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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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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46) 댓글:  조회:1982  추천:0  2016-07-04
                         3. 면례 형내와 상철이 소 수레를 몰고 질척질척한 길로 걸어 나가고 근형과 최구장이 주위의 동정을 살피면서 앞뒤에서 소 수레를 옹위하여 한 걸음 한 걸음 북으로, 북으로 힘겹게 걸어 나아갔다. 그들은 점심때가 되자 걸으면서 주먹밥으로 대충 끼니를 에웠다. 뒤에 다시 섬나라 오랑캐들이 따라오는가 해 흘끔흘끔 되돌아보기도 했다. 오후에도 그들은 별일 없이 한 삼십 리 길을 걸었다. 서산으로부터 땅거미가 어둑어둑 지기 시작했다. 어둠의 장막이 서서히 드리웠다. 그들은 길옆 마을의 한 집에 렴치를 불구하고 비비고 들어가서 쪽잠을 잤다. 그때 사달이 생겼다. 최구장 옆에서 자는 것 같던 근형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이 놈 새끼 어디 갔을까?” 최구장은 사돈들을 보기 민망스러웠다. “사돈들이 목숨을 걸고 나선 마당에 어디 갔어? 할배 버리고 이놈 호로 자식.” 최구장이 한바탕 욕지거리를 하는 소리를 듣고 상철이 말리었다. “돌아 오겠습지비. 너무 신경 쓰지 맙소.” 최구장은 계속 하얀 머리를 절레절레 가로저으면서 푸념 질을 했다. “도대체 뭘 하러 갔을까?” 사실 근형은 어두운 장막을 헤치면서 고향 운주동으로 돌아갔다. 그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다섯 살에 여읜 어머니를 홀로 고향 운주동 뒷산기슭에 모셔둔 채 만주국으로 빠져 가는 것이 속에 내려가지 않았던 것이다. (안 돼! 자식 된 놈으로 그럴 순 없어. 증조할아버지 유골은 사돈들이 수레로 모셔서 두만강 강변까지 가면 돼! 그새 난 엄마 유골을 파와야 하겠어. 삼촌이랑 새단이랑 일본 놈들의 범 아가리에 물리었는데 찾아보지도 않고 혼자 만주국으로 갈 순 없지.) 이젠 어둠속에서 우뚝 치솟은 기운봉 절벽이 지척에 보였다. 저 멀리 고향 운주동 마을과 산기슭을 감돌아 흐르는 고향의 강 운주하도 희읍스름하게 바라보였다. 이젠 고향의 뒷산 성산도 산발을 따라 희미하게 바라보였다. 엄마가 묻혀있는 선산을 바라보면서 그는 생각을 바꾸게 됐다. “안 돼, 할아버지는 어머니와 증조부를 다 만주국에 모시고 갈수 없다면서 반대할 거야. 어제 저녁에 내가 엄마산소 말을 하자 ‘어떻게 한 번에 증조부와 네 엄마를 만주국에 모시고 가겠는가’고 말씀하신 적이 있지 않는가!” 한참 걷다가 그의 머리를 탁 치는 궁리가 떠올랐다. “옳다. 엄마를 면례해 어머니 고향 업동에 모셔 가자. 그곳엔 외가 집 선산이 있지 않는가!” 근형은 이튿날 동녘하늘이 희읍스름하게 밝아올 때에야 운주동 마을 뒤 선산발치에 이르렀다. 그는 돌 토성 안에 들어선 후 먼저 증조부 산소자리에 가서 묻어 두었던 삽을 손으로 파냈다. “됐어!” 그는 곧추 산중턱에 있는 어머니 산소에 달려 내려갔다. 빗물에 씻긴 엄마 산소 앞에 꿇어앉은 근형은 할아버지한테서 배운 대로 목 놓아 울면서 말했다. “엄마- 젊은 년세에 세상 떠난 엄마, 엄마 산소마저 온전히 모시지 못하는 이 불효한 도리깨아들을 용서하옵소서. 흑흑. 이 못난 자식은 엄마를 만주국에 모시고 가지 못해 외가 집 성산에 모셔가려고 합구마. 날 용서하옵소서.” 인사말을 마치자마자 그는 팔소매로 눈물을 쓱쓱 닦고 일어나 삽으로 산소를 파재꼈다. 어쨌든 날이 완전히 밝기 전에 일을 끝내야 했다. 한참 무덤을 파다가 말고 그는 주위를 살피면서 마을 쪽으로 슬금슬금 달려 내려갔다. 절처럼 쓸쓸한 고향집에 이른 그는 울안에 다른 동정이 없자 인차 집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집안 식구들의 체취가 풍기는 집안을 눈으로 쓸어보다가 그는 바 줄을 얻어다가 안방에 놓여있던 궤를 묶어 둘러멨다. 삽짝문을 열고 바깥동정을 살펴보아도 아무런 인기척이 없었다. 근형은 궤짝을 메고 바깥으로 살금살금 나와 걸음아 날 살려라고 뒷산으로 줄달음쳤다. 그가 산중턱에 있는 엄마 산소에 이르렀을 때는 동녘하늘이 희붐히 밝아왔다. 그는 궤짝을 산소 옆에 내려놓기 바쁘게 엄마 유골을 하나하나 궤안에 담으면서 중얼거렸다. “엄마, 이 불효자식을 용서합소. 엄마 산소를 이 좋은 고향에 모시지 못하고 엄마 고향에 모셔 갑구마. 놀라지 말고 내가 모시는 대로 가깁소. 이제 엄마 고향에 엄마를 모셔가겠습구마. 외할머니랑 함께 편안히 계십소.” 그는 엄마 유골을 다 궤안에 담자 덮개를 닫고 꾸벅꾸벅 절을 아홉 번이나 올렸다. 그리고나서 그는 궤를 업고 수림 속을 꿰지르고 나가 령 길을 잡아타고 남으로 걸었다. 한참 걸으니 동녘하늘에 구름을 꿰뚫고 아침햇살이 몇가닥 내리 비추었다. 그런데 그는 온밤을 자지 못해 곤기가 몰려 오는 것을 어찌하는 수가 없었다. “안 돼! 일본 놈들에게 잡히기 전에 엄마를 엄마 고향에 편안히 모셔가야 해.” 근형은 머리를 흔들면서 도정신하여 운주하 강변까지 다가갔다. 그 곳은 운주동과 한 오리 떨어진데다가 키 넘는 버들 숲이 우거진 강변이여서 보통 일본 놈들의 시선이 와 닿지 않는 곳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근형은 궤를 벗어 조약돌 우에 올려놓고 누런 흙물에 세수를 했다. 순간 곤기가 사라지고 정신이 들었다. 하여 그는 누런 흙물을 둬 모금 들이마시고 궤를 업으려고 두 손을 궤를 묶은 바 줄에 걷어 넣었다. 이때 갑자기 버들 숲에서 돼지 멱따는 소리가 날벼락 치듯이 울렸다. “뭘 하는 놈이야? 꼼짝 말고 손 들엇!” 근형이가 머리를 돌려 피뜩 보니 일본헌병대 옷을 입은 조선 자위대 개다리 놈들이 총을 겨냥하고 버들 숲에서 뛰쳐나왔다. “에쿠! 큰일 났구나.” 근형은 궤를 제꺽 업고 사품 치며 흐르는 강물에 철썩 뛰어들었다. 푱 푱! 총알이 날아와 궤짝에 꼽혔다. 근형은 궤에 머리를 딱 붙이고 헤엄치면서 하류 쪽으로 둥둥 떠내려갔다. 그는 놈들이 자기를 겨냥하기만 하면 물속으로 머리를 숨겼다. 어려서부터 자맥질에 이름 있는 그여서 물속에 갈아 앉아 한 일, 이분은 숨어 있을 수 있었다. 한참 후에 멀리 떠내려가서 물위로 머리를 살며시 내보내 강변 쪽을 살펴보았다. 저 먼 발치에서 놈들끼리 지껄이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아마 총에 맞아 물귀신이 됐을 거야!” “그래! 물 위에 다시 대가리를 내밀지 않는구먼.” “돌아가자! 끼무라 국장에게 유격대 한 놈을 쏴 죽였다고 보고하자.” “허허허, 그래! 우린 상을 톡톡히 타게 됐어!” “우린 탄약을 메고 가는 유격대원을 쏴서 물귀신을 만들었으니까. 하하하.” 근형은 궤짝에 머리를 딱 붙이고 하류 쪽으로 떠내려가다가 놈들이 저 멀리 버드나무숲으로 사라지기를 기다려 궤짝을 묶은 바 줄을 왼손으로 잡고 남쪽 대안으로 헤엄쳐 나갔다. 한식경이나 허우적거려서야 한 사품 치는 운주하를 건널 수 있었다. 궤가 강바닥에 닿자 그는 허리를 펴면서 물속에서 일어나 궤를 안고 무릎을 치면서 찰랑거리는 강물을 헤가르면서 절버덕절버덕 뭍으로 걸어 나갔다. 그는 뭍에 이르자 먼저 궤부터 훑어보았다. “아니, 이게 뭐야? 궤에 총구멍이 숭숭 뚫렸구나!” 그는 바삐 덮개를 열고 궤안을 들여다보았다. 그는 유골을 하나하나 살펴보다가 총구멍이 뚫린 대퇴골을 보고 두 손으로 어루만지면서 엉엉 소리 내 울었다. “엄마! 엄마를 욕보게 한이 불효자식을 죽여 주옵소서! 엄마는 세상 떠서도 머리로 내게 날아드는 총알을 막으셨구먼요. 엄마, 저 일본 놈들에게 천벌을 내립소! 엉엉~” 푱 푱! “서라!” 이때 갑자기 북쪽 대안에서 또 돼지 멱따는 소리가 들려왔다. 근형이 머리를 홱 들어 건너다보니 금방 총을 갈기던 놈들이 쫓아왔던 것이다. 그 놈들은 돌아가려다가 시체를 보지 못해 마음이 놓이지 않았던지 말머리를 돌려 창을 찌르는 교활한 수법을 쓴 것 같았다. 근형은 궤를 둘쳐 업고 줄행랑을 놓았다. 발밑에 총알이 죽음의 노래를 부르면서 푱 푱 박히며 모래가루가 폴싹폴싹 튕겨 올랐다. 귀전에서도 총알이 무섭게 비명을 지르면서 스쳐지나갔다. 푱 푱! 그가 논밭까지 달려갔을 때다. 총알이 날아와 머리에 쓴 삿갓마저 구멍을 뚫었다. 삿갓이 총알에 맞아 발부리에 떨어져 나뒹구는 것도 돌볼 새 없었다. 근형이 줄행랑을 놓는데  총소리는 점점 더 자지러졌다. 그는 황급히 논 둔덕 밑에 살짝 엎드렸다가 엉금엉금 기면서 궤를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끌고나갔다. 개다리들은 논 둔덕 위에 드러난, 움직여가는 궤짝 모서리를 보고 왝왝 소리칠 뿐이었다. 나중에 그 놈들은 강을 헤엄쳐 건너와 추격할 엄두도 못 내고 닭을 쫓던 개가 지붕을 쳐다보는 격이 되고 말았다. 한참 후 개다리들은 새로 놓은 운주교를 건너와서 쫓아오려고 상류 쪽으로 뛰어갔다. 그 틈을 타 근형은 일어나 또 줄행랑을 놓았다. 운주하를 건넌 다음에는 별 곡절 없었다. 하루 동안 걸어서 해질녘에는 무난히 업동에 있는 외가 집 선산에 갈수 있었다. 그는 온종일 쌀 한 알 먹지 못하였는지라 너무 배고파 외삼촌 네 집에 들렀다. 큰외삼촌 허득필과 둘째외삼촌 허명철, 그리고 이모 명실은 모두 놀랍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여 야단쳤다. “아니, 이게 무슨 일이냐?” 큰외삼촌은 근형의 잔등에서 궤를 받아내려 놓으면서 눈이 떼꾼해졌다. 근형에게서 자초지종을 들은 외삼촌댁은 혀를 끌끌 차면서 바삐 저녁밥상을 차려 놓았다. 근형은 허기 찬 나머지 볼이 메지게 기장밥을 먹었다. 그런데 빈속에 너무 급히 밥을 먹어 밥에 취해 까무러쳐 쓰러졌다. 코를 드렁드렁 고는 근형을 보고 득필과 명철은 머리를 절절 저었다. 큰외삼촌네 맏아들 성룡과 딸애 보금은 고모사촌 형님과 오빠가 초면인지라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이모네 둬 살 되는 아들 차종범은 형이 죽었는가 하여 “형님, 형님!”하고 애타게 부르면서 흔들었다. 이튿날 근형은 외가집의 도움을 받아 어머니 유골을 어머니 고향 업동 뒷산에 편안히 모셨다. 근형은 어머니 산소에 꾸벅꾸벅 절을 하고나서 무릎을 꿇고 한바탕 대성통곡 쳤다. “엄마, 이젠 눈을 감으시고 편안히 주뭅소. 이곳엔 일본 놈들이 알지 못하는 외가 집 선산입구마. 지척에서 엄마를 모시지 못하는 이 불효자식을 용서해줍소. 이제 만주국에 가면 언제 올지 모르겠습구마. 언젠가는 조선 강산에서 일본 놈들을 몰아내고 강산을 찾은 다음엔 꼭 다시 찾아와 잘 모시겠습구마. 서른 살도 안 되는 새파란 연세에 돌아가신 우리 불쌍한 엄마, 흐 흐 흑, 아이고, 불쌍한 우리 엄마, 엄마를 두고 살길을 찾아가는 이 도리깨아들을 용서해주옵소서. 다행히 외가 집이 있으니 대신 잘 모시리라고 마음 놓고 갑구마. 이제 기회만 있으면 고향에 와서 엄마를 찾아 뵙겠습구마. 엄마! 흑흑흑.” 큰외삼촌 허두필이 땅을 치면서 대성통곡치는 근형을 일궈 세웠다. “됐다. 우리가 네 엄마 산소를 잘 보살필게. 근심하지 말고 떠나거라.” 근형은 이후에 찾아와도 엄마 산소를 쉽게 찾아 볼 수 있게 비석처럼 모와 날이 선 둬자 길이 되는 바위 돌을 들어다가 산소 앞에 세워놓았다. 그리고 산소자리를 잘 기억해두려는 듯이 주위를 죽 돌아보았다. 업동 북산 양지바른 곳에 자리 잡은 외가 집 선산은 정말 풍수가 좋은 명당자리였다. 근형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가슴에서 큰 맷돌을 내려놓은 듯이 시름은 놓은 홀가분한 심정이었다. 그는 외가 집에 돌아가 외삼촌댁에게서 주먹밥을 한주머니나 얻어가지고 그 길로 북쪽을 향해 떠났다. 작별하는 외삼촌은 눈물을 머금고 어깨를 들먹이는 근형을 안고 어루만지면서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근심 말고 떠나거라. 종종 인편에 소식이나마 전해 달라.” “삼촌네도 여기 맞갖잖으면 만주국에 들어오오. 우린 아마 명옥이 시집간 함흥촌에 가서 살 거 같소.” “응, 그래. 우리도 조만간에 일본 놈들의 성화에 여기서 살 것 같지 못하다. 그때 함흥촌에 가든지 하지. 일본 놈들을 조심해 잘 가거라.” 근형은 무거운 발걸음으로 어머니 고향마을을 떠났다. 저 마을 동구어귀에서 외가 집 식구들은 석별의 정을 금치 못하면서 눈물을 흘리면서 되돌아보는 근형에게 끊임없이 손을 저었다.                   4.친일주구의 끝장        근형은 할아버지가 자기를 애타게 기다릴 것 같아 바지가랭이에 휘파람소리 나게 발걸음을 다그쳤다. 그는 일본 놈들이 지키는 운주교를 건널 엄두도 내지 못하고 황급히 사품 치는 운주하에 뛰어들었다. 한참 소용돌이치는 강물 속에서 허우적거리면서 개발헤엄을 쳐서야 겨우 운주하를 건넜다. 닭 알만큼 한 조약돌을 보는 순간 그의 뇌리에는 돌팔매로 일본 놈들을 겁 먹여 도망치게 하던 생각이 번개같이 스치고 지나갔다. (옳지, 일본 놈 새끼들이 달려들면 조약돌로 대갈통을 까버리고 도망치자. 그 놈들은 돌멩이만 날아가면 유격대가 왔는가고 질겁하지 않는가. 허허허. 그게 묘수로다.) 그도 돌팔매질에 재미들었다. (진달래 고모만큼 돌팔매질 하면 얼마나 좋겠니. 흥!) 그가 한창 조약돌을 주어 호주머니에 넣을 때었다. 갑자기 검둥이가 뛰어와 끼깅거리면서 앞다리를 들고 주인의 품에 매달리며 어리광을 부리는 것이 아니겠는가. “아니, 검둥이야, 넌 어데 갔다가 불쑥 나타났니?” 근형은 큰 어선을 만난 것 같았다. 검둥이는 주인의 말을 알아들었던지 앞에서 달리다가 주춤 멈춰서더니 되돌아보면서 꼬리를 휘휘 저었다. 근형은 다가가 검둥이의 대가리를 툭툭 다독여 주고 나서 조약돌을 넣어서 묵직한 자기 젖은 옷을 검둥이 잔등에 달아맸다. 그리고 양손에 닭 알만큼 한 조약돌을 서너 개씩 골라 쥐고 뒷산으로 씨엉씨엉 발걸음을 다그쳤다. 그가 검둥이를 앞세우고 운주동 뒷산기슭에 올랐을 때였다. 갑자기 검둥이가 왕왕 짖어댔다. 근형이 숲속에 납작 엎드려 길을 내려다보니 말발굽소리가 어지럽게 박근해왔다. 뒤이어 털 한 모숨이가 한길수가와 수길 등 놈들을 한 무리 이끌고 뛰어왔다. 분명 놈들은 운주하를 건넌 근형을 발견한 것이 틀림없었다. “에크, 저놈들을 어쩌느냐?” 근형이 중얼거리는데 검둥이가 뒤에 대고 “왕왕!”짖어댔다. 근형이 황급히 몸을 홱 틀며 돌아섰다. 뒤에서 외눈깔백이 야마모도 소장 놈과 코 수염 쟁이 끼무라 국장 놈이 말을 타고 시퍼런 군도를 빼들고 숱한 졸개들을 휘몰아 덮쳐왔다. 근형은 숱한 놈들을 당할 수 없는지라 검둥이를 보고 짖지 말라고 주둥이를 틀어막고 나무숲속에 몸을 숨겼다. “금방 개 짖는 소리를 들었지? 분명 이 뒷산에 올랐어! 샅샅이 뒤져!” 끼무라 국장 놈이 돼지 멱따는 소리를 쳤다. 근형은 숨을 딱 죽이고 슬슬 기여 머루덤불속으로 들어가 숨었다. 이때 한길수란 놈이 외눈깔을 해가지고서도 권총을 뽑아들고 두리번거리면서 이쪽으로 어슬렁어슬렁 다가왔다. 검둥이가 한길수를 보고 벌떡 일어나면서 짖으려고 했다. 근형이 검둥이의 주둥이를 꽉 쥐고 눌러 앉혔다. 그러나 때는 늦었다. 푱! 푱! 한길수는 머루덤불 속에서 버스럭거리는 소리를 듣고 총을 쏘았다. “유격대 놈들이 여기 머루덤불속에 있다! 붙잡아라!” 근형은 들킨 것을 알고 몸을 일으키면서 조약돌을 날렸다. 딱! 면바로 외눈깔배기 한길수놈의 낯빤대기에 맞았다. “앗!” 한길수놈은 말 잔등에서 퉁 떨어졌다. 질겁한 그 놈은 말을 버린 채 도망치면서 되돌아보지도 않고 뒤에 대고 헛총을 갈겼다. 졸개들도 다른 머루넝쿨에 대고 헛총을 갈기면서 덮쳐들 엄두도 못 내었다. 그 새 백마는 어디로 달아났는지 꼬리도 보이지 않았다. 이때 뒤쪽에서 야마모도소장과 끼무라 국장의 무리가 덮쳐왔다. 한길수는 주춤 멈춰 서서 다시 이쪽 머루 덤불 쪽을 권총으로 가리켰다. “저 머루덤불속에 있습니다.” 끼무라는 한길수를 쏘아보면서 욕지거리를 했다. “한 대장, 유격대 저 머루덤불속에 있는데 왜 이쪽으로 도망쳤쏘까?” 끼무라 국장 놈은 시퍼런 군도로 머루덤불 쪽을 가리키면서 고함쳤다. “샤게끼(사격)!” 땅! 땅! 땅! 물샐 틈 없이 날아간 총알에 한 오십 미터 떨어진 곳에 덮여있는 머루넝쿨이 마구 끊어져 내려앉고 잎사귀가 튕겨났다. “깨갱!” 개 비명소리가 들리었다. “도쯔게끼(돌격)!” 끼무라 국장이 군도를 휘두르면서 명령했다. 놈들은 일제히 머루넝쿨 쪽으로 덮쳐갔다. 그런데 머루넝쿨을 샅샅이 뒤져도 사람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이게 웬 일인가?” 끼무라 국장은 한길수를 쏘아보면서 투덜거렸다. “당신 눈에 똥이 폈쏘까? 머루넝쿨속의 개를 보고서도 유격대인가고 소리쳤쏘까?” "아니, 분명 머루덤불 속에서 인기척이 났는뎁쇼." "헛소릴 작작 쳐! 금방 개새끼 깨갱거리는 소릴 듣지 못했어? 눈이 멀었지. 귓구멍도 멨어?" 끼무라의 비난소리에 한길수는 피 묻은 볼을 가리키면서 자기 판단을 고집했다. “아닙니다. 끼무라 국장님, 이걸 보십시오. 난 분명 유격대가 뿌린 돌멩이에 맞았습니다.” 끼무라 국장은 졸개가 머루넝쿨 속에서 들춰낸 피 묻은 조약돌 서너 개를 가져오라고 하여 오른손으로 만지작거렸다. 그는 오른손으로 코 수염을 매만지더니 혀를 날름거렸다. “음, 소까(그래). 분명 유격대야! 그 놈은 총에 맞았어! 빨리 수색해!” 야마모도 소장 놈이 옆에서 의문스러워했다. “금방 개가 깨갱거리는 소리 들렸소. 혹시 개가 총에 맞지 않았을까? 개가 버스럭거리는 걸 가지고 한 대장이 놀라 소리친 게 아닌가?” 끼무라 국장이 거드름을 피우면서 고함쳤다. “나니(뭣이)? 아니야, 아니? 개가 돌멩이를 우리 한 대장한테 뿌릴 수 있쏘까? 한 대장 백마도 감쪽같이 잃어졌어! 개가 백마를 타고 달아날 수 있쏘까? 유격대는 백마를 타고 달아났어! 잔말 말고 빨랑빨랑 이 산을 샅샅이 수색해!” 야마모도도 머리를 끄덕였다. 놈들은 머루 숲을 꿰뚫고 나가 산중턱 수림 속을 수색하면서 나갔다. 사실 근형은 한길수가 말을 버리고 달아나는 순간 백마를 제꺽 타고 수림 속으로 도망쳤던 것이다. 그런데 검둥이가 뒤에서 주인을 엄호하느라고 머루덩쿨 속에서 조약돌주머니를 멘 채 맴돌면서 뒤에서 쫓아오는 놈이 있으면 물어 메치려고 하다가 총에 엉덩이를 맞았던 것이다. 한참 백마를 타고 달리던 근형이 뒤를 흘끔 보니 검둥이가 따라 달려올 뿐 놈들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말에서 내려 검둥이의 대가리를 쓰다듬어주다가 검둥이의 엉덩이 털에서 피가 낭자하게 흐른 것을 발견했다. “아니, 이게 웬 일이냐?” 근형이가 살펴보니 검둥이가 엉덩이에 총알을 빗맞고 피를 흘리고 있었다. 다행히 조약돌을 호주머니에 넣은 웃옷을 달아맸기에 총알이 조약돌에 맞으면서 빗맞은 것 같았다. “에이, 너를 하마터면 목숨 잃게 할번 했구나.” 그는 매부 상순에게서 배운 대로 괴춤을 까고 검둥이의 엉덩이에 대고 소변을 보았다. “검둥이야, 내 매부 알려준 약이란다. 오줌은 지혈시키고 소염시킨단다.” 검둥이는 꼬리를 휘휘 저으면서 주인의 소변을 몸에 받았다. 일을 마치자 근형은 검둥이를 안고 말 잔등에 뛰어올랐다. “저놈이야! 백마를 탄 저 놈을 나포햇!” 뒤를 보니 한길수무리가 추격해오고 있었다. 근형은 검둥이를 안은 채 고삐로 말 잔등을 힘차게 갈겼다. “쨔!” 백마는 주인을 갈았지만 말을 잘 들었다. 백마는 네 굽을 안고 산기슭 수림 속으로 달아 들어갔다. “땅!” “땅!” 갑자기 뒤에서 자지러진 총소리가 울렸다. 함성소리와 비명소리도 들리었다. 근형이 뒤를 돌아다보니 산기슭을 에돌아간 수림 속 길에 한길수의 무리가 보이지 않았다. (웬 일일까?) 근형이 의아해하면서 수림 속 오솔길 갈림길에 이르렀을 때였다. 앞에서 달리던 검둥이가 근형의 팔소매를 물고 끼깅거리다가 산중턱 수림 속을 향해 “왕왕!” 짖는 것이었다. “이 놈 개새끼, 갈 길이 바쁜데 왜 이래?” 손바닥으로 대가리를 슬쩍 때려도 깨갱거리면서도 막무가내였다. “무슨 일이 있어?” 검둥이는 몸뚱이를 꿈지럭거리다가 근형의 팔에서 빠져나가 땅바닥에 풀썩 뛰어내리더니 수림 속을 향해 “왕왕!” 짖어댔다. 그러고는 꼬리를 휘휘 저으면서 근형을 쳐다보았다. 심상치 않음을 느낀 근형은 놈들을 멀리 따돌린 것을 보고 검둥이가 달리는 쪽으로 백마를 타고 따라 뛰어갔다. 한참 뒤따라가 보니 웬걸 그 곳에 셋째삼촌과 넷째삼촌 그리고 새단이 피 못이 된 채 쓰러져 있지 않겠는가. “아니,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새단이!” 근형은 궤를 내리워 놓고 새단의 어깨를 쥐여 흔들었다. 그 소리에 경민과 경욱이 천천히 눈을 떴다. “으흐흑, 근형이구나. 네가 어떻게?” 넷째 삼촌 경민이가 끊어진 오른손을 잡고 가까스로 일어나 앉으면서 기뻐 어쩔 줄 몰라 했다. “아니, 삼촌, 어떻게 돼 이런 수림 속에 누워 있습둥?” 넷째삼촌 경욱이 벌떡 일어나 앉으면서 앞질러 대답했다. “어제 저녁에 진달래랑 유격대들이 우리를 구해냈다. 야마모도랑 우리를 서대문형무소에 끌어가라고 헌병 놈들에게 명령하더라. 우리는 뛸 데 없이 죽었구나 하면서 며칠 전에 남쪽으로 정처 없이 끌리어갔다. 그런데 업동을 지나 마천령을 넘을 때 난데없이 돌멩이가 쉭쉭 날아와서 헌병 놈들이 넷이나 쓰러지지 않겠느냐? 뒤이어 길 양옆의 수림 속으로부터 십여 명 말을 탄 복면괴한들이 덮쳐 나와 나머지 두 놈을 비수로 단칼에 목을 썩뚝 베 버렸지. 복면한 검정헝겊을 푼걸 보니 진달래중대장이랑 최동욱 중대장이랑 데리고 온 항일유격대 대원들이 아니겠느냐? 그들에게 구원돼 어제 밤으로 여기까지 왔단다.” “그래 진달래고모랑 어데 있소?” 근형이 묻자 경욱은 “산 아래로 우리 식구들을 데리러 갔다. 그들은 우리가 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장백산으로 들어가려다가 말고 말머리를 돌려 마천령 부근에 매복해있다가 우리를 구원하였단다.”라고 대답했다. 이때 경민이가 산 아래를 가리키면서 “저기 온다! 진달래 여동생이랑 온다.” 산 아래를 보니 진달래랑 셋째삼촌네 맏아들 근활(봉문)이랑 넷째삼촌네 근호랑 데리고 왔다. 그런데 놀랍게도 결박한 한길수란 놈을 말에 태워가지고 스적스적 끌고 오지 않겠는가. 근형은 한길수란 놈을 보자 눈에 불티가 튕기었다. “작은고모, 저놈을 당장 처단하오. 저놈한테 아까운 말을 태울게 있소?” 근형은 검둥이 잔등에 처맨 옷에서 조약돌을 꺼내 연속 한길수놈에게 뿌렸다. 딱! 딱! 한길수 놈은 조약돌에 대갈통을 맞고 “아이쿠!” 비명을 지르면서 말 잔등에서 거꾸로 떨어졌다. 진달래는 유격대원들에게 명령했다. “저 섬나라 오랑캐 개다리 놈을 나무에 묶어라!” 유격대 대원들은 피투성이로 된 한길수 놈을 피나무에 묶어놓았다. 진달래는 모젤권총을 빼들고 한길수 놈한테로 다가갔다. “늙다리 개다리 놈아, 네 놈도 조선 사람인데 왜 내 나라 강토를 짓밟는 일본 놈들의 개가 돼 우리 조선 형제자매들을 못살게 구는 거냐? 네 놈의 죄악은 만 번 죽어도 마땅해!” 진달래가 모젤권총을 들고 방아쇠를 당기려 할 때였다. 한길수 놈이 피범벅이 된 우멍한 눈을 가슴츠레 뜨고 지껄였다. “총만 쏴 봐라! 끼무라 국장과 야마모도가 당장 뛰어와 네 놈들을 한 놈도 없이 소멸해버릴거야!” 진달래는 권총 끝으로 한길수 놈의 턱을 쳐들고 암범처럼 호통 쳤다. “끼무라 놈 보고 오라고 해. 몽땅 네 놈처럼 죽여 버릴 테다! 금방 보았지? 산기슭 수림 속 길에서 그 놈들이 우리 용맹한 장백산 항일유격대에 혼쭐난 걸. 우멍한 개 눈깔로 똑똑히 보았지? 그 놈들이 도망치지만 않았으면 우리 돌멩이에 몽땅 죽었을 게다!” 원래 진달래랑 경민과 경욱의 식솔을 데리고 산기슭을 에돌아 빠진 수림 속 길에서 금방 산에 올랐을 때였다. 야무진 총소리와 함께 앞에서 근형이가 개를 안은 채 말을 타고 도망치는 것이었다. 뒤에서 한길수와 끼무라 국장 놈이 말을 탄 한 무리 일본 헌병들과 개다리들을 끌고 뒤쫓아 오고 있었다. 그리하여 진달래 중대장은 최동욱 중대장과 함께 산기슭 수림 속에 숨었다가 일본 놈들과 한길수 등 개다리들에게 매복습격 전을 들이댔던 것이다. 그들은 제일 먼저 달려오던 한길수 놈에게 오라를 뿌려 목을 걸어 생포했다. 최동욱 중대장은 유격대원들을 지휘해 일제히 보총과 권총으로 사격해 뒤따르던 놈들을 대여섯 놈 살상했다. 특히 진달래 중대장이 뿌린 조약돌에 몇 놈이 보기 좋게 대갈통이 터졌다. 한길수 놈도 오라를 받고서도 도망치려다가 진달래가 날린 조약돌에 얻어맞고 쓰러졌다가 유격대원들에게 생포됐던 것이다. 진달래 중대장은 권총으로 한길수를 겨누었다. “오늘 우리는 일본 놈들에게 수난당한 백의동포들을 대표하여 네놈을 처단한다!” 근형이 검둥이의 잔등에 매단 옷에서 큼직한 조약돌을 꺼내들면서 말했다. “작은고모, 아까운 총알을 쓸게 있소. 아예 조약돌로 이 놈의 대가리를 박산내기요.” “좋아!” 진달래는 권총을 옆구리에 차고 조약돌을 쥐여 한길수의 대가리에 뿌렸다. 딱! “앗!” 한길수는 비명을 질렀다. “이건 네놈에게 수난당한 우리 큰아버지랑 새단 조카랑 원수를 갚는 게다.” 이번에는 근형이 조약돌을 뿌렸다. 딱! “아이고! 날 더 욕보이지 말고 총을 놔라!” 조약돌에 턱을 빗맞은 한길수가 애걸복걸했다. “네 놈을 그렇게 쉽게 죽게 할 순 없어!” 경민과 경욱 그리고 새단이랑 조약돌을 쥐고 우르르 쓸어왔다. 근활과 근호도 돌멩이를 들고 달려들었다. 딱! 딱! 딱 따 닥! 따다닥! 숱한 조약돌이 원한을 안고 한길수에게로 사납게 날아갔다. 한길수의 대가리는 성한 곳이 없었다. 나무 아래에는 한길수의 더러운 피가 낭자하였고 피 묻은 조약돌이 널려 있었다. 이젠 비명소리도 없고 피가 낭자한 한길수 놈의 대가리도 앞으로 축 늘어뜨려졌다. 진달래는 숨진 한길수 놈을 나무에 비끌어 매 놓은 채 말 잔등에 올라탔다. 한길수 놈을 처단한 후 진달래가 거느린 유격대는 네 개 소조로 나뉘어 최구장의 일가식솔들을 만주국으로 호송하는 길에 올랐다.  
66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45) 댓글:  조회:1974  추천:0  2016-06-24
                      제16장 조상들의 산소 1.외로운 무덤 골짜기 어디에선가 샘물이 졸졸 흐르는 소리가 귀맛 좋게 들리었다. 일본 놈들한테 빼앗긴 고향 산천에는 의연히 샘물이 흐르고 있어 다행이었다. 경인은 수림이 꽉 뒤덮인 산속에서 헤매다가 골짜기에 내려가 끝내 퐁퐁 솟구치는 샘물을 찾아냈다. 그는 두 손으로 샘물을 퍼 마셔 타는 목을 축이었다. 그런데 어디에선가 뭘 파는 듯 괭이소리 들렸다. 경인은 골짜기에 듬성듬성 난 쑥대를 헤가르면서 소리 나는 쪽으로 슬금슬금 다가갔다. “아니, 아버지와 근형이 이런 산골짜기에 뭘 팔가?” 경인은 허리를 펴고 황급히 아버지한테로 달려갔다. “아버지, 큰일 났습구마. 경민과 경욱이 몽땅 일본 놈들에게 잡혀갔습구마. 경민은 야마모도란 놈이 휘두른 검에 왼손이 날아났습구마." “뭐라고?!” 최구장은 맥없이 비 물에 괴죄죄한 땅바닥에 풀썩 물앉았다. “그 놈들과 정말 한 하늘을 쓰고 못살겠구나.” 근형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최구장은 근심이 태산 같았다. “에이, 손비는 어쩔까? 하혈이 심한데 관준네 약도 못 쓰고. 경민은 검에 찍혀 끊어난 팔을 어쩌니? 신설집 병관네 약을 썼으면 팔이 썩지 않겠는데.” 최구장이 한숨을 쉬면서 하는 말에 경인은 다소 미심쩍은 듯이 물었다. “아버지, 그 집안이 정말 그렇게 용한 명의내력입둥?" 최구장은 머리를 끄덕였다. “그래. 한번은 한 처녀애가 두 손을 머리 위에서 내리우지 못해 어미와 함께 신설집에 찾아왔댔어. 건데 병관 영감이 그 처녀애를 보자고 가까이 오라 손짓하더니 불시에 치마를 활 들어 올렸단다. 속치마도 입지 못한 그 처녀애는 부끄럽고 놀라 두 손을 내려 치마를 붙잡더래. 그래 두 손이 자연스레 내려왔대.” “어허, 거 정말 용하구만요.” 경인은 혀를 내두르며 감탄했다. 최구장은 근형이가 잡은 괭이자루를 잡고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경인과 근형이 최구장을 부축했다. “아버지, 여기다 움을 파서 뭘 합니둥? 만주로 가깁소. 일본 놈들의 등살에 이런 동굴에서 못 삽구마. 황차 장마철이지.” 최구장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나도 만주로 당장 가야 한다는 걸 알아. 허나 성남에 묻힌 아버지 산소를 홀로 둔 채 차마 떠나가지 못하겠다. 아버지 고향 개성에 모셔가든지 만주국에 모시고 가든지 해야 하겠어 경인은 머리를 홰홰 가로저었다. “지금 일본 놈들이 우릴 죽이지 못해 헤맵구마. 잡히면 어쩌자고 그래요?” 근형도 괭이를 내려놓으면서 삼촌의 말에 찬동해 나섰다. “옳습구마. 할아버지 산소를 가만히 남겨두고 가면 누가 다치겠습둥? 고향이나 만주국에 모시고 가기보다 계속 여기 모시는 게 어떻습둥?" 최구장은 먹장구름이 뒤덮인 먼 북녘하늘을 바라보면서 장탄식했다. “얘들아, 아무리 험난한 일이 있더라도 조상들의 산소는 잘 모셔야 한다. 조상이 없이 우리가 있을 수 있냐? 조상들을 잘 모시면 덕을 쌓고 후대들도 복을 받는 법이야. 산소에 가토를 많이 하면 후대들이 번성하고 풀이 무성하면 재앙을 입게 된다는 말이 있어. 아버지를 어떻게 이 일본 놈들이 득실거리는 눈물 젖은 땅에 외롭게 남겨두고 가겠느냐? 아버지를 아버지 고향인 개성에 모시자면 기차를 타면 한 이틀 가면 당도할게야. 그러나 이젠 일본 놈들의 눈에 나서 기차에 모시고 갈수 없게 되였구나. 만주국에 모시고 가는 게 옳아. 만주국에 가서 아버지 산소를 잘 모시는 게 옳다. 얘들아, 아버지 유골을 파서 그곳까지 메고 갈만하겠느냐?” 경인과 근형은 머리를 끄덕이더니 지지해 나섰다. “우리 번갈아 할아버지 유골을 업고 만주국까지 가겠습꾸마.” 최구장은 아들과 장손의 어깨를 툭툭 치였다. “참 장하구나. 너희들은 정말 효자현손들이야. 경인은 더 지체말구 처자들을 데리고 먼저 만주국에 들어가라. 우리 들어가면 살 집이나 봐둬라. 내 근형과 함께 손비도 구해내고 집도 팔아 뒤처리해가지구 아버지를 모시고 들어갈게.” “어찌 아버지와 형제, 조카들을 사지에 남겨두고 내 혼자 살겠다고 몸을 빼겠습니까?” 경인이 떠나갈 념을 하지 않자 최구장은 화를 버럭 냈다. “네 이 놈, 아버지 말을 거역해? 만주에 가는 게 나를 생각하는 게야.” 경인은 아버지에게 절을 꾸벅 올리었다. “아버지, 몸 조심합소. 만주국에서 다시 만납시다.” 경인은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신설집으로 갔다. 그는 신설집에서 아내와 아들딸들을 데리고 정든 고향을 떠났다. 고향을 떠나면서 그는 먼 산기슭을 감돌아 흐르는 고향의 강 운주하를 돌아다보았다. 순간 운주하 백사장에서 땀을 흘리면서 검무를 추던 일로, 빨래터에서 어금을 만나던 일로, 버들강변에서 어금과 연애하던 일이 삼삼히 떠올랐다. 그는 저도 몰래 코마루가 시큼해나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열 살도 되나마나한 근현은 종알거리면서 물었다. “아버지, 우린 어디로 가는가요?” “이밥도 배불리 먹는 살기 좋은 곳으로 가지.” 근환은 새까만 눈을 한번 깜짝하지도 않고 아버지를 쳐다보면서 물었다. “이래 가면 언제 우리 집으로 돌아오는가요?” 그 천진한 물음에 경인은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그저 한숨만 땅이 꺼지게 내쉬었다. 한참 후에야 그는 무겁게 입을 떼였다. “이담 너희들이 크면 꼭 고향 집으로 찾아오너라.” 근환의 물음은 끝이 없었다. “그럼 우리 클 때까지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는가요?” “그거 몰라? 이담 우리 크면 집으로 찾아오라고 하잖아.” 옆에서 근원이가 아버지 손을 쥐고 걸으면서 아는 척 하면서 끼어들었다. “안 돼, 난 운주하에서 고무신 배랑 띄우면서 놀겠는데. 언제 그렇게 오래 있다가 오겠니?” 근현도 끼어들어 종알거렸다. “난 배불리 먹기만 하면 인차 돌아올 테야. 운주하에서 모래에 물도랑이랑 파고 물레방아를 돌리면서 놀고 싶어.” 철부지 애들 말에 어금은 하염없이 눈물을 줄줄 흘렸다. 그들의 섭섭한 기분을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경학은 떠나가는 그들의 뒤에서 빈정거렸다. “쳇, 별게 다 공밥을 처먹구서 약값도 내지 않고 달아나! 흥!” 옆에 서 있던 형내가 경학을 쏘아보았다. “그럼 못 써. 저 분은 내 스승님의 둘째아드님이시어.” 그래도 경학은 까만 눈을 깜빡거리면서 툴툴거렸다. “형님 스승의 아들이면 어때? 나하고 무슨 관계있소. 우리 집 쌀독만 바닥이 날게 아니요?” 형내는 더는 참지 못해 경학의 귀 쌈을 찰싹 갈겼다. “인정머리 없는 놈 새끼야, 저분은 우리 칠촌고모부야. 팔촌이 한 구들이라는데 친척도 모르는 새끼, 다시 개소릴 쳤다간 없어! 알아?!” 경학이 볼을 싸쥐고 엉엉 울면서 집안으로 들어가자 상철과 관준이 형내를 나무랐다. “말할 거지 왜 손찌검이냐?” 경인은 뒤에서 하는 수작들을 다 들었지만 못들은 척 하고 길만 다그쳤다. 최구장은 동굴을 파다 말고 새단의 약 첩을 달일 데 없는데다가 배고파서 수림에서 내려와 신설집으로 들어왔다. 마당에서 조약돌로 차기를 놀던 경학과 광학이 보기 싫어 쓴 눈길을 보냈다. “별 것들이 다 밥 축을 내러 온다.” 형내가 무섭게 경학을 쏘아보았다. 그러자 경학은 겁나 혀를 홀랑 내밀더니 삽작문 밖으로 달아났다. 형내는 바삐 마루에서 땅바닥에 내려나가면서 인사했다. “스승님, 모처럼 우리 집을 찾아오셔서 반갑습구마.” “고맙네.” 이때 상철과 관준이 마중나와 반갑게 인사했다. 최구장이 장손을 데리고 마루에 들어서자 상철의 처가 헤헤 웃으면서 함지에 발을 씻을 물을 담아 들여왔다. “발에 묻은 싯누런 흙을 씻고 들어가시우. 구들을 다 어지럽히겠습구마.” 상철은 안해한테 흘끔 눈을 흘기더니 상을 찡그렸다. “사람이 부실한데는 약이 없어. 거 무슨 소리오.” 상철은 미안해 허리를 굽히면서 “그대로 방에 들어갑소. 괜찮습꾸마.” 하고 말했다. “아니, 며칠 만에 발을 씻는데 좋지” 최구장과 근덕은 널찍한 널마루에 앉아 함지 물에 발을 담그고 말끔히 씻었다. 뒤이어 최구장은 제일 위방에 들어가고 근덕은 형내와 함께 아래 방에 들어갔다. 그날 저녁에 최구장과 근덕은 한 끼 잘 대접받고 잠자리에 들었다. 밖에서는 번개가 번쩍이면서 집안까지 환하게 비추었다. 뒤이어 집 천정이 날려갈듯 천둥소리가 하늘땅을 진감했다. 최구장은 종내 잠이 오지 않았다. (일본 놈들에게 잡히는 날엔 아버지를 만주에 모시고 가지도 못해! 자칫하면 아버지 산소마저 욕보일 수도 있잖아. 하루 급히 아버지를 모시고 만주에 가야 해!) 그는 막걸리를 마신 관준이 코를 드렁드렁 고르는 소리를 듣고 살며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아래 방에서 근형도 잠을 이루지 못해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다가 위방에서 누군가 밖으로 나가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소변도 볼 겸 스르르 방 미닫이를 열고 밖으로 나갔다. 번쩍 하는 번개 불을 빌어 허리를 구부정하고 삽작문을 나서는 분이 바로 할아버지라는 것을 알았다. “할아버지!” 근형이 소리치면서 삽짝문을 나섰다. “쉿- 남들을 깨우겠어.” 최구장은 손을 휘저어 재차 소리 치려는 손자를 제지시켰다. 근형은 의아해 “할아버지, 야밤삼경에 어디로 갑둥?” 하고 나지막한 소리로 물었다. “넌 곤하겠는데 집에 들어가 쉬렴.” “아니, 나도 가겠습꾸마.” 최구장은 한숨을 길게 내쉬더니 머리를 끄덕였다. “그래, 난 아버지를 하루속히 파 모시고 만주국으로 가야겠어. 나온바 하곤 이 밤으로 아버지를 파내자. 소낙비 내리기에 일본 놈들이 찾아올 근심은 없을 거 같애.” “예? 이젠 오래잖아 동이 트겠는데요.” 최구장은 먼동이 아직 트이지 않은 동녘하늘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그걸 가릴 새 있냐? 일본 놈들에게 잡히면 아버지를 만주에 모시고 가지 못할게 아니냐? 어서 서두르자.” 근형은 최구장의 팔을 부축하면서 산골짜기로 내려갔다. 그들은 질척질척한 산길을 밟으면서 먼저 동굴을 파던 골짜기에 이르러 괭이와 삽을 찾아들고 수림으로 하여 성남 쪽으로 더듬어나갔다. 소낙비가 억수로 쏟아져 옷이 다 젖어 후둘 후둘 떨리고 덜덜 아래위 이를 쪼면서도 그들은 한사코 성남으로 찾아갔다. 근형은 정작 만주국으로 떠나가게 되니 불시에 다섯 살에 잃은 어머니 생각이 났다. (내 어머니를 어찌 홀로 이 일본 놈들이 득실거리는 조선 땅에 남겨두고 가겠는가? 먼저 증조부를 모셔간 후 어머니도 모셔가자.) 그들은 어느덧 양지바른 산중턱 돌 토성을 두른 옛 성에 모신 산소 앞에 이르렀다. 번개가 번쩍이면서 쓸쓸한 무덤 앞에 꿇어앉은 최구장과 근형을 비추었다. 꽈르릉 우레 소리가 천지를 진감했다. 억수로 퍼붓는 소낙비를 맞으면서 최구장은 손자 근형을 데리고 절을 아홉 번이나 올렸다. “아버지, 이 불효한 아들을 용서해 주옵소서. 일본 놈들이 득실거리는 이 더럽혀진 땅에 아버지를 홀로 남겨 둘 순 없어 만주국에 모셔 가려고 합니다. 놀라시지 마시고 제가 모시는 데로 함께 가옵소서. 괭이질과 삽질에 많이 편하지 못하시더라도 불효자손을 용서해 주옵소서.” 최구장은 말을 마치자 훌쩍 일어나 근형을 돌아보았다. “됐어. 이젠 시작하자.” 뒤이어 근형은 괭이질을 하고 최구장은 삽질을 했다. 그들이 한 둬 자 깊이 파 들어가자 썩은 관 널조각이 나왔다. “아버지 뼈를 다치겠다. 이젠 괭이는 치우고 살살 삽질해.” “예.” 최구장은 구덩이 속에 들어가 비 물에 질벅한 구덩이 위층 누런 흙을 매만지다가 나지막한 소리를 쳤다. “나오셨다. 여기 머리가 만지는구나. 아버지, 양해하옵소서. 온 몸을 단번에 모시지 못해서 잠시 머리를 먼저 모셔 내갑니다. 차차 온몸을 다 모셔 내가겠습니다.” 최구장은 더듬어 내는 족족 “이건 머리다.”, “이번에는 목 뼈 같구나.” 하면서 근형에게 넘겨주었다. 근형은 구덩이 밖에서 하나하나 받아서 비 물이 줄줄 흐르는 땅바닥에 사지를 맞추어 죽 이어놓았다. 한참 후 일을 마치자 최구장은 근형의 손을 잡고 구덩이 밖으로 나왔다. 이때 뜻밖에 근형이 왕왕 대성통곡을 쳤다. “아니, 얘가 웬 일이냐? 누가 듣고 오겠다.” “할아버지, 난 엄마 산소를 저기 두고 만주국으로 못 가겠습꾸마. 엄마도 모시고 가겠습꾸마.” 그제야 최구장은 허리를 쭉 펴더니 근형의 어깨를 툭툭 쳤다. “너도 효자는 효자로구나. 네 엄마 생각을 하지 못했구나. 그런데 단번에 두 사람을 업고 그 먼 만주국으로 가지야 못하지. 어떻게 한다?" 최구장은 뒤더수기를 긁적거리었다. "옳다. 네 엄마를 네 외가 집 산소에 모셔 가면 어떨까? 저 길주로 나가는 업동에 네 외가 집 산소들이 있잖니?” “거기에 모시고 만주에 가면 어떻게 다시 찾아 봅둥?” “야, 이 놈아, 증조부와 엄마를 단번에 만주국에 데리고 갈순 없지 않아? 먼저 거기에 모셔 뒀다가 후에 천천히 만주국에 모시고 가자.” 그제야 근형은 뒷덜미를 썩썩 긁적이었다. “이젠 먼동이 트는구나. 어서 서두르자. 어데 가서 가마니라도 얻어다가 먼저 아버지를 안전한 곳에 피신시켜야 하겠어.” 그제야 근형은 비 물에 폭 젖은 팔소매로 눈물을 닦으면서 연신 “예, 예.”라고 하면서 괭이와 삽을 구덩이 속에 파묻어두었다. “야, 그건 경인이네 쓸만 한 삽이야. 가지고 가자.” “아니, 여기 뒀다가 엄마도 파서 모시고 만주로 가겠습꾸마.” “응, 그게 바로 효자 처사야. 자기 어시나 조상의 산소도 온전히 모시지 않는 놈이 어찌 다른 사람들을 위해 일할 수 있겠어?” 그들은 비바람 속에서 유골을 하나, 하나 주어 냈다.                 2.부모의 유골을 모시고 근형은 가마니를 얻으러 떠나갔다. 최구장은 합장한 아버지와 어머니의 유골을 머리로부터 발가락까지 죽 순서대로 맞춰놓았다. 아버지 유골을 내려다보는 최구장의 주름 잡힌 얼굴에는 뜨거운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아버지, 어머니, 부모를 고향에 모셔야 하는데 일본 놈들 때문에 길이 막혔어요. 어이, 어이. 생전에 잘 모시지 못했는데 세상을 떠난 아버지마저 내 고향에도 모시지 못하는 이 불효한 아들을 용서하옵소서. 어이, 어이. 흑흑. 어이, 어이.” 최구장은 처음에는 곡을 하면서 하소연하다가 저도 몰래 흐느끼면서 대성통곡 했다. 이 시각 그는 일본 놈들이 자기를 뒤쫓는다는 것마저 다 잊었다. 그의 머리속에는 다만 세상을 떠난 아버지마저 고향의 산소에 편안히 모시지 못하는 것을 뉘우치려는 것 밖에 없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근형이 벌건 나무궤짝을 바 줄로 묶어 등에 지고 오지 않겠는가. “아니, 손자야, 어데서 이렇게 좋은 궤짝을 가져 왔냐?” 최구장은 단단한 나무궤짝을 매만지면서 물었다. “관준 사돈과 가마니를 좀 달라고 하니까 자초지종을 묻더니 사랑방에서 이 궤짝을 내다가 줍디다. 그는 ‘너 할아버지는 참말로 유교학설을 닦은 효자로구나.’하고 말씀하지 않겠습둥?” “어이구, 감사할 변이라고. 적송으로 짠 단단한 궤로구나.” 근형은 궤짝을 벗어놓고 팔소매로 이마의 땀을 닦더니 손으로 뒤쪽을 가리켰다. “저기, 사돈아바이네 옵구마.” 최구장이 뒤를 돌아다보니 관준과 상철, 형내까지 3대가 솔밭에서 걸어 나오는 것이 아니겠는가. “아니, 여기까지 올 거야 있소? 사돈, 저렇게 좋은 궤를 주어서 정말 고맙소.” 너부죽하게 생긴 관준은 사람 좋게 웃으면서 말했다. “아니, 사돈할아버지를 모시는 이런 중대사가 있으면 말씀이라도 하셔야지. 우리도 흙 한 삽이라도 파주지 않았겠소? 야밤삼경에 혼자 이렇게 나와서 면례를 하오?” 최구장은 연신 허리를 굽히면서 인사치례를 했다. “자다가 불시에 아버지 생각이 나서 나왔는데 사돈까지 깨워서 미안하오다.” 관준도 허리를 굽히면서 맞 인사를 했다. “에이, 천만에 말씀을. 사돈이 한집안이라는데 별 말씀을 다 하오다.” 관준은 쪼그리고 앉아 최구장을 도와 비 물에 하얗게 바래진 유골을 궤에 순서대로 담았다. 최구장은 아버지를 모신 궤 앞에 꿇어앉아 눈물을 휘 뿌리면서 절을 올렸다. 관준, 상철과 근형도 따라 절을 올렸다. 뒤이어 최구장은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 어머니, 이 불효자식을 용서해 주옵소서. 이렇게 총망히 면례행사도 올리지 못하고 부모를 모시고 정든 고향을 떠나가는 불효를 널리 양해해 주옵소서. 시국은 이 불효한 아들이 례도 올릴 경황이 없게 만들고 있사옵니다. 이제 만주국에 아버지를 모시고 가면 산소에 편안히 모시고 가토도 많이 올리겠나이다. 아버지! 어이, 어이, 이 불효자식을 용서하옵소서. 어이.” 최구장은 곡을 하다가 대성통곡 쳤다. 근형도 팔소매로 얼굴을 닦으면서 흑흑 흐느껴 울었다. 모두들 한동안 “어이, 어이.” 하고 곡을 했다. “자. 그만하고 길을 떠나기요. 일본 놈들한테 잡히면 큰일 나겠소.” 관준은 최구장을 부축해 일으켰다. 형내가 먼저 궤를 지겠다고 나섰다. “아니요. 내 손자 메면 되오.” 형내는 기어이 자기가 지겠다고 나섰다. “그러지 맙소. 만주국까지는 몇 천리도 되겠는데 근형 사돈의 힘은 남겼다가 쓸 일이 많고도 많습니다.” “고맙소.” 최구장은 다시 산 사람과 말하듯이 정중하게 말했다. “아버지, 놀라지 마옵소서. 이젠 정든 고향을 떠나 천천히 만주국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최구장은 아버지가 묻혔던 산소자리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자꾸 되돌아보았다. 근형도 팔소매로 눈물을 쓱쓱 닦으면서 삽을 파묻어둔 자리를 재확인하듯이 자꾸 되돌아보았다. 한 일리나 걸은 후 근형이 형내의 어깨에서 궤를 받아 지고 질척질척한 누런 산길을 걸어 나갔다. 근형이 나무 궤를 메고 신설집 삽작문 안에 들어서자 상철의 처가 중얼거리면서 마중 나왔다. “이 양반들이 신새벽에 나가더니 뭘 메고 들어와? 어머, 간밤에 소낙비가 쏟아지더니 송이버섯을 한 궤나 캐가지고 왔잖아?”        관준은 억이 막혀 입을 딱 벌리고 뒤에 서 있다가 눈을 둑 부릅뜨고 발을 탕 굴렀다. “에이, 상철이 어데서 저런 부실한 후처를 데려왔소? 양해하오. 사돈어른.”        최구장은 그저 한숨만 후 내쉬였다. "원래야 저렇지 않았는데. 그만 일본 놈들 총박죽에 머리를 맞은 후부터 저렇게 부실하게 됐다니까. 우리 가문이 아무리 대대로 명의라  해도 저 며느리 부실한 병을 떼는 약은 없소. 참 답답하오.” 최구장과 관준이 시키는 대로 상철과 형내, 근형은 우방에 고인의 유골을 모시고 아침식사를 했다. 식사 후 관준은 숭늉 물에 양치질을 하더니 이런 말을 꺼냈다. “아무래도 만주국까지는 천리나 되겠는데 어떻게 저 무거운 궤를 지고 가겠소. 상철과 형내를 보고 우리 집 수레에 모시고 두만강 강변까지 바래다드리게 하겠소.” 최구장은 황망히 “감사하오." 하고는 손사래를 쳤다. "우린 일본 놈들에게 쫓기는 몸이오. 어찌 사돈들을 연루시키겠소. 그러지 마오.” 이때 아래 방에서 경학이 형내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형님, 들었지. 형님은 이 소낙비 오는 날에 절대 소 수레를 몰고 나서지 마오. 괜히 일본 놈들의 군도에 목이 뚝 떨어지겠소.” 형내가 경학을 훌 밀어놓았다. “그럼 못써!” 위방에서 그 괘씸한 행동거지를 다 내려다본 관준은 얼굴색이 확 어두워졌다. 그는 마른기침을 몇 번 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에헴, 사돈어른, 저 철없는 애들의 말을 탄하지 마오.” 최구장은 “아니, 건 자연스러운 일이지요. 애들을 탓해 뭘 하겠소?” 하고는 덤덤히 앉아 있었다. 최구장은 엉거주춤 일어났다. “뒤 근심이 나는데다가 갈 길이 멀어서 인차 떠나야겠소.” 관준도 너부죽한 얼굴에 긴장한 빛을 띠웠다. “양. 더 말리지 않겠소. 형내야, 소수레를 메워라. 경학도 함께 가라.” 아래 방에서 경학이 투덜거리자 관준이 더는 참지 못하고 아래 방으로 성큼성큼 내려갔다. “너 이 놈 새끼, 감히 내 말을 거역해? 네놈이 이렇게 부덕하기에 의술을 물려주지 않은 거야. 항상 맏형에게만 의술을 물려주고 자기한텐 목수재간만 배워줬다고 입에 다발을 걸 지경이라도 별수 있어? 사람의 목숨을 구하고 죽이고 하는 의술은 너같이 덕이 없는 놈에게는 물려주었다간 큰 경을 치겠다. 네 오늘 사돈어른의 유골을 두만강변까지 모셔가지 않는 날엔 이 집에 발을 들여놓게 하는가 봐라!” 최구장은 말리었다. “사돈어른, 이러지 마오. 내 더 미안하다니까.” 할아버지 성질을 알만큼 아는 경학은 할 수 없이 투덜거리면서도 수레를 메웠다. “별, 사돈의 부모 유골이지 우리 부모 유골이라데?” 관준은 최구장의 눈치가 보여 더 욕하지 못하고 건 가래만 크게 뗐다. 좌우간 관준의 덕에 최구장은 아버지 유골을 수레에 모시고 비 오는 날에 두만강을 바라고 길을 떠나게 됐다. 최구장은 아침에 수림으로 돌아올 때 나무숲에서 버스럭거리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어 이제껏 속이 불안했다. 순간 웬 늑대가 자기들을 노리면서 살피고 있는 듯한 불길한 예감이 들었던 것이다. 최구장은 숟가락을 놓기 바쁘게 엉거주춤 일어났다. “사돈어른, 실례하기요. 일본 놈들의 개가 도처에서 우리를 노려보고 있소. 우리는 갈 길이 머니까 떠나야 하겠소. 폐를 끼치는바에 주먹밥이라도 좀 주오.” 그러자 관준은 하얀 염소수염을 슬슬 내리쓸면서 양미간을 찌푸리더니 입을 열었다. “최구장, 두만강 강변까지는 오백리길이나 되오. 그러니 아예 저 상철과 형내를 보고 우리 집 수레에 유골을 모시고 가게 하겠소.” 상철도 동을 달았다. “사돈어른, 우리 부자가 수레에 모셔다 드리겠습꾸마.” 최구장은 머리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아니요. 우린 일본 놈들에게 쫓기는 몸들이요. 사돈어른 일가를 연루시킬 순 없소.” 이때 아래 방에서 형내가 선뜻이 나섰다. “스승님, 근심하지 마십시오. 스승님을 위해서라면 오백리 아니라 천리라도 모셔다드려야죠.” “그러오. 이 소낙비 오는 날에 어떻게 유골을 메고 만주국까지 가겠소? 둘째손자 경학도 딸려 보내야 하겠소.” 병관의 말에 최구장은 바늘방석에 앉은 듯이 안절부절 못했다. “아니, 둘째손자까지 보낼 게야 있소?” “철부지애지만 효성이라는 게 뭔가를 알아야 하오. 저놈에겐 최구장의 가르침을 받을 좋은 기회요.” 최구장은 관준의 덕분에 아버지 유골을 수레에 모시고 길을 떠나게 됐다. 상철의 후처가 정지에서 나오더니 주먹밥 한주머니를 수레에 실으면서 투덜거렸다. “송이버섯이랑 많이 캤으면 내놓을게지. 깍쟁이 같은 양반들이 그 채로 싣고 장마당에 가?” 그녀는 얼굴을 들어 상철을 보면서 “여보, 시내 장마당에 가면 생선이나 한 구럭 사오오.”라고 말했다. 상철이가 눈을 흘겼다. “에이유, 저 부실한 여편네를 어쩌겠소. 누가 바로 장마당에 가는가 하오. 쯧쯧.” 그는 뒤에 서 있는 최구장을 돌아다보면서 “사돈어른, 부실한 사람의 말을 탄해 듣지 맙소.” 하고 사과의 말을 했다. 최구장은 그저 묵묵히 서 있다가 바래러 나온 관준에게로 다가갔다. 상철과 형내가 수레를 몰고 앞에서 걷고 경학은 마지못해 느릿느릿 뒤따라갔다. 최구장과 근형은 뒤에서 관준과 인사를 나누었다. “고맙소. 사돈어른, 덕분에 쉽게 두만강까지 가게 되였소.” 관준은 너부죽한 얼굴에 웃음을 지으면서 인사를 받았다. “마땅히 도와야지요. 사돈어른의 효성에 정말 감동을 받았소. 다 남의 일이 아니요. 내야 감사를 드려야 하겠소. 자식들에게 사돈의 훌륭한 본을 잘 보여주게 되여 일거양득이요. 이담 우리도 만주국에 가게 되겠는지 조상들의 산소가 참 근심스럽소. 에이유, 이 놈의 세월에 아무 일도 없이 고향에서 살았으면 얼마나 좋겠소. 그러면 조상들의 산소도 아무 문제없이 고향에 모시겠는데 말이요. 후유-” 관준은 땅이 꺼지게 한숨을 내쉬고 나서 궤 춤에서 동전 한줌 꺼내주었다. “이걸 적은대로 로비로 쓰오.” 최구장은 관준의 손을 굳게 잡고 흔들면서 작별인사를 했다. “사돈어른, 참 고맙소. 여기 고향에서 살기 힘들면 만주국 함흥촌에 오오. 거기서 우리 함께 잘 살아보기요.” 인품이 좋은 관준은 최구장의 손을 놓을 줄 몰랐다. “양, 그때 보기요. 내 삼촌도 함흥촌에 간지 몇 해 되는데 살기 괜찮다고 자꾸 오라고 하오. 내 가보니 함흥촌도 일본 놈들의 포위토벌까지 받았던데 그 놈들의 성화에 어디 마음 놓고 병이나 보면서 살겠는지 모르겠소? 조만간에 우리도 만주국에 들어가야 할 것 같소. 허나 근심은 태산 같소.” 이쯤 하고 그는 화제를 돌렸다. “우리 애들은 일본 놈들에게 괜찮으니까 수레를 몰고 큰길로 가고 사돈네는 썩 떨어져서 가든지 위험한 시내를 지날 때는 피해 가오. 아픈 머리를 치료도 하지 못하고 떠나가는구먼.” 최구장도 관준의 손을 으스러지게 잡고 흔들었다. “이렇게 갈라지면 언제 또 만나겠소?” 최구장과 관준은 오래도록 손을 잡고 흔들면서 뜨거운 눈물을 흘리면서 작별했다. 최구장이 허연 팔소매로 눈물을 훔치면서 몸을 돌려 형내가 모는 수레 쪽으로 비칠비칠 걸어갔다. 앞에서 경학이가 하는 신경질적인 말소리가 최구장의 귀전을 아프게 때렸다. “에이 씨, 사돈영감네 뼈다귀가 무슨 그리 대단해다고 이렇게 흐린 날에 우리를 보고 실어가라는 게야?” “닥치지 못해?! 이놈 새끼, 다시 개 주둥이를 놀리기만 해봐라. 가만 놔두지 않겠다.” 형내가 경학을 욕하면서 뒤를 힐끔 돌아다보았다. 최구장은 못들은 척 하면서 머리를 숙이고 한숨을 땅이 꺼지게 쉬면서 질척질척한 길을 터벅터벅 걸었다. 그들이 마을에서 한 이리쯤 떨어진 산기슭에 이르렀을 때였다. 갑자기 마을 쪽에서 개들이 짖는 소리가 요란스럽게 들려왔다. 상철은 황급히 최구장의 팔을 잡아끌었다. “사돈어른, 빨리 산에 올라가 피합소. 일본 놈들이 쫓아오는 것 같습구마.” 최구장은 마을 쪽을 돌아다볼 뿐 발에 뿌리라도 내린 듯이 뜰 념을 하지도 않았다. “빨리 피합소! 스승님!” 형내도 옆에서 발을 동동 구르면서 재촉했다. 그러나 최구장은 개의치 않는 표정이었다. “피하려면 다 함께 피하기요. 나만 도망가고 사돈네를 욕보게 해서야 되오? 연루시킨 것만 해도 죄송스러운데.” 그러자 형내는 스승 최구장을 마구 끌고 산기슭으로 가면서 말했다. “스승님과 저 사돈만 피하면 일본 놈들은 전과가 없는 우리 집 식구들과는 어쩌지 않을 겁니다. 어서 피하십시오.” 그 말에 도리가 있는지라 최구장은 근형과 함께 산기슭으로 올라가 수림 속으로 안개처럼 사라져버렸다. 경학은 옆에서 또 투덜거렸다. “괜히 사돈네 유골로 해서 우리가 봉변을 당하게 되였구나.” 형내가 눈알을 부라렸다. “주둥이를 다물어. 자칫 목이 날아나.” 가메다란 헌병 놈이 말을 타고 영팔이 등 대여섯 명의 개다리를 끌고 덮쳐왔다. 가메다 놈은 별스럽게 입귀 오른쪽으로 하여 노란 털 한 모숨이 자랐다. “이 놈들아, 그 궤짝 안의 건 뭐냐?” 가메다가 채찍으로 궤를 가리키면서 건방지게 물었다. “조상의 유골입니다.” 형내 말에 가메다는 영팔에게로 낯을 돌렸다. “나니까?(뭐야?) 유격대에 쌀을 실어가는 건 아냐?!” “유골이라는뎁쇼.” 영팔의 말에 가메다는 의아해 하더니 을러멨다. “유골을 실어가서 뭘 해? 들춰 봐!” 영팔이 팔을 홱 젓자 개다리들이 말 잔등에서 뛰어내려 우르르 수레에 뛰어올라가 궤짝을 활 열어 재꼈다. 삐꺼덕! 흐리멍덩한 하늘아래 산기슭에서 비명소리와 같은 삐꺼덕 궤를 여는 소리가 울렸다. “에크!” 졸개들은 궤짝안의 유골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 놈들은 우르르 수레에서 뛰어내렸다. “진짜 유골입니다. 유골!” 영팔과 졸개들의 말을 듣고서도 가메다는 믿어지지 않았던지 자기 눈으로 궤짝 안을 들여다보았다. “유골 옆에 놓은 저 주머니 건 뭐냐?” “쌀밥입니다.” “쌀밥? 너희들 셋이서 저렇게 많은 쌀밥을 처먹어? 혹시 유격대에 실어가는 건 아냐?” “멀리 가야기에 푼푼히 가져 왔소.”         가메다는 하얀 수갑을 낀 왼손으로 코를 싸쥐고 궤짝 덮개를 닫으라고 오른손으로 손시늉을 했다. 한 졸개가 궤짝덮개를 쾅 닫아버렸다. 최구장과 근형은 산 아래에서 벌어지는 광경을 내려다보다가 한숨을 후- 내쉬었다. 이젠 떠나가려니 한 가메다는 말을 탄 채 수레 주위를 빙빙 돌면서 요것조것 따지고 들었다. “조선 사람들은 왜 죽은 사람의 유골을 파가지고 다니는가?” 일본 말을 배운 형내가 나섰다. “우리 조선 사람들은 효성이 지극해서 돌아가신 조상들을 더 좋은 곳에 모시려고 면례합지비.” 형내의 유창한 일어대화를 듣고 가메다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면서 계속 지껄여댔다. “넌 우리 대일본제국 말을 참 잘하는구나. 황군의 양민이 돼야 살아남을 수 있어. 이실직고해라. 최구장과 손자 놈이 운주동 산소에서 해골을 파가지고 너희들 집에 간적이 있다고 밀고 들어왔어. 우린 다 알고 따라왔어. 어서 말해! 최구장과 손자 놈이 어디로 갔어?” 상철은 겁에 질려 부들부들 떨었다. 그러나 형내만은 아주 태연자약하게 일어로 대꾸했다. “우린 최구장을 본 적도 없습니다. 이 유골은 우리 노할아버지 유골입니다. 혹시 새벽에 우리가 간걸 누가 잘못 보고 고발한 게나 아닌지요?” 가메다는 형내의 너부죽한 얼굴과 예지로 빛나는 까만 쌍가풀 눈을 뚫어지게 쏘아보았다. “교할한 놈, 헌병대에 끌려가 죽겠냐? 실토정하지 않겠어?” 이때 경학이 겁을 집어먹고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려고 했다. “황군, 사실, 저…?” 가메다는 인차 털 한 모숨을 만지작거리면서 교활한 눈길을 경학의 새파랗게 질린 낯에 돌렸다. “이실직고해. 너만은 살려줄게. 최구장이랑 어데 갔어?” 형내가 주먹을 으스러지게 쥐고 부르르 떨면서 경학을 무서운 눈길로 쏘아보았다. “사실 우리는 그들이, 그들이 어데 갔는지 모, 모릅구마.” 가메다 놈은 채찍을 들어 경학의 어깨를 짱짱 내리쳤다. “앗!” 경학은 두 손을 들어 날아오는 채찍을 막으면서 비명을 질렀다. “말햇! 말하잖으면 온 집 안 몽땅 몰살이야! 알았소까?!” 영팔이 옆에서 섬나라 오랑캐처럼 고래고래 고함쳤다. 졸개들이 우르르 덮쳐들어 상철과 형내, 경학을 질척질척한 길바닥에 꿇어앉히고 포승으로 뒷결박을 지었다. 거메다는 군도를 뽑아들고 당장 목을 내리칠 상을 하면서 호통 쳤다. “당장 말해! 최구장과 그 아들놈 경인이, 그 놈들은 우리 황군을 살해하고 도망쳤다. 운주동 구장 응삼도 죽였어. 대지 않으면 당장 죽여치우겠다.” 쉭! 쉭! 이때 난데없는 돌멩이가 날아와 면바로 가메다의 대가리를 깠다. “앗!” 가메다 놈은 대갈통을 싸쥐고 말 잔등에 쓰러지면서 비명을 질렀다. “돌멩이 유격대!” 가메다는 말 배때기를 탁 찼다. 그 놈은 말 잔등에 낯을 딱 붙이고 선불 맞은 노루처럼 꼬리 빳빳해 도망쳤다. 당황해난 영팔이 등 졸개들도 상철이네 삼부자를 놓고 말 잔등에 뛰어올라 줄행랑을 놓았다. “네놈들이 어디로 도망쳐?! 어디 죽어봐라!” 형내가 산쪽을 올려다보니 근형이가 수림 속에서 돌멩이를 뿌리면서 고함치고 있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유격대가 왔는가고 도망치기 시작하여싿.     바줄만 봐도 뱀인가 한다고   유격대애 혼 줄이 난 적 있는 가메다와 영팔 등은 이젠 돌멩이가 날아와도 돌멩이를 잘 뿌리기로 소문난 장백산 유격대인가고 겁을 집어먹고 도망쳤던 것이다. 하긴 일본 놈들은 명천에서뿐만아니라 만주 함흥촌에서도 여러차례 돌멩이를 뿌리는 유격대한테 혼났으니까. 놈들이 도망치자 이윽고 최구장과 근형이가 산에서 황급히 뛰어내려왔다. “놀랐겠소. 사돈, 이젠 돌아가오. 괜히 우리 일로 해 고생하겠소.” 최구장은 상철을 결박한 바줄을 풀어주면서 권고했다. 상철은 한숨만 땅이 꺼지게 내쉬었다. 형내가 대수롭잖게 말했다. “우리 잘못이 뭐입둥? 스승님, 근심 말고 령 길을 타고 가십시오. 우리가 꼭 궤를 두만강 변에까지 모셔다드리겠습니다.” 경학은 결박당했던 팔을 어루만지며 아버지와 최구장의 눈치를 힐끔힐끔 보면서 슬금슬금 마을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몇 발자국 모로 걸어간 그는 투덜거렸다. “형님이나 실어가라지. 난 몰라. 괜히 그 유골 때문에 일본 놈들의 손에 죽겠어.” 최구장은 뒤걸음 질 치다가 줄달음질쳐 달아나기 시작하는 경학의 등 뒤에 대고 소리쳤다. “작은사돈! 집에 가면 관준 어른께 자초지종을 알리오.” 경학은 들었는지 마는지 걸음아 날 살리라고 달아났다. 그들의 뒤로 무형의 공포가 서리서리 휩싸고 있었다.  
65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44) 댓글:  조회:2255  추천:0  2016-06-17
               9. “무죄석방”         하늘도 울고 산도 몸부림치고 들판도 흐느낀다. 근형은 어릴 때 동갑인 막내고모와 함께 기운봉에 가서 돌 버섯을 캐던 일로, 함께 놀던 일이 눈물 흐르는 눈앞에 삼삼히 떠올랐다. (오늘 오전에만 해도 살구를 먹겠다고 살구나무 우에 올라가 바가지에 살구를 뜯어가지고 내려오던 막내고모, 그 막내고모가 큰물에 세상을 떠나다니?) 그는 최구장을 따라 가마골 앞산에 올라 걸으면서도 자꾸 손등으로 눈시울을 적시는 뜨거운 피눈물을 훔치었다. 뒤이어 그는 피뜩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할아버지 쪽으로 몸을 돌렸다. “할아버지, 이대로 저 산 아래 보이는 운주동엔 갈 거 같지 못합구마. 내 여기로 오는데 운주동 개울가 버드나무숲 속에서 개를 만났습니다.” 최구장은 이상하다는 듯이 눈을 치켜뜨더니 “개라니? 사냥개보다도 일본 놈의 개가 더 무섭지.” 하고 두덜거리었다. “내 뒤를 밟는 거 보니 일본 놈의 개가 틀림없습구마. 집에 갔다간 영락없이 붙잡힐 겁니다.” 장손의 말에 최구장은 손으로 나무를 잡고 몸을 의지하더니 아무것도 개의치 않았다. “붙잡겠으면 붙잡으라지. 딸을 앞세우고 살아서 뭘 하겠나? 내 이젠 칠순이 넘었으니 살만큼 다 살았어. 집에 가 볼테니 넌 저 고모부랑 함께 먼저 만주로 들어가라. 나도 처리할 걸 다 처리하고 인차 들어갈게.” 최구장은 노친을 데리고 곧추 운주동쪽으로 발길을 돌려 산 아래로 성큼성큼 걸어 내려갔다. 근형은 따라 가면서 계속 위험하다고 말리었지만 최구장은 대수로워 하지도 않았다. “저 노친이랑 계순이랑 무슨 죄가 있단 말이냐? 제 고향의 버섯을 뜯어먹어도 죄란 말이냐? 고향의 버섯도 몽땅 날강도 같은 일본 놈들의 거라더냐?” 근형은 별수 없이 할아버지를 따라 운주동으로 떠나기로 했다. 야마다 면장 놈을 죽인 형만과 석수 그리고 용기는 그럴 수가 없었다. “그럼 가시아버지, 인사를 드리고 떠나가겠습구마.” 형만은 진창에 털썩 꿇어앉아 최구장과 순금에게 절을 올리고 둥실한 어깨를 들썩이면서 흑흑 흐느껴 울었다. 최구장은 두 손으로 사위를 부축해 품에 끌어안고 잔등을 치면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허리가 꼬부장한 순금이도 사위가 불쌍해 빗물과 눈물이 줄줄 흐르는 얼굴을 매 만졌다. “자네들이 잘 사는 걸 보자 했는데 이게 웬 일이요? 죽은 사람이야 어쩌겠소. 빨리 만주에 들어가오. 일본 놈들에게 붙잡히면 죽고 마오.” 형만은 손등으로 눈물을 쓱 닦더니 떨어지지 않는 걸음으로 령 길을 타고 북으로 떠나갔다. 그는 떠나가면서도 자꾸 산 아래로 내려가는 최구장과 저 가마골 중턱에 누워있는 계순과 흥기의 봉분을 번갈아 보았다. 그의 눈길을 따라 한 가닥의 피눈물과 슬픔이 줄줄 흘러내렸다. 최구장네는 두려울 것 없이 비바람을 무릅쓰고 운주동의 집으로 돌아왔다. 뭉청 끊어진 창살과 펑 구멍 뚫린 창호지, 여기저기 박산 나 나뒹구는 오지동이, 고리짝을 보면서 최구장은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었다. 순금은 깨진 물독을 매만지면서 주름살이 죽죽 간 눈시울에 눈물을 줄줄 흘리었다. 근형은 부랴부랴 뒤울안에 가서 사닥다리를 가져다 중천정구멍에 대놓았다. “여보, 내려오오.” 중천정 위에서 신음소리에 가까운 새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예, 내려가겠소.” 이윽고 중 천정 구멍이 열리더니 새단의 얼굴이 보이었다. 뒤이어 치마에 둘린 가는 다리가 사닥다리 위에 조심스레 내려왔다. 새단은 근형을 따라 방에 나와 최구장과 성단을 보고 문안인사를 했다. “할아버지, 할머니, 무사히 왔습둥?” 최구장은 손비를 보고 “응, 너희들이 무사한 것만 해도 다행이야.” 하고 인사를 받았다. 새단은 근형과 함께 깨진 물독을 주어치우고 가마를 부시었다. 그런데 순금이 어디 불편한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있었다. 이때 갑자기 어두워지는 바깥에서 말발굽소리가 요란하고 말 호용 소리가 들렸다. 근형이 바깥을 내다보고 새된 소리를 질렀다. “왜놈들이 왔습구마. 할아버지, 할머니 천정에 어서 피신합소.” 새단은 비명소리를 지르면서 고방 쪽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최구장은 까딱하지 않고 타리대를 치고 편안히 앉아 있었다. “죽이겠으면 죽이라지. 우리 무슨 죄가 있대?” 근형은 황급히 할아버지를 부축하여 일으켜 고방 쪽으로 모셔가려고 했다. 최구장은 근형의 팔을 뿌리치면서 고함쳤다. “이걸 놔! 난 안 달아나. 여기서 저 놈들이 어쩌나 꼬락서니를 보겠어.” 이때 구멍이 펑 뚫린 문구멍에 숱한 꺼먼 그림자들이 언뜰거리었다. 드디어 다 찌그러진 문이 벌컥 열렸다. “참 좋아, 네 놈들이 몽땅 여기 있었구나.” 응삼이 졸개들을 데리고 뛰어 들어왔다. 근형은 새단의 손목을 잡고 고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들은 고방 문을 박차고 뒤울안으로 달아났다. 근형은 울바자 밑에 가서 울바자에 매달려 바둑거리는 새단을 받쳐 들어 나무울바자 밖에 내보내려고 했다. 그러나 울바자가 높아 인차 들어 올려 내보내지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새단의 허벅지에서 거무스름한 피가 주르르 흘러내렸다. 새단이 이를 옥물더니 상을 찡그리면서 신음소리를 냈다. 근형은 새단의 엉덩이를 나무바자우로 떠밀었다. 이때 응삼의 무리가 고방 문을 쾅 박차고 뛰어들 나왔다. 근형은 더 지체할 수 없어 나무울바자를 화닥닥 기어 올라가 뛰어 넘어갔다. 그는 울바자 밖에서 나무 사이로 피 흘러내리는 새단의 다리를 쥐여 우로 춰 올렸다. “어디로 달아나! 이년!” 울바자 안에서는 응삼이 울바자를 거의 넘는 새단의 종아리를 쥐여 아래로 당기면서 을러멨다. 새단은 통곡치면서 울바자를 틀어쥔 손을 놓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녀는 악착스레 두 다리를 바둑거리었다. 그러나 마수를 벗어나지 못하고 퉁 땅바닥에 떨어지었다. 졸개 한 놈이 근형의 손을 칼로 찍어댔다. 다른 놈은 새단의 뒷다리를 마구 끌어내리어 집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여보!” 근형은 손을 뻗치며 고함쳤다. 졸개 몇이 울바자에 기어 올라갔다. 그러나 근형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비바람 속에 나무들이 몸부림칠 뿐이었다. 소낙비가 억수로 퍼붓자 응삼과 졸개들은 더 쫓고 싶은 생각이 없어졌다. 한길수와 야마모도 소장 놈이 살기등등해 졸개들을 데리고 들어왔을 때 집안에는 최구장과 성단 밖에 없었다. 야마모도 소장은 손을 홱 휘둘렀다. “젠부 다바네(몽땅 묶엇)!” 영팔 등이 우르르 덮쳐왔다. 성단이 비명을 쳤다. 최구장이 안간힘을 다하여 고함치면서 팔을 뿌리쳤다. “닥쳐라! 우리 무슨 죄 있다고 이러는 거냐?!” 응삼이 개를 잡은 포수처럼 우쭐거리었다. “황군을 칼로 찍어 죽인 죄를 모르는가?” 수길과 림호가 졸개들과 함께 최구장과 성단을 묶었다. 야마모도 소장은 근형과 형만을 놓쳐서 속이 내려가지 않았다. 하지만 늙은 최구장 양주와 손비를 붙잡았으니 분풀이를 할 데 있어 좋았다. 야마모도 소장과 한길수 등은 최구장 양주를 말 뒤에 매 끌고 곧추 상우남면 사무소 옆에 있는 일본 파출소로 돌아갔다. 파출소안에 들어서자 끼무라 국장이 사무상 정면에 코 수염을 잔뜩 살리고 콩 알 눈깔을 부릅뜨고 살기등등해 앉아 있었다. 그의 옆에는 일본 놈들을 그림자처럼 붙어 다니는 통역 류강철이 서있었고 그 앞에는 좌우로 스까다 이찌분로 경찰과 개다리경찰 등이 죽 늘어서있었다. 야마모도 소장은 끼무라 국장에게 뭐라고 일본 말로 지껄여댔다. 끼무라 국장은 코 수염을 쓱 만지더니 머리를 끄덕이었다. 한참 후에야 그는 비에 후줄근히 젖은 최구장을 쏘아보면서 호통쳤다. “영감, 타고난 이름이 구장이라. 구장에서 떨어졌다고 대일본제국에 불만이 있는 거지? 맞지?” 강철이 통역해 주어도 최구장은 끼무라 국장놈을 쓴 외 보듯 하면서 머리를 조금도 숙이지 않았다. 끼모라 국장은 의자에서 몸을 앞으로 기울이면서 음흉한 눈길로 최구장 네를 쏘아보았다. “이에(말해)! 네 놈의 막내사위 형만이 어데 갔소까? 석수, 용기 어데 갔소까?” 최구장은 목석처럼 서서 입에 빗장을 지른채 끄덕하지 않았다. “이찌분로, 히도꾸 다다께(호되게 족쳣)!” “하잇(옛)!” 이찌분로는 다짜고짜 덮쳐와 몽둥이로 최구장의 잔등을 땅 내리쳤다. 칠순이 넘는 최구장은 “억!” 비명소리와 함께 걸상에서 푹 꼬꾸라져 땅바닥에 맥없이 쓰러졌다. 성단이 묶인채 비명소리를 지르면서 영감 쪽으로 다가왔다. “우리 영감이 뭘 잘못했다고 이렇게 치느냐?” 새단도 “할아버지!” 하며 다가왔다. 새단은 최구장이 입귀로 피를 흘리자 닦아주고 싶었지만 두 손을 뒤로 묶이어 용빼는 수가 없었다. 야마모도는 성단의 가슴을 발길로 걷어차 넘기었다. “이년아, 여기가 어디라고 함부로 고함쳐? 네년이 우리 대일본제국의 버섯과 딸기를 뜯어먹고서도 죄를 승인하지 않아?” 순금은 가슴을 부둥켜안고 너무 억이 막혀 “내 고향의 버섯을 뜯어먹어도 죈가?” 라고 대들었다. 열이 부쩍 오른 한길수는 채찍으로 성단의 얼굴이고 목이고 사정없이 내리치며 고함쳤다. “이년아, 지금 이 곳이 어데 옛날 조선 땅인가 하니? 이젠 대일본제국의 땅이 됐단 말이야. 대일본제국의 버섯을 도적질해 먹고서도 계속 악다구니질 할 테냐?” 한길수는 상전들에게 잘 보이려고 채찍으로 성단의 잔등을 사정없이 내리쳤다. 그 호된 채찍질에 순금의 베적삼이 째지면서 핏자국이 나는 잔등이 드러났다. 성단은 비명소리를 지르면서 땅바닥에 쓰러졌다. 새단은 새된 소리를 지르며 자기 몸으로 시어머니에게 날아드는 채찍을 막았다. 한길수의 채찍질에 베저고리가 째지면서 새단의 하얀 잔등이 드러났다. 음흉한 눈길로 까만 무명치마 밑으로 드러난 성단의 피에 젖은 하얀 허벅다리를 본 끼무라 국장 놈이 하얀 장갑을 낀 손을 척 쳐들었다. “가만! 그 년이 정말 예쁘구먼. 하하하.” 끼무라 국장 놈은 의자에서 일어나 성단의 옆으로 다가왔다. 성단은 겁기어린 눈으로 끼무라를 쏘아보면서 엉덩이 걸음으로 뒤로 비실비실 물러앉았다. “어우, 혼또니 우쯔꾸씨이네(정말 예쁘네).” 끼무라 국장 놈은 장갑을 벗고 손으로 새단의 턱을 고이더니 야수의 눈빛이 번쩍이는 사발눈깔을 희번뜩거리며 새단의 얼굴을 쏘아보았다. “히히, 난 조선에서 이처럼 예쁘고 순수한 색시를 처음 봐.” 끼무라 국장 놈이 히죽거리면서 수작을 하였다. 색마 한길수는 옆에서 새단의 피 묻은 허벅지와 가슴을 노려보면서 괜히 닭 알 침을 꼴깍 넘기었다. 야마모도 소장은 끼무라와 한길수를 번갈아 보다가 채찍으로 사무 상을 짱 쳤다. “끼무라 국장! 난 형님의 원수도 갚지 못했는데 이게 뭔가? 심문은 하지 않고 히히거리다니?" 이찌로 경찰도 맞장구를 쳤다. "무슨 심문? 아예 한 칼에 한 놈씩 칼 탕을 쳐버리면 다지?” 그제야 끼무라는 창피해 한숨을 후 내쉬면서 엉거주춤 일어나 사무 상 앞으로 되돌아갔다. “야마모도 소장, 범인을 심문하는 건 우리 파출소에서 할 일이지 당신 임산파출소와는 상관없네. 당신은 가서 삼림이나 잘 지키게. 내가 어련히 이 범인들을 심문해 당신 형을 죽인 형만을 잡아올게. 당신에게 칼을 휘두른 그 이름 모를 그 놈도 다 잡아오지 않으리라고 그래?” 야마모도는 벌컥 성을 냈다. “나와 한길수가 비바람을 무릅쓰고 저 연놈들을 잡았으니 그렇지. 자네들은 쥐 새끼처럼 비를 피해 집안에 떡 들어앉아있기나 했지. 언제 잡을 궁리나 했는가?” 끼무라는 어이없다는 듯이 “아하, 야마다 소장, 말이 너무 지나치지 않은가? 상전을 보고. 쯧쯧.” 이때 입에서 피를 흘리면서 쓰러졌던 최구장이 천천히 정신을 차리면서 일어나 땅바닥에 앉았다. “그래, 이 영감두상이 어디 얼마나 질긴가 보자.” 끼무라는 책상을 땅 치면서 위엄을 돋우어 소리쳤다. “최 두상! 거기 걸상에 앉게. 거 당신네 집에 온 그 스무살 푼한 자는 누군가?” “난 몰라. 지나가던 길손이겠지.” 그제야 최구장이 입의 빗장을 뽑더니 입귀의 피를 손바닥으로 쓱 닦았다. “그래, 이제야 입을 여는구먼. 저런 나약한 선비 놈에게는 매가 제일이야. 생떼를 쓰지 말고 어서 말해! 그렇잖으면 당신의 손비를 부하들에게 줘 버릴 줄 알라!” 최구장은 똑바로 앉더니 끼무라를 증오에 찬 눈길로 쏘아보면서 욕설을 퍼부었다. “죽이겠으면 나를 죽일게지 내 손비를 욕보이지 말라! 머리카락 하나 까딱 다쳐 봐. 내 죽어서라도 악귀로 돼 네놈들을 물어뜯어 황천에 보내 줄거야.” 성이 꼭뒤까지 치밀어 오른 끼무라 소장은 군도를 쓱 뽑아들었다. 옆에서 통역하던 강철이 끼무라를 말리면서 귀에 대고 일본 말로 뭐라고 지껄였다. 그러자 끼무라는 “요로씨이. 요로씨이.” 하고 연신 머리를 끄덕였다. 옆에서 구경하던 실 돌피 같은 응삼이 끼무라에게 귀속 말로 “어째 거 보지 못했던 길손이 어데서 딱 본 것 같다니까. 아, 옳지, 거 세 귀 눈이랑 주먹코랑 생김새가 영월동에 있던 병완 영감이나 기준이란 놈처럼 생겼단 말이야.”라고 했다. 그 소리에 끼무라는 뭐가 집히는 데가 있었던지 교활한 눈길로 최구장을 쏘아보더니 능구렁이처럼 지껄였다. “최 영감, 당신이야 직접적인 죄가 없어. 난 영감을 풀어주겠네. 그 길손이 다시 오면 우리 파출소에 알리게. 다시 숨겨놓으면 안 돼.” 최구장은 응삼이 일본 말로 끼무라에게 뭐라고 하였는지 알아듣지 못했다. 그는 피투성이로 된 노친과 손비를 돌아보면서 “가기요.”라고 말하고 걸상에서 일어났다. 야마모도는 최구장 네를 가지 못하게 두 팔을 벌려 막으면서 일본말로 야단쳤다. “우리가 저 비바람을 무릅쓰고 어떻게 잡아 왔다구 놓아줘? 안 되오. 이 놈들을 내놓아서는 안 되오.” 그러자 끼무라 국장은 실망스럽다는 듯이 도리머리 질 했다. 뒤이어 그도 일본말로 지껄였다. “야마모도 소장은 하나만 알았지 둘은 몰라. 저 놈들을 고와서 내 놓는 거 같은가. 큰 그물을 넓게 쳐서 큰 고기를 낚자는 게요. 저 비틀거리는 늙은 영감태기나 노친이나 나약한 아녀자를 붙잡아 둬 무슨 소용 있어? 관건은 형만과 그 길손인지 하는 자를 잡는 거야.” 야마모도는 더 할 말이 없었다. 형사범죄자를 다스리는 권리는 끼무라 국장에게 있으니까 말이다. 그리하여 최구장과 성단은 하신에서 피를 줄줄 흘리는 새단을 데리고 파출소 밖으로 비칠거리면서 간신히 걸어 나왔다. 그들은 휘몰아치는 비바람도 무릅쓰고 어두운 밤에 주린 배를 달래면서 비칠비칠 집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들의 뒤로 보이지 않는 그물, 그리고 섬나라 오랑캐들의 감시의 눈길, 생사고비를 넘나드는 공포가 엄습하고 있었다.                              10.야습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 새단은 시조부모를 양팔로 부축해 모시고 비바람을 무릅쓰고 질척질척한 진창길로 비틀거리며 걸었다. 운주동 동쪽 산모퉁이를 돌아 걸을 때다. 산마루에서 번개가 번쩍 하더니 우르르 꽝꽝 천둥소리가 울렸다. 바람이 휙- 소용돌이치자 주먹 같은 비방울이 빗발치듯 쏟아져 기름종이우산도 들지 못한 가여운 세 사람의 몸을 덮쳤다. 그들 셋은 그래도 정신을 가다듬고 비칠거리면서 한사코 마을 쪽으로 걸어갔다. 그들이 이제 거의 운주동 마을 어귀에 들어설 때 웬 일인지 억수로 퍼붓던 소낙비기 둑 끊었다. 갑자기 앞에서 웬 검은 그림자들이 마주 오는 것 같았다. 뒤에서도 말발굽 소리가 급촉하게 들리더니 전지불이 이쪽을 어지러이 비추며 덮쳐왔다. 앞의 검은 그림자들은 인차 길옆 수풀 속에 쓸어 들어갔다. 그들 셋은 머리끼 곤두설 지경이었으나 조심스레 버스럭거리는 수풀 곁을 지나갔다. 이때 뒤에서 말발굽 소리가 더욱 요란스럽게 들려왔고 전지불이 환하게 비추면서 가까이 다가왔다. “서라!” 뒤에서 한 무리 검은 그림자들이 말을 타고 달려왔다. “최구장, 어디로 가?!”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 전지불이 쭉 이쪽을 비춘다. 순간 비를 흠뻑 맞은 최구장 양주와 새단이 비틀거리면서 겨우 몸을 지탱하며 주춤 멈춰 섰다. 한길수가 졸개들을 데리고 덮쳐왔던 것이다. “우릴 더 못 살게 굴지 말고 죽이겠으면 어서 죽여라.” 어둠속 에서 한길수가 지껄여댔다. “끼무라 국장은 네 놈을 놔주지만 우리 야마모도 소장님은 절대 놔두지 못해.” 한길수의 옆에서 실 돌피 같은 응삼이 손을 홱 휘둘렀다. “저 놈들을 당장 묶어라!” 최구장은 어둠 속에서 그자를 손가락질하면서 욕했다. “응삼이, 자넨 내 제자건만 왜 왜놈들의 개다리로 돼 이다지도 못살게 구는가?” 그러자 응삼은 “날 나무라지 마쇼. 황군을 죽인 죄인의 가시아버지니까. 나도 별수 없습구마.”라고 지껄였다. “잔말 말고 어서 묶어!” 한길수가 재차 나무숲이 떠나갈듯이 을러메자 검은 그림자들이 말에서 뛰어내려 최구장에게 바 줄을 들고 욱 덮쳐들었다. 쉭! 딱! 쉭! 쉭! 딱! 딱! “앗!” “아이쿠!” 숲속에서 날아온 돌멩이에 먼저 응삼이 대갈통을 붙잡고 비명을 질렀다. 뒤이어 연신 대여섯 놈이 삼대 쓰러지듯이 꼬꾸라졌다. 뒤이어 돌멩이가 날아와 말을 탄 한길수의 이마빼기에 딱 맞았다. “아이쿠!” “웬 놈들이야?” 숲속을 전지불로 비추었다. 그러자 숲속에서 복면한 사람들이 방망이며 검이며 몽둥이를 들고 뛰쳐나왔다. “이 놈들아, 칼을 받아라!” “죽여라!” 한길수와 야마모도는 황급히 허리춤에서 권총을 꺼내 괴한들을 겨누었다. 딱! 딱! 한길수와 야마모도는 돌멩이에 손목을 맞고 권총마저 떨어뜨렸다. “이크!" "웬 놈들?” 겁을 집어먹은 야마모도와 한길수는 날 살려라고 말 배때기를 두 발로 차더니 꼬리 빳빳해 달아났다. 응삼과 졸개들은 최구장 네를 놓고 말을 탈 새 없이 다리야 날 살리라고 도망쳤다. 이때 웬 사내가 말에 훌쩍 뛰어 올라 검을 휘두르면서 뒤쫓아갔다. 다른 한 그림자도 말에 뛰어올라 쫓아가면서 소리쳤다. “오빠, 쫓지 말아요!” 앞에서 쫓던 오빠란 사람은 계속 뒤쫓아 갔다. 그는 전지 불을 쥐고 달리는 응삼을 쫓아가 검을 번쩍 휘둘렀다. “어이쿠!” 비명소리와 함께 응삼이 어깨에 칼을 맞고 썩박나무 넘어가듯이 쿵 떨어져 쓰러졌다. 전지불이 질척한 땅바닥에 떨어지면서 앞에서 달려가는 한길수가와 야마모도 등뒤를 비췄다. 복면괴한이 말을 타고 쏜살같이 뒤쫓아 갔다. 검이 휙 소리와 함께 번쩍했다. “앗!” 한길수가 비명소리와 함께 팔을 붙잡고 말 잔등에 납작 엎드려 도망쳤다. 괴한은 검을 휘두르면서 야마모도에게 덮쳐들었다. 야마모도는 뜻밖에도 말머리를 돌리더니 시퍼런 군도를 빼들었다. 괴한은 검으로 야마모도의 목을 내리 찍었다. 검이 내려오다가 야마모도의 칼날에 맞아 불꽃을 튕겼다. 괴한의 검이 재차 날아 내려오는 척 하더니 독사처럼 야마모도의 눈깔을 팍 찔렀다. 비명소리와 함께 야마모도는 눈깔을 싸쥐고 군도를 발악적으로 휘둘렀다. 괴한은 날아오는 군도를 검으로 비켜치우고 야마모도의 목을 찔렀다. 야마모도는 목을 틀어 검을 피하더니 말을 놓아 꼬리 빳빳해 도망쳤다. 뒤에서 웬 여자가 말을 타고 달려오면서 돌멩이를 날렸다. “앗!” 야마모도는 눈깔을 붙들었던 왼손으로 뒤통수를 싸쥐고 말 잔등에 납작 엎드려 꼬리 빳빳해 도망쳤다. 졸개들은 몽둥이고 칼이고 버린 채 숲속으로 도망쳤다. 그러나 숲속에서 복면한 괴한들과 부딪쳐 난투를 벌리다가 죽은 놈은 죽고 몇몇 놈만이 간신히 살아 면사모소 쪽으로 달아났다. “오빠, 더 쫓지 말아요!” “알았어. 진달래야, 빨리 큰아버지를 말에 모시고 이 자리를 뜨자.” “알았어요.” 그들이 말머리를 돌려 돌아올 때였다. 앞에서 한 괴한이 응삼의 손에서 전지 불을 빼앗아 비추었다. 괴한은 진창에 쓰러져 신음소리를 내고 있는 응삼의 목덜미를 틀어쥐더니 시퍼런 칼을 목에 들이대는 것이었다. “이 놈아, 네 놈이 응삼이란 개다리 놈이겠구나.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잘 만났어. 우리 일가를 제 고향에서 못살게 굴더니 내 손에 죽어봐라.” 응삼은 검에 찍힌 팔을 붙잡고 기어일어나 앉으면서 애걸복걸했다. “장수님, 누군지 제발 살려주오.” “옳아, 죽어도 알고 죽어라. 난 네놈들이 못살게 굴어 일곱 살에 만주로 쫓겨 간 상순이야. 네 놈들이 우리 조손 삼대를 얼마나 못살게 굴었냐? 다 알았지? 에이, 죽어라.” 상순이 칼로 응삼의 가슴을 찌르려는 순간 최구장이 말리였다. “이보게, 상순이, 그자를 살려주게. 내 제자니까.” 그러나 그 말을 들을 상순이 아니었다. 그는 칼로 응삼의 가슴이고 낯이고 마구 찍으면서 고함쳤다. “이 놈이 어디 가시할아버지를 선생으로 알아줍디까? 이 놈 개다리하구 길수가란 놈의 성화에 못 이겨 우리 온 집 조손 3대가 고향에서 못살고 풍설이 이는 날에 만주로 갔댔습니다. 오늘 원수를 갚겠습구마.” 근형도 달려왔다. “에이, 이 일본 놈의 개다리야, 어디 죽어봐라!” 그는 고함치면서 몽둥이로 응삼의 대가리를 땅땅 내리쳐놓고도 성차지 않아 마구 차놓았다. 응삼은 피 못이 낭자하게 된 채 네 각을 쭉 뻗었다. 그는 비바람 속에서 상순의 칼을 열네 차나 맞고 일본 놈의 개다리 구장을 하던 더러운 일생을 끝장보고 말았다. “놈들이 되 쫓아오기 전에 이곳을 떠나야 하오.” 한 괴한이 소리치자 진달래와 괴한들은 졸개들이 버리고 달아난 말에 최구장 양주와 새단을 태우고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금방 검을 휘두르면서 끼무라와 한길수를 쫓아가던 괴한은 경인이었고 돌팔매질을 한 여자는 최구장의 동생 최구철의 딸 진달래였다. 그리고 한패의 괴한들은 진달래가 백두산에서 데리고 내려온 항일유격대 대원들이였다. 원래 낮에 형만은 지친 몸을 끌고 먼저 불붙이에 있는 처남인 경인이네 집으로 찾아 갔다. 그곳에서 상순과 명옥이 그리고 죽순도 만났던 것이다. 경인은 형만에게서 자초지종을 들은 후 수염을 쓱쓱 내리쓸더니 상순의 부부를 보고 말했다. “처남, 여긴 위함하네. 형만과 함께 만주로 빨리 떠나오.” 상순은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매형, 이제 그 놈들이 되돌아와 나를 잡지 못하면 가시할아버지를 해치자고 하지 않겠소? 그 놈들과 생사결단을 내고 싶소. 우리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어째 고향에서 쫓겨났소? 다 그 한길수와 응삼이 놈이 일본 놈들을 등에 업구 못살게 군 때문이요. 이번에 왔을 때 복수를 하지 않고 또 언제 하겠소?” 어금이 말렸다. “오라비, 어쩌자고 그래? 매형 말을 들어라. 내 마른 누룽지와 미시가루를 한주머니 줄 테니 얼른 각시를 데리고 만주로 떠나라.” 큰누나까지 말하자 상순은 앉아 곰곰이 생각을 하더니 무겁게 입을 떼였다. “가시고모 내 각시와 함께 먼저 가오. 내 일을 쳐 놓고 가시할아버지를 혼자 고생하게 놔두고 혼자 살겠다고 만주로 빠져갈 순 없소.” 형만도 동감을 표시했다. “내 야마다 면장 놈을 죽였소. 나도 가시아버지를 혼자 남겨두고 갈순 없소.” 그들이 어떻게 최구장 등을 안전한 곳으로 모셔오겠는가고 한창 궁리하고 있을 때 운주동에서 근형이가 헐떡거리면서 달려왔다. “삼촌, 큰일 났소. 할아버지랑 할머니랑 일본 놈들에게 잡혀갔소.” “뭐라고?” 경인과 상순이 놀라 벌떡 일어났다. 경인은 “얘, 천천히 말해라.”라고 하면서 근형의 어깨를 잡아 흔들었다. 근형은 숨이 차 헐떡거렸다. “해질녘에 우리 집에 들어섰을 때 야마모도 소장 놈과 한길수의 패거리들이 욱 쓸어 들어 와서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묶었소. 나는 바삐 고방 문을 열고 뒤울안으로 해서 달아났댔소.” 이때 진달래가 한패의 괴한들을 데리고 집안에 들어섰다. “너는 어떻게 돼 여기로 왔냐?” 경인이가 마중 나가면서 묻자 진달래는 철색얼굴에 웃음꽃을 피우며 “일이 있어서 지나가다가 들리었어요.”라고 하였다. 그녀는 뒤에 따라 들어오는 괴한들은 자기 친구들이라고 덧붙였다. 진달래는 사촌오빠 경인에게서 큰아버지 최구장 등이 일본 놈들에게 붙잡혀갔다는 소식을 듣고 펄쩍 뛰었다. “의논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요. 어서 큰아버지를 구해야지요.” 경인도 아버지가 붙잡혔기에 더는 참을 라야 참을 수 없었다. 그는 오래 동안 쓰지 않았던 검을 찾아들고 복면한 후 진달래와 함께 아버지를 구하러 나섰다. 상순과 근형도 각기 식칼과 몽둥이 찾아들고 보자기로 복면한 후 비바람을 무릅쓰고 떨쳐나섰다. 그들은 최구장을 찾아 면사무소로 가다가 운주동 마을 어귀에서 면바로 최구장네를 만났고 최구장 네를 뒤쫓아 온 끼무라 국장과 한길수의 패거리를 딱 마주쳐 접전을 벌렸던 것이다.                             11. 핍박에 고향을 떠나        최구장은 집에 돌아와 쥐마당같이 돼버린 쓸쓸한 구들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는 등잔불을 켠 어두운 집안을 둘러보았다. 경인은 “아버지, 일이 이 지경이 됐으니 먼저 우리 집에 피신하깁소. 일본 놈들이 꼭 덮쳐 올겝구마.”라고 했다. 최구장은 한숨을 후- 내쉬었다. “거기 간들 쫓아가지 않겠냐?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됐어? 이젠 정말 운주동에서 다 살았구나.” 성미가 불 같은 상순이 최구장 앞에 나서서 권고했다. “가시할아버지, 아예 우리 만주국 함흥촌에 들어갑시다. 설마 일본 놈들이 그곳까지 찾아오겠습둥?” 그 말에 온 집안이 웅성거렸다. 여기저기서 만주국으로 가는 게 옳다고 했다. 그때 진달래가 나섰다. “큰아버지, 함흥촌이라고 일본 놈들이 없겠어요. 전번엔 일본놈들의 소탕까지 받았습구마. 아예 우리 아빠랑 사는 장백산에 들어가죠. 거기엔 유격대도 있어 보호받을 수 있어요.” 최구장은 진달래를 피뜩 쳐다보더니 머리를 가로저었다. “공자 성인이 가로사대, ‘자기를 억제하고 예에 맞게 행동하라.’ 그래, 중용지도가 제일인 거야. 일본 사람들도 자기들을 해치지 않는 나를 어쩌겠냐? 그놈들도 사람인데 어찌 량심을 항상 개한테 맡기겠나?” 유격대 대장 최동욱은 썩 앞에 나서면서 권고했다. “처음엔 우리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영월동을 떠나지 말고 살려고 머리를 숙였습구마. 그러나 일본 놈들은 우리 나라를 빼앗았고 착한 마음을 가진 우리를 어디서도 못살게 짓밟고 있습구마. 심지어 내 앓는 안해마저 짓밟았습구마. 우린 일본 놈들의 철 발굽 아래서 자기 여편네도 가정도 지키기 어렵게 됐습구마. 그래서 나도 총칼을 들고 일어섰습구마. 지금 일본 놈들은 만주국에까지 쳐들어가 우리 조선 사람들을 못살게 굴고 있습구마. 일본 놈들을 이 땅에서 몰아내기전엔 우린 고향에서도 살 수 없고 만주국에서도 허리를 펴고 살 수 없습구마.” “그만하게. 건 알만하네. 그러나 칠순이 넘은 내가 이제 총칼을 들고 일본 놈들과 어떻게 싸우겠는가? 우린 좌우간 운주동에선 못 살고 나앉게 됐네. 만주국에 들어가지 않으면 칼에 피를 묻힌 경인이랑 어떻게 하겠어?” 한숨을 후- 하고 땅이 꺼지게 내쉬던 최구장은 가슴을 탕탕 치며 통탄했다. “어떻게 돼 이 좋은 조선 강산을 두고서도 고향에서마저 살지 못하게 됐는고? 하늘도 너무 무심하구나. 창천이여, 굽어 살피옵소서. 으 흐 흐 흑, 흑흑.” 최구장은 천정을 쳐다보면서 땅바닥을 탕탕 쳤다. 등잔불 밑에 비낀 그늘진 그의 두 볼에서는 눈물이 하염없이 줄줄 흘렀다. 뒤이어 그는 애들에게 공부를 배워주던 서당방의 마루를 어루만지더니 어깨를 들먹이면서 흑흑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리었다. 경인은 뒷근심이 컸다. “아버지, 먼저 불붙이에 있는 신설집 형내네 집에 가서 숨어 있으면 어떻습둥? 아버지 상처하구 며느리 병도 치료하고.” 최구장은 맥없이 진달래와 경인을 번갈아보면서 조금 궁리하다가 머리를 끄덕였다. “그래, 얼른 운주동을 떠나자.” 최구장은 피와 빗물로 흠뻑 젖은 옷을 활활 벗어 버리고 농짝에서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경인과 근형은 집안에서 입을만한 옷이랑 농짝에서 꺼내 보자기에 쌌다. 소문을 듣고 달려온 셋째 경민과 넷째 경욱은 어안이 벙벙해 했다. “밤중에 어디로 간다고 야단들이오?” 경욱이 밤중에 홍두깨를 내밀듯 하는 말에 최구장은 핀잔부터 했다. “일본 놈들의 등살에 어디 운주동에서 살겠냐? 차차 만주로 달아나야겠어. 맏사위 사는 만주국 함흥촌에 가든지. 너희들도 준비하거라.” 경민은 납득되지 않았다. “이 팔간집이랑 어쩌고?” 그는 좁은 얼굴에 마땅찮은 표정이 흘렀다. “상순이 말하지 않더냐? 만주에는 땅이 넓고 황무지가 많아서 부지런히 밭을 일구기만 하면 기장밥에 감자 국을 먹는다더라.” 어느 결에 앞집에 있던 막내 경석도 들어왔다가 그 소리를 듣고 빈정거렸다. “만주에 가면 목침을 베고 누워 있어두 된장국에 기장밥이 입에 마구 쏟아져 들어오겠구먼.” 그 말에 경욱이 제 딴에는 고명한 방법으로 동생을 훈계했다. “너, 이 놈, 목침을 베고 약 담배 질이나 해서야 어떻게 살아? 약 담배장사래도 해야 살지!” “넷째야, 너 언제 그 놈의 약 담배 질을 그만 두고 살림살이나 온전히 해라.” “아버지도 웬 말씀인가요? 나도 살림살이를 잘하자고 약 담배장사를 합니다.” 최구장은 하얀 머리를 홰홰 가로저었다. “너 언제든지 그 놈의 약 담배로 경을 치겠다. 일본 놈들이 오겠다. 어서 떠나자. 끼무라란 놈의 상통을 생각만 해도 치 떨려.” 모두들 우르르 집을 나섰다. 최구장은 등불을 쥐고 이 구석 저 구석 살피다가 팔간 집 한가운데 어두커니 서서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는 정든 팔간 집을 떠나기 아쉬웠고 마음이 여간 아프지 않았다. 경숙이가 들어와서 다급히 소리쳤다. “아버지, 빨리 떠납시다. 일본 놈들이 들이닥치면 어쩌겠습둥?” “그래, 어서 가자. 이젠 영영 떠나가야 될 것 같구나.” 최구장은 발길이 떨어지지 않아 대답은 해놓고서도 발 뿌리가 내린 듯이 계속 어두커니 서있었다. 경숙이 억지로 아버지를 부축해 집 문을 나섰다. 경숙이가 비칠거리는 아버지를 옆에서 모시고 기름종이우산을 들었지만 비바람에 하얀 바지가 빗물에 젖어들었다. 새단이 자꾸 까무러쳐서 봉인이 아예 둘쳐 업고 불붙이 쪽으로 황급히 떠났다. 그들은 비 내리는 밤중에 신설집 병권이네 집으로 들어가지는 못하고 먼저 경인이네 집으로 들어갔다. 최동욱과 진달래는 유격대를 거느리고 바람결처럼 비바람 치는 수림 속으로 사라졌다. 경인이네 고방에 들어간 새단이 가는 앓음 소리를 냈다. 뒤이어 근형이가 방으로 들어와 상순을 찾았다. “아무래도 안 되겠네. 내 처가 하신에서 자꾸 피가 흐르오. 신설집에 찾아가 형내를 불러오든지 하오.” 상순은 한마디 대답하고는 인차 떠나갔다. 근형과 경인은 최구장의 옆에서 머리상처의 피 자국을 솜으로 닦아드렸다. 한참 후 상순이 큰아버지 관준과 칠촌조카 형내를 데리고 비바람을 무릅쓰고 경인이네 방에 들어섰다. “가시할아버지, 큰아버지와 조카가 왔습니다.” 최구장은 몸을 일으켜 일어나려고 했다. “사돈어른 누운 대로 계십소.” 관준은 최구장의 손을 잡으면서 구들에 앉았다. 그래도 최구장은 일어나 간신히 앉았다. “내 근심은 하지 말구 먼저 내 손비를 봐 주오.” 관준은 먼저 근형과 함께 고방에 들어가 새단의 병을 보았다. 그 사이 형내가 최구장의 손맥을 짚어보고 머리도 손으로 매만져 보았다. “스승님, 세상에 둘도 없이 착한 선생님께서 어쩌다가 이런 봉변을 당하셨습니까?” 최구장은 그저 눈을 지그시 감고 한숨만 후~ 내쉬었다. 한참 후 관준이 고방에서 근형과 함께 나왔다. “새 색시가 너무 놀라서 하마터면 낙태할 번했습니다. 허나 안궁 약을 몇 첩 쓰고 지혈제를 쓰면 될 것 같습구마.” 최구장은 한숨을 후~ 내쉬었다. “우리 손비에게 무슨 죄가 있다고 일본 놈들이 저렇게 모질게 굴어? 에이, 고약한 놈들이라고. 제 놈들이 우리 운주동 주인행세를 하고 있단 말이요. 어디 될 말인가?” 관준도 눈을 지그시 감고 최구장의 손맥을 보면서 머리를 끄덕였다. “사돈어른, 외상이니깐. 지혈제를 쓰면 되겠습구마.” 관준은 침통을 꺼내 최구장의 머리와 볼, 어깨 등 여러 부위에 침을 쏙쏙 꽂아놓았다. “에이, 내야 이젠 팔순고개를 바라보니까 죽어도 괜찮지만 저 손비나 좀 살려 주오.” 관준은 침을 하나하나 뽑아 약솜에 닦아 침통에 걷어 넣으면서 말했다. “무슨 소릴 하오. 우리 다 살아서 만주국으로 들어가 잘 살기요. 만주국에 먼저 들어간 내 조카가 몇해 전 생전에 고향에 왔다가 하는 말이 일본 놈들이 적은 만주국에 가면 땅도 넓고 사람이 적어서 지나가던 길손에게도 기장밥에 토장국을 대접한다고 했소.” 최구장은 도리머리를 가로저었다. “만주국에 일본 놈들이 없으면 몰라도.” 관준은 침통을 주머니에 넣고 새하얀 염소턱수염을 슬슬 만지면서 최구장을 보고 말했다. “글쎄, 직접 들어가 제 눈으로 똑똑히 봐야 알지. 여기서 소문만 들어서야 어찌 제대로 알겠소? 그러나 저러나 최구장과 손비는 우리 집에 가 있으면서 치료해야 되겠소. 인차 떠나도록 하기요. 손비 병은 중하오. 다시 놀라면 애도 떨어지게 되오.” 그 말에 최구장은 “그럼 먼저 내 손자하구 손비나 데리고 가서 잘 치료해 주오. 난 내일 날이 밝으면 약을 가지러 경인을 보내겠소.” 하고 말했다. 이튿날 이른 새벽에 상순은 최구장과 경인 등과 일일이 인사하고 만주국을 바라고 떠났다. 그는 매형 경인과 어금을 이슬 맺힌 눈길로 바라보면서 떠나기 아쉬워했다. “매형과 누님도 인차 만주로 들어오오. 가시할아버지랑 가시부모랑 모시고 다 함흥촌에 들어오오. 함흥촌에서 우리 함께 살기요.” 상순의 말에 경인은 머리를 끄떡이었다. “그래기요. 우리도 인차 들어가야 하겠소. 내 검에 피를 묻혔으니 일본 놈들의 등살에 어디 고향에서 더 살 수 있겠소?” 상순은 고향을 떠나면서 계속 한숨만 땅이 꺼지게 내쉬었다. (야, 내 고향 운주동이 어쩌다가 이 모양이 되였는가? 다 일본 놈들 때문이야. 이제 성칠 큰아버지를 만나면 총 한 자루를 달라고 해야지. 일본 놈들을 하나하나 쏘아 죽일 테야.) 상순은 명옥을 데리고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떠났다. 그는 령마루에 올라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 고향 산천을 휘 둘러보았다. 저 멀리 바라보이는 구름 속에 우뚝 솟은 기운봉과 치마봉 허리에 은띠를 두른듯이 사품 치며 흐르는 운주하, 고향마을 뒤에 뻗은 산발 따라 조상들의 선산도 바라보였다. 마치 눈에, 마음에 고향 산천을 다 담아가지고 떠나가지 못하는 것이 아쉬워 오래도록 눈을 떼지 않았다. 그는 명옥의 손을 잡고 장탄식했다. “여보, 우리 언제 고향으로 또 돌아오겠소?” “글쎄. 일본 사람들과 싸우지만 않아도 몇해 후에 오겠는 걸 그랬소.” 명옥이 하는 말에 상순은 벌컥 성을 냈다. “개소릴 작작 치오. 섬나라 오랑캐들을 몽땅 몰아내야 우리가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는게야.” 상순은 씩씩거리면서 령길을 씨엉씨엉 앞질러 걸어 나갔다. 명옥은 나그네의 성질을 아는지라 감히 다른 말을 하지 못하고 뒤따라갔다 … 처남 상순이 떠나간 후 경인은 약을 가지러 신설 집으로 떠나가고 최구장과 근형은 삽과 괭이를 들고 산속으로 몸을 숨기었다. 경인이 신설집 팔간 집 삽작문에 들어서니 형내의 아버지 상철이 널마루에서 내려오면서 반겨 맞았다. “어이구, 불붙이 검객사돈이 왔구먼. 그래 사돈어른 병은 어떻소?” “아버진 괜찮은데 큰조카네 색시가 하혈이 심하오.” 이때 관준과 그의 아들 상철이 안방에서 들어오라고 경인을 불렀다. “사돈, 어서 들어오오. 약을 다 지어놓았소.” 상철의 고조부 수종, 증조부 승중, 조부 병권, 아버지 관준 그리고 그의 맏아들 형내까지 6대를 내려오면서 이 집안은 대대로 명의였다. 고조부 수종과 증조부 승중은 모두 리씨 왕조의 궁중어의였다. 승종영감은 궁정에서 오줌약을 왕후에게 썼다가 왕후의 병은 치료하였지만 사실진상이 발각된후 왕에게 축출당하였던것이다. 그는 이 명천 골안에 낙향한 후 맏아들 병권에게 의서를 물려주었고 둘째아들 병완에게는 힘과 목수재간을 물려주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큰집 신설집은 병권으로부터 대대로 조상이 물려준 비방으로 병을 보면서 여유있게 살았고 둘째집 성남집은 병완으로부터 시작하여 대대로 목수재간과 뚝심을 믿고 어렵게 살아왔다. 경인이 황급히 인사를 드리고 약 첩을 들고 나오면서 보니 상철의 열둬 살 푼한 둘째아들 경학과 일여덟 살 돼 보이는 셋째아들 광학이가 피뜩 보였다. 그러나 그들은 새까만 눈알을 때굴때굴 굴리면서 입을 꼭 닫아 맨 채 종내 인사할 줄 몰랐다. (저 애들은 뜨거운 형내와는 달리 차지고 꽁한 애들이야. 이런 집에 어떻게 우리 할아버지네가 와있겠는가.) 이런 궁리 저런 궁리 하다나니 어느덧 불붙이에 이르렀다. 그런데 개 짓는 소리가 요란했다. 경인이 소나무 뒤에 몸을 숨기면서 자기 집 쪽을 내려다보았다. “앗!” 경인은 하마터면 고함칠 번했다. (저게 뭐야? 일본 헌병대 놈들이 아니야?) 경인은  깜짝 놀랐다.  야마모도 놈은 왼눈 통을 붕대로 싸매고 헌병들을 데리고 자기 셋째동생 경민과 넷째동생 경욱을 묶어 앞세우고 자기 집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뒤이어 한길수도 졸개들을 끌고 들이닥쳤다. 집 마당에서 경욱이 목에 지렁이 같은 핏줄을 살려가지고 고함치고 있었다. “우리 형님에게 무슨 죄가 있다고 이렇게 못살게 구오?” 경민은 그저 겁이 나서 온몸을 사시나무 떨듯 바들바들 떨기만 했다. 이윽고 한길수는 경인의 집에서 쌍검을 찾아냈고 복면하였던 검은 보를 찾아냈다. “물증이 다 있는데도 떼를 쓸 테야? 이게 바로 어제 저녁에 저 야마모도소장의 눈을 찌른 검이야. 이 피를 보아라. 아직 채 마르지도 않았어.” 영팔이 고함쳤다. “맞소. 건 경인이란 놈 거 틀림없어!” 야마모도 소장 놈은 외눈깔 통에 불이 이글이글거렸다. 그는 한길수 손에서 쌍날 검을 빼앗더니 씽 덮쳐가 경민을 내리찍었다. 경민이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막다가 왼손이 뭉청 끊어져나갔다. “앗!” 비명과 함께 그의 손이 피바람과 함께 땅바닥에 떨어졌다. 경민도 쓰러져 대굴대굴 굴렀다.야마모도가 내리찍으려는데 끼무라 국장이 말리였다. “이 놈들을 잡아가둬야 범을 산에서 끌어낼 수 있단 말이요. 그만해.” 야마모도는 허우적거리면서 검으로 하늘을 마구 찍어대며 고함쳤다. “당신들은 또 그물을 넓게 쳐서 큰 고기를 낚겠어? 난 동생과 눈마저 잃었어.저놈들을 요정내고 말겠어.” 야마모도가 미쳐 날뛰자 끼무라소장은 부하들을 시켜 야마모도마저 묶어가지고 경민이 형제 그리고 근형의 색시까지 함께 끌고 산 아래로 내려갔다. 어금은 잡혀가는 시동생들과 시조카들을 바라보면서 어쩔 줄 몰라 마당에서 두 손으로 앞섶 잡고 발을 동동 굴렀다. 경인은 주먹을 불끈 쥐고 부르르 떨었다. (안 되겠어. 도망쳐야지.) 그는 일본 놈들이 사라지기를 기다려 아내와 딸 해옥을 데리고 약 첩을 쥔 채 산속으로 달아났다. “이보, 근덕은 어쩌고 이렇게 달아나오? 그 애도 데리구 달아나야지.” 경인은 숨이 차 헐떡거리면서 말했다. “당신은 먼저 해옥을 업고 신설집 쪽으로 피하오. 내 우시장에 가서 인편에 근덕을 만주국에 가자고 기별하겠소.” 어금은 해옥을 업고 뒷산 속으로 사라지고 경인은 령길을 타고 남쪽으로 사라졌다. 한편 우시장의 일본 놈의 상점에서 일하던 근덕은 그날도 상점에서 일하다가 면목 모를 사람이 찾아와 쪽지를 한 장 주고 가는 걸 받아 쥐었다. 근덕은 뒷간으로 가는 척 하면서 뒤울안에 가서 쪽지를 가만히 펴보았다. 쪽지에는 이런 글이 또박또박 씌어있었다. 분명 아버지의 필적이었다.         근덕아, 우리는 사고를 쳐서 부득이 만주국으로 들어가게 된다. 너도 속히 기차를 타고 외할아버지랑 계시는 만주국 함흥촌으로 들어오너라.   쪽지를 받자마자 근덕은 일본 상점의 주인을 보고집에 급한 일이 있어 돌아가야 하겠다고 했다. "차비를 하게 봉금을 주오." 일본 주인은 안경알 밑으로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더니 동전 몇 잎을 달랑 내놓았다. “중도에 나가면 없어. 불쌍해 주는줄 알아." 근덕은 원통한 대로 동전 몇 닢을 받아 넣고 우시장 역으로 나갔다. 그는 아버지가 직접 오지 못하고 쪽지를 보냈을 때에는 집에 꼭 무슨 일이 생겨 먼저 떠나갔으리라고 짐작했다. 그리하여 그는 고향에도 들리지 않고 그날로 기차를 타고 명천을 떠나 만주국으로 떠나갔다. 정든 고향을 떠나는 근덕의 눈에는  고향을 빼앗긴 슬픔이 피눈물로 흘렀다. 나어린 그도 나라를 잃은 망국노의 아픔이 마음속 깊이 폐부에 맞혀오는 것을 가슴깊이 느꼈다.    
