을 배운 거 같잖구나. 천지만물이 다 변하는데 누가 사랑이라고 변하지 않는다 했냐?” “에이, 듣기도 싫어.” 승호는 우쭐 일어나려는 성호를 붙잡아 앉혔다. “내 말을 들어봐라. 홍희나 은영과 같이 예쁘고 따르는 대학생들이 줄을 쭉 섰는데. 왜 욕을 처먹으면서 천하디 천한 중학생출신 녀자애를 계속 사랑해야 한단 말이냐? 황차 경옥은…” 그는 눈알을 떼굴떼굴 굴리더니 고등어쪼각을 집어 입에 넣고 우물우물 씹으면서 말꼬리를 꿀꺽 삼켜버렸다. 승호는 경옥을이성에 대한 호기심으로 한 2년 데리고 놀았다. 그러나 몸만 뜨거워졌지 정은 오히려 점점 식어갔다. 설상가상으로 경옥보다 훨씬 풍만한 홍희와의 치정에 푹 빠진 후부터 경옥의 비행장 같은 밋밋한 가슴에 정이 뚝 떨어졌던 것이다… 승호는 어머니와 선금이 들을가봐 성호에게 속심의 말을 더 할 수  없었다. 성호는 승호와 련애관이 판이하게 다르다지만 누구도 누구를 설복시킬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성호는 더는 술맛이 없어 우쭐 일어났다. “됐다. 술도 잘 마셨고 속심도 잘 나눴다. 이젠 숙사에 돌아가야겠어.” 승호는 말리는 척했다. “얘, 랭장고에 맥주 몇병 더 있어. 더 마시다 가라.” 허나 성호는 기어이 그 귀족 아파트 울안 같은 높다란 담장 속에서 나왔다. 저쪽에서 경복을 입은 작달막한 매부리코가 마주오고 있었다. 피뜩 보니 승호 아버지 같았다. 성호는 보기도 싫어 황급히 골목길에 굽어들어섰다. 어느날, 성호가 학용품을 사들고 선녀음식점 문 앞을 지나갈 때였다. “야, 성호!” 등뒤에서 승호가 소리치면서 헐레벌떡 쫓아와 손을 잡았다. “한잔 마시자.” “싫다, 술맛이 없다.” “오늘 녀자 말 하지 말고 술이나 맛있게 마시자.” 승호는 성호를 끌고 선녀음식점으로 들어갔다. 숱한 손님들이 이쪽에 머리를 돌렸다. 승호를 알아보는 몇몇 손님들은 질겁해 부랴부랴 일어났다. 승호는 항상 깡패들과 싸웠기에 시내에 소문난 싸움군이였다. “아이유, 오빠들 참말 오랜만이구만요.” 선화가 아양을 떨면서 다가왔다. 그녀는 승호와 성호가 은영 때문에 갈등을 겪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지라 함께 온 것을 이상하게 생각했다. 얼굴에 여러 군데 멍이 든 그들 둘의 얼굴을 보고 혹시 싸우지나 않았는가고 의심했다. “뭘 시킬가요?” 승호는 손사래를 쳤다. “개고기 계렬로 가져오오.” “알았어요.” 이윽고 복무원아가씨가 개고기로, 개뼈다귀로, 개가죽고기로, 개간으로, 개밸로 상다리 부러지게 올렸다. “소주 할가?” “시간도 없는데 그러자.” “무슨 일이 그리 바쁘니?” “목동이여서 졸업배치생각만 해도 골치 아프다.” 승호는 성호 앞의 큰 잔에 소주를 찰찰 넘치게 부었다. 성호도 술병을 받아 승호 잔에 부었다. 그들은 술잔을 댕 부딪쳤다. “나하고 홍희, 은영을 보호해주어 각골난망이야.” 승호는 개고기를 집어 입에 넣고 질근질근 씹으면서 개기름이 번지르르한 입을 열었다. “최성균교수하구 잘 부탁해보지. 널 시내에 남겨 달라고.” “에이고, 뭘 보고 농부네 아들을 시내에 남기겠니?” 승호는 주위를 살피더니 나직이 말했다. “그럼 시내처녀와 약혼하면 어떨가?” 성호는 한숨을 후~ 내쉬였다. “배치받기 위해 가짜약혼이라도 하라는 거냐?” “그래, 살자면 마지막수라도 써야잖겠니? 사랑이라는 거 별거더냐? 만나서 살을 비비면서 사느라면 사랑이 생기는 거야.” 성호는 승호의 글러먹은 건달놈의 련애관과 혼인관을 딱 듣기도 싫어 화제를 돌렸다. “넌 어디에 배치받을 작정이냐?” “공안기관에 들어갈 예산이야.” 성호는 자기 귀를 의심했다. “야, 아버지와 함께 일할 작정이냐?” “그래, 정부기관이나 돈깨나 생기는 단위에 배치받을 수도 있어. 적어도 난 학생총회 부주석이고 학생당원이고 체육위원이 아니냐?” 승호는 술을 거나하게 마셨는지라 한바탕 큰소리를 탕탕 치면서 불어댔다. “기실 정부기관에 들어가 일하고 싶은데 이번에 일을 쳐서 정부기관에 들어갔다가 배길 것 같지 못해.” 성호는 머리를 끄덕였다. “잘 생각했다. 정부 기관에야 날뛰는 정객들이 많은데 네 같은 놈이 며칠 삐치겠니?” 승호는 한 숨을 후~ 내쉬였다. “에이, 경옥이 엄마 날 즉살나게 욕하지만 않았어도 경옥에게 복수하느라고 일을 치지 않았을 거야.” 성호는 눈이 떼꾼해졌다. “진짜 경옥을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복수하느라고 해쳤니?” 승호는 주위를 둘러보더니 머리를 끄덕였다. “경옥이 엄마가 나를 더러운 바람둥이네 새끼라고 욕한게 진짜 이발이 갈리도록 괘씸했어.” 성호는 술맛이 없어 술잔을 내려놓았다. “야, 이 놈 새끼야, 경옥의 어머니와 복수할 걸 왜 경옥을 짓밟았니?” 승호는 “글세 지금 생각하면 그래. 그 일만 없어도 난 정부기관에 가서 장차 시장이나 서기 쯤 하겠는데 말이야.” 하고 한숨을 후~ 내쉬였다. 승호는 마음이 아팠는지 술잔을 들어 성호의 잔과 마주치고 굽을 쭉 냈다. “넌 시내에 남겠으면 시내 처녀와 약혼해라. 혹시 말이 있는 처녀 있니?” “불시에 마대치기를 해오겠니? 어떻게 시내 처녀와 약혼하는 방법으로 리상과 전도를 실현해?” “종수는 시내 국장집 딸과 약혼했다더라. 이제 시내 어느 신문사에 배치받기로 했단다.” “그래? 가정배경이 든든해야 일이 슬슬 풀리는 판이구나.” 승호는 어두워지는 성호의 얼굴표정을 보고 뒤말을 꿀꺽 삼켜버렸다. 농민의 아들인 성호에게는 혹시 상처를 입힐 수도 있기 때문이였다. 그는 인차 화제를 돌렸다. “시내 처녀 소개해 줄가?” 성호는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그만둬. 사랑은 사랑이고 졸업배치는 졸업배치지. 어찌 사랑에 졸업배치를 섞울 수 있냐?” 승호는 골치 아팠다. “야, 이 봉건통아, 항상 순결성이고 뭐고? 사랑이라고 어찌 순결하기만 해? 리몽룡과 춘향이 어디에 있느냐? 아직도 그따위 개도 먹지 않는 사랑의 순결성을 고집하니? 농민출신은 시내 가시아버지 방조라도 받아야 졸업배치를 잘 받아.” “됐다, 됐어.” 성호는 승호의 말을 반박했다. “개혁개방을 한다는 건 결코 성해방을 하라거나 우리 민족의 전통적인 혼인관을 부정하라는게 아니야. 난 시내에서 좋은 일자리를 찾지 못하더라도 자기 성적만큼 가라는데로 가서 인생 가치를 실현할 테야. 난 차마 시내 처녀를 사닥다리로 졸업배치를 사기치지 못하겠어.” “이런 바보.” 승호는 꽉 막힌 성호가 답답해 도리머리를 홰홰 돌리면서 삿대질해댔다. “야, 인생길에 그런 좋은 챤스 몇번 있다고 이래? 챤스를 놓치지 말아야지.” 그는 성호의 옆에 다가와 사진 한장을 꺼내 들었다. “이 처녀애 어때?” 성호는 보지도 않으려고 했다. 그러나 눈 앞에 대는 사진 속의 처녀는 피뜩 봐도 예뻤다. “네 동생 아니야?” 그는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야, 말도 안돼.” “왜?” “녀동생까지 내놓겠니?” “넌 매부로선 손색없는 사람이야. 의리심도 강하지. 진짜 현대판 리몽룡이야. 내 매부 되면 졸업배치 근심하지 말라. 우리 둘이 공안기관에 가서 손잡고 일하면 두려울 것도 없어.” 성호는 자기에게 기대려는 승호의 허무하고 나약한 속심지가 가련하고 우스웠다. “선금은 사범학교를 다녔는데 이제 곧 시내 소학교에 배치받을 거야." 성호는 입에 빗장을 지른 채 묵묵부답이였다. "네보다 두살 지하니까. 나이도 어울리지. 얘가 춤을 얼마나 선녀같이 잘 춘다고. 어때? 전번에 녀동생 봤지 않았니?” “그래서 집에 청했던 거야?” “겸사 겸사.” 성호는 그제야 베일 속에 가리였던 승호의 속내를 알아챘다. 도와주려는 마음과 믿음만은 고마웠다. 그러나 어쩐지 건달 같은 승호가 싫었다. 성호는 저가락으로 고기점들에 고추를 마구 버무려놓으면서 내키지 않는 어투로 말했다. “이전에 그 세집 지하독서실에서 뭐라 했느냐? ‘어찌 녀성들의 치마자락에  매달려 리상을 실현하려고 하는가?’, ‘땅을 밟고 하늘을 떠인 사내대장부로서 자기 피타는 노력으로 공부를 잘해 리상과 전도를 개척해야 해.’ 그 때 넌 그렇게도 커보였다. 그런데 날 보고 그 썩어빠진 길을 걸으라는 거냐?” “사람이 살자면 허허실실, 기동령활한 전략전술이 필요해. 만약 나처럼 학습성적이 높으면 모르겠는데. 넌 중축에 가나마나 해.” 성호는 저도 몰래 머리가 숙어졌다. “사람의 일은 몰라. 네가 우리 선금과 약혼하면 시내에 남기만 하겠냐?  공안국이나 법원에서 일할 수 도 있어.” 성호는 한잔 기울이며 묵묵부답했다. 그러나 승호의 호의를 무시할 수도 없어 진퇴량난에 빠졌다. 취기 오른 승호는 또 제 좋은 소리를 줴쳤다. “처녀라는게 별게 아니야. 모두 하루 처녀야. 그런 하루 처녀가 그리 중해?” 순간 성호는 피뜩 의심이 쑥 들었다. (자식, 네 녀동생도 하루 처녀란 말이냐?) 성호는 너무 매끄러운 승호를 생각할수록 부아통이 터져 술잔으로 밥상을 꽝 치고 격분해 고함쳤다. “그 더러운 련애관에 얼마나 많은 무고한 처녀들이 정조를 짓밟혔니? 아직도 내 앞에서 그 더러운 말을 하겠니?” 승호는 손님들의 눈길이 뜨거워 손사래를 쳤다. “됐다, 됐어. 우린 아무리 말해도 한곬으로 갈 수 없어.” 승호는 잔을 쭉 굽내고 안주를 몇 저 집더니 훌 일어났다. 카운터로 가서 결산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음식점 문을 박차고 나가버렸다. 선화가 이쪽으로 걸어와 문 밖을 눈짓했다. “더러운 놈새끼.” 성호는 분김에 남은 술을 병채로 들어 꿀꺽꿀꺽 마시고 비틀거리며 나가려고 했다. 선화는 뒤따라가 부축했다. “안방에 들어가서 한잠 자고 가오.” “왜 이래? 저리 가!” 성호는 선화를 활 밀어놓고 나가버렸다. 선화가 따라 나오면서 소리쳤다.  “야, 혼자 갈만 하니?”  성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비틀거리며 팔을 휘둘러댔다. “내 시내 년들 신세에 시내에 남을 거 같애. 농, 농촌에  가더라도 내 힘으로 살 테야.” 선화는 승호에게 골나가지고 자기와 성을 내는 성호가 얄미웠다. “차도 복잡한데 교통안전 주의해라!” 성호는 들었는지 말았는지 비틀거리면서 황혼빛이 너울치는 학교 숙사로 터벅터벅 힘겹게 걸어갔다. 그의 눈 앞에는 불찌가 반짝반짝 빛났다. 홀연 그 황혼의 락조가 불타는 불티 속에서 한 미녀가 웨딩드레스를 입고 너울너울 춤을 추면서 자기한테로 달아오는 것이 희미하게 보였다. 그런데 그 미녀가 누구인지 아물거려 분간하기 힘들지 않겠는가.                                                                                19. 충고 찜통에 찌는듯한 날씨에 성호는 침대에 들누워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면서 속궁리를 굴렸다. 아무리 궁리해 봐도 어쩐지 승호의 매부로 되기는 싫었다. (개자식, 날 자기 집안에 끌어들여 호위무사로 삼으려고? 저런 놈이 공안국에 들어가면 무슨 짓 할지 누가 알아?) 성호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부랴부랴 신을 주어 신었다. 그때 문이 벌컥 열리더니 승호가 들어왔다. "야, 녀동생을 데리고 왔어." "아니, 말도 하지 않고?" 그때 문이 배시시 열리더니 선금이 사뿐 들어서서 혀를 홀랑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성호는 황급히 인사를 받으면서 승호를 돌아봤다. 선금은 귀밑까지 홍조가 번지고 있었다. 성호는 승호를 보고 나직이 “우리 둘이 조용히 말하자. 녀동생을 먼저 내보내라.” 하고 선금을 흘끔 곁눈질했다. 승호는 선금을 잠간 현관에 나가 기다리라고 했다. 선금이 나가자 성호는 "아니, 이게. 뭐야?" 하고 어처구니없어 입을 짝 벌리기까지 했다. "네가 선금을 좋아하는 것 같아 데리고 왔다." "야, 내 언제 좋다고 했니? 난 이미 사랑하는 처녀가 있어." 뜻밖의 말에 승호는 따지고 들었다. "뭐라구? 누구야?!" 성호는 명확히 말했다. "네 녀동생을 더 괴롭히고 싶지 않아. 이 일은 없던 일로 하자." 말을 마치자 성호는 문 밖으로 나갔다. 승호는 성호 뒤잔등을 삿대질하면서 대성질호했다. "야, 너 꼭 후회할 거야." 선금은 벽에 돌아서서 어깨를 가늘게 들먹였다. 성호는 더는 미룰 수 없었다. 어제 술에 만취돼 꿈 속에 떠올랐던 처녀를  찾아보아야 했다. 그는 정신을 똑바로 가다듬고 곧추 녀성숙사 쪽으로 걸어갔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고 주춤 멈춰섰다. (그래, 숙사에 없을 거야. 꼭 그녀가 잘 가는 열람실에 있을 거야.) 그는 정신을 잃고 허둥지둥 열람실로 반달음쳐 갔다. 교정의 언덕을 올라가면서도 그녀와 뭐라고 말할가고 속궁리를 베아링처럼 굴렸다. "열번 찍어 넘어지지 않는 나무가 없다고. 아무리 질겨도 이번에야 견디지 못하고 꼭 넘어갈 거야." 성호가 열람실에 올라가 보니 아닌게 아니라 은영이 습관처럼 제일 뒤에 앉아 책을 열심히 뒤지고 있지 않겠는가. (아니, 기말시험도 끊났는데 저렇게 열심히 독서해?) 그는 스적스적 그녀한테로 다가갔다. 그가 벼르고 별러 마음먹고 찾은 그녀는 바로 은영이였다. 그녀는 성호를 피뜩 보고서도 새침한 표정을 지으면서 눈을 살며시 내리깔고 책을 보는 척했다. (조 표정 죽여주는구나.) 성호는 쿵쿵 울리는 심장을 가까스로 진정하면서 은영의 곁에 슬쩍 앉았다. "안녕?" "오랜만인데요." 은영은 대충 인사하고는 버릇처럼 굽실굽실한 체육머리를 뒤로 쓸어넘겼다. "무슨 일이 있어요?" "은영이, 할 말이 있소." 은영은 주위의 눈총을 둘러보더니 "공부 바쁜데 이러지 마세요." 하고는 책을 하나 슬쩍 밀어주었다. 성호는 눈치채고 책을 보는 척하면서 얼굴을 가리고 은영에게 나직이 속삭였다. "바깥에 나가기요." 은영은 주위의 눈길이 쏠리자 마지못해 책을 가방에 주섬주섬 주어넣고 일어섰다. 성호는 피가 온몸을 세차게 박차고 흐르고 심장이 쿵쾅, 쿵쾅 높뛰는 것을  느끼면서 바깥으로 나갔다. 그뒤로 좀 거리를 두고 은영이 체육머리를 훔치면서 따라 나갔다. 성호는 은영을 데리고 나무숲에 둘러싸인 운동장으로 걸어갔다. 운동장에서는 성대학생운동대회에 참가할 준비를 하는 대학생선수들이 달리기를 하고 있었다. 진짜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운동장이였다. 이 운동장에서 은영과 함께 성대학생륙상경기대회에 참가하려고 뛰지 않았던가. 겨울에는 빙장에서 은제비들처럼 쌍쌍이 나래치지 않았던가! 그는 뒤따라 온 은영을 돌아보면서 무거운 입을 간신히 열었다. "은영이, 이 운동장은 우리 둘이 달리던 활무대였지." 은영은 외까풀눈을 곱게 흘겼다. "어머, 추억에 푹 빠질 여유도 있는가요?" 성호는 은영을 정겹게 마주 바라보았다. "은영이, 첫사랑 널 영원히 사랑해. 이 목숨과 심장을 바쳐서라도 영원히 사랑해." 은영은 너무 당황해 주위를 둘러보다가 성호에게 눈을 흘겼다. "아직도 미련 버리지 않았어요?" "그런 말 하지 말라. 내 가슴이 찢어져." "…" 성호는 은영의 눈치를 흘끔 보면서 또 입을 열었다. "은영은 아주 마음이 착하고 지조가 굳센 처녀요. 절대 승호와 그런 관계를 버무렸다고 보지 않소. 머저리 아니고서야 어찌 경옥이랑 홍희이랑 관계를 버무린 짐승과 그럴 수 있겠소?" "그만 하세요." 허나 성호는 멈추지 않았다. “승호 헛소리를 누가 믿겠소? 그 놈 새끼, 아무리 사내답고 처녀들을 꼬시는 재간이 있다고 해도 누가 그 미친 수캐 같은 놈한테 몸을 맡겨?” “…” 은영은 나무숲 속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성호는 뒤따라가면서 계속 공세를 가했다. “승호는 처녀들을 자기 더러운 욕구를 만족시키는 도구로 볼뿐이야. 그런 놈을 믿고 어떻게 살아?” “이렇게 헐뜯으면서도 친군가요? 진짜 소인배군요.” “친구를 헐뜯는게 아니요. 전번에 승호와 술을 마시면서 속뽑이를  다 해보았소. 승호는 무한한 자극을 받으려고 끊임없이 처녀를 갈아댈 놈이요.” “그만 하세요.” 성호는 진정어린 눈길로 은영을 마주보면서 뒤말을 이었다. “어째 내 마음을 몰라주오. 은영은 녀동생처럼 정든 처녀요. 은영이 전도를 생각해서 모든 체면을 잃고 충고하는 거요. 승호, 그 자식 미련의 거미줄에 묶여 작작 따라다니란 말이요. 내 순결한 첫사랑을 처참하게 만들지 마오!” 그는 은영의 손을 잡고 정중히 말했다. “내 사랑을 받아주지 않아도 되오. 허나 승호는 포기하오. 한뉘 눈물을 흘리면서 고생할 거요.” 은영은 머리를 다소곳이 숙이고 어깨를 들먹이며 발걸음을 옮겼다. 저쪽 수림 속에서 엿보는 정희의 걀쭉한 얼굴 반쪽이 보였다. 성호는 은영을 뒤따라 걷다나니 교정을 벗어나 어느덧 학교 뒤산으로 올라갔다. 서늘한 소나무숲이 그들을 시원히 감쌌다. 그는 은영을 와락 끌어안았다. "시퍼런 대낮에 뭔가요?" 성호의 가슴을 밀어내는 은영의 눈시울에는 뜨거운 눈물이 흥건했다. 그녀는 줄 끊어진 구슬처럼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과거를 묻지 말고 이제부터 다시 시작하기요." "…" "너와 승호와의 과거를 묻지 않을 거야. 우리 이제부터 시작하자." "…" 은영은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그녀의 눈시울에 뜨거운 눈물이 고였다가 줄 끊어진 구슬처럼 걀죽한 볼을 타고 주르르 흘러내렸다. 드디여 그녀는 비술나무를 짚고 어깨를 들먹였다. "야, 은영아, 울지 마라. 네 울면 내 심장이 다 터진다." 은영은 한참 후에야 간신히 울음을 멈추었다. “은영아, 속 시원히 말해. 날 사랑하지? 맞지? 널 속이지 말라.” “…” 모든 것이 그녀에게는 돌이킬수 없는 일이였다. 승호와 넘지 말았어야 할 너무 깊은 곬을 넘었던 것이다. 땅을 치면서 통탄해도 쓸데 없었다. 회상하기도 싫은 비극이였다. 색마의 감언리설에 유혹돼 청춘을 매장해버린 허무맹랑한 악몽이였고 죄악의 구렁텅이였다. 한 순진한 처녀의 청춘과 순정을 매몰한 함정이였다. 성호가 새삼스레 사랑을 고백하자 은영은 마음의 상처가 더욱 아파났다. 그러나 그 내막을 고스란히 성호에게 드러낼 수는 없었다. 목숨 같은 정조를 잃은 그녀는 자기에 대한 순정을 고이 간직한 성호 앞에 설 자격이 없다고 느꼈다. 그럴수록 후회와 고통, 상처가 독침으로 돼 가슴을 아프게 찔렀다. 그녀는 이를 옥물더니 뽁뽁  갈았다. 색마 승호가 한없이 가증스러웠다. “오빠, 자꾸 캐고 드는게 정말 지겹다고. 무슨 자격으로 남의 사생활을 자꾸 간섭하는 거요?” 그제야 성호는 은영의 비밀을 알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지막으로 충고하죠. 절 깡그리 잊으세요. 하루라도 빨리 잊을 수록 오빠에겐 좋을 거요.” “널 잊으라고? 나한텐 어떤 존잰데…” “몇번 더 말해야 해요? 난 오빠를 사랑하지도 않아요. 난 시집가지 않아. 한평생 혼자 살래. 이 더러운 세상에서 어떤 남자를 믿고 살 수 있어? 세상의 남자는 몽땅 승냥이고 색마고 변태야. 흑흑, 흑흑…" 순간 그녀는 가방을 툴렁 떨어뜨린 채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어디론가 정처 없이 허둥지둥 뛰여갔다. 성호가 은영의 가방을 주어들고 뒤쫓아갔다. 성호의 그 모습 너무나도 가엽고 작아 보였다… 오래지 않아 졸업식이 닥쳐왔다. 성호는 은영에게 마음 속으로 감사했다. 그도 은영의 상처를 자꾸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은영한테 자기를 사랑하는가를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혹시 은영이 자기를 사랑하는데 전도를 고려해 농민의 아들인 자기를 포기하고 공안국 과장 시아버지를 등에 업으려고 승호한테 몸을 맡겼는가를 알고 싶었다. 그러나 은영이 그런 말을 할리 없었다. 성호가 파고 들면 파고 들수록 은영에게는 옷을 한벌, 한벌 벗기우는 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모든 비밀을 무덤까지 가지고 가야 했다. "별, 정조를 잃은 주제에. 흥! 농부 아들이라고 나무려?" 이젠 성호도 은영에 대한 모든 미련을 버리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이 세상에서 살 것 같았다. 마음의 한쪽 구석에서는 반발심도 생겼다. (내 꼭 은영보다 더 예쁘고 어린 처녀를 만나 보란듯이 살 거야.) 후~ 그는 한숨을 후 내쉬고 나서교정 나무숲 속의 시원한 아침공기를 한가슴 가득  들이켰다. 아무리 시원한 아침 공기도 가슴 한가운데 남은 실련의 아픔은 가셔주지 못했다. 은영과 함께 뛰여다니던 교정의 운동장, 스케트를 타던 잡초가 자란 빙장을 둘러보는 성호의 마음은 비길데 없이 쓰라렸다. 은영과의 쓰라린 사랑을 기억 속에서 지우려고 해도 자꾸 은영과 지내던 일들이 새록새록 떠올라 비길데 없이 고통스러웠다. 체육머리를 흩날리면서 저 운동장에서 화살처럼 달리던 은영이, 매화꽃이 핀듯이 눈꽃을 떠인 나무들이 빙 둘러선 빙장에서 빨간 운동복을 입고 타력있는 몸매를 날렵하게 놀리며 빨간 불새처럼 훨훨 날아예던 은영이, 빙장에서 스케트를 타던 성호를 걸어넘겨 외발로 얼음가루를 날리면서 반원을 그리며 돌아와 미안해하던 은영이… (아, 그게 우리 첫 만남이였지. 하늘이 내린 우연한 만남이였는데. 얼마나 사랑스런 처녀인데. 이젠 얼마나 고통스런 추억으로 남았는가.) 성호는 쓰라린 추억에 잠겨 허무한 웃음을 지었다. (우린 숱한 학우들의 흡모의 눈길을 한 몸에 받으며 함께 빙장에서 쌍무를 추었지. 후-. 건 모두 꿈만 같은 행복한 추억일뿐이야. 이젠 다 허사로 됐어.) 성호는 고통의 심연에서 허우적거리면서 헤여나오려고 발버둥질쳤다.  허우적거릴 수록 자꾸 은영이 생각이 났다. (은영은 승호한테 당한게 분명해.) 실련의 고배를 재차 마신 성호는 가버린 첫사랑 은영이 자기 마음 속에, 아니, 골수 속에, 대뇌 속에 얼마나 깊이 배겼는가를 깊이 느꼈다. 성호는 사랑하는 은영을 사랑할 수 없어 막 죽고 싶었다. 그는 은영한테 거듭 실련당해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 되였다. 미련의 꼬리에 뺨을 한대 얻어맞은듯 얼얼했다. 뒤산 절벽에 가서 훌쩍 뛰여내리고 싶었다. 양재물을 한사발 꿀떡꿀떡 마시고 이 세상과 결별해버리고 싶었다. 성호는 머리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그는 은영이 도대체 승호한테 시집가는가 두고 보고 싶었다. 성호도 자기가 서글프고 가련하고 곤혹스러웠다. 격분해 주먹으로 교정의 백양나무를 꽝꽝 쳤다. 나무무가지에 앉아 재잘거리던 참새들이 놀라 포르릉 포르릉 날아가버렸다. 은영을 사랑하면서도 사랑할 수 없는 성호의 고통 오죽하랴. (은영의 아버지는 정부기관의 거물급지도자라고 하지 않는가? 그럼 무엇 때문에 승호를 사랑해?) 성호는 몽롱한 안개 속에 잠긴 사랑의 미로에 빠지고 말았다. 그는 아직도 막연한 심연 속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지하에 묻혀버린 그 비밀은 언제 가야 밝혀질 수 있을가? 진짜 가슴에 묻고 무덤까지 가지고 가야 하는가?
123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92) 댓글:  조회:1268  추천:0  2018-02-12
               제25장 시련                    1. 함흥대대 당지부 서기       여우도 눈물을 흘리고 박달나무가 얼어 탁탁 터질 것만 같던 겨울이 아무리 발버둥질 치며 물러가기 싫어해도 끝내는 서서히 다가오는 훈훈한 봄 아가씨한테 밀려 이영 끝초리에서 눈물로 방울방울 곤두박질쳐 떨어지고 있었다. 겨우내 눈보라에 날려와 용을 쓰던 허연 눈도 녹아 내렸다. 여기저기 얼어 갈라 터진 땅 바닥에 봄아가씨의 미소가 흘러 들어가며 진흙물을 채워가고 있었다. 백열화된 반우파투쟁 그리고 대약진, 인민공사 세 폭의 붉은 기가 대지를 휩쓸고 지나간 후 정치기후가 확 달라져 갔다. 상급당조직에서는 정성해 서기의 지시에 따라 허영주 사장의 우파 모자를 벗기고 일약 현인민정부 부현장으로 제발시켰다. 허영주 부현장은 부임되자마자 현당위 부서기 이계삼과 토론한 후 함흥대대와 조개덕 대대를 합병해 함흥대대로 재편성한 후 대대 당총지부를 재구성하는 일부터 착수했다. 허영주 부현장과 이계삼 부서기는 진수해당위 조직위원을 데리고 함흥대대에 내려 왔다. 대대 당 지부 회의에서 장수로인 김병완은 당 지부 확대회의에서 아들 셋을 앞 세운데다 나이도 많기에 더는 당 총지부 서기를 하지 않겠다고 하면서 젊은 당원을 제발시켜 양성할 것을 제의했다. 그러자 흥수가 제꺽 뛰쳐나왔다. “좋습네다. 로서기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제가 서기를 맡아 할라우.” 그는 우먹눈으로 상순과 병완의 눈치를 살피면서 계속 횡설수설 입을 널어놓았다. “병완 서기 말이 옳아요. 젊은 서기를 세워야 생기발랄하고 사업도 척척 해재낄 수 있는기우.” 학수는 이 기회에 동생 흥수가 대대의 권력을 장악했으면 하면서도 병완과 상순의 눈치를 흘끔거렸다. 관건적인 시각에 이계삼 부서기가 나서서 엄숙하게 말했다. “김병완 로서기는 광복 후 줄곧 우리 함흥촌에서 농민들을 이끌어 많은 일을 한 훌륭한 농촌 당지부 서기요. 항일전쟁시기 조선에서 일본 놈들의 경찰국과 숱한 군용다리를 무너지게 만들었소. 간도에 온 후 집 식구들을 이끌어 농사를 지어 장백산 항일유격대에 쌀을 실어 보냈습니다. 그는 또 아들 기준과 창준과 손자 상순을 데리고 장백산에 들어가 유격대에 통나무집을 지어주었고 지하당원으로 돼 항일투쟁을 여러 모로 지지하였습니다. 그는 자손들을 조직해 마을에서 항일투쟁을 하였고 토지개혁 때에는 지주를 청산하여 빈농들에게 밭과 재산을 나눠주었습니다. 항미원조 전쟁시기에는 공안부문을 도와 마을에 기어든 남조선 특무를 숙청하는데 큰 공을 세웠습니다. 반우파투쟁 속에서도 그는 상급 당조직의 영도아래 견정히 사회주의 길로 나아가면서 실제적인 일을 많이 했습니다. 그는 한평생 공산당을 따라 혁명하였고 양심에 어긋나는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젠 연세가 많으시기에 지부서기 사업을 젊은이들에게 대담히 맡기려고 하는데 이는 로지부서기의 아주 고상한 품성이라고 봅니다.” 병완은 황급히 손사래를 쳤다.      “아니, 아니, 과분하게 평가해서 몸둘바를 모르겠소.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데.” 상순이 뭐라고 입을 열려고 할 때었다. 허영주 부현장이 입을 열었다. “내 보건대, 흥수 동무는 입당한지 이제 겨우 반년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지도경험이 없어 당총지부 서기를 하기 적합하지 못합니다.” 흥수는 목에 지렁이 같은 피 줄을 세우면서 우멍눈을 부라리며 발끈 성을 냈다. “아니, 뭐라노? 반우파투쟁 때 허 현장을 투쟁하는데 앞장섰다고 보복하는 건 아니기우?” 학수도 허영주 부현장을 흘겨보았다. 그러나 허영주 부현장은 견결히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흥수 동무는 정치두뇌가 명석하지 못하오. 보오, 그때 허백호 서기가 이 마을에 와서 심갱밀식농사법을 강요했지. 내 반대해 나섰다고 동문 날 대약진을 반대한 우파분자란 모자까지 씌우지 않았소. 그때 흥수 동무는 허 서기 심갱밀식농사법이 맞는지 틀리는지도 잘 분석하지 않고 나를 투쟁하는 데만 앞장섰소. 흥수동무에게 충고하오. 이후에는 뭐나 맞는가, 틀리는가 잘 분석하고 정치투쟁에 나서란 말이오.” 심장을 찔린 흥수는 입을 쩝쩝 다시면서 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때 상순도 한마디 했다. “옳습니다. 흥수는 자칫하면 정치착오를 질 수 있습니다. 뭐나 덧대고 앞장서기만 합니다. 앞뒤를 재지도 못하는 흥수에게 우리 대대 당 지부를 맡길 수 없습니다.” 흥수는 성이 꼭뒤까지 치밀어 붉으락푸르락 하면서 상순을 손가락질하며 고함쳤다. “그럼 당신이 지부 서기를 하라우. 원래 함흥촌은 대대로 당신들 김씨네 조손 3대 세상인 거니까. 지껌은(제길할), 흥!” “당원이란 사람이 그것도 말이라고 하오?” 허영주 부현장은 흥수를 준절히 꾸짖었다. “엄숙한 당지부 회의에서 그게 무슨 말이오?” 진수해 공사당위 조직위원은 좌중을 둘러보더니 엄숙하게 말했다. “함흥촌은 확실히 병완 할아버지와 그의 자손들이 두만강을 건너와 개척한 마을입니다." 실로 그렇다. 함흥촌의 소서구나 계동이나 장개골안나의 숱한 밭과 논 어느 밭고랑엔들 그들 조손 3대의 피땀이 배지 않은 게 있겠는가? "이 마을에서 경력이나 조직능력이나 군중토대나 모든 걸 다 보아도 상순 동무가 당총지부 서기를 하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허영주 부현장은 학수를 건너다보며 “동무 보기에는 어떻소?”하고 바투 들이댔다. 학수는 대세가 기운 것을 보고 입을 열었다. “상순이 하는 것이 좋습니다. 흥수는 아직 경험도 없기에 선전위원을 시켜도 과분합니다. 상순에게서 많이 배우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그 말에 흥수는 흥! 코방귀를 뀌었다. “그럼 조직위원은 누가 하면 좋겠습니까?” 허 현장의 물음에 병완은 가슴까지 드린 흰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학수가 계속 조직위원을 하면 좋을 거 같소.”라고 말했다. “상순 동무, 어떻소?” 허영주 부현장의 물음에 상순은 인차 “동의합니다.”하고 대답했다. 허영주 부현장은 총화발언을 했다. “그럼 이렇게 합시다. 함흥대대 당총지부 서기에 김상순, 조직위원에 리학수, 선전위원에 리흥수로 결정합시다. 모두 동의되면 박수로 통과합시다.” 모두 박수를 쳤다. 그러나 흥수는 또 상순 밑에서 길 생각을 하니 썩 달갑지는 않았다. 하여 박수를 치지 않고 덤덤히 앉아 있다가 마지못해 박수를 치었다. 선전위원이라도 주어했기에 다행이었다. (학수 히야(형)까지 둘이 합세하면 당지부 서긴들 어쩐기오? 상순은 독불장군이 될거잖아.) 흥수는 속으로 시퍼런 칼을 갈며 음흉한 궁리를 굴리고 있었다. “병완 서기, 그간 수고 많았습니다. 상순 동무랑 젊은 동무들의 농촌 사업을 많이 지도해주십시오.” 그러자 병완은 사람 좋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지, 난 늙었소. 90고개를 바라보지만 난 의연히 노당원이요. 새 당총지에서 우리 대대를 잘 이끌도록 뒤에서 도와주겠소.” “감사합니다.” 허영주는 마음속으로부터 노서기에게 감사를 드렸다. 사실 병완은 년세가 든 것도 있었지만 모든 고민과 사상부담을 벗어버리려는 장구지책도 있었다. (맹자는 가혹한 정치는 범보다 무섭다고 하지 않았는가? 백열화된 정치시련을 겪을 필요 없이 깨끗이 물러나야지.) 병완은 당지부 서기를 벗어 멘 뒤 얼마나 홀가분하고 거뿐한지 몰랐다. 허영주 부현장은 진수해공사 함흥대대를 시점으로 잡고 대약진을 할 때 우에서부터 자본주의 길로 나아가는 싹이라던 “3자 1포”(시장 등 3가지 자유, 1가지(토지) 도급)를 회복시키기 시작했다. 그는 함흥대대에 내려와서 우의 지시대로 시장자유를 회복하면서 사원들이 마음대로 진수해 시내에 가서 장을 볼 수 있고 자류지에 곡식이거나 남새를 심어 먹어도 된다고 했다. 게다가 집체식당을 폐지하고 집집마다 자유로 자기 집 가마에 밥을 지어 먹어도 된다고 했다. 또 개인 집에 밭을 떼 맡겨 개체로 농사를 제 마음대로 지으라고 했다. 사원들은 위의 눈치를 흘끔흘끔 보면서도 떼 맡은 밭을 기름이 찰찰 돌게 알뜰히 다루기 시작했다. 그러나 사원들은 한쪽구석으로 이러다가 또 자본주의 길로 나가는데 앞장섰다고 투쟁을 받을까봐 겁났던 것이다. 허나 자기 집에서 밥을 끓여 먹으라는 것만은 얼마나 좋은지 몰랐다. 집체 식당에서 멀건 죽물을 마시면서 사회주의 좋다는 노래를 날마다 부르기보다 자기 집에서 자기 구미에 맛게 죽을 끓여 먹는 것이 좋았다. 봄이 짙어가자 풀이나 많이 캐다가 푸성귀라도 마음대로 많이 끓여 보태 먹을 수 있어 좋았다. 사원들은 이런 날이 얼마나 갈 까고 근심이 태산 같았다. . 박성근은 병완을 찾아갔다. “보오, 내 뭐라고 했습니까? 소련에서도 꼴호쯔가 폐단이 많았습니다. 생산 적극성이 내려가고 살기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저 이화영 영감도 그 머나먼 우즈베크에서 여기까지 달아왔지. 그 영감 말이 멀고도 먼 우즈베크에서 소련을 지나오면서 보니 다 그 즛살(모습)이더라오. 우리 여기선 절대 소련에서 한 대로 하면 안되오, 안돼." 그는 덤덤히 앉아 듣기만 하고 일언반구도 대구를 하지 않는 병완의 눈치를 보고 화제를 돌려 이번엔 지청구를 들이댔다. "김서기, 한 가지 청을 들어 주겠습니까? 나에게 씌운 우파 모자를 벗겨 주십시오.” 허나 병완은 의연히 입에 빗장을 지른 채 덤덤히 앉아 있을 뿐이었다. 성근은 이번에는 상순을 찾아갔다. “김 서기, 내 말한 말이 맞지? 내 말은 모두 진리요, 진리! 내 우파 모자를 벗겨 주오. 내 무슨 잘 못 말한게 있소.” 허나 상순도 일언반구 하지 않았다. 갑갑해난 성근은 버럭 고함쳤다. “들었소? 못 들었소? 억울하게 쓴 우파 모자를 벗겨 달란 말이오? 당신들이 뭘 잘 한 게 있소? 숱한 군중들이 집체식당에서 굶어 죽게 해놓고서! 흥!” 참다못해 상순은 입을 무겁게 뗐다. “빈 양철통이 소리가 더 난다고 개뿔도 모르면서 함부로 혀끝을 놀리지 마오! 또 다른 모자를 더 쓰기 전에! 지금 무슨 세월이라고 입을 벌리기만 하면 구렁이 나가는지 뱀이 나가는지 모르고 함부로 지껄이오?!" 그는 상순을 상냥한 얼굴로 보면서 뒤말을 이었다. "입건사만 잘하오. 그럼 우파모자를 벗기는 일은 내 상급당조직에 말해보겠소.” “에이, 씨! 서기 모자를 벗겨주면 벗는 건데. 뭘 그리 질질 끄오? 벗겨주지 않겠으면 그만두오!” 박성근은 엉덩이를 들더니 휑하니 가버렸다. 턱을 쳐들고 가는 저 모양 보소. 딱 나래 부러진 수탉 같지 않은가? 병완은 백열화된 정치마당에서 뒤로 물러나 앉으니 얼마나 편안한지 몰랐다. 게다가 손자 상순이 사원들을 잘 이끌어나가니 속으로 얼마나 대견한지 몰랐다. 어느 날 아침. 그는 상순이 정치에 계속 휘말려들어 혹시 착오라도 변하면 고생할 까봐 적이 근심됐다. (집체식당을 했다가 마스는가 하면 심갱밀식농사법을 했다가 틀렸다고 하지 않는가? 또 언젠가는 다시 집체 식당을 꾸리라고 할지 누가 아는가? 또 언젠가는 사원들에게 떼맡겼던 밭을 찾아내 집체농사를 짓겠는지, 자류지도 빼앗아 생산대에 들여놓고 집체로 다루라고 할지 누가 아는가? 이랬다저랬다 하는 노선을 어느 걸 따라 가야 한단 말인가?) 병완은 곰방대를 뿍뿍 빨았다. 담배연기를 후 내뿜자 세파에 부대끼며 시련을 겪을대로 다 겪어 밭고랑 같은 주름살이 얼기설기 잡힌 볼이 훌쭉해졌다. 이가 다 빠져 너부죽하던 그의 아래턱이 길쭉해진 것이 알렸다. (아무래도 시름놓을 수 없구나.) 병완은 상순을 찾아가려고 엉거주춤 일어났다. 그때 때마침 상순이 대대 사무실 쪽에서 이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할아버지, 아침진지 드셨둥?” “오, 그래.” 상순은 윗방에 들어갔다. “할아버지, 우에서 몇 해에 한번씩 이랬다 저랬다 해서 원, 어떻게 해야 될지 갈피를 잡지 못하겠습니다.” 병완은 곰방대를 들어 빨다가 말했다. “이런 시국에 뭐나 너무 열성을 부리면서 앞장서지 않는 게 좋아." 병완은 사위를 둘러보더니 상순의 귀에 대고 귓속말을 했다. "공자나 맹자나 왈 '중용지도'  일리 있어. 무슨 정치운동이든 젤 앞장서지 않는게 좋아. 알만해? 언제 어떤 정치몽둥이에 맞아댈지 어떻게 아니?” “글쎄 말입니다.” 병완은 속심의 말을 다했다. “공자 성인이 가로사대, ‘자기를 억제하여 례에 맞게 행동해야 한다.’ 이 세월에는 중용지도가 제일이야. 그것이 자기를 지키고 집안을 지키고 인민을 지키는 정치이다.” 상순은 한숨을 땅이 꺼지게 후- 내쉬었다. “그래도 어찌 시비에 틀린 걸 보고 가만 앉아 있겠습둥. 저 흥수랑 봅소. 소불알 달걀처럼 이 볼 쳤다 저 볼 쳤다 하는 게 보기만 해도 구역질이 납니다.” “허허허.” 병완도 가소로워 너털웃음을 웃었다. “그 인간 그렇게 벌레처럼 정치에 앞장서면서 살 놈이야. 옛날 한길성 같은 놈이야. 일본 놈들에게 아부하면서 사는 더러운 버러지 같은 놈이야.” 상순은 할아버지네 집에서 나와 대대 사무실로 돌아가면서 오랜 시련을 겪은 할아버지의 의미심장한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이때 상길이 다가와 상순을 보고 "정치에 작작 삐쳐."하고 충고했다. 그는 조선 명천에서 아홉 살 밖에 안된 자기 손목을 잡고 일본 놈들과 한길성의 추적을 피해 가녿 소서구에 들어온 삼촌이 불쌍했다. 지독한 정치세파에 못이겨 굶어 사망까지 한 삼촌이 한없이 억울했다. "범도 무서워 피할 힘장사 삼촌이 굶어 세상 뜨다니? 정말 더러운 세월이야. 무서운 세월에 정치에 작작 삐치는게 집안을 지키는 수야." 상순은 할아버지와 사촌형의 충고를 심중히 들었다. (정치파도 속에서 주의해야지. 허나 정치몽둥이에 맞아 죽을가 봐 도리에 어긋나는 일을 보고서야 어찌 목을 움추린단 말인가? 사람이 빚을 지고 살아도 어찌 시비에 지고 살겠는가?) 그는 토성 굽이에 가 서서 흐릿한 하늘을 둘러보며 한숨을 후 내쉬었다. “무슨 속 탄 일이라도 있소?” 난데없이 지춘실이 나타나 생글거리며 배죽거렸다. 상순은 거들떠보지 않고 대대 사무실로 성큼성큼 들어갔다. 춘실은 대대 사무실에까지 따라 들어오면서 상순의 팔소매를 쥐어 당겼다. “조용히 말할게 있소." “무슨 말? 흥!” 춘실은 새침해졌다. “연길에 백과부네 집에 간 을준이 결혼한다오. 가보지 않겠소?”  그 말에 상순은 주춤 섰다가 홱 돌아섰다. "백호가 벌써 결혼하게 됐는가?" 그러나 인차 자리를 떴다. “내게 무슨 상관이오?” “몰인정한 사람이라고. 제 새끼도 모르고 그래…?” 이때 지새금이 대대 사무실과 붙은 서쪽 칸에서 나오며 알은체 했다. “어우, 생원이구먼. 사촌여동생도 오고.” 그제야 지춘실은 입술을 쫑긋 하며 상순을 가로 쏘아보더니 토성 밖으로 나가 버렸다. 상순은 아주머니와 알은체 하고 대대 사무실로 들어갔다. 성이 날대로 난 그는 사무상에 마주 앉아 한참이나 씩씩거리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제대로 돼가는 일이 없었다. (효성을 하려고 공안국 국장마저 하지 않고 마을에 돌아왔건만 부모도 온전히 모시지 못했다. 마을 백성들을 배불리 살게 하려고 애를 써도 어디 잘 되는가?) 상순은 세상이 돌아가는 눈치를 보면서도 생산대 우사의 소들을 몽땅 개인 집에 나눠줘 기르게 했고 밭도 몽땅 사원들에게 나눠주었다. 사원들은 이제야 살 때를 만났다고 좋아 야단쳤다. 병완 네는 생산대에서 비녀뿔을 되찾아다가 외양간에 매고 여물을 주었다. 상순은 저녁에 집으로 돌아오면서 코 깜쟁이 암소를 집에 끌고 돌아왔다. 명옥은 코가 새까맣고 눈확도 새까만 코 깜쟁이 암소를 보고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여보, 이전에 어른들이 말하던데. 코 새까만 소는 말을 잘 듣지 않는다던데.” 상순은 벌컥 화를 냈다. “아무 소리나 줴치지 마오!” 명옥은 빗자루로 갈비뼈가 어룽어룽한 소잔등을 쓱쓱 쓸어주면서 “소가 말을 잘 듣지 않아 답답하단 말이오.”라고 했다. 상순은 안해를 닦아세웠다. “당원에게 소만 생겨도 괜찮은게지. 무슨 좋고 나쁘고 말이 그리도 많소?” 명옥은 이때까지 남편의 말이라면 두말없이 꼽싹꼽싹 순종해왔다. 그런데 이번만은 아니었다. “당원은 사람이 아니오? 당원은 욕심이 하나도 없소? 가져 오는 바 하고는 둥글소를 가져 왔으면 얼마나 좋았겠소." 상순은 우사에서 나오면서 아내를 보고 정중하게 말했다. “당원을 아무래나 말하지 마오. 정치문제에 걸리겠소. 당원은 항상 대공 무사해야 하오. 암소라도 생겼으면 입을 꾹 다물고 잘 먹이기나 하오. 노동력이 없는 집에 저렇게 비틀거리는 암소를 줘서야 어떻게 농사를 짓겠소?” 명옥은 “공산당원은 항상 대공 무사해야 한다.”는 남편의 말이 귀에 못이 박힐 지경이었다. “공산당원은 뭐기에? 당원은 자기 집 안속을 차릴 줄도 모르는 사람인가?” 명옥은 도리머리를 흔들면서 혼자말로 중얼거리었다. 코깜쟁이 암소도 이들 부부간이 주고받는 말을 알아듣기나 한듯이 귀를 벌쭉하고 그들 부부를 번갈아 보며 여물을 우물우물 씹어 꿀꺽 삼키는 것이었다.                                                                                      2. 개구쟁이 시절           어느 날, 상순과 명옥이 일하고 맥없이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은숙이랑 애들이 울안의 옥수수 밭에 모여 서서 뭐라고 떠들어댔다. “아이구, 해바라기 불쌍해라.” “이게 살 수 있을까?” “해바라기 끝내 요 새끼한테 들켰다.” 상순과 명옥이 터밭에 들어 가 보니 옥수수 속에 숨어 자라던 해바라기 대가 분질러지지 않았겠는가! 은숙이랑 분질러진 해바라기 대를 일궈세우고 한창 수수대를 대고 새끼줄로 동여맨 후 진흙을 이겨 발라 놓고 있었다. “덕돌이 한 짓이겠구나.” 상순이 세 귀 눈을 부릅뜨자 애들은 아무 말도 못하고 머리를 숙이었다. 덕돌만은 쌔물거리면서 씩씩거렸다. “내보다도 키 더 큰데 해바라기 대는 견디지도 않는다. 야.” 그 말에 명옥은 손으로 덕돌의 엉덩이를 쨩 치면서 호통쳤다. “이 놈아, 어째 해바라기 대를 끊었니? 다시 그러겠니?” “아이 그러게. 해바라기 꽃이 너무 고와서 뜯자고 쥐여 당긴게 뚝 끊어지지 않겠습니까? 으흐흑, 흑흑.” 덕돌은 흑흑 흐느껴 울면서 변명하려고 했다. 상순은 세 귀 눈으로 덕돌을 무섭게 쏘아보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집으로 들어갔다. 그는 하나 밖에 없는 덕돌과 성을 낼 대신에 은숙이가 밥상 우에 퍼 놓은 돌피죽사발을 창문으로 바깥에 훌 내던졌다. 누런 사발이 물웅덩이에 엎어져 고인 빗물에 밑굽만 보일락 말락 빙그르르 돌아갔다. “아니, 돌피죽을 어떻게 쑨 게라고 그렇게 내던지오?” 명옥은 밖에 달려 나가 물웅덩이에 엎어진 돌피죽사발을 주어들고 보았다. 사발은 이발이 빠졌을뿐 다행히 깨지지는 않았다. 허나 돌피죽은 빗물에 쏟아져 먹을 수 없게 됐다. 사실 쌀 고생이 심해 지난해 가을에 은숙이랑 홍자랑 논밭에 나가서 돌피를 뜯어다가 말리어 절구에 찧어 돌피 쌀을 얼마간 장만해두었던 것이다. 보릿고개를 넘기 바쁠 때 금싸래기 같은 돌피 쌀이었다. 애들은 모두 기분이 상해 무서운 아버지 세 귀 눈을 피해 벽 밑에서 머리를 숙이고 훌쩍거렸다. 명옥은 이발이 빠진 사발을 들고 들어오면서 아까워 두덜거렸다. “싸울 때는 싸우더라도 죄 없는 그릇을 왜 내던지오?” “뭐라니?!” 상순은 점심을 먹을 기분이 없어 숟가락을 밥상에 탕 놓았다. 그는 담배쌈지를 꺼내 담배를 말아 물고 부시를 쳐서 불을 붙이더니 하염없이 창 밖을 내다보면서 무슨 궁리를 하고 또 했다. 은숙이 돌피 죽을 퍼다 밥상에 재차 올렸지만 상순은 숟가락을 들지도 않았다. 상순은 일이 잘 되지 않아 신경질이 나면 집에 와서 가정기물을 부시지지 않으면 마구 내던졌다. 아버지가 굶어 세상을 뜬 후에는 더욱 신경이 좋지 않았다. 글쎄 약 한첩도 온전히 써주지 못하고 세상을 뜨게 했으니 아들된 마음이 오죽하랴. 그때 비를 맞으면서 순자가 집으로 돌아왔다. “아버지, 난 농학원에 붙었습니다.” “뭐? 우리 맏딸 대학에 붙었어?” 상순은 후닥닥 일어나 순자의 손에서 입학통지서를 받아 쥐고 보면서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야, 우리 맏딸 정말 장하구나. 우리 대학생 딸!” 오늘 따라 처녀 티가 나는 맏딸 순자가 얼마나 고운지 몰랐다. 금시 돌피죽 사발을 내던지던 상순이 같지 않게 만면에 춘풍이었다. 불티가 튕기던 세귀눈에는 전에 없이 자애로운 빛이 반짝였다. “순자야, 대학에 가서 공부 잘해라. 너 아비는 가난해 소학교 문에도 가보지 못했다. 만약 공부를 너만큼이라도 했으면 여기서 땅을 파고 있겠느냐?” 그 말에 순자가 한마디 덧붙였다. “아버지는 사회에서 군정대학을 나오지 않았습니까? 아버지야 말로 사회대학 대학생입니다.” “저 윗마을 봉선 여동생 네 성환은 어느 대학에 가니? 그 앤 학교에서 A생인데.” 상순의 물음에 순자는 고개를 숙이면서 도리머리질을 했다. “참 안됐습니다. 성환이, 그 앤 페결핵으로 앓아서 대학시험을 치지 못했습니다.” 울먹울먹하면서 말끝을 흐리는 순자를 보고 상순도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스쳐 지나갔다. “참 아까운 일이구나. 우리 집안에 이름난 수재감인데.” 사실 성환은 청화대학을 목표로 지나치게 몸을 돌보지 않으면서 밤늦도록 공부했기에 폐결핵에 걸려 각혈까지 하여 입원해 치료를 받고 있는 중이었다. “저 삿갓봉 집 경산은 어떻게 됐니?” 순자는 다소곳이 숙였던 머리를 들면서 말했다. “저 윗집 경산인 나와 함께 농학원에 가게 됐습니다. 그 앤 수의학부로 가고 난 농학부로 가게 됐습니다.” “오, 경산인 공부를 잘 하더니 끝내 대학에 붙었구나. 그런데 우리 조카 철국이랑 철봉이랑 안됐구나. 좀 공부를 더 했더라면 대학에 갔겠는 걸 말이야.” 상순은 순자의 대학입학통지서를 명옥에게 주고 나서 은숙에게 머리를 돌렸다. “미안하구나. 널 13세 때부터 집에서 일을 시켜서.” 은숙은 쌍까풀눈을 똑바로 뜨고 말했다. “아버지, 언니나 공부하면 됩구마. 집이 가난한데 언제 내까지 공부하겠습둥?” 은숙의 눈에 눈물이 핑그르르 도는 것을 보고 부모들은 가슴이 뭉클했다. 명옥은 순자에게 입학통지서를 돌려주고 나서 “은숙은 이제라도 농중에 다니면 안 될까?” 하고 남편을 쳐다보았다. “은숙은 어려서부터 글도 잘 쓰고 산수도 아주 잘했지.” 상순은 은숙을 돌아보았다. “농중에 가서 공부해라.” 순자도 옆에서 그러라고 눈짓했다. 허나 은숙은 도리머리를흔들었다. “부모들의 호의는 감사합니다.”라고 하더니 도리머리를 흔들면서 “언니와 하나 밖에 없는 남동생 덕돌이나 공부를 하면 됩니다.” 부모는 은숙의 말이 고맙긴 했지만 평생 자식에게 공부를 시키지 않은 죄를 질까봐 기어이 은숙을 농중으로 다니라고 했다. 그리하여 이튿날부터 은숙은 2년제 농중을 다니게 됐다. 농중을 다니면서도 은숙은 농망기만 되면 청가를 맡고 집에 달려와 부모를 도와 벼모 내기로부터 김매기, 가을걷이를 도왔다. 소낙비가 구질구질 내리는 어느 날이었다. 시 공안국에서 민경을 하는 강운룡과 옥순이 상순의 집에 놀러 왔다. 최옥순은 명옥의 넷째삼촌의 셋째딸이었는데 훤칠한 키에 어글어글한 쌍까풀눈이랑 꽤나 곱게 생겼다. 그녀는 간장물 같은 빗물이 벽을 타고 줄줄 내려 사발과 대야로 받아내는 시골의 초가집에 새 신랑을 데리고 온 것을 후회했다. 명옥은 사촌여동생보다도 새 생원을 보기 민망했다. 새 생원이 왔는데 집에 돌피 죽을 내놓고 대접할 만한 쌀과 풀채도 변변히 없어 궁색하기 그지없었다. 그래도 운룡은 허물하지 않고 사나이 대장부답게 능쟁이를 데쳐서 올린 채에 자기기 사온 술을 동서인 상순과 함께 마주 앉아 쭉쭉 마셨다. “형님도 한잔 내오.” 운룡이 술병을 쳐들고 상순의 잔에 부으려고 했다. “아니, 난 한잔만 마셔도 취하오.” 상순은 메부리코 운룡을 마주 보며 정색해 손사래를 치며 뒤로 물러앉았다. 채가 없어서는 나무리지 않던 운룡은 형님이 술을 받지 않자 상을 찡그렸다. “형님, 원래 술을 마시지 않았소?” “아니오.” 상순은 술병을 받아 운룡에게 부어주고 자기 잔에도 좀 부었다. “이전엔 좀 마셨소. 헌데 사회 공작을 하면서 술을 점점 마시지 않았소. 이젠 습관이 돼서 술이란 말만 해도 얼굴이 벌개나면서 취한단 말이오.” 그러자 운룡은 “형님, 한잔만 드오.”라고 했다. 상순은 마지못해 한잔을 드네 했다. 운룡은 술이 서너 잔 들어가자 말이 많아졌다. “그럼 그렇겠지. 사회 공작을 하려면 술도 마시는게 옳소. 술도 교제 도구인데 술을 마시지 않으면 교제가 없이 어떻게 공작을 하오. 옆에 친구가 없고 기반도 없이 어떻게 사오? 참.” 그러나 상순은 자기 관점이 있었다. “술을 마시면 실수를 할 까봐 마시지 않았소. 지금 세상 정치풍파가 얼마나 사납소? 혀를 잘못 놀리면 우파 모자를 쓰고 투쟁받고 노동개조를 해야 하는 판이 아니고 뭐요?” 운룡도 술 맛이 없어 술잔을 내려놓으면서 한숨을 후 내쉬었다. “오늘 점심상에야 정치 투쟁이 없지 않습니까? 그래두 난 형님이 영월구 공안국 국장을 한적이 있어 마음이 통하오.” “가난한 때 와서 제대로 대접하지 못해 미안하오. 이 다음 내 농사를 잘 지어놓으면 감자랑 가지러 오오.” “감사하오.” 운룡과 상순은 돌피죽을 한 사발씩 드네 마네 하고 그만두었다. 오후에 비가 멎고 날이 기적적으로 개였다. 운룡은 새 색시를 태우고 시내로 쥉쥉 돌아갔다. 명옥은 옹색한 살림에 손님이 오는 것이 두려웠다. 운룡이 가자 그녀는 한숨을 호- 길게 내쉬었다. 그녀는 간장물 같은 빗물이 흘러내리는 바람벽과 집 손질도 방정히 하지 않는 남편을 번갈아 보며 한숨만 호-호- 내쉬었다. 상순은 바깥에서 정신을 놓고 삽으로 물도랑을 파면서 장난 치는 덕돌을 내다보며 명옥에게 말했다. “저 자식, 이젠 일곱살을 먹었으니 학교에 일찍이 붙이기오.” “저 어린 걸 어떻게 붙이오? 괜히 큰 애들한테 얻어맞기나 하겠소.” 명옥은 가마를 부시다가 돌아앉았다. “일찍이 공부를 시켜야 남의 애들보다 셈이 일찍이 드오.” “그래도 그렇지. 너무 어리오. 급하기도 우물터에 가서 숭늉을 달라 할 지경이구먼.” 명옥은 내키지 않아 했다. 허나 상순은 마음을 굳게 먹었다. “저걸 보오. 집에서 저런 장난이나 했지. 배울 게 있소. 애비 어미 삽이나 괭이로 땅을 파는 게나 배웠지. 언제 철이 들겠소?” 상순은 명옥이 반대해도 일하고 돌아오면 덕돌을 불러 품에 안고 목에 팔베개를 베워주고 이러루한 물음에 대답하는 것부터 배워 주었다. “우리 하나 밖에 없는 아들 이름이 뭐냐?” “덕돌.” 덕돌은 까만 집안에서 아버지 물음에 잘 대답도 했다. “성은 뭐냐?” “김씨입니다.” “본은 뭐냐?” “영월 김씨.” “몇 살이냐?” “일곱 살입니다.” “만으로는 몇살?” “여섯살입니다.” “아버지 이름은 뭐냐?” “아버지는 김상순, 어머니 이름은 최명옥입니다.” “허허, 그 자식 총명하구나.” 상순은 아들을 꼭 껴안으면서 이마에 뽀뽀를 해주었다. “우리 하나 밖에 없는 아들 이담 공부를 잘 해라. 응?” “예, 아버지와 어머니 말씀을 잘 듣고 공부도 일등 하겠습니다.” 상순은 “그래야지. 아버지 몫까지 네가 다 공부를 해야 한다. 알만하지?”라고 다짐을 땄다. 덕돌은 아버지 품에 안긴 채 “예. 그런데 아버지, 내 어째 아버지 대신 공부를 해야 합니까?” 하고 천연스레 물어서 누나들도 구들에 누워 듣다가 키득거렸다. “이 자식아, 아버지와 어머닌 집이 가난해서 어려서부터 일하다나니 학교로 가지 못했단다.” “허, 별나다.” “넌 아직 잘 모른다. 그땐 집에 먹을 쌀도 없는데 언제 학교에 낼 돈이 있었겠니? 넌 아버지와 어머니가 굶어 허리띠를 매고서라도 공부를 시킬 테니 공부만 잘 해라. 알았지?” “예, 공부를 잘 하겠습니다. 날 학교에 보내 줍소.” “됐다. 이젠 입 다물고 자라.” “예.” 까만 집안은 조용해졌다. 이윽고 덕돌은 꿈나라로 들어가 코를 다랑다랑 곯았다. 그는 꿈에 학교로 가서 공부하는 푸른 꿈을 꾸었다. 덕돌은 꿈도 많았지만 일도 많이 치는 개구쟁이였다. 이튿날, 상순과 명옥이 일을 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었다. 덕돌은 두 손을 벌리고 달려오며 소리쳤다. “엄마, 엄마, 내 고양이를 죽였소.” “뭐라고?” 명옥은 덕돌을 안고 집 울안으로 들어서다가 깜짝 놀랐다. 아니, 글쎄 울바자에 고양이 목을 매달아놓지 않았겠는가? “아니, 이 자식아,” 상순은 말이 더 나가지 않았다. 덕돌은 울안에 있는 윗집의 철주를 가리키면서 종알거리었다. “내 양, 저 철주 말대로 고양이를 다 죽였소.” “뭐? 철주 시키는 대로 했어?” “양, 철주 말하는 게 자기 집 고양이를 죽이는 게 영 재미있더라고 하지 않겠소?” “이 놈 새끼! 철주가 똥 먹으라면 똥 먹겠니? 줏대 없이!” 상순은 아내 품에 안긴 덕돌을 욕하면서 엉덩이를 찰싹 쳤다. 그런데 윗집 철주가 제 풀에 놀라 겁을 집어 먹고 “아이쿠머니!” 하고 종 주먹을 쥐고 뺑소니쳤다. 덕돌은 한 대 얻어맞고 와 하고 울음보를 터뜨렸다. 상순은 집에 들어간 후 덕돌을 보고 을러멨다. “이후엔 철주하고 놀지 말라.” “심심한데 그래 누구와 놀라오?” “그 애 할아버지부터 애비까지 다…” 명옥이 외까풀 눈을 치뜨자 상순은 말끝을 삼켜버렸다. 윗집 철주라는 애는 역사문제가 있는 이화영의 손자요 병진의 아들이었는데 어찌나 쏠락거리면서 말썽을 일으키는지 동네방네에 소문이 있었다. 방아 호박에 똥을 싸지 않겠는가, 똥을 누는 애를 물 앉혀 놓지 않겠는가. 별의별 말썽을 다 일으켰다. 그런 불량한 철주와 함께 놀면 덕돌도 나쁘게 번질까봐 근심됐다. 설상가상으로 병진은 또 먼 집안 집 조카사위지만 심술이 바르지 않아 상순은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어느 날, 병진은 자기 집 뿔이 위로 난 둥글소 뿌죽이와 조개덕 5대 황시연이네 황소와 싸움을 시켰다. 그리하여 5대의 황소가 그만 뿌죽이한테 박혀 한쪽 뿔이 빠져 피를 줄줄 흘렸다. 그때 상순이 달려가면서 말렸다. “조카사위, 이거 무슨 짓이오? 한창 밭갈이를 할 소들을 죽일 예산이오?” 뿌죽이와 5대의 황시연네 황소는 서로 떠받으며 싸워 피를 흘리면서도 물러서려고 하지 않았다. 상순은 황급히 벼 짚단을 둬 개 얻어다가 불을 달아 뿌죽이와 5대 황시연네 황소 사이에 따라가면서 들이댔다. 활활 타오르는 불에 대가리 털이 타들어가서야 소들은 싸움을 멈추고 갈라졌다. 허나 5대의 황소는 피를 너무 많이 흘린 탓에 며칠 후에 죽고 말았다. 5대의 황시연을 비롯한 사원들은 병진을 욕하면서 대대 당총지 서기이자 치보 주임인 상순을 찾아와 떠들어댔다. “병진은 마땅히 황소 값을 내게 해야 하오" 상순은 파출소에 알렸다. 파출소 민경이 와서 조사한 후 병진을 보고 죽은 황소 값 800원을 내라고 판결을 내렸다. 그때 돈으로 800원은 적지 않은 돈이었다. 허나 남의 소를 싸움시켜 죽였기에 울며 겨자 먹기로 내지 않으면 안 됐다. 병진은 죽인 황소 고기를 팔아 얻은 돈을 제하고 나머지 300원을 물어야 했다. 불시에 돈을 낼 수 없어 늙은 비술나무 밑의 두 간 집을 팔지 않으면 안 됐다. 동지섣달에 허망에 나앉게 된 병진은 핍박에 의해 양산에 오르듯이 부득불 한족들이 사는 조개덕에 가서 토성안집 한족 장지주네 사랑방을 빌어 곁방살이를 하지 않으면 안됐다. 그 일로 한이 맺힌 병진은 쩍하면 마을 사람들과 심술을 부리었던 것이다. 상순은 조카사위지만 늘 퉁방울눈에 웃음 짓고 “아즈바이, 아즈바이.”하면서 다가드는 병진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덕돌이 병진의 아들 철주와 노는 것도 말렸던 것이다.      상순은 애를 먹이던 덕돌을 생각하면서 도롱도롱 코를 골며 자는 덕돌의 머리를 매만지면서 꼭 끌어안았다. “여보, 얘를 인차 학교에 붙이기오.” “양, 알았소. 밤도 깊었으니 어서 쉬오.” 두 간 자리 집안에는 마흔에 낳은 하나 밖에 없는 아들 덕돌에 대한 상순과 명옥의 푸른 꿈이 그윽한 향기를 풍기면서 어둠을 타고 바깥으로 나가 하늘 끝까지 훨훨 날아오르고 있었다. 상순은 낮에 밭일을 하고 돌아오면 저녁에 덕돌에게 공책을 매준다, 자대를 대고 줄을 쳐준다 하면서 무등 관심했다. 그는 또 “기윽 ㄱ, 니은 ㄴ…”를 가르친다 하면서 덕돌을 학교로 붙일 준비교육을 했다. 그때 상순이네 가난한 생활형편에서 덕돌에게 새 공책 하나 갖춰준다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처럼 어려운 일이었다. 상순이네 대학을 간 맏딸 순자를 내놓고 홍자와 신자 그리고 성숙은 늘 공책이 아까와 공책에 연필로 살짝 가늘게 첫 벌을 썼다. 첫벌을 다 쓰면 고무가 없어 대신 손가락 끝에 침을 묻혀 첫 벌에 살짝 쓴 글씨를 살살 지우고 좀 더 진하게 두 벌로 썼다. 나중에는 만년필로 세벌 글을 썼다. 이렇게 공책 하나에 세벌을 쓰곤 했다. 그러니 공책 하나가 남들의 공책 세개 노릇을 담당한 셈이었다. 상순이 대대 사무실로 나가면 대신 명옥이 덕돌에게 1, 2, 3, 4를 가르치지 않으면 손을 꼬부렸다 폈다 하면서 “하나에다 하나를 합하면 몇이냐?” 하고 물으면서 산수도 가르쳤다. 부모가 없을 때에는 누나들인 은숙과 홍자 그리고 신자, 지어 덕돌보다 네 살 밖에 이상이 아닌 성숙까지 덕돌을 가르쳤다. 총명한 덕돌은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누나들이 하나를 배워주면 둘을 알 지경이었다. “이젠 학교에 갈만하다.” 명옥은 총기 좋은 덕돌을 대견스레 바라보며 흐뭇해했다. 그녀는 양손에 덕돌과 시조카 네 아들 성욱의 손을 잡고 즐겁게 함흥소학교로 찾아갔다. “엄마, 우리 어디로 갑니까?” “너희들을 학교에 붙이러 간다.” “학교에?” “응.” “야, 좋다.” 덕돌은 엄마 왼손을 잡고 외발띰을 하며 좋아하는 성욱을 보면서 “야, 성욱아, 우리 학교에 간단다. 얼마나 좋니?” 하고 입이 함박만 해졌다. 성욱도 “그래, 우린 이젠 학생이다. 야, 야!” 하고 고사리 손을 쳐들고 흔들면서 종알거렸다. 덕돌은 엄마를 쳐다보면서 물었다. “엄마, 이제 학교에 가면 어째야 합니까?” “선생님이 묻는 걸 잘 대답해야 한다. 그래야 학교에 붙을 수 있다.” 성욱은 할머니를 쳐다보면서 “선생님이 뭘 묻습니까?” 하고 물었다. “이름이랑 나이랑 부모 이름이랑.” “아, 알만합니다.” 성욱은 자신 있게 말했다. 과연 명옥이 두 애를 데리고 교무실에 들어서자 교무처 선생님은 덕돌에게 진짜 성과 이름이랑 나이랑 부모의 이름이랑 이것저것 묻더니 “순자 동생이구먼.”라고 하면서 머리를 끄덕였다. “순자의 동생들은 모두 총명해 공부를 잘 합니다. 덕돌은 나이가 어려도 학교에 붙여도 되겠습니다.” 그 다음 성욱의 차례였다. 선생님이 덕돌과 똑 같이 묻자 성욱도 다 척척 대답했다. 나중에 선생님은 그 애들에게 노래를 시켜 보았다. 그러자 덕돌과 성욱은 목청을 돋구어 노래를 불렀다.   고개고개 고갯길 학교 가는 길 …   시간을 보고 교무실에 들어온 오옥선 선생님을 비롯한 여선생들은 덕돌과 성욱이 부르는 노래를 듣고 박수쳤다. 선생님들이 춰주자 덕돌은 사기 났다. “선생님, 난 한 자릿수 합하기도 할 줄 압니다.” “그래?” 교무처 선생님은 신기한 눈길로 어린 덕돌의 초롱초롱한 깜장 눈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하나에 하나 합하면 몇이니?” “둘입니다.” “하나에 셋을 합하면?” “넷입니다.” 그 다음에는 선생님이 묻기도 전에 덕돌은 아빠와 엄마 그리고 누나들이 배워준 걸 내리 외웠다. “…아홉에 아홉을 합하면 열여덟입니다.” “와-” 선생님들은 입을 하 벌리고 박수갈채를 보냈다. 교무처 선생님은 성욱을 보고 “너도 할 수 있지?” 하고 물었다. 성욱은 고사리 손으로 뒷덜미를 긁적거리면서 “난 하나에 하나를 합하면 둘이란 것 밖에 모릅니다.”라고 했다. 교무처 선생은 머리를 끄덕였다. “둘 다 학교에 붙입시다. 그런데 너무 어려서 한 살이나 둬 살씩 더 큰 애들 속에서 삐칠 수 있겠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명옥은 “근심하지 마십시오. 공부만 잘 하면 됩니다.”라고 했다. 그리하여 덕돌과 성욱은 일곱 살에 함흥소학교에 붙었다. 조개덕에서 일곱 살에 학교에 붙은 애들은 그들 외에 허동림과 철주가 더 있었다. 한 마을에 사는 금옥은 조카 덕돌을 고와 항상 맛나는 음식만 생기면 자기 집에다 업어다가 먹였다. 어느 하루 이른 아침이었다. 금옥은 일찍이 찾아와 아직 잠에서 깨나지도 않은 덕돌을 옷을 입히더니 업고 자기 집으로 향했다. “고모, 오늘은 뭘 맛있는 걸 했습니까?” 금옥은 잔등에 업힌 덕돌의 엉덩이를 다독이면서 “우리 큰 조카님이 좋아하는 두부를 했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야, 맛있겠다.” 덕돌은 벌써 하얀 두부를 먹을 생각을 앞세우면서 군침부터 삼켰다. 집에 들어서면서 금옥은 “우리 큰 조카 왔습구마.” 하고 말하면서 덕돌을 잔등에서 내리어 놓았다. 고모부 최학철은 퉁방울 같은 눈에 상냥한 웃음을 띠우면서 반겨맞았다. “어이구, 우리 덕돌이 왔구나.” 철국은 말을 타고 집 문 앞을 지나가다가 반겼다. “덕돌이 왔냐?” “양, 형님! 나도 말을 탈까?” 덕돌은 마구 바깥으로 나가면서 소리쳤다. 급해 맞은 금옥은 따라나오면서 소리쳤다. “덕돌아, 말은 이담 크면 타고 들어와 두부나 먹어라.” “예.” “에이유, 우리 큰 조카는 말도 참 잘 들어.” 금옥은 집에 되들어오는 덕돌에게 먼저 치하가 끝이 없었다. 그는 김이 문문 나는 네모 난 함지 안의 두부를 식칼로 쭉쭉 줄을 쳐 끊으면서 이렇게 되뇌었다. “우리 덕돌은 모나게 공부를 잘하라고 귀퉁이모를 주자.” 금옥은 네 귀의 두부모를 몽땅 사발에 담아 덕돌에게 주었다. 그러자 인자누나는 외사촌동생이 귀여워 웃음을 보냈다. 덕돌보다 한 살 지하인 인숙과 네 살 지하인 국범은 자기네도 귀퉁이모를 먹겠다고 손을 내밀었다. 덕돌은 자기 사발의 두부모를 하나씩 나눠 주면서 “옳다, 너네도 먹고 공부를 잘 하자.”라고 했다. 그러자 고모부 학철은 덕돌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혀를 끌끌 찼다. “덕돌은 속에 영감이 들어앉은 어린 영감이야!” 집안에서 항상 덕돌을 보고 공부를 잘 하라고 치하해주고 타이른 덕분인 것 같았다. 덕돌과 성욱 그리고 동림은 일곱 살에 학교에 붙었지만 나이가 두 살이나 이상인 애들보다도 공부를 잘 했다. 덕돌은 항상 100점을 맞은 시험지를 타가지고 집으로 돌아와 아빠와 엄마에게 바쳤다. 큼직하게 쓴 100점 맞은 시험지를 들고 보면서 상순과 명옥은 기뻐 어쩔 줄 몰라 했다. 어느 날 점심, 덕돌이 함흥소학교에 갔다가 집에 들어서자마자 환성을 질렀다. “엄마, 엄마. 난 달래기 해서 2등을 했습니다.” 덕돌은 공책 하나를 어머니한테 내밀면서 “그래서 이 공책을 타왔습니다.”라고 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자 명옥은 죽을 끓이다가 덕돌을 안고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물었다. “우리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이 참말 대단하구나. 그래 몇이 달았니?” “둘이 달았습니다.” “뭐라고?” 명옥은 상을 찌푸렸다. “둘이 달아 2등이면 꼴찌 아니야?” “예?” 덕돌은 자랑을 한다는 것이 꼴찌라고 하자 울먹해졌다. 그러다가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엄마, 그런 게 아닙니다. 처음에는 숱한 애들이 달았는데 나와 성욱만은 끝까지 달았습니다.” “그래 달래기 시작할 때 다른 애들도 있었니?” “예. 처음에는 일곱이 달았습니다. 그런데 다른 애들은 끝까지 닫지 않았는데도 뭐?” 덕돌은 입이 뾰족해 종알거렸다. “다른 애들은 끝까지 닫지 않고 뭘 했니?” 명옥이 이상해 하자 덕돌은 웃으면서 뒷말을 이었다. “다른 애들은 닫다가 중간쯤에 가서 ‘엄마!’ 하고 소리치면서 응원하는 엄마한테로 두 팔을 벌리고 달려가 안겼습니다.” “그랬니?” “예.” “호호호. 거 참 우스운 일이구나.” “다른 애들은 엄마한테 가서 사탕을 달라해 먹었습니다. 헌데 성욱과 나는 엄마네 응원하러 오지 않은 바람에 오 선생이 소리치는 흰 끈을 든 데로 끝까지 달려갔습니다. 그래서 이 공책을 상으로 탄 겁니다.” 덕돌은 엄마 품에 안겨서 공책을 만지작거리며 종알거렸다. “허허, 정말 우리 아들 장하다! 공부도 잘하지 달래기도 끝까지 달아 상까지 탔구나.” 명옥은 늘그막에 낳은 아들이 참말 장하기만 했다. 어느 날 덕돌은 강변에 가서 놀다가 물이 찰랑대는 한쪽 고무신짝에 모래무치 한 마리를 담아 들고 코노래도 흥겹게 흥얼거리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엄마, 엄마, 내 물고기를 잡아 왔습니다.” “뭐라고? 우리 아들 참말 장하구나. 이번에는 물고기를 다 잡아 왔구나.” 명옥은 덕돌이 고무신짝에 담아온 모래무치를 희구해 들여다보며 덕돌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때 상순이 담배를 말아 붙이면서 씨물씨물 웃으면서 빈정거렸다. “덕돌아, 그 물고기 눈이 멀지 않았니?” 덕돌은 그 말을 딱 곧이듣고 고무신짝 안을 한참이나 들여다보면서 “아니, 눈이 둘 다 있습니다. 어디 상한데도 없습니다.” “허, 이상하다. 두 눈이 다 있는 물고기 어떻게 네 손에 다 잡혔을까?” 그러자 덕돌은 사실대로 말했다. “아버지, 요건 동림이 잡은 물고기를 한쪽 고무신짝과 바꾼 겁니다.” “뭐라고?” 그제야 명옥은 덕돌의 맨 발을 내려다보고 소스라쳤다. “요놈 새끼야! 한쪽 고무신짝을 어쨌니?!” 명옥은 덕돌의 엉덩이를 쨕쨕 치며 소리쳤다. “동림을 주고 이 모래무치를 가졌습니다.” “아이고, 요놈새끼를 어쩌니?” 명옥은 덕돌의 손에 든 고무신짝을 탁 치며 욕했다. 그 바람에 덕돌은 왕 울음보를 터뜨렸고 모래무치가 땅 바닥에서 팔딱팔딱 뛰었다. 상순은 세귀눈을 치뜨더니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동림이 어디 있니?” “저기 태평강에 있습니다.” 덕돌은 손가락으로 문 밖을 가리켰다. “가자!” 명옥은 덕돌의 손을 잡고 태평강으로 쏜살같이 달려갔다. 그때 동림은 한창 태평강가의 모래톱에서 물도랑을 파면서 놀고 있었다. 명옥은 동림을 보자 황급히 “야, 덕돌의 신을 어쨌니?” 하고 물었다. 그러자 동림은 대수롭잖아 하면서 “내 모래무치와 바꾼 신이라고 저기 물에 배처럼 동동 띄워 보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뭐라고?!” 명옥은 어이없어 동림을 보고 소리쳤다. “아이고, 그 신을 어떻게 산 게라고 그러니?” “내 신인데 무슨 내 마음대지. 뭐.” 명옥은 물도랑을 파면서 거들떠보지도 않는 동림한테서 눈을 떼더니 출렁거리면서 흐르는 강물을 살피면서 아래쪽으로 달려갔다. 허나 명옥이가 강물을 따라 2, 3리나 내려가면서 아무리 찾아보아도 덕돌의 고무신짝은 보이지도 않았다. 화가 날대로 난 명옥은 돌아와 덕돌의 엉덩짝을 마구 패댔다. “너 다시 신짝을 가지고 아무 거나 바꾸겠니?” “다신 아이 그러겠습니다.” 덕돌은 엉엉 울면서 다짐했다. 명옥은 억이 막혀 웃지도 울지도 못하고 통곡치는 덕돌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그 덕분에 덕돌은 온 여름과 가을에 맨 발 바람으로 학교를 다니지 않으면 안 됐다. 서발 막대를 휘저어도 거칠 것 없이 살림형편이 가난한 상순이네는 하나 밖에 없는 아들에게 고무신짝 하나 사줄 돈도 없었던 것이다. 사실 우에서 생산대에 보조금이 내려와도 대공무사한 상순은 마을에서 제일 가난하나 다름없으면서도 자기에게 차례진 보조금을 항상 마반산 집 할머니거나 오보 호와 열사가족인 오옥선의 부모에게 더 드리고 일전 한 푼 가지지 않았던 것이다. 하여 귀여운 아들에게 고무신을 사줄 돈도 없었던 것이다. 명옥은 돈을 꿔서 검정고무신을 사주었다. 그 돈을 무느라고 후에 명옥과 은숙은 숱한 가마니를 짜야 했다. 명옥과 은숙은 가마니를 짜다가도 둬 뽐 짜고는 쉬면서 역을 틀기를 시합했다. 그런데 항상 명옥이 은숙에게 졌다. 옆에서 지켜보던 덕돌은 엄마가 졌다고 “왕~”하고 울음보를 터뜨렸다. 덕돌이 우는 것을 보려고 은숙은 제꺽 역을 틀어 엄마를 지워놓고 덕돌을 놀렸다. “또 울어. 울어! 이 울보야. 해해해.” 은숙이 이렇게 놀리면 죄꼬마한 덕돌은 “엄마, 기실 엄마 이겼소. 빨리 틀어 뭘 하오? 저렇게 밉게 틀면서. 엄마 튼게 더 곱소.”라고 했다. 그 말에 명옥과 은숙은 둘 다 가마니를 짜다가 그만두고 덕돌이 대견해 마주 바라보며 웃었다. 명옥은 은숙과 숱한 가마니를 짜서 덕돌에게 새 신을 내밀면서 신신당부했다. “이담부터 다시는 신이나 옷으로 다른 걸 바꿔선 안 돼. 온 동삼에 맨발로 어떻게 학교로 다니니?” 덕돌은 머리를 끄덕이더니 그때부터 덕돌은 신 건사를 잘하느라고 무척 왼 심을 썼다. 항상 어느 군일 집으로 가도 두 짝 신을 신끈으로 한데 무어 문 꼬리에 대롱대롱 매달아 놓았다. 그러자 집안 집 어른들은 문 꼬리에 대롱거려 불편해 하면서도 덕돌을 희구해 했다. “조놈은 뭘 닮아서 신 건사를 이렇게 무섭게 하니?” “쯧쯧쯧, 애는 무서운 애오.” “저 앤 고무신으로 물고기를 바꿔 먹더니 다신 신을 잃어먹지 않겠소.” “허허허.” “호호호.” 어른들은 덕돌과 문고리에 땅땅 매단 신을 번갈아보면서 웃고 떠들어댔다. 어느덧 눈보라가 윙윙 휘몰아치는 겨울이 다가왔다. 다른 애들은 털모자를 쓰고서도 귀가 얼까봐 털실장갑을 낀 두 손으로 귀를 잡고 학교를 다녔다. 허나 덕돌은 털모자가 없어 항상 네 귀 수건으로 머리를 동이고 귀를 얼면서 학교를 다녔다. 명옥은 학교로 갈 때면 항상 무릎을 꺾고 쪼그리고 앉아 두 손으로 덕돌의 두 볼을 싸쥐고 신신당부했다. “덕돌아, 귀 시려도 절대 울지 말라.” “예.” “울면 눈물이 얼어붙으면 눈을 뜨지 못해.” “예? 눈을 뜨지 못한다고?” “응. 그래. 그리고 귀가 시려도 손으로 만지지 말라. 귀가 더 언다.” “예. 꼭 그럴게.” 덕돌은 집에 찾아온 성욱과 함께 학교로 떠나가려다가 몸을 돌렸다. 명옥은 학교로 가라고 손을 저었다. 그런데 덕돌이 쪼르르 되 달려왔다. “왜?” 명옥은 이상해 했다. 덕돌은 성욱을 가리키면서 “엄마, 나도 성욱이 쓴 거 같은 털모자를 사주오.”라고 하면서 몸 동아리를 배배 탈면서 떼를 썼다. “얘…” 명옥은 코마루가 시큼해나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하나 밖에 없는 아들에게 돈이 없어 털모자 하나 사주지 못하는 어머니 마음이야 오죽했으랴. 가슴을 쇠 깍쟁이로 마구 허비는 것 같이 아팠다. “후에 엄마 돈을 많이 벌어서 사주마.” 명옥은 덕돌을 겨우 달래며 동구 밖에까지 손을 쥐고 가서 학교에 보내고야 돌아서면서 치맛자락으로 눈물을 훔치며 어깨를 들먹였다. 덕돌은 수업이 끝나면 엄마 부탁대로 학교 복도로 해 넷째누나 신자네 교실에 가서 문을 똑똑 두드렸다. 선생님이 나오면 “신자누나를 찾습니다.”라고 했다. 신자는 나와서 덕돌이 가져온 네 귀 수건으로 초롱초롱한 눈을 내놓고 부상병처럼 머리를 싸매주었다. 박달나무가 얼어 터질 맵짠 추위에 덕돌은 귀가 얼어들어 쨍 아파나 참을 수 없었다. 허나 눈물을 흘리면 얼어붙어 눈을 뜨기 어렵다던 엄마 말이 떠올라 억지로 눈을 크게 뜨고 집으로 달음박질쳐 돌아오곤 했다. 벌써 이맘때면 학교에서 아들이 돌아오겠다고 명옥은 동구 밖에서 기다리다가도 포대기에 아들을 싸안고 집으로 돌아 올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허나 엷은 수건은 귀여운 아들애의 얼어드는 귀를 보호해줄 수 없었다. 덕돌은 끝내 귀가 얼어들어 귀방울에서 진물이 흥건히 흘러내렸다. 그 살색을 잃고 거멓게 번져가며 진물이 흐르는 아들의 귀를 보는 상순과 명옥은 칼로 어이는 듯이 마음이 아팠다. 어느 하루 상순이가 당 지부 회의를 열고 당원들에게 “지부생활”에 난 상급의 문건정신을 전달하려고 찾으니 없지 않겠는가! “아니, ‘지부생활’이 어디로 갔어?” 아무리 찾아도 없었다. 그런데 농궤 뒤 벽밑에 쌓여있는 딱지를 보고 깜짝 놀랐다. “지부생활”을 뜯어 만든 딱지가 아니겠는가! “덕돌아, 여기 오라!” 독이 서린 아버지의 세 귀 눈을 바라보면서 덕돌은 겁부터 집어먹었다. “요놈새끼, 책을 뜯어 딱지를 만들다니?” 상순은 덕돌의 귀 쌈을 찰싹 갈겼다. 덕돌은 대뜸 얼얼한 얼굴을 만지면서 통곡을 쳤다. 그러자 명옥은 “애를 어째 이렇게 모질게 치오?”라고 기절 난 소리를 치면서 덕돌을 훌 안아갔다. 상순은 세 귀 눈을 흘기면서 “애를 그렇게 역성을 들어서 교육이 들어가겠소? 이리 보내오.”라고 하면서 손을 내밀었다. “그럼 때리지 말고 말로 타이르오. 어째 쩍하면 그렇게 치오?” “잔말 말고 얼른 이리 보내라!” 호랑이처럼 호통 치는 남편의 성미를 아는지라 명옥은 울며 겨자 먹기로 덕돌을 내리어 놓고 그 옆에 앉아 또 칠까봐 지켰다. 상순은 덕돌을 보고 어조를 낮춰 “이 책은 내가 보는 중요한 책이다. 딱지를 만들어 책이 없어 어쩌니? 이후에는 다시 책을 찢거나 딱지를 만들어선 안 된다. 알겠니?” 하고 타일렀다. 덕돌은 고사리 손으로 눈물을 닦으면서 머리를 끄덕였다. “말로 대답해라. 다시 그러겠니?” “아이 그러겠습니다.” “응, 그래야지. 그래야 훌륭한 애지. 우리 덕돌은 공부도 잘 하고 아빠 엄마 말도 잘 듣지? 응?” “예.” “그럼 내 묻는 말을 대답해라. 거짓말을 하면 못 쓴다. 알았지?” “예.” “딱지를 만들고 나머지 책 종이는 어쨌니?” 덕돌은 아버지 눈치를 할끔 쳐다보면서 “성욱에게 딱지를 만들라고 줬습니다. 우리 둘이 딱지치기를 놀자고.”라고 대답했다. “응. 알았다.” 그 자리로 상순은 한집 건너 뒷집에 있는 7촌 조카 경학이네 집에 가서 성욱에게서 딱지를 찾아왔다. 상순은 덕돌이 앞에서 딱지를 싹 풀어 페지 수를 맞춰 책을 다시 맺다. 옆에서 초롱초롱한 포도알눈으로 아버지가 책을 매는 것을 여겨보면서 덕돌은 속으로 그 책이 아버지가 정말 읽기 좋아하는 책이라는 것을 알고 자기 잘못을 새삼스레 느끼었다. 그 후부터 덕돌은 다시는 책을 찢어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책이라면 보배처럼 건사하기 시작했다. 그는 그저 책이 하늘만큼 크다고 느꼈을 뿐이었다.
