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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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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    대하소설 진달래 소야곡(18) 댓글:  조회:1421  추천:1  2018-06-26
                         34. 마수에 걸린 아가씨들 승호는 신변에 범송을 데려왔지만 여전히 공포의 심연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다.  낯선 사나이 몇이 다가와도 저승사자나 덮쳐오는 것처럼 공포에 온몸이 오싹해났다. 어느 하루, 그는 복도에서 서성거리다가 보위과 패쪽을 쳐다보고 엉뚱한 궁리를 했다. (보위과장을 했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권총을 척 차고 다니면 어느 놈이 감히  건드리겠는가.) 그는 인차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보위과 조과장을 잘 친해 보호받는게 상책이야.) 승호는 백화상점의 상품구입은 몽땅 범송에게 맡겨놓고 조과장한테 은밀히 접근하기 시작했다. 조과장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 것조차 눈치채지 못하고 승호가 청하자 술을 마시러 따라나섰다. 조흥수 과장은 특종부대 패장출신으로서 제대한 후 외지에서 파출소 소장까지 하다가 백화상점 보위과 과장으로 전근해왔다. 그는 무예도 뛰여나고 사건해명에도 신통력이 있어 시공안국과 백화상점 안수련 총경리의 신임을 받았다. 그는 교제능력도 강해 부모와 동생들까지 호적을 몽땅 시내에 올렸다. 그는  술친구가 어찌나 많은지 로임만으로는 엄청 모자랐다. 그리하여 직업도 없는 안해를 보고 음식점을 차리게 했다. 그런데 조과장이 항상 술친구들을 자기 집 음식점에 데리고 와서 공짜술을 마셨기에 음식점은 결손딱지가 처 들어붙게 되였다. 조과장이 손님만 데리고 오면 안해는 “또 공짜 손님을 데리고 왔는가?” 하고  바가지를 긁었다. 손님들도 조과장 안해의 바가지를 긁는 소리가 듣기 싫어 발길을 돌렸다. 이날에는 승호가 청했다. 그러나 조흥수는 이상 처신을 하느라고 순희네  풍성불고기점으로 갔다. 불고기점으로 들어서면서 조과장은 전화로 아가씨들을 불렀다. “선희야, 해연을 데리고 당장 풍성불고기점으로 오라. 여기 돈 많은 신사 한 분이   기다려.” 승호는 조흥수와 처음 앉은 술자리인지라 조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과장, 아가씨들은 그만두기요.” “괜찮아. 술좌석엔 사촌누나라도 마주 앉아야 술맛 나지. 헤헤헤.” 조흥수는 눈을 거슴츠레 뜨고 징글스런 표정을 지었다. 승호는 별 수 없었다. 이윽해 상다리 부러지게 주안상이 들어오고 아가씨 둘도 들어서서 흥이  도도해졌다. 순희는 공짜로 양고기를 두접시나 들여왔다. “여러분, 우리 불고기점을 찾아와주셔서 고맙습니다. 맛있게 드십시오.” “고맙소. 우린 단골 손님이 아니고 뭐요?” 조과장이 우쭐 일어나 순희의 보름달 같은 얼굴에 뽀뽀까지 뻑뻑 했다. “아, 징글스러워요. 쯧쯧쯧.” 순희는 상을 찡그리며 볼에 볼우물을 옴폭 파기까지 하며 아닌 보살을 떨었다. 저쪽에서 숯불을 들고 오던 철주는 흘끔 도적질해보고서도 못 본 척했다. 조흥수는 승호에게 아가씨들을 일일이 소개했다. “서로 인사하지. 백화청사 구입과 과장 리승호요.” “어머나, 구입과장이면 돈 많겠다. 전 장선희라고 불러요. 후에도 종종 불러주세요.” 걀죽하게 생긴 녀자가 넉가래 같은 승호의 손에 가늘고 긴 손을 살짝 얹었다가 내려 놓으면서 종알거렸다. “해연이예요.” 승호는 해연을 별로 대학교 식당에서 본 것 같았다. 그러나 조과장 옆에 앉은 그녀를 모르는 척했다. “선희, 오늘 리과장을 잘 모셔라.” “어마나, 이런 행운 어디 있어요?” 선희는 아양을 떨며 승호 곁에 바싹 다가앉았다. “오빠, 잘 모셔드릴게요.” 해연은 안경알을 춰올리면서 조과장의 곁에 다가앉았다. 조흥수는 아가씨들 앞에서 어깨가 으쓱해졌다. “술상에서 예쁜 아가씨들과 마주 앉으니 기분이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소.” 그는 승호를 흘끔 건너다보면서 “리과장, 오늘 내 한턱 내는 걸로 하고 질탕하게 놀아보기요.” 하고 술잔에 술을 찰찰 넘치게 부었다. “자, 우리 만남을 위해 한잔 들기요.” “오늘 술맛 좋아요.” “호호호.” 아가씨들은 교태를 부리면서 술잔을 홀짝 기울였다. 승호도 술잔에 돌아가면서 술을 붓더니 “자, 오늘 아가씨들과의 아름다운 추억을 위해 한잔 들기요.” 하고 한잔 권했다. “와~ 미남자, 말도 멋지군요.” 선희는 승호를 하늘높이 건뜩 춰올렸다. 선희가 오쫄 일어나 승호 잔으로부터 시작해 돌아가면서 술을 따랐다. “오늘 멋진 리과장을 만났는데요. 별스레 가슴이 설레이는데요. 기분 좋게 한잔 드세요.” “야~ 리과장, 선희 격정에 찬 말만 들어도 술맛나겠다.” 조과장은 애교 많은 선희를 승호 옆에 앉힌 것이 입 안의 비게덩이를 놓친 것처럼 아까웠다. “선희, 하나 제의하지.” “뭔데요?” 선희는 승호의 잔과 마주치고나서 앵두입가에 술잔을 가져가려다가 멈추며 승호를 쳐다보았다. “리과장과 교배주를 마시면 어때? “호호호.” 선희는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으며 승호를 핼끔 쳐다보았다. 뒤이어 그녀는 “좋아요.” 하고 술잔을 들더니 승호한테 다가앉았다. 승호는 짐짓 체면을 차리면서 씨무룩이 웃기만 했다. “보기와는 달리 꽤나 수줍네요. 자, 한번 해보죠.” 선희가 술잔을 든 손으로 승호의 잔등을 휘감아안을 때였다. 조과장이 능청을 떨었다. “건 좀 이른 것 같은데.”  “남이야 뭐 하든 관계하지 마세요.” 선희는 눈까지 질끔 해보였다. 눈치 빠른 승호는 제꺽 선희를 끌어안고 교배주를 마셨다. 별로 조과장이 미리 아가씨들과 짜고든 감이 들었다. 그들은 권커니 작커니 하면서 거나하게 마셨다. 조과장이 새 제의를 했다. “자, 이젠 나눠 앉아 마실가?” 선희가 빨갛게 달아오른 외씨얼굴까지 흔들어대면서 아양을 떨었다. “진작 그래야죠. 오늘 질탕하게 망가져보자요.” 승호는 안팎이 다르게 말렸다. “초면강산에 이러지 맙시다. 우리 넷이 한 자리에서 재미나게 마십시다.” 조흥수는 “사람이, 원, 시키는 서방질도 못하겠어?” 하고 두덜거리더니 해연을 데리고 다른 칸에 옮겨갔다. 그리하여 승호와 선희가 어지러운 원래 술상에 마주 앉게 됐다. 선희는 밀창을 드르륵 닫아버리고나서 담대하게도 승호 무릎에 달랑 올라앉았다. 그녀는 몸을 살며시 기대더니 승호의 얼굴에 얼굴을 살며시 가져다댔다. 순간 승호는 감전이나 된듯이 아래배로부터 찡 줄이 뻗치면서 온몸이 전률을 느꼈다. “아니, 이러지 마오. 초면강산에.” “오빠, 어째 제가 밉상이어서 싫어요?” “아니, 선희는 정말 예쁘오.” 승호는 선희를 무릎에서 슬쩍 내려놓으면서 술을 한잔 부어주었다. “자, 한잔 마시기요.” “리과장도 남잔가요?” 승호는 대답 대신 술잔을 들어 쭉 굽냈다. (야, 네깐 년이겠니? 난 숱한 처녀들을 잡아먹고 죄를 만난 병신이야.) 그는 선희 앞에서 루추한 자기 모습을 로출되는 것이 싫었다. 선희는 보아하니 놀아난 녀자였다. 그런 녀자는 승호가 병신이란 걸 첫눈에 알아볼 것이 아니겠는가. 승호는 개꼴망신당하기 싫어 애꿎은 술잔만 기울이면서 부글부글 사품치며 끓어번지는 정욕을 억지로 참고 또 참았다. 선희는 한숨을 호- 내쉬였다… 그날 승호와 선희는 끓어번지는 정욕을 술로 지져버리고 자리를 떴다. 아쉬움과 미련을 남기고 떠나는 술자리였지만 앞날이 궁금해 황홀하기만 했다. 그후 승호는 답례로 조과장을 청했다. 조과장이 앉은 술자리에는 꼭 아가씨들이 들어와 앉았다. 그것도 번마다 다른 아가씨들이였다. 조과장은 번마다 통이 크게 아가씨들한테 팁으로 몇장씩 줘보냈다. 아가씨들은 그 놈 팁 때문에 서로 경쟁할 지경으로 조과장을 졸졸 따라 다니면서 놀아댔다. 조과장은 숱한 돈을 팔았지만 승호 같은 아우를 얻어 속으로 흐뭇했다. 승호도  조과장의 보호를 받을 수 있을 것 같아 더 좋았다. 진짜 매형 좋고 처남 좋고 다 좋은 판이다. (조과장이 어데서 저리 많은 돈이 생겨서 저렇게 물 쓰듯 할가?) 승호는 꽤나 궁금했다. 사실 조흥수는 맨 보위과장을 해서야 어디서 그리 많은 돈이 생기겠는가. 그는 누구도 모르게 엉큼하게 돈을 얻어내는 잔재간을 피우고 있었다. 백화상점 출납 춘란은 예쁘게 생긴 처녀였다. 그런데 조과장은 우연하게 춘란의  치명적인 약점을 발견했다. 어느 하루, 조흥수는 안총경리가 불러서 사무실에 갔다. 안총경리는 춘란을 내보내고 단도직입으로 말했다. “춘란이 글쎄 돈가방을 도적맞혔다오.” 조과장은 눈이 휘둥그래졌다.  “예?! 어떻게 돼?” 안수련 총경리는 억이 막혀 횡설수설했다.  “아, 글쎄 돈 만원이나 넣은 돈가방을 출납원실에 뒀댔는데 도적맞혔다오.  백화청사에 어쩜 이런 일이 생길 수 있단 말이요? 춘란인 뭐요? 출납이라는게 돈가방을 어떻게 그렇게 건사한단 말이요?” 조흥수 과장은 속으로 웃음주머니 흔들거렸다. (춘란아, 이 년, 끝내 내 마수에 걸렸구나. 으흠.) 그는 속내를 드러내지 않으려고 짐짓 쏘파에 물앉아 안경알을 벗어 닦으면서 빈대눈깔을 데굴데굴 굴렸다. 80년대초에 돈 만원이면 작은 돈이 아니였다. 일반 직원의 월로임은 극상해야 40여원 밖에 안됐고 년말 상금도 극상해야 200원이나 300원 밖에 안됐다. (그 년, 엄청난 돈가방을 출납원실에 두고 화장실에 갔단 말인가? 아무리 영업대청 출납원실라고 해도 그렇지. 숱한 사람이 오가는 영업대청에서 잃어버릴 수 있단 말인가?) 한참 후 조흥수는 안경을 걸고나서 안수련 총경리 굳어버린 얼굴을 쳐다보았다. “안총경리, 이 사건에 의문점이 많습니다.” 안수련은 조과장의 얼굴에서 답안을 찾으려는듯이 기대가 넘치는 눈길을 보냈다. “돈가방을 왜 보험궤에 넣지 않았답니까? 도대체 무슨 급한 일이 있어 돈가방을 영업대청 출납실에 두고 어델 갔답니까?” 안수련은 머리를 끄덕이면서 뭐라고 필로 노트에 적어넣었다. “춘란은 재무과에 인차 가져가려고 그랬다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쩜…” 조과장은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꿀꺽 삼켰다. 총경리 앞에서 언제나 여지를 두군 했다. 안수련 총경리는 안경알 밑으로 조흥수를 날카롭게 쏘아보면서 지시했다. “형사수사대대 지원을 청할가요?” 안총경리 제의에 조흥수는 황급히 손사래를 저었다. “먼저 소문 내지 말고 내부수사부터 합시다.” “알았소.” 안총경리는 백화상점 위신이 추락될가봐 근심하고 있었다. 조흥수는 먼저 과원들에게 수사임무를 주어 몽땅 내보내고 춘란을 보위과에 불렀다. 춘란은 보위과에 들어오면서 안경알 너머 쏘아보는 조과장의 카리스마 넘치는 눈길에 머리를 푹 숙이고 말았다. 조과장은 한참 춘란을 쏘아보기만 했다. 춘란은 몸둘바를 몰라하면서 빨간 등산복깃을 만지작거렸다. 조과장은 쇠덩이 구으는 듯한 목소리로 질책했다. “어쩜 돈가방을 재무과에 가져가지도 않고 화장실로 간단 말이요? 엉? 어쩜 그렇게 무책임하오?!” 춘란은 눈물을 줄줄 흘렸다. “글쎄 말이예요. 정말 후회막급인데요.” “평소에도 그랬소?” “아닌데요. 보통 영업이 끝나면 퇴근전에 재회과에 가져갔어요. 그런데 그날 오전에 벌써 영업액이 만원이 넘어서…” “어떤 가방에 넣었소?” “전 항상 토색가방에 넣어서 재무과에 가져갔지요.” “보위과에 알려야지. 현금운송 원칙도 다 까먹었어?! 응?!” 출란은 엉엉 대성통곡쳤다. 조과장은 사무상을 꽝 쳤다. “이실직고하지 못해?!” “왜 이래요? 제가 도적놈인가요? 보위과에서 잘했으면 백화청사 안에서 절도사건이 다 생겼겠어요?” 적반하장이라고 춘란이 되물고 늘어질줄은 몰랐다. (아니, 이년이 이게.) 조과장은 춘란의 돌변한 태도에는 개의치도 않고 계속 닦아세웠다. “아직도 자기 죄를 뉘우치지 못하는구먼. 돈 만원이면 몇십년 로임이라는 건 알겠지? 출납원 자리를 내놓겠소? 감옥에 가 로동교양이라도 하고 싶소?” 춘란은 눈물을 닦으면서 조과장을 쳐다보았다. “조과장, 좀 봐주세요. 고의로 그런 것도 아닌데요. 어떻게 도적을 잡아주세요. 제가 때벗이를 하는 길은 그거 밖에 없어요.” 조과장의 어조는 좀 부드러워졌다. “춘란이, 절 잡아 뭘 하겠소?” 조흥수는 얼리고 닥치고 해서 춘란을 내보내고 뭔가 잡히는 것이 있었다. “뭐? 좀 봐달라고? 이년, 뭔가 있구나.” 조흥수는 수사경험이 있는, 꽤나 로련한 보위과장이였다. 그는 사무실에서 뚜벅뚜벅 왔다갔다 거닐면서 궁리했다. 그의 뇌리에서는 번개가 치고 무성의 우뢰가 울부짖으면서 무서운 령감이 피뜩피뜩 떠올랐다. 조과장은 퇴근 때 집에서 빈들거리는 남동생을 시켜 춘란을 스리슬쩍 미행하라고 했다. 이튿날 사건해명에 기적이 일어났다. 조과장은 퇴근 전에 안총경리를 속이고 암암리에 공안국에 가서 인맥을 통해 은행구좌 춰적소개신을 떼가지고 춘란의 은행구좌를 수사했다. 그런데 은행 해당 책임자는 춘란의 은행구좌에 1500원이 새로 들어온 것을 밝혀냈다. 저금시간도 사건이 발생한지 반시간도 되나마나 한, 딱 오전 11시 15분이였다. “네년이 어디로 도망쳐?” 조흥수는 춘란의 꼬리를 꽉 밟았다. (불여우 같은 년, 꼬리를 숨길 수 있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나머지 돈은 어쨌지?) 그는 혹시 춘란이 집에 감춰두지 않았을가 의심했다. 그는 재무과장을 시켜 춘란을 재무과에 불러들이게 했다. 조흥수는 남동생을 불러 춘란의 집을 알아낸 후 골목에서 보초를 서게 하고 혼자 춘란의 세집에 접근했다. 그는 사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자물쇠를 부시고 세집에 들어갔다. 궤짝이고 식탁이고 지어 이불 속까지 활딱 번졌는데 일전한푼도  없었다. 그는 량미간을 찌프리며 궁리하다가 부엌의 장판에 눈길이 갔다. (혹시 부엌에 숨겨두지 않았을가?) 조흥수는 부엌의 장판널을 들고 뛰여내려갔다. 그는 부뚜막을 두루 살피다가 석탄무지에 눈길이 갔다. 어둑시그레한 석탄무지에 별로 무슨 끈이 보일락말락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라이터를 켜들고 보니 토색가방 끈이 보였다. 훌 쥐여당기니 확실히 토색가방이 묻어나왔다. 조흥수는 미칠듯이 기뻤다. 그는 석탄먼지를 털새도 없이 토색가방 쟈크를 쭉 열어제꼈다. 가방 안에 두툼한 지페묶음이 나왔다. 몽땅 5원짜리였다. 세여보니 딱 8,500원이였다. “하하하. 엉큼한 도적년! 네년이 아무리 손오공처럼 육갑을 해도 내 마수에서 벗어나지 못해!” 조과장은 돈이 무둑이 든 토색가방을 그대로 들고 엉거주춤 일어났다. 그는 세집 문을 살며시 열고 안경알을 춰슬리고 바깥동정을 살폈다. 작은 골목에는 쥐새끼도 드나들지 않았다. 그는 도적고양이처럼 가방을 들고 세집문을 나서서 사위를 흘끔거리면서 스리슬쩍 도망쳤다. 그는 토색가방이 날아나기라도 할가봐 옆구리에 끼고 속궁리를 베아링처럼 굴렸다. “춘란은 분명 먼저 은행에 저금한 후 이 돈가방을 세집에 치워놓고 안총경리한테 허위사건보고를 한 거야.” 묵직한 돈가방을 안은 그는 공과 사 갈림길에서 격렬한 갈등을 겪고 있었다. “이 돈을 조직에 바치면 극상해야 사건을 해명했다고 상금 몇백원 주겠지. 흥, 아예 이 돈을 통채로 챙겨넣고 춘란의 꼬리를 계속 단단히 밟고 기름을 짜내야지.” 조과장은 제딴에는 일석이조의 묘수를 둔 것처럼 득의양양해했다. 그러나 기실 역은 새 방아간을 지나가듯이 끝내 감옥으로 향한 기로에 한발 들여놓고야 말았다. 그는 돈가방을 끼고 곧추 자기 집에 가서 사랑칸 문 자물쇠를 열고 들어갔다. 여름이여서 김치움에는 드나드는 사람도 없었다. 그는 어둑시그레한 김치움에 스리슬쩍 들어가 김치독 옆의 흙을 파고 파묻어놓았다. 뒤이어 그는 김치움에서 나와 덮개를 덮고 자물쇠까지 잠가놓고서도 시름이 놓이지 않아 그 우에 떡돌까지 들어다 짓눌러놓았다. 모든 것이 빈틈 없다고 느낀 그는 득의양양해 어깨를 으쓱하더니 사랑 문 밖으로 나갔다. 엉큼한 조흥수는 돈을 집에 가져다 궤짝에 숨겨 놓은 후 백화상점에 돌아갔다. 그는 보위과가 빈 틈을 타 춘란을 불러들였다. 춘란은 조과장의 교활한 눈길을 피하면서 머리를 수깃하고 쏘파에 옹송그리고 앉았다. 조흥수는 포로된 사냥물의 걀죽한 얼굴을 쏘아보면서 엉큼한 궁리를 구을렸다. 납덩이 같은 침묵이 지루하게 흘렀다. 한참 후에야 육중한 조과장은 엉거주춤 일어나더니 어슬렁어슬렁 춘란의 옆으로 다가와 앉았다. 그는 비수같은 말로 나긋나긋한 춘란의 빈틈을 푹 찔렀다. “어쩜 그렇게 엉큼하오?” 춘란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조과장을 쳐다보았다. “무슨 소린가요?” “허허허. 아직도 시치미를 따겠어? 저금통장에 무슨 돈이 그렇게 많아? 어데서 난 돈인가?” 춘란은 뻔뻔스럽게 나왔다. “상금을 저금했는데요.” 조과장은 춘란의 어깨에 손을 얹으면서 한술 더 떴다. “춘란이, 상금이 1천 5백원이나 돼?” 춘란은 조과장이 어깨에 올린 팔을 탁 쳐버릴 맥조차 없었다. “어디서 난 돈인가?” 춘란은 머리를 숙였다가 안간힘을 다해 천천히 쳐들었다. “딸이 세집살이를 한다고 우리 부모가 집 사라고 준 건데요. 백화상점 총경리들과 재무일군들의 상금이 얼마나 많은지 알아요?” “꽤나 태연자약하군. 아무렴 총경리들이 재무과와 짜고들어 무짐작으로 상금을 나눠 먹었어?” 춘란은 속으로 조과장을 욕했다. (개뿔도 모르는 놈새끼,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기나 아니?) 조흥수는 “세집 석탄무지에 파묻은 돈가방은 뭐냐?!” 하고 고함치고 싶었다. 그러나 용케도 목구멍까지 치미는 말을 꿀꺽 삼켰다. “우린 네 죄행을 몽땅 장악했어. 감옥에 보내줄가?” 춘란은 아무 말도 못하고 머리를 툭 떨어뜨리였다. 드디여 그녀는 머리를 천천히 들더니 눈물이 글썽한 눈으로 조과장을 쳐다보았다. “조과장, 제발 살려주세요.” 그녀의 목소리는 가련하게 떨리면서도 높았다. 그때 문을 똑똑똑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쉿-“ 조과장은 입가에 식지를 대더니 우쭐 일어나 문께로 다가갔다. “누구요?” “승호요.” “오, 그래?” 조과장은 바깥으로 나가 뭐라고 쑤근거리더니 되들어와 문까지 절컥 잠궜다. 그는 춘란의 곁에 돌아와 앉더니 언포를 놓았다. “난 지독한 저승사자야. 널 지옥에 보낼 수도 있고 천당에 보낼 수도 있어. 어쩌면 좋겠느냐?” 춘란은 징글스런 조과장의 눈총을 맞으면서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흐흐흐흐.” 순간 조과장은 사냥총에 맞아 푹 꼬꾸라지면서 피를 흘리는 사슴이나 본듯이 쾌감을 느꼈다. “조과장, 제발 살려주세요.” “널 놔주고 보위 과장 내놓으란 말이냐? 뭘 보고 너 대신 내 지옥에 들어가?” 춘란은 손으로 걀죽한 볼에 흐르는 눈물을 닦더니 머리를 들었다. “조과장이 시키는대로 다 할게요.” 조과장은 선수를 쳤다. “그래? 나머지 돈 8,500원은 어디다 숨겼어?” “세집 석탄무지에 파묻어놓았어요.” “오~ 그래?” 능구렁이 같은 조과장은 능청을 떨었다. “그 돈 어쩌면 좋아?” “조과장이 가지세요.” 엉큼한 조과장은 안팎이 다르게 나왔다. “이년, 이 조과장을 어떻게 보고 그래?” “?!” 조흥수는 사무상에 돌아가 앉더니 서랍 속의 미형록음기를 쳐들어보였다. 춘란은 혀를 홀랑 내밀다가 속으로 욕설을 퍼부었다. (음흉한 놈! 네놈은 제 명에 죽지 못할 거야.) 춘란의 속내를 꿰뚫어보았는지 조과장은 좀 더 무섭게 나왔다. “네 절도증거를 이 서랍에 보관해두마. 고까짓 돈으로 내 입을 틀어막으려고? 쳇, 어림도 없어!” “그럼 어쩜 좋아요?” 능청스런 조과장은 어슬렁어슬렁 춘란한테 다가와 귀속말을 했다. “절도해간 돈은 네 손으로 가져다 상점에 바쳐라. 넌 정말 아름다운 처녀야. 어느 사내도 홀딱 반해 미칠 미녀야.” 그 말귀를 알아듣지 못할 리 없는 춘란은 온몸을 바들바들 떨려 흐느껴 울었다. 조과장은 춘란의 걀죽한 볼을 살살 매만지면서 색마의 진면모를 드러냈다. “강요하지 않아. 싫으면 그만 둬. 지옥을 자청하면 별 수 없지.” 이윽고 춘란은 눈물을 닦고 머리를 쳐들었다. “조과장, 전 숫처녀예요. 좀 봐주세요. 술 마실 용돈을 푼푼히 드릴테니까요. 돈만 있으면 어데 가서 아가씨를 데리고 놀지 못하겠어요.” “닥쳐!” 조과장은 사무상을 탕 쳤다. “감히 나와 흥정해?” 그는 춘란의 곁에 다가와 나직이 한마디 뱉었다. “내 입만 터지면 넌 당장 지옥에 들어가야 해. 만원이면 총살받을 수도 있어.  목이 떨어진 숫처녀를 지키고 싶은가? 아니면 이 조과장의 아가씨로 되겠는가? 둘 중 마음대로 해.” 조과장은 손을 내흔들었다. “나가!” 춘란은 간신히 일어나 나가려다가 주춤 멈춰서 독살이 비친 눈길로 조과장을 쏘아보았다. “조과장, 약속을 어기는 날엔 황천에 가서라도 당신 그걸 물어뜯어놓을테요.” “모든 건 너한테 달렸어.” “고려할 시간을 주세요.” 조과장은 대답 대신 나가라고 손을 내저었다. 출란은 바깥에 나오면서 속으로 욕했다. (색마 같은 놈, 네 놈은 제 명에 죽지 못할 거야.) 그녀는 억지로 마음을 진정시키고나서 황급히 택시를 잡아타고 세집으로 쏜살같이 달려갔다. 세집 앞에 달려가 부서진 자물쇠꼬리를 보고 기절초풍하게 놀랐다. “아니, 이게 뭐야?!” 그녀가 집 안에 들어가보니 궤짝문은 열려 있고 옷이고 이불이고 온 구들에 지저분하게 널려 있었다. 그녀는 황급히 장판널을 들고 뛰여내려가 석탄무지를 손으로 뒤져보았다. 그러나 토색가방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이걸 어쩌나?) 그녀는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원래 그 돈을 조과장한테 주고 몸을 빼려고 했던 것이다. 그녀의 눈 앞에는 징글스런 조흥수 과장 낯빤대기가 떠올랐다. 안경알 너머 징글스레 그녀의 몸을 노려보던 색마의 거슴츠레한 눈길이 삼삼거렸다. (그 놈 작간 아닐까?) 춘란은 석탄무지에 물앉아 석탄덩이를 마구 뿌리며 대성통곡쳤다. 그녀는 깜깜하고 아득한 수렁에 훌렁 끊임없이 빠져들어가는 감을 느꼈다.           35. “시인”과 녀제자의 로맨스 찌는 듯한 무더위가 휩쓸고 지나간 대지에 어느덧 시원한 가을바람이 선들선들 불어왔다. 가을 하늘은 구름 한점 없이 말끔히 밀어내고 높고 푸르른 가슴을 드러냈다. 이른 아침, 공원 수림에는 락엽이 돌랑돌랑 한여름의 아쉬움을 휘날리고 있었다. 승호는 공원에 산보하러 나갔다가 범송이 공원에서 웬 처녀와 장의자에 나란히 앉아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가 다가가는 것도 모르고 계속 도란도란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저 자식이, 다른 처녀애와? 선금과 련애할 새 없이 결혼하더니 딴 짓을 해?) 승호는 그대로 지나쳐버릴 수 없어 슬금슬금 다가갔다. 범송은 엉거주춤 일어나더니 어색하게 웃었다. “내 녀학생이야.” 범송은 황급히 일어나는 처녀애를 돌아보면서 인사시켰다. “예화, 내 처남이야.” “안녕하세요?” 예화는 해맑은 눈길로 승호를 보고 허리 굽혀 인사했다. “오. 그래? 이야기하오. 저기 산보하러 가겠네” 승호는 그쯤 하고 자리를 떴다. 예화는 범송이 천수해중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을 때 늘 작문을 써가지고 정치교원인 범송을 찾아다녔다. 예화를 비롯한 녀학생들은 범송이 훌쩍 솟구치며 배구를 내리깎는 날렵한 모습에 홀딱 반해버렸다. “예화, 그래 신랑은 어데 있소?” 범송은 예화와 나누던 이야기를 계속 나누었다. “신랑?” 예화의 얼굴에 수심의 어두운 그림자가 흐르는 것을 보고 범송은 꼭 무슨 곡절이 있음을 엿보아냈다. 그때 예화가 오쫄 일어나 떠나려고 했다. “미안하오. 상처 건드리지 않았는지 모르겠소.” “다신 신랑 말 하지도 마세요. 일이 있어 가야겠어요.” 예화는 떠나가려다가 주춤 멈춰서더니 몸을 돌렸다. “최선생님, 후에 편할 때 련락드리겠는데요. 전화번호 줄래요?” “그래, 제 전화번호도 알려주오.” 범송은 둔덕 아래로 내려가는 비틀거리는 예화의 뒤모습을 보면서 도리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며칠 후, 범송이 사무실에 있는데 예화한테서 전화가 걸려왔다. 범송은 승호를 힐끔 곁눈질해보고 거짓말로 스리슬쩍 전화를 받았다. “양, 누나, 참 오랜만이구만요. 매형이랑 모두 잘 있소?” 그제야 시름놓였는지 승호는  과장실로 들어갔다. “최선생님, 저 예화예요.” “오, 알았소.” “선생님, 전화 받기 편해요?” 범송은 옆의 다른 과원들의 눈치를 슬쩍 곁눈질해보고 “양, 좀, 만나서 말하면 어떻소?” 하고 대답했다. “그래요. 그럼 어데서 만날가요?” “전번 그 자리에서.” “알았어요.” 범송은 전화를 놓기 바쁘게 바깥에 내려가 택시를 잡아타고 공원으로 달려갔다. 그는 예화를 만나자 줄느런히 펼쳐놓은 양산 밑에 마주 앉아 콜라를 한잔씩 놓고 시원한 가을바람을 쐬면서 청년들이 배구를 치는 것을 구경했다. 그때 웬 소녀애가 빨간 장미꽃 한송이를 그들의 앞에 내밀었다. 범송은 마주 바라보는 예화 눈치를 채고 제꺽 10원을 주고 빨간 장미꽃 두송이를 샀다. “뭘 그렇게 비싸게 주고 사요?” “랑만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꽃값을 묻지 않는 법이요.” 예화는 범송이 내미는 장미꽃을 받아 향긋한 꽃향기를 맡으면서 걀죽한 얼굴에 전에 없이 생기를 띄우는 것이였다. “선생님은 아직도 랑만적이군요.” 범송은 예화가 기분이 좀 돌아서는 것 같아 저으기 위안됐다. 그런데 저쪽 양산에서 승호가 혼자 앉아 콜라를 마시면서 그들을 살피고 있을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자식, 의심병이 도졌나? 항상 제 색시를 의심하더니 이젠 날 의심해? 자기  밑구멍이 쯘쯘하니 남을 자꾸 의심해? 신경병!) 범송은 더 앉아있을 재미가 없어 콜라를 홀짝 마셔버리고 예화를 데리고 자리를 떴다. 그들은 공원 맞은켠 조용한 골목에 자리잡은 다방으로 들어갔다.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음악이 잔잔히 흐르는 다방에서 범송은 희미한 불빛 아래 예화를 마주하고 앉아 커피를 마시면서 무거운 침묵을 깨뜨렸다. “예화, 지금 뭘 하오?” “자그마한 음식점을 차렸어요. 후에 청하죠.” “꼭 가지. 그간 무슨 일이 있었소?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 “예~ 최선생님, 관상 볼줄도 알아요?” “아니.” “예- 한 입으로 다 말하기 힘들어요. 사람의 팔자는 타고 난 건지 전 남자 복이 없는가 봐요.” 범송은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였다. 예화의 살아온 이야기를 들을 수록 마음이 무겁기만 했다… 대학에 가지 못한 예화는 서른살 파란 나이에 홀로 난 어머니가 불쌍하여 인물체격이 좋고 돈이 있는 총각에게 시집가서 어머니와 남동생을 경제상에서 돕고 싶었다. 그녀는 재학하여 대학에 가라는 어머니의 권유도 듣지 않고 스무살에 록화청을 차린 한 총각과 번개식결혼을 했다. 신랑은 첫인상에 성격이 씨원씨원한 것 같아 그녀의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시집을 가고보니 신랑에게는 큰소리를 친 것과는 달리 돈이 별로 없었다. 록화청에 날아드는 가랑잎 같은 돈을 번다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였다. 관중이 서넛 밖에 안되는 날밤에도 온 밤 비디오테프를 바꿔 돌려야 했다. 치고 박고 칼로 찌르는 무술영화에 울며 겨자먹기로 조금 색갈이 짙은 걸 섞어 돌려야 관중을 끌수 있었다. 그러나 경찰들이 두려워 그런 테이프는 감히 돌리지 못했다. 그래도 그들 부부는 법을 어기지 않고 량심을 속이지 않으며 정정당당하게 돈을 벌려고 모지름을 썼다. 무슨 돈을 번단 말인가? 신랑이 혼자 밤낮 록화청을 지킬 수 없어 낮에는 예화가 임신한 몸으로 무더위를 무릅쓰고 지켰다. “말이 길어졌군요.” 예화는 범송의 눈치를 살짝 보았다. “괜찮아.” 범송은 커피잔을 들어 후루룩 마셨다. 예화는 머리를 다소곳이 숙이고 뭔가 골똘히 생각하다가 범송을 마주 바라보면서 무겁게 뒤말을 이었다. “신랑은 어찌 그렇게 철면피할 수 있어요? 돈을 벌지 못해도 참고 살 수 있어요. 그런데 바람 피우는 건 정말 용서할 수 없죠. 한번은 신랑의 옷을 씻으려고 호주머니를 들추다가 처녀애들의 사진 서너장이 나오지 않겠어요. 그때부터 의심스러워 살피기 시작했어요.” 그제야 예화는 커피를 한모금 홀짝 마시더니 뒤말을 이었다. “한번은 낮에 록화청을 지키다가 새 테이프를 가지러 집에 갔지요. 대낮에 안으로 문을 걸지 않았겠어요. 문을 두드리자 집 안에서 뭐라고 하더니 버스럭거리지 않겠어요. ‘어서 문을 열지 못하겠어?’ 하고 소리치자 한참만에야 문을 열었어요. 당황해하는 신랑의 표정이 참말 이상했어요. 제가 이상해 집안을 두루 살펴보다가 침대 우에서 길다란 까지색머리카락이 널려 있는 걸 발견했어요. 전 근본 머리에 염색한 적이 없었거든요. 제가 머리카락을 쳐들어보이면서 ‘이건 뭔가?’고 따지자 신랑은 꺽꺾거리면서 대답하지 못했어요. 저는 집 안에 이상한 기운이 도는 걸 녀성의 예민한 육감으로 느꼈어요. 옷궤랑, 베란다랑 여기저기 들춰보았어요. 그런데 글쎄 부엌에서 버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겠어요. 부엌에 가서 장판널을 활 들가하다가 가마옆의 뜨물초롱을 들어 장판에 활 부어놓았어요. 장판널을 왈 뜯어보니 글쎄 사진에서 본 듯한 그년이 뜨물과 국수오래기를 들쓴채 쪼그리고 앉아 있지 않겠어요. 분명 빈집에 그년을 끌어들여 그 짓을 한게 아니고 뭔가요. 흑흑,” 예화는 대성통곡쳤다. “그 년의 머리채를 잡아채고 마구 잡아 뜯어놓고 생야단쳤지요. 그런데 괘씸한 신랑은 오히려 저를 뜯어말리면서 뺨까지 찰싹 갈기지 않겠어요. 그 틈에 까지색머리년은 부엌에서 기신기신 기여나와 도망쳤죠. 그런 놈과 어떻게 살겠어요? 한다는 소린 얼마나 메스꺼운지 알아요?” “?” “숫처녀맛 보자고 그랬다. 어째?” “얼머나 뻔뻔스러운가요? 흑흑흑.” 예화는 서럽게 울며 어깨를 가냘프게 달싹이였다. 범송은 한숨을 땅이 꺼지게 후- 내쉬면서 중얼거렸다. “어쩜 이렇게 예쁜 색시를 두고 바람을 피워?” 예화는 범송의 말에 고개를 들고 마주 바라보았다. 어두운 다방의 불빛을 빌어서  눈빛이 이상하게 반짝이었다. “글쎄 저와 살면 어쩐지 격정이 없대요.” 범송은 차잔을 들어 후룩 마시고나서 말했다. “바람을 피우는 사내들이 다른 녀자들이 자기 색시보다 더 예뻐서 그러오?” “사내들은 왜 그래요? 남의 녀자와 살면 별난가요?” “글쎄 말이요. 아마 한 녀자와 오래 같은 방식으로 사노라면 지루하고 짜릿한 격정이 없겠지. 남의 녀자와도 오래 살면 또 자기 색시처럼 격정이 다슬어없어지는 건 매한가지지.” 예화는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그럼 한뉘 얼마나 많은 녀성들과 바람을 피워야 되는가요?” “중이 고기 맛을 들이면 빈대도 다 잡아먹는다오. 바람둥이는 말리지 못해. 일찌기 갈라지길 잘했소.” “선생님은 어쩜 시만 잘 쓰는가했더니만요. 남녀관계에 대해서도 어쩜?” 범송은 황급히 손사래를 쳤다. “아니, 아니요. 오래 살다보면 점차 알게 되오.” 예화는 머리를 수깃하고 답답한 속사정을 말했다. “신랑은 말로는 ‘임신한 거 어떻게 자꾸 다치겠는가?’고 했어요. 아마 젊다보니 나와 그러진 못하니까요. 성욕을 참지 못해 다른 녀자와 해소했을 수도 있지요.” “애는 어쨌소?” “긁어버렸어요.” 범송은 예화의 속뽑이를 해보았다. “신랑을 한번쯤 용서하면 안되겠소?” “아니, 복수하고 싶어요.” “못써. 신랑을 살뜰히 대해줘야지. 물론 임신한 몸이여서 힘들었겠지만 말이요. 그래야 신랑의 마음을 붙잡을 수 있소.” 예화는 이번만은 선생님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선생님, 제가 임신해 입덧이 나 왝왝 토하면서도 낮에는 록화청을 지켰는데요.  밤마다 달려드는 신랑을 어떻게 받아당하겠어요. 한번 대충 그러는 것도 아니고 하루 밤에도 끝없이 달려들어요. 배속의 애가 상할가봐 근심도 하지 않고 미친듯이 달려들었어요. 흐흑흑.” 범송은 더 할 말이 없게 됐다. 예화는 억울함을 하소연했다. “그 개새끼보다 더 나은 남자가 없어서 빌고 들겠어요?” 범송은 풍전등화 같은 예화의 운명을 생각해서라도 무거운 입을 또 뗐다. “가정은 티없이 맑고 깨끗한 사랑을 토대로 하여 융합된 부부로 이루어져야 오래 갈 수 있소. 어떤 땐 사랑보다 가정이 더 크오. 많은 사람들은 가정을 유지하면서도 바깥에서 정부를 찾거나 애인을 찾아 감정과 애정의 부족한 걸 보충하려고들지. 건 다 도덕에 어긋나오.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리혼하지 않는 것도 도덕에 어긋나오. 그런 점에서 보면 예화가 갈라진 건 도덕적으로도 잘한 일이요. 저는 아직 젊소. 참다운 사랑을 찾아 도덕적으로도 어긋나지 않고 부부사랑으로 차넘치는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게 옳소.” 그 말에 예화는 귀가 솔깃해지는 눈치였다. “예화는 자기절로 깊은 고민의 구렁텅이에 빠지지 마오.” 예화는 한숨을 호~ 내쉬였다. “선생님의 말씀을 들으니 이젠 마음이 후련해요. 후에도 종종 저의 고민을 풀어주세요.” 범송은 다방에서 나와 예화를 음식점 부근에까지 데려다주었다. 그는 어스름한 골목길로 멀어져가는 예화의 뒤모습을 보노라니 저도 몰래 처량하고 마음이 쓰라리기만 했다. “어쩜 가야금을 둥기당당 신나게 타면서 방실방실 웃던 예화가 저런 마음고생을 하게 됐을가? 예화를 여러 모로 도와줘야지.” 그후 범송은 예화네 음식점으로 자주 찾아갔다. 별로 크지 않은 음식점은 예화의 예술적인 손길에 아주 단아하고 깔끔하게 차려졌다. 범송은 맥주를 잘 들지 않았다. 그러나 예화가 부어주는 맥주가 시원하여 맥주잔이 술술 내려갔다. 이래서 술상에서는 사촌누나라도 마주 앉으면 술맛이 난다는 말인가. 얼굴에 홍조가 피여오른 예화는 맥주병을 들어 범송의 잔에 자꾸 맥주를 부어올렸다. 이때 양복차림을 깔끔하게 한 깡마른 청년이 음식점에 들어섰다. 예화는 오쫄 일어났다. “미안해요, 선생님. 우리 음식점에 자주 드나드는 손님이 와서 잠간  건너가 봐야겠어요.” 예화가 그쪽에 가서 단골손님을 데리고 단간방으로 들어갔다. 순간 범송은 슬그머니 속이 비길데 없었다. (이상해, 내가 예화를 좋아하는가?) 범송은 도리머리를 하면서 애꿎은 맥주잔을 연신 기울였다. 한참 후에야 예화가 돌아와 마주 앉았다. “예화, 이젠 손님들이 올 때 돼서 돌아가야겠소.” 범송은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50원짜리 지페 내놓았다. “아니, 선생님, 5원만 주세요.” 예화가 받으려고 하지 않자 범송은 되밀어주었다. “제가 영업을 하는데 스승이 좀 부조하면 안되오?” “예화, 우리 왔소.” 범송이 문어귀를 피뜩 돌아보니 뜻밖에도 승호가 빨간 적삼을 입은 춘란을 데리고 들어서지 않겠는가. 승호도 범송도 서로 놀랍고 이상했다. “안녕하세요? 리과장, 최선생님은 저의 중학교시절 담임선생님인데요.” 예화가 나서서 어색한 분위를 깨면서 인사했다. “서로 아는 사인가요?” “오, 전번 공원에서 본 그 색시구먼.” 승호는 어색하게 범송과 예화를 번갈아 바라보면서 허구픈 웃음을 지었다. 한켠으로 피해섰던 춘란은 더욱 어색했다. 아주 은밀히 리승호 과장과 붙어다니는 판인데 범송에게 들킬줄을 누가 알았겠는가. “안녕하세요? 최선생님, 단위에 손님이 와서 나왔어요.” “오, 그래?” 범송은 승호를 돌아보면서 “그럼 일을 봐라. 난 얼근히 취해서 가봐야겠어.” 하고 자리를 떴다. 그 후에도 범송은 술친구들만 생기면 예화네 음식점에 데리고 가서 맥주를 마셨다. 지어 술상이 끝나고 영업도 끝나면 예화와 식당 복무원들까지 데리고 노래방에 가서 흥청망청 밤이 가는줄도 모르고 놀았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후 승호와 춘란의 그림자는 얼씬하지도 않는 것이였다. (자식, 더 으슥한델 데리고 가서 놀겠지. 해산달이 된 색시와 그 짓을 못하니까. 굴어귀 풀도 놓지지 않아?) 조과장한테 붙어놀던 춘란이 승호한테 찰싹 붙어 암암리에 놀아날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개 똥 먹는 버릇 못 고친다더니?) 그는 승호와 춘란을 개의치 않았다. 다만 식당영업이 잘 돼나가서인지 수심의 그림자가 가뭇없이 사라진 예화의 해맑은 얼굴, 유쾌하게 노래를 부르는 예화의 생기발랄한 모습을 보고 내심 기뻤다. 며칠 후 범송은 선금과 함께 산부인과에 가서 아들을 본 승호를 축하해주었다. 선금과 갈라지기 바쁘게 범송은 예화네 음식점에 전화를 쳤다. 그런데 중지신호 밖에 없었다. “웬 일일가?” 범송은 황급히 택시를 잡아타고 예화네 음식점으로 달려갔다. 음식점 문 앞에 가보니 “세집”이라는 큼직한 글자가 붙어있지 않겠는가. “참, 사람도 무정하지. 어디로 간단 말도 하지 않고 감쪽같이 사라져?” 눈보라가 윙-윙- 휘몰아치던 지루한 겨울이 지나가고 화창한 새 봄이 왔다. 봄아가씨가 사뿐사뿐 다가오자 차디차고 쌀쌀한 눈깔만 부라리던 동장군은 겁을 집어먹고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다. 비단결로 얼굴을 매만지는 듯한 부드러운 봄바람이 산들산들 불어왔다. 범송은 예전처럼 공원에 가서 로인들과 함께 태극권을 련습했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아니, 예화!’ 범송은 태극권을 그만두고 땀을 훔치면서 생글방글 웃으면서 자리를 바라보는 예화한테 다가갔다. 예화는 허리를 굽혀 구십도경례를 올렸다. 범송은 미색외투를 입은 예화의 손을 놓치기라도 할가봐 꽉 잡고 핀잔부터 했다. “어데 갔댔소? 괘씸한 것, 아무 말도 없이. 그게 뭐요? 핸드폰번호까지 바꾸고. 그래 그간 어데 갔댔소?” “청도에.” “뭘 하러?” 예화는 새물새물 웃을뿐 대답하지 않았다. “저녁에 다시 보자요.” 그녀는 핸드폰번호를 알려주었다. 범송은 퇴근하자마자 승호의 눈을 피해 예화한테 핸드폰을 쳤다. 이윽고 그들은 화도해물관에서 조용히 만났다. 오색령롱한 전등불빛이 반짝이는 널다란 대청에는 손님들이 몇이 없었다. 범송은 시원한 감이 드는 해물관의 큼직하고 알른알른한 유리창문 옆에 예쁜 예화와 마주 앉으니 기분이 한결 좋았다. 예화는 맥주를 들어 범송의 잔에 찰찰 넘치게 부었다. “오늘 사죄하는 의미에서 제가 한턱 내지요.” “아니, 영업도 그만뒀는데 무슨 돈이 있다고 그러오.” “번마다 선생님의 도움이 많았어요. 감사해요. 자, 드세요.” 예화는 범송의 맥주잔과 댕그랑 마주치고나서 굽을 냈다. 범송도 굽을 내지 않을 수 없었다. “청도에서 무슨 일을 했소?” 범송은 또 꼬치꼬치 캐묻기 시작했다. “비밀이예요.” 예화는 이쑤시개로 익은 조개살을 쏙쏙 빼내 범송 앞의 접시에 놓아드렸다. “어째 음식점은 그만뒀소? 그간 내 얼마나 애타게 찾았는지 아오?” “참 미안해요. 한입으로 다 말하기 힘들어요.” 예화는 앵두입으로 소라살을 홀짝 흡입하면서 뒤말을 이었다. “이전에 우리 집 단골손님을 기억나세요?” “오- 그 깡마른 양복쟁이.” “맞아요.” “꽤나 날 질투나게 하기도 굴었지.” “왜요?” “쩍하면 예화를 불러가서 날 속이 볶이게 했던 거야.” “호호호. 선생님~ 질투나던가요?” “왜? 나도 칠정육욕이 있어.” 예화는 새물새물 웃었다. 한참 후에야 그녀는 입을 열었다. “그 단골은 박철이라고 불러요. 박철이 보기싫어 청도로 갔지요.” 범송은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걔가 보기싫다고 음식점을 때려치워? 말도 안돼.” 예화는 게다리를 쏙 뽑아 속살을 빼 범송이 앞의 접시에 놓고 자기도 오물오물 맛나게 씹어 꼴깍 삼키더니 앵두입을 열었다. “어진간하면 잘되던 음식점을 다 때려치웠겠어요? 박철은 시내에서 한다하는 간판광고상인데요. 돈이 많으니 녀자들도 많지요. 몇해전에 네살짜리 딸애를 데리고 리혼했지요. 음식점의 단골이 되면서 이래저래 정이 들어 우린 동거하는데까지 갔지요. ” 예하는 범송과 맞잔을 하고 뒤말을 이었다. “박철은 내가 마치 자기 소유물이기나 한듯이 깜짝 못하게 했어요. 손님들과 맞잔을 해도 안됐어요. 미안한 말씀을 드리지만요. 심지어 선생님과 맞잔을 하는 걸 봐도 며칠이고 저하고 행악질을 하군 했어요.” 그 말에 범송은 “예화한테 피곤하게 굴어 미안하오.” 하고 죄송스러워했다. “아니예요. 절대 아니예요. 박철이 좀스러워 그렇지요. 또 남녀의 감정문제는 사심이 있기 마련이니까요. 보세요. 최선생님도 박철을 질투하지 않았는가요?” “이제 보니 그래.” 범송은 머리를 수깃하고 애꿎은 소라 속살만 이쑤시개로 뽁뽁 뽑아내 우물우물 씹어먹기만 했다. “박철은 나한텐 손님과 웃어도 안되고 술을 마셔도 안된다고 했지만요. 자기는 숱한 처녀애들과 밤중까지 술을 마시고 질탕하게 놀 때가 한두날이 아니였어요.” 예화는 범송의 앞에서 진짜 부모 앞에서 하소연하듯이 허물없이 그간 있은 털어놓았다. “련인절날엔 어쩌겠어요. 아침에 훌 나가더니 이튿날 새벽에야 들어오지 않았겠어요. 그날 혹시 저녁에나 들어와 뜻밖의 랑만을 주겠는가고 기다렸죠. 그런데 밤이 깊어가도 오지 않았어요. 전화 한마디 없었어요.  후에 뭐라고 하는지 알아요. 단위에 업무가 바빠서 그랬다고 해요. 그날 정말 최선생님을 찾을가고도 했지요.” “찾을게지. 고독하면 날 찾소.” “고마와요.” 예화는 범송의 술잔에 술을 찰랑찰랑 넘치게 부어올렸다. “자, 드세요.” 예화는 범송의 잔과 댕 마주치더니 반쯤 마셨다. “말이 길어진 거 같아요. 선생님과 만나면 허물없이 말하는데요. 널리 량해하세요.” “괜찮아. 우린 사제간이 아니고 뭐요?” “예. 그날 선생님을 찾아가려고 했는데요. 호주머니에 단돈 6원 밖에 없었어요. 박철은 제 호주머니에 돈이 있으면 선생님이랑 술을 사 대접한다고 몽땅 들춰내 치워놓군 했지요. 어디 믿음과 마음이 가야 살지요. 제가 뭐 로임도 받지 않는 보모인가요? 그렇게 박정하게 놀았는데요. 제가 박철이 술내 풍기는 옷을 빨아주고 하루 세때 밥을 해줘야 한다는 도리가 어디 있어요?” 범송은 머리를 끄덕이고나서 술잔을 들었다. “자, 한잔 드오.” “예. 선생님과 만나니 기분 참 좋아요.” 댕그랑 댕댕. 그들은 술잔을 들어 한잔 굽을 냈다. “전 이젠 홀로 살겠어요. 저의 자유를 얽매는 정신쇠사슬이 없지. 홀가분한게 얼마나 좋아요? 남자를 해 뭘 해요? 이젠 신물이 나요.” (예화는 예쁘게 생겼지만 남자 복이 없는가 봐!) 범송은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생각과 다른 말을 했다. “예화는 아직 젊소.  후에 꼭 예화 마음에 드는 신랑이 생길 거요.” “전 남자복이 없어요.” “아니요. 이후엔 먼저 상대방을 잘 알아본후 사귀란 말이요. 너무 성급하게 서두르면 자꾸 사고를 치게 되는거요.” “제가 너무 경솔했을 수도 있죠.” 범송은 화제를 돌렸다. “그래 지금 뭘 하오?” “이번엔 다방을 차렸어요.” “재간이 있구만.” 예화의 얼굴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스쳐지나갔다. “전번에 음식점을 차렸다가 3만원이나  밑졌어요.” “무슨 소리요?” 범송은 눈이 데꾼해 예화를 쳐다보았다. “장식비에 임대료에 두루 그렇게 됐어요. 3년 임대계약을 맺았댔는데요. 계약기한 전에 그만뒀기에 임대료를 절반이나 받지 못했어요. 장식비를 허망 처넣고나니 그렇게 됐어요.” “에이구, 차물을 팔어서 어찌 그 돈 벌겠소?” “괜찮아요. 청도에 가서 그만큼 벌었으니까요.” 예화는 혀를 홀랑 내밀면서 범송의 눈치를 살피더니 이쑤시개로 조개살을 뽁 뽑아 앵두입 안에 넣었다. 돈도 벌고 새 삶의 길을 걷고 있는 에화를 보고 범송은 한시름을 푹 놓았다. “이젠 자주 만나지 않아도 되겠지.” 그는 예화와 자주 만났다가 괜히 승호와 선금의 오해를 살가봐 근심됐다.
146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107) 댓글:  조회:1500  추천:0  2018-06-16
                     2. "작은 선생"        하늘에서는 거무칙칙한 구름이 감때사납게 흩날리고 먹장구름을 꿰뚫고 불뱀이 패용천산 중턱을 날카롭게 핥아갔다.        꽈르릉! 꽝! 꽝!         먹장구름은 칼산이 높이 솟구치려는 야심이 있다고 갖은 술책을 다 부린다. 먹장구름은 때로는 넓은 흉금으로 포옹한다는 것을 세상에 보여주려고 잠시나마 옥맺힌 옹졸한 가슴을 하얗게 풀어헤치면서 산봉오리를 끌어어안기도 하고 숙구멍을 어루만져준다.        그래도 말을 듣지 않고 함구무언일 때는  불채찍을 휘둘렀다.         번쩍!         우르릉 꽝꽝!         간사한 요귀는 먹장구름 사이에 숨어서 음산한 바람을 일이키더니 불혀를 날름거린다.         천둥소리가 천지를 진동하며 지꿎게도 소낙비가 억수로 쏟아졌다. 빗줄기가 점점 굵어지더니 나중에는 밤알만큼 한 우박이 와르르 쏟아져 진창에서 물똥이 튕겼다. 풀이 듬성듬성 난 함흥중학교 운동장에는 난데없는 탁구공만큼 한 하얀 우박이 쏟아져 나뒹굴었다. 운동장에서는 체육시간을 본지 오래었고 뛰노는 학생들을 본지 오래 풀이 무성하게 자라 범이 새끼를 칠 지경이었다. 감때사납게 불어치는 비바람에 학교 지붕 양철이 들려 넌덜거리며 산신당 귀신 소리를 울리며 사생들의 마음을 아프게 긁었다. 펑펑 구멍 뚫린 교실 유리창문은 을씨년스러운 날씨를 내다보며 장탄식하고 있었다. 학교 벽에는 대자보가 다닥다닥 들어붙어 있었다. 이른바 류소기의 “독서벼슬론”을 비판하고 “반역자이며 내부간첩이며 매국역적인 류소기 수정주의 교육노선”을 비판하는 대자보들이었다. 그런 대자보를 많이 써야 정치표현이 좋다고 하는 세월이었다. 때문에 남의 대자보를 베껴서라도 비판대자보를 주일마다 한 장 붙여야 했다. 겹겹이 나붙은 대자보는 세상에 보기 드문 “명필”들이었고 필체도 각양각색이었다. 쌀이 귀한 세월이라 쌀 물로 풀을 쑤어 붙이지 못하고 그 추운 겨울에 바깥에 나가 진흙을 파다가 물에 풀어 진흙탕으로 벽에 대자보를 붙였다. 그러다나니 허연 종이에 쓴 대자보는 그야말로 흑대자보로 돼버리었다. 덕돌은 공부를 뛰어나게 해 애들이 “수학 골”, “작은 선생”으로 별명을 지어 부를 지경이었다. 하지만 “문화대혁명시기” 학교 정치 환경에서는 용빼는 수가 없었다. 당시 사회에서는 지식분자들을 “더러운 아홉째”라느니 “소자산계급”이라고 몰아붙이면서 “그들의 사상은 발에 소똥이 묻은 빈농들의 사상보다 못하다.”고 했다. 또 지식보다도 사상이 붉어야 한다며 지식분자들은 빈농의 재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우에서 최고지시가 내렸다. 함흥중학교에서는 정치형세에 맞춰 빈농 대표 이흥수가 와서 관리하기 시작했고 학교 당 지부 서기 장동원은 유명무실한 지도자로 되였고 학교 혁명위원회 주임 이승복과 서기 장동원은 대대 혁명위원회 주임 황종연과 학교 빈농 대표 이흥수와 토론한 후 함흥대대 당 지부 선전위원이던 김철봉, 김성환 등 몇몇 지식이 있는 농민들을 겸직교원으로 초빙했다. 이흥수는 학교 빈농 대표라는 특수신분을 이용해 종연의 동생 황승연도 학교에 끌어들이었다. 자기 졸개로 쓰려는 이도에서였다. 학교에서는 문화지식공부는 뒷전이고 농업과를 설치하고 학생들에게 농사짓기를 가르쳤고 학생들을 생산대에 내몰아 봄에 담배그루뽑기, 벼모꽂기부터 가을하기에 탈곡까지 하게 했다. 진짜 학생이 아니라 공을 받지 않는 준농사군들이나 다름없었다. 덕돌은 당시 공부를 잘했지만 표창을 받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류소기 “독서벼슬론” 반동사상에 물젖었다고 락인돼 한쪽으로 밀리었다. 더구나 담임교원 황승연은 형 황종연과 이흥수와 짜고 들어 상순의 아들이라고 덕돌을 학습위원에서 내치고서도 모자라 처처에서 기를 펴지 못하게 들볶았다. 어느 날 아침, 숱한 학생들이 교탁 옆에 황승연을 둘러싸고 서 있었다. 덕돌이 다가간 줄도 모르고 황승연은 계속 지껄였다. “덕돌은 안 되오. 새애기처럼 코를 풀럭거리며 공부나 잘했지. 일하기 싫어하고 체육이랑 영 못한단 말이오. 뽈이랑 어디 찰줄 아오?” 애들은 덕돌을 돌아보면서 키득키득 웃었다. 그제야 덕돌이 애들 뒤에 서있는 것을 본 승연은 교편으로 교탁을 탁탁 치더니 교실에서 훌 나가버렸다. 분명 덕돌을 때리지 못해 하는 짓거리였다. 비가 구질구질 내리는 지꿎은 날에 사래긴 밭을 김맬 때 덕돌은 제일 앞에서 기음을 매며 나갔다. 황승연은 호미를 메고 전문 덕돌의 꽁무니를 뒤 따라다니며 곡식포기 속의 풀을 뽑아 숱한 애들 앞에 높이 쳐들어 보이면서 비평했다. “이게 뭔가? 이렇게 거짓으로 매서 되니? 빈농의 재교육을 밑구멍으로 받아?” “허허허. 어째 그렇게 빨리 나갔나 했더니 풀을 매지도 않았구먼.” “일을 할줄 알아야 어쩌지?” “작은 선생”으로 불린 덕돌을 질투하던 어떤 애들은 속이 시원해 헐뜯었다. 게다가 성욱이랑 상선이랑 덕돌이 철주와 함께 동네 해바라기를 훔쳐 먹었다는지 뭔지 하면서 이른바 덕돌의 “죄상”을 만들어 헐뜯었다. 그럴수록 덕돌은 김매기도 더 잘하고 쉼 시간이면 애들과 멀찍이 떨어져 숨어 성환 형님이 빌려준 소설책을 가만히 읽었다. 덕돌은 황승연이 어찌나 미웠으면 모주석의 칠언율시를 배운 후 딱딱 한 행에 일곱 자로 된 이른바 “7언 시”를 써서 황승연을 “황둥개”라고 욕하면서 자기를 압제하는 이른바 죄상을 폭로했다. 그런데 성욱이 황승연에게 덕돌이 쓴 시를 훔쳐다 보이는 바람에 덕돌은 또 봉변을 당했다. 황승연은 쑥 꺼져 들어간 우멍 눈에 쌍불을 켜고 덕돌의 귀 쌈을 후려갈겼다. “이 새끼야, 길러준 개 발 뒤축을 문다고 네놈새끼 언감 날 헐뜯어?” 저쪽에서 성욱이랑 깨 고소해 입을 싸쥐고 웃었다. 허나 방순희랑은 덕돌을 동정해 마음이 아파 상을 찡그리며 불쾌한 표정으로 황승연을 바라보았다. 덕돌은 황승연에게 한매 또 한매 얻어맞을 때마다 속으로 이 다음 커서 힘이 세면 황둥개부터 까부실테다.” 하고 윽벼르면서 이를 악물었다. 허나 흐린 하늘이 조금 개이면서 간혹 쨍 하고 해 뜨는 날도 있었다. 덕돌을 그렇게 못 살게 굴던 황승연이 글쎄 하루 새에 함흥중학교를 떠나게 됐다. 대대 혁명위원회 주임 황종연이 김용만 국장에게 술 상자를 들어다주고 뒷문거래를 해서 승연을 공사 기업소에 넣어주었던 것이다. 황승연이 학교에서 사라지자 덕돌은 얼마나 홀가분한지 긴 한숨을 후 내쉬었다. 뜻밖에도 담임교원으로 김경산 선생이 왔다. 성환이나 경산, 황승연은 모두 덕돌의 큰누나 춘자와 소학교 때부터 고중까지 동창생이었다. 특히 경산은 춘자와 한 마을에서 자랐고 소학교부터 농학원 다닐 때까지 동창생이었다. 덕돌은 인차 경산 선생님이 담임교원으로 온 기쁜 소식을 편지로 써서 교하 큰누나한테 부쳤다. 춘자가 쓴 편지 두통이 인차 날아왔다. 한통은 고향 친구 경산한테 날아왔다. 그는 편지에서 덕돌이 그간 황승연에게 수모를 당한 일을 이야기하고 덕돌을 잘 가르쳐달라고 부탁했다. 다른 한통의 편지는 덕돌에게 날아온 것이었다. 덕돌은 편지를 받아 쥐고 학교 운동장 동남쪽에 있는 백양나무 아래로 갔다. 운동장에는 쑥이 한 키씩이나 자라 범이 새끼를 칠 지경이었다. 설상가상 한족묘지 바깥으로 드러난 뻘건 관 널이 아가리를 쩍 벌리고 있어 시꺼먼 관속이 들여다보여 무시무시하기만 했다. 허나 덕돌은 한족묘지꺼리에 누구도 오지 않아 좋았다. 편지를 뜯어보니 춘자는 덕돌을 보고 교오자만하지 말고 경산선생님의 가르침대로 공부만 잘할 것이 아니라 다른 동창생들과 단결도 잘하고 공부를 잘 못하는 친구들을 도와주며 훌륭한 사상품성을 닦으라고 재삼 부탁했던 것이다. 덕돌은 글귀마다 형제의 정이 찰찰 넘치는 편지를 읽으면서 흐느껴 울었다. 뜨거운 눈물은 편지지에 점점이 떨어져 젖어갔다. “누나, 꼭 누나 가르침을 명기하겠소.” 덕돌은 교하 쪽을 향해 머리를 숙이었다. 그때 경산 선생님이 찾아왔다. “온데를 찾아도 없더구나. 여기서 뭘 하니?” 덕돌은 허리를 굽혀 인사하고 나서 “선생님, 전 잘 못도 많은데 많이 도와주십시오.”라고 했다. 그러자 경산은 “독서무용론이 살판 치는 세월에 너 같은 훌륭한 학생들이 고생하게 됐다.”라고 하며 덕돌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너네 누나에게서 편지가 왔더구나. 내 있는 힘껏 도와 줄 테니 근심하지 말고 공부를 잘 해라.” 그 말에 덕돌은 놀랐다. “공부를 잘해도 일없습니까?” “일 없다. 요즘 등소평 동지가 올라가 교육을 틀어쥐면서 학교에서 지식교육을 중시하기 시작했다. 마음 놓고 공부를 잘 해라. 우리 학급의 학습 성적을 춰 세워야 하겠는데 네가 학습위원을 맡아야겠다.” “예?!” 경산 선생님의 말에 덕돌은 놀랐다. “난 널 믿는다. 학습위원이 된 후 자기 공부만 잘 할뿐만 아니라 이전처럼 ‘작은 선생’이 돼 학습 성적이 차한 애들을 배워줘라.” 뒤이어 경산 선생님은 미더운 눈길로 덕돌을 바라보면서 “할 만하지?”라고 물었다. 덕돌은 뜨거운 눈물을 흘리면서 감개무량해 경산 선생님을 바라보며 “꼭 잘겠습니다.”라고 했다. “좋다. 내일 학급에서 통과하겠다. 그리고 몇 가지 말해야겠다.” 덕돌은 손등으로 눈물을 닦고 나서 똑바로 서서 선생님의 말씀을 귀담아 들었다. “참된 사람이 되려면 공부도 잘해야 하겠지만 고상한 품성부터 닦아야 한다. 황승연 선생이 너를 압제하고 때리고 학습위원을 철직한 것은 잘 못이다. 나는 그를 몇 번이고 찾아 너의 학습위원을 회복시키라고 했다. 허나 필경 그는 너의 담임교원이 아니냐? 너도 이젠 나이 어리잖고 책도 다른 애들보다 많이 보았으니까. 이젠 셈이 들어야지. 아직도 밉던 곱던 자기 선생을 황둥개라고 시까지 지어 숱한 학생들 앞에서 욕한 건 잘 못이야. 지금 아무리 학생과 선생은 ‘한 전호 속의 전우’라고 하지만 필경 너의 스승인데 그럼 못 쓴다. 알만하지? 큰 그릇이 되려면 마음을 널리 써야 한다.” 덕돌은 인차 마음이 돌아설 수 없어 머리만 숙이고 발끝으로 땅바닥의 풀만 긁어댔다. “공부를 못하는 애들을 잘 배워주면서 자기 주위에 애들을 뭉치게 할 줄도 알아야 한다. 각종 방법을 대서 애들을 하나하나 단결해 친구로 보내라. 그럼 외목에 나는 일은 없을 거야. 지어 성욱과도 단결해야 한다. 황차 성욱은 네 9촌 조카가 아니냐?” 어린 덕돌은 그 말까지 접수하기 힘들었다. “성욱이랑 나를 도처에서 헐뜯는데 그 애하고 어떻게 단결합니까?” “그래도 단결해야 한다. 너를 질투하고 미워하는 걸 나도 안다. 그럴수록 단결해 너를 미워하지 않고 헐뜯지 말게 해야 한다. 그래야 네 위신이 올라 갈 수 있다. 알만하지?” “네~” 덕돌은 실오리만큼 알듯 말듯해 그저 머리만 끄덕이었다. 이튿날 이른 아침 날씨는 유난히 밝았다. 밤새 지루하게 내리던 소낙비도 멎고 새들도 깃을 털며 날 준비를 하느라고 여념이 없었다. 덕돌이 오랜만에 호미 대신 책보를 메고 학교에 갔다. 그날 경산 선생은 숱한 학생들 앞에서 엄숙히 선포했다. “오늘 우리 학급 새 간부들을 선포하겠습니다. 반장에 장영웅, 홍위병 조장에 최설복, 체육위원에 김일광을 임명합니다.” 학생들은 모두 박수를 우레와 같이 보냈다. 그때 장영웅이 옆에 앉은 최설복을 보고 의아해 “어째 학습위원이 없니?”하고 중얼거렸다. 그러자 설복은 “학습위원이야 성욱이지 않고 뭐야?”라고 하며 앞줄에 덕돌과 나란히 앉은 성욱을 바라보았다. 덕돌이 보니 성욱은 득의양양해 경산 선생을 바라보았다. 경산 선생은 성욱이네와 벽을 하나 사이 둔 아래 웃집 사이이었다. 성욱은 그 지리적 우세를 믿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때 경산 선생은 정말 성욱과 덕돌을 번갈아보더니 목청을 돋우어 선포했다. “다음 학습위원을 개선하겠습니다. 학습위원은 반드시 학습 성적이 우리 학급에서 최고인 학생이여야 됩니다.” “학습 성적 1등이야 덕돌이지. 성욱이 되니?” 장영웅이 설복과 말했다. 허나 설복은 의견이 달랐다. “그래도 학습 성적만 봐서 되니? 품성도 봐야지. 담임교원을 황둥개라고 욕하는 애가 어떻게 학습위원을 하니?” 그때 경산 선생이 설명했다. “물론 학습위원은 다른 간부들과 마찬가지로 품성도 좋아야 합니다. 내 보건대 우리 학급의 학습위원은 공부를 제일 잘 하는 덕돌 동무가 하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성욱 동무도 잘 하지만 학습 성적이 덕돌과 비할만합니까? 누가 학습위원을 하는 게 옳은지 토론해봅시다.” 그러자 교실 안은 장마당처럼 의논이 분분했다. 영웅은 벌떡 일어나 말했다. “덕돌 동무는 매개 과목 평균성적이 100점입니다. 우리 학급에서 최고 1등입니다. 성욱 동무는 겨우 급제나 맞았는데 어떻게 학습위원을 할 수 있습니까? 덕돌 동무는 기실 품성도 좋습니다. 황승연 선생님이 자꾸 욕하니까. 괘씸해 황둥개라고 그런 시를 썼을 뿐입니다.” 경산 선생은 명확히 말했다. “건 덕돌의 잘못입니다. 밉던 곱던 선생을 그렇게 욕해선 안 됩니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선생님과 어른들을 존경하는 훌륭하고 참된 사람이 돼야 합니다. 덕돌 동무는 이전의 잘못을 고치고 고상한 품성을 키우겠다고 나한테 결심을 표시했습니다. 덕돌 동무는 총명하고 학습도 잘할 뿐만 아니라 품성도 좋습니다. 덕돌은 초중 1학년 때 겨울이면 날마다 학교에 일찍이 나와서 자기 학급 교실의 난로를 피웠을 뿐만 아니라 교무실의 난로도 피워 사생들의 호평을 받았습니다. 덕돌은 활동소에서도 단장을 하면서 학생들을 이끌고 3년 동안 돼지 똥을 해마다 열 수레씩이나 주어 생산대 온상에 내게 했고 날마다 학생들을 데리고 패용천산을 톺아 오르면서 군사훈련을 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학교에서 제1패로 로두구 만인갱 앞에서 선서하고 홍위병에 가입한 훌륭한 동무입니다. 덕돌은 이후에 꼭 큰 일을 할 훌륭한 학생이 되리라는 것을 나는 굳게 믿습니다.” 그는 학생들을 향해 엄숙히 말했다. “이제부터 학습위원을 민주로 선거하겠습니다. 동무들은 필기장을 찢어내 자기가 동의되는 학습위원의 이름을 써서 내십시오.” 애들은 “와!” 하고 소리치며 이구동성으로 “덕돌이 좋다.” “학습이야 누가 덕돌을 따르니?” 하고 말하며 손으로 종이를 가리고 이름을 써 바쳤다. 해월이랑 은숙이랑 경산 선생을 도와 애들이 투표 결과를 흑판에 바를 정(正)자로 한 획 한 획 썼다. 결과는 불 보듯이 뻔했다. 성욱의 이름 아래에는 바를 정자 하나 밖에 없었지만 덕돌의 이름 아래에는 무려 열 개나 줄줄이 달려 있었다. 성욱은 콩알 눈으로 옆에 앉은 덕돌을 힐끔 가로보더니 머리를 책상에 파묻고 어깨를 들먹였다. 덕돌은 성욱을 측은한 눈길로 내려다보았다. 뒤이어 그는 벌떡 일어났다. “내 생각에는 성욱이 계속 학습위원을 하고 내가 옆에서 도와주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난 학습위원을 못하겠습니다.” 그러자 애들은 “우-” 하고 소리치는가 하면 어떤 애들은 “안 됩니다. 덕돌이 해야 합니다.”라고 소리치며 책상을 마구 손바닥으로 두드렸다. 경산 선생은 웃으며 덕돌을 내려다보았다. “덕돌을 정식으로 학습위원으로 임명합니다. 학습위원 덕돌은 우리 학급 학생들을 이끌어 학습성적을 제고하기 위해 노력하십시오.” 덕돌은 일어나서 전체 사생들 앞에서 우렁차게 대답했다. “저는 선생님과 동무들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잘 해보겠습니다.‘ 그 “취임연설”에 애들은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를 보냈다. 이튿날 덕돌은 전반 학급 학습 성적을 제고시키기 위한 처음 조치로 자리정돈을 할 자기 생각을 반장 장영웅과 홍위병 조장 최설복과 말하고 구체적으로 토론해 자리정돈계획을 세웠다. 그 계획에는 한 횡대 줄에 앉은 대여섯 동무들 중간에 공부를 괜찮게 하는 학생을 하나씩 앉히는 혁신적조치가 들어 있었다. 덕돌은 그 자리정돈계획을 손수 작성해 교무실에 가서 경산 선생에게 바쳤다. 경산 선생은 자리정돈계획을 받아 보고 덕돌이 기특해 대견하게 바라보았다. “이런 계획을 다 세웠단 말이냐?” (열대여섯 살 밖에 안 되는 초중 2학년 학생이 이런 엉뚱한 계획을 세워? 정말 큰일을 할 애들은 애 때부터 다른 거야.) 이튿날에 경산 선생은 덕돌의 방안대로 자리정돈을 했다. 그리하여 시간에 선생님이 가르쳤지만 공부를 따라가지 못하던 애들을 중간에 앉은 덕돌을 비롯한 “작은 선생”들이 자습할 때 보충으로 배워 주었기에 제때에 알고 넘어 갈수 있었다. 키가 훤칠한 성택은 힘도 세고 축구도 잘 찼지만 수학시간에 선생님이 잘 가르쳤는데도 따라 이해하지 못했다. 허나 “작은 선생” 덕돌이 옆에 앉아 제 시간에 보충해 배워 준 데다가 하학한 후에 교실에 남거나 일요일에 교실에 나와 배워줬기에 꽤나 공부를 잘했다. 그 후부터 성택은 젖은 누룽지랑 감자밥이랑 밥 곽에 싸다 덕돌에게 주면서 친해졌다. 성택은 정말 속으로 덕돌을 따랐다. 그는 항상 “덕돌아, 누가 너를 건드리면 내 가만 놔두지 않겠다. 나를 믿어라.”라고 했다. 허나 성욱은 덕돌의 위신이 올라가자 그의 옆에 앉기도 싫어했다. 지어 그는 경산 선생을 찾아가 다른 자리에 앉혀달라고 졸라 앞으로 세 번째 줄에 상선이랑 같이 앉았다. 