64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43) 댓글:  조회:2003  추천:0  2016-06-08
          7. 큰물        최구장의 집은 쑥밭처럼 됐고 어덴가 모르게 살기가 스미어 들었다.        “이제 일본 헌병 놈들이 쳐들어오겠는데. 아, 이 일을 어쩐단 말이요?” 최구장은 집안에 들어와 김빠진 공처럼 풀썩 물앉았다. 경인은 상순을 나무랐다. “에끼, 이 사람아, 좀 참지 못하고 그게 뭐요? 일본 놈들과 맞서서야 되오?” 그는 몸을 돌려 상을 찌푸리면서 어두커니 서있는 아버지를 위안했다. “아버지, 괜찮습구마. 먼저 처남을 만주국에 보내고 아버지네도 숨었다가 함흥촌에 달아 납소. 내 뒤처리를 싹 해가지구 동생들을 데리고 들어가겠습구마.” 어금도 오랍동생의 팔을 붙들고 말리었다. “얘, 어쩌면 참지 못해? 옛날에 아버지도 한길수를 떴다가 여기서 못 배기고 만주에 달아나지 않았니?” 상순은 그제야 가마뚜껑을 가마 위에 놓으면서 씩씩거렸다. “그래 가시할머니와 각시를 다 붙잡아 가자는데도 놔 두라오? 내 잘 못한 게 하나도 없소. 그 놈들이 우리를 한심하게 업신여기고 날뛴단 말이요. 자기 고향의 딸기와 버섯을 뜯었는데 무슨 죄를 졌단 말이요?” 경인은 “설마 죽겠소? 극상해서 매를 맞고 벌금이나 하면 되겠지?”라고 하면서 도리머리를 절레절레 가로 흔들었다. 성단은 계순의 팔을 붙잡고 열 당부를 했다. “얘, 시집에서 기다리겠다. 이젠 온지 일주일도 됐으니 어서 집에 가라. 여기 있다간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몰라.” 그러고 나서 성단은 죽순과 상순이네 쪽으로 얼굴을 돌리더니 “자네들도 어서 만주로 빨리 달아나오. 일본 놈들에게 붙잡히면 죽는 길 밖에 없소.” 라고 하며 발을 동동 굴렀다. 그런데도 계순은 “야, 엄마도, 더 놀고 가겠소. 이래 보면 언제 또 보겠소? 난 가기 싫소.” 라고 하면서 흥기를 끌어안았다. “이것아, 날이 개였을 때 집에 피해 있다가 정서방과 의론해서 저 죽순이네 함흥촌으로 달아나라. 우리도 들어가야겠다.” 계순은 가기 싫어하면서도 일본 놈들이 쳐들어올 것 같아 흥기를 들춰 업고 빨갛게 익은 살구 반 바가지를 천에 싸든 채 꿀꿀이를 이끌고 가마골로 떠나는 길에 들어섰다. 그녀가 울 밖에 나가서 가마골로 가는 길에 들어섰을 때였다. 앞에 숱한 까마귀들이 날아내려 앉아 “까지 마오! 까지 마오!” 하고 울어대였다. 그러자 몇 발자국 떼지 않은 계순은 바래러 나온 엄마 쪽으로 되돌아오더니 몸을 비틀면서 떼를 썼다. “엄마, 난 가지 말까? 저 까마귀들을 보오. ‘가지 마오, 가지 마오.’ 하고 울지 않소?” 그때 또 까마귀들이 참말로 그렇게 우는 것이었다. “까욱! 까욱!” “까지마욱!” “까지 마우! 까지 마우!” 그 까마귀들의 울음소리는 정말로 “가지 마우, 가지 마우.” 하고 우는 상 싶었다. 순금은 돌멩이를 쥐여 까마귀무리에 뿌리면서 “닭 수리야, 우~씨! 닭 수리야, 우~씨!” 하고 쫓았다. 그러자 까마귀들은 후닥닥 날아났다가도 또 길 앞에 내려와 앉으면서 울어댔다. “까지 마욱!” “까지 마우!” "가지 마우!" 계순은 우는 까마귀를 보고 또 되돌아서서 “어디로 갈 때 까마귀가 울면 나쁘다던데 엄마, 난 가지 말개.”라고 하면서 한발자국도 내딛지 않고 되돌아왔다. 성단은 애를 업은 계순의 잔등을 어루만지면서 달래였다. “저 까마귀들은 네가 여기 있으면 일본 놈들에게 붙잡혀가서 죽을까봐 우는 게야. 빨리 이곳에서 달아나라.” “엄마와 명옥은 어쩌겠소?” “우리도 여기서 달아나겠어. 언니네 마을에 가서 만나자. 우리 거기 가서 잘 살자.” 그제야 계순은 가기 싫은 걸음으로 마지못해 가마골로 향했다. 그는 가기 싫어서 몇 번이고 몇 발자국을 가다가도 뒤를 돌아보고 되돌아오려고 하군 했다. 그럴 때면 성단이가 어서 가라고 손짓하군 했다. 그리하여 계순은 마지못해 흥기를 춰 업고 느릿느릿 마을 어귀로 걸어갔다. 계순이가 마을 어귀를 벗어나 가마골 쪽으로 굽어들자 모두들 집안에 들어와 대책을 상론했다. 최구장은 한참이나 담배를 피우면서 궁리하더니 입을 무겁게 열었다. “명옥이 네는 죽순과 함께 먼저 떠나거라. 우리도 애들을 다 데리고 만주국에 들어가야 하겠어. 저 한길수 놈과 응삼이랑 우리를 여기서 살게 하니? 일본 놈들까지 득실거리는 여기서 하루도 삐치기 힘들구나. 공부도 배워주지 말라지, 밭에다 곡식을 심지 말라지. 이젠 버섯이구 딸기마저 뜯어먹지 말라지. 뭘 먹고 살아?” 그는 경인을 보면서 “너희들도 동생들과 함께 떠나도록 해라.” 하고 말했다. 경인은 “알았습니다.”라고 하며 머리를 숙였다. 경인과 어금은 근현과 두 살 밖에 안 되는 해옥을 각기 업고 집으로 먼저 떠나갔다. 한편 계순은 홍기를 업고 가마골에 마지못해 돌아왔다. 계순이 삐뚤게 달린 정지 문을 열고 집에 들어섰다. 그러자 열흘 만에 아내를 보는 정형만은 반가와 애를 업은 계순을 덥석 안아 빙빙 돌렸다. “이걸 놓소. 위방에서 시아버지 웃겠소.” 형만은 아내를 내려놓으면서 “그래 가시부모랑 모두 무사하오? 처형이랑 처조카네랑 만주에서 잘 보낸다오?” 하고 이것저것 물었다. “예, 우리도 언니네 사는 만주에 가서 잘 살아보기요. 이 가마골에서 어떻게 사오?” 그러자 형만은 계순을 꼭 끌어안으면서 “응, 그래. 우리 만주에 가서 잘 살아보자.”라고 하며 계순의 이마에 흘러내린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었다. “이번에 우리 엄마와 명옥이 강가에 가서 버섯하구 딸기를 따 왔다고 일본 놈들이 붙잡아가려고 하지 않겠소. 그래서 조카사위가 글쎄 가마뚜껑과 식칼을 들고 덮쳐들어 일본 놈과 응삼이 그 구장 놈을 찍어놓았소.” 그들이 이런 얘기를 주고받는데 바깥에서 꽹과리소리가 쟁쟁 울렸다. “야마다 면장님의 명령이야! 모두 저수지 둑막이를 나왓!” 형만은 아내 계순과 더 재미없는 말을 하지도 못하고 둑막이를 나가게 됐다. 계순은 문 밖에 나서는 남편을 보고 신신당부했다. “여보, 내 본가집에서 떠나는 길 앞에 별나게 까마귀들이 울더군요. 어찌나 불길하던지. 둑 막으러 가면 어찌나 물을 주의하오.” 형만은 문 밖에까지 따라 나온 아내의 근심어린 얼굴을 돌아보며 “근심하지 마오. 자네나 주의하오.”라고 말하고는 떨어지지 않는 걸음으로 떠나갔다. 형만은 또 마을 사람들과 함께 산골짜기 막바지에 둑막이에 끌려 나갔다. 그러나 형만은 그것이 아내와의 생리별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한참 후 바깥에서 요란한 소리가 울렸다. (무슨 소릴까?) 계순은 이상해서 흥기를 업고 바깥에 나가보았다. 다른 집들에서도 비행기가 날아오는 소린가 하여 비행기를 구경하려고 바깥에 나왔다. 모두들 소리 나는 골짜기 막바지 쪽 구름 덮인 하늘을 쳐다보았다. 먹장구름이 뒤덮인 하늘에 비행기는 보이지 않고 대신 골짜기막바지에 온통 누런 것이 덮쳐오는 것이 보일뿐이었다. 우르르 쓰~와~ 골짜기를 메우면서 누런 흙물이 기세 사납게 덮쳐 오고 있었다. 이때 우에서 정형만이 달려 내려오면서 고함쳤다. “큰물이다! 사람 살리오! 큰물이다!” “큰물?” 계순이 골짜기를 올려다보니 정말 큰물이 어느 결에 북쪽 마을어구지의 집을 휩쓸더니 곧추 덮쳐 오고 있었다. “에구머니!” 계순은 애를 업은 채로 내뛰기 시작했다. 그런데 물을 피해 높은 곳으로 달려가도 모르겠는데 글쎄 물 앞에서 아래쪽으로 내달렸다. 그러나 우로 뛰나 아래로 뛰나 매 한가진 것은 불 보듯이 뻔했다. 코앞에까지 덮쳐온 큰물은 사정없이 온 마을을 덮치면서 집들과 마을 사람들을 덮쳤다. 파도치면서 덮쳐온 누런 흙탕물은 흥기를 업은 계순을 훌 파묻으면서 스쳐지나갔다. 시형은 시아버지를 업고 집에서 나오자마자 흙탕물에 휩쓸려 자취를 감추었다. 형만은 령 길을 따라 마을 쪽으로 달려오다가 그 광경을 보고 훌렁 진흙탕에 물앉아 손바닥으로 땅을 탁탁 치면서 울었다. “아이고, 계순아, 흥기야, 너네 어디로 가니? 에이고, 하느님도 무심하지. 내 계순과 흥기를 데려가다니?” 형만은 땅을 치면서 대성통곡 쳤다. 형만의 삼촌 석수가 달려와 형만을 위안했다. 한참 후 그는 혹시나 하여 파도치면서 흘러내려간 싯누런 흙탕물을 눈이 뚫어지게 들여다보았다.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예쁜 아내 계순과 아들 흥기가 보이지 않았다. 흙탕물 쪽으로 저벅저벅 걸어가던 형만은 대성통곡 치면서 고함쳤다. “계순아, 흥기야, 너희들이 없이 살아서 뭘 하겠니? 옳다. 나도 너희들 따라 갈게! 기다려라.” 형만은 휘청거리더니 물에 뛰어들려고 했다. 그때 뒤따라 걷던 삼촌 석수도 울면서 형만을 꽉 껴안았다. “야, 정신 나갔니? 간 사람이 돌아오겠니?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 형만아- 어엉엉.” 그러나 형만은 몸부림치면서 기어이 물에 뛰어들려 했다. 바빠 맞은 석수는 형만을 바 줄로 허리를 묶어 나무에 매놓았다. 싯누런 흙탕물은 마을을 툭 쳐 밀고 간 다음 차차 가라앉기 시작했다. 파도치던 물도 잔잔히 흐르기 시작했다. 이때 저수지 둑을 막으려고 산골짜기막바지로 올라갔던 마을 사람들이 달려 내려왔다. 그들도 모두 자기 늙은 부모와 처자를 잃고 무릎을 꿇거나 흙탕물에 뒹굴면서 대성통곡 쳤다. 야마다 면장은 우산을 들고 내려와 지껄였다. “이 바보들아, 이젠 물귀신이 돼버렸는데 살아나겠어? 올라가 물막이나 해! 둑을 잘 막았더라면 이런 일이 있었겠어? 내 말을 잘 듣지 않더니 죽어 싸지.” 그 말에 열이 오른 형만은 바줄을 풀면서 두덜거렸다. “네놈이 마을 사람들의 말을 듣지 않아 이렇게 됐다. 비 내릴 때 저수지 물을 조금씩 빼버렸더라면 둑이 터졌겠어?” 그는 몸을 빼자마자 물 옆에 서있는 야마다 가까이 다가가더니 불시에 흙탕물에 훌 밀어 처넣었다. “네 놈도 죽어봐라.” 야마다는 흙탕물에 빠져 떠내려갔다. 다행히도 야마다는 헤염칠 줄 알아서 살겠다고 허우적거리면서 구해달라고 손을 물 밖으로 내밀었다. 석수가 황급히 달려 내려가면서 바 줄을 들이 뿌렸다. 야마다는 바 줄을 덥썩 잡고 끌리어 뭍으로 올라왔다. 금방까지도 죽은 돼지 눈 같던 야마다의 눈에는 복수의 불길이 이글거렸다. “이 놈, 황군을 물에 빠지어 죽게 하고서도 살 거 같아?” 야마다는 지휘도를 쑥 뽑아 들고 형만에게 덮쳐들었다. 형만은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고 못 박힌 듯이 서서 도끼눈으로 야마다를 쏘아보았다. 야마다가 지휘도로 내리찍는 순간 옆에 서있던 석수가 지휘도를 바 줄을 들어 막았다. 그러나 그때는 늦었다. 지휘도가 바 줄을 몇 토막 내고 석수의 왼쪽팔목을 내리찍었다. 석수의 손가락이 몇 대 흙탕물에 철썩 떨어졌다. 뻘건 피가 떨어진 손에서 흘러 흙탕물에 퍼져나갔다. 그 광경을 본 형만은 더는 참지 못하고 와락 달려 들어 바 줄로 야마모도의 목에 올가미를 걸었다. 석수도 힘을 합쳐 외손으로 야마모도의 추켜든 지휘도를 꽉 잡았다. 웃집의 용기가 야마다의 팔목을 붙잡고 군도를 빼앗아냈다. “네 놈 때문에 우리 온 가족이 몽땅 죽었다.” “에잇, 죽어봐라!” 석수와 형만이 세길 네길 뛰면서 야마모도의 두 팔을 바로 한데 옭아맸다. 그것도 모자라 형만은 옆집 용기의 손에서 지휘도를 빼앗아 야마다의 다리를 내리찍었다. 야마다의 왼다리가 보기 좋게 썩 뚝 잘리어 나갔다. 연약한 마을사람들은 옆에서 말리였다. “자네들이 어쩔 셈이요?” “이러다가 온 마을 사람들이 몰살당하겠소.” 그러나 형만과 석수는 끝내 야마다를 흙탕물 속에 처넣었다. 야마다는 허우적거리며 꽥꽥 고함치다가 흙탕물속에 가라앉아 자취를 감추었다. 뒤이어 야마다가 사라진 흙탕물에서 피가 뻘겋게 퍼져 올라 아래로 둥둥 떠내려갔다. 마을 사람들이 야단났다고 수군거릴 때였다. 가마골의 구장 림호라는 억대우 같은 사내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그는 호랑이도 맨 손으로 꼬꼬리를 잡아당겨 껍질을 다 벗겨놨다는 사내였다. 그는 오자마자 고래고래 고함쳤다. “석수, 어째 죽고 싶은가! 이게 무슨 짓이냐?” 석수와 형만은 피발이 선 눈길로 림 구장을 쏘아보았다. 그러자 림구장은 형만의 살기에 찬 눈길을 보고 뒤로 주춤주춤 멈춰섰다. 그제야 석수는 질척질척한 땅바닥에서 자기 손가락을 주어 보다가 흙탕물에 훌 쥐어뿌리고 손을 잡고 상을 찡그렸다. 형만은 석수의 손목에서 아직도 피가 흐른 것을 보고 “야, 오줌을 팔목에 누오. 피가 멎게.”라고 권했다. “그게 뭐 약이야?” 형만은 우두커니 서 있다가 석수를 재촉했다. “산 사람은 살아야지. 오줌을 빨리 누오. 손이 썩어 들어가겠소.” 석수는 마지못해 손에 오줌을 누웠다. 그런데 기적적으로 손목의 피가 멎었다. 마을사람들은 “석수, 빨리 도망치오. 이제 구장이 일본 놈들을 데리고 덮쳐올게요.”라고 말했다. 형만은 가라앉는 흙탕물을 멍해 바라보면서 “아내 시신을 거두지도 않고 어디로 간단 말이요?”라고 말하면서 떡 못 박힌 듯이 서서 좀처럼 떠나려고 하지 않았다. “빨리 달아나자! 이제 구장이 우시장헌병대에 알리면 영낙없이 죽어!” 그제야 형만은 마지못해 몇 발자국을 뗐다. “용기도 함께 달아나라.” 마을 사람들이 극구 권고하였다. 하지만 용기는 “내 어째 달아난단 말이요?” 라고 말하면서 떡 버티고 서있었다.        석수는 형만을 데리고 정처 없이 달아났다. 형만은 달아나면서도 자꾸 고향 마을과 아내가 떠내려간 물을 되돌아다보았다.        기운봉 쪽에 먹장구름이 몰려왔다. 번개가 산중턱을 번쩍 내리치더니 하늘땅을 진동하는 우레 소리가 울리었다. 뒤이어 장대 같은 소낙비가 창창 억수로 쏟아졌다.                                                                                              8. 먹장하늘 번개 불이 사무실 안에까지 번쩍 들어왔다가 나가더니 꽈르릉 요란한 우레 소리가 울렸다. 야마모도 소장은 상우남면 사무소에서 우시장 헌병대에 전화를 걸어 운주동 사건을 보고하고 헌병들이 오기를 기다렸다. 창밖에서는 또다시 소낙비가 억수로 쏟아졌다. 갑자기 면사무소 소장 사무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림호가 뛰어 들어왔다. 야마모도 소장은 그의 출현에 이상해 엉거주춤 의자에서 일어났다. “아니, 가마골 림 구장, 둑막이 하지 않고 웬 일인가?” 몸에 비를 흠뻑 맞은 림호는 헐레벌떡거리면서 두덜거렸다. “야마모도 소장, 큰, 큰일 났습니다. 야마다 면장이 살, 살해됐습니다.” 조선 말을 잘 모르는 야마모도 소장은 림호가 뭐라는지 통 알아듣지 못했다. 옆에 서있던 응삼은 자기 귀를 의심했다. “뭐라고? 야마다 면장이 살해되다니?” 갑갑해난 야마모도 소장은 안경을 춰올리면서 “니혼고데 하나세(일본말로 말하게)!” 하고 버럭 고함쳤다. 응삼이 보리 일본 말이라도 알아서 목구멍으로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전해주었다. 야마모도 소장은 자기 형을 잃은 것으로 해 펄쩍 뛰었다. 그는 림호 구장의 멱살을 틀어쥐고 흔들면서 꽥꽥 고함쳤다. “다시 말해봐! 내 형님이 어떤 놈에게 살해됐소까?” 숨을 돌릴 새도 없이 림호는 자초지종을 죽 이야기했다. 야마모도 소장은 비보를 다 듣고 군도를 쑥 뽑아들더니 책상을 탁 내리찍었다. 그 바람에 책상이 두 동강이 나고 말았다. “원수놈!" 야마모도는 이를 쁘득쁘득 갈았다.  "가자!” 응삼은 야마모도를 뒤따라 가면서도 운주동에서 당한 일이 있어 슬그머니 겁을 집어먹었다. “야마모도 소장, 우리 힘으론 그 놈들을 붙잡지 못합니다. 괜히 갔다가 우리까지 목숨을 잃겠습니다.” 성이 꼭뒤까지 치밀어 오른 야마모도 소장은 응삼의 멱살을 틀어쥐면서 안경알 밑으로 사발 눈깔을 희번덕거리었다. “겁쟁이 같은 놈, 네놈부터 죽여치우겠어!" “에이, 에이! 이러지 마십쇼. 이제 황군헌병이 오면 가마골과 운주동 그리고 최구장까지 싹 쓸어버립시다. 헤헤헤." 야마모도는 그 소리에 귀가 번쩍 띄어 운주동에서 상순에게 당한 일을 생각하고 치를 떨며 군도를 내리웠다. 그도 몇몇의 힘으로는 운주동과 가마골의 “불온분자”들을 어쩌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는 인차 한길수에게 알려 우시장의 깡패들이라도 데리고 오라고 한 후 헌병대에 다시 전화를 쳐 헌병을 보내달라고 했다. 우시장의 헌병대에서는 다른 곳에서도 불온분자들의 소동이 있어서 못 간다고 했다. 사실 다른 곳에 소동이 있은 것이 아니라 헌병들은 소낙비가 쏟아지는데다가 물이 불어 빠져 죽을까봐 오기 싫었던 것이다. 창밖에서는 닭알만큼 한 우박이 쏟아져 사무실지붕 기와에 따 당 따 당 부딪쳐 요란한 소리를 냈다. 야마모도가 사무실에서 왔다 갔다 하면서 애타게 기다릴 때, 그래도 늙은 한길수가 말을 타고 건달들을 일여덟 데리고 헐레벌떡 달려왔다. 그가 든 기름종이우산은 총알을 맞은 듯이 빈대만 남고 기름종이는 구멍이 펑펑 뚫려 너덜거렸다. 비를 폭 맞은 늙다리 한길수는 야마모도 앞에서 굽은 허리를 굽신거리었다. “참 안됐습니다. 야마다 면장께서 그런 봉변을 당하다니.” 한길수는 림호에게 낯을 돌리더니 이렇게 훈계했다. “구장이라는 게, 참, 면장 어른도 잘 보호하지 못하다니.” 림호는 상전의 앞에서 억대우 같이 구척이나 되는 몸뚱이를 굽실거리었다. “정말 죽을죄를 졌습니다. 한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가마골의 놈들을 한 놈도 남기지 않고 몽땅 죽여 버리겠습니다.” 통역이 번역해주자 야마모도는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그는 부하들 앞에서 약한 속심지를 보이는 것 같아 인차 안경을 벗고 손수건으로 눈물을 쓱 씻더니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요로씨이(좋아), 그래도 한상이 제일이야. 가자, 먼저 가마골에 가서 불온분자들을 처단하고 우리 형님의 시신을 거두자.” 한길수는 야마모도를 따라 면사무소에 준비해둔 군용방수포비옷을 입고 가마골로 쏜살같이 덮쳐갔다. 그들은 말배까지 치는 운주강을 겨우 건너 가마골 어귀에 들어섰다. 누런 흙탕물은 강바닥이 다 드러나게 가라앉았고 다만 누른 흙탕물이 탁 치고 지나간 흔적을 알리는듯 산골짜기중턱에까지 누런 진흙탕이 묻어있고 온 마을에 밭이라고는 산중턱에 강냉이 밭 세 고랑 밖에 남지 않았다. 산골짜기 막바지는 산사태가 무너지면서 골짜기를 껍질을 한번 벗긴 듯이 무너져 내렸고 여기저기에 시체들과 죽은 가축들이 지저분하게 널려있었다. 야마모도는 시체들을 보자 혹시 자기 형이 있겠는가고 살피였다. 그러자 한길수가와 가마골 구장 림호도 자기 상전을 찾느라고 세 귀 눈을 희번덕거리었다. 그래도 혈육이 혈육인가 본다. 야마모도는 누런 진흙탕 속에서 건뜻 쳐들린 군화를 발견했다. 그는 진흙탕 속에서 군화를 신은채로 있는 왼쪽 다리를 쥐여 쳐들고 이리저리 보더니 결론을 내렸다. “조선 사람들은 이런 군화를 신지 못하네. 꼭  형님의 군화 같애. 이 근처에 내 형님이 있을 것 같네. 흩어져서 잘 찾아봐!” “옛!” 한길수와  졸개들은 말에서 내려 사처로 흩어져서 야마다의 시신을 찾기 시작했다. 이때 야마모도는 군화를 신은 왼쪽다리를 쥐고 꿇어앉아 땅을 치면서 대성통곡 쳤다. “아이고, 형님, 이게 무슨 일이요? 조선에 와서 잘 살자고 하던 노릇이 이게 뭐요? 형님, 동생이 왔소. 형님, 어, 허, 헉, 흐, 흑, 흑.” 실 돌피 같은 응삼이 그래도 여기저기 널린 시체 속에서 진흙탕 속에 쓰러진 야마다의 시체를 찾아냈다. 늙은 버드나무가지에 팔과목이 바 줄로 꽁꽁 묶인 것이 야마모도의 시체가 분명했다. “여, 여기 있습니다.” 그러자 야마모도와 한길수는 황급히 그리로 달려갔다. 야마모도는 우두커니 서서 왼쪽다리가 썩 둑 잘린 형의 시체를 바라보다가 털썩 꿇어앉았다. “아니상(형님)! 아니상(형님)!”        일본 말을 잘 모르는 한길수는 다가가서 야마모도를 보고 “당신 형님이 옳습니다. 어째 아니라고 그럽니까?” 라고 말했다.        번역관은 코웃음이 났지만 겨우 참고 번역해주지 않았다. 야마모도는 꺼이꺼이 울다가 와락 야마다의 품에 쓰러져 낯을 만지면서 흑흑 흐느껴 울었다. (저러다간 가마골의 흉수들을 다 놓치겠어.) 한길수는 개화장을 홱 휘두르더니 응삼과 수길에게 명령했다. “자네들은 가마골의 림 구장과 함께 빨리 가서 흉수들을 잡아오게나. 야마다면장의 원수를 꼭 갚아야 하네.” “예이!” 응삼과 수길, 영팔 등이 림호 구장과 함께 떠나려는데 야마모도가 벌떡 일어났다. “이이에(아니야)! 내 손으로 그 놈들을 잡아 칼 탕을 쳐 놓을 테다! 가자!” 그리하여 한길수 등 졸개들은 야마모도를 따라 말을 타고 곧추 가마골 막바지 쪽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올라가면서 보니 집이라고는 한 채도 보이지 않고 큰물에 밀대를 맞아 없고 사람들도 보이지 않았다. 집도 없고 창대같은 비가 쏟아지는데 모두들 비를 피해 어디를 갔는지 찾아볼 길이 없었다.       사실 형만과 석수는 어디론가 달아났고 용기랑 마을사람들은 살길을 찾아 머나먼 다른 마을의 친척집으로 가 버렸던 것이다.        야마모도는 이를 부득부득 갈면서 말을 타고 막바지 터진 둑이 있는 데까지 달려가 보았다. 그러나 사람이라고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늙은 한길수는 더는 말을 타고 달리기 싫어서 야마모도 소장을 보고 “원수는 십년을 갚아도 늦지 않습니다. 후에 그 놈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려 감쪽같이 없애버립시다.” 통역이 그 말을 번역해주자 야마모도는 군도를 뽑아 옆에 서있던 나무 가지를 탁 쳤다. “가자! 운주동에 가서 최구장의 년 놈들을 몽땅 붙잡아가자!” “예이!” 한길수 등은 야마모도를 따라 말머리를 돌려 운주동쪽을 달려갔다. 그들이 억수로 쏟아지는 비를 무릅쓰고 가마골과 운주동 골짜기가 한데합친 목에 이르렀을 때였다. 운주동 마을 어구에서 몇 사람이 울며 불면서 기름종이우산을 쓰고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한길수가랑 말을 타고 달려 점점 가까이 다가갔지만 기름종이우산에 가리어 누군지 똑똑히 볼 수 없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 사람들의 울음소리가 둑 끊어진데다가 슬금슬금 신흥동으로 난 길 쪽으로 굽어드는 것이었다. 뱁새눈 응삼이 그래도 눈치 빨랐다. “저 놈들이 가능하게 최구장의 무리인지도 모릅니다.” 그 소리에 야마모도는 군도를 쓱 뽑아들고 말에 박차를 가했다. “하야꾸 쯔이게끼(빨리 추격)!” “빨리 추격해!” 한길수 등은 일제히 말에 채찍을 안기며 쇠방망이와 시퍼런 칼을 빼들고 짓쳐나갔다. 그러나 그 사람들이 굽어든 곳으로 덮쳐갔을 때는 사람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고 대신 버드나무와 낙엽송들이 억수로 퍼붓는 소낙비에 몸부림 치고 있었다. 그들은 말을 타고 비바람 치는 수림 속으로 헤매기도 싫었지만 야마모도의 눈치를 봐서 마지못해 이리저리 수색하는 척 했다. 한참 후 응삼이 야마모도 앞에 가서 말에서 내려 실 돌피 같은 허리를 굽실거리면서 상전의 귀에 대고 이런 잔꾀를 대주었다. “속담에 중놈은 달아나도 절은 달아나지 못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저 놈들은 달아났지만 집이야 달아 날수 있겠습니까? 집에 쳐들어가면 한 놈이라도 붙잡을 수 있을 겁니다.” 그 말에 뭔가 피뜩 떠오른 것이 있었던지 야마모도는 군도로 운주동을 가리켰다. “이께(가자)!” 그리하여 그들은 말을 타고 운주동으로 짓쳐 들어갔다. 영팔과 수길은 개를 잡은 포수처럼 최구장네 집 울안에 들어서자마자 문을 박차고 쇠방망이를 쳐들고 뛰어 들어갔다. 그런데 집안에는 아무도 없이 조용했다. “제길 할!” 수길은 쇠방망이로 물독을 땅 쳤다. 쏴- 물독의 물이 온 부엌바닥에 질벅하게 쏟아졌다. 야마모도도 뒤따라 들어왔다. 그는 텅 빈 집안을 휘둘러보더니 “개놈새끼들이 몽땅 어디로 달아갔단 말인가?” 하고 고함치면서 군도로 대들보를 탁 찍었다. 우수수 흙이 구들에 떨어졌다. 그것이 명령이기라도 한 듯이 영팔과 수길이 등 망나니들은 집안의 가정기물을 쇠방망이와 칼로 마구 쳐 부시고 찍었다. 영팔이 라이터를 꺼내들고 당장 칠상을 하면서 “아예 이 놈의 개굴에 불을 콱 지르고 말기요.” 하고 고함쳤다. “가만!” 이때 응삼이 손을 쳐들어 영팔의 손에서 라이터를 내리웠다. 그는 실눈을 가슴츠레 뜨고 야마모도와 한길수의 앞에 가서 입에 손을 대고 목소리를 죽여가면서 지껄였다. “이 집을 놔두고 갑시다. 한 두 사람을 남겨 집주위에 매복시켰다가 그자들이 이 집에 다시 기여들 때 일망타진하는 게 상책입니다.” 그러자 야마모도는 응삼의 코끝에 엄지손가락을 내들면서 “리상 요로씨이(리군 좋아), 가에로(돌아가자)!” 하고 고함치며 손을 홱 바깥으로 내저었다. 영팔 등은 통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이 머리를 절레절레 저면서 쇠방망이를 들고 문밖으로 나갔다. 수길은 문을 나서면서 시퍼런 칼로 문풍지를 쭉 내리그었다. 그 바람에 문풍지는 사람몸뚱이가 통 채로 나들게 구멍이 펑 뚫렸다. 림호는 사립짝문을 발로 걷어차서 번져놓고 가버렸다. 그자들이 우르르 쓸어나가자 말들이 대가리를 흔들면서 투레질했다. 한참 후 집안은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그때까지 중 천정에 숨어 숨을 죽이고 엎뎌 있은 근형은 천천히 일어나 앉았다. 그는 옆에 엎뎌 있는 새단을 툭툭 치고 나서 입을 그녀의 귀에 가져다대였다. “여보, 저 놈들이 집주위에 숨어서 살피는 줄도 모르고 할아버지랑 이 집에 들어오면 어찌 하겠소. 내 가마골에 가서 할아버지께 놈들의 간계를 알려줘야겠소.” 그러자 새단은 신랑의 팔을 더듬어 잡으면서 “아이고, 당신이 가면 나는 어찌 하라오?” 하고 말하면서 부들부들 떨었다. “내 올 때까지 여기 까딱 말고 엎뎌 있소.” 근형은 각시의 귀에 대고 뭐라고 열 당부를 하고 나서 천정구멍 쪽으로 살금살금 기어가서 뚜껑 한쪽을 빠금히 열고 숨을 죽인 채 아래 동정을 한참이나 엿들었다. 바늘이 떨어지는 소리가 다 들릴 정도로 조용했다. 그제야 근형은 뚜껑을 열고 중 천정에 끌어올려놓았던 사닥다리를 구멍으로 끌어다가 내려놓고 고방으로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내려갔다. 그가 사다리를 옮기려고 들 때 구멍을 올려다보니 어느새 새단이 뚜껑을 꼭 닫아놓지 않았겠는가? 근형은 사닥다리를 들고 고방 뒷문 쪽으로 살금살금 다가갔다. 그는 고방 문을 살며시 열고 뒤울안으로 나가 사다리를 내려놓았다. 밖에서는 아직도 대살 같은 소낙비가 비바람 속에 쏟아졌고 기와 추녀 끝에서는 숱한 실 폭포들이 쏟아져 내려오고 있었다. 이따금 번개가 번쩍 하고 우레가 천지를 진동했다. 근형은 우산이고 뭐고 들새 없이 비바람 치는 뒤울안 바자를 뛰어넘어 몸부림치는 수림 속으로 숨어 들어갔다. 사실 야마모도와 응삼이 행패를 부리다가 간 후 상순과 명옥이 그리고 죽순은 최구장과 성단의 분부대로 먼저 떠나가 버렸다. 그런데 점심쯤에 형만과 석수 그리고 용기가 헐레벌떡거리면서 최구장네 집으로 달려왔던 것이다. 형만에게서 계순과 흥기가 잘못된 자초지종을 듣고 최구장과 성단은 백사불구하고 형만과 함께 가마골로 가서 계순과 흥기의 시신이라도 찾아 거둬주려고 떠났다. 근형과 새단은 뒤에 남아서 집을 지켰던 것이다. 그런데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그들은 마을도 채 벗어나지 못하고 야마모도와 한길수의 무리들을 만났던 것이다. 근형은 수림 속을 헤매다가 신흥동으로 가려고 제방 둑에 나섰다. 그런데 제방둑 저쪽에 웬 사람이 얼씬거렸다. 분명 한길수가 남긴 감시군것 같았다. 근형은 인차 제방 둑 아래 버드나무숲속에 몸을 숨기었다. 소낙비에 큰물이 질대로 진 강물은 세찬 파도를 일구면서 제방 둑을 당장이라도 치고 넘어올 듯 했다. (신흥동으로 못 가겠구나. 그럼 아버지랑 응삼 등이 집에 뛰여들어 야단치는 새에 산기슭을 에돌아 가마골로 다 간 게 아닐까? 저 놈을 다른 데로 유인해야겠다.) 근형은 인차 비바람을 무릅쓰고 버드나무숲 속으로 허리를 굽히고 살금살금 가마골과 반대방향으로 달아났다. 그러자 또 다른 자가 이쪽으로 따라오는 것이었다. 근형은 그자에게 잡힐까봐 양손에 주먹만 한 돌멩이를 주어들고 버드나무숲속으로 숨어 들어가 버렸다. 그자는 버드나무숲속을 헤치면서 슬금슬금 다가오다가 살기 넘치는 버드나무숲속이 싫은지 빠져나가더니 제방 둑에서 왔다 갔다 하면서 이쪽을 살폈다. 그러자 근형은 그자를 제방 둑에 따돌리고 다리야 날 살리라고 버드나무숲속으로 하여 이번에는 가마골 쪽으로 도망쳤다. 근형의 추측이 맞았다. 최구장 등은 버드나무숲 속에서 한참 한길수 무리와 숨바꼭질하다가 그 놈들이 집으로 쳐들어간 새에 버드나무숲속에서 나와 곧추 가마골 쪽으로 굽어들어 달아갔던 것이다. 근형이 가마골로 가보니 진짜 살풍경이었다. 고모네 집이고 마을이고 곡식이고 몽땅 누런 흙탕물이 쫄 밀어가고 아무것도 없었다. 여기 저기 몇몇 마을사람들이 집식구들의 시체를 붙안고 울고 있었다. 저 멀리 할아버지 최구장과 할머니 순금이가 고모부 형만과 함께 작은 고모의 시체를 찾느라고 흩어져 돌아다닌 것이 보였다. 그가 산골짜기중턱 버드나무 밭에서 할아버지를 부르며 달려가려다가 무엇엔가 걸려 넘어갔다. 찬찬히 보니 진흙탕에 반 넘어 묻힌 웬 검정무명치마였다. 발을 빼면서 보니 웬 허벅다리가 누런 진흙탕 속에 알릴락 말락 드러났다. “이크, 이게 뭐야? 막내고모 무명치마가 아니냐?” 근형은 바삐 손으로 진흙탕을 마구 파헤치고 시체의 얼굴을 보았다. 분명 막내고모 계순이었다. “막내고모! 아이고, 이게 웬 일이요? 고모!” 근형이 대성통곡 치면서 진흙탕을 손으로 마구파고시체를 끌어안아 일으켜 앉혔다. 계순의 잔등에는 포대기에 싸 업은 흥기가 업히어 있었다. “할아버지! 할머니! 고모 여기 있습구마! 엉, 엉, 엉.” 최구장과 성단, 형만 등이 황급히 뛰어왔다. 최구장은 뛰어오자마자 막내딸을 붙안고 가슴을 치면서 불렀다. “야, 계순아, 우리 왔다. 깨나라. 응? 야, 이게 무슨 일이야?” 성단은 굳어버린 흥기를 껴안고 손바닥으로 진흙탕을 치면서 통곡했다. “흥기야, 흥기야, 다 할미 내 잘못이다. 딸이 그렇게 가기 싫어하는 걸 내 너 네를 죽였구나. 자꾸 가라고 해서 너를 죽였구나. 죽순아 내가 너를 죽였구나. 길에서 까마귀가 ‘가지 마우.’ 하구 운다면서 가지 않겠다는 걸 내가 가라 해서 이렇게 죽였구나. 어이구, 나는 어쩌겠니?” 형만은 처자를 가시부모에게서 빼앗아내듯이 와락 끌어안더니 계순의 낯에 볼을 마구 비비면서 황소소리로 온 골짜기가 울릴 지경으로 처량하게 대성통곡 쳤다. “계순이, 내 어데 가서 계순 같은 각시를 얻겠소? 계순이 없으면 난 못 사오. 나도 같이 죽기요. 어 허 헉, 헉헉.” 석수도 근형도 눈물을 줄줄 흘리었다. 용기도 손등으로 눈물을 씻었다. 이윽고 최구장이 일어났다. “그만들 하오. 어쩌겠소. 다 제 명이 그만한 걸. 응삼과 림호랑 또 쫓아올지 모르니까 빨리 시체를 파묻어주고 떠나기요.” 개똥도 약으로 쓰자면 없다고 불시에 관은커녕 널판자도 쓰려고 하니 큰물에 다 떠가서 하나도 없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여기저기 널린 가마니를 주어다가 모자의 시체를 싼 후 산등성이에 메여갔다. 그들은 삽도 없어 손으로 대충 시체를 파묻을 구덩이를 파고 두 모자 시체를 나란히 내려놓았다. 그러자 형만은 죽순이를 파묻기 아쉬워 마구 구덩이에 뛰어들어가 가마니를 싼 계순과 흥기, 꿀꿀이를 끌어안고 드러누웠다. “나를 계순과 함께 파묻어주오. 어서 파묻소. 파묻어!” 그러자 석수가 엉엉 울면서 “야, 나오라. 이러면 못쓴다.”라고 하면서 형만을 겨우 뜯어 안아 내왔다. 최구장과 근형은 피눈물과 함께 계순과 흥기를 나란히 파묻어주었다. 성단은 애기 산소같이 손으로 파묻어놓은 계순의 묘를 치면서 계속 대성통곡 쳤다. “에이유, 계순아, 내가 너를 죽였구나. 이게 무슨 일이냐? 그렇게 떠나기 싫어하는 걸 내 너를 쫓아 보낼 게 뭐냐? 에이고, 아이고. 꿀꿀아, 네 이름을 돼지이름으로 지으면 앓지 않고 튼튼하게 자라겠는가구 했는데. 이게 뭐냐? 이 외할미 먼저 죽어야 하는데 너 네를 먼저 죽였구나. 에이고, 내 먼저 죽어야 하는데 새파란 너 네를 죽였구나. 흐 흐 흑. 흑흑. 흥기야!” “됐소. 우린 여길 빨리 떠나야 하오. 일본 헌병 놈들이 들이닥칠지도 모르오.” 최구장은 성단의 팔을 끌어당기었지만 끌리어 일어나면서도 발을 떼려고 하지 않았다. “에이고, 내 막내딸을 여기다 두고 어떻게 제만 살겠다고 간단 말이요?” 최구장과 근형은 성단을 끌어당기면서 울지 말라고 말리였다. 형만도 석수와 용기가 끌어안고 밀고 해서야 겨우 몇 발자국 떼였다. 아, 왜 슬프지 않겠는가? 친혈육을 잃은 그 고통이야 이루다 헤아릴수 있겠는가! 자기 혈육을 이런 누런 진흙탕에 묻고 떠나야 하는 마음이야 오죽 하랴! 사랑하는 처자를 고향 땅에 묻고 떠나는 형만의 마음은 참말로 칼로 심장을 도려내듯이 아팠다. 최구장도 성단도 형만도 모두 걸음이 떨어지지 않아 비칠거렸다. 먹장구름이 뒤덮인 하늘에서는 소낙비가 쏟아졌다. 우르릉 꽝꽝! 우레가 지동치고 번개가 번쩍였다. 먹장하늘에서는 대살 같은 소낙비가 끊임없이 쏟아진다. 아니, 아니야. 한 많은 이 고향 산천에, 처자를 묻은 고향의 진흙탕에 피눈물을 휘뿌린다.  
63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42) 댓글:  조회:2091  추천:0  2016-05-24
                                             4. 험난한 고향 길       1938년 찜통더위가 대지를 갑갑하게 품은 무더운 여름이다.        어느 하루 죽순 고모가 명옥을 찾아왔다.       명옥은 가마 목을 걸레로 닦다가 고모를 반겨 맞았다.       죽순은 구들에 올라와 가마 목에 앉더니 이런 말을 꺼냈다.       “내 조선에 갔을 때 아버지가 너희들을 영 보고 싶어하더라. 이번에 나와 함께 가보자.”       뜻밖에 상순이 가시고모의 말에 선뜻이 대답했다.      “여보, 고모와 함께 고향에 나가보기요. 고향에 퍽 가고프오.”      상순은 정말 고향에 가보고 싶었다. 물론 조선에서 일곱 살 때 중국 만주국에 건너왔지만 눈만 감으면 고향의 산천이 눈앞에 선히 떠올랐다. 이전에 홀락 벗고 목욕하고 모래불에 물도랑을 파면서 놀던 운주강도 보고 싶고 남대성하도 보고 싶었다. 그러나 고향 마을을 지척에 두고 지나가면서도 감히 들리어 보지 못했다. 또 유격대의 쌀이 긴박한지라 들릴 시간도 없어 약담배짐을 지고 박달령을 넘어 만주 허허벌판으로 돌아왔던 것이다. 명옥은 신랑이 말하자 인차 “나도 열여덟 살에 여기 들어온 후 계속 할머니와 작은고모 생각이 납데.”라고 했다. 죽순은 “그럼 채비를 해라. 내 차비를 대줄게 뒷근심은 말고 가자.”라고 말하며 고무신을 신고 집에서 나갔다. 그때 세 살 난 영자가 어른들이 주고받는 말을 알아들었는지 종알거렸다. “아빠, 나도 가겠소.” “영자야, 엄마와 아빠 인차 돌아온다. 그새 고모랑 할머니랑 함께 맘마 많이 먹으면서 있어. 응?” 영자는 도리머리를 흔들며 왕왕 대성통곡 쳤다. “싫다, 싫어. 응-응-” 명옥은 상순의 품에서 영자를 안아다가 손등으로 눈물범벅이 된 얼굴을 닦아주면서 다독여주었다. “그래, 그래. 우리 맏딸을 데리고 고향에 가야지. 이 다음에 크면 엄마가 꼭 영자를 고향에 시집보내주마.” 영자는 엄마의 얼굴을 애고사리 손으로 매만지면서 흑흑 흐느꼈다. 명옥은 상순을 건너다보며 눈을 찔끔 감아 보였다. 상순은 한숨을 후- 내쉬었다. 밖에서는 번개가 번쩍이고 우레가 울더니 장대비가 쫙쫙 쏟아졌다. 상순은 밀짚모자를 쓰고 마을에 나가 지 촌장을 찾아가 고향에 갔다 오겠다고 청가를 맡았다. 그 어지러운 세월에 일본 놈들은 조선 사람을 2등공민이라고 하면서도 조선에 두고 온 고향에 마음대로 가지 못하게 했다. 일본 놈들은 이른바 집단부락을 만들어놓고 마을 둘레를 서너길씩 되는 장대기로 바자를 세워놓고 네귀에 보초까지 세워놓았다. 놈들은 이렇게 함으로써 백성들과 유격대를 격리시키고 유격대에 쌀이랑 생활필수품을 날라가지 못하게 통제하였던 것이다. 어디로 가려면 괴뢰촌장이거나 일본 놈들의 분주소나 파출소에까지 가서 출국신고를 한 후에야 내 보냈다. 심지어 나무하러 가도 지학사 촌장한테 청가를 맡고 갔다가 와선 몸수색과 짐수색을 받아야 했다. 그간 상순과 충국은 조선에 나간 사실을 지학사 촌장에게 알리지도 않고 바자에 구멍을 내고 드나들었던 것이다. 지촌장한테 들키우면 약 캐러 갔다든지, 병 보이러 갔다든지, 장 보러 갔다든지 두루두루 왕청 같은데 둘러 대군 했다. 지학사는 걸 하나도 눈치채지 못한건 아니지만 상순은 겁나고 충국은 자기 외가집 조카인지라 한쪽 눈은 뜨고 한쪽 눈은 감고 모르는척 했던 것이다. 며칠 후 억수로 쏟아지던 장맛비가 뚝 끊고 맑은 하늘에 해가 째듯이 떴다. 소서구 오두막마을에도 따스한 아침해살이 비췄다. 상순과 명옥은 일을 하러 가는척하면서 호미를 들고 문밖에 나섰다. 영자는 열두 살 밖에 안 되는 고모 금옥의 잔등에 업혀 아빠와 엄마를 빤히 쳐다보았다. “영자야, 아빠와 엄마가 일하러 먼데 갔다가 인차 온다. 고모와 할머니 말을 잘 들어라. 응?” 영자는 머리를 끄덕이다가 고사리 손을 내밀면서 흑흑 흐느껴 울었다. 상순은 우는 영자를 끌어안고 볼에 뽀뽀를 해주었다. “영자야, 아빠 낯에 뽀뽀.” 영자는 울음을 그치고 아빠의 얼굴에 뽀뽀를 했다. 명옥이 얼굴을 들이대자 엄마의 낯에도 뽀뽀를 했다. 상순과 명옥은 어른들에게 인사하고 죽순과 함께 길을 떠났다. 그들은 부르하통하 통나무다리를 건너 진수해 시내에 들어가 곧추 남쪽 산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 기차역으로 나갔다. 일본 놈들이 게다짝을 신고 딸까닥딸까닥 자그마한 역 대합실을 휩쓸었다. 요염하게 치장한 일본 년들이 비단화복을 입고 엉덩이를 빼뚤거리면서 종종 걸음 쳐 개찰구 쪽으로 나가고 있었다. 온 세상은 모두 일본 놈들의 세상으로 된 듯 했다. 그들이 기차표를 떼서 들고 개찰구로 나가 홈에 들어섰을 때였다. 일본 헌병들과 기생 년들이 죽 늘어서서 기차가 달려오는 서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기차가 뽕- 고동을 울리면서 서쪽으로부터 천천히 들어섰다. 기차가 홈에 들어서자 일본 기생 년들이 고약딱지 기대를 흔들면서 “빤짜이!(만세!)” “빤짜이!(만세!)” 하고 외쳤다. 기차가 멈춰 섰다. 차문이 쭉 열리더니 검은 테 안경을 건 일본 장교가 하얀 장갑을 낀 손으로 군도자루를 부여잡고 거들먹거리면서 기차에서 내렸다. 일본 기생 년들이 앞장서 꽃다발을 장교의 목에 걸어주었다. 일본 헌병들이 경례를 착 붙이고 송장처럼 까딱하지 않고 못 박힌 듯이 서있었다. 일본 장교는 안경 밑의 눈깔을 번뜩거리더니 하얀 장갑을 낀 왼손을 들어 답례하면서 개찰구 쪽으로 나갔다. 상순은 그 장교 놈이 퍽 눈에 익었다. “아니, 저 놈은 한길수의 아들 한철주 놈이 아닌가? 정말 동만으로 나왔어?” 상순은 그 놈을 힐끔 되돌아보다가 그 놈에게 들키기라도 할까봐 제꺽 머리를 돌렸다. 일본 군 놈들이 기차에서 다 내려가자 일본 사람들과 상순이네가 기차에 올라갔다. 자리를 찾아 앉은 후 죽순은 한숨을 후 내쉬면서 “에이, 학준도 영자 못잖게 어찌나 떼를 쓰는지 혼났어.”라고 했다. 기차는 칙 소리와 함께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덜거덕거리면서 동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죽순은 명옥의 큰고모이자 상순의 8촌 할머니 벌이 돼 인연이 깊었다. 죽순은 석은과 결혼한 날에 우스운 일이 있었다. 첫날밤에 불시에 신방에서 “사람 살려라!” 하고 고함소리 나더니 죽순이 정지로 달려 나왔다. 정지에서 자던 어른들은 모두 깜짝 놀라 등잔불을 켰다. “웬 일이냐?” 여럿은 모두 잠자리에서 일어나 어리둥절해 새 각시를 쳐다보면서 물었다. 죽순이 한다는 말은 유치하기로 그지없었다. “신랑이란 저게 건달이요.” “어째?” 시어머니 물으니 죽순의 말은 더 웃기는 소리. “글세 날 마구 만집니다. 내 속옷까지 마구 벗기려고 들지 않겠습둥? 우추사단 말입구마. 어찌 저런 건달과 살겠습둥? 본가 집에 돌아가겠구마.” 그 말에 모두들 배를 끌어안고 웃었다. “어유, 열여덟을 먹고서도 쯧쯧쯧.” “각시, 신랑 각시 사는 게 원래 그러는 법이요.” 시어미는 며느리애기 귀에 대고 뭐라고 여쭈고 방에 억지로 잔등을 밀어 넣었다. 그는 방에 밀리어 들어가면서도 “세상에 별난 법이 다 있다. 오늘 밤에 다시 그래봐라. 내 막 물어놓겠다.” 하고 두덜거렸다. 그 바람에 석은은 사람들을 웃길까봐 그날 밤에 각시를 더 다치지도 못했다. 그러나 며칠 후 본가집에 갔다가 친정어머니에게서 설득을 받고서야 죽순은 신랑이 하는대로 억지로 수긍했다고 한다. 그들이 탄 기차는 온 하루 밤낮을 달려서야 어두운 밤에 우시장역에 이르렀다. 그런데 고향의 이전 우시장이 아니었다. 역 대합실 꼭대기에는 고약딱지 같은 일본 기발이 바람에 펄럭이고 철갑모를 쓴 일본 헌병들이 총칼을 부여잡고 개찰구와 홈에 촘촘이 늘어섰다. 손님들은 포로병들처럼 그자들의 쏘아보는 눈총을 받으면서 개찰구 쪽으로 나가야만 했다. 죽순이네가 개찰구로 나가려는데 일본 헌병이 총창 끝으로 막았다. “도꼬까라 끼다까?(어데서 왔는가?)” 그러자 죽순이가 “만슈고꾸까라 끼마시다(만주국에서 왔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일본 헌병이 꽥꽥거리자 헌병 분대장이 다가와 음흉한 눈길로 죽순과 상순이, 명옥의 아래위를 훑어보더니 물었다. “메이센니 끼데 나니오 신다이까?(명천에 와서 뭘 하려고?” 죽순은 일본 말로 줄줄 대답했다. “교리에 있데 오지상 또 오까상오 미요우(고향에 가서 아빠와 엄마를 보려고요.)” 이번에는 헌병 분대장이 상순의 밀짚모자를 벗겨 땅바닥에 던지면서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어깨를 꽉 쥐여보면서 물었다. “아나따와 나니오 스루 히도까?(넌 뭘 하는 사람이냐?)” 분명 총이나 어깨에 멨나 어깨를 만져보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상순은 시끄러워서 밀짚모자를 주어 쓰고 눈을 부릅뜨며 조선말로 대구했다. “에이 씨, 제 고향으로 가는데 시끄럽게 무슨 개소리냐?” 그 말귀를 알아들은 일본 헌병 분대장은 상순의 귀쌈을 찰싹 치면서 고함쳤다. “빠까요로! ‘개소리’? 나니? 빠까모노(멍청이같은 놈! 개소리? 뭣이?) 제길 할!” 상순은 손으로 볼을 만지면서 도끼눈을 부릅뜨고 대들었다. “고향을 찾아왔는데 무슨 상관이야?” 옆에서 바빠 맞은 죽순이가 옆구리를 치면서 말리였다. 그러나 그때는 늦었다. 일본 헌병은 호각을 불어댔다. 그러자 헌병 대여섯이 달려오더니 분대장이 뭐라고 꽥꽥 고함치자 상순을 붙잡고 초소 쪽으로 끌고 갔다. 명옥은 애가 타서 발을 동동 굴렀다. “저걸 어쩌오?” 그래도 일본 말도 알고 융통성이 있는 죽순이가 여러 번 고향나들이를 해보았기에 머리가 잘 돌았다. 그는 제꺽 머리에서 은비녀를 뽑아 일본 헌병에게 주면서 양해해달라고 했다. 일본 헌병 분대장은 은비녀를 쥐고 매만지면서 눈을 가슴츠레 뜨고 여겨보더니 입에서 이런 소리가 구렁이처럼 기어 나왔다. “요로씨이(좋아), 쯔기니 마다 고우 시레바 신데시마우(다음에 또 이랬다간 죽고말아).” 헌병 분대장은 아래 헌병에게 뭐라고 귀속 말을 했다. 이윽고 맞아서 얼굴이 퍼렇게 멍이 든 상순이가 욕지거리를 하면서 초소에서 풀려나왔다. 죽순과 명옥은 상순의 양팔을 끼고 개찰구를 빠져나갔다. 그들은 일본 놈들이 쫓아오기라도 할까봐 뒤를 흘끔흘끔 되돌아보면서 역에서 멀리 달아났다. 한참 달려 역에서 멀리 벗어난 후 명옥은 숨이 차 헐떡거리면서 꾸중했다. “당신 때문에 고모가 은비녀를 일본 놈에게 줬소.” 그러자 상순은 명옥을 흘겨보면서 “내 뭘 잘못했다고 은비녀까지 줬소?”라고 하더니 한숨을 길게 쉬었다. (아, 어쩌면 내 고향이 이 지경이 됐는가? 일본 놈들이 뭘 믿고 우리 조선을 다 먹어치우고서도 모자라 만주국에까지 쫓아가서 우리를 못살게 군단 말인가?) 그는 생각할수록 속에서 분통이 터져 참기 어려워 길가에 침만 퉤퉤 뱉었다. 그들은 마른 누룽지를 길가의 내 물에 퍼지워 먹으면서 온 종일 산을 넘고 들을 지나 끝내 어슬녘에야 고향 운주동에 이르렀다. 명옥은 열여덟 살에 고향을 떠났기에 어둠속에서도 고향 집을 인차 찾을 수 있었다. 죽순이 목조 팔간 집 울안에 들어서기 바쁘게 소리쳤다. “엄마! 아버지!” 명옥도 고함쳤다. “할머니! 할아버지!” 죽순과 명옥은 소리치면서 엎어질 상으로 집안에 달려 들어갔다. 집안에 등잔불이 켜졌다. 뒤이어 집안에서 자그마한 그림자가 나오더니 “아니, 이게 웬 일이냐? 죽순과 명옥이가 오다니? 쯧쯧!”라고 하며 반겨 맞았다. 활발한 죽순은 뒤를 가리키면서 종알거렸다. “저 뒤에 누가 왔나 보오. 명옥이 신랑도 왔습구마." 그제야 최구장과 성단은 반갑게 마주 나왔다. “오, 그래, 우리 큰사람 왔구먼. 어서 들어오게나.” 상순은 성큼 앞으로 나가면서 “할아버지, 할머니, 절을 받읍소.”라고 하면서 태산이 무너지듯이 넓적 엎드려 절을 올렸다. 최구장은 그의 절을 황망히 받으면서 혀를 끌끌 찼다. “쯧쯧, 급하기도. 집에 들어가 인사해도 늦지 않아. 쯧쯧, 어서 들어가 앉게나.” “예.” 그제야 상순은 일어나 방으로 들어갔다. 최구장은 등잔불을 빌어 상순의 얼굴과 몸을 두루 살펴보더니 무릎을 탁 쳤다. “에이, 앞으로 큰일을 할 미남이로구나.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똑 떼 닮았구나.” 그들이 밤중에 기약 없이 들어서자 고방에서 자던 근형(봉인)과 새 각시 리새단도 깨어나 위방에서 나와 서로 인사했다. “명옥아, 갈라질 때는 그렇게 싸우면서 갈라졌지만 네가 떠나가니 정말 보고 싶더라.” 근형(봉인)이가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자 명옥도 뜨거운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우리 네댓 살에 엄마를 잃고 얼마나 고생하면서 자랐소? 나도 오빠를 두고 혼자 중국에 간 후에 오빠 생각이 자주 나서 혼자 울었소.” 둘은 다 통곡 쳤다. 최구장과 할머니도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엄마 잃고 고생스레 자란 오누이를 바라보면서 한숨을 길게 쉬었다. 최구장은 죽순에게서 그간 상순이가 지방의 지주 지학사와 송사놀음을 해서 이긴 이야기도 들었기에 그가 똑똑하고 강한 사내대장부라는것을 알고 있는 터였다. 허나 너무 짝지는 것 같아 좀 근심스러웠다. 그들은 오랜 만에 한자리에 모여 앉아 저녁식사를 하면서 밤중까지 그간 있은 일을 얘기했다. 5. 쑥밭이 된 고향 이튿날 이른 아침 날씨는 유난히 좋았다. 치마봉과 기운봉 쪽을 내려다보아도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날이었다. 비가 올 것 같으면 기운봉 쪽이 시꺼멓게 흐리면서 번개가 산중턱을 치군 하였던 것이다. 근형은 밥도 먹지 않고 초신을 신고 바깥에 나가면서 집안의 할아버지에게 말했다. “할아버지, 내 저 명옥과 매부를 데리고 엄마 산소에 피뜩 갔다가 오겠습꾸마.” “그래, 산에 갔다가 가마골에 들려 계순을 데려오라.” 최구장은 수염을 슬슬 만지면서 부탁했다. “예.” 근형은 새단과 함께 명옥과 상순을 데리고 선산으로 떠났다. 한참 후 예전처럼 돌로 토성을 한 성안으로 들어가자 거기에 그간 잘 모신 산소가 나타났다. 근형은 산소에 달려가 꿇어앉더니 “엄마, 명옥과 매부 엄마를 보러 왔습구마.”라고 하며 왕왕 울었다. 명옥도 꿇어앉아 엉엉 울었다. “엄마, 엄마, 어쩜 우리 오누이를 두고 그렇게 일찍이 돌아갔습둥? 엉엉, 흐흐흑. 엄마- 엉엉.” 그들은 한참이나 선산이 떠나가게 울었다. 상순은 “처남, 그만 우오. 가시엄마에게 인사를 해야겠소.” 그제야 깨달았는지애들처럼 울던 근형과 명옥은 일어나 옷깃을 여미고 산소 앞에 죽 늘어섰다. 근형은 새단과 함께 먼저 절을 올렸다. “엄마, 명옥이 신랑을 데리고 와서 인사를 드립구마.” 상순과 명옥이 산소에 큰절을 세 번 씩 세 번 올렸다. 근형은 아주 흡족한 표정으로 매부를 바라보고 나서 명옥한테 얼굴을 돌렸다. “명옥아, 기억나니? 너는 이전에 엄마가 세상 떴을 때 네 살 밖에 안 됐다.” “양.” 명옥은 머리를 끄덕이더니 울면서 말했다. “그런데 셈이 못 든 난는 숱한 사람이 모였다고 벽 구석에 세워놓은 좁쌀가마니우에서 뚝 뛰어내리고 뚝 뛰어내리곤 했다.” 명옥은 땅을 치면서 점점 더 섧게 울었다. “아이고, 엄마, 그때 엄마가 세상을 뜬 것도 모르고 이 철부지는 사람이 많이 오니까 좋다고 그렇게 뛰놀았지 않았겠습둥. 엉, 엉. 그때 다섯 살인 오라비는 셈이 들어서 엄마 세상떴다고 엉엉 우는데 말이요. 에이, 내가 철부지였지. 엉엉.” 그들은 한창 울다가 떠나오면서 다 함께 큰절을 아홉 번이나 올리었다. “엄마, 이 딸이 이후에 오라비네와 함께 또 엄마를 찾아오겠습니다. 그때까지 편안히 계십시오.” 명옥은 산성을 떠나면서 자꾸 엄마의 산소를 돌아다보았다. 상순과 명옥은 집으로 돌아가고 근형은 가마골로, 새단은 불붙이에 들려서 명옥 부부와 죽순이 왔다고 알리러 갔다. 상순은 운주동에 돌아가자마자 어려서 놀던 운주강 강가에 가서 세수를 하려고 스적스적 걸어 나갔다. 전날 밤에는 발견하지 못했는데 이전의 고향이 아니었다. 이전에는 이 최구장 어른네 마당이 아주 널찍했고 강냉이와 감자를 심었다. 그런데 지금은 마당이 한 푼도 되나마나 하고 그 손바닥만한 마당마저 곡식이나 남새는 한포기도 볼 수 없었고 적송을 촘촘히 심어놓았다. 십여 년 살이 적송들이 촘촘히 들어앉아 수림을 방불케 하였고 그 속에 듬성듬성 배추와 파가 자라나 있었다. 온 마을을 둘러보니 몽땅 수림 속에 파묻혀있었다. (허참, 밭에다 곡식을 심지 않고 나무를 심어 팔면 더 잘 살까? 입에 풀칠도 못하면서 나무를 심다니?) 상순은 운주강에 가서 개울물에 대충 세수를 하고 집으로 들어왔다. 그는 가시할아버지인 최구장에게 물어보았다. “어째 집 마당에 나무를 심었습니까? 곡식이나 남새를 심지 않고?” 최구장은 한숨을 천정이 날아나게 후- 내쉬었다. “누가 곡식을 심어먹으면 좋은 줄 몰라? 거 일본 놈들이 제 욕심을 차려서 밭에 곡식을 심지 못하게 하고 나무를 심으라고 강박했지. 자네 할아버지도 그래서 고향을 버리고 만주에 간 거야.” 그 말에 상순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럼 내 고향의 우리 집 자리도 나무가 들어섰겠구먼요.” 최구장은 머리를 무겁게 끄덕였다. “아니, 이럴 수가 있습니까? 내 고향집에 가보겠습니다.” 최구장은 담배 물 주리를 툭툭 재떨이에 털더니 엉거주춤 일어나더니 상순을 데리고 바깥에 나섰다. 상순은 최구장을 따라 개울둑을 따라 아래쪽으로 내려갔다. 어디라 없이 밭은 보이지 않고 나무와 소나무가 우거졌다. 최구장은 집터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산을 등지고 적송이 꽉 우거진 곳으로 찾아가 발걸음을 멈추었다. “이곳이 바로 자네 아버지 기준이가 살던 집 자릴세.” 그 말에 상순은 적송 밭 속으로 걸어 다니면서 혹시 아버지랑 엄마랑 살던 흔적이라도 있겠는가고 찾아보았다. 그러나 도자기그릇 하나 없이 반반했다. 한참 눈 빗질해 겨우 나무 밭 속 평평한 곳에 재가 섞인 흙무지가 있었다. 그 흙무지에 쑥이 한 발씩이나 자라 집터라기보다 쓸쓸한 둔덕을 방불케 했다. (아, 이것이 바로 내 고향 집이란 말인가?) 상순은 억이 막혀 쑥이 한발씩이나 자란 쑥밭과 나무 밭이 된 집터에서 눈길을 떼 최구장에게 얼굴을 돌렸다. 최구장은 머리를 끄덕이며 한숨을 후 내쉬었다. 상순은 쭈크리고 앉아 손으로 재를 한 움큼 쥐고 일어나 후루루 날려 보냈다. “돌아가기요. 일본 놈들의 성화에 점점 살기 힘드네. 20년 전부터 밭이란 밭은 몽땅 나무를 심게 하고 쌀 한 되라도 줘? 저 산성 저쪽으로 해서 수림 속에 황무지를 개간하구 감자라도 심으면 꽤나 보탬이 되겠는데. 헤이, 까딱 다치지 못하게 하네. 한길수가란 놈이 일본 놈들의 말대로 나무를 심으라고 생 지랄을 했소. 별수 있소. 나무를 심으니 뭘 먹고 살겠소? 이전에 차린 서당방도 못 차리게 한지 오래오. 애들의 학비라도 받아서 메밀이라도 사 보탬을 했는데.  허참, 이젠 정말 살기 어렵게 되였소. 일본말만 배우고 말해야 되구. 조선말을 하면 큰 경을 치고 마오. 제 민족 말도 못하고 제 민족어도 배우지 못한다니 어데 될 말이요. 나는 구장 자리도 빼앗겼소. 내 대신 응삼이란 자가 구장이 돼서 개 잡은 포수처럼 우쭐하오. 저 강 건너 만춘집 김구장도 구장자리를 빼앗기고 대신 영팔이 구장을 하오.” 최구장은 한숨을 푸 내쉬더니 허무한 웃음을 지었다. 상순은 운주강 둑으로 해서 집에 돌아오면서도 자꾸 고향집 쪽을 돌아다보고 한숨을 지었다. 상순은 주먹을 부르쥐면서 “나도 어려서부터 아버지에게서 한길수란 놈의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그 악질지주가 지금도 영월동에 있습둥?”라고 물었다. “아니, 지금 우시장에 나가 자위대 대대장이 돼 갖은 악랄한 짓을 다 하네. 그 놈들의 성화에 어데 살겠나?” 상순은 걸음을 멈추고 “한길수 아들 한철주 놈이 지금 만주에서 일본 놈들을 등에 업고 일본 놈들을 미화하느라고 연설하러 다니는 거 길림에서 봤습구마.” 라고 했다. 최구장은 땅이 꺼지게 한숨을 쉬었다. “참말로 한심한 세월이구먼. 그 놈 부자 놈들이 우리 고향 마을을 일본 놈들에게 팔아먹더니. 에이, 이젠 중국 만주국마저 짓밟는 판이구나.” 상순과 최구장은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어느덧 최구장에 팔간 집 앞에 이르렀다. 그때 안에서 계순이 어린애를 업은 채 뛰어나오면서 “아버지, 편안히 계셨습둥?” 하고 허리 굽혀 인사를 올렸다. 그녀는 상순을 보더니 “아유, 조카사위는 정말 끌날같은 미남이구먼.”라고 하면서 반갑게 인사했다. 상순이가 어리벙벙해하자 옆에 서 있던 최구장이 인사시켰다. “ 막내딸 계순이네.” 상순은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최구장은 막내딸 계순의 잔등에서 외손자 녀석을 쑥 뽑아내 안고 뽀뽀를 하였다. “그래 어디 보자. 우리 홍기야.” “외할아버지, 꿀꿀이도 왔습구마.” 최구장은 방에 들어가 앉아 한 팔에 하나씩 안고 기뻐 어쩔 줄 몰라 했다. 명옥은 죄꼬만 동생들을 귀여워 머리를 쓰다듬었다. “에이, 이렇게 예쁜 애들을 이름을 별나게 꿀꿀이라고 지었소?” 계순은 “돼지처럼 잘 먹고 앓지 말고 자라라고 아버지가 그렇게 지었단다.”라고 명옥에게 알려주었다. 그때 최구장의 노친도 외손자와 외손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핥을 상했다. “아이고, 내 외손자야,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몰라.” 성단은 정지를 내려다보면서 계순에게 “그래, 정서방은 왜 오지 않았니?”라고 물었다. 계순은 걀쭉한 얼굴로 어머니를 바라보면서 입을 비쭉거렸다. “언니와 조카들이 왔을 때 같이 왔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런데 일본 면장이 구장을 데리고 마을마다 돌아다니면서 가마골의 저수지 둑을 든든히 막아야 한다고 떠들더니 끌고 갔어요.” “에이, 일본 사람들이 뭘 안다고 그래? 장마가 오면 둑의 물을 빼서 줄여야 하지 막아 물을 가두면 무슨 사고라도 치자고 그런대?” 최구장의 상서롭지 못한 말을 듣자 계순은 아버지가 더 말하지 못하게 했다. “아버지, 그만 하세요. 가뜩이나 애 아버지를 두고 와서 근심스러운데 불길한 말씀을 하지 마세요. 예?” 최구장은 외손자를 안고 뽀뽀를 하면서 “응, 그래. 말하지 않으마.”라고 했다. 이때 바깥의 검둥개가 왕왕 짓는 소리에 뒤이어 왁작 떠드는 소리가 들리었다. 약삭빠른 근형이 달려 들어오더니 헐떡거리면서 “할아버지, 삼촌과 사촌 댁들이 왔습구마.” 라고 했다. 최구장은 엉거주춤 일어서더니 마루에 나갔다. 경인과 어금은 맏아들 근덕(봉순)과 둘째아들 근원, 딸 해옥과 막내아들 근환까지 데리고 왔다. 상순이 보니 큰 매형 경인은 긴 외태머리 대신 하이칼라를 하고 있어 더 멋져보였다. 모두들 인사를 마치고 자리를 정해 앉았다. 그들이 한창 그간 회포를 털어놓으면서 이야기 꽃을 피울 때었다. 바깥이 불시에 새까맣게 어두워지더니 먼 곳에서 우르릉 꽝 하는 우레 소리가 울렸다. 명옥이가 습관대로 문밖에 나가 마루에 서서 동쪽의 기운봉 쪽을 내려다보았다. 기운봉 산중턱에서 번개가 번쩍하더니 우르릉 꽝꽝 우레 소리가 울렸다. 마당에 열콩알만한 비방울이 마구 떨어졌다. 뒤이어 쏴- 소리와 함께 마당의 적송 밭과 들판의 나무 밭에, 그 어데라 없이 대 줄기 같은 소낙비가 억수로 쏟아졌다. 추녀 끝에서 실 폭포를 방불케 빗물이 쏴 쏟아져 마당의 어지러운 발자국을 메우면서 마당 밖으로 흘러내려갔다. 최구장은 한숨을 후- 내쉬더니 “에이, 너희들이 정말 딱 맞춰 왔다. 좀 늦었으면 소낙비를 맞아 물병아리로 될 번했구나.”라고 했다. 부모자식들이 모인 집안은 큰 잔치 집을 방불케 했다. 웃고 떠들썩하면서 장밤이야기꽃을 피웠다. 특히나 성단과 죽순, 계순 그리고 명옥 등은 온 밤 이야기를 하다가 소낙비 내리는 바깥이 훤해져올 때에야 잠간 눈을 붙였다. 6. 고향의 버섯과 딸기 온밤 내리던 소낙비가 이튿날 오전 9시쯤 되여 아이들의 장난을 하듯이 믿기 어렵게 뚝 멎었다. 그때까지 최구장의 집안은 큰 잔치 집 같이 떠들썩했다. 아침 상을 물리자 경인과 경민, 경욱 네는 집에 집짐승도 있고 하여 집을 비울 수 없어 애들을 데리고 먼저 돌아갔다. 그러나 어금은 오라비 상순이 왔기에 하루만 더 묵기로 했다. 그는 상순과 만주에 간 부모형제와 친척들의 형편을 묻기도 하고 이 말 저 말 하면서 놀았다. 계순은 애를 아버지께 맡겨놓고 부엌에 내려가 버들바구니를 둬 개 얻어들고 명옥을 불렀다. “얘, 우리 엄마와 함께 저 운주강가 버드나무 숲에 버섯을 따러 가지 않겠니?” 명옥은 상순의 눈치를 보면서 “그게 좋을 것 같소. 할머니 함께 가깁소.”라고 하며 짚신을 신으러 마루에 나갔다. 이전에도 성단은 막내딸 계순과 맏손녀 명옥을 데리고 기운봉과 운주강가 버드나무숲에 가서 버섯을 따다가 보태군 했다. 이번에도 그는 막내딸의 말을 듣고 바구니를 들고 따라나섰다. 죽순은 “나는 홀랑 빼놓고 가겠습둥?” 하고 눈을 곱게 흘기었다. 그 말에 성단은 “넌 집에서 점심채비나 해라. 우리가 버섯을 따오면 버섯채나 볶아 놓고.” 라고 했다. 성단은 막내딸과 맏손녀를 데리고 운주강가로 갔다. 비온 뒤 해볕이 내리 쬐자 바람에 춤추는 버드나무아래에 하얀 버드나무버섯이 뿌죽 뿌죽 자라나 있었다. 계순은 원래 활발한 여자인지라 애 엄마가 됐는데도 엄마 앞에서는 항상 어린애처럼 뛰어다니면서 놀았다. 그녀는 버섯을 하나 뜯어서는 바구니 안에 넣으면서 “또 하나 흥흥!”하고 말하며 코 노래까지 흥얼흥얼 불렀다. 성단은 버섯을 따면서 명옥을 보고 “얘, 너 신랑이 생기기는 잘 생겼는데 밸 때기는 무섭다던데. 어떻니? 싸우지는 않고 사니?” 하고 넌지시 물어보았다. 원래 할머니를 어머니처럼 믿는 명옥이는 속이는 것이 없이 다 말했다. “에이, 잘나면 낯을 뜯어서 밥을 해먹겠소? 밸 때기는 시아버지보다도 더 유다릅구마. 한번은 아주머니가 소를 쓴다고 말한다고 작두날을 뽑아들고 씽 달려가더니 소 궁둥이를 탁 내리찍지 않았겠소. 헤이고, 농사꾼이 소를 믿고 농사를 짓는데 그 황소가 죽으면 한해농사를 어찝니까? 그래서 시아버지는 겨우 분을 참고 쩍 벌어져 피가 줄줄 흐르는 소 궁둥이에 재를 바르고 조상들의 밀 방약이라면서 대야에 눈 오줌을 쳐주었댔습니다. 그래 겨우 그 황소를 살려내서 지난해 농사를 졌습구마.” 순금은 한숨을 호- 내쉬었다. 계순은 그 끔찍스런 소리에 버섯을 뜯어 쥔 채 명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얘, 네 팔자도 불쌍하구나. 그렇게 밸 때기 더러운 신랑을 만나서 이 다음 어떻게 마음고생을 하겠니?” 그 말에 명옥은 한숨을 호 내쉬면서 할머니와 막내고모를 바라보며 뒷말을 이었다. “한번이면 모르지. 또 한 번은 동네 사람이 자기를 욕했다고 집 마당에 있는 화로 불을 들어 남의 지붕에 훌 올리던져 불이 달릴 번 한적이 다 있소.” “에이, 저 둘째오빠가 왜 저런 신랑한테 너를 소개했을까? 자기 처남이면 성질이랑 잘 알았겠는데 말이야.” 계순이가 경인까지 거들어 도도거리자 성단은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 “얘, 알지도 못하면서 둘째오빠를 나무랄게 뭐냐? 네 둘째오빠는 저 명옥이 네 살에 엄마를 잃고 고생스레 자랐다고 처남에게 시집보내면 잘 살겠는가고 중매를 섰다. 괜히 이러쿵저러쿵 하지 말라. 명옥이도 우리 앞에서는 일없는데 남들 앞에서 절대 신랑의 허물을 하지 말라. 신랑을 잘 받들어야 복을 받는다. 에이고, 이 답답한 것들아, 알겠니?” 계순과 명옥은 숨이 한 줌만 해서 찍소리 못했다. “아이유, 이 빨간 딸기를! 명옥아, 빨리 와서 딸기를 따가자.” “딸기?” 명옥과 성단이 달려가 보니 버드나무숲과 비술나무숲이 마구 어우러진 가운데 빨간 딸기가 새빨갛게 다닥다닥 달려있었다. 그들은 한참이나 딸기를 뜯어 버드나무바구니에 무드기 담겼다. 그런데 계순은 딸기를 뜯으면서 딸기를 자꾸 쥐여 입에 넣고 오물오물 먹어댔다. “아이유, 시쿨어. 어쩜 이렇게 맛있을까?” 명옥도 딸기를 씹으면서 시쿨어 상을 찡그렸다. “아재네 가마골엔 딸기 없소?”라고 물었다. 계순의 걀쭉한 얼굴에는 대번에 어두운 그림자가 흘러지나갔다. “에이고, 딸기 있으면 우리를 먹으라고 할 것 같냐? 그 일본 놈의 앞잡이 구장 놈이 버섯이고 딸기고 따오면 집까지 찾아와서 가마골에서 난 버섯이고 딸기고 다 자기한테 바쳐야 한다면서 뺏아 가지 않겠니?” 성단은 한숨을 후- 내쉬더니 말했다. “얘, 범이 자기 흉을 하면 온다고 일본 놈들의 말을 하지 말라. 운주동에서도 일본 놈들이 알면 버섯과 딸기를 따지 못하게 하고 다 빼앗아간다. 그 새끼들은 우리가 조선 말을 해도 안 되고 이름마저 조선이름을 달면 안 되는데다가 일본 사람들의 이름으로 창씨 개명해야 한다고 한다. 명옥아, 너네 만주는 좀 낫니?”       “우리 거기는 산골이 돼서 그런지 모르겠습구마. 전번에 온 마을에서 일본 파출소에 협화회라는지 뭔지 들었습구마. 그래서 그런지  일본 사람들이 우리 마을에 와서는 그렇게 행패를 부리지 않습꾸마.” 성단은 버섯을 따서 바구니에 넣으면서 “글쎄, 네 큰고모네 작년에 와서 하는 말이 만주국에 황무지도 많고 일본 놈들도 덜 성화를 부린다고 하더라. 여기서 어디 일본 놈들의 성화에 살겠니? 산나물도 못 캐먹게 하니 어떻게 사니? 우리도 만주국에 가 살아야 할 것 같아.” 라고 말했다. 계순은 엄마 팔을 붙잡고 흔들었다. “엄마, 그래 이 막내딸은 가마골에 버리고 혼자 만주에 갈 예산입니까? 나도 정서방을 데리고 만주국에 가겠습니다. 언니와 명옥이도 거기서 된장국에 기장밥을 먹고 잘 산다던데 내 무슨 저 가마골에서 일본 놈들의 눈치 밥을 먹으면서 살겠소?”  “그래, 내 어찌 막내딸을 버리고 혼자 잘 살겠다고 가겠니? 우리 다 만주국에 가서 잘 살자.” 성단은 흐릿한 하늘을 쳐다보더니 이렇게 뒷말을 이었다. “얼른 버섯이나 좀 더 뜯어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자. 저 기운봉 쪽을 봐라. 어둑시그레 해나는 게 또 비 오겠는 모양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입을 다물고 한참 버섯을 더 뜯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들어섰다. 명옥은 할머니를 보고 “우리 언제 비가 오지 않는 날에 이전에처럼 막내고모와 함께 기운봉에 돌 버섯을 따러 가지 않겠습둥?” 하고 물었다. 계순은 어린애처럼 서적을 피우면서 “엄마, 함께 가깁소. 예?” 하고 말하면서 걀쭉한 얼굴을 갸우뚱했다. 성단은 “그래. 해만 나면 가자. 돌 버섯을 캐다가 물에 퍼지어 데쳐서 기밀가루에 반죽해 먹으면 얼마나 쌀 보탬이 된다고.” 하고 선선히 응낙했다. 계순은 점점 흐려오는 하늘을 바라보면서 “에이유, 그런데 이 놈 하늘이 맑은 날이 있을 것 같지 않아.”라고 하며 입술을 쫑긋해보였다. 이때 갑자기 말발굽소리가 났다. 그들이 머리를 들어 보니 일본 군도를 차고 말을 탄 한 일본 놈이 채찍을 들고 이쪽을 살피고 있었다. “아이유, 큰일 났다. 삼림지킴 야마모도소장이다. 어서 숨자.” 성단의 황급한 말에 계순과 명옥은 숨이 한줌만 해서 버드나무숲속에 납작 엎드렸다. 야마모도는 말에서 내려 채찍으로 버드나무숲을 헤치면서 이쪽으로 슬금슬금 다가왔다. 그대로 엎드려 있으면 야마모도에게 잡힐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였다. 성단은 달아나자고 버드나무 숲속 쪽으로 손짓했다. 계순과 명옥은 바구니를 안고 허리를 굽힌 채 살금살금 버드나무숲속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겁이나 여기저기 살피던 계순이 그만 일본 놈의 눈에 딱 띠였다. “난노 온나다까?(웬 계집인가?) 고이!(오라!)” 야마모도가 채찍을 쳐들고 흔들면서 오라고 을러멨다. 당황해난 계순은 다리야 날 살리라고 버드나무숲속을 헤치고 줄행랑을 놓았다. 명옥과 순금이도 선불을 맞은 노루처럼 버드나무 숲속으로 달려 들어갔다. 야마모도는 버드나무 숲속에서 그들 셋과 한식경이나 숨바꼭질 하였지만 끝내 붙잡지 못했다. 이때 하늘에 먹장구름이 뒤덮이고 번개가 번쩍이더니 우레 소리가 하늘땅을 진동했다. 딸기 알 같은 비방울이 툭, 툭, 툭 떨어졌다. 야마모도소장은 재수 없다고 두덜거리면서 말에 올라 채찍질을 하더니 어디로인가 달려가 버렸다. 소낙비가 억수로 쏟아질 때에야 여자 셋은 물병아리로 된 채 버섯과 딸기를 무드기 담은 바구니 셋을 들고 웃고 떠들면서 집으로 달려갔다. 하늘에 큰 구멍이 났는지 연 일주일이나 소낙비가 억수로 쏟아졌다. 그새 계순은 마침 잘 됐다고 본가 집에 눌러앉아 둘째오빠 경인이네 부부와 언니 죽순이네 부부 그리고 명옥 부부와 함께 웃고 떠들면서 끝없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계순은 무슨 할 말이 어쩌면 그렇게도 많았을까? 그는 조왕간 쪽으로 앉아 죽순을 보고 물었다. “언니, 왜 복금이하구 양금이, 어금이, 학준이를 몽땅 데리고 오지 않았소? 그 애들이 영 크겠는데. 학준은 이젠 저 봉순만큼 크지 않소?" 죽순은 눈을 곡베 흘기였다. “얘를 봐라. 이젠 다 큰 봉순을 자꾸 애명을 부르지 말구 근덕이라고 불러라. 열 살 밖에 안 되는 학준을 데리고 어떻게 여기까지 오겠니? 우리 어른들이 오는 것도 기차 길이 다 끊어나서 혼났다.” 그러자 계순은 상큼한 코를 발름거리면서 “기차를 타고 오는데 무슨 일이 있소?”라고 말했다. 죽순은 상순과 명옥을 번갈아 보면서 뒷말을 이었다.  “얘, 우시장에서부터 여기까지 오는데 얼마나 고생했는지 아니? 학준을 데리고 왔더라면 당날로 밤중에라도 들어서지 못했을 게야. 이담 너네도 그 잘난 가마골에서 살지 말구 만주국에 들어오라. 그러면 조카와 저 명옥의 딸애 영자도 보구 우리 애들도 봐라. 그러지 않아도 학준이랑 복금이랑 어찌나 이모를 보고 싶다면서 외가 집으로 가자고 떼를 쓰는지 겨우 떼놓고 왔다.” 그제야 계순은 해시시 웃으면서 짙은 눈썹아래 까만 쌍까풀눈에 활기를 띠였다. 그 눈에는 앞날의 행복한 생활에 대한 갈망과 희망의 빛이 반짝였다. “야, 우리도 언제 언니와 명옥을 따라 땅도 넓고 장국에 조이 밥을 먹는 만주국에 가서 발 펴고 살까? 언니와 아저씨네 좀 우리 여기 있는 본가집식구들이 다 그곳에 가게 자리를 봐두오. 이곳에서는 일본 놈들의 등살에 어디 살겠소? 정말 신물이 날 지경이오. 이렇게 비 오는 날에 우리 정서방을 글쎄 저수지 둑막이에 내모니 어찝둥?” 이때 성단이 휘어든 허리를 펴고 바깥을 내다보더니 일허게 말했다.  “계순아, 날이 차츰 개는구나. 출가 집 외인이라고 어서 집에 돌아가라. 네가 온지도 이젠 일주일이나 된다. 정서방이 기다리겠다.” 계순은 쌍까풀 깜장눈을 곱게 흘기면서 “엄마는 어쩌다 언니와 명옥이네 왔는데 더 놀면 뭐라오? 정서방두 이제 올지 누가 아오? 아유, 나는 가기 싫다.”라고 하면서 가마 목에 드러누웠다. 애들도 어미를 따라 가마 목에 활 드러누우면서 “아이고, 가기 싫어라. 외가 집에서 더 놀자.”라고 말하며 떼를 썼다. 그 모양을 보고 최구장과 경인이 윗방에서 “허허허.” 하고 웃었다. 최구장은 위방에서 경인과 근형과 함께 상순과 마주앉아서 그 곳 형편을 이것저것 알아보았다. “그래, 우리 맏이 네가 무고한가?” “예, 세 식구가 모두 남의 밭이나 붙이고 황무지를 얼마간 개간해서 입에 풀칠이나 합니다. 남의 건너 간에 들었는데 이젠 집도 새로 지어서 들었습구마." 최구장은 한시름 놓은 듯이 염소수염을 쓰다듬으면서 머리를 끄덕이었다. 이윽고 그는 제일 관심이 가는 일을 묻기 시작했다. “그래, 그 곳에서는 일본 사람들이 여기처럼 살판치지 않는가?” 상순은 담배를 말아서 입에 붙여 물고 길게 빨아들였다가 연기를 후 내보냈다. “천하의 까마귀는 다 검다고 우리 진수해의 일본 놈들이라고 우리를 살게 하겠습둥? 그 놈들은 중국 사람들과 우리 조선 사람들을 자꾸 이간을 놓습구마. 우리 조선 사람들은 2등공민이라면서 좁쌀을 한줌 먹게 하구 중국의 한족사람들은 3등공민이라면서 수수밥이나 옥수수떡을 먹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우리 마을에 와서 어찌나 사람들을 군대에 나가라고 강박하는지 혼났습니다. 그리고 양민이 되겠으면 협조회나 협파회에 들어야 한다고 강요했습니다. 우리 함흥촌에서는 구장이 시키는 대로 거진 협파회에 들었습구마. 그런 후부터 우리가 일본 사람들의 양민이 됐다고 그리 들볶지는 않습더구마.” 경인은 조용히 앉아 듣다가 상순에게 “여기서는 일본 놈들이 우리 아버지를 서당 방에서 조선 글을 배워주지 못하게 하고 일본글을 배워주라고 강박했네. 그래서 서당 방이 문을 닫고 말았네. 그곳에서는 어떤가?” 상순은 아는 대로 대답했다. “우리 곳이라고 에누리 있겠습니까? 난 소학교 문에도 가보지 못해서 잘 모르겠소만 학교에서 조선 애들이 일본 말을 하지 않고 조선말을 하면 목에 개패를 걸구 청소를 일주일동안 시킨답구마.” 그 말을 듣더니 경인은 최구장을 돌아보았다. “봅소. 어디를 가면 우리 고향과 다르겠습니까? 다 일본 놈들의 세상인데. 아버지가 자꾸 내 보고 처남네 함흥촌으로 가서 알아보라고 하지만 난 주춤주춤 하고 있소.” 최구장도 속이 타서 담배 물 주리 재를 재떨이에 툭툭 털더니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었다. “나도 오죽하면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따라 정든 고향 개성을 떠나서 이곳에까지 왔겠느냐? 사실 아버지 산소가 저 산성에 있고 할아버지 산소는 업동에 있는데 조상의 산소를 두고 멀리 만주에 간다는 것도 조상들에게 얼마나 죄를 짓는 일이냐. 그래서 지금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오.” 옆에서 듣던 근형이 끼어들었다. “증조부 산소를 파서 업고 함흥촌에 가지 뭐.” 최구장은 외까풀눈이 대번에 휘동그레서 근형을 바라보았다. “에끼, 이 놈아. 아버지는 파서 업고 간다고 하자. 그럼 업동에 있는 내 할아버지는 어쩌겠느냐? 개성에 있는 내 증조부와 고조부는 어찌 하겠느냐? 고조부의 아버지와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랑 다 대대로 개성에 산소가 있는데 그분들을 다 어떻게 파가지고 가겠느냐? 참 답답하고 한심하구 기막힌 일이 아니냐?" 머리가 잘 돌아가는 근형이었지만 그 말에는 어찌는 수가 없었다. 경인과 상순은 다 한숨을 푸푸 내쉬었다. 납덩이같이 무거운 침묵이 한창 흘렀다. 바늘이 구들바닥에 떨어져도 다 들릴 듯이 위방과 정주는 조용해졌다. 한참 후 상순이가 코마루가 시큼해나서 말했다. “우리 증조부도 좋고 고조부도 그렇고 다 저 운주동 산성 안에 있지 않습니까? 그 우에 조상들의 산소도 대대로 다 여기 명천에 있지 않습니까? 생각하면 조상들을 여기에 모셔 두고 살 길을 찾아 고향을 떠난 게 정말 마음이 아픕니다.” 이때 바깥이 왁작 떠들썩했다. 처음에는 애들이 바깥에서 놀거니 하였는데 아니었다. “문 열어! 이 놈들아!” 근형과 경인이가 내다보니 야마모도소장과 응삼 구장이 말을 타고 울 밖에서 고함치고 있었다. 그때 계순은 살구나무 위에서 살구를 뜯다가 질겁하여 살구를 담뿍 담은 바가지를 들고 살금살금 조심조심 내려왔다. 야마모도 소장 놈은 채찍으로 계순을 가리키더니 꽥꽥 고함쳤다. “고노 빠까아맛꼬 새끼! (이 멍청이계집년새끼!) 니기리모데! (붙잡아라!)” “하이(옛)!” 응삼은 말 잔등 우에서 길쭉한 말대가리를 조아리더니 훌쩍 뛰어내려 곧추 울안으로 덮쳐들어왔다. 계순이가 새된 비명을 지르면서 집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그러자 꿀꿀이가 왕 통곡 쳤다. 그 광경을 보고 성단은 “아이고, 범이 제 흉을 하면 온다더니 끝내 왔구나.”라고 하면서 발을 동동 굴렀다. 최구장과 경인이가 바깥마루에 버선발바람으로 뛰어나갔다. “리 구장, 대체 이게 무슨 일이요?” 응삼은 채찍으로 최구장을 한쪽으로 밀어내면서 땅방울같이 을러멨다. “최 영감의 노친과 막내딸이 운주강가 수림 속에서 버섯과 딸기를 도적질해왔단 말이요. 도적 죄로 잡아가야겠소.” 가물에 실 돌피 같은 응삼이가 집안에 들어오더니 계순과 순금을 우멍한 눈으로 쏘아보면서 구들에 올라섰다. 최구장은 그래도 응삼이 학생이라고 일루의 희망을 안고 옆에 있는 응삼에게 한마디 조용히 했다. “이보게. 이 구장, 내 딸을 좀 놔주게. 자기 마을 강가의 딸기랑 버섯이랑 따왔는데 도적질이라니? 말이나 되오?” 그러나 응삼은 개 잡은 포수처럼 우쭐거리면서 실눈을 흘기었다. “지금 무슨 정신 나간 소리를 하는 거요? 대일본제국의 황군 앞에서 다시 그런 소리를 했다간 영감부터 잡아갈 테요. 흥!” 그때 상순이가 위방에서 나오면서 고함쳤다.  “네놈이 까딱 손을 대봐라! 여기서 살아서 나갈 것 같으냐?!" 깜짝 놀란 응삼이가 구들에서 주춤 뒷걸음치면서 상순을 눈알이 휘동그레서 쳐다보았다. 그러나 뒤에 야마모도 소장이 서있는지라 다시 억지로 침착성을 회복하더니 없는 용기를 내 을러멨다. “이 놈은 어데서 굴러온 놈이냐? 이 구장어른을 감히 건드려?” 야마모도 소장도 군도를 쓱 뽑아들고 상순에게 덤벼들었다. “빠까야로(제길할 놈)! 신다(죽는다)!” 그래도 상순은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고 대들었다. “제 고향 마을의 버섯과 딸기를 따왔는데 무슨 죄란 말이냐?” 응삼이 우쭐해서 상순의 가슴을 주먹으로 쥐여 박으면서 밀었다. “뭐라고? 이 미친 새끼야! 지금 무슨 세월인데 버섯을 따 가지고도 죄 없다고 변명이냐! 온 조선이 일본 천황의 땅이 됐어. 이 마을도 일본 거야! 일본 딸기와 버섯을 따왔으니 도적질이 아냐?” 야마모도 소장은 군도로 이 사람 저 사람 가리키면서 꽥꽥 고함쳤다. “니혼고데 하나세(일본말로 말햇)!” 응삼은 야마모도 놈에게 실 돌피 같은 허리를 구십 도로 굽히면서 굽실거리었다. “하이(옛)! 와까리마시다(알았습니다)!” 상순이가 세 귀 눈에 분노의 불길이 이글거리는 것을 보고 경인은 처남이 참지 못하고 일을 칠까봐 나서서 말리었다. “처남, 참소, 참아!” 그러나 상순은 참기는커녕 씽 부엌으로 달려가더니 가마뚜껑과 시퍼런 식칼을 들고 야마모도 소장 놈과 응삼한테로 덮쳐들었다. 야마모도 소장은 이 돌발적인 사태에 깜짝 놀랐다. "이런 미친 놈은 난생처음 본다." 응삼은 상순을 손가락질하며 지껄여댔다. 야마모도 놈은 군도를 번쩍 들어 상순을 내리찍었다. 상순이 가마뚜껑으로 막자 쟁강 소리와 함께 불꽃이 튕겼다. 일본 지휘도는 보기 좋게 련속 가마뚜껑에 맞아 불꽃을 튕겼다. 근형은 놀라 바깥으로 뛰어나갔고 홍기랑 와 하고 울음보를 터뜨렸다. 응삼은 일본 상전을 도와 주먹으로라도 상순을 치고 싶었다. 그러나 옆에 둘러서서 노려보고 있는 경인이나 근형을 보고 감히 손을 대지 못하고 소리만 꽥 쳤다. “어데서 굴러온 놈이야, 담대하기로 대일본제국의 소장님에게 덤벼들어?” “네놈은 언제든지 내손에 죽었어. 손을 떼지 못할까?!” 하긴 경인이가 검을 휘두르면 누가 당해내겠는가. 그의 검술솜씨를 아는 응삼은 손을 쓸 엄두도 내지 못했던 것이다. 고함소리에 놀라 칼질을 그만둘 상순이가 아니었다. “얏! 이 일본 개놈새끼야! 죽어봐라!” 고함소리와 함께 상순이가 가마뚜껑으로 날아드는 일본 지휘도를 막으면서 식칼로 야마모도와 응삼을 마구 찍었다. 이제껏 이런 반격을 받아 본적 없는 야마모도는 식칼에 왼팔을 찍히고 선불을 맞은 노루새끼처럼 비명을 지르면서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응삼도 잔등에 칼을 빗맞고 다리야 나를 살리라고 바깥으로 줄행랑을 놓았다. 야마모도는 왼팔이 아파 오른손으로 움켜쥐고 오만상을 찌푸리면서도 입만은 살아서 울바자 밖에 세워놓은 말을 타면서 꽥꽥 고함쳤다. “젠부 신데시마우(몽땅 죽여치우겠다)!” 응삼도 오른 손으로 잔등의 상처를 만지면서 고함쳤다. “어데서 굴러온 놈 새끼야! 죽어 봐라! 흥, 최구장, 어데 운주동에서 사는가 두구 보라구! 몽땅 작두날로 목을 잘라치우겠어!” “에끼, 이 놈 새끼들아! 죽어봐라!” 상순이  호랑이처럼 고함치면서 식칼을 들고 쫓아나갔다. 야마모도와 응삼은 말배를 차더니 꼬리 빳빳해 도망쳤다. 뒤에서 온 마을의 개들이 으르렁거리면서 선불맞은 노루처럼 줄행랑을 놓는  놈들을 보고 컹컹 짖어댔다.  
62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41) 댓글:  조회:1991  추천:1  2016-05-18
                                               2. 두만강을 넘나들며        삼복염천에 태평강도 부글부글 끓어 번질 지경이었다. 쨍쨍 내리 쪼이는 햇볕에 옥수수 잎도 시들어 맥없이 축 드리워지었다.        약담배 짐을 메주고 삯전을 번 상순은 속으로 자기도 혼자 약담배 장사를 해보려고 선준과 두준을 따라 나섰다. 전번과는 달리 그들은 대담하게 천수해역에 가서 기차를 타고 고향을 바라고 떠났다.       그들은 아주 순조롭게 명천에 가서  약담배 짐을 해 전번처럼 치약에 넣어 지고 산길을 타고 북으로 떠났다. 상순은 이번에는 선준과 두준의 약 담배 짐만 진 것이 아니라 선준에게서 돈을 꿔 약담배를 아홉 냥이나 사 지었던 것이다.       어느 날 그들이 인적을 피해 산마루를 타고 소나무가 우거져 원시림을 방불케 하는 명천의 박달령(지금의 칠보산 박달령임)을 넘어 수림 속을 꿰질러나갔다. 그들이 다리쉼을 하자고 둔덕에 앉아 땀을 들이고 있을 때었다. 웬 사내 대여섯이 늑대처럼 슬금슬금 다가왔다. 상순은 대뜸 호미를 쥐고 벌떡 일어섰다. 선준한테 약 담배를 판 약 담배장사꾼도 끼어 있었다. (강도들이구나. 분명 약담배를 팔아먹고 우리 뒤를 밟았구나.) “삼촌, 자리를 뜨기요.” 두 삼촌도 눈치 채고 벌떡 일어났다. “짐을 두고 가라!” 강도들이 품속에서 비수를 뽑아 들고 일시에 덮쳐왔다. 상순은 호미를 들고 그자들을 막아 싸우면서 고함쳤다. “삼촌,  빨리 달아나오!” 한 놈이 비수를 휘두르며 덮쳐들었다. 상순이 호미를 휘둘러 치는 척 하면서 발길을 날려 손목을 걷어찼다. 그 놈의 손에서 비수가 날아 났다. 상순은 재차 원앙새 발길을 날려 아랫배를 걷어찼다. 그 놈은 배를 끌어안고 나동그라졌다. “이 놈, 썩어져라!” 강도들은 동시에 칼과 몽둥이를 휘두르며 앞뒤로 덮쳐들었다. 순간 상순이가 슬쩍 몸을 낮추면서 그들 두 새로 미꾸라지처럼 빠져 나갔다. 몽둥이가 그의 잔등을 탁 내리 치었다. 다른 두 놈은 그만 칼로 서로 팔을 찍었다. “앗!” 한 놈은 칼을 뚝 떨어뜨리더니 팔을 붙잡고 땅바닥에 물앉았다. 상순은 나머지 세 놈을 이기지 못하는 척 하면서 삼촌네와 다른 쪽 수림으로 달아났다. 세 놈은 헐금씨금 뒤쫓아 왔다. 상순은 아름드리나무를 안고 홱 돌아 서면서 호미 등으로 제일 먼저 뒤쫓아 온 놈의 대가리를 탁 쳤다. “억!” 그 놈이 보기 좋게 대가리를 싸쥐고 쓰러졌다. 그 틈을 타 뒤쫓아 온 놈이 비수를 상순에게 휘둘렀다. 상순이가 호미를 휘둘러 막았다. 호미날에서 “쟁강!” 소리가 나며 불티가 튕기었다. 뒤쫓아 온 다른 놈도 합세해 상순에게 달려들었다. 상순은 또 도망쳤다. 두 놈은 죽기내기로 뒤쫓아 왔다. 그런데 상순은 그만 돌멩이를 빗디뎌 쿵 넘어졌다. “이 놈, 죽어 봐라!” 두 놈이 비수를 휘두르며 쓰러진 상순에게 덮쳐들었다. 넘어진 상순은 땅바닥에서 돌멩이를 주어 몸을 반쯤 돌리며 휙 날렸다. 딱! 한 놈이 이마를 맞고 “앗!” 소리와 함께 이마를 싸쥐고 물앉았다. 쉭! 딱! 나머지 놈도 보기 좋게 나동그라졌다. 놈들은 대가리에 피를 흘리면서 더는 쫓아 올 엄두도 내지 못하였다. 상순이가 호미를 들고 수림 속을 절뚝거리면서 걷다가 수림 속에서 인기척을 육감적으로 느끼었다. 상순은 눌러 쓴 초 모자 밑으로 수림 속을 둘러보았다. 웬 놈이 나무숲에 숨어 있는지 나무 이파리가 사시나무 떨듯이 떨리고 있었다. “겁쟁이, 어서 나오지 못해?!” “아, 천하장사, 제발 살려 주오.” 그 놈은 수림 속에서 기어 나와 꿇어 엎뎌 바들바들 떨었다. 그자는 선준에게 약 담배를 팔던 코큰이 장사꾼이었다. 상순은 멱살을 틀어잡고 호통 쳤다. “장사군도 의리가 있는 법이야. 왜 팔아놓고 되빼앗아?” 그자는 떨리는 목소리로 횡설수설했다.  “내 말을 듣소. 사실 나도 저 놈들에게 당했소. 저 놈들이 칼을 들이 대고 열흘 안에 돈 500원을 내놓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을러멨소. 또 큰 약 담배 장사꾼이 오면 기별하라고 을러멨소. 그러지 않으면 죽을 줄 알라고 했소.” 상순은 목에 지렁이 같은 피 줄을 세우며 욕했다.  “아무리 그래도 제 살겠다고 강도들에게 우릴 팔아먹어?” 그 자는 뒤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가라! 다시 그 따위 짓 해 봐라! 이 어른이 용서하지 않을 테야!” 그 자는 절을 꾸벅꾸벅 하더니 슬슬 기어 일어나 다리야 날 살리라고 꼬리 빳빳해 달아났다. 상순은 초 모자를 눌러 쓰고 호미를 든 채 쩔룩거리며 숲을 헤매면서 삼촌들을 찾았다. 그는 온 하루 산속을 헤매서야 겨우 나무숲이 우거진 한 절벽 밑에서 삼촌들을 찾아냈다. “상순아, 다리는 어째?” 선준은 조카를 보자 반가와 어쩔 줄 몰라했다. “빗디뎠소. 오줌 약을 썼으니 괜찮을 게요. 일없소?” 선준은 “덕분에 무사하다.” 하고 말하며 상순의 두 손을 잡았다. “여긴 야수들이 욱실거리는 수림속인 거 같소. 빨리 떠나기요.” 그들은 수림 속 여러 곳을 살필 수 있는 산등성이를 타고 북으로 길을 재촉했다. 상순이가 뒤를 지키며 걸으면서 보니 두준이 자꾸 뒤에 떨어지더니 여기 저기 살피면서 무슨 궁리를 하는 것 같았다. 상순은 이상해 뒤떨어진 두준에게 다가갔다. “어째 무슨 일이 있소? 자꾸 뒤에 떨어지오?” “아, 아니야. 아무 일도 없어. 발목을 좀 풀쳐서, 어, 에헴.” 두준은 발목을 붙잡고 물앉더니 상순의 눈치를 흘끔 보는 것이었다. “얘, 목이 말라 죽겠어. 네 짐을 메 줄 테니 저 아래 산골짜기 마을에 가서 물이나 한바가지 퍼 오겠니?” “양? 갔다 올 게.” 상순이 짐을 벗어 두준에게 맡기고 막 산 아래로 내려가려고 했다. “얘, 어디로 가? 강도 나타나면 어쩌니?” 선준이 근심돼 말렸다. 상순은 대수로워 하지 않으면서 “근심하지 마오. 인차 갔다 올 게요. 숨어서 기다리오.”라고 하고는 산골짜기 아래로 내려갔다. 마을에 들어가자 그는 우물을 찾아 드레박으로 물을 잣아 올려 샘물을 꿀꺽꿀꺽 마셨다. 이가 시릴 지경으로 찬 샘물은 시원하기 그지없었다. 그는 두리번거리다가 우물 옆의 한 집에 들어가 커다란 바가지를 빌어다 시원한 샘물을 한바가지 푹 퍼들고 바삐 산우로 올라 왔다. (이게 뭔가? 삼촌들은 어디로 갔어? 혹시 강도들한테 당하지 않았을까?) 상순은 물바가지를 내리어 놓고 나무숲이 무성한 곳마다 돌아다니면서 호미로 이리저리 헤쳐 보았지만 삼촌네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이 일을 어쩌면 좋은가? 삼촌네 잘 못 되지 않았을까? 숱한 빚을 져 산 약 담배를 빼앗겼으면 어쩌니? 빚더미에 깔려 죽게 생겼는데.” 상순은 중얼거리면서 한숨을 산이 날아가게 후- 내쉬었다. 그의 가슴속에서 매돌 짝이 쿵 떨어지는 것 같았다. 로비마저 다 떨어진 그는 마른 삭정이를 주어 마을에 지고 가서 밥을 얻어먹으면서 걷고 걸어 겨우 함흥촌에 돌아 왔다. 그는 마을에 들어서자마자 그 걸음으로 두준을 찾아갔다. 이게 웬 일인가? 두준은 펀펀해 집에서 빗자루로 마당을 썩썩 쓸고 있었다. “삼촌! 무사하구먼.” 상순을 보자 두준은 펄쩍 놀라 빗자루를 짚고 부들부들 떨다가 겨우 입을 여는 것이었다. “엉? 어, 너도 살아 왔구나.” 상순은 한걸음 다가가면서 물었다. “내 짐은 어쨌소?” 두준은 머리를 숙이면서 기어들어 가는 모기 소리로 겨우 대답했다. “미안하다. 우린 강도를 만나 죽을 번했다가 겨우 살아 집에 왔다. 짐을 몽땅 강도한테 빼앗겼어.” “뭐라오? 그거 어떻게 산거라고? 당장 내 짐을 내 놓소. 강도를 만났다는데 어째 상처 하나 없소?” 두준은 꺽꺽거리면서 아무 말두 못했다. “얘, 강도한테 빼앗긴 짐을 내 놓으라면 어쩌라니?” 상순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것도 말이라고 하오? 내 짐을 잃어버렸으면 갚아야 할 게 아니오?” “이런 새끼를 봤니? 남이 죽다가 겨우 살아 왔는데 무슨 망발이냐? 원, 네놈을 믿다가 괜히 약 담배나 떼었지. 우릴 지키지도 못하면서 무슨 염치로 돈을 내라고 호통질이냐? 정 믿지 못하겠으면 선준을 찾아 가서 물어 봐라.” 두준이 쪽에서 오히려 목에 지렁이 같은 피 줄을 세우면서 야단치었다. 상순은 별 수 없이 선준을 찾아 갔다. 그런데 그의 대답도 두준의 대답과 똑같았다. (더러운 새끼들이, 사촌형제끼리 짜고 들어 촌수가 먼 내 약 담배를 떼먹었구나. 어디 가만 놔두나 두고 보자.) 상순은 증거를 잡지 못했기에 빤한 일도 용빼는 수가 없었다. 그러나 가만 있자니 밸이 울컥 치밀었다. 그는 다짜고짜로 두준의 집에 다시 찾아갔다. 그는 도끼로 나무를 패는 두준의 멱살을 틀어쥐고 호통쳤다. “더러운 두상, 내 약 담배를 내 놓지 못하겠는가?!” 상순은 주먹으로 한대 치려고 쳐들었다가 주먹을 내리웠다. 순간 성칠 큰아버지가 가르친 무덕이 그의 주먹을 꺾었던 것이다. (집안 어른을 칠 순 없지.) “이 놈 새끼, 삼촌을 치겠니? 버르장머리 없는 놈, 어디 쳐봐라!” 두준은 상순이 주춤 하는 틈을 주먹질 했다. 두준의 아들 상설도 몽둥이를 들고 뒤에서 씽 달려 나오면서 상순의 뒤 골을 내리쳤다. 상순은 피하지도 않고 날아드는 몽둥이를 왼손으로 턱 받아 쥐었다. “이까짓게 다 뭐야?!” 그는 몽둥이를 무릎에 대고 툭 끊어 땅 바닥에 탁 내동댕이쳤다. “퉤! 내 집안이라고 놔두니까. 그리 알아라.” 상순은 벌벌 떠는 두준의 부자에게 침을 뱉고 그 자리를 떠나버렸다. 마을 사람들 속에서 감탄소리가 울리었다. 토성안집 지학사는 토성 안에서 졸개들을 데리고 나와 뾰족한 턱을 쳐들고 기웃거리다가 개화장을 휘두르며 집으로 되들어가버렸다. “상순은 그저 놈 새끼 아니야? 저 놈을 내 편에 끌어 왔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토성 밖의 버드나무가 시원한 가을바람에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지학사는 두준의 부자가 상순과 싸워 코 대를 꺾어 놓았으면 했는데 멋 적게 끝나자 도리머리를 가로 저었다. 그는 몇 해 전에 자기를 송사에 걸어 망신시킨 상순이가 점점 커 가는 것이 눈에 든 가시 같았다. 그는 함흥촌에서 촌장 질을 해 먹으려면 제일 먼저 상순이네 부자부터 꺾어 놓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지학사 촌장 놈은 전번에 춘실과 은실을 위안소로 잡아갈 때 일본 놈들이 늙은 비술나무에서 도끼에 찍혀죽은 일을 잊지 않고 있었다. (글쎄 총에 맞아 죽은 건 유격대 짓이라고 쳐도 돌멩이에 맞아죽거나 도끼에 찍혀 죽은 건 심상치 않았다. 마을에서 일본 황군과 맞서 싸울만한 호랑이 담을 가진 놈은 상순이나 기준이 밖에 없어. 황차 상순은 춘실을 좋아하고 배속에 애까지 싸넣었다고 하지 않는가!) 지학사는 쥐눈깔을 떼룩 굴리며 촌공소에서 왔다갔다 하면서 계속 생각을 굴렸다. (황군 앞에 모범집단부락을 꾸리자면 불온분자들부터 처단해야 해.) 룡정통감부 간도파출소에서는 춘실과 은실을 잡아가는 그날 밤에 예비로 일본 경찰들을 한 개 분대나 풀어 이른바 "흉수"를 수색했지만 꼬리도 잡지 못했다. 그 놈들은 늙은 비술나무 부근에서 피 묻은 돌멩이와 도끼를 주은 것이 유일한 단서였다. 그 놈들은 원래 함흥촌 부근 패랑산촌과 조개덕 그리고 태평거우까지 몽땅 소탕하려고 했다. 그러나 지학사가 모범집단부락을 숙청하면 이후에 누가 함흥촌에 와서 살겠는가고 간언해 소탕을 그만두었던 것이다. 대신 모범집단부락이고 뭐고 불온분자들을 세심히 관찰해 속속들이 복구하라고 명령을 내렸던 것이다. 그런데 이날 이때까지 상순의 꼬리를 잡지 못한게 문제였다. (전번에 상순은 확실히 그날부터 잃어졌는데 썩 후에 약을 캐 담은 지게를 지고 나타나지 않았던가. 말로는 약을 캐러 산에 들어갔다고 하지만 유격대와 내통했는지 누가 알겠는가.) 고심하던 끝에 지학사는 암암리에 기준과 상순 부자 일가를 망하게 해 없애버리려고 꿍꿍이를 꾸몄다.       어느 날 그는 자기 졸개를 시켜 가만히 상순이네 소여물에 독약을 풀어 넣게 해 소를 독살했던 것이다. 소임자인 손호표 지주가 상순이네 집에 찾아와 야단치자 지학사는 토성 위에 올라서서 구경하면서 잘코사니를 불렀다.       그 일로 해 기준은 울며 겨자 먹기로 집마저 팔아 소 값을 갚지 않으면 안됐다. 소를 팔아서도 소 값을 채 갚지도 못해 그들 부자는 웃새집 사랑채에 임시 들었다. 상순은 눈앞이 막막했다. 빚 구렁텅이에 빠진데다 설상가상으로 유격대는 당장 쌀이 떨어져가고 있는데 약 담배 짐까지 삼촌들한테 사기 당한 판이었다. 그는 궁리하다 못해 뇌리에 큰아버지의 말이 떠올랐다. (독불장군이라고 성칠 큰아버지 말씀 대로 군중을 동원해야 해.) 그는 집안 형님들로부터 시작해 온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쌀 몇 근 씩이라도 얻어 주머니에 담아 김치 움에다 치워 놓았다. 한편 마을 청년 희수, 붕수, 흥수, 7촌조카 의호, 충국 등한테 중국 공산당의 혁명의 도리를 알려주고 이 땅에서 일본 놈들을 몰아내고 진정 인민이 땅의 주인이 되는 나라를 세우기 위해 싸우자고 선동했다. 그리하여 청년들은 집의 쌀을 얼마간씩 밤에 상순의 집에 가져왔다. 상순은 쌀을 가만히 김치움에 가져다 놓았다. 나중에 상순은 소서구 토성안집으로 발길을 옮겼다. (장 지주는 인삼 삼촌네 양아버진데 쌀을 얼마간이라도 주겠지.) 상순은 토성 안 서쪽 채에 들어가자마자 장학산을 보고 정색해 말했다. “돈을 한 200원 꿔주오.  큰 장사를 해 돈을 벌면 은공을 톡톡히 갚겠소.” 장학산은 다가앉으면서 나직이 물었다. “혹시 약 담배장사를 하자고 그러지 않니? 목이 날아나지 못해서.” “무슨 말이요? 소금 장사 밑천으로 쓰자고 그러오.” “유격대에 쌀을 가져가자고 그러지 않고?” “듣자니 당신도 인삼 삼촌이랑 먹게 쌀을 많이 가져갔더구먼.” 장학산은 대뜸 손사래 질 했다. “난 인삼이가 유격대인 줄 몰랐어. 그 자식 때문에 난 쫄딱 망했어. 토성 안 집이 재더미로 됐지. 그거마저 일본 놈들의 촌공소로 빼앗겼단 말이야. 어떻게 지은 집인데. 아까워 죽겠어.” 상순은 쐐기를 박았다. “그게  일본 놈들 탓이지. 지금 인삼 삼촌네는 굶어서 거의 죽게 됐소. 굶고서야 언제 일본 놈들을 몰아내고 토성 안 집을 찾아내고 저 숱한 밭을 지키겠소?” 장학산은 이를 갈았다. “일본 놈들 생각만 하면 악이 난다. 요새 지학사 형님을 꼬드겨서 뭐 대일본제국에 밭을 바치라지 않겠니?” 장학산은 격분해 손까지 부들부들 떨며 황소숨을 몰아쉬었다. 이때라고 상순은 손을 내밀었다. “200원만 뀌어주오. 장사를 해 인삼네 유격대를 살려야겠소. 쌀이 거의 떨어졌소. 유격대는 우리 중국 사람들의 군대란 말이요. 밥을 든든히 먹어야 일본놈들을 족치지." 장학산은 한참 궁리하더니 시원히 대답했다. “내 300원 뀌어줄게.” 장학산은 일거양득이었다. 상순에게 인심을 내구 인삼도 돕게 됐으니 말이다. 상순은 빚 문서에 지장을 찍은 후 묵직한 돈주머니를 받아 품에 간직하고 토성 안 집을 나왔다. (장사만 잘 되면 유격대에 쌀을 가져가고 용정에 가서 공부를 좀 해야지.) 며칠 후 상순은 그 돈으로 장마당에 가서 쌀을 사 수레에 꽉 박아 싣고 달빛을 밟으며 패용천산 쪽으로 떠났다. 희수와 붕수도 따라나섰다. 흥수는 혹시 지학사한테 들키울가봐 집에서 머리도 내밀지 않았다. 상순은 희수와 붕수를 시켜 마을 대문을 보초서던 졸개들을 집에 데리고 술을 마시라고 했다. 전날 상순이 시내에서 사온 술로 희수와 붕수가 자위대 보초병 둘을 따돌리자 상순은 쌀을 꽉 박아 실은 수레를 몰고 마을을 빠져나왔다. 그들이 금방 태평강가 아름드리버드나무가 우거진 수림 속으로 들어갔을 때었다. 난데없이 뒤에서 뻐꾹새 울음소리가 뻐꾹 뻐꾹 들렸다. (혹시 유격대가 왔는가?) 상순은 손을 들어 형님들을 보고 수레를 멈추게 하고 버드나무숲 속을 둘러보았다. 우수수 낙엽 지는 소리가 들리는데 버드나무숲 속 여기저기에 희읍스름한 달빛이 비꼈다. 아무리 살펴보아도 사람의 그림자도 얼씬하지 않았다. 아주 가까운 버드나무 뒤에서 가냘픈 흐느낌 소리가 들리었다. (이게 무슨 소리야?) 상순은 비수를 뽑아 들고 살금살금 그 버드나무에 다가갔다. 그때 황둥개가 상순한테 달려 와 앞발을 쳐들고 매달리면서 꼬리를 저어댔다. 춘실이 버드나무에 기대어 훌쩍거리고 있지 않겠는가? 상순은 버드나무숲 속에 드문드문 비치는 달빛을 빌어 흐느끼며 우는 춘실을 볼 수 있었다. “아니, 밤중에 웬 일이야?” “말해야 아니? 날 이렇게 만들어 놓고.” 춘실은 주먹으로 상순의 가슴을 마구 두드리었다. 상순은 이쪽을 돌아보는 상훈과 상길을 보고 “형님네 먼저 가오. 내 춘실과 할 말이 있소.” 하고 말하고는 춘실의 손을 잡고 한쪽으로 갔다. “춘실아, 미안해. 내가 널 버린 게 아니라 부명을 어길 수 없어 그렇게 됐어. 우리 집안은 대대로 효자들이었지. 집안혼사를 망친 불효자루 될 수 없었어.” “뭐라니? 효성 한다고 나를 헌신짝 버리듯이 할 예산이야? 오늘 밤 내 죽고 너 죽고 해보자.” 춘실은 단말마적으로 달려들어 상순을 꼬집고 허비었다. “내 말을 들어라.” “안 들어. 콩으로 메주를 쓴대도 안 들어! 커가는 애를 어찌 하겠는가만 말해라. 에이고, 애비 없는 애를 보기만 하면 악이 난다. 분통이 터져 못 살겠다.” 상순은 춘실의 양어깨를 잡고 정색해 말했다. “얘, 내 장사해 돈을 많이 벌면 국자가에 집 한 채를 사 놓을게. 우리 둘이 가만히 국자가에 가서 살자.” 춘실은 도리머리를 가로 흔들었다. “또 속을 거 같니?" 그러나 상순은 춘실을 꼭 끌어안고 열변을 토했다. “춘실아, 부명을 어기지 못해 명옥과 잔치했지만 난 지금도 너와 살고 싶다. 어떤 일이 있어도 넌 내 아내야.” 춘실은 상순의 목을 꼭 끌어안으며 섧게 대성통곡쳤다. “이 나쁜 놈아, 사기꾼 놈아, 거짓말쟁이야! 내가 첩이야? 뭐야? 엉? 어 엉 엉. 흑흑.” 상순은 마음이 아팠다. 춘실은 상순의 품속에서 빠져 나오면서 욕설을 퍼부었다. “나쁜 자식! 애까지 내 쏴놓고 책임은 못 지고. 네놈은 한평생 내게 죄를 진 죄인이야. 언제든지 원수를 갚을테야!" "얘, 내가 어찌 죄인이냐? 난 네한테 둘도 없는 은인이야." "은인? 이 뻔뻔스런 놈새끼, 지금 누굴 기를 채워 죽일 작정이야?" 상순은 단말마적으로 달려드는 춘실을 꼭 끌어안고 정색해 말했다. "내 말 좀 들어봐! 내 널 임신시켰기에 넌 위안소에 붙잡히지 않았어. 숫처녀들을 봐라…" "야, 숫처녀가 문제냐? 일본 놈들이 색마돼 그렇지. 나도 애를 낳았으니 언제 또다시 잡혀 갈지 몰라. 일본 놈들의 미친 개눈깔엔 반반하게 생긴 거도 죄야." 상순은 달빛 속으로 스적스적 걸어가면서 중얼거리었다. “좋은 신랑을 찾아 잘 살아라. 그래야 일본놈들의 눈 밖에 나지." 춘실은 버드나무에 기대며 대성통곡을 그치지 않았다. 이때 저쪽에서 검은 그림자가 다가왔다. “춘실아, 집으로 가자. 그 놈을 믿지도 말아라. 하늘이 무너져도 살 길이 있겠지.” 춘실은 비칠거리다가 어머니 부축을 받으며 겨우 집으로 돌아갔다. 버드나무숲 속에서는 마른 낙엽을 밟는 소리와 춘실의 흐느낌소리가 마음 아프게 들릴 뿐이었다. 왕 왕 왕! 황둥개는 자기 여주인을 두고 떠나가는 상순을 바라보며 요란하게 짖어댔다. 한편 상순이네가 쌀 수레를 몰고 패용천산 지나 칼산앞에 이를 때었다. 갑자기 산기슭 나무숲에서 와삭와삭 소리가 나더니 웬 그림자가 뛰쳐나왔다. 상순은 비수를 빼들며 “누구야?!” 하고 물었다. 충국도 비수를 뽑아 들고 수레 양옆에 붙어 섰다. 상우와 상길도 쌀 마대 사이에서 괭이와 삽을 뽑아 들고 싸울 잡도리를 했다. 검은 그림자들이 멈춰 섰다. “혹시 상순이랑 아니야?” 맞은쪽에서 걸걸한 말소리가 울리었다. 목소리가 귀에 퍽 익었다. 가까이 다가온 것을 보니 확실히 인삼이가 억복과 철석 등 10여명 유격대원을 데리고 왔던 것이다. “삼촌!” “여기서 만날 줄은 몰랐구나.” 상순과 충국은 빼들었던 비수를 품속에 되 질러 넣었다. “깜짝 놀랐소.” 인삼은 충국을 보고 “너도 왔구나.”하고 말하고 나서 “비수를 빼든 걸 보고 난 상순인줄 알았어.” 하고 하면서 상순의 어깨를 툭툭 쳤다. 원래 인삼이네는 유격대에 쌀이 떨어져 소서구 쪽으로 내려오다가 칼산 앞에서 삐꺼덕거리는 수레바퀴 소리를 듣고 산기슭 수림 속에 매복해 있었던 것이다. 인삼은 상순을 보고 정색해 말했다. “쌀을 잘 먹겠다. 너 절대 약 담배 장사를 하지 말라. 우리 유격대는 절대 약 담배 장사를 해 산 쌀을 먹지 않겠다. 약 담배가 만연되면 나라를 일본 놈들의 손에서 찾은들 무슨 소용이 있겠니?” 상순은 건성으로 “양, 알았소.” 하고 대답했다. 상순이네는 인삼이가 이끈 유격대원들에게 쌀 마대를 넘겨주고 수레를 몰고 마을로 돌아 섰다. 유격대원들은 쌀 마대를 갈라지고 희읍스름한 달빛이 깔린 수림 속으로 유령처럼 사라졌다.              3. 신음하는 고향        소서구와 천지꽃산, 패용천산과 칼산, 모든 산과 태평벌은 가을바람에 누런 물결이 파도 쳤다. 세상에 이보다 더 재간 있는 화가는 없으리라. 들과 산기슭으로부터 시작해 올라가면서 점점 누런 물을 들이더니 이젠 산중턱에도 울긋불긋 단풍에 물들이고 있었다. 상순은 아무 장사라도 해서 유격대에 쌀을 보내려고 이튿날 이른 아침에 충국을 찾아갔다. 장학사와 충국이 생각 밖으로 유격대를 돕는 것을 알게 된 상순은 그제야 이전에 인삼 중대장이 하던 말에 도리가 있음을 깊이 느끼게 됐다. "중국의 한족형제들, 지어 중국의 양심적인 한족지주들과도 단합해 일본 놈들과 싸워야 이길 수 있다." 상순은 무작정 따라 나서는 충국을 데리고 령 길을 넘어 동불사 쪽으로 갔다. 진수해보다 동불사가 놈들의 감시가 허술했기 때문이다. 뒤따라가던 충국이 주춤 멈춰 섰다. “아차, 한 가지 잊었어. 형님, 비수를 가지고 기차에 올라도 되겠소?” 상순도 주춤 멈춰 서더니 사위를 두리번거렸다. “일본 놈들이 비수를 들춰내는 날엔 의심받을게 아니야?” 그는 주위에 아무 사람도 없는 것을 보고 충국을 데리고 한 초가집에 다가가 비수를 꺼내 이영 밑에 쑥 박아 넣었다. 충국은 “혹시 강도를 만나면 어쩌니?” 하고 물었다. 상순은 역 개찰구에 총칼을 비껴들고 왔다 갔다 하는 일본 놈들을 턱짓하었다. “저놈들이야 말로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날강도 놈들이지.” 충국은 머리를 끄덕이더니 아까운대로 비수를 이영 밑에 쑤셔 넣었다. 그는 상순을 따라 역으로 나가면서 나직이 물었다. “왜 산길로 가지 않고 기차를 타는 거야?” “시간이 없다. 어떤 땐 등잔불 밑이 더 어둡다.” 그들은 기차를 타고 아주 순조롭게 조선 함경도 명천에까지 달려 나갔다. 명천 역에서 내리자 일본 놈들이 득실거리고 있었다. 고향은 일본 놈들의 쇠발굽 밑에서 신음하고 있었다. 대뜸 긴장해난 상순은 충국을 조용한 구석에 데리고 가서 귀속 말을 했다. “넌 조선말을 잘 모르기에 이제부터 벙어리 상을 해라.” “건 왜? 우리 둘이 중국말을 하면 안 돼?" “안 돼. 꼬리를 밟혀.” “음, 알았소.” 충국은 세밀한 상순에게 머리를 숙이었다. 상순은 초 모자를 꾹 눌러쓰고 앞에서 걷고 충국은 한 일여덟 발자국 떨어져 뒤따라갔다. 상순은 유격대에 쌀을 가져가려면 다른 장사는 시간도 많이 들고 돈을 얼마 벌기 힘들어 고려 끝에 딱 이번만 약담배장사를 하자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리하여 그는 충국을 데리고 전번에 약을 사던 몇 집에 가서 약 담배를 사서 챙기어 넣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순조로웠다. “서라!” 상순이가 멈칫거리며 초 모자 채양 밑으로 옆으로 곁눈질해 보니 전번에 밀림 속에서 혼 빵 낸 적이 있는 날강도 놈들이었다. 전번에 혼빵 난 코큰이는 보이지 않았다. 상순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계속 앞으로 걸었다. 충국은 겁을 집어먹고 주춤 멈춰 섰다. (비수를 두고 와서 어쩌지?) “서란 말 못 들었어?!” “우시장에서 감히 우리 어르신님들을 보고 인사도 하지 않는 놈 있어?” “그러게 말이야.” 상순은 반쯤 몸을 돌리며 초 모자를 쓴 머리를 좀 들고 쏘아보았다. “쳐라!” 우두머리가 고함치자 날강도 놈들은 일제히 몽둥이와 칼을 휘두르며 승냥이들처럼 사납게 덮쳐들었다. 상순은 날렵하게 옆으로 피하며 몸을 솟구쳐 바람개비처럼 원앙새발길을 날리었다. 두 놈이 거의 동시에 아랫배와 턱을 채웠다. “앗!” 비명소리와 함께 몽둥이와 칼을 떨어뜨리며 꺼꾸러졌다. 행인들은 우시장에서 그렇게 날랜 솜씨를 본적이 없었다. 나머지 세 놈은 수적 우세를 믿고 덤벼들었다. “얏!” 상순은 고함치며 몸을 솟구치더니 어느 결에 공중에서 뒤발로 우두머리 뒤통수를 걷어찼다. “앗!” 우두머리는 뒤통수를 붙잡고 보기 좋게 꺼꾸러졌다. 나머지 두 졸개는 덤벼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우두머리를 부축해 달아났다. “전번에 산에서 만났던 초 모자 쓴 놈이야!” 졸개들은 달아나면서 아우성 쳤다. 약방문을 열고 내다보던 약방 주인 코큰이는 수림 속에서 당한 적이 있는지라 아예 문을 닫아걸었다. 충국은 상순의 날랜 솜씨를 처음 보고 눈이 휘 동그래졌다. 그제야 상순이 자신 있게 비수를 두고 온 이유를 조금 알 것 같았다. 상순은 손을 툭툭 털면서 강도떼들이 달아난 쪽을 쏘아보았다. 충국은 골목에서 뛰어나오면서 고함쳤다. “형님, 참 멋진 솜씨야!” “이 놈 벙어리야!” 그제야 충국은 실수한 것을 알고 입을 꽉 다물었다. “중국 사람들이구나!” “초 모자를 쓴 사람은 참 대단한 호한이야!” 행인들은 여기저기서 웅성거리었다. 상순은 골목으로 피해 달아나 충국을 훈계했다. “중국말을 하는 바람에 우린 꼬리를 밟히게 됐어.” “어망간에 말이 훌 나갔소. 우리 중국말을 하면 조선 사람들이 알아듣지도 못하는데도 무슨 놈의 꼬리 같은 소리요?” “우리가 중국 사람인걸 알면 변경이거나 기차에서 시끄러워진단 말이야.” 그제야 충국은 혀를 잘못 놀린 것을 알고 뒷더수기를 긁적거리며 뒤따라갔다… 그들은 담대하게도 경성군 어느 자그마한 역에서 기차를 잡아타고 국경을 넘어 길림 쪽으로 달려 들어갔다. 기차 안에서 일본 헌병 놈 몇이 다가오더니 손님들의 몸과 짐을 일일이 검사하였다. 상순은 표독스러운 눈길로 자기를 쏘아보는 일본 놈들 앞에서 태연자약하게 등에 지었던 소금주머니를 꺼내 치약이랑 꺼내 보이었다. 일본 놈은 치약을 짜 보더니 허연 치약이 나오자 옆에 앉아 당황해 하는 충국을 쏘아 보았다. “일어섯!’ 일본 놈은 충국의 몸을 샅샅이 수색했다. 헛물을 켠 놈들은 다음 손님의 짐을 수색했다. 충국은 상순을 쳐다보면서 속으로 나다니는 머저리가 앉은 영웅보다 낫다는 말이 맞는구나 하고 감탄했다. 길림에 도착하니 밤장막이 천천히 내리 드리었다. 송화강변은 싸늘한 늦가을 바람에 나무 이파리 다 떨어져 앙상하기 그지없고 초라했다. 상순이네는 쓸쓸하고 을씨년스런 거리에서 구은 감자를 사서 대충 주린 배를 달래고 나서 북산공원에 있는 절로 찾아 갔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뭘 하러 왔는가요?” 까까머리 중이 대문 옆에서 합장하며 막아섰다. “아, 우린 외지에서 왔는데 잘데 없어 왔소.” 상순의 말에 중은 “어서 들어오오. 불쌍한 창생들이여.”라고 하며 마당을 가리켰다. 충국은 처음 왔는지라 겹겹이 늘어선 커다란 절들이 신기해 여기저기 기웃거리었다… 그들은 절에서 새우잠을 자고 동녘 하늘이 푸릇해지자 바깥에 나가 밥값을 할 양으로 빗자루를 찾아들고 절 마당을 썩썩 쓸어놓은 후 시내로 슬금슬금 내려 왔다. 상순은 충국을 데리고 송화강변에 자리 잡은 약방과 면목 있는 약 담배장사군의 집으로 찾아다니면서 약 담배를 팔아 돈을 챙겨넣었다. “서라!” 이때 일본 놈 몇이 호각을 불어대며 쫓아 왔다. 상순은 약 담배 짐을 충국에게 벗어주면서 “빨리 달아나라!” 하고 소리쳤다. “형님은?” “저놈들을 다른 데로 끌고 갈게. 북산공원 절에서 만나자.” 충국은 짐을 받아 쥐고 달아났다. 상순은 일본 놈들을 맞받아나가다가 옆 골목으로 쏜살같이 달아났다. “초 모자를 쓴 저 놈을 잡아라!” 일본 놈들은 충국을 놔두고 상순을 뒤쫓아 갔다. 상순은 일본 놈들을 끌고 이 골목 저 골목 달아나다가 송화강변의 웬 잿빛벽돌학교 울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되돌아보니 일본 놈들이 보이지 않았다. 상순은 재 빛 기와를 얹은 학교건물을 두리번거리며 신기해했다. “아참, 나도 이런 학교에서 공부했으면 얼마나 좋을까?” 이때 맞은편에서 한 교사가 다가왔다. “저, 하나 물어봅시다. 이 학교 이름이 뭡니까?” 교원은 상순의 아래위를 훑어보더니 “길림시 육문중학교요.” 하고 대답하면서 지나가려고 했다. 상순은 “선생님, 이 학교를 다니자면 학비를 얼마나 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교원은 상순을 유심히 쳐다보더니 “학비는 많잖소. 이 학교는 유명한 항일장군도 길러낸 길림에서 유명한 학교요.”라고 말했다. 상순은 흥취가 더 가서 한걸음 다가들며 물었다. “어느 장군 말입니까?” 그 교원은 주위를 살펴보더니 상순의 귀에 대고 “항일연군 김성주 사단장이 바로 이 학교출신이라오.”라고 대답했다. “아, 장백산 줄기줄기 주름잡아 다니며 일본 놈들을 호되게 족친 그 김 장군님 말인가요?” "그래요. 김 장군은 옛날 우리 학교를 다니면서 일본 놈들을 몰아내고 나라를 되찾을 웅대한 포부를 지니시게 됐네. 그는 육문중학교 동창생들을 묶어세웠을뿐만 아니라 길림지구의 청년들을 조직해 항일구국 혁명도리를 널리 홍보하고 항일투쟁사업을 했죠." 상순은 육문중학교를 돌아보며 머리를 끄덕이었다. 교원은 육문중학교에 관심을 갖고 있는 상순에게 학교 동북쪽을 가리켰다. "저기 북산공원에 가보았소?" "예." "북산공원에서 김 장군은 어릴 때 동지들과 모임을 자주 갖고 항일투쟁을 포치하곤 했죠." "예~ 그분은 지금 우리 동만일대 항일유격대를 지휘해 항일무장투쟁을 하고 있다는 전설적인 이야기도 많이 들었습니다." 그 교원은 대문 안에 들어서는 일본 놈들을 눈짓하면서 “이 학교는 일본 놈들이 항상 주시하니까 다니기 퍽 어렵네.” 하고 자리를 떴다. 상순은 일본 놈들을 보자 주먹을 쥐고 학교 복도로 달아 들어갔다가 뒷문으로 빠져나갔다. 그는 안간힘을 다해 높다란 학교 토성을 뛰어 넘어 다리야 날 살리라고 쏜살같이 달아났다. 그는 점심때 다 돼서야 북산공원에 올라가 아침에 나온 절로 들어갔다. 상순을 보자 충국은 기뻐 어쩔 줄 몰라 했다. “형님, 일본 놈들에게 붙잡힐까봐 얼마나 근심했는지 모르오?” 상순은 충국의 어깨를 툭툭 치면서 “가자, 나머지 약 담배를 팔자.”라고 하며 약 담배 짐을 메고 나섰다. “에이, 이 장사도 숨이 한줌만 해서 어디 해먹겠소?” 충국은 중얼거리면서도 뒤따라 나섰다. “그래, 돈이 하늘에서 떨어지니?” 상순의 말에 충국은 뒷덜미를 긁적거리었다. 상순은 일본 놈들이 밀짚모자를 쓴 자기를 추적하고 있다는 것을 몰랐다. 그리하여 의연히 밀짚모자를 꾹 눌러 쓰고 충국을 데리고 늦가을 비를 맞으면서 돌아다니며 나머지 약 담배를 다 처리하고 역 광장 쪽으로 갔다. 그때 일본 놈들이 역 광장에 늘어서는 것이었다. 총칼을 든 일본 놈들을 빼곡이 실은 자동차 한대가 덜커덕거리며 들어섰다. 운전실에서 한 일본 장교가 내려 자동차 적재함에 바라 올라갔다. 적재함의 숱한 일본 놈들이 차렷 자세로 군례를 올리며 양쪽에 벌려 서서 그 장교 놈을 호위하는 것이었다. 장교 놈은 흰 장갑을 낀 손을 홱 젓더니 유창한 한어로 일장연설을 시작했다. “여러분, 잠시 가던 걸음을 멈추고 내 말을 좀 들으라. 우리 대일본제국은 당신들을 해치러 온 게 아니야. 우리는 대동아공영권을 행사하여 당신들을 잘 살게 하려고 여기까지 왔다.” 자동차 아래 군중들이 여기저기서 나직이 수군거렸다. “고양이 쥐 생각을 한다.” 그 놈은 계속 오만하게 잔뜩 늘여놓았다. “봐라. 우리 대일본제국에서는 이 황야에 철도를 놓고 발전소를 세웠어. 당신들은 살기 얼마나 좋아졌는가? 기차를 타고 몇 천리 밖에도 순식간에 갈 수 있게 됐어. 등잔불을 버리고 대낮같이 환한 전등불 아래에서 살게 됐어. 우리 대일본제국이야 말로 당신들의 구명은인이야.” 그러자 행인들은 침을 퉤 뱉으면서 떠나가 버렸다. 일본 놈들은 가지 못하게 총칼로 억지로 막아 세웠다. “헛참, 중국 놈들은 내 말을 잘 듣지 않아. 이걸 어쩐다?” 그 놈이 갑자기 조선말로 지껄여대는 것이 아니겠는가? 상순은 머리를 천천히 들고 밀짚모자 채양 밑으로 그 놈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일본헌병대 장교 모자를 꼭 눌러쓰고 안경을 낀 우멍한 눈에 살기가 번뜩이었다. 우멍 눈과 메부리 코가 퍽 인상적이었다. “중국 놈들은 3등 공민대우를 받으니까 우리 말을 잘 듣지 않는 게 당연합죠.” 옆에서 또 다른 놈이 조선말로 지껄여댔다. 장교는 연설할 흥이 나지 않는지 옆의 놈과 조선말로 지껄이었다. “글쎄 말이야. 용정이나 국자가나 진수해에서 연설할 때는 달랐지. 숱한 조선 사람들이 멍해 들었던 건데.” “한 련대장, 조선말로 연설해 보십시오. 아마 한 련대장 한어말이 순통하지 못해 그러는지. 여기도 조선 사람들이 적잖은 거 같습디다. 여기서는 함경도보다 경상도 사람들이 많으니까 남대 말을 쓰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장교 놈은 실 머리를 흔들었다. “그래? 건데 난 순 함경도 치어서 남대치 말을 몇마디 모르는디.” "걸케 하면 돼요." "그래?" 이윽고 그 놈은 마른 기침을 하더니 가래를 목주래로 꿀꺽 삼키고나서 조선말로 지껄여대기 시작했다. “조선에서 들어 온 2등 공민 여러분, 우리 대일본제국에서는 고향을 떠나 이국 타향에 온 당신들을 보호하러 왔시우. 생각들 해보라니께. 우린 고향에서 손바닥만 한 밭도 없어 굶으면서 살지 않았나요? 그러나 우리 대일본제국의 덕분에 청나라 대문을 열고 역사의 비밀이 숨겨진 이 땅에 들어와 황무지를 개간하고 밭을 일궈 배불리 먹고 살게 되지 않았시우?” 상순은 밀짚모자를 꾹 눌러쓰고 물었다. “당신은 도대체 한족입니까? 조선 사람입니까?” 장교 놈은 연설하다가 이쪽을 내려다보더니 “잘 물었어요. 난 종래로 내 이름을 속인 적 없는디오. 조선 명천에서 온 조선인 출신 장교 한철주 부련대장인데요. 보세요. 대일본제국을 위해 충성을 다하면 나 같은 조선 백성도 장교로 될 수 있죠. 예.” (한철주? 그럼 할아버지하구 아버지가 늘 외우던 고향의 철천지원수 한길수의 맏아들이란 말인가?) 상순을 독기어린 눈길로 한철주를 쏘아보았다. 그 놈은 옆에 선 놈에게 귀속 말로 뭐라고 말하더니 계속 열변을 토했다. “내 고향은 조선 함경도 명천인디오. 우리 집은 조선에서 대부자입니다. 그러나 왜서 일본 유학까지 한 내가 여기까지 왔겠어요? 건 대일본제국의 2등 공민인 우리 동포들을 보호하기 위해서죠. 허허, 당신들은 중국 지주들의 성화에 소작 농사를 짓느라고 힘들지 않아요? 어려운 일이 있으면 나를 찾아오십시오. 꼭 도와주겠습니다.” 상순은 놀랐다. (바로 그 놈이야.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악패지주 아들 놈새끼야! 섬나라 오랑캐 개다리 놈아! 네놈 대갈통을 까부실 테다!" 상순이 고함치고 충국의 손을 잡아채며 금방 몇 발자국 떼였을 때었다. 자동차 우에 섰던 놈이 꽥꽥 소리쳤다. “저 밀짚모자를 쓴 놈을 잡아라!” 상순은 밀짚모자를 벗어 활 집어던졌다. 그들은 사람들 속에 몸을 숨기며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 달아났다. 숱한 일본 놈들은 상순과 충국을 찾지 못해 우왕좌왕 하였다. 순간 역 광장은 수라장이 돼 버렸다. 송하강반에 어둠의 장막이 서서히 드리웠다. 상순과 충국은 일본 놈들을 따돌린 후 배 촐촐해 이 골목 저 골목을 헤맸다. 한 어둑시그레 한 골목에 토성안에 빨간 초롱불을 걸어 놓아 유난히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그들이 지나다가 들여다보니 계집들이 일본 놈들과 팔을 끼고 복도에서 오가는 것이 드문드문 보이었다. “위안소야!” 상순이 멀리 피해 가려고 하는데 충국은 호기심이 부쩍 동해 멈칫거리었다. “형님, 배고픈데 들어가 술이나 한 잔 마시고 가기요.” “거기 어디 술 먹는 데냐? 가자.” 상순이가 충국을 마구 끌고 가려는데 맞은쪽에서 일본 헌병 놈 몇이 총칼을 빼들고 기웃거리며 오고 있었다. 상순과 충국은 그 놈들과 작은 골목에서 딱 마주 쳤기에 불시에 피할 데도 없었다. 이 위기일발의 시각에 상순은 충국을 데리고 위안소 안으로 들어가 버리었다. “어, 이 놈들이. 어디라고 들어와?” 술을 잔뜩 처마신 한 일본 놈이 한어로 말하면서 눈깔을 부라리었다. 뜻밖에도 상순은 담대하게 “우리도 일본 제국을 위해 일하는 사내들이오.”라고 했다. 다른 일본 놈이 “에이, 여긴 종군 위안부 영업을 하네. 일본 군인 외에는 들어오지 못해.”라고 했다. 상순은 “우리 돈을 벌지 않겠소?”라고 하며 동전을 꺼내 그자의 손에 쥐어 주었다. 그 자는 옆전을 손바닥에 쥐어 공중에 뿌리어 잘그락거리더니 “우리 군인만 받아서야 어디 돈을 벌겠는가? 황군을 위해 일하는 중국 놈들도 우리 위안소에 들어올 자격이 있어.”하고 말하면서 상순이네를 안방에 들여보냈다. 바깥에서 지나가던 헌병 놈들이 집안에 들어와서 주인들과 떠들어댔다. “수상한 놈들이 오면 보고하게. 오늘 역 앞에서 수상한 반일불온분자를 놓쳤네.” “예, 예, 예.” 놈들이 바깥에서 떠드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상순은 태연자약하게 호주머니에서 돈을 세여 주인한테 주면서 부탁했다. “고운 년들로 골라 보내게나.” “예, 예, 그러지.” 주인이 나가자 충국은 질겁해 부들부들 떨면서 상순의 팔소매를 툭툭 건드리더디 잡아 당겼다. "너 어쩌자고 이래?" "내 안속이 따로 있어." 얼마 지나지 않아 두 계집이 들어왔다. 한복차림을 한 계집은 상순의 곁에 와 앉으며 팔을 끼더니 교태를 부리었다. “우~메, 이 분은 조선 사람이네요. 명천을 떠난 후엔 조선 사람을 보지도 못했는데요.” “명천?” 상순은 귀가 번쩍 뜨이었다. “어째, 명천에서 혹시 왔어요?” 상순은 말이 빗나간 것을 알고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아, 아니, 난 함흥에서 왔네. 우린 한고향이군.” 그러나 계집은 “한 고향? 누가 당신캉 한고향이래? 난 있제이, 부산 출신 옥설이랑께.” 하고 종알거렸다. 상순은 어정쩡해 서 있는 다른 계집을 쳐다보고 깜짝 놀랐다. "얘, 너 은실이 아니냐? 아니, 여기서 널 만나다니?" 은실은 돌아서서 어깨를 들먹이며 쿨적쿨적 울었다. 술상이 들어오자 옥설은 술을 부어 상순과 충국에게 잔을 내밀었다. “자, 술을 드시지요. 은실을 면목 아나요?” 그녀는 멍해 앉아있는 다른 계집을 보고 “은실아, 닌도 옆 손님 권하랑께.”라고 했다. 충국의 옆에 앉은 은실은 술잔을 드리며 “자, 마셔요. 아무 말두 하지 마세요.”라고 하였다. “그 놈은 벙어리야.” 상순은 충국에게 한어로 “벙어리 놈!” 하고 말하며 눈을 찔끔해 보이었다. 상순은 술맛이 없어 한잔 드네하고 은실을 보고 말했다. "내 죄인이야. 그날 널 구하지 못해 안됐다." "오빠, 부모한테 제 말을 하지 마오. 전 이젠 망가질 대로 망가진 몸이오." "아니야, 네가 원해 그런거 아니잖니? 다 일본 놈들이 미쳐서 이렇게 된거야. 내 어떻게 하든 널 구해내야 하겠어." "안 되오. 괜히 오빠까지 다치겠소." "네 부모와 춘실이 널 얼마나 찾는지 아니?" "그래 언니는 잘 있어요? 이쯤 해선 애를 낳았겠는데." "그래. 아들을 낳았어." 상순은 체면을 잃고 그간 춘실의 일을 간단히 말하고 일어서려고 했다. “일본 놈들한테 쫓기는 판이라 오래 있지 못하겠다. 내 어떻게든 여기서 널 빼내가겠어.” 그때 상순의 옆에 있던 아가씨가 상순의 손을 꼭 잡고 발을 동동 구르기까지 했다. "오빠, 저도 구해주시유, 잉?" "그럼, 여기 위안부 몇이 있소?" "모두 십여명 되는데요. 우린 일본군을 따라 내일이면 신경으로 해서 봉천으로 간다고 해요. 이제 어디로 갈지 몰라요. 말로는 관내로 간다고 해요. 일본 놈들이 이젠 장강이란 긴 강을 건너 중국 남방으로 나갔대요. 그래서 수천수만의 위안부들이 기차에 실려 끌려 남방으로 나간대요." "그래? 오늘 저녁 밖에 시간이 없구나." 옥설은 눈물을 흘리면서 애원했다. "절 구해주세요. 전 경기도 인천 출신인데요. 바다가 개벌에 조개 주으러 갔다가 일본 놈들한테 잡혀 명천에 끌려갔다가 여기까지 끌려 왔어요. 제발 구해주세요.” 상순은 술상에 되물앉더니 술을 들어 쭉 마시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그녀들의 하소연을 들으면서 어떻게 은실과 옥설 같은 불쌍한 여동생들을 구하겠는가 궁리를 했다. 옥설은 초면이였지만 오래 갈라졌던 오빠라도 만난 듯이 계속 하소연을 했다. “날마다 열일여덟씩 달려드는 일본 놈들한테 사지가 찢기고 물러 날 지경인데요.” 이때 만금이도 건너칸에서 건너와 끼어들었다. “난 글쎄 열댓 살에 고향에서 아버지 말대로 산에 가서 소를 풀어 오다가 그만 일본 놈들에게 잡혔지요. 그 끼무라 국장인지 뭔지 하는 놈 때문이야. 그 놈의 졸개들이 우릴 끌어 왔잖아.” 이때 뽕녀라는 위안부도 건너와서 맞장구를 치었다. “다 일본 놈들 때문이야. 일본 놈들이라면 이가 갈려.” 상순은 한참만에 물었다. “오늘 일본 놈들이 적은 거 같은데. 우릴 따라 바람 쏘이는척 하다가 여기서 달아나면 안 되오?” “쉬.” 옥설은 식지를 입술에 대더니 문 밖에 귀를 기울이었다. 이윽고 그녀는 “달아난단 말 말아요. 저 놈들한테 들키는 날엔 목이 날아 나제이.” 만금은 눈이 데꾼해서 “어디로 뛰어? 겹겹이 총칼을 들고 지키는 걸 못 봤어? 전번에 뽕녀가 달아나다가 들키지 않았나. 일본 놈들이 뒤뜰 안에 매달고 몽둥이로 쳐 반 주검을 만들었어.” 하고 말했다. 상순은 한숨을 후 내쉬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오늘 한대장이 올 거니까. 빨리 자리를 뜨세요. 괜히 우리 때문에 곤경을 치르겠어요.” 충국은 바늘방석에 앉은것처럼 안절부절 못하면서 상순의 얼굴만 쳐다보았다. 상순은 바로 앉으면서 “거 한대장이란 누구요?” 하고 궁금해 물었다. 옥설은 술상을 한쪽으로 치우면서 “관동군 부연대장이라고 하더구먼요. 세상 나쁜 놈이야. 같은 조선 사람이 우릴 일본 놈 밑에서 짓뭉개져 죽게 만들었제이.” 하고 도도도-거리었다. 만금이도 공소했다. “그 놈이 우릴 끌고 동만으루 되간다잖아?” 이때 복도 쪽이 소란스러워졌다. “한 연대장, 오셨습니까?” 바깥에서 주인이 일본말로 인사하는 말이었다. “왔어요. 범이 자기 흉을 하면 온다고 그 놈이 왔어요. 빨리 자리를 뜨세요. 저 놈은 우리가 다른 손님을 모시는 걸 보면 좋아 안 한다니까요.” 옥설의 말에 만금도 “얼른 자릴 피하세요.” 하고 방에서 빠져 나갔다. “가자!” 상순이 충국에게 눈짓했다. “벙어리라더니 중국말 하네.” 만금은 앵두 같은 입을 쫑긋 했다. 상순은 돈을 술상 우에 활 주어 던지고 은실의 손목을 잡아끌며 "달아나자!" 하고 황급히 뒤 창문을 열고 뜰에 뛰어 내렸다. "은실이, 저년이, 어디로 도망쳐!" 위안소 소장놈이 고래고래 고함치며 뒤창문으로 내다보며 발을 동동 굴렀다. 상순은 담장 밑에서 은실을 떠밀어 올리려고 악을 썼다. 땅땅! 총알이 죽음의 노래를 부르며 날아와 벽돌담장에 박혀 불꽃을 튕기었다. 상순은 뒷담을 뛰어 올라 은실을 끌어올리려고 했다. 땅! "앗!" 총알이 은실의 팔에 박혔다. 은실이 관통상을 입은 팔을 붑잡으며 담장 밑에 퉁 떨어졌다. "은실아! 은실아!" 푱! 총알이 상순의 발부리에 날아와 박혀 불티가 튕겼다. "빨리 도망쳐!" 충국이 담장을 뛰어넘으며 새된 소리를 질렀다. 위안소 소장 놈이 권총 방아쇠를 재차 당기려는 순간 상순은 몸을 날려 담장을 뛰어내려 도망쳤다. "오빠~!" "빠가요로(제길할)!" 담장 안에서는 은실의 울부짖음소리가 일본 소장놈의 욕지거리가 반죽해 울렸다. 상순은 담장 모서리를 잡고 되 기어오르려고 했다. "안 돼! 총앞에서 어떻게 구한다고 그래?" 상순은 은실을 구하지 못해 맴돌이쳤다. 충국은 상순을 마구 끌고 골목길로 도망쳤다. 그들은 굽이굽이 돌아 도망치다가 뒤가 잠잠하자 멈춰서 뒤돌아보면서 헐떡거리면서 잠간 숨을 돌렸다. "안 돼, 은실을 승냥이 우리 안에 두고 돌아갈순 없어." 상순은 북산공원에까지 도망쳐가서도 은실을 구해내지 못한 것을 안타까와 맴돌아쳤다. 이튿날 동녘이 희붐히 밝아오자 상순은 위안소로 향했다. "가지 말라! 너 혼자 어떻게 구한다고 그래? 우리 어째 길림에 왔니? 유격대에 쌀을 사서 가져가는게 중요하지. 은실을 구하는게 중요하냐?" 상순은 주춤 멈춰섰다가 또 터벅터벅 산아래로 내려갔다. "안돼. 은실이 잘못 될거 같아." 상순은 기어이 산을 내려 시내에 들어갔다. 그는 골목길을 이리저리 에돌아 위안소 부근에 살금살금 접근했다. 그런데 위안소 토성을 잡고 들어가려다가 이상한 감을 느꼈다. 위안소 안에 아무런 동정도 없었다. "웬 일일가?" 상순은 위험을 무릅쓰고 당장을 기어넘어갔다. 그가 위안소 벽에 기대 집안 동정을 살펴보니 휑뎅그렁했다. "꼭 무슨 일이 있구나." 상순이 벽에 기대 앞마당쪽으로 살금살금 나갈 때였다. 만복차림의 중국인이 집안에서 나와 마당에 나왔다. "꼼짝 말엇!" 상순은 그자의 목을 끌어안고 조이면서 물었다. "위안부들을 어데 끌어갔어?" "아니, 이 목을 놓소." "바른대로 대라. 안 그럼 죽어!" "일본 놈들이 끌고 봉천으로 갔습니다." "뭐라고?" "더러는 진수해라는데 가고." "넌 무슨 놈이야?" "난 이 집 주인이요. 일본 놈들이 내 살림집을 강점해 위안소를 꾸렸던 거요." 그자는 상순의 손이 느슨해지자 울상을 했다. "장사, 이 목을 좀 놓고 말하기요." 상순은 중국인의 목을 활 놓아주었다. "그래 위안부들이 하나도 남지 않았어?" "예, 예. 그 놈들이 어제 웬 청년들이 위안부를 끌고 달아나려고 한 사건이 있었소. 위안소라는게 발각되자 급히 위안부들을 끌고 이 자리를 뜬 거 같습니다." "길림 시내에는 위안부들이 없어?" "건 잘 모릅니다." (은실아, 어데 있어?) 상순은 위안소 안을 몽땅 훑어보았다. 은실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어서 나와! 이때 언제 왔는지 충국이 손을 홱 휘둘렀다. 상순은 별수 없이 위안소에서 무거운 피눈물의 발을 뗐다. "길림 역으로 가지 말자. 위험해!" "그래." 그들은 송화강을 따라 내려가다가 룡담산 앞의 철교를 건넜다. 룡담산 령길이 아무리 험악해도 일본 놈들 눈밑을 지나기 보다는 쉬운 것 같아 산을 넘고 들을 지나 강밀봉쪽으로 걷고 또 걸었다. 그때 산굽이돌이에서 짐차가 달려왔다. "기차에 앉아 진수해로 가자." "위험해." "언제 걸어서 집으로 돌아가? 타자." 상순의 말에 충국은 포로병처럼 마지못해 뒤따랐다.        그들은 굽인돌이에서 기차가 속도를 늦추는 기회를 타서 절벽에서 짐차 바곤에 뛰여내렸다.        그들의 등뒤에서는 늦가을 바람이 무서운 비명을 지르면서 공포를 몰고 뒤따랐다…  
61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40) 댓글:  조회:2011  추천:0  2016-05-09