122    대하소설 진다래 소야곡(9) 댓글:  조회:1408  추천:1  2018-01-30
                        16. 약혼녀 교정에는 활짝 핀 라이라크가 생글방글 웃음지으면서 처녀총각들의 싱숭생숭한 마음을 보듬어주고 있었다. 어느날 밤중에 승호가 침실문을 뚝 떼고 황망히 뛰쳐들어왔다. “성호, 날 좀 도와달라.” “무슨 일이야?” 성호는 반사적으로 벌떡 일어나 신발부터 신었다. “홍희와 은영을 지켜달라. 이전에 말이 있던 경옥이 보복하러 올 거 같아.” 성호는 굳어졌던 얼굴의 근육을 느슨히 풀었다. “녀자앤데 어쩐다구?” “숱한 친척들을 데리고 오겠다더라.” 승호는 맥없이 침대에 털썩 물앉았다. “졸업을 앞두고 이게 뭐야? 이번엔 뛸데 없이 퇴학맞을 거야.” 그는 침대 이불 밑을 더듬더니 시퍼런 비수를 들춰냈다. “요즘 좀 덜 자더라도 이걸로 홍희와 은영을 보호해 달라.” 성호는 비수를 되밀어주었다. “필요없어.” 자신만만해 하는 성호를 보고 승호는 비수를 내밀면서 타일렀다. “경옥의 사촌오빠는 악명 높은 깡패두목이야. 난 7년 전부터 악연을 맺었어. 독종들이야. 은영과 홍희 눈깔을 빼가겠다더라.” 성호는 벌떡 일어났다. “공안국에 좋은 아버지를 두고 뭘 해?” 승호는 난색을 지었다. “아버진들 어쩌겠니? 그 자식 언제나 교활하게 수하를 시켜 해치우고는 꼬리를 빼는데야.” 승호는 한숨을 후~ 내쉬였다. “또 공안국에 알리면 더 악감을 품고 무슨 짓을 할지 몰라.” 승호는 성호의 어깨를 다독였다. “홍희와 은영을 부탁하자. 난 최선생과 허서기를 찾아가 대책을 의논해 봐야겠어.” 성호는 비수를 침대 우에 훌 던져버리고 나섰다. “근심하지 말라.” “감사하다. 믿을만한 건 너 밖에 없어.” 승호는 성호의 손을 꽉 잡고 힘차게 흔들었다. 성호는 곧추 녀성숙사로 달려가 홍희네 침실 문을 노크하고 들어갔다. 침실에는 침대에 누운 홍희 외에도 정희와 연화가 있었다. 성호는 연화와 인사하고나서 홍희를 복도에 데리고 나가 조용히 찾아온 사연을 알렸다. 홍희는 맥빠진 소리를 했다. “창피해 어떻게 살아? 아예 깡패들한테 죽는게 낫지.” “쓸데없는 소릴 하지 마오.” 성호는 홍희를 침실에 들여보낸 후 정희를 나오라고 했다. “요즘 침실을 지켜야겠소.” 정희는 사연을 듣고 파랗게 질린 얼굴을 들었다. “멍청이짓 하지 마세요. 괜히 상하겠어.”  “알았어. 근심하지 마오.” 성호는 책상과 걸상을 들고 복도에 나갔다. “왜? 우리 침실에 앉아 있을게죠.” 성호는 “은영네 침실도 지켜야지.” 하고 걸상에 턱 들어앉아 복도를 지켰다. “진짜 로지심 같아.” 침실 안에서 정희와 연화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성호는 은영네 침실에 가서 은영을 조용히 불렀다. 은영은 상을 찡그리면서 복도에 나왔다. “왜 또 찾아왔어요?” 성호는 밸 같아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훌 가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용하게 놀라운 인내력으로 꾹 참았다. 성호는 은영을 복도 한켠에 데리고 가 나직이 사연을 말했다. “야, 복잡해 어떻게 살겠니?” “뭐라고 합데. 이런줄 알았으면 당초에…” 은영은 시끄러워 성호의 말을 중도무이했다. “됐어요, 됐어. 제발 날 잊어주세요. 그럼 감사하겠어요.” 성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침실로 들어가는 은영의 등뒤에 대고 부탁했다. “명심하오. 혼자 아무데나 가지 마오.” 녀학생들은 사연도 모르고 이상한 눈길로 성호를 흘끔흘끔 훔쳐보며 지나갔다. 화장실 쪽에 가서는 손으로 입을 가리면서 키득거렸다. 정희는 복도에 나와 성호를 침실에 끌고 들어갔다. “멍청이 아니야? 푸대접을 받으면서 보호해?” “승호 부탁을 받았어.” “그래도 그렇지. 복도 다 떠나가게 괄시하잖아? 분해서 어디 살겠어.” 성호는 복도에 나가 책상에 책을 놓고 보면서 스스로 위안했다. (참새들이 어찌 고니의 큰 뜻을 알리오?) 성호는 진짜 의리심이 강했다. 승호의 부탁을 받은 것도 있지만 기어이 홍희와  은영을 보호하려고 작심했다. 정희는 슬그머니 나와 책상에 종이쪽지를 놓고 눈을 흘기면서 가버렸다. 성호가 쪽지를 펼쳐보니 이런 글씨가 또박또박 씌여 있었다.   여보세요. 목숨 걸고 보호할 건 뭔가요? 괜히 남의 일에 다칠까봐 속이 다 타 죽겠어요. 그만두고 숙사로 돌아가세요. 제발 빌어요.   성호는 그 쪽지에 몇글씨 쓱쓱 쓰더니 정희가 돌아올 때 건네주었다. 정희가 침실에 들어와 펴보니 이렇게 또박또박 씌여 있었다.   녀동창생들을 구해야 되겠다는 일념 밖에 없어. 너무 근심하지 말라. 잘 자! 밤중이 되자 성호는 잠이 호르르 와서 큰일났다. “성호야, 잠을 좀 덜 자더라도 은영과 홍희를 보호해달라.” 그때 승호가 부탁하던 말소리가 귀전을 때렸다. 꺼떡꺼떡 자불던 성호는 눈을 비비고 걸상에 앉아 복도를 지켰다. 이때 홍희가 잠옷을 껴입고 복도에 나왔다. “화장실에 가려고?” 홍희는 머리를 끄덕였다. “데려다줄게.” 성호는 홍희를 화장실에 데려다주고 문어귀에 서서 로지심처럼 바깥을 지켰다. 그때 녀대성숙사 당직을 서던 경비원이 다가왔다. “여기 서서 뭘 하오?” “녀동창생을 기다립니다.” “음.” 경비원은 마땅찮은 눈길을 보내더니 경비실로 돌아갔다. 성호는 피뜩 령감이 떠올랐다. (경비원의 방조도 받아야지.) 성호는 경비원을 찾아가 딱한 사정을 이야기했다. “공안국과 보위과에 알려야지.” 경비원은 급히 전화번호를 눌렀다. 홍희가 화장실에서 나와 숙사로 뛰여들어오는 승호와 딱 마주쳤다. “승호, 이 개놈새끼, 어디 죽어봐라!” 갑자기 바깥에서 녀성의 앙칼진 목소리가 귀청을 때렸다. 성호는 황급히 경비실에서 뛰쳐나왔다. 어둑시그레한 바깥에 억대우 같은 20대 사내들이 한무리나 덮쳐들었다. 뒤에서 한 처녀애가 앙칼지게 고함쳤다. “족쳐라! 쌍가시나 눈깔을 빼가자!” 성호는 다짜고짜 녀대생숙사로 뛰쳐들어오는 사내들을 막아나섰다. “쳐라!” 깡패들은 쇠파이프를 휘두르며 쳐들어왔다. 성호는 깡패들의 머리 우로 날아나가면서 쌍발로 대가리를 탁탁 걷어찼다. 몇놈이 비명소리와 함께 나동그라졌다. “개새끼!” 뒤에서 억대우 같은 코수염쟁이 방치를 휘둘러 어깨 넘어 날아지나가는 성호의 종아리를 쳤다. 성호는 몸을 훌 날려 뒤발로 코수염쟁이 관자노리를 걷어찼다. “아야! 이 새끼.” 하이칼라도 코방귀를 뀌면서 방망이를 휘두르며 덮쳐들었다. “꽤나 솜씨 있구나!” 코수염쟁이는 방망이를 내리며 빈정거렸다. “알고 지내자. 넌 누군데?” “시골에서 온 목동이야. 넌 누구냐?” 코수염쟁이 거만스레 코웃음쳤다. “흥! 이 시내에 코수염쟁이도 모르는 놈도 있구나.” “녀자숙사에 쳐들어오는 주제에 우쭐거리긴?” “뭐 어쩌고 어째?” 성호와 코수염쟁이 맞붙으려고 할 때였다. “송파, 서라!” 뒤에서 전지불빛이 어지럽게 비췄다. “너 허서기 아들 맞지?!” 경비원이 나와서 꺽다리 코수염쟁이에게 삿대질했다. 코수염쟁이는 목을 움츠리더니 뒤에 대고 손을 홱 휘둘렀다. “돌아가자!” 뒤에서 처녀애의 앙칼진 목소리가 울렸다. “저 년놈들을 살려두고 어디로 가?!” “경찰이다!” 코수염쟁이는 뒤에서 야단치던 처녀애를 끌고 도망쳤다. 그때까지 승호는 대가리도 내밀지 않다가 그제야 기신기신 기여나와 두리번거렸다. “상한데 없니?” 성호는 승호를 보고 “홍희와 은영을 숙사에 두고 지키는게 방법이 아닌 것 같아.”라고 했다. 그는 승호의 귀에 대고 나직이 말했다. “쟤들을 너네 집에 숨겨 둬라.” 승호는 머리를 끄덕였다. 그때 담임교원 최성균선생님이 다가왔다. “홍희를 우리 집에 데려갈게.” 최선생은 대머리에 흐르는 땀을 손으로 뚝뚝 찍더니 홍희를 데리고 자리를 떠났다. 승호는 은영을 침실에서 데리고 나왔다. 때마침 승호가 리과장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아보는 경찰이 있었다. 그리하여 승호는 은영을 경찰차에 앉혀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날부터 은영은 경찰의 보호를 받으면서 집에서 학교로 통학하기로 했다. 성호는 정희마저 몸소 집에까지 데려다주고서야 침실에 돌아왔다. 그는 한숨을 후~ 내쉬고 침대에 덜렁 들어누었다. 이튿날, 웃지도 울지도 못할 희비극이 벌어졌다. 침실문이 벌컥 열리더니 승호가 뛰여들어왔다. “허서기 호출장이 왔어. 경옥이 또 숱한 깡패들을 데리고 학교 기률검사위원회까지 찾아갔어.” 성호는 보던 책을 놓고 천천히 일어났다. “천하의 호랑이가 다 놀라다니? 쯧쯧쯧.” 승호는 얼굴에 겁기까지 띠지 않겠는가. “얘, 그 쌍년 사촌오빠가 누군지 아니? 요 먼저 숙사에 쳐들어왔던 깡패두목 허송파야!” “그 코수염쟁이? 허허허. 그 새끼 뭐 대단하냐?” “웃긴? 남은 칼모태에 오른 물고기 신센데.” 성호는 승호의 어깨를 다독였다. “이후엔 범송이랑 촌뜨기라고 욕하지 말라. 바쁠 땐 그래도 동창생이잖아.” 승호는 머리를 끄덕이면서 따라나섰다. 범송과 종수는 성호 낯을 봐서 마지못해 따라나섰다. 그들이 허서기 사무실로 곧추 갔을 때였다. 층계에서 한무리 코수염쟁이와 하이칼라들이 잡아먹을 것처럼 쏘아보았다. 깡패들은 허서기 사무실  앞에 보위과 경비원들이 죽 늘어서서 대기하고 있어 손을 쓰지 못하고 있는 눈치였다. 그런데 교활한 깡패두목 허송파는 보이지 않았다. 승호가 성호네 호위를 받으면서 사무실에 들어섰을 때다. “야, 이 색마야, 오늘 네 죽고 내 죽고 해보자!” 약혼녀 경옥이 승호에게 단말마적으로 덮쳐들었다. 그녀가 승호를 마구 허비고 뜯으려고 하자 성호가 막아 나섰다. “왜 이러오? 무슨 일인지 말로 하오.” 한쪽으로 밀려난 경옥이 성호랑 둘러보더니 승호를 손가락질 하면서 쌍욕을 퍼부었다. “야, 이 개새끼, 아직도 조직능력이 대단하구나. 벌써 셋이나 데리고 왔어? 네깐 놈이 뭔데? 난 30명을 데리고 왔다. 오늘 숱한 처녀들을 해친 그 더러운 XX을 베가지 않는가 봐라!” 승호는 콧방귀를 뀌며 허서기를 바라보았다. 허서기는 경옥을 제지한 후 아니꼬운 눈길로 승호를 쏘아보며 꾸짖었다. “승호, 넌 진짜 우리 학교를 다 팔아먹는 말썽꾸러기야. 학생당원이자 학생회 체육부장이 아니요? 저 경옥과는 약혼한 사이라면서?” 승호는 억울한듯 고아쳤다. “아닙니다. 내 언제 쟤하구 약혼했습니까?” “뭐라니? 약혼도 하지 않고 날 짓밟았니? 처녀 정조 목숨 같다는 거 모르니?” 허서기는 사무상을 꽝꽝 두드리면서 승호를 훈계했다. “그게 뭔가? 약혼녀 있으면서 숱한 녀대생들을 짓밟다니?!” “아니, 경옥은 약혼녀 아닙니다.” “야, 홀딱 나눕겠니?” “결혼도 하지 않고 무슨 조강지처입니까?” “야, 썩어질 개새끼야? 내 정조를 돌려달라.” 성호와 범송은 눈길을 마주쳤다. 경옥은 헐치 않은 처녀애였다. 인물도 그만하면 시내 처녀애치고 잘 생겼다고 할 수 있었다. 독살이 오른 외까풀눈을 내놓고 훤칠한 체격에 걀쭉한 우유빛얼굴이라든가 오똑한 콧날이라든가 앵두 입이라던가  표독스러워 그렇지 매력이 엿보였다. “그만!” 허서기는 또 사무상을 꽝꽝 두드렸다. “똑똑히 말하오. 경옥과 약혼한 사이오? 아니오?” “약혼? 저를 과부네 아들이라고 항상 업신여겼는데 약혼 같은 소릴 다. 어우, 씨.” “내 언제 널 업신여겼니?” 허서기가 경옥한테 눈길을 보냈다. 경옥은 억울하다는듯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공안국 형사과장네 아들을 누가 감히 업신여겨?” “너네 부모 그래 날 과부네 더러운 새끼라면서 약혼을 거부하지 않았댔니?” “네 애비 펀히 살아 있는데 네 에미를 과부라 했다니? 말도 안돼.” 승호는 누구도 모르는 사실을 밝혔다. “허서기, 이건 사실입니다. 저의 어머니는 진짜 과부였습니다. 전 어려서부터 쟤네 에미한테서 ‘애비도 없는 과부네 아들’이라고 놀림을 당하고 무시당했습니다.” 성호랑 범송이랑 놀란 눈길로 눈물까지 핑 돈 승호를 바라보았다. “음~” 허서기도 승호를 흘끔 건너다보았다. 경옥은 우쭐해 일격을 가했다. “과부 아들 주제에 남의 정조를 짓밟고 살아남을 거 같애?” 승호는 뭐라고 맞받아치려다가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삼키고 속으로 욕했다. “항상 과부네 아들이라고 깔보는 네 에미한테 보복하고 싶었어. 어째?” 탕, 탕, 탕! 허서기는 경옥을 쏘아보았다. “그만해! 이제야 본성이 들어났군.” 그는 녀조카 경옥이 일을 궁지에 몰고가는 것이 미웠다. 둘이 약혼한 사이라면 성호가 경옥의 정조를 짓밟은 것이 정당화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줄도 모르고 떠드는 경옥이 안타까웠다. “묻는 말에만 대답해라.” “밸이 나는 거 어쩌랍니까?” 경옥이 머리를 숙이자 허서기는 승호에게 눈길을 돌렸다. “경옥의 부모가 동의하지 않았으면 약혼한 사이도 아니고 뭐요? 그런데 경옥의 정조를 짓빫은 건 강간죄요, 강간죄! 강간죄는 퇴학은 물론, 감옥에 들어가야 하오.” 승호는 벌떡 일어났다. “아니, 허서기, 허서긴 아무리 경옥의 큰아버지노라고 그러지 마십시오. 어째 짝시비만 합니까?” “뭐라오?” 허서기도 사무상을 땅 치며 일어나 승호를 손가락질 하면서 으름장을 놓았다. “너 그래 경옥을 강간하지 않았니? 깡패한테 경옥이 당한 거야.” 승호도 물러서지 않았다. “경옥이 나한테 시집오지 못해 몸을 들이댔지. 언제 강간했다고 생사람을 물어먹습니까?” “야, 이 개새끼야, 오늘도 억울하게 굴겠니? 네놈이 뭐라 했니? ‘우리 둘이 좋아하면 다야. 그걸 다 했는데 부모가 결혼 동의하지 않을 수 있니?’ 그래서 그렇게 됐지.” 허서기는 울고 불고 하는 경옥을 앉으라 하고 승호를 꾸짖었다. “문제는 결혼도 하지 않으면서 경옥을 짓밟은 거요. 또 경옥을 다쳐놓고 홍의와 은영과도 련애를 구실로 짓밟은 건 용서할수 없는 형사죄요.  진짜  악질상습강간범이구나. 이대로 놔뒀다간 얼마나 많은 처녀들을 해칠지 모르겠소.” 승호는 물러서지 않았다. “검정개 돼지 흉을 하지 마십시오. 온 시내에서 깡패두목 허송파라면 모르는 사람이 몇입니까?” 허서기는 옆에 앉은 깡패들이랑 성호랑 둘러보더니 의자에 앉더니  건 가래를 뗐다. “에헴, 승호와 경옥을 내놓고 몽땅 바깥에 나가오.” 성호랑 깡패랑 서로 쏘아보면서 슬밋슬밋 나갔다. 허서기는 훌쩍거리는 경옥을 가엽게 바라보다가 성호에게 물었다. “엎질러놓은 물을 어쩌겠소? 새 출발을 하면 어떻소? 그럼 경옥이나 동무나 다 전도를 망치지 않고…” 승호는 자기 귀를 의심할 지경이였다. 그는 한숨을 후~ 내쉬더니 무겁게 입을 열었다. “어찌 쏟은 물을 되담을 수 있겠습니까? 누가 사랑이 변하지 않는다고 했습니까? 난 경옥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어찌 억지로 결합할 수 있습니까? 정조 말을 하는데 내가 경제적으로 보상해주면 안되겠습니까? 성형외과에 가서 성형수술을 하면 될 건데요. 개방세월에 정조라는 건 봉건전통관념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두 하루밤 처녀지 무슨, 처녀면 어떻고 사랑스러워야 처녀지…” “아니, 이 자식! 그것도 말이라고 악다구니질이냐?” 허서기도 리지를 잃고 말았다. “돈으로 처녀의 생명 같은 정조를 사고 팔 수 있느냐?!” 그는 사무상을 꽝 치면서 벌떡 일어났다. “진짜 개새끼구나.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왜 경옥을 짓밟았어? 처녀들의 정조를 초개같이 여기는 네놈이 이제도 얼마나 많은 처녀를 짓밟을지 몰라. 이 세상에 살아남을 거 같아?!” 경옥도 악이 치밀대로 치밀었다. “야, 이 개새끼야! 오늘 내 정조를 돌려달라.” 승호는 능청을 떨었다. “서로 좋아서 그랬는데 어쩌란 말이냐?” 경옥은 울며불며 손을 뻗쳐 승호의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마구 뜯으며 고함쳤다. “야, 이 새끼야, 정조는 처녀의 목숨이야. 정조를 돌려주지 않으면 내 손에 죽는다, 죽어!” 승호는 단말마적으로 달려드는 경옥을 슬쩍 밀어냈다. 경옥은 머리로 벽을 마구 쪼으면서 고함쳤다. “옳다! 오늘 날 죽여라! 죽여! 죽이지 못하면 넌 여기서 죽을줄 알아라! 오늘 정조 대신 네 XX을 빼가지 않는가 봐라!” 경옥은 머리가 터져 뻘건 선지피가 마구 흘러 두볼을 흥건히 적셨다. 허서기는 경옥을 말렸다. 승호는 멍해 서 있다가 “경옥이, 미안하오. 이제 어쩌란 말이오?” 하고 서성거렸다. 그는 이젠 경옥이나 홍희나 은영이나 아무도 버리면 죄인으로 락인될 가능성이 아주 컸다. 그는 괘씸한 경옥 일가에 돌려대고 오줌도 싸고 싶지 않았다. 그런바 하고는 홍희나 은영 가운데 하나 붙잡고 늘어질 판이였다. 경옥이 행악질하자 그것이 신호로 됐다. 바깥에서 깡패들이 문을 박차고 욱 쓸어들어왔다. “쳐라!” 그자들은 호랑이처럼 성호에게 덮쳐들었다. 성호도 주먹을 쥐고 벽구석에 몸을 딱 붙이고 이리 치고 저리 치면서 몸을 피했다. 바깥에서 성호랑 쳐들어와 맞붙었다. 허서기는 황급히 두 손을 쳐들면서 고함쳤다. “닥쳐!” 그는 우두머리인 듯한 꺽다리 하이칼라를 손가락질하면서 “그만두지 못하겠느냐?!” 하고 고함쳤다. 그자는 송파의 졸개였다. 허서기는 바깥에 달려나와 고함쳤다. “경비원들은 뭘 해?! 몽땅 체포해!” 그제야 얻어맞아 쓰러졌던 경비원들이 하나, 둘 일어나 허서기 눈치를 보면서 건성으로 말리는 척했다. 그들도 비수를 들고 날치는 깡패들에게 무모하게 목숨을 잃기 싫었던  것이다. 이때 머리에서 경옥이 “으-악!” 소리치면서 사무실에서 달려나갔다. “원통해 이 세상에서 못 살겠다!” 그녀는 곧추 층계쪽으로 달려가 마구 고함치며 콩크리트란간에  머리를 탁 쫗고 폭 꼬꾸라졌다. “경옥아!” 허서기와 송호가 달려가 얼굴이 피투성이 된 경옥을 껴안았다. 경옥은 머리가 터져 뻘건 피를 쿨쿨 흘리면서 인사불성이 되였다. 경옥은 백지장같이 창백해진 얼굴에 피를 줄줄 흘리면서 까무러진 채 인사불성이 됐다. 맹강녀가 만리장성에 가서 죽은 남편을 그리며 통곡친들 어찌 저보다 더 처참할가. “어서 병원에 업어가라!” 하이칼라는 보기 구차해 경옥을 둘쳐 업고 달려갔다. 이때 호각소리 요란하게 울리더니 경찰들이 들이닥쳤다. “몽땅 체포하라!” 승호의 아버지 리철갑 과장이 팔을 홱 휘둘렀다. 숱한 경찰들이 깡패들과 범송이랑 종수랑 몽땅 나포했다. 경찰들은 깡패들에게 쇠고랑이를 채워 끌고 갔다. 어데서 슬쩍 기여나왔는지 송호가 피투성이 된 경옥을 받아업고 달렸다. 허철만 서기는 울상이 돼 발을 동동 굴렀다. “이게 뭐요?” 리철갑 과장은 허철만 서기를 흘겨보았다. 최성균 교수는 뒤늦게야 소문을 듣고 달려왔다. “야- 졸업식을 앞두고 이 일을 어쩌는가?” 그는 허서기를 한쪽으로 데리고 가서 한참이나 뭐라고 쑤군거렸다. 허서기는  그제야 제 정신이 펄쩍 들었는지 리철갑 과장의 잔등을 툭툭 치며 한쪽 구석으로 데리고 갔다. 그들 둘은 한참이나 뭐라고 쑤군거리더니 갈라졌다. 을씨년스런 하늘에는 먹장구름이 몰려왔다. 먹장구름 속에서 몇가닥의 불뱀이 대지에로 번쩍 내리꽂히며 시뻘건 혀로 채찍질하였다. 드디여 우뢰가 하늘땅을 진동했다. 소낙비가 억수로 쏟아져 어지러운 발자욱을 지워버렸다.                                     17. 베일에 가려진 진상 이른 아침에 자오록한 안개가 삼라만상을 뒤덮으면서 몽롱한 세상을 만들고 있었다. 뜨거운 아침해가 서서히 동산에 솟아오르자 자오록하던 안개층이 서서히 엷어지면서 드문드문 푸른 하늘이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삼삼오오 대학교  교정과 기숙사에 가는 대학생들도 베일 속에서 서서히 자기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베일 속에 가려졌던 희비극의 진상도 서서히 륜곽이 드러나기 시작하면서 온 대학교에서 특급뉴스보다도 현념이 더  커갔다. 며칠 전 경옥은 층계란간에 부딪쳐 머리가죽이 터지고 뇌진탕까지 좀 왔다. 다행히 아직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고 했다. 염라대왕은 어린 그녀가 너무나도 큰 상처를 입었다고 불쌍해 차마 데려가지 못한 것 같았다. 기적이 일어났다. 경옥이 서서히 흐리마리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머리에 붕대를 감은 채 병상에 누워서도 한없이 원망스러웠다. (승호를 과부네 아들이라고 욕할 건 뭔가?) 그러나 인차 도리머리를 홰홰 저었다. (아니야, 부모가 잘했어. 그런 바람둥이를 거절하길 잘했지.) 그녀는 승호한테 릉욕당하고 짓밟히고 상처입은 것이 원망스러웠다.   원래 승호와 경옥은 고중 동창생이였다. 승호는 체육위원, 경옥은 문예위원, 둘다  춤도 잘 추고 운동도 잘해 학교에서 인기인물이였다. 둘이 손도 척척 잘 맞춰 각종 활동도 본때나게 조직해 사생들의 호평을 받았다. 훤칠한 경옥은키에 물새 다리로 살같이 달려 교내 륙상대회에서 항상 일등을 따내군 했다. 그녀는 학교 문예공연대회 때마다 무대에 올라 걀죽한 우유빛얼굴에 나리꽃웃음을 꽃피우면서 학이 나래치듯 너울너울 춤 추군 했다. 승호는 그때 벌써  경옥한테 홀딱 반했다. 가슴에서는 저도 몰래 첫사랑의 씨앗이 움트기 시작했다. 옥의 티라고나 할가. 경옥은 운동이나 춤은 잘 췄지만 공는 수술하게 했다. 그러나 그 흠집은 경옥의 아름다움을 가릴 수는 없었고 그녀에 대한 승호의 사랑의 감정을 저지할 수는 없었다. 고중을 졸업하고 승호는 대학에 입학하게 됐지만 경옥은 그만 락방했다. 그들 둘의 운명은 갈림길에 들어섰다. 그러나 승호는 더 열렬하게, 아니, 더욱 무섭게  경옥한테 덤벼들었다. 경옥은 승호가 열렬해지면 열렬해질수록 미심해나고 불안해났다. 시원한 가을바람이 선들선들 불어오는 어느 하루 밤, 승호는 경옥을 불러 조용한 강가 버드나무숲 속에 갔다. 밝은 달빛은 실실이 내리드리운 버드나무 가지에 애처롭게 매달린 잎사귀들을 비추다가 아예 흐르는 강물에 뛰여들어 자맥질했다. 찬 빛을 띤 강물은 부서지는 은잔디를 싣고 촐랑촐랑 유유히 흘러갔다. 평소에 활발하던 경옥은 전에 없이 쓸쓸히 무거운 침묵을 지켰다. "왜 아무 말도 없어." 그제야 경옥은 돌아서면서 겨우 승호를 응시했다. "대학생하고 이젠 말하기도 어렵구나." "무슨 소릴 해? 너도 열심히 복습해 대학에 입학해야지." 그러나 경옥은 김 빠진 공처럼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한숨을 호~ 내쉬였다. "될 것 같잖아. 오르지 못할 나무는 바라보지도 말라고." 승호가 손을 잡으려고 하자 경옥은 홱 빼갔다. "이러지 말라. 날 잊어라. 넌 대학생이고 난 고중생이야. 우린 한 길로 갈 수  없을 거 같아." "아니야." 승호는 경옥을 와락 끌어안았다. "난 이 세상에서 너 밖에 사랑하지 않아." "픽." 경옥은 코방귀를 뀌더니 도리머리를 흔들면서 몸을 빼려고 했다. "믿지 못하겠니?" 승호는 경옥을 더 꽉 껴안았다. 경옥은 단말마적으로 몸을 빼려고 몸부림쳤다. "왜 이래? 넌 너무 역어서 믿기 어렵다." 승호는 경옥을 놓아주면서 정색했다. "날 믿어다오. 사랑에 대해선 진지해. 넌 영원히 잊지 못할 첫사랑이야." 웬 일일가? 그 말은 마디마다 경옥의 가슴을 파고 들지 않겠는가. 경옥은 한숨을 호~ 내쉬였다. 그녀도 승호를 남자 같다고 여겼고 마음 속으로  좋아하고 사랑했다. 그것은 소녀의 티없이 맑고 깨끗한 첫사랑이였다. 룡암처럼 부글부글 피끓는 청춘남녀, 아니, 처녀총각의 첫사랑은 바야흐로 사랑폭포로 요란하게 쏟아질 것만 같았다. 뜨거운 사랑은 룡암처럼 골짜기와 들이라도 불태울 수 있었다. 경옥은 온몸이 찡해나면서 전률하다못해 두다리마저 나른해져 땅바닥에 물앉고 말았다. 승호는 경옥을 한품에 꼭 껴안고 열기 확확 풍기는 사랑을 고백했다. "경옥아, 피 끓는 청춘을 다 바쳐 사랑한다. 목숨 다 바쳐 사랑해. 바다가 마르고 장백산이 무너져도 사랑할 거야. 칼산에 오르고 불바다에 뛰여들라고 해도 영원히 사랑할 거야. 혹시 마음이 변한다면 목을 쳐도 돼. 목숨으로 널 사랑한다는 걸 증명하겠어." 경옥은 승호의 팔을 천천히 풀더니 일어났다. "아직도 믿지 못하겠니?" 경옥은 뜨거운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사랑해.” 그녀는 승호의 품에 얼굴을 파묻고 어깨를 들먹였다. 승호는 두 손으로 경옥의 얼굴을 받들더니 열기 오른 입술로 키스벼락을 뻑뻑 안겼다… 달님도 부끄러운듯이 얇은 구름송이를 들어 얼굴을 가렸다. 버드나무잎들도 장작더미에 붙은 불더미처럼 활활 타오르는 처녀총각의 사랑에 도취돼 선들선들한 가을바람에 너울너울 춤추며 설레였다… 그후부터 승호는 쩍하면 경옥을 불러내 뒤산 소나무 밭에서, 빈 집에서경 사랑의 서정서사시를 엮었다. 어느 하루, 승호는 집 문을 땅땅 걸고 그녀를 침대에 쓸어뜨리고 소중한 최후방선을 무너뜨리려고 했다. "이러지 말라. 아직 사돈보기도 하지 않았는데 이게 뭐야? 더구나 어머니가 널 반대하는 눈친데…" 그때 승호는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데 뭐가 대수냐?" 하고 말하면서도 경옥의 몸에서 손을 스르르 뗐다. 순간, 승호의 눈 앞에는경옥의 어머니 표독스런 눈길이 떠올랐다. 경옥의 어머니는 백화상점 총경리 안수련이였다. 처음 경옥의 집으로 갔을 때였다. 그녀는 승호의 아래우를 훑어보더니 훤칠한 체격에 남자같이 생겼다고 그러는지 함박꽃웃음을 지었다. “부모들은 뭘 하오?” “아버지는 공안국 과장입니다.” “그래? 가정배경 좋구먼. 아버지 명함은?” “리철갑이라고 부릅니다.” “뭐? 리철갑?” 안수련 총경리 얼굴에 대뜸 어두운 그늘이 퍼졌다. “어머니는 뭘 하오?” 승호는 머리를 숙이면서 쥐구멍으로 들어가는 소리로 대답했다. “병원 간호장입니다.” “혹시 박벽화 아니오?” “예. 혹시 아십니까?” “알다뿐이겠소?” 순간 경옥의 어머니 표정이 대뜸 흐려졌다. 갑자기 팽팽해진 집 안 분위기에 보이지 않는 번개가 치고 우뢰가 지동쳤다. “경옥아, 당장 저 애하고…, 아이고, 이 일을 어쩌니?” 안수련은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채하지 못했다. 그녀는 머리를 싸쥐고 벽을 짚더니 구들에 스르르 물앉았다. “아니, 어머니, 왜 이래요?” 경옥은 어머니를 껴안아 일으켰다. 수련은 승호를 되돌아보지도 않고 손삿대질을 했다. “그만둬라. 사람을 친해도 부모가 어떤 사람인가 알고 친해라. 절대 안된다, 안 돼!”  “어머니, 왜? 승호 아버지 공안국 과장이지. 어머닌 간호장이지. 좀 좋아서?” “넌 몰라. 저 승호 아버진 친아버지 아니야.” “뭐라고?” 승호도 충격이였다. “어머니는?” “쟤 어머니는… 아이고, 이 일을 어쩌니?” (그만두겠으면 그만두라지. 흥!) 승호는 코방귀를 뀌면서 훌쩍 일어나 나와버렸다. 뒤에서 경옥이 애원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엄마, 왜 이래? 우린 벌써 헤여지지 못할 관계인데. 으흐흑.” “뭐라고? 절대 안돼! 이 일을 어쩌니? 아이고~” 승호는 문 밖에서 엿들었다. “저 애 엄마는 우리 시내에서 소문난 바람둥이야. 아이고, 이 일을 어쩌니? 뭐나 유전이 있어. 바람둥이 난 아들은 꼭 바람기가 있는 법이야. 고생문이 터지자고 이래? 절대 안돼. 쟤는 타고난 바람둥이야!” 승호는 성이 꼭뒤까지 치밀어 더는 참을 수 없었다. 그는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가 경옥의 어머니를 손가락질하면서 고함쳤다. “뭐라고 지껄이는 겁니까? 딸을 주기 싫으면 싫었지. 엄마를 모욕하지 말란 말입니다! 이제 더 모욕하면 가만놔두지 않겠습니다!” 수련은 승호를 표독스런 눈길로 쏘아보면서 욕했다. “봐라! 뛸데 있어? 더러운 피를 물려받은 놈새끼, 수양 없는 걸 봐라! 언감  누구한테?” 경옥이 중간에서 울면서 발까지 탕탕 굴러대며 말렸다. “이러지 마십시오. 어머니-!” 그는 승호의 손을 잡아 바깥으로 끌고 나갔다. “얘, 이러지 말라. 천천히 해결하자. 이러면 우리 몽땅 끝장나.” 승호는 간신히 참으면서 경옥에게 끌려 담장 바깥으로 나갔다. “야~ 왜?” 승호는 주먹으로 담장을 쾅쾅 쳤다. 벽돌들이 마구 튕겨 마당에 날아가 떨어졌다… 그때 일을 생각하면 승호는 정이 뚝 떨어졌다. 대학에 입학해 숱한 이쁜 녀대생들을 본 후에는 점점 더 멀어졌다. 숱한 예쁜 녀대생들이 줄지어 따라다니는 판에 고중생인 경옥한테 정이 가지 않았다. (헤이구, 어디 처녀 없어서 욕 먹으면서 계속 련애해?) 그러나 승호는 생각을 좀 고쳤다. 칭칭 감겨드는 경옥의 우유빛 살결과 탄력있는 몸매를 놔주고 싶지 않았다. 더욱이 경옥의 어머니가 무슨 “더러운 바람둥이  피를 물려받았다”는지, 자기 어머니를 “시내에서 소문난 바람둥이”라는지 모욕한 일이 속에 내려가지 않았다. (옳다, 네년의 외동딸도 더러운 바람둥이로 만들어줄게.) 승호는 자기 모자간을 모독한 경옥의 어머니한테 복수하려고 이를 쁙쁙 갈았다. 어느 날 승호는 이성에 대한 유혹보다도 보복심과 야성이 반죽된 복잡한 심리로 끝내 그녀의 집에서 경옥을 침대에 쓰러눕혔다.   경옥은 뜨거운 승호의 손을 딱 잡아 쥐고 똑바로 쳐다보았다. "한가지만 묻자." "백가지라도 물어라. 다 대답해주마." 승호는 경옥의 몸에서 손짓을 멈추었다. 경옥은 일어나더니 승호의 두 눈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이제부터 네 건 몽땅 내 혼자 거야! 알았지?" "그래." 경옥은 끌어안으려는 승호의 가슴을 밀어냈다. "배신하는 날엔 이걸 칼로 썩뚝 베갈줄 알아라!" 그 섬찍한 말에 승호는 질겁해 그만 뒤로 벌러덩 물앉았다. "얘, 사랑하는 사람끼리 왜 면도칼날처럼 선뜩선뜩한 말을 해?" 경옥은 의연히 백지장 같은 하얀 얼굴에 독기어린 표정을 짓더니 몸서리를 칠 말을 퍼부었다. "약속해! 아녀자라고 업신여기지 않겠다고. 배신하지 않겠다고.” 승호는 경옥의 백옥 같은 몸을 가지기 급급해 술술 대답했다. "하늘에 맹세하지. 절대 배신하지 않을게.” “대답 너무 쉽게 하지 말라.” 경옥은 정색해 승호를 마주 바라보면서 두 손으로 량귀를 꽉 움켜쥐며 물었다. “이후에 중학생이라고 업신여겨선 절대 안돼. 알았지?” 승호는 경옥의 탄탄한 허리를 꼭 끌어안고 정중하게 입을 열었다. “땅을 밟고 하늘 떠인 사내 승호, 정중히 맹세한다. 허경옥과의 사랑을 위해 추호의 배신이란 없다. 만약 배신하는 날엔 천벌을 받아 마땅하다. 하늘땅이 증명할 거야!" 경옥은 외씨같이 걀죽한 얼굴에 뜨거운 감동의 눈물을 끊어진 구슬처럼 주르르 흘렸다. “혈서라도 써라니?” "필요없어. 난 절대 후회하지 않는다. 사랑해, 승호. 모든 걸 다 줄게." 처녀총각의 첫사랑은 휘발유를 친 장작더미에 붙은 불길처럼 세차게 활활 타올랐다. 요란하게 연기가 뭉게뭉게 피여올랐다. 뻘겋게 탁탁 튕기며 모든 것을 삼켜버리면서 활활 타올랐다. 승호의 가슴에서 기승을 부리는 복수의 불길이 이글거리면서 열기오른 몸을 기승스레 불태웠다… 경옥은 사흘 만에야 정신을 차리고 병상에서 간신히 깨여났다. 그녀는 흐리멍텅한 머리 속에 승호에게 처음 당하던 정경이 희미하게 떠올라 말라 터진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경옥아, 정신이 드니? 아이유, 이게 무슨 일이냐? 흑흑흑.” 그녀의 눈에는 눈물을 줄줄 흐리는 어머니가 희미하게 떠올랐다. “어머니!” 그녀는 일어나려고 했다. 붕대를 팅팅 감은 천근무게나 되는 머리가 뻐개지는 것 같아 도저히 일어날 수 없었다. 수련은 황급히 불쌍한 외동딸을 제자리에 눕히고 이불을 덮어주었다. 병실이 어찌나 더운지 선풍기를 켜놓아도 경옥의 상처투성이 코등에 식은 땀이 송골송골 내배였다. 수련은 옆에서 땀을 닦아준다, 부채질을 해준다 하면서 바삐 맴돌았다. 경옥은 서서히 정신을 차리자 악귀 같은 승호가 떠올랐다. 사랑한다고 맹세하던 승호가 배신할줄은 꿈에도 몰랐다. 경옥은 입귀를 옥물더니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개자식, 내 손에 죽을줄 알아라.) 사랑이 원한으로, 련인은 원쑤로 돼버렸다. 그녀는 사촌동생 송호에게서 승호가 녀대생들과 좋아한다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승호 하늘 땅에 맹세했는데. 설마?” “누나, 진짜라니까. 은영이나 홍희라는 녀대생을 번갈아 데리고 선녀음식점에 드나드는 걸 보았어.” “녀동창생이더냐?” “그래. 교실에 들어가는 거 보니까.” 심한 충격을 받은 경옥은 이를 옥물었다. 그녀는 승호를 찾아가 물어볼 수도 없고 어떻게 확인할 수 도 없었다. 더구나 그렇게 가슴아픈 일을 아예 자기 눈으로 확인하고 싶지도 않았다. (진짜 그런 일 있으면 어떻게 살아?) “개자식, 진짜 딴 녀성 품는 날엔 내 죽고 네 죽을줄 알아!” 그녀는 승호를 몰래 감시하라고 부탁해놓고서도 행여나 송호 말이 거짓말로 됐으면 하고 하느님께 빌고 또 빌었다. 반년도 안돼 승호가 한 학급의 홍희를 좋아한다는 것이 사실로 드러났다. 승호가 야밤에 홍희와 학교 식당 복도에서 사고를 쳤던 것이다. 경옥은 학교 기률검사위원회 사무실에 가서 큰아버지 허철만 서기를 만나  알아보았다. 진짜 사실로 확인됐다. 하늘땅이 핑그르르 돌아갔다. 순간 경옥은 허망 엉덩방아를 찌으면서 땅바닥에 쓰러졌다. “경옥아, 경옥아!” 허서기는 녀조카를 껴안아 일으켜 사무실 소파에 앉혀 놓으면서 위안했다. “얘, 그까짓 품질이 나쁜 놈을 깨끗이 잊어버려라!” “어떻게 잊어? 우린 그런 사이 아닌데.” 허서기도 놀랐다. “뭐라고?” 경옥은 차마 입으로 번지지 못하고 소파를 치면서 대성통곡쳤다. “왜 부모 동의도 없이, 아이유, 이걸 어쩌니?” 허철만 서기는 경옥을 가엽게 바라보면서 속궁리했다. 그는 우선 승호를 불러 학생기률로 압력을 가해 경옥과 관계를 회복하게 하도록 설복시키려고 했다. 그런데 그날 격분한 경옥이 송호랑 시내 깡패들을 데리고 온데다 사무실에서 승호를 격노시켜 일을 그르치고 말았다. 그는 승호가 변심해서 홍희와 은영을 사랑하지 결코 경옥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승호와 담화하는 가운데서 경옥과 량성관계를 발생한 것은 다만 경옥의 어머니를 보복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는 승호의 말을 듣고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괘씸한 놈, 퇴학시키고 감옥에 처넣지 않는가 봐라!) 허철만 서기는 복수를 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할 수 없는 현실에 주저앉고 말았다. 승호의 뒤에 리철갑 과장의 살기등등한 얼굴이 떠올랐다. 송파랑 송호랑 어려서부터 공부하지 않고 무리싸움을 하고 강도짓을 해서 쇠살창신세를 져야 했다. 그러나 번마다 허철만이 나서서 리철갑 과장에게 례물을 먹이고 쇠살창에서 꺼내군했다. 리과장의 아들 승호가 학교에서 자주 남녀관계사고를 쳤다. 때문에 엎음갚음으로 송호 형제를 간신히 지키고 있는 형편이였다. “후~” 허서기는 이번 일도 엎음갚음으로 끝내고 싶었다. 하여 리철갑 과장과 쑤군거려 덮어두기로 했다. 그러나 경옥을 짓밟은 승호를 도저히 용납할 수 없어 속을 끙끙 앓았다. (어디 두고보자! 수캐 같은 놈새끼!)
121    대하소설 진달래 소야곡(8) 댓글:  조회:1390  추천:1  2018-01-26
                       14. 폭풍 복도에서 벌어진 희극의 후폭풍은 대학가에서 아주 거셌다. 홍희는 식사를 전페하고 이불을 들쓰고 침실에 들어누워 있었다. 그러나 승호는 오히려 아주 뻔뻔스러웠다. “어, 재수 없다.” 그날 저녁에 망신당하고서도 숙사에 돌아와서 맞은 켠 성호를 흘끔 곁눈질하더니 이불을 들쓰고 쿨쿨 자는 척했다. 아무리 낯가죽이 두껍기로 돼지 엉덩짝 같다고 해도 승호라고 왜 부끄럽지 않겠는가? 허나 그는 동창생들 앞에서 결코 나약하게 나올 수 없었다. (련인 사이에 놀다가 들켰는데 어떻단 말인가?) 그는 모든 인맥을 다 동원해 자기 목에 걸린 올가미를 벗어버리려고 애썼다. 다만 마음이 약한 홍희가 멍청이 같은 짓을 할가봐 두려웠다. 그는 밤중이기에 홍희를 찾아가 위로의 말 한마디 못하는 것이 못내 안타깝기만 했다. 성호는 이불을 들쓴 승호를 보고 어이없어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모든 일을 주도면밀하게 처리하던 승호가 이번에는 역은 참새 방아간을 날아지나간 격이 되지 않았는가. 이때 침실 문이 벌컥 열리면서 싱거운 범송이랑 작달막한 종수랑 우르르 쓸어 들어왔다. 범송은 긴 목을 빼들고 승호의 침대를 들여다보면서 빈정거렸다. “헤헤헤. 우리 부장님께서 벌써 잠들었네.” 승호는 귀에 거슬렸지만 이불을 푹 쓰고 못들은 척했다. 종수도 한마디 끼여들었다. “항상 우릴 보고 학생기률을 잘 지키라더니. 흥! 하긴 잘한다, 잘해.” “소 볼기짝이면 어디 저렇게 두텁겠니? 뻔뻔스럽긴…” “뭐라니?!” 승호가 갈범처럼 버럭 고함지르며 벌떡 일어나 범송의 멱살을 틀어쥐였다. “이 촌뜨기새끼들아! 개소릴 작작 치지 못해?!” 범송은 승호의 손을 풀면서 두덜거렸다. “시내 새끼들은 바람이나 잘 피웠지! 뭘 대단하냐?” 승호는 범송의 면상을 한대 갈겼다. “이 새끼 누굴 치니?” 범송도 승호를 한대 맞받아 쳤다. 종수도 아니꼬운 눈길로 승호를 쏘아보며 “어데 가 맞아서 반창고를 더덕더덕 붙이고 다니다가 우리하구 해내니?” 하고 승호를 말렸다. “이 촌새끼들이 몽땅 덤벼라!” 성호가 일어나 말렸다. 그는 승호가 계속 범송을 치자 훌 밀어놓으면서 “뭘 잘 했다고 이러니?” 하고 핀잔을 주었다. 승호는 범송을 놓고 성호를 이마로 떵 들이받았다. 그 바람에 승호의 눈덕에 붙었던 반창고가 성호의 이마에 철썩 붙었다. “촌놈새끼들이, 다 덤벼라!” 성호는 귀에 거슬렸다. “야, 왜 쩍하면 우릴 촌놈새끼라고 욕해? 계속 우릴 깔보겠니?” 승호는 오늘 저녁 일을 분풀이할데 없어 속을 끙끙 알았다. 때마침 성호가 나서자 팔을 썩썩 걷어붙이며 을러멨다. “걸고 들겠어?! 이 새끼들을 시켰지?” 성호도 물러서지 않았다. “어째 아직도 덜 혼났니?” 이때 문을 똑똑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고 들어선 이는 뜻밖에도 낯선  녀대생이였다. “밤중에 왜 이래요? 아래층에서 어디 자겠어요? 기말인데요. 제발 작작 떠들면 어때요?” 승호와 성호는 서로 틀어쥐였던 멱살을 놓았다. 녀대생이 문을 닫고 나가자 범송과 종수도 툴툴거리면서 자기 침실로 돌아갔다. 침실에 성호 밖에 없자 승호가 또 걸고들었다. “나가서 한판 붙어보겠니?” 성호는 침대에 들어앉으면서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난 촌뜨기여서 시내 애들하고 싸우지 못해. 어찌나 권투실력이 센지. 흥!” 승호는 성호한테 다가서면서 정색했다. “사내 대 사내로 한판 붙어보자.” 성호는 씨무룩이 웃으며 승호를 쳐다보았다. “전번에 모든게 끝나지 않았니?” “아니야. 너 아직도 은영을 사랑하느냐?” 승호는 질투가 번뜩거리는 눈길로 성호를 똑바로 응시했다. “은영이 널 사랑하지도 않는데 싱겁잖니? 짝사랑을 해도 유분수지.” 성호는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정말 리해되지 않는다. 넌 도대체 홍희냐? 은영이냐?” 승호는 직답을 피했다. “은영과 정리하겠다는 말인 거 같은데 좋다. 허나 우리 둘 사이 아직도 정리하지 못한게 있어.” 성호는 의아한 눈길로 승호를 바라보면서 “또 뭐냐?” 하고 물었다. “사내 대 사내로 한판 붙어보자.” “그만 둬라.” 성호는 승호가 어리석어보이기까지 했다. “그게 더 중요하냐? 이번 일이 전도에 어떤 영향을 미칠거 짐작이나 했니? 친구로서 충고하는데 처분을 경하게 받는게 급선무야.” 그러나 승호는 아주 아쉬운 어조로 말했다. “친구? 이런 놈과 아직도 친구야? 전번엔 널 촌놈이라고 너무 업신여겼어.” 성호는 진지해졌다. “그래 농부 아들 주먹맛을 단단히 봐야 알겠니? 이번 일 말끔히 정리한 후 제대로 붙어보자.” “좋다.” 승호는 씩씩거리면서 침대에 돌아가 두다리를 쭉 펴고 들어누웠다. “참 재수없어.” 승호는 성호 쪽으로 돌아누우면서 물었다. “너희들 어떻게 돼 미리 짜고 든 것처럼 창고에 몰려 들었어? 네가 시켰지?” 성호도 승호 쪽으로 돌아누웠다. “우연히 벌어진 일이야.” 성호는 승호에게 솔직히 말해주었다. 승호는 벌떡 일어나며 두덜거렸다. “정말 재수 없는 놈은 뒤로 넘어져도 코등을 깬다더니. 원, 참. 재수없어.” 성호는 듣다못해 한마디 더 했다. “누굴 원망하지 말고 네한테서 모든 걸 찾아야 해. 왜 그런짓을 자꾸 하니?” 승호는 침대에 되들어 누우면서 두덜거렸다. “됐다, 됐어. 누굴 교육하니?” 승호는 이불을 들썼다. 침실에는 납덩이 같은 침묵이 흘렀다. 창문으로 서글픈 달빛이 비껴들어 침실바닥을 쓸쓸히 어루만졌다. 이튿날 큰 일이 일어났다. 점심때 쯤에 담임교원 최성균 교수가 찾아와 승호를 불러갔다. 승호는 죄수처럼 머리를 숙이고 따라갔다. 그런데 선생님은 교무실로 데리고 간 것이 아니라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갔다. 거기에는 진작 홍희도 있었다. 최교수의 주름이 간 얼굴에는 검은 그림자가 흘러가고 있었다. “뭐요? 어쩜 복도에서 그런 일을 다 치오? 정말 한심하오.” 홍희는 머리를 두 무릎 사이에 파묻고 어깨를 들먹였다. 그의 어깨를 흘러 지나간 긴 머리카락이 잔잔한 파도를 일으켰다. 승호는 머리를 조금 숙이며 손가락으로 소파를 쓱쓱 긁을뿐이였다. “큰일났소. 누가 학교당위 기률검사위원회에 고발했소. 대학생들은 재학기간에 련애하지 못한다고 학생기률에 명확히 규정했는데 뭐요? 승호는 학생당원이기에 퇴학을 주지 않겠는지 모르겠소.” 최교수는 승호한테 머리를 돌렸다. “승호는 학생회체육부장에 체육위원인데 어째 련애모범을 보이느라고 그러오? 졸업을 코 앞에 두고 뭐요? 전도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아오?” 승호는 “선생님, 선생님께 부담을 줘서 정말 미안합니다.” 하고 반성했다. 최교수는 한숨을 후~ 내쉬였다. “이 일을 어떻게 뒤수습하면 좋소?” 그는 권연을 꺼내 물었다. 승호가 옆에서 제꺽 라이터를 꺼내 불을 켜 드렸다. 최교수는 담배연기를 한가슴 가득 길게 빨아들였다가 후~ 내 뿜었다. “저네 둘이 진정 사랑하오?” 승호는 “예.” 하고 기여드는 소리로 대답하였다. 그러나 홍희는 머리를 들지 못하였다. “승호를 사랑하오?” 홍희는 그제야 눈물범벅이 된 얼굴을 들었다. “네.” 최교수는 한숨을 후~ 내쉬였다. “졸업하면 꼭 결혼식을 올리오. 그래야 때를 벗을 수 있소.” “알았습니다. 이제 졸업하면 꼭 결혼하겠습니다.” 승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최교수는 너무 안타까워 고함쳤다. “헛참, 무슨 낯으로 허철만 서기를 만날가? 그러잖아도 내가 학생들을 잘 관리하지 못한다고 비평했는데. 에이, 참.” 최성균 교수는 성호와 홍희에게 여차여차 하라고 일러준 후 돌려보냈다. 오후에 대학교당위 기률검사위원회에서 승호한테 호출장이 내렸다. 승호는 성호를 피뜩 곁눈질해보더니 머리를 숙이고 나갔다. 허철만 서기는 승호와 초면강산이였다. 그는 승호를 보자마자 날카롭게 질책했다. “동무는 학생당원이고 학생회 부장 아니오? 그게 뭐요? 복도에서 부정당한 관계까지 발생하다니? 정신 있소?” 승호는 손으로 삿대질하는 허서기를 응시하면서 반박했다. “전 부정당한 관계를 발생한 적이 없습니다. 나와 홍희는 서로 사랑하는 련인 사입니다.” 꽝! 허서기는 책상을 치며 벌떡 일어섰다. “이 동무, 이게! 아직도 자기 잘못을 깨닫지 못했구먼. 대학교에서 누가 함부로 련애하라 했소? 학생기률을 엄중하게 위반했단 말이요.” 허서기는 의자에 되앉으면서 책상에 놓은 손까지 부들부들 떨었다. “안되겠소. 호되게 처분해야겠소.” 승호는 풀썩 땅바닥에 꿇어 앉아 두 손을 싹싹 비볐다. “살려 주십시오. 이제 한학기만 있으면 졸업하겠는데요. 저의 전도를 생각해서라도 선처를 해주십시오.” 허서기는 코방귀를 뀌였다. “쳇, 호되게 처분하지 않으면 이후에 이 학교를 어떻게 관리하겠소? 영향이 얼마나 나쁜지 아오? 자산계급의 더러운 생활방식이 머리에 꼴딱 찼구만. 옳바른 련애관을 수립해야 하지. 뭐요? 이번에 버릇을 떼주지 않으면 장차 또 무슨 일을 칠지 모르겠소.” 승호는 아무 말도 못하고 그저 “잘 못했습니다.”라고 했다. 허서기는 뜻밖에 나지막이 묻는 것이였다. “동무 아버지 시공안국에서 일하오?” “예. 형사경찰대대를 책임졌습니다.” “오, 그렇구먼. 동무 서류를 보고 진작 알았소. 이래서 세상은 둥글둥글하다는  거요.” 허서기는 승호를 앉으라고 하고나서 “이번 일은 덮어놓고 지나갈 순 없소. 먼저 잘 검사하오. 내 좀 돌봐주지. 누구한테도 비밀이요.”라고 하더니 희죽이 웃으면서 손을 내저었다. “가보오.” “예. 심려를 끼쳐드려 미안합니다.” 승호는 선처를 받을 실오리만한 희망을 안고 침실에 돌아왔다. 그는 침실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고 책상에 마주 앉아 검사서를 줄줄 내리썼다. 한참 후 그는 검사서를 가지고 곧추 학교당위 규률검사위원회 사무실로 찾아갔다. 그러나 허서기가 없었다. 그리하여 옆사무실을 찾아가 검사서를 전해달라고 부탁하고 시공안국으로 발길을 돌렸다. 승호는 무거운 심정으로 아버지 사무실문을 노크하고 들어갔다. 이게 웬 일인가? 아버지 사무실에 허서기가 와 있지 않겠는가! 승호는 몸둘바를 모르고 되나와버렸다. 뒤에서는 이런 말이 묻어나왔다. “송파 일은 근심하지 마십시오.” “승호 일도 근심하지 마십시오.” “이거 번마다 신세를 집니다.” “이래서 세상은 둥글둥글하다고 하지 않습니까.” “하하하.” “허허허.” 승호는 오른주먹으로 왼손바닥을 탁 쳤다. “그럼 그렇겠지.” 그는 꽉 막았던 숨이 활 나왔다. (‘송파’는 시내에서 한다하는 깡패인데. 허송파, 그 놈새끼가 허서기 아들이란 말인가? 참, 일이 별나게 돌아간다.) 승호와 송파는 시내 주먹세계에서 악연을 맺은지 오랜 라이벌이였다. 그런데 이번 일로 서로 돕는 사이로 될줄은 천만뜻밖이였다. 이튿날 허서기가 승호를 찾았다. “승호동무는 검사서를 아주 심각하게 썼더구만. 다신 련애하지 마오. 원래 동무는 퇴학을 맞아야 할 일을 쳤소. 그러나 동무 전도와 학교 위신을 봐서 학급에서 사상검토나 시키고 말 예산이오. 다시 이런 일을 치지 마오. 그땐 나도 어쩔 수 없단 말이오. 알만 하오?” “예. 허서기 감사합니다. 이후에 꼭 은공을 갚겠습니다.” “에이, 그런 말을 절대 입 밖에 내지 마오. 이건 ‘병을 치료해 사람을 구하는 원칙’에 의해 선처한 것뿐이오.” 승호는 허리를 굽신거리고 돌아서 나오려다가 되돌아서 한마디 물었다. “예, 알았습니다. 선처하는바에 학급에서도 검사를 시키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허서기는 입을 떡 벌렸다. “건 어렵소. 온 학교에 소문이 자자한데. 참, 괜히 보호우산까지 구멍이 펑펑  뚫리게 놀지 말고 검사나 잘 하오.” 승호는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우산이 구멍 나는게 더 엄중한가? 창피해서 어떻게 동창생들 앞에서 검사한단 말인가?) 승호는 또 입을 열었다. “혹시 성호랑 범송이랑 고발하지 않았는지?” 허서기는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걸 알아서 뭘 하오? 동문 검사만 잘하고 고치면 되오. 절대 보복해선 안되오. 일을 복잡하게 만들지 마오.” 승호는 우둔한 짓을 했다는 것을 깨달은듯이 혀를 홀랑 내밀었다. 그는 홀가분한 심정으로 침실로 돌아왔다. 성호를 보는 순간 의심이 부쩍 들었다. (꼭 저 새끼 고발한 거 같아. 이 기회에 나를 꺾어버리고 은영을 빼앗아가려고 그랬을 가능성이 커.) 순간 성호와 재차 결투를 벌리고 싶은 충동이 욱 치밀어 올라 흉벽을 쿵쾅쿵쾅 무섭게 두드렸다. “절대 보복해선 안되오. 그럼 일이 복잡해지오.” 귀전에 허서기가 하던 말이 떠올라 으스러지게 쥐었던 주먹을 스르르 풀었다. 며칠 후 학급에서는 회의를 열었다. 회의에는 허철만 서기, 담임교원 최성균 교수 외에 학생회 간부들과 학급 동창생들이 참가했다. 홍희는 아예 책상에 머리를 파묻었다. 승호만은 개턱처럼 턱을 쳐들고 뻔뻔스레 앉아 있었다. 최성균선생이 직접 회의를 사회하였는데 거두절미하고 이런 일이 생긴 데는 담임교원인 자기에게 주요책임이 있다고 반성부터 했다. 뒤이어 승호가 검사했다. “학생당원으로서 학생기률을 위반한 잘못을 반성하며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여기까지는 괜찮았다. 그런데 그가 쓸데없는 말을 한마디 해서 물의를 일으킬줄은 몰랐다. “유감스러운 점도 있습니다. 우리 대학교 학생기률은 인성화되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대학생들을 보고 련애하지 못한다는 기률조목은 성인이 다 된 우리 대학생들의 실제에 부합되지 않습니다.  학교당국에서 개정할 것을 희망합니다.” “아니, 저 동무, 저게!” 허철만 서기는 책상을 치며 벌떡 일어섰다. “무슨 망발이요? 엄숙한 비판대회장에서 그런 돼먹지 못한 말을 하다니?!” 최성균선생도 아주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내 발언하겠습니다.” 모두들 뒤로 머리를 돌려보니 꺽다리 범송이 일어섰다. “보십시오. 얼마나 뻔뻔스러운가? 자기 잘못을 근본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학생회 당원간부로서 창고 복도에서 련애한게 옳습니까? 창피한줄도 모르고. 학교에서 학생기률을 잘못 정했다고? 뭐 인성화되지 못했다고? 그럼 학교에서 너처럼 숱한 녀학생들의 정조를 짓밟는 개 같은 새끼들에게 마음대로 하게 놔두라는 건가? 검사가 철저하지 못하다고 봅니다. 이후에도 또 개짓을 하겠다는 겁니다. 우리 학급을 다 팔아먹고서도 뻔뻔스럽긴?!” 성호가 옆에서 범송의 팔소매를 잡아당겼다. “놔라! 어째, 저 새끼 항상 우릴 촌뜨기라고 깔보더니 잘 됐어. 퇴학이나 콱 맞아라!” 최성균선생이 제지했다. “인격모욕을 하지 말고 비평하십시오.” 범송을 피뜩 쳐다보는 승호의 눈길이 그리 곱지 않았다. “제가 말하겠습니다.” 정희가 발딱 일어나자 모두들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나는 홍희하고 한 침실에 있는 동창생으로서 정말 마음이 아픕니다. 승호 동무는 어쩜 처녀들의 정조를 헌신짝 다루듯 할 수 있소? 정조는 처녀들의 생명이나 마찬가지라는 걸 모르오? 그 얼마나 많은 처녀들이 정조를 잃고 고민하고 심지어 자살까지 했습니까? 녀성들의 정조를 사정 없이 짓밟은 승호의 착오는 그저 학생기률로 처분할 일이 아니라고 봅니다. 형사범죄로 처분해야 해요.” 숱한 학생간부들이 머리를 끄덕였다. 힘을 얻은 정희는 계속 대포를 퍼부었다. “승호를 지금 엄격히 처분해 경종을 울려줘야 다신 이런 착오를 범하지 않게 할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승호는 이른바 련애한다는 미명하에 홍희를 내놓고도 숱한 녀학생들을 해치고 있습니다…” “그만하오!” 뜻밖에 성호가 책상을 꽝 치면서 벌떡 일어나 정희에게 면박을 주었다. “칼모태에 오른 물고기를 잘 썰어서 선생님들한테 잘 보이려고 하지 마오. 이제 30년이 지나도 우린 동창생들이오. 우물에 빠진 승호 머리에 돌멩이를 작작 떨어드리란 말이오. 그런다고 학교에서 졸업배치를 더 잘 해줄 거 같소?” 뒤이어 성호는 선생님들을 돌아보면서 거리낌 없이 말했다. “허서기, 승호와 홍희는 서로 사랑하는 사입니다. 이제 한학기 지나면 결혼할지 누가 압니까? 련인끼리 련애한 게 무슨 잘못입니까?” 모두들 성호가 이렇게 나오리라고는 실로 천만뜻밖이였다. “어째 너도 속에 걸리는게 있니?” 범송이 성호에게 눈을 흘기며 두덜거렸다. “쟤들 어디 그저 련애한 거야? 복도에서 뭘 했다고 그러니?” “관둬! 량심을 지켜라.” 성호의 말에 범송은 펄쩍 뛰였다. “야, 원칙을 지켜야 해! 뭐야? 동창생이라고 잘못을 보고서도 덮어줘서야 되니?” 성호는 범송한테 한대 안겨주고 싶었다. 그는 범송과 “너는 은영과 련애하지 않았니?” 하고 묻고 싶었지만 가까스로 참았다. 이때 허철만 서기가 총화발언을 했다. “오늘 승호 동무는 심각하게 반성했습니다. 이후에 우리 학교에서 다신 이런  사고가 생기지 말 것을 바랍니다. 이후에 이런 일이 또 발생하면 그땐 엄격히 처분할 것입니다.” 허서기는 대충 몇 마디 말하고는 최성균선생한테 끝내라고 눈짓했다. 최성균선생은 홍희한테 물었다. “홍희는 진짜 승호를 사랑하오?” 책상에 머리를 파묻고 있던 홍희는 용기를 내 머리를 들며 천천히 일어났다. “예. 이 몸이 죽어죽어 백골이 진토로 될지언정 님을 향한 일편단심이야 변할 수 있겠어요? 아무리 비판해도 승호를 사랑해요.” 그 소리에 여기저기서 킬킬 웃는 소리로 부산했다. “웃지 마오. 이건 저 동무들 처분에 관건적인 대목이요.” 최성균선생은 아주 엄숙한 표정으로 교실을 둘러보더니 계속해 승호에게 물었다. “동무들은 졸업하면 결혼할 예산이요?” 승호는 사전에 시켜준대로 “예. 새해 9.3에 결혼할가 합니다.” 최성균선생은 머리를 끄덕였다. “됐소. 앉소. 모두 들었지요? 물론 공공장소에서 그런 짓을 한 건 학생기률에 어긋납니다. 그러나 이건 도덕범주에 속한다고 생각합니다. 황차 이 동무들은 당장 결혼할 사이라는 것과 전도를 감안해 허서기께서 경한 처분을 내릴 것을 바랍니다.” 허서기는 아무런 표시도 하지 않고 묵묵히 앉아 있었다. 회의는 간단히 끝났다. 승호는 숙사로 돌아오면서도 정희와 범송이 속에 내려가지 않았다. 반면에 성호의  의리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변이 아닐 수 없었다. (열길 물 속은 알아도 한치 사람 속은 모른다고 병 주고 약 주는 성호 속심을 누가 알아? 내놓고 대포를 쏘는 년놈들보다도 안팎이 다른 놈새끼 더 무서워. 저 자식 분명 자기 발등이 저려서 미리 방패를 들고 나선 거야. 넌 은영과 짝사랑을 하지 않았니? 퇴학맞을가봐 겁나지. 흥!) 승호는 침실에 돌아와 성호의 동정어린 눈길을 피하면서 침대에 털썩 들어누웠다. 한가지 풀리지 않는 의문이 피뜩 떠올랐다. (자식, 날 물어재끼고 은영을 채갈 좋은 기횐데 왜 날 비호하지?) 며칠 후 후폭풍이 잔잔해지자 승호는 목욕탕에 가서 목욕까지 하고나니 심신이 홀가분해졌다. 승호는 소고기와 돼지고기, 닭고기를 두 꾸러미나 사들고 최성균 교수네 집으로 찾아가 인사했다.   최교수는 김이 문문 나는 소고기국을 떠서 안방에 홀로 계시는 늙으신 아버님께 드리면서 혀끝이 다슬 지경으로 승호의 인사성을 칭찬했다. “승호는 인사성이 밝은 제자요. 효성과 의리가 강한 사람은 보답받기 마련이요.” 시름시름 앓던 사모님도 자리에서 일어나 김치움에 가서 대야에 김치를 담아 내왔다. 승호는 “이번에 선생님께서 미리 가르쳐주셨으니 말씀이지요. 퇴학맞을 번했습니다.” 하고 입이 마르게 개여올렸다. 또 기회를 봐서 담임교원 앞에서 성호를 춰올렸다. “최선생님, 이후에 성호를 좀 봐주십시오. 걘 진짜 의리심이 강한 친구입니다. 그날 비판회의에서 보십시오. 다른 애들은 저를 죽어라고 비평했지만 성호는 저를 두둔해 중점발언을 했단 말입니다.” 최교수는 승호를 타일렀다. “성호 은혜를 잊지 않는 건 좋소. 그러나 뭐나 속으로 많이 생각하고 적게 말해야 하오.” “예, 명심하겠습니다.” 승호는 원래 허철만 서기한테도 인사하러 가려고 했다. 그러나 승호의 아버지 리철갑 과장이 떽 했다. “야, 정신 있니? 까딱 말라. 이 일은 아무도 모르게 무덤까지 가지고 가야 해. 세상 사람들이 알면 너와 송파는 물론, 내하구 허서기까지 몽땅 끝장난다. 알겠니?” 승호는 머리를 끄덕이면서도 리해되지 않았다. (대체 내 무슨 죄를 졌다고 깡패들의 일을 덮어주기까지 해야 하는 걸가?  허송파가 무슨 일을 쳤는가?) 세상에는 지하에 암장돼 흐르는 뭔가 있었다. 승호는 아직 세상의 피상만 보고 지하에서 흐르고 있는 지하수를 보지 못하고 있었다.                                                                                   15. 목동과 파랑새 엄동설한은 대지에서 맥없이 스르르 물러가고 봄아씨가 사뿐사뿐 다가왔다. 비단결로 얼굴을 쓰다듬는 듯한 부드러운 봄바람이 대지를 간지르며 산들산들  불어왔다. 처녀총각들의 설레는 가슴에도 훈훈한 봄바람이 스물스물 스며든다. 성호는 사랑의 눈길을 은영한테서 점차 떼려고 모지름을 썼다. 아무리 예쁘더라도 색마 같은 승호한테 사랑의 목숨과도 같은 정조를 잃은 녀자애를 사귀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한날 한시에 깊이 뿌리 내린 감정을 단절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였다. 그제야 그는 자기 마음 속에 은영이 아주 깊이 얼기설기 사랑의 뿌리를 박고 있었다는 것을 느꼈다. 그 사랑의 뿌리를 흔적 없이 빼려고 할수록 마음의 상처는 더 커졌고 고통스러워났다. (아무런 미련도 없이 은영을 잊자.) 성호는 몇번이고 다짐하였다. 하지만 교정에서 우연히 흩날리는 체육머리를 보아도 사랑스러워 어쩔 수 없었다. 진짜 사랑스러운 은영의 머리카락으로부터 외씨 같은 얼굴, 탄력 있는 몸매, 어데라 없이 사랑스러웠다. 다른 이성과는 달리 은영으로 인해 감정이 무섭게 파도치는 것에 무기력해지는 자기를 꾸짖은 때도 한두번이 아니였다. 꽃노을을 쓰고 웨딩드레스를 입은 은영이 자기 팔을 끼고 사뿐사뿐  결혼례식장에 들어가는 꿈이 눈 앞에서 삼삼거리는 상 싶었다. 그런 은영을 허망 내던지기에는 너무나도 힘들고 마음 아픈 일이였다. 그는 졸업론문을 쓰는데 도정신하면서 점차 은영을 잊으려고 했다. 황차 겨울이 물러간지라 빙장에 가서 스케트를 타는 일이 없었다. 아래학급이기에 교실에서 은영을 자주 만나는 일이 없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성호는 그간 은영 때문에 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바람에 학기말 시험성적이  좋지 않았다. 농민의 아들이기에 그럴가. 자기가 땀을 흘려 가꾼 밭에서 나는 것만큼 곡식을 걷어들여 먹는데 만족하듯이 자기 기말성적에 만족했다. 승호는 성호의 그런 사상을 소농경제사상이라고 비웃었다. 그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수단을 가리지 않았다. 외교를 하고 권세에 아부하고 돈을 써서라도  목적을 달성하고야 말았다. 성호는 승호의 그런 처세술을 좋아하지 않았다. 성호는 천수해중학교로 실습하러 떠나게 되였다. 그런데 운명의 조화라고 할가. 범송과 종수, 정희도 함께 천수해중학교로 실습하러 가게 됐다. 성호가 뻐스정류소로 가는데 파랑새가 뛰여와 생글방글 웃으며 따라나섰다. 그러나 성호는 별로 반기는 기색이 없었다. “어째 범송이랑 함께 가지 못하오?” “또, 또. 무슨 일이 있어? 어째 얼굴색이 좋지 않구나.” 정희는 옆에 사람이 없는 것을 보고 나직이 물었다. “아직도 은영을 잊지 못해?” 성호는 피씩 웃었다. 그는 정희를 데리고 공원으로 들어갔다. 줄줄이 늘어선 화단에는 모란꽃, 빨간 장미꽃들이 활짝 피여 그윽한 향기를 풍기고 있었다. 원예사들이 연분홍 진달래꽃과  무궁화까지 심어 별유천지를 만들어놓아 유람객들의 눈길을 끌었다. 성호는 소나무가 우거진 수림 속으로 들어가 정희와 마주 섰다. “정희, 전번에 그게 뭐요? 승호와 홍희를 그렇게까지 사정없이 비판할 수야 있소? 동창생으로서 어찌…” “픽!” 정희는 파랑새란 별명처럼 예쁜 얼굴이 대뜸 파랗게 질렸다. “그래 승호가 잘 했어? 학생기률을 어긴 건  둘째고 그게 뭔가? 이 처녀 저 처녀 돌아가면서 정조를 짓밟고 있단 말이요. 대학교로 오기 전에 벌써 약혼녀가 있었다던데 그게 뭐요? 홍희하구 저렇게 망신스런 일을 쳤지. 어디 그뿐이야? 은영과도 지하독서실인지 세집인지 뭔지 하는데 들어가는 거 여러번 봤어. 개 같은 놈이 가만 놔뒀겠어? 나쁜 놈을 비호하는 네가 더 나빠! …” “그만해! 검정개 돼지 흉을 작작 해.” “퇴학을 줘야 해, 퇴학을! 걔는 별명이 ‘호랑이’라더구나. 이젠 발정 난 ‘수개’라고 해라. 호호호.” 정희는 어글어글한 눈이 떼꾼해지더니 정색했다. “넌 아직도 승호가 련애를 구실로 숱한 처녀애들 정조를 유린하는게 옳다고 보니? 그래 너도 걔처럼 개짓을 하겠다는 거야?” “아니지.” “왜 자꾸 승호를 보호해나서니?” “우물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는 동창생이 불쌍해서 그래지.” 정희는 머리를 끄덕이더니 성호를 맑은 눈으로 빤히 쳐다보면서 한마디, 한마디 똑똑히 말했다. “그게 동창생을 구하는게 아냐. 승호가 그 개 버릇을 고치지 않으면 이제 또 무슨 사고를 칠지 아니? 전번 비평회의 때 짯짯하게 비평해줘야 했어. 쓴 약은 병 치료에 도움이 된다는 말이 있잖아? 승호를 비호한 건 구하는게 아니라 수렁에 떠밀어넣은 살인행위와도 똑같아.” 성호는 정희가 이렇게까지 똑똑할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그는 저도 몰래 정희를 다시 여겨보면서 속으로 혀를 끌끌 찼다. 순간 정희가 은영을 비집고 자기 마음 속에 서서히 들어서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왜 그래? 내 말이 틀렸어?” 정희가 묻는 소리에 성호는 그녀에게서 눈길을 떼면서 되물었다. “자기는 련애하지 않았겠구나.” 정희는 정색해 따지고 들었다. “무슨 소리야? 이전에 승호가 련애를 하자면서 접어들더라. 난 바람기 있는 승호를 간파하고 단마디로 거절해버렸어.” 성호도 물러서지 않았다. “넌 그래 련애를 걸지 않았겠구나.” “승호하고?” “나한테.” 파랑새는 새파랗게 질린 복숭아얼굴에 홍조가 어리더니 머리를 돌렸다. “그랬던가?” “모두 남의 티끌만한 허물은 보아도 자기 태산 같은 허물은 못 봐.” 정희는 주먹으로 성호의 넓은 가슴을 쾅쾅 팼다. 이윽고 그녀는 파도치는 굽슬굽슬한 긴 머리카락을 어깨 너머 쓸어넘기면서 몸을 돌리더니 부끄러운듯이 두 다리를 배배 비틀었다. “말이 나온바 하고 묻자. 아직도 은영을 사모해?” “또, 또. 내 바보냐?” 정희는 안도의 한숨을 호~ 내쉬는 것이였다. 그녀는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이 바보야, 은영이란 애를 그렇게 따라다니더니. 왜?” 성호는 직답을 피하고 반문했다. “왜 은영한테 질기게 관심을 보여?” 정희는 소나무숲이 설렐 정도로 까르르 매력적으로 웃었다. “내가?” 성호는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네 운명이 근심될뿐이야.” 뒤이어 그는 머리를 숙이더니 나직이 중얼거렸다. “짝사랑은 아주 고통스러운 거야.” 정희는 대뜸 얼굴이 새파래났다. 그녀는 자리를 뜨려는 성호의 가슴을 손으로 찌르며 따졌다. “누가 짝사랑을 한다는 거야?” 성호가 주춤 멈춰서며 입을 떼려고 할 때다. “성호야!” “여기 있었구나.” 어디서 솟아났는가. 싱거운 꺽다리 범송과 실돌피 같은 종수가 소나무숲 속에서 나타났다. 성호가 황급히 돌려 맞췄다. “어, 너희들을 여기서 기다리는 중이야.” 그들은 웃고 떠들면서 함께 천수해로 떠났다. 천수해중학교에서 학생들과 실습교원들이 련합문예공연을 할 때 성호는 정희의  새로운 매력을 발견했다. 최성균선생은 정희를 보고 실습생을 대표해 독무를 추라고 했다. 정희는 중학생무용수들 속에서 키가 비슷한 연화라는 녀학생의 한복을 빌어 입고 무대에 올랐다. 그녀는 은은히 흐르는 음악에 맞춰 화려한 독무를 선보였다. 훤칠한 키에 탄력 있는 몸매는 심산 속에 피여난 날씬한 장미꽃 같았고 날렵히 놀리는 그녀의 껑충한 다리나 손놀림은 호수가에서 백조가 날아예는 듯했다. 사생들의 우뢰와 같은 박수소리가 울렸다. (진짜 예뻐!) 성호는 속으로 연신 감탄했다. 그러나 그는 인차 자기를 꾸짖었다. (오르지도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라고. 목동이 어떻게 규방 규수를 쳐다본단 말인가.) 순간 성호는 무대에 올라선 정희가 오르지 못할 벼랑 우의 도고한 진달래꽃으로 보였다. (싹 걷어치워.) 그는 땅이 꺼지게 한숨을 후~ 내쉬였다. 그날 무대에서 연화라는 녀학생의 쌍까풀눈에 눈길이 자꾸 갔다. 어찌나 금방울 굴리는듯 청아한 목소리로 노래를 구성지게 부르는지 사생들이 혀를 끌끌 찰 지경이였다. 정희의 실습교수를 참관하러 교실에 들어갔다가 연화가 노란 샤쯔를 입고 제일 뒤줄에 앉아 있는 것이 눈에 띄였다. 성호의 눈길이 저도 몰래 자꾸 연화의 우유빛얼굴에 가 멈춰섰다. 연화는 그 뜨거운 눈길을 감지하고 머리를 수깃하면서 쌍까풀눈을 곱게 살포시 내리떴다. 천수해중학교에서 교내운동대회를 열었다. 연화는 노래만 잘 부른 것이 아니라 달리기도 아주 날래게 달렸다. 다른 애들을 한 대여섯메터 떨궈놓고 400메터 코스를 뛰여 봉긋한 가슴에 흰 끈을 걸지 않겠는가. 학생들이 운동장 복판에서 고도를 날렵하게 뛰고 있었다. 성호가 가보니 고중생들이 1메터 50을 뛰고 있었다. 그런데 몇이 넘지 못하고 다 고도대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보다 못한 성호는 슬금슬금 닫다가 고도대를 훌쩍 뛰여넘었다. 학생들은 모두 눈이 휘둥그래 쳐다보다가 박수갈채를 보냈다. 체육교원은 성호가 얼마나 뛰여넘는가 보려고 대뜸 고도대를 1메터 60으로 올려놓았다. 성호는 고도대를 향해 닫다가 개구리 물에 뛰여드는 날렵한 동작으로 훌쩍 날아넘어갔다. “와-싸-!” 우뢰 같은 박수갈채가 터졌다. 체육교원도 혀를 끌끌 차며 성호를 흘끔 쳐다보는 것이였다. 성호가 자기 학급으로 돌아오자 학생들은 우뢰와 같은 박수갈채를 보냈다. 정희가 맡은 학급의 연화는 뒤줄에서 일어나 수건을 건네면서 “선생님, 땀을 닦으시오.” 하고 정답게 말했다. 정희도 건너와서 “어쩜 그렇게 날래? 실습생들의 본때를 보여줬구만요.”하고 감탄했다. 성호는 정희와 함께 뒤로 물러가서 연화를 가리키면서 “저 앤 예술의 싹이 보이오.” 하고 말했다. 그 말을 들었는지 연화는 이쪽을 보고 생글방글 웃어보이면서 머리를 숙였다. “글쎄 나도 전번 공연 때 저 녀학생이 노래를 잘 부른다 했어. 노래와 춤을 좀  가르쳐주렴.” 정희는 머리를 끄덕였다. “점심에 시내돌이를 하지 않겠어?” “어째?” “선물 할 거 있어.” 성호는 고의로 자빠듬하면서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오후에 계속 운동대회를 하겠는데 어디로 가?” 정희는 단통 얼굴이 새파래지더니 “주겠다고 할 때 가지지 않으면 꼭 후회할 거야.” 하고는 자기 학급으로 돌아가 앉았다. 점심에 성호는 정희의 성의를 저버릴 수 없어 범송과 종수의 눈을 피해 가만히 천수해백화상점에 따라갔다. 자그마한 진의 백화상점 치고는 없는 것이 없었다. 정희는 성호를 데리고 옷매대 쪽으로 걸어가면서 줄느런히 걸린 남자 옷을 돌아보는 것이였다. “뭘 하려고?” “옷 한벌 선물하고 싶어.” “그러지 마.” “왜?” “사내라는 게 녀자한테서 먼저 선물을 받다니?” 정희는 귀밑까지 홍조어린 걀죽한 얼굴을 들어 성호를 정겹게 바라보더니 애교섞인 어조로 말했다. “주고 싶어 주는 거니깐. 괜찮아.” “무슨 명목으로?” “말해야 알겠어?” 나직한 귀속말이였지만 성호는 자기 귀를 의심했다. “뭐라고?” “몰라.” 정희는 귀밑까지 새빨갛게 물들어가며 외면했다. 성호는 가슴이 쿵쾅 뛰는 것을 느꼈다. 백화점인지라 더 묻지 못하고 묵묵히 그 자리를 떠나려고 했다. 정희는 황급히 뒤쫓아와 성호를 붙잡아 세웠다. “어디로 가? 부담 갖지 말아요. 교단에 선게 옷이 너무 헐더군요.” 성호는 정희의 성의를 묵묵히 받아들이면서 저도 몰래 마음의 쪽문이 천천히 열리는 것을 느꼈다. 그는 은영이 못잖않게 정희를 사랑하고 있었다는 것을 서서히 온 몸으로 느꼈다. (사랑이란 뭐냐? 이 녀자 저 녀자 짓밟는다고 승호를 욕했는데. 왜 이래? 첫사랑 순희로부터 은영, 정희한테 서서히 옮겨붙는 사랑의 불씨, 참 알고도 모를 사랑이야!) 실련의 망망대해에 풍덩 빠져 허우적거리던 성호는 지푸라기라도 붙잡은   신세였다. 그는 마음먹고 은영을 잊으려고 했다. 그러나 잊으려고 하면 할수록 그녀와 함께 빙장에서 스케트를 타며 놀던 화려한 시절이 그리워지고 사랑의 흔적을 말끔히 지울 수 없었다. 뒤엉킨 사랑의 뿌리를 뽑으려고 하면 할수록 마음이 더욱 아팠다. 그는 은영이 사무치게 그리는 심정을 담아 시조 “장미꽃”을 써놓았다.   장미꽃 맘 속에 춘풍처럼 스며든 녀신 그대 혜성처럼 나타났다 별찌처럼 사라졌네 그리움 장미꽃으로 빠알갛게 꽃폈네   착잡한 내심의 갈등을 겪을 때 정희가 또다시 그의 가슴에 사랑의 불을 지폈다. 그 따뜻한 사랑의 불길이 얼어붙은 성호의 마음을 서서히 덥혀주기 시작했다.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진 그에게 하나의 구명줄을 내리드리워주었다. 그녀는 고통의 심연에서 모지름을 쓰는 그를 끌어올리려고 애쓰고 있었다. 성호는 믿던 도끼에 발을 찍힌듯 실련의 고배를 마신 후 처녀애들한테 쉽게 마음을 주지 않았다. 정희가 주동적으로 망망한 바다에 침몰하려던 쪽배에 사랑의 돛을 올리자 성호는 정희의 진심어린 사랑에 유혹돼 저도 몰래 조심스레 그 사랑의 돛배에 오를가 말가 망설이고 있었다…  
120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91) 댓글:  조회:1165  추천:0  2018-01-17
                                  11. 폭풍우에 쓰러져가는 사람들       눈보라가 기승스레 휘몰아치던 동장군이 물러가고 농사꾼들 희망의 씨를 뿌리는 봄아가씨가 사뿐사뿐 다가왔다. 보릿고개가 아득히 멀건만 불비를 맞아 말라터진 소서구의 옥수수는  시들어가고 있었다. 아무리 사원들이 물을 이고 지어다 밭에 쳐도 곡식을 되살려낼 수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보릿고개를 넘기기 어려워 기아에 허덕이던 마을 사람들도 하나 둘 쓰러져갔다.       (하늘도 무심하지. 어떻게 보릿고개를 넘긴단 말인가.)       상순은 생각할수록 앞길이 막막하고 의심스러웠다.       (이대로 계속 나간다면 사원들이 다 굶어 죽지 않을까?)       이제껏 위 지시라면 순순히 다 순종해온 상순이었건만 이젠 이맛쌀을 찡그리면서 고민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어느 하루, 상우가 떡메를 만들어 들고 동생네 집으로 놀러 왔다. 그때 상순은 하나라도 백성들의 생활에 보태주려고 사원들을 동원해 생산대에서 양돈장을 짓고 집체로 돼지를 길렀다. 그는 가솔을 데리고 아예 양돈장 사양실에 들어 있으면서 명옥을 보고 생산대 돼지를 기르게 했다. 초봄이어서 쌀이 조금 있어서 그래도 명옥은 차좁쌀 죽에 장국을 끓여서 시형을 대접할 수 있었다. 상우는 동생 집인지라 속심의 말을 했다.       “그 놈 흥수가 무더위를 먹고 쓰러지는 바람에 잘됐구나. 코개가 없어 집에서 죽을 먹어도 살피는 놈이 없어 편안하구나.” 상순은 터놓고 말했다.      “허백호 서기도 철직당해 근심할게 없소. 집체식당도 당장 문을 닫게 됐소.”      상우는 죽을 맛있게 먹으면서 말했다. “집체식당보다 자기 집에서 끓여 먹는 게 훨씬 더 좋다. 사람마다 구미가 다르고 식사양이 다른데 어떻게 사기사발에 똑 같게 나눠 먹는다니?”      “당과 국가를 믿어야 하오. 우에서도 보는 눈이 있을 거오. 집체식당을 차리다가 안 되면 자기 집에서 끓여 먹으라고 하겠지.” “그래야지. 집체식당을 믿고 어디 배고파 살겠니?” 상우는 죽 두 그릇을 다 비우고 나서 명옥한테 얼굴을 돌렸다.      “제수, 정말 잘 먹었소. 야, 이 놈의 재해 언제 끝나겠소? 정말 쌀 고생을 더 못하겠소. 사람이 굶고 사는 것만큼 바쁜 게 어데 있소?”        상우는 눈물이 글썽해 엉덩이를 들고 일어나더니 집으로 돌아갔다. 상우는 따라 나가면서 명옥이 준비한 좁쌀주머니를 형님에게 건네주었다. 그러자 상우는 사양했다. “이걸 주고 너네는 어떻게 살겠니? 싫다. 제수를 가져다 줘라.” 그러나 상순은 기어이 좁쌀주머니를 형에게 밀어주었다. “형님, 가져다 자시고 몸을 춰 세우오. 공산당의 영도아래 험한 3년 재해를 이겼으니까 이제 잘 먹고 잘 살 날이 올 거요. 형님, 우리 형제는 죽이라도 나눠 먹으면서 함께 살아나기요.” “응, 그러자.” 상우는 동생네 부부가 정말 고마워 코마루가 시큼해났다. 그는 쌀 주머니를 메고 집으로 흥겨운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그 좁쌀로 죽을 쑤어서 다 먹고 나니 또 먹을 것이 없었다. 결국 상우는 처자가 불쌍해 사양하다나니 몸이 겨릅대처럼 여위어갔다. 너무 굶어서 피골이 상접하게 된 상우는 어느 날 밤에 동생네 집에 와서 조 열대여섯 근 되게 얻어 집에 가져왔다. “여보, 이걸 껍데기 채로라도 끓여서 좀 먹기요. 난 굶어서 내일이면 죽을 거 같소.” 그러나 아내는 날카로운 눈길로 영감과 조주머니를 번갈아보면서 생야단을 쳤다. “아니, 이 영감이, 정신 나갔잖소. 시동생네 좁쌀을 가져다가 집에서 끓여 먹어서야 되오? 집에서 끓여먹다가 들키면 큰일 나겠소. 당장 가져가오. 그러찮으면 생산대에 고발하겠소.” 그 욕지거리를 듣고 상우는 맥없이 구들에 벌렁 나누었다. 그러자 아내는 자기가 가져가겠다고 좁쌀주머니를 들고 떠들썩하면서 바깥에 나가려고 했다. 상우는 안간힘을 다하여 아내의 왼쪽다리와 좁쌀주머니를 붙잡고 놓지 않았다. 열아홉 살 나는 순애까지 막아 나서자 나가는 수 없었다. 그녀는 두덜거리면서 신을 벗고 구들에 들어와 핸들 나자빠졌다. 그런데 이튿날 새금은 끝내 그 좁쌀주머니를 들고 생산대회의실에 가서 숱한 사람들에게 자기 영감을 낱낱이 고발했다. 그 바람에 생산대에서는 굶어서 다 죽어가는 상우를 회의실에 끌어다가 집체식당을 파괴했다고 비판했다. 그런데 상우가 연 며칠 굶어서 서서 비판을 받다가 까무러치는 바람에 투쟁대회는 희지부지해지고 말았다. 상우는 사망하기 사흘 전에 사촌여동생 복선이네 집으로 갔다. 그러자 복선은 사촌오빠에게 가만히 죽을 쑤어 주었다. “여동생이 집에서 죽을 끓여 내게 줬다고 생산대에서 욕을 먹지 않겠니?” 상우가 근심하자 복선의 고중을 다니는 맏아들 성환은 “큰아버지, 잡숩소.”라고 했다. 상우는 죽사발을 받아들고 외탁을 한 성환의 너부죽한 얼굴을 보면서 혀를 끌끌 찼다. “넌 공부도 잘한다더구나. 전번에 동생네 홍자가 말하던데 네가 초중에 내려가 초급중학교 애들에게 로어로 본 소설을 얘기해 줬다더구나. 러시야어 공부를 어떻게 잘했으면 러시야어 소설을 보고 아래 학년 애들에게 옛말을 해줄 수 있니?” 성환은 안경을 춰 쓰면서 그저 희죽이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김한봉의 맏아들 김성환은 동생 철주나 철삼, 철우, 철갑 등과는 달리 외탁해 수염이 더부룩하고 얼굴이 너부죽했다. 그는 마음도 너그럽고 공부도 특별히 잘했다. 그리하여 당시 초중 때부터 학교에서 몇 명 없는 "A학생"으로 뽑혀 진수해중학교 조교장의 특별대우를 받고 있었다. 조교장은 청화대학이거나 북경대학 입학생을 많이 양성해내는 것을 목표로 삼고 성환과 순자, 경산 등 이른바 "A학생" 10여명을 뽑아 학교에서 우유까지 대접하면서 특별개별교육을 진행했던 것이다. 러시야의 사회주의 교육체계를 본 받아 당시 5점 시험점수제를 실시했는데 김성환과 김경산, 김순자 등은 항상 과목마다 5점을 맞았던 것이다. 하여 그들은 모두 진수해중학교의 보배로 불리었다. 당시 성환은 북경대학이나 청화대학 입학을 겨냥하고 공부했고 순자는 아버지 말씀대로 의과대학교로 가서 의사로 되려는 목표를 세우고 공부했다. 상우는 공부를 잘하는 성환과 순자를 한바탕 칭찬하면서 죽물을 맛있게 먹은 후 사촌녀동생 복선한테 말했다. “복선아, 손바닥만 한 땅이 있으면 호박을 심어라. 호박넌출이 뻗으면 그 넌출에 흙을 퍼놓아라. 그럼 호박넌출에서 뿌리가 내리고 호박이 달릴 게 아니야? 호박을 많이 심어 먹어도 쌀 보탬할 수 있다.” 그 말을 하고 사흘이 지나 상우는 굶어서 뼈 앙상하게 된 채 저세상으로 떠나가고 말았다. 농업중학교를 졸업하고 길림으로 기관사질을 하러 떠나간 동선은 아버지가 굶어 세상을 떠났다는 비보를 듣고 황급히 돌아왔다. 그는 아버지 관작을 매만지면서 흑흑 흐느끼며 대성통곡 쳤다. “아버지! 이 불효자식을 용서해주옵소서. 일본 놈 세상에서도 살아남은 아버지를 굶어 세상 뜨게 하다니요. 어, 어엉.” 순애도 대성통곡쳤다. 지새금도 3년 재해를 원망하면서 뜨거운 눈물을 훔쳤다. 형님의 유체를 염습해 칠성판에 모신 상순은 형님을 붙안고 서럽게 울고 또 울었다. 상순의 처자들도 모두 와서 절을 올리며 울었다. 상순은 일곱 살에 형 상우의 지게에 올라 앉아 고향을 떠나 살 길을 찾아 간도 함흥 촌으로 들어왔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형을 삼촌처럼 따르고 의지해 살아왔고 형수도 작은 어머니처럼 존중하며 섬겼었다. 그런데 형은 소서구에 숱한 밭을 일궈놓고 굶어 세상을 떠나지 않았는가? “형님, 세상에 이런 안타까운 일이 어디 있소? 소서구에 상우지를 남겨두고 죽물도 온전히 잡숫지 못하고 세상을 뜨다니? 형님, 일본 놈들의 세상에서도 굳세게 살아온 형님, 형님이 돌아가다니. 으흐흑, 흑흑, 형님-” 손자를 앞세운 병완은 긴 한숨을 쉬며 애탄했다. “내가 오래 살아서 차마 보지 못할 일을 수태 보는구나.” 병완은 자기가 함흥촌을 잘 이끌지 못했기에 손자마저 잃게 됐다고 속으로 자책감을 느꼈다. 상순은 둘째조카 동선과 토론하고 형의 산소를 조개덕 뒷산 기슭에 썼다. 두 해 사이에 아버지와 형을 잃은 상순은 절망에 빠지나 다름없었다. 설상가상으로 눈가루가 풀풀 흩날려 내리는 어느 하루, 하나 밖에 없는 동선이 찾아와서 밤중에 홍두깨처럼 이런 말을 불쑥 꺼내는 것이 아니겠는가.      “삼촌, 조선으로 가겠습구마.”      “뭐라니? 엄마와 순애 그리고 이 삼촌을 두고 어디로 간다고 그러니?”       상순은 조선으로 가려는 조카를 단통 나무랐다.       “으리으리한 길림 시내에서 월급과 배급을 타면서 기관사질을 하면 좀 좋아 그러니? 배부른 타령 해도 한두가지 아니구나. 조선에 가면 별날 거 같니?” 허나 동선은 고집썼다.      “원래 한족애들 속에서 일하지 못하겠습구마. 꼬리빵즈(高丽棒子)라면서 어찌나 놀려대는지 하루도 더 못 삐치겠습니다.” 상순은 머리를 끄덕이더니 권고했다.     “한족애들한테 머리를 숙이면서라도 잘 어울려 일해야지. 조선에 간다고 이밥이 하늘에서 떨어질 거 같니? 조선에 갔다가 돌아오면 자칫하면 조선특무나 민족우파로 몰릴 위험이 있다. 잘 생각해봐라.”  그러나 동선은 자기 생각을 돌리지 않았다. “삼촌, 내 재간으로 조선에 가서 얼마든지 기관사를 하면서 살 수 있습니다. 조선에 나가서 아버지네 고향 기차를 몰고 싶습니다. 아버지 고향에 돌아가서 굶어 죽어도 돌아오지 않겠습니다.” 상순은 다 큰 조카를 억지로 붙들어 둘 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한숨만 내쉬었다. 동선은 공부도 잘하고 글씨도 아주 곱게 써서 마을에 소문이 있었다. 게다가 키는 자그마해도 외까풀 눈을 굴리면서 어찌나 눈치 빠르고 역빠른지 다른 청년들은 따라 다니기 힘들었다. 금옥이네 칠군이랑 함깨 조선으로 장사를 가면 어느새 어디로 쭁드르르 빠져 나갔는지 모르게 돌아다니면서 물건을 팔고 돈을 척척 챙기곤 했다. 그는 외교에도 능해 촌구석에 박혀 살 사람이 아니라고 마을 어른들이고 친구들이고 혀를 끌끌 찰 지경이었다. 상순은 조카 동선과 공학을 자기 아들처럼 아끼고 믿고 살려고 했다. 그런데 공학이 몹쓸 병으로 해 훌쩍 떠나간 마당에 동선마저 조선으로 떠나가면 어떻게 하겠는가? 삼촌의 이런 심정을 읽은 동선은 위로의 말을 덧붙였다. “삼촌, 근심하지 마십시오. 이젠 삼촌에겐 덕돌이 있잖습둥?” 동선은 네 살 밖에 안 되는 덕돌을 품에 안더니 뽀뽀를 해주었다. 허나 상순은 세 귀 눈을 치뜨면서 나무랐다. “내 근심은 하지 말라. 허나 엄마는 어쩌니? 금방 아버지 세상 떴는데 엄마를 나어린 순애한테 맡겨놓고 조선으로 가니? 잘 생각해봐라. 조선에 가지 말고 엄마를 잘 모시면서 여기서 삼촌이랑 함께 살자.” 동선은 한숨을 후 내쉬면서 고집을 부렸다. “여기 있어 봤자 아버지처럼 굶어 죽을 수밖에 더 있습니까? 우파나 현행반혁명 모자를 쓰지 않으면 변화무쌍한 정치몽둥이에 맞아 죽을지도 어떻게 압니까?" 동선은 마음을 굳힌듯 정색했다.      "삼촌, 오랫동안 생각하고 내린 결심이니까.  더 말리지 맙소. 이제 조선에 가서 기관사를 하고 자리를 잘 잡으면 엄마와 삼촌을 모셔 내가겠습니다.” 상순은 한숨을 후 내쉬었다. “절대 날 조선에 데려간단 말을 하지도 말라. 함흥촌과 조개덕은 우리 두 번째 고향이야.  할아버지랑 너네 아버지랑 우리 조손3대가 저 소서구로부터 황무지를 개간하느라고 얼마나 고생했느냐? 난 이 두 번째고향 땅을 떠나지 않아.” 드디어 그는 동선을 더 말려야 쓸데없다는 것을 알고 마지막 부탁을 했다. “조선에 가도 항상 엄마와 순애를 잊지 말라.” “예. 불효한 조카를 용서합소.” 동선은 삼촌에게 절을 꾸벅 하고 일어났다. 상순은 떠나가려는 조카의 얼굴을 한참이나 바라보며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항상 독기 서린 세귀눈에 흐르는 뜨거운 석별의 정을 보고 동선도 돌아서며 눈물을 훔쳤다. 그는 돌아서더니 “삼촌, 덕돌이 모자를 쓰고 가깁소.” 라고 했다. 그러자 덕돌은 털모자를 벗어 몸 뒤에 숨기면서 몸부림쳤다.     “안되오. 내 털모자를 쓰고 가면 나는 어쩌오?”      동선은 덕돌을 훌 안아 들고 마주 보며 얼렸다.      “덕돌아, 이제 형님이 돈 많이 벌면 사탕과자를 하늘만큼 사줄게. 이 모자도 가져다줄게." 그제야 덕돌은 “형님, 꼭 내 모자를 가지고 오오. 양? 사탕과 과자를 꼭 사오지? 양?”라고 했다. 동선은 머리를 끄덕이면서 “그래, 꼭 사올게.”라고 했다. 그래도 시름이 놓이지 않는지 덕돌은 고사리 새끼손가락을 내밀면서 깍지걸이를 하자고 했다. “거짓말을 하면 안되오. 형님.” “그래 약속하마.” 동선은 덕돌을 안은 채 새끼손가락으로 깍지걸이를 하고 흔들었다. 동선은 잘 들어가지도 않는 덕돌의 자그마한 털모자를 억지로 꾹 박아 쓰고 길을 떠났다. 삼촌과 여동생들인 순애, 순자, 은숙 그리고 남동생 덕돌까지 떠나가는 동선을 마을 동구 밖에까지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바래였다. 지새금은 하나 밖에 남지 않은 아들마저 가는 길을 보기 싫어 바래러 나오지도 않았다. 동선이가 저 멀리 아래 마을 어귀에서 흑점으로 아물거리다가 사라질 때까지 상순과 친척들은 눈물을 머금고 손을 저으며 눈을 떼지 않았다.       동선이 조선으로 떠나간 후 상순이네 일가에 대한 지새금의 태도는 일변했다. 이전에는 순자랑 함흥촌에 올라가면 토성안 집의 큰집 큰어머니가 밥을 주지 않아 항상 셋째외할머니네 집에 가서 얻어먹곤 했다. 또 지새금은 이전에 동서인 명옥과도 물과 불처럼 생불을 켜고 욕설을 퍼붓곤 했다. 허나 동선이 간 후 처지가 뒤바뀌었다. 그녀는 이젠 시동생 네를 믿고 살아야 했다.       어느 하루, 광석 촌에서 사는 상순의 둘째매형 박범석과 둘째누나 김월금이 환갑을 쇠게 돼 순자와 홍자는 큰 집의 순애와 함께 간 적이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 순애는 입을 열자마자 또 삼촌댁의 허물을 하기 시작했다. “네 엄마 우리 할아버지를 굶겨 죽였다더라. 못된 아주머니야!” 너무 억울해 순자는 맞받아 욕했다. “네 엄마는 맏며느리라는게 어째 할아버지와 할머니도 모시지 않았니? 그래서 우리 아버지와 엄마는 둘째인데도 할아버지와 할머니, 막내고모까지 우리 집에 모셔 왔다더라. 3년 재해에 조부모를 모시느라고 우리 아빠와 엄마 얼마나 고생했는지 아니?” 허나 한 살 위인 순애도 녹녹치 않았다. “너네 아버지하구 엄마 둘째 돼가지고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우리 부모보다 더 잘 모실 것처럼 모셔갔기에 우리 부모가 온 동네에 얼마나 팔렸니? 마치 우리 부모가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잘 모시지 않아 모셔간 거처럼 되잖았니? 삼촌은 왜 그랬다니? 우리 부모와 사전에 토론도 없이 수레를 몰고 와서 모셔갈게 뭐야? 그 땜에 우리 부모 동네에서 얼마나 팔렸는지 아니? 정말 주책없이 놀았어.” 순자는 지려고 하지 않았다. “큰아버지 굶어 세상 뜨지 않았고 뭐야? 헌데 어떻게 할아버지와 할머니에 작은 고모까지 모시겠니? 그래서 우리 아버지와 엄마가 큰집 부담을 덜어주느라고 그랬다. 그것도 모르고 떠드니?” 그러자 순애는 말문이 막혀버렸다. 둘은 서로 소 닭 보듯 하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돌아가자마자 순애는 어머니에게 순자가 하던 말을 일러바쳤다. 후에 순자는 순애와 놀자고 큰집에 찾아갔다. 그는 속으로 전번에 순애와 싸운 일로 한바탕 욕먹을 거라고 생각하고 큰어머니 눈치를 살폈다. 허나 뜻밖에도 큰어머니 지새금은 아주 상냥하게 웃으면서 대하지 않겠는가.        “윗대 때문에 너희들까지 틀리면 되니? 이 다음부터는 외가집에 가서 밥을 먹지 말고 우리 집에 와서 먹어라. 내 없으면 너희들끼리 식장에서 꺼내 마음대로 먹어라!”        (아니, 맏엄마 어떻게 된 일인가?)        이전에는 맏아들 공학이 개산툰병원에서 의사질을 할 때 사카린을 혼자 먹으면서 동네에 나가 사카린을 조금만 넣어도 얼마나 단지 모른다고 자랑했다. 허나 시동생네를 한 숟가락도 주지 않았다. 허나 지금은 해가 서산에서 뜰 지경이 됐다. 새금은 밥도 먹으라고 하고 사카린도 냉수에 타서 냉국을 해 먹으라고 둬 숟가락 떠서 주기까지 했다. 순자는 돌변한 큰어머니 태도에 놀랍고도 반신반의했다. (정말 별 일이야! 깍쟁이를 쓰던 큰어머니가 불시에 부처님처럼 마음이 선량해지었단 말인가.) 순자는 생각할수록 우스웠다. 상순이 1년 사이에 아버지와 형님마저 여의고 조카 동선마저 조선에 보내고 마음이 아파할 때었다. 설상가상으로 웃새집의 큰아버지가 또 앓아누웠다. 웃새집 큰아버지 김창준은 그해에 82세였다. 항상 가슴까지 내리드린 흰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동네를 성큼성큼 돌아다니던 큰아버지가 불시에 앓아누웠다. 아마 동생과 조카 그리고 손자들이 연이어 돌아가는 바람에 심리적 타격이 심했을 수 있었다. 연 며칠 식사를 드시지 못하던 창준은 끝내 동생과 한해 동삼에 세상을 떴다. 상순과 상훈, 상길은 한해에 세 번이나 상을 치렀다. 그들은 비통한 나머지 목이 메여 울고 또 울었다. 밤이 깊어가도록 곡소리가 끝이지 않았다. 사흘만에 자손들은 비통한 마음으로 창준을 그가 생전에 피땀을 흘리며 개간하던 황무지밭이 쓸쓸히 누워있는 소서구 북쪽 산비탈에 모시었다. 명옥은 시집마을에 연이어 상치기 나는 것을 보고 마음이 아팠다. 다행히 본가집은 그간 그래도 무사히 보냈다. 오빠 근형은 효자였다. 그는 할아버지를 모시다가 둘째삼촌 경인이 할아버지를 효성을 다해 모시자 진수해를 떠나 화룡 시내에서 그리 멀지 않은 남가에 가서 혼자 살았다. 그새 근형 오빠는 맏아들 만길과 천길에 뒤이어 딸 송죽까지 보았던 것이다. 명옥의 동생 근룡은 열여섯에 항미원조 전쟁으로 나갔다가 복부에 부상을 입어 영예군인으로 됐다. 근룡은 농사일도 못했는데 체격도 좋고 인물도 좋은 처녀에게 장가를 들어 진수해에서 살면서 맏딸 정옥까지 보았다. 막내 동생 근삼은 큰형 근형의 맏아들 최만길과 명옥 누나의 둘째딸 은숙과 동갑이었다. 그들은 누가 삼촌이고 조카인지 구분하기 힘들게 허물없이 지냈다. 명옥과 상순은 병완 할아버지가 너무나도 괴로워 허연 수건을 머리에 질끈 동이고 자리에 드러누운채 일어나지 못해 근심이 태산 같았다. 병완은 자손들이 연 이어 저세상으로 떠나가자 극도로 비통에 빠져 식읍을 전폐하다 시피 했다. 자손들을 앞세운 아픔을 가슴에 묻고 더 살고 싶지도 않았다. 정말 죽지 못해 억지로 사는 괴로운 심정이었다.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창준과 기준, 상우의 원혼이 하늘에서 훨훨 날아다니는 것 같았다. 그 외로운 귀향 혼이 구름과 안개가 부서지듯이 흩어져 남으로, 남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하늘에서는 무정한 눈가루가 풀풀 흩날리고 있었다. 아니, 고향으로 날아가는 그들의 하얀 혼이 흩날리고 있었다. 아니, 고향에 대한 티없이 맑고 깨끗한 하얀 그리움이 흩날리고 있지 않겠는가! 며칠 전까지만 해도 하늘에는 물고기비늘, 룡비늘을 련상케 하는 구름이 둥둥 떠다녔다. 상순은 그 구름을 쳐다보면서 하늘을 원망하며 막연한 생각도 했었다. 저도 몰래 허구픈 웃음을 웃었다. (하늘엔 물고기도 많건만 하늘도 무심하지. 어쩜 사람 사는 인간세상에는 물고기는커녕 입에 풀칠할 쌀알도 없는가. 하느님이여, 좀 우리 백성들이 먹고 살 하늘에라도 흔한 그 물고기랑 룡이랑 내리뜨려주옵소서.)    그는 어깨가 무거워나는 것을 온 몸으로 느겼다.    (우리 중국과 조선 인민들은 그 얼마나 백성들이 배불리 먹으며 잘 살 수 있는 새 사회를 갈망했는가. 그 새 사회를 맞아오려고 그 얼마나 많은 선렬들이 일본 놈과 미제 양키들과 싸우다가 장렬히 희생되였는가.)    큰아버지 성칠, 큰어머니 김하옥, 최구철, 엄상호, 엄은희, 이병호, 득호, 림호, 최형철, 조철호... (그러나  오늘 숱한 사람들이 굶어 죽어가지 않는가!)       아버지 김기준, 둘째큰아버지 김창준, 형님 김상우... (선렬들이 보면 얼마나 마음 아파하겠는가? 백성들이 굶어 마구 쓰러지지 않는가? 당지부 서기인 내게 책임이 제일 많다. 서기가 얼마나 잘 령도했으면 숱한 사람들이 굶어 죽어가겠는가. 어떻게 하나 백성들이 배불리 먹고 사는 행복한 새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모든 지혜와 힘을 바쳐야 할 때가 왔다.) 상순은 마음 속으로 굳은 결의를 다지고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성큼성큼 토성안 대대 사무실로 걸어갔다.                                                             12. 빗발치는 정치몽둥이 마을에서 숱한 사람들이 제대로 먹지 못해 얼굴이 퉁퉁 부은 채 주린 배를 끌어안고 집체식당으로 몰려갔다. 그런 지루한 세월이 흐르자 이집 저집 식구들이 까무러치고 북망산에 가는 일이 자주 일어났다. 자연재해로 마을에 자주 곡성이 처량하게 들리고 인심이 뒤숭숭해졌다. 인심이 각박하다 못해 사람이라도 마구 잡아먹을듯이 살벌해져갔다. 설상가상으로 민족우파를 타도하는 정치폭풍이 사납게 불어쳐 조선에서 이사해온 마을 사람들은 모두 목을 움츠렸다. 무슨 정치몽둥이 날아오겠는지 모를 일이 아닌가. 반민족우파 몽둥이가 이번에는 진수해공사 당위 서기 허백호와 조개덕대대 당지부 조직위원 진달래에게 날아들었다. 허백호는 이른바 도처에서 조선족의 우량한 전통과 중국 혁명에서 조선족의 공훈을 너무 떠들어댔고 조선족을 이 땅의 진정한 주인이라고 말한 죄로 민족우파 고깔모자를 쓰고 온 공사 탈곡장을 돌아다니면서 투쟁당하는 판이었다. 신임 공사 당위 서기 박우성이 허백호 서기를 고깔모자를 씌워 조개덕의 탈곡장에 떠밀고 들어서더니 목에 지렁이 같은 핏줄을 세우고 고래고래 고함쳤다. “오늘부터 우리는 민족우파 허백호를 투쟁하겠습니다.” 박우성은 동북군정대학 시절 상순의 동창생이었다. 그는 일찍 일본까지 유학했었다. 허나 상순은 숱한 사람들 앞이라 박우성과 그저 눈인사만 했다. 허백호가 고깔모자를 쓴 것을 보고 상순은 속으로 “싼 통 했다.”고 욕했다. 박우성은 사원들 앞에 우파분자 오옥선과 박성근, 이 화영, 그리고 이른바 민족우파들인 허백호, 허영주, 진달래에게 고깔모자를 씌워 지주 장학산과 그의 아들 장충국,  악질지주 지학사의 아들 지괴호 등과 한 줄에 세워놓고 투쟁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빗발치는 총포탄 속을 헤가르며 토비와 미제 특무들과 싸워온 허백호와 항일전쟁시기 일제 놈들과 돌멩이로 싸운 진달래를 지주들과 한줄에 세워놓고 투쟁하는데는 모두들 도리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나 모두 감히 말하진 못하고 그저 눈치만 흘끔흘끔 볼뿐이었다.        그러나 진달래는 너무나도 억울해 욕설을 퍼부었다. “항일유격대 중대장인 내가 목숨을 걸고 일본 놈들과 싸웠는데 무슨 죄가 있다고 투쟁해?” 병완은 항일투사 진달래를 지주들과 함께 투쟁한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아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그리하여 박우성을 조용히 한쪽으로 데리고 가서 넌지시 말을 건넸다. “저 진달래는 무슨 죄가 있다고 지주들과 함께 투쟁하오?” 그러자 박우성 서기는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아니, 촌당지부 서기가 이렇게 정치두뇌가 명석하지 못하니 어떻게 합니까? 진달래 전 남편은 남조선 특무가 아닙니까? 그러니 특무의 새끼를 낳은 진달래는 남조선 특무입니다. 지주보다도 더 나쁜 우파입니다. 우리 공산당이 영도하는 사회주의 조국을 허물고 뒤엎으려고 미쳐 날뛴 국제 원수입니다. 잔말을 마십시오. 자칫하면 영감도 민족우파로 몰리어 투쟁 받을 수도 있습니다.” 병완은 상순과 박우성을 번갈아 보며 중얼거렸다. “항일전쟁에서 목숨을 내걸고 일본 놈들과 싸운 항일유격대 중대장을 어떻게 지주들과 함께 투쟁하오?” 그는 괴어오르는 불만을 가까스로 눅잦히면서 진달래를 돌아보다가 제자리에 가서 맥없이 주저앉았다. 흥수가 이번에도 앞장서 “우파분자들을 타도하자!” 하고 높이 외쳤다. 군중들은 주먹을 쳐들고 구호를 부르는 척 했다. 그들은 고깔모자를 쓴 허백호 서기와 진달래를 보는 순간 구호를 부르고 싶은 마음도 힘도 없었다. 그렇게 개 잡은 포수처럼 우쭐하던 허백호도 우파로 몰리어 투쟁 받는 판이었다. “이제 또 누가 투쟁을 받겠는지 아오?” 뒤에서 군중들은 쉬쉬 했다. 상순은 앞장서 구호를 부르는 흥수를 쏘아보다가 눈을 스르르 내리감고 머리를 숙인 채 덤덤히 앉아 있었다. (허영주 사장이나 진달래에게 무슨 죄가 있단 말인가? 허백호 서기는 반우파투쟁 때 흥수를 추동질해 밉게 놀았지만 억울한 일면도 있었다. 그래 허백호 서기가 조선족들이 이 땅의 주인이라는 것이 틀렸단 말인가? 이 땅을 개척하고 보호하기 위해 우리 조선족들이 쪽박을 차고 두만강을 건너와 흘린 피땀이 적은가? 그래 우리 조선족들이 이 땅의 주인이 아니란 말인가? 그래 우리 조선족에게 우량한 민족전통이 없단 말인가? 죄를 들씌우다 못해 별 거 다 들씌우는구먼.) 상순은 이해되지 않았다. 하지만 입에 빗장을 지른채 눈을 내리 감고 덤덤히 앉아 있었다. 구호소리가 멎자 박우성 서기가 연설했다. “우리는 반우파투쟁을 끝까지 벌려야 합니다. 잡귀신 같은 우파분자들은 우리 중국 공산당을 악독하게 공격하고 모독했습니다. 이런 잡귀신들은 생기는 족족 제때에 잡아 없애 버려야 합니다.” 박우성 서기는 개를 잡은 포수처럼 우쭐해 뒷말을 이었다. “진달래는 항일투쟁 때 공훈을 세운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의 본 남편 김용천은 항미원조 전쟁 때 남조선 특무가 아닙니까? 그 놈은 장백산 지구에 기어들어 우리 후방을 파괴하고 나아가서 갓 태어난 우리 사회주의 조국을 뒤엎으려고 미쳐 날뛰었습니다. 그래 남조선 악질특무의 새끼 김경주까지 낳은 진달래를 투쟁하지 않고 누굴 투쟁하겠습니까?” 그때 병완이 벌떡 일어나 고함쳤다. “박 서기, 한 가지만 물어 보기요.” 박우성은 낯이 백지장처럼 바래지더니 쌍까풀눈을 뚝 부릅뜨고 병완을 쏘아보았다. 병완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진달래는 항일투사 김성칠의 아들 경수를 낳았는데 그것도 죄오? 성칠은 항일유격대 대장이자 조선인민군 연대장이었소. 항일유격대 대장, 조선인민군 연대장의 후처로 된 진달래를 그래 우파라고 할 수 있소?” 박우성은 돌처럼 굳어졌던 백지장 같은 얼굴 표정을 느슨히 풀더니 희죽이 웃으며 병완을 마주 바라보았다. “예~ 김 서기 잘 말했습니다. 우리 미처 생각하지 못한 문제를 잘 제기했습니다. 모자를 씌워도 알맞은 모자를 씌우는 게 옳습니다.” 그러자 군중들의 눈길은 일제히 박우성 서기의 나풀거리는 입술로 집중됐다. 박우성은 군중들의 따끔한 시선을 둘러보더니 목청을 돋우어 고함쳤다. “여러분, 진달래의 본 남편 김용천은 남조선 특무고 후남편 김성칠은 조선인민군 연대장이고 렬사입니다. 진달래는 남조선 특무와도 살았고 북조선 장교와도 살았습니다. 지금 한창 북조선 특무도 잡아내라고 합니다. 내가 조사한데 의하면 진달래는 사회주의 중국에 마음을 두지 않고 수차 조선에 드나들었습니다. 표현을 보면 남조선 특무보다도 북조선 특무일 가능성이 아주 많습니다. 때문에 오늘부터 진달래의 조선 특무 혐의를 조사해야 하겠습니다.” “뭐라고?” 진달래는 박우성을 쏘아보며 언성을 높였다. “내가 장백산에서 일본 놈들과 싸울 때 당신은 일본에 가서 공부를 한 선비에 불과해요. 당신이야 말로 일본 특무 혐의가 있어!” 그러자 박우성은 억이 막혀 물려고 드는 개 주둥이처럼 짝 벌리고 불길이 이글거리는 쌍까풀눈으로 진달래를 쏘아보았다. “개도 미치면 생사람을 문다더니. 이거야 말로 참!” 박우성은 진달래를 더 조겨 보았자 자기에게 불리할 것 같아 이번에는 허백호 서기를 돌아보며 투쟁하려고 들었다. 그때 진달래는 계속 박우성을 공격했다. “내 모르는 것 같아? 넌 일본 나고야대학까지 나오지 않았나? 진짜 일본 놈들이 파견한 일본 특무 맞지?”        박우성은 울상이 돼 쌍까풀눈을 흘기며 발설했다. “내 일본 나고야대학을 나왔지만 반당 언론을 퍼뜨린 일은 없소.” “지금 어디 우파 언론을 퍼뜨려 우파로 되는가? 정규상을 봐라. 일본유학도 하지 않고 장춘에서 일본 국비생으로 공부했다고 우파로 됐는데?” 박우성은 극력 자기에게 날아오는 올가미를 벗어 버리려고 발버둥질을 쳤다. “아, 정규상과 내가 어떻게 같은가? 정규상은 듣는 말에 의하면 일본의 총애를 받아 국비생이 됐는가 하면 공산당 조직에 12가지 의견이나 종합해 제기했다는구먼. 그러니 반당 우파분자로 몰리지. 허나 난 일본 나고야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후 군정대학에서 맑스-레닌주의와 모택동 사상을 계통적으로 학습하고 왕청 같은 산골에 가서 사회주의 농촌을 건설했고 줄곧 중국 공산당에 충성했소. 우파 놈들이 깨끗한 공산주의자를 모욕하고 중상하지 말라.” 박우성은 따발총처럼 끝없이 을러멨다. “네 놈 우파들이 오히려 나를 투쟁하려고? 어림도 없어. 도적을 잡아도 우두머리를 족치라고 허백호 서기부터 타도해야 한다.” 그는 허백호의 멱살을 틀어쥐고 호통 쳤다. “여실히 탄백해라! 네 놈은 누가 소개해서 우파로 됐니?” 이때 허백호 서기가 목에 지렁이 같은 핏줄을 세우고 고함쳤다. “우파도 누가 소개해 되는가? 당신이 내 자리를 차지하고 편안할 거 같은가?” “아, 이 놈, 언감 공사 서기와 대들어?” 박우성은 질서를 유지하려고 따라 온 파출소 경찰들에게 머리를 돌렸다. “허영호 소장, 뭘 하오? 이 우파분자들의 입을 틀어막소! 이 놈들이 주둥이를 자꾸 벌려서 어디 투쟁대회를 정상적으로 하겠소?” 허나 허영호 소장은 멍해 자기 사촌형 허백호 그리고 허영주 사장 등을 둘러볼 뿐이었다. 박우성은 기다리다 못해 꽥 소리쳤다. “허 소장! 뭘 하오?!” 민경들은 모두 허 소장의 눈치를 살폈다. 허영호 소장은 두 팔을 펴보이었다. “박 서기, 입을 틀어막을 수건이 있어야 틀어막지?” 박우성은 쌍까풀눈을 허백호에게 돌렸다. “넌 서기로 있을 때 전 공사 숱한 생산대대의 빈농들이 굶어 죽게 한 죄가 있다. 총살해도 시원찮을 놈이야! 지주보다도 죄가 더 한 악질 우파분자야!” 그 말에 허영주 사장이나 허백호 서기나 모두 놀라했다. 장충국은 옆에 서 있는 진달래를 슬쩍 다치며 시원해 눈을 질끈 감아보이었다. 진달래는 장충국을 가로 보았다. 장학산은 장충국을 그러지 말라고 눈짓하더니 박우성과 민경들의 눈치를 보았다. 지주들은 허백호 서기와 허영주 사장 그리고 항일투사이며 토지개혁 때 촌 간부 진달래까지 고깔모자를 쓰고 자기들과 함께 투쟁을 받게 되자 속으로 시원해 하는 눈치였다. 간부들을 투쟁하는 사이에 지주들은 편안하게 서서 구경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박우성은 허백호 서기를 물고 늘어졌다. “허백호는 대약진이란 붉은 기치를 내걸고 왕청 같은 짓을 했습니다. 심갱밀식농사법이란 구호를 내걸고 둼을 한자 깊이로 파묻고 그 위에 옥수수를 심었으니 아까운 소서구 밭에서 쭉정이도 거두지 못하게 했습니다. 이 놈은 심갱밀식농사법을 반대한 허영주 사장을 우파로 몰아 타도했습니다.” 그 말에 병완이나 허영주 사장이나 상순이나 모두 머리를 들었다. “결과 어떻게 됐습니까? 숱한 빈농들이 3년 재해 기간에 굶어 세상을 떠나는 비극을 재연했습니다. 그들은 일제의 철 발굽 아래에서도 길가의 민들레처럼 짓밟히면서도 살아서 두만강을 건너 이 곳에까지 온 우리 인민들입니다. 어떤 인민들을 굶어 죽게 했습니까? 그래 우파 조건이 안 된단 말입니까?” 그제야 군중들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이때 흥수가 나서 구호를 불렀다. “계급투쟁을 잊지 말자!” 군중들은 흥수를 따라 구호를 높이 불렀다. “우파분자 허백호를 타도하자!” 허백호는 점점 머리를 숙였다. 그 옆에 선 허영주 사장은 머리를 점점 들었다. 박우성은 허영주 사장의 손을 잡으면서 정중히 말했다. “허 사장, 고생했습니다. 얼마나 억울했습니까? 내 상급당위에 회보해 허 사장에게 억울하게 씌워진 우파 모자를 벗겨달라고 청시할 예산입니다. 허영주 사장이야 말로 조선의용군 지하간부이고 빨찌산 항일투사입니다. 당신이야 말로 토지개혁공작대의 우수한 간부이며 우리 인민공사의 훌륭한 사장입니다. 내 꼭 우파 모자를 벗겨 주겠습니다.” 그러자 허영주는 박우성의 손을 잡고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박우성은 이번에는 병완과 상순을 일일이 찾아 손을 잡고 흔들며 말했다. “그간 저 우파분자 허백호 때문에 얼마나 고생했습니까?” 병완은 박우성의 갑작스레 태도변화에 덤덤히 서 있었다. 허나 상순은 자기 손을 잡은 박우성의 손을 꽉 잡아 흔들었다. “여보, 반장, 당신이 우리 공사 당내 문제와 우리 마을 농사문제에 대해 정확하게 보니까 시름 놓이오.” 병완은 태도 표시를 소홀히 하는 것 같아 손자 상순에게 턱을 가로 저으며 눈짓했다. 그날 투쟁대회는 허백호를 투쟁하는 바람에 군중들이 잘 동원됐다. 특히 흥수가 투쟁의 앞장에 서는 바람에 모두들 그를 두고 정치투쟁의 급선봉이라고 했다. 그 덕분에 흥수는 함흥 촌 당 지부의 동의와 공사당위의 비준을 거쳐 정식으로 입당했다. 이전에는 병완과 상순이 동의하지 않아 입당을 하지 못했다. 허나 이번에는 상순이가 조개덕에 내려간데다가 병완마저 박우성 서기의 지시를 듣고 흥수의 입당을 동의했던 것이다. 새로 입당한 흥수는 어깨가 으쓱해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정치투쟁에 더욱더 열성을 부리었다. 그는 함흥대대를 틀어쥐려고 자기 주위에 얼치기 "정치인"들을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두만강변에서 갓 이사해온 황종연과 황승연 형제를 제일 먼저 자기 밑에 끌어왔다. 황종연과 황승연 형제는 갓 제대한데다가 주먹은 셌다. 하지만 어려서부터 부모 없이 자라서 버릇이 없었다. 그는 흥수 지시가 떨어지기만 하면 쩍하면 주먹을 휘둘러 사람을 다치게 했다. 진달래네 두 아들 경주와 경수는 애들에게 “우파”, “남조선 특무, 북조선 특무 아들”이라고 놀리음을 당해 머리를 들고 학교를 다니지 못했다. 상순은 동창생인 박우성의 사무실을 찾아가 시비를 가르자고 했다. 박우성은 십중팔구는 통사정을 들이대리라고 진작 짐작하고 손사래를 쳤다. “어째 왔소? 그 조선 여자특무를 놔달라고 사정하자고? 안 되오. 이게 어느 때오? 양? 어디 동창생의 사정을 봐줄 때오?” 상순은 물러서지 않았다. “박 서기, 난 동창생 개인감정으로 사정하는 게 아니오.” 상순은 박우성의 맞은 켠 걸상에 척 앉아 자세를 바로 잡아 앉았다. 보아하니 단단히 해 낼 잡도리인 것 같았다. “사실 진달래는 진짜 항일빨찌산 여중대장이었어…” “됐소, 돼. 또 묵은 그루에 이밥 먹던 소리군. 누가 옛날 진달래가 목숨 걸고 일본 놈들과 싸운 걸 모르오? 지금 표현을 봐야지. 그는 남조선 특무 아내요. 또 조선인민군 연대장의 아내요. 사회관계가 얼마나 복잡하오? 그는 확실히 남조선 특무와 북조선 특무 혐의가 있소. 잘 조사해봐야 한단 말이오.” 상순은 책상을 탕 치면서 세 귀 눈을 무섭게 치떴다. “마구 모자를 들씌우지 마오! 제발 생사람을 잡지 마오.” “뭐라고?!” 박우성도 책상을 꽝 치면서 벌떡 일어났다. “이 동무 이게, 아무 말이나 마구 하겠소? 내 언제 생사람을 잡았단 말이오?” 상순은 좀 언성을 낮춰 도리를 따졌다. “남조선 특무의 아내라고 해 한국특무라고 할 수 있소? 조선인민군 연대장의 아내라고 해서 마구 북조선 특무라고 하면 되오? 그게 생사람을 잡는 게 아니고 뭐요? 항일투사들과 당 간부들을 지주들과 한 줄에 세워놓고 투쟁해서야 되오? 그렇게 정치두뇌가 명석하지 못하고서야 어떻게 공사 당위 서기를 하오?” 그 말에 박우성은 피씩 웃었다. “그렇게 정치두뇌가 명석한 자네가 왜 우리 공사 당위 서기를 하지 못하오? 난 그래도 허영주 사장을 상급에 말해 우파 모자를 벗겨주겠소. 내처럼 공정하게 처사하는 간부가 어디 있소?” “그 일은 참 잘 처리했소. 그래서 빈농들은 당신을 믿기 시작했소. 진달래 동지의 억울한 모자도 벗겨주란 말이오. 진달래 동지는 우리 당이 오랫동안 고험한 훌륭한 동지요. 절대 특무가 아니오. 난 당성으로 담보할 수 있소. 이전에 그의 전 남편 용천이가 우리 함흥 촌에 기어들었을 때 남조선 특무라른 것을 알고 돌멩이를 날려 전 남편의 머리를 까서 우리 민경들이 붙잡게 도왔댔소.” “그건 발뺌일 수도 있소. 내 생사람을 잡지 않는다는 것만은 믿어주오. 진달래 문제는 꼭 사실대로 밝혀질 게요. 기다려 주오. 또 내 혼자 마음대로 규정할 수도 없는 거고.” 상순은 박우성의 딱한 처지도 알았다. 프로수를 정해 놓고 우파 분자를 잡는 세월에 박우성인들 명액에 든 우파 분자를 놓자고 하겠는가! 상순은 박우성이 점심을 먹고 가라는 것도 밥맛이 없어 집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며칠 후 진달래가 경수만 데리고 감쪽같이 어디로인가 사라졌다. 병완은 곰방대에 담배를 꾹꾹 눌러 넣고 불을 달아 물었다. 속이 탄 연기가 꾸역꾸역 타래치며 방안에 꽉 들어찼다. (두만강이 얼었지. 그래, 우리가 두만강을 건너 여기로 올 때에도 두만강이 얼어붙어 쉽게 건넜지.) 그는 엉거주춤 일어나더니 눈보라 기승치는 바깥을 내다보며 중얼거리었다. (지독한 년, 어쩜 시부모와 말 한마디 없이 달아난단 말인가? 못된 년, 용천의 새끼는 자기 새끼 아닌가? 자기 살 도리만 하고 경주는 어쩌고? 우린 어떻게 살라는 거야? 네년이 달아나면 조선특무라는 때를 영영 벗지 못할 게 아니야?) 병완은 땅이 꺼지게 한숨을 후- 내쉬었다. 창 밖에 저 멀리 상순이 허둥지둥 찾아들어서는 것이 눈에 뜨이었다. (나는 앞날이 멀지 않지만 저 상순은 어떻게 더러운 때를 쓰고 한뉘 살겠는가? 경주는 어떻게 살겠느냐?) 병완은 집에 들어서는 상순을 보고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경주를 어쩌느냐?” 그는 상순에게 한마디 하고 엉거주춤 일어나더니 불쌍한 막내손자 경주를 보러 바깥으로 나갔다. 상순도 도리머리를 흔들면서 할아버지를 따라 진달래네 집으로 내려갔다.      병완이 진달래네 집 안에 들어서니 덕성 영감이  경주를 붙안고 서럽게 울고 있었다.      "경주야, 엄마 없이 혼자 어떻게 살려나? 가자 작은햘배네 집으로 가자."    병완도 어시 없는 경주를 보고 콧마루 시큼해나 머리를 쓰다듬었다.    경주는  열댓살 밖에 안됐지만 키는 덕성 영감 어깨를 넘어섰다. 그래도 덕성은 어미, 애비 없이 홀로 난 그 손자가 불쌍해 자기 집에 데려다 키울 예산하는 것이었다. 병완은 서로 붙안고 우는 덕성과 경주를 바라보며  땅이 꺼지게 한숨을 내쉬었다.   창 밖에서는 윙윙 눈보라만 사납게 휘몰아쳤다. 엄동설한 폭풍이 온 대지를 하얗게 실망으로 물들이며 사납게 파도치며 덮쳐왔다.  