그들 셋은 누가 가르쳐주는 “작은 선생”이 없다나니 다 똑같이 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이 토대 위에서 덕돌은 집에 돌아간 후 학습 열성을 불러일으키려고 마을 별로 학습소조를 내오고 조장들이 학습이 차한 애들의 공부를 책임지고 보습시키게 했다. 이런 조치는 정말 전반 학급 학생들의 학습 성적을 제고시키는데 유조했다. 허나 마을에서 덕돌과 한 소조에 든 성욱은 상선이랑 종호랑 애들을 동원해 학습소조 공부에 참가하지 말게 맛있는 감자누룽지랑 삶은 옥수수 이삭이랑 쥐어 주면서 꼬드겼다. 그 바람에 덕돌은 슬그머니 애를 먹었다. 마을의 활동소에서도 성욱은 소장인 덕돌을 외목에 내려고 종호랑 상선이랑 짜고 들어 걸으라면 서고 서라면 걸으면서 처처에서 청개구리들처럼 애를 먹였다. 어느 날 경산 선생은 덕돌을 교무실로 불러갔다. 난로 옆에 방순희가 경산 선생과 나란히 앉아 뭐라고 말하고 있었다. “덕돌아, 여기 와 앉아라.” 경산 선생은 수학시험지를 덕돌과 순희에게 주면서 “수학선생님은 일이 있어 외출하면서 학습위원들인 너희들한테 중요한 임무를 주더라. 이 시험지를 너희들 둘이 매겨라.”라고 말했다. 사실 경산 선생은 덕돌이 여학생들을 배워주지 못하는 형편에 따라 순희에게 부학습위원을 맡겨 학습이 차한 여학생들의 공부를 가르치게 했던 것이다. 뒤이어 그는 시험지를 놓고 매개 문제 모범답안을 알려주고 매기는 표준을 일일이 알려 주었다. 그날 저녁에 덕돌은 경산 선생이 말한 표준대로 시험지 점수를 매기었다. 일광의 시험지를 매기다가 응용문제 아래에 답을 쓰지 않은 것을 몇 점을 떼 내야 하겠는지 몰라 고개를 갸웃거리었다. 한참 모지름을 쓰다가 그는 경산 선생의 집에 가서 물어보려고 신을 신고 떠났다. 그런데 그가 경산 선생 네 집으로 갔을 때 전등불이 이미 꺼져 있었다. “이걸 어쩐다? 내일 시험지를 바치라고 했는데.” 생각하다 못해 덕돌은 “순희한테 물어볼까?” 하고 생각하고 순희네 집 쪽으로 발걸음을 떼었다. 그날따라 전기가 오지 않아 온 마을에 등불만 깜빡이었다. 허나 먼발치에서 등불이 깜빡이는 순희 네 집을 바라보며 걷다가 주춤 멈춰 섰다. (내 순희 네 집으로 갔다고 혹시 성욱이랑 놀려주지 않을까?) 그는 늙은 비술나무 아래 성욱이 네 집 쪽을 돌아보았다. 성욱이랑 종호랑 사랑채에서 한창 노느라고 여념이 없는 것 같았다. (에라, 시험지 때문에 가지. 뭐라니?) 덕돌은 시험지를 다 매기려는 일념으로 순희 네 집 문 앞으로 다가갔다. 안도에서 이사해온 순희 네는 3대가 한 집에서 사는 집이었다. 순희는 윗방에서 살고 오빠네 일가가 정지와 고방에서 살았다. 덕돌은 등불이 깜빡이는 윗방에 순희가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그쪽에 가서 “순희.” 하고 조용히 불렀다. “누구야?” “덕돌이야.” “밤에 어째?” “시험지를 매기다가 모를 게 있어 그래.” 집안에서 바스락거리더니 순희가 문을 열고 “들어오라.” 하고 말했다. 그런데 정지에서 순희보다 두살 이상인 여조카 월순이 두덜거렸다. “밤에 찾아와 뭘 해?” 순희는 방에 들어오는 덕돌에게 자기 옆자리를 내주면서 정지에 대고 핀잔을 주었다. “삐칠 게 뭐야? 남이 시험지 매기는 거 땜에 찾아왔는데.” “낮에 올게지. 밤에 오니 말하지.” 그때 옆에 앉아 있던 순희 엄마가 월순을 나무랐다. “월순이 그만하지 못하겠니? 남이 공부 땜에 그런다는데.” 덕돌은 영상한대로 모를 걸 물어보고 일어서려고 했다. 그러자 순희는 “덕돌아, 온바하고는 몇 가지 물어보자.”라고 했다. “뭘?” 덕돌은 멈칫 멈춰 선 채 등불아래 쳐다보는 순희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반문했다. “일광이랑 성적이 어떻데?” “수학성적이 괜찮다.” “그 애네 외삼촌이 우리 수학선생 이기춘 선생이란다.” “오, 수학을 잘하는 내력이겠다.” “장영웅의 성적은 어떠냐?” “98점이다.” “어째? 어디 틀렸더니?” “소수점을 하나 찍지 않아 한 문제 틀렸더라.” “설복은 몇 점이냐?” “78점 밖에 맞지 못했다.” “홍위병 조장이란 게 뭐야?” “성욱은?” “74점.” “이전 학습위원이라는 게 뭐야? 이전에 수학콩쿠르에서도 네 껄 보고 베껴서 100점을 맞았다더구나.” “…” “베껴 쓴 애나 보인 애나 다 한가지야.” “허허허.” 덕돌도 여자애들의 성적을 물었다. “은숙이랑 성적이 어떻데?” “잘했다. 95점이더라.” “월금이는?” “92점이다.” “잘 했구나.” 이때 정지에서 부스럭거리며 듣던 월선이가 소리 질렀다. “너네 계속이냐? 염치 있니? 남이 자야겠는데 밤중까지 뭐야?” 그러자 아재노라고 순희가 또 정지에 대고 욕했다. “계속 삐치겠니?” 순희가 손을 들어 정지를 손가락질 하다가 그만 등잔불을 툭 쳐서 꺼버렸다. 순희의 아버지가 성냥을 그어대자 순희 엄마와 순희가 등잔불을 다시 밝혔다. 허나 덕돌은 더 있을 재미없어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와 버렸다. 그런데 그 일이 말썽거리로 될 줄은 천만뜻밖이었다. 월순은 활동 참 부 참장이었는데 활동 때마다 덕돌과 의견이 맞지 않아 티격태격 했다. 어떻게 말하면 두살 지하인 덕돌이 지휘를 받는다는 것도 속에 내려가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주책없는 월순은 동네에 나가 덕돌이 순희를 좋아한다고 하면서 그 날 일을 가지고 소문을 펴놓았다. 그 바람에 성욱이랑 종호랑 상선이랑 월순의 말을 보태 덕돌이 순희에게 연애를 걸려고 밤에 집에까지 찾아갔고 덕돌이 “이담 커서 순희를 각시로 데려다 살겠다.”고 했다고까지 학교에서 소문을 퍼뜨렸다. 그러자 덕돌보다 한두 살씩 이상인 설복이랑 일광이랑 원래 공부를 잘하는 덕돌을 질투하던 터라 놀려대기 시작했다. “못된 송아지 뿔부터 난다더니? 우리 학급 학습위원이 연애한다면서?” 그러자 덕돌과 순희가 억울하게 당하기만 하고 머리를 들고 다닐 수 없었다. 월순은 지어 덕돌이네 집에까지 찾아와 한창 부모형제와 함께 밥을 먹는 덕돌을 찾아와 한바탕 행악질을 했다. “덕돌아, 조꼬만게. 이 담에 우리 순희를 각시로 데려다 살겠다고 했니?” “난 그런 적이 없다. 너도 그날 밤에 정지에서 들었겠지만 나와 순희는 시험지와 공부에 관계되는 말만 했지 않고 뭐니?” 덕돌의 말에 월순은 성을 발칵 냈다. “네 아직도 승인하지 않겠니? 네 친구 철주도 그렇게 말한 적이 있다는데도.” 덕돌은 벌떡 일어났다. “뭐라고? 네가 그날 밤 일을 소문냈기에 말이 보태져서 그렇게 됐다.” “조꼬만 새끼, 니 정말 못된 놈 새끼구나.” 그 말에 상순은 밥술을 놓고 월순을 손가락질 하며 훈계했다. “들어보니 네가 불을 저질러놓고 오히려 누구한테 와서 행악질이냐? 보기도 싫다. 썩 나가지 못하겠니?”  “어디 두고 보자!” 월순은 덕돌에게 주먹을 쳐들어 보이더니 문을 쾅 닫고 나가버렸다. 한편 순희는 집에서 월선을 욕했다. “남의 일에 삐치겠니? 네 소문 놓는 바람에 내하고 덕돌이 머리를 들고 학교에 다니지 못하게 됐다. 네 책임져라.”        그러나 엎질러진 물을 퍼 담을 수는 없게 돼버렸다.       나중에 말이 눈덩이처럼 굴면서 점점 더 커져 덕돌과 순희가 밤중에 집에서 연애하다가 월순에게 들키었다고 소문이 퍼졌다. 그 말이 끝내는 경산 선생의 귀에 들어갔다. 경산선생은 순희와 덕돌을 또 교무실에 조용히 불러 전후시말을 죽 들은 후 이후에 주의하라고 주의를 주었다.       경산선생이 학급에 덕돌과 순희는 근본 연애한 적이 없었다고 명확히 지적하고 나서 엄포까지 놓았다. “이후에 누구든 다시 덕돌과 순희를 놀려주면 책임을 추궁할줄 아십시오."  그제야 부글부글 끓어오르던 콩물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덕돌의 어머니 명옥은 황급히 순희 엄마를 찾아가 빌었다. “어쩌겠소? 이집 순희 애들에게 몰리는데 미안하오. 우리 덕돌이 잘못했소.” 그런데 순희의 어머니는 뜻밖의 말을 해서 명옥도 놀랐다. “덕돌의 잘 못이 없소. 장차 애들의 일을 어떻게 아오? 황차 덕돌이 그날 밤에 순희를 찾아와 잘 못한 게 없소. 나와 순희 아버지도 이 칸에서 덕돌이 하고 순희 말하는 거 다 보았소. 걔들 연애한 일이 없소. 괜히 공부를 못하는 애들이 질투 나서 떠드는 거 가지고 근심하지 말고 가오.” 그 바람에 덕돌과 순희의 관계도 어색하게 됐다. 그들은 교실에서 딱 마주쳐도 머리를 숙인 채 서로 못 본체 하면서 지나쳐버렸다. 더욱이 애들 앞에서는 서로 마주 보고 말하기는커녕 마주 걷기조차 하지 못했다. 덕돌은 그 번 일을 생각만 해도 등 곬에 식은땀이 돋고 소름이 끼칠 지경이었다. 그는 한숨을 후 내쉬며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3. 묘지부근 혈안       토성 안팎의 실실이 늘어진 버드나무 가지들이 무더운 햇볕에 축 늘어져 이파리마저 달팽이처럼 오그라들 지경이었다. 토성 안의 늙은 비술나무는 벽돌 집 짓기에 들끓고 있는 사원들을 굽어보며 방불히 희죽이 웃음 짓는 것 같았다. 비술나무는 백여 년 살면서 이 마당에 빨간 벽돌집이 들어앉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상순은 조개덕 1대 사원들을 데리고 널찍한 토성 안 마당에 와서 벽돌로 대대 사무실과 위생소, 공장건물을 짓기 시작했다. 장차 대대 민영기업을 대대적으로 발전시켜야 한다고 내다보았다. 흥수와 종연은 새 벽돌사무실에 들 생각을 하자 어깨가 으쓱해 토성 안에 와 맴 돌아쳤다. 그들은 이번만은 상순이 “계급투쟁을 틀어쥐지” 않는다고 헐뜯어대지 않았다. 박영발은 윤희와 함께 위생소에서 침대를 들어 내오면서 빈정거렸다. “침대 다 마사져 이젠 못 쓰겠소. 새 걸로 바꿀까?” 윤희는 영발에게 눈을 곱게 흘기면서 해쭉거렸다. “누가 듣겠어요.” “들으면 뭐라오? 체면을 차려? 침대 밑에 사내를 두고 다른 사내한테 다리를 벌려대는 주제에.” 윤희는 침대를 활 놓고 가버렸다. 그 바람에 침대가 각이 나버렸다. 상순은 삽으로 건물 기초를 파다가 그들 둘을 흘금 훔쳐보며 콧방귀를 뀌었다. “원, 참, 꼴 보기도 더러워서. 흥!” 충국은 괭이로 기초를 꽝꽝 파면서 두덜거렸다. “이 토성안집은 우리 집에서 인섭 형님에게 져준 집인데 왜 허물어? 아무 때건 주인이 오면 어디 보자.” 상순은 저쪽에 서서 담배를 꼬나물고 뭐라고 떠들어대는 종연과 흥수를 돌아보며 중얼거렸다. “말조심하라고. 이 집의 주인은 바로 인민공사 생산대대야. 아무 소리나 했다간 고깔모자를 씌워서 투쟁하지 않는가 봐라.” 충국은 그래도 픽픽거렸다. “한뉘 혁명하더니 꼴좋다. 대대 서기도 하지 못하고 우리 같은 지주나 거느린 대장이나 하면서. 그래, 하긴 조선에서는 대대장보다 대장이 더 높고 세지. 허허허.” 충국이 비웃는 소리에 상순은 그저 빙긋이 웃기만 했다. “내 혁명을 한게 너 국민당처럼 벼슬이나 하자는게 아니야. 난 이 다음 북망산에 가도 조상들한테 할 말이 있어. " 그렇다. 상순은 저 천지꽃산 비탈밭이랑 소서구 상우지랑 장개골안과 계수동 숱한 밭이랑 일궜고 강물을 막아 멍지뫼산 앞에 산종논밭을 풀었다. 패랑산과 칼산에 과수원을 만들었고 조개덕에 벽돌공장을 세웠다. 이제 대대 사무실을 짓고 사원들의 집을 하나하나 지을 예산이다. "우리 공산당원들은 너 국민당원과 달라." 그렇다. 상순과 같은 공산당원은 자기 이해득실을 따지지 않고 고생은 앞장서 하고 향수 앞에서는 뒤로 물러선다. “그만하오. 내게 뭐 당과 학습을 시키는 판이오?” 장충국은 괭이질을 멈추고 허리를 펴더니 상순을 손가락질하면서 신경질을 썼다. “아무리 교육해도 나는 죽어도 지주 아들귀신이고 국민당 잔여세력 혼이니까. 헤이.” “잔말 말고 기초나 잘 파라. 난 논물을 보러 가야 해.” 상순은 삽을 기초구덩이에 세워놓고 훌쩍 뛰어나갔다. “내 무슨 지주 대장이오? 모르오. 저 종연이랑과 말하오.” 충국은 두덜거리면서 괭이질을 콱콱 했다. 종연과 흥수는 온 대대 이른바 "문제거리" 로간부들과 지주들을 몽땅 조개덕에 처박아 상순한테 떠맡겼다. 그리하여 충국도 소서구 토성 안에서 조개덕으로 이사해 왔다.  다리 부러진 노루 한 곬에 모인다고 진짜 이 시대 "문제거리분자들"이 몽땅 조개덕 1대에 모인 셈이었다. 흥수는 시름이 놓이지 않아 날마다 공지에 와서 그들을 감독했다. 상순이 논으로 나가려고 하자 종연이 막아섰다. “김 서기, 토론할 일이 있습니다.” “김 서기? 난 서기 아니오. 생산대 대장이지.” 종연은 상순의 볼 부은 소리에 희죽이 웃으며 다가섰다. “김 서기, 난 김 서기를 진짜 일을 하는 농촌 노서기라고 마음속으로 존중합니다. 흥수처럼 입방아만 찧는 간부는 딱 질색입니다.” 상순은 담배쌈지를 꺼내 담배를 말아 물더니 달라진 종연의 태도를 유심히 바라보면서 물었다. “무슨 일인지 빨리 말하오. 난 논물을 보러 가야겠소.” “김 대장이 딱 논물을 봐야 합니까?” 상순은 담배연기를 후 내뿜으며 나직이 “한족사원들은 아직 벼농사는 둘째고 논물도 잘 보지 못하네. 어서 말하오. 무슨 일이오?”하고 물었다. 종연은 다가오는 흥수를 건너다보며 입을 무겁게 뗐다. “저 박영발 서기는 정치입장이 견정하고 개조 표현이 좋다고 봅니다. 장차 제일 먼저 시내로 돌려보내는 것이 어떻습니까?” “영발을?” 상순은 저쪽에서 윤희와 희희닥거리는 영발을 건너다보다가 상을 찡그렸다. 그는 한창 무거운 기초 돌을 쇠줄그물에 담아 멜대로 메 나르는 이계삼과 허영주, 허백호를 가라키면서 언성을 높였다. “어째 저 노 간부들을 시내 당정 부문에 보내지 않고 박영발을 보내자고 그러오? 말도 안 되는 소릴 작작 하오.” “아이쿠!” 이때 저쪽에서 허백호가 물앉아 손을 쥐고 죽는 상을 했다. “어디 상하지 않았습니까?” 상순은 뛰어가며 물었다. 이계삼과 허영주도 멜대로 돌을 메 나르다가 내려놓고 허백호한테 다가갔다. 상순이가 보니 허백호가 상을 찡그리며 잡은 왼손에서 뻘건 선지피가 흐르고 있었다. 함지만큼 큰 돌을 움직이다가 그만 손이 찌워 터졌던 것이다. 상순은 무릎을 꺾고 앉더니 허백호의 피 흐르는 손가락에 묻은 돌먼지를 후후 불고 손으로 닦아준 후 자기 흰 바지가랭이를 찢어 싸매주려다가 말았다. “허 서기, 나에게 돈도 먹지 않는 조상들이 물려준 밀 방약이 있습니다. 써보겠습니까? 꼭 낫습니다.” “뭐기에?” “저쪽으로 가서 이 터진 손가락에 소변을 보십시오. 즉석에서 지혈이 되고 어혈이 풀립니다. 또 소염도 되고 진통도 됩니다.” “알았소. 또 오줌약이구먼.” 이렇게 돼 허백호는 상을 찡그리며 일어나 토성 밑으로 가서 왼 손의 상처에 대고 오줌을 누었다. 그는 손을 들어보더니 “허, 정말 그 밀 방약이 좋긴 좋구먼. 피가 뚝 멎었구먼.”라고 하더니 피와 오줌이 게발린 손을 바지에 쓱쓱 닦았다. 상순은 종연에게 다가갔다. “박영발이 위생소에서 해놓은 일이 뭣이오? 난 동의하지 않소. 저렇게 궂은 일, 무거운 일을 다 하는 허백호 서기랑 이계삼 서기랑 허영주 현장이랑 시내에 보낼 걸 제기하오.”라고 했다. “김 서기, 이건 대대혁명위원회 결정입니다. 박영발 서기를 시내로 보내겠습니다.” 종연이 고집을 쓰자 상순은 삽을 둘러메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논밭으로 떠나가 버렸다. 저쪽에서 상순에게 하는 종연의 말을 듣고 박영발은 득의양양해 윤희의 어깨까지 툭툭 치며 히히거렸다. 종연은 자기 안속이 따로 있었다. (박영발을 시내로 돌려보내고 윤희를 흥수에게 넘겨주면 두 사람에게 다 위신을 얻을 수 있어. 이거야 말로 꿩 먹고 알 먹고 둥지 틀어 불을 때는 격이 아니겠는가? 두 입당소개인에게 충성을 보여야 입당도 더 빨리 될 것이 아니겠는가? 또 상순과 토론하는 척 해야 상순의 미움을 덜 보지 않겠는가. 영발을 쫓아보내고 송선을 위생소에 넣고 윤희 대신 데리고 놀아야지.) 종연은 전날 밤에 위생소 주사실에 뛰어들었다가 흥수와 딱 마주친 후 윤희에게서 떨어지기로 마음먹었다. 황차 하늘에서 선녀가 내려온 듯이 윤희보다 얼마나 더 예쁜 무용수 송선이가 마을에 나타났으니 말이다. 송선은 요즘 종연의 관심을 받아 대대 맨발의사로 돼 날마다 대대 위생소에서 박영발과 윤희에게서 주사를 놓는 재간으로부터 청전기로 진맥하고 혈압을 재는 것까지 배우고 있었다. 대지를 무덥게 달구던 여름해가 서쪽 하늘의 구름들을 뻘겋게 지지며 불태우다가 서산으로 뉘엿뉘엿 넘어갔다. 송선이 토성 안 위생소에서 나와 조개덕으로 돌아갈 때다. 종연은 대대 사무실 공지에서 송선이 나오기를 혈안이 돼 기다리다가 사위를 둘러보면서 스적스적 먼발치에서 송선의 뒤꽁무니를 따라갔다. 송선은 뒤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리자 불길한 느낌을 받고 함흥 촌을 벗어나 함흥중학교 마당에 들어서자 선불 맞은 노루처럼 황급히 조개덕으로 반달음박질을 쳐갔다. 허나 부대에서 십여 킬로미터도 단숨에 뛰어가는 군사훈련을 거친 특종병출신의 종연을 어찌 떼버릴 수 있었겠는가? 그들의 거리는 각일각 더 가까워졌다. 조개덕과 몇 백미터 떨어진 한족묘지꺼리에 이르렀을 때다. 종연은 송선을 뒤따라 잡자  나직이 소리쳤다. "겁나 마오. 나요, 나.”  송선은 황급히 돌아서면서 물었다. “아니, 황주임이구먼. 무슨 일이 있습니까?” 종연은 달빛을 빌어 송선의 부풀어올랐다 내렸다하는 풍만한 가슴을 음충한 눈길로 게걸스레 쓸어보았다. “몰라서 묻소? 내 아니면 대대 맨발의사와 선전대 대장을 할 수 있었소?” “고마워요.” “사람이 신세를 졌으면 갚을 줄 알아야지.” 종연은 손을 내밀어 송선의 어깨를 감싸안으려고 했다. 송선은 무용수의 특유한 날렵함으로 허리를 살짝 굽혀 탈면서 종연의 겨드랑이 밑으로 머리를 빠져나갔다. “아니, 어째 내 말을 고분고분 듣지 않겠소?” “황주임을 이렇게 보지 않았는데 왜 이래요?” 달빛에 색마의 불길이 비치는 종연의 우멍눈이 무섭게 드러났다. “난 선녀 같은 송선 동무에게 홀딱 반했단 말이오. 내 책임지고 농사일을 시키지 않고 위생소에 들여앉힐 테니까. 내 말을 고분고분 듣소.” 종연은 다시 송선을 끌어안으려고 두 팔을 벌리며 덮쳐들었다. 송선은 뒤로 비칠비칠 물러서며 두 손을 들어 종연의 팔을 막았다. 딱! 어둠속 어디에선가 돌멩이가 날아왔다. “앗!” 비명소리와 함께 종연이 머리를 싸쥐고 핑그르르 돌아서다가 쿵 쓰러졌다. “어마나!”  송선은 풀이 한 키씩이나 들어선 한족묘지를 둘러보았다. “어쩌나!” 송선은 두 손으로 대가리를 싸아나고 땔땔 구으는 종연을 내리보다가 다리야 나를 살리라고 주먹을 쥐고 묘지꺼리 풀밭에서 뛰쳐나갔다. 그녀는 종주먹을 쥐고  선불 맞은 사슴처럼 조개덕 쪽으로 달아났다. 뒤에서 종연의 돼지 멱따는 비명소리가 처절히 들리었다. 한참 후 풀숲 속에서 한 검은 그림자가 허리를 구부정하고 쓰러져 신음소리를 내는 종연한테로 슬금슬금 다가왔다. 그 그림자는 발길로 종연의 면상이며 배며 가슴이며 마구 꽝꽝 걷어찼다.        “앗! 악, 아이고!”       종연은  비명을 칠 뿐 아무런 반항도 하지 못했다.       검은 그림자는 발로 종연의 가슴이며 아랫배며 마구 차고 짓밟아놓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구름도 드라마 한 장면 같은 참경을 보기 무시무시해 먹장구름 속으로 얼굴을 숨겼다. 이튿날, 흥수가 우사 회의실 마당에서 사원대회를 연후 조개턱을 쳐들고 야단법석하며 고아 쳤다. “여러분, 우리 마을에 큰 형사사건이 생겼습니다. 어떤 놈이 황주임을 때려 정신을 잃게 만들었습니다. 이는 우리 대대 계급투쟁의 새로운 동향입니다. 계급의 적들은 혁명위원회 주임과 우리 공산당원들을 눈에 든 가시처럼 여기면서 처처에서 복수의 칼을 시퍼렇게 갈고 있었습니다.” 여기저기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대체 어디서 얻어맞았소?” 병진이 나서서 물었다. “남의 말 다 듣고 떠드오.” 흥수는 건 가래를 떼더니 병진을 힐끔 곁눈질해보고 뒷말을 이었다. “어제 오후까지 펀펀하던 황주임이 해진 뒤라고 생각되는데. 저기 함흥중학교 동남쪽 조개네 한족묘지꺼리에서 맞아 쓰러졌단 말이오.” “와-” “어째 하필 그런 으쓱한 데 가서 얻어맞았다오?” 병진이 제일 떠들어댔다. 이때 흥수가 뒤짐을 짚고 치보 주임 틀을 차리면서 사원들을 둘러보며 목청을 돋우어 말했다. “이제부터 대 별로 매개 사원들은 어제 저녁에 뭘 했는가를 교대하며 수상한 자가 있으면 적발하오.” 그 말에 제일 가슴 찔리는 데가 있는 사람은 송선이었다. 허나 그녀는 어제 저녁에 있었던 일을 입 밖에 낼 수 없었다. 그녀가 머리를 숙일 때었다. 흥수가 또 말했다. “누구나 모두 어제 오후에 입었던 옷을 입고 다시 이 마당에 모이오.” 모두 집으로 돌아갔다. 상순은 이계삼과 허영주 그리고 허백호를 찾아가 의논했다. “혹시 충국이 어제 볼 부은 소리를 하더니 그 놈 새끼 한 짓이 아니겠습니까?” “무슨 소리요?” 이계삼은 눈을 치켜뜨며 물었다. “어제 충국은 토성 안 집은 자기 아버지가 양형님인 김인섭에게 지어준 집이라면서 주인이 조선에 간 후 빈틈을 타서 허물면 되는가? 언제든지 주인을 되돌려줘야 한다는 식으로 두덜거리더구먼요.” “음-” 이계삼이 머리를 끄덕였다. 옆에 서있던 허영주는 한숨을 후- 내쉬었다. 허나 허백호는 “그 놈 새끼 얻어맞아도 싸오.”라고 하면서 시원해 했다. 사원들은 하나 둘 어제 입었던 옷을 입고 우사 마당에 돌아왔다. 과연 흥수의 그 수사방법이 괜찮았다. 그는 어제 저녁에 묘지꺼리에서 종연을 때려 피터지게 한 자의 팔소매나 바지에 꼭 종연의 피가 묻어있으리라고 믿었다. 한편 진수해 파출소 허영호 소장을 비롯한 민경들도 마을에 들이닥쳤다. 그들은 흥수와 함께 사원들의 옷을 일일이 세심히 검사했다. 특히 지주 아들 장충국과 지괴호 등의 옷을 꼼꼼히 검사했다. 허나 피 묻은 옷을 입은 지주가 하나도 없었다. 특히 충국의 바지와 팔소매를 서너 번이나 번지면서 검사했지만 혈흔이 하나도 없었다. “어제 확실히 이 옷을 입었어?” 그러자 장충국은 상순을 흘깃 곁눈질하며 날카로운 흥수의 우멍한 눈을 피했다. "어째 나를 의심하오? 어제 이 옷을 입었소. 저 상순대장과 물어보오.”  상순이 충국의 아래위를 훑어보더니 흥수에게 머리를 끄덕였다. 흥수는 도리머리를 흔들더니 민경들과 함께 이젠 우파분자 정규상, 허백호, 일제통역 리달송, 하향간부 이계삼과 허영주 차례로 검사하기 시작했다. 흥수가 순식간에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민경 옆에 서 있던 상순의 바지를 가만히 보더니 외까풀 눈을 데굴거리며 고함쳤다. “저 피!” 민경들과 숱한 사람들의 눈이 동시에 상순의 바지에 집중됐다. 상순은 “허허허.” 하고 웃더니      “어째 나를 의심하오?”라고 하며 찢어지고 피가 발린 바지와 흥수를 번갈아보았다. 저쪽에 갔던 허영호와 허백호도 이쪽으로 다가왔다. “아니, 저 피!” 이번에 흥수는 허백호의 팔소매와 바지에 묻은 피를 가리켰다. 허영호와 민경들의 눈이 허백호와 상순에게 집중됐다. 상순은 허영호를 보고 어제 허백호 서기 상처를 처치해준 일을 얘기했다.  “허 소장, 사실 이건 어제 허 서기가 돌에 손이 찌워 흐른 피오!” 허영호 소장은 머리를 끄덕이고나서 오류분자들한테로 다가갔다. 흥수는 상순과 허백호 서기를 의심하는 것이 분명했다. 허나 허영호 소장은 사촌형 허백호를 놔두고 충국 같은 악질지주들을 의심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주들이 어제 여기 대대 사무실을 짓는 공지에 와서 일하던 옷을 아무리 검사해도 피 흔적이 하나도 없었다. 그러자 의심에 찬 시선은 다시 상순과 허백호 서기한테 집중됐다. 흥수는 외까풀 눈으로 쏘아보며 상순을 쏘아보며 다가섰다. “피는 증겁네.  당신들 종연 주임을 상해한 혐의를 벗지 못 하오. 로실하게 말하라니께. 반란 파 두목 종연이가 대대 혁명위원회 주임으로 올라간 데 앙심을 먹었지?” 상순은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허, 이 사람이 생사람을 잡는다. 난 확실히 종연이 노간부들을 못 살게 구는 게 눈꼴사납소. 허나 해칠 생각은 전혀 없었소. 모 주석도 ‘말로 싸워야지. 주먹다짐을 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소?” “뻔뻔스럽긴! 아직도 떼를 쓰긴!” 흥수는 우먹한 외까풀 눈을 무섭게 부라리며 상순한테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다가섰다. “그만 두오!” 그때 허백호 서기가 앞에 썩 나섰다. “김 대장은 아무런 죄도 없소. 내 종연을 때려눕혔다. 통쾌하게 돌로 대가릴 까고 발로 밟아놓았다. 봐라! 이 팔소매와 바지의 피를!” 모두들 시선이 허백호에게 집중됐다. “아니, 허 서기가 저럴 수가?” “글쎄 말이오. 사람은 겉을 봐서 모른다니까.” 허영호 소장은 실망어린 눈길로 사촌형을 바라보았다. 상순은 허백호 서기한테 다가가며 두 손을 펼쳐보였다. “아니오. 허 서기는 절대 그럴 수 없소.” 허나 허백호는 자기 소행을 시인했다. “김 대장, 확실히 내가 돌로 까부셨소. 난 이미 묘지꺼리 백양나무에 목을 맸던 사람이오. 어찌 똥이나 퍼서 밭에 내며 노동개조를 하면서 살겠소. 죽기만 못하오. 난 죽기 전에 종연과 흥수를 죽여 버리고 싶었소. 종연이가 묘지꺼리로 가자 뒤따라가 돌멩이를 뿌려 대가리를 깠소…” 뒤이어 사건 경과를 죽 얘기했다. “와-” 좌중에 숱한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평소에 말수가 적은 공사당위 서기 허백호, 그것도 파출소 소장의 사촌형이 대대 혁명위원회 주임을 해쳤다니?) 흥수는 외까풀눈을 가슴츠레 뜨고 허영호 소장의 눈치를 흘깃 곁눈질하며 허백호 앞에 다가갔다. 그는 어색한 함경도 말투로 물었다. “난 허 서기가 한 짓이라고 보지 않소. 그래, 종연이 어쨌다고 그렇게 돌로 쳤단 말이오?” 허백호는 가슴을 쭉 펴고 자랑삼아 속에 들어앉은 앙금을 쏟아냈다. “종연은 노 간부들을 반란해 대대혁명위원회 주임을 한 새끼요. 우리 노 간부들을 똥이나 쳐서 밭에 내게 하면서 노동개조를 악착스레 시킨 놈이오. 언제부터 내 그 놈 새끼를 때려죽이자고 별렀소.” 흥수는 반대파가 하나 줄어들 거 같아 속 시원했지만 파출소 소장의 형인지라 다른 때보다는 살살 다루려고 억지로 애썼다. “한가지 더 묻기요. 어떻게 종연이 조개덕 뒤에 있는 한족묘지꺼리로 갈 거 알고 따라가 해쳤소?” 허백호는 아무런 고려도 없이 말했다. “어제 대대 사무실을 짓는 공지에서 보니까. 종연 놈 새끼 뒤지개를 짚고 여기 왔다 갔다 하더구먼. 해질녘에 먼 발치에서 종연의 뒤를 밟아 묘지까지 쫓아갔댔어.” 송선은 허백호의 눈길이 자기에게 오자 종연이 자기 뒤를 쫓아와 덮친 사실을 말할까봐 머리를 폭 숙였다. 허나 다행히 허백호는 송선을 보고 희죽이 웃을 뿐 송선의 말은 입 밖에 내지도 않았다. “뭣들 해! 죄인을 파출소로 압송하지 않고!” 허영호 소장의 명령이 떨어지자 민경들은 허 소장의 눈치를 보면서도 허백호 서기의 손목에 쇠고랑을 철컥 채워 찌프에 등을 떠밀었다. 상순이가 보니 찌프에 압송돼가면서도 허백호는 죄책감이라고는 하나도 없이 머리를 쳐들고 격분해하고 있었다. 그는 머리를 들고  고함쳤다. "종연 새끼 숨통을 끊어주지 못한 게 한이다!”  허영호가 찌프에 오르려고 하자 상순이 팔소매를 잡아 끌어당겼다. “좀 보기요.” 허영호 소장은 상순의 엄숙한 세 귀 눈을 보며 차문 고리를 스르르 놓더니 운전수에게  먼저 가라고 당부했다. 부르릉 부르릉. 찌프가 먼지를 새뽀얗게 일구며 마을을 벗어났다. 허영호 소장은 상순을 따라 토성안 늙은 비술나무 쪽으로 스적스적 걸어갔다. 상순은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고  물었다. “허소장, 그래 종연인 어떤 정황이오?” 허영호 소장은 옛 상전을 미더운 눈매로 보면서 대답했다. “이마가 돌에 맞아 터졌고 갈비뼈도 밟혀 부려져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허나 며칠 치료하면 괜찮다고 합디다.” 상순은 “다행이군.”라고 하며 한숨을 후 내쉬더니 조용히 말을 꺼냈다. “아무리 봐도 허백호 서기가 그런 무모한 일을 했다고 믿어지지 않소. 충국이랑 지주들을 다시 잘 조사하는게 어떻소?” 허영호 소장의 어두운 얼굴에 고통스러운 그림자가 스쳐지나갔다. 그는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었다. “무슨 단서라도 쥔 게 있습니까? 김국장님?”  “또, 또. 국장은 무슨 국장이야? 김 대장이라고 편히 부르게나.” 상순은 허영호 소장의 입버릇을 핀잔주고 나서 뒤 말을 이었다. “아무리 봐도 충국이랑 지주들이 수상하단 말이오. 어제 충국은 한참이나 우리 공산당과 대대 간부들을 헐뜯었소. 불만이 이만 저만이 아니더구먼. 우린 계급의 적들이 날마다 우리 당과 정부를 보복하려고 칼을 시퍼렇게 간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되오.” “해가 서산에서 뜨지 않겠소?” 이때 언제 다가왔는지 흥수가 뒤에서 오며 끼어들었다. “김 대장이 어쩌다가 계급투쟁을 다 말하오? 항상 생산만 틀어쥐더니. 흥. 우리 대대에는 아직도 계급투쟁이 존재한단 말인기오.” 상순은 세 귀 눈으로 흥수의 외까풀 눈을 엄히 쏘아보았다. “내 언제 계급투쟁을 잊은 적이 있소? 모 주석께서는 ‘혁명을 틀어쥐고 생산을 촉진하라.’고 지시하셨지 언제 혁명만 틀어쥐고 생산을 틀어쥐지 말라고 했소? 혁명을 제대로 인식하란 말이오. 입방아만 찧으면서 계급투쟁만 하는게 혁명이 아니오. 생산도 새 마을 건설도 모두 혁명이란 말이오.” 리론 수준이 차한 흥수는 기암이나 썼지 상순의 전면적인 이론에 답변할 여지가 없었다. 그는 그저 외까풀 눈을 부라리며 끙끙거릴 뿐이었다. “잘 왔소. 이 치보, 우리 허 소장이랑 함께  지주들의 집을 한번 돌아가면서 들추는 게 어떻소?” 상순이 어색한 장면을 깨면서 건의했다. “좋다니께.” 리흥수는 상순과 허영호 소장과 함께 지주와 부농들의 집을 몽땅 수색할 행동방안을 짰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면서 패용천산과 태평 벌에 두툼한 어둠의 장막이 서서히 내리 드리웠다. 마을은 자정이 가까워오자 얼굴에 주먹이 날아들어도 보이지 않을 지경으로 어둠 속에 짓눌렸다. 허영호 소장과 이흥수 치보 주임, 상순은 꼴꼴한 세 개 소조 민병들을 거느리고 조개덕에 집중된 전 대대 지주와 부농들의 집을 동시에 수색했다. 상순은 민병들을 데리고 둔덕 아래 장충국이네 집을 들이닥쳐 수색했다. 장학산과 아내는 이미 죽고 충국은  홀로 대충 살고 있었다. “문 열엇!” “누구요?” “민병이다!” 안에서 버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충국이 두덜거리며 전등불이 켜졌다. 드디어 문이 삐꺽 열렸다. 불시에 뛰어든 민병들은 충국을 한쪽에 밀어버리고 집 구석구석을 뒤졌다. 민병들은 궤짝이며 쌀독이며 지어 장독까지 뒤져도 아무것도 뒤져 내지 못했다. 희미한 전등불아래 충국은 민병들을 쓸어보다가 상순을 흘겨보며 두덜거렸다. “우리 집에 뭐가 있다고 그래? 밤중에 자지 못하게.” 그때 상순은 집안을 두리번거리다가 북쪽구들에 뛰어올라가 이불을 쥐어 훌 들었다. 요대기 밑으로 시퍼런 칼끝이 삐죽이 드러났다. “이게 뭐냐?!” 상순은 요대기를 훌 들었다. 그 밑에 시퍼런 검과 비수가 드러났다. 상순은 전등불빛에 번쩍이는 시퍼런 검과 비수를 쥐어 충국의 코앞에 대고 흔들어 보였다. “이놈, 이게 뭐냐? 삼도만 토비질을 할 땐 이불 밑에 권총을 숨기더니 이번엔 시퍼런 칼을 숨겼구나. 우리 공산당과 정부를 보복하려고 시퍼런 칼을 갈고 있었구나.” 상순은 비수를 충국의 목에 바투 들이댔다. “탄백해. 시퍼런 검과 비수를 갖춰두고 보복하려고 했지? 네놈이 황 주임을 돌로 깠지? 로실히 탄백해라!” “형님! 아니, 김 대장!” 충국은 머리를 번쩍 쳐들고 고래고래 고함쳤다. “왜 나를 억울하게 구오? 난 어제 저녁에 근본 그리로 간적이 없었소.” “이 놈아, 황주임 머리를 깐 돌멩이엔 지문이 남아 있다! 로실히 탄백하지 못할까?! 위국은 어디로 갔어?!” “야, 억울하다! 누가 한 짓을 내게 들씌우는가?!” 상순은 “뭘 하는가? 이 놈을 끌어가라!” 하고 명령했다. 민병들은 장충국을 바 줄로 꿍꿍 뒤 결박 지어 함흥 대대 우사에 있는 회의실로 끌어갔다. 회의실에는 다른 소조의 민병들이 속속 돌아왔다. 허영호 소장이 거느린 민병소조에서는 한국 특무 용천의 아들 김경주의 집을 수색했다. “김경주와 그 놈의 새끼 아들애 토함산이 보이지 않소.” 그 말에 충국은 피씩 웃었다. “어디로 갔어? 말해!” 허영호 소장이 따지자 충국은 “그래, 미련이도 없습디까? 토함산이 정말 없습디까?” 하고 물었다. “미련은 있더라.” 충국은 한숨을 후 내쉬었다. “애를 데리고 어디로 갔단 말인가?” “이 놈, 시치미를 딸 작정이냐?” 상순은 계급투쟁의 안광으로 위국과 경주가 잃어진 일을 한데 연계시켜 경각성을 높이고 있었다. “난 모르오. 알면 허 소장에게 미련이 있던가고 물어보았겠소?” 흥수가 이끈 민병소조도 회의실에 돌아왔다. “그 조덕림이랑 무슨 눈치를 차렸는지 아무것도 들춰내지 못했소.” 허영호 소장은 상순과 흥수와 금후 계급투쟁에 대해 의논한 후 찌프를 타고 파출소로 돌아갔다. 민병들은 회의실에 장충국을 가둬놓고 윤번으로 보초를 섰다. 이튿날 저녁부터 장충국과 조덕림, 지괴호 등에게 고깔모자를 씌워 성세 호대한 투쟁대회를 열었다. “계급투쟁을 절대 잊지 말자!” 상순이 일어나서 주먹을 쥐고 휘두르며 구호를 목청껏 불렀다. 사원들은 상순을 따라 구호를 목이 터지게 불렀다. “계급투쟁을 절대 잊지 말자!” “잊지 말자!” “반혁명분자, 지주와 부농, 일제 주구들을 타도하자!” “타도하자!” 커다란 쇠 물통에 충국을 비롯한 지주들을 높이 올려 세워 놓고 두 손을 추켜들게 하고 몇 시간 동안 연속 투쟁했다. 허나 지주들은 손을 쳐든 채 한사코 “종연을 돌멩이로 깐 일이 없다.”고 딱 잡아뗐다. 충국은 꾀 망둥이어서 두 손을 쳐들고 오래 서 있기 힘드니 한 미터 높이도 더 되는 쇠 물통 위에서 거꾸로 떨어지군 했다. 민병들이 다시 쇠물통을 세워놓고 그를 들어 올려놓는 사이라도 팔을 쉬우려는 수작이었다. 홍위병완장을 낀 민병들에게 얻어맞아도 한 10분 서 있고는 또 쇠물통 위에서 굴러 떨어지군 했다. 밤이 깊어도 투쟁대회는 백열화돼갔다. 뭇별도 깜박이며 우사 회의실을 내려다보고 휘여든 반달도 겁을 집어 먹은듯이 바르르 떨다가 황급히 구름 속으로 숨어버렸다.                                     4.경쟁     온 하루 구름이 뒤덮여 흐리터분하던 하늘이 조금 맑아지는 것 같더니 해가 어슬어슬 져가고 있었다. 허나 덕돌은 함흥중학교 마당에 홀로 가서 남몰래 철봉대에 매달려 턱 걸기도 해보고 닫다가도 멀리 뛰기도 연습했다. 그는 당장 고중에 올라가야 했다. 학습 성적은 근심도 하지 않았다. 허나 료녕성 철령사범학교에서 대학입시에서 백지 시험지를 낸 장철생이란 “백지영웅”이 나온 후부터 학교에서는 학습을 틀어쥐지 않고 빈농의 재교육을 받는답시고 농촌에 나가 농사 일만 했다. 학생들이 고중에 입학하려고 해도 시험성적을 우선 보는 것이 아니라 이른바 사상품성을 우선 고려해 학생들이 먼저 추천하고 대대 혁명위원회에서 동의해야 하며 학교 빈농 대표 흥수와 학교 당지부와 혁명위원회에서 최후로 결정했다. 허나 성욱이랑 질투해서 어찌나 덕돌이 방순희와 연애를 걸었다고 헐뜯었던지 덕돌의 위신은 납작하게 돼버렸던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덕돌이 공부를 잘한 것도 “독서벼슬론”에 물이 든, 이른바 사상품성이 좋지 못한 죄로 돼 덕돌의 뒷다리를 물고 늘어졌다. 셈이 들지 못한 덕돌은 시대를 잘못 만난 것을 모르고 생각하면 할수록 성욱이 괘씸해났다. (개새끼, 아무리 아버지가 친척이기에 용서하라고 했으나 정말 용서할 수 없어.) 이때 송철과 철주가 다가왔다. “야, 덕돌아, 아무리 연습해도 쓸데 있니? 성욱이 새끼 너를 헐뜯어서 어떻게 고중으로 가니?” “글쎄 말이다. 내 고중에 가지 못하는 날엔 성욱을 가만 놔두지 않겠다.” 철주가 뒤에서 쐐기를 박았다. “야, 우리 성욱을 언제 또 때려놓을까?” 허나 덕돌이 머리를 가로 흔들었다. “안 돼. 그랬다가 전번에도 아버지한테 혼났다. 괜히 친척집 9촌 조카를 때렸다가 말썽을 일으켜 고중에도 가지 못하겠다.” 철주는 철봉대에 디룽디룽 매달려 흔들거리면서 빈정거렸다. “그 새끼, 연애하지 않은 거 연애했다고 했겠니?”   “후-” 덕돌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안 돼. 내 한주먹이면 성욱이랑 콩가루로 만들 수 있다. 허나 고중에 간 다음에 보자.” 송철도 “옳다.” 라고 하며 쌍봉 대에서 풀쩍 뛰어내리더니 “고중에 올라간 담에 손을 써도 늦진 않아.”하고 동을 달았다. 덕돌은 마을로 돌아오다가 피뜩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철주야, 너 어째 내 커서 순희와 잔치해 살겠다고 했다고 물어먹었니?” 바빠 맞은 철주는 “난 근본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 누가 그러더니?” 하고 변명했다. “성욱 새끼, 경산 선생과 그렇게 말하는 바람에 얼마나 욕을 먹었는지 아니? 우리 아버지는 못된 송아지 엉덩이에 뿔부터 난다면서 집에서 쫓아내기까지 했다.” 덕돌의 말에 송철은 손사래치면서 말렸다. “됐다, 됐어. 우리끼리 싸우면 괜히 성욱이랑 좋아하겠다.” 덕돌도 비상시기에 친구끼리 싸우지 말아야 하겠다고 생각하고 그만두었다. 상순은 덕돌이 공부는 잘했는데 순희와의 일로 고중에 올라가지 못할까봐 함흥중학교 장동원 서기 집을 찾아갔다. 장동원 서기는 원래 진수해중학교 화학교원이었다. 그는 당시 쏘련과의 전쟁과 재해에 대처할 준비를 잘하라는 최고지시에 따라 화학품으로 수류탄을 만들다가 그만 화학품폭파사고로 오른손 엄지손가락을 잃고 말았다. 당의 호소에 적극적으로 호응한데서 그는 화선입당했고 함흥중학교 당지부 서기로 내려오게 됐다. 상순이 찾아가자 장동원은 반갑게 맞이해 위방에 모셨다. “춘자 아버지 어떻게 돼 왔습니까?” 상순은 자리를 정하고 앉자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우리 덕돌을 고중에 붙여주십시오. 부탁드립시다.” “예. 알았습니다. 덕돌은 총명한 아이어서 장차 꼭 큰일을 할 학생입니다. 지금 시대를 잘 못 만나 고생합니다. 공부를 잘하는 덕돌 같은 애들을 무슨 류소기 ‘독서벼슬론’ 나쁜 사상에 물젖었다고 하는데 그건 잘 못입니다.” “감사합니다. 우리 덕돌이 소롱소롱 해 성욱이랑 싸우고 여자애들과도 말썽을 일으킨 거 같은데 많이 교육해주십시오.” 상순이 머리를 숙이며 하는 말에 장동원은 미안해 솔직히 말했다. “시대가 발전하자면 장차 덕돌이 같이 공부를 잘 하는 학생들에게 의거해야 합니다. 농사일을 잘하고 힘이나 세고 일이나 잘하고 남을 헐뜯는 애들에게 의거하면 맨 날 계급투쟁만 해야 합니다. 지식에 의거하지 않고 정치투쟁만 해서야 어찌 사회가 발전하겠습니까.” 장동원은 너무 장황히 말한 것 같아 화제를 되돌려왔다. “덕돌은 온 학교에서도 손꼽히게 공부를 잘하는 학생입니다. 체육까지 몽땅 우수를 맞은 학생은 그 학급에서 덕돌 밖에 없습니다. 그런 장래성이 있는 학생을 고중에 붙이지 않고서야 우리 함흥중학교가 장차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근심하지 말고 돌아가 덕돌을 보고 다신 말썽을 일으키지 말게 잘 타일러 주십시오.” 상순은 “예, 고맙습니다. 그럼 장 서기를 믿고 시름 놓고 집으로 가겠습니다.”라고 하며 일어나 떠나갔다. 정지에서 장동원의 아들 장영웅이 아버지와 덕돌의 아버지가 주고받는 말을 다 들었던 것이다. 장동원은 영웅을 불러 타일렀다. “넌 다른 애들이 덕돌을 놀려주면 말려라. 덕돌은 창창한 전도 있다. 네가 친구로 보낼만한 애다. 넌 덕돌에게 추천 투표를 하게 애들을 하나하나 동원해라.” 아버지 부탁을 들은 동원은 항상 광철을 데리고 덕돌의 집에 찾아와 함께 놀면서 애들을 하나하나 낚을 토론을 했다. 상순은 오촌 조카 철봉과 성환 그리고 담임 경산 선생까지 찾아다니면서 덕돌의 고중입학을 주문했다. 철봉은 덕돌을 참된 사람을 만들려고 자기 집에 데리고 가서 조용히 타일렀다. “얘, 넌 어려서부터 공부를 잘하고 옛말도 잘하고 아동단 단장으로부터 활동소 소장까지 하면서 정치공작도 잘했지 않았고 뭐야? 우리 가문에서는 너에게 희망을 건다. 이제부터 쓸데없이 애들과 싸우며 말썽을 일으키지 말고 나한테 다니면서 글짓기를 배워 장차 기자나 작가나 되면 어떠냐?” 덕돌은 6촌 형님의 진심어린 말이 마음에 와 닿아 “양, 형님의 말대로 하겠소.”라고 진심으로 대답했다. 철봉은 궤짝에서 자기가 애지중지하던 누렇게 색 바래진 책들을 꺼내 주면서 타일렀다. “쓸데없이 말썽을 일으키지 말고 이런 책이나 읽어라. 지금 시대에 지식이 쓸데없다고 하지만 장차 지식이 있는 애들이 사회에 쓰일 거야. 난 ‘문화대혁명’이 터지는 바람에 때를 놓쳐 대학공부를 하지 못했다. 네나 이 책을 읽고 장차 큰 문인이 돼라.” “양.” 덕돌은 형님의 말씀에 가슴이 뭉클해 나고 희망으로 한 가슴이 벅차올랐다. 철봉은 시나 극, 소품도 꽤나 잘 썼다. 덕돌이 머리를 숙여 철봉 형님이 준 책을 보니 “문학창작의 길”, “임해설원”, “홍루몽”과 같은 두툼한 책이었다. “홍루몽, 조설근? 허허허. 그러지 않아도 읽을 책이 없어 헤맸는데 실컷 보겠소.” 그는 보풀이 진 누런 두툼한 책을 받아 쥐자 읽고 싶은 충동부터 생겼다. 그때 철봉의 아들애 일국과 성국 그리고 성빈은 아버지가  책을 삼촌을 준다고 아까워했다. 덕돌은 자기보다 일여덟 살 밖에 지하가 아닌 일국이랑 성국이랑 조카들의 머리를 매만지면서 “얘들아, 삼촌이 본 후 가져다 줄 게.”라고 했다. 철봉은 길쭉한 얼굴에 희죽이 웃음 지었다. “쾐찮다. 가져다 봐라. 열 살도 안 된 얘들이 언제 그 책을 알고 본다고 그러니?” 아주머니도 상냥하게 웃으면서 “괜찮소. 생원이 가져다 보고 큰 사람이 되오.”라고 하며 가지고 가라고 손짓했다. 덕돌은 “그래도 이담 얘들이 보게 다 본 후 가져오겠소.”라고 다짐했다. 그제야 조카들은 해시시 웃었다. 떠나갈 때 철봉은 덕돌의 손까지 잡고 재삼 타일렀다. “그 책을 너만 보고 남에게 보이지 말라. 자칫하면 황색소설을 본다고 또 말을 듣겠다.” “양, 알았소.” “고중에 가는 관건적인 대목에 절대 말썽을 일으키지 말라. 영웅이랑 광철이랑 하나하나 무슨 수를 쓰더라도 친해라. 그래야 너를 고중에 추천하는 애들이 많아 질 게 아니냐? “네만 잘하면 경산 선생이랑 성환이랑 우리도 학교에서 네 고중에 가도록 힘을 써줄게.” 덕돌은 책을 안고 떠나가면서 “형님, 형님 말대로 잘 해보겠소.”라고 했다. 덕돌은 “임해설원”을 읽으면 읽을수록 재미나서 밤중까지 탐독하였다. 그는 책을 보다가 곤해 바깥에 나와 두 팔을 벌리고 뒤지개를 지으면서 휘영청 밝은 달을 쳐다보았다. 여름밤의 무더운 밤공기를 한껏 들이마시다가 피뜩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순희랑 은숙이랑 내게 투표하게 편지나 써볼까?) 허나 인차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괜히 또 연애를 한다고 말을 들으면 어쩐다?” 그는 소설책이나 더 보려고 집으로 들어오다가 또 생각을 달리했다. “혹시 필적을 속이면 내 쓴 거 아무도 모르지 않을까?” 덕돌은 무릎을 탁 쳤다. “그래, 익명신을 쓰자.” 그는 제 딴에는 아주 묘하게 필체를 바꿔 익명신을 쓰기 시작했다. 고의로 글씨도 필획을 평소처럼 죽죽 곧게 긋지 않고 비뚤비뚤하게 써내려갔다. 내리 금은 고의적으로 뱀처럼 구불구불하면서도 윗 끝을 실하게 오려놓았다. 은숙아, 내 누구라는 거 묻지 마라. 내 고중입학 도와 투표해 달라. 옛날 내가 배고플 때 감자누룽지를 준 것처럼 말이야. 찬란한 미래를 향해 어깨 겯고 한걸음 한걸음 나가자. 넌 영원히 내 누룽지야. 덕돌은 또 다른 필기장 한 장을 쭉 찢어낸 후 또 다르게 써 내려갔다. 순희야, 우리 둘 다 공부를 잘하는데 함께 고중에 가고 대학에 가자. 나 고중 입학을 도와 달라. 네가 날 돕지 않으면 누가 돕겠니? 여자애들을 동원해 나에게 투표하게 해 달라. 하늘이 굽어 지켜볼 거야. 편지라 할까? 쪽지라 할까? 덕돌은 다 쓰자 접어서 책가방에 넣었다. “옳지. 내일 학교에서 진수해에 영화 보러 간다지? 그때 우전국에 가서 부치자.” 이튿날 덕돌은 진짜 영화 보러 가는 김에 우전 국에 들리어 자기를 아는 애들이 들어 올까봐 흘금흘금 살피다가 편지봉투와 우표를 샀다. 그가 편지에 은숙과 순희 집 주소를 거의 쓸 때다. 갑자기 우전국 문 안으로 상선과 종호가 쑥 들어왔다. (젠장!) 덕돌은 편지 주소를 제꺽 써서 책가방에 넣었다. 상선이 다가오다가 덕돌을 이상한 눈길로 여겨보더니 나갔다. “어쩔까?” 덕돌은 우전국 안에서 왔다 갔다 하면서 상선이랑 떠나 갔는가고 바깥을 흘금흘금 내다보았다. 상선이랑 보이지 않자 그는 황급히 편지봉투를 번져 놓고 풀을 가져다 우표를 붙여 우체통에 슬쩍 걷어넣았다. 그때 우체국 안에 모를 시내 애들이 몇이 있을 뿐 알만한 애들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상선이랑 있은들 뭐라니? 내 교하 누나네 집에 편지를 부쳤다고 하면 다지. 황차 누가 쓴 건지 모르는데 겁날 게 없다. 연애편지도 아니고 투표해달라는 거뿐인데 뭐라니?” 덕돌은 제딴에는 귀신도 모르게 편지를 부쳤다고 위안하면서 우체국에서 나왔다. 그런데 저쪽에 상선이랑 성욱이랑 종호랑 모여 서서 뭐라고 이쪽을 손가락질을 하며 바라보는 것이었다. 그때 우체국에 있던 애들이, 시내 애들이 성욱이랑 쪽으로 달려가는 것이었다. “저 새끼들이, 오늘 시내 애들을 시켜 나를 칠 작정인가?” 덕돌은 편지를 가만히 부치려고 오늘만은 철주랑 동림이랑 송철이랑 함께 오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허나 그런 근심은 인차 사라졌다. 성욱이랑 뭐라고 말하며 그를 먼발치에서 바라볼뿐 털 하나 건드리지 않는 것이었다. 그제야 덕돌은 시름놓고 영화관으로 콧노래를 부르면서 갔다. 며칠 후 가을에 떨어지는 낙엽처럼 난데없는 편지가 순희 집에 날아와 떨어졌다. 다행히 편지는 주책머리 없는 월순이 먼저 받지 않고 순희가 먼저 받아 보았다. 순희는 콩콩 높뛰는 가슴을 억누르면서 겉봉을 뜯어보았다. 보지 않던 필체였다. 허나 그는 대뜸 덕돌이라는 것을 짐작했다. 공부는 특등 가게 잘하지만 고중을 가지 못할까봐 근심하면서 자기에게 투표해달라고 할 남자애는 덕돌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언제 일 밭에서 돌아왔는지 엄마가 불쑥 집안에 들어왔다. 정신을 잃고 편지를 거듭 읽고 또 읽는 순희를 보고 “누구한테서 온 거야?” 하고 물었다. “어마나!” “무슨 편지기에 그러니?” “편지는 무슨 편지. 삐치지 마세요.” 순희는 황급히 편지를 가지고 부엌에 내려가 성냥을 득 그어 불을 달아 아궁이에 걷어 넣고 벼 짚을 넣고 또 넣었다. 그녀는 다시는 또 덕돌에게서 연애편지를 받았다는지 연애했다는지 쓸데없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았고 애들에게 놀림을 받고 싶지 않았다. 더욱이 자기와 덕돌이 당장 있게 될 고중입학에 영향을 주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순희는 부지깽이로 아궁이에서 불타오르는 벼짚과 편지를 들여다보면서 쌔무룩이 웃으면서 나직이 혼자 말을 했다. “별 애를 다 보았다. 좋은 입을 뒀다 뭘 하고 이런 짓을 하니? 남 또 웃기자고. 나쁜 놈 새끼. 놔두는가 봐라.” 순희의 놀란 거동을 보고 엄마는 대개 짐작이 갔다. “너 남자애들과 작작 휩쓸려라. 자칫 전번처럼 덕돌과 연애한다고 동네방네 학교에까지 소문이 나면 큰일이다. 괜히 고중에 입학하지 못하겠다.” “됐습니다. 누가 듣고 무슨 일이 있는가 하겠습니다.” 그때 월순이 학교에서 돌아오는 바람에 그들 모녀간은 제꺽 입을 다물어버렸다. 순희는 이튿날 학교에 가서 덕돌을 보고서도 편지를 받은 일이 없는 것처럼 꾸며댔다. 그러자 덕돌은 혹시 자기 쓴 편지를 받지 못했는가고 추측이 들어갔다. 순희는 덕돌의 이상한 눈길이 자꾸 자기를 훔쳐보는 것을 보고 덕돌이 한 소행임을 육감적으로 느껴졌다. 순간 웬 일인지 소녀의 가슴이 더욱 세차게 할랑거리고 높뛰는 것을 어찌는 수가 없었다. 휴식 시간에 복도에서 덕돌을 딱 마주치자 순희는 저도 모르게 곱게 흘겨보더니 머리를 숙이며 얼굴을 귀밑까지 빨갛게 붉히었다. 그제야 덕돌은 순희가 편지를 받은 것을 알게 됐다. 한편 같은 날 은숙도 편지를 받았던 것이다. 허나 은숙이 먼저 그녀의 어머니가 받아 가만히 뜯어보았다. “이게 뭐야? 옛날 배고플 때 감자 누릉지를 어쩌고 뭐고 한 거 보지. 요게 저 아랫마을 덕돌이란 놈 새끼 한 짓이 아니야? 조꼬만 새끼 벌써부터 연애편지질이냐? 못된 놈의 송아지 새끼 엉덩이에 뿔이 난다더니. 이러고서도 고중으로 가?” 은숙의 어머니는 편지를 뜯어 부엌 아궁이에 넣을까 하다가 그만 두었다. “덕돌이 편지를 썼는지 붙잡아내 혼내 줘야지. 고놈새끼 쏠락거리면서 웃기지 않아? 흥!” 이때 은숙이 집으로 돌아왔다. “너 혹시 누구와 연애를 하는게 아니야?” “어째 그럽니까?” “이걸 봐라! 누가 쓴 겐가.” 은숙은 편지를 뜯어보고 또 뜯어보며 숙인 머리가 홍당무로 돼버렸다. “주의해라. 덕돌이 어떤 애냐? 전번에는 순희하고 잔치해 살겠다고 해 온 마을과 학교를 떠들썩하게 하더니. 이젠 또 옛날 누룽지 친구 어쩌고저쩌고 집적거리니?” 은숙은 머리를 천천히 들더니 두 손을 싹싹 비비며 빌었다. “엄마, 절대 학교나 마을에 나가 아무 말도 하지 마오.” 어린 딸의 말도 그럴 법해 어머니는 은숙의 손에서 편지를 빼앗아 갔다. “좋다. 이 편지는 내가 건사할게. 덕돌이 새끼 이제 또 편지 쓰는 날엔 이 편지까지 가지고 학교에 찾아가 한바탕 해낼 테다.” 은숙은 무릎을 꿇고 빌었다. “어머니, 제발 떠들지 마오. 소문 펴지면 난 어떻게 머리를 들고 학교를 다닌다고 그러오? 고중에도 가지 못하오.” 그제야 어머니는 두덜거리면서 편지를 건사했다. “덕돌이, 고 못된 올 종자 놈 새끼, 좋은 입을 가지고 투표해달라고 말할 게지. 간이 떨어지게 편지질은 왜 한다니?” 은숙은 벽 쪽에 마주 서서 손으로 맑은 눈물이 줄줄 흐르는 두 눈을 비비며 어깨를 들먹였다… 담임교원 김 경산 선생은 학생들 속에서 덕돌의 위신을 높이려고 처처에서 여론을 조성했다. 그는 덕돌이 쓴 글을 학급마다 돌아다니면서 읽어주는가 하면 지어 한어로 쓴 작문이나 “칠언률시”마저 붓으로 대자보로 써서 벽보 란에 붙여주었다. 고중입학을 추천하는 관건적인 시각이 닥쳐왔다. 두 개 학급에서 고중은 한개 학급만 모집하기에 기실 절반 밖에 가지 못하게 됐다. 진산선생이 천방백계로 덕돌의 위신을 세워주었기에 성욱이랑 아무리 추천하지 않고 헐뜯어댔지만 물거품으로 되고 말았다. 장영웅이랑 맹광철이랑 전성택이랑 모두 덕돌을 추천했다. 게다가 순희와 은숙이가 여학생들 속에서 장차 대학으로 갈 애는 덕돌 밖에 없다고 여론 조성을 한 바람에 여학생들도 대부분이 덕돌을 추천했다. 순희 차례가 되자 그녀는 발딱 일어나 제일 처음으로 덕돌을 추천했다. “덕돌은 우리 학교 뿐만 아니라 우리 전 진수해 공사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공부 천재입니다. 수리화 평균성적이 100점을 맞는 학생이 어디 있습니까? 수학콩쿠르에서도 번마다 100점, 그것도 참고문제까지 몽땅 풀고 1등을 했습니다. 이런 동무를 고중에 추천하지 않으면 누구를 추천하겠습니까? 우리 학교에서 덕돌을 고중에 입학시키지 않으면 후회할 겁니다. 큰 손실입니다.” 그러자 성욱이랑 “아우, 어우. 자는 덕돌의 각신 게 뭐.”하고 빈정거렸다. 순희는 돌아서서 성욱을 쏴줄까 하다가 영상해 그만두었다. (똥이 더러워 피하지. 무서워 피하니?) 은숙의 차례가 됐다. “나도 덕돌을 추천합니다. 공부도 잘하고 조직능력도 있다고 봅니다. 우리 학급에서 덕돌이 고중에 가지 못하면 안 됩니다. 덕돌을 추천하면서 한마디 충고하겠습니다. 이후에 남녀관계를 주의하기 바랍니다. 전도가 유망한 동무인데 이 결점을 고치지 않으면 장차 전도에 영향을 줄 겁니다.” “이제야 중점발언을 했다.” “옳다. 저 덕돌이 새끼 순희와 잔치해 살겠다고 했지 않고 뭐야?” 성욱이 떠들자 덕돌은 벌떡 일어나 고함쳤다. “난 근본 그런 말 한 적이 없다. 네 어찌 9촌 조카라는 게 이다지도 날 헐뜯니?” 교실 안에서 덕돌과 성욱의 무섭게 번쩍이는 눈길 사이에 갑자기 보이지 않는 번개가 치고 우레가 천지를 진동하며 울렸다. “누가 널 9촌숙이라니? 옛말이면 듣기나 좋지. 흥!” 경산 선생이 둘 다 말리지 않았더라면 당장 맞붙을 것만 같았다. 추천은 계속 이어졌다. 결과 덕돌의 이름 아래에는 바를 정자가 6개 하고도 2획이 꼬리 붙었다. 덕돌은 학급 학생들의 투표수가 32표나 돼 친구들인 장영웅, 맹광철, 동림, 순희, 은숙과 함께 고중입학선에 추천됐다. 물론 일을 잘해 이른바 사상품성이 좋은 성욱이도 겨우 26표, 딱 반수를 얻어 제일 마지막이름으로 추천됐다. 성욱과 친하던 리응과 종호, 상선도 추천됐다. 허나 손버릇이 나쁜 철주가 그만 고중에 추천받지 못했다. 철주는 누구 탈만해 입이 따발 3개나 걸 지경으로 나와 온 마을로 돌아다니며 누구와 행패를 부리지 못해 씩씩 거렸다. 경산 선생과 성환, 철봉은 덕돌의 고중입학 그 다음 보조로 학교 빈농 대표 이흥수와 학교 지도부 공작을 했다. 경산 선생은 성환과 철봉과 무슨 수를 대겠는가고 토론하고 흥수의 딸 해월이 추천받지 못한 일을 가지고 거래하기로 했다. 허나 흥수는 호의로 찾아간 경산선생을 외까풀 눈으로 흘겨보았다. “무슨 일이오?” “해월의 고중입학문제 때문에 왔습니다.” 흥수는 “흥!” 하고 코 방귀를 뀌더니 “김 선생이 담임교원을 어찌나 잘 했으면 우리 해월이 학생들에게 추천도 받지 못했겠어?”라고 하며 누런 이발사이로 침까지 튕겼다. “그래서 찾아왔습니다.” 경산 선생은 흥수 앞으로 허리를 굽히며 다가앉아 조용히 말했다. “거래를 합시다. 해월을 우리 책임지고 고중에 입학시키고 대신 덕돌의 고중입학을 학교에서 토론할 때 비준해 주십시오.” “안 돼!” 흥수는 딱 잡아뗐다. “어디 와서 뒷문거래를 하려는기여? 빈농 대표를 보기로 뭐로 보는가? 되지도 않을 소릴! 흥!” 허나 경산 선생은 맥을 버리지 않고 재삼 권고했다. “서로 좋게 하면 어떻습니까? 덕돌이도 구하고 해월도 구하면 좀 좋아 그럽니까? 잘 고려해보십시오. 황차 학교 지도부 결정은 빈농 대표 혼자 결정하는 것도 아닙니다. 학교 당 지부 장동영 서기는 덕돌의 고중입학을 지지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심중하게 결정하십시오.” 그래도 흥수는 경산을 보지도 않고 고집을 부렸다. “덕돌은 애비를 닮아 사상품성이 나쁜 애여. 류소기 ‘독서벼슬론’에 푹 물젖어서 공부밖에 모르는 애오. 장차 어떻게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위업을 그런 애들에게 믿고 맡기는가. 우리 해월이 고중에 가지 못하면 농촌에 나와 일을 잘해 추천 받아 대학으로 가면 돼. 장철생이랑 처럼 고중에 가지 못해도 빈농의 재교육만 잘 받으면 얼마든지 대학에 갈 수 있단 말이여.” “그래도 잘 고려해보십시오. 나도 해월과 덕돌의 일로 두 번 다시 찾아오진 않을 겁니다.” 진산 선생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흥수네 집 문밖으로 나가버렸다. 그때 해월이 정지에서 어린 애처럼 발버둥질을 치며 엉엉 울면서 떼를 썼다. “아버지, 날 고중에 붙여 주오. 엉~ 엉. 헝, 어 헝, 헝, 엉~ 엉” 춘실도 위방에 올라와 두 손을 싹싹 비볐다. “영감, 남의 새끼 눈을 멀게 하자고 제 딸의 눈도 멀게 하겠소? 황차 당신이 반대해도 덕돌의 앞길을 막지 못하오. 학생들이 추천했지 장동원 서기나 리종봉 주임이 동의하는 판에 당신 혼자 어쩌오?” “흥!” 흥수는 그래도 납작한 콧대를 세웠다. “종연까지 반대하면 상순의 금이야 옥이야 하는 외동아들이 어떻게 고중에 입학해?” “종연을 그렇게 믿소? 지난여름에 한족묘지꺼리에서 대갈통이 깨진 후 어리어리해졌더구먼. 너무 믿지 마오.” “종연까지 믿지 못하면 누굴 믿고 일하오? 황차 입당소개인 말도 안 듣고 어떻게 그 자식이 입당하오?” 춘실은 호들갑을 떨어댔다. “혹시 입당하려고 상순한테 타협할 수도 있잖소?” 흥수는 큰 소리를 탕탕 쳤다. “그 새끼, 림표처럼 양면파 수법을 쓰기만 하면 해봐라. 가만 놔두는가 . 그 놈 새끼 속까지 들어갔다 나와서 다 알아.” 흥수는 정지에서 떼질 쓰면서 우는 해월에게 마구 욕설을 퍼부었다. “그치지 못하겐? 어떻게 서둘렀으면 애들에게 추천받지 못해?” 허나 해월의 울음소리는 점점 더 자지러지기만 했다. 대대 우사 회의실에서는 학생들에게서 추천받은 학생들의 명단을 놓고 하나하나 혁명위원회와 당지부에서 토론하게 됐다. 회의에는 황종연, 이흥수, 김상순, 이학수, 이성수, 이계삼, 허영주, 박윤희 등이 참가했다. 먼저 경산 선생이 담임교원 신분으로 학생들을 쭉 소개했다. 그는 덕돌을 소개할 때 특별히 자세히 소개했다. “덕돌은 우리 학급 학습위원이고 전 교에서도 공부를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게 잘하는 학생입니다.” 그때 흥수가 콧방귀를 뀌었다. “공부를 잘 해 무슨 소용 있소? 사상품성이 좋아야지.” 그때 종연이가 제지시켰다. “다 듣고 말하오.” 흥수의 우멍한 외까풀 눈에 의아한 눈빛이 어리었다. (저 자식이 어데가 찰싹 붙어?) 경산 선생은 계속 소개했다. “덕돌 학생은 사상품성도 아주 좋습니다. 그는 자기 공부만 한 것이 아니라 ‘작은 선생’으로 돼 학습이 차한 학생들을 잘 배워주어 학생들에게서 위신이 아주 높습니다. 그는 학생들의 자리를 정돈하고 공부를 잘 하는 학생들이 차한 학생들을 이끌면서 호상 학습하는 열조를 일으켜 우리 반의 학습 성적을 눈 뜨이게 제고시켰습니다.” “원래 담임교원부터 ‘독서벼슬론’에 푹 전 사람이구먼. 그저 공부, 공부 밖에 모르지 않아.” 흥수가 또 부르튼 소리로 두덜거렸다. 종연은 싸맨 머리를 들더니 또 손시늉으로 제지시켰다. “덕돌 학생은 노동도 아주 잘하고 정치사상도 아주 좋습니다. 중학교에 올라온 후 하루도 아니고 몇 해 동안 우리 학급의 난로 불을 도맡다 시피 피웠을 뿐만 아니라 교연실의 난로불도 피웠습니다. 또 아동 단 단장으로부터 활동 참 참장까지 하면서 겨울 방학이면 자기보다 두세 살씩 이상 되는 애들까지 데리고 패용천산에 오르면서 군사훈련을 했고 겨울방학마다 돼지 똥을 열 수레씩이나 주어 생산 대에 바쳐 빈농들이 모상 판 둼으로 잘 쓰게 하지 않았습니까? 덕돌은 해마다 생산 대에 가서 빈농의 재교육을 받을 때에도 누구보다 앞장서 일을 잘 했습니다. 근 첫 패로 홍위병에 가입한 훌륭한 학생입니다. 때문에 덕돌의 고중입학을 대대에서 비준할 것을 건의합니다.” 경산선생이 덕돌을 하나 소개하는데 한 식경이나 걸렸다. 퉁퉁 부은 머리에 붕대를 감은 황종연이 무거운 입을 벌리더니 첫 포를 쏘았다. “경산 선생의 소개를 듣고 난 덕돌의 고중입학을 지지합니다.” “뭐라오?!” 흥수는 종연의 뜻밖의 말에 깜짝 놀랐다. 아니, 상순이나 경산 선생 그리고 회의장소에 있는 모든 이들이 자기 귀를 의심했다. 허나 종연의 발언은 명확했다. “덕돌은 김상순 서기를 닮아 애들을 이끌어 좋은 일을 많이 했고 사상품성도 좋습니다. 공부도 잘해 장차 큰일을 할 훌륭한 인재인데 그런 학생을 고중에 보내지 않으면 누굴 보내겠습니까? 여러분 안 그렇습니까?” 종연은 말을 마치면서 상순과 이계삼의 눈치를 흘금 곁눈질해 보는 것이었다. “더러운 새끼, 깨 그루에 앉은 새 새끼처럼 까불지 말라. 김 대장한테 알락거리면 널 입당시켜 줄 거 같니?” 종연도 숱한 당원들 앞에서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입당할 사람이니까. 더욱 원칙을 지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 덕돌 같이 훌륭한 학생을 고중에 입학하지 못하게 하면 역사에 죄를 짓는 것이 두렵지 않습니까? 개인감정으로 너무 그럴 필요 없다고 봅니다.” “옳소.” “덕돌의 입학을 동의합니다.” 여기저기에서 이구동성으로 덕돌의 고중입학을 동의한다고 표시했다. 지어 흥수의 형들인 성수나 학수마저 동의해 나섰다. (이렇게 될 줄을 알았더라면 경산 선생과 해월의 고중입학을 거래할 거 괜히 고집했지 뭐야?) 흥수는 후회막급이었다. 그는 발버둥질을 치며 엉엉 울던 해월이 떠올라 두 손으로 머리를 싸쥐고 회의실에서 훌 나가버렸다. (이젠 모든 게 끝장이야. 학교에서 토론해보았자 불 보듯 빤하지 않는가? 장 서기나 이 주임이나 모두 덕돌의 큰누나 춘자의 은사들인데. 상순이네 조손 3대가 반세기 동안 쌓은 기반에 와서 사는데, 흥! 진짜. 남의 눈을 빼려다가 제 딸의 눈을 멀게 하지 않았는가? 쳇!) 흥수는 아예 학교에서 토론할 때 참가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런데 장동원 서기가 어찌나 빈농 대표가 참가하지 않으면 무효라고 해서 마지못해 참가했다. 그는 눈을 뻔히 뜨고서도 회의에서 장동원 서기가 덕돌의 우점을 잔뜩 늘여놓아 덕돌의 고중입학이 통과되는 것을 구경했다.       진짜 닭 쫓던 개 지붕을 쳐다보는 격.       덕돌은 고중에 입학하게 됐다. 그는 하늘을 날듯이 기뻤다. 마음 속으로 자기를 도와준 김경산, 철봉과 성환 등 은사님들과 부모, 형님들과 친구들이 고마웠다. 그는 희망의 나래를 활짝 펼치고 이상의 세계로 훨훨 날아가기 시작했다.