                               10. 효자와 사랑         상순은 그날 밤으로 어둠 속을 꿰질러 도망치다가 유격대원 바우돌을 만났다.         "마을로 돌아가지 말라."         바우돌의 말에 상순은 "지 촌장 놈이 나를 의심하지 않을가?" 하고 뒤더수기를 긁적거렸다.          그때 신출귀몰하는 진달래 중대장이 버드나무숲속에서 나타나 타일렀다.         "먼저 장백산 원시림으로 들어가 피신했다가 방법을 대면 돼."         그리하여 상순은 유격대 근거지로 들어가 버렸던 것이다.         원래 그는 춘실을 데리고 함께 유격대를 찾아가 산에서 살려고 했다. 그런데 일본 놈들에게 춘실을 빼앗긴바 하곤 진달래 중대장을 따라 유격대에 들어가 원수를 갚으려고 했던 것이다. (죽어도 총을 잡고 일본 놈들과 통쾌하게 싸우다가 죽자.) 그는 진달래 중대장이랑 유격대원들과 함께 산속으로 들어가면서 죽을 각오까지 했던 것이다. 사실 그날 밤에 진달래 중대장은 양식을 구하러 함흥촌에 오다가 우연히 춘실과 은실의 통곡소리를 듣게 돼 비술나무 밑으로 황급히 접근해 매복습격을 했던 것이다. 어둠 속에서 누군지는 똑똑히 보지는 못했지만 조선족 두 여성이 일본 놈들에게 잡혀가는 것만은 분명히 보였다. 그런데 조선여성들이 상할까봐 진달래 중대장은 총을 뽑아들었다가 쏘지 못했다. 진달래는 기민하게 돌팔매를 날려 두 놈을 처치했던 것이다. 그때 늙은 비술나무 꼭대기에서 웬 사내가 뛰어내려 도끼로 일본 놈 한 놈을 찍어 죽일 줄은 누구도 몰랐다. 도끼를 든 상순이 어둠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발견했다. "따라가 보오."  진달래 중대장은 바위돌한테 명령했다.     그리하여 바위돌은 상순을 뒤따라가  함께 산으로 떠나게 됐다.      그들은 연 며칠 산속을 가시덤불을 헤치면서 장행군해서야  끝내 장백산 원시림 속의 유격대 주둔지에 들어섰다. 성칠은 아주 반가워하며 상순을 자기 통나무집에 데리고 가서 이것저것 물었다. “불시에 왜 들어왔니? 전번에 말하잖았느냐? 농사를 잘 지어서 유격대에 쌀을 보내는 것도 항일투쟁을 하는 것이라구. 응?  일가식솔들이 다 무사하냐?” “큰일 났습구마.” 상순은 머리를 숙이고 며칠 전에 함흥촌에서 벌어진 사건을 이야기했다. "일본놈들 천하에선 귀여운 딸도 지키기 어렵구나." 성칠은 앙천개탄하면서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었다. 하옥은 상순의 파난 베적삼을 벗으라고 하여 한 뜸 한 뜸 기워주었다. 성칠은 상순의 얼굴 표정이 밝지 못한 것을 보고 “또 무슨 일이 있니?” 하고 물었다. 상순은 기다렸다는 듯이 부어오른 입을 열었다. “아버진 이해되지 않습니다. 난 춘실하구 결혼하고 싶은데 마음에 들지 않는 명옥과 결혼하라고 강다짐을 들이댑니다. 그래 밸이 나서 집에서 달아났습니다. 나도 큰아버지 밑에서 총을 메고 일본 놈과 싸우겠습니다. 어디 장학산 밑에서 소작 농사나 지으면서 살겠습니까?” 성칠은 한참 궁리했다. 이윽고 그는 상순의 어깨를 다독여주었다. “결혼은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게 아니야. 부모들의 말대로 명옥과 결혼해라. 이미 택일하고 사돈보기까지 했다니 더욱 그러하다.” “난 춘실과 이미, 에이. 며칠 전에 일본 놈들한테 아마 위안부로 잡혀간 거 같습구마. 이 세월에 일본 놈들의 성화에 어찌 삽니까?” 상순은 말끝을 흐리며 큰아버지를 흘끔 쳐다보더니 머리를 숙였다. 춘실과 살아서 이미 임신한 일을 말하려다가 욕을 먹을까봐 말끝을 삼켜버렸다. 그는 학식도 있고 무예도 있는 큰아버지를 아주 존경하면서도 두려워했다. 하기에 그의 말은 어진간해서는 부정하지 않았다. 오늘 말만은 인차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성칠도 그런 눈치를 채고 일어나면서 무거운 입을 열었다. “자식은 부명을 천명으로 받들어야 한다. 부모의 뜻대로 명옥과 결혼하는 것은 효자의 본분을 지키는 것이다. 옛날 양산박 호한 로지심이나 무송은 여색을 멀리 하고 재물을 초개같이 여긴 대신 의리를 중히 여겼다. 그게 진정한 사나이야. 너도 농사를 짓고 살 애는 아닌 것 같아. 공산당을 따라 혁명하려는 사람이라면 너는 가정과 사랑에 얽매서는 안 돼. 큰 일을 할 사람은 여색을 멀리 해야 해.” 상순이 귀담아 듣는 것을 보고 “잘 생각해 보아라.”라고 하고나서 화제를 바꾸었다. “이 먼 산 속으로 온바하고는 유격대에서 무예나 배워라. 넌 함흥촌에 돌아가면 농사만 짓지 말고 마을의 청년들을 묶어세워 민병으로 유격대 소 분대를 조직해 일제 지주 지학사 촌장 등 악질지주와 싸워라. 할 수 있겠니?” 상순은 큰아버지를 따라 바깥으로 나가면서 “큰아버지, 총만 주오. 그럼 일본 놈들과 본때 나게 싸울 수 있습니다.” 하고 말했다. 성칠은 토굴을 되돌아보더니 상순의 어깨를 다독이면서 차근차근 말했다. “얘야, 아까 큰어머니 있어서 말하지 못하였다. 너네 큰어머니도 애를 하나도 낳지 못하지 않았고 뭐니? 그러나 난 할아버지가 정해준 색시이기에 버리지 않고 계속 데리고 산다. 내라고 자식을 보고 싶지 않겠니? 조카들을 볼 때면 나도 이제라도 떡돌 같은 아들을 하나라도 봤으면 얼마나 좋겠느냐? 이런 비유 날 때도 한두 번이 아니다.” 상순은 그제야 큰아버지를 우러러보았다. “큰아버지, 그럼 큰아버지도 새 큰어머니를 하면 안 됩니까? 할아버지도 새 할머니를 모셔오고 작은 할아버지도 새 할머니를 모셔 왔는데.” 상순이 말하는 작은 할아버지는 성칠의 여동생의 남편 김범호를 말하는 것이다. 김범호는 곱순과 살아서 딸 하나를 낳고 10여년 동안 애를 보지 못해 첩실을 들여앉혀 오랜 만에 맏아들 동길의 뒤를 이어 명길까지 아들을 줄줄 보았던 것이다. 성칠의 대답은 완전히 달랐다. “우리 항일유격대 혁명 자들은 혼인문제를 완전히 다르게 대한다. 우리 혁명 자들은 전통적인 봉건 혼인과는 달리 일부일처제를 주장한다.” “일부일처제라니?” “남자는 아내를 하나만 하고 아내도 남편을 하나만 둬야 한다는 것이다. 첩을 둬서는 절대 안 된다. 할아버지처럼 아내가 사망한 후 후처를 두는 것은 허용한다. 아들을 보자고 이제껏 생사고락을 함께 해온 조강지처를 버리고 후처를 하거나 첩을 두는 건 혁명 자의 처사가 아니지.” 상순은 머리를 끄덕였다. “너도 그래. 부모가 이미 택일까지 했으면 부모의 명대로 명옥과 결혼하는 게 옳아. 혁명 자로 되려면 혁명자의 혼인 관을 세워야 한다. 개인의 감정을 억제하고 도리에 맞게 혼인을 대해야 한다. 모든 일에서도 개인의 감정이나 기분을 억제하면서 조직의 기율대로 처신할 줄 알아야 하지.” 상순은 마음속에서 잘 납득되지 않았다. 성칠은 옷을 슬슬 벗어버리더니 상순에게 덤비라는 시늉을 했다. “자, 보자, 막내조카 권투기술이 늘었는가?” 상순은 이전에 큰아버지에게서 여러 번 배운 동작대로 주먹을 쳐들고 8자를 그으면서 번개 불이 나게 덮쳐들었다. 상순이 주먹을 날리려는 순간 성칠은 몸을 낮추며 상순의 오른쪽 겨드랑이 밑으로 빠져나가면서 오른 주먹을 바람개비처럼 날려 상순의 아래 배를 슬쩍 갈겼다. “억!” 상순은 외마디소리와 함께 배를 끌어안고 앞으로 쓰러졌다. 성칠이가 매가 쥐를 덮치는 동작으로 날아 들어가며 주먹을 재차 쳐들 때였다. 상순은 공중에서 덮쳐드는 매를 두발로 차는 토끼 동작으로 성칠의 가슴팍을 탕탕 차며 뛰어 일어났다. “하하하. 그놈이 제법인걸.” 성칠은 금방 있은 접전을 총화면서 권술을 가르쳤다. “급급히 이기려고 서둘면 자기 허점을 드러내게 되여 반격을 맞게 된다. 때문에 변화 속에서 상대방의 허점을 유도한 후 일격을 가해야 한다. 말하자면 주먹을 들고 자세를 취한 후 상대방의 주위를 재빨리 맴돌다가 상대방의 자세가 흐트러질 때 번개같이 덮쳐들어 일격을 가해야 한다. 그러면서도 상대방의 반격을 피할 준비도 해야 한다. 알만하지?” 성칠은 직접 동작을 해보이면서 배워주었다. “이렇게 해라.” 상순은 주먹을 쳐들고 배워 준 대로 해보았다. “맞아. 상대방을 단매에 쳐 눕히지 못하면 치곤 즉시 옆으로 혹은 뒤로 피했다가 인차 연속 공격을 들이대야 해. 그래야 공격하면서도 반격을 피할 수 있는거야.” 상순이가 따라 하는 힘 있고도 날랜 동작을 보고 성칠은 엄지를 내둘렀다. “넌 정말 전도 있는 권투수다. 그러나 한 가지만 잊지 말아라. 지금 배우는 권투는 권투시합에 쓸 권투가 아니라 죽기내기를 건 권투다. 일본 놈들과 싸우려면 권투기교가 있어야 하겠지만 더욱 중요한건 목숨을 내걸고 싸울 용기와 담이 있어야 한다. 무쇠주먹을 연마해라. 단매에 일본 놈을 쳐 죽이지 못하면 그 놈의 총이나 칼에 내가 죽는다는 거 각오하고 생사결단하고 싸워야 해.” 상순은 무겁게 머리를 끄덕였다. 성칠은 밀림 속에서 대야만큼 한 둥글 넙적한 돌을 주어 들고 오더니 너럭바위 우에 놓았다. 성칠이가 기합을 단전에 모았다 손에 기를 넣더니 “얏!” 소리와 함께 주먹을 휘두르자 둥글 넙적한 돌이 세 토막으로 박살났다. “와~ 어떻게 이런 무쇠주먹을 연마했습니까?” 성칠은 돌가루가 묻은 자기 주먹을 쳐들어 보이며 말했다. “하루 이틀에 연마할 수 있는 게 아니야.” 뒤이어 그는 종아리에 처맨 납작한 모래주머니를 풀어 상순에게 주면서 “처음에는 이런 모래주머니를 주먹으로 치고 점차 딴딴한 마른 나무도 치고 아름드리나무도 치면서 무쇠주먹을 연마해라.” 상순은 모래주머니를 주어들고 보더니 “함흥촌 옆의 태평강 모래바닥에 가서 모래나 자갈을 치면서 무쇠주먹을 연마하면 안 됩니까?” 하고 물었다. “좋지. 아무도 몰래 무쇠주먹을 연마해라. 속담에 평소에 흥 소리도 없던 소가 뜬다고 했다.” 상순은 큰아버지의 깊은 말뜻을 알아듣고 속으로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번엔 권총을 쏴 봐.” 성칠은 땅바닥에서 자기 옷 위에 벗어놓은 권총집에서 권총을 꺼내 탄창을 뺀 후 상순에게 넘겨주었다. 상순은 제법 안전장치를 누른 후 아름드리나무를 겨눠 방아쇠를 절컥 당겼다. 그는 각종 자세를 취하면서 여기저기 겨누면서 방아쇠를 절컥, 절컥 당겼다. “참 멋지군.” 상순은 뒷덜미를 긁적거리면서 이런 청을 드렸다. “큰아버지, 권총 한 자루만 주시요. 내 지학사 같은 악질지주를 처단해 버리고 쌀을 빼앗아 유격대에 가져 오겠습니다. 지학사를 봅소. 남의 귀한 딸들을 글쎄 일본위안소에 팔아넘기지 않겠는가 인피를 쓴 승냥입니다. 춘실과 은실은 어떻게 됐는지 알수조차 없습구마. 내 언제든지 내 손으로 지학사를 죽여 치우겠습구마. ” “안 돼.” 이때 인삼이가 희죽이 웃으면서 다가왔다. “왜?” “유격대 대장들도 지금 권총을 주지 못하는 형편이야. 또 네게 권총을 줬다가 밀정들에게 들키는 날엔 함흥촌 일대 항일 근거지가 타격을 받을게 아니야? 그리고 네 일가가 몽땅 연루될 수도 있지.” 상순은 답답해 머리를 홰홰 가로 저었다. “총이 없이 어떻게 총을 쥔 지학사랑 진수해분주소 경찰 놈들과 싸우오?” 성칠은 “저 인삼동생의 말이 옳다. 먼저 넌 마을사람들을 묶어세워 소작료를 적게 내구 쌀을 유격대에 지원하는 임무를 수행해라. 그것도 우리 유격대 항일투쟁을 돕는 게야. 이전에 인삼 중대장이 직접 그 일을 했지만 지금 네가 맡아 하도록 해라. 잘 할 수 있느냐?” 상순은 주먹을 쳐들어보였다. “할만 합니다. 유격대를 위하는 일이라면 뭐든 하겠습니다.” 성칠은 상순의 어깨를 툭툭 쳤다. “좋아. 우리 항일유격대에서는 너를 믿어. 총이 없어도 비수나 주먹이 어떤 땐 감쪽같이 없앨 수 있어. 독불장군이라고 혼자 경거망동하지 말고 함흥촌의 청년들을 묶어세워 유격대에 쌀도 지원하고 유사시에 일본주구들도 처단해라. 그러나 모든 군사행동은 우리 유격대 명령을 기다려라.” “옛, 알았습니다. 한 가지 요구 있습니다." "뭐야?" "일본놈들한테 잡혀간 춘실과 은실을 구해 줍소.” "그래, 언제든지 기회를 보아 은실을 구해야 해." "감사합니다!" 상순은 제법 유격대원들처럼 군례를 올렸다. 그때 진달래가 와서 상순이 늙은 비술나무에 숨어있다가 용감하게 뛰어내려 일본 놈을 찍어 죽이고 장총을 로획한 일을 죽 이야기했다. 인삼은 미더운 눈길로 상순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우리 유격대에 후계자가 생겼군그래. 먼저 여기 있으면서 유격대와 함께 군사훈련도 하도록 해라.” “옛,” 차렷 자세를 하고 군례를 올리는 상순을 보고 성칠과 인삼은 마주보며 껄껄 웃었다. “우리 집안에 또 항일유격대 꼬마대장이 나타났구먼.” “허허허. 참말 장하오.” 저쪽에서 하옥도 시조카를 대견하게 바라보며 웃었다. 먹장구름이 뒤덮인 하늘을 가리운 밀림속에서는 유격대원들의 격투련습소리가 여기저기에서 들려왔다. 그는 유격대원들이 투지도 높이 군사훈련을 하는 것을 보고 그들의 혁명투지에 마음속 깊이 감동됐다. (항일유격대원들은 정말 목숨을 내걸고 일본 놈들하구 용감히 싸우는 투사들이야!) 상순은 두 달 동안이나 성칠과 인삼, 진달래를 스승으로 모시고 권투와 총 쏘기, 돌 뿌리기를 익힌 후 장백산 밀림의 항일유격대 군영에서 나왔다. 그는 성칠 큰아버지가 시켜준대로 산 약재 캐러 간것처럼 위장하려고 시오랑 도라지랑 산 약재를 두루 캐서 광주리에 담아 지게에 얹어 지고 함흥촌으로 돌아 왔다.         해가 뉘엿뉘엿 지면서 어둑어둑한 땅거미가 멍지뫼산 그리고 칼산과 패랑천산의 절벽과 나무숲을 서서히 뒤덮어 갔다. 상순은 이를 부드득 갈면서 토성 동남쪽에 있는 자기 집 울안에 들어섰다. 그런데 온 집 식구들이 사랑 칸 쪽에 우두커니 모여 서서 떠들썩했다.        "무슨 일입둥?" 상순이 황급히 집식구들 속을 비집고 들어갔다. “오, 상순이 왔구나.” 기준은 막내아들이 온 것을 보고 무등 기뻐했다. 상순이가 사랑 칸 안을 들여다보니 황소가 쓰러지어 있었다. “아니, 이게 어떻게 된 일이오? 또 콩을 먹었습둥?” 기준은 소의 배를 어루만지면서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었다. “콩을 먹은 게 아니야. 구유에 매 놓은 채로 있는데 주지도 않은 콩을 먹었겠니? 뭘 잘 못 먹었는지 아침부터 아무 것도 먹지 못하고 누워 있다. 손지주네 주재소를 이걸 어쩌니?” 상순은 구유 안을 들여다보더니 손을 넣어 옥수수장이랑 풀이랑 썰어 넣은 소여물을 휘저어 보았다. 소여물을 쥐여 코에 가져다 씩씩 냄새를 맡아 보고 혀끝으로 냄새를 맡아보던 그가 상을 찡그리면서 소리치었다. “무슨 독이 들어간 거 같습구마.” “뭐라고? 독이?” “예. 옥수수 대는 달겠는데 씁구마.” “그럴 리 있겠느냐?” 그런데 둥글소는 눈을 감더니 숨마저 거두었다. “에이, 또 손지주 와서 야단치겠구나.” 기준은 상순을 보고 “손 지주 뭐라고 해두 꾹 참아라.  항상 너 그 불 같은 성깔이 근심된다. 낮은 문턱일수록 머리를 숙이어야 머리가 맞아 터지지 않는 법이야.” 상순은 억지로 밸을 참으면서 사랑 칸에서 나갔을 때었다. 난데없는 황둥개가 씽- 달려 와서 상순의 바지를 물어 당기었다. “지개!” 기준은 위방 쪽을 쳐다보면서 퉁명스레 쏘아 부치었다. “황둥개 또 꼬리를 친다. 쯧쯧쯧.” 상순은 개의치 않고 황둥개가 뛰어 가는 대로 뒤 집 쪽으로 굽어 들었다. “형님! 여기 빨리 오오.” 갑자기 상순이 새된 소리를 치면서 손을 저었다. “무슨 일이야?” 기준과 상우는 황급히 달리어 갔다. 그들이 보니 뒤 집 구새가 한쪽으로 기울어지어 거의 넘어 가고 있었다. 군선이가 혼자 안간힘을 다해 넘어 지는 구새를 받치어 보려고 해도 막무가내였다. 그런데 구새목에 배가 남산만한 춘실과 머리를 싸맨 해금이가 용빼는 수가 없어 맴돌았다. (아니, 춘실이 돌아왔어?) 상순은 기뻐 어쩔 줄 모르면서 뒷집으로 달려갔다. "춘실이!"  그러나 춘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를 외면한 채 어깨를 들먹이며 손으로 눈물을 닦았다. 상순은 춘실이 우는 걸 보고 체면 따위는 다 벗어버리고 춘실을 와락 끌어안았다. 춘실은 손으로 상순을 밀어버리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때 저쪽 토성안 집 토성 우에서 지학사란 촌장놈이 이쪽에 도끼눈을 흘기며 으르렁거렸다. "아니, 춘실이, 저년이 어떻게 돌아왔어?" 지학사는 심술이 났다. "개쌍년을 일본 놈들한테 괜히 줬어. 개 놈들, 여기 와서 배부른 흥정을 다 해? 나도 데리고 놀지 못했는데. 저 고운 년을 어쩌면 좋을가?" 지학사는 사다리를 타고 토성에서 내려가며 중얼거렸다. "일본놈새끼들, 안 가져가겠으면 말어. 내 먹어버려야지. 상순, 저 놈 새끼한테 춘실을 넘겨줄순 엇어. 흥! 어디 두고 보자." 그때 춘실이네 구새는 거의 번져 지고 있었다. “기다립소!” 상순은 허리띠를 질끈 동여매고 어깨로 번져 지는 구새를 떠받치었다. 뒤에 들이닥친 기준과 상우까지 합세하여 구새를 떠밀자 구새는 도로 곧게 서기 시작했다. 구새통을 곧게 세운 후 기준이가 도끼와 못을 가지고 와서 받침목을 대고 고정시키어 놓았다. 그리하여 군선이네는 한차례 위험을 모면했다. 군선은 맥없이 구새 목에 물앉으면서 “야, 아들이 없는 게 한이로구나.” 하고 장탄식했다. “아버지, 딸은 자식이 아닙둥?” 춘실은 훌쩍이며 돌아서더니 마주 보는 상순한테 눈을 흘기며 외면했다. 춘실의 어머니는 상순을 쏘아 볼뿐 행악질은 하지 않았다. 상순은 춘실을 데리고 집으로 들어가 조용히 물었다. "어떻게 돌아왔어? 네가 살아왔으니 살맛이 있구나. 지학사 촌장이 또 붙잡으러 오지 않을가?" 춘실은 전날 상순이 목숨을 걸고 구해준 일이 있는지라 그를 미워하진 않았다. "아마 내 몸이 이런걸 보고 그만둔 거 같아." 사실 춘실과 은실은 모두 지학사란 촌장놈의 밀고로 해 밤중에 일본놈들에게 붙잡혀갔었다. 지학사는 상순을 눈에 든 가시처럼 미워했다. 그는 상순과 붙어다니는 춘실 자매를 일본 놈들한테 팔아버려 상순의 기를 꺾어놓자고 나쁜 마음을 먹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악귀 같은 지학사의 밀모에 의해 춘실과 은실 자매는 진수해 북쪽 어귀에 있는 높은 토성 안에 있는 위안소라는곳에 붙잡혀 들어갔다.       위안소 소장 놈은 아랫배가 부어오른 것도 모르고 이뻐보이는 춘실을 다짜고짜 끌고 작은 방에 들어갔다. "오, 우쯔꾸씨이 온나(이쁜 여자)!"       그 놈들은 다짜고짜로 춘실을 깔고 들어앉아 저고리를 와락와락 벗기었다.  춘실이 아무리 발버둥질을 치면서 발악해도 악귀 같은 그 놈을 당하지 못하고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춘실의 하신에서 어찌나 피를가 많이 흘러나오는지 더러워 코를 싸쥐였다. "흥! 퉤!"       재미없었다. 소장 놈은 괴춤을 춰올리면서 춘실을 툭 차버렸다. 소장놈은  이번엔 은실을 강제로 끌어내 독방에서 이른바 신체검사를 하는 척 하면서 짓밟다가 아연실색했다. "나니까(뭐야)? 빠까요로(제밀할), 이시무스메(돌처녀)!" 그 놈은 아무리 야욕을 채우려고 해도 은실의 몸속으로 그게 들어갈 수 없었던 것이다. 지독한 그 놈은 다른 일본 놈들을 시켜 은희를 짓밟게 했다. 야욕이 발정한 야수 대여섯이 연이어 은실을 짓밟았다. 은실은 너무 아파 대성통곡 치면서 "엄마! 엄마!" 하고 죽어가는 신음 섞인 소리로 고함쳤다.       일본놈들이 은실한테 덮쳐드는 틈을 타서 춘실은 도망쳤던 것이다. 그러나 춘실은 창피해 상순한테 그 내막을 제대로 말할 수 없었다.       소장 놈은 은실의 방에 계속 야욕이 발작한 놈들을 십여명씩 밀어넣어 무참히 짓밟았다. 그래도 은실의 하신이 째지지 않자 소장놈은 뾰족하게 깎은 참대칼로 은실의 하신을 미친 듯이 찔렀던 것이다.       소장놈은 피묻은 참대칼을 쳐들고 징글맞게 웃어댔다. "네 년이 아무리 돌처녀라고 해도 참대칼을 당할 수야 있어? 으하하하" 은실은 기혼하고말았다. 그러나 야수 같은 소장님과 색마들은 은실의 피흐르는 하신을 구경하면서 "오, 이시무스메!" 하고 변태적으로 으르렁거리며 지껄여댔다. 색마 같은 일보 놈들은 춘실이 임신부라는 것을 발견한 후 아쉬운 대로 며칠 잡일을 시키다가 쫓아냈던 것이다. "개놈새끼들, 이 원쑤는 꼭 갚아야 해!' 상순은 주먹으로 애꿎은 벽을 퉁 쳤다. 흙벽이 움푹 주먹자리가 나면서 마른 흙벽가루가 흩날려 떨어졌다. 춘실은 상순의 귀에 대고 귓속말을 했다. "어떻게 유격대에 연락해서 은실을 위안소에서 구해내지 못할까?" "글세, 기회를 보자." 상순은 어깨를 들먹이는 춘실을 보자 속이 부글부글 괴어 번지어 자리를 떴다. 그가 울타리를 금방 나설 때였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지학사 놈과 딱 마주쳤다. 밸 같아선 한주먹에 때려죽이고 싶었다. 하지만 상순은 용케도 꾹 참고 능청스레 인사했다. "지 촌장, 무사합둥?" 지학사는 개화장을 휘두르면서 우멍눈을 가슴츠레 뜨고 상순의 아래위를 훑어보았다. "이 촌장어른께 청가도 맡지 않고 요새 어디에 갔어?" "오, 그래잖아도 지촌장한테 산 약재를 가져다 드리자고 캐왔는데. 에헴, 내 따라 옵소. 그간 내 산에 가서 장수약재를 캐왔수다. 허허허." "뭐라고? 너 약재를 캐왔어?" "우리 마을에 유격대 쳐들어온 일 몰라? 웬 놈이 도끼로 일본 황군을 찍어 죽였어." "모릅구마. 누가 감히 그런 짓을 다 해?" 상순은 능청을 떨었다. "산약재나 어디 보자구나." 지학사는 상순을 따라 앞집에 갔다. 어둑시그레한 사랑칸에 들어가 보니 아닌게 아니라 지게 위 광주리에 도라지랑 시오랑 더덕이랑 한 광주리나 있지 않겠는가. "허허허. 너 이런 재간도 있어?" 지학사는 광주리채로 들어가려고 했다. "가만, 이 좋은 약재를 우리 아버지한테도 주게 좀 남기요." 상순은 도라지 몇뿌리를 쥐어냈다.  "놔둬. 자식," 지학사는 가슴츠레한 실오리눈깔을 해가지고 상순을 쏘아보았다. "늙은 비술나무에 귀신이 붙었어? 똘만경찰도 늙은 비술나무 아래서 돌멩이에 맞아 죽었고 이번에도 거기서 사단났거든. 그놈 늙다리비술나무를 송두리채 뽑아버려야지.흥!"  지학사는 한바탕 으르렁대다가 상순을 놓아주고 약재광주리를 안고 헐레벌떡 가버리었다. 아무 꼬리도 밟지 못하자 이빨을 쁙쁙 갈았다. (아무대든 내 손에 죽을줄 알아! 흥!) 그때 상순도 윽윽 별렀다. "개놈새끼, 언제든 피빚은 피로 갚아야 해!" 상순은 뒤에서 살기찬 눈길로 지학사의 뒤잔등을 노려보았다. 지학사가 말하는 늙다리나무란 조개덕과 함흥촌 동구에서 뻗어나간 길이 합해지는 길목에 있는 늙은 비술나무를 가리키는것이였다. 그 나무는 몇백년이나 살았는지 키는 그리 높지 않아도 둘레길이는 장정 대여섯이 팔을 펴고 손잡고 둘러서야 다 안을수 있는 엄청 실하고 늙은 비술나무였다. 기준은 어둠속에서도 구새 받침대에 못을 땅땅 박으면서 군선에게 말했다. “군선이, 우리 상순이 돌아오는 음력 10월 10일에 결혼하니까 잔치 술이나 마시러 오오.” 그 말에 군선은 구새를 잡은 채 맥 없이 말했다. “내 만났을 때 하는 말이지만. 아니, 그 집 막내 놈과 우리 애가 사고를 친 거 같소. 이 일을 어쩌오?” “양? 사고라니?” 군선은 나지막이 “우리 애가 배 남산만큼 부어오른 걸 보지 못했소?” 하고 말했다. 기준은 또 못을 단단히 박았다. “자식 놈들이 덤벙댄 거 용서해 주오. 춘실을 좋은 신랑감을 찾아 잔치를 시키우.” “그것도 말이라고 하오? 남의 애를 낳은 딸이 시집을 온전히 갈 거 같잖소.” 기준은 마지막 못을 땅, 땅, 땅 박았다. “미안하오.” 춘실은 아버지와 기준이 구새 목에서 주고받는 말을 가만히 듣고 이불을 와락와락 내려 들쓰고 들어 누워 섧게 울었다. 해금은 딸이 불쌍해 훌쩍 일어나 쌩 구새 목으로 달려 나갔다. 그러나 기준은 보이지 않고 영감만 구새 목에 맥없이 물앉아 있었다. “이 오줌 깨 같은 영감이, 앞집영감하구 찍 소릴 못 하구 마오? 내 오늘 가만 놔두는가 봐라.” 그녀는 홱 돌아서더니 앞집으로 씽 달리어 나갔다. 뒤에서 군선은 손가락질 하면서 “저, 저, 또, 또.”라고 할뿐이었다. 해금은 앞집에서 한창 저녁 숟가락을 드는데도 정지에 들어가 떠들어댔다. “앞집나그네, 우리 딸을 내놓소! 우리 딸을 제대로 내놓지 않는 날엔 내 가만 있나 보오! 흥!” 사련은 엉거주춤 일어나 “어쨌다고 이러오? 올라 와 저녁이나 들면서 천천히 얘기하오.” 하고 말하면서 바닥에 내려가 해금의 손을 잡아끌었다. “이걸 놓소. 남의 딸을 배 남산만큼 만들어 놓고 다른 집 딸과 잔치 하면 되오? 춘실의 배 속에는 이집 새끼가 자라고 있소.” 기준은 숟가락을 탕 놓았다. “뭐라오?” “그래 몰라 묻소?” 해금이 행악질하는데 새금이 막아 나섰다. “그만 하오. 삼촌댁, 아무 말씀이나 할 게 아니오.” 그는 자기 삼촌댁의 손을 잡아 구들에 올라오게 하고 뒤 말을 이었다. “동네에 소문이 나면 어찌오? 그러지 않아도 동네서 쉬쉬 하는데 창피해 어떻게 사오? 어찌 하겠소? 시아버지 고르고 골라 쥐며느리를 삼자고 그러는 거. 우리 지씨 네 딸들이 어떻다고 나무라는지 모르겠소.” 기준은 등잔불 밑에서 맏며느리를 흘기어 보았다. 상우도 너무한 것 같아 핀잔을 주었다. “여보, 아버지와 무슨 말버릇이오?” 그러나 새금은 공혁을 안고 바깥에 횡 하니 나가면서 끊임없이 도도도 거리었다. “개성 최 씨네 시어미에 며느리까지 들어와 이 집안이 재미 있겠소. 난 이 집 쥐며느린 게 무슨?” 기준은 훌쩍 일어나 위방으로 들어 가버리었다. 상순은 어쨌으면 좋을지 몰라 바깥으로 나가더니 어디론가 달아나 버리었다. 기준은 위방에서 바로 앉더니 걸걸한 목소리로 맺고 끊듯이 말했다. “좌우간 그 집과는 혼사 말을 하지 않으니까 그만 두고 가오. 우리 상순이 뭣이 모자라 데릴사위로 들어 간답데? 염치없는 집안이라구야, 원, 흥!”       해금은 가슴에 못이 꽝꽝 박히고야 말았다. 성이 날대로 난 그녀는 위방으로 씽 달려들어 가 기준의 멱살을 틀어쥐고 늘어지며 행악질했다. “이 더러운 영감두상, 개소리를 치지 말구. 내 딸을 처녀로 돌려 달라. 우리 집에 아들이 없다고 업신여기는가? 엉?” “콱 신어놓기 전에 놓지 못하겠는가?! 그 쌍년 어미에 상년 딸이지. 우리 집에 와서 종질을 하겠다고 해 봐라. 데려 오는가?!” 기준은 고래고래 고함치며 해금의 손을 풀어 활 떠밀었다. 해금은 저만치 벽 구석에 뿌리어 나가 나뒹굴었다. 상우도 해금을 말리어 위방에서 모시고 나갔다. “작은 가시엄마, 우리 아버지 고집을 돌리지 못합구마. 내 처제한테 상순이보다 더 좋은 신랑감을 얻어주겠습구마.” “관두오. 저 배속에 애는 어찌 하오? 누가 남의 애를 가진 계집애를 데려 가자 하겠소?” “바깥에서 떠들지 맙소. 누가 듣겠습구마.” 상우는 해금을 부축해 뒤 집으로 들어갔다. 새금도 공혁을 안고 훌쩍거리면서 뒤따라나갔다. 그제야 토성안집 동쪽이 조용해지었다. 어디에선가 뻐꾸기가 우는 뻐꾹뻐꾹 소리가 들리어 왔다. 해금과 상우는 이불을 들쓰고 누운 춘실을 불쌍하게 내리 보았다. 그러나 춘실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다만 이불이 풀럭거리며 가느다란 신음소리가 들릴 뿐이었다. 태평강가의 아름드리버드나무가 무섭게 몸부림치고 있었다. 상순은 성이 꼭뒤까지 치밀어 씩씩거리면서 태평강 가에 달리어 갔다. “아, 아버지는 어째 내 춘실과 살지 못하게 합니까?” 그는 장백산 밀림 속에서 큰아버지가 하던 말을 생각하고서야 겨우 고민 속에서 해탈되어 그간 배운 권술을 연습했다. 한참 발딱거리면서 주먹질과 발길질을 했더니 성이 좀 풀리었다. 그는 먼 동산에 걸린 먹장구름 속의 초생 달을 쳐다보면서 한숨만 푸푸 내쉬었다. 1937년 음력 10월 10일, 결혼식 날은 끝내 돌아 왔다. 마을 사람들과 기준의 온 집 식솔들은 밸 때기 더러운 상순이가 백마를 타고 명옥을 가마에 앉혀 데려 올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집안사람들은 곱게 단장한 명옥을 보고 혀를 끌끌 찼다. “새각시 너무나 곱구나.” “춘실과 자꾸 비해 그렇지. 저만하면 상순이 각시 복이 있지 뭐.” 백마를 탄 상순은 원래 벗어진 이마나 짙은 눈썹아래 예리하게 번쩍이는 세 귀 눈이라던가, 날이 선 코나 맵짠 입은 정말 호남아였다. 그러나 상순은 웃음 한 점 없이 머리를 숙인 채 묵묵히 백마를 타고 앞으로 나갔다. 사람들은 가마를 탄 명옥을 보고 “첫날 새 각시도 저만하면 곱다야.”라고 했다. “응아-” “응아-” 이때 뒷집에서 갑자기 갓난애 우는 소리가 울리었다. 춘실은 앞집 상순이가 백마를 타고 가마를 탄 각시를 데리고 집안에 들어설 때 애를 낳았던 것이다. 춘실은 앞집에서 왁작 떠드는 소리를 듣고 애비 없는 애를 가엾이 내려다보더니 돌아누워 어깨를 들먹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었다. 쓰라린 눈물이 흐르고 흘러 베개 잇을 적시었다. 처량한 달빛이 춘실의 모자간이 가엾어 은빛으로 감싸 주었다.       첫날밤에 상순은 어머니와 여동생 금옥이가 펴 놓은 누더기 첫날이불 속에 들어갔다. 하지만 한숨을 후 내쉬더니 새 각시 명옥의 옆으로 가지도 않고 훌 돌아누워 버리었다.       명옥은 오히려 편히 잠을 잘 수 있어 더욱 좋았다. 사랑방이 어찌나 비좁았으면 옆에는 시어머니와 시누이까지 누워 돌아누울 자리조차 없었던 것이다. 다행히 시아버지는 웃새집에 들어갔기에 넷이 누울 자리가 났던 것이다.       초겨울 밤의 희읍스름한 달빛이 첫날이불을 쓸쓸히 비췄다…                                                                                                15장 피눈물 젖은 고향                                                                                                                                                             1. 유격대 군량미         상순은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따라 간도에 들어 와 새로 닦은 터전인 함흥촌을 돌아보자 코마루가 시큼해 났다.        (뼈 빠지게 황무지를 개간해 곡식을 심어도 중국 지주 장학산에게 소작료를 바치고 나면 어디 유격대에 가져 갈 쌀이 남겠는가.)       상순은 토성 안 집에 살다가 허망 나앉은 큰아버지가 근심스러웠다. 그러자 인삼 중대장의 말이 머리에 떠올랐다.      (지주나 부자 놈들의 쌀을 빼앗아내 가져가야지. 먹을 게 없는 농민들은 총칼을 들고 일본 놈들을 이 땅에서 몰아내고 지주와 부자 놈들의 재산을 몰수해 나눠 가져야 진정 땅의 주인이 돼 떳떳하게 살 수 있다. 이게 바로 우리 가난한 사람들이 중국 공산당을 따라 혁명을 하는 도리이다.) 상순은 높다란 토성 밑에 와서 토성 안 집 자리에 독사처럼 들어앉은 촌공소를 들여다보는 순간 눈에 불티가 번쩍이었다. “지학사, 네 이 놈, 지금 일본 놈들을 등에 업고 우쭐거린다만 오래 가는가 두고 보자. 어느 땐가 내 유격대를 데리고 와서 네놈을 처단하고 재산을 청산해 버릴 줄 알아라. 이게 인삼아저씨네 토성안집이지 네 집이야? 바로 자기 집인 거처럼 개지랄이야. 흥!” 상순은 토성 대문 안에 소홀히 들어가지 않고 기웃거렸다. (유격대에 쌀이 당장 떨어지는데 얻어다 줘야지. 저놈 토성 안 촌공소를 들이쳐서 쌀을 빼앗아 가져갈까?) 그러나 한참 궁리해 보니 자칫하면 그들 삼대가 와서 개척해 놓은 함흥촌이 또 일본 놈들의 토벌을 맞을 수도 있었다. (토끼도 자기 굴 앞의 풀을 먹지 않는다는 말이 있지 않는가.) 그는 강가의 너부죽한 너럭바위 우에 앉아 궁리하다가 무릎을 탁 치면서 일어났다. “옳지, 구촌 아저씨 선준을 따라 다니면서 약 담배 장사를 해 유격대에 쌀을 사가자.” 이튿날, 상순은 선준을 찾아 갔다. 인사수작이 끝나자 상순은 단도직입적으로 “삼촌, 나도 약 담배 장사를 하고 싶소. 좀 도와주오.” 하고 간청했다. 그러자 선준은 위방 문부터 닫아걸었다. “자칫하면 목이 날아 나.” 선준은 도리머리를 가로 흔들었다. 바빠 맞은 상순은 선준의 손을 꽉 붙잡고 애원했다. “사몬, 우리 집에서 손 지주네 주재소를 죽이었는데 어찌 하오? 당장 소를 사줘야 하겠는데 목숨을 걸고서라도 장사를 해야 하겠소.” 선준은 머리를 숙이고 한참이나 궁리하였다. 등불이 가물거리는 방안에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한참 후 선준은 머리를 천천히 들더니 상순을 마주 바라보았다. 벗겨진 이마에 독기서린 세 귀 눈, 베적삼 팔소매 밑으로 드러난 울뚝불뚝한 팔 근육… 어디를 보아도 씩씩하고 믿음직한 조카였다. “밑천도 없는데 처음부터 어떻게 약 담배장사를 하겠니? 우리 약담배짐이나 메고 호위나 해 달라.” “감사하오. 삼촌.” 상순은 선준의 두 손을 꽉 잡았다. 며칠 후 상순은 호미를 들고 기음매러 가는 척 하면서 집을 나섰다. 그는 미리 약속한대로 조개덕 아래 늙은 비술나무 밑에서 구촌 아저씨들인 선준과 두준을 만났다. 선준과 두준은 사촌형제였는데 기실 상순보다 서너 살 이상이었다. “괜찮다. 호미는 왜 가지고 왔니? 저기 길옆에 파묻어 두구 가자.” 상순은 호미를 쳐들어 보이면서 호언장담했다. “이걸 보면 누가 우릴 약 담배장사군으로 보겠소? 또 강도떼를 만나면 호미로 단매에 쳐 죽일 수도 있소.” 그 말에 선준은 머리를 끄덕이었다. “성남집 조카는 머리가 비상하다니까.” 그러나 두준은 입귀를 비쭉거리었다. “그까짓 호미로 어떻게 호위한다고? 쯧쯧쯧.” 선준은 성격이 활달하고 남을 쉽게 믿지만 두준은 조금 우울한 편인데다 남에게 마음을 쉽게 주지 않았다. 상순은 호미를 쥐고 앞뒤를 살피면서 령길을 앞장서 걸었다. 가시덤불을 만나면 앞에서 호미로 길을 헤치어 나갔고 어두운 밤이면 뒤에 서서 두 삼촌을 지켜 주었다. 조선 명천에 거의 들어서자 두준은 별 말을 다 했다. “팔촌형 때문에 고향에서 살지도 못 하구 간도에 쫓기어 가서 이게 뭐야? 옛날 조선 법에 한사람이 죄를 지으면 팔촌까지 누명을 쓴다더니 어쩜 일본 놈들 법도 똑 같니?” 선준은 묵묵히 걸었지만 두준은 계속 두덜거리었다. “기준 형님네 부자간이 우시장 경찰국이 무너지게 짓지 않았더라도 우린 고향에서 쫓기어 나지 않았겠는데…” 선준이 참다 못 해 한마디 툭 내쏘았다. “기준형님 덕분에 우리 큰집 작은집이 몽땅 함흥촌에 발을 붙이게 됐는데 어째 자꾸 형님 네를 헐뜯소? 상순을 옆에 두고.” “야, 임마, 고향에서 살면 살았지. 누가 함흥촌에서 살고 싶어 사니?” 두준은 계속 말하려다가 상순이가 호미를 쥐고 되돌아보자 허 벌렸던 입을 천천히 닫아버리었다. 밀림 속은 찌는 듯이 무더웠다. 여기저기에서 놀란 새들이 푸르릉 푸르릉 날아 푸르른 나무 잎에 가리어 보이지 않는 하늘로 날아갔다. 그들은 명천 시내에 들어가지 못하고 산골짜기를 넘어 동남쪽 산기슭으로 올라갔다. 적송이 우거진 박달령을 넘어서자 깎아지른 듯한 산과 협곡이 나타났다. 몇 시간이고 령을 타고 산을 넘고 산골짜기를 몇 개 건너가자 은띠 같은 은주하가 산굽이를 굽이굽이 에돌아 뻗어 내리어 간 것이 눈에 띄었다. 강물을 끼고 산 아래 마을이 보이었다. 선준은 산 아래 마을을 가리키면서 “저게 네 고향 운주동이야.” 하고 알려 주었다. “내 고향이라고? 저 고향 마을에 가보기오. 무너진 우리 집 자리라도 있는지 가봐야겠소.” “에끼, 이 놈, 환장했니?” 두준은 상순을 흘겨보면서 손으로 목을 치는 시늉을 하였다.  “지금 일본 놈들이 너네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잡지 못해 피 눈이 돼 날뛰고 있는데 고향으로 가? 자칫하면 우리까지 작두에 목이 썩 뚝 잘리겠어.” 상순은 고향을 눈앞에 두고도 가보지 못하는 것이 못내 아쉬워 발에 뿌리 내린 듯이 멈춰 서서 고향 마을을 오래도록 내려다보았다. 선준은 상순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면서 “이담 일본 놈들을 몰아 낸 후 고향에 와서 살아도 돼. 가자.” 하고 갈 길을 재촉했다. 그제야 상순은 할 수 없이 경각성을 높이어 사위를 두리번거리면서 앞길을 헤치며 나갔다… 명천 시내에 들어서자 선준은 상순에게 귀속 말을 했다. “우리 물건을 하는 새 너는 썩 떨어져 따라 오라. 만약 우리 뒤를 밟는 놈이 있으면 가차 없이 해치워야 한다. 알만하니?” 상순은 머리를 끄덕였다. 그는 호미자루를 거머쥐고 선준과 두준의 뒤에 한 일여덟 발자국 떨어지어 따라 가면서 사처를 두리번두리번 살피었다. 선준과 두준은 우시장에 들리어 이전에 거래하던 약 담배 장사꾼들에게서 약 담배를 사 들이었다. 그들은 소금주머니 속에 약 담배를 감춰 가지고 시내를 벗어나자 또 령 길을 잡아타고 북으로, 북으로 걸어갔다. 연 며칠 산속에서 헤매 끝내 회룡 부근에 이르렀다. 선준은 잔등에 지었던 소금짐을 끌러 내리우더니 약 담배를 꺼내며 상순에게 말했다. “이대로 가져가서는 안 돼. 좀 보초 서라.”        선준은 미리 사둔 일본제 치약을 짜 버리고 치약 안에 약 담배를 쑤시어 넣는 것이었다. 두준은 치약에 넣고도 약 담배가 남자 나무숲에 가서 뒤를 보고 돌아왔다. 그는 약 담배를 비닐로 감더니 바지를 벗고 낑낑거리며 항문에 쑤셔 넣었다. 두준은 나머지 약 담배를 상순에게 건네주었다. “너도 항문에 넣어라. 강도도 없는데 공 짐삯을 받지 말고." 상순은 이제껏 공밥을 먹고 공 짐삯을 받을 것 같아 약 담배를 받아 이를 악물고 항문에 넣기 시작했다. 그런데 항문이 어찌나 아픈지 오만상을 찡그리었다. (에이, 이 놈 약 담배 장사도 쉽지 않구나.) 선준과 두준이 일본 놈들이 총칼을 쥐고 지키는 두만강 나루터 쪽으로 다가가는 것을 보고 상순은 멈춰 섰다. “어째 하필 일본 놈들이 지키는 나루터로 가오? 놈들이 없는 데 가서 고기 배라도 얻어 가지고 건너지.” 선준이 다가와 상순에게 나직이 귀속 말을 했다. “어떤 때엔 놈들을 피해 가면 더 의심받을 수 있다. 저 놈들이 얼마나 교활한지 아니? 고기 배 주인들에게 돈을 주면서 유격대나 약 담배장사를 붙잡으라고 매수했어. 알만 해?” 나루터에서 몇몇 일본 놈들이 총칼을 비끼어 들고 간도에 들어가는 조선 사람들의 몸과 짐을 수색하고 있었다. 그중에는 가마를 빼 지게에 진 사내로, 애를 업고 함지를 인 아낙네로 떠들썩했다. 선준 등의 차례가 되자 콧수염을 기른 일본 놈이 도끼눈으로 아래위를 훑어보면서 두 팔을 벌리어 들게 한 후 온 몸을 샅샅이 수색했다. 잔등에 진 짐을 벗기어 치약 대여섯개를 쥐여 만지작거리면서 선준의 눈치를 흘끔흘끔 곁눈질 했다. 선준은 일부러 고개를 들어 먼 북산을 쳐다보면서 대수롭지 않은 척 했다. “고레와 나니까?(이건 뭐야?)” 선준은 일본 말을 꽤나 하였지만 대답 대신 입을 벌리고 손가락으로 이를 닦는 시늉을 했다. 헌병 놈은 엉거주춤 일어나더니 두 손으로 선준의 볼을 잡고 “아~” 하고 “구찌오 히라께(입을 벌려)!”라고 명령했다. 선준의 벌린 입안을 들여다보더니 버럭 고함쳤다. “빠가요로(바보), 이발이 싯누런데 칫솔 약을 저렇게 많이 사 갔소까?” 헌병 놈은 치약 마개를 일일이 열어 쭉쭉 짜보았다. 그런데 안에서 하얀 치약만 괴어 나왔다. 그래도 시름 놓지 못하고 일본 놈은 소금주머니 안에 손을 찔러넣어 이러 저리 헤쳐 보기도 하고 총창 끝으로 소금을 이리저리 헤치어 보기도 하는 것이었다. “이께(가라)!” 선준은 소금 짐을 지고 나루 배 쪽으로 갔다. 두준의 차례가 됐다. 일본 놈은 소금 짐을 들춰 보고 치약이 나오자 거들떠보지도 않고 두준을 끌고 한쪽으로 갔다. “후꾸오 누게(옷을 벗어)!” 두준은 눈이 휘동그래졌다. (‘똥을 누게’? 큰 일 났는데.) “하야꾸 누게(빨리 벗어)!” “금방 누게.” 두준은 옷을 쫄딱 벗으면서 앉아 똥을 누는 시늉을 했다. 헌병 놈은 두준이 앞에서 앉았다 섰다 하는 시늉을 하며 을러멨다.  “고레요우니 야루(이렇게 해)!” 순간 숱한 눈길들이 이쪽으로 쏠리었다. 선준은 두준이 근심돼 나룻배에 오르지 못하고 서성거리었다. 그때 상순이가 두준 쪽을 주시하는 다른 헌병 놈들의 눈치를 살피다가 자기 호주머니에서 치약 깍지를 꺼내 슬쩍 선준에게 건네 주었다. 두준은 항문에 넣은 약 담배가 빠져나올까 봐 천천히 앉았다 섰다 했다. 두준이 항문이 아파 오만상을 찡그리자 헌병 놈은 헤벌쭉 웃으며 지껄여댔다. “하야꾸(빨리), 하야꾸(빨리)!’ 두준이 빨리 일어났다 섰다 해도 밑구멍에서는 다행히 피가 섞인 똥물이 흘러나올 뿐이었다. 헌병 놈은 아무것도 나오지 않자 머리를 가로 흔들었다. 그러나 그쯤 해 그만 둘 놈이 아니었다. “왜 상을 찡그려?” 몇 해 동안 나루터에서 두만강을 건너는 조선 사람들을 검사해 온 그 놈은 조선말도 놀랄 지경으로 꽤나 잘하는 것이었다. “설사를 만나서 죽겠소.” 그제야 헌병 놈은 머리를 끄덕이며 코를 싸쥐었다. 그 놈은 상순을 오라고 손짓했다. 헌병 놈은 건장하게 생긴 상순이 아래 위를 살피었다. 아무래도 예지로 번쩍이는 세 귀 눈과 불뚝불뚝한 팔뚝과는 달리 호미를 쥔 상순이가 잘 어울리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그는 상순의 손을 쥐더니 손바닥을 만지어 보는 것이었다. “손바닥에 군살이 박힌 걸 보면 농사군 같은데 비범한 생김새를 보면 아무래도 거저 농사나 지어 먹고 사는 놈 같지 않아. 이름이 뭐냐?” 하고 물었다. 상순은 처음 헌병과 띄운 일이어서 조금 긴장했다. “김진.” “김진? 어데 살아?” 상순은 제대로 대지 않았다. “태평거우.” 헌병 놈은 꽤나 긴장해 하는 상순을 보고 자꾸 물었다. “뭘 하러 조선에 갔어?” “소금과 치약 장사 하러 갔소.” “호미는 왜?” “호미 사다가 기음매자구. 강도도 막구.” 상순은 얼버무리면서 헌병놈을 곁눈질했다. “호미로 날강도의 비수를 당하는가? 총을 쥔 강도도 많은데.” 상순은 점점 침착성을 되찾았다. “우리 농사꾼들은 보지도 못한 총보다두 호미가 제일 좋은 호신봉이요.” 헌병 놈은 아무 말꼬리도 잡지 못하자 “옷을 벗어!” 하고 눈깔을 부라리었다. 상순은 두덜거리면서 한쪽에 가서 옷을 벗었다. 또 두준에게 하던 것처럼 앉았다 섰다 하라고 손시늉 했다. 상순은 앉았다 일어났다 하다가 약 담배가 빠져 나올 것 같았다. 그래서 앉았다가 일어나 오줌을 싸면서 엉덩이에 힘을 주어 약 담배가 항문 속으로 되들어가게 했다. 헌병 놈은 둬 번 더 앉았다 섰다 하게 해보고 상순도 건너가라고 손을 홱 저었다. 상순은 바삐 옷을 주어 입고 소금 짐을 잔등에 지고 선준 등이 탄 배 쪽으로 스적스적 걸어갔다. 배에 오른 후에도 겁을 집어먹고 손마저 부들부들 떠는 두준을 보고 선준과 상순은 희죽이 웃었다. 공포와 살기 넘치는 두만강을 건너 나루터를 벗어나 버드나무숲 속으로 숨어 들어간 그들은 한숨을 활 내쉬었다. 선준은 “살았다, 살았어!” 하고 좋아 야단이었다. 두준은 상순의 항문에서 약 담배를 빼내 챙기면서도 두덜거리었다. “내 뭐라데? 호미를 가지고 오지 말라는데도. 하마터면 내 약 담배를 빼앗기고 목이 떨어질 번했다.” 선준은 두준을 흘겨보았다. “형님도, 쯧쯧, 걔 덕에 약 담배를 숱해 건네오고도 그러오? 짐삯이나 푼푼히 주오.” “주지 않으리? 우리 둘이 가도 되겠는 걸 돈이나 축냈지.” 두준은 대답은 선선히 해놓고 집에 돌아온 후에도 짐삯을 공 주는 것 같아 아까워 끝내 선준보다 적게 주었다. 약 담배 짐을 날라 준 삯으로는 유격대에 가져갈 쌀을 쉰 근도 살 수 없었다. (안 되겠다. 큰아버지랑 애타게 기다리겠는데 먼저 쌀을 가져가고 보자.) 그는 궁리하던 끝에 선준에게서 돈 50원을 꿔 쌀을 사 상우 형님을 시켜 수레에 실어 유격대에 실어가게 하었다. 당시 상순이네는 손지주네 소가 독약을 먹고 죽어 숱한 빚을 걸머지었던 것이다. 할 수 없이 죽은 소고기를 팔고도 모자라 집마저 팔아 손지주네 소 값을 물어 주었다. 그러고 나니 웃새집 헛간에 되들어가 구들을 놓고 사는 구차한 형편이었다. 한편 밀림 속에서 버섯이랑 고사리와 더덕 등 산나물이나 캐먹던 유격대는 상우가 싣고 간 하얀 입쌀을 보고 기뻐 어쩔 줄 몰라 했다. 하옥과 은녀는 오랜만에 쌀알을 넣고 죽을 끓이면서 못내 상순 형제네 지원에 코마루가 시큼해 났다. 성칠은 입쌀마대들을 보고 인삼을 돌아보면서 혀를끌끌 찼다.  “상순이 그 놈이 끝내 일을 해냈구먼. 잘 배양하면 장차 훌륭한 유격대 골간이 될 거 같네.” 인삼도 머리를 끄덕이었다. “우리가 함흥촌을 떠난 후 산 속의 유격대는 쌀 고생을 많이 했소. 이젠 상순이 내 뒤를 이었으니 시름 놓아도 되겠소.” 그들의 말에 화답이나 하는 듯이 장백의 밀림도 초가을 바람에 너울너울 설레고 있었다.  
60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39) 첫사랑 댓글:  조회:2122  추천:0  2016-04-20
                           8. 첫사랑        잔설도 여기저기 지저분하게 널려 땅을 지지누르다가  자취를 감추었다.  비단결로 얼굴을 만지는듯한 부드러운 봄바람이 산들산들 불어왔다. 이젠 땅에 누기  잘 들어 농사꾼들이 밭갈이를 하고 희망의 씨앗을 뿌릴 설레는 농사철이 다가왔다.       기준은 상우와 상순을 데리고 토성안집 동남쪽으로 가서 새 집터에 괭이로 기초돌을 놓을 구덩이를 팠다. 창준과 상훈, 상길도 괭이와 삽을 메고 왔다.       “형님, 밭갈이나 하러 갈 게지. 다 여기 오구 밭갈이는 어쩌오?”       기준이 반겨 맞으며 하는 말에 창준은 “괜찮아. 제꺽 기둥과 가시오나 세워 놓은 후 밭갈이를 하지 뭐.” 하고 말하면서 괭이로 기초를 풍풍 팠다.       상길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꾸 패랑천산 앞쪽을 흘끔흘끔 건너다 보는 것이었다.       “앗!”       상길은 비명소리와 함께 발을 감싸 쥐고 구덩이 안에 물앉았다. 괭이 날이 그만 발을 빗 찍었던 것이다. 기준이 다가가 상길의 손을 치우고 발을 들여다보았다. 살가죽이 찍혀 피가 질벅하였다. “제꺽 흙을 닦아버리고 오줌을 눠라.” 기준이 하는 말에 상길은 인차 일어나 구덩이에서 나와 저쪽으로 갔다. 창준은 한숨을 후 내쉬면서 “정신이 복잡한 게 발을 찍지 않을 수 있소?” 하고 중얼거렸다. 기준은 형님을 건너다보면서 “무슨 일이 있었소?” 하고 물었다. 창준은 괭이질을 멈추고 한숨을 토해냈다. “어제 동불사의 웬 중놈이 와서 쓸데없는 소릴 쳐놔서 그러오.” “무슨 말을?” 기준의 물음에 모두들 괭이질을 멈추고 창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돌도 안 된 설봉을 가지고 글쎄 굿을 하라고 하지 않겠소. 그래서 그 중 말대로 둘째며느리가 설봉을 안고 패랑천산 서쪽 멍지뫼산 앞에 갔소.” 기준은 “어떻게 굿을 한단 말이오?” 하고 황급히 물었다. 창준은 대수롭잖게 말하였다. “설봉은 집안을 망하게 할 수도 있고 흥하게 할 수도 있는 애라오. 그래서 멍지뫼산 앞에 가서 애를 풀밭에 놓고 빙 돌아가면서 불을 싸지르라고 했소. 애가 타 죽으면 액운을 없앨 게고 죽지 않으면 이 집안의 기둥이 될 애기에 잘 키우라오.” “그게 무슨 소리요? 조카 간지 오래오? 당장 설봉을 안아오기요.” 기준은 괭이를 버리고 패랑천산 쪽으로 막 떠나가려고 하였다. 그러자 상길이가 말리였다. “삼촌, 이젠 설봉은 다 타 죽었을 게요.” “아니야. 그럴 수 없어. 일루 희망이라도 있으면 가봐야 해.” 기준의 말에 상순도 맞장구를 쳤다. “무슨 놈의 개똥미신? 형님이 그 발로 언제 가겠소.” 상길은 절뚝거리면서 상순을 앞세우고 패랑천산 쪽으로 반달음 쳐 갔다. 그들이 헐금씨금 종주먹을 쥐고 달려 칼산 앞으로 갔을 때었다. 멍지뫼산 앞 버드나무숲 속에서 삼단 같은 연기가 하늘을 찌르면서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설봉아~!” 상길은 손을 하늘로 쳐들고 다리를 절룩거리며 멍지뫼산 앞으로 달려갔다. “하느님, 설봉을 살려주오!” 상순은 상길보다 더 빨리 앞으로 씽 달려 나갔다. 그런데 웬 일일까? 활활 타오르는 불길에 깜짝 놀라 우뚝 멈춰 섰다. 중의 말대로 불을 놓고 뒤도 돌아보지 말고 자리를 떠나던 상길의 처 련옥도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아니, 글쎄 괴상하게도 활활 타오르는 불길은 보에 싸서 놓은 설봉을 삼키지 않고 빙 둘러 피하면서 풀밭을 불태우고 있지 않겠는가. 활활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설봉은 “응아~” “응아~” 하고 울고 있었다. 상길은 황급히 불길 속에서도 타죽지 않은 설봉을 와락 끌어안고 달아나왔다. “설봉아!” 련옥은 상길의 품안에서 설봉을 빼앗다시피 와락 끌어안고 볼에 볼을 대면서 뜨거운 눈물을 흘리었다. “보오. 설봉은 액운아 아니라 우리 집안을 지킬 기둥감이오.” 상길의 말에 련옥과 상순은 머리를 끄덕였다. 련옥과 상길이 설봉을 번갈아가면서 안고 상순과 함께 패랑천산 앞에 이르렀다. 맞은편에서 창준과 기준은 상훈과 상우와 함께 마중 나왔다. “설봉이 살아 돌아왔구나.” 창준은 기뻐 잃을번 했던 맏손자를 끌어안고 기뻐 어쩔 줄 몰라 하였다. 창준과 기준은 어느 새 함흥촌 어귀에 이르렀다. 온 집안 식구들이 소문을 듣고 몽땅 마중 나왔다. “어디 보자, 우리 설봉을.” 후증조모는 설봉을 안고 볼을 매난졌다. “네 놈은 불길 속에서도 살아남았으니 천명이로구나. 설봉인 하늘이 내린 애로다.” 그 덕담에 모두들 머리를 끄덕였다. 상길은 언제 얼굴에 그늘이 졌나 시피 봄기운이 넘실거렸다. 수월 할머니는 후시어머니한테서 설봉을 받아 안고 볼을 맞추더니 련옥에게 안겨주었다. “이젠 중놈이건 신선이건 누구 말도 듣지 말고 설봉을 집안 장손으로 잘 키우게.” “예.” 련옥은 설봉을 받아 꼭 껴안으면서 뜨거운 눈물을 줄 끊어진 구슬처럼 줄줄 흘렸다. 련옥이 설봉을 안고 시할머니와 시어머님을 모시고 집으로 들어갔다. 아녀자들은 설봉을 안고 놀다가 점심준비에 맴돌아쳤다. 창준과 기준이랑은 다시 토성 동쪽 새 집터로 돌아와 일하였다. 한참 일하는데 뒷집 지군선이 “에헴.” 하고 건 가래를 떼면서 괭이를 들고 오면서 인사하였다. “성남집과 앞뒤 집으로 살게 됐구먼.” 기준은 인차 “양, 이웃사촌이라고 우리 화목하게 살기요.” 하고 인사를 받았다. 군선도 기초 구덩이를 파자 기준은 말리였다. “밭갈이나 할 게지. 우리 일손만 해도 되오.” 군선은 기준의 팔을 밀면서 “야 따, 이웃사촌이라고 앞집에서 살 양반네 집을 짓는데 모르는척 해서야 되오?” 하고 계속 팠다. 기준은 더 말리지 않았다. 이때 상순이가 힐금 곁눈질해보니 뒤집 지씨네 정지 문이 살며시 열리면서 치렁치렁한 쌍태 머리채가 드러났다. 찬찬히 여겨보니 집안에서 춘실이 문을 열고 가만히 자기를 보다가 문이 삐꺽 닫기는 것이었다. 왕 왕 왕! 황둥개는 낯선 사람들을 향해 대가리를 쳐들고 자지러지게 짖어댔다. 허나 상순을 보자 꼬리를 휘저으면서 다가와 끼깅거리면서 상순의 바지를 주둥이로 마구 들췄다. “지개!” 황둥개는 한발 물러서면서 이상한 눈길로 상순을 쳐다보는 것이었다. 상순은 황둥개와 뒤집을 흘끔흘끔 곁눈질하였다. 정지 문이 또 살며시 열렸다가 삐꺼덕 닫기는 것이었다. 상순은 전날 버드나무숲속에서 춘실과 만나 사랑을 나누던 일을 떠올리자 싱숭생숭해나 괭이질이 잘 되지 않았다. 눈치를 차렸는지 기준은 “에헴.” 하고 건 가래를 뗐다. “어떻게 바라 다녔으면 개 꼬리를 다 흔들 지경이야?” 그는  세귀눈으로 상순을 가로보면서 중얼거렸다. “내 종아리를 분질러놓지 않는가 봐라.” 상순은 목을 움츠렸다. 그러나 그것도 그때뿐이었다. “종아릴 분질러 놓으면 누가 아버지를 도와 집을 짓고 농사를 짓겠습둥? 또 이담 누가 아버질 모시겠습둥?” “이 놈 새끼, 주둥이를 다물지 못할까?” 상순은 아버지를 마땅찮은 눈길로 바라보며 입에 빗장을 질렀다. 이때 지학사가 숱한 가병들을 끌고 토성안집에 나타났다. 그는 일본 놈들의 토벌 때 반 너머 무너진 토성과 타버린 토성안집을 두루 돌아보더니 개화장을 휘두르면서 이쪽으로 다가왔다. 그 놈은 기초돌을 놓고 있는 기준이랑 둘러보더니 개화장을 휘둘러대며 고함쳤다. “누가 함부로 여기에 집을 지으라 했어?! 집단부락 촌장인 내 허락도 없이 촌공소 옆에 집을 짓다니!” 기준은 허리를 펴면서 지학사를 쏘아보았다. “자넨 패랑천촌에 있지 않는가. 함흥촌 땅이 자네 땅인가?” “허 허 허. 그래 네 땅이냐?” 기준이 머뭇거리자 지학사는 우쭐거렸다. “조선에서 굴러온 거지 같은 놈들아, 여기서 밥술이라도 얻어먹고 살겠으면 이 어른께 복종하란 말이야. 누가 여기다 함부로 집을 지으라 했어?!” 그 소리에 상순은 눈에 불이 이글거렸다. 그는 허리를 펴더니 괭이로 땅을 꽝꽝 찍었다. 당장 지학사에게 괭이라도 휘두를 것만 같았다. 일촉즉발의 순간, 기준이 상순의 괭이를 빼앗아 치우면서 눅잦히라고 눈치 했다. 상순은 억지로 참느라고 괭이를 되찾아 짚고 서서 황소숨을 씩씩 몰아쉬었다. 지학사도 눈에서 불덩이가 뚝뚝 떨어질 지경인 상순을 보고 겁을 집어먹고 가병들 쪽으로 몇 발자국 물러섰다. 가병들은 사태의 위험성을 느낀지라 사냥총이며 검을 거머쥐고 주인 옆에 바싹 붙어 서서 이쪽을 노려보았다. 지학사는 우쭐해 장황설을 늘여놓았다. “지금 누구 세상인 걸 알고 덤벼? 대일본제국은 너희들의 조선을 통 채로 삼킨 후 동북에 만주국을 일떠세웠다. 지금 관내로 승냥이들처럼, 아니, 호랑이들처럼 쳐들어갔다. 우리 만족들은 만주국 땅을 되찾고 주인이 됐다. 난 함흥촌과 패랑천촌을 통합한 대일본제국의 집단부락 촌장이란 말이야. 내 허락 없이 집을 져? 조선 망국노 신세에 언감 이 어른과 맞서?” “숱한 땅을 두고 여기다 집을 짓지 못한다는 건 무슨 심보인가? 이전에 송사에 진 승풀인가?” “어, 허, 허허허. 네 놈들이 내 돈을 몇 십 원 쓰고 발편잠을 잘 것 같아? 어, 험.” 지학사는 건 가래를 뗐다. “이 토성 안에 모범집단부락 촌공소를 재건할 예산이야. 그런데 너희들이 토성 밖에 돌아가면서 집을 지어선 안 돼. 절대 안 돼!” 그때였다. 어느새 나탔는지 장학사가 장충국이랑 데리고 나타났다. “형님, 어떻게 돼 왔소?” 지학사가 알은체를 하였지만 장학사는 성을 발칵 냈다. “내 기준이네 여기에 집을 지으라 했다. 동생은 왜 자꾸 여게 와 이래?" 지학사는 억이 막혀 입을 헤 벌린 채 한식경이나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기준은 장학사의 손을 잡으면서 인사하였다. 상순은 한숨을 후~ 내쉬었다. 개화장을 휘두르면서 서성거리던 지학사는 한참 후에야 할 말을 겨우 찾은 듯이 지껄여댔다. “형님은 이 놈들을 뭘 보고 집을 지으라고 땅까지 주면서 이러는 거요?” 장학사는 지학사 코에 대고 삿대질하였다. “이 놈아, 개를 쳐도 집주인을 보고 쳐라. 이 경칠 형제가 소서구에 얼마나 많은 황무지를 개간해 내게 줬는지 아니?” 여기서 왁작거리자 숱한 마을사람들이 모여왔다. 숱한 사람들을 둘러보던 지학사도 자존심을 지키려고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형님, 황무지개간은 개간이고 개인 은정에 얽매어 대일본제국의 지시를 어겨? 대일본제국에선 토성안집자리에 촌공소를 지으라고 했소. 토성 밖에 이렇게 지저분하게 집을 지으면 되는가?" 장학산은 누그러들기는커녕 기세 등등해났다. 그는 지학사 낯에 대고 손가락질하면서 욕설을 퍼부었다. “너 이 놈아, 쩍하면 일본 놈들을 등에 업고 우쭐거리지 말라. 일본 놈들이 촌장이나 시키니 어째 벌써 조상이 누군지도 다 잊어버렸어? 일본 놈 앞잡이. 흥! 전번에도 말했지만, 토성안집은 내가 양아들에게 지어준 집이야. 인삼이 갔으면 내 집이지. 촌공소를 세운다는 건 강도행위야. 인삼한테서 기별이 왔는데 토성안집을 경칠에게 주라고 했어. 토성안집을 줄 대신 내 경칠을 보고 여기에다 집을 지으라고 했지. 그런데 어째 아침부터 와서 지랄이야?” 지학사도 자기 외사촌 형이 노발대발하자 어찌는 수가 없어 졸개들을 데리고 자리를 뜨면서 두덜거렸다. “형님도 너무 그러지 마오. 유격대에 쌀을 대준 양아들을 믿고 우쭐거리다가 언제 큰 코 다치지 않는가 보오. 대일본제국에서 주는 밥이나 순순히 먹고 조용히 사는게 좋을 게오.” “자식, 그것도 말이라고 주둥이질 해?” 장학산은 꼬리 빳빳해 토성 안으로 들어가는 지학사 뒤 잔등에 대고 손가락질하면서 계속 고래고래 꾸짖었다. “네놈이나 순순히 중국 사람으로 살아라. 일본 놈들의 코개 되지 말구. 흥!” 장학산은 기준의 어깨를 다독여주면서 호언장담했다. “경칠이, 일없어. 여긴 몽땅 우리 조상들이 대대손손 살아온 고장이네. 누가 감히 막아. 흥! 우리 밭이나 잘 가꾸게나.” 그는 마른기침을 하며 “소작료는 몽땅 8할로 바치게나. 으흠.” 하고 마구잡이를 해댔다. (몽땅 승냥이들구나. 생각하는 척 하면서 벼 게를 주구 살까지 도려가려는 수작이니. 원.) 기준은 속이 알알하였다. 그래도 집이라도 짓게 하니 다행으로 생각됐다. 장학산은 창준을 돌아다보며 말했다.  “자네도 작은 아들을 세간내겠으면 저 토성안집 뒤에 짓게나. 내 허락했네.” 마을 사람들은 여기저기서 수군거렸다. 종달새 지종, 지종 우는 봄날, 천지꽃산에 뻐꾸기마저 와서 뻐꾹뻐꾹 울어댔다. 상순은 송지주네 둥글 소를 빌어다가 가대기로 밭을 한창 갈아 번지고 있었다. 갓 갈아 번져 놓은 누르스름한 흙에서는 훈훈한 흙냄새가 풍겨 올랐다. 기준과 상우가 상순의 가대기를 따라가면서 괭이로 구멍을 파면 사련과 새금이, 금옥이가 따라 나가면서 옥수수 알을 떨궈 넣고 발로 파묻은 후 꽁꽁 다져놓았다. 그들은 장학산이 소작료를 한심하게 8할이나 받아가려고 했지만 새 해 봄에도 부대를 많이 일궈 부지런히 일하면 입에 풀칠이라도 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으로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소작농사군들의 희망은 바로 이러하였다. 그들은 땅에 모든 희망과 목숨을 내걸고 땅에 얽매여 부지런히 일해 연명하려고 아득바득 애를 썼다. 전번 달 말에 기준 등은 기초돌에 기둥이라고 대충 세워놓고 지붕틀을 올리고 가로세로 나무대기를 대고 수수 대와 벼 짚으로 에를 얽어 흙으로 벽이라고 발랐다. 뒤이어 총망히 그 초가삼간집에 들었다. 집을 다 짓자 그들 온 집식구들은 봄 파종에 달라붙었다. 괭이질하는 기준과 상우의 가슴과 잔등에는 땀이 흥건히 배 있었다. 상순도 열세 살부터 가대기 질 해왔지만 한참 가대기 질 하더니 잔등이 땀벌창이 대버렸다. 그는 밭갈이를 하면서도 혹시 장백산 항일유격대를 찾아 소왕청쪽으로 들어간 인삼 아저씨가 찾아오지나 않았는가 하여 드문드문 천지꽃산 나무숲을 살피였다. 그러나 애나무 사이에 연분홍색진달래가 탐스럽게 피어있을 뿐 사람의 그림자도 얼씬거리지 않았다. 혹시 봄바람에 마른 나무가 우수수 흔들려도 인기척이 나나 살펴보아도 아무도 없었다. 상순은 밭갈이를 하면서 동쪽밭머리로 나와 가대기를 서쪽으로 돌려대면서도 혹시나 하여 석현지 쪽으로 하여 춘실이 네가 일하는 쪽을 흘끔흘끔 건너다보군 하였다. 춘실도 부모 뒤를 따라가면서 씨앗을 심으면서 드문드문 허리를 펴고 이쪽을 바라보았다. 상순은 아버지를 흘끔 곁눈질해보니 괭이질하자 춘실 쪽에 대고 손을 흔들어보였다. 그러다나니 그만 가대기가 빠져나와 밭이랑 밖으로 빗나갔다. “뭐 해? 쯧쯧쯧, 가대기질이나 온전히 하지 못하고. 흥!” 어느새 눈치 챘는지 기준은 괭이질하다가 상순을 흘겨보았다. “이 놈새끼, 다시 저 춘실을 만나봐라. 종아리를 분질러놓겠다.” 상순은 묵묵히 가대기질을 하였다. 속으로는 두덜거렸다. (어쩜 아버진 저렇게 인정사정 돌보지 않을까? 내 춘실을 좋아하면 데리고 살게 할 게지. 내 원 어떻게 한뉘 이렇게 가대기질이나 하면서 살겠니? 큰아버지랑 있는 장백산유격대에 들어가 버릴까?) 상순은 머리를 들어 저쪽 장백산 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춘실을 데리고 산에 들어가 살면 어떨까? 산에서는 부모 허락이 없어도 마음에 드는 춘실과 살 수 있는 곳이 아니겠는가?) “이라!” 상순은 애꿎은 소 엉덩이만 회초리로 짝 갈겼다. 그는 밭갈이를 하면서 복잡하게 생각을 굴렸다. (그래도 어찌 부명을 거역할 수 있겠는가?) 상순은 땅이 꺼지게 한숨을 후 내쉬었다. 밭갈이를 한 쉼 하고 쉴 때에도 상순은 회초리로 밭머리의 풀을 툭툭 치면서 계속 어떻게 하면 아버지를 설득해 춘실과 살 궁리를 하였다. (옳지, 명옥과 약혼하기 전에 손을 써야지.) 온 하루 밭갈이를 하면서 상순은 궁리를 하고 또 했다. 집으로 돌아와 모두들 저녁이라고 천정이 들여다보이는 죽물을 후루룩 들이마셨다. 상순은 고방 농짝에 미리 감춰놓은 숯 검댕이와 누런 기름종이 장을 가만히 꺼내 호주머니에 넣고 바깥으로 나왔다. 동산마루에 구리바라 같은 보름달이 두둥실 떴다. 상순은 이영 밑에 숨겨둔 마른 물고기를 한줌 꺼내 쥐고 울바자 안으로 해 뒤집 쪽으로 돌아갔다. 흘끔 들여다보니 뒤 집에는 희미한 등잔불이 켜져 있었다. 왕 왕 왕! 뒤 집 황둥개가 짖어대면서 앞으로 뛰어왔다. 집 안에서 춘실의 아버지가 “지개!” 하고 개를 말리는 소리가 났다. 상순은 마른 물고기를 황둥개한테 뿌려주었다. 황둥개는 끼깅거리면서 뒤로 몸을 탈면서 물러섰다. 황둥개는 땅바닥에 떨어진 물고기 쪽으로 달려가 코로냄새를 맡더니 끼깅거리면서 물고기를 물고 뒤 집 마당 쪽으로 가서 먹어댔다. 상순은 황둥개에게 물고기를 쥐어 보이면서 “꼬독꼬독~” 하고 나직이 불렀다. 황둥개는 끼깅 하며 꼬리를 휘저으면서 상순한테 달려왔다. 상순은 물고기를 꺼내 황둥개에게 뿌려 줬다. 황둥개는 좋아라고 먹어댔다. 상순은 숯 검댕이로 누런 기름종이에 볼 견(见)자를 써서 쪽지로 접어 제꺽 황둥개의 귀구멍에 꽂아 넣었다. 상순은 황둥개의 대가리를 슬슬 쓰다듬어주면서 물고기를 실컷 먹였다. 뒤이어 황둥개에게 “집으로 가라.” 하고 조용히 말하면서 개 배를 집 쪽으로 밀어냈다. 황둥개는 끼깅거리면서 가기 싫어하면서도 자기 집쪽으로 돌아갔다. 상순은 춘실이가 나오기를 아래 목에서 애타게 기다렸다. 황둥개는 두 앞발 사이에 주둥이를 파묻고 앞집 울안에서 떠나가지도 않고 물고기도 주지 않는 상순을 한참이나 바라보더니 갑갑하였든지 낑낑거리었다. 이때 집안에서 춘실의 아버지가 “지개! 누가 온 모양이다. 황둥개 자꾸 끼깅거린다. 나가 봐라!” 하고 말하였다. “예.” 춘실의 대답소리가 나더니 정지 문이 살며시 열렸다. “지개! 어째 자꾸 짓니?” 춘실은 개를 말리면서도 개가 보는 앞집 쪽을 흘끔 내다보았다. 그러나 손은 인차 개의 귀 구멍부터 더듬었다. 정말 종이쪽지가 있었다. 그녀는 글을 몰랐지만 숯검댕이로 누런 기름종이에 그어놓은 한자를 보았다. 춘실은 종이쪽지를 치마폭 밑에 잘 감추고 황둥개 대가리를 쓰다듬으면서 앞집 쪽을 눈 빗 질 했다. 이때 앞집 울안 아래쪽에서 기침소리가 났다. 기침소리 나는 쪽에 달빛 아래 훤칠한 사내가 손을 젓고 있는 것이 피뜩 보였다. 이윽고 앞집 상순은 뒤울안을 빠져 나오더니 토성 안 집 쪽으로 걸어가는 것이었다. 춘실은 집안에 가물거리는 등잔불빛을 곁눈질하더니 발끝걸음으로 살금살금 집 마당을 벗어났다. 그는 황둥개를 데리고 달빛 속에서 치마 자락을 팔락이면서 토성 밑으로 사라졌다. 보름달빛은 유난히도 휘영청 밝게 마을 서쪽 태평강 가의 버드나무숲속을 비추었다. 달빛을 가린 아름드리버드나무숲 속에서 상순은 춘실을 꼭 껴안았다. “춘실이, 난 춘실을 좋아하오.” “야, 누가 몰라?” 춘실은 부끄러워 고개를 숙였다. “저는 날 좋아하오?” “이젠 몇 번 물었소?” “그래도 오늘 밤엔 꼭 말하오.” 춘실은 부끄러워 한쪽으로 머리를 돌리면서 머리를 끄덕였다. “고개만 끄덕이지 말고 말하오.” “양. 딱 말해야 아오?” 상순은 춘실을 더 꽉 껴안으면서 재촉하였다.  “그렇소. 꼭 대답하오.”  “딱 어린애 같다. 우리 서로 사랑한들 무슨 소용이 있소?” “그런 쓸데없는 맥 빠진 말을 하지 말고 얼른 대답하오.” 춘실은 고개를 숙이고 상순의 귀 간지럽게 가까이 대고 조용히 그러나 아주 명확하게 속삭였다. “사랑하오. 친애하는 내 상순이.” 상순은 기뻐 춘실의 볼에 살짝 뽀뽀 해주었다. “우린 서로 사랑하오. 하늘이 보고 땅이 증명하오. 오늘부터 우린 정식 부부로 되였소.” 춘실은 새된 소리를 지르면서 상순을 밀어냈다. “무슨 소리요? 이걸 놓소.” 상순도 춘실을 놓으면서 되물었다. “우리 둘이 서로 사랑하는데 어째 부부가 못 된단 말이오?” 춘실은 격분해 몸까지 바르르 떨었다. “부모가 동의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부부오?” 상순은 한숨을 후 내쉬었다. “아, 옳소. 춘실이, 우리 아버진 우리 결혼 허락했소.” “뭐? 곧이들리지도 않소. 들으니 저네 아버진 거 명옥과 결혼하라고 했다면서?” “누가 그래?” “사촌언니한테서 들었소. 누굴 속여?” “우리 아주머니? 쓸데없는 소릴.” 상순은 한숨을 푸 몰아쉬더니 둘러댔다. “양, 이전엔 그랬소. 그런데 춘실이 명옥보다 인물체격이 낫소.  그래서 가시부모를 모시겠다구 했소. 난 근본 명옥이란 사돈 새기 마음에 들지 않소. 음식은 먹기 싫으면 뒀다가 먹어도 돼도 녀자는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어떻게 한뉘 억지로 살겠소. 난 춘실이 아니면 살지 않겠다구 했소.” 춘실은 거짓말 절반 진말 절반 하는 상순의 말에 귀가 솔깃해졌다. “그래 나중에 아버진 별수 없어 나와 당신의 결혼을 허락했던 게요. 이제 저네 부모만 동의하면 되오.” 상순은 춘실을 빼앗기기라도 할까봐 꽉 껴안으면서 물었다. “저네 아버지와 엄만 동의하오? 우리 둘은 서로 첫사랑이란 말이야.” 춘실은 끌어안은 채 열기가 이글거리는 말을 토하는 상순이 겁났다. “이걸 놓고 천천히 말해.” 춘실은 손으로 상순의 껴안은 팔을 풀려고 무등 애를 썼다. “대답하기 전엔 놓지 않을테야.” 춘실은 막무가내여서 상순에게 안기운채 머리를 끄덕이면서 조용히 말하였다. “우리 부모는 진작 허락했다니까.” “양? 정말?” “그럼.” 상순은 자기 귀가 믿어지지 않았다. 순간 보이지 않는 끈이 그들을 한데 꽁꽁 묶어놓는 상 싶었다. 상순은 어찌나 기뻤든지 춘실을 번쩍 들어 둘러메더니 몇 바퀴 빙빙 돌렸다. “내려놔. 누가 듣겠소. 후엔 황둥개 귀에 쪽지를 넣지 마오. 우리 아빠한테 들키면 큰일이오.” 상순은 춘실을 내려놓았다. “그럼 어떻게 저를 불러내겠소? 금옥을 보내도 안 되고.” 춘실은 다소곳이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뻐꾸기 우는 소리를 내면 내 나갈게.” “좋소.” 말수가 적던 상순은 오늘 따라 말이 많아졌다. “하여간 우리 아주머니를 봐도 그렇고 저네 지씨네는 수단이 좋소.” “이제야 알았소?” 뒤이어 상순은 춘실의 어깨에 두 손을 얹더니 아주 정중하게 말하였다. “우리 오늘 달밤에 진짜 부부 연을 맺는 게 어떻소?” “어떻게?” “다 큰 처녀애가 남자, 여자 하는 거 몰라?” “모를 소리?” “모르면 차자 배우면 돼.” 상순은 춘실의 허리를 껴안고 아름드리버드나무사이로 비껴드는 달빛을 저벅저벅 밟으면서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이걸 내려놔.” 달빛아래 버드나무 숲속에서 춘실이 두 다리를 바둑거리며 애원하는 소리가 가냘프게 들릴 뿐이었다. 어디에선가 뻐꾸기가 밤의 정적을 깨우면서 뻐꾹뻐꾹 노래하고 있었다. 버드나무들도 흥겨워 훈훈한 봄바람에 가지를 흐느적이며 설레고 있었다. 은쟁반 같은 보름달도 보기 송구스러웠던지 얇은 고기비늘구름 속으로 하얀 얼굴을 숨겨버렸다.                                         9. 뻐꾸기 뻐꾹뻐꾹 이상한 일이였다. 둬달 동안 해가 지기만 하면 토성 밑에서 뻐꾸기 뻐꾹뻐꾹 우는 소리가 자주 들리었다. 뻐꾸기 뻐꾹뻐꾹 우는 소리가 나기만 하면 춘실은 정신없이 바깥으로 나갔다가도 한식경이 넘어서야 돌아 오군 했다. 춘실의 어머니는 대개 짐작되는데 있었지만 모르는 척 했다. 사실 춘실은 상순이 약속대로 뻐꾸기 울음소리를 내기만 하면 암호를 듣고 바깥에 나가 어둠을 타 상순과 만나 열연하곤 했던 것이다. 이날 저녁에도 춘실은 뻐꾸기 울음소리가 뻐꾹뻐꾹 울리기 바쁘게 바깥으로 나갔다. 그녀가 토성 밑 버드나무 아래로 가보니 상순은 뭔가 쥐고 있었다. 춘실은 가까이 다가가 “건 뭐요?” 하고 물었다. 상순은 “버들채발이오. 우리 집에서도 채발을 놔서 고기를 잡으러 간다면 의심하지 않을게 아니고 뭐요?” 춘실은 “참 묘수구먼요.” 하더니 버들가지를 촘촘히 엮어 만든 채발을 보고 아주 희귀해 했다. “이걸로 물고기를 잡을만 할까?” 상순은 채발을 둘러메더니 “글쎄 나를 따라오기만 하오.” 하고 앞에서 씨엉씨엉 걸어 나갔다. 춘실은 종종 걸음 쳐 따라나섰다. 그들은 은빛달빛을 밟으면서 버드나무숲을 지나 태평강가에 이르렀다. 달빛이 강물에 쏟아져 은파가 부시고 있었다. 인기척에 놀란 새들이 여기저기 버드나무가지에서 푸르릉푸르릉 날아났다. 상순은 바지를 걷고 물에 들어가더니 강가의 진흙을 두 손으로 쑥쑥 파다가 강물 한쪽을 막았다. 춘실도 치마 자락을 걷어안고 강가에서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자그마한 돌을 주어다가 상순을 도와 강물을 막았다. 한참 후 그들은 버들채발을 강물에 걸었다. 채발에 떨어지는 물소리가 귀맛 좋게 들리었다. 상순은 여기저기 가서 버드나무가지를 낑낑 꺾어다가 채발 가까이 강가에 제법 그럴듯한 버드나무 오두막을 지어놓았다. 상순은 어두커니 서있는 춘실을 보고 “아직 날씨가 싸늘하오. 막 안에 들어가 앉기요.” 하고 버드나무 오두막을 가리켰다. 춘실은 상순과 함께 둘이 들어가 나란히 앉았다. 상순은 춘실의 허리를 꼭 껴안았다. 춘실은 몸을 상순한테 기대면서 얼굴을 상순의 얼굴에 대고 살살 비비였다. 고르로운 소리를 내며 채발로 흐르는 강물에서는 수천만 개의 금싸락이 눈부시면서 출렁이며 흐르고 있었다. “오늘 밤 달이 밝기도 하지?” 춘실의 말에 상순도 웃기였다. “왕자와 왕후가 태평강 가에 온 게 밝지 않을 수 있소?” 춘실은 깔깔깔 웃어댔다. “당신은 왕자, 난 왕후? 그래? 참 듣다가 귀 맛 좋은 말이군요.” “장차 우린 아들 다섯에 딸 열을 낳아 기르기요.” “어마나~ 누가 그렇게 낳아 준다 했겠군요?” “어째 낳지 않겠단 말이오? 저네 부모를 보오. 저와 여동생 딱 둘을 낳으니 어떻소? 형제도 없고 얼마나 외롭소?” “하긴. 수태 낳았다가 어떻게 먹여 살리겠소?" 춘실은 한숨을 호 내쉬었다. “난 돈을 많이 벌어 공부도 하고 자식들도 수태 낳아 기를 예산이오.” 춘실은 어이없어했다. “지금 죽물도 제대로 못 먹는 신세에 언제?” 상순은 춘실을 꼭 껴안으면서 희망에 차 말했다. “전번에 산에 들어가서 우리 큰아버지와 토성안집 인삼 삼촌이랑 만났소. 항일유격대를 만났단 말이오. 그들은 일본 놈들을 몰아내구 가난한 사람들이 땅의 주인으로 되는 나라를 세운다오. 그때면 밥 먹을 근심 없이 잘 살수 있소.” 춘실은 도리머리를 가로 저었다. “되지도 않을 소릴. 토성안집을 보오. 어떤 인삼인데 일본 놈들의 토벌에 배겨내지 못하고 달아나지 않았소? 그런 일에 삐치지 말고 우리 세간살이나 잘 할 궁리나 하오.” 상순은 계속 흥미진진해 말했다. “큰아버지와 인삼 삼촌 말씀이 옳소. 손바닥만 한 땅도 없이 중국 지주 놈들의 눈치를 보면서 소작농사만 지어서야 언제 허리를 펴고 살겠소? 유격대를 따라 총을 들고 일본 놈들을 몰아내야 우리가 진정 땅의 주인이 될 수 있단 말이오.” 춘실도 동감했다.  “하긴, 우리 집에서도 올해 보리고개를 어떻게 넘겠는지.  근심이 태산 같소.” 상순은 춘실의 허리를 꽉 껴안으면서 슬쩍 시탐해보았다. “우리 장백산에 들어가 유격대에 들까? 거기엔 몽땅 일본 놈들과 싸우는 항일투사들만 있단 말이오. 거기에서는 서로 마음이 맞고 사랑만 하면 함께 살수 있단 말이오.” 춘실은 도리머리를 가로저었다. “딸이 산으로 들어가 총을 쥐고 달아 다니면 우리 아버지, 엄마는 어쩌오?” 춘실은 허리를 끌어안은 상순의 팔을 풀면서 세차게 몸부림쳤다. “다신 유격대 말을 하지 마오. 계집애가 총칼을 들고 어떻게 그 독사 같은 일본 놈들과 싸운다고 그러오? 요즘 어째 몸이 불편해 근심이 태산 같은데. 어디로 간다고 그러오?” 상순은 갑갑해 춘실의 두 어깨를 쥐여 마구 흔들었다. “우리 큰엄마와 진달래, 은녀는 모두 여자가 아니오? 그들은 백두산 밀림에서 빼앗긴 나라를 되찾으려고 일본 놈들과 싸운단 말이오. 황차 전 여동생 은실이 있지 않소? 그들은…” 춘실은 막에서 마구 발버둥질치며 땅바닥을 탕탕 굴러댔다. “말 말라니까. 난 아녀자야. 나를 낳아준 부모를 두고 산으로 들어가지 못한다. 절대 가지 못해.” 상순은 춘실과 혁명 말을 해선 안 되겠다는 것을 느끼고 춘실을 놓고 담배를 꺼내 말아 붙여 물었다. 그는 담배연기를 길게 빨아 후 토해냈다. 속 탄 마음이 연기로 타 번지며 봄밤을 곤혹스럽게 했다. 이때 철렁 소리에 뒤이어 채발 안에서 툭, 툭툭 어지러운 소리가 났다. “물고기 뛰어들었어.” 상순은 춘실을 안고 있다가 놓고 채발 곁으로 다가갔다. 그는 손으로 채발 안을 더듬더니 달빛에 번뜩거리는 물고기를 잡아내 미리 준비해놓은 버들가지에 꿰였다. “허허, 손바닥만 한 게 서너 놈이 내렸구먼.” 이윽고 상순은 채발 옆에 다가온 춘실의 앞에 손바닥만 한 모래무치며 버들치며 쑥 내밀었다. “이걸 가져다 가시아버지를 대접하오.”  “당신은 빈손으로 어떻게 집으로 들어가겠소?” 상순은 강물에 손을 씻으면서 “좀 기다리면 물고기가 채발을 채우지 않나 보오.” 라고 했다. 춘실은 달빛에 물고기 뀀을 쳐들고 보았다. “호호호, 희구하다야. 이 물고기로 물고기 탕을 끓여 대접하면 우리 아버지 반가워하겠다.” “사위 덕에 잘 자시라고 하오. 나를 사위를 삼아보오. 이제 가시부모 호광을 하지 않는가? 얼마나 든든하겠소? 우리 처제도.” “은실은 당신보다 더 센 신랑한테 시집가지 않는가 보오.” 상순은 개의치 않고 “빨리 가보오. 엄마 속이 타겠소.” 하고 재촉했다. 춘실은 기뻐 어쩔 줄 몰라 했다. “고맙소. 내 신랑.” 상순은 춘실의 허리를 껴안고 원두막 안으로 들어갔다. 상순은 춘실의 얼굴에 뽀뽀를 하려고 서둘렀다. 춘실은 상순을 살짝 밀어냈다. “왜 또 이래?” 상순은 달빛을 빌어 정색하는 춘실의 새까만 두 눈동자를 들여다보면서 물었다. “안 되오? 우린 부부나 다름없잖소? 이젠 한두 번도 아닌데.” “가만있소. 물고기 뀀을 저기 놓고 내 말 듣소.” 상순은 춘실의 따뜻한 허리를 안았던 팔을 스르르 풀면서 물었다. “어째 후회되오?” 춘실은 흐트러진 쌍태 머리를 바로잡아놓으면서 조용히 말했다. “결혼 전에 자꾸 이러는 게 아니오. 아직 부모의 허락도 받지 못했는데 자꾸 이러다가 망신하면 어쩌오? 부모한테 봉변당하지 못해서. 안 되오. 이젠 그러지 말기요.” 상순은 한숨을 후 내쉬더니 호언장담했다. “근심 마오. 우리 아버지 허락했으니까. 우린 조만간에 결혼하게 될 게요. 그저 내 하자는 대로 하오. 그럼 만사대길이오.” 춘실은 그래도 상순을 밀어냈다. 그러나 어찌 힘깨나 쓰는 사내가 달려드는 것을 막겠는가. 훈훈한 봄바람에 태평강 가 채발 옆의 버드나무 오두막이 세차게 몸부림쳤다. 태평강은 사랑의 노래를 세차게 부르며 남으로, 남으로 사품 치며 흐르고 있었다. 채발에는 물고기들이 뛰어들어 푸덕, 푸덕 뛰 논다… 밭에 옥수와 조를 다 심자 기준은 상우와 상순를 데리고 소서구 남쪽 천지꽃산 산마루 쪽으로 올라가면서 괭이로 황무지를 부지런히 개간했다. 키 넘는 나무도 뿌리를 파고 어깨로 떠밀면 뿍뿍 뽑혀나갔다. 어느새 상우와 상순의 베적삼은 땀에 질벅하게 젖었고 온 몸이 땀벌창이 돼버렸다. 땀은 열어젖힌 앞가슴과 팔에서 줄줄 흘러 내렸다. 괭이로 아무리 찍어도 사발 통만 한 마른 나무뿌리가 끊어지지 않자 상순은 팔을 걷고 나서더니 괭이로 뿌리 쪽을 푹푹 찍어 파냈다. 한참 파내자 큰 뿌리가 다 드러났다. 상순은 제일 실한 뿌리를 찍어내려고 괭이로 탁 찍었다. “앗!” 괭이로 뿌리를 빗 찍으면서 그만 상순의 발목을 빗 찍었다. 상순은 발목을 잡고 상을 찡그렸다. 발목을 잡은 손가락 사이로 뻘건 피가 흥건히 괴어 나와 누런 흙에 뚝뚝 떨어졌다. “빨리 오줌을 찍힌 발목에 쏴라. 조상들이 물려준 지혈약이야.” 상순은 바삐 괴춤을 까고 발목에 대고 오줌을 누었다. 순간 오줌을 맞은 상처에서 피가 더 흐르지 않았다. “오줌이 명약이로구먼.” 상우는 주의해가면서 괭이질해 마른 나무뿌리를 찍어냈다. “물러나오.” 상순은 형님을 물려치우고 뿔뚝뿔뚝한 팔로 나무 밑 둥을 휘감아 쥐더니 허리를 쭉 펴면서 “끙” 하고 힘을 썼다. 마른 나무는 통 뿌리 채로 뿍 뽑혀 나왔다. “에이, 이렇게 피를 흘리면서 황무지 밭을 개간해 장지주네 좋은 노릇이나 하겠다. 참, 땅도 없는 이런 소작농사꾼 질을 어느 때까지 해야 하오?” “별수 있니? 부지런히 황무지라도 개간해야 입에 풀칠을 할 게 아니냐?” 상순은 손으로 얼굴에 흐르는 땀을 닦으면서 황소숨을 몰아쉬었다. 이윽고 그는 먼 산을 쳐다보면서 땅이 꺼지게 한숨을 내쉬었다. 봄 파종이 끝나고 황무지도 꽤 많이 개간한 후 기준은 상우를 불러 창준 형님을 모셔오게 했다. 이윽고 창준이가 위방에 들어와 위 자리에 앉았다. “형님, 상순도 이젠 열아홉 살인데 혼사를 질질 끌 필요 없소. 오늘 택일을 해서 사돈어른께 보내기요.” 창준은 하얀 수염을 쓰다듬더니 “좋소. 좋은 날을 택일을 해야지.” 하고 대답했다. 그런데 상순은 자리에서 훌쩍 일어나가 버렸다. “난 명옥과 결혼하지 않겠소. 어째 기어이 마음에 들지 않는 여자와 살라고 합니까?” “또, 또! 집안혼사를 망칠 생각이냐?! 경숙 사돈어른의 딸은 고생 속에서 자랐기에 훌륭한 맏며느리 감이다.” 상순은 들었는지 마는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휑하니 어디론가 나가버렸다. 기준은 개의치 않고 하얀 종이를 농궤에서 꺼내놓았다. “형님, 내 전번에 아버지께도 말했는데 음력 10월 10일로 택일하면 좋은 거 같소.” 창준은 “사돈네 애들의 결혼을 동의했으니 그날에 결혼식을 올려 주자.” 하고 동의했다. 기준은 상우를 시켜 붓과 먹을 가져오라고 했다. 그는 손수 붓을 들어 묵사발의 먹에 찍어 하얀 창호지에 슬슬 한자로 써내려갔다.        존경하는 최경숙 사돈어른: 저의 막내아들 김상순과 귀댁 따님 최명옥의 결혼 날을 소화 11년 음력 10월 10일로 택일을 하였사오니 허락해주옵소서. 저의 흠집이 많은 막내아들을 사위로 받아들여주어 고맙소이다. 애들의 행복을 미리 축원하옵니다.        소화 11년 5월 2일 김기준   택일서를 다 쓰자 기준은 형님을 보고 “함께 사돈집에 가기요.” 하고 말했다. 창준은 “가만, 거기 한 글자 고치자.”라고 하며 택일서를 자기 앞으로 쭉 끌어왔다. “뭘 그러오?” 기준의 물음에 창준은 택일편지를 들여다보더니 “여기 일본 놈들 달력이 마음에 거리는구나. 이 ‘소화 11년’을 고치자.” 하고 말했다. 기준은 택일편지를 자기 앞에 끌어다가 들여다보면서 “소화가 어쨌다고 그러오?” 하고 이상해 형을 쳐다보았다. 창준은 아주 정색해 “ ‘소화’라는 건 일본 놈들의 년대 아니고 뭐냐?” 하고 말했다. 기준은 그제야 머리를 끄덕이더니 붓을 들어 “소화”란 글자를 그어버리고 위쪽에 “1937년”이라고 써놓았다. 그는 또 어데 흠집이 없나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기준형제 부부는 아버지와 말한 후 택일서를 품에 넣고 미리 장만한 음식과 술을 가지고 사돈집으로 갔다. 경숙 일가는 매부 석은이네 고방에 임시 들어있었다. 서로 인사수작이 끝나자 기준은 석은과 경숙을 마주 보며 정중히 말을 꺼냈다. “우리 막내아들 상순과 사돈집 딸 명옥의 결혼택일서를 가지고 왔습니다. 사돈인사도 하고 사돈보기도 하고 겸사겸사 해 왔습니다.” 경숙과 석은은 택일서를 보고 만면에 춘풍이 돼버렸다. “택일이 좋은 날이구먼. 내 동생 경인과 제수가 한 혼사 말인데다 귀댁 아들이 영웅인물 같아 좋은 사위 감이라고 믿습니다. 애들의 결혼을 동의합니다.” 이렇게 두 사돈집에서는 신랑감 상순도 없는 자리에서 일일이 맞절을 하며 사돈인사를 하고 술상에 마주 앉아 기쁜 술을 들면서 상순과 명옥의 행복한 앞날을 축원했다. 오후에야 사돈집에서 집에 돌아온 기준과 사련이 상순을 아무리 찾아도 찾지 못했다. “이 놈 새끼, 사돈보기에도 가지 않고 어디로 갔을까?” 이 시각 상순은 확실히 마을에서 사라졌다. 사련은 혹시 춘실과 함께 도망치지 않았는가 해 끌신을 끌고 황급히 뒷집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뒤 집 터 밭에서 춘실이 괭이질 하는 것을 보고 주춤 멈춰 섰다. “얘, 춘실아, 너 우리 상순이 어데 갔는지 모르니?” 춘실은 머리를 들어 사련을 보더니 생글 웃으면서 “제 어떻게 압둥?” 하고 반문했다. 사련은 춘실에게 손짓하면서 “너 여기 좀 오라.” 라고 했다. 춘실은 괭이를 살짝 놓고 사뿐사뿐 다가왔다. 사련은 울바자를 사이에 두고 춘실에게 귀속 말을 했다. “춘실아, 우리 상순은 명옥과 돌아오는 10월 10일에 결혼하기로 오늘 택일까지하고 사돈보기까지 했다. 이후엔 작작 따라다녀라.” “예? 지금 뭐랍니까?” 춘실은 그 말에 깜짝 놀라 어안이 벙벙해졌다. 집안에서 문을 살며시 열고 내다보던 은실도 놀라 "어마나!" 하고 소리치면서 그 자리에 폴싹 물앉았다. 춘실은 두 손으로 얼굴을 붙안고 어깨를 들먹이는 것이었다. 뒤이어 그는 흑흑 흐느끼면서 겨우 일어나더니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비칠거리면서 울바자를 나가 집안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 구슬픈 정경에 사련은 혀를 끌끌 찼다. “쯧쯧, 쯧쯧.” 상순은 마음에 없는 결혼에 반발해 소서구 천지꽃산에 올라가 기음을 매면서 화를 냈다. 그는 온 하루 기음을 매면서 궁리하다가 초저녁에 눈썹달을 저벅저벅 밟으면서 마을로 내려왔다. 그는 호미를 뒤울안에 가만히 두고 춘실의 집을 들여다보았다. (우리 둘이 좋아하는데 살지 못하게 할 건 뭔가?) 그는 아버지가 원망스러웠다. 토성안집 동쪽으로 스적스적 걸어간 그는 춘실을 불러내 답답한 마음을 풀고 싶었다. 그는 춘실과 약속한대로 아름드리버드나무 뒤에 숨어서 입에 두 손을 모아대고 뻐구기 울음소리를 냈다. 뻐꾹, 뻐꾹, 뻐꾹… 한참 기다려도 희읍스름한 눈썹달의 달빛아래 춘실의 그림자도 얼씬하지 않았다. 이전에는 밤에 뻐꾸기 울음소리를 둬 번 내면 인차 나오곤 하던 춘실은 머리를 내밀지도 않았다. 상순은 버드나무에 손을 얹고 기대어 서서 춘실의 집 쪽을 눈 뿌리 빠지게 바라보면서 춘실이 나타나 사뿐사뿐 걸어오기를 애타게 기다렸다. (혹시 듣지 못했을까?) 상순은 또 뻐꾸기 울음소리를 높이 여러 번 냈다. 뻐꾹, 뻐꾹~ 뻐꾹~ 뻐꾹~ 한참 후에 저쪽에서 춘실이가 나와 이쪽으로 다가오는 것 같았다. 상순은 한숨을 후~ 내쉬면서 그쪽으로 마주 나갔다. 그는 달빛아래에서 마주 걸어오는 여인은 춘실이 아니라 춘실의 어머니라는 것을 보고 놀라 우뚝 멈춰 섰다. 그때 해금이 다가와 뜻밖에도 상순의 손을 잡았다. “이 사람아, 이젠 춘실을 더 찾지 마오. 앞집에서 명천 사돈새기와 사돈보기를 하고 택일까지 했다던데 춘실을 찾아 뭘 하겠소? 춘실도 이젠 나오지 않을 게요.” 상순은 성이 나서 펄쩍 뛰었다. “누가 그 결혼을 한대? 난 춘실과 살겠는데.” 춘실의 어머니는 한숨을 호~ 내쉬었다. “별수 있소? 혼사 말은 부모가 결정하는 거니까.” 상순은 하늘을 멍해 쳐다보면서 황소숨을 몰아쉬었다. 그는 집으로 들어가려는 춘실의 어머니 손을 두 손으로 꽉 붙잡고 애원했다. “춘실의 엄마,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으니까 춘실을 내보내줍소.” “안된다니까. 왜 이러우? 그 애를 끌어내다가 자꾸 버들강변에 가더니, 에이고, 이 일을 어쩜 좋소?” “아무 근심도 하지 맙소.” 해금은 상순의 손을 홱 뿌리치면서 언성을 높였다. “뭘? 근심 말라고? 혼사말도 하지 못하고 남의 귀한 딸의 몸에 손을 대긴 왜 대? 남은 망신스런 일이 생길까봐 근심이 태산 같은데도. 제 정신이 있소?” 그 말에 상순은 깜짝 놀라면서 춘실의 어머니 두 손을 꽉 잡아 한쪽으로 끌고 가서 나직이 물었다. “무슨 일이 있습둥? 전번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던데?” “아이고, 사내들이란 다 이런가. 애가 몸이 그런데… 아이고, 내 싸지르기만 하면 되오? 이 일을 어쩌오?” “정말입둥?” 상순은 놀라기는커녕 기다리기나 한 듯이 기뻐 어쩔 줄 몰라 했다. “이걸 봐라. 남은 속이 타 재 가루 다 됐는데도 헤벌쭉 헤벌쭉 웃긴?” 해금은 상순의 손을 홱 뿌리치면서 노발대발했다. 상순은 모든 것이 자기가 계획한대로 돼나가는 것 같아 대수롭지 않아했다. “엎지른 물을 어쩜둥? 나와 춘실이 살면 되지. 뭐?” 해금은 잔뜩 약이 올랐다. “그것도 말이라고 해? 그래 우리 춘실은 첩이냐? 뭐냐?” 상순은 뒷덜미를 긁적거리면서 “당연히 본댁입지. 일이 그 지경이 됐으면 사는 수밖에 있습둥?” 하고 쉬운 소리를 해댔다. 춘실의 어머니는 야단쳤다. “이 놈아, 네 애빈 결혼택일까지 했는데. 되지도 않을 소릴 하겠니? 내 딸을 내놔라.” “그러나 저러나 춘실을 한번 보기요. 전번까지도 몸이 그렇단 말은 하지도 않았는데.” 해금은 상순의 귀 쌈을 한대 찰싹 갈겼다. “요 못된 놈 새끼야, 남의 딸을 못 쓰게 만들어놓고서도. 낯짝이 돼지 엉덩짝보다도 더 두터운 놈아. 아이고, 이 일을 어쩜 좋소? 동네에 소문이 나가면 우리 춘실은 어쩌니?” 상순은 춘실의 어머니가 높이 떠들수록 흥이 났다. (좋기는 우리 아버지와 온 동네 사람들이 다 듣게 떠드오. 그래야 아버진 할 수 없이 춘실과 살라고 할 게 아니요?) 달빛아래 이집 저집에서 문을 열고 동정을 살피였다. 기준도 뒤울안에 소변을 보러 나왔다가 토성 밑에서 떠들썩하자 이쪽에 귀를 기울였다. 그는 상순과 뒤집 해금이가 주고받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이 놈 새끼! 종아리를 분질러놓지 않는가 봐라.” 상순은 두 손으로 머리를 싸쥐고 토성 밑에서 아름드리버드나무를 안고 돌면서 몸을 숨기였다. 그러나 달아날 예산은 없었다. 그는 고의적으로 온 동네 사람들이 다 들으라고 아버지와 춘실의 어머니 약을 올려주었다. 춘실의 어머니는 기준을 보자 멱살을 틀어쥐고 늘어졌다. “내 딸을 어쩜둥? 양? 내 그 집 막내아들놈을 놔두지 않겠소. 내 딸을 그 집엥서 데려갑소. 이젠 내 딸을 책임지오.” “뭐라오? 듣고도 모를 소릴. 저 놈 새끼 어쨌단 말이오. 이걸 놓고 천천히 말하오.” 춘실의 어머니는 달빛아래 동네 사람들이 많이 구경나온 것을 보고 기준의 멱살을 활 놓고 “아이고, 동네 창피해 못 살겠다. 원.” 하고 넉두리를 하며 집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기준은 성이 날대로 나 상순을 쫓아다녔다. “못된 쇠새끼 엉덩이에 뿔부터 난다더니 저놈새끼를 저거, 그저, 가만 놔두지 않겠다.” 그제야 상순은 아름드리버드나무를 안고 돌다가 다리야 날 살라고 꼬리 빳빳해 달아났다. 뒤에서 동네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들리었다. 연 며칠 상순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초생 달이 동산마루에 가냘픈 처녀의 눈썹처럼 가늘게 떠올랐다. 뻐꾹, 뻐꾹, 뻑뻑 꾹. 이때 토성 밑에서 연 며칠 들리지 않던 뻐꾹새 울음소리가 들리었다. 뻐꾹새 울음소리는 점점 높아만 갔다. 뒤 집 춘실과 부모들은 그 뻐꾹새 울음소리가 바로 상순이 부르는 소리라는 것을 짐작했다. 춘실의 어머니는 춘실의 눈치를 힐끔 곁눈질해보았다. 춘실은 베개를 두 개나 구들에 내리워다놓더니 맥없이 쓰러졌다. 그는 베개를 베고 다른 베개를 안고 누워 어깨를 들먹였다. 춘실은 속으로 상순을 원망했다. (개놈새끼, 애비가 동의하긴 개똥으로 동의했어? 날 얼려 김칫독처럼 파먹었구나.) 바깥 토성 쪽에서는 뻐꾸기 울음소리가 더 애타게 울렸다. (안 나간다. 안 나가! 네놈새끼 사돈보기까지 했는데 어째 나가? 속힌 것만 해도 분해 죽겠는데. 두 번 다시 속을 줄 아니?) 춘실은 베개를 활 뿌려 치며 돌아누우면서 손으로 눈물을 닦았다. 지군선은 그 모양을 보다가 아래쪽 정지로 내려왔다. “여보, 아무래도 저 애 혼처를 구해 시집보내야 할 거 같소.” 밤중에 홍두깨 내밀듯이 하는 그 말에 해금은 놀랐다. “불시에 무슨 소리요?” 해금은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군선은 말소리를 낮췄다. “쟤가 몸이 점점 부어오르면 정말 어쩌오? 동네 망신을 하기 전에 시집보내면 누구 앤지 누가 아오?” 해금도 그 말에 귀가 솔깃해졌다. “글쎄 말이오.” 춘실이 화닥닥 일어나면서 성을 발칵 냈다. “시집 말을 하지도 마오. 난 시집가지 않겠소.” 그 말에 춘실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뒤로 훌렁 물앉았다. “이제 다시 시집 말을 하면 난 자살할테야.” 해금은 춘실의 손을 붙잡아 앉히면서 차근차근 일깨워주었다. “얘야, 부모는 널 생각해 그런다. 엎지른 물을 어찌겠니? 상순이보다 더 좋은 혼처를 구해서 널 시집보내면 우린 시름 놓겠다. 우린 자식이라곤 네 밖에 없지 않고 뭐니? 절대 짧은 생각을 하지 말라.” 그 말에 춘실은 서럽게 울었다. 쓸쓸한 달빛이 구들을 희읍스름하게 비추는데 바깥 토성밑 쪽에서는 뻐꾸기 울음소리가 애타게 울고 있었다. 한참 후 뻐꾸기 울음소리가 뚝 그쳤다. 집안과 바깥은 희읍스름한 달빛이 출렁일 뿐 숨 막히게 고요가 설레고 있었다. "문을 열엇!" 이때 바깥에서 귀에 익은 중국말로 지르는 고함소리가 들리었다. 뒤이어 어지러운 발자욱소리가 들리더니 문을 마구 잡아 두드렸다. "문을 열지 못해!" 춘실과 은실은 이불밑으로 기어들어가 바들바들 떨었다. "좀 기다리오." 지군선이 일어나 문께로 가기도전에 문을 박차고 웬 놈들이 뛰어들었다. 손전지불이 어지러이 구들을 비춘다. "어느 년이냐?" 일본 놈의 말소리가 어지러이 공포에 찬 어둠속에 울려 퍼졌다. 지학사란 놈이 구두 발로 구들에 뛰어올라왔다. 그놈이 이불을 활 걷어치우자 이불속에서 몸을 옹송그리고 와들와들 떠는 두 처녀애들이 드러났다. "오~ 우쯔꾸씨이 무스메, 이께!" 몇몇 일본 놈들이 징글스레 웃으면서 두 처녀애들한테 덮쳐들었다. "엄마!" 춘실과 은실이 몸부림치며 애처롭게 소리쳤다. "왜 이러는가?!" "우리 딸을 못 다친다!" 군선과 해금은 필사적으로 달려들어 두 딸을 막아나섰다. "빠가요로!" 일본놈이 총박죽으로 군선의 턱주가리를 걷어쳐올렸다. "악!" 군선은 외마디 비명소리와 함께 구들에 썩박나무 넘어가듯 넘어갔다. 일본놈들과 자위단 졸개들이 춘실과 은실을 끌고 나갔다. "춘실아!" "은실아!" 해금이 두팔을 벌리고 소리치면서 따라나갔다. 어둠속에서 지학사가 능청을 부렸다. "네 딸이 어찌나 예쁜지 이 동네 상순이 빼앗아가기전에 좋은 곳에 보내주지." "걔들이 무슨 죄가 있다고 그러오?" 지학사는 개화장을 휘두르면서 으시댔다. "너무 이쁜게 죄지. 대일본제국의 높은 담장안에 있는 기와집에 보내주는데 얼마나 좋아? 돈도 많이 벌고." '지촌장, 좀 일본군과 말해 우리 딸을 살려주오."" "흥! 안 돼!" 지군선이 사정해도 안되자 버럭 고함쳤다. "내 딸을 일본군에 팔아먹어자고?  안 돼!" 그러나 지학사는 계속 지껄여댔다. "먼데 가지 않아. 진수해 어귀 일본군위안소에 보낼 거야. 으흐흐흐흐. 고운 얼굴을 팔아서 돈이나 많이 벌어서 좀 좋아서 그래?" "엄마!" 두 딸은 울고 불며 끌려가지 않으려고 몸부림쳤다. 엄마는 두 딸을 한날 한시에 빼앗기지 않으려고 악을 딱딱 쓰며 손목을 잡고 놓지 않았다. "빠까!" 일본놈이 총깨묵으로 해금의 머리를 탁 내리쳤다. 순간 해금은 "앗!" 외마디 비명소리 지르며 쓰러졌다. "엄마!" 춘실과 은실은 일본놈들에게 끌리어 진수해 쪽으로 내려가고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그 광경을 차마 볼수 없어 모두 눈물을 흘리었다. 상순은 도끼를 쥐고 달려나가다가 기준한테 붙잡혔다. "정신 나갔니? 총을 든 일본놈을 당할수 있니?" "춘실이랑 잡혀가는데 눈깔을 펀히 뜨고 놔두람둥?" 기준은 펄펄 날뛰는 상순을 말릴수 없었다. 상순은 도끼를 들고 씽 달려 동산으로 뛰어올라갔다. 그는 산마루를 타고 춘실을 붙잡고 가는 일본 놈들을 노려보면서 뒤따라갔다. 딱 네 놈이었다. 그러다가 그는 앞질러 산기슭으로 달려 내려갔다. 뒤이어 그는 일본놈들이 지나갈 길 목에 머리를 숙이고 있는 늙은 비술나무에 기여올라갔다. 드디어 일본 놈 넷이 춘실과 은실을 끌고 올 때였다. 그는 나무위에서 뛰어내리려고 했다. 쒹- 딱! "아야!" "이다이(아파라)!" 어디서 날아왔는지 돌멩이에 맞아 두 놈이 꺼꾸러졌다. 그때 상순이 늙은 비술나무에서 뛰어내렸다. "이 놈들아!" 도끼가 번쩍 했다. 한 놈이 총창으로 날아드는 도끼를 막았다. 쟁강! 쇠가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불찌가 튕겼다. 땅! 땅! 어둠속에서 쓰러졌던 일본 놈이 기어일어나다가 총을 맞고 쓰러졌다. "달아나라!" 춘실과 은실은 상순이 두 놈을 대적해 싸우는 틈을 타서 선불맞은 노루처럼 황급히 달아났다. 한놈은 상순을 버리고 처녀들을 쫓아가면서 고함쳤다. "쓰빠라시이 무스메(예쁜 처녀)!" 또 다른 놈도 쫓아갔다. 둘 다 잡힐 거 같았다. "갈라져 달아나라!" 상순이 고함치자 둘은 남북으로 갈라져 도망쳤다. 쫓던 놈은 춘실을 놓아주고 은실을 쫓아가 붙잡고 버두나무 숲속으로 사라졌다. 상순은 몸을 날려 찔러 들어오는 총창을 피하면서 도끼로 그 놈의 대갈통을 내리 찍었다. 그 놈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쓰러졌다. 땅! 땅! 총알이 죽음의 노래를 부르며 날아와 상순의 발부리에 꽂혔다. 상순은 급히 몸을 날려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사실 진달래 중대장은 쌀을 구하러 함흥촌에 오다가 우연히 일본 놈들이 함흥촌에서 처녀애들을 끌고 내려오는 것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돌팔매를 날려 두 놈을 까눕히고 유격대원들을 지휘해 후미의 일본 놈들 십여 명을 대적해 싸웠던 것이다.         유격대원들은 길바닥에 쓰러진 일본 놈들의 시체를 뒤져 보총 세 자루를 걷어가지고 원시림 속으로 잠적해버렸다.                                                                  저자 김장혁 련계방식:                                     핸드폰, 위쳇 번호:138-4435-2157.                                      QQ: 3025398304@qq. com
59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38) 댓글:  조회:1667  추천:0  2016-04-08
                      5. 달밤의 연정 점심 때 흐리멍텅한 하늘에서 흰 눈송이들이 흩날려 내렸다. 상순은 진수해로 갔다가 제사상 소물을 사 지게에 지고 흰 눈을 빠드득빠드득 밟으면서 함흥촌으로 헐금씨금 돌아왔다. 상순이 정지에 들어가 술이며 과자며 과일이며 지게에서 내리워 구들에 벌려 놓았다. 그때 상우가 상순의 팔소매를 쥐어 당기면서 바깥을 눈짓했다. “어째?” 상순이 이상해했다.       상우는 되돌아보면서 상순에게 눈짓까지 하며 바깥으로 나갔다. 상순이 바깥에 나가자 상우는 울바자 밖을 나가 구새 목 쪽으로 에돌아갔다.       상순이 따라 가자 상우는 동생의 어깨에 손을  얹고 무거운 입을 열었다. “얘, 너 춘실을 정말 좋아하니?” 상순은 팔소매로 땀을 닦으면서 형님을 쳐다보았다. “불시에 건 무슨 말이오? 난 춘실을 좋아한 적도 없소.” 상우는 땀벌창이 된 동생의 길쭉한 얼굴을 바라보면서 따지고 들었다.        “내 다 알아. 너네 저 태평강 버드나무숲에서 뭐 했니?” “뭐 어쨌다고 이러오?” “계속 시치미를 딸 예산이냐? 너네 버드나무숲 속에서 안고 도는 거 다 봤는데도?” 그제야 상순은 얼굴이 지지벌개나면서 당황해했다. “물론 너네끼리 좋아해도 무방해. 허나 부모들의 허락도 없이 그러지 말아라. 아버지 얼마나 성나 하는지 아니?” 상순은 머리를 숙이고 발끝으로 땅바닥을 허비였다. 상우는 뒷말을 이었다. “내 아버지께 말했어. 너와 춘실의 약혼을 허락해달라고 말이야.” 상순은 대수로워하지도 않았다. “춘실과 좋아하면 좋아했지 어쨌다고 그러오? 그러잖아도 부모한테 허락받자고 말하려던 참이오.” “이 밸때기를 어쩌겠니? 쯧쯧.” 상우는 머리를 홰홰 가로저었다. “내 시켜준 대로 해라. 아버지 물으면 잘못했다 해. 아버진 최구장네 맏손녀와 마주 세울 예산이더구나.” 형님의 말에 상순은 눈이 떼꾼해졌다. “뭐라오? 춘실을 놔두고 왕청 같은 짓을 다 하오. 정말, 큰누나 최구장네 둘째며느리로 시집갔으면 됐지. 또 내까지 걸 버무릴 건 뭐라오?” 상순은 노발대발하면서 어디론가 휭 하니 달아났다. 등 뒤에서 상우의 애탄 목소리가 들렸다. “얘, 어디로 가? 저 울뚝밸을 어쩌겠니?” 형님이 그러건 말건 상순은 성이 날대로 나 씩씩 황소숨을 몰아쉬면서 토성안집 동쪽으로 가는 것이었다. “저 놈 새끼 또 춘실네 집으로 가는구나. 고삐를 끊은 뜨개소 같은 게, 저 놈 새끼를 어쩌겠니? 저걸.” 상우는 상순의 잔등에 손가락질하면서 머리를 홰홰 가로저었다. 며칠 후 어느 날 저녁, 초생 달이 함흥촌 동산마루에 두둥실 걸렸다. 상순은 가만히 웃새집에서 금옥을 불러내 바깥으로 나갔다. “오빠, 어째?” 상순은 금옥의 손을 잡아끌고 울바자 한쪽으로 눈을 빠드득빠드득 밟으면서 가더니 귀속 말을 했다. “얘, 춘실이 너 형님을 하면 좋지?” 금옥은 손을 빼면서 “좋지 않고. 며칠 전에 우리 집 앞에 애기를 업고 온 명옥이란 사돈 새기를 본 게 마음에 들지 않습데. 춘실 언니 얼마 좋소? 생기기도 씨원하게 생기고. 성질도 씨원씨원하고.” “나도 그래. 춘실은 키도 훤칠하고 얼마나 곱게 생겼니? 야, 그 쌍가풀 눈만 봐도 정신 잃을 지경으로 곱다. 동그란 낯이랑 얼마나 복성스레 생겼니?” 상순의 열변에 금옥은 배를 끌어안고 웃음보를 터뜨렸다. “아이, 오빤 진짜 춘실 언니한테 미쳤구먼요. 호, 호, 호.” 상순은 집 쪽을 흘끔 보더니 손으로 금옥의 입을 막았다. “부탁 좀 들어줄래?” “뭘?" 상순은 주위를 살피더니 손을 펴 금옥에게 귀에 가져다대고 귀속 말을 했다. “춘실을 나오라고 해라.” “어이고, 아버지한테 들키면 엉덩짝이 성하겠소?” “근심 말라. 맞을 일이 생기면 다 내게 밀어라.” 금옥은 머리를 숙이고 궁리하더니 “불러 내올게. 헌데 오빠, 내 청도 하나 들어주겠소?” 하고 물었다. “말해라. 다 들어줄게.” “내 춘실 언니를 불러내온 대신 감자누룽지를 한줌 주겠소?” “줄게.” “약속하지?” “응.” “그럼 깍지걸이를 하기요.” “그래, 하자. 넌 열세 살이나 되는 게 아직도 천덕꾸러기 어린애 같구나.” 상순은 진짜 금옥과 빼끼 손가락으로 깍지걸이를 하면서 감자가마치가 생기면 한줌 주기로 약속했다. “오빠, 어데서 기다리겠어?” 금옥이 떠나가면서 묻자 상순은 “저기 동산기슭 조그만 골 안이 있잖니? 거기서 기다릴게.”라고 했다. 금옥은 되 달려 와서 “오빠, 이 시꺼먼 밤에 그렇게 으쓱한 데로 가자면 가겠소?” “그것도 그렇긴 하구나." 상순은 잠간 궁리하더니 “그럼 토성안집 토성 밑으로 데리고 나오너라.” 하고 부탁했다. 그제야 금옥은 “토성 밑은 비슷하오. 춘실 언니네 집과 가까우니까 나올 게요. 그런데 춘실 언니네 집식구들한테 들키는 날엔 큰일 날 게요. 조심하오.” 하고 근심했다. “야, 근심 말라. 네가 토성 밑까지만 데려오면 내가 알아서 조용한델 데리고 가지 않으리라고.” 상순의 말에 금옥은 머리를 끄덕였다. 금옥은 춘실의 집으로 가서 춘실을 불렀다. “왕 왕 왕!” 이때 인기척을 느낀 황둥개가 요란스럽게 짖어댔다. 그러자 춘실의 어머니가 문을 열고 어두운 바깥을 내다보면서 개를 불러가고 나서 “금옥이구나. 이 밤에 무슨 일이냐?” 하고 물었다. “춘실 언니와 함께 놀자고 그럽꾸마.” 이때 문으로 춘실의 동그란 얼굴이 쏙 나타났다. 그는 옆에서 짖어대는 개 대가리를 쓰다듬어주면서 “지개! 짖지 말앗!” 하고 말리더니 이쪽에 대고 물었다. “금옥이 아니야? 이 밤에 뭘 논다고 그래?” 춘실은 자기보다 세살이나 어린 금옥 내다보면서 심드렁해했다. 금옥은 손으로 오라는 시늉을 하면서 춘실의 어머니가 집으로 들어가는 것을 할끔할끔 보면서 토성 밑을 콕콕 손가락질했다. 토성 밑을 흘금 쳐다보던 춘실은 상순이가 피뜩 보이었던지 바삐 짚신을 끌고 금옥을 따라나섰다. 뒤에서는 황둥개가 꼬리를 흔들면서 뒤따라왔다. 춘실은 금옥을 따라 버드나무 밑을 지나 우물가 토성 밑으로 갔다. 거기에는 진짜 상순이 호랑이처럼 왔다 갔다 하면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무슨 일이요? 이 밤에?” 춘실의 물음에 상순은 “저쪽 강가에 가서 조용히 할 말이 있소.” 하고 말하면서 몸을 돌려 토성 북쪽으로 걸어갔다. 춘실은 발로 눈 덮인 땅바닥을 동동 구르면서 “할 말이 있으면 여기서 말하오.” 하고 애나했다. 상순은 “그러다가 그 집 아버지한테 들키면 큰 일 나겠소.” 하고 말하더니 계속 북쪽으로 걸어갔다. 춘실은 집 쪽을 할끔 곁눈질하더니 상순을 몇 발자국 따라가다가 오똑 멈춰 섰다. “새까만 밤에 으쓱한 강가로 갈 게 있소? 여기서 말하오.” 그러자 상순은 되돌아오더니 동산 쪽을 가리키면서 “달이 저렇게 환한데 무슨 일이 있소?”라고 하면서 춘실의 손을 잡아끌었다. 춘실은 금옥을 할낏 곁눈질하더니 " 이걸 놓소." 하고 상순의 손에서 손을 쏙 빼갔다.       “여동생 앞에서 부끄럽지도 않소? 사람도 없는 눈 덮인 강가가 무섭단 말이오.” 상순은 춘실의 손을 되잡으면서 큰 소리를 땅땅 쳤다.       “겁내지 마오. 한다하는 싸움꾼 상순이가 있는데 뭐가 무섭소? 이 골 안에서 나 상순을 당할 자가 누가 있소?”        그 말에는 도리 좀 있었다. 상순은 장백산과 소 왕청 항일유격대를 찾아가 한다하는 항일투사들에게서 총 쏘기와 검술, 비수, 권투를 배웠다. 그리하여 상순은 진짜 이 골 안에서 당할 자가 없을 정도로 유명한 싸움꾼으로 됐던 것이다.       금옥은 어깨를 옹송그리면서 상순과 춘실을 할낏할낏 번갈아보면서 종종 걸음쳐 토성 밑에서 빠드득빠드득 눈을 밟으면서 떠나가 버렸다. 춘실은 동산에 걸린 초생 달과 황소숨을 몰아쉬는 상순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뒤따라 나섰다. “무슨 일이기에 내일 오전에 말해도 되겠는 걸 이러오? 딱 사람들이 없는 강가에 가 말해야 되오?” 상순은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면서 하늘을 쳐다보면서 걷기만 했다. 그들 둘은 착잡한 생각에 잠긴 채 어느덧 마을을 벗어나 서쪽에 있는 태평강 가 아름드리버드나무가 들어선 어둑캄캄한 버드나무숲속에 이르렀다. 봄은 찾아왔건만 아직도 여기저기 잔설이 누워있고 봄의 밤바람에 버드나무숲이 휴~휴~ 소리 내며 설레고 있었다. “멀리 가지 말고 여기서 말하오. 대체 무슨 일이라도 생겼소?” 춘실이 멈춰서면서 발을 통통 굴러 짚신에 묻은 눈을 털며 머리를 다소곳이 숙였다. 황둥개는 엉덩이를 땅에 붙이고 껌껌한 버드나무숲속을 두리번거리더니 끼깅 하고 집주인과 상순을 번갈아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딱 마치 “주인 새 애기, 하도 많은 대낮을 두고 왜 밤에 이런데 와서 놀아? 저 사낼 믿을만해?” 하고 묻는 상 싶었다. 상순은 몸을 돌려 춘실한테 다가오더니 춘실의 어깨에 오른손을 올려놓았다. “춘실이, 난 죽어도 춘실을 영원히 사랑할테오. 너도 나를 버리지 않을 거지?” 상순은 밤중에 홍두깨 내밀듯이 불쑥 열변을 토했다. 춘실은 심장이 톡탁톡탁 뛰면서 방금 흉 벽을 박차고 몸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아 두 팔로 두근두근 거리는 가슴을 꽉 안았다. “왜 말이 없소? 그래 나를 사랑하지 않소?” 상순의 물음에 춘실은 도리머리를 가로 흔들었다. “무슨 뜻이오? 사랑하지 않는단 말이오?” 춘실은 상순의 손을 쳐버리면서 앵돌아졌다. “이제껏 일 년 남짓이 따라다녔건만 딱 말해야만 아오?” 상순은 황급히 두 팔로 춘실을 꽉 껴안았다. “양, 오늘 확실하게 결단내기요. 춘실이, 말하오. 날 사랑하오? 사랑하지 않소?” “어유, 이걸 놓소. 이런 양반 믿고 어떻게 한뉘 살겠니?” 춘실은 서러운 듯이 마구 몸부림쳤다. 이제껏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상순을 경계하던 황둥개가 왕왕 짖어댔다. 상순은 개의치 않고 춘실을 더 꽉 껴안았다. “그래, 날 사랑한단 말이지?” 춘실은 머리를 무겁게 끄덕이며 “그래요. 나도 당신을 무척이나 사랑하오. 됐지?”라고 시원히 대답했다. 상순은 너무 기뻐 어쩔 줄 몰랐다. 그는 춘실을 건뜻 들어 올리더니 몇 바퀴 빙빙 돌면서 버드나무숲이 쩌렁쩌렁 울리게 고함쳤다. “야~! 하늘과 땅이 들었지? 나무들도 다 봤지? 춘실이 나를 사랑한다고 했어! 하느님, 들었습둥?” “야~ 어째 고함치오? 누가 듣겠소. 에이유, 보기도 싫다 야.” 춘실은 주먹으로 상순의 가슴을 마구 패대면서 두 다리를 가둥거렸다. “들으면 뭐라오? 우리 서로 사랑하는데. 흥!” 상순은 춘실을 내려놓으면서 춘실의 보름달 같은 얼굴에 뽀뽀를 쪽 했다. 초생 달도 부끄러워 생글 웃으면서 얇은 구름 속으로 들어가 구름솜으로 얼굴을 가리었다. “이러지 마오.” 춘실은 손으로 뽀뽀를 맞은 얼굴을 가리며 외면하더니 머리를 다소곳이 숙였다. 그녀는 부끄러워 발끝으로 눈 덮인 땅바닥을 긁으면서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우리 이젠 열아홉 살인데 무슨 소리요?” 춘실은 한숨을 호 내쉬었다. “이보세요. 아직 부모들이 허락하지 않았다는 걸 생각이나 했소? 부모들이 반대하는 날엔 끝장이란 말이요.” “쳇, 누가 우리 결혼을 반대한단 말이오? 부모가 반대해도 우리 둘만 서로 사랑하면 다요.” 상순의 호언장잠에 춘실은 “그래도 어찌 부모들의 말을 듣지 않을 수 있소?” 하고 뒤 말을 이었다. “우리 부모들에게 잘 말해보기요. 우리 엄만 내 말을 영 잘 듣는데 아버지가 성격이 유달라서 근심되오.” 상순도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었다. “글쎄 나도 우리 아버지 근심되기는 하오. 마음에 있는 사람끼리 살아야지. 어찌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과 산단 말이오?” 상순은 아버지가 한창 새로 이사 온 사돈집 명옥과 혼사 말을 한다는 말을 하려다가 춘실이 알면 재미없을 것 같아 혀끝까지 닿은 말을 꿀꺽 삼켜버렸다. 춘실도 발끝으로 눈을 살살 긁으면서 조용히 말했다. “그거야 그렇지. 후엔 금옥을 보내지 마오.” “그럼 어쩔까?” “쪽지를 써서 황둥개 귀에다 끼워 넣어 보내오.” “저 황둥개는 나를 보면 짖으면서 물자고 드는데?” 상순은 되지도 않는 말을 한다는 식으로 두 손을 툭툭 털었다. 춘실은 몸을 상순에게 기대면서 “그런 재간도 없소? 개한테 누룽지랑 주면서 친하오. 그럼 개는 당신도 주인처럼 따를게 아니요? 그때 살작 쿵…” 상순은 춘실을 와락 끌어안았다. “에이, 당신을 만나자고 기다리는 게 하루가 삼추 같은데 언제 저 황둥개를 친해 만나겠소?” “그래도 황둥개를 친해야 하오. 금옥이 자꾸 우리 집을 찾아다니면 우리 집이나 당신 집에서 눈치 채면 어쩌오?” 상순은 춘실을 안고 하늘에 두둥실 뜬 달을 쳐다보면서 “아무 때나 부모들이 알아야 할 걸 가지고. 원, 참.” 하고 대수로워 하지 않았다. 그들 둘이 한창 이야기꽃을 피우는데 마을 저쪽에서 “춘실아-” 하고 부르는 춘실의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리었다. 춘실은 어깨를 옹송그리더니 상순의 품안에서 빠져나왔다. “빨리 가봐야겠소.” “그럼 개 오른쪽 귀를 잘 뒤져보오.” “양, 황둥개를 친하기 전에 날 찾지 마오.” “양. 춘실과 첫사랑을 맺었는데 그까짓 황둥개를 친하지 못하겠소?” 춘실은 짚신바람에 치마자락을 날리면서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그 뒤를 황둥개가 왕왕 짖어대면서 뒤쫓아 갔다. 상순은 춘실과 백년가약을 맽고 너무 기뻐서 어쩔줄 몰라했다. 그는 버드나무 밑에서 눈을 움켜쥐어 버드나무에 마구 뿌렸다. 그러나 아까처럼 소리치지는 못했다. 상순은 기뻐 어쩔 줄 모르면서 주먹과 발길로 마구 아름드리버드나무들을 치고 박고 걷어찼다.                            6. 집안혼사 초생달이 함흥촌 동산마루에서 장 바 줄 서너 개 만큼 가냘프게 떠있었다. 상순은 형님을 불러내 집 울바자 동쪽으로 나갔다. 상우는 황소숨을 몰아쉬는 동생을 마주 보면서 정색해 “무슨 일이냐?”라고 조용히 물었다. “형님, 전번에도 말했지만 저기 춘실과 살게 아버지와 말해주오. 우리 둘은 서로 사랑하니까.” 당돌한 그 말에 상우는 한숨을 후 길게 내쉬었다. “야, 나와 아주머니도 너희 둘이 살았으면 좋겠다고 했어. 그런데 매형과 누님이 한 혼사 말이어서 아버진 한사코 사돈집의 명옥이란 새기와 너를 마주 세우려고 해. 이 일을 어쩜 좋아?” 이때 지새금이 구정물을 버리려고 나왔다가 형제간에 주고받는 말을 듣고 물을 마당에 왈 부어버리고 구정물 함지를 들고 다가왔다. “시동생, 근심하지 마오. 내 어떻게 해서라도 시아버님과 말해서 우리 춘실과 살게 만들겠소. 그 사돈 새기는 원래 시동생 짝이 되지도 않소. 키도 작고 잘 생기지 못했더구먼. 그래도 우리 사촌여동생이 인물도 잘났고 키도 큼직한 게 시동생하구 천생배필이오. 이 다음 애들을 낳아도 우리 공혁처럼 큼직한 거 낳을거요.” 상순은 아주머니한테 엄지를 내휘둘렀다. “그래도 내 마음을 알아주는 건 아주머니야!” 이때 위방 문이 덜컥 열리는 소리가 났다. “쉿!” 지새금은 입에 식지를 대더니 구정물대야를 들고 들어갔다. 위방 쪽에서 마른기침을 하는 소리가 들리었다. 기침소리를 들어봐도 아버지 기침소리가 아니고 큰아버지의 기침소리 같았다. 울바자 밖을 나온 사람은 확실히 창준이었다. “너희들 여기서 밤중에 뭘 그렇게 구구거리냐?” 상순이 먼저 청을 드렸다. “큰아버지, 나와 춘실이 살게 아버지께 말씀해줍소.” 창준은 머리를 끄덕였다. “글쎄 말이다.” 창준은 조카들을 번갈아보더니 뒷말을 이었다. “헌데 맏조카 어금과 맏사위 경인이가 편지로 네 혼사 말을 했더구나. 혼사는 원래 부모가 결정하는 거니까. 아버지 결정에 따르는 수밖에 없다. 아무리 춘실과 좋아해도 너희들이 왈가불가 할 일이 아니다.” 그 기막힌 말에 상우가 끼어들었다. “큰아버지, 아버지와 어떻게 잘 말해줍소. 얘와 춘실은 서로 좋아하오. 내 보건데 사돈 새기 명옥보다 내 사촌처제 춘실이가 체격이나 인물이나 마음이나 낫습니다. 사돈 새기는 동생과 짝이 기웁니다.” 창준은 버럭 성을 냈다. “이 자식들이, 흥 소리도 반간이라고. 그래 부명을 어기고 집안 혼사 말을 어찌겠니?” 창준은 조카들에게 너무한 거 같아 좀 눅잦혔다. “글쎄 내 동생하구 말해보마. 다 좋을 대로 하자고.” 상순은 황소숨을 몰아쉬다가 큰아버지 손을 덥석 잡았다. “큰아버지, 꼭 잘 말해줍소. 난 춘실을 내놓고 못 살겠습니다.” 창준은 뒷간 쪽으로 가면서 도리머리를 가로 흔들었다. “이 일을 어떻게 한단 말이야?” 상우는 동생을 보고 타일렀다. “너 그 밸 때기를 죽여라. 혹시 아버지가 뭐라고 하더라도 밸을 써선 안 된다. 그럼 나도 널 돕지 않을 거야.” 상순은 맥없이 머리를 끄덕이더니 집안으로 들어갔다. 희끄무레한 등잔불이 나불거리는 위방으로 곧추 올라간 상우와 상순은 아버지와 큰아버지 앞에 마주앉았다. 상우가 두분의 눈치를 흘끔 보면서 무거운 입술을 떼였다. “아버지, 큰아버지, 전번에도 말씀드렸지만 상순과 춘실이는 천생배필감입구마. 얘들을 함께 살게 허락해줍소.” 등잔불 밑에서도 기준의 성난 그림자가 선뜩하게 드러났다. “뭐라고? 되지도 않는 소릴. 흥!” 기준은 움찔하더니 바로 앉으면서 마음을 굳힌 듯이 말했다. “상순은 큰사위 경인의 조카 명옥이란 사돈 새기와 결혼해야 한다. 어금과 맏사위 경인이 혼사 말 편지까지 보내왔다.” 기준은 담배통 안에서 창호지 같은 누런 종이에 붓으로 쓴 편지를 꺼내 상순의 앞에 밀어놓았다. 그 말에 상순은 편지를 보지도 않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수그리며 간청했다. “아버지, 매형과 누나도 나를 잘 살아라고 사돈 새기와 혼사 말을 했다는 걸 압구마. 헌데 난 춘실과 정이 들 대로 들어서 서로 떨어질 수 없습구마." “이 놈 새끼, 부모 허락도 없이 마구 계집애들을 친하다니?” 상순은 무릎을 꾼 채 까딱하지도 않았다. 옆에서 보던 창준은 “집안 법도가 무너져서야 되니? 조용히 말해라.” 하고 기준을 말렸다. 상순은 큰아버지 역성에 용기를 얻었든지 당돌하게  속심의 말을 했다. “아버지, 제발 사돈 새기와 혼사 말을 그만 두시오. 난 춘실과 살겠습니다.” 기준은 꽥 소리쳤다. “이 놈 새끼, 집안 혼사를 망칠 셈이냐? 뭐래도 안 된다. 넌 사돈 새기 최명옥과 결혼해 살아야 한다.” 상순은 넙적 엎드려 어깨를 들먹였다. “아버지, 그 부명만은 거둬줍소. 난 마음에 들지 않는 사돈새기와 살기 싫습니다. 춘실과 살겠습구마.” 창준은 옆에서 보다 못해 한마디 했다. “동생, 어째 같은 사돈 새긴데 지춘실하군 안 된다고 딱 잡아떼니?” 기준은 무뚝뚝하게 툭 내쏘았다. “맏며느리를 지 씨네 집에서 삼았으면 됐지. 둘째며느리를 맏며느리네 사촌여동생을 데려오겠소?” 상우는 그 말에 속이 걸리었다. (아버진 평소에도 새금을 못 됐다고 나무리더니 이러는구나.) 상우는 그제야 아버지가 극구 춘실을 반대하는 원인을 대개 짐작이 갔다. 정지 가마 목에서 그 말을 들은 새금은 입을 비쭉거리면서 조왕 쪽으로 몸을 틀었다. “에이, 지씨네가 어떻다고. 너무나 사리 밝고 체격이 큼직한 게 좀 좋아서?” 앵돌아진 며느리를 보고 사련이가 책망했다. “이 사람아, 그럼 못 써. 시아버님 말에 그게 뭔가?” 새금은 진짜 화를 냈다. “시어머님도 생각해 봅소. 시동생 혼사말에 지씨네를 씹을 건 뭣입니까?” 최사련은 어처구니없어 입을 함박만큼 벌리고 고개만 홰홰 내저었다. 새금은 공혁을 안고 바깥으로 훌 나가면서 입귀를 비쭉거렸다. “잘못했습니다. 하기사 새시할머니로부터 시어머니까지 몽땅 개성최씨 아닙니까? 이제 3대로 개성 최 씨 들어앉으면 희한하겠습니다. 무슨 집안혼사 말인지 정말 모르겠습니다.” 이때 위방에서 기준이가 고래고래 고함쳤다. “거 어째 어른들이 말하는데 정지에서 그렇게 시끄럽게 구는 거야?!” 새금은 머리를 숙이기는커녕 위방을 흘끔 쏘아보면서 손바닥으로 괜히 공혁의 엉덩이를 짝짝 치더니 바깥으로 나가버렸다. “저 개 버릇을 어쩌겠니?” 상우도 위방에서 사이문으로 내다보다 못해 바깥으로 쫓아나갔다. “여보, 어째 이러오?” 허나 새금은 울바자 바깥으로 나가면서 왕왕 울어댔다. “내 분해서 이 집에서 못 살겠다. 그래도 내 시부모를 모시고 이제껏 살아 왔는데. 흐 흐 흑, 흑 흑…” 위방에서 기준은 의연히 자기 주견을 고집했다. 그러자 상순은 얼 주머니 크게 한마디 또 했다. “아버지, 이전에 둘째누나 혼사 때에도 매형과 둘째누나가 마음에 있어 하는데도 반대하더니 어떻게 됐습니까? 결국엔 끝내 둘이 결혼하지 않았습까? 아버지 벽쪽으로 돌아앉아 절을 받지 않았다고 매형은 두고 두고 승 풀이를 하면서 가시집에 발을 들이밀지도 않지 않고 뭣입니까? 어째 이번에도 내 살자는 춘실과 살지 못하게 막습니까? 아버진 꼭 후회할겁니다.” 기준은 성이 나 씩씩거리면서도 창준이가 옆에 있어 매질을 하지 못했다. “너 이놈 새끼, 뭘 안다고 주둥아리 질이야?” 기준은 담배통에서 담배부스러기를 꺼내 말아 부시를 쳐 불을 붙였다. 그는 담배를 길게 빨아 연기를 꾸역꾸역 내보내면서 맞은 켠의 상순을 보면서 맺고 끊듯이 말했다. “집안혼사를 망치지 말라! 부명을 어길테냐? 자초에 춘실과 단념하고 명옥과 결혼할 준비나 해라.” 기준은 엎드린 채 일어나지 않는 상순을 내려다보면서 내심하게 말했다. “이 답답한 놈아, 애비 말을 들어 낭패 없다. 저 개성최씨는 양반가문이다. 옛날 신라말기에 최응이란 총명하고 지식이 많은 문필가가 있었다. 최응이란 양반은 개성에서 고려 궁예 밑에서 책사로 있었는데 후에 자손들은 모두 대대로 개성에서 양반노릇을 했다. 너네 엄마도 개성 최씨다. 봐라, 네 엄마가 우리 집에 들어온 후 너희 형제들이 잘못된 게 있느냐? 그래서 네 큰누나도 개성 최씨네 집에 줬다. 네 몸에도 개성 최 씨네 피가 흐른다. 그래서 집안혼사라고 하는 거다. 집안 혼사를 하면 친한데다 더 친해진다. 알만 해?” 상순은 어이없다는 듯이 머리를 들어 원망스런 눈길로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집안혼사가 뭣이 좋다고 그럽니까?” “집안혼사야말로 제일 믿을만 하다. 서로 잘 아는 집안끼리 믿음에 믿음을 더하는 게 아니겠니? 내 알아보니 명옥은 어려서 부모를 잃고 눈치 밥을 먹으면서 자라면서 별의별 고생을 다 했더구나. 어려서부터 고생하면서 자란 여자가 시집에 들어오면 복이 차례지는 법이다. 그래서 어려서 고생은 금을 주구도 사지 못한다고 한다. 알겠니? 명옥인 또 인정이 두터운 처녀다. 조선 고향에서 후어머니 젖이 없다고 어린 동생을 업고 동네 애어미들한테 찾아가서 동냥젖을 얻어먹이어 키웠단다. 이렇게 인정미가 있고 어려서부터 고생한 새기는 살림살이를 잘할 제일 좋은 며느리 감이다.” 웃방에서는 상순이 일어나더니 아버지께 넙적 엎드리며 큰절까지 올렸다. “아버지, 빕니다.춘실과 함께 행복하게 살게 허락해줍소.” 그러나 기준은 가물거리는 등잔불을 바라보며 상순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손사래를 쳤다. “이젠 밤도 깊었으니 나가라. 등잔불이 아깝다. 일찍 자구 내일 새 집을 짓는데 나가야지. 음.” 상순은 머리를 들어 아버지를 바라보면서 간절하게 물었다. “허락했습니까?” “안 된다. 집안혼사를 망칠 셈이냐? 절대 안 된다.” 상순은 맥없이 풀썩 주저앉으면서 원망스런 눈으로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기준은 막내아들의 그 꼴이 보기 싫은 듯이 벽 쪽으로 반쯤 돌아앉으면서 외면했다. 가물거리던 희미한 등잔불마저 꺼져버렸다. 어둠속에 컴컴한 위방 안에서 기준의 우렁우렁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집안혼사를 망칠 생각은 하지도 말라. 부명을 어기지 말고 최명옥과 결혼할 준비나 해라.” 그 말소리에 어두운 위방에서 상순의 씩씩거리는 황소숨소리가 톱질 했다. 7. 사위 어두운 정지에 차츰 희미한 달빛이 희읍스름하게 비껴들었다. 춘실의 엄마 박해금은 춘실의 쪽에 베개를 끌어다놓고 바싹 다가와 이불속에 들어왔다. 춘실은 죄나 진 듯 이불 밑에서 곰실거리면서 돌아 누워버렸다. 춘실의 엄마는 춘실의 손을 살며시 잡으면서 귀속 말로 물었다. “너 어데 갔댔니?” 춘실은 손을 빼 이불을 머리까지 푹 덮어썼다. 이불속에서는 엄마의 말소리가 또 들렸다. “대개 짐작이 가. 너, 김진을 만나러 갔지?” “아니.” “내 다 알아. 금옥이 데리러 왔을 때 벌써 이상했어. 혹여나 놀러 가나 했더니. 새까만 밤에 강변엔 뭘 하러 갔어?” “아무 일도 아니요.” “엄마한텐 제대로 말해라.” “아버지 들으면 어쩌겠소?” “무슨 일인지? 아버지한텐 말하지 않을게.” “김진 나를 좋아한다오.” “그래?” 춘실의 엄마는 딸을 꼭 끌어안으면서 언성을 좀 높였다. “그래, 어쨌니?” “어쩌긴 나도 사랑한다고 했지.” 춘실은 부끄러워 이불을 더 꽉 쓰면서 얼굴을 가리었다. 춘실의 엄마는 손을 뻗쳐 이불을 헤치면서 춘실의 얼굴을 매만지었다. “너도 시집갈 때는 됐구나. 허나 부모 허락 없이는 동네 사내애들과 놀지 말라. 상순은 일을 칠 애야. 밸이 어찌나 센지 누가 시집가서 삐치겠니?” “나하곤 괜찮소.” “이 놈 가시나, 너 환장했니? 정말 걔한테 혼을 빼앗겼구나. 그 집안 내력이 어디 그렇게 호락호락한 내력이냐?” “사내란 독이 있어야 하오. 나긋나긋한 여자들처럼 마음만 고와 뭘 하오? 일본 놈의 난세에는 김진 같이 힘도 세고 싸움도 잘 하는 사내한테 시집가야 살아 남을 수 있소." 춘실은  김진의 자랑을 늘어놓기까지 하지 않겠는가. "말을 들어보니 그 집안은 조선 신라라는 왕국의 38대로 왕을 지낸 경주 김씨네 후손이라오. 난 지금 막 왕후로 들어가기 직전 기분이오. 김진의 아버지나 할아버지나 다 얼마나 사내대장부답게 생겼소?” “닥치지 못하겠니?!” “어째 밤중에 고함질이오?” 위방에서 지군선이 깨나 정지로 나왔다. 해금은 이불을 활 걷어치우면서 버럭 고함쳤다. “이 가시나, 글쎄 저 성남집 경칠네 막내아들을 좋아한다오. 그 놈 새끼 밸 때기 얼마나 더럽다고? 누가 우리 딸을 그런 심술이 바르지 않은 놈 새끼한테 준답데.” 춘실은 집안에 비껴든 달 빛 속에서 아버지가 정지 벽 밑에 내려와 앉아 등불을 다는 것을 보고 겁이 나 사시나무 떨듯이 바들바들 떨었다. 옆에서 자던 춘실의 여동생 은실은 경을 쳤구나고 질겁해 이불을 덮고 바들바들 떨었다. 등잔 불이 밝혀지더니 집안이 희읍스름해졌다. 군선은 이불을 머리꼭뒤까지 푹 쓴 춘실을 보고 도리머리를 가로 흔들었다. “춘실아, 일어나라. 너도 열여섯 살이니 시집갈 나이 됐다. 이 애비하구 제대로 말해라. 어떻게 된 일이냐?” 아버지가 때리려니 했는데 조용히 말하자 용기를 얻은 춘실은 이불을 활 내리우더니 천천히 일어났다. “아버지, 김진한테 시집가겠습구마. 난 김진이 마음에 딱 드오.” 군선은 머리를 끄덕였다. 뜻밖의 거동이었다. “혼사란 서로 좋아해서 되는 게 아니야. 양가 부모가 허락해야 돼.” 춘실은 어린애처럼 아버지한테 기여가 손을 잡고 몸까지 흔들면서 간청을 드렸다. “아버지, 김진이 얼마나 남자 같소? 그 애가 말하는 게 이담 나와 살면 아버지와 엄마를 자기 친부모처럼 효성을 다해 모시겠다고 했소.” 등잔 불 밑으로 그 말에 반가운 표정을 짓는 군선의 얼굴이 환히 드러났다. “여보, 이 일을 어쩌오? 사돈집과 변소는 멀어야 한다는데 저 성남집 경칠네 우리 앞에 집터를 봐두고 내일부터 새 집을 짓는다오.” “그러오?” 뚱뚱한 해금은 영감을 쳐다보다가 말귀가 이상하게 들려 물었다. “영감, 그래 저 성남집 김진을 사위로 삼겠단 말이오?” 그 물음에 군선은 “내 언제 허락했소?” 하고 반문했다. "김진이 너무 좋아서? 배부른 흥정을 하면서." 그런데 자는 척 하던 은실이 끼어들었다. 해금은 은실한테 눈을 흘겼다. “자라, 죄꼬만게 언니 일에 삐치겐? 금방 사돈집이라고 해놓고?” 군선은 말끝을 흐렸다. “이담 혹시 사돈을 맺으면 너무 가까워 불편하겠단 말이오. 어떻게 앞뒤 집에서 살겠소?” “야, 영감도, 그 밸때기 사나운 상순한텐 딸을 주지 못하오. 무슨 개고생을 시키자고?” 그런데 군선의 말은 달랐다. “무슨 소리요? 그 집안은 예로부터 양반가문이오.” 춘실도 끼어들어 상순이네 집안을 하늘높이 춰 올렸다. “옳습꾸마. 상순이 하는 말이, 옛날 조선을 천년이나 통치해온 신라에서 대대로 왕 질을 한 가문이라오. 뭐 38왕이 걔네 경주 김 씨라오. 그 애네 족보에 딱딱 적혀 있다오.” “옳다. 그 집안이 대단한 왕의 후손 가문이니라.” 그런데 해금이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이전에 우리 본가 집 아버지 말하는 게 천년 신라는 원래 우리 박 씨네 세웠다더라. 저 성남집은 경주 김 씨 아니고 영월 김 씨인데도 알기나 하고 그러오?” 지군선은 그래도 고집을 부렸다. “성남집은 원래 경주 김 씨인데 4백 년 전에 김려생이란 충신이 핍박에 의해 영월에 와서 숨어 살면서 영월 김 씨로 고쳤다고 하더라.” 해금이도 지려고 하지 않았다. “그 집안 고향은 명천인데 무슨 왕청 같은 영월 소리요?” “영월에 있다가 명천에 들어왔단 말이지.” “어떻게 그 집안을 그리 잘 아오?” 해금은 영감을 흘낏 쏘아보면서 “혹시 딸을 그 집안에 주자고 미리 알아봐 둔 게나 아니오?” 하고 다잡아물었다. 순간 해금과 춘실의 눈길은 등잔불을 빌어 일제히 군선에게로 쏠렸다. “어떻소? 그 집과 사돈을 맺으면 든든한 게 좀 좋아서. 보오, 우리 조카네 다 얼마나 잘됐소. 아래사랑집에 들어간 큰조카나 성남집 상우한테 시집간 새금이나 얼마나 잘 됐소? 우리 딸을 김진한테 시집보내면 역시 호박이 넝쿨채루 떨어진 셈이지 않겠소? 황소 같은 사위를 삼아놓으면 누가 감히 우리가 아들이 없다고 업신여기겠소? 신라왕의 후손한테 시집가면 우리 외동딸이 진짜 왕후가 된 셈이지.” 해금은 억이 막혀 입을 함박만큼 딱 벌렸다. 첫딸을 병으로 잃은 뒤 춘실을 금이야 옥이야 하는 그들 부부였다. “아이고, 몇 천 년 전의 왕의 후손을 아직도 왕의 후손 소리를 하고 있소? 다 잘못돼서 고향에서도 못 살고 일본 놈들한테 쫓기어 이 간도로 들어온 주젠데. 땅 한 짐 있소? 뭘 보고 딸을 준다고 그러오? 이 일을 어찌 하겠소?” 춘실은 좋아서 일어나 아버지 목을 끌어안고 흐느적거렸다. “아버진, 정말 좋은 아버님입꾸마. 이담 김진을 데릴사위로 삼으면 우리 둘이 아버지와 엄마를 남부럽잖게 모실 게요.” “그랬으면 오죽 좋겠니? 내 저 석철 조카사위와 말해서 어떻게 하나 너네 혼사 말이 되게 하겠다.” 해금은 도리머리를 홰홰 저었다. “아이고, 누가 우리 딸을 데려가잔다. 내 듣자니 그 집에서 석은 사돈네 처조카하구 혼사 말을 한다던데. 아는 거 같잖소.” “뭐라고?” 군선은 적이 놀라했다. 그는 담배를 말아 붙이더니 담배연기를 후- 길게 내뿜었다. “뭐나 하늘이 정하는 법이오. 인연이 있으면 혼사가 되는 법이고 궁합이 맞지 않으면 안 되는 법이지.” 춘실은 아버지를 마구 흔들었다. “아버지, 나와 김진인 인연이 있습니다. 남들은 천생배필이라고 합꾸마.” 군선은 올방자를 틀고 바로 앉더니 한다하는 말은 이러했다. “흥, 남자 쪽에서 혼사 말을 걸어야 되지. 우리 무슨 좋은 딸을 시집보내지 못할까봐 혼사 말을 먼저 하겠니? 건 안 된다. 기다려보자.” “저 새금 언니 전번에 말하던데 자기 시아버지한테 내 혼사 말을 했답꾸마.” “그래?” 군선은 뒤 잔등에 매달린 딸의 손을 쥐여 앞으로 끌어다 앉히면서 말했다. “그런데 어째 기준이 까딱 말하지 않니? 새금의 말이 그 집안에서 설 거 같니?” “언닌 맏며느린데도 시아버지 듣지 않겠소? 맏며느리를 홀대했다가 무슨 승풀이를 당하자고 감히. 흥!” “너 못하는 말이 없구나. 입 다물지 못하겠어?” 춘실은 혀를 홀랑 내밀더니 구들에 활 들어 누워 이불을 꼭뒤까지 들쓰고 누워버렸다. 이불이 파도치고 흐느낌소리가 적막한 침묵이 흐르는 집안에 간간히 들리었다. 군선은 한숨을 후 내쉬었다. “근심 말아. 내 석철 조카와 혼사 말을 하라고 해볼게. 석철 조카사위는 경칠의 7촌 숙이 되니 말을 들을 거야.” 군선은 일어나 위방으로 들어갔다. “일찍 자고 내일부터 농사차비를 해야겠다. 내일 엄마하구 저 석현지에 심을 콩 씨를 골라라.” 춘실은 이불을 쓴 채 홱 돌아누웠다. 은실은 혀를 홀랑 내밀더니 이불을 푹 뒤집어썼다. 해금은 등잔불을 끄고 춘실의 옆에 누워 이불 밑으로 손을 넣어 딸의 얼굴을 매만지었다. 춘실은 엄마 손을 탁 쳐버렸다. “아가야, 엄마라고 어째 딸을 아끼잖겠니? 널 더 좋은 신랑한테 시집보내자고 그러지.” “난 김진이 아니면 시집 안 가.” 초생달빛이 비껴드는 집안에는 밤이 깊도록 모녀간이 주고받는 소리와 흐느낌소리, 한숨소리가 끝이 없이 흘렀다.  