119    대하소설 진달래 소야곡(7) 댓글:  조회:1449  추천:1  2018-01-09
                                 12. 복도에서 벌어진 희극 휘몰아치는 눈보라에 몸부림치는 백양나무가지에서 눈송이들이 주정을 부리면서 맥없이 떨어졌다. 희읍스름한 창 밖 하늘이 음침하게만 느껴졌다. 성호는 침대에 누워 맞은 켠 승호의 빈 침대를 보면서 착잡한 생각에 잠겼다. (다 끝났어. 사랑은 티 없이 맑고 깨끗한 두 심장으로 연주하는 멜로디야. 사랑의 진실은 결국 순정인 거야. 은영은 이미 모든 걸 승호에게 짓밟혔어.) 성호는 저도 몰래 눈물을 줄 끊어진 구슬처럼 줄줄 흘리면서 베개잇을 적셨다. 이제껏 공부도 제대로 하지 않고 추구해온 사랑을 놓치자 절망감을 느꼈다. 천길 나락에나 떨어지는듯이 눈앞이 캄캄해났다. 사랑하는 은영이 색마에게 정조마저 무참히 짓밟힌 것으로 하여 칼로 심장을 도려내는듯이 아팠다. (불 보듯 빤하지 않은가. 은영은 정조를 바친바 하고는 죽든 살든 승호에게 달라붙어 살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러찮으면 승호가 경옥과 홍희와도  사귄다는 걸 알면서도 승호한테 빌붙을 수 있겠는가.) 성호는 모진 진통을 겪은 후 한숨을 후~ 내쉬였다. 더는 은영을 괴롭힐 수  없어 놔줄 수밖에 없었다. 순간 성호는 이상하게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다만 목숨을 걸고 열렬히 사랑했던 은영을 잃은 진통과 더불어 은영의 암담한 미래가 근심스러웠다. 색마가 미리 파놓은 함정에 은영을 빠지게 놔두는 것이나 다름없어 마음이 고달팠다. (나한테 시집오면 고생이지. 농민의 아들이여서 물려받을 재산은 없는데다 설상가상으로 시부모를 모셔야지. 또 아홉이나 되는 시형과 시누이들 속에서 어떻게 눈치를 보면서 시집살이를 한단 말인가. 씨원히 잘 됐어. 사랑하는 은영을 데려다 고생시키잖아 대행이야.) 그는 승호가 색마의 본성을 고치고 은영을 진정으로 사랑해줄 것을 기대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젠 성호는 승호와 사랑의 라이벌로부터 옛날처럼 친구로 되돌아가고 싶었다. 그러나 승호가 자기를 “농부의 아들”이라는지 “촌뜨기”라는지, “농포”라는지, 소궁둥이를 치던 “목동”이라는지 뭔지 하면서 깔보는 것이 마음에 앙금이 가라앉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개자식, 언젠가는 농부 아들의 짯짯한 맛을 보여 줘야지.) 성호는 자리를 툭툭 털고 일어나 바깥으로 나왔다. 울적한 기분과 홀가분한 마음이 반죽할 때 어디에 가서 술로 쓸쓸한 기분을 달래고 싶었다. 그는 눈보라가 룡트림하는 큰 길에 나섰다가 주춤 멈춰섰다. 호주머니를 뒤져보아도 달랑 동전 몇잎 밖에 없었다. “이게 바로 농부 아들의 설음이구나.” 그는 숙사로 되돌아가다가 또 주춤 멈춰 섰다. (선화네 음식점으로 가볼가? 술은 외상으로 얼마든지 마실 수 있는데.) 그 생각도 인차 접었다. (아니야, 난 절대 승호처럼 허위적인 사랑을 미끼로 처녀애들의 마음과 육체를 사기칠 수 없어. 에라, 그만두자. 술을 마시지 못하면 말라지. 공을기처럼 선술집에 가서 땅콩 한접시에 외상으로 소주 한잔 쪽 마실 순 없어.) 성호는 아무리 농민의 아들이라고 해도 70년대 땅을 밟고 하늘을 떠인 사내대장부, 아니, 농민출신 대학생의 기개마저 접고 싶지 않았다. “오빠, 어디 갔다 와요?” 등뒤에서 느닷없이 들리는 처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해연이 아니겠는가. (오빠라니? 한살 이상 돼가지고.) 성호는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꿀꺽 삼키고 건성으로 대답했다. “산보를 나왔소.” 해연은 오가는 대학생들을 개의치 않고 다가서면서 속삭였다. “전번에 대학교 식당에 출근한다고 말한 거 같은데요.” “오, 깜빡 잊었구나.” 해연은 주위를 둘러보더니 성호에게 바싹 다가와 은근히 귀속말로 소곤거렸다. “내 식당 책임자로 발탁됐거든. 식당에 다른 학생들이 없을 때 조용히 찾아오라고. 채를 듬뿍 담아줄게.” “음.” 해연은 성호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종알거렸다. “어째, 오빠 얼굴기색이 좋잖군요. 무슨 일이 있는가요?” 성호는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해연은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더니 성호의 팔소매를 잡아끌었다. “우리 어디 가서 한잔 마실가?” 성호는 속으로는 때마침 잘됐구나 하면서도 능청을 떨었다. “식당 책임자가 출근시간에 술 마시면 되오? 어서 출근이나 하오.” “식당 일이야 아래사람들이 하지 않을라고? 길에서 이러지 말고 어서 가기요. 내 한잔 내죠.” 성호는 못 이기는 척하면서 끌려갔다. 해연은 성호를 끌고 또 선화네 선녀음식점으로 갔다. “아니, 오빠 오랜만이구만요.” 선화는 음식점에 들어서는 성호를 보고 아양을 떨다가 뒤에 따라 들어서는 해연을 보고 새침해졌다. 보름달 같은 얼굴에 질투의 그림자가 파도치며 스치고 지나가기까지 했다. “음식점이 잘 되니?” 해연의 물음에 선화는 건성으로 “그래, 너까지 도와준 덕에 밥이나 먹을 수 있지.” 하고 대답했다. “오빠, 뭘 잡숫겠어요?” “농부네 아들이야 주는대로 먹지 뭐.” 선화는 아주 정색해서 종알거렸다. “천만에 말씀, 대학생오빠 뒤에 처녀들이 줄지어 따라다니는데. 우리 음식점에 자주 오세요. 무료로 잘 대접할 테니까.” 해연도 뒤지지 않으려고 했다. “야, 우리 별로 공짜로 얻어먹으러 온 거 같구나. 후에 다신 오지 못하겠어.” 해연의 말에 선화는 저쪽으로 가서 복무원처녀를 보냈다. 해연은 돼지고기, 소고기, 개고기에 물고기 채를 시켜 한상 차리는 판. “언제 다 먹겠소? 랑비하지 마오.” “다 못 먹으면 비닐봉지에 싸서 숙사에 가지고 가서 잡수세요.” 이윽고 진수성찬이 상다리 부러지게 올라왔다. 성호는 기분이 울적한데 해연이 권하는 술을 한잔, 또 한잔 마시다나니 얼근이 됐다. “고맙소.” 성호는 해연의 술잔과 댕그랑 부딪치고 한잔 또 쭉 굽내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손님들이 시글버글한데 선화가 주방에 들어가 맴돌고 있었다. 성호는 고개를 돌리더니 해연의 손을 덥석 잡았다. 해연은 놀라 반사적으로 손을 빼려다 말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해연이, 누나, 정말 고맙소.” 해연은 손을 빼면서 나직이 중얼거렸다. “누나? 취했어? 누나는 무슨 누나? 애인이라면 안돼요?” 성호는 취기가 오른 얼굴에 희죽이 웃음을 짓다 말았다. “난 농민의 아들이란 말이요. 부모를 모실 효자. 허허허. 누가 나한테 와서 개고생을 하겠소?” 성호는 술병을 쥐어 꿀꺽꿀꺽 마셨다. “이러지 마세요. 취하겠어요. 난 그런 개고생을 하고 싶은데 어쩌지?” “바보. 아직도 포기하지 않았어?” “난 당신의 바보로 되고 싶어요. 농촌에서 돼지치기랑 하면서 살면 재밌을 것 같은데.” 성호는 도리머리를 홰홰 저었다. 해연이 술병을 빼앗을 때 선화가 오이랭채를 한접시 들고 사뿐사뿐 다가왔다. “한잔 따라도 괜찮지요?” 해연이 상을 찡그렸다. “얘, 이제 와서 뭐야? 오빠 취하겠어.” “괜찮아.” 성호는 술잔을 선화 앞에 내들었다. “로동자처녀들이 좋아. 순박하고 진심이란 말이야. 안 그래?” 성호는 해연과 선화를 번갈아보면서 떠들어댔다. “자, 한잔 주오. 선녀의 술을 천잔, 만잔 마시고프오.” 선화는 해시시 웃으면서 유리잔에 술이 찰찰 넘치게 따라 두손으로 손수 올렸다. “자, 선화 한잔, 해연도 한잔.” 성호는 술병을 들어 선화와 해연의 잔에 술을 따랐다. “난 농민의 아들이지만 처녀부자라니까. 하하하. 대학생처녀들과 사귀지 않을래. 순박하고 진심인 식당 누나들과 친하겠어.” 선화와 해연은 서로 눈길을 마주치더니 성호의 잔과 댕그랑 부딪치고 한잔씩 쭉 굽냈다. 선화는 해연과 동창생인지라 스스럼없이 개고기점을 집어 성호 입에 넣어주었다. 성호는 볼이 미여지게 우물우물 씹어넘겼다. “선화, 요즘, 내 동창친구 자주 다니오?” “오빠 심통한 그 친구 말이죠?” “그래. 그 꺽다리친구.” “거의 사흘 건너 한번 온다면 섧다 할 지경이지요. 그 량반 녀자친구 많더구만요. 번마다 다른 녀자친구를 데리고 오던데요. 뭘 하는 집 자식인지 돈도 물 쓰듯 하던데요.” 성호는 대개 짐작이 갔다. “그래, 체육머리를 한 녀자애도 데리고 왔지?” “맞아요. 보름달처럼 얼굴이 동그란 처녀애도 데리고 왔는데. 뭐 ‘홍희’라고 하는 같던데요. 점심에 데리고 온 굽슬굽슬한 체육머리를 한 녀자보다 더 어리고 예쁘던데요. 그 꺽다리 말이요. 메부리코를 어데가 다쳤는지 반창고를 더덕더덕 붙이고 왔던데요.” 꽝! “어마나!” 해연과 선화는 이구동성으로 비명을 질렀다. 해연은 손으로 입을 막았고 선화는 두 손으로 머리를 싸쥐였다. 성호가 주먹으로 술상을 내리친 바람에 술병이 땅바닥에 떨어져 박살났다. 개고기 국물도 주르르 흘러 땅바닥에 떨어졌다. “왜 이래?” 선화가 의아해 성호를 마주 바라보았다. “미안하오. 그만…” “이젠 돌아 가자요.” 해연은 결산까지 하고 성호를 부축해 음식점에서 나갔다. 등뒤에서는 선화가 “안녕히 가세요. 또 오세요.”하는 간드러진 인사말이 묻어났다. 바깥은 벌써 칠흑같이 캄캄했다. 눈보라가 기승을 부리면서 엄습해도 성호는 예쁜 해연이 동무해주는데다 술기운에 추운줄 몰랐다. “우리 공원에 들어가 놀가?” “미쳤어? 이 추운 겨울에 뭘 놀아?” “눈싸움을 해볼가?” 성호는 해연에게 팔을 맡기고 비칠거렸다. “싸움은 끝났어. 끝났단 말이야.” “뭘? 눈싸움을 하지도 않고 벌써 끝났어?” 성호는 취기가 버쩍 올라 제 좋은 소리를 쳤다. “결투는 끝났단 말이야. 그 놈새낀 소나무에 처박혀 죽다 살아났어. 허허허. 제깐 놈이 시내에서 자랐노라고 우쭐거려도 이 굴 뱀을 이길 수 있어. 뭐? 호랑이라고? 허허허. 룡호상박이라. 거죽 밖에 없는 호랑이는 이 왕의 후손인 룡을 이기지 못한단 말이야. 종이범이 룡을 이길 수 있어? 허허허.” 해연은 듣고도 무슨 소린지 몰라 어안이 벙벙해 성호를 쳐다보며 앞으로 걸어갔다. (이렇게 추운 날에 길에서 취해 쓰러지면 어쩌지?) 해연은 손목시계를 들여다보고 식당 근처에 있는 자기 집 쪽으로 성호를 부축해 갔다. “아하, 이거 방향이 틀린 거 같아. 숙사 가는 길 아닌데.” 성호는 주춤 멈춰서 겨우 몸을 가누면서도 여기저기 둘러보았다. “어디로 가? 외박은 절대 안돼.” “우리 집으로 가서 좀 쉬고 술을 깬 후에 숙사로 가오.” “안돼. 취하지 않았어. 숙사로 돌아가야 해.” 성호는 해연을 뿌리치고나서 “오늘 감사하오. 꼭 갚아줄게.”라고 하고는 돌아서서 용케도 숙사로 비칠거리면서 돌아갔다. 해연은 시름이 놓이지 않아 은밀히 뒤따라가면서 성호가 숙사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서야 돌아섰다. 뒤에서는 룡과 호랑이 싸우는듯 눈보라가 윙-윙 무서운 소리를 지르면서 기승스레 불어쳤다. 해연은 피뜩 학교 창고 쪽을 둘러보다가 가로등 불빛에 창문이 하나 열려 바람에 덜커덕거리는 것을 보았다. (에이, 어쩜 창문도 닫지 않고 퇴근했어?) 그녀는 저도 몰래 학교 창고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는 창문 가까이 다가갔다가 이상하게 눈가루 뒤덮인 창문턱에 크고 작은 발자국이 찍혀 있지 않았겠는가. (혹시 창고에 도적이 들었는가?) 가만히 동정을 살펴보니 진짜 복도에서 인기척이 나는 것이 아닌가. 해연은 경각성을 높이기 시작했다. 그녀의 머리에는 성호가 번개처럼 떠올랐다. 그녀는 고양이처럼 발뼘발뼘 뒤걸음질치다가 남성숙사 쪽으로 뛰여갔다. 단숨에 3층에 뛰여올라간 그녀는 성호네 침실 문을 두드렸다. “누구야? 밤중에 성가시게.” “해연인데요.” “뭐? 해연이?” 침실에서 부시럭거리더니 신짝을 짝짝 끄는 소리가 들렸다. 덜컥 문을 연 성호는 놀란 해연을 보고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해연은 침실에 들어가자 “큰 일 났어요. 창고에 도적이 든 거 같아요.”라고 했다. “뭐? 도적?!” 성호는 범송이랑 종수랑 불러 식당으로 줄달음쳐갔다. 그들은 쥐도 새도 모르게 식당을 포위하고 돌멩이랑 주어들고 삼엄하게 대기했다. 성호는 해연을 뒤따라 창고 뒤문을 열고 슬그머니 사무실에 들어갔다. 해연은 전지를 찾아 들고 성호는 망치를 주어들었다. 성호는 해연의 귀에 대고 뭐라고 쑤군거리더니 복도 문을 슬그머니 열고 달빛이 드문드문 깔린 복도를 쪽제비처럼 살금살금 들어갔다. 해연은 뒤에서 따라가며 수시로 전지불을 켤 준비를 했다. (저게 뭐야?) 굽인돌이를 꺾어돌자 저쪽 복도에서 웬 녀성의 신음소리가 간간히 들렸다. 성호는 가로등과 달빛을 빌어 복도를 찬찬히 살펴보고 깜짝 놀랐다. 희미한 전등불빛이 비껴드는 복도에서 웬 벌거숭이 남녀가 누워 버둥거리는 추태가 보이지 않겠는가! 해연은 코를 싸쥐고 킬킬킬 웃었다. 성호는 해연의 손에서 손전지를 빼앗아 쥐고 더러운 남녀를 비추었다. 깜짝 놀란 남자는 황급히 일어나 옷을 주어들고 창문턱에 뛰여올라갔다. “붙잡아라!” 성호가 고함치면서 쫓아갔을 때 벌거숭이 남자가 바깥으로 뛰여내렸다. “서라! 이 도적놈들!” 바깥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미처 뛰여나가지 못한 벌거숭이 녀자는 바깥의 고함소리를 듣자 옷으로 얼굴과 가슴을 가리면서 복도 저쪽 끝으로 달아났다. 해연이 쫓아가자 벌거숭이 녀자는  창문고리를 벗겼다. 성호는 차마 손전지로 더 비추지 못했다. 긴 머리카락을 흩날리면서 창문턱에 기여오르는 그녀의 뒤태가 홍희 같아 보였기 때문이다. 그녀는 옷을 안고 창문턱에 홀짝 뛰여오르더니 바깥으로 뛰여내렸다. “도적이야!” “히히히.” “어디로 도망쳐!” “아니, 이게 누구야?!” “하하하!” “허허허!” 남학생들은 분명 홍희라는 것을 발견했다. 성호는 손전지불을 내리며 창문으로 바깥에 뛰여내렸다. 범송은 도망치는 남자를 안걸이를 걸어 번져놓고 발로 대가리를 밟고 서서 한창 우쭐거렸다. “이 놈 씨름장수 손에서 벗어나려고?!” “야, 놔라. 내다, 내!” 벌거숭이는 낯을 가리웠던 옷을 치우면서 범송의 발 밑에서 애걸했다. “뭐라고?” “이게 누구야?!” 범송이 낯을 밟았던 발을 들었다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뜻밖에도 승호가 아니겠는가! 진짜 웃지도 울지도 못할 노릇이였다. 모두들 벌거숭이들이 옷을 입는 것을 놔두고 숙사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홍희는 옷으로 얼굴을 가리고 달빛 속에 눈보라 속에 사라졌다. 허나 승호는 개꼴망신을 당하고서도 옷을 주섬주섬 주어입으면서 철면피하게도 큰소리를 떵떵 치며 위협했다. “흥! 어느 새끼 감히 학교에 고발해봐라! 깡패들을 시켜 재가루를 만들어놓을 테다!” 모두들 코를 싸쥐고 킬킬거렸다. 범송은 허리를 구부정하고 웃으면서 “오늘 재수 좋게 희극을 보았어. 허허허.”하고 떠들어댔다. 저쪽에서 승호의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맨 물에 거시 같은 새끼, 작작 너덜거려라.” 범송은 홱 돌아서 소리 나는 쪽을 쏘아보았다. 승호는 계속 위협했다. “촌뜨기새끼, 까딱 개소릴 치면 없애치우겠다!” 범송은 승호를 보고 혀를 한발이나 내두르면서 빈정거렸다. “적반하장이라구야! 쳇! 숱한 처녀애들 정조를 짓밟아 놓고서도 무사할 거 같아? 퉤! 퇴학을 맞지 않나 두고 보자!” 희극은 어둠 속에 서서히 막을 내리면서 기승스레 불어치는 눈보라가 모든 종적을 감춰버렸다.                                                                                                13. 사랑의 진실       발이 없는 소문이 천리를 간다고 복도에서 벌어진 희극은 윙윙 휘몰아치는 눈보라를 타고 온 학교에 파다히 퍼졌다. 기말복습을 하느라고 조용하던 교정은 운석이 떨어진 호수처럼 부글부글 긇어면서 요란해졌다.       홍희는 머리를 들고 교정에 다니기 힘들어 종일 숙사에 붙박혀 이불을 푹 쓰고 들어누워 있었다. 이불 밑에 흐트러진 머리카락 사이에 퍽 수척해진 얼굴이 반쯤 드러났다. 그녀는 밥을 먹으러 식당에 가지 않았다. 식당 복도만 생각해도  머리카락이 곤두설 지경이였다. 한 침실에 있는 정희가 식당에서 죽을 타다가 침대머리에 놓으면서 홍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얘, 죽이나 먹어라.” 홍희는 이불로 얼굴을 푹 가리였다. 기실 정희는 홍희가 승호에게 바싹 달라붙는 것에 잘 리해되지 않았다. (승호한테 약혼녀가 있다는데도 망신당할게 뭔가.) 그녀는 정조를 녀성의 생명으로 간주했기에 홍희의 행실을 리해할 수 없었다. (이제 승호가 헌신짝 차버리 듯하는 날엔 어쩔 셈인가?) 홍희도 승호가 은영을 좋아하는 것을 눈치챘다. 그러나 승호와 은영이 마지막 장벽까지 넘었는가는 알 수 없었다. 외지 시골에서 자란 그녀는 농부의 일생이 어떻다는 것을 알고도 남음이 있었다. 집에는 남동생 둘에 녀동생 셋이나 있었다. 그녀는 부모와 동생들의 유일한 희망이였고 정신기둥이였다. 그녀는 승호와 결혼해 시내에 남아 한평생 농사를 지으면서 고생한 부모를 시내에 모셔다 효성하려는 미몽을 꾸었다. 그녀는 또 맏이로서 동생들을  경제적으로도 도와주고 싶었다. 그러나 전날 저녁에 식당에서 추태를 보인후 이제껏 모든 정성을 다해 쌓아 온 탑이 한날 한시에 와그르르 무너지는 것을 느꼈다. 이전에 그녀와 승호가 벽돌공장 숯가마 안에 들어가 련애하다가 허서기에게 들키워 무장부에 끌려가 심문받고 처분받은 적이 있었다. 승호는 그때 입당할 기회마저 박탈당할 번했다. 다행히 승호는 아버지 덕분에 쓰러지면 뒤집어눕는 재간이 있어 그저 검사서나 쓰고 말았다. 허나 대학교당위 기률검사위원회 허서기는 승호와 홍희를 조용히 불러 “다시 련애하기만 하면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은 적이 있었다. 이제 누가 이번 사고를 고발하는 날엔 무슨 낯으로 허서기를 본단 말인가? (퇴학맞으면 자살하고 말테야.) 그녀는 희망이 절망으로 뒤바뀌는 순간 천길나락으로 떨어지는 감이 들고   괴롭기만 했다. 어둠칙칙한 심연으로 끊임없이 빠져 들어가는 것 같아 한시도 견디기 어려웠다. 순간 그는 승호가 한없이 원망스러웠다. (얼마나 능력을 자랑하던 슈퍼맨인가. 뭐냐? 전날 밤의 행실은 그를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뜨리지 않았는가?) 홍희는 학교에 온 후 자기 사랑의 오아시스의 주인공으로 승호를 선택했던 것이다. 물론 그녀는 승호가 좋아하는 녀자들이 많다는 것을 모로지 않았다. 그녀는 승호가 한메터 70도 훨씬 넘는 사나이다운 체격에 무섭게 매력있는 세귀눈에 퐁당  빠져버렸다. 또 학급의 체육위원과 대학교 학생회 체육부장이였다. 그 슈퍼능력에 반해버렸다. 날이 갈수록 승호는 남다른 야망을 가진 진짜 사내라고 여겨졌다. 게다가 승호 아버지는 시내 공안국에서 과장을 하고 엄마는 병원에서 총간호장을  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때로부터 승호와 같은 완벽한 대학생총각, 백마왕자는 이 세상에 둘도 없다고 생각했다. 홍희는 사랑의 거미줄로 승호라는 권세가문의 백마왕자를 꽁꽁 묶어놓고 싶었다. 홍희는 백방으로 승호 주위를 감돌면서 그런 날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녀는 자리를 정돈하는 기회를 타서 승호의 딱 앞에 앉아 승호의 눈에 쉽게 뜨일 수 있는 지리적위치부터 확보했다. 우유빛얼굴에 크림에 분까지 하얗게 바르고 승호 앞에 앉아 분내를 풍기였다. 철학이나 정치경제학 공부는 그럭저럭 해도 되련만 공부할 때면 쩍하면 머리를 돌려 승호한테 이것 저것 묻군 했다. 그뿐이 아니였다. 아버지가 온돌을 뜯어 고쳐 준 용돈으로 승호에게 손수건도 사다 가만히 필기장에 끼워놓기도 하였다. 승호는 차츰 수태 따르는 녀자애들 속에서 홍희에게 눈길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날은 끝내 돌아오고야 말았다. 대학 3학년 때 어느 여름날 밤이였다. 홍희가 교실에서 공부를 다 하고 숙사로 내려와야 했다. 그런데 승호는 뭔가 계속 들추면서 엉덩이를 들 념도 하지 않았다. 홍희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승호에게 나직이 “오빠, 숙사에 내려가야겠는데요. 어쩐지 무서워요.” 하고 종알거렸다. 승호는 “데려다줄게.” 하고 대답하면서 책가방에 둘러메고 우쭐 일어났다. 가로등불빛이 환히 비추는 교정을 뒤로 하고 숙사에 내려오는 나무숲 속 오솔길은  꽤나 어둠침침해 녀학생들이 홀로 걷기는 무서운 곳이였다. 언젠가는 시내 건달들이 어두운 밤에 나무숲 속에 숨었다가 불씨에 뛰쳐나와 한 녀대생을 끌고 들어가 강간하려 했다. 그때 경비원들이 뛰여나오는 바람에 그 녀대생은 봉변을 면했었다. 진짜 그 나무숲 속의 여기저기서 공포가 귀신처럼 도사리고 있었다. 홍희는 저도 몰래 승호한테 다가서면서 “무서워요.” 하고 팔을 끼였다. “무서워 마오. 내 있잖아.” 승호는 스스럼없이 오른 팔로 홍희의 허리를 껴안고 걸었다. “시내 깡패도 다 때려눕힌 호랑이가 옆에 있는데 무서워 할게 뭐요? 어떤 놈이 감히 호랑이 코구멍을 들쑤신대?” 홍희는 승호의 호언장잠을 믿었다. 체육시간에 꺽다리 범송을 메치는 것을 보았고 장거리달리기를 달리는 것도 보았던 것이다. 허나 그녀는 그 나무숲 속을 지날 때면 겁났다. “호랑이 말을 더 하지 마세요. 범이 자기 흉을 하면 온다고 하지 않았어요? 괜히 자는 호랑이를 깨울라…” 그때다. “서랏!” “앗!” 갑자기 괴성과 함께 나무숲 속에서 괴한 서넛이 뛰쳐나왔다. “살겠거든 계집을 놔두고 꺼져!” 홍희는 비명을 지르면서 승호의 등뒤에 달라붙었다. “어디서 굴러온 놈들이냐? 언감 교정에서 강도질해?!” “족쳐라!” 괴한들은 우르르 쓸어들었다. “얏!” 탁! 퍽! 어둠 속에서 승호가 훌쩍 날아나가면서 발길로 차고 주먹으로 내질렀다. 단번에 두 놈이 쓰러졌다. 한 놈은 홱 몸을 돌려 곤두박질쳐 승호의 뒤에 날아내렸다. 그자는 비수를 뽑아 승호의 잔등을 푹 찔렀다. 승호는 옆으로 피하면서 구두발을 날렸다. 비수가 길 옆의 백양나무에 날아가 꽂히면서 부르르 떨었다. 그 놈이 씽 달려들자 승호가 자세를 낮춰 앞으로 굴러나가더니 재차 솟구치면서 주먹으로 그 놈의 아래배를 올리쳤다. “억!” 그 놈이 배를 끌어안고 쓰러졌다. 그 광경을 본 건달들은 날 살려라고 꽁무니를 뺐다. 그제야 승호는 비수에 찍힌 왼 어깨를 오른 손으로 감싸 안았다. “피! 아니, 저 피를!” 홍희의 손에 뜨거운 뻘건 액체가 매만지웠다. “괜찮소.” 홍희는 승호를 부축해 불빛이 환한 길에까지 간 후 책가방에서 위생지를 꺼내 승호의 어깨에 흐르는 피를 닦아주었다. 그녀는 자기 손수건으로 상처를 꼭 싸매준 후 승호를 부축해 숙사로 내려갔다. “큰일날번 했어요. 이 원쑤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승호는 홍희를 껴안으면서 고백했다. “사랑하오, 홍희. 홍희를 위해서라면 목숨이라도 선뜻이 내놓겠소.” 홍희는 뜻밖에 날아든 사랑, 아니, 오매에도 고대하던 사랑을 순식간에 품게 될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녀는 가슴이 한껏 부풀어올랐다. 그녀는 승호가 뜨거운 피 흐르는 두 팔로 꼭 껴안고 키스벼락을 안기는대로 놔두었다. 그녀는 승호의 사랑이 그렇게 갑작스럽게, 순식간에 찾아올줄은 몰랐다. 또  그렇게 열렬할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이튿날 아침에 그녀는 승호를 데리고 학교 의무실에 가서 비수에 찍힌 상처를 처치했다. 승호는 사랑의 스피드를 너무 과하게 내지 않겠는가. 사귄지 한달도 안돼 승호는 홍희를 어둠침침한 지하독서실에 데리고가서 사랑의 마지막 장벽을 허물어뜨리려고 서둘렀다. “안돼요. 이 것만은 안돼요.” 홍희는 숫처녀의 소중한 정조를 너무 일찍이 바치고 싶지 않았다. 그것은 결코 승호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였다. 어쩐지 불안하였다. 아래 학급의 은영이란 처녀애가 승호를 좋아하는 것을 눈치챘다. 게다가 승호한테 대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약혼녀가 있다는 것도 뒤늦게나마 알게 되였다. 꽉 끌어안았던 홍희를 풀어주면서 승호는 지지벌건 낯에 음흉할만치 독한 표정을 지으면서 물었다. “어째 나를 사랑하지 않소?” “아니죠.” 홍희는 침대에서 일어나 앉으면서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올려 가냘픈 어깨 뒤에 넘기면서 정색했다. “왜 학교 오기 전에 련애하던 녀자가 있단 걸 속였어요?” “아니, 근본 그 녀자를 사랑하지 않았소.” 승호는 그렇게 대답해놓고 속으로는 피씩 랭소했다. (경옥이 학교에 와서 떠들아댄 걸 알면서도 네가 계속 쫓아다니지 않았어? 새삼스레 그 일을 왜 꺼내? 다 쒀놓은 죽이 밥이 될 것 같아?) “학교 학생기률에 련애해도 안된다는데요. 이런 짓을 해서야 되겠어요?” “픽!” 승호는 코웃음치며 굳어졌던 길쭉한 낯의 근육을 느슨히 풀었다. “허허허. 우리 둘이 사랑하는 이상 뭐라오? 학생 기률도 너무나도 인성화 되지 못했단 말이요. 멀쩡하게 성인이 다 된 우릴 보고 련애도 하지 말라는 건 말이나 되오? 대학교가 어디 중놈들을 기르는 절당이라오?” 승호는 “흥!” 하고 콧방귀를 뀌더니 또 홍희를 꽉 껴안더니 침대에 쓸어눕혔다. 홍희는 두 다리를 바둥거리면서 단말마적으로 발악했다. 무슨 힘이 홍희로 하여금 발정난 호랑이처럼 달려드는 꺽다리를 몸 우에서 밀어냈는지 몰랐다. “남들의 눈이 두렵지 않아요? 들키면 퇴학이라는 걸 몰라요?” 승호는 멋쩍었든지 침대에서 툭툭 털고 일어나더니 “싫으면 마오. 강요하지 않소.” 하고 자리를 뜨려고 자물쇠를 찾아 들었다. 그날 홍희는 뜨거운 눈물을 흘리면서 간신히 처녀의 생명과도 같은 신성한 정조를 지켰다. 하지만 며칠 후에 그녀는 더는 기승스레 덮쳐드는 승호를 밀막을 힘이 없었다. 그날 점심에 승호가 아래 학급의 은영을 데리고 공원 맞은켠에 있는 선녀음식점에 가는 것을 뒤를 밟았던 것이다. 그것은 최대의 위기가 아닐 수 없었다. 은영은 나이가 어릴뿐만아니라 인물도 요귀처럼 이쁠 정도였다. 설상가상으로 은영의 아버지는 시내 정부기관에서 한자리 하는 세도가문이라고 하지 않겠는가. (사랑하는 백마왕자를 은영에게 빼앗길 순 없어. 어떤 수를 쓰든지 백마왕자를  품 속에 꽉 품고 빠져나가지 못하게 해야지.) 어느날 밤, 자습을 마치고 홍희는 큰 마음을 먹고 승호를 조용히 동무해달라고 청했다. 그녀는 승호의 팔소매를 잡고 지하독서실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지하 독서실에 들어간 홍희는 승호에게 단도직입으로 물었다. “오늘 결판을 내자요. 로실히 말해요. 오빤 도대체 날 사랑해요? 은영일 사랑해요?” 승호는 어두운 전등불빛 아래에서 길쭉한 얼굴과 입귀에 귀찮은 표정을 흘리였다. 갑자기 그는 홍희를 와락 껴안더니 열변을 토했다. “사랑하오. 목숨을 바쳐서라도 홍희를 사랑하오. 하늘이 알고 땅이 알 거요. 믿어주오. 이 지하독서실이 증명 설 거요.” 홍희는 홧홧 달아오른 승호의 몸을 밀어내면서 한마디 더 물었다. “학교 오기 전 약혼녀는 어쩔 셈인가요?” “약혼녀?” 승호는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허허허. 또 그년 말이요? 그년이 홍희와 내 사랑 발목을 잡을줄은 몰랐는데.” 승호는 진지한 표정을 지으면서 홍희의 어깨를 다독였다. “이후에 걔 말을 하지도 말아라. 묵은 상처를 건드리지 말란 말이야! 알았어?!” 허나 절대 물러설 수 없는 홍희였다. “이건 꼭 알고 넘어가야 할 대목이요. 똑똑히 말하세요.” “진작 싹 정리한 일이야. 그 녀잔 날 과부네 아들이라고 업신여겼단 말이야. 나도 자존심이 있어.” “뭘? 과부의 아들? 듣다 첫 소리군요. 아버지 공안국에서 한자리 한다고 하지 않았어요?” 홍희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친아버진지 계분지 몰라.” “계부?” 승호는 맥없이 머리를 끄덕였다. 허나 인차 몸을 홱 돌리더니 홍희의 두 어깨를 쥐어 마구 흔들었다. “난 친아버지가 누군지도 모르는 쌍놈이야. 계부 성을 탄 망종일 줄도 몰라. 그래, 왕의 후대래라. 허허허.” 그는 홍희를 침대에 활 밀어놓고 주먹으로 벽을 쿵쿵 쳤다. 홍희는 혹시 현관으로 지나가던 사람이 알가봐 말렸다. 그녀는 항상  활기 차넘치던 승호에게 쓸쓸한 사연이 있는줄은 몰랐다. 그녀는 불쌍해 일어나 승호의 얼굴을 쓰다듬다가 가냘픈 품에 꼭 껴안아주었다. 승호는 홍희의 가슴에서 머리를 떼더니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홍희를 마주 보았다. “홍희, 난 이 세상에서 홍희만큼 사랑하는 처녀는 하나도 없소. 믿어주오.” 홍희는 떨리는 두 손으로 승호의 뜨거운 눈물을 훔쳐주었다. “한마디만 묻자요? 은영과 계속 붙어다니겠어요?” “아, 그 앤 학생회 문예위원이 아니고 뭐야? 사업관계로 자주 만나는 편이긴 하지. 그런 관계는 아니라는데도 왜 그래?” 승호는 홍희의 가슴을 손으로 더듬으려고 했다. 홍희는 그 열 오른 손을 뽑아 치웠다. “재차 묻겠는데요. 은영을 사랑해요? 날 사랑해요?” “야, 이젠 귀못이 박히지 않소? 사랑하오. 심장을 빼 주고서라도 홍희를 사랑하오.” 승호는 홍희의 적삼 속에 손을 밀어넣었다. 홍희는 가슴으로 스르르 기여오르는 승호의 싸늘한 손을 꽉 움켜쥐였다. “변심하는 날엔 더러운 손이 만진 이 젖가슴을 가위로 베서 개한테 줄테야. 아니야!” 그녀는 다른 손으로 승호의 얼굴을 밀며 날카로운 말을 쏟아냈다. “변심하는 날엔 너 죽고 나 죽을줄 알아.” 승호는 머리를 끄덕이며 어렵잖게 받아넘겼다. “알았소, 알아. 믿어주오. 홍희를 영원히 사랑하오!” 홍희는 눈을 살포시 감았다. 순간 그녀는 봄날에 눈이 스르르 녹듯이 온몸이 나른해졌다. 그녀는 자꾸 젖가슴으로 기어오르려는 승호의 손을 꽉 움켜잡았다가  손을 맥없이 풀었다. 열김이 확확 풍기는 승호의 저속한 손놀림에 리지의 방선은 산산이 풍지박살나고 말았다. 이윽고 그녀는 그래도 용케 눈을 살며시 뜨고 승호의 지지벌개난 야수 같은 얼굴을 쳐다보았다. 영원히 기억해두려는듯이 빤히 쳐다며 눈사진을 찍어두었다. 그때 승호는 불티가 뚝뚝 떨어지는 허연 눈알을 무섭게 부라리면서 지껄였다. “사내는 정복자야. 전세계 녀성들이여, 뉘라서 내가 과부의 못난 아들이라더냐?” 홍희는 모든 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였다. 아무튼 강도들에게 당할 번한 자기를 구해준 구명은인이 아닌가! 그녀의 보름달 같은 얼굴에서는 줄 끊어진 구슬처럼 뜨거운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 한번이 있으면 두번이 있기 마련이였다. 그 후부터 승호는 해가 지기만 하면  그녀를 지하독서실에 데리고 가서 습관처럼 몸을 빼앗군 했다. 사랑의 마음을 달구는 것이 아니라 저렬하게 몸부터 달구면서 그녀의 몸만 빼앗았다. 이것이 그래 승호 오빠 사랑의 진실이란 말인가? 끝없는 성애가 그래 세상에서 제일 고상하고 진실한 사랑이란 말인가? 홍희는 기말인데다 해가 지는 것이 지겨울 지경이였다. 이젠 승호가 무서웠다. 아니, 이젠 짐승 같은 저렬한 "사랑유희"가 싫어졌다. 허나 이미 다 쑤어놓은 죽을 어쩔 수 없게 돼버렸다. 그녀는 모든 것을 운명과 승호의 량심에 맡기고 자포자기하고 말았다. 전날에도 혹시 헌 세집에서 그 짓을 했더라면 들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허나 역은 새 방아간을 지나가고 말았다. 그날 밤 승호는 꼬리가 길면  밟힌다면서 담대하게도 홍희를 끌고 창고 복도로 들어가서 그짓을 했다. (뭐 창고 복도에서 아짜아짜하게 도적질해 노는게 더 재미있다고? 더 쨍하게 자극적이라고? 픽!)   홍희는 생각하면 할수록 원통하고 승호가 얄미웠다. 그녀는 침실에서 이불을 푹 들쓰고 진종일 하염없이 눈물로 베개를 적시였다. (차라리 활 죽어버리면 모든 것이 끝날게 아닌가!)
118    대하소설 진달래 소야곡(6) 댓글:  조회:1531  추천:1  2017-12-27
                        10. 달밤의 추억 동녘하늘이 푸름히 밝아오면서 거무칙칙한 하늘을 파란 물감으로 칠하기 시작했다. 성호는 온 밤 잠을 이루지 못하고 창 밖에서 기승을 부리는 눈보라가 윙-윙 우는 소리를 들으면서 착잡한 생각에 잠겼다가 새벽녘에야 겨우 새우잠을 잤다. 그가 피뜩 눈을 떠보니 벌써 아침 해살이 창문에 새겨진 천태만상의 성에꽃무늬에 매달려 있었다. 그는 어제 저녁에 순희 결혼식에 만취하도록 마신데다 제대로 자지 못해 머리가 좀 뗑 해나는 감을 느꼈다. 어려서 사랑의 어섯눈이 뜨기 시작해서 그렇게 사랑했던 첫사랑 순희를 철주에게 보내고나니 아쉬웠다. 하지만 홀가분하기도 했다. 리상과 전도를 위해서는 그렇게 해야만 했다고 생각됐다. (이래서 사랑은 요술쟁이요, 요귀라고 하는구나. 난 지금 사랑을 사닥다리로 쓰려고 하지 않는가.) 그는 스스로도 어이없어 피씩 웃으면서 도리머리를 홰홰 저었다. 성호는 너무 어린 나이에 사랑에 어섯눈이 뜨기 시작하면서 녀자애들을 너무 많이 좋아한 것 같았다. 진짜 사내 감정은 산꼭대기에 부어놓은 물과도 같아 산발을 타고 여러 갈래로 쫙 흩어져 흐르는 것인가. 그는 얼굴이 좀 반반한 처녀애만 보면 이것 저것 툭툭 건드리기는 잘 건드렸지만 순희처럼 남에게 빼앗기거나 넘겨주는 일이 많았다. 은영을 하늘땅이 울게 사랑했지만 성사하지 못하고 승호한테 빼앗기지 않았는가! 성호는 JH시에 있는 둘째누나 춘자네 집으로 놀러 갔다가 또 매형 홍수의  외조카벌 되는 영화를 보자마자 첫눈에 반해 좋아했다. 그때 춘자는 소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성호가 연변에서 기차를 타고 간 날 춘자는 탄광마을에서 교원학습반에 참가하고 집에 없었다. 외조카 정춘과 정일을 보고 싶은데 둘 다 소학교에 가고 없었다. 정춘과 정일은 부모의 말을 아주 잘 들었다. 특히 아버지를 똑 떼닮은 정춘은 새물새물 웃을 때면 얼마나 귀여운지 몰랐다. 어머니가 길에서 마차나 소수레가 오면 걷지 말고 길옆에 서있으라고 했다고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500메터 밖에서 오는 마차를 보고 미리 길옆에 서 있었다. 어머니가 멀다고 일없다고 했지만 어머니 말한대로 한다면서 마차가 지나갈 때까지 길옆에 서서 기다렸다. 8살 밖에 안되는 정춘은 늦잠꾸러기였다. 그러나 체육위원을 맡은 그는 추운 겨울에  항상 제일 먼저 학교에 가서 난로불을 피웠다. 후꾼후꾼한 교실에 들어선 담임선생님과 학생들은 매우 감동됐다. 홍수가 술을 마시기 좋아하는 걸 아는 정춘과 정일은 서로 앞장서 현관에 나가 술을 병에 퍼담아가져다 드렸다. 성호는 빈집 앞에서 서성거리다가 집 열쇠를 가지러 누나를 찾아 소학교로 갔다. 그가 사무실에 들어서자 녀교원들 속에서는 모두 "우~와~ 잘 생겼어." “멋져!” 하고 환성이 터졌다. 그중 나이 어린 한 처녀교원은 새물새물 웃으면서 "김선생은 이런 미남동생을 뒀어요?" 하고 감탄했다. 춘자는 씨물 웃으면서 “영화야, 우리 동생한테 잘 해줘라.” 하고 씨물 웃었다. “그럼요. 친해도 괜찮지요?” “처녀총각들 일을 난 몰라.” 영화라는 그 처녀교원은 알고보니 정춘의 담임교원이였다. 그녀는 난로 우에 놓인 물주전자를 기울여  컵에 김이 몰몰 나는 물을 따라 성호한테 주면서 호들갑을 떨었다. 성호가 영화의 하얀 손에서 컵을 받아쥐면서 피뜩 보니 어글어글한 눈이 정신 나게 빛나고 있지 않겠는가. 무더운 여름 어느날 밤, 눈썹 같은 초생달이 동녘하늘에서 고기비늘 구름 속에서 자맥질을 하고 있었다. 성호는 누나의 집과 길을 하나 사이 둔 영화네 집 주위를 맴돌면서 영화를 만나고 싶은 충동을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 아무 일도 없이 찾아가기 어색해 머뭇거렸다. 이때 영화네 집문이 벌컥 열리면서 열대여섯살 돼보이는 영화 남동생 송철이 뛰여나왔다. 어데 가 싸우다가 맞았는지 송철의 눈덕에 붕대와 반창고가 붙어 있었다. 그래도 송철은 친척이라고 정춘과 정일이 애들한테 맞기만 하면 역성을 들어주군 했다. “너 또 공부를 하지 않겠어? 어디로 가!?” 뒤에서 영화가 비자루를 쥐고 쫓아나왔다. 그녀는 희미한 달빛 속에 서 있는 성호를 발견하고 “어머!” 하고 주춤 멈춰 서면서 비자루를 뒤에 감췄다. “언제 왔어요? 어서 들어와요.” 성호는 뒤덜미를 긁적이면서 “아니, 아니요. 집식구들이 보면 무슨 일인가 하겠소.” 라고 했다. “아니, 아무도 없어요. 어서 들어와요.” 성호는 “아니, 아니.” 하면서도 영화를 따라 처마가 낮은 초가집에 들어갔다. 촉수 낮은 전등을 켜놓아 그런지 집 안은 퍽 어두웠다. 집 안에는 진짜 서발 막대를 휘둘러도 거칠 것이 하나도 없을 지경이였다. 손바닥만한 남북쪽 높은 한족구들 우에 궤짝 하나씩 덩그러니 놓여 있을뿐 그렇다 할만한 가정기물도 보이지 않았다. 벽에는 옷이 몇견지 걸려 있었다. “부모들이 보면 뭐라 하지 않을가요?” “우메- 뭐 도둑질이라도 했나요? 왜 그리 겁나 해요?” 영화는 바닥에서 서성거리는 성호를 보고 구들을 가리키면서 “어쩌다  왔는데요. 앉아요.”라고 하면서 닦은 해바라기를 사발에 담아 가져왔다. “자요. 우리 오누이뿐이래요. 부모도 없어요.” “그럼 부모는 어디에 일하러 갔소?” 순간 영화는 얼굴색이 어두워지더니 어글어글한 눈에 침울한 기색이 피여올랐다. “부모는 우리 오누이를 두고 모두 일찍 돌아갔어요. 그런데 저 종수는 공부를 통 하기 싫어해요. 쩍하면 싸움질만 해요.” “오- 미안하오. 아픈 상처를 다쳐놓아서.” 영화는 돌아서서 손등으로 눈물을 쓱 닦더니 돌아서면서 억지로 웃음을 지어보였다. “괜찮아요.” 그녀는 성호 옆에 앉으면서 “연변 말씨는 어쩜 그렇게 듣기 재미있어요?” 하고 화제를 돌리며 어글어글한 눈으로 마주 보았다. (정말 예쁘구나.) 성호는 부지중 “영화 말씨가 생긴 것처럼 곱소.” 하고 불쑥 말했다. “호호호. 그래요? 이거 기장밥 한 대야 해드려야 하잖겠어요?” 성호와 영화가 한창 재미나게 얘기할 때 송철이 달려들어왔다. “인사해라. 정춘의 외삼촌이야.” “그래요? 안녕하세요?” 송철은 허리를 굽히면서 인사하고 주먹으로 누런 콧물을 씩 닦았다. “얘, 종이로 콧물 닦아.” 영화는 필기장을 쭉 찢어 송철의 콧물을 닦아주었다. 송철은 나이에 비해 꽤나 훤칠하고 힘꼴을 쓰게 생겼다. 그는 성호를 뒤돌아보면서 “기실 우린 사돈이죠. 정춘의 아빠는 저의 이종륙촌 오빠거든요.”라고 했다. 그 말에 송철은 “아재네 처남이면 우리캉은 친척이겠네요.” 하고 성호를 보며 씨물씨물 웃었다. “그래.” 영화는 성호를 돌아보면서 “얘는 어려서부터 부모 없이 자라서 친척이라면 좋아해요.”라고 했다. 영화는 대야에 빨래를 담아 이면서 “송철아, 숙제 해. 잉?”라고 했다. 송철은 마지못해 머리를 끄덕였다. 영화는 성호를 보고 “집 안이 무더워서 바깥에 나가자요.”라고 했다. 성호는 영화를 따라 바깥으로 나갔다. 눈썹달이 고기비늘 구름 속에서 나와 헤염치고 있었다. 성호는 빨래대야를 인 영화를 따라어디라 없이 걸어갔다. 마을 뒤로 좀 가니 달빛을 실은 희읍스름한 개울이 나졌다. 영화는 빨래대야를 내리려고 머리 우에 손이 올라갔다. 성호는 다급히 다가가 빨래대야를 받아 강가에 내려놓았다. 저도 몰래 영화의 손을 잡았다. 어쩐지 그 손은 그렇게 차고 처녀의 손답지 않게 터덜터덜한 감이 들었다. “고마워요.” 영화는 얼른 손을 빼더니 강가에 쪼그리고 앉았다. 그녀는 빨래를 강물에 훨훨 헹구어 넓적한 빨래돌 우에 올려놓고 방치로 투닥투닥 두드려대기 시작했다. 성호는 영화 옆에 있는 넓적한 돌에 앉아 영화가 빨래하는 걸 지켜보았다. 어디에선가 뻐꾸기가 뻐꾹뻐꾹 울어대 밤의 정적을 더해주었다. 강물은 달빛과 무더위를 싣고 출렁출렁 흘러가고 있었다. 밤의 정적과 함께 무거운 침묵도 흘러갔다. 한참 후 성호는 “영화, 올해 나이가 어떻게 됐소?” 하고 물었다. “처녀 나이 물어 뭘 하는데요?” 영화는 방치질을 멈추고 옆에 앉은 성호를 피뜩 보더니 빨래를 물에 활활 헹구었다. “글쎄, 괜찮지요?” “오빠부터 말해요.” “21세.” “호호호, 오빠구먼요.” “얼마기에?” “기어이 알아야겠어요?” “말하오.” 영화는 나직이 “소녀 올해 19세 밖에 안돼요.” 하고 말하고는 방치로 빨래를 탕탕 쳤다. “일찌기 학교에 갔나 보오.” “집형편이 어려워서 대학시험장에 가보지도 못하고 고중을 졸업하자마자 마을학교 민영교원으로 들어갔어요.” “오~ 그랬구먼.” 성호는 한숨을 후~ 내쉬였다. 그는 첫눈에 정이 든 영화가 점차 불쌍해 저도 몰래 동정심이 스르르 생기는 감을 어쩔 수  없었다. “민영교원이기에 농민이래요. 오빠 같은 대학생들이 부러워요.” 성호는 부지중 “아직 늦지 않았소. 대학시험을 치면 되지.” 하고 불쑥 말했다. 영화는 빨래를 훌훌 헹구어 대야에 담으면서 “대학시험이 그리 쉬워요? 제가  대학 가면 누가 학비를 대고 송철을 먹여 살린대요?” 하고 한숨을 호- 내쉬였다. 성호는 아무런 도움조차 줄 수 없어 계면쩍고 한스러웠다. 사람의 땀내를 맡은 모기들이 어둠 속에서 앵앵 엄습해왔다. 성호는 자꾸 손으로 종아리와 목을 짝짝 쳐댔다. “모기 물어서 안 되겠어요.” 영화는 씻자고 내놓았던 옷을 하나 가져다 성호의 종아리에 감싸주었다. 모기는 앵앵- 계속 엄습해왔다. 옆에서 성호가 저도 몰래 자꾸 손으로 목이고 얼굴이고 쳐댔다. “안 되겠어요. 돌아 가자요. 모기도 물지 정춘의 아빠랑 오빠를 찾겠어요.” 영화는 빨래를 대야에 담았다. “아니, 괜찮소. 다 큰 동생 범에게 물릴가봐 찾겠소?” 성호의 말에 영화는 빨래대야를 이려고 엉거주춤 일어났다. “그래도 좋을 거 같잖아요. 밤중에 처녀총각이 빨래터에 나란히 앉아 있는 걸 보면 뭐라겠어요?” 성호는 별수 없이 황급히 일어나 빨래대야를 들어 영화의 머리에 얹어 주었다… 성호가 상념에 빠졌을 때 정지에서 갓난 경남의 울음소리가 자지러지게 들렸다. 미닫이가 쭉 열리더니 엄마가 웃방에 들어왔다. “얘, 철주랑 농민인데도 결혼까지 했는데. 넌 제 짝이 없니?” 성호는 손시늉으로 미닫이를 닫으라고 했다. 영옥은 미닫이를 사르르 닫고 누워있는 성호의 옆에 와 앉았다. “얘, 자꾸 이걸가 저걸가 하지 말고 마음에 드는 새애기 있으면 하날 꽉 잡아 데리고 오려무나.” “알았소, 알아.” “그래. 우리 아들 얼마나 잘나고 총명하다고. 남의 집 열 아들을 주고도 못 바꾸지. 철주 같은 건 백개를 주고도 못 바꾸지. 쯧쯧.” 정지에서 성숙은 “내 요리 작달막해도 이렇게 꺽다리신랑을 얻어서 떡돌 같은 아들까지 낳았는데. 우리 대학생오라비를 근심할 거 있소?”라고 하더니 갓난 애기 경남의 이마에 뽀뽀를 했다. “경남아, 옳지? 저 칠한 외삼촌이 꼭 영화배우를 데려올 거야. 응~” 성호는 정지에서 노는 막내누나 부부와 조카를 내려다보면서 씨무룩이 웃더니 잠자리에서 일어나 이부자리를 거두었다. 사실 어려서 성호는 계속 막내누나 성숙을 키 작다고 늘 “난쟁이”라고 놀리면서 “난쟁이신랑”을 얻어올 거라고 비양거리군 했다. 또 너무 깍쟁이질을 한다고 늘 “깍쟁이”라고 조롱했다. 그럴 때마다 성숙은 성이 날대로 나서 “난 꼭 키꺽다리 신랑을 얻을 거야. 네나 난쟁이각시를 얻지 말라.” 하고 반격하군 했다. 오누이간에 서로 한 말이 경종으로 돼서 성숙은 자기가 키 작아 가지고서도 혼사말이 들어오면 키 큰가부터 물으면서 키 작은 남자는 아예 맞선도 보지 않았다. 하여 끝내 키 1.75도 되는 꺽다리신랑 명선을 만난  것을 항상 흐뭇하게 생각했다. 성호는 고향 마을을 떠나 학교에 돌아오면서도 번개 같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올랐다. (순희를 철주에게 준 건 별로 아깝지 않아. 허나 은영마저 승호에게 빼앗길 수는 없어. 흥!) 성호는 어려서부터 처녀애들을 너무 많이 좋아한  것 같았다. 왕춘영이, 순희, 선화, 정희, 은영이… 이제 또 처녀애 몇을 사랑할지 모른다. 그래서 그럴가. 이번에 순희를 철주한테 빼앗겼을 때 전날까지도 쓸쓸했지만 밤을 자고나니 인차 마음이 정리돼가는 감을 느꼈다. 더구나 자기 리상을 실현하는데 짐으로 밖에 될 수 없다고 생각하자 어떻게 말하면 잘 된 일이라는 감까지 들었다. (내가 순희를 사랑하기나 했는가? 순희는 내 첫사랑이 아닌가? 사랑이란 참말로 알고도 모를 불여우야.) 성호는 학교에 돌아와 침실에 누워 창문으로 비껴드는 휘영청 밝은 달빛을 내다보면서 또다시 끝없는 추억의 바다에서 돛이 없는 배를 타고 정처 없이 떠다녔다.                                                                                                                     11. 결투        휘몰아치는 눈보라 속에 아물거리는 달밤이 오면 성호는 검은 구름 속에 숨어버리는 달을 쳐다보면서 은영을 어떻게 승호 손아귀에서 찾아오겠는가고 속궁리를 굴렸다. 간혹 맞은 편 침대에 와서 자는 승호를 보면 단매에 때려 눕히고 싶은 충동이  속에서 불끈거리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승호의 비쭉한 코와 개턱처럼 쳐든 조개턱만 보아도 눈에 불티가 탁탁 튀였다. 그런줄도 모르고 은영은 이전에 성호에게 늘 어째 승호가 성호와 비슷하게 생긴 점이 많다고 쌍둥이 아닌가고 호들갑을 떨기까지 했다. (개소릴 친다. 내 어찌 바람둥이를 닮아?) 성호는 은영마저 괘씸해나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승호와 최후결판을 내는 수 밖에 없는 것 같았다. (승호와 결투를 벌려 쳐눕혔다고 해도 승호가 은영에게서 떨어지려고 하겠는가. 한뼘은 더 크고 시내에서도 한다하는 싸움군과 결투를 벌려 승산도 없어. 관건은 승호에게 있는 거 아니야. 다 은영한테 달렸어. 은영이 승호한테서  떨어져 나한테 오면 모든게 다 풀릴 거야.) 기말이 코 앞에 닥쳐왔건만 성호는 련 며칠 책도 들지 않고 침실에 들어누워  어떻게 은영을 떼내겠는가 궁리만 하고 또 했다. 갑자기 성호는 벌떡 일어나더니 무릎을 탁 쳤다. “옳지! 그래. 바로 그거야!” 성호는 오른 주먹을 으스러지게 쥐여 승호의 빈 침대 기둥을 탕 치며 구두를 신고 바깥으로 나갔다. 그가 숙사 복도 층계를 텅텅 내려갈 때였다. 뜻밖에도 층계 아래 쪽에서 은영이 머리를 다소곳이 숙이고 올라오는 것이 아니겠는가. (잘 됐어. 제 발로 찾아오는구나.) 성호는 층계를 둘러보고 나서 “은영이, 좀 보기요.”라고 하며 앞을 막아섰다. “어머, 왜? 미안해요. 급한 일 있어서.” 은영은 성호를 피해 층계를 텅텅 올라갔다. 성호는 뒤따라 올라가면서 “또 그 바람둥이를 찾아가? 갠 침실에 없어.”라고 했다. 허나 은영은 곧이듣지도 않고 곧추 침실로 향했다. 그녀는 숙사 문을 줴당겨보았다. 문이 잠가진 것을 보고서야 되돌아섰다. “잠간만.” 성호는 급히 열쇠를 꺼내 문을 열고 은영을 잡아 마구 끌고 들어갔다. 그는 문까지 걸어버린 후 은영을 똑바로 마주보았다. “왜 이래요?” 은영은 깜짝 놀라 걀쭉한 얼굴에 새침한 표정을 지었다. 성호는 단도직입적으로 돌직구를 날렸다. “너 승호 어떤 사람인지 알기나 알고 따라다녀? 걔는 바람둥이야!” “승호는 학교에 오기 전에 벌써 약혼녀가 있었어. 걔 지하독서실에서 어쨌는지 아니? 홍희와도…” “됐다, 됐어. 그만해!” 은영은 놀라기는커녕 신경질적으로 화만 냈다. “너 아니? 승호 처녀애들을 몇이나 해쳤는지?” “그만해라도. 알면 이제 어쩌라는 거야?” 성호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저도 몰래 두 손으로 은영의 어깨를 붙잡고 마구 흔들었다. “너 다 알고 있었니? 정신 좀 차려라! 이제라도 절벽 앞에서 말머리를 돌려라! 뒤에는 내가 있지 않니? 엉?!” 은영은 대답 대신 뜨거운 눈물을 줄 끊어진 구슬처럼 줄줄 흘리며 성호의  가슴을 마구 떠밀어버렸다. 승호의 침대에 털썩 물앉아 어깨를 들먹이는 은영을 보자 성호는 모든 것을 알아차렸다. 은영이 불쌍했다. 아니, 승호에게 짓밟힌 약혼녀 경옥이, 홍희가 더욱 불쌍했다. 성호는 옆에 앉아 은영의 들먹이는 어깨에 왼손을 올려놓으면서 정색해 물었다. “혹시 너도 승호에게 당하지 않았니?” 은영은 갑자기 일어나 성호의 뺨을 찰싹 갈겼다. “걸 물어 뭘 해?! 더러운 자식!” 성호는 얼얼해나는 뺨을 매만지면서 오리무중에 빠졌다. “더러운 자식? 색마 승호를 용서해? 왜 진정으로 널 사랑하는 날 받아주지 않니? 참 이상해.” 은영은 눈물범벅이 된 한쌍의 포도눈알로 성호를 바라보면서 미친듯이  고함쳤다. “오빠를 증오해요. 한평생 증오할 원쑤예요.” “그래, 증오한단 말이지. 날 사랑하고 있구나. 날 속이고 널 속이지 말어라!” 은영은 피씩 코웃음쳤다. “진짜 미움깨만 살려고 그래?” “그래, 널 위해서라면 미움깨겠니? 칼산에 오르더라도 바른 말 할테야.” 성호는 은영을 와락 끌어안으며 열변을 토했다. “바람둥이한테서 떠나라. 나한테 오라!” 은영은 성호를 밀어내며 “흥!” 하고 콧방귀를 뀌였다. “개구리 학의 고기를 먹으려고 해?! 정말 지겹게 논다. 승호 허물을 하면 오빠한테 돌아올 거 같아? 착각하지 마!” “그래, 실컷 욕해라. 세상에서 널 사랑하고 아낄 사람은 그래도 나뿐이야. 언젠가는 알게 될 거야.” 은영은 눈물을 손등으로 닦더니 발딱 일어났다. “다신 승호 오빠 흉을 보지 말라. 자꾸 끼여들지도 말고 소문도 까딱 내지 마세요.이젠  미련도 버리세요.” 은영은 오른손으로 체육머리를 뒤로 쓸어넘기더니 전에 없이 외까풀눈을 매섭게 뜨고 쏘아보았다. “똑똑히 말해 줄게. 난 아무런 능력도 없는 낙제생을 따라 농촌의 시부모를 모시고 시형과 시누이 아홉이나 되는 복잡한 시집에서 살지 못해. 승호는 체육위원 겸 학교 학생회 체육부장이지. 학습성적도 오빠보다 우수해. 난 승호 같은 영웅과 살고 싶단 말이야. 황차 가정환경도 얼머나 훌륭한가요? 그러니까, 오빤 이젠 제발 성가시게 지 말아요.” 성호는 맥없이 침대에 물앉아 묵묵히 침실에서 나가는 은영의 가냘픈 뒤모습을 바라보며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였다. 쾅! 문이 닫혔다. 찬바람이 능구렁이처럼 묻어들어왔다. “농민의 아들, 그래, 난 농민 아들이야. 너희들은 세도가문의 대단한 새끼들이야.” 성호는 아직도 문벌장벽이 엄연히 존재한다는 것을 뼈저리게 실감했다. “승호 새끼를 어쩜 좋을가? 한각 분질러 놔야 알겠어?" 성호는 주먹으로 승호의 침대를 쾅 내리쳤다. 이때 문이 덜커덩 열렸다. 범이 자기 흉을 하면 온다고 승호가 들어오지 않겠는가. 그는 의아한 눈길로 성난 사자 같은 성호를 마주보며 침대에 털썩 들어앉았다. “무슨 일 있니? 우린 친구 아니야? 어려운 일 있으면 스스럼없이 말해라. 도와줄게.” 성호는 “흥!” 하고 코방귀 뀌며 랭소했다. 그는 쌀쌀한 눈길로 승호를 쏘아보았다. “경고하마. 은영을 다치지 말라!” “은영을 좋아하니?” “그래, 은영은 내 목숨과 같은 사랑이야!” “네깐 놈이 뭔데. 이래라! 저래라 해?” “뭐라고?” 성호는 와닥닥 일어나 승호에게 덮쳐가 목덜미를 거머잡았다. “내 입이 터지면 넌 퇴학, 아니, 감옥에 가야 할 색마야!” 승호는 능구렁이처럼 씨무룩이 웃었다. “이걸 놔라! 친구간에 뭐야?” “친구? 난  바람둥이친구 없어.” 승호는 진지한 표정을 짓고 고함치는 성호를 보고 능청을 부렸다. “계집애 하나 때문에 친구 의를 상하겠느냐? 만천하 사람들이 웃겠다. 네가 은영을 좋아하는 거 같은데. 물어봐라. 널 좋아하는가? 넌 짝사랑을 한 거야. 친구니까 충고한다. 널 사랑하지도 않는 은영을 작작 쫓아다녀라.” 승호는 멱살을 꽉 움켜쥔 성호의 손을 비틀어 빼고 침대에 앉으면서 뒤말을 이었다. “글쎄 은영이 널 사랑한다면 은영을 양보하겠어. 허나 은영은 나와 죽자 살자 한단 말이야. 알만하지?” 성호는 억이 막혀 말도 나가지 않았다. 승호는 풀이 죽은 성호를 보고 중얼거렸다. “성호야, 너 혹시 무슨 소문 들었니?” 성호는 승호를 쏘아보면서 “네놈새끼 무슨 짓을 한건 네가 제일 잘 알게  아니야?!” 하고 공을 차넘겼다. 능글맞은 승호는 중을 떠보려고 했다. “혹시 은영과 내 뭘 어쩌는 걸 보았니?” 성호는 승호를 쏘아볼뿐이였다. (개자식, 지하독서실에서 짓밟은 처녀애가 은영이냐?) 그때 승호가 대수롭잖게 지껄였다. “뭐 대단한 일이냐? 서로 사랑하는 사이에 인지상정이지.” 성호는 지하독서실에서 홍희와 그러는 거 못 본거 같으냐고 고함치려다 목구멍까지 터져나오는 말을 겨우 삼켜버렸다. 승호는 성호한테 다가와 어깨를 툭툭 치면서 지껄였다. “친구니까 충고하마. 은영을 포기해라.” “왜?” “넌 농부의 아들이니까.” “이 자식!” 성호는 승호의 멱살을 틀어쥐여 콱 밀쳤다. “이 새끼야! 농민 아들이라고 업신여기지 말라!” “타고난 팔자가 농부 아들인 거 어쩌겠니? 쇠나 방목하다 대학에 오기만 해도 대단한게지. 욕심이 너무 과하면 독이 돼 다친다, 다쳐.” “뭣이?!” 성호는 승호의 멱살을 놓고 조용히, 그러나 면도칼날 같이 섬뜩한 말을 토했다. “담이 있으면 나하고 결투 하자.” “흥! 결투?!” 승호는 세귀눈으로 성호를 쏘아보며 랭소하더니 대수롭잖게 물었다. “지금 나한테 도전하는 거냐?” “그래, 깨끗하게 결투로 결판내자.” “난 걸투 안 해.” 승호의 대답은 뜻밖이였다. 입귀에 조소를 흘리기까지 하는 걸 보고 성호는 모욕감을 느꼈다. “겁나냐?”  “계집애 땜에 친구를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아.” “누가 다칠지 몰라. 쓸데없는 소릴 싹싹 걷어치우고 한판 붙어보자.” 승호는 흥흥거리면서 코웃음쳤다. “너 력도도 하고 투탄도 멀리 한다만. 흥, 싸움은 달라.” 큰 소리도 땅땅 쳤다. “난 시내 깡패두목들도 쳐눕힌 호랑이야. 흥, 소궁둥이나 치던 촌놈이 언감 도전해?”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알아!” “좋다! 결투면 결투지. 한판 깨끗하게 승부를 갈라보자. 한각 부러져도 절대 후회하지 말라.” 승호는 흉악한 상통에 조소를 날리면서 성호의 도전을 거리낌 없이 받아들였다. “뭘 걸고 결투하겠느냐?” “은영을 걸고 결투하자! 네 지면 은영을 놔라.” “허허허. 그렇게 쉽지 않을 걸!” 승호는 앙천대소했다. “네가 지면 어쩌지?” 성호는 여지를 두지 않고 제꺽 대답해버렸다. “다신 은영한테 미련을 두지 않을게.” “아니야. 내 사생활을 까딱 소문내지 말고 무덤까지 가지고 가라.” 성호와 승호는 아무 말도 없이 숙사에서 나와 눈보라 치는 학교 뒤산으로 올라갔다. 승호는 무릎까지 풍풍 빠지는 눈덮인 야산을 둘러보면서 두덜거렸다. “이런데서 어떻게 결투 해?” 성호는 오른 주먹으로 왼손 바닥을 탁탁 쳤다. “우리 촌놈들은 싸움터를 가리잖아!” “눈보라 치는 야산이라. 뿌슈낀이 결투하던 장소와 비슷하구나. 오늘 여기가 네 무덤이 될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개소릴 작작 치고 덤벼라!” 승호는 목을 놀리더니 발로 눈을 풍 차던지면서 지껄였다. “시골 농부 새끼, 어디 내 주먹맛 봐라!” 그때 승호는 씽 번개같이 날아 들어오면서 승호의 면상을 주먹으로 퉁퉁 갈겼다. 성호는 몸을 옆으로 슬쩍 피했다. 허나 왼 주먹은 간신히 피했지만 오른 주먹을 미처 피하지 못했다. 성호는 얼굴을 한대 얻어맞고 비틀거렸다. 승호는 성호 잔등에서 랭소하며 몸을 홱 돌려 성호의 뒤통수에 헤딩을 딱 했다. 그 찰나 성호의 팔굽이 굴에서 나온 구렁이처럼 승호의 이마를 찔렀다. “앗!” 승호는 이마를 싸쥐고 몸을 날려 저만치 뛰여나갔다. “흥!” 성호는 코방귀를 뀌면서 터진 입귀의 피를 쓱 닦았다. 약이 오른 승호는 호랑이처럼 으르렁거리면서 덮쳐들었다. 승호가 비발처럼 주먹을 휘두를 때다. 성호가 허리를 굽히며 승호의 아래배를 탁 올리쳤다. 승호가 아래배를 부등켜안고 허리를 굽혔다. 성호는 무릎으로 승호의 숙인 면상을 올리걷어찼다. 승호는 어디서 그런 힘이 생겼는지 풀쩍 테 밖으로 뛰여나갔다. 용케도 성호의 무릎과 발길 공격을 피했다. 승호는 악이 날대로 났다. 이번엔 주먹을 휘두르며 날아들다가 몸을 키넘어 날리면서 양다리 질로 성호의 면상을 갈겼다. 성호는 주먹과 골만 잘 쓰는가 한 승호가 발길을 날리리라고 예측하지 못했다. 결과 발길에 채워 저만치 날려 나가 꺼꾸러졌다. 승호는 맹호가 양을 덮치듯이 몸을 날려 성호에게 덮쳤다. 어찌나 날래고 무섭게 용맹스러운지 딱 마치 독수리가 토끼를 덮치는 상 싶었다. 성호는 위기에 처했다. 그 찰나 성호는 반듯이 누운채 두다리를 굽혔다가 덮쳐드는 승호의 아래배를 탁 차서 머리 우로 넘겼다. 옆으로 굴러 벌떡 일어난 성호는 무송이 호랑이를 때려잡는 기세로 주먹을 쥐고 승호가 일어나기를 대기했다. “일어나라! 범도 죽은 양은 잡아먹지 않아!” “네 따위가 다 범이냐? 퉤!” 승호는 점점 악이 나 벌떡 일어나더니 눈덮인 높은 지세를 리용해 발길로 성호에게 눈을 탁 쳐놓았다. 성호가 눈에 튄 눈을 손으로 닦는 틈을 타 승호는 몸을 날리면서 성호를 량다리로 걷어찼다. 허나 성호가 고의로 빈틈을 주었을 줄이야! 성호는 기다렸다는듯이 자세를 낮추면서 팔꿈치로 허공 뜬 승호의 아래 배를 탁 올리쳤다. “앗!” 승호는 외마디 비명소리와 함께 눈구뎅이에 나가 떨어져 때굴때굴 굴렀다. “그만해!” 뜻밖에 한 처녀애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성호가 쓰러진 승호가 일어나기를 기다려 치려고 하다가 그쪽을 돌아보았다. 은영이 눈보라  속에 허우적허우적 뛰여오면서 고함쳤다. 그때 승호는 벌떡 일어나 은영에게 눈길을 파는 성호의 뒤통수를 주먹으로 쳤다. “억!” 성호는 비명소리와 함께 눈에 처박혔다. “농부새끼! 감히 덤벼?!” 승호는 씽- 몸을 날려 날아가면서 기여일어나려는 성호의 목을 겨누고 발길을 날렸다. 성호는 날아드는 발을 덥석 잡아 홱 내동댕이쳤다. 승호는 소나무에 처박혀 머리를 꽝 쪼았다. 순간 눈언저리에서 뻘건 피가 주르르 흘러 얼굴을 뒤덮었다. 하얀 눈 우에 수치스러운 피가 벌겋게 물들었다. “촌뜨기새끼, 죽여버리겠다!” 은영이 앞에서 망신당한 승호는 벌떡 일어나 갈범처럼 덤벼들었다. 성호는 련속 날아드는 승호의 주먹을 손으로 탁, 탁 쳐냈다.  “그만해요!” 은영이 두팔을 벌려 호랑이들처럼 펄펄 날뛰는 성호와 승호 사이에 막아서며  통곡쳤다. “왜 이래요? 네? 어째 내 죽는 걸 보고 싶은가요. 엉~ 엉~” 그제야 승호와 성호는 주먹을 내렸다. 승호는 터진 머리와 눈언저리를 눈을 쥐여닦고 성호는 입귀의 피를 눈을 쥐어 닦으면서 씩씩 거렸다. “싸우지 말고 아예 날 죽여 버리세요. 그럼 다 끝날게 아닌가요?” 승호는 은영의  앞에서 우쭐거리면서 빈정거렸다. “삐치지 말라! 내 이겼어. 이젠 성호가 약속을 지킬 거야. 아무리 농부의 아들이라고 해도 군자 협의야 지켜야지.” 성호는 눈을 쥐어 입귀의 피를 닦을뿐 묵묵부답이였다. 승호는 점점 떠들썩하게 고아댔다. “하루 강아지 호랑이 무서운줄 모른다고. 촌뜨기새끼, 감히 호랑이를 건드려? 시내 가서 물어봐라. 호랑이란 별명만 들어도 깡패들이 다 달아난다. 졌다고 해라. 그럼 내 봐줄게.” 성호는 승호를 쏘아보면서 “아직도 입만 살아 있구나. 이 자식아, 아녀자 앞에서 자존심을 작작 건드려라!” 하고 반격했다. 성호는 주먹을 으스러지게 쥐였다. (저 새끼를 놔뒀다간 이제도 얼마나 많은 처녀들이 짓밟힐지 몰라!) 허나 인차 주먹을 스르르 풀었다. 승호는 물러서지 않고 계속 빈정거렸다. “아무리 악을 써도 은영은 내 거야! 다 쑤어놓은 죽을 이제 와서 어쩌겠단 말이냐?” 성호는 은영을 똑바로 쏘아보았다. 삽시에 은영은 얼굴이 새파래나면서 승호를 쏘아보았다. “그만 해요. 원, 창피해서 어떻게 살겠니?” 은영은 돌아서서 얼굴을 싸쥐고 어깨를 들먹이였다. 허나 승호는 눈언저리에서 줄줄 흐른 피가 흘러 들어가는 입귀에 시누런 금이빨을 드러내면서 씨무룩이 웃었다. 성호는 은영의 가냘픈 뒤모습과 승호의 더러운 몰골을 번갈아보면서 무엇인가 짐작이 가는 데 있었다. 그때 승호는 머리를 숙이는 성호를 보고 또 지껄여댔다. “활딱 벗고 나와야 물러나겠니? 허허허.” 성호는 머리를 숙이고 머리를 툭 떨어뜨린 채 자리를 터벅터벅 간신히 떠났다. 비틀거리며 멀어져 가는 성호의 넓은 등뒤를 훔쳐보며 은영은 서럽게 울었다. 뒤이어 그는 자기 목수건으로 승호의 눈언저리에서 멈출줄 모르고 흘러나오는 피를 닦아주었다. 윙-윙- 휘몰아치는 눈보라 속에 성호의 뒤에서는 은영의 통곡소리에 반주하여 승호의 고함소리가 허연 눈덮인 소나무 숲  속에서 울려퍼졌다. “은영은 내 거야! 내 거! 허허허!” 화답이나 하는듯이 은영의 울음소리가 눈덮인 황야에서 서럽게 울려퍼졌다.                    