145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106) 댓글:  조회:1340  추천:0  2018-06-13
                          10. 먹장구름이 뒤덮인 광활한 천지        금빛태양의 따뜻한 햇볕을 받아 만물이 우썩우썩 자라고 맑은 이슬에 수풀이 우거질 계절이었다. 허나 하늘이 어찌나 변덕스런지 맑은 하늘을 찾아 볼 수 없어 곡식이 잘 자라지 않았다. 옥수수도 극상해야 애들 키만큼이나 자랄까 말까 할 난쟁이었다. 설상가상으로 화가마 같은 뻘건 태양이 어찌나 불비를 퍼붓는지 밭고랑이 다 터질 지경으로 가물어서 옥수수 이파리마저 달팽이처럼 댈댈 감겨들고 말라버리었다.        먹장구름이 뒤덮인 광활한 천지에서 별의별 해괴한 일이 다 벌어지고 있었다. 상순은 이사해온 후 재차 함흥 대대 당 지부 서기로 선거됐지만 그만두었다. 이계삼과 허영주는 상순을 조용히 태평강 변에 데리고 가서 엄숙히 비평했다. “왜 당 지부 서기를 하지 않소?” 이계삼의 격한 말에 상순은 개의치 않고 자기 주견을 내놓았다. “대대 혁명위원회 나온 후 당지부는 유명무실하게 돼버렸습니다. 비당원인 종연이 혁명위원회 주임으로 돼 당지부를 쥐고 흔들면서 개 잡은 포수처럼 우쭐거리는 꼴조차 보기 싫습니다. 난 대대 당지부서기를 하면서 권력다툼에 혈안이 돼 미쳐 날뛰는 흥수하구 종연 사이에서 눈치를 보면서 옥신각신하기도 싫습니다.” 허영주는 상순의 날카롭게 비평했다. “정치는 감정으로 대하는 게 아니오. 동무는 원칙을 지키고 시비에 지려고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불의에 굴종하지 않았소. 헌데 어째 이번엔 이렇게 연약하게 나오오? 정치는 물러서면 물러설수록 밀리는 법이오. 동무는 한뉘 평생 수많은 기회를 놓쳤소. 삼도만 토비숙청 때 영장을 할 기회를 놓쳤고 영월구 공안국 국장마저 내놨소. 사람이 한뉘 평생에 그런 기회 몇 번 있겠소? 이제 대대 당지부 서기마저 하지 않으면 또 후회하게 될 거요. 전반 국면을 생각해 서기를 해야 하오.” 허나 상순은 자기 고집을 부렸다. “지금 정치를 할수록 당과 인민의 이익을 해치는 착오를 더 지게 됩니다. 오히려 한개 생산대를 맡아 백성들을 위해 일하는 것이 낫습니다. 진짜 종연과 흥수하구 날마다 대대에서 싸우기도 신물이 날 지경입니다.”       이계삼은 상순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돼지꼬리 되기보다 닭 머리 되는 게 낫을 수도 있지.”   “한개 생산대라도 잘 건설해 사원들이 배불리 먹고 살게 하는 게 낫습니다.”      두 노간부들도 더 말리지 않았다.      상순은 자진해 함흥대대 조개덕생산대 정치대장으로 됐다. 원래 조개덕은 한 개 마을이자 한개 생산대었는데 혁명위원회 주임 황종연의 제의에 따라 한족들로 제1생산대를, 조선족들로 제2생산대를 나누기로 했다. 종연은 고의적으로 상순을 애먹이느라고 지주와 부농들이 욱실거리는 한족생산대인 제1생산대 정치대장으로 보냈다. 상순은 민족단결도 강화할 좋은 기회가 왔다고 계급성분이 복잡하고 낙후한 1대로 가게 된 것을 좋아 했다. 명옥은 남편을 말렸다. “한족 곳에서 겨우 조선족마을로 되돌아왔는데 어찌 호박을 쓰고 돼지 굴로 들어가겠소?” 허나 상순은 고집을 쓰고 한족대로 갔다. “한족들은 부지런하고 남을 헐뜯지 않아 조선족들보다 더 좋소. 한족들은 벼농사를 잘 모르오. 내 가서 벼농사를 가르쳐주고 직접 논물도 봐주면서 한족사원들한테 벼농사도 배워주고 이밥을 먹고 살게 만들어야겠소.” 아내와 자녀들이 한사코 반대하면서 한족마을로 가지 않겠다고 하자 상순은 혼자 한족 대에 가서 일하고 집식구들은 조개덕 2대에 남겨두었다. 어느 날 공사 혁명위원회에서 자동차에 한 20명 되는 상해 지식청년들을 실어 마을에 부리어 놓았다. 찌프에서 뚱뚱한 간부가 내려 눈덕에 살이 져 퉁퉁 부은 거 같은 눈으로 거만하게 상순을 째려보면서 손을 내밀었다. “난 현 공안국 국장 김용만이오. 김 대장의 말은 많이 들었습니다. 오늘 상해 지식청년들을 실어왔습니다.” “오, 김국장이구먼. 수고 많습니다.” 상순은 영발에게서 김용만 국장의 말을 피뜩 들었지만 모르는 척 했다. 저쪽에서 영발은 용만을 보자마자 기가 꺾이어 토성 안 위생소로 들어가 버렸다. 종연과 흥수는 진작 기별을 받고 헐금씨금 뛰어와 용만 국장에게 허리를 굽신거리면서 머리를 조아렸다. 그들은 용만 국장 옆에 서 있는 상순을 흘겨보았다. 상순은 용만에게 물었다. “이 숱한 상해 청년들을 마을에 실어다 뭘 하오?” 용만은 찌프에서 뒤따라 내린 허영호 소장을 보면서 말했다. “광활한 천지에는 할 일이 많소. 상해 지식청년들이 조개덕에 와서 빈농들에게서 재교육을 받아야 하오.” 그는 짐을 부리는 상해 청년들을 가리키면서 상순에게 말했다. “저 청년들은 대도시에서 자라다나니 이런 시골 농촌마을엔 처음 왔소. 오기 싫어하는 것을 실어온 청년들도 있으니까. 사상정황이 복잡할 거요. 만약 불온분자나 파괴분자가 생기면 인차 허 소장에게 알리오.” 용만은 틀을 차리면서도 아주 능란하게 수작을 피웠다. “김 대장은 산전수전 다 겪은 노간부기에 상해지식청년들을 잘 교육하리라고 믿습니다.” 그는 상순을 한쪽으로 데리고 가서 조용히 뒷말을 이었다. “김 대장, 종연한테서 들을라니 김 대장은 이사 올 때 호구를 올리기 힘들었더구먼. 내 듣고서 허 소장을 보고 호구를 올려주라고 했소.” 기실 용만과 종연은 모두 반란파에 들어가 한바지를 입고 득세한 일맥상통한 자들이었다. 종연이 찾아가 고발하자 용만은 권력을 빌어 백방으로 상순의 호구를 올려줘서는 안된다고 허영호 소장을 압력을 가했다. 허나 허영호 소장은 은인이며 노상전인 상순을 배신할 수 없었다. 영월구 때부터 자기를 경찰로 배양했고 어머니한테도 무진 관심을 돌린 상순이 아닌가. 허영호 소장은 용만과 종연의 협박에도 물러서지 않고 상순의 호구를 올려 주었던 것이다. 용만은 상순이 그 정황을 모르는가 해 상순의 앞에서 아닌 보살을 떨었다. “한가지 부탁할 일이 있소. 상순 대장이 직접 입당소개인으로 나서서 혁명위원회 주임 종연을 입당시키오. 우리 서로 도우면서 살기요. 종연은 부대에 갔다 왔지. 정치 민감성이 있는 아주 전도유망한 청년이오. 입당하면 공사에 올려다 써줄 예산이오. 부탁하기요.” “알았소. 나도 이젠 나이가 들었으니 진작 청년들을 후비간부로 양성해야지. 다 내 잘못이오.” 상순의 진심에 찬 말을 듣고 용만은 한시름을 놓으면서 머리를 끄덕였다. “그럼 부탁하고 돌아가겠소. 김 대장, 무슨 일이 있으면 나한테 전화하오. 현 공안국에 연계하면 인차 찾을 수 있소.” 상순은 그저 머리만 끄덕였다. 흥수와 종연은 상순의 말에 적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항상 원칙을 내세우면서 불의에 맞서고 직설적이던 상순이 같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김용만의 찌프가 먼지를 일구면서 꼬리 빳빳해 달아났다. 흥수와 종연은 할 말이 가득한데 채 하지 못했는지 아주 아쉬워하면서 찌프가 마을 동구 밖 굽인 돌이를 돌아 사라질 때까지 손을 저었다. 상순은 상해지식청년들의 집체호를 새해에 짓기로 하고 먼저 그들을 마을에서 좀 괜찮다는 서너 집에 나눠 들게 일일이 배치했다. 짙은 눈썹아래 부리부리한 봉이 눈을 슴벅이는 상지민이라고 부르는 상해지식청년은 키도 크고 딱 서양 사람처럼 생겨 마을 청년들에게 꽤나 인기가 있었다. 상순은 집체호 호장인 상지민과 수호, 이행복 그리고 마대랑, 송 꼬마 등을 자기 집에 들게 했다. 상지민은 정치대장인 상순에게 부쩍 호기심을 가지고 이것저것 물었다. “우리 마을에 빈농이 몇 분입니까?” 상순은 “내까지 포함해 대여섯 집 밖에 안 되네.”라고 대답해주었다. “그래요? 그 나머지는 모두 중농 이상입니까?” 보통키에 귀가 뻘쭉하고 너부죽하게 생긴 수호는 호기심에 차 물었다. “그래. 대부분 지주와 부농이지.” 상지민은 버릇처럼 눈을 슴벅이면서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우린 빈농의 재교육을 받으러 왔지. 지주와 부농의 재교육을 받으러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상순은 상지민을 나무랐다. “벌써부터 그렇게 생각하면 못써. 여기 와서 지주나 부농의 교육을 받으라는 건 아니오. 나를 포함한 빈농의 말을 잘 듣고 농사를 배우면 돼. 알만하지?” “예!” 꺽다리 상지민은 발뒤꿈치를 척 붙이더니 군례까지 올리었다. 그는 꽤나 유모아적이었다. “너희들도 김 대장께 경례를 올려!” 그러자 수호와 마대랑, 이행복, 송 꼬마 등은 일렬횡대를 짓더니 차렷하고 군례를 척 붙였다. “우린 김 대장 말을 잘 듣겠습니다.” 상지민은 상순의 두 손을 잡고 맹세했다. 상순이 알고 보니 상지민의 아버지는 상해교통대학의 교수이었고 어머니는 상해 국제호텔 한개 부문 책임자라고 했다. 교양 있는 지식분자 가정에서 태어 난 상지민은 영어와 노어, 일어까지 안다고 했다. 그런데 지식분자는 더러운 아홉째이어서 지식분자 자녀일수록 더 빈농의 재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해 고중을 졸업한 상지민은 대학에 입학하지 못하고 이런 동북 변강 산골에 내려와 하향지식청년으로 돼 집체호 호장으로 됐다. 상순이 상지민 등을 금방 자기 집에 배치하고 나오는데 또 공사에서 찌프가 달려왔다. 찌프에서 허영호 소장이 내리고 그 뒤에 웬 곱살한 중년여인이 여자애 둘을 데리고 내려왔다. 허 소장은 상순과 손을 굳게 잡으며 인사한 후 뒤에서 내린 여인네를 돌아보며 소개했다. “이 분은 정성해 서기네 처남댁 김송선입니다. 문공단의 이름난 무용수입니다.” 허소장은 송선한테 상순을 소개했다. “이분은 이 마을의 원로 김상순 서기요.” 상순이 송구해하며 인차 고쳐 말했다. “아니, 지금은 조개덕 1대 정치대장이오.” “잘 부탁드립니다. 김 대장.” 송선은 허리를 구십도로 굽히며 인사했다. 상순은 어두운 그림자가 흐르는 외씨처럼 걀쭉하고 예쁜 송선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인사했다. “이런 산골에 와서 어떻게 고생하겠소?” 송선은 조심스레 김상순 대장을 바라보며 억지로 미소를 지어보였다. “괜찮습니다. 김대장 많이 관심해주십시오.” 상순은 뒤에 따라 내려온 열대여섯 살 돼 보이는 여자애와 열둬살 돼 보이는 여자애를 돌아보면서 이상해 물었다. “남편은 무슨 사업을 하기에 여기로 오지 않소?” 그러자 송선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상순과 허 소장을 번갈아 보며 오물거렸다. “저, 남편은 대학교 영어교수입니다. 지금 5.7간부 학교에 가서 재교육을 받고 있습니다. 여기로 올 거 같지 못합니다.” 상순은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아무리 정서기 처남이라고 해도 그렇지. 한집 식구들을 이렇게 억지로 갈라놓을 게 뭐요? 사람들이. 원, 참.” 송선은 코마루가 시큼해나 얼굴을 돌려 딸애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상순은 허 소장을 보고 어처구니없는 웃음을 웃었다. “에이유, 우리 마을에 숱한 노간부와 지식청년이 왔소. 이젠 무용수까지 왔으니 정말 별의별 인재가 다 왔구먼. 허허허.” 허영호 소장은 상순을 한쪽으로 데리고 가서 나직이 말했다. “정성해 서기 처남댁은 문공단에서 한다하는 무용수입니다. 그런데 반란파 두목 김용만과 한 짝패인 일룡의 수청을 거부했답니다. 설상가상 송선 동무는 김용만의 처 허해복과는 예술학교의 동창생친구인데 후에는 무용권위를 두고 적수로 됐답니다. 용만의 처 해복은 무용권위자리를 차지하려고 베개머리 송사해서 송선 동무를 이 산골로 쫓아 보냈답니다.” 허 소장이 떠나간 후 상순은 측은한 눈길로 송선의 가냘픈 두 어깨를 바라보면서 한숨을 후 내쉬었다. “가기요. 한족생산대어서 좀 습관 되지 않을 거요.” 상순은 먼저 송선 일가 세 식구를 자기 집에 데리고 갔다. “먼저 우리 집에 있다가 이제 생산대 창고 제일 동쪽 간에 구들을 놓고 들게 할 게.” “고맙습니다.” 뒤따라가면서 송선은 가냘픈 어깨를 들먹이었다. 그들이 늙은 비술나무 밑에 갔을 때었다. 종연과 흥수가 헐레벌떡거리면서 뛰어왔다. “김 서기, 아니, 김 대장, 이게 뭐요?” 흥수가 떠들어댔다. “당신의 눈에는 우리 대대 간부들이 보이지 않는기어? 노동개조범들이 왔으면 대대에 먼저 데리고 와 인사시켜야지.” “사람이 아무리 늙고 눈치 무뎌도 조직관념이야 있어야지. 참.” 종연도 한마디 하다가 속세를 벗어난 선녀같이 예쁜 송선을 보자마자 얼빠진 놈처럼 주춤 멈춰 섰다. 그는 멍해 호리호리한 송선의 몸에서 눈을 뗄 줄을 몰랐다. 순간 네모난 낯빤대기가 별스레 수수떡처럼 벌겋게 번지었다. (저 년을 꼭 재껴치울테야. 아이유, 저 호리호리한 몸매에 풍만한 젖가슴, 치마 속에서 출렁이는 하들하들 한 엉덩이, 두부살 같이 야들야들한 허벅다리. 오, 정말 사내 애간장을 불태우는 미녀구나.) 이상했다. 우멍눈으로 송선을 뚫어져라고 쏘아보던 흥수의 코등이 뻘겋게 달아올랐다. 그에게는 한가지 모병이 있었다. 젊고 예쁜 여자만 보면 말상이 찡그러지고 코등이 뻘겋게 달아올랐다. 그리하여 마을 사람들은 뻘겋게 달아오른 흥수의 콧등을 손가락질하면서 코빨개라고 별명을 부르면서 놀려댔다. 해가 뜨자 달이 진다고 송선이 조개덕에 내려오자 종연의 눈에서 점차 윤희가 사라져 갔다. 상순은 색마 종연의 수수떡처럼 벌개나는 낯빤대기에서 데굴데굴 굴리는 음충한 눈길을 눈치채고 임기응변해 송선 일가를 자기 집에 데리고 가지 않았다. 그는 송선을 돌아보더니 종연이네를 가리키며 일일이 소개했다. 그러자 송선은 또 허리를 굽히며 억지로 웃음지으며 인사했다. 종연은 단통 아랫배가 찡해 나며 온 몸에 욕정이 끓어 번져 참을 길이 없었다. 옆에 서있는 흥수는 비록 나이를 먹었지만 한뉘 평생 이런 미녀를 처음 보는지라 적이 군침이 목구멍으로 꼴깍 넘어갔다. 삽시에 그의 콧등이 뻘겋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종연은 흥수한테 눈을 흘기며 주먹으로 옆구리를 툭 쳤다. 뒤이어 그는 자기 음흉한 속내를 덮어 감추며 아주 점잖게 송선한테 관심부터 보였다. “송선 동무라고 했지. 어떻게 이런 산골에 와서 고생하겠소? 문공단 무용수라는데 농사일을 시키긴 아깝소.” 그는 흥수를 돌아보면서 손을 홱 저었다. “이렇게 하기요. 송선 동무는  한족대에 두기보다 대대 마을에 집을 잡게 하고 우리 대대 문예선전대 대장을 시키기요.” 그러자 송선은 허리굽혀 인사했다. “관심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동무는 우리 대대 문예선전대를 이끌어 무산계급현대혁명경극 ‘흥등기’ 같은 걸 조선말로 만들어서 사원들에게 공연하오.” 송선은 눈귀로 실웃음을 살살 지었다.      “꼭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잘 해보겠습니다.”       상순은 오히려 한시름을 덜게 됐다. 그러나 종연의 색마 본성을 꿰뚫어보고 적이 근심됐다. 함흥대대에서 저녁에 토성 안 대대 사무실 앞에 무대를 꾸리고 상해지식청년환영대회를 열었다. 상해지식청년들이 처음 내려왔기에 환영대회무대는 특별했다. 대대 혁명위원회 주임 황종연이 무대에 선코로 올라가 공식적으로 환영사라고 장황하게 늘여놓았다. 뒤이어 대대 혁명위원회 부주임 겸 치보 주임 이흥수가 주먹을 내휘두르며 사원들에게 상해지식청년들의 신변안전을 보호하며 생활상에서 자기 자녀들처럼 관심할 것을 요구했다. 상해지식청년 대표 상지민은 무대에 올라가 먼저 상해 지방말로 뭐라고 떠들어대더니 표준말로 빈농의 재교육을 잘 받겠다고 표시했다. 그는 입 반주를 하더니 현대경극 “흥등기”의 한 토막을 손짓 몸짓 해가면서 흥얼거렸다. “…구산 선생의 술 한 사발을 마셨더니 온 몸에 담이 커지고 더운 피가 끓어 번지네…” 이 산골에서 한해에 영화마저 몇 번 보지 못하다가 “혁명본보기극”이라는 현대경극 노래를 처음 듣고 사원들은 호기심으로 들끓었다. 상지민이 우멍한 눈을 슴벅이며 하는 뛰어난 연기에 모두들 박수갈채를 아끼지 않았다. 게다가 상해 여자애 황지민까지 무대에 올라가 노래에 맞춰 춤을 춰대고 마대랑이랑 군도를 빼들고 일본 놈의 무술연기를 해 흥을 돋우었다. 나중에 송선이 무대에 올라 우리 민족의 민요 “도라지”를 부르며 춤을 너울너울 추며 상해지식청년들을 환영하는 조선족사원들의 뜨거운 마음을 표시했다. 상지민은 무대에 뛰어올라가 송선에게 엄지를 내두르며 사원들을 향해 “재청을 요구합니까?” 하고 소리쳤다. 그러자 사원들은 “재청!”, “재청!” 하고 소리치며 우레 같은 박수를 쳤다. 송선은 무대에 나와 사원들에게 허리를 굽혀 경례를 드리고 잔등에 감췄던 탈과 상모를 쓰고 머리를 흔들며 상모를 돌리다가도 도라지 춤을 너울너울 추었다. 그녀는 잠간 춤을 멈추더니 감명 깊게 말했다. “이전에 우리 조선족들이 상모 춤을 추느라고 머리를 흔드는 것을 보고 일부 극좌적인 사람들은 ‘왜 머리 위의 꼬리를 자꾸 가로 흔드는가? 당과 사회주의에 불만을 품고 부정하느라고 도리머리 질 하는 게 아닌가?’라고 무함했습니다. 그 바람에 마음 놓고 우리 민족의 도라지나 상모 춤을 추지 못했습니다. 오늘 마음껏 추겠어요.” 모두들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냈다. 음악이 없는 형편에서 송선은 “도라지”에 “양산도”와 “농악무” 노래를 번갈아가면서 흥얼거리며 춤을 추었다. 환영무대는 하늘에서 내린 선녀와도 같이 날씬한 그녀의 춤판으로 해 고조에 올랐다. 특히 경극 밖에 보지 못하던 조선족사원들은 자기 민족의 무용을 마음껏 보고 흥이 나서 어깨를 들썩들썩 하며 어깨춤을 추기까지 했다. 상순은 송선의 무용표현을 보면서 아까운 인재가 이런 산골에 와서 썩는다고 마음이 아파하면서 한숨을 후 내쉬었다. 허나 무대아래에서 종연은 날씬한 송선의 출렁이는 풍만한 젖가슴을 노려보면서 온 몸을 부르르 전율했다. 그는 낯이 수수떡처럼 뻘겋게 달아올라 온 몸에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욕정을 억누르기 힘들었다. (어떻게 하면 저 미녀를 손아귀에 넣을까?) 흥수도 자기 생각이 따로 있었다. 그는 오래 동안 윤희에게 눈독을 들이면서도 종연이 무서워 다가서지 못했다. 종연이 송선에게 부쩍 관심을 보이자 이젠 때가 왔다고 여기었다. 환영대회 공연이 거의 끝나갈 무렵에 흥수는 슬그머니 토성 안에 콩나물처럼 꽉 박아선 사람들 속을 참빗질하면서 윤희를 찾았다. 윤희는 자지색 수건을 치고 턱을 고인 채 박영발의 옆에 서서 무대 위에서 송선이가 추는 춤을 구경하고 있었다. 흥수는 슬금슬금 뒤로 물러서서 윤희만 지켜보았다. 공연이 끝나자 윤희는 곧추 사람들 속에서 헤어나갔다. 그때 영발이 주위를 두루 살피더니 윤희에게 뭐라고 말하더니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사람들이 모두 헤어진 뒤에야 윤희는 주위를 둘러보더니 위생소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윤희는 독신이기에 살림집을 잡지 않고 홀로 위생소 침실에서 밥이나 대충 끓여 먹으면서 있었다. (벌써 자는가. 으흐흐.) 흥수가 토성 대문 어귀에 서서 위생소 쪽을 바라볼 때었다. 문소리가 덜컥 나더니 윤희가 위생소에서 나와 토성 밑에 있는 변소로 가는 것이었다. 흥수는 토성 밑에 두툼히 깔린 어둠 속으로 해 슬금슬금 변소 쪽으로 다가갔다. 변소에서 윤희가 오줌을 누는 소리가 쌕 나는 것이었다. (저 오줌 소리를 봐라. 노처녀 오줌소리 소 오줌소리 같구나. 흐흐흐. 빨 힘도 셀 거야.) 흥수가 입맛을 다시고 있을 때 윤희가 변소에서 나와 위생소 쪽으로 들어갔다. (어찔까? 여기서 덮칠까? 안 돼, 혹시 소리나 치면 들키기는 십상이야. 들어가서 해치우는 거야.) 이때 갑자기 토성 대문 쪽에서 발자국 소리가 났다. 흥수가 토성 밑에서 여겨 보니 꺽다리었다. (영발이? 저 년 놈들이 아직도 언감 간통을 해?) 마당의 검은 그림자를 본 윤희는 위생소 안으로 달아 들어가더니 문 걸개를 채우는 소리가 잘칵거렸다. 허나 검은 그림자가 다가가 문을 똑똑똑 두드리는 것이었다. “문을 여오. 나 영발이오.” (영발이 새끼 옳구나. 저 놈, 뭐 할락꼬 이 밤중에. 어디 보자.) 흥수가 욕하며 볼라니 위생소 안에서 윤희의 말소리가 들렸다. “밤중에 뭐예요? 남들이 보면 뭐라 하겠어요? 일이 있으면 내일 낮에 얘기 합시다.” “요즘 감기환자 많아서 어디 조용히 얘기 할 새 있소? 황차 황주임이 윤희를 항상 지키는데 어떻게? 빨리 문을 여오.” “안 돼요. 밤 말은 쥐가 듣고 낮말은 새가 듣는다는데 할 말이 있으면 내일 하세요.” “내 긴히 할 말이 있소. 들어가 말하기요.” “무슨 말인지요. 내일 봅시다.” “밤 말은 쥐가 듣는다는데 어떻게 바깥에서 말하겠소?” 그제야 두덜거리며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영발은 문고리를 쥐고 주위를 둘러보더니 슬쩍 들어가 문을 채우는 것이었다. 흥수는 숨을 죽이고 어둠이 깔린 토성 안 주위를 살핀 후 아무런 동정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도적고양이처럼 슬쩍슬쩍 마루에 올라가 허리를 굽히더니 위생소 침실 쪽으로 다가갔다. 흥수가 위생소 유리창문 밑에 웅크리고 앉아 귀를 도사리고 동정을 살폈다. 집안에서 영발의 말소리가 두런두런 들렸다. “네년이 황주임과 흐물 넙적거려? 네놈 새낄 시내 병원에 보내줄 거 같아? 보기도 메스껍다. 퉤!” “당신 아직도 나를 관리할 예산입니까?” “내 입이 터지는 날엔 네 년은 끝장이야.” 흥수는 숨을 죽이고 듣다가 “뭐 숨긴 거 있구나. 뭘까?” 하고 중얼거리며 위생소 안에 귀를 도사렸다. “내 전도까지 망쳐 놓고서도 여기까지 따라와서 내내 시끄럽게 굴어요?” (뭐라고? 저 연놈들이 원래 그런 관계였구나. 끝내 년놈들 꼬리 밟혔어.) 흥수는 당장 윤희를 자기 손에 다 넣은 듯이 웃음주머니가 흔들거리었다. “저리 피해요! 왜 이래요?” “내 말을 고분고분 듣겠니? 안 듣겠니? 내 입이 터지면 넌 이 마을에서 머리를 들고 있을 거 같니?” “당신도 머리를 들고 살겠구먼. 흥!” “난 황 주임의 입당 소개인이야. 황 주임이 날 봐준단 말이야!” (황 주임이 나는 봐주지 않겠구먼.) 윤희는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꼴깍 삼켰다. “시간이 없다. 누가 오겠다. 고분고분 말을 들어라.” “가만, 이전 일을 무덤까지 가지고 가겠다고 맹세할만 해요?” “응. 그래. 너와 내 이 똥구덩이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비밀을 고수하마. 흐흐흐.” “에이유, 이 영감을 어쩌겠니? 집안집 삼촌이라는게. 이게 뭔가요? 사람들을 웃기지 않겠어요?” 뒤이어 책상이 삐꺽거리는 소리가 나고 고양이가 우는 소리 같은 신음소리가 간간히 들리었다. 바깥에서 귀 솔깃해 듣는 흥수의 아랫배가 찡 해났다. (아이유, 저것들이.) 흥수는 점점 달아오르는 욕정을 억누를 길이 없었다. 그는 달아오르는 콧등을 슬슬만지다가 뒤로 슬슬 마루에서 물러섰다. 그는 마루 밑에서 닭 알만한 돌을 주어 유리창문에 뿌렸다. 찰라당! 순간 위생소 침실이 쥐 죽은 듯이 조용해지었다. 흥수는 어둠을 밟으며 쥐새끼처럼 토성을 따라 쪼르르 달려가 구석에 숨어버렸다. 토성 안에 물을 뿌린 듯이 무거운 침묵이 애타게 흘렀다. 한참 후 위생소 문이 살며시 열리더니 윤희가 헝클어진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살피는 것이었다. (놀랐지? 더러운 년놈들. 흥!) 흥수는 코 방귀를 뀌며 냉소했다. 이윽고 위생소에서 박영발이 슬그머니 나오더니 토성 안을 두리번거리며 꼬리 빳빳해 어둠속에 사라졌다. 달도 뜨지 않아 어둠침침하게 먹칠한 밤하늘에 먹장구름만 덮쳐와 광활한 천지를 갑갑하게 지지 누르고 있었다.                          제28장 동틀 무렵          1. 어두운 장막아래 희극       동녘 하늘이 희붐히 밝아왔다. 종달새가 지종지종 울면서 농부들의 파종을 재촉했다. 강남에 갔던 제비들도 광풍폭우를 무릎 쓰고 북으로 날아와 둥지를 트느라고 분주했다.       종연과 흥수가 짜고들어 고의적으로 상순을 조개덕에, 그것도 한족대에 보낸 것은 그와 조선족사원들 그리고 이계삼과 허영주, 허백호 등 노 간부들과 갈라놓기 위해서였다. 허나 상순은 대수로워 하지도 않았다.      (네놈들이 아무리 그런들 어쩔 테냐? 조개덕을 새 마을로 건설할 테야.)     상순은 새로운 건설계획을 세우고 조개덕 동구 늙은 비술나무 부근 둔덕에 벽돌공장을 세우기로 했다.      그는 사원대회에서 한족사원들에게 격조높이 동원했다. “여러분, 우리 함흥대대에 과수원이 있지 않습니까? 이제 우리 조개덕에 벽돌공장을 세우면 초가집을 허물고 벽돌집을 한채 한채 짓고 벼농사를 지어 이밥을 배불리 먹고 삽시다.” “좋소!” 한족사원들은 모두 두 손을 들어 환영했다. 상순은 동원령이 끝나자마자 사원들을 이끌고 괭이와 삽으로 쑥대와 잔나무가 키를 넘은 둔덕을 파헤치고 평평하게 고르고 피장을 치기 시작했다. 조개덕의 절반도 넘게 차지하는 지주나 부농들은 반란파들과는 달리 찍 소리 못하고 상순의 말을 고분고분 들었다. 상순은 함흥대대 당지부 서기를 벗어 멘 것이 얼마나 홀가분한지 몰랐다. (함흥대대에 벽돌공장을 세우려면 또 반대파 종연과 흥수가 나서서 말썽을 일으킬 거 아닌가? 허나 조개덕에는 반대할 사람이 없지.) 상순은 아무런 저애도 없이 벽돌공장을 짓고 벽돌을 구워내기 시작했다. 그 바람에 지주나 부농을 투쟁하는 투쟁대회를 연지 오래됐다. 오히려 함흥대대 당지부 서기를 그만두고 조개덕 한족대로 오니 여러 모로 마음이 편해 좋았다. 이젠 황종연과 이흥수 수하에 이계삼과 허영주 그리고 허백호, 정규상 등 로간부들을 투쟁하지 않아도 돼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어느 날, 혁명위원회 주임 황종연이 벽돌공장에 어슬렁어슬렁 기어들어왔다. 그는 한창 시뻘건 벽돌 가마의 불을 들여다보며 석탄을 퍼 넣는 상순을 보고 코 방귀를 뀌었다. “흥!” 그때 석탄을 떠 넣고 돌아선 상순은 석탄가루 검댕이 묻은 얼굴을 들어 종연을 흘겨보았다. 종연의 꼬리를 따라온 흥수는 저쪽에서 뻘겋게 구워낸 벽돌장을 쥐어 이리저리 보며 이쪽을 힐끔거렸다. 종연은 목에 지렁이 같은 핏줄을 세우면서 호통쳤다. “김 대장은 뭐요? 혁명을 틀어쥐지 않고 생산만 틀어쥐다니? 모 주석께서는 ‘계급투쟁을 기본 고리로 틀어쥐라”고 하지 않으셨소? 그래 모 주석의 최고지시마저 다 잊었단 말인가? 김 대장은 이게 뭐요? 대대 비준도 없이 함부로 벽돌공장을 세우다니? 지주들과 부농을 투쟁하지 않고 벽돌만 구워내니 누구 좋은 노릇을 하오? 정말 이렇게 하다가는 대장도 하지 못할 줄 아오.” 그러자 상순은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았다. “야, 종연아, 혁명은 빈 말로 하는 게 아니야. 생산을 틀어쥐는 실제 행동으로 혁명해야 한다. 넌 진짜 혁명을 모르면서 어떻게 입당하겠니?”       종연은 성이 꼭뒤까지 올라 꽥꽥 고함쳤다.      “김 대장이 막는다고 내 입당하지 못할 거 같소? 어디 두고 보기오.” 종연은 대뜸 네모난 낯판대기 뻘개나면서 두 손으로 벽돌무지를 떠밀어 무너뜨리면서 고래고래 고함쳤다. “당장 벽돌공장을 허무오! 그러잖으면 대대 민병들을 동원해 강제로 허물어 버리겠소!” 그러자 한족사원 왕청해가 종연의 멱살을 틀어쥐고 눈을 부라렸다. “이놈새끼, 우리 한족사원들이 김 대장 덕분에 새 벽돌집을 짓고 살려는데 벽돌공장이 무슨 원수를 졌다고 허물어?” 분노한 한족사원들은 괭이며 삽을 틀어쥐며 노한 눈길로 종연을 쏘아 보았다. 그 사태를 수습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지 모를 일이었다. 종연은 겁을 집어먹고 뒤로 비실비실 물러서면서 을러멨다. “지주, 부농 놈의 새끼들, 감히 혁명위원회 주임께 손을 대?!” 허나 한족사원들은 종연을 노려보며 팔을 걷고 조여들었다. 그때 상순은 분개한 사원들을 말렸다. “여러분, 절대 손찌검 하지 마오! 그럼 우리에게 도리 없어지게 되오. 황주임도 대갈통이 달린 놈이니까. 벽돌공장을 세운 걸 차차 동의할게요. 누가 감히 벽돌공장에 손을 대면 하늘이 용서하지 않을 겁니다!”   상순의 말에 한족사원들은 모두 이구동성으로 소리쳤다. “옳소!" "누가 감히 우리 대 벽돌공장을 허문단 말이오!" "우린 그 놈들과 결사적으로 싸울 거요!” “이 놈들이 반란이다! 반란!” 종연은 고래고래 고함치며 뒤로 물러섰다. 흥수가 앞으로 나서면서 위엄을 보였다. “네 놈들이 감히 대대 혁명위원회 주임과 맞서?! 몽땅 파출소에 잡아 갈테다!” 그 틈을 타서 종연은 흥수의 뒤에 비실비실 물러섰다가 꼬리 빳빳해 도망쳤다. 흥수도 외까풀 눈으로 격분해 모여오는 한족사원들과 상순을 번갈아 보다가 뒤로 비실비실 물러서다가 몸을 돌려 달아났다. 기세등등해 을러메던 황종연과 흥수는 며칠이 지나도록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그날 대대 사무실에 돌아간 흥수는 종연을 말렸다. “벽돌공장을 지은 일은 잘 된 일이오. 사원들을 새 벽돌집에 들어 살게 하면 오죽 좋겠소? 사회주의 제도 우월성도 보여주고. 사기 난 사원들이 혁명을 더 틀어쥐고 생산을 촉진할 게 아니오?” 그러나 종연은 세길 네길 펄쩍 뛰었다. “이 치보도 사상이 온전하지 못하구먼. 대대 간부들이 혁명에 대한 인식이 통일되지 않으니 조개덕에서 반란이 일어나지!” 허나 흥수는 입당 소개인인지라 종연을 어린애 타이르듯 했다. “내 말을 듣소. 오래지 않으면 입당할 발전대상인데 말썽을 작작 일으키란 말이오. 상순이 서기도 그만두고 조개덕에 물러갔는데 자꾸 신경을 건드려 무슨 좋은 일이 있소? 개도 막다른 골목에 이르면 문다는 말을 듣지 못했소? 그가 조개덕에 갔지만 이 마을은 그들의 조손 3대가 와서 개척한데다가 거의 60여 년 동안이나 기반을 닦아왔소.” 그 말에 종연이 사무상에 다가가 털썩 들어앉으며 좀 수긍하는 눈치가 보이었다. 흥수는 나직이 뒷말을 이었다. “입당하려면 상순의 지지를 받아야 하는기여. 그러잖으면 저 이계삼과 허영주, 허백호까지 몽땅 들고 일어나면 될 거 같소? 아직은 상순과 타협해야 해.” 그 말에 눈이 좀 뜨이었던지 종연은 흥수를 쳐다보면서 한숨을 후 내쉬었다. “그럼 먼저 입당하고 보지. 뭐!” 그러면서도 적이 내키지 않아 도리머리를 흔들며 두덜거렸다. “아직도 우리 상순의 눈치를 보면서 살아야 하오? 벽돌공장을 세워 벽돌을 구워내면 조개덕 사원들이나 좋은 노릇을 했지. 우리한테 무슨 소용 있소?” 그러자 흥수는 절충하기로 했다. “상순은 그런 사람이 아니오. 대공무사해 놔서 먼저 대대에 벽돌을 실어오고 후에 조개덕 사원들의 집을 지을 거요.” 종연은 계속 두덜거렸다. “이 치보는 아직도 상순을 그렇게 믿소? 내 원, 참, 미련을 가지지 마오.” 그 날 저녁에 흥수는 가만히 상순을 찾아가 좋은 말로 구슬렸다. 상순은 황소가 개를 쳐다보듯 하면서 “오뉴월의 쇠불알처럼 이 볼 저 볼 작작 치오.”하고 두덜거리며 벽돌공장 아궁이에 석탄을 퍼 넣었다. 흥수는 밸 같으면 콱 쏴주고 싶었지만 황종연의 입당문제를 생각하자 상순의 턱 밑에 기여들지 않을 수 없었다. “내 황 주임과 말해서 벽돌공장을 허물지 못하게 했네.” 허나 상순은 “해가 서산에서 뜨지 않겠소? 흥!” 하고 코웃음 쳤다. “정말이라니께. 김 대장은 대공무사한 분이어서 꼭 벽돌을 구워 먼저 대대에 실어오고 나중에야 조개덕 사원들의 집을 지을 거라고 말했어. 그래서 황주임이 가만있는기여.” 말귀를 제꺽 알아차린 상순은 삽질을 멈추고 몸을 돌려 흥수를 돌아보며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황 주임이 어쩌다가 셈이 들었소? 난 벽돌로 대대 사무실부터 지으려오.” 흥수는 제꺽 동을 달았다. “종연이 입당할 중점발전대상인데 그만한 정치 각오야 없겠수?" 흥수는 이젠 함경도 말을 꽤나 잘 했다. "김 대장이 그 애 입당을 많이 도와주오. 쉰이 넘은 우리 늙은이들이 이제 볼 게 있나? 젊은이들의 앞길을 잘 닦아주는 게 덕을 쌓는 일이지.” 상순은 한숨을 후 내쉬며 담배쌈지를 꺼내 담배를 말아 물었다. “그거야 그렇지. 황주임이 왼 고집을 부리지 말고 우리 말 잘 들으면 노당원들이 왜 그를 도와주지 않겠소? 허나 입당하려고 듣는 척 해선 절대 안 되오.” 상순도 이젠 책략을 고쳐 속내와는 달리 얼렁뚱땅 얼려넘겼다. 흥수는 내키지는 않았지만 겉으로는 수긍하는 척 하고 좋은 말을 한바탕 해대고 자리를 떴다. 어둠 속에서 달아다니던 쥐새끼들이 모두 자기 굴로 달아 들어가 노란 콩과 벼 알을 까먹고 있었다. 패용천산 양지바른 벼랑 위 가파론 산마루에 돌로 한 글자가 50미터씩 되게 새긴 “모 주석 만세!”란 허연 글발은 어찌나 큰지 부르하통하 남쪽에 있는 다른 마을들에서도 다 환히 볼 수 있었다. 그 글을 새긴 덕에 당과 당의 위대한 수령 모 주석에 대한 충성심이 높다고 종연은 비당적극분자로부터 중점발전대상으로 됐다. 물론 거기에는 황종연에게 아첨해 농촌을 벗어나려는 박영발, 황종연과 타협하면서 대대 권력을 양분하려는 흥수가 입당소개인을 해 힘쓴 덕분이었다. 게다가 윤희마저 황종연에게 아양을 떨며 아첨하는 판국이서 쉽게 통과되었다. 흥수는 종연과 박영발이 빈 틈을 타서 위생소 주사실에 가서 윤희를 기웃기웃 살폈다. 윤희는 한창 어린 애에게 주사를 놓다가 알은체 했다. “어머, 이 치보 왔어요?” “응, 그래. 환자 많소?” 윤희는 마스크를 벗고 얼굴의 땀을 훔치면서 말했다. “오늘은 괜찮습니다. 며칠 전엔 감기에 걸린 환자들이 많아 눈 코 뜰 새 없이 보냈습니다.” 아낙네가 어린 애 바지를 춰 입혀 업고 주사실에서 나가자 흥수는 음충한 눈길로 윤희를 쏘아보며 따졌다. “너 이년, 당과 인민에게 죄를 진 일이 없니?” (밤중에 홍두깨라더니 이건 또 무슨 감투 끈인가?) 윤희는 청청백일에 생벼락을 맞은 듯이 오도카니 서있었다. 그녀는 각일각 다가서는 흥수의 이상한 눈길을 피하며 뒤로 비실비실 물러섰다. “이년, 말해! 위생소에서 무슨 짓을 했니?” “아니, 건 무슨 말인가요?” “어째 계속 시치미를 따? 네 년이 위생소에서 박영발과 거의 날마다 간통한 거 모르는가 해?” “어마나!” 윤희는 두 다리에 맥을 잃고 바르르 떨다 환자 침대에 폴싹 물앉았다. 흥수는 자기 말이 비수로 돼 면바로 윤희의 심장을 찔러 빨간 피가 주르르 흘러내린 것을 보고 계속 칼질을 해댔다. “귀신을 속여도 내 눈은 속이지 못해! 어째 사원대회를 열고 날마다 투쟁하고 공사 파출소에 붙잡아 가야 알겠어? 정규상처럼 돼지 똥과 인분을 퍼 나르겠어?” 윤희는 콧등이 뻘개 으르렁거리며 다가서는 콧빨개를 쳐다보며 두 손을 마주 싹싹 비볐다. “이 치보, 제발 살려 주십시오. 제발, 난 어떻게 이 세상에서 머리를 들고 살아요?” “그럼 내 말을 듣겠나?” 윤희는 백지장처럼 창백하게 질린 얼굴을 들어 흥수를 바라보았다. “뭘 말인가요?” 흥수는 주사실 바깥 동정을 살피더니 윤희를 와락 끌어안고 풍만한 가슴에 손을 쑥 넣었다. “이러지 마세요.” 흥수는 자기 손을 잡아 빼는 윤희를 쏘아보며 을러멨다. “어째 거절할 거야?” “누가 보겠어요.” 이때 위생소 소장실 쪽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덴겁한 흥수는 윤희 가슴에서 손을 빼면서 나직이 쑤근거렸다. “저녁에 보자!”  윤희는 마른기침을 “에헴, 에헴” 깇으면서 복도에서 멀어져가는 흥수의 발자국소리를 들으며 침대에 풀썩 물앉았다. (내 운명은 왜 이다지도 기구할까? 저 콧빨개를 어쩔가?) 그녀는 가냘프게 어깨를 들먹이었다. 그때 복도에서 마른기침 소리가 나더니 뜻밖에도 황종연이 주사실에 들어섰다. 윤희는 제꺽 눈물을 훔치며 침대에서 일어섰다. “혈관주사를 놔주오. 어째 감기에 걸린 거 같소.” 윤희는 제 정신이 없었다. 다른 때 같으면 어린애 정맥주사바늘이라도 단번에 찔렀으련만 종연의 팅팅 살아난 피 줄에도 주사바늘을 제대로 박지 못했다. 서너 번 주사바늘을 찌르자 종연이가 재채기를 하더니 두덜거렸다. “아파 죽겠소. 젠장!” “미안해요. 황 주임.” 종연은 피가 흐르는 주사바늘자리를 개의치도 않고 낯빤대기 수수떡처럼 뻘개 음충한 눈길로 윤희를 뚫어지게질 바라보았다. “박 간호사도 마흔 고개에 오르니까 주사바늘도 온전히 꼽지 못하는구먼. 빨리 맨발의사를 배양해야겠소. 박호사를 믿다간 동지섣달에 한지에 방아를 걸겠소.” 윤희는 주사를 놓으면서 속으로 욕했다. (늑대 같은 놈.) “근심하지 마오. 우리 함흥대대에서 내 말만 잘 들으면 위생소에서 쫓겨날 근심 할 필요 없소. 허나 내 말을 거역하면 당장 18층 지옥에 갈수도 있소. 알만하오?” 윤희가 머리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자 종연은 거친 숨소리를 내면서 지지벌건 네모낯을 윤희의 귀밑머리를 간지를 지경으로 머리를 바싹 들이대고 나직이 중얼거리었다. “언제든 문을 두드리면 열란 말이오.” 윤희는 홧홧 열기를 풍기는 종연의 뻘건 네모낯을 피하면서 속으로 계속 욕했다. (네 놈도 달려들 궁리지. 어쩜 이 산골에는 맨 색마들이야?) 해가 서산으로 넘어가자 윤희는 위생소 문고리를 단단히 걸고 두 손을 맞잡고 침대머리에서 왔다갔다 서성거리였다. 그녀는 열십자로 반창고를 붙인 유리창문을 내다보며 무서운 생각부터 들었다. (전번에 저 유리는 흥수가 깬 걸 거야. 그러지 않으면 어떻게 우리 일을 알 수 있겠는가?) 밤이 깊어가면서 바깥이고 위생소 안이고 어둠이 두툼히 깔렸다. 무시무시한 공포가 슬밋슬밋 구석구석에서 몰려오고 있었다. 윤희가 속이 두근닥근해 침대에 누웠다 일어났다 하면서 불안해 할 때다. “똑똑똑.” 출입문 쪽에서 노크소리가 들렸다. 윤희는 발딱 일어나 두 손을 맞잡고 바장이었다. 이런 일은 여러 번 당했지만 오늘 저녁에는 심장이 가슴 바깥으로 튀어나가는 것 같고 머리기가 곤두섰다. (난 어떻게 해? 어떡해?) 이때 문을 더 자지러지게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윤희는 바들바들 떨었다. “누굴까?” 윤희는 중얼거리며 문 쪽으로 살금살금 걸어가 문고리를 잡고 바깥 동정을 살폈다. 바깥 밤 사람이 벽에 딱 붙어 서서 누군지 알 수 없었다. “누구예요?” “나요, 나! 문을 여오.” (이 치보? 어쩌면 좋을까?) “빨리 문을 열지 못하겠어? 어째 똥 짐 메고 싶어?” 윤희는 문고리를 쥐고 망설이었다. (한 놈이면 어떻고 두 놈이면 어떠냐? 눈을 찔끔 감고 고비를 넘기자. 똥 짐을 지며 수모를 당하기보다야 낫겠지.) 이래서 하는 말이다. 여자란 한번만 정조가 열리면 터지는 홍수와도 같아 걷잡을 수 없었다. “빨리 문을 열지 못해?” 그때 문이 절컥 열렸다. 흥수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슬쩍 들어오자마자 윤희를 와락 끌어안고 키스벼락을 안겼다. “조급해 하지 마세요. 문이나 걸어야죠.” “오, 그래, 어서 잘 걸어.” 흥수는 누가 볼까봐 두려운 듯이 먼저 위생소 주사실 안으로 씽 들어가 버렸다. “어서 와. 뭘 꾸물거리는 거야?” 윤희가 문가에서 문고리를 절컥거리면서 오지 않자 흥수는 속에서 욕정이 끓어 번지다 못해 괴여 번지었다. 더는 참을 수 없어 그는 주사실에서 나와 윤희를 번쩍 들어 안고 들어갔다. “문을 잠그는 게 뭐 그리 오래?” 흥수는 씩씩거리면서 윤희를 침대에 내려놓고 깔고 들어앉았다. 침대가 삐꺼덕거렸다. “이년 이 침대에서 사내들을 얼마나 많이 끌어들여 한바탕 굴러댔으면 침대가 다 찌그러지게 삐꺼덕거려?” “헛소릴 작작 쳐요.” 그는 윤희의 웃옷부터 빡빡 벗기면서 빈정거리었다. “모르는가 해? 전날 네년이 영발과 이 침대에서 개짓을 한 거. 헤헤헤. 울긴 왜 울어? 내 말 고분고분 들으면 누구한테도 말하지 않을게. 지금 아니? 황 주임은 널 대전일 시키고 대신 송선을 위생소에 들여앉히려고 맨발의사로 배양할 예산이야. 내 너를 보호해 주지 않으면 되겠어? 내일부터 당장 똥 짐을 메면서 고생하지 못해서.” 흥수는 오래 동안 탐내오던 윤희의 발가숭이 몸이 홀랑 들어나자 어루만지고 핥으면서 계속 너덜거렸다. “아이고, 이 몸이 반지르르 한 게 딱 태평강 바닥 조약돌 같구나. 허허허. 오, 홍, 어이구.” 윤희는 자기 몸을 메주 밟듯 하는 흥수의 오르내리는 손이 징글스럽고 어우르면서 하는 짓이 메스꺼워 온 몸이 오싹해났다. 허나 그녀는 노동개조를 하기 싫어 이를 꼭 악물고 억지로 참아야만 했다… 드디어 흥수는 목석같이 누워 있는 윤희의 차디찬 몸 옆에 스르르 맥없이 굴러 떨어졌다. 그는 긴 한숨을 후- 톱아 내더니 윤희를 욕했다. “이년, 죽은 돼지처럼 누워 있기만 하니 무슨 흥이 나겐?” 똑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 “가만있어!” 탕탕탕! 문을 잡아 두드리는 소리가 자지러졌다. 드디어 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흥수는 벌거숭이 된 채로 황급히 침대 밑으로 기어들어갔다. “어째 인차 문 열지 않았소?” 목소리가 귀에 익었다. 윤희는 치마를 입을 새도 없이 침대에서 발딱 일어나면서 침대 위에 널린 흥수의 옷을 훌 걷어 침대 밑에 처넣었다. 흥수는 침대 밑에서 감히 옷을 입을 엄두도 내지 못했다. “불을 켜지 말라.” (종연이구나. 이걸 어쩌나?) 흥수는 침대 밑에서 옷으로 몸을 가리며 옹송그렸다. 이때 벌써 종연이 침실에 들어섰다. “내 뭐랬는가? 내 말을 고분고분 듣지 않으면 18층 지옥에 걷어 넣겠다는데.” “금방 나가 문을 열려고 했어요.” “문을 걸지 않았던데. 문고리가 마사지지 않았어?” 사실 윤희는 오늘 저녁에 뛰어든 놈들을 망신시키자고 고의로 문고리를 채우는 척 하면서 되 열어놓았던 것이다. 흥수나 종연이나 그런 줄도 모르고 있었다. “왜 인차 대답하지 않았어.” “이러지 마세요.” “뭐라고? 네가 정말 이따위로 나오면 위생소에서 쫓아내고 송선을 이 자리에 앉힐 줄 알아라. 정규상을 앉히든지. 고분고분 말을 들으란 말이야.” (더러운 놈, 송선을 눈독들이면서도 윤희를 놓지 않아?) 침대 밑에서 흥수는 욕하면서 숨을 죽이고 하회를 기다렸다. “황주임, 난 황주임보다도 열 몇 살이나 이상이오. 황 주임은 이 다음 장가가지 않겠소? 입당하지 않겠소? 중점발전대상이 이렇게 하면 어떻게 입당해요?” “네깐 화냥년이 누굴 교육하려고 드니? 잔 말 말아. 네 년이 내 입당을 도와주지 않으면 가만 놔둘 거 같아?” 종연은 흥수와는 달리 다짜고짜 윤희를 침대 위에 깔고 넘어갔다. “이 년이 진작 쫄딱 벗었어? 날 기다렸지? 왜 온 몸이 축축해?” 흥수 머리 위 침대에서 호랑이들이 서로 물어뜯으며 싸우는 것 같았다. 흥수는 침대 밑에서 속으로 연놈들을 욕하면서도 윤희의 열기 띤 신음소리에 온 몸을 바르르 떨었다. 이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누구야?!” 윤희는 종연을 밀어내면서 급기야 소리쳤다. “도적이야!” 종연도 흥이 깨져 어둠 속에서 옷을 주섬주섬 주어 입으면서 욕지거리를 퍼부었다. “박영발, 그 개새끼, 내 흥을 깨뜨렸어.” 전등불이 짤깍 켜졌다. 윤희는 치마를 대충 주어 입다가 종연이 옷매무새를 보고 킬킬거렸다. 종연은 어찌 황급했으면 바지 위에 팬티를 껴입은 것이 아니겠는가! “이게 뭐야?” 황종연도 웃으면서 침대에 걸터앉아 팬티와 바지를 벗어 다시 입었다. “간 거 같소. 또 할까?” “안 되오. 밤이 깊었으니 어서 가오.” “글쎄 오늘 다 끝내겠소? 이후엔 내가 온 눈치면 문을 두드리지 않아도 문을 여오.” 종연은 바지를 훌 춰 입었다. 그는 윤희를 끌어안아 빙빙 돌리다가 침대 위에 쾅 내려놓았다. 꽈당! 요란한 소리와 함께 그만 침대 널판이 펄러덩 꺼지었다. 그 바람에 윤희는 침대 밑 땅바닥에 퉁 떨어졌다. “아이쿠!” 침대 밑의 흥수는 깔리어 그만 허리가 접질릴 정도였다. “이게 무슨 소리야!” 황종연은 침대 널을 들다가 자기 눈을 믿지 못할 참경에 깜짝 놀랐다. 그는 얼빠진 사람처럼 입을 딱 벌리고 멍청히 서서 침대 밑을 쏘아보았다. 침대 밑에서 글쎄 벌거숭이 흥수가 피 흐르는 머리를 싸안고 슬금슬금 기어 나와 후닥닥 바깥으로 도망치지 않겠는가! 종연은 윤희의 귀 쌈을 찰싹 갈겼다. 뒤이어 그는 침을 퉤 뱉고 바깥으로 비파소리 나게 나가버렸다. 토성 밖 어디에선가 동네 개들이 왕왕 짓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었다. 윤희는 허물어지듯이 주사실 침대에 쓰러져 서럽게 울었다. 그녀는 자기 기구한 운명이 서럽고 자기를 무참히 짓밟은 세 사내들을 증오하는 불길을 억누를 수 없어 울고 또 울었다. 먹장구름도 토성 안 어둠의 장막아래 벌어진 희극을 보기 싫은듯이 두툼한 어둠으로 삼라만상을 덮어버렸다.  
144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105) 댓글:  조회:1160  추천:0  2018-06-07
                     7. “내 몫까지 공부해 달라”        연변의 4월 중순은 화창한 봄날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여기 교하는 아직도 싸늘했고 여기저기 아직도 잔설이 남아 있었다. 어떤 큰 물도랑에는 겨우내 두텁게 얼어붙었던 얼음이 채 녹지 않은 채 싸늘한 봄바람에 찬 기운을 풍기며 햇볕에 번쩍이고 있었다. 이 맘 때면 연변에서는 밭갈이가 거의 끝나갔지만 여기서는 이제야 밭갈이 준비로 가대기를 내다 보습 날을 닦았다. 상순은 황하채소생산대대의 논물기술원으로 왔기에 벼 냉상모판을 만든다, 벼씨를 소금물에 불궈 소독한다 하면서 바삐 보냈다. 중국 어디로 가나 생산대대마다 계급투쟁을 하지 않는 곳이란 없는 것 같았다. 비록 교하는 ‘문화대혁명’ 바람에 정치 백열화가 된 연변보다는 덜 했지만 여기서도 지주와 우파 그리고 이른바 현행반혁명을 투쟁하고 있었다. 그러나 연변과는 달리 황화채소대대에는 상순처럼 항일전쟁 때 유격대원 출신에 해방 후에 대대 당지부 서기라도 한 조선족간부가 없었고 오랜 “노집권파”, 이른바 노간부가 없었다. 그래서 상순은 이사해 오자마자 당지부 부서기로 돼 존중을 받았다.      채소대대에는 제3대가 조선족마을이고 나머지 두개 생산대는 한족생산대었다. 상순이네는 한족들이 사는 제2생산대에 이사 왔기에 편안했다. 한족들은 “문화대혁명” 바람이 아무리 불어도 서로 덜헐뜯었다. 자기 발등에 불이 떨어지지 않으면 남의 일에 삐치려고 하지 않았고 남을 조만에 건드리지 않는 것이 그들의 우점이었다. 진짜 한족들은 자기 안해를 건드리지만 않으면 남이야 살인했든 뭐 했든 제 눈으로 보고서도 눈을 질끈 감고 모르는 척했다. 허나 일단 자기를 건드리거나 원수를 맺기만 하면 10년이고 20년이고 대대로 원수치부를 했다. 또 좋다하면 자기 밸도 다 빼줄 상한다.  의리심이 강한 것이 그들의 특성이라고 할 수도 있었다. 황화대대 이 서기는 오히려 상순을 항일 노투사라고 하면서 아주 존중했고 무슨 일이 있으면 그와 토론한 후 결정했다. 상순은 이런 한족들의 성질을 오래 전부터 알고 있는 터이라 쓸데없는 일에 삐치지 않고 그들과 화목하게 지냈다. 하여간 상순은 쇠 물도 녹일 도가니 속 같은 함흥대대를 벗어나 고요한 황화채소대대에 온 것이 얼마나 홀가분하고 좋은지 몰랐다. 보리 고개를 바라보는 함흥대대에서는 이 때면 벌써 쌀이 떨어져서 일성 골 안의 한족들한테 가서 강냉이 쌀이나 수수쌀을 꿔 먹고 가을에 가서 꿔온 수수쌀 한근에 입쌀 한근 두냥씩 갚아주어야 했다. 그러다나니 꿔 먹은 쌀을 가을에 입쌀로 갚고 나면 이듬해 또 보리고개를 넘기 힘들었다. 허나 여기 황화채소대대에 오니 쌀은 로동자들처럼 배급받을 수 있어 쌀 고생은 덜 했다. 연변에서 가지고 온 쌀을 다 먹자 생산대에서는 상순에게 옥수수쌀을 두 가마니나 배급해주었다. 게다가 맏딸 춘자가 배급을 탄 밀가루랑 드문드문 가져다주어 칼면도 해먹고 강냉이떡을 해 먹을 수 있어 쌀 고생은 별로 하지 않았다. 상순이 키운 벼 모가 심한 저온 냉해 년에도 잘 자라 남새대에서 처음으로 제때에 벼모를 냈다. 상순이 이른 아침에 나가 달을 지고 돌아오면서 온 정성을 다해 논물을 보았기에 논밭에서 벼모가 잘 자라 논밭 옆의 길을 지나가던 행인들은 상순에게 엄지를 내두르면서 혀끝을 끌끌 찼다. 상순은 일약 합격된 논물관리원으로 자리매김을 했다. 그런데 셋째사위 동준이네 이모 집에 빌려 들어서 살았는데 장구지책은 아니었다. 그리하여 상순은 연 며칠째 피장을 쳤다. 명옥은 학교에 가서 외손자 성춘과 성일을 봐주었다. 첫달에 춘자는 자기 애 둘을 본다고 어머니한테 30원을 가져왔다. 명옥은 맏딸이 내미는 돈을 받으려고 하지 않았다. “얘, 좋은 제 외손자를 봐주고 돈을 받아서야 되니?” “엄마, 남한테 애를 보이면 15원을 내야 하는데 좋은 자기 엄마를 주는데 뭐 아깝겠소?” 명옥은 첫달에 마지못해 15원만 받고 두 번째 달부터 춘자가 뭐라고 해도 일전도 받지 않았다. “얘, 남을 웃기겠다. 가져가라.” 춘자는 별 수 없어었다.      “그럼 이 돈은 엄마 나를 준 셈 치고 가져다 잘 쓰겠소.”       후에 사돈집에서 둘째아들을 세간내겠다고 하면서 집을 내라는 바람에 상순은 있을 곳이 없어 맏딸 춘자네 외통 집에 들어가 얹혀 살았다. 맏딸 춘자네 집이라야 구들이 열대여섯 평방미터 밖에 되지 않는 손바닥만 한집이었다. 게다가 한족 집구들이어서 비좁은 집에서 아홉 식구가 정말 돌아누울 자리도 없었다. 춘자네 부부는 자기네가 이사 오는 것을 동의한 터라 불편한대로 부모와 함께 한 구들에서 살아야 했다. “빨리 집을 짓고 나가야지. 사위 보기 미안해 어쩌니?” 상순은 이렇게 중얼거리면서 생산대와 말해서 집터를 잡고 짬짬이 피장을 쳐서 집을 짓기 시작했다. 설상가상으로 한족마을에 이사해오니 한족들이 은자와 성숙을 욕심내서 혼사 말을 어찌나 거는지 당혹스럽기만 했다. 지어 한족 총각들이 은자와 성숙과 어찌나 지분거리는지 딸애들이 집에 돌아오면 고충을 털어놓으면서 한족마을에서 살지 못하겠다고 빌빌거리었다. 게다가 연변에서는 공부를 잘하던 덕돌이 한족학교를 다니면서 공부를 따라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설상가상으로 그는 한족 건달무리들과 어울려 탄광 시내로 돌아다니면서 싸움을 하고 지어 학교로 가는 척 하고 마을을 떠나 중도에서 술이나 마시고 계집애들과도 지분거렸다. 덕돌은 한반 뒤좌석에 앉은 왕춘영(王春荣)이라는 애가 이뻐보여 자꾸 지껄였다. 쌍태 머리를 땋아 올린 그 여자애는 우유빛 얼굴에 운우지정을 그리는 듯한 외까풀눈이 생글생글 웃음 지을 때면 퍽 유혹적이였다. 덕돌은 그 여자애를 날마다 보면 오금을 쓰지 못할 정도이었다. 그런데 춘영도 덕돌을 보고 웃음을 살짝살짝 보내면서 유혹했다. 그녀는 자기 필기장을 내밀면서 생글방글 웃음을 보냈다. “조선어로 내 이름을 써 달라.” "엉? 왜?" "기념으로!" 덕돌은 싱글벙글 하면서 “좋아. 내 써 줄게.”라고 하더니 필기장을 가져다 왕춘영의 이름을 멋있게 써주느라고 애썼다. “와, 멋있다. 이게 정말 내 이름 맞지?” 왕춘영은 입을 함박만큼 활짝 벌리고 웃으면서 필기장을 광순한테 내밀어 보였다. 광순은 덕돌의 셋째매형의 사촌여동생이었다. 그 애는 덕돌보다 두 살이나 이상인데 소학교 1학년을 조선학교를 다녀서 한글을 알아보았다. “맞아. 이거 네 조선 이름이야.” “와, 좋다. 난 조선이름을 가졌어.” 춘영이 좋아서 필기장을 안고 교실에서 어린애처럼 퐁퐁 뛰자 리려평이랑 진해화랑 다른 한족 여자애들도 조선이름을 써달라고 덕돌에게 졸랐다. 덕돌은 그 애들에게 일일이 조선이름을 정성껏 써주었다. 그리하여 덕돌은 한족학교 공부는 따라가지 못했지만 한족 여자애들의 호감을 사게 됐다. 여자애들은 점심이 되면 맛있는 돼지고기채랑 덕돌에게 집어 주군 했다. 특히 춘영은 맛있는 소고기랑 닭고기랑 많이 사다가 덕돌에게 가만히 주었다. 그 덕분에 덕돌은 춘영의 고기를 잘 얻어먹고 좋아 입이 함박만해졌다. 심지어  춘영과 가만히 만나 영화 보러 가기도 했다. 춘영은 덕돌이 학교에 오지 않으면 용대랑 보고 “어째 덕돌은 오지 않아?” 하고 묻곤 했다. 그러자 용대랑 덕돌을 놀려주었다. “춘영의 신랑, 제일 고운 각시 얻어 좋겠어.” 기실 용대도 슬그머니 춘영을 좋아했는데 춘영이 덕돌을 좋아하는 눈치자 은근히 질투했던 것이다. 어떤 때 춘영이가 말을 듣지 않는다고 덕돌은 그만 삐져서 춘영의 책상에 모래를 한줌 쥐어 올려놓았다. 그리하여 여담임 왕숙혜 선생한테 들켜 된욕을 치르기도 했다. 지어 왕 선생은 덕돌의 집에까지 찾아와서 친구 춘자한테 덕돌의 소행을 고발했다. 그러자 덕돌은 점점 학교에 가기 싫어 집에서 싸준 도시락과 책들을 가방에 넣어 메고 학교로 가는 척 하면서 집을 떠나서는 용대랑 용구랑 함께 학교로 가는 도중 탄광에 가서 놀았다. 그들은 석탄을 실은 소철에 뛰어올라 몇 리씩 호사를 보다가도 뛰어내리면서 놀았다. 어떤 때에는 학교에 가지 않고 영화관에 가서 영화를 보았다. 학교로 가다가 자기들을 놀리는 한족애들을 때려놓기도 했다. 한족 애들은 덕돌이랑 어찌나 미웠는지 그들이 나타나기만 하면 손벽을 치면서 놀려댔다. “고려새끼 큰 바지가달, 애를 한무리 낳는다!” 그러면 그 놀리는 소리에 용대랑 용구랑 반격하군 했다. "낳은 애들은 몽땅 너네 할아버지다!” 하여 쩍 하면 한족 애들과 무리 싸움을 하였다. 그래서 덕돌이랑 맞을 까봐 가까운 길로 학교로 다닐 수 없어 멀리 에돌아 다니지 않으면 안됐다.     “안 되겠다. 여기에 애들을 뒀다간 한족 집에 시집가지 않으면 건달이 되겠다.” 명옥은 춘자를 불러다 토론했다. “야, 저 덕돌을 연변에 보내 공부를 시켜야겠다. 여기 뒀다간 건달이 되겠다.” 춘자는 무서운 눈길로 동생을 흘겨보았다. “야, 어째 학교는 가지 않고 애를 먹이니? 내 낯이 다 깎인다. 왕 선생은 공사에서 회의할 때마다 네 말을 한단 말이다. 수학은 잘 하는데 다른 공부는 몽땅 낙제라고.” 덕돌은 겁기 띤 눈으로 큰누나를 흘금 훔쳐보며 입이 뽀로통해 중얼거렸다. “난 한족학교를 다니지 못하겠소. 이전에 소학교에서 한족 반을 다닐 때도 공부를 따라하지 못해 그만두지 않았소? 그때도 괜히 재수 없이 ‘류소기를 타도하자’를 한어로 잘 쓰는 바람에 한족 반에 갔단 말이오.” 그러자 춘자는 나무랐다. “얘야, 여기서도 부지런히 공부 하면 따라갈 수 있다. 어째 학교에 가지 않고 건달들과 휩쓸려 다니니?” 그러자 덕돌은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한족 선생들이 시간에 뭐라는지 근본 알아듣지도 못하겠는데 어쩌오?” 이때 동수가 다가와 덕돌에게 불러 쓰기를 시켜보았다. 그런데 매형이 부르는 단어를 거의 다 썼다. “열심히 하면 되겠다. 금방 이사 왔는데 어떻게 또 이사해? 이담에 모를 게 있으면 나한테 물어라.” 그리하여 후에 덕돌은 모를 것이 있으면 큰매형 동수 아니면 셋째매형 동준을 찾아가 배웠다. 하여 한어와 수학은 비슷하게 배워나갔지만 한어로 강의하는 정치나 역사, 물리, 화학은 근본 따라갈 수 없었다. 덕돌은 시험을 치면 수학과 한어문은 우수를 맞았지만 기타 과목은 몽땅 낙제를 맞았다. 한족학교에 온 바람에 처음으로 낙제생이 돼버린 덕돌은 공부에 재미를 붙이지 못하고 방황하게 됐다. 그때 명옥은 가문 회의에서 이런 기발한 생각을 내놓았다. “내 생각에는 덕돌을 연변에 내보내 잠시 은숙이네 집에서 공부를 시키는게 옳은 거 같다. 먼저 은숙에게 편지를 써 보내자.” “뭐라고요?” 춘자는 놀라 눈이 동그래지더니 남편을 쳐다보았다. 동수는 한참 궁리하더니 “좋겠소." 하고 동의해나섰다. "여기 시내에서 친구를 잘못 사귀는 날엔 얘가 건달이 아니면 도적, 아니 강도로 될 수도 있소.” 명옥은 춘자의 손을 쥐고 당부했다. “빨리 은숙한테 편지를 써 보내라.”       춘자는 하나 밖에 없는 남동생의 전도를 위해 체면을 버리고 은숙에게 편지를 썼다. 편지에 이사온 후 부모와 덕돌의 근간 형편을 말하고 쌀고생을 하면서 고생스런 대로 남동생을 데려다 공부시켜달라고 부탁했다. 동녘이 푸름 해 오자 상순은 덕돌을 두들겨 깨웠다. “야, 일어나라.” “어째 그럽니까?” “학교 다니기 싫으면 농사라도 지어야지.” 덕돌은 언감 아버지 말씀을 어기겠는가. 곤한 대로 눈을 집어 뜯으면서 아버지를 따라 바깥으로 나갔다. 그런데 이상했다. 이전엔 이쯤 되면 아버지한테 얻어맞기 일쑤였다. 그런데 아버진 이상하게 때리지 않았고 심지어 욕하지도 않았다.         “이걸 메라!”          상순은 삽과 괭이를 들더니 멜대를 내밀었다.        덕돌은 멜대를 받아 물초롱을 메고 아버지를 따라 변소 쪽으로 갔다. 상순은 괭이로 변소 뒤의 넓적한 돌을 들었다. 순간 누런 똥이 드러나면서 구린내가 물씬 풍겨 코를 찔렀다. “똥을 퍼서 초롱에 담아!” “아, 구린내야.” 덕돌은 코를 싸쥐고 울상을 지었다. 상순은 덕돌을 흘겨보았다. “공부하기 싫으면 별 수 있니? 한뉘 소 궁둥이나 쳤지.” 덕돌은 아버지를 무서워 구린내를 맡으면서 억지로 퍼 담았다. “그걸 메고 나를 따라오라.” 덕돌은 무거운 대로 똥초롱을 멜대로 메고 아버지를 따라 남산으로 올라갔다. 덕돌이 똥초롱을 메고 올라가다가도 맥이 없어 쉬자 상순이 메고 산비탈을 한참 올라갔다. 상순은 푸름 해 오는 옥수수 밭골땅에 괭이로 홈을 죽죽 파더니 을러멨다. “거 코 막고 말뚝처럼 서있지 말고 똥이나 이 홈채기에 쏟아라.” 덕돌은 하는 수 없이 구린내를 참으면서 똥초롱을 들어 홈채기에 나가면서 누런 똥을 줄줄 쏟았다. “이 놈아, 한 곳에 그렇게 많이 쏟아서 어떻게 이 많은 밭에 다 쏟니? 작작 쏟아!” 덕돌은 빨리 쏟아버려 일을 끝내려고 했던 것이다. 아버지 호령에 덕돌은 꼼짝 못하고 조금씩 쏟으면서 나갔다. 자칫하면 아버지가 온 밭에 똥을 지어 나르라고 하면 큰 일이었다. 개구쟁이 아들의 그런 속내를 빤히 들여다본 상순은 똥을 두 초롱 다 내자 괭이를 짚고 서더니 아주 의미심장한 말을 하기 시작했다.        “야, 이 놈아, 난 어려서 공부를 하고 싶어도 집이 가난해 공부를 하지 못했다. 아침을 먹으면 저녁쌀을 근심해야 해서 난 여덟살부터 그렇게 가고 싶은 학교도 가지 못하고 아주머니 기음을 맬 때면 앞에서 밭고랑의 풀을 뽑았다. 열세 살부터는 가대기질도 했다. 어려서 공부를 하지 못했기에 이렇게 한뉘 농사를 지으면서 별의별 고생을 다 하면서 산다. 넌, 얼마나 좋니? 무슨 근심이 있니? 너를 일하라 하니? 공부만 잘 하면 되는데 어째 배불리 먹고 배때 쑤셔나서 학교에도 가지 않니?” 덕돌은 아버지의 엄한 눈길을 피하면서 머리를 숙이며 목구멍으로 기여 들어가는 소리로 “잘못했습니다.”라고 겨우  대답했다. 상순은 아주 엄숙하게 말했다. “공부를 잘 하지 않으면 별수 있니? 한뉘 소 궁둥이나 쳤지. 학교로 가지 않겠으면 오늘부터 이 밭에 똥을 메 내라." 덕돌은 울상을 지으며 눈물을 줄줄 흘렸다. "어쩌겠니? 학교로 가서 공부하겠니? 날마다 똥을 메 나르겠니?” “학교로 가겠습니다.” 덕돌이 눈물을 흘리며 어깨까지 들먹이는 것을 보자 상순은 덕돌의 어깨를 다독이며 무거운 입을 열었다. “내 공부만 했으면 현장이라도 했겠다. 넌 내 하지 못한 몫까지 공부하면 안 되겠니? 넌 전도가 창창한 애다. 내 몫까지 공부를 잘 해라. 부탁이다. 네가 공부를 잘해 한뉘 소 궁둥이를 치지 말았으면 얼마나 좋겠느냐?” 덕돌은 아버지 말에 흐느껴 울었다. “아버지, 잘 못했습니다. 이젠 학교로 가서 공부를 명심해 하겠습니다.” 상순은 덕돌을 품에 꽉 끌어안고 머리를 쓰다듬어주면서 신신당부했다.        "그래야지, 이제야 내 아들답구나. 나처럼 한뉘 후회하지 말게 공부를 잘해라.”       “예.” 그들 부자간이 남산의 비탈 밭을 내릴 때는 이른 아침 해가 동산에서 두둥실 떠올라 대지를 환히 비추었다. 덕돌은 마을에 들어서면서도 마음 속으로 부모를 애먹이지 않고 공부를 잘하겠다고 다지고 또 다지었다. (이제 연변에 나가면 본때나게 공부해야지.) 열흘도 되지 않아 은숙한테서 친혈육의 정이 담뿍 담긴 편지가 날아왔다. “…부모형제들 쌀 고생, 마음고생 하지 않는다니 이 둘째딸은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습니다. 한편 덕돌이 안쪽에 가서 공부하기 힘들다고 하니 마음이 아픕니다. 우리 집에 하나 밖에 없는 남동생을 공부를 잘 시켜야 합니다. 덕돌을 보내시오. 내 책임지고 우리 집에서 공부를 시키겠습니다…” 그 편지를 읽으면서 덕돌은 감사한 마음에 눈물을 주르르 흘리면서 친형제의 뜨거운 정을 느꼈다. 물보다 피가 더 짙고 피보다 짙은 것은 정이 아닌가! 아버지와 어머니도 한시름을 놓은듯이 한숨을 후 내쉬었다. 춘자는 밥상을 가져다 놓고 함흥중학교에 있는 동창생들인 경산과 성환 그리고 황승연에게 편지를 써 보냈다. 편지마다에 동창생들의 우정을 먼저 간단히 말하고 남동생 덕돌이 함흥중학교에 되나가니 잘 가르쳐달라고 부탁했다. 어머니는 덕돌의 손을 붙잡고 신신당부했다. “외지에 가서 공부하노라면 여러 모로 어려운 점이 많을 거야. 누나를 애 먹이지 말고 공부를 잘해라.” 어머니가 눈물을 흘리면서 하는 말을 덕돌은 가슴 깊이 아로 새겼다. “나도 어지간하면 너를 보내지 않겠다. 네 앞날을 망칠까봐 모진 마음을 먹고 누나네 집에 보낸다.” “꼭 최우등을 할 테니 근심하지 마십시오.” 덕돌은 어머니가 주는 단돈 5원에 쌀 한 주머니를 가지고 떨어지지 않은 걸음으로 연변으로 떠나가게 됐다. 그는 부모와 누나들과 갈라지기 아쉬운 대로 연변 고향으로 나가야만 했다. 용대랑 용구랑 현준이랑 광순이랑 아쉬워하면서 덕돌을 바랬다. 성숙과 은자는 쌀주머니를 번갈아 이면서 교하역에까지 가서 바래었다. 뜻밖에도 왕춘영이 교하역에까지 따라 와 눈물을 흘리면서 덕돌의 손을 잡고 애원하지 않겠는가. “연변에 가지 말라.” 누나네는 덕돌을 흘겨보았다. “못된 쇄지 뿔부터 난다더니. 쯧쯧쯧." "쓸데없이 가시나들부터 친하지 말라." "연변에 나가면 공부나 잘해라. 알았지?” 허나 덕돌은 누나네 말에는 개의치 않고 개찰구로 나가면서 왕춘영에게 머리를 돌렸다. “내 이제 대학에 붙으면 너를 찾아올게.” 그는 무거운 한마디 남기고 무정한 열차에 올랐다. 천천히 미끄러져 가는 차창 밖으로 성숙과 은자가 보였다. 아니, 저게 뭐야? 춘영이 플래트홈에까지 나와 뛰어오며 처량하게 손을 흔드는 것이 아니겠는가? 덕돌은 코마루가 시큼해나 일어나 차창 밖으로 머리를 내밀고 내다보았다. 춘영은 손을 흔들면서 뛰어오다가 허망 넘어진 채 손으로 눈물을 닦으며 무정히 달리는 열차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덕돌이 아무리 차창 밖으로 머리를 내밀고 눈 뿌리 빠지도록 보아도 시야에서 춘영의 모습은 훌 무정하게 사라지고 말았다…                        8. 교정의 종소리      소낙비가 언제 쏟아 졌나 시피 먹장구름이 드리웠던 하늘이 맑게 개이면서 동쪽 벌판에 칠색무지개가 곱게 걸려 패용천산 앞 큰 도랑물에 거꾸로 비끼었다. 이슬은 해빛을 한오리 한오리 꿰여 황홀한 칠색비단을 드리우고 황홀한 꿈의 세계로 무지개-아치교를 놓아주었다. “빨리 나가 고기를 잡자. 물이 흐리면 꼭 미꾸라지가 많을 거야.” 덕돌은 성욱과 함께 바삐 다리 밑에서 나갔다. 덕돌이 반디를 대고 성욱이 발을 쿵쿵 굴러 물고기를 반디 쪽으로 쫓았다. 덕돌이 반디를 드니 미꾸라지가 한 종지씩이나 나왔다. 비온 뒤 물고기가 많이 나와 덕돌은 반디 질을 하는 재미가 좋았다. “아차, 큰 고기 든 거 같다.” 덕돌이 반디를 들면서 하는 말에 성욱은 “거 어떻게 아니?” 하고 호기심에 찬 눈길로 반디를 들여다보았다. “아이야, 뱀이다! 뱀!” 덕돌은 소리치더니 “이걸 어쩌니?” 하며 제꺽 반디를 감아쥐었다. 성욱은 미꾸라지를 반 초롱이나 담은 초롱을 들고 따라 도랑둑으로 나갔다. 덕돌은 양미간을 찌푸리더니 “옳다. 이대로 집에 가지고 가서 가마에 삶아서 돼지를 먹이자.”라고 했다. 성욱은 섬직해 “그 가마에 어떻게 밥을 해먹니?” 하고 짧은 목을 움츠리었다. “그럼 우리 누나네 집 가마에 삶아 우리 돼지를 먹일게.” “그래라.” 그들은 덕돌의 누나네 집으로 뱀을 감아쥔 반디를 들고 갔다. 모두 일하러 가고 집에는 누나도 매형도 없었다. 덕돌은 성욱을 보고 “가마 덮개를 열어라.”라고 했다. 성욱이 가마를 여니 돼지죽이 절반이나 차 있었다. 덕돌은 가마에 다가가 반디를 스르르 풀었다. “뱀이 가마에 떨어지자마자 제꺽 가마뚜껑을 닫아라!” “응.” 덕돌이 반디를 가마 안에 넣고 슬슬 풀었다. 뱀이 가마 안에 뚝 떨어지자마자 성욱은 뚜껑을 찰강 닫아버렸다. “이젠 됐어.” 덕돌은 부엌에 내려가 아궁이에 벼 짚을 쑤셔 넣고 불을 지폈다. 한참 있으니 김이 쌕 나면서 가마뚜껑이 무엇엔가 툭툭 맞히는 소리가 났다. “뱀이 데 죽는 모양이야.” “하하하.” 한참 후 가마를 살그머니 열어보니 부글부글 끓는 돼지죽 위에 꼬불꼬불한 뱀이 푹 삶겨져 있었다. 바가지로 툭툭 건드려 보니 확실히 죽었다. 덕돌은 삶은 뱀을 바가지에 퍼서 돼지 굴에 가지고 가서 돼지구유에 쏟아 놓았다. 그러자 돼지는 꿀꿀 거리며 다가가더니 아주 맛있게 한 입에 다 먹어 버렸다. 덕돌은 배짱도 있고 시원시원한데 비하여 콩알 눈인 성욱은 꼭 다문 입처럼 속이 꽁해 쩍하면 잘 앵돌아졌다. 그러나 그들 둘은 성미는 달라도 친척이어서 그런지 늘 잘 어울려 다니곤 했다. 한번은 낙제생인 원순이가 성욱의 새 모자를 빼앗아 가지고 달아났다. 그때 성욱이 따라 달려가면서 모자를 돌려달라고 했다가 원순에게 얻어맞았다. 그러자 덕돌과 성욱이 달려들어 한쪽다리씩 들어 건뜻 들어 메쳐놓고 모자를 되찾았다. 성욱과 덕돌은 늘 같이 다니면서 단짝이 됐기에 아이들의 업신여김을 덜 받았다. 둘째매형 경만은 덕돌에게 특별한 관심을 보였다. 교하에서 조개덕에 올 때도 수레를 몰고 와서 마중해 덕돌과 쌀을 실어왔고 책도 매주었다. 쌀 고생을 어찌나 많이 했던지 경만은 아내와 함께 마당에 자란 청수수를 베여 낟알을 털어내 말리었다. 허나 그 수수가 마르기도 전에 쌀이 다 떨어졌다. 은숙은 부득불 돌도 되지 않은 둘째딸 주옥을 업고 방아에 청수수를 쪘다. 수수가 채 마르지도 않아 방아에 묻어나면서 잘 찧어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은숙은 오전부터 진종일 방아를 찧어서야 여나무근 되는 수수쌀을 얻어냈다. 은숙은 그 청 수수쌀로 죽이라고 쑤어놓았다. 그런데 죽이 목에 걸려 덕돌은 속으로 눈물과 함께 삼켰다. 그런 어려운 형편에서도 덕돌은 공부는 잘해 학습위원으로 됐다. 그것도 매 학과목 평균 성적이 98점 이상이었다. 그중 수학과 물리, 화학 평균성적은 100점이나 됐다. 하지만 덕돌은 항상 낙제생 큰애들에게 얻어맞았다. 매형 경만이나 양형님 수봉에게 말하면 원순이랑 철주랑 광일이랑 시간에 덕돌의 잔등에 잉크를 쳐놓는가 하면 여자애들이 보는데서 더 놀려주었다. 그리하여 덕돌은 학교에서 머리를 들고 공부하기 어려웠다. 그때마다 수봉과 경만은 덕돌의 역성을 들곤 했다. 한번은 학교에서 전 교 수학콩쿠르를 벌렸다. 성욱은 덕돌의 옆에 딱 붙어 앉아서 덕돌의 시험지를 처음부터 몽땅 베껴 썼다. 결과 성욱은 덕돌과 함께 1등상을 탔다. 그것도 어느 문제 답안이나 똑같았고 성적도 똑같이 100점으로 1등을 했던 것이다. 그런데 성욱은 덕돌의 덕분에 1등상을 타고서도 차츰 덕돌을 질투하기 시작했다. 이런 형편에서 덕돌은 두번째 수학 콩쿠르 때에는 성욱과 갈라 앉았다. 물이 가라앉자 물에 가리었던 돌이 수면에 드러났다. 결과는 불 보듯 빤했다. 덕돌은 그번 수학 콩쿠르에서 2등을 했지만 성욱은 등수에 들지 못했을뿐만 아니라 한 문제 밖에 풀지 못했다. 그때부터 성욱은 덕돌과 나란히 앉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덕돌이 자기와 나란히 앉아 시험지를 보였더라면 그래도 2등은 했겠는데 말이다. 한번은 성욱이 교실에서 발딱 일어나면서 소리쳤다. “선생님, 덕돌은 학습위원 자격이 없습니다.” 애들의 눈길이 일시에 성욱에게 쏠렸다. “어째?” 황승연의 물음에 성욱은 터무니 없는 소리를 했다. “전번 수학콩쿠르 때 내 시험지를 다 보고 써서 2등을 했습니다. 덕돌은 학교 나무도 수태 꺾었습니다.” 덕돌은 너무 억이 막혀 일어나 되물었다. “내 언제 네 시험지를 보고 썼니? 네가 내 시험지를 보고 썼지. 또 언제 나무를 꺾었니?” 성욱은 질투의 불길로 타오르는 눈길로 덕돌을 쏘아보다가 주먹을 한 대 날렸다. 그때 덕돌이 팔을 들어 막으면서 한주먹을 안겼다. “손을 떼라!” 황승연 담임이 고함치면서 다가왔다. “시간에 이게 뭐야? 덕돌은 참아야지. 학습위원이라는게 뭐야?!” 덕돌은 머리를 숙이면서 “잘못했습니다. 선생님.”라고 했다. 짙은 눈썹아래 쑥 패어들어 간 우멍눈, 날이 선 코. 황승연 선생님을 보기만 해도 덕돌은 겁부터 났다. 그 일이 있은 뒤 덕돌과 성욱은 서로 소 닭 보듯 했다. 덕돌은 그래도 어깨동무이자 9촌 조카라고 성욱과 더 싸우지 말려고 했다. 하지만 성욱은 상선이랑 자기 집에 데려다 놀면서 덕돌의 흉을 한바탕 보면서 따돌리자고 했다. 신록이 짙어가고 무더위가 쏟아지는 여름이 지나가고 선들선들한 가을바람이 불어왔다. 덕돌은 태평강 가에 이르자 채발로 고기잡이를 하던 성욱이랑 상선이랑 애들의 옷을 걷어안고 저쪽으로 달아났다. 덕돌은 그제날 활동참 단장을 하던 애 답지 않게 친구들을 잃고 말았다. 그때 철주가 채발과 비닐초롱을 들고 저쪽에서 흥얼거리면서 다가왔다. “너 따돌림을 당했지?” “아, 아니야.” 덕돌은 그제날 성욱과 함께 철주와 원순의 두 다리를 들어 메 치고 때린 일이 생각나 얼버무렸다. 한편 그는 공부도 잘 못하고 남의 해바라기랑 딱총이랑 훔친 철주와 놀기 싫었다. “야, 외목에 날게 뭐야? 나와 친하겠니?” 철주의 말에 덕돌은 저 멀리에서 히히거리는 성욱이랑을 보며 머리를 끄덕였다. 덕돌은 철주를 따라 태평강에 들어가서 고기잡이를 하기 시작했다. 잔잔히 흐르는 태평강 물에는 병풍처럼 둘러선, 깎아지른 벼랑이 치솟은 패용천산이 거꾸로 비꼈다. 철주가 발을 대자 덕돌이 강물에서 발을 굴러 고기를 쫓았다. 철주가 발을 들자 하얀 모래무치와 버들치가 팔딱팔딱 뛰었다. 한참 물고기 잡이를 하면서 그들은 어느덧 칼산기슭의 과수원 옆에까지 이르렀다. 주렁주렁 달린 노란 배들이 싱그런 향기를 풍기었다. 덕돌은 닭 알 군침을 꼴깍 삼켰다. “덕돌아, 더운데 저 배를 뜯어먹자.” 덕돌은 덴겁해 “얘, 들키면 큰일 날 게 아냐? 그만두자.” 하고 뒤로 물러섰다. “일없다. 난 도적질에 이골이 텄으니까. 들킬까 봐 근심하지 마.” 그래도 자리를 뜰 염을 하지 않는 덕돌을 보고 철주는 바투 들이댔다. “너 정 재미없이 놀면 나까지 널 외목에 낸다.” 그 말에 덕돌은 마지못해 따라나섰다. 그는 철주를 따라 살금살금 강냉이 밭을 꿰질러나가 배 밭에 숨어들어갔다. 그들 둘은 쥐처럼 배나무에 기어 올라가 주먹만큼 한 배를 뜯어 적삼 앞가슴에 불룩하게 넣었다. 덕돌은 두 다리와 손이 바들바들 떨리었다. 심장이 콩콩 뛰어 밖으로 튀어 나올 것만 같았다. 덕돌과 철주가 배를 가득 뜯어 넣고 태평강 쪽으로 다가올 때다. 저 멀리에서 빨래를 하는 순희랑 보였다. “저 애들에게 배를 나눠 줄까?” 덕돌도 맞장구를 쳤다. “옳다. 순희랑 우리 편이 되게 하자.” 그들은 그대로 마을에 들어갈 수 없어 태평강 가의 버드나무 밭 모래를 파고 배를 파묻었다. 그리고 서너 개씩만 쥐고 가서 순희랑 인옥이랑 또래 여자애들에게 나눠주었다. “이 배는 어디서 훔쳤지?” “아니야, 6촌 형님한테서 가진 거야.” “응, 옳다. 함흥촌의 과수원은 덕돌네 6촌형이 지킨다더라.” 철주도 맞장구를 쳤다. 덕돌이 앞가슴에서 노란 배를 서너 개 꺼내 순희에게 주자 순희랑 생글 웃으며 받았다. 애들은 태평강에 가서 배를 씻어 사각사각 맛나게 먹었다. 그런데 그날 저녁에 큰 경을 치렀다. 농약을 친 줄도 모르고 애들이 배를 먹고 저마다 배를 끌어안고 마구 뒹굴었다. 어른들은 사연을 알고 황급히 손잡이 트랙터에 덕돌이랑 순희랑 싣고 진수해 병원으로 달려갔다. 정규상과 박영발은 “빨리 진수해병원에 가야 애들을 살리오.”라고 했다. 생산대 손잡이 트랙터 운전수 허성훈은 전 속력을 다해 애들을 싣고 밤길을 달려 진수해 병원으로 향했다. 배도적사건이 드러난 후 덕돌은 자연히 학습위원직을 철직 맞을 위기에 처했다. 설상가상으로 사건은 연속 생겼다. 어느 날, 애들은 보슬비가 쏟아지는 싸늘한 날씨를 피해 학교 동쪽에 가서 뛰놀았다. 그런데 종이 울린 줄도 모르고 계속 놀았다. 담임 황승연은 함흥대대 혁명위원회 주임을 찬탈한 황종연의 동생이었다. 그는 덕돌이 상순의 아들이라고 눈에 든 가시처럼 여기는 터였다. 그런데 오늘 때마침 잘 걸려들었던 것이다. 황승연은 학교 동쪽에 와서 숱한 애들과 함께 뛰노는 덕돌을 보고 꽥 소리쳤다. “종이 울렸는데도 계속 놀 테냐?!” “아야, 종이 울렸구나.” 덕돌은 당황해 이렇게 외치며 황승연의 날이 선 코 위 독기서린 눈길을 보면서 질겁해 하며 교실로 뛰어 들어갔다. 애들은 모두 교실로 찍 소리치지 못하고 쓸어 들어갔다. 승연은 교실에 들어오자마자 교편으로 교탁을 탕탕 치며 꽥꽥 고함쳤다. “덕돌아, 일어서!” 덕돌은 잘 못 걸렸구나 생각하며 머리를 숙이면서 일어섰다. “너 종이 울린 거 들었니? 못 들었니?” “못 들었습니다. 지각해서 잘못했습니다.” “그러면 단가? 노실하지 못한 새끼, 어디 혼나봐라!” 승연은 “위응과 철복도 서라! 너네는 종이 울린 걸 듣지 못했니?” 하고 물었다. 위응은 덕돌이 사실 대로 말했다가 혼나는 것을 보고 인차 “들었습니다.”하고 거짓말로 대답했다. “음, 로실하구나. 넌 앉아라!” 약삭빠른 철복도 당연히 들었다고 대답하고 자리에 앉게 됐다. 그런데 승연이 덕돌에게 다시 물어도 역시 지각한 것은 잘 못했지만 종소리 나는 건 정말 듣지 못했다고 했다. 그러자 승연은 독기 서린 우멍눈으로 쏘아보며 덮쳐오더니 덕돌을 마구 책상에 짓 쪼아 놓고 주먹으로 때렸다. 덕돌은 코피가 터져 책상에 피가 질벅했다. 순희랑 미선이랑 차마 그 참경을 볼 수 없어 책상에 머리를 파묻었다. 덕돌이 맞을 때마다 여기저기서 여학생들이 비명을 질렀다. 승연은 때리고서도 성차지 않아 당장에서 처분결정을 내렸다. “덕돌의 학습위원직을 철직한다. 대신 성욱을 학습위원으로 임명한다.” 그는 덕돌을 질투하는 성욱을 버쩍 추켜올리고 덕돌의 얼굴에 먹칠을 해놓기 시작했다. “성욱은 덕돌보다 공부를 더 잘한다. 이전에 덕돌이 수학 콩쿠르에서 1등한 것도 모두 성욱의 시험지를 베껴서 쓴 거야. 어쩜 시험 답안이 성욱의 답안과 똑같단 말이냐?” 덕돌은 너무나 억울했다. “선생님, 난 학습위원을 하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허나 성욱의 답안을 베낀 적이 없습니다.” 덕돌은 성욱이 그래도 9촌 조카라고 성욱이 자기 답안을 베낀 것은 숱한 애들 앞인지라 말하지 않았다. 이때 성욱이 일어나 덕돌을 손가락질하면서 교실이 떠나가게 소리쳤다. “덕돌이 내 답안을 베꼈습니다. 이건 사실입니다.”       덕돌은 피 묻은 손가락으로 성욱을 손가락질 하며 어처구니없어 했다. “얘, 네가 이런 말을 할 처지냐?” “친척이고 뭐고 모르겠다.” “옳다. 친척이고 뭐고 사실대로 말한 성욱이 잘 했다.” 승연은 성욱과 덕돌 사이에 붙는 불에 키질했다. 순희랑 미선이랑 덕돌이 억울하다고 떠들었다. 덕돌은 아무리 말해도 버선목이라고 번져 보일 수 없었다. 진짜 만두 먹은 벙어리 처지로 되고 말았다. 그저 속으로 꼭 이담 성욱보다 공부를 더 잘해 대학에 가는 것으로 누가 진정 자기 성적인가, 누가 누구의 시험지를 베꼈는가를 증명해 보이려고 마음먹었다. 집으로 돌아가는데 덕돌은 해쭉거리는 성욱 그리고 오류분자 리달송의 아들 이응을 보았다. 그때 철주가 다가와 덕돌에게 나직이 쑹얼거렸다. “야, 네가 나떨어지니 성욱이 새끼 박수까지 치더라. 그냥 놔두지 말자.” 철주의 말에 덕돌은 주먹을 으스러지게 쥐었다. 철주는 덕돌을 끌고 고추밭에 들어가 빨간 고추를 뜯어 그 즙액을 손에 바르게 했다. 덕돌과 철주는 준비가 끝나자 성욱이네를 쏜살같이 쫓아갔다. “서라, 개새끼들아, 오늘 맞아봐라!” 덕돌이 꽥 소리치며 덮쳐들어 성욱의 눈통을 잽싸게 쳤다. 성욱은 눈이 아려 눈을 싸쥐고 맴돌았다. 그때 상선이가 덕돌에게 덤벼들었다. 옆에 있던 철주가 상선을 막아 귀 쌈을 짱 갈겼다. 그러자 상선이가 철주의 턱주가리를 헤딩했다. 덕돌이 손바닥으로 성욱의 눈 통을 짱 갈겼다. 고추 발린 손에 눈 통을 맞은 성욱은 눈을 뜨지 못해 물매를 맞았다. 담배 밭에서 일하던 경학이 갑자기 뛰쳐나왔다. 그 바람에 덕돌과 철주는 혼비백산해 달아났다. 그날 저녁에 성욱은 부모에게 야단맞았다. “뭐야? 친척끼리 싸우다니?” 성욱이 자기 좋은 소리를 하자 경학은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고놈 새끼, 굴러 온 돌이 배긴 돌을 뺀다고 공부를 잘 한다고 너를 업신여겨?” 덕돌은 연변으로 나올 때 아버지와 어머니가 하던 부탁을 생각한데다가 둘째 누나와 매형이 자기 때문에 고생하는 것을 생각하고 공부를 열심히 했다. 한편 날마다 누나를 도와 아침과 저녁으로 불을 때고 외 조카 혜옥과 주옥도 업어주면서 도와주었다. 그런데 겨울인데도 덕돌은 솜옷을 가지고 온 것이 없어 추워 기침을 쿨룩쿨룩 깇었다. 나중에 가래를 뱉으면 피가 묻어 나왔다. 