58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37) 댓글:  조회:1923  추천:1  2016-04-01
                                 2. 어린 누나       윙-윙- 휘몰아치는 눈보라를 무릅쓰고 최경숙이 살던 고향이라고 운주동으로 돌아가 보니 마을은 볼품없이 돼버렸던 것이다.       글쎄 집 문 앞에까지 나무를 심어놓아 앙상한 나뭇가지가 눈보라 속에 몸부림치고 있었다. 아버지가 애들을 가르치던 서당은 문을 꽁꽁 닫아걸었고 대신 마을 복판에는 일본 학교가 보란 듯이 도고히 도사리고 앉아 있었다. 아버지는 늘그막에 일어를 배워가지고 일본 학교에서 마지못해 일어를 가르치고 있었다.       경숙은 위방에 들어가 아버지에게 권고했다.       “아버님, 섬나라 오랑캐들 말을 그만 가르치고 간도로 들어갑시다. 간도에는 확실히 땅이 많고 소작료도 절반 밖에 받지 않습디다. 혼자 날 농사를 지었는데 소작료를 물고도 낟알이 서너 마대나 남았습니다. 죽물이라도 먹으면서 살 거 같습디다.”        최구장은 구부정한 허리를 펴면서 목멘 소리로 조용히 말했다.       “그래? 큰 사돈어른 노친이 간도에서 사망됐다니 참 섭섭하구나. 죽순이랑 잘 있느냐?”      경숙은 농사일을 하느라고 검실검실하게 탄 얼굴에 웃음을 지었다. “예, 잘 있습니다. 그 애넨 중국 지주네 밭을 붙이는데다 함흥촌 앞쪽 평평한 곳에 밭을 개간해서 죽물은 푼푼히 먹고 삽니다.” “그래? 그럼 한시름 놨구나.” 최구장은 한숨을 길게 내쉬더니 곰방대를 뻑뻑 빨았다. 경숙은 아버지한테 다가앉으면서 조용히 간곡한 청을 들었다. “아버님, 우리도 간도로 들어갑시다. 여기서 일본 놈들의 성화에 어디 살겠습니까? 손바닥만 한 땅도 없지. 저 마당에까지 나무를 심었으니 뭘 먹고 살겠니까?” 그러나 최구장은 한숨을 구들이 꺼지게 내쉬면서도 도리머리를 가로 흔들었다. “간도에 간들 일본 놈들의 마수에서 벗어나겠냐? 봐라, 네 말을 들어보니 간도에서도 함흥촌이 토벌을 맞았다고 하지 않니? 사람이 배불리 먹고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굶으면서도 고향을 지키면서 사는 건 더 중요하다. 혹시 배불리 먹고 살아도 자기 나라와 민족, 고향을 잃고 살아서야 죽은 거나 다름없다.” 경숙도 말을 꺼낸 바 하고는 끝을 보려고 들었다. “아버지, 일본 학교에서 일어를 가르치고서야 어찌 자기 민족을 위해 산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아예 일본 놈들의 마수가 덜 미친 간도에 가서 새 고향을 꾸리고 서당도 세운 후 우리 글을 가르치면서 사는 게 어떻습니까?” “이놈 자식, 아무 말이나 다 하느냐? 내 일본 학교에서 우리 애들에게 일어를 가르치는 게 어째 가르치는지 알기나 하면서 지껄이는 거냐?” 최구장은 성을 벌컥 냈다. 드디어 그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나직이 말했다. “이 놈아, 일본 놈들을 우리 고향에서 몰아내려면 우리 애들이 물론 우리 조선어를 먼저 알아야지. 'ㄱ, ㄴ, ㄷ, ㄹ'가 칼이 되고 총알과 폭탄이 될 수도 있지. 일본 놈들을 치려면 일어도 알아야 해. 독은 독으로 쳐야 한다고 악귀들의 말도 배워두면 일본 놈들을 치는 강력한 무기로 될 수도 있어.” 경숙은 머리를 숙였다. “아버님, 용서하십시요. 아버님의 깊은 뜻을 알지 못하고 횡설수설해서 미안합니다.” 한참 후 경숙은 마지막으로 간청을 드렸다. “아버님, 온 집 식구들을 데리고 간도에 들어갑시다. 그 길만이 살 길입니다.” 최구장은 바로 고쳐 앉아 결연히 말했다. “안 가! 조상들의 뼈가 묻힌 고향 개성을 떠난 것만 해도 염통이 쓰린데 간도 허황한 벌판으로 가? 정 가고 싶으면 너나 먼저 들어가라. 난 죽어도 간도 황야 땅에 안 간다, 안가. 다신 내 앞에서 간도 말을 꺼내지도 말라.” 경숙은 아버지 고집을 이길 수 없어 속이 탔다. 이때 정지에서 어린애 울음소리가 자지러지게 들리었다. 경숙은 도리머리를 가로 흔들면서 한숨을 지었다. 또 갓태여난 근룡이 젖이 없어 우는 모양이었다. 경숙은 엉거주춤 일어나더니 정지로 나갔다. “명옥아, 동생을 업구 나가서 동냥젖이라도 얻어 먹여라.” “예.” 명옥은 갓 태어난 지 대여섯 달 밖에 안 되는 동생 근룡을 업고 눈보라치는 바깥으로 나갔다. 경숙은 집안을 돌아보면서 두덜거렸다. “애에미는 어디로 갔니? 우는 애는 젖을 얻어 먹일 궁리는 하지 않고.” 경숙은 애 때문에 꽤나 속을 태웠다. 후처 김순금은 강릉 김씨네 맏딸이었다. 그런데 집이 어찌나 가난하였는지 그의 아버지는 늘 그를 남의 집에 1년이나 3년씩 줘 보내 소나 방목하면서 죽물이나 얻어먹고 연명하게 했다. 그러다가 스물세 살 때에야 그래도 운주동에서 살림형편이 괜찮은 최구장의 맏아들 최경숙의 후처로 들여보냈던 것이다. 처녀 몸으로 마흔도 넘은 경숙의 후처로 들어온 순금은 젖이 나오지 않아 애를 먹이지 못해 늘 투덜거렸다. 그는 쩍하면 자기보다 네댓 살 밖에 어리지 않은 선처의 오누이 근형과 명옥을 보고 남편의 뒷소리를 했다. “별 늙은 영감을 마른 비행기를 다 태운다. 다  애비 무능한 탓이야. 어떻게 가난하면 먹지 못해 애를 먹일 젖도 안나오겠니.” 근형과 명옥은후 어머니가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러나 후어머니가 아버지를 늙었다고 욕하는 것만은 알아듣고 불쾌해했다. 근형과 명옥은 처음에는 후 어머니가 자꾸 아버지를 욕한다고 아버지에게 고자질했다. “아버지, 아버지, 저 후엄마 자꾸 아버지를 욕합디다.” “뭐 어쩌더냐?” 경숙은 다 큰 근형을 보면서 물었다. 근형은 들은대로 “별 늙은 영감을 마른 비행기를 다 태운다고 합더구마.” 하고 전해주었다.       경숙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너부죽한 얼굴에 웃음을 지었다.      “그래? 일 없다. 건 욕하는 게 아니야. 후에 다신 계모 뒷소리를 해선 안 돼. 계모두 엄마야. 엄마 말을 잘 들어라.”  경숙은 처녀 몸으로 계모로 들어온 색시 억울한 심정을 헤아리는 만큼 그저 지나쳐 버리곤 했다. 그 후부터 근형과 명옥은 네댓살 밖에 이상이 아니지만 계모 뒤 말을 하지 않고 시키는 심부름이랑 아주 잘했다. 그런데 후어머니는 젖이 나오지 않아 근룡은 낳은 날부터 젖을 온전히 먹지 못하여 늘 배고파 울었다. 그런데 순금은  동네 집으로 놀러 나가 집에 없군 했다. 그리하여 경숙은 명옥을 보고 불쌍한 동생을 돌보라고 부탁하군 했다. 명옥은 남동생이 불쌍해 업고 나가 동냥젖을 얻어 먹이군 했다. 그런데 하루 이틀이지 날마다 명옥이가 동냥젖을 얻어 먹이자고 하니 동네 애 엄마들이 좋아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명옥은 평소에 동네 애 엄마네 집에 가서 물도 길어주고 바느질두 해주고 맛 나는 음식이 생기면 가져다 주군 했다. 명옥은 근룡을 포대기에 싸 업고 눈보라가 휘몰아치는데 동네에 동냥젖이라도 얻어 먹이자고 나갔다. 그는 동네 애 엄마네 집으로 가다가 집 울안에서 어미염소가 새끼에게 젖을 먹이는 것을 보고 두덜거렸다. “염소도 제 새끼를 젖을 먹이는데 우리 후 엄마는 어쩜 제 난 애도 젖을 먹이지 않고 놀러 다녀요?” 그런데 명옥은 피뜩 떠오르는 생각이 들었다. (옳지, 우리도 염소를 기르면 근룡의 젖이 근심이 없을게 아닌가.) 명옥은 그날 동냥젖을 겨우 얻어 먹인 후 집으로 부랴부랴 돌아와 아버지께 간청을 드렸다. “아버지, 우리 염소를 삽시다.” 경숙은 명옥을 한심하다고 마주 보았다. “왜?” 명옥은 자기 주견을 내놓았다. “젖이 나는 어미염소를 사면 우리 근룡이 젖 근심을 하지 않아도 될게 아닙둥?” 그러나 경숙은 도리머리 질 했다. “에이, 산 사람도 입에 풀칠을 하기 힘든데 언제 염소를 사겠니? 또 어데 불시에 젖이 나는 염소가 있겠니?” 명옥은 “이젠 근룡이 살았구나.” 하고 환성을 질렀다. “저 앞집 똥애네 집에 젖이 나는 어미염소 있습구마. 그걸 사깁소.” “그래?” 경숙은 궁리 깊은 명옥을 보고 내심 감탄이 나갔다. “이젠 우리 명옥이 다 컸구나. 어미 없이 자란 네 정말 기특하다. 그럼 그 집 염소를 사자.” 경숙은 근룡을 살려내려고 간도 함흥촌에 가서 농사를 지어 번 돈을 풀어내 염소를 사기로 마음먹었다. 명옥과 근형은 기뻐 그 길로 아버지를 데리고 똥애 네 집에 갔다. 그러자 똥애 네 엄마는 똥애에게 젖을 먹이다가 “무슨 일입둥? 올라 옵소.” 하고 인사했다. 경숙은 바닥에 선채 애를 안고 일어나는 똥애 어미를 보고 “그간 우리 근룡에게 젖을 먹이느라고 수고 많았소.” 하고 인사부터 했다. “동네 애라고 굶겨 죽이겠습둥?” 똥애 엄마는 명옥과 두두두 거리던 때와는 달리 체면을 차렸다. 경숙은 단도직입적으로 흥정을 걸었다. “이 집 염소를 파오.” “예?” 똥애 엄마는 똥애를 안고 서성거리면서 경숙의 부녀를 번갈아보았다. “남의 암염소를 사서 뭘 하겠습둥?” 경숙은 구들 끝에 걸터앉으면서 비난사정을 들이댔다. “똥애 엄마, 지금처럼 어떻게 근룡에게 동냥젖을 계속 먹여 키우겠소? 하루 이틀도 아니고. 그래서 이집 염소를 사다가 거두면서 염소젖을 근룡에게 먹일 예산이오.” 마음씨 착한 똥애 엄마도 자기 젖을 근룡에게 갈라 먹이기보다 염소를 팔면 좋을 것 같아 제꺽 대답했다. “그럽시다. 그런데 염소새끼는 팔지 않겠는데 어미염소를 사가면 어쩌겠습둥?” “똥애 엄만 우리 근룡을 젖을 먹여 키워줬는데 우리 새끼 염소를 그저 키워줍지.” “그럼 그러세요. 한 10원은 받아야겠는데요.” 그러나 경숙은 “15원을 드립지.” 하고 그 자리에서 동전을 세어 주었다. “이래서 되겠습둥?” 똥애 엄마는 받기 미안해했다. 그러자 경숙은 사람 좋게 인사했다. “그간 우리 근룡한테 친엄마처럼 젖을 먹였는데 감사해 더 드리는 거요. 염소까지 팔아주니 얼마나 감사한지 절이라도 하고 싶은 마음이오.” 똥애 엄마는 미안해 눈치를 보면서도 동전을 몽땅 받아 까래 밑에 쓸어 넣었다. 어미염소를 산 명옥은 기뻐 어쩔 줄 몰랐다. “이젠 우리 근룡이 젖을 먹지 못해 울지 않겠어요.” 그는 아버지가 사준 어미염소를 근룡의 어머니처럼 모시면서 풍설이 이는 겨울에도 눈 속에서 마른 풀을 훑어다 먹이고 지어 자기 밥이나 죽물마저 염소에게 젖을 내라고 덜어내 먹이군 했다. 그는 어미염소에게 풀을 먹이면서 “많이 먹고 젖을 내라. 그래야 우리 근룡이 배고프지 않지. 많이 먹어.” 하고 중얼거렸다. 어미염소를 산후 근룡은 젖 근심이 없이 염소젖을 먹고 잘 자랐다. 그런데 눈풍설이 이는 날에 명옥은 염소를 먹일 풀을 얻어들이기도 여간 힘겹지 않았다. 명옥은 눈보라가 윙윙 휘몰아치는 삭막한 산과 들판을 바라보면서 언제면 고향에 살구꽃과 배꽃이 피고 신록이 짙어가는 봄이 오겠는가고 손꼽아 기다렸다. 그는 염소 먹일 파란 풀이 자란 들판을 눈앞에 그려보았다. 정말 어린 남동생에 대한 어머니와도 못하지 않은 어린 누나의 사랑은 눈물겨웠다.   3. 생이별 빼앗긴 고향의 들에도 봄은 찾아와 훈훈한 봄바람이 불어왔다. 경숙은 후처가 둘째아들 근룡을 낳는 바람에 고향에서 그럭저럭 삯일이나 하면서 겨울을 보냈다. 어느 날, 경숙이 금방 잠자리에서 일어나 땔나무를 패려고 도끼를 쥐고 바깥을 나갈 때었다. 몇 집 건너 앞집에서 사는 막내제수 한혜옥이 손으로 눈물을 닦으면서 울안으로 들어왔다. “아주버님, 난 저 나그네와 못 살겠습구마.” “막내제수, 또 어째 그러오?” 경숙의 물음에 혜옥은 정지로 들어가면서 투덜거렸다. “또 본병이 발작해 그러지 어째 그러겠습둥?” 경숙은 도끼를 털렁 떨어뜨리면서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었다. 막내 동생 경석은 관준 영감이나 시준 영감에게서 배우라는 의술은 제대로 배우지 않고 약 담배 질을 해 집이 망할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다. (저놈새끼를 어쩌겠니? 이전에도 막내제수 자살하려고 뒤 산에 가서 나무에 목을 맨 걸 겨우 풀어 구해냈잖은가? 그때 다신 약 담배를 피우지 않겠다더니. 갑산에 가서 감자농사나 계속 지을 게지 또 약 담배 질이니 어쩐단 말이냐?) 막내제수가 시아버지 앞에 가서 고소하는 소리와 대성통곡소리를 들으면서 경숙은 도리머리를 절레절레 가로흔들었다. “시아버님, 어떻게 저 근섭이 애비 버릇을 떼 줍소. 우린 못 살구 나앉게 됐습구마. 약 담배를 사자고 돈을 빡빡 끌어내가더니 이젠 집까지 내놓겠답구마.” 최구장은 하얀 수염을 슬슬 어루만지면서 막내며느리를 다독이는 말을 했다. “아가야, 고놈새끼를 혼뜨검 낼 테니 근심 말아라. 이젠 우리 집에 들어와 살도록 해라. 밤낮 고놈을 지킬 테니 어디 약 담배를 사기나 하겠냐. 흥!” 그 말에 혜옥은 눈물을 훔치면서 머리를 천천히 들었다. “아버님, 저를 한집에서 아버님을 모시고 살게 해줍소. 그렇찮으면 우리 집은 끝장입니다.” “그래, 그래. 오늘로 들어오너라.” 경숙은 바깥에서 아버지와 막내제수가 주고받는 말을 듣고 속궁리 하였다. (안 되겠다. 아무래도 간도에 가야지. 여기 있다간 온 집안이 망하겠다.) 막내제수가 저고리 고름으로 눈물을 닦으면서 나오자 경숙은 윗방으로 들어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였다. “아버지, 여기서 어떻게 살겠습둥? 간도에 들어가 삽시다. 확실히 간도는 땅이 조선보다 넓어서 살기 괜찮습더구마.” 최구장은 못마땅한 눈길로 경숙을 쏘아보았다. “어째? 막내 들어온다고 그러니?” “아닙구마.” 어진 경숙은 아버지 눈길을 피해 방구석을 내려다보면서 목구멍으로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겨우 대답하였다. “이 집안을 구하자면 내 먼저 간도로 들어가는 게 옳은 거 같습니다.” 최구장은 아예 맏아들의 말을 잘라버렸다. “그만 해라. 난 죽어도 아버지와 엄마 산소를 남겨두고 고향까지 버리고 간도에 가지 않아. 더구나 조선을 버리고 연명이나 하자고 오랑캐들이 득실거리는 만주국에 가?” 어진 경숙은 오늘만은 물러서지 않고 계속 자기 생각을 말하였다. “그럼 제 먼저 처자들을 데리고 들어가겠습구마. 간도에 살만하게 발을 붙인 다음에 그때 아버님을 모셔가겠습구마. 물론 맏이로서 불효를 저지르는 거 같습니다. 그런데 달리 어떻게 고향에서 살 도린 없습구마. 팔간 집에 왁 모여서 손가락을 빨면서 마주 보면서 어떻게 살겠습둥?” 최구장은 먼 문밖 하늘을 내다보면서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었다. “어떻게 돼 우리 가문이 이 지경이 다 됐느냐?” 이때 불붙이에서 경인과 어금이 근원과 근현을 데리고 놀러 왔다. 경인 부부는 위방에 올라와 문안을 올렸다. “그간 아버지와 형님, 편안히 계셨습둥?” “오, 그래.” 이때 근원과 근현이 뛰어 들어왔다. “할아버지!” 구장은 손자들을 끌어안으면서 얼굴의 주름살을 잠시나마 폈다. “오, 손자들 왔구나.” 그는 어금의 잔등에 업힌 근환을 보면서 “많이 컸구나.” 하고 반기다가 “어째 근덕은 보이지 않니?” 하고 물었다. 경인은 “저기 우시장에 있는 일본사람들의 상점에 일하러 보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최구장은 도리머리를 가로 흔들었다. “에이, 이제 겨우 열세 살 밖에 안 되는 죄꼬만 게 어떻게 일본 놈들의 성화에 삐치겠느냐?” “그래도 어찌겠습니까? 어려서부터 강하게 키워야 합지.” 최구장은 경숙을 돌아보면서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었다. “에이, 어쩌겠니?” 경인은 아버지와 형님을 번갈아 보면서 “그간 무슨 일이 생겼습둥?” 하고 다급히 물었다. “네 형이 간도로 들어가 살겠다고 해.” “예?” 최구장의 말에 경인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면서 형님을 쳐다보았다. 경숙은 아버지 손을 잡고 꿇어 엎디면서 눈물을 흘리었다. “아버지, 맏아들 구실을 못해 미안합니다. 저를 보내줍소.” 최구장은 먼 문밖 하늘에서 눈길을 떼더니 맏아들의 너부죽한 잔등을 내려다보았다. “어찌겠니? 기왕 네 오래 한 생각이 그거면 간도에 가는 수밖에. 너나 들어가라. 맏사위 석은과 맏딸 죽순이두 간도 어떻게 좋고 하는데 살 길을 찾아 가 봐라.” “좋긴 아버님과 어머님도 함께 갑시다.” “안 된대도. 난 고향을 떠날 수 없어. 섬나라 오랑캐들한테 쫓기어 고향을 버리고 간도엔 안 가. 굶어 죽어도 고향에서 조상들의 산소를 지키면서 사는 날까지 살 테야.” 경숙은 일어나더니 큰절을 꾸벅 올리었다. “아버지, 그럼 난 오늘로 간도에 떠나가겠습구마.” 최구장은 하얗게 서리 내린 머리를 끄덕이면서 주름이 밭고랑 같은 눈물을 두 볼에 주르르 흘리었다. 정지에서 부자간이 하는 말을 듣고 성단이가 위방에 뛰어 들어왔다. “경숙아, 너 무슨 말이냐? 너까지 간도에 가면 이 가문은 어쩌지?” 경숙은 어머니께도 큰절을 꾸벅 올리었다. “어머님 불효자식을 용서합소. 부모님도 인차 간도에 모셔가겠습니다.” 이때 근형이 위방에 뛰어 들어왔다. “아버지, 엄마 산소를 두고 어디로 갑둥? 난 가지 않겠습구마.” 명옥이 보니 정지에서 새어머니는 근형의 말에 입귀를 비쭉하는 것이었다. 경숙은 열아홉 살이나 되는 근형을 보고 난감해하였다. “할아버지도 내 간도에 가는 걸 억지로 막지 않았다. 나도 널 보고 억지로 간도에 가자고 하지 않겠다. 네 생각대로 해라. 내 대신 고향에서 할아버지를 잘 모셔라.” 경숙은 정지에 내려와서 근룡을 업고 있는 명옥에게 물었다. “너는 어쩌겠니?” “간도로 가지 않으면 근룡을 어쩌겠습둥?” 경숙은 머리를 끄덕였다. 근형은 발칵 성을 냈다. “명옥아, 엄마 산소를 두고 어디로 간다고 그래? 넌 오빠하구 함께 엄마 산소를 지키자.” 명옥은 어쨌으면 좋을지 몰라 망설이었다. 그때 경숙이가 “엄마 산소는 근형이 지키면 된다. 명옥은 따라가고 싶으면 가자.” 하고 결단을 내렸다. 근형은 명옥의 손을 잡고 말리었다. “넌 오빠 말을 들어.” 명옥은 근형의 손을 맞잡고 “아버지 말은 듣지 않고? 오빠도 함께 가기요.” 하고 말하면서 오빠를 간절한 눈길로 쳐다보았다. 그러나 근형은 명옥의 손을 활 팽개치면서 성을 발칵 냈다. “넌 엄마가 낳은 딸이 아니냐? 가지 못해.” 그러나 명옥은 근형을 업은 채 부모를 따라나섰다. 이때 경인이가 지게를 진 경숙을 따라 나왔다. “형님, 실은 내 명옥의 혼사 말로 내려왔소.” “그래?” 경숙은 경인을 돌아보았다. “아직 근형을 장가보내지 못했는데 불시에 명옥의 혼사 말이냐?” 경인은 경숙에게 다가앉으면서 귀속 말을 하였다. “형님, 명옥이 어미 없이 불쌍하게 자랐는데 우리 막내처남에게 시집보내면 어떻소?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절반은 집안혼사니까 명옥이 고생하지 않고 살 거 같소.” 경숙은 도리머리를 가로 흔들었다. “사돈 지간에 혼인을 어떻게 하니?” “일없소. 내 막내처남은 여기서 갈 때 일곱 살이지만 이젠 열여덟이나 되였소. 큰처남 같게 생겼다고 생각하면 되오." 최구장은 한참 생각하더니 “그 혼처 좋은 거 같아. 남을 주기보다 큰며느리 동생에게 주면 믿을만하지 않겠느냐?” 하고 뚝 찍어 말했다. 경숙이도 아버지 말에 “글쎄 말입니다.” 하고 말하더니 인차 “내 이번에 들어가면 너 막내처남을 보고 혼사 말을 전해주마.”라고 대답하였다. 최구장은 경인을 보고 “둘째며느리를 불러오라.” 하고 분부하였다. 그리하여 경인이 정지에 나가 어금이를 데리고 들어왔다. “둘째며느리, 여기 앉소.” 어금은 근환을 업은 채 무릎을 꿇고 한쪽으로 쪼그리고 앉았다. 최구장은 곰방대를 뻑뻑 빨다가 천천히 말하였다. “금방 경인이 명옥과 둘째며느리네 막내오라비 혼사 말을 꺼내던데 둘째며느리 생각은 어떻소?” 어금은 머리를 숙인 채 대답하였다. “집에서 토론하고 왔습구마. 시조카는 어려서 엄마를 잃고 고생스레 자랐는데 제 남 동생한테 시집보내면 마음 놓을 거 같습구마.” 최구장은 머리를 끄덕였다. “경인아, 너희들이 혼사말서함이라도 써라. 경숙아 기준 사돈어른께 보내려무나.” 경인은 제꺽 “예.” 하고 대답했다. 그는 인차 위방에 있던 붓과 먹 그릇을 찾아왔다. 경숙이가 먹을 물에 갈고 경인이가 최씨 가문의 의사를 대표해 편지를 간단히 썼다. 최구장이 들고 자세히 보더니 머리를 끄떡이면서 경숙에게 넘겨주었다. “기준 사돈어른께 적당한 시기에 전해라.” “예, 그렇게 합시다.” 말을 마치자 경숙은 처자를 데리고 누더기를 싼 보따리를 지게에 메고 울타리 밖을 나섰다. 그때였다. 근섭이 약 담배인이 올라 비틀거리면서 들어오다가 거슴츠레 뜬 눈으로 경숙이네 일가 네 식구를 흘겨보면서 두덜거렸다. “어째 우리 큰집에 들어온다고 보기 싫어 떠나가오?” 경숙은 술에 취한 듯이 비틀거리는 경석의 어깨를 잡아 흔들면서 애탄 소리를 쳤다. “야, 이놈아, 정신을 차려! 이제 또 약 담배 질을 해 봐라. 네놈과 형제 인을 끊어버리겠어.” 경석은 계속 볼 부은 소리만 하였다. “양, 옳소. 혼자 부모형제들을 버리고 간도에 가서 잘 사오.” 최구장이 보자 못해 경석의 귀 쌈을 찰싹 갈겼다. “네 이놈새끼, 부모와 맏형님 앞에서 무슨 돼먹지 못한 소리냐? 언제 정신을 차리고 제 노릇을 하면서 살겠느냐?” 숱한 사람들 앞에서 얻어맞자 경석은 섧다고 어린애처럼 엉엉 울었다. 경숙은 처와 함께 넓적 엎드려 부모에게 절을 올리고나서 허리 굽혀 여러 형제들에게 인사했다. 경숙의 뒤에 보따리를 인 순금과 근룡을 업은 명옥이 뒤따라 간도를 향해 떠났다. 그는 멀어져가는 정든 고향을 돌아보더니 한숨을 후 내쉬면서 지게를 춰지고 성큼성큼 걸음을 다그쳤다. 경숙은 산정에 올라서서 동으로 유유히 흐르는 운주하와 치마봉아래 푸릇푸릇 해가는 산비탈을 둘러보았다. 수림속의 감자밭자리와 운주동 터 밭에까지 나무를 심은 지 몇해 되여 나무가 허리를 칠 지경이었다. (후~ 섬나라 오랑캐 놈새끼들, 손바닥만한 밭에까지 나무를 심으라니 뭘 먹고 산단 말이냐?) 그는 속으로 일본 놈들을 욕하면서 고향의 뒷산 선산을 바라보는 순간 할아버지 산소에 절도 하지 않고 떠나는 불효한 자기를 발견하였다. “아차, 할아버지 산소를 두고 가는데 큰 절이라도 올리고 가야겠다.” 순금은 투덜거렸다. “에이고, 갈 길도 바쁘구먼. 원, 별 걱정은?” 경숙은 눈을 흘기면서 큰 소리를 쳤다. “잔말 말고 따라와. 머나먼 간도로 가면서 조상의 산소에 가서 인사도 드리지 않으면 돼?” 그제야 순금은 찍소리도 못했다. 그들은 선산에 이르러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합장한 커다란 산소 앞에 가 나란히 늘어섰다. 경숙은 옷깃을 여미고 정중히 말씀 올렸다. “할아버지, 할머니, 이 불효자식을 용서하옵소서. 살 길을 찾아 고향을 떠나 땅이 넓은 간도로 먼저 들어갑니다. 농사를 많이 지어 잘 살게 되면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겠습니다. 그때까지 편안히 계십시오.” 그들은 큰절을 꾸벅꾸벅 세 번이나 올리었다. 순금은 머뭇거리다가 마지못해 남편을 따라 큰절을 올렸다. 명옥은 쌔근쌔근 잠든 근룡을 업은 채 증조할아버지에게 큰절을 올렸다. 이때 순금은 시할아버지 산소 앞에 엎드린 채 흑흑 흐느껴 울었다. 경숙은 처음에는 의아해하였다. 그러나 순금이 우는 것이 이상해졌다. “여보, 왜 우오?” 순금은 경숙의 물음에는 대답하지 않고 엉뚱한 말을 하였다. “시할아버님, 이 불쌍한 손비를 가엾이 여겨 도와주옵소서. 아무리 우리 본가집이 가난하다고 해도 그렇지 않습둥? 본가 집에 어디로 간다는 말도 하지 못하고 간도로 떠나야 합둥? 시할아버님, 도와주옵소서.” 경숙은 아내의 말에 도리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고 도리머리 질 하였다. “여보, 당신 효성심은 알만 하오. 지금 일본 밀정들이 우리가 어디로 가는가 뒤를 밟고 있는지 어떻게 아오? 황차 이번에 가면 영 가는 게 아니고 다시 고향에 돌아온단 말이오. 그때 인사해도 늦지 않소.” 엄마가 울자 근룡도 명옥의 잔등에 업힌 채 고사리손을 엄마 쪽에 뻗치면서 “응아-” 울음보를 터뜨렸다. 경숙은 아내의 두 손을 잡아 일으키면서 “우린 꼭 농사를 많이 지어가지고 돌아오는 게요.” 하고 얼리었다. “말씀이야 그렇지만 이제 가면 언제 온다고 그럽둥? 흑흑.” 순금은 경숙의 말을 곧이듣지 않으면서도 조금 누그러들었다. 정작 할아버지 산소를 떠나고 고향을 떠나게 되자 경숙의 마음은 허전해졌다. 그는 고향산천을 빙 둘러보더니 처자를 데리고 무거운 발검음으로 북을 바라고 떠났다. "이제 고향을 떠나면 언제 다시 올가?" 순금은 남편을 바라보면서 “금방 꼭 돌아온다 해놓고. 배불리 먹을 수 있다면 간도에서 살자고 그러지. 누가 이 잘난 시집 고향으로 오겠습둥?” 하고 말하였다. 경숙은 후처를 쏘아보며 “그래도 정든 고향 아니오?” 하고 퉁명스레 쏴주었다. 순금은 “하기야 여기 본댁이 묻혀있으니까 어찌 잊겠습니까? 맏아들도 저렇게 남아있지.” 하고 두덜거렸다. 저쪽 뒤 산 중턱에서 근형의 애탄목소리가 산골짜기와 들판에 메아리쳤다. “명옥아~ 가지 말라, 엄마 산소는 어쩌고 가니?!” “명옥아, 가지 말라, 오빠를 두고 어데 가니~?” 그러자 명옥은 손등으로 눈물을 닦더니 두 손을 모아 입에 대고 목소리를 가다듬어 소리 질렀다. “오빠- 우리 함께 간도에 가기요. 빨리 오오.” 명옥은 발을 동동 구르면서 애타게 소리쳤다. 하건만 근형은 어머니 산소에 절을 하고나서 이쪽을 눈 뿌리 빠지게 바라보면서도 오지 않았다. 명옥은 오빠가 애타게 부르자 돌아갈까고 생각하면서 멈춰 섰다. (그런데 잔등에 업힌 근룡은 어찌겠는가? 내 없으면 간도에 가서 누가 근룡한테 동냥젖을 먹이겠는가? 또 아버지는 어쩌겠는가?) 명옥은 “오빠, 우리 함께 가기요. 빨리 오오.” 하고 울면서 고함쳤다. 그러나 오빠가 어머니 산소 옆에 떡 버티고 서 있는 것을 보고 왕왕 울었다. 그러자 경숙이가 명옥의 손을 마구 잡고 끌었다. “네 오빤 이제 할아버지와 할머니와 함께 올게다. 후에 내 와서 데려가겠다.” 그제야 명옥은 흑흑 흐느끼면서 아버지 네를 따라갔다. 그는 그때까지 어머니 산소 옆에 서서 손을 젓는 근형 오빠에게 손을 젓고 또 저었다. 차마 떨어지지 않는 걸음으로 몇 발자국 가다가도 저 멀리 오빠를 되돌아다보면서 눈물을 흘리며 흑흑 흐느꼈다. 명옥이 고개를 넘어설 때까지도 근형은 한발자국도 까딱하지 않고 어머니 산소 옆에 서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근형은 이쪽을 따라오면서 산꼭대기에 올라가 두 손을 입에 모아대고 고함쳤다. “명-옥-아- 가-지 마-라- !” “오빠- 빨리 따라 오오-” 생이별하는 오누이의 그 애처로운 목소리 산골짜기마다에 처량하게 메아리치며 울려 퍼졌다. 야속하다, 야속해. 어찌하여 오누이는 이렇게 애절한 생리별을 하여야만 하는가? 야속하다, 야속해. 구경 어느 놈들 때문에 우리 부모형제가 생리별하고 망국노의 설음을 안고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어 간도로, 연해주로, 사할린으로, 현해탄을 건너 일본으로 흩어져 가서 살 길을 찾아야만 하는가? 4. 명천에서 온 사돈처녀 눈앞을 가리기 힘들게 눈보라가 윙- 윙- 휘몰아치는 날에 경숙은 지게에 누더기이불을 얹은 가마를 지고 처자를 이끌고 온 하루 걸어서 우시장에 이르렀다. 순금은 투덜거렸다. “온 하루 걷고 나니 다리 아파 죽겠다. 이렇게 걸어서야 언제 간도라는데로 가겠니?” 경숙은 안해가 본가집 부모형제도 찾아보지 못하고 떠나는 억이 막힌 심정을 알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는 말썽없이 간도로 가려고 판자 집을 가리켰다. “저건 우시장역이오. 저기 들어가 기차를 타고 간도로 가면 하루면 다 갈 수 있소.” 순금은 언 얼굴에 대뜸 화색을 띄우면서 “기차를 타고 가? 거 호사로구나.” 하고 기뻐하다가 인차 웃음을 거뒀다. “돈 많이 들지 않습둥?” “아따 걱정도. 어서 역에 들어가기요.” 경숙은 꼬리를 밟는 일본 밀정놈들이 없나 사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는 자기 쪽에 오는 수상한 눈길이 없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양손으로 순금과 명옥의 팔을 잡고 역 대합실로 들어갔다. 역 안에는 개찰구 쪽으로 나가는 숱한 일본 사람들로 야단법석이었다. 경숙이네도 그 뒤를 따라 개찰구 쪽으로 밀려나갔다. 대부분 팔소매 넓은 화복을 입은 일본남녀들이었다. 일본 사람들 속에 쌀에 티만큼이나 흰 무명한복을 입은 조선 사람들이 섞여있었다. 경숙이네가 자그마한 쇠살창문안에 들어서자 일본 사람이 경숙의 앞을 막으면서 기차표를 달라고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경숙은 호주머니에서 동전 대여섯 개를 꺼내 손바닥을 내밀었다. 일본 역무일군은 “나니에 이끼(어디로 가)?” 하고 물었다. 일본 말을 알아들을 리 없는 경숙은 뒤덜미를 긁적거리기만 했다. “빠가야로, 하야꾸 고다에(빨리 대답해)!” 경숙은 머리를 들고 일본 사람의 도끼눈을 마주보며 아무래도 어디로 가는가고 묻나 싶어 희죽이 웃으면서 “간도, 간도!” 하고 대답했다. “오, 간도 나니에 이끼(간도 어디에 가)?” “하이!” “간도 나니(간도 어디?” “간도 나니라니?” 일본말을 모르는 경숙은 뒷덜미를 긁적거리다가 뒤를 돌아보더니 아내와 명옥을 손가락질하면서 엉뚱하게 대답했다. “간도 난다구? 진수해 난다.” “진수해에 이끼?” 경숙은 손짓을 보태가면서 웃지도 울지도 못할 대답을 얼버무렸다. "응, 진수해 산에 이끼 많지. 그래, 진수해 난다." 경숙은 “난다”는 일본 말은 “간다”는 말인가 알고 “진수해를 간다”는 말을 “진수해 난다”고 대답했던 것이다. 그러나 일본 사람은 진수해란 지명만 듣고서도 경숙의 손바닥에서 동전 세 개를 쥐여내고 대신 기차표 석장을 주면서 역 밖의 플래트 홈을 가리켰다. “이께(가게)!” 순금은 역에서 나가면서도 의문이 많았다. “일본 사람들은 어째 이끼를 자꾸 외울까? 일본엔 이끼 밖에 없나 봐. 호호호." 경숙은 순금에게 눈짓하면서 "어서 나가자고."하고  팔소매를 잡아끌었다. "그 돈이면 숱한 쌀을 사 먹겠는데.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다고. 여보, 혹시 일본 놈에게 돈을 떼우진 않았습둥? 일본 놈들이 어떤 놈들이라고.” 경숙은 재촉했다. “어서 가기오.” 순금은 겁나 목을 움츠렸다. “작작 소릴 지르라고. 간 떨어지겠다. 흥! 일본 사람들 앞에선 고양이 본 쥐처럼 꼼짝달싹 못하다가도 여편네한텐 고래고래 고함질이네.” 경숙은 돌아서면서 욕하려다가 그만뒀다. 저쪽에서 기차가 허연 연기를 내뿜으면서 칙칙 폭폭 달려오고 있었다. 경숙이네 네 식구는 숱한 사람들과 함께 기차에 올라탔다. 이윽고 기차는 그들을 싣고 고향을 서서히 떠나 북으로 달렸다. 고향 명천 산천이 뒤로 점점 멀어져갔다. 순금과 명옥은 차창 밖으로 멀어져가는 고향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순금은 본가집 부모형제들에게 어데로 간다는 말도 남기지 못하고 정처없이 고향을 떠나가는 것이 마음이 앞 두 볼에 눈물을 줄줄 흘리었다. 명옥은 근룡을 업은 채 차창 밖을 내다보면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었다. (오빠, 미안하오. 내 돈을 많이 벌면 꼭 기차를 타구 고향에 돌아와 오빠를 데리고 갈게. 그때까지 잘 있소.) 이때 명옥의 잔등에 업힌 근룡이 자지러지게 울었다. 명옥은 일어나 서성거리면서 중얼거렸다. “울지 말라, 근룡아, 이제 간도에 가면 널 쌀죽을 끓여줄게. 응? 울지 말라. 근룡아.” 순금은 명옥의 잔등에서 근룡을 쑥 빼내 안았다. “에이고, 염소도 없지 어찌 하겠니? 배고파 이러는데. 근룡아, 불쌍한 아가야, 어쩜 네 어미는 젖도 안 난다니? 구차한 살림살이에 속을 어찌나 바질바질 태웠으면 젖도 안 나겠니?” 경숙은 눈물을 흘리는 처자를 보고 마음이 아파 차창 밖으로 외면해버렸다. 명옥은 바늘방석에 앉은듯이 서서 두 손을 맞잡고 계모와 근룡을 번갈아보았다. 명옥은 아버지 지게에서 보따리를 헤치고 주먹밥덩이를 꺼내더니 밥알을 뜯어내 근룡의 입에 넣어 주었다. 기적이 일어났다. 배고픈 근룡이 글쎄 입으로 쌀알을 오물오물 받아 넘기는 것이었다. “야, 애기 목에 걸리겠다.” 경숙은 “오래지 않으면 돌이 되겠는데 일없소. 언제까지 젖을 먹이겠소?” 하고 손수 밥알을 근룡의 입에 넣어주었다. 한참 쌀알을 먹이자 근룡은 울음을 끊었다. 기차 안에서는 간도로 들어가는 숱한 흰 두루마기 차림새의 사람들과 화복을 입고 요염하게 치장한 일본 사람들로 떠들썩했다. 그들은 기차를 타고  밤낮을 달리다가도 멈추고 멈췄다가도 달려서야 겨우 진수해에 이르렀다. 경숙은 진수해역에 내려 지게를 진 채 개찰구 쪽으로 가면서 자기 뒤를 흘끔흘끔 살폈다. 수상한 놈이 꼬리를 밟을까봐 겁이 났던 것이다. 사람들이 밀물처럼 개찰구 쪽으로 나가고 있었다. 뒤에 낯선 사내가 다가와도 자기 뒷덜미를 덥석 잡고 “어디로 가?” “병완과 기준이 알지?” 하고 고함칠 것만 같았다. 다행히 개찰구를 나와 조용한 골목에 들어서도 뒤를 밟는 사람은 없었다. 그제야 경숙은 그는 한숨을 후- 내쉬었다. “함흥촌으로 시름 놓고 가도 되겠소. 해지기 전에 빨리 가기요.” 순금은 또 도도거리기 시작했다. “에이고, 간도에 오면 일본 놈들이 없나 했더니 쥐며느리처럼 와글거리는구나. 뭐. 어데서 저렇게 숱한 일본 놈 새끼들이 깨났을까?” 경숙은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었다. “그래도 여기 중국 지주들은 우리 조선 지주들보다 소작료를 덜 받소. 어째 그러는지 간도의 일본 놈들은 밭에다 나무를 심으라고 하지 않소.” 순금은 곧이듣지 않았다. “천하의 까마귀는 다 검다고 여기 일본 놈 새끼들이라고 악귀가 아니고 부처님이겠습둥?” 경숙은 처자를 데리고 이 골목 저 골목 에돌아 진수해 북쪽 끝으로 나갔다. 어떤 골목에는 기와를 얹고 유리창 문을 해단 상점이랑 약방이랑 들어앉았다. 순금은 고향 명천보다도 더 떠들썩하는 진수해를 보고 “우리도 여기서 살았으면 좋겠소. 상점에 들어가 엿 사탕도 사먹고 얼마나 좋겠니?” 하고 명옥을 돌아보았다. 경숙은 “조개덕의 밭은 어쩌고?” 하고 막 막아버렸다. 순금은 남편을 흘겨보면서 푸념질을 했다. “한뉘 농사만 짓고 어떻게 살겠습둥? 장사도 해야 남들처럼 기와집을 짓고 살지.” 경숙은 순금의 말에도 일리가 좀 있다고 생각했다. (사돈집과 변소 간은 멀어야 한다고. 명옥이 혼사 말이 성사되면 기준 사돈과 어떻게 한 마을에서 산단 말인가? 명옥과 상순이 부모형제 지간에 말썽이라도 생기면 어떻게 서로 눈치를 보면서 살겠는가? 에이, 괜히 이 놈의 혼사 말을 꺼냈다가 함흥촌에서 살지 못하게 되는 건 아니야?) 경숙은 근심부터 앞섰다. 그러나 그는 근룡을 업은 명옥을 피뜩 돌아보고는 한숨을 땅이 커지게 후- 내쉬었다. (안 돼. 어미 없이 자란 저 명옥을 경인의 말처럼 걔 막내처남에게 줘서 시름 놔야지.) 경숙은 함흥촌에 마음을 붙이게 하려고 처자들 앞에서 그런 속내를 내비춰 보이지 않았다. 순금은 “어이구, 해 다 넘어가는데 아직도 먼 모양이지. 아름드리버드나무 꽉 들어선 게 어디 무서워 가겠니?” 순금은 낯선 고장에 온지라 남편을 바싹 따라 걸음을 다그쳤다. 명옥은 근룡을 업은 채 겁이 나 여기 저기 곁눈질하면서 아버지 뒤에 딱 붙어 서서 걸었다. 다행히 근룡이 젖을 먹겠다고 울지 않았다. 경숙은 처자를 데리고 봄날 농사군의 새 해 희망을 안고 저물어가는 해를 밟으면서 함흥촌으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그들이 함흥촌 죽순이네 집에 들어섰을 때는 해가 지고 어둠의 장막이 서서히 내리드리우고 있었다. 고향과는 달리 간도 함흥촌은 아직도 여우가 눈물을 흘릴 지경으로 추웠다. 더구나 지난해 겨울 일본 놈들의 토벌 때 불에 타버린 마을이 볼품조차 없었다. 경숙이 처자를 데리고 여동생 죽순이네 집에 들어서자 매부 석은과 여동생 죽순이 반겨 맞았다. “에구, 인차 들어온다더니 한해 만에 들어왔구먼.” 경숙은 지게를 벗어 바닥에 세워놓으면서 말했다. “어린 둘째를 업구 올 일이 막막했소. 게다가 아버지까지 어찌나 간도로 가지 말라고 하는지 어떻게 오겠소. 아버님도 모시고 올가고 설복해보았지만 안 되겠습데. 고향이 뭔지 기어이 고향을 떠나지 않는다오.” 죽순은 손으로 눈언저리를 닦으면서 중얼거렸다. “그래 아버지랑 어머니랑 오라버니들이랑 모두 별 변고 없이 잘 있소?” 경숙은 위방에 올라가면서 “그럭저럭 보낸다. 경석이 그 놈새끼 또 약담배인이 올라 부모들이 속을 태운다. 어쩌겠니? 개 똥 먹는 버릇을 고치지 못한다고.” 하고 중얼거렸다. 석은 부부간은 정지에 들어선 순금을 보자 “새 아주머니, 절을 받소.” 하고 절을 하려고 했다. 순금은 어쩔 줄 몰라 했다. “아니, 이러지 맙소. 내 훨씬 어린데 왜들 이럽둥?” 경숙도 손사래를 하면서 바삐 매부와 여동생을 말렸다. “형제간에 신식으로 악수나 하면 되지. 절은 무슨 절?” 그리하여 그들 형제간은 서로 악수로 인사했다. 석은은 경숙을 데리고 위방으로 들어갔다. 정지에서 죽순은 명옥을 보더니 와락 끌어안았다. “에이고, 우리 명옥이 이렇게 처녀로 다 돼 왔네.” 뒤이어 명옥의 잔등에 업힌 근룡을 보고 “요게 우리 조칸가? 어디 안아보자.” 하고 근룡을 안았다. “양. 근룡이오.” “근룡이? 이름이 참 좋구나. 요 귀여운 것아.” 죽순은 근룡을 안고 야들야들한 볼에 쪽 뽀뽀를 했다. “근룡아, 이담 룡처럼 건실하게 자라라. 응? 에이고, 요고 고와서 어쩌겠니.” 쪽쪽 뽀뽀를 하는 죽순을 보고 순금은 속으로 흐뭇했다. “아~그~ 요고 어쩌겠니? 아니, 이 총각이 이런 실례라고.” 근룡이 죽순의 품에 오줌을 쐈던 것이다. 명옥은 바삐 걸레를 가져다 고모의 저고리를 닦아주었다. “괜찮다. 오줌과 똥이 친척을 가린다고 조카 오줌이 아니라 똥도 더럽지 않아.” 등잔불 밑에서도 순금의 얼굴에 띤 반가운 기색을 짐작할 수 있었다. 위방에서 경숙은 경인이 써주던 혼사 말 편지를 석은 앞에 내놓고 한창 의논중이였다. “매부, 이 혼사 말을 어떻게 하면 좋소?” 석은은 머리를 끄덕였다. “우리 집안에 또 개성 최 씨를 데려온다? 이건 집안 혼사나 마찬가지요. 상순은 내게 8촌 손자벌이요. 이전에 내 죽순과 결혼하자 어떤 스님이 말하던데 영월 김 씨 네 집안에 개성 최 씨 네 집안에서 여자 셋이 들어오면 영월 김 씨 집안이 잘 된다고 했소. 이 집안 혼사는 하는 게 좋을 거 같소. 형님 생각은 어떻소?” 이때 정지에서 순금형님과 놀던 죽순이 위방에까지 올라와 말렸다. “에이고, 오빠, 이 혼사를 그만두오. 둘째오빠는 뭘 보구 상순에게 명옥을 주겠다고 그러오? 그 상순은 잘 생기긴 했소만 밸 때기 유별나오. 요즘 또 뭐 드문드문 장백산에 들어가 인삼한테서 총을 쏘는 걸 배우고 권투를 배운다 했소. 어디 살림살이를 할 사람이오? 자칫 명옥을 줬다가 고생하면 어쩌오?” 그 말에 석은은 기분이 상했다. “작작 말하오. 상순은 남자답게 잘 생겼고 대단히 역빠르더구먼. 장차 보오. 그 놈이 큰일을 하지 않는가?” 그래도 죽순은 계속 자기 생각을 터놓았다. “아니, 명옥의 한뉘 팔자 걸렸는데 가만 있으라오?” 석은은 아내에게 정지를 눈치 질 하면서 “쯧쯧쯧” 하고 마땅찮아했다. 죽순은 입을 비쭉거렸다. “명옥이 들어도 괜찮소. 이전에 큰집 아주머니가 소를 쓴다고 말한다고 작두로 소 엉덩이를 찍어놓은 일을 잊었소? 풍로를 지붕에 올리 뿌려서 집에 큰불이 날 번 하기까지 했는데도.” “그만하오. ‘흥!’ 소리도 반간이라고 그만하구 나가오.” 죽순은 정지에 내려가서도 순금과 명옥에게 상순의 허물을 말하면서 상순에게 시집가면 십중팔구는 고생한다고 말렸다. 순금은 가타부타 한마디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듣고만 있었다. 명옥은 “고모, 상순이란 게 누굽둥?” 하고 호기심이 나서 물었다. “에이고, 이번 혼사 말을 한 경인 오빠네 작은 처남이란다. 너도 알게다. 우리 고향에 산적이 있는 사돈네 막내아들이지. 우리가 간도에 들어온 이듬해에 부모랑 형이랑 함께 간도에 들어왔지.” 고모의 말을 듣고 명옥은 한 참이나 기억을 더듬다가 “오, 기억나오. 이전에 우리 할아버지 서당에 와서 공부를 하던 애겠구먼. 호 호 호. 코를 풀럭거리면서 ‘엄마, 집에 가기요.’ 하던 애구나.” 하고 코를 싸쥐고 웃었다. 순금은 눈을 흘기면서 “너 그 말버릇부터 고쳐라. 네 신랑 될 사람을 코를 풀럭거리던 애라니? 쯧쯧.” 하고 훈계했다. 위방에서 석은은 극구 상순을 두둔해 나섰다. “상순이 성질은 좀 유별나게 괴벽하오. 사내란 골기 있어야 되오. 그 앤 열여섯 살 때 글쎄 아버지를 괭이로 찍어놓은 저 패랑천촌의 대지주 지학사를 해동분주소에 송사를 걸어 이겨서 치료비까지 배상받아낸 애오. 이담 그 앤 공부만 하면 큰일을 할 애오. 저 아녀자들 말을 곧이듣지 말고 명옥을 시집보내기요. 낭패 없을 거요.” 그때까지 경숙은 담배를 말아 피우면서 묵묵히 궁리만 했다. 한참 후 경숙은 이렇게 말했다. “내 보건대두 상순 사돈총각은 총명하구 역빠르더구먼. 그런데 확실히 성질이 불 같아서 좀 근심되오.” 석은은 계속 상순이 좋은 사위 감이라고 말했다. “이 어지러운 난세에 상순처럼 주대 있고 역빨라야 사오. 고방 새기처럼 어지기만 하면 어데다 쓴다오. 여편네한텐 마음고생시키지 않아 좋겠지만 골기 없어 아무 일도 못하오.” 경숙은 머리를 수깃하고 한참 생각하더니 머리를 들었다. “경인이도 자꾸 제 처남한테 주면 고생하지 않을 게라고 하더구먼. 매부까지 좋다고 하니 이 혼사 말을 받아들이는 걸로 하기요. 그런데, 내 어찌 제 딸을 주자고 사돈영감을 찾아가 혼사 말을 하겠소?” 석은 영감은 “그 게야 그렇지. 여자 쪽에서 먼저 혼사 말을 하는 거 같잖소. 내 기준 영감네 집에 가서 경인처남 편지를 전하구 조카를 절반쯤 삶아놓지.”하고 자신 있게 말했다. 석은 영감은 그 자리로 기준을 찾아 떠났다. 기준이네는 전번 토벌에 소서구의 집이 불에 타버려 웃새집 제일 위방에 들어 살고 있었다. 웃새집으로 찾아가니 집 울안에서 창준이 부부가 농사차비를 하느라고 밭갈이 할 가대기랑 소버치랑 손질하고 있을 뿐이었다. “무슨 일루 해 넘어가는데 왔소? 어서 들어오오.” “기준이 있소? 내 할 말이 있어 왔는데.” 석은의 말에 창준은 토성안집 아래를 가리켰다. “그 앤 지금 집을 짓자고 저기 집터를 보러 갔소.” 석은은 두루 돌아보면서 “상순은 어디로 갔소?” 하고 물었다. 창준은 가대기를 들어 집 뒤에 가져가면서 “저 형과 상 소물을 사러 진수해에 갔소.”라고 알려주었다. 석은은 “아, 벌써 아주머니 돐제가 됐구먼." 하고 머리를 끄덕이더니 “그럼 내 둘째조카를 찾아 할 얘기 있어 가보겠소.”라고 하며 울안에서 되나왔다. 석은은 그 길로 토성안집 동쪽으로 갔다. 기준은 거기서 토성밖 우물주위를 빙빙 돌면서 집터를 보고 있었다. “여기다 집을 짓자고 그러오?” 석은의 물음에 기준은 이쪽으로 머리를 돌리면서 “양, 아저씨 보건대 집터가 어떻소?” 하고 되물었다. “글쎄, 우물이 가까워서 좋긴 한데.”하고 대답하면서 주위를 살폈다. “그런데 토성안집과 가까워 좋겠소? 일본 놈들이 병완 형님과 조카들을 잡지 못해 날뛰는데 일없겠소?” 석은의 말에 기준은 한숨을 후 내쉬면서 먹장구름이 뒤덮인 하늘을 멍해 쳐다보다가 머리를 숙였다. “괜찮소. 똘만 놈이 죽었기에 누구도 우릴 알아보지 못하오. 우린 전번에 협파회에 이름을 써넣을 때두 형님은 김문칠이라고 써넣구 난 김경칠이라고 써넣었소. 이젠 누가 우리를 쉽게 알아보겠소.” 그러나 석은은 마음을 놓지 못했다. “그래도 조심하오. 고향에서 자네들을 알아보는 일본 놈들의 개다리가 찾아오면 대사요.” “일없소. 또 똘만이놈처럼 때려죽이지 뭐. 소서구에 있다고 우릴 잡지 않겠소? 간도 어데로 간들 일본 놈들의 마수가 뻗치지 않겠소.” 기준의 말에 석은도 땅이 꺼지게 한숨을 지었다. “병완 형님이 집안 족보를 만들어놔서 큰일을 했소. 잘 건사하오. 일단 족보가 발각되면 끝장이오.” “그러지 않고. 기름종이에 싸서 오지독에 넣어서 천지꽃산 어머니 산소 옆에 묻어뒀소.” “잘했소.” 석은은 머리를 끄덕이더니 품속에서 편지를 꺼내 기준에게 건네주었다. “이건 뭐요?” “둘째처남이 보낸 거요.” “맏사위가 무슨 일로?” 기준은 내리 글로 된 편지를 뜯어보았다. 두 번이나 곡을 내면서 내리읽더니 기준은 머리 들어 석은을 바라보았다. “칠촌 숙, 이건 상순 혼사 말을 하는 게 아니오?” “그렇소. 내 처조카 명옥과 상순이 혼사 말을 하는 게오.” 기준은 우물가에 가서 우물덮개에 엉덩이를 붙이고 한참 먼 하늘 쪽을 바라보며 무슨 궁리를 하는 것이었다. 석은이가 다가가자 기준은 “이건 집안 혼사말이구먼. 명옥이란 사돈새기는 칠촌숙의 처조카이자 내 맏사위네 친조카 아니고 뭐요?” 하고 물었다. 석은은 기준과 나란히 우물덮개에 기대서면서 개의치 않아했다. “집안 혼사면 어떻소? 석철 형님의 가마골에 있던 처제가 조카네 맏며느리로 들어갔는데 좋지 않았소? 그때도 조카는 사돈 간 집안 혼사라고 싫어했지만 지금 보오. 조카네 맏며느린 처사도 밝고 인사성도 밝고 사리에 밝지 않소. 사돈 간에 서로 알고 믿을 수 있어 더 좋지.” 기준은 석은을 마주보면서 머리를 끄덕였다. “하긴 그렇소. 최구장네야 우리 한 고향에서 대대로 함께 살아서 믿을만하지. 그런 사돈집안과 겹겹이 사돈을 맺는다는 건 아주 좋지. 맏딸도 그래서 최구장 네 둘째며느리로 준 게지. 그런데 최구장 맏손녀가 벌써 그렇게 컸는가?” 기준이 무릎을 탁 쳤다. “아차, 우리 상순이 간도에 들어올 때만 해도 일곱 살 밖에 안 됐는데 양띠니까 올해 벌써 열아홉 살이나 됐으니까. 최구장 네 맏손녀도 나이 그쯤 됐겠구나.” 석은은 혼사 말이 돼가는 것 같아 기뻤다. “그러잖고. 우리 처조카 상순과 동갑양띠요. 걔는 섣달 초닷새 생이요. 상순은 생일이 언제오?” 기준은 인차 대답했다. “시월 십팔이지.” 석은은 박수까지 쳐댔다. “천생배필이오. 둘 다 양띠라. 생일도 상순이가 앞섰으니 궁합도 맞을 거 같소.” 기준은 한숨을 후 내쉬었다. “글쎄 나두 맏사위하구 맏딸이 한 이 혼사말은 집안혼사여서 믿음직하다고 보오. 그런데 칠촌숙도 알지만 내 처가집도 개성 최씬데 또 개성 최씨를 며느리로 맞아들여도 일없겠소? 당자들은 어떻게 생각하겠는지? 상순은 밸 때기 사나워서 말을 듣겠소? 또 사돈 새 애기를 보지두 못하고 어떻게 혼사 말을 하겠소?” 석은은 우물 덮개에서 엉덩이를 떼면서 기준을 마주 바라보며 말했다. “근심하지 마오. 지금 내 큰 처남 식솔들이 다 우리 집에 와 있소. 아예 오늘로 혼사 말을 매듭짓는 게 어떻소?” 기준은 도리머리를 가로 흔들었다. “안 되오. 내일은 우리 어머니 한돐 날이오. 한 보름 지나 다시 보기요.” “아차, 내 그만 깜빡 잊었구먼.” 석은이 간 후 상우는 아버지께 다가와 말했다. “아버지, 또 집안혼사 말을 하겠습둥?” “어떠냐? 믿을만한 집안인데.” 기준이 대수롭잖게 생각하자 상우는 우물 뒤 집 쪽을 살피더니 뒤를 달았다. “아버진 모르는 거 같은데. 어험, 상순은 저 내 사촌처제 춘실과 좋아하는 눈칩구마.” “뭐라고? 그 놈 새끼 부모 허락 없이? 내 이놈새끼 집으로 돌아오기만 해봐라. 종아리를 분질러놓지 않는가.” 기준은 버럭 고함쳤다. 상우는 지 씨 네 집을 흘끔 들여다보더니 바삐 아버지 팔을 잡아 토성 앞으로 모시고 갔다. “지씨네 듣겠습구마.” 기준은 성이 꼭뒤까지 치밀어서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어이구, 저 놈 새끼를 어쩌겠니? 제 형님의 사촌처제하구 좋아하다니? 제 정신이 있니?” 상우는 아버지 팔을 놓으면서 말했다. “매형네 조카나 내 처제나 다 사돈 간인데?” 기준은 상우를 쏘아보면서 을러멨다. “너도 같은 양 하겠니?” 마음이 어진 상우는 더 말하지 못하고 집터 쪽으로 스적스적 걸어갔다. 기준도 한숨을 길게 내쉬더니 상우한테로 다가갔다. “여기다 집을 짓는 걸로 하자. 토성 동쪽이자 우물이 가까우니 살기 편리할 거 같구나.” 상우도 “아버지 생각대로 합시다.” 하고 대답하고 나서 뭉청 무너진 서쪽토성을 바라보더니 한숨을 후 내쉬었다. “이 아까운 토성안집을 어쩝둥?” “일본 놈 새끼들이 집단부락촌공소루 쓴다잖니?” “개새끼들이, 인삼 형님네 집을 빼앗아 촌공소루 쓰다니? 장학사랑 놔둘 거 같습둥.” 기준은 머나먼 곳을 바라보면서 땅이 꺼지게 한숨을 내쉬었다. “언제 일본 놈들을 다 몰아내구 마음 놓고 살겠니? 제 집과 땅을 가지고 살날이 언제 있을까? 일본 놈들을 봐라. 남의 양아들 집도 마구 빼앗아 자기네 촌공소를 앉힌다지 않니? 에이고, 이 놈의 세상이 언제 끝나겠니?” 상우도 먹장구름이 뒤덮인 하늘을 쳐다보면서 갑갑해 구름이 다 날려가게 거친 황소숨을 씩-씩-몰아쉬었다.  
57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36) 댓글:  조회:2248  추천:0  2016-03-25
                                                              8. 함흥촌       인삼은 사냥개가 왕왕 사납게 짓는 파출소 대문을 비틀거리면서 간신히 걸어 나왔다. 채찍에 맞아 갈기갈기 찢어지고 피로 얼룩진 옷은 차가운 늦가을 바람에 넌덜거렸다.       “아니, 양아들아! 이게 뭐냐?”       이때 대문 뒤에서 장학산이 뛰어나오더니 인삼을 와락 끌어안았다.       “양아버지, 어떻게 돼 여기까지 왔습니까?”      “아니, 이 놈들이 감히 너를 이렇게 때려? 파출소를 쾅 폭파해버려라!”      장학산은 이를 뿌득뿌득 갈면서 대문 안을 쏘아보았다. 뒤에 지학사와 그의 가병들도 사냥총을 쥔 채 나타났다.      장학산은 미리 대기하고 있던 마차에 인삼을 업어다 앉혔다.      “먼저 집으로 가라! 내 저놈들과 따져봐야겠다. 도대체 왜 무고한 사람을 이 지경으로 때려? 흥!”     지학사는 가병들을 돌아보더니 장학산한테 고함쳤다.      “형님, 내 사촌 동생도 믿을 놈이 못되오. 금방 뭐라고 했소? 대일본제국과 맞서선 안 된다지 않소. 허나 그놈 지학구가 눈을 좀 뜨게 만들기요.”      그때 인삼은 수레에 누운 채 머리를 간신히 들고 손사래를 쳤다. “양아버지, 안 되오. 절대 안 되오. 내 혼자 매를 맞았으면 됐지. 양아버지와 양 삼촌까지 연루시킬 필요 없소. 가만있으면 모든 게 끝나고 맙니다.” 장학산은 주먹으로 마차 바닥을 꽝 치며 눈을 부릅뜨더니 손을 홱 저었다. “병원에 가자!” 마차는 진수해 아래 개방지 쪽으로 내려가 한자로 “약”자를 박은 초롱을 데룽데룽 건 집 앞에 가 멈춰 섰다. 약방이었다. 장학산이 들어갔다가 이윽고 나왔다. 장충국이 인삼을 업고 아버지를 따라 들어갔다. 중의는 피가 낭자한 인삼의 몸을 두루 살펴보더니 도리머리를 가로 흔들었다. “웬 놈들이 이렇게 때렸어? 쯧쯧쯧.” "일본 놈들이지 누구겠소?” 중의는 인삼의 팔소매를 걷어 올리며 물었다. “사촌동생 지학구가 해동분주소 소장을 하지 않소? 건데 당신 양아들을 감히 이렇게 때린단 말이오?” 지학사는 뒤에서 코 방귀를 뀌었다. “지학구 동생도 섬나라 오랑캐 놈들의 밥을 처먹더니 섬나라 오랑캐들의 눈치를 흘끔흘끔 본단 말이오. 형님의 양아들을 구하기는커녕 우릴 보고 대일본제국 분주소와 엇서지 말라고 말리기까지 했어. 쳇! 중국 사람의 기를 개를 떼 준 모양일세!” 중의는 인삼의 맥을 한참 보더니 팔소매를 내려놓으면서 말했다. “괜찮소. 다행히 당신 양아들이 정신이 강하기에 피부가 찢기었을 뿐 내상은 없소.” “다행이구먼. 약을 좀 지어 주오.” 한참 후 첩약 열 몇 첩이 나와서 장학산은 자기 호주머니에서 은전 몇 닢을 주고 일어섰다. “약값이 이렇게 들지 않소. 가지고 가오.” 중의는 따라 나오면서 은전을 내밀었다. 장학산은 사람 좋게 마구 밀어주고 나왔다. 이번에는 장리국이 인삼을 업고 나와 마차 위에 눕히고 자기 솜옷을 벗어 덮어주었다. 그들이 진수해 다리를 건너왔을 때 다리건너 원시림에서 기준과 창준 그리고 상우와 상훈이, 상길과 상순까지 나타났다. 인삼은 마차 우에서 머리를 들고 황급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뒤이어 그는 기준을 조용히 손짓해 불렀다. 기준이 마차 우에 올라가 풍덩 들어앉았다. “어서 숲속으로 피신하오. 명천에서 형님과 큰아버지 네를 추격해 똘만이란 경찰이 왔소. 이러다가 똘만한테 들키는 날엔 우리 함흥촌이 끝장나오.” 창준은 다가와 피투성인 인삼의 얼굴과 몸을 목수건을 벗어 닦아주었다. 그들은 귓속말을 주고받았다. “어떻게 동생이 잡혀갔는데 집에서 기다리겠는가? 쯧쯧. 이게 뭐야?” 기준은 주먹을 으스러지게 쥐면서 말했다. “개 놈새끼들, 토성 안에 왔을 때 어째 억복이랑 동굴에서 총을 쏘게 하지 못했소? 언제 저 일본 섬나라 오랑캐 놈들을 몽땅 잡아 없애버리겠소?” 인삼은 재촉했다. “어서 이 자리를 떠나오.” “그러지.” 기준과 창준이가 자식들을 데리고 원시림속으로 숨어들어갔다. 인삼이랑 해동 굽인 돌이를 돌아갈 때였다. 굽인 돌이 산등성이에서 한패의 무장괴한들이 나타났다. 지학사 가병들은 사냥총을 겨누면서 고함쳐 물었다. “누구얏?!” “우리오.” 꺽다리 억복의 목소리였다. 뒤이어 철석이랑 바위돌이랑 달려 내려왔다. “어째 왔는가? 빨리 피신하오.” 억복은 마차 위에까지 뛰어올라왔다. 인삼이가 보니 그들은 다행히 총을 들지 않고 왔었다. 인삼은 자기 얼굴에 얼굴을 비비면서 눈물을 흘리는 억복의 귀에 대고 귀속 말을 했다. “왜 눈치코치 없이 노오? 이 길로 장백산 본영에 가오. 김성칠 대장한테 토성안집은 이미 폭로됐다고 전하오. 성칠 대장 아버지네 일가를 알아 볼수 있는 놈은 똘만밖에 없소. 똘만 놈을 꼭 처단해야 하네.” “우리 어찌 대장을 남겨 두고 혼자 갑니까?” “이건 명령이오. 시간을 끌지 말고 당장 떠나오.” 인삼은 억복의 귀에 대고 뭐라고 몇 마디 더 했다. “옛!” 억복은 팔소매로 눈물을 쓱쓱 닦으면서 조용히 부탁했다. “무사히 돌아오십시오.” 서산에 뉘엿뉘엿 넘어가는 해를 바라보면서 억복과 철석은 유격대원들을 데리고 서쪽을 바라고 바람결처럼 사라졌다. 철석은 그간 기준이 알려준 조상의 묘방- 오줌에 상처를 처치하고 나아 씽씽 달아다닐 수 있어 유격대 대오를 떨어지지 않게 돼 다행이었다. 어둠의 장막이 서서히 원시림숲속으로 뻗어나간 굽이굽이 산기슭 길을 내렸다. 인삼을 실은 마차는 어둠속에서 울퉁불퉁한 호박 길을 덜커덩거리면서 함흥촌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이때 어둠이 뒤덮인 원시림 속에서 그들의 뒤를 밟는 자들의 눈이 있었다.  바로 똘만을 비롯한 특무, 경찰, 밀정 놈들의 도적놈 눈길들이였다. 그 놈들은 사이또 소장의 포치에 따라 길 옆의 수림 속을 따라 인삼을 멀찍이 뒤따라오면서 마중하러 온 사람들을 일일이 살펴보고 있었다. 그런데 너무 먼데다가 아름드리나무들이 앞을 막아서 마중하러 온 사람이 많다는 것은 보았지만 대체 누가 누군지는 똑똑히 보아내지 못했던 것이다. 인삼이네가 토성 안에 들어갔다. 성해가 마중 나왔다가 마차 위에 누워 있는 인삼을 보고 왼손으로 입을 싸쥐고 흐느끼면서 다가왔다. “주인님, 이게 웬 일입니까?” “울지 마오. 이후에 놈들 앞에서 절대 눈물을 보이지 마오.” 그제야 성해는 눈물을 훔치더니 마차에서 내리는 인삼을 부축했다. “아저씨, 우리 업어 드리지요.” 상길이가 등을 들이대자 인삼은 사양했다. “아니, 너희들은 집으로 돌아가라. 괜히 똘만 놈의 눈에 뜨이면 대사다.” 기준은 “그 똘만 놈 새끼 여기까지 쫓아왔어? 내 만나기만 하면 도끼로 대갈통을 까치우겠다.” 하고 을러멨다. 기준과 창준은 인삼을 부축해 위방에 들어가 자리에 눕혀 놓은 후 별수 없이 집으로 돌아갔다. 인삼은 성해한테 “집안에 다른 정황이 없지?” 하고 물었다. 성해는 눈물을 손으로 닦으면서 “아무 일도 없습니다.”라고 목구멍으로 기어드는 소리로 대답했다. 인삼은 미닫이문을 열고 정지를 내다보았다. 그는 쌀독이 그대로 똑바로 서 있는 것을 보았다. (다행이군, 동굴이 문제없군.) 그는 한 숨을 후 내쉬며 자리에 드러누웠다… 한편 똘만은 이끈 자위대 놈들은 동산에 올라가 계수동쪽에 숨어있으면서 토성안집 마당을 내려다살피기로 했다. 똘만은 자위대 놈들에게 명령했다. “토성안집에서 쥐새끼 한 마리 얼씬거려도 놓치지 말라!” “예.” 두덜거리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새까만데 어떻게 살핀다고.” “그러게 말이야. 추워 죽겠는데.” 그러자 똘만은 목이 빠지게 고래고래 고함쳤다. “뭐라고? 네놈들이 유격대 두목 인삼을 놓치는 날엔 목이 날아 날 줄 알아라.” 그러자 자위대 놈들은 질겁해 목을 움츠렸다. 그 놈들은 추운지 겁이 났는지 덜덜 떨면서도 산 아래를 살피는 척 했다. 한참 후 똘만은 그저 산등성이에 서서야 어두운 밤에 토성안집을 살핀다는 것도 수하자위대원들의 말처럼 안 되겠다는 것을 느꼈다. “너희들은 둘씩 짝을 무어서 함흥촌에 내려가라. 토성안집 말고 다른 집도 살펴라. 만약 의심스러운 놈들이 있으면 나한테 와서 보고해라.” 자위대 놈들은 짝을 무어가지고 내려가려고 서둘렀다. 한 놈이 의아해 물었다. “똘만 경찰님, 경찰님은 어데 있겠습니까?” “건 비밀이야.” 똘만의 말에 자위대 놈들은 툴툴거렸다. “어데 있는지 알아야 보고하지.” 그제야 똘만은 엉뚱하게 말했다. “너희들의 옆엔 항상 내가 있다고 생각해. 빨리 내려가 수사해!” 자위대 놈들은 툴툴거리면서 둘씩 짝을 무어 흩어져 산 아래로 내려갔다. 똘만은 산등성이에서 서성거리다가 착잡한 생각이 들었다. (내 여기 간도까지 온 게 무슨  진짜 유격대와 겨뤄보자고 왔어? 자칫 잘못 걸려들었다가 목이 날아나겠다. 영월구 지게꾼과 십가장 끝장 몰라? 으흐흐, 성지촌 허팔기처럼 목이 썩뚝 잘리자고? 쳇, 웃기지 말라. 이 똘만 경찰을 어떻게 보고? 흥! 사이또 소장과 조일파출소 소장이 다 뉘 아들이냐? 난 끼무라 국장과 한길수 대대장 파견받은 간도에 온 특무야. 끼무라 국장 포치대로 병완과 기준이 부자 놈들이 어데 있는가 알아내면 한평생 배때를 두드리면서 잘 살 텐데. 자위대 부대대장도 시키겠댔지. 흐흐,  한 대장처럼 양옥도 준댔는데. 으흠, 그런데 소서구란 골짜기는 도대체 어데 있을까?) 이때 뼈 속을 스미는 초겨울 바람이 우수수 낙엽을 날리면서 을씨년스럽게 불어왔다. (유격대를 잘못 건드렸다가 목숨 잃겠다. 살아서 고향 명천에 돌아가야 우시장에서 한다하는 자위대 부대장을 하지.) 똘만은 두 손을 마주 싹싹 비비며 서성거렸다. (이거 추워서 어쩌지?) 어둠속에서 동쪽 골 안에 게딱지처럼 널려있는 움막들이 그의 뱁새눈에 피뜩 뜨였다. “에라, 모르겠다. 추워 죽겠어.” 그는 어느 움막에도 들어가 한잠 푹 자면서 자위대 놈들이 보고하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9. 외나무다리에서 만난 원수        이튿날 이른 아침 기준은 가을걷이고 뭐고 다 팽개치고 곧추 용정 동쪽에 있는 성지촌 으로 떠나갔다.       (일본 놈 새끼들이 어떻게 모질게 때렸으면 ‘꼬리 없는 황소’가 화병에 앓아누워 일어나지도 못한단 말인가?)      그는 일본 놈들을 한없이 괘씸했다.      그는 령길을 타고 반나절 너머 걸어서야 성지촌 뒤 산등성이에 이르렀다. 이전에 옥수수 밭에 마른 이파리들이 너펄거리는 옥수수 밭이라도 있었기에 몸을 숨기기도 좋았다. 그런데 산우에서 원삼이네 집 뒤쪽 옥수수 밭을 보니 이젠 옥수수단을 세워놓은 무지 밖에 없었고 저쪽 멀리 산비탈 밭에서 옥수수단을 날라다 무지는 애들 몇몇이 보일뿐이었다. 방법 없이 그는 옥수수단 무지 속에 숨어서 산 아래 원삼이네 집에서 이쪽으로 오는 사람이 없는가 애타게 살폈다. 마을에도 별로 오가는 사람이 없고 다만 산비탈에 널려있는 밭들에는 가을 곡식 싣기에 바삐 도는 농사꾼들 밖에 보이지 않았다.       기준은 속에서 불길이 활활 피어올랐다. 그 울뚝밸에 원삼이네 식구가 나타나기를 기다리노라니 한식경이 삼추 같았다. 생각 같아서는 원삼이네 집으로 씽 달려 내려가 원삼을 만나보고 싶었지만 시퍼런 대낮에 그렇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원삼이네 집은 사이또 소장 놈과 똘만이가 집중적으로 감시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대로 내심하게 둬 식경이나 마을을 내려다보다가 피뜩 원삼이네 마당에 수레가 없는 것이 보였다. 산비탈 밭을 두루 살펴보아도 수레는 보이지도 않았다.      “원삼을 싣고 병원에 갔을까? 아니야, 원삼은 죽어도 병원에 가지 않을 사람이야.”      기준은 중얼거리면서 어데 갔을까 궁리하다가 무릎을 탁 쳤다. (혹시 원삼이 타작하느라고 물레방아 골의 리영룡네 집에 가지 않았을까?) 기준은 옥수수단 무지에서 산비탈과 마을을 참빗질해보았다. 그러나 일하는 사람 외에는 이상하게 기웃기웃 하는 자가 보이지 않았다. 기준은 옥수수단무지에서 살그머니 나와 옥수수단 무지 사이를 슬금슬금 빠져나가 산등성이 길에 들어서려고 했다. 그때 산기슭에서 “장활아, 종호야~ 점심을 먹어라.” 하고 부르는 여인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종호라니? 그럼 쟤들이 비탈 밭에 있었단 말인가?” 기준이가 바삐 옥수단사이로 여기저기 살펴보았다. 확실히 산기슭 둔덕 우에 키가 작달막한 원삼의 처가 입가에 두 손으로 손나팔을 해대고 애들을 부르고 있었다. 그리고 산비탈 밭에서 애들 서넛이 원삼이네 집이 있는 둔덕 쪽으로 가는 것이었다. 기준은 황급히 옥수수단 무지 속에서 “종호야!” 하고 나직이 불렀다. 종호는 이쪽을 피뜩 돌아보더니 기준을 발견하지 못하고 이상한지 도리머리 질 하면서 계속 어머니 쪽으로 가는 것이었다. “종호야!” 기준은 좀 더 높이 부르면서 옥수수단 무지 속에서 손을 휘저었다. 그제야 종호는 이쪽을 여겨보더니 달려왔다. 종호는 산비탈 아래위를 훑어보더니 옥수수단속으로 슬쩍 들어왔다. “큰아버지! 어떻게 돼 왔습니까? 큰아버지랑 유격대랑 잡지 못해 놈들이 미친개 눈깔이 돼가지고 싸다니는데.” 기준은 종호의 손을 잡고 물었다. “아버진 어떠냐?” 종호는 철색얼굴에 어두운 그늘이 비치더니 머리를 숙였다. “아버진 식사도 하지 못합니다. 마른 팥알 몇 알씩 씹어 넘기고선 숨을 몰아쉽구마. 그런데 뒤를 보지 못해 생야단입구마. 우리하구 엄마가 손가락으로 파낼 지경입구마.” 기준은 도리머리를 가로 흔들면서 산비탈아래 원삼이네 집 쪽을 내려다보았다. “야, 원삼이, 어떻게 돼 이 지경이 되였소?” 뒤이어 그는 옥수수단 무지에서 나와 곧추 원삼이네 집으로 씨엉씨엉 내려갔다. 종호는 기준의 뒤를 따라 내려가면서 사위를 둘러보며 조용히 말리였다. “큰아버지, 해진 뒤에 내려오시오. 대낮인데 개다리들의 눈에 띠우겠습니다.” 그러나 기준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성큼성큼 계속 내려갔다. “동생이 죽어 가는데 어떻게 해지기를 기다린단 말이냐? 어느 놈이 개다리질 하면 도끼로 허팔기 새끼처럼 대갈통을 까부시겠어.” 종호와 장활은 마을에 이르러 이집 저집 흘끔거리면서 살폈다. 그러나 다행히 길목에 다가오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기준이가 집 문을 뚝 떼고 들어가니 원삼이가 피골이 상접해 위방에 누워있었다. “아니, 이게 무슨 일이오? 원삼이.” 그 소리에 피골이 상접한 원삼은 겨우 고개를 돌려 기준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형님이 어떻게 돼?” 상처투성이 얼굴에 관골이 튀어나오고 눈 확이 푹 꺼진 원삼의 얼굴을 보는 순간 기준은 원삼의 손을 잡고 눈물을 줄줄 흘리었다. 원삼은 기준을 맥없이 쳐다보면서 나직이 말했다. “형님, 난 허팔기 새끼를 처단한 게 정말 시원하오.” 기준은 눈물을 손등으로 닦으며 머리를 끄덕였다. 원삼은 기준의 손을 꽉 잡으면서 “형님, 우리 온 집 식구는 살 길이 없게 됐소. 온 일 년 뼈 빠지게 농사를 지었는데 리영룡이 소작료를 8, 8할이나 가져가오. 에헴, 헴, 컥.” 하고 말하다가 억이 막혀 숨을 거칠게 톺았다. 기준은 원삼을 부축해 앉히고 잔등을 투덕투덕 두드려주면서 고래고래 고함쳤다. “리영룡 새끼를 도끼로 대갈통을 까치우겠어.” 원삼은 억이 막혀 겨우 숨을 톺았다. “리영룡이 다 나를 업신여기다니? 어, 헉, 원, 기, 기막혀 어디 살겠소? 어, 헉, 헉.” 기준은 “근심하지 마오. 내 언제든지 동생의 원수를 갚아 줄 테니. 그러나 저러나 동생 병원에 가 보이고 약을 쓰오. 꼬리 없는 황소 이게 뭐요?” 하고 말하면서 호주머니에서 동전 몇 잎을 들춰 내놓았다. 원삼은 기준이쪽에 동전을 밀어주면서 사양했다. “형님, 형님네도 바쁘겠는데.” 기준은 버럭 성을 냈다. “야, 잔말 말구 병 치료를 하게. 우리 일본 놈들을 몰아내고 함께 고향에 돌아가자.” 원삼은 희죽이 웃더니 두 눈을 슬며시 감으면서 자리에 누웠다. “고향에 돌아갔으면 얼마나 좋겠소. 요즘 자리에 누워 눈만 감으면 고향 경성 산골과 부모들의 산소가 떠오르오. 언제 일본 놈들을 몽땅 몰아내겠소. 고향에 가서 뒤 산의 나무를 마음대로 해 때면서 살아야 하는건데. 내 밭에 곡식을 심어먹으면서 사는 그 날이 오면 얼마나 좋겠소?” 기준은 원삼을 꽉 껴안고 왈칵 눈물을 쏟았다. “그날이 멀지 않네. 꼭 강해져라. 꼭 나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가자.” 원삼의 눈귀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러 베개 잇에 뚝뚝 떨어졌다. “난 고향에 돌아가고 말 거 같잖소.” 기준은 버럭 고함쳤다. “그게 무슨 소린가? 우린 꼭 함께 고향에 가는 거야. 이 놈아, 이 못난 놈아.” “일본 놈들과 리영룡 놈 때문에 억이 막혀 숨이 올라오지 않소.” “용정에 가서 죤슨한테 부탁해 좋은 의사를 보이면 치료할 수 있네.” 그러나 원삼은 가늘게 도리머리를 가로 흔들었다. “속병, 속병을 누가 치, 치료한다오. 허 헉, 꺽.” 그 말에 장활과 종호랑 모두 흑흑 흐느껴 울었다. 그런데 뭐야? 한참후 원삼이가 숨을 거칠게 톺았다. 이윽고 숨이 꺽 막혀 눈물이 글썽한 두 눈을 크게 뜬 채 손으로 문밖을 가리키다가 털썩 떨어뜨렸다. 기준은 원삼을 안아 일으켜 마구 잔등을 퉁퉁 두드려주었다. 그러나 원삼은 두 눈을 부릅뜬 채 숨이 올라오지 못했다. “아버지!” “아버지!” 종호랑 애들은 아버지를 부르며 대성통곡 쳤다. 원삼의 처는 구들을 치며 대성통곡 쳤다. 기준은 원삼을 스르르 자리에 눕히면서 입만 멍하니 헤벌리었다가 눈물을 줄줄 흘리었다. “이보게, 함께 고향으로 가야지. 이렇게 먼저 세상을 떠나가다니? 이 못난 놈아. 그렇게 가기 바쁜가? 엉? 야, 세상에 이런 일도 다 있단 말인가? 엉엉.” 기준의 넉두리에 온 집 식구들은 모두 대성통곡 쳤다… 기준은 죽음도 뭐도 겁나지 않았다. 그는 원삼을 손수 염습하고 원삼이네 집 널 바자를 뽑아 손수 관을 짠 후 원삼을 입관했다. 이튿날 아침 일찍 그는 애들과 함께 성지촌 뒷산 양지바른 언덕아래 원삼을 묻어주었다. 원삼의 묘 앞에 꿇어앉은 기준의 눈에는 눈물이 줄 끊어진 구슬처럼 줄줄 흘러내렸다. 그는 원삼의 처자들 눈물바다 울음바다 속에서 애 끊는 듯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원삼이, 일본 놈을 몰아내고 함께 고향에 돌아가자던 자네 이게 웬 일이오? 으흐흑, 흑흑.” 한참 대성통곡 치고 난 기준은 팔소매로 눈물을 닦으면서 일어나 옆에서 꿇어 엎딘 채 울고 있는 원삼의 처자들을 근심했다. “일본 놈들의 감시 밑에 성지촌에서 어떻게 살겠습니까?” 작달막한 원삼의 처는 “예. 애들도 다 컸으니 용정에 가서 막일을 하더라도 소작 농사를 짓기보다 나을 겝구마.” 하고 대답했다. 기준은 장은이랑 종호랑 일일이 손을 잡아주었다. “이젠 너희들이 살림살이를 떠메야 해.” 제일 마지막에 그는 열 살도 되지 않는 장록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나서 원삼의 처 잔등에 업힌 둬 살 밖에 안 되는 막내 장권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요것들이 불쌍합구마.” 기준은 장활에게 머리를 돌리더니 “이후에 무슨 일이 있으면 알려라.” 하고 말하고는 무거운 발걸음을 뗐다. 그의 뒤에서는 종호랑 애들이 훌쩍거리는 소리가 을씨년스러운 초겨울 바람에 술렁거렸고 석별의 정이 사품치며 출렁거렸다. 기준은 해진 뒤에야 계수동으로 올라가는 골짜기어귀와 조개덕이 갈라진 갈림길에 이르렀다. 늙은 비술나무가 고개를 숙이고 초겨울바람에 벌거숭이가지를 휴~휴~ 몸부림치고 있었다. 기준은 서너 아름이나 되는 늙은 비술아래에 몸을 기댄 채 숨을 돌리면서 담배를 말아 물고 궁리를 돌렸다. (조개덕으로 해 갈까? 안 돼? 토성안집에 왔다간 똘만이랑 조개덕 길목을 지키면 어찌는가?) 기준은 부시를 척척 쳐 담배를 붙여 물고 뻑뻑 빨았다. “그래, 계수동 쪽으로 올라갔다가 산등성이를 넘어가자.” 그가 몇 발자국 떼지 않았을 때였다. 계수동쪽 산길에서 웬 사람이 터벅터벅 다가왔다. 밤길에는 산짐승보다도 밤 사람이 싫은 법이다. 기준은 짚신의 흙을 터는척하며 길바닥에서 돌멩이를 슬쩍 주어 쥐었다. 그때 맞은 켠에서 터벅터벅 다가오던 작달막한 밤 사람이 마른기침을 하며 말을 건네었다. “여보게, 담배 불이나 붙입세.” 둬 발자욱 지척에 다가온 상대방의 목소리가 귀에 좀 익었다. 하지만 기준은 작달막한 상대방을 개의치 않고 담배 대를 뻑뻑 빨다가 작달막한 밤 사람에게 맞불을 붙여주었다. 담배 불에 비친 상대방의 얼굴을 서로 보는 순간 둘 다 깜짝 놀랐다. “앗!” 똥똥한 몸집과 뱁새눈, “똘만이 놈 새끼!” 구척 키에 세귀 눈을 보는 순간 똘만은 깜짝 놀라 잽싸게 허리에서 권총을 빼들었다. “기준 이놈!” 기준이가 돌멩이로 똘만의 대가리를 꽝 내리쳤다. 담배 불이 땅바닥에 탁 떨어져 불똥을 날렸다. 똘만은 살짝 옆으로 피하면서 발길을 날려 기준의 손목을 걷어찼다. 기준의 손에서 돌멩이가 밤하늘로 씽 날아났다. 똘만은 권총으로 기준을 겨누고 지껄였다. “허튼 수작 하지 마! 허파에 바람구멍 내줄테야!” 권총이란 말에 기준은 주먹을 쳐들었다가 맥없이 내리웠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허허, 여기서 네 놈을 만날 줄이야. 으흐흐.” 똘만은 위세를 돋우느라고 공중에 대고 총을 쏘았다. 땅! “꼼짝 말고 진수해 쪽으로 걸어!” 기준은 갑작스레 들이닥친 봉변에 똘만이가 뒤통수에 겨눈 권총 앞에서 맥없이 털썩털썩 걸었다. 그는 주위를 살피면서 똘만을 까 눕힐 궁리를 했다. 똘만은 그의 등 뒤에 총을 겨누고 걸으면서 우쭐거렸다. “내 네놈을 찾느라고 8년 동안 간도 땅을 메주 밟듯 했어. 그런데 끝내 여기서 네놈을 나포했구나. 허허, 나도 이젠 고향 명천에 돌아가 호광할 때 됐구나. 흐흐흐.” 이때 늙은 비술나무 주위에서 마른 풀숲을 와삭와삭 헤집는 소리가 들리었다. “총소리를 듣고 우리 애들이 왔구나.” 똘만이가 으시댈 때다. “똘만 경찰님! 웬 일입니까?” 저쪽에서 검은 그림자 여럿이 우르르 이리떼처럼 쏟아져 나왔다. 똘만은 총구멍으로 기준의 너부죽한 잔등을 떠밀면서 개 잡은 포수처럼 우쭐거렸다. “기준 놈을 잡았어!” “예? 어디 보기요.” 쉭- 딱! “앗!” 갑자기 날아온 돌멩이에 얻어맞은 똘만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면서 권총을 쥔 손으로 대갈통을 싸쥔 채 맴돌았다. 그때 기준은 도척 같은 몸을 홱 돌렸다. 번개 불이 번쩍 나게 똘만의 오른손을 비틀어 권총을 빼앗아냈다. 똘만의 손목뼈가 부서지는 소리와 비명소리가 반죽돼 들렸다. 기준은 무쇠주먹을 연신 꽝꽝 안겼다. 자위대 놈들은 뒤늦게 영문을 알았다. 하지만 똘만경찰이 상할까 봐 총도 쏘지 못하고 기준과 똘만을 에워싸고 맴돌 뿐이었다. 그 틈을 타 기준은 권총박죽으로 똘만의 대갈통을 연신 내리깠다. 쇠 가마라도 견딜소냐? 똘만 놈은 대갈통이 피로 묵사발이 된 채 찍소리도 내지 못하고 뻐드러지고 말았다. 그제야 기준은 몸을 날려 골짜기 아래로 뛰어들어 데굴데굴 굴러 내려갔다. 뒤에서 야무진 총소리가 땅! 울렸다. 기준의 머리우로 총알이 죽음의 노래를 부르면서 앵앵 날아지나갔다. 쉭- 쉭- 어두컴컴한 어둠속에서 연속 돌멩이가 날아왔다. “웬 놈들이야?!” 자위대 놈들이 질겁해 늙은 비술나무 뒤에 비실비실 물러갔다. 땅! 땅! 야무진 총소리가 계수동 골짜기 어귀에서 초겨울 밤하늘을 울렸다. 몇몇 자위대 놈이 썩박나무처럼 푹푹 쓰러졌다. 땅 땅! 몇 놈이 또 꺼꾸러졌다. “1소대는 북쪽으로! 2소대는 서쪽으로! 3소대는 동쪽으로 포위하라!” 분명 거짓말로 놈들을 겁을 먹이느라고 하는 여성지휘관의 명령소리였다. “투항하면 살려준다!” “우린 항일유격대다!” "항일의병이 왔다!" 이상했다. 유격대 속에서 여인의 목소리가 또 울렸다. “총을 버렷!” 늙은 비술나무 쪽에서 어느 놈인가 “빨리 달아나라!”라고 고함치는 소리가 들렸다. 보안대 놈들은 숱한 유격대가 왔는가 하여 겁을 집어 먹었던 것이다. 뒤이어 진수해 쪽으로 달아나는 어지러운 발자국 소리가 들리었다. (인삼 아저씨가 유격대를 보냈을 거야.) 기준은 구사일생으로 놈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빼앗은 권총을 쥐고 아름드리버드나무들에 이리저리 몸을 숨기면서 부르하통하 쪽 원시림숲속으로 달아났다. 기준은 한참 닫다가 아름드리버드나무에 몸을 기댄 채 헐떡거리면서 숨을 돌렸다. 아무리 귀를 기울여도 조개덕과 계수동쪽에서 뒤쫓는 동정이 하나도 없었다. 그러자 그는 지학사네 토성 밖을 에돌아 패용천산과 칼산사이 골짜기로 들어갔다. (똘만 놈 새끼 썩어졌으니까. 이젠 누가 우리 집 식구들을 알아보겠는가? 길수 놈 새끼야, 끼무라 놈아, 어디 아무리 특무를 보내봐라. 흥!) 한참 헐떡거리면서 걷고 나니 누런 천지꽃산 마루가 보였다. 황야의 밤은 무섭게 고요한데 어디서인가 개짓는 소리가 숨 막힐 듯이 정적을 깨뜨렸다.                                 10. 포위토벌      초생 달이 동녘하늘에 걸렸을 때였다.      한 무리 일본 헌병 놈들이 자위대원과 일제 경찰들과 함께 계수동에 덮쳐들었다. 계수동과 조개덕, 함흥촌 갈림길 옆에 서너 아름이나 되는 늙은 비술나무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일본 헌병놈들은 먼저 늙은 비술나무 부근 둔덕 우에서 똘만의 시체를 찾아냈다.      헌병 대장 놈은 늙은 비술나무 옆에서 군도자루를 잡고 서서 돼지 멱따는 소리로 꽥꽥거렸다.     “여기서 병력을 다섯 갈래로 나눠 함흥촌 부근 마을을 몽땅 소탕하라. 사이또 소장은 저 동쪽의 계수동을 토벌하라. 나는 헌병들을 데리고 유격대 본거지인 함흥촌 토성안집부터 소탕해버리겠다. 진수해의 분주소와 조일파출소는 경찰과 자위대를 세 길로 나눠 진격하라. 너희들은 저 패랑천촌의 토성안집 지학사와 서쪽골 안의 장학산, 이 조개덕의 조덕림을 몽땅 소탕해버려야 해.” 사이또 소장과 조일파출소 소장이 경찰들을 데리고 떠나려 할 때다. “잠간!” 모두들 덮쳐나가려다가 주춤주춤 멈춰서 헌병 대장을 향해 돌아섰다. 헌병 대장 놈은 군도를 빼들어 휙 휘둘렀다. “풀을 건드려 구렁이를 놀래지 말엇!  함흥촌에서 첫 총소리 울리면 동시에 행동하라! 무고한 백성 백 명을 잘못 죽이더라도 유격대 한 놈이라도 놓쳐선 안돼! 똘만 살해 작전은 유격대 아낙네가 지휘했다. 남녀노소 모조리 살해하라!” “하이!” “옛!” 어지러운 군화소리가 마른 풀숲을 짓밟으면서 밤 정적을 깨웠다. 여기저기서 놀란 새들이 푸르릉 날아났다. 한참 후 함흥촌 쪽에서 자지러진 총소리가 울렸다. 뒤이어 계수동에서도 총소리가 어지러이 울렸다. 놈들은 계수동을 포위하고 닥치는 대로 조선 백성들의 집에 뛰어들어 한참 잠이 든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무참하게 총을 놓거나 총창으로 찔러 살해했다. 그것도 모자라 초막과 집에 불을 지르고 부림소나 돼지 같은 집짐승마저 총창으로 찔러죽이고 빼앗아갔다. 경찰 놈들은 소 두마리만 살려 수레에 메워 자기들이 살해한 백성들의 귀를 베 죽은 돼지와 함께 수레에 싣고 토성안집 쪽으로 내려갔다. 인간백정들은 무고한 백성들을 살해해 전리품으로 싣고 너털웃음을 치면서 산 아래로 내려왔다. 한편 헌병 대장은 군도를 빼들고 헌병들을 지휘해 토성  밖을 포위하고 작탄으로 대문을 부신 후 일제히 덮쳐들어갔다. 살인야수들은 집안에 대고 한창 몰사격을 가하고 수류탄까지 들이 뿌렸다. 그러나 집안에서는 총 한방 쏘지 않았다. 헌병 대장 놈은 유격대가 보이지 않자 이를 악물더니 군도를 빼들어 휘둘러댔다. “토성과 창고를 몽땅 무너뜨렷!” 몇몇 일본 놈들이 수류탄묶음을 토성 밑에 뿌렸다. 서쪽토성이 굉음과 함께 서너 발이나 쿵 무너졌다. “대장님, 갱도입구!” 대장 놈과 몇몇 분대장이 다가갔을 때였다. 활활 타오르는 불빛에 무너진 토성 굽에 갱도입구가 드러났다. 그 안에는 입쌀가마니가 드러났다. 대장 놈은 군도로 가마니를 푹 찔러 째보았다. 싯누런 옥수수 알이 드러났다. “요로씨이(좋아), 유격대 옥수수! 흐흐흐.” 유격대 한명도 잡지 못하고 헛물을 켠 대장 놈은 전리품이나 얻은 듯이 너털웃음을 웃어댔다. “끝내 유격대 놈들의 꼬리를 밟았구나.” 그 놈은 이를 갈며 뒤를 돌아보고 군도를 휘둘렀다. “갱도 안을 수색해라. 개미 한마리라도 얼씬거리면 몽땅 참살해라!” “하잇!” 한개 분대나 되는 헌병 놈들이 시꺼먼 갱도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웬 일일까? 갱도 안에서 닭 몇 마리가 풍겨 나왔다. 그러나 총소리 한방 울리지 않았다. 드디어 헛물을 켠 놈들이 갱도어귀로 맥없이 되나왔다. “한 놈도 잡지 못했어?” 헌병 대장 놈이 낯을 찌를 듯이 군도를 휘두르며 묻는 소리에 분대장 놈은 차렷 자세로 대답했다. “없습니다. 유격대 놈들은 진작 몽땅 도망쳤습니다”. 이때 그나마 계수동쪽에서 회합해온 사이또 소장 등이 수레 두 채에 죽은 돼지와 숱한 무고한 귀라도 실어 왔다. 그제야 대장은 조금 위안됐다. 그러나 대장 놈은 상전에게 보고할 무엇이 있어야 했다. 그 놈은 군도를 토성밖에 대고 홱 휘둘렀다. “옛!” 일본 놈들이 야수들처럼 덮쳐나갔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 원래 성칠 대장과 인삼이가 보낸 진달래 중대장과 억복 소대장은 한 개 소대 유격대를 영솔해 계수동 부근에 매복해있었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그때 늙은 비술나무 밑에서 기준을 발견한 똘만 놈이 고아대는 목소리를 듣게 됐다. 기준과 똘만이가 박투하면서 주고받는 말을 들은 진달래는 키 큰 게 기준이고 기준에게 총을 겨눈 작달막한 놈이 똘만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그때 진달래가 먼저 돌멩이를 날려 똘만의 대갈통을 까고 뒤이어 연속 몇 놈을 까 눕혔던 것이다. 기준이가 도망치자 유격대원들은 진달래의 명령에 따라 사격하면서 자위대 놈들을 쓸어 눕혔던 것이다. 진달래 중대장은 놈들이 꼭 소탕하러 올 것이라는 것을 예측하고 유격대원들을 이끌고 전이하면서 미리 병완과 석은의 형제 등 마을사람들에게 기별하여 몽땅 산속으로 피신하게 하였던 것이다. 또 헛물을 켜고 난 놈들은 악이 받쳐 집집이 돌아가면서 불을 지르고 미처 달아나지 못한 마을 사람들을 무참히 살해하고 약탈하기 시작했다. 헌병놈들이 토성안집에 휘발유를 치고 불을 지르려고 할 때었다. 헌병 대장 놈이 군도를 거두면서 고함쳤다. “잠간!” 놈들이 야수의 손들을 마지못해 멈추었다. “불을 지르지 말엇!” 분대장 놈과 사이또 놈은 의아해했다. “난 이 마을이 아주 좋아. 산을 등지고 남쪽과 서쪽에 강이 흘러 여름이면 얼마나 경치가 좋겠는가?” 사이또 소장은 헌병소대장이 정신이 혹시 나가지 않았는가고 어리둥절해했다. (자식, 환장했어? 싸우다가 웬 기생집 생각이 났는가?) 대장 놈의 입에서는 엉뚱한 소리가 튀어나올줄이야.. “소탕 맞은 유격대 놈들이 다시는 이 마을에 얼씬하지도 못할게다.” 그러자 사이또 소장 놈이 활활 타오르는 가재수염을 슬슬 어루만졌다. “그래 어쩌자는 겁니까?” 헌병 대장 놈은 희죽이 웃으면서 사이또 소장과 여러 놈들을 두리번거렸다. “이 마을에 토성안집을 중심으로 우리 대일본제국에 충성하는 조선인 모범집단부락을 세우면 어떤가?” “조선인 모범집단부락?” 사이또 소장은 치켜떴던 피비린 눈 확에 가는 미소를 지었다. “거 참 좋은 생각입니다."       헌병대장은 군도로 땅을 짚고 어깨를 으쓱하였다. "모범집단부락을 잘 꾸려 유격대 놈들이 있을 때보다 이 마을 조선인들이 더 잘 살게 만들어야  그런 날엔 조선인들이 스스로 우리 대일본제국에 충성할게 아니겠는가?” 이때 해동분주소 지학구소장이 자기 사촌형님인 지학사를 데리고 사이또 소장과 헌병 대장 놈 앞으로 다가왔다. “이 자는 누구?” 지학구는 굽신거리면서 소개했다. “내 사촌형 지학사입니다. 형님, 어서 말하오. 대일본제국에 충성하겠다고.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다니까.” 그제야 지학사는 겁기 띤 눈길로 사이또 소장과 헌병 대장 놈을 두리번거리더니 목구멍으로 기어들어가는 모기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부터 에, 에헴, 대일본제국에 충성하겠습니다.” 사이또 소장은 그리 쉽게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다. “이 자가 혹시 패용천산 앞마을에 유명한 대지주 지학사가 아닌가?” “맞습니다.” 옆에서 지학구 소장이 머리를 조아렸다. “전번에 왜 우리 진수해분주소 자위대에 총을 겨눴쏘까? 인삼이 항일유격대 대장 좋쏘까? 보호했쏘까?” 사이또 소장이 허리에 찬 권총을 매만졌다. 헌병소대장도 군도자루를 매만졌다. 지학사도 자존심이 있었다. “그때 우린 인삼이 우리를 지켜준다고 생각했소. 우리 중국 사람은 그리 호락호락하게 보지 마오. 우리 중국에는 이런 속담이 있소. 남이 나를 건드리지 않으면 나도 남을 건드리지 않소. 우리 집과 처자 그리고 밭을 다치지 않으면 당신들한테 쌀도 주겠소. 허나 털끝 하나라도 다치기만 하면 우린 가만…” 그때 옆에서 지학구소장이 지학사의 옆구리를 툭 쳤다. “이 자가 뭐래?" 지학구 소장이 앞질러 말했다. “가만 있으면서 대일본제국에 충성하겠다는 말입니다.” “그래? 그럼 장학산은?” 지학구 소장은 인차 대답했다. “이 부근 중국 지주들은 내 책임지고 몽땅 대일본제국에 충성하게 만들겠습니다. 태군, 근심하지 마십시오.” 사람을 죽이고서도 눈 하나 깜짝이지 않던 사이또도 지학구소장의 말에는 머리를 끄덕이었다. “좋아, 지 선생, 당신을 촌장으로 임명할 테니 이 부근 중국 사람들과 조선인들을 몽땅 집단부락에 들어오라고 하게나. 우리한테 대일본제국에 충성할 충성 맹세서를 써내야 살려주겠소.” 이때 장학사네 집으로 덮쳐갔던 자위대 놈들이 어둠속에서 달빛을 빌어 장학산마저 뒤 결박을 지워 끌고 왔다. “이 놈은 유격대 우두머리 인삼이란 놈의 양애비랍니다.” 그때 지학구소장이 나서서 사이또 소장의 귀에 대고 뭐라고 중얼거렸다. 사이또 소장놈이 헌병 대장과 귀속 말을 했다. “놓아줘라! 우리 친구야.” 헌병 대장 놈의 말에 자위대 놈들은 전리품을 빼앗기는듯해 두덜거리면서도 장학산을 풀어주었다. 사이또 소장은 진수해분주소 소장을 보고 물었다. “그래 함흥촌 서쪽 골안은 잘 훑어보았는가?” “옛! 골짜기 사람들은 함흥촌에서 울린 총소리에 놀랐던지 몽땅 도망치구 없습디다. 몇몇 초가집과 움막을 몽땅 불살라버리고 오는 길입니다.” 리달송 통역에게서 통역을 들은 사이또 소장과 헌병소대장은 대가리를 끄덕였다. 놈들은 동녘하늘이 희붐히 밝아올 때에야 무고한 백성들의 시체를 남기고 계수동과 함흥촌에서 떠나갔다. 먹장구름이 뒤덮인 하늘에서는 한 많은 거위 털 같은 눈이 잿더미로 된 함흥촌에 풀풀 흩날려 내렸다.                     제14장 한 많은 사랑          1. 모범집단부락         창준과 기준은 일본 놈들의 포위토벌에 목숨을 건진 것만 하여도 다행으로 생각했다. 장학산이 지학사와 가병까지 불러 일본 놈들의 손에서 인삼을 구하려고 길목을 막아나선 일이 고마워 소작료를 8할이나 내라고 하여도 옴니암니 따지지 않았다. 그런 줄도 모르고 장학산은 창준과 기준이 이젠 다신 감히 자기와 얼굴을 붉히지 못하는 것이라고 오산했다. 지학사는 더구나 기고만장해 거들먹거렸다. 어느 날, 그는 사냥총을 든 가병들까지 데리고 함흥촌에 우르르 쓸어들었다. 지학사는 인심을 얻는 수작을 잊지 않았다. 그는 창준이네 집에 가서 괴춤에서 동전 몇 닢을 위방 구들에 내놓았다. “보태 쓰오.” 병완은 “고맙소." 하고 인사하면서도 동전은 되밀어주었다. “왜? 자네 아들을 괭이로 찍었다고 안 받아?” 지학사의 눈길에는 서슬 푸른 빛이 번뜩였다. (이제야 네놈 속심이 드러나는구나. 네 놈과는 한 하늘을 이구 살지 못할 거 같구나.) 지학사는 인차 침착성을 되찾았다. “중국에 왔으면 우리와 화목하게 보내야 해. 우리에겐 땅이 많아.” 이젠 창준도 중국말을 많이 배워 지학사의 빈정거리는 소리를 대개 알아들을 수 있었다. 창준과 상길이 아무 말도 않고 묵묵히 듣는 것을 보고 지학사는 문턱에 걸터앉아 계속 지껄였다. “문칠이, 우리 손을 잡고 함흥촌과 패랑천촌, 조개덕을 합쳐 모범집단부락을 차리자. 중국 사람들 속에서 위망 있는 내가 촌장을 하고 조선 사람들속에서 위신이 있는 병완이 부 촌장을 하게나. 우리 모범집단부락만 되면 대일본제국 일본 사람들은 우리 마을에 전기도 놔주고 석마간도 져 준다오. 얼마나 좋소. 생각해보오. 모범집단부락이 얼마나 좋은 지상낙원이오?” 그래도 병완은 머리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지학사는 옆에 서있던 가병의 사냥총을 쥐어 흔들어댔다. “누가 만약 모범집단부락건설을 방애한다면 이 총이 용서하지 않을 게요. 곰곰이 생각해보오. 관동군이 백만도 넘는데 역지 못해 그들과 엇선단 말이오? 당신네 조선 사람들도 어째 고향을 떠나 이국 타향에 왔소? 배불리 먹고 잘 살자는 게 아니오? 누가 배불리 먹고 살게 하면 우린 그를 주인으로 모시고 하라는 대로 해야 할 게 아니오?” 창준은 속으로 지학사를 욕했다. (개놈새끼, 촌장벼슬을 가지더니 벌써 왜놈의 개다리로 돼버렸구나. 뒈질 놈 새끼!) 지학사는 괴춤에서 필기장을 꺼내들면서 말했다. “여기에 김병완, 김문칠이란 이름 석 자씩만 써넣게나. 그럼 당신네 가족, 에헴, 헴, 그럼 일본 사람들은 자네들을 못살게 굴지 않을 거네. 대일본제국과 맞서서 뭘 하오? 어서 양민 명단 속에 자네도 이름을 써넣게나.” 창준은 필기장을 건너다보면서 물었다. “이건 뭐요?” 창준이 호기심을 가지는 것 같아 지학사는 입이 당나발이 돼 문턱에서 내려 다가와 앉았다. “이건 진수해분주소에서 내준 ‘협파회’와 ‘협조회’에 든 사람들의 이름을 적어 넣는 호구부오. ‘협조회’나 ‘협파회’에 들면 일본제국에선 정식으로 대일본제국의 양민으로 인정해주오. 내 기쁜 소식을 알려줄게. 대일본제국에서는 당신네 조선인들을 대일본제국의 2등 공민으로 인정해주고 조밥을 먹게 해준다오. 죽물도 먹기 힘든데 조밥을 먹는 2등공민이 매우 좋소. 좋아.” 창준은 상길을 돌아보면서 피씩 웃었다. 지학사는 창준이 마음이 돌아 선다고 생각하고 계속 늘어놓았다. “우리 중국 사람은 3등공민이라오. 3등공민은 수수쌀을 먹어야 된다나. 그래도 난 이렇게 2등 공민 당신한테 찾아와 부 촌장을 하라고 하오. 허허허. 하하하.” 지학사는 창준의 부자간을 번갈아보면서 너털웃음을 웃었다. 그는 엉덩이를 떼고 일어나면서 말했다. “당신을 강박하지 않겠소. 시간을 줄 테니 잘 생각해보오. 중국에 밥이라도 얻어먹으러 왔으면 잘 생각할 필요가 있소. ‘협조회’에 들면 나처럼 일본 사람들을 위해 뭔가 일을 해야 하오. 허나 ‘협파회’에 들면 대일본제국과 엇서지 않고 그저 평범한 일본 공민이 되겠다는 결심과 같소. 그러니 어느 회에 들겠는가는 잘 생각해 아무데나 드는 건 옳을 게오. ‘협파회’에도 들지 않으면 일본 사람들은 요시찰인물이거나 반일불온분자라는 딱지를 붙여놓소. 그럼 살기 힘들 게요. 지어 함흥촌에서 쫓겨나게 될 거요. 함흥촌은 일본 공민들로 채워 모범집단부락을 꾸려야 하니까. 으흠, 납득되면 그 필기장에 이름 석 자를 써주오. 그럼 내 진수해분주소에 보고하고 당신을 부 촌장으로 임명하게 하겠소.” 창준은 필기장을 주어들더니 지학사에게 주었다. “난 못하겠소.” “뭐? 중국에는 이런 말이 있소? 권하는 술은 마시지 않고 벌주를 마시겠는가?” 지학사가 눈알을 번뜩이면서 고함쳤다. 그러나 창준은 굳은 표정이 변함없었다. “난 아무 술도 마시지 않겠소.” 지학사는 떠나가면서 말했다. “토성안집을 보지 못했소? 유격대를 따라 항일을 해봤자 어떻게 됐소? 인삼은 내 외사촌형님의 양아들이네. 내겐 양조카구. 그래서 나도 인삼이 잡혀갈 때 가병까지 데리고 가서 구하려 했소. 일본 헌병들을 당할 수 있소? 인삼이가 토성안집에 있었더라면 낙자없이 참살 당했을 거네. 토성안집 덕에 온 마을사람들이 삶의 터전을 잃었네. 한심하지 않소? 중국에 와서 농사를 지으면서 편안히 살겠으면 협파회에 들란 말이오.” 그러나 창준은 문밖에 나가 지학사를 바래면서 도리머리질만 했다. 지학사를 보내고 창준은 위방에 들어와 구들에 앉으면서 땅이 꺼지게 한숨을 내쉬었다. 고방에서 기준이가 나왔다. “이 일을 어쩜 좋겠느냐?” 기준은 아버지와 형님 앞에 마주 앉았다. 그는 벽이라도 차고 뛰쳐나가는 성격과는 달리 이런 말을 했다. “형님, 협파회에 이름을 써 넣기요.그래야우리 함흥촌에서 편안히 살 수 있소. 온 조선과 만주국이 몽땅 일본 놈의 세상이 됐는데 어디에 간들 협파회에 들지 않고 우리가 마음 놓고 살겠소.” 창준은 놀란 눈길로 기준을 쳐다보았다. “너 그게 무슨 소리냐? 그래 우리 일본 놈들의 공민이 되잔 말이냐? 안 된다. 무슨 낯으로 유격대를 보겠느냐?” 기준은 한참 궁리하다가 천천히 말했다. “살기 위해 가짜로 협파회에 잠시 드는 게지. 우린 일본 놈들을 위해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 되지. 아버지는 부 촌장 하지 마시요.” 창준은 곰방대를 뻑뻑 빨면서 얼굴이 굳어있었다. 이때 상순이가 미닫이문을 열고 위방에 나왔다. “절대 안됩니다. 굶어 죽을지언정 일본 놈들의 백성이 돼서는 안됩니다.” 기준은 넉가래 같은 손으로 상순의 뺨을 짱 쳤다. “요놈새끼, 어른들 말에 끼어들겐?” 상순은 볼을 매만지며 정지에 나가면서도 계속 두덜거렸다. “일본 놈들의 개가 되는 게면 죽고 말겠다. 씨.” 나중에 창준은 이렇게 말했다. “글쎄 촌장을 하지 않으면 목숨을 구하고 함흥촌에서 살자고 협파회에 드는 거쯤은 유격대에서도 양해하겠지.” 창준은 곰방대를 재떨이에 툭툭 쳐서 담배 재를 털면서 뒷말을 이었다. “성칠한테 물어보고 가불간 결정하자.” 이튿날 기준은 도끼 한 자루를 허리에 차고 장백산으로 들어갔다. 점심때가 다 되여 지학사가 또 찾아왔다. “에헴, 문칠 영감 있소?” 창준은 전날과는 달리 굳었던 얼굴을 좀 풀면서 “지 촌장이 왔소?” 하고 인사까지 하며 위방에 들였다. 지학사는 필기장을 또 꺼내들면서 말했다. “이걸 보오. 이 마을의 숱한 사람들이 거의 다 협파회에 이름을 써넣었소. 이게 역은 거요. 살자면 낮은 문턱에도 머리를 굽혀야 하는 법이오. 내라고 중국 사람의 자존심이 없겠소? 흥, 여기 중국 땅은 우리 조상들이 몇 천 년 동안 대대로 살아온 땅이오. 뭘 구실로 내 조상의 뼈가 묻힌 이 땅을 저 일본 놈들이 차지한다오? 그 놈들이 내 땅을 빼앗고 우릴 못살게 굴면 내부터 저 놈들을 목숨을 걸구 싸울테오.” 지학사는 창준의 눈치를 힐끔 쳐다보며 물었다. “그래, 동생네하구 간밤에 잘 토론해보았소? 동생은 어데 갔소? 어째 보이잖소?” 창준은 제꺽 에둘러댔다. “그 앤 집을 손질하자고 산으루 목재를 베러 갔소.” 지학사는 병완의 눈치를 흘끔거리면서 다가앉았다. “에이, 이 개울가에도 숱한 나무를 두고 어디로 가오? 이리 중대한 일을 두고. 그러나 저러나 부 촌장을 하겠소? 저 아래 리부림이란 사람이 하자고 나섰지만 난 어쩐지 당신이 마음에 있소. 그래도 함흥촌의 개척자인 자네 함흥사람의 말이 서지. 그 지씨 말 설 거 같잖단 말이오.” 그 말에 창준은 제꺽 대답했다. “부 촌장은 하지 않겠소. 그러나 ‘협파회’에 드는 거 좀 생각해보기오.” 그러자 지학사는 만면에 춘풍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는 뾰족한 턱을 슬슬 만지면서 장황설을 늘여놓았다. “옳소. 잘 생각했소. 머저리 아닌 이상 누가 감히 대일본제국을 항거하겠소. 나도 내 밭을 지키면서 살자고 억지로 촌장을 하오. 일본 옷을 한벌 갈아입은 셈이지. 으흐흐. 촌장 질을 하면 최저한도 우리 집 밭을 빼앗아 가지야 않겠지. 그 놈들도 사람인 게. 아무리 그러니 자기들께 충성하는 내 아내하구 짐승들을 끌어 가지야 않을게 아니요. 이게 혼란한 일본 놈들의 세상에서 살아남는 처세술이지. 안 그래? 다시 생각해보오. 부 촌장을 해보오. 그럼 내 장학사동생과두 말해 자네 소작 농사를 영영 짓게 주선해보지.” 창준은 머리를 숙고 생각하다가 말했다. “앓았소. 협파회에는 들게. 우리 아버지는 부 촌장을 하지 않소.” “좋소. 그럼 먼저 ‘협파회’쪽에 이름을 써넣소.” 창준은 지학사에게서 연필을 받아 떨리는 손으로 필기장에 자기와 동생 기준의 이름까지 써넣었다. (세상에 못할 노릇을 했구나.) 창준은 후회 절반 근심 절반 하건만 지학사는 필기장을 쳐들고 보면서 너털웃음을 웃었다. “그래, 그래, 이게 명지한 선택이지. 일본 백만 일본 관동군 앞에서 누가 무릎을 꿇지 않고 살아남겠소? 흐흐흐, 하하하. 이게 살아남는 유일한 방법이지.” 창준은 위방 문을 나서는 지학사의 득의양양한 낯을 보면서 땅이 꺼지게 한숨을 후~ 내쉬었다. 문밖에서는 거위 털 같은 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창준은 하얀 눈을 빠드득빠드득 밟으면서 멀어져가는 지학사와 가병 둘을 내다보면서 가슴이 답답해 주먹으로 가슴을 탕탕 쳤다. 상순은 문밖으로 뛰쳐나가 지학사가 떠나간 쪽에 대고 눈을 마구 쥐여 뿌렸다. “개새끼, 콱 썩어져라!” 그러나 지학사는 들었는지 말았는지 어깨가 으쓱해 토성안집 쪽으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무너진 토성 밑 동굴에서는 장학산이 한창 동굴 속의 쌀을 마대에 퍼담고 있었다. “형님, 유격대 놈들이 두고 달아난 쌀은 대일본제국에 바쳐야 하오.” 장학산은 자학사에게 눈을 흘겼다. “너 일본 놈 새끼들 촌장 되더니 이 형님도 알아보지 못해? 토성안집은 내 양아들에게 지어준 집이야. 이 토성안집의 쌀과 집은 이젠 몽땅 내거란 말이다. 삐치지 말라!” 그러나 지학사는 언성을 높였다. “형님, 이게 무슨 세월이라고 이러오? 대일본제국에서 함흥촌에 집단부락을 세우고 이 토성안집을 손질해 촌공소로 쓰라고 했소.” 그 말에 장학산은 성을 벌컥 냈다. “야, 이 놈 새끼야, 그래 네깐 놈이 일본 놈 새끼들을 등에 업구 이 형님의 양아들 집을 빼앗아 네놈이 쓰겠단 말이냐?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엔 안 된다, 안 돼!”        지학사도 세길, 네길 펄쩍 뛰는 장학산을 어찌는 수 없었다. 그는 머리를 홰홰 가로저었다.         “형님, 왜 그리 세상물정을 모르오? 지금 무슨 세월이오? 일본 놈들의 세상이랑 말이오. 일본 놈들과 등져서 먹을 알이 있소?"        장학산은 허리를 쭉 펴고 일어서서 지학사를 손가락질하면서 욕했다. "골기 없는 놈새끼, 굶어 죽어도 일본 놈의 개 돼선 안돼!" 지학사는 억이 막혀 입을 함박만큼 벌렸다. "형님, 우리 집단부락을 잘 꾸리기오. 그게 살 길이오. 나도 우리 집 밭을 일본 놈들이 빼앗아간다면 가만놔둘 거 같소. 난살기 위해선 집단부락보다도 더 한 짓이라도 할수 있단 말이야.”       지학사는 침을 퉤 뱉고는 뒤짐 짚고 패용천산 앞으로 가버렸다.  