117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90) 댓글:  조회:1338  추천:5  2017-12-20
                    9. 추방        정규상 같은 유명한 교수, 의사를 보고 병을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은 사상교양에 결부한, 범보다 더 무서운 정치징벌이었다. 그것은 마치 푸르른 초원에서 풀을 먹지 못하고 달리지 못하게 천리마를 말뚝에 매 두는 것이오, 소 주둥이에 꾸러미를 채워 여물을 먹지 못하게 하는 격이 아니고 무엇인가?        의학학부 학부장 로기순 박사는 정규상이 어처구니 없이 무함과 릉욕을 당하는 것을 보고 항상 도리머리를 저으며 침묵으로 항거했다.        어느 하루 저녁 퇴근하기 전에 정규상이 복도를 청소할 때었다. “박 서기, 이러지 마세요. 누가 보면 큰 일 나겠습니다.” “떠들지 마오.” “서기가 어째 이럽니까? 이걸 놓으십시오.” 박영발 서기 사무실에서 여성의 애원소리가 간간히 들리었다. “입당하겠다면서 어째 정치민감성이 없소?” “…” “고분고분 말 들으면 입당시키구 내과 간호사장을 시킬게.” “저는 처녀예요. 이러면 어떻게 시집갑니까?” "우리 둘 밖에 모르는데. 어째 시집가지 못한다고 그러오?” “야, 이걸 놓으십시오.” “말 들어. 제꺽, 응?” “어쩜 사무실에서 이럽니까?” “잔말 말고 하자는대로 들이대라." "입당 못해두 이런 짓, 아니, 이러지 말라는데두!" "어째 정규상처럼 우파모자를 쓰구 투쟁맞겠니?” “아, 아, 집안 집 삼촌이라는 게. 이, 이게 뭐, 뭔가요?” “눈 딱 감고 조금만 참아라.” “이러지 마, 말라는데. 아이구, 아파 죽겠다. 씨!” "쉿!" 정규상은 복도를 두리번거리었다. 누구도 없었다. 다만 저쪽에 당직의사가 한창 환자서류철을 뒤적이고 있을 뿐이었다. 정규상은 살금살금 사무실에 다가가 귀를 기울였다. 밀봉된 문이 꼭 닫힌 사무실 안에서 후닥닥 후닥닥 하는 소리와 여성의 비명인지 신음소리, 침대가 삐꺼덕삐꺼덕 하는 소리 귀청을 아프게 때렸다. (더러운 놈!) 정규상은 고의로 복도를 청소하는 척 하면서 걸레대로 사무실 문을 퉁퉁 쳐놓았다. 정규상이 걸레질을 하면서 세면실로 들어가 문을 살며시 열고 살펴볼 때다. 사무실 문이 살며시 열리더니 박영발 서기가 복도를 두리번거리는 것이었다. 정규상은 제꺽 세면실 문을 닫고 걸레를 물초롱 안에 넣고 휘휘 휘저으며 씻어댔다. 그러다가 다시 세면실 문을 살며시 열고 박영발의 사무실 쪽을 살폈다. 한참 후에 한 간호사가 머리를 쓰다듬으며 나오더니 사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종종 걸음을 쳐 세면실을 지나 간호사 실로 가는 것이었다. 그녀가 세면실을 지날 때 정규상은 자기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항상 박영발을 삼촌이라고 졸졸 따라다니며 아양을 떨던 박윤희가 아니겠는가! 정규상은 박윤희가 불쌍해 보지 못할 것을 본 것 같아 세면실 안 칸에 있는 화장실에 들어가 문을 닫아걸고 나오지 않았다. 한참 후 여성 화장실문이 열니는 소리가 나더니 잘칵 문을 잠그는 소리가 나고 뒤이어 흑흑 흐느껴 우는 소리가 들리었다. 박윤희의 흐느낌 소리 같았다. 한참 후 여성 변소 쪽에서 종이를 버스럭거리는 소리와 흐느낌소리가 들리었다. 정규상은 여성 화장실에서 나가는 여성이 누군가고 살펴보았다. 분명 박윤희였다. 박윤희가 나간 후 정규상이 여성 화장실을 청소하면서 살펴보니 파지 통에 빨간 피가 가득 묻은 위생지가 수두룩이 널려 있었다. 정규상은 피 묻은 위생지가 지저분하게 널린 쓰레기통을 청소해 버리면서 박영발에게 간음당한 박윤희가 불쌍해났다. 한참 후 박영발의 사무실의 불이 켜졌다가 꺼졌다. 이윽고 박영발이 어두운 사무실에서 나와 복도에 서서 여기 저기 살펴보는 것이었다. 드디어 어깨를 으쓱하더니 층층계 쪽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세면실에서 정규상이 문을 살며시 연채 살피다가 걸레를 들고 나올 때었다. 갑자기 뒤에서 나는 고함소리에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놈 우파분자, 아직도 퇴근하지 않고 뭘 기웃거려?!” 정규상이 돌아보니 떠나간 것 같던 박영발이 도끼눈이 돼 쏘아보는 것이었다. “아, 박서기, 이제야 퇴근하오?” “안되겠다. 네 놈은 투쟁을 덜 받았구나. 진짜 음흉한 놈이구나.” 정규상은 속으로 맞받아 욕했다. (적반하장이라더니 누가 할 소리를 누가 하니?) 박영발은 정규상을 잡아먹을 듯이 쏘아보며 이발을 부득부득 갈았다. “네 놈, 말을 함부로 해 고생을 하는 걸 알지? 주둥이를 잘 건사해라. 함부로 지껄였다간 감옥에 보낼줄 알아라. 알겠어?” 정규상은 자기 입을 막으려고 하는 개수작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어쩌는 수 없었다. “예, 알았습니다. 난 아무 것도 모릅니다.” “당신은 총명한 사람이란 걸 아오. 어떻게 해야 살아남을 수 있게 된다는 거 알리라 믿네.” 박영발은 경고 메시지를 보내고는 휑하니 자리를 떴다. 정규상은 심장박동이 급해지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그는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며 박영발이 떠나간 어둠침침한 복도와 사무실을 둘러보았다. 이튿날 아침이었다. 정규상이 한창 청소할 때다. 박영발이 다가왔다. “우파분자 정규상은 광명위생원으로 가서 개조해라.” “예?” 정규상은 자기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못 들었는가? 광명위생원으로 가라!” 광명위생원은 시내 한 가도 위생원이었다. 정규상이 위생원에 개조하러 내려갔을 때었다. 광명위생원에는 5십대의 김형내라는 중의와 약제사, 간호사 셋밖에 없었다. 김형내는 염소수염을 쓰다듬으면서 기 죽은 정규상을 아주 반갑게 맞았다. “에이유, 심장내과 전문가가 이런 누추한 가도위생원에 와서 어떻게 고생하겠소?” 정규상은 목구멍으로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사상개조를 잘 해얍지.”라고 한마디만 했다. 여성약제사는 형내의 둘째 며느리 박명자라고 불렀는데 약제사를 하는 한편 시아버지한테서 중의를 배우고 있었다. 그녀는 아주 성근한 여성이어서 아주 존중하는 눈길로 정규상을 바라보면서 “후에 저에게 서의를 많이 가르쳐 주세요.”라고 하며 반갑게 인사했다. 허나 정규상은 겸손하게 “개조분자에게서 뭘 배울 게 있겠습니까?” 하고 말했다. 명자는 웃으면서 “정교수는 우리 연변에서도 이름 높은 진단전문가에 심장내과 전문가인데요. 이 기회에 꼭 스승으로 모시고 심장내과 의료기술을 배워야겠어요.”라고 했다. 정규상은 한숨을 후 내쉬며 옆에 서 있는 간호사에게 눈길을 돌리며 먼저 눈인사를 건넸다. 허나 간호사 박영자는 정규상한테 멸시하는 눈총을 주며 등을 돌리는 것이었다. 지어 자기는 팔짱을 끼고 떡 버티고 서 있으면서도 아버지 벌 되는 정규상을 보고 훈계부터 했다. “개조하러 왔으면 청소랑 말끔히 해야지, 뭔가요?”       정규상은 속으로는 불쾌했지만 별수 없었다. 꾹 참으면서 청소를 하지 않으면 안 됐다.       형내는 너무 한 것 같아 영자를 책망했다.       “예절 없이, 참, 그거 뭐요?” “에이유, 김 의사는 우파분자를 두둔하는가요?” “조선 사람들은 예로부터 어른을 존중하는 예절을 지켜왔소. 그게 뭐요?” 형내의 질책에 영자는 혀를 홀랑 내밀었다. 그후부터 그녀는 형내 앞에서 더는 정규상과 각박하게 놀지 못했다. 허나 항상 눈살이 꼿꼿해 정규상을 핼끔 쳐다보며 눈을 흘기군 했다.          어느 날 오후에 출근한 박영자는 형내를 찾아와 호들갑을 떨었다. “김 선생님, 언닌 입당하고 내과 간호사장이 됐대요. 언니가 얼마나 부러운지 모르겠어요.”        형내는 염소수염을 슬슬 쓸면서 “축하한다고 언니에게 전하오.”라고 하고는 환자를 계속 보았다.       그는 환자의 손목에서 진맥하던 손을 떼더니 그때까지 종알거리는 영자에게 눈길을 돌리며 물었다. “언니 이름이 뭐라고 했던가?” 영자는 외까풀 눈을 곱게 상글거리었다. “박윤희입니다. 어째 대상자라도 소개해주렵니까? 우리 언니 저 보다 퍽 예뻐요. 여자들이란 예쁜 것도 밑천인가 봐요. 언니는 예쁜 덕에 큰 병원에 갔잖아요.  미모 덕에 또 입당도 빨리 했지요.” (박윤희? 아니, 그럼 영발에게 짓밟힌 윤희가 하루 아침 사이에 입당하고 간호사장이 됐단 말인가?) 정규상은 자기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형내가 눈을 내리깔고 처방을 떼면서 영자에게 물었다. “어떻게 돼 그리 빨리 입당했다오. 뭐 예쁘다고 입당시켰겠소? 당조직에서 미녀만 입당시키겠소? 그럴 수는 없소. 반 우파 투쟁이 심한데 그런 말 작작 하오.” 그제야 영자는 혀를 홀랑 내밀더니 의사 사무실에서 나가며 종알거렸다. “에이고, 내 팔자도 기구하지. 한뉘 쥐구멍만한 위생원에서 낑낑거리다나면 언제 언니처럼 입당하겠니?” 정규상은 영자가 나가자 슬며시 형내에게 물었다. “저 영자 동무의 언니는 어느 병원 내과 간호사장이랍니까?” 그러자 형내는 정규상을 흘끔 건너다 보더니 대수롭잖게 대답했다. “YB병원 내과 간호사장이라오.” “예, 그렇군요.” 형내는 이상한 듯이 정규상을 쳐다보았다. “오- 정의사 그 병원에서 왔으니깐. 아는 사람이겠소.”  “알다뿐이겠습니까. 예. 한과에 있었습니다.” “오, 정말 그렇지. 항상 저 여동생을 찾아와 웃고 떠들고 했는데 요즘 보이지 않소. 전번에 피뜩 큰 길에서 보니까 아주 수척해졌더구먼. 그 곱던 얼굴이 반쪽이 되지 않았겠소.” 정규상은 속으로 짚이는 데가 있었다. 분명 박영발이 윤희의 정조를 짓밟은 대신 돌격입당시켜 간호사장까지 시킨 것이었다. 그런 방법으로 자기 죄악의 흔적을 가리려는 것이었다. (개자식, 내가 입당신청서를 쓴지 십년이 되도록 입당시키지 않더니 풋내기를 입당시키고 그런 개짓을 하는구나. 개똥을 청보자기로 싸놓을 수 있을 거 같니? 처녀 전도를 짓밟고 더러운 야욕을 채우고서도 천벌받지 않을 거 같니?) 허나 정규상은 누구하고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정규상이 빗자루를 쥐고 청소하려고 하니 형내는 말렸다. “청소는 영자나 시키고 환자를 볼 준비나 하오. 의사가 병을 보지 않고 그런 일까지 하겠소?” 허나 정규상은 빗자루를 쥐고 사무실 안을 썩썩 쓸었다. 어느 날, 웬 곱살하게 생긴 각시가 애기를 업고 정규상을 찾아왔다. “정 의사 바쁘지 않습니까?” “오, 옥선이 어떻게 돼 왔소?” 김옥선은 애기를 잔등에서 풀어내려 안으면서 “얘가 아파서 왔습니다. 좀 봐주십시오.”라고 하며 기침을 콜록콜록 하는 애를 앞으로 내밀었다. 정규상은 형내의 너부죽한 얼굴을 마주 바라보면서 “김 의사는 정말 용한 중의요. 김 의사에게 보이오.”라고 했다. 사실 광명위생원에는 중약이나 있었지 애들 감기에 맞을 베니실린마저 없었다. 서약이 없는 중의위생원에서 정규상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던 것이다. 그러자 옥선은 애기를 안고 맞은쪽에 다가갔다. “우리 마을에서 살던 각시오.” “안녕하십니까? 선생님, 얘를 살려 주십시오. 자꾸 기침을 콜록콜록 하면서 열이 자꾸 오릅니다.” 형내는 애 손을 잡아 사무 상우에 놓더니 맥을 보기 시작했다. 이윽고 형내는 옥선을 마주 보며 “폐가 좋지 못하구먼. 치료를 바짝 하지 않으면 위험하오.”라고 했다. 뒤이어 형내는 처방을 떼면서 “혹시 집에 결핵병을 앓는 사람이 없소?” 하고 물었다. 옥선은 눈물을 흘리면서 “후남편의 본댁이 결핵병을 앓아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후남편도 전염됐는지 기침을 쿨룩쿨룩 합니다.”라고 했다. 형내는 짚이는 데 있어 처방을 쓱쓱 써서 약제사 며느리에게 주었다. 한참 후 박명자가 중약을 내다 옥선에게 주었다. 옥선은 눈물을 흘리면서 “고맙습니다.” 하고 인사하고 애를 업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분 수고했습니다. 얘가 살아나면 내 떡을 쳐 가지고 오겠습니다.”라고 인사했다. 옥선이 광명위생원을 나서는데 정규상이 따라 나와 그의 손에 돈 2원을 쥐어 주면서 “얘 병을 치료하는데 보태오.”라고 했다. “아니, 이렇게 큰돈을, 이러지 마십시오.” “받소.” 옥선이 받지 않으려고 하는 것을 정규상은 마구 밀어주고 나서 “그래, 재가를 가서 후남편과 잘 보내오?”라고 물었다. “예. 정의사 소개한대로 정말 마음이 좋고 듬직한 후남편을 만나서 마음고생이 없이 잘 보냅니다. 얘가 아파서 속이 타 그렇지요.” 옥선은 또 코마루가 시큼해나 손으로 눈물을 닦았다. “크게 근심하지 마오. 일없을 게요. 저 김 의사는 우리 시내에서 소문난 한의(중의)요.” 정규상의 말을 듣고 옥선은 얼굴에 조금 긴장을 푸는 기색이 피어올랐다. 광명위생원을 나와 점심때가 오래지 않은 것을 느낀 옥선은 애를 업고 여동생 옥숙이네 집으로 갈 가고 생각했다. 여동생 옥숙은 옥선보다 열 살이나 지하였다. 체격도 좋고 예뻐서 시내 운수공사 운전수 질을 하는 신랑을 만나 아주 재미나게 살고 있었다. 그녀의 신랑 리상철은 원래 부대를 갔다가 내몽골자치구에서 해방표 자동차를 몰았는데 이 시내로 들어왔던 것이다. 옥선은 애를 업고 가서 점심이나 먹고 갈까 생각하다가 인차 생각을 달리했다. “앓는 애를 업고 여 동생네 집으로 가지 마자. 혹시 폐병이 귀여운 조카 춘화한테 전염되면 어떻게 해?” 옥선은 앓는 애를 잔등에 업고 첩약을 들고 걸어서 모아산 고개 길에 들어섰다. 20전을 주면 버스를 타고 모아산을 넘어 집으로 가련만 정규상이 준 돈을 쓰기 아까웠던 것이다. 하긴 이전에는 물독을 사도 좋은 버스를 두고 물독을 이고 모아산을 넘고 가슴을 치는 해란강을 넘어 집으로 돌아간 일도 아주 많았다. 하여 애를 하나 달랑 업고 집으로 돌아가는 일은 식은 죽 먹기였다. 힘겹게 모아산 고개를 넘으면서 옥선은 자기 인생이 고달픈 모아산 고개 길과 같은 감이 들었다. 옥선은 원래 남편 조철호를 12년이나 기다렸다. 기실 조철호는 항미원조 전쟁 때 김성칠 련대장을 따라 무명고지 전투에 참가했다. 무명고지 절벽이 적들의 포격에 무너지는 바람에 조철호는 대적공세를 벌이던 아나운서 녀전사와 함께 무정한 바위돌에 깔려 장렬히 희생됐던 것이다. 시집 큰동서네 고방에서 베갯잇을 눈물로 적시면서 신랑을 기다리다가 혹시 구새 목에서 발자국 소리가 쿵쿵 들리면 신랑이 달빛을 밟으면서 문을 뚝 떼고 집으로 돌아 올 것만 같았다. 하여 문고리를 쥐고 바깥을 내다보다가 낯모를 나그네가 문 앞을 지나가군 했다. 발걸음 소리가 멀어져 가면 옥선은 문고리를 잡은 채 모래기둥이 무너지듯이 스르르 물앉곤 했다. 어떤 때에는 독수공방하면서 신랑이 1948년 가을 장춘을 해방한 후 집에 피뜩 들리었다가 간 후 보낸 편지와 조선전쟁 때 보낸 편지를 매만지면서 신랑을 그리고 또 기다렸다. 허나 평양이 폭격을 맞은 후 다시는 편지가 오지 않았다. 게다가 신랑이 남기고 간 유복자 외동아들마저 잃어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는지 모른다. 후에 옥선은 시부모와 말해 한 마을에 세간난 후 네 살짜리 막내 시동생을 업어 키우면서 신랑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기다리었다. 하여 새파란 나이에 옥선은 12년이나 신랑을 기다리며 허무한 세월을 보냈던 것이다. 한마을에서 살던 의사 정규상이 소개해 평란 촌에 있는 후남편 이종호를 만나 살게 되었던 것이다. 이종호에게는 본댁이 낳은 14살 난 딸 신자와 11살 난 아들 경수 그리고 일곱 살 밖에 안 되는 둘째딸 순자 해서 조롱조롱 애 셋이나 달려 있었다. 종호는 애 하나도 데리고 오지 않은 후처 옥선에게 미안해 애들 셋 가운데서 젖먹이 순자를 용정에 있는 사촌형네 집에 줬다. 그 사촌형 내외간은 슬하에 자식 하나 낳아 기르지 못했다. 사촌형은 일점혈육도 없는 허전함을 달랠 겸 사촌동생네 둘째딸을 두말없이 제꺽 받아들이었다. 순자가 용정 오촌큰아버지네 집으로 떠나가는 날 눈보라가 어찌하여 그렇게 불어쳤는지 모른다. 순자는 큰아버지 손에 잡혀 용정으로 떠나면서 아버지와 경수 오빠 그리고 신자 언니를 번갈아 보면서 눈물을 줄줄 흘리었다. 평란촌 마을 동구 밖을 거의 떠나 갈 때었다. 갑자기 순자가 몸을 돌려 “언니! 오빠!” 하고 고함치며 발을 동동 구르다가 큰아버지의 손을 홱 뿌리치고 이쪽으로 되 달려 왔다. “순자야!” 경수도 네 살 지하인 여동생을 와락 끌어안고 엉엉 울었다. “아버지, 내 여동생을 남에게 주지 마시오. 예?” 경수가 아버지를 쳐다보는데 종호는 “이 놈 자식, 여동생을 시내에서 살게 보내는데 뭘 알아서 그러니?” 하고 욕했다. 종호가 흘끔 옥선의 눈치를 살폈다. 옥선은 머리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며칠 후 옥선은 어미 없는 선실의 애들이 더 없이 불쌍해 났다. 그녀는 후남편 종호를 보고 “애들이 불쌍해 어디 남의 집에 보내겠어요? 데려 오세요.”라고 말을 꺼냈다. 그러자 종호는 속으로는 놀랍고도 기뻤지만 동의할 수 없었다. “무슨 소리를 하오? 남도 아니고 사촌형한테 보냈는데. 시내에서 살면 좀 좋아서?” “후 어미도 어미입니다. 어찌 자기 자식을 남에게 맡기겠습니까? 데려 옵시다.” “뭘 먹고 살겠소? 3년 재해 세월에 입이 하나라도 불어나면 입에 거미줄을 치겠소.” 그러나 옥선은 기어이 데려오려고 고집했다. “그 애를 데려오지 않으면 후 어미가 무슨 면목으로 이 마을에서 살겠습니까? 남들은 후 어미가 애들을 쫓아냈는가 하겠습니다. 멀건 죽물을 먹으면서라도 한 집에서 키우면서 삽시다.” 종호는 옥선의 두 손을 잡고 “고맙소. 낸들 제 새끼 불쌍하지 않겠소?”라고 하더니 옥선을 와락 끌어안았다. 그날로 종호와 옥선은 용정에 가서 순자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물론 사촌형은 순자를 내놓기 아까와 했지만 별 수 없었다. 자기 딸을 데려가는 데야. 순자는 너무 좋아 아버지와 후 어머니 손을 쥐고 퐁퐁 외발 뜀을 하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경수와 신자는 여동생 순자를 와락 끌어안고 왕왕 대성통곡 쳤다. 그 정경을 보고 마음이 비단 같은 옥선은 애들이 불쌍해 뜨거운 눈물을 흘리었다. 선실의 애들을 셋이나 키우는 것도 쉽지 않은데 설상가상으로 재혼해 낳은 첫애마저 글쎄 기침을 콜로콜록 하면서 앓아 야단났다. 속이 타다 못해 재 가루로 될 지경이었다. 옥선이 어린애를 업고 모아산 고개 아리랑 고개를 터벅터벅 넘으니 재가해온 평란촌 마을이 환히 내려다 보였다. (얘가 일 없어야겠는데.) 옥선은 광명위생원에 있는 유명한 의사 정규상을 생각하자 애를 구할 신심이 생겨 한 숨을 후 내쉬더니 애를 춰 업고 모아산 고개 길을 내려갔다.                                   10. 3년 재해 비극       어느 토요일 날, 눈보라 치는 바깥을 내다보다가 정규상은 전번에 아버지가 편찮다고 약을 지어달라고 찾아왔던 상순이 눈앞에 선히 떠올랐다. 그는 퇴근하면서 형내에게 “아버지 친구가 농촌에 있는데 몹시 편찮은 거 같습디다. 내일 피뜩 가서 보고 오겠습니다.”라고 했다. 형내는 역서장을 뒤번져보더니 “쉬는 날인데 가보오.” 하고 청가를 주었다. 그는 주사실 쪽을 피뜩 살피더니 영자가 벌써 퇴근한 것을 보고 시름 놓고 물었다. “아버지 친구는 어느 마을에 있소?” 정규상은 문 밖을 나가려다가 주춤 멈춰 섰다. “여기서 한 40여리 떨어진 함흥 촌이라던가 하는 시골마을에 있습니다.” 정규상은 기억을 더듬다가 무릎을 탁 쳤다. “아차, 아닙니다. 함흥 촌에서 살다가 조개덕으로 이사해 내려왔다고 합디다.” 형내는 문께로 가다가 돌아섰다. “아버지 친구 이름이 뭐요?” “김기준입니다. 그 집 아들은 김상순입니다.” “아니, 그 분이 편찮다고 하오?” “예. 어떻게 아는 사입니까?” 형내는 도로 사무상 앞으로 가더니 “그 분은 작은 할아버지 되는 분이오.” 라고 했다. “예? 정말 세상은 넓고도 좁구먼.” "어떻게 내 작은할아버지를 아오?" "사실 세교지간이죠. 저의 아버지와 상순의 아버진 제정 때 룡정 장마당에서 면목을 익히게 됐답니다." 정규상한테서 이왕지사를 쭉 듣고 나서 형내는 머리를 끄덕였다. “어떻게 편찮다오?” 정규상은 상순이 약을 지으러 왔던 때 일을 죽 이야기하고 나서 뒷말을 이었다. “제대로 잡숫지 못해 기맥을 쓰지 못하는 거 같습디다. 전번에 상순을 보고 인삼 같은 거나 사다가 대접시키라고 했습니다.”  형내는 정규상을 보고 “정 선생, 내일 함께 가 보기요.”라고 제의했다. 정규상은 기뻐하면서도 얼굴에는 근심의 그림자가 스쳐지나갔다. “우파분자와 동행해 괜찮겠습니까?” “별 소리를 다 하오. 환자를 보러 가는데 어떻단 말이오. 후과는 내 책임질게.” 그때 형내 둘째며느리 박명자는 시아버지를 흘끔 곁눈질하면서 근심하는 표정을 드러냈다. 이튿날 아침, 형내는 돼지고기 몇 근에 기맥을 추는 약 몇 첩을 져 들고 떠났다. 정규상은 좁쌀주머니를 둘러메고 그를 따라 나섰다. 오동지섣달이라 매섭게 추웠다. 대지는 눈보라가 윙-윙- 휘몰아쳐 얼어붙은 은세계를 방불케 했다. 소서구 어구지에 있는 조개덕에 이르러 그들은 마을 사람들과 물어 제일 남쪽에 자리 잡은 상순의 집으로 들어갔다. 상순은 한창 아버지를 부축하고 숟가락으로 죽물을 입에 떠 넣어주다가 그들이 온 것을 보고 놀랍고도 반가워했다. 시아버지가 눈 대변을 닦아내던 명옥은 반갑게 인사하고는 부엌으로 내려가 가마부터 부시었다. 그녀는 큰시조카가 가져온 돼지고기를 장물에 얹고 부엌에 내려가 아궁이에 불을 땠다. 형내는 자기보다 거의 열 살이나 지하인 상순을 항상 깎듯이 삼촌 대접을 했다. 명옥은 돼지고기를 좀 베내 둘째 은숙을 보고 큰집 시조카 경학네 집에 가져가라면서 점심을 잡수러 오라고 이르라고 했다. “예.” 은숙은 돼지고기를 받아들고 한집 건너 뒤에 늙은 비술나무 아래 경학 오라버니 집으로 달려갔다. 형내와 정규상이 한창 앓는 기준을 진찰했다. 세월은 기준만 스치고 지나갔는지 이마에는 밭고랑 같은 주름살이 패이고 머리에는 시허연 서리가 내리었다. 기준은 그때까지도 푹 꺼져 들어간 눈으로 형내와 규상이 그리고 금방 들어선 경학까지 다 알아보았다. 상순은 형내와 규상을 한쪽으로 불러 물었다. “아버지 병세 어떻소?” 형내는 규상을 바라보며 “큰 병이 없소. 굶어서 기맥을 쓰지 못하는 거 같소.”라고 했다. 규상도 머리를 끄덕이었다. 상순은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야, 내 얼마나 무능하면 아버지를 굶기기까지 했겠소? 흉년세월에 어쩜 이런 일이 다 있소?” 명옥은 죽으라는 소리 내놓고 상순의 말을 고분고분 듣고 한마디 말대꾸를 하지 못했다. 뜻밖에 명옥이 한마디 툭 내쏘았다. “생산대에서 쌀을 나눠주면 저 오보호 마반산집 할머니한테 다 가져다주는게 어쩌겠소.” “뭐라고? 난 공산당원인데 어떻게 힘든 할머니를 돌보지 않겠소?! 우리 마을 애들 치고 어느 애가 마반산집 할머니 조산사로 받아내지 않았소? 덕돌도 그 할머니 받아내지 않았고 뭐요?" 상순은 아내에게 허연 눈알을 부라렸다. "됐소, 돼." 형내는  상순을 말리더니 물었다. “작은할아버지 올해 연세가 어떻게 되오?” “일흔 둘이오.” “오, 우리 집안은 모두 장수한 내력이오. 작은 할아버지는 문제없소.” 정규상은 환자가 듣는 자리에서 하는 위로의 말이라는 것을 알았다. 귀신같이 진단해 소문 높은 그는 푹 꺼진 눈 확에서 맥없이 한곳만 바라보는 기준의 눈과 바쁘게 몰아쉬는 숨소리를 듣고서도 큰아버지가 오래 앉기 힘들다는 것을 알고도 남음이 있었다. 이때 기준이 머리를 규상한테 힘겹게 돌리며 띄염띄염 물었다. “아, 아버지 조선에서 무, 무사히 보내오?” “아버지는 십년 전에 미제가 평양을 폭격할 때 세상떴습니다.” “오, 그랬구나. 참 좋은 친, 친군데.” 기준은 맥없이 눈을 스르르 감았다. 그날 저녁에 기적이 일어났다. 기준은 놀랍게도 자리에서 일어나 돼지고기 국에 이밥 한 사발이나 말아 다 잡수었다. 그리고는 맥없이 드러누웠다. 상순은 아버지를 근심했다. 허나 형내는 상순을 위로했다. "작은삼촌, 근심하지 마오. 작은할아버지는 음식에 취해 누웠소. 좀 쉬고 나면 괜찮을 거요. 약재에 인삼을 좀 넣었는데 잘 닳여서 대접하오. 그러면 일어날 게요.”  형내와 규상은 점심 숟가락을 놓기 바쁘게 기준을 깨울세라 조용히 일어나 귀로에 올랐다. 정규상은 광명위생원에 사상개조를 하러 왔기에 더욱 이튿날 출근에 주의해야 했던 것이다. 상순은 두 손으로 그들의 손을 꽉 잡고 인사했다. “약과 돼지고기 가져다줘 감사하오.” “규상 동생은 정치몽둥이에 맞으면서 고생하면서도 이렇게 먼 시골에까지 와서 고맙소.” 규상은 우파란 말만 나와도 머리 끼가 곤두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상순의 손만 잡고 흔들기만 했다. 상순은 형내와 규상의 뒷모습이 휘몰아치는 눈보라 속에 자그마한 흑점으로 돼 아물거릴 때까지 바라보았다. 순간 그들의 미거가 고마워 코마루가 시큼해났다. 형내의 말대로 이튿날 기준은 맥없이 일어나 앉았다. 상순과 명옥은 얼마나 기뻤는지 몰랐다. 연 며칠 상순과 명옥이 풍로에 형내가 지어다 준 첩약을 약탕기에 닳여 대접하고 규상이 가져온 입쌀로 정성껏 이밥을 따로 지어 드렸다. 기준은 약과 밥을 잡숫고 기적적으로 바깥으로 지팽이를 짚고 나가 대변을 보는가 하면 젖먹이 손자 덕돌을 안고 흥얼거리기까지 했다. 그러자 상순과 명옥의 얼굴에는 반가운 미소가 피기 시작했다. 손녀들도 할아버지 일어나 앉자 좋아서 어찌 할줄 몰라 깡충깡충 뛰였다. 그 애들은 다시는 애를 먹이지 않고 할아버지 심부름을 아주 잘했다. 덕돌은 할어버지 무릎에 앉아 흔들거리면서 재롱을 피웠다. 어느 날, 윙윙 휘몰아치던 눈보라가 누그러들자 기준은 상순을 불러 이런 말을 꺼냈다. “얘야, 소서구로 가보자.” “예? 이렇게 추운 겨울에 소서구로 가서 뭘 하겠습니까?” 상순은 창문으로 눈 덮인 바깥을 내다보면서 세귀눈이 휘동그래졌다. 기준은 벽을 짚고 겨우 일어나 바깥으로 나가려고 했다. 상순과 명옥이 양쪽에서 아버지를 부축해 바깥으로 나갔다. (풍설이 윙윙 이는데 왜 이러실까?) 기준은 괭이를 들고 길을 떠나려고 했다. 상순은 바삐 아버지 손에서 괭이를 받아 들면서 “뭘 하려고 이러십니까?” 하고 물었다. “가 보면 알 거야.” “수레에 앉아 갑시다.” 상순은 바삐 생산대 우사에 가서 소수레를 메워 몰고 왔다. 명옥은 황급히 집에 달려 들어가 이불을 내다 수레 밑바닥에 펴고 시아버지를 모셨다. 뒤이어 탄자를 수레에 앉은 시아버지 몸에 둘러 주었다. “고맙소. 며느리.” 명옥은 “추운데 일찍이 돌아오십시오.”라고 당부했다. 기준은 머리를 끄덕였다. 상순이 아버지를 모신 수레를 몰고 소서구로 삐꺼덕삐꺼덕 올라갔다. 눈보라가 하얀 백룡처럼 소서구 골 안을 핥아 대고 있었다. 드문드문 길이 눈 둔덕에 막혀 상순이 삽으로 마구 파헤쳐버리면서 길을 낸 후 계속 올라갔다. 기준은 살던 소서구 옛 집터를 둘러보더니 수레를 세우라고 했다. “상순아, 여긴 조선 고향에서 쪽박 차고 살 길을 찾아 간도로 들어와 살던 옛 집터지?” 상순은 그제야 아버지가 왜 소서구로 온 것을 알 것 같았다. 아버지는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더니 괭이를 쥐고 눈 가슴을 헤치며 천지꽃산 쪽으로 부축을 받으며 올라갔다. 한참 걷던 기준은 천지꽃산 기슭의 밭에 물앉는 것이었다. “아버지, 추운데 일어나십시오.” 허나 기준은 “놔라. 내 좀 여기서 편히 쉬고 싶구나.” 라고 하며 눈을 스르르 감고 앉아 까딱하지 않았다. 상순은 아버지를 부축해 일으켰다. 그런데 기준은 천천히 일어나자마자 상순의 손에서 삽을 받아 쥐어 눈을 파헤치는 것이었다. 한참 파니 검누런 흙바닥이 드러났다. 기준은 괭이를 놓고 무릎을 꿇고 물앉더니 검누런 흙바닥을 두 손으로 매만지더니 눈물을 줄줄 흘렸다. “얘, 이 땅, 이 땅은 우리 조손 3대가 피땀을 흘려 개간한 밭이 아니더냐? 이 아까운 밭을 버리고 가기 아깝구나.” “아버지!” 상순도 눈물을 흘리며 아버지를 부축해 일으켰다. 기준은 두 손에 언 흙부스러기를 담아 든 채 상순의 부축을 받아 천천히 일어났다. 뒤이어 손에 든 흙을 코에 대고 냄새를 흡흡 맡아댔다. “겨울이 돼서 흙의 향기 덜 나는구나. 허나 나는 마음 속으로 이 흙의 냄새가 맛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말을 마치자 그는 흙을 마구 입에 넣고 씹어 삼키었다. 그같이 이 땅을 사랑하고 아끼는 참 농사꾼이었다. “아, 이제야 우리 피땀이 푹 스며든 이 땅의 맛을 제대로 보았구나.” 기준은 흙을 씹으면서 몸을 돌리더니 상순을 진지하게 바라보며 간절히 부탁했다. “상순아, 정치인들이 어떻게 세상을 만들든지 간에 우린 농사꾼이야. 농사꾼의 양심은 밭을 묵여선 안 된다. 농사도 잘 모르는 건달들의 지시만 듣지 말라. 이 아까운 밭을 잘 다뤄 사원들이 굶지 말게 해라. 새 해에는 보릿고개도 넘기 힘든데 꼭 명심해라. 이 밭은 우리가 어떻게 일군 거냐? 우리 조손 3대가 뱀에게 물리고 괭이에 발등을 찍히면서 일군 밭이 아니냐? 지주 장학산의 눈칫밥을 먹으면서도 한 괭이 한 괭이 파서 일군 피밭이야!” 상순은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흐느껴 울며 정중하게 말씀을 드렸다. “예, 아버지, 제가 사원들을 잘 이끌지 못해 미안합니다. 이제부터 저는 진리를 견지하면서 허풍치기들의 말을 절대 듣지 않겠습니다. 농사를 잘 지어 사원들을 배불리 먹고 살게 하겠습니다.” 그제야 기준은 생강같이 바짝 마른 손으로 상순의 어깨를 다독여주었다. “일어나라. 내 죽으면 이 자리에 묻혔으면 좋겠다. 난 여기 누워서 우리 일군 밭에서 잘 자라는 곡식을 보고 싶구나. 허나 손바닥만 한 땅도 아깝구나. 밭에 묻지 말고 저쪽 계수동 쪽의 황무지에 묻어주면 족하다. 거기 누워서도 서쪽에 있는 이 밭을 볼 수 있으니까.” “아버지!” 아버지는 자기가 피땀으로 일군 밭에 묻히기도 아까와 하는 것이 아닌가! 상순은 속으로 피눈물을 흘리면서 수레에 아버지를 모시고 귀로에 올랐다. 소서구 골안은 그들을 환송이나 하는 듯이 눈보라들이 환호성을 울리면서 뒤따라 달려왔다. 정규상이 가져온 쌀로 죽을 쑤어 며칠 아버지를 대접하고 나니 쌀이 또 떨어졌다. 하긴 열 근이 좀 넘는 쌀을 9명 식솔이 죽을 쑤어 며칠 먹겠는가! 겨울이 돼서 푸성귀도 없고 정말 살기 각골했다. 명옥은 쌀독을 빡빡 긁다가 웃새집에 달려갔다. 항상 바쁜 일이 있으면 웃새집에 달려가면 큰집 시조부모로부터 동서들까지 항상 도와주군 했다. 그리하여 명옥은 큰집을 아주 자기 본가집처럼 믿고 살았다. 명옥이 앓는 시아버님께 죽물이라도 대접하게 쌀을 뀌어 달라고 하자 둘째동서와 후시할머니는 두 말없이 좁쌀을 한주머니 내주었다. “에이고, 효성스러운 며느리구나.” 오히려 시할머니는 손비 명옥을 기특하게 생각하며 혀를 끌끌 찼다. 명옥은 웃새집에서 얻어온 좁쌀로 지은 고들고들한 조밥사발을 시아버지 밥상에 올렸다. 기준은 아주 맛있게 조밥 한 사발을 굽 내고 자리에 드러누웠다. “야, 밥을 먹으니 살 것 같구나.” 이 한마디가 아버지가 남긴 마지막 말씀일 줄은 상순과 상우, 명옥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3년 재해를 입어 쌀 고생을 해 3년 동안이나 제대로 잡숫지 못해 앓던 기준은 끝내 동지섣달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생전에 그렇게 사랑하던 자손들을 한 구들이나 남겨두고 너무나도 총망히 세상을 떠났다. 그해 기준의 연세는 겨우 72세 밖에 안됐다. 자식을 앞세운 병완은 조개덕의 상순이네 집에 와서 하늘을 멍해 쳐다보면서 땅을 치며 탄식했다. “내가 오래 살아서 보지 못할 일을 다 보는구나. 내가 먼저 죽어야 하는데 주책없이 너무 오래 사는구나. 우리 고향을 떠나 간도에 와서 황무지를 개간해 배불리 먹고 살자고 그렇게 애를 썼구먼. 하늘도 무심하지. 황소같이 힘도 센 내 둘째아들마저 굶어 죽게 만들다니?” “아버지!” 상우는 굶어서 운신하기 힘들면서도 달려 와서 대성통곡 쳤다. “맏아들인 내가 아버지를 모시지 못한 불효를 용서해줍소. 아버지~, 아버지~” 상순은 아버지를 붙안고 더욱 서럽게 울었다. “내가 더 잘 모시자고 모셔왔건만 따뜻한 밥도 온전히 대접하지 못해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같습니다. 아버지- 아버지! 어엉, 어엉,” 두 며느리와 순자랑 순애랑 애들도 모두들 서럽게 엉엉 울었다. 덕돌은 무슨 영문인지 몰랐지만 아빠와 엄마, 누나네가 서럽게 울자 덩달아 엉엉 울어댔다. 최경인과 어금도 영월구에서 맏아들 근덕과 맏손자 일웅을 데리고 왔다. 최경인은 영월구에서 교편을 잡게 됐다. 그리하여 아버지가 돌아간 후 진수해로부터 차조구로 이사해갔던 것이다. 월금도 광석으로부터 맏아들 해진을 데리고 달려 왔다. 금옥도 남편 최학섭과 칠군이랑 인자랑 데리고 와서 서럽게 울었다. 그들은 아버지가 앓는다고 하자 몇 번이고 쌀 주머니와 돈을 들고 찾아와서 병문안을 하고 돌아갔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자 효성을 다하지 못한 것 같아 서럽게 대성통곡을 쳤다. 그 밸을 끊는 것 같은 통곡소리는 밤이 가고 새날이 밝을 때까지도 끊지 않았다. 상우와 상순은 없는 살림살이에도 누이들의 돈까지 모아 아버지 기준을 관작을 짜서 계수동으로 올라가는 산마루에 어머니와 함께 나란히 모셨다. 그들은 아버지와 어머니를 합장하지는 않았다. 상순은 아버지의 쓸쓸한 무덤 앞에서 절을 꾸벅꾸벅 올리면서 죄송한 마음을 칼로 한 오리 한 오리 어이는 듯이 아팠다. (3년 흉년 세월에 아들로 생겨서 부모를 제대로 대접하지 못한 불효를 어찌 하리오? 부모에게 효성을 하려고 영월구 공안국 국장을 다 버리고 두 번째 고향인 함흥 촌으로 돌아왔건만 부모께 제대로 효성도 하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함흥 촌과 조개덕 백성들의 쌀독은 텅텅 비었고 오래지 않아 가마에 거미줄이 칠 지경입니다. 한개 대대 사원들의 쌀독을 책임진 당 지부 서기로서 백성들이 굶어서 일 밭에서 척척 쓰러지는 비참한 정경을 더는 눈 뜨고 볼 수 없습니다. 형님도 항상 굶어 눈 확이 푹 꺼져 보기도 무섭게 됐습니다. 몇 십 년 동안 할아버지와 함께 혁명을 한 결과가 고작 이렇단 말씀입니까?) 그때로부터 상순은 과묵한 사람으로 돼 늘 고민에 잠겼다. 아버지를 갓 여읜 상주로서 항상 생산대대 회의실에서 회의를 해도 벽에 기대 앉아 대머리를 숙인 채 눈을 감고 숱한 문제를 사고하고 고민했다. 그는 무슨 회의를 하든 항상 입에 빗장을 지르고 묵묵히 앉아 있었다. 말수가 적은 그는 회의 때마다 몇 시간이고 지어 며칠이고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지어 술도 마시지 않았다. 그것은 백열화된 정치폭풍 속에서 무슨 말을 하겠는가. 혹시 술을 마시면 취해 세치 혀끝을 잘 못 놀려 우파 모자를 쓸 수도 있지 않는가. 또 어지러운 길목에 춘실과 같은 음흉한 녀자들이 함정을 파고 기다리고 있는 형편에서 남녀관계와 같은 다른 실수를 할 수도 있지 않는가.        칠칠흑야와 같은 세월에 아무리 노력해도 어두운 하늘에서 총총한 별같이 반짝이는 생활의 한 쪼깍이라도 숨겨 둘 수 없었던 것이다. 언제 어디서 밤중에 내민 홍두깨와 같은 몽둥이에, 명목 모를 몽둥이에 얻어맞아 쓰저질지 모를 어지러운 세월이 아닌가.   
116    대하소설 진달래 소야곡(5) 댓글:  조회:1201  추천:1  2017-12-11
                  8. 꺽다리와 난쟁이 성호는 마음 같아서는 승호의 더러운 몰골을 만천하에 밝혀놓고 싶었다. 하지만 승호를 해치기는 싶지 않았다. 또 홍희한테 너무 큰 충격을 줄가봐 그만두었다. 성호는 충동을 가까스로 억누르며 부랴부랴 집으로 향했다. 농민의 자식이라 호주머니를 이리저리 다 들춰보아도 동전 몇잎 밖에 없었다. 단돈 30전만 있으면 금의환향하는 신사처럼 좋은 뻐스에 앉아 20리 떨어진 천수해까지 가고 거기서 한 18리만 걸으면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단돈 30전도 없어 맨 주먹을 불끈 쥐고 달리면서 풍설이 이는 귀향길에 올랐다. (돈이 없는데 신체단련도 하고 좀 좋아.) 성호는 아Q처럼 스스로 좋게 위안하면서 행인이 없는 구간에서는 닫다가도 행인이 나타나면 걸으면서 길을 다그쳤다. 천수해에 이르러 시장기가 났다. 그는 호주머니를 들춰 빡빡 긁어모은 돈 15전을 들고 식품상점 문을 밀고 들어가 닭똥과자 반근을 샀다. 그는 길에 나서자 닭똥과자를 쥐여 입에 넣고 우두둑우두둑 씹으며 시장기를 말리면서 집으로 달려갔다. 정이 들대로 든 막내누나가 해산했는데 성호는 손에 쥔 것이 없어 아무 것도 들고 가지 못하는 자기가 너무나도 안쓰러웠다. 사실 성호는 막내누나와 성질은 서로 잘 맞지 않았지만 함께 자라다나니 정이 아주 깊었다. 막내누나 성숙은 키가 1메터 50좌우 밖에 안되는데다 성질이 좀 팩하고 뭐나 하나면 하나, 둘이면 둘, 딱딱 따져가면서 사는 "깍쟁이"였다. 허나 어찌나 총명한지 성호가 자랄 때 작은 가정선생님이나 다름없었고 인생의 도리도 많이 일깨워주었다. 성호는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날에도 여섯 누나 가운데서 막내누나의 은정 그리고 과거사에 추억의 돛배를 저어갔다. 그는 작달막한 막내누나 성숙이 키가 훤칠한 명선 같은 꺽다리에게 시집갈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둘째매형 경만의 큰매형이 성숙한테 한 마을에 있는 명선을 소개했다. 어떻게 보면 짝이 기울었다. 명선의 부모는 키 큰 며느리를 삼자고 첫날 한복이고 뭐고 장래 며느리의 옷감은 다 제일 키 큰 녀성의걸로 재여 마련해두었던  것이다. 헌데 사돈보기때 명선이 데리고 온 성숙을 보고 도리머리를 홰홰 돌릴 지경이였다. 명선도 작달막한 성숙을 데리고 마을이고 시내고 다닐 때면 손을 쥐고 나란히 걷기는커녕 항상 따로 걸었다. 키가 너무 유표하게 차나서 함께 걷기 창피해서였다. 더구나 시누이들은 올케 체격이 마음에 들지 않아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나중에는 오빠를 보고 그만두라고 권고했다. 하긴 명선은 큰녀동생이부모의 허락도 없이 한동네 식지가 끊어진 자기 친구와 좋아한다고 죽여버리겠다고 온 동네를 쫓아다녔다고 한다. 단 손가락 하나가 사고로 끊어졌다고 온 동네가 떠나갈 듯이 야단쳤던 것이다. 그런 오빠가 글쎄 자기보다 거의 한자나 더 작은 처녀를 데리고 왔으니 말이다. 시누이들은 입귀를 비쭉거리면서 작달막한 올케를 흘겨보았다. 결혼식날에 성호는 상빈으로 막내누나가 시집가는 경박호 부근 막내 매형의 마을에 가보았다. 그가 바깥에서 서성거리면서 볼라니 시누이들은 마을 사람들 속에 서서 올케를 여겨보더니 상을 찡그리면서 돌아서서 흉을 보았다. "에이고, 작달막한 올케를 삼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어." "글쎄 말이야. 그럴 줄 알았더라면 아까운 천표 없애면서 옷감을 큰 걸 사지나 않았을 걸 그랬어. 쯧쯧쯧." 남이 흉을 봐도 모르겠다. 시누이들은 형님의 흉을 보다가 상빈으로 온 성호를 보고 혀를 홀랑 내밀면서 뒤로 물러섰다. "어쩜 조렇게 작달막한 올케한테 저렇게 칠칠한 남동생 있어?" 성호는 그런 사돈처녀들이 미워 욱 치미는 밸 같으면 한대 갈겨주고 싶었다. 허나 막내누나와 매형을 봐서 용케도 참고 술을 취토록 마시고 왝왝 토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성숙을 지내보면서 어찌나 똑똑하고 참돌처럼 꽁꽁 여물고 농사나 살림살이나 예산있게 잘했는지 시누이 셋은 모두 혀를 끌끌 찰 지경이였다. 성숙은 또 효성이 지극해서 시집 큰아버지 앞으로 양아들로 들어간 남편과 함께 큰집 시부모를 효성을 다해 모시였다. 그러나 친시부모들은 자기들한테 효성을 하지 않는다고 쩍하면 트집을 잡고 심술을 부릴가 했다. 게다가 첫 애를 글쎄 현병원에 가서 낳다가 의료일군들이 산대에서 애를 떨어뜨려 그만 잃고 말았다. 그때 애를 잃었다고 성질이 괴벽한 시아버지는 쌍욕을 퍼지르면서 맏며느리를 욕했다. 심지어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며느리를 삼았기에 손자를 보기도 전에 잃었다고 투정을 부렸다. 애를 잃은 어머니 심정은 오죽했으랴. 그런데 시아버지는 성숙의 아픈 상처에 소금을 뿌렸다. 성숙은 시부모를 넷이나 모셔야 했기에 여간 힘들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한 마을에서 사는 시누이 셋이 가세해 흉을 보는 판에 정말 시집살이가 쉽지 않았다. 그런데 둘째며느리를 삼아봐야 맏며느리 무던한 것을 안다는 말이 맞았다. 둘째며느리는 키는 성숙과는 달리 체격은 멀쑥하게 생겼지만 어찌나 욕심이 과하고 자기 것만 자기 것이라고 어찌나 깍쟁이질을 하는지 시부모는 둘째며느리에게서 밥 한숟가락도 얻어먹기 힘들었다. 그제야 시부모는 “둘째며느리를 삼아봐야 맏며느리 무던한 걸 안다더니, 참.”라고  하면서 뒤늦게야 맏며느리한테 마음을 좀 돌리려고 했다. 허나 가슴에 못이 박힌 성숙은 시부모와 시누이를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녀성들이란 워낙 마음을 한번 꼭 닫으면 열기 힘들었고 앵돌아서면 돌려세우기  힘들었다. (첫 애를 잃고 두번째 애를 봤으니 누난 얼마나 기뻐할가?) 성호는 막내누나 못지 않게 기뻐 어깨춤을 덩실덩실 출 지경으로 걸음도 경쾌해졌다. 한 3시간 급행진해서야 집에 도착했다. 막내매형 명선은 부엌에서 불을 때다가 엉거주춤 일어났다. "매형, 뭘 보았소?" 성호의 말에 명선은 싱글벙글 웃으면서 "아들을 보았소."라고 대답했다. "축하하오. 누나 제 노릇을 했소." 성호는 이젠 막내누나가 아들을 보았으니 시집에서도 할 말이 있고 허리를 펴고 살 수  있게 돼 기뻤던 것이다. 그는 구들에 누워 있는 막내누나와 귀여운 갓난 조카의 발가우리한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이름을 뭐라고 지었소?" 성숙은 애기에게 젖을 먹이면서 "매형과 물어보렴."라고 했다. 명선은 시무룩이 웃으면서 "남자애를 낳은 걸 경축한다는 의미로 경남이라고 짓지 뭐." 하고 나직이 말했다. "경남이, 참 좋은 이름이요." 성호는 외조카를 안아보고 싶었지만 바깥에서 금방 들어와 몸이 차가워 그만두었다. 명선은 부엌에 들어앉아 그 큰 팔간집이 후끈후끈하게 석탄을 자꾸 퍼넣으면서 불을 땠다. 성호는 아직 장가도 들지 못한 총각이기에 모성애가 뭔지 잘 모르고 있었다. 첫애를 잃고 두번째애로 아들을 낳은 성숙의 심정이야 얼마나 기쁘겠는가. 성숙은 이젠 아들을 낳았기에 시부모 앞에 떳떳이 나설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성호는 막내누나를 보고 물었다. “어째 이모네 집에 있으면서 애를 낳을게지. 이모는 병원의 의사지. 얼마나 편리하오. 이런 시골에 왔다가 또 첫애처럼 일이라도 생겼더라면 어쩌오?” 성숙은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말도 말라. 난 그래도 엄마 집이 좋다. 엄마가 조산사가 돼서 경남을 받아냈다.” 명선은 부엌에서 아궁이에 석탄을 다 떠넣고 허리를 펴면서 말했다. “눈치 보여서 이모네 집에 어디 있겠소.” “건 무슨 말이요?” 명선은 계속 말했다. “이모가 뭐라는지 아오? 옛날에 우리 집에 본가집 손님들이 어찌나 많이 찾아왔는지 우리 시어머니 이랬소. ‘앞문으로 금방 사돈이 갔는데 뒤문으로 또 다른 사돈이 들어오오.’ 이러지 않겠소. 그 말이 무슨 뜻이요? 우리 갔다고 귀찮아서 하는 말이지. 이모부는 걸레를 쥐고 다니면서 내 구들을 밟은 자리를 싹싺 닦는단 말이요. 이모부 쌀쌀한 표정만 봐도 어디 하루라도 더 있겠습데?” “그만하라니깐.” 성숙은 신랑을 말렸다. “그래도 이모네 신세에 병원에서 산전검사를 하고 보름이나 숱한 식구들이 들어 있지 않았소?” 영옥도 한마디 했다. “녀동생이 어디 쫓는 걸 떠나왔소? 우리 스스로 떠나왔지. 저래서 옛날부터 고생을 죽게 한 사람 허물이 난다는 말이 있소.” 그제야 이모의 허물소리 끝났다. 성숙은 눈보라가 윙윙 휘몰아치는 엄둥설한에 천수해로부터 태평거촌에까지 무릎까지 풍풍 빠지는 18리 눈길을 만삭이 된 배를 부둥켜안고 걸어왔다고 한다. 한 10분에 한번씩 아파나는 산전통증으로 해 아래 모진 배를 부둥켜 안고 길가의 나무가지를 붙잡고 기대서서 이를 옥물고 아픔을 참아야 했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무릎까지 빠지는 눈길을 한 걸음, 한 걸음 걸었다. 너무 아파 입술을 깨물고 눈물을 흘리면서도 길에서 애를 낳을가봐 빨리 걸음을 옮기느라고 잔등에 식은 땀을 줄줄  흘리면서 애썼다. “23년 전에 나도 당장 낳을 성호를 배 속에 넣고 천수해에 가서 옥수수쌀을 사 이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날 저녁에 성호를 낳았지 뭐야. 어미 이를 악물고 걸어온 그 길로 어쩜 막내딸이 또 만삭이 된 애를 품고 걸어와서 그날로 애를 낳는단 말이냐? 어미 고생을 네가 또 이어할줄 누가 알았겠느냐?” 성숙은 바로 엄마가 옥수수쌀을 이고 만삭이 된 배를 부둥켜안고 힘들게 걷던 그 길로 그것도 무릎까지 펑펑 빠지는 눈길을 걸어 본가에 와서 경남을 낳았던 것이다. 성호는 힘겹게 자기를 낳은 엄마와 경남을 낳은 막내누나로 해 마음이 아팠다. 길에서 마구 양수가 터져서 하마트면 눈길에서 애를 낳을번했다고 한다. 다행히 엄마와 명선이 누나를 부축해 집으로 와서 세시간도 지나지 않아 경남을 무사히 낳았다고 한다. “에이고, 그래도 우리 경남이 길에서 나오지 않고 엄마 집에 와서 나와줘서 고맙다.” 성숙은 경남의 발가우리한 얼굴을 매만지다가 뽀뽀까지 해주었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가난한 집에서 자라서 시집가서도 평소에 뭐나 많이 아껴 먹고 아껴 썼다. 사실 성숙의 시집 식구들은 전라도에서 들어온 후대였다. 그들은 늘 함경도 사람들을 “함경도 도둑놈들”이라고 욕했으며 며느리 성숙이 좀 뭐나 아끼는 것 같아 함경도 도둑놈들의 후대여서 어쩌고저쩌고 하지 않으면 “함경도 깍쟁이”라고 했다. 성숙은 시집 식구들이 빗대고 욕할 때면 속으로 “전라도 깍쟁이”라고 맞받아치면서  “검정개 돼지 흉을 한다.”고 두덜거렸다. 원래 상진은 딸을 줄 때면 특별히 랭정히 고려한 후 대답하군 했다. 둘째딸 춘자를 숱한 대학생들이 따라다녔지만 춘자가 딱 마음에 들어 하는 홍수를 데려오자 이것저것 물어보고서야 대답했었다. 셋째딸 은숙의 약혼 때는 한 마을의 경만이 아버지 없이 자란데다가 성질이 더럽다고 딸을 고생시킬가봐 인차 승낙하지 않았다. 경만은 시원히 “딸을 주겠다.”고 대답하지 않는 가시아버지가 야속했다. 술을 마시면 쩍 하면 가시아버지와 “내야 애비 없이 자라 덜 된 놈인게 무슨.” 라고 하면서 걸고들어 주정을 부리군 했다. 넷째딸 봉금의 혼약은 대학을 졸업한 둘째 딸과 사위가 소개한 사위감인데다 송준은  중등학교를 졸업한데다 말수가 적고 마음이 착해보여서 대답했다. 다섯째딸 은자의 신랑감은 뒤집에서 소개한 혼처였는데 아래마을 허씨네 맏아들  학철이였다. 학철은 키는 작달막한데다가 어쩐지 말소리가 모기소리 만해 사내 같지 않은 것이 흠이였다. 하지만 인사성이 아주 밝았다. 영옥이 하도 인물보다 마음씨 착한게 좋다고 해서 혼사가 겨우 성사됐다. 여섯째딸 성숙의 신랑감을 처음 보자마자 상진은 인물체격이 남자답게 훤칠한 명선을 일등사위감이라면서 대답했던 것이다. 사실 명선은 훤칠한 체격값을 해 힘꼴을 쓰는데다 농사일에 미립이 텄고 손재간이 이만저만이 아니였다. 그는 목수재간이 있는데다 야장도 잘해 집을 짓고 탈곡기를 만들어 동네방네 재간둥이로 소문났다. 그런데 명선의 조상들이 전라도 출신이라는 것을 뒤늦게나마 알게 되자 상진은 지어 혼사를 그만 둘가고 하기까지 했다. 영옥은 막내딸의 일이 근심돼 사돈보기를 한후 신랑을 따라 시집마을에 갔다온 딸한테 집이 비였을 때 조용히 물어보았다. “신랑이 손을 줴주더니?” “엄만 별 걸 다 묻습둥?” “글쎄 대답이나 해라.” “줴줍데.” “그래? 안아주데?” “음~” 성숙은 부끄러워 목 안으로 기여드는 목소리로 가늘게 외마디로 대답하면서 머리를 끄덕였다. “집에서 신랑하구 잤니?” “아니, 시누이들과 함께 잤소. 엄만 별 걸 다 묻소.” 성숙은 왼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바깥으로 나가려고 했다. 영옥은 엉거주춤 일어나 딸의 손을 잡았다. “얘, 신랑이 널 고와하는지 알자고 그래.” “고와하오. 발해왕터에 가서 련애했습꾸마. 날 꼭 끌어안고 키는 작아도 똑똑해보인다면서 사랑한다고 합더구마.” 영옥은 한숨을 후~ 내쉬었다. “그럼 됐다. 아버지와 엄마를 봐라. 짝이 기우니까 틀렸더라. 너 애비 공안국장이느라고 날 못생겼다고 사랑하지 않고 동네 녀편네들 뒤꽁무니를 쫓아다니면서  나를 얼마나 못살게 굴었는지 아니? 난 네 신랑감이 키도 구척이지 짝이 기운다고 말릴가 했어. 너 애비처럼 각시를 못살게 굴가봐 근심돼.” 성숙은 물끄러미 어머니를 들여다보다가 겨우 입을 뗐다. “근심하지 맙소. 명선은 날 진짜 좋아합구마.” “그럼 얼마나 좋겠느냐?” 기실 성숙은 신랑감이 도문에서 자기와 함께 걷지 않고 자꾸 길 건너쪽에서 따로 걷는 것을 눈치챘다. 분명 자기가 키 작다고 함께 걷기를 싫어한다는 것을 짐작했다. 그후 영옥은 남편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사돈보기도 하고 성숙이 시집 마을까지 갔다 왔는데 놔두오. 전라도면 어떻고 사람에 달렸지. 굳은 땅에 물이 고인다고 깍쟁이시집에 가면 더 잘 살 수도 있소.” 상순은 마지못해 막내딸을 명선에게 준 거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듣던 말과는 달리 명선은 부지런하고 마음씨 순박하고 착하기로 한량없었다. 이때 명선은 화로에 자기가 잡아 말리어온 장어를 빠지직빠지직 구워 올려왔다. 상진과 성호는 명선과 함께 술상에 마주 앉아 술잔을 나누었다. 술상에는 명선이 고향에서 가져다 화로불에 빠지직빠지직 구운 장어와 소고기가 올라 군침이 돌게 했다. 온 집 안에는 기쁨의 금물결이 출렁거렸다. 이전에 성호가 대학을 다닐 때 여름방학에 놀러 가면 성숙은 가마니를 짜서 판  돈으로 새 옷을 사 입혔다. “우리 대학생 막내오라비가 옷도 멋지게 입고 다녀야지. 옷이라도 헐게 입으면 처녀들이 오라비한테 시집오려고 하겠니?” 성호가 집으로 돌아올 때는 꼭 돈을 손에 쥐여주면서 학교 가서 배고플 때 사 먹고 싶은 걸 사 먹으라고 했다. 어느 누나나 다 성호한테는 그랬다. 성호는 누나들의 그 은정이 눈물겹게 고마웠다. 명선은 자기 집에 온 성호를 데리고 자전거를 타고 경박호 구경을 시켰다. 처음 거울같이 맑은 경박호를 바라보는 순간 성호는 흑룡강성에 이같이 아름다운 호수가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더욱이 용암이 굳어버린 암석낭떠러지에 눈사태가 무너지는듯 쏟아지는 폭포수와 유구한 력사가 누워 있는 발해왕국터를 돌아보면서 감탄을 련발했다. 산천경개가 아름다운 경박호 부근 넓은 벌을 바라보면서 성호는 이 다음 대학을 졸업하면 이런 곳에 와서 교편을 잡을가고도 푸르른 꿈을 꾸기도 했다. 아들을 보고 기뻐하는 매형과 마찬가지로 성호는 외조카 경남을 보고 얼마나 귀여웠는지 모른다. 영옥은 명선이 바깥으로 나간 틈을 타서 성숙에게 물었다. “저런 꺽다리 신랑이 작달막한 막내딸에게 차례질줄은 몰랐지. 야, 신랑 퇴를 냈다, 퇴를 냈어.” 그러자 성숙은 경남에게 젖을 먹이면서 부은 얼굴에 희죽이 웃음을 지었다. “저 신랑 결혼 전에 그게 말을 잘 듣지 못하는 모병이 있었소. 그런 모병이 없었더라면 어찌 나한테 장가 갔겠소.” “그래?” 영옥은 입을 딱 벌렸다. 영옥은 문쪽을 힐끔 돌아보면서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그래 지금은 일없니?” “일이 있으면 애를 낳았겠소?” 영옥은 한숨을 후 내쉬였다. “그럼 됐어. 이후에 신랑 보신을 잘 시켜라. 인삼을 넣고 닭곰도 해 대접해라. 그리고 남편의 양기를 죽이는 말을 절대 한마디도 하지 말라.” 성숙은 부끄러움을 좀 타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문소리 덜컥 나면서 명선이 집 안에 들어섰다. 초가집에는 또 웃음소리 울려퍼졌다. 아니, 이런 경사가 또 어디 있겠는가. 온 집 안은 갓난 경남을 가운데 눕혀놓고 둘러 앉아 웃으며 밤이 깊어가도록 덕담을 늘여놓았다.                            9. 청춘 로맨스 이튿날 아침에 영옥이 한창 아침상을 차릴 때였다. 마을에 있는 셋째딸 은숙이 들어섰다. “우스운 일이 터졌소!” “?” 모두들 궁금해 구들로 올라오는 은숙을 쳐다보았다. 은숙은 구들에 풍덩 들어앉으면서 말했다. “순희가 글쎄 철주와 결혼한다오!” “뭐라구?” 모두 자기 귀를 의심했다. “아니, 북경에 가서 공부한다더니 철주한테 시집가?” 제일 놀란 것은 성호였다. 그때 한 마을의 미옥이 애를 안고 문을 뚝 떼고 들어왔다. “어마니, 우리 대학생신랑이 왔구나.”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영옥은 장국을 푸던 바가지를 솥안에 퉁 떨어뜨렸다. 국물이 사처로 튕겼다. 그 바람에 부엌에서 아궁이에 석탄을 떠넣던 명선이 손을 다 뎄다. 미옥은 미친듯이 웃어대면서 지껄여댔다. “아니, 신랑, 뭐 해? 네 애를 받아안지 않고.” 그녀는 갓난애를 창호한테 마구 떠밀어주었다. 성호는 미옥한테 되밀어주었다. “야, 너 무슨 미친 소릴 치니?” “호호호. 얘, 우리 둘이 만든 앤데. 모르는 척하겠니?” 성호는 억이 막혀 애를 마구 미옥에게 떠밀어주면서 야단쳤다. “얘, 미친 소릴 작작 쳐라. 내 언제 너와 련애나 했니?” 상진은 무서운 눈길로 미옥과 성호를 번갈아 쏘아보았다. “저 애는 어떻게 된 거냐?” 성호는 “저 정신환자 말을 다 믿습니까?” 하고 말하며 미옥을 쏘아보았다. “나가라! 정신병자 같은게, 어데서 만든 애를 가지고 생사람을 잡니?!” 허나 미옥은 애를 구들에 활 놓으면서 미친 소리를 계속했다. “얘, 울어도 이 집에서 울고 죽어도 이 집에서 죽어야 팔자를 고친다. 이 집이 초가집이라도 대학생네 집이야. 이 집에 와야 너도 내 첫사랑 성호처럼 대학에도 가구 잘 살지.” 미옥은 애를 안고 성호 옆에 와서 다가앉으면서 미친듯이 웃어댔다. “넌 대학생 성호네 아들이 돼야 잘 살 수 있어. 호호호.” 그제야 상진은 굳었던 주름 잡힌 얼굴을 느슨히 풀었다. 그는 진작 정신이 나간 미옥이 시내 거지한테 당했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었다. 허나 애를 안고 뛰여들어와 성호 애라고 하자 처음에는 오해하면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명선은 처음에는 어찌된 영문인지 몰라 눈이 데꾼했다가 부엌에서 국물을 털며 구들에 올라왔다. 놀란 경남과 미옥의 애가 자지러지게 울어댔다. 정신 나간 미옥은 아예 애를 안고 구들에 퍼더버리고 앉아 갈 념을 하지 않았다. “아무리 인심이 각박하기로 이 집에 온 손님한테 밥도 주지 않겠소. 흥!” 미옥은 밥상에 차려놓은 밥을 푹 떠서 먹다가 한술 푹 떠서 흘겨보는 창호의 입에 가져갔다. “얘, 이러지 말고 조용히 밥이나 먹어라!” 미옥은 희쭉 웃었다. “그럼 그렇겠지. 아무리 아들이 흔한 집이라고 해도 그렇지. 막내며느리 손자를 안고 왔는데 푸대접을 해서야 쓰오?” 그는 구들에 누워 있는 성숙을 보고 빈정거렸다. “어머, 언니 언제 왔소? 우리 산모들이 아침을 먼저 먹기요. 자, 일어나오. 내 무슨 이 집에서 밥을 주지 않으면 먹을 곳이 없을 것 같소? 오늘 순희하구 철주 결혼한다오. 그 집에 가면 잔치 떡을 배터지게 먹을 수 있지. 씨, 아침은 여기서 먹고 점심엔 거기 가야겠어.” 성호는 미옥이 또 정신병이 발작한다고 여겼다. 그러나 철주와 순희가 결혼한다는 것은 믿었다. 진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미옥은 계속 늘여놓았다. “순희, 그년 쌍통했어. 씨,” 그녀는 성호를 힐끔 쳐다보더니 중얼거렸다. “이전에 내 성호와 좋아하니까. 얼마나 질투했다고 그래. 제 되오? 끝내 똥푸개 철주한테 시집갔지. 뭐? 북경에 가서 공부를 한다더니 결국엔 이 마을에 돌아와 똥푸개 같은 철주한테 시집 가면서. 흥! 바보라도 그런 바보년이 어디 있어. 내 걔만 공부는 못해도 내 노릇은 착실히 했어. 이렇게 대학생과 좋아해서 떡돌 같은 아들을 보았지. 제 되오? 똥푸개 철주야 이런 농촌에서 똥이나 펐지. 내야 이제 대학생 신랑을 따라 시내에 가서 기와집에서 호광하면서 살게 됐어. 호호호.” 그녀는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건 말건 계속 웃겼다. “시아버지, 안 그래요? 옛날부터 시앙버지 사랑은 며느리라는데 그저 쳐다보기만 하면 어떻게 해요?” 상진과 영옥은 그저 웃어댔다. 국이 다 끓자 모두들 아침밥상에 마주 앉아 숟가락을 들었다. 미옥은 성숙의 옆에 있는 애를 들여다보더니 히쭉 웃었다. “에이고, 귀해라. 가만, 얘가 우리 애하고 어떻게 되지.” 그는 성호를 뒤돌아보더니 또 지껼여댔다. “얘들 고모사촌간이구나. 그래. 이 세상에서 잘 살자면 김서기네 손자로 태여난게 옳지. 김서기네 외손자나 사돈에 팔촌의 손자로라도 다 호광할수 있단 말이야.” 미옥은 혼자 계속 중얼거리며 미친 소리를 쳤다. “성호야, 너 대학생이느라고 너무 우쭐거리지 말라. 너 때문에 내 정신나갔지 뭐야? 씨.” “뭐라고?” 성호는 밥을 먹다가 미옥을 건너다보았다. “정말 한심하구나. 널 좋아한 적도 없다, 없어!” 상진은 미옥을 마구 쫓아냈다.  “생사람을 작작 잡아라. 가라, 가!” 미옥은 쫓겨나가면서도 계속 지껄였다. “그 잘난 밥이 아까우면 말게지. 쫓긴 왜 쫗아? 미옥이 너네 집에서 밥을 얻어먹지 못하면 먹을데 없을 것 같아? 씨, 순희네 집에 가서 잔치떡이나 먹자.” 성호는 “순희 북경에 갔다더니 어째 불시에 철주와 결혼한다오?” 하고 물었다. 그러자 영옥은 도리머리를 홰홰 가로저었다. “순희 전번에 북경에서 돌아와 철주하구 사돈보기를 했다.” 성호는 숟가락을 달랑 내려놓았다. “맨 미친 년들이구나.” 그는 밥맛이 없어 바깥으로 나왔다. 눈보라가 룡트림을 하면서 언 땅을 훑어가고 있었다. 모래알 같은 눈가루가 휘몰아치는 바람에 여기기 흩날리다가도 바람을 따라 종달음질쳐갔다. 순희가 철주와 결혼한다는 건 성호에게는 너무나도 큰 충격이였다. 속이 비길 데 없었다. (순희가 이럴 수가?) 성호는 모든 것을 믿고 싶지 않았다. 착잡한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올랐다. 철주는 어릴 때도 과수원에 가서 배를 훔쳐 셔츠안에 넣어가지고 와서 순희를 여러번 준 적이 있다. 물고기를 잡아서도 초롱채로 들어다주기도 했다. 성호는 도리머리를 흔들면서 한 집 건너 순희네 집을 내려다보았다. 첫사랑 순희를 철주한테 빼앗긴 감이 스물스물 기기들었다. (진짜 함박꽃이 둼 무지에가 꽂힌 격이야.) 그때 순희네 집 굴뚝에서 삼단 같은 연기가 무럭무럭 솟아올랐다. 그는 저도 몰래 스적스적 눈을 밟으면서 순희네 집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자기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순희네 집과 성호네 집 앞에 건조실이 있었다. 숱한 암탉들이 수탉 한마리 주위에서 북데기 속의 낟알을 쪼아먹느라고 구구거렸다. 수탉은 북데기 속의 낟알을 뚝뚝 쪼아 골라내놓고 뭐라고 구구거리며 암탉들에게 먹이고 있었다. (말 못하는 닭들의 사랑은 얼마나 간단해. 수탉이 구구구 하면 암탉이 따라다니면서 먹으며 재미있게 살거든. 허나 인간 세상의 사랑은 왜 이다지도 복잡해?) 성호는 속이 부글부글 괴여번지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똑똑한 순희가 리해되지 않았다. (바보 같은 게.) 성호는 건조실 마당에서 서성거리면서 막연한 생각에 갈마들어 몸부림쳤다. 철주는 성호보다 키도 더 큰데다가 진짜 이름처럼 실팍한 쇠기둥같이 생겨 싸우면 항상 성호를 이겼다. 진짜 사이 좋지 않은 라이벌이였다. 게다가 철주는 총명해서 공부도 아주 잘했다. 특히 그는 태평거촌 동구에 있는 한족마을 쪽에서 자라나서 한어를 아주 잘했다. 그리하여 담임교원은 철주한테 체육위원까지 시켰다. 허나 성호는 수학은 잘했지만 한어는 철주의 발뒤꿈치도 따라가지 못했다. 그래도 수학경색대회에서 몇번 우승을 한 덕에 성호는 수학교원인 담임교원의 신임을 받아 학습위원을 했다. 안도저수지를 수축하는 바람에 순희는 그 골안의 이주민들과 함께 태평거촌에 이사해왔다. 철주와 성호는 서로 순희에게 잘 보이려고 하면서 경쟁과 갈등은 더 심해졌다. 철주는 과수원에 가서 배를 훔쳐다준다, 반디를 들고 강물에 가서 모래무치랑 잡아다준다 하면서 순희를 얼리려고 했다. 허나 머리 뜨거워난 철주는 잘못을 저질렀다. 남의 집 해바라기를 훔치고 감자를 파다 순희에게 주다가 들통이 났다. 바늘도적이 소 도적이 된다고 철주는 나중에 진짜 남의 개까지 훔쳤다가 파출소에 잡혀가기도 했다. (도적놈한테 시집가? 흥!) “성호!” 성호가 머리를 들어보니 기다리는 순희는 집에서 나오지 않고 보기도 싫은 월순이 이쪽으로 빠드득빠드득 눈을 밟으며 다가왔다. 눈덮인 북데기 속에서 낟알을 쪼아먹던 닭들이 독살스런 월순을 두려운 듯이 달아났다. “때마침 잘 왔구나. 한가지 부탁하자.” “뭘?” 성호는 자리를 뜨려다가 주춤 멈춰서면서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오늘 내 작은고모 결혼하는데 저녁에 와서 좀 오락 사회를 맡아주렴.” 월순의 말에 성호는 어처구니없어 피씩 웃었다. “얘, 내가 왜? 싱겁게. 사람을 뭘로 보고 이러니?” 월순은 퉁방울 같은 눈을 번쩍 무섭게 뜨더니 성호를 쏘아보며 두툼한 입술을 열었다. “얘, 대학생이라고 봐주니까. 고까짓 주례도 서지 못하겠니?” 성호는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얘, 내 어디 주례를 설 기분이 있니?” 그때 갑자기 문이 발칵 열리면서 실내복바람의 순희가 나오더니 “월순아, 그만둬라! 집에 들어오지 못하겐?” 하고 눈을 흘겼다. 성호는 머리를 숙이면서 순희의 눈길을 피했다. 월순은 뭐라고 욕하려다가 순희가 다가와서 잡아끄는 바람에 그만두고 집 쪽으로 가면서 두덜거렸다. “순희야, 내 좀 보자.” “?” 순희는 월순을 놓고 돌아서더니 의아한 눈길을 보냈다. “얘, 시집 가는 날에 그런 애들과 말도 하지 말라. 괜히 괄시를 당하겠어.” 월순은 성호를 힐끔 되돌아보더니 문을 쾅 닫고 들어가버렸다. “무슨 일이야? 추워 죽겠어.” 성호는 순희의 헝클어진 머리카락 밑에 팅팅 붓긴 까만 포도알눈을 보면서 간신히 입을 뗐다. “너 미쳤니? 뭘 보고 철주한테 시집가니?” “어째 심술나? 남이야 철주한테 시집가든 말든 잔치날에 웬 반간이냐? 데려가라고 할 땐 데려가지 않더니, 철주한테 시집가니 어째 아깝니?” 놀랍게도 순희는 깨고소해하는 표정이였다. (바로 내게 보복하려고? 이런 묘한 기분 보여주자는 거야?) 성호는 기분이 정말 엉망이였다. “북경에서 살게지. 이런 농촌에 돌아와 뭘 하니?” “난 네가 보라고 철주와 결혼해서 이 마을에서 돼지 치고 개를 가득 치면서 백년을 살테야.” “흥! 호박을 쓰고 돼지굴로 들어간다.” “너 정말 재수 없이 논다. 남의 결혼식날에 고양이 방정을 떨겠니?” 순희는 주위를 둘러보더니 머리를 돌렸다. “한가지만 명확히 알려주마. 철주는 내 첫사랑이야. 그가 따준 배가 내 배 속에 아직도 남아 있어. 난 그때부터 철주를 사랑했다. 난 너처럼 첫사랑을 헌신짝 버리 듯하지 않아.” 성호는 더 할 말이 없었다. “저녁에 오락판 주례를 서주겠니? 마지막 부탁이야.” 순희의 눈에 핑그르르 돌아가는 눈물을 보고 성호는 마지못해 기여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마. 너와 철주 결혼을 축하한다.” 순희는 두손으로 얼굴을 가리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으로 뛰여갔다. 성호는 우두커니 서서 집 안으로 들어가버리는 순희 뒤잔등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시뿌연 김 속으로 순희가 사라져버렸다. 성호는 집에 돌아와 심란해 위방에 들어가 훌러덩 들어 누었다. 착잡한 생각이 머리를 칭칭 휘감고 끝없이 괴롭혔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가. 바깥에서 북소리와 징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그 요란한 소리는 각일각 가까이 다가왔다. (제길할, 무슨 일이야?) 성호는 호기심에 문을 열고 내다보았다. (저게 뭐야?) 글쎄 아래 마을 한족들이 북을 두드리고 징을 치면서 순희네 집 쪽으로부터 건조실을 건너 성호네 집 쪽으로 올라오고 있지 않겠는가. 그 한가운데 백마를 탄 철주가 옛날 원님처럼 거만하게 다가오고 그 뒤에 꽃가마가 다가왔다. 성호는 바깥으로 나가려고 하다가 문고리를 놓고 벽에 기대섰다. (진짜 갑돌이와 갑순이 이야기를 만드는구나.) 그는 자기 첫사랑 순희가 꽃가마를 타고 도둑놈 같은 라이벌 철주한테 시집가는  꼴을 차마 더 보기 힘들어 눈을 꼭 감고 벽에 기대 서 있었다. 그런데 웬 일일가. 북소리와 징소리가 멀어져 가지 않고 딱 성호네 집 앞에서 더 요란해지는 것 같았다. 성호가 이상해 창문으로 바깥을 내다보았다. (아니, 저게 웬 일인가?) 철주가 백마에서 내리더니 꽃가마 앞으로 다가가 꽃가마 문을 열고 순희를 안아 내려 업고 덜썩덜썩 어깨춤을 추며 야단쳤다. 눈보라 윙윙 휘몰아치는 맵짠 엄동설한에도 철주는 첫날한복을 입은 순희를 안고 한바퀴 휘 돌리더니 업고 어깨춤을 덩실덩실 추었다. 이때라고 북소리 둥둥, 징소리 쟁쟁, 새납소리 한바탕 요란하게 울렸다. “저것들이 짜고들어 우리 집 앞에서 시위하는 거야.” 성호는 중얼거리면서 창문에서 떨어져 구들에 훌렁 물앉았다. 마음이 아파 참 더 눈 뜨고 볼 수 없었다. (복수하려고? 아침에 어글어글한 눈에 고인 눈물은 뭘 설명할가? 아무리 괘씸해도 우리 집 문 앞에까지 와서 성질을 건드릴 건 뭔가?) 성호는 와닥닥 일어나 앉았다. 이때 미닫이가 쭉 열리더니 엄마 들어왔다. “에이고, 넌 언제 제 노릇을 하겠니? 대학생처녀면 어떻고 저 순희 따를 때 약혼했더라면 얼마나 좋았겠니? 철주 좋은 노릇 하지 않았니?” “엄마, 근심하지 맙소.” 성호는 귀밑머리가 희슥희슥한 어머니를 위안했다. “내 꼭 순희보다 더 예쁜 며느리를 데려올게.” 성호는 구들에 들어 누우면서 눈을 딱 감았다. 정지에서 막내누나 성숙도 한마디 했다. “엄마, 성호 순희와 연분이 없어 그런 거요. 대학생인 성호 이제 영화배우 같은 시내 대학생처녀를 데려오지 않는가 보라니깐.” “글쎄 말이야.” 그때에야 바깥에서 북소리와 징소리가 멀어져갔다. 영옥은 탄자를 아들의 몸에 덮어주고 정지로 나갔다. “더러운 놈들, 고의로 우리 집  앞에 와서 떠들긴?” 성호는 어릴 때 키가 자기보다 한 뼘은 더 큰 철주와 맞붙으면 씨름을 해도 안되고 싸워도 안 됐다. 게다가 철주는 한족마을의 애들과 친해 쩍하면 한족애들을 데리고 와서 성호를 때리고 괴롭혔다. 그런데 후에 성호가 길림으로 가서 몇해 동안 누나네 집에 있으면서 초중공부를 하며 시내 애들에게서 무술을 배운 다음부터는 상황이 달라졌다. 고중에 다닐 때 고향에 돌아오면서 성호와 철주가 한번 붙은 적이 있었다. 철주는 근본 상대가 아니였다. 처음에는 씨름을 붙었다. 철주는 키 크고 힘이 센걸 믿고 대판 성호의 허리를 꽉 끌어안고 떠밀기를 했다. 그때 성호는 철주의 힘을 리용해 옆으로 슬쩍 피하면서 꿇어앉아 왼 손으로 철주의 오른다리를 번쩍 들어 어깨우로 떠 넘기었다. 철주는 자기 힘에 앞으로 머리를 처박으면서 꼬꾸라졌다. 열이 오른 철주는 “고새끼, 미꾸라지처럼 잘 빠지는구나.” 하고 손바닥에 침을 뱉고 덤벼들었다. 두번째 판에 철주는 태산이 정수리를 누르는 기세로 덮쳐들어 오른팔로 성호의 목을 껴안고 꽉 내리눌렀다. 성호는 머리가 거의 모래바닥에 닿을 지경이였다. 그 아슬아슬한 찰나에 성호는 목을 철주의 겨드랑이 밑에 바싹 밀어넣어 쳐들며 오른 손을 철주의 사타구니에 찔러 넣고 XX을 꽉 움켜쥐여 비틀었다. “앗!” 철주가 그게 아파 성호의 목을 껴안은 팔을 놓아버렸다. 그때 성호가 오른 팔을 철주의 사타구니에 넣어들면서 허리를 쭉 폈다. 그 큰 철주를 번쩍 들어 거꾸로 처박아놓았다. “어이쿠!” 철주는 높이 떠들려 버둥거리며 강산구경을 하다가 모래바닥에 처박혔다. 성이 날대로 난 철주는 주먹을 쳐들고 씽 덤벼들어 성호의 얼굴을 쥐여박았다. 성호가 옆으로 쓱 피하면서 날아드는 주먹을 덥썩 잡아 비틀어 당기면서 아래 종아리를 탁 걷어찼다. 철주는 이번에도 자기 힘에 저쪽에 가서 나동그라졌다. 마을 사람들이 우르르 모여 그들 둘은 뜯어 말렸다. 성호는 어릴 때처럼 뛰쳐나가 뚜들겨 패놓을 수도  없었다. (난 대학생이야.) 토끼꼬리만한 겨울해가 지고 있었다. 몇가닥의 차디찬 해빛이 저녁노을 속에서 마을을 비췄다. 정지 문소리가 삐꺼덕 났다. “성호, 우리 집에 와서 잔치 술이나 마셔라!” 성호가 미닫이를 열고 내다 보고 자기 눈을 의심할 지경이였다. 범이 자기 흉을 하면 온다더니 생각 밖으로 왼쪽 가슴에 꽃을 단 철주가 찾아오지 않았겠는가. 성호는 벌떡 일어나 나가면서 철주의 손을 잡아주고 나서 “결혼을 축하한다. 잘 살아라.”라고 덕담을 해주었다. “고맙다.” 철주도 반갑게 인사를 받았다. “이전에 어려서 우린 라이벌이였지. 허나 이젠 우리 갈 길은 서로 갈라졌잖았구 뭐니? ” “그래, 필경 우린 한 고향 마을에서 자란 짜개바지친구니까.” 철주는 사람좋게 성호를 잡아끌면서 “가자, 우리 집에 가서 마을 친구들과 함께 술이나 마시자. 그리고 저녁에 잔치오락을 좀 재미나게 조직해달라.” 라고 했다. 성호는 연신 “그래, 그러자. 근심하지 말아라.” 하고 바삐 신을 찾아 꿰고 따라 나섰다. 성호는 고향 마을 친구들과 함께 술을 취토록 마셨다. 철주와 순희의 부탁대로 그는 오락판 사회를 맡았다. 미닫이가 열리더니 순희가 위방에서 나왔다. 꽃너울을 쓰고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순희, 머리를 다소곳이 숙이며 오락 판에 사뿐사뿐 나서는 순희가 그렇게 예쁠 수가 없었다. 성호는 속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생각 같아선 마구 손을 잡고 자기 집으로 끌고 달아가고 싶었다. 성호의 눈길을 받는 순간 순희의 어글어글한 눈이 유난히 이상한 빛을 발산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성호는 그날 밤 착잡한 마음을 정리하면서 무슨 정신에 오락을 사회했는지 몰랐다. 그는 자기 차례에 “갑돌이와 갑순이”이란 노래를 부르려다가 그만두었다. 그는 코로 흥얼거리면서 두 팔을 활짝 벌리고 너울너울 춤을 추었다. 순희가 행복할 것을 축원하는 간절하고 깨끗한 마음을 담아 서정적으로 춤을 추었다. 꿇어앉아 순희와 철주를 향해 두팔을 벌리고 가슴을 내밀며 두 팔을 내뻗었다가도 무술동작을 곁들어 벌떡 뛰여 일어나 백조가 맑은 호수에서 두발로 모둠다리로 옆으로 가는 시늉을 내기도 하고 학이 나래치는듯이 두 팔을 너울거리기도 하고 어깨춤을 덩실덩실 추기도 했다. 오락이 끝나자 순희는 꽃노을을 쓴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성호의 술잔에 술을 찰찰 넘치게 따랐다. 그런데 그녀가 하얀 장갑을 낀 손에 잡힌 술병끝이 술잔을 도도도 두드리는 것이 눈에 보일 지경이였다. 성호는 술잔을 받아 한잔 쭉 들이켰다. 꽃노을을 쓰고 다소곳이 숙인 순희의 하얀 보름달 얼굴을 보는 순간 성호는 가슴이 미여지는 것만 같았다. 짙게 그린 눈썹아래 순희의 어글어글한 두눈에는 눈물이 글썽해졌다. 성호는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나 비틀거리며 바깥으로 나왔다. 순희는 왼손으로 얼굴을 반쯤 가리면서 반쯤 돌아섰다. 성호는 한복을 입은 고운 순희를 철주네 집에 남겨두고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떼놓았다. 허나 떠나야만 했다. 그는 손으로 허공을 마구 그으면서 휘청휘청 어두운 눈보라 속으로 걸어갔다. 바깥에서는 눈보라가 윙윙- 휘몰아치면서 어둠 속에 짓눌린 고향마을을 핥으면서 산악 같은 슬픔을 몰아왔다. 모래알 같은 눈가루가 지붕에서 흩날려 목 안에 기여들어 성가시게 굴었다. 휘몰아치는 눈보라 속에 어디선가 쓸쓸한 노래 소리가 성호의 귀전을 아프게 때리는 상 싶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 가서 발병이 난다      
115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89) 댓글:  조회:1612  추천:2  2017-12-03