덕돌이 돌을 던지며 운동하던 곳을 돌아보던 경만은 놀라 은숙에게 알렸다. 은숙은 깜짝 놀라 바깥에 뛰어나와 덕돌의 손을 잡고 물었다. “얘, 언제부터 피 나왔니?” “한 보름 되오?” “뭐라니? 그럼 왜 진작 말하지 않았니?” 은숙은 주옥을 업고 덕돌을 데리고 정규상을 보이러 토성안집의 위생소로 찾아갔다. 대대 혁명위원회 간판을 버젓이 건 위생소에서 무슨 옥신각신 소리가 들렸다. “당신, YB병원에서 우파 모자를 쓰지 않았소? 여기 와서 그간 위생소 소장을 했으면 과분하지. 이젠 박영발 서기한테 소장을 시키겠소. 정규상 우파는 이제부터 돼지 똥이나 모으란 말이오. 빈농에게서 재교육을 잘 받으란 말이오.” 정규상은 소침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위생소에서 나왔다. “저기, 정 선생, 얘 병을 봐주십시오.” 그러자 정규상은 뒤에 따라 나오는 종연과 박영발의 눈치를 흘끔 보았다. “어째, 아프오? 아프면 이젠 박 소장한테 보이오. 난 병을 보지 못한다오.” 은숙은 아버지와 할아버지에게서 정규상 의사가 용하다는 말을 듣고 기어이 정 선생에게 보이려고 졸라댔다. 그때 종연이 마루에 나와 허리에 두 손을 지르더니 혁명위원회 주임 틀을 차리면서 정규상을 쏘아 보며 을러멨다. “정 우파는 거기서 뭘 하는가? 얼른 가서 오류분자 리달송과 함께 돼지 똥이나 줏지 못하겠소?” “예?” “아직도 꾸물거리겠는가?” 정규상은 어정쩡해 서 있다가 물었다. “리달송은 일제 때 용정통감부 간도파출소 일본통역인데 나를 어찌 그런 일본주구 놈 취급을 한단 말이오?” 종연은 정규상의 눈길이 곱지 못한 것을 보고 발을 탕 구르며 을러멨다. “뭐라고?! 정 우파는 반당분자이기에 옛날 지주나 통역보다도 더 악독한 현행반혁명분자야! 무산계급전정의 타도 대상이란 말이야! 썩 물러가 돼지 똥이나 백 수레를 주으란 말이야.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면 네놈의 대가리를 둼 무지에 거꾸로 심어놓을 테다!” 박영발은 위생소 유리창문으로 내다보며 깨고소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김상순 서기를 믿고 이 마을에 왔었다. 하지만 정작 와보니 상순은 기운 달과 같았고 흥수가 살판 치는 것을 보고 상순을 따르지 않고 점차 흥수한테 붙었다. 허나 흥수도 맥을 추지 못하는데다가 상순마저 교하로 이사해가자 반란파 종연한테 철썩 달라붙어 입당소개인이 돼주었다. 종연이 혁명위원회 주임으로 올라갈 때는 슬그머니 막후에서 “정치고문”을 서 주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종연은 박영발을 치하해주었다. “박 서기는 세상물정을 아는구먼. 당신, 정치표현이 아주 좋소. 지금 반란파들의 세상인데 그까짓 시들어가는 노간부들을 보호해 보았자 밥이 나오오? 사형장에 끌리어 가지 않으면 감옥에 가고 노동개조를 하지 않으면 돼지 똥이나 주어야 하지.” 박영발은 속으로 자기보다도 스무 살이나 어린 20대 반란파 두목 종연을 건달 같은 놈이라고 욕하였다. 허나 혁명위원회 주임 종연에게 달라붙어야 노동개조도 덜 하고 위생소에 들어박혀 병이나 보고 어려운 세월을 넘길 것 같았다. 종연은 박영발의 그런 속내까지는 모른 채 홱 달라진 정치표현을 보고 계속 횡설수설했다. “박 서기, 대대혁명위원회에 대한 충성심을 봐서 박영발 서기를 우리 대대 위생소 소장으로 임명하겠소.”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박영발은 허리를 굽신거리면서도 뒷말을 다는 것을 잊지 않았다. “헌데 정규상 의사는 어쩌겠습니까?” “근심하지 마오. 그 놈은 돼지 똥이나 주어라면 되지. 근심할게 있소? 정치표현이 아주 나빴단 말이오. 이전부터 병완 영감과 상순 서기한테 찰싹 붙어서 내가 혁명위원회 주임으로 올라가는 걸 얼마나 반대했다고?” 이렇게 돼 오늘 정규상은 위생소에서 쫓기어 나가 돼지 똥을 줏게 되었던 것이다. 윤희는 창문가에 서서 측은한 눈길로 정규상을 내다보았다. 은숙은 정규상을 욕보이지 않으려고 덕돌을 데리고 위생소에 들어갔다. 정규상은 먹장구름이 뒤덮여 흐리터분한 하늘을 쳐다보며 땅이 꺼지게 한숨을 후 내쉬더니 머리를 수깃하고 토성안 대대사무실 마당에서 나가버렸다. 박영발은 덕돌의 가슴에 대고 청진기를 대보더니 놀라했다. “아니, 폐염에 걸렸구먼. 허나 약을 좀 쓰면 되오.” 그때 주사실에서 박윤희 간호사가 건너와 아양을 떨었다. “아니, 이게 김 서기네 아들딸이 아닌가요? 어쩜 김 서기는 이렇게 예쁘고 칠칠한 아들딸을 두었어요?” 그녀는 부끄럼을 타는 덕돌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계속 했다. “이 부리부리한 눈이랑 보오. 딱 김 서기를 답지 않았소?” 그러자 옆에 서 있던 종연이 두덜거리었다. “노처녀 돼 그러오? 걔가 뭘 잘 났다고 그러오? 새애기처럼 곱게 생겨 뭘 하오? 무골충처럼 애들에게 놀림만 당한다던데.” 박영발은 처방을 떼더니 먼저 덕돌에게 마이시린 주사를 맞으라고 했다. 덕돌이 주사를 맞으러 갔을 때었다. 종연은 덕돌이 들어온 줄도 모르고 주사실에서 윤희의 엉덩이를 툭툭 치면서 쌍소리를 하며 지분거렸다. “주사 맞으러 왔니?” 윤희는 덕돌을 보자 종연의 손을 밀치며 주사를 놓으려고 서둘렀다. 그제야 종연은 윤희한테서 물러서면서 자기 흥을 깼다고 그러는지 덕돌을 곱지 않은 퉁방울눈으로 흘겨보았다. 덕돌은 기침을 쿨룩쿨룩 하면서 점심마다 토성 안 위생소에 와서 주사를 맞았다. 허나 기침이 좀 나을 뿐 계속 가래에 피가 묻어나왔다. 그때 은숙은 덕돌을 데리고 가만히 조개덕 생산대 식당자리에 있는 정 의사를 찾아가 덕돌의 병을 봐달라고 했다. 정규상은 돼지 똥을 줏던 작은 삽을 놓고 사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여기 오는 걸 누가 본 사람이 없소?” 하고 물었다. “없습니다. 덕돌을 살려주십시오.” “집에 들어가기요.” 정규상은 황급히 돼지 똥 초롱과 삽을 든 채 집 문을 떼고 들어갔다. “내 병을 봤다는 걸 알면 야단나오.” 은숙은 “본 사람이 없습니다. 전번에 박 서기한테 보이니 페염이라고 합디다. 주사를 며칠 맞혔는데도 계속 가래에 피가 묻어나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정규상은 덕돌의 손목을 짚고 맥을 보더니 “페염은 옳소. 중약을 써야 하겠소. 내 처방을 떼 줄 테니 진수해 병원에 가서 중약을 지어다가 달여 먹이오.”라고 했다. “감사합니다.” 은숙은 정규상의 처방을 받아 쥐자마자 애를 업은 채로 진수해 병원에 헐금씨금 달려가서 약을 지어다가 풍로에 달였다. 그런데 돼지 똥을 줏느라고 돌아다니던 이달송이 은숙이네 마당을 지나다가 은숙과 덕돌이 풍로에 중약을 달이는 것을 보았던 것이다. 은숙은 개의치 않고 중약을 달였다. 정규상의 약 세 첩을 달여 먹였는데 기적적으로 덕돌의 가래에 피가 묻어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이달송이란 자가 은숙이네 중약을 달인 일을 박영발한테 밀고할 줄이야. 그 바람에 등줄이 달아오른 박영발은 공사병원에 달려가 은숙이 중약을 지어간 처방을 들춰내 정규상의 필적을 확인하고 돌아왔다. 그는 위생소 소장 몰래 우파 정규상이 병을 마음대로 보고 약 처방을 뗀 일을 고발했다. 그 일로 해 정규상은 조개덕생산대 우사에 소들과 함께 갇혀 날마다 소 똥과 돼지 똥을 쳐내고 밤에는 투쟁맞고 소들과 함께 북데기를 쓰고 자야 했다. 그는 낮에는 돼지 똥을 주어 모으면서 노동개조를 하지 않으면 안 됐다. 대신 이달송은 고발한 공로로 돼지 똥 임무를 백 수레로부터 50수레로 줄일 수 있게 됐다. 덕돌은 페염이 치료돼 건강한 몸으로 공부를 잘해 기말에 최 우수생으로 됐다. 수학콩쿠르에서 덕돌은 백점으로 1등, 그것도 아주 풀기 어려운 참고문제까지 몽땅 풀어 만점으로 1등을 했던 것이다. 어문 성적은 그의 모든 학과목 성적에서 제일 낮았지만 역시 다른 과문과 마찬가지로 최우등을 했다. 특히 작문을 어찌나 멋있게 썼던지 김경산 선생은 한 학년의 다른 학급에 다니면서 덕돌의 작문을 참고하라고 읽어주기까지 했다. 한어는 더 말할 데 없었다. 교하에서 한족학교를 다니다가 온 덕돌은 한어로 대화도 술술 하고 과문은 통째로 줄줄 한어로 이야기 할 정도로 통달했던 것이다. 비록 학습성적은 올라갔지만 덕돌은 한번 지각했다가 승연에게 혼난 후 몇해 동안이나 승연에 대한 공포증으로 시달렸다. 그는 교정에서 뛰놀다가도 종소리만 들으면 신경을 도사리고 교실로 뛰어 들어가곤 했다. 덕돌의 대신 학습위원으로 된 성욱의 학습 성적은 덕돌과 비하기도 어렵게 훨씬 낮았는데 전 학급에서 중상류에 속했던 것이다. 은숙과 경만은 입이 하나 불어 쌀고생에 힘들었지만 덕돌의 진보에 기뻐 힘든줄 몰랐다. 그러나 정규상 의사가 덕돌의 페염을 치료해주었다고 대대 혁명위원회의 처벌을 받아 돼지 똥을 모으면서 수모를 당하는 것을 보고 미안해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었다.         9. 우국우민의 충정 내자산탄광의 하늘을 찌르며 아찔하게 솟아오른 버럭 산에서는 불길이 활활 타오르고 버럭을 실은 차가 연신 소철을 타고 버럭산 꼭대기로 올라가 버럭 돌을 버렸다. 그때마다 숱한 버럭 덩어리가 가파른 버럭 산꼭대기에서 굴러 내려오면서 깨져 돌 속에 숨은 석탄을 굴려내려 보냈다. 상순을 비롯한 마을 사람들은 위협을 무릅쓰고 버럭 산 아래로 가서 버럭 차가 올라와 버럭 돌을 부리어놓고 내려오는 틈을 타서 버럭 속의 석탄덩이를 주어 수레에 담았다. 그렇게 온 하루 모으면 몇 버치는 돼 땔 근심을 하지 않아도 됐다. 상순이네 황하전자에 온지도 어언간 한해가 다 지나가고 새해 봄이 다가왔다. 아직도 날씨는 아주 쌀쌀했지만 버럭 산에서 활활 타오르는 불길의 화기로 해 추운 줄을 몰랐다. 며칠 전에 선후하여 이계삼 서기와 허영주 부 현장한테서 눈물겨운 편지가 왔던 것이다. 편지에서 두 노간부는 함흥대대 반란파들이 당지부를 말살하고 유명무실하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혁명위원회 주임이며 반란파 두목인 황종연이 새까만 정치를 하고 있는 살벌한 정황을 죽 쓰고 나서 상순을 보고 현실을 도피하지 말고 함흥대대에 돌아오라고 했다. 상순은 망치로 버럭덩이를 땅 쳐 깨 석탄을 주어 버치에 담으면서 긴 한숨을 후 내쉬었다. (황화전자 남새생산대에 있으면 쌀 고생과 마음고생 하지 않고 땔나무근심을 하지 않아 좋긴 좋은데.) 상순은 허리를 펴고 버럭 산 저쪽 산기슭 아래 무연하게 펼쳐진 검은 논을 내려다보면서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하지만 나를 양성해준 이 서기와 허 현장을 사지에 놔두고 좌시할 수는 없지 않은가?” 상순은 이런 생각을 굴렸다. (황차 덕돌은 여기 한족학교에서 공부를 할 수도 없고 딸애들을 한족 집에 줄 수도 없지 않는가?) 여기까지 생각하자 상순은 석탄을 그만 줏고 수레를 몰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가 자기 생각을 아내와 말하자 아내는 기뻐 야단쳤다. “잘 생각했소. 애들 전도를 봐서라도 연변에 나가기요.” 허나 춘자와 홍자는 말리었다. “여기 오라고 한 나를 망신시키지 마십시오.” 춘자는 성이 나 펄펄 뛰었다. 상순은 춘자를 보고 말했다. “이 일은 체면이 아니라 숱한 사람들의 운명과 관계되는 대사야. 내 먼저 연변에 나가 마을 형편을 두루 살펴보고 결정하겠다.” 춘자는 일단 생각을 잡은 후에는 벽이라도 마구 차고 나가는 아버지 성격을 아는지라 더 말리지 못했다. 명옥은 연변으로 떠나가는 남편에게 희망을 기대하면서 바래었다. “꼭 이사해 나가기요. 종연이랑 좀 입당시키겠다고 얼려 일이 되게 만들어보오.” 허나 상순은 콧방귀를 뀌었다. “흥! 이사를 가지 못하면 못했지. 종연한테 알락거리라고? 원칙도 없이 오뉴월의 소불알달걀처럼 이 볼 쳤다 저 볼 쳤다 하라고? 어림도 없어. 나는 이사를 가도 당당하게 갈 테오.” 허나 명옥은 남편의 손을 꼭 잡고 부탁했다. “어떤 때에는 일이 되게 하자면 종연이랑 스리슬쩍 얼려 넘겨야 하오.” “스리슬쩍 얼려 넘겨? 오호. 그래 그 말은 하던 중에 멋있소. 얼려 넘기기만 하겠소. 나를 받지 않고선 그 놈이 살아남을 수 없지.” 상순의 그 말 뜻을 다 알아듣지 못했지만 명옥은 남편도 꼭 이사해 나가려고 한다는 것만은 알고 한시름 놓았다. 상순은 함흥대대에 돌아오자마자 토성 안 아주머니부터 찾아가 보았다. 아주머니는 딸 순애마저 진수해 음악교원 최수룡에게 시집보내고 홀로 외롭게 살고 있었다. “아주머니, 그간 편안히 계셨소?” 뜻밖에도 지새금은 네 살 밖에 안 되는 외손자 최귀춘을 데리고 놀다가 반가와 어쩔 줄 몰라 했다. “난 생원이 우리를 버리고 영 갔나 했소. 올 봄에는 생원이 없어서 이영을 잇지 못해 어쩌겠는가 근심했소. 그런데 범이 자기 흉을 하면 온다고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겠소.” 상순은 아주머니를 한참 위문하고 나서 옆에 있는 대대 사무실로 들어갔다.         “어머나!”         위생소에서 쓰레받기를 들고 나오던 윤희는 놀랐다. 그녀는 주춤 멈춰 섰다가 생글방글 웃었다. “김 서기, 어떻게 돼 왔습니까?” 상순은 머리를 끄덕이며 인사를 받아 주었다. “누가 왔다고?” 건방진 목소리가 들리더니 조개턱 종연이 길쭉한 머리를 내밀었다. “어, 당신 어떻게 돼 왔소?” “사원들이 다 어데 갔소?” 종연은 심드렁한 표정을 지으면서 냉소했다. "저 패용천산에 갔소. 저기 보오.  돌로 ‘모 주석 만세’를 새기고 있잖소?”  그의 상통에는 상순이 다시 나타난 것을 좋아하지 않는 속내가 환히 드러났다. 박영발은 위생소 창문으로 상순을 보면서도 나와 인사도 하지 않고 신문으로 낯을 가리는 것이었다. (간에 가 붙고 슬개에 가 붙는 자식, 딱 오뉴월에 소불알처럼 이 볼 쳤다 저 볼을 쳤다 하는 놈 새끼야.) 상순도 종연과 영발이 보기 싫어 토성 안에서 성큼성큼 나와 패용천산으로 향했다. 대문어귀에서 되돌아보니 종연이가 윤희의 팔소매를 억지로 끌고 대대 사무실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종연은 윤희를 사무실로 끌고 들어가 을러멨다. “박 간호사, 내 말 듣겠소? 안 듣겠소?” 윤희는 두 손을 싹싹 마주 비비면서 종연이가 무슨 수작을 부리겠는가고 눈치를 살폈다. “어찌 언감 황주임 말을 듣지 않겠습니까?” “그래, 우리 함흥대대에 온 이상 내 말을 잘 듣지 않고 되겠소? 누구 덕에 무더운 여름이나 칼바람이 부는 겨울에 산과 들에 나가 헤매지 않는지 아오?” 종연은 사무 상을 손가락으로 똑똑똑 치면서 윤희 눈치를 살피면서 수작을 피웠다. “아차, 앉소. 여기 앉소.” 윤희는 별 수 없이 종연이 내주는 걸상에 앉았다. 종연은 옆으로 윤희를 째려보았다. “이제 보니 우린 동갑인 거 같소. 둘 다 용띠지?” “어머, 그래요?” 윤희도 위생소에서 쫓기워 날까봐 발라맞추었다. “나는 노총각, 박동무는 노처녀. 우린 천생배필인 거 같소.” 윤희는 눈을 곱게 흘기면서 앵돌아졌다. “처자 있으면서 노총각은 무슨 노총각? 사람을 웃기지 마세요.” 종연은 손으로 윤희의 허리를 슬쩍 끌어안으면서 지껄였다. “애는 있어도 마음만은 총각 마음이오.” 윤희는 겁기 띤 표정으로 종연을 흘끔 곁눈질했다. “왜 이래요? 누가 보겠어요.” “모두 일하러 가고 없소.” 윤희는 걸상에서 엉덩이를 옴찔하면서 옆의 위생소 눈치를 살피더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오, 그래. 옆에 박 소장이 있지. 이제 보니 그 놈을 일밭에 쫓아 보내고 윤희 혼자 소장 겸 의사 겸 간호사를 하면 좋겠다.” 종연은 서뿔리 건드리지 않고 아주 점잔을 빼면서 서서히 윤희에게 다가들고 있었다. 윤희는 종연이 징그럽고 두려웠다. “아니, 전 병을 볼 줄 몰라요. 그저 주사나 놓았지.” “그 놈을 쫓아 내지 않으면 어지간히 불편하지 않겠소?”       종연은  다시 윤희를 와락 끌어안고 걀쭉한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윤희는 종연을 살짝 밀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황주임은 박 소장 지지마저 받지 못하면 어떻게 입당하겠습니까?” 그러자 종연은 걸상 등받이에 잔등을 대면서 머리를 끄덕였다. “아, 옳소. 박영발 소장과 윤희 간호사는 문화대혁명 전부터 어진간한 관계가 아니었다면서?” 한참 무슨 궁리하던 종연은 등받이에서 잔등을 떼면서 헤헤 웃으면서 윤희를 쳐다보았다. “동갑이, 내 입당을 도와주오. 그럼 내 동갑을 영영 위생소에서 일하게 할게.” 윤희는 억지로 웃음을 지었다. “황 주임이 진보하고 입당하려는데 어찌 돕지 않겠습니까?” 윤희는 종연이가 문화대혁명 초부터 국장을 하는 반란파 두목 김용만과 다 한통속이라는 것을 잘 아는 터라 발라 맞추지 않을 수 없었다. 종연은 윤희를 노려보면서 한바탕 열변을 토했다. “고맙소. 허나 절대 림표처럼 양면파 수법을 쓰지 마오. 저 박영발은 양면파 수법을 쓰는 사람이오. 듣자니, 대대 당지부 서기를 선거할 때 모든 당원들 앞에서는 이흥수 서기를 선거하고 나중에 투표할 때는 상순한테 투표했다오. 오히려 정적이나 다름없이 수십 년 싸운 상순이한테 투표했다오. 사람이 어찌 이렇게 의리와 양심을 어기고 논단 말이오.” 갑자기 위생소 쪽에서 박영발의 부름소리가 들렸다. "윤희! 환자 왔소. 얼른 주사를 놓소!”   종연은 목소리를 낮추더니 옆의 위생소 쪽을 흘끔 눈짓하며 헐뜯어댔다. “저 영감은 믿지 못할 사람이오. 윤희는 뭘 보고 저런 영감과 바람을 피웠소? 흐흐흐. 이젠 나와 친하기요.” 윤희는 낯이 새파랗게 질리더니 앵돌아져 나가버렸다. 한편 상순이 패용천산으로 올라가면서 볼라니 온 함흥대대 사원들을 다 동원했는지 돌을 나르는 사원들이 과수원 다락 밭과 패용천산 양지바른 벼랑 위 사이로 개미떼처럼 분주히 오가는 것이었다. 그런데 사원들은 글쎄 과수원에 다락 밭에 둔덕을 쌓은 돌을 허물어 날라다 벼랑 위에 “모주석 만세!”를 새기고 있었다. “아니, 이게 무슨 일이야? 저 다락밭의 둔덕을 어떻게 쌓은 거라고 저래? 저걸 허물면 수토유실이 생겨 과수원은 끝장 날 게 아닌가!” 상순은 다락밭으로 달려가 다짜고짜 흥수의 손에서 돌을 빼앗아냈다. “이게 무슨 짓이오? 과수원을 망치려고 드오?” 흥수는 깜짝 놀랐다. 처음에는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어리둥절해하다가 그는 성난 상순의 아래위를 훑어보면서 비웃음을 지었다. “이보, 당신, 아직도 우리 함흥대대 일에 삐치오?” 상순은 흥수에게서 빼앗은 돌을 도로 쌓아놓으면서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다락밭 돌을 허물어선 안되오.” 흥수는 옆구리에 두 손을 지르고 침을 튕기며 을러멨다. “이 싱거운 나그네를 봐! 지금 모주석께 충성을 표시하려고 패용천산에 세상에서 제일 큰 ‘모주석 만세’를 새기는데 파괴할 예산인기여? 어째 ‘현행반혁명’ 모자를 씌워서 교하에 보내 달라노? 더운 밥을 먹고 식은 걱정 말라!” 흥수는 상순을 밀어놓으면서 돌을 기어이 가져가려고 했다. 상순은 돌을 가져가지 못하게 하려고 흥수와 밀고 닥치고 했다. 이때 이계삼과 허영주 그리고 허백호까지 다가와 상순을 말렸다. 그러자 상순은 그들과 인사한 후 저쪽에 데리고 가서 말했다. “아니, 칼산과 패룡산 돌을 새로 캘게지. 하필이면 다락밭 돌을 왜 허물어간단 말입니까?” 이계삼은 상순의 어깨를 다독이었다. “놔두오. 지금 무슨 세월이라고 그러오?” 허영주도 말렸다. “놔두오? 지금 과수원이겠소? 새해 농사를 다 망쳐 먹으면서도 그 노릇을 하는데. 무슨 수가 있소? 시대 조류가 아니오? 누가 감히 거슬러 올라 간다오? ‘나를 따르는 자는 흥하고 나를 거역하는 자는 망한다.’는데.” 허백호는 사위를 둘러보더니 목소리를 낮췄다. “상순이 잘 왔소. 저녁에 우리 다시 토론해보기오.” 이때 산비탈에서 종연이 헐금씨금 올라오고 있었다. 이계삼은 머리로 종연이 올라오는 쪽을 가리키자 허영주와 허백호가 스적스적 돌을 나르러 떠나들 갔다. 종연은 과수원에 올라오자마자 상순을 손가락질하며 빈정댔다. “김상순, 당신 정말 싱거운 사람이오. 교하에 갔으면 그 곳 혁명이나 할 거지. 어째 불청객이 나타나서 남의 충성심을 어지럽히오? 당장 산 아래로 내려가오. 안 그러면 민병들을 부르겠소.” 흥수가 맞장구를 쳤다. “황 주임 말이 맞아. 조금만 더 지랄 쓰면 민병들을 불러야제이. 치보주임이 부르지 못할 거 같아? 파출소 허소장이라도 불러오지 않는가 보라구.” 상순은 흥수와 종연을 손가락질하며 질책했다. “교하로 이사해 가면서 자네들한테 우리 대대를 맡겼더니 이게 뭔가?” 상순은 침을 퉥 뱉더니 산비탈 아래로 성큼성큼 내려갔다. 먼발치에서 슬금슬금 바라보던 이계삼이랑 허영주랑 그제야 상순을 시름 놓고 돌을 날랐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찾아 왔지만 아직도 날씨는 싸늘했다. 강남에 갔던 제비들도 날아와 지붕 밑에 둥지를 틀고 새끼를 낳을 준비를 하느라고 분주히 날아가고 날아오고 있었다. 토끼꼬리만한 해가 서산으로 넘어가고 먹장구름이 뒤덮인 동녘 하늘에 그래도 초생 달이라도 떠서 먹장구름 사이를 헤집고 지지리 어두운 밤하늘을 밝히려고 무등 애를 썼다. 두꺼운 먹장구름 떼들이 퍼져 별들이 총총한 밤하늘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상순은 조개덕에 있는 둘째딸 은숙이 네 집에서 저녁을 들었다. 은숙은 보글보글 끓는 장국을 사발에 떠서 아버지 밥상 위에 올려놓으면서 말했다. “많이 듭소. 이전에 이사갈 때 제가 뭐랍디까? 이사가지 말라는데도 기어이 가더니. 이제라도 이 딸의 말을 듣고 돌아옵소.” 상순은 한숨을 후 내쉬었다. “오자 해도 집이 없구나.” “먼저 우리 건너 사랑방에 구들을 놓고 있으십시오. 차차 집이 나지면 사고 듭지요.” 은숙은 아버지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받아들인 거로 여기고 뒤 말을 이었다. “하나 밖에 없는 덕돌이 부모가 없으면 친구를 잘 못 친해 나쁜 애로 변질하면 어쩝니까?” 상순은 돼지고기 점을 떠서 덕돌의 국그릇에 담아주면서 타일렀다. “최우수노라고 자만하지 말고 꾸준히 공부해라. 그리고 누나와 매형을 애 먹이지 말고 말을 잘 들어라. 철주랑 손버릇이 나쁘니까. 놀지 말라. 그런 애들과 놀면 나쁜 물이 묻을 수 있다.” 은숙도 타일렀다. “넌 별나게 성욱이랑 놀지 않고 하필 철주와 노니?” “성욱이가 내 공부를 잘하고 학습위원이 됐다고 질투하오. 내 나무를 꺾지 않았는데 선생한테 나무를 꺾었다고 물어먹었소.” “뭐라고?” 은숙은 적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덕돌은 성욱에게 물리어 학습위원에서 떨어진 일도 말할까 말까 하다가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아 그만 두었다. (아버지와 누나 그리고 매부가 들으면 얼마나 실망할까? 교하에 있는 엄마와 누나들은 펄쩍 뛸 게 아니겠는가?) 경만은 덕돌을 보고 말했다. “이후에 누가 너를 때리거나 놀리면 내나 수봉한테 말해라. 내 놔두지 않겠다. 쓸데없이 시시한 철주랑 친해가지고 그러지 말아라.” 허나 덕돌은 외목에 날까봐 철주와 놀지 않을 수 없었다. 숟가락을 놓기 바쁘게 우사 회의실로 이계삼을 찾아갔다. 도중에 늙은 비술나무 밑으로 가는데 누가 부삽으로 뭘 줏는 듯한 어두운 그림자가 어렴풋이 보였다. “누구요?” 가까이 가서 보니 정규상이 초롱을 들고 돼지 똥을 부삽으로 주어 담고 있지 않겠는가? “아니, 이게 무슨 일이요? 동생은 대대 위생소에서 병을 보지 않고?” “그렇게 됐소.” 정규상은 주위를 슬금슬금 둘러보더니 상순을 데리고 늙은 비술나무 밑으로 가 나직이 영발에게 밀리어 위생소에서 쫓겨나 돼지 똥을 줏게 된 경과를 간단히 이야기했다. 그러자 상순은 주먹을 으스러지게 틀어쥐었다. “정말 말이 아니구먼. 영발 서기는 뭐요? 반란파들에게 붙어 동생을 해치다니? 참.”  정규상은 상순을 보고 귀속 말을 했다. “놔두오. 괜히 그자들을 건드렸다가 형까지 고생하겠소. 형은 교하로 시원히 잘 떠나갔소. 보지 않으면 약이지.” “내 어찌 동생이나 이계삼 서기랑 여기서 고생하게 놔두고 혼자 피해 있겠소?” “그래 어쩔 예산이오?” 상순이 뭐라고 입을 떼려고 할 때었다. 저쪽에서 기침 소리가 나더니 어두운 그림자가 둘이 나타났다. 상순과 규상이 비술나무 뒤에 숨으면서 살펴보니 별로 허영주 서기 같아 보였다. 가까이 다가온 걸 보니 과연 허영주가 아니겠는가. “허 현장!” 허영주를 와락 끌어안으면서 상순이 외치자 허영주는 “쉿-” 하고 식지를 입에 대더니 나직이 말했다. “여기는 오래 말할 데가 아니오. 저기 가기요. 이 서기랑 기다리고 있소.” “알았습니다.” 상순과 정규상은 허영주를 따라 마을 뒤로 해 조개덕 서북쪽으로 한 1리 떨어져 있는 한족묘지꺼리로 슬금슬금 다가갔다. 백양나무가 봄바람에 쏴- 쏴- 무섭게 을씨년스레 소리치며 몸부림치고 있었다. 마른 풀이 한 키씩이나 자란 한족묘지꺼리는 꽤나 무시무시했다. 허영주가 다가가면서 손 벽을 짝짝 치자 저쪽에서도 손 벽을 짝짝 치는 소리가 들렸다. 놀란 까마귀가 푸 닥닥 날아나는 소리가 들리면서 무시무시한 감이 더했다. 상순이네가 다가가자 묘지 쪽에서 세 사람이 나타났다. “상순이 왔소?” 이계삼이 먼저 다가와 상순의 손을 잡았다. “이서기, 허서기, 반갑습니다. 아니, 이게 누구야? 허 소장이 아니오?” 상순은 제일 뒤에 나타난 허영호 소장을 보고 놀랐다. “김 국장, 제가 노간부들을 제대로 보호해 드리지 못해 미안합니다.” “아니, 언제 국장이오?” 상순은 허영호를 와락 끌어안으면서 속심의 말을 했다. “이젠 우리 모두 허 소장의 신세를 져야 하겠소.” 인사를 마치자 허 백호 서기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아무리 ‘문화대혁명’이라도 그렇지. 우린 이대로 노동개조나 하면서 세월을 보낼 순 없소. 저 반란파 두목 종연과 반란 파 개다리들과 생사결단을 내기요.” 그러자 이계삼이 말렸다. “그래도 당을 믿소. 위대한 당은 꼭 영명한 결단을 내릴 것이오.” 허나 허백호 서기는 땅이 꺼지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날이 대체 언제 오겠소? 내나 정규상 교수나 보오. 십여 년 전에 우파 모자를 썼는데 오늘도 그 상이 장상이오. 우린 일본 놈들과 국민당 놈들과도 목숨을 내걸고 싸웠소. 저 종연과 흥수만 없애치우면 누구도 우리를 어쩌지 못할 게요.” 허영주도 격분해 했다. “우린 대갈로부터 발끝까지 무장한 일본 놈들과도 태항산으로부터 싸우면서 동북에 진군했고 정성해 서기를 따라 연변에까지 나왔소. 그까짓 주먹깨나 쓰는 반란파 놈들이 뭐가 대단하오?” 허백호는 살기 띤 말을 이었다. “난 이 묘지거리 저 백양나무에 목을 매 이미 죽은 사람이오. 상순이 구해준 목숨인데 이제 그까짓 반란 파들을 죽이고 죽으면 뭐라오?” 이계삼은 나직하지만 엄숙하게 말했다. “안 되오. 아무리 정치투쟁이 백열화해도 무리한 행동은 하지 마오. 일단 살인사건을 저지르기만 하면 공안국에 잡히고 말 거요. 정적은 정치투쟁으로 해결해야지. 왜 산전수전 다 겪은 노 간부들이 요만한 시련을 이기지 못하오? 내심하게 싸워야 하오.” 허백호는 한숨을 후 내쉬었다. “종연과 흥수를 병신이라도 만들어놓으면 다요.” 이계삼이 백호와 영주를 보고 나직이 말했다. “안되오. 종연과 흥수를 병신을 만들어놓으면 지금 같은 ‘문화대혁명’ 바람에 또 두 번째 종연과 흥수, 박영발이 나타날 게요. 몇을 병신을 만들어야 이 놈의 세월이 끝나겠소?” 뒤이어 그는 상순을 돌아보더니 뒤 말을 이었다. “상순이, 이사 갈 때도 우린 반대했소. 현실도피를 하지 말고 돌아오오. 숱한 노간부들을 버린 건 둘째고 우리 대대를 흥수와 종연에게 맡기는 바람에 이게 무슨 꼴이오?” 허영주도 말했다. “옳소. 돌아오오. 우리 일치단결해 흥수와 종연을 꺾어버리잔 말이오.” 여러분의 말을 다 듣고 상순은 무거운 입을 열었다. “그간 노간부들을 두고 교하로 가서 죄송합니다. 저는 돌아와야겠습니다. 반란파들이 로간부들을 반란해 정권을 찬탈하는 것을 좌시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들과 주먹이나 칼로써가 아니라 마레주의 모택동 사상이란 정치투쟁 무기를 들고 최대의 인내성으로 끝까지 싸워야 합니다.” 여럿은 박수쳤다. “좋소. 환영하오.” 이계삼은 상순을 끌어안았다. 허영주도 상순을 끌어안았다. 허나 이제껏 입을 다물고 있던 정규상이 근심했다. “형님이 돌아오는 건 옳소. 그런데 혁명위원회와 치보 주임 자리를 차지한 종연과 흥수 형님을 받자 하겠소?” 그러자 상순은 주먹을 틀어쥐고 을러멨다. “누가 내 앞길을 막는다오?” “형님이 이사해 오려고 해도 그 놈 새끼들이 동의하지 않으면 어떻게 오겠소?” 그러자 허백호가 자기 사촌동생 영호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얘야, 네가 방법을 대봐라. 상순이 와야 우리가 발편잠을 잘 수 있다.” 한참 납덩이같이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허 영호 소장이 자기 소견을 내놓았다. “방법이 있습니다. 우선 조개덕 생산대 사원대회를 열고 김 서기를 받겠는가를 투표해서 결정하게 합시다. 조개덕에는 종연 밖에 없습니다. 흥수는 함흥촌에 있지 않습니까? 조개덕생산대에서 결정하면 직접 파출소에 락호증을 가져오면 내 호구를 올려놓으면 모든 게 끝납니다.” 그러나 허백호는 시름놓지 못했다. “만약 생산대에서 통과되지 못하면 어쩌니?” 허영호는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관대루야?” 허영주가 동을 달았다. “옳소. 조개덕 생산대 광범한 사원들은 모두 상순동무를 환영할 거요. 지난해 종연과 흥수가 대대를 맡으면서 무슨 꼴이 됐소?” 허백호는 영호쪽으로 돌아서면서 간절히 부탁했다. “얘야, 혹시 생산대에서 통과되지 않더라도 네가 손을 써라. 파출소에서 상순이네 호구를 조개덕에 붙여주면 다야.” “정 안되면 마지막수라도 써야지.” 이튿날, 조개덕 우사에 있는 생산대 회의실에서 사원대회가 열렸다. 회의에는 당연히 종연과 흥수도 대대를 대표해 참가했다. 허영호 소장과 허영주, 이계삼, 허백호, 정규상 등이 모두 참가했다. 생산대 허송산 대장은 사원들이 다 모인 것을 보고 선포했다. “이제부터 사원대회를 시작하겠습니다. 우리 대대 당지부 오랜  서기 김상순 동지 일가 이사문제를 토론하겠습니다.”  종연은 벌떡 일어나 버럭 고함쳤다. “안되오! 절대 안되오! 이사 갔으면 갔지. 왜 되돌아와? 어림도 없는 짓이오!” 흥수도 맞장구를 쳤다. “안 되고말고. 아예 이사회의를 열지도 말아야 해. 생산대에 밭이 적어 죽물도 먹기 힘든데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이사해간 사람을 받어? 식량이나 줄어들었지. 사원 여러분, 안 그렇습니까? 잘 따져 보십시오.” 그러자 여기저기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때 허동원이 입을 열었다. “내 생각에는 김상순 서기를 받는 게 옳소. 김 서기와 병완 서기가 우리 대대 과수원을 꾸리고 저 멍지메산 앞에 논밭을 여섯 헥타르나 더 풀었소. 저 장개골안과 천지꽃산 그 어느 밭인들 김 서기네 일가가 일군게 아니겠소? 사람이 양심이 있어야지. 로실히 말해 우리 함흥촌은 김 서기네 일가가 개척한 마을이라고도 해도 과언이 아니오. 우리가 쪽박을 차고 고향을 떠나 이 곳에 발을 붙이고 사는 게 다 누구네 덕이오? 김 서기네 은공을 잊어서는 안 되오. 사람이 양심을 저버리고 배은망덕해서야 되오? 우리 마을은 김 서기 같이 대공무사하고 재간과 능력이 있는 실농군 간부가 와서 영도해야 살 길이 있소.” “뭐라고?” 종연은 허동원을 쏘아보면서 자기 귀를 의심했다. “종연아, 네 말버릇을 조심해라. 이상들과 뭐야? 넌 혁명위원회 주임을 하면서 해놓은 일이 뭐냐? 과수원 다락밭에 쌓은 돌을 허물어 뭘 했니? 그 바람에 과수원에 수토유실이 심해 사과나무 뿌리가 다 드러났고 지난해 여름 폭풍우에 숱한 나무가 넘어지고 아무 것도 거둬들인 게 없다. 지난해 농사도 다 망태기로 돼버려 올해 사원들은 보리 고개를 넘기 어렵게 됐다. 상순 서기와 병완 서기가 우리를 이끌어 얼마나 많은 고생을 해 차려놓은 과수원이냐?” “뭐라오? 감히 ‘모주석 만세’를 새긴 위대한 공적을 죄로 몰겠는가? 어째 반혁명 모자를 쓰고 싶소?” 흥수는 눈을 뚝 부릅뜨고 을러멨다. 그때 허영호 소장이 나섰다. “이치보, 괜히 죄 없는 사람에게 마구 모자를 씌우지 마오. 상급에서는 타격면을 좁히라고 했소. 쩍 하면 우파가 아니면 현행반혁명 모자를 씌워 타도하다나면 함흥대대에 혁명적인 빈농이 몇이 남겠소? 정 그따위로 놀면 파출소에서 당신 치보주임 자격을 취소해버리겠소.” 파출소 소장이 말하자 흥수는 찍 소리 하나 더 치지 못했다. 그러자 최국선이 나서서 흥수를 종연과 흥수를 손가락질하면서 공소하듯 말했다. “너희들이 한 게 뭐냐? 내 온 일년 내내 뼈빠지게 일한 게 년말에 5전짜리 동전 세 개 밖에 타지 못했다. 내 그래 온 일년 가마니 한 장 짜서 판 것보다도 일을 못했단 말이냐?” 최국전은 지난해 연말에 탄 동전 세 개를 종연의 낯에 쥐어 뿌렸다. 그러자 국전의 동생 국천은 더 한심한 말을 했다. “형님은 그만하면 그래도 괜찮소. 난 빚을 120원이나 진 건 어찌 하오?” 그때 정규상이 나섰다. “김서기 영도할 땐 그래도 이 마을에서 찰떡을 쳐 먹고 돼지고기도 놔눠 먹지 않았소?” 그러자 사원들은 이구동성으로 “옳소. 김 서기 돌아와야 하오.”라고 했다. 이쯤 되자 일이 뒤틀린 것을 알고 종연은 아예 자리를 훌 떠나 버렸다. 허나 흥수는 일루의 희망을 품고 남아 있었다. “사원대회에서 무기명투표를 하제이(하지).” 그는 일어나 말했다. “모두들 담배 종이에 동의, 부동의를 써서 바치오. 한 사람이 한 장만 써내야 하오. 내가 직접 검표하겠소.” 모두들 담배쌈지에서 담배종이를 한 장씩 꺼내 써서 바치고 회의실을 나가 흥수와 허영호소장의 검표한 결과를 기다려야 했다. 한참 후 흥수가 두덜거리며 투표종이를 허공중에 활 뿌리치며 두덜거렸다. “어쩜 이럴수 있단 말인가? 지주나 부농들이 반대하고는 누구도 막아 나서지 않다니?” 허소장은 머리를 끄덕였다. “이게 바로 조개덕생산대와 함흥대대 민심의 반영이오.” 흥수의 형 학수도 끼어들었다. “민심은 천심이라고 상순을 받는 수밖에 있어? 괜히 원수를 맺지 말고 낙호증이나 떼줘라.” 성수도 형 흥수를 나무랐다. “상순은 항미원조 전쟁때도 형님을 몇 번이나 구했소? 형님은 잊었소? 압록강을 건널 때 미군 전투기가 소사할 때도 상순이 밀치며 엎드리게 하지 않았으면 살아 남을 수 있소? 남조선 충청도 한산면에 산등성이에서 육박전을 할 때도 상순이 공병삽으로 미군 흑인을 찍지 않았더라면 왼팔을 상한 형님이 살아남았겠소? 상순은 왼팔까지 날창에 찔리면서 널 구해줬는데 구명은인한테 배은망덕해서야 쓰나?” 그러나 흥수는 “흥!" 하고 회의실을 떠나갔다. 이계삼과 허영주 그리고 허백호와 정규상 등은 모두 상순한테 다가와 악수를 나누면서 기뻐했다. 사원들도 이구동성으로 환영했다. “잘 됐소. 김 서기 온다니 살 길이 나졌소.” “어서 옵소. 김 서기.” 밤이 가는 줄도 모르고 사원들은 상순과 웃음꽃을 피웠다. 허동원은 상순의 두 손을 잡고 흔들며 진심으로 축하했다. “김 서기 돌아오면 우리 생산대 정치대장을 합소. 내 계속 생산대장을 하면서 손잡고 사원들이 잘 살게 합시다.” “감사하오. 나를 받아주어서 고맙소.” 그날 사원대회는 기실 상순이 돌아오는 것을 환영하는 희의나 다름없었다. 사원들은 진짜 우국우민의 충정을 지닌 상순과 같은 대공 무사한 농촌간부가 필요했던 것이다. 상순이 노간부들과 사원들에게 휩싸여 회의실을 나섰을 때는 밝은 보름달이 구중천에 두둥실 떠 있었다.
143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104) 댓글:  조회:1753  추천:0  2018-06-02
                 5. 삼십육계 줄행랑이 제일       가을의 쪽빛하늘은 맑고 푸르고 높았다. 산과 들의 곡식밭은 누렇게 번져가고 있었다. 하늘에는 강남으로 날아가려는 새끼제비들이 날개를 굳히느라고 나는 연습을 하고 있었다. 덕돌은 성욱과 함께 삽을 둘러메고 쥐 굴을 파러 태평강을 넘어 제방둑 옆의 콩밭으로 갔다. “야, 쥐 굴!” 덕돌이 소리치자 성욱은 삽으로 그 쥐 굴을 파기 시작했다. 한자 깊이도 파지 않았는데 다 퍼진 노란 콩알이 나왔다. “야, 쥐 콩!” 덕돌은 희구해 쥐 콩을 손으로 마구 파냈다. 그때 놀란 쥐 한 마리가 쥐 굴에서 나와 구덩이 밖으로 뛰어나갔다. “요놈 쥐새끼! 죽어 봐!” 성욱은 마른 콩 숲속으로 뛰어 들어가는 쥐를 따라가면서 삽날로 탁탁 때려 끝내 잡아치웠다. “덕돌아! 큰누나 왔다. 어서 집으로 돌아가자!” 그때 저쪽에서 덕돌의 막내누나 성숙의 부름소리가 들려왔다. “응? 큰누나 왔다고?” “응- 빨리 가자.” “큰 매형이 또 사탕이랑 과자랑 가져왔데-?” “응!” 덕돌은 쥐 굴에서 난 젖은 콩을 성욱에게 다 주고 성숙을 따라 부랴부랴 집으로 달려갔다. 그는 무슨 생각이 났던지 돌아섰다. “성욱아, 우리 집에 놀러 오너라. 내 사탕이랑 과자랑 줄게.” “응, 고맙다!” 그들은 서로 손을 저으면서 헤어졌다. 경학의 아들 성욱은 덕돌의 9촌 조카인데 둘은 각별히 친한 짜개바지친구였다. 덕돌은 이전에 털모자도 없이 귀를 얼굴 때 성욱이 자기 쓰던 털모자를 씌워주던 일을 잊지 않았다. 그리하여 덕돌은 동갑조카라고 성욱과 사탕 한 알이라도 나눠 먹곤 했다. 덕돌이 주먹을 쥐고 집으로 뛰어오니 마당에서 큰누나 춘자가 어린애를 안고 반겨 맞았다. “우리 하나 밖에 없는 남동생이 왔구나.” “큰누나!” 덕돌은 한달음에 애를 안은 큰누나의 품에 안겼다. 춘자는 덕돌과 애를 한품에 안고 기뻐 어쩔 줄 몰랐다. “덕돌아, 네 조카 성춘이야.” 그제야 덕돌은 큰누나의 품에서 머리를 들고 어린애를 빤히 들여다보았다. 성춘은 어머니 품에 안겨 손가락을 입에 넣고 빨면서 하얀 두 다리를 바둑 거리었다. “성춘아, 얘 생일이 언제요?” 덕돌은 외조카 성춘의 젖살이 포동포동 오른 볼을 손가락으로 매만지면서 물었다. 그러자 춘자는 덕돌에게 애를 안겨주었다. “옳지. 외삼촌이 안아봐야지. 얘는 70년도 11월 11일이 생일이다.” 덕돌이 입이 함박만 해 성춘을 안고 싱글벙글하며 횡설수설했다. “그 놈이 생일이 특별한 게 큰 노릇을 하겠다. 어쩜 몽땅 1자냐? 네 가지가 몽땅 1등을 할 팔자로구나.” 명옥이 집에서 나오면서 황급히 소리쳤다. “애를 떨어뜨리겠다. 꼭 안아라.” “예.” "이젠 그만 안아보고 큰누나한테 줘라." "예." 마을에서는 모두들 나이는 어려도 속에 영감이 들어앉았는지 옛말을 잘 하는 덕돌을 보고 “속에 영감이 들어찬 쪽똘영감”이라고들 했다. 덕돌은 성춘을 품에 꼭 안고 흔들면서 귀여워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는 아쉬운대로 성춘을 큰누나한테 넘겨주었다. 전 해 겨울에 엄마가 기차를 타고 교하에 가서 성춘을 낳는 것을 받아내고 뒤 바라지를 했다. 둬달 후에 엄마가 집으로 돌아와 큰매형 등에 업혀 강을 건너 큰딸 집으로 간 얘기로, 갓난 애기 얘기를 하는 것을 들었기에 덕돌은 큰누나네 아들을 낳았다는 것을 진작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처음 보니 매형과 누나를 고루고루 닮아 새하얀 살색에 곱게 생긴 조카 성춘이 얼마나 귀엽고 고운지 몰라 어쩔 줄 몰라 했다. “우리 하나 밖에 없는 처남이 왔구나.” 이때 동수가 나와 덕돌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입에 사탕 알을 넣어 주었다. “야, 이 놈아, 돌이 둘인 거 뭐야? 허허허.” “호돌매돌.” 춘자가 한마디 끼어들며 웃었다. 동수는 덕돌의 손을 끌고 들어가더니 “봐라, 셋째매형도 왔다.”라고 하면서 윗방에 앉아 있는 한 청년을 가리켰다. “셋째매형?” “응. 그래. 셋째매형이야.” 덕돌이 보니 작달막한 셋째매형은 철색얼굴에 웃음을 지으면서 사과 한 알을 들고 일어나 다가왔다. “자요. 사과 드세요.” (셋째매형도 남대치구나.) 춘자는 “에이고, 열네 살 밖에 안 되는 애하고 무슨 존대를 쓰오? 편안히 이래라 저래라 하오.”라고 했다. “하나 밖에 없는 처남인데요.” 이때 상순이 집에 들어섰다. 동준은 동서 동수를 보고 “절을 해도 돼요?” 하고 물었다. “글케 하게.” 허나 상순은 손사래를 흔들었다. “아니, 절은 뒀다 천천히 하오.” 그 말에 동준은 손으로 뒷덜미를 긁적거렸다. 상순은 상좌에 앉더니 덕돌을 보고 “너 과수원에 가서 셋째누나를 데려오렴.”라고 했다. “예.” 덕돌은 큰누나가 주는 사탕과 과자를 호주머니에 넣고 칼산과 패용천산 사이에 있는 대대 과수원으로 달려갔다. 상순은 셋째 사위감을 마주 앉아 엄숙하게 물었다. “이름을 뭐라고 부르오?” “고동준이라고 불러요.” “고씨라? 무슨 고씨요?” 상순과 동준은 딱딱하게 일문일답을 했다. “제주 고씨입니다.” “그럼 남조선 제주도가 고향이오?” “아닌데요. 우리 고씨는 본이 제주지만 후에 탐라에서 대륙에 들어와 경상도에서 살았어요.” 상순은 한숨을 후 내쉬었다. “경상도에서 여기까지 입북하느라고 고생이 얼마나 많았겠소? 다 일본 놈들 때문이었지.” 상순은 담배쌈지를 꺼내 담배를 말아 한 대 붙이더니 물었다. “길림에서 중등전문학교를 나와 소학교 교원을 한다지?” “예.” “내 하나 궁금한 게 있소. 지금 모 주석께서는 ‘이계급투쟁위강(以阶级斗争为纲),강거목장(纲举目张)이라고 했는데 무슨 뜻인지 설명해주겠소?” 그것은 사위 감의 지식을 시험 치는 대목이나 다름없었다. 동수는 별로 생각도 하지 않고 술술 대답했다. “그 뜻은 이런 거 같아요. ‘계급투쟁을 기본 고리로 하여야 합니다. 기본 고리를 틀어쥐면 모든 것이 다 풀립니다.'” “무엇 때문에 ‘강거목장’이라고 했소?” “예. 말씀 드리면요. 고기그물이 있잖아요. 예서도 투망이라고 하지요?” “그래 투망이지.” “투망에서 끈은 고리와 같은 거죠. 투망이 아무리 커도 끈을 잡아당기면 그물이 끌려 모아지면서 고기를 잡을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러니깐. 계급투쟁을 기본 고리로 틀어쥐면 모든 일이 술술 다 풀린다는 뜻이지요.” “오, 그래서 계급투쟁을 기본 고리로 틀어쥐라는 말이구먼.” 상순은 동준의 그럴 듯한 대답에 머리를 끄덕이었다. 뒤이어 그는 동준의 집안 형편을 두루 물어보았다. 교하에서 소학교 교원을 하는 동준은 고씨네 일곱 형제 가운데서 둘째였다. 로임을 타는 교원이기에 귀여운 딸 홍자를 고생시킬 것 같지 않았다. 이때 홍자가 누런 사과를 듬뿍 담은 하얀 버들광주리를 이고 집안에 들어섰다. 동준은 나가 홍자의 머리 위에서 사과광주리를 받아 내리워 주었다. 그 모습을 보고 명옥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사실 상순과 명옥은 이전에도 서뿔리 홍자의 결혼을 결정하지 않았다. 이전에도 동네에서 숱한 중매군들이 문턱이 다슬게 찾아왔지만 다 거절했다. 그들은 애지중지하며 키운 딸을, 죽다가 살아난 셋째딸을 아무데나 줬다가 고생시킬까봐 마음고생을 시키지 않을 사위 감을 고르고 또 골랐던 것이다. 병진이 동불사의 고모사촌동생을 소개했을 때에도 술주정뱅이 병진을 닮아 주정뱅이라는 것을 알고 거절했다. 윗집 아낙네가 로투구의 자기 5촌 조카를 소개했을 때에도 키가 작은데다가 농사를 짓는 고생할 자리라고 대답하지 않았던 것이다. 상순은 고방에 들어가 머리 수건으로 얼굴의 땀을 훔치는 홍자를 따라 들어가 의향을 물었다. “저 동수가 마음에 드느냐?” “예. 교원질을 하니까. 농사지을 고생은 하지 않을 거 같습니다. 말수가 적고 마음이 좋아 보입니다. 나를 마음고생을 시키지 않을 거 같습디다.” “그래. 네가 그간 춘자네 집으로 가서 여러 번 만나보고 지내봤다니 믿겠다.” 상순은 고방에 들어온 아내와 큰딸 춘자를 보고 의향을 물었다. “헌데 말이 적고 눈에 독이 좀 있는 거 같아. 어떠냐?” 춘자는 자기 견해를 제대로 말해주었다. “말수가 적어서 속을 알기 힘듭니다. 허나 이제껏 2년 동안 지내보니 마음이 어진 편입디다.” 그러자 명옥은 상순이 너무 꼬치꼬치 캐묻는다고 여겼다. “에이고, 춘자가 한 학교에서 지내보고 소개했는데 틀림 있겠소. 절을 받기요.” 그리하여 상순과 명옥은 정중하게 고동준을 셋째사위로 맞아들이기로 하고 절을 받았다. 동준은 “감사해요. 홍자를 데려다 마음고생을 시키지 않고 행복하게 살겠습니다.”라고 하면서 꾸벅 절을 올리었다. 상순과 명옥은 친척들을 불러다 약혼술상을 차렸다. 둘째사위 영만과 큰사위 동수는 술친구였다. 그날도 그들은 새 동서를 맞은 기쁨에 겨워 술을 취토록 마셨다. 허나 말수 적은 동준은 첫걸음인지라 눈을 내리깔고 술을 덜 마셨다. 덕돌은 사탕과자를 내다가 성욱과 동린과 함께 나눠 맛있게 먹었다… 음력 정월 초아흐레에 홍자는 동준한테 시집가게 됐다. 동준은 잔치 전 일주일 전에 가시집에 와서 홍자와 함께 있었다. 잔치 날 새벽 3시 반이 되자 성급한 상순은 기차시간이 늦을 까봐 신랑의 큰상을 차려놓으라고 재촉이 성화같았다. 명옥은 “기차가 8시 반에야 떠나는데 무슨 재촉을 그렇게 합니까?”라고 했다. 허나 상순의 성깔을 아는 명옥은 은숙이랑 춘자랑 데리고 윗방에 큰상을 차렸다. 그리하여 동준은 새벽 4시도 되지 않아 큰상을 받았다. 전기도 오지 않아 초불을 밝히고 진짜 전쟁을 치르는 격이었다. 상빈으로 동준의 삼촌이 왔는데 술을 한 잔도 입에 대지 않았다. 상순이 술을 마시지 않는 위인이라는 것을 알았는지 사돈영감도 술을 별로 마시지 않았다. 이쪽에서 상빈으로 상순이 직접 덕돌을 데리고 갔다. 상순은 제일 귀엽게 기른 셋째딸 홍자가 어떤 곳에 시집가는가를 직접 자기 눈으로 그 미지의 땅을 밟아보고 와야 시름을 놓을 것 같았던 것이다. 그들은 새까만 밤에 첫날 마차에 첫날이불이랑 실어가지고 진수해를 바라고 떠났다. 그런데 반란파 두목 종연이 뜻밖에도 마차를 몰고 짐을 실으러 오지 않았겠는가. (진짜 이게 해 서산에서 뜨지 않았는가.) 상순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종연도 당지부 서기인 상순에게 잘 보이지 못하고는 입당은 고사하고 이 마을에서 발을 붙이기 어렵다는 혁명의 도리에 눈이 트기 시작했던 것이다. 상순은 셋째 딸과 함께 기차를 타고 일곱 시간 남짓이 지루하게 달려서야 교하에 이르렀다. 저 멀리 탄광의 버럭산에서 불이 활활 타오르면서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내자산 탄광이 마을에서 한 3리 밖에 되지 않아 땔나무근심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사돈집이 있는 마을에 가보니 집집마다 벽 밑에 기름이 번지르르한 피장 같은 석탄을 쌓아놓고 때고 있었다. 덕돌은 또 상빈으로 가서 상다리 부러질 지경으로 차려놓은 상빈 상을 받고 배가 세간나게 먹어댔다. 둘째누나 은숙의 결혼에 상빈으로 갔을 때와는 달리 열네 살이나 됐기에 배를 슬슬 만지면서 “야, 잘 먹었다.”고 하지는 않고 좀 체면을 차리었다. 상순은 춘자네 집에 며칠 있으면서 건두부 채에 돼지고기를 실컷 먹을 수 있었다. 두루 마을 형편을 알아보니 밭도 많고 남새를 가꾸므로 살기도 함흥대대보다 나을 것 같았다. 함흥대대에서 아무리 한평생 대대로 고생해도 죽물이나 겨우 먹었다.  땔나무도 없어 항상 담배뿌리와 강냉이뿌리를 파다가 때면서 기아에 허덕이지 않았던가! 어느 해인가 한번은 집에서 어쩌다 음역설을 만나 돼지고기 두 근을 사다 장국을 끓여놓았다. 애들은 숟가락으로 국 사발을 살살 저으면서 돼지고기를 찾느라고 여념이 없었다. 그런데 성숙이가 불시에 “와-” 하고 울음보를 터뜨렸다. “어째 그러니?” 성숙은 눈물을 닦으면서 “내 돼지고기 은자 국사발에 들어갔소?”라고 했다. “어쩌다가 그렇게 됐니?” 명옥이 물으니 성숙은 울면서 말했다. “내 국 사발하고 은자 국 사발을 나란히 놓아놔서 내 숟가락으로 장국을 젖다가 아까워 먹지도 않던 돼지고기점이 은자 사발에 들어갔소.”       명옥은 은자의 국 사발에서 성숙이 가리키는 돼지고기 점을 숟가락으로 퍼서 주었다. 그런데 성숙이 씹어보니 장덩이었다. 참 울다가 웃을 일이었다.     상순은 황화전자 큰딸네 집에 와 있으면서 두루 살펴보니 땔나무근심도 없지 쌀도 배급을 주지 논도 잘 다루면 잘 먹고 살 것 같았다. 이곳 한족들은 원래 논농사를 지을 줄 몰라 씨를 뿌려 거두는 것만큼 거둬다 먹고 위주로 채소를 가꾸고 있었다. “여기 와서 논물기술원으로 살면 어떨까? 그까짓 함흥대대에서 문화대혁명의 시련을 받을 게 뭔가? 에라, 삼식육계에 줄행랑이 제일이야. 교하로 훌쩍 이사해 버리자.” 상순은 며칠 심사숙고한 끝에 춘자와 말해 보았다. 그러자 춘자는 남편과 토론하고 본가집을 황하전자대대 2대 논물기술원으로 받게 주선했다. 그때 내자산공사 농업보급소에 배치된 동수의 말을 대대에서 인차 들어주었다. 황차 상순은 벼농사 기술원이라는데야. 대대 당지부 서기에 치보 주임도 해본 경력까지 있어 공사에서마저 훌륭한 농촌 간부를 얻었다고 환영하는 눈치였다. 홍자도 부모를 떠나 먼 타향에 시집왔는데 자기를 금지옥엽처럼 아끼던 친정 부모가 옆에 오면 좋다고 기뻐 어쩔줄 몰랐다. 상순은 “문화대혁명” 정치가 백열화된 함흥대대를 떠나 조용한 한족 곳에 와서 쌀 근심, 땔나무 근심을 하지 않으면서 살고 싶었다. 게다가 상순이 대대에 돌아오니 반란파들이 그의 둘째딸 은숙이 조선 회룡에 가서 있은 일로, 진달래 큰어머니 문제 등을 꼬챙이에 꿰들고 조선특무라는지, 고모 6촌 동생 이병수와 용천의 남조선 특무사건을 꼬챙이에 꿰들고 남조선 특무라고 떠들어대는 것이었다. (에라, 모르겠다. 이 더러운 대대를 떠나고 말자.) 집에 돌아온 후 상순은 이계삼을 찾아가 볼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찾아가 보아야 현실을 도피하려고 한다면서 반대할 것은 빤한 일이었다. 그리하여 먼저 허영주를 찾아가 교하에 이사해 갈 의향을 말했다. 그러자 허영주는 눈이 똥그래 상순을 뚫어지게 보다가 펄쩍 뛰었다. “아니, 무슨 말이오? 우린 김 서기를 믿고 이 마을로 내려왔소. 숱한 노간부들을 버리고 어디로 간단 말이오? 함흥대대를 뭐로 만들 예산이오?” “문화대혁명 바람에 어디 살겠습니까? 우리 조손 3대가 쪽박을 차고 이 마을에 와서 황무지를 개간하고 한평생 고생했지만 오히려 투쟁 받아야 했습니다. 종연이랑 이마에 피도 마르지 않은 반란파들이 우리 당지부 머리 위에 올라 앉아 똥을 쌀 지경입니다. 보기만 해도 눈에 불이 나서 어디 살겠습니까? 안쪽에는 땅이 많아 농사를 짓기 좋고 마을 옆에 탄광이 있어서 땔나무근심도 없어 살기 좋을 거 같습디다.” “꼼꼼히 잘 생각해보오. 당을 믿어야 하오. 우리 당은 꼭 정확한 길로 나갈 것이오. 우리는 초인간적인 인내력으로 이번 ‘문화대혁명’의 시련을 이겨나가야 하오.” 영주는 절절한 눈길로 상순을 바라보며 두 손을 꼭 잡아 흔들었다. 상순은 머리를 숙이고 우사 회의실을 나섰다. 그는 먹장구름이 뒤덮인 채 개일 줄 모르는 하늘을, 애꿎은 함박눈만 펑펑 내리쏟아붓는 하늘을 쳐다보더니 한숨을 후 내쉬었다. 이계삼과 허영주 그리고 허백호까지 나서서 현실을 도피하는 것은 당과 인민을 책임지지 않는 행위라고 비평하면서 말렸다. 하지만 벽이라도 차고 나가는 상순의 성질을 막을 수는 없었다. 노 간부들은 자기가 살자고 쌀 걱정을 하지 않으려고 이사 가는 상순을 더 막을 수도 없어 그만 물러서고 말았다. 상순의 둘째딸 은숙도 갓난 계옥을 업고 와서 울면서 말리었다. “아버지, 우리를 버리고 가지 마십시오. 안쪽에 간다고 쌀이 하늘에서 떨어지겠습니까? 온 집 식구들이 한족 곳에 가서 무슨 고생을 하자고 그럽니까?” “썩 꺼져라! 남이 이사 가는데 고양이 방정을 떨겠니?” 은숙은 울면서 집으로 돌아갔다. 아버지 성격을 아는 그녀도 어쩌는 수 없었다. 그녀는 맏딸 계옥을 업고 겨울 하늘을 우러러 보며 섭섭해 눈물을 지었다. 청청 하늘이어, 어이하여 아버지는 이 딸의 일편단심 효성을 몰라주는 걸까?                                    6. 정든 고향을 떠나      천지꽃산에는 잔설이 듬성듬성 널려있었다. 만주 땅에서는 아직도 꽃샘추위가 꽤나 맵짰다. 얼굴을 스치는 바람은 아직도 사람들을 괴롭혔다. 상순은 삽을 메고 명옥은 제물을 담은 함지를 이고 천지꽃산 중턱의 쓸쓸한 할아버지 병완의 무덤으로 다가갔다. 그 뒤에 어린 덕돌이 따라 올라갔다. 상순은 산소 앞에 이르자 명옥과 덕돌과 나란히 서서 두발을 모으고 똑바로 섰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이 불효한 손자를 용서하옵소서. 혹시 이 손자를 현실을 도피하는 연약무능한 놈이라고 욕할 수도 있으리다. 허나 할아버지와 아버지께서 고향을 떠나 쪽박을 차고 두만강을 건너와서 개척한 우리 함흥대대는 반 우파투쟁에 뒤이어 ‘문화대혁명’ 바람까지 불어와 이젠 사람이 살 곳이 못됩니다. 반란파들이 이른바 혁명을 한답시고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마귀굴로 돼 버렸습니다. 차라리 일본 놈들이나 국민당 놈들이라면 모조리 죽여 버리면 그만이 아닙니까? 허나 반란파들은 위로부터 혁명적인 홍위병이라고 지지를 받기에 그렇게 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대갈통부터 발끝까지 무장한 일본 놈들을 몰아내고 국민당들을 때려 부셨고 세계 최강이라고 자부하는 미군까지 조선에서 몰아내지 않았습니까? 허나 새로 생긴 반란파들은 어찌는 수가 없습니다. 속담에 똥이 무서워 피합니까? 더러워서 피한다고 했습니다. 제가 이사는 가지만 조부모님과 부모의 산소를 꼭꼭 찾아 뵙고 모실 것입니다.” 말을 마치자 상순은 가지고 간 삽으로 산소에 흙을 푹푹 퍼 올렸다. 이쪽에서 명옥은 제사상을 차려놓았다. 뒤이어 상순과 명옥은 덕돌과 함께 절을 꾸벅꾸벅 아홉 번이나 올렸다. 뒤이어 상순과 명옥은 제주를 부어 올리고 절을 하였다. “조부모님들, 이 불효한 손자를 널리 양해하시고 편안히 계십시오. 이 마을을 떠나는 게 영영 떠나는 게 아닙니다. 제 마음은 항상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계시는 우리 마을에 두고 갑니다. 편안히 계십시오.” 상순은 작별의 절을 또 아홉 번이나 하고나서 눈물을 훔치면서 산 아래로 내려갔다. 태평강을 건너 계수동 산정으로 올라가 부모의 산소도 찾아보았다. 그는 어머니와 아버지 산소에 다가가자 넓적 엎드려 산소를 부둥켜안고 대성통곡했다. “아버지, 어머니! 이 불효자를 욕하십시오. 부모 생전에 맛있는 음식을 제대로 대접하지 못하고 3년 재해 때 따뜻한 밥 한 끼 제대로 잡숫지 못하고 돌아간 아버지께 정말 미안합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반란파들을 보기 싫어 떠나는 거지. 아버지, 어머니를 영 버리고 떠나가는 게 아닙니다. 용서하십시오, 이 불효자를.” 덕돌은 부모가 눈물을 훔치자 뜨거운 눈물을 주먹으로 닦았다. 상순은 심란한 나머지 계속 중얼거렸다. “삼십육계에 줄행랑이 제일이라고 여기서 반란파들에게 투쟁받고 살게 있습니까? 부러지면 부러졌지 후려들 순 없습니다. 사람이 빚을 지고 살아도 어찌 시비 지고 삽니까?” 상순과 명옥은 손수 제주를 부어 올리고 덕돌과 함께 절을 아홉 번이나 했다. 뒤이어 상순은 덕돌을 보고 제주를 부어 산소에 올리고 절을 올리게 했다. 작별제사를 마치자 상순은 한참 비틀거리면서 산기슭으로 내려가다가 부모의 산소를 되돌아보았다. 잔설이 뒤덮인 민둥산의 흔들리는 마른 풀대 숲속에 누워 있는 부모의 산소가 쓸쓸하기 그지없었다. 이튿날 동녘이 희붐히 밝아오자 상순과 명옥은 은자를 데리고 먼저 마을을 떠났다. 그런데 어떻게 소문을 들었는지 마을 동구 밖에까지 상순을 바래러 나온 마을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그 속에는 이계삼과 허영주 그리고 허백호와 박영발도 있었다. 박윤희는 저쪽 늙은 비술나무 아래에서 눈 굽을 찍었다. 전날 그녀는 상순을 찾아와 눈물이 글썽해 하소연하며 사정했다. “김서기를 믿고 이 산골에 왔는데요. 이렇게 우리를 버리고 가면 어떻게 해요? 이제라도 말머리를 돌리세요.” 그때 상순은 그저 한숨만 후 내쉬었다. “절대 그대들을 버리고 가는 것이 아니요. 이 마을이 이젠 살기 더러워서 시원히 바람을 쏘이러 가는 것이오.” “그게 무슨 말씀인가요?” 윤희는 명옥의 눈치를 핼금 보면서 물었다. 그 한마디 말에 실오리만한 미련을 거머잡을 수 있었다. “다시 돌아오지요? 예?” 그 말에 상순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박윤희는 야속한 마음으로 자리를 떠났다. 이날 상순의 동생 금옥이네도 이사를 떠났다. 금옥은 오빠가 없는 이 마을에 있을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숱한 한족들까지 나와 그들 오누이네를 바랬다. 흥수는 헤벌쭉거리면서 달려 나와 머리에 서리가 내리기 시작한 상순의 두 손을 잡았다. “상순이, 이제껏 너무 한 거 같아 미안하이.” 상순은 아주 넓은 마음으로 흥수를 포옹했다. “우리 대대를 맡기고 가오. 우리 마을을 잘 건설하오.” 상순은 흥수가 야속할 때 많았다. 항미원조 전쟁 때 두번이나 흥수를 구해주지  않았는가. 압록강반에서 미제 공중날강도가 날아올 때 뻔히 서서 적기를 구경하는 걸 상순이 달려가 안아 엎디게 하고 자기 몸으로 덮지 않았더라면 팔만 상했겠는가. 남조선 지역에 군복을 운송할 때 야산에서 육박전을 할 때도 흑인 놈한테 찔릴 번하는 흥수를 상순이 공병삽을 휘둘러 흑인놈을 찍어죽이고 구하지 않았던가. 그때 상순은  흑인놈한테 왼팔을 날창에 찔리지 않았던가. 상순이 아니었더라면 흥수 오늘까지 살아 있겠는가! 그런데도 배은망덕하고 권세욕에 눈이 어두워 항상 상순을 헐뜯지 않았는가. 그러나 상순은 드넓은 품으로 전우를 양해해왔다. 종연은 입이 함박만 해 반란파들 속에 서서 상순을 손가락질 하면서 뭐라고 중얼거리었다. 상순이 가게 돼 서기 자리가 비지 않겠는가. 탈권할 좋은 기회였다. 비록 탯줄을 묻은 고향은 아니지만 상순은 거의 반평생 건설하느라고 애써 온 두 번째 고향 함흥촌을 정작 떠나자고 하니 코마루가 시큼해났다. 그는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모지름을 썼다. 허나 그는 이계삼과 허영주와 작별의 악수를 나누면서 끝내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이서기, 허현장, 편안히 있으십시오.” 허영주는 상순의 손을 잡고 놓지 않으면서 늙은 비술나무 밑의 한쪽으로 가서 신신당부했다. “교하에 가서는 한쪽 눈만 뜨고 한쪽 눈을 감고 세상 시비를 작작 하게나.” 허나 상순은 머리를 들어 하늘의 먹장구름을 쳐다보더니 또 그 말이었다. “허현장, 사람이 빚을 지고 살아도 어찌 시비 지고 살겠습니까? 난 인생좌우명을 버리고는 살지 못합니다.” 허영주가 한숨을 쉬는데 그때 이계삼도 다가왔다. 그는 고목 주위를 둘러보더니 숱한 사원들이 먼발치에 서서 이쪽을 보는 것을 보고 간단히 작별인사를 했다. “김 서기, 교하라고 반란 파들이 없겠소? 한족 곳에 갔다가 맞갖지 않으면 우리 마을에 돌아오오.” 그 말에 상순은 정중하게 말했다. “반란파들이 살판 치는 이 마을이 이젠 보기도 싫습니다. 편안히 계십시오.” 지춘실은 비술나무 밑으로 다가오면서 흥수의 눈치를 할금할금 훔쳐보더니 상순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지새금과 순애는 눈물이 글썽해 상순에게 다가왔다. 순애는 상순의 두 손을 잡고 “삼촌, 삼촌이 가면 우린 누구를 믿고 삽니까? 삼촌이 옆에 있으면서 이영도 이어주고 집도 손질해주더니 이렇게 훌쩍 떠나가면 어쩝니까?”라고 애원했다. “올해는 이미 이영을 이어놓았으니 괜찮다. 명년에 부모 산소를 보러 올 때 이영을 손질할 테니 근심하지 말라.” 성욱과 동림은 달려와서 아버지와 어머니 옆에 서 있는 덕돌을 불렀다. “이사 가니?” 성욱이 묻자 덕돌은 울먹울먹해 겨우 말했다. “나는 아이 간다. 여기서 놀다가 이제 밭갈이랑 할 때 오라더라.” 그러자 동림은 손벽까지 치면서 좋아했다. 덕돌은 성욱과 동림의 손을 잡아 흔들었다. 동림은 덕돌의 손을 잡아 끌었다. “가자, 오늘 패랑산에 올라가지 않겠니?” “며칠 후에 올라가자. 내 우리 아버지와 엄마 이사 가는데 바래야지.” "아싸, 우리도 안쪽으로 이사간다고 하더라.” 동림은 이사가기 싫은지 입에 따 발을 걸 지경으로 뽀족해졌다. “뭐라고?” 놀란 것은 성욱이었다. “동림이네까지 이사가면 나는 누구와 놀겠니?” “나와 함께 놀면 되지.” 그때 병진이네 맏아들 철주가 달려왔다. “누가 너하고 논다더니?” 성욱은 앵돌아졌다. 덕돌이랑 성욱이랑 손버릇이 나쁜 철주와 놀기 싫어했다. 어려서는 쩍하면 다른 애들의 놀이감 권총이랑 훔치더니 크면서 남의 해바라기랑 훔쳐 까 먹군 했던 것이다. 저쪽 종연이네 집 부근에서 방순희랑 정인옥이랑 월선이랑 이쪽의 덕돌이랑 보고 있었다. 상순은 마을의 숱한 사람들의 환송을 받으면서 마을 동구 밖으로 떠나갔다. 그는 머리를 들어 자기가 한뉘 평생 분투해온 마을과 패용천산과 칼산, 그리고 조상의 산소가 모셔진 천지꽃산과 계수동 산정을 바라보며 눈물을 훔쳤다. 그는 조상들의 산소 그리고 함흥촌과 조개덕 마을 사람들을 향해 돌아가며 꾸벅꾸벅 절을 올렸다. 그는 눈물을 훔치더니 비틀거리며 진수해를 바라고 떠나갔다. 저쪽 어데선가 한 여인의 쓸슬한 노래소리가 간간히 들리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오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 가서 발병 난다 ... 상순은 그 귀에 익은 목소리 주인이 누구인가를 알고도 남음이 있었다. 저쪽 늙은 비술나무 아래에서 지춘실이 하얀 머리수건을 벗어 두 손으로 맞잡고 석별의 정을 담아 쓸쓸히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속이 강철 같은 상순도 그 장면을 보자 코마루가 시큼해났다… 봄 제비들이 지저귀면서 어둠이 엷게 색바래져가는 하늘에서 날아다녔다. 그날은 유난히도 맵짠 칼바람이 세차게 불어쳤다. 덕돌은 부모와 넷째누나가 마을에서 저 멀리 흑점으로 아물거리다가 굽인 돌이를 돌 때까지 배웅했다. “덕돌아, 오늘 안쪽으로 가기 전에 군사훈련을 하지 않겠니?” 동림이 물어보자 덕돌은 주먹으로 눈물을 쓱 닦으면서 머리를 끄덕였다. “온 마을의 홍소병하구 홍위병들을 몽땅 집합시켜라!” 성욱은 “동림아, 너네는 어디로 이사가니?” 하고 물었다. “흑룡강성 상지라는 곳으로 간다.” 동림은 씩씩거렸다. “이씨, 쌀고생 하지 말자고 안쪽으로 간다더라.” 덕돌은 동림을 보고 말했다. “우리 아버지는 투쟁대회 싫어서 이사한다더라. 이씨, 나는 가기 싫어 죽겠다.” 그러자 성욱은 불쑥 뜻밖의 소리를 쳤다. “작은 아즈바이, 커라배(할아버지)는 서기를 내놓기 싫어하더니 덕돌인 활동참 단장을 내놓기 싫어하는구나. 정말 웃긴다, 웃겨. 흥!” 덕돌은 희죽이 웃으며 성욱을 바라보았다. “이 놈아, 내 이사 가면 단장을 하려무나. 잔말 말고 오늘까지 이 단장 아즈바이 말을 들어라! 빨리 애들을 불러오라.” “알았다. 아즈바이께 잘 보여야 단장이나 하겠는지.” 이윽고 애들이 몽땅 조개덕 마을 복판에 자리 잡은 창고마당에 모였다. 희붐히 밝아오는 마당에 모인 애들 속에는 덕돌보다 두, 세 살 이상 되는 초중 졸업반의 애들도 있었다. 애들은 낙제를 자꾸 하여 초중 1학년을 다니는 덕돌과 한 학년을 다니는 애들도 있었고 어떤 애들은 덕돌보다 두 학년이나 세 학년 이상 되다나니 덕돌보다 키가 머리 하나는 더 커도 단장이라고 죄꼬만 조왕들이 영도를 받아야 했다. 덕돌은 제법 나무권총을 허리에 차고 애들앞에 서서 목청을 가다듬어 구령을 불렀다. “3열 횡대로 줄을 섯!” 그러자 애들은 즉시 3열 횡대로 줄을 섰다. 허나 어떤 애들은 이전처럼 말을 잘 듣지 않았다. 키 큰 동철은 저쪽으로 서서 굿을 보고 서 있었다. 그는 철주와 수군거리기까지 했다. “저 덕돌은 이사 간더던데 아직도 우리 단장 한다니?” 동철의 말에 철주가 맞장구를 치면서 줄도 바로 서지 않았다. “글쎄 말이야. 자네 아버지는 금방 갔다. 그런데 자는 어째 가지 않니?” 그때 덕돌이 소리쳤다. “난 가지 않는다! 줄이나 바로 서라!” 그러자 애들은 쑤군거렸다. “옳다! 가지 마라! 네가 가면 우리 활동참이 재미없다.” “옳다! 누가 우리에게 재미나는 옛말을 해주겠니?” “누가 우리를 데리고 패용천산에 가서 전투놀음을 놀겠니?” “가지 말라!” 애들이 소리치자 덕돌은 코마루가 시큼해났다. “그래, 난 이사 가지 않는다! 근심하지 말라! 오늘 군사훈련을 하는 게 어때?” “와!” 애들은 좋아 야단쳤다. 허나 철주랑 성욱이랑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성욱은 덕돌이 가야 단장을 하겠는데 가지 않겠다고 하니 앵돌아졌다. 덕돌은 떠들어대는 애들을 향해 소리쳤다. “이제부터 내 구령대로 해라!” “차렷!” 애들은 제법 구령대로 두 발뒤꿈치를 척 모아붙이면서 똑바로 섰다. “쉬엇!” “차렷!” “좌로 돌앗!” 애들은 제법 구령대로 좌로 척 돌아섰다. “뛰엇!” 애들은 덕돌의 구령에 따라 발을 척척 맞춰 마을 밖으로 달려 나갔다. 애들은 패랑산을 바라고 닫다가도 덕돌이 나무권총을 휘두르며 “엎드려!” 하고 외치면 길 양옆에 두 줄로 쭉 엎드렸다. 머리는 길을 향해 줄느런히 엎드렸다. 하긴 겨우내 눈이 오는 날을 내놓고 거의 날마다 애들은 이른 아침에 일어나 덕돌의 지휘에 따라 군사 연습을 했기에 구령만 내리면 아주 멋지고 일치하게 엎드리고 기고 달리었다. 그뿐이 아니다. 애들은 어느 새 패랑산에서도 제일 가파로운 남쪽 기슭에 이르렀다. 마을로부터 약 한 키로미터나 달려온 애들이 쉴 새도 없이 덕돌은 허리에 찼던 권총을 빼내 휘둘렀다. “돌격!” “싸(杀)!” 애들은 소리치면서 경사도가 60도도 넘는 가파론 절벽을 톺아 오르기 시작했다. 덕돌은 한참 톺아 오르다가 내려다보았다. 눈뿌리가 아찔 해났다. 그의 앞에서 9촌 조카 후남이가 제일 가파론 절벽 돌틈을 잡으면서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창선은 항상 그랬듯이 제일 마지막에서 기어오르고 있었다. 막내외동아들인 창선은 항상 겁을 먹고 절벽으로 기어오르기 싫어했다. 허나 그 애도 덕돌의 명령도 명령이었지만 활동참 기율을 어길 수 없어 마지못해 기어오르고 있었다. 덕돌이네 아랫집 정규상네 둘째딸 순임도 후남의 뒤를 따라 절벽을 톺아오르고 있었다. 죄꼬만 덕돌은 몇몇 꺽다리들의 뒤를 따라 빠른 축에 들어 절벽 위로 톺아 올랐다. 반시간도 안돼 애들은 몇십미터나 되는 가파로운 패랑산 절벽을 톺아 올라 정상에 올랐다. 애들은 패용천산 꼭대기에서 땀을 들이며 시원한 산 공기를 한 가슴 가득히 들이켜면서 웃고 떠들었다. 그때 저 동녘에서 붉은 해가 불덩이처럼 구름을 가르고 불끈 떠올랐다. 고기비늘 같은 먹장구름이 점차 발갛게 타오르다가 금빛으로 물들어져갔다. 덕돌은 금빛으로 물들어가는 산꼭대기에 돌로 조각한 글처럼 새긴 “모주석 만세!”란 글을 보면서 흥얼거렸다. “금빛태양이 대지를 비추니 모주석 만세 금빛구호 더욱 빛나는구나!” 순임이랑 후남이랑 산꼭대기가 떠나가게 박수를 쳤다. “쟤는 작문을 잘하지 않고 뭐야!” “옳다. 그래서 말도 아주 멋지게 하지 않고 뭐니.” 이때 동철이 코를 풀적 거리면서 다가왔다. “덕돌아, 이사 가기 전에 옛말을 좀 더 해 달라.” 그 말에 애들이 떠들까봐 덕돌은 손사래를 쳤다. “누가 내 이사 간다더니? 안 간다, 안가!” 그러자 순임은 박수를 치면서 쌍까풀눈을 곱게 흘겼다. “그러지 않고. 네가 가면 누구한테서 옛말을 듣겠니? 빨리 하나 해라.” 애들은 예전처럼 산이 떠나갈 듯이 박수를 치면서 덕돌을 바라보았다. “그럼 하지.” 애들은 덕돌을 둘러싸고 모여 앉았다. 덕돌은 금방 절벽을 오르느라고 땀을 흘린 애들이 감기에 걸릴까봐 “에헴, 에헴.” 하고 마른기침을 하더니 짧은 옛말을 시작했다. “호랑이가 담배를 피우던 옛날이었다.” “야, 야. 호랑이가 어떻게 담배를 피우니? 순 거짓말이다, 거짓말.” 철주가 떠들어대자 꺽다리 애들은 손으로 철주의 머리를 눌러놓으며 말렸다. “작작 떠들어라. 옛말이 다 그렇지. 뭐. 덕돌아, 계속 해라.” 애들은 코를 풀적거리며 숨을 죽이고 귀를 강구고 덕돌의 옛말을 들었다. “수말이 새끼를 낳았다는 멀고 먼 옛날에 어떤 마을에 개코라는 애가 있었지.” “히히히.” 애들은 코를 싸쥐고 웃었다. “개코다, 개코.” 덕돌은 웃는 순임이랑 순희랑 보면서 뒤를 이었다. “개코네 아버지는 사방 십리에 이름을 날린 사냥꾼이지. 그런데 하루는 산에 가서 범을 잡다가 나무 위에 올라갔지. 그런데 그만 날랜 범이 나무가지 위에까지 씽 날아올라왔지." "저걸 어쩌니?" "그래서 아버진 범한테 물려 죽었단 말이야.” “저런! 그래 어쨌니?” 덕돌은 턱을 고이고 다가드는 성욱이랑 돌아보며 계속 이야기했다. “그래서 개코는 원수를 갚으려고 어머니한테서 활쏘기를 배웠지. 활을 잘 쏘면 멀리서도 범을 잡을 수 있어 물리어 죽을 위험이 적지. 그런데 어머니는 물동이 물에 바가지를 얹어 이고 개 코를 보고 바가지 쪽지를 활로 쏘라고 했지. 개 코는 어머니를 쏠까봐 겁이 나서 손이 떨렸지만 잘 조준해 물 동이 우에서 바가지 쪽지를 면바로 쏘아 떨구었단다.” “야, 명사수구나.” “그래. 개코 어머니는 개 코에게 활과 칠성비수를 주면서 아버지 원수를 갚으러 가도 된다고 했지. 그래서 개코는 범과 승냥이들이 득실거리는 머나먼 산으로 갔지. 처음 원시림 속에 간 개 코는 날이 어두워지자 으르렁거리는 범과 이리들을 보고 겁이 나 나무 밑에 눈을 감고 있었지. 그때 마을로 갔던 범들이 돼지랑 오리랑 물고 산으로 돌아오고 있었지. 제일 큰 아버지 범은 냄새를 ‘흡, 흡.’ 맡더니 나무 밑에 두 팔로 눈을 가리고 있는 개 코를 발견하고 새끼와 조카 범들을 보고 ‘저 개 코를 물어오라! 내 양치질이나 해야 하겠다.’라고 명령했단다. 그러자 새끼 범들은 달려와 개코를 물려고 했지. 그때 개코는 활을 꺼내 달려드는 범을 쏘았지. 백발백중인 개코의 화살에 숱한 범이 쓰러졌지. 그런데 한 놈이 쓰러지면 또 다른 범이 달려들었지. 개코는 용감히 싸우다가 나중에 화살이 다 떨어졌지. "저런!" "그래서 개코는 끝내 어미 범 앞에 물려 갔지. 어미 범은 개 코를 제꺽 입에 넣더니 통째로 꿀꺽 넘겼지. 개코는 어미 범의 새까만 배때 안에서 칠성 검으로 밸을 싹싹 베고 간에도 칼을 대 도려내기 시작했단다.“ “하하하. 거 재미있구나.” 숨이 한줌만 해서 귀담다 듣던 애들은 웃고 떠들기 시작했다. “조용해!” 제일 머리 큰 순춘이 소리쳐 제지시켰다. 덕돌은 계속했다. “어미 범은 배 아파 땔, 땔 굴다가 ‘이 놈 새끼들이, 나에게 독이 묻은 개 코를 물어다 줬다.’라고 하더니 돌아가면서 새끼들을 물어 죽였지. 그때 개 코는 어미 범의 배를 쓱 가르고 세상 밖으로 살짝 나왔지.” “허허허. 정말 개코 같다야.” “깔깔깔.” 애들은 재미있다고 배를 끌어안고 웃어댔다. 덕돌은 애들을 돌아보면서 물었다. “내가 말하지 않아도 개코가 어떻게 된 건 알만하지?” 동림이 제꺽 대답했다. “그거야 이전 옛말 끝처럼 ‘숱한 범을 잡아 아버지 원수를 갚고 범을 팔아 어머니를 모시고 잘 살았다.’ 이렇겠지 뭐?” 성욱이 동림의 얼굴을 가리키면서 끼어들었다. “그래도 조선지도 머리 좋단 말이야!” 덕돌은 엉덩이를 털며 일어났다. “이젠 땀도 들였으니 내려가자!” “와, 좋다!” 기실 덕돌은 힘이 약하기에 옛말이나 공부를 잘하는 우세를 빌어 애들을 자기 주위에 모으려고 애썼다. 그는 애들에게 할 옛말을 준비하려고 엄마 아니면 아버지 지어 6촌형님 철봉과 동생 송희에게서 옛말을 해달라고 졸라대 숱한 옛말을 들어두었던 것이다. 어떤 날에는 애들이 너무 옛말을 더 해달라고 졸라대 며칠 들어둔 옛말이 바닥이 날 지경이었다. 그리하여 즉흥으로 숱해 전하거나 꾸며내서 되는대로 옛말을 해주었다. “사냥꾼이 범 한 마리를 잡은 게 배를 짜개니 배안에 새끼 범이 있지 않겠니? 그래서 그 새끼 배를 짜개니 또 배 안에 또 새끼 있더란다. 그래서 그 새끼 배를 짜개니 또 범이 있더란다. 그래 범 한 마리를 잡아서 숱한 범을 얻어가지고 수레에 실어다 집으로 와서 잘 살았단다.” 그 허황한 말도 애들은 딱 곧이듣고 “참 신기한 범도 다 있다.”라고 하면서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어떤 때에는 그럴듯한 옛말도 해주었다. “옛날이 지주 한 놈이 어찌나 지독하게 머슴들을 부리는지 머슴들은 복수하려고 들었지. 그래서 남자 머슴과 여자 머슴은 각기 아주 고운 앵무새로 변했지. 그들은 지주네 소 뿌리에 앉아 지주를 욕해댔지. ‘욕심쟁이 지주놈 얼마나 사는가 보자.’ 그 말을 들은 지주는 독이 나서 방치를 들고 슬금슬금 다가와 소 뿔 위에 앉은 앵무새를 딱 쳤지. 앵무새들은 날아나고 대신 지주네 소가 대가리를 맞고 즉살했단다. “하하하.” “이번에는 앵무새가 지주 놈의 번대머리 위에 올라 앉아 놀려댔지. 그러자 지주는 방치로 자기 대가리를 딱딱 쳤단다. 딱 소리와 함께 지주는 대가리 터져 죽었단다.” “호호호.” 애들은 재미있다고 배를 끌어안고 웃어댔다. 순임이랑 패용천산 뒤쪽으로 내려가면서 “아침에 이렇게 신체단련을 하니 영 좋다. 그런데 집에 가서 아침을 많이 먹어 대사다.”라고 했다. 후남은 “너네는 그래도 공호 돼서 괜찮다. 우린 죽물도 배불리 먹기 힘들다.”라고 두덜거렸다. 순희는 덕돌을 뒤따라 산을 내려가면서 “덕돌아, 가지 마라. 네가 가면 우리 활동참은 망태기 된다.”라고 말리었다. 허나 덕돌은 보름달 같이 고운 순희의 얼굴을 돌아보면서 “우리 아버진 쌀 고생을 너무 해서 교하로 이사 간다더라.”라고 했다. 그러자 순희는 주위에 애들이 없는 것을 보고 한마디 했다. “한족 곳에 가서 뭘 하니? 아무리 쌀 고생을 해도 그렇지. 교하가 그리 좋데?” “나도 모르겠다. 아버지 가자고 집까지 다 팔아먹었는데 어쩌겠니? 차차 가야지.” 허나 순희는 계속 말렸다. “넌 우리 학년에서 제일 먼저 홍위병에 들어가지고 가면 어쩌니? 교하에는 홍위병 조직이 있다니?” 허나 덕돌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온 세상이 홍위병 세상인데 교하 한족학교라고 홍위병이 없겠니? 난 배고파 여기서 못 살겠다.” 순희가 또 뭐라고 말하려는데 저쪽에서 철주와 동철이 뛰어 내려오는 것이 보여 그만두었다. 애들이 패용천산에서 내려와 줄을 서서 마을에 들어설 때었다. 성수랑 학수랑 한창 겨우내 덕돌이 애들을 이끌어 주어 모아놓았던 돼지 똥을 수레에 실어다 모상 판에 내고 있었다. 그들은 덕돌이랑 보고 엄지를 내둘렀다. “저 덕돌을 보오. 김서기를 닮아서 애들을 데리고 군사훈련을 하고 돌아오는 거 보오.” 이남이 하는 말에 활동참 보도원인 수봉은 “이 돼지 똥도 덕돌이 애들을 데리고 온 겨울 주어 모아놓은 게오.”라고 칭찬했다. 이남을 비롯한 사원들은 모두 혀를 끌끌 찼다. “저 애들이 해마다 돼지 똥 열 수레씩이나 주어서 모상 판에 잘 쓰오.”라고 했다. 그 칭찬하는 소리를 듣고 겨우내 손을 얼면서 고생해 돼지 똥을 주었지만 속으로 긍지감을 느꼈다. 사실 애들은 덕돌이 활동참 단장이 된 후 보도원 수봉과 토론하고 학습소조를 내와 방학숙제를 한다, 돼지 똥을 한 대야씩 주어오라, 패용천산 절벽을 오르라 하니 처음에는 추운데 헛고생을 한다고 두덜거렸다. 허나 이 때에야 덕돌의 말을 듣고 군사훈련을 하고 공부를 하면서 날마다 조개덕 생산대를 위해 좋은 일을 한 것이 옳았다는 것을 깊이 느끼게 됐다. 덕돌은 끝내 떠나가는 날이 돌아왔다. 그는 막내누나 성숙과 함께 십여일 둘째누나네 딸 계옥이랑 업고 놀다가 집에서 애지중지 키우던 토끼 두 마리를 바구니에 담아들고 마을을 떠나게 됐다. 부모들은 교하에 가서 사돈집을 빌어든 후 들어오라고 편지가 왔던 것이다. 그 소문을 듣고 송아지친구 성욱이랑 동림이랑 뛰어왔다. “너 정말 가니?” 덕돌은 토끼를 담은 바구니를 막내누나에게 주고 성욱과 동림의 두 손을 잡고 흔들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늙은 비술나무 밑 저쪽에서 미선과 순희가 눈물이 그렁그렁해 덕돌을 볼뿐 다가오지 못했다. 덕돌은 순희 쪽에 대고 손을 저었다. 허나 순희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우고 저쪽으로 달아났다. 덕돌은 고향 마을을 떠나면서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되지 않는 발걸음을 겨우 무겁게 한 발자국 한발자국 떼었다. 눈물을 휘 뿌리며 정든 고향을 떠나는 그의 심정 오죽하랴. 아, 고향이란 무엇이기에?                             