56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35) 댓글:  조회:1678  추천:1  2016-03-11
                       5. 밀정을 처단        가을비가 구질구질 내리는 초저녁에 유격대의 억복 등은 질척질척한 진흙탕 길을 밟으면서 간신히 함흥촌으로 돌아왔다.        기준은 웃새집에 가서 아버지께 문안을 드린 후 토성안집으로 들어갔다.        그가 마루에 올라서자 인삼이 반겨 맞았다.       “형님, 김 장군이 우리를 보고 용정 부근 성지촌의 허팔기란 개다리를 처단하라고 지시했소. 형님이 함께 가서 허팔기와 마을 정황을 알아보겠소?”       기준은 두말없이 “그러지. 허팔기란 놈이 나를 알아놔서 불편하지 않을까.” 라고 했다. 뒤이어 그는 무슨 궁리를 하는 인삼에게 툭 찍어 말했다. “에이, 고 한줌 도 안 되는 놈을 죽이는데 무슨 숱한 사람이 가서 뭘 하겠소. 내 혼자 가서 도끼로 대갈통을 까치우면 다지.” 인삼은 인차 대답하지 않고 한참 궁리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리 간단할 같지 않소. 지금 일본 놈들은 개다리들이 하나하나 처단되자 보안을 강화했소. 잘 정찰하지 않고 소홀히 건드렸다간 풀을 건드려 구렁이를 놀래는 꼴이 되고 말 거오.” 기준은 한참 궁리하다가 무릎을 탁 치였다. “오, 성지촌과 그리 멀지 않은 물레방아 골에 원삼이가 있지 않소? 그를 찾아가 도와달라고 하면 될 게요.” 인삼은 이전에 원삼과 기준이가 호송하던 쌀 수레를 빼앗을 때부터 원삼의 위인을 아는지라 그리하기로 했다. 기준은 이튿날로 원삼을 찾아 떠나갔다. 부상당한 억복을 토성안집에 남겨두고 인삼과 철석이 유격대 대여섯을 데리고 기준을 뒤따라 물레방아골 쪽으로 떠났다. 한편 기준이 물레방아 골로 도착했다. 원삼의 집은 텅 비어 있었다. (어디로 갔을까?) 기준은 사위를 둘러보다가 리영룡 지주네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때 면바로 뚱뚱한 리영룡이 집 울안에서 나왔다. “리 주인, 무사합둥?” 리영룡은 개기름이 번지르르한 낯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어, 어떻게 돼 여기까지?” “원삼을 찾아왔습니다.” “저 아래 성지촌으로 갔소.” 리영룡은 경계하는 눈초리로 주위를 살폈다. 기준은 너무나도 허황해 서글픈 웃음을 지었다. “아니, 가을걷이를 하지 않고 어디로 간단 말이오?” 리영룡은 심드렁한 표정이었다. “알 턱이 있소? 사람이 말을 타면 견마를 잡히고 싶어 한다더니 사람의 욕심이 어디 끝이 있소? 간도에 쪽박 차고 오자마자 힘꼴을 쓴다고 밭도 붙이라고 줬더니. 에이, 참, 원, 소작료를 적게 내려고 좀스럽게 논단 말이오. 흥!” 리영룡은 코 방귀를 뀌더니 뒤짐을 짓고 휭 하니 가버렸다. 기준은 뒤에서 주먹을 으스러지게 틀어쥐었다. (총이나 있었으면 저 놈 새끼 대갈통부터 박살냈으면. 원, 참.) 기준은 별수 없이 뒷산등성이에 올라갔다. 그때 인삼이네가 셋씩 두 패로 나눠 다가왔다. 그들은 인차 옥수수 밭에 들어가 몸을 숨겼다. 기준은 성이 꼭뒤까지 올라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아무래도 원삼은 리영룡 지주에게 쫓겨 간 거 같네. 동생, 허팔기보다 저 악질지주 리영룡부터 없애 버리는 게 어떻소?” 인삼은 머리를 가로저었다. “아니오. 우린 이번에 일본 놈의 개다리 허팔기를 처단해야 하오. 리영룡의 대갈통은 잠시 목에 붙여두었다가 다시 보기요.” 기준은 한숨을 후~ 내쉬었다. “원삼은 리 지주한테 억눌려 사는 게 억울해 항상 유격대에 가고 싶다 했네. 언젠가는 꼭 나와 원삼이 리 지주의 목을 베 버리겠소.” 인삼은 유격대원들을 돌아보면서 결단성 있게 명령했다. “산등성이를 타고 성지촌으로 가기요.” 유격대원들은 기준을 앞세우고 일정한 거리를 두고 산등성이를 타고 성지촌 쪽으로 떠났다. 기준이 육도하 북쪽 산등성이를 타고 걸으면서 보니 조선족 간민들이 올망졸망 지은 초가집들이 게딱지처럼 여기저기 널려있었다. 산비탈마다 누렇게 번져가는 손바닥만 한 밭들이 올망졸망 널려있어 별유풍경이었다. (에이유, 아무리 부지런히 농사를 지어도 쓸데 있어? 가을에 지주들이 소작료를 다 걷어가고 나면 빈 털털인 걸.) 기준은 농사꾼들이 불쌍해 땅이 꺼지게 한숨을 후- 내쉬었다. 그들은 해질녘에야 성지촌에 이르렀다. 기준은 앞서 나가 마을 어귀에 들어서자 여기저기 기웃거리다가 골목길에 나오는 사람과 물었다. “이 마을에 금방 이사해온 원삼이네 집이 어느 겐지 모르오?” 그 사람은 기준의 아래위를 훑어보더니 “당신은 그 집 사람하구 어떻게 되오?” 하고 물었다. “오, 한 고향 사람이오.” 그러자 그 사람은 산기슭 첫 집을 가리켰다. “저 집에 있을 게요.” 기준은 그 사람에게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고나서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마른기침을 하더니 원삼이네 집으로 갔다. “원삼이 있소?” 등불이 나불거리는 집안에서 대답소리 났다. “양, 아니, 이게 귀에 익은 목소리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원삼이 달려 나왔다. “아니, 정말 범이 제 흉을 하면 온다더니 밤에 이게 웬 일이오?” 원삼이가 기뻐 야단쳤다. 기준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팔꿈치로 원삼의 옆구리를 툭 쳤다. “소릴 좀 낮추오! 팔기 듣겠소.” 원삼은 기준의 손을 잡고 황급히 집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원삼의 처자들은 기준을 알아보고 모두들 인사했다. 원삼이 위방에 올라가 앉자 원삼의 작달막한 아내가 저녁상을 들여왔다. 기준은 체면을 챙길 새 없이 숟가락을 들면서 물었다. “인삼한테서 들으니 화나서 앓는다더니 어떻소?” “물레방아골을 떠나니 좀 낫소. 리영룡 지주를 보기만 해도 화 나서 못 견디겠소. 그래 인삼 형님은 막일을 하러 용정으로 갔고 나도 여길 내려왔소. 건데 여기 와서도 허팔기란 놈 새끼를 보면 또 화나군 하오.” “그래, 그 팔기 새끼 쌀을 유격대에 빼돌렸다고 자넬 물어먹더니 아직도 마을에 있는가?” 기준의 물음에 원삼은 화나서 몸까지 움찔했다. “에이, 옛말에 악한 놈이면 죄를 만나 일찌감치 썩어진다던데 그 놈 새끼는 눈이 퍼래 살아 있소.” 기준은 허리를 앞으로 굽히더니 원삼한테 귀속 말을 했다. “요즘 마을에 일본 놈들이나 수상한 놈들이 드나들지 않았소?” 원삼은 엉거주춤 일어나 방문을 열고 바깥을 내다보더니 정지에 대고 말했다. “종호야, 네 좀 나가 살펴라. 누가 오면 기침소릴 높게 내라.” “예.” 문을 여닫는 소리가 난후 원삼은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며칠 전에 수상한 놈들 몇몇이 허팔기 집에 왔었소. 농사꾼들 같지 않습데.” “아직도 있소?” “없소.” “오늘 온 놈은 없소?” “가만 있자. 자위대 놈이 한 놈 와 있는 거 같소. 술상을 벌렸는지 온 저녁 굴뚝에서 연기 뭉게뭉게 납데.” 기준은 한숨을 후 내쉬었다. “허팔기 집이 어느 게요?” “두 집 건너 앞집이오. 보기 싫다 하니 날마다 눈에 띠우오? 흘끔흘끔 나를 살피기만 하오. 밸 같았음 그놈 새끼를 단매에 때려죽이고 싶소. 에이, 참.” 기준은 저녁술을 놓기 바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원삼도 일어났다. “아니, 형님, 무슨 일이 있소?” “내 좀 나갔다가 올 일이 있소.” “무슨 일이오? 이 밤중에? 혹시 내 도울 일이 없소?” 기준은 주춤 멈춰서더니 몸을 돌려 원삼한테 다가서면서 귀속 말로 말했다. “허팔기 놈을 처단하러 인삼 아우가 왔네.” “양? 그럼 우리 집에 오라고 하오.” “아니네. 우린 일을 끝내고 그 길로 돌아가겠네. 괜히 자넬 연루시킬게 없네.” “허팔기 놈을 내 손으로 없애자 했는데. 에이, 좌우간 속이 시원하겠소. 나도 나가겠소.” 그러자 기준은 원삼의 손을 잡고 말했다. “동생, 그까지 허팔기 목을 비트는데 자네까지 필요 없네. 모르는 척 하고 집에 있소.” 이때 바깥에서 기침소리 높이 났다. “누가 온 거 같소.” 원삼의 말에 기준은 “아마 아우가 온 거 같소. 내 나가 봐야겠소.” 하고 말하면서 바깥으로 나가려고 했다. 그때 원삼은 기준의 팔을 잡아당기더니 자기가 위방 문을 살며시 열고 바깥을 내다보다가 나갔다. “누구요?” “쉬-” 기준이가 문을 삐쭉 열고 내다보다가 나갔다. “아우요.” 기준은 인삼한테 다가가 앞집 쪽을 가리키면서 뭐라고 귀속 말을 했다. 그러자 인삼은 원삼과 인사를 나누었다. 인삼은 뒤따라 마당에 들어선 철석에게 뭐라고 나직이 명령했다. 뒤이어 뒤에선 유격대원들에게 동서남북을 가리키면서 일일이 뭐라고 귀속 말로 명령했다. 그러자 유격대원들은 동서남북으로 흩어져갔다. 인삼은 원삼을 집에 들어가라고 한 후 기준을 미리 뒷산 옥수수 밭에 보냈다. 뒤이어 그는 철석을 데리고 앞으로 걸어갔다. 그들 둘은 두 집 건너 허팔기 집 마당에 들어서기 전에 사위를 두리번거렸다. 가을바람에 굴뚝에서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연기가 마구 날려갔다. 인삼이가 위방 문 쪽에 다가갔다. 철석은 정지 문에 다가갔다. 그들은 동시에 손가락에 침을 발라 창호지를 구멍 내고 집안을 들여다보았다. 등불이 너불거리는 위방에서 작달막하고 턱이 뾰족한 자와 실팍한 자가 뭐라고 두런두런 말을 주고받았다. 인삼은 작달막한 자가 허팔기고 실팍한 자가 원삼이가 말하던 자위대 놈이라고 짐작했다. 뒤이어 그들은 서로 눈길을 마주쳤다. 인삼이가 위방 안쪽을 손가락질했다. 철석이가 위방 문 쪽으로 다가왔다. 그들은 위방 문을 벌컥 열고 동시에 뛰어 들어갔다. 인삼이가 휘두른 시퍼런 비수에 실팍한 자위대 놈의 목이 썩 뚝 날아났다. 위방과 정지에서 새된 비명소리가 울렸다. 철석이가 시퍼런 비수를 허팔기 놈의 목에 들이댔다. “이 일본 놈들 개다리야! 우란 유격대다. 또 일본 놈들에게 고발해 봐라!” 허팔기는 구들바닥에 머리를 쪼아대면서 두 손이 발이 되게 싹싹 빌었다. “제발 목숨만 살려줍소. 나도 조선에서 살 길을 찾아온 조선 사람이요.” 인삼은 비수를 허팔기의 눈앞에 들이대고 호통 쳤다. “네놈이 일본 놈들의 밀정질을 하면서 무고한 우리 조선 사람과 중국 사람들을 얼마나 많이 물어 먹었느냐?! 낱낱이 탄백해라.” 허팔기는 뽀족한 턱을 쳐들고 희미한 등불을 빌어 구척같이 훤칠한 인삼을 쳐다보면서 애걸했다. “내 일본 놈들이 시킨 걸 다 말하면 살려주겠소?” “어서 탄백해!” 허팔기는 이번에는 일본 놈들을 팔아 목숨을 구해보려고 늘여놓았다. “용정통감부 간도파출소 사이또 소장놈과 조일파출소의 일본 놈의 소장 그리구 조선에서 온 똘만 경찰은 나를 보구 성지촌에 숨어있으면서 이 지방에 유격대와 내통하는 수상한 사람들이 있으면 밀고 하라고 했소. 그놈들은 지금이 마을에 숱한 변복한 자위대 놈들을 깔아두고 유격대가 나타나기만 하면 붙잡자고 했소.” 철석은 비수를 턱밑에 들이대면서 따졌다. “아직도 더 있어. 말해!” 허팔기는 철석의 비수를 손으로 좀 밀면서 마른기침을 꼴딱 넘기더니 말했다. “저 물레방아 골에서 이사해온 원삼이네 집에 수상한 사람들이 나타나면 즉시 밀고하라고 했소. 똘만 경찰이 그러던데. 전번에 원삼이네와 함께 쌀 수레를 몰던 경칠이란 사람은 조선에서 경찰국을 무너뜨린 죄인 김기준이라면서 나타나기만 하면 당장 밀고하라고 했소. 기준을 붙잡으면 평생 먹을 근심이 없게 상을 준다고 했소.” 이때 바깥에서 왁자지껄 하며 복잡해졌다. 인삼은 철석에게 머리 짓을 했다. 철석이가 비수를 쳐들면서 고함쳤다. “에잇, 이 일본 개다리 놈아, 네놈은 일제 개다리 본성을 고치지 못해. 인민을 대표해 네놈을 처단한다!” “아이고, 일본 놈들을 다 팔아 먹었는데도 죽이는가?” “네놈이 유격대를 물어먹은 피 빚은 용서할 수 없어!” 눈 깜짝할 새에 철석의 비수가 휙 내려가자 허팔기의 가는 목이 썩 뚝 잘려나갔다. 인삼이가 또 한칼을 더 안기자 허팔기의 피범벅이 된 대갈통이 구들바닥에 뚝 떨어져나가 뒹굴었다. 정지에서는 비명소리가 들렸다. 인삼은 즉시 철석과 함께 위방에서 뛰어나와 성지촌 뒷산 옥수수 밭으로 철거했다. 그들은 마른 옥수수이파리들이 가을바람에 춤을 추는 누런 옥수수 밭에 숨어서 성지촌의 동향을 면밀히 주시하면서 함흥촌 쪽으로 철거했다. 그때였다. 불시에 옥수수 밭이 우수수 소리 났다. 인삼과 철석이 주위를 살펴보았다. 낯모를 사람들이 어둠을 타 옥수수밭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우린 발각됐습니다. 김 대장, 빨리 선바위 쪽으로 달아나시오. 우리 엄호하겠습니다.” 철석은 소리치며 옥수수 밭에서 뒤에 추격해오는 놈들에게 총을 쏘았다. 그때 낫을 들었던 자들이 낫을 버리고 허리춤에서 권총을 빼들어 쏘아대며 추격했다. “서라!” 땅! 땅! 땅! 야무진 총소리가 옥수수 밭에서 울렸다. “삼촌, 빨리 산속으로 달아나시오!” 철석은 기준에게 고함치며 돌아서서 총을 쏘아댔다. 땅! 땅! 귀청을 째는 총소리와 함께 제일 앞에서 쫓아오던 놈이 가슴을 붙안고 꺼꾸러졌다. 기준은 도끼를 거머쥔 채 옥수수 밭에서 달아났다. 땅! 기준이가 되돌아보았다. 저게 뭐냐? 뒤에서 총을 쏘면서 엄호하며 따라오던 철석이가 다리에 총을 맞고 쩔룩거리었다. 기준은 되돌아가 철석을 옆구리에 껴안고 달아나려고 안간힘을 썼다. 한 놈이 그때라고 쫓아오면서 옥수수 대 사이로 권총을 겨누었다. “개놈새끼!” 기준은 욕지거리를 하면서 시퍼런 도끼를 뿌렸다. 제일 앞에서 쫓아오던 놈의 어깨에 빙글빙글 날아간 도끼가 툭 박혔다. “아이쿠!” 비명소리와 함께 그 놈이 쓰러졌다. 땅! 철석이가 뒤따라오던 놈을 쏘아 눕혔다. 땅! 인삼이가 되돌아와 철석을 붙안고 총을 쏘았다. 겁을 집어먹은 놈들은 더 쫓지 못하고 눈먼 총질만 했다. 그 틈을 타 기준은 철석을 제꺽 둘러업고 다리야 날 살리라고 강냉이 밭을 벗어났다. 이윽고 나무숲이 꽉 들어선 수림 속으로 몸을 숨겼다. 뒤에서 인삼은 총을 쏘면서 엄호했다. 기준은 가시덤불 속을 헤치고 들어가 철석을 내려놓았다. 그는 피가 질벅한 철석의 허벅다리를 자기 저고리 팔소매를 쭉 찢어내 동여맸다. “가기요!” 기준은 중얼거리면서 철석을 업고 숨도 돌릴 새 없이 나무숲이 우거진 령 길을 타고 고개를 넘었다. 그날 밤중에 인삼과 기준은 유격대원들과 함께 서로 다리에 피가 질벅한 철석을 바꿔 업으면서 기진맥진해 간신히 토성안집에 들어섰다. 그들을 보고 업복과 유격대원들은 깜짝 놀랐다. 철석은 피를 너무 흘린 탓으로 정신을 잃은 채 두 팔을 기준의 어깨 넘어 축 내리 드리고 있었다. 인삼은 억복을 보고 소리쳤다. “빨리 따뜻한 가마 목에 눕히오.” 철석을 가마 목에 내려놓자 기준은 맥이 지내 땅바닥에 풀썩 엉덩방아를 찧었다. 땀벌창이 된 인삼도 가마 목에 풀썩 물앉았다. 억복은 기준을 부축해 일으켜 집안으로 들어가면서 물었다. “어떻게 된 일이오?” 기준은 위방에 들어가 억복에게 낮에 있은 일을 쭉 이야기해주었다. 뒤이어 인삼은 정지에 내려가 여성유격대원을 보고 뭐라고 귀속 말을 했다. 이윽고 한 아낙네가 저녁밥상을 들여왔다. 어느덧 낙엽은 우수수 지고 서리가 내리기 시작했다. 싸늘한 가을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허팔기가 처단된 사실을 성지촌의 밀정들에게서 보고 받은 용정통감부 간도파출소와 조일파출소 일본 경찰들은 성지촌에 몰려와 온 마을을 발칵 뒤집었다. 그들은 교활하게 원삼은 건드리지도 않고 다른 마을사람들을 붙잡아다가 허팔기를 죽인 자들의 용모파기를 본적이 있나 심문했다. 그러나 그렇다할만한 아무런 단서도 쥐지 못하고 말았다. 용정통감부 간도파출소 사이또 소장은 조일파출소 소장과 토론하고 암암리에 원삼의 주변을 감시하기로 했다. 그런데 안보촌에서 십가장과 특무(밀정)까지 처단된 보고가 올라오자 용정 일본영사관과 통감부 간도파출소는 도가니 속처럼 끓어 번졌다. 사이또 소장은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분명 장백산 유격대의 소행이야. 유격대를 소멸하지 않고선 간도를 떠나지 않을 테다!” 그는 숱한 밀정들을 파견해 “소서구”의 “김병완”과 “김기준” 부자를 수사해내라고 부하들을 들볶아댔다. 간도파출소 마당에서 일본 놈의 경찰들과 자위대 놈들이 이발을 사려 물고 떠들썩하는데 사냥개들이 컹 컹 컹 짖어대는 소리가 요란했다.                            6. 돌연습격 기준은 오후에 상우와 상순을 데리고 잔등에 땀이 흠뻑 젖도록 조이단을 져서 장지주네 집 마당에 내려갔다. 조단을 져 내려가는 그들의 뒤로 거무스름한 땅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 황야의 거무스름한 땅은 기준의 조손 3대가 샛별을 이고 나가서 달을 지고 돌아오면서 땀 동이를 기울여 황무지를 개간한 목숨 줄 같은 땅이었다. 그 피땀이 슴밴 땅에서 난 곡식을 걷어 들이는 그들은 잠시나마 수확의 기쁨에 온몸이 흠씬 젖어 있었다. 해질녘에 기준은 상순만 데리고 함흥촌 토성안집에 내려갔다. 인삼은 기준을 반갑게 맞아들인 후 상순과 상길을 보고 토성 바깥에서 놀면서 망을 보라고 했다. 상길과 상순은 토성바깥의 공지에서 애들과 함께 놀면서 망을 보았다. 그러다가 너무 숨이 차고 목이 말라 토성바깥의 우물가에 가서 드레 박을 자아 올렸다. 그가 샘물을 꼴깍꼴깍 들이켤 때다. 드레박 물에 웬 일본 헌병대 옷차림이 비꼈다. (아니, 이게?!) 깜짝 놀란 상순은 몸을 홱 돌렸다. “악!” 가을 독사 같은 일본 헌병대 놈이 시무룩이 웃었다. 토성 안 집안에서는 인삼이네가 한창 성지촌과 원삼의 형편을 두고 대책을 토론하고 있었다. 상순은  돌발사태에 심장이 바깥으로 튀어나올 듯이 두근거렸다. (이걸 어쩐담?) 곧장 달려가 일본 헌병이 왔다고 하면 놈들의 의심을 받을 수 있었다. 헌병 놈은 낯선 조선 땅딸보경찰 똘만이랑 서넛을 데리고 토성안집 쪽으로 기웃거리면서 다가오고 있었다. 보초를 서던 어린 상순은 돌발사태에서도 인삼이가 시켜 준 대로 했다. 그는 제꺽 드레박을 들고 대문 안으로 들어가면서 황급히 고함쳤다. “개 왔습구마!” “개 왔습구마!” 그 소리를 들은 인삼은 당장 명령했다. “빨리 피신하오. 나와 성해가 놈들을 대처할게.” 그는 말을 마치자마자 앞마당으로 나가려고 했다. 억복이 막아 나섰다. “김 대장이 나가선 안 됩니다. 내가 남겠습니다.” 인삼은 억복을 뒤로 밀어냈다. “억복이나 철석은 부상당했기에 들키기 쉽소. 집주인이 없으면 놈들이 더 의심할 게요. 빨리 피신하오. 어떤 일이 있든지 간에 절대 나오지 마오. 이건 명령이오.” “김 대장!” 억복이가 뻗치고 서서 인삼을 쳐다보았다. “시간이 없소. 빨리 피신하오.” 억복과 철석 등 10명 유격대원과 기준은 쌀독을 들고 쌀독 밑에 난 동굴로 몽땅 들어갔다. 김인삼은 쌀독을 끌어다 벽 밑에 난 동굴 문을 막아버리고 성해한테 돌아섰다. 그는 문 옆에서 두 손을 맞잡고 어쩔 줄 몰라 서성거리는 성해의 손을 꼭 잡아주면서 머리를 끄덕였다. 그제야 성해는 머리를 끄덕이면서 마음을 진정하였다. 인삼은 머리를 쳐들고 당당하게 바깥으로 나갔다. 낯선 땅딸보는 수하들을 데리고 다짜고짜로 상순을 따라 토성안집에 뛰어 들어갔다. 그때 인삼이가 마루에서 내려 상순에게서 드레박의 물을 받아 들면서 낯선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일본 헌병놈이 손을 홱 휘저었다. “수색해!” 낯선 조선족경찰들이 집안으로 우르르 쓸어 들어갔다. 그자들은 구두 발로 구들을 마구 밟으면서 온 집안을 발칵 뒤집었다. 한 놈이 쌀독덮개를 열고 들여다보았다. 그러자 성해는 머리를 숙이면서 자위대 놈을 흘끔 훔쳐보았다. 인삼은 그녀에게 도리머리 질 했다. 성해는 머리를 들고 바깥을 외면하면서 마음을 억지로 진정했다. 이때 그 자위대 놈이 쌀독덮개마다 열었다가 쾅쾅 닫으면서 빈정거렸다. “이놈들이 잘 살긴 잘 사는구나. 쌀독마다 쌀이 꼴딱꼴딱 하구먼.” 놈들은 아무런 단서도 잡지 못했다. 땅딸보가 다가와 드레박을 성해에게 건네주는 인삼의 아래위를 훑어보았다. 인삼은 억울해 땅딸보에게 따지고 들었다. “당신들은 무슨 사람들이기에 우리 집을 마구 뒤지는 거요?” 땅딸보는 인삼과 옆에서 뛰노는 상순을 번갈아보면서 부하들에게 두덜거렸다. “요 새끼 금방 ‘개 왔습구마’고 소리친 바람에 다 달아난 거 같아.” 땅딸보 놈은 상순의 멱살을 틀어쥐어 건뜻 쳐들더니 “왜 ‘개 왔다’고 했어? 그래 우리가 개냐?” 하고 따지고 들었다. 상순은 목이 졸려 얼굴이 발개 두 다리를 바둑거리면서 땅딸보 놈을 쏘아보았다. 상순은 목을 좀 놓자 “드레박을 개(가져)왔다 했는데 어쨌다고 이러오?” 하고 대들었다. 헌병 놈은 뭐라는지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고 멍해 땅딸보만 건너다보았다. “드레박을 개 왔다?” 땅딸보는 드레박을 받아든 성해를 보면서"개왔다.”는 말을 반복해 보아도 어데 흠을 잡을 데 없어 도리머리 질 했다. 뒤이어 그는 인삼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따졌다. “당신 인삼인가?” 인삼은 태연자약하게 “옳소? 무슨 일이오?” 하고 물었다. 땅딸보는 자기 수하들에게 눈짓했다. 수하들은 집안을 눈 빗 질 하면서 경계태세를 취했다. “당신 들으니 밭이 몇 짐 없다던데 무슨 일로 이렇게 큰 집에 숱한 사람들을 치오? 돈은 어데서 나왔소?” 땅딸보의 돌연적인 물음에 인삼은 땅딸보의 쏘는 듯이 표독한 눈길을 피하지도 않았다. “이 집은 우리 양아버지가 지어준 집이오. 장사를 하다나니 사람도 많이 필요하오. 돈도 좀 벌었는데 그게 무슨 죄오?” 땅딸보는 인삼에게 한발자국 더 다가들면서 바투 들이댔다. “무슨 장사를 하는가?” “소금과 쌀 장사를 하오.” “그래?” 땅딸보는 헌병 놈한테 다가가더니 인삼을 턱짓하면서 일본말로 쑤군거렸다. 헌병 놈이 뭐라고 떽떽거렸다. 땅딸보는 졸개들에게 “소금과 쌀을 수색해내라.” 하고 고함쳤다. 졸개들이 우르르 흩어져 온 토성 안을 샅샅이 수색하기 시작했다. 인삼은 땅딸보를 따라 나가면서 물었다. “당신들은 무슨 사람들인데 남의 집을 마구 수색하오?” 땅딸보는 외까풀 눈으로 인삼을 째려보면서 한마디 던졌다. “우린 진수해 조일파출소분주소에서 내려온 순사어른들이야. 네놈 집에 수상한 놈들이 드나든다는 제보를 받고 수사하러 왔어.” “어느 놈이 생사람을 잡아먹었는가?” 인삼은 중얼거리면서 능청을 부렸다. 이윽고 놈들은 사랑방에서 차곡차곡 쌓아놓은 숱한 쌀 마대와 소금마대를 들춰냈다. 땅딸보는 놀란 눈길로 엄청난 쌀과 소금 무지를 둘러보더니 꽥 고함쳤다. “이 놈을 나포하라!” 놈들은 와닥닥 달려들어 인삼의 양팔을 비틀어 뒤로 재꼈다. 뒤이어 그를 꼼짝 못하게 바 줄로 얼기설기 꽁꽁 묶었다. 이 돌발사태에도 인삼은 태연자약하게 허무맹랑한 웃음을 지었다. “생사람을 왜 잡는 거요? 장사를 해도 죄오?!” 땅딸보는 외가풀 눈깔이 실눈이 돼 교활한 웃음을 지었다. “이 놈, 귀신을 속여도 조선 명천의 유명한 경찰 똘만을 속이지 못해. 내 네 놈 토성안집을 몇 해 동안 동산 계수동에 있으면서 감시했는지 아니? 그간 토성 안에서 개미새끼 꿈틀 해도 손금 보듯 해 왔다. 밭을 한 짐도 붙이지 않은 놈이 어데서 이렇게 많은 쌀과 소금이 났니?” “조선에서 소금을 들여다가 바꾼 쌀이오. 이 나라에 언제부터 소금과 쌀장사를 못한다는 법이 있었소?” “잔말 말고 간도파출소에 가자.” 뒤이어 땅딸보는 토성 안을 기웃거리더니 인삼에게 물었다. “거 숱한 놈들이 맨 날 욱실거리더니 다 어데 갔어?” 이때 억복이 사랑채 뒤 토성구석의 동굴구멍의 돌 조각을 빼내고 내다보았다. 서쪽 토성구석 구멍도 살며시 열리더니 철석이가 한쪽 눈으로 이쪽을 내다보았다. 인삼은 도리머리 질 해 그러지 말라고 암시하고 나서 머리를 돌려 땅딸보에게 말했다. “모두 장사하러 가고 없소. 아무리 큰 일이 있어도 며칠 후에야 올 게오.” 억복과 철석은 김인삼 대장의 그 말 뜻을 알아듣고 동굴구멍을 막아버리고 동굴 속으로 몸을 숨겼다. 헌병 놈은 인삼과 성해를 압송해 진수해 쪽으로 내려갔다. 똘만경찰이 토성 안을 나서자마자 뱁새눈으로 버드나무아래 우물과 드레박을 번갈아 흘끔거리더니 인삼을 불러 세웠다. “가만! 아까 그 개 왔다던 죄꼬만 새끼는 누군가?” “김진이란 애오.” “김진?” 똘만은 한걸음 다가서면서 “소서구는 어데 있소?” 하고 중을 떠보았다. “여긴 소서구란데 없소?” “저 서쪽골짜기 이름은 뭐요?” 인삼은 태연자약하게 “천지꽃산 골짜기요.” 하고 나서 씁쓸해했다. 그래도 똘만은 실오리만한 꼬리도 놓으려 하지 않았다. “저 골짜기에는 누가 살고 있는가?” “주경칠이란 사람이 사오.” “주 씨라고? 허참, 소서구의 기준이란 놈은 어데서 대체 살까? 서쪽 골안에 사는 사람은 이씨 아니면 허씨고 박씨가 아니면 주씨군. 흥!” 똘만은 도리머리 질 했다. “가자!” 몇 발자국 걷다가 똘만은 또 소리쳤다. “잠간!” 그자는 또 표독스런 뱁새눈을 가슴츠레 뜨고 인삼을 노려보면서 물었다. “아까 드레박을 들구 다니던 김진이라던가 그새끼는 당신 아들인가?” 인삼은 속으로 적이 놀라면서도 태연자약하게 “아니요. 이 마을의 애요.” 하고 대답해버렸다. “그 놈 새끼 애비 이름이 뭐요?” “허 쑥떡이요.” “또 허 씨구먼.” 그 소리에 자위대 놈들이 배때기를 끌어안고 박장대소했다. “웃긴 뭘 웃어? 그놈새끼 딱 내가 조선에서부터 쫓아온 기준이란 놈처럼 생겼단 말이야. 나이 어려 그렇지 시꺼먼 눈썹이라든가 독살스런 세 귀 눈이라든가 넙죽한 이마가 신통히 기준이란 놈처럼 생겼단 말이야.” 쌀독덮개를 열었다 놨다 하던 자위대 놈이 중얼거렸다. “그럼 그놈새끼와 애비를 잡아가면 알게 아닙니까? 후회나지 말게.” 그러나 똘만은 인삼의 앞인지라 아닌 보살을 떨었다. “허 씨라는데도?” “허 씬지 김 씬지 잡아봐야 알게 아닙니까?” 자위대 놈이 계속 횡설수설하자 똘만은 대답하다 못해 눈치코치 없는 그 허수아비 같은 자를 콱 쏴줬다. “이놈새끼, 내가 알아서 하지 않을라고 그래? 잔말 말구 이놈들이나 잘 압송해가라. 빼앗기면 봐라. 네놈새끼들 대갈통이 목우에 붙어있는가!” “옛! 알았습니다!” 뒤이어 그놈은 시어미 역정에 개배때기를 찬다고 인삼을 쿡 윽박질러 떠밀고서는 “어이쿠, 내 대갈통이 언제 땅바닥에 떨어져 굴지 모르겠다!” 하고 익살을 부리면서 머리를 움츠리더니 목을 슬슬 만지였다. 똘만은 그런 상통이 너무 우스워서 킬킬거리면서 발길로 그자의 엉덩이를 툭 걷어찼다. "이놈새끼, 주둥이나 까졌지 어느 쪽에 쓰겠니?" “헌 신짝도 짝이 있다는데 나도 고운 색시 있을 거요.” “짹짹거리는 참새새끼 같은 거 누가 딸 주겠니?" 이때 한 무리 사내들이 해동 굽인 돌이 쪽에서 앞길을 막아 나섰다. 일본 헌병 놈은 깜짝 놀라 고함쳤다. “나니까(뭐야)?” 인삼이가 머리를 들어보니 장학산과 그의 아들들인 장충국, 장리국이 달려왔다. 뒤따라 지학사와 그의 가병들은 손에 사냥총까지 들고 달려오고 있었다. 헌병과 자위대 놈들은 대적이나 만난 듯이 총을 겨누면서 앞으로 나갔다. 그러나 지학사네 가병들은 총을 겨누지 않은 채 다가왔다. 똘만은 인적이 없는 산기슭 굽인 돌이에서 겁기라곤 없는 한패의 사내들을 만나자 적이 당황해났다. “네놈들이 감히 황군의 앞길을 막아? 죽기 싫으면 어서 피해!” 장학사는 웃는 얼굴로 똘만의 앞에 다가와 허리를 굽히면서 두 손을 모아 쥐었다. “장관, 무슨 일로 내 양아들을 잡아가오?” 똘만은 뭐라는지 알아듣지 못해 장학사와 헌병 놈을 번갈아 둘러보았다. 그때 인삼이가 장학사에게 중국말로 “양아버지, 일 없습니다. 돌아가시오.” 하고 말했다. 똘만은 인삼이가 중국말을 아는 것을 보고 “이자가 뭐랬는가?” 하고 물었다. 인삼은 똘만에게 “이분은 내 양아버진데 무슨 일로 내 양아들을 잡아가나 물었소.” 하고 통역해주었다. 똘만은 어깨가 으쓱해가지고 지껄였다. “너네 양아들이 유격대라는 밀고가 들어와서 잡아간다.” 그 말을 인삼이가 통역해주자 장학사는 두 손을 싹싹 빌었다. “내 양아들은 장사꾼이지 유격대 아니오. 제발 내 양아들을 놔주오.” 그 말을 듣자 똘만은 펄쩍 뛰었다. “이놈은 농사도 짓지 않는데 그 큰 집에 숱한 일군을 집에 두고 쌀과 소금이 창고에 산더미 같네. 우리가 가니까 겁나 한 놈도 없이 몽땅 달아났어. 분명 유격대들이야. 유격대에 쌀을 날라 간 거야!” 그 말에 장학산은 노기가 충천해 목에 지렁이 같은 피 줄을 세우면서 펄쩍 뛰었다. “야, 이 놈들아, 네놈들이 환장했냐? 그 토성안집은 내 지어준 게고 쌀도 내가 줬어. 집이 크고 쌀이 많은 게 무슨 죄란 말이냐?” 심지어 지학사가 손을 홱 휘젓자 가병들은 사냥총을 자위대 놈들에게 겨누었다. 자위대 놈들도 장총을 내리워 가병들에게 겨눴다. 일본 헌병 놈은 이 돌발사태에 눈깔이 휘 동그래졌다. “뭐야? 유격댄가? 감히 우리 황군에게 총을 겨눠?” 인삼은 일본 말을 알아듣는지라 장학산을 말리였다. “양아버지, 성내지 마십시오. 괜히 진짜 유격대로 오해받겠습니다. 이제 내 파출소에 가서 똑똑히 시비를 하면 놔 줄겁니다.” 인삼은 머리를 돌려 헌병 놈에게 일본 말로 말했다. “오해하지 말게나. 저분들은 내 양아버지네 친척들의 가병이오. 나를 놓아주지 않으면 싸움을 면치 못할 거요.” 이때 산등성이에서 또 한패의 사람들이 괭이랑 도끼랑 들고 내려왔다. 어떤 사내들의 손에는 시퍼런 식칼이 번뜩였고 어떤 사내들의 손에는 사냥총이 들려있었다. 헌병은 수적으로 열세에 처한 것을 보고 똘만을 불러 뭐라고 쑤군거렸다. 똘만이가 인삼에게 다가와 말했다. “자네 양아버진 여기 토호열신에 대지주니까 좀 봐주는 거네. 당신의 처를 놓아줄게. 그러나 당신만은 파출소에 가야겠네. 좀 알아볼게 있소.” 장학산은 더부룩한 수염을 흩날리며 짙은 눈썹을 곤두세우면서 인삼에게 물었다. “요 땅딸보 놈 새끼 뭐라느냐?” “성해를 놔 보내겠답니다. 나보고 조일파출소에 가서 알아볼 게 있답니다.” “개소릴 친다. 안 돼! 널 꼭 잡아가야 돼!” 장학산은 두덜거리면서 인삼의 손을 결박한 바줄을 풀려고 손을 댔다. 헌병 놈이 군도자루를 잡고 눈을 부라렸다. “네놈이 감히? 미쳤어?” 똘만도 권총을 빼들고 두리번거렸다. 장학산이 꽥 고함치자 산등성이와 골짜기에서 숱한 사냥군들이 일떠나 일제히 총을 이쪽에 겨누었다. 그들은 장학산의 딸 장미련이 일러서 찾아온 부근의 지주들과 가병들이였다. 그 속에는 제지주랑 위지주랑 조지주랑 지학사의 가병들도 있었다. 인삼이가 두루 살펴보니 놀랍게도 억복이랑 철선이랑 유격대들도 총을 잡고 마른 나무숲 속에 엎디어 이쪽에 총을 겨냥하고 있었다. 이 일촉즉발의 시각에 인삼이 우렁찬 목소리로 말렸다. “양쪽에서 모두 총을 내리오!” 그는 한어와 일어로 말했다. “내가 파출소에 가서 이 양반들과 시비를 똑똑히 하고 돌아 올 겁니다. 일본 황군은 죄 없는 무고한 나를 어쩌지 않을 것입니다. 근심하지 마십시오.” 일본 헌병은 세 가지 말로 유창하게 말하는 인삼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장학산은 억울해 똘만의 코에 대고 주먹을 쥐고 흔들었다. “네놈들이 내 양아들을 털끝 하나 다쳐만 봐라. 간도파출소구 조일파출소구 박살내겠어. 네놈들의 대갈통도 몽땅 미친개 대갈처럼 까버리겠다!” 지학사도 뾰족한 턱을 쳐들고 을러멨다. “쬐꼬만 일본 놈의 개다리 놈들이 감히 우리 양조카를 건드려? 까딱 했다간 개처럼 목을 달아매 죽일 줄 알아!” 장학산은 인삼한테 다가가 두 손으로 와락 끌어안더니 “무사히 갔다가 오게나.”라고 말하고는 돌아서면서 손을 홱 저었다. “조카 댁을 데리고 돌아가자!” 지학사는 똘만에게 침을 퉤 뱉고 가병들을 데리고 돌아섰다. 산등성이에 서있던 중국 지주들도 도끼와 사냥총을 휘둘러보이고는 산등성이 뒤로 사라졌다. 그제야 헌병 놈은 군도자루에서 손을 떼면서 하얀 수갑을 벗어 낯에 송골송골 돋은 땀방울을 닦았다. 이윽고 그는 다시 위엄을 찾은 듯이 돌아가는 지학사와 장학산의 등 뒤에 대고 손질 발질 해대면서 꽥꽥 고함쳤다. “이 골짜기에 반일불온분자들이 무리승냥이들보다 더 많구나. 어디다 대고 사냥총을 겨눠? 그까지 사냥총으로 우리 대일본제국의 총과 대포, 탱크, 비행기를 당할 거 같아!” 뒤이어 그 놈은 개 잡은 포수처럼 우쭐해서 손을 홱 저었다. “끌고 가!” 인삼은 결박당한 채 가슴을 쭉 뻗치고 자위대 놈들에게 떠밀리어 진수해 쪽으로 걸어갔다. 뒤에서는 원시림의 마른 풀과 나무들이 싸늘한 가을바람에 쏴쏴 무섭게 소리치며 몸부림치고 있었다.          7. 항일투사       똘만과 헌병은 조일파출소에서 인삼을 형틀에 달아매고 고문하기 시작했다. 그 놈들은 인삼이 확실히 유격대의 큰 인물이라는 단서를 잡기만 하면 용정 간도파출소로 이송할 예산이었다. 자위대 놈과 헌병 놈이 형틀 옆에 악마처럼 딱 붙어 서있었다. 헌병 놈과 똘만은 사전에 소장 놈에게서 포치 받은 대로 먼저 혹독한 매질부터 시작했다. 헌병 놈이 채찍을 들어 인삼의 가슴과 잔등 엉덩이를 짱, 짱 후려쳤다. 남루한 옷이 째지더니 살갗이 벗겨지고 피 줄 뱀이 쭉쭉 갔다. 똘만은 인삼의 신음소리를 들으면서 깨 고소해 입귀에 간사한 미소를 흘리었다. 한참 후 인삼은 머리를 맥없이 툭 떨어뜨렸다. 헌병 놈이 손을 척 들었다. “그만!” 똘만은 자위대 놈을 보고 물을 퍼 치게 했다. 온 몸에 찬 물을 맞은 인삼이 머리를 천천히 들더니 겨우 눈을 뜨고 희미하게나마 앞에 떡 앉아 있는 저승사자 같은 헌병과 똘만을 노려보았다. “양아비를 믿고 또 우쭐거려 봐라. 모가지를 썩 뚝 잘라 버릴 테야!” 인삼은 피와 물방울이 줄줄 흘러 떨어지는 얼굴을 겨우 쳐들고 똘만을 쏘아보면서 맞아터진 입귀를 실룩거렸다. “당신은 누구요? 왜 무고한 사람을 이다지도 못 살게 구오?” “내 이름 들으면 깜짝 놀라지 말라. 난 명천에서두 소문난 경찰 똘만이야. 으흐흐흐. 알만해?” 인삼은 머리를 천천히 들어 똥똥한 땅딸보를 기억해 두려는 듯이 뚫어지게 쏘아보았다. 똘만은 득의양양해 인삼을 심문했다. “당신은 유격대 두목이라는 거 시인하는가?” “우겨대? 듣다 첫소리오? 난 아무것도 모른다는데 당신들이야 말로 우겨댔지. 흥!” "이놈? 귀구멍이 막혔어? 무슨 우겨대야? 넌유격댄가 말이야!" 인삼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우격대? 난 장사를 하다 보니 유격대라는 거 들어본 적도 없소. 유격대라는 거 뭐 하는 거요?” 똘만은 뱁새눈을 흘기며 인삼을 뚫어지게 쏘아보았다. “이놈이 더 맞아야 실토정하겠어? 우린 다 알고 있어.” 인삼은 시치미를 땄다. “다 알면 물을 게 뭐요? 난 유격대라는 걸 모르오.” 똘만은 사무 상을 꽝 치면서 고래고래 고함쳤다. “저 놈을 뼈대 부러지게 매우 쳐라!” 자위대 놈이 채찍을 휘둘러 짱, 짱 칠 때었다. 똘만은 벌떡 일어나면서 씽 달려가 방망이 같은 몽둥이를 잡더니 인삼의 잔등과 다리를 꽝꽝 패댔다. 한참 후 인삼은 외마디 신음소리를 내더니 이로 입술을 깨물고 까무러쳤다. 똘만은 인삼의 턱을 쳐들고 중얼거렸다. “이 악질 빨갱이 놈아, 그래도 아닌 보살 할 텐가?” 아무리 물을 퍼 쳐도 인삼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똘만은 헌병 놈을 돌아보면서 서툰 일본 말로 “이 놈이 죽지 않았을까?” 하고 중얼거렸다. 그제야 일본 헌병 놈은 일어나더니 인삼에게 다가와 손을 목에 대고 맥박을 짚어보는가 하면 코에 손을 대 보는 것이었다. “때리지 말게! 이 미끼가 죽으면 큰 고기를 낚으려는 용정의 사이또 소장님에게 할 말이 없네.” 똘만은 헌병에게 대가리를 조아렸다. “하이(옛)” 한참 후 인삼은 신음소리를 내더니 머리를 스르르 드는 것이었다. “말해! 넌 유격대지?” 인삼은 도리머리 질 했다. “백번 물어봐도 그, 그 대답이오. 난 모르오.” 똘만이 악이 나 인삼의 귀 쌈을 짱 갈겼다. “잠간!” 그때 헌병 놈이 하얀 장갑을 낀 손을 쳐들었다. 헌병 놈이 심문하려고 하자 통역이 들어왔다. “필요 없어. 이 놈은 일본 말을 아주 잘해.” 헌병 놈은 하얀 장갑을 낀 손을 들어 내저으면서 나가라고 했다. 뒤이어 그는 인삼에게 다가와 빈정거렸다. “긴상(김군), 우린 당신을 다 알고 있네. 당신은 함경도 길주 태생이지. 우린 아나따(당신이) 대일본제국의 와세다대학까지 나왔다는 걸 다 아네. 어쩜 우리 일본제국에서 배양한 아까운 인재가 이렇게 산골짜기에서 유격대란 나쁜 길에 들어섰소까? 참말로 아깝소다. 이해되지 않아.” 인삼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흥!” 하고 냉소했다. 헌병 놈은 똘만을 한쪽 구석에 데리고 가서 뭐라고 귀속 말로 쑤군거렸다. 뒤이어 헌병 놈은 간사하게 웃으면서 인삼에게 다가와 형틀에 처맨 양팔의 바 줄을 손수 풀어주었다. “에이, 유격대 고위 장관을 이렇게 무례하게 굴다니?” 인삼은 바 줄에 묶이었던 손목을 손으로 슬슬 만지더니 코 방귀를 뀌는 것이었다. “흥! 생사람을 잡는 데는 이름이 있구먼.” 똘만은 인삼에게 걸상까지 들어다 주고 앉으라고 손짓 하고 나서 횡설수설 잔뜩 늘여 놓았다. “인삼이, 일찌감치 탄백하게나. 우린 자넬 잘 알고 있네. 자넨 전번에도 수하 놈들을 시켜 쌀을 장백산 유격대에 가져다줬네. 우리 조일파출소의 특무는 지게를 지고 그 놈들의 뒤를 밟아 장백산 원시림에까지 접근하였네. 헌데 가석하게도 우리 특무는 영월구 부근에서 유격대에 암살당했네. 어떤가? 우린 자네들의 행동을 면밀히 감시해왔네.” 인삼은 아주 태연자약하게 말했다. “무고한 사람을 건너짚지 마오. 난 듣다 첫소리요. 우리야 장사꾼인 게 조선에서 소금을 가져다가 여기 쌀을 사고 여기 쌀을 조선에 내다 팔아 웃돈을 벌뿐이오.” 똘만은 피씩 웃었다. “우린 알아. 네놈들이 조선의 소금을 들여다 간도 중국인들과 조선인들한테 팔아 돈을 번다는 걸. 문제는 소금을 팔아 번 돈으로 쌀을 사서 장백산 원시림의 유격대에 보냈다는 거야. 창고에 산더미를 이룬 쌀 마대가 어디로 갔어? 그게 문제란 말이야.” (이놈들이 다 알고 있는 건가? 아니야, 그럴 수 없다. 이 놈들은 건너짚기를 하는 거다.) 인삼은 머리를 천천히 들면서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정말 심통한 소리를 하는구먼.” 이때 고문실 철문이 드르릉 열리더니 키꺽다리 놈이 가재수염을 쓱 문지르며 허리를 굽히면서 문안에 들어섰다. “잠간!” 그 놈은 들어서자마자 하얀 장갑을 낀 손을 쳐들었다. 헌병 놈과 똘만은 차렷 하고 군례를 붙였다. “사이또 소장님, 친히 오셨습니까?” (사이또 소장?) 인삼은 머리를 들어 사이또 소장이란 놈을 쳐다보았다. 까만 군관 모자, 번들거리는 까만 채양 밑의 짙은 눈썹, 살인마의 음흉한 눈길, 삐죽한 코 밑의 팔자형가재수염이 퍽 인상 깊었다. 사이또 소장은 살인마의 섬뜩한 표정을 감추고 억지로 상냥한 표정을 지었다. “김군, 난 당신 같은 인재를 흠상하네. 난 용정통감부 간도파출소 소장이네. 명천군 상우남면에는 김병완과 그의 아들 김기준이 대일본제국의 우시장 경찰국과 숱한 다리를 무너뜨렸고 대일본제국의 자위대장에게 괭이를 휘두른 특대 죄를 범한 범죄자일세. 똘만 경찰은 그놈들의 가족을 추격해 이미 모든 걸 손금 보듯이 장악하였네. 당신이 탄백하지 않아도 토성안집에 대해서도 낱낱이 알고 있네. 당신이 진 죄로 말하면 천번만번 총살하구 릉지처참 해도 성차지 않네.” 인삼은 태연자약하게 앉은 채로 코웃음 쳤다. “흥! 옛말이면 듣기나 좋지.” 사이또 소장은 인삼의 태도에 개의치 않고 다가와 손까지 잡으며 될수록 아주 화기애애한 듯한 어조로 말했다. “김군, 당신은 얻기 힘든 아까운 인재요. 어쩜 빨갱이들의 더러운 물을 먹어 이 지경이 됐어? 사냥총이나 든 유격대가 그래 비행기와 탱크, 대포로 무장한 우리 대일본제국의 백만 관동군을 대적할 거 같은가? 건 닭 알로 바위 돌을 치는 격이야! 아니, 썩은 닭 알로 엄청나게 우뚝 솟은 후지산을 치는 격이지. 와세다대학을 졸업한 당신은 우리 대일본제국을 알만큼 다 알 거야. 명지한 선택을 하게나. 시간 줄게. 잘 생각해보게나.” 인삼은 머리를 들고 떳떳이 일본말로 말했다. “고려할 게 없어. 난 장사꾼이오. 죽이겠으면 어서 죽여라.” 한참 숨 막힐 듯이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똘만과 헌병 놈 그리고 자위대 놈들도 몽땅 사이또의 눈치를 흘끔흘끔 살피였다. 사이또는 호주머니에서 만년필을 꺼내 뭐라고 쓱쓱 써내려갔다. 이윽고 사이또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웃음 속에 칼을 품고 지껄였다. “요로씨이(좋아). 김군, 우리가 잘못하였네. 우리 대일본제국의 양민을 몰라봐서 미안하네. 이렇게 합세. 자네가 맹세서에 서명만 하면 되네. 자, 여기에 서명하게나.” 인삼이가 사이또 소장이 내민 누런 종이 장을 받아 보니 일어로 삶은 소대가리 웃을 지경으로 이렇게 썼던 것이다. 충성맹세서 나는 쌀과 소금을 팔아먹는 대일본제국의 장사군 양민이다. 이후에 나는 대일본제국에 충성하며 유격대와 절대 관계를 맺지 않을 것이며 돕지도 않을 것을 맹세한다. 성명: XXX . 소화 9년 10월 30일.   인삼은 코웃음 치며 그 종이 장을 갈기갈기 찢어 버리고 나서 버럭 고함쳤다. “이따위 짓거리를 하지 말라. 난 돈이나 버는 장사꾼이지 아무런 일에도 삐치지 않으려고 하네.” 순간 사이또의 낯 색이 하얗게 질리었다가 붉으락푸르락 해졌다. 그러나 조금 지나자 인차 냉정을 되찾으면서 태연자약해졌다. 그는 인삼을 한참이나 뚫어지게 쏘아보더니 입귀로 냉소했다. “김 군, 애들처럼 성내긴. 쳇.” 그자는 뒤짐을 짓고 고문실을 왔다갔다 거닐더니 이쪽으로 홱 몸을 돌렸다. “당신 양아빈지 뭔지 하는 자들이 다시 우리 헌병과 자위대 앞길을 막아나서는 날엔 몰살시킬 테야. 허나 자네가 양아버지를 설복하여 부근의 지주들이 무장을 들고 총 뿌리를 유격대에 돌리게 하게나. 만약 그렇게만 당신이 도와준다면 우리 용정 간도영사관에 말해 간도파출소 요원으로 써주겠네.” 사이또는 인삼의 표정을 한동안 살폈다. 그러나 인삼은 여전히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태연자약하게 앉은 채 아무런 응답도 하지 않고 쓰거운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사이또는 속으로 허리춤에서 권총을 뽑아 단방에 인삼의 머리를 박살내고 싶었다. 허나 인차 길게 숨을 들이쉬면서 억지로 꼭뒤까지 치밀어 오른 성을 내리눌렀다. “어떤가? 날 돕겠는가? 쌀장사하기보다 나을 거네.” 인삼은 한참 궁리하는척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 양아버지 장학산과 양아버지 고모사촌동생 지학사와 가병들은 일본제국을 반대해 앞길을 막은 게 아니네. 그들은 양아들인 나를 웬 강도들이나 토비들이 붙잡아간다고 그런 거지. 이후에 난 그들이 대일본제국의 앞길을 막거나 항거하지 않도록 말하겠네.” 사이또 소장놈은 붉으락푸르락 하던 얼굴에서 뭉게뭉게 피어오르던 검은 구름의 그림자가 가뭇없이 사라지더니 가재수염까지 떨릴 지경으로 싱글벙글했다. “좋아, 참 좋아. 진작 이렇게 나와야지. 우리 대일본제국의 대문은 항상 열려있네. 우릴 도와 일하면 일한만큼 돈과 쌀이 많이많이 주겠네. 양옥도 주고 미인도 주겠네. 당신은 장사꾼이니까 주산알을 잘 튕길 거야.” 인삼은 자리에서 일어까지 나면서 다짐했다. “알았네. 이후에 소장께서 많이 도와주게나.” 사이또는 분주소 소장과 헌병 그리고 똘만을 데리고 고문실에서 나갔다. 이윽고 졸개들이 들어와 인삼을 고문실에서 끌고 나가더니 분주소 바깥으로 놔주었다. 똘만이가 분주소에서 나오더니 대문 밖에까지 따라 나왔다. “우리 사이또 소장님께서 너그러운 마음으로 당신을 놔주는 거네. 다신 우리 눈에 항일유격대로 보이지 말게 놀게나. 근거 없이 무고한 당신을 혹독하게 고문해서 미안하오. 후에 유격대 놈들이 얼씬거리면 우리한테 기별하게나. 소금 장사나 쌀장사를 하기보다 나을 거네. 유격대 한 놈을 불어 우리가 잡으면 쌀 한수레나 소금 둬 마대 주지. 어떤가? 할 만한 장사지?” 인삼은 똥똥한 똘만을 흘끔 건너다보면서 코웃음 쳤다. “거 정말 할 만한 장사군. 자넨 그런 사람장사에 꽤나 상을 많이 탔겠구먼.” 땅딸보는 인삼의 말에 흥이 도도해 떠벌였다. “그래, 간도에 와서 김병완과 김기준만 잡으면 난 살고 날판인데. 자네 좀 도와주게. 그럼 우린 양옥도 있고 미인도 가지겠는데 말이야. 흐흐흐.” 인삼은 정색해서 똘만의 손까지 잡아 흔들었다. “그럽세. 우리 손잡고 사람장사를 해 보지. 난 돈벌이가 된다면 무슨 짓이나 다 하겠네.” 똘만은 똥똥한 몸뚱이를 뒤로 번져 누울 상하면서 호탕하게 웃었다. “좋아, 결국 자넨 나와 한 배에 타구 말았구먼. 하하하. 한바탕 잘 해 보세나.” 인삼은 똘만과 한참 웃고 떠들다가 갈라져 함흥촌으로 떠나갔다. 분주소안에서 싸이또 소장은 조일파출소 소장 그리고 헌병은 비틀거리며 대문에서 멀어져가는 인삼을 보면서 중얼거렸다. “거저 볼 놈이 아니야. 거 태연자약한 걸 봐라. 어떤 놈인가? 아니야. 아주 훈련받은 놈이야." 이때 똘만이가 뛰어 들어왔다. “소장님, 저 놈을 어떻게 붙잡아왔는데 놔 보냅니까?” 사이또 소장은 똘만의 말을 통역을 통해 들으며 가재수염을 슬슬 어루만지면서 한마디한마디 똑똑히 말했다. “내가 왜 그 놈에게 속은 척 하겠는가? 큰 그물을 쳐서 큰 고기를 잡자는 거야.” 똘만은 도리머리를 가로 흔들었다. “우시장의 끼무라 국장이 항상 그 말을 하였습니다. 병완과 기준 부자를 미끼로 유격대를 잡으려고 하였습죠. 그러나 결과 그물만 치고 미꾸라지도 잡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저 놈을 죽이기야 쉽지. 그러나 저렇게 엄청 큰 미끼 아니고서야 장백산기슭 유격대를 낚을 수 있겠는가? 응?” 파출소 소장과 똘만 그리고 자위대 놈들은 반신반의하면서도 사이또 소장의 눈치를 보면서 머리를 끄덕였다. 헌병 놈만이 감히 이렇게 의문을 들고 나왔다. “인삼이란 놈을 잡아올 때 함흥촌과 패용천산 부근의 숱한 지주들이 가병까지 데리고 와서 우리 앞길을 막았습니다. 몽땅 반일불온분자무리들입디다. 몽땅 소탕해버립시다.” 사이또 소장은 손사래를 쳤다. “안 돼! 인삼을 놓아준 것도 그놈들과 관계 돼. 인삼을 놓아주지 않는 날엔 그놈들이 몽땅 유격대편에 설게 아닌가? 오합지졸 같은 그 놈들을 죽이자면 식은 죽 먹기지. 허나 우린 이 부근 지주 놈들을 몽땅 우리 대일본제국 편으로 끌어와야 하네. 알만한가?” “예~ 알았습니다.” 똘만은 입을 헤벌리고 뒷덜미를 긁적거렸다. 그 자리에 있던 모든 놈들은 사이또 소장의 넓은 정치 흉금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사이또 소장은 똘만에게 “전번에 함흥촌 서쪽 골안에 있다던 놈들이 병완과 기준이 옳은가 정탐해보았는가?” “예.” 똘만은 제꺽 들은 대로 말했다. “그런데 함흥촌에 온 놈들은 몽땅 함흥부근에서 이주한 조선 이민들이고 김인삼한테 물으니까 함흥촌 서쪽의 산골짜기 이름은 천지꽃산 골짜기라고 합디다. 천지꽃산 골짜기를 소서구가 아닌가 하여 수하들을 보내 탐문해보았는데 확실히 천지꽃산이라거나 서쪽 골안이라고 하더랍니다. 그 골 안에 사는 농사군들을 알아보니 주현경과 김대동, 김경칠이란 이주민이 소작 농사를 짓고 있더랍니다. 주현경이나 김대동은 모두 함경북도 회령에서 온 게 분명하고 김경칠이란 사람은 함흥 부근에서 왔더랍니다. 그 천지꽃산 골짜기 안에는 병완이나 기준의 그림자두 보이지 않습디다.” “음-” 사이또 소장은 머리를 끄덕이다가 인차 독살스런 눈을 치떴다. “아니야, 병완과 기준을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은 자네 밖에 없어. 자네 눈으로 직접 확인하라고. 어쩜 수하들에게 시켜 탐문했는가? 생각해 보게. 내가 김기준이거나 병완이라면 자네 수하들 앞에서 ‘내가 병완이요. 내가 김기준이요. 어서 잡아가오.’ 이러겠는가?” 똘만은 숙였던 머리를 번쩍 쳐들었다. “아차, 그놈새끼 딱 기준을 빼 닮았던데. 혹시 그 놈의 아들새끼 아닐까?” “누가?” 사이또는 똘만의 입을 노려보며 다그쳐 물었다. “오늘 함흥촌에 갔을 때 신통히 기준이를 닮은 새끼를 발견했습니다. 짙은 눈썹과 독살스런 세 귀 눈이 신통히도 기준과 같습디다.” 통역 리달송의 통역을 듣자 사이또 소장은 가재수염을 슬슬 쓸다가 손을 멈췄다. “그때 그 놈을 잡아 족쳐야지. 쯧쯧.” “이름을 물어보니까 김진이라고 합디다. 그래서 놔뒀습니다.” 진수해분주소의 조선족통역은 어망간에 “김진? 그럼 함흥촌의 김진을 그럽니까?” 하고 똘만에게 조선말로 물어보았다. “양. 자네 아는가?” “아오. 함흥촌의 김진은 이제 열대여섯 살 밖에 안 되지?” “그렇소.” 순간 똘만은 신경을 곤두세웠다. “기준의 아들인가?” 통역은 일본말로 먼저 말했다. “아니오. 그는 김경칠의 아들이오.” 똘만은 도리머리를 가로흔들었다. “그걸 어떻게 아는가?” “지난해 봄에 김진이 해동분주소에 지학사란 지주와 송사를 걸어 이긴 일이 있소. 김진의 아버지 김경칠이가 글쎄 지학사가 휘두르는 괭이에 찍혀 갈비뼈 세대나 부러졌소. 해동분주소 지학구소장은 누구겠소? 지학사의 사촌동생이오. 그런데 하루 강아지 범 무서운 줄도 모르고 지학구 소장한테 가서 그의 지학사를 소송했단 말이오. 지 소장은 증거가 없다고 처리해주지 않았소. 그런데 김진은 기어이 패랑천촌의 송 씨라는 사람을 증인으로 끌구 와서 송사에서 이겼소. 치료비까지 40원이나 받아갔소.” “그래? 그 놈 새끼! 독살스런 눈길을 봐도 헐치 않은 놈이겠더라. 우리 갔을 때도 드레박을 들고 토성안집에 달려들어가서 ‘개 왔다’고 해서 유격대 놈들이 다 달아난 게 아닐까? 우리 가는 걸 보고 ‘개가 왔다’고 알린 게 아니고 뭐요?” “그럼 얼른 그 놈을 잡아들여야지.” 사이또 소장의 말에 통역은 도리머리를 가로흔들었다. “내 보건대 그 놈이 기준의 아들이라면 감히 우리 분주소 부근에 얼씬거리기나 했겠습니까? 병완과 기준이가 제 새끼를 여기에 보내겠습니까? 풀 섶을 지고 불구덩이에 뛰어들 듯이 말이야.” 그 말에 사이또 소장이 머리를 끄덕였다. 똘만도 덩달아 머리를 끄덕였다. 사이또 소장은 똘만과 소장을 돌아보면서 위엄 있게 말했다. “지금 기준을 닮았다는 김진이란 애보다도 우선 유격대 우두머리 혐의가 있는 함흥촌의 김인삼과 그 머슴이란 자들의 뒤를 파보아야 하네.” 똘만은 난감해했다. “유격대가 분명한데 뭘 망설입니까? 함흥촌 부근 반일불온분자들을 몽땅 쓸어버립시다.” “인삼은 훈련을 받은 우두머릴 거야. 지게꾼은 영월구 부근 마을 십가장에게 토성안집에서 장백산 원시림까지 간 키꺽다리랑 땅딸보랑 분명 유격대 숙영지로 들어갔다고 했다오. 십가장집의 여편네가 정지에서 들었다오.” “토성안집의 놈들을 일망타진합시다.” “아니야. 인삼을 미끼로 장백산 원시림속의 유격대 숙영지를 알아내야 하네. 나가서 그 놈들의 동만 근거지를 탐지해 동만과 북만, 남만 항일유격대를 일망타진하게 관동군에 정보를 제공해야 하네. 그전에 우린 절대 풀을 건드려 구렁이를 놀래지 말아야 하네.” 똘만과 소장은 머리를 진수해분주소 소장과 똘만은 머리를 끄덕이면서 연신 찬탄했다. “소장님, 정말 고명합니다.” “참 고명합니다.” 사이또 소장은 어깨가 으쓱해 진수해분주소 소장과 똘만을 데리고 소장 실에 들어가 한식경이나 쑤군거렸다. 그때마다 분주소 소장과 똘만은 “예~ 참 묘수입니다.” “거 참 좋습니다.” “옛, 알았습니다!” 하고 감탄소리를 냈다. 진수해분주소와 토성 하나를 사이둔 토성안집의 기생집의 종군위안부들이 “해해해.” “호호호.” 하는 웃음소리가 귀를 간질거리고 있었다. 사이또 소장은 “에헴.” 하고 마른기침을 하며 분주소를 나섰다. 눈치를 챈 분주소 소장이 사이또 소장을 안내해 아래쪽 토성 안 일본군위안소로 늑대처럼 스적스적 다가갔다.      똘만은 따라가고 싶었지만 언감 생색을 내지 못하고 아래 배를 끌어안더니 바지멀춤을 싸쥐고 날 살려줍시사 하고 부랴부랴 변소간으로 뛰어 들어갔다.  
55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34) 댓글:  조회:1757  추천:0  2016-03-02
                     2. 안보촌에서 울린 총소리        고기비늘구름 속으로 서글픈 하현달이 흘러가며 쓸쓸한 달빛을 흘린다. 그 희미한 달빛이 외롭게 우는 고방 창살과 싸늘한 하옥의 이불깃을 마음이 아프게 스치면서 흘러간다. 고독과 적막, 쓸쓸함이 달빛이 깔린 고방구석에서 유령처럼 슬금슬금 기어 나와 외로운 하옥을 괴롭힌다.        후시어머니를 모신 후 고방에 홀로 쪼그리고 자던 하옥은 남편생각이 나 이불을 푹 덮고 어깨를 들먹였다.        (그림자처럼 동무해주던 시어머니도 세상 떠났어. 이젠 누구와 동무하면서 산단 말인가? 십여 년이나 과부가 아닌 과부로 보내지 않았던가? 이젠 진절머리 나.)        하옥은 뒤 고방 문을 살며시 열고 바깥으로 나가 샛별이 깜빡거리는 새벽 밤하늘을 쳐다보면서 한숨을 땅이 꺼지게 호~ 내쉬었다.       그는 이전에 성칠이 불쑥 나타났을 때 김치 움에서 오래간만에 운우지정을 나누던 일을 떠올리자 가슴을 붙안고 어깨를 들먹였다. (안 돼! 나도 남편을 찾아가야지. 유격대 밥을 지으면서라도 남편과 함께 살아야 해. 안 될게 뭐야? 은녀와 진달래도 거기 있잖아. 유격대에도 여자들이 할 일이 많지.) 하옥은 집으로 들어가자마자 농궤를 들춰 입을만한 옷 견지를 들춰내 보따리를 꾸렸다. 병완은 고방에서 덜컥거리는 이상한 소리를 들었지만 새벽이어서 며느리와 묻지 않았다. 하옥은 옷에 로비까지 몇 푼 찔러 넣고 싼 보따리를 뒤 고방 문을 살며시 열고 나가 미리 바깥 울바자 밑에 가져다 놓았다. 동녘이 푸름 해지자 하옥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소변보러 나가는 척 하면서 울바자 바깥으로 나가 바자를 벌리고 보따리를 꺼냈다. 그는 옷 보따리를 옆구리에 끼고 번개같이 속궁리를 굴렸다. (시아버지 알면 보내지 않을 건 불 보듯 빤한 일이야. 허망 어떻게 유격대를 찾아가? 혹시 시동생은 전번에 쌀 수레를 몰고 가면서 유격대가 어데 있는지를 알지 않을까? 시동생을 찾아갈까? ) 하옥은 인삼을 찾아갈까도 하다가 주춤 멈춰 섰다. (유격대 어디 있는지 나 같은 아낙네한테 알려주겠어? 안 돼. 믿음직한 셋째시동생을 찾아가야지.) 하옥은 웃새집 식구가 누구라도 따라 나와 말릴까봐 치마 자락에서 비파 소리 나게 소서구 쪽으로 반달음 쳐갔다. 소서구 막바지에 이르니 성남집 마당에서 상우가 도끼를 휘둘러 땔나무를 팡팡 패는 것이 보였다. “둘째조카!” 상우는 쪼개진 나무토막을 주어 무지에 쌓으려다가 허리를 펴면서 인사하였다. “맏아매(큰어머니)!” 기준은 큰어머니가 보따리를 안고 있는 것을 보고 이상해 하였다. “내 일이 있어 급히 왔소. 아버지 어떻소?” 상우는 큰어머니를 모시고 집에 들어갔다. 사련은 하옥의 손을 잡고 “형님, 어떻게 돼 왔소?” 하고 반갑게 맞았다. 지새금도 가마목에서 바삐 돌아치다가 행주에 손을 닦으면서 허리 굽혀 인사하였다. 하옥은 사련의 귀에 대고 뭐라고 귀속 말을 하였다. 그러자 사련은 하옥을 데리고 위방으로 들어갔다. 기준은 베개를 받치고 비스듬히 기대 앉아 있다가 하옥을 보자 일어나면서 인사하였다. “아주머니, 어떻게 돼 이렇게?” 하옥은 위방에 올라가 정주 문 곁에 앉으면서 물었다. “생원이 어떻소?” 기준은 바로 앉으면서 “괜찮소. 조상이 물려준 오줌 약을 바르고 상순이 져다준 약을 달여 먹고 많이 낫소.” 하고 대답하였다. 하옥은 앞으로 좀 다가앉으면서 나직이 귀속 말을 하였다. “생원이, 생원은 유격대가 어데 있는걸 알지 않고 뭐요? 날 큰형님한테 데려다주오.” 기준은 아주머니를 바라보더니 육중한 몸을 움찔거렸다. 한참 후에야 그는 천천히 입을 떼였다. “아주머니, 형님이랑 동삼에도 집도 없이 행군하면서 일본 놈들과 싸우는데 거길 가서 뭘 하오? 괜히 형님에게 짐이 되겠소.” 그 말에 하옥은 슬픈 나머지 눈물을 하염없이 흘렸다. “생원이, 난 이젠 더는 혼자 살지 못하겠소. 과부 아닌 과부로 못 살겠단 말이오. 흐흑.” 통곡 치는 아주머니를 마주 보면서 기준 같은 사내대장부도 염통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그는 한숨을 길게 내쉬더니 퉁명스럽게 중얼거렸다. “황차 나도 형님네 유격대가 어데 있는지 딱히 모른단 말이오.” 하옥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아무리 여자 몸이라고 해도 은녀보다 못하겠소? 장백산 어디라 없이 찾아다니노라면 찾아낼 날이 있겠지.” 하옥이가 바깥으로 나가자 바빠 맞은 기준은 엉거주춤 일어나면서 말리였다. “아주머니, 가지 마오. 어데 가 찾는다고 그러오?” “찾든 말든 도와주지 않겠으면 그만두세요.” 하옥은 노여워 뒤도 돌아보지 않으면서 소서구 아래쪽으로 되 내려갔다. 그가 소서구 어귀까지 내려갔을 때였다. “아주머니, 나와 함께 가기요.” 하옥이가 뒤돌아보니 기준이가 목수도구까지 지고 씨엉씨엉 걸어 내려왔다. 하옥은 기준이가 옆으로 오자 “옆구리를 상해 가지고 갈만 하오?” 하고 근심하였다. 기준은 목수도구를 춰 업으면서 “일없소. 먼저 인삼 동생과 물어보고 가기요.” 하고 말하였다. “글쎄, 허망 찾아다닌다는 것도 그렇소.” 하옥은 기준을 따라 함흥촌으로 되돌아가 토성안집으로 들어갔다. 심부름꾼인척 하면서 대문을 보초 서던 유격대원은 기준과 하옥을 알아보고 인차 토성안집 위방으로 안내하였다. 인삼은 마루에까지 마중 나왔다. “어떻게 돼 왔소? 어서 안으로 들어오오.” 기준과 하옥은 인삼을 따라 위방으로 들어가 앉았다. 기준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성칠 형님이랑 어데 있는지 알려주오. 내 아주머니를 데리고 만나봐야겠소. 갔던 바에 통나무집도 져줄까 하오.” 인삼은 기준과 하옥을 미더운 눈길로 바라보다가 물었다. “아주머니 어떻게 찾아가겠소?” 하옥은 머리를 숙이더니 어깨들 들먹이기 시작하였다. 옆에서 기준이가 대신 말해주었다. “아주머닌 십여 년이나 형님과 떨어져 살았소. 빨리 알려주오. 형님이 어데 있는지?” 인삼은 한참이나 궁리하더니 무겁게 입을 떼였다. “형님과 아주머니를 믿고 알려줍네. 헌데 누구한테도 유격대 행방을 말해선 안 되오.” 기준과 하옥은 이구동성으로 다짐하였다. “그러지 않고.” 인삼은 목소리를 죽이더니 귀속 말을 하였다. “성칠 대장이랑 전번에 쌀을 가지고 의란구근거지로 갔소. 의란근거지가 일본 놈들의 소탕을 받은 후 소왕청으로 전이했다가 다시 영월구에서도 몇 백 리 떨어진 장백산 밀림 속으로 들어갔소. 내 말해 줘도 찾아가기 힘드오. 우리 유격대원들 보고 두 분을 모셔가게 하겠소. 가는 길에 조선의 이민으로 꾸미고 쌀두 얼마간 가져다주오.” 제일간 하옥이가 기뻐서 어쩔 줄 몰라했다. “생원이, 고맙소. 내 쉰이 넘었으나 쌀 쉰 근은 이고 갈만 하오.” 인삼은 도리머리 질 하였다. “어이고, 거 무슨 소리요? 천수해만 하면 괜찮겠으나 몇 백 리 산길을 어떻게 이구 간다고 그러오? 우리 유격대원들이 지고 가면 되오.” 인삼은 마루에 나가 유격대원 둘을 불러 뭐라고 분부하더니 유격대원들을 이끌고 기준과 하옥이쪽으로 다가왔다. 그는 꺽다리유격대원부터 인사시켰다. “여기 온지 며칠 안 되는 유격대 반장 리억복이요.” 그리고 이쪽 탄탄한 유격대원을 인사시키면서 "우리 토성안집에서 제일 날랜 유격대원 리철석이요. 우리 성칠 대장네 셋째동생과 아주머님이네."라고 일일이 소개하였다. 억복과 철석은 허리를 굽혀 인사하면서 이구동성으로 “처음 뵙습니다.” “항일유격대 김 대장께 안전하게 모셔 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하였다. 기준과 하옥은 이구동성으로 “수고하겠소.” 하고 인사를 받았다. 기준이가 억복이란 유격대원을 본적이 없었다. 훤칠한 키에 얼굴이 철색이여서 쇠기둥같이 생긴데다가 쩍 벌어진 어깨를 보니 힘깨나 쓸 것 같았다. 기준과 하옥은 쌀 주머니를 진 유격대원 둘을 따라 길을 떠났다. 인삼은 토성 대문 밖에까지 따라 나왔다. “형님과 아주머니, 몸조심하면서 편안히 갔다가 오십시요.” 기준과 하옥은 자그마한 쌀 주머니를 이고 지고 인삼과 작별하고 유격대원들을 따라 서쪽을 바라고 패용천산 앞으로 떠났다. 유격대원들은 쌀 주머니 속에 권총을 숨기고 종아리에 친 각반에 비수를 차고 앞뒤에서 기준과 하옥을 호위하면서 걸었다. 그들은 풍찬노숙하면서 거의 이틀 걸어서야 해질녘에 영월구에 이르렀다. 기준은 영월구에 오면서 일본 놈들이 도문으로부터 영월구를 지나 철길을 닦은 것을 알고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영월구에도 일본 놈들의 분주소를 들여앉혔는데 분주소에는 벌써 전등불이 환하고 일본 경찰 놈들이 총창을 비껴들고 대문 앞에서 왔다 갔다 하였다. 분주소 앞으로 한복차림의 조선족사내가 지게를 지고 이쪽을 두리번거리면서 지나갔다. 그 뒤에 한 아줌마가 함지를 이고 검정치마자락을 휘날리며 지나갔다. 보초병은 분주소 대문 앞에서 지나가는 조선 사람들과 한족사람들을 불러 세워 몸수색을 하고 있었다. 기준과 하옥은 유격대원들이 이끄는 대로 분주소를 피해 영월구를 벗어났다. 그 뒤에는 지게군이 뒤따라왔다. 그들은 온밤 걸어 영월구에서 몇 십리 떨어진 한 산기슭에 이르렀다. 그들은 쌀 짐을 벗어놓고 주먹밥을 꺼내 대충 저녁이라고 먹었다. 지게꾼은 그들에게 눈길 하나 팔지도 않고 스적스적 걸어 지나갔다. 그들이 한참 걸어 산을 에돌아가니 초가집이 게딱지처럼 늘어앉은 마을이 나졌다. 키꺽다리 리억복은 머리를 들어 산정을 뉘엿뉘엿 넘어가는 여름 해를 쳐다보더니 기준의 옆에 다가와 귀속 말로 말하였다. “해도 져 가는데 이 마을에서 한밤 자구 가깁소.” 기준은 “아직도 머오?” 하고 물었다. “아직도 한날 부지런히 가야 될 거 같습니다.” 기준은 머리를 끄덕이면서 목수도구상자를 둘러메고 억복을 따라갔다. 그들은 마을 서남쪽 제일 마지막집 울안에 들어섰다. 집 주인 나그네는 낯선 사내 셋에 아낙네가 들어서는 것을 보고 적이 놀라 하였다. “주인님, 지나가던 길손들인데 하루 밤 자고 가면 안 되겠습니까?” 철석이 사람 좋게 웃으면서 앞장서 나가면서 사정하였다. 주인은 하옥이가 끼어 있는 것을 보고 조금 안심됐든지 “해 넘어가는데 어데 가서 쉬겠소. 들어오오.” 하고 대답하였다. 주인은 장승 같은 억복을 보는 순간 위압감을 느낀 것 같기도 했다. “귀한 손님들이 비좁아 어떻게 쉬겠소?” 철석은 주인을 따라 위방에 들어가면서 “괜찮습니다. 쉬게만 해줘도 감사합구마.” 하고 인사말을 하였다. 기준은 주인을 보고 “이 마을은 뭐라고 부르는 동네요?” 하고 물었다. 주인은 “영월구 안보촌이라고 부르오.”라고 대답했다. 기준은 “오, 안보촌이구먼.” 하고 머리를 끄덕였다. 그들 넷이 금방 위방에 들어갔을 때였다. 이때 바깥에서 집주인과 웬 사내가 바깥에서 주고 받는 말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요?” “이 집에서 하루 밤 자고 가면 안 되오?” 억복이가 위방 문을 살며시 열고 내다보고 깜짝 놀랐다.  영월구로부터 그들의 뒤를 따라오던 지게꾼이 아니겠는가. (저 자는 마을 동북쪽 산기슭에서 앞서 지나가더니!) 지게꾼은 수상하게 이 집 울안에 들어와 흘끔거리는 것이었다. 주인은 “위방에 금방 길손 넷이나 들어갔소. 아래 집에 가보오.” 하고 딱해 하였다. “별수 없구먼. 아래 집에 가보지. 에헴.” 억복이 철석에게 바깥으로 눈짓하였다. 철석은 바깥에 나가 옷을 툭툭 털면서 아랫집 쪽을 살폈다. 지게꾼이 아래 집 울안에 들어가 주인가 뭐라고 말을 주고받더니 위방 쪽에 지게를 벗어놓고 위방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하옥은 고방에 들어가 이 집 열서너설 되는 딸애와 함께 잠자리에 들었다. 억복은 철석과 번갈아 바깥 울바자 안에 숨어 보초를 서기로 하고 기준과 함께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기준은 곤해서 벌써 코를 드렁드렁 골면서 통잠에 빠져버렸다. 한밤중에 갑자기 바깥에서 부엉이 귀뚜라미 울음소리가 났다. 억복은 본능적으로 와닥닥 일어나 앉았다. (야밤삼경에 무슨 사람이 올까?) 유격대에서는 귀뚜라미 울음소리를 내면 어떤 사람이 오는 일반신호였고 부엉이나 뻐꾹새 울음소리가 울리면 좀 위험하거나 서로를 확인하는 긴급신호였던 것이다. 이때 바깥에서 발자국소리가 어지럽게 들리더니 “주인 계시오? 나 십가장이오.”라고 부르는 소리가 들리었다. “예~ 십가장어른.” 집주인이 나가는 덜커덩 문소리에 뒤이어 신발을 짝짝 끄는 소리가 바깥에서 들리었다. “무슨 일이오?” “이 집에 무슨 손님들이 왔소?” “양, 사내 셋에 아주머니 한분이 지나가다가 하루 밤만 쉬고 가자고 들어왔소.” “나한테 손님신고를 해야지 뭐요? 사람두 원, 쯧쯧. 일본 분주소에서 알면 집단부락을 잘 관리하지 못했다고 벌 받을게 아니요? 정 그러면 일본 경찰들은 우리 마을도 다른 집단부락처럼 마을에 토성을 쌓고 가둬 넣고 말게요.” “에이, 무슨 일이 있다고 그러오? 처음엔 나도 낯선 사내들을 보고 겁이 났는데 농촌 아낙네가 끼어 있는지라 집에 들였소.” 억복이가 벽에 붙어 서서 문을 살며시 열고 내다보았다. 달빛아래 추녀 밑에서 두 그림자가 마주 서 있었다. 그런데 불시에 목소리가 낮아졌다. “요즘 일본 놈들이 저쪽 산골짜기에서 유격대 매복습격을 받았다네.” “양?! 거 시원한 노릇을 했구먼.” “소릴 낮추게. 자동차에 탄 놈들이 길 양쪽 산기슭에 매복해있던 유격대한테 자동차는 폭파되고 숱한 일본 놈들이 몰살당했다네. 또 김 대장이 한 매복습격전이라오. 그래서 요즘 일본 분주소에서 장백산으로 가는 길목에서 행인들 검문이 심하네. 길손들을 훌훌 받아들이지 말게. 혹시 길손들 속에 유격대나 있는 날엔 괜히 봉변당할게 아니요?” “양. 알았소. 유격대를 도와주면 뭐라오? 그 놈 일본 놈들 등살에 어디 살겠소?” 그들이 주고받는 말을 듣고 억복은 시름을 놓고 제자리에 돌아와 잠자리에 누웠다. 이윽고 집주인이 끌신을 작작 끌고 집으로 들어와 문을 덜커덩 닫는 소리가 들리었다. (참, 수상하다. 이 집에 든 걸 본 사람이 없는데.) 억복은 잠자리에서 일어나 앉아 번개같이 생각을 굴렸다. (야밤에 집주인을 불러 물어보는 수도 없고. 어쩐다? 옳다. 철석과 보초 교대도 하면서 토론해보자.) 억복은 옆에서 코를 드렁드렁 고는 기준의 옆구리를 툭툭 쳤다. “왜 그러오?” 기준이가 돌아누우면서 물었다. 억복은 “바깥이 심상치 않습니구마.” 하고 일깨워주고 방문을 살며시 열고 바깥으로 나갔다. 그는 울바자 밑에 서서 소변보는 척 하면서 사위를 둘러보았다. 그때 철석이 굴뚝 부근에서 보초를 서다가 다가왔다. 그들은 집 서쪽 굴뚝 밑으로 갔다. “바깥에 수상한 동정이 없소?” “그 십가장이란 사람은 아래 집 주인인 거 같소. 십가장이 아까 아랫집 마당에서 그 지게꾼과 쑤군거리더니 여길 왔소.” 그 말에 불길한 징조가 피뜩 억복의 머리 속을 스쳐지나갔다. “아차, 그 지게군은 영월구로부터 우리 뒤를 밟은 거 같소.  빨리 이 자릴 떠야겠소.” “양~ 빨리 뜨기요.” 이때 어지러운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그들이 벽에 붙어 울 밖을 살펴보니 한 무리 검은 그림자가 이쪽으로 쓸어오고 있었다. “한 놈도 놓치지 말고 몽땅 붙잡아라!” “일본 어른들께 바치고 상 타라!” 억복이 허리춤에서 권총을 뽑아들고 철석을 돌아보았다. “저 놈들부터 쓸어 눕히자.” 검은 그림자 서넛이 바로 위방문을 열고 들어서려는 찰나였다. “앗!” 비명 소리와 함께 문을 열던 놈이 대갈통을 싸쥐고 쿵 썩박나무 넘어지듯 쓰러졌다. 문 뒤에 숨었던 기준이 도끼로 대갈통을 찍었던 것이다. 땅! 땅! 야무진 총소리와 함께 또 두 놈이 쓰러졌다. 뒤따르던 놈들은 꼬리 빳빳해 울 밖으로 도망쳤다. 아래 방에서 놀란 소리가 웅성거렸다. 억복은 집안에 뛰어 들어 갔다. “아주머니, 빨리 이 곳을 떠납시다!” 기준은 문 뒤에 숨어 도끼를 쳐들었다가 내리웠다. 억복과 철석은 쌀 짐을 지고 기준은 목수도구상자를 둘러메고 아주머니를 부축해 밖으로 나갔다. 억복은 문 앞에 쓰러진 시체를 발길로 툭툭 차 넘기고 살펴보더니 “자위대 놈들이구나.” 하고 중얼거렸다. 그때까지 집주인 식솔들은 질겁하여 이불을 들쓰고 어둠속에서 부들부들 떨었다. 억복은 정지에 들어가 지고 가려던 쌀 주머니를 내리워놓으면서 조용히 말하였다. “겁 내지 마오. 우린 장백산 항일유격대오. 간밤에 폐를 끼쳐 미안하오.” 집주인은 억복의 팔을 잡고 “필요 없소. 가지고 가오. 당신들이 가면 우린 어쩌오. 십가장이 분주소 일본 놈들에게 고발하는 날엔 우린 끝장이오.” 하고 부들부들 떨었다. “오, 십가장과 지게꾼 놈이 남았지.” 억복은 그 길로 아래 집으로 뛰어가 문을 쾅 박차고 집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아랫집 안에서 여성의 비명소리가 들릴 뿐 총소리는 울리지 않았다. 인차 뛰어나온 억복은 기준과 하옥이가 나온 것을 보고 권총을 홱 휘둘렀다. “두 놈은 달아났소.” 억복은 집주인을 돌아보고 “이후에 일본 놈들이 뭐라면 아무것도 모른다고 하오. 만약 십가장 놈이 당신을 털끝 하나 다치는 날엔” 하고 말하면서 권총을 쳐들어보였다. “이걸로 그 놈의 허파에 바람구멍을 뚫어놓을 테요.” 뒤이어 그는 기준과 하옥을 보고 “분주소 놈들이 추격해 올게요. 빨리 이 자리를 뜨기요.” 하고 말하였다. 억복은 철석의 쌀 주머니 쌀을 빈 주머니를 꺼내 갈라 넣은 후 잔등에 졌다. 이윽고 앞에서 억복이가 권총을 들고 기준과 하옥을 데리고 나가고 철석이가 뒤를 살피면서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어둠이 꽉 들어찬 울바자 안에서 허리를 치는 옥수수가 잎사귀를 너펄거리며 그들을 바래였다.                             3.  항일 유격대 근거지         하늘을 찌르는 몇 십 길씩 되는 미인 송들이 꽉 박아 들어선 원시림 속에 해 빛이 들지 않아 음침했다. 간혹 하늘을 가린 나무 잎 새로 실오리 같은 몇 가닥 해 빛이 축축하고 이끼 낀 땅바닥을 비추었다. 억복 등은 안보촌에서 일본 놈들의 추격을 간신히 벗어나 산등성이를 타고 며칠 동안 걸어서야 원시림 속에 들어섰다. 기준은 푸른 주단을 깐 듯이 푸른 이끼로 깔린 푹신푹신한 수림 바닥을 밟으면서 이 비옥한 부식토 땅을 파재끼고 곡식을 심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궁리했다. (야, 이 밋밋한 미인 송을 베다가 고향 땅에 팔간대청을 짓고 살았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는 하늘을 찌른 미츨한 나무들을 보고 감탄했던 것이다. 하옥은 가시덤불에 얼굴을 긁히고 치마 자락이 나무 가지에 걸려 미여졌건만 남편의 신변으로 다가간다는 일념으로 하여 곤기가 가득한 얼굴에는 숨은 미소가 넘실거리고 있었다. 어디에선가 부엉이의 울음소리가 들리고 뻐꾹새가 뻐꾹뻐꾹 우는 소리가 고즈넉한 원시림의 정적을 깨웠다. 억복은 뒤를 돌아보면서 “철석이 암호를 보내오.” 하고 말했다. 철석이가 입에 손을 모아대고 “뻐꾹뻐꾹” 하자 원시림 속 여기저기에서도 “뻐꾹뻐꾹” 울음소리가 울렸다. 뒤이어 원시림 속에서 총을 든 유격대원 몇이 나타났다. “억복 반장이 왔구먼.” “철석도 오고.” 그들은 다가와 억복과 철석의 잔등에서 쌀 주머니를 받아 메였다. “도구상자를 메게나.” 그중 한 유격대원이 기준의 목수도구상자를 벗겨 메고 하옥을 보더니 억복과 철석에게 눈길을 보냈다. 억복은 “김 대장네 아주머니와 동생이네.” 하고 알려주었다. “안녕하십니까?” “처음 뵙습니다.” 유격대원들은 모두 채양 밑에 거수경례를 척 붙이였다. 억복은 짐을 메지 않은 꼬마를 보고 “리 꼬마, 빨리 달아가서 김 대장께 전하게나. 아주머니와 동생 왔다고.” 하고 분부했다. “옛!” 리 꼬마는 날래게 앞으로 달려갔다. 기준 등이 얼마 가지 않아 원시림 속에서 한패의 유격대원들이 나타났다. 그 속에는 성칠 대장도 보이었다. “아니, 기준아, 어떻게 돼 여기까지 왔니?” 성칠 대장은 눈길을 기준에게서 하옥한테 돌리더니 “당신은 어째 왔소?” 하고 물었다. “남편 찾아오면 안 되는 건가요?” 하옥은 몸을 돌려 어깨를 들먹였다. 성칠 대장은 “양, 잘 왔소. 여기는 싸움터라 위험하다고 그러오.” 하고 안심시켰다. 하옥은 손등으로 눈물을 닦았다. 그때 억복은 성칠 대장을 조용히 불러 한쪽으로 가서 영월구 부근에서 자위대원 세 놈을 쏴 죽인 경과를 죽 이야기했다. “참 잘 했소. 후에 일본 앞잡이 놈들을 하나하나 처단해 버리기요. 영월구의 그 십가장 놈과 용정 부근 성지촌의 허팔기란 놈을 우선 처단하고 지게꾼이 누군가 밝혀내 처단해야 하오. 지게꾼 같은 놈들이 더 위험하오. 그 놈들은 신분을 속이고 밀정이 돼 우리를 해칠 수 있소.” 성칠은 말을 마치자 기준과 하옥의 옆으로 다가왔다. 성칠은 기준의 손을 잡고 나란히 걸으면서 “부모들께서 무사하시니?” 하고 물었다. 기준은 “엄마께선 삼 년 전에 사망하셨소.” 하고 대답했다. 성칠은 주춤 멈춰 섰다. “아니, 무슨 소리야? 내 갔을 때만 해도 반가워하던 엄마가 사망하다니? 엉?!” 성칠은 양 눈썹이 한데 모일 지경으로 놀란 눈길로 기준을 바라보았다. 하옥은 눈물을 주르르 흘리면서 조용히 말했다. “어머닌 돌아가기 전에 당신을 얼마나 보고 싶어 했는지 알아요? 흐 흐 흑. 고향으로 언제 가겠냐면서, 흑, 흑, 명천과 충청도 한산면을 그리고 또 그리었어요. 어머니~” 성칠은 머리를 툭 떨어뜨렸다. 드디어 그는 소서구가 있는 동북 쪽을 향해 털썩 주저앉으면서 무릎을 꿇고 절을 꾸벅꾸벅 올렸다. 기준과 하옥이도 꿇어 엎드려 함께 꾸벅꾸벅 절을 올렸다. 성칠은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대성통곡 쳤다. “엄마~ 이 불효자를 용서하십시오. 불효자를 콱 욕하십시오. 엉~ 엉~, 엄마가 세상을 떴는데도 이 불효자는 장례에도 가보지 못했습니다. 일본 놈들을 몰아내고 고향에 모셔가겠다고 어머님께 약속드렸건만 엄마는 어이하여 이 아들을 기다리지 않고 이렇게 빨리 돌아갔습니까?” 유격대원 모두들 눈물을 줄줄 흘리며 주먹으로 눈물을 닦았다. 성칠은 기준을 보고 욕했다. “이 못난 놈아, 어째 엄마 세상 떴는데 알리지 않았느냐?” 기준은 머리를 숙이었다. “잘못했소. 그때 불시에 당한 일인데다가 형님이 어데 있는지 찾을 거 같지 못해 알리지 못했소.” 성칠은 기준에게 성난 눈길을 보냈다. “그래 엄마를 어데 모셨느냐?” 기준은 그제야 머리를 들고 나직이 대답했다. “함흥촌 서쪽 천지꽃산 양지바란 산중턱에 모셨소. 아버지가 고향을 볼 수 있는데 모신다구 거기에 모셨소.” 성칠은 미인 송에 가리여 보이지 않는 하늘을 쳐다보면서 한숨을 후 땅이 꺼지게 내쉬었다. 그는 일어나 기준의 손을 잡아 일으키면서 물었다. “엄마 무슨 병으로 그렇게 갑작스레 돌아갔니?” 그때 하옥이가 대신 대답했다. “두 생원이 수레에 모시고 병원으로 가다가 시어머님이 편안히 가시겠다고 집으로 모시고 돌아왔습니다.” 기준은 “딱 무슨 병인지 모르겠소. 고향을 그렇게도 그리었고 형님을 그렇게도 외우시겠소?” 하고 입귀를 실룩였다. 성칠은 한숨을 후 내쉬었다. “내 언젠가 함흥촌 부근에 가면 꼭 산소에 찾아가 엄마께 사죄드려야겠다. 아버님은 얼마나 고독하겠느냐?”  하옥은 “그래서 우리 쉰 고개를 갓 넘은 새 시어머니를 모셨어요.” 하고 알려주었다. 성칠은 또 주춤 멈춰서더니 중얼거렸다. “엄마 3년제가 지났으니 괜찮겠구나. 아버지 말동무를 해도 좋지.” 그들을 앞서 재빨리 하늘이 보이지 않는 원시림속의 숙영지로 갔다. 기준이가 하늘을 덮어버리게 몇 십 길씩이나 되게 쭉쭉 빠진 미인 송들을 보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 좋은 나무면 유격대 통나무집은 실컷 짓겠군.” 이때 원시림 쪽에서 나뭇잎을 헤가르는 와스락, 와스락 소리 들리더니 한패 사람들이 나타났다. 성칠과 기준이네는 나무 뒤에 숨었다가 마주 나갔다. 제일 앞에서 중년 여성이 총을 든 전사들을 거느리고 마주 오면서 웃음 지었다. “형님과 사돈 오느라 수고 많았어요.” 기준은 양태머리를 기른 그 여성이 퍽 낯에 익어보였다. 성칠은 기준을 돌아보면서 인사시켰다. “진달래 중대장이다." 기준은 진달래를 마주나가 인사하면서 진달래의 철색얼굴에서 하옥의 눈치를 보는 것을 눈치 챘다. “형님, 여기까지 오느라 얼마나 고생했어요? 여기는 유격대 전투장이여서 위험한데요.” 하옥은 진달래의 철색얼굴을 똑바로 마주 바라보며 똑똑히 말했다. “자네가 총을 쥐고 싸울 수 있는데 나라고 못할 거 있나요? 나도 유격대에서 밥을 짓고 제 남정 옷을 씻어주겠소. 총 쏘기도 배워 이제 내 손으로 일본 놈들을 쏴 죽일 테요.” 진달래는 하옥의 당당한 그 표정에 머리를 끄덕였다. “예, 형님, 환영해요. 우리 유격대에는 여성들이 적지 않아요.” 그들은 담소하면서 유격대 숙영지에 이르렀다. 원시림 속에 자그마한 통나무집이 여기저기에 널려있었다. 한 통나무집 앞에서 구레나룻이 더부룩한 노인 한분이 사냥총을 쥔 채 나오더니 인사했다. “사돈어른 안녕하세요?” 기준이가 보니 최구장의 동생 최구철이었다. “어이구, 사돈어른, 무사합니까? 산속에 계신단 말은 들었습니다만 여기에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최구장은 “참, 오래간만이군요. 큰 사돈어른님 무사한가요?” 하고 문안인사를 하면서 자기 통나무집으로 안내했다. 최구장네 통나무집은 지은 지 몇 십 년이 돼서 이젠 낡아보였다. 반토굴이나 다름없는 통나무집 지붕 위에 머루대래넝쿨이 푹 덮여있어서 피뜩 보아서는 통나무집을 알아볼 수 없었다. 다만 출입문으로 드나드는 다래넝쿨 틈이 있어 사람이 드나드는 곳이라는 감이 들 뿐이었다. 어두운 통나무집에 들어가 보니 호랑이 가죽으로 사슴 가죽을 깐 구들은 대여섯 사람을 들이기는 너무나도 비좁아보이었다. 기준은 최구철과 진달래에게 어머니가 사망한 일로, 막내아들 상순이가 지학사 지주를 소송해 이긴 일로, 며칠 전에 이곳으로 오면서 안보촌에서 자위대 놈들과 싸우던 일을 죽 이야기했다. 최구장은 한숨을 후~ 길게 내쉬었다. “에이, 참, 조선 지주나 중국 지주나 속은 통 검다니까. 지주들보다 더 검은 놈은 일본 놈들이요. 지주는 소작료나 많이 받아먹지만 일본 놈들은 우리 조선을 통 채로 빼앗아갔단 말이요.” 기준은 한숨을 후 내쉬면서 “밸 같으면 나도 일가식솔들을 데리고 유격대에 들어와 총을 잡구 일본 놈들을 통쾌하게 족치고 싶습니다. 오면서 보니까 그 놈들이 저기 도문으로부터 진수해를 지나 영월구에로 죽 철길을 놓느라고 숱한 조선 사람들을 노예처럼 부려 먹습디다. 그 놈 새끼들이 조선에서도 우릴 못 살게 굴더니 여기까지 쫓아와서 우리를 못 살게 군단 말입니다. 이번 기회에 항일 유격대를 돌아보고 다시 생각해 봐야 하겠습니다.” 하고 말했다. 옆에서 성칠은 “거 무슨 소리야. 소서구에서 아버지를 잘 모시고 농사를 지어라. 유격대에 쌀을 지원하는 것도 일본 놈들과 싸우는 게야. 이전에 말해줬는데도 또 그 말이야.” 하고 핀잔을 주었다. 기준은 뒷덜미를 긁적이면서 “도리는 그런데 어떻게 중국 지주들의 눈치 밥을 먹고 살겠소?” 하고 두덜거렸다. 성칠은 기준을 못마땅한 눈길로 흘겨보더니 하옥을 데리고 자기 헌 통나무집으로 갔다. 기준은 최구장에게 궁금한 걸 물었다.  “우리 고향 명천에서 온 칠백이랑 동욱이랑 용천이랑 다 잘 있습니까? 어째 보이지 않습니까?” 최구장은 더부룩한 구레나룻을 슬슬 만지더니 진달래의 눈치를 보았다. 진달래가 입을 떼였다. “다 잘 있어요. 용천 대장은 항일 투쟁의 수요에 의해 경상도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사는 길림과 북만 일대로 갔고요, 칠백 오빠나 동욱 오빠네는 모두 중대장이 됐어요. 그들도 쌀 얻으러 무송현 쪽으로 나간 지 일주일이 되는데 아직 돌아오지 않았어요.” 최구철은 한숨을 후 내쉬었다. “고향 명천에 있는 구장 형님이랑 어떻게 보내는지 몰라 속이 답답해 죽겠소.” 기준은 무릎을 탁 쳤다. “아차, 잊을 번했구먼. 경숙 사돈이 우리 함흥촌 큰매형네 집에 들어와 있으면서 농사를 짓습니다.” 최구철과 진달래는 아주 반가워했다. “큰조카 함흥촌에 왔구먼. 언제 가 봐야지.” “큰오빠 왔다고? 언제 성칠 오빠와 함께 가 봐야겠어요.” 최구장은 엉덩이걸음으로 기준한테 다가앉으면서 물었다. “그래, 형님은 명천에서 무사히 있소?” 기준은 경숙에게서 들은 말을 대충 전해주었다. “일본 놈들이 우리 고향 명천에 득실거리는 판에 허리를 펴고 살겠습둥? 일본 놈들은 최구장 사돈어른을 보고 서당을 그만 두고 일본 놈 말을 배워 일본 학교에서 훈장질을 하라고 하였습구마. 창씨개명인지 뭔지 하라고 일본 놈들이 야단이랍더구마. 조선 사람들이 모두 천황페하의 백성이 됐기에 성도 일본 놈들의 성을 따라 고치라고 못살게 군답구마.” 최구장은 땅이 꺼지게 한숨을 후 내쉬었다. “한뉘 서당 훈장을 하시던 분을 훈장을 하지 말라니까. 입을 기워 매고 굶어 죽으라는 게 아니고 뭐요? 언제 저 섬나라 오랑캐 놈들을 다 몰아내구 편안히 살겠소?” 속이 탄 한숨 소리가 적막한 통나무집안의 정적을 톱질했다. 한참 후 최구장이 납덩이 같은 침묵을 깨였다. “우리 여기 유격대두 쌀 고생을 모질게 하오. 여름에는 산나물이랑 캐먹으면 괜찮은데 겨울엔 정말 풀뿌리도 얻어먹기 힘드네. 일본 놈들이 항일유격대를 압살하려고 봉쇄가 어찌나 심한지 쌀이 극난이오. 김 대장 말처럼 사돈어른이랑 농사를 잘 지어 우리 유격대에 쌀을 대주는 것도 항일투쟁이고 일본 놈들과 싸우는 거요.” “글쎄 성칠 형님과 토성안집 인삼 아저씨도 다 그러더군요.” 기준은 일어나 바깥을 내다보면서 말했다. “이번에 온 바에 통나무집이나 여러 채 져주고 갈까 합니다.” 최구철과 진달래는 눈길을 마주치며 반가운 웃음을 지었다. 최구철도 일어나 바깥으로 나가 머루다래 넝쿨 속을 나가더니 하늘을 찌를 듯 한 미인 송을 올리다보면서 뒤따라 나온 기준에게 말했다. “이 미인송이면야 숱한 통나무집을 지을 수 있지. 헌데 너무 많이 통나무집을 지으면 일본 놈들의 비행기에 발각될 수도 있네. 황차 유격대는 말 그대로 유격전을 위주로 하기에 이 곳에 오래 머물지 않지.” 기준은 자기 생각을 돌리지 않았다. “토끼도 굴을 여러 개 파놓고 산다 하지 않습니까? 여기 저기 숱한 통나무집을 지어 놓으면 이 부근에 오면 들려서 잘 데라도 있지 않겠습니까? 난 형님이랑 유격대원들이 추운 겨울에 들 집도 없어 허허벌판에서 나무이파리를 덮고 잔다는 말을 듣고 잠이 다 오지 않습디다. 하다못해 비를 끊고 추위를 막아도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 말에 진달래는 따라 나와 지지했다. “사돈 말씀이 옳아요. 한곳이 아니라 몇 백 미터 사이에 여기 저기 드문드문 통나무집을 지어놓으면 좋겠어요.” “사돈 새 애기 말이 옳소.” 기준은 당장 통나무집을 지으려는 듯이 통나무집안으로 들어가더니 목수도구상자를 메고 나와 한 아름씩 되는 통나무들을 쳐다보았다. 이때 성칠 대장이 하옥과 함께 걸어왔다. “형님, 내 온바 하곤 통나무집을 지어줄게.” 하옥은 미소를 지으면서 반겼다. “생원이, 나도 이젠 여기서 살게 통나무집을 하나 져 주세요.” 성칠은 어이없다는 듯이 어깨를 움찔해보였다. “아낙네들이란 참 코 막고 답답하다. 전쟁터에서 아낙네들이 뭘 한다고 여기 눌러 있어? 바로 살림을 차릴 예산이요?” 그러자 진달래가 통나무집으로부터 머루넝쿨을 쳐들면서 나오더니 끼어들었다. “형님 말이 맞아요. 여기가 통나무집을 짓고 저쪽에 밭까지 일궈 놓고 오빠와 함께 있으세요.” 하옥은 때를 만났다고 지청구를 들이댔다. “여보, 당신 들었어요? 유격대에도 여성들이 필요해요. 밥도 짓고 빨래도 해드릴게요. 저를 받아주세요. 네? 절대 유격대 짐이 되지 않을게요.” 진달래가 맞장구를 쳤다. “그래요. 은녀랑 형님이랑 있으면 저도 고독하지 않을 거 같아요.” 하옥은 제꺽 “은녀랑 어데 있어요?” 하고 물었다. 진달래는 병수 소대장과 함께 “통화 쪽으로 잠시 임무를 집행하러 나갔어요.” 하고 말했다. 성칠은 “에헴.” 하고 마른기침을 했다. 진달래는 혀를 홀랑 내밀었다. 원래 유격대 종적은 비밀에 부치기로 됐던 것이다. 그러나 진달래는 성칠의 동생과 아내 앞인지라 구애 없이 말했던 것이다. 성칠은 기준과 최구철과 함께 풀숲을 헤치면서 원시림 속으로 저벅저벅 걸어갔다. 해가 원시림에서 사라지고 어둠의 장막이 우중충한 미인 송들을 덮을 때까지 그들은 이산 저산 넘어 다니면서 통나무집을 지을 일을 토론했다. 4. “지게꾼”을 처단 하늘이 보이지 않는 원시림 속은 기준의 지휘아래 미인 송을 베여 통나무집을 짓는 억복, 바위 돌 등 유격대원들로 한창 법석이었다. 성칠과 최구장의 주장대로 기준은 한곳의 미인송을 베 내지 않고 여기저기서 아름드리나무 밑에 있는 대야밑굽만한 미인 송을 드문드문 톱으로 베 냈다. 그리고 유격대원들을 시켜 천연적으로 은폐하기 좋은 나무숲속의 경사진 곳을 괭이로 파고 통나무를 쌓은 다음 위 갓을 씌웠다. 통나무 틈에는 원시림속의 풀과 흙을 이겨 발라놓았고 지붕 위에 싸리나무와 단풍나무를 촘촘히 얹고 흙을 이겨 바른 다음 그 위에 흙을 두툼히 발라놓았다. 얼핏 보면 그저 둔덕으로만 보였다. 그러나 그 속은 10여 명씩 잘 수 있는 동굴이나 다름없는 통나무집이었다. 성칠은 유격대원들을 조직해 통나무집과 통나무집 사이를 동굴을 파 이어놓았다. 동굴을 파서 나온 흙은 커다란 통나무집 사이에 통나무로 만든 동굴 위에 쌓아올렸다. 그리고 키 넘는 나무들을 송두리 채 파다가 옮겨놓았다. 하여 가산 같은 커다란 흙무지 사이에 통나무집들이 가려져 유사시에 이런 가산의 동굴을 리용해 통나무집을 습격하는 적들을 매복습격하고 통나무사이 동굴을 이용해 침략자들을 사격할 수 있고 철퇴할 수도 있었다. 기준은 형님에게 특별히 세 칸 들이 통나무집을 지어주었다. 경사진 둔덕으로부터 동굴을 파고 첫 칸은 부엌이자 경위원이 자는 칸이고 뒤 칸에는 성칠 부부간이 자는 칸이었다. 부엌 천정에는 공기통이자 피신구멍을 냈는데 그 구멍문을 열고 올라가면 천정이 있었다. 바깥으로 삐뚤게 낸 공기구멍은 잔 나무에 가리어져 은폐가 잘 된데다 바깥이 환히 내다보여 돌변사태에서도 적정을 정찰하고 사격할 수도 있었다. 동굴에는 두 칸이 있었다. 하나는 성칠의 부부간의 침실이고 다른 칸은 경위원의 침실로 쓰기로 했다. 두 침실 뒤로 동굴을 파서 다른 통나무집과 가산의 동굴과 이어놓았다. 둬달 전에 기준이 원시림 속 유격대 숙영지에 들어섰을 때는 녹음이 짙었건만 벌써 나무숲과 풀들이 누런색을 띄기 시작했다. 어느 날 아침, 기준은 성칠의 통나무집 경위원 실에서 경위원과 함께 일어나자마자 성칠의 칸을 찾아가 조용히 말했다. “가을걷이를 하러 집으로 돌아가야겠소.” “옳다. 돌아가라. 농사를 잘 지어 우리 유격대를 도와주는 것도 항일투쟁을 지지하는 게다. 이번에 와서 큰 수고를 했다.” 기준은 성칠에게 목수도구를 내놓으면서 “이걸 유격대에 두고 가겠소. 후에 유격대에서 이걸로 통나무집을 짓소.” 하고 말했다. 성칠은 목수도구들을 두루 들여다보면서 잠간 궁리하더니 입을 열었다. “통나무집을 지어놔서 올 겨울에는 유격전을 벌리다가도 여기 와서 잠복해 있으면 덜 얼겠다. 건데 톱과 도끼, 작은 자귀하구 끌만 두고 대패랑 큰 자귀랑 가져가라. 빤빤하게 대패질한 문보다도 통나무 문이 위장하기엔 나을 거 같아.” 기준은 대패와 자귀만 가지고 가기로 했다. 성칠은 머리를 훔치고 나서 기준을 연이하려는 하옥을 돌아보면서 말했다. “당신두 동생과 함께 집으로 돌아가 부모나 잘 모시오.” 하옥은 단통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앵돌아져 성칠을 외면하면서 두두 거렸다. “안 가. 집에 있는 동서 둘이 시부모를 모시면 돼. 여기서 유격대 밥을 짓고 빨래를 하겠어요.” 성칠은 도리머리 질까지 했다. “여보, 여긴 싸움터이지 살림을 차리라는 곳이 아니오. 얼른 따라가오.” 하옥은 외까풀 눈으로 성칠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내게도 총 주세요. 나도 은녀처럼 애를 업고 여성유격대원들처럼 싸울 수 있어요.” “쳇, 남자들도 어려워하는데. 당신이?” 성칠은 코웃음 쳤다. “꼭 내 손으로 일본 놈을 쏴 죽여 보여야겠어요.” 성칠은 별수 없이 하옥을 남겨두기로 했다. 그는 경위원의 귀에 대고 뭐라고 분부했다. 경위원이 나가 얼마 되지 않아 최구장과 진달래가 나무집 문을 떼고 들어왔다. 진달래는 하옥이가 남아 있게 됐다는 말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는 성칠의 눈치를 곁눈질하면서 인차 표정을 정리했다. “형님이 남으면 내 동무돼 좋겠어요.” 하옥은 진달래의 말뜻을 제대로 이해나 했는지 싱글벙글 웃었다. “그래요. 후에 사돈새기와 동무하면서 유격대를 잘 받들 예산이라요.” 이윽고 억복과 철석이가 성칠의 통나무집안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이 두 달 사이에 함흥촌의 토성안집과 장백산 원시림 속 유격대 숙영지를 두 번이나 왔다 갔다 하면서 임무를 수행하였던 것이다. 성칠은 억복과 철석을 경위원 침실에 불러 조용히 물었다. “영월구 지게꾼과 십가장을 정찰해봤소?” 억복이가 회보했다. “십가장 놈은 전번에 일루 겁을 집어먹고 집에 잘 들지 않고 어떤 때엔 밤중에 돌아오는 때가 간혹 있습니다. 그러나 지게군 놈은 영월구에서 사라졌습니다.” “알았소. 그 놈들을 즉시 처단해버리오. 팔기란 놈을 심문해 적정을 알아낸 후 좋기는 그 놈을 미끼로 일본 놈이거나 개다리 놈들을 몇이라도 으슥한 곳에 데려다가 처단하면 좋을 거 같소.” “옛, 명령을 집행하겠습니다.” 성칠은 억복의 어깨를 다독이면서 분부했다. “영월구나 송강의 놈들이 눈치 채지 못하게 동생하구 앞뒤에 거리를 띄워두고 령 길로 돌아가오.” “예, 알았습니다.” 기준은 경위원 침실에서 나오는 성칠의 손을 굳게 잡으면서 “형님, 부디 주의하면서 일본 놈들을 많이 족치오.” 하고 말하고 나서 긴 한숨을 후 내쉬었다. “언제 일본 놈들을 다 몰아내구 고향 명천으로 돌아가 형님이랑 함께 마음 놓고 살가?” 성칠은 기준의 어깨를 툭툭 쳤다. “돌아가 농사를 많이 져서 여기에 쌀을 많이 보내라. 그럼 고향으로 돌아갈 날도 멀지 않을게다.” 기준은 큰 자귀와 대패를 묶어 메고 나서 하옥에게 허리를 굽혀 작별인사를 했다. “아주머니, 형님을 모시고 잘 있소.” 하옥은 생글 웃음지었다. “집에 돌아가면 시부모님과 동서들에게 안부를 전해주세요. 올 때 알리지 않고 가만히 와서 미안하다고 시아버님께 사과를 드린다고 전해주세요.” “알았소. 부부간이 함께 있자는데 아버지도 양해할 거요.” 기준은 옆에 선 최구장과 진달래에게도 작별인사를 드렸다. “사돈어른, 무사히 계십시오. 사돈 새기 잔치 술은 언제 마시겠는지 알리십시오.” 진달래는 몸을 돌리면서 외면했다. 최구장은 한숨을 후 내쉬더니 혼자 말처럼 중얼거렸다. “혁명을 하느라고 시집갈 새 어디 있어야죠.” 성칠과 진달래, 최구장 등은 기준이네를 원시림 속에서 한참 걸어 나오면서 바래였다. 원시림에서 폭풍이나 불어칠 듯이 무섭게 설레면서 휴~ 휴~ 소리 냈다. 기준이네 셋은 련 이틀이나 주먹밥을 먹으면서 걸어서야 영월구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그 마을 앞산에 이르렀다. 억복이가 하늘을 쳐다보니 서늘한 가을해가 서산으로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다. 그는 뒤에서 터벅터벅 다가오는 기준을 보고 “삼촌은 여기 숨어 있으십시오. 우리 둘이 내려가 십가장 놈을 처단하고 오겠습니다.” 하고 말했다. 기준은 대수로워 하지 않았다. “그까짓 놈 새끼를 죽이는데 자네들까지 필요 없네. 내 내려가서 자귀로 푹 찍어죽일게.” 억복은 자귀를 메고 산 아래를 막 내려가려는 기준의 팔을 붙잡았다. “안 됩니다. 마을에 정황이 복잡합니다. 전번에 자위대 놈들이 셋이나 처단당한 일로 놈들은 보초를 강화했습니다. 혼자 십가장 놈은 죽일 순 있겠지만 몸을 빼기 힘듭니다.” 기준은 숨을 길게 몰아쉬면서 궁리하더니 “그럼 자네 말을 따르겠네.” 하고 자귀를 내려 자루를 짚고 멈춰 섰다. 기준은 한참 궁리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아래도 자네들이 총을 쏘면 자위대 놈들이 달려들 거 같네. 내 십가장 놈을 찍어 죽일 테니 자네들이 덮쳐드는 자위대 놈들을 족치게.” 억복은 철석이가 다가오자 작전을 꾸몄다. “내가 십가장 놈을 처단할 테니 삼촌과 자넨 뒤를 막소.” “예, 이 분대장!” 억복 등은 해가 지기를 기다려 산에서 내려 마을로 다가갔다. 어둠의 장막이 그들의 행동을 감춰주었다. 그런데 마을에 다가가자 개들이 “컹컹” 요란하게 짖어댔다. 마을 동서남북에 보초를 서던 자위대 놈들이 개가 짓는 것을 듣고 떠들어댔다. “웬 놈이 오지 않았어?” “글쎄 말이야.” “가 봐라!” “싫어. 전번에도 죽다가 살았어.” “에이, 겁쟁이 같은 게 우리 둘이 가 보자.” “왕왕!” 억복이 제꺽 주먹밥 한 덩이 꺼내 뿌렸다. 요란하게 짖으면서 덮쳐오던 개가 짖지 않고 주먹밥 덩이가 떨어진 곳에 달려와 밥덩이를 먹는 것이 달빛에 보이었다. 이때 버드나무숲속에서 꿩인지 까마귄지 푸르릉 날아났다. “에이 씨, 깜짝이야. 꿩이구먼. 괜히 놀랐다.” 자위대 놈들 둘은 개를 불러 가지고 마을 쪽으로 돌아갔다. 엎드렸던 억복이 버드나무숲속에서 일어나 앉으면서 머리를 숙이고 궁리했다. “인차 이 곳을 옮기기요. 놈들이 우릴 발견하고서도 모르는 척 할 수도 있습니다.” 기준은 “자네들은 개울가로 에돌아 그 죽일 놈의 십가장 집으로 가오. 내 이쪽으로 나갈게. 목수인 나를 어찌 하겠소.” 하고 말하면서 큰자귀를 짚고 일어서려고 했다. 억복은 황급히 기준의 팔을 잡았다. “안 됩니다. 전번에 살아남은 자위대 놈이 있습니다. 그 놈은 삼촌을 알아 볼 겁니다.” “그래 어찌 하겠단 말이오?” “저와 함께 개울가로 에돌아 마을 서남쪽으로 해서 들어갑시다. 철석은 북쪽으로 해서 마을에 들어가 일단 일이 일어나면 뒤를 차단하오. 우린 십가장을 처단한 후 회합하기요.” “옛!” 이리하여 억복과 기준은 버드나무숲을 헤가르면서 개울가로 하여 마을 서남쪽을 에돌아나갔다. 가을바람에 버드나무들이 쏴~쏴~ 소리 내면서 몸부림쳤다. 바람소리가 그들의 발자국소리를 감싸 안고 날아가 버렸다. 마을 동남쪽으로 하여 역시 자위대 보초 놈들이 뭐라고 중얼거리면서 담배를 피우거나 서성거리고 있었다. 억복은 기준과 뭐라고 귀속 말을 하더니 함께 허리를 구부정하고 제일 서남쪽 집으로 슬렁슬렁 달려갔다. 그들은 울바자 안에 슬쩍 뛰어들어가 허리를 치는 터 밭 강냉이 속을 헤집으면서 십가장의 집 앞으로 접근했다. 서럭서럭 옥수수 이파리들이 팔소매를 스치었다. 옥수수이파리들이 밤 가을바람에 너펄너펄 몸부림을 쳤다. 이때 집 북쪽에서 뻐꾹새 울음소리가 “뻐꾹뻐꾹” 들려왔다. 억복은 기준에게 다가와 “철석이가 예정한 자리에 들어온 것 같습니다. 삼촌은 옥수수 밭에 숨어 있으시오. 내 집안에 들어가 십가장 놈을 처단하겠습니다.” 하고 귀속 말을 했다. 기준은 머리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억복의 팔을 잡아당겼다. “십가장 놈이 있는가 보고 들어가게나.” 억복은 머리를 끄덕이더니 억대우 같은 몸을 날려 아래 집 울바자 안으로 훌쩍 뛰어넘어갔다. 그러나 평소에 어찌나 연습하였던지 고양이가 나무 우에서 살짝 뛰어내리듯이 아무런 자취도 들리지 않았다. 황차 밤 가을바람이 와스랑와스랑 터 밭의 옥수수 밭을 들춰놓아서 아무런 소리도 자취를 감추었다. 십가장의 집에는 등잔불이 환히 켜져 있었다. 굴뚝으로 하여 벽에 붙어 슬슬 윗방 문으로 다가갔다. 억복은 혀끝의 침으로 창호지를 살짝 젖혀놓고 손가락으로 살랑 구멍 냈다. 창호지 구멍으로 안을 들여다보니 등잔불 밑에서 술상을 마주하고 십가장과 낯모를 사람이 뭐라고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전번 네 놈은 유격대 옳지?” 십가장의 말에 맞은쪽의 사람이 머리를 끄덕였다. “옳소. 내 약재 캐는 사람으로 가장해 령 길을 따라 그 놈들의 뒤를 밟아보았는데 장백산 원시림으로 들어갔소. 그 놈들은 원시림에 통나무집을 짓고 야단입데. 목수도구를 멘 놈이 유격대 두목의 형제인 거 같았소.” (이 놈이 바로 그 지게꾼 놈이구나.) 억복이가 문을 차고 쳐들어가려는데 십가장이 또 지껄였다. “그럼 빨리 헌병대나 경찰국에 알려야지.” “내일 영월구파출소에 가서 알려야겠소. 파출소 소장이 용정 조일파출소나 용정통감부 간도파출소에 알릴 게요. 놈들의 꼬리를 밟았으니 일본 관동군이 장백산에 숨은 유격대를 놔두지 않을 게오.” (밀정 놈, 어디 죽어봐라!) 억복이 비수를 빼들더니 문을 탁 차고 뛰어 들어 갈 때였다. 어느새 기준이도 뛰어 들어갔다. “에이쿠, 당신들은?” 억복은 비수로 두 놈을 번갈아 겨누면서 을러멨다. “우린 항일 유격대다! 인민을 대표해 일본 놈 개다리들을 처단한다!” 땅! 그때 지게꾼 놈이 어느 결에 술상 밑에서 권총을 들어 억복을 쏘았다. 억복의 왼팔을 꿰뚫고 벽에 박힌 총알은 불꽃을 튕기며 윙- 죽음의 노래를 울렸다. 억복이 왼팔을 붙잡고 비틀거렸다. 순간 기준이 큰 자귀를 번쩍 휘둘러 지게꾼 놈의 대갈통을 콱 찍었다. 지게꾼 놈은 대갈통이 뻐개져 푹 꼬꾸라졌다. 억복이 아픔을 참고 비수로 십가장 놈의 목을 썩뚝 도려냈다. 정지에서 아낙네와 애들의 비명소리가 요란했다. 억복과 기준이 문을 열고 바깥에 나왔을 때였다. 자위대 놈들이 이쪽으로 뛰어오는 어지러운 발자국 소리와 고함소리 요란했다. “웬 총소리냐?!” “십가장 집 쪽이야!” “지게꾼이 잘못 됐겠어.” 그때다. 땅! 야무진 총소리와 함께 제일 앞에서 뛰어오던 자위대 놈이 꺼꾸러졌다. 억복이가 뛰어나오면서 총을 쏘았다. 자위대 놈들도 맞불질했다. 땅! 땅! 뒤울 안에 숨었던 철석이가 자위대 놈들을 요격했다. 땅! 뒤울 안에서도 총알이 날아오자 맞불질하던 자위대 놈들은 꼬리 빳빳해 달아났다. “유격대다!” 억복은 권총을 쥔 손으로 왼팔을 싸쥐고 기준과 함께 뒤울안 쪽으로 뛰어갔다. 그들이 뒷집 울바자 안으로 뛰어 들어갔을 때였다. 북쪽에서 뛰어온 자위대 놈들은 남쪽으로 달아나는 자위대 놈들을 유격대인가고 총을 쏘아댔다. 그러자 남쪽으로 달아난 자위대 놈들은 동쪽에서 뛰어온 놈들과 합세하자 북쪽의 자위대 놈들을 유격대인가고 맞불질했다.       그 틈을 타 억복과 기준 등은 뒷집 굴뚝을 에돌아 그 뒷집 울안을 넘어 북산 쪽으로 몸을 뺐다. 그들이 뒤 산으로 올라간 후에야 자위대 놈들의 총소리가 멎었다. 아마 그제야 자기들끼리 싸운 것을 안 것 같았다.  