                                     7. 콩꼬투리죽 한 사발        고개, 고개 열두 고개에서 제일 넘기 어려운 고개는 십리도 못 가서 발병이 나는 아리랑 고개가 아니었다. 백성들이 제일 넘기 어려운 고개는 아직도 보릿고개였다.       중국 전국적으로 반우파 투쟁과 함께 인민공사화, 대약진 바람이 거세지면서 허백호 서기는 이른바 우파분자 오옥선과 박성근을 투쟁하는데 그치지 않았다. 그는 집체식당을 마을마다 차리게 하고 집체 화식을 강요했고 집집마다 문뜩문뜩 뛰어들어 가마뚜껑을 들었다놨다하면서 야단쳤다. 그는 혹시 쌀이나 감춰 두고 자기 집 가마에 뭘 끓여 먹는가 해 눈깔이 뻘개 삽살개처럼 싸다니면서 살폈다. 혹시 배추김치나 산나물 채를 따로 해 먹는 사원을 발견하기만 해도 몽땅 빼앗아 집체식당에 가져다 놓고 한바탕 비판대회를 열었다.        사원들은 살금살금 능쟁이랑 세투리랑 캐다가 돼지를 먹이는 척 하며 끓여 돼지죽초롱 같은데 치워두었다가 허백호 서기와 흥수의 눈을 피해 가만가만 꺼내 먹으면서 주린 배를 달랬다. 허백호 서기는 참 우스운 일도 다 했다. 자기는 흥수네 집에 들어서 가만히 돼지고기랑 사다가 끓여먹으면서 사원들은 먹지 못하게 입을 봉해버릴 잡도리였다. 그는 온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누구네 집 가마에 녹이 쓸었는가, 뭘 끓인 흔적이 있는가를 살펴보고 이른바 사상이 빨간가 누런가를 가늠했다. 물론 위에 있는 허백호 서기가 그런 사상교양정책을 내놓으면 사원들은 새 대책을 댔다. 사원들은 돼지죽을 끓이는 척하며 푸성귀를 끓여 먹고는 가마를 깨끗하게 가셔내 말리우군 했다. 하여 아무리 허백호와 흥수가 싸다니면서 가마를 열어보아도 뭘 끓여먹은 흔적이 하나도 남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은 남녀노소 모두 허백호의 코개질을 하는 흥수를 미워했다. 그가 아무리 허백호를 믿고 개 잡은 포수처럼 삐죽한 조개턱을 쳐들고 우쭐거려도 모두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오히려 허백호 그림자만 사라지면 모여들어 흥수를 놀려주었다. 어느 하루, 깡마른 콩밭에 물을 주는 일을 하는 날이었다. 나이를 먹은 아낙네들이 우쭐거리며 돌아다니는 흥수를 보자 놀려주었다. “저 흥수, 허 서기한테 잘 보여서 또 화선입당하겠다!” “코개 같은 게! 보기만 해도 눈에 불이 난다!” “저 삽살개를 오늘 두들겨 팰까?” “좋다! 모든 개 매를 맞아봐야.” 누가 선코를 뗐는지 아낙네들은 사전에 토론이나 한 것처럼 “와-” 함성을 지르며 흥수한테로 돌격해갔다. 그녀들은 우르르 모여들어 흥수를 깔고 들어앉았다. 가물에 실돌피 같은 흥수가 아무리 버둑거려도 숱한 아낙네들을 당하지 못했다.  아낙네들은 흥수 웃옷을 와락와락 벗겨 낯빤대기에 들씌워놓고 한바탕 두들겨패주었다. 그것도 모자라 아낙네들은 흥수의 바지를 훌렁 벗기었다. “아이고, 이게 무슨 고추람?” “애들 거보다도 더 작아. 히히히.” “우메-요렇게 작으니 딸 밖에 줄줄 낳지 못하지.” “호호호.” 그것도 모자라 아낙네들은 흥수의 낯빤대기에 젖을 짜서 마구 발라놓았다. 이 때 개 한마리가 왕왕 짖어대며 구경하러 뛰어와 똥오줌을 쫘르르 내쏴놓고 달아났다. 한 아낙네는 개똥을 퍼다 흥수 주둥이에 마구 쑤셔넣었다. "에, 퉤. 함경도 가시나들, 퉤!  어더렇게 죽고 파?!" 흥수는 주둥이만은 살아 있었다. "이 놈, 남도치!" "고슴도치야?!" "이 콧개!" "전라도 깎쟁이!" "오늘 톡톡히 망신 주자!" 아낙네들은 흥수의 바지와 속옷을 몽땅 벗겨 안고 "와야-"하고 저 멀리 밭머리로 달아났다. 한 아낙네는   망신시키려고  비술나무에 바라올라갔다. 아래서 흥수의 옷을 나무꼬챙이에 걸어올려보내면 그 아낙네가  말라 죽은 나무 가지에 걸어놓았다. 실 한 오리 걸치지 못한 흥수는 창피해 젖 투성이 된 거시기를 손으로 싸쥐고 콩밭에서 달아나 옥수수 밭에 숨어 있었다. 해가 서산에서 뚝 떨어져서야 사원들이 마을로 내려갔다. 그제야 발가숭이 흥수는 슬금슬금 옥수수 밭에서 나와 사위를 흘끔흘끔 훔쳐보며 옷이 걸려 있는 나무쪽으로 다가갔다. “으흐흐!” 갑자기 하늘에서 뭔가 쯘쯘한 것이 발가숭이 엉덩이와 낯에 뚝 떨어졌다. 흥수가 황급히 닦으면서 하늘을 쳐다보았다.     까욱!     흥수가 하늘을 바라보았다. 까마귀 날아지나가면서 똥을 찔찔 내리 쏘았다. 재수없는 놈은 뒤로 넘어져도 콧등을 깬다더니 날아가는 까마귀가한테 흥수는 똥벼락을 맞았던 것이다. “에크, 퉤! 재수 없어.” 흥수는 옥수수 이파리를 뜯어 쥐고 낯과 엉덩이를 쓱쓱 닦았다. 그런데 시허연 까마귀 똥은 얼룩덜룩하게 대충 닦았는데 저걸 어쩌나? 엉덩이와 낯이 옥수수 이파리에 긁혀 아려나기 시작했다. 그는 상을 찡그리면서 나무 가지에 걸려 너펄거리는 옷을 벗겨 입고 아낙네들을 윽, 윽 벼르면서 마을로 내려갔다. 그 일이 있은 후 흥수는 혼자 마을로 싸다니면서 콧개처럼 이집 저집 냄새를 맡으며 싸다니지 못했다. 대대 당지부 서기와 치보 주임을 겸한 상순은 눈가림으로 대충 이 사건을 조사하는 척 하고 두루뭉실하게 지나쳐 버렸다. "망신당해 싸다, 싸!" 상순은 속으로 잘코사니를 불렀다. 후에 흥수는 상순과 병완을 믿어서는 앙갚음을 못할 것을 알고 창피한대로 그번 이른바  "능욕사건"을 공사당위 서기 허백호에게 고발했다. 허백호의 지시를 받고 공사 파출소 허영호 소장이 조개덕대대에 내려왔다. 그러나 허영호도 용빼는 수가 없었다. "누가 때렸는지 어떻게 수사한단 말인가?" 조사해보니 흥수의 머리에 웃옷을 푹 씌워놓고 숱한 아낙네들이 달려들어 옷을 벗기고 물매를 안겼던 것이다 . "얼마나 미움개를 샀으면 아낙네들한테 물매를 맞아? 개꼴망신당해 싸다, 싸." 영호 소장도 깨고소해 조사하는 척 하다가 그저 사원대회를 열고 아낙네들을 경고나 해놓고 치보 주임 상순에게 맡기고 돌아가 버렸다. 상순은 더 조사하지도 않고 지나쳐버렸다. 흥수는 마음을 곱게 먹지 못했기에 일이 잘 풀리지 않았다. 그가 아무리 입당하려고 허백호 서기 앞에서 두 주먹을 불끈 쥐고 개처럼 뛰어다녀도 헛수고였다. 당 지부 대회에서 그의 입당문제를 토론만 하면 함흥 촌 당 지부 서기 병완의 반대를 받아 통과 되지 못했다. 게다가 마을 사원들에게서 흥수에 대한 의견을 청취하면 별의별 나쁜 의견이 다 올라왔다. 허백호는 사원들이 푸성귀를 뜯어다 돼지죽을 끓이는 척 하면서 먹는 것을 눈치 챘다. 그는 외까풀 눈을 내리 깔고 어떻게 이른바 "자본주의 길로 나아가려는 싹"을 미연에 뿌리를 뽑아치우겠는가를 고민했다. 며칠 후 그는 상순을 보고 생산대 우사 옆에 커다란 돼지 굴을 지으라고 했다. 상순은 속으로 돼지라도 많이 치면 배를 곯는 사원들에게 좀 보탬이 되겠다고 생각했다. 하여 그는 사원들을 데리고 패용천산과 칼산에 가서 정으로 돌을 캐 실어다 일주일도 되지 않아 커다란 돼지 굴을 열 칸이나 지었다. 그러자 허백호는 집집이 기르던 돼지마저 몽땅 집체돼지우리에 몰아다 넣고 함께 기르라고 지시했다. 사원들은 도리머리를 홰홰 저었다. “돼지마저 치지 못하게 하면 어떻게 살라는 거요?” “글쎄 말이오. 우린 원래 돼지보다 못한게 무슨. 돼지도 푸성귀를 마음대로 먹잖소? 근데 우리 사원들은 자본주의로 갈가봐 푸성귀도 마음대로 끓여먹지 못하게 한단 말이요.” 모두들 이구동성으로 떠들어대며 반대했다. 박성근이 제일 떠들어댔다. “소들도 보오. 수수대로 엮은 집체 우사로 들어가더니 다 얼어 죽고 굶어 죽을 지경이오. 막부득이 하면 황소들이 우사에서 뛰여나서 옛날 옥수수랑 감자랑 심어먹던 두만강변으로 도망쳤겠소?" 확실히 그런 일이 있었다. 사람들이 굶어 죽을 지경인데 언제 소를 잘 먹일게 있겠는가? 어느 하루 몇마리 황소가 고삐를 끊고 잃어지지 않았겠는가. 혹시나 해서 상순과 흥수가 옛날 합작사에서 부업으로 감자를 심었던 두만강변 범바위골로 가 보았다. 그런데 소들이 글쎄 거기서 무리로 풀을 뜯어먹고 있지 않겠는가. "이 놈 소새끼들이." 흥수가 돌멩이를 쥐고 쫓아가자 소들은 꼬리 빳빳해 도망쳤다. 다행히 흥수가 황소 한 마리 끊어진 고삐를 붙잡았다. "생산대 우사로 돌아가자." 흥수가 고래고래 고함치며 아무리 고삐를 쥐여당겨도 황소는 네발로 벋디디면서 대가리를 흔들어댔다. 코에서 피가 흘러도 황소는 돌아가려고 하지 않았다. 박성근은 계속 떠들어댔다. "아무리 우둔한 소도 생산대 우사에 돌아가면 굶어 죽는다는 거 알았단 말이요." 그때 상순과 흥수는 황소들을 하나하나 붙잡아 생산대 우사로 몰고 오느라고 얼마나 고생했는지 모른다. 어떤 소들은 뿌리로 흥수를 마구 뜨기까지 하며 반항했다. "이제 돼지마저 집체 돼지우리에 들어가면 다 굶어 죽지 않는가 보오.” 허백호는 빈정거리는 성근을 아니꼽게 쏘아보았다. "야, 이 우파분자야, 주둥이를 다물지 못해? 계속 씨부렁거리면 소처럼 주둥이에 꾸러미를 꽉 채우지 않는가 봐라. 저 주둥이 대사긴 대사야."  그의 고집스러운 지시와 협박을 누가 언감 막겠는가? “어째 성근이나 오옥선처럼 우파 모자를 쓰고 개고생 해봐야 알겠는가?” 그제야 누구도 감히 찍 소리를 못하고 울며 겨자 먹기로 돼지를 생산대 돼지우리에 몰아갔다. 돼지들은 집체 돼지우리에 들어가 서로 물고 뜯었다. 보기도 난처했다. 소련에서 중학교까지 다닌 성근은 우파 모자를 쓰고서도 뒤에서 계속 두덜거렸다. “그래도 흐루쑈브 XX주의 채가 좋지. 흐루쑈브는 감자에 소고기 볶음은 XX주의라고 했소. 얼마나 도리 있소? 빨리 감자에 소고기볶음채를 먹으면서 살았으면 얼마나 좋겠소?” 상순은 성근의 곁에 다가가서 삽으로 돼지우리 둼을 쳐내면서 나직이 말리었다. “쓸데없이 횡설수설하지 마오. 우파 모자를 쓰고서도 아직도 말장난이오?” 허나 성근은 콧방귀를 뀌었다. “흥! 이미 우파로 됐는데 이제 죽이기까지야 하겠소?” “날마다 투쟁 받는게 고달프지도 않소?” “이 놈 세월에 속심말 한마디도 하기 힘드오. 어떻게 살겠소? 배불리 먹지 못하는데 말이라도 씨원하게 했으면 얼마나 좋겠소?” 상순은 주위를 둘러보면서 성근을 돼지우리 한쪽구석으로 데리고 가서 은밀히 물었다. “소련에서는 무슨 폐단이 있었소?” 성근도 주위를 둘러보더니 다른 사람들이 돼지우리 저쪽에서 돼지 똥을 쳐 내는 것을 보고 말했다. “어째 우파 모자를 씌워놓고서도 모자라오? 어쩌자고 자꾸 험한 말까지 다 묻소?” 성근은 볼 부은 소리를 한마디 내뱉고서는 입에 빗장을 질렀다. 상순은 쉼에 성근을 데리고 마을을 벗어나 태평강 가에 가서 조용히 말했다. “나를 믿소. 절대 비밀에 붙일게. 나는 집체생산을 한 후 어쩐지 사원들의 생활이 이전에 호조조를 할 때보다도 못해가니까. 소련의 경험과 교훈을 알려고 그러오.” 그래도 성근은 주위를 흘끔거리면서 입에 빗장을 빼지 않았다. 상순은 속심의 말을 했다. "인민들이 배불리 먹고 행복하게 사는 새 사회를 건설하혀고 그 얼마나 많은 선렬들이 희생됐소. 그런데 새 사회에서 백성들을 굶겨서야 되오? 그래서 쏘련 사회주의 경험교훈을 알려는 거요. 그래야 우리 소련의 굽은 길을 다시 걷지 말고 백성들이 행복하게 사는 새 사회를 하루 빨리 제대로 건설하지." 그제야 성근은 한숨을 후 내쉬더니 꾹 다물었던 입을 겨우 열었다. “소련 꼴호즈에서 집체생산을 하니까. 사람들이 노동적극성이 없고 노라리만 쳐서 지금 우리 생산대 꼴이었소. 개체 생산을 할 때보다 형편없었소. 소련 원동 울라보지또스크 주변 그 좋은 시꺼먼 밭에서 감자 몇 알을 거둬들이지 못했소. 그래서 흐루쑈브는 쓰딸린을 마구 물어뜯으면서 기여 올라 갔소. 흐루쑈부는 레닌과 쓰딸린이 건설한 소련 사회주의 기틀을 마구 허물어 버리고 수정주의를 해나갔소. 쓰딸린 때 지금 중국처럼 정치 백열화가 됐소. 밤을 자고 나면 꼴호즈의 간부들이 없어졌단 말이오. 쓰딸린을 욕하는 사람은 모두 반혁명으로 몰리어 어디로 갔는지 다시 돌아오지 못했소. 쓰딸린이 독재였다면 지금 흐루쑈브도 보나마나 나쁜 놈이오. 보오. 쓰딸린 때 중국에 숱한 지원을 한 걸 다 빚받이를 해간단 말이오. 글쎄 2차 대전 때 빚마저 다 받아가고 중국에 파견한 기술자를 몽땅 철수하지 않았소? 그 놈 기술자들이 돌아가면서 용광로에 쇠 물이랑 그대로 식혀 굳혀버린 바람에 용광로랑 못쓰게 만들었다오. 그래서 우리 여기서 공장뿐만 아니라 학교와 상점, 농촌에서까지 자력갱생, 간고분투의 기치를 들고 전민이 동원돼 강철을 생산한다고 떠들고 있지 않소? 허나 우리 농민들이나 공인계급이나 얼마나 살기 어렵게 됐소? 팽덕회를 타도했지만 팽덕회 말에 일부 도리 있소. 어떻게 한헥타르에서 10만근을 내오? 우리 마을도 보오. 허백호 서기 말대로 해서 한헥타르에 5만근을 냈소? 소련에서도 꼴호즈를 반대한  정치인들이 몽땅 숙청당했소. 허나 흐루쑈브가 올라가 몽땅 억울한 사건을 시정했소. 나도 언젠가는 진리를 견지한 영웅으로 재평가돼 억울한 모자를 벗을 날이 있을게요.” 상순은 성근의 말을 듣고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말은 조심해야 하오. 우린 공산당을 믿고 사회주의를 믿고 이 땅에서 살아야 하오. 우리 공산당도 어떻게 하면 인민들이 잘 살게 하겠는가고 새 길을 탐색하는 과정이 아니고 뭐요? 이제부터 말을 조심해 하오. ” 박성근은 도리머리를 홰홰 둘렀다. "딱 쏘련의 옛길로 나가서야 어떻게 잘 살 수 있소? 쏘련에서 잘 못한 건 우리 무조건 따라 하지 말고 교훈을 섭취하고 새 길로 나가야지. 에이구, 말이 통하지 않소."       상순은 속으로 성근은 오옥선보다는 다른 우파라고 느꼈다. 오옥선은 확실히 공산당원을 모욕한 죄가 있었다. 그러나 성근은 두갈래 로선투쟁에서 착오를 진 우파라고 생각되였다. 그러나 무조건 당을 반대한다고 우파모자를 마구 들씌운 건 어쩐지 도리머리를 흔들며 심사숙고하게 됐다. 3년 재해 시절에 쌀 고생이 막심했다. 화영은 원래 소련에서 조선 사람들이 사는 곳으로 오느라고 해방직 후에 중앙아시아로부터 도망쳐 중국 만주로 들어왔던 것이다. 그리하여 성근보다 못지 않게 소련 꼴호즈를 잘 알았다. 그러나 그는 세상이 돌아가는 것을 살피며 입에 빗장을 지른 채 진종일 수걱수걱 일만 하면서 한마디 말도 삐치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던 그도 너무 배고파 마을 집체식당에서 참지 못하고 한마디 했다. “에구, 그놈 마우재들이 중국에서 빚을 받아가는 바람에 우리 중국 사람들이 잘 살지 못한다.” 그런데 그 말을 이번에는 학수가 허백호 서기에게 달려가 고발했다. 그러자 허백호 서기는 기뻐 무릎까지 쳐댔다. “잘 됐소. 우파분자는 한 놈, 한 놈 생기는 족족 투쟁해야 하오.” 그날부터 화영도 우파 모자를 쓰고 오옥선과 성근과 함께 투쟁을 받았다. 허백호 서기는 화영의 우파 죄장은 어머니 사회주의 모국인 소련을 모욕, 중상했다는 것이었다. 오옥선과 박성근, 화영의 죄는 지주 장학산이나 국민당 장충국, 조개덕의 대지주 장용객과 패용천 촌의 이봉각 등의 죄보다 더 크다고 했다. 하여 그들 세 우파분자들은 지주, 부농, 역사반혁명분자, 국민당분자들과 함께 고깔모자를 쓰고 한 줄로 서서 투쟁을 당했다. 농사는 제체 놓고 정치투쟁을 백열화하는 바람에 농사는 망쳐 먹었다. 게다가 연속 자연재해까지 덮씌워 농사꾼들은 입에 거미줄을 칠 지경이었다. 만물이 누렇게 번져가는 가을이 돌아오자 허백호 서기의 심갱밀식농사법대로 심은 밭에서 옥수수 몇 알을 거두지 못했다. 반대로 병완과 상순의 말대로 심은 옥수수는 그래도 모진 가물에 물을 길어 주어서 그런대로 한 헥타르에 5천근을 거두었다. 그리하여 모든 것이 자연히 결론이 나왔다. 그러나 허백호 서기는 이젠 심갱밀식농사법을 더 고집하지 못하고 정치투쟁의 몽둥이를 휘둘러 우파 모자를 씌워 자기를 따르지 않는 사원들을 하나하나 타도했다. 자연재해에 정치 투쟁의 세찬 파도 속에 떠밀리어 다니는 사원들은 주린 배를 끌어안고 보릿고개를 넘지 못해 죽어가는 소리로 아우성쳤다. 지어 굶어 하나하나 이 세상을 떠나가기도 했다. 상우는 너무도 굶어서 피골이 상접할 지경으로 되였다. 어느 날 너무 배고파 상우는 태평강 건너 양돈장 근처 동생 상순이네 집으로 찾아갔다. “형님, 왔소? 어서 올라오오.” 상순은 바람에 날려갈 듯이 여윈 형님의 손을 잡고 구들에 올라갔다. “아주버니 왔습둥?” 명옥은 아주버니를 반갑게 맞으면서 점심 차비를 했다. 그런데 쌀 고생을 어찌나 하였던지 가마에 쌀을 얹은 지 며칠 됐다. 명옥은 밑바닥이 난 쌀독을 떠올리자 어쩌다 온 시형에게 뭘 끓여 대접할 가고 근심했다. 그러다가 그녀는 바깥에 나가 생산대에서 돼지죽을 끓일 불을 때라고 돼지 굴 부근에 쌓아 놓은 콩깍지를 안아 들여왔다. 그녀는 콩깍지를 맷돌에 갈기 시작했다. 상우는 앓아누운 아버지를 보자 두 손을 잡고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아버지, 그렇게 정정하던 아버지가 앓다니? 이 놈의 3년 재해가 아버지를 쓰러지게 만들었구나. 아버진 고향 명천에서도 한다하는 힘장사였는데. 빈손이 돼서 앓는 아버지를 찾아와 문안도 못한 불효자식을 용서합소.” 범도 마구 잡아먹을 근력을 가졌던 천하의 기준도 굶어서 머리를 들지 못하고 있었다. 상우는 호주머니에서 동전 열다섯 개를 꺼내 앓는 아버지 손에 쥐어 주었다. “아버지, 이 돈으로 약이라도 씁소.” 기준은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상순은 “감사하오. 형님, 며칠씩 굶으면서 이게 어디서 난 돈이오?” 하고 의아해 했다. 상우는 손사래를 쳤다. “더 묻지 마라. 너 아주머니 몰래 모아둔 돈이다.” 상순은 도리머리를 흔들며 “좌우간 감사하오. 이 돈을 보태 아버지께 약을 지어다 대접하겠소.”라고 했다. 기준은 명옥에게 건사하라고 동전을 건네주었다. 한참 후 명옥이 콩깍지 가루를 끓인 죽을 퍼서 밥상에 올렸다. 상우는 콩깍지 죽을 받아 후후 불면서 맛있게 먹었다. “에구, 이 세월에 콩깍지 죽이라도 한사발이면 온 하루 견딜 만 하지.” 상순은 목이 꺽 막혀 입을 하 벌리고 있다가 죽사발을 밥상에 내려놓았다. “아니, 형님, 그래 죽 한 사발을 잡숫고 어떻게 온 하루 삐친단 말이요? 형수는 형님을 죽 한 사발도 안 준단 말이오?” 상우는 제수 앞인지라 아내의 허물을 하기 싫어 에둘러댔다. “네 아주머닌들 빈 쌀독을 가지고 용빼는 수가 있니? 처하구 순애가 먹고나면 죽물 한 숟가락도 남는 게 없다.” 상순은 한숨을 천정이 날아나게 내쉬었다. 그는 마음속으로 어질고도 어진 상우형님이 불쌍했다. 그리하여 한마디 해주고 싶었다. “형님, 아주머니하구 말해서 때마다 죽물이라도 얼마간씩 나눠 잡숫소. 처자만 처자라고 사양하다가 정말 형님이 세상을 뜨기라도 하겠소. 이 놈의 재해 년에 정말 형님이 근심스럽소.” 동생의 충고에 상우는 그저 묵묵히 앉아 아무런 대답 한마디도 하지 않고 엉거주춤 엉덩이를 들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상순은 형님이 맥없이 머리를 숙이고 비틀거리며 함흥 촌으로 돌아가는 뒷모습을 보고 코마루가 시큼해나는 것을 어찌는 수 없었다. 그는 자기가 항상 인민군중들이 배불리 먹고 잘 살게 하려고 뛰여다녔지만 허사였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며 도리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 놈의 세월에 범바위골로 들어가 감자라도 심어먹게 했으면 좋으련만…) 장닭이 “꼬끼오-오-” 홰를 길게 치며 우렁차게 목청을 뽑았다. 거무스레한 어둠살이 안개 발이 흩어지듯이 사라지면서 시들고 말라 죽어가는 나무와 풀들이 뒤덮인 산과 들판이 선명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패용천산 기슭을 연분홍으로 물들였던 진달래꽃들이 지고 개울가의 개나리들이 샛노랗게 피어나고 있었다. 산과 들의 꽃들이 시들어 떨어지고 나무와 풀들이 시들고 말라 죽는 살풍경은 사람들을 전에 없이 쓸쓸하게 만들어버렸다. 상순은 이튿날 생산대 대장 허동원에게 청가를 맡고 일을 제쳐놓고 아버지 약을 지으러 가려고 서둘렀다. 명옥은 까래 밑을 들춰 집에 있던 동전들을 긁어모아 전날 시형이 준 돈에 합쳐 상순에게 주었다. 상순은 돈을 쥐고 윗방에 올라가 무릎을 꿇고 앉아 “아버지, 함께 병원에 가 봅시다. 무슨 병에 걸렸는지 약을 씁시다.”라고 했다. 그러나 기준은 누운 채 우명하게 패운 눈으로 효성이 지극한 아들을 올려다보면서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난 병이 없다. 병원에 가지 않겠다. 그 돈으로 쌀, 쌀이나 얼마간 사다 밥이나 한술 다구.” “예.” 상순은 손으로 눈물을 닦으면서 일어나 돌아나갔다. 그도 진작 알았다. 원래 몸이 굉장했던 아버지는 속에 병이 없었다. 다만 자연재해와 인재로 인해 제대로 잡숫지 못해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상순은 그래도 앓는 아버지 기를 도와주려고 동전과 부스럭 돈을 주어들고 진수해 약방에 가서 인삼을 달라고 했다. 그러자 약방 점원은 동전을 안경 너머 내리 보더니 코웃음쳤다. “요걸로 어떻게 인삼 사오?” 상순은 “아버지가 앓는데 기맥을 출 약을 지어주오.”라고 했다. 그제야 점원은 머리를 끄덕이더니 약 세봉지를 달랑 지어 주고 동전을 세 받았다. 집에 돌아오자 상순과 명옥은 풍로 불을 피워놓고 약탕기에 약을 닳였다. 해가 지기 전에 상순과 명옥은 약을 광목천에 쏟아 짜서 약을 한 사발 받아냈다. 그들은 정성 들여 약 사발을 들고 아버지한테 들어갔다. 아버지를 안아 일으키고 효성의 약을 대접했다. 상순은 시름이 놓이지 않아 온 마을을 다 돌아다니면서 돈을 꿔 가지고 YB병원에 가서 정규상을 찾았다. 심혈관내과에 가보니 문이 꼭 잠겨져 있었다. 문을 똑똑똑 두드려도 안에서 아무런 인기척도 없었다. 복도로 이리저리 다니면서 찾아보아도 정규상을 찾을 수 없었다. (에참, 한창 병을 볼 시간에 문을 꼭 닫고 뭘 해? 혹시 칸을 옮기지 않았는가?) 상순은 심혈관내과란 간판을 단 칸이란 칸은 다 돌아다니면서 아무리 이 칸 저 칸 들여다 봐도 정규상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허, 별 일이다. 심장전문가가 심혈관내과에서 병을 보지 않고 어디로 갔담?) 그때 심혈관내과 사무실에서 이전에 정규상과 함께 마주 앉아 병을 보던 서기인지 뭔지 했던 의사 박영발이 걸어 나왔다. (안에 있으면서 문을 열지도 않았어?) 상순은 속으로 두덜거리면서 박영발 서기에게 다가갔다. “여보세요. 박서기 아닙니까?” “어, 허,” 박서기는 농사꾼차림을 한 상순의 아래위를 훑어보다가 면목이 좀 있었는지 “오, 그래. 무슨 일이오?” 하고 물었다. 상순은 정규상이 있던 칸을 가리키면서 “아버지가 편찮아서 정규상 주임을 찾아 왔습니다. 안에 있습니까?” 하고 말했다. 그러자 박서기는 대뜸 낯색이 퍼렇게 변했다. “정규상은 주임이 아니오. 우파분자를 찾아서 뭘 하오? 흥!” “우파라니? 그래 이 병원에 없습니까?” 박영발 서기는 검퍼래서 “저 아래 2층 소화내과에 가 보오.”라고 마지못해 알려 주고 사무실로 휭 하니 들어가 문을 쾅 닫아버렸다. 상순은 우두커니 서서 꼭 닫긴 심혈관내과 사무실을 멍해 바라보다가 2층으로 내리어 갔다. 2층 복도에서 두리번거리며 소화내과를 찾을 때 누군가 뒤에서 옆구리를 슬쩍 건드렸다. “아니, 이게 상순이 아니오?” 상순이 머리를 돌려 보니 정규상이 아니겠는가! “형님, 그간 무사했소?” 상순이 반가와 소리치자 규상은 사무실과 복도를 두리번거리더니 상순을 데리고 세면실로 들어갔다. 상순은 따라 들어가면서 이상한 감이 들었다. (무슨 눈치 보여?) 규상은 세면실에 들어가서 수도 물을 틀어놓고 문 밖의 동정을 살피면서 나직이 물었다. “무슨 일로 여기까지 왔소? 아버지는 잘 있소?” 상순은 수척해진 규상을 보자 대뜸 울먹해졌다. “아버지 편찮아 왔소.” “안됐구나. 어떤 정황이냐? 모시고 올 게지.” 규상은 아버지 정황을 죽 이야기 하고나서 뒷말을 이었다. “올해 농사를 쫄딱 망쳤소. 허백호 서기는 무슨 심갱밀식농사법인지 해서 한 헥타르에 5만근을 거두라고 강박했소. 그런데 50근도 거두지 못했소…” 이때 안경을 건 의사가 세면실에 물 초롱을 들고 들어왔다. 그러자 정규상은 변소로 들어가 소변을 보는 척 했다. 상순은 의아해 하다가 안경쟁이가 나간 후 규상에게 물었다. “어째 이상하오. 형님은 왜 남의 눈치를 그렇게 살피오?” 규상은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더니 복도에 누가 엿듣는 사람이 없는가 살피고 되들어왔다. “동생만 아오. 난 지금 우파 모자를 쓰고 병을 볼 권리마저 박탈당했소. 세면실과 변소를 청소하라오. 난 환자와 만나지도 못하게 하오.” “뭐라오? 어쨌다고 그런다오.” “쉿-” 정규상은 상순을 한쪽으로 데리고 가서 나직이 말했다. “여기서 말할 일이 아니오. 말 한마디를 했다가 좌우간 이렇게 됐소. 기준 삼촌의 약 처방을 떼는 날엔 또 투쟁당하고 검사서를 써야 되오. 언제 시간 있으면 함흥 촌에 가서 삼촌의 병을 보기요.” 세상이 돌아가는 형편이 너무나도 험악해 상순은 더 말도 나가지 않았다. “알았소. 우린 함흥 촌 아랫마을 조개덕에 이사했소. 그럼 형님, 주의하오.” 정규상은 상순을 바래며 미안해 두 손을 싹싹 비볐다. 상순은 정규상의 처지가 불쌍해 목이 꽉 막힌채 작별하고 병원을 떠났다.                                          8. 함정      붉은 태양이 대지를 비추자 온 세상이 붉게 물들어 갔다. 태양의 따뜻한 햇볕에 만물이 소생하는 것은 예사로운 일이다. 하건만 온 한 해 불비를 퍼부었기에 온 대지가 후꾼후꾼 무덥고 가물어 한해 농사를 또 망쳐 먹었다. 사원들은 쌀 고생을 하다못해 서북풍을 마실 지경이다. 그렇게 뜨겁던 태양은 초겨울이 되기 바쁘게 이번에는 대지를 꽁꽁 얼어붙게 만들었다. 눈보라가 사납게 윙윙 불어치면서 창문을 두드리며 찬 기운이 집 안에까지 마구 파고 들었다. 여우도 맵짠 추위에 눈물을 똑똑 떨어뜨릴 엄동설한이건만 시내에서는 정치투쟁이 백열화돼 부글부글 끓어번지는 도가니 속 같았다. 정규상이 억울하게 우파 모자를 쓴 것은 아주 억울한 정치사건이고 무함사건이었다. 어떻게 말하면 음흉한 자들이 계획적으로 은밀히 파놓은 함정에 빠졌다고 할 수도 있었다. 언제 우파 모자를 쓸지 몰라 모두 신경을 도사리면서 출근하던 어느 날이었다. YB대학에서는 교원대회를 열었다. 정규상도 의학학부의 부교수였으므로 회의에 참가했다. 회의에서 한 책임자는 동원연설 가운데서 당의 정풍을 협조해달라고 동원하면서 당에 대한 의견이 있으면 무엇이든 주저하지 말고 제기하라고 했다. 회의가 끝난 후 사무실에 돌아온 YB대학 의학학부 당총지 서기 박영발은 정규상을 조용히 찾았다. 그는 복도를 두리번거리더니 사무실 문까지 절컥 잠그고 아주 신비하게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정주임, 정주임이 책임지고 교원들을 동원해 의견을 청취한 후 정리해 당위에 회보하오.” 정규상은 이마 쌀을 찡그렸다. “아니, 난 당원도 아닌데 왜 하필 나한테 그런 일을 시키오?” 그러자 박영발은 눈을 가슴츠레 뜨더니 바투 들이댔다. “당신은 우리 의학학부 부학부장이 아니오? 당의 정풍을 도와 달라는데 고만한 일도 못하겠소? 황차 당신도 당원에 들자고 신청한 적극분자가 아니오?” 정규상은 그래도 선뜻이 대답하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망설이면서 창문 밖을 내다보았다. 열이 불끈 오른 박영발은 마땅찮은 눈길을 보내는 것이었다.       “당조직에서 도와달라면 할 게지. 무슨 군말이 그리 많소. 당에 대한 고만한 충성심도 없소?”  박영발의 그 눈길에는 아주 음침하고 복잡한 내면세계가 번뜩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때 정규상은 그 눈길 속에 숨어 있는 음흉한 심보를 보아내지 못했다. “그럼  의견을 수집해 당위에 보고하겠소.” “좋소. 당에서는 정주임을 믿소. 그래야 입당도 남 먼저 하지. 허허허.” 박영발의 길죽한 낯에서는 사특한 웃음기가 너불거리었다. 정규상은 이튿날 오전에 의학학부 교원들과 YB병원 내과 의사들 그리고 간호사들까지 불러 의견청취회의를 열었다. 회의를 당장 시작해야 하겠는데 박영발 서기만은 2층 회의실에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정규상이 내과 서기 사무실에 가보니 문이 꼭 닫겨 있었다. 그가 노크하고 문을 열고 들어가보니 박영발은 신문으로 얼굴을 가리고 앉아 있었다. “회의를 시작하겠는데 박 서기 없어서 시작하지 못하고 있소.” “정 주임, 당원들에 대한 의견을 청취하는 회의인데 내 가면 불편해하오. 누가 서기 앞에서 당에 대한 의견을 제기하겠소?” “오, 알았소.” 회의실에 돌아 온 정규상은 당에 대한 의견을 제기하라고 교원과 의료일군들을 동원했다. 교원들은 모두 서로 눈치를 보면서 입에 빗장을 지르고 묵묵히 앉아 있었다. 회의실은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한참 후 한 교원이 대담하게 발언했다. “당과 군중간의 관계가 긴장한데 이 문제를 시급히 해결해 주십시오.” 삽시에 회의실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 교원은 제 자리에 앉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규상은 그 교원을 돌아보며 팽팽하던 신경을 느슨하게 만드는 말을 했다. “구체적으로 실례를 들어 얘기하십시오. 의견을 드리는 것은 당에 대한 충성심으로부터 출발한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당에 허물이 있으면 제기해서 고치게 하면 우리 당이 더욱 발전하고 위대하게 될게 아닙니까? 괜찮습니다. 구애 받지 말고 얘기하십시오.” 그제야 그 교원은 우쭐 일어나 대담히 말했다. “우리 내과 박 서기를 보십시오. 진종일 문을 꼭 닫아걸고 신문만 본단 말입니다. 병원의 한개 과 당총지 서기 뭡니까? 의사라면 환자들 병을 봐야지 신문만 보다가 퇴근하면 됩니까? 또 군중들이 당총지 서기를 찾아가 담화를 하려고 해도 무슨 일을 하는지 항상 문을 꽉 닫아건단 말입니다. 사실 군중들은 서기 사무실 문고리를 쥐였다가도 두려워서 말도 하지 못하고 만 적이 많습니다.” 그 교원이 선코를 떼자 웅성거리던 회의실은 도가니 속처럼 부글부글 들끓기 시작했다. 교원들은 너도 나도 앞장서 신변의 당원들에 대한 별의별 의견을 다 드렸다. 회의가 끝난 후 정규상은 당의 정풍을 도우려는 충성심에서 교원들과 의료일꾼들을 찾아다니면서 당 조직에 대한 의견을 더 수집했다. 뒤이어 며칠 밤도와 교원과 의료일군들이 제기한 의견을 12가지로 귀납해 당 조직에 바쳤다. 그중에 이런 의견도 있었다. “당과 군중은 물과 고기와 같아야 되는데 당 총지 서기실 문이 꽁꽁 닫혀서야 되는가? 당과 군중 간에 문턱이 있어야 되는가? 응당 이런 문턱부터 없애야 합니다.” 당총지 서기 박영발은 정규상이 종합정리해 가져온 두툼한 의견서를 받아들고 펼쳐 보더니 길죽한 말상에 간교한 웃음을 지었다. “당에 대해 의견이 아주 많구만. 좋소. 수고했소.” 며칠 지난 뒤 문제가 터졌다. 정규상은 그 의견서가 화근이 돼 우파 모자를 쓰고 몇 십 년이나 고생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해 3월에 정규상은 전국소수민족참관단의 120명 가운데의 지식분자 소조 조장으로 돼 할빈, 대련, 천진, 북경, 상해, 광주, 내몽골 등 전국 각지를 참관했다. 그 사이에 북경 5.1국제노동절을 경축하는 천안문성루 관례대에 올랐다. 그런데 그 좋던 기분이 사라지기도 전에 의학학부에 돌아와 보니 2층 회의실로 올라가는 난간에 그를 공격하는 대자보가 다닥다닥 나붙은 것이 첫눈에 띄었다. 대자보의 주요 과녁은 그가 수집해 제기한 12가지 의견서였다. 기실 그것은 정규상이 한 말도 아니고 군중들이 제기한 의견을 그가 귀납해 제기한 것뿐이었다. 그것은 또 당위 지시에 따라 정풍을 돕자는 합리화건의라고 보는 것이 옳았다. 허나 정치모자공장에서는 그에게 터무니없는 “우파모자”를 끝내 들씌웠다. 하긴 YB대학 의학학부에서도 몇 프로에 해당된 우파분자를 만들어 투쟁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러나 우파대상이 하나도 나타나지 않아 박영발 서기는 쩔쩔 맸던 것이다. 그 대목에 정규상이 그처럼 엄청난 12가지 의견을 도처에 뛰어다니며 수집해 귀납해 바쳤다. 박영발은 무릎을 탁 치며 잘코사니를 불렀다. "이런, 이런! 네 놈이 우파 모자를 써 봐라.” 하느님도 무심하지. 당에 대한 충섬심이 오히려 화근으로 되다니? 청청 하늘이어, 어이하여 세상에 이런 억울한 일도 다 있는가? 억울한 우파 모자를 들쓰고 집에 돌아온 정규상은 침식을 잊은 채 구들에 털썩 들어 눕고 말았다. 그는 부모를 조선에 보내면서도 조선 고향에 나가지 않았다. 지어 그를 보고 연변에 남으라고 동원하던 림춘추까지 조선에 가벼렸다. 하지만 그는 조선 고향에 가지 않고 이 땅에서 중국 공산당과 조선족의 의학교육을 위해 룡정에서부터 국자가에 들어와서까지 불철주야 가시덤불을 헤쳐 왔다. 그가 그래 중국 공산당을 반대한 우파분자란 말인가?        1949년 여름에 정규상은 조선 평양의과대학으로 고찰하러 나갔을 때다. 그렇게 함께 살자고 하는 부모와 여동생들을 보고 중국 조선민족의학교육 사업이 자기를 요구한다면서 그들을 중국에 되돌아오라고 동원한 그가 아닌가! 하나 밖에 없는 아들로서 어린 여동생과 매부에게 부모와 어린 여동생 셋이나 맡겨 놓고 하루 밤 묵어서 부모를 떠난 그의 심정이 오죽했겠는가! 그릇마저 없어 바가지에 밥과 국을 떠 자시는 부모형제들을 조선에 남겨두고 하나도 돕지 못하고 두만강을 건너온 그, 6.25전쟁에 두만강이 막힌 미국비행기 폭격에 시체마저 남기지 못한 아버지를 보지도 못하고 사업한 그의 충성심, 당과 인민, 민족의 의학교육사업에 대한 그의 충성심을 무엇으로 다 표현하랴! 그런데도 우파란 말인가! 건국 전에 입당신청서를 쓰고 당 조직에서 시키는 일은 발을 벗고 나선 그가 아니었던가! 그는 깊은 함정에 훌렁 빠지고 말았다. 누가 그것이 정치 야심가들이 파놓은 보이지 않는 정치 함정일 줄을 꿈에나 생각했겠는가! 그 함정은 어찌나 어둡고 깊고 침침한지 몇 십년을 허우적거리고 발악해도 헤어 나오기 힘든 함정이었다. 밤이 가고 흐린 날이 희붐해지도록 그는 천정만 멍하니 쳐다보았다. 이튿날 밤 먹장구름이 덮쳐왔다. 창밖에서는 소낙비가 우르릉 꽝꽝 우레 소리와 더불어 억수로 퍼부었다. 웬 승용차가 문 밖에 와 조용히 멈춰 섰다. 이윽고 똑똑똑 노크 소리가 나직이 들렸다. (밤 일곱 시도 넘었는데 누구일가? 날 붙잡으러 온 게 아닐까?) 착잡한 생각에 모대기면서 정규상이 일어나면서 들어오라고 맥없이 말했다. 그런데 들어온 이는 생각 밖으로 정성해 서기의 부인 리영희었다. “어떻게 돼 오셨습니까? 혹시 정 서기 앓습니까?” “…” 정규상은 아무 말도 없는 리영희를 따라 밖에 나가 승용차에 앉았다. 비가 억수로 퍼붓는데 그들은 어느새 자그마한 호수 옆에 있는 정성해 서기의 주택에 이르렀다. 정규상은 화분에 물을 주던 정성해 서기가 들어오라고 하자 온돌 침실에 들어갔다. 정성해가 손을 씻고 올라왔다. 정규상은 인차 “어데 아픕니까? 봅시다.”라고 하면서 다가앉았다. 그러자 정성해는 “아니요. 동무 속이 아픈 거 같아 속이나 풀어주자고 오라 했소.”라고 했다. 뒤이어 술상이 들어왔다. “자, 한잔 들면서 얘기하기요.” 정성해 서기가 권하자 정규상은 마음을 놓고 함께 한잔을 쭉 냈다. 정성해 서기는 채를 집어 정규상의 앞에 놓인 접시에 놓으면서 말했다.       “지금 시국에 주의해야 하오. 그러나 아무 근심하지 말고 계속 자기 앞의 일을 잘하오.”      그 우렁우렁한 말소리에 정규상은 속이 훅 풀렸다. 속이 든든해지는 감이 들었다. 코마루가 시큰해났다. 그것은 곤경에 빠져 억울한 우파 모자를 쓰고 정치투쟁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려들어 허우적거릴 때 구명환을 뿌려주는 구명은인을 만난 심정이었다. 정규상은 뒷심이 든든해졌다. 그는 시름 놓고 술잔을 쭉쭉 굽 냈다. 정성해 서기는 그에게 술을 부어주면서 따금하게 충고해주었다.        “동무는 정치안광이 너무 없소. 자기 속심의 말을 아무한테나 다 해서야 되오?”        정규상은 인차 손사래를 쳤다.       “아닙니다. 아니, 건 내 개인 의견이 아닙니다. 군중들의 의견을 귀납해 제기했을 뿐입니다.”        정성해 서기는 답답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당과 군중 관계를 혼돈하지 마오. 좌우간 근심하지 마오. 당에서 시키는 일을 했으니까. 계속 당에서 시키는 일을 잘 하오. 시간이 흘러가면 공정한 판결이 있을 게요.”       정규상은 정성해 서기 말을 듣고 시름 놓고 술을 마셨다. 하여 그날 밤에 둘이서 한 근 술을 다 마셨다… 그 후 정규상은 YB대학 의학학부 부학부장 직무를 철직받고 YB병원 내과의 청소공으로 돼버렸다. 환자도 보지 못하고 진종일 변소와 병실을 청소하면서 사상개조를 해야 했다. 그때부터 그는 거의 날마다 우파 고깔모자를 쓰고 이른바 우파 분자라는 모자 외에도 “반당분자”, “심장내과 반동권위”, “반역자”, “내부간첩”, “일본특무”, “조선특무”, “매국역적” 등등 숱한 터무니없는 모자를, 억울한 모자를 쓰고 투쟁당했다. 박영발 서기는 투쟁대회에서 정규상의 머리를 쥐어 시멘트땅바닥에 마구 짓 쪼아 놓았다. 정규상은 머리가 터져 대뜸 피가 질벅하게 흘렀다. 박영발 서기는 악에 받쳐 꽥꽥 고함쳤다. “이 놈은 철두철미한 반당분자입니다. 당에 어떻게 의견이 많으면 12가지나 만들어냈겠습니까?” 정규상은 억울해 숙이었던 머리를 쳐들면서 고함쳤다. “억울하오. 건 박서기가 날 보고 시키지 않았소? 내가 당원도 아닌데 하지 못하겠다고 하자 박 서기는 사무실에서 문을 걸고 뭐라고 했소? 당조직을 돕는 셈치고 군중들의 의견을 수집해 당위에 보고하라고 하지 않았소?” “에끼, 이 놈, 생사람을 잡는다. 내 언제 그랬니? 이 놈이 사상개조 표현이 나쁘구나.” 박영발은 청년 교원과 의사, 학생들을 시켜 쇠줄에 큰 돌을 묶어 가져오게 해 정규상의 목에 걸었다. “반당 우파분자 정규상”이라는 글줄이 달린 커다란 돌이 어찌나 무거운지 쇠줄이 목덜미를 파고들면서 목에서 피가 질벅하게 흘렀다. 정규상은 목이 아프다 못해 까무러치고 말았다. 그러자 박영발 서기는 학생들을 시켜 정규상에게 찬물을 끼얹게 했다. 찬물을 맞은 정규상은 겨우 일어났다. “계속 투쟁합시다.” 박영발 서기는 정규상을 손가락질 하며 마구 무함했다. “이 놈은 항상 심장전문가라는 기술을 뻗대고 서기인 나를 업신여긴 반당분자입니다. 이 놈 정규상은 일본 특무입니다. 항일전쟁시기에 일본 놈들이 대준 장학금으로 공부한 일본 국비생 대학졸업생입니다. 이 놈은 조선특무입니다. 이 놈의 아버지와 어미, 여동생들은 조선에 있습니다. 그래도 조선특무 아니라고 하겠는가!” 그러자 정규상은 너무 억울해 고함쳤다. “일본 국비생이면 다 특무입니까? 조선에 부모형제가 있으면 다 조선 특무입니까? 여기 조선에 친척이 없는 교원이 몇입니까? 그래 박서기는 조선에 친척이 없습니까? 그럼 박서기도 조선특무입니까?” 말문이 막힌 박영발은 한참 입을 다물고 멍해 서있다가 다른 빈 구석을 찔렀다. “이 놈이 정말 자기 죄를 승인하지 않는구나. 네놈이 이전에 농촌에서 온 네 아버지 친구네 아들이 왔을 때 뭐라고 했는가? 그 상순이라던가 그 사람 굶은 조카가 죽어나갔다는 말을 들을 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아무래나 백성들이 배불리 먹구 살면 되지. 무슨 일이 중요한가?’…” “난 그렇게 말한 적도 없소. 그저 농촌에서 빈하중농들이 배불리 먹고 살면 얼마나 좋겠는가고 말한 적은 있소. 생사람을 물지 마오!” 박영발은 정규상이 완강하게 부인하자 말로는 안 되겠으니 주먹다짐을 들이댔다. 그는 구두 발로 숙인 정규상의 머리를 마구 찼다. 그러고도 성차지 않아 목에 건 돌멩이를 매단 쇠줄로 마구 톱질 하듯이 쥐어 당겼다 밀었다 했다. 정규상은 목이 베져 뻘건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그는 너무 아파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그 정경을 보던 군중들은 너무 구차해 상을 찡그리면서 머리를 숙이었다. 여기저기 여성의무일군들의 비명소리가 들리었다. 정규상은 그런 모진 투쟁을 받으면서, 비인간적인 모욕받고 피 흘리며 어둠속에서, 고통 속에서 외롭게 지지리도 깊고 긴 음흉한 함정의 어둠 속을 무릎걸음으로 기고 또 기여야만 했다.
114    대하소설 진달래 소야곡 (4) 댓글:  조회:1418  추천:0  2017-11-26
         6. 실련영탄곡        (오~ 내 '레날 부인'은 정말 붙잡을 수 없는 부평초야. 오 맞아, 은영아, 넌 부평초야."       성호는 숙사를 내려오면서 부평초란 즉흥시조를 짓기 시작했다.       "호수에 둥둥 떠돈 무근초 부평초야, 그래, 넌 뿌리 없는 부평초처럼 이 남자 저 남자에게 떠돌아다니는 부평초야."        "오빠, 호호호. 누가 부평촌가요?"    뜻밖에 길 옆에서 정희가 뛰여나왔다. "밤중까지 숙사에 돌아가지 않고 뭐 해?" "내 물을게 있는데요. 은영이 그렇게 좋아?" 희미한 가로등 불빛에도 파랑새의 굳은 표정이 드러났다. "네가 뛰여나온 바람에 즉흥시조 령감이 다 날아났어." "즉흥시조?" "그래, 부평초, 뿌리 없이 떠도는 부평초." "호호호." 파랑새 정희는 코를 싸쥐고 웃었다. "진짜 오빠를 두고 짓는 근사한 시조군요. 뿌리 없이 떠도는 부평초. 내 한마디 보태 줄가요?" "뭐야?" "‘묻노니, 산들 미풍에 이리 저리 떠돌겠나?’ 이건 제가 오빠에게 하는 속심의 말이예요." 성호는 저도 몰래 웃음보를 터뜨렸다. "아니야. 부평초는 은영과 파랑새를 두고 짓는 시조야!" "아니예요. 오빠야말로 부평초예요. 호호호." "너, 정말!" 성호는 도망치는 정희에게 주먹을 불끈 쳐들었다. 정희는 깔깔깔 웃으며 녀성숙사 쪽으로 달아났다. 성호는 숙사에 돌아와서도 밤중까지 침대에서 이리궁실 저리궁실 하면서 은영을 빗대고 시조 "부평초"를 다듬었다. 저쪽 침대에서 책을 보던 승호도 보다 못해 책을 놓고 이불을 들쓰고 코를 드렁드렁 골았다. 성호는 끝내 부평초란 시조를 다 써서 제비꼬리처럼 쪽지로 접어 웃 호주머니에 잘 간직했다. 이튿날 성호는 교실로 올라 갈 때 올리막길에서 은영이 오기를 기다렸다. 드디여 은영이 체육머리를 흩날리며 사뿐사뿐 다가왔다. 성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시조를 쓴 쪽지를 건네주고 교실로 가버렸다. 은영이 교실로 들어가 가만히 쪽지를 꺼내 책상 밑에서 피뜩 읽어보았다.   부평초 호수에 뿌리 없이 떠도는 부평초야 파란 이팔 빨간 꽃잎 지녔다고 뽐내지 마 묻노니, 산들 미풍에 떠다니다 말겠냐?   은영은 어이없어 피씩 웃으며 쪽지를 쓰레기에 버리려 했다. 그러다 말고 그 시조에 몇 마디 쓱쓱 쓰더니 책가방에 건사했다. (누가 누구에게 써 보낼 시조인가요?) 그녀는 공부를 하다가도 교수의 강의를 듣지도 않고 가방에서 쪽지를 꺼내 지우고 또 뭐라고 쓱쓱 쓰고 또 지우고 다시 썼다. 점심에 숙사로 내려 갈 때 은영은 옆 교실에서 불쑥 나온 성호를 따라갔다. 조용한 나무 밭 속 오솔길에 들어서자 은영은 나직이 "오빠, 밤중까지 쓴 시조를 잘 보았어요."라고 하더니 책가방에서 쪽지를 꺼내 건네주었다. "이건 제가 오빠에게 드리는 시조예요." 성호는 쪽지를 펴보지도 않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하긴, “부평초”는 우리 둘의 합작시조인 셈이지. 이건 영원한 기념이 될 수도 있는 명시조야.) 은영은 뒤에 파랑새 정희가 따라 오는 걸 보고 발뺌을 하듯 총총히 녀성숙사 쪽으로 내려갔다. 성호는 숙사에 돌아와 슬그머니 그 놈의 쪽지에 손이 갔다. 그는 평소에 지하 독서실에 가 있던 승호가 침실에 있는 것을 보고 위생실에 갔다. 위생실에서 성호는 호주머니에서 쪽지를 펴 보았다. 자기가 쓴 시조 "부평초"아래에 이런 글씨가 씌여 있었다.        누가 누구에게 써 보낼 시조인가요? 나도 오빠에게 드릴 답시조라겠는지 충고라겠는지 한수 썼어요.   참새 날마다 재잘재잘 떠드는 참새야 어느 깨알 더 큰가 저울질만 하겠는가 역은 새 방아간이나 지나가지 맙소서   "허허, 정치학부 학생답잖게 잘 썼는데." 성호는 은영이 자기를 역은 참새에 빗대 야유했는데도 욕할 대신 감탄이 앞섰다. 성호는 은영이 쓴 답시조를 읽고 또 읽어도 야유보다 마지막 "충고"의 구절이 마음에 쏙 들었다. ( 질투의 불길을 달아주었더니 속이 좀 탄 모양이야. 내 '어느 깨알이 더 큰가 저울질 하는” 것이 꽤나 답답한 모양이지. 그래, 난 지금 파랑새냐 너 체육머리냐 저울질하고 있어. 역은 새가 방앗간을 지나갈 거 같아? 건 다 속담에 지나지 않아. 난 절대 방아간을 날아지나가는 참새 격이 되지 않을 거야. 근심하지 마. 사랑스런 체육머리야.) 성호는 은영이 고마워 시조에 대고 키스까지 뽁 안겼다. 그렇다. 은영이 곱다 못해 이젠 야유를 당해도 밉지 않았다. 어느 날 체육시간에 싱거운 꺽다리 범송이 글쎄 생각 밖에 성호와 씨름을 하자고 걸고 들지 않겠는가. 그 앤 어느 진 씨름경기에서 일등을 한 적이 있어 자신 있게 성호에게 도전했다. (싱거운 자식!) 범송은 춤판에서도 독무를 추기 좋아했다. 땅바닥에 엉덩이가 거의 닿을 정도로 물앉았다가도 뻐드렁다리를 펴며 일어나면서 두 손을 천정이 닿을 정도로 올리 뻗칠 때면 숱한 녀학생들이 웃어 죽을 지경이였다. 싱거운 범송은 늘 자기가 춤을 잘 춰서  웃는가 여기고 점점 괴상한 동작으로 너펄거렸다. 성호는 범송의 도전에 응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성호는 원래 주먹치기는 잘 하지만 씨름 같은 건 별로 해본 적이 없었다. 자신감은 없었지만 응전하면서 모래판에 나섰다. (잘 됐어. 녀자애들 앞에서 어디 혼나봐라!) 범송은 성호보다 키가 한뼘이나 더 큰데다 실팍했다. 황소 같은 범송이 떡 끌어안자 성호는 숨마저 꽉 막히고 범송의 다리가 어떤 동작을 하는가 살피기도 어려웠다. 승호가 "시작!" 하기 바쁘게 범송은 성호를 끌어안고 안손을 치면서 황소처럼 떠밀었다. 성호는 힘도 써보지 못하고 썩박나무통이 넘어가듯 뒤로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처녀애들은 비명을 질렀고 승호랑 너무 일방적이기에 재미없다며 도리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범송은 사기충천해 오른 주먹을 하늘로 쳐들며 처녀애들 앞으로 가서 으시대며 테를 돌았다. 성호가 엉덩이 모래를 툭툭 털면서 볼라니 언제 왔는지 옆 학급의 은영이도 숱한 처녀애들 속에 끼여 있지 않겠는가. (헛참, 이거 은영이 앞에서 무슨 꼴이야.) 성호는 머리를 푹 숙이고 테를 돌면서 키 큰 범송을 재낄 수를 생각해보았다. (또 황소처럼 떠밀어봐라.) 두번째판이 시작됐다. 약이 오를대로 오른 성호는 범송이 안손을 치지 못하게 오른 손을 딱 쥐였다. 아니나 다를가. 범송은 큰 키와 힘을 믿고 또 황소처럼 마구 떠밀었다. 그때 성호는 옆으로 몸을 홱 탈아 빼더니 손바닥으로 범송의 뒤통수를 탁 치며 왼손으로 엉덩이를 콱 떠밀며 고함쳤다. “가라! 이새끼!” 범송은 자기 힘에 모래에 머리를 처박았다. 숱한 녀학생들은 “우~와~” 하고 감탄했다. 처녀애들은 황소 같은 범송에게 보통 체구의 성호가 또 당하리라 예상했다. 그런데 뜻밖의 장면을 보고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세번째판이 시작됐다. 범송은 얼굴의 모래를 툭툭 털고 악이 올라 성호의 허리를 끊어지라고 주먹을 쥔 손으로 꽉 누르며 틀어쥐고 내동댕이쳤다. 하도 날랜 성호였기에 멀리 뿌려나갔지만 오또기처럼 모래판에 앉았다가 되일어섰다. 약이 오를 대로 오른 범송은 말상을 흔들며 서우처럼 덮쳐들어 성호를 끌어안아 하늘 높이 쳐들어올렸다가 모래에 내리메쳤다. 허나 성호는 모래 우에 살짝 날아내렸다. 그는 번개 같이 달려들어 범송의 사타구니 밑에 오른 손을 밀어넣더니 물소 같은 꺽다리를 산천경개를 구경해보라고 건뜻 들어올렸다. “야- 힘장사로구나!” 어디선가 은영의 감탄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범송은 허망 들려 성호의 어깨 너머 두다리를 버둥거리며 발악했다. “에끼, 이놈새끼! 저리 가라!” 성호는 갈범처럼 고함치며 범송의 한종아리를 가로 치며 태를 쳤다. 범송은 엉덩방아를 찧으며 절구통처럼 맥없이 쿵 쓰러졌다. 너무 아파 오만상을 찌푸렸다. “2대 1! 성호가 이겼어!” 승호가 고함쳤다. 그런데 범송은 눈에 쌍불을 켜고 달려들더니 성호의 뺨을 찰싹 갈겼다. 성호도 벼르던 참이라 재차 날아드는 갈구리 같은 손을 피하면서 자세를 낮추며 오른 주먹으로 범송의 아래배를 올리쳤다. 련이어 성호의 무쇠주먹이 두다리 새를 강타했다. “아이쿠!” 범송은 사타구니를 움켜쥐고 비명소리와 함께 무릎을 꿇었다. 성호는 그때라고 주먹으로 말상을 올리 걷어쳤다. 범송은 뒤로 벌렁 쓰러져 땔, 땔 굴렀다. 성호는 승호랑 동창들이 말리건말건 발길을 날려 범송의 길쭉한 말상을 마구 걷어찼다. 힐끔 곁눈질해 보니 은영은 바늘로 쏘는 듯한 눈길로 표독스레 성호를 쏘아보는 것이 아니겠는가. 허나 성호는 마음 속으로 시원해하였다. 청춘의 활기로 가슴 벅찼던 대학교 시절은 동지섣달 해처럼 짧기도 짧았다. 오래지 않아 졸업하게 되였다. 실로 평생의 리상을 실현할, 전도를 개척할 관건적인 시각이 닥쳐왔다. 승호랑 연구생시험준비에 헌 세집에서, 열람실에서, 교실에서 골똘히 공부하고 있었다. 그러나 성호는 은영이라는 사랑의 돛배에 리상을 실현하는 돛을 올릴 푸른 꿈을 꾸면서 어디 려관 손님이면 그렇게 시름놓고 잘 잤겠는가. 점심을 먹고 해가 서산에 지도록 쿨쿨, 저녁을 먹고 련애소설이나 읽고 은영을 낚을 묘수만 궁리하다가 초저녁부터 이불을 들쓰고 누워 쿨쿨, 하여간 머리가 뗑 해나고 온 얼굴이 팅팅 붓게 자고 또 잤지. 진짜 자는 시간 외에는 알심 들여 사랑환상곡을 짓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밤, 쿨쿨 자던 성호는 누가 이불을 활 벗기고 코를 마구 비트는 바람에 와닥닥 놀라 깨났다. “왜 이래? 남의 단잠을 깨우면서.” 성호가 툴툴거리면서 이불을 쓰고 되누우려 할 때였다. 이번에는 성호의 귀를 마구 비틀어 쥐여 일으키지 않겠는가. 벌떡 일어나보니 승호가 아니겠는가. “이 자식!” 성호가 주먹을 쳐드는데 승호가 주먹을 내리면서 “조용히 할 말이 있어.”라고 하며 침실 밖으로 나갔다. 다른 애들은 삼각련애 일로 싸우자고 그러나 해서 성호를 보고 주의하라고 했다. 성호는 승호가 또 전번에 범송을 메쳐놓고 한바탕 족쳤다고 한판 붙어보자고 찾는가고도 생각하며 운동복에 가벼운 신까지 신고 따라나갔다. 칼바람이 낯을 핥으며 윙윙 불어쳐 나무가지들에서 무서운 비명소리를 내 분위기가 자못 신경을 곤두서게 했다. 승호는 성호를 데리고 세집으로 들어가 전등을 찰칵 켜지 않겠는가. 성호는 한숨을 후- 내쉬면서 어두운 전등불빛을 빌어 세집을 둘러보았다. 언제 헌집인가 싶게 말쑥하게 거두고 새로 천정과 창문을 간단히 장식까지 했다. 실내에는 성호와 함께 들어 올려온 침대에 책걸상  밖에 없었다. “이게 네 지하독서실이냐?” “응, 앉아라. 친구로서 충고하는 거야. 아무리 ‘급제 만세 시대’라고 하지만  졸업장이라도 탈 수 있게 명심해 공부해라.” 성호는 뒤말이 궁금해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승호는 깜장눈을 한번도 깜짝하지 않고 정중하게 말하는 것이였다. “련인이 없으면 고독하고 타격이 클 수도 있다. 하지만 은영과 정희와 그런 련애 그만둬! 삼각련애, 질투 따위는 이 세상 련애사에서 지나간 옛 방법이야. 련애는 그래도 내가 선배지. 사랑은 대방의 감정에 대한 향수이고 티 없이 맑고 깨끗한 두 순정으로 연주하는 아름다운 사랑의 멜로디야. 네가 ‘사랑의 돛배에 리상의 돛을 올리려는 건’ 얼마나 순결하지 못해? 너 은영을 사랑하니? 아니면 그 애 아버지 권력을 탐내는 거냐?” 성호는 자기를 훈계하는 승호가 눈꼴사나웠다. “검정개 돼지 흉을 작작 해라. 넌 그리 련애를 하지 않겠구나. 픽!” 승호는 놀라는 기색이 조금치도 보이지 않았다. “내 말은 련애면 련애지. 사내대장부가 뭐야? 녀자애들의 치마폭에 휩싸여 뜻을 펴려고 하다니? 너무 연약하고 가련하잖아?” 성호는 승호의 말을 듣다 못해 변명했다. “얘, 점점, 무슨 말을 하는 거냐? 모로 가도 서울에 가면 돼. 네가 삐칠 일이 아니야.” 그는 자기 말이 얼마나 가련할 정도로 무력한가를 느끼며 실망스러워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승호는 깜장눈으로 성호를 똑바로 들여다보면서 련주포를 쏘았다. “계속 이따위로 놀면 난 친구로 보지 않아. 땅을 밟고 하늘을 떠인 사내대장부가 지구라도 삼켰다가 토할 큰 뜻을 세울게 아니라 사랑을 구걸하고 권세에 아부하고 동창생을 질투하고 상사병에 걸리고. 뭐냐? 권세가문의 치마자락에 매달려 상류사회에 기어오르려고 꿈을 꿔? 가소롭다, 진짜 가소로워! 4년 동안 배운 건 고작 고거냐?” 성호도 자기 이른바 주의를 토로했다. “얘, 이 검정개야. 네 말에 도리 있어. 허나 지금 학교에서 졸업배치도 책임지지 않는데 그래 사랑이나 권세가문과의 관계학이라도 쓰지 않고 어쩌니? 관계학도 생산력이잖아. 그래 부모들의 숱한 돈을 팔고 대학공부를 하고서도 도시 일자리도 못 찾고 시골에 가서 교편을 잡아야 되니?” 승호는 철색얼굴에 비장한 기색을 띠며 뒤말을 이었다. “관계학 소영없다는게 아니야. 우리는 우선 자기 운명을 남에게 맡기지 말고 인류가 수천년 쌓아놓은 문명과 지식을 머리에 넣어야 해. 그래야 이 다음 사회에 나갈 때 관계학이나 사랑철학을 그리 쓰지 않아도 도시에 남아 훌륭한 일을 할게 아니냐? 너처럼 구걸하지 않아도 지식이 있고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는 사랑이 자기 발로 자연스레 찾아올 거 아냐? 대장부란 자기 운명을 자기 능력에 맡겨야 눈 앞의 사랑과 명예, 지위, 금전 따위를 초개같이 보며 떳떳이 자기 갈 길을 나가면서 청사에 길이길이 빛날 업적을 이룩할 수 있는 거야. 친구야, 정신 차리고 공부하게나.” “됐다, 됐어. 너 같이 공안과장의 아들이면 그렇게 해도 될 거야. 허나 농부의 아들은 그렇게 못해.” 승호는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더 말하려고 해도 말이 들 거 같지 못해 그만 두었다. 성호는 지하 독서실에서 나온 뒤에도 승호의 말이 어찌나 철리가 있는지 자기가 얼마나 무지한가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흥, 자식 헌 세집에서 철학을 연구하더니 사랑철학도 깊이 연구했구나. 자식, 약혼녀를 두고서도 제일 야드르르한 홍희라는 꽃을 꺾으려고 하는 주제에 누굴 훈계해?” 그는 승호를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모두들 성호와 그를 친구인데 생김새가 비슷하게 생겼다고 했다. 허나 승호는 그보다 한살 이상인데 뭐나 자기보다 한 수 우였으니까 머리를 숙이지 않을 수 없었다. “흥, 자식, 학교 식당에 갈 때에도 손바닥만한 카드를 쥐고 중이 념불하듯이 뭐라고 중얼거리더니 저런 명언 따위를 토해내는가? 흥, 승호야, 너 같은 놈은 위생실에서 뭘 연구하면서 살겠지만 난 달라. 넌 애비 권력을 빌어 좋은 일자리에 가서 리상을 실현하겠지만 난 농사군의 아들이야. 우리 아버지도 공안국장을 그만두지만 않았더라면 나도 이렇게 속을 태우지 않고서도 시내에서 활개치면서 살 거야. 아버진 얼마나 소박한 토지개혁 때 간부야. 난 그렇게 못해. 절대 그렇게 순박하게 살 수 없어.” 성호는 중얼거리며 손바닥으로 머리를 탁탁 쳤다. “승호, 너희들 동으로 갈 때면 난 혼자 서쪽으로 갈테야. 혹시 시장경제시대에 나 같은 실력가들이 더 쓰일 수도 있어.” 성호는 침실에 돌아와 침대에 눕자마자 눈 앞에 방불히 웨딩드레스를 입은 선녀,  사랑하는 은영과 함께 사랑환상곡에 맞춰 결혼례식장에 들어서는 장면을 보는 것만  같이 눈 앞에 삼삼히 떠올랐다. “오- 나의 레날부인이여!” 성호는 기도나 드리듯이 두 손을 모아 가슴에 대고 눈을 딱 감았다. 이튿날 오후에 파랑새 정희가 성호를 조용히 찾았다. 성호가 현관으로 나가보니 새파란 털실내복에 빨간 쵸치사 목수건까지 맨 정희가 희미한 불빛 아래 더 예뻐보였다. “은영이, 아, 아니, 정희!” 성호는 불쑥 튀여나간 실수에 그만 혀끝을 홀랑 입귀로 내밀었다. 정희는 침울한 표정을 짓더니 “조용한 곳으로 가서 얘기할게 있어요.”라고 하거이 현관 저쪽으로 또박또박 걸어갔다. 정희, 그녀는 이전에 은영에게 질투의 모닥불을 피우는데 공을 세웠다. 성호는 하는 수 없이 은영이 보지나 않나 흘금흘금 곁눈질하면서 정희를 따라 나섰다. 그는 정희가 인도하는대로 그녀를 따라 눈보라 휘몰아치는 대학 뒤동산으로 갔다. 푸른 소나무들이 윙윙 몸서리치며 비명을 질렀다. “무슨 일이야? 추운데 어서 말해.” 정희는 머리를 다소곳이 숙이더니 목수건을 만지작거리며 간신히 빨간 앵두 입을 열었다. “어떤 애가 사랑인지 뭔지 고백하면서 어찌나 치근거리는지. 어떻게 하면 좋을가.” “누가?!” “범송이.” “뭐라고? 범송이?” 정희는 머리를 끄덕였다. “그 자식 개버릇 해. 반반한 녀자는 누나고 뭐고 다 지껄여? 흥!” 성호는 그제야 자기가 은영과 정희를 동시에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사실 성호는 정희를 질투의 불씨로만 쓰기 아까울 정도로 마음 속으로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재삼 느꼈다. 허나 리상의 꿈을 실현하려면 은영의 아버지 막강한 권세를 빌어야만 했다. 은영은 사랑의 녀신일뿐만 아니라 상류사회에 바라오르는 사닥다리였다. 때문에 더 높은 절벽에 있을지라도 그는 정희보다 은영을 골라잡고 은근히 슬쩍슬쩍 다가가고 있었다. 성호는 1 대 1의 련애도 아니고 복잡한 삼각련애, 아니, 이중, 삼중, 다각 련애에 빠진 것이 아닌가? 그 사랑도 더러운 권세욕에 얼룩진 순결하지 않은 건 아닌가? 정희는 격분해하면서 착잡한 생각을 하는 성호를 보고 용기를 내 한술 더 떴다. “난 범송이 은영에게 홀딱 반해 쫓아다녔다는 걸 알아요. 주책없는게 한살 이상인데도 내한테 매달리지 않겠어요?” 정희는 성호를 흘끔 곁눈질 하더니 “난 어쩌면 좋아요?” 하고 물었다. “어쩌긴 어째? 알아 할게지.” “사랑하는 련인이 있다고 했어요.” “누구?” “아이고, 이 능구렁이야.” 정희는 두 주먹으로 성호의 어깨를 북 치 듯했다. “범송이 키도 멀쑥한게 좀 좋아서?” “말이라고 해?” “이전에 볼라니 범송에게 스케트도 가져다달라, 책가방을 메다달라, 심지어 밥까지 타다달라 하면서 꼬리를 쳐들고 한들거리더니. 숫총각의 사랑을 어째 그렇게 헌 신짝 차버리 듯하오?” “픽, 딱 한 가지 리유,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이죠. 내가 심부름을 시키니 아마 자기를 좋아하는가 했던 모양이지. 쳇, 더러운 기름개구리 백조 고기를 먹으려는 거지.” 성호는 놀라운 눈길로 정희의 걀쭉한 얼굴을 신기한듯 들여다보았다. “사실 난 성호 씨 가슴에 질투심을 불러일으키려고 그런 건데요. 범송인 오해한 거 같아요.” 정희는 점점 열을 올렸다. “정희, 말뜻을 알 거 같소. 시간을 주오. 좀 생각해봐야겠소.” 성호는 뒤를 달면서 속으로 어머니와 넷째누나가 항상 하던 말이 떠올라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절대 결혼하지 않을 처녀애들을 다치지 말라. 괜히 대학에서 제명받겠다.” (정희와 결혼하려는 거야? 아님, 왜 뒤를 달아? 량심 없는 놈!) “실망을 주지 말아요.” “에이고, 내 지식이 있소? 돈이 있소? 난 농사군의 아들이란 말이요. 열번째 자식이지만 부모를 모셔야 할 막내아들이라오. 뭘 보고 날 따르오.” 정희는 정색했다. “사랑하기 때문에!” 성호는 이글거리는 정희의 따가운 눈길을 외면하면서 자리를 떴다. 그는 정희를 숙사에까지 데려다주고 눈이 퍽퍽 빠지는 교정의 백양나무 밑에 기대서서 찬바람이 스치는 총총한 뭇별을 쳐다보며 사랑과 리상, 전도를 두고 처음 심각하고도 여러 면으로 심사숙고해보았다. 결론은 간단했다. 기실 정희는 은영보다 인물체격이나 성격이나 다 짝지지 않은 예쁜 처녀애였다. 순수한 사랑을 선택하라면 성호는 아무런 고려도 없이 숲 속에 핀 나리꽃 같은 정희를 선택했을 것이다. (허나 아무런 배경도 없이 대학교수를 믿고서야 어찌 정계에 진출해 상류사회에 바라오른단 말인가? 정희는 전도를 개척하고 리상을 실현하는데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아.) 성호는 이튿날에 다시 정희를 불러 학교 뒤산으로 올라갔다. 정희는 그래도 희망으로 가슴이 부풀어올라 환한 웃음을 지으면서 성호의 뒤를 따라 발목까지 풍풍 빠지는 하얀 눈을 빠드득 빠드득 밟으면서 뒤산 소나무숲 속까지 따라왔다. 성호는 희망에 찬 눈길로 자기를 바라보는 정희에게 차마 실망을 주기 힘들어 한 식경이나 무거운 침묵을 지켰다. 정희의 얼굴에 점점 웃움기가 사라지고 파랑새란 별명답게 파랗게 질려갔다. “왜 아무 말도 안 해요?” “정희, 미안하오.” “알았어요. 은영을 사랑하지?” 성호는 대답을 하지 못하고 그저 머리만 끄덕였다. 정희는 파랗게 질린 볼에 눈물을 주르르 흘리며 성호의 허리를 감아 안았던 팔을 맥없이 스스르 풀었다. 정희는 성호의 허리를 와락 끌어안으며 애원하듯 련주포를 놓았다. “아니죠. 어제 저녁에 내 범송의 말을 할 때 격분해하는 성호씨를 보고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걸 알았어요. 맞지? 성호는 나를 사랑하고 있죠? 왜 자기 감정을 속여요?” 성호는 정희  앞에서 허울이 쫄딱 벗겨졌다. 그는 더는 초라한 모습을 감출 수 없었다. 정희는 계속 반격을 가해왔다. “성호, 성호는 은영을 사랑하기보다 권세가문을 탐낸 거 아니고 뭔가요?” 성호는 답변할 말이 없었다. “우린 청춘을 불태워 노력만 한다면 자기 능력으로 얼마든지 전도를 개척할 수  있다고 봐요. 자기 감정을 속이지 말고 진정한 사랑을 택하세요.” 그러나 성호는 은영에게 모든 희망을 걸고 사랑과 전도를 가지고 도박을 걸었다. 그는 아주 허위적인 인간으로 탈바꿈했다. “정희, 난 정희를 사랑한 적이 없소. 절대 오해하지 말고 사랑의 키를 돌리오. 빨리 돌릴수록 좋을 거요.” “알았어요. 사랑은 구걸할 수  없어요. 꼭 후회할 거예요.” 정희는 눈물을 씻더니 한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어깨를 들먹이면서 맥없이 휘청휘청 산 아래로 내려갔다. 빨간 목수건이 바람에 날려 눈위에 떨어진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가 내 시선에서 사라지자 성호는 정희의 빨간 목수건을 주어들고 보다가 품 속에 건사했다. 뒤이어 주먹으로 소나무를 피터지게 꽝꽝 치면서 고래고래 고함쳤다. “난 사람이 아니야! 넌 권세욕에 불타는 마귀야! 마귀!” 성호는 무슨 정신에 눈덮인 학교 뒤산에서 내려왔는지 몰랐다. 이튿날 오전에 성호는 수업이 끝나자마자 현관에서 기다렸다가 교실에서 갓 나온 은영 옆에 다가가 걸으면서 점심에 보자고 했다. 누가 은영을 빼앗아라도 갈가봐 선손을 써야만 했다.        은영은 깜장눈을 크게 뜨며 놀란 표정을 지으면서 대수롭잖게 말했다. “무슨 말인지? 지금 말하면 될게 아닌가요?” “아니, 어떻게 동창들이 오가는데서.” “그럼 말하기 바쁜 문젠가요?” “그쯤 알고 점심을 자시고 교실에 오오.” 그제야 체육머리 은영은 알 것 같다는듯이 머리를 무겁게 끄덕이면서 깜장눈으로 성호를 빤히 들여다보았다. 그 표정만 보아도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몰랐다. 허나 벼른 도끼 무딘다고 그날 점심에 성호는 너무 긴장해 사랑을 고백하지 못하고 뚱딴지 같은 졸업론문을 잔뜩 늘여놓고 정이 폭 든 은영을 놔 보냈다. 성호는 재가루 될 듯한 마음을 쏟아부을 용기마저 없는 자기를 한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학교 속도스케트경기 개막식에서 성호는 뜻밖의 대박이 터졌다. 주최측에서 글쎄 그를 보고 체육머리와 함께 스케이트 쌍무를 추라는 것이였다. 졸업론문준비에 바쁘면서도 그들은 보름동안 발을 맞추고 무용동작을 창작해 매개 동작마다 익숙히 련습했다. 드디여 그날은 오고야 말았다. 3년 전처럼 은영은 탄력 있는 몸에 착 붙는 얇은 오렌지색 나일론운동복에 노란 털실 못자를 썼다. 이전보다 다르게 이번에는 하얗고 탄탄한 허벅다리가 다 드러나게 투명하고 긴 살색 양말을 신고 척 나섰다. 수천쌍의 눈길을 받으면서 성호와 은영은 리종수가 작사 작곡한 “사랑환상곡”에 맞춰 한쌍의 은제비처럼 훨훨 나래 치며 경쾌하게 빙상무용을 추었다. 성호는 흥에 겨워 멋진 조형동작을 리드해나갔다. 성호가 한쪽 다리를 뒤로 높이 추켜들면서 은영씨의 허리와 한쪽 허벅다리를 잡자 은영은 한발로 평형을 잡으면서 꽃나비처럼 두팔을 벌리고 뒤로 누우면서 한쪽 다리를 높이 추켜들었다. 뒤이어 그들 둘이 서로 허리를 안고 나란히 미끄러져나가면서 한 손씩 앞으로 뻗치고 한쪽다리씩 뒤로 높이 추켜들었다. 그들은 관성으로 십여초 동안이나 그 멋진 조형동작대로 판들판들한 빙판 우로 큰 반원을 그리면서 미끄러져나갔다. 여기저기서 섬광등이 번쩍번쩍하였다. 박수갈채가 우뢰가 터지듯싶었다. 그날은 아마 그들이 영원히 잊지 못할 날이였다. 정열에 넘치는 24살 때 그 날은 정열에 불타는 청춘의 한 페리지로 영원히 남아 있을 것이다. 퇴장해서도 은영은 흥분이 가라앉지 않아 가슴을 할딱이면서 성호의 품 속에 꼭 안기더니 허리를 꼭 껴안았다. 순간 성호는 얼마나 놀랍고도 행복했는지 몰랐다. 그는 거기서 용기를 얻고 그날 점심식사를 같이 하자고 했다. 은영은 귀밑을 살짝 붉히면서 “그래요.” 하고 쾌히 응낙하였다. 성호는 조용한 음식점으로 은영을 데리고 가서 점심을 잘 차려 맛나게 먹었다. 성호는 음식점에서 나오자 은영을 보고 정색해 말했다. “졸업시험에 바쁜데 잠간 얘기하다가 가기요.” 은영은 버릇처럼 체육머리를 뒤로 쓸어넘기면서 “퍽 신비한데요.”라고 하면서 따라나섰다. 성호는 부풀어 오르는 가슴을 안고 사랑하는 은영을 데리고 정희를 만났던 학교 뒤동산으로 올라갔다. 무릎을 빠지는 눈을 무릅쓰고 그들은 남들의 눈길이 보이지 않는 소나무 숲 속으로 들어갔다. 학교 무장부나 학생회에 들키는 날에는 야단이였다. 학교에 통보나지 않으면 검사를 해야 했고 학생기률 처분을 받아야 했다. “호호호. 참 랑만적인 설경인데요. 여기서 스키라도 타면 얼마나 좋겠어요?” 성호는 “오늘은 우리 청춘에 영원히 남을 날이니까.”라고 허두를 뗐다. “그래요. 죽어도 잊지 못할 것 같아요. 우리 아빠와 어머니마저 와서 구경했는데요.” 성호는 머리를 끄덕였다. “그래? 날 인사시키지.” 은영은 걀쭉한 얼굴에 웃음을 지었다. “뭐 그렇게까지야.” 성호는 마른 입술을 혀끝으로 축이면서 몇십 번이나 외워보던 말을 느릿느릿 꺼냈다. “은영은 어떻게 생각하겠는지 모르겠소. 한 친구가 은영을 피끓는 청춘의 티 없이 맑은 순정으로 사랑하고 있다오.” “어마나!” 은영은 의아한 눈길을 보냈다. 성호는 외마디 대답을 피하고 계속 에둘러 말했다. “그는 비바람이 불어치고 파도 세차게 쳐도 끄떡하지 않는 바다가의 초석처럼 영원히 드팀없이 은영을 사랑하겠다오.” 은영은 긴장한 기색이라고는 티끌만치도 없이 피씩 웃기만 하는 것이였다. (남은 식은땀을 흘리면서 말하는데 깔깔깔 웃다니?) 성호는 더는 룡암처럼 끓어번지는 정열을 누르지 못하고 은영을 와락 끌어안고 화산 폭발처럼 사랑을 고백했다. “은영이, 사랑하오. 은영의 사랑이 없으면 난 자유와 리상, 행복, 지어 생명과 령혼마저 끝장나오. 난 미쳐 죽을 것 같소. 나를 구해주오. 의심되면 심장이라도 꺼내보오. 내 심장은 그대를 위해 높뛰고 있단 말이요.” 은영은 성호의 가슴을 밀어냈다. “성호씨, 이러지 마. 이럼 난 괴로워.” “왜? 내가 사랑하는데.” “안 될 일이기에.” “왜? 술 마시고 말한다고?” 머리를 살래살래 젓는 그녀. “은영보다 나이 더 많다고?” “사랑에 나이가 대순가요?” “그럼 뭐요? 대학교에서 4년 생활하면서 내 마음 속엔 은영 밖에 없었소. 4년 전 스케트를 타던 그날부터 난 은영을 줄곧 사랑해왔소. 은영은 내 피끓는 청춘의 모든 것이였소.” “성호씨, 스케트를 타거나 사교춤을 춘 건 공동한 과외흥취지 사랑은 아니죠.” “사랑은 공동한 흥취에 토대하지 않는가?” “호호호, 그럴 때도 있겠지만 난 그렇찮아요. 과외애호를 일종 오락으로 논 것이지 거기에 토대해 사랑을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성호는 맥없이 은영을 놓아주며 중얼거렸다. “난 이불을 꾸며주던 날이랑, 아까 빙무를 다 추고 나를 꼭 끌어안을 때도 그렇고.” “호호호. 성호씨, 그래 오빠 같은 동창생이 저녁에 덮을 이불이 없을 때 꾸며주지 않을 수 있겠어요?” “그렇긴 하지. 난 내가 짝사랑을 했다고 믿지 않는데.” 성호는 정신이 나간  것처럼 중얼거리다가 은영의 가녀린 어깨를 잡아 마구 흔들며 부르짖었다. “아니야, 아니! 난 믿어지지 않아. 내 정희를 좋아하는가 의심해 그러지? 간에 가 붙고 쓸개에 가 붙고 한다고? 맞지? 난 정희와 관계를 끊은지 오래.” 그때 은영은 놀란 표정을 짓더니 나직이 입을 열었다. “정희와 갈라지다니. 어마나. 정희 때문도 아닌데.” 그녀는 성호 품에서 몸을 빼더니 아주 조용하면서도 똑똑히 말했다. “이걸 놓고 들어봐요. 사랑을 날개로 삼으려는 사람한텐 사랑도 찾아가지 않아요. 이 시대 처녀애들은 지식이 있고 능력이 있는 개척자에게 자기 평생을 맡기려고 하지 녀성 치마 밑에 기여들고 치마폭을 잡고 바라 오르려는 연약하고 무능한 무골충 같은 남자들을 좋아하지 않아요.” “권세 있고 돈 많은 남자를 좋아하지 않고 언제 나 같은 농부의 아들을 좋아하겠소?” 성호는 멍청하게 눈가루 흩날리는 하늘을 쳐다보면서 중얼거렸다. “나에겐 물려 받을 재산도 없는데다 부모까지 모셔야지. 그게 큰 흠이지. 나한테 웬 머저리처녀가 시집오겠소?” 은영은 정색했다. “오해하지 마세요. 오빠, 몇해전 능력 있고 지식 있는 사람이 되라고 충고하지 않았어요? 그런데도 오빤 그 상이 장상이니 전 실망했어요. 오빤 훌륭한 남자예요. 사내 기질이 있고요. 꼭 저보다 더 좋은 처녀대학생을 얻어 잘 살리라고 믿어요.” 성호는 고함쳤다. “인생은 마라토너요. 이제 금방 스타트선인데. 이제부터 시작하면 안되겠소? 난 은영만 곁에 있으면 무슨 일이라도 해낼 수 있을 것 같소.” 허나 은영은 체육머리를 쓰다듬어 넘긴후 옷매무시를 바로 잡더니 분명히 말했다. “늦었어요.” 그녀의 정색한 맑은 깜장눈길과 마주치자 성호는 가슴이 갑갑해나고 귀뿌리가 윙- 해났지만 그녀의 말을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우린 남이면 몰라도 웃학년 선배인데다 오빠 같은 분이 아닌가요? 더 애나게 굴고 싶지 않아요. 난 이미 사랑하는 남자가 있어요.” “누구? 범송이?” “차차 알게 되겠지요.” “그럼 누구?” “나는 구지욕이 강한 한 탐구자에게 내 사랑을 바치기로 했어요. 그의 연구생 시험준비에 영향을 줄가봐 기다리는 중이예요.” “그 탐구자라는 량반은 행복하겠다. 이렇게 아름다운 은영이 사랑을 받으니까. 건데 도대체 누구요?” 성호의 애탄 말에 은영은 “힌트 한나 해주지요. 지하도서실을 가 본 적이 있죠? 그 남잔…” “앗! 승호?!” 성호는 정수리에 청천벽력이나 얻어맞은 듯이 기겁했다. 그는 몸의 균형을 잡지 못하고 비틀비틀 뒤로 물러섰다. 자기 눈을 의심할 정도로 은영을 똑똑히 쳐다보았다. 은영은 분명 체육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머리를 끄덕였다. 아, 성호의 연극은 이렇게 희극적으로 짝사랑이란 비극의 막을 서서히 내렸다. 성호의 화산 폭발 같던 참사랑도, 옹근 4년 동안 모든 정력을 기울여 엮어온 사랑환상곡도 짝사랑으로 처참하게 끝났다. 그가 바꿔 온 것은 오직 살 용기마저 잃게 하는 실련의 고통이였다. 모든 것이 파멸을 선고하는 그 시각 성호에게는 외로움과 공허감, 슬픔과 칼로 에이는 듯한 마음의 아픔만이 남아 있게 됐다. 성호는 사랑과 질투로 해 고민과 가슴 아픈 실련의 고통을 안고 헤맨 정희와 실련으로 해 정신 이상에 걸린 범송에게도 미안했다. 게다가 동창생들을 볼 면목도 없게 됐다. 성호는 마음  속에 얼기설기 뿌리내린 은영에 대한 사랑이 뽑히는 순간 칼로 에이는  듯한 고통과 절망으로 죽을 것만 같았다. 마음  속에 뼈 속에 골수에 얼기설기 뿌리 내린 사랑의 낚시줄이 뽑히면서 뻘건 피를 흘리고 슬픔이 흘러나왔고 절망의 고름이 처절하게 흘렀다. 성호는 불시에 귀뿌리가 윙 해나면서 시꺼먼 천길 나락 아래로 허망 떨어져내려가는 감을 느끼면서 눈앞이 캄캄해났다. 염라왕국에 갇히면 이런 고통에 비하랴. 사랑하던 은영을 잃고는 살 것 같지 못했다. 소나무 초리에서 눈보라가 절망과 슬픔으로 부서져 흩날렸다. 씁쓸한 눈가루가 모래알처럼 날아와 성호의 뺨이며 목이며 얼얼하게 들부신다. 실련의 눈보라 속에 은영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가녀린 어깨를 들먹이고 오도카니 서 있었다. 그녀 뒤에서 성호가 그 절망의 심연에서 허우적거리며 비틀비틀 간신히 몸을 지탱하면서 멀어져갔다.       은영이 눈보라 속으로 사라진 허허벌판에 성호가 우두커니 서서 즉흥으로 시조를 읖조렸다.                                 장미꽃 맘 속에 춘풍처럼 스며든 녀신아 혜성처럼 다가왔다 별지처럼 사라졌네 외로움 눈보라처럼 하아얗게 서렸네                   7. 미련 성호는 침대에 누워 멍청히 천정 한곳만 쳐다보며 착잡한 생각에 잠겼다. 그는 비록 은영에게 실련당했지만 자기 감정을 시원히 토로하고나니 얼마나   홀가분한지 몰랐다. 그녀한테 어떻게 말할가고 며칠이고 벼르고 별렀지만 결과는 비극적으로 끝났다. 일종 해탈감이라고나 할가. 결과는 어떻든간에 속시원히 활 말해놓고나니 한시름을 놓은 것 같았다. 그러나 뒤이어 이제껏 쌓아온 리상의 달걀무지가 하루 아침에 와그르르 무너지는 감, 그리고 쓸쓸한 패배감도 스물스물 기여들었다. (이날 이때까지 범송이 은영과 좋아한다고 경계했는데. 허참, 승호가 중뿔나게 튀여나올 줄이야. 개새끼, 지하독서실에서 공부하는 척하면서 엉뚱한 짓을 했군. 밤중에 막내 홍희와 쑥떡거리며 련애하더니 아래 학번의 은영까지 넘보았어?) 성호는 벌떡 일어나 앉았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 사랑의 라이벌한테 한대 안겨주고 싶었다. (다 승호를 탓할 순 없지. 은영도 눈이 멀었어. 약혼녀가 있는 승호를 사랑하다니? 헛참, 홍희하고 이중련애를 하는 거 알기나 해?) 성호는 다시 들어누워버렸다. 허나 승호에게 순순히 지고만다는 것도 자존심에 허락되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개 주둥이에 들어간 내 ‘레날 부인’을 빼내오지?) 성호는 침대에 누워 한참 이리 궁실 저리 궁실 하면서 궁리를 굴리고 또 굴렸다. (혹시 건달놈새끼 더러운 밑바탕을 알면 떨어지지 않을가? ‘약혼녀도 있어’, ‘우리 학급 막내와도 련애하더라’. 그럼 은영은 ‘아이고, 사기꾼이야!’ 비명을 지르며 두  손으로 얼굴을 싸쥐고 도망칠 거야. 혹시 귀뺨을 찰싹 갈길지도 몰라. 그 다음엔  나한테 달려올 거야.) 성호는 금시 웨딩드레스를 입고 자기한테 달려오는 물 찬 제비같이 예쁜 은영을 방불히 보는 것만 같았다. 그는 승호의 밑바닥을 들춰내는 일을 한시도 늦출 수 없었다. 며칠이고 은영을 조용히 만나려고 기회를 노렸지만 은영은 련 며칠 눈에 뜨이지도 않았다. 어느 날 저녁에 학교 식당으로 가다가 뭔가 들고 사뿐사뿐 걸어가는 은영을 발견했다. (아이고, 내 사랑아, 오늘 끝내 만났구나.) 성호는 걸어가는 은영의 뒤모습을 보기만 해도 가슴이 설레여 황급히 뒤따라 달려갔다. “나 좀 보기요.” 은영은 와뜰 놀라 주춤 멈춰서 새침한 표정으로 뒤돌아보았다. “어마나, 간 떨어지겠네.” 그 바람에 사발에서 국물이 흘러내렸다. 성호는 뒤덜미를 긁적이면서 “미안하오. 조용한데 가서 얘기하기요.”라고 했다. 은영은 홱 돌아서면서 “무슨 할 얘기 또 있어요? 숱한 애들이 봐요. 창피하게.” 하고 발뺌을 빼기 시작했다. 성호는 리지를 잃고 은영의 팔을 홱 잡아챘다. 쟁그랑! 댕그랑! 밥사발과 국사발이 땅바닥에 떨어져 나뒹굴었다. “왜 이래요? 난 할 말이 더 없어요.” 은영은 화난 나머지 언성을 높였다. 그녀는 지나다니는 숱한 애들을 보더니 귀밑을 붉히며 엎드려 밥사발과 국사발을 주어들고 성호를 쏘아보았다. “다신 찾지도 말아요.” 한마디 남기고는 홱 돌아서서 침실 쪽으로 뛰여갔다. 성호는 닭 쫓던 개 격으로 돼 녀성숙사로 사라지는 은영의 뒤모습을 멍청히 보다가 돌아섰다. 밥맛이 없어 식당에 가지도 않고 숙사 쪽으로 돌아섰다. “성호-” 백양나무 쪽에서 웬 처녀애의 목소리가 들렸다. 성호가 맥없이 머리를 들어 그 쪽을 바라보니 뜻밖에도 해연이 오도카니 서서 자기를 웃는 얼굴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겠는가! 성호는 울적한 기분에 별로 반기는 기색도 없이 다가가면서 퉁명스레 물었다. “여긴 어째 왔소?” “뭐 대학교는 나 같은 로동자들이 오지도 못하는 곳이오?” 성호는 너무 지나친 것 같아 “언제 왔소?” 하며  속에 내키지 않은 인사말이라도 건넸다. 그제야 해연은 해시시 웃으며 성호 옆에 달라붙더니 “한참 되오.”라고 하더니 주위를 둘러보는 것이였다. “저녁식사 했소?” 성호는 볼멘소리로 “밥맛이 없소.”라고 했다. 해연은 성호를 쳐다보면서 “우리 시내에 가서 맥주나 한잔 할가요?”라고 하며 스리살짝 추파를 보냈다. 성호는 눈보라가 윙윙 휘몰아치며 백양나무 가지들이 몸부림치는 을씨년스런 날씨에 몸을 옹송그렸다. “추운 날에 맥주는 무슨?” “그럼 소주 할가?” 성호는 진퇴량난에 빠졌다. 호주머니에 단돈 1원도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버선목이라고 번져보일 수도 없었다. 또 필경 한 마을에서 머리를 맞대고 일하던 해연을 몰라라고 숙사에 들어가버릴 수도 없는 일이였다. “성호는 소비자 아니고 뭐요? 내 한턱 낼게.” 성호의 고충을 알기라도 한 듯한 해연이 선뜻이 성호를 잡아 시내로 끌었다. 성호는 못 이기는 척하면서 시내로 발길을 옮겼다. (이래선 안되는데. 고중생과 약혼하고 결혼할 수 없어. 난 꼭 은영과 같은 권세가의 규수를 꽉 잡아야 출세한단 말이야.) 체면  앞에서 리성의 방패는 산산이 박살났다. 성호는 마지못해 끌리다싶이 시내 음식점에 가서 들어앉았다. 갓 개방한 세월이여서 시내에 음식점이라고는 거의 한거리에 몇집 밖에 없었다. 40평방메터도 되나마나한 음식점에 손님도 몇이 없었다. 성호는 제일 구석진 곳에 가서 자리를 잡고 앉았다. 해연은 메뉴를 들고 보면서 성호가 좋아할 것 같은  돼지고기로, 개고기로, 소고기로 이것 저것 수태 시켰다. “해연이, 언제 다 먹는다고 그래오?” 성호는 미안했다. “근심 말라고.” 그 말에 메뉴를 적던 아가씨는 외면하면서 킥킥 웃었다. 성호는 재수 없는 날이여서 별 수모를 다 당한다고 속으로 욱하고 뭔가 괴여올라오는 것을 겨우 참아냈다. “오빠 좋아하는 모두부야 빼놓을 수 없지.” “됐소, 됐어.” 성호가 손사래를 쳤다. “알았어. 먼저 이만 하고 먹으면서 보지요.” 해연은 아주 흥이 도도해서 성호를 마주 바라보았다. “오빠, 어째 오늘 기분이 썩 좋지 않다. 무슨 일이 있어?” 성호는 입에 빗장을 지른채 묵묵부답이였다. 해연은 성호의 얼굴에 흐르는 검은 그림자를 보아낸듯 화제를 슬쩍 바꾸었다. “오빠, 내 오늘 태평거촌에 올라가 보았는데요. 오빠네 막내누나 왔더라고요.” “막내누나? 건데 어째 고향마을에 갔소?” “뭐, 못 갈델 갔소? 난 태평거촌 집체호 지식청년인데. 또 장차 농촌에 뿌리박고 혁명을 할 사람인데. 호호호.” “쳇, 해연이 어디 한뉘 시골 풀밭에 머리를 파묻고 살 녀자오?” 불쑥 그런 말을 해놓고 성호는 후회하면서 혀를 감빨았다. (해연을 책임지지 못하겠으면 웬 쓸데없는 말?) “내야 든든한 대학생 오빠 있는데 왜 시골에서 살아? 허나 시골 시부모를 위해서라면 내야 시골에서 닭과 돼지를 기르면서 살 수도 있지.” “또, 또. 오빠라고 부르지 말라고. 한살 이상 누난데. 원, 쯧쯧.” “어마나, 지금 세월에 나처럼 자진해 시부모를 모시겠다는 색시감이 어디 있소? 한나라도 있으면 내 비단보에 싸서 이고 다니겠어.” 성호는 더 할 말이 없었다. (그런 걸 어떡해?) 드디여 채가 들어왔다. 해연은 술잔에 소주를 찰찰 넘치게 부어올렸다. “오빠, 오랜만에 오빠와 마주 앉으니 진짜 기쁘오.” 뜻밖에 해연은 술잔을 내밀었다. “한잔 따라주겠어요?” “어쩌지 못하면서 웬 소주요? 맥주나 마시오.” “취하지 않을테니 근심하지 마오.” 성호는 곧이듣지 않고 점원을 보고 맥주 한병 달라고 해 부어주었다. “오빠, 자, 한잔 마시오.” 잘라당 술잔을 마주치더니 해연은 꼴깍꼴깍 굽냈다. 성호도 기분이 상한지라 에라 모르겠다고 굽냈다. 먹지 않아도 먹었다고 할 판이라 성호는 돼지고기점을 짚었다. “막내누나 무슨 일이 있습데?” “아마 애를 낳으러 온 거 같습데.” “그래? 며칠 전에 YB병원에 다니는 우리 이모네 집으로 왔었는데.” “그래도 자기 엄마 집에 와서 낳는게 마음에 놓여 그랬겠지.” 성호는 한시 바삐 막내누나와 매형을 보고 싶었다. 둘다 이젠 술이 거나하게 됐다. 