142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103) 댓글:  조회:991  추천:0  2018-05-27
                     3. 청춘의 욕정 무더기로 쌓인 억울한 백골더미 위에서 요정이 사악한 입김을 내뿜자 수많은 억울한 사람들이 허깨비처럼 백골로 변해갔다. “깔깔깔, 까르륵, 깔깔.” 요정은 쓰러져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배를 끌어안고 간사하게 웃어댔다. 도대체 왜 세상이 이렇게 변했을까? “문화대혁명”의 음산한 바람이 불어온 후 도시와 농촌 그 어디나 모두 살풍경이었다. 노간부들을 보호하던 한영수 등 수많은 조선족간부들은 감방에서 풀려 나오지 못했다. 현위 이계삼 등 적지 않은 한족 노간부들도 조선족 노간부들과 함께 이른바 “5.7간부학교”에 가서 노동개조를 해야 했다. 산골에 있는 “5.7간부학교”는 모주석의 “5.7지시”에 따라 차린 간부학교라고 했다. 하지만 사실 “착오”를 진 간부들을 가둬 놓고 마레-주의, 모택동 사상으로 두뇌를 씻어내고 노동개조개조를 하는 전문학교라고 할 수 있었다. 사회에서는 지식분자들을 더러운 아홉째들로 몰아부치면서 지식분자들은 손과 발에 똥이 묻은 빈농들보다 사상이 못하다고 여론조성을 했다. 또 지식분자들은 광활한 농촌에 내려가 빈농들에게서 생산노동을 배우면서 재교육을 받아야 사상이 붉은 간부로 될 수 있다고 했다. 하늘에서는 최고지시가 눈송이 날아 내리듯이 끝이 없이 쏟아져 내렸다. “광활한 천지에는 지식분자들이 할 일이 많다.” “빈농이 없으면 혁명도 없다. 빈농을 반대하는 것은 혁명을 반대하는 것이다.” “빈농이 일체를 영도한다.” “노동계급이 일체를 영도한다.” 최고지시가 쏟아져내려오는 족족 남녀노소를 물론하고 참답게 학습하고 암기해야 했다. 모주석의 말씀은 마디마다 진리이고 황금을 주고도 바꾸지 못하는 진리였고 철리였다. 그 금지옥엽 같은 말씀, 진리, 최고지시를 누가 감히 어기겠는가! 전 당, 전국 인민들이 최신, 최고 지시를 목책에 적어두고 사람들이 눈에 제일 잘 띠우는 곳에 세운 흑판보거나 선전란에 큼직큼직한 뻘건 글씨로 써서 모셔놓았다. 지어 조각을 잘 하는 예술가들은 최고 지시를 목판조각하거나 지어 세멘트 흑판에 새겨 놓았다. 집집마다 밥을 먹기 전에 최고 지시를 실은 손바닥만 한 붉은 모주석 어록책을 가슴에 댔다가 모주석의 초상화에 올리휘두르면서 “경애하는 모주석의 만수무강을 축원합니다!” 라고 충성의 인사를 올리었다. 학교에서도 시간을 보기 전이면 사생들이 몽땅 기립해 모주석의 초상화에 대고 “경애하는 모주석의 만수무강을 축원합니다!”를 삼창하는 것이 관례로 됐다. 조금 문제가 있다는 로간부들은 모두 “5.7”지시에 따라 “5.7”간부학교에 가서 뼈가 빠지도록 각종 농사일을 하면서 사상을 개조했다. 기실 감옥이 아닌 감옥이라고 할 수 있는 학교에서 징역살이를 하고 있었다. 한영수는 아내 이연분까지 “5.7간부학교”에 끌리어 갔다. 이연분은 신문사 기자였는데 코신부대를 지지하는 문장을 썼다고 해 “보황파”로 몰리어  “5.7”학교에 끌리어왔다. 허나 학교에서는 그들 부부를 한 침실에 들어 함께 자지도 못하게 했다. 한영수는 산을 넘어 분교  양돈장에 가서 돼지죽을 끓여 먹이게 됐고 아내는 이 학교에 와서 노동개조를 하는 수십 명 간부들의 밥을 지어야 했다. 학교 혁명위원회 관리일군들은 그들이 서로 잡담을 하지 못하게 감독했으며 채찍질을 하지 않았을뿐 감옥의 죄수들을 다루듯 했다. 표현이 좀 좋지 않으면 저녁에 여는 사상개조회의에서 한바탕 비판받아야 했다. 어느 날 저녁, 사상개조회의에서 한 간부는 앞장서 한영수를 적발하고 비판했다. 남을 투쟁하는데 앞장서야 하루라도 빨리 이 지긋지긋한 5.7간부학교를 벗어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저 영수는 돼지를 잘 먹일 대신 배고프다면서 돼지죽을 훔쳐 먹었습니다." 그 말에 모두 웅성거렸다. (어떻게 배고팠으면 돼지죽을 다 훔쳐 먹었겠는가.) "쯧쯧쯧." "또 있습니다. 한영수는 여기 본교 식당에 와서 아내를 도와 나무를 팼습니다. 아직도 자산계급의 썩어빠진 생활과 사상 습관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분교 양돈장의 돼지죽이나 잘 끓일게지 여기 와서 뭘 하려는 겁니까? 남들이 일하러 간 틈을 타서 아내를 돕는 척하다가 밥이라도 훔쳐 먹을 작정 아닙니까? 사심이 얼마나 많습니까?” 영수는 머리를 숙이고 반성해야 고비를 넘길 수 있었다. 한 반란파는 영수의 아내 이연분의 머리카락을 잡아 마구 내리누르면서 고래고래 고함쳤다. “속담에 암캐 꼬리를 치지 않으면 수캐 달려들지 않는다고 네년이 꼬리쳤지?” 그 억이 막힌 말에 한영수나 이연분은 두 말할 것이 없었다. 노간부들은 모두 어이없어 고개를 툭 떨어뜨린 채 도리머리를 흔들거나 한숨을 푸푸 내쉬었다. 너무 혹독하게 바투 들이대자 연분은 머리를 들고 반란파를 직시하면서 반문했다. “나와 영수동무는 합법적인 부부 아니오?” “그거야 옳지.” 어망 간에 이렇게 대답하고 반란파는 말을 바꿨다. “허나 너희들은 노동개조하는 반동간부야. 마음대로 사통해선 안 돼!” “뭐가 사통이란 말이오? 부부간에 살아도 사통이오? 정말 사람을 웃겨도 분수가 있지.” 비인간적인 모욕에 연분은 굴하지 않았다. “너희들 정말 그걸 했는 모양이구나.” 영수는 옆에 선 연분의 손을 툭툭 쳐 말리며 한발 나섰다. “근본 그럴 새 없었소. 난 나무를 팼고 이 동문 밥을 짓고 돼지죽을 주었을 뿐입니다.” “음, 하기만 해보지. 네놈들 바지를 벗겨놓고 거기에 개똥을 발라놓겠다.” 그 소리에 간부들은 속으로 어처구니없어 하면서도 누가 감히 나서 말 대구 한마디 하지 못했다. 반란파들은 저녁이면 노간부들을 투쟁하면서 변태적인 재미를 보고 있었다. 이런 어지럽고 변태적인 세상이기에 영수와 연분 부부는 한 방에 들어 잘 수도 없었다. 더구나 노간부 십여 명이 시루속의 콩나물처럼 한 구들에 누워 돌아누울 자리도 없이 잤기에 서로 감독하다나니 용빼는 수가 없었다. 바깥에 있는 변소로 나가도 보초를 서는 당직이 변소까지 따라 다니기에 그럴 기회가 없었다. 한번은 분교의 취사원이 애가 앓아 청가를 맡는 바람에 밥을 지어 분교에 가져가게 됐다. 이른 새벽에 연분은 밥을 지어 함지에 퍼 이고 남편이 있는 분교에 가면서 별스레 가슴이 높뛰었다. 뒤에는 물론 당직이 뒤따랐다. 그녀가 밥함지를 이고 헐금씨금 영을 넘어 어느덧 분교 숙사에 이르렀다. 그녀가 숙사에 들어가 구들을 둘러보니 아직 숱한 노간부들이 이불을 들쓰고 구들에 빼곡하게 누워 곤하게 자고 있었다. 그녀는 육감적으로 제일 문 옆에 누운 사람이 자기 남편임을 알아보았다. 하여 살금살금 다가가다가 뒤돌아보았다. 당직은 바깥에서 서성거리다가 변소로 어정어정 가고 있었다. 연분은 오랜만에 가까이에서 남편을 보자 가슴이 울렁이었다. 그러나 숱한 노 간부들이 자는 커다란 구들에서 어찌는 수가 없었다. 궁리 끝에 그는 다른 노간부들이 깰까봐 가만가만 남편의 발치에 다가가 맨발을 매만졌다. 그 바람에 깨어난 영수는 자기 발을 매만지며 바라보는 연분을 보고 깜짝 놀랐다. 연분의 심정을 헤아리고 그저 도리머리를 흔들면서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었다. 영수가 와닥닥 일어나려고 하는데 연분이 옆을 눈치하면서 눌러 눕혔다. 그녀는 남편의 발만 가만히 매만지다가 들키기 전에 인차 나가와버렸다.  “에헴, 에헴” 그때 당직이 마른기침을 하면서 변소에서 나와 괴춤을 춰 입었다. 그는 밥함지를 두고 나오면 될 연분이 늦어서야 나오는 것을 보고 대개 눈치 챘다. 돌아오는 길에 당직 노간부는 연분에게 말했다. “이 놈 세월 무슨 세월이오? 부부라도 만나 말 한마디 해도 안 되니. 참.” 그 말에 연분은 코마루가 시큼해나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돌아서 어깨를 들먹였다. “후에 내 당직을 설 때 기회를 마련해 줄게.” 그 노간부는 그들을 위로해 주었다. 허나 그 험악한 세월에 누가 누구를 믿겠는가. 어느 날 아침, 영수가 돼지먹이를 푸려고 본 교 식당으로 오게 됐다. 그때는 금방 노간부들이 일밭으로 나가고 반란파가 당번을 서고 있었다. 영수는 식당에 들어가 바가지로 뜨물독에서 시크무레한 냄새 나는 뜨물이랑 묵은 음식찌꺼기를 한 바가지 한 바가지 퍼서 물 초롱에 꼴딱 담았다. 그가 멜대로 물 초롱을 메고 떠나려 할 때다. 연분이 앞치마에 손을 닦으면서 식당 침실에서 나오다가 딱 마주쳤다. “여보, 좀…” 오랜만에 만난 영수는 식당 안에 누가 없는 것을 보고 아내를 와락 끌어안았다. 아내는 자기 볼에 키스벼락을 안기는 남편의 볼을 매만졌다.        젊은 부부는 끓어오르는 욕정을 어찌 할 수 없어 신음소리를 내면서 찰떡처럼 딱 들어붙어 포옹한 채 말을 잃었다. “여보, 누가 보겠소. 또 투쟁 받겠소.”  “보겠으면 보라지. 우리 어디 남남이오?” 영수는계속 여기저기 매만졌다. 연분은 피뜩 “여보, 돼지 굴에 가면 어떤가요?”라고 물었다. 영수는 머리를 저었다. “안 되오. 돼지 꿀꿀거리면 인차 들키오.” 뒤이어 영수는  기발한 생각을 내놓았다. “변소로 가면 어떠오?” 연분은 머리를 들고 영수를 마주 바라보며 궁리하다가 머리를 끄덕였다. “당신 먼저 들어가오.” 영수는 사위를 흘금거리면서 식당에서 그리 멀지 않은 토성 구석에 있는 변소로 들어갔다. 문고리를 쥐고 식당과 바깥을 살피던 연분도 돼지죽을 퍼들고 돼지 굴로 가는 척 하면서 땔나무 주위를 한 바퀴 돌아보았다. 전날에 보초를 서던 노 간부가 당직을 서느라고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있었다. 반란 파는 저쪽 숙사 쪽으로 어깨가 으쓱해 가고 있었다. 연분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누르면서 바가지를 든 채 변소로 다가가 문 꼬리를 쥐어 당기었다. 영수는 물앉아 벌써 바지를 내리었다. 연분은 변소 문고리를 단단히 쥐고 바지를 재빨리 내리었다. 그들 부부는 그 비좁고 구린 내 나는 변소에서 오랜만에 끓어오르는 청춘의 욕정을 불태웠다. 누가 들을까봐 거친 숨소리도 크게 쉬지 못하면서도 그들의 사랑은 기름을 친 마른 장작더미에 붙은 불처럼 열렬하고 강렬하게 활활 타번지었다. 계급투쟁을 기본 고리로 하는 세월에 가혹한 정치몽둥이에 얻어맞으면서도, 날마다 고된 노동개조를 하면서도 인간의 기본 욕정만은 머리를 숙일 줄을 몰랐다. 부드러운 비단이불속이 아니어도 푹신푹신한 침대 위가 아니어도 좋았다. 그들 부부는 구린내 나는 변소에서도 그다지도 달콤하게 사랑을 나누는 것이 아닌가! “에헴. 에헴.” 마른기침 소리와 함께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애햄, 애햄, 칵 퉤!” 연분은 문고리를 두 손으로 딱 틀어쥐면서 황급히 인기척을 냈다. 영수는 두 번 다시 사랑을 나누고 싶었다. 하지만 어찌는 수가 없어 아쉬운 대로 아내 허리를 놓아주면서 허리를 굽힌 채 조용히 바지를 춰 입었다. 연분은 옹이구멍으로 바깥을 내다 살피었다. 당번 노간부가 도리머리를 흔들면서 식당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저 치가 눈치채지 않았을까? 이 일을 어쩐담?) 연분은 근심하면서도 머리를 손으로 싹싹 빗어 넘기고 옷매무새를 단정히 한 후 변소 문을 살랑 열고 나가 변소 문을 꽉 닫아놓았다. 그녀는 변소 옆에 놓았던 바가지를 쥐고 사위를 두루 살피면서 황급히 자리를 떠나버렸다. 당직 노간부는 짐짓 보지 못한 척 하면서 아예 식당 울안에서 나가 저쪽 숙사 쪽으로 스적스적 가버리는 것이었다. 영수와 연분은 그 노간부가 눈치 챘다는 것을 직감했다. 만약 그가 눈치 채지 못했더라면 연분이 나왔으면 뒤가 바빠서라도 변소로 인차 들어갈 것이 아니겠는가! 영수는 속이 한줌만 해 도적고양이처럼 변소에서 나와 식당에 들어가 돼지먹이를 퍼 담은 물 초롱을 멜대로 둘러메고 식당 문을 나섰다. 그가 울안을 벗어나는데 반란파와 딱 마주쳤다. 반란파가 이상한 눈길로 영수의 아래위를 훑어 볼 때다. 저쪽에서 당직 노간부가 돌아오더니 “어, 한 동무 왔소?” 하고 짐짓 모르는 척 했다. “양.” 영수는 황급히 돼지 뜨물을 메고 총총 걸음을 재우쳤다. 노간부는 슬쩍 웃음을 지어보이면서 길가의 돌을 발로 툭 차버리었다. 반란파는 휘파람을 불면서 숙사로 들어가 버리었다. 되돌아보니 식당의 굴뚝에서 점심밥을 짓는 삼단 같은 연기가 꾸역꾸역 솟아오르는 것이었다. 그제야 영수는 한숨을 땅이 꺼지게 후 내쉬면서 고개를 넘어섰다. (이 놈의 암흑한 세월이 언제면 끝날까?)                     4. 민주투표 박영발과 박윤희는 이른바 “보황파”로 몰리어 갖은 고문과 능욕을 받을 대로 다 받았다. 어느 날, 그들은 가족까지 데리고 시골 함흥대대에 쫓기어 내려가 노동개조를 하지 않으면 안 됐다. 진수해공사에 떨어진 박윤희와 박영발은 허영호 소장의 덕분에 상순이 있는 함흥대대로 내려가게 됐다. 말로는 하향간부라고 듣기 좋게 불렀지만 기실 농촌으로 추방해 노동개조를 시킨 셈이다. 박영발은 함흥대대에 내려오자마자 상순의 집을 찾아갔다. 상순은 맨발 바람으로 뛰어나오다 시피 했다. 영발은 상순의 두 손을 잡고 통사정을 들이댔다. “김 서기, 이전에 이집 애들을 치료해준 걸 봐서라도 나를 도와주오. 당신을 믿고 함흥대대로 왔는데 조개덕 생산대에 오는 게 좋을 거 같소.” 상순은 박영발 서기의 두 손을 꽉 잡고 흔들었다. “근심 마오. 내 치보 주임과 말해서 우리 대에 내려오게 하지. 농촌에 내려와서 어떻게 고생하겠소?” “양, 괜찮소. 그래도 감옥에 갇혀 고문당하고 투쟁 맡기보다야 낫겠지.” 상순은 누추한 초가집에 영발을 데리고 들어갔다. 그는 영발에게서 그간 시내 “문화대혁명” 정황을 죽 들었다. “우리와 함께 고생하던 시 당위 판공실의 김진욱은 지금 사평감옥에 가서 감옥살이를 하오.” …진욱은 완고한 악질반동분자로 몰리어 사평감옥에 가서 진종일 30도도 넘는 고온용광로 앞에서 쇠 물을 녹이는 강제노동개조를 해야 했다. 옥수수떡 한 쪼각이거나 천정이 다 들여다보이는 멀건 강냉이죽물을 대충 먹고 낮에 쇠 물을 녹이는 고된 일을 해야 했다. 어떤 때에는 멀건 배추장물을 먹다가 쥐새끼마저 장물 그릇에 있어 먹다 말 때도 있었다. 허나 배고파 그런 장물도 쥐새끼를 퍼 버리고 먹지 않으면 안 됐다. 배고파 고된 일을 삐치기 힘들었던 것이다.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해 강철생산임무를 완수하지 못하는 날이면 또 노라리를 쳤다고 투쟁 받거나 고문당하거나 지어 작은 단방에 갇혀 반성해야 했다. 생산임무를 완수했어도 날마다 밤이면 감방에서 끌리어 나가 감옥 회의실에 가서 숱한 “죄수” 앞에서 손을 들고 투쟁받으면서 모택동 주석의 저작을 암기하고 사상을 검토해야 했다. 밤중이면 너무 배고파 주린 배를 그러안고 시달림을 받아야 했다. 어떤 때에는 진짜 기어지나가는 쥐며느리마저 다 잡아 입에 넣고 씹어 먹기까지 했다. 허나 그래도 하루 노동개조와 사상개조가 끝나 감방 잠자리에 들면 제일 좋았다 쇠살창 너머 흘러드는 쓸쓸한 달빛을 볼 때면 고향에 있는 처자들의 생각이 나 고통스러웠던 것이다… 상순과 영발은 이말 저말 하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함흥촌에 올라가 치보 주임 이흥수를 찾았다. 흥수는 상순의 말을 듣자 영발과 윤희를 번갈아 보다가 영발을 보고 “조개덕으로 가서 잘 개조하오.”라고 했다. 영발은 그날로 처자를 데리고 이불 짐을 수레에 실어가지고 상순을 따라 조개덕에 내려와 상순이네 집에 임시로 들게 됐다. 박윤희는 함흥촌에 독신으로 내려와 대대 위생소 옆 칸에 임시 들어 있게 됐다. 사실, 윤희는 영발과 마찬가지로 치보 주임 흥수에게 상순이 있는 조개덕에 보내달라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흥수는 백지장 같이 살결이 하얀 윤희의 예쁜 모습을 아래위 뚫어지게 훑어보더니 한마디로 잘라버렸다. “안돼. 조개덕에 개조범들이 많으면 뭉쳐서 나쁜 짓 할 수 있우니께. 못가. 함흥촌에 남으라면 남을 게지. 무슨 잔말인가? 상순의 엉덩이에 엿이나 달렸어?”      윤희는 혀를 홀랑 내밀며 눈을 곱게 흘기었다. 치보 주임이 어찌나 으르렁거리는지 그녀는 다시는 조개덕으로 가겠다는 말을 꺼내지 못했다. 다리 부러진 노루가 한데 모인다고 함흥대대에 개조하러 내려 보낸 하향간부들이 날에 날마다 늘어갔다. (어쩜 이계삼 부서기와 허영주 부현장을 오류분자와 함께 몬단 말인가? 그래 노간부들이 지주, 부농, 우파분자, 역사반혁명분자, 현행반혁명분자들과 똑같이 노동개조하고 투쟁받아야 한단 말인가?) 상순은 사원들을 데리고 천지꽃산 상우지에 가서 기음을 매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납득이 되지 않았다. 그는 산중턱에 있는 쓸쓸한 할아버지 산소를 보자 그 앞으로 다가갔다. 풀숲 속에 쓸쓸하게 누워 있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산소를 바라보는 순간 가슴이 뭉클하고 코마루가 시큼해났다. 사원들이 산비탈 아래로 다 내려가기를 기다려 그는 조부모의 산소 앞에 무릎을 꿇고 꾸벅꾸벅 절을 올리면서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할아버지, 할머니, 왜 저를 홀로 이 사악한 세상에 남겨두고 그렇게 총망히 가시였습니까? 항일 노 간부들인 이계삼 부서기와 허영주 부현장마저 우리 마을에 돌아와 노동개조를 하게 됐습니다. 할아버지, 이젠 이 험악한 세상에서 누구와 우리 마을 건설을 의논하랍니까? 어허허, 흑흑흑.” 상순은 산소를 끌어안고 목 메여 할아버지를 부르고 또 불렀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 천지꽃산 산비탈에는 쓸쓸한 흐느끼는 울음소리가 수풀과 옥수수, 조밭을 휩쓸며 울렸다. 그때 선들선들 불어오는 가을 바람소리에 섞여 할아버지 걸걸한 말소리가 들려오는 상 싶었다. “얘야, 울지 말라. 이계삼 서기와 허 현장이 있지 않느냐? 위대한 중국 공산당을 믿어라.” “할아버지! 할아버지!” 상순은 머리를 들고 할아버지를 부르면서 두리번거렸지만 하얀 구레나룻이 더부룩한 할아버지의 자애로운 모습은 보이지도 않았다. 참말 이상한 노릇이었다. (환각인가?) 상순은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아니야. 할아버지 혼이 하늘에 현령하여 비틀거리는 나를 가르친 거야.) 상순은 머리를 끄덕이고 나서 또 할아버지 산소를 끌어안고 서럽게 울었다. 한참 통곡치고 나니 속이 후련했다. 비통한 울음소리가 메아리치고 쓸쓸한 파도가 사납게 치는 산비탈 하늘로 외기러기 한 마리가 외롭게 “끼룩끼룩” 울며 가로 날아 지나갔다. 상순은 또 한참이나 산소를 붙안고 흐느껴 울다가 산소에 절을 올리고 나서 이를 악물고 일어나 산비탈 아래로 터벅터벅 걸어 내려갔다. “그래, 위대한 중국 공산당을 믿고 살아야 하지. 아무 때건 우리 당은 억울한 사건을 시정하고 올바른 길로 인민들을 이끌어나갈 거야.” 상순은 이렇게 중얼거리면서 마을에 들어갔다. 점심 숟가락을 놓기 바쁘게 그는 이계삼 서기가 든 우사에 있는 회의실로 찾아갔다. 상순은 집도 없어 이 서기 일가를 회의실에 모시고 허영주 부 현장을 창고 옆에 구들을 놓은 초가 단칸방에 모신 일이 미안했다. 허나 우사에 든 날에 이계삼과 허영주는 이구동성으로 괜찮다고 했다. "항일투사들은 추운 겨울에도 언제 이런 집에서 쉬어 보았겠소?" "나뭇잎을 깔고 덮고 잘 때에 비하면 꽃이오.” 우사 회의실에 들어가 보니 이계삼은 회의실에 보이지 않았다. 바깥에 나가 두루 살펴보니 이계삼과 허영주는 글쎄 앞집 변소에 가서 누런 인분을 초롱에 퍼담는 것이었다. “이서기, 이른 아침부터 인분을 퍼서 뭘 합니까?” 상순의 물음에 이계삼은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신새벽에 흥수가 와서 우리를 보고 오늘부터 인분을 퍼서 천지꽃산 비탈밭에 내라고 했소. 별수 있는가?” 상순은 주위를 둘러보더니 이 서기 손에서 쇠바가지 긴 자루를 빼앗아 두 초롱에 구린내 나는 누런 인분을 꼴딱 담았다. 뒤이어 이 서기 대신 멜대까지 메려고 서둘렀다. “놔두게나. 흥수 보면 또 자네까지 말을 듣겠소.” 상순은 마지 못해 멜대를 놓고 괭이를 들고 따라나섰다. 이계삼과 허영주가 멜대로 인분 초롱을 메고 마을을 벗어나자 받아 메고 천지꽃산 비탈 밭으로 씨엉씨엉 올라갔다. 밭머리에 이르러 상순은 멜대를 내려놓고 인분 초롱을 들어 밭골땅에 줄줄 쏟았다. 이계삼과 허영주가 뒤를 따라가면서 괭이로 인분을 파묻었다. 상순이 불평을 털어놓았다. “에이, 이전에 흥수를 어째 입당시켰던지 모르겠습니다.” 그러자 이계삼은 주의를 주었다. “이제부터 당원을 발전시킬 때 장시기 엄격한 고험을 거친 후 입당시켜야 하오. 정치열성을 지나치게 부리는 자들은 흔히 정치야심이 있을 수 있소.” “예. 종연이랑 승연이랑 주의해야 하겠습니다.” 이계삼은 머리를 끄덕였다. 상순은 조용한 산비탈밭에서 사원들이 오기 전에 요긴한 말부터 꺼냈다. “이서기, 난 당지부 서기를 내놓겠습니다. 반란파들과 흥수가 어찌나 탐내는지 어디 배기겠습니까?” “뭐라고?!” 이 서기는 놀라면서 인분을 끄다가 괭이질을 멈추었다. “그게 무슨 나약한 소린가? 언제부터 천하 면도칼날 같이 자존심이 강하던 자네가 그렇게 무른 밀가루반죽이 됐는가?” 상순은 머리를 숙이었다. 허영주도 상순을 비평했다. “어찌 그런 나약한 소리를 하오? 종연이랑 반란파들이 지금 우리 공산당 노간부들을 몰아내고 대대 권력을 찬탈하려고 하네. 정치란 물러서면 물러설수록 입지가 좁아지는 법이네. 당지부 서기를 내놓을 궁리는 하지도 마오.” “조개덕 생산대 정치대장이나 할 예산입니다. 원 저 함흥촌 흥수나 종연이 보기 싫어 어디 일하겠습니까? 정치대장을 해도 조개덕의 인민을 위해 일할 수 있지 않습니까?” 허나 이계삼은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자네가 서기를 내놓고 정치대장을 하면 그런 수모를 당하지 않을 것 같은가? 자네 이젠 쉰이 다 된 노간부야.” 이계삼은 상순의 어깨를 툭툭 치면서 정중하게 타일렀다. “상순이, 자네 일생을 돌이켜 보면 청렴하고 원칙을 지킨 일생이오. 지위도 명예도 따지지 않고 오직 당과 인민을 위해 혁명을 해왔소. 영월구 공안국 국장자리도 수하에게 내주었소. 지원군 영장을 하다가 퇴대한 후 시내에서 살 권리도 내놓고 이 골안에 되돌아와 이제껏 마을을 건설하느라고 김병완 서기와 함께 대를 이어 고생했소. 그런데 지금 난세 판에 뒤로 물러서려고 하오? 흥수나 종연이 좋아할 일을 하려오?  지금 반란파들은 우리 로공산당원들을 몰아내고 대 혁명위원회를 장악하려고 하오. 혁명위원회라는 데는 당원이 아니어도 들어갈 수 있어 반란파들이 탈권하기 좋은 근거지로 됐소. 때문에 당지부 서기를 내놓아서는 절대 안 되오. 비당원 반란파들인 종연이랑 당권마저 우롱하게 해서는 절대 안 되오. 이런 관건적인 시각에 김 서기는 자기절로 자기를 타도하자고 개패를 메고 나설게 뭐요? 공산당원으로서 스스로 억울한 누명을 쓰고 반란파들에게 권력을 찬탈할 기회를 내주어서야 되오? 정말 어처구니없는 짓을 하지도 마오. 현실도피를 하려고 하지 말고 역경을 맞받아 싸워나가야 하오. 이럴 땔수록 모든 일을 신중하게 처리하오.” 상순은 노서기의 비평에 머리를 숙이었다. “그럼 저의 정치견해를 보류하기로 하겠습니다. 허나 당지부 서기를 민주로 선거합시다. 대체 우리 대대 당원들의 민의를 알아야 될 것 같습니다.” 허영주가 한마디 보탰다. “좋은 의견이오. 명심하오. 우리는 허백호와 박영발, 박윤희까지 모두 단결해 종연을 우두머리로 한 반란파들의 기염을 꺾어 놔야 하오. 우린 노동개조를 하러 나왔지만 아직도 중국 공산당 당당한 당원이오. 우리가 뒤에서 떠밀어 줄 테니까. 근심하지 말고 대담이 공작하오. 종연이랑 절대 우리 당내에 기어들지 못하게 막아야 하오.” 상순은 머리를 끄덕였다. 이때 저쪽에서 종연이랑 흥수랑 붉은기를 메고 사원들을 몰아 밭으로 나오고 있었다. 흥수는 눈초리 꼿꼿해 을러멨다. “똥을 퍼 나르라고 했더니, 참. 한 초롱 밖에 나르지 못했어? 오늘 언제 열 초롱 나르겠어?‘      상순이 막아 나섰다. “아니, 좋은 수레를 두고 왜 노간부들에게 똥 짐을 나르게 하오? 무슨 심보요?” 그러자 흥수는 삐죽한 조개턱을 개 턱처럼 쳐들고 대들었다. “어째? 노동개조범에게 똥 짐을 메나르게 했는데 가슴 아파?” 흥수는 사원들 속에서 가물에 실돌피 같은 한 나그네 뒤 덜미를 잡아 끌어냈다. 헝겊막대기처럼 훤칠한 키에 다닥다닥 기운 누더기를 입은 예순도 넘어 보이는 나그네였다. “알만하오? 이 놈은 일제 때 용정통감부 간도파출소에서 일본 놈들의 통역을 하던 이달송이란 개다리란 말이오. 이제부터 이계삼과 허영주는 이놈과 함께 똥이나 퍼 나르게나.” “뭐라고?!” 상순이 눈을 뚝 부릅뜨자 흥수는 주름이 쪽쪽 간 길죽한 호박대가리에 비웃음기가 서리어 쪽 퍼졌다. “어째 달통되지 않는가?” “어쩜 노간부들을 일본 통역과 똑 같이 취급한단 말이오?” 상순의 질책에 흥수는 코방귀를 “흥!” 하고 뀌었다. “퉤! 당내에 자본주의 길로 나가는 집권 파는 지주나 부농, 일본주구보다도 더 나쁜 놈들이란 말이오. 당과 인민을 위해 일하는 척 하며 양면파 수법을 써가면서 나쁜 짓을 한단 말이오.” 상순이 한걸음 나서면서 흥수와 따지고 들려고 하자 이계삼이 인분초롱을 메고 허리를 펴면서 말렸다. “그만하게. 치보 주임이 하라는 대로 하지. 뭐.” 흥수가 우쭐거리는데 종연이가 흥수를 밀치면서 나섰다. “이젠 당지부 서기나 치보 주임이 이래라 저래라 할 때는 지나갔네. 모든 건 우리 혁명위원회에서 하라는 대로 해야 돼.” 상순은 “이마에 피도 마르지 않은 놈 새끼.” 하고 욕하려다가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억지로 삼켰다. 이계삼이 인분초롱을 메고 산비탈 아래로 내려가려고 할 때다. “서오!” 종연이 고함쳤다. 이계삼이 돌아서 옆구리에 두 손을 지른 종연을 쳐다보았다. “이 놈아! 밭머리에서 모주석께 충성무를 춰드리고 가야지. 잊었는가?!” 그제야 이계삼과 허영주, 상순도 별 수 없어 머리를 숙이고 다가섰다. 흥수는 남조선 특무로 몰리자 인차 카멜레온처럼 살짝 입장을 바꿔 종연을 괴수로 하는 반란파들에게 달라 붙었다. 그것도 정치매매를 앞세우고. “종연이, 너도 정치를 하려고 나선바하고는 입당해야 하지 않겠느냐?” “건데?” “입당하려면 내 방조가 필요할 거야.” 종연과 흥수는 모주석의 초상을 휘날리는 붉은 기대에 걸어놓으려고 했다. 허나 걸개가 없어 아무리 역사질을 해도 걸 수 없었다. 종연은 상순을 보고 모 주석 초상을 안고 서 있으라고 했다. 허나 상순은 나서지 않았다. 그때 흥수가 제꺽 나섰다. “내 들게.” 그때 상순이 나무랐다. “에끼, 이 사람아, 모주석 초상을 자네가 들고 있으면 모두들 자네에게 충성무를 춰 올리겠는가?” 그러자 흥수는 주춤 멈춰서더니 쭈물거렸다. 종연은 모 주석 초상을 들고 이리저리 돌아보면서 중얼거렸다. “모 주석을 높이 모셔야겠는데 오늘은 별 수 없구나. 후에는 모 주석 초상을 모실 걸개를 멋지게 만들어 가지고 와야겠다.” 종연은 꽂아놓은 기발 두 대 사이에 모 주석 초상을 기대 세워놓았다. 뒤이어 종연은 사원들을 보고 모 주석 초상을 향해 빨간 모 주석 어록 책을 들고 자기를 따라 외치게 했다. “위대한 수령 모주석의 만수무강을 축원합니다!” “만수무강!” “만수무강!” “만수무강!” 뒤이어 사원들은 모 주석 초성을 향해 쩔룩거리면서 충성 무를 추어댔다. 밭머리 충성무가 끝나서야 모두들 김을 매기 시작했다. 쉼에는 또 모 주석의 최신지시와 어록을 학습하고 암기하기 시작했다. “우리 사업을 영도하는 핵심적 역량은 중국 공산당이다. 우리 사업을 지도하는 지도사상은 맑스- 레닌주의이다.” 강냉이밭에 범이 새끼를 칠 지경으로 풀이 자라나도 사상혁명만 하다나니 기음을 제대로 맬 겨를이 있겠는가! 장마철이 다가오면서 소낙비가 억수로 퍼부었다. 풀들은 밤낮으로 소리를 치면서 자라고 있었다. 그래도 반란파 종연은 군복을 입고 우쭐거리면서 “농사는 잘 못 돼도 사상만 새빨가면 된다.”고 했다. 사원들은 모두 멀건 죽물을 마시면서 배고픈 판에 일하는 척 하면서 축을 내지 않았다. 만약 누가 농사를 틀어쥐면 류소기의 “생산유일역론”에 물 젖은 반동분자로 몰리우기 십상이었기에 누구도 감히 “시대의 조류”를 막을 수 없었던 것이다. 저녁에 당원들은 토성 안 대대 사무실에 모였다. 회의에는 비당원들인 종연과 송희 등 반란 파들도 참석했다. 상순은 이계삼과 허영주, 허백호에게 눈길을 보낸 후 입을 열었다. “오늘 우리는 당지부 확대회의를 열고 새로 당 지부 서기를 선출하기로 했습니다. 오늘 회의에는 ‘문화대혁명’ 가운데서 나온 정치열성분자들인 종연과 송희도 열석으로 참석했습니다. 당 지부 회의기 때문에 비당원들은 방청할 수는 있지만 선거권과 표결권은 없습니다. 이에 특별히 회의 전에 안면고시를 하는 바입니다.” 그러자 종연은 책상을 꽝 치며 벌떡 일어나더니 고래고래 고함쳤다. “우리를 벙어리로 만들 거면 참석시켜 뭘 한단 말이오? 대대 혁명위원회 주임을 뭘로 보오?” 상순은 양보하지 않았다. “엄숙한 당원대회에 참가했으면 조용히 듣기나 하오. 이제 더 떠들면 회의장에서 쫓아 내겠소.” 종연이 뭐라고 또 말하려고 하는데 흥수가 뒤에서 바지 뒤꽁무니를 잡아 물 앉혀 놓았다. 종연은 성이 꼭뒤까지 치밀었지만 씩씩거리면서 자리에 앉아 팔꿈치로 책상을 꽝 쳤다. 상순은 눈꼴이 사나웠지만 회의를 계속 사회했다. “지금부터 우리 대대 당지부 서기를 선출합시다. 자유로 발언하시오.” 이때 또 종연이 나섰다. “내가 하면 안 됩니까?” “종연은 당원도 아닌데 어떻게 지부 서기를 한다고 그러오?” 그러자 흥수는 조개턱을 쳐들고 일어나 떠들어댔다. “난 이번 회의에서 아예 우리 대대 반란파 우두머리, 아니, 반란파 수령 종연 동무를 입당시킬 것을 건의합니다.” 허백호가 단마디로 막아 나섰다. “입당조건도 구비되지 않은 햇내기를 어떻게 입당시킨단 말이오?” “왜 안돼? 종연은 군인출신이자 ‘문화대혁명’ 가운데서 우리 공사 반란파 우두머리인데도 화선입당을 할 수 없어?” 흥수의 어처구니없는 말에 허백호 서기가 눈을 흘겼다. “자네를 잘 고험하지 않고 화선입당 시켰기에 혁명에 얼마나 큰 지장을 줬는가? 종연의 화선입당을 반대하오.” 그러자 종연은 벌떡 일어나 고함쳤다. “더러운 영감들이 짜고 들어서 내 입당을 가로막다니? 내일부터 죽게 투쟁 받을줄 알아라!” 이계삼 서기도 한마디 했다. “자, 자, 그만두오. 입당조건도 안된 종연을 어떻게 입당시키오. 오늘 회의는 새 당지부 서기를 선거하는 회의요.” 그리하여 다시 당 지부 서기를 선거하기 시작했다. 순간 납덩이같은 침묵이 흘렀다. 한참 후 이계삼이 제일 먼저 침묵을 깨뜨렸다. “내 보건대 김상순 동무가 계속 서기를 하는 게 옳소.” 허영주도 맞장구를 쳤다. “옳소. 상순 동무가 하지 않으면 누가 할 수 있소?” “내가 할 수 있어!” 흥수가 눈알을 부라리면서 소리쳤다. 그 바람에 모두들 코웃음쳤다. 그때 영발 서기가 일어서더니 입을 열었다. “내 보건대 상순 동무는 계속 지부 서기를 할 자격이 없다고 봅니다.” 그 말에 모두들 놀라운 눈길을 영발에게 돌렸다. 영발은 개의치 않고 계속 발언했다. “상순 동무는 생산, 생산, 하면서 농사 밖에 틀어쥘 줄 모릅니다. 지금 모주석의 지시대로 ‘계급투쟁을 기본 고리로 틀어쥐는 시대’에 류소기의 ‘생산유일역론’의 썩어빠진 수정주의 사상에 물든 사람을 서기로 선거해서야 됩니까? 상순 동무가 계속 서기를 하면 우리 대대에서 자본주의 싹이 저 장마철의 풀처럼 범이 새끼 칠 지경으로 자라날 겁니다. 난 흥수 동무가 서기를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모두들 놀랐다. 상순도 적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믿던 도끼에 발등을 찍힌다고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었다. (노동개조를 하러 시골로 왔다고 불쌍해 자기 집 위방에 들이고 생각해주었건만 관건적인 시각에 흥수 편을 들다니? 하긴 반란파들인 종연이나 흥수에게 달라붙어야 투쟁도 덜 받을게 아닌가? 사람을 잘 못 보았구나. 오뉴월 소불알처럼 이볼 쳤다 저볼 쳤다 하는 놈.) 허영주는 도리머리를 흔들더니 강경하게 말했다. “박 동무는 이 마을의 역사와 상순 동무의 공적을 알기나 하도 말하오? 난 박 동무 의견을 반대하오. 우리 마을 서기는 상순 동무 해야 하오.” 이렇게 옥신각신 다투듯이 자기 견해를 주장하다나니 밤중이 됐다. 나중에 표결을 하게 됐다. 흥수가 성이 나서 바깥으로 횡 하니 나가버렸다. 그러자 박영발은 소피보러 가는 척 하면서 뒤꽁무니를 따라 나갔다. 그런데 저게 뭔가? 박영발은 뒤간으로 가는 흥수를 따라가더니 “아버지!” 하고 불렀다. 흥수는 자기 귀를 의심하며 돌아서 영발을 바라보았다. “아버지, 근심하지 마오.” “아버지라니?” 흥수는 영발이 미치지 않았나 외가풀눈을 치켜뜨며 쏘아보았다. 영발은 밤이어서 똑똑히 볼 순 없었다. 하지만 분명 아첨이 번지르르하게 흐르는 낯으로 흥수를 쳐다보며 손까지 잡고 말했다. “아버지, 근심하지 마시오. 내 투표 할테니까 당지부 서기는 꼭 아버지가 당선될 겁니다.” 흥수는 너무 어처구니없어 코방귀를 뀌었다. 허나 인차 관건적인 시각인지라 영발을 보고 지시하듯 말했다. “꼭 투표하오. 그럼 자넬 제일 먼저 시내 병원에 보내 줄게.” 이때 뒤에서 윤희가 쫓아나와 “빨리 들어오오. 투표를 해야겠어요.”라고 소리쳤다. 흥수와 영발을 오줌을 누는 척 하고 인차 회의실로 돌아갔다. 모두 무기명으로 담배종이에 대대 당 지부 서기 후보들인 상순과 흥수 가운데서 한사람만 써넣기로 됐다. 모두들 엄숙하게 담배종이에 자기 마음에 드는 후보의 이름을 써넣었다. 흥수는 제꺽 자기 이름을 써넣고 영발이 자기 이름을 쓰리라고 여기고 건너다보면서 희죽이 웃기까지 했다. 윤희가 투표결과를 공포했다. “리흥수 2표, 김상순 6표. 차기 대대 당 지부 서기는 김상순 동지로 통과됐습니다!” 박윤희가 공포하자 모두들 박수 쳤다. 허나 반란파들은 우르르 일어나 문을 꽝 박차고 나가버렸다. 허나 흥수는 벌떡 일어나더니 박윤희의 손에서 투표쪽지를 와락 빼앗아 보았다. “아니, 이렇게 될 수 없소. 절대 없소.” 그는 두덜거리면서 쪽지를 보고 또 살펴보았다. “내 한 표에 박영발 서기 한 표, 학수 형님의 한 표 해도 셋이 될게 아닌가?” 그때 학수가 흥수를 질책했다. “그만둬라! 난 너에게 투표하지도 않았다.” “형님, 어찌 이럴 수가 있소?” 흥수가 입을 짝 벌리고 싯누런 덧이를 드러냈다. 당장 학수를 물것만 같았다. “네가 저 종연이랑 저 반란파들을 끌어들여 이 마을을 무엇으로 만들 작정이냐?! 퉤! 서기를 해? 어림도 없다.” 흥수는 형에게 욕보고 영발을 돌아보면서 손을 잡았다. “그래도 믿을 건 형도 아니고 박서기 밖에 없구먼.” 그러나 사실 박영발은 앞에서는 흥수를 선거했지만 양면파 수법을 써서 무기명 투표를 할 때에는 상순의 이름을 써넣었던 것이다. 흥수가 서기를 하면 계속 투쟁만 받을까봐. 흥수는 상순이가 자기를 선거했을 줄은 몰랐다. 그는 영발이 자기를 선거했다고 오해했던 것이다. 그러나 투표종이를 다 펴보고서야 박영발이 자기를 투표하지 않은 것을 눈치챘다. 흥수는 평소에 영발의 검토 서를 늘 보다나니 필적을 알고 있었다. “개 자식, 변소 간에 가서 나를 아버지라고까지 불러놓고?!” 박영발은 시원한 웃음을 얼굴에 지으면서도 흥수에게 그 말을 하지 말라는 듯이 눈을 질끔 해보였다. “알락 고양이 같은 놈! 어디 두고 보자!” 흥수가 노발대발 할 때다. 허백호가 흥수의 손에서 투표쪽지를 빼앗아갔다. “이게 무슨 작법이오? 투표쪽지를 펴봐서야 되는가?!” “펴보면 어째?” “어째 보복이라도 하려는 거요?!” 허백호는 외까풀눈으로 무섭게 흥수를 쏘아보았다. “내 눈이 멀었지, 멀었어. 자넬 입당시킨 내가 당과 인민 앞에 부끄럽소. 부끄러워!” “뭐라고?” 흥수는 결이 날대로 났다. “어디 두고 보자. 언제까지 이 시골에서 똥이나 치면서 사는가?” “마음대로 해봐라. 개똥을 무서워 피하는가 하니? 더러워서 피하지. 퉤!” 그날 회의는 이렇게  당원들의 승리로, 상순이가 재차 대대 당지부 서기로 재선된 것으로 끝났다.      흥수는 회의실에서 나와 토성 밖에 나가자마자 씩씩거리면서 종연이랑 반란파들이 모인 황연건조실 쪽으로 씨엉씨엉 걸어갔다. 그의 납짝코에서 시거먼 연기가 풍겨나오고 있었다.