54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33) 댓글:  조회:1952  추천:0  2016-02-23
                               7. 시비      시간이 흐를수록 기준의 상처는 심해져 돌아눕기도 어려워했다. 운신조차 하지 못하고 위방에서 신음하는 아버지를 보자 상순은 분을 참을 수 없어 속에서 뭔가 자꾸 울컥울컥했다.       밸이 그렇게 센 상순도 온 집안의 목숨과 관계된다는 부모의 말을 듣고 용케도 참았다.      그는 마당에서 왔다갔다 거닐면서 속궁리를 하다가 피뜩 인삼의 말이 떠올랐다. “아버지가 분명 지학사한테 괭이에 찍혔는데 법으로 해도 지학사한테 질게 뭔가? 아무리 더러운 세상이라도 법이 있겠지. 어디 한번 법으로 해보자.” 이렇게 마음먹은 상순은 위방에 들어가 자기 의향을 말해보았다. 그러자 창준은 말리였다. “일본 놈의 세상에 송사를 해 무슨 소용 있다고 그러니?” 기준도 너무 기 막혀 손을 들어 말리었다. “이 한심한 놈아, 여기 어디라고, 이기지도 못할게 뻔하다. 괜히 긁어서 부스럼을 만들지 말라.” 상순은 또 성이 울컥 치밀어 참지 못하고 바깥으로 나가 발로 땅을 탕탕 굴러댔다. 그때 위방에 앉아있던 할아버지가 다가와 그의 어깨를 툭툭 쳤다. “장하다. 사내란 기를 꺾이고 살아선 안 된다. 헛일 삼아 송사를 해봐라.” 마당에서 의논하는 시할아버지와 시동생을 내다보던 지새금이 정지에서 새된 소리를 쳤다. “아이고, 우리 소서구에서 못 살고 허망에 나앉겠다. 저 시동생 때문에 언제 지학사네 총에 맞아 죽을지 모르겠다. 시할아버지는 애들을 말리는 게 아니라 붙는 불에 키질하오." 눈까지 흘기는 지새금을 보고 병완은 꽥 호통 쳤다. “거 입 다물지 못할까?! 암탉이 꼬꼬댁거리면 집안이 망하는 법이다.” 지새금은 머리를 푹 떨어뜨리더니 어깨를 들먹이면서 도도도 거렸다. “에이고, 내 억울해 이 집안에서 어떻게 살겠니?” “계속 지껄이겠는가?!” 지새금은 입을 딱 다물고 터지는 울음을 참느라고 흑흑 흐느끼면서 정지에서 쌀을 일어 가마 안에 왈왈 쏟아 넣었다. (에이고, 분해서 어디 살겠니? 언니하구 아저씨는 나를 뭐 이런 집에 시집보냈어? 흑흑흑. 밥이나 지어 놓고 시집에 달아나야지. 흑흑.) 언니란 아래사랑집 석철의 처를 말하는 것이다. 그들 부부가 지새금을 상우한테 혼사 말을 했던 것이다. 얼마 전에 고향 운주동 뒷골안 가마골에서 살던 새금의 남동생 지선달마저 함흥촌에 데려왔고 토성안집 바깥에 있는 우물 동쪽에 초가삼간까지 져주었던 것이다. 지새금은 시집살이에서 밸이 날 때마다 쩡하면 본가 집 오라비 선달이네 집으로 달아나군 했다. 본가 집 어머니와 올케와 시집 허물을 한바탕 늘여놓으면 속이 훌 풀리곤 했다. (에이고, 할아버진 늘 저런 것도 막내 손자라고 역성을 들긴?) 오늘도 그녀는 오라버니네 집으로 가버리었다. 한편 상순은 숟가락을 드네 마네 했다. 그는 숟가락을 놓기 바쁘게 주먹을 쥐고 진수해 쪽으로 달려갔다. 상순은 싸늘한 부르하통하 강물을 헤엄쳐 건넜다. 토성안집을 피해 지나가 길손들에게 이리저리 물어 겨우 진수해에 있는 조일파출소를 찾아갔다. 조일파출소는 용정에 있는 통감부 간도파출소 소속 파출소이었다. 파출소문안은 밑바닥을 일본식으로 자주색 널판을 깔아놓아 꽤나 이색적이고 으리으리해보였다. 보초를 서던 경찰이 총창으로 상순의 앞을 막으면서 뭐라고 소리쳤다. 그러나 상순은 알아들을 수 없어 보초를 쳐다보면서 손짓했다. 그때 통역인 조선 사람이 나타나더니 “무슨 일인가?”고 물었다. 상순은 단도직입적으로 “저 패용천산 앞마을의 지학사란 지주 놈이 우리 아버지를 괭이로 찍었습니다. 지학사를 고발하려고 왔습니다.” 하고 말했다. 뒤이어 사건경과를 죽 이야기했다. 그러자 통역은 상순의 아래위를 죽 훑어보면서 대견스레 머리를 끄덕였다. “조꼬마한 자식이 정말 담대하구나. 너 이름이 뭐니?” 상순은 조선족 사람이니까 도와줄 것 같아 대답했다. “김진입니다.” 상순은 아버지가 고쳐준 이름을 댔다. “네 아버지 이름은?” 이번에도 이전에 할아버지가 일러둔 대로 아버지 애명을 불렀다. “경칠입니다.” 통역이 통역해주자 보초는 안에 들어가라고 했다. 통역이 상순을 데리고 소장 실에 들어가 뭐라고 꼬부랑꼬부랑 말했다. 그러자 일본소장은 상순을 보고 뭐라고 말했다. 통역은 “일본 제국의 2등공민이니까 봐준다네. 그런데 별로 큰 일이 아니니까 관할구역의 분주 소에 가서 말해라고 하네.”하고 통역해주었다. 상순은 머리를 숙여 인사하고 진수해조일파출소 소장 실을 나왔다. 통역은 바깥에까지 따라 나와 상순을 말리였다. “지학사라고 들었네. 진수해에서도 악명이 높더구먼. 주의하게나.” 그러나 상순은 대수로워 하지 않았다. “아무리 세력이 세다 해도 지학사는 어처구니없는 무함을 하면서 괭이로 죄 없는 사람을 찍어놨으니 잘못한 게 아니고 뭡니까?” 통역은 조일파출소 대문 밖에까지 따라 나오면서 “해동분주소 소장은 지학사의 친척집 동생이네. 송사를 걸어서 이길 수 있겠니?” 하고 말렸다. 그러자 상순은 통역을 보고 청을 들었다. “만약 중국 소장이 시비를 제대로 가르지 않고 지학사 죄를 덮어 감추는 날엔 난 파출소를 찾아오겠습니다. 그때 좀 도와줍소. 같은 조선 사람이 아닙니까?” 그러자 조선통역은 상순의 강한 성격과 어린 나이에 하늘을 찌르는 기개에 감동돼 머리를 끄덕였다. 통역은 상순을 보고 진수해 북쪽에 있는 토성 쪽을 가리키면서 “저 북쪽으로 가서 부르하통하를 건너서 한 2 리 들어가면 해동분주소가 있다.” 하고 자세히 알려주었다. 상순은 조선통역에게 허리를 굽혀 인사하고는 주먹을 쥐고 진수해 북쪽으로 뛰어갔다. 상순은 오던 길로 돌아서서 부르하통하를 헤엄쳐 건넜다. 그가 통역이 알려 준 대로 북쪽으로 한 2 리 가니 자그마한 마을이 나타났다. 마을 사람들과 물으니 마을 복판을 찔러 서북쪽으로 뻗은 길옆의 둔덕 위에 해동분주소가 있었다. 상순은 해동분주소 대문으로 쑥 들어갔다. 그때 권총을 차고 거들먹거리면서 파출소 울안에서 거닐던 한족경찰이 그를 불러 세웠다. “무슨 일로 여기 왔니?” 상순은 주춤 멈춰서면서 인차 류창한 중국 말로 “지학사가 우리 아버지를 괭이로 찍어놔서 소장을 찾아왔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 경찰은 손가락질하면서 호통 쳤다. “네 이놈새끼야, 하루 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고 언감 지학사를 고소한단 말이냐? 살고 싶거든 가라.” 상순은 진짜 범 무서운 줄 모르는 하루 강아지처럼 그 경찰을 꾸짖었다. “당신은 지학사의 누구기에 지학사 역성을 드오?” 그러자 옆에서 듣던 다른 경찰이 상순을 말리였다. “네 요놈새끼, 언감 우리 소장한테 무슨 말버릇이냐?” 그제야 상순은 조금 언성을 낮처 말했다. “당신은 소장이면 법을 제대로 집행하리라 믿소. 우리 아버지 지학사가 휘두른 괭이에 찍혀 지금 집에 누운 채 운신도 하지 못하고 있소. 지학사를 처리하구 치료비를 받아주오.” 뒤이어 사건경과를 죽 이야기했다. 상순은 입술이 말라 터지게 한식경이나 말했건만 한족소장은 코웃음을 쳤다. “네 지금 세상을 아니? 지학사가 어떤 분이고 네가 누구냐?” 그러나 상순은 굽어들지 않고 소장에게 바투 들이댔다. “소장은 지학사와 아무리 친척이라고 해도 죄인을 제대로 처리하지 않고 무사할 거 같소?” 그 말에 소장은 상순을 데리고 소장 실로 들어갔다. 한족소장은 틀스레 사무 상에 앉아 맞은쪽에 빗물이 채 마르지도 않은 헌 옷을 입은 상순의 아래위를 한참이나 훑어보았다. 그는 상순의 집안 형편을 이것저것 묻더니 마지못해 한마디 물어보았다. “지학사가 괭이로 네 아버지를 찍어놓았다는 증거나 증인이 있느냐?” “증거와 증인이라는 건 뭐요?” 소장은 의자 등받이에 잔등을 붙이면서 허리를 쭉 펴며 턱을 쳐들고 거만스레 말했다. “말하자면 지학사가 괭이로 네 아버지를 찍는 걸 본 사람이 있는가는 말이다.” “있소. 내가 바로 증인이오.” 상순의 말에 한족소장은 쓴 웃음을 지었다. “넌 피해자의 아들이기에 증인으로 될 수 없다. 증인이 없으면 네 아버지를 찍었다는 건 거짓말과 같다.” 상순은 머리를 숙이고 궁리하더니 한족소장에게 다가서면서 말했다. “있소. 증인이 있소.” “누구냐?” “패용천산 앞마을의 송학정이요.” “송학정?” 한족소장은 벌떡 일어나면서 놀라했다. 그자는 상순을 쏘아보더니 머리를 숙이고 소장실안을 뚜벅뚜벅 거닐었다. 한참 후에야 한족소장은 교활한 웃음을 지으면서 지껄여댔다. “네가 증인을 내 앞에 데려오면 처리하겠다.” 상순은 대번에 “알았소. 내 송학정을 증인으로 데려오겠소.” 하고 말하고는 팔소매로 터진 입술의 피를 쓱 닦으면서 소장 실을 나왔다. 버드나무숲속의 아름드리나무가 봄바람에 아우성치며 몸부림쳤다. 상순은 버드나무숲속을 헤집으면서 소서구로 돌아오는 길에 어떻게 하면 송학정을 증인으로 분주소까지 끌고 가겠는가를 궁리하고 또 궁리했다. 해가 어둑어둑 져가는 것을 보고 그는 소서구 집으로 돌아갔다. 집에 들어서자 위방에서 아버지는 신음소리를 내며 돌아누우려고 애썼다. “얘, 상순아, 네 절대 말썽을 일으키지 말라. 중국 지주를 건드려 놓고 어떻게 살자고 그러니?” 상순은 말라 터진 입술을 감빨면서 말했다. “어찌 남에게 짓밟히고 가만있겠습니까? 벌레도 디디면 꿈틀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뒤이어 그는 낮에 진수해조일파출소와 해동분주소로 갔던 경과를 죽 이야기했다. “얘, 내 오줌 약을 발랐더니 아픈 것도 좀 낫는 거 같다. 그래 참구 넘어가자. 옛 말에 맞은 놈은 발편잠을 자구 때린 놈은 발편잠을 자지 못한다구 하지 않았느냐?” 기준의 말에 상순은 펄쩍 날뛰었다. “아버지, 맞고 가만있으란 말입니까? 억울해 어떻게 삽니까? 사람이 빚을 지고 살아도 어찌 시비에 지고 살겠습니까? 지학사를 절대 가만 놔둘 수 없습니다. 이제 송학정을 증인으로 나서게 하면 됩니다. 내 분주소 한족소장이 제대로 처리하지 않으면 진수해조일파출소에 가서 일본 소장에게 고발하겠습니다.” 기준은 앓음 소리를 냈다. “에이고, 이 답답한 애야, 일본 놈들이 우리를 도울 거 같니? 중국 지주들과 한통속이다.” 기준은 애써 상반신을 일으키려고 애썼다. 상순과 상우가 양쪽에서 조심스레 부축해 벽에 기대여 앉히었다. 기준은 옆구리가 너무 아파 상을 찡그리더니 겨우 나직이 말했다. “상순아, 넌 어려서 모른다. 조선에서 할아버지와 나, 큰아버지는 일본 놈들의 경찰국이 무너지게 지었단 말이다. 성칠 큰아버지는 항일유격대 대장이 아니고 뭐냐? 그 형님은 고향에서도 포수대를 영솔해 숱한 일본 놈들을 죽였다. 그래서 일본 놈들은 지금도 우리 일가를 수색해내 몰살시키려고 한다. 네가 일본 놈들의 파출소에 가서 송사를 걸다가 우리 일가가 드러나는 날엔 온 집안이 몰살하게 된다. 황차 지학사는 장지주네 친척이 아니고 뭐니? 자칫하면 우리 소서구에 애나게 일군 황무지 밭을 붙히지도 못하고 쫓겨나겠다. 제발 송사를 그만둬라.” 새금이 도도거렸다. “생원이, 정말 비오. 제발 싸움을 걸지 마오.” “그만 말하오! 옛날부터 집안에서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오.” 상순은 눈알을 부라리면서 아주머니를 쏘아보았다. 새금은 시동생의 성난 사자 같은 성질을 아는지라 뭐라고 중얼거리면서 부엌으로 내려가 옥수수 죽을 끓이기 시작했다. 상순은 아버지에게 간곡히 말했다. “이 놈의 소서구에서 살지 못하면 이 넓은 간도에서 어데 가서 살지 못하겠습니까? 사람이 빚을 지고는 살아도 어찌 시비에 지고 억울하게 살겠습니까?” 기준은 근심스러워서 “네가 파출소에 가서 이름이 뭐라고 했니?” 하고 물었다. 상순은 “이전에 아버지가 고쳐준 대로 김진이라고 했습니다. 아버지는 김경칠이라 하구. 이제 큰아버지를 물어보면 김문칠이라구 하겠소.” 하고 대답했다. 기준은 머리를 끄덕이더니 “고향은 어디라고 하겠니?” 하고 물었다. 상순은 머리를 긁적이더니 “이전에 함흥에서 왔다고 하라 했지 았았습니까? 그래서 저 아래 마을도 함흥촌이라고 달았지 않았고 뭡니까?” 하고 대답했다. 기준은 그래도 시름을 놓지 못했다. “일단 조선 명천에서 온 일본 경찰이거나 조선경찰들이 우리를 면목을 알기에 큰일 난다. 이전에 내 용정에 갔을 때 조선의 똘만이란 경찰이 내 뒤를 쫓는 걸 겨우 꼬리를 떼 놓았다. 제발 송사를 그만 둬라. 괜히 풀 섶을 지고 불에 뛰어들지 말거라.” 상순은 거친 황소숨을 몰아쉬면서 주먹을 으스러지게 틀어쥐더니 구들을 탕탕 쳤다. 기준은 막내아들을 계속 말리였다. “내라구 네보다 성이 나지 않는 거 같니? 네보다 밸이 약한 거 같니? 그래도 온 집안 목숨을 생각해 이를 악물고 참고 견딘다.” 상순은 성이 나서 “에이!” 하고 소리치더니 바깥으로 화닥닥 뛰어나갔다. 그는 밸을 참지 못하고 발로 땅을 탕탕 구르면서 하늘에 대고 꽥꽥 고함쳐댔다. 이때 소서구로 최경숙과 석철, 석은형제가 기준이네 집으로 올라왔다. “사돈총각이 어째 이리 야단이오?” 상순은 허리굽혀 인사하고는 “우리 아버지 괭이에 찍혔는데도 송사를 하지 못하게 합니다.” 하고 하소연했다. 경숙은 안사돈과 인사를 하면서 위방으로 들어갔다. “사돈어른 어떻습니까?” “아, 아니, 사돈어른이 어떻게? 아저씨 네도 왔구만.” 기준은 아파서 상을 찡그리면서도 상우를 보고 부축하라고 하여 일어나 비스듬히 기대앉았다. “사돈어른, 편안히 누워있소.” 석철과 석은이도 이구동성으로 문안했다. 석은은 바깥에 서서 주먹을 쥐고 씩씩거리는 상순을 피뜩 내다보고 머리를 되돌리더니 나직이 말했다. “조카, 절대 송사를 걸지 마오. 괜히 말썽이나 일으켜 우리 종친들까지 함흥촌에서 못 살게 만들지 마오.” 기준은 신음소리를 냈다. “그러지 않고. 근심하지 마오. 우리도 송사를 하지 말라고 저 자식 놈을 꾸짖소.” 기준은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있는 상우를 보고 “상순을 불러라.” 라고 했다. 상순이가 들어와 무릎을 꿇고 앉았다. “상순아, 네 기개는 장하다. 허나 종친과 온 집안의 목숨을 생각해서 송사는 그만둬라. 알았니?” 상순은 마지못해 “예, 아버지 말씀대로 송사를 그만두겠습니다.” 하고 말했다. “그래, 그래야지. 우리 요 막내아들은 밸때기는 세도 어시 말은 잘 듣지.” 경숙이나 석철 형제는 모두 한숨을 후~ 내쉬었다. “그럼 시름 놓겠소. 만약 송사를 계속 하면 여기를 오지 말자고 했습니다. 자칫하면 사돈어른 네 여기 사는 게 일본 놈들에게 드러나는 날엔 우리도 사돈네를 따라서 여기서 살지 못합니다. 일본 놈들의 성화에 살겠습니까? 우리 고향 마을에 선 일본 학교에 드나드는 아버지 옛 제자 류강철이 기억납니까?” 경숙의 물음에 기준은 “기억나고 말고. 그자가 끼무라 국장 놈의 일어통역을 하지 않소?” 하고 기침을 쿨룰쿨룩 했다. 경숙은 기준을 부축해 자리에 편안히 눕힌 후 말했다. “류강철이 아버지하구 말하는 거 들으니 지금 끼무라 국장과 한길수란 놈이 사돈어른이 어디를 갔는가고 혈안이 돼 찾는다고 합디다. 그 놈들은 사돈어른 네를 붙잡기만 하면 팔촌까지 몰살시키겠다고 독살을 피운답니다. 신설동의 병권 큰 사돈어른을 교살하구서도 살인마수를 계속 뻗치고 있습니다. 여기서 숨어 살면서도 주의해야 합니다.” 기준은 비스듬히 누워서 머리를 끄덕였다. “그러지 않고. 주의해야지.” 모두들 상순이가 송사를 그만두겠다고 한지라 한시름을 놓고 소서구에서 내려갔다. 오후에 숱한 장지주로 제지주로 숱한 중국지주들이 줄을 지어 소서구 기준이네 집으로 찾아왔다. 뒤에 장지주네 충국과 리국까지 나무꼬챙이로 길옆의 옥수수이파리를 탁탁 쳐서 끊어놓으면서 따라 왔다. 장지주는 신도 벗지 않고 구들에 털썩 올라와 앉지도 않고 떡 뻗치고 섰다. 그 거만한 상통은 똑 마치 부뚜막 우에 뛰어올라 간 흙투성이 개 같았다. 그는 괭이에 찍혀 앓아누운 기준을 보고 문안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고 한바탕 위협공갈을 해댔다. “기준이, 자넨 계속 여기서 살겠소? 말겠소?” 기준은 아프면서도 상우의 부축을 받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비스듬히 벽에 기대앉았다. “장 주인, 앉소. 우린 송사를 그만두기로 하였소. 당신들과 등을 져서야 이득이 날게 뭐요?” 제지주가 나서서 송사를 말리였다. “거 잘 생각했네. 지학사가 누구요? 밭만 해도 몇 백무나 되네. 밭 한 뙈기만 분주소에 줘도 자넨 송사에서 지고 말거네.” 장학산은 우쭐해서 지껄여댔다. “이 집에 뭘 내밀게 있소? 서발막대를 휘둘러도 걸칠게 없는 주제에 내 사촌동생네하구 걸구 들겠는가? 밭 한 짐도 없어 내 밭을 붙이는 비렁뱅이 신세에, 흥!” 이때까지 잠잠히 바깥 문 옆에서 주고받는 말을 듣던 상순은 속으로부터 뭔가 꼭뒤까지 울컥 치밀었다. 그는 씽 사랑방에 달아 들어가 시퍼런 작두날을 뽑아들었다. 그때 상우가 뛰어와서 작두날을 빼앗아냈다. “어째 이래니? 넌 욱 하면 왜 작두날을 휘두르니? 참아라, 참아!” 그러나 상순은 분해 눈물을 흘리면서 고래고래 고함쳤다. “어떻게 참소?” 그때 충국이 사랑방을 들여다보고 지껄였다. “개새끼, 네 감히 작두날을 뽑아들고 달려들겠니? 죽지 못해서.” 그 말은 붙는 불에 키질을 한 셈이었다. 상순은 이번엔 괭이를 쥐고 씽 달려 나가려고 했다. 그때 상우가 상순의 손에서 괭이를 빼앗아내고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제발 이러지 말라.” “야, 어디 분해 살겠소?” 상순은 몸부림치며 야단쳤다. “참아라. 참아!” 상순은 한참 후에야 겨우 꼭뒤까지 치미는 노기를 용케도 가라앉혔다. 그는 장학사네를 보면 눈이 불이 활활 일어 천지꽃산을 넘어 패용천산으로 달려 나갔다. 그는 산정에 올라 버드나무숲속에 거만하게 높다란 토성 안을 내려다보면서 소리쳤다. “지학사, 이 놈아! 내 네놈을 가만 놔둘 거 같으냐? 내 유격대에 들어가 꼭 네놈을 내 손으로 처단 할테다!” 상순의 고함소리는 산울림에 의해 멀리멀리 메아리쳤다. “지학사 놈아! 우리 아버지를 찍은 네 놈을 절대 용서할 수 없다!” 그는 발로 너럭바위를 탕탕 굴렀다. “사람이 어찌 시비 지고 사는가!” 상순은 고함치며 돌멩이를 주어 절벽 아래에 힘껏 뿌렸다. 뒤이어 그는 커다란 돌을 절벽아래로 굴렸다. 돌멩이는 상순의 성난 사자 같은 밸 때기를 담기나 한 듯이 델 델 굴렀다. 그는 노기가 풀리지 않아 연속 육중한 바위 돌을 내리굴렸다. 커다란 매돌 같은 바위 돌들은 내리 굴다가도 비스듬히 경사진 절벽 너럭바위 돌에 부딪쳐 하늘 공중에 튕겨 올랐다가 더 무섭게 산 아래로 날아 내려가 퉁퉁 떨어졌다. 8. 송사 한참 후 상순은 패용천산에서 내려가 칼산 사이에 난 산골짜기를 따라 남쪽으로 나갔다. (지학사가 또 물도랑을 터지어 놓고 우리 탓이라면 어찌 하겠니?) 그는 이런 근심을 하면서 어느덧 지학사네 밭과 자기네 논밭사이에 뺀 물도랑 옆의 오솔길에 들어섰다. 물도랑을 따라 서남쪽으로 올라가면서 찬찬히 살펴보았지만 물도랑은 터진데 없었다. (다행이구나. 시비곡직이 없는 지학사 놈이 또 무슨 꿍꿍이를 칠지 누가 아니?) 그때 동쪽 그리 멀지 않은 곳의 강냉이 밭에서 누군가 기음을 매고 있었다. “아! 저게 송학정이 아닌가!” (저 사람은 그날 아버지가 자학사에게 괭이에 찌힌 걸 보았다. 저 작자를 증인으로 내세우면 되겠는데. 저 놈은 감히 지학사와 엇서면서 증인으로 서지 않을게야.) 상순은 금방 집에서 아버지와 친척들 앞에서 송사를 그만두겠다고 한 일을 까맣게 잊고 고개를 갸우뚱하고 양미간을 찌푸리면서 어떻게 하면 송학정을 증인으로 내세우겠는가를 한참이나 궁리했다. 이윽고 그는 송학정에게 스적스적 다가갔다. 송학정은 상순을 못 본 척하면서 계속 자루 긴 호미로 기음을 매나갔다. 상순은 미리 궁리한대로 다짜고짜로 송학정의 멱살을 틀어지고 따지고 들었다. “네놈이 어째 내 아버지를 괭이로 찍었니?” 송학정은 억울해 어망 결에 변명했다. “내 언제 찍었니? 지학사가 찍었지.” “뭐라고? 네 놈이 자기 찍고서도 지학사한테 떠밀어? 죽고 싶으냐?” 그러자 송학정은 멱살을 틀어쥔 손을 풀면서 소리쳤다. “이걸 놓고 내 말을 들어라.” 상순은 멱살을 놓아주었다. 송학정은 이렇게 말했다. “그날 내 다 보았다. 지학사가 괭이로 물도랑을 터지어놓았어. 그러고도 네 아버지가 터지어 자기 밭에 물이 들어가게 했다고 걸고 들었어. 그 놈은 네 아버지를 괭이로 세 번이나 찍어놓았다.” “네가 찍지 않고 지학사가 찍었다는 걸 증인으로 나서서 증명설 만 한가?” 속학정은 호미로 땅바닥을 짚고 서서 살기등등한 상순을 겁기 띤 눈으로 보면서 머리를 끄덕였다. “증인을 서서 증명하겠다.” 그런데 송학정은 인차 뒤로 물러섰다. “이제 생각해보니 증인을 서는 날엔 지학사 성화에 이 마을에서 못살고 나앉는다. 증인을 못 서겠다.” 그러자 상순은 “그럼 네가 찍은 게구나. 증인을 서겠니? 우리 아버지를 찍은 죄를 쓰겠니?” 하고 바투 들이댔다. 송학정이 얼떨떨해 멍청히 서있으면서 대답하지 않자 상순은 멱살을 틀어쥐고 끌었다. “분주소로 가자, 이 놈 새끼 찍은 게 분명하구나.” 그러자 송학정은 “아니다. 지학사가 찍었다. 증인으로 나서 증명하겠다.”라고 하며 멱살을 놔라고 했다. “그럼 좋다. 이 길로 가자.” 상순이가 쥐어 끄는데 송학정이 뻗치면서 말했다. “내 말을 듣고 가자. 어제 해동분주소 지소장이 지학사 네 집에 와서 술을 가득 처먹고 가더라. 권총을 차고 우리 집에 와서 절대 증인으로 나서지 말라고 하더라. 증명을 서는 날엔 여기서 살지 못할 줄 알아라고 을러메더라. 지학사도 증인으로 나서는 날엔 수하를 시켜 죽여치우겠다고 하더라. 내 증면을 서도 이 송사는 이기지 못할게 뻔하다. 너나 내나 그저 못 살고 나앉겠니? 가지 말자.” 그 말을 듣자 상순은 더욱 약이 올랐다. “나쁜 놈 새끼들이, 벌써 짜고 들었구나. 어디 두고 보자. 내 가만 놔두지 않을 테다!” 상순은 주먹으로 하늘공중을 마구 찌르며 을러멨다. “무서워 말고 가자. 내 뒤에는 몇 백명 군대가 있다. 저까짓 지학사나 분주소 소장 놈이 다 뉘 아들이라더냐?” 기고만장한 상순을 이기지 못해 송학정은 호미를 옥수수 밭에 파묻어놓고 상순에게 끌리다 싶이 하여 그 길로 해동분주소로 내려갔다. 어린 옥수수는 야들야들한 이파리를 봄바람에 파르르 떨었다. 아무리 야들야들한 옥수수이파리라고 하여도 모난 이파리에는 선뜩선뜩한 날이 서있음을 지학사가 알았으랴? 분주소 소장이 짐작이나 하였으랴! 상순은 송학정이 변심할 가봐 단숨에 끌고 분주소로 달려가지 못하는 것이, 아니 나래라도 돋았으면 학정을 훌 안고 훨훨 날아가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웠다. 그는 송학정이 달아나기라도 할 가봐 손을 꽉 잡고 버드나무숲을 헤치고 가시덤불을 헤집으면서 호박 길을 반달음 쳐 해동분주소로 찾아갔다. 그를 본 지 소장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또 왔는가?” 확실히 오려니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다. “예. 증인을 데리고 왔습니다.” “증인?” 상순의 당돌한 말에 한족소장은 적이 놀라면서 믿기지 않는 눈길로 상순과 송학정을 번갈아 쏘아보았다. 상순은 소장을 똑바로 마주 보면서 대답했다. “이 송학정이 바로 증인이오.” 송학정이 뭐라고 말하려 할 때였다. “송씨야!” “예!” 송학정은 한족소장을 겁기 띤 눈으로 흘끔 쳐다보다가 머리를 숙였다. “네 거짓말만 해봐라. 목이 날아 날 줄 알아라. 지학사 어른이 어떤 어른이라고 네가 감히 거짓말을 하려고 드니?” 한족 소장은 분명 겁을 먹이고 있었다. “난 종래로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소장은 사무 상을 꽝 치면서 벌떡 일어나 꽥꽥 고함쳤다. “여기 어디라고 네놈이 횡설수설한단 말이냐?” 상순은 괘씸해났다. “소장, 그게 뭐요? 남이 데려온 증인을 겁을 먹여 말두 못하게 할 예산이오?” 상순은 옆에 선 송학정을 보고 을러멨다. “겁나 말구 어서 본 대로 말해라.” 송학정은 때를 벗으려고 제대로 말했다. “확실히 지학사가 괭이로 김진의 아버지를 찍었습니다. 그날 내 눈으로 똑똑히 봤는데도 그러오?” 소장은 입을 헤벌리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상순은 바투 들이댔다. “증인이 있는데도 지학사를 처리하지 않겠소?!” 지 소장은 함구무언이었다. 침묵으로 상순의 진공을 방어하고 있었다. 상순은 입술이 말라 터지도록 따지고 들었다. “그래 괭이로 사람을 찍은 게 죄가 없는가?” 그때 송학정은 소장의 눈치를 살피다가 이런 말을 불쑥 했다. “소장님, 미안합니다. 전번에 소장하구 지학사 어른이 우리 집에 와서 증인으로 나서지 말라고 했는데 이래서.” 그러자 소장은 더는 침묵을 지키지 못했다. “너 이놈, 내 언제 너를 찾아간 적이 있느냐? 지학사가 찾아갔으면 갔겠지. 법을 집행하는 내가 어찌 그런 말을 하였겠느냐? 아무래나 주둥이를 놀리다가 네놈의 혀 바닥을 잘라버리지 않는가!” 그때라고 상순은 최후의 일격을 가했다. “그래 만주국 법에는 사람을 찍어놓은 놈을 치죄하지도 않는가? 소장이 치죄하지 않고 어디 견디는가 보기요. 흥!” 상순은 담대하게도 피 터진 가래를 땅바닥에 퉤 뱉었다. 그 소리에 지 소장은 잔등에 식은땀을 쭉 흘리었다. 상순은 연 며칠 입술이 말라터지고 발바닥이 달아 떨어지게 날마다 소장을 찾아가 도리를 딱딱 따져가면서 턱밑에 들이댔다. “당신 지학사의 검은 돈을 얼마나 얻어먹었는가?” “당신이 죄인을 놔두면 이제 진수해조일파출소에 찾아가서 상소하겠소. 그래지 않아도 전번에 진수해조일파출소에 찾아갔을 때 통역이나 일본 소장이 해동분주소에서 제때에 처리하지 않으면 찾아오라고 하더구먼. 어디 당신이 질질 끌다가 그 자리에 계속 앉아있는가 보기요.” 소장은 더는 지학사의 죄를 비호할 수도 없고 더 질질 끌 수도 없어 막다른 골목에 이르러 판결을 내리고 말았다. 판결서에는 이렇게 씌어 있었다.   본 해동분주소에서 조사한 결과 패용천산촌 지학사는 민국 24 4월 25일에 패용천산 앞에서 괭이로 함흥촌의 김경칠을 찍어 륵골 세대나 부러뜨렸다. 이 사실을 송학정이 증인으로 나서 증명했다. 지학사는 사흘 내에 김경칠에게 치료비로 40원을 줘야 한다.   해동분주소 민국 24 5월 7일.   결국 진짜 하루 강아지가 범을 이긴 격이 되고 말았다. 상순은 소장에게 요구를 제기했다. “소장님, 수고스러운 대로 치료비를 분주소에서 받아서 우릴 주오. 그러지 않으면 우리 절로는 총을 든 사병들이 지키는 그 놈의 집으로 가서 돈을 받지 못하오.” 소장은 시끄러워하면서 한마디 툭 내쏘았다. “그 놈 새끼, 점점 말을 타면 견마 잡히고 싶어 한다더니. 흥!” 상순이 “그래 치료비를 받아주지 못하겠단 말이요?” 하고 캐고 들려고 하자 소장은 시끄럽다는 듯이 손을 쳐들어 바깥으로 손사래를 쳐댔다. “가라, 가! 보기도 싫다. 수하경찰들 보고 치료비를 받아오게 할 테니 며칠 후에 와서 가져가라!” 상순은 분주소를 나오면서 “진작 이렇게 나올 게지. 농번기에 발바닥이 달토록 찾아다니게 할게 뭐요?” 하고 나와 버렸다. 지 소장은 열대여섯살 밖에 안 되는 놈 새끼한테 당한 느낌이 들어 못들은 척 했다. 상순이가 나간 다음 지소장은 왼손으로 머리를 떡 받치고 사무 상에 마주 앉아 있다가 건너 칸에 대고 꽥 소리쳤다. 며칠 후 상순은 분주소에 가서 한족소장에게서 판결서와 함께 치료비로 40원을 받아 천에 꽁꽁 싸서 호주머니에 넣어가지고 돌아섰다. 소장은 상순의 세 귀 눈과 딱 벌어진 넓은 가슴을 눈 박아 쏘아보면서 속으로 중얼거렸다. (죄꼬만 새끼, 십여 년 소장 질 하면서 처음 본 무서운 놈이야.) 상순은 치료비를 받아가지고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40원을 몽땅 아버지를 비롯한 일가식솔들 앞에 내놓았다. 그러자 기준은 놀라워 하면서 “이건 어데서 난 돈이냐?” 하고 물었다. 상우도 숱한 지전을 놀라운 눈길로 내려다보면서 구들에 주저앉았다. “지학사를 상소해 받은 아버지 치료비입니다.” “뭐라니? 네가 끝내 상소했단 말이냐?” “예, 난 지학사를 이기고야 말았습니다.” 상순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아버지에게 욕을 먹거나 맞을 까봐 볼을 붙들고 한쪽으로 피해 앉았다. “이놈 새끼, 하루 강아지 범 무서운 줄을 모른다고 이렇게 담대하냐? 그래 정말 상소해 이긴 돈이냐?” 기준은 애숭이 막내가 그 어마어마한 지학사를 상소해 이겼다는 말이 믿어지지 않았다. 상우도 미덥지 않은 눈길로 상순을 뚫어지게 보면서 따지고 들었다. “너 밸 때기 더러운 게 혹시 지학사네 돈을 빼앗아 온 건 아니야?” 그러자 상순은 호주머니에서 판결서를 꺼내 보였다. “보오. 이게 판결문입니다.” 상우는 글을 알아보지는 못하고 기준은 한어를 조금 알아보는지라 뻘건 도장이 박힌 해동분주소란 글씨를 매만지면서 보더니 벌떡 일어나 앉았다. “판결서 옳구나! 아이고.” 그는 아픔도 잊은 채 벌떡 일어나 놀란 소리를 지르다가 그만 옆구리가 아파 오만상을 찡그렸다. 상우는 아버지 손에서 판결서를 받아 쥐고 들여다보더니 “40원”이란 글씨를 알아보고 환성을 질렀다. “아버지, 옳습니다. 여기 40자가 있습니다.” 뒤이어 상우는 상순의 얼굴을 매만지면서 “그래 이게 모두 40원이냐?” 하고 물었다. 상순은 머리를 끄덕였다. 상우는 열 살이나 어린 동생을 바라보면서 “정말 장하구나. 어쩜 내 이런 동생을 두었을까?” 하고 말하더니 벌떡 일어났다. 뒤이어 그는 상순을 안고 구들에서 삥삥 돌다가 아예 업고 집안을 맴돌았다. 상순이가 송사를 건다고 “시동생 때문에 집안이 망하겠다”던 새금도 조개턱을 쳐들고 혀를 끌끌 찼다. “시동생은 정말 골기 있는 사내대장부야. 어쩜 악질 지주와 송사에 이겨서 소 반 마리 값을 벌어온단 말이오?” 사련은 막내아들이 송사에서 이겼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이게 꿈이냐? 생시냐?” 상순은 어머니 손을 잡고 정색해 말했다. “정말입니다.” 그러자 사련은 상순의 손을 잡고 앉으면서 “얘, 송사하던 과정 이야기를 죽 해라. 어디 들어보자.” 하고 말했다. 그러자 상순은 말라터진 입술을 감빨고 나서 송사이야기를 하나도 빠짐없이 얼음 우에 박 밀듯이 이야기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모두 상순이가 장하다고 혀를 끌끌 찼다. 그러나 기준은 위방에서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근심에 찬 말을 했다. “너무 좋아하지 말라. 지학사가 송사에선 졌지만 무슨 보복을 할지 아니?” 상순은 벌떡 일어나며 고래고래 고함쳤다. “그랬다간 내 지학사 놈 새끼를 목 주래를 베버리겠습니다. 이번엔 치료비를 받아냈지만 아버지 찍히운 걸 생각하면 속이 내려가지 않습니다.” 위방에서 기준이가 혀를 끌끌 차는 목소리가 들리었다. “에이, 씨는 속이지 못한다고. 이 울뚝 밸에 저 아들놈이구나.” 그 말에 사련과 새금은 손으로 입을 싸쥐고 키득거렸다. 바깥에서는 번개가 번쩍이고 봄 우뢰가 꽈르릉 무섭게 울리더니 쏴 하고 소낙비가 쏟아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상우는 바깥을 내다보면서 중얼거렸다. “봄농사가 잘 되라고 봄비가 내리는구나!” 뒤이어 초가 육간 벼 짚 추녀 끝에서 숱한 실 폭포처럼 비 물이 흘러내렸다.                                             제13장 장백산기슭의 항일유격대 1. 중국 형제민족들과 단합해야 황야에 일군 밭에서는 허벅지를 치는 시퍼런 옥수수들이 이파리를 나풀거리고들 서있었다. 야들야들하던 옥수수이파리들은 이젠 시퍼런 날을 세우고 검은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하늘과 범이 새끼를 칠 야산들에 도전이나 하는 듯이 선들선들 칼춤을 추고 있었다. 어느 날, 상순은 천지꽃산 중턱의 상우지에서 상우와 나란히 나가며 기음을 매면서 물었다. “형님, 난 지금도 이해되지 않소. 인삼 아저씨는 왜 이번 일에 삐치지 않았을까? 고까짓 지학사 사병 일여덟이 무서워서 자라목처럼 움츠린단 말이오?” 상순은 도리머리를 홰홰 가로 저었다. 상우가 사위를 둘러보더니 나직이 말했다. “너 누구한테도 말하지 말라.” “양.” 상순은 천천히 호미질을 하면서 형의 말에 귀를 기울이었다. “유격대원들한테서 들은 말에 의하면 인삼 삼촌은 조선에서도 한다하는 지주였단다. 우리 들어오기 전에 벌써 중국에 들어와 지주 장학산의 양아들로 들어갔단다. 그 덕에 함흥촌에 저렇게 덩실한 토성 안 팔간 집을 짓고 산단다.” “글쎄 말이오. 어째 삐치지 않나 했더니 원래 장학산이나 지학사 같은 지주들과 한 통속이었구먼. 그런 줄도 모르고 도와 달라한 게 우둔하지.” 상순은 어느 날 오후 소낙비가 억수로 쏟아져 일하지 못하게 되자 벼 짚단을 벌려 거꾸로 쓰고 토성안집으로 찾아갔다. 대문을 다급히 두드려대자 안에서 심부름꾼으로 가장한 유격대원이 나왔다. “무슨 일이냐?” 상순은 “아저씨를 찾아왔소.” 하고 말하면서 토성 안으로 들어갔다. 상순이가 마루에 올라가 발을 비 물에 대고 씻을 때 위방에서 너부죽하게 생긴 인삼이가 나왔다. “어허, 악질지주와 송사를 걸어 이긴 우리 집안 영웅조카가 왔구먼. 어서 위방으로 들어가자.” “예.” 상순은 바지에다 발을 쓱쓱 문질렀다. 그러자 인삼이가 바삐 “걸레를 가져오라 할게.” 하고 심부름꾼을 불러 걸레를 가져오게 했다. 상순은 걸레에 발을 닦고 위방에 들어가 아래 자리에 앉았다. “넌 정말 담대한 애야. 어찌 감히 지학사와 송사를 거니?” 상순은 춰주는 인삼의 말이 귀에 거슬렸다. “그까짓 지학사가 사병 일여덟을 기른다고 그렇게 무섭습둥? 이번에 아저씨 집안일에 나서지 않은 게 의문스럽습니다.” 인삼은 세 귀 눈을 똑바로 뜨고 자기를 쏘아보는 상순의 독기어린 눈길을 피하지 않았다. “얘야, 넌 아직 어려서 모든 거 너무 단순하게 본다. 지금 우리 조선 유격대에서는 한족들과도 합작해 공동의 원수 일본 놈들과 싸워야 한다.” 상순은 더욱 이해되지 않아 외면하기까지 했다. “쳇, 들을수록 아리숭하구만. 그래 지학사 같은 지주들과도 한편이 돼야 한단 말이오?” “그렇다. 우리 주적은 일본 놈들이다. 일본 놈들은 우리 조선을 강점하였고 중국 대륙을 한 치 한 치 다 뜯어먹으려고 하고 있다. 정의적인 중국 사람들은 이미 일본 놈들의 침략야심을 간파하고 무기를 들고 그들과 싸우기 시작한지 오래다. 우린 조선 사람 뿐만 아니라 일체 단합할만한 중국의 한족과 몽골족, 만족, 회족 같은 다른 민족들을 몽땅 단합해 일본 놈들과 싸워야 한다.” 상순은 눈이 휘 동그래 물었다. “그래 지학사는 우리 적이 아니요?” 인삼은 담배를 꺼내 붙여 물고 차근차근 일깨워주었다. “물론 우리 가난한 백성들을 압박하고 착취하는 지주 지학사도 우리 적이다. 그러나 잠시 주적 일본 침략자 놈들을 중국과 조선 땅에서 몰아내기 위해선 중국 지주들을 단합해 일본 침략자들과 싸워야 한다. 일본 놈들을 몰아낸 다음에는 지주들을 청산해 가난한 사람들에게 땅을 나눠 줘야지. 그때 지학사 같은 놈들을 처단해도 늦지 않다.” 상순은 그렇게 엄청난 도리를 단번에 터득할 수 없어 그저 도리머리 질만 했다. “지금 일본 놈들과 싸워야 해. 중국 지주들까지 건드려서 원수를 만들어서야 어떻게 일본 놈들을 치겠느냐? 우린 패용천산촌의 지학사를 잠시 놔두고 소서구 장학산이나 조개덕의 조덕림 지주 같은 중국 사람들과도 단합하여 일본 놈들을 쳐야 한다. 그들이 물론 너의 집에서 소작료를 많이 받아가 괘씸하지만 참아야 해. 그들도 일본 놈들이 진수해에 기어든 걸 좋아하지 않고 있어. 이제 일본 놈들이 우리 여기까지 기어들면 우리보다 그들이 자기 땅을 빼앗길까봐 사병을 데리고 싸우지 않는가 봐라. 우린 일본 놈들과 싸우려는 모든 사람들과 단합해 먼저 일본 침략자 놈들부터 쳐 부셔야 한다. 알만하니?” 상순은 그래도 들을 뿐 시원히 대답하지 않았다. 한참 후에 그는 천천히 무겁게 입을 열었다. “아무리 어째도 아버지가 괭이에 찍혔는데도 나서지 않은 아저씨 좋지 않습니다. 우리 아버지를 괭이로 찍어놓은 악질지주 지학사와 어떻게 단합합니까? 쳇.” 상순은 더는 들을 말이 없다고 여기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얘야, 내 우리 마을을 둘러보니 넌 나이가 어려도 역빠르고 애들의 왕 노릇을 하더구나. 그래서 구구히 말하지만 꼭 명심해라. 일본 놈을 치기 위해선 개인 원수나 감정을 접어 둘 줄 알아야 한다.” 그래도 상순은 도리머리 질 했다. “난 모르겠소. 자기 아버지를 찍은 원수도 놔두란 말이오? 난 절대 그러지 못하오.” 인삼은 바깥으로 휭 하니 나가는 상순을 뒤에서 따라 나오면서 똑똑히 말했다. “넌 내 말을 알아들을 날이 꼭 있을 거야.” 상순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씨엉씨엉 대문 밖으로 걸어 나갔다. 상순은 토성안집의 높은 토성을 피뜩 올려다보면서 두덜거렸다. “장지주 양아들로 들어가면서라도 토성안집에서 살아야 하는가? 쳇, 어째 일본 놈들의 양아들로 들어가서 파출소에서 한자리 하지 못하는가? 참, 세상의 일은 알고도 모를 일이야.” 상순은 비를 맞으면서 할아버지네 집으로 들어갔다. 병완은 상순을 보자 만면에 춘풍이 흘렀다. “어이구, 우리 막내손자 오는가? 어서 올라오라.” 상순은 비 물을 대충 닦고 위방으로 올라갔다. 창준과 상훈이 온 집식구들은 비가 내려 일하러 가지 못해 모두 집에 있다가 상순을 반겨 맞았다. 병완은 상순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면서 “봐라, 그래도 손자 넷 가운데서 내 성질을 닮은 건 이 막내손자 밖에 없어.” 하고 치하했다. 상훈은 머리를 떨어뜨렸다. 상길은 입이 뿌루퉁해 못 마땅한 눈길로 할아버지를 곁눈질했다. 눈치 챈 병완은 “상훈과 상우는 마음이 어질고 착하지. 상길은 우리 집안의 하나 밖에 없는 수재야. 우리 막내손자는 기개 있어. 지주와 송사를 해서 이긴 장한 손자야.” 하고 돌아가면서 치하해주었다. 창준은 희죽이 웃으면서 “아버진 훌륭한 손자 넷이나 뒀습니다. 허허허.” 하고 맞장구를 쳤다. 뒤이어 창준은 상순에게 “비 오는 날에 무슨 급한 일이 있어 여기까지 내려왔니? 아버진 좀 괜찮니?” 하고 물었다. 상순은 머리를 숙이더니 대답했다. “인삼아저씨네 집에 갔습니다. 아버진 진수해에 가서 약을 져다 대접하고 오줌찜질을 하니 좀 낫습니다. 그런데 조의 말이 뼈가 제대로 잇자면 한해 넘어 고생해야 한답니다.” 병완과 창준은 머리를 끄덕이면서 한숨을 후~ 내쉬었다. 상순은 뒷말을 이었다. “난 인삼아저씨 어떤 줄을 모르겠습니다.” “어째서?” 병완이 묻자 상순은 금방 있은 일을 죽 이야기고 나서 이렇게 불평을 토로했다. “내 보고 아버지를 괭이로 찍은 지학사 새끼를 용서하랍구마. 아무리 일본 놈을 치자고 그런 악패지주와 손을 잡으라는 게 말이나 됩니까?” 상훈과 상길이도 이구동성으로 “건 안 될 말이지.” 하고 동을 달았다. 병완은 곰방대에 담배를 쑤셔놓고 부시를 쳐서 불을 붙여 뻑뻑 빨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인삼조카의 말이 옳아. 너희들은 아직 어려서 잘 몰라. 개인 원수는 뒤로 미루고 일본 놈들을 증오하는 모든 사람들이 마음을 모으고 힘을 합쳐 일본 놈들을 대적해야 한다. 우리 조선 사람들의 힘만으로 백만 대군이나 되는 관동군이나 조선에 있는 몇 백만 일본군을 몰아 낼 수 있니?” 병완은 막내손자가 귀담아 듣는 것을 바라보고 뒷말을 이었다. “인삼 아저씨한테서 항일의 도리나 글도 배우고 주먹치기나 총 쏘는 재간도 배워 둬. 내 언제 인삼 조카에게 부탁할게.” 상순은 다른 형들과는 달리 주먹치기나 총에 대해 각별한 흥취가 있었다. “할아버지, 우리 아버지 말씀이 할아버진 젊어서 씨름이나 싸움을 아주 잘했다고 합디다. 고향 명천에서 한다하는 일본 놈들의 개다리 한길수란 놈과 씨름해 이겼다면서요. 그 놈과 싸우다가 왼 눈깔을 빼놓은 적이 있답디다.” 병완은 자손들 앞에서 겸손하게 나왔다. “그게 다 옛날이로다. 묵은 그루에 이밥 먹던 소리를 하지도 말아라. 이젠 힘도 없고 싸울 엄두도 내지 못해. 허허허.” 창준은 도리머리 질 했다. “아닙니다. 아버진 아직도 근력이 대단합니다. 애들에게 씨름재간을 물려줍소.” 상순은 할아버지 가래 같은 손을 잡구 졸라댔다. “할아버지, 유격대에 가자고 해도 싸움재간이 있어야 갈게 아닙니까? 날 씨름재간 배워 줍소.” 병완은 곰방대를 빨면서 상순을 똑바로 바라보다가 눈을 지그시 감는 것이었다. “내 부탁 하나 들으면 배워 주마.” 상순은 “예. 내 뭐든 그대로 하겠습니다.” 하고 다가앉았다. 병완은 눈을 크게 뜨면서 똑똑히 말해두었다. “그 울뚝 밸을 고쳐라.” 상순은 입을 딱 벌렸다. “할아버지!” “어째 고치지 못하겠니?” 상순은 머리를 홰홰 가로저었다. “할아버지, 다른 부탁은 다 들을 수 있어도 그건 힘듭니다. 타고 난 성질을 어떻게 고칩니까?” 병완은 고집을 썼다. “네 애비부터 욱 하면 울뚝 밸을 쓰는데 일을 망칠 때가 많았다. 소 궁둥이를 작두로 찍고 화로 불을 지붕에 던지다니?” 상순은 머리를 숙이며 뒷덜미를 긁적거렸다. “건 잘못했습니다. 그럼 씨름재간 배워줍지?” 병완은 “그 밸 때기를 고쳐라. 그 밸 때기에 또 누굴 둘러메치라고 씨름을 배워줘?” 하고 뒤로 허리를 쭉 펴고 상순의 얼굴표정을 살폈다. 상순은 “성질을 고쳐 보겠습니다. 그런데 성질이야 몇 십 년 고쳐도 고쳐지겠는지 모르겠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어쨌든 고쳐라. 내 앞에서 다신 그런 일을 하지 말라.” 상순은 씨름재간을 배우고 싶어 “예, 꼭 고쳐 보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병완은 상순을 대견하게 바라보면서 “너 그 울뚝밸만 고치면 재목으로 될 수 있는 애다. 전도가 창창하다.” 하고 용기를 북돋아주었다. 상순은 좋아서 할아버지 주글주글한 가래 같은 손을 매만지면서 싱글벙글 했다. “언제 비 오지 않는 날에 내려오면 배워줍소.” “그래, 그래.” 상순은 좋아서 상길을 따라 아래 방으로 내려갔다. 창준은 애들이 내려가자 병완에게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버지, 어머니도 계시잖는데 얼마나 고독하겠습니까? 옛말에 효자불여악처라 하지 않았습니까? 후 어머니를 모셔 오깁소.” 병완은 움찔 엉덩이를 들며 자리를 움직이기까지 했다. “거 무슨 소리냐? 늘그막에 후처라니? 너 어미 돌아간 지 언제라고, 되지 않는 말을 다신 꺼내지도 말아라.” 그러나 창준은 계속 권고했다. “엄마 삼년제도 지났기에 일없습니다. 고독한데 말동무라도 하시요. 저 석은 아저씨 네 집에 와있는 어금이 시형도 재혼했답니다. 말짱 처녀장가를 말입니다.” “그래도 그렇지. 나이 어리냐?” 창준은 말을 꺼낸바 하고는 뒤 말을 이었다. “저 상우네 처가 집에 가마골에서 홀로 난분이 왔답니다.” 병완은 묵묵히 앉아있었다. “이제 쉰 밖에 안 된답니다.” 창준의 말에 병완은 의연히 함구무언한 채 애꿎은 곰방대만 뻑뻑 빨았다. 며칠 후 기준까지 내려와서 후 어머니를 모시자고 아버지를 권고했다. 그리하여 병완은 마지못해 두 아들을 앞세우고 토성안집 동쪽에 자리 잡은 노친을 가서 만났다. 쉰 살 밖에 안 된 그 노친은 보통 키에 통통하게 생겼는데 아직 젊었다. 정말 맏며느리 하옥이나 둘째며느리 수월과 나이도 비슷했다. 다만 셋째며느리 사련이보다 좀 이상이 될 뿐이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최금단이라고 부르는 그 노친은 셋째며느리 사련과 같은 개성 최씨란다. 더구나 사련의 맏사위 경인이네와도 십여 촌 되는 노친이었다. 그날로 그 노친을 집에 데려다가 위방에 들었다. 그러다나니 병완은 노친을 잃은 지 세 해 되도록 가셔지지 않던 우울한 기분에서 다소나마 해탈됐다. 본가 집 아버지 기색이 좋아진 것을 보고 곱순은 기뻐 어쩔 줄을 몰랐다. “아버지, 이젠 새 엄마하구 편안히 삽소. 농사는 오빠하구 조카들이 지으면 됩니다.” 병완은 하얀 수염을 슬슬 어루만지면서 “고맙다. 너나 빨리 아들을 낳으렴.” 하고 염려했다. 사실 곱순은 시집간 지 십여 년이 되도록 딸 상금을 하나 낳고는 단산이 돼 적이 근심됐고 사위 김범호가 아들을 보려고 후처를 할까봐 슬그머니 걱정이 끝없이 앞섰다. (웬 일일까? 이전에 병권형님이 전주 김씨와 우리 영월 김씨는 모두 경주 김씨네 후대라면서 곱순이 정혼을 반대하였다. 그 말을 듣지 않아 그런가? 전주 김씨와 우린 몇십 촌 되겠는데 집안 혼사도 아니라고 할 수 있지. 궁합이 맞지 않을까?)       황야의 곡식들이 따뜻한 여름을 맞아 소리치면서 자라고 있었다. 꽃나비가 한들한들 춤추면서 꽃잎사귀에 날아 내린다. 꿀벌이 꽃 이파리 속을 앵-앵 날아다니면서 꿀을 채집하느라고 분주히 서둘고 있었다.  
53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32) 댓글:  조회:1791  추천:0  2016-02-14
                      4. 망향의 한 어느 날, 맑게 갠 아침에 기준과 상우가 땔나무를 팡팡 팰 때였다. 상길이 소서구 막치기로 주먹을 쥐고 달려왔다. “삼촌, 큰 일 났습니다.” “웬 일이냐?” 기준은 도끼질을 멈추고 팔소매로 얼굴의 후줄근한 땀을 쓱쓱 닦으면서 물었다. “할머니 불시에 앓아 누었습니다.” “응? 그게 무슨 소리냐?” 그 소리를 듣고 사련과 새금이 밥을 짓다가 행주에 손을 닦으면서 바깥으로 나왔다. 기준은 사련을 돌아보았다.       “얼른 가보기요.”  기준은 그 길로 함흥촌으로 주먹을 쥐고 달려 내려갔다. 그 뒤에 온집 식구들이 따라 달려 내려갔다. 기준이 웃새집에 내려가 보니 아버지랑 창준이랑 집식구들이 위방에 누운 어머니를 둘러싸고 앉아 있었다. “엄마가 어떻게 된 일이오?” 기준이가 식구들을 헤집고 어머니한테 다가갔다. 병완은 기준을 돌아보면서 “왔니? 성칠을 보낸 후 집에 들어와 자꾸 울더니 드러눕고 말았다. 쿨쿨 자기만 하고 정신을 못 차린다.” 하고 목이 메 말하였다. 그러자 기준은 어머니 얼굴을 매만지다가 손을 잡고 “엄마! 이게 웬 일입둥? 어제까지 형님을 보고 반가워하던 엄마가? 엄마, 정신 차리오.” 하고 애타게 불렀다. 그제야 사련은 겨우 눈을 스르르 뜨더니 사위를 두리번거렸다. “기준아, 우린 언제 고, 고향으로 가니?” “엄마, 힘내 일어나시오. 이제 성칠 형님이랑 조선에서 일본 놈을 몰아내면 고향으로 돌아갑시다. 엄마를 꼭 고향에 모셔 가겠습니다.” 기준의 말에 뒤이어 창준이도 동을 달았다. “광복의 날에 엄마를 수레에 모시고 고향으로 가겠습니다.” 성희는 눈물을 주르르 흘리었다. “그럼 얼마나 좋겠어? 본가 집 오라버니캉 조카, 손, 손자들을 언제 보겠니? 본가 집 부모, 조상들의 산소를 보고 싶어.” 그 간곡한 말에 창준과 기준은 태산 같은 어깨를 들먹였다. “엄마, 꼭 외가집 식구들을 다시 만나는 날이 있을 겁니다.” 성희는 머리를 가늘게 끄덕이는 것 같더니 눈물을 하염없이 흘리며 천정 어디엔가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것은 몇 천리 밖에 둔 고향을 그리워서이리라. 창준은 기준을 보며 “우리 이러고 있을 때 아니다. 빨리 엄마를 모시고 천수해 일본 놈들의 병원에라도 가자.” 하고 말했다. “옳소. 빨리 가기요.” 기준은 황급히 누워있는 엄마에게 등을 들이댔다. “엄마를 업기우.” 창준은 어머니를 안아 일으켰다. 그때 성희가 눈을 맥없이 떴다. “나, 나를 가, 가만 놔, 놔둬라. 죽어도 일본, 일본 놈들의 병원에 안, 안 가.” “어떻게 앓는 엄마를 집에 눕혀 둔다고 그럽둥?” 성희는 말라서 겨릅대 같은 손으로 기준의 얼굴을 매만지었다. “얘들아, 사람의 명, 명은 하, 하늘에 달, 달렸어. 난 갈 때, 됐, 됐어.” 기준은 어머니를 형님에게서 받아 안고 눈물을 텀벙텀벙 쏟았다. “엄마, 엄마 일흔이 갓 넘었는데 갈 때라니요? 병원에 가서 치료하기요.” 그러나 성희는 기준과 창준의 애원을 받아주지 않고 문 밖을 맥없이 손으로 가리키며  말하였다. “그러지 말, 말고 바깥에 나, 나자.” 창준은 “예, 그러기요.” 하고 말하더니 기준과 함께 어머니를 안아 모시고 마루에 나갔다. 성희는 두 아들에게 안기어 맥없는 눈길로 사위를 둘러보았다. 실실이 늘어진 수양버들가지들이 모진 봄바람에 몸부림치고 백양나무가 쏴쏴 소리치면서 굽어본다. 비술나무들이 머리를 풀어헤치고 숙이고 구슬픈 이 장면에 흐느끼고 있다. 성희는 머나먼 남쪽하늘을 바라보면서 손으로 뭘 매만지려는 듯이 휘저으면서 나직이 소리쳤다. “내 고, 고향 언제 갈, 갈까? 아버지, 어머니~, 성군 오빠, 명호야, 병수야~” 뒤이어 성희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엄마, 엄마!” “엄마!” 창준과 기준이 눈물을 머금고 어머니를 안고 애타게 불렀다. “여보!” 병완은 무릎을 꿇고 앉아 노친을 목 메여 애타게 불렀다. 성희는 천천히 눈을 뜨더니 두루 살피다가 병완을 찾아보고 가는 목소리로 겨우 띄염띄염 말하였다. “여보, 미, 미안해요.” 병완은 아들의 품에서 노친을 빼앗다시피 하여 와락 끌어안고 얼굴을 대고 맞비비면서 울었다. “안 되오. 난 당신을 먼저 보낼 수 없소. 아무리 고향이 그립고 본가 집 부모형제가 그리워도 화병에 갈 거까지야 없지 않소? 으흐흑, 흑흑.” 며느리들과 손비들이 어깨를 들먹이면서 동전으로 눈시울을 닦았고 손자들은 주먹으로 뜨거운 눈물을 닦으면서 흐느껴 울었다. 기준은 창준과 귀속 말을 주고받았다. 뒤이어 창준은 수레를 메우고 기준은 위방에 들어가 농짝 위에서 이불을 안아다가 수레 위에 폈다. 병완은 말리였다. “얘들아, 사람의 명은 하늘이 정해준거다. 엄마를 편안히 가게 해라.” 창준은 아버지를 피뜩 바라보면서 중얼거렸다. “아무리 그래도 어찌 엄마를 무슨 병으로 돌아가려는지 치료도 하지 않고 보내겠습둥?” 병완은 숨이 넘어가고 있는 노친을 안고 말하였다. “얘들아, 엄마를 일본 놈들의 병원에 싣고 갔다가 너희들도 못 살고 나앉자고 그러니?” 그 말에 기준도 수레 위에 이불을 펴던 손을 멈추었다. 그러나 인차 계속 폈다. “간대로 일본 놈들의 의사가 환자 가속을 어찌겠습둥?” 병완은 혀를 끌끌 찼다. “너네 잘 못 되는 날엔 엄마도 저세상에 가면서두 눈을 감지 못한다. 어째 애비 어미 말을 듣지 않니?” 기준은 기어이 어머니를 안아 수레에 모셔 안고 창준이가 수레를 울바자 바깥으로 몰고 나갔다. 온 집안이 수레를 따라나섰다. 병완은 고집을 부리는 아들들을 어쩔 수 없어 머리를 가로저으면서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었다. 수레 위에서 이불에 어머니를 싸안은 기준은 눈물을 줄줄 흘렸다. 창준은 수레를 몰면서도 자꾸 어머니를 뒤돌아보았다. 그는  손으로 눈물을 훔치면서   걸었다. 하옥도 수레에 올라와 이불깃을 여며주었다. 수레가 덜커덩거리면서 조개덕을 내려서서 늙은 비술나무 밑에 이르렀을 때였다. “형님, 엄마 안 되겠소.” 기준의 황급한 소리에 창준은 수레를 멈춰 세우고 뒤돌아보았다. “뭐라니?” “엄마, 엄마, 숨이, 으흐흑.” “엄마!” 창준은 목 메여 소리치며 수레 우에 뛰어 올라갔다. “엄마!” 병완도 뒤따라오다가 소리쳤다. “여보, 이게 웬 일이요? 성칠이네 일본 놈들을 몰아내면 고향에 가자고 했는데.” 성희는 영감과 아들며느리들이 애타게 부르는 소리를 듣지 못하고 눈을 꼭 감고 바쁜 숨을 몰아쉬었다. “얘들아, 빨리 집으로 수레를 몰아라.” 성희는 마지막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뒤이어 목에서 뭔가 꼬르륵 소리가 났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성칠 형님을 어제 산에 보내지 않을 걸 그랬소.” 기준의 말에 창준은 수레를 집 쪽으로 돌려 몰면서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었다. “아무런 병도 앓지 않은 엄마가 이럴 줄 꿈엔들 생각했니?” 병완은 “고향이 너무 그립고 본가집식구들이 그리워 화병에 앓아 누운 거야. 이럴 때 관준 조카라도 있으면 저 노친을 살려내겠는데.” 하고 한탄하였다. 기준은 엄마 얼굴에 얼굴을 맞비비면서 아무말두 못하고 흑흑 흐느끼면서 눈물을 줄줄 흘리며 울었다. 상순은 수레를 따라가면서 “할머니!” 하고 부르면서 대성통곡 쳤다. 병완은 애들에게 일렀다. “엄마를 조용히 가게 소리 내 울지 말라.” 기준은 흑흑 흐느끼면서 왼손으로 눈물을 닦았다. 창준은 어머니를 모신 수레를 몰고 눈물바다 속에서 웃새집 울안으로 서서히 들어섰다. 기준과 창준이 위방을 치우고 어머니를 스르르 눕혔다. 별 일이였다. 집에 돌아가자 성희는 시름을 놓았는지 길게 숨을 몰아쉬더니 다시 숨이 올라오지 않았다. 영영 아들과 며느리, 손자와 손비들의 애탄 울부짖음 소리를 듣지 못하였다. 병완은 무릎을 꿇고 울부짖었다. “여보, 이게 웬 일이요? 함께 고향으로 돌아가자 약속하지 않았소. 나를 버리고 이렇게 가면 어쩌오? 으흐흑!” “엄마!” “어머님!” 아들과 며느리들이 대성통곡 쳤다. “할머니!” 손자들과 손비들도 흑흑 흐느껴 울었다. 하옥은 한심한 소리를 하였다. “어머님, 손자 하나 안겨드리지 못한 이 불효 며느리도 데리고 가세요. 이 죄 많은 며느리를 먼저 데려가세요~ 엉~ 엉. 흐 흐 흑 흑.” 병완은 시어머니 팔을 매만지면서 대성통곡치는 하옥을 뜯어 한쪽으로 밀어내면서 말리였다. “아가야, 이러지 말라. 이게 무슨 소리냐?” 그러나 하옥은 머리까지 마구 집어 뜯으면서 대성통곡 쳤다. “어머님, 나를 데리고 가세요. 꼭 나를 데리고 가세요. 칠거지악중 대를 끊은 죄 제일 크다고 들었습니다. 나를 꼭 데리고 가세요. 저승에 가서라도 대를 끊은 죄를 속죄하면서 어머님을 효성 다해 모시겠습니다. 엉~ 엉~ ” 병완은 수월을 돌아보면서 “큰며느리를 데려 내가오.” 하고 분부하였다. 수월과 사련은 눈물을 닦으면서 정신을 잃고 대성통곡치는 하옥을 부축해 고방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창준은 어머니 옷 견지를 들고 나가 사다리를 놓고 지붕 우에 올라가 “옥보!” “옥보!” 하고 떠나가는 어머니 혼을 불렀다. 혼이야 불러 무엇 하랴. 어머니는 이젠 모든 시름 놓고 혼이라도 넋이라도 훨훨 날아 부르하통하를 넘고 해란강을 날아 지나 두만강을 훌쩍 건너 뛰어 명천으로 가고 있으리라. 임진강을 넘고 한강을 넘어 충청남도 서천군에 있는 한산면의 고향으로 날아갔으리라. 그렇게 꿈에도 보고 싶던 고향 산천과 본가 집 부모의 산소에 날아가서 철새들처럼 지저귀며 성군 오라버니, 명호 조카, 병수 손자를 만나 그간 하지 못한 말을 한창 하고 있으리라. 며칠 후 천지꽃산 동쪽 양지바른 산 중턱에는 커다란 봉분 하나가 생겼다. 그 봉분에는 생전에 그렇게도 고향을 그리던 착한 어머니 리성희가 망향의 한을 품은 채 쓸쓸하게 묻혔다. 사망해서도 고향산천을 바라볼 수 있게 높은 산중턱 양지바른 곳에 자녀들의 눈물과 함께 고이고이 모셨다. 병완은 합장하고 눈물이 글썽해 노친을 묻은 봉분을 바라보면서 중얼거렸다. “여보, 외로운 대로 먼저 가서 기다리오. 이제 몇 해 아니면 당신을 동무 하러 올게.” 그 불길한 말씀에 창준과 기준은 도리머리 질 하면서 눈물을 줄줄 흘리었다. 봉분 남쪽에 하늘을 찌르며 고개를 숙이고 서 있는 몇 대 백양나무의 가지들에서 까마귀 몇 마리가 까욱~ 까욱~ 을씨년스럽게 울부짖고 있었다. 5. 중국 지주 한전 밭갈이를 다하고 희망의 씨앗까지 다 뿌리자 기준은 인삼의 말처럼 벼농사를 지으려고 상우와 상순, 금옥까지 데리고 패용천산 앞에 있는 조지주네 황무지로 갔다. 무인지경인 황야에는 아름드리 버드나무가 우중충하게 들어앉아있었는데 까마귀들이 버드나무 위에 앉아 까욱 까욱 애처롭게 울면서 놀라 날아났다. 황야를 바라보는 그들은 한숨을 길게 몰아 내쉬었다. 버드나무들을 뿌리 채로 뽑아내고 논을 풀려고 서둘렀다. 그때 패용천산 앞마을의 지학사가 어슬렁어슬렁 다가오더니 눈 흰자위를 굴렸다. “너희들 이거 뭐 하는 짓이야?” 열여섯 살 난 상순은 조 지주와 장 지주네 애들과 휩쓸려 놀다나니 이젠 중국말을 꽤나 했다. “여기다 논을 풀려고 그러오.” 상순이 하는 중국말에 지학사는 기준과 상우에게 눈알을 부라리었다. “너희들 정신 있냐? 여긴 물도 없는데 어떻게 벼농사를 한다고 이 지랄이냐? 남의 배추 밭 옆에 이렇게 황무지를 일구면 이담 큰물이 지면 내 배추밭이 쓰게 되겠는가?” 상순이가 기준에게 통역하자 기준은 괭이를 짚고 서서 웃는 얼굴로 지학사를 바라보았다. “우린 조개덕 조덕림네 황무지에 논을 풀지 지 씨의 밭에 논을 푸는 게 아니오. 절대 그 집 밭에 물 한 방울도 들어가지 않게 할 테니 근심하지 마오.” 상순이 통역해주자 지학사는 기준에게 삿대질해댔다. “여기 밭 지경에 이렇게 물도랑을 빼는 게 우리 밭에 물이 들어가지 않을 수 있는가?” 그러나 기준은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았다. “근심하지 마오. 우리 잘 지킬 테니까.” 지학사는 텃세를 믿고 호통 쳤다. “네놈들이 여기다 논을 일구는가 봐라. 내 말을 듣지 않으면 장학산 동생한테 말해서 그 집 밭을 부치지 못하게 하겠다.” 그래도 기준과 상우는 계속 괭이로 버드나무뿌리를 파내고 모래땅을 골고루 펴면서 논판을 만들었다. 며칠 후 이른 아침에 장학산이 정말 소서구 기준이네 집에 찾아왔다. 그는 밥을 먹는 기준을 보고 위방문턱에 걸터앉아 건 가래를 문 밖으로 퉤 내뱉으면서 볼 부은 소리를 쳐댔다. “자넨 이젠 우리 밭을 붙이지 않을 작정인가? 무슨 놈의 논을 푼다고 그래?” 기준은 구들에서 일어나 웃는 얼굴로 “주인님, 올라와 밥이나 함께 먹기요.” 하고 인사부터 했다. 사련과 새금은 옥수수 죽을 무룩이 뜬 그릇까지 밥상 우에 올려놓으며 올라와 들라고 수저를 쳐들어 보였다. 장학사는 도리머리 질 하면서 볼 부은 소리만 했다. “우리 밭을 잘 다루면 됐지. 여기서 져도 보지 못한 벼농사를 짓자고 그럴 게 있는가? 우리 형님네 어떤 사람이라고 그 옆에 물도랑을 빼오? 여기서 살자고 그러오? 어쩌자고 그래?” 기준은 수저를 놓고 장학산을 위방에 이끌고 들어갔다. “주인님, 우리 어찌 주인님의 구명은혜를 잊겠소? 주인집 밭도 잘 붙이고 조덕림 네 황무지두 개간해 입에 풀칠하자고 그러오. 널리 양해하오.” 장학산은 금방 찾아왔을 때만은 달리 조금 노기가 사그라졌다. 그러나 말 속에 위협공갈이 잔뜩 담겼다. “우리 형님을 어설프게 작작 건드리게나. 자칫하면 여기서 살려니 하지 말게. 우리 형님네 집을 보았지? 높다란 토성 네 귀 망루에 사냥총을 가진 머슴들이 일여덟이나 지키고 있네. 정신 있소? 호랑이 코 구멍을 잘못 건드리면 호랑이에게 물리어 뼈다귀도 추리지 못 할 줄 아오.” 장학산은 독기어린 눈길로 기준을 쏘아보더니 엉덩이를 툭툭 털고 일어나 훌쩍 떠나 가버렸다. 어진 상우는 아버지를 보고 “논을 풀지 맙시다. 괜히 장학산이나 노엽혀서 애나게 일궈 놓은 여기 밭도 붙이지 못하겠습니다.” 라고 했다. 그러나 상순은 세 귀 눈을 번뜩였다. “형님은 겁도 많소. 인삼 삼촌이랑 있는데 무서울 게 뭐요? 지학사 개새끼 정 못 살게 굴면 성칠 큰아버지한테 말해 총으로 다 쏴죽이면 다지 뭐.” 기준은 상순을 말리였다. “그럼 안 된다. 할아버지 말씀을 듣지 못했느냐? 우린 여기서 새로 원수를 맺지 말고 살아야 해. 일본 놈들과 한길수한테 쫓기어 간도로 왔는데 여기서 또 쫓기면 어데 가서 살겠느냐?” 그래도 상순은 불 부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중국 땅이 넓고도 넓은데 어데 가면 살지 못하리라고 그러오?” 기준은 상우와 상순을 보고 말했다. “지학사와 장학산은 고모사촌형제 간이야. 지학사를 건드리면 우린 살 터전도 잃을 거야.” 그때 상순은 “조덕림이나 인삼 삼촌한테 물어보고 그만 두는 게 어떻습니까?” 하고 물었다. 기준은 한숨을 후 내쉬더니 머리를 끄덕였다. “그게 좋겠다.” 이날은 온 집식구들이 논을 풀러 가지 못했다. 기준은 중국말을 잘 하는 상순을 데리고 먼저 조개덕으로 내려갔다. 그들이 묵은 비술나무아래를 지나가는데 맞은편에서 낯익은 사람이 다가왔다. “아니, 이게 누구요?” 기준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마주 인사하는 사람은 글쎄 사돈어른 최경숙이 아니겠는가! “사돈어른, 여기서 만날 줄은 정말 꿈에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상순은 허리 굽혀 큰누나의 시형에게 인사를 올렸다. 최경숙은 알아보지 못하게 큰 상순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게 막내사돈 아니오?” “예, 막내아들앱니다.” 경숙은 상순의 어깨를 다독여주면서 “야, 정말 잘 생긴 총각이구나.” 하고 혀를 끌끌 찼다. “어떻게 돼 여기까지 찾아왔습니까? 사돈어른은 편안히 계시오?” 경숙은 한숨을 길게 내쉬더니 하소연했다. “앓진 않습니다. 그런데 이젠 고향에선 살기 어렵게 됐습니다. 조선말을 가르치지 못한다는 일본 놈들의 엄령에 아버진 서당 훈장도 못합니다. 일본 통역 질 하는 강철한테서 일어를 배우긴 배웠는데 아버진 일본 놈의 말을 배워주는 훈장질을 하기 싫어 그만 뒀습니다. 밭은 없지 훈장질은 못하지 어떻게 살겠습니까? 여기서 농사나 지을까 해 함흥촌의 큰 매형을 찾아 가는 길입니다.” 기준은 머리를 끄덕였다. “잘 왔습니다. 우리 여기서 농사를 지으면서 함께 삽시다.” 최경숙은 뜨겁게 손을 잡아주는 사돈이 고마웠다. 기준은 조개덕 버드나무숲속 높다란 토성 안에 우뚝 솟아있는 한족 집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저기 조지주네 집에 가서 밭이나 얻어보면 어떻습니까?” "거 온바하곤 가봅시다." 경숙은 기준을 따라 조지주네 집으로 갔다. 일여덟 길이나 되게 높디높은 토성은 보기만 해도 위엄 있었다. 대문짝은 어찌나 큰지 사람이 한쪽대문짝에 둘씩 달려들어야 열 것만 같이 우둔해보였다. 큰 대문짝에 난 자그마한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개 짓는 소리가 들리고 뒤이어 신짝을 끄는 소리가 들려왔다. 삐꺼덕 문이 열리더니 머슴이 길쭉한 얼굴을 내밀었다. “웬 일이오?” 상순은 순통한 중국말로 “지금 지학사가 패용천산 앞에 논을 풀지 못하게 해서 찾아왔다고 전하오.” 하고 말했다. 이윽고 조지주가 황급히 마중까지 나왔다. “어서 들어오게나.” 코 수염을 기르고 너부죽하게 생긴 조덕림은 사람이 좋아보였다. 그는 경숙을 피뜩 보더니 기준에게 물었다. “이 양반은 누구요?” 기준은 경숙을 가리키면서 중국말로 “조선에서 금방 온 내 사돈이오.” 하고 말했다. 경숙은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조덕림은 인사를 받으면서 경숙의 손까지 잡아주었다. 경숙은 기준을 따라 들어가면서 보니 넓은 토성 안에는 정면에 고래등 같은 기와를 얹은 덩실하게 높다란 몸채가 으리으리하게 들어앉아있었고 서쪽과 동쪽에 머슴과 자식들이 사는 사랑채가 들어앉아있었다. 몸채와 사랑채 문들은 문살이 조각처럼 눈부시게 멋있었다. 적송으로 짠지 오랜 문은 검붉어서 한결 위엄이 있어보였다. 검둥개는 짓다가 주인과 함께 웃으면서 몸채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꼬리를 저으면서 반기였다. 조덕림의 몸채에 들어가니 맞은쪽에 고풍스러운 맞은편에 벽시계가 걸려있었다. 남쪽구들과 북쪽구들 사이 방바닥 맞은쪽에 놓인 상 량옆에 위엄스런 검 뻘건 의자 서너 개씩 놓여있었다. “자, 앉게나.” 조덕림은 오른쪽의자에 가서 척 틀스레 앉았다. 여자 머슴들이 차 잔과 물주전자를 들고 들어오더니 김이 몰, 몰 피어오르는 차물을 부어 올렸다. 조덕림은 “차물을 마시게나.” 하고 권하고 나서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래 지학사가 어쩌던가?” 기준은 차물을 마시면서 사실대로 말했다. 조덕림은 차 잔을 상우에 탕 놓으면서 고래고래 고함쳤다. “지학사가 언감! 개를 쳐도 주인을 보고 치랬다. 내 가만 놔두는가 봐라!” 기준은 노발대발하는 조덕림이 일이나 칠까 봐 말리였다. “우리 논을 풀지 않으면 다지. 괜히 사냥총을 쥔 그 집 보초꾼들에게 다치겠습니다.” 조덕림은 벽에 걸린 군관복색을 한 사진을 가리키면서 우쭐거렸다. “흥! 내 저 조덕산 동생이 뭘 하는지 아는가? 신경에서 한다하는 국민당 군에서 단장 질하오. 조까짓 지학사 사병 몇이 다 뭔가? 내 동생 군대 한개 패만 오면 지학사네 집을 잿더미로 만들어 버릴 수 있어. 시골 놈의 하루 강아지 정말 범이 무서운 줄도 모르고 날뛰여. 내 이제 그 놈 새끼를 찾아가서 혼방 내놓을 테니 근심하지 말고 논을 풀게나.” 상순은 대뜸 입이 함박만 해졌다. “우리 기어이 논을 풉시다.” 조덕림은 다가와 상순의 어깨까지 다독여주었다. “이 놈 자식이 어려도 사내 숫기 있어. 됨직한 아들놈을 두었구먼.” 기준은 조덕림을 보고 “밭이 있으면 우리 이 사돈이 붙이게 좀 주오. 조선에서 금방 들어오는 길인데 살길을 열어주오.” 하고 말했다. 조덕림은 그 자리에서 통쾌하게 대답했다. “좋소. 우리 집 뒤에 황무지가 가득하오. 개간한 첫해에 8할을 주고 이듬해부터 절반 줄게. 어떻소?” 기준이 조 지주의 말을 경숙에게 통역해주자 경숙은 인차 일어나 허리 굽혀 인사까지 했다. “고맙소. 그런데 이제 와서 황무지를 개간해서야 농사철을 놓칠 거 같소. 그러니 황무지는 명년에 개간하기로 하고 올해엔 인차 심어먹을 밭을 줬으면 좋겠소.” 조덕림은 경숙이가 뭐라는지 알아듣지 못해 기준과 상순을 쳐다보았다. 기준이도 이젠 중국말을 제법 잘해 경숙의 말을 전해주고 뒤 말을 이었다. “주인, 올해 농사철을 늦추지 말게 묵밭이 있으면 주오.” 조덕림은 눈을 지그시 감고 궁리하더니 천천히 눈을 떴다. “있소. 이 뒤에 몇 짐 되지 않지만 줄게. 조덕산 동생네 밭이 있소. 그 동생이 국민당 군대에 간 후 묵어빠졌소. 그 밭에 먼저 농사를 지으면서 여가에 우리 집 황무지도 일구란 말이오. 올해부터 일구면 명년에야 농사를 지을 수 있지 않고 뭐요.” “예, 그렇게 하기요.” 기준은 경숙이네 밭까지 얻은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덕림은 보리 고개를 넘는데 보태라고 좁쌀 반주머니씩 경숙과 기준에게 주었다. 기준과 경숙은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고 높다란 토성안집에서 나와 거뿐한 심정으로 함흥촌으로 향했다. 그들의 뒤에서 아름드리비술나무들이 봄바람에 무섭게 아우성쳤다. 6. 무함 부르하통하의 봄 물결은 겨우내 얼었던 황야를 누비며 무섭게 사품 쳐 흘렀다. 기준의 온 집식구들은 조덕림과 인삼까지 두둔해나서는 바람에 지학산을 두려워하지 않고 부르하통하로부터 칼산과 패용천산 앞의 논밭에까지 3 리나 되는 가느다란 물도랑을 팠다. 생명수와 같은 부르하통하의 봄물은 물도랑을 따라 누런 모래땅을 적시면서 논밭에 흘러들어갔다. 기준은 논물이 물도랑을 넘어 길 건너 지학사네 배추밭에 들어갈 까봐 무척 신경을 썼다.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는 먼저 물도랑의 물이 새지 않나 살피곤 했다. 기준은 인삼과 유격대원들의 지지를 받으면서 희망의 벼 씨를 간도의 황야 논밭에 뿌렸다. 모를 키우지도 않고 산종을 뿌려 거두는 만큼 먹을 예산이었다. 그런데 기준이네 집에 사달이 생겼다. 상순은 웃새집 상훈형님네 큰아주머니가 소를 쓴다고 어찌나 말하는지 화가 나서 세길 네길 뛰었다. 그는 씽 달려 나가더니 시퍼런 작두날을 뽑아들고 우사간으로 달려 들어가 웃새집 소 궁둥이를 팍 내리찍었다. 구유에 대가리를 틀어박고 먹이를 먹던 소는 난데없는 작두날에 궁둥이를 찍혀 어찌나 아팠던지 뒤발로 상순을 걷어찼다. “아이고, 이놈 소 새끼 썩어 지기 전에도 찬다.” 상순은 고함치면서 재차 작두날을 들어 소 궁둥이를 또 내리찍었다. 소 궁둥이는 쩍 갈라져 피가 줄줄 흘렀다. 순간 소는 그만 몸뚱이를 지탱하지 못하고 풀썩 쓰러졌다. 그때 기준이가 달려 나와 작두날을 빼앗아내면서 고함쳤다. “이놈 새끼야, 말하지 못하는 소한테 무슨 죄가 있다고 이러니? 아이고, 형님을 무슨 낯으로 볼가?” 기준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소가 불쌍해 머리를 어루만지면서 눈물까지 흘리었다. 그래도 상순은 고함을 쳐대면서 아주머니를 욕했다. “큰집이란 게 그 잘난 소를 쓴다고 계속 짹짹거린단 말이요. 어디 형제간 같소? 원, 밸이 나서 어디 살겠습둥?” 기준은 상순의 귀쌈을 찰싹 갈겼다. “이놈새끼, 주둥이를 다물지 못해?!” 뒤이어 넉두리를 해댔다. “에이, 참대 그루에서 참대 자라지 버드나무 자라겠냐? 이놈새끼도 어쩜 울뚝 밸을 똑 떼 닮았을까! 기준은 어이없어 도리머리 질 하면서 우사에서 나가버렸다. 이때 사련이 밥을 짓다가 말고 부엌에서 나와 우사로 들어왔다. 그는 재를 물에 이겨서 갈라터진 소 엉덩이에 붙이였다. “이런 끔찍한 일이 어디 있느냐?” 사련은 막내아들을 쳐다보면서 나무랐다. “큰집 큰며느리 말을 잘못했지만 농사를 지을 부림소를 이게 뭐냐? 이젠 누굴 믿고 농사를 짓겠느냐? 응? 원. 저런 못된 놈을 어쩌겠니?” 어머니 말을 듣고 안 됐는지 상순은 쓰러진 둥글 소를 흘끔 내려다보더니 머리를 숙였다. 며칠 후에도 소는 기준과 창준이 토 방법으로 오줌 약을 조금 써 효과를 보았는지 다행히 죽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집의 아주머니 지새금이 조개턱을 쳐들고 세 귀 눈을 흘기면서 상순을 나무랐다. “생원이, 이후엔 그 울뚝 밸을 좀 작작 쓰오. 소가 죽었으면 어찌 하겠소?” “아주머니 뭐라오?!” 상순은 성이 꼭뒤까지 치밀어 세 귀 눈을 부라리더니 와락 달려들어 아주머니가 마당에서 한창 불을 피우는 화로를 들어 지붕에 활 뿌렸다. 대번에 지붕에 불이 확 달렸다. 다행히 기준과 사련이 인차 물을 퍼치고 마을 사람들이 지붕에 올라가 화로를 내리 던졌기에 큰 화재는 입지 않았다. 기준은 상순을 붙들어 귀쌈을 호되게 치면서 꾸짖었다. “어째 쩍하면 이렇게 울뚝 밸을 쓰니?” 상순은 오른손으로 맞은 귀쌈을 만지면서 내리떴던 눈을 치뜨며 아버지를 쏘아보았다. “친구들은 진수해에 있는 일본 중학교를 졸업하는데 공부도 시키지 못하는 거 무슨, 밸이 나 죽겠습구마.” 그 말에 기준은 가슴이 아팠다. “아버지 가난해 너를 공부를 시키지 못했다. 이젠 너도 어린애가 아니니까 너 절로 돈을 벌어 공부해라.” 기준은 눈을 흘기면서 일 밭으로 나갔다. 어느 날 그날 오전에도 패랑천산 앞 논밭에서 일하고 상순은 집으로 점심을 먹으러 돌아가게 됐다. 그는 논밭을 떠나기 전에 아버지처럼 논물이 혹시 물도랑을 넘어 지학사네 배추밭으로 흘러들어갈 까봐 물도랑을 따라 올라가면서 쭉 살폈다. (터질 위험이 없구나.) 상순은 한숨을 호 내쉬고는 패용천산과 칼산 사이 골짜기를 거쳐 소서구 집으로 돌아갔다. 점심을 먹고 아버지가 일 밭으로 떠나가자 상순이도 뒤따랐다. 그런데 패용천산과 칼산 사이 골짜기 사이 골짜기에 이르렀을 때 뒤가 마려워 뒤떨어지게 됐다. 그런데 저게 뭔가? 상순이가 먼발치에서 보니 지학사가 괭이로 물도랑을 터치워 자기 배추밭에 물을 대지 않는가! “저 놈 새끼 무슨 꿍꿍인가?” 상순이가 황급히 뛰어 내려갈 때다. 지학사란 놈이 일하러 상순보다 밭에 간 기준의 멱살을 틀어쥐어 흔들더니 다짜고짜로 괭이로 옆구리를 찍었다. 준비 없는 틈에 찍는 바람에 명천에 이름난 울뚝밸 기준은 그저 당하고 말았다. 후에 안 일이지만 옆구리 늑골이 세대나 끊어졌다. 기준은 옆구리를 찍혀가지고서도 재차 찍는 괭이를 틀어쥐고 놓지 않았다. 그때 상순이 달려와 지학사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이놈새끼, 어째 우리 아버지를 괭이로 찍었느냐?” 지학사는 텃세를 믿고 물이 들어간 자기 배추밭을 가리키면서 호통 쳤다. “보면 몰라? 네 애비 우리 배추밭에 물을 댔어!” 그러자 상순도 마주 호통 쳤다. “이 놈 새끼, 금방 네놈이 물도랑을 괭이로 터치우는 거 다 보았어. 우리 아버지가 그랬다고 들씌워?!” 상순이 주먹을 쳐들자 옆에서 기준이 급히 막았다. “얘, 그만둬라. 중국 지주를 때리고 여기서 어떻게 살자고 그러니?” 그 말에 상순은 붉으락푸르락 하면서도 쳐들었던 주먹을 겨우 내리웠다. “야~ 이놈 새끼들이 아무리 지주라고 해도 사람을 너무 업신여기지 말라!” 기준은 옆구리를 괭이에 찍혀가지고서도 괭이로 터진 물도랑을 막았다. 그러자 지학사는 개 잡은 포수처럼 우쭐거리면서 상순과 기준의 코를 번갈아 삿대질하면서 빈정거렸다. “네놈들이 언감 나와 걸고 들어?” 이때 미리 버들방천에 숨어있던 지학사의 졸개들이 우르르 쓸어 나왔다. 미리 짜고 든 게 불 보듯 뻔했다. 자기 주인이 열세에 처한 것 같아 졸개들이 미리 획책한대로 역성을 들려고 덮쳐오는 것이었다. 그들의 손에는 사냥총이며 낫이며 칼을 들고 있었다. 먼발치에서 처음부터 이 광경을 보던 송학정은 질겁해 버드나무숲속에 몸을 감춰버렸다. 졸개들을 본 지학사는 상순을 손가락질해대며 더 광기를 부렸다. “개자식, 어디 주먹으로 쳐봐라! 썩어지지 못해. 흥!” 상순은 숱한 졸개들 앞에서도 겁기라고는 없이 쏘아보았다. 그러자 기준은 상순을 마구 끌고 집으로 향했다. 상순은 꼭뒤까지 치민 성을 가까스로 참으면서 아버지를 부축해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돌아온 기준은 옆구리가 너무 아파 구들에 털썩 드러누웠다. “상순아, 네 오줌을 받아다가 내 옆구리에 발라 달라.” “예. 아버지.” 이윽고 상순은 대야에 오줌을 받아가지고 들어와 신음소리를 내는 아버지 옆구리에 오줌을 발라주었다. 그때 천지꽃산 동쪽 상우지에 가서 일하던 상우와 사련이 그리고 지새금과 금옥도도 상서롭지 못한 감이 들었던지 집으로 돌아왔다. 상우는 위방에 누워 운신도 하지 못하는 아버지를 보고 무릎을 꿇고 엎디면서 아버지 손을 잡았다. “아버지, 이게 무슨 일입둥?” 상순은 금방 있은 일을 형님에게 죽 이야기하고 나서 씩씩거렸다. “내 식칼을 가지고 가서 지학사 지주 옆구리를 콱 찔러놓겠다.” 그러자 기준은 상순이쪽 허공에 대고 손을 겨우 허우적거리면서 나지막이 말했다. “상순아, 그만둬라. 그러는 날엔 우린 간도에서도 살 길이 없다.” 그때 정주간 문턱너머에 서서 보던 지새금이 길쭉한 얼굴을 돌리면서 넉두리를 해댔다. “우린 저 밸 때기 더러운 생원 때문에 못 살구 나앉겠다. 쯧쯧.” “뭐라오? 내 때문에 못 산다고? 그거 말이라고 하오? 양?!” 지새금도 어린 시동생이 붉으락푸르락 해도 대수로워 하지 않았다. “들을라니 지학사는 총을 가진 졸개만 해도 일여덟이나 되고 밭이 백무도 넘는다오. 그런 지주를 잘못 건드렸다간 살기나 하겠소?” 상순은 상순이 대로 도리가 있었다. 그는 아버지 옆에서 일어나 정지로 쫓아 나오면서 고래고래 고함쳤다. “죽으면 죽었지. 그런 놈한테 맞고서도 내내 머리 숙이고 살아야 한단 말이오?” 새금은 열 살이나 어린 상순을 꾸짖었다. “생원이, 좀 그 밸을 참지 못하오? 생원 때문에 집안이 망하겠소.” 상순이가 또 뭐라고 하려는데 위방에서 아버지가 불러서 올라갔다. 기준은 상순의 손을 잡고 말했다. “절대 지학사를 뜨지 말라. 부탁이다. 우리 온 집안 식구들을 생각해서 내 부탁을 들어다우. 일본 놈들과 지주들이 살판 치는 세상에 자칫하면 우린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상순은 아버지 말에 머리를 숙이고 꼭뒤까지 올리 치민 노기를 참느라고 거친 황소숨만 씩씩거렸다. 그때 상순은 머리에 피뜩 함흥촌의 웃새집 상길형님과 토성안집의 인삼형님이 떠올랐다. 그러자 그는 아버지 손을 놓고 정지에 나가 짚신을 찾아 신자 주먹을 쥐고 바깥으로 씽 뛰어나갔다. 등 뒤에서는 어머니 사련이가 부르는 소리가 들리었다. “상순아, 절대 날뛰지 말라.” 상순은 뛰어가다가 머리를 돌려 소리쳤다. “엄마, 근심하지 마오. 내 인삼 삼촌과 상길 형님과 토론해 보겠습구마. 어쩜 좋겠는가고.” 상순이가 함흥촌에 가서 웃새집에 긴급한 정황을 알리자 창준은 처자들을 데리고 소서구로 올라갔다. 다만 상길이만은 상순과 함께 토성안집으로 인삼형님을 찾아갔다. 인삼은 그때 마당에서 유격대원들과 함께 쌀을 한창 버치로 지다가 토성 안에 뛰어 들어오는 그들을 보고 대견한 표정으로 맞아주었다. “장차 우리 집안 기둥들이 왔구먼. 무슨 일에 이렇게 성급한 게냐?” 상순은 바쁜 숨을 몰아쉬면서 오후에 있은 일을 죽 이야기하고 나서 대책을 물었다. “어찌 하면 좋겠소?” 그러자 인삼은 놀라했다. “작은 형님이 상하다니? 그 놈 지학사 놈을 어쩌면 원수를 갚겠니?” 인삼은 버치를 놓고 담배를 물고 생각에 잠기는 것이었다. (지학사 같은 놈을 처단하자면 우리 토성안의 유격대원들이면 족하다. 그러나 풀을 건드려 뱀을 놀래면 함흥촌 근거지는 일본 놈들과 지방 중국지주토호들의 성화에 끝장날게 아닌가? 그럼 유격대의 쌀을 어데서 구해오겠는가?) 그리하여 인삼은 상길과 상순을 위방에 데리고 가서 조용히 타일렀다. “우린 여기서 참으면서 살아야 한다. 절대 여기 중국지주들을 건드리지 말아야 한다. 알만하니?” 상순은 뒤 덜미를 쓱쓱 극적이었다. “에이, 삼촌을 믿고 왔더니. 고작 참으라는 게요?” 인삼은 유격대의 비밀도 있고 하여 어린 상순과 상길에게 속심의 말을 다 할 수 없어 갑갑했다. “법으로 해도 지학사한테 질 게다. 참고 형님의 상처나 치료해보자.” 상순은 “흥! 됐소, 돼. 삼촌도 그저 그렇구먼.” 하고 볼 부은 소리를 하더니 상길의 손을 잡아끌고 토성 바깥으로 나갔다. 대문 옆에서 머리를 풀어헤치고 흔들거리는 실실이 늘어진 수양나무가지들을 보자 상순은 슬그머니 밸이 울컥 치밀었다. “에이, 지학사 개새끼를 어떻게 하면 원수를 갚을까?” 상순은 꼭뒤까지 치민 노기를 가라앉히지 못하고 우물덮개를 탁 걷어찼다.  
52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31) 댓글:  조회:1847  추천:0  2016-02-03
                                                                           김장혁 작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 제3권                         제12장 황야의 땅                             1. 극적인 상봉        흐릿한 하늘이 하나의 큰 천정처럼 하늘을 뒤덮었다. 그래도 계절은 속일 수 없어 겨우내 모진 풍설과 엄동설한을 이겨낸 완강한 연분홍 진달래꽃은 천지꽃산 아래 황야를 뒤덮으면서 피어났다. 마치 진달래꽃이 만발한 온 산이 하나의 큰 진달래꽃나무를 방불케 했다.       흐르는 물처럼 세월이 흐르고 흘러 몇 번 봄이 바뀌었던가. 해마다 돌아오는 봄은 농사꾼들에게는 황무지를 개간하고 희망의 씨앗을 뿌리는 가슴을 벅차게 하는 계절이었다.       기준 일가는 천지꽃산 꼭대기까지 올라가면서 억척스레 황무지를 개간했다. 기준과 상우 부자는 패용천산북쪽 산등성이에 가서 시꺼먼 부식토를 한 수레 한 수레 실어다 인분과 돼지 똥을 섞어 개간한 누런 땅에 널어놓았다. 그런 다음 가대기로 밭갈이를 하니 기준 일가가 땀 동이를 부어 개간한 누런 황야의 거친 땅은 점차 거무스름하고 토실토실한 밭으로 번져갔다. 누런 땅에 옥수수를 심었을 때에는 누르스름하고 키가 허리를 넘지 못하였고 이삭도 애들 손만 하였다. 하지만 거무스름한 비옥한 밭이 된 후부터 옥수수나 조, 수수, 기장을 심으니 곡식이 퍼런 색을 띠고 키도 한 키를 넘은데다 이삭도 아주 컸다. 조이 이삭은 개꼬리 같았고 강냉이는 팔뚝만큼 한 이삭을 둬 개씩 업고 있었다. 기준과 상우가 억척스레 개간한 천지꽃산 그 황무지 밭은 후에 마을 사람들에게 상우지로 불린 옥답으로 됐다.       그 덕분으로 기준 일가는 조선에서 집안의 문중전을 꿔 쓴 빚을 이자의 이자까지 다 물고 웃 새집의 둥글 소 값을 갚아주고도 먹고 살 수 있게 됐다. 새 봄이 오자 그들은 온종일 괭이로 나무뿌리를 찍어내고 밭을 만들었다. 그러다나니 기준과 상우의 베적삼을 입은 잔등에는 땀이 후줄근히 배여 김이 물물 피어올랐다. 상순도 이젠 열세 살이나 돼 제법 어른스레 괭이를 휘두르면서 나무뿌리를 찍어 뽑아내고 삽으로 웅덩이를 메워 밭을 만드는데 한몫 끼어들었다. 이젠 온 집 식구들이 흘린 피땀으로 천지꽃산 등성이로 올라가면서 한 평방, 한 평방 밭이 만들어졌다.       기준은 몇 해 전에 원삼과 함께 쌀 수레를 호송하다가 유격대를 만나 성칠의 행방을 대개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성칠은 몇 해 되도록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후에 용천에게서 들으니 그 사이 김 장군의 유격대를 따라 소련에 나가 군사훈련도 받고 간부양성을 받았다고 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혁명을 하더라도 집에 들 시간마저 없단 말인가?) 기준은 속으로 형님을 나무랐다. 그때 기준은 유격대를 찾아 눈 덮인 산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유격대는 쌀을 가득 지고 어디로 갔는지 종적을 찾지도 못했다. 그날로 기준은 명동교회당에 가서 김하규한테 그간 있은 일을 알리고 혹시 용천 대장이거나 성칠 형님이 오면 자기에게 보내라고 했다. 하긴 기준은 소서구에 있었지만 유격대는 기동성이 강해 찾아갈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한번은 용천 대장이 함흥촌의 토성안집에 나타났다. 그리하여 병완으로부터 창준과 기준이 모두 용천을 만나보았다. 그때 기준은 용천 대장을 보고 “나도 유격대에 들어가겠소. 나를 받아주오.”라고 했다. 용천 대장은 기준의 손목을 잡고 “유격대에 들어가 총을 들고 일본 놈들과 싸우는 것도 좋당께. 허나 후방에서 농사 잘 지어 유격대에 쌀을 지원하는 것도 일본 놈을 족치는 유격대와 한가지라니께.”라고 했다. 뒤이어 그는 “집식구들이 다 기준을 믿고 사는데 농사는 누가 지어? 성칠 대장만 해도 이 집에서는 항일에 공훈이 크다니께.” 하고 재삼 말리었다. 그래서 기준은 고민 끝에 토성안집 인삼을 도와 유격대 쌀을 장만하는 일을 하기로 하고 소서구에 물앉았던 것이다. 어느 날 상순은 한창 암소에 가대기를 메워가지고 밭을 갈고 있었다. 기준이가 막벌이를 해 번 돈으로 산 암소로 밭갈이를 하니 흥이 났다. 수송아지가 밭갈이 하는 어미를 졸졸 뒤따라 다녔다. 그때 훤칠하게 생긴 한 사내대장부가 천지꽃산을 넘어 오더니 산마루에 서서 산비탈을 굽어보면서 땀을 들이면서 쉬는 것이었다. 그는 한참이나 가대기키만큼도 되나마나 한 상순이 가대기에 동동 매달려 비틀거리면서 밭을 가는 걸 보고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는 허리에 권총을 차고 있었다. 그는 상순에게 다가와 “어린 나이에 밭갈이까지 하다니. 참, 장해.” 하고 치하했다. 상순은 “와.” 하고 소를 세우고나서 그 사나이를 훑어보며 “누굽니까?” 하고 물었다. 훤칠한 키에 어글어글한 쌍까풀눈, 위엄 있게 생긴 사나이였는데 옆구리에 권총까지 척 차고 있었다. “난 지나가던 나그네야.” 그는 상순의 어깨를 툭툭 다독여주면서 “내 밭갈이를 해 볼까?”라고 하며 가대기 손잡이를 거머쥐더니 “이라!” 하고 소를 몰았다. 그 사나이는 꽤나 밭갈이에 손이 익어보였다. 그는 옆에서 따라오는 상순을 보고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어린 나이에 어떻게 한뉘 밭을 갈구 살겠느냐? 일본 놈의 세상에서 아무리 부지런히 농사를 지어도 가을이면 지주들이 소작료를 다 걷어가지. 어떻게 살겠니?” “농사를 짓지 않으면 별 수 있습둥?” 그 나그네는 한숨을 후~ 길게 내쉬면서 뭔가 한참 궁리하는 것이었다. “공부 했니?” “공부를 하고파도 살기 바빠 못했습꾸마. 고향에 있을 때 서당 방에서 하늘 천, 땅 지를 조금 배웠을 뿐입꾸마. 아버지가 용정 학교를 두루 알아보았는데 월사금이 너무 비싸서 다니지 못합꾸마.” “그래두 공부를 해야지. 토성 안 집 인삼을 찾아가 배워라.” 상순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예? 인삼 삼촌처럼 항일 유격댑둥?” 그 사나이는 허리에 찬 권총을 뒤로 밀어 놓더니 계속 지탑을 쥐고 밭갈이를 해나가면서 “난 인삼과 한 집안 사람이란다.” 하고 대답했다. “이 근방에 기준이란 사람이 있느냐?” 상순이가 찬찬히 그 사나이를 쳐다보다가 어쩐지 자기 아버지와 비슷하게 생긴 것 같아 놀라했다. 그러나 누가 물어도 대답하지 말고 이름도 경칠이라고 하라던 아버지 말이 피뜩 떠올랐다. “그런 사람이 없습꾸마.” 그때 뒤에서 기준이가 상순을 번갈아 밭갈이를 하자고 이쪽으로 다가왔다. 그 사나이는 가대기질하면서 뒤를 돌아보다가 주춤 멈춰 섰다. “기준아!” 기준도 주춤 멈춰 섰다. “아니, 형님!” 그 사내와 기준은 서로 마주 달려가더니 얼싸안고 어린애들처럼 풍덩풍덩 뛰는 것이었다. “뭐? 형님? 그럼 십 여 년이나 찾고 찾던 성칠 큰아버지란 말인가?” 상순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기준은 성칠을 놓으면서 상순 쪽에 머리를 돌렸다. “야, 상순아, 어서 와서 인사해라. 네 큰아버지다.” 상순이가 달려가 절을 올리자 기준은 성칠에게 “얘는 둘째 상순이오.” 하고 알려주었다. 성칠은 상순을 부축해 일으켜 세우고 길쭉한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와락 끌어안았다. “상순이 벌써 이렇게 컸어? 몇 살이냐?” “열세살입구마.” “야, 그러니 칠팔 년 만에 만났구나. 내 영월동의 집을 떠날 때는 서너 살 밖에 안 됐는데. 제법 가대기질까지 하던데. 아버지랑 엄마랑 잘 계시느냐? 함흥촌이라는 건 어느 마을이냐?” 성칠은 한시 급히 부모와 집안의 형편을 알고 싶었다. “아버지와 엄마는 형님을 찾다 못해 이젠 머리에 서리 내린 늙은이로 늙었소. 저 아래 산골짜기 벌판에 저게 부모와 큰집에서 사는 함흥촌이요. 그리고 저 뒤에 막바지 집이 우리 집이오.” 성칠은 “빨리 부모를 찾아가봐야겠다.” 하고 함흥촌 쪽을 내려다보았다. 기준은 소서구 뒤 산을 가리키면서 “양, 그러기요. 뒤 산 양지바른 저기에서 웃새집 형님이랑 지금 한창 밭을 갈고 있소. 함께 내려가기요.” 하고 말한 후 상순을 빨리 가 알리라고 했다. 상순은 소서구 북쪽 산비탈에 달려가 웃새집 창준큰아버지와 상훈형님에게도 기쁜 소식을 알렸다. 기준과 창준 일가는 성칠과 오랜만에 극적인 상봉을 해 서로 눈물이 글썽해 인사를 나누었다. 창준은 성칠의 손을 굳게 잡고 “형님, 그간 집식구들이 얼마나 찾았는지 아오?” 하고 눈물이 글썽해 했다. 성칠은 바삐 “함흥촌으로 내려가자. 임무 집행중이라 빨리 부모형제를 만나야겠어.” 하고 산비탈로 발걸음을 뗐다. 이때 천지꽃산과 저쪽 소서구 서쪽 산등성이에서 총을 둘러멘 청년 일여덟이 이쪽으로 다가왔다. 기준은 “저 사람들은 누구요?” 하고 물었다. “유격대원들이야.” 그 청년들은 이쪽으로 다가와 반갑게 인사했다. 그 속에서 한 청년이 성칠에게 말했다. “김 대장, 아무런 정황도 없습니다. 함흥촌에 내려가도 될 것 같습니다.” 성칠은 그중 튼튼하게 생긴 유격대원을 불렀다. “바위돌이 나와 함께 함흥촌에 내려가고 다른 동무들은 동산과 서산에 나눠가서 보초를 서고 윤번으로 내려 와서 점심을 자시오. 정황이 있으면 알리오.” “옛!” 유격대원들은 서넛씩 나뉘어 천지꽃산과 계수동쪽의 말 무덤 장대에 올라갔다. 성칠은 일가족들과 함께 함흥촌으로 성큼성큼 내려갔다. 기준은 내려가면서 형님에게 “전번에 개산툰으로 가는 길에서 쌀을 탈취하러 온 용천 대장한테서 형님 정황을 들었소. 우린 꼭 멀지 않아 형님이 찾아오리라 믿었소.” 하고 말했다. 성칠도 한숨을 후 내쉬더니 “나도 용천에게서 아버지랑 집식구들이 인삼이 있는 함흥촌에 있다는 걸 들었다. 일본 놈들과 싸우다나니 와 볼 새도 없었다. 이번에 유격대 쌀을 얻으러 나오다나니 겨우 올 수 있게 됐다.” 하고 이야기했다. 천지꽃산의 진달래도 성칠과 온 집안 식구들의 극적인 상봉에 하늘하늘 춤추며 반기고 있었다. 봄바람에 함흥촌의 원시림이 우~ 소리 내며 성칠을 환영하듯이 설레며 춤춘다. 실실이 늘어진 버드나무가지들은 넘실넘실 흐느적이며 반긴다. 성칠은 두 동생 일가의 옹위 속에서 웃새집 육간 집으로 들어갔다. “아버지, 성칠 형님이 왔습구마.” 창준이 집안으로 들어가면서 소리쳤다. “어, 성칠이?” 성칠은 하얀 수염이 더부룩한 아버지가 마루에까지 나오는 모습을 보고 코마루가 시큼해났다. “아버지!” 뒤이어 성희와 하옥도 집안에서 달려 나왔다. 성칠은 태산이 무너지듯 부모 앞에 넙적 엎드려 절을 올렸다. “그간 부모님께서 무사히 계셨습니까? 이제야 찾아온 불효자를 용서해줍소.” 병완은 맨 발 바람으로 마루에서 내려 성칠을 안아 일으켰다. “무사히 살아 있어서 고맙다.” 성희는 맏아들을 끌어안고 눈물을 줄줄 흘리었다. 하옥은 마루에서 눈시울을 적시면서 반겨 맞았다. “여보, 그간 잘 있었소?” 성칠의 문안소리에 하옥은 얼굴을 끄덕였다. 그는 눈귀에 주름살이 지기 시작한 아내 손을 잡아 매만져주면서 “그간 부모를 모시고 고생하였소.” 하고 재차 문안했다. “어서 집으로 들어가자.” 병완의 말에 어른들은 위방에 들어가고 나머지는 정지에 들어갔다. 바위돌은 울바자 밖을 돌면서 보초를 섰다. 병완의 집에는 큰 잔치나 벌어진 것 같았다. 아낙네들이 점심준비를 하느라고 부엌 앞에서 바삐 맴돌았다. 웃새집의 상길이랑 채선이랑 복선이랑은 창준의 부탁대로 성남집의 상순이랑 금옥이랑 바깥에서 뛰놀면서 수상한 사람이 나타나나 살폈다. 위방에서는 성칠과 병완이 그간 서로의 형편을 주고받았다. “소작료랑 얼마나 바칩니까?” 성칠의 물음에 병완은 한숨을 후 내쉬더니 도리머리 질 했다. “저 소서구 어구 토성 안에 장지주네 산다. 장학산 지주는 처음에는 황무지를 개간한 밭에서 난 곡식은 소작료로 2할만 받았다. 그런데 몇 해 지나가지 않아 절반씩 소작료로 가져갔다. 올해 년 말에는 7할씩 걷어갈 예산인 것 같더라.” “어떻게 살겠습니까?” 성칠도 한숨을 내쉬었다. “경상도에서 온 용천 대장이랑 잘 있는 거 같더구나. 우리 마을에서 너를 따라 유격대에 간 칠백이랑 동욱이랑 다 잘 있니?” 병완이 궁금해 하자 성칠은 “예, 모두 백여 명 씩 영솔하는 중대장들입구마.” 하고 속 시원히 대답해주었다. “최구철 사돈어른의 딸이랑 한길수의 집에서 머슴 질 하던 병수랑 은녀랑 모두 잘 있느냐?” 하고 물었다. “예, 모두 항일유격대 골간들입구마.” “유격대 형편은 어떠냐?” 병완의 물음에 성칠은 한숨을 재차 길게 내쉬었다. “어렵게 됐습니다. 의병이 홍범도 장군이 소련으로 가는 바람에 유격대는 동북에서 잠잠해졌습니다. 나머지 의병들은 항일 유격대에 들어온분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일본 놈들이 우리 항일 유격대를 봉쇄하고 대거 소탕하는 작전을 벌리는 바람에 항일유격대의 처지는 아주 간고하게 됐습니다. 이번에도 인삼한테 쌀을 얻으려고 나왔습니다.” “그래? 그럼 우리 집 쌀도 얼마간 가져가라.” 병완이 서슴없이 말하자 성칠은 “고맙습니다, 아버지. 그런데 유격대에 보내고 집에서는 어떻게 보리 고개를 넘기겠습니까?” 하고 근심했다. “우리가 세투리랑 캐먹더라도 수림 속에서 일본 놈들과 싸우면서 고생하는 유격대원들이 굶게 해선 안 되지.” 병완의 말에 창준이도 동을 달았다. “옳소. 형님, 좁쌀 둬 마대 가져가오.” 기준이도 나섰다. “우리 집에서도 둬 마대 내놓지.” 성칠은 창준과 기준의 손을 잡아주면서 “고맙다.” 하고 감개무량해했다. 쌀 네 마대를 실은 후 창준은 사랑 간에서 목수도구상자를 가져다 쌀 수레에 실었다. 기준은 의아해 “건 어째?” 하고 물었다. 창준은 “산에 들어가다가 가대기감이나 보이면 베 오자고 그래.” 하고 대답했다. 기준은 머리를 끄덕였다. “옳소. 남들도 가대기감 베러 간 줄로 알게고.” 이때 성희가 흰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올리면서 위방에 들어와 성칠의 손을 잡고 울먹거리면서 말했다. “이것아, 그래 우린 언제 명천으로 돌아가? 너희들이 빨리 일본 놈들을 고향에서 몰아내야제. 글캉 우리도 조선에 되돌아갈 게 아니냐?” 성칠은 눈물을 머금고 솔직하게 말했다. “언제 돌아가겠습니까? 일본 놈들이 지금 조선을 통 채로 먹어치운 후 조선을 발판으로 삼아 중국 대륙까지 먹어치우려고 미쳐 날뜁니다. 동북에만 해도 이젠 몇 십 만 대군을 보냈습니다. 이제 조선 청년들까지 강제징병해 관동군에 끌어옵니다. 아마 멀지 않아 관동군은 백만 대군이 된답니다. 항일 투쟁은 아마 몇 십 년 갈지도 모릅니다. 언제 고향 명천에 돌아가겠는지 모릅니다.” 성희는 억이 막혀했다. “그럼 이제도 몇 십 년을 여기 간도에서 살아야 된다는기여? 난 눈만 감으면 충청남도에 있는 서천군 한산면이 떠올라. 고향에 묻힌 본가 집 부모와 네 외삼촌이랑 명호랑 조카들이 떠오른다니께. 있자 노. 오라버니랑 명호하구 손자 병수를 데리고 우리 간도에 온 후 명천에 왔다가 우릴 만나지도 못하고 집으로 돌아갔어. 얼마나 섭섭했겠니?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 네 외삼촌과 외사촌동생들을 보지 못할 거 같애.” 성칠은 신심에 찬 어조로 말했다. “우리 항일 유격대는 꼭 일본 놈들을 간도와 조선에서 몰아낼 수 있습니다. 지금 동만 뿐만 아니라 북만, 남만, 어디나 다 항일유격대가 일떠 났습니다.” 성희는 “일본 놈들을 몰아내고 고향에 돌아가는 날을 보았으면 얼마나 좋겠나?” 하고 한숨을 호~ 내쉬었다. 성희는 뒤이어 “너희들 유격대는 고향 명천에까지 나간 적이 있느냐?” 하고 물었다. 성칠은 “이전에 상호를 구하는 작전 때 동북에 들어온 후 나가지 못했습니다. 지금 항일투쟁은 제일 어려운 고비에 들어섰습니다. 일본 놈들의 봉쇄가 어찌나 물샐 틈도 없는지 간도에서두 발을 붙이기 어렵습니다. 유격대는 어떤 때 둬 날 씩 굶을 때도 있습니다.” 하고 어려운 사정을 털어놓았다. 이때 하옥이가 점심상을 들고 들어와 숟가락과 저를 올렸다. “집에 왔을 때나 유격대들을 데려다 조밥이라도 많이 대접해라.” 성희의 말에 성칠은 허기증부터 났다. 그는 하옥과 조용히 이야기를 나눴으면 좋겠는데 부모형제와 이야기를 나누다나니 말할 새 없었다. 창준의 처와 상훈의 처가 점심상을 차려 올리자 모두 숟가락을 들었다. 성칠은 바깥에서 보초를 서는 바위돌을 불러다 점심식사를 같이 했다. 성칠과 바우돌은 조밥 한 그릇을 게눈 감추듯이 먹어버렸다. 성칠은 하옥이 떠온 냉수를 아버지께 드리고 상훈의 처가 떠온 물 사발을 받아 꿀꺽꿀꺽 마시며 바깥을 나가는 하옥을 보았다. 성칠은 대야를 들고 김치 움으로 들어가는 하옥을 보고 바깥으로 나가면서 바위돌에게 눈짓했다. 바위돌이 바깥으로 따라 나오자 나지막한 목소리로 “동산과 서산에서 보초를 서는 동무들을 불러다 점심을 들게 하오.”라고 분부했다. “옛! 김 대장!” 바위돌이 떠나간 후 성칠은 서성거리다가 김치 움 덮개가 열린 것을 보자 피뜩 김치 움에 들어가 하옥을 조용히 만나보고 싶은 충동을 억제할 수 없었다. 그는 사위를 둘러보다가 시꺼먼 김치 움으로 슬쩍 뛰어들어간 후 김치움 덮개를 안에서 닫아버렸다. “어마나! 놀라라. 난 또 누구라고?” 성칠은 하옥의 입에 식지를 대고 나직이 쏘곤거렸다. “여보, 우리 오랜만이구만.” 성칠은 하옥을 와락 끌어안았다. 하옥도 성칠의 가슴을 주먹으로 두드리다가 목을 꼭 껴안았다. 이윽고 격정에 넘치는 거친 숨소리와 간간한 신음소리가 어둠속에 잠긴 김치 움 안에서 격조높이 들리었다. 하옥과 잠간 사이에 운우지정을 나눈 성칠은 하옥을 꽉 껴안고 놓지 않았다. “난 인차 산으로 들어가야 하오.” “예? 며칠 쉬고 가요.” “아니오. 산에서 며칠씩 굶은 유격대원들이 쌀을 기다리고 있소.” “그럼 언제 또 와요?” “기약할 수 없구먼.” “그럼 나도 산에 들어가겠어요. 안 돼요?” “유격대는 고정된 지점이 없이 이동작전하기에 따라 다니지 못하오. 부모를 모시면서 집에 있소.” “난 그럼 과부 아닌 과부로 한뉘평생 살아야 합니까?” “일본 놈들을 이 땅에서 몰아내구 내 찾아올게.” 김치 움에서는 흑흑 흐느끼는 소리가 간간히 들리었다. 뒤이어 김치 움 덮개가 열리고 김치를 한대야 든 성칠이 나왔다. 뒤이어 성칠의 억센 손을 잡고 얼굴이 빨갛게 상기된 하옥이가 치마폭을 걷어안고 올라왔다. 그들을 보고 성희와 창준의 처 김수월은 눈치를 채고 미소를 지으며 눈길을 마주쳤다. 이윽고 유격대원들이 서넛씩 번갈아 와서 점심상에 마주 앉았다. 그들은 오랜만에 조밥에 보글보글 끓는 된장국을 보고 숟가락을 들고 배불리 맛나게 먹었다. 그때 인삼이 와서 성칠과 바깥에서 뭐라고 토론했다. 성칠은 집에 들어와 부모를 보고 나란히 앉으라고 하더니 큰 절을 꾸벅 올리었다. “아버지, 엄마, 난 산으로 쌀을 가지고 산에 가야 하겠습니다. 다시 올 때까지 무사히 계십시요.” 창준은 “칠팔 년 만에 만나자마자 이별이라니 될 말이오?” 하고 중얼거렸다. 기준은 “우리 쌀이랑 수레에 실어다 유격대에까지 가져가면 어떻소?” 하고 뜻밖의 말을 했다. 성칠은 믿음에 찬 눈길로 기준을 보더니 잠간 궁리하더니 “좋긴 한데. 목표가 너무 커서 될까? 농망계절인데 밭갈이는 어쩌고?” 하고 근심했다. 기준은 “상순도 이젠 밭갈이를 해도 되오. 내 수레에 실어다주고 와서 밭갈이를 해두 되오.” 하고 고집했다. 성칠은 인삼을 돌아보면서 “이렇게 하기요. 유격대원들이 며칠씩 굶어서 원래 쌀을 지고 갈 거 같지 못한데 잘 됐소.” 하고 말했다. 인삼은 믿음에 차 창준과 기준의 어깨를 다독여주었다. 창준과 기준은 고방에서 좁쌀 두마대나 내다 수레에 실었다. 누가 볼까봐 유격대원들은 몇 백 미터 간격을 두고 몽땅 산으로 올라가 사처에 흩어져 경계를 섰다. 이때 성희가 집안에서 달려 나오며 성칠을 붙잡으려는 듯이 오른손을 마구 휘저었다. “성칠아, 이제 가면 언제 오겠느냐?” 성칠은 백발이 성성한 부모를 두고 막상 떠나자고 하니 코마루가 시큼해났다. “약해지지 마라. 나라를 되찾는 일이 그렇게 쉽겠냐?” 옆에서 병완이 무겁게 말하면서 성칠의 어깨를 다독였다. 그러고 나서 성희에게 말했다. “여보, 생사를 기약할 수 없는 산으로 떠나는 길에 울지 마오.” 성희는 성칠의 손을 잡아 매만지면서 뜨거운 이별의 눈물을 줄줄 흘리었다. “에이고, 제 자식 하나 낳아서 기르지 못하고. 쯧쯧쯧, 내 그게 안타까워하는 말입니다.” 성칠은 머리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더니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었다. “어머니, 이젠 집을 알았으니까 종종 찾아 오겠습구마. 일본 놈들을 몰아내고 조선과 간도가 해방되는 날은 꼭 돌아올 겁니다. 그때 고향에 돌아가 부모를 잘 모시구 형제들과 함께 행복하게 살깁소.” “언제 그런 날이 있겠니?" 성칠은 눈물이 낭자하고 주름살이 조글조글한 얼굴에 잠시나마 반가운 표정을 짓는 어머니 손을 잡고 힘 있게 말했다. “광복의 그 날은 꼭 올 겁니다.” 성칠은 부모형제에게 군례를 척 붙이고 성큼성큼 울바자바깥으로 나갔다. 하얀 머리를 흩날리며 바래는 부모를 피뜩 되돌아보고 성칠은 팔소매로 눈시울을 닦았다. 하옥은 머리를 숙이고 어깨를 들먹이며 울바자 바깥으로 따라 나갔다. 성칠은 강한 눈빛을 하옥에게 주고 나서 인삼이네 집 쪽으로 걸어갔다. 창준은 수레를 몰고 토성안집에 가서 인삼이네 쌀 세 마대를 더 실었다. 인삼은 성칠을 한쪽으로 불러가더니 “전번에 용천 대장이랑 탈취한 쌀은 가난한 백성들과 쌀 수레 몰이꾼들에게 거의 다 나눠주고 얼마 남은 게 없소.” 하고 회보했다. 성칠은 머리를 끄덕이면서 인삼에게 뭐라고 귀속 말로 지시를 내렸다. 이윽고 창준은 쌀 수레를 몰고 계수동쪽 동산으로 올라갔다. 영길이 너무 가파로워 창준이가 앞에서 쌀 수레를 몰고 뒤에서 성칠과 기준이가 힘껏 떠밀면서 삐꺼덕삐꺼덕 힘겹게 올라갔다. 쌀 수레는 사처에 흩어져 경계를 서는 유격대원들의 옹위를 받으면서 동산 마루 길에 올라섰다. 쌀 수레가 사라질 때까지 흩날리는 머리를 훔치며 눈 바램 하던 성희는 주름살이 조글조글한 두 볼에 뜨거운 눈물을 흘리었다. “이 놈아, 이렇게 떠나가면 언제 또 만나? 엉?” 시어머니를 부축해 눈 바램 하던 하옥은 흑흑 흐느끼며 어깨를 세차게 들먹였다. 병완은 허리를 펴면서 땅이 꺼지게 한숨을 후~ 내쉬었다. 집 뒤에서 버드나무들이 무섭게 봄바람에 몸부림쳤다. 하늘에 꺼먼 매지구름이 흩날려오더니 진눈깨비가 풀 풀 흩날려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2. 항일의사들 나무가 꽉 박아 선 수림이 술렁이면서 항일 유격대원들을 맞았다. 창준과 기준은 쌀 수레를 몰고 나무숲이 우거진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면서 보니 아직도 잔설이 여기저기 누워 있었다. 성칠은 삐꺼덕삐꺼덕 힘겹게 움직여나가는 수레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그간 고향 명천에서 있은 일을 동생들에게서 들었다. “아버지와 너희들이 우리 유격대 한 개 대대도 하지 못할 엄청난 일을 했구나. 일본 놈들의 경찰국과 군용다리를 수태 무너지게 만들다니. 참, 대단해.” 성칠은 한숨을 후~ 길게 내쉬고 뒷말을 이었다. “관준 큰아버지가 교수형을 당하다니? 정말 일본 놈들과 어떻게 피 값을 받아내면 다 받아내겠니? 상호와 은희도 그 놈들의 손에 비참하게 죽었지. 지금도 우리 조선과 간도에서 그 얼마나 많은 형제들이 악귀 같은 일본 놈들에게 죽어 가는지 모른다.” 기준은 그간 용정에서 보고 들은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용정통감부 간도파출소 놈들은 지하고문실에서 숱한 무고한 백성들을 항일유격대라는 죄명을 씌워서 살해한다오. 전번에 원삼이두 쌀 수레 사건이 생긴 후에 지하고문실에서 죽을 번했소. 그래서 우리 함께 형님을 찾아가 유격대에 들어가려고 했소.” 이때 수레가 웅덩이에 털렁 빠졌다. 창준이 앞에서 소를 몰고 뒤에서 성칠과 기준이 어깨를 들이대고 수레를 힘껏 떠밀었다. 그제야 쌀 수레는 겨우 웅덩이에서 빠져나왔다. 성칠은 허리를 펴면서 서리 내리기 시작한 머리를 쓰다듬어 올렸다. “후~ 나도 이젠 나이를 먹었구나. 너희들도 이젠 총을 들고 일본 놈들과 싸우기는 힘들 거야. 농사나 지으면서 부모를 잘 모시고 유격대에 쌀을 가져다주는 것도 역시 항일투쟁을 하는 것과 같다. 항일투쟁도 중요하지만 부모를 잘 모시고 효성을 하는 것도 중요하다. 옛날부터 사람들은 충신은 효자가 아니라고 했지만 난 동의하지 않는다. 항일투쟁도 하고 효성도 하면 좋지 않느냐? 내가 유격대에서 총을 쥐고 너희들 몫까지 일본 놈들과 싸우고 너희들은 후방에서 농사를 지어 유격대를 지원하면서 부모를 잘 모시면 일거양득이 아니겠냐?” 성칠의 일리 있는 말에 창준과 기준은 머리를 끄덕였다. 창준과 기준은 성칠에게서 항일투쟁의 어려운 형편과 많은 놀라운 이야기를 듣게 됐다. “일본 놈들을 이 땅에서 없애버리려고 수많은 애국의사들이 목숨을 내걸고 싸우다가 장렬히 희생됐다. 20여 년 전에 애국지사 안중근은 할빈역에서 조선 총독 이또히로부미를 저격해 죽여치운 후 려순 감옥에서 장렬히 순국했다. 그는 사전에 죽을 각오를 한 혈서를 써서 동지들과 가족에게 남겼다. 그의 비할 데 없는 애국충정이 담긴 혈서는 당시 일본 놈들의 간담을 써늘케 만들었고 항일의병들의 사기를 더없이 고무했다. 몇 해 전 리봉창 의사는 일본 도꾜에서 일본 천황 히로히도를 작탄으로 폭사시키려고 하였다.” “양?” 기준은 너무 놀라 걸음까지 우뚝 멈추면서 두 눈이 동그래졌다. 앞에서 수레를 몰던 창준도 소를 멈춰 세우고 돌아섰다. “그래 일본 천황을 죽였소?” 성칠은 머리를 가로저었다. “죽이진 못했어. 리봉창 의사는 참말 대단한 일을 했다. 그는 중국 상해를 거쳐 배를 타고 일본까지 건너갔댔다. 그는 몸에 조직에서 준 작탄을 품은 채 도꾜에서 일본천황의 황궁 사꾸라다 대문에까지 찾아갔지. 그때 일본 천황 놈과 괴뢰만주국 위 황제로 될 부의란 놈이 탄 차가 황궁 사꾸라 대문에서 나왔지. 그 차에 리봉창 의사는 폭탄을 던졌다. ‘꽝!’ 요란한 소리와 함께 작탄이 차 앞에서 폭발하였단다. 일본 천황 놈과 부의 놈이 탄 차는 해뜩 번졌지. 그 바람에 두 놈은 차와 함께 멀리 뿌리워 나가 뒹굴었단다. 천황 놈을 죽이지는 못했지만 중상을 입혔지. 리봉창 의사는 그 자리에서 헌병 놈들한테 체포됐고 후에 1932년 10월 10일에 일본에서 교살 당했어.” 성칠은 뜨거운 눈물을 흘리더니 팔소매로 눈시울을 닦았다. 창준과 기준도 한숨을 길게 내쉬며 장탄식했다. “대단한 분이 아쉽게 희생됐구먼. 쯧쯧.” 성칠은 앞으로 나가는 쌀 수레를 따라가면서 수림 속을 두루 살피였다. 쌀 수레 전후좌우로 유격대원 여섯이 한 이, 삼 리 씩 떨어져 경계하면서 앞으로 나가기에 별로 큰 일은 없었다. “저기 저 구분 나무로 가대기를 만들면 좋겠소.” 창준도 기준이가 가리키는 길옆의 비술나무를 보고 “그게 구불렁한 게 진짜 가대기감이구나.” 하고 동을 달았다. 기준은 쌀 수레 위에 얹어놓은 도끼와 톱을 내리워가지고 구불렁한 나무쪽으로 다가갔다. 창준은 “야, 언제 그걸 베가지구 가겠니?” 하고 말리면서 성칠의 눈치를 보는 것이었다. 성칠은 “괜찮아. 소도 좀 쉬울 겸 가대기감두 베가지고 가라.” 하고 말하더니 기준을 따라갔다. 그래도 창준은 “소가 쌀 수레도 끌기 힘들어하는데 어떻게 가대기감까지 싣구 가겠니?” 하고 말리였다. 기준은 톱질을 슬슬 하면서 “베 뒀다가 돌아갈 때 싣고 가기요.” 하고 말했다. 창준은 수레를 멈춰 세우고 기준한테 다가갔다. 성칠은 산속 수림 속에서 산새들이 지저귀는 소리와 톱질하는 소리 밖에 들리지 않자 주위를 살펴보면서 계속 애국지사들의 이야기를 했다. “상해에서도 영웅이 나타났지. 윤봉길 항일의사는 상해 홍구공원에서 대회장 주석 대 일본 두목 놈들에게 작탄을 던져 숱한 놈들을 폭사해버렸어.” “윤봉길?” 기준이 놀라 묻자 성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애국충정으로 온 몸을 불사르던 윤봉길 의사지. ‘9,18’사변 후 일본 놈들은 동북을 다 감정하고서도 전 중국을 강점하려는 야욕을 채우려고 1932년 1월 28일부터 군함 60척과 비행기 100여대에 10만 대군으로 상해를 들이치면서 미쳐 날뛰었어. 장개석의 파괴로 하여 일본 놈들은 석달만에 상해를 점령했다. 일본 놈들은 그해 4월 29일에 상해시 홍구공원에서 상해점령경축대회를 열게 되였지.” 기준은 톱질하다가 뒤돌아보면서 “형님, 상해라는 게 어데 있소? 봉천이나 신경은 들었는데 상해는 듣다 첫 소리오.” 하고 물었다. 성칠은 “나도 가본 적이 없다. 그런데 여기서도 서남쪽으로 신경을 거쳐 산해관을 넘어서도 몇 천 리는 가야 되는 모양이더라.” 하고 뒷말을 이었다. “상해에는 한국 임시정부가 있었다. 윤봉길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총리 김구 선생 수하들이 세운 주밀한 계획에 따라 경축대회장 주석단을 폭파해 상해점령 일본 괴수들을 폭사시킬 계획을 세웠다.” 성급한 기준은 “그래 이번에도 천황처럼 폭사하지 못했소?” 성칠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통쾌하게 폭사시켰지. 윤봉길 의사는 조직에서 제공한 보온병폭탄을 들고 경축대회 주석 대 밑에 접근했다. 그가 경축대회 주석단에 던진 보온병폭탄이 폭발하면서 일본 놈 괴수 일곱 놈이 몽땅 쓰러졌단다.” 그러자 창준과 기준은 이구동성으로 “정말 시원한 노릇을 했구나.” 하고 속이 시원해했다. 성칠은 계속 뒷말을 이었다. “상해거주일본민단 위원장 가와하다 놈은 가슴과 배때기에 폭탄파편을 맞고 그날 밤을 넘기지 못하고 즉살하였단다.” “에이, 시원해라!” 기준과 창준은 성칠의 말에 반주라도 하는 듯이 잘코사니를 불렀다. “상해점령 총사령관 시로가와란 놈도 한 스무날 후에 상처에 독을 타 죽었단다.” “잘 썩어졌군!” “일본해군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란 놈은 그때 윤봉길 의사가 던진 작탄에 왼쪽눈깔을 잃어버리고 애꾸눈이 되였단다.” “아버지한테 골 받이를 하다가 눈깔을 잃어버린 한길수 놈하구 심통하게 됐구먼!” “하하하!” “상해주재 일본공사 시게미쯔는 오른쪽다리가 날아나 절름발이 됐단다. 상해 총영사 무라이는 왼쪽다리에 부상을 입구 상해거류일본민단 서기장 도모노는 오른팔에 중상을 입어 병신이 되구말았단다.” “에이, 정말 통쾌하다.” “하하하!” 창준과 기준은 통쾌하게 웃더니 번갈아 톱질하며 뒤를 돌아보면서 “그래 윤봉길 의사는 어떻게 됐소?” 하고 물었다. 성칠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수라장이 된 경축대회장에서 당장 일본 놈들에게 체포됐단다. 일본에 끌려간 윤봉길의사는 그해 12월 19일에 이사가와현에 있는 가나자와시에서 총살됐단다. 그는 일본 놈들에게 체포돼서나 총살당하기 직전에도 일본 놈들의 죄행을 질책하면서 통쾌한 웃음을 웃어 조선애국지사들의 죽음도 모르는 영웅적 기개를 보여주었단다.” 애국지사들을 추모하듯이 구름이 뭉게뭉게 피여 오르며 나무 끝 초리를 씻어 올리고 있었다. 성칠은 말을 마치자 몇 십 길이나 되는 장백의 미인송과 그 사이로 보이는 수림 속의 흐린 하늘을 쳐다보면서 한숨을 후~ 내쉬었다. 이때 바위돌이 뛰어왔다. “김 대장, 산에서 사람들이 왔습니다.” “그래?” 그들이 머리를 들어 앞을 바라보니 수림 속으로부터 일여덟 사람이 이쪽으로 걸어왔다. 제일 앞에서 오던 여자가 소리쳤다. “김 대장, 수고했어요.” “진달래 중대장, 여기까지 다 마중 나왔소?” 진달래중가 다가왔다. “예, 그래요. 용천 대장이랑 지금 쌀을 애타게 기다려요.” 그는 쌀 수레에 다가오다가 창준과 기준을 보고 놀랐다. “아니, 경인오빠네 가시아버님들이 아닌가요?” 창준이도 기준이도 자기 눈을 의심할 정도로 놀랐다. “아니, 사돈 새 애기구먼. 그래 최구철 사돈어른은 잘 계시오.” 진달래는 철색얼굴에 수줍음을 띄우면서 머리를 다소곳이 숙이며 그들의 눈길을 피해 쌀 마대에 눈길을 돌렸다. “예, 언제 때 새기를 아직도 새 애기래요?” 진달래는 혼자말로 중얼거리더니 황급히 인사말을 받았다. “예, 저 아버님도 유격대 뒤 일을 하면서 잘 있어요.” 성칠은 중얼거리면서 진달래와 이상한 눈길을 마주쳤다. “정말 오래간만이구먼요.” 진달래는 창준과 기준에게 허리 굽히면서 반갑게 인사했다. 창준과 기준도 반갑게 답례했다. 진달래는 쌀 마대를 매만지면서 “바위돌한테서 들었어요. 이 많은 쌀을 보내줘 참말 고마워요.” 하고 인사했다. 성칠은 진달래와 한쪽 편에 가서 뭐라고 나직이 말을 주고받더니 이쪽으로 다가왔다. “너희들은 농망 계절에 바쁘겠는데 이젠 집으로 돌아가라. 우리 유격대원들이 쌀 마대를 나눠지고 가면 돼.” “양?” 기준은 성칠과 진달래를 번갈아보면서 말했다. “여기까지 온바하곤 유격대주둔지에 통나무집이라도 져 주자고 했는데 이러오?” 창준도 동을 달았다. “형님, 한 사나흘 늦어가도 애들이 있으니까 괜찮소. 유격대 주둔지에 가보기오. 그래야 후에 무슨 일이 있어도 형님네 유격대를 찾아가지.” 성칠은 머리를 숙이고 궁리하더니 머리를 들었다. “우리는 항상 이동작전하기에 찾지 못한다. 우리 종종 인삼이네하구 집 형편을 알아 볼 테니까. 일단 일이 있으면 인삼과 말해라.” 창준은 기준을 마주보면서 “그럼 가대기감이나 더 베가지고 돌아갈까?” 하고 제의했다. “그게 좋겠소.” 그러나 성칠은 동의하지 않았다. “이젠 해도 넘어갔는데 집에서 부모들이 기다리겠다.” 기준은 하는 수 없이 한숨을 후 내쉬면서 성칠을 꽉 껴안으면서 석별의 정을 나누었다. “형님, 밸 같았으면 나두 유격대에 들어와 총을 쥐고 싸우고 싶소. 끼무라나 한길수 같은 놈들을 쏴죽였으면 얼마나 좋겠소. 어떻게 중국 지주들의 눈치밥을 먹으면서 한뉘 농사를 짓고 살겠소. 조선 지주나 중국 지주 놈들도 다 새까맣소. 우린 장지주네 소작료를 7할이나 내라는 바람에 이젠 조개덕의 조지주네 황무지를 새로 일궈야 살 거 같소.” “해 넘어 갔기에 길게 말할 새 없구나. 우리가 중국 공산당을 따라 혁명해서 일본 놈을 몰아내구 지주를 청산하는 날이면 잘 살 수 있을 거야.” 성칠의 말에 기준은 눈물을 머금고 맏형님을 바라보면서 물었다. “뭐? 중국 공산당이라고 했소?” 성칠은 머리를 끄덕였다. “그래, 우린 중국공산당의 영도아래 일본 놈들과 싸워야 해.” 창준과 기준은 성칠의 손을 굳게 잡고 흔들면서 “우린 형님의 말대로 하겠소.” 하고 힘 있게 말했다. 진달래도 다가와 이상하게 아까처럼 부끄러워하는 표정으로 작별인사를 했다. “평안무사하게 보내세요.” “우리를 대신해 일본 놈들을 이 땅에서 몽땅 몰아내주오.” 유격대원들도 일일이 창준과 기준의 손을 잡고 인사한 후 수레 위에서 쌀 마대 쌀을 나눠 등에 지고 떠날 준비를 서둘렀다. 진달래가 쌀을 지지 않은 유격대원 둘에게 분부했다. “저 두 분을 집에까지 호송하고 돌아오세요.” “예, 최 중대장!” 기병 둘은 군례를 척 붙였다. “필요 없소. 이제 우리를 집에 데려 가고 언제 돌아오겠소.” 그러나 성칠도 호송하라고 고집했다. 그리하여 눈썹달이 걸린 봄밤에 창준과 기준은 성칠과 갈라져 고향으로 돌아가는 산길에 들어섰다. 그들의 등 뒤에서는 성칠과 진달래가 오래도록 바래며 서 있었다. 드디어 수레가 떠나가면서 삐꺼덕거리는 소리가 검어 칙칙하고 적막한 수림 속에서 들려왔다. 3. 토성안집 주인 말이 봄이지 아직 꽃샘추위가 엷은 옷을 뚫고 온몸이 오싹하게 스며들었다. 소서구 어구에 장지주네 높다란 토성이 똬리를 틀고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기준은 머리를 숙이면서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었다. (에이고, 어떻게 이런 골 안에서 한뉘 장지주네 눈치나 보면서 농사짓고 살아? 인삼과 유격대 정황을 잘 알아보고 유격대에 들어가는 게 옳은 것 같은데.) 그는 성칠 형님이 떠나가면서 하던 부탁을 생각하자 한숨을 후~ 내쉬었다. 기준은 어둠을 더듬어 밟으며 집으로 올라가면서 중얼거렸다. “내일 날이 밝으면 인삼을 찾아가야지.” 이튿날 이른 아침에 기준은 먼저 웃새집에 들리어 위방의 부모에게 인사를 드렸다. “성칠 형님을 보내고 얼마나 섭섭하겠습둥?” 그러자 병완은 대수롭잖게 말했다. “부모한테 다리를 묶여서야 어찌 나라를 구하겠느냐? 황차 너희들이 옆에 있는데.” 성희는 김이 빠진 공처럼 맥없이 한숨을 호 내쉬면서 눈물부터 하염없이 흘리었다. “언제 일본 놈들을 몰아내구 고향에 돌아가겠느냐?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 일본 놈들을 다 몰아낼까?” 기준은 어머니 손을 잡고 신심에 차 말했다. “성칠 형님의 말처럼 중국 공산당의 영도아래 일본 놈들을 몽땅 몰아내면 고향으로 돌아갈 겁니다.” 성희는 기준의 손을 꼭 잡으면서 “그럼 얼마나 좋겠니?” 하고 눈을 사르르 감았다. 병완은 두 아들과 함께 토성안집 인삼이네 집으로 찾아갔다. 심부름꾼한테서 병완의 3부자가 온다는 기별을 듣고 인삼은 너부죽한 얼굴에 웃음을 머금고 마루 아래로 내려오면서 인사했다. “편안 무사합니까?” 병완은 인삼의 손을 잡고 “자네가 우리 집안 집인 줄을 몰랐네. 이제야 알고 지내 미안하네.” 하고 말했다. “저도 유격대 일을 하다나니 신분을 공개할 수 없어 옆에서 지켜보면서도 인사가 늦어 미안합니다.” 인삼은 사람 좋게 인사하고 나서 “들어가서 천천히 이야기합시다.” 하고 위방으로 안내했다. 병완은 널찍한 위방에 올라가 자리에 앉자 인삼을 보고 “족보부터 알아보는 게 어떻소?” 하고 물었다. 김인삼은 “좋습니다. 그런데 족보 없어 어떻게 따지겠습니까?” 하고 되물었다. 병완은 하얀 턱수염을 슬슬 만지더니 “건 아는 방법이 있소. 우리 영월 김씨네 입북시조 김려생 할아버지 대부터 몇 대 손인가 알면 벌수와 촌수가 나오오.” 하고 대답했다. 그러자 인삼은 반색하면서 “옛날에 부모에게서 들으니 난 입북시조 려생 할아버지의 15세 손이라고 합디다.” 라고 진지하게 말했다. “오, 그럼 영월 김씨네 둘째집이라고 하던가? 큰집이라던가?” 병완의 물음에 인삼은 “큰집 파라고 합디다.” 하고 대답했다. 병완은 머리를 끄덕이더니 “난 려생 할아버지의 14세 손이니 자넨 조카벌이구먼. 얘들에겐 형제벌이 되고.” 하고 껄껄 웃었다. 그 말에 인삼은 일어나면서 “큰집 조카 큰아버지한테 인사 올립니다.” 하고 큰절을 올렸다. 병완도 앉은자리에서 허리를 앞으로 굽히고 두 손을 구들바닥에 대면서 인사를 받았다. 인삼은 뒤이어 “큰집 형님들께도 인사를 드리기요.” 하고 절을 하려고 서둘렀다. 그러자 창준은 황망히 인삼을 붙들어 앉히면서 이구동성으로 “이러지 마오. 나이가 별로 차이 없는데.” 하고 말리였다. 병완도 인삼을 붙들어 앉히면서 “형제간이니까 이후에 허물없이 보내오.”라고 말했다. 인삼은 자리에 앉으면서 병완에게 “큰아버지, 촌수로는 얼마나 됩둥?” 하고 물었다. 병완은 한참 손가락을 폈다 굽혔다하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려생 할아버지 대부터 7세 손대에 큰집의 김남중, 둘째집의 김남윤, 우리 셋째집의 김남온 삼형제 할아버지께서 계셨네. 그러니까 자넨 큰집 후손인데 내게 17촌 조카 되고. 얘들과는 18촌 형제간이 되네.” 김인삼과 창준이네 형제는 모두 머리를 끄덕였다. “그럼 저 아래사랑집 김석철 영감과 김석은 영감은 내게 어떻게 됩니까?” 병완은 “석철은 내 육촌동생이 디니까 자네에겐 역시 18촌 조부벌이 되고 그 집 보준이나 학준은 어린애들이지만 자네에겐 19촌 숙이 되네.” 하고 알려주었다. 인삼은 머리를 끄덕이면서 “그 집은 어째 벌수가 높습니까?” 하고 의아해 했다. 병완은 곰방대를 길게 빨았다가 후 연기를 내보냈다. “우리 할아버지가 맏이고 그 집 할아버진 제일 작은할아버지여서 그렇소. 큰집은 대수가 빨리 내려 가다나니 벌수가 낮고 작은집은 대수가 늦게 내려 가다나니 벌수가 높은 거네.” 모두들 머리를 끄덕였다. 인삼은 병완을 보고 “집에 족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친척을 봐도 무슨 벌 몇 촌 되는지 알아야 합지.” 하고 말했다. 병완은 머리를 끄덕이더니 무겁게 입을 열었다. “새 족보를 만들어야 하오. 사람이 살자면 자기 뿌리야 알아야 하지. 조선에서 뿔뿔이 흩어져서 살 길을 찾아 간도로 일본으로 가다나니 이후에 우리 후대들이 자기 조상이 누군지도 모르겠소. 이후에는 친척도 알아보지 못하고 통혼하는 망신도 하겠소.” 창준은 옆에서 듣다가 “이전에 조선에서 물려받은 족보가 있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다. “있지. 집안 집 후대들을 다 써넣어야 후대들이 보지.” 병완의 말에 모두 머리를 끄덕였다. 병완은 곰방대를 붙여 물더니 담배연기를 길게 빨아 후 내뿜었다. “큰집 병권형님네 집에 족부가 있다. 거기에 후대들을 일일이 적어 넣으면 새 족보로 되겠는데 말이다. 문중전두 우리 쓴 걸 다 갚았으니 그 돈으로 족보나 만들면 되겠는데. 나서는 사람이 있어야 이 일도 될 수 있다. 이전에는 조선에서 살 때는 집안 집을 일일이 돌아다니면서 남자애를 낳으면 적어서 족보에 붓으로 올리곤 했다.” 그 말에 인삼은 “작은할아버지 문장으로 나서서 만듭니다. 우리 옆에서 도와줍지.” 하고 덧붙였다. “그래 볼가? 이제 큰집 조카 관준이 오면 작은집 석철 삼촌과 석은 삼촌과 토론해서 이 일을 착수해야겠어.” 기준은 “좋기는 문필이 있는 큰집 큰손자 형내나 시켜서 집집이 돌아다니면서 후대들을 적어오게 하면 좋을 거 같습꾸마.” 하고 동을 달았다. “그래지.” 집안 집 어른 병완은 집안 집 새 족보를 만드는 중대한 일을 그 자리에서 결정지었다. 인삼은 창준과 기준에게 “삼촌네는 맨 한전만 붙여서야 어찌 배불리 먹고 유격대를 지원하겠소. 패용천산 앞에 조지주네 밭에 논을 푸오. 논에 벼농사를 하면 산량이 높을 거요.” 하고 귀띔해 주었다. 창준은 “거 좋은 기별이구만. 우리 벼농사를 해보지.” 하고 인차 호응했다. 기준은 “벼농사를 어떻게 짓는지 몰라도 괜찮소?” 하고 인삼을 쳐다보았다. 인삼은 “내 우리 집 사람들을 보내 도와줄게.” 하고 대답했다. 그리하여 창준과 기준은 패용천산 앞에 논을 풀고 벼농사를 짓기로 했다. 병완은 인삼에게 그간 궁금한 것을 물었다. “인삼이, 유격대 얘기나 들려주게나.” 인삼은 한숨을 후 내쉬더니 이야기를 시작했다. “집안 집 어른들이니까 얘기합니다. 절대 마을에 나가 얘기하지 맙소.” 창준은 바로 앉으면서 “그러지 않고. 성칠 형님이랑 유격대들의 그림자 말도 하지 않겠소.” 하고 다짐이나 하는 듯이 입을 꾹 다물어버렸다. 그제야 인삼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일본 놈들은 1923년에 일본에서 관동대지진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지진에 도꾜 시내에 숱한 불이 달린 걸 조선 사람들이 불을 질렀다고 숱한 무고한 조선 사람들을 잔혹하게 살해하였습니다.” 기준은 “일본 놈들은 원래 시비 없는 놈들이오.” 하고 욕했다. 인삼은 머리를 끄덕이고 나서 뒤 말을 이었다. “일본 놈들은 숱한 구실을 만들어가지고 만주국을 점령했습니다. 지금 우리 유격대는 형편없이 어렵게 됐습니다. 일본 놈들은 우리 유격대하구 조선백성들의 연계를 막으려고 이른바 집단부락이라는 걸 만들어가지고 여기저기 널려 사는 우리 조선 개간민들을 강제로 이주시켜서 커다란 마을을 만들고 적송으로 높다란 나무장재를 세워놓고 일본 놈들이 보초를 선단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 유격대에서 쌀을 얻을 곳이 없이 만들고 있습니다. 그래서 유격대는 쌀 고생에 소금고생까지 하다나니 말이 아닙니다. 이렇게 열악한 형편에서도 근거지 수많은 중국 공산당원들과 항일 유격대원들이 일본 놈들과 싸우다가 장렬히 희생됐습니다.” 기준은 머리를 수기였다. “전번에 성철형님한테서 안중근 의사랑 리봉창 의사랑 윤봉길 의사 얘기를 좀 들었소.” 인삼은 머리를 끄덕였다. “나라를 구하기 위해 순국한 그분들 말고 우리 동만에도 중국 공산당 열사들이 아주 많습니다.” “중국 공산당이란 건 뭐요?” 병완의 물음에 인삼은 간단히 알려주었다. “중국 공산당은 우리 백성들을 위해 일본 놈들과 싸우는 중국의 조직입니다.” “조직이라니?” “어떻게 설명할까? 사람들이 뭉친 집단이란 말입니다.” 창준도 호기심에 차 물었다. “그래 중국 공산당은 우리 조선 사람들이 뭉친 집단이냐?” 인삼은 허리를 펴고 가슴을 내밀면서 말했다. “우리 조선에는 우리 조선 사람들이 세운 조선 공산당이 있고 중국에는 최초에 한족들이 일떠세운 중국 공산당이 있소. 중국 공산당에는 지금 한족뿐만 아니라 조선족과 몽골족도 있고 숱한 다른 민족도 있소.” 기준도 궁금해 물었다. “그래 중국 공산당에는 지금 몇 사람이나 있소?” “확실히 얼마 있는지는 몰라도 여기 만주에만 해도 몇 만 명은 될게요.” 병완은 머리를 끄덕였다. “일본 놈들을 쳐 눕히자면 몇 만명, 아니, 몇 십만 되는 군대가 있어야지. 그래도 우린 조선 사람이니까 조선 공산당에 들어가야지 않겠는가?” 그러나 인삼의 대답은 달랐다. “일본 놈들은 우리 조선 사람들뿐만 아니라 중국 사람들이 한 하늘을 쓰고 살지 못할 공동한 원수입니다. 우린 중국에서 혁명하기에 당지에 있는 중국 공산당에 들어 그들의 영도아래 항일투쟁을 하는 게 옳습니다. 황차 조선 공산당은 우리 여기하구 멀리 떨어져 조선 국내에 있는데다가 항일투쟁에서 별로 역할이 없습니다.” 모두들 머리를 끄덕이었다. 이때 심부름꾼이 조밥에 장국이 오른 점심상을 들여왔다. “아니, 얘기나 나누자고 왔는데 점심까지 폐를 끼치게 됐네.” 병완의 말에 인삼은 “한집안 식구들이 무슨 체면의 말씀을 합니까? 잡수면서 얘기합시다.” 하고 음식을 권했다. 기준은 인삼에게 “우리 성칠 형님을 모두 ‘김 대장’, ‘김 대장’ 하던데 몇 사람이나 영솔하는 군관이오?” 하고 물었다. 인삼은 조밥을 한술 떠서 냉수에 말아 입에 떠 넣고 우물거리다가 꿀꺽 넘긴 후 말했다. “한 이백 명 영솔하는 군관이지.” “음, 대단하구나.” 창준은 “거 사돈 새 애기 진달래는 무슨 군관이오?” 하고 물었다. “한 백 명 영솔하는 중대장이오.” 인삼의 말에 기준은 “야, 참 대단하구나. 새 애기가 어쩜 그런 높은 군관이 되였지?” 하고 혀를 끌끌 찼다. 인삼은 “우리 항일 유격대에는 그런 여성군관들이 많습니다.” 하고 자랑스레 말했다. 점심식사가 끝나 양치물까지 마시고난 인삼은 이런 얘기를 했다. “우리 유격대에서는 용정에서 대부자 남군필의 돈 12만 5천원이나 군자금으로 탈취해간 일도 있습니다.” 기준은 제꺽 물었다. “거 선바위 부근에서 최봉설이랑 15만원을 탈취한 사건을 말고 또 있소?” “그러지 않고.” 기준은 엉덩이걸음으로 인삼한테 다가앉으면서 물었다. “그게 어떻게 된 얘긴지 얼른 듣기오.” 인삼은 병완과 창준까지 양치질을 다 하고 상을 물리자 얘기를 시작했다. “기준삼촌은 용정에 가봐서 알 게오. 용정 우물 옆 왼쪽 뒤로 해서 좀 가면 은행골목이 아니고 뭐요. 은행에서 별로 멀지 않은데 대부자 남군필의 집이 있었소.” 기준은 쌍까풀눈을 슴벅이면서 듣더니 “오~ 대개 알만하오.” 하고 머리를 끄덕였다. 인삼은 뒤 이야기를 이었다. “하루는 유격대원 ‘최폴’과 옹 조꼬마’가 신사차림을 하구 인력거에 앉아 남군필을 찾아갔습니다. 최폴이 조선에서 온 한 무역회사 남부일이라고 소개하구 장사예약금으로 2만원을 내놓았습니다. 그러자 남군필은 대번에 최폴을 자기 집안 집 종친 동생이라고 하면서 그날 잘 접대해주고 자기 집에서 재우기까지 했지. 그런데 이튿날 이른 아침에 유격대원들은 남군필에게 권총을 들이대고 12만 5천원에 예약금까지 2만원을 내놓으라고 호통 쳤습니다.” 기준은 “제 따위 권총 앞에서 용빼는 수 있었겠소?” 하고 통쾌하게 웃었다. “유격대원 최폴과 옹쫌꼬마는 돈 한주머니나 탈취한 후 남군필을 인질로 납치해가지고 차에 끌고 가서 타고 용문교를 벗어나갔지. 차단 봉을 내려놓고 지키던 자위대 놈들도 남군필의 옆과 뒤에 앉은 최폴과 옹쪼꼬마를 보고 남군필에게 인사했습지. ‘아침에 일찌기 어디로 갑니까?’ 하고 묻자 남군필은 뒤에서 허리에 차갑게 와 닿는 권총을 느낀지라 ‘어, 일이 있어서 가오.’ 하고 얼버무렸습니다. 그래서 차단 봉이 들리고 유격대원들은 모아선 근처에까지 가서 돈을 챙겨가지고 남군필과 운전수를 놔주었습니다. 그래서 유격대에선 그 돈을 유격대 군자금으로 잘 쓰게 됐습니다.” “야, 정말 통쾌하다. 우리도 총을 들고 유격대처럼 저 장지주랑 지학사랑 까부시고 땅이랑 가졌으면 얼마나 좋겠소?” 기준의 말에 인삼은 이렇게 말했다. “되오. 중국 공산당은 인민들을 영도해서 일본 놈들을 몰아내구 지주들을 청산해 백성들에게 땅도 나눠주고 재산도 나눠줍니다.” 병완은 그 말에 빨던 곰방대도 내려놓았다. “그럼 얼마나 좋겠소. 한뉘 농사를 지은 사람인데 손바닥만 한 땅이라도 자기 땅이 있었으면 얼마나 좋겠소.” 창준은 “우린 조선에서 온 조선 사람인데 중국 땅을 주겠소?” 하고 반신반의했다. 인삼의 말은 명확했다. “우리 조선 사람들에게도 줍니다. 중국 공산당은 민족을 가리지 않고 일본 놈들과 전문 부자들을 쳐 엎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땅도 주구 살 길을 열어 줍니다. 우리 유격대는 공산당과 우리 가난한 사람들의 군대입니다.” 병완은 “정말 유격대는 손바닥만 한 땅도 없는 우리 가난한 사람들의 군대구나.” 하고 감탄했다. “그 놈의 장지주네 소작료만 내지 않아도 얼마나 좋겠소.” 기준의 말에 창준은 “쪽박 차구 조선의 고향을 떠나 여기 간도로 들어온 가난뱅이 신세를 고친다는 게 그리 쉽겠소?” 하고 반신반의했다. “글쎄 말이다.” 병완의 말에 인삼은 신심에 차 말했다. “우리 함흥 촌에서 농사를 잘 지어 유격대에 쌀을 대주면 유격대가 배불리 먹고 일본 놈들을 깡그리 소멸하고 조선과 이 간도 땅에서 일본 놈들을 몰아내면 우리 가난한 사람들이 땅의 주인이 되는 그날이 꼭 올 겁니다.” 모두들 가슴이 부풀어올라했다. 바깥에서 번개가 번쩍하더니 봄 우레가 꽈르릉 울렸다. 천지개벽이 일어나려는가 보다.  