해연은 자꾸 돼지고기채를 더 청해온다, 술잔에 술을 찰찰 넘치게 따라 두손으로 들어 권한다 하면서 정성을 다했다. 성호는 그녀가  눈물겹게 가긍하기만 했다. 성호는 울적한 기분에 해연의 손에서 술잔을 받아 꿀꺽꿀꺽 삼키면서 불쑥불쑥 속심의 말을 쏟아냈다. “너 오늘 밑진 장사 했어.” “뭘? 웃기지 마오. 난 장사하러 온 게 아닌데. 뭘 밑져?” “난 호주머니에 돈 1전도 없어.” “오~ 그런건 근심하지 않아도 돼. 님께선 아직 소비자가 아니오? 난 학교 식당에라도 출근하는 월급쟁이 로동자 아닌가요?” 성호는 불쌍한 자기를 여린 마음으로 보듬어 주는 해연이 불시에 사랑스러운 감을 느꼈다. “그래, 우리 대학교 식당 아줌마, 고맙소.” “아이유, 벌써 취했어? 숫처녀를 보고 아줌마라니?” (실련의 아픔을 달래줄 사람은 너뿐이지. 전도고 리상이고 뭐고 젠장, 해연이랑 같이 예쁘고 풍만한 계집애와 마구 뒹굴면서 놀고 싶은 건 어쩌지?) “너 학교 식당에 취직했니?” “그래, 래일부터 학교식당에 들어가 너한테 국물이랑 퍼줘야 해.” “그래, 잘 됐구나.” 성호는 조용한 음식점을 두리번거리다가 나직이 귀속말을 했다. “얘, 식당에서 돼지고기채랑 가만히 좀 더 퍼주렴.” “고만한 거야 OK!” 성호는 취중에도 용케 리성을 되찾아가군 했다. “얘, 이젠 밤도 깊었구나. 너, 뭘 보고 이 못난 농민의 아들에게 미련을 두고 뒤꽁무니를 쫓아다녀?” 그 기막힌 말에 해연은 손으로 취기 오른 성호의 코끝을 살짝 쥐여 비틀어놓았다. “좋아 그래.” “이전에 내 소를 방목할 땐 날 소 닭 보듯했잖아? 갑자기 이 성호가 그렇게 좋아?” 해연은 억이 막혔는지 입을 함박만하게 쫙 벌리고 다물지 못했다. “사실 네가 대학에 입학하지 않았더라면 그저 멋지고 잘난 총각으로 남을 수도 있었지.” “이런 멍청이라고. 넌 리상과 전도도 안중에 없냐?” “식당 복무원한테 무슨 리상과 전도가 있어? 대학생 성호한테 시집가면 다지.” 성호에게는 그런 말이 아주 실망스러웠다. 순수한 녀성보다도 그래도 리상과 전도를 추구하는 녀성이 지적인 것 같다는 생각이 머리를 탁 쳤다. “한잔, 따라 올리지요.” 이때 주방에서 개고기 한접시를 들고 나온 한 처녀가 다가왔다. 성호의 흐릿한 눈길에도 그녀의 모습에 놀랐다. “아니, 선화야!” 더 놀라 일어선 건 아마 해연인 것 같았다. “선화지?” 성호 이모네 옆집의 그 선화 맞았다. 선화는 성호  앞에 개고기 접시를 내려놓고 술병을 들었다. “한잔 올려도 괜찮을가요?” 성호는 이 술자리가 복잡하게 얽힐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해연은 성호에게 선화를 소개하기에 급했다. “얜, 우리 소학교 동창생이야. 어떻게 돼 여기 있니?” 선화는 보름달 같은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를 흘리며 성호의 술잔에 술을 찰찰 넘치게 따랐다. “어쩌겠냐? 대학에도 붙지 못한게 음식점이라도 차려야 밥벌이를 하지.” “그래, 이 음식점이 네 거냐?” 선화는 머리를 끄덕였다. “보스님,  한잔 받아.” 해연이 술병을 잡자 선화가 찬장에 가서 술잔을 들고 왔다. 그때 성호가 해연의 손에서 술병을 빼앗아 한잔 부어주었다. 선화는 술잔을 들고 “진작 부으려고 하다가 두 분의 주흥을 깨는 거 같아 늦었어요. 아무튼 이후에도 우리 음식점에 자주 오세요. 그럼 제가 소주 한잔 권하지요. 두분 행복할 걸 축원해요.” 하고 말하였다. 그녀는 성호와 해연의 술잔을 달라당 마주쳤다. 성호는 술잔을 높이 들어 쭉 굽냈다. “오늘 기분 좋구먼. 시내 미녀들과 한잔 하는게. 한가지 명확히 할게 있소.” 그는 해연과 선화를 번갈아보면서 “나와 해연은 절대 그런 관계 아니오. 절대 오해하지 마오.”하고 술잔을 들었다. 이때 음식점 문이 벌컥 열리더니 처녀총각 손님이 들어왔다. 그런데 뜻밖에도 승호가 글쎄 홍희를 데리고 들어서지 않았겠는가. “어서 오세요. 단골손님들께서 오셨구만요.” 선화가 마중 나가면서 아양을 떨었다. 홍희는 자기들을 놀라운 눈길로 보는 성호를 발견하고 혀를 홀랑 내밀며 외면했다. 승호는 황급히 홍희를 데리고 자리를 뜨려고 했다. “야, 어딜 가?! 같이 한잔 하자!” 성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승호는 “마셔라! 주흥을 깨뜨리지 않을게.” 하고 나가버렸다. 성호는 뒤쫓아나가려다 말고 제자리에 물앉았다. 선화는 손님을 빼앗겨 아쉬워하다 말고 성호에게 한잔 더 따랐다. “저분들을 어떻게 알아요?” “동창생이요.” 성호는 선화의 잔에 한잔 따라주면서 물었다. “쟤들 여기 자주 오오?” “그래요. 주일마다 서너번 와요. 단골손님인데요.” “그래? 참 좋은 친구지.” 성호는 머리를 끄덕이다가 뭔가 꼬리를 밟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후에 종종 와서 술을 마시세요.” 선화는 해연의 눈치도 보지 않고 성호와 술잔을 부딪치고 잔을 쭉 굽냈다. 성호는 “승호, 저 친구는 우리 학급의 체육위원인데. 정말 능력이 있는 친구지.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하고 녀자친구도 많고.” 하고 슬슬 올리췄다. “그런 거 같아요. 번마다 다른 녀자친구 데리고 오던데요.” “혹시 체육머리를 한 녀자애도 데리고 왔소?” “예. 체육머리 굽실굽실한 녀자 체격 진짜 죽여주더구만요. 좀 나이 있는 녀잔 티격태격 말다툼을 하던데요.” “그래?” 성호는 가능하게 옛날 약혼녀 아닐가 짐작됐다. 성호는 머리를 가로 흔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순간 리성의 높은 장벽이 해연, 선화와 자기 사이에 우뚝 일어서는 감을 느꼈다. (그래, 그 한마디가 고맙구나. 해연아, 넌 교수 딸이니까 . 학교식당에 들어와 일하면서라도 시내에서 만족스레 살진 몰라. 선화, 넌 음식점을 차려 돈이나 벌면서 잘 살 수 있어. 난 농민의 자식이야. 그러나 너희들과는 달라. 나한텐 상류사회로 진출할 원대한 포부와 리상이 있어. 절대 리상과 전도를 포기할 수 없어. 너희들을  선택하는 거면 같은 값에 분홍치마라고 정희를 선택하지.) 선화의 깎 듯한 인사를 뒤로 하고 성호가 바깥에 나오자 차디찬 눈보라가 실련의 쓸쓸함과 함께 윙윙 휘몰아쳐왔다. 해연의 덕분에 거나하게 마셨건만 그의 마음을 쓸쓸하게 만들었다. “고맙다.” 성호의 말에 해연은 “이담 두고 두고 인정을 갚아다오.” 라고 했다. 성호는 그저 머리를 끄덕였다. “이담 로임 타면 한턱 낼게.” “돈은 싫어. 사랑해달라.” 성호는 비틀거리며 해연의 부축을 받아 겨우 학교 대문어귀까지 왔다. “이 팔을 좀 놔라. 남들이 보면 련애한다고 소문나겠어.” “소문 나면 뭐라니?” “이러지 말래도.” “우리 집에 가 놀래?” “어디로 가? 놔라.” 성호는 용케도 팔을 빼내고 비틀거리며 숙사 쪽으로 걸어갔다. 뒤에서 해연은 오도카니 서서 성호의 뒤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미련에 찬 눈길이 보이지 않는 한오리 실처럼 어둠  속에서 성호의 잔등으로 따라갔다. 눈보라 치는 어둠  속에서 성호를 바라보는 미련에 찬 눈길이 또 한나 있었다. 진짜 눈물겨웠다. 그 주인공이 바로 정희였다. 성호가 은영에게 미련이 남아 있는 것보다 못지 않게 그녀는 아직도 성호에게 가는 미련이 남아 있었다. 헌데 해연의 부축을 받으며 비틀거리는 성호의 뒤모습을 보고 실망의 파도가 찰랑거렸다. 정희는 도리머리를 흔들더니 비틀거리며 숙사로 발길을 옮겼다. 침실에 돌아와 맞은켠 승호의 침대를 보니 이불이 개여진 채 사람은 없었다. (요놈 자식, 홍희를 데리고 어데서 노는 모양이야.) 순간 성호는 그들의 꼬리를 밟아서 은영한테 알려주고 싶은 충동이 생겼다. (옳다. 항상 열집의 사위가 돼야 한다더니 약혼녀를 두고 홍희와 은영을 건드려? 어림도 없어. 만천하에 쫄딱 밝혀놔야지.) 성호는 침실에서 나와 주춤 멈춰섰다. (요 교활한 새끼, 어데 가서 개 수작을 할가? 선화네 음식점엔 다시 안 갈 거고.) 바깥에 나와 서성거리다가 눈보라치는 백양나무숲 속을 바라보는 순간 혹시 어둠  속에 홍희를 껴안은 승호의 징그러운 모습을 방불히 보는 것만 같았다. 성호는 주먹을 으스러지게 쥐고 눈보라 속을 헤집고 교정의 백양나무숲 속을 헤집고 찾고 또 찾아 헤맸다. 허나 승호네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순간 천진한 막내동창생 홍희가 불쌍해났다. (어쩜 시내에 남으려는 미련에 승냥이 같은 색마한테 얼리워? 네 처지  불쌍해.) 그는 숙사로 돌아오다가 2층 세집 전등이 켜졌다가 깜빡 꺼지는 것을  발견했다. (혹시 저 것들이 헌 세집에서? 그래, 지하독서실이 어쩜 이 추운 겨울엔  제일 좋은 련애장소지.) 성호는 다짜고짜로 세집으로 슬금슬금 다가갔다.  평소에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은지 오랜 곳이였다. 2층 제일 안쪽에 있어 조용하기로 천혜의 련애장소였다. 밤중인지라  바늘이 떨아지는 소리마저 들을 수 있을 지경으로 아주 조용하였다. 성호는 도적고양이처럼 헌 세집에 다가가 문꼬리를 잡아 당겨보았다. 문이 꼭 잠겨 있었다. 그때였다. 집 안에서 와닥닥, 와닥닥 무슨 소리가 들리고 녀성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왜 이래? 미쳤어?” (아니, 홍희 목소리 같은데.) “미치긴? 함께 이 시내에서 살겠으면 내 말을 곰상곰상 들어.” “그래도 그렇지. 결혼도 안하고 맨날 이럼 돼?” “우린 이미 몇번이나 결혼했는데도 왜 이래?” “들키면 어째? 퇴학맞자고 이래?” “근심하지 말라? 아무도 모르니까.” 성호는 자기 귀를 의심했다. 문에 난 옹이구멍으로 들여다보았다. 그는 "지하독서실" 안에서 벌어진 광경에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승호가 글쎄 한 녀자를 깔고 들어앉아 그걸 하려고 덤벼들고 녀자는 밑에서 두다리를 버둥거리면서 저항하고 있지 않겠는가! 성호는 심장이 바깥으로 튀여나올듯이 쿵쾅, 쿵쾅 높뛰였다. “누구야? 혹시 은영이? 머리카락이 긴 걸 보니 체육머리가 아니야.) “이러지 말래도?” “홍희, 사랑해. 한번이면 어떻고 열번이면 어때? 이미 쒀놓은 죽인데.) “오빠, 약속해. 나하구 결혼하겠다고. 영원히 배신하지 않겠다고.” “이젠 몇십번 맹세했어. 영원히 사랑해, 영원히 네 신랑이 돼주마.” “은영을 좋아하지 않지?” “그래, 너만 사랑할게.” 성호는 자기 귀를 의심했다. 승호가 색마처럼 어린 막내 홍희를 깔고  씨닥거리는 것을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었다. (홍희 불쌍하구나.) 성호는 놀란 나머지 그 자리를 바삐 떴다. 그러나 고약한 생각이 머리를 쳤다. (잘됐어. 네 놈이 이러고서도 은영과 좋아해?) 침실에 돌아와 성호는 복잡한 생각을 굴렸다. 그는 은영의 마음을 돌려세우기 위해서라도, 아니, 은영을 승냥이 같은 색마의 아가리에서 빼내기 위해서라도 승호의 진상을 알려줘야 했다. 그러나 친구를 잃을 것을 생각하니 한편으로 마음 한 구석이 아팠다. 더구나 사건이 커지면 승호와 홍희는 퇴학맞을 수도 있었다. 은영 때문에 그들의 전도를 망치고 싶지 않았다. 이때 승호가 침실에 돌아왔다. 그는 자는 척하는 성호 쪽을 흘끔 곁눈질 해보더니 침실에서 되나갔다. 그날 밤에 승호는 다시 침실로 돌아오지 않았다. (개자식, 진짜 미쳤구나. 지하독서실? 픽, 지하섹스장이라고 해라. 오늘 밤에 허리 뚝 부러지게 밤을 새겠지. 큰 일은 큰 일이야.) 성호는 친구로서 승호를 속심의 말로 타일러주지 못하는 것이 자못 마음 아팠다. 성호는 구경 어떻게 해야 은영을 쟁취할 수  있을가?                                                                          
113    대하소설 진달래 소야곡(3) 댓글:  조회:1704  추천:0  2017-11-23
                     4. 체육머리 처녀        성호는 요즘 시내에 와서 대학가의 처녀 은영이나 시내 처녀애 선화를 여겨보면서 자기 마음에 미묘한 변화가 생기는 것을 느꼈다.        (왜 이래?순희와의 순박한 첫사랑을 절대 배반해선 안되는데.) 예쁜 대학생처녀나 시내물에 전 섹시한 처녀애들이 자기 사랑의 방파제를 충격할 때마다 그는 흔들리는 마음을 질책하면서 도리머리를 흔들군 했다.        (아니야, 난 벌써 사랑에 빠져서는 안돼. 공부를 해야 해. 순희고 은영이고 선화고 다~) 성호는 침실에서 침대에 누워 착잡한 생각에 빠졌다가도 도리머리질하며 삼검불 같은 번민에서 벗어나려고 모지름을 썼다. 며칠 전 일요일 점심, 성호는 시내 이모네 집에 놀러 갔다. 그런데 아무리 노크해도 아무런 인기척도 없었다. 성호가 한참 서성거리다가 몸을 돌려 층층계를 내려가려는데 파란 세다를 입은 웬 예쁜 처녀가 나타나 리상한 눈길로 성호를 훑어보다가 놀라했다. “아니, 성호 아니요?” 성호도 놀랐다. 집체호의 선화였다. 그는 짐짓 “우리 이모네 어델 갔지?” 하고 중얼거리면서 뒤머리를 긁적였다. “오, 우리 아래집 분이 이모 돼요?” 그녀는 성호의 왼쪽가슴에 단 대학 마크에 눈길을 멈추더니 활기 넘쳐났다. “잠시 기다리세요. 이제 조금 있으면 올 거예요.” 그녀는 말을 마치고 집 문을 열고 들어가면서 잠간 우리 집에 들어가 기다리오.” 라고 하는 것이였다. “아니, 난 여기서 이모를 기다리겠소.” 눈치 빠른 선화는 어색해하는 성호의 손을 잡아끌었다. “어마나, 줄나긴, 면목 모를 집이오?” 그때 이모가 나타나 어색한 장면을 타개해줄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성호야, 우리 옆집 선화야.” 선화를 보고는 성호를 가리키면서 “내 외조카야. YB대학에 다닌다. 서로 알고 지내라."라고 했다. “저 선화는 우리 생산대 집체호에 내려왔댔습니다.” 성호는 선화와 어색하게 눈길을 마주쳤다. 이모의 말에 의하면 선화는 마음이 어찌나 착한지 자기 딸처럼 가깝게 지낸다고 했다. 그런데 대학 입학시험을 3년 채 쳤는데 계속 몇 점씩 모자라 입학하지 못해 애나한다고 했다. "정말 넌 글을 잘 쓰지 않느냐? 쟤 글짓기를 좀 지도해주면 안 되겠니?" 선화는 그 말에 새침한 표정을 지으면서 콕콕 찌르는 눈길로 성호를 여겨보는  것이였다. 그 표정에는 네가 내 선생을 할 수  있겠는가는 심리상태가 환히 드러났다. 성호는 입을 헤 벌리고 웃는 것보다 새침한 표정을 짓는 선화가 오히려 그렇게 이쁜 것이 이상할 지경이였다. 순간 성호와 선화의 눈길이 반공중에서 조용히 마주쳤다. 선화는 쌍까풀눈을 살며시 내리깔더니 자기 집으로 들어가는 것이였다. (이러면 안되는데. 순희를 가수로 가르쳐달라고 이모부한테 부탁하러 왔다가 선화한테 반하면 안되는데. 선화는 인정미가 있긴 하지.) 그제야 성호는 순희가 똑똑한 녀자애라는 것을 새삼스레 느꼈다. 예쁜 처녀애들을 보기만 하면 마음이 흔들리는 자기를 어떻게 첫사랑이란 말끄댕기를 하나 잡고 믿고 시집오겠는가. 성호는 허구픈 웃음을 피씩 웃었다. 이날도 그는 금방 선화의 글짓기를 좀 지도해주고 돌아왔다. 그는 침실에 누워서도 선화의 퍽 인상 깊은 쌍까풀눈과 어깨 너머 물결치던 머리카락이 떠올랐다. 선화의 오빠도 퍽 인상 깊었다. 이모의 말에 의하면 선화의 번대머리 오빠는  30대 초반의 로총각이라고 했다. “시간이 있으면 저 선화를 도와주오. 저는 대학생이 아니고 뭐요. 저 애도 올해 시험을 쳤댔는데 내 말을 통 듣지 않더니 락제했소…” “오빠! 별 말을 다해요. 창피하게.” “야, 쓸데없는 성악공부를 그만두고 이 대학생한테서 많이 배워라. 저 애는 통 내 말을 듣지 않소. 되지도 않는 노래나 자연과학을 공부해서 잘못됐소. 사회과학이 상대적으로 쉽지 않고 뭐요?” “오빠! 그만두래도!” 선화는 앵두입술을 뾰족이 내밀면서 콕콕 찌르는 눈길로 오빠와 성호를 번갈아 쏘아보더니 책을 와락와락 걷어치웠다. 그녀는 훌 일어나더니 침실로 들어가면서 문을 쾅 닫아버렸다. 오빠는 너부죽한 얼굴에 실망에 찬 표정을 꽉 싣더니 도리머리질을 홰홰 저었다. “안되오. 쟤는 오빠가 무식하다면서 통 말을 듣지 않소? 그래도 사회과학을 배워야 사무실에 엉덩이를 척 붙이고 들어앉아서 철 밥통을 끌어안고 편안히 살 수 있겠는데. 쳇.” 선화의 오빠는 한숨을 후~ 내쉬였다. “아차, 깜빡 잊었군.  대학교에 복습재료랑 좋은 거 있으면 가져다주오.” 그는 초면강산에도 스스럼없이 성호에게 부탁했다. 시간도 퍽 간 것 같아 성호는 엉거주춤 일어났다. “점심을 자시고 가오.” 선화의 아버지마저 대학교 교수라는 틀을 차리지 않고 아주 친절하고 스스럼없이 대했다. 성호는 선화가 들어간 침실 쪽을 힐끔 곁눈질해보았다. 빠금히 열린 침실문  안에서 파란 세다가 바람결처럼 사라지는 것을 훔쳐볼 수 있었다. 성호는 지금도 보조개를 옴폭 파면서 방실방실 웃던 선화의 우유빛 얼굴이 삼삼거렸다. 성호는 돌아오기 전에 뒤를 달려고 선화의 집 서재에서 파금의 “집”이란 소설책을 쑥 뽑아들고 밥상에 마주 앉아 공부하는 영애 쪽으로 다가갔다. “선화, 이 책을 가져다 보고 가져올게.” 선화는 새침한 얼굴을 거두고 생글 웃으면서 일어나더니 떠나가는 성호에게 손까지 흔들었다. “빠이-빠이!” (아, 내 마음이 왜 저 오뉴월 하늘처럼 변덕스럽게 파도칠가? 순희를 보면 순희를 좋아하고 대학가에선 아래학급 은영이 예뻐보이고 시내에선 선화가 절세미녀 같고, 에참, 세상의 예쁜 처녀들을 다 사랑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가.) 성호 스스로도 산들산들 불어치는 미풍에도 흔들리는 갈대 같은 자기 마음으로 해 심란했다. 허나 무슨 수로 파도치는 마음을 달랜단 말인가? 성호가 선화네 집에서 돌아올 때까지만 해도 맑게 개였던 하늘이 갑자기 먹장구름이 몰려왔다. 불 뱀이 대지에 뻘건 불혀를 번쩍 뻗치더니 먹장구름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진짜 짐작하기 어려운 변덕스러운 오뉴월의 하늘이였다. 성호는 아무리 마음을 순희에 대한 첫사랑, 그 한 곬으로 몰아가려고 해도 잘 되지 않았다. 예쁜 처녀들만 보면 수시로 가을바람을 맞은 늪 가의 갈대처럼 흔들리는 것이 아니겠는가. 원래 한 학급의 누나들은 여겨보지도 않았다. 보통 대학가에는 공부를 잘하는 처녀애들이 적었다. 중학교 때부터 인물자랑이나 할만큼 예쁜 처녀애들은 대부분 일찍 련애나 하면서 공부를 잘 하지 않아 그런지 대학에 오지 못하고 일찍이 시집이나 가버린 것 같았다. 그런데 아래 학급의 어린 대학생처녀들 가운데는 꽃같이 예쁜 처녀애들도 드문드문 눈에 뜨이였다. 특별히 옆 교실을 드나드는 체육머리를 한 처녀애가 성호의 눈에 쑥 들어왔다. 걀쭉한 우유빛얼굴에 버들잎같이 꼬리가 살짝 쳐들린 짙은 눈썹, 어글어글한 깜장눈, 오똑한 코, 작고 빨간 앵두입, 진짜 "홍루몽"의 미녀 주인공 림대옥이 울고 갈 미녀가 아니겠는가. 더구나 칠칠한 체격에 탄력 있어보이는 그녀의 몸매는 성호의 가슴을 억누를 지경으로 압박을 가해왔다. 저도 몰래 한번 꽉 껴안고 키스벼락을 뻑뻑 안겨주었으면 속이 시원할 것 같은 강한 충격을 받았다. (안돼. 괜히 학교 기률을 어겨서 퇴학이나 맞으면 어쩔라고? 어떻게 힘들게 입학했다고 경거망동한단 말인가?) 천지꽃산 기슭에서 소방목을 하다가 입학한 목동 출신 대학생 성호는 이성으로 인해 강한 성적인 충동을 받을 때마다 대학교 기률로 자기 꿈틀거리는 용암 같은 사랑의 화마를 지지누르면서 억제하군 하였다. 개혁개방 초기라는 것도 있었지만 대학교당위 기률검사위원회 허철만 서기는 제대군간부출신인데 학생기률을 군부대 기률처럼 엄하게 다스렸다. 그는 대학생들은 "재학 중에 련애를 해서는 절대 안 된다."는 대학생수칙을 내놓고 련애를 하는 대학생만 잡아내면 호되게 처분했다. 한번은 이런 기괴한 사건도 있었다. 성호의 한 동창생이 벽돌공장에 가서 한 녀대생과 어깨에 손을 얹고 련애를 한창 할 때였다. 불시에 전지불이 쭉 비치더니 "꼼짝 말라!" 하고 돼지 멱따는  듯한 고함소리가 울렸다. 깜짝 놀란 처녀총각은 선불 맞은 노루처럼 화닥닥 도망쳤다. 어지러운 전지불이 뒤따르면서 계속 고함소리 들렸다. "꼼짝 말라! 계속 도망치면 총을 쏜다!" 그 고함소리에 처녀총각은 꼼짝달싹 못하고 그 자리에 못 박힌듯 멈춰서  “체포”됐다. 그들은 학교 무장부에 끌려가서야 기률검사위원회 허서기라는 것을 발견했다. 한참 심문을 받고 둘 다 신분이 밝혀진 후에야 겨우 풀려나와 숙사로 돌아왔다. 하지만 이튿날에 벌써 그들의 이른바 학생기률위반사건은 전 교에 통보되였고 입당지원서까지 당조직에 바치기까지 한 그 남학생은 엄중경고처분에 입당자격을 취소당했다. 녀대생도 경고처분을 받는 비극을 겪게 됐다. 당시 대학교 학생기률수칙은 성인으로 성숙된 20대 초반의 학생들 실제에 맞지 않는 인성화되지 못한 극좌적인 것이였다. 허나 별 수 없었다. 학생들은 처분을 두려워 지하련애를 하지 않으면 안됐다. 재수 없는 놈은 뒤로 자빠져도 코등을 깬다고 들키면 된통을 치러야 했다. 그러므로 성호는 근신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느 날 이른 아침, 성호는 며칠 후면 열리게 될 학교 륙상대회를 준비하려고 학교 운동장에 뛰여가서 아침달리기를 했다. 앞에서 달리는 한 처녀애를 보고 저도 몰래 깜짝 놀라 발걸음을 멈출 번했다. (아니, 저게 그 처녀 아니야?)  앞에서 파란 운동복을 입은 체육머리 처녀애가 탄력 있는 젖가슴을 탈랑거리면서 달리고 있지 않겠는가? 1메터 60도 넘게 쭉 빠진 훤칠한 키, 대나무처럼 칠칠한 체격을 가진 그녀는 탄력 있는 긴 다리로 아주 가볍게 성큼성큼 달려나가고 있었다. 성호는 뒤에서 슬며시 뒤따라 달리면서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을 훔쳐보았다. 그런데 한참 달리던 그녀가 눈치를 채기나 한듯 불시에 스피드를 내 달려나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다고 눈치코치 없이 무작정 그녀를 따라 스피드를 낼 수도 없어 아쉬웠다. 성호는 날이 갈 수록 그녀한테 끌려들어가는 것을 가슴깊이 느꼈다. 학교 식당에 가서도 그녀가 있나 해 눈빗질을 하다가 그녀가 나타나면 가슴이 설레이다못해 심장박동이 쿵쾅쿵쾅 드세지는 것을 온몸으로 느꼈다. 교실 현관에서 그녀를 마주쳐도, 아니, 눈길이 조금 마주쳐도 어쩐지 가슴이 뭉클해났다. 어찌 하여 심지어 그녀가 사뿐사뿐 걸어가는 모습만 보아도 그렇게 예뻐 보일가? "제길, 이거 어디 공부를 하겠어? 사춘기도 아닌데 왜 이래?" 성호는 교실이나 침실에서 책을 들어도 그녀의 모습이 떠올라 혼자 중얼거렸다. 어떤 때에는 보름달 같은 얼굴이 겹치어 떠오를 때도 있어 머리가 꽤나 복잡해났다. 심지어 이모네 옆집의 선화의 쌍까풀눈까지 아른거려 그를 심란하게 만들었다. (이렇게 머리 복잡하고서야 어찌 공부를 제대로 할 수 있단 말인가?) 만물이 춘흥을 못이기는 초여름의 어느 날, 청춘의 꿈도 많은 대학교 운동장에서 전교 륙상대회가 성황리에 열렸다. 확성기에서 경쾌한 민족음악이 흐르고 운동장을 돌아가면서 학부마다 북소리를 둥둥 울리면서 응원하느라고 떠들썩했다. 성호는 학부 수류탄선수로 뽑히였다. 수류탄뿌리기 차례가 돼 성호가 나가보니 한뼘씩이나 더 큰 한족애들이 우르르 쓸어나왔다. 키다리들  속에 들어선 성호는 딱 마치 거위무리 속의 닭 같다고나 할가. 설상가상으로 키다리 한족애들이 뿌린 수류탄이 축구장 중간선 전후에 날아가 퉁퉁 떨어졌다. 한 학급의 누나들은 벌써 승부가 갈린 것 같아 부산을 떨었다. "에이고, 우리 학부 졌어." "작달막한 성호 질 건 빤하다, 빤해!" 허나 반전이 일어날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와야!" "저게 뭐야?!" 숱한 학생들 눈길이 일제히 성호가 뿌린 수류탄이 날아가는 포물선을 따라 날아갔다. 퉁! 축구장 중간선을 날아넘어갔다. 두번째로 멀리 날아갔던 것이 아니겠는가. "57메터!" 재판이 자로 재더니 흰 기를 들면서 소리쳤다. "와~ 기적이야!" "대박이야!" 성호가 글쎄 그렇게 멀리 뿌릴줄은 누구도 몰랐다. 성호는 은근히 옆에 앉은 정치학부 녀학생들을 흘끔흘끔 곁눈질했다. 그 속에서 그 파란 운동복의 처녀애가 걸 봤겠는가 하는 것이 궁금했던 것이다. 성호는 뭔가 그 처녀애  앞에서 본때를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저게 뭐야? 그녀는 진짜 선수, 아니, 에이스, 스타였다. 백메터 달리기에서 시작을 알리는 총소리가 울리자마자 그녀는 체육머리를 흩날리며 어찌나 빨리 달리는지 다른 선수들을 한 서너메터 뒤떨궈놓고 흰 선을 풍만한 가슴에 걸었다. 체육머리가 어찌나 빨리 닫는지 운동장 확성기에서는 누군가 그녀를 두고 읊는 즉흥시 소리가 울렸다. “와~ 화살같이 내달리는 체육머리선수, 구름속을 달리는 보름달 같은 녀신이여라!” 이때 남녀 혼합릴레이달리기가 시작됐다. 뚱뚱한 성호는 장거리달리기에서 발목을 풀친 승호 대신 선수로 나섰다. 파랑새라고 불리는 정희는 얼굴이 파래 성호를 흘겨보더니 뒤에서 녀학생들  속에 가서 “에이고, 우리 학급 졌어. 저 뚱뚱보를 승호 대신 넣다니?” 하고 뒤공론을 했다. 다른 녀학생들도 머리를 끄덕였다.         “성호야, 힘이 세서 수류탄이나 표창 같은 건 잘 뿌려도 뚱뚱해서 잘 닫겠니?” 승호는 정희를 보고 “쓸데 없는 헛소리 말아. 성호는 나보다 더 잘 달릴 거야!” 오가는 소리를 들으면서 성호는 녀학생들의 쓸데 없는 근심을 산산이 부셔버리고 자기 존재를 과시하고 싶었다. 혼합릴레이가 시작됐다. 앞선 세 선수들이 잘 달리지 못해 성호네 학급은 9개 학급에서 그만 여섯번째로 됐다. 이제 성호까지 제대로 닫지 못하는 날에는 한 륜이나 떨어질 수도 있었다. 실로 무언의 압력이 성호의 어깨를 지지눌렀다. 성호 차례가 되자 정희랑 벌써 도리머리부터 흔들었다. 여기저기 성호네 학부 얼굴들에는 실망의 그림자가 파도치고 있었다. 반발심이 난 성호는 계주봉을 받아 쥐자마자 처음에는 천천히 달리면서 호흡과 심장박동, 발폭을 조절하고나서 점점 속도를 가했다. 승호는 관중석에서 일어나 앞으로 달려지나가는 성호에게 “빨리! 성호! 빨리!” 하고 고함소리를 날렸다. 성호는 눈길 하나 팔지 않고 발끝에 힘을 주며 발폭을 점점 넓게 내밟으면서 속도를 점점 더 가하였다. 5천 메터 장거리를 한 절반 달리면서 벌써 한 300메터나 앞선 선수 둘을 따라 잡았다. 그제야 정희랑 녀성들 속에서 군소리가 잦아들었다. 성호는 정치학부의 체육머리한테 한눈을 팔 여유도 있었다. 이상하게 정치학부 응원단 속에는 체육머리가 보이지 않았다. 정희랑 녀동창생들의 응원까지 받았다고 생각한 성호는 더욱 속도를 가해 50메터 앞선 정치학부의 선수도 따돌린 후 계주봉을 다음 선수에게 넘겨주었다. 이게 뭐야? 다음 계주봉을 받아쥘 선수는 그 체육머리 처녀가 아니겠는가! 그녀는 박수갈채를 보냈다. 정치학부 앞선수의 계주봉을 받게 돼 박수를 보냈는가! 성호는 제 좋은 생각을 하면서 체육머리한테 계주봉을 넘겨줬다. (내가 놀란 솜씨로 달렸다고 박수를 쳤겠지. 잘 달리지도 못한 자기네 선수에게 박수를 보낼 수 있어. 내게 져서 분해 죽는 선수에게 박수를 보내는 건 말도 안돼!) 좌석에 돌아가자 정희는 달려나와 수건까지 주면서 “어쩜 그렇게 잘 닫소?”라고 했다. 성호는 수건을 받아 땀을 닦았는데 숨이 차하는 눈치가 전혀 보이지도 않았다. 재잘거리던 참새 아가씨들은 너무나도 뜻밖이여서 입까지 함박만큼 벌렸다가 손으로 가리였다. 경기 결과 성호네 학부가 일등을 따냈다. 성호와 체육머리 등 선수들은 영웅처럼 떠받들렸다. 물론 축하파티에서 승리의 희열은 하늘을 찌를 지경이였다. 승호는 체육위원이노라고 술잔을 높이 들고 “오늘 기분 좋게 이긴 걸 축하한다.  그래도 인재를 제대로 발견하고 제때에 교체해 써준 내 눈이 밝다는 것을 다시한번 증명했어. 자, 마음껏 마시자!”라고 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파란 운동복을 입은 파랑새 정희는 입을 삐쭉하며 성호를 치켜 올렸다. “이번 운동대회에서 우리 정치학부가 총 성적 1등을 따낸데는 성호와 아래학급 은영의 공훈이 아주 컸어! 자, 성호, 술잔을 받아요. 축하해요.” 정희는 술잔을 들고 와서 성호의 잔을 쟁그랑 마주쳤다. “승리의 축배를 들어요. 진심으로 축하해요.” 성호는 기분이 좋아 술을 쭉 들었다. 사내들이란 우스워. 처녀애들 앞에서 항상 뭔가 본때를 보이고 싶어하는 거야. 처녀애들 앞에서 뭐나 잘하려고 최선을 다 하는 사내애들이 눈물겹도록 불쌍하지 않은가! 성호는 그녀와 말을 걸고 가까이 할 틈을 노리고 또 노렸다. 그날은 끝내 기적같이 다가왔다. 성호는 그번 운동대회에서 솜씨를 보였기에 대학교 륙상선수로 선발돼 성 대학생륙상경기에 참가하게 됐다. 그런데 운동장에 연습하러 갔다가 자기 눈을 의심했다. 체육머리, 그녀도 선수로 뽑혀 대기하고 있지 않겠는가. 선수들이 줄을 쭉 섰다. 감독이  출석을 장악할 때였다. "성호!" "옛!" 성호는 가슴을 쭉 내밀고 손을 들며 앞에 나섰다. 그녀의 눈길이 자기 몸에 와닿는 감각을 느꼈다. "은영!" "옛!" 체육머리 그녀가  앞에 나서면서 손을 쳐들었다. "은영? 쟤가 은영인가?" 성호는 하마트면 소리 지를 번했다. 일이 되자니 그랬을가. 은영은 성호와 함께 혼합릴레이를 하게 됐다. "잘됐어. 이건 다 하늘의 뜻이야." 성호는 은영과 릴레이를 주고 받는 연습을 하면서도 미끈하고 탄력 있는 체육머리의 몸을 아래위로 훑어보며 제 좋은 생각을 굴렸다. (인물체격이 물 찬 제비 같지. 나어린 대학생이지. 얼마나 좋아.) 순간 천지꽃산에서 순희와 맹세한 말이 떠올라 성호를 괴롭혔다. "넌 내 첫사랑이야!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첫사랑이야!" "넌 첫사랑이 몇이야? 이제 또 몇을 사랑하겠니?" 순희가 하던 말이 뇌리를 쳐서 순희에게 죄송한 감이 났다. (진짜 사랑이란 수시로 변하는 건가?) 성호는 코웃음쳤다. (뭐 은영이 사랑이나 하는 걸 제 좋은 생각을 해? 천천히 지내봐야지.) 그런데 성 대학생륙상경기에서 운이 따라가지 못했다. 그날 푸른 잔디가 깔린 륙상운동대회에서 앞선 선수들은 아주 잘 달려 다른 대학교 선수보다 앞섰다. 그런데 관건적인 시각에 글쎄 은영이 넘겨주는 릴레이 대를 성호가 받다가 그만 땅바닥에 뚝 떨어뜨렸던 것이다. 성호가 황급히 땅바닥에서 릴레이 대를 주어 들고 죽기내기로 뛰였지만 허사였다. 꼴찌를 하고 말았던 것이다. 다행히 성호가 수류탄던지기 시합에서 2등을 해 좀 미봉했다. 성호는 그번 성 대학생륙상경기는 회억하기조차 싫었다. 은영을 마주 바라보기조차 창피했다. 며칠 후에 성 대학생륙상경기에 갔던 운동원들은 쉬는 날에 뻐스를 타고 산으로 봄철 들놀이를 가게 됐다. 소나무가 푸르청청한 산기슭에 이르자 먼저 보배찾기를 하게 됐다. 성호와 은영은 푸른 소나무밭에서 보배를 찾으면서 산으로 올라가다나니 어떻게 돼 다른 동무들과 멀리 떨어진 외딴 곳으로 가게 됐다. 그런데 나무숲이 우중충하게 솟은 웬 깊은 골짜기에 들어서서 점점 오르기 힘들어졌다. 성호는 그래도 남자느라고  앞에서 가시덤불을 헤치면서 나가며 혹간 은영의 손을 쥐여 끌어당겨주었다. 그때 따뜻하고 보동보동한 은영의 손을 놓기 싫었다. 하지만 다른 선수들의 눈치가 보여 아쉬운대로 올리막을 다 올라가면 은영의 손을 놓아주어야만 했다. "성호, 어쩜 그렇게 힘도 세고 잘 닫소. 수류탄을 박격포처럼 멀리 던지고 전번에 릴레이 때도 넷이나 따라 잡는 걸 보았단 말이오." "허허허." 성호는 놀라움과 기쁨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은근 슬쩍 말을 돌렸다. "은영을 모두 빨리 닫는다고 '화살같이 달리는 보름달 녀신'이라고 했는데." "오빠, '보름달 녀신'? 어째 비유가 적절하지 않은 거 같아요. 화살과 보름달, 류사성이 있는가요?" 성호는 그저 "좌우간 즉흥시에 오른 은영이 얼마나 녀신 같은 존재오?"라고 했다. "어머! 내가 이젠 보름달로부터 녀신까지 됐네." 성호는 "그래, 그대는 숱한 남학생들 마음 속의 녀신이오." 하고 말하려다가 꿀꺽 삼켜버렸다. “은영이, 어쩜 그렇게 빨리 달릴 수 있소?” 은영은 걀쭉한 얼굴에 얇은 미소를 찰랑거리면서 되물었다. “내야 정말 묻고 싶어요. 오빤 어쩜 그렇게 빨리 달릴 수 있어요?” “내야 애들에게 덜 맞고 살자고 가만가만 지하에서 력기나 장거리달리기 같은 걸 좀 한 과외운동원일뿐이오. 은영은 진짜 수준급이더란 말이오.” 성호는 정색해서 소나무숲  속에 선 은영을 바라보며 감탄했다. (어쩜 숲  속에 피여난 빨간 장미꽃 같아. 너무 예뻐!) 은영은 눈자리 나게 바라보는 성호의 따가운 눈길에 반쯤 외면하면서 귀밑을 살짝 붉혔다. 성호도 스스로 어색해 한마디 더 물었다. “중학교때 륙상전문팀 운동원이 아니였소?” 은영은 숲  속에서 쑥대 몇가지 꺾어 냄새를 맡으면서 나직이 “원래 전교  스피드스케이트팀 선수였죠.”라고 했다. “오- 글쎄 일반선수들보다 다르더라니까. 그런데 왜 체육학부엔 입학하지 않았소?” 은영은 자꾸 묻는 성호에게 솔직히 말했다. “녀성들의 선수생애는 하루살이처럼 아주 가련하게 짧지요. 불타는 청춘을 영원히 간직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사회학과에 지망하게 됐어요. 지금 보면 정치학부보다 문학학부나 예술학부에 갔더라면 더 좋았을 걸.” “왜? 련애소설을 실컷 읽자고?” “전 련애소설을 읽기도 좋아해요. 그보다 정치를 싫어하고 정객을 좋아하지 않아요. 그런데 시험성적이 차해서 3지망인 정치학부에 입학했어요. 그만도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성호는 머리를 끄덕이며 화제를 돌렸다. "야- 덥다야. 은영이, 오늘 들놀이 재미있지?" "그래요. 나무숲 속의 공기도 좋지. 보배 찾기도 재미있지." 은영은 버릇처럼 체육머리를 뒤로 쓸어 넘기면서 손부채질 하면서 이마에 송골송골 내밴 땀을 들이였다. 그러다가 하얀 손수건을 내밀며 땀을 닦으라고 했다. 성호는 은영의 분내인지 체취인지 풍기는 손수건을 받아 땀을 닦았다. 이때 저쪽에서 승호가 이쪽에 대고 소리쳤다. "어이, 성호, 그쪽에는 보배가 없어! 여기로 오라!" 승호는 운동은 성호보다 잘하지 못했지만 이번 운동대회에서 학교 선수단 단장으로 돼서 이번에도 들놀이 령솔자로 왔던 것이다. 성호는 승호네 그쪽으로 스적스적 걸어가면서 복잡한 궁리를 했다. 그때 은영이 돌 밑에 삐죽이 내민 종이쪽지를 주어 들었다. "성호 오빠, 보배요, 보배, 난 보배를 주었단 말이요." 은영은 어린애처럼 퐁퐁 뛰었다. 그녀는 성호의 빈 손을 보더니 보배를 내밀었다. "오빠, 이걸 가지오." "아니요. 제 가지요. 혹시 무슨 기념품이라도 타겠는지." 이윽고 성호도 소나무 껍데기에 끼워놓은 누런 종이쪽지를 발견했다. 빼보니 그 것도 보배였다. 그런데 은영의 번호와 똑같은 번호였다. "잘 됐소. 번호가 똑 같군 그래. 자기 건 날 주고 내 건 자기를 주고." "호호호. 누가 자기네 자기야? 응? 호호호." "자기도 날 자기라 하고서도. 허허허." 성호는 자기 보배를 은영에게 건네주었다. "이게 바로 오고 가는 정이 아니고 뭐요?" 은영은 자기 보배를 성호에게 주면서 별 생각없이 말했다. "자기면 어떻고 저기면 어떻소? 이게 바로 주고 받는 정이지. 호호호." 그때 성호는 자기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 요 꽉 깨물어놓고 싶은 처녀야, 날 사랑해?) 성호는 가슴이 부풀어 오르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성호는 앞으로 걷다가 여린 풀숲에 곱게 핀 날씬한 참나리꽃을 꺾어 작은 꽃다발을 만들어 은영의 머리에 씌워주고 향기로운 백일향꽃을 꺾어주었다. 은영은 머리에 꽃다발을 손수 다시 바로잡아 쓰고 백일향 꽃향기를 맡더니 그윽한 깜장눈으로 성호를 바라보면서 생글방글 웃었다. 꽃다발을 쓰고 푸른 나무 숲 속을 배경으로 함박꽃처럼 웃으면서 성호를 바라보는 은영은 참말로 수림 속의 어여쁜 선녀 같고 그리스 신화속의 용맹하고 예쁜 녀신 헤라 같아 보였다. 성호는 가슴이 뭉클 해나 그녀를 꽉 끌어안고 키스벼락이라도 한바탕 안기고 싶었다. 그러나 성호는 용케도 충동을 억제하면서 리지를 잃지 않았다. 성호는 카메라를 가지고 가지 못해 그 아름다운 모습을 찍어두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보배를 다 찾았으면 이젠 여기 모엿!" 저쪽에서 승호가 고함쳤다. 보배찾기가 끝나자 오락판을 벌이게 되였다. 보배번호에 따라 한쌍의 남녀가 나가 사회자 승호의 요구에 따라 한가지 표현을 해야 했다. "37번!" 이번에는 성호와 은영의 차례 됐다. 그런데 승호란 자식이 괴상한 표현을 시키지 않겠는가. 그는 은영과 몇몇 녀선수들을 쭉 세워놓고 성호의 눈을 싸매면서 성호를 보고 보지 말고 손더듬이를 해서 숱한 녀학생들  속에서 은영을 찾아내라는 것이였다. "제길할, 번마다 날 애먹이거든." 성호는 볼이 부어 두덜거렸다. "안돼요!" 이때 은영이 소리치며 달려오더니 성호의 눈을 잘 싸맸는가 얼굴이 닿을 정도로 살폈다. 승호랑 주의하지 않는 새에 그녀는 성호의 귀에 대고 "내 손가락으로 살짝 간지를 게." 하고 귀속말을 슬쩍 해놓았다. 성호는 은영의 수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은영과 녀선수들은 두 손을 쳐들고 서 있었다. 성호가 다가가자 승호는 고의로 녀선수들의 위치를 슬쩍 뒤바꿔놓았다. "에라, 모르겠다. 아무 녀성 손이나 줴본들 뭐라냐?" 성호는 중얼거리면서 눈을 싸맨 채 녀선수들 쪽으로 걸어나갔다. 그때 승호가 익살을 피웠다. "꽃 같은 선녀들이 손을 쳐들고 쭉 서 있네. 됐어. 손을 한나한나 만져보고 은영을 찾아 손을 들게나." 성호는 소나무 숲 속에서 쥐여보았던 그 따뜻하고 보동보동한 은영의 손을 찾느라고 이 손 저 손 쥐고 만져보았다. 가늘지 않으면 길고 차지 않으면 땀이 흥건한 것이 다 아니였다. "제길할, ‘손을 간지를게.’ 해놓고 왜 아무런 동정도 없지?" 제일 마지막에 쥐우는 손이 별로 보동보동한 것이 은영의 손과 비슷했다. 그런데 성호의 손을 간지르지 않는 것이 이상했다. "은영이 맞소?" "호호호." 은영의 웃음소리가 맞았다. 그런데 킥킥거리기만 하고 간지르지 않는 것이였다. 코웃음소리도 별로 딱  앞에서 나는 것 같지 않았다. 성호는 손을 들어 키를 재려고 숫구멍을 만진다는 것이 그만 걀죽한 얼굴을 만졌다. 그 바람에 여기 저기에서 허허허, 깔깔깔, 키득키득 웃음보를 터뜨렸다. 그때 그 보동보동한 손이 성호의 손을 살짝 간지르는 것이 아니겠는가. "은영 맞다!" 성호는 그 손을 꽉 쥐고 한발 끌고 나와 쳐들더니 눈을 싸맨 수건을 풀어 내리고 보았다. 허나 그녀는 "괴짜", "멋쟁이", "파랑새"로 소문난 정희가 아니겠는가! "이게 웬 일이야?" 또 승호란 자식이 꾸민 짓이 아니겠는가. 글쎄 은영을 정희 뒤에 떡 세워놓았는데 은영마저 성호를 골려주려고 은영을 보고 성호의 손을 간지르라고 했던 것이다. "기념사진을 찍어주지." 싱거운 꺽다리 승호가 왜가리 목을 잔뜩 빼들고 떠들어대며 카메라를 가지고 다가왔다. "내 사진 한 장 찍어주지." 승호는 성호와 은영을 나란히 세워놓고 샷터를 누르려고 했다. "나도!" 파랑새 정희도 성호 옆에 달려와 섰다. 성호는 좌우간 어여쁜 미녀 둘과 함께 정답게 사진을 찍는 기분만은 좋았다. "이건 영원한 기념이야!" "그래!" 은영과 정희가 감탄하며 식지와 중지를 성호 머리 위에 대고 깔깔 웃어댔다. 오락 판은 계속 흘렀다. 그런데 뜻밖에도 저쪽 수림  속에서 왁작 떠드는 소리가 났다. 성호랑 머리를 돌려 보니 웬걸, 은영과 정희가 손풍금을 치는데 웬 건달들이 서넛이 와서 지껄이더니 마구 목이랑 끌어안는 것이 아니겠는가! 열이 후끈 오른 성호와 승호 그리고 숱한 남자선수들이 우르르 뛰여갔다. 건달들은 돌멩이를 주어들고 달려들어 승호의 머리를 내리깠다. 승호의 머리에선 선지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격분한 나머지 성호는 공중잡이로 씽 날아나가며 양발차기로 두 놈 자식을 보기 좋게 차 넘겼다. 나머지 세 놈 자식은 돌멩이를 주어 뿌리면서 성호에게 덮쳐들었다. 그때 승호도 나무 뒤로 피했다가 씽 덮쳐나가면서 무쇠주먹으로 면상을 갈겼다. 그 찰나 성호도 날아드는 돌멩이를 피하면서 덮쳐나가 헤딩으로 한 놈 자식을 받아 넘겼다. 그런데 다른 자식이 돌멩이로 성호의 머리를 겨눠 뿌렸다. 성호가 옆으로 피했으나 돌멩이는 턱에 날아와 맞았다. 뒤로 벌렁 넘어졌던 성호는 벌떡 일어나면서 발로 홱 돌려 차 그자를 차넘겼다. 다른 남자 선수들이 왁 모여들어 건달 다섯에게 도리깨로 타작하듯 물매를 안겼다. 그 놈 자식들은 은영이랑 정희랑 녀선수들을 지껄였다가 피투성이 된채 수림 속으로 꼬리 빳빳해 도망쳤다. "아이고, 이 머리를 어떻게 해?" 은영은 승호의 피투성이 된 머리를 보고 자기 수건을 꺼내 매달리다시피 하면서 얼굴의 피를 닦아주었다. "턱에 피를 봐라!" 정희는 새된 소리를 지르면서 성호의 턱에 내밴 피를 닦아주었다. 그제야 성호는 턱이 아픈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날 오락판은 건달 때문에 스산하게 깨졌다. 하지만 성호와 승호는 은영과 정희를 건달들의 폭행에서 구해준 영웅으로, 은인으로 돋보였다.                                        5.쌍쌍이 나래치는 은제비 성호는 은영과 친해진 후 청춘의 푸른 꿈과 환상으로 둥둥 떠서 하늘의 별이라도 딴 듯한 기분이였다. 그는 늘 은영의 환심을 사려고 신사처럼 차려입고 머리기름을 뚝뚝 떨어지게 바르고 두툼한 련애소설책이나 끼고 다니면서 교실에서 읽었다. 어떤 때에는 은영과 정희를 불러 노래방에 가지 않으면 사교무장에 가서 안고 빙글빙글 돌아가면서 한바탕 놀았다. 초겨울이 되자 성호는 책보기도 싫어 스케트타기에 눈이 아홉이 돼 돌아갔다. 배꽃같이 하얀 눈꽃을 떠인 나무들이 삑 둘러선 얼음판에서는 파랗고 노란 갖가지 운동복을 입은 스케트애호가들이 유리판 같이 판들판들한 빙장에서 잔잔한 호수를 스치는 은제비들처럼 나래치고 있었다. 성호는 스케트를 타다가 불같이 빨간 운동복을 입고 노란 털실 모자를 쓴 한 처녀가 마치 수림 속을 스쳐 나래치는 솔개처럼 날렵하게 뭇운동원들 속을 이리저리 스쳐지나 미끄러져나가는 것을 보았다. 몸에 착 들어붙은 빨간 운동복, 균형 잡히고 탄력 있는 몸매, 활개치며 미끄러져나가는 그녀는 섹시한 몸매를 뽐내고 있지 않는가. 일시에 숱한 남학생들의 눈길이 그 불새 같은 녀스케트선수한테 쏠렸다. 성호는 누군지 알아 볼 양으로 그녀가 다가오기를 기다리면서 스적스적 미끄러져나갔다. 쾅! 성호는 다른데 눈을 팔다가 그만 탁 밀쳐 뒤로 쿵 자빠져 대여섯메터나 쭈르륵 미끄러져나갔다. 숱한 눈길에 뒤잔등이 바늘에 쏙쏙 찔리는 듯해 급급히 일어서려고 했다. 그때 불새 같은 처녀가 한쪽 스케트날로 흰 얼음가루를 물보라처럼 날리면서 반원을 쪽 긋더니 앞에 척 멈춰섰다. "미안해요.” 그녀는 사과하려다가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어마나! 성호 오빠!" 성호가 쳐다보니 뜻밖에도 은영이 아니겠는가! "어디 상하진 않았어요? 어서 일어나세요." 은영은 성호의 손을 잡아 일으켜주었다. "괜찮소." 성호는 그렇게 말해놓고서도 상을 조금 찌푸렸다. 은영은 얼굴을 살짝 붉히면서 노란 털실 모자를 벗어쥐고 버릇처럼 파도치는 체육머리를 뒤로 쓸어넘겼다. "왜 번졌어? 속 시원히 욕이라도 하세요." 성호는 엉덩이에 묻은 얼음가루를 툭툭 털며 중얼거렸다. "그런다고 아프잖겠소?" 은영은 따라 미끄러오면서 "참말 다행이에요. 모를 남자를 번져놓았더라면 큰일 날 번했는데요."라고 했다. 성호는 짐짓 아픈 상하면서 넌지시 "내 절름발이 되면 은영이 책임져야 하오." 하고 능청을 떨었다. "호호호. 한뉘 책임지라고?" "그래, 그럼 안되오?" "호호호. 단단히 걸고 드는구먼." "이런 기회에 걸고 들지 않으면 언제 걸고 들겠소?" 은영은 혀를 홀랑 내밀더니 "진짜 언덕이 없어 비비지 못하는 량반이구먼." 하고 종알거렸다. 성호는 밀착한 빨간 운동복을 입은 은영의 몸을 흘끔흘끔 곁눈질해 훔쳐보았다. 짙은 눈썹까지 가릴락말락 타래치듯 넘긴 곱슬곱슬한 체육머리, 빛뿌리는 깜짱눈, 예리하게 솟은 코아래 웃음을 함뿍 머금은 빨간 입술, 얇게 생긴 얼굴선에 걀쭉한 얼굴, 탄력있는 호리호리한 몸매, 풍만한 가슴… 아, 은빛 스케트를 척 신고 빙장에 나선 이 빨간 체육머리 처녀 은영은 빙산에서 내려온 빨간 선녀가 아닌가. 저쪽에서 파랑새 정희가 미끄러져오더니 얼굴이 새파래서 은영을 보고 새침한 표정을 지었다. "얘, 남을 넘어뜨리고도 재미나 웃고 떠드니?" 은영도 맞받아쳤다. "별 일에 다 끼여드오." 이때 승호란 자식도 슬슬 미끄러져 와 왜가리 목을 빼들고 끼여들었다. "스케트를 타다나면 넘어질 때도 있지 뭐." 성호는 쩍 하면 끼어드는 승호를 속으로 욕했다. (자식, 언제 봐도 맨 물의 거시처럼 싱겁게 노는 놈이야! 흥!) "우리 몇바퀴 돌가요?" 은영이 체육머리를 뒤로 쓰러넘기며 하는 말에 성호랑 승호랑 정희까지 따라나섰다. 은영은 노란 털실 모자를 꼭 눌러쓰더니  앞에서 활개 치며 쌩- 쌩- 미끄러져나갔다. 진짜 은제비를 방불케 했다. 허나 승호는 로반의  앞에서 도끼를 휘두르는 격이라는 걸 눈치 챘던지 힐끔 곁눈질하더니 테 밖으로 쭉 미끄러져나가 스케트 끈을 조이는 척하다가 빙장 저쪽에 사라졌다. 성호와 정희는 그래도 억지로 은영을 따라 미끄러져나갔다. 그러나 슬쩍슬쩍 옮기는 체육머리를 따라가자니 기교는 고사하고 되는대로 짧고도 빨리 발을 옮겨놓아야 했다. 그래도 체육머리 눈에 드이지 않으니 얼굴은 덜 뜨거웠다.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숨소리도 헐레벌떡. 드바삐 체육머리를 뒤따라가던 성호는  졸지에 무릎으로 얼음을 꽝 쪼으며 푹 꼬꾸라져 쓱 미끄러져갔다. 재수 없이 끈을 밟았던  것이다. 급급히 되돌아온 은영은 "아니, 상하진 않았어요?" 하고 놀라하며 성호를 부축해 일으켜주었다. 성호는 창피한 나머지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드디여 따라 잡은 정희도 성호의 바짓가랑이에 묻은 얼음가루를 털어주었다. 성호는 항상 범송과 붙어 다니던 정희가 살갑게 구는 순간 눈에 거슬렸다. 까슬까슬한 체육머리와 파도치는 긴 노랑 머리카락이 성호의 얼굴을 간지럽히고 처녀들의 뜨거운 입김이 호호 풍겨왔다. 순간 성호는 온몸이 찡- 해나고 가슴이 울렁이며 무언의 심한 충격을 받았다. 진짜 꽃향기에 취해 몸을 가누기 힘들었다. (은영은 정말 매력적인 처녀애야! 탄력 있고 날씬한 몸매는 또 얼마나 곡선미가 있는가!) 그후 성호는 빙장에서 체육머리 은영에게 본때를 보이려고 승호와 은영, 정희, 범송이 누구도 몰래 금싸라기를 뿌린듯이 총총한 뭇별들이 반짝이는 밤이면 밤 가는 줄도 모르고 남몰래 스케트타기를 연습하였다. 넘어지면 일어나면서 바지가랑이에 얼음가루가 하얗고 반지르르하게 묻으면 툭툭 털고 일어나면서 끈질기게 련습했다. 공든 탑이 무너지랴. 그 보람으로 성호는 숱한 학생들의 놀라움과 흠모의 눈길  속에서 체육머리 처녀와 함께 한쌍의 은제비처럼 유리장처럼 반들반들한 빙장 우에서 자유롭게 훨훨 나래칠 수 있게 됐다. 오, 그때 성호는 종래로 느껴보지 못한 쾌감으로 해 막 미칠 것만 같았다. 그 즐겁고 행복한 시간이 그대로 영원히 멈춰 서 있었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진짜 은영을 사랑하고 있는가!) 순간 성호는 순희가 천지꽃산에서 하던 말이 귀전을 아프게 때리는 것이였다. "너한텐 첫사랑이 몇이나 되냐? 은숙이, 미옥이, 이제도 첫사랑이 몇이 될지 어떻게 아느냐?" 성호는 허무맹랑한 웃음을 지었다. "이래서 사랑은 변한다는 말이 있는가?" 순간 성호는 평소에 승호가 하던 말이 떠올랐다. "사내란 열집 사위가 돼야 진짜 사내란 말이야." (너무 한 거 아니야? 그럼 열집 귀공주들을 잡아먹겠다는 것이 아닌가? 사람이 어찌 그럴 수 있어? 아버지 말씀처럼 난 절대 한평생 데리고 살 처녀가 아니면 걸버무리지 않겠어.) 성호는 순희를 사랑한다고 고백해놓고 저도 몰래 은영에 대한 사랑이 자기 가슴  속에서 싹트고 얼기설기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는 것을 가슴깊이 감지했다. 그는 어쩌는 수 없어 도리머리를 절레절레 가로 흔들었다. 진짜 저도 모르게 싹 트지만 또 한뉘 잊어지지 않고 쓰디 쓴 것이 사랑이란 말인가? 엄동설한이 다가온데다 난방시설이 미비해 아무리 랭수욕을 견지하는 성호라고 해도 침실에서 이불이 얇아 추웠다. 그는 이불거죽을 뜯어가지고 집에 돌아가서 어머니한테 두툼한 이불을 꾸며달라고 했다. 그러나 불시에 무슨 돈이 있어 새 이불을 꾸미겠는가. 어머니는 고육지책으로 집에 있던 헌 이불을 뜯어 이불솜을 꺼냈다. "얘야, 미안하구나. 가난한 엄마를 만난게 죄다. 이 이불솜을 더 펴고 꾸며서 임시 덮으렴." "괜찮습니다. 어머니." 성호는 별수 없이 어머니가 씻어 방치 돌에 두드려 하얗게 바랜 이불거죽과 낡은 솜을 꿍져 메고 대학교로 돌아가려고 했다. 그때 뜻밖에도 순희의 조카 월순이 찾아왔다. “오, 때마침 성호 있구나.” 월순이 어색하게 웃으며 문고리를 잡고 들어서자 성호는 잔등에 소름이 끼쳐 본체만체 하면서 문 밖으로 나가려고 서둘렀다. “아니, 가버리면 다야?” 월순은 따라 나오면서 “성호” 하고 불러 세웠다. “난 너와 싸울 시간이 없어. 대학교에 가서 이불을 꾸며야 하니까.” 월순은 따라 오면서 “이전에 네 집에 와서 해낸 건 잘못했어. 이제라도 빌면 안 되니?” 하고 뜻밖의 소리를 했다. 그러나 성호는 월순의 말에 쉽게 넘어갈 위인이 아니였다. “그래 오늘 빌고드는 저의가 뭐냐?” 월순은 뒤에서 손을 젓는 영옥을 힐끔 곁눈질하고나서 떨어지지 않는 입을 겨우 뗐다. “우리 순희 북경에 가서 일자리를 얻은 것 같더라.” 그 뜻밖의 소리에 성호는 궁금해 “그래 대학시험은 안쳤니?” 하고 주춤 멈춰섰다. 월순은 고개를 숙이고 발끝을 보면서 쥐구멍으로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말했다. “또 락제했단다. 이젠 시험도 치지 않고 큰오빠하구 말해서 아마 북경에 호구를 올리고 일자리를 찾은 거 같아.” 성호는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였다. “참, 안 됐구나. 어쩜 4년이나 시험 쳐도 붙지 못하니?” “해마다 몇점씩 모자라니 어쩌니? 대학에 갈 운이 모자라는 걸.” 성호는 은영과 정희를 떠올리자 인차 말머리를 돌렸다. “순흰 수도에서 살게 됐으면 잘 됐구나.” 월순은 성큼성큼 걸어가는 성호를 뒤따라오면서 한술 더 떴다. “순흰 날 보고 너한테 전하라고 하더라.” “?” 성호는 혹시 누가 듣지나 않나 해서 주위를 돌아보았다. 월순도 주위를 한고패 살피더니 나직이 말했다. “순희는 너를 사랑한다더라. 너보고 북경에 와서 일하면서 함께 살지 않겠는가 물어보라더라. 넌 순희를 ‘영원히 잊지 못할 첫사랑’이라고 했다면서?” “그래, 그랬어. 건 다 지나간 얘기고.” “그럼 지금은 사랑하지 않는단 말이냐?” 순간 월순의 언성은 거칠고 높아졌다. 성호도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너네 집식구들은 정말 이상한 사람들이야. 내 순희를 사랑하든 말든 간섭할 건 뭐야? 이렇게 강권하면 내 북경에 갈 것 갔애?” 월순은 또 본색을 들어내며 행악질했다. “한마디로 뚝 찍어 말해라. 너 순희를 사랑하니? 안 하니? 살겠니? 안 살겠니?” “주먹을 들이대고 강요하겠니?” “얘, 우리 근심하지 말고 순희하고 살겠으면 살아라.” 이때 엄마까지 바자굽에서 가만히 듣다가 뛰쳐나왔다. “엄마, 제가 알아서 처리할테니깐요.” 이번에는 상진까지 와서 성호를 말렸다. “얘, 네 큰형이 웃마을에 있으니까. 근심하지 말고 북경에 가라. 수도에 가면 얼마나 좋니? 예로부터 충신은 효자가 아니라고 했다. 날 봐라. 부모를 모시려고 고향 마을에 돌아오는 바람에 공안국장도 그만두고 한뉘 풀밭에서 헤매고 말았어. 네까지 우리 땜에 시골에 돌아오게 하고 싶지 않다.” 성호는 그 말씀을 따를 수는 없었다. “부모 마음이 고맙긴 하지만 불효를 저지를 수 없습니다. 수도가 좋다고는 하지만 그리 멀리 가면 부모를 몇해에 한번 보겠습둥?” 그 말에 월순도 부모도 어쩌는 수가 없었다. 성호는 아예 뒤를 맺고 끊었다. “순희를 보고 날 잊어라고 해라. 수도에서 좋은 혼처를  얻어 잘 살라고 전해라.” 월순은 뾰로통해 발끝으로 발 밑 흙덩이를 톡톡 차버리다가 “알았다. 네 아니면 순희 북경에서 시집가지 못 할 거 같니?” 월순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렸다. 성호는 한숨을 후~ 내쉬였다. 순간 그는 홀가분한 감이 나 훨훨 날 것만 같았다. 성호는 숙사로 간신히 돌아왔지만 이불을 꾸밀 재간이 없었다. 그렇다고 불시에 어머니나 누나를 불러다 침실에 와서 꾸며달라고 할 수 도 없어 서성거렸다. 그때 피뜩 은영이 떠올라 집에서 가지고 간 찰떡 꾸러미를 들고 녀대생숙사에 발길을 돌렸다. “그래, 이런 기회에 은영 속을 떠봐야지.” 성호는 은영이네 침실문을 두드리고 들어갔다. 다른 녀학생들은 성호한테 이상한 눈길을 보냈다. “오빠 왔구먼. 앉으세요. 이건 뭐 또 들고 왔어요?” 은영과 녀학생들은 성호 앞인 것도 잊고 찰떡을 맛있게 주어먹으면서 웃고 떠들었다. “은영, 내 좀 보기요.” 성호는 얼굴을 붉히며 현관으로 나왔다. 뒤따라 나온 은영을 보고 찾아간 사연을 말했다. “그러지요. 내 잘 꾸미진 못해도 오빠 이불이야 꾸미지 못하겠어요.” 은영은 두 말없이 따라나섰다. 성호는 은영을 혼자 부르기는 그래서 나머지 떡 꾸러미를 들고 정희네 침실로 가서 정희를 불러냈다. 그런데 정희는 은영을 보자 질투의 눈길을 보냈다. “은영이 가면 되겠구먼. 왜 나까지 불렀소?” “둘이면 말동무도 되고 좋지 않소?” 정희는 마지못해 따라나섰다. 그녀들은 성호네 침실에 가서 책상 네개를 맞붙여놓고 그 우에 이불거죽과 솜을 펴놓고 한뜸 한뜸 바느질해나갔다. 성호는 바느질 하는 은영의 그 정다운 모습을 보면서 앞날의 그 무엇을 보는 상 싶어 흐뭇했다. 아마 그때부터 성호는 은영이 자기를 사랑한다고 믿고 마음 속에서 급속도로 사랑의 뿌리가 내리기 시작한 것 같았다. 성호는 늘 은영이 책을 보는 열람실에 가서 공부했다. 그녀가 오지 않으면 허전하고 공부하기도 재미없었다. 그럴 때면 무슨 구실을 대고 그녀를 찾아갔다. 때론 도서열람카드가 모자란다면서 그녀의 열람카드를 빌기도 하고 소설책을 빌려다 보고 소설독후감을 이야기하군 하였다. 그녀 또한 식성이 좋은 성호에게 남겨둔 밥표와 채표를 줬다. 그런데 한 학급에 있는 정희도 성호에게 밥표와 채표를 주어 성호는 배고픈 근심은 덜게 되었다. 그녀들의 은정이 고마워 성호는 시골에 있는 집에 가면 늙으신 어머니 보고 찰떡을 많이 쳐달라고 해 한 보따리씩 해서 트렁크에 메다가 은영과 정희네 침실에 가져다줬다. 하여 성호가 집에 갔다가 오는 날이면 승호와 성호, 은영과 정희네 침실은 토장과 찰떡, 순두부로 상다리가 부러질 지경,  다른 침실의 애들도 맛을 보러 건너오군 하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성호의 마음  속에 차지하는 은영의 자리는 점점 커갔다. 순희와 선화 그리고 해연이 들어앉을 자리는 점점 작아지는 감이 들었다. 실로 성호의 사랑은 이렇게 랑만과 환상 속에서 싹트고 얼기설기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며칠 후 성호는 한가지 놀라운 발견을 했다. 한번은 성호는 은영의 스피드를 따라 잡으려고 밤에도 스케트를 타는 련습을 했다. 그런데 달빛이 깔린 서북쪽 얼음판 우에서 도란도란 남녀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아주 귀에 익은 소리 아닌가. (누굴가?) 성호는 스케트를 타며 그들의 곁으로 스쳐지나가면서 슬쩍 훔쳐보았다. 달빛을 빌어 보니 정희가 스케트를 신고 있지 않겠는가. 그것도 글쎄 싱거운 키꺽다리 범송의 허리를 잡고 외발로 서서 스케이트를 신지 않겠는가! (혹시 정희가 범송을 좋아하는가?) 어두운 밤인데다 스케트를 스피드하게 탔기에 정희와 범송은 성호를 알아보지 못했다. 성호는 서로 붙잡고 스적스적 스케트를 타는 정희와 범송의 뒤를 한 30메터 미행하면서 동정을 살폈다. 달밤에 얼음판에서 웃고 떠들며 스케트를 타는 그 애들을 보자 슬그머니 질투 났다. (왜 이러지? 정희를 사랑하고 있는 건가?) 성호는 이상야릇한 감을 느꼈다. (허참, 사랑은 모를 일이야. 은영을 좋아하면서도 범송을 질투해?) 성호는 저도 몰래 정희와 은영을 대비해보았다. 그는 그 애들이 웃고 떠들면서 스케트를 타는 것을 보기도 싫어 스케트를 벗어 메고 숙사로 내려갔다. 그가 눈덮인 고요한 수림 속을 걸을 때다. "후과가 두렵지 않아요?" "난 모든 거 두려워하지 않는단 말이요!"… 소나무숲  속에서 또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누굴가?) 성호는 소나무 뒤에 숨어 숨을 죽이고 그 쪽을 살펴보며 귀를 기울였다. 저쪽의 남녀는 계속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진짜 렴치없구먼. 대학교에 오기 전에 약혼녀가 있었다는 걸 다 아는데요. 나와 왜 이래요?" “건 사고야." "사고? 그래 이젠 헤어지기라도 하겠단 말인가요?" "그럴 수도 있지. 홍희와의 사랑을 위해서라면." "뻔뻔스럽군요. 약혼녀와 이만저만한 거 아닌 거 같은데. 무슨 렴치로…" "이전 일을 자꾸 끄집어내 방패로 삼지 마오. 난 홍희를 사랑하오." "그 말 녀자 몇한테 곱씹었어요? 약혼녀하고도 했겠지?" "누가 듣겠소. 좀 나직이 말하오. 들키면 학교에 통보 날라?" "천하의 승호도 두려운 거 있구먼요. 호호호." (승호, 저 자식이 홍희를 건드려? 저 놈이 진짜 열집 사위노릇 할 작정인가?) 성호는 자기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승호는 이전에도 술을 마신 뒤에 성호에게 종종 약혼녀 허경옥과 처음 성생활을 해보니 어떻더라고 자랑을 늘여놓은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지금 약혼녀 경옥을 배반하고 나 어린 홍희를 얼리지 않는가! (량심없는 자식! 멍청이 같은 계집애라고야. 쯧쯧쯧.) 순간 성호는 도리머리질하면서 불쌍한 홍희의 걀쭉한 우유빛얼굴이 떠올랐다. 홍희는 외지에서 온 녀대생인데 미끈하고 섹시한 몸매로 해 대학생총각들의 인기를 끌었다. 홍희는 공부는 수술하게 했지만 학교 문예경인대회에서 무대에 올라 섹시한 몸매를 휘날리며 춤을 출라치면 총각들의 눈뿌리를 다 뺄 지경이였다. 그런데 그녀는 산재지구에 가기 싫어 한사코 조선족이 모여 사는 yj시내에 남으려고 기를 썼다.  yj시내 공안국 수사과장의 아들인 승호는 홍희의 그 욕망에 찬 약점을 틀어쥐고 구슬리고 있지 않는가! "전도를 위해선 부득불 그렇게 됐소. 오래잖으면 졸업하겠는데 조심하는 것도 좋지." 그때 승호와 홍희는 소나무숲  속에서 천천히 걸었다. 성호는 소나무에 붙어서서 눈이 풀풀 흩날리기 시작하는 하늘을 쳐다보았다. 어둠 속에서 소나무숲을 하얗게 덮으면서 풀풀 흩날려 내리는 눈이 서글프기만 했다. 그때 저쪽 빙판에서 범송과 정희가 희희닥닥거리며 다가오는 목소리가 들렸다. 순간 성호는 아주 고독한 감을 느꼈다. 허나 한편으로 은영을 생각하자 스스로 위안되는 감을 느꼈다. (그래, 난 은영이만 있으면 다른 애들이 눈에 들지 않아. 은영인 나보다 서너살 어린 대학생이야. 게다가 물 찬 제비처럼 예쁘고 활발하고 인정미가 넘치는 처녀야. 우리 둘이 살면 꼭 행복하고 늙으신 부모도 잘 모실 수 있을 거야.) 성호는 눈을 빠드득빠드득 밟으면서 숙사로 내려갔다. 신선놀음에 도끼자라가 썩는줄도 모른다고 성호는 달콤한 사랑에 빠져 푸르른 꿈을 꾸다나니 자연히 학습을 게을리했다. 어느 하루 저녁에 승호는 성호를 조용히 불렀다. (이 자식, 또 무슨 련애경험담을 하려나?) 승호를 따라가니 숙사 앞에 침대가 놓여 있었다. "이걸 함께 들자." "이걸 들어다 뭘 해?" "가면 알 수 있어." 승호는 무뚝뚝하게 말하면서 성호와 함께 침대를 맞들어  6층아빠트쪽으로 올라가는  것이였다. 묵묵히 침대를 들고 낑낑 거리면서 2층 아빠트에 겨우 올라갔다. 어둠침침한 헌 집에서 매캐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둘러보니 깨진 도자기관으로, 쥐똥으로 지저분하게 널려 있었다. "뭐 하려는 거야?" 성호는 코를 싸쥐고 궁금해 물었다. "쉿-" 승호는 입에 식지를 대더니 나직이 귓속말을 했다. "누가 듣겠어.” 성호는 너무나도 이상해 “여기다 침대를 놔 뭘 해?” 하고 물었다. 승호는 철색얼굴에 괴상한 빛을 띠우더니 “이 세집에 지하열람실을 차리고 조용히 우리 정치학부의 중심연구과제인 고전철학을 연구할 예산이야.”라고 하면서 침대를 바로잡아놓았다. “지하열람실?” 성호는 너무나도 어처구니없어 입을 쫙 벌렸다. “야, 이 자식아, 너 좋은 교실과 침실을 두고 여기서 고전철학을 연구해?” 멀쑥한 승호는 보기와는 다른 소릴 쳤다. “이 세집이야 말로 고전철학을 연구하기 맞춤한 신비로운 환경이지. 시끌벅적한 세속에서 어떻게 정치를 연구해?” 승호는 자못 정색해서 말했다. "지식은 모든 사업의 에너지야. 지식이 있어야 사업에 성공하고 높이 바라오를 수 있는 거야. 지식이 있어야 부자로 될 수 있고 자기 야망을 실현할 수  있어. 이런 도릴 알기나 해?" 성호는 코웃음이 터져나왔다. “축하한다, 지하실에서 탄생할 철학가를.” “이 자식, 비웃긴?” “아니, 교실이 복잡하면 왜 시내에 있는 너네 집에서 공부하지 못하느냐? 너 엄마와 아빠, 모두 출근하고 나면 조용할 거 아냐?” 승호는 계속 중얼거렸다. “녀동생 선금이랑 경옥이랑 정말 귀찮아.” 그는 뒤늦게야 옆에 성호가 있다는 것을 의식한 듯했다. “침대를 들어다줘 감사하다. 언제 술이나 한잔 마시자. 량산박 호한처럼 의리심이 강한 넌 입에 빗장을 단단히 지르리라 믿는다. 됐어. 이제 어둡기 전에 난 전기를 가설하고 창문에 문발도 쳐야겠어.” 성호는 승호가 항상 남을 아주 능란한 솜씨로 부려먹고 수염을 쓱 씻는데 이젠 습관이 돼버렸다. (늘 우뢰만 울고 비는 내리지 않지.) “전날 밤에 련애했지? 약혼녀는 어쩌고?” 성호는 이렇게 물을가 하다가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꿀꺽 삼켜버리고 그 신비한 낡은 세집 문 밖을 나왔다. (나는 놈이야. 련애는 련애대로 하고 철학은 철학대로 연구한단 말이지. 애비 덕에 시내에 배치받겠는데 뭐가 딸려서 냄새 나는 어둠컴컴한 세집에서 철학을 연구해?) 성호는 기말에 성적이 보잘 것 없어 머리를 들기 힘들었다. 그날 승호가 철색얼굴에 가련하다는듯 쌀쌀한 비웃음을 흘리며 성호의 시험성적을 부를 때였다.  성호는 그만 얼굴에 모닥불을 뒤집어쓴 것 같아 책상 우에 두손을 얹고 얼굴을 파묻고야 말았다. 자칫하면 퇴학맞을 판이였다. 성호는 실로 발 밑은 천길 절벽이요, 밟고 선 바위돌이 움씰움씰 움직이는 격이 되고 말았다. 고민에 싸여 있을 때 그래도 체육머리가 찾아주었다. 그녀는 성호를 숙사 밖에 불러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교수청사 뒤 울부짖는 소나무숲 속으로 걸어갔다. 두 손을 맞잡고 머리를 다소곳이 숙인 채 눈 우를 빠드득빠드득 걷는 그녀의 뒤모습마저 어찌나 사랑스러운지. 성호는 넋을 놓고 뒤에서 바라보았다. 은영은 천천히 돌아서더니 “오빠, 앞날을 위해서라도 정신 차리고 공부해요.” 하고 단도직입으로 말했다. (어떻게 알았지? 누가 알려줬는가?) 성호는 두 살이나 지하인 은영의 “훈계”를 듣고 시퍼런 면도칼날 같던 자존심이 단통 도끼에 맞은 감을 느꼈다. 그런 눈치를 몰랐을가. 은영은 습관처럼 파도치는 체육머리를 뒤로 쓸어 넘기면서 성호의 반응을 살폈다. “이젠 늦었소.” 성호는 후~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면서 김빠진 공처럼 물앉았다. “아니, 이렇게 꼴기 없는 남자일줄 진짜 몰랐어.” 은영은 어처구니없어 성호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오빠, 밤중까지 스케트를 타던 그런 완강한 의지는 어디 갔어요? 하늘을 떠인 사내대장부의 기세는 어데 갔어요? 네?” 성호는 은영을 볼 면목이 없었다. “낙제 하면 은영과 한 학급에 다니고 좀 좋아서?” “무능한 남자일줄 진작 알았어야 하는데.” 은영은 깜장눈까지 흘겼다. “남들은 지하실에서 밤중까지 공부를 하는데 오빤 뭐예요? 네? 구두바닥이 닳게 춤 추지 않으면 스케트나 타면서 논단 말이죠. 그래도 자기 앞의 공부야 해야 되지 않아요?” “그만 하오. 내 살 도리를 하지 않으리라고 훈계하려고 드오?” 성호는 불그락푸르락 하면서 두덜거렸다. “충고예요. 오빠 공부하지 않으면 이젠 함께 스케트도 타지 않을래요.” 은영은 그 차디찬 말 한마디를 남기고 체육머리를 뒤로 휙 쓸어넘기고는 자리를 떠났다. 성호는 뒤에서 주먹으로 소나무를 탕 쳤다. “에이!” 희망이 절망으로, 리상이 망상으로 돼버리는 시각에도 체면을 잃고 충고해준 체육머리 처녀 은영이가 고마웠다. 그녀의 마음 속에 자기가 있다는 것에 더욱 고마웠다. 이젠 성호는 좀 책을 봐야 했다. 기말에 아직도 경제학과목 시험이 남았건만 그는 그 놈의 서양과 조선의 애정소설유혹이 너무나 컸다. 그리하여 또 도서관에 가서 정치학부의 경제학공부는 걷어치우고 스탕달의 “붉은  것과 검은  것”, 천세봉의 “석개울의 새 봄”이란 소설을 빌어왔다. “석개울의 새 봄”은 짜릿한 련애이야기에 언어가 어찌나 형상적이고 생동한지 읽으면 읽을 수록 구수하고 감칠맛이 났다. “붉은  것과 검은  것”이란 서양애정소설은 머리를 탁 치는 것이 있었다. “그래, 바로 이거야!” 그 소설의 청년주인공 줄리앙 쏘렐은 목수의 아들이였다. 18살이나 이상인 시장의 안해 레날 부인을 애인으로 사랑한 덕에 백작이란 명문귀족으로까지 되지 않았는가! “하하하. 가시 영웅이로다. 생활을 잘 모르는 승호 같은 놈은 굴쥐처럼 헌 변소에 들어박혀 철학이나 연구해 학술가로 될 거야. 그 자식은 공안부문에서 한자리 하는 애비 덕에 상류사회에 진출하거나 대학에 남아 유명교수로 될 수도 있을 거야. 허나 난 농부 아들이기에 어떤 묘수를 쓰든지 가정배경이 그럴 듯한 규수를 붙잡아 사랑도 하고 상류사회에 바라올라가려는 푸른 꿈을 실현해야 해.” 성호는 주위에서 자기 꿈을 실현하는데 도움이 될 “레날 부인”을 눈빗질하기 시작했다. 그의 시야에 한 처녀가 나타났다. 그녀가 바로 파랑새 정희와 체육머리처녀 은영이. 여러 모로 뒤조사를 해보니 정희는 모교의 유명교수의 무남독녀, 은영은 부시장의 무남독녀, 둘다 규방의 규수라고나 할가. 성호는 마치 량 손에 떡을 쥐고 어찌 할줄 몰라 헤매는 격이 되고 말았다. “누굴 선택해야 하는가?” 혹시 정희와 은영이 둘 다 성호를 사랑할 수도 있고 또 사랑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혹시 성호가 스스로 제 좋은 생각이나 환상을 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성호는 파랑새나 은제비나 모두 자기를 사랑한다고, 아니, 최저한도로 자기를 좋아한다고 여기고 푸른 꿈에 가슴이 설레였다. (파랑새네 부모가 나를 좋아할가? 시골 농부의 아들인데. 봉건사회도 아닌데 아직도 반상의 차별이 이렇게 클가?) 성호는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몸서리쳤다. 아버지가 공안국장만 내놓지 않았어도 자기 처지가 이다지도 서글프지 않았겠는데 하는 막연한 생각도 머리를 쳤다. (정희는 성격이 좀 팩하고 괴상하지. 사랑스럽긴 한데 농민 부모를 잘 모실 수 있을가? 노여움을 잘 내는 엄마와 맞을 수 있겠어?) 성호는 사랑과 효성을 모순되게 생각하지 않았다. 짜릿하고 깊은 사랑은 끊임없는 령감을 불러왔다. 그의 눈 앞에는 파랑새 대신 얼음판에서 훨훨 나래치는 은 제비가 나타났다. 체육머리 그녀를 방불히 보는 듯해 시무룩이 웃었다. (그래, 어여쁜 녀대생이지. 가정배경도 좋고. 정부기관의 모모한 간부의 외동딸이니깐. 만약 그 집 맏사위로 되면 마음에 드는 일자리 알선해주겠지. 은영의 아버지 농부의 아들을 받아들일가?) 성호는 고민에 빠졌다가도 자기 인물체격에 기대 자신감이 생겼다. (옛날 바보 온달은 왕가의 공주에게도 다 장가들었을나니. 요 자그마한 고을 아전의 딸이 뭐 그리 대단해. 내 인물체격이면 규수와 천생배필이야. 어디 가서 나 같은 사위를 얻어? 흥!) 어디서 생긴 용기인지 몰랐다. 성호는 그런 배심을 먹고 파랑새든 은제비든 량자간에 자기 나름대로 선택하리라 독한 마음을 먹었다. (같은 값이면 분홍치마라고 부모를 모시는데 누가 낫다고 생각하면 누굴 택할 판이야. 누가 감히 시부모를 모시지 않고 내 색시로 될 수 있어?" 련 며칠 성호는 량손에 파랑새와 은제비를 쥐고 저울질을 했다. 나중에 그는 어쩐지 인정미 있고 사랑스러운 은제비 쪽으로 마음이 기우는 것을 어쩌는 수 없었다. (좀 가련하긴 해. 허나 난 은영의 치마꼬리를 붙잡고서라도 은영의 애비 신세에 내 꿈을 실현해야 해. 살기 푼푼해야 부모도 시내에 모셔올 수 있지 않겠는가. 고급간부의 외동딸인 은영을 쟁취하는 거야 말로 비단에 수놓은 꽃을 따는 격이지. 이런 걸 두고 꿩 먹고 알도 먹고 둥지 털어 불을 땐다는 거야. 그렇지 줄리앙 쏘렐식으로 명문가족의 치마자락을 단단히 잡고. 으흐흐. 나의 레날부인이여~) 마음을 정했는데 웬 일인지 파랑새를 놓기도 좀 아쉬운 감이 들었다. (사실 정희도 놓기 아쉬운 처녀애야. 성질이 좀 괴벽해서 그렇지. 후~) 성호는 땅이 꺼지게 한숨을 내쉬였다. 그러나 그것도 한순간에 지나지 않았다. 강렬한 점유욕으로 하여 먹장구름 속에서 대지로 쫙 내리치는 번개처럼 성호의 머리 속에는 은영을 손에 넣을 묘수들이 스치고 지나갔다. 노대없이 망망한 바다에 나섰다가 세찬 파도 속에 휘말려들어 넘어질번하던 사랑과 리상의 쪽배에 사랑의 돛배를 달고 전도의 항로가 항주 서호와 같이 잔잔하고 미묘한 경지에 이르렀다. 눈앞이 환해진 성호는 미친듯이 흥분해 소설책에 키스까지 뻑 안기고 고함쳤다. "살았다, 살았어!" 성호는 침실에서 나가 그 길로 은영을 불러냈다. "요새 좀 책을 보는 거 같더니 밤중에 왜 영상하게 이래?" 은영은 버릇처럼 체육머리를 뒤로 쓸어넘기면서 못 마땅한 눈길을 보냈다. "음, 소설책을 보니 배울게 많더구먼. 은영만 내 옆에 있으면 다 될 수 있어." "그래요? 공부를 잘할 수  있지? 응?" "그럼, 리상도 멋있게 실현할 수  있지. 오늘만 동무해줘. 다신 찾지 않을게." "그럼 약속하자요. 오빤 뭐나 하면 짱이죠. 공부에서도 노력하면 오빤 총명해서 꼭 될 수 있어요. 그래 오늘 밤에 어디로 갈래요?" 성호는 자못 흥분돼 하는 은영을 끌고 노래방으로 갔다. 그는 맑은 유리잔에 맥주를 찰찰 넘치게 부어드리면서 정중하게 말했다. "고맙소. 이후에도 날 믿어주오. 난 모든 걸 약속대로 할 테니까." 은영은 성호의 잔과 딩둥댕 마주치고 나서 성호의 등까지 다독여 주었다. "나도 기뻐요. 오빠가 책을 보고 뭔가 터득하기 시작하니 말이죠. 책에는 수천년 인류가 쌓아놓은 얼마나 많은 지식들이 있는가요. 잘 해보세요." "정치를 그만하고 오늘 밤 질탕하게 놀아보자. 자, 건배!" 댕그랑! 잔을 시원히 굽을 낸 다음 그들은 노래하고 춤을 추었다. 은영이 성호의 노래에 맞춰 반짝이는 오색령롱한 레이저빛 아래에서 탄력있는 몸매를 흔들어대면서 춤을 추는데 진짜 매혹적이였다. 그날 밤, 성호와 은영은 각기 좋은 생각을 하면서 밤 깊도록 맥주를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추었다. 양산도에 사랑환상곡에 맞춰 사교무에 어깨춤까지 덩실덩실, 재즈음악에 맞춰 디스코와 댄스까지 쿵작쿵 퉁작쿵 추고 또 추었다. 흥에 겨운 춤판은 식을줄  몰랐다… 오색령롱한 불빛이 별처럼 깜빡이는 사교무청사 안에서는 파격적이고 경쾌한 원무곡에 맞춰 대학마크를 단 신사숙녀들이 우아한 무용자태로 쌍쌍이 돌아가고 있었다. 그들은 마치 맑디맑은 물 속에서 분홍색, 파란색, 노란색 지느러미를 하늘거리며 헤엄쳐 돌아가는 금붕어들을 방불케 하였다. 성호도 흥에 겨워 꽃 같은 파랑새 정희의 오른 손을 잡고 날씬한 허리를 잡은 후 소용돌이치는 꽃물결 속에 들어가 빙글빙글 돌아가기 시작했다. 한바퀴 돌면서 볼라니 은영은 외롭게 걸상에 앉아 있지 않겠는가. 성호는 고의적으로 파랑새를 안고 은영이 앞에서 왔다 갔다 하면서 보라는듯이 멋진 사교춤 동작으로 리드해나갔다. 은영은 그저 성호와 파랑새를 보고 고개를 끄덕이면서 눈인사를 살짝 할뿐이였다. 두바퀴 돌아왔을 때 그 긴 걸상에서 은영이 보이지 않았다. 성호가 파랑새를 안고 스리슬쩍 춤을 추면서 사교무청 안을 참빗질할 때다. 눈 앞에는 피가 꺼꾸로 쏟아질  듯한 장면이 안겨왔다. 글쎄 은영이 싱거운 꺽다리 범송의 품에 안겨 빙글빙글 돌아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저 싱거운 새끼, 정말 기를 채워도 한두가지 아니구나. 정말 죽고 싶어   환장했어?) "아, 미치겠다, 미쳐!" 성호는 저도 몰래 파랑새를 활 놓으며 고함쳤다. 그 바람에 춤군들의 눈길이 일제히 쏠렸다. 그제야 실수한 것을  느낀 성호는 두 손을 잡고 할딱거리는 정희를 끌어안고 머리를 숙이고 춤을 추었다. 범송과 은영이 춤을 추는 꼴을 보기도 싫었다. (끝내 올게 왔구나. 저것들이 진짜 사랑하는 건가?) 성호는 도저히 확인하기 싫었고 눈 앞의 현실을 받아들이기도 싫었다. 물론 성호의 품에 안겨 돌아가는 정희도 파랑새라고 불릴만큼 물 찬 제비처럼  예뻤다. 영화배우처럼 해말쑥하고 걀쭉한 얼굴, 하현달같이 가늘고 살짝 꼬리 들린 눈섭 아래 파란 꿈을 꾸는 듯한 파란 눈, 뜨거운 키스를 기다리는 듯한, 빨간 혀끝까지 보일락말락하게 빠금히 열린 입술, 게다가 파랑새를 수놓은 파란 적삼에 탄력 있는 허벅다리가 드러난 짧은 치마는 영화배우 같은 그녀의 인기도를 퍽 높였다. 허나 파랑새 어깨 너머 소똥무지에 박힌 함박꽃처럼 범송에게 안겨 생글방글 웃으면서 돌아가는 은영을 보자 춤을 출 기분조차 없었다. 그 느릿하고도 은은히 들려오는 곡에도 성호는 사선을 칠 때 길게 내딛어야 할 것을 짧게 디뎌 파랑새의 발을 자꾸 밟아 미안했다. 한곡이 끝나자 성호는 파랑새의 나긋한 허리를 놓고 노기 띤 얼굴로 범송의 옆에 앉아 있는 은영한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은영은 기다렸다는듯이 손을 내밀어 잡히며 범송을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였다. 마치 성호와 춤을 춰도 괜찮지 하면서 말이다. 그것조차 성호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성호는 격렬한 곡이 시작되자 동작을 급하고도 크고 힘차게 춤추기 시작했다. 은영을 안아 팽이처럼 사교춤판을 한 바퀴나 돌아가다가도 불시에 멈처서며 손을 쥐여 마구 돌려놓기도 했다. 또 허리를 안아 뒤로 젖히기도 하고 홱 나꿔채며 손을 잡아 빙글빙글 돌리기도 했다. 은영은 이상한 감이 들어 핼끔핼끔 못마땅한 눈길을 보냈다. 그러나 운동세포가 발달한 처녀여서 성호가 아무렇게나 휘두르며 못 살게 굴어도 다 맞춰 마지막박자까지 췄다. 그새 꺽다리 범송이 글쎄 파랑새를 안고 돌아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성호는 그 장면을 보아도 가슴이 별스레 아파났다. (대체 무슨 판인가! 내가 은영과 정희를 둘 다 사랑하고 있어? 질투심만 불타오르니 말이야. 괜히 체육머리에게 질투의 불길을 달려다가 오히려 질투심에 속이 타들어가니 말이야.) 은영과 한곡을 다 춘 성호는 은영의 체육머리 밑에 드러난 고운 귀에 대고 귀띔했다. "끝나면 문 밖에서 기다릴게. 할 말이 있소." 은영이 머리를 가볍게 끄덕였다. 성호는 뒤이어 울리는 곡마다 체육머리와 파랑새를 바꿔가며 춤을 췄다. 그런데 싱거운 꺽다리가 끼여들어 성호가 체육머리와 추면 파랑새와 추고 성호가 파랑새와 추면 체육머리와 춤추면서 애를 먹였다. (개자식!) 성호는 주먹을 불끈 쥐였다가 한숨을 후~ 내쉬면서 참았다. 춤판이 끝나자 성호는 파랑새를 먼저 보내고 문 밖에서 은영을 기다렸다. 제일 마지막으로 체육머리가 나타나 층계를 내려오면서 사처를 두리번거렸다. 그녀는 성호를 발견하고 어두운 나무밭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는 뒤따라오는 성호를 뒤돌아보며 "밤도 깊었는데 무슨 일인지 간단히 말하세요."라고 나직이 말했다. 성호는 묵묵히 걷다가 돌아서며 은영의 두팔을 잡아 마구 흔들면서 갈범처럼 으르렁거리렸다. "그래 그 꺽다리 그렇게 좋아? 그 자식 나보다 더 좋은 거 뭔데?" "이걸 놔요. 놔!" 은영은 팔을 빼더니 체육머리를 뒤로 쓸어 넘기면서 생각 밖으로 맞대포를 쏘는 것이였다. "범송 오빠는 오빠처럼 간에 가 붙고 쓸개에 가 붙지 않아요. 뭐나 진심이죠. 공부도 잘하고 인물체격도 좋고 뭐나 다 좋아요. 어때요? 만족돼요?" "그래?" "네. 누굴 좋아하든 말든 웬 상관인데요?" "5.1절에 흰 반팔 와이셔츠 입고 다니는 주책없는 꺽다리새끼 그리 좋아? 엉?" "픽-" 은영은 코웃음 치며 쏘아부쳤다. "남의 흉은 잘 보는구만요. 범송은 오빠처럼 옹졸하지 않아요. 흉금이 넓고 시원시원하고 랑만적이죠." 그녀는 체육머리를 뒤로 쓸어넘기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성호가 아무리 애타게 불러도 거미줄로 묶은 선학 같아 멈춰 세울 수 없었다. "아- 내 그 꺽다리를 어쩌면 좋을가? 정말 기를 채워 죽인다." 성호는 주먹으로 백양나무를 피 터지도록 탕탕 치면서 통탄하였다.      