141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102) 댓글:  조회:1648  추천:3  2018-05-18
                  14. 고향으로 날아간 혼 억수로 쏟아지던 비도 가을에 접어들면서 드물어지고 홧홧 달아오르던 열기도 서서히 물러갔다. 화가 난 세월의 화가가 산과 들판을 누렇게 물들여가더니 황금물결이 가을바람에 출렁이었다. 다만 세월의 바람에 화약내 나는 정치열기만은 우매한 정치몽둥이에 펄럭이고 있었다. 사원들은 허리띠를 졸라매고 이 가을을 기다리었던 차라 낫을 숫돌에 갈면서 가을 준비를 다그쳤다. 해마다 언제면 풍작을 거둬 배불리 먹고 살겠는가고 희망에 한껏 가슴이 부풀어 올랐지만 가을을 하고 타작을 하고나면 또 배고픈 고생을 해야 하는 것이 농가의 살풍경이었다. 계급투쟁을 하다나니 곡식밭에 범이 새끼를 칠 지경으로 풀이 한 키씩 자라 곡식이 잘 자랐겠는가? 논밭에 가 보면 벼 밭인지 돌피 밭인지 분간하기조차 힘들 지경으로 검은 돌피가 대가리를 쳐들고 넘실거렸다. 조 밭으로 가 보면 누런 가라지들이 잘 난 듯이 대가리를 쳐들고 조이 이삭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느 날, 상순이 낫을 갈아들고 누런 밭으로 나갈 때다. “김 서기―!” 상순이가 머리를 돌려 보니 글쎄 뜻밖에도 이계삼 서기와 허영주 부 현장이 저쪽 우사 쪽에서 손을 저으면서 부르고 있었다. “이 서기!” 상순은 낫을 쥔 채 그리로 뛰어갔다. 그는 이계삼 서기와 허 현장을 보자마자 양손으로 두 분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 “아니, 어떻게 돼 두 분이 여기 왔습니까?” 이계삼 서기가 머리를 숙이면서 대답했다. “그렇게 됐네.” 허영주 부현장은 “광활한 천지에는 우리가 할 일이 많지.”라고 씁쓸하게 말했다. 그제야 상순은 허영호 소장이 말하던 일이 피뜩 떠올라 한숨을 후 내쉬었다. “어떻게 고생하겠습니까?” 그러나 노간부들은 오히려 상순을 위로해 주었다. “우리 때문에 어떻게 속을 태우겠소?” 상순은 두 분의 손을 꽉 잡아 흔들면서 위로했다. “근심하지 마십시오. 우리 마을에서 누가 감히 두 분을 어쩐단 말입니까?” 이계삼과 허영주는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면서 마을을 돌아보았다. 저쪽에서 흥수와 종연이랑 이쪽을 쓴 외 보듯 힐끔거리었다. 반란파들은 가을걷이는 뒷전이고 투쟁대회를 여는데 혈안이 돼 미쳐 날뛰었다. 그 바람에 이계삼과 허영주 뿐만 아니라 흥수마저 반역자, 남조선특무로 몰리어 투쟁 받았다. 종연이랑 송희랑 먼저 흥수와 상순을 끌어내 투쟁하려고 들었다. 그런데 사원들이 투쟁대회장에 잘 나오지 않아 투쟁대회는 흐지부지 해졌다. 종연과 승연, 송희가 직접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투쟁대회장에 나오라고 동원했지만 모두 나가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만은 예외로 됐다. 상순이 자원해서 대대 사무실 앞의 쇠종을 두드리며 소리쳤다. “오늘 중요한 회의를 합니다. 모두 대대 사무실 마당에 모이십시오.” 그러자 사원들은 하나, 둘 토성 안에 모여들었다. 게다가 상순이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동원하자 한 사람도 빠지지 않고 토성 안에 모여와서 시루 속의 콩나물 대가리처럼 꽉 박아섰다. 이날 상순은 자기 절로 집에서 만든 개패를 목에 걸고 숱한 사람들 앞에 나섰다. 개패에는 다음과 같은 꺼먼 글씨가 쓰여 있었다.   사원들을 배불리 먹이지 못한 대대 서기 김상순을 타도하자! 그것도 상순이란 이름은 거꾸로 쓰여 있었다. 모두들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사원 여러분들이 나를 투쟁하십시오. 난 착오가 많습니다. 난 할아버지 대신 당지부 서기를 한지도 십년이 다 돼가지만 우리 대대 면모를 개변시키지 못했고 우리 대대 사원들을 배불리 먹고 살게 하지 못했습니다. 나는 당지부 서기를 할 자격이 없습니다. 내가 젊은 당원을 발전시키지 못했기에 사회주의 새 농촌을 건설할 후계자가 없습니다. 종연이랑 송희랑 믿고선 우리 마을을 사회주의 새 농촌으로 절대 건설할 수 없습니다. 난 투쟁을 맞아야 합니다.” 이계삼 서기와 허영주 부 현장 그리고 허백호 서기까지 모두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상순이, 지금 뭐 하는 거요?” 그러나 상순은 개패를 목에 건 채 허리를 구십도로 굽히었다. 그러자 사원들은 분분히 고함쳤다. “김 서기 절대 자리를 내줘선 안 되오.” “우리 대대는 김 서기가 영도해야 됩니다.” “흥수가 영도해선 절대 안 된다니까!” 어떤 사원들은 뒤에서 나지막이 뒷소리를 했다. “셈이 들지 못한 종연이 형제나 송희 안 되오.” “몽둥이질이나 했지 농사를 알기나 하오? 뭘 아오?” “몽둥이질도 어디 김 서기 발뒤축에나 가오?”       회의실은 수라장이 됐다.       이때 송희가 앞에 나섰다.       “가만, 가만!”        종연은 상순의 개패를 쥐어 당기면서 악담을 퍼부었다.       “김상순, 당신 지금 투쟁 받으러 왔소? 아니면 자기 자랑 하러 나왔소? 당신은 지금 후퇴하는 척하면서 전진하는 게 아닌가? 서기를 하지 않겠다고 하지만 기실 내놓기 싫어 여론 조성하는 게 아니고 뭔가? 한보 후퇴하는 걸로 열 발자국 전진하려고? 누가 모르는가? 당신은 혁명은 모르고 생산만 하는 놈이오. 류소기나 등소평의 ‘3자 일포’거나 ‘유일생산역론’이거나 ‘물질자극’ 따위 더러운 사상에 물젖은 썩어빠진 서기요. 진작 물러나야 했소. 당신은 역사문제가 많은 사람이오. 우리 마을에까지 기어든 남조선 특무 이병수의 외 6촌 형이 아니오? 또 남조선에 가서 남조선 괴뢰군과 내통한 혐의도 있어. 오늘 잘 나섰어. 진작 투쟁 받고 서기를 우리에게 넘겨줘야지.” 상순은 머리를 들고 종연을 마주 보더니 눈을 흘겼다. “넌 날 투쟁할 자격이 없다." 그러나 상순은 사원들을 향해  말했다. "사원 여러분들이 나를 투쟁하십시오. 난 착오가 많습니다. 그러나 나는 남조선 특무가 아니오. 난 항일전쟁 때부터 유격대를 도와 쌀도 날라 갔고 장백산 밀림에서 성칠 대장을 도와 일제와 총을 맞대고 싸웠소. 난 삼도만 토비를 숙청하는 전투에도 참가해 토비를 몰아내고 우리 마을 주변의 숱한 마을 사람들을 보호 했소. 이 상순이 무슨 죄가 있느냐? 난 손바닥만한 땅도 없이 조선 고향을 떠난 너희 부모들을 이 마을에 받아 주었고 우리 할아버지와 함께 당의 영도아래 저 장학산과 지학사 같은 지주를 청산해 너희들 부모한테 밭을 나눠주고 배불리 먹고 살게 했다. 우리 조손 3대는 제일 일찍 이 마을에 들어와 황무지를 개간한 밭을 몽땅 내놓고 너희 부모들을 이끌어 생산대를 꾸리고 황무지를 개간해 논을 풀고 과수원을 차려 너희들을 배불리 먹고 과일도 먹게 했다. 이것도 죄냐? 너희들이 대대 권력 찬탈에 눈이 뻘개 미쳐 날뛰는 흥수 꼬드김에 들어 이렇게 반란하면 누가 좋아하느냐? 종연아, 너희들이 그래 저 장충국이나 지괴호 같은 지주 새끼들이 좋아하는 노릇을 하겠느냐?” 일부 사원들은 모두 머리를 끄덕였다. “김 서기를 투쟁해선 안 되오. 안 돼!” 종연은 상순의 빈틈없는 말에 더 할 말이 없어 몽둥이만 쳐들었다. “이 나그네 한 대 맞아봐야 알겠는가? 전탕 자기 좋은 소리만 한다니까.” 종연이 몽둥이를 들어 상순을 내리쳤다. 그때 옆에 서있던 성환이 손으로 막았다. “종연이, 말로 해야지. 몽둥이를 휘둘러서야 되오?” 종연은 상순을 투쟁하려다가 오히려 민심만 잃고 말았다. 그날 회의는 상순을 투쟁한다기보다 상순이가 인심을 얻고 종연이랑 반란 파들의 기염을 꺾는 회의로 돼버렸다. 그날 회의에 참가한 후 병완은 앓아눕고 말았다. 병완은 고향을 떠나 쪽박을 차고 두만강을 건너 함흥 촌에 들어와 함흥 촌의 군중들을 배불리 먹고 살게 하려고 한뉘 정성을 다했다 하건만 계급투쟁의 예봉이 자기와 손자에게 돌려지자 정치투쟁의 참혹함을 뼈저리게 느꼈다. 하여 그는 깊고 깊은 심연 속에 빠져 허덕이고 있었던 것이다. 상순이 달려왔다.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꼭 일어나셔야 합니다. 꼭 밝은 세상을 보셔야 합니다.”  허나 병완은 더는 깨어나지 못했다. 정규상이 달려와 맥을 짚어보고 중풍에 걸린 것 같다고 했다. 상순과 상길은 할아버지를 수레에 싣고 진수해 병원으로 가려고 서둘렀다. 그때 아랫사랑집 보준이 말렸다. “큰아버진 집에서 편이 운명하시게 놔두오. 진수해병원에 간들 우리 마을 정교수만 용하겠소? 정 의사, 치료방법이 없소?” 정규상은 수레에 병완을 모시려는 상순과 상길 그리고 상훈을 말렸다. “뇌출혈에 걸린 환자를 들어 수레에 싣고 가느라고 덜렁거리면 뇌가 울리면서 더 중해질 수 있습니다. 집에 모시고 중약을 써봅시다.”       정규상은 먼저 혈관주사를 가져다 놓으면서 직접 약을 져 가져왔다. 그러자 상길과 상순은 손수 풍로를 피웠고 명옥과 상길의 처 리련옥은 약탕기를 씼은 후 중약을 쏟아 넣고 풍로에 올려놓고 달였다. 한참 후 명옥과 련옥은 중약을 사발에 짜서 좀 식인 후 양쪽에서 한술한술 떠 입에 넣어드렸다. 병완은 손자들과 손비들의 살뜰한 보살핌을 받아 보름 후에야 천천히 눈을 떴다. 그는 천천히 손을 들어 상순과 상길의 얼굴을 매만지면서 겨우 몇 마디 했다. “나, 난, 안, 안 되겠다. 꼭 머, 머리를 들, 들고 꿋꿋이, 꿋꿋이 살아나가야 한다.” 상순은 세 귀 눈에 뜨거운 눈물을 주르르 흘리면서 머리를 끄덕였다. “할아버지, 세상이 아무리 험악해도 인민군중들을 위해 살려는 저를 어쩌지 못 할 겁니다. 난 당과 인민에게 미안한 일을 한 것이 없습니다. 저는 공산당을 믿습니다. 반란 파들이 아무리 일시 미쳐 날뛰어도 당과 인민들은 꼭 정확한 결론을 내릴 것입니다.” 병완은 상순의 손을 굳게 잡으면서 머리를 끄덕였다. 그는 자기 주위에 둘러 앉아 눈물을 흘리는 상훈과 상길 등 손자들과 손녀들 그리고 증손자, 증손녀들을 둘러보면서 상길에게 물었다. “성, 성칠이, 큰며느리 진, 진달래, 인섭이 보고 싶구나. 그들은 참, 참, 장하다.” 상길은 할아버지 손을 잡고 귀가에 대고 조용히 말했다. “진달래 큰어머닌 편지에 조선에 나갈 때 몇몇 악질분자들을 돌멩이로 까 눕힐 수 있었대요. 하지만 정치소용돌이 속에서 미혹된 군중들이라고 생각돼 놔뒀답니다. 조선에 나간 큰어머니와 인섭 삼촌 그리고 은녀 아주머니 모두 잘 있답니다. 옥선도 조선에 나가 중학교 교장으로 사업한답니다. 너무 근심하지 마십시오.” 병완은 맥없이 머리를 끄덕이더니 눈을 스르르 감았다. 그이 눈귀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주르르 흘러 밭고랑 같은 주름살을 흥건히 적시었다. “고, 고향, 고향으로 돌아가는 날이 언, 언제 오겠니? 누구든 이후에 고, 고향에 돌아가면 조상님들의 산, 산소에 찾아가 꼭 인, 인사를 드리어라. 부, 부모님과 조상들이 계시는 고향 땅에 묻히고 싶구나.” 상길은 주먹으로 눈물을 닦았다. “할아버지, 왜 이런 말씀을 합니까? 흐흑, 할아버지, 일어나십시오. 정신을 차리십시오.” 그러나 병완은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였다. 상순과 상길은 정규상과 규혁이 지어준 첩약을 달여 계속 할아버지께 대접하였다. 그 덕에 병완은 사흘만에 또다시 겨우 눈을 떴다. 그는 사위를 두리번거리었다. “할아버지,” 병완은 상순과 상길의 손에 손을 얹고 간신히 물었다. “성, 성칠은 어디 있니?” “예? 큰아버지는 조선에서 희생됐습니다.” 상길의 말에 병완은 눈물을 주르르 흘리면서 마지막 숨을 몰아쉬었다. 드디어 병완은 숨을 길게 톺아 올리더니 후 내쉬면서 천천히 숨을 거두었다. “할아버지!” “할아버님!” 상길과 상순이 할아버지 두 손을 잡고 대성통곡 쳤다. “노할아버님!” 온 집 식구들은 눈물의 바다에 빠지고 말았다. 그렇게도 조상의 뼈가 묻힌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었건만 끝내 돌아가지 못하고 타향에서 병완은 한을 품은 채 영영 두 눈을 감았다. 바깥에서 초겨울 바람에 앙상하게 마른 버드나무 가지들이 몸부림치고 까마귀 두 마리가 원통해 떨고 있는 비술나무 가지에 앉아 꽁지를 들썩이며 “까욱”, “까욱” 하고 처량하게 울어댔다. 상길은 할아버지 흰 적삼을 들고 지붕에 올라가 “복!” “복!” “복!” 하고 처량하게 할아버지 혼을 불렀다. 그러나 초겨울 바람을 타고 날아난 할아버지 혼은 영영 돌아오지 못하였다. 육신은 타향에 있어도 혼이나마 고향 명천으로 훨훨 날아가고 있었으리라. 온 집 식구들은 상모를 쓰고 베옷을 입고 조상객들을 맞이하였다. 석철과 석은 형제를 비롯한 친척들과 마을 사람들이 윗방 앞에서 큰절을 세 번씩 올리었다. “형님, 이게 웬일이요? 우린 함께 농사를 잘 지어가지구 고향으로 돌아가자고 하지 않았소? 아이고, 형님~” 석철의 말에 상순과 기준은 구슬픈 곡소리를 하였다. 뒤이어 마을사람들이 하나, 둘 조상하러 찾아왔다. 평소에 웃새집 병완 영감네 신세를 진 사람들이 투쟁 받을 위험을 무릅쓰고 찾아왔다. 상순은 덕팔의 손을 굳게 잡고 “장례에 와 주셔서 고맙습니다.” 하고 인사하였다. 사흘 후 마을 사람들은 병완을 모신 상여를 메고 천지꽃 산중턱으로 올라 갔다. 그들은 반란 파들의 위협도 무릅쓰고 장례대오를 뒤따랐다. 장충국과 조덕산도 장례에 왔다. 곡성과 함께 자손들은 할아버지를 할머니의 묘지에 피눈물과 함께 합장하였다. 병완의 후노친은 진작 리성희의 묘지와 산골짜기 하나를 사이 두고 뒷산에 썼던 것이다. 본댁과 후처를 한데 산소를 쓰면 구천에서도 서로 싸운다는 풍속에 의해 그리 된 것이었다. 함흥촌 서쪽 천지꽃산 중턱 산비탈에, 마른 개암나무가지가 몸부림치는 황야에 커다란 묘지 하나가 쓸쓸히 누워 있었다. 그 묘지 속에는 고향을 지키려고 목숨을 내걸고 싸우던 병완이, 숨을 거두기 전까지도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해 차마 눈을 감지 못하던 리성희 량주가 쓸쓸히 누워 계시었다. 모두들 제주를 붓고 장례가 끝났다. 그러나 상순과 상길은 조부모의 묘지를 끌어안고 대성통곡 쳤다. 상길이 대성통곡을 쳤다. “할아버님! 할머님! 이게 웬 일입둥?” 상순도 할아버지의 묘를 끌어안고 엎디어 어루만지면서 대성통곡을 쳤다. “할아버님, 할머님! 조부모님들에게 효성을 다하지 못한 이 불효자식을 용서해 주옵소서. 이 추운 겨울에 입을 거 제대로 입히지 못 하고 잡수실 거 제대로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이 불효자손들을 용서하십시오. 어째 우리를 두고 홀로 가십니까?”       자손들은 모두 묘지 앞에 꿇어앉아 대성통곡을 치었다. 애절한 울음소리는 눈이 풀풀 흩날리는 황야에 처량하게 울려 퍼지었다. 산소 남쪽의 백양나무 가지에서 까마귀가 까욱까욱 스산하게 울고 있었다. 고향을 그렇게도 사랑하던 병완이,  조상들의 산소가 계시는 고향을 그렇게도 사무치게 그리던 조선의 한 효자가, 고향을 지키려고 목숨을 걸고 싸우던 한 용사가 노친과 함께 타향의 황야에 영영 묻히었다. 아, 태줄을 묻은 고향이여, 희망과 사랑을 묻어 두고 조상들의 산소를 모셔둔 고향이여, 사망하면서도 고향이 그리워 눈을 감지 못한 이 고독한 영령들을 위로해 주시라. 육신은 죽었어도 혼이라도 고향 명천으로 훨훨 날아가고 있으리라.                     제27장 암야                           1.비밀사형 먹장구름이 대지를 짓누르면서 감도는 깜깜한 밤이었다. 달도 별도 찾아 볼 수 없는 암야였다. 지하감방 구석구석까지 공포의 어둠이 서리서리 도사리고 있었다. 억울한 모자를 쓰고 갇힌 노간부들은 지하감방에서 끌려나가 가혹한 고문을 당하다가도 어디엔가 끌려가면 종적을 감추고 말 때도 있었다. 갑자기 철창 밖에 반디 불 같은 남포등 불빛이 다가왔다. 천정에 개구멍만큼 난 철문이 드르릉 열리더니 두 자가 뚜벅뚜벅 사다리를 타고 내려왔다. 희미한 남포등 불빛에 그자들의 군복 팔에 뻘건 완장을 두른 것이 눈에 뜨이었다. “박영발! 나왓!” “예.” 박영발은 목구멍으로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또 무슨 고문을 들이 댈지 몰라 머리끼 곤두섰다. 고문실에 나가자마자 몽둥이찜질부터 들이대며 고문했다. “이 놈! 로실히 말해! 반혁명 폭란 때 누가 구락부에 불을 질렀어?” “난 모르오.” “아니, 이 자식, 누구 앞이라고. 이 분은 모원신, 아, 아니, 이씨 지도자 김 통역이야, 이분이 한마디만 하면 네 놈은 목이 썩둑 날아날 줄 알아라.” 옆에 선 놈이 퉁퉁한 자를 춰 올렸다. 이씨의 통역이라고 하는 퉁퉁한 김용만은 남포등을 들어다 영발의 코앞에 들이대고 이발을 사려 물더니 물었다. “구락부에 불을 지른 사건을 이실직고하지 못해?” “모르오!” 찰싹! 영발은 귀 쌈이 얼얼하게 한대 맞았다. “말해! 누가 불을 질렀어?!” “말해도 너희들이 믿지 않을 걸.” “말해! 누가 불을 질렀어?!” 악에 받친 그는 맞고함을 쳤다. “반란파들이 불을 질렀다. 왜 우리한테 들씌우는 거야?” 그러자 김 씨는 돼지처럼 살이 진 상판대기에 흉악한 몰골을 지었다. “정말 죽고 싶으냐? 너희들 두목들도 다 탄백했다. 한영수랑 김진욱이랑 다 불었어. 그 사람들은 로실히 탄백하고 발편잠을 잔다. 집에 가서 편안히 식구들도 만나고 편안히 살고 싶지 않니? 아니면 계속 지하 감방에서 고문을 당하겠는가?” 김용만은 돼지 대가리를 홱 젖히더니 뒤에 선 졸개들에게 손시늉 했다. 졸개들이 우르르 달려들어 형틀에 영발의 두 팔을 달아맸다. 졸개들은 마치 모래주머니나 치듯이 영발의 몸에 대고 사정없이 주먹질을 해댔다. “억, 억.” 영발은 졸개들의 주먹에 배를 얻어맞으면서 비명소리를 질렀다. 그래도 졸개들의 주먹질은 멈추지 않았다. 졸개들은 그러고도 성차지 않아 몽둥이로 영발의 머리를 탁 내리쳤다. “앗!” 영발은 끝내 비명소리와 함께 까무러치고 말았다. 졸개들이 영발의 낯에 찬 물을 한 대야 퍼 쳤다. 그러자 영발은 천천히 피 흐르는 머리를 들었다. “말해! 누가 불을 질렀어?!” 허나 영발은 입에 빗장을 지른 채 물이 줄줄 흐르는 눈으로 맥없이 김씨를 쏘아볼 뿐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김용만은 이발을 앙물고 영발의 길쭉한 턱을 쳐들더니 눈깔을 부라리면서 을러멨다. “이 놈이 정말 목이 날아나야 불겠니?!” 뜻밖에 김용만은 어조를 부드럽게 바꾸면서 물었다. “누가 불을 지른 것만 불면 넌 자유다. 병원에 돌아가 계속 서기를 하면서 고운 간호사들이랑 얼려서 데리고 살아도 된다.” 김용만은 고문 방법을 바꾸었다. “듣자니 네 놈은 서기를 하면서 내과 간호사장 박윤희를 간음했다더구나. 옳지?” 영발은 머리를 숙이었다. “빨리 탄백하고 윤희한테 가게나.” 김용만은 꿈지럭거리는 영발을 보고 만족한 웃음을 웃었다. “그 고운 노처녀를 두고 저 세상으로 가긴 싫지?” 영발은 대뜸 울음보를 터뜨렸다. “그래, 고운 간호사들을 수태 두고 이 세상을 떠나긴 싫은 거지. 명지한 선택을 하라고.” 김용만은 퉁퉁한 낯을 영발의 얼굴에 닿을 정도로 들이대며 물었다. “말해, 누가 불을 질렀어? 한영수? 김진욱? 아니면 너냐?!” “난 ‘항대’의 먹을 쌀과 기름을 책임졌을 뿐이야!” “이 놈이, 이게! 네 놈이 채를 하라고 들여보낸 기름을 치고 불을 달았지!?” “어느 얼빠진 놈이 자기들이 숨은 구락부에 불을 지르겠는가?” “반란파 조직에 죄를 들씌우고 네 놈들이 반혁명 폭란을 일으킬 도화선에 불을 지르려는 게 아닌가? 진상을 모르는 조선족 군중들에게 홍색이 악독하게 네놈들을 불태워 죽이자고 불을 질렀다는 여론을 조성하려는게 아니야?! 홍색이 민심을 잃게 만들고 네놈들이 반혁명폭란을 일으키려는게…” “퉤!” 영발은 김씨에게 침을 퉥 뱉었다. “이 놈 새끼! 매우 쳐라!” 김용만의 불호령이 떨어지자 졸개들은 몽둥이와 쇠파이프로 영발을 육장 버러지 되게 때렸다. 그런데 영발은 몽둥이찜질을 당할 때 이상하게 덜 아픈 감이 들었다. 후에 알고 보니 몽둥이를 날린 사람은 강운룡이었다. 강운룡은 교통정보과에서 근무하다가 형사정찰과에 전근해 왔던 것이다. 강운룡은 마음속에 민족심이 있었기에 조선족 노간부 정성해 서기를 보호하려고 똘똘 뭉쳐 싸우다가 체포된 한영수나 김진욱, 박영발을 동정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몽둥이로 칠 때면 솜방망이로 치듯이 슬쩍슬쩍 치는 척했을 뿐이었다. 허나 한 졸개의 몽둥이질에만도 영발은 정신을 잃고 쓰러지고 말았다. 김용만은 졸개들에게 명령했다. “끌어내가! 저 놈을 오후에 모아산에 끌어내다가 총살해버려!”  영발은 졸개들에게 질질 끌리어 지하 감방에 들어갔다. 한참 후에 영발은 신음소리를 내더니 점차 정신을 차렸다. 눈을 슬며시 떠보니 깜깜한 감방 안은 어디가 어딘지 알아 볼 수 없었고 축축한 시멘트 땅바닥이 온 몸을 차갑게 지졌다. 영발은 홍색의 무리들이 구락부를 불태우고 점령한 뒤 조직을 따라 의학원 사무 청사에 철거했다. 그 곳도 포위되고 점령당하게 되자 그는 자살하자고 의학원 사무 청사 2층 지붕에서 뛰어내렸었다. 허나 질긴 것이 사람의 생명이었다. 그 높은 2층 지붕에서 뛰어내렸는데 두 발이 진흙탕에 푹 빠져 들어가면서도 죽지 못하고 까무러쳤던 것이다. 그리하여 여기까지 끌리어 와 지독한 심문을 받게 됐던 것이다. (한영수나 김진욱은 절대 승인하지 않았을게다. 그들이 승인했으면 나를 이다지도 심문하겠는가?) 저쪽에서 매질 소리로 고함소리로 비명소리로 지하감방이 처참하고 살풍경이었다. 한참 후 저쪽에서 남포등 불빛이 밝아오더니 지하감방 철문이 드르릉 열리었다. 졸개들이 누군가를 끌어다 들이뿌리치고 가버렸다. 감방은 또다시 공포에 찬 어둠으로 꽉 메웠다. 깜깜한 감방에는 간간히 신음소리가 들릴 뿐이었다. 졸개들이 멀리 간 것을 확인한 영발은 어둠을 헤집고 겨우 기어가 쓰러진 사람을 흔들었다. “진욱이요? 영수요?” 신음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몸과 얼굴을 만져보고 키가 작은 것을 보고 한영수인 것 같았다. 허나 인차 부인했다. 진욱도 한영수보다 크지만 그도 그리 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한참 후에야 쓰러진 사람이 입을 쩝쩝 다시면서  숨 넘어가는 소리를 하는 것이었다. “물을…”  그 목소리는 가늘었지만 영발은 대뜸 한영수의 목소리라는 것을 알게 됐다. 한영수는 YJ시 당위 판공실 주임이었고 정성해 서기를 보호하는 군중단체에서 책임자였다. “영수, 영수!” “누구요? 진욱이오? 영발이오?” “영발.” “오, 살아 있구먼.” “죽자고 층집에서 뛰어내렸는데 죽지 못하고 살았소.” “죽기보다 못하오. 오후에 우리를 총살하겠다 했소. 사상 준비를 했소?” “양?” 영발은 깜짝 놀랐다. 그러나 인차 진정했다. “차라리 죽으면 더 좋을 거 같소.” “정성해 서기를 구하지 못한 바에야 죽는 게 낫지. 여기서 고문당할게 있소? 나도 반란 파들에게 손을 들고 투항해 나오는 게 싫어서 자네를 따라 2층 사무 청사에서 뛰어내렸네. 그런데 엎어져서 갈비뼈만 끊어지고 죽지 못했네. 진욱인 내 앞에서 손을 들고 나가는 척 하다가 문을 나가자마자 도망쳤소. 헌데 반란파들한테 붙잡혀 몽둥이에 맞아 여기까지 질질 끌려 왔다오. 쯧쯧쯧.” 감방 안에서 죽음을 앞둔 두 사람이 두려움 없이 비장한 대화를 나누었다. “세상이 어떻게 돼 이렇게 됐소? 반란파들은 한족간부 전인영 부서기랑 요흔이랑 배극이랑 정성해 동지를 끝까지 보호했다고 타도한다오. 그분들도 이 지하감방에 갇혀 고문당하다오.” 영발의 말에 한영수도 한숨을 후 내쉬었다. “전인영 부서기는 참 좋은 한족간부지. 그는 정성해 등 숱한 조선족간부들을 보호했을 뿐만 아니라 민족단결을 위해 애썼소. 그의 아내는 조선족인데다가 며느리 감도 조선족을 골라두었다오.” “그러니 반란파들이 민족반역자라면서 타도하자고 혈안이 돼 미쳐 날뛰지.” “그러나 저러나 군 분구 조모 동지가 정성해 동지를 보호해 안전하게 북경으로 전이시켰기에 다행이오.” “가족들은 어찌 한다오?” “그게 문제요. 허나 김영순 동지랑 애들도 밤에 빼서 자동차에 실어 의란으로 해서 안도 역에까지 실어갔다오. 거기서 기차에 앉혀 북경으로 빼 보냈다오.” “그럼 됐소. 가족들까지 무사하면 됐소.” “헌데 정성해 서기 안전문제가 큰 걱정이오.” 영발은 한영수의 귀가에 대고 귀속 말을 했다. “소리를 낮춰 말하오. 저 놈들이 꼭 우리 말을 염탐할 거오.” “알았소. 허나 오후면 죽게 됐는데 무서울게 뭐요?” “그래도 다른 사람들을 다치게 하면 어쩌오?”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가 갈까 봐 그들은 소리를 낮추어 한참이나 이 이야기 저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참 후 지하 감방 복도가 조금 훤해지더니 철문이 드르릉 열리는 소리가 들리었다. 한영수는 신음소리를 내면서 벽을 붙잡고 엉거주춤 일어났다. “저승사자가 오는구먼.” 그러자 영발은 따라 일어서더니 어둠컴컴한 지하 감방에서 자못 비장한 표정을 지었다. “한뉘 혁명을 해온 우리가 여기서 반란파들에게 죽을 줄은 몰랐소.” “북소리 둥둥 저승사자 갈 길을 재촉하는구나.” 영발은 발을 탕 구르면서 화를 발끈 냈다. “아니, 형님! 형님은 아직 시나 읊을 기분이 있소?” “허허허, 혁명자들은 죽는 것을 예사로운 일로 여기네.” 허나 영발은 계속 두덜거렸다. 이때 감방 문이 드르릉 열리더니 군복을 입고 뻘건 완장을 낀 자들이 대여섯이 남포등을 들고 뛰어 들어왔다. 그 놈들은 다짜고짜로 한영수와 영발의 두 팔을 잡아끌고 나갔다. 영발은 끌려 나가면서도 소리를 질렀다. “이 놈들아, 우릴 어디로 끌고 가는가?!” “비밀사형이다!” “잔말 말고 걸엇!” 햇볕을 오래 동안 보지 못한 그들은 지하 감방에서 땅 위로 올라갔다. 순간 눈이 시려 어디가 어딘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한참 후에야 실눈을 짓고 여기저기 두루 알아 볼 수 있었다. 지상의 저쪽 감방에서도 또 누군가 끌려 나왔다. 영발이가 보니 박윤희었다. “윤희!” “박 서기!” 그들은 서로 마주 보며 발에 뿌리 내린 듯이 우뚝 멈춰 섰다. “걸어! 이 년 놈들아!” 반란파 졸개들은 총 박죽으로 그들의 잔등을 떠밀고 두 팔을 잡아 끌어내갔다. 박영발은 끌려 나가면서도 고함을 멈추지 않았다. “윤희, 미안하오!” “네 놈들이 저 불쌍한 처녀애를 죽일게 뭐냐?! 죽이겠으면 나 하나만 죽일 거지. 우리가 무슨 죄 있느냐? 억울한 모자를 쓰고 타도되는 우리 민족의 지도자들을 보호했을 뿐이다. 네놈들이야 말로 아무 죄도 없는 무고한 간부를 잡는 죄인들이다. 살인악마들이다. 이제 제 명에 죽지 못할 거다!” “이 놈 새끼, 썩어질 때까지 아가릴 벌릴 테야?!” 반란파들은 박영발과 한영수의 입과 눈을 검은 천으로 동여매고도 모자라 반창고를 몇 겹으로 마구 감아 놓았다. 한영수와 박영발은 입이 있어도 소리도 치지 못하고 끙끙 벙어리 소리를 내면서 자동차 운전실에 떠밀리어 올라갔다. 자동차 운전실 차창에는 검은 보를 쳐놓아 바깥을 볼 수 없었다. 자동차는 시내를 벗어나 한참 달리더니 산으로 올라가는지 엔진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드디어 덜커덕덜커덕 자동차가 몹시 들추더니 엔진이 뚝 꺼지면서 멈춰서는 것이었다. “내려!” 자동차에서 그들을 끌어내리자 눈과 입을 싸매 동였던 수건을 풀었다. 그들이 둘러보니 소나무 숲이 우거진 모아산으로 올라가는 산비탈 중턱이었다. 여기는 이전부터 비밀리에 사형을 집행해온 비밀사형장이나 다름없었다. 반란파 우두머리 김용만이란 자가 찌프에서 내려와 피둥피둥 살진 몸뚱이를 앞으로 움직여왔다. 그 자는 허리에 찬 권총을 매만지면서 말했다. “이제래도 말해라! 너희들 두목 누구인가? 너희들이 구락부에 불을 질렀고 반혁명폭동을 일으켰다는 것을 승인만 하면 살려주겠다.” 한영수는 앞으로 나서면서 떳떳이 말했다. “내만 죽여라! 난 정성해 서기를 보호한 군중단체의 책임자다! 이 박영발이나 윤희는 상관없다!” “허, 그 놈이 죽음 앞에서까지도 꽤나 책임자답구나. 악질반동분자!” “우리 공산당원들은 죽음을 겁내지 않는다! 죽일 테면 어서 죽여라!” 김용만은 한 발자국 다가서면서 가슴을 쭉 내밀고 떳떳이 서서 자기를 쏘아보는 한영수를 주먹으로 떠밀었다. “마지막으로 묻겠다. 네 놈들이 불을 지르고 반혁명 폭란을 일으켰지?” “아니다. 네놈들이야 말로 반혁명 폭동을 일으킨 놈들이다. 네 놈들은 할빈에서 온 이 씨 놈의 충동질을 받고 군중들에게 총질하면서 억울한 간부들을 붙잡아 고문하고 억울한 모자를 씌워 타도하려고 했다. 네 놈들이야 말로 연변조선족자치주를 뒤엎으려고 반혁명폭동을 일으키고 미쳐 날뛴 폭군이다. 반혁명 반란파 놈들이다. 총살 맞은 놈들은 바로 네 놈들이다!” “이 놈을 끌어내라!” 성이 꼭뒤까지 치민 김용만은 낯이 지지벌개 나더니 돼지 멱따는 소리로 고함쳤다. 졸개 이일룡 등이 한영수를 미리 파놓은 구덩이 앞으로 끌고 갔다. 옆에 보니 아직도 구덩이가 여럿이 있었고 저쪽에는 주검을 갓 파묻었는지 자그마한 애기 묘지 같은 것이 여러개 있었다. 반란 파들이 한영수를 무릎을 꿀리려고 하자 한영수는 꿋꿋이 서서 뻗치었다. “난 아무 죄도 없는 공산당원이다. 왜서 네놈들에게 무릎을 꿇어야 한단 말이냐?” “잠간만!” 김용만은 박영발과 박윤희를 돌아보고 음흉하게 웃었다. 그 살진 낯에 발린 웃음 속에는 살인마의 살기가 가득했다. “네놈들은 아주 바람난 연놈들이라면서? 헤헤헤. 비록 태어난 날은 하루가 아니지만 바람둥이 짝과 함께 죽어서 기분 좋겠구나. 허허허.” 김용만은 다가와 박윤희의 피로 얼룩진 턱을 쳐들고 물었다. “네 년은 코신부대에 들어가서 자갈을 날라다 항대에 섬겨줘 우리 혁명반란파들을 치게 했다지?” 박윤희는 가슴을 쭉 내밀고 떳떳이 대답했다. “그랬다. 네 놈들을 더 족치지 못하고 죽게 된 것이 한일뿐이다.” 김용만은 윤희의 귀 쌈을 찰싹 갈겼다. “이년, 죽게 됐는데도 개소리냐?” 그자는 이를 악물었다. “마지막으로 묻겠다. 코신부대 두목 누구야?!” “말해!” 일룡이랑 졸개들이 잡아먹으려고 덮쳐드는 승냥이무리처럼 고아댔다. “내다! 어서 죽여라!” 윤희가 굴하지 않자 용만은 슬쩍 전술을 바꿨다. “넌 새파란 나이에 이 쉬 빠진 자들과 함께 죽을 작정이냐? 나이 아깝다. 아까워.” 그 자는 윤희의 잔등을 매만지면서 지껄였다. “넌 영발보다 더 좋은 총각한테 시집가서 애기도 낳고 행복하게 살고 싶지 않느냐?” “이 더러운 세상을 보기도 싫다. 어서 죽여라!” 작달막한 일룡은 실눈으로 윤희의 높은 젖가슴을 노려보면서 지껄였다. “너무 아깝지. 저렇게 새파란 노처녀를, 헤헤헤.” “악질반동분자들은 살려둘 수 없다!” 용만은 이를 악물면서 “윤희를 끌어가라!”라고 고함쳤다. 졸개들이 우르르 덮쳐들어 윤희를 결박지운 채로 밀고 닥치면서 구덩이 앞에 끌고 갔다. 일룡이란 자는 윤희를 밀고 가는 척 하면서 손으로 젖가슴을 스리슬쩍 만져보았다. “퉤!” 윤희는 일룡에게 침을 뱉었다. “더러운 놈새끼!” 일룡은 낯의 침을 쓱 닦으면서 윤희의 얼굴을 골로 떠받아 코피를 터지어 놓았다. 윤희는 코피 흐르는 얼굴을 들어 일룡을 쏘아보았다. 이쪽에서 용만은 영발에게 족따졌다. “마지막으로 묻겠다. 네 놈들이 구락부에 불을 지르고 반혁명폭란을 일으켰지? 두목은 누구냐?” “죽어도 그 말이다. 불은 반혁명반란 파 네 놈들이 질렀다. 혁명정권을 보위하는 군중조직의 총책임자는 내다. 어서 죽여라!” 김용만은 악이 치밀어 이를 악물더니 손을 홱 휘저으면서 고함쳤다. “이 놈들을 몽땅 총살해라!” 박영발도 구덩이 앞에 끌리어갔다. 한영수는 구덩이 앞에 선 영발과 윤희를 보고 말했다. “우린 사전에 준비한대로 하기요.” 그러자 박영발도 비장한 표정을 지으면서 중얼거렸다. “다만 혁명지도자들을 보호하지 못한 게 한이오.” 윤희도 쉰 목소리로 외쳤다. “반란 파들이 총살당하는 날을 보지 못하고 이렇게 일찍이 죽는 것이 한일뿐이다!” 그러자 김용만은 유들유들한 살진 네모낯짝에 살기찬 웃음을 게바르며 찌껄이었다. "어째 계속 박영발과 통간하지 못하는 게 한이라고 하지 않니? 퉤! 더러운 연놈들.”  뒤이어 그자는 이발로 입술을 사 물더니 오른 손을 쳐들고 돼지 멱따는 고함을 질렀다. “이 놈들을 당장 총살해." 뒤이어 그는 명령을 내렸다. "사격준비!” “잠간!” 뜻밖에 박영발이 고함쳤다. “뭐야?” 김용만이 벌벌 떠는 박영발한테 다가갔다. 박영발은 한영수를 흘끔 훔쳐보더니 용만의 귀에 입을 가져가더니 나직이 쑹얼거렸다. “우리 두목은 저 한영수입니다. 난 졸개일뿐입니다...” “오- 그래? 좋아. 진작 고발할게지.” 김용만은 퉁퉁한 낯바닥에 음흉한 몰골을 드러냈다. “박영발은 살려준다. 나머지 놈들은 몽땅 총살이다.” 한영수는 무슨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눈치챘다. 이때 이구동성으로 구호소리가 울렸다. “공산당 만세!” “모주석 만세!” 한영수와 윤희는 구호를 불렀다. 땅! 땅! 총소리와 함께 한영수와 윤희는 구덩이에 채워 굴러 떨어졌다. 허나 한참 후 한영수는 자기가 죽지 않고 의식이 있는 것을 느꼈다. 머리를 매만져보아도 성한대로 있었다. 영문을 모르고 죽은 척 하고 있을 때다. “이 놈들아, 죽은 척 하지 말고 기어 나와!” 일룡이란 자가 고함치면서 구덩이 안에 자갈을 쥐어 뿌렸다. 한영수는 구덩이에서 기어 나오면서 반란파 두목 김용만에게 물었다. “왜 죽이지 않고 또 시달리게 하는 거야?” 그러자 용만은 음흉한 웃음을 지었다. “네 놈들을 그리 쉽게 죽게 할 거 같으냐?” 일룡이란 자는 “허허허.” 웃더니 주둥이를 너펄거렸다. “‘공산당 만세!’ ‘모주석 만세!’를 부르는 자들을 어떻게 총살하니? 그럼 우린 국민당이 되래?” 그들은 다시 한영수와 영발 그리고 윤희의 입과 눈을 수건으로 꽁꽁 싸맨 후 자동차에 싣고 돌아와 다시 지하 어둠 컴컴한 감방에 처넣었다.                   2. 신음하는 꽃송이들 어둠컴컴한 감방 철문이 드르릉 열리더니 남포등이 쑥 들어오면서 이일룡이란 자가 윤희의 감방에 들어섰다. 그런데 이상하게 일룡이 혼자 들어왔다. 순간 윤희는 두 팔로 몸을 감싸 안고 옹송그리면서 감방 구석에서 바들바들 떨었다. “히히히, 아까운 미인이 누추한 감방에 갇혀 있다니?” 일룡은 남포등을 들고 음충스러운 눈길로 윤희의 풍만한 젖가슴을 노려보았다. “윤희, 나와.” 윤희가 바들바들 떨면서 감방 구석에 앉아 있자 일룡은 덮쳐가 마구 끌고 바깥으로 나갔다. “윤희! 윤희! 무슨 일이 있소?” 박영발이 소리쳤다. “사람 살려요!” “사람 살려요!” 허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작달막한 일룡은 가물에 실돌피 같았지만 그래도 사내인지라 굶고 지친 윤희는 당해낼 수 없었다. 그녀가 아무리 문설주와 벽모서리를 잡고 바둑거려도 용빼는 수가 없이 감방 당직실로 끌려갔다. 당직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원래 반란 파들은 술을 마시러 가고 당직으로 일룡을 남겨 두었던 것이다. 일룡의 징글스런 눈길을 보는 순간 윤희는 겁에 질려 와들와들 떨리면서 두 다리의 맥이 쪽 빠지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겁내지 말라.” 일룡은 일단 먼저 덜덜 떠는 윤희를 구슬리면서 다가섰다. “윤희는 청년당원이라면서. 투쟁정신만은 좋아. 조선족 여성들로 코신부대를 무어 조선족 노간부들을 보호하기 위해 보황파들에게 자갈을 주어 날라다 주었다? 허허, 그 돌멩이에 우리 홍색의 수많은 반란 파들이 머리 터졌단 말이야. 참 아까운 나이에 어쩜 한영수나 영발이 같은 보황파들의 더러운 물을 먹었어?” 허나 윤희는 쓴 외 보듯 하면서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이 년아, 죽고 싶으냐?” 갑자기 일룡은 당장 잡아먹을 상을 지으면서 고함쳤다. “네년의 목숨은 내 손에 달려 있어! 알만해? 고분고분 묻는 말을 대답해. 누가 보황파 우두머리냐?” “모른다!” 윤희는 이를 악물로 고함쳤다. 그러자 일룡은 음흉한 몰골을 드러냈다. “이 년이 이게, 특수고문을 당해 봐야 알겠니?” 그 자는 바 줄로 윤희 두 손을 뒤로 꽁꽁 묶어 까딱 할 수 없이 책상 다리에 끌어매놓았다. 뒤이어 윤희의 높은 젖가슴에 손을 쓱 넣어 슬슬 매만졌다. 윤희는 구렁이가 가슴에서 기는 것 같아 신음소리를 냈다. 그녀는 더는 참을 수 없어 침을 일룡의 낯에 퉤 뱉었다. “이년이, 이게. 말해! 누가 우두머리냐? 영발이 고발했다. 두목은 한영수지?” “더러운 자식, 네가 다 대학생이야? 대학공부를 밑구멍으로 했니?” “뭐라고? 이년이 어디 죽을 맛을 봐라!” 일룡은 윤희의 웃옷을 홀딱 벗겼다. 순간 우유 빛 젖가슴이 훌렁 드러났다. 그녀가 몸부림칠수록 야들야들한 젖무덤이 두부모처럼 하들거렸다. 짐승 같은 야욕이 발정한 일룡은 거친 숨을 몰아쉬더니 윤희에게 와닥닥 덮쳐들었다. 그 자는 윤희의 풍만한 젖무덤을 두 손으로 움켜쥐고 마구 만지다가 침이 질질 흐르는 뻘건 혀 바닥으로 마구 감빨아댔다. “이 짐승 같은 놈아, 아, 아, 아!” 윤희가 욕설을 퍼부으면서 신음소리를 냈다. 신음소리를 낼수록 짐승 같은 일룡의 더러운 손이 더 거칠게 젖가슴을 쓰다듬고 만지고 틀어쥐어 흔들고 빨고 핥아댔다. 한참 더러운 짓을 하던 일룡은 징글스럽게 윤희를 쏘아보며 물었다. “말하겠니? 말하지 않겠니?” “퉤!” 일룡은 낯에 묻은 건 가래를 닦으면서 지껄이었다. “이 년이, 환장했구나. 어디 언제까지 뻗치는가 보자!” 그자는 사무 상 앞에 다가가더니 서랍에서 가는 노끈을 꺼내더니 이쪽으로 다가왔다. 뒤이어 노끈으로 윤희의 앵두알 같이 빨간 젖꼭지를 동여맸다. “말해! 누가 우두머리야?” “…” 윤희는 응대도 하지 않았다. 일룡은 이발을 악물고 노끈을 쥐어 당기었다. “아가!” 윤희는 젖꼭지가 아파 비명을 질렀다. “말해!” 허나 윤희의 입에서는 욕설만 터져 나왔다. “짐승보다 못한 놈, 언젠가는 네놈을 심판할 날이 올 거다.” 일룡은 악에 받쳐 노끈을 꽉 당겼다. 그만 젖꼭지가 끊어지면서 빨간 피가 젖무덤으로 줄줄 흥건히 적셨다. 윤희는 너무 아파 신음소리를 냈다. “말하겠니? 안 하겠니? 이 년이 정말 지독한 악질이구나!” 윤희는 머리를 천천히 들면서 흐트러진 머리카락사이로 일룡을 무섭게 쏘아보았다. 일룡은 그 무서운 눈길을 피하더니 권연을 붙여 물고 풀썩풀썩 피웠다. 연기가 감방 당직실에 서리서리 올라가면서 매캐한 냄새를 피웠다.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일룡은 윤희에게 다가오더니 담배를 길게 빨아댔다. 빠지직 소리와 함께 담뱃불이 새빨갛게 피어올랐다. 갑자기 그자는 담뱃불을 피가 줄줄 흐르는 윤희의 끊어진 젖꼭지에 빠지직 빠지직 지져댔다. “아이고머니!” 윤희는 너무 따가워 비명을 지르면서 마구 몸을 배배 꼬았다. “하하하.” 일룡은 짐승처럼 너털웃음을 웃어댔다. “말해! 우두머리가 누구야?” “내다. 내가 코신부대 책임자이다. 내가 조선족 여성들을 보고 네놈들을 족치라고 자갈을 날라다 주라고 시켰다! 네놈의 대갈통을 까부시지 못하고 잡힌 게 원수다! 원수!” “이 년이 또 혼나봐야 주둥이를 열겠니?!” 한 쉼 쉬고 난 일룡은 또다시 야욕이 발작했다. 그자는 씩씩거리면서 윤희를 마구 끌어다가 허리를 굽혀 책상다리에 마구 매놓고 치마를 훌렁 벗겨 놓았다. “뭘 하려는 거야?!” 일룡은 말 대신 괴춤을 까고 달려들었다. 윤희는 뒤로 달려드는 일룡의 사타구니를 뒤발길질을 했다. “이 짐승 같은 놈아, 네 놈이 날벼락을 맞아 썩어지지 않는가 봐라!아, 악, 아이유…” 사무상 다리마저 삐꺼덕거렸다. 윤희의 날카로운 욕설과 죽어가는 비명소리가 당직실을 메웠다… 세상의 풍운조화는 예측하기 어려웠다. 위에서 정성해 등 조선족 노간부들을 보호하는 이른바 “보황파”라고 일컫는 군중단체들과 이른바 노간부들을 타도하려고 미쳐 날뛰던 “반란파”들은 이젠 싸우지 말고 대연합을 하라고 했다. 위의 지시에 따라 옳고 그름을 떠나서 이젠 변론이고 돌팔매질이고 때리고 마스는 투쟁은 끝났다. 허나 실상 반란파들은 감옥에 들어간 자들이 하나도 없었고 각급 기관의 요직을 차지했다. 할빈에서 온 반란파 두목 이씨의 통역을 하던 자는 노국장을 몰아내고 모모한 국장으로 승급해 권총을 차고 찌프에 앉아 개 잡은 포수처럼 싸다니면서 계속 노간부들을 못 살게 굴었다. 그리하여 노간부들은 그를 보기만 하면 모골이 송연해질 지경이었고 눈에 든 가시처럼 미워했다. 이일룡이란 자마저 미녀들이 꽃송이들처럼 방실거리는 시내 문화단위로 들어가 원래 과장을 반란해 몰아내고 과장자리를 차지했다. 일룡은 이쁜 무용수나 가수를 보기만 하면 새파란 새애기든 각시든 상관없이 젖가슴을 스리슬쩍 만져 봐야 시름 놓는 건달 습관이 있었다. 일룡은 콧노래를 부르면서 복도를 지나가다가 무용수인 용만의 처 해복과 정성해 서기 처남댁인 송선을 만났다. “과장님, 안녕하십니까?” “오, 그래, 그래.” 일룡의 눈길은 대번에 생글방글 웃는 송선의 얼굴로부터 풍만한 젖가슴에 가 꽂혔다. 송선은 그 찔러버리는 눈길이 너무 아파 가슴에 뭐가 묻었는가고 내려다보았다. 저고리에 뭐가 묻은 것도 없었다. 일룡의 나쁜 습관을 아는 송선과 해복은 눈인사를 하고는 바쁜 걸음으로 자리를 떴다. 해복은 자기 남편이 국장인데 감히 나하고야 어쩌지 않으려니 했다. “왁!” 갑자기 일룡이 뒤에서 덮쳐와 해복과 송선을 와락 끌어안으면서 젖가슴을 만져놓았다. “어마나!” 해복은 국장 남편을 믿고 일룡을 쏘아보았다. 허나 송선은 감히 일룡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팔을 치워버리고 저리로 가버렸다. “건달 같은게. 과장이라는 게 뭡니까?” 해복이 불평을 토로하면서 눈을 흘기자 일룡은 씨물씨물 웃으면서 변명했다. “어허, 국장 부인님, 미안하오. 불시에 그만, 헤헤헤.” 그때 복도에 다른 무용수들이 나오자 해복도 더 어쩌지 못하고 눈만 흘기며 헤어져 갔다. 이러루한 일은 수두룩했다. 허나 여성무용수들은 예술과 과장을 감히 건드리지 못했다. 하긴 과장을 건드리면 무대에 오를 수 없었던 것이다. 일룡은 과장 실에 가서 걸상에 앉아서도 금방 해복과 송선의 풍만한 젖가슴을 움켜쥐었을 때 가슴이 뭉클하고 높뛰던 흥분이 가라앉지 않았다. 아직도 손에는 야들야들한 해복과 송선의 젖가슴을 만지던 감각이 남아 있었다. (아, 그 야들야들하고 뭉글뭉글한 젖통! 어쩜 바가지를 엎어놓은 것처럼 그렇게 크고 야들야들할까!) 눈앞에서는 송선의 외씨처럼 걀쭉하고 우유처럼 하얗고 해맑은 송선의 얼굴과 풍만하고 야들야들한 젖가슴이 삼삼거렸다. “오호호.” 순간 아래배로부터 거기가 찡해나면서 사타구니 두 새가 부풀어 올랐다. “에이, 이걸 어쩌지? 해복은 국장 부인이니까. 안돼. 송선아, 네년은 타도대상인 정 서기 처남댁이니까. 내 손아귀를 벗어나지 못해. 헤헤헤. 타도 맞은 정 서기는 처자들도 구하지 못하고 종적을 감췄는데 언제 처남댁을 구해?” 일룡은 더는 참을 수 없어 어떻게 하면 송선을 손아귀에 넣고 데리고 놀 것인가 궁리했다. 이윽고 일룡은 외까풀 눈을 치뜨더니 발딱 일어났다. 그는 무용실에 가서 한창 내복바람에 춤 연습을 하는 송선을 불렀다. 송선은 자기 다리로부터 젖가슴을 얼이 빠진 듯이 뚫어지게 노려보는 이 과장의 게슴츠레한 외까풀 눈을 피해 옷을 입으면서 물었다. “무슨 일이 있습니까?” “과장 실로 오오. 조직담화를 할 일이 있소.” 숱한 무용수들의 앞인지라 일룡은 제법 점잖게 과장 틀을 차리면서 한 마디 던지고 무용실의 무용수들을 위엄이 있는 외까풀 눈으로 빙 둘러보더니 훌 나가버렸다. 과장 실에 돌아간 일룡은 거만스레 의자 등받이에 잔등을 대고 권연을 꺼내 풀썩풀썩 피웠다. 똑, 똑, 똑. 노크소리가 가볍게 들렸다. “들어오오.” 문소리가 가볍게 나더니 송선이 머리를 숙인 채 조용히 들어섰다. “여기 앉소.” 일룡은 송선의 붕긋한 젖가슴을 보는 순간 버릇처럼 당장 만지고 싶은 충동이 생겼다. 허나 짐짓 그런 안속을 드러내지 않고 마른 침만 꼴깍 넘기면서 맞은편에 앉는 송선의 몸을 노려보았다. “송선이, 동무는 ‘문화대혁명’의 동풍에 날려가고 싶소? 살고 싶소?” “예?” 안속과는 달리 일룡은 단도직입적으로 위협부터 들이댔다. “제가 뭘 잘 못한 것이라도 있습니까?” “몰라서 묻소?” “뭘 말인가요?” “내 말해 줘야 알겠소?” “…” 송선은 공포에 새파랗게 질린 눈길로 일룡의 얇은 입을 쳐다보았다. “넌 반역자, 내부간첩이야!” “?” “네 년은 한간이며 민족우파이며 독립왕국을 세우려던 정성해 서기 처남댁이야!” 그제야 송선은 십중팔구는 눈치를 차렸다. “정 서기 처남댁인데 무슨 죄가 있는가요?” 일룡은 의자에서 일어나 송선의 곁으로 어슬렁어슬렁 다가갔다. “이년! 어째 날마다 투쟁받고 싶으냐?” 그는 불시에 송선의 젖가슴을 만지려다가 송선이 살짝 피하는 바람에 헛탕을 치고 말았다. “왜 이래요?” 송선은 일룡의 손을 뿌리치면서 문 쪽을 쳐다보며 나갔다. “할 말이 없으면 무용연습하러 나가겠습니다.” “흥! 더러운 년.” 일룡은 낯이 지지벌개지더니 이발을 부득부득 갈았다. “네년이 그 문을 나서는 날이면 투쟁받아야 한다.” 그 말에 송선은 감히 문을 박차고 나갈 엄두를 내지 못하고 문고리를 쥐고 섬섬 거리었다. “이제야 세상이 돌아가는 걸 알만 해?” 일룡은 송선에게 뒤로 다가가 와닥닥 끌어안으면서 젖가슴을 노리고 손을 뻗쳤다. “이걸 놓으세요.” 송선은 몸부림치면서 일룡의 손을 뿌리쳤다. 허나 일룡의 손이 인차 구렁이처럼 송선의 젖가슴 속으로 기어들어가 꿈틀거리었다. “이 년아, 내 말을 순순히 듣고 무대에 오르겠느냐? 아니면 날마다 거리를 돌면서 개패를 메고 숱한 사람들 앞에서 비행기를 타면서 투쟁 받겠니? 응?” “이걸 놔라!” 찰싹! 송선은 일룡의 귀 쌈을 한대 갈겼다. 일룡은 이발을 악물었다. “이년, 미쳤구나. 어디 투쟁 받아봐라!” 뜻밖에도 송선은 일룡을 콱 밀치면서 버럭 고함쳤다. “개 같은 자식! 누구를 능욕하려는 거냐!” 일룡은 괜히 끓어오르는 욕정을 가까스로 눅잦히면서 문을 박차고 나가는 송선을 닭 쫓던 개처럼 쳐다보기만 했다. 그날 오후부터 투쟁대회가 시작됐다. 일룡은 김용만과 짜고 들어 송선을 군중들 앞에서 투쟁했다. 용만의 처 해복과 송선은 예술학교 동기 동창생이었다. 가난한 빈농 가정에서 태어난 해복은 예술학교를 졸업했지만 시내 문화단위에 남기 힘들었다. 그때 정성해 서기 처남댁 송선이 나서서 정서기에게 줄을 달아주었기에 해복은 송선과 함께 시내 문화단위에 남게 됐던 것이다. 허나 김용만은 일룡을 불러 말했다. “이번 기회에 아예 송선이란 년의 예술생명을 잘라 버려야겠네.” “예. 알았습니다. 국장 어른의 지시대로 하겠습니다.” 일룡은 상전의 앞에서 머리를 조아렸다. “그년을 아주 그냥 정치상에서 대가리를 쳐들지 못하게 타도하고 무용도 하지 못하게 만들어 놔야죠. 그래야 국장님 사모님이 우리 단위에서 쥐락펴락 하지. 흐흐흐.” 김용만은 일룡의 정치민감성에 만족한 웃음을 짓더니 권총집을 매만지며 과장실을 나섰다. 일룡은 무용실에 숱한 책걸상을 쌓아놓았다. 책걸상 키가 천정에 닿을 지경이었다. 무용수들과 성악지도교사들 그리고 숱한 반란 파들이 모였다. “반혁명 무용권위 김송선을 끌어내라!” 몇몇 반란 파들이 개패를 목에 건 송선의 두 팔을 뒤로 비틀어 끌고 나왔다. 일룡은 앞에 나가 송선의 머리카락을 움켜쥐어 흔들며 빈정거렸다. “이년아, 어떠냐? 이런 날이 오리라고 몰랐지?” 허나 송선은 날카로운 눈길로 일룡을 쏘아보았다. “누굴 감히 쏘아봐?” 일룡은 뒤로 주춤 물러서더니 손을 홱 휘두르며 천정이 날아나게 고함쳤다. “이 년, 비행기를 타 보겠니?!” 그러자 숱한 반란파들이 송선을 숱한 책걸상을 쌓아 놓은 위로 올라가라고 핍박했다. 송선은 방법 없이 개패를 건채 책걸상 무지로 기여 올라갔다. 그가 천정에 머리 닿을 지경으로 올라가자 일룡은 목에 지렁이 같은 피 줄을 세우며 고래고래 고함쳤다. “이 반혁명예술권위야! 잘못이 뭔지 알만 한가?!” 그때 뜻밖에도 해복이 군중들 앞에 뛰어 나서더니 “반혁명예술권위 김송선을 타도하자!” 하고 외쳤다. 그러나 무용수들은 서로 눈치를 보면서 구호를 따라 부르지 않고 주먹을 들었다가 슬슬 내리웠다. “모주석께서는 계급투쟁을 잊지 말자고 지시하셨습니다. 동무들, 이 치열한 계급투쟁 마당에 정치입장과 계급입장을 정확하게 수립해야 합니다!” 그제야 모두들 마지못해 주먹을 쳐들고 해복의 구호를 따라 부르네 마네 했다.  “이년, 비행기 타봐라!”  갑자기 일룡이 고함치더니 책상다리를 탁 걷어찼다. 꽈당! 요란한 소리와 함께 책걸상 무지가 넘어졌다. 그 위에 섰던 송선은 무용실 바닥에 무릎을 짓쪼며 꽈당 떨어졌다. 순간 송선의 머리와 팔굽, 무릎에서 빨간 피가 질벅하게 흘렀다. 다행히 송선이 무용수이기에 유연하게 떨어졌기에 덜 상한 셈이었다. “히히히. 일어나!” 일룡은 겨우 기어 일어난 송선의 머리를 끌어 당겨 일으키면서 빈정거렸다. “비행기 맛이 어때? 중국 속담에 권하는 술은 마시지 않고 벌주를 마신다더니. 헤헤헤.” 일룡과 해복이 사전에 사촉한대로 일부 무용수들은 정치표현이 나쁘다는 말을 들을까봐 앞다퉈 송선을 투쟁했다. 그때 송선은 이전에 투쟁을 받은 정성해 서기가 집에 돌아와 들려준 이야기가 떠올랐다. 중국 남방으로 가면 국연에 잔나비 대갈통을 까먹는 것이 최고 요리라고 했다. 그것도 산 잔나비를 쇠살창안에 가두고 면도칼로 빡빡 깎은 잔나비 대가리를 쇠살창 위에 고정시켜놓고 손님들이 망치로 대가리를 딱 까서 숟가락으로 뇌 즙을 파먹는다고 했다. 그리하여 벌써 취사원들이 잡을 잔나비를 고르러 잔나비 우리로 가기만 하면 잔나비들이 서로 죽을 까봐 눈을 판들거리면서 누가 죽을 차례인가고 둘러본다고 한다. 취사원이 한 잔나비를 손가락질만 하면 잔나비들이 욱 모여들어 그 잔나비를 붙잡아 마구 살창 밖으로 떠밀어 내보냈다. 취사원은 힘도 들이지 않고 그 잔나비를 붙잡아내 요리상에 올릴 수 있었다. 지금 자기를 투쟁하는 장면이 딱 그 숱한 잔나비들을 방불케 했다. 이튿날부터 용만 국장의 지시대로 일룡은 정치열성을 보이는 반란 파들을 지휘해 개패를 목에 건 해복에게 평소 무용복을 비롯한 숱한 값진 옷을 꽉 걷어 넣은 옷궤를 지워 거리로 끌고 다니면서 투쟁했다. 송선은 거리로 나가 반란파들에게 끌리어 절룩거리며 다니면서 꽹과리를 댕댕 치며 “반혁명예술권위 김송선을 타도하자!” 하고 구호를 부르면서 거리투쟁을 받아야만 했다. “어우, 저 멋쟁이 무용권위 송선이 어쩜 저렇게 투쟁을 다 받소?” “이전에 얼마나 잘난 척 했소.” “그게 다 정 서기 처남댁이노라고 우쭐거린 게지.” 사람의 질투란 무서운 것이었다. 평소에 질투심으로 속이 꽤나 불편하던 일부 사람들은 송선이 투쟁을 받으니 깨고소해 했다. 지어 진상을 모르는 일부 군중들은 송선의 머리에 돌을 쥐어 뿌렸다. 송선의 머리에서는 뻘건 피가 줄줄 흘러 볼까지 적시었다. 피에 질벅하게 젖은 머리카락이 어깨에 드리워 예쁘던 무용수가 볼품없이 됐다. 그것도 모자라 용만은 일룡에게 지시해 정성해 서기 아내 김영희(김영순)도 끌어내 송선과 함께 개패를 걸고 옷궤를 메워 투쟁하게 했다. 이튿날부터 영희와 송선은 무거운 옷궤를 지고 개패를 건 채 꽹과리를 댕댕 치며 거리로 끌려 다니면서 처참하게 투쟁 받았다. 아름다운 무용수 송선의 예쁨은 오히려 변태적인 반란 파들에 의해 화를 불러왔다. 반란 파들의 사촉을 받은 자들은 질투하던 나머지 그 아름다운 꽃송이를 무참히 음해했다. 연변의 암흑에 찬 대시에서 아름다운 꽃송이들은 야수들에게 무참히 짓밟혀 신음하고 있었다.
140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101) 댓글:  조회:1082  추천:1  2018-05-15
                                                                             12. 반란 먹장구름이 덮쳐 오더니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대지의 연기가 구름에 올라가 붙은 듯이 살풍경이다. 갑작스레 덮쳐오고 밀려가는 비구름은 풍운을 짐작하기 어려웠다. 사람들은 대체 비옷을 입어야 할지 반팔적삼을 입어야 할지 갈팡질팡하면서 변덕스러운 하늘만 욕하고 있었다. 요즘 함흥소학교에서는 기상천외한 일이 벌어졌다. 흥수는 공사에 가서 무슨 충성 무라는 것을 배워가지고 돌아와 사원들에게 배워주었다. 그는 근본 상순과 회보하기는 고사하고 한마디 토론도 없이 충성 무를 보급했다. 원래 미제와 육박전을 할 때 왼팔을 총창에 찔린 흥수는 별스레 쩔뚝거리는 시늉을 하면서 두 팔을 들어 윗사람을 받드는 시늉을 반복하는 춤을 배워주다. 홍자랑 충성 무를 배우다가 도리머리를 했다. “어째 우리 도라지만은 아주 달라. 영 추기 힘들어.” 그러자 흥수는 길죽한 말상을 기우뚱 했다. 움푹이 팬 외까풀 눈을 희번뜩거리면서 눈알부라리며 고래고래 고함쳤다. “무슨 잔소리냐? 두말 말고 충성 무를 잘 배워. 충성 무를 배우지 않는 사원은 모 주석에게 충성하지 않는 사람이야. 알만하지?” 홍자랑 정자랑 신자랑 입을 홀랑 내밀었다. 그녀들은 모두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충성 무를 배웠다. 한 사흘 배우니 제법 쩔뚝거리면서 손을 위로 쳐들어 올리면서 빙빙 돌아갔다. 상순은 처음에는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지만 위로부터 충성무를 정치적으로 내리 먹이니 별 수 없어 따라 쩔뚝거리면서 모주석의 초상에 받들어 올리는 팔을 휘저으면서 충성 무를 췄다. 지어 흥수는 위의 정신이라면서 집집마다 남녀노소가 몽땅 식사 전이면 벽에 높이 모신 모택동 주석의 초상을 향해 밥상을 돌아가면서 충성무를 추라는 것이었다. 상순은 그것이 정말 위의 정신인가고 박우성 서기한테 물어 보려고 진수해 공사에 찾아 올라갔다. 공사 벽돌토성 안에서는 숱한 사람들이 별스레 뻘건 복숭아 판에 “충”자를 새긴 패쪽을 목에 걸고 한창 충성무 표현을 하느라고 야단이었다. 상순은 목에 뻘건 충성패쪽을 걸고 뻘건 완장을 낀 홍위병들이 지키는 대문 안에 들어가려고 서둘렀다. “이게 어디서 온 촌놈이야?!” 한 홍위병이 상순의 아래위를 훑어보면서 몽둥이 끝으로 땅바닥을 쿡쿡 찍으며 막아 나섰다. “박서기를 찾아 왔소. 좀 들어가기요.” 허나 그 홍위병은 퉁명스레 한 마디 내 뱉을 뿐이었다. “박우성은 일본특무야. 일본특무를 만나 뭘 하려고 하오?” “뭐라오?!” 상순은 몽둥이에 정수리를 맞은 듯이 몸을 가누지 못했다. “박 서기가 일본특무라니? 되지도 않는 말.” 그러자 홍위병들은 상순을 둘러싸며 달려들었다. “이 놈이, 너도 일본특무지?” “뭐라고? 일본 특무? 난 항일전쟁 때 일본 놈들과 싸운 항일유격대 출신이다. 뭘 알아서 떠드느냐? 생사람을 잡지 말라!” 상순은 홍위병들의 말이 믿어지지 않았다. “피해라. 박 서기는 어디에 있느냐?” “이 나그네 정말 한 대 맞고 싶어?” 그러자 상순은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이러지 말라! 내 새끼 같은 애들과 싸우고 싶지 않구나.” 그때 분명 한 마을의 황종연이 있었건만 알은체도 하지 않고 홍위병들에게 뭐라고 시키는 것 같았다. 종연의 부추김을 받자 한 홍위병이 상순의 멱살을 쥐어 공사 대문 밖으로 떠밀었다. “썩 물러가지 못하겠는가?!” 상순은 재차 떠밀려는 자 팔목을 척 잡아 채 어깨에 둘러멨다가 태를 탁 쳐놓았다. 홍위병이 쉰 고개를 바라보는 나그네라고 준비 없은 것도 있었다. 하지만 그 날랜 솜씨는 한 폭의 유도 명장면을 방불케 했다. 홍위병은  땅 바닥에 머리를 박고 나동그라져 다시 일어나지도 못했다.. 황종연이 소리쳤다. “저 나그네 특종병 출신이다. 몽땅 달려들어라!” 홍위병들이 몽둥이를 휘두르면서 덮쳐들었다. 상순은 바람개비처럼 날아드는 몽둥이를 피해 몸을 훌쩍 날려 한 키나 되는 벽돌토성 위로 올라 가 날래게 달아났다. 홍위병들이 토성바깥에서 쫓아오면 토성 안으로 몸을 훌쩍 날려 들어가고 토성 안에 따라 들어오면 몸을 날려 토성바깥으로 날아나가면서 제일 먼저 쫓아오는 홍위병 한 둘씩 쳐 눕혔다. 뒤에서 두목인 종연이 죽어가는 소리로 고함쳤다. “그저 나그네 아니다. 달아나라!” 홍위병들은 뿔뿔이 흩어져 도망치기 시작했다. 숱한 구경꾼들이 상순의 날랜 솜씨에 혀를 내두르면서 구경했다. 상순은 토성을 넘어 달아나려는 홍위병 두목의 뒷다리를 잡아끌어 내리었다. 상순은 무쇠주먹을 쳐들고 눈알을 부라리었다. “박 서기를 어데 가뒀느냐?!” “모릅니다. 밤에 잡아오자마자 위에서 그날로 잡아갔습니다.” “어디로 잡아갔느냐? 죽고 싶지 않으면 말해라.” 상순은 주먹으로 그 홍위병의 머리를 한 대 딱 내리쳤다. “앗! 정말 모릅니다. 특무라고 잡아갔습니다. 어르신님.” 상순은 홍위병을 땅바닥에 훌 뿌리치고 공사 사무실로 들어갔다. 홍위병들은 저쪽 먼발치 벽 모서리에 반쪽 얼굴을 내밀고 로지심 같은 상순을 바라보면서 부들부들 떨었다. 상순이 공사 박 서기 사무실로 찾아가보니 문에 열십자로 널을 대고 대못을 박지 않았겠는가! 그 위에 “일본 특무 박우성을 타도하자!”라고 쓴 대문짝 같은 대자보까지 더덕더덕 붙어 있지 않겠는가. “무슨 특무야?! 개새끼들, 진상도 모르면서 좋은 간부를 타도해?” 상순은 대자보를 와락와락 뜯어 땅바닥에 내동댕이치고 발로 짓뭉개버렸다. 이때 파출소 허영호 소장이 소문을 듣고 살기등등해 뛰어왔다. “아이고, 김국장이구먼. 무사합니까?” 허 소장은 상순을 보자 권총을 옆구리에 되차면서 머리를 조아렸다. 홍위병들은 자기들이 그렇게 믿던 허 소장이 상순을 “김 국장”이라면서 허리까지 꿉썩거리며 공손히 대하는 걸 보고 쉬쉬거리면서 뒤로 물러났다. “어서 돌아가지 못하겠느냐? 네 같은 놈들이 우리 김 국장을 이길 거 같니? 옛날 내 스승이자 우리 공안국 국장이시다.” 허 소장이 몽둥이를 들고 복도에 들어오는 홍위병들을 뒤돌아보면서 욕했다. 그제야 홍위병들은 상순을 업신여기지 못하고 뒤로 비실비실 물러섰다. “박서기는 어디에 있는가?” 상순은 다짜고짜 물었다. 허영호는 상순의 두 손을 잡고 공손히 말했다. “김 국장, 갑시다. 우리 사무실에 가서 천천히 얘기합시다.” “언제 국장이 지금도 국장이오? 그렇게 부르지 마오. 홍위병들이 웃겠소?” 상순은 허영호 소장을 따라 진수해파출소로 들어갔다. 상순을 윗자리에 모신 후 허영호 소장은 천천히 입을 뗐다. “김 국장은 나의 영원한 국장입니다. 김국장이 안보 촌에 있는 저를 영월구 공안국에 받아들이지 않았더라면 오늘 소장도 하지 못했을 겁니다.” 상순은 허영호의 진심을 받아들였다. “건 그만 말하고. 박서기 어데 있소?” 허영호는 어조를 낮추어 대답했다. “이건 비밀입니다. 아무와도 말하지 마십시오.” “뭔가?” 상순은 의자 등받이에서 잔등을 떼면서 영호의 두툼한 입을 쳐다보았다. “박서기는 일본 와세다대학 유학생이 아니고 뭡니까?” “그거야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일이지.” 상순은 의자 등받이에 잔등을 붙이면서 심드렁해 했다. 허나 허영호는 의연히 심중한 태도를 보였다. “박 서기는 일어를 잘 하지 않고 뭡니까?” “그래서 어쨌단 말이오. 한마디로 뚝 찍어 말하오.” 상순은 갑갑해 언성을 높였다. 허나 허영호는 일어나 권총집을 뒤로 하면서 상순한테 가까이 다가와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이 일은 나 밖에 모릅니다. 위 공안국에서 저에게 특수임무를 주었습니다. 박우성에게 일본특무 모자를 씌워 투쟁하라고 했습니다.” “뭐라고?” 상순은 놀라는 기색을 보였다. “위에서는 그에게 일본특무 모자를 씌워 투쟁한 후 특수임무를 맡겨 어디에 보냈습니다.” 상순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디로 파견했다는 말이오?” “모르겠습니다.” “이건 너무 하지 않소. 뭐로 파견하겠으면 할 거지. 일본특무라는 억울한 누명을 씌워 붙잡아가듯 하면 박 서기 처자들은 어쩌오?” 허영호도 일어나면서 말했다. “이렇게 혼란한 정황에서도 우에서는 나에게 박 서기는 일본특무가 아니라 우리 공안부문과 안전부문에서 파견한, 특수임무를 맡은 분이라는 것을 몇 십 년 후에까지 증명서라고 했습니다. 박 서기 아내는 누구도 모르는 통화지구 어느 한 소학교에 전근시켰습니다. 이제 몇 해 후면 아무도 모르게 연길의 어느 소학교에 전근시킬 예산이라고 합디다. 박 서기의 종적을 누구도 모르게 감쪽같이 사라지게 한 것입니다.” 그제야 상순은 의자에 되앉으면서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었다. “그러루하면 알만 하오. 고육계를 쓰는 거구만. 어쩌겠소? 나라 안전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바칠 수도 있지. 억울한 모자를 쓰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지.” 상순은 담배쌈지를 꺼내 한 대 피워 물었다. “충성무를 추라는 건 공사 지시오?” 허영호는 아무런 고려도 없이 대답했다. “예. 박우성 서기가 떠나가기 전에 내린 지시입니다. 먼저 각 대대 선전위원을 불러다 충성무 학습반을 꾸리고 전 공사에 보급할 예산입니다. 류소기를 타도한 후 지금 전국적으로 모두 모주석께 충성하는 충성무를 보급하고 모주석의 최고지시를 구절마다 암송하듯이 학습해야 한답니다. 집집마다 모주석의 최고지시를 옹호는 구호를 붙이고 흑판에 모주석의 지시를 색분필로 써놓아야 한답디다. 김 서기도 형세에 뒤떨어지지 마십시오. 그 마을의 선전위원 흥수란 사람도 와서 먼저 충성무를 배우더구먼요.” 흥수 말이 나오니 두 사람 모두 콧방귀를 뀌었다. 허영호도 자기 사촌형 허백호를 물어 먹은 흥수를 두고 속에 앙금이 어지간히 앉은 것이 아니었다. 상순은 허영호를 보고 궁금한 것부터 물었다. “지금 위 정황은 어떠오? 허영주 부 현장이랑 무사하오?” “그러지 않아도 김 서기한테 알리려고 했습니다.” “무슨 일이 있소?” 허영호는 벌떡 일어나는 상순을 보고 일어났다. “지금 반란 파들이 허영주 부현장을 투쟁한답니다.” “뭐라고? 그놈 반란파들이 무슨 이유로 허 현장을 투쟁하오? 그는 항일유격대 출신 노간부요. 조선의용군에서 정성해 서기와 함께 파견한 노간부인데 누가 감히 투쟁한단 말이오?” 허영호도 답답해 담배를 태우면서 두덜거리었다. “무슨 판인지 모르겠습니다. 정성해를 따라 할빈에서 나온 조선족간부들을 돌아가면서 몽땅 붙잡아 감옥에 가두고 억울한 모자를 씌워 투쟁하는 판입니다. 이계삼 서기도 허 현장 같은 조선간부들을 보호한 보황파라고 몰아서 투쟁한답니다.” “개새끼들이 개수작 한다. 다 항일 노간부들인데 타도해? 국민당이나 지주들보다 더 한 놈들이구나.” 상순은 격분해 씩씩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지금 홍위병들은 무슨 놈들인지 모르겠습니다. 쩍 하면 노간부들을 잡아다가 투쟁하면서 말마디마다 혁명한다고 떠듭니다. 아마 이계삼 서기나 허 현장은 그 자리에 있을 것 같지 못합니다.” “누가 감히 그들을 다쳐?” 상순은 눈을 부릅뜨고 허영호를 쏘아보았다. “홍위병들이 반란을 일으킨 목적은 바로 허 현장이나 이서기를 말에서 끌어내리고 자기들이 올라가려는 것입니다. 지금 정성해 서기 가족들이나 친척들마저 농촌에 쫓아 보내 노동개조를 시킨답디다. 이계삼 서기와 허영주 부 현장도 철직시켜 우리 공사 어느 시골 농촌에 보내 노동개조를 시킨답디다.” 상순은 억이 막혀 입을 딱 벌렸다가 다물었다. 한참 후 상순은 천천히 무거운 입을 열었다. “허 소장, 자네나 내나 알지 않는가? 이계삼 서기나 허영주 부 현장은 착오 없네. 모두 항일전쟁 때부터 항일유격대였네. 지금까지 수십년 동안 변항 없이 줄곧 당과 인민에게 충성해온 충직한 간부들이네. 우리는 그들을 보호할 의무가 있소. 다른 곳으로 가면 꼭 여러 모로 고생할 게 아닌가? 될 수 있으면 이 서기와 허 현장을 우리 대대에 보내게나. 내 잘 보필해야겠네. 그 분들은 모두 나를 혁명의 길에 들어서게 이끌어준 스승이고 입당소개인들이네. 목숨으로라도 그 분들을 보호해야겠네.” 그 어조는 어찌나 간곡한지 허영호는 상순의 참된 인간성을 실감할 정도였다. “알았습니다. 홍위병들의 눈치는 보이지만 함흥 촌에 보내드리겠습니다.” 상순은 한숨을 후 내쉬면서 물었다. “홍위병이란 건 어데서 깨난 물건짝들인가?” “북경으로부터 생겨난 조직인데 위로부터 그 기세가 사납습니다. 연길의 반란파들은 할빈으로부터 온 이씨라는 자의 지휘아래 위로부터  지방에 이르기까지 처처에서 노 간부들을 잡아내 투쟁하고 타도하고 노 간부들의 자리를 빼앗아 차지하고 있습니다. 홍위병들은 정성해 서기를 타도하고도 모자라서 정성해 서기를 보호한 김문보 부서기까지 타도했답디다. 그 놈들은 정성해 서기를 붙잡아다가 가두고 무슨 정 서기를 ‘민족반역자’요, ‘민족우파’요, 독립왕국을 꾸리자고 날뛴 놈들을 보호한 ‘매국역적’이라는 모자까지 씌워 투쟁한답니다. 이씨(모원신)는 직접 조남기, 김문보 등 조선족간부들을 불러다놓고 심문하면서 정성해 서기한테 별의별 억울한 죄장을 들씌웠답니다. '정성해는 조선족들이 많이 모여사는 목단강지구와 길림지구를 연변에 떼달라고 했다.',  '연변자치구를 자취주로 고친건 잘못이다. 응당 연변조선족자치구로 회복해야 한다.'  '연변에 조선족독립왕국을 세우려고 했다. 이러루한 억울한 죄명을 들씌워 정성해 서기를 타도하고도 모자라서 정성해 서기가 반역자, 매국역적이라는 걸 승인하라고 조남기, 김문보 부서기 등 조선족간부들을 핍박했답니다. 그런데 조남기, 김문보 부서기 등은 리씨의 터무니없는 날조를 견결히 반격했답니다.  그들은 '정성해 서기는 중국혁명에 중대한 공헌을 한 훌륭한 조선족간부'라고 주장하면서 억울한 루명을 씌주지 말라고 했답니다. 그래서 그들도 지금 날마다 투쟁 맞고 로동개조를 한답니다. 심지어 정성해 서기를 보호한 자치주급 한족간부 전인영이랑 배극이랑 요흔이랑도 비판투쟁받았답니다. 리씨는 그들을 비밀리에 불러다 놓고 '너희들은 한족간부인데 모주석을 따라 혁명하겠는냐? 아니면 조선족매국역절들을 따라 한평생 투쟁받고 지옥에 처박힐 거냐?'고 위협했답니다. 그러나 전인영과 요흔, 배극은 의연희 진리를 견지해 '정성해 서기는 훌륭한 간부이지 반역이나 매국 행위를 한게 없다.'고 증명 섰답니다. 그래서 그들 한족간부들도 조남기나 김문보처럼 투쟁받고 투옥됐답니다. ” 상순은 땅이 꺼지게 한숨을 후- 내쉬었다. “허, 세상에 별난 일을 다 보겠소. 발톱까지 무장한 일본 놈들이나 국민당 앞에서도 꺼꾸러지지 않고 싸워온 노간부들이 그 놈 홍위병들에게 꺼꾸러진단 말인가?” 상순은 김빠진 공처럼 의자에 털썩 물앉았다. "홍위병들을 동원해 로간부들을 타도하는 건 위로부터 새로운 투쟁방식이랍니다." "원참, 교활한 놈들이라구야!" 한참 후 상순은 쇠덩이 같이 무거운 침묵을 깼다. “정성해 서기를 타도하자는 홍위병들이 나왔으면 정성해 서기를 보호하는 조직을 결성해야 할 게 아닌가? 그래 훌륭한 조선족간부가 타도되는 것을 눈을 뻔히 뜨고 보고만 있겠소?” 허 영호 소장은 일어나 권총집을 뒤로 돌리더니 사무실 안을 뚜벅뚜벅 거닐었다. “우리 민경들이야 형사사건이나 처리하면서 중립을 지키라는 상급 부문의 지시가 있습니다. 이번 군중운동에는 참가하지 못합니다. 김문보 부서기랑 정성해 서기를 보호하자고 반란파들에 맞서 싸우다가 목숨까지 바쳤습니다. ” “정치민감성으로 세상이 돌아가는 걸 잘 살피오. 무슨 일이 있으면 알리게나.” 상순의 가르침에 허영호 소장은 순순히 대답했다. “예. 저도 눈과 귀가 있으니까요. 세상형편이 돌아가는 걸 보고만 있을 수 없습니다. 전번에 내 사촌형을 구해 줘서 정말 고맙습니다. 형님도 강한 분이었는데 어쩜 그렇게 억울한 누명을 쓰고 약해졌는지 모르겠습니다. 마음은 꽤나 비좁은 분이어서 전번에 백양나무에 목을 매기까지 하지 않았습니까? 아무쪼록 우리 백호 형님을 많이 도와주십시오. 이전에 백호 형님이 김서기한테 죄를 졌는데 널리 양해해 주십시오. 당시 저도 김서기는 좋은 분이니까. 김서기와 그러지 말라고 형님한테 여러 번 귀띔했습니다. 그런데도 형님은 대약진을 한다고 고집을 부리면서 김서기를 못 살게 굴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아도 김서기한테 미안합니다.” “됐어. 고까짓 일을 잊은지도 오라오. 관건은 지금 어떻게 홍위병들을 대처하는가 하는 문제요.” 이윽고 상순은 영월구에서 수하에게 명령하듯이 허 영호에게 말했다. “허 소장은 먼저 공사마당의 홍위병들부터 철수시키게나. 눈 골 사나워서 어디 공사를 다니겠소?” 허나 허 소장은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힘듭니다. 그들은 권총이 없다 뿐이지만 기세가 사납습니다. 우리 진수해만 해도 몽둥이를 끌고 온 시내를 싸다니는 홍위병들이 수백 명에 달합니다. 그들은 파출소고 뭐고 마구 포위하고 공격합니다.” “좋은 권총을 뒀다가 뭘 하오?” “아직 적아모순이 아니기에 파출소와 군부대에서는 중립을 지키고 어느 쪽에도 무력을 쓰지 못한다는 상급 명령이 있습니다. 헌데 YJ에서는 정성해 서기를 보호하려는 ‘항대’조직과 정성해를 타도하려는 ‘홍색’조직에서 서로 자기 정치주장을 대자보에 써서 붙이던 데로부터 이젠 개판이 됐습니다. 변론하던데로부터 무리 싸움질을 하다가 나중에는 서로 총질을 했답니다. 8.27이란 조직도 나왔답니다. 