                      8. 일제의 군량미수레대오를 습격 정미소 바깥에서는 눈보라가 윙-윙- 사납게 불어쳤다. 백양나무 가지에 까마귀가 앉아 까욱까욱 불길한 징조를 알리기나 하듯 울고 있었다. 보초를 서던 일본 놈은 총으로 까마귀를 겨누었다. 그때 조장인듯한 놈이 총대를 내리누르면서 제지했다. “난데(어째)?” 보초병은 까마귀를 가리키면서 “아노 도링아(저 까마귀가)!” 하고 지껄여댔다. “그래도 총을 쏘지 말란 말이야.” 보초병은 열이 나 토성에서 깨진 기와 장을 주어 나무에 뿌렸다. 놀란 까마귀는 푸닥닥 날아나면서 까욱 까욱 울며 남으로 훨훨 날아갔다. 기준과 인삼은 부지런히 쌀 마대를 메어 날라다 수레에 실었다. 그들의 잔등은 땀벌창이 된 채 쌀 먼지가 두툼하게 들어붙었다. 이주림은 뒤짐을 짚고 꼬리 없는 황소 같은 일군 기준을 더 얻어 만면에 춘풍이 흐르고 있었다. 기준은 혹시 정미소에서 일하다가 일본 놈들의 쌀 수레를 습격하는 유격대거나 정미소를 습격하는 성칠 형님을 만날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막연한 일루의 희망을 품고 정미소에서 일하기로 마음을 먹었던 것이다. 한편으로는 혹시 똘만이나 사이또 같은 놈들을 만날까봐 근심도 태산 같았다. 어느 날 한창 기준과 인삼이가 땀을 뻘뻘 흘리면서 쌀 마대를 나를 때였다. “와~” 소를 멈춰 세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귀에 익은 소리여서 기준이가 몸을 돌려 보니 제일 앞 수레에서 원삼이가 한창 빈 쌀 주머니를 훌훌 땅바닥에 부리고 있지 않겠는가! 기준은 쭉 늘어선 쌀 수레몰이 일꾼들과 총칼을 둘러멘 일본 놈들을 보는 순간 원삼을 부르려다가 그만두고 머리를 숙이고 벼 마대를 둘러메 얼굴을 가리면서 정미소안으로 들어갔다. 원삼은 소를 풀어 수레 채에 고삐를 매놓고 정미소로 들어왔다. 그는 정미기계에 벼를 쏟는 기준을 보자 반가워 “형님!” 하고 부르며 성큼성큼 다가와 두 팔을 벌렸다. “원삼이! 길에서 무사했는가?” “양, 이번엔 떼도적을 만나지 않았소.” 그들은 얼싸 안고 서로 잔등을 툭툭 쳤다. 이때 일본 놈이 실눈으로 기준을 쏘아보았다. 순간 기준과 원삼은 다른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빠까요로(멍청이), 하다라께(일해)!” “하이(예).” 주림이 대신 어색한 일본 말로 대답하고 인삼의 쪽에 대고 일하라고 했다. 기준은 원삼한테 일본 놈을 눈짓하며 “저녁에 얘기하자.” 하고 말하고 나서 벼 마대를 메러 바깥에 나갔다. 뒤에서 일본 놈이 기준을 가리키며 이주림과 뭐라고 쑤군거리었다. 저녁에 기준과 원삼이네 형제가 비좁은 정미소 온돌방에서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 숱한 쌀을 일본 놈들이 조선에 실어다가 뭘 할까?” 원삼은 코 방귀를 뀌었다. “흥! 조선에 있는 일본 놈들의 군량으로 쓴다오.” 기준은 땅바닥에 침을 탁 뱉었다. “개놈새끼들이 조선의 쌀도 모자라서 간도 쌀마저 빼앗아 가는가?” 인삼은 “조용히 말하오. 벽에도 귀가 있다고 혹시 주림이 들으면 어쩌오?” 하고 말리였다. 원삼은 대수로워하지도 않았다. “이 주인은 그래도 양심적인 조선 사람인 거 같소. 살자니까 별수 없이 일본 놈들의 쌀을 찧어주지만 기실 일본 놈들을 미워하는 거 같으오.” 기준은 거칠게 숨을 쉬다가 원삼을 보고 속궁리를 털어놓았다. “혹시 떼도적이 유격대가 아닌지 모르겠소. 아예 저 숱한 입쌀을 불태우지 않으면 항일유격대 군량미로 넘겨주면 어떻겠소?” 인삼은 손사래를 치면서 말리였다. “그러지 마오. 우리 형제와 주림까지 목이 날아나게 하지 하자고?” 그 말에 기준은 묵묵히 앉아 있었다. 이튿날 아침 원삼 등은 다 찧은 입쌀을 정미소에서 메여 내다 수레에 실었다. 한 일본 놈이 정미소안으로 들어오더니 기준을 보고 입쌀을 수레에 실으라는 손시늉을 했다. 기준이 쌀 마대 무지에 가서 쌀 마대를 혼자 어깨에 둘러메고 수레에 가져다 척 실어놓았다. 일본 놈들은 총칼을 왼손에 쥔 채 엄지를 내휘둘렀다. “오, 찌까랑아 쯔요이(힘이 세군)!” 원삼과 기준은 쌀 수레 몰이꾼들과 함께 순식간에 10채의 수레에 입쌀을 실었다. 인삼은 눈코 뜰 새 없이 바깥에서 벼 마대를 메다가 정미소안에서 맴돌면서 벼를 찧었다. 그리고 다 찧은 입쌀을 마대에 받아 바깥 입쌀마대무지에 내다가 쌓아놓았다. 원삼은 숨을 돌릴 새 없이 쌀 수레를 제일 앞에서 몰고 떠났다. 그런데 일본 놈들은 기준이가 힘이 센걸 보고 쌀 수레를 따라 가라고 잡아당겼다. 리주림은 일본 말을 좀 할 줄 알아 일본 놈 우두머리를 보고 “이쏭아씨이데 난데 소노히도오 히끼이끼마쓰까?(바쁜데 어째 저 사람을 끌고 갑니까?)” 하고 물었다. “이야!(안 돼) 와레와레오 마모레(우릴 지켜야네)!” 일본 놈들은 정미소안에 둔 기준의 목수도구에서 도끼와 자귀를 들춰내다 기준과 원삼의 손에 쥐어주었다. 원삼은 손자귀를 허리에 차면서 기준을 보고 “이 놈들이 어찌나 혼났으면 이러겠소.” 하며 흥하고 코 방귀를 뀌었다. 일본 놈 셋이 전후와 중간에서 총칼을 들고 압송하고 원삼이가 코 기러기처럼 쌀 수레를 몰고 제일 앞에서 나가고 기준이가 도끼를 쥐고 제일 뒤 쌀 수레를 따라 길을 떠났다. 시내를 빠져나갈 때 일본 놈들은 개 잡은 포수처럼 우쭐해 장총을 어깨에 멘 채 기세등등해 척척 걸어갔다. 그러나 용정 시내가 멀어져가고 눈 덮인 수림이 우거진 산골짜기에 들어서면서부터 일본 놈들은 총칼을 비껴들고 골짜기 여기저기를 두리번거리면서 가재걸음을 쳤다. 기준은 속으로 유격대나 나타나 쌀을 몽땅 빼앗아 갔으면 얼마나 속이 시원하겠는가고 했다. 그런데 유격대는커녕 떼도적들도 나타나지 않았다. 일본 놈들도 저희들끼리 뭐라고 하면서 웃고 떠들어댔다. 그들의 쌀 수레가 하얀 눈이 덮인 산골짜기막치기를 타고 산등성이 길로 올라갈 때였다. 땅! 땅! 별안간 야무진 총소리가 연속 울렸다. 제일 뒤 기준과 나란히 걷던 일본 놈이 대갈통이 박살난 채 푹 꼬꾸라졌다. “범이 자기 흉을 하면 온다더니!” 기준은 도끼를 쥐고 대갈통이 박살난 일본 놈을 내려다보았다. 길옆에 납작 엎드려 피뜩 보니 수레대오 중간의 일본 놈은 다리에 총탄을 맞았는지 푹 꼬꾸라졌다. 그 놈은 다리를 부둥켜안고 땔 땔 구을면서 “이다이(아파), 이다이 시누(아파 죽겠다)!” 하고 고래고래 고함쳤다. 제일 앞에 섰던 일본 놈은 멈춰선 원삼의 쌀 수레 밑에 들어가 엎드린 채 눈 먼 총질을 해댔다. 원삼은 수레바퀴에 붙어 꿇어앉은 채 부들부들 떠는 쌀 수레 몰이꾼들을 돌아보고 소리쳤다. “쌀 수레 밑에 들어가 엎드려라!” 그제야 제 정신이 펄쩍 든 쌀 수레 몰이꾼들은 엉금엉금 기여 쌀 수레 밑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땅바닥에 엎드려 두 팔로 머리를 감싸 안고 까딱하지 않았다. 기준은 눈 밑에서 꾸불거리며 점점 눈 위에 올라오는 검은 그림자들을 둘러보면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진짜 눈 밑에서 솟아나는 귀신 같구나. 진짜 떼도적한테 정말 죽었다.) 이때 일본말로 꽥꽥 고함치는 소리가 산등성이를 쩌렁쩌렁 울렸다. “총과 쌀을 내놔!” “계속 항거하면 죽어!” 원삼의 쌀 수레 밑에 원삼과 함께 엎뎌있던 일본 놈은 대가리를 들고 여기저기 살폈다. 수레 양쪽 산마루에서 눈 위에서 숱한 꺼먼 머리통들이 반쯤 내밀고 이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산등성이길 양쪽에서 이번에는 조선말로 주고받는 소리가 바람결에 똑똑히 들려왔다. “김 대장, 아예 다 죽여 버립시다.” “안 돼! 한 놈 쯤은 살려 보내야 해! 그래야 쌀 수레 몰이꾼들이 살아남을 수 있어!” “옳소!” 기준은 길옆에 누워서 김 대장이란 말에 혹시 성칠 형님이 영솔한 유격대가 아닌가 생각하자 담이 커졌다. 그는 머리를 들고 길 양옆을 두리번거리면서 살펴보았다. “손을 쓰기오!” 땅! 땅! 푱! 푱! 총알이 수레바퀴에 박히면서 죽음의 노래를 불렀다. “총을 버려! 대갈통 박살내기 전에!” 원삼의 옆에 있던 일본 놈은 총을 놓고 엉금엉금 기여 나오더니 손을 들었다. “살려줄테니 용정에 가서 사이또 소장 놈을 보내라!” “대갈통에 구멍을 뚫어 줄 테야!” 일본 놈은 다리야 나를 살리라고 손을 든 채 꼬리 빳빳해 산골짜기 쪽으로 내뛰었다. “허허허!” “하하하!” 혼이 날아나 달아나는 일본 놈 추한 꼴을 보고 유격대원들이 웃음보를 터뜨렸다. 쌀 수레 밑에서 다리를 안고 대굴대굴 뒹굴던 일본 놈은 달아나는 일본 놈 쪽에 총을 쏘아댔다. “지분데 하시레(혼자 달아나)?! 와다시모 쯔레데 하시레(나도 데리고 달아나라)!” 한참 달아나던 일본 놈은 몸을 돌려 한번 이쪽을 돌아보고는 더욱 황급히 허겁지겁 도망쳤다. 수레대오 중간 수레 밑에 엎드린 일본 놈은 쌀 수레 몰이꾼을 인질처럼 한손으로 목을 꽉 끌어안고 총알받이로 내세우고 오른손으로 눈먼 총을 쏘면서 반항했다. 쌀 수레 몰이꾼은 겁이 나 부들부들 떨었다. 이때 조선말로 외치는 소리가 쩌렁쩌렁 들려왔다. “우리는 조선 항일유격대요! 조선 사람이 일본 놈에게 붙잡혀 있어 사격하지 못하겠구먼. 모두 힘을 합쳐 수레 밑의 일본 놈 총을 빼앗소.” 그러나 쌀 수레 몰이꾼들은 두리번거리며 서로 눈치를 볼뿐 누구도 감히 손을 쓰지 못했다. 일본 놈은 겁을 집어먹고 쌀 수레 물이꾼들에게 일본 말로 뭐라고 죽어가는 비명 같은 소리를 질렀다. 그 놈은 최후발악하면서 인질로 붙잡은 쌀 수레 몰이꾼 목을 꽉 조였다. 쌀 수레 몰이군은 살려고 목을 조인 일본 놈의 손을 두 손으로 꽉 틀어쥐어 풀었다. 일본 놈이 총 박죽으로 머리를 쳐댔다. 쌀 수레 몰이꾼은 두 손으로 총을 꽉 틀어쥐고 일본 놈과 엎치락뒤치락 했다. 땅! 야무진 총소리와 함께 쌀 수레 몰이군을 깔고 앉아 목을 조이던 일본 놈의 쳐든 대갈통이 박살났다. 뻘건 피가 하얀 눈길에 한 벌 튕겼다. “앗!” 쌀 수레 몰이꾼이 놀라 일본 놈의 총을 틀어쥔 채 뒤로 쓰러졌다. 눈 속에서 숱한 개털모자들이 일어나 총을 꼬나들고 덮쳐왔다. “놀라지 마오. 우린 항일유격대요. 우리 조선 백성들의 군대요.” 기준은 도끼를 쥔 채 유격대원들을 훑어보았다. 그러나 성칠 형님은 보이지 않았다. 이때 한 유격대원이 금방 대갈통에 총을 맞고 뒈진 일본 놈을 수레 밑에서 끌어내 툭 차버렸다. 그는 권총을 찬 훤칠한 사내를 보고 “김 대장, 쌀 수레 몰이꾼들도 돌려보냅시다.”라고 했다. “음, 그래야지. 자칫하면 이분들이 우리 유격대와 짜고 들었나 하겠소.” 김 대장이란 사나이가 얼굴을 이쪽으로 돌렸다. “여러분, 빨리 저 산골짜기 아래로 달아난 일본 놈을 따라 용정으로 달아나오.” 기준은 구레나룻이 더부룩한 김 대장이라는 사나이를 보는 순간 어디엔가 눈에 익어보였다. (아니, 용천 형님 아닌가?!) 기준은 너무도 뜻밖의 만남인지라 하마터면 고함치며 달려 갈 번했다. 그러나 몇 발자국 걸어가다 피뜩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안 돼, 내가 유격대 대장과 면목이 있다는 걸 알면 안 된다. 이 사람들 속에서 누군가 일본 놈들에게 고발하는 날엔 끝장난다.) 기준이 이런 속궁리를 하면서 용천 대장에게서 눈을 떼고 머리를 숙이고 돌리려는 순간 김 대장도 기준을 발견했다. 그는 쌀 수레를 일일이 살피는 척 하면서 제일 뒤쪽 쌀 수레에 다가왔다. 그는 기준을 보고 눈을 찔끔 감아 보이고 나서 높은 소리로 “여보, 왜 그 튼튼한 몸에 일본 놈들의 쌀 수레나 지키면서 개처럼 살아?” 하고 욕했다. 가까이 다가와 옆에 사람이 없는 것을 보고 목소리를 죽여 말했다. “잘 있었나? 간도에 왔다는 말 들었는데 어데서 사제이? 성칠 형님이 애타게 찾고 있당께.” 기준도 쌀 마대를 툭툭 두드리며 가까이에 쌀 수레 몰이꾼들이 없는 것을 보고 “소서구에 있소. 함흥촌 토성안집 인삼네 마을과 멀지 않소.” 하고 나직이 말했다. 기준은 높은 목소리로 “먹고 살자니 어찌 하겠소. 막벌이하기보다 나으니까 했는데 장관, 제발 목숨만 살려주오.” 하고 빌었다. 김용천은 높은 소리로 “이제 다시 쌀 수레를 호송하는 날엔 죽을 줄 알게!” 하고 을러멨다. 기준이가 용천과 말을 주고 받는 것을 듣고 원삼이가 다가와 “나리, 내 형을 살려줍소.” 하고 높은 소리로 말했다. 이때 쌀 수레 몰이꾼들이 원삼을 보고 “달아 나기오.” 하고 몰려왔다. “우리 일본 놈을 따라 달아나지 않으면 유격대와 짜고 들었다고 죽일 게요.” 쌀 수레 몰이꾼들은 여기저기서 웅성웅성 떠들어댔다. 한 쌀 수레 몰이꾼이 뾰족한 턱을 쳐들고 야단쳤다. “일본 군대 죽었으니 이 일을 어찌 하오? 돌아가면 우릴 죽일게 아니요?” 기준이가 대수롭잖게 말했다. “유격대 한 일인데 우리와 무슨 상관이오?” 턱이 뾰족한 쌀 수레 몰이꾼이 나서더니 “우릴 쌀 수레를 주오. 몰고 돌아가야 살지.” 하고 말하면서 당장 몰고 돌아가려는 듯이 소고삐를 잡았다. 김용천 대장이 막아 나섰다. “쌀 수레는 몰고 돌아가세요. 허나 이 입쌀은 우리 조선과 중국 백성들이 피땀으로 가꾼 입쌀이잖아요. 우리 유격대는 이 입쌀을 메다가 가난한 중조 백성들에게 나눠주고 유격대 군량으로 쓸 예산이오.” 그러자 그 쌀 수레 몰이꾼들은 머리를 끄덕였다. 이번에도 턱이 뾰족한 쌀 수레 몰이꾼이 나서면서 “그럼 우리 쌀 수레 몰이꾼들의 집을 알려 줄 테니 한 마대씩 만 날라다 주겠소?” 하고 물었다. “물론 가져다 드리죠.” 김용천 대장은 수하를 시켜 십여 명 쌀 수레 몰이꾼들의 주소와 이름을 일일이 적었다. 턱이 뾰족한 쌀 수레 몰이꾼의 집은 선바위에서 한 십여 리 떨어진 성지라는 마을에 있었다. “이름은 뭔가요?” “허팔기요.” “허팔기?” 이름을 적던 유격대원이 우스워하는데 허팔기는 자랑스레 너스레를 떨었다. “예. 평생 별거 다 팔면서 잘 살라고 우리 아버지 그렇게 이름을 지었소.” 그는 뒷덜미를 긁더니 “아예 우리 쌀 수레를 몰고 집에 가져가면 안 될까?” 하고 떠들었다. 김용천 대장이 경상도 사투리로 말렸다. “건 안 돼요. 있자노, 저 산꼴자기 아래 일본 놈이 보고 있제이. 우리가 꼭 책임지고 가져다줄테니께. 근심하지 말라요. 빨리 수레 몰고 돌아가시라니께.” 김용천 대장이 말을 마치자 오른 손을 홱 휘둘렀다. 유격대원들은 쌀 수레에 올라가 허리에 찼던 주머니를 끌러내 쌀을 반 마대 씩 푹푹 덜어내 꽁꽁 맸다. 순식간에 몇 십 명 유격대원들이 입쌀을 반 마대 씩 둘러메고 나머지 몇 십 명은 전신무장한 유격대원들의 호송 하에 산등성이를 타고 수림 속으로 흩어져 사라졌다. 수림 속에 들어가면서 용천 대장은 기준과 원삼이 쪽을 피뜩 돌아다보고 나서 눈풍설이 무섭게 이는 산골짜기로, 눈 덮인 허연 수림 속으로 바람결처럼 사라졌다.       9. 용정통감부 간도파출소 원삼과 기준은 쌀 수레 몰이꾼들과 함께 두 일본 놈의 시체를 빈 쌀 수레에 싣고 산골짜기 길을 타고 내려갔다. 그들 둘은 제일 뒤 쌀 수레에 딱 붙어 서서 걸으면서 조용히 말을 주고받았다. 기준이 먼저 선코를 뗐다. “돌아가면 일본 놈들이 쌀을 빼앗겼다고 야단치겠는데 어찌겠소? 아예 집식구들을 다른데 이사시키고 유격대에 들어갈까?” 원삼이가 맞장구를 쳤다. “글쎄 말이네. 이 놈 세월에 지주 놈의 땅을 붙여서야 어디 배 불리 먹고 살 날이 있겠소? 총을 들고 일본 놈들과 싸우면서 사는 게 나을 거 같소.” 기준은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었다. “글쎄 우리는 김 대장 유격대에 가면 그만인데 집식구들을 어찌겠는가?” 기준의 말에 원삼은 걸음마저 멈추고 눈이 휘 동그래 물었다. “아까 그 유격대장이 누군지 아오?” 기준은 주위를 둘러보고 아무도 들을 것 같지 않자 나직이 “성칠 형님이랑 함께 명천에서 들어온 김용천 대장이네.” “양?” 원삼은 저 멀리 소 수레를 몰고 걷는 사람들을 둘러보다가 몸을 돌려 용천이 사라진 눈 덮인 수림 속을 뒤돌아보는 것이었다. “글쎄, 아까 형님과 그 양반이 딱 붙어서서 하는 말을 듣고 이상하다 했더니 그런 판이구먼.” 그때 허팔기가 돌아서 이쪽으로 다가왔다. “원삼 형님, 우리 돌아가면 일본 놈들에게 죽지 않겠소? 쌀을 몽땅 털렸으니 말이오. 유격대가 총을 쏘아 일본군까지 죽였지. 우릴 놔두겠소?” 원삼은 허팔기의 가는 허리를 쿡 찌르며 안심시켰다. “일본 놈들이 뭐라든지 우린 유격대란 말을 하지 말기요. 그저 떼도적에게 빼앗겼다고 입을 맞추기요. 그러잖으면 끝장나오.” 허팔기는 “오~ 그게 옳소.” 하고 머리를 끄덕였다. “빨리 수레를 몰러 가오.” “양, 갈게. 내 다른 쌀 수레 몰이꾼들한테 입을 맞추게 알릴게.” 허팔기가 금방 떠나갔을 때였다. 기준은 도끼를 쥔 채 걸음을 멈추더니 원삼에게 나직이 말했다. “아무래도 난 도망쳐야 하겠소. 사이또 놈에게 붙잡히면 끝장이오. 명천과 우시장의 끼무라 국장과 한길수놈은 똘만이라는 경찰을 여기까지 보냈소. 그 놈들은 분명 나와 우리 일가를 찾아 죽이려고 하오. 무슨 일이 있으면 우리 서로 명동교회당의 김하규한테 기별합세. 돌아가면 내 목수도구를 건사했다가 명동교회당 김하규거나 용정 교회당 죤슨 신부에게 가져다 두오.” 원삼은 기준의 손을 꽉 잡더니 “형님, 이렇게 갈라지면 언제 만나겠소?” 하고 석별의 정에 눈시울을 붉혔다. “산 사람이 꼭 만날 날이 있을 거요. 후에 기회 있으면 유격대에 쌀을 보내게나.” “알았소.” 기준은 도끼를 쥐고 눈 덮인 산등성이쪽으로 올라가다가 풍설이 사납게 이는 수림 속으로 사라졌다. 그때 허팔기도 뒤따라가면서 “나도 달아나겠소.” 하고 고함쳤다. 그 말에 쌀 수레 몰이꾼들이 떠들썩했다. “우리도 달아날까? 일본 놈들에게 맞아죽지 않으면 다행일 것 같아.” “우리 뭐 쌀을 빼앗아 갔다고. 유격대 그랬지.” 쌀 수레 몰이꾼들은 다행을 바라고 다시 쌀 수레를 몰고 용정 쪽으로 올라갔다. 도중에 수레 밑에서 자기 목을 조인다고 일본 놈의 총을 붙잡고 뒹군 쌀 수레 몰이꾼이 주춤 멈춰서더니 사위를 둘러보았다. 뒤이어 그는 원삼에게 다가와서 “난 달아 나겠소. 일본 놈이 둘이나 죽은 마당에 살아 남을 수 있겠소?” 하고 기준이가 달아난 쪽을 바라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들이 산골짜기를 벗어나 용정 쪽의 올려다 보이는 벌판에 들어섰을 때였다. 말을 탄 한 무리의 일본 헌병 놈들이 들이닥쳤다. 총소리를 듣고 덮쳐 온 것이다. 기병들 속에는 아까 산등성이 길에서 겨우 살아 산골짜기 아래로 달아났던 일본 놈이 끼여 있었다. “두 놈이나 달아났구나.” 그놈의 말에 군관 놈이 채찍을 들어 쌀 수레 몰이꾼이 금방 달아난 산등성이쪽을 가리키면서 “발자국을 따라 추격하라!” 하고 고함쳤다. 기병 놈들은 쌀 수레를 호송하던 일본 놈과 함께 산마루 쪽으로 덮쳐갔다. 기병 군관 놈은 또 몇몇 기병들에게 쌀 수레 몰이꾼들을 가리키며 “빠까요로!” 하고 뭐라고 을러멨다. 나머지 몇몇 일본 기병 놈들은 빈 쌀 수레 몰이꾼들을 압송해 용정 쪽으로 달려갔다. 기병 놈들은 눈 덮인 수림 속으로 쫓아갔지만 숱한 발자국이 흩어져 어느 발자국을 따라 쫓아간단 말인가? 게다가 유격대는 신을 거꾸로 신었기에 수림 속에서 나온 발자국만 있을 뿐 수림 속으로 들어간 발자국이 하나도 없어 대체 무슨 놈의 판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그 놈들은 무릎까지 풍풍 빠지는 눈 덮인 수림 속에서 헛물을 켜고 말머리를 돌려 용정 쪽으로 되 달려갔다. 원삼이네가 일본 놈들의 압송을 받으면서 용정 정미소 마당에 가서 소 수레를 벗겨놓았다. (기준 형과 함께 달아날걸 그랬어.) 원삼이가 이런 궁리를 하면서 일본 놈들을 쳐다보니 당장 잡아먹을 상을 하고 쏘아보는 것이었다. “고이(오라)!” 일본 군관이 원삼을 손가락질하면서 오토바이에 앉으라고 했다. 인삼은 원삼을 잡아가려고 하자 정미소 문 옆에서 팔짱을 끼고 구경하는 이주림을 보고 통사정했다. “주인님, 좀 우리 동생을 구해줍소. 주인은 저 일본군관을 알지 않소?” 이주림은 도리머리를 가로 흔들었다. “잘못 걸렸네. 용정통감부 간도파출소 사이또 소장에게 딱 걸리면 죽지 않으면 반 주검이 되려니 해야 하오.” “이 일을 어쩌는가?” 인삼이 두 팔을 휘두르면서 원삼을 바라고 뛰어갔다. 부르릉. 떠나는 오타바이 위에서 원삼은 대수롭잖은 표정을 지으면서 오지 말라고 손을 흔들었다. “형님, 근심하지 마오. 난 잘못한 일이 아무것도 없으니까.” 그래도 인삼은 쌀 먼지를 온몸에 들쓴 채 대문 밖에까지 뛰어나갔다. 원삼은 일본 놈이 압송하는 오토바이에 앉아 덜커덩거리면서 골목길에서 사라졌다. “원삼아! 원삼아!” “가에레(돌아가)!” 이때 대문 옆에 서있던 일본 놈이 총칼을 휘두르면서 인삼을 들어가라고 꽥꽥 소리쳤다. 인삼이가 돌아서 대문 안을 들어갈 때였다. 일본 기병 놈들이 쌀 수레 몰이꾼들을 몽땅 바로 얽어매 끌고 나오는 것이었다. 이주림은 보기 안 되였는지 도리머리 질 했다. “이 일을 어떻게 하오. 정미소가 어떻게 돌아가겠소? 이거 원.” 사이또 소장이 꽥꽥 고함쳤다. “젠부 유게끼다이다(몽땅 유격대다). 젠부 시누, 시누( 몽땅 죽어, 죽어)!” 사이또의 얼룩사냥개도 주인을 따라 아가리를 벌리고 컹컹 사납게 짖어댔다. 사이또 소장 놈은 원삼과 허팔기 등 쌀 수레 몰이꾼들을 몽땅 용정통감부 간도파출소에 끌고 갔다. 대문어구에 총칼을 쥐고 얼룩사냥개를 데리고 선 보초병 두 놈은 잡아먹을 듯이 도끼눈으로 원삼이랑 쏘아보았다. 얼룩사냥개는 사이또 소장을 보자 꼬리를 흔들거리면서 다가왔다. 그 놈 개는 원삼이를 보자 으르렁거리면서 눈깔에서 불똥이 뚝뚝 떨어질 지경이었다. 사이또 소장은 오토바이에서 거만스럽게 내리며 전리품이나 보는 듯이 원삼이네를 쭉 둘러보더니 코 수염을 쓱 닦더니 손을 안으로 홱 휘둘렀다. 일본경찰들이 원삼이네를 파출소 고문실에 몽땅 끌고 들어갔다. 어둡고 침침한 고문실에서 사이또 소장은 검정경찰복차림으로 의자에 거만스럽게 앉아 위엄을 부렸다. 그는 원삼을 가리키면서 옆에 선 일본경찰에게 호령했다. “저자를 형틀에 달아매라!” “옛!” 원삼은 두 경찰에게 끌리어가 형틀에 바 줄로 매달린 채 사이또 소장을 분노에 찬 눈길로 바라보았다. 사이또 소장은 채찍을 쥐고 옆에 대기하고 서있는 두 경찰에게 뭐라고 귀속 말로 쑤군거렸다. 그 경찰이 나갔다가 고문실에 땅딸보 같은 조선인을 데리고 들어왔다. 원삼은 그 조선 사람이 별로 면목이 있어 찬찬히 보았다. (아니, 저 놈은 똘만 경찰 놈이 아닌가!) 그는 깜짝 놀라 머리를 숙였다. 사이또 소장은 그 모든 것을 여겨보고 흉악한 몰골에 흐뭇해하는 미소를 지었다. “똘만이, 저 괴한을 알만한가?” 똘만은 가까이 다가가 머리를 숙인 원삼의 머리를 손으로 쳐들고 찬찬히 들여 보더니 뒷걸음질 쳤다. “이 놈은 기준 놈의 친굽니다. 그때 우시장 경찰국을 지을 때 병완과 기준과 짜고 들어 썩박나무로 기둥을 세운 놈입니다.” 그 소리에 사이또 소장 놈은 벌떡 일어났다. 그 놈은 구두를 신은 발로 뚜벅뚜벅 걸어가 원삼을 쏘아보았다. “끝내 병완 놈과 기준 놈의 꼬리를 밟았구나.” 사이또가 똘만을 보고 일본말로 뭐라고 떠들자 똘만이 원삼을 보고 을러멨다. “네 이놈, 원삼이라던가. 날 알아볼만 하지. 난 끼무라 국장이 보낸 조선 경찰 똘만이야. 말해! 병완과 기준은 어데 있어?!” 원삼은 머리를 들고 천천히 입을 뗐다. “난 모르오. 일본 영사관의 명대로 쌀을 날라 간 게 무슨 죄 있다고 이러오?” 똘만이 통역해주자 사이또가 입을 열기도전에 유격대의 손아귀에서 겨우 살아남은 일본 놈이 고래고래 고함쳤다. “도끼를 쥐고 네놈과 쑤군거리던 놈은 누구냐? 내 다 보았어.” 이때 정미소안에서 보초를 서던 일본 경찰 놈이 기준의 목수도구를 들고 들어왔다. “보라, 저건 뭔가?” 목수도구상자를 보자 똘만은 우쭐거렸다. “맞아, 내 글쎄 몇 달 전에 시내에서 별로 이런 목수도구를 멘 구척이나 된 자가 기준이 아닌가 뒤를 밟은 적이 있어. 그때 그 놈을 막걸리 집에서 놓친 후 지금까지 못 찾았는데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났구나.” 정신환자처럼 지껄이던 똘만이 원삼의 배를 발길로 차면서 호통 쳤다. “말햇! 네놈과 함께 도끼를 쥐고 쌀 수레를 호송한 자가 기준이 맞지? 기존과 병완이 어데 있어?!” 그러나 원삼은 낯 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 “뭘 말이오? 난 그런 사람을 본 적도 없소. 쌀 수레를 호송한 게 무슨 죈가?” 똘만이가 돌아가 사이또 소장에게 뭐라고 일본말로 지껄이자 싸이또 소장이 천천히 일어나더니 을러멨다. “호되게 족쳐라!” 사이또 옆에 서있던 두 경찰 놈이 사냥개처럼 덮쳐들어 채찍으로 기준을 사정없이 짱짱 후려갈겼다. 쌀 수레 몰이꾼들은 차마 눈뜨고 채찍질에 원삼의 저고리가 째지고 피로 얼룩진 살가죽이 묻어 떨어지는 것을 볼 수 없어 머리를 떨어뜨렸다. 허팔기는 온 몸을 사시나무 떨듯 바들바들 떨더니 풀렁 물앉으며 엉덩방아까지 찧었다. 사이또는 음흉한 눈길로 쌀 수레 몰이꾼들을 쓸어보다가 땅바닥에 물앉아 오줌까지 쉥- 쉥- 싸는 허팔기에게 독기서린 눈길이 멈춰 섰다. 사이또는 똘만에게 뭐라고 쑤군거렸다. 그러자 똘만이가 허팔기를 끌고 다른 고문실에 나갔다. 똘만은 채찍으로 공포에 바들바들 떠는 허팔기의 뾰족한 턱을 쳐들고 을러멨다. “말해! 원삼과 목수 놈이 어쨌는가? 말하지 않으면 썩 뚝!” 똘만은 칼로 목을 치는 손시늉을 했다. 질겁한 허팔기는 “말하면 곰 같은 원삼과 호랑이 같은 목수 놈에게 맞아죽겠는데 어떻게?” 하고 말하며 힐끔 똘만의 눈치를 살폈다. 똘만은 “근심하지 말라! 우리 대일본제국에 이실직고만 하면 비밀을 지켜 줄 뿐만 아니라 두툼한 상금까지 준단 말이야.” 하고 눅잦혔다. 허팔기는 원삼을 뒤따라보았자 먹을알은 없고 물어먹으면 상금까지 준다는데 해 볼만 한 것이라고 속궁리를 돌렸다. 허팔기는 머리를 쳐들더니 “원삼은 그 목수 놈과 서로 야, 자, 하는 친구더구먼. 내 뒤에서 걸으면서 그 놈들이 주고받는 말을 들을 라니 목수 놈은 이랬소. ‘일본 놈들의 세월에 지주 놈의 땅을 붙여서야 어디 배 불리 먹고 살 날이 있겠소? 총을 들고 일본 놈들이나 지주 놈들이 빼앗아간 우리 쌀을 뺏아 먹고 사는 게 낫을 거 같소.’ 원삼이가 ‘김 대장네 유격대에 가면 그만인데 집식구들을 어찌 하겠는가?’ 하고 근심하자 목수 놈은 나직이 ‘뭐 명천에서 들어온 김용천 대장한테 가면 일없다’고 말했소. 쌀을 몽땅 털리고 유격대에 일본군이 살해당했기에 우릴 살려 두겠는가고 내가 근심하자 원삼은 ‘일본 놈들이 뭐라든지 우린 유격대에게 습격당한 말을 하지 말기요. 그저 떼도적에게 빼앗겼다고 입을 맞추기요. 그러지 않으면 우린 끝장난다’고 했소. 후에 목수 놈은 겁이 나서 산 속으로 달아나고 수레 밑에서 일본군의 총을 잡고 뒹굴던 룡지촌의 박성활두 달아나고.” 똘만은 살기 띤 통통한 낯에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넌 우리 황군을 도와 아주 큰일을 했어. 후한 상금을 내 줄 거야. 지금 주면 눈에 날거니까 후에 성지에 있는 집에 가만히 상금을 가져다줄 게. 허나 쌀 수레 몰이꾼 놈들 앞에서 아무 티도 내지 말라. 우리가 고의로 때리거나 욕할 테니까 꾹 참으라고.” 허팔기는 겁기를 풀며 머리를 끄덕였다. 그는 속으로 시원히 말했으니 목숨은 건졌는데 상금까지 주겠는가는 반신반의했다. 한참 후 똘만이가 고문실에 들어오더니 사이또 소장에게 뭐라고 지껄였다. 사이또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저 놈은 항일유격대와 내통한 놈이야! 지하감방에 처넣어!” 경찰 서너 놈이 달려들어 형틀에서 피 못이 된 원삼을 풀어내 질질 끌고 지하 감방으로 가서 처넣었다. 밤중에야 원삼은 칠흑 같이 새까맣고 공포에 휘감긴 감방 안에서 정신을 차리었다. 축축하고 싸늘한 감방 안은 숨 막힐 듯이 적막했다. 간혹 옆 감방에서 고통스러운 신음소리가 간간히 들리었다. 원삼은 기준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이 한없이 후회됐다. (우시장경찰국 일을 홀 까먹었구나. 똘만이가 여기까지 올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 원삼은 기준이가 무사히 달아난 것만 해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죽기내기로 말하지 않으면 네깐 놈들이 어쩐단 말이냐?) 그는 쇠고랑이 찬 손으로 감방 벽을 어루만지며 붙잡고 일어나려고 안간힘을 쓰면서 엉덩이를 들려고 했다. 그러나 가슴과 허리 팔, 다리까지 아파 되 물앉았다. 쌀 두 마대를 옆구리에 끼고 다루던 그가 자기 몸도 이기지 못해 물앉아보기는 난생처음이었다. 그는 이를 악물고 다시 엉덩이를 들어보았다. 이번에는 물앉지 않고 간신히 일어났다. 암흑하고 적막한 지하감방 안에는 긴 신음소리에 뒤이어 땅이 꺼질 듯이 한숨이 공포에 뒤섞여 모든 공간을 침침하게 꽉 채워버렸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밤인지 아침인지 저녁인지 헤아릴 수 없었다. 원삼은 사지가 칼로 에이는 듯이 아파나는 것을 느겼다. 그때 지하 감방 천정 문이 쭈르륵 열리더니 한 가닥의 빛이 지하 감방 안을 비추었다. “이 놈, 나와!” 원삼은 눈이 시려 딱 감았다가 천천히 눈을 떴다. 그제야 감방 문을 겨우 찾은 원삼은 안간힘을 다해 겨우 일어나 쩔룩거리면서 감방문밖을 나가 지하 감방을 벗어나 층계를 한 층계 한 층계 걸어 올라갔다. “엄살을 부리긴? 사내대장부가 고까짓 채찍질 몇 번 견디지 못해?” 똘만이가 빈정거렸다. 똘만은 다른 세 경찰들과 함께 쇠고랑이 찬 원삼을 끌고 통감부 간도파출소 소장실로 갔다. 사이또 소장은 기세 사납던 전날과는 달리 길쭉한 낯에 간사한 미소를 지으면서 지껄였다. “오해가 있었네. 허팔기한테서 들을 라니 자넨 유격대두 아니고 기준이란 놈과 내통한 적도 없다더구먼. 황군의 쌀 수레를 계속 호송하게나. 잘하면 이담 우리 통감부 간도파출소에서 경찰로 써주지.” (개자식들, 차라리 죽일 게지 또 무슨 개수작인가?) 원삼은 머리를 쳐들고 노한 눈길로 사이또 소장을 쏘아보다가 머리를 숙이고 쩔룩거리면서 소장실에서 나갔다. 뒤에서 사이또 소장은 똘만의 귀에 대고 뭐라고 쑤군거렸다. 사실 사이또 소장 놈은 전날 똘만을 시켜 겁이 나 부들부들 떠는 허팔기를 다른 고문실에 끌고 나가 시퍼런 군도로 겁을 주면서 심문하였다. 그 놈들은 끝내 원삼과 기준의 관계 그리고 유격대가 습격하던 정경과 유격대가 쌀 수레 몰이꾼들의 주소를 적으면서 쌀을 나눠주기로 한 정황 등을 속속들이 알아냈던 것이다. 사이또 소장 놈은 능청스레 아무 것도 모르는척하면서 원삼을 놓아주었다. 그것은 원삼이 같이 우둔한 놈은 때려죽여도 입을 열지 않기에 놓아줌으로써 큰 그물을 쳐서 기준과 병완이, 나아가서 김 대장이 영솔하는 유격대까지 나포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원삼을 감시하는 비밀임무는 물론 똘만과 허팔기에게 차려졌다. 10. 호송대장과 밀정 원삼이가 용정통감부 간도파출소를 나오면서 흐릿한 하늘을 쳐다보니 이튿날 아침 해가 뜨고 있었다. 전날 오후부터 채찍에 얻어맞으면서 심문당하고 밥 한술 먹지 못한 채 온밤 지하 감방에 갇혀 있었던 것이다. 너무 아파 쌀 수레를 호송할 수 없게 돼 원삼은 정미소로 돌아오자마자 소 수레를 몰고 물레방아 골로 돌아갔다. 그는 몸이 아파 이전에 기준이가 알려준 대로 소변을 받아 아내보고 상처에 바르게 했다. 장활이랑 장은이랑 장욱이랑 피투성이 된 아버지를 보고 주먹을 쥐고 일본 놈들을 윽별렀다. 넷째 종호와 다섯째 장록은 어머니가 대야에 받은 소변으로 아버지 상처를 닦아주면서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고 따라 눈물을 줄줄 흘리었다. 원삼은 집식구들이 구차해하는 것을 보고 이를 악물고 신음소리 한마디 내지 않았다. 며칠 치료하고 나니 조금 몸이 괜찮아져 바깥출입도 할 수 있었다. 먹고 살자니 봄이 오기 전에 정미소에 가서 일을 해야 했다. 그때 때마침 허팔기가 와서 병문안을 했다. “형님, 일본 사람들은 그래도 내 말을 듣고 형님을 놔줬으니 다행이오. 오해했소.” 허팔기는 뾰족한 턱을 쳐들고 구들에 누워있는 원삼의 팔을 들고 보면서 혀를 끌끌 찼다. “쯧쯧, 생사람을 이렇게 치다니?” 원삼은 허팔기의 진상을 모르고 “고맙네. 자네가 잘 말했기에 풀려나왔네.” 하고 인사했다. 허팔기는 원삼의 처자들을 힐끔 곁눈질하더니 원삼에게 다가앉으면서 귀속 말로 물었다. “김 대장이 영솔한 유격대에서 쌀을 가져왔소?” 원삼은 도리머리 질 했다. “양? 유격대는 신용이 없구먼. 우리 집에는 가져왔던데. 어째 제일 고생한 형님한테 가져오지 않았소?” 원삼은 “모르겠소. 아마 내 잡혀갔으니까 연루될까봐 그랬겠지.” 하고 고지식하게 말했다. “어찌겠소? 아예 우리 몽땅 유격대에 달아나는 게 좋지 않겠소? 유격대에 들어가서 총을 쥐고 일본 놈들이나 지주네 쌀을 빼앗아 배불리 먹고 사는 게 나을 거 같소.” 원삼은 지나치게 달라붙는데다가 무섭게 나오는 허팔기가 이상해 입을 꾹 다물어버렸다. 나중에 그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래도 난 정미소에 가서 쌀이나 개산툰 쪽에 날라가고 쌀이나 얻어다 먹고 사는 게 옳은 거 같소. 이제 농사철이 되면 농사를 짓고. 농사군은 땅을 떠나지 말아야 하오.” 허팔기는 턱을 쳐들고 물소같이 우람진 원삼의 바위 돌 같은 몸을 힐끔 곁눈질하더니 머리를 끄덕였다. 원삼은 바깥으로 떠나가는 허팔기를 연의하고 나서 속으로 지레 역게 논다고 욕하면서 침을 퉤 뱉었다. 며칠 후 원삼은 허팔기와 함께 수레를 몰고 또 정미소에 갔다. 이전과 달리 정미소에는 일본군이 한개 소대는 증파돼 대문 안 밖을 삼엄하게 경계하고 있었다. 사실 사이또 소장은 관동군에 연계해 한개 중대나 되는 일본군을 파견하여 용정으로부터 개산툰으로 나가는 산길을 서캐 훑듯 하였고 한개 소대가 정미소를 지키고 한 개 소대가 쌀 수레를 직접 호송하고 한개 기병소대는 기동하면서 부근의 산과 들을 순찰하다가 일단 쌀 수레 대오를 습격하는 유격대를 발견하면 총을 쏘아 신호하여 유격대를 일망타진하려고 했다. 한편 쌀 수레대오 속에 허팔기와 같은 밀정으로 원삼을 비롯한 쌀 수레 몰이꾼들을 감시하게 하였고 원삼과 쌀 수레를 미끼로 유격대를 유인해 일망타진하려고 들었다. 특히 용정과 가까이에 있는 성지촌의 허팔기네 집 부근에 항상 변복한 밀정들을 배치해 유격대가 약속대로 빼앗아간 쌀을 가져다줄 때 기습해 나포하려고 들었다. 그리고 다른 쌀 수레 몰이꾼들의 집에도 한두 놈씩 붙여 유격대가 쌀을 가져가나 감시하게 했다. 그러나 기동영활한 김용천 대장이 영솔하는 유격대는 눈보라 치는 수림 속에 사라진 뒤 다시는 이 부근에서 그림자도 나타나지 않았다. 가져다준다던 쌀을 반마대도 가져다주는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기실 유격대에서도 놈들이 꼭 쌀 수레 몰이꾼들에게 쌀을 가져다주는 것을 감시하리라는 것을 진작 짐작하고 직접 가져다주지 않고 그 마을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쌀을 준 다음 쌀 수레 몰이꾼에게 전해주게 했다. 그것도 단번에 쌀을 한마대나 반 마대를 가져가지 않고 여러 번에 나눠 스무 근씩이나 가져다 주었던 것이다. 그런데 허팔기에게 쌀이 전달될 때마다 유격대는 쌀을 마을의 다른 집에 가져다 주고 떠나 간지도 사나흘이 된 후였다. 유격대원들은 허팔기나 다른 쌀 수레 몰이꾼들에게도 자기들이 왔다 간지 며칠 후에 가져다주라고 하였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그 마을의 가난한 사람은 번마다 허팔기에게 쌀을 전해주지 않았다. 그러다나니 유격대의 그림자를 보지도 못한 채 그물에서 놓치고 말았던 것이다. 사이또 소장은 유격대가 그물에 철렁 뛰어들기를 기다리다 못해 속이 바질바질 타버렸다. 그 놈은 “유격대가 신용을 지키지 않을 수 없어." 하고 중얼거리면서 밀정들에게 원삼과 쌀 수레 몰이꾼들과 그들의 집을 물샐틈없이 감시하라고 명령했다. 사이또 소장은 정미소에 찾아와 원삼을 보고 “원삼이, 난 자네를 쌀 수레 호송대장으로 임명하네.” 하고 희죽이 웃었다. 겉으로는 원삼을 “중용”하는 척 하고 속으로는 죽이려고 들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원삼은 아무 일도 없는 듯이 쌀 수레를 몰고 쌀 수레를 호송하면서 개산툰 쪽을 바라고 떠났다. 산골짜기에 들어서서 걸으면서 아무리 생각해봐도 허팔기를 점점 의심하게 됐다. (용정통감부 간도파출소에 끌리어갔을 때도 그렇지. 똘만 놈이 허팔기를 끌고 나갔다가 들어와 사이또 소장 놈에게 뭐라고 귀속 말을 하자 사이또 소장놈이 펄펄 뛰면서 나를 유격대하구 내통했다고 채찍질하더니 지하 감방에 가두지 않았던가!) 여기까지 생각하자 원삼은 성이 꼭뒤까지 치밀었다. (저놈새끼 속심을 개 밸처럼 빼봐야지. 내 일본 놈들의 군량미를 온전히 조선에 가져 가게 할 거 같은가? 흥!) 그는 제일 앞에서 개 턱을 쳐들고 쌀 수레를 몰고 가는 허팔기한테 씨엉씨엉 걸어가 일부러 걸고 들었다. “네 이놈, 언감 내 앞에 서서 쌀 수레를 몰겠니?” 허팔기는 옆에 선 일본군 놈들을 힐끔 쳐다보면서 대수로워도 하지 않았다. “왜 이리 무지막지하게 구오?” 원삼은 눈알을 부라리면서 호통 쳤다. “너 요놈새끼, 쌀 수레 호송대장을 우습게 보는구나.” 그러자 허팔기는 뾰족한 턱을 쳐들고 코 방귀까지 뀌었다. “픽! 대장? 지금 누구 세상이라고 이러오?” 원삼은 왼손으로 허팔기의 멱살을 쳐들었다. 허공 쳐들린 허팔기는 두 다리를 바둑거리면서 목이 꺽 막혀 개목을 다는 소리를 쳤다. “어, 억, 이 놈아, 네 놈이 감히 누굴 이래? 내 한마디면 네놈은, 죽, 죽을 줄 알아라.” “알았다. 네놈새끼 제 조선 사람도 다 팔아먹는 일본 놈의 개라는 걸.” 이때 일본 놈들이 몇이 달려들어 원삼을 떼 말렸다. 그러나 원삼은 허팔기를 놓자 씽 달려가더니 두 손으로 허팔기의 쌀수레 한쪽 바퀴를 건뜻 들더니 어깨로 “끙” 소리와 함께 떠밀었다. 쿵! 모진 소리와 함께 쌀 일여덟 마대나 실은 소 수레가 한쪽으로 쾅 번지어졌다. 로지심 같은 원삼의 괴력에 쌀 수레 몰이꾼들은 물론 일본 놈들마저 깜짝 놀라 입을 딱 벌렸다. 허팔기는 겁을 집어먹고 아픈 목을 만지면서 산비탈로 도망쳤다. 이윽고 제 정신을 차린 일본군 다이로 소대장 놈은 “콘칙쇼(닥쳐)!” 하고 고래고래 고함쳤다. 일본군 대여섯 놈이 덮쳐들어 원삼을 붙잡았다. 그러나 원삼이가 곰처럼 양팔을 휘두르면서 펄펄 날뛰어 일본 놈들이 여기저기 나가 꺼꾸러졌다. 땅! 다이로 소대장 놈이 권총을 빼들어 하늘에 대고 한방 쏘았다. 그 놈은 권총박죽으로 일본군에 양팔을 잡혀서도 반항하는 원삼의 머리를 사정없이 내리쳤다. “파출소에 잡아가라!” 다이로 소대장이 호통 치자 일본 놈들은 머리에서 뻘건 피를 줄줄 흘리는 원삼을 바 줄로 꽁꽁 묶었다. 뒤이어 서너 놈이 원삼을 쌀 수레에 매서 끌고 총칼을 빼들고 용정으로 되돌아갔다. 간도파출소 고문실에 들어갈 때에야 제정신을 차린 원삼은 다시 살아나오지 못하리라고 생각하고 죽을 잡도리를 했다. 사이또 소장은 원삼을 잡아온 일본군을 손짓해 보내고 나서 아주 상냥한 표정으로 원삼을 맞이했다. 조선통역이 옆에서 사이또의 말을 통역했다. “리군, 무슨 놈의 밸이 그렇게 센가?” 지어 사이또 소장은 걸상을 가리키면서 자리까지 권했다. “앉게나.” 원삼은 이상할 정도로 자기를 대하는 키가 훤칠한 사이또 소장을 의심스레 쳐다보면서 걸상에 앉았다. (어쩌자는 거야.) 사이또 소장은 일본권연 한대를 지갑에서 꺼내더니 원삼에게 권하기까지 했다. “일본 권연인데 한 대 피워보게.” 원삼이가 사양하자 사이또 소장은 도리머리 질 했다. “사내들이란 술과 담배야 내 것 네 것 따로 없지 않은가! 허허, 한대 피워보게나.” (무슨 수작을 피우자고 이래?) 원삼은 마지못해 한대 받아 물었다. 사이또 소장이 라이터를 척 켜 붙여주자 한 모금 길게 빨아보았다. 담배 향기가 달랐다. “어떤가? 우리 일본은 당신들이 조국이라는 조선보다 적어도 50년은 모든게 앞섰네. 담배도 그렇고 농사도 그렇고.” 사이또는 담배를 뻑뻑 맛나게 빠는 원삼을 보고 엄지를 내휘두르면서 지껄였다. “당신 진짜 사내대장부야! 난 자네 같은 힘장사를 좋아하네. 그 무거운 쌀 수레를 번쩍 들어 번지었다면서? 천하힘장사야, 힘장사. 난 수레를 번진 죄를 묻지 않겠네. 그까지 개 같은 허팔기 때렸소. 일없어.” 사이또는 “허팔기”라고 하더니 꼴찌손가락을 내리 흔들면서 “이거. 당신 천하장사!”라고 하면서 엄지를 내둘렀다. “오늘 천하힘장사 이원삼을 알게 돼 기쁘오. 어떤가? 우리 파출소 경찰이 돼보지 않겠는가?” 통역의 말을 듣자 원삼은 “뭐라고?” 하고 자기 귀를 의심하면서 사이또에게 눈길을 돌렸다. 사이또는 원삼의 어깨를 다독이면서 분명히 재차 말했다. “우리 용정통감부 간도파출소 경찰이 했소까. 입쌀도 많이, 많이 주구 돈도 많이, 많이 줬소. 계집도 마음대로 놀았소. 얼마나 좋소까?” 원삼은 도리머리 질 했다. 사이또는 통역을 가리키면서 지껄였다. “저 이달송 통역두 일본 와세다대학까지 유학하고 돌아왔소다. 우리 통역했소. 황금이 많이, 많이 있소다. 잘 살았소다.” 그래도 원삼은 도리머리 질 했다. 사이또는 성을 벌컥 냈다. “중국에 이런 말 있소다. 권하는 술을 마시지 않고 벌주를 마셨소까?” 원삼은 그래도 묵묵부답이었다. “좋소까. 이 놈을 호되게 족쳐!” 원삼은 이를 악물고 매서운 채찍을 맞으면서도 속으로는 시원해했다. (맞아죽을지언정 네놈들의 개는 되지 않을테야.) 원삼이가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눈앞이 깜깜해 어디가 어딘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누운 자리에서 축축하고 차디찬 땅바닥을 매만지자 원삼은 지하 감방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이 놈들은 허팔기한테서 나와 기준이가 주고받은 말을 다 들었다. 지어 유격대에 가자고 한 말도 다 들었을 게다. 이 일을 어쩐다? 용천 대장이랑 드러나게 해선 절대 안 돼!) 원삼은 어둠 컴컴한 감방에서 이를 빠드득 갈며 유격대를 지키려고 죽을 결의를 꽉 다지었다. 사이또 소장 놈은 교활하게도 의연히 원삼을 경찰로 끌어들일 일루의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더욱이 큰 그물을 쳐서 도주범 김병완과 김기준 나아가서 유격대를 일망타진할 궁리를 버리지 않았다. 그는 부하와 똘만의 반대의견에도 불구하고 이튿날에 원삼을 놓아 보냈다.        원삼은 망국노의 한을 품고 피가 낭자한 몸을 비틀거리며 간신히 집으로 한발작, 한발작 발걸음을 뗐다.  그 발자국마다 망국노의 한이 하나 둘 아로새겨지었다.           (지금까지 여러분들은 김장혁 작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 제2권까지 보았습니다.  여러분 감사합니다. 아래에는 저의 창작소감과 문예평론이 이어집니다.)             나는 다년간 리근전의 “고난의 년대”, 리기영의 “두만강”, 천세봉의 "고난의 력사", 라관중의 “삼국연의”, 시내암의 “수호전”, 조정래의 “아리랑”과 “태백산맥”, 박경리의 “토지” 등 력사소설을 탐독하면서 이런 력사소설에서 력사반영의 예술수법을 연구한후 나의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에서 중국 조선족의 백년력사를 예술적으로 반영하려고 모진 애를 썼다.       광범한 독자들께서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에서 력사반영의 예술수법을 료해하시는데 도움을 주고저 몇해전에 "문화시대"에 실린 나의 이 문예평론을 보충하고 수개해 싣는다. 대학교 졸업론문으로 "리기영의 에서 력사반영의 예술수법"을 썼기에 이 문예평론에서는 "에서 력사반영의 예술수법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력사소설창작에서 읽기 구수한 이야기속에서 그 시대 전형환경에서의 개성이 독특한 전형형상을 부각해 자연스레 한시기 력사를 반영해야 한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수호전"이나 "삼국연의"는 이야기성과 전형인물 형상성이 어찌나 강한지 읽으면 읽을수록 구수하고 자연스레 그때 당시 력사를 알게 한다. 그렇지 않고 력사소설을 창작한다는것이 깡마른 직설로 력사를 서술하는데 그친다면 그것은 문학성과 예술성을 상실한 "변종된 력사책"에 불과하게 된다. 그런 이른바 "력사소설"을 읽기보다 독자들은 아예 력사책을 읽으면 시간도 남고 력사를 더 전면적으로 알수 있지 않겠는가하는 생각이 든다. 소설창작에서 관건은 력사반영의 예술 수법과 기교에 대한 작가의 끊임없는 연구와 활용이 필요한것이다.         조글로에 이 문예평론을 따로 올려야 했는데  잘 게시되지 않아 대하소설 편단에 붙여 실은것을 량해하기 바란다.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 저자 김장혁                                                                                  2016. 1.25.           문예평론                                  력사소설에서 력사반영의 예술수법에 대하여                                                                                                                        김장혁       중국조선족의 이름난 작가 리근전선생은 장편소설 에서71명의 개성이 독특한 인물형상을 창조하고 독특한 력사반영의 예술수법으로 동만을 중심으로 조선북부와 전 동북을 넓은 무대로, 19세기 말엽으로부터 20세기 “8.15”해방에 이르는 반세기란 기나긴 력사시기 조선족인민들의 피눈물 나는 이민사,  중국 공산당의 령도아래 한족 등 형제민족과 어깨겯고 이 땅을 개척하고 일제와 벌린 수많은 피어린 투쟁사를 형상적으로 보여주었다. 때문에 리근전작가의 장편소설 는 중국조선족인민들의 투쟁력사의 기념비적거울로 될수 있는 작품이라고 할수 있다. 리근전작가의 에서 력사반영의 예술수법을 깊이 연구하는것은 중국조선족문학사, 나아가서 중국당대문학사에서 리근전작가의 창작과 그 지위를 반석우에 세우며 금후의 장편력사소설창작에 아주 큰 문학적의의와 현실적의의가 있다고 생각한다.       우선, 리근전작가의 와 프랑스 작가 발자끄의 , 중국 작가 라관중의 , 조선 작가 천세봉의 , 조정래의 대하소설 “태백산”과 “아리랑”.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 등에서 력사반영의 예술수법을 대조해 연구해보기로 하자.       프랑스 작가 발자끄는 무려 96편이나 되는 소설로 이뤄진 “인간희극”에서 주로 부동한 소설에서의 동등한 인물재현의 예술수법으로 프랑스의 나뽈레옹제정시대(1799년)부터 1848년혁명에 이르는 기나긴 력사시기 천태만상의 “인간희비극”을 보여주고있다. 세계 명작가 발자끄는 객곽세계를 호상 전형적련결에서 고찰하며 사회현상을 지배하고있는 기본법칙들을 찾아내 보여주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하여 그는 96편의 소설로 된 “인간희극”에 2천여명이나 되는 전형인물을 부각하여 등장시키고 부동한 소설의 부동한 환경에서 동일한 인물을 주인공으로, 혹은 차요인물로 재현시킴으로써 부동한 환경에서의 인물성격의 진일보 발전을 보여주면서 주제를 심화시켰으며 여러 소설을 하나의 정체—“인간희극”으로 유기적으로 통일시켰다. 하여 부동한 소설에서 보여준 부동한 력사환경은 의연히 프랑스 사회를 떠나지 않았음을 보여주면서 프랑스 사회 력사를 련결적으로, 거폭의 형상적화폭으로 보여주었다.       조정래의 대하소설 “아리랑”은 조선반도와 중국, 로씨야(구쏘련),  태평양 미국의 하와이, 지어 싸이판과 괌, 동남아세아, 일본까지 배경으로 해 20세기 초엽으로부터 1945년 광복까지 력사시에 일제의 폭압에 맞서는 우리 민족의 피어린 항일투쟁과 민족의 이민사, 끈질긴 생존과 투쟁을 다룬 민족의 대서사시이다.      조정래 작가는 지삼출, 대근, 송수익, 신세호, 방영근, 남용석, 감골댁, 보름, 수국, 정분, 김창봉, 정재규, 장칠문, 장덕풍, 김봉구, 방태수, 무주대, 임덕구, 주성춘, 손판식, 기생 옥향; 백종두, 주재소장 하야가와, 요시다, 쓰지무라 등 허구된 수많은 전형인물들을 부각하여 반세기나 되는 그 시대 력사화폭을 형상적으로 보여주었다.     또 허구된 인물의 허구된 이야기와 력사적으로 실존한 리승만, 김구, 의병장 임병서, 최익현, 임병찬 등의 진실한 이야기를 유기적으로 결합하는 력사반영의 예술수법으로 이 시기 민족의 력사를 아주 넓은 화폭으로 예술적으로 반영하였다.       일부 력사이야기는 작중 허구된 인물의 대화속에서 예술적으로 삽입해 보여주었다. 례하면 작중의 방영근과 남용석의 대화에서 당시 하와이에서의 반일단체와 이승만의 항일투쟁사를 정면으로 보여주었다.       일부 력사이야기는 사회배경을 소개하는 형식으로 직설적으로 보여주었다. 례하면 조선 서울의 3.1독립운동과 중국 룡정의 3.13반일운동, 의병장 홍범도가 만주에서 항일운동을 하다가 구쏘련에 전이한 과정 등 력사이야기는 작자가 사회배경을 소개하듯이 직설적으로 보여주었다.                조정래의 대하소설 “태백산맥”은 광복후로부터 6. 25 전쟁 전후를 배경으로 분단이후 여순반란사건을 시작으로 하여 한국 태백산맥을 따라 남으로 나가면서 지리산구를 근거지로 삼고 남로당(박헌영의 령도하에 있은 남조선 주재 조선로동당의 약칭임.) 유격대의 유격투쟁활동과 한국 계엄사령본부와 경찰대, 토벌대가 지리신지역 남로당유격대를 진압한 과정의 력사이야기를 폭넓게 보여주었다.        이 소설에서 작가 조정래는 “실화소설” 같은 력사반영의 예술수법으로 당시  염상진대장, 안창민대장, 하대치 등 유격대 두목과 골간들의 투쟁이야기를 주선으로 소설로서의 진실한 인물화폭을 그리면서 진실한 력사를 반영하는 예술수법을 쓰고있다. 진짜 력사와 예술의 혼연일치를 보여준 걸작이라고 할수 있다.        우선 작가는 실존한 력사인물들을 피도 있고 살도 있는 아주 전형화된 인물로 형상적이고도 생동하게 형상화해 유격대 투쟁과 정부군, 토벌대의 진압의 력사이야기를 반영했다. 작중에는 보성군 유격대 대장 염상진과 보성군당위원장 겸 후임 대장 안창민을 비롯한 하대치, 오판돌, 강동식, 이해룡, 고두만, 손승호, 강동기, 김임일, 이영생 그리고 계엄사령관 심재모, 신임사령관 백남식, 보성경찰서장 남인태, 토벌대장 임만수, 검찰총장 권승렬, 중부경찰서장 윤기병 등 실존한 전형인물들을 아주 성공적으로 부각하였다. “태백산맥”에서도 조정래 작가는 작중 인물의 대화를 통해 력사이야기를 보여주는 예술수법을 적지 않게 썼다. 례하면 작중인물  손승호와 김범우의 대화를 통해 백범 김구가 암살당한 력사사건을 보여주었다.         조정래 작가는 “태밴산맥”에서 허구된 인물의 허구된 에피소드를 양념처럼 많이 삽입해 독자들을 력사이야기를 감염력있께 읽게 흡인하는  예술수법을 보조적으로 썼다. 례하면, 염상구에게 강동기 안해가 장기적으로 강간당해 임신까지 한 에피소드, 허출세에게 외서댁이 강간당한 에피소드, 그외에도 작중 인물의 진한 사랑과 치정  에피소드 등을 들수 있다.        중국 조선족작가 리근전선생의 동일한 하나의 소설인 (상, 하집)에서,  조선의 작가 리기경선생은 "두만강" 에서  발자끄처럼 부동한 소설의 부동한 력사환경에서가 아니라 부동한 력사시기 환경에서 동일한 인물을 재현시키고 인물들을 혈연적, 사회적, 계급적으로  련결시키고 충돌시키면서 인물성격을 발전시키고 력사사건들을 유기적으로 련결시키면서 보여주고있다. 때문에 “인물재현”이라는 측면에서는 발자끄의 력사반영의 예술수법과 류사한 점이 있다. 하지만 “부동한 소설에서”와 “동일한 소설에서”의 부동한 력사시기에서 인물재현이라는데서 발자끄의 과 리근전선생의 는 력사반영의 예술수범이 서로 다르다는것을 알수 있다.      다음, 중국 작가 라관중의 에서 력사반영의 예술수법을 대조해 연구해본다 첫째,  라관중의 에서는 력사상의 실재인물들인 조조, 류비, 손권, 제갈량 등을 주인공으로, 주요하게 적벽싸움과 관도싸움 등 력사적전형환경과 력사인물과의 관계속에서 전형성격을 부각하면서 해당시기 력사를 반영하였다. 그러나 리근전선생의 에서는 주요하게 주인공 박천수, 박윤민 등을 비롯한 71명 인물들은 모두 허구된 인물들로서 춘황폭동, 5월폭동 등 력사사건과 천수동민란, 동맥휴학 등 허구된 사건과 허구된 인물관계속에서 부각하면서 해당 시기 력사를 형상적으로 반영하였다. 둘째, 에서 각 력사사건의 발생, 발전, 고조, 해결은 주인공에 의해 제약되고 추동되는 예술수법으로 력사사건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리근전선생의 에서는 력사사건에 력사인물 대신 허구된 작중인물을 바꿔넣거나 차요한 위치에서 참여시키면서 작중인물의 이야기, 회억, 대화속에서 자연스레 력사사건을 반영하였다.      때문에 사건과 인물관계가 력사적인것인가, 허구적인것인가 하는데서 라관중의 와 리근전선생의 는 력사반영의 예술수법이 부동하다.         다음, 조선 작가 천세봉의 와 대조해 력사반영의 예술수법을 연구해보면 허구된 전형인물형상을 부각하여 력사를 보여준 점에서는 력사반영의 예술수법이 류사하지만 일부 부동한 점도 있다. 첫째, 천세봉의 는 순전히 허구적인 사건들인 소작인동맹건립, 보돌공사장폭동, 박진우환갑식, 대검거참안 등을 통해 현재진 일가 5형제, 최선도, 최창국 등 인물형상을 부각하여 당시 력사정형을 반영하였다. 그러나 리근전선생의 에서는 허구된 사건외에도 력사적사건속에서 박천수, 박윤민 등 인물형상을 부각하고 당시 력사정형을 반영하고있다. 이런 예술수법은 리기영의 "두만강에서도 찾아 볼수 있다.      둘째, 천세봉의 에서는 전형적사회력사환경을 작자의 정면서술로 밝히지 않았고 자연환경도 “XX군 송하면 월하리” 등 허구적으로 모호하게 보여주었다. 그러나 리근전선생은 에서 작자의 정면서술로 사회력사환경을 밝히였으며 자연환경도 허구적인 “천수동”뿐만아니라 실재한 륙도구, 국자가 등을 삼고있다는 점에서도 다르다. 리깅영의 두만강에서도 제2대혁명자 "씨동"의 활동 자연환경은 두만강 량안의 조선 중북부와 중국 동만으로 삼고 있다.           총적으로 리기영선생과  리근전선생은 고금동서 명작들의 부동한 력사반영의 예술수법에서 정화를  섭취하여 계승하고 발전시켜 독특한 력사반영의 예술수법을 창조해냈다.         그럼 리근전선생의 에서 력사반영의 예술수법은 구경 어떤것인가? 첫째, 전형환경에서 전형인물을 부각하여 해당 시기 사회력사를 반영한 예술수법이다.         똘쓰또이는 자기 창작은 “인물형상을 부각할뿐만아니라 그 형상을 통해 력사를 보여주기 위한데 있다.”고 하였다. 리근전선생은 동서고금의 력사물명거작들의  력사반영의 예술정화를 섭취하여 “고난의 년대에서 륙도구와 천수동을 동북의 축영으로 형상화하고 그속에서 자기로서의 얼굴과 웃음, 말본새를 가지고 자기 신분에 알맞는 행위를 하는, 개성이 독특한 각이한 인물을 71명이나 형상적으로 부각하였다.  이런 인물들은 당시 전변하는 사회적계층의 어느 한 계층을 각각 대표하는 전형인물로 등장하면서 매개 인물들의 개인적운명의 발전속에 몰락하는 계층과 발전하는 세력간의 계급투쟁, 민족투쟁에 의한 력사적진로를 표시해놓았다. 하여 우리는 력사의 흐름에 따른 륙도구와 천수동의 변화와 그속의 인물성격의 변화를 통해 사회력사 제특성들의 변화를 통해 당시 력사 발전을 찾아볼수 있다.        이제 작중에서 전형인물들의 개성적얼굴들을 찾아보면서 그 전형형상이 당시 력사정형을 어떻게 반영했는가를 살펴보기로 하자.        주인공 박천수는 시대적제한성으로 하여 로동계급의 혁명리론으로 무장하지는 못했지만 부지런하고 성실하며 의협심과 결단성이 강하고 봉건통치배들을 반대하는 강의한 개성과 일반화정도가 높은 애국적농민의 전형형상으로 그려졌다. 그리고 순박하며 선량하며 의협심이 강한 한족농민 왕덕후, 말수 적고 심성이 곧은 김성녀, 착하고 어진 김명도, 강직하고 반항심이 강한 최창두를 비롯하여 장서방, 강도룡, 조월래 등 농민들의 형상을 개성적이고도 살아 움직이게 그려 봉건지주와 통치배들의 압박과 착취 밑에서 생활난을 껵다가 각성하여 반항하기 시작하는 당시 조선족과 한족 형제민족농민들의 력사적제특성을 예술적으로 재치있게 반영했다. 그외에도 조장희, 리광국 등 전형형상을 통해 당시 민족주의자들로 무어진 반일단체의 제 력사정형을 보여주었다. 또 비굴하고 탐욕스러우며 잔인하고 횡포무도하며 교활한 친일주구 오영길, 음탕하고 아첨을 일삼는 앞잡이 마상수, 탐욕스럽고 강직하며 량반의 체모를 중히 여기는 상인 최영세를 비롯한 매판자본가 김경필, 김만호, 팽국장과 향악지주 주천림, 김소래 등을 비교적 개성적으로 인물형상화하여 해당 력사시기의 자본가, 지주들이 일제와 봉건통치배들에 아부굴종하고 인민을 잔혹하게 압박착취한 시대적 제 특성을 잘 보여주고있다. 이밖에도 교활하고 잔인한 스즈끼총령사, 특무 고산, 경찰서장 고자끼, 친일주구 김목사도 비교적 성공적으로 형상화해내 그 부류인들의 죄악적력사도 예술적으로 반영했다.      작자는 이상의 늙은세대의 긍정적, 부정적인 인물형상들을 통해 주요하게 19세기말부터 20세기 10년대말의 력사와 그제반특성 및 각 계층 특성들을 반영하였다.      다음, 소설에서 이런 늙은세대에 의해 보여준 미적리상과 인민투쟁력사의 계승자로서 슬기롭고 용감하며 심중하고 강직한 당원 박윤민을 비롯하여 왕주, 김범도, 순희, 윤길, 영심, 귀동이와 큰동이, 당조직 지도자 리진과 안경림 그리고 명화와 기생 김벽선, 향화 등을 개성적으로 부각하면서 그들이 부정인물 오창수, 오창덕 및 일제놈들과의 갈등과 투쟁을 통해 1919년 5.4운동이후로부터 1945년 8.15해방이전 력사시기 당의 령도아래 조한 형제민족 인민들이 단결하여 진행한 반제, 반봉건 투쟁력사를 예술적으로 반영하였다. 그리고 작품 결말에 제3대 인물인 귀섭이 형상을 등장시킴으로써 조선족인민들의 투쟁력사는 계속됨을 암시해주고있다.        이런 3대에 걸친 수많은 인물형상체계의 중심에는 박천수와 박윤민이 련이어 서서 끌고나가고있으며 이들과 기타 인물들의 혈연적, 사회적, 계급적 련결과 갈등속에서 인물성격을 발전시키고 해당 시기 력사를 예술적으로 반영하고있다. 때문에 매개 력사사건은 동떨어진감이 없이 련결되여 독자들로 하여금 형상적이고도 체계적으로 매 시기 력사정형을 리해하게 하였다.       둘째, 작자가 정면서술한 력사환경(력사사건을 포함)에서 작중 인물이 활동하거나 작중 사건의 발전속에 력사사건을 삽입시키는 력사반영의 예술수법이다.        이런 력사반영의 예술수법으로 장백산봉금령반포와 개간국설치, 한족과 조선족 동북이주력사, 신해혁명, 1911년 룡정 력사환경, 룡정통감부 간도파출소와 일본령사관 설립, 3.13폭동, 20년대 반일단체활동, 1923년 대검거참안, 녕안위만군 탄약탈취 등 력사를 반영하였다.        이런 력사반영의 예술수법은 작자 정면서술의 지루함과 무형상성 그리고 작중 인물의 활동으로써 전반 력사환경을 제시하기 어려운 결함을 피면하고 장점을 취해 독자들로 하여금 피와 살이 있는 개성적인물들의 움직임을 여겨보면서 당시 력사정형을 완정하고도 형상적으로 감칠맛이 나게 알수 있도록 하였다.       셋째, 인물의 이야기, 회억, 대화속에서 력사사건을 보여주는 력사반영의 예술수법, 그리고 이런 제 수법과 작자 정면서술을 서로 결합시켜 력사사건을 반영하는 예술수법이다. 이는 작자가 작중에서 제일 많이 쓴 력사반영의 예술수법이라고 할수 있다.     이런 력사반영의 예술수법으로 제31장에서 윤길과 김성녀의 대화, 제32장에서 순희의 회상속에서 3.13폭동을 보여주었다. 김범도와 왕주, 윤민의 대화와 이야기속에서 경신년대토벌을, 귀동의 이야기에 의병단 및 왕청 배초구습격사건을, 스즈끼와 김벽선의 대화, 리진의 분석과 작자 정면서술로 일제 “만몽침략계획”과 9.18사변을 반영하고있다. 그외에도 선바위 부근에서 12만 5천원 탈취한 사건, 춘황폭동도 이런 력사반영의 예술수법으로 보여주었다. 그중에서 스즈끼나 친일주구 오창덕, 오창수와 같은 부정인물들의 대화, 이야기로 9.18사변의 내막이나 일제의 만몽침략야심, 일제의 “문치주의”와 “무단정치”의 본질을 드러내 보여준것은 력사제재 장편소설창작에서 거둔 창신적인 예술성취라고 본다. 이같이 부동한 장절에서 여러 인물의 대화, 회억, 이야기 그리고 작자 정면서술을 서로 결합시켜 력사사건을 반영함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딱딱하고 지루한감이 없이 다측면적으로 형상적인 력사교과서를 보는듯한감을 느끼게 한다. 이는 독자들의 다시각적형상을 통해 력사를 알려고 하는 심미적수요에 맞는 력사반영의 예술수법이라고 생각한다.       넷째, 력사적인물 대신 작중 허구적인물의 이름을 바꿔놓는 력사반영의  예술수법이다. 력사상 약수동토벌참안때 실제 존재한 항일렬사 김순희의 감동적사적을 반영하기 위해 작자는 제55장 “대참안”에서 렬사 “김순희” 대신 작중 윤길의 처 “백봉선”이란 허구된 인물을 바꿔넣고 등장시켰다. 이런 력사반영의 예술수법으로 춘황폭동, 5월폭동, 12만 5천원 탈취, 해란강대참안 등 력사를 핍진하게 반영했다. 이런 력사반영의 예술수법은 작중인물과 력사적인물, 작중 사건발전과 력사이야기를 유리시키지 않고 통일적인 전일체로 련결해 반영하였다.       다섯째, 인물의 설정과 인물의 신분, 활동경력, 인물이 처한 사회와 자연 환경 등은 모두 인물의 성격을 부각하고 생활론리에 맞으면서도 력사를 반영하기 위한데 복종시킨 력사반영의 예술수법이다.       작자는 1911년 룡정력사환경, 춘황폭동, 3.13폭동, 경신년대토벌, 반일단체활동, 의병단활동, 5.30폭동, 12만 5천원 탈취, 항일련군 항전투쟁 등을 반영하기 위해 주인공 박윤민을 두만강변으로부터 륙도구 자선학교, 천수동, 륙도구술공장, 할빈, 봉천, 왕청과 의란 산속, 녕안현, 중쏘변경, 연안 등지로 번개같이 드나들게 하였다. 그리고 신분도 배사공, 교원, 로동자, 지하당원, 의병단 부단장, 항일련군 군관, 지위 서기로 바뀌고있다. 이는 다 생활론리에 맞게 박윤민이란 인물성격을 부각하면서도 력사반영의 수요에 따라 그의 신분도 변화시키면서 중요하거나 차요한 위치에서 력사사건에 참가하거나 참여시키면서 박윤민이란 인물의 대화, 회상, 아야기 등으로 력사를 반영하는 예술수법을 쓴것이다. 이는 동일한 소설의 부동한 력사사건과 환경에 동일한 인물을 재현시키는 재치있는 력사반영의 예술수법이다.       이밖에 짙은 지방민족생활색채, 흥미진진한 민담, 민요, 속담 등의 광범하고 적절한 응용과 향토적이고 형상적인 언어 등은 작품의 감염력을 높여 작중 력사반영의 예술수법들의 효과성을 높이는 보조적인 력사반영의 예술수법과 같은 작용을 놀았다. 허나 옥에 티라고나 할가.  하집에서 작중 인물의 회억, 이야기, 대화에 의한 력사반영의 예술수법을 지나치게 많이 썼기에 력사반영의 형상성을 약화시켰다고 본다.       필자의 수준제한으로 하여 저명한 중국 조선족작가의 에서 력사반영의 예술수법상 거둔 예술성취를 제대로 긍정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력사반영의 예술수법을 더욱 깊이 연구한다면 력사제재 장편소설창작에 매우 큰 방조를 주리라고 믿는다.                                          
50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29) 댓글:  조회:2244  추천:1  2016-01-13
                       5. 일제의 쇠 발굽 밑에서 신음하는 용정        두만강변의 버드나무들은 발가벗은 채 추운 초겨울 바람에 몸부림 치고 있었다.        기준은 관준 형님이 무사히 쪽배에 앉아 두만강을 건너간 후에야 시름 놓고 발길을 돌렸다.        그는 반나절이나 걸어서야 명동교회당에까지 이르렀다. 숱한 신자들이 교회당에서 꾸역꾸역 밀려나오고 있었다. 금방 예배가 끝난 것 같았다.        기준은 시장기가 엄습하여 견딜수 없었다. 나중에는 더 걷기 힘들게 모질 지쳤다.        그는 비틀거리면서 명동교회당에 들어갔다.         한창 예배당에서 청소하던 하규가 빗자루를 든 채 반갑게 맞이했다.         “아니, 참 오랜만이구만. 어서 가서 점심이나 들게나.”         기준은 맥없이 문안하며 하규를 따라 교회당 위방에 들어가 앉았다. 정지의 아줌마가 점심상을 들여오자 기준은 하규와 함께 맛나게 식사하면서 허기진 배를 달랬다. 기준은 숟가락을 놓고 숭늉으로 입가심을 한 후 물었다. “그간 사위 최봉설이랑 왔다 갔소?” 하규는 밥상을 물리고 주위를 둘러보더니 나직이 말했다. “군자금과 군량을 얻어가려고 며칠 전에 왔소.” 기준은 앉음걸음새로 하규한테 다가앉았다. “혹시 최봉설은 유격대 소식을 모르오?” 하규는 기준에게 바깥으로 나가자고 눈짓했다. 기준은 하규를 따라 스적스적 뒷동산에 올랐다. 하규는 기준을 되돌아보면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러잖아도 인편에 기별하자고 했네. 최봉설은 항일유격대와 연계가 있는 모양이더군. 자네 혹시 유격대에 들어갈 생각은 없소?” “유격대?” “음.” 도척 같은 기준이도 적이 놀랐다. “그럼 최봉설이 유격대 아니오?” “쉿- 누가 듣겠네.” 하규는 식지를 입에 대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귀속 말을 했다. “이전에 말하잖았소? 내 사위는 후에 적기단에 들어갔다가 김 대장이 영도하는 항일유격대로 들어갔네. 최봉설의 말에 의하면 자네 같은 힘장사가 필요하다오.” 기준은 한참 궁리하더니 도리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내 전번에 물레방아골 원삼이네 집에 들렸을 때오. 지주들이 소작료를 빡빡 걷어갈 때면 유격대에 가서 총을 들고 그 놈들을 몽땅 쏴죽이고 싶습데. 그런데 내 가면 우리 처자들은 누굴 믿고 살겠소? 황차 성칠 형님도 행방불명이 돼 아버지가 날마다 형님 생각에 한숨만 푸푸 쉬면서 세월을 보내오. 아버지는 항상 우리를 보고 고향에서 한길수나 일본 놈들과 등져서 고향에서 살지 못하고 간도로 들어왔는데 여기서 새 원수를 맺지 말라고 타이르곤 했소. 에이, 이 놈의 지루한 고난의 세월이 언제면 끝나겠소?” 기준은 의로운 효자니까 아버지의 명을 어길 수 없을게 뻔했다. 하규는 더 말해봤자 부질없는 노릇이라는 걸 짐작하고 입을 꾹 다물어버리었다. 그때 기준이 입을 열었다. “혹시 김 선생님은 우리 형님 소문을 듣지 못했습둥?” 하규는 도리머리 질 하다가 뭔가 스쳐지나가는 것이 있는 모양으로 머리를 들어 기준을 마주보았다. “혹시 김 대장이 자네 형님이 아닌지 모르겠네. 김 대장은 얼굴모색이 딱 자네를 닮았더란 말이오.” “김 대장이?” 기준은 귀가 번뜩 뜨여 다가앉으면서 물었다. “이름이 뭐라오?” 하규는 기억을 더듬으면서 “전번에 우리 사위 봉설과 함께 왔을 때 성칠이라고 하지 않고 김인섭이라고 한 것 같은데.” 하고 말했다. 기준은 다소 실망하였지만 그래도 일루의 희망을 품고 한 가지만 더 물었다. “그래 김 대장이랑 어디에 거점을 잡고 있다고 하더군.” 하규는 기준을 믿기에 곧이곧대로 말해주었다. “유격대는 딱 어느 곳에 머물러있지 않고 이동성이 강한가 봐. 어쨌든 이 동만 지구에서 활동하는데 어떤 때엔 용정에도 오고 진수해 부근에도 오구 왕청 쪽에도 가구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니까 종잡기 힘드네. 전번에는 훈춘에 가서 최현 대장을 만난 거 같데.” 기준은 호기심이 가 한 발자국 더 다가들며 물었다. “훈춘은 최현 대장네 고향이 있지 않소?” “그렇지. 훈춘 경신의 장고봉은 쏘련 홍군이 일본 놈들을 처음 맞붙어 싸운 곳이지. 전투가 벌어진 곳이지. 일본 놈들이 중쏘조 접경지인 훈춘 경신에서 제일 높은 산봉오리인 장고봉 부근에서 쏠락거리니까 쏘련 홍군들이 가만 놔둘 수 있겠어? 쏘련 홍군은 자기네 국경을 넘보는 일본 놈들을 여지없이 족친게지.” “김 대장이 진수해 부근에는 어째 갔을까?” 김하규는 은수염을 슬슬 매만지면서 “아마 유격대 군량을 얻으러 돌아다녔다는 거 같소. 피뜩 들어보면 자네네 소서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도 돌아다닌 거 같네. 전번에 내가 사위 보고 그 많은 군량을 어디다 두는가 근심했소. 진수해 부근 어느 토성을 한 집에 뒀다가 먹을 만큼 산에 날라 간다고 합데.” 하고 말했다. “예? 그럼 혹시 우리 함흥촌의 토성 안 집이?” 기준은 적이 놀랐다. “그 토성 안 집은 농사도 짓지 않지만 숱한 쌀을 날라 들였소. 무슨 장사를 하는지 숱한 낯모를 사람들이 드나들구.” 김하규는 도리머리 질 했다. “진수해 부근에 토성안집이 숱한데 딱 자네 함흥촌 토성 안 집인지 어찌 알겠소?” 기준은 뒷덜미를 쓱쓱 긁었다. “글쎄. 진수해 부근 토성 안 집이라고 했는데 진수해 토성안집은 기생집이니까 아닐 거고. 조개덕의 두 토성안집은 한족지주니까 아닐 거고. 소서구의 장지주네 토성 안 집에는 누구도 다니는 게 없고. 대체 어느 집일까?” 하규는 기준에게 부탁했다. “내 한 말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구 가만히 찾아보라구. 다음에 사위가 오면 김 대장을 알아볼게. 혹시 김 대장이 자넬 아는가도 알아보지.” 기준은 하규의 두 손을 잡고 신신당부했다. “꼭 우리 성칠 형님 어데 있는가 알아봐 줍소. 겨울이면 내 용정에 와서 목수 일을 하겠으니까. 드문드문 찾아오겠소. 김 대장이 내 형님이 옳으면 용정 장마당에 와서 나를 알려줍소.” “그러지.” 기준은 할 말은 많았지만 큰집 소값을 만들어야 하겠기에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하규는 기준이 교회당 앞의 징검다리를 건너 떠나갈 때까지 바래주었다. “종종 오게나.” 기준은 허리를 굽히면서 “편안히 계십시오.” 하고 작별인사를 하고는 용정을 바라고 걸음을 다그쳤다. 육도하를 따라 서쪽으로 내리 걷고 걸어 용정에 이르렀을 때는 초겨울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다. (시내 큰길에서 목수라는 걸 눈치 채면 좋지 않은데. 혹시 똘만 같은 밀정 놈들이 암암리에 뒤를 밟으면 큰일 날게 아닌가.) 기준은 버들방천을 두리번거리다가 문뜩 꾀가 떠올랐다. 그는 마른 삭정이를 주어다가 목수도구상자 위에 얹어 목수도구를 가리어버렸다. 제창 목수가 아니라 땔나무장사군 같아 보이었다. 그는 땔나무로 가린 목수도구상자를 지고 용정 시내로 스적스적 걸어 들어갔다. 그가 장마당골목에 들어서자 어떤 나그네가 다가와 흥정을 걸었다. “땔나무를 얼마에 팔겠소?” 기준은 손사래를 쳐댔다. “아니, 이건 임자가 있소.” 그는 장마당에 목수도구상자를 내리워놓고 일거리를 찾기 시작했다. 그런데 땅거미가 어둑어둑 져 가는데 일을 시키려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장마당에는 장군들과 일거리를 기다리는 막벌이일군들이 서로 마주 보고 서있었다. 옆에서 온돌을 손질할 일거리를 기다리던 한 사나이가 기준을 보고 “여보, 땔나무를 팔지 않겠소?” 하고 물었다. “아니, 이 땔나무는 팔게 아니요. 임자가 있소.” 그 사나이는 히죽이 웃으면서 “보나 마나 목수 일을 기다리는 거 같은데 땔나무를 파오.” 하고 한술 더 떴다. 그 말에 기준은 별수 없이 “그럼 가져가오.” 하고 시원히 땔나무 단을 내놓았다. “얼마요?” 기준은 어두워진 시내 골목을 둘러보면서 “난 먼 외지에서 와서 잘 데도 없소. 하루 밤 자면 안 되겠소?” 하고 물었다. “거 좋소. 지나가던 행인이라도 쉬게 해야 하는데. 어험, 이거 땔나무를 공 가져 가는 거 같아 미안하오. 오늘 저녁과 내일 아침을 잘 대접하지.” 기준은 땔나무를 목수도구 위에 얹어 지고 따라가면서 감사하다고 했다. 그 사내는 도끼를 쥐고 걷는 기준을 돌아보면서 “우리 알고 지내기오. 난 세린하에서 온 정성문이요.” 하고 손을 내밀었다. 기준은 초면강산의 정성문에게 제대로 말할 수 없었다. “난 함흥에서 온 허동팔이요.” 그들은 어려운 세상살이를 얘기하면서 정성문의 손바닥만 한 집에 들어섰다. 집안에서는 십대중반의 남학생이 한창 밥상에 마주 앉아 공부를 하고 있었다. “내 아들 정규상이오. 인사해라. 함흥에서 온 삼촌이다. 얘는 징금 대성중학교를 다니고 있소.” 정규상은 보던 책을 내려놓고 우쭐 일어나 허리를 굽히면서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기준은 넉가래 같은 손으로 규상의 어깨들 다독이면서 “오, 그래. 얼굴이 길쭉한 게 정말 영특하게 생겼구나.” 하고 덕담을 해주었다. 저녁에 그들은 죽 한 사발에 시라기국 한 사발씩 들고 상을 물렸다. 기준은 공부를 하는 규상을 보자 이전에 상순이랑 상길이랑 공부를 하고 싶어 하던 일이 떠올랐다. 그는 정성문에게 용정의 학교 형편을 두루 알아보았다. “이 학생이 다니는 아까 어느 학교라던가. 월사금이랑 많이 드오?” 정성문은 담배를 붙여 물며 한숨을 후 내쉬었다. “많이 드오. 쟤가 다니는 대성중학교는 옛날에 애국지사 이상설이 차린 서전의숙자리요. 그런데 이상설지사가 떠나간후 일본 사람들이 들어오면서 일어를 억지로 배우게 한단 말이요.” 기준은 한숨을 후~ 내쉬면서 “일본 사람들이 진짜 억지를 부리는구먼.” 하고 동을 달았다. “일본 사람들은 진짜 노화교육을 한단 말이요. 월사금을 어찌나 많이 받는지 모르오. 내 글쎄 온돌쟁이로 돼서 날마다 낯에 숯 검댕이 칠을 하면서 구들을 뜯어 고쳐주고 서도 얘 월사금을 내구나면 우리 부자간이 입 살이 하기도 힘드오.” 그 말에 기준은 속으로 상순과 상길을 공부시키지 못 하겠구나 생각했다. (에이고, 이 세월에 배가 불룩한 여편네가 또 애를 낳으면 입이 하나 더 생겨서 어쩌는가? 아직 큰집 소 값도 만들지 못했는데.) 그러나 기준은 허리띠를 조여 매고서라도 막내아들을 공부시키고 싶었다. “용정에 그 학교보다 월사금이 더 눅은 데는 없소?” 정성문은 한숨을 후~ 내쉬면서 용정의 학교들을 죽 얘기해주었다. “우리 조선에 향학열이 불어칠 때 용정에는 십여 년 전에 이상설 등 조선의 지명인사들이 세워놓은 서전의숙이 있었소. 1906년도에 서전의숙이 갓 섰을 그때만 해도 몽땅 조선선생님들이 배워줬기에 월사금도 아주 눅었소. 서전의숙은 중국에세 세운 첫 조선족학교요. 서전의숙이 일본 놈들에 의해 불타버린 후 그 터전에 대성중학교라는 학교를 세웠는데 일본 사람들이 관리하면서부터 월사금이 엄청 많아졌소.” 정성문은 숭늉그릇을 들어 꿀꺽꿀꺽 마시더니 뒤 말을 이었다. “용정에는 대성중학교를 내놓고서도 저 대성학교앞쪽에 광명여자중학교가 있고 영국덕에 은진학교가 있소. 룡문교 서쪽에는 또 동흥학교가 있소. 그런데 월사금은 거의 피장파장이요.” 기준은 정성문의 말을 들으면서 속으로 먹물을 먹은 양반 같구나 생각했다. “당신도 공부를 많이 한 거 같소. 세상 아는 것도 많고.” 정성문은 아주 겸손하게 말했다. “난 겨우 원산에서 중학교를 졸업했을 뿐이오.” “양?” 기준은 눈이 휘 동그래졌다. “아니, 지금 난세에 중학교를 나왔으면 대단한 유지인사지우. 허허. 눈이 있어도 태산을 알아보지 못 했구먼 그래.” “사실 내 할아버지 때부터 우리 가문에는 자식을 너무 공부 시키고 세상을 널리 보면 고향과 부모 곁을 떠난다고 소학교 정도만 공부시키는 집안의 전통이 있었소. 그런데 내 아버지만은 나를 큰 뜻을 세우고 큰 일을 하라고 고향 산골에서 머나먼 원산중학교에 보내 공부를 시켰소. 그런데 정말 고향을 떠나 이렇게 먼 간도에 올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였소.” 기준은 그 말을 듣고 고향생각이 저절로 나서 한숨을 푸 내쉬었다. “우린 어디 공부나 하고 고향을 떠났소. 다 일본 놈 새끼들이 우리 고향에 쳐들어오는 바람에 핍박에 의해 고향을 떠나왔지.” 정성문이 제꺽 동을 달았다. “정말 일본 놈 새끼들이 아니면 우리 무슨 조선 고향을 떠나 부모형제와 이별해서 이런 간도에 와서 고생하겠소.” 그때 정규상이 끼어들었다. “일본 선생들은 정말 말이 아닙니다. 우리 조선말만 하면 대나무패쪽을 하나 빼앗아갔습니다. 한 학생에게 패쪽 다섯 개씩 나눠줬는데 다 빼앗기면 개패를 목에 걸어놓고 구더기 욱실거리고 구린내 나는 변소 청소를 시킵니다.” 정성문이 동을 달았다. “학생들은 서로 개패를 걸지 않고 변소 청소를 하지 않으려고 누가 조선말을 하기만 하면 서로 물어먹으면서 제꺽 패쪽을 빼앗아 가질 내기 한다오.” “에이, 일본 놈들은 우리 고향에서도 학교를 세우고 그런 짓을 한답데. 그 놈들은 못하는 짓이 없소.” 그들 둘은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었다. 그들은 나직이 이 말 저 말 하다가 기름등잔불을 빌어 밥상에 마주 앉아 공부를 하는 규상을 보고 지장을 주지 않으려고 일찍이 잠자리에 들었다. 이튿날 아침 죽을 먹고 숟가락을 놓기 바쁘게 정규상은 책보를 싸들고 학교로 떠나갔다. 기준은 문께로 내려가 목수도구를 챙기다가 부엌 쪽을 둘러보면서 말했다. “이 집에 식장이 없구먼. 그릇을 저렇게 부엌이마에 쭉 널어놓았다가 쥐며느리라도 들어가면 음식을 어떻게 먹겠소? 내 식장을 짜 줄게.” 정성문은 대수롭잖게 머리를 절레절레 가로 저었다. “언제 식장을 다 놓고 살겠소?” 기준은 사람 좋게 웃으면서 “내 하루 밤 신세를 졌으니 공짜로 짜줄게.” 라고 했다. 정성문은 손사래까지 저었다. “관두오. 식장을 짤 널도 없소.” 기준은 목수도구상자를 둘러메면서 “그럼 널을 얻어놓으면 아무 때나 짜줄게.” 하고 말했다. 그들은 어깨 나란히 장마당에 일거리를 찾으러 갔다. 기준이 정성문과 이 말 저 말 하면서 웬 큼직한 대문 앞을 지나갈 때였다. 웬 일본 경찰이 얼룩사냥개를 데리고 놀고 있지 않겠는가. 기준은 속이 꿈틀해 머리를 숙이고 황급히 파출소 앞을 지나갔다. 경찰과 멀어지자 기준은 간신히 머리를 들면서 “정 선생, 저게 혹시 경찰국이 아니오?” 하고 물었다. 정성문은 “저게 용정 통감부 간도파출소라는데요. 금방 얼룩사냥개를 데리고 놀던 놈은 악명 높은 소장 사이또란 놈이오.” 하고 일러주었다. 그 말에 기준은 사이또란 놈의 낯이라도 익혀 둘 듯이 뒤를 힐끔 돌아보았다. 코수염쟁이 사이또 소장은 꽤나 훤칠하게 생긴 놈이었다. “에이, 저 놈들이 여기에 1907년도에 파출소를 세운지 이젠 20년도 훨씬 넘었소. 저 놈들은 이층짜리 용정 영사관 울안 지하 감방에서 수많은 항일투사들을 고문하구 살해하고 있소. 사이또 소장 놈은 이 일대에서 악명이 자자한 악당 우두머리 놈이요.” 정성문의 말을 듣고 기준은 몸서리쳤다. 기준은 “일본 놈들의 용정영사관이란 건 뭐 하는 데요?” 하고 물었다. 정성문은 장마당주위를 살피면서 나직이 말했다. “한마디로 일본 놈들의 간도통치중심일세. 저 놈들이 용정 영사관을 지을 때 어쨌는지 아오? 제일 처음에는 간사한 일본 놈들이 부패 무능한 만청정부와 용정에 소가죽만한 땅만 달라고 했다오. 그래서 고만한 땅이야 주지 못하겠는가고 만청 길림성정부 관원이 제꺽 대답해버렸지. 그런데 간사한 일본 놈들은 소가죽을 실오리만큼 오려내 이어서 소가죽 줄을 쭉쭉 늘여놓고 지금 영사관을 지을 널다란 땅을 내놓으라고 해서 가졌다오.” 기준은 억이 막혀 입을 딱 벌렸다. “보아하니 당신은 내처럼 일본 놈들을 아주 미워하는 거 같구먼.” 성문은 기준을 돌아보았다. “당신을 믿고 솔직히 말하는데 난 강원도 원산중학교를 다닐 때 나팔을 불었소. 후에 독립군을 알게 되면서 독립군 나팔수로 산으로 들어갔다가 일본 놈들의 지명수배에 배기지 못해 간도에 도망쳐 왔소.” 기준은 머리를 끄덕였다. “당신이나 내나 마찬가지 신세구만. 난 고향에서 일본 놈의 개다리를 괭이로 찍어 죽이려다 죽이지도 못 하고 고향을 떠나 여기 간도로 도망쳐 왔소.” 정성문은 왼손에 구들 긁개를 바꿔 쥐더니 기준의 손을 굳게 잡았다. “후에 우리 손을 잡아보기요.” 기준은 사위를 둘러보며 나직이 말했다. “길바닥이라 길게 말하지 못하겠는데 후에 자주 만나서 속심 얘기를 하기요. 일본 놈들을 조선과 간도 땅에서 몰아내지 않고선 잘 살 날이 없소.” 정성문은 믿음에 차 기준의 손을 잡고 머리를 끄덕이면서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었다. “언제 저놈새끼들을 다 없애버리겠소.” 장마당에 간 후 거의 둬 식경이나 초조하게 기다렸는데도 기준의 손을 비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한참 후에 웬 만또를 입은 뚱뚱한 한족사내가 기웃거리면서 오더니 구들긁개를 쥐고 있는 성문을 보더니 멈춰 섰다. “따캉(구들) 손질했소?” “쓰아(예.)” “껀 워 쩌우바(날 따라가자).” 정성문은 기준을 돌아보고 “후에 장마당에서 다시 만나기오.” 하고 작별인사를 하고 한족사내를 따라 떠나갔다. 기준은 반나절을 기다리다가 일거리가 없자 집에 해산달이 된 사련을 두고 온 것이 적이 근심됐다. 게다가 통감부 파출소 앞을 지나다가 사이또 소장 놈을 본 후 용정에 한식경도 더 서 있고 싶지 않았다. 기준은 장마당에서 해산할 아내에게 미역국을 끓여 먹이려고 마른 멱을 좀 사 목수도구 상자 안에 넣어 둘러메고 져가는 땅거미를 밟으면서 집으로 부랴부랴 돌아왔다. 6. 가난한 집 딸 해가 진지도 몇 식경이 지난 후에야 기준은 비칠거리면서 겨우 소서구에 있는 집에 들어섰다. 그때 집안에서 애기 울음소리가 자지러지게 났다. “에이고, 이 살기 바쁜 세월에 우리 가난한 집에 태어나서 또 어떻게 한뉘 고생하겠느냐?” 기준은 중얼거리면서 집안에 들어서자마자 애기에게 젖을 물리고 누워 있는 사련에게 “수고했소.” 하고 인사하고 나서 물었다. “사내요? 계집애요?” 사련은 맥없이 “딸애요.” 하고 대답했다. 그 말에 기준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면서 중얼거렸다. “입에 풀칠도 하기 어려운 세월에 입이 하나 더 생겨서 어찌겠니?” 사련도 갓난 애기를 내려다보며 “글쎄 말이요. 애를 낳으라는 며느리는 애를 낳지 못하고 시어미 늦둥이를 낳다니? 어이고, 어처구니 없어요.” 하고 중얼거렸다. 기준은 아래 방을 내려다보며 월금에게 “넌 목수도구 상자 안에서 멱을 꺼내 멱국이나 끓여라.” 하고 당부했다. 월금이 위방에 놓은 목수도구 상자 안에서 미역을 꺼내 들고 정지로 나가자 며느리 새금이 가마를 부시였다. 상순은 애기를 보고 좋아 생글방글 웃으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요거, 아이고, 오물오물 젖을 빠는 거 봐라. 야~ 내한테도 여동생이 있어. 야~ 좋다야.” 기준은 상순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응, 그래. 상순에게 여동생이라도 있어야 하지.” 하고 장해했다. 한참 뭔가 궁리하던 기준은 “애 이름을 금옥이라고 짓기요.” 하고 말했다. 사련은 얼굴에 희색을 띄우면서 쌔근쌔근 자는 갓난애를 안고 안간힘을 쓰면서 일어났다. “금옥아, 아~ 그~ 딱. 우리 금옥이 참 귀엽구나.” 옆에 있던 상순은 손뼉까지 치면서 좋아 야단쳤다. 기준은 사련의 손에서 금옥을 받아 안고 손 그네를 태워주면서 놀았다. 사련은 딸을 보고 만면에 춘풍이 흐르는 기준을 보고 무거운 입을 뗐다. “여보, 저 아래 주현경이 월금에게 혼사 말을 하러 왔습디다. 뭐 망석이란 박씨 총각이라 했소.” 정지에서 월금은 미역을 씻어 가마에 넣으며 부모가 주고받는 말을 듣고 가슴이 당장 튀어나올 듯이 콩콩 뛰었다. “그래 총각은 어떻소?” “인기는 잘 썼소. 튼튼한 게 농사도 잘 지을 거 같고.” “가문은?” “당신이 없어 자상히 물어보지 못하고 보냈소. 피뜩 들으니 여주 박씨 네 셋째아들인데 집안 내력이 괜찮은 거 같소.” “음.” 그때 위방에서 한숨소리에 뒤이어 사련의 목소리가 나직이 들리었다. “그런데 장가갔는데 반년도 안 돼 색시가 급병으로 죽었다오.” “뭐라고 그럼 홀아비지 않소?” 위방 안에서 씩씩거리는 거친 숨소리에 뒤이어 땅방울 같이 을러메는 고함소리가 들리었다. “안 되오. 딸을 시집보낼 데 없다고 홀아비와 혼사 말을 하겠소? 이 혼사 말은 절대 안 되오!” 고함소리에 갓난 애기가 놀라 “응아~ 응아~” 하고 자지러지게 울었다. “응~ 금옥아, 울지 마라. 애를 여기 주구 좀 조용조용 얘기하오.” “개 소릴 치지 말라. 그 자리로 딱 잘라 버릴 게지. 뒤를 질질 달게 뭐야?” “당신 오면 보자고 했소.” “주현경이 그 놈 새끼, 우릴 어떻게 보고 홀아비를 다 중매한단 말이냐?” 월금은 미역국을 끓이면서 눈물을 하염없이 줄줄 흘리었다. 두 볼을 타고 흐르는 뜨거운 눈물방울은 가마 안의 미역장국에 방울방울 굴러 떨어졌다. 이튿날 기준이네 딸을 보았다고 기별하자 웃새집과 아래사랑집에서 갓난애를 보러 왔다. 병완은 위방에 앉아 한참 몸을 녹인 후 두 손을 내들면서 “막내손녀를 어디 좀 안아보자.” 하고 기뻐 어쩔 줄 몰라 했다. 아버지가 금옥을 안고 반가워하는 모습을 보면서 기준과 창준은 마주 보며 만면에 웃음을 지었다. 기준은 “성칠 형님이 소식이 있을 거 같소. 하규가 그러던데 항일유격대 대원들이 오랑캐령에서 용정 일본 놈들이 조선에 날라 가는 쌀 수레를 습격한 적이 있었답꾸마.” 병완은 한숨을 후 내쉬었다. “허, 아무 때건 성칠이 집에 찾아오겠지.” 기준은 병완을 보고 “저 토성 안 집이 성칠 형님과 뭇근 관계있지 않는지 모르겠습꾸마.” 하고 말했다. 창준은 “그게 무슨 소리냐? 토성 안 집은 장지주가 조선 양아들에게 지어준 집이잖니?” 하고 물었다. 기준은 “형님이 아마 토성안 집 인삼이네 집으로 드나드는 것 같소. 유격대 양식이랑 인삼이네 집에다 숨겨둔 것 같소.” 하고 말했다. 창준은 머리를 끄덕였다. “음~ 글쎄 이상하게 토성 안 집에 숱한 사람이 드나든다 했더니.” 병완은 곰방대를 물고 뻑뻑 빨다가 “언제 인삼을 찾아가 물어보자. 성칠을 찾겠는지.” 하고 말했다. 창준과 기준은 머리를 끄덕였다. 정지에서 지새금과 웃새집 맏며느리는 점심준비에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돋았다. 소서구 골 안에서는 눈보라가 윙윙 휘몰아쳤지만 집안에서는 웃음소리가 멎지 않았다. 기준은 아버지를 보고 “저 아래 집 주현경이 남자애까지 달린 홀아비를 월금에게 혼사 말을 하던데 어찌 하겠는지 모르겠습꾸마.” 하고 근심을 터놓았다. 창준은 도리머리를 가로 저었고 병완은 갓난 금옥을 기준에게 안겨주면서 말했다. “사람만 좋으면 돼. 총각이라고 다 좋고 홀아비라고 다 나쁘겠느냐?” 기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벽쪽으로 머리를 돌려 외면했다. 며칠 후 눈보라가 사납게 휘몰아치는 엄동설한을 무릅쓰고 주현경이 진짜 그 박씨 네 젊은이를 데리고 혼사 말을 하러 또 왔다. 기준이 흘끔 보니 젊은이는 길쭉한 얼굴에 꽤나 패기가 넘쳐 보이었다. 그러나 그는 주현경을 보자 눈알을 부라리며 노발대발했다. “자네 아는가? 혼사 말은 잘하면 술이 석 잔이고 잘못하면 칼이 석 자루라는 거?” 기준은 당장 주현경을 잡아먹을 듯이 펄쩍 뛰었다. “자네 나를 어떻게 보고 홀아비를 데리고 와서 혼사 말을 하오? 이 혼사 말은 아예 꺼내지도 마오.” 기준은 정지 조왕 쪽으로 두 다리 사이에 머리를 파묻고 앉아있는 월금한테 머리를 돌리며 쏘아보았다. 주현경이 머리를 쳐들었다. “당자끼리 마음이 들어 하는 거 같은데 허락하오.” 기준은 주먹으로 구들을 탕탕 치면서 주현경을 쏘아보았다. “당신, 정말 나를 기를 채워 죽일 예산이오? 당장 저 홀아비를 데리고 가오. 도끼로 족대기를 찍어 버리기 전에 썩 물러가지 못 할까!” 범처럼 펄펄 날뛰며 고래고래 고함치는 기준을 보고 주현경은 어이없다는 듯이 도리머리 질 하면서 박범석를 데리고 자리를 떴다. 기준은 손님들이 떠나간 후 월금을 닦아세웠다. “얘야, 아버지도 널 생각해 하는 말이야. 처녀인 네가 신랑감이 없다고 홀아비한테 시집가겠느냐? 만약 저 사람들이 다시 오면 이번에는 너도 싫다고 똑똑히 말해라. 알만하니?” 월금은 아버지의 독살에 겁을 집어먹고 머리를 수기면서 끄덕였다. 옆에서 사련은 기준에게 한마디 했다. “여보, 월금이 이젠 나이도 어리지 않은데 신랑감이 나졌을 때 주기요.” 기준은 그 소리에 세 길 네 길 펄쩍 뛰었다. “그 주둥아리를 다물지 못할까? 이 혼사 말은 절대 안 되오.” 며칠 후 주현경은 이번에는 박범석의 아버지와 형 둘까지 데리고 또 찾아왔다. 기준은 곰방대에 담배를 쑤셔놓으면서 딱 잘라 말했다. “어째 또 왔는가? 이 혼사는 절대 안 되오. 내가 동의하지 않는 한 우리 둘째딸을 데려가려니 하지도 마오.” 박범석의 아버지는 희죽이 웃으면서 인사를 드렸다. “사돈어른, 애들이 서로 좋아하는 거 같은데 오늘 매듭을 지읍시다.” “어, 어. 누가 당신과 사돈을 맺는다오. 바꿔 놓고 당신이면 좋은 제 딸을 홀아비한테 주겠소? 흥, 염치도 소 볼기짝 같소. 정말.” 상우는 혼사 말에 삐치지는 못하고 바깥에서 서성거리면서 위방을 들여다보았다. 그런데 박범석의 아버지는 염치를 불구하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그럼 이 집 딸 말이나 받아보고 그만두든지 어찌든지 하는 게 어떻습니까?” 그 말에 기준은 자신 있게 대답했다. “물어 보겠으면 물어보오.” 그는 정지를 내려다보면서 월금한테 물었다. “네 의향은 어떠냐?” 월금은 머리를 두 무릎 사이에 파묻고 쳐들지도 못했다. “얘, 어서 말해라!” 월금은 귀밑까지 빨개나면서 쥐구멍으로 들어가는 소리로 겨우 말했다. “모르겠습니다.” 기준은 자기 귀를 의심했다. “뭐라? 네 지금 뭐라니? 싫으면 싫다고 딱 찍어 말해라.” 월금은 용기를 내서 머리까지 들고 똑똑히 말했다. “모르겠습니다.” 기준은 성이 꼭뒤까지 치밀어 야단쳤다. “에이, 한뉘 고생할 연이라고. 시켜준 말도 온전히 못하니?” 그때라고 박범석의 아버지는 좋다고 마구 떠밀었다. “봅소. 싫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건 좋다는 말입니다. 새기 어떻게 내놓고 제 신랑감을 좋다고 하겠습둥?” 박범석의 아버지는 더 염치없이 나왔다. “얘, 가시부모에게 절이나 해라.” 그러자 기준은 손사래를 치면서 벽 쪽으로 돌아앉으면서 마구 욕설을 퍼부었다. “우리 집안을 깔보지 마오. 우린 2천년전부터 조선을 천년 동안이나 쥐락펴락하던 신라 경순대왕 왕족의 후손이오. 아무리 신랑감이 없으니 좋은 제 딸을 홀아비한테 줄 거 같소? 흥!” 박범석은 자존심이 상했지만 아버지 명을 어길 수 없어 엉거주춤 일어났다. 그는 벽 쪽으로 돌아앉은 기준의 등 뒤에 대고 “가시아버지, 절을 받으십시요.” 하고 말했다. 기준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고래고래 고함쳤다. “누가 절을 하라고 했소? 괜히 절값을 내라고 떼질 쓰지 마오.” 허나 박범석은 자존심을 꺾으면서 기준의 잔등에 대고 절을 꾸벅 했다. 박범석의 아버지는 싱겁게 떠들어댔다. “됐소. 이젠 우린 사돈 간이 됐소. 이제 택일해서 결혼잔치만 하면 되오.” 기준은 박범석 네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코웃음 쳤다. “흥! 별난 사람들을 다 보겠소. 혼자 부르고 쓰고 하오.” 기준도 용빼는 수가 없었다. 그 후 반년 동안 신랑 쪽에서 염치를 불구하고 달려드는데다가 기준의 아버지까지 동의해 버렸던 것이다. 이듬해 음력설을 쇠고 한 달 후 월금은 훈훈한 봄날에 아버지 욕설 속에 눈물을 비 내리듯이 흘리면서 망석촌의 여주 박씨 네 범석에게 시집갔다. 범석은 결혼잔치 전에는 예쁜 월금을 데려가려고 묵묵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가시아버지에게 듣지 못할 쌍욕을 먹은 후 다시는 가시집에 발길을 돌리지 않았다. 그리하여 월금은 한 동안 본가 집 아버지와 남편 사이에서 속을 썩이면서 마음고생을 했다. 7. 종적을 찾아 뼈 속까지 오싹 스며드는 칼바람이 간도의 황야를 휩쓸며 감때사납게 불어쳤다. 토성 안 집에서 토성 밖에 우물을 파놓는 바람에 조선에서 이사해온 사람들이 우물과 가까운 토성 안 집을 중심에 두고 돌아가면서 집을 짓고 살았다. 하여 함흥 촌은 이젠 20여 호가 모여 사는 꽤나 큰 마을로 번져갔다. 병완은 성칠의 소식을 알려고 창준과 기준을 데리고 토성 안 집으로 갔다. 병완은 이제껏 지주네 집이라고 한 마을에서 살면서도 거래하지 않고 그저 마을에서 떠도는 소문만 묵묵히 듣고 있었다. 병완은 처음으로 방틀 팔간 집으로 지은 토성 안 집으로 들어갔다. 대문 짝에 난 작은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머슴인 듯 사내가 문의 빗장을 열고 나왔다. “무슨 일이요?” 병완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집주인을 만나러 왔네. 있는가?” “예, 내 알리지. 들어오오.” 병완 등이 대문 안에 들어서서 몸채 쪽으로 들어가면서 보니 토성 안에는 몸채 외에도 토성 안 서쪽과 동쪽에 커다란 창고가 둘이나 있었고 사랑채와 마당에는 말로는 머슴이라고 하는 숱한 사람들이 드나들고 있었다. 집안 집 병완이 왔다는 말에 토성안집 인삼은 미닫이문을 열고 황급히 마루로 내려와 마중했다. 억대우 같은 인삼은 잘 생긴 미남자였다. 너부죽한 얼굴에 예지가 반짝이는 눈, 우뚝 일어선 코 날, 어디를 보아도 늠름해보였다. “어이구, 집안 집 어른이 어떻게 왔소?” 병완 등은 인삼이 안내하는 대로 마루우로 올라가 위방으로 들어갔다. 자리를 정하고 앉자 병완은 정색해 말했다. “내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어 묻네. 혹시 성칠이란 사람을 본적이 있는가?” 그러자 인삼은 뒤로 물러앉으면서 “본 적이 없습니다. 왜 그럽니까?” 하고 병완과 창준의 표정을 살폈다. 병완은 나직이 말했다. “사실 성칠은 내 맏아들이네. 조선에서 오기 전에 우리 우시장 일대의 사냥꾼들을 데리고 포수대를 조직했다가 항일 독립군에 들어갔네.” 순간 인삼은 놀라운 기색이 너부죽한 얼굴을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 완연히 드러났다. “이젠 거의 8년이 되도록 종무소식이네. 어쩜 자식 놈이 어시를 찾아보지도 않는단 말인가?” 기준도 한마디 조용히 했다. “난 명동의 하규한테서 성칠 형님이 이 토성 안 집에 드나든다는 말을 듣고 찾아왔소. 자네도 우릴 근심하지 말게나. 우린 고향에서 일본 놈들의 피해를 받아 핍박에 의해 조선 고향을 떠나 간도로 들어왔네. 우리 일가는 일본 놈들과 한 하늘을 떠이고 살지 못할 원한이 있는 집안이네.” 창준도 속심을 터놓았다. “우린 이 집에 성칠 형님이랑 선바위와 오랑캐령 부근에서 일본 놈들의 쌀을 탈취한 숱한 쌀을 무져 두고 있는 것도 알고 있네. 근심하지 말게나. 우리도 유격대를 도울 테니까. 후에 유격대에서 쌀이 필요하면 우리도 한몫을 담당하겠네.” 기준은 한술 더 떴다. “성칠 형님이 어데 있는지 알려주게나. 유격대 김 대장이 우리 성칠 형님인가?” 인삼은 한참 병완이네 부자들의 솔직한 말을 듣고 나서 무겁게 입을 열었다. “오늘 집안 집 큰아버지와 형님들의 말을 듣고 놀랐습니다. 우린 원래 영월 김씨 피를 나눈 한집안인데다 항일사상도 같다는데서 절친하게 됐습니다.” 그 말에 병완은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지, 우린 피를 나눈 한 집안이야. 우린 목숨 걸고 유격대, 자네들을 돕겠네. 후에 무슨 일이 있으면 우리 할 수 있는 건 알리게나.” 그러나 인삼은 조금 에둘러 말하는 것 같았다. “우린 이 마을에 온 후 어느 집이나 다 살펴보았습니다. 큰아버지 일가는 정말 양심적인 조선의 백성이고 의리심이 강한 분들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병완의 부자간들은 인삼이가 알고 싶은 성칠의 행방은 말하지 않고 자꾸 동문서답하는 식으로 왕청 같은 말을 하는 것이 답답했다. “우리도 어떤 형님의 부탁을 받고 형님의 보모형제들을 찾으려고 여러 모로 알아보았습니다. 허나 마을 형편을 알아보면서 살펴보았지만 이름이 같지 않습디다. 경칠, 문칠, 김진 모두 생소한 이름이었습니다.” 병완은 그 말에 인삼에게 다가앉으면서 “건 다 애명을 부른 거네. 난 병완이고 얘들은 내 둘째아들 창준이고 셋째아들 기준이오. 김진이란 애는 내 넷째손자 상순이요.” 하고 말했다. “예~ 이제야 맞습니다. 명함들이 다 맞습니다.” 그제야 인삼은 통쾌하게 말했다. “우린 확실히 성칠 대장이 영솔하는 유격대입니다.” 그러자 병완과 창준, 기준은 서로 눈길을 맞추었다. 인삼은 속 시원히 말하기 시작했다. “성칠 형님은 항상 고향에 있는 부모형제들을 외웠습니다. 형님은 조선에 군사행동을 하러 몇 번 나갔을 때 고향의 부모형제 소식을 여러모로 알아봤습니다. 그런데 간도로 떠나갔다는 소식 밖에 없다면서 애타게 찾았습니다. 그런데 여기 와 계실 줄은 정말 천만뜻밖입니다. 그러자 병완은 다그쳐 물었다. “그래 성칠은 지금 어데 있는가?” 인삼은 엉거주춤 일어나 미닫이문을 스르르 열고 바깥을 둘러보고 나서 미닫이문을 꼭 닫고 긴장한 얼굴을 풀면서 돌아와 앉았다. “성칠 형님은 조선 본토와 장백산 일대 남만과 동만 지어 북만까지 주름잡아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면서 일본 놈들을 족치기에 그가 딱히 어데 있는 건 누구도 모릅니다.” 인삼은 군사비밀이기에 초면강산이나 다름없는 병완 등에게 성칠의 거점을 아직은 말해 줄 수 없었던 것이다. 기준은 그런 어렴풋한 대답에 답답해났다. “혹시 성칠 형님은 지금도 그 여대장과 같이 있는가?” 인삼은 머리를 끄덕였다. “우리 유격대에는 김 대장도 많고 여대장도 많소. 혹시 최진달래 대장을 묻는 말인지 모르겠소만.” 기준은 인삼의 손까지 잡고 말했다. “맞소. 이전에 우리 성칠 형님네는 그 진달래 여대장과 함께 저목장을 기습하였소.” 인삼은 소리를 더욱 낮춰 말했다. “후에 성칠 형님을 만나면 여기에 큰아버지 계신다고 알려주겠습니다.” 병완은 머리를 끄덕이더니 엉거주춤 일어나더니 인삼의 손을 으스러지게 꽉 잡았다. “후에 무슨 일이 있으면 알리게나.” 인삼도 일어나 병완의 부자들과 일일이 손을 굳게 잡아주었다. “큰아버지와 형님들을 믿고 이 마을에서 마음 놓고 항일활동을 하겠습니다.” 인삼은 대문 밖에까지 그들을 연의했다. 그는 대문 안에 되돌아들어가면서 함흥촌 일대에서 영향력이 있는 병완 일가를 호흡할 수 있어 마음이 든든해났다. 집으로 돌아온 병완은 성희와 하옥을 위방에 불렀다. 그는 먼저 성희를 보고 “여보, 성칠이 소식 있소.” 하고 단마디로 알렸다. “예? 어데 있대요?” 병완은 주위를 둘러보고 나서 허리까지 성희 쪽으로 숙이면서 나직이 귓속말을 했다. “토성 안 집 인삼과 함께 유격대에 있는데 대장을 한다오.” 하옥은 그 말에 머리를 다소곳이 숙이고 조금 외면하더니 동전으로 뜨거운 눈물을 닦으며 어깨를 들먹였다. 병완은 애 하나 낫지 못하고 십년 가까이 독수공방하면서 성칠을 기다리는 맏며느리가 여간 불쌍하지 않았다. 그는 하옥의 손을 잡으면서 “맏며느리, 근심하지 마오. 이제 우리 맏아들이 언젠가는 찾아올 게요.” 하고 위안해주었다. 하옥은 어깨들 들먹이더니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뒤 고방으로 달아 들어갔다. 성희는 “쯧쯧” 하고 혀를 끌끌 차더니 뒤 고방으로 따라 들어갔다. 병완은 땅이 꺼지게 후~ 내쉬었다. 한편 인삼이네 집에서 나온 기준은 큰집 둥글 소 값을 마련하려고 엄동설한을 무릅쓰고 주먹밥주머니를 목수도구상자에 넣어 둘러메고 용정으로 갔다. 그는 저녁에는 교회당을 찾아가 죤슨의 덕에 교회당에서 돈 일전도 내지 않고 잘 수 있었다. 어떤 때에는 교회당에서 죤슨 목사가 서툰 조선말로 하는 설교를 듣기도 했다. (명동의 하규나 용정의 죤슨이나 교회당의 양반들은 참 마음씨 착한 분들이야.) 등잔불 밑이 어렵다고 기준이가 용정통감부 간도파출소 앞을 지나다니면서 목수 일을 찾아 해도 그를 발견한 자는 한 놈도 없었다. 가을부터 새해 늦겨울까지 목수 일을 하여 기준은 꽤나 적잖은 돈을 모았다. 그간 이전에 말한 대로 정성문의 식장도 짜주었다. 이젠 기준은 정성문과 자별한 구면친구로 됐다. 장마당에서 기준은 정성문과 나란히 서서 일거리를 기다리면서 이런 저런 궁리를 했다. (한 보름 목수 일을 하면 소고기를 판 돈에 보태 암소는 살 수 있겠다.) 그때 쌀 마대를 꽉 박아 실은 수레가 여러 대 장마당골목을 지나 육도하 쪽으로 지나갔다. 기준이가 피뜩 보니 제일 앞에서 수레를 모는 억대우 같은 사나이가 별로 낯이 익어보였다. “아니, 저게 원삼이?!” 정성군도 머리를 그쪽으로 돌렸다. 장총을 멘 일본 경찰 셋이 앞뒤에 서서 쌀 수레를 압송하고 있었다. 기준이 다시 찬찬히 수레를 모는 조선 사내들을 살펴보아도 확실히 맨 앞에서 수레를 모는 사나이는 어깨가 쩍 벌어진 원삼이었다. 기준은 원삼과 몇 해만에 만났는지라 그간 얘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쌀 수레를 압송하는 일본 경찰들에게 발각돼 체포될까봐 그만두었다. 기준은 그날 목수 일을 마치고 교회당으로 돌아가다가 인삼이가 일한다는 정미소로 가보기로 했다. 혹시 정미소로 가면 쌀 수레를 습격하는 유격대 종적을 찾겠는가는 일루의 희망을 품었던 것이다. 그는 이 골목 저 골목 돌아다니면서 물어서야 겨우 자그마한 골목에서 정미소를 찾을 수 있었다. 정미소 대문기둥에는 고약딱지 같은 일본기발이 휘날리고 대문 양옆에는 일본 놈이 총칼을 빼들고 왔다 갔다 하면서 보초를 서고 있었다. 기준이가 정미소안을 기웃기웃 하며 들어가려고 하자 일본 놈이 총칼로 가로 막았다. “나니까(뭐야)?” 기준은 손짓으로 쌀 마대를 메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와깠다(알았어), 하이레(들어가)!” 하고 안으로 총칼로 들어가라고 가리켰다. 기준이가 정미소 울안에 들어가면서 둘러보니 마당 안에도 일본 놈 서넛이 총칼을 잡고 왔다 갔다 하면서 보초를 서고 있었다. 마당 양옆에 기둥이나 세우고 천정이나 누른 창고에는 소잔등 같은 쌀 마대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연자 돌로 저 많은 곡식을 어떻게 다 찧겠니?) 기준이 정미소에 들어서 둘러보니 정미소안에서도 일본 놈 둘이 총칼을 잡고 정미일군들을 감시하고 있었다. 어두운 정미소 천정에 희미한 등이 걸려 있었다. 그런데 등잔불도 아닌데 아주 빤했다. 기계소리 요란한 정미소에서 온 몸에 겨 먼지를 새뽀얗게 쓴 인삼이가 달아 맨 나무상자 옆에서 한창 마대 안에 쏟아져내려오는 쌀을 손으로 받아 쥐어 살피고 있었다. 그런데 쪽진 상투머리가 없어진 것이 참 우스웠다. 몇몇 낯모를 한족일군들이 쌀 마대를 바깥으로 분주히 나르고 있었다. 기준은 다가가 “인삼이, 바쁘지 않소?” 인삼은 반가와 입쌀을 마대 안에 처넣고 악수했다. “어떻게 돼 내 여기 있는걸 알았소?” “전번에 물레방아 골에 가서 원삼한테서 들었소.” 이때 작달막한 사내가 건 가래를 떼면서 이쪽으로 힐끔거리면서 다가왔다. “우리 주인 이주림이요.” 기준이가 허리를 굽히며 인사했다. “인삼을 많이 도와줘 고맙소.” 주림은 거만하게 머리를 꺼떡거리고는 “에헴.” 하고 기계를 쳐다보면서 저쪽으로 가버렸다. 인삼은 못 마땅해 하는 주림의 눈치를 보더니 기준을 보고 “내 요걸 제꺽 찧어 놓고 얘기하기요.” 하고 말했다. 기준은 머리를 끄덕이고 나서 바깥으로 나가 묵묵히 기다렸다. 한참 후 인삼이 나왔다. 기준은 인삼을 조용히 한쪽으로 데리고 가서 물었다. “정미소를 보니 희한하다. 당나귀를 메워 연자 돌로 찧는가 했더니 저건 뭔가?” 인삼은 쌀 마대를 한 팔에 하나씩 안아 정미소안으로 들여가면서 말했다. “전기로 돌리는 정미기루 찧으니 얼마나 쉬운지 모르겠소. 용정에는 전기라는 게 들어와서 정말 편리하오.” 기준은 목수도구를 놓고 인삼을 도와 쌀 마대를 안아 정미소에 들여다 두면서 이것저것 물었다. “전기라는 게 좋긴 좋구나.” 하고 신기해 물었다. “옳소. 전기정미기계로 쌀을 찧으니 절구로 연자방아로 빻는 것보다 힘도 덜 들고 빨리 찧어서 얼마나 편리한지 모르오.” 기준은 쌀 마대를 쌓아놓은 창고에 들어가면서 나직이 물었다. “인삼이, 아까 원삼이가 일본 놈들의 압송을 받으면서 쌀 수레를 몰고 가더군. 대체 어떻게 된 일이오?” 인삼은 한숨을 후~ 내쉬었다. “물레방아골의 지주는 새 해부터 소작료를 8할로 올려 받는다 하오. 원삼이네 여덟이나 식구들이 뭘 먹고 살겠소? 그래서 이 정미소에 왔다가 일본 놈들이 개산툰으로 해서 조선에 실어가는 쌀 싣기를 하오.” “음~” 기준은 머리를 끄덕였다. “그런 일이구만. 아까 일본 놈들이 있어서 원삼과 인사하지 못하였소. 그럼 이 숱한 쌀 마대는 모두 일본 놈들이 실어가는 쌀이겠구먼.” 인삼은 머리를 끄덕였다. “하루살이 일이라도 여기서 이것저것 하는 게 농사를 짓는 것만 나은 거 같소. 품삯이야 소작 농사처럼 반작이요 8할이요 하면서 뜯어가는 게 없잖소.” “글쎄 말이오. 나도 요즘 목수 일을 해보니 그런 거 같소. 그런데 난 죄 지은 몸이어서 어디 일본 놈들의 코밑에서 마음 놓고 일할 수 있소?” 기준의 하소연 같은 말에 인삼이도 두덜거렸다. “원삼은 원래 우리 정미소에서 쌀 마대나 메자고 왔는데 일본 놈들이 힘깨나 쓰는걸 보고 쌀을 운송하는 쌀 레 몰이꾼들의 우두머리로 쓰고 있네. 그런데 떼도적들이 나타나 총을 들고 와서 쌀을 수레 채로 빼앗아가는 일이 종종 생겨 머리기 곤두선다오.” 기준은 피뜩 들은 말이 떠올라 골목길을 둘러보고 나직이 물었다. “혹시 그게 떼도적이 아니고 유격대 아닐까?” “글쎄~” 인삼이도 머리를 끄덕이면서 뭔가 생각해보았다. 정미소 주인 리주림은 기준이가 한참 인삼을 도와 쌀 마대를 날라주면서 이말 저말 하는 것을 여겨보다가 피뜩 이런 속궁리를 굴렸다. (보아하니 인삼과 친구 같은데 목수인데다가 힘꼴도 쓰는구나.) 주림은 스적스적 기준한테 다가가 쌀 마대를 내려놓으라고 손짓하더니 “아예 우리 정미소에서 일하는 게 어떤가?” 하고 넌지시 물었다. 그러나 기준은 쌀 마대를 나르면서 “난 봄이 오면 농사를 지으러 가야 하오.” 하고 대답했다. “그럼 봄이 오기전만 우리 집에서 일하지 않겠는가? 인삼이 혼자 밤낮 저 숱한 쌀을 미처 찧기 바쁜데.” 그러자 기준은 인삼을 생각해서라도 마음을 고쳐 먹었다. “겨울 한철에 일해 보겠소.” “삯전은 꼭꼭 줄 테니 금심하지 마오.” 주림은 선선히 말했다. 이렇게 되여 기준은 주림의 정미소에서 인삼과 함께 일하면서 유격대와 성칠의 종적을 찾아보기로 했다. 정미소에서는 정미기가 돌아가는 요란한 소리가 윙윙 듣기 바쁘게 울렸다.  