112    대하소설 진달래 소야곡(2) 댓글:  조회:1730  추천:5  2017-11-09
                                  대하소설 진달래소야곡 제1권 청춘의 고백 차례 1. 첫사랑 그녀 2. 효자와 사랑 3. 마음의 파도 4. 체육머리 처녀 5. 쌍쌍이 나래치는 제비 6. 실련영탄곡 7. 미련 8. 꺽다리와 난쟁이 9. 청춘 로맨스 10. 달밤의 추억 11. 결투 12. 복도에서 벌어진 희극 13. 사랑의 진실 14. 폭풍 15. 목동과 파랑새 16. 약혼녀의 폭발 17. 베일에 가려진 진상 18. 리몽룡과 춘향 어디에 있나? 19. 충고 20. 규수와 목동 21. 깍쟁이령감 22. 소나무숲 속의 참사 23. 흉수의 그림자 24. 흉수와 피해자 25. 백일하에 드러난 윤간범들 26. 소식공개회 27. 흉수를 나포 28. 미궁 29. “한뉘 소 궁둥이나 칠 놈”                                                                                                        1. 첫사랑 그녀        뭉게뭉게 피여오르는 구름과 안개 속에 칼날 같은 절벽을 깎아세운 천지꽃산은 푸르른 소나무와 연분홍 진달래꽃 옷을 입고 우뚝 솟아 있다. 구름인지 안개인지 담담하게 흐르며 기암괴석을 보일락말락하게 쓸어올려 드러났다 숨었다 하는 절벽이 더 진한 매력을 풍긴다.        옛날에는 칼날처럼 예리한 절벽이 치솟았다고 하여 이 산을 칼산이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이른 봄이여서 아직도 여기저기 잔설이 남아 있다. 층암절벽에 뿌리를 박고 엄동설한의 눈보라와 찬서리에도 악착스레 살아온 진달래는 봄바람에 하느작이며 도라지춤을 추는 상 싶다. 천지꽃산에는 해마다 진달래꽃이 온 산을 뒤덮으며 활짝 피여 봄이면 봄마다 산이 하나의 큰 연분홍 진달래꽃송이를 방불케 했다. 고향 사람들은 이 산을 천지꽃산이라고 불렀다.       천지꽃산의 진달래를 두고 사람들은 항일전쟁시기 영용한 항일투사들의 선혈을 머금고 떨기떨기 피여난 꽃이라고 했다. 또 항일투사들의 넋이 진달래꽃으로 재생한 꽃이라고 했다.      그렇다. 천지꽃산의 진달래는 항일투사들의 불요불굴의 넋이며 엄동설한 찬서리와 풍설에도 억척스레 살아온 우리 겨레의 상징이 아니겠는가!      비단결로 얼굴을 만지는듯 부드러운 봄바람이 불어오고 어느덧 봄아가씨가 사뿐사뿐 다가왔다. 봄아가씨의 따뜻하고 부드러운 숨결이 대지를 키스하며 스치고 지나가자 천지꽃산 층암절벽에서 겨우내 찬서리와 싸우면서 억세게 살아온 진달래도 언 몸을 풀며 애어린 꽃잎사귀가 파릇파릇 돋아나기 시작하였다. 보슬보슬 내리는 보슬비는 층암절벽에 축복의 은구슬을 뿌리고 천지꽃산의 진달래는 여느 꽃나무들을 앞찔러 이슬을 머금고 싱숭생숭한 봄꿈을 꾸면서 꽃망울을 부풀어올린다. 벌써 양지바른 언덕에 있는 진달래는 꽃망울이 버들개지처럼 오동통하게 움트기 시작하였다. 봄바람에 흥겨워 수양버들가지가 흐늘흐늘 설레이면서 춤추고 파랗고 빨간 꽃들이 소리 없이 피어 길손들을 부른다. 봄빛은 날이 감에 따라 짙어가고 해님이 방실방실 꽃웃음 짓는 따뜻한 때를 만나 예쁜 진달래꽃들이 산들산들 불어오는 봄바람에 꽃향기를 풍기면서 자기 아름다움을 한껏 자랑한다. 진달래 꽃이 만발한 고향의 산에서는 피끓는 청춘들이 싱숭생숭한 사랑의 서정시로 청춘의 노래를 연주한다. 어느 일요일, 성호는 향기로운 봄 기운을 가슴 뿌듯이 느끼면서 오랜만에 천지꽃산에 올랐다. 푸른 창공을 찌른 검 같은 천지꽃산은 뭇산 위에 우뚝 솟아 있어 참말로 장관이였다. 바람벽 같은 절벽과 파란 봄 하늘을 배경으로 산새들이 원을 그리며 재롱을 피우면서 날아예고 층암절벽에는 연분홍 진달래가 활짝 피여 반겨 맞았다. 성호는 시원한 고향 산공기를 가슴 뿌듯이 들이켜고나서 연분홍 진달래로 물든 천지꽃산을 둘러보았다. 마치 한 폭의 아름다운 산수화도 같아 아름다움의 극치를 감상하는 것만 같았다. 그는 진달래 꽃밭에 앉아 진달래꽃 향기를 한껏 맡으면서 경제학교과서를 꺼내들었다. 갑자기 그리 멀지 않은 뒤산 진달래꽃 숲  속에서 은방울을 굴리는  듯한 웬 처녀애의 구성진 노래소리가 이른 아침 봄하늘에 메아리쳤다. “이런 야산에 웬 녀가수야?” 성호는 그 청아하게 부르는 노래소리에 그만 암송마저 그만두고 쌍까풀눈을 퉁방울눈처럼 뜨고 진달래숲 속을 두리번거렸다. 웬 일인가? 성호가 그녀를 찾는 눈치를 챘는지 노래소리가 뚝 끊기고 잠잠해졌다. 성호는 가슴이 높뛰기 시작하는 것을 느끼면서 진달래숲 속으로 성큼성큼 걸어들어갔다. “어떤 미녀가수일가?” 그러나 한참 진달래꽃밭을 헤매면서 찾아도 그녀가 숨박꼭질이나 하는듯이 찾아내지 못하였다. 분명 그녀가 성호를 발견하고 숨박꼭질하는 것 같았다. 성호는 도리머리질하며 중얼거리더니 진달래꽃숲 속에서 나와 다시 중얼거리면서 책을 읽었다. 그런데 그가 산기슭으로 거의 내려올 때산에서 또 처녀애의 구성진 노래소리가 들려왔다. 성호는 책을 읽으면서도 드문드문 진달래꽃숲 속에 흘끔흘끔 눈길을 보냈다. 한참 후 성호는 연분홍진달래꽃숲 속에서 호리호리하게 생긴 웬 예쁜 처녀애가 진달래꽃 한줌을 가슴에 모아쥐고 나오는 것을 발견하였다. “아니, 저게 누구야? 순희?!” 성호는 깜짝 놀랐다. 순간 성호는 대학교시절에 처녀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겠다던 자기 맹세가 산산이 박살나고 있음을 폐부로 느꼈다. 진짜 유혹의 힘은 리성을 잃게 할만큼 어머어마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어머!" 저쪽도 그를 발견하고 놀랐다. 정말 충격적인 장면이였다. 어쩜 진달래꽃이 만발한 고향산 기슭에서 첫사랑 순희와 로맨틱한 상봉을 한단 말인가! "순희!" 성호는 순희의 아래우를 훑어보았다. 볼우물을 옴폭 파며 생글방글 웃는 그녀는 퍽 매혹적이였다. (아, 저 살인할 볼우물, 그 옴폭 파이는 볼우물에 유혹돼 첫사랑을 달구지 않았던가.) 1메터 육십도 넘는 호리호리한 키에 보름달 같은 우유빛 얼굴, 버들나무잎 같은 눈섭, 은은한 정을 담은 까만 한쌍의 청포도 쌍까풀눈, 입술에는 연분홍 진달래꽃잎 풀물이 진하게 물들어 있었다. 예전보다 보름달 얼굴이 좀 수척해보일뿐 의연히 예뻤다. 순희는 성호와 한 고향에서 나서 자란 죽마고우였다. 아니, 성호의 가슴을 처음으로 설레이게 한 첫사랑, 잊을 수 없는 첫사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생글생글 웃는 순희의 수척하고 갸름한 보름달 얼굴이 그렇게 고울 수 없었다. 성호는 진달래꽃을 꺾어든 순희한테 다가가면서 그간 궁금하던 것부터 물었다. "소문도 없이 길림에 갔다더니?" 순희는 한숨을 길게 내쉬면서 천지꽃산 아래 고향 마을을 내려다보았다. "대학도 붙지 못한게 어쩌겠니? 호~" 성호는 어떻게 위로했으면 좋을지 몰라 서성거렸다. "아니야, 또 시험 치면 되지. 실망할 거 없어." 그러나 순희는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3년이나 시험 쳤는데도 낙제했는데 무슨 렴치로 또 시험을 쳐?" 성호는 부지중 아주 자연스레 오른 손을 순희 어깨  우에 올려놓으면서 열변을 토했다. "세상에 어디 정해준 명이 있어? 넌 총명해. 노력하면 꼭 대학에 입학할 수 있어." 순희는 성호의 손을 내리우면서 눈을 곱게 흘겼다. "다 네 탓이야!" "뭘?!" 성호는 눈이 떼꾼해졌다. "네가 철주  앞에서 '장차 순희와 결혼하겠다.'는 말만 하지 않았어도 내 인생 이렇게 되지 않았을 거야. 길림 교외에 이사 가지도 않았을 거고." 성호는 산기슭의 고향 마을을 굽어보더니 "철주, 그 새끼 정말!" 하고 중얼거리면서 동년시절의 회억에 빠졌다. 철주와 성호는 동갑이였다. 그들 둘은 짜개바지 때부터  한 고향 마을에서 어깨동무하면서 자랐다. 철주는 어려서부터 손버릇이 나쁜데다가 어찌나 까불어댔는지 모른다. 성호보다 키도 훨씬 큰 그 자식은 항상 같지 않은 일로 성호와 걸고들어 한바탕 두들겨 패놓군 했다. 또 녀자애들을 꼬시는데는 남다른 재간이 있었다. 그는 천지꽃산 넘어에 있는 과수원에 가서 사과배를 훔쳐다가 태평강 버들숲 속 모래밭에 파묻어두고 드문드문 파내 강물에 씻어 먹었고 순희와 월순한테 주기도 하면서 호감을 샀다. 성호는 슬그머니 순희를 꼬시는 철주가 미워났다. 공부를 잘 못하는 철주는 한어만은 죽여줬다. 그는 학급 학습위원을 하는 성호를 슬그머니 질투한 나머지 녀성애들 앞에서 한어로 연설하듯이 헐뜯어댔다. 지어 두 학급의 학습위원을 하는 성호와 순희가 좋아한다는지, 수학시험지랑 함께 매기면서 련애를 했다는지, 성호가 장차 순희와 결혼해 쌍둥이를 낳겠다고 했다는지 별의별 터무니없는 험담을 다 했다. 어느 날, 성호는 강바닥 모래톱에서 철주와 대판 싸움을 붙은 적도 있었다. 그때만 해도 성호는 키가 한 뼘이나 더 큰 철주를 당해내지 못하고 한매 얻어맞고 허망 쓰러졌다. 철주는 성호를 깔고 들어앉아 주먹으로 어찌나 사정없이 때려댔는지 코피까지 다 터졌다. 성호는 어린 시절을 회상하면서 피씩 웃었다. "철주는 이젠 상대도 아니지." 순희는 성호를 곱게 흘겨보았다. "어째 대학생이라는게 아직도 싸우려니?" "승부가 다 났는데 뭘 싸워? 흥!" 성호는 코방귀를 뀌었다. "철주 탓이 아니야. 다 네 탓이야." 순희의 말에 성호는 추억 속에서 깨났다. "철주 아니면 난 녀자애 같은 남자애로 됐을 거야. 그 놈 새끼 내 성격마저 고쳐놓았지 뭐야?" 성호는 극력 변명하면서 책임을 회피하려고 들었다. "너네 길림에 이사 간 건 쌀 고생해서 갔지 어디 내 탓이냐?" 순희는 까만 포도알눈을 부릅뜨고 따지고 들었다. "뻔뻔스럽긴? 철주랑 애들이 어찌나 놀렸는지 내 학교로 머리를 들고 다니지 못한 걸 아니?" 성호는 심장을 찔린 듯 어쩔 줄 몰랐다. 그의 변명 같은 방패는 펑펑 구멍이 뚫리고 말았다. 그래도 이리저리 피하면서 궤변을 부렸다. "애들이 널 고와서 놀린 거야." "뭐라고?" "사춘기 때는 그래. 고운 녀자애들이 자기와 좋아하지 않으면 놀려주지. 지어 때려주고 싶지." "뭐라니? 네나 그랬겠지. 요 궤변쟁이야!" 순희는 참다못해 주먹으로 성호의 가슴을 마구 조겨댔다. "길림에 가서 되지 않는 한어로 대학시험을 치는 바람에 못 붙었다. 알았니? 이 놈아, 다 네 탓이야!" 성호가 이리저리 피하면서 진달래꽃숲 속으로 도망치자 순희는 진달래꽃가지를 꺾어 쥐고 쫓아가면서 후려쳤다. 그 바람에 진달래 꽃이 여기저기 흩어져 날렸다. "얘, 얘, 졌다. 그만하자. 괜히 말도 못하는 불쌍한 진달래꽃만 상해." 순희는 할딱거리면서 성호를 똑바로 보면서 경고했다. "이제 다시 사람들 앞에서 '순희'란 말만 입 밖에 내는 날엔 내 황천에까지 쫓아가서 족쳐줄 거야." "그래?" "난 네 손목 한번 쥐여보지도 못하고 애들에게 얼마나 놀림을 당했는지 알어?" 성호는 순희한테 다가가 가냘프고 길죽한 손을 와락 잡았다. "왜 이래?" "얼마나 대가를 치른 손인데. 한번 쥐여보면 안돼?" "얘, 놔라, 놔!" 순희는 겨우 손을 빼 쳐들고 보면서 오만상을 찡그리었다. "아파 죽겠다." 성호는 희죽거리면서 빈정거렸다. "세상에 둘도 없는 무서운 녀자애구나." "또, 또 안될 말을 꺼내겠니?" "남은 정식으로 말하는데 넌 파쑈독재를 해?" "난 널 좋아하지 않니?" "?!" "넌 외동아들이 돼서 자기 밖에 몰라." 성호는 그 말에 한숨을 후~ 내쉬었다. "고까짓 걸로야 리유로 될 수 없지. 혹시 부모를 모셔야 할 내가 싫어진게 아니야?" 순희는 속으로 이렇게 부르짖었다. (아니야! 난 일찍 아버지를 여의여서 시부모라도 계셨으면 좋겠다. 시아버지 사랑도 받아보면 얼마나 좋겠니?) 그러나 그녀는 단마디로 대신했다. “넌 그저 싫다.” “왜?” “아주 간단해…” 그녀는 “바라오르지 못할 나무는 바라보지도 말라고 했잖아." 하고 말하려다가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삼켜버렸다. 성호는 순희한테 다가가 앉았다. 순희는 손가락으로 시꺼먼 부식토에 줄을 쪽쪽 그었다. 성호는 순희의 속심은 모르고 횡설수설했다. "거 이상 조카 월순이 또 놀릴까봐 겁나?" 순희는 머리를 점점 더 떨어뜨렸다. "그럼?" 순희는 머리를 들어 성호를 피끗 바라보더니 눈길을 칼날 같은 구름송이가 절벽을 스치면서 흘러가는 파란 하늘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천번이고 만번이고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넌 대학생, 난 농민이야.) "말해라. 도대체 무엇 때문이야?” 성호는 온 몸에 열이 올라 순희를 와락 끌어안았다. 순희는 몸부림치면서 성호의 억센 두팔을 밀어내더니 발딱 일어났다. "이러지 말라. 어서 내려가자. 누가 보겠다." 성호는 따라 일어섰다. "보면 뭐라니? 이젠 우린 중학생이 아니라 청년이란 말이다. 청년! 이전에 너네 엄마 뭐랬는지 아니?" "?" "내 엄마 너네 엄마를 찾아가서 빌었지. '우리 철 없는 성호 장차 순희와 결혼해 살겠다고 해놔서 이집 순희 애들에게 놀림을 당해 미안하오.' 그런데 너네 엄만 뭐라고 했는지 알아? ‘장차 애들 일을 어떻게 안다고 그러는가?’라고 하면서  성호를 너무 욕하지 말라고 했지. 어디 그뿐이야? 너네 월순이 날 '염치없는 올종자놈'이라고 욕한다고 다신 욕하지 말라고 엄포를 놓았지. 건 너네 엄마 날 좋아한단 말 아니고 뭐야?" 순희는 주춤 멈춰서서 성호를 곱게 흘겨보았다. "개꼬리를 3년 파묻어도 썩지 않는다더니 그 개꼬리 개꼬리구나. 참, 넌 어쩜 항상 사춘기 소년처럼 철딱서니 없니? 눈치코치 없는 멍청이라고야. 원." 허나 성호는 순희의 뒤잔등에서 계속 열변을 토했다. "넌 내 첫사랑이야. 죽어도 잊지 못할 첫사랑이야.” 순희는 오똑 멈춰 서더니 몸을 돌리고 정색해 물었다. “너 도대체 뭘 보고 자꾸 이러니?” 성호는 “너 웃을 때 볼에 옴폭 파이는 볼우물이 얼마나 사랑스럽다고.” 하고 말하려다가 너무 유치한 것 같아 그만두고 동문서답을 했다. “넌 길림에 이사가면서도 간다는 말도 한마디 안했지. 얼마나 서운했는지 아니? 영영 생리별하는가 했어. 헌데 오늘 이렇게 첫사랑 그대를 만날줄을 누가 꿈에나 생각했겠어." 순희는 실망에 찬 눈길을 흘리더니 또다시 몸을 돌려 천천히 걸었다. "픽-" 순희는 랭소했다. "네겐 첫사랑이 대체 몇이냐? 은숙이? 미옥이? 도대체 누가 네 첫사랑이냐? 넌 사춘기도 아니니데 딱 개구쟁이 같아." 순희의 보름달 얼굴에 어둠과 비웃음이 반죽된 그림자가 흘러지나갔다. "내 첫사랑은 너 밖에 없어." "호호호. 우리 학교에서 얼굴이 반반하다는 녀자애들을 건드리지 않은게 몇이나 돼?!" "됐다, 됐어. 좌우간 내 마음  속에는 너 밖에 없어." "남자애들 마음은 왜 그래? 한 곬으로 흐르지 못하고 여기저기 산지사방으로 흩어져 흘러?" 성호는 피할 곳이 없게 됐다. 무거운 침묵 속에서 그들은 산에서 터벅터벅 걸어내려갔다. 한참 후 성호는 순희 뒤에서 진달래꽃을 한가지 꺾었다. "순희야, 이 진달래꽃이 곱지?" 순희는 주춤 멈춰서 돌아서더니 성호의 손에 쥐여진 연분홍 진달래꽃을 보고 반색했다. "참 곱구나!" 금방 새침해하던 순희 같지 않게 반기는 것이 아니겠는가. "옛다! 선물이야!" 성호는 진달래꽃을 순희 앞에 내밀었다. 순희는 진달래꽃을 받아 냄새를 맡더니 상을 찡그렸다. "야! 불쌍한 진달래꽃을 왜 또 꺾어? 몇시간 지나면 말라 죽을게 아냐?” 성호는 횡설수설 늘여놓았다. "넌 사랑의 선물을 받았으니 이젠 내가 알아서 할게." "야, 무슨 헛소리야!" 성호는 들었는둥 말았는둥 희쭉거리면서 진달래꽃을 더 꺾어 작은 꽃다발을 제꺽 만들어 순희의 머리 우에 척 얹어주었다. 순간 성호는 진달래꽃다발을 쓰고 진달래꽃묶음을 든 순희를 보고 저도 몰래 환성을 질렀다. "야, 이쁘다! 넌 한송이 진달래꽃 같아! 야, 이쁜 진달래꽃 처녀야!" 순희는 너무나도 당황해 "야, 이러지 말라. 이럼 난 어쩌니?"라고 했다. 성호는 환성을 멈추고 순희에게 다가갔다. "순희야! 내 피뜩 한 가지 령감이 떠오른다!" 순희는 그윽한 정이 찰랑이는 눈길로 성호를 마주 보았다. 성호는 정색해 말했다. "넌 예쁘고 목소리도 곱지 않고 뭐야? 아까 산 우에서 노래를 부르는 걸 듣고 웬 가수가 부르나 했어. 정말 가수를 하면 되겠더라." "가수?" "응, 그래. 가수를 해라." "가수 하자면 가수 되겠니? 황차 시골 농민처녀애가?" 기실 순희는 문과대학생으로 되려다가 말고 가수로 될 새로운 꿈을 바꿔 고향에 놀러 왔다가 심란한 마음도 달래고 목청을 튀우려고 천지꽃산에 올랐던 것이다. 성호는 한 걸음 다가가 순희의 손을 잡고 열변을 토했다. "농민처녀애라도 훌륭한 스승을 모시고 배우면 될 수 있어. 넌 중학교 때도 무대에 올라 꾀꼴새처럼 노래를 아주 불러 소문이 있었잖니?" 순희는 진달래 꽃을 들어 향기를 길게 들이켜더니 머리를 들고 성호를 정색해 마주 바라보면서 입술을 감빨았다. "누가 시골 처녀애를 배워 주겠느냐?" "내 다리를 놔서 스승을 찾아 줄게." "네가?" "그래." 성호는 미심해 하는 순희의 손을 두 손으로 꽉 잡았다. "내 이모부가 예술학원 교원이야." "그래? 뭘 가르치니?" 순희의 청포도알 같은 쌍까풀눈에서는 한줄기 희망의 빛이 반짝이였다. 성호는 신심에 차 말했다. "이모부를 보고 성악교수를 소개해달라고 할게." "글쎄." 순희는 반신반의했다. 그들은 묵묵히 산기슭으로 걸어 내려왔다. 저 먼발치 혁명렬사기념비 앞에 웬 사람이 절을 꾸벅꾸벅 하는 것이 보였다. 성호가 찬찬히 살펴보니 아버지였다. "야, 숨자!" 순간 성호는 순희의 손을 잡고 진달래 숲에 숨어들어갔다. 처녀 총각의 가슴은 쿵쾅쿵쾅 높뛰었다. 뭘 도적질한 건 아니건만. 또 련애를 해선 안 될 사춘기도 아니건만. "너네 아버진 우릴 발견하지 못했을가? 왜 청명도 아닌데 렬사기념비를 찾아 왔을가?" 성호는 하얀 보름달 같은 얼굴이 연분홍진달래꽃처럼 새파랗게 질린 순희의 얼굴을 훔쳐보면서 말했다. "우리 아버진 해마다 이때면 기념비를 찾아 오군 해. 우리 큰할아버지와 큰할머니는 모두 항일유격대 군관이랬어. 그런데 바로 이 산기슭에서 큰할아버진 일본 놈들과 싸우다가 흉탄을 맞고 쓰러져 영용하게 희생됐다고 한다. 또 진달래라고 부르는 녀유격대는 임신한 몸으로 마지막유격대전사로 남아 피 한방울 남을 때까지 일본 침략자들에게 맹사격을 퍼부었대. 탄알이 다 떨어지자 돌로 일제놈들을 까부셨대. 일본놈들이 벼랑 우까지 기여올라와 그를 포위하고 생포하려고 했어. 그는 저 벼랑 우에서 뛰여내려 장렬하게 희생됐단다." "오~ 그래?" 성호는 아버지가 두 손을 맞잡고 혁명렬사기념비 앞에 머리를 숙이고 묵념을 드리는 걸 보면서 뒤말을 이었다. "이전에 아버지 얘기하던데 우리 큰할아버진 아주 힘장사였대. 이 천지꽃산 기슭에서 일본 놈들과 육박전을 할 때란다. 일본 놈 세 놈이 총창을 꼬나들고 덤벼들자 날아드는 총창을 틀어쥐고 그 놈들을 강아지 다루듯 휘둘러 쓰러뜨렸단다. 큰할아버진 탄알이 다 떨어지자 맨 무쇠주먹으로 그 세 놈의 대갈통을 까부셨단다. 그런데 뒤에서 덮쳐든 놈이 권총으로 쏘는 바람에 큰할어버지는 가슴에 흉탄을 맞고 쓰러졌단다. 후에 우리 아버지랑 마을사라들이 진달래렬사랑 우리 큰할아버지랑 렬사들의 유체를 모두 저기 혁명렬사기념비 뒤에 모셨단다." "음~ 정말 비장하구나!" "성호야, 거기서 뭘 하니? 어서 내려오라!" 성호가 가만히 진달래꽃숲을 헤치고 내려다보니 기념비  앞에서 아버지가 이쪽을 보고 손짓하지 않겠는가. "들켰어." 순희는 진달래숲에 몸을 낮추면서 성호에게 눈을 흘겼다. 성호는 순희의 손을 잡은 손을 놓으면서 "넌 죽어도 여기서 나와선 안돼."라고 했다. 그는 혼자 아무 일도 없는 척하며 휘파람을 휘휘 불면서 산 아래로 내려갔다. 그때 저쪽에서 철주가 수레를 몰고 집으로 가다가 이쪽을 흘끔거리며 채찍으로 애꿎은 소잔등을 쨩쨩 후려갈겼다.  순희는 허리를 굽히고 진달래꽃숲에서 살금살금 소나무숲 속으로 스며들어갔다.                                               2. 효자와 사랑       갑자기 먹장구름이 뭉게뭉게 피여오르더니 천지꽃산을 지지눌렀다. 연분홍 진달래꽃잎들은 삽시에 불어치는 스산한 산바람에 몸부림치면서 떨었다. 성호는 한시급히 순희와 달콤한 꿈을 무르익히고 싶었다. 상진은 진달래꽃을 꺾어쥐고 내려오는 성호를 마주 보면서 정색해 말했다. "얘, 너 그게 뭐야? 어째 불쌍한 진달래꽃을 꺾었니?" 성호는 대수롭잖게 진달래꽃을 쳐들어보였다. "집에 가져다 병에 꽂아두자고 그럽니다." "뭐라고?! 얼마나 고생스레 살아온 진달래를 그렇게 허타하게 꺾어?!" "쌔고 버린게 진달래꽃인데 몇가지 꺾었다고 큰 일 나겠습니까?" "얘, 그 진달래꽃은 무슨 꽃인지 알기나 아느냐? 일본 놈들과 싸우던 항일렬사들의 피로 물든 꽃이야." 아버지 말씀에 성호는 그제야 진달래꽃을 무심히 볼 수 없었다. 드디여 꽃을 마구 꺾은 잘못을 뒤늦게나마 느꼈다. "오늘은 큰할아버지와 큰할머니가 희생된 날이야. 어서 큰절을 올려라." 상진은 성호를 데리고 기념비 뒤에 있는 커다란 혁명렬사 묘지에 다가가 큰 절을 세번 올렸다. 성호가 머리를 들어 천지꽃산 진달래꽃숲 속을 살펴보니 순희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아차, 우리 집에 데리고 갈 걸 그랬어. 오랜만에 만났는데 밥도 한때 대접하지 못하고 보내다니?) "사내란 큰 일을 하려면 녀자를 멀리 해야 하느니라." 말수가 적은 아버지의 마디마디 말은 성호의 심장까지 쿵쿵 울려주었다. 아버지에게 꾹 잡혀 산 아래로 내려가는 성호의 발걸음은 무겁기만 했다. 한편 순희의 둘째오빠가 고향 마을에 있다는 것에 생각이 미치자 시름이 좀 놓였다. 아버지는 산기슭에 내려가 사래 긴 밭에 가 멈춰서는 것이였다. 밭머리에는 황소 한마리가 가대기를 끌다가 말고 서 있었다. 분명 아버지가 밭갈이를 하다가 쉼에 기념비에 절을 올리러 갔다가 온 것이였다. "얘야, 너와 조용히 할 말이 있다.” 상진은 가대기를 잡고 채찍으로 황소를 "이라!" 하고 몰았다. 순간 상진이 쥔 가대기가 지나간 밭에 거머스럼한 부식토가 번져지면서 그윽한 흙냄새를 풍기였다. 상진은 밭을 갈면서 산기슭 저쪽 진달래꽃숲 속을 힐끔거리는 성호를 곁눈질하더니 무겁게 입을 열었다. "얘야, 대학에 갔으면 쓸데 없이 녀자애들 뒤꽁무니를 따라다니지 말고 공부나 잘해라. 내 너만큼 공부를 할 수 있었더라면 현장도 했겠다." 그렇다. 성호의 아버지는 생활고로 소학교 대문에도 가보지 못했다. 그러나 해방전쟁과 항미원조전쟁에서 혁혁한 공훈을 세우고 제대하자 현공안국 초대국장을 맡았다. 상진은 문화대혁명때 반란파들의 피해를 받아 공안국장을 그만두고 농사를 지으면서 두번째고향 건설에 혼신을 다 바쳤다. 아버지를 두고 성호는 내심 탄복한 적이 한두번이 아니였다. 성호는 밭갈이를 하는 아버지 옆에서 고삐를 쥐고 소를 몰면서 묵묵히 따라 걸으면서 명심해 들었다. "너 혹시 저 순희를 좋아하니?" 그 말에 성호는 머리를 숙였다. 황소는 성호가 대학교를 가기 전에 반년 넘어 방목하던 놈이여서 말을 잘 들었다. "너도 이젠 컸으니 련애도 하고 대상도 찾아야 할 때긴 하지." 그 말에 성호는 안도의 한숨이 후~ 나갔다. 상진은 채찍으로 황소를 제 곯에 몰아넣듯이 성호를 자초부터 잘 타이를 예산이였다. "대상을 고를 때 꼭 자기가 사랑하는 처녀를 골라야 한다. 음식은 먹기 싫으면 식탁에 뒀다가 먹을 수 있어. 허나 마음에 들지 않는 녀자와는 한뉘 살기 힘들다. 말하자면 사랑이 없는 결혼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거야." 그렇다. 상진은 자기 교훈을 아들에게 일러주고 있었다. 기실 상진은 공안국 국장을 할 때 한 마을에 사는 성실이라는 처녀와 서로 사랑했고 결혼했던 것이다. 그런데 성실이 아들애를 낳다가 난산으로 새파란 나이에 사망할줄을 누가 알았겠는가. 상진은 하는 수 없이 갓난애를 yj 시내에 애를 낳지 못하는 집에 주었다고 한다. 상진은 꽃나이에 사망한 사랑하는 성실을 잊지 못했다. 시어머니 역정에 개 배때기를 찬다고 성실이 생각나기만 하면 쩍하면 후처 영옥을 욕하고 때리면서 가정기물을 부시고 내던지기가 일쑤였다. 영옥은 너무나도 힘들어 항상 남편에 대한 불평을 자녀들에게 털어 놓군 했다. "너넨 잘난 신랑 찾지 말라. 애비 인물이 잘나서 좋은 게 뭐냐? 인물을 뜯어먹고 살겠니? 잘나도  성질이 더러운 놈 만나면 나처럼 한뉘 고생한다." 영옥은 사위를 삼을 때나 며느리를 삼을 때면 항상 아들딸들에게 인물보다도  마음이 첫째라고 타이르군 했다. "남편을 황제처럼 받들고 모셔라. 남편이 황제가 되면 너희들은 황후로 되는 거야." 또 아들과 사위들을 볼 때마다 늘 이렇게 말했다. "남편은 집 안에서 아내를 아끼고 보살펴야 바깥에 나가서도 남에게 대접을 받소. 자기 아내도 아낄 줄 모르는 사람이 남을 아끼면 얼마나 아끼겠소? 집이 화목해야 만사가 잘 되는 법이오." 영옥은 이제 자기 집에 들어올 막내며느리만 잘 삶으면 되겠는데 정말 근심이 태산 같았다. 아들이 천지꽃산에서 소를 모는 목동일 땐 며느리감이 없을가봐  근심했는데 대학생이 되자 혼사말군과 며느리감 처녀들이 문턱이 다슬게 찾아들어 경사났다. 시아버지 사랑은 며느리라는데 이 집에서는 상진이 순희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 눈치였다. 상진은 밭머리에 가서 황소를 멈춰 세우고 성호를 정색해서 바라 보며 무겁게 말했다. "넌 대상자를 고를 때 애비와 에미 걱정은 말고 사랑하는 처녀를 골라라."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부모를 모시고 효성을 다할 처녀를 데려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상진은 아들을 대견스레 바라보았다. "그런 처녀 얻기 어디 그리 쉽겠느냐? 효성도 있고 사랑스런 처녀 이 세상에 몇이나 되겠느냐?" 상진은 황소 머리를 돌려 다시 가대기질을 하면서 뒤말을 이었다. "그래 네 생각에는 저 순희가 사랑스럽고 효성이 있다고 생각하니?" "예." 성호는 머리를 숙이며 쥐구멍으로 기어들어가는  듯한 목소리로 말하더니 발끝을 내려다보며 걸었다. "심중하게 생각해봐라. 이래라 저래라 강요하진 않겠어. 대상자문제는 신중해야 해.” "예-" "네 지금 생각에는 순희가 세상에서 제일 고운 거 같아도 이후에 순희보다 더 이쁜 애가 나타날 수도 있어." "순희는 내 첫사랑입니다. 어찌 첫사랑을 쉽게 버릴 수 있겠습니까?" 상진은 가대기를 깊숙이 박더니 황소를 멈춰 세우고 순희가 사라진 진달래꽃 숲 속을 두리번거리더니 나직이 말했다. "이후에 살자면 맨 사랑으로만은 안돼. 농민처녀애 호구를 시내에 들여가려면 힘들어. 애들도 낳으면 시내호구로 올리기 힘들게고." 성호는 머리를 들고 장담했다. "건 근심할 필요없습니다. 순희는 총명해서 꼭 예술학원에 입학할 수 있을 겁니다. 중학교 때도 학습위원이였습니다. 노래실력도 괜찮습니다. 내 이제 예술학원의 이모부한테 말해서 좋은 스승을 소개해 훌륭한 가수로 배양하게 할 예산입니다." 성호의 말을 유심히 듣던 상진은 무겁게 입을 뗐다. "순희를 대학생으로 키워서 장가들려면 퍽 힘들겠구나." "난 순희를 꼭 가수로 만들어 내 각시로 만들겠습니다." 상진은 밭갈이마저 멈추고 담배를 말아 물었다. 성호는 바삐 호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여 드렸다. 상순은 희죽이 웃으면서 성호를 바라보았다. "너 다니는 대학에는 사랑할 만한 대학생 처녀애 하나도 없니?" "없습니다. 내가 대학에 일찍 가다나니 모두 리상 누나들입니다. 다른 학부나 학년에도 눈에 드는 처녀 없습구마." 성호는 아버지 눈치를 흘끔 훔쳐보았다. 상진은 담배 연기를 후~ 내 뿜으며 한숨을 쉬였다. "너 공부 바쁘지 않으면 집에 온바 하고는 이 밭에 둼이나 내라. 이 밭을 어떻게 얻어온 밭이냐? 밥을 먹고 사는 놈이라면 이 땅을 사랑해야 해. 부모에게 효성을 다 하듯 조상들의 피땀이 슴배인 이 밭에 땀동이를 기울여야 한다." 진짜 실농군의 철리적인 말씀이였다. 밭고랑 같은 주름살이 패인 얼굴에 내비치는 엄숙한 아버지 표정을 보고 성호는 오후에 순희를 데리고 시내로 가자던 일을 잠시 접기로 했다. "아버지, 환갑이 지났는데 이젠 농사를 짓지 마십시오. 이제 대학을 졸업하면 아버지를 호광시키겠습구마." "말만 들어도 고맙네. 아직 손에 풀이 있을 때 농사라도 지어서 아들을 섬겨 줘야겠네. 대대로 붙여오던 밭인데 내놓긴 아깝구나." 순간 성호는 콧마루가 시큼해나고 눈물이 글썽해졌다. 성호는 두 말 못하고 집에 돌아가 외양간에서 암소를 풀어 수레에 메워  돼지우리 옆의 퇴비장에 몰고 가서 삽으로 둼을 푹푹 퍼 실었다. 그는 둼수레를 몰고 가면서 천지꽃산 기슭의 그 사래긴 밭을 쳐다보았다. "그래, 저 밭을 무심히 볼 수 없지." 성호는 아버지가 저 밭을 떠나지 않고 집착하는 마음을 조금이라도 알 것 같았다. 아버지는 조상들의 피땀이 배인 밭이라고 특별히 잘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연분홍진달래꽃이 둘러 선 천지꽃산 기슭의 밭에서 허리를 구부정하고 밭을 가는 상진과 둼을 밭에 내는 성호의 모습이 한폭의 농촌 사시풍경화와도 같이 안겨왔다.                                                                       3. 마음의 파도        세상 만물이 다 변하는데 사랑이라고 변하지 않겠는가!        성호는 아버지 말씀이 현실로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또 현실로 되면  너무나도 비극이라고 생각했다. 꽃구름이 두둥실 떴던 오전의 봄 하늘과는 달리 삽시에 서쪽의 천지꽃산에 먹장구름이 뒤덮여 오고 있었다. 성호는 도리머리를 흔들면서 땅이 꺼지게 한숨을 후~ 내쉬였다. 천지꽃산 기슭에서 소를 방목하던 목동이 이 시골을 벗어나 대학문으로 들어갔다는 것은 정말 고향 마을에서는 개천에서 룡이 난 새 신화나 다름없었다. 고향 마을에 천지꽃산의 전설이 생긴후 처음 기적적인 새 이야기가 파다히 퍼졌다. 성호는 소를 방목하면서도 늘 책을 호주머니에 넣고 가서 읽으면서 이 시골을 벗어나려고 청춘의 혼신을 불태웠다. 그리하여 집체호 교수들의 숱한 "왕자"들과 "귀공주"들이 대학에 가지 못했는데 농민의 아들인 성호가 대학으로 갔던 것이다. 성호는 집체호 영희나 해연이 대학에 가지 못한 건 별로 개의치 않았다. 교수들의 귀한 "귀공주"들인 그녀들은 모두 이제 시내에 들어가 아무 직업에나 취직해 시내에서 살 것이다. 하지만 농민의 딸인 순희는 시험에 급제하는 외에 농촌에서 벗어날 다른 방도가 없었다. 첫사랑인 그녀, 농민의 딸이란 딱지가 딱 들어붙어 풀밭에 그 고운 보름달 같은 얼굴을 파묻고 살 것을 정말 마음이 아팠다. 순희와 성호는 한 고향 마을에서 자란 죽마고우라는 것도 있지만 둘다 공부를 전 학교에 이름나게 잘한 최우수생이로서 1반과 2반의 학습위원이였다.담임 교원 경산 선생은 항상 그들 둘을 보고 시험지를 매기라고 했다. 성호와 순희는 서로 경쟁하면서도 서로 돕는 친구 사이였다. 남몰래 점점 리상야릇한 감정을 품게 됐고 이담 둘 다 커서 대학에 입학하자고 깎지걸이까지 한 사이였다. 성호는 리별의 쓰라림만 뿌려놓고 가버린 순희가 얄미웠다. 그 리별의 눈물이 소낙비로 억수로 쏟아져 내릴 지경이였다. (어쩜 이사갈 때도 간단 말을 안 하고 갈 수 있어? 오늘 또 간다는 말 한마디도 안 하고 훌 가버렸어? 오후에 시내에 함께 가서 이모부를 만나 스승을 찾아주려고 했건만.) 성호는 책을 들어도 머리에 들어가지 않고 순희의 어두운 그림자가 흐르던 수척한 보름달 얼굴만 떠올랐다. "얘야, 그만 둬라. 인연이라는 건 따로 있느니라." 옆에서 성호의 속내를 환히 꿰뚫어 본 어머니 말이다. 성호는 마지못해 책을 들여다보다가 소낙비가 뚝 멎자 책을 부랴부랴 책가방에 넣고 학교로 떠나려고 했다. "김 대장 있소?" 뜻밖에도 순희 둘째오빠 학선이 찾아왔다. "들어오오. 아니, 소낙비 오는데 어쩌다 우리 집에?" 개혁개방을 하면서 호도거리를 시작하자 며칠 전에 학선은 상진과 밭을 나누는 일로 대판 말다툼을 했던 것이다. 제비를 쥐여 천지꽃산 기슭의 밭을 나누자고 했다. 그런데 상진은 제비고 뭐고 그 밭은 자기가 가져야 한다고 고집했다. 리유는 간단했다. 그 밭은 자기 할아버지때부터 리지주네 황무지를 소작 맡아 개간한 밭이고 대대로 피땀을 몰부어 가꾼 밭이기때문이였다. 더구나 자기 큰아버지와 큰어머니가 천지꽃산에서 일본 놈들과 싸우다가 희생됐고 무덤도 천지꽃산 기슭 그 밭머리에 모셔져있기 때문이였다. "그 밭을 지주와 토비들의 철발굽 밑에서 빼앗아내고 지키려고 내가 민병을 데리고 토지개혁을 하고 토비를 숙청하느라고 싸울 때 너희들은 집에서 녀편네 궁둥이나 지켰지 뭐야?! 어림도 없어! 흥!" 좀 쌍트럽긴 했지만 학선은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황차 그는 고집을 쓰기 시작하면 벽이라도 차고 나가는 상진의 호랑이 같은 성질을 알고도 남음이 있었다. 재수령감을 비롯한 마을 사람들도 상진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해 모두 제비뽑기를 그만두고 상진에게 천지꽃산 기슭의 그 기름진 밭을 주기로 했던 것이다. 학선은 상진에게 져서 천지꽃산 기슭의 그 욕심나는 밭을 가지지 못하게 되자 숱한 사람들 앞에서 침을 퉤 뱉으면서 욕지거리를 해댔다. "김 대장한테 빌붙어서 콱 잘 살아라!” 그는 상진에게 흰자위를 부라리면서 "내 이후에 김 대장 네 집에 발을 들여 놓으면 내 이름을 바꾸겠다!"라고 두덜거렸다. 그는 밭을 재던 메터자를 쾅 던지고 휭 하니 찬바람을 일구며 자리를 떴다. 그래던 학선이 상진이네 집 안에 발을 들여놓았다. "이게 서산에서 해가 뜨지 않았는가?" 상진은 학선이 무슨 일로 왔겠다는 걸 대개 짐작하고 허리를 뒤로 쭉 펴면서 빈정거렸다. 학선은 분을 억지로 삼키면서 구들에 올라와 앉으면서 전번과는 달리 아주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다. "김 대장, 내 상론할 일이 있어 왔습꾸마." "천지꽃산밭 말은 꺼내지도 마오." 상진은 한마디 꽝 해놓고 창문 밖으로 칠색무지개가 핀 먼 동산을 쳐다보았다. "김 대장, 천지꽃산 밭이야 이 집에서 대대로 가꾼 밭인데 응당 김 대장네 붙여야 합지." "허, 듣다가 좋은 말이구먼." 그제야 상진은 학선을 되돌아보았다. "사실 오늘 온 건 김 대장네 성호와 내 막내 녀동생 순희 혼사말을 하러 왔습꾸마." 그 말에 상진과 영옥 내외는 서로 눈길을 마주치더니 일제히 성호에게 눈길을 돌렸다. 영옥은 입이 함박만해졌다. "거야 좋은 일이지." 영옥의 말에 상진은 "에헴," 하고 건 가래를 떼면서 세귀눈으로 아내를 흘겨보았다. 그는 어쩐지 학선이 좋지 않았다. 전번에 밭분배 때도 그렇고 자기 밑에서 생산대 회계를 할 때도 그렇고 어쩐지 언쟁을 일삼아 오면서 시비를 걸던 나그네였다. 그래서 성호를 순희한테서 떼놓으려고 했는데 사돈까지 맺자고 하니 억이 막혔다. (끝내 올게 왔구나. 어쩌지?) 상진은 마음을 정할 수 없었다. 저 집에서 발가벗고 접어드는 판에 심중히 처사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였다. 자칫 잘못 처사했다가 순희가 정말 며느리로 들어앉는 날에 한뉘 치란을 받을게 아닌가? "애들은 서로 좋아하는 거 같은데 성호 아버진 어떻습둥? 우리 순희 이 집에 며느리로 들어오면 꼭 시부모를 잘 모실겁니다. 우리 엄마를 닮아서 마흔 다섯까지도 애를 줄줄 낳아줄 겁니다. 보십시오. 내 처가 월순을 낳은 이태 후에 우리 엄마 글쎄 마흔 다섯에 저 순희를 낳지 않았습둥? 기적이 아닙둥? 우리 순희도 꼭 김 대장네 집에 떡돌 같은 손자를 낳아줄 겁니다. 쌍둥이를 서넛 낳아줄 수도 있습구마. 예. 김 대장네두 옛날에 애를 열이나 낳지 않았습둥? 우리 집과 이 집은 애를 수태 낳는 가문이니까. 성호와 순희는 꼭 궁합이 맞을겝구마. 어떻습둥?" 학선이 젖을 달라고 졸라대는 어린애처럼 졸라댈수록 상진은 입에 빗장을 지른 채 쇠덩이 같은 침묵만 지켰다. 학선은 지원이나 청하듯 조왕간쪽 영옥과 성호를 건너다보았다. 성호는 아버지 눈치를 슬슬 보면서 감히 입을 열지 못하는 눈치였다. "성호야, 네 말해 봐라. 순희를 좋아하지?" 성호는 대답대신 동문서답하듯 되물었다. "순희 길림으로 가지 않고 집에 있습니까?" 학선은 한숨을 후 내쉬더니 머리를 툭 떨어뜨리며 나직이 대답했다. "어제 네가 순희를 첫사랑이라고 하면서 약혼을 걸었다고 하더구나." "뭐? 어쩌고 어째?!" 상진은 더 참지 못하고 손바닥으로 구들 고래 꺼지게 탕 치기까지 했다. 날카로운 호랑이 눈길에 질겁한 성호는 "내 언제 약혼하자고 했다고 그럽니까?" 라고 발뺌부터 했다. 그제야 상진은 그럼 그렇겠지 하는 표정으로 바뀌였고 학선은 일이 틀려가는  것을 눈치챘다. "에이고, 어제 순희는 집에 돌아와서 울면서 이러다라. 성호가 자기를 좋아하는데 대학에 가지 못해 함께 살지 못해 죽을 거 같다면서 길림으로 가버렸다. 네가 순희를 좋아하면 좋아한다고 제대로 속심을 털어놔야지. 괜히 순희 마음을 뚜쟁이질해놓고 나 몰라라 하면 어쩌니?" 상진도 장차 애들 일이 어떻게 되겠는지 칼로 두부모를 베듯 하지 못하고 얼버무리였다. "차차 보기요." 무슨 일이나 언제나 단칼에 베듯 과단하게 처리하던 상진은 성호와 순희 혼사말만은 꼬리를 달고 질질 끌었다. 순희가 대학에 가면 그때 혼사말을 해도 늦지 않다는 배포유한 흥정을 하려는 속심이였다. "별 수 없지. 그렇게 하깁소." 학선은 맥없이 구들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오면서 골이 날대로 나서 속으로 두덜거렸다. "내 무슨 녀동생을 줄데 없어 빌붙는 거 같소. 배부른 흥정을 하긴? 쳇! 이제 수도 북경에서 한자리 하는 큰형님이 순희를 데려다 취직시켜 북경 아가씨로 만들 거야. 중앙간부를 매부로 삼지 않는가 두고 봐라! 흥!" 자존심이 강한 학선은 네모난 낯이 수수떡처럼 벌개 집으로 돌아가면서 욕지거리까지 해댔다. 한참 후에 뜻밖에도 기다리던 순희는 오지 않고 순희네 이상조카 월순이 성호네 집 앞에 나타났다. "성호야, 네 무슨 대단해서 우리 순희를 나무라니?!" "이건 또 뭐야?" 성호가 바깥을 내다보니 월순이 불그락푸르락해 펄펄 날뛰는 것이 아니겠는가. 월순은 바깥에 나가는 성호를 손가락질을 하면서 별의별 악담을 퍼부었다. "내 작은고모 뭐 시집갈 데 없다고 바람둥이 같은 너한테 빌붙을 거 같니?" "야, 동네 영상하게 왜 이래니? 할 말이 있으면 집에 들어와 해라!" 성호의 말에 월순은 더 고아댔다. "집에 들어가 뭘 해? 온 동네 사람들이 다 들으라고 떠들 테야!" 성호도 맞불질을 했다. "네가 떠든다고 순희를 데려올 게 아니야!" 월순은 집에 들어올 기미도 없고 울바자 굽에 서서 온 동네 떠나가게 떠들어댔다. “에이고, 그 잘난 시골 대학에 붙어가지고 작작 우쭐거려라.” 성호는 최후일격을 가했다. "야, 월순아, 혹시 네가 순희를 질투하는 거 아니냐?! 작은고모를 이기고 나한테 시집오겠으면 이렇게 떠들어서 될 일이 아니야!" 월순은 얼굴이 홍당무로 돼버렸다. 필경은 그녀도 숫처녀였으니까. "뭐라고?! 거 말이라고 하니? 난 네보다 두살이나 이상인데. 아무리 대학생이라도 그렇지. 내 주책없이 너한테 시집갈 거 같니? 죄꼬만 새끼!" “별 멍청이들이라고야. 여기 와서 떠들면 너네 작은고모를 대학생한테 시집 보낼 거 같니? 월순아, 근심하지 말라!” 언제 구경하러 왔는지 철주가 닭무리 속 거위처럼 긴 목을 빼들고 끼여들었다. “너네 순희는 이 사내대장부가 먹여 살릴 게!” “하하하!” “저 새끼 순희를 좋아하지 않니?” 마을 사람들은 일제히 철주에게 눈길을 돌리며 떠들썩했다. 철주는 숱한 사람들  속에서 고의로 목을 빼들고 고래고래 고함쳤다. “대학에 붙지도 못한 계집애들이라곤, 성호를 쳐다보는 게 원래 우둔하지. 순희는 농부라도 나한테 시집와야 편안히 살 수 있어. 헌 신짝도 제 짝이 있는 법 아니요?” 월순은 철주의 정신 나간 소리에 억이 막혀 그저 입을 딱 벌리고 쏘아볼 뿐이였다. 뒤이어 발길에 차인 강아지처럼 바자굽에서 깨갱거리며 도망치 듯했다. 성호는 월순의 뒤잔등에 대고 빈정거렸다. "네 작은고모보다 네가 시집오겠다면 혹시 고려해보겠는지 어떻게 아니? 집에 가서 네 둘째오빠와 토론하고 다시 혼사말 하러 오라!" 월순은 싸우러 왔다가 창피해 얼굴을 싸쥐고 도망가버렸다. 성호는 구경하러 모여든 숱한 마을 사람들을 둘러보면서 뒤에서 깨고소해 하였다. 서쪽 천지꽃산 쪽에 락조가 비낀 황혼 무렵이였다. 밥술을 들까 하는데 이번엔 집체호의 해연이 찾아왔다. "어마나, 어째 떠들썩했는가 했더니만요. 우리 마을 대학생이 왔구나." 성호는 숟가락을 놓고 알은 체했다. "올라오오. 식사했소?" 해연은 안경알을 춰올리더니 구들에 스스럼없이 올라오면서 "저녁을 주겠습니까?" 라고 했다. 영옥은 반갑게 맞이하면서 자기 곁에 자리를 내주었다. "여기 앉아 잡숫소." 해연은 옛날 도고한 시내 귀공주 같지 않았다. 이전에 소를 방목하는 성호가 말을 걸어도 소 닭 보듯 하면서 말대답조차 하지 않았던 것이다. 성호는 한뉘 이 시골에서 소방목이나 하면서 살 일을 생각하니 너무 섧고 답답했다. 그는 항상 천지꽃산 기슭의 풀밭에 소를 몰아놓고 산꼭대기에 올라가 산기슭의 사래 긴 강냉이밭을 내려다보면서 쓸쓸한 노래를 부르군 했다. 그렇게 날마다 노래를 부르다나니 목청이 터서 꽤나 듣기 좋게 노래를 불렀다. 산기슭에서 성호 아버지랑 함께 기음을 매던 선화랑 해연이랑 영희랑 성호의 노래소리를 들으면서 흥이 나 함께 코노래를 흥얼거렸다. 해연이랑 선화랑 기음을 다 매고 호미를 들고 퇴근할 때면 성호도 산꼭대기에서 노래를 그만 부르고 소를 몰고 집으로 돌아갔다. 성호는 돌아오는 길에 태평강 물에 손을 씻는 해연과 선화를 보고 말을 걸었다. “귀공주들 정말 선녀 같구먼.” 선화는 덤덤히 앉아 손을 씻었다. 해연은 아예 보기도 싫다는듯이 반쯤 돌아앉아 성호를 외면하면서 호미자루를 썩썩 씻더니 안경을 춰올려 다시 끼고는 훌 일어나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마을 쪽으로 가버렸다. 목동인 성호는 벼랑 우에 핀 그 진달래꽃송이들을 쳐다보지도 말았어야 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목동의 눈에도 예쁜 처녀들이 눈에 뜨이는 것을. 그때 상진이 터벅터벅 왔다. 선화는 자기 머리 수건을 벗어 성호에게 건네 주었다. “자, 손을 닦소.” 선화의 그 뜻밖의 행동에 성호는 어리둥절해졌다. “손이나 닦소.” “감사하오.” 성호는 부자연스럽게 수건을 받아 손을 닦네 하고 선화에게 넘겨주었다. “괜히 목동의 손때 묻어서 수건이 더럽혀지겠소.” 선화는 피씩 웃으면서 수건을 받아 손을 닦더니 강물에 훌훌 휭기어 씼으면서 중얼거렸다. “별 소릴 다 하오. 지금 목동이나 선녀나 다를 배 뭐 있소? 다 풀밭에 까투리처럼 머리를 파묻고 궁둥이를 쳐들고 땅파기를 하는 신센데.” 성호는 체면이나 챙겨가지고 소를 몰고 우사로 돌아갔다. 해연은 안경쟁이였지만 훤칠한 키에 배구를 잘 쳤다. 농촌에서 운동대회를 열면 항상 대대 배구팀 주공격수로 돼 그물 우로 솟아 올라 풍만한 가슴을 내밀며 늘씬한 허리를 뒤로 젖혔다가 앞으로 펴면서 놀라운 파괴력을 가진 강타를 안기군 했다. 배구에서는 해연과 성호는 손이 맞았다. 성호는 항상 감독으로 나가 해연과 함께 배구팀을 지휘해 하나 또 하나의 승리를 이끌어냈다. 그런데 해연은 배구시합만 끝나면 성호에게 한치의 곁도 주지 않았다. 하긴 대학교 교수의 귀한 공주이니만큼 이 시골에 와서 일시 빈농들의 재교육을 잘 받고 추천받아 시내로 들어가야 했다. 괜히 농부의 아들 - 목동과 자칫 흐물거렸다간 한뉘 시골  소똥무지에 물앉을 수도 있었으니까. 신분제도가 심했던 그 시절에 시내 공호와 농민, 아니 대학교수의 공주와  농부의 목동 사이에는 건너 뛸 수 없는 어마어마하게 높은 담벽과 깊고 깊은 협곡이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였다. 시내 대학교수의 딸들인 해연이나 선화는 아무리 성호가 인물이 잘나고 김 대장의 아들이라고 해도 곁을 주지 않은 것은 당연지사라고 할 수 있었다. 성호로서도 자기 처지를 아는지라 그런 선화와 해연을 두고 머리를 끄덕이지 않으면 안됐다. 성호는 결코 한살씩 이상인 해연이나 선화를 언감 생심  사랑까지 할 수 있었겠는가. 다만 신분 차이, 그 것이 섧고 한스러웠다. 아니, 염오하고 증오했다. “왕후장상도 씨가 따로 없거늘 이 세상에 시내 사람들과 농촌 사람들은 씨가 따로 있다더냐?! 흥!” 성호는 농부의 가문에서 태여난 더러운 팔자타령을 두덜거리면서 소채찍으로 소 궁둥이를 쨩, 쨩 치고 길가의 나무잎을 마구 치군 했었다. “우리 아버지도 제 노릇은 못했어. 공안국장을 그만두고 이런 시골에 올게 뭔가? 부모를 모시겠으면 그 좋은 국장 권력을 빌어 할아버지와 할머니 호구를 시내에 옮겨 갔더라면 자녀들도 시내에서 살게 됐을게 아닌가? 그럼 내 팔자도 이렇게 소궁둥이나 치는 목동 신세로 되지 않았겠는데. 헛 참. 더러운 팔자야!” 성호가 대학으로 가자 모든 신분 차이의 장벽이 일시에 와그르르 무너졌다. 농부의 아들이라고 성호와 금을 쪽 그어놓던 수녀나 비구니 같던 해연이 오늘 성호네 집에 찾아온게 아닌가! (해가 서산에서 뜨는 게 아니야? 대학 교수의 귀한 공주도 3년 째 대학시험을 쳐보더니 대학에는 아무나 가는 게 아니라고 생각된 건가? 혹시 시험공부 일로 해 지도받자고 찾아왔는가?) 점심상을 물리자 해연은 정색을 하면서 성호와 부모를 번갈아보았다. “성호한테 혼사말을 할가 해서 왔습니다.” 영옥은 반가워 인차 “성호 이젠 혼처를 구할 때도 됐소. 어디 좋은 며느리감 있소?” 하고 물었다. 해연은 꽤나 웃겼다. “이제 며칠 있으면 시내 들어가 살게 되는 처녀 하나 있어요. 인물 체격도 괜찮고 부모들은 모두 대학에서 교수 사업을 하는데요. 어려서부터 수양있게 자라서 시부모를 잘 모실 수 있대요. 그녀는 진짜 심청 같은 효성이 있는 효녀예요.” 영옥은 눈치 채지 못하고 “그래, 우리 성호는 맏이가 아니고 셋째아들이지만 아마 우릴 모실 팔잔 거 같소. 보오. 맏아들은 큰집 앞을 섰지, 둘째아들은 조선에 나갔지. 성호 밖에 없소. 이런 집에 들어올 시내 처녀 있다니 얼마나 기쁜 일이요?” “여보, 말귀도 알아듣지 못하면서. 쯧쯧쯧.” 상진은 눈을 흘겼다. 해연은 상진과 성호 눈치를 번갈아보면서 “한살 이상인데 괜찮겠어요?” 하고 계속 물었다. “거야 저희들 좋으면 나이가 뭐 대수요?” 영옥의 말에 상진은 한마디로 잘라버렸다. “성호 뭐 누나한테 장가들겠소?” 영옥은 상진을 흘겨보면서 고집을 썼다.  “나이 무슨 문제오? 예로부터 가정이 화목해야 모든 일이 잘 풀린다고 했습네. 한두살 이상이면 뭐라오? 누나 같은 녀자한테서 사랑을 많이 받고 좀 좋아서. 이 집엔 마음씨 착하고 효성이 지극한 며느리가 들어와야 하오.” 그때라고 생각한 해연은 한술 더 떴다. “제가 이 집 며느리 되면 안 되겠습니까? 성호가 음력으로 1월 생인데 제가 12월 생이니까요. 전 한달 때문에 한살 더 먹었는데요. 동갑이나 다름없어요.” 해연은 성호를 흘끔 훔쳐보았다. 성호는 속으로 순희를 떠올리면서 입에 빗장을 지른 채 덤덤히 앉아 있었다. 부모를 모셔야 할 처지에 놓인 성호는 여러 모로 대상자를 물색하지 않으면 안 됐던  것이다. 상진은 너무 답답해 “얘, 혼사 말은 맺고 끊고 해야 해.”라고 했다. 성호는 그제야 겨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천천히 생각해봅지.” 해연은 줄포를 놓았다. “알았어요. 혹시 순희나 선화 때문에 그러지 않나요? 성호씨가 대학에 갈 때 선화는 뭐 코바늘뜨개로 뜬 담배쌈지를 주었다면서? 흥, 그까짓 담배쌈지 인연이 그렇게 대단한가요? 난 시내에 살림집까지 갖춰 놓았어요.” 그 말에 영옥은 성호를 재촉했다. “야, 네가 집까지 있는 처녀와 살면 시름 싹 놓겠다. 시내에 집을 갖추려면 얼마나 힘드니?” “여보, 그 입 다물지 못하겠소?” 상진은 아내한테 눈알을 부라렸다. 해연은 훌 일어나면서 한마디 더 남겼다. “성호, 잘 생각해 보고 답복해주오.” 그때 성호도 일어나면서 한마디 하려고 하려다가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삼켜버렸다. (사랑은 나이를 그리 따지지 않소. 허나 사랑이 없는 결혼은 무의미하고 행복하지 않을 거요. 카멜레온 같은 처녀애, 이전에 목동질을 할 땐 쓴 외 보 듯하더니 지금 와선… 흥!) 순간 같은 시내 대학교 교수의 딸이지만 선화가 그래도 해연보다는 인정머리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최저한도로 머리수건을 벗어 목동에게 땀을 닦으라고 주던 선화는 최저한도로 자기한테 인간대접은 하지 않았던가! 해연은 집 안에 돌개바람을 세차게 일으켜놓고 횡 하니 가버렸다. 순간 성호는 소 방목을 하던 목동인 자기를 소 닭 보 듯하던 해연이 떠오르면서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바깥에서는 제비들이 빨래 줄에 앉아 몰려오는 먹장구름을 보면서 소낙비가 올 징조를 예고하듯이 짹짹 거리다가 집 안으로 날아 들어와 둥지에 올라갔다. 제비새끼들은 주둥이를 벌리고 먹이를 달라고 짹짹 울어댔다. 이튿날, 동녘 하늘이 희붐히 밝아오자 성호는 바삐 아침을 먹네 하고 시내로 돌아가는 길에 올랐다. 그는 순희 둘째오빠를 찾아가 순희 주소라도 알아볼가고 주춤 멈춰섰다가 발길을 돌렸다. 마음의 거센 파도 충격에 그는 학교로 돌아가는 길에 착잡한 생각에 빠지고 말았다.
111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88) 댓글:  조회:1780  추천:6  2017-11-06
                    5. 화선입당       땡볕이 재글재글 내리 쪼이는 삼복염천에 곡식과 나무들이 시들어갔다. 강냉이 이파리들은 달팽이처럼 감긴 채 말라버려 사원들의 마음이 재가루가 될 지경이었다. 사람들과 가축들도 홧홧 달아오르는 무더위를 먹고 쓰러져 갔다.       대지에는 “인민공사”, “대약진”, “반 우파투쟁”이란 세폭의 붉은 기가 새빨갛게 휘날렸다. 사원들은 허백호 서기의 명령에 따라 밭으로 일하러 나아갈 때도 세 폭의 붉은 기를 들고 나가 밭머리에 꽂아놓아야 했다. 그들은 굿이나 하듯이 바람에 펄럭이는 붉은 기를 바라보면서 일하고 쉼에는 붉은 기 아래에서 날마다 시시각각 허백호 서기의 가로사대를 들어야 했다. 항상 정치 유머로 횡설수설하던 성근은 이번에는 붉은 기 귀를 쥐어 내리쪼이는 뙤약볕을 가리었다. 그러자 사원들은 너도 나도 성근처럼 붉은 기 아래로 달려가 앉아 붉은 기 귀를 쥐어 햇볕을 가리었다. 밭머리마다 세 폭의 붉은 기는 펄럭였지만 사원들과 소들은 굶고 무더위를 먹어 하나하나 쓰러져갔다. 어느 하루, 흥수가 무더위를 먹고 까무러쳐 쓰러졌다. 상순은 두 말 없이 자기 웃옷을 벗어 흥수에게 씌워 업고 산 아래 마을로 내려갔다. 모두들 허백호 서기를 따라 입방아만 찧는 흥수가 쓰러지니 깨 고소해 했다. 지어 일부 사원들은 흥수를 업고 가는 상순을 나무랐다. “썩어지게 놔둘 게지.” “흥수한테 헐뜯기우면서도 구해서 뭘 한다오.” 허나 상순은 개의치 않고 흥수를 토성 안 위생원에 업고 들어가 진달래를 보고 흥수를 구급하라고 했다. 진달래는 황급히 응급조치를 대기 시작했다. 상순은 흥수가 사경에서 벗어나는 것을 보고 그날로 현 당위에 찾아갔다. 그는 곧추 이계삼 부서기를 만나 그간 허백호 서기가 함흥촌에 와서 이른바 심갱밀식농사법을 강제로 실행하면서 허영주 향장과 할아버지에게 우파 모자를 씌워 투쟁했고 사촌동생인 허영호 소장을 시켜 쇠고랑이를 채워 파출소에 연행한 정황을 반영했다. 사건경과를 죽 들은 이계삼 부서기는 책상을 꽝 치면서 벌떡 일어났다. “말이 아니구먼. 아무에게나 우파 모자를 씌워 투쟁하다니? 무슨 죄가 있다고 훌륭한 간부들에게 쇠고랑까지 채워 감금한단 말이오? 내 당장 허 서기를 찾아봐야겠소.” 상순은 믿음에 찬 눈길로 이계삼 부서기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이 서기, 기실 우파는 허백호 서기라고 봅니다. 안 되는 농사법으로 올해 농사를 다 망쳐 놓았습니다. 한자 깊이로 둼을 파묻고 그 위에 강냉이를 심어서야 뭘 거둘 수 있겠습니까? 밭에 가 보니 옥수수 몇 대 나지 않았습디다. 그걸 막았다가 허 사장과 할아버지가 우파 모자를 쓰고 말았습니다. 허 서기를 놔두면 온 진수해공사 농사를 몽땅 망쳐놓을 것 같습니다.” 이계삼은 사무실에서 한참이나 왔다 갔다 하며 거닐다가 우뚝 멈춰 섰다. “이 정황은 아주 중요하오. 우리 현당위에서 언제 그런 우둔한 짓을 하라고 지시했소? 자칫하면 허백호 서기로 인해서 진수해 숱한 간부들을 해치고 농사를 다 망치겠소.” 상순은 그때라고 한 걸음 더 다가서며 말했다. “허 서기는 함흥대대에서 먼저 심갱밀식을 실험한 후 그 경험을 전 공사에 보급하겠다고 합디다.” “우둔한 게 범을 잡겠소. 김 서기는 꾹 참고 허 서기 하는 대로 놔두오. 가을이 되면 자연히 실험전의 산량이 나오고 시비가 갈라질 게 아니오?” “예, 알았습니다.” “당에서는 언제든지 억울한 허 사장이나 할아버지 우파 모자를 벗겨 줄 것이요.” “예, 이 서기를 믿고 돌아가겠습니다.” 이계삼 부서기는 현 정부 대문 밖까지 나와 미더운 눈길로 상순을 바래였다. 한편 허백호 서기는 병완이네 집에서 나와 며칠 전에 이흥수의 집으로 옮겨갔다. 우파 모자를 씌운 병완과 결렬한다는 뜻이었다. 흥수는 허 백호를 등에 업고 입당하고 나아가서 병완을 밀어내고 대대 당지부 서기 자리를 차지하려고 허 백호를 자기 집으로 끌어들였던 것이다. 사실, 흥수는 항미원조 전쟁 때 상순의 친척 되는 남조선 유격대 총에 자기 동생이 죽은 후 상순네 일가에 원한을 품고 있었다. 게다가 춘실마저 상순과 애매한 관계가 있어 애까지 낳았다는 것을 알게 돼 속에서 복수의 불길이 이글거렸다. 그때부터 흥수는 처처에서 병완과 상순을 눈에 든 가시처럼 여기면서 암암리에 보복의 칼을 시퍼렇게 썩썩 갈았다. 그는 진수해로 달려가 돼지고기를 사온다, 술을 사온다 하면서 허백호에게 아첨하려고 괴춤이 다 벗어지는 줄도 모르고 달아 다녔다. 저녁에 춘실이 저녁 밥상을 챙겨 웃방에 올려 왔다. 흥수는 소주를 한사발이나 부어 올린 후 연신 자기 사발의 돼지고기 점을 집어 허백호의 국 사발에 놓아주었다. “허 서기, 많이 드십시오.” 김이 몰몰 나는 돼지고기를 보자 허백호는 연신 달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는 게걸스레 큼직한 돼지고기 점을 골라 저로 집어 급급히 입안에 넣었다. (이걸 어쩌나?) 돼지고기 점이 어찌나 따가운지 큰일 났다. 허백호 서기는 천정을 쳐다보며 혀로 돼지고기를 이 볼 저 볼로 굴리면서 물었다. “허허, 이 집 대들보 좋긴 좋다. 음, 어데서 베 왔소?” 흥수도 게걸스레 먹다가 입천정이 덴 허백호를 놀리려고 전라도 말로 유머를 부렸다. “된 천덩(정)꼴(덴 입천정꼴)에서 베 왔으니께.” 백호는 입을 하 벌려 김을 빼면서 계속 천정을 쳐다보며 물었다. “이 집은 어느 해 졌소?” 흥수도 능청을 부렸다. “게걸 년에 지었지라.” 허백호는 자기를 게걸스럽다고 놀리는 것이 괘씸했다. 그 사이 그는 돼지고기 점을 우물우물 돌리며 식히다가 겨우 꿀꺽 삼켰다. 순간 뜨거운 돼지고기점이 목줄로부터 명치끝까지 쪽 내려갔다. 허백호는 입을 딱 벌리고 눈을 감고 있다가 돼지고기점이 똥집에까지 내려간 후에야 입김을 후 내보냈다. “야, 거 돼지고기 맛 좋다.” 그때 흥수는 희죽이 웃으며 빈정거렸다. “맛있으면 많이 드시랑께. 돼지고기 너무 뜨겁잖은께(디까)? 찬물을 드릴까요?” “에끼, 이 사람아, 돼지고기를 먹고 찬물을 마시면 배탈이 날게 아닌가?” “예~ 그럼 술을 천천히 드시랑께.” 허백호는 술 사발을 들어 쭉 마시고 돼지고기 점을 집어 연신 입에 넣었다. “허, 거 술맛 좋고 돼지고기 맛있도다.” 그는 흥수의 귀에 대고 나직이 쑤군거렸다. “병완 영감네 집에서는 돼지고기는커녕 이밥도 온전히 얻어먹지 못했소. 뭐, 간부들이 죽물을 먹어봐야 사원들의 쌀 고생하는 거 안다던가. 진짜 푸대접을 하지 않겠소? 흥! 진작 당신네 집으로 왔겠는 걸.” "헤헤헤." 허백호는 흥수가 기다릴 말을 술술 쏟아냈다. “성의 정말 대단하오. 당에 대한 충성심도 대단하구. 이런 동무를 아직까지 입당시키지 않다니. 정말 병완 영감과 상순이 무슨 심보요? 이번 반 우파 투쟁에서 동무는 표현이 아주 좋았소. 이제 흥수 동무를 화선 입당을 시킬 작정이오.” 흥수는 어깨마저 으쓱해 가마 목 쪽의 춘실을 힐끔 건너다보았다. 눈치차린 춘실은 생글방글 웃으며 술상에 다가와 술병을 두 손으로 받쳐 들었다. “허 서기, 많이 드세요. 이 나그네를 입당시키겠다고 하니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자, 한잔 받으세요. 해해해.” 춘실이 술잔에 찰찰 넘치게 부어 올리면서 아양을 떨어댔다. 그녀도 흥수한테서 시동생이 처첨하게 남조선 유격대한테 사살됐다는 말을 들은 후 상순을 곱게 보지 않았다. 더욱이 상순한테 버림받은 앙금이 세월이 흐르고 흘러도 쉽게 풀어지지 않았다. 진짜 사랑과 원한이 마구 뒤범벅이 돼 그녀를 속이 부글부글하게 괴롭혔다. 그래서 몇 해 전에도 상순을 집에 불러들여 함정에 빠뜨리려고 했던 것이다. 허백호는 술잔을 받아 쭉 굽을 내고 나서 “아, 그 술맛 좋다.”라고 하며 술잔을 술상에 내려놓았다. 그는 흥수와 춘실을 번갈아 보며 호언장담했다. “근심하지 마오. 입당뿐이겠소? 장차 병완 영감 대신 함흥대대 당 지부 서기를 시킬 예산이오. 이 마을에서 병완과 상순의 뿌리를 찍어내야 인민군중들이 허리를 펴고 살 수 있소.” 흥수와 춘실은 너무 놀랍고도 기뻐 서로 마주 보며 연신 머리를 조아리었다. “허 서기, 정말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춘실은 손으로 머리카락을 풀어헤치며 걸작아양을 떨었다. “머리라도 잘라 신발을 지어드리겠어요.” "아니, 아니, 그럴 필요까진 없소. 술이나 잘 마시면 됐소. 허허허. 성의 참 대단하구려." 허백호는 술이 거나하게 됐지만 아첨인지 추파인지 보내는 정에 함빡 젖은 춘실의 눈길이 너무 따가와 슬쩍 피했다. “흥수 동무, 정치만은 나한테서 배워야 하오. 어, 거, 이제 우파분자 병완을 투쟁할 때 앞장서 구호도 부르고 투쟁하란 말이오. 그래야 화선입당하지.” 흥수는 멍해 허백호를 쳐다보다가 천천히 입을 뗐다. “화선입당이란 건 뭐신고?” “어, 거 전, 전쟁터에서 입, 입당한단 말이오.” “예-농사를 짓는데 무슨 전쟁이락꼬?” 허백호는 얼근이 취해 손을 내 휘저으면서 가르치려 들었다. “반 우파 투쟁은 총소리 나지 않는 전쟁이란 말이오. 반 우파투쟁을 잘하면 화, 화선입당을 할 수 있소.” 흥수는 머리를 끄덕이면서도 앞장서 병완을 투쟁하고 구호를 부를 일을 생각하니 저도 몰래 한숨이 나왔다. “어째 부담스럽소? 한, 한숨부터 자꾸 쉬, 쉬면서. 입당하려면 똥담이 커야 하오. 이번 반, 반 우파 투쟁은 병완이 사느냐 흥수가 죽느냐는 생사결판을 내는 전쟁이란 말이오? 알만 하오?” 그 말에 뭔가 알리는지 흥수는 속으로 입당해 함흥대대를 쥐락펴락 하려면 양심을 어기고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다고 굳게 마음을 다잡아먹었다. “구호를 어떻게 부르꼬?” “우파분자 김병완을 타도하자! 알만하오?” 흥수는 들었던 술병을 밥상에 내 놓더니 허백호를 쳐다보았다. “허 서기, 김 서기를 타도하다니? 그렇게 엄중한 착오입니까?” 취기가 올랐던 허백호는 정신을 차리며 눈알을 희번득거렸다. “그렇소. 하늘에 사무치는 죄를 지었소. 그 영감은 3대 혁명 붉은 기를 반대했소. 대약진을 하려면 한 헥타르에 10만근을 내야 하오. 난 올해 함흥대대에서 한 헥타르에 5만근을 내고 명년에는 8만근, 그 다음해에는 10만근을 내게 하겠소. 이제 함흥대대에서 5만근만 내면 전 공사에 그 선진경험을 보급할 예산이오. 이 중대한 임무를 흥수 동무가 병안이 대신 맡아야 하겠소. 병완 영감을 타도하지 않고 어떻게 동무가 대대 당지부 서기로 올라가오? 올라갈 자리를 내야 올라가지. 할만하지?” 흥수는 “예~ 병완 영감을 타도해야 내가 올라가지.”라고 하며 머리를 끄덕이면서도 농사는 허백호 요구를 만족시킬 자신이 없었다. (한 헥타르에 어떻게 5만근을 낼까?) 흥수가 생각해도 한심한 생산량이었다. 허백호 서기는 흥수의 그런 속심을 알고도 남음이 있었다. 하긴 그도 한 헥타르에 5만근을 낼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그도 상급의 지시를 어길 수 없었고 한번 기적을 창조하고 싶었다. 그는 그런 속내를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흥수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근심하지 마오. 우선 입당하고 당 지부 서기는 천천히 해도 되오. 먼저 상순과 병완 두 당 지부 서기를 이용해 5만근 실험을 해 보기요. 5만근을 내지 못하면 그 놈들의 책임이 아니오? 허허허.” 그제야 흥수는 조금 시름 놓을 수 있었다. “내일 우파투쟁대회에서 앞장서 ‘김병완을 타도자하!”고 구호를 높이 부르고 투쟁하오. 그럼 인차 입당부터 시키겠소.” 백호는 한미디 덧붙였다. "서기 되려면 말투부터 고치라고. 함흥대대엔 대부분 함경도 분들이라고. 계속 전라도 말 쓰면 민심을 얻는데 걸릴 거 같소." "예- 입당할락꼬, 아니, 저 말버릇 돼갖고. 무슨 조건 많은디. 고향 말씨도 못 쓰는갑디?" 흥수가 부르튼 소리하자 백호는 내심하게 타일렀다. "글세 차차 고치라니까. 이게 정치요." (정치 진짜 무지무지 더러운디.) 흥수는 한숨을 내쉬면서 술병을 들어 허백호에게 붓고 또 부어 올리고 개여 올렸다. 이튿날 오전, 사원들이 기음을 한 쉼 맨 후 쉴 참이었다. 허백호는 사원들을 향해 “몽땅 밭머리에 모이시오!” 하고 호통 쳤다. “또 무슨 일이야?” 사원들은 자기 모자에 우파 모자가 씌워질까봐 겁나 목을 움츠러뜨리며 밭머리에 양떼 몰리듯이 모여왔다. 허백호는 독기어린 눈길로 파출소에서 끌어온 병완과 허영주를 쏘아보며 아주 격앙된 목소리로 을러멨다. “우파분자 김병완과 허영주를 끌어내라!” 병완과 허영주는 쓰거운 표정을 지으면서 밭머리에 뿌리내린 듯이 까딱하지도 않았다. “우파분자들은 듣지 못했는가?!” 허백호 서기가 고함치자 흥수가 씽 달려 가더니 병완의 뺨을 찰싹 갈겼다. “영감, 나오지 못하겠는가?” 흥수가 재차 영주 사장의 뺨을 갈기려고 손바닥을 휘두를 때었다. “이 놈 새끼!” 병완이 흥수의 손목을 덥썩 잡아 비틀며 허망 밭머리에 태를 쳐놓았다. 뜻밖에 벌어진 사건에 모두들 깜짝 놀랐다. 흥수는 대가리부터 흙에 처박혔다. 그는 뻘건 피와 흙이 처 발린 상을 쳐들고 신음소리를 내면서 겨우 일어났다. “우파분자! 감히 나를 쳐?!” 뒤이어 그는 병완을 쏘아보며 주먹을 불끈 쥐고 높이 쳐들더니 목이 터지게 구호를 불렀다. “우파분자 김병완을 타도하자!!” 병완과 허백호의 독기 어린 눈길이 공중에서 부딪치는 순간 보이지 않는 번개가 번쩍이고 우레가 천지를 진동했다. 허영주 사장도 한 치의 양보 없이 대들었다. “허 서기, 내 무슨 잘못이 있다고 우파요, 뭐요 하고 떠드오?” 허백호는 어이없다는 듯이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당신, 그래 죄를 모르겠소?” 허영주는 우쭐 일어나 억울함을 호소했다. “난 이제껏 중국 공산당에 충성해온 공사 간부요. 항일전쟁시기 당신이 영월구에서 민병 련장이나 할 때 나는 조선의용군을 따라 태항산에서 일제 놈들과 싸웠소. 당신이 민주연군에서 련장을 할 때 나는 이계삼 서기와 함께 이 함흥 촌의 첫 당 지부를 세웠소. 우리 공사 어느 골안에 내 발자국이 찍혀 있지 않는 곳이 있소?…” “그만 지껄여? 자기 죄를 뉘우칠 대신 숱한 사원들 앞에서 아직도 자기 자랑을 잔뜩 늘여 놓겠는가?!” 허백호는 숱한 사원들 앞에서 수세에 몰릴 수 없었다. 그는 파출소 소장 허영호를 한쪽으로 불러 뭐라고 쑤군거렸다. 병완과 허영주를 노려보던 허영호 소장이 민경들에게 손을 홱 휘둘렀다. “우파분자들에게 고깔모자를 씌워!” 민경들은 다짜고짜 덮쳐들어 병완과 허영주에게 미리 준비해온 고깔모자를 씌우고 양팔을 붙잡아 사원들의 앞에 내 세웠다. “내 무슨 죄 있는가?” 허영주 사장이 팔을 마구 뿌리치며 반항했다. 허백호는 흥수를 돌아보며 눈짓했다. “우파분자 투쟁대회를 시작하겠습니다.” 흥수가 앞장서 투쟁했다. “허영주 사장은 우리 위대한 중국 공산당을 모욕한 죄가 있으니께." 그는 눈을 흘기는 백호의 눈치를 채고 제꺽 억지로 말투를 고쳤다. "이전에 우리 생산대에서 범바위골에 갔을 때 허영주는 ‘사원들이 배불리 먹으면 사회주의고 공산주의’라고 했습니다. 또 함흥대대의 경험을 온 진수해공사에 널리 보급했습니다. 병완 영감과 상순은 허영주 사장의 반동노선을 그대로 집행한 원흉이라니께. 아니, 원흉입니다. 우리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는 그저 배불리 먹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까? 마땅히 반 당 반 사회주의 우파분자들을 잘 투쟁해야 합니다. 저런 우파분자들이 대를 물려받으면서 우리 함흥대대를 통치해서야 됩니까? 저 병완 영감과 상순만 봐도 나는 눈에 쌍불이 난다니께. 저 놈들이 당원이노라고 얼마나 우쭐거렸는지 압니까?” 허백호는 흥수가 개인 보복하는 듯이 투쟁하는 것 같아 눈짓했다. (어쩜 시켜준 서방질도 못해?) 눈치챈 흥수는 말머리를 제꺽 돌렸다. “저 허영주 사장은 부패분자입니다. 전번에 범바위골에 왔을 때 상순이 준 멧돼지고기랑 사슴고기랑 수태 가져다 처먹었습니다. 어찌 공산당 간부로서 굶어 사는 백성들에게 쌀이나 돼지고기를 가져다 줄 대신 뭔가요? 배때 터지게 막걸리에 멧돼지 고기를 수태 처먹고 수태 챙겨 간단 말입니까? 원 격분해서!” 흥수는 또 병완을 치려고 주먹을 불끈 틀어쥐고 다가섰다. 허나 병완의 불길이 이글거리는 세 귀 눈을 보자 질겁해 꼬리를 사타구니에 차고 뒤로 한걸음 물러섰다. 황급해난 허백호는 흥수를 한쪽으로 불러 나직이 말했다. “멧돼지 고기 말은 더 하지 마오. 괜히 난장판을 만들겠소.” 격분한 흥수는 언성을 높였다. “그래 공짜로 멧돼지 고기를 처먹은 죄를 투쟁하지 않으면 뭘 투쟁하라는기오? 아, 저 투쟁하랍니까?” 백호는 허영주의 눈치를 흘끔 보며 흥수의 팔소매를 잡아 당겼다. 그제야 흥수는 침을 퉥 뱉으며 뒤로 물러섰다. 다른 사원들은 눈치만 보면서 투쟁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자 허백호는 이번에는 오옥선 교원에게 고깔 모자를 씌워 한참 투쟁했다. 그런데 오옥선이 또 야단칠 줄이야. "내 죄보다 허백호 서기 죄 더 큽니다." "뭐? 어찌고 어째?" 허백호는 눈이 휘둥그래졌다. 사원들은 모두 허백호와 오옥선을 번갈아보았다. 오옥선의 입은 칼날이었다. "삼도만토비 숙청 때 나팔수를 했던 저의 오빤 저 백호 때문에 희생됐습니다. 저 놈이 산중턱에 우리 오빠랑 세워놓지 않았어도 놈들의 총에 맞아 희생되지 않았을 겁니다. 한 개 련이나 되는 민주련군 전사들을 토비들의 탄알받이로 산중턱에 세워 놓은 죄보다 더 큰 죄가 뭡니까?" 허백호는 갑작스레 고함쳤다. "이 년, 주둥일 닥치지 못해?" 그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흥수가 씽 달려가더니 옥선의 입에 수건을 틀어막았다. 백호는 식은 땀을 쓱 닦더니 놀라운 일을 공포했다. “나는 진수해공사 당위를 대표해 반우파 투쟁에서 이흥수 동지의 적극적인 표현에 근거해 화선입당을 비준한다는 것을 선포합니다. 동시에 이흥수 동지를 병완 영감 대신 함흥대대 당 지부 서기로 임명합니다.” 허영주는 쓴 웃음을 짓더니 허백호를 손가락질 하면서 따지고 들었다. “당의 조직원칙이 있소? 없소! 당신 마음대로 입당시키오?” 흥수는 손바닥으로 낯빤대기의 피 묻은 흙먼지를 쓱 닦으면서 입이 당나발이 돼 헤벌쭉거렸다. “감사합니다. 허 서기, 난 토비숙청과 해방전쟁, 항미원조 전쟁에 가서 상순을 따라 다니며 싸우면서 왼팔에 부상당해도 저 자들이 압제하면서 입당시키지 않습다니께. 헌데 오늘 입당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정말 감사하다니께.” 흥수는 허백호 서기 앞에 무릎을 꿇고 절까지 했다. 허백호는 숱한 사원들 앞이라 너무 과분한 감이 들어 황급히 흥수를 부축해 일으켜 세웠다. 허나 흥수는 허백호의 바지가랭이를 잡고 눈물을 줄줄 흘리기까지 하는 추태를 보였다. 갑자기 허영주 사장이 고깔모자를 벗어 밟아 버리더니 버럭 고함쳤다. “허 백호, 당신은 내 범바위산에서 가져온 멧돼지고기를 먹지 않았는가?! 당신의 논리대로면 당신도 부패분자고 우파분자요!” 사원들 속에서는 소란이 벌어졌다. “에이, 검정개 돼지 흉을 한다더니. 쯧쯧쯧.” “허백호 서기도 우리 생산대 멧돼지고기를 먹은 우파분자구먼.” 어떤 사원들은 뒤에서 이러쿵저러쿵 떠들어댔다. “기실 우리 대대 농사를 망쳐 먹은 게 누구요?” “저 허 서기야.” 지어 어떤 사원들은 나직이 허 서기를 우파 모자를 씌워 투쟁해야 한다고 했다. 바빠 맞은 허백호는 황급히 고함쳤다. “오늘 투쟁대회는 이만 하겠습니다. 너무 오래 쉬고서야 언제 5만근 고지에 오르겠소?” “아니오! 오늘 회의는 계속 해야겠소!” 모두들 소리 나는 쪽을 바라보니 사원들의 뒤에서 이계삼 부서기와 상순이 앞으로 걸어 나왔다. 허백호와 허영호는 이계삼의 앞으로 다가서며 굽실거렸다. “헤헤헤, 이 서기 언제 왔습니까? 진작 온다고 알렸더라면 허영호 소장을 시켜 찌프차에 모셔 왔겠는 걸 그랬습니다. 헤헤헤.” 이계삼 부서기는 허백호를 거들떠 보지도 않고 사원들을 향해 소리 높이 말했다. “여러분, 여러분들의 말씀이 옳습니다. 병완 서기와 영주 사장은 아무런 착오도 없습니다. 나는 현 당위를 대표해 정중히 선포합니다. 허영주 사장과 김병완 서기에게 우파 모자를 씌운 것은 좌적인 착오입니다. 이 두 분은 우리 당의 실사 구시한 원칙을 견지했고 혁명에 공헌을 아주 많이 한 훌륭한 간부입니다!” 숱한 군중들이 우레가 터질듯이 박수쳤다. 이계삼 부서기는 계속해 연설을 했다. “올해 함흥대대 농사를 망쳐 먹은 허백호 서기야 말로 함흥생산대대 집체와 사원들의 죄인입니다. 저 옥수수 밭을 보시오. 곡식이 나게 만들어 놓았는가?” 사원들은 둼 구덩이 우에 몇 대 자라지 못한 옥수수, 말라 누렇게 된 옥수수를 바라보며 장탄식했다. 뒤이어 이계삼 부서기는 허백호를 돌아보며 훈계했다. “허 백호 서기는 제 정신이 있소? 둼 구덩이 위에 옥수를 심어 5만 근을 낼 수 있소? 농사를 모르면서 눈 먼 장승이 길을 가리키듯이 농사를 지휘하다니? 정말 머리가 뜨거워져도 한심하구먼.” 허백호도 지려고 하지 않았다. “이제 저쪽 밭에서 옥수수 묘를 떠다가 심으면 풍작을 거둘 수 있습니다.” “5만근을 내지 못할 땐 어찌 하겠소?” “당성으로 보장하겠습니다!” “그렇게 장담하지 마오. 당 간부로서 뭐나 실제로부터 출발해 말해야 하오. 당장 저 둼 구덩이를 흙으로 메우고 강냉이모를 떠다 심소. 이제라도 늦지 않소.” 허나 허백호는 고집을 부렸다. “이대로 심갱밀식농사법을 쓰면 5만근을 꼭 낼 수 있습니다.” 여기저기에서 “와-” 하고 웅성거렸다. 상순과 눈짓을 맞춘 이계삼은 돌아서 허백호를 보면서 “좋소. 저 한 헥타르 농사를 망칠 셈 치고 허백호 서기의 호언장담이 맞는가 보기요.”라고 했다. 뒤이어 이계삼 부서기는 돌아서더니 사원들을 향해 높이 외쳤다. “지금 반 우파투쟁이 고조에 이르렀습니다. 허나 죄 없는 병완 서기와 허영주 사장에게 우파 모자를 씌운 것은 착오입니다. 함흥대대와 진수해공사의 사원들을 동원해 배불리 먹고 잘 살게 하겠다고 황무지를 개간했는데 무슨 죄가 있단 말입니까? 우리 당원들이 혁명을 왜서 합니까? 바로 우리 사원들이 잘 사는 그 날을 위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위해 분투하는 것이 아닙니까? 때문에 나는 현 당위 반 우파투쟁 사무실을 대표해 병완 동지와 허영주 동지에게 우파모자를 씌운 것은 잘 못됐다는 것을 선포합니다. 또한 당의 조직건설원칙도 없이 아무나 입당시킬 수 없습니다. 흥수 동무의 화선입당은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선포합니다!” 흥수는 김이 빠진 공처럼 밭머리에 풀썩 물앉았다. 사원들은 우쭐거리던 흥수가 소낙비를 맞은 병아리 상이 된 흥수를 보고 입을 가리며 키득거렸다. 춘실은 어이없어 나그네와 허백호를 번갈아 보며 바른 총질했다. “허 서기 말도 쓸데 없습니깐. 하루 아침에 화전(화선)입당 했다가 한 시간도 안 돼 당원에서 떨어집니까?” 허백호는 창피해 머리를 들지 못했다. “에구, 나그네도. 내가 뭐랍데? 정치에 삐치지 말라는데도. 꼴 보기 좋게 됐구먼.” 흥수는 마른 흙덩이를 쥐어 춘실에게 뿌리면서 벌떡 일어났다. 춘실은 목을 움츠려 뜨리며 주먹을 쥐고 쫓아오는 흥수를 피해 밭고랑을 타고 달아났다. 흥수는 숱한 사람들 앞인지라 창피해 여편네를 쫓다가 말고 이계삼에게 따지고 들었다. “조직원칙이란 게 뭐 길래? 이제 금방 입당한 나를 당에서 쫓아내는기우?” 이계삼은 답답한 표정을 지었다. “한 사람의 입당은 결코 어느 책임자 개인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요. 반드시 본인이 입당 신청서를 제기한 후 기층당지부에서 당원들이 민주토론해 비준한 후 상급 당위에서 비준해야 하오.” 흥수는 우둔한 소리를 했다. “그래 허백호 서기는 상급 당위 서기 아닙니까? 허 서기 비준했으면 됐지. 무슨 잔소리 그리 많습니까?” 이계삼 부서기는 손으로 입을 싸쥐고 울컥 치미는 웃음을 겨우 막았다. “허백호는 개인이지 진수해 당위를 대신할 수 없소. 함흥촌당지부에서 당원들이 토론도 하지 않았소. 황차 동문 입당신청서를 쓴적이나 있소?” 여기저기서 웅성거렸다. “저런 걸 어떻게 입당시키오?" "간에 가 붙고 슬 개에 붙는 자식. 흥!” 상순도 끼어들었다. “소불알처럼 이 볼 쳤다 저 볼 쳤다 하는 놈 새끼!” 흥수는 상순의 독기 서린 상순의 세귀눈길을 피해 꼬리를 사리더니 휑하니 산 아래로 내려가 버렸다. 정말 낙태한 상 싶은 피투성이 꼴은 보기도 구차했다. 이계삼 부서기는 사원들을 보고 “회의가 끝났으니 이젠 일하러 가고 당원들만 남으십시오.”라고 했다. 이윽고 맨 당원들만 남자 이계삼 부서기는 허백호를 한 식경이나 비평했다. “허 서기는 조직 관념이 있소? 없소? 어떻게 우파 모자를 함부로 마구 들씌우고 투쟁까지 하오? 어떻게 개인의 명의로 흥수를 입당시킬 수 있소? 동무는 정신이 있소? 동무의 그 무슨 심갱밀식농사법대로 해서 농사를 제대로 할 수 있소? 동무의 심갱밀식농사법 대로 하지 않으면 당을 반대하고 사회주의를 반대한 거요?” 이계삼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산골 안으로 내려가는 흥수의 잔등을 가리키면서 삿대질을 했다. “어떻게 지부에서 토론한 적도 없는 흥수를 개인의 명의로 입당시킨다고 선포하오? 정말 한심하오! 허백호 서기는 당장 현 당위에 검사 서를 써서 바치오. 재차 이런 엄중한 착오를 범한다면 당의 기율로 호되게 징벌하겠소.” 뒤이어 이계삼 부서기는 병완과 허영주를 위문했다. “얼마나 억울했겠소.” “괜찮습니다. 그래야 우리 당내 두 갈래 노선 투쟁이 얼마나 치열한가를 알 수 있지.” 허영주 사장은 개의치 않았다. 병완은 고개를 숙이는 허백호를 험하게 쏘아 볼뿐이었다. 맑게 개였던 하늘에 불시에 먹장구름이 뒤덮여왔다. 저 멀리 칼산과 패용천산에 불줄기가 쭉 뻗치더니 하늘땅을 진감하는 우레 소리가 터졌다. 감 때 사나운 폭풍이 불어오며 밤알만큼 한 우박이 마구 쏟아져 옥수수 이파리를 마구 두드려댔다. 사원들은 호미를 쥐고 마을로 달려 내려가면서 올해 농사를 망쳤다고 하늘을 원망했다.                                                                                        6. 집체식당        하늘도 무심하지. 억수로 쏟아지는 우박이 심갱밀식을 하지 않은 밭의 옥수수를 덮쳐 이파리가 펑펑 구멍이 뚫리며 다 떨어졌다. 딱 마치 벌레가 갉아 먹고 남은 옥수수 대처럼 앙상해 볼 품 없이 돼버렸다.        사원들은 하늘을 원망하고 허백호를 원망하면서 한숨을 땅이 꺼지게들 쉬었다.      설상가상 좌적 바람이 세차게 불어쳐 우로부터 마을마다 생산대를 단위로 집체식당을 차리고 집체 화식을 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모두들 또 허백호 서기가 마을 사람들을 못살게 군다고 야단쳤다.      허백호 서기는 회의를 연다,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선전고동했다.      "집집마다 따로 가마를 걸고 밥을 지어 먹으면 사심이 생기오.  그 사심이 자본주의 싹을 틔우게 되오.  때문에 집체식당을 차리고 큰 대국가마를 걸고 죽을 끓여 똑같이 나눠 먹어야 하오."     함흥대대와 조개덕대대에서는 별 수 없어 허백호의 지시대로 마을에 집체식당을 차리고 큰 대국가마를 걸었다. 사원들은 집체식당에 모여들어 천정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멀건 죽을 한 사발씩 얻어먹고 주린 배를 달랬다.    성근은 이발 빠진 사발을 들고 명옥이 떠주는 죽을 한 사발 받아가지고 가면서 두덜거렸다.     “에구, 요걸 먹고 어떻게 온 하루 기음 매오?”     그러자 저쪽에서 멀건 입쌀 죽을 후룩후룩 마시던 허 서기가 힐끔 성근을 흘겨보더니 당장 반박해버렸다. “쓸데없는 소릴 작작 하오. 해방 전에는 그런 죽물도 없어 못 먹었소. 푸성귀로 주린 배를 달래던 세월에도 황무지를 개간했소. 당의 덕분에 흉년세월에도 죽물이라도 먹으면 감사한 줄 아오.” 허나 성근은 도리머리 질을 해댔다. “내 소련 원동에서 살아 봐서 아오. 쓰딸린이 영도하던 소련에서는 이렇게 집체식당을 차리기까지는 하지 않았소. 허 서기는 정말 괴상한 생각을 많이 내놓는 사람이오.” 허백호는 성근을 쏘아보며 위협했다. “말을 조심하오!” 그러나 성근은 삐죽한 턱을 흔들며 계속 두덜거렸다. “소련의 소들도 굶어 죽을 까봐 꼴호즈라는 집체 농장으로 가기 싫어하데. 황차 사람을 소들처럼 우사 같은 집체식당에 몰아넣고 멀건 물을 먹으라고 하니. 원, 어떻게 살겠소? 사람마다 배때 크기가 다르고 식미도 다른데 말이오. 맨날 멀건 죽물만 나눠먹고 어떻게 산단 말이오? 이제 내 말이 맞지 않은가 두고 보오. 집체식당을 마스고 이전처럼 집집마다 자기 가마에 끓여먹지 않는가? 쯧쯧쯧.” 사원들은 머리를 끄덕이더니 죽물을 후룩후룩 마시면서 허백호 서기의 눈치를 살폈다. 허백호는 버럭 고함 질렀다. “성근이! 어째 우파 모자를 쓰고 싶소?!” 그제야 성근은 혀를 홀랑 내밀더니 목을 움츠리며 흘끔거리며 죽 사발을 들고 한쪽 구석에 쫑그리고 앉아 후룩후룩 마셨다. 그는 홀쭉한 두 볼이 볼록하게 죽물을 물었다가 꿀꺽 삼키더니 또 입을 놀렸다.       “에구, 야야, 이런 멀건 물을 먹고 어떻게 둼을 져 산꼭대기까지 나르겠니?” 그는 사발을 들고 부뚜막 앞에 가서 명옥이 앞에 사발을 내밀며 비난사정을 했다. “한 사발 더 주오. 어디 허기 나서 살겠소?” 그러자 창욱이랑 병수랑 죽을 퍼 마시던 숟가락을 멈추고 모두 명옥을 쳐다보았다. 명옥도 어떻게 했으면 좋을지 몰라 애들에게 죽을 퍼주던 바가지를 들고 상순과 허백호를 쳐다보았다. 허백호는 성근을 쏘아보며 또 호통쳤다. “성근이, 정말 경을 칠 예산인가? 집체식당에서 주는 대로 먹을 게지. 뭐 특수해서 게걸스레 더 먹겠다고 떠드오?” 성근은 이발 빠진 사발을 구들에 달랑 내려놓으면서 두덜거렸다. “에구, 말밑천도 못 찾겠다. 배고파도 더 먹지 말고 입을 틀어막고 있으라오?” 창욱이랑 병수랑 성근을 흘금 곁눈질해 보며 맥없이 숟가락질을 했다. 허백호는 허기진 배를 글어 안고 후루룩후루룩 죽을 마시는 남녀노소를 향해 소리쳤다. “여러분, 우린 일제 놈들의 철발굽 아래서 살 때 언제 이런 입쌀죽을 다 먹어 보았겠습니까? 우린 절대 해방 전의 쓰라림을 잊지 말고 오늘 공산당의 영도아래 죽이라도 먹을 수 있는 행복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허백호 서기는 피뜩 기발한 생각이 떠올라 상순을 보고 바깥에 나가자고 했다. “내게 좋은 사상교양방법이 하나 생각나오.” 허백호는 큰 발견이나 한 듯이 상순을 돌아보며 팔을 잡아끌고 바깥으로 나갔다. “내게 사원들의 사상교양을 할 묘안이 있소.” “?” “저녁에 보드라운 게가루로 떡과 죽을 만드오.” 상순은 세 귀 눈을 치떴다. 바깥에는 숱한 사원들이 허기진 배를 끌어안고 죽물을 얻어먹으려고 모여오고 있었다. “동무는 왜 그렇게 정치 민감성이 없소?” 상순은 화났다. “그래 사원들에게 겨죽을 먹이면서 오늘이 행복하다고 교양할 예산이오?” 쓴 표정을 짓는 상순을 보고서도 허백호는 계속 했다. “용케 알아들었구먼. 동무는 총명하고 촉기 빠른데 욱 하면 성질을 내는게 흠이오. 왜 자꾸 내 말에 의문표를 달면서 그대로 착착 하지 않소? 그래 동무보다 내 뭐나 모르는 거 같소?” 상순은 머리를 숙이며 손사래를 쳤다.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그럼 뭐요? 진수해파출소 소장을 시키지 않았다고 그러오?” “아닙니다.” “그럼 뭐요?" 허백호는 눈썹을 치켜 올리며 상순을 뚫어지게 쏘아보았다. 상순은 정색했다. 그는 나이나 경력이나 비슷한 허백호한테 항상 존대를 썼다. “제가 파출소 소장을 하고 싶어 하는 거 같습니까? 그럼 왜 영월구에서 국장마저 하지 않고 마을로 돌아왔겠습니까? 저는 다만 군중들을 이끌어 혁명하면서 부모에게 효성을 하려고 했을 뿐입니다. 군중들이 쌀독을 빡빡 긁고 부모에게도 제대로 효성을 하지 못해 마음이 아픕니다. 전 허 서기를 존중합니다. 자꾸 과거 못 살던 때와 비기자고 하니 납득이 잘 되지 않습니다. 생산을 틀어쥐어 알곡생산량을 올립시다. 그래야 백성들이 잘 살고 우리 사회주의 우월성을 만천하에 알릴 수 있습니다.” “누가 틀어쥐지 않소? 나도 한 헥타르에 5만근을 올리라고 하잖소?” 허백호는 말머리를 돌리며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좌우간 저녁에 겨떡과 겨죽을 쑤라고 하오. 과거를 회상해야 오늘의 행복을 알 수 있소. 군중들이란 양떼와도 같아 사상교양을 하면서 에우는대로 가기 마련이오.” 상순은 도리머리를 흔들면서 어깨 으쓱한 허 서기를 흘겨보았다. 저녁에 명옥은 아낙네들과 함께 허백호 서기의 말대로 제일 보드라운 벼 겨로 죽을 쑤었다. 밭에 나가 역사를 하고 돌아온 사원들은 저녁에 주린 배를 안고 삼삼오오 식당에 모여들었다. 허백호는 멀건 죽사발과 게 떡을 올린 밥상에 마주 앉은 사원들을 보고 연설을 시작했다. “사원 여러분, 우리 빈농들은 해방 전에 일본 놈들의 철 발굽 밑에서 압박과 착취를 받으면서 겨떡도 변변히 먹지 못하면서 우마와도 못한 거지생활을 했습니다. 지금 많은 사원들은 해방 후 당과 정부의 영명한 영도아래 배불리 먹고 살아 왔기에 과거의 쓰라림을 잊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절대 해방 전에 일제와 지주 놈들의 가혹한 착취와 압박 밑에서 허덕이던 고통과 계급투쟁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겨떡과 겨죽을 잡숫면서 과거의 쓰라림을 회상하면서 잊지 말고 오늘의 생활이 얼마나 행복하고 공산당이 얼마나 위대한 가를 알아야 합니다.” 여기까지 연설하고 나서 허 백호 서기는 죽 사발을 들었다. “자, 여러분, 이제부터 과거의 쓰라린 맛을 봅시다.” 허백호와 상순이 먼저 겨죽사발을 들어 숟가락질을 했다. 목이 꺽꺽 막혀 겨죽이 목에 걸려 캑캑 거렸다. 허백호는 외까풀눈에 눈물이 글썽해지기까지 했다. 그것이 사상교육을 하기에는 안성맞춤 했다. 그는 손으로 눈물을 닦으면서 연설했다. “여러분들도 눈물 나는 이 겨죽을 자셔 보십시오. 이건 당에서 준 정치임무입니다. 어서들 드시오!” 그는 사원들 속으로 돌아다니면서 겨죽을 먹는 것을 감독했다. 울며 겨자 먹기로 사원들은 물을 떠다 한 모금씩 마시면서 껄껄한 겨죽을 억지로 넘겼다. 성근은 겨죽그릇을 밥상에 내려놓았다. “야, 이거 어디 먹겠소?” 그는 겨에 걸린 목을 만지더니 삐죽한 턱을 가로 흔들면서 두두 거렸다. “내 소련에 있을 때 쓰딸린은 이렇게 한 적이 없소. 진짜 소련 꼴호즈 보다도 더 하오.” “또 또, 쏘련 사회주의를 비방하겠소? 말 주의하라고. 박성근은 어째 빈농의 본색을 잊었는가?” 허백호가 성근을 흘겨보며 하는 말에 흥수가 호응했다. “성근이, 이 맛있는 겨죽을 먹으라면 먹을 게지 무슨 잔말이 그렇게 많은고?” “또, 또, 또 나선다. 에이유, 저 하루살이 당원동무 보기도 싫어서 어떻게 살겠소?” 성근은 쓴 오이 보듯 하면서 흥수를 손가락질했다. “당신은 어째 아랫마을 윗마을 정치에 그리 삐치오? 그런다고 입당시킬 거 같아? 화선입당했다가 하루도 못돼 퇴당당하고서도 부끄럽지 않어?” 흥수가 입을 짝 벌린 채 멍해 서있었다. 그때 상순이 한마디 했다. “오늘 겨 떡을 먹을 때 흥수가 ‘이 맛있는 겨죽을 먹으라면 먹을 게지’라고 말하지 않았소?” “허백호 서기 먹으라는 죽을 그래 맛있게 먹지 않고 어쩔고?” “오늘 겨죽이 맛있고서야 어찌 과거의 쓰라린 생활을 회상할 수 있소?” “허허허.” “호호호.” 상순의 말에 모두들 흥수를 우습다고 죽사발을 든 채 주린 배를 끌어안고 웃어댔다. 사원들은 억지로 물에 겨죽과 겨 떡을 삼켰다. 이때 흥수가 또 나섰다. 그는 주먹을 불끈 쥐고 구들 복판에 뛰어 나가더니 구호를 높이 외쳤다. “쓰라린 과거를 잊지 말자!” 사원들은 죽을 먹다가 죽사발을 든 채 멍해 흥수를 쳐다보았다. 허백호가 일어나면서 구호를 따라 불렀다. “쓰라린 과거를 잊지 말자!” 흥수는 흥이 나서 격앙된 목소리로 구호를 계속 불렀다. “지주를 타도하자!” 상순이도 따라 불렀다. “공산당 만세!” 사원들도 구호를 불렀다. “빈농 만세!” “빈농 만세!” “허백호 서기 만세!” “허백호…” 사원들은 구호를 부르려고 주먹을 쳐들다가 멈추었다. 모두들 허백호에게 눈길을 보냈다. “그만, 그만! 내 만세를 불러선 안 되오. 모주석 만세를 부르오!” 허백호가 황급히 손사래를 치면서 막아 나섰다. 흥수는 또 목에 지렁이 같은 핏줄을 세우면서 구호를 불렀다. “모주석 만세!” “쓰딸린 만세!” 흥수는 지지벌겋게 상기된 얼굴에 내 돋은 땀을 훔치더니 허백호 서기의 옆에 바싹 다가앉으면서 물었다. “허 서기는 우리 진수해의 모 주석과 같은 분인데 만세를 부르면 안 됩니까?” 상순은 아첨을 일삼는 흥수의 꼴이 보기도 싫어 픽 쓴웃음을 지었다. 숱한 사원들도 흥수가 조개덕에까지 내려 와서 삐치는 것이 눈에 거슬려 흘겨보았다. 그때 학수가 동생 흥수를 바깥으로 나가자고 했다. 이윽고 흥수는 두두 거리면서 식당에 들어와 벗어 놓았던 두루마기를 껴입더니 훌쩍 나가버리는 것이었다. 그날 식당에서 희극이 일어난 것은 아무 일도 아니었다. 사달은 이튿날 아침에 식당에서 일어났다. 박성근은 새하얀 입쌀 죽 그릇을 보더니 환한 웃음을 지었다. “에구, 오늘 정말 행복하구나. 내 오늘 기적을 쌓았다니까.” 학수랑 창걸이랑 모두 성근을 쳐다보며 이구동성으로 “무슨 기적을 쌓았단 말이오?”라고 물었다. 성근은 흥이 도도해 긴 목을 빼들고 횡설수설 늘여 놓았다. “글쎄 어제 저녁에 겨 떡을 먹으면서 과거의 쓰라린 우마와 같은 생활을 잊지 말고 오늘의 행복을 좋을씨고 하는 사상교육을 받았지 않았고 뭐요?” 허백호와 상순은 성근에게 눈길을 모았다. 성근은 뒷말을 이었다. “내 사상교육을 어찌나 잘 받았던지 오늘 아침에 변소에 가서 똥을 싼 게 똥마저 새빨갛지 않겠소?” “허허허.” “호호호!” 숱한 사원들이 우스워 배를 글어 안고 웃었다. 성근은 더 흥이 나서 우쭐거리며 턱을 쳐들고 또 너덜거렸다. “소련의 소마저 집체 우사간에 들어가려고 하지 않소. 우리 여기서는 사람을 소처럼 집체식당에 몰아넣다니 말이나 되오? 배고파 어떻게 살겠소? 사람마다 식성이 다르고 입맛이 다른데 똑같이 먹고 똑 같이 일하라고 하니. 그게 싫어서 소련 꼴호즈를 떠나 중국에 왔더니 여기서도 이러는구먼. 이럴 줄 알았더라면 소련에 있었을 거 그랬소. 소련 마우재(러시아 사람)들은 이다지 사람을 들볶진 않았소. 마우재들은 우리 중국 사람들보다 성질이 시원시원하고 통이 크단 말이오.” 상순은 “쯧쯧쯧.” 하고 성근에게 눈짓하며 허백호의 눈치를 살폈다. 허백호는 숟가락을 놓더니 “됐소. 잘 됐소.” 라고 하며 성근을 쏘아보았다. 상순은 제꺽 일이 상서롭지 못함을 직감했다. 허백호는 밥상에 죽사발까지 털컹 내려놓더니 구들에서 엉덩이를 뗐다. “이 마을에서 우파분자 한 놈을 붙잡아냈소.” 허 백호는 흥수를 보고 소리쳤다. “우파분자 박성근을 붙잡아 내오.” “옛!” 사원들 속에서 뛰어나와 날치는 흥수를 보고 학수는 “또, 또, 또!” 라고 하면서 눈을 흘겼다. 허나 흥수는 사원들 속을 비집고 씽 달려 나가 성근의 멱살을 틀어쥐어 끌어냈다. “이 우파분자야! 어디 인민정권의 독재 맛을 봐라!” “우파라니?” 성근은 끌려나오면서 눈이 떼꾼해 “무슨 죄를 졌다고 이러오?” 하고 물었다. 허백호는 성근의 귀 쌈을 찰싹 갈겼다. “금방 뭐라고 했는가? 뭐 ‘어제 사상교육을 어찌나 잘 받았는지 오늘 아침에 똥을 누니 똥마저 빨갛더라.’?! 이건 우리 당의 사상교육에 대한 모욕이 아니고 뭔가?!” 흥수는 손가락으로 성근의 배를 쿡쿡 찌르면서 을러멨다. “탄백해! 이 배때기에 우리 위대한 중국 공산당에 대한 불만 꼴똑하지?” 흥수는 성근의 손에서 죽사발을 빼앗아 성근의 꼭뒤에 팍 엎어놓았다. 성근의 얼굴은 죽으로 얼룩져 쥐마당이 돼 버렸다. 여기저기에서 너무 한다고 흥수를 욕하는 소리가 들렸다. 성근은 한손으로 얼굴의 죽을 닦으면서 계속 중얼거렸다. “똥을 눈 게 빨갛다 했는데 무슨 우파란 말이요? 씹할, 별 빨간 똥 우파 다 있다. 퉤!” 흥수는 개 잡은 포수처럼 우쭐해 고아댔다. “이 빨간 똥 우파야, 탄백해! 허백호 서기가 뭐 하려고 하면 네 놈은 뒤에서 항상 헐뜯으면서 빈정거렸지! 그래도 우파 아냐?!” 허백호는 오른 손으로 주먹을 불끈 틀어쥐더니 구호를 불렀다. “우파분자 박성근을 타도하자!” “박성근을 타도하자!” 처음에는 모두 허백호를 따라 흥수만 구호를 불렀다. 그러자 허백호는 상순과 학수를 쏘아보았다. 상순은 납득되지 않아 주먹만 쳐들고 구호는 나지막이 입안소리로 불렀다. 학수도 상순을 본 따 구호를 부르네 했다. “나를 따라 구호를 부르지 않는 자도 우파분자야!” 막대기를 세우자 그림자가 생기듯이 그 말은 즉시 효과를 보았다. 모두들 허백호를 따라 구호를 불렀다. 구호소리는 점점 높아졌다. 이 화영은 도리머리를 슬슬 흔들었다. “원, 쓸데없는 소리를 해서 하루아침에 타도대상이 됐구먼!” 상순은 옆에서 화영의 허벅다리를 슬쩍 쳤다. 화영이 상순과 눈길을 맞추더니 눈을 내리깔며 입에 빗장을 지르고 묵묵히 앉아 있었다. 상순은 남몰래 가만히 조개덕 제일 앞에 있는 성근이네 집 변소로 가 보았다. “이게 뭐냐?” 확실히 변소 밑바닥에는 뻘건 피똥이 무드기 쌓여 있지 않았겠는가! 그날 저녁 집체식당에서는 함흥소학교의 로우파 오옥선과 새 우파 성근을 투쟁했다. 허백호 서기와 흥수가 땀을 뻘뻘 흘리면서 투쟁하고 나니 밤중이 다 됐다. 사원들은 오옥선과 성근이 세치 혓바닥을 잘 못 놀려 우파로 몰리어 투쟁 받는 것을 본 후부터 입에 빗장을 지르고 혀를 건사하느라고 무등 신경을 썼다.  