조선족 여자들은 코신부대라는 걸 무어가지고 정성해 서기를 보호하겠다고 나섰답니다. 그들은 부르하통하에 가서 자갈을 치마에 주어 담아 ‘홍색’ 반란 파들을 맞서 족치는 ‘항대’와 YB대학의 ‘붉은기연대’의 사내대장부들에게 날라다 주었답니다. 싸워서 열세에 처하자 반란파조직의 홍위병들은 중앙에서 파견한 반란 파 두목 이 씨의 지시에 따라 군 분구 무기창고에서 총기를 발급받아 ‘항대’조직에 총으로 사격까지 했답니다. 돌 총 질만 하다가 총을 든 반란 파들의 총격에 수많은 사상자를 낸 ‘항대’조직의 골간들은 적수공으로 반란 파들에게 쫓기어 노동자구락부에 철거해 문을 닫아걸고 걸상과 책상 다리를 끊어 쥐고 최후까지 싸울 각오를 했답니다. 그들을 포위한 홍위병 반란 파들은 두목의 명령에 따라 악독하게도 구락부에 휘발유를 치고 불을 달았답니다. 수많은 ‘항대’의 조선족 사내대장부들은 불길을 피해 구락부 천정에까지 올라가 아래로 벽돌장과 기와를 벗겨 내리 던지면서 필사적으로 최후까지 싸웠답니다. 마지막에 불길 속에서 뛰어나온 ‘항대’의 골간들은 모두 체포돼 감금됐고 모진 고문을 당했답니다. 구락부에서 철거한 나머지 골간들은 모두 의학원 2층 사무청사에 철거해 책상과 널판자로 문을 막고 결사적으로 항거했답니다. 그런데 총을 든 반란 파들을 어찌 당하겠습니까? 그들은 먹을 것이 다 떨어지고 물 한모금도 마시지 못하면서도 사흘을 뻗치었답니다. 2층 사무 청사에서 적수공권인 그들은 권투를 연습하면서 최후결사전을 다짐했습니다. 후에 반란 파들은 스피카에 대고 ‘손을 들고 투항해 나오면 살려준다. 허나 끝까지 항거하면 몽땅 총살할 테다.’라고 을러멨답니다. 그래도 투항하지 않자 반란파들은 작약으로 의학원 토성을 폭파하고 기관총으로 엄호사격하면서 2층 청사로 쳐들어갔습니다. 련 며칠 포위공경에 굶어 모두 쓰러질 지경으로 되어 ‘항대’의 골간들과 ‘코신부대’ 골간 200여 명은 핍박에 의해 손을 들고 하나하나 의학원 사무 청사에서 나왔답니다. 할빈에서 왔다는 반란 파 두목 이씨의 지시에 따라 그들은 몽땅 공안국 경찰들에 의해 반혁명 폭동분자들이라는 모자를 쓰고 감옥에 들어갔답니다.” “큰일은 큰일이구먼. 우리 여기에서 한족과 조선족 형제들은 원래 항일전쟁시기로부터 사회주의 혁명시기까지 얼마나 단결했소? 그런데 반란파들은 민족 분열을 조성하고 있구먼.” 상순은 땅이 꺼지게 한숨을 쉬었다. “그 이 씨란 놈은 중뿔나게 할빈에서 우리 연변에 와서 반란한다오?” 상순은 기실 정규상한테서 대충 들어서 문화대혁며 혀세는 좀 알았다. 그러나 그는 여기저기서 하는 말을 귀담아 들으면서 침묵할뿐  소홀히 말하지 않고 있었다. 허영호는 로상전 앞인지라 시름놓고 들은 말을 줄줄 내리했다.        “듣는 말에 의하면 그 이 씨라는 자는 성이 모씨라고 합니다." "오- 모씨?" "예, 그자는 자기 진정한 신분을 속이려고 일부러 이 씨 성을 달고 막후조종을 한답니다. 그자는 중앙의 모모한 지도자의 조카라고 합니다." 상순은 그저 머리만 끄덕였다. "모씨는 기세가 하늘을 찌를 듯이 사납다고 합니다. 정성해 서기를 타도하고서도 성차지 않아 정성해 동지를 따라 혁명해온 숱한 노지도일군들을 타도하자고 미쳐 날뛰고 있습니다. 주 당교 청사에 전문 심문실을 설칠해놓고 반란파들은 날마다 밤낮 노간부들한테 몽둥이찜질을 한답니다. 당교 청사는 진짜 노간부들의 아우성소리와 신음소리 처참하답니다. 반란파 놈들은 로간부들한테 고춧가루를 눈에 치고 쇠못을 발등에 박아넣고 송곳으로 손톱눈과 항문을 찌르면서 고문한답니다…” “큰일 났구먼. 정성해 서기도 살아나지 못했으니까 다른 조선족지도간부들도 살아남기 어렵겠구먼.” “조선족 간부뿐만 아니라 정성해 서기를 따라 혁명한 한족간부들인 전인영 동지랑 모두 타도대상으로 몰아 부친답니다. 그러니 정성해 서기랑 이계삼 서기랑 허영주 부 현장이랑 농촌에 쫓겨 가지 않고 배기겠습니까? 일부 조선족들도 반란 파들과 합세해 이 기회에 노 간부들을 몰아내고 권력을 장악하려고 미쳐 날뛰고 있습니다. 함흥대대에서는 흥수랑 종연이랑 주의해야 합니다.” 상순은 땅이 꺼지게 한숨만 푸푸 내쉬었다. 속이 탄 마음이 연기로 돼 담배연기와 함께 꾸역꾸역 풍겨 나와 파출소 사무실을 숨 막히게 꽉 채웠다. 그날 상순은 허영호 소장이 식당에 가서 사주는 점심까지 잘 대접받았다. 식당 주위에서 몽둥이를 끌고 맴돌던 홍위병들은 상순이가 허영호 소장이 모는 찌프에 앉아 함흥 촌에 돌아가는 것을 먼발치에서 보고 그저 농촌 나그네 아니구나 하는 낯짝들을 절레절레 흔들어보였다. 상순이 찌프에 앉아 마을에 들어서면서 보니 건조실 부근에서 숱한 마을 사람들이 모여 뭘 만들고 있었다. 허 영호 소장을 먼저 보내고 상순이 다가가 여겨보니 종연이랑 경만이랑 풍로 불에 양철 위에 연을 녹여 충성할 “충(忠)”자를 부어 만들고 있었다. 그것도 마음 “심(心”자 모양 복판에 제법 “충”자를 새겨 은빛처럼 번쩍번쩍 하는데다가 고리를 걸 구멍까지 뒷면에 내서 긴을 꽂아 목에 걸 수 있게 만들고 있었다. “그걸 만들어 뭘 하느냐?‘ 상순이 묻자 종연이 풍로의 풀무를 돌리면서 “모 주석께 충성하는 충성심을 보여주려고 만듭니다. 김서기는 어째 형세에 그리 떨어집니까? 진수해에 갔다가 어째 충성패쪽을 목에 걸고 다니는 걸 못 보았습니까?”라고 했다. 그제야 상순은 진수해 공사 울안에서 충성 무를 추는 사람들과 대문을 지키던 홍위병들이 모두 충성패쪽을 건 것이 눈에 떠올랐다. “헤이 참, 목에 그런 충성패쪽을 걸어야 충성심을 보여준다더니?” “그래도 이걸 걸지 않으면 반동분자로 몰릴 판인데?” 상순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이때 덕돌이 다가와 졸라댔다. “아버지, 나도 충성패쪽을 만들어 줍소.” “애들이 그걸 해 어쩌니?” “성묵이랑 동림이랑 다 만들어 목에 걸었는데도?” 상순은 덕돌의 손을 쥐고 집으로 가더니 물었다. “덕돌아, 연이 없어 불시에 어떻게 만드느냐? 후에 만들자.” “성묵의 아버지는 칫솔 깎지를 녹여 만들었답니다.” “그래? 어디 보자.” 상순은 엉거주춤 일어나더니 조왕간 덕대 위를 두루 살펴보다가 치분을 쳐들었다. “이걸 봐라. 아직도 치분이 절반이나 있는데 어떻게 벌써 녹이겠니?” 그러자 덕돌은 구들에 발랑 들어 누워 발버둥질을 치면서 떼를 썼다. “안 된다, 안 돼. 오늘 꼭 충성패쪽을 만들어 줘야 하오.” “어디 보자.” 덕돌이 울며 두 손으로 눈물을 비비고 닦다가 손가락 새로 여겨보니 아버지가 집안을 두루 살피다가 고기 그물을 쳐들고 보는 것이었다. “됐다. 이거면 충성패쪽을 몇 개라도 만들겠다.” 덕돌은 제꺽 일어나 앉았다. 아버지가 그물에서 모래무치처럼 생긴 것을 떼 내는 것이었다. “그게 뭡니까?” “고기그물의 연돌이야. 몽땅 연이다.” “와, 좋아라.” 상순은 연돌 세 개를 가지고 덕돌의 손을 잡고 건조실로 나갔다. 종연은 연돌 세 개나 보고 욕심나서 손바닥에 놓고 매만지면서 물었다. “연돌 세 개나 필요 없습니다. 한 개면 하나 만들 수 있습니다.” “아니오. 덕돌이 걸 하나에 내꺼 하고 홍자 꺼도 하나 만드오.” 종연은 아쉬운 듯이 “헛 참, 연을 남겨서 내 하나 가질 까 했더니. 안되겠어.”라고 했다. “그럼 충성 패를 만든 수고비를 주는 셈 치고 하나 만들어 가지게나.” “그럼 그렇겠지. 김서기 제일이야.” 한참 후에 종연과 수봉은 덕돌에게 은빛이 번쩍번쩍 나는 연충성패쪽을 주었다. 덕돌은 아직도 따뜻한 충성 패쪽을 가지고 모택동 주석의 충성스러운 전사로 된 듯한 긍지감으로 한 가슴이 뿌듯해났다. 생글방글 하는 늘그막에 본 아들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상순은 흐뭇해 세월의 풍파에 벌거스름하고 거멓게 그은 얼굴에 벙긋이 웃음을 지었다. 정오가 지난 하늘에는 따가운 태양이 불비를 퍼붓고 있었다. 곡식 잎사귀들이 타들어갈 듯이 녹아내려 맥없이 축 늘어졌다. 사원들은 축 늘어진 옥수수 이파리와 수수 이파리들을 보고 하늘을 쳐다보면서 죽는 소리로 중얼거렸다. “에이유, 저 놈의 해, 어째 불처럼 뜨거운 열기만 내리 뿜소. 가물어서 올해 농사는 또 끝장이로구먼.” “글쎄 말이오. 하늘도 무심하오. 소낙비를 억수로 쏟아 붓지 않으면 불비를 쏟아 부으니 어쩌오? 또 졸라매야겠구먼.” 그때 어디에서인가 스피카에서 “동방홍”이란 노래 소리가 벌판을 휩쓸면서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동방홍 중국에 모택동이 태어났네 그이는 인민에게 행복을 주네 후얼 헤이요 그이는 인민의 대구성이라네             13. 돌을 들어 자기 발등을 까      어제는 태양이 불비를 퍼부어 가문가 싶었는데 오늘은 소낙비가 연속 사흘이나 퍼부어 태평강 강물이 불어 홍수가 제방 둑을 뚝 끊어 놓고 논밭을 마구 뜯어갔다. 상순은 사원들을 데리고 버드나무를 끊어다 큰물이 제방 둑을 더 뜯어가지 못하게 막는다, 패용천산과 칼산의 돌을 실어다 제방 둑을 구축하느라고 여념이 없었다. 상순은 바위 돌을 굴려 제방 둑을 쌓다가 하늘을 쳐다보았다. 허나 하늘은 구름이 흩어지기는커녕 먹장구름이 점점 더 두텁게 몰려와 어둠침침하게 대지를 뒤덮었다. 대살 같은 소낙비가 쏟아지더니 나중에는 밤알 같은 우박을 마구 쏟아 부었다. 여기저기에서 탁구공 같은 우박들이 떨어져 흙물방울이 사처로 튕겨 올랐다. 소들은 우박에 맞아 아픈 대가리를 흔들어대면서 하늘을 원망하듯이 눈알을 부라렸다. 코 깜장이는 벌써 돌을 꽉 박아 실은 수레를 끌기 싫어 대가리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한 발자국도 나가려고 하지 않았다. 상길은 별 수 없이 소를 멈춰 세우고 수레 밑에 들어가 소낙비와 우박을 피하지 않으면 안 됐다. 흥수의 그림자는 근본 뚝 막기 공지에서 보이지도 않았다. 이 시각 그는 어떻게 하면 “문화대혁명”의 동풍을 빌어 병완과 상순을 쓸어버리고 대대 당 지부 서기자리를 차지하겠는가고 길쭉한 남북골을 쥐여 짜고 있었다. “그래 ‘문화대혁명’ 동풍을 빌어 청년 반란 파들의 힘을 빌려 병완과 상순, 으흠, 김 씨 네 족벌체계를 부셔 버려야지. 이번에는 확실하게 김씨 네를 몰아내고 대대 일인자 자리를 차지해야지.” 그는 외까풀 눈을 내리 깔더니 좁은 이마를 딱딱 치면서 함흥 촌에서 합당한 반란 파들을 물색했다. 한참 후에 그는 무릎을 탁 치면서 일어났다. “옳다, 바로 그 놈이야. 종연과 승연이, 송희야, 그 놈들이야.” 흥수는 사기 올라 어깨춤을 덩실덩실 추더니 흥분이 가라앉지 않아 대대 사무실 안을 왔다 갔다 했다. “그래, 바로 그 놈들이야. 종연 형제나 송희는 권력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반란을 일으킬 놈들이야. 성환은 폐결핵에 걸려 피를 토하다나니 대학시험장에도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농촌에 돌아온 놈이야. 그래, 그 놈 자식은 농촌에서 썩기 아까운 놈이지. 그 놈이 어찌 이 좋은 기회에 반란을 일으키지 않겠는가!” 흥수는 인차 종연과 송희를 불러 반란할 구체 계획을 말해 주었다. 종연은 흥수를 마주 바라보며 말했다. “예, 아주 좋은 일입니다. 반란해야지오. 우리 마을 청년들을 동원해 먼저 상순 서기네 집을 치게 할게. 치보 주임은 구경만 하십시오.” 허나 흥수는 손사래를 저었다. “아니오. 나도 가겠소. 이 관건적인 혁명투쟁마당에 내가 뒤에 물러서서야 되오? 난 정면으로 나서 상순을 붙잡아다가 투쟁하겠소.” 흥수는 그들을 보낸 후 피씩 웃었다. “자고로 권력과 돈, 여색에는 그저 넘어가는 영웅이 없다고 했다더니. 허 참, 권력투쟁을 위해서는 숙질간에도 마구 잡아먹는 세상이지.” 흥수는 철봉이랑 자기 삼촌에게 반란을 일으키지 않아 반란을 망칠 까봐 근심됐다. 하여 만일을 대비해 따로 한족청년들을 비밀리에 동원했다. 그러나 흥수는 오산했다. 그날 저녁에 성환은 흥수랑 반란파들이 반란을 일켜 외노할아버지와 외큰아버지를 붙잡아 투쟁하련다는 중요한 정보를 병완과 상순에게 알리면서 미리 피신하라고 귀띔해 주었던 것이다. 허나 병완과 상순은 피신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 놈들이 어찌 하는가 어디 두고 볼 테다.” 상순은 반란 파들이 오기를 기다렸다. 한편 흥수는 반란 파들을 토성 안 대대 사무실 마당에 불렀다. 그런데 종연과 승연, 인국과 인철이 보일뿐 철봉과 종학, 지어 성환마저 보이지 않았다. “아니, 어떻게 된 판인가?” 흥수는 조카 인철에게 물었다. 그러자 인철은 손사래쳤다. “삼촌, 생각해 봅소. 누가 자기 노 할아버지나 오촌 숙을 붙잡으러 나서겠습둥?” “내 오산했구나.” 흥수가 한창 실망한 나머지 김이 빠진 공처럼 마루에 들어앉을 때었다. 숱한 한족 청년들이 삼삼오오 토성 안에 모여들었다. 그들 속에는 지주 자제들인 장충국, 장미련 오누이에 지학사네 아들 지괴호, 지주 장풍객의 아들 장신하도 끼여 있었다. 장풍객은 장학산의 동생인데 금방 죽은 자기 형의 원수를 갚으려고 아들 장신하를 반란파들을 따라 나서서 상순과 병완을 투쟁하라고 추겼던 것이다. 장신하는 장풍객의 일본 첩에게서 얻은 아들로서 사촌형 충국의 말을 듣고 담대하게 나섰던 것이다. 흥수는 반란 파 수십 명을 무어가지고 손을 홱 저었다. “출발!” 반란파들은 구질구질 내리는 비도 아랑곳 하지 않고 기세등등해 곧추 조개덕으로 내려갔다. 먼저 병완의 집을 들이쳤다가 풀을 건드려 뱀을 놀랠 까봐 그만 두었다. 황차 늙은 병완은 이미 대대에서 물러나 앉았는데 반란해 보았자 먹을알이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대대 당지부 서기 상순부터 타도하는 것이 관건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비가 내려 반란파들이 동요할까 봐 계속 선동했다. “오늘 우리는 김서기를 확실하게 반란해 우리 대대 사무실에서 몰아내야 하오. 그러잖으면 우리 함흥촌은 대대로 그 김 씨들 세상이 되고 마오.” 반란 파들은 “옳소.”하고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 대답소리에는 한족 말과 조선말이 섞여 들렸다. 한편 명옥은 성환에게서 반란파들이 들이칠 것이라는 기별을 듣고 상순을 보고 피신하라고 했다. 허나 상순은 애들을 피하게 해놓고 자기는 피할 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문 뒤에 방치를 한 자루 갖춰 놓고 비 내리는 밤 어둠이 두텁게 포위한 바깥을 내다보면서 반란 파들이 오기를 기다렸다. 이때 저쪽에서 몇 가닥의 전지불이 소낙비가 대살처럼 쏟아지는 밤하늘을 어지럽게 헤가르면서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옳지, 정말 오는구나.” 상순은 한 손에 방치를 잡고 다른 손에 전지를 잡았다. 이때 숱한 전지불이 일시에 상순이네 집 안을 비추더니 구호소리가 비가 구질구질 내리는 어두운 동네에 울려 퍼졌다. “김상순을 타도하자!” “김서기를 타도하자!” “상순 놈 새끼는 대대 당 지부 서기를 내놓고 물러가라!” 그러자 상순은 창문을 열어 재끼고 전지불로 억수로 쏟아지는 소낙비 속에 반란 파들의 어두운 그림자들을 하나하나 비춰보았다. 그는 전지불로 흥수의 낯을 찾아내자 목청을 가다듬어 고함쳤다. “흥수!  잘 하는구나. 지주 새끼들을 데리고 와서 공산당 서기를 반란할 텐가! 넌 공산당원이냐? 지주, 부농, 반동파들의 이익을 대표한 국민당원이냐?” “반란이다! 반란! " "어서 서기 자리를 내놓고 함흥대대를 떠나라! 그러지 않으면 네 놈의 대갈통을 까부시고 집에 불을 질러버려!” 그 소리에 반란 파들은 당장 집으로 들이덮쳐 올 잡도리를 했다. 허나 상순은 아주 침착하게 전지불로 이번엔 어두운 그림자 속에서 주봉을 비추더니 고함쳤다. “주봉아, 넌 자기를 젖을 먹여 살린 양 엄마를 붙잡아갈 테냐? 잡아 가겠으면 어서 집에 들어와서 잡아 봐라!” 어둠 속에서 주봉의 죽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가 들릴락 말락 했다. “내 어디 양 엄마를 붙잡잡니까?” “그럼 흥수를 따라 와 뭘 하니?” “구경하러 왔습니다. 어느 새끼 우리 양아버지와 양엄마를 건드려 봐라. 가만 놔두지 않겠다.” 그 소리에 반란 파들 어두운 그림자들 속에서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흥수는 반란 파들이 동요하기 시작하자 고함쳤다. “반란파 동지들, 겁내지 말라. 나를 따라 쳐들어가 허영주 현장과 이계삼 서기 보황파 두목을 붙잡자!” 상순은 전지 불에 방치를 쳐들어 보이면서 맞받아 고함쳤다. “어느 놈이 감이 우리 집에 한 발자국만 들여놓았다간 이 방치가 가만 있지 않을 거다! 난 적수공권으로 일본 놈들과 장개석 토비 놈들도 때려 눕혔다. 미국 놈들도 내 무쇠주먹에 즉살했어. 네깐 놈들이 어쩔 테냐? 어디 덤벼봐라!” 총알이 빗발치는 숱한 전쟁마당에서 숱한 놈들을 족치면서 살아남은 특전사 출신 상순의 무예솜씨를 알만큼 아는 황종연 형제와 반란 파들은 서로 눈치를 보면서 감히 덤벼들지 못했다. 그때라고 상순은 무서운 무기를 썼다. “너희들은 들어라! 이 상순이 무슨 죄 있느냐? 난 손바닥만 한 땅도 없이 조선 고향을 떠난 너희 부모들을 이 마을에 받아 주었다. 우리 할아버지와 함께 당의 영도아래 저 장학산과 지학사 같은 지주를 청산해 너네 부모들한테 밭을 나눠주고 배불리 먹고 살게 했다. 우리 할아버지와 나는 너희들의 부모들을 이끌고 토비를 숙청해 마을을 보위했고 너희들이 공산당의 따뜻한 품속에서 행복한 나날을 보내게 했다. 우리 조손 3대는 제일 일찍 이 마을에 들어와 황무지를 개간한 밭을 몽땅 내놓고 너희 부모들을 이끌어 멍지뫼산 앞 모래밭을 개간해 논을 풀었고 칼산과 패용천산 사이 골짜기에 과수원을 차렸다. 그래서 너희들은 배불리 먹고 살게 됐다. 이것도 죄냐? 너희들이 대대권력찬탈에 눈이 벌개 미쳐 날뛰는 흥수의 꼬드김에 들어 이렇게 반란하면 누가 좋아하겠느냐? 너희들이 그래 저 장충국이나 지괴호 같은 지주 새끼들이 좋아하는 노릇을 하겠느냐?” 반란파들 속에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뒤이어 반란 파 무리 속에서 몽둥이를 버리고 어둠속에서 하나, 둘 떠나가는 것이 보였다. 황급해난 흥수는 돼지 멱따는 소리를 쳤다. “개 소릴 작작 치고 오라나 받아라!” 흥수는 미리 준비한 바를 상순에게 훌 뿌렸다. 허나 날랜 상순은 날려 오는 바줄을 피하면서 방치에 걸아 감아쥐어 홱 당겼다. 흥수가 어찌 힘으로 상순을 당할 수 있었겠는가! 흥수는 앞으로 무릎을 딱 쪼면서 푹 꼬꾸라졌다. “뭣들 하느냐? 보황파 두목을 붙잡아라!” 그제야 충국과 장신하, 지괴호가 문께로 다가들었다. 딱! 딱! “아야!” “마야!” 비명소리와 함께 쓰러진 것은 상순이가 아니라 충국이다. 상순은 창문 밖으로 뛰어 나가면서 방치로 날아드는 몽둥이를 막으면서 연신 발길과 방치를 날렸다. 충국과 흥수가 연이어 꺼꾸러졌다. 지괴호는 맹호와도 같이 펄펄 날뛰는 상순을 보자 질겁해 뒤로 비실비실 물러서다가 도망쳤다. 상순은 그래도 덮쳐들려는 반란 파들을 보고 흥수의 목을 짓밟고 서서 땅방울 같이 고함쳤다. “물러서지 못할까! 어째 흥수 꼴이 되고 싶은가!” 그때 갑자기 뒤에서 “앗!” “아이쿠!” 하는 비명소리가 들렸다. 상순이 전지 불을 비춰 보니 어둠 속에서 매부 최학철과 사위 경만, 조카들인 철봉, 종학, 철국, 성환, 그리고 양아들 주봉까지 반란 파들을 뒤에서 족치고 있었다. “뛰어라!” 반란파 무리 속에서 누군가 소리치자 반란 파들은 소낙비 속에서 질척질척한 진창을 밟으면서 어지럽게 도망쳤다. 상순은 한발에 한 놈씩 흥수와 충국을 걷어차 놓았다. “흥수야, 서기 자리가 그렇게도 욕심나더냐?” 상순은 흥수의 좁은 낯에 침을 택 뱉었다. 뒤이어 그는 충국의 배를 걷어 차놓으면서 을러멨다. “너 같은 지주 놈 새끼 감히 대대 서기를 반란해도 되는 세월인가 하느냐? 망상이다. 망상!” 상순은 방치를 내동댕이치면서 호통 쳤다. “충국아, 이 놈, 아직도 반동사상을 개조하지 않았구나. 어째 하늘땅이 뒤바뀐 줄 아느냐? 어림도 없다.” 흥수는 목을 밟혀 숨이 막혀 진창에서 허우적거리며 이를 뻑뻑 갈았다. 반란은커녕 찍소리 한번 제대로 치지 못하고 개꼴망신 당한 흥수는 이튿날부터 대대 사무실에 얼씬거리지도 못했다. 그는 집에서 팅팅 부은 낯가죽을 매만지며 이를 뿌득뿌득 갈았다. 그는 진종일 집구석에 박혀 있으면서 어떻게 상순을 몰아낼 것인가 궁리하며 속을 끙끙 앓았다. 그는 상순의 과거를 훑으면서 어디를 비수로 푹 찌르면 단통 피를 왈칵 쏟으며 쓰러지겠는가고 흠집을 찾기 시작했다. 온 종일 낑낑거리던 그는 끝내 뭔가 찾아낸듯이 일어나 앉더니 머리를 싸맨 수건을 잡아 홱 벗겨 내던졌다. “옳지. 이번엔 네 놈이 어찌 하겠느냐? 어디 살아남는가 보자!” 허나 그는 신으려고 잡았던 신짝을 놓으면서 다시 생각해보았다. (나도 한국에 나갔을 때 상순이네 친척집에 숨어 목숨을 건지지 않았는가? 괜히 잘 못 건드렸다가 나도 한국특무라고 몰리지 않을까?) 한참 후 흥수는 다시 신을 신고 바깥으로 나갔다. “어디로 가오?” 토성 밑으로 나가다가 흥수는 토성 안에서 나오는 처형 지새금의 길쭉한 얼굴을 만났다. “상순을 놔두는가 보오. 그 놈은 남조선 특무요.” 흥수의 살기등등한 말을 듣자 지새금은 팔소매를 붙잡고 말리었다. “생원이, 우리 시동생이 뭘 잘 못했다고 이러오? 양? 자넬 입당시켰고 선전위원까지 시켰으면 됐지. 뭐가 모자라서 항상 그러오? 제발 그만하오.” “픽! 아주머니, 삐치지 말락꼬.” 흥수는 외까풀 눈을 부라렸다. 지새금은 팔소매를 활 뿌리치는 흥수를 따라가면서 말렸다. “제발 그만두오. 우리 시동생 없이 내 누굴 믿고 살겠소?” “근심도 하지 마오. 그 새끼 없으면 이 사촌생원이 있잖아.” 지새금은 말려서 듣지 않자 위협조로 한 마디 내뱉었다. “이제 돌을 들어 제 발등을 까지 않는가 봐라!” 허나 흥수는 어깨가 으쓱해 토성 안으로 쥐새끼처럼 쪼르르 달려 들어갔다. 그는 종연이랑 반란 파 무리를 데리고 두 번째로 반란을 꾀하였다. 그는 상순을 힘으로 체포하려 해선 안 된다는 것을 심심히 느꼈다. 하여 그는 우선 상순이가 확실히 나쁜 놈이라는 여론을 조성한 후 서서히 일을 도모하기로 작심했다. 그리하여 그는 먼저 너무 투쟁을 맞아 사상고민을 하다못해 거의 죽어가는 덕성 영감을 대대 사무실로 끌어다가 얼리고 닥쳤다. 흥수는 사무 상에 틀스레 앉아 허수아비처럼 서있는 덕성의 아래 위를 훑어보더니 단도직입으로 위협했다. “김 영감, 죽고 싶소? 살고 싶소?” 덕성은 어정쩡해 흥수를 바라볼뿐 입에 빗장을 지르고 있었다. “영감은 한국 특무의 삼촌이란 말이야. 한국 특무로 몰리어 감옥에 가서 노동개조를 하다가 죽겠어? 아니면 내 말을 고분고분 듣고 한국 특무모자도 벗어버리고 함흥 대대에서 편안히 살겠어?” 덕성은 숙였던 머리를 천천히 들면서 흥수를 쳐다보았다. “어쩌자는 기여? 이 치보?” 흥수는 외까풀 눈을 가슴츠레 뜨고 흥수를 깔보면서 음흉한 속심을 서서히 드러냈다. “영감, 살겠으면 내 하라는 대로 하면 돼. 듣는 풍문에 이전에 고향 명천에 있을 때 병완 영감은 일본 경찰국을 짓는 공지의 총 도감이라면서? 일본 특무 아니고 뭐요? 병완 영감이 일본 특무면 상순은 일본 특무의 손자라 당 지부 서기는커녕 감옥에 가야 할 게 아닌가?” 덕성 영감은 구부정한 허리를 겨우 펴면서 흥수를 흘낏 쳐다볼 뿐 아무 말도 없이 목석처럼 덤덤히 서있었다. 흥수는 자기 말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알고 계속 늘여놓았다. “영감이 내 시키는 대로 하기만 하면 내 영감의 특무 모자를 벗겨 주겠네. 지금 ‘문화대혁명’ 바람이 세차게 불어오고 있어. 상순은 더는 서기를 할 수 없어. 대대 치보인 나는 영감을 살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단 말이야. 알만 해? 명지하게 선택하란 말이야.” 덕성은 주름살이 조글조글한 얼굴을 들더니 흥수를 흘겨보면서 중얼거리었다. “어찌 병완 영감을 물어 먹으락꼬 그래? 그 영감은 총 도감이었지만 경찰국을 무너지게 지었어. 건데 일본 특무라니 무슨 말인고?” “영감!” 흥수는 생강처럼 바짝 마른 손으로 사무 상을 꽝 내리치더니 벌떡 일어났다. 그는 외까풀 눈을 부릅뜨고 고래고래 호통 쳤다. “어째 죽고 싶은가?!” 덕성은 파뿌리처럼 흰 머리를 숙이었다. “영감, 똑똑히 노오. 병완 영감과 상순을 보호해 먹을알이 있어?” 흥수가 구슬렸지만 덕성은 우물거렸다. “그래도 어찌 한 고향에서 온 짜개바지 친구를 물어 먹겠어?” “김 영감, 병완과 상순이 한 고향 친구라고 영감에게 사정을 두던가?” 흥수는 덕성의 가까이에 다가와 귀에 대고 낮은 목소리로 존대를 쓰면서도 선뜩선뜩한 말을 횡설수설했다. “병완과 상순이 영감의 조카 용천 대장을 한국 특무라고 체포해 총살한 일을 벌써 잊었어요? 그 놈들이 영감과 한 고향 친구라고 사정을 두던가? 어째 이 기회에 원수를 갚을 생각을 하지 않아요? 잘 생각해 보세요.” 덕성은 머리를 점점 숙이더니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대대 사무실 안에서 흥수는 한참이나 덕성 영감을 얼리고 닥쳤다. 그날 저녁에 흥수는 돌멩이를 쥐어 토성 안 늙은 비술나무에 매단 쇠 종을 댕, 댕, 댕 두드렸다. “사원대회를 합니다. 여섯시 전에 대대 토성 안에 모이시오!” 해 지기 전에 사원들은 토성 울안에 모이었다. 상순은 할아버지를 부축하여 토성 안에 들어섰다. 그들은 흥수가 또 무슨 회의를 소집하는가를 알아보려고 왔던 것이다. 덕성은 병완과 상순을 보더니 머리를 숙이면서 한쪽으로 피해 앉아 있었다. 흥수는 마루 위에 올라서서 가물에 실 돌피 같은 목을 빼들고 득의양양해 고래고래 고함쳤다. “병완과 상순은 들으라. 병완 영감이 일본 특무라고 고발하는 사람이 나타났어.” “일본 특무라니?” “말도 안 되오.” 병완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 병완 영감은 우시장 경찰국을 지을 때 일본 끼무라 국장한테서 총 도감을 임명받은 일이 없었는가?” 병완은 숨김없이 말했다. “있소. 허나 나는 일본 놈들의 경찰국과 다리를 무너지게 만들었소. 그런데 일본 특무라니?” “건 새빨간 거짓말이야!” 이때 덕성이가 숱한 사람들 속을 비집고 앞에 나서더니 병완을 손가락질 하면서 대성질호했다. “저 병완 영감은 일본 경찰국장 끼무라 놈이 우리 민공들 속에 파견한 특무였네.” 그 생 똥 같은 소리에 여기저기에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병완 영감은 일본 놈들에게서 로임을 받아먹으면서 총 도감을 해서 경찰국을 지어 바친 극악무도한 일본 간첩이네! 이건 내가 증명 설 수 있어.” 덕성의 터무니없는 무함에 병완은 머리를 숙이는 덕성을 바라보았다. “덕성이, 우린 남쪽 경주에서 온 자네를 우리 고향에 받아주고 함께 산 친구가 아닌가? 일본 놈들의 피해를 받아 우린 함께 정든 고향을 떠나 여기까지 쪽박을 차고 왔지. 이젠 우리 모두 저세상으로 갈 사람들인데 이제 몇 년을 더 살려고 사람을 무함하는가? 에이, 참. 사람이 원, 흥수가 그렇게 무서운가? 사람이 아무리 겁을 집어먹어도 얼빠진 사람처럼 횡설수설해서야 쓰는가? 사람이 양심이 있어야지. 양심을 잃고서야 후에 어찌 이 세상 사람들을 보고 살겠소?” 덕성은 뒤로 비실비실 물러서면서 머리를 숙였다. 흥수는 병완의 앞으로 다가오면서 고래고래 고함쳤다. “일본 특무 영감, 누구 입을 막으려고? 어림도 없어. 분명 영감은 일본 경찰국 공지 총 도감이야. 일본 놈들의 경찰국도 지어준 거 사실이야. 계속 떼를 쓸 작정인가?” “여러분, 이젠 일본 개다리 병완 영감은 다시는 공산당원이 아니오. 상순은 일본 개다리 손자이기에 서기 자격이 없습니다.” 흥수는 득의양양해 뒷말을 이었다. “상순은 남조선 특무입니다!” “남조선 특무?!” “예.” 흥수는 두 팔을 걷고 역설했다. “나에게는 증거가 있습니다. 항미원조 전쟁 때 우린 대대장인 상순을 따라 군복을 싣고 남으로 나가다가 령 길을 잘못 들어서서 한국 충청남도 서현군 한산면의 한 마을에 피신한 적이 있었습니다. 상순은 그 마을에 친척이 있었습니다. 그때 김치 움에서 버스럭거리며 무슨 쪽지 같은 거 써서 함지에 두고 나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분명 한국 놈들과 내통했습니다. 그러지 않으면 우리가 그 마을에 숨었을 때 어떻게 인차 한국 괴뢰군 놈들이 마을까지 뒤쫓아 와 수색할 수 있었겠습니까? 병수랑 돼지 굴에 숨었다가 들키어 하마터면 죽을 번했습니다.” 흥수는 병수를 찾아내 도움을 받으려고 들었다. “병수, 옳지?” 그러자 병수는 앞으로 나오면서 “그런 일이 있긴 있소.”라고 말하더니 뒤 말을 이었다. “그러나 짝 시비를 해선 안 되오. 그때 상순의 고모부네 일가가 밥을 지어 주지 않았더라면 우린 몽땅 남조선 땅에서 굶어 죽었을 겁니다.” 태수랑 나서서 흥수를 손가락질하면서 욕했다. “사람이 양심이 있어야 하지. 그때는 상순의 친척 덕분에 살아남아 가지고 지금 와선 남조선 특무로 물어먹으면 되오? 당신은 괴뢰군 동생과 전장에서 만나 뭐라고 쑤근거렸소?” 병수는 아주 격분해 했다. “상순이 남조선 특무면 남조선 괴뢰군 동생까지 있는 당신은 남조선 특무가 아니란 말이오?” 그때 종연이가 나서서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옳소. 몽땅 특무들이오.” 그러자 반란 파들이 소리쳤다. “남조선 특무들을 타도하고 새로운 당 지부를 건립하자!” “남조선 특무 상순과 흥수를 몽땅 타도하자!” 흥수는 병완과 상순을 한국 특무로 몰아 타도하자고 벌린 연극인데 이런 반전 결과를 가져 오리라고 생각지도 못했다. 참말로 돌을 들어 자기 발등을 깐 격이 되고 말았다. 흥수는 입을 짝 벌리고 종연이랑 반란 파들을 멍해 바라보았다. 병완과 상순은 흥수를 흘겨보면서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반란 파들은 그날 저녁부터 대대 사무실을 점령하고 병완과 상순 그리고 치보주임인 흥수마저 대대 사무실에 얼씬하지 못하게 했다. 이튿날 이른 아침 춘실이 물동이를 이고 토성 바깥에 있는 우물로 물을 길으러 갔다가 깜짝 놀라 비명을 질렀다. 드레박 줄에 덕성 영감이 목을 맸던 것이다. “어마나! 목을 맸다!” 상순과 덕팔이 달려가 보니 덕성은 혀를 한발이나 빼물고 드레 박 줄에 목을 맨 채 데룽데룽 매달려 있었다. “이 우물의 물을 어떻게 먹겠니?” 다가오는 상순과 흥수를 보고 춘실이 중얼거렸다. 그런데 상순과 덕팔이 드레박 줄을 끌어올린 후 덕성 영감의 목에 맨 드레박 줄을 풀면서 보니 그의 손에는 무슨 종이 쪼박이 쥐어져 있었다. 꽛꽛하게 굳은 손가락을 겨우 풀고 꼬깃꼬깃한 종이 조박을 펼쳐보니 거기에는 연필로 이런 글이 또박또박 쓰여 있었다.   병완이, 난 양심이 없네. 목숨을 걸고 일본 경찰국을 무너뜨린 자넬 물어먹었으니까. 항일투사께 죽을죄를 졌네. 자네와 마을 사람들을 볼 면목이 없네. 양심 없는 고향 친구를 용서하게.   이때 경주가 달려왔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그는 눈을 뻔히 뜬 채 혀를 빼문 덕성을 보는 순간 그 참상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는 할아버지를 껴안고 “할아버지!” 하고 목 놓아 태성통곡을 쳤다. “할아버지, 이 험악한 세상에 나 홀로 남겨놓고 떠나가시면 어떻게 해요? 난 누굴 믿고 살아가래요? 네?” 그 와중에도 흥수는 상순의 손에서 덕성의 쪽지를 빼앗아 가려고 홱 채갔다. 덕팔은 쪽지를 빼앗으면서 고래고래 고함쳤다. “이건 좋은 증거네. 아무렴 덕성이가 그렇게 양심 없는 짓을 할라고? 흥!” 상순은 허리를 쭉 펴고 일어나면서 흥수를 쏘아보았다. 흥수는 겁을 집어먹고 뒤로 비실비실 물러섰다. “사람이, 서기 자리가 욕심나는가? 정 하고 싶으면 해보게나. 우리 마을 사원들을 배불리 먹고 살게 할 수만 있다면 난 대대 서기를 내놓겠네.” 흥수는 아직도 미련을 가지고 좁은 얼굴에 시무룩이 웃음을 지었다. 먹장구름이 뒤덮인 하늘에서는 장마 비가 구질구질 내리었다. 소문을 듣고 병완은 지팡이를 짚고 와서 덕성의 뒤처리를 거들면서 뜨거운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저 멀리 칼산에서 불구렁이가 산허리를 자를 듯이 번쩍 휘감더니 우르릉 꽝 요란한 천둥소리가 하늘땅을 진감했다. 소낙비가 억수로 퍼붓는 천지꽃산 비탈에 또 정치투쟁마당에서 희생된 한 원혼이 묻힌 묘지가 하나 더 생겨났다.  
139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100) 댓글:  조회:1040  추천:1  2018-05-11
                          9. 사라진 여 교원        소낙비가 내린 후 동녘 하늘에는 칠색무지개가 곱게 걸렸다. 반짝 뜬 햇빛은 이슬을 꿰어 끊임없이 황홀한 무지개를 발산했다. 진짜 신화나 동화 속 한 폭의 아름다운 산수화 같았다.       초가집 추녀 끝에는 아직도 빗물이 대롱대롱 매달렸다가도 땅바닥에 고인 빗물에 촐랑촐랑 떨어져 수많은 물방울로 부서져 튕겼다. 흥수네 집 추녀와 구새 사이에 거미가 슬금슬금 기어 나와 한창 다시 먹이를 낚으려고 거미줄을 치고 있었다.       집안에서는 애들이 학교를 다 간 뒤라 춘실이 한창 댕댕거렸다.       “더러운 나그네 새끼, 되놈 가시나 새끼와 지랄해 보니 어떻던? 어쩌지 못하면서 달려들기는 잘 달려든다. 맥이 뻗히면 변소나 칠 게지. 똥이 엉덩이를 찌를 지경이다.” 흥수는 머리를 가로 저으면서 바닥에 내려가 신을 신고 밖으로 훌 나가버렸다. 등 뒤에서는 춘실의 앙칼진 목소리가 귀전을 때렸다. “젊은 각시들과 지랄해보면 시래기처럼 된 게 살아날 거 같아?” (그래, 어쩐지 미련한테 들이대니 그게, 헤헤헤.) 흥수는 히쭉 웃고 나서 대대 사무실로 나갔다. 상순은 대대에 별로 다른 일이 없자 일 밭으로 나갔다. 흥수는 대대 간부답게 사무실을 지킬 줄을 모르고 일 밖에 모르는 상순을 코웃음 치면서 신문을 뒤적였다. 그런데 좀 앉아 있으니 그것이 또 꿈틀거리면서 간질거려 참을 수 없었다. “허 참, 내 약을 먹은 것도 아닌데. 왜 이러지?” 흥수도 이상할 정도였다. (혹시 미련과 그걸 했더니 양물이 치료된 건가?) 흥수는 조개턱을 설레설레 저으면서 미련한테 다시 갈까 하다가 쌍까풀눈을 뚝 부릅뜬 충국이 떠올라 그만두었다. 그런데 그것이 자꾸 불룩하게 치밀어 올라 어쩌는 수 없었다. 흥수는 충국의 부릅뜬 쌍까풀눈을 말상을 흔들어 쫓아 보냈다. 충국의 성난 사자 얼굴이 사라지자 불현듯 오옥선의 보름달 같은 얼굴이 눈앞에 삼삼거렸다. “옳다, 네 놈들이 내 비준도 없이 먼저 임신부터 해. 온 동네에 소문을 자자하게 놓으면서. 충국 놈은 담이 큰 놈이야. 목숨을 내걸고 덤벼든단 말이지. 더러운 개구리 새끼 감히 학의 고기를 탐내? 뭐, 결혼 소개신을 떼 달라고? 임신 했어? 말도 안돼.” 흥수는 옥선을 찾아가 임신했는가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옳다. 도대체 어떤 정황인가?” 그는 사무 상 위의 신문을 활 집어 던지고 벌떡 일어섰다. “정 선생을 데리고 갈까?” 주춤 멈춰 서서 궁리하던 그는 생각을 고쳤다. “아니야. 혼자 가야지. 꽃도 따고 임도 보고 좀 좋아서.” 흥수가 대대 사무실을 나가려고 할 때다. 범이 자기 흉을 하면 온다더니 생각 밖에도 옥선이 토성 안에 들어서지 않겠는가! 흥수는 대번에 반색했다. "에헴, 에헴"      흥수는 헛기침을 하며 인차 치보 주임의  위엄을 차리면서 못 본 체 했다. 아래 칸 위생소에 정 선생도 있고 그 위집에는 새금이 일 밭으로 나가려고 서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위생소로 들어가려니 한 옥선이가 뜻 밖에도 대대 사무실에 들어섰다. “치보 주임, 저 충국을 가만 놔둡니까?” “어, 그러잖아도 널 찾아가려고 했어. 너희들 언감 이 치보주임 비준도 없이 임신부터 했어? 어디 오늘부터 투쟁받을 준비나 해.” 허나 옥선은 대수로워 하지 않았다. “죄 없는 사람한테 또 누명을 씌울 예산입니까?” “그래 치보 주임 비준도 없이 임신한 게 죄가 아니란 말이냐?” 흥수는 외까풀 눈을 부라리면서 을러멨다. “너희들, 무법천지로구나.” 옥선은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내 말을 들어보십시오.” “무슨 말을?” 전라도 남도치 돼서 그런가? 흥수는 성질도 꽤나 팩했다. 허나 그는 야욕을 내리누르며 신문을 들어 보는 척 하며 옥선의 반응을 기다렸다. 한참 기다려도 옥선이 달라붙지 않자 흥수는 신문을 뒤척이다가 사무 상 위에 놓고 창문 밖을 흘금흘금 곁눈질했다. 새금은 간 것 같고 옆 칸에 정 선생만 있는 것 같았다. “전 정말 억울합니다. 근본 임신한 적이 없습니다.” 옥선이 눈물이 글썽해 사무상 옆에까지 다가와 하소연했다. “처녀가 애를 낳은 소문은 감추지 못해. 온 동네 소문이 자자한데도 승인하지 않겠어?” 흥수는 목소리를 낮추었으나 분명 살기가 선뜩 했다. “건 지주 아들 충국이 나와 억지로 결혼하려는 목적으로 없는 소문을 낸 겁니다.” “불을 때지 않은 굴뚝에 연기가 날까?” “정 믿어지지 않으면 옆 칸의 정의사 보고 검사해 보라구 하십시오.” “너희들이 미리 짜고 들었는지 누가 알아? 우파 의사 검사해서야 어찌 믿어?” 옥선은 두 손으로 눈물을 닦으면서 정색해서 말했다. “그럼 치보 주임이 직접 검사해 보십시오.” 뜻밖의 말에 이흥수는 입이 함박만 해졌다. 바로 그런 말이 나오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흥수는 창문 밖을 내다보았다. 토성 안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흥수는 마른 침을 꿀꺽 삼키면서도 속과는 다른 말을 내뱉었다.  “내 의사 아닌데 어떻게 검사해?”  옥선은 누명을 벗으려는 일념 밖에 없었다. “눈이 저울이라고 내 배를 보면 모르겠습니까? 홀쪽한 배에 무슨 애가 있다고 그럽니까?” 흥수는 능글스럽게  옥선에게 다가섰다. "치보 주임의 투철한 계급투쟁 안광은 배속에 애가 있는지 없는지까지 다 꿰뚫어 볼 수 있어.”  그는 옥선의 배를 보려다 말고 창가에 다가가 문발을 치고 문마저 닫아걸었다. “문은 왜 걸어요?” “철면피한 연, 누가 들어오면 부끄럽지 않아?” 그제야 옥선은 한숨을 호 내쉬면서 적삼을 올려 걷고 배를 드러내 놓았다. 흥수는 제법 의사 흉내를 냈다. “아니야, 여기 사무상 위에 누워. 그저 보기만 해서 되겠느냐?” “그래 이 배를 보면 모르겠습니까? 근본 임신이 아닙니다.” “아니야, 누굴 속이려고? 손으로 만져 봐야 안다. 애가 만지우지 않으면 때를 벗을 수도 있어.” 옥선은 하는 수 없이 사무상 우에 누우면서 한숨을 호 내쉬며 다리를 맥없이 죽 폈다. 흥수는 양을 덮치려는 늑대처럼 어슬렁어슬렁 다가와 정욕이 끓어 번지는 눈길로 옥선의 하얀 배를 넋 잃고 바라보더니 마른 침을 꼴깍 삼켰다. “어디 보자. 으흠.” 흥수는 마른 삭정이 같은 메마른 손으로 옥선의 배를 꾹꾹 눌러 보기도 하고 아랫배를 슬슬 매만져보았다. 옥선은 징그러워 상을 찡그리면서도 배를 내맡기는 수밖에 없었다. 허나 흥수의 손이 어지럽게 점점 아래로 내려갈수록 그녀는 참을 수 없어 손으로 아랫배 쪽을 막으며 다리를 가두었다. “애기 정말 없습니다. 치보 주임이 증명 서 줄 수 있습니까?” “으흠, 임신하지 않았다는 거 증명을 서주려면 쉬운가?” “배를 만져보고 애기 없으면 증명을 서면 되는 거죠.” 흥수는 외까풀 눈을 가슴츠레 뜨고 옥선을 내려다보면서 누런 이발을 드러냈다. “허허허. 유일한 방법은 네가 아직도 처녀인가 아닌가 하는 것을 알아야 증명을 설수 있다.” “난 아직도 처녀예요. 하늘땅이 증명을 설 수 있어요.” “누가 아느냐? 우파인 네가 이제 치보 주임 비준도 없이 애를 설었을 경우 넌 나라 산아정책과 법을 어긴 범죄자로 돼 감옥살이를 해야 해.” “그럼 어떻게 처녀인지 아닌지 검사한단 말입니까?” “건 간단하다. 네가 하기에 달렸다.” 순간 흥수는 온 몸에 야욕의 피가 끓어 번지면서 세차게 흐르는 감을 느꼈다. “입을 꽉 다물고 치보주임의 검사를 받아.” 흥수가 거센 숨을 몰아쉬면서 배를 슬슬 만지다가 능구렁이처럼 손을 아래 하신에 쑥 걷어 넣었다. 뜻밖의 침입에 옥선은 와닥닥 일어나면서 적삼을 내리워 아랫배를 가리었다. “뭐 하는 거예요? 내가 어디 세 살 짜리 앤가요?” 흥수는 머리가 뗑 해나 신경질을 썼다. “좋다. 네 년은 죄가 드러날까 봐 겁났구나. 그만두려면 그만둬!” 옥선은 사무상에서 내리면서 욕설을 퍼부었다. “검사할 게면 검사나 온전히 할 게지 손은 왜 아래로 들어갑니까?” “뭐라고? 그래 아래로 들어가 보지 않고 어떻게 검사해?” 옥선은 머리를 휙 휘저어 치렁치렁 땋아 늘인 쌍태 머리를 뒤로 홱 젖히었다. 그녀는 쌍까풀눈을 딱 부릅뜨고 벌겋게 달아오른 흥수를 쏘아보더니 침을 땅바닥에 탁 뱉었다. “더러운 놈!” 흥수는 닭 쫓던 개 지붕을 쳐다보듯이 멍해 서서 사무실 문고리를 철꺽 벗기고 나가는 옥선의 등 뒤에 대고 두덜거리었다. “어디 두고 보자! 더러운 년놈들! 날마다 투쟁하고 비판하고 똥 짐을 메게 하지 않는가. 두고 봐!” 그러나 옥선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문을 쾅 닫고 나가버렸다. 저녁에 흥수는 옥선과 충국을 투쟁하자고 대대 사무실 마당에 투쟁대회를 열었다. 토성 안 마당에 전등불까지 환히 밝혔다. 사원들이 곤해 하품을 하면서 모여들었다. “오늘은 누구를 투쟁하오?” 사원들은 곤했지만 뒤숭숭해 물었다. “충국과 옥선이 임신했다고 투쟁한다오.” “어쩜 치보주임 비준도 없이 임신부터 하오?” “볼만 하겠소. 국민당 노총각과 우파 노처녀 결혼 전에 애부터 설었으니까.” “허허허.” “호호호.” 사원들이 거의 모여들었다. 하지만 충국만 왔을 뿐 옥선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흥수는 황종연이랑 황승연이랑 시켜서 옥선을 잡아오라고 했다. 그러나 그들은 조개덕으로 달려갔다가 반시간도 안 돼 달려와 긴급정황을 알렸다. “여우파 오옥선이 집에 없습디다.” “뭐라고?” 모두 놀랐다. 충국은 “헤헤.” 웃으면서 흥수를 조롱하듯이 쳐다보더니 침을 퉥 뱉었다. 흥수가 충국을 쏘아보았다. “네놈이 알지? 옥선이 어디에 갔어?” “내 알 턱이 뭐야? 달아나면 어디로 갔겠니? 너희들 조선 고향에 갔겠지 뭐.” "뭐? 조선에 도망쳐? 매국역적! 우리 민족을 다 팔아먹는 개쌍년이구나!' 흥수가 성나 고래고래 고함칠수록 충국은 꽤 고소해 "허허허." 하고 너털웃음을 웃었다. “안 되겠구나. 네 놈이라도 투쟁해야겠다.” 흥수는 시어미 역정에 개 배때기를 차듯이 옥선을 놓치고 대신 충국을 꼬챙이에 꿰 쳐들었다. “말해! 네 놈들이 언제부터 관계를 발생했어?! 몇 번 했어?! 언제 임신했어?!” 흥수는 연발탄을 발사하듯이 고래고래 소리쳤다. 장충국은 “허허허." 하고 웃으면서 고함쳤다. "다 내 잘못했소. 난 오옥선과 근본 성관계를 발생한 적이 없었소.” “뭐라고? 그런데 어째 온 마을로 다니면서 그런 소문부터 퍼뜨렸는가?” 장충국은 노실하게 말했다. “오옥선과 결혼하자고 그랬소. 임신했다고 소문내면 나와 결혼 하겠는가 해서 그랬소.” 여기저기에서 웅성거렸다. “괜히 옥선 선생만 당하지 않았소?” “글쎄 말이오.” 흥수는 입을 딱 벌렸다. “나쁜 놈!” 흥수는 충국의 따귀를 찰싹 갈겼다. 상순은 앞에 나가 충국을 쏘아보면서 욕했다. “결혼하겠으면 정당하게 결혼해야지. 오선생을 무함해 못 살게 굴건 뭐야?!” 그날 회의는 흐지부지하게 끝났다. 그 후 옥선은 개학이 됐는데도 학교에도 집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충국의 말대로 옥선은 조선 고향으로 가버렸을까? 그녀가 어디로 갔는지는 누구도 알 수 없었다. (설마 의지 가지 없는 늙은 부모를 버리고 조선 고향으로 달아났을까?) 상순과 병완은 모두 도리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10. 청춘의 고백      신록이 짙어가는 7월 중순에 어머니가 농학원까지 허둥지둥 찾아가 순자를 찾았다. “엄마, 왜 일하지 않고 왔소?” 순자는 적이 놀라 엄마의 두 손을 잡고 물었다. 숙사의 다른 여동창생들도 놀란 표정을 짓고 순자 어머니에게 얼굴을 돌렸다. 명옥은 순자를 데리고 숙사에서 나가 세면실 쪽으로 가서 말했다. “홍자가 글쎄 맹장이 터져 하마터면 죽을 번했다.” “양? 그래 홍자는 어디 있소?” 순자는 단통 눈물을 흘리면서 물었다. “진수해병원에 있다. 문화대혁명인지 뭔지 양패 의사들이 패싸움을 하다나니 수술을 늦게 해 일을 치고 말았다.” “예? 빨리 가봅시다.” 순자는 숙사에 들어가지도 않고 어머니를 따라 진수해 병원으로 달려갔다. 명옥은 버스에 앉아 진수해로 가는 길에 순자의 손을 잡고 “그새 우린 하나 밖에 없는 아들과 막내딸도 잃을 번했다.”라고 했다. “예? 무슨 일이 있었습둥?” 순자는 놀라 눈이 뒤집혀질 지경이었다. 명옥은 며칠 전에 있은 일을 말했다. 칼산과 천지꽃산 쪽에 먹장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덕돌은 토끼풀을 캐다가 덮쳐오는 먹장구름을 보고 성욱과 동림에게 소리쳤다. “야, 집으로 가자! 소낙비 내리겠다.” “응, 가자!” 그들은 토끼풀을 담은 바구니를 들고 마을 쪽으로 내리달렸다. 그들이 태평강을 건너 마을에 들어서기 바쁘게 천지꽃산 쪽에서 번개가 번쩍했다. 불 구렁이 혀를 날름거려 산중턱을 내리 핥더니 우르릉 꽝꽝 우레 소리가 천지를 진동했다. 그들이 집에 들어가자마자 소낙비가 대야로 퍼붓는 듯이 억수로 쏟아졌다. 추녀 끝에서 실폭포들이 쏟아져 내리었다. 덕돌이 토끼 굴 쇠살창 안에 금방 캐온 능쟁이랑 쑤셔 넣어 토기를 먹였다. 토끼는 물기를 머금은 생신한 능쟁이를 오물오물 맛있게 먹었다. 구들에 앉아 담배를 피우던 상순은 창 밖을 내다보다가 덕돌을 돌아보면서 “비가 멎으면 소를 풀어 오너라. 코 깜장이 비를 폭 맞았겠다.”라고 했다. “예.” 이윽고 억수로 쏟아지던 비가 언제 왔느냐 시피 뚝 멎었다. 덕돌이 혼자 소를 풀러 가려고 할 때다. 성숙이 따라 나섰다. “나도 함께 가자!” “누나도 가겠니?” “응.” “혼자라도 되는데 무슨 오겠니?” “가서 버섯을 따오겠다. 비 온 뒤에는 버드나무 밑에 새하얀 버섯이 뾰족뾰족 돋아나.” “그럼 같이 가자.” 그리하여 성숙은 낫을 들고 덕돌과 함께 소를 풀러 태평강 가로 갔다. 덕돌은 소를 맨 긴 바를 풀어 소를 끌고 집으로 오려고 했다. 허나 소는 한 곳에 매여 있으면서 풀을 제대로 먹지 못했던지 대가리를 흔들면서 좀처럼 떠나오려고 하지 않고 비에 흠뻑 젖은 파란 풀을 자꾸 뜯어먹었다. 이때 갑자기 논물을 막아버리던 집안 집 이상형님 만석이 이쪽에 소리쳤다. “덕돌아, 큰물이 터졌다. 빨리 태평강을 건너오라!” 덕돌이 위쪽을 바라보니 싯누런 흙물이 보 둑을 마구 넘어 덮쳐 오고 있었다. “이라! 이라!” 덕돌이 아무리 안간힘을 다해 앞에서 긴 고삐를 쥐어 당겨도 깜장이는 대가리를 흔들면서 떠나려고 하지 않고 자꾸 풀만 뜯어 먹었다. 정말 코등이 새까만 암소는 말을 잘 듣지 않는다고 명옥이 말하더니 틀린 말이 아니었다. 황급해난 덕돌은 고삐를 어깨에 둘러메고 앞에서 끌었다. 그제야 깜장이는 마지못해 한 발자국씩 움직이면서도 계속 풀을 뜯어먹었다. 집채와도 같은 흙물이 사품 치며 각일각 덕돌의 앞으로 덮쳐왔다. “빨리 소를 던지고 태평강을 건너오라!” 만석은 논물을 보다가 덕돌을 보고 고함쳤다. 허나 덕돌은 소를 버릴 수 없었다. 빚을 가득 걸머져서 온 집 식구들의 명줄이나 다름없는 소를 큰물에 띠워 보내는 날에는 아버지한테 맞아 죽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라! 이라!” 이때 난데없이 버섯을 따러 갔던 성숙이 뛰어와 낫등으로 소잔등을 탁탁 쳤다. 깜짝 놀란 깜장이는 그제야 풀을 먹지 않고 부랴부랴 태평강을 건넜다. 그들이 소를 몰고 강물을 건너 강둑에 올라자마자 저게 뭔가! 그들의 발밑을 툭 치면서 누런 흙물이 들이덮쳤다. 아름드리나무랑 물에 떠 내려와 강둑을 마구 치며 흘러지나가면서 그들의 발밑이 마구 울릴 지경이었다. “빨리 높은 둑 위로 올라가자!” “응!” 그들 오누이 제방 뚝 위로 올라갈 때다. 마을 저쪽에서 상순과 명옥이 아들딸을 큰물에 잃어버린 것 같아 소리치면서 이쪽으로 달려 나왔다. “덕돌아!” “성숙아!” 그들은 제방 뚝 위에서 소를 몰고 마을 쪽으로 다가가는 오누이를 보고서야 달음박질을 그만두고 걸어왔다. 상순은 다가와 덕돌과 성숙을 와락 끌어안았다. “덕돌아!” "성숙아!" 명옥도 덕돌의 머리를 매만졌다. “어떻게 얻어 본 아들인데 큰물에 잃을 번했구나.” 아버지와 어머니가 덕돌만 끌어안고 야단치자 성숙은 꽤나 섭섭했다. “어이구, 아들만 아들이라고 하면서. 딸은 자식이 아닙둥? 원, 내 달려와 낫등으로 소 궁둥이를 쳤으니 말이지. 깜장쇠 강물이나 건넜겠구먼? 쳇. 내 오지 않았더라면 덕돌이 살았겠습둥?” 그제야 명옥은 성숙이 머리도 만지면서 칭찬했다. “그래, 네가 아니었더라면 금이야 옥이야 하는 덕돌을 잃어버릴 번했다. 네가 정말 덕돌을 따라 나오기를 잘했다.” 상순은 깜장이를 끌고 가면서 “주의를 주었다. "덕돌아, 이후부터는 소낙비가 쏟아진 후에는 소를 풀러 가지 않아도 된다. 소낙비가 온 뒤에는 큰물이 질 수 있다는 걸 생각하지 못했구나.”        그들은 다시 살아난 기쁨에 겨워 웃고 떠들면서 깜장이를 몰고 집으로 돌아왔다… “천만 다행이구먼요.” 엄마 하는 이야기를 듣고 순자는 한숨을 후 내쉬었다. 그들이 진수해 공사 병원에 이르러 병실에 들어갔을 때다. 침대에 누워 있는 홍자의 얼굴은 창백하다 못해 백지장 같았다. “홍자야, 이게 웬 일이냐?” “언니!” 순자는 홍자를 안고 울었다. 홍자도 울면서 일어나려고 했다. 그때 옆에 있던 간호사가 말렸다. “누워 있소. 옆구리에서 대변이 나오겠소.” “옆구리에서 대변이 나오다니.” 간호사가 다급히 말했다. “저걸 보오. 꾸르륵 소리 나는 거 보니 또 대변이 나온 모양이오.” 알고 보니 홍자는 맹장이 터져 밸을 한 뼘이나 떼 내고 옆구리에 구멍을 내고 대변을 보게 만들어놓았다. 하루에도 몇 번이고 밥을 먹으면서도 옆구리로 대변을 보았다. 항문으로 대변을 볼 때는 대변이 나가는 기별이 있었지만 옆구리에 낸 구멍은 시도 때도 기별도 없이 아무 때건 불시에 밀밀 괴여 나왔다. 순자는 엄마를 도와 옆구리에 붙인 붕대를 떼 내고 구멍으로 나온 대변을 받아 닦아낸 후 약으로 소독하고서야 붕대를 대고 반창고로 붙여 놓았다. “엄마, 집으로 돌아가오. 이젠 내 홍자를 간호하겠소.” 명옥은 순자를 마주보면서 근심했다. “넌 대학공부를 하지 않고 이래 되겠니?”        그러나 순자는 “여동생을 내가 돌보겠습니다. 엄마는 집에 돌아가 일을 하시오.”라고 하더니 뒤 말을 이었다.       “농학원에선 공부도 하지 않습니다. ‘문화대혁명’을 합네 하고 무슨 빠얼치('8.27’)요, ‘항대’요, "홍색"이요 하면서 패싸움만 합니다.” “그럼 수고해라. 그러지 않아도 아버진 생산대 일만 하다나니 돼지랑 닭이랑 제대로 먹이는지 모르겠다.” 명옥은 순자에게 홍자를 맡겨놓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때부터 순자는 반년 동안이나 날마다 홍자 옆에서 대소변을 받아냈다. 붕대도 돈이 든다고 버리지 않고 대변을 털어버리고 비누 물에 손으로 씻어 말린 후 병원의 소독실에 가서 고압가마를 빌어다가 손수 소독해 재차 쓰곤 했다. 순자는 매번 홍자의 옆구리에서 대변을 닦아내고 헤벌린 옆구리에 낸 벌건 구멍을 볼 때마다 마음이 아파 눈물이 샘솟곤 했다. 순자는 정규상과 YB병원에서 내과 의사로 일하는 고모사촌 언니 해옥의 소개로 YB병원에 가서 재차 수술을 받게 됐다. “근심하지 말라. 내 외과에서 제일 유명한 이성일 의사를 소개해줄 터이니 꼭 저 홍자를 항문으로 대변을 보게 수술해줄 거야.” “그럼 얼마나 좋겠소.” 순자는 고모사촌언니가 고마웠다. “언니, 정말 고맙소. 이전에 신자가 앓을 때에도 언니가 담보를 서고 치료했기에 신자를 살려냈소.” 순자의 말에 해옥은 식지를 입가에 대면서 “쉿-” 하면서 병원 복도 주위를 둘러보았다.       “얘야, 그런 말을 하지 말라. 병원에서 신자 치료비도 물지 못한 거 알면 홍자를 수술해 주자 하겠느냐? 이번에도 내 담보를 섰다. 치료비를 후에 꼭 문다고 말이다. 외삼촌네 물지 못하면 내가 물겠다고 했다.” 순자와 홍자는 그저 해옥 언니 손을 잡고 감동의 뜨거운 눈물만 주르르 흘렸다. 수술을 받기 전에 마음이 더운 해옥은 자기 외사촌여동생 순자와 홍자를 자기 집에 데리고 가서 맛있는 음식을 대접했다. 해옥은 영월구에 이사해간 후 공부를 잘해 연변위생학교를 졸업한 후 YB병원에 배치돼 내과의사로 됐던 것이다. 그는 YB대학 졸업생 차대균과 결혼해 문일과 영일 두 아들에 딸 영애를 낳아 기르면서 신화서점 옆에 자리를 잡고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그런데 한창 식사를 할 때 그만 홍자가 실수했다.       꾸르륵 소리가 나더니 또 옆구리로 대변이 흘러 나왔다. 순자는 황급히 숟가락을 놓고 홍자를 데리고 한쪽으로 가서 대변을 닦아내고 옆구리 구멍에 붕대를 바꿔 채워 주었다. 홍자와 순자는 아저씨를 보기 미안해 머리를 숙이었다. “어쩌겠니? 이제 이성일 의사라는 유명한 외과 의사한테 보이고 수술하면 항문으로 대변을 볼 수 있을 거야.” 해옥은 점심 식사가 끝나기 바쁘게 홍자를 데리고 이성일 의사를 찾아가 보였다. 그때 외과의 이성일 의사는 홍자의 옆구리 구멍을 보고 대장을 항문에 이어놓을 수 있다고 했다. 그리하여 홍자는 다시 수술대에 올랐다.  고명한 이성일 의사의 수술은 아주 성공적이었다. 홍자는 마음이 뜨거운 해옥 언니의 정성과 리성일 의사의 고명한 수술재간 덕분에 다시 항문으로 대변을 보게 됐다. 옆구리의 구멍도 한 달이 지나자 봉합이 돼갔다. 그때 여동생 홍자를 살려낸 것으로 해 해옥과 순자는 얼마나 기뻤는지 몰랐다. 순자가 홍자를 간호할 때 남동창생들은 순자의 여동생 홍자를 문안하러 오는 척 하면서 순자를 만나보자고 YB병원에 찾아갔다. 순자와 홍자가 진수해공사 병원에 있을 때부터 리동수는 여러 번 자전거를 타고 병원에 찾아갔다. 이전에 홍자가 옆구리로 대변을 볼 때 있은 일이다. 홍자는 옆구리로 똥이 밀밀 나와 일어나지도 못하고 다급했다. 허나 그때 동수는 순자에게 자전거 타기를 배워주고 있었다. “언니, 똥이 나왔소!” 홍자는 고함치고나서 중얼거렸다. “남은 바빠 죽겠는데 저네는 희죽거리면서 자전거연습 해?” “오, 알았다. 내 갈게.” 순자는 자전거를 쾅 번져놓은 채 병실로 뛰어 들어갔다. 그녀는 여동생의 옆구리에 나온 대변을 닦아내고 붕대를 갈아대주었다. 동수는 YB병원에 찾아갔다가 순자와 홍자가 고향으로 돌아갔다는 말을 듣고는 얼굴이 가려워 찾아 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순자는 환하게 생긴 인물에 체격이 쭉 빠찐데다가 배구까지 잘 쳤기에 남학생들 속에서 아주 인기가 있었다. 그와 연애를 거는 남학생들만 해도 적게 쳐서 열대여섯은 됐다. 허나 순자는 조만에 어느 남자와도 가까이하지 않았다. 한 마을에 사는 경산은 성환을 시켜 자꾸 순자에게 연애를 걸었다. 그러나 순자와 경산은 한 마을에서 태어나 소학교로부터 초중, 고중, 대학까지 동창생이다 보니 너무나도 친하고 서로를 잘 알았다. 상순은 순자가 한 마을의 경산과 함께 농학원으로 갔다 왔다 하는 것을 보고 순자를 불러 을러멨다. “경산과 연애하는 날엔 종아리를 분질러 놓겠다. 알았니?” 어리둥절해난 순자는 눈을 치켜 떴다. “아버지, 경산이 너무 좋아 그랩둥?”  입이 무거운 상순은 그저 호통만 쳤다. "안 된다면 안 되는 거지. 무슨 잔말이냐?” 순자는 아버지를 믿었다. 허나 아무리 경산과 그 집 식구들을 두루 여겨보면서 궁리해보아도 아버지가 반대하는 영문을 알 수 없었다. (혹시 삿갓봉 집 할머니 보고? 아니면? 정말 모르겠어. 경산은 얼마나 꼼꼼하다고. 나하고 나란히 앉아 이야기 할 때면 손수건을 바위돌 위에 펴놓고 나보고 손수건 위에 앉으라고 하지 않는가? 그렇게 살뜰히 여자를 관심할 사람이 어데 있어?” 순자는 안개 속처럼 흐리흐리한 오리무중에 빠졌다. 허나 그녀는 아버지 말을 따르기로 했다. 황차 자기가 경산과 연애를 해 성공한다고 해도 아버지가 대답하지 않으면 허사였기 때문이었다. 그 후부터 순자는 경산과 허물없는 친구이자 동창생, 아니, 어떻게 말하면 오누이 같이 친한 사이이었지만 연애까지는 발전하지 못했다. 어떤 때 경산은 순자의 손을 잡고 진정으로 고백했다. “우정이 사랑으로 변할 수 없소? 나는 우리 둘의 우정이 사랑으로 발전할 수 있다고 보오.” 허나 순자는 대답해주지 않았다.       평소에 동수는 농학공부를 하고 나머지 시간이면 도서관에 가서 연애소설을 빌어다 읽으면서 어떻게 하면 순자를 낚아채겠는가  연구하는 판이었다. 그는 연애소설을 보고 멋진 구절을 벗겨가지고 순자에게 자주 연애쪽지를 써서 동창생들의 눈을 피해 슬쩍슬쩍 쥐어주곤 했다. “… 달빛을 빌어 사뿐사뿐 침실로 걸어가는 순자, 그대를 보고 나는 미칠 것만 같소…” “… 하루라도 보지 못하면 삼추나 보지 못한 것 같이 그립소. 나는 그대를 비단보에 싸서 업고 다니면서라도 천하에 둘도 없이 행복하게 해 주려오…” “… 나는 피 끓는 청춘과 정열을 다 바쳐 그대를 사랑하오. 아니, 내 심장과 생명을 다 바쳐 사랑해 …” 그러나 순자는 누구에게도 대답하지 않았다. 순자는 어쩐지 자꾸 첫사랑 허송림과 비하게 됐다. 허송림은 조개덕의 함흥소학교 때부터 고중을 다닐 때까지 한 학급을 다닌 동창생이었다. 훤칠한 체구에 쩍 벌어진 어깨, 남성다운 어글어글한 눈이라던가, 우뚝한 코, 언제나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휘잡는 말을 하는 입. 어디를 보아도 이상적인 남자이다. 허송림은 순자를 마음에 두고 한 학급에 다니는 성환을 내세워 자꾸 사랑을 고백해왔다. 허나 순자는 허송림이 마음에 들어 하면서도 고중시절이라 대답하지 않았다. 허송림은 연길에 가서 대학시험 두 과목을 치고 나서 갑자기 순자를 찾아 말했다. “난 대학시험을 치지 않겠다.” “건 왜?” 순자는 공부를 잘하는 송림의 말에 깜짝 놀랐다. 허나 송림은 대수로워 하지 않았다. “네 봐라. 우리 영숙 누나 의학원을 졸업하고 의사 하지? 형님도 의사지. 그런데 나도 의사를 하겠니? 난 부대에 가서 군관을 해보겠다. 그래야 진짜 사내다울 게 아니야?” “그래도 다시 잘 생각해봐라. 나도 의학원에 가려고 그러는데 너도 함께 가면 좋지 않니?” “아니야. 난 시험을 치지 않겠다.” 허송림은 그렇게 대학 시험을 중도에서 그만두고 부대로 자원해 가게 됐다. 순자는 울먹울먹해 떠나가는 송림을 전송했다. 송림은 역에 나온 숱한 동창생들 속에서 순자를 찾아내 손을 내밀었다. “손이라도 잡아보자.” 순자는 손을 내밀면서 머리를 숙이었다. “잘 가라. 안전에 주의하고.” “그래. 내 군관이 된 후 다시 찾으마.” 순자는 머리를 끄덕였다. 그 후 허송림은 부대에 가서도 농학원에 간 순자에게 끊임없이 연정이 꽉 밴 편지를 날려 보냈다. 부대생활이 간고할수록 보고 싶고 그립다고. 지어 순자의 충고를 듣지 않은 자기 잘못을 뉘우치기도 하고. 그 후 그는 또 부대에서 패장으로 제발됐다고 전해왔고 얼마 안 있어 련장으로 승급했다고 하면서 부대에 시집오라고까지 했다. 허나 순자는 소홀히 대답하지 않았다. 다섯 살 위나 되는 반장 박위동은 공부도 잘하고 사업도 잘하는데다가 크라네까지 아주 잘 불어 농학원의 악대 대장으로 활약했다. 박위동은 쩍 하면 농학원 배구대 대장인 순자를 불러 사업을 토론하는 척 하면서 연애를 걸었다. 그는 안경알을 춰올리면서 순자를 보고 “순자, 내 악대 대장을 그만둘까?”라고 했다. “그만 두겠으면 그만두오. 나하고 무슨 상관이오?” 순자는 씁쓸해 하면서 “더 할 말이 없으면 가겠소.”라고 했다. 그러자 위동은 순자의 손을 와락 잡으면서 빈정거렸다. "가지 마오. 내 악대에서 대장으로 활약하면 숱한 여동창생들이 광목에 가시처럼 매달리면 순자가 질투나지 않겠소?”  “어마나, 박 반장이 악대 대장을 하는데 내가 왜 질투 나겠소? 정말 우습소.” 박위동은 외까풀 눈을 곱게 흘기는 순자를 보고 안 되겠다 싶었다. “그래 순자는 내 마음을 모르겠소?”  순자는 외까풀 눈을 치켜뜨면서 복성스레 생긴 얼굴에 그늘을 지었다. “뭘 말이오?” 박위동은 순자 손을 잡으면서 고백했다. “난 순자를 사랑하오. 동의되오?” 순자는 손을 빼면서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어머나! 이러지 마세요.” 순자는 어쩐지 평소에 지분거리는 위동이 그리 좋지 않았다. 쩍 하면 술을 마시고 여대생 숙사에 와서 이 여자 저 여자 지껄이곤 했다. 어쩐지 정파답지 못해 보였던 것이다. (아무리 능력이 있고 공부를 잘 해 뭘 해? 술주정뱅이 같은게.) 그러나 순자는 겉으로는 그런 내색을 내지 않았다. “난 아직 어려서 대상문제를 고려하지 않소.” 그러나 박위동은 순자를 놓아주지 않고 집에까지 쫓아왔다. 그러나 순자는 만나주지 않고 은숙과 홍자를 보고 두부나 바꿔 두부장국이나 끓여 대접하게 했다. 그 먼 곳에서 이런 시골까지 왔다가 순자의 복숭아얼굴도 보지 못하고 장국만 마시고 말 그가 아니었다. 그래서 은숙을 보고 이젠 농학원으로 돌아가겠으니 함께 돌아가자고 알리라고 했다. 동네 정자네 집에 피해있던 순자는 그제야 돌아와 위동과 함께 농학원으로 떠났다. 40리 멀고 먼 밤길을 걸으면서 위동은 내내 순자에게 사랑을 고백했지만 순자는 기어이 대답하지 않았다. 삼봉동을 넘어 말발굽산이 보일 때는 동녘이 푸름히 트기 시작했다. 박위동은 마지막으로 “정말 내 싫소?” 하고 물었다. 허나 순자의 대답은 변함이 없었다. “난 아직 어려서 대상문제를 고려하지 않소.” 박위동은 어처구니없어 했다. “아니 스물세 살이나 되는데 아직도 어리오? 그 허춘림인지 뭔지 하는 군관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소?” 그 말에 순자는 머리를 숙였다. “지금도 편지가 눈송이 날아내리 듯이 자꾸 날아오는 걸 보면 서로 잊지 못하는 모양이지? 군관이 무슨 좋아서 그러오? 부대를 따라 어느 산골로 갈지도 모르오. 그까짓 련장이 다 뭐요? 우리 대학생은 부대에 가자마자 부 패장급이오. 이후에 내 농업국 국장을 하지 않는가 보오. 나를 따라 연길에 가 행복하게 살지 않겠소?” 순자는 함구무언한 채 이렇게 속으로 대답했다. (사람이 착실해야 되지 어느 고장에서 사는게 중요한가? 사람을 얼려도 유분수지. 난 연길이 아니라 한족들이 욱실거리는 곳이더라도 사람만 좋으면 신랑을 따라 어디든지 갈 테야.) “어디 두고 보기오. 어떤 놈한테 시집가는가?” 둘은 이렇게 영영 갈라졌다. 박위동은 다시는 순자를 찾지 않았다. 확실히 순자는 춘림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부대에 간 후 춘림은 계속 연정이 폭폭 배인 편지를 써 보냈다. 그리하여 박위동과 동수, 송영은 가만히 순자에게 날아온 편지를 뜯어보고 다시 밥풀로 붙여 원 자리에 놓곤 했다. 영상해서 순자는 허춘림이나 동수에게서 온 편지나 쪽지를 몽땅 신문지에 싸서 집으로 가져다 엄마한테 맡겼다. 글을 볼 줄 모르는 엄마한테 맡기면 제일 안전하고 비밀을 지킬 것 같아서였다. “엄마, 이 편지를 누구한테도 보이지 마오.” “응, 그래.” 그때 덕돌이 옆에서 그 말을 들었다. 엄마는 순자만 보는 데서 윗방 종이천정을 뜯고 그 위에 편지꾸러미를 올려놓고 다시 천정 종이를 풀로 붙여 놓았다. 그런데 엄마는 순자가 떠나 간 후 며칠도 되지 않아 홍자를 불렀다. “여기 무슨 편지가 있는가 보자.” “큰 언니한테 들키면 큰 봉변을 당하겠는데. 난 무서워 못 다치겠소.” 홍자가 덴겁해 하자 명옥은 “근심하지 말라.."라고 했다. "우리 쥐도 새도 모르게 가만히 뜯어보고 원래대로 붙여 천정에 올려놓으면 된다.” 그리하여 명옥과 홍자는 쪽걸상을 가져다 놓고 올라서서 천정종이를 가위로 살짝 도려내고 편지끄러미를 내리웠다. “엄마, 난 그래도 겁나오.” “겁나 말라. 들키면 내 막아나설게.” 그리하여 홍자는 겨우 담을 키워 가지고 콩당콩당 뛰는 가슴을 눅잦히면서 순자에게 날아온 두툼한 편지꾸러미를 헤치었다. 숱한 편지와 쪽지 그리고 일기책이 나졌다. 거기에는 허송림과 동수 그 외에도 이름 모를 남자들의 연애편지와 쪽지가 가득했다. 홍자는 명옥의 앞에서 그 편지와 쪽지를 하나하나 몽땅 뜯어 내리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옆에서 덕돌이 신기해 보다가 물었다. “엄마, 어째 큰누나가 아무한테도 보이지 말라 했는데 셋째누나와 함께 보오?” 섬찍해난 명옥은 덕돌의 눈을 두 손으로 꽉 막으면서 말했다. “요걸 어쩌니? 덕돌아, 이 담 큰누나가 오면 절대 엄마와 셋째누나 편지를 뜯어본 말을 하지 말라. 알았지? 말해선 안 돼. 큰누나 아는 날이면 보지 말라는 거 봤다고 야단난다. 알았지?” 덕돌은 머리를 끄덕였다. 그날 명옥과 홍자는 편지와 쪽지 그리고 일기까지 몽땅 읽어본 후 밤늦게야 보꾸러미에 잘 싸서 천정에 올려놓고 다시 천정종이를 원래대로 붙여 놓았다. 그들은 빈틈이 없이 원래대로 된 걸 보고 코를 싸쥐고 윗방에 나와 코를 싸쥐고 순자를 두고 웃고 떠들었다. 허나 며칠 후 큰누나가 오자마자 큰 일 났다. 덕돌은 순자에게 마주 달려 나가면서 첫마디에 고발했다. “큰누나, 큰누나! 저 엄마하고 셋째누나 큰누나 편지를 다 뜯어봤소.” “뭐라고?” 순자는 두 손을 싹싹 비비면서 공포에 떠는 셋째 여동생과 엄마를 번갈아보더니 덕돌을 내려다보았다. “그게 무슨 소리냐?” 덕돌은 깜장 쌍까풀눈을 똑바로 뜨고 큰누나를 쳐다보면서 곧이곧대로 일러바쳤다. “정말이오. 엄마는 나를 보고 큰누나한테 말하지 말라고 했소. 큰누나 아는 날이면 큰일 난다고 했소.” 순자는 윗방에 달려 올라가 천정종이를 와락와락 뜯고 편지꾸러미부터 내리워 보더니 왕왕 대성통곡 쳤다. “홍자, 네 썩어진다. 감히 내 편지를 뜯어봐!” 홍자는 무릎을 꿇고 빌다가 큰언니한테 귀쌈을 찰싹 한대 얻어맞고 울면서 바깥으로 달아났다. 명옥은 더 할 말이 없었다. 그는 두 손을 잡고 서성거리며 맴돌다가 순자를 말렸다. "다 엄마 보자고 해서 그랬다. 홍자를 욕하지 말라." 순자는 편지를 와락와락 쥐어뜯더니 그중에서 동수의 쪽지만 골라 두고 나머지는 몽땅 들고 부엌으로 내려가 태워버렸다. 순자는 어쩐지 서란에서 온 남도치 동수에게 마음이 조금씩 끌려가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송영이나 박위동이나 다른 남동창생들은 술을 퍼먹고 쩍하면 여자 숙사에 와서 주정을 부리고 여자들을 지껄이다가 돌아가곤 했다. 하여 순자는 저런 남자를 만나면 한뉘 평생 마음고생을 하면서 살겠다고 그들에게 반감을 가졌다. 허나 서란 농촌에서 자란 동수는 여자숙사를 한 번도 온 적이 없었고 술을 마시고 주정을 부리는 것을 한 번도 본적이 없었다. 청년답지 않게 백지장처럼 하얀 얼굴이나 숱이 많고 검은 머리나 짙은 눈썹, 그리고 새별처럼 반짝이는 한쌍의 눈, 우뚝 솟은 코 마루… 그때만 해도 순자 앞에서 동수는 술을 그리 마시지 않았다. 그는 농학원 도서관에 붓박혀 연애소설을 보면서 5년 동안이나 고금동서의 명구를 다 써먹으면서 순자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연애쪽지를 쓰고 또 썼던 것이다. 그리하여 순자는 점차 동수의 매력에 빠져 정이 가는 것을 어찌할 수 없었다. 기실 동수는 그때 순자가 인차 대답하지 않기에 인내성이 거의 거의 동강 날 번했고 가만히 용정에 가서 답답한 술을 마시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여자 숙사에는 얼씬거리지도 않았다. 자칫 주정뱅이로 몰리어 대사를 망칠 까봐 겁났던 것이다. 그의 인내성 있고 아량 있는 처사가 순자의 마음을 끌었다. 그때 대학생들이 북경으로 가서 모주석의 접견을 받는 바람이 불었다. 그런데 순자는 차멀미를 심하게 해 왝왝 토하곤 했다. 그때마다 그녀의 옆에는 항상 동수가 있었다. 그들은 인산인해를 이룬 북경 천안문 앞에서 하이야를 타고 씽- 지나가는 모주석의 접견을 받고 의화원에 가서 배도 타고 놀았다. 순자는 남동창생들이 자꾸 치근거리는 것이 싫어 혼자 가만히 집으로 돌아오자고 북경 역에 빠져갔다. 그런데 역에서 동수를 만날 줄이야 누가 알았으랴. “어, 순자, 여기서 만났구먼.” 동수는 우연하게 만난 것처럼 꾸몄지만 순자는 그가 진작 자기 뒤를 미행했다는 짐작이 갔다. 멀미가 심한 순자를 동수는 어린애를 간호하듯이 줄곧 농학원으로 돌아올 때까지 “간호”해주면서 돌아왔다. 그때 그 살뜰히 간호해주던 동수가 고마워 순자는 동수를 믿기 시작했다. 어느 달 밝은 밤에 동수는 조용히 만나자고 했다. 순자는 흔연히 약속한 지점에 나갔다. 동수는 순자와 나란히 앉아 달을 쳐다보더니 사랑을 고백했다. “난 순자를 죽기내기로 사랑하오. 내 그대를 한뉘 행복하게 해주겠소.” 순자는 머리를 숙이더니 동수의 품에 안겼다. “대답해주오.” “나도 동수동무를 사랑하오.” 그러자 동수는 너무나도 기뻐 순자를 꽉 끌어안고 고함쳤다. “하하하, 이 날은 끝내 왔구먼. 숱한 남자들이 따라다녀도 순자는 내것이구먼. 허허허.” 동수는 순자에게 뜨거운 키스벼락을 안겨주었다. 