49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28) 댓글:  조회:1859  추천:0  2016-01-05
                           2. 오누이의 생이별         성단은 애들을 데리고 기운봉 기슭으로 갔다.        “할머니, 오늘 뭘 따러 갑둥?”        성단은 하얀 머리를 흩날리며 명옥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면서 “돌 버섯을 따러 가지.” 하고 말했다.        명옥은 똥그래진 외까풀 눈으로 할머니를 쳐다보면서 “돌 버섯? 돌 버섯은 돌입니까?” 하고 종알거렸다.        성단은 명옥과 계순의 손을 잡고 걸으면서 “이제 가 보면 어떤 겐가 알 수 있어.” 하고 말해주었다.        그들이 기운봉 기슭에 가자 깎아 세운 절벽이 나타났다. 산새들이 사람들이 오자 포르릉 날아 푸르른 가을하늘을 날아옜다. 성단은 절벽의 얼룩덜룩한 바위 돌 톰을 가리키면서 “봐라, 저게 돌 버섯이란 게야.” 하고 알려주었다. 근형과 명옥은 신기해 “아이유, 저걸 사람이 먹을 수 있습둥?” 하고 이구동성으로 종알거렸다. 성단은 허리를 펴더니 바위 돌 우에서 누르께한 돌 버섯을 몇 잎 뜯어내 애들에게 보였다. “이봐라. 이건 바위 돌에 난 버섯이다. 그래서 돌 버섯이라 해.”       “야, 신기하다.” 애들은 할머니를 도와 키 자라는 대로 바위 돌에서 돌 버섯을 뜯어 바구니에 담았다.       "이건 고양이 발톱이라고 해."       성단은 바위돌 위에서 딱 고양이발톱 같기도 하고 파 같은 이파리가 마늘대가리처럼 촘촘 들어박힌 풀을 뜯어 애들에게 쳐들었다. 근형이가 보니 자기 머리 위쪽으로 해 고양이발톱이란 풀이 있어 뜯어 입에 넣고 씹었다.       "야, 시쿨다. 시쿨어."       "배 고픈데 언제 시쿤 거 나무릴게 있냐?"       그 말에 근형은 고양이발톱을 입에 넣고 상을 징그리면서도 씹어 먹었다. 한참 돌 버섯을 뜯던 근형은 지루하고 심심해 나무 우에 올라가 나무 가지를 타고 앉아 흔들거리면서 놀았다. “야, 재미있다. 흔들흔들 그네를 뛰는 거 같다야. 흥, 흥, 좋다야.” 성단은 허리를 펴고 나무우의 근형을 보고 다급히 소리쳤다. “내려라! 내려. 우리 집 장손이 떨어지면 어쩌니?” 계순은 갑자기 질투 났다. “엄마는 거저 '장손', '장손' 하면서 근형 밖에 모릅둥?” 성단은 손가락으로 계순의 볼을 꼭 집어놓았다. “요놈의 계집애야, 네 같은 년 열 주고도 우리 장손 바꾸지 못해.” 근형은 우쭐해졌다. “계순아, 넌 이런 나무에 올라오기나 하니?” 그 소리에 계순은 나무 가지를 쥐고 올라가려고 바둑거렸지만 안됐다. 그러자 명옥도 나무 가지를 쥐고 바둑 거렸다. 그런데 명옥은 나무 가지를 쥐고 나무 우에 올라갔다. “야, 떨어지겠다.” 성단은 소나무를 올려다보며 소리치다가 손으로 가리켰다. “거 소나무에 솔방울이 많구나. 가만있어라.” 성단은 바구니를 내려놓고 근형이 올라간 소나무로 올라가 솔방울을 뜯기 시작했다. “너네는 내려가라.” 근형은 “명옥이나 내려가. 난 할머니를 도와 이걸 뜯겠다. 할머니 이건 뭐라구 합둥?” 하고 물었다. “솔방울이라고 한다.” 명옥은 기어이 내려가지 않고 솔방울을 뜯어 할머니와 근형처럼 땅바닥에 떨궈 놓았다. “할머니, 솔방울도 먹습니까?” “그래. 솔방울이 마르면 딱딱 버러지면서 솔 씨가 나온다. 이 놈의 세월에 산나물이나 돌 버섯이랑 캐먹지 않고서야 어디 살겠냐? 다 굶어 죽겠다, 굶어죽어.” 성단은 애들에게 “떨어지겠다. 주의해라.” 하고 재삼 귀띔해주었다. 한참 후에는 계순까지 승벽심이 나서 나무에 바라 올라 가는 바람에 솔방울도 적잖게 땄다. 성단은 애들을 데리고 돌 버섯이랑 솔방울이랑 고사리랑 바구니에 듬뿍 캐가지고 귀로에 올랐다. 산새들도 그들이 떠나가는 상공에서 나래 치며 둥지를 털리지 않아 한시름을 놓은 듯이 즐겁게 노래를 불렀다. 그들이 집으로 돌아오니 웬 낯모를 어른이 위방에서 최구장과 뭐라고 중얼중얼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른들 옆에는 일여덟 살 되는 남자애가 앉아있었다. 성단은 쌀이 모자라는 세월에 손님이 싫었다. (어떻게 점심을 차린다?) 큰며느리도 세상 떠서 없지. 막내아들을 잃었지. 엉망진창이 된 이 집에 최구장의 낯을 보고 운주동에만 오면 최구장네 집에 손님이 끄칠 새 없었다. 최구장은 산나물바구니를 이고 금방 정주에 들어서는 노친을 보고 “여보, 올라와 사돈어른을 인사하오.” 하고 말했다. 성단은 머리 수건으로 땀을 훔치며 위방으로 올라가며 허리 굽혀 인사했다. 최구장은 구레나룻이 더부룩한 나그네를 가리키며 “병완 사돈어른의 큰 처남이라오.”라고 했다. “예, 구차한 세월에 폐를 끼치겠어요.” 리성군은 일여덟살 돼 보이는 어린애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요건 내 맏손자죠. 병수, 인사해.” 어린애는 일어났다가 넙적 절을 올렸다. “안녕하세요?” 최구장은 “에이, 그놈이 인사성이 밝군. 너 아버지 이름 뭐냐?” 병수는 일어서서 까만 눈을 깜빡이며 “이명호라고 불러요.” 하고 대답했다. 위방 마루에 기여와 가만히 들여다보던 근형과 계순, 명옥은 병수를 말똥말똥 훔쳐보았다. “재, 눈 밑에 짐이 저렇게 보기 싫게 있어?” 근형의 말에 계순이가 “듣겠다.” 하고 종알거렸다. 명옥이가 보니 확실히 애 눈 밑에 팥알만 한 짐이 있었다. 근형은 “어른들이 그러던데 눈 밑에 짐이 있으면 울 일이 많단다.” 하고 중얼거렸다. 그러자 최구장은 손으로 바깥을 가리키면서 “사돈총각은 나가서 저 애들과 놀아라.” 하고 말했다. 병수가 성단과 함께 바깥에 나가자 애들은 좋다고 뛰놀았다. 성군은 “내 눈 밑에 짐이 있다더니 넌 볼에 짐이 있구나.” 하고 말하면서 근형의 얼굴을 가리켰다. 명옥은 “볼에 난 짐은 괜찮다. 눈 밑에 기미 있으면 울보 되는 거지.” 하고 말했다. 병수는 근형과 명옥이 어찌나 잘난체하는지 뭘 자랑할까 한참 궁리하다가 죄꼬만 입을 열었다. “네 고향은 왜 일케 산골이여?” 그 말에 근형이가 다리를 배배 꼬고 서서 어깨를 으쓱하며 물었다. “그럼 네 고향에는 산도 없고 골짜기도 없니? 그럼 얼마나 멋이 없겠니? 평평한 들판인 게.” 병수는 길쭉한 얼굴을 쳐들면서 “우리 고향 마을은 해변 가야. 산도 있고 파도가 출렁이는 바다가 있어. 바다의 물고기도 낚시질해 잡아먹지. 굴, 조개, 미역, 고마이 없는 게 없어.” 하고 한바탕 자랑했다. 명옥은 듣다가 끼어들었다. “오, 옳다. 바다가는 참 멋진 거야. 이전에 바다 가에 있는 외가 집에 간적이 있다. 모래에 구덩이를 파놓고 있으면 집채 같은 파도가 덮쳐 왔다가도 무너지면서 밀려나가더라. 물구덩이에 미처 바다로 되나가지 못한 물고기가 파닥거리지. 어떤 때에는 물구덩이에 게가 꾸물거리지.” “우리 충청도에선 있제이. 낚시로 큰 바다 물고기를 잡지. 참치도 어른들의 다리만큼 큰 거 잡아. 난 어떤 때 낚시로 내 다리만큼 한 참치를 잡아 집에 겨우 메고 왔댔어.” 근형은 낚시로 자기 다리만큼 한 참치를 잡아 메고 집으로 가는 병수를 연상하며 혀를 끌끌 찼다. “참 멋지구나. 우리 여긴 니 말처럼 산골이 돼서 운주하에는 큰 고기도 별로 없어. 일본 사람들이 들어와서 물고기를 잡아도 바치라고 강박한다. 너희들 고향에는 일본 사람 없니?” 죄꼬만 병수는 길쭉한 머리로 도리머리 질 했다. “에이, 우리 고향에도 일본 사람들이 많아. 바다 고기를 마음대로 잡지 못해. 고기 잡은 거 있자노, 들키면 절반 넘어 바쳐야 해. 매만 맞지 않아도 재수 좋제이.” 근형은 입을 싸쥐고 웃었다. “얘는 말할 때마다 ‘있제이’, ‘있제이’ 한다. 우스워 죽겠다. 야, 야.” 근형이랑 병수랑 마루에 걸터앉아 다리를 흔들거리면서 웃고 떠들며 인차 친해졌다. 위방에서 리성군은 병수에게서 눈을 떼 최구장에게 돌리면서 한숨을 푸 내쉬었다. “어쩜 매형은 어데로 간다는 말두 하지 않고 누나를 데리고 훌쩍 가버렸어요?” 최구장은 바깥동정을 살피더니 나직이 말했다. “그때 그렇게 됐습니다. 일본 놈들이 병완 사돈어른 일가를 다 체포해 죽이려고 들었습니다.” 리성군도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무슨 죄를 졌다고 그랬어요?” 최구장은 곰방대를 길게 빨아 후 속이 탄 연기를 내뿜었다. “사돈도 아는지 모르겠습니다. 병완 사돈네 맏아들은 항일유격대에 들어갔습니다.” 최구장은 병완 일가가 핍박에 의해 간도로 들어가게 된 일을 죽 이야기했다. 리성군은 섬직해 베적삼 호주머니에서 수건을 꺼내 이마의 식은땀을 훔쳤다. “아, 그간 그런 일도 있었구먼요. 아, 누님과 매형은 어디로 갔을까요?” 최구장은 조용히 말했다. “그때 당신 누님은 가지 않겠다고 야단쳤습니다. 충청남도 서현군 한산면에 있는 친정집과 오라버니한테도 어디로 간다는 말을 하지도 않고 가겠어요?” 성군은 눈 확에 글썽해진 눈물을 수건으로 훔치면서 물었다. “누님은 어디로 간 것 같아요?” 최구장은 조용히 귀속 말로 알려주었다. “아마 간도로 간 것 같소. 류강철이라고 경찰국에서 통역을 하는 제자가 있소. 그한테서 들으니 소문에 일본 놈들은 병완 어른네 간도 어디 소서구란 곳에 있다고 하던데. 딱히 모르겠습니다. 일본 놈들이 관동군에 병완 어른 나포하라고 포고를 보내 그들을 찾아내자고 서캐 훑듯 한답디다. 그런데도 아직 찾지 못했답니다.” 리성군은 누님생각에 흑흑 흐느껴 울었다. “야, 손자를 데리고 몇 천리를 걸어서 이 한끝 함경도까지 왔다가 누님을 만나지도 못하고 이게 뭔가요? 으흐흑, 흑흑.” 최구장도 서러워하는 리성군을 보고 안타까워 한숨을 푸푸 내쉬었다. “이렇게 갈라지면 언제 누님을 또다시 만날까? 어허허. 기막힌 세상이지. 이렇게 누님과 생이별하다니. 허 허 헉.” 리성군은 체면도 잊고 대성통곡 쳤다… 리성군은 충청남도 한산군의 마을로 돌아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병완의 집 자리에 찾아가 보았다. 그를 맞아준 것은 상냥한 누나 대신 쓸쓸한 폐허더미였다. 집 자리에는 여기저기 흙속에 파묻힌 수수대가 드러나고 마른 쑥대가 한 키도 넘게 자라 가을 바람에 스산하게 술렁대고 있었다. 성군은 집터를 마주해 풀썩 무릎을 꿇고 물앉아 대성통곡 쳤다. “누님, 매형, 날 버리고 어디로 갔어요? 성칠아, 창준아, 기준아, 조카들은 지금 어디로 갔냐? 이렇게 생이별 하다니? 언젠가는 충청남도 한산군에 오면 외삼촌을 찾아오라.” 병수는 할아버지 얼굴의 눈물을 닦아주면서 함께 울음보를 터뜨렸다. “할아버지, 울지 마. 응? 울지 마.” “응, 그래. 병수야,” “집에 가자.” 성군은 눈물을 닦으며 병수의 애고사리 손을 잡고 일어났다. “응, 그래. 가자. 고향으로 돌아가자. 여긴 이젠 큰할아버지와 큰할머니가 없다. 이담 네가 크면 꼭 큰할머니랑 삼촌들이랑 상순이랑 상길이랑 형님들을 찾아봐라.” “응. 내겐 형님도 많구나. 상길이랑 상순이랑 다 내 형님이다.” 할아버지와 손자가 주고받는 말을 들으면서 최구장과 경숙이도 눈시울을 닦았다. 근형은 계순과 명옥의 귀에 대고 “봐라. 내 말이 맞지. 눈 밑에 기미가 있으면 울 일이 많다 하지 않던? 병수는 울보가 되겠어 하고 중얼거렸다. 뒤이어 근형과 계순, 명옥은 고향으로 돌아가는 병수를 울지 말라고 랬다. 성군은 더 놀다가 가라는 최구장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날로 머나먼 한산을 바라고 떠나갔다. 떠나가는 그들의 뒤로 친 혈육과 생이별의 아픔과 슬픔이 파도치며 뒤따라가고 있었다. 3.풍작을 거두었건만 고향 명천의 밭 자리는 진짜 황야를 방불케 했다. 밭 자리에는 고개를 숙인 곡식이삭 대신 새로 심은 애 어린 적송들이 허리를 치면서 자랐다. 고향의 황야와는 달리 병완과 자손들이 땀 동이를 쏟아 부어 걸군 간도 소서구의 황무지에는 조 이삭들이 고개를 숙이고 서 있었고 애기를 업은 어머니들처럼 강냉이들이 강냉이 이삭을 업고 가을바람에 마른 이파리들을 바르르 떨고 있었다. 어느 날 병완은 노친과 고향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성희는 기침을 쿨룩쿨룩 하며 “고향 말은 하지도 말라고. 괜히 친정집과 고향이 생각나게 굴지 말라니께.” 하고 손사래를 쳤다. 병완은 마늘을 머리채처럼 땋아 마루 기둥에 걸면서 중얼거렸다. “보오. 여길 오길 잘했지. 고향 명천에 있었더라면 진작 염라대왕을 보러 갔을 거요.” 성희는 감자를 깎으면서 “오라버니와 조카 명호랑 얼마나 보고 싶다고요. 어데 간단 말두 남기지 못하고 왔으니 이젠 그 애들과 생이별 한 거죠.” 하고 아직도 마음이 아파했다. 병완은 노친이 너무 고향 생각할까봐 화제를 바꿨다. “우린 여기 와서 잘 보내는데 물레방아골 원삼 삼 형제는 잘 보내는지 모르겠소.” 성희는 구부정한 허리를 펴면서 일어나 남쪽 하늘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궁금하면 가 보죠.” 병완은 마루가 꺼지게 한숨을 쉴 뿐이었다. “용정을 지나가기 등곬이 다 싸늘해지오. 전번에 용정에 집 지을 일이 있어 가볼까 했소. 그런데 끼무라 국장 놈과 한길수 낯이 자꾸 떠올라 그만뒀소.” “그 놈들이 간도에서 당신을 잡자고 집 짓는 곳마다 살필걸.” 병완은 땅이 꺼지게 한숨을 후~ 내쉬었다. 사실 물레방아 골짜기에 남은 원삼 형제들도 조선 고향에 있을 때보다 더 잘 보냈다. 조선 지주 리영룡이 처음에는 황무지를 개간하면 8할을 먹게 하여 생활이 좀 펴졌다. 가을에 원삼이네는 리영룡의 소와 수레를 빌어 조이와 기장을 산에서 실어 내리게 됐다. 그런데 워낙 가파른 산비탈 길에서 황소도 조단을 싣고 내리막을 받지 못해 눈깔을 희 번뜩거리며 두발을 떡 뻗치고 옮겨 디디지 못했다. 원삼이가 수레 멍에를 내리누르며 아무리 고삐로 소 궁둥이를 치면서 “헤이!” “헤이!” 하고 고함쳐도 좀처럼 발을 떼지 못했다. 그는 “이 놈 소 새끼, 이러고서도 황소냐?” 하고 멈춰서 내리막길을 내려다보았다. 산 아래서 리영룡도 속이 타 주먹으로 손바닥을 치며 왔다 갔다 하다가도 머리 들어 원삼과 소를 쳐다보며 소리쳤다. “원삼이, 괜히 소나 상하겠네. 수레나 마스면 어쩌겠소.” 원삼은 조를 산더미처럼 실은 수레를 돌아다보다가 중얼거렸다. “빌어먹을 놈 소 새끼, 안 되겠어.” 원삼은 수레에서 황소를 벗겨냈다. “괜히 소나 상하면 올해 농사를 지은걸 다 줘도 안 되겠다.” 산 아래에서 리영룡이 손나발을 해대고 고래고래 소리쳤다. “원삼이, 자네 어쩌자는 건가? 작작 실을 거지 욕심 쓸게 있소?” 원삼은 산 아래에 대고 “근심 마소.” 하고 소리치고 나서 베적삼을 벗어 허리를 질끈 동여맸다. “뭐 하자는 거야?” 영룡 지주가 아래에서 소리치건 말건 원삼은 손바닥에 건침을 퉤 뱉아 비비더니 꿈틀거리는 룡 같은 두 팔로 수레 채를 안더니 “어차!” 소리와 함께 들어 올리더니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아래로 옮겨 디뎠다. 영룡은 억이 막혀 산 아래에서 입을 함지만큼 딱 벌렸다. “아, 저 우둔한 게. 황소도 받지 못하는 내리막길을 저 놈이, 저게!” 원삼은 조 수레채를 안고 꾸불꾸불하고 가파로운 산비탈 내리막길을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소처럼 뻗디디며 내려왔다. 숱한 사람들이 자기 눈을 의심할 광경을 보고 혀를 끌끌 찼다. “쯧쯧, 실로 힘장사는 장사로구나!” “저게 어디 사람이오?” “꼬리 없는 황소요. 황소!” 원삼은 멈춰 서서 한숨도 돌려 쉬지도 않고 산비탈 아래로 내려왔다. 리영룡은 손에 비지땀을 그러쥐고 그 광경을 지켜보다가 입을 함지만큼 떡 벌린채 다물지 못했다. 수레 채를 슬쩍 내려놓는 원삼을 보고 영룡은 자기야 먼저 긴장이 풀려 땅바닥에 풀썩 물앉았다. “에이, 사람도 도깨비구만. 도깨비!” 원삼은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허허허. 주인이 아끼는 둥글 소가 상할까봐 그럽구마.” 하고 웃으며 그 길로 산비탈 길로 씨엉씨엉 올라갔다. 그는 산에서 황소를 끌고 내려와 조 수레에 메워가지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다나니 원삼은 험한 비탈길이 있는 밭의 조와 기장을 몽땅 소 대신 자기 힘으로 수레에 실어 내리었다. 그때부터 소문난 원삼은 부근에서 모두들 힘장사라고 엄지를 내둘렀다. 리영룡은 뚱뚱한 배를 뚱기적거리면서 탈곡장에 와서 원삼이네 삼형제가 애들을 데리고 도리깨로 타작하는 것을 구경했다. 그는 꼬리 없는 소처럼 일이 푹푹 축나게 일하는 그들 삼형제를 보고 개기름이 유들유들한 웃음주머니가 흔들흔들 했다. “자네들 만나서 황무지도 많이 일구고 곡식도 많이 거둬들여 정말 감사하네.” 원삼은 팔에 힘이 들어가 도리깨를 탁탁 휘두르며 마주 인사했다. “다 주인이 우리 삼형제한테 황무지를 일구게 준 덕분입구마.” “허허허, 그래. 사람들이 해박하기도. 쯧쯧쯧.” 영룡은 날마다 탈곡장에 와서 일손을 구경하는척했지만 기실 곡식무지가 축나지 않나 흘끔흘끔 살피고 있었던 것이다. 지어 그는 목이 말라 집안에 들어가 물을 마시는척하면서 위방과 고방을 흘끔흘끔 살피기까지 했다. 20명이나 넘는 삼형제네 식구가 빈대 굴 같은 집에서 사는 집에 어데 쌀을 감출 곳도 없었고 또 감춘 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 눈치를 챈 원삼은 속으로 버섯목이라고 뒤집어 보이겠는가 이리저리 못내 근심됐다. 어느 날 영룡이 또 나타나서 흘끔거리자 원삼은 도리깨질을 멈추고 집 벽에 도리깨를 세워놓았다. “주인님, 탈곡장을 아예 주인집 마당에 옮겨 가깁소.” 영룡은 네모 번듯 한 낯에 당황한 그림자가 번개 불처럼 스쳐지나갔다. “어, 어허허. 건 불시에 무슨 소리요? 자초에 난 여기에 탈곡장을 닦으면 자네 삼형제가 타작하기 쉽다고 그랬네.” 춘삼은 아예 썩 뚝 잘라 말했다. “오늘로 곡식을 몽땅 주인집에 옮기기요. 주인집 마당은 넓어서 타작하기도 좋소.” 영룡은 흡족해 너털웃음을 웃었다. “어허, 허, 허허허. 그래, 그럼 자네들 생각대로 하게나. 저 숱한 곡식을 어떻게 옮기겠나?” 그러나 원삼은 씁쓸해했다. “산비탈 밭에서도 여기까지 실어 왔을라니 100미터도 안 되는 주인집에 가져가지 못 하겠습둥?” 작달막한 인삼이도 팔을 걷고 나섰다. “수레에 나르면 하루면 되겠지. 황차 내리막아래에 주인집이 있어서 빠를 거요.” 원삼이네 삼형제는 그날로 곡식을 주인집 앞마당에 실어갔다. 타작해놓은 곡식은 마대에 담아 실어갔고 조이단과 기장단은 수레에 실어 내려갔다. 해가 질 무렵에는 원삼이네 삼형제가 사는 우두막집 앞마당에는 곡식 단 한단, 조이이삭 하나, 낟알 한 알 남지 않았다. 그날로부터 한 보름 원삼이네 삼형제가 땀을 뻘뻘 흘리면서 타작해 곡식더미가 산더미 같았다. 영룡은 뚱뚱한 배를 쑥 내밀고 개기름이 번지르르한 낯을 슬슬 매만지면서 곡식무지를 빙빙 돌았다. (어떻게 나눠야 내게 더 차례질까? 곡식무지를 봐선 어느 쪽으로 쭉 짜개 나눠도 더 가질데 없어.) 한참 궁리하던 영룡은 낯을 들고 원삼이네 삼형제를 번갈아보더니 슬쩍 외면하면서 혀를 날름거리었다. “자네들도 얘기했다시피 내가 황무지를 개간하라고 주지 않았으면 이 많은 곡식을 거둘 수 있었겠나?” “그거야 그렇습지.” 원삼이네 삼형제는 이구동성으로 중얼거렸다. “자네 삼형제를 8할이나 주고나면 난 서북풍이나 먹으래?” “건 연초에 우리가 일군 밭에서 난 곡식은 8할을 준다고 하지 않았소?” 춘삼의 말에 영룡은 귀밑까지 뻘개나면서 말했다. “그랬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 안 되겠네. 반작을 해도 좋은 줄 아오?” “예?” 인삼은 눈이 동그래졌다. “그래, 올해는 절반씩 나눕세.” 원삼은 원래 말수가 적은 양반이여서 너무 억울해 쓴 입을 쩝쩝 다실뿐 한마디 말도 나가지 않았다. “뭘 하는가?” 영룡은 뒤에 서고 있는 머슴들을 둘러보면서 소리쳤다. “어서 곡식무지를 딱 절반 끊어 나눠놔라!” 머슴들은 가래를 쥐고 원삼이네 삼형제 눈치를 보면서 감히 곡식무지에 손을 대지 못했다. “얼씨덩!” 머슴들은 우레 같은 고함소리에 못 이겨 원삼이네 삼형제의 이글거리는 눈길을 피해 머리를 숙이고 곡식무지에 달려들어 가래로 딱 절반을 쭉 긋더니 퍼 번지기 시작했다. 한참 역사 질 하니 곡식무지에 골짜기 하나가 생겨났다. “서쪽무지를 자네들이 가져가게.” 춘삼은 볼 부은 소리를 쳤다. “뼈 빠지게 황무지를 개간해 농사를 지어놓으니 가을에 와서 이렇게 하는 법이 어데 있소?” 리영룡은 자기 쪽에서 뚱뚱한 볼에 살기를 띄우면서 고래고래 고함쳤다. “명년에 반작농사를 하지 않겠으면 그만둬. 반작농사를 짓자는 사람이 쌔고 버렸어. 배부른 흥정을 다 하게 든다. 별것들이 원, 흥!” 원삼 형제는 억울한 대로 절반으로 나눈 곡식무지를 수레에 실어 집으로 가져갔다. 춘삼은 분이 풀리지 않아 그날로 다른 곳으로 농사지으러 가겠다고 했다. “아무튼 우리 삼형제가 한 집에서 살기도 힘든데. 난 기준형제들을 찾아가보든지 하겠다.” 풍작을 거두었건만 쌀 몇 마대를 가지지 못한 원삼 삼형제는 물레방아 골에서 지주 영룡을 믿고 살기 힘들다는 것을 점차 느끼게 됐다. 가을해가 소서구 동쪽 령 마루에서 서서히 떠오르고 있었다. 풍작은 거두었지만 소서구의 기준 일가는 황무지를 개간한 것이 많지 않은데다 식구가 많이 늘어나 목수일이라도 찾아 해 보태지 않으면 보릿고개를 넘기 힘들 것 같았다. 기준은 맏아들 상우와 함께 땔나무와 목수도구를 수레에 싣고 진수해로 떠났다. 그때 상순이가 따라 나와 몸을 배배 탈면서 “아버지, 나도 가게 해 주오.” 하고 서적을 부렸다. “아니, 십여 리나 되는 호박 길을 어떻게 따라 간다고 그래?” 기준이가 눈을 부라리는데도 상순은 계속 떼를 썼다. “아빠 모는 수레에 앉아 가면 되지. 응~” 상우 동생을 안아주면서 얼렸다. “얘, 어떻게 저 높은 수레 꼭대기에 앉는다고 그래? 집에 있어라. 장마당에 갔다가 올 때 형님이 엿사탕 사다줄게.” “엿 사탕? 아, 좋아라! 약속해야 돼, 꼭 사온다고.” “오, 그래.” 상순과 상우는 깍지걸이를 했다. 기준은 울퉁불퉁한 호박 길로 수레를 겨우 몰고 둬 식경 내려가자 진수해 북쪽에서 세차게 흐르는 부르하통하 강물이 앞을 가로 막아 나섰다. “와.” 소를 세워놓고 기준은 강물 가에 가서 수심을 여겨보았다. 조약돌이 환히 들여다보이는 물은 그리 깊지 않아보였다. 기준은 둥글소 쪽에 돌아가 고삐를 쥐고 멍에를 팔꿈치로 지그시 누르면서 “이라!” 하고 소를 몰았다. 둥글 소는 기준의 명이 떨어지기 바쁘게 머리를 숙이고 소 수레를 끌고 앞으로 힘차게 나아갔다. 소 앞다리의 근육이 불뚝불뚝 일어섰다. 둥글 소는 용케도 나무를 산더미같이 실은 수레를 끌고 강심까지 들어갔다. 그런데 강심을 벗어나려는 곳에서 그만 웬 돌에 오른쪽바퀴가 턱 걸려 옴짝달싹 못했다. “상우야, 소를 몰아.” 기준은 소고삐를 상훈에게 넘겨주고 오른쪽바퀴 쪽에 가더니 두 손으로 수레 살을 잡고 건뜻 들었다. “몰아라!” “이라!” 그제야 둥글 소는 수레를 끌고 겨우 앞으로 나갔다. 한참 기준과 둥글 소가 끙끙 애써 간신히 부르하통하를 건넜다. 그들은 겨우 버들방천을 벗어나 진수해 북쪽에 있는 토성 안 집 앞을 지나가게 됐다. “에에, 고이(오게나).” 토성 안에서 일본군복을 입은 자가 나오면서 손짓하여 불렀다. “와.” 기준이 수레를 세우는데 상훈은 나지막이 말리였다. “아버지, 일본 놈입니다. 혹시 우릴 알아보면 어쩝니까?” “설마, 땔나무를 사자고 그러는지 아니?” 그자는 가재수염을 슬슬 내리쓸며 수레를 빙 돌아가면서 땔나무를 여겨보더니 땔나무를 손짓하면서 뭐라고 지껄였다. “뭐라는지 알아들어야 어쩌지.” 기준이가 중얼거리는데 토성 안에서 요염하게 치장한 여인이 나오면서 호들갑을 떨었다. “땔나무를 사겠다고 해요.” 일본 군인은 손가락 두 개를 펴대더니 “니엔(2원)!” 하고 지껄였다. “3원이면 팔겠다고 알려주오.” 그러자 보름달같이 생긴 창녀가 일본 군인에게 전해주었다. 일본 군인은 기어이 손가락 두개를 꼿꼿이 펴 쳐들었다. “그럼 안 팔겠소.” 기준은 땔나무수레를 몰고 떠나려고 했다. 그러자 창녀가 “2원이라도 주겠다고 할 때 팔아요. 괜히 일본 놈들 성질을 건드렸다가 빼앗기지 말고.” 하고 종알거렸다. 그 말도 비슷하여 기준은 별수 없이 2원을 받아 쥐고 땔나무를 넘겨주기로 했다. 그와 상우는 수레를 몰고 토성 안으로 들어갔다. 토성 안에 들어서니 덩실한 기와집이 여러 채 남향하여 “ㄷ”자형으로 들어앉아있었다. 푸른 기와를 얹은 위안소는 추녀가 도고하게 하늘 높이 건뜻 쳐들려있어 위엄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유리창문까지 달아 깨끗하고도 산뜻해보였다. 마당에는 아침해 볕을 쪼이느라고 한복이거나 화복을 걸친 숱한 종군위안부들이 왔다 갔다 거닐고 있었다. 기준과 상우는 땔나무를 창고 앞에 부리어놓은 후 목수도구를 수레에 되 싣고 떠나려고 했다. 일본 놈은 가재수염을 만지면서 목수도구를 보고 “거 목수도구 아닌가?” 하고 물었다. 그 위안부가 통역해줘 그 소리를 알아듣자 기준은 등 곬에 싸늘하게 소름이 쪽 끼쳤다. “어, 어. 그렇소. 우린 일이 바빠 가야 되겠소.” 위안부의 통역을 듣고 일본 놈은 머리를 끄덕이더니 “우리 마사진 문을 손질해주게나. 오까네 이빠이 아게(돈 많이 줄게).” 하고 씨부렁거렸다. 일본 놈이 어찌나 찰거머리처럼 들어붙는지 용빼는 수가 없었다. “어느 걸 손 질 하라오?” 일본 놈은 몸채의 정문으로 다가가더니 열었다 닫았다 하면서 찌그러진 문을 손질하라고 했다. 기준은 찌그러진 문짝을 내려다본 후 머리를 끄덕이더니 상우를 보고 부탁했다. “넌 먼저 수레를 몰고 집으로 가라. 내 제꺽 손질해놓고 가마.” 기준은 일본 놈이 준 땔나무 값을 상훈에게 줘 보냈다. 상우가 수레를 몰고 소서구로 떠난 후 기준은 땀을 뻘뻘 흘리면서 대패질할 때였다. 이때 한패의 일본 헌병들이 징그럽게 너털웃음을 웃으면서 토성 안에 들어섰다. 기준은 속으로 욕설을 퍼부었다. (개새끼들이, 어찌 문턱이 다슬게 드나들었으면 문이 다 찌그러져?) 기준은 부러진 널판을 도끼로 팡팡 찍어내면서 두덜거렸다. “개자식들이, 어떻게 주정을 부렸으면 문을 다 차서 끊어버려?” 뒤이어 그가 부러진 나무 대신 새 널을 바꿔 넣었다. 일본 군경들이 우르르 쓸어들어 위안부들을 끼고 방안으로 들어갔다. 그때 아까 가재수염에게 통역을 해주던 보름달같이 동글납작한 위안부가 일본군관을 밀어놓으면서 상을 찡그리며 종알거렸다. “소대장님, 어제 손님 열일곱이나 받고 보니 몸이 불편해 오늘은 안 되겠어요. 만금과 해요.” (만금이?) 기준은 어데서 듣던 이름 같아 피뜩 쳐다보았다. 걀쭉하게 생긴 만금은 꽤나 예쁘장하게 생겼다.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일본 놈들에게 몸을 팔아?” 기준은 자귀로 쐐기를 깎아 옹이구멍에 박아 넣으면서 중얼거렸다. “우리라고 몸을 팔고 싶어 그러게?” “누군 고향을 떠나 섬나라 오랑캐들의 깔개가 되고 싶어 간도에까지 왔게?” “별 나그네 다 있어.” 만금은 종알거리면서 일본군 소대장의 팔을 끼고 방으로 들어갔다. 잔등에 탄자 같은 걸 띠고 화복을 입은 일본 위안부들도 밀가루주머니에 들어갔다 나온 것 같은 낯을 해가지고 일본 군 장병들을 모시고 이간 저간 들어갔다. 여기저기서 위안부들의 고통스런 울음소리와 신음소리가 간간히 들려왔다. 기준은 마사진 문을 제꺽 손질해놓고 떠나려고 가재수염을 보고 손질해놓은 문을 손가락 질 한 후 손을 내밀었다. “삯전을 달라고? 이놈, 정말 우리 황군의 돈을 벌고 싶은 모양이지.” 가재수염은 삯전을 주기는 고사하고 기준의 얼굴에 대고 손가락질하면서 욕지거리를 해댔다. “네놈의 땔나무를 샀으면 문을 손질해주면 안 돼?!” 이때 보름달같이 동글납작하게 생긴 아까 그 위안부가 나와 말리였다. “오가와센세이, 그만하세요.” 오가와란 놈은 기준을 손가락질하면서 “옥설인 저 도척 같은 놈을 알아?” 하고 물었다. “몰라요. 내가 어찌 저런 가난한 사내를 알겠어요?” 오가와는 기준의 아래위를 훑어보면서 “그래도 혹시 명천에서 봤는지 알 턱이 있는가?” 하고 빈정거렸다. (옥설이? 분명 명천에서 온 위안부들이구나. 이전에 병권 큰아버지가 말하던 불쌍한 여자들이 여기까지 끌려왔구나.) 기준은 오가와가 혹시 알아볼까봐 삯전이구 뭣이고 기생집에서 나왔다. 이때 등 뒤에서 웬 웅글진 조선말소리가 들려왔다. “명천이라니? 누가 명천에서 왔다고?” 뒤에서 옥설의 말소리가 들리었다. “아니예요? 똘만이, 오가와 센세(선생)이 저 나그네를 명천에서부터 아는가 물었어요?” (저건 똘만이 경찰이구나! 이걸 어쩌지?) 기준은 토성문안을 나서자 걸음아 날 살려라고 도망쳤다. (아차, 소서구 쪽으로 달아나면 따라올 게 아닌가?) 기준은 발길을 돌려 진수해 남쪽으로 달아났다. 그는 작은 골목을 굽이굽이 돌다가 남산으로 올라 서쪽으로 달아났다. 둬 식경 헤매 패랑천산과 칼산 앞에 이르자 부르하통하를 건너 북으로, 북으로 버들방천 속으로 숨어들었다. 해가 거의 넘어갈 저녁녘에 기준이가 집으로 돌아오니 집식구들이 누워있는 둥글소를 둘러싸서 야단쳤다. 그가 다가가보니 둥글소의 배가 남산만큼 컸다. “어떻게 된 일이오?” 상우가 눈물이 글썽해 두 손을 맞잡아 싹싹 비비면서 말했다. “웃새집 둥글 소가 글쎄 콩을 먹고 배가 불러 쓰러졌습구마!” 기준은 상우의 뺨을 찰싹 갈겼다. “이 놈아, 수레를 몰고 와서 어찌 했기에 소 배때 이 모양이냐?” 상우는 손으로 볼을 만지면서 눈물을 뚝뚝 떨궜다. “수레 채에 소를 매 놓았는데 수레 옆의 콩꼬투리를 먹은 거 같습니다.” “자식, 소를 어떻게 매놓았으면 콩꼬투리를 먹니?” 기준은 황소숨을 몰아쉬면서 가래 같은 손을 쳐들었다가 맏며느리 지새금이 돌아서서 어깨를 들먹이는 것을 보고 내리웠다. “에이, 황소 없으면 명년에 어떻게 농사를 짓겠느냐?” 철부지 상순은 어른들 속에 끼어들어 듣다가 “둥글 소 죽으면 잡아 고기를 먹지 뭐? 얭 얭 맛있다. 오래오래 맛있다 하지.” 하고 종알거렸다. 사련은 제꺽 손으로 상순의 입을 막으면서 기준의 눈치를 살폈다. 기준은 한숨을 후~ 땅이 꺼지게 내쉬더니 집안으로 들어가 털썩 드러누웠다. (저걸 어쩌느냐? 큰집에 뭐라고 말해?) 한 시간에도 두 번씩이나 나가 둥글 소를 보아도 배만 점점 더 커져갔다. 그때 상훈이가 들어와 무릎을 꿇고 앉아 말했다. “아버지, 소가 죽으면 소를 잡아 고기를 팔구 모자라는 돈은 겨우내 땔나무를 해다 진수해에 팔아 만듭시다.” 기준은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었다. “진수해 북쪽길목에 토성안집이 있어서 어떻게 시내로 들어가겠냐? 오늘 문짝을 서너 개 손질해주고 삯전을 한푼도 받지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명천경찰국에서 온 똘만이 경찰을 마주 띄워 하마터면 붙잡힐 번했다.” “예?” 그 소리에 상훈이나 사련이나 온 집식구들이 모두 놀라 일어나 앉았다. 이튿날 둥글 소는 끝내 배불러 죽어버렸다. 별수 없이 기준은 상훈을 보내 큰집 웃새집에 알리였다. 농사군의 목숨과도 같은 둥글 소가 배불러 죽었다는 말에 웃새집에서는 깜짝 놀랐다. “그게 무슨 소리냐?” 병완은 기침을 쿨룩쿨룩 하며 위방에서 엉거주춤 일어나 바깥으로 나갔다. 창준은 외양간에서 상훈과 함께 작두로 소를 먹일 풀을 썰다가 이마에 돋은 식은땀을 닦으며 바깥에 나왔다. “뭐라니? 황소가 어쨌다고?” 상우는 머리를 숙이고 두 손을 싹싹 비볐다. “소를 수레 채에 매놓았는데 그만 콩 먹고 배불러 죽었습니다.” “아이고, 이 일을 어찌 하느냐?” 창준은 손의 먼지를 투다투닥 털고 병완을 따라 소서구로 헐금씨금 달려갔다. 병완과 창준은 소서구 기준이네 집에 이르러 마당에 쓰러진 배 뿔룩한 황소를 보고 땅이 꺼지게 한숨을 후~ 내쉬었다. “형님, 미안하오. 내 꼭 소 값을 만들어 주겠소.” 창준은 기준의 손을 잡고 “얘, 형제간에 무슨 소리냐? 소를 잡아 고기를 진수해에 가서 팔아라. 두루 보태 둥글 소를 사야 너희들도 명년에 농사를 짓지.” 하고 말했다. 기준에는 울며 겨자먹기로 둥글 소를 잡아 고기를 팔고 나머지 내장은 큰집과 나눠 먹었다. 4. 흑영 기준은 늦가을부터 목수일이라도 해서 황소를 살 돈을 보태려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진수해의 토성안집이 두려워 가지 못하고 목수도구상자를 메고 대담히 용정으로 떠나갔다. 도시락에 마른 누룽지를 싸가지고 길을 떠난 그는 반나절이나 걸어서야 해란강변에 이르렀다. 기준은 목수도구상자를 메고 용정 시내를 빙빙 돌아다니면서 일감을 찾았다. (목수도구상자를 메고 돌아다니는 걸 보면 부르겠지.) 기준은 코 노래를 흥얼거리면서 영국덕과 토성포까지 한식경이나 돌아다녔지만 아무도 부르지 않았다. 교회당 부근을 돌아다니는데 까만 신부복을 서양신부가 안경알을 닦으면서 그를 불러 세웠다. “핼로(여보세요). 목수일 하지 않겠어요?” 서양신부 같은데 조선말을 꽤나 잘했다. “예. 하겠습꾸마.” 애타게 일을 찾던 기준은 아주 반가워하면서 신부를 따라 교회당으로 들어갔다. 신부는 기준을 데리고 십자가가 걸린 넓은 예배당을 지나 옆칸으로 들어갔다. 부엌에서 여성들이 한창 남새를 다듬다가 건장한 사내가 뭘 메고 들어서자 모두 이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신부는 식장을 가리키면서 “저런 식장을 둬 개 더 짜줄 수 있겠어요?” 하고 물었다. “예. 한 일여덟 날 걸릴 것 같은데 괜찮겠습둥? 그런데 난 잘 데도 없어 안 되겠는데.” 기준은 조금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하긴 가지고 온 도시락도 얼마 남지 않았고 돈도 몇 푼 없었던 것이다. “일주일? 괜찮아요. 삯전은 푼푼히 주겠으니까. 근심하지 말아요. 교회당에서 우리와 함께 숙박하면서 식사해요.” 신부는 마음이 아주 너그러웠다. 신부는 기준을 데리고 뒤울안으로 들어가더니 숙사 한간을 내주었다. “일주일 동안 여기서 쉬면서 식장을 짜주세요.” 기준은 감지덕지하여 “감사합꾸마. 꼭 일주일안에 멋있는 식장을 짜 드립지비.” 하고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기준은 목수도구상자와 도시락을 숙사에 두고 나서 신부에게 “식탁을 짤 목재는 어데 있습니까?” 하고 물었다. 신부는 어깨를 들썩하더니 “따라오세요.” 하고 서쪽 마당으로 갔다. 거기에는 마른 목재들이 쌓여있었다. 기준은 가꾼 목을 하나 골라 들고 보더니 머리를 끄덕였다. “예. 몽땅 홍송이구먼. 좋은 식장을 짤 수 있습꾸마.” 이윽고 기준은 점심을 교회당 식당에서 잘 먹고 목수도구상자를 메고 목재 무지 옆에 가서 일을 시작했다. 이튿날 기준이 한창 일할 때 교회당 예배당 안에서 아주 들어보지도 못했던 음악소리가 은은히 들리었다. 그 음악소리가 어찌나 맑고 부드러운지 기준은 귀가 솔깃해졌다. 하여 그는 대패질하다가 유리창문으로 교회당 예배당 안을 들여다보았다. 비단옷을 입은 숱한 부자들이 앉아있는가 하면 남루한 한복을 입은 여성도, 떠꺼머리도 수태 들어앉아 있었다. 앞무대 위에서는 한창 서양신부가 뭐라고 연설을 하고 있었다. (밥을 먹고 할 일도 없는 모양이지.) 기준은 다시 대패질을 썩썩 했다. 한주일 동안 부지런히 대패질하고 쐐기를 박아 넣어 식장 두개를 다 짜놓았다. 서양신부와 조선신부들이 몇이 와서 식장을 보더니 혀를 끌끌 찼다. 주방장 조선족아줌마는 키 넘는 식장을 매만지면서 찬탄을 금치 못했다. “어쩌면 요렇게 빤질빤질하게 짰을까? 요기다 음식그릇을 얹어 놓으면 음식 맛이 다르겠다. 야~” 신부는 호주머니에서 뭔가 꺼내더니 기준의 손바닥에 쥐어주었다. “자, 받으세요. 10원입니다.” 기준은 돈을 받아 쥐자 “감사합꾸마.” 하고 허리 굽혀 인사했다. 주방장아줌마는 “아니, 내 두 달 일해도 그만큼 받지 못하는데.” 하고 아까워했다. 신부는 주방장아줌마에게 “우리 교회당 주방에 멋진 식장을 짜줬으니 두고두고 얼마나 잘 쓰겠어요? 항상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야죠.” 하고 말했다. 주방장아줌마는 너무나도 창피하여 머리를 들지 못하고 웃으면서 “감사합니다. 목수.”하고 거듭 사과하는 마음으로 감사의 인사를 드렸다. 기준은 허리를 굽혀 인사를 드리고 교회당에서 나왔다. 신부는 문밖에까지 배웅했다. “난 죤슨이라고 부릅니다. 이후에 혹시 용정에 왔다가 어려운 일이 있으면 찾아오세요. 저희가 있는 힘껏 도와드리죠.” “예. 고맙습꾸마.” 기준은 다시 허리를 굽혀 인사하고 교회당을 떠났다. 그는 한참 걷다가 다시 십자가가 꽂힌 교회당의 뾰족한 지붕 쪽을 되돌아보았다. 그런데 그때까지도 죤슨 신부는 선 자리에 있다가 되돌아보는 기준에게 손을 저었다. “참, 이렇게 살벌한 세상에 별나게 착한 사람도 다 있군 그려.” 기준은 중얼거리고 나서 또 시내를 돌아다니면서 일거리를 찾았다. 그는 한낮이 돼 한 아름이나 되는 버드나무 아래에 갔는데 우물이 있었다. 그는 갈증이 나서 나무에 걸린 드레박을 풀어 우물에 풍덩 처넣고 슬슬 잣아 올렸다. 그가 드레박의 시원한 물을 부어 마실 때였다. “이게 누구야?” 기준은 물을 마시다 말고 입을 쓱 닦으면서 허리를 펴는 순간 자기 눈을 의심할 정도였다. 글쎄 관준 형님을 용정에서 만나다니. 관준은 주위를 흘끔흘끔 살피면서 기준을 끌고 작은 골목으로 슬밋슬밋 숨어들어갔다. 기준은 너무나도 반가와 사촌형님의 팔을 붙잡고 물었다. “아니, 형님. 여기는 어떻게 돼 왔소? 큰아버지랑 잘 있소?” 관준도 반가워 어쩔 줄 몰라 했다. “야, 한입으로 어떻게 다 말하겠니? 정말 간도에서 이렇게 만날 줄은 몰랐다.” 기준은 관준 형님을 데리고 자그마한 개장 집으로 들어갔다. 그는 개고기 한 접시에 막걸리를 둬 잔 시켰다. “그래 큰아버지랑 무사하오?” 그러자 관준은 아주 슬픈 표정을 지으면서 나직이 말했다. “일본 놈들에게 붙잡혀 무너진 우시장 경찰국 청사자리 폐허에서 교수형을 당했다.” “양?!” 기준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는 곁에 사람들이 있는 것도 눈치를 볼 새도 없이 대성통곡을 쳤다. “아이고, 큰아버지!” 숱한 손님들이 그들을 쳐다보았다. 관준은 허리를 앞으로 약간 굽히면서 미안하다는 뜻을 표시했다. 기준도 소리를 낮춰 흑흑 흐느껴 울다가 그쳤다. 분김에 기준과 관준은 막걸리를 들어 쭉 굽 냈다. 그는 개고기를 도시락에 싸 넣고 황급히 개장 집을 나와 작은 골목에 굽어들었다. 기준은 관준에게서 그간 큰아버지 일가가 당한 봉변을 듣고 주먹을 으스러지게 틀어 쥐었다. “일본 놈 개씨끼들을 어떻게 해야 원수를 다 갚겠소?” 이때 캡을 쓴 한 땅딸보가 그들의 뒤를 따라오더니 빈대 눈으로 쏘아 보는 것이었다. “형님, 빨리 이 곳에서 빠져 나가기요. 저 캡을 쓴 자가 수상하오.” 관준은 제꺽 눈치를 채고 기준을 따라 주먹을 쥐고 작은 골목길로 이리저리 굽이를 돌아 달아났다. 그들은 단숨에 해란강을 건너 버들방천 속에 몸을 숨기였다. 뒤를 돌아다보아도 뒤를 따라오는 자가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삼봉동 고개에까지 뛰어가다 싶이 했다. “형님, 여기까지 온 바 하고는 우리 소서구에 가기요.” 관준은 쾌히 응낙했다. “그래, 오랜만에 삼촌도 만나봐야겠다. 사실 간도가 살만 한가 내 먼저 왔다.” 그들은 진수해에 들리지 않고 뒷산에 올라 곧추 함흥촌에 이르렀다. 윗방에서 관준을 본 병완은 눈물이 비 오듯 쏟아졌다. “얘, 이게 몇 해 만이냐? 어이구, 이젠 영영 다시 만나지 못 하는가 했는데. 흑흑.” 관준은 위방에 올라가 병완과 성희를 나란히 모시고 넙적 엎드려 큰절을 올렸다. “그간 삼촌과 삼촌댁 평안히 계셨습둥?” 병완은 “그래, 잘 있었다. 형님은 잘 있느냐?” 하고 물었다. 관준은 머리를 툭 떨어뜨리면서 “아버지는 일본 놈들에게 교살당했습니다.” 하고 무거운 입을 떼더니 그간 있었던 일을 죽 말했다. 나중에 그는 “아버지는 돌아가기 전에 ‘성칠 조카랑 꼭 돌아와서 일본 놈들을 쳐 죽이고 원수를 갚을 것이다.’고 외치시면서 '내 조선의 고향에 묻힐 수 있어 다행이다"고 했습니다.” 그 비보를 듣자 병완은 형님의 불행에 가슴을 치며 “어이, 어이. 형님~ 이 동생 때문에 형님이 억울하게 돌아갔소. 어이, 어이, 형님.” 하며 대성통곡 했다. 기준은 “내 간도로 들어올 때 큰아버지도 들어왔더라면 얼마나 좋았겠습둥? 큰아버지는 고향을 떠나기 싫다고 하시더니, 에이고, 큰아버지가 불쌍합구마.” 하고 중얼거렸다. 창준과 성희도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정주간에서 아낙네들도 저고리 동전으로 눈물을 닦았다. 이윽고 성희는 “혹시 내 오라비랑 명천에 왔댔어요?” 하고 물었다. 관준은 자리에 앉으면서 삼촌댁을 바라보며 “최구장이 그러는데 삼촌네 떠나간 후 손자를 데리고 운주동에 왔다가 대성통곡치고 돌아갔답니다.”라고 했다. 그러자 성희는 본가 집 오라비가 생각나 눈물을 하염없이 흘리더니 정주간으로 나갔다. 병완은 곰방대에 담배를 쑤셔 넣으며 물었다. “최구장 사돈어른은 잘 계시느냐?” 관준은 바깥을 내다보며 말했다. “에이고, 그 사돈어른 막내아들은 약담배 매매를 했다고 끼무라 놈이 교수형에 처했습꾸마. 일본 놈들 말도 하지 맙소. 아버지를 교살한 교수대에서 달마다 거의 십여 명씩 별의별 죄명을 다 들씌워서 교살했습꾸마.” 병완은 담배연기를 후 내뿜으며 이를 갈았다. “일본 놈새끼들을 어떻게 원수를 다 갚겠느냐?” 관준은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었다. “일본 놈들은 경찰국 사무 청사와 다리가 수태 무너지자 누구 탈만해서 미쳐 날뜁니다. 삼촌과 기준 탓이라면서 지금 잡자고 미쳐 날뜁꾸마. 듣는 말에 그 놈들은 간도에도 기별해서 삼촌과 기준을 잡으라고 했답더구마.” 기준도 한마디 했다. “이번에 용정에 갔을 때 우리 뒤를 쫓아다니던 놈이 별루 명천 경찰국의 조선 경찰 똘만이 같았습꾸마. 캡을 썼지만 땅딸보가 누구 눈을 속인단 말입둥? 전번에 진수해 기생집에 같다가 피뜩 뒤돌아보니 땅딸보 똘만이 같습더구마.” “개자식들, 여기까지 쫓아와 우리를 못살게 굴자구?” 병완이 욕설을 퍼 부었다. “성칠 동생은 어데 있소?” 병완은 담배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몇 해째 행방불명이다. 아무리 유격대에서 바쁘더라도 제 애비 어미는 찾아봐야지. 사람자식이. 참.” 병완은 담배 재를 재떨이에 털더니 관준을 보고 “이제라도 여기 들어오너라. 일본 놈들이 성화에 어떻게 배기겠느냐?” 관준은 눈물을 닦으면서 진정을 토로했다. “사실 이번에 그래 왔습니다. 간도가 어떤지 알아보고 집 식솔들을 데리고 들어오겠습니다. 그런데 아버지 산소를 고향에 모셔두고 오기도 죄송스럽습니다.” 병완도 속을 털어놓았다. “나도 할어버지와 부모 산소를 고향에 두고 온 게 죄송스럽다. 핍박에 의해 고향을 떠난 불효를 조상들께서도 구천에서 용서하겠는지.” 관준은 한숨을 후 내쉬었다. “용정도 보니 일본 놈들의 세상이 다 됐더구먼. 여기 소서구는 어떻습니까?” 병완은 담배를 풀썩풀썩 피우면서 대답했다. “아직 여기는 일본 놈들이 들어오지 않아 편안하다. 한족지주들도 조선 지주들보다 마음이 후하고.” 관준은 흥미가 당겨 가까이 다가앉았다. “소작료를 얼마나 바칩니까?” 창준은 볼 부은 소리를 했다. “몇 해 전엔 우리 황무지를 일군 밭에서 난 곡식은 우리 8할 먹으라고 했소. 그런데 이젠 절반 밖에 주지 않소.” 기준도 씩씩거리며 울분을 토했다. “우리 애나게 나무를 뽑아 버리고 황무지를 개간했는데 이제 조선 지주들처럼 8할을 떼 낼 지 누가 아오? 원삼도 물레방아 골에서 반작농사를 짓는다던데.” 관준은 무겁게 머리를 끄덕였다. “천하의 까마귀는 다 까맣다고 조선 지주나 중국 지주나 세상의 지주들이 다 그렇지. 많이 줄 상 하면서 황무지를 기껏 개간하게 해놓고는 제 배때를 채우자고 들지. 후~ 가난한 사람들이 어떻게 살겠소?” 병완은 관준을 보고 정색해 말했다. “일본 놈들이 그래도 널 감방에서 내놓은 게 다행이야.” 관준은 도리머리질을 했다. “내 대신 상철을 잡아갔습니다. 놈들은 우릴 미끼로 삼촌 일가 꼬리를 밟자고 미쳐 날뜁니다. 이번에 간도에 들어올 때에도 난 꼬리를 떼버리느라고 혼났습니다.” 저녁에 아래사랑집 석은과 석철 두 내외간이 와서 집안집 종친회를 방불케 했다. 석은의 아내 죽순은 관준에게서 막내 동생 경석의 비보를 듣고 동전으로 눈물을 닦으면서 마당으로 조용히 나갔다. 석은이 따라 나가 들먹이는 아내의 어깨들 다독이며 위안했다. 죽순은 머리를 들고 석은을 바라보며 눈물을 빗물 내리듯 줄줄 흘리며 흐느껴 울었다. 석철과 병완은 관준과 밤늦도록 두런두런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관준은 열흘이나 있으면서 기준이네 집에도 가보고 황무지를 개간한 밭들도 돌아보았다. 병완은 관준 앞에서 창준과 기준을 돌아보며 “새해부턴 형제간의 밭을 나눠 다루면 어떠냐?” 하고 물었다. 창준과 기준은 서로 마주보며 이구동성으로 좋다고 했다. 병완은 손으로 소서구 막바지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아무리 형제간이라도 나눠 다루면 말썽도 없고 힘이 더 난다. 저기 막바지등성이로부터 기준이네 집으로 쭉 내려오면서 금을 긋고 그 남쪽으로부터 천지꽃산까지 기준이네가 개간해 다루고 북쪽 산비탈 밭은 창준이네 다루도록 하자.” 창준과 기준은 다 좋아했다. 관준은 소서구에는 붙힐 땅이 없는 것을 보고 큰 골 안의 동쪽으로 쑥 들어간 골 안을 가리키며 물었다. “삼촌, 저기 동쪽 골안은 사는 사람이 없습니까?” 병완은 머리를 절레절레 가로 저었다. “사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 그런데 의사 질 하는 너희들이 밭을 해 뭘 하겠니? 만약 너희들이 여기 오면 개간할 황무지는 쌔고 버렸다. 내 저 동쪽 골안을 장학산 지주에게 말해서 붙이게 할게.” 관준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인적도 드문 이 골 안에서 무슨 환자를 보겠습니까?” “그렇긴 하다.” 며칠 후 관준은 고향으로 떠나갔다. 병완은 5원이나 쥐어 보내면서 부탁했다. “내 대신 할아버지와 아버지한테 제주를 부어 달라. 형님 산소에 가서 이 동생이 직접 고향에 찾아가 제주를 붓지 못해 죄송스럽다고 전해라.” 병완은 눈물을 주르르 흘리었다. 창준이네와 기준이네도 동전잎을 쥐어주었다. “형님네도 여기 들어오오. 우리 함께 간도에서 살기요.” “알았다. 돌아가 집식구들과 토론해보겠다.” 관준이가 몸을 돌려 떠나가려 할 때였다. 성희가 기침을 콜록콜록 하며 신신당부했다. “혹시 내 오라버니 명천에 오면 이 누이 여기서 산다고 전해주세요.” “예, 알았습니다.” 관준은 병완과 성희에게 큰절을 올리고 떠나갔다. 기준은 관준을 배웅하는 길에 용정에 가서 일하려고 함께 길을 떠났다. 집 동쪽에 있는 늙은 비수나무 꼭대기에서 까마귀 몇 마리가 까욱, 까욱 울었다. 싸늘한 늦가을 바람에 낙엽이 우수수 떨어졌다. 기준과 관준은 누런 낙엽을 밟으면서 길을 다그쳤다. 기준은 육도하 강변을 따라 선바위 골 쪽으로 올라가면서 관준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다. “이 근방을 달라재라는 한다오.” “건 왜 그렇게 부른다니?” 그러자 기준은 허무한 웃음을 지으면서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달라하자 근방에 오누이가 살았지요. 어느 날 그들 오누이는 육도하를 건너 산나물 캐러 가게 됐다오. 그런데 큰 비가 억수로 퍼부어 물이 불어 세차게 사품 치면서 흘렀다오. 그래서 오라비가 누이를 업고 강을 건너게 되였지. 누이를 업고 강을 건너던 오라비가 불시에 남근이 꿋꿋하게 살아났다오. 오라비는 강을 건넌 후 누이를 내리워놓고 버들방천에 뛰어 들어갔지. 오라비는 누이를 보고 짐승처럼 살아난 자기 남근을 돌에 대고 돌로 쳐 끊어버리고 죽어버렸다오. 누이는 그 사연을 알고 죽은 오라비를 안고 ‘누이를 보고 달라 할 게지, 달라 할 게지.’ 하며 통곡 쳤다오. 그때로부터 그 애탄 사연을 담아 이 근방을 ‘달라하자’라고 불렀다오. 그 후 달라하자는 달라재라고 불렀다오.” 관준은 그 이야기를 듣고 어처구니없어 했다. “그 오라비 그 누이구나. 인륜이란 천륜인거야.” 그들은 이 말 저 말 하다나니 어느 새 오랑캐 령을 넘어 오후에야 두만강 변에 이르렀다. 기준은 몇 해 전에 한을 품고 고향을 떠나 두만강을 건너던 일을 되 돌이키자 한숨만 땅이 꺼지게 내쉬었다. 이전에 어린 조카를 데리고 이 두만강을 건너 간도에 첫발을 들여놓았고 이듬해에는 아버지와 형님을 이 두만강에서 마중했다. 오늘은 또 살 길을 찾아 간도에 왔던 사촌형님을 생사이별을 기약할 수 없는 조선으로 바래여야 했다. 그는 고향 명천 운두동이 사무치게 그리웠다. 고향 산천이 그립고 조상들의 산소가 그립고 고향의 모든 것이 그리웠다. (아, 두만강, 한 많은 두만강이여, 너는 우리와 조선, 우리와 혈육을 갈라놓은 강이구나. 일제와 네가 없으면 우린 자유로운 새처럼 조선을 드나들고 고향으로 찾아갈 수 있을게 아니냐.) 관준은 살 얼음조각이 둥둥 떠 동으로 유유히 흐르는 두만강을 멍해 바라보고 있었다. 이때 기준이 관준의 손을 잡고 나직이 말했다. “형님, 고향이 아무리 좋아도 일본 놈들의 세상이 된 판에 우리 소서구에 들어오오.” 그러나 관준은 도리머리 질 했다. “아버지 3년 제사도 지내지 못하고 어떻게 고향을 떠나겠니? 또 우리까지 떠나면 아버지와 할아버지 산소를 누가 모시겠냐?” 기준은 한참 궁리하더니 귀띔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끼무라 놈이랑 한길수랑 형님을 가만 놔둘 거 같지 않소. 잘 생각해보고 선손을 써 우리 여기로 들어오는 게 옳은 거 같소.” 관준은 믿음에 찬 눈길로 기준을 바라보며 머리를 끄덕였다. “그 놈들이 우리 뒤를 밟아 너 일가를 발견할까봐 근심돼 그런다.” “그런 막연한 근심을 하지 말고 들어오오.” 관준이 머리를 끄덕이며 기준의 손을 굳게 잡았다. “형님, 이제 갈라지면 언제 또 만날까?” 기준은 형님을 꼭 끌어안았다. 그들은 눈물을 휘 뿌리면서 두만강 변에서 작별했다. 아, 눈물 젖은 두만강아, 그대는 그 얼마나 많은 부모형제들의 생이별을 묵묵히 바라보았던가!  
48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27) 댓글:  조회:1818  추천:1  2015-12-25
            12. 사꾸라관의 신음소리        가을바람이 살벌한 명천과 우시장 땅에 써늘하게 불어왔다.       어느 하루 오후 스즈끼는 수하들이 없는 틈을 타서 끼무라를 불러놓고 넌지시 힌트했다.       “반일 불온분자 소탕전은 초보적으로 전과를 거뒀네. 난 이제 업동 경찰총국에 끼무라 대대장과 자위대 한길수 대대장의 공훈을 보고하겠네. 상부에서 상을 내리게 말이네. 만족하진 말게. 한 달에 불온분자 십여 명씩은 체포해 목을 매달아야 하네.”       “십여 명씩이나?”       끼무라는 눈깔이 뒤집힐 정도로 뚱그래졌다. 그러나 스즈끼의 안경알 밑의 살기 넘치는 눈길과 마주치자 인차 혀를 날름 감췄다가 제꺽 “하이!” 하고 대답했다.       스즈끼는 독사와 같이 혀를 날름거렸다. “이젠 닭을 잡아 원숭이를 훈계할게 아니라 원숭이를 잡아 닭을 훈계하란 말이야.” “하이!” 끼무라는 벌떡 일어나 군례를 척 붙이며 고함쳤다. 끼무라는 차렷 하고 군례를 올리었다. “스즈끼 국장님의 은공을 한평생 각골난망이올시다.” 스즈끼도 일어나 군례를 하며 희죽이 웃었다. 끼무라는 한숨을 후- 길게 내쉬었다. 스즈끼는 끼무라 옆에 다가와 어깨까지 툭툭 다독여주면서 거만하게 이상부하에게 하대 로 지껄였다. “처음에 왔을 때 모르고 떽떽거렸는데 양해하게나. 이젠 허리를 꿋꿋이 펴고 일하게나.” 끼무라는 머리를 조아렸다. “하이!” 스즈끼는 이번에는 춰주면서 구슬렸다. “후에 나는 끼무라 국장이 야마모도소장과 한길수대대장이랑 거느리고 포수대 출신 항일유격대와 용감히 싸워 엄상호를 교살하고 김성칠 괴수를 부상 입히고 엄은희를 교살한 전과를 뒤늦게야 알게 되였네. 미안해. 당신은 명천과 우시장 일대 항일유격대를 숙청해버렸고 안정을 수호하는데 중대한 공훈을 세웠네. 충신을 몰라봤네.” 그만하면 끼무라의 옹이 진 속을 후련하게 풀어준 것 같아 스즈끼는 화제를 돌렸다. “유격대를 소탕하느라고 위압을 많이 받았겠네. 업동을 떠나 객처에 오니 종종 위안부 아가씨들이 필요하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네.” 끼무라는 제꺽 눈치챘다. 스즈끼는 끼무라를 돌아보면서 슬쩍 말을 돌려 욕망으로 부글부글 끓어 번지는 속내를 덮어 감추려 했다. “명천에는 경치 좋은 곳이 없어? 시원히 바람이라도 쏘였으면 좋겠는데.” 마른기침을 하면서 힐끔 곁눈질하는 스즈끼를 보고 끼무라는 제꺽 눈치 챘다. (영웅도 미인관을 넘기 어려운 법인걸. 네 놈이라고 칠정육욕이 없겠느냐?) “사꾸라관에 가서 위안부 아가씨들을 끼고 한잔 나눕시다. 명천에 이름난 기운봉, 치마봉(저자 주: 기운봉과 치마봉은 지금의 칠보산의 두 개 봉우리임)이 있지만 우리 후지산엔 짝도 되지 않습니다. 지금 가을 산에는 항일유격대 잔당들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진작 술잔이라도 나누면서 스즈끼 국장님의 피로를 풀어드렸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또 주색에 빠질 것 같아 주춤, 주춤 했습니다.” 끼무라는 스즈끼의 눈치를 힐끔힐끔 곁눈질하면서 중얼거렸다. 스즈끼는 픽 냉소했다. “그때는 반일 불온분자 숙청이 급하니까 언제 술을 마실 겨를이 있었소? 지금 큰 전과를 거뒀으니까 축배를 들만도 하지 않은가?” “예, 예, 당연하죠. 자, 갑시다.” 스즈끼는 희죽이 웃더니 기생을 놀 생각을 하며 마른 침을 꼴깍 삼켰다. 스즈끼와 끼무라는 수하들 몰래 사복을 하고 좋은 지프도 내버려두고 걸어서 경찰국 대문을 나섰다. 사꾸라관은 경찰국과 헌병대 울안에서 엎어지면 코가 닿을 지척에 두었다. 끼무라는 아가씨들의 생각이 나면 몇 분 사이에 달려갈 수 있게 사꾸라관을 변소 간처럼 지척에 지어 놓았던 것이다. 스즈끼가 끼무라를 따라 사꾸라관에 가 보고 군침을 꼴깍 넘겼다. 높다란 토성 안에 자리 잡은 2층 푸른 기와집으로 된 사꾸라관은 주변의 경치가 아름다웠다. 사꾸라관 앞의 자그마한 인공호수에는 연꽃이 활짝 피어있었고 호수 가에는 일본에서처럼 사꾸라나무가 우거져있어 그윽한 정취를 자아냈다. 봄이면 호수 가에 연분홍 사꾸라꽃이 활짝 피면 꽃향기가 그윽했다. 사꾸라 나무 사이로 예쁜 기생들이 화복을 입고 게다짝을 딸깍거리면서 산보를 한다, 연못의 잉어들에게 먹이를 준다 하면서 깔깔깔 웃고 떠들었다. 그녀들은 끼무라와 스즈끼가 다가오는 것을 보자 방실방실 웃으며 허리가 버들가지처럼 휘어들면서 인사를 올렸다. 아끼꼬가 사뿐사뿐 다가와 버들가지처럼 호리호리한 허리를 굽히며 “곤니찌와(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드렸다. 정자에서 호수안의 연꽃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하나꼬가 머리 들어 이쪽을 바라보더니 반겨 맞으며 생글방글 웃으며 종알거렸다. “끼무라 국장님, 정말 오랜만인데요. 얼마나 그리웠는지 몰라요.” 유끼꼬도 사꾸라 나무 가지를 꺾어들고 놀다가 한들한들 다가와 정겹게 인사를 드렸다. “끼무라 국장님이 놀러 오시지 않으니 우린 다 굶어죽을 지경인데요.” 끼무라는 스즈끼 앞인지라 조심스레 “오늘 새로 오신 스즈끼 경찰국장을 잘 모셔라. 이젠 날 국장이라고 부르지 말라.” 하고 겸손하게 말했다. “국장이 아니면 뭐라고 불러야 하나요?” 하나꼬가 눈이 동그래 물었다. 끼무라는 하나꼬에게 “난 헌병대 대대장이다. 하나꼬와 유끼꼬는 오늘 스즈끼 국장님을 잘 모셔라.” “저희들이요?” “음, 그래. 스즈끼 국장님 얘들이면 되겠습니까?” 스즈끼는 안경을 춰올리면서 음충한 눈길로 하나꼬의 속살까지 뚫어지게 훑어보는 것이었다. 외씨처럼 걀쭉하고 하얀 얼굴, 운우지정을 나누고 싶은 듯이 갈망과 열망으로 타 번지는 까만 눈, 색정을 담은 그윽한 갈보 년의 눈, 향수와 머리 기름으로 다듬어진 서양식파마머리아래 해 볕을 보지 못해 하얀 우유 빛 살결, 가느다란 목은 스즈끼의 게걸스런 키스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대충 감싸 드러날락 말락 한 봉긋하고 하얀 젖가슴은 할딱거리고 있었다. 게다가 배배 꼬는 탄력 있어 보이는 허리와 엉덩이는 저도 몰래 사내의 욕정을 끓어 번지게 했다. 스즈끼는 마른 침을 꼴깍 넘기면서 온 몸에 끓어오르는 욕정을 금할 수 없었다. “참 예뻐.” 그때까지 하나꼬와 유끼꼬는 스즈끼와 끼무라를 번갈아 보다가 눈길을 끼무라에게 되돌렸다. “뭘 해? 빨리 스즈끼 국장님을 모시지 않고!” 바빠 맞은 끼무라는 하나꼬와 유끼꼬에게 눈을 찔끔 했다. 그제야 눈치를 차린 하나꼬와 유끼꼬는 교태를 부리며 아양을 떨어댔다. “아이유, 스즈끼 국장님은 젊고 참 멋져요.” 그녀들은 양옆에서 스즈끼 국장의 팔을 끼고 한들거리며 사꾸라관 2층으로 올라갔다. “근력도 참 좋을 거 같아요.” 스즈끼는 입이 헤벌쭉해 연신 “그래? 그래. 너희 둘쯤이야. 헤헤헤.” 하고 그녀들의 한들거리는 허리를 양팔로 껴안고 층층계를 밟았다. 뒤에서 끼무라는 아끼꼬와 하루꼬의 살진 엉덩이를 껴안고 따라 올라갔다. 하나꼬와 유끼꼬는 스즈끼의 양팔을 양쪽에서 안고 층계를 다 올라가 방 쪽으로 굽이를 돌면서도 뒤따라 올라오는 끼무라를 핼끔핼끔 되돌아보았다. 끼무라는 눈을 찔끔해 보이면서 하나꼬와 유끼꼬를 빼앗긴 것이 못내 아쉬워 한숨을 푸 내쉬었다. (별수 없지. 살기 위해선 어린 상전에게라도 애지중지하는 하나꼬와 유끼꼬를 내줘야지.) 벌써 전화로 예약해놓았기에 사꾸라 관에서는 하나꼬의 방에 술상을 차려놓았었다. 스즈끼는 거만하게 상좌에 앉았다. 양옆에 하나꼬와 유끼꼬가 딱 붙어 앉아 애교를 부리면서 아양을 떨었다. “스즈끼 국장님, 술을 한잔 드세요.” 하나꼬는 끼무라가 축배를 들기 전에 주제넘게 섬섬옥수로 술잔을 들어 스즈끼에게 권했다. “그래, 그래. 한잔 마시자.” 스즈끼는 건너편에 멍청해 바라보는 끼무라에게도 잔을 들어보였다. “끼무라 대대장, 한잔 마시게.” 그제야 정신이 펄쩍 든 끼무라는 술잔을 들었다. “예, 예. 마십시다. 스즈끼 국장님이 복숭아 꿈이 이뤄질 것을 축원해 한잔 듭시다.” 한잔 굽을 쭉 낸 스즈끼는 육감이 나는 하나꼬와 유끼꼬를 옆에 두고 더는 끓어 번지는 욕정을 참을 수 없었다. 그는 군인의 체면이고 뭐고 끼무라의 앞에서 하나꼬의 탄력있고 부드러운 허벅다리를 슬슬 매만지면서 지분거렸다. 하나꼬는 끼무라의 눈치를 슬슬 보아가면서 스즈끼의 가슴에 안기면서 섬섬옥수로 목을 살살 매만졌다. 끼무라는 머리를 끄덕이면서 하나꼬를 보고 스즈끼를 잘 만족시켜주라고 눈짓했다. 끼무라는 스즈끼가 술 생각이 없는 것을 보고 “하나꼬, 스즈끼 국장을 모시고 안방에 들어가 기쁘게 해드려라.”라고 하며 고개로 안방을 눈짓했다. 스즈끼는 권유에 못이기는 척 하면서 “그래, 먼저 바쁜 일부터 봐야지. 으흠.” 하고 하나꼬를 껴안고 안방에 들어가다가 주춤 멈춰서 되돌아보았다. 그는 멍청히 앉아 자기와 하나꼬를 바라보는 유끼꼬를 보고 “넌 따라 들어오지 않고 뭘 해?” 하면서 눈알을 희번뜩 부라렸다. “예? 나도요?” “으흠.” 유끼꼬는 말똥말똥 쳐다보다가 “알았어요. 잘 모셔드릴게요.” 하고 일어나 스즈끼와 하나꼬를 따라 안방으로 들어갔다. 끼무라는 그제야 한숨을 후 내쉬면서 옆에 앉은 아끼꼬와 하루꼬를 양팔로 끌어안고 볼을 슬슬 비비면서 술잔을 기울였다. 안방에서는 하루꼬와 유끼꼬가 아양 떠는 소리가 들려왔다. 끼무라는 마른 침을 꼴깍 삼키더니 아끼꼬의 허벅다리를 슬슬 만지더니 손이 뱀처럼 하루꼬의 가슴에 스르르 들어가 주물럭거렸다. “아이유, 살살 만지세요. 허벅다리가 아려요. 아아, 코 수염이 목을 찔러요. 아갸갸.” “끼무라 국장님도 저의 안방에 가자요.” 아끼꼬와 하루꼬는 양옆에서 아양을 떨면서 끼무라의 성욕을 돋우느라고 애를 썼다. 그러나 끼무라는 음위가 온지라 욕망의 머리를 쳐들지 못했다. 아끼꼬는 옆에서 끼무라의 술잔을 빼앗다 시피 하여 자기가 쪽 들어 마시고나서 “술만 마시지 말고 오랜만인데 우리를 좀 죽여주세요.” “오늘은 스즈끼 국장이 즐거우면 돼. 어험.” 끼무라는 음위가 와서 하지 못한다는 말은 꺼내지 않고 스즈끼에게 충성하는 척 했다. 그는 사꾸라관 당직실에 앉아있는 하루꼬를 보고 류강철을 불러오게 했다. “자, 우리 한 잔 합세.” 그러자 류강철은 아끼꼬를 흘끔흘끔 곁눈질해보면서 술잔을 들어 쭉쭉 들이켰다. “아끼꼬가 욕심나?” 끼무라의 물음에 류강철은 “아니, 아니, 제가 어찌 감히 국장님이 애지중지하는 아가씨를 건너다보겠습니까?”라고 하면서도 아끼꼬를 힐끔 곁눈질했다. 그런데는 눈치 빠른 끼무라는 술잔을 내려놓더니 “강철이, 나를 따라 수고 많았네. 자, 한잔 들고 아끼꼬를 데리고 놀게나.”라고 하면서 아끼꼬의 허리에서 손을 떼더니 강철의 쪽에 훌 밀어 보냈다. “류 통역을 즐겁게 해주어라.” 아끼꼬는 싫어하는 척 하면서도 류강철의 옆에 가 앉았다. 끼무라는 “아예, 유끼꼬 안방에 들어가 놀게나.” 하고 말했다. 아끼꼬는 좋아라고 류강철을 잡아 일으켰다. 류강철은 이게 웬 떡이냐고 아끼꼬의 허리를 안고 자리를 옮겨갔다. 끼무라는 하루꼬를 껴안고 술잔을 들어 하루꼬의 잔과 마주치고 쭉 들이켰다. “우리 오늘 특별한 재미를 보자.” 하루꼬는 버들잎 같은 눈썹을 치키면서 끼무라의 목을 끌어안고 물었다. “어떻게요?” “가자.” 끼무라는 엉거주춤 일어나더니 하루꼬의 허리를 껴안고 아끼꼬의 안방 쪽으로 도적고양이처럼 다가갔다. 끼무라는 하루꼬를 데리고 미닫이문을 살며시 열고 방안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끼무라는 고함치다가 스즈끼네 쪽을 뒤돌아보면서 다시 언성을 낮춰 강요했다. “난 구경하는 게 더 재미있어.” 한참 후 스즈끼와 끼무라는 하나꼬의 겉방에 하나둘 돌아와 먹다 남은 술상에 마주 앉았다. 스즈끼는 해가 질녁에야 떠나기 아쉬워하면서 끼무라와 함께 사꾸라관을 나가 찌프차에 올라탔다. 그는 경찰국으로 돌아가는 찌프차에서 고개를 뒤로 돌려 끼무라를 뒤돌아보면서 슬쩍 속내를 내비쳤다. “자넬 경찰국장으로 복직하도록 우에 주선하겠네.” “은공은 백골난망입니다.” “으흠.” 끼무라는 둥둥 뜨는 기분으로 헌병대 사무실로 돌아왔다. 재생의 기회가 왔다고 생각한 스즈끼는 그날부터 뇌물을 보낸다, 사꾸라관의 예쁜 아가씨들을 선물한다 하면서 스즈끼의 주위에서 아첨하며 돌아갔다. 그 덕분에 한달 후에 끼무라는 다시 우시장경찰국 국장으로 복직하게 되였고 스즈끼는 업동 경찰총국으로 돌아갔다. 13. 참살 끼무라는 류강철에게 병권의 약을 써보게 한 후 성기능이 아주 강하게 된 것을 알고 병권의 약 처방대로 초약을 쓰기로 했다. 그러나 병권이가 관준과 상철을 체포해 가둔 것을 아는 날이면 정말 독약이라도 자기에게 쓸까봐 슬그머니 겁났다. 그리하여 관준과 상철을 보지 못할 한쪽 구석 숙사에 병권을 연금해두었다. 그런데 병권은 아들과 손자가 경찰국 감옥에 갇힌 것도 모르고 그들의 목숨을 구하려고 약 처방대로 끼무라에게 약을 써주었다. 끼무라는 하루 빨리 사꾸라관의 기생들과 재미를 보려고 한 시간이라도 늦어 약을 가져 오면 약제사들을 들볶아대곤 했다. “빨리 약을 가져오라. 인삼과 대추도 한보따리 하나꼬한테 가져가게. 내 뭐라던가? 병권 놈을 몇 번 감옥에서 빼줬는데 그가 나를 해치겠는가?” 끼무라의 성화와 같은 독촉에 가메다와 류강철은 인삼과 대추를 메고 사꾸라관에 찾아갔다. 그들은 하나꼬 앞에 인삼과 대추 주머니를 두 주머니나 내려놓으면서 말했다. “이걸 네 XX에 잘 걷어 넣어 퍼지게 해라. 우리 끼무라 국장님이 잡숫겠단다.” 하나꼬는 인삼과 대추주머니를 보자 두 손을 맞잡고 기절초풍했다. “이야, 야라, 야라(어마나 안 돼, 안 돼요), 이 많은걸 언제 내 요 죄꼬만 거기에 넣어 퍼지라고? 아이고, 유끼꼬와 아끼꼬에게도 얼마간씩 나눠줘요.” 가메다 소대장은 음충한 눈길로 하나꼬를 뚫어지라고 쏘아보았다. “영광인 줄 알아라. 끼무라 대대장에게서 제일 총애 받는 기생을 누구나 하니?” 하나꼬는 버들잎 같은 눈썹까지 찡그렸다. “총애하면 양물로 총애해야지 이따위 추잡한 일을 시켜요? 난 약도 별 약을 다 본다. 보지에 넣어 퍼진 대추를 먹으면 시든 양물이 살아날까? 늙은 두상!” 그 말에 류강철은 입을 싸쥐고 킬킬거렸다. 가메다는 류강철을 툭 치고 나서 하나꼬를 총알 같은 눈길로 쏘아보았다. “말 조심해. 병권은 양기를 살리려면 꼭 제일 총애하는 아가씨의 질에 넣어 퍼진 후 먹어야 효과가 좋다고 해. 잔말 말구 잘 퍼지게 해. 끼무라가 네한테 오면 네 좋고 국장님도 좋을 게 아냐? 우리 좋겠느냐?” 하나꼬는 별수 없이 인삼과 대추를 두 주머니나 받아 놓으면서 두덜거렸다. “그 조선 염소수염이 이 치사한 약 처방을 다 냈대? 나쁜 영감, 끼무라 국장도 바보야. 자기를 능욕하는 것도 모르고. 하긴 양물이 시드니 변태적으로 손가락질만 해서 어디 견디겠냐? 이거래도 먹고 양기가 살아났으면 나도 편안하겠다.” 끼무라는 병권의 처방대로 하나꼬의 질에 넣어 퍼진 인삼과 대추를 날마다 먹을 뿐만 아니라 초약을 달여 먹고 시들었던 양기가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몇 달 후 늦은 가을에는 온 몸에 힘이 용용 솟구쳤다. 그때부터 그는 거의 날마다 저녁이면 사꾸라관에 기어들어가 하나꼬와 유끼꼬, 아끼꼬, 하루꼬를 번갈아가며 죽여줬다. 정말 기적이 일어나 끼무라도 하나꼬도 깜짝 놀랄 지경이었다. 사꾸라관의 아끼꼬와 하루꼬, 유끼꼬는 그 기적의 끼무라를 모시기도 무서웠다. “그 조선 염소수염 영감쟁이 재간이 있긴 있어.” “싹 시들어서 어쩌지 못하던 두상이 정말 놀랍게도 죽여준다.” “글쎄 말이야. 얼마나 세기에 저 지경으로 숨이 넘어가는 소릴 지를까?” 사꾸라관에서는 사꾸라 노래와 여인의 신음소리가 섞여 자지러지게 들려오고 있었다. 어느날 이른 아침 끼무라는 한길수를 자기 사무실에 불러왔다. 한길수는 스즈끼 국장이 간 후 보복 당할까봐 끼무라를 아주 조심했다. “무슨 지시가 있습니까?” 끼무라는 한길수를 냉소하는 눈길로 쏘아보며 으르렁거렸다. “병권을 교수형에 처하라!” “예?” 그 자리에 있던 가메다, 나까노라이찌로, 류강철은 그 천만뜻밖의 명령에 깜짝 놀랐다. 이윽고 류강철이 통역하자 길수는 깜짝 놀라며 자기 귀를 의심할 정도였다. 그는 씨무룩이 웃으면서 다시 똑똑히 들으려는 모양으로 끼무라 앞에 다가가 허리를 꿉실거리더니 “정말 죽이렵니까?” 하고 손으로 목을 자르는 시늉 했다. “음.” “이젠 그 영감태기 약을 쓰지 않으렵니까?” 한길수가 연신 묻자 끼무라는 음흉한 표정을 지으며 나직이 말했다. “이젠 영감태기 필요 없어. 허허허.” 그러자 한길수는 머리를 끄덕이며 말상에 간사한 웃음을 지었다. “예~ 이제야 알았습니다. 그 영감태기 약 처방을 알아냈으니까 살려둘 필요 없지요.” 끼무라는 한길수를 보고 냉소했다.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놈, 참새가 어찌 고니의 큰 뜻을 알겠어?” 한길수는 머리를 연신 끄덕이며 감탄했다. “참말 고명합니다. 아예 관준이나 상철을 몽땅 목을 매 죽여 후환을 없애는 게 어떻습니까?” 끼무라의 대답은 천만뜻밖이었다. “관준은 감옥에 가둬두고 상철은 내보내.” “예? 참 얼떨떨합니다.”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멍청한 놈, 그 나이를 어디로 먹었어? 미끼로 병완과 성칠의 꼬리를 밟을 수 있단 말이다. 성칠과 병완은 아무리 강한 놈이래도 상철에게서 관준이 갇힌 걸 들으면 꼭 구하러 올 거야. 그때 일망타진 한단 말이다.” 한길수는 머리를 끄덕이면서도 속으로는 빈정거렸다. (개 똥 먹는 습관을 개를 떼 주겠는가? 또 그물만 치자고? 고기는 잡지 못하면서. 흥!) 한길수는 “하이! 알았습니다. 명령을 즉시 증명하겠습니다.” 하고 군례를 척 붙이고 나갔다. 한길수는 자위대를 풀어 숱한 조선 사람들을 또 무너진 경찰국옛터에로 몰아왔다. 그리고 감옥에 갇힌 최구장을 비롯한 이른바 반일불온분자들도 몽땅 압송해왔다. 늦가을의 싸늘한 바람을 맞아 마른 쑥대가 쓸쓸히 몸부림쳤다. 교수대에 매놓은 올가미가 가을바람을 맞아 무섭게 비명을 지르며 흔들거렸다. “걸어!” 결박을 지운 병관이가 교수대 밑으로 흰 염소수염을 흩날리면서 끌려왔다. “아버지!” “할아버지!” 관준과 상철은 결박 당한 채 자위대에 끌려오다가 교수대 밑에 선 병권을 보고 애처롭게 소리쳤다. 끼무라는 둔덕 위에 사무상을 놓고 군도를 짚고 앉았고 그 옆에 이찌로, 가메다, 야마모도소장, 이찌분로 등이 헌병들의 호위 속에 교수대를 내려다보면서 다리를 벌리고 틀스럽게 서있었다. 한길수는 교수대 밑으로 다가가 병권에게 지껄여댔다. “병권이, 이제라도 병완과 성칠의 행방을 대게나. 그럼 살려주지.” 병권은 먼 남산을 쳐다보았다. “퉤! 더러운 개다리 놈 새끼! 난 일흔도 넘게 살대로 다 살았다. 나는 내 고향에 뼈라도 묻힐 수 있어 다행이다.” 그는 사람들 속에 결박 당한 채 머리를 숙이고 자기를 쳐다만 보는 관준과 상철을 내려다보면서 한탄했다. “조선 내 고향 땅에서 일본 섬나라 오랑캐들과 개다리 놈 새끼들이 썩어지는걸 보지 못하고 죽는 게 한스러울 뿐이다.” “당장 죽게 된 주제에 주둥이만은 여물었다. 당장 이 반일불온분자를 교수형에 처해!” 자위대졸개들이 달려들어 병권의 목에 올가미를 억지로 걸었다. 그때 병권은 “가만!” 하고 소리치더니 둔덕에 있는 끼무라를 쳐다보았다. 한길수는 말 이발을 드러내며 냉소했다. “금방까지 죽기를 원하더니. 그래, 병완의 거처를 말하면 살려주지. 소시거우란 곳은 어디냐?” 병권은 허리를 펴더니 끼무라를 쏘아보더니 “할 말이 있다.” 하고 툭 내쏘았다. 류강철이 통역하자 끼무라는 하얀 장갑을 낀 손을 홱 저었다. “말해!” “내 지어준 약은 몇 해 후에 해독약을 먹지 않으면 죽을 수도 있네. 나를 죽이고 누구한테서 해독약을 얻어먹겠는가?” 류강철이 통역하자 끼무라는 저으기 당황해 군도를 짚고 벌떡 일어났다. 그러나 인차 침착성을 되찾으면서 희죽이 웃었다. “음, 네 놈이 죽기 싫은 모양이구나. 잔꾀를 작작 부려!” 병권은 하얀 염소수염을 흩날리며 날카롭게 물었다. “내 무슨 죄 있는가?” 끼무라는 군도를 잡고 벌떡 일어나더니 어슬렁어슬렁 교수대 곁으로 내려갔다. 한길수는 개 잡은 포수처럼 어깨를 살구고 교수대 밑에서 으르렁거리며 왔다 갔다 하고 류강철은 안경알을 춰올리며 발바리처럼 끼무라 뒤를 바싹 따라 내려갔다. 끼무라는 시퍼런 군도를 쓱 빼들어 병권의 턱을 쳐들고 을러멨다. 언제 병권에게 달라붙어 약이나 얻어먹자던 “환자”였던가 싶었다. 끼무라가 병권을 사꾸라관에까지 청해 상대접을 하면서 빌붙었다면 누가 믿겠는가? “네 놈은 항일유격대 두목 성칠 놈과 반일불온분자 병완 놈의 행방을 감춘 하늘에 사무치는 죄를 졌다. 병완 놈은 우리 대일본제국의 경찰국 사무 청사를 이렇게 썩박나무더미로 만들어놓은 천추에 용서하지 못할 놈이다. 네놈들은 몽땅 천번 만번 칼 탕 쳐 죽여도 원수를 다 못할 놈들이야.” 병권은 눈깔을 희 번뜩거리는 끼무라를 쏘아보며 날카롭게 맞섰다. “내 조카 성칠이 자기 고향의 산에서 사냥을 한 게 무슨 죄 있는가? 네 놈들의 경찰국 사무청사를 지어주고 길을 닦아준 내 동생 병완은 또 무슨 죄 있느냐? 우리 조선을 통 채로 빼앗아간 네 놈들이야 말로 조선 인민들 제일 큰 죄인! 날강도 놈들이다!” 바빠 맞은 끼무라는 “닥쳐! 당장 목을 매 죽여!” 하고 날강도 본성을 드러냈다. 헌병 놈들이 목에 올가미를 거는데도 병권은 몸부림치며 사형장이 떠나게 고함쳤다. “내 조선을 빼앗은 섬나라 오랑캐 놈들이 썩어질 날 멀지 않다. 여러분, 총칼을 들고 일본 날강도 놈들을 고향에서 몰아내오. 이 강도 놈들아, 성칠이 꼭 유격대를 데리고 와 내 원수를 갚을 거다. 네 놈들을 몽땅 없애 치울 거다!” 자위대졸개들이 올가미를 조였다. 그때 양옆에 섰던 일본 헌병 놈들이 병권의 발밑 걸상을 탁 걷어찼다. 관준과 상철은 “아버지!” “할아버지!” 하고 소리쳤다. 그들은 더는 차마 볼 수 없어 머리를 숙이고 눈을 내리감았다. 병권은 일본 헌병 놈들과 자위대 졸개들의 마수에 교수대의 올가미에 처참하게 목을 매달린 채 한 많은 이 세상을 떠나갔다. 한길수는 개 잡은 포수처럼 우쭐거렸다. “보았지? 반일사상을 가진 놈들의 끝장은 이렇게 개죽음 밖에 없어. 누구든지 병완 놈과 성칠 놈 같은 반일불온분자거나 유격대를 숨겨주면 이런 끝장 밖에 없다는 걸 알아! 누가 성칠 놈과 병완 놈의 행방을 알면 우리에게 고발하면 한평생 복을 누릴 상금을 내줄테다!” 조선백성들은 모두 질겁하여 곁눈질하며 머리를 숙였다. 그 모습을 보고 끼무라와 한길수는 깨 고소해 음흉하게 웃었다. 최구장은 자기 막내아들 경석의 뒤를 이어 큰 사돈어른이 비참하게 돌아가는 처절한 장면을 목격하고 중용지도가 와그르르 무너지는 감을 느꼈다. (저런 악귀 같은 일본 놈들을 보고 어떻게 놔둔단 말인가? 병완 사돈어른이나 성칠 사돈이 하는 일이 옳아. 악은 악으로 다스려야 한다. 내 고향을 찾으려면 총칼을 든 놈들과는 총을 들고 맞서는 게 옳다. 내 나가기만 해봐라.) 최구장은 속으로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최구장은 감옥에 갇혀 보름 전에 아들 경석의 시체도 수습하지 못한 것이 못내 속에 내려가지 않았다. 그때 성단은 기별을 듣고 달려와 경석의 시체가 다 썩어 떨어진 후에야 기별을 듣고 막내며느리와 근형과 계순이 그리고 명옥을 데리고 와서 피눈물을 흘리며 막내아들의 시체를 겨우 수습해 갔던 것이다. 놈들은 또 병권을 최구장의 막내아들 경석을 처형하였을 때처럼 교수대에 매단 채 며칠이고 썩어 스스로 떨어질 때까지 효시했다. 이번에도 헌병 놈들은 병권의 시체가 다 썩어 땅바닥에 떨어진 후에야 수습해가게 했다. 경찰국옛터의 교수대는 도살장처럼 피 비린 내를 풍겼다. 감옥에서 풀려나온 상철은 형내와 함께 보름 만에 다 썩어 퉁퉁 붓기고 살에서 물이 괴죄죄하게 내밴 할아버지 시체를 대충 칠성 판위에 들어 올린 후 수레에 실어 고향 신설동에 모셔갔다. 형내는 흑흑 흐느껴 울면서 “증조부는 ‘조선 내 고향 땅에 묻힐 수 있어 다행이다.’고 말씀하면서 나를 보았습니다.” 하고 말했다. “그래, 우린 할아버지 유언대로 할아버지를 고향에 모시자.” 상철은 집에 남은 어머니 태화영과 만식이, 형내와 함께 할아버지를 고향 신설동의 뒷산에 모셨다. 상철의 어머니 태화영은 “에이구, 이게 웬 일이냐? 네 아버지 아직도 감옥에 갇혀있으니 근심스럽기만 하구나.” 하고 낙루했다. 그러자 헌병에게 맞아 골병을 앓은 만식은 또 부산을 떨었다. “보라니까. 내 뭐라 했소. 병완 시할아버지네 간도로 갔다고 훌 말했더라면 이런 일이 있겠소?” 그러자 상철은 주먹을 쳐들고 만식을 때릴 상 하면서 욕했다. “어쩌래? 이거 그저. 부실한데 약이 없다고 이걸 어쩌니?” 그러자 댓살 되는 경학은 “아버지 부실하다. 우리 엄마를 때리긴? 씨.” 하고 입을 쫑긋했다. 그러자 만식은 경학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옳다. 아버지랑 할아버지랑 다 부실하다. 내처럼 활 말할 지.” 하고 계속 중얼거렸다. 상철은 여편네의 귀 쌈을 찰싹 갈겼다. “주둥이를 다물지 못할까? 다 네년이 일본 놈들 앞에서 병완 할아버지 간도에 갔다고 말하는 바람에 할아버지가 살해당했어.” 만식은 볼을 싸쥐고 엉엉 어린애처럼 울었다. “때리긴 왜 때려? 내 시할아버지를 바로 죽인 상 한다. 불알을 찼으면 시할아버지를 죽인 일본 놈들과 해낼 거지. 엉엉, 제 여편네와 센 척 해라. 엉엉~” 형내는 못 마땅한 세 귀 눈으로 후 어머니를 흘겨보았다. 신설동 뒷산 쓸쓸한 소나무밭에서는 친인을 잃은 관준 일가의 서러운 울음소리가 구슬프게 울려 퍼지고 을씨년스러운 먹구름이 감도는 하늘에서는 짝을 잃은 외기러기가 지는 해를 바라고 북으로 날아가면서 외롭게 울었다.                             제11장 망국노의 한 1. 일제의 노화교육 억울한 혼들이 둥둥 떠다니는 우시장 경찰국 고문실에 끼무라가 졸개 한길수와 함께 악마처럼 도사리고 앉아있었다. 끼무라는 또다시 얼리고 닥치는 간사한 수단을 되풀이하기 시작했다. “최구장을 끌어왓!” 한길수는 “또 썩뚝?” 하고 손으로 목을 자르는 시늉을 했다. 끼무라는 “끌어오라면 끌어 올 거지. 흥!” 하고 눈깔을 부라렸다. 류강철이 통역하자 한길수는 돌아서 나가면서 두덜거렸다. (죄꼬만 자식이, 숱한 사람들 앞에서 뭐야? 내 무슨 세 살짜리 앤가?) 이윽고 최구장이 쇠고랑이를 절렁거리며 자위대 졸개들에게 압송돼 고문실 철문 안에 힘겹게 들어섰다. “어, 이게 뭐요? 우리 명천에서 유명한 최구장 선생을 이렇게 박대해서 되는가?” 끼무라는 언제 잔혹한 악마냐 시피 웃음을 지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졸개들에게 손짓했다. “어서 풀어줘.” 졸개들은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멍청히 서 있다가 최구장의 손목과 발목의 쇠장갑을 하나하나 풀어주었다. 누구 명이라고 어길 수 있었겠는가. 졸개들은 머리를 홰홰 돌렸다. 끼무라의 수완을 짐작할 수 없었던 것이다. 때로는 최구장을 쏘아보며 갈범처럼 고함치며 당장 잡아먹을 상을 하다가도 때로는 자기 스승이나 대하는 듯이 깍듯이 모시는 시늉을 냈다. 끼무라는 최구장을 보고 “자, 앉게나. 내 할 말이 있어.” 하고 자리를 권했다. 최구장은 떡 뻗치고 선채로 피발이 선 눈으로 끼무라를 쏘아보면서 무뚝뚝하게 말했다. “간사하게 놀지 말고 죽이겠으면 어서 죽여라.” 끼무라는 부하들의 못 마땅해 하는 눈치를 보고 최구장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전번에 최구장의 짐을 벗겨 준 걸 알아?” 최구장은 어처구니없어 픽 냉소하며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약 담배 인이 박힌 당신 막내아들은 후환거리야. 우리 대일본제국에나 최구장한테나 모두 모두 후환이야.” (개자식, 남의 막내아들을 비참하게 살해하고서도 도와줬다고? 네 놈도 인간이냐? 약 담배를 피우는 아들이라도 난 살아 있었으면 좋겠어. 이게 천하 어시들 마음이야.) 최구장은 혀끝까지 흘러나온 말을 겨우 참았다. “그런 놈은 살려둬서 무익하단 말이야.” 끼무라는 사무상을 탕 치며 호통 쳤다. “난 그래도 최구장을 우시장 인근에서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라고 이제껏 살려뒀단 말이야. 당신 막내아들도 내가 죽인 게 아니라 스즈끼 국장이 죽인 거야.” 자기 수를 쓰느라고 끼무라는 상전을 헐뜯기까지 하며 분풀이를 했다. 한참 후 끼무라는 연설을 잔뜩 늘여놓았다. “조선은 이젠 대세가 기운 나라야. 한번 기운 집이나 나라는 구할 수 없어. 우리 경찰국 청사를 보라. 병완 놈이 고의적으로 썩은 나무에 벌레까지 있는 나무를 섞어 지어서 한쪽으로 천정이 기우니 별수 없이 무너지지 않았는가? 당신은 선비기에 어림짐작해도 알 거야.” 최구장은 교활한 웃음을 짓는 끼무라의 상판을 어처구니없어 오래도록 쏘아보았다. 끼무라는 계속 늘여놓았다. “조선 사람들이 우리 대일본제국을 떠보았자 닭알로 바위 돌을 치는 격이지. 허허허. 무슨 의병이요, 백두산 유격대요, 다 호랑이와 맞서 미쳐 날뛰는 미친개들에 불과하오. 정신이 있소? 그 놈들이. 우리 대일본제국은 이미 간도를 손안에 넣었고 이제 심양을 타고 앉아 산해관을 넘어 관내로 진군할 것이네. 어허, 허허허.” 여기까지 역설하고 난 끼무라는 흥이 도도해서 군도자루를 잡고 일어나 사무실안을 버릇처럼 뚜벅뚜벅 거닐면서 계속 으르렁거렸다. “명지한 최구장은 똑똑한 선택을 하리라 믿네. 우리 대일본제국과 맞서서 무슨 좋은 일이 있겠는가? 병완 놈도 내 말을 듣고 점잖게 대일본제국에 붙어 목수 질이나 잘하거나 자위대 부대대장이나 시킬 때 했더라면 뭘 자기 고향에서 쫓겨났겠는가? 간도에 간들 우리 대일본제국 마수에서 벗어 날 거 같은가? 이국 타향에서 잘 살 거 같은가? 어림도 없어! 우린 소시거우에 있는 병완을 잡아다가 서울 서대문감옥에 압송해 처단할 거야.” 최구장은 얼렸다 닥쳤다 하는 끼무라의 음흉한 속심이 뭔지 알고 싶었다. “그래, 어쩌란 말인가?” 끼무라는 홱 돌아서면서 최구장의 표정을 살폈다. 마치 그의 얼굴에서 한 가닥의 희망의 빛을 찾으려는 상 싶었다. “그렇지. 아직 늦지 않았네. 전번에도 말했지만 난 운주동에 최구장네 서당보다 훨씬 좋은 일본학교를 차려 놓겠네.” 끼무라는 천천히 최구장의 옆에 다가와 억지로 살기띤 낯가죽에 교활한 웃음을 지으면서 중얼거렸다. “최구장은 명지한 선택을 하리라 믿소. 우리 일본학교에서 선생질을 해주오. 우리 대일본제국의 말을 배워주고 우리 대화민족의 훌륭한 민속과 민족전통문화를 배워주게나. 우리 대일본제국의 휘황한 력사를 가르치란 말이네.” 그제야 최구장은 한숨을 후 내쉬었다. (이 놈들, 날 보고 노화교육을 하라고? 쳇, 어림도 없다.) 끼무라는 최구장의 얼굴표정이 모질게 굳어지는 것을 훔쳐보고 너털웃음을 웃었다. “허허허, 최구장, 난 당신과 길게 흥정할 시간이 없네. 당신 일가 십여 식솔 죽이겠쏘까? 살리겠쏘까? 병권이 죽었소. 당신 막내아들 죽었소. 보았겠지? 으흠. 당신도 죽겠쏘까?” 끼무라는 사무상에 돌아가 털렁 들어앉더니 살기띤 눈길로 최구장을 노려보았다. 최구장은 한참이나 머리를 숙이고 속궁리를 했다. (먼저 식솔들을 구하고 보자.) “일본 선생 하겠쏘까?” 최구장은 머리를 숙이고 무겁게 대답했다. “예.” 끼무라는 등받이에서 잔등을 떼고 사무상에 다가앉으며 물었다. “똑똑히 말했쏘까.” 최구장은 목소리를 조금 높여 “일본 선생 하겠소.” 하고 말했다. 끼무라는 득의양양해 줄 연설을 퍼부었다. “그럼 그렇겠지. 최구장 명지한 선택을 했어. 대일본제국은 메이찌유신 후에 유럽의 선진적인 과학기술과 문화를 인입해 동양에서는 그 어느 나라보다도 선진국이야. 그런 일본의 선진문화를 대일본제국에 귀순한 우리 명천과 우시장의 무지한 까막눈들에게 배워주면 좀 좋은 일인가?” 류강철이 통역 뒤끝에 둬 마디를 슬쩍 보탰다. “최 선생, 잘 했습니다. 대일본제국과 맞서서 좋을 게 있습니까? 이전에 선생은 저희들을 보고 공자와 맹자의 중용지도를 지키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누구와도 싸우지도 말고 뜨지도 말라고. 날마다 하늘 천 땅 지를 배워줘 대일본제국 세상에서 어디다 쓰겠습니까? 선생님은 집 식구들도 구하고 일본 학교 선생 월급도 타고 일거양득이 아닙니까?” 그러자 최구장은 허무한 웃음을 지었다. “난 일어를 모르는데 애들에게 어떻게 배워주겠는가?” 류강철이 통역하자 끼무라는 가재수염을 슬슬 매만지면서 최구장에게 다가왔다. “최 선생, 의자에 앉소. 모르면 당신 학생 류 통역에게서 배워서 가르치게나. 학생이라도 누가 먼저 대일본제국의 선진문화를 배웠으면 선생이지. 이젠 당신 제자 류강철이 당신 일어 선생 됐쏘다. 알았쏘까? 하하하.” 최구장은 자기 어깨를 툭툭 다독이며 조소 섞인 말을 지껄이는 끼무라를 속으로 버릇없는 놈이라고 욕했다. 끼무라는 어깨가 으쓱해 사무상에 돌아가 앉더니 최구장을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최구장, 이걸로 끝난 게 아니야. 감방의 죄수들과 온 명천과 우시장을 돌면서 일어를 배우라고 선동하게나. 그래야 난 최선생의 집 식솔들을 풀어주겠네.” 류강철은 옆에서 눈까지 찔끔해 보이면서 황급히 “선생님, 대답하시오. 살자면 무슨 고만한 거야 못하겠습니까?” 하고 귀띔해 주었다. 류강철은 끼무라를 돌아보고 “최 선생은 하겠답니다.” 하고 앞질러 말했다. 끼무라는 씨무룩이 웃으면서 “류통역은 선생을 딱 구하려고 애를 쓰는구먼.” 하고 지껄였다. 류강철은 차렷 자세로 군례를 올렸다. “하이! 제대로 통역하겠습니다.” 최구장은 차마 자기 입으로 섬나라오랑캐들의 말을 배우라고 동원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일가 십여 명 식솔들을 살리려면 마음에 없는 일을 하여야만 했다. 끼무라와 한길수는 최구장을 데리고 경찰국 감방으로 갔다. 철문을 쩔꺼덕 열자 경숙과 경민, 경욱이 철창을 잡고 이구동성으로 “아버지!” 하고 불렀다. 최구장은 이로 입술을 깨물고 온몸을 부르르 떨더니 끼무라와 류강철의 눈치를 흘끔 곁눈질해보고 천천히 무거운 간신히 입을 뗐다. “얘들아, 우린 이제부터 일어를 배워야 한다. 일본의 선진기술과 문화를 배워야 한다.” 그러자 감방에 있던 기타 사람들은 모두 눈이 휘 동그래졌다. “그래야 고향에서 살 수 있다. 옛날 한신은 남의 가달 두 새로 기어나가면서도 살아서 천하에 둘도 없는 영웅이 됐다. 우린 참고 일어를 배우면서도 살아야 한다.” 류강철은 한신의 말을 빼놓고 일어를 배워야 한다는 말을 제 나름대로 보태 끼무라가 듣기 좋게 통역했다. 끼무라는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최구장의 입으로 감방안의 죄수들에게 할 수 있어 아주 흐뭇했다. 뒤이어 끼무라와 한길수 등은 최구장을 싣고 명천과 우시장의 산골까지 돌아다니면서 최구장의 입으로 조선 사람들에게 운주동에 일본 학교를 차리는 일을 공개하고 일어공부를 동원하게 했다. 한달 후 최구장의 십여명 식솔은 감방에서 풀려나왔다. 그러나 끼무라와 한길수는 경욱만을 인질로 잡아두었다. 최구장이 감방에서 나갈 때 끼무라는 살기 띤 눈길로 쏘아보면서 말했다. “최구장, 먼저 여기 있으면서 류통역에게서 일어를 배우게. 당신 넷째아들은 여기 남아서 최구장을 거들게 하겠네. 당신, 거짓을 부리면 언제든지 먼저 넷째아들을 썩 뚝!” 끼무라는 군도를 들어 목을 치는 시늉을 했다. “알았는가?” 최구장은 속으로 지독한 끼무라 놈에게 침을 퉤 뱉었다. 끼무라는 “새해 봄에 운주동에 새 학교를 짓겠네. 그전에 일어를 잘 배우게나.” 하고 뒷말을 이었다. 최구장은 도리머리 질 했다. “이 늙은이가 어떻게 그리 빨리 일본 말을 배우겠습니까?” 끼무라는 딱 잘라 말했다. “안 돼! 반년 내에 배워내!” 옆에서 류강철도 한숨을 후 내쉬었다. 그러나 살인악마 끼무라의 앞인지라 언감 딴전을 부리겠는가. “선생님, 반년을 배운 후 학교에서 애들을 가르치면서 짬짬이 시간을 타서 저에게서 배우십시오.” 옆에서 듣던 한길수는 외눈깔을 번뜩이면서 지껄였다. “쯧쯧쯧, 끼무라 대대장이 알아듣지 못한다고 류통역 작작 수작을 붙이게나. 내 일어를 알았으면 자네들이 하는 수작을 통역해주겠는데.” 최구장은 울며 겨자 먹기로 경찰국 감옥이 아닌 감옥인 숙사에 갇혀있으면서 류강철에게서 일어를 배웠다. 경욱도 너무 심심해 아버지 어깨 너머로 일어를 배웠다. 최구장은 유학자로서 휘어들지언정 끊어지지 않으려고 잠시 일본 놈들의 낮은 문턱에 머리를 숙이고 들어갔던 것이다. 그는 일본 놈들을 이기려면 애들이 일어를 배워두는 것도 낭패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일본 문화의 힘을 빌어 일본 놈들을 내 조선 고향에서 몰아내야지.) 그 덕분에 최구장의 일가 십여 명 식솔들은 감옥에서 풀려나와 고향 운주동으로 돌아갔다. 기운봉 기슭은 울긋불긋 단풍이 들기 시작했다. 일본 놈들이 조선에 침입하기 전에는 늦가을이면 최구장은 아들딸들을 데리고 수림속의 밭에서 옥수수도 따오고 겨울나이 땔나무도 해왔다. 그리고 자기 위방에 차려놓은 서당에서 애들에게 한문과 조선어를 가르치었다. 그러나 감옥에서 막내아들까지 일본 놈들에게 참살 당하는 것을 보고 돌아온 최구장은 마루에 앉아 곰방대에 담배 부스러기를 꿍꿍 다져놓고 부시를 척 켜서 불을 붙여 물었다. 그는 곰방대를 뻑뻑 빨면서 누렇게 번져가는 먼 남산을 쳐다보며 착잡한 생각에 잠겼다. 그는 생각하면 할수록 한뉘 평생 신앙처럼 믿어온 유교학설중의 중용지도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내 아들을 죽인 악귀 같은 일본 놈들 앞에서 어떻게 자기를 억제하여 례에 맞게 행동한단 말인가? 악이 딱딱 나는데 그놈들의 글을 배우고 우리 조선 애들에게 노화교육을 한단 말인가? 흥!) 그는 담배를 길게 빨아 연기를 후 불어버리면서 머리를 절레절레 가로 저었다. 그는 마당에서 장난하는 근형이랑 손자들을 보면서 이렇게 중얼거렸다. “안 된다, 안 돼. 일본 말을 배우고 가르치더라도 애들에게 민족 심과 항일구국의 도리를 부어넣어야 해. 저 애들은 꼭 자기 삼촌 경석을 누가 죽였는가를 영원히 잊지 말아야 한다.” 그는 엉거주춤 일어나더니 곰방대를 빨며 마루에서 왔다 갔다 거닐었다. (혹시 구철동생이 말이 옳을 수도 있는 거야. 총칼을 든 일본 놈들과는 총칼을 들고 맞서 싸워야 한다.) 그는 아주 고통스러웠다. 일본 놈들 때문에 자기가 검은 머리 백발이 되도록 믿어온 공맹지도의 공든 탑이 하루 사이에 와그르르 무너지는 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동생은 다시 보이지도 않을까? 진달래도 몇해 동안 보이지 않고. 그 애들을 보면 저 애들을 장백산유격대에 보냈으면 좋을 텐데. 거기서 애들이 마음껏 우리 조선어를 배우고 찬란한 민족문화를 배우고 민족정신을 키워 총칼을 들고 일본 놈들을 이 조국 땅에서 몰아내야 한다.) 이때 오토바이 한대가 울 밖에 와 부르릉 거리더니 멈춰 섰다. 안경을 낀 류강철이 일본 헌병이 몰고 온 오토바이에서 내렸다. 뛰놀던 애들은 또 일본 놈들에게 붙잡혀 혼살 날까봐 구새 목과 마루 밑에 달려가서 숨어 머리를 반쯤 내밀고 이쪽을 말똥말똥 쳐다보았다. 그러나 최구장은 경숙과 함께 류강철을 마중했다. “최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그래, 무슨 일로 왔는가?” 류강철은 안경을 춰올리면서 마루 앞에서 허리를 굽히며 인사했다. “최 선생, 종종 찾아뵙지 못해 미안합니다. 끼무라 국장님이 전번에 말한 대로 선생님께 일어를 배워주라고 해서 왔습니다.” 그러자 최구장은 내키지 않는 듯이 마른기침을 하면서 “올라오게나.” 하고 건성으로 응부했다. 류강철이 마루에 올라오자 최구장은 웃방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일번헌병은 오토바이에서 내려 여기저기 기웃거렸지만 최구장은 들어오라고 말도 하지 않고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최구장은 자리에 앉자 류강철에게 “칠순이 된 늘그막에 반년내에 일어를 배워내겠는가? 되지두 않는 소릴, 쳇!” 하고 말하면서 냉소했다. 류강철은 버릇처럼 안경알을 춰올리면서 정색해 말했다. “배우는 것만큼 배워가지고 애들에게 가르치면 됩니다. 종종 내가 와서 선생님에게 보도해주겠으니까 근심하지 마십시오.” 류강철은 바깥의 헌병의 눈치를 살피면서 조용히 말했다. “일본제국의 세월에 일어를 배워야 합니다. 일어를 배운다고 해서 다 일본 사람들의 개다리는 아닙니다. 일어를 배워 우리 조국과 민족을 위해 일할 수도 있습니다. 일본을 알아야 우리 민족도 발전하고 일본을 따라잡고 장차 초과할 수 있습니다. 일어를 모르고 어떻게 일본 사람들과 겨뤄 보겠습니까?” 최구장은 그래두 머리를 홰홰 가로 저었다. “거 자네 말이 어상사하지만 말이야, 일본 말을 하면 일본 사람이 되는 거지.” 류강철은 바깥을 힐끔 곁눈질해 내다보았다. 일본 헌병은 의연히 오토바이 옆에서 서성거리면서 먼 남산을 쳐다보고 있었다. 류강철은 머리를 돌리더니 두 손으로 옛 스승 최구장의 손을 잡고 정색해 말했다. “스승님, 제가 비록 일본말을 하고 일본 경찰국에서 통역을 하지만 사실 저의 온몸에는 조선 사람들의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처처에서 될수록 조선 사람들을 위해, 우리 고향사람들을 위해 한마디라도 하고 싶습니다.” 최구장은 “어험.” 하고 마른기침을 하면서 바로 잡아 앉았다. 속으로는 썩 믿어지지 않아 하는 것이 환히 드러났다. (자식, 경석이가 잘못 될 때 한마디라도 했냐?) 그러나 최구장은 이렇게 나왔다. “됐네. 오늘 먼 길을 왔으니까. 섬나라 오랑캐들의 말 몇 마디를 배워주게나.” 최구장이 경숙을 보고 밥상을 가져오라고 했다. 경숙이가 밥상을 가져오고 경민이가 종이와 붓을 가져왔다. 류강철은 붓으로 일어 50음표를 몇 개 써놓고 읽어보였다. “이건 ‘아, 이, 우, 에, 오.’라고 읽는데 제일 기본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최구장은 일어 음표를 보고 입을 딱 벌렸다. “얘, 이거 무슨 놈의 글이 이래? 메시를 쫏는 닭이 발로 마구 오려 놓은 거 같니?” 최구장은 하얀 수염을 매만지면서 도리머리 질 했다. “거나 저나 따라 읽기를 해보자.” 한참 따라 읽기를 하는데 경숙과 경민, 경욱까지 구들에 들어와 따라 읽기를 했다. 나중에는 근형과 근덕, 근활 모두 아래방문에 붙어 서서 위방을 훔쳐보며 따라 읽기를 했다. 최구장은 혼자 읽어보고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하루에 대여섯 개를 배워서 언제 쉰 개나 배우겠는가? 아예 자네가 서당 방에 와서 애들에게 직접 배워주게나.” 류강철은 손을 내저었다. “안 됩니다. 끼무라 통역은 어쩌고?” “일본 놈들의 통역을 하기보다 서당 선생질 하면 낫지 않겠는가?” 류강철은 땅이 꺼지게 한숨을 내 쉬었다. “지금 일본 사람들의 세상에서 어디 뭘 하고 싶으면 뭘 할 수 있습니까?” 류강철은 점심 때가 거의 되도록 최구장에게 일어를 배워 주고 나서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선생님, 며칠 후에 또 오겠습니다.” 최구장은 마루에 나가 신을 신고 바삐 오토바이에 올라타는 류강철을 보고 손을 저었다. “그래, 자네 말대로 일본 말을 배워야 일본 놈들과 겨뤄보지.” 류강철은 울 밖에서 오토바이에 앉아 달려가면서 이쪽에 대고 손을 저었다. 최구장은 류강철이 간 후에도 그날 배운 일어 음표를 써보기도 하고 읽어보기도 했다. 성단은 그러는 영감을 보고 코웃음 쳤다. “일본 놈들에게 막내아들이 참살 당했는데도 그런 놈들의 말을 본 따 해요?” 최구장은 바구니를 들고 근형과 계순, 명옥을 데리고 바깥에 나가는 노친을 흘겨보았다. “아낙네들이 뭘 알아 그래? 소견머리 좁은 아낙네들이라고 원?” 최구장은 양미간을 찌프리더니 돋보기 밑으로 새로 배운 일어를 내려다보며 붓으로 쓰면서 익혀나갔다. 그러다가도 원수나 만난듯이 강철이 써놓은 일어 글씨에 대고 마구 승하기를 쳐놓고 마구 찢어버리었다.  그는 붓까지 활 팽개치고 먹장구름이 점점 덮쳐오는 바깥 하늘을 쳐다보면서 땅이 꺼지게 한숨을 후~ 토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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