110    대하소설 진달래 소야곡(1) 댓글:  조회:2072  추천:1  2017-10-31
                                                                                       머리말        40년 동안 나는 문학창작을 해 선후해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 3부작 장편과학환상소설 “야망의 바다”와 “욕망의 천지”, “황천의 유령” 그리고 장편실화소설 “3.8선에서 싸우던 나날에”, 장편실화소설 "부르하통하강반 살인악마의 유령", 장편실화 “인민의 훌륭한 법관 록도유”, 수필집 “리별” 등 도합 18권을 세상에 내놓았다.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에서는 지난 세기 초로부터 우리 조선족이 걸어온 100년 력사시기 눈물겨운 이민사를 썼다.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과 3부작  장편과학환상소설 “야망의 바다”, “욕망의 천지”, “황천의 유령” 등 소설은 출판된 후 다음,  네이버, 조글로와 모이자 등 블로그에 널리 련재돼 수많은 네티즌들이 열람하였다. 장편과학환상소설 “야망의 바다”, 중편과학환상소설 “지구보위전”은 연변인민방송국 청소년부 부장 채선녀사가 련속방송드라마 “지구보위전”으로 각색해 방송하였다.  장편과학환상소설 "야망의 바다"는 한국 "아동문학세상"에도 소개되였으며  "옹달샘컵한중아동문학상"을 받았다. 장편과학환상소설 “욕망의 천지”는  한국 "서울문학"에도 소개되였으며 “웰빙아동문학상”을 받았다. 중편과학환상소설 “지구보위전”은 한국 "서울문학"에 소개되였으며 “동심컵 중한아동문학상”을 받았고 그 수상소식은 한국 련합뉴스에 보도되였다. 장편실화소설 “38선에서 싸우던 나날에”는 연변인민방송국에서 2년 동안 련속랑독을 하였고 료녕조선문보에서도 전문을 련재하였다.        이젠 문우들의 권고대로, 예순고개에 오른 나는 필을 내려놓고 귀여운 손자 세빈이나 안고 천륜지락을 누리면서 안일한 만년을 보낼 수도 있다. 그러나 계속 문학창작이란 올리막길을 걷고 싶고 중화민족 부흥의 위대한 꿈을 실현하기 위해 세상에 새로운 도전을 하고 싶다.       그 불요불굴의 기개와 강렬한 심정을 시조 “락락장송”으로 표현해볼가.                청춘은 락화류수              인생은 일장춘몽                백발이 성성타만              뜻이야 굽힐손가                여봐라 락엽이 져야              락락장송 알리라          문학창작은 참말로 사막의 올리막길로 힘들게 달리는 끝도 보이지 않는  마라토너와도 같다. 나는 지금까지 너무나도 생존을 위한 삶을 살아왔고 사회에 해놓은 일도 별로 없다. 만약 돈을 벌고 안일하고 편안히 살려면 누가 붓을 들겠는가! 누가 피곤해 코피를 줄줄 흘리면서 글을 쓰겠는가! 누가 눈을 두번이나 수술하면서도 맨날 엉뎅이 배기게 서재에 들어앉아 글을 쓰겠는가! 그러나 나는 40여년이나 달구고  갈고 간 필을 소홀히 놓을 수 없다. ㄱ, ㄴ, ㄷ, ㄹ가 사회와 가정의 심장에서 썩어가는 곰팽이를 도려내는 수술칼로 되고 사막에 연분홍 진달래꽃이 방실방실 웃음짓는 오아시스를 가꾸는 감로수로 되게 하고 싶다.        나는 아파트를 한채 더 갖춰놓기보다도 나라와 민족, 우리 후대들에게 정신적 문화재부를 하나라도 창조해 물려주는 것이 더 보람차다고 생각한다. 혁명선배들은 민족의 독립과 나라의 번영을 위해 목숨까지 서슴없이 바치지 않았던가! 내가 글을 쓰면서 혈압이 올라가 코피를 몇번 흘리고 피와 고기 씌운 눈을 두번 수술한 것 쯤은 목숨바쳐 싸운 혁명선렬들의 희생정신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나라와 인민들이 양성한 작가로서 나라와 민족을 위해 력사적인 사명감과 의무감을 안고 계속 붓을 들어 중화민족 부흥의 위대한 꿈을 더욱 황홀하게 장식하기 위해 문학작품을 창작해내는 것은 천만지당하다.        불굴의 우리 조선민족은 찬서리와 눈보라 속에서도 층암절벽에 뿌리를 박고 완강하게 살아온 진달래마냥 이 땅에서 불요불굴의 완강한 의지로 굳세게 살아왔다. 민족대이동의 격변기에 진달래는 중국의 광활한 대지, 지구촌의 방방곡곡에 날아가서 뿌리를 내리고 악착스레 살아나가면서 온누리에 연분홍 진달래꽃을 활짝 꽃피우고있다. 이 땅에서 지혜롭게 살아온 우리 조선족의 삶과 희로애락을 책으로 써내는 것이 작가, 편심인 나의 숙명이고 사명이라고 생각한다.       허용규, 김강희 등 장군님들은 나에게 민족을 위해 묵직한 글을 쓸 것을 기대했다. 조룡호, 김영만, 정규창 등 로지도자들과 김재권, 김설봉, 김철환, 김진산 등 은사님들 그리고 전평선, 윤진주, 리창수, 리석복, 신길웅, 리운학, 윤응순 등 전국각지 수많은 회장님들은 내 손을 꼭 잡고 민족을 위해 력사적인 기념비를 남길만한 문학작품을 써낼 것을 간곡히 부탁했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그렇다할 만한 글을 쓴  것이 없다는 것을 재삼 느꼈다.      뇌장을 불태우고 뼈를 깎으면서라도 우리 조국과 민족에 기념비와 정신기둥을 세워놓아야 한다. 이 성스러운 사업을 나라와 민족의 역사적인 사명감과 의무감으로 삼고 앞사람이 쓰러지면 뒤사람이 이어나가면서 필사적으로 해나가야 하지 않겠는가.       정조를 짓밟히고 절망에 빠져 머리로 콩크리트바닥을 떵떵 쫏아대던 처녀, 나중에 삶의 욕망을 잃고 소나무에 목을 매단 처녀, 한국에서 10여년 동안 번 피나는 돈과 고향집마저 판 돈으로 몽땅 두 아들며느리한테 집과 차까지 갖춰주고서도 불효한 아들며느리들한테 박대를 받다못해 쫓겨나 눈물을 흘리면서 고향으로 돌아간 늙은 량주, 림종을 앞둔 시어머니를 어서 죽으라고 주사마저 놔주지 않는 “쥐며느리”, 사선에서 헤매는 어머니한테 마지막으로 주사라도 한대 더 놓아주려고 사처로 헤맨 불쌍한 아들… 이 모든 것을 보고 들은 나는 다시 필을 들 강한 충동을 받아 마침내 대하소설 “진달래 소야곡”을 쓰게 되였다.       대하소설 “진달래 소야곡”은 개혁개방시기부터 민족대이동의 현시대를 배경으로 사회 최소 세포인 가정을 해부하여 사랑과 혼인, 가정에 비낀 희비극적인 희로애락을 보여주었으며 삶의 뼈아픈 교훈을 따끔하게 짚어내고 가정문제를 헤쳐나갈 앞길을 긴 여운으로 남기려고 모지름을 썼다.       나는 요란스러운 폭포수로 되려고도 하지 않는다. 수풀에 가려진 계곡에서 촐랑촐랑 노래하면서 흐르는 금강산의 한줄기 벽계수로 되고 싶다. 항상 낮은 곳으로 잔잔히 흘러가는 티없이 맑은 벽계수의 한방울 물방울로 되고 싶다. 때로는 세인들이 보지도 못하는 지하수로 소리없이 흐르다가도 사람들이 가뭄에 허덕이는 사막에 한줄기 생명수로 퐁퐁 솟아올라 삶의 오아시스를 가꾸고 진달래꽃을 활짝 꽃피우고 싶다.        나는 기자, 편심, 작가로 키워준 당과 인민의 충성스러운 작가로 되고 싶다. 민성이란 필명 그대로 백성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글을 쓰면서 외나무다리를 타고 기어이 가람을 건너 온 누리에 진달래가 활짝 핀 황홀한 경지에 이르고 싶다.  괴로우나 즐거우나 내 령혼의 영원한 안식처는 문학창작이다. 내가 한부의 문학작품을 낼 때마다 하늘에 외롭게 둥둥 떠돌아다니던 내 령혼을 웅위로운 백두산 기슭의 진달래꽃과 수려한 금강산의 모란꽃, 하늘 높이 치솟은 한라산의 무궁화가 반겨 맞으리라.        여지껏 다년간 나의 사업을 정성껏 지지해주고 대하소설 “진달래소야곡”의 창작과 출판에 신심을 준 리성권 전임사장과 량문화 사장, 리원철 부사장, 리철주 부총편을 비롯한 연변인민출판사 지도일군들과 동료들께 감사를 드린다. 그리고 이 대하소설을 정성껏 편집출판한 료녕민족출판사 권춘철 사장과  편집들께 숭고한 경례를 드린다. 또 이 대하소설 창작과 출판에 지성어린 지도와 관심을 한 심양시 고려경제문화유한회사 리사장 전정환 회장님, 주신문출판국 손룡호 부국장, 연변대학 최문식 교수님, 허휘훈 교수님께 삼가 경의를 드린다.                                                                      저자 김장혁                                           2017년 5월 7일
109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87) 댓글:  조회:1109  추천:0  2017-10-27
                3. “헥타르 당 5만근 내라!”       겨우내 꽁꽁 얼었던 밭에 아직도 여기 저기 잔설이 널려 있었다. 아직도 찬바람이 기승을 부리며 대지를 싹쓸이하고 있었다. “인민공사, 대약진 동풍을 빌어 헥타르 당 5만근씩 양곡을 내십시오.” 토성 안 생산대대 사무실에서 열린 사원대회에서 향 당위 허백호 서기가 밤중에 홍두깨 내밀듯 내리는  지시에 무두들 입을 딱 벌렸다. 병완은 머리를 홰홰 둘렀다. “농사 지을줄 알고 말하오? 제 정신 있는 사람들 같지도 않소. 우리 대대 밭에서 한 헥타르에 5천근씩만 내도 대단하오. 5만근씩 내라는 건 정신 있는 소리 같잖소.” 상순도 동을 달았다. “신문에 어디선가 한 헥타르에 10만근을 거둬들였다고 하지 않았고 뭣입둥?” “뭐라니?”] "아하, 상급에서 5만근 내라면 낼게지. 무슨 잔소립둥?" 병완은 주름살이 산골짜기처럼 패였다. “어떻게 농사를 지으면 한 헥타르에 10만근을 낸다오?” 상순은 코웃음 쳤다. “신문에서 사진 봤습니다. 사람이 벼 우에 올라앉았습디다. 곡식이 어찌나 잘 됐으면 사람이 벼 우에 올라앉아도 꺼지지 않겠습니까. 흥!” 회의가 끝난 뒤에도 병완은 허백호의 지시가 잘 납득되지 않아 도리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정말 귀신이 곡할 노릇이야. 허 서기는 자꾸 둼을 많이 내면 한 헥타르에 5만근을 거둘 수 있다고 하지만 둼 무지 꼭대기에 강냉이를 심어 보라지. 천근이나 내는가? 모두 정신이 있는 거 같지 않다.” 상순도 할아버지와 맞장구를 치면서 볼 부은 소리를 했다. “글쎄 말입니다. 자본주의 싹이 자란다면서 황무지를 마음대로 일구지 못하게 하면서도 무당 수확고 지표는 정신이 나가게 올리니까. 아래서 어떻게 일하겠습니까?” 병완은 이마살을 찌푸리었다. “상순아, 세상이 돌아가는 게 심상치 않다. 그저 당에서 하라는 대로 하면서 아무 말이나 하지 말라. 봐라, 팽덕회로부터 시작해 지금 전국적으로 숱한 우파분자들을 붙잡아 내 투쟁하지 않니? 잘 못 걸리면 정치몽둥이에 맞아 죽겠다.” 허나 상순은 대수로워 하지도 않았다. “5만근을 내지 못할 게 빤한데 못할 건 못하겠다고 해야지.” 병완은 근심스러워 한숨만 땅이 꺼지게 내쉬었다. “허백호 서기는 기어이 5만근을 내야 한다고 하더라. 좌우간 우에서 하라면 노력은 해보자.” 상순은 인차 “예, 해봅시다.”라고 대답하더니 엉덩이를 구들에서 떼었다. 상순이 조개덕으로 내려 간 뒤 병완은 함흥 촌의 여러 생산대 사원들을 동원해 이른 봄부터 언 둼을 꺼서 밭에 내갔다. 병완이 한창 사원들을 데리고 소 수레에 실어온 둼을 밭에 고루고루 펴놓을 때다. 저 멀리 허백호 서기와 허영주 사장이 자전거를 타고 소서구 어귀로 달려올라 오더니 자전거에서 내려 밀고 올라오는 것이었다. 병완이 황급히 마중해 내려갔다. 그때 허백호 서기는 헐레벌떡거리면서 가파른 밭에 올라가 사원들이 밭에 둼을 고루고루 펴놓는 것을 둘러보았다. 그는 병완을 못 마땅한 눈길로 되돌아보며 목에 지렁이 같은 피 줄을 세우고 을러멨다. “아니, 김 영감! 밭에 둼을 저렇게 적게 펴서야 5만근은커녕 만근도 내지 못하겠소!” 병완은 너무 한심해 도리머리를 흔들더니 옆에 서 있는 허영주 사장을 돌아보았다. 허영주 사장은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숱한 사원들 앞에서 허백호 서기는 손사래를 치면서 고함쳤다. “함흥대대는 한 헥타르에 5만근을 낸 우리 공사 모범대대로 돼야 합니다!” 병완은 참다못해 한마디 했다. “허 서기, 아무리 대약진 시대라고 해도 될 만한 지시를 해야 하오. 어떻게 이 싯누런 황무지 밭에서 5만근을 내오? 이 밭에서 한 헥타르에 5만근을 낼 수 있는 농사꾼이 있으면 내 앞에 데려 오오.” 허백호 서기는 성이 꼭뒤까지 치밀어 올랐다. “김영감! 당신도 당원이오? 공사당위 서기가 5만근을 내라면 낼 거지 무슨 잔소리 그리 많소?” 허영주는 이상어른과 버릇없이 노는 허 서기가 눈꼴 사나와 한마디 했다. “이보, 허 서기, 너무 지나치지 않소?” 허백호 서기는 홱 돌아서며 허영주 사장을 쏘아 보았다. “또, 또, 또! 공사 사무실에서 그만 논쟁했으면 됐지. 숱한 사원들 앞에서 계속이오?” 허영주 사장은 굽어 들지 않았다. “뭐든지 실제적이어야지. 이 묵밭에서 5만근을 못 낸다는 건 빤한데 왜 억지로 하라고 하오?” “동무! 조직 관념이 있소?  숱한 사원들 앞에서 뭐요? 나를 까서 망신시킬 예산이오? 어째 우파 모자를 쓰고 한뉘 개고생을 해 보겠소?” 허영주와 병완은 서로 마주 보며 머리를 가로 흔들었다. 한참 납덩이같은 무거운 침묵이 흐른 후 병완은 천천히 무겁게 입을 열었다. “허 서기, 이 밭에서 5만근을 낼 수 있는 구체방도를 가르쳐 주오.” 숱한 사원들은 모두 삽을 짚고 서서 허백호 서기의 입을 쳐다보았다. 허백호 서기는 물러 설 수 없어 사원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둼을 한자 두께로 낸 후 둼 우에 흙을 펴고 곡식을 심소.” 사원들은 모두 눈이 휘동그래졌다. 허백호 서기는 삽으로 밭을 팍팍 팠다. 한참 후 허백호 서기는 사원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정성이 지극하면 돌 우에도 꽃이 피는 법이오. 우리 공산당원들은 특수재료로 만든 강철 전사들입니다. 가열처절한 전쟁년대에 목숨 걸고 싸워 승리했습니다. 그런데 왜 한 헥타르에서 5만근을 내지 못하겠습니까?” 이때 학생들을 데리고 일하던 함흥소학교의 여 교원 오옥선이 비쭉거렸다. “공산당원도 그거 해서 남자의 정자와 여자의 난자가 합해 만들어진 사람이겠지? 강철로 만들었겠소?” “하하하!” “호호호!” 사원들은 코를 싸쥐고 웃었다. 허백호 서기는 자기 말을 비꼬는 오옥선을 쏘아보며 꽥 소리쳤다. “오 선생이 금방 뭐라 했소?” 그러자 모두들 혀를 홀랑 내밀더니 머리를 숙이었다. 허나 허백호 서기는 닭을 잡아 원숭이를 훈계하듯이 오옥선을 투쟁해 반 우파투쟁의 불길을 지펴 한 헥타르에 5만근을 내지 못한다는 사원들의 입을 틀어막으려고 했다. 쉼에 허백호 서기는 사원들을 불러 놓고 고함쳤다. “오옥선 선생은 사원들 앞에 나와 머리를 숙이고 서오!” 오옥선 선생은 무슨 영문인지 모르고 사원들의 뒤로 슬금슬금 물러서면서 이상한 빛이 번뜩이는 허백호 서기의 외까풀 눈을 훔쳐보았다. 허백호 서기는 금방 오옥선이 공산당을 모욕한 사실을 대충 말하고 오옥선에게 우파분자 모자를 씌워 투쟁한다는 결정을 선포했다. “반당 우파분자 오옥선은 공산당을 엄중하게 모욕 중상했습니다. 우린 이런 우파분자를 뛰여나오는 족족 잡아내서 견결히 투쟁해야 합니다.” 허백호 서기 명령에 따라 민병들은 오옥선 선생을 사원들 속에서 잡아 앞에 끌어냈다. 허백호 서기는 오옥선을 손가락질하면서 구호부터 불렀다. “반 당 우파분자 오옥선을 타도하자!” 그러나 사원들은 서로 눈치를 보면서 구호를 부르지 않았다. 허백호 서기는 붉으락푸르락 해서 이른바 오옥선의 우파분자 죄행을 공포했다. “금방 오옥선은 우리 위대한 중국 공산당을 상욕으로 욕했습니다.” 그때 오옥선은 머리에 쓴 빨간 수건을 풀어 허벅다리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면서 물었다. “그래 사실이 아닙니까? 공산당원도 그걸 해서 남자의 정자와 여자의 난자가 합해져 만들어지지 않았습니까? 아무리 특수재료로 만들어졌다 해도 납이나 강철로 만들어 졌겠습니까?” 또 폭소가 쏟아졌다. 허백호 서기는 오옥선의 콧대를 삿대질하면서 고래고래 고함쳤다. “보십시오. 이 악질 반당 우파분자가 얼마나 더러운 상욕으로 공산당을 모욕했는가!” 허백호 서기는 목청을 돋우어 구호를 불렀다. “반당 우파분자 오옥선을 타도하자!” 그러자 숱한 사원들 속에서 따라 부르는 구호소리가 소서구 골짜기에 울려 퍼졌다. “반당 우파분자 오옥선을 타도하자!” 오옥선은 그날 오후부터 날마다 쉼이면 우파분자란 고깔모자를 쓰고 투쟁받고 노동개조를 했다. 그 후부터 누가 감히 공사 당위 서기 허백호의 말에 왈가불가 하겠는가! 오옥선 우파분자 사건이 발생한 뒤 허백호 서기가 함흥대대에 점을 잡고 병완이네 집에 들었다. 그가 직접 소서구 황무지 밭에서 한 헥타르에 5만근을 수확하는 농사혁명을 지휘했다. 그러나 조개덕의 상순만은 아직도 한 헥타르에 5만근을 낸다는 것을 납득돼 하지 않았다. 그는 먼저 토성 밖에서 조용히 할아버지를 만났다. “어떻게 마른 짚과 둼을 한자 두께로 편 후 곡식을 심습니까? 생짚과 생풀이 썩으면서 피여오르는 증기에 곡식이 살아나 남겠습니까? 아까운 땅만 버리겠습니다.” 허나 병완은 주위를 둘러보면서 “쉭-” 하고 입에 식지까지 댔다. “허 서기 앞에서 아무 말이나 하지 말라! 자칫하면 너도 오옥선처럼 우파 모자를 쓰겠다.” 할아버지가 말리는 것도 상순은 머리를 숙이지 않았다. “사람이 빚을 지고 살아도 어찌 시비에 지고 살겠습니까?” “얘야, 내 말대로 말 좀 주의해라! 지금 한마디만 잘못 했다간 ‘반당 우파모자’를 쓰고 한뉘 고생하겠다.” 상순은 대대 사무실에 있는 허백호 서기를 찾아갔다. “오, 김 서기 왔구먼. 앉소.” 상순이 자리에 앉자 허 서기는 온 몸에 힘이 넘쳐나는 젊은 김 서기를 보면서 물었다. “그래, 조개덕대대에서는 헥타르 당 5만근을 낼만 하오?” 상순이 입을 열려고 하는데 옆에 앉은 병완이 허벅다리를 툭 쳤다. 허나 상순은 마른기침을 하더니 기어이 입을 열었다. “허 서기, 한 헥타르에 5만근을 내기 어려울 거 같습니다.” “건 왜?” 허백호 서기는 호랑이 눈썹을 치켜 올렸다. 상순은 구김 없이 말했다. “밭을 한자 깊이로 파고 마른 볏짚과 풀을 깔고 둼을 펴면 볏짚과 풀이 썩으면서 피어오르는 증기에 곡식이 살지 못합니다. 또 맨 둼을 한자 두께나 펴면 곡식이 자라지도 못합니다. 우리 한번 맨 쇠똥무지에 강냉이를 심어 봅시다. 잘 자라는가?” 그러자 허백호 서기는 단통 구들을 탕 치면서 버럭 고함쳤다. “동무! 동무는 우리 공사 팽덕회요? 뭐요? 팽덕회가 전문 모주석이 뭘 하려고 하면 반대만 해서 타도된 걸 모르오? 당 조직에서 어떻게 하라면 할 게지. 무슨 잔소리 그리 많소?” 상순이 뭐라고 말하려는데 병완이 말을 빼앗아 했다. “허 서기 말이 옳습니다. 우린 상급 당위에서 지시하는 대로 일단 해보는 게 옳습니다.” 그제야 허백호 서기는 어깨가 으쓱해 엉덩이를 움찔하더니 바로 앉았다. “해 보지도 않고 된다, 안 된다는 건 진짜 나쁘오. 상순 동무는 할아버지한테서 많이 배워야 하오. 이전에도 말했지만 동무는 소처럼 올리 뜨는 괴벽한 성질이 흠이요. 세상에서 살자면 강하기만 해선 안 되오. 어떤 때에는 낮은 문턱에 머리를 숙일 줄도 알아야 하오.” 병완도 머리를 끄덕이면서 상순에게 충고했다. “얘야, 허 서기 충고를 잘 들어라.” 허백호 서기는 도리어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반 우파 투쟁 때 상급에서 하라는 대로 해선 낭패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상순은 참지 못하고 또 한마디 했다. “이제 5만근을 내자다가 농사를 망쳐 먹으면 그때 허 서기 책임지겠습니까? 되지도 않을 일을 왜 고집합니까?” 허백호 서기는 김빠진 공처럼 뒤로 물앉더니 나직이 말했다. “나도 별 수 없소. 한 헥타르에 5만근이든 10만근이든 위에서 내라면 내야 하오. 좌우간 먼저 해보기요.” 그제야 병완과 상순은 허백호 서기도 난처한 처지라는 것을 알고 묵묵히 앉아 애꿎은 담배만 풀썩풀썩 태웠다. 풍작을 거두려면 초봄에 밭의 누기가 좋아야 했다. 허나 무정한 하늘에서는 풍작을 약속하는 보슬비 한 방울도 내리지 않았다. (야, 한시간만이라도 비를 내려보냈으면, 하늘도 무심하지.) 사원들은 하늘을 쳐다보면서 통탄했다.                                                                              4. 우파분자        가뭄이 든 황무지 밭에서는 마른 흙가루가 봄바람에 마구 흩날리었다. 말라 갈라터진 밭고랑에서는 화기가 홧홧 달아올랐다.        허 서기는 가물다고 사원들을 동원해 소서구 밭에 물을 길어다 치게 했다. 한 보름 역사질 했을 때다. 둼을 한자 두께로 깐 밭에서 김이 문문 났다. 병완은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올해 농사는 끝장났구먼. 구덩이에 파묻은 마른 볏짚과 풀이 썩으면서 김이 올라오고 있는 거요.” 허나 농사는 지을 줄도 모르는 허 서기는 자기 좋은 소리를 했다. “이제야 제대로 둼이 되느라고 김이 나는구먼. 허허허.” 병완은 더부룩한 흰 구레나룻을 흩날리며 가까이에 가서 보더니 무릎을 탁 치더니 밭머리에 풀썩 물앉았다. 허 서기는 순 지도자의 자존심으로 나왔다. “난 신흥무군관학교 우수졸업생이오. 총알과 대포 탄알이 어데서 날아오는 것도 다 아는데 그까짓 농사를 모를 거 같소. 아무 근심도 하지 마오. 가을에 이 밭에서 5만근을 거둘 낫이나 잘 갈아놓소.” 병완은 상급이고 뭐고 더는 참을 수 없어 허 서기가 보는데서 흙을 손으로 허비어 뜬 김에 썩어 버린 강냉이 알을 파내 쳐들었다. “이걸 보오. 강냉이 씨가 다 썩어버렸는데도 근심하지 말라고! 허서기, 농사를 개뿔도 모르면서 눈 먼 지휘를 작작 하오!” “이 영감이, 이게, 늙긴 늙었구먼. 로망이구만, 어째 당 지부 서기를 하지 못하자고 올리뜨오?” 병완은 대수로워 하지도 않았다. “못하면 못했지. 당신 정신 나간 지휘대로 올해 농사를 망쳐 먹을 순 없소. 올해 함흥대대 천여명 사원들이 뭘 먹고 살겠소?” 그때 상순이 왔다가 허백호 서기 앞에 한발 나섰다. “할아버지 말씀이 맞습구마. 농사는 농사꾼이 더 잘 알지. 허 서기 더 잘 알겠소? 허 서기는 전쟁을 하라면 우리 할아버지보다 더 잘 할지는 몰라도 농사는 우리 할아버지 말씀을 듣소.” 허영주 사장은 상순에게 더 말하지 말라고 눈짓했다. 그러나 상순은 머리를 숙이지 않고 맞섰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우리 함흥 촌에서 범바위산에 가서 강냉이와 감자를 심어 빈농들이 쌀 고생을 하지 않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황무지도 마음대로 개간하지 못하게 하던게. 또 이런 망년된 농사법을 지시하니 올해 우리 빈농들이 뭘 먹고 산단 말입니까?” 참다못해 허영주도 옆에서 한마디 끼어들었다. “허 서기, 이분들 충고를 듣소. 온 함흥대대에서 뭘 먹고 살겠소? 지금 집집마다 쌀독을 빡빡 긁는 소리를 듣지 못했소? 숱한 사람들이 먹을 거 없어 밤이면 산에 가서 비술나무껍질을 가만히 발라다가 구워 먹는다오. 당신 모르오? 이러고서야 어찌 사회주의 우월성을 과시할 수 있겠소?” 갑자기 허 백호 서기가 고함을 버럭 질렀다. “좋소! 우리 공사에 우파를 잡아 내지 못해 그러는데 잘 됐소. 금방 허 사장이 말한 말은 우파로 되고도 남음이 있소. 허영주는 우파요. 내일부터 우파 모자를 쓰고 투쟁을 받아 보오.” 허나 허영주의 얼굴에서 겁기를 털끝만치도 찾아 볼 수 없었다. “난 총탄이 빗발치던 항일전쟁터에서 싸워온 조선의용군 군관이오. 내 우파 모자를 쓸지언정 온 진수해공사 한해 농사를 망칠 순 없소. 한자 깊이로 땅을 파고 짚과 둼을 파묻어선 낟알을 제대로 거두지 못하오.” 허백호 서기는 붉으락푸르락 해서 목에 지렁이 같은 핏줄을 세우며 온 산골짜기가 다 떠나가게 고래고래 고함쳤다. “당신 정말 계속 인민공사와 대약진을 반대하면 우파 모자를 씌워 총살해 버릴 수도 있어!” 그래도 허영주 사장은 기가 꺾이지 않았다. “내 목이 날아나도 전 공사 인민들의 목숨과 같은 한해 농사를 망칠 수 없소. 보오. 숱한 사원들이 지금 죽물마저 먹지 못하고 보릿고개도 넘기기 힘든 형편이오. 그런데 어찌 이런 무지막지한 농사법으로 한해 농사를 망치자고 든단 말이오?!” 그 말에 모여 왔던 사원들은 웅성거리며 머리를 끄덕였다. 지어 어떤 사원들은 허영주 사장의 말이 옳다고 떠들어댔다. 허백호 서기는 뒤로 물러 설 수 없었다. 그는 허영주에게 마구 악담을 퍼부었다. “당신은 지금 무슨 죄를 짓고 있는지 알기나 하는가? 당이 영도하는 사회주의 우월성을 무시했지? 사회주의 사회에서 보릿고개를 넘기 어렵다고? 죽물도 변변히 먹지 못한다고? 풀과 나무껍질로 연명한다고? 이는 사회주의에 대한 모욕이야!” 뒤이어 그는 사원들을 돌아보면서 을러멨다. “여러분, 모두 들었지? 금방 이 놈이 뭐라고 반당 반사회주의 언론을 퍼뜨렸는지. 이 놈은 반당, 반사회주의 우파분자입니다.” 허나 허영주는 머리를 숙이지 않고 맞서 싸웠다. “허백호 서기! 개도 먹지 않는 자존심을 버리오! 이 밭 심갱밀식을 해서야 되오? 아무리 둼을 한 미터 깔고 빽빽이 밀식한들 될 거 같소? 한 헥타르에 어떻게 5만근을 낼 수 있는가?! 천근이 어떻겠소?” 허백호는 높은 둔덕에 올라서서 고함쳤다. “누구든지 심갱밀식을 반대하면 그는 반당, 반사회주의 우파분자 모자를 쓰고 투쟁 받을 것입니다.” 뒤이어 그는 병완을 보고 명령했다. “김 서기, 반당 반사회주의 우파분자 허영주를 끌어내시오!” 허나 병완은 팔쩡을 끼고 들은 척도 하지 않고 하늘을 쳐다보면서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이윽고 병완은 허영주 사장의 앞에 다가가 그의 왼손을 쥐어 높이 쳐들었다. “허영주 사장의 말이 옳습니다. 이렇게 심갱밀식해선 낟알 한 알도 거두지 못합니다. 원래대로 둼이나 많이 내고 흙에 곡식을 심읍시다. 농사는 그래도 우리 농사꾼들이 더 잘 압니다. 삐뚠 정치 밖에 모르는 사람들의 정신 나간 말을 듣지 맙시다!” 뜻밖의 말에 허영주나 허백호나 모두 경악했다. 여기저기서 웅성거렸다.  “김 서기 말이 옳소.” “쯧쯧, 저 영감이 오망을 하지 않소?” "투쟁맞지 못해 저러오?" 허백호는 병완을 손가락질하면서 위협공갈했다. “어째 영감도 우파 모자를 쓰고 투쟁 받고 싶소?” 허나 병완은 대수로워 하지 않았다. “난 당과 사회주의를 반대한 적도 없소. 올해 농사를 망쳐 우리 대대 사원들을 굶게 하는 허 서기야 말로 진짜 우파요!” 병완은 허백호 서기 턱밑에 삿대질 하면서 우렁찬 목소리로 고함쳤다. “당신이 어찌 위대하고 정확하고 영광스러운 중국 공산당을 대표할 수 있소? 당신 말이 어찌 우리 당을 대표하는 지시라고 할 수 있소?!” 사원들이 마구 구호를 불러댔다. “우파분자 허백호를 타도하자!” 지어 삼합에서 갓 이사해온 종연이랑 어떤 청년들은 허백호를 마구 붙잡아 때리려고 들었다. “아까운 밭농사를 이렇게 망쳐놔 우린 어떻게 살아!” “가물에 둼무지 우에 강냉이를 심어 뭘 거둬들이겠는가!” 허백호는 꼬리 빳빳해 산골짜기 아래로 도망쳐 내려갔다. “이 놈들, 어디 두고 보자, 가만 놔두는가!?” 병완은 허영주와 토론하고 둬짐 되는 밭을 딱 절반씩 나눠 실험하기로 했다. 절반에는 허백호 서기 지시대로 한자 두께로 둼을 편 위에 강냉이 씨를 반 뼘씩 간격을 두고 빽빽이 밀식하기로 했다. 나머지 절반에는 둼을 얼마간 섞어 펴놓은 흙에 강냉이 씨를 한 뼘 간격을 두고 심기로 했다. 병완은 빙 둘러선 사원들을 둘러보면서 가슴을 쭉 펴고 목청을 돋우어 말했다. “이 밭에서 두 짐을 딱 절반씩 나눠 두 가지 농사법으로 강냉이를 심어 실험해 봅시다! 실천은 진리를 검증할 것입니다.” 허영주도 앞에 나서 말했다. “지금 소련 수정주의자들이 우리 나라에서 3년 재해를 입은 기회에 우리 나라에 보냈던 소련 기술자들을 철수해가고 이전에 지원한 걸 빚으로 받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린 아주 어려운 형편에 처하게 됐소. 그런데 한해 농사를 망쳐서야 됩니까?” “안 됩니다!” 사원들은 허백호 서기를 욕하며 벌건 저녁노을을 밟으면서 마을로 내려갔다. 벌건 낙조는 김이 문문 나는 밭과 사원들을 다 데워 죽일 듯 무시무시하게 빨갛게 타올랐다. 하늘도 무심하지 가물에 단비를 내려 보내지 않고 불비만 퍼부었다. 가물을 이기려고 사원들은 소 수레로 물독을 실어 강냉이 밭에 퍼 쳤다. 그런데 무더위에 물독을 싣고 다니던 비녀뿔이랑 숱한 소들이 더위를 먹고 척척 쓰러졌다. 소들은 들누워 일어나지 못하고 퉁방울 눈알들이 뒤집혔다. “이걸 어쩌는가?” 사원들이 한창 쓰러진 소잔등 위에 나뭇가지를 꺾어 덮어줄 때었다. “저 놈들을 체포해라!” 허백호 서기가 허영호 소장과 함께 숱한 민경들을 데리고 덮쳐들었다. 민경들은 허 서기의 지시대로 허영주와 병완을 체포했다. 병완은 민경들의 손에서 팔을 빼며 야단쳤다. “무슨 죄 있다고 이래?” “아직도 몰라?” 허백호 서기가 어깨가 으쓱해 우쭐거리면서 외까풀 눈을 부릅뜨고 고래고래 고함쳤다. “우리 공사 당위에서는 네놈 둘을 우파분자로 결정 내리고 날마다 투쟁하기로 했다!” “우파라니? 정말 한심한 세상이구먼!” “뭐라고?” 허영호가 병완을 흘겨보며 욕했다. “손을 떼라!” 언제 왔던지 상순이 밭머리에 나타났다. “길러준 개 발뒤축을 문다더니.” 상순의 앞에서 허영호 소장은 머리를 숙이면서 뒤로 물러섰다. “김 국장, 공사 당위 지시인지라 그만, 양해하십시오.” 허백호 서기는 영호에게 외까풀 눈을 흘기더니 상순의 멱살을 틀어쥐고 을러멨다. “이 놈아, 네 놈도 어째 우파 모자를 쓰고 싶은 거야?! 썩 꺼지지 못해?!” 허나 상순은 가슴으로 허백호를 떠밀며 물러서지 않았다. 성이 꼭뒤까지 치민 허백호는 허영호 소장을 돌아보며 고래고래 호통을 쳤다. “뭘 하니?! 이 놈들을 몽땅 체포해라! 내 진수해에 오자마자 함흥 촌의 김씨 3대부터 눈에 거슬리더라! 너네 김씨 3대가 없으면 함흥대대를 영도할 사람이 없을 거 같은가?” 어떨 꿍 하는 욕심이 사람을 죽인다고 흥수가 삽을 짚고 서 있다가 썩 나섰다. “허 서기, 저 병완 영감이랑 상순이랑 대대로 우리 함흥대대를 쥐락펴락 해습니다. 우리 사원들도 저 김씨 조손3대를 모두 눈꼴 사나와 합니다.” “좋소. 이런 동무들이 전도 있단 말이오. 동무는 이름이 뭐요?” “이흥수라고 부릅니다. 전 항미원조 때 소대장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병수가 코웃음쳤다. "흥! 겨우 반장이나 한 주지에 자기절로 한급 올려 붙여 소대장이라고 말하는구만."         그러자 흥수는 우먹눈을 부릅뜨고 병수를 쏘아보며 목에 지렁이 같은 핏줄을 세우고 고래고래 고함쳤다. "병수야, 넌 반장이랄도 해봤어? 난 항미원조전쟁에서 팔을 부상당한 영예군인이란 말인기여." 태수가 저쪽에서 삽을 짚고 서서 빈정거렸다. "참, 대단하오. 압록강을 건너면서 비행기구경 하다가 적기 소사 받지 않았고." 병수도 맞장구를 쳤다. "육박전을 할 때 상순을 찌른 적이 없지. 뭐." "허허허." 허백호는 병수와 태수한테 손사래를 치더니 흥수한테 몸을 돌렸다. "그래? 흥수동문 전도 있소." 허백호는 바다에서 지푸라기라도 잡은듯이 흥수 손을 잡았다. “동무는 당원이오?” “아닌기오.” “이런 동무들을 진작 입당시키지 않고. 당지부 서기 뭘 했는가? 쯧쯧쯧. 근심하지 마오.” 허백호의 말에 흥수는 합박만한 입이 귀밑까지 째졌다. “저 사람들, 내캉 남대치라고 입당시키지 않았시우. 허서기, 무슨 일 있으면 내게 시키라우.” 흥수는 미소를 짓는 허백호 서기 얼굴을 보자 가슴을 내밀고 마구 물어먹었다. “저 병완 영감과 상순은 저네 자리를 빼앗길까봐 나를 입당시키지 않았시우. 저 김씨네 조손 3대가 세습하면서 우리 마을을 영영 쥐락펴락하자는 게 아니고 뭡니까? 저런 지껌은.” 허백호 서기는 머리를 끄덕였다. “확실히 함흥대대에 문제 있소.” “나를 빨리 입당시켜 지부 서기로 제발시키라우. 내 꼭 허 서기 말대로 한 헥타르에 5만근을 내겠는지라우.” 그러자 사원들은 모두 흥수를 아니꼬운 눈길로 쏘아보았다. 저 쪽에서 지주 장학산은 공산당 간부들끼리 싸우는 것을 보고 깨고소해 했다. (옳다, 잘 싸운다! 네 놈들 끼리 서로 싸우다나면 우린 투쟁을 덜 받겠구나.) 충국도 속으로 너털웃음을 웃었다. (허허허. 병완과 상순을 투쟁하는 걸 구경하면 좀 좋아서.) “허소장, 뭘 하오? 저 놈들을 체포하지 않고.” 허영호 소장은 허백호를 한쪽으로 데리고 가서 조용히 말렸다. “형님, 좀 냉정하오. 그저 농사문제구만. 어찌 우파 모자를 씌워 체포할 수 있소?” “에이, 정치 불문이라고. 어서 내 말대로 체포해.” 허영호 소장이 발에 뿌리 내린 듯이 서 있자 허 백호는 펄펄 뛰면서 민경들에게 하늘땅이 맞붙을 듯이 고래고래 고함쳤다. “저 병완 영감과 허영주에게 수갑을 채우고 고깔모자를 씌워!” 민경들은 우르르 달려들어 병완과 허영주에게 수갑을 채우고 미리 준비해 가지고 온 고깔모자를 머리에 씌웠다. 어찌나 높은 고깔모자를 썼는지 병완과 허영주를 동화속의 인형 같아 보기도 우스웠다. “이게 무슨 짓인가?!” 상순은 다짜고짜 병완과 영주의 머리에서 고깔모자를 벗겨 땅바닥에 내동댕이쳐 발로 마구 짓밟아 놓았다. “이 놈, 너도 어째 우파 모자를 쓰고 싶니?” 허나 상순은 뒤로 한걸음도 물러서지 않고 허백호 서기에게 대들었다. “억울한 모자를 작작 씌우오. 뭘 잘 못했다고 이럽니까?” 병완은 막내손자를 말렸다. “얘, 삐치지 말라. 괜히 연루되겠다.” 병완은 민경들에게 잡혀 파출소로 가면서도 가슴을 뻗치고 마을 사람들을 향해 목청을 돋우어 소리쳤다. “나는 우리 마을 빈농들에게 미안한 일을 한 게 없소. 여러 분, 근심하지 마오.” 상순과 사원들은 죄수처럼 수갑을 차고 떠나가는 병완과 허영주를 묵묵히 목송했다. 하늘의 진붉은 태양은 지상의 만물을 불태울듯이 불비를 마구 내리퍼부었다. 갓 머리를 내민 야들야들한 옥수수 이파리들이 무정한 불볕에 데여 맥없이 축 늘어졌다. 온 대지를 진붉게 물들이는 낙조마저 굶주린 사람들이 발라 먹어 껍질이 벗겨진 비술나무마저 불태울듯 했다. 사원들은 무더위를 피해 쉼 시간이면 말라 죽어버린 앙상한 비술나무 밑으로 들어가 들어누워 팔로 얼굴을 가리고 쉬었다. 목 안에서 겨뿔 내가 확확 풍길 지경이었다. 일할 때 사원들은 모두 현훈증이 나 수건으로 머리를 질끈 싸매고 일하는 척 했다. 저쪽에서 모진 소리가 나서 모두들 그리로 눈길을 돌렸다. 학수가 물을 실어 나르던 곤두뿔의 잔등을 고삐로 치며 “이랴!” “이랴!” 하고 고함쳐도 곤두뿔은 대가리를 땅바닥에 댄 채 일어나지 못했다. 모두들 우르르 그리로 달려갔다. “이 놈의 쇠새끼, 일어나지 못하겠니?” 그러나 곤두뿔은 눈알을 흡뜨며 바쁜 숨을 몰아쉬는 것이었다. 저쪽에서 소수레에 물통을 실어 나르던 소들이 이쪽으로 대가리를 돌리고 곤두뿔을 근심어린 눈길로 바라보았다. 상순이 달려 가보니 곤두뿔은 마지막 숨을 몰아쉬는 것 같았다. “안 되겠소. 아마 무더위를 먹은 거 같소.” 말을 마치자 상순은 곤두뿔의 목에서 수레 멍예를 벗겨주었다. 곤두뿔은 자기 임자 상순을 알아보았는지 “음메-” 하고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뻐둑거렸다. 상순이 황급히 달려가 곤두뿔을 춰 세우려고 무등 애썼다. 허나 아무리 애써도 곤두뿔은 끝내 일어나지 못하고 대가리를 털썩 모로 떨어뜨리더니 네다리를 쭉 뻗었다. “나와 함께 숱한 황무지를 일궈 놓고 이렇게 털썩 쓰러지니? 곤두뿔아, 쓰러지면 안 된다! 안 돼!” 상순은 곤두뿔의 목을 끌어안고 엎뎌 대성통곡쳤다. “범바위골에서 네가 아니었더라면 우린 범과 곰에게 죽었을 게다. 네가 이렇게 물을 긷다가 죽으면 어쩌니? 죽는 날까지 일하다가 불쌍하게 죽었구나. 곤두뿔아!” 허백호 서기는 뒤에서 “원, 사람이 무슨 제 아비나 죽었다고 저러오?” 하고 코웃음 쳤다. 상순은 곤두뿔의 목을 글어 안고 흐느끼면서 울고 또 울었다. 어찌 슬프지 않으랴! 소서구와 범바위골의 어느 밭고랑에 곤두뿔의 발자국이 찍혀있지 않았겠는가! 허백호가 어찌 농사군과 밭갈이소의 깊은 정을 다 알 수 있었겠는가! 오후에 흥수랑 허백호랑 달려들어 곤두뿔을 잡았다. 집체식당에서 곤두뿔의 뼈를 우린 소탕에 곤두뿔의 살코기를 담아왔다. 허백호와 흥수는 밥상에 마주 앉아 야수들처럼 곤두뿔의 고기를 게걸스레 먹어댔다. 허나 상순은 숟가락을 들어 고기를 저어보다가 달랑 내려놓고 바깥으로 나가버렸다. 그가 어찌 자기와 함께 뼈 빠지게 황무지를 개간하고 농사를 지어온 곤두뿔의 고기를 먹을 수 있겠는가!
108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86) 댓글:  조회:1442  추천:0  2017-10-20
                                            제24장 폭풍우                                                                   천지를 뒤엎을듯이 으르렁대는 무서운 폭풍이 산과 들을 안아 바다에 처넣을듯이 천하를 샅샅히 휩쓸었다. 중국의 대지에는 전례 없는 폭풍이 먹장구름을 몰아왔다. 먹장구름이 뒤덮인 하늘의 변덕스런 풍운조화는 누구도 가늠하기 힘들었다. 꺼머칙칙한 하늘에는 흑룡이 아가리를 쫙 벌리고 인간세상을 통채로 삼킬듯이 덮쳐들었다. 숱한 얼룩독사들이 숲속에서 혀를 날름거리며 호랑이를 노려보는가 하면 원숭이들이 나무에 기어올라가 해금을 켜기도 했다. 어떤 먹장구름은 똑 마치 백골더미에서 기어나오는 백골정이 사악한 바람을 불러 일으키는 모양새를 해 간사해보이기로 그지없었다.        악마처럼 사악한 폭풍은 산과 들판을 휩쓸다가 야수무리처럼 먼지를 새뽀얗게 일구며 조용하던 마을에 덮쳐들었다. 엉터리없는 폭풍은 심술을 부리면서 고즈넉하던 초가집 이영을 홀락 벗겨갔으며 굴뚝 모서리에서 휘파람을 불면서 창문을 두드리고 동네 집 처녀가 옷을 갈아입는 것마저 게걸스레 훔쳐보며 바람벽을 핥아갔다.        심술쟁이 폭풍은 사람들을 못살게 굴더니 비구름을 몰아왔다.       뻘건 불 뱀이 먹장구름이 뒤덮인 하늘을 짜개며 날아들어갔다가 포화의 파편 속 같은 매지구름 속에서 뛰쳐나와 대지를 사정없이 채찍질 했다.       우르릉 꽝 꽝! 천지를 뒤흔드는 우레 소리와 함께 룡을 방불케 하는 룡구름 속에서 불뱀이 불쑥 나타나 패용산 마루에 도사리고 있는 호랑이 상을 한 호랑이구름을 휘감아 내동댕이쳤다.      따웅- 땅!광      하늘 땅을 들었다 놓는듯한 천둥소리와 함께 시뿌연 호랑이구름이 아가리를 쩍 벌려 산정에서 불뱀을 한입에 집어 삼켰다.     꽈르릉 -따웅- 천지를 진감하는 우뢰소리에 발맞춰 누러스름한 호랑이구름이 하늘 룡구름을 향해 뻘건 혀를 날름거렸다. 룡구름은 황급히 하늘로 치솟아 오르며 흩어지는 상 싶었다. 그러나 뭉게뭉게 타래쳐오르든 룡구름은 먹장구릅 속에서 아래로 날아내리더니 호랑이구름과 패용천산 허리를 휘감아 천길나락에 내리뜨리려고 용을 썼다.     꽈르릉!       따웅!      룡호구름이 아가리를 쩍 벌리고 맞부딛치는 순간 거대한 화광이 번쩍이고 불룡수염과 불호랑이수염이 하늘에 뻗치며 하늘땅을 진동하는 우뢰소리가 천지가 맞붙을 지경으로 지동쳤다.           똑 마치 하늘에서 룡과 호랑이가 피를 말리는 쟁투를 벌이는 것 같았다. 그 룡호쟁투에 휩쓸려 태양은 빛을 일었고 대지는 저승사자의 곡을 하며 신음하고 있었다. 질겁한 패용천산의 호랑이와 승냥이 사슴떼들이 산기슭으로, 산골짜기로 흩어져 숨어 하늘의 룡호쟁투를 쳐다보다가 살길을 찾아 도망치기에 바쁘다. 룡호쟁투의 칼바람 속에 백성들은 갈팡질팡하며 몸부림치며 하나하나 쓰러진다.      광풍이 휘몰아쳐 곡식들이 땅에 맞절을 할 듯이 허리를 굽혔다 폈다 하면서 모지름을 썼다. 후두둑 후두둑 곡식 이파리를 두드리면서 밤알만큼 한 우박이 와르르 쏟아졌다.      우박은 온 봄부터 여름까지 사원들이 땀 동이를 기울여 가꾼 강냉이 이파리들을 사정없이 쓸어 눕히고 짓밟았다. 사원들은 미친 듯이 불어치는 광풍 속에서 산과 들의 밭에 새뽀얗게 쏟아지는 소낙비를 바라보면서 주먹으로 가슴을 쿵쿵 치고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었다.                                                                      1.  조개덕      병완은 토성 안 생산대대 사무실 마루에 서서 무심한 하늘에서 사납게 일어나는 풍운변화 쳐다보면서 상을 찡그렸다. “하늘이 불쌍한 우릴 돕지 않는구나. 어떻게 하나 인민공사 첫해에 풍작을 걷어야 사회주의가 좋고 우리 공산당이 영명하다는 걸 보여주겠는데. 이 일을 어쩌오?”      상순은 할어버지를 위로했다.      “할아버지, 근심하지 맙소. 함흥대대 밭에서 곡식을 제대로 걷어들이지 못하면 또 범바위골에 들어가 묵밭에 감자를 심깁소.”       병완은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또 파출소에 잡혀가자구? 당원대회에서두 부업에만 정신을 팔면서 자본주의 소농경제를 발전시킨다고 비판받자고? 안 된다. 더는 널 욕보이게 할 순 없어.” 그러나 상순은 개의치 않았다. “함흥대대는 이전보다 너무나 큽구마. 원래 함흥촌에 소서구와 동구, 마개동 그리고 조개덕까지 들어와서 이젠  200호도 넘습구마. 난 조개덕 생산대 사원들만 데리고 가만히 산에 들어가겠습구마.” “야! 왼 고집이냐?! 지금 전국 정치형세가 심상찮다. 대약진과 인민공사를 반대하는 세력을 타도하는 반우파투쟁 바람이 세차게 불어치고 있잖니?  자본주의를 복벽한다고 투쟁맞자고 그러니? 정신 있니?”       할아버지 말리는 말에 상순은 대꾸하지 못하고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더니 엉덩이를 들고 우쭐 일어났다. 그는 착잡한 생각에 잠겨 이리저리 궁리하며  조개덕 초가집으로 돌아왔다.       지난해에 범바위산에서 동언의 실수로 산불이 달려 숱한 산림을 불태웠다. 그 일로 해 상순은 당내에서 비판받았고 동언은 파출소에 잡혀가 석달 동안 노동개조를 했던 것이다. 다행히 새로 온 파출소 소장은 허영호였다. 그는 상순이 영월구 공안국을 세울 때 받아들여 과장으로 제발시킨 간부였다. 후에 허백호 서기는 영월구로부터 진수해공사 당위 서기로 온 후 천용구 공안국장과 말해 사촌동생 허영호를 진수해 파출소 소장으로 데려왔던 것이다. 그리하여 허영호 소장은 옛날의 상전이라고 봐주어 그만해서 동언의 "방화사건"을 마무리지어버렸던 것이다. 허나 당내 비판대회에서 상순은 혼줄 났다. 허백호 서기는 상순을 비평할 때 코웃음쳤다. “흥! 상순 동무는 아직도 안하무인이구먼. 그 나쁜 버릇부터 고치라구. 삼도만 토비숙청 때도 항상 세상 일을 다 아는 척 하더니 아직도 그 꼴이구먼. 아직도 소농경제사상에 물젖어 인민공사에 청시도 하지 않고 가만히 심산에 들어가 황무지를 개간하다니? 참, 동무는 조직 관념이 있소? 없소? 세상에 둘도 없는 무정부주의자란 말이요.” 허 백호 서기는 갈범처럼 들었던 자료를 사무상에 탁 던지며 호통쳤다. “동문 정말 성질이 괴벽한 사람이오. 어째 고집이 그리 세오? 그 괴벽한 성질을 좀 고치오. 동무 눈에는 상급 공사당위 서기 있소? 없소?” 그때 병완은 일어나 흰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발언했다. “우리 마을 사원들을 데리고 범바위골로 들어가라고 지시한 사람은 내오. 내 모든 책임을 다 지겠소. 상순하고 아무런 관계없소.” “분명 제가 마을 사람들을 데리고 산에 들어갔는데 나설 게 뭡니까?” 상순의 그 말에 허백호 서기는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그 할아버지에 그 손자구먼. 손자가 조직의 비준도 없이 산에 들어가 부업하려고 할 때 어른이라면 마땅히 제지해야지. 왜 한 바지를 입고 춤 추오? 흥! 함흥촌은 당신들 때문에 문제요, 문제!” 그때 상순이 벌떡 일어나 허 서기를 손가락질 하며 질책했다. “저의 할아버지를 모독하지 마십시오. 산불이 난 건 저에게 영도 책임이 있습니다. 허나 사원들을 배불리 먹게 하려고 산에 들어간 것이 무슨 잘못이란 말입니까?!” "쯔쯔쯔, 저걸 보라니깐." 허 서기는 상순에게 삿대질하며 비평했다. “동무, 다른 공사 산에 들어가 황무지를 개간게 잘 했는가?  쌀을 국가에 바치지 않고 사원들에게 다 나눠 주면 되오? 그렇게 하면 자본주의 싹을 키우게 된단 말이오. 단순히 쌀 문제 아니오. 이건 사회주의 길로 나가는가, 자본주의 길로 나가는가 하는 엄숙한 문제란 말이오.” 이때 진수해인민공사 허영주 사장이 나섰다. “상순 동무가 범바위산에 들어가서 황무지를 개간한 일은 허 서기도 알겠는데. 이전에 내 범바위골에 갔다가 상순 동무가 보내온 멧돼지 고기랑 가져다 준 걸 기억나지 않소?  허 서기도 잘 먹고 인사까지 하지 않았소? 그때  허서기 비준받고 전 향에서 황무지개간현지회의을 열고 상순이 경험까지 소개하지 않았소? 그때 허 서기는 전 향에서 황무지를 개간하는 운동을 벌리자고 하지 않았소?” 허백호 서기는 미꾸라지처럼 구멍을 내고 빠져나갔다. “황무지를 개간한 일은 잘못이 없다고 보오. 허나 황무지를 개간해서 얻은 낟알을 국가에 한 알도 바치지 않고 몽땅 함흥 촌에서 나눠 먹은 건 착오가 아니고 뭐요? 순전히 자본주의 싹을 키우는 무정부주의 행위요.” 그때 상순이 가슴을 펴며 일어나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 “허 서기 말대로 생산대에서 황무지를 개간해 잘 먹고 잘 사는 게 자본주의 싹을 키운 게라면 배를 쫄쫄 굶으면서 사는 게 사회주의고 공산주의란 말입니까?” 허백호 서기도 물러서지 않고 사무상을 꽝 치며 일어났다. “이게 정말 우리 공사에도 자본주의냐 사회주의냐 하는 두 갈래 노선 투쟁이 존재하는구먼. 그저 넘어갈 일이 아니구먼.” 현당위 조직부 부장 이계삼은 상순에게 눈길을 돌리며 엄숙하게 비평했다. “범바위골 산불이 난데는 상순 동무가 영도책임이 있소. 이후에는 무슨 일을 하나 조직 관념에 주의하고 상급을 존중해야 하오.” 이계삼 부장의 공정한 발언에 허 백호 서기는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으며 상순과 허영주를 두리번거렸다. 이계삼 부장은 뜨거운 물을 마시고나서 뒷말을 이었다. “황무지를 개간하는 것이 ‘사회주의냐? 자본주의냐?’ 하고 너무 끌어올리지 말 걸 바라오. 오늘 날 모든 일은 이제 역사의 준엄한 시련과 고험을 받고 검증을 받아야 하오. 단 한가지만은 여러분들이 모두 심사숙고해 볼 문제입니다. 우리 공산당원들이 그래 마을 사람들이 굶어 죽는 걸 뻔히 보고만 있어야 합니까? 황무지를 개간해 백성들이 배고프지 않게 하는 것도 그래 잘 못이란 말입니까? 우리 공산당원들은 인민들의 이익을 위해 분투하는 게 취지가 아닙니까? 인민들을 배불리 먹고 살게 하는 것이 뭐가 잘못 됐단 말입니까?” 그 말에 모두들 머리를 끄덕였다. 이계삼 부장의 발언은 참가자들로 하여금 이구동성으로 상순과 병완이 한 일은 인민을 배 불리 먹고 잘 살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다만 사전에 공사당위 비준도 받지 않고 산에 들어갔고 화재가 생긴 일만은 상순이 서면검사를 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그날 상순은 서면으로 검사 서를 써서 공사당위에 바쳤다. 허백호 서기는 아주 엄숙하게 날이 선 말을 했다. “지금 한창 인민공사, 대약진과 반우파투쟁의 붉은 기를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고지에 꽂는 시기에 말을 주의하오. 자칫하면 반당분자로 몰리어 투쟁받을 수도 있소. 동무는 노실한 건 좋소. 허나 욱 하면 벽이라도 마구 차고 나가는 그 울뚝밸이 마음에 안 드오. 좀 울뚝밸을 참지 못하겠소?” 이계삼도 머리를 끄덕였다. “허 서기 말이 옳소. 당과 인민을 위해 일을 잘 하려면 꼭 그 결점을 고치고 인내성을 키워야 하오.” 허영주는 상순의 손까지 잡고 간곡히 부탁했다. “쓴 약은 몸에 좋다고 허 서기 말을 명심하오. 우린 무슨 일을 하나 냉정하게 심사숙고하고 빈틈없이 처리해나가야 하오.” 상순은 그들의 충고를 모두 받아들이고 결점을 시정하고 당과 인민을 위해 착실히 일할 것을 다짐했다. 그 후 공사에서는 함흥생산대대가 너무 커 관리하기 힘든데다가 병완과 상순이 한 생산대대에서 사업하기 불편한 점을 감안해 조개덕과 패용천마을 계수동을 함흥생산대대에서 떼내 조개덕생산대대를 내오고 상순을 조개덕생산대대 당 지부 서기로 임명했다. 함흥촌에서 1리 떨어지나 마나한 조개덕은 지주 조덕림이 제일 먼저 살던 마을인데 후에 조선에서 숱한 이민들이 하나, 둘 모여들면서 조선족과 한족들이 형제처럼 섞여 사는 혼합마을로 됐다. 조개덕과 패용천촌 한족들 가운데는 지주가 아주 많았고 빈농이 몇 집이 없었다. 이계삼 부장과 공사에서는 한어에 능통한 상순을 서기로 보내야 조개덕생산대대를 잘 다스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상급에서는 상순의 사업을 협조하라고 조개덕생산대대 당지부에 진달래와 새로 입당한 이학수도 보냈다. 상순이 조개덕으로 간다고 하자 창걸, 병수, 경학 등 숱한 사원들이 그를 따라 조개덕으로 이사해갔다. 상순은 조개덕에 내려가면서 천지꽃산 뒤의 소서구 밭을 둘러보았다. (저 밭은 우리 조손 3대가 조선 고향에서 쪽박을 차고 간도에 들어와 어떻게 일군 황무진가!) “아이고, 김서기, 이젠 조개덕으로 간다고 하니 내사 발편잠을 자겠구먼요.” 상순은 등 뒤에서 나는 한 여인의 웃음소리에 몸을 천천히 돌렸다. 지춘실이 갓 돌이 지난 딸애 미선을 안고 비웃음이 가득 실린 입귀를 비쭉거리었다. "또 무슨 소리야? 내사 뒤근심 없는줄 알아라," 춘실이 눈귀를 치켰다. "어쨌다고?" 상순은 주위에 다른 사람이 없는 것을 보고 말했다. “전번에 어째 나를 함정에 빠뜨리자고 하잖았는가?” “뭘 어쨌다고 이래?” 상순은 한걸음 다가가며 따지고 들었다. “몰라서 묻소? 애 앓는다 해놓고 그게 뭐요? 하마트면 도적으로 만들어놓고서도. 이젠 너하구 한 마을에서 살지 않게 됐으니 발편잠을 잘 거 같다.” “호호호. 삶은 소대가리 웃다가 꾸러미 터질 소릴! 원! 사내대장부가 고만한 담도 없소? 고런 토기 담에 어떻게 양키놈들하구 싸웠소?” 춘실은 애를 안고 허리 부러지게 폭소했다. “남의 나그네 없는 틈에 집에 들어왔으면 도적이 아니고 뭐요? 그것도 밤중에 아녀자가 홀로 있는 집에?” “왜 날 해치려고 드느냐?” 춘실은 외까풀눈을 치켜떴다. “함께 못 살 바엔 짓밟아 버리고 싶다. 어째? 명옥이한테 장가들더니 아들 하나 없이 꼴 보기 좋다. 콱 잘 살아라!” “함께 살지 못해도 우린 원쑤가 아니잖니? 우린 이젠 모든 게 끝이야!” “아갸!" 상순의 세귀눈을 보고 질겁한 춘실은 애를 안고 황급히 달아나면서 소리쳤다. "김 서기 사람 죽인다고 또 고함칠 테다.” 상순은 달아나는 춘실의 뒤에 대고 건 가래를 퉥 뱉었다. “더러운 년! 미인계를 써서 나를 함정에 빠뜨리려고?!” 상순은 저쯤 굽이를 돌아 달아나는 춘실의 펑퍼짐한 엉덩이를 보고 이상야릇한 감을 느꼈다. (사람의 정욕은 이상하지?) 허나 상순은 인차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안 돼, 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건설하기 위해 종신토록 분투해야 할 당원이야!) 상순은 마른 침을 꿀꺽 삼키더니 한숨을 길게 내쉬며 돌아서서 성큼성큼 걸어갔다. 모든 것이 냉정하게 이지의 세계로 서서히 돌아오는 순간이었다. 상순이네 조개덕으로 이사하게 된 날, 병완과 창준, 상훈과 상길 그리고 상우까지 찾아와 짐을 꾸려 주었다. 그런데 기준이 보이지 않았다. 짐을 다 싼 후 상순과 상우는 아버지를 찾아 온 마을을 헤맸지만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상순은 혹시나 해 어머니 산소가 있는 동산에 있는가 올라가 보았다. 계수동까지 다 찾아도 아버지는 보이지도 않았다. “혹시 소서구에 있는 할머니 산소에 가지 않았을까?” 상순은 중얼거리면서 상우 형님과 함께 소서구 중턱에 있는 할머니 산소로 올라가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할머니 산소에서 아버지 처량한 울음소리 들렸다. “어머니, 우리 정든 고향을 떠나 쪽박을 차고 건너와서 어떻게 일군 땅이라고 다 내놓고 조개덕으로 이사간단 말입둥? 예? 이 소서구 밭은 우리 조손3대가 피땀으로 일군 밭이지 않습둥? 그런데 조 막내아들놈이 조개덕으로 간다오. 이 일을 어쩌면 좋습둥? 어허헉, 헉헉.” "아버지!" 상순과 상우는 목메여 이구동성으로 아버지를 부르면서 달려갔다. 어둠 속에서 기준은 어머니 산소 옆의 밭에서 머리를 숙이고 벌벌 무릎걸음을 하고 있었다. “아버지!” 상순은 아버지를 부축해 일으키려고 했다. 아버지는 울면서 입으로 밭의 흙을 쩝쩝 핥는 것이 아니겠는가. “아버지, 이러지 맙소. 내려 가깁소. 이제 조개덕에 가서 황무지를 많이 일구면 꼭 함흥촌에서보다 못잖게 배불리 먹고 살 수 있을 겁니다.” “이 놈 자식, 놔라!” 기준은 상순의 팔을 활 뿌리치면서 고함쳤다. “이 놈아, 곡식도 뿌리를 뽑아 옮겨 놓으면 잘 자라지 못해. 우리 고향 떠나 여기 와서 얼마나 고생했느냐? 여기서 겨우 밭을 일궈 놓고 살만 하니까. 또 밭도 별로 없는 한족마을로 가서 고생할 예산이야?” 상순은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아버지 심정은 이해됩구마. 이 막내아들은 공산당원입구마. 나는 배고픈 고생을 하는 조개덕 군중들을 이끌고 배불리 먹고 살게 하는 길로 나가겠습구마. 아버지, 이해해 줍소.” 기준은 더욱 서럽게 울면서 무릎을 꿇고 밭의 흙을 두 손으로 담아 코에 대고 흙냄새를 맡다가 봄바람에 후루루 날려 보냈다. 아쉬운 눈물이 이별의 아픔으로 부서져 흩날려갔다. 상순은 아버지 아픈 마음을 위안해주며 겨우 집으로 모시고 내려왔다. 조개덕으로 떠날 때, 기준은 두 번째 고향 함흥 촌을 떠나기 싫어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애들도 할아버지를 따라 덩달아 울었다.        병완은 조개덕으로 떠나는 상순을 대견하게 바라보았다.        상순은 조개덕에 내려가면서도 근심부터 앞섰다.        (조개덕에는 손바닥만한 논밭도 없는데 어떻게 사원들을 배불리 먹고 살게 한단 말인가?)                                                                           2. 덕대 위 덕돌       상순은 조개덕 사원들의 초가삼간마다 돌아다니면서 정황을 요해하고 나서 앞이 막막해 한숨만 땅이 꺼지게 내쉬었다.       그가 집 안에 들어서니 아버지가 한창 둘째 손녀 은숙과 함께 가마니를 짜느라고 땀을 흘리고 있었다. 순자는 벽 밑에서 밥상에 마주 앉아 한창 공부를 하고 있었다.        “아이고. 이 년이 또 가마니 술로 내 손을 쳤다!” 기준은 바디를 놓고 가래짝 같은 손을 쳐들었다. “어마나!” 은숙은 가마니 술을 든 채 황급히 바깥으로 달려 나갔다. “어데로 달아나? 달아나면 어떻게 가마니를 짜니?” 은숙은 바깥에서 집 안에 대고 부서지는 소리를 쳤다. “때리는 거 뭐? 이젠 어머니하고 가마니를 짜지 할아버지하고 짜지 않겠습구마..” 그러자 순자가 밥상을 밀어 놓더니 가마니 술을 쥐고 다가와 앉았다. “할아버지, 내 술질을 할래요.” “응, 그래. 공부하지 않구 되겠니?” “숙제를 거의 했어요.” “음, 저녁으로 밀지 말라. 괜히 석유를 없애지 말고.” “예.” 상순은 구들에 올라와 앉으면서 아버지를 만류했다. "쉬면서 가마니를 짭소.” “얘, 며느리 오래잖으면 애기를 낳겠는데 가마니를 짜야 미역국이라도 끓이지.” 상순은 조롱조롱 들어앉은 딸들을 둘러보더니 한숨을 땅이 꺼지게 쉬었다. 그때 고방에서 명옥이 앓음소리 들렸다. 상순은 고방으로 들어갔다. “어떠오?” 상순은 벼짚을 깔고 누워 있는 명옥의 남산만한 배를 내려다보면서 물었다. “내일이나 모레면 애를 낳을 거 같소.” “이번에는 아들일가?” 상순은 혼자 소리를 하면서 명옥의 배를 만져보았다. “남들이 말하는게 배 한판이 뿔룩하면 아들이고 움푹하면 딸이라던데 어디 보자.”        상순은 명옥의 배를 슬슬 만져보면서 중얼거렸다. “아니, 이번에도 딸이면 어쩌니? 대가 끊어지겠는데. 이게 또 딸인 모양이구나. 배 한판이 움푹한 게.”       뒤이어 그는  명옥의 남산만한 배를 손으로 툭 쳐 밀어놓으면서 바깥으로 나가버렸다.       명옥은 배 안에서 꿈틀거리는 애기를 매만지면서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마흔 살에 어떻게 임신한 애라고 저럴까?”       순간 그 애를 가지려고 모진 애를 쓰던 이왕지사가 눈물겹기만 했다.        조롱조롱 딸애 다섯이나 낳았다고 남편 상순은 집에만 들어오면 대가 끊어지게 됐다고 야단쳤다. 상순이 어찌나 신경질을 쓰는지 명옥은 너무 힘들고 지겨웠다. 그런데 아들을 낳자고 해도 서른여덟 살에 벌써 달거리가 가버렸다. 명옥이 아무리 기다려도 달거리는 나지지도 않았다. 아마 제대로 먹지 못해 영양부족으로 인해 너무 일찌기 그렇게 된 것 같았다. 조개덕과 함흥 촌에서 목수 최국선이네와 상순이네가 아들이 없었다. 그런데 한해 전에 최국선은 아들을 보고 기뻐서 동네 사람들을 청해 큰 생남잔치까지 베풀었다. 이젠 아들이 없는 집은 상순이네 밖에 없었다. 명옥은 떡돌 같은 아들을 낳았으면 좋겠는데 용빼는 수가 없었다. 약을 써 보려고 해도 쌀독을 빡빡 긁어 죽물도 겨우 먹는 신세에 어데서 돈이 있어 약을 쓰겠는가? 그런데 조개덕 생산대대 당지부 조직위원을 맡은 이학수가 상순이네 딱한 사정을 보고 지원의 손길을 보냈다. 어느 하루, 그는 상순이네 집으로 찾아와 돈 5원을 내놓았다. “김 서기, 이 돈을 보태 아주머니한테 녹태를 사다 대접하오. 꼭 아들을 낳을 수 있을 게요.” “고맙소.” 아들이란 말에 상순은 학수가 얼마나 고마운지 몰랐다. 학수가 상순에게 돈을 가져다준 것은 상순이네 부부가 이전에 덕을 쌓은 덕분이었다. 상순과 병완은 학수를 입당시킨 소개인이었고 상순의 아내 최명옥은 학수의 외동아들 주홍을 젖을 먹여 키워준 주홍의 구명은인 양어머니가 아닌가! 며칠 후 이른 아침에 목수 최국선이 상순이네 집으로 찾아와 호주머니에서 돈 12원을 꺼내 내놓으면서 진심에 어린 말을 했다. “벙어리가 벙어리 고통을 안다고 이 집에 아들이 없어 속을 태우는 걸 아오. 이 돈으로 녹태를 사서 제수를 대접하오. 내 아내도 녹태를 사 먹고 떡돌 같은 아들을 낳았소.” “고맙소, 최 목수.” 상순은 일하러 나가기 전에 돈 17원을 순자에게 주면서 “네가 연길에 가서 녹태를 사오너라.”라고 신신당부했다. 명옥은 근심스러워서 순자를 붙잡고 “돈을 꼭 잘 건사해라.”라고 하면서 일원을 꺼내 쉽게 꺼낼 웃옷호주머니에 넣어주고 나머지 돈은 바지 호주머니에 넣어주었다. “요걸로 차비를 하고 점심이나 사먹어라. 연길에 가면 넷째외할머니네 집으로 찾아가서 사달라고 해라. 네가 어데 가서 녹태를 사겠니? 가짜라도 사면 큰 일 난다.” 명옥은 나머지 돈을 넣은 호주머니를 바늘로 꿰매주고 나서 외할머니네 집을 어떻게 찾아 가라고 상세히 알려줬다. 순자는 그때 겨우 열세 살 밖에 안됐다. 연길을 가본 적도 없었고 녹태란 말 들어 본적도 없었다. 그래도 남동생을 보려는 일념으로 단돈 17원을 간직하고 연길로 떠났다. 버스를 타고 연길에 가서 내린 후 어머니가 가르쳐 준대로 하남다리를 건너 우물을 지나 동쪽으로 굽어 들었다. 처음 연길에 왔는지라 가보지도 못한 넷째 외할머니네 집을 어떻게 찾는단 말인가? 천방지축 헤매다가 어머니가 가르쳐준 근방에 가서 이 골목 저 골목 헤매면서 이 집 저 집 들어가 물었다. 외할머니 명함도 모르고 허망 외삼촌 댁이 식품상점에 다닌 다고 말하면서 찾고 또 찾았다. 정성이 지극하면 돌 우에도 꽃이 핀다고 점심 때 거의 돼서야 끝내 넷째 외할머니네 집을 찾아냈다. 넷째 외할머니는 기뻐 어쩔 줄 몰라 했다. “에이고, 네가 어떻게 하면 우리 집까지 다 찾아 왔느냐?” 갓 결혼한 외삼촌 최근호와 새 삼촌댁은 있으면 아주 반가와 했겠는데 출근하고 없었다. 순자의 넷째 외할머니 정어금은 남편이 밥이라도 배 불리 먹으려고 마약 장사를 하다가 일본 놈들에게 살해된 후 딸 셋과 아들 근호를 데리고 시아버지 최구장을 따라 함흥촌에 왔었다. 광복을 맞은 후 중국 공산당 덕분에 사돈 병완 촌장에게서 조개덕의 땅을 분배받았다. 허나 남편도 없이 도저히 농사를 지을 수가 없었다. 비록 맏시형 경숙과 셋째 시동생네 집 식구들이 옆에서 거들어 주고 사돈 병완과 조카사위 상순까지 돌봐주었지만 눈치가 보였다. 설상가상으로 시아버지와 맏시형 경숙이네가 사돈집과 멀리 한다고 진수해 시내로 내려가자 믿을 구석이 없게 됐다. 그리하여 정어금은 애들을 데리고 연길에 내려가 닥치는 대로 보짐 장사를 하면서 살았다. 살림살이가 아주 궁핍했지만 그녀는 원래 인품이 후하고 마음이 뜨거운 분이어서 구차하게 사는 시댁조카 명옥을 아주 동정하면서 입던 옷이라도 쥐어 주면서 도와주군 했다. 순자가 오자 넷째 외할머니 정어금은 와락 끌어안으면서 불쌍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에이구, 시골애가 꽤나 역바르구나. 어떻게 연길에서 우리 집을 다 찾아왔니?” 순자가 찾아오게 된 사연을 말하자 넷째 외할머니는 혀를 끌끌 찼다. “그래, 녹태를 먹으면 옥동자를 낳을 거야.” 그런데 넷째 외할머니는 일하러 나가는 길에 순자를 데리고 연길의 어느 한 의약상점에 가보았다. 그런데 그 상점에 녹태가 없었다. “이걸 어쩌니?” 넷째 외할머니는 울상을 지었다. “난 일하러 가야겠는데 녹태를 사지 못해 어쩌니?" 넷째 외할머니는 아래쪽을 가리키며 알려주었다. "가만 있자, 저기 오금상점 아래쪽에 있는 백화상점이거나 다른 약방에 가면 있겠는지. 가봐라.” 넷째 외할머니까지 일이 바빠 가버리자 순자는 눈앞이 캄캄해났다. (녹태를 꼭 사가지고 가야겠는데. 엄마가 남동생을 업어오게 해야지.) 순자는 점심도 먹지 못하고 이 골목 저 골목 돌면서 묻고 또 물으면서 여러 약방을 찾아 다녔다. 한 약상점에서  녹태가 있다고 하자 얼마나 기뻤는지 몰랐다. 순자가 옆구리에 기워 맨 호주머니를 뜯고 16원을 꺼내 점원에게 주자 상점 점원은 눈이 휘둥그래 물었다. “네가 녹태를 사다 뭐 하니?” “우리 엄마 녹태를 잡숫고 남동생을 업어오게 하자고 그럽니다.” “그래?” 약방 녀점원들은 서로 눈길을 맞추며 어린 시골소녀의 그 가긍한 마음에 혀를 끌끌 찼다. “돌아갈 때 녹태를 잘 건사해라.” "예." 순자는 상점 점원이 꽁꽁 싸주는 성냥갑만한 녹태를 받아 호주머니에 잘 건사하고 상점 문을 나섰다. 그는 녹태를 잃어버릴까봐 녹태를 넣은 호주머니를 손으로 꼭 잡고 길을 떠났다. 그녀는 배를 촐촐 굶으면서도 남동생을 보겠다는 일념으로 이를 꼭 옥 물고 연길에서 버스에 올라타고 진수해로 떠났다. 그녀가 진수해에서 15리나 떨어진 함흥촌으로 돌아왔을 때에는 입에서 겨뿔내가 확확 났고 눈앞이 아물거리면서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어느 날, 상우는 패랑산 앞의 물도랑에서 익모초 한 짐을 베서 지게에 지고 동생 상순네 집으로 왔다. 명옥이 바삐 마당에 나가며 상우 잔등의 풀를 보며 물었다. “아주버니, 이건 뭐예요?” 상우는 지게를 벗어 받침막대기로 받쳐놓으면서 말했다. “제수, 이건 익모초요. 이걸 닳여서 먹으면 랭이 빠져서 아들을 낳을 수 있을게요. 우리 처도 애를 낳지 못하다가 익모초를 달여 먹고 애를 줄줄 낳았소.” 명옥은 시형을 거들어 지게에서 익모초를 부리면서 보니 연분홍 보라빛 입술모양의 꽃이 핀 풀이였다. 상순이 집에 돌아오자 명옥은 금방 시형이 가져온 익모초 이야기를 했다. 상순과 명옥은 아들을 볼 간절한 마음에서 익모초를 작두에 썩썩 썰어 가마 안에 넣고 부글부글 끓였다. 명옥이 뚜껑을 열고 김이 물물 나는 가마 안을 들여다보니 씨꺼먼 약물이 보이었다. 명옥이 바가지로 조금 떠서 맛을 보니 쓰겁기로 말이 아니었다. 그러나 명옥은 아들을 보려는 일념으로 이를 악물고 익모초를 닳인 물을 마셨다. 기적이 일어났다. 마흔도 다 된 명옥은 순자가 사온 녹태와 시형이 베 온 익모초를 닳여 먹고 가버렸던 달거리가 다시 나졌다. 몇 달후에는 서른아홉에 기적적으로 임신까지 했던 것이다. 그렇게 애나게 임신했건만 남편 상순은 딸을 낳을까봐 두덜거리기만 했다. 어느 날 초저녁, 상순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오늘 일찍이 자자.”라고 했다. 석유등잔불 밑에서 숙제를 하던 순자는 뾰로통한 소리를 했다. “아직 숙제도 채하지 못했는데 벌써 쉬겠습니까?” 상순은 맏딸의 애원소리를 들었는지 말았는지 등잔불을 훅 불어 끄고 아내 옆에 드러누웠다. 그는 전날처럼 또 아내의 배를 만져보면서 중얼거렸다. “애가 왼쪽에 있고 복판이 볼록해야 아들이라오. 그런데 이게 애가 오른쪽에 있고 복판이 둥그렇게 움푹 빈 걸 보니 또 딸이구나!” 그는 배까지 툭 쳐놓고 나가버렸다. 또 딸일까 봐 명옥은 적이 근심됐다. “어떻게 임신한 앤데. 제발 이번엔 아들을 낳았으면 얼마나 좋을까?” 배 속의 어린애는 나기 전에 전설 같은 이야기가 많았다. 조개덕의 늙은 비술나무 밑으로 지나가던 늙은 스님이 상순이네가 넷째 딸 신자의 생일을 쇠 주지 않자 함흥 촌에까지 찾아 온 적이 있었다. 그 스님은 상순을 보고 신자를 가리키며 이렇게 예언했다. “이 애를 천대하지 말고 생일을 잘 쇠 주오. 그러면 5년 후에 소가 밟아도 우그러들지 않는 애를 낳을 거요. 장차 이 집에 하늘신과 땅신, 인간신 세 신을 업은 천하에 둘도 없는 애를 낳을 거요.” 태몽 또한 이상했다. 명옥은 어느 하루, 땔나무 하러 가파른 패용천산으로 갔다. 그녀가 숨이 가쁘게 나뭇가지들을 잡아 쥐면서 가파른 산으로 톱아 오를 때였다. 불현듯 아름드리나무들이 하늘을 찌르는 수림 속에서 금빛이 누렇게 하늘을 찌르며 눈부시게 빛나고 있지 않겠는가. 하도 이상해 그녀가 잔 나뭇가지를 휘어잡고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가 보고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글쎄 아름드리 소나무 가지에 금빛이 반짝반짝 빛나는 커다란 금낫이 걸려 있지 않겠는가! “아니, 금 낫이 어쩌면 내게 차려졌담!” 명옥은 황급히 금빛이 반짝이는 금 낫을 벗겨 쥐였다. 분명 낫날이고 낫자루고 모두 금빛이 반짝이는 금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겠는가! 참말 놀랍고도 기쁜 일이었다. 명옥은 땔나무고 뭐고 다 그만두고 그 금빛 낫만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금빛 낫에 깃든 태몽을 꾸고 잉태한 것이 바로 명옥의 배 속 아기였다. 명옥이 함흥 촌에 올라가자 웃새집 큰시어머니는 또 “작은집 작은며느리 이번엔 또 무슨 태몽을 꾸었소?” 하고 물었다. 금낫에 깃든 태몽 이야기를 들려주자 큰시어머니는 머리를 끄덕이더니 “이번에 열 번째 만에 분명 금돌 같은 아들애를 보겠구먼.”라고 했다. 명옥은 잉태한 열달 동안 줄곧 하느님께 “제발 금덩이 같은 아들을 점지해 주옵소서.” 하고 서쪽의 패용천산과 칼산을 향해 마음속으로 빌고 또 빌어 왔다. 이튿날 이른 아침, 명옥은 중얼거리다가 빡빡 긁던 쌀독이 떠올라 애를 낳으면 먹을 것을 마련하려고 만삭이 된 몸으로 농궤에서 단돈 50전을 꺼내 들고 진수해로 떠났다. 그녀는 만삭이 된 모진 몸으로 장마당에 가서 강냉이 쌀을 한 주머니 사 이고 점심도 사 먹지 못한 채 허기진 만삭이 된 배를 끌어안고 귀로에 들어섰다. 그녀는 천신만고 끝에 해가 서쪽으로 기운 후에야 겨우 집으로 돌아왔다. 다행히 땡볕이 쨍쨍 내리 쪼일 뿐 비가 내리지 않아 무사히 집으로 돌아 올 수 있었다. 황혼이 깃들어 열린 고방 문으로 내다보자 서쪽의 패용천 산과 칼산이 타는 듯이 낙조가 벌겋게 비껴 있었다. 무슨 아쉬움이 저렇게 빨갛게 탈까? 하늘도 힘겹게 사는 이들을 보고 속이 다 뻘겋게 타는 모양이다. 명옥은 진수해 장마당에서 돌아오자마자 애를 당장 낳겠는지 하신에서 끈적끈적한 양수가 흘르는 것을 발견했다. 하건만 그녀는 이를 악물고 신음소리를 내면서 강냉이 쌀을 씻어 가마에 얹혀 놓고 불을 일궈 놓았다. 그녀는 때끔때끔 아파나 더는 참을 수 없어 벽 밑에서 공부하는 순자를 불렀다. “맏이야, 애를 낳을 거 같다. 네가 불을 때라." 그녀는 바깥에서 제기차기를 노는 은숙도 불렀다. "얘, 넌 빨리 우사에 가서 아버지를 오라고 일러라.” “예-” 은숙은 바깥으로 나가자마자 종주먹을 쥐고 우사로 뛰어갔다. 그때 기준은 윗방에서 나와 사랑방으로 들어갔다. “아니, 이게 뭐냐? 멱 줄거리 밖에 없구나. 며느리가 애를 낳으면 멱국을 먹이자고 가마니를 팔아 멱을 사다가 여기 숨겨뒀는데.” 정지에서 홍자랑 신자랑 “히히히.” 하고 코웃음을 치다가 할아버지가 나오자 손으로 입을 가리면서 머리를 숙였다. “분명 네 년들이 한 노릇이지?!” 기준이 멱 줄거리를 쳐들고 정지에 들어서자 애들은 “와!” 하고 바깥으로 도망쳤다. 다만 순자만은 부엌에 앉아 불을 때면서 시무룩이 웃었다. 기준은 “넌 모르니?” 하고 따졌다. 순자는 “배고파서 아마 애들이 뜯어 먹은 거 같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기준도 팔소매를 훌훌 걷더니 돼지죽을 끓이던 가마를 싹 부셔내고 멱 줄거리를 씻어 넣고 멱 줄거리로 국을 끓이기 시작했다. 고방에서 명옥은 앓음 소리를 내면서 배속의 애를 만져 보았다. 애기는 세상에 나오기 조급한지 배 속에서 요란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에이고, 애비를 닮아서 성급하기도 하구나. 제일 먹을 게 없는 재해를 입은 세월에 세상에 나와서 어떻게 먹을 고생을 하겠느냐?) 한편 은숙이 우사에 뛰어가 아버지를 불렀다. “아버지, 엄마 애기를 낳겠는 모양입니다. 빨리 집으로 가깁소.” “헤이, 또 딸이겠지.” 상순은 쇠똥을 치던 삽을 벽에 세워놓고 집으로 갔다. 상순이 벼 짚을 깐 어두운 고방에 들어서니 명옥이가 아파나는 아랫배를 부둥켜안고 굴고 있었다. 상순은 다가가 “좀 참고 견디오.”라고 하며 수건으로 명옥이 얼굴의 땀을 닦아주면서 위로했다. 저녁 여섯시쯤 되었을 때었다. 명옥은 앓음 소리를 내면서 안간 힘을 다해 애를 낳았다. “응아-” “응아-” 갓난 애기의 울음소리가 온 집안을 요란하게 울렸다. 상순은 애기를 받아 낸 후 입으로 탯줄을 물어 끊기 바쁘게 바삐 애기 두 다리 사이를 만져 보았다. “아니, 이게 뭐야?” 명옥은 황급히 “어째 그러오?” 하고 맥없이 물었다. “뭐 달린 놈이구나!” “양? 잘 보오.” 명옥은 놀랍고도 급해났다. “정말이오. 고추 달린 놈이오! 당신은 끝내 아들을 낳았소.” 명옥은 머리를 들어 애기를 보려다가 어두워 보지 못하고 머리를 툭 떨어뜨렸다. “음. 그럼 시름 놓았소.” 그녀는 아들을 낳고 시름을 활 놓았던지 스르르 까무러쳤다. 아들을 낳아 기쁘기도 했겠지만 굶어서 맥이 진한 것이었다. 기준은 손자를 보자 윗방에서 정지에 내려와 상순이 품에서 손자를 받아 안고 들여다보면서 기뻐 어쩔 줄 몰랐다. 이윽고 기준은 상순을 보고 애기를 까무러친 어미젖을 먹인 후 시퍼런 칼과 함께 함지에 담아 조왕 덕대에 올려놓게 했다. “아버지, 어째 이럽둥?” 기준은 보로 손자 놈을 잘 덮어주면서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함지에 칼을 담아 두면 병마가 애에게 감히 덮쳐들지 못한다. 함지에 담아 덕대에 높이 올려놓으면 장차 이 애가 만 사람이 우러러 보는 높은 사람이 될 거야. 사람은 집에서부터 높이 모셔야 바깥에서도 높이 모시는 거야.” “예~ 듣다 첫 얘깁구마.” 한참 궁리하던 기준은 마른기침을 쿨룩거리더니 “얘, 이름을 덕돌이라고 짓자.”라고 했다. 상순은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아니, 이담 크면 혹시 애들이 떡돌이라고 별명을 지어 부르면 어쩝둥?” 허나 기준은 고집을 썼다. “모르는 소리! 이 이름이 좋다. 덕대에 높이 모신 손자니까 덕대라는 덕을 넣어서 덕돌이라고 지은게야. 덕은 또 도덕, 덕분에 덕이 들어가서 좋아. 돌은 쇠 밟아도 부서지지 않을 지경으로 딴딴하고 앓지 않을 거야. 이전에 그 중 말이 기억나지 않니? '5년 후에 이 집에서 소 밟아도 우그러들지 않는 떡돌 같은 아들을 보게 된다.' 하지 않았어?” 아버지 말씀에 상순은 머리를 끄덕였다. “덕돌. 알고 보니 이름이 좋습니다.” 기준은 도리머리를 저으면서 장탄식했다. “헤이구, 재해년에 나서 뭘 먹고 살겠니?” 순자랑 애들도 남동생이 귀여워 모여와 구경했다. 순자는 성냥마저 없어 윗집 경산의 집에 가서 나무꼬챙이에 불을 붙여다 부엌 아궁이에 불을 땠다. 상순은 가마 안에 미역 몇 오리를 더 걷어 넣고 미역국을 끓이기 시작했다. 이때 조왕 덕대에 올려놓은 함지에서 덕돌이 자지러지게 울어댔다. “저 놈이 무서워 우는 게 아닐까?” 상순은 함지를 내리우고 덕돌을 안아 아내한테 가져다 젖을 물리었다. 그때까지도 명옥은 까무러친 채 깨나지 못하고 있었다. 석유등잔불 아래 덕돌이 엄마 젖을 오물오물 빨며 젖을 먹는 귀여운 모습이 보였다. “여보, 이젠 깨나오. 깨나서 멱국이나 먹소.” 상순은 멱국을 퍼다 숟가락으로 명옥의 입에 퍼 넣었다. 그래도 명옥은 깨나지 못했다. 명옥은 아들을 낳고 시름을 활 놓은데다 며칠 동안 쌀알이라고는 입에 대지도 못해 맥이 모자라 온 밤 깨나지 못했다. 밤중에 남편이 부축해 일으켜서야 그녀는 겨우 일어나 순자가 떠온 미역국을 후후 불며 마셨다. 그제야 정신이 좀 났다. 이튿날 아침, 아버지가 쑤어놓은 강냉이 죽을 보자 며칠 배를 촐촐 굶은 애들은 정지에서 좋다고 국자로 떠서 후후 불면서 먹어대고 있었다. 겨우 정신을 차린 명옥은 모기 소리 같은 목소리로 “죽을 좀 퍼 달라.”하고 말했다. 그 소리에 은숙은 “엄마 살아났구나.” 하고 말하며 강냉이 죽을 한 사발 퍼다 어머니 입에 한 술 한 술 떠 넣어주었다. 점심에 상순은 집에 돌아왔다가 아내가 일어나 애기에게 젖을 먹이는 것을 보고 너무도 기뻐 집에 있던 돈을 다 들춰가지고 마을에 나갔다. 그는 7촌 조카 경학이네 집에 가서 돈을 꿔가지고 아래 마을 계수동합작사에 가서 보온병을 사다가 덕대에 덜렁 올려놓았다. 그런데 하나 밖에 없는 아들 덕돌은 난 날부터 어찌나 자지러지게 우는지 낳은 엄마도 어쩌는 수 없었다. 그때 죽을 먹던 신자가 덕돌이 우는 소리가 듣기 싫다고 숟가락으로 밥상의 숟가락을 두드렸다. 달라당, 달라당! 숟가락을 두드리는 소리에 덕돌은 울던 울음을 뚝 끊었다. 그 후부터 애들은 덕돌이 울기만 하면 밥상에 숟가락을 놓고 두드리곤 했다. 그때마다 덕돌은 재미났는지 울지 않았다. 마반산 집 할머니는 산파였다. 그의 말이라면 사람들은 의사 말만큼 믿고 그대로 했다. 덕돌이 너무 자주 똥물싸개를 하자 마반산집 할머니를 찾아갔다. 마반산 집 할머니는 명옥을 보고 “애에게 젖을 자꾸 먹이지 마오. 젖을 너무 많이 먹이면 똥물싸개를 하오.”라고 했다. 그때부터 명옥은 그 말대로 덕돌에게 젖을 잘 먹이지 않았다. 그 후부터 덕돌은 여위어 자꾸 앓으면서 갈비대가 아롱아롱하고 눈확이 폭 꺼졌다. 하루는 경학의 처가 덕돌보다 열엿새 늦게 낳은 성욱을 안고 놀러 왔다가 덕돌을 보고 놀랐다. “아니, 얘가 어째 이렇게 되였소?” “마반산집 할미가 젖을 먹이면 똥물싸개를 한다고 해서 젖을 먹이지 않았소.” 성욱의 엄마는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그 할미 말을 듣지 마오. 젖을 먹이오. 우리 성욱을 보오. 젖을 많이 먹어도 똥물싸개는커녕 감기도 하지 않소. 빨리 젖을 먹이오.” 그때부터 명옥은 덕돌에게 젖을 먹였다. 그리하여 덕돌은 차차 몸에 혈색이 띄고 포동포동해지면서 튼튼하게 자랐다. 그사이 똥물싸개를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일, 여덟 달이 지나 덕돌이 구들에서 앙금앙금 기기 시작했다. 기준은 너무 희구해 웃방 문턱 너머 손을 내밀면서 “이리 와, 이리 와. 헤이구 그 놈이 조걸 보오, 기는구나. 그 놈이 희구하다.”하고 대견스레 웃었다. 기준은 조개덕에 내려온 후 제대로 먹지 못해 3년 동안이나 앓음 소리를 내면서 앓았댔다. 허나 손자를 보자 기뻐서 어데서 힘이 생겼는지 일어나 호미를 쥐고 나가더니 사래긴 콩밭 기음을 몇 고랑씩 맸다. 지어 상순이 이영을 이을 때면 지붕에 올라가 이영을 잇는 일을 도와 주군 했다. 상순과 명옥은 늘그막에 낳은 하나 밖에 없는 아들에게, 금이야 옥이야 하고 쥐면 부서질가봐 놓으면 날아날 가봐 하면서 키우는 덕돌에게 생일상을 차려 주었다. 덕돌의 생일상에 상순은 연필과 공책, 돈과 쌀 사발을 놓았다. 명옥은 잘 살라고 입쌀과 좁쌀, 기장쌀, 옥수수쌀, 수수쌀, 열콩, 콩을 그릇 그릇 담아 올려놓았고 찰떡, 감자떡, 닭 알 지짐을 올려놓았다. 덕돌은 명옥의 품에 안겨 생일상에 마주 앉자 벌떡 일어나 연필을 덥썩 쥐더니 필기장에 죽죽 오리면서 놀았다. 친척들과 마을 사람들은 “이 담 덕돌은 공부를 잘 하겠다.”라고 했다. 어떤 사람들은 덕돌이 5원짜리 돈을 가지고 놀다가 연필로 쌀을 담은 사발을 돌아가면서 휘저으면서 놀자 혀를 끌끌 찼다. “에, 큰 노릇을 할 놈이 다르긴 다르다.” “장차 쌀 고생을 하지 않고 잘 살겠다.” 덕돌은 어머니가 손수 빚어놓은 생일 떡을 두 개나 먹었다. 누나들은 남동생이 귀여워 항상 아버지와 어머니가 일 밭에 간 후에 덕돌을 탄자에 올려놓고 네 귀를 들고 그네처럼 흔들면서 온 동네를 돌아 다녔다. 그 놀음이 좋아서 덕돌은 항상 입귀가 귀밑까지 찢어질 정도로 벌리고 깔깔깔 웃어댔다. 그것이 습관이 돼 덕돌은 돌이 지나고 서너 살을 먹은 다음에도 늘 “누나, 그네 타자.” 하고 떼를 썼다. 누나들은 제기도 차고 차개차기도 놀아야 하겠는데 시끄러울 때다가 많았다. 그럼 애들은 덕돌이를 탄자에 올려놓고 애기 때처럼 “헤이 싸! 헤이 싸!” 하면서 그네를 태우는 척 하다가 길바닥에 쾅 내려놓았다. 덕돌은 엉덩방아를 찧어 아파 “와-” 하고 울음보를 터뜨렸다. 그 후부터 덕돌은 다시는 탄자그네를 타자는 말을 하지도 못했다. 엄마와 아버지가 일 밭에서 돌아오면 손시늉을 하면서 고발했다. “엄마, 엄마, 누나네 탄자를 쾅 이랬다.”  “엉? 누가 그랬니?” “저 누나들이 다!” 덕돌은 누나네를 손가락질 했다.       명옥은 빗자루를 들고 애들을 때리면서 고래고래 고함쳤다.       “이 년들아, 내가 어떻게 낳은 아들이라고 땅에다 탕 놓니? 요 년들아, 너네 다섯을 주고 덕돌이 하나 바꿀 거 같니? 응?!” 명옥은 애들을 쫓아가며 때리면서 욕설을 퍼부었다. “금이야 옥이야 하고 쥐면 부서질까 봐 근심하면서 키우는 애라고? 우리 덕돌을 까딱 다치기만 해봐라. 몽땅 가만놔두지 않겠다!” 애들은 빗자루에 맞으면서 바깥으로 달아났다. 둘째 은숙은 문을 열고 신도 못 신은 채 달아나면서 혀를 내두르면서 엄마에게 반항했다. “아들, 아들! 덕돌이, 덕돌이 밖에 모르면서!” 누나 네가 다 쫓기어 나간 후 덕돌은 울먹울먹해 서적을 쓰면서 말했다. “엄마, 누나네 없어 심심하다!” 그제야 명옥은 비방울이 떨어지는 바깥을 향해 소리쳤다. “얘들아, 들어오너라. 덕돌이 심심하다고 운다!” 누나들은 대사령이나 내린 듯이 와르르 집으로 쓸어 들어왔다. 애들은 덕돌이 운다고 식장에서 숟가락을 꺼내 밥상 우에 올려놓고 쟁그랑 댕그랑 두드려댔다. 덕돌은 그 소리가 듣기 좋다고 울음을 그쳤다. 명옥이 일하러 가고 없으면 덕돌은 누나들에게 혼줄 났다. “다시 엄마한테 고발하겐?” “아이(아니) 그러겠다.” “다시 고발해봐라. 없다, 없어.” “아이 그러겠다.” 누나들이 야들야들한 허벅다리를 꼬집어대면서 다짐해도 덕돌은 그저 당하면서도 역성을 들 엄마나 아버지가 없는지라 꼼짝하지 못했다. 엄마나 아버지나 큰누나 순자가 집에 들어오면 덕돌은 “와-” 울음보를 터뜨리면서 누나들을 손가락질 하면서 고발했다. “저 누나 때렸다.”  누나들이 집에서 쫓기어 나갈 것은 불 보듯이 빤한 일이었다. 그 후에도 이런 일이 수두룩했다. 비 오는 날이고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날이고 누나 네는 덕돌이를 때렸다가 집에서 쫓기어 나군 했다. 그러나 덕돌이 자기를 제일 아끼는 넷째누나 신자만은 들어오게 하라고 엄마와 말해서 신자만은 재수 좋았다. “야, 얘가 신자만은 들여놓으란다. 어서 들어오너라. 덕돌이 운다.” “예-” 넷째누나 신자만은 운이 좋게 들어왔다. 그 덕분에 신자는 덕돌이 울지 않을 때까지 밥상에 숟가락을 놓고 두드리면서 밥도 제때에 얻어먹을 수 있었다. 그때로부터 넷째누나 신자는 덕돌을 고와 각별히 아끼고 보살폈다. 금이야 옥이야 하는 덕돌은 진짜  온집 식구들의 각별한 사랑 속에서 무럭무럭 자라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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