그들은 달빛아래에서 오래도록 꼭 포옹했다. 달도 부끄러운듯이 얇은 구름 속으로 얼굴을 살짝 감추었다.                                               11. 사위 달빛도 밝은 어느 날, 박경만은 상순이네 집 마당에 와서 사위를 둘러보더니 머리를 들어 구리바라 같이 밝은 달을 쳐다보면서 뻐꾸기 우는 소리를 냈다. “뻐꾹, 뻐꾹.” 뻐꾸기 소리가 나자마자 저녁을 먹던 은숙은 숟가락을 놓고 바깥으로 나갔다. 로 경찰의 특유한 민감성으로 해 상순은 은숙의 거동이 이상해 뒷간으로 가는 척 하면서 따라 나갔다. “에헴, 에헴.” 상순이가 보니 달빛아래 바자 저쪽에서 은숙이 머리를 숙이고 서있는데 웬 남자가 서서 어깨에 손을 얹고 있었다. “가기요. 조용한데 가서 말하기요.” “난 아직 나이 어려서 연애를 하지 않겠소.” “허, 정말, 스무 살을 먹고서도 어리다니? 옛날 우리 엄마랑은 열여섯 살에 우리 큰누나를 낳았소.” 사내의 목소리가 퍽 귀에 익었지만 딱히 누군지는 알 수 없었다. “옛날과 지금 어디 같소? 지금 어디 스무 살에 결혼하는 여자들이 있소?” “내 지금 결혼하자는 게 아니요. 먼저 서로 얘기나 하자는 거지.” “결혼할 생각을 하지 않으면서 무슨 연애 소리요? 연애하는 거야 결혼하기 위한 거지.” “하긴 그렇소. 그래 나와 결혼하겠소?” “어마나. 별, 누가 그 집과 결혼한다 했소? 약혼도 하지 못하고 결혼하는 법이 어디 있소?” (저, 저, 못된 놈들이 연애하는구나.) 자기와 명옥도 19세에 결혼했으니까. 애들도 이젠 시집을 갈 나이가 된 것이었다. 상순은 한숨을 후 내쉬더니 집으로 들어갔다. 은숙이 들어오자마자 상순은 따지고 들었다. “이제 금방 만난 건 누구야?” “소변보러 갔는데 누굴 만났다고 그럽니까?” 상순은 세 귀 눈을 부라리면서 을러멨다. “너 날 속이겠어? 내 이제 다 들었다. 말해라! 누구야?” 그제야 은숙은 속일 수 없었다. “박경만입니다. 난 연애를 하지 않겠다는데 계속 연애를 겁니다.” “음.” 상순은 주먹을 쳐들었다가 내리었다. 박경만이란 안도 저수지를 건설하면서 조개덕에 이사 온 안도 박 씨 집 청년이었다. 사람이 역빠르고 힘도 세기로 소문이 있었다. 글쎄 온 마을에서 혼자 자전거를 사 타고 논 드럼으로 마구 달려 다니는가 하면 한손으로 자전거를 머리 위로 추켜올릴 정도로 힘이 셌다. 그의 말에 의하면 그는 중학교 때 현 중학생축구팀의 선수였다고 하는데 확실히 축구를 잘 해 공사대회에서도 소문이 높았다. 둘째인 그는 성격이 부드러운 형 경권과는 달리 꽤나 팩하고 자존심이 강했다. 마을의 단서기인 그는 당 지부 서기인 상순을 부지런히 찾아다니면서 가르침을 받으면서 청년들을 이끌어 당지부의 호소에 따라 발을 벗고 일해 나갔다. 그리하여 상순은 경만을 장차 전도 있는 청년으로 손꼽았다. 상순은 단 지부 일로 문턱이 다슬 지경으로 찾아 다녔는가 했더니 은숙을 넘보고 다닌 줄은 눈치도 채지 못했던 것이다. 상순은 한숨을 후 내쉬었다. (은숙이 마음에 들어 하면 아무 때라도 시집보낼 앤데 줘 보내야지. 그러나 맏딸 순자가 아직 약혼도 하지 않았는데 둘째부터 줄 순 없지 않은가? 참 답답한 일이야.) 몇 달 후 농학원에 다니는 순자가 집으로 놀러 왔다. 큰언니를 너무 따르는 홍자는 인차 둘째 언니가 마을의 경만과 좋아한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그러자 순자는 은숙을 불러 물었다. “야, 너 경만과 무슨 관계냐?” “연애 관계요.” “그래 경만이 마음에 드니?” “양, 한 마을에서 자꾸 얼리는 거 어쩌오?” “그래도 쉽게 대답하지 말라.” “내 어찌 하던 언니 무슨 상관이오?” “야, 정신 있니? 이제 스무 살 밖에 안 되는데 그리 일찍 시집가면 고생이나 했지 뭣이 좋니? 황차 너보다 세 살이나 이상인 언니도 아직 약혼하지 않았는데 너부터 서둘면 어쩌니?” “내 시집가는데 언니와 무슨 상관이오? 누가 언니를 스물 셋이나 되도록 약혼하지 말라 했소?” 은숙은 이전에는 언니 말이라면 무조건 따랐지만 이번만은 물러서지 않고 딱딱 들이 받치면서 고집을 썼다. “너 정말 동네 망신을 시킬 예산이냐?” “누가 먼저 약혼하면 누가 먼저 시집가는 거지 뭐? 형제간에 순서를 정해 놓았소?” 순자는 은숙을 흘겨보면서 한바탕 훈계하려다가 물앉으면서 그만 두었다. 그때 아버지가 들어오자 은숙은 왕왕 울면서 “아버지, 나와 경만의 약혼을 허락해 주시오.”라고 지청구를 들이댔다. 상순은 윗방에 올라가 다리를 틀고 앉았다. 이때 명옥도 일 밭에서 돌아와 정지에 들어섰다. 상순은 윗방에서 “어험.” 하고 마른기침을 떼더니 은숙을 불러 “그래 경만이 마음에 딱 드냐?” 하고 물었다. 은숙은 윗방에 무릎을 꿇고 앉아 대답했다. “예. 남자답습니다.” 상순은 머리를 끄덕이었다. 명옥도 들어와 한마디 했다. “숱한 딸애들을 두고 줄 때 되면 주기요. 큰 아들도 없는데 든든한 사위라도 한 마을에 있으면 좋지 않소?” “음. 알았소.” 상순은 명옥에게서 눈길을 떼더니 은숙을 바라보면서 뒷말을 이었다. “헌데 경만이 팩해서 혹시 너를 마음고생을 시킬 까봐 근심된다.” “일 없습니다. 내가 다짐을 따니 이후에 절대 나에게 손을 대지 않고 밸을 쓰지 않겠다고 합디다.” 상순은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약혼할 때는 다 그런다. 허나 결혼만 하면 약속을 저버리는 게 사내들이다.” “근심하지 마십시오. 내 맞춰 살겠습니다.” 상순은 “너네 정 마음이 맞는다면 언제 경만을 데리고 와서 말을 떼거라.”라고 허락했다. 은숙은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상순은 순자를 돌아보면서 타일렀다. “어쩌겠니? 저 애들이 연애한지 오래니 먼저 약혼을 허락하겠다. 넌 언제 약혼하겠니?” 그러자 순자는 머리를 숙이며 나직이 말했다. “나도 남자는 있습니다. 그런데 아직 약혼까지는 생각해보지 못했습니다.” “여동생이 이젠 약혼하는데 너도 빨리 약혼해라.” 아버지 말씀에 순자는 귀밑을 살짝 붉히면서 머리를 숙이었다. 그날 경만은 형 영권과 5촌 삼촌이랑 4촌 형이랑 함께 술과 떡을 메고 와서 사돈보기를 하러 왔다. 상순이네 비좁은 집에는 윗방과 정지에 숱한 친척들로 꽉 들어앉았다. 경만은 상순과 명옥의 앞에 태산이 무너지듯 넓적 엎드리면서 절을 올렸다. “가시아버지, 가시어머니 은숙을 데려다 잘 살겠습니다.” 상순은 둘째사위의 절을 받으면서 정중히 말했다. “은숙은 아직 나이 어려서 모르는 것이 많소. 데려다 함께 잘 사오.” 경만은 철색얼굴을 들지도 않은 채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었다. “예, 귀여운 딸을 20년이나 길러서 주어 살게 해서 고맙습니다.” 그때 경만이 어찌나 공손했는지 은숙은 저쪽에서 속으로 못내 감탄했다. 뒤이어 경만은 한 마을에 있는 큰 가시어머니 지새금 그리고 가시고모 금옥과 가시고모부 최학철로부터 시작해 상길과 봉선, 채선, 경학 그리고 가시외가편의 근룡과 근삼에게까지 돌아가면서 일일이 절을 다 올리고 나니 땀을 줄줄 흘렸다. 그는 뒤에 선 형한테 가만히 중얼거렸다. “무슨 친척이 이렇게 많은지 모르겠소. 절을 하는 게 허리 불러질 번했소.” 그러자 영권은 옆구리를 툭 치더니 곰보 얼굴이 굳어지면서 “아무 말이나 하지 말라. 장가가는 게 그리 쉬운 줄 알았니?”라고 했다. 가시집에서 술상을 차리자 경만은 무릎을 꿇고 공손히 두 손으로 가시집 어른 들게 술을 따라 올렸다. 상순은 별로 술을 마시지 않았다. 하지만 이날만은 사위가 부어주는 술을 받아 한잔 쭉 냈다. 경만이 어찌나 공손하고 깎듯 한 예절로 대하는지 명옥은 사람이 밸이 있는 사람 같지 않아 보일 정도였다. 경만은 연신 머리를 조아리었다. 경만은 앞집에서 사는 가시고모부 최학철과 진수해의 가시외삼촌 최근룡에게도 일일이 술을 따라 드렸다. 앞집에 사는 금옥 가시고모네는 맏아들 최철국이 아래로 인자와 인숙이, 국범이, 국빈이가 있었는데 철국은 경만과 친구 사이었다. 상순은 철국에게서 경만이가 뽈도 잘 차고 남자답다는 말을 듣고 둘째딸과의 결혼을 허락했던 것이다. 둘째가시외삼촌 최근룡은 태씨네 딸을 데려다 덕돌보다 한 살 지하인 정옥이 아래로 영길, 현길, 호길, 홍길이를 줄줄 나아 기르면서 재미나게 살고 있었다. 다만 항미원조 전쟁에 나가 부상당해 심장병에 기관지도 좋지 않아 불구자퇴역군인의 접대를 받으면서 농사도 짓지 못하고 정부 보조를 받으면서 힘겹게 살고 있었다. 그런데 작은외삼촌 최근삼에게 술을 부을 때는 주춤 했다. 근삼은 은숙과 동갑이었고 경만보다는 한 살 지하였던 것이다. 허나 별 수 있나. 작은 가시외삼촌인데. 경만은 머리를 숙였다가 들면서 술을 따랐다. “가시외삼촌, 술을 받소.” 근삼은 몇해전에 금방 장가를 가서 딸애 순애를 보았던 것이다. 후에 또 원길도 낳고... “양, 행복하게 잘 사오.” “예.” 뒤이어 그는 시집도 가지 않은 처형 순자에게까지 술을 따라 올렸다. “처형이라 불러야 할지, 아주머니라 불러야 할지 모르겠소. 시집도 가지 않았으니 아주머니라고 부르기도 그렇고. 뭐 어떻게 부르면 좋겠소?” 순자는 웃음을 띤 경만의 철색얼굴을 마주 보면서 술잔을 받아 쥐고 한손으로 입을 가리면서 웃었다. “그저 처형이라고 부르오. 아주머니는 무슨 아주머니?” “그럼 좋소. 처형은 언제 약혼 술을 내겠소?” “동생네 결혼한 후에 보기오.” “우리 먼저 결혼해서 안 됐소.” “무슨 말을, 약혼과 결혼이 어디 정해놓은 순서가 있소? 이제 내 졸업하면 술을 낼게.” 경만은 처형과 잔을 마주치면서 통쾌하게 웃었다. “은숙이, 처형과 함께 한잔 마시기오.” 그제야 은숙은 고방에서 나와 언니 순자 옆에 앉아 술잔을 들었다. “언니, 고맙소.” 순자는 진심 어린 눈으로 여동생 부부간을 마주 바라보았다. “동생네 서로 아끼면서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오.” “고맙소. 우린 땅을 뒤지는 농민들이 돼서 아무 것도 모르오.” 은숙은 옆에서 경만의 무릎을 툭 쳤다. “언니하고 무슨 말을, 또 걸고 들겠소?” “괜찮다.” 순자는 은숙을 보며 웃으면서 뒤 말을 이었다. “동생 신랑은 단지부 서기 사업도 하지 않소?” “그래도 대학생 처형보다 사회를 모르고 사오.” 순자는 경만이 어지간히 자존심이 강하지 않음을 느끼면서 동생이 근심돼 한숨을 호 내쉬었다. 순간 그녀는 동창생 동수의 하얀 얼굴과 너부죽한 이마를 가리는 숱 많은 머리카락이 눈앞에 겹쳐 보였다. 이듬해 5.1절에 은숙은 한 마을 여주 박 씨네 둘째아들 경만한테 시집가게 됐다. 생활이 가난한 상순이네는 아내 명옥이 돼지를 친 덕분에 그래도 은숙에게 첫날 한복에 삼일에 입을 옷으로 겨우 몇 견지 사주어 시집보낼 수 있었다. 물론 대대 당지부 서기인 상순이네가 돼지를 두 마리나 쳤다고 뒤에서 흥수가 콧방귀를 뀌었다. “내 때문에 아버지가 자본주의 길로 나간다는 말을 들어 어쩌겠소?” 은숙이 눈물을 흘리면서 근심했다. 허나 명옥은 대수로워 하지도 않았다 “그까짓 거, 개소리거니 하면 돼. 그래 당원은 시집가는 딸에게 첫날 한복도 해 입히지 말아야 한다니?” 이른 아침에 경만은 길을 하나 사이 둔 가시집으로 반시간이나 걸려서야 올 수 있었다. 마을의 종연이랑 창식이랑 주봉이랑 마을 큰길에다 새끼줄을 띠워 놓고 가로 막았던 것이다. “이보, 경만이, 어디로 가오?” 경만은 중산 복을 빼입고 씩씩하게 걸어오다가 주춤 멈춰서 웃었다. “각시 데리러 가오.” 종연은 안도에서부터 경만과 잘 아는 친구였다. 명육은 “각시는 누구요?” 하고 물었다. “뻔히 알면서 묻소?” “우리 어떻게 아오? 도대체 누구요?” 경만은 시간을 끌기 싫어 “우리 마을 김서기네 둘째딸 은숙이오.”라고 시원히 대답해주었다. 그러자 종연은 “어떻게 돼 한 마을에서 약혼했소?” 하고 물었다. 창식은 길쭉한 얼굴을 찡그리면서 “약혼 경과를 말하지 않으면 이 큰길을 지나가지 못하오.”라고 단단히 잡도리를 하면서 새끼줄을 매만졌다. 경만은 새끼줄을 손으로 쥐어 당겨보면서 “요까짓 게 다 뭐요?”라고 하면서 쥐어 들려고 했다. 그러자 청년들은 경만의 두 팔을 비틀려고 들었다. 경만이 두 팔에 힘을 주며 뻗치자 움쩍도 하지 못했다. “첫날 신랑과 싸울 예산이오? 장난도 한도 있지. 정말 한심하오.” 그때 덕돌의 팔촌형 경학이 동네 청년들을 나무랐다. 그러자 종연이랑 명육이랑 물러섰다. “보내주면 술을 주겠소?” 창식이 묻자 경만은 시원히 “양, 큰상 옆에 오오.”라고 했다. 그 말에 창식이 새끼줄을 풀어주면서 “신랑을 따라가 큰상이나 받자.”라고 했다. 새끼줄이 풀리자 경만은 성큼성큼 걸어 은숙이 네 집에 갔다. 철국이 대반을 들면서 경만을 집 윗방에 모시고 들어가 큰상에 앉혔다. 명육이랑 종연이랑 창식이랑 큰상에 앉은 경만의 앞에 두 줄로 죽 둘러 앉아 고주망태 될 지경으로 술을 잘 마신 것은 두 말할 것이 없다. 오전 11시쯤에 신랑 경만과 색시 은숙이 부모와 집안 이상 분들에게 절을 하고 문을 나섰다. 노할아버지는 거동이 불편해 오시지 못했기에 후일 전문 찾아가 절을 올리도록 했다. 경만과 은숙은 서로 팔을 끼고 걸었다. 연분홍비단한복을 입은 은숙은 아주 예뻤다. 화장까지 한 쌍까풀눈이 특별히 정신이 나게 고왔다. 종연이랑 창식이랑 신랑 큰상을 물리자 이번에는 신랑각시 먼저 경만이 네 집으로 뛰어가 술을 먹으려고 들어앉았다. 상순은 하나 밖에 없는 외동아들을 칠촌조카 경학과 함께 상빈으로 딸려 보냈다. 덕돌은 둘째 누나와 매형을 따라 가서 상빈 상을 받고 잘 먹었다. 경학은 동네 분들에게 술을 따라 부어주고 말했다. “팔촌이 한 구들이라고 내 오늘 한 마을에 사는 팔촌 동생 덕돌을 데리고 상빈으로 왔는데 모두 술을 포근히 드오.” 그러자 모두들 상순이 네 집 기둥인 덕돌을 보고 재미있어 하면서 술을 마셨다. 덕돌은 상다리 부러지게 차린 상빈 상의 과자며 돼지고기며 보지도 못했던 음식을 배 터지게 먹었다. 그는 심심해 누나 은숙이 들어있는 사돈집에 가서 마당에서 뛰놀았다. 그러다가 목이 말라 사돈집도 가리지 않고 들어가 부엌에 가서 물을 달라고 해 마셨다. 사돈 아주머니들은 상빈으로 온 새 각시 남동생인 것을 보고 사발에 물을 퍼서 두 손으로 드렸다. 그러자 덕돌은 물을 마시고나서 배를 슬슬 마시면서 “에이고, 상빈으로 와서 정말 배 터지게 잘 먹었다.”라고 했다. 숱한 사돈들이 배를 그러안고 웃음보를 터뜨렸다. 동네 사위를 삼은지 얼마 되지 않아 초겨울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는 어느 날이었다. 순자가 남대 치 이동수를 데리고 부모에게 인사하러 왔다. 동수는 사탕과자에 술을 사들고 왔다. 그는 가시부모 상순과 명옥에게 절을 올렸다. 상순과 명옥은 금방 동네 사위를 삼고 또 남대 치 대학생 사위까지 삼게 돼 기뻐 어찌할 줄을 몰라 싱글벙글 했다. 노 할아버지는 거동이 불편해 오시지 못했기에 후일 전문 찾아가 절을 올리도록 했다. 그때 덕돌이 바깥에서 달려 들어왔다. 그는 얼굴이 백지장처럼 새하얀 동수를 보고 어려워서 두 손을 싹싹 비비면서 구들 끝에 서있었다. 순자가 소개하기도 전에 동수는 싱글벙글 웃으면서 일어나더니 “처남이겠구나. 어서 오라.”라고 하며 덕돌에게 손짓했다. 덕돌은 동수에게 안기면서도 어떻게 불러야 할 지 몰라 우물쭈물했다. 그때 순자가 옆에서 덕돌의 손을 잡고 “매형이라 불러라. 큰 매형이야.”라고 알려주었다. “매형.” “오, 그래.” 동수는 열다섯 살이나 지하인 어린 처남을 품에 안고 내려다보면서 “언제 커서 내 술동무를 하겠어?”라고 중얼거리었다. 순자는 동수를 곱게 흘겨보면서 “술을 안 마신다더니 쩍 하면 술 말시오?”라고 했다. 그러자 동수는 고수머리를 쓱 쓰다듬으면서 가시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상순은 동수를 보고 “큰사위 네는 부모가 다 계시오?” 하고 물었다. 그런데 덕돌이 어찌나 무릎 위에 앉아 호돌 매돌 하는 지 좀처럼 가시아버지 말을 들을 수 없었다. 동수는 덕돌을 내려놓고 사탕 알을 쥐어 주고 나서 가시아버지 묻는 말에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시고 집에 어머니 계셔요. 형 둘에 누나 둘이 있어요. 전 막둥이예요.”라고 대답해 드렸다. “음.” 상순은 조용히 들으면서 머리를 끄덕였다. 그때 옆에서 순자가 한마디 보탰다. “큰조카는 저 동무와 동갑입니다.” “음-” 상순은 동수를 보고 “서란에 있다던가? 그 곳 농사는 잘 되오?” 하고 물었다. 그러자 동수는 별로 고려도 하지 않고 “예. 우리 고향 서란은 땅이 많은데다가 농사가 잘 돼요.” 하고 남도말로 대답했다. 그 남대 말에 홍자는 뒤에서 “저 남대 치 말을 봐라.” 하고 웃었다. 그녀는 큰형부를 남대 치라고 놀리다 못해 항상 “남대 치”(남도치)를 거꾸로 “치대남(치도남)” 이라고 놀려주곤 했다. “집에 빚이랑 없소?” 상순의 물음에 동수는 대수롭잖게 대답했다. "한 400원 푼히 빚 졌어요. 아무 것도 아니래요.”  그 대답소리에 상순은 한숨을 후 내쉬었다. 괜히 딸을 고생시킬 까봐 근심됐던 것이다. 눈치 빠른 동수는 인차 말꼬리를 달면서 해석했다. “건 큰 형님 빚이지 이제 세간나서 살 우리와는 상관없어요. 근심하지 마세요.” 상순은 바로 앉으면서 물었다. “지금 ‘문화대혁명’ 바람이 대단한데 무슨 조직에 들었소?”  그러자 동수는 가시아버지 눈치를 살피면서 소홀히 대답하지 못하고 어물 주물 했다. 사실대로 말하면 서기질하는 가시아버지한테 정치 불문이라고 말을 들을 까봐 망설였다. 그때 순자가 옆에서 끼어들었다. “저 동무는 ‘문화대혁명’에 영 소극적입니다. 내랑 든 ‘봉화’란 조직에 들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소설책을 읽기만 좋아합니다. 저 동무는 농학원에 왔는데 도서실의 연애소설과 세계명작을 수태 읽었습니다.” 그러자 상순은 머리를 끄덕이더니 동수에게 물었다. “언제 결혼하면 좋겠는지? 큰 사돈어른께 물어보았소?” 그런데 동수는 이런 말을 했다. “결혼식을 따로 할 필요가 없습니다. 결혼식을 할 돈이 있으면 생활에 보태 쓰세요. 이렇게 와서 가시집 부모형제를 보면 됐어요.” 그 말에 상순은 놀라하면서 동수를 똑바로 마주 보았다. “그게 어디 될 말이오? 우리 집이 아무리 가난해도 맏딸을 시집보낼 돈도 없을 정도는 아니오. 우리 조선족들은 한뉘에 큰상을 세 번 받는다오. 갓 태어나서 돌 생일상을 받고 시집장가 가면서 큰상을 받고 예순에 환갑상을 받는다지 않소?” “괜찮아요. 지금은 문화대혁명시기어서 결혼도 봉건전통예식을 타파하고 혁명적으로 해요. 이렇게 와보면 결혼이라고 여기면 돼요. 딱 큰상을 받아야만 하나요.” 허나 상순은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그래도 어찌 큰상도 받기지 않고 시집보내겠소? 사위에게 큰상을 받기지도 않고 결혼식도 하지 않고 어떻게 그렇게 엉터리로 하겠소? 이번 걸음은 인사라 치고 집에 돌아가 사돈어른과 토론해 결혼 날자를 정해 결혼식을 올리기로 하기요.” 허나 동수는 고집을 부렸다. “괜찮아요. 원래 결혼식을 할 새도 없어요. 이번에 북대황으로 가면 한 1년 있어야 돼요. 우리 그저 이렇게 떠나가면 함께 살면 결혼과 마찬가지예요. 전 순자만 데리고 가면 모든 거 만족인데요.” 순자도 옆에서 한 마디 올렸다. “아버지, 근심 마십시오. 이 동무는 저와 약혼하고 얼마나 기뻤던지 가시집에 부담을 주지 말자면서 결혼식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습니다. 그저 저와 살기만 하면 된다고 했습니다.” “그래도 그렇지. 어찌 결혼식도 하지 않고 산다니?” 상순은 동수를 마주 보면서 다시 부언했다. “종신대사인데 잘 생각해보오. 결혼식은 치르지 않고 두고두고 후회하지 않겠소?” 허나 동수와 순자는 괜찮다고 했다. “절대 후회하지도 원망도 하지 않겠습니다. 근심하지 마십시오. 우리 하자는 대로 해주십시오.” 그때 홍자도 옆에서 끼어들었다. “지금은 혁명적으로 결혼한다고 시집갈 때면 모두 대장 함에 모택동 선집 네 권을 달랑 걷어넣고 낫에 붉은 댕기를 매서 보낸답니다. 결혼식 날에 밭에 나가 일하다가 점심에 큰상이라고 겨 떡을 먹는다오. 과거의 쓰라림을 잊지 말고 오늘의 해복을 생각하게 한다던가?”       허나 아버지가 “어른들 말에 끼어들긴?”하고 흘겨보자       홍자는 혀를 홀랑 내밀더니 입을 싸쥐고 일어나 조왕 쪽으로 가버렸다. 그 말에 동수와 순자는 희죽이 웃었다. 그들은 착한 효심에서 결혼식마저 치르지 않겠다고 했던 것이다. 홍자가 앓아서 숱한 빚을 진 부모에게 번다하게 결혼하느라고 또 빚더미를 더 지워주지 않으려는 것이었다. 종신대사도 마다하고 큰상마저 받지 않은 효심이야 말로 심청이 울고 갈 일이었다. 허나 부모로 된 상순과 명옥은 그 일을 두고두고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그리하여 상순은 동수와 순자의 요구대로 동수에게 큰상은 차려주지 못했지만 친척들을 다 불러 맏딸 순자의 결혼식 삼아 술상을 차렸다. 손님들이 많이 오자 덕돌은 정지와 방을 달아 다니면서 진정하지 못했다. 동수는 “덕돌아, 내 수수께끼 하나 내면 맞출래?”하고 물었다. 그러자 덕돌은 좋아라고 매형의 옆에 앉았다. “돌이 두 개 있는 거 뭐야?” “돌이 두 개 있는 게?” 덕돌은 인차 손벽을 쳤다. “아, 알았소. 눈이오.” “눈이 어디 돌이냐?” “그럼 뭐요?” 덕돌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한참 궁리해도 맞추지 못했다. 그때 옆에서 순자가 제꺽 알려 주었다. “호돌 매돌!” “양? 호돌 매돌? 그게 어디 돌이 두 개오?” “네가 어찌나 호돌 매돌 했으면 매형이 너에게 그런 수수께끼를 냈겠니?” “아, 아니야! 그게 무슨 수수께끼요?” 덕돌은 매형의 품에 안기면서 떼를 썼다. “다른 거 내오. 안되오.” 동수는 인차 “그럼 다른 거 내면 맞춰봐. 응?” “양. 내오.” “물이 두 개인 거 뭐야?” “물이 두 개?” 덕돌은 이번에도 맞추지 못했다. 그러자 큰누나가 또 말했다. “흐물흐물이지 뭐야?” “아, 또 나를 놀리는 게구나. 안 되오.” “그렇게 자꾸 흐물거리지 말라. 그러면 그런 수수께끼를 내지 않는다. 숱한 손님들이 오는데 어른답게 놀아라. 알았지?” 큰누나 말에 그제야 덕돌은 서적을 쓰지 않고 똑바로 앉아 주는 사탕과 과자나 받아가지고 마을에 나가 성묵이랑 동림이랑 나눠 먹으면서 놀았다. 어린 처남 덕돌을 떼놓았지만 동수는 둘째동서 경만과 육촌 형들인 성환과 종학이가 어찌나 “대학생, 대학생” 하고 놀리면서 술을 많이 권하는지 혼났다. 술을 과하게 마신 동수는 입을 싸쥐고 바깥에 나가더니 왈칵왈칵 토했다. 순자는 찬 물을 떠가지고 나가 잔등을 두드려주면서 책망했다. “동무, 무슨 술을 이렇게 마십니까? 술을 마시지 않는다 해놓고서도…” “순자, 미안하오. 동서가 술이 꽤나 세구먼.” 여동생들인 은숙과 홍자 그리고 신자와 성숙이가 큰언니의 결혼을 축하해 밤이 깊어가도록 홍심 충성 패를 목에 걸고 “문화대혁명”시기 제일 유행한 충성가를 쟁쟁한 고음으로 부르면서 충성무를 절룩절룩 추었다. 동수와 순자는 서로 마주 보며 싱글벙글 생글방글 웃으면서 박수를 치고 노래를 불렀다. 동수도 일어나 걸걸한 목소리로 사랑타령을 아주 멋있게 불러 박수갈채까지 받았다…  
138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99) 댓글:  조회:1305  추천:1  2018-05-01
             6.외롭게 우는 외기러기 먹장구름에 가린 해가 서산으로 서서히 넘어가버린 후 을씨년스러운 하늘에는 또 먹장구름이 몰려왔다. 언제 맑게 갠 하늘의 환한 해를 보고 말 것 같지 못했다. 하늘의 풍운조화는 참말로 짐작하기 어렵려운 변덕꾸러기어서 농사군들을 괴롭히고 시달리게 했다. 사원들은 장탄식하면서 변덕스런 하늘을 쳐다보며 원망하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상순은 마을에 돌아오자마자 높다란 토성 안으로 들어갔다. 할아버지가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번마다 관건적인 시각이면 상순은 할아버지를 찾아가 의논하군 했다. 병완은 대대 사무실에서 기다리다가 상순이 들어서자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이제 장마철이 오기 전에 태평강과 부르하통하에 제방뚝을 잘 쌓아야 한다. 그러잖으면 우리 대대 사원들이 몇십년 동안 고생스레 일궈 놓은 밭이 다 밀려가겠다.” “예. 알았습니다. 나도 궁리해 두었습니다. 제방뚝 양쪽에 버드나무와 비술나무를 심어놓을 예산입니다.” 병완은 가슴까지 내리두리운 하얀 수염을 매만지면서 머리를 끄덕이었다. “음, 백양나무는 안 돼. 곧은 뿌리 밖에 없어서 물에 밀리면 뿌리 채로 뽑혀. 더구나 모래 뚝에 심어놓아선 견디지 못해. 그래도 비술나무와 버드나무가 잔뿌리 많아서 물엔 견딘다.” 상순은 담배를 말아 붙이면서 할아버지께 말했다. “장개골 안과 돌문 안에 저수지를 만드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해마다 쩍 하면 큰물이 져서 어디 감당하겠습니까? 저수지를 만들어서 소낙비가 오면 물을 가둬 두고 가물 때는 물을 빼서 쓰면 일거양득이 아니겠습니까?” 병완은 이가 다 빠져 좁아진 볼이 움푹 파이게 곰방대를 뿍뿍 빨더니 머리를 끄덕였다. “그래, 그게 원대한 계획이구나. 부르하통하를 막아 모래밭에 논을 풀었고 패용천산과 칼산 사이에 과수원을 만들었지. 이제 장개골 안과 돌문 안에 저수까지 만들어 놓으면 우리 마을은 살기 좋은 고장으로 되겠구나. 허허허.” “할아버지, 제 생각엔 산비탈 밭머리와 령 길에 모두 비술나무를 심으면 좋을 거 같습니다.” “건 왜?” “가물 때면 땡볕을 피할 나무 한 대도 없어 틀렸습니다. 이전에 대약진 때 가물어 더위를 먹고 사원들과 소가 쓰러지지 않았습니까. 비술나무를 심어 더위도 피하고 장차 구부정한 비술나무를 베다가 가대기나 호리 같은 농기구도 만들면 좀 좋습니까?” “오- 그거 정말 일거양득이구나.” 병완은 가슴까지 내려온 흰 수염을 슬슬 매만지더니 뒷말을 이었다. “밭을 일구지 못할 산비탈에 백양나무를 심어 청산을 조림해라. 이 담 몇 십년 후에 우리 자손들이 그 나무를 베다가 새 집을 짓고 살게. 지금 지은 집은 우리 고향을 떠나서 대충 바람이나 막자고 지은 초가삼간들이 아니냐? 낡았다. 낡았어. 이후에는 벽돌기와 집을 덩실하게 짓고 살아야 하지.” 상순은 할아버지 두 손을 잡고 바라보면서 말했다. “이 좋은 세월에 오래오래 앉으십시오. 이제 자손들이 우리 뒤를 이어 우리 마을을 잘 건설하는 것을 오래오래 지켜봐주십시오.” “그래. 넌 내가 하지 못한 일을 해 달라. 난 다만 우리 사회주의 새 농촌을 잘 건설해 모든 사원들이 남부럽지 않게 배불리 먹고 사는 걸 보기만 하면 눈을 감아도 원이 없겠다.” 병완은 눈물이 글썽해 손자에게 부탁의 말을 하더니 기침을 쿨룩쿨룩 했다. 상순은 날 따라 수척해가는 할아버지를 보고 마음이 아팠다. “할아버지, 좋은 의사 마을에 있는데요. 규상에게 폐에 좋은 약을 지어달라고 하겠습니다. 형내한테도 약을 지어달라고 하랍니까?” 병완은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아니야, 아니. 난 큰 속병이 없다. 다만 ‘문화대혁명’인지 뭔지 하는 바람에 근심스럽구나. 층층이 한다하는 조선족간부들을 다 끌어내다가 투쟁한다는데 그게 무슨 혁명이란 말이냐? 진짜 세상 모르는 애들을 시켜서 공산당 노간부들을 반란하고 투쟁하고 못살게 구는 게 아니고 뭐냐?” 상순은 천정을 쳐다보면서 땅이 꺼지게 한숨을 후 내쉬었다. “듣는 말에 의하면 허영주 부현장도 홍위병들과 학생반란파들에게 끌려 나가 투쟁당했답니다. 진수해공사 박우성 서기도 반란파들에게 끌려 나가 일본특무라고 투쟁당했답니다.” 병완은 곰방대를 뻑뻑 빨면서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일본 특무라니?” 상순은 담배연기를 길게 뿜더니 두덜거렸다. “우성이 일본 와세다대학을 졸업한게 죄로 됐답니다. 정규상도 일본 국비생으로 장춘의과대학을 졸업했다고 일본 특무라고 반란파들이 또 투쟁하겠다고 떠듭디다. 내 말렸으니 말이지 끌려 나가 투쟁당하고 얻어맞을 번했습니다.” “우리 마을에도 ‘문화대혁명’ 바람이 불어오겠구나. 각별히 주의해라. 청년 애들 가운데서 누가 반란파 두목이냐?” “아직 잘 알리지 않습니다. 삼합에서 이사해온 황종연과 황승연 형제 좀 말이 있습니다. 진수해 시내에서 한다하는 싸움꾼이랍니다.” “그 부대 갔다 왔다는 종연이 말이냐?” “예. 걔가 진수해 싸움꾼들과 무리를 지어 사처로 돌아다니면서 로간부들을 투쟁합니다.” “그 놈 새끼, 진상을 알면서 그런다니?” “걔는 흥수 덕분에 제대해 대대 기업에 들어갔는데. 기업의 일은 하잖고 쩍하면 시내에 내려가 싸움질을 한답니다.” “참 대사는 대사야.” 상순은 한참 머리를 숙이고 궁리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할아버지, 이젠 서기를 내놓을까 합니다.” “건 왜?” 상순은 머리를 천천히 들고 허리를 쭉 펴더니 말했다. “전번에도 얘기 드렸지만 흥수 삼형제가 어찌나 짜고 들어 서기 자리를 욕심내는지 시끄럽습니다. 흥수가 서기를 해서 우리 대대를 더 잘 건설하면 괜찮습니다.” 그러나 병완은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벼슬을 초개처럼 여기는 정신은 귀하다. 넌 부모를 잘 모시고 마을 사람들을 이끌어 사회주의 새 농촌으로 건설하려고 공안국 국장도 내놓고 함흥 촌으로 돌아오지 않았느냐? 절대 약하게 나오지 말라. 흥수에게 자리를 내준다고 해서 우리 마을이 새 농촌으로 건설될 거 같니? 날마다 투쟁대회나 열다나면 언제 건설을 하니?” 병완은 머리를 숙이고 눈을 지그시 감고 도정신해 듣는 상순을 보고 말했다. “계속 서기를 하는 게 옳다.” 그러자 상순은 머리를 들더니 “치보 주임을 흥수에게 맡기면 어떻습니까?”라고 물었다. “왜?” 병완은 축 처진 눈시울을 치켜뜨면서 물었다. 상순은 “흥수가 어찌나 모든 권력을 우리 조손 삼대가 다 틀어쥔다고 여론을 조성하는지 말이 아닙니다.”라고 했다. “건 생각하지 못한 일이구나.” 병완은 곰방대를 뻑뻑 빨면서 궁리하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래, 치보주임을 계속 흥수를 시켜라. 그러나 서기는 내놓지 말라. 남을 너무 믿지 않고 모든 걸 다 틀어쥐는 건 틀린 공작 작법이지. 우린 어떻게 하나 군중들과 한 덩어리가 돼야 한다. 군중들의 의견을 귀담아 듣고 군중들의 어려운 일부터 해결해 주어야 한다. 그러나 모든 걸 회피하고 뒤로 물러서는 것도 잘못이야.” 상순은 “예, 할아버지 가르침을 명심하겠습니다.”라고 말하고는 할아버지를 부축해 집으로 모셔갔다. 상순이 함흥 촌에서 조개덕으로 내려오다가 조씨네 묘지 부근을 지날 때었다. 묘지에는 범이 새끼를 칠 지경으로 풀이 한길씩이나 자라나 있어 무시무시했다. 묘지 옆을 지나는 순간 이전 일이 떠올랐다. 그때 상순은 이 묘지 옆을 지나다가 웬 울음소리를 듣고 다가가보니 아버지가 글쎄 무릎을 꿇고 쪼그리고 앉아 울지 않겠는가! 하여 상순은 그날 밤으로 수레를 가지고 부모와 여동생 금옥을 모셔 자기 집으로 내려왔댔다. 또 이 한족묘지 속에는 국민당 토비두목 조덕산의 시체도 파묻혀 있었다. 조덕산은 국민당군의 파견을 받고 장춘으로부터 국민당 군 한 개패를 끌고 고향마을에 돌아와 전보흥을 괴수로 하는 삼도만 토비들을 사촉해 함흥 촌 일대 공산당조직을 여지없이 짓부시려 했다가 민주련군에 나포돼 총살당했던 것이다. 그의 동생인 지주 조덕림이 조덕산의 깨진 두개골을 주어 맞춘 후 조상들의 뼈가 묻힌 이 무덤군에 파묻었던 것이다. 매번 마을 사람들은 이 곳을 지날 때마다 등 곬에 싸늘한 식은땀이 오싹 돋을 지경으로 무시무시해 했다. 그러나 상순은 군인출신인지라 이 곳을 지날 때마다 겁이 나기는커녕 속으로 계급투쟁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며 마음을 굳게 먹었다. 그런데 오늘 밤 달빛에 피뜩 보니 누군가 을씨년스러운 묘지 옆의 백양나무로 바라 오르는 것이 보이지 않겠는가. (저게 뭐야? 혹시 덕성 영감이 또 자살하려는 게 아닌가?) 상순은 이상해 주위를 둘러본 후 경각성을 높여 백양나무에 바라 오른 사람의 동태를 살폈다. 휘영청 밝은 달빛을 빌어 여겨보니 검은 그림자는 그리 높지 않은 나무 가지에 바 줄을 감아 매더니 올가미에 목을 걸려고 하지 않겠는가! “누구야?!” 상순의 고함소리에 그 검은 그림자는 멈칫 목에 걸려던 올가미를 멈추었다. “뭐 하는 짓이야?! 내려오지 못하겠는가?” 나무 위에서 맥 빠진 소리가 들렸다. “상순이, 말리지 마오.”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 “아니, 허 서기 아니오? 이게 무슨 짓입니까?” 상순은 달려가 백양나무에 바라 올라갔다. “난 이 세상에서 살 멋이 없소.” 상순은 허 백호의 손에서 올가미를 빼앗아 풀어내면서 말렸다. “이렇게 약하게 나올 줄은 몰랐습니다. 빨리 내려갑시다. 아무리 갈 길이 험난하고 곡절을 겪더라도 중국 공산당을 믿고 살아야 합니다. 당에서는 아무 때든 허 서기를 공정하게 평가할 날이 있을 것입니다.” 상순은 허백호를 부축해 나무에서 내려갔다. 허백호는 한 키도 넘는 풀이 깔린 땅바닥에 김이 빠진 공처럼 풀썩 주저앉았다. “왜 이런 좁은 생각을 다 했습니까?” “상순이, 난 살 용기가 없소. 이 놈의 세월이 언제 끝나겠소?” “먹장구름이 걷히면 해 뜰 날이 있을 게 아닙니까?” 상순의 말에 허백호는 한숨을 땅이 꺼지게 후 내쉬었다. “언제 이 놈 세월이 끝난다고? 보오. 반 우파투쟁에 뒤이어 또 ‘문화대혁명’이 시작됐소. 우에서 5, 6년에 한 번씩 새로운 형식으로 나타나는 계급의 적들과 투쟁해야 한다고 했소. 이젠 지주나 국민당보다도 당내 투쟁에 중점을 두고 있소. 류소기를 타도하자고 하더니 층층이 로 간부들을 다 타도하오. 날마다 투쟁을 받으면서 살아서 뭘 하오?” 상순은 머리를 툭 떨어뜨리는 허백호 서기를 와락 끌어안으면서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아니오." 상순과 흥수는 나이 비슷했다. 그러나 상순은 옛날 민주련군 때 삼도만 토비 숙청전투에서 자기 반장할 때의 련장이였다고 항상 존대말을 썼다. 급할 땐 때론 대등의 말이 불쑥 튀여나갈 때도 있었다. "허서기, 우리 당은 꼭 인민들을 정확한 길로 이끌 겁니다. 우리 당을 믿고 역경 속에서도 굴하지 말고 함께 꿋꿋이 살아갑시다.” “사는 게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럽네.” 상순은 무릎을 꿇고 앉아 허백호의 두 손을 잡고 머리를 조아렸다. “모진 정신타격을 받은 허 서기를 잘 보필해주지 못해 미안합니다. 저는 삼도만 토비 숙청 전투 때나 영월구 공안국에 있을 때나 허 서기를 존경해왔습니다. 그런데 제가 잘 모시지 못해 미안합니다.” 허백호도 엉거주춤 일어나 무릎을 꿇더니 상순의 두 손을 꽉 맞잡았다. “상순이, 정말 자네한테 미안하네. 내가 살아서 뭘 하는가? 이렇게 좋은 사람도 몰라보고 지도자를 뜬다고 계속 짓밟았으니. 흑흑.” “무슨 말씀을, 다 오해해서 그렇게 됐지요. 자기 입 안의 혀도 깨물 때가 있지 않습니까?” 허백호는 솔직히 말했다. “아니야. 자네가 삼도만에서 날 퇀장에게 고발했다고 그게 속에 내려가지 않아 처처에서 흠집을 잡아내 메치려고 했네. 정말 미안하네. 날 용서해 주오. 으흐흑, 흑, 흑흑.” 상순은 흑흑 흐느껴 우는 허백호 서기를 넓은 품에 꼭 껴안아 주었다. “저는 나쁘게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그럴수록 결점을 고치고 굳세게 일해 왔습니다. 허 서기가 자리를 냈지만 계속 스승으로 모시겠습니다.” “야, 상순이, 자넨 정말… 흐흑, 흑흑.” 백호는 흑흑 흐느껴 울며 상순의 잔등을 손으로 다독였다. “상순이, 자네가 한 노선이 옳았네. 사회주의라는게 백성들을 굶기고서야 무슨 우월성이 있겠소? 우리는 군중들을 이끌어 배불리 먹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사회주의 새 농촌을 건설해야 하오. 이전에 내가 내밀었던 심갱밀식재배법은 대약진 때 잘 못한 농사법이었네. 자네가 옳았네. 날 용서해줄 수 있겠는가?” “용서라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허 서기도 혁명을 하느라고 그랬습니다. 나는 절대 그 일을 마음에 두지 않습니다.” 허백호는 상순을 와락 끌어안았다. 둘은 서로 꽉 끌어안고 오래도록 놓지 않았다. 하늘의 먹장구름도 서서히 걷히더니 휘영청 밝은 달빛이 설레는 수풀 속에서 서로 부둥켜안은 두 사람에게 은빛 옷을 입혀 주었다. 상순은 삼도만 토비숙청전투 때부터 허백호를 상전으로 모신 후 한 번도 그에게서 사랑을 받지 못하고 타격만 받아왔다. 하지만 그는 죽지 못해 사는 허백호가 불쌍해 마음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자네와 흥수는 판판 달라. 기실 흥수는 내가 그때 얼떨떨해 화선입당을 시켰소. 양심이 없소. 내게 붙어서 입당하고 지부서기까지 하자다가 내가 우파 모자를 쓰자마자 헌 신짝 차버리듯 했소. 믿지 못할 사람이오. 지금 난 얼마나 후회하는지 모르오.” 상순은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었다. 허백호는 상순의 두 팔을 붙잡고 속심을 털어놓았다. “기실 흥수는 요즘 자기 여조카 정옥도 조선에 갔다가 돌아왔기에 이른바 조선특무 말을 입 밖에 내지도 않으면서 투쟁대회를 다시 하지 않는 거요.” “근심하지 마십시오. 우린 당과 사회주의 조국에 미안한 일을 하지 않은 이상 세상에 두려울 게 없습니다.” 그들은 수풀이 우거진 묘지 군에서 나와 태평강 가에서 오래도록 이왕지사를 얘기했다. 삼도만 토비숙청으로부터 항미원조 전쟁 때 일로, 영월구 공안국에 있을 때 일로 초생 눈썹달이 서산으로 기울 때까지 얘기를 나누었다. 어디에서인가 외기러기가 날아가면서 외롭게 우는 소리가 끼룩끼룩 애처롭게 들리었다.              7. 치보 주임 높다란 토성 안 늙은 비술나무 위에서 참새 한 마리가 요 가지 조 가지 옮겨 앉으면서 짹짹거렸다. 참새는 발로 부리를 싹싹 닦다가 짹짹 자지러지게 울다가도 다른 나뭇가지에 포롱 날아가 앉아 온 토성 안이 부산하게 짹짹 울었다. 요즘 흥수는 어깨 으쓱해 개 잡은 포수처럼 우쭐거리면서 마을을 돌아다니다가도 토성 안대대 사무실에 틀을 차리며 앉아 신문을 척 보곤 했다. 치보 주임으로 된 그는 나라 주석이나 대통령이나 된 듯이 조개턱을 쳐들고 안하무인격이었다. 어느 하루, 충국이 흥수를 찾아 대대 사무실로 들어와 두 손을 싹싹 비볐다. “이 치보 주임, 저,” 흥수는 서기 사무상 옆에 앉아 신문을 내리 보다가 머리를 들더니 의자 등받이에 잔등을 대며 허리를 쭉 펴고 틀스럽게 물었다. “무슨 일이야?” “소개신 한장 떼 주오.” “무슨 소개신?” “결혼등록소개신.” “뭘? 누가 너 같은 지주 놈 새끼한테 시집간다더니? 흥!” 충국은 흥수를 쏘아보면서 정색해 말했다. “지주 아들은 사람이 아니오?” “누구한테 장가가?” “조개덕 오옥선과 결혼해야겠소.” “뭐라고? 옥선과?” “예?” 흥수는 외까풀 눈이 뒤번져지게 치켜뜨며 놀란 표정이었다. 그러나 인차 랭정성을 회복하더니 천천히 눈을 내리깔았다. “우파 여자와 지주 아들이 결혼해? 흥! 내 계급투쟁 안광을 어떻게 보고 그래? 꿈도 꾸지 말라니께.” 허나 충국은 물러가려고 하지 않았다. “우린 오래잖으면 애까지 낳게 됐소.” “뭐라고? 이 놈 새끼, 바로 무법천지로구나. 결혼을 동의하지도 않았는데 애까지 설어? 당장 긁어 버려! 너희들 오누이는 결혼 전에 애를 만드는 전문가로구나. 흥! 더러운 연놈들. 애를 먼저 만들면 결혼시켜 줄 거 같아?” 흥수는 충국을 쏘아보더니 휭 하니 대대 사무실 옆에 있는 위생소로 나갔다. “정선생, 빨리 조개덕으로 가야겠네.” 정규상은 주사기를 소독하다가 말고 물었다. “누가 앓소?” 흥수는 조개턱을 쳐들고 떠들어댔다. “말이나 돼. 저 충국 새끼캉(하고) 우파 오옥선이 애까지 설었다니께(니까).” 정규상도 놀라면서 뒤에 들어서는 충국을 흘끔 곁눈질했다. 충국은  울먹울먹해 통사정을 들이댔다. “정 선생, 제발 애를 긁지 마십시오. 제발 빕니다.”  허나 흥수는 외까풀눈을 부릅뜨고 충국을 쏘아보았다. “이 놈 새끼! 아직도 떠들겠느냐? 썩 꺼져!” 뒤이어 그는 정규상을 돌아보면서 명령하듯 고함쳤다. “어서 가. 정선생.” 정규상은 소독한 수술칼이랑 갖춰 위생가방에 넣어가지고 둘러메고 흥수를 따라 조개덕으로 떠나갔다. 바빠 맞은 충국은 황급히 그들 앞서 조덕림의 묘지 부근에 달려갔다. 흥수도 필경은 삼도만 토비숙청전투와 조선전쟁에 참가해 백전노장답게 기민한 치보주임이었다. 이전에 미련의 절육수술을 하려다가 충국에게 당한 적이 있어 그는 충국을 방비해야 했다. 그는 정규상을 데리고 토성 밖을 나가 마을 어귀를 벗어나려다가 주춤 멈춰 섰다. “정 선생, 가지 말자니께.” “왜?” 규상은 이상해 걸음을 멈추면서 가슴츠레 뜬 흥수의 외까풀 눈을 마주 보았다. “아무래도 우리 힘으로 저 충국을 이길 거 같지 못해. 전번에도 혼나지 않았나?” 지난 달에 흥수는 미련의 배속에 있는 애를 수술해 버리려고 정규상과 함께 소시거로 올라간 적이 있었다. 그때 장충국은 성난 사자처럼 세길네길 뛰었다. 그는 불시에 정규상의 손에서 수술칼을 빼앗아들고 흥수를 깔고 들어앉아 그걸 움켜쥐고 베버리겠다고 야단쳤다. 정규상이 뜯어말려서야 흥수는 그걸 간신히 건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도 생각하면 머리끼 곤두서고 등곬이 싸늘해졌다. “그때 저 놈한테 그걸 잡힌 후부텀 이게 통말을 듣지 않는다니께. 항상 여섯시를 가리키는 벽시계처럼 꼼짝할 수 없어.” 규상은 입으로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느라고 손으로 입을 감싸 쥐고 기침을 하는 척 했다. “못된 놈의 암캐 부뚜막에 뛰어 오른다더니. 허, 참, 세상에 별 일을 다 보겠네.” 정규상은 흥수를 따라 토성안 대대 위생 소로 들어가면서 물었다. “그래 오옥선을 어쩔 예산이오?” 흥수는 대대 사무실로 들어가면서 두덜댔다. “쌍 빌어먹을 년, 확실히 지주 놈의 새끼를 뱄는가 알아보고 손 써도 늦지 않는기요. 충국을 다른 데 일하러 보낸 후에 옥선한테 손을 써도 늦지 않소. 그 우직한 놈을 잘 못 건드렸다가 경을 치겠네. 안 그래?” (겁을 먹긴 단단히 먹었군. 흐흐흐.) 정규상은 속으로 웃으면서 위생 소로 들어가 주사기를 계속 소독했다. 한편 충국은 함흥촌과 조개덕 사이에 수풀이 무성한 조덕림의 무덤 부근에서 기다리다가 흥수가 나타나지 않자 덜컥 이상한 감이 들었다. 그는 함흥촌에 돌아와 대대 사무실을 들여다보고 더욱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저 놈들이 무슨 꿍꿍이지?) 충국은 도리머리를 흔들다가 “에라, 모르겠다. 될대로 되라지.” 하고 중얼거리면서 팔소매를 휙 젓고 나서 소서구로 성큼성큼 돌아갔다. 흥수는 대대 사무실에 앉아 한가하게 신문을 뒤적였다. 상순은 서기이지만 평소에 항상 밭에 나가 사원들과 함께 일했기에 흥수만 대대 간부처럼 무더운 여름날에 일하러 나가지 않고 서늘한 사무실에 들어앉아 있었던 것이다. 한참 신문을 뒤적이다가 웬 일인지 눈앞에 불시에 정규상과 함께 소서구에 갔다가 본 미련의 하얀 허벅다리가 눈앞에 삼삼해났다. (뭐야? 사람이 편안하니 여자 생각이 많이 나?) 글쎄 흥수는 아래 하신이 근질거려나더니 그것이 놀랍게도 칼산처럼 서서히 솟아오르지 않겠는가. 그는 신문으로 아래를 가리고 손으로 슬슬 주물다가 창문 밖을 내다보았다. (충국이 소서구로 돌아갔을까?) 그는 도적고양이처럼 살금살금 바깥에 나가 마루에 서서 여기저기 살피다가 마루에서 내려섰다. 그는 늙은 비술나무 밑으로 해 대문께로 쪼르르 달려갔다. 토성 밖을 한 고패 돌면서 살펴보아도 충국의 그림자는 보이지도 않았다. 그는 토성 남쪽에 자리 잡은 미련이네 집을 바라보면서 군침을 꼴깍 삼켰다. 허나 어쩐지 어디에선가 자기 행적을 감시하는 눈길이 따갑게 느껴져 토성 안으로 되돌아들어갔다. 남의 집 구새 목에 숨어 먼발치에서 토성 대문을 감시하던 충국은 반나절이나 돼도 흥수가 토성 안에서 나오지 않는 것이 이상했다. 그는 너무 이상해 한참 더 살피다가 고개를 기웃거리면서도 투쟁을 받을까봐 소서구 상우지로 일하러 갔던 것이다. 흥수는 집에 가서 점심을 먹고 모두들 일 밭으로 나간 후에야 대대 사무실로 갔다. 헌데 이상하게 축 쳐져 있던 그것이 미련의 하얀 젖무덤을 떠올리기만 하면 대가리를 쳐들까 했다. (별 일이야. 이 놈도 젊고 예쁜 가시나 알아보는 모양이지. 어디 참겠어. 이거.) 그는 마흔을 넘긴 춘실의 펑퍼짐한 엉덩이를 봐서는 아무런 감각도 없었다. 허나 윤택이 나고 하얀 미련의 허벅지를 눈앞에 떠올리기만 해도 그것이 뻣뻣이 머리를 쳐들지 않겠는가? (충국한테 잘못 됐는가 했더니. 아니야. 이 놈도 젊은 연들을 만나면 용을 쓰겠지.) 흥수는 더는 참을 수 없어 슬금슬금 토성 밖으로 나갔다. 그때 때마침 저쪽 우물가에서 삐꺼덕 삐꺼덕 드레 박을 잣아 올리는 소리가 들리었다. 때마침 애를 업은 채 드레박을 잣는 미련이 보였다. “어험, 어험.” 흥수는 마른기침을 하면서 다가가 말을 걸었다. “미련아, 그래, 애는 잘 자라느냐?” 미련은 드레박을 잣다가 깜짝 놀라 멈칫 하다가 억지로 해시시 웃었다. “예. 치보주임, 덕분에 잘 자랍니다.” 흥수는 조선말도 꽤나 잘하는 미련을 흘금흘금 곁눈질 했다. 드레박을 잣아 올려 초롱에 물을 붓는 미련이가 오늘따라 하야말쑥한게 더 고와 보였다. (아이고, 저 허연 젖가슴을 봐. 말랑말랑한게 쥐면 톡 터질 거 같아.) 흥수는 혼 나간 야수처럼 미련의 가슴을 노려보았다. “세상에 별일이야. 지주네 딸이 이렇게 고와보이다니?” “예?” 미련이 듣고 누런 이빨을 다 드러내며 헤헤헤 웃었다. “응? 어, 그래 어째 네가 영 곱구나.” “어마나, 치보주임도.” 미련은 눈을 곱게 흘기면서 물 초롱을 들고 집으로 떠나갔다. “힘들겠구나. 내 들어다 줄게.” 흥수는 능글맞게 물 초롱을 들고 앞서 미련의 집으로 들어갔다. 미련은 여기저기 사처를 둘러보면서 입을 싸쥐고 뒤따라 집으로 들어갔다. “치보 주임, 남들이 지주네 딸을 도와주었다고 욕하지 않겠습니까? 헤헤헤.” “괜찮아. 난 너를 위해서라면 뭐든 해주고 싶구나.” “어마나!” 미련은 허리를 비꼬며 손으로 낯을 가리면서 부엌으로 들어와 물을 물독에 부으려고 했다. “가만, 내가 부어 줄께니.” 흥수는 물독에 물을 부어주기까지 하면서 중얼거렸다. “미련아, 내 소개 신을 떼주지 않았더라면 네가 이렇게 애를 낳고 살 수 있었겠어?” “감사합니다. 치보 주임.” 흥수는 물을 다 붓고 음충한 눈길로 미련을 돌아보면서 능글맞게 구슬렸다. “너 이런 말 알아?” 미련은 이상해 물었다. “뭘 말인가요?” “우물의 물을 마실 때 우물을 판 사람을 잊지 말라.” “예? 저 토성 밖의 우물은 병완 할아버지네 부자들이 조선에서 이 마을에 처음 왔을 때 팠다던데요.” “그래, 허나 너 네 살 게 만든 건 누구냐?” “그거야 치보 주임이죠.” “그래.” 흥수는 미련을 활 채 끌어안았다. “왜 이래요? 애 다치겠네. 별라냥 한다. 우추 같은게.” 미련은 흥수를 활 밀쳐버리고 나서 애 띠를 풀고 애를 잔등에서 내려 구들에 눕혔다. 흥수는 구들에 올라가 단통 미련의 젖가슴에 손을 쑥 넣어 꽉 움켜쥐면서 호통쳤다. “사람이 은공을 갚을 줄도 알아야지. 함흥대대에서 이 치보주임을 모르고 살 수 있어?” “이러지 맙소!” 미련은 흥수의 손을 빼려고 안간힘을 다해 몸부림쳤다. 허나 흥수는 미련을 꽉 껴안아 부엌 장판 밑에 밀어넣었다. 뒤이어 깔고들어앉아 야수처럼 그걸 하려고 달려들었다. 아녀자 미련은 흥수의 억센 팔을 이길 수 없었다. 물초롱이 넘어져 물이 와르르 부엌바닥에 흘러내렸다. 흥수는 거센 숨을 몰아쉬면서 소리치는 미련의 입을 손으로 막았다. “쉿- 한번만 참아. 널 투쟁 맞지도 않고 편안히 살게 할 거니께.” 허나 미련은 발버둥치면서 발악했다. 흥수가 치마를 걷어 올린 후 괴춤을 까는 새에 미련은 소리쳤다. “애 깨나겠다. 동네서 알면 난 어떻게 살아? 우리 오빠 치보주임을 놔 둘 거 같은가?!” “지주 아들놈이 감히 이 어른을 어쩐다고?” 흥수는 발버둥질치는 미련을 어찌할 수 없어 통사정했다. “얘, 내 말을 고분고분 들어. 그럼 네 오빠하고 옥선도 결혼시켜주마.” “예?” 미련은 자기 귀를 의심하면서 발버둥질을 멈췄다. 그새 흥수는 미친듯이 덮쳐들었다. “아!” 미련은 반사적으로 소리가 나갔다. “아, 아, 그럼 우리 오빠, 오 선생과 결혼, 결혼 시켜주지?” “응, 그래.” 미련은 눈을 질끈 감고 입을 하 벌리고 말았다. “하긴 잘한다!” 이때 갑자기 느닷없이 귀에 익은 목소리가 울렸다. 흥수가 머리를 들어보니 춘실이 집에 뛰어 들어왔다. 흥수는 괴춤을 춰 입고 황급히 문 밖으로 뛰어나갔다. 춘실은 물이 줄줄 흐르는 부엌바닥에 쓰러진 미련의 머리채를 잡아 쥐고 마구 흔들어댔다. “이 년아, 죽자고 이러니?” “내 어쩌래? 죽기내기로 달려드는 걸.” 춘실은 물참봉이 된 미련의 허벅지를 쏘아보았다. “저 나그네 나와는 어쩌지 못하면서.” “아, 아니,” “무슨 소리냐?” “어째 그게 어쩌지두 못하더구먼.” “그래? 그래도 바람을 쓰면 그 병이 낫는다더니. 젊은 계집을 봐도 안 돼?” 춘실은 중얼거리더니 미련을 표독스럽게 마주 보면서 다짐을 땄다. “너 누구한테도 이 일을 말하면 안 돼. 그때면 너 죽는다. 알겠지?” “예.” 미련은 머리를 끄덕이었다. 춘실은 미련의 귀쌈을 찰싹 갈기고 우쭐 일어나 흥수를 흘겨보면서 문 밖으로 나갔다. 바깥에서는 까마귀 한 마리가 하늘을 찌르고 선 백양나무 가지에 올라 앉아 진절머리 나게 까욱까욱 울고 있었다.                             8. 밝은 달밤이 오면    봄기별을 알리는 종달새들이 지종지종 지저귀고 봄바람에 넘실거리는 버드나무가지에 알락까치들이 앉아 “까, 까, 까.” 노래하고 있다. “이라! 이라!”  버드나무숲이 우거진 해란강변 습개지에서 종호와 장묵은 써레질을 하느라고 분주했다. 종호는 새하얀 옷을 입고 써레질을 했지만 흙물 한 점도 옷에 띠지 않게 깐지고도 깨끗하게 일해 모내기를 하는 아낙네들이 혀를 끌끌 찰 지경이었다. 이때 장묵의 걸기를 끌던 황소가 습개구덩이에 풀렁 빠졌다. 원래 습개자리에 흙을 파다 펴고 푼 논이기에 장묵이 아무리 궁둥이를 채찍으로 때려도 황소는 습개구덩이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황소가 근육이 불뚝불뚝 살아날 지경으로 뻐둑거릴수록 더 빠져 들어가 이젠 엉덩이마저 흙탕물에 들어가고 말았다. 급해난 장묵은 아우성쳤다. “종호! 빨리 오라!” 종호는 “와.” 하고 황소를 세워놓고 채찍을 걸기에 걸어놓았다. “소가 습개에 오래 빠져 있으면 배가 불어 죽소.” 종호는 다가와 장묵의 손에서 채찍을 받아 쥐어 소등을 짱짱 내리쳤다. 허나 황소는 움쭉 거리다가 주춤 물앉았다. 황소는 이젠 각일각 배가 붓기 시작했다. 도리머리를 흔들던 종호는 소 궁둥이 쪽으로 가서 여겨보았다. “형님, 내 소 궁둥이를 들면 채찍으로 소를 치오.” “에이고, 어떻게 소 궁둥이를 든다고 그러니?” “그러지 않으면 소 죽는걸 보고만 있겠소?” 종호는 사원들을 보고 가마니를 가져오라고 해 소 궁둥이 뒤쪽에 폈다. 그는 습개 위에 편 가마니를 밟고 서더니 두 팔을 쓱쓱 걷고 용처럼 꿈틀거리는 두 팔로 소 궁둥이를 두 손을 잡았다. 두 팔의 근육이 울뚝불뚝 살아났다. “어-차!” 종호가 몸을 뒤로 젖히면서 두 팔에 힘주어 소 궁둥이를 번쩍 들어 올렸다. 그때 장묵이 “이라!” 소리치며 채찍을 날리자 잔등을 얻어맞은 황소가 앞으로 벌컥 내짚더니 습개에서 빠져나왔다. “와! 꼬리 없는 소구먼!” 사원들은 입을 딱 벌렸다. 여기저기에서 감탄소리가 터져 나왔다. “저게 어디 사람이오?” “글쎄 말이오. 어쩜 습개에서 소 궁둥이를 건뜻 든단 말이오?” “이전에도 수레 멍에에 애들을 둘이나 앉히고 수레 채를 쥐고 수레를 들어 몇 바퀴씩 돌린 적이 있소.” “힘이 무적이오. 무적.” 장묵은 힘장수 동생이 대견스러워 사원들을 돌아보면서 자랑을 늘여놓았다. “종호는 이전에도 땔나무하러 갔다가 빠진 수레를 땔나무를 실은 채로 건뜻 들어 빼낸 적이 있소. 우리 내력은 나를 내놓고 모두 힘이 세오. 우리 아버지는 성지 촌에 있을 때 소가 조단을 싣고 산비탈 길을 받지 못하자 소를 벗겨놓고 자기가 수레 채를 안고 내리막을 내려 온 적이 다 있소.” “야, 원래 천하장사는 유전이 있는 모양이오.” “대를 물린 힘장사들이구먼.” 장묵은 황소를 논밭머리 둔덕 위에 끌고 갔다. 황소는 배가 좀 불렀지만 종호가 인차 구해냈기에 살아났다. 장묵이 황소의 배에 묻은 흙물을 닦고 씻고 해주었더니 오줌과 똥을 질질 내 쏘더니 꼬리를 휘휘 휘둘렀다. 동쪽 하늘에서 금빛태양이 구름을 뚫고 전원을 비추었다. 이때 마을 쪽에서 옥선이랑 아낙네들이 아침밥을 이고 치맛자락을 날리면서 이쪽으로 다가왔다. “아침이나 먹고 일하기오.” 종호가 외치자 모두들 논도랑 물에 손을 대충 씻고 논머리 둔덕위로 올라갔다. 옥선이랑 아낙네들은 이고 온 함지를 내려놓고 함지 안에서 이밥과 부추달걀볶음이랑 두부모랑 막걸리랑 내놓았다. 종호와 장묵은 사원들과 함께 밥함지에 둘러앉았다. 종호는 막걸리 잔을 들었다. “자, 막걸리나 시원히 마시고 식사하지.” 장묵도 잔을 들었다. 나그네들은 막걸리를 뻘꺽뻘꺽 마시더니 기분이 좋아했다. “막걸리를 마시고 일을 할 만할까?” 장묵의 말에 종호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옛날 무송은 술을 서른 사발이나 마시고서도 범을 때려잡았다오. 막걸리를 마시면 힘이 나서 걸기질을 더 잘 할 수 있소.” 그 말에 옥선은 눈을 곱게 흘기면서 생글생글 웃었다. 옥선이 눈을 흘기면서 방실방실 웃을 때면 넓은 눈시울이 좁아지며 쌍까풀이 되면서 더 고왔다. 종호는 막걸리 잔을 내려놓으면서 “둘째형님도 이 마을에서 가지 않았더라면 얼마나 좋았겠소.”라고 했다. 그러자 장묵은 밥숟가락을 내려놓고 한숨을 후 내쉬었다. “글쎄 말이다. 숱한 잔 밥을 먹여 살리자고 목재판에 갔다가 잘못되지 않았을 수도 있겠는데.” 그들 형제는 둘째형 장은의 불행에 마음이 아파 막걸리를 들 생각이 나지 않았다. 장은은 목재판에 갔다가 불행하게도 넘어가는 아름드리나무에 깔려 사망했다. 장은의 맏아들 명수가 황급히 목재판에 달려가 보니 아버지는 얼굴이 알아 볼 수 없게 퍼렇게 팅팅 부었다. 사망한 지 며칠 돼 얼굴이 썩어 들어가면서 진물이 괴어 나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명수는 눈앞이 깜깜했던 것이다. 어머니도 계시지 않는데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났으니 말이다. 그때부터 명수는 어시로 돼 어린 동생들인 경자, 영찬, 경애, 영일을 거느려야 했다. 너무나도 힘든 명수는 할 수 없이 다섯 살 밖에 안 되는 영일을 투도에서 교원사업을 하는 민씨 네 집에 양아들로 줘 보냈던 것이다. “이젠 춘삼 큰아버지하고 인삼 둘째큰아버지도 사망했지. 형님들도 뿔뿔이 흩어져 보기도 힘들어졌다.” 형의 말에 종호는 한숨을 후 내쉬면서 “고향에 있을 때보다 재미없소.”라고 동을 달았다. 종호와 장묵은 그리운 친척들로 해 한숨을 후 내쉬었다. 한참 후 마을 어귀에서 종호의 셋째 딸 경숙과 둘째 아들 춘수가 나무수레를 끌고 이쪽으로 달려왔다. 그러자 종호는 “얘들아, 물도랑에 빠지겠다. 마을에 가서 놀아라!” 하고 소리쳤다. 그러자 춘수는 몸을 배배 탈면서 떼를 쓰고 경숙은 춘수를 데리고 가려고 수레와 춘수의 팔을 잡아끌었다. 옥선은 나그네들이 아침을 다 먹자 황급히 함지에 빈 그릇을 담아 이고 치맛자락을 휘날리면서 애들 쪽으로 반달음 쳐 갔다. 그녀는 바삐 경숙과 춘수를 데리고 마을로 돌아갔다. 춘수는 엄마를 올려다보면서 “엄마, 오늘 저녁에 영화를 한다오. 구경하기오. 양?” 하고 종알거렸다. 옥선은 “응, 그래. 너네나 구경해라. 엄마는 곤해서 보지 않겠다.”라고 했다. “엄마~ 같이 보자. 응?” 허나 옥선은 떼를 쓰는 춘수를 끌고 가면서도 대답을 하지 않았다. 옆에서 경숙도 졸라댔다. “영 재미있는 전투영화를 한답니다. 아버지랑 엄마랑 같이 가서 보기요. 내하고 춘수 먼저 제일 앞에 자리를 잡아 놓을게.” 그래도 옥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분주한 하루 일이 끝나고 종호랑 장묵이랑 사원들은 소를 벗겨 몰고 마을로 돌아왔다. 옥선이랑 벼 모 내기를 하고 비닐박막을 허리에 띤 채 집으로 돌아왔다. 마을 앞쪽으로 해 있는 탈곡장에는 벌써 남쪽을 향해 허연 영사막을 쳐놓았다. 애들은 해도 지기 전에 좋은 자리를 서로 앞 다퉈 차지하느라고 누룽지랑 먹으면서 영사막 앞에 조롱조롱 앉아 있었다. 경숙과 춘수는 벌써 검둥이를 데리고 영사막 제일 앞에 널따랗게 자리를 차지해놓고 감자누룽지를 먹느라고 여념이 없었다. 그 옆에 경숙의 큰언니네 여 조카 송선까지 데려다 앉혀 놓았다. 이윽고 온 하루 대지를 달구던 해가 서서히 서산인 모아산 쪽으로 져가고 고기비늘구름에 누르스름한 황혼이 불타기 시작하고 대지에는 황혼의 낙조가 비끼었다. “오래지 않아 영화를 돌리겠는데 어째 아버지 하고 엄마가 오지 않을까?” 춘수의 말에 경숙은 “집에 가서 데려올게. 넌 여기서 송선과 함께 자리를 지켜라.”라고 했다. “응, 그러자.” 이때 경숙은 탈곡장에 오던 경숙의 큰 언니 금자와 아저씨 김승준이 그리고 둘째언니 순자와 마주쳤다. “넌 어디로 가니?” 순자의 물음에 경숙은 “아버지하고 엄마를 데리러 가오.”라고 했다. 그러자 금자와 순자는 서로 마주 보다가 경숙의 손을 잡고 내려다보면서 말렸다. “아버지와 엄마는 전투영화를 보지 않는다.” “어째? 전투영화 얼마나 재미있소?” “너네는 애들이 돼서 모른다. 데리러 가지도 말아라. 가자, 언니들하고 아저씨랑 함께 보자.” 큰언니 말에 어리둥절해진 경숙은 몸을 탈면서 떼를 썼다. “싫소. 난 기어이 엄마를 데려오겠소.” 어려서부터 고집이 센 경숙을 말리지 못하는 언니들이었다. 경숙은 언니네를 뿌리치고 조그만 주먹을 쥐고 부랴부랴 집으로 뛰어갔다. 그런데 집안은 전등마저 죽여 놓아서 깜깜하게 어두웠다. “엄마! 엄마! 전투영화를 하오. 빨리 가기요. 오래지 않으면 영화를 시작하오.” “너네나 봐라. 난 곤해서 가지 않겠다.” 옥선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경숙은 구들에 올라와 누워있는 아버지와 엄마를 돌아가면서 흔들었다. “엄마, 아버지, 가기요. 예? 오랜만에 온 영화를 보러 가기요.” 허나 옥선은 돌아누우면서 “빨리 가 봐라. 영화를 시작하겠다.”라고 했다. 아닌 게 아니라 탈곡장 쪽에서 무슨 노래 소리가 높이 울렸다. 바빠 맞은 경숙은 어머니를 마구 흔들면서 떼를 썼다. “영화 보러 가자, 응~ 응~” 이때 아버지가 돌아누우면서 말했다. “경숙아, 우린 전투영화를 보지 않는다. 전투영화에서 사람이 죽는 걸 보면 속이 아파서 보지 못한다. 너네나 가 봐라. 어서! 아빠, 엄마 말을 잘 듣지? 응?”  그제야 경숙은 구들에서 옴찔 일어나 나가면서 종알거렸다. “별나다. 재미나는 전투영화를 보는데 속이 아프다니?” 경숙이 집에서 나가 탈곡장으로 달려가는 발자국 소리를 들으면서 옥선은 뜨거운 눈물을 주르르 흘려 베갯잇을 적셨다. 옥선은 전투영화에서 빗발치는 탄우 속에서 총칼을 들고 뛰쳐 나가는 전사들을 보기만 하면 그 속에 스무 두 살 난 전 남편 조철호가 있는 것 같았다. 기실 조철호는 김성칠 련대장 휘하에서 무명고지전투에서 지휘부를 사수하다가 절벽 아래에서 장렬히 희생되였었다. 그런데 옥선은 남편 조철호의 소식을 모르고 있었다.  하여 그녀는 마음이 비길 데 없이 아파 전투영화를 보지 않았다. 그런 줄을 애들이 어찌 알겠는가!     옥선은 전 남편 조철호를 13년이나 기다리다가 소식이 없자 종호한테 재가해 와서 첫아이를 폐 염으로 잃고 경숙과 춘수 오누이를 낳아 재미나게 살았다. 그녀는 경숙을 1962년에 낳고 춘수를 3년 후에 춘수를 낳아 오누이를 정말 재미나게 키웠다. 허나 스무 한 살에 결혼해 백날도 되나마나해 유복자를 남겨놓고 조선전쟁터에 나간 신랑이 돌아오지 않아 옥선은 속을 태울 대로 다 태웠다. 오늘처럼 휘영청 달빛이 밝은 달밤에 깜깜한 집안에 누워있으면 어쩐지 신랑이 어디에 이름 모를 산기슭 어느 나무 밑에 쓰러져 있는 것 같아 뜨거운 눈물로 눈시울을 적시었다. 구새 목에서 쿵쿵쿵 울리는 발자국 소리를 들으면 혹시 신랑이 돌아오지 않는가 하여 문고리를 쥐고 내다보다가도 문 앞을 지나가면 스르르 무너지듯 물앉아 쓰라린 눈물을 흘리었다. 그녀가 달을 바라보며 흑흑 흐느껴 운 달밤이 얼마나 되는지 모른다. 오늘도 전투영화를 돌린다고 하자 옥선은 또 기분이 상해 어려서 잃은 신랑 생각으로 속절없이 눈물로 베갯잇을 적시었다. 그러나 경숙이랑 애들이 어찌 그렇게 아픈 엄마의 속마음을 알 수 있었겠는가! 탈곡장 마당에서는 대포소리가 요란하고 총소리가 자지러지게 울렸다. 사람이 죽으면서 지르는 비명소리도 높아갔다. 처량한 달빛이 쓸쓸히 집안 구들을 휩쓸었다. 종호는 후처 옥선의 마음을 헤아려 전투영화만 돌린다고 하면 가지 않고 옥선을 동무하며 위안해주었다. 종호는 모로 돌아누워 들먹이는 옥선의 어깨를 붙잡아 돌려 눕히고 꽉 끌어안아주었다. 옥선은 종호의 드넓은 품에 안겨 흑흑 흐느껴 울었다. 집 안에는 한숨과 흐느낌 소리가 반죽해 어둠이 깔린 구석구석까지 쓸쓸하게 울렸다.
137    대하소설 진달래 소야곡(17) 댓글:  조회:1801  추천:1  2018-04-30
                32. 의심병 먹장구름이 뒤덮인 하늘에서는 뻘건 불구렁이 몇마리가 대지에 내리박혔다가 능청스레 훌 사라졌다. 꽈르릉 꽝! 꽝! 하늘땅을 뒤흔드는 우뢰소리와 함께 대줄기 같은 소낙비가 대야로 퍼붓는듯이 창창 쏟아져내렸다. 승호는 패륜이 드러나 감옥관리대대에서 제명된 후 애비 덕에 겨우 백화상점 구입원으로 들어갔다. 그는 어머니 덕분에 큰 병원을 돌아다니면서 그걸 성형수술을 한 덕분에 무난히 영희와 결혼했다. 영희는 선금과 한 소학교에서 일하는 친구였다. 그녀는 선금의 중매로 승호를 알게 됐다. 승호가 훤칠한 체격에 사내답게 생긴 대학생인데다가 공안국 과장의 아들이라는데 유혹돼 경솔히 결혼했다. 치명적인 생리흠집이 있는 것도 알아볼 새 없었다. 그녀는 숫처녀여서 원래 남자 건 그렇게 생겼는가고 지나쳐버렸다. 그 바람에 승호는 근심하던 고비를 얼렁뚱땅 얼려넘길 수 있었다. 그들은 허송파네 깡패무리한테 보복당할가봐 결혼해 얼마 안돼 자그마한 세집을  맡고 세간났다. 승호는 집에 상점을 차려놓고 영희를 보고 교편을 내려놓고 상점을 돌보게 하였다. 영희는 잘 납득되지 않았지만 승호의 말을 거역할 수 없어 막무가내로 고양이 굴 같은 상점에 들어 앉고 말았다. 자기 밑구멍이 칫칫하면 남의 밑구멍도 더러운가 한다고 승호는 쩍하면 영희가 다른 남자들과 눈을 맞추는가고 의심했다. 어느날 승호는 외지로 복장을 구입하러 떠나면서 부탁이 끝이 없었다. “영희, 이번에 심양에 가면 한 대엿새 걸릴 것 같소. 그거 알만하지?” 해말쑥하고 박씨처럼 걀쭉하게 생긴 영희는 앵두입술을 쫑깃하면서 눈을 곱게 흘기더니 종알거렸다. “예- 이젠 몇번 말했는가요? ‘밤이면 문을 꽁꽁 닫아 걸고 잘 것!’ 맞지요?” “빠진게 있어.” 영희는 제법 무릎까지 탁 치며 소리쳤다. “‘상점에서 사내들과 작작 술을 마셔.’ ‘사교무도 작작 춰!’ 맞죠?  호호호.” 승호는 문고리를 쥐고 떠날 념을 하지 않고 머뭇거리리더니 영희 어깨를 잡고 아주 정색했다. “이번엔 두개 항목을 더 보태야겠소.” “두개나?” 영희는 포도알눈이 휘둥그래졌다. “그래. 첫째, 저금통장을 잘 건사해.” “저금통장을 잘  건사해.” 영희는 승호를 따라 외웠다. “둘째, 밤이면 일찌기 문을 꽁꽁 걸고 자라.” “문을 꽁꽁 걸라.” 승호는 계속했다. “또 있어!” 영희는 입이 귀 밑까지 째질 지경이다. “또 있다고?” “그래. 무릇 어떤 놈이 달려들 땐 목숨을 걸고 반항하라. 그저 당하지 말고. 좋기는 낯빤대기에 생채기를 낼 것!” 영희는 량미간을 찌프렸다. “녀자 몸으로 그럴 새 있겠어요?” “그래야 흉수를 추적할 수 있어. 그보다도 정조를 목숨처럼 여긴다는 걸 믿지.” “제 색시 다 만들어놓고서 아직도 정조 말을 해요?” “시집간 녀자라도 정조는 생명이야. 정조를 잘 지켜. 알만해?” “알았어요.” 영희는 뾰로통해서 콕콕 찌르는 듯한 눈길로 승호를 곱게 흘겨보았다. “별, 언젠 제가 청백하지 못했는가요? 믿지 못하겠으면 외지로 가지 마세요. 나 대신 상점을 지키세요. 대신 제가 구입하러 갈게요.” 승호는 슬슬 구슬렸다. “믿지 못해 그러는게 아니요. 그저 강가에 내놓은 애처럼 항상 근심돼 그러지. 어쨌든 내 하라는대로 하면 랑패없을게요.” “예, 알았어요. 꼭 그렇게 할게요. 잘 다녀오세요.” 그제야 승호는 목구멍까지 올라왔던 말을 삼키더니 문을 쾅 닫고 떠나갔다. 영희는 문을 닫아 걸면서 도도거렸다. 하긴 영희는 물 찬 제비같이 예쁜데다가 성격이 활달한 편이여서 처녀 때 숱한 총각들이 꽃편지를 보냈다. 다 뿌리치고 가정배경이 좋다고 승호한테 시집왔다. 그런데 외지로 구입하러 갈 때마다 색시를 믿지 못하는지 항상 의심병이 도질줄은 진짜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영희는 울고 불며 자기를 믿지 못하는가고 한바탕 행악질했다. 승호는 익살을 피워대며 구슬리군 했다. “색시가 너무 귀여워 강변에 내놓은 어린애처럼 시름놓지 못해 그래. 이건 영희를 너무너무 사랑한다는 표징이 아니고 뭐요?” 승호가 영희를 의심하는데는 조금 그럴만한 리유도 있었다. 좀 예쁜 영희를 보고 사내들은 게침을 질질 흘리면서 상점에 찾아왔다. 술군들은 영희가 떠준 술이 더 시원한지 상점이 꽉 차게 들어서서 선술을 마셨다. 항상 영희를 안주로 해 지껄여대며 얼근히 취해 밤중에야 아쉬운대로 돌아갔다. 어떤 때에는 보다못해 역겨워 영희를 불러 집 안에 들여보내고 승호가 대신 상점에 나왔다. 그제야 사내들은 술맛이 없다면서 가버렸다. 코수염쟁이와 멀쑥이 나그네는 승호네 상점의 단골손님이였다. 코수염쟁이는 상점에 와서 척 들어앉으면 영희를 안주로 해 지껄이면서 맥주 열병을 굽내지 않고서는 밤이 깊어도 자리를 뜰 념을 하지 않았다. 코수염쟁이는 상점에 걸어놓은 결혼사진을 피뜩 보더니 흠칠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저게 신랑이요?” 영희는 별로 개의치 않고 “예.” 하고 대답했다. 코수염쟁이는 술잔을 쥔 채 결혼사진 가까이에까지 가서 찬찬히 뜯어보더니  돌아와 술잔을 들어 영희한테도 권했다. 그는 영희 잔에 술을 찰찰 넘치게 부어주고나서 맞잔을 했다. “야, 이런 각시를 얻은 나그네는 얼마나 좋겠는가?” “어째? 질투라도 나는가요?” “질투는 무슨? 저네 나그네 얼마나 훤칠한게 잘 났소?” “어머, 반신사진을 보고 훤칠한지 난쟁인지 어떻게 알아요?” 영희의 말에 콧수염쟁이는 “아, 그런가? 실수했구먼.” 하고 술을 들며 다시 결혼사진을 쳐다보았다. 그 후부터 코수염쟁이는 상점에 들어설 때면 나그네가 혹시 있지 않는가 살핀 후  구렁이처럼 스리슬쩍 기여들어 술을 마시군 했다. 기실 코수염쟁이와 멀쑥이는 모두 송파네 깡패무리였다. 그들은 시내에 도처로 싸다니면서 승호가 어디 숨었는가고 서캐 훑듯 했다. 그런데 여기서 승호 녀석을 찾아낼줄은 몰랐다. 그것도 자기네가 단골이 돼 쓸어다니는 상점의 아주 예쁜 녀주인이 바로 승호의 색시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 줄도 모르고 영희는 영업액을 올리려고 날마다 싶이 코수염쟁이와 멀쑥의 안주로 돼 술판에 끼여들었다. 승호가 코수염쟁이만 탓할게 아니였다. 코수염쟁이나 멀쑥이가 상점에 오지 않는 날에는 영희가 오히려 궁금해 할 정도였다. 그녀는 손님이 없는 날에는 상점문을 철컥 닫아 걸고 부근에 있는 사교무청에 가서 황홀하게 반짝이는 샨데리아불빛 아래에서 격조 높고 우아한 음악에 맞춰 뭇사내들의 품에 안겨 빙글빙글 돌아갔다. 승호는 집에 왔다가 문에 자물쇠가 잠겨있는 것을 보면 사교무청에 갔는가고 찾아가 볼 때가 잦아졌다. 승호가 말려도 영희는 혼자 상점을 돌보느라고 받은 스트레스를 푸느라고 그러는데 괜히 의심한다고 했다. 어떤 때에는 사교무청에서 춤 추던 사내들을 하얀 찰떡에 고물을 묻히듯이 수태 묻혀가지고 상점에까지 달고 와서 술판을 벌리고 술을 부어주기까지 하는 판이였다. (송파 깡패무리에는 코수염쟁이들이 욱실거리는데 혹시 그 놈 코수염쟁이가 송파 무린지 어떻게 아는가? 암컷이 꼬리를 치지 않고서야 어찌 수컷이 매달리겠는가?) 사내들은 아예 사교무청에 가기보다 영희네 상점에 와서 술도 마시고 록음기를 틀어놓고 예쁜 영희와 춤을 추니 좀 좋아서. 승호는 외지에 나갔다가도 돌아와 상점 안에서 뭇사내들에게 안겨 돌아가는 영희의 꼴을 보기도 역겨웠다. (천길 물속은 알아도 한치 사람 속은 모른다!) 물과 녀자는 에우기에 달린다고 생각한 승호는 영희 안전을 고려해서라도 단단히 단속하기 시작했다. 외지로 구입하러 떠날 때마다 영희한테 행동규범까지 몇 조목 내놓고 한바탕 훈계해놓고서야 떠나군 했다. 그날 저녁 영희는 승호의 말대로 일찌감치 상점문을 닫아 걸었다. 똑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바깥에는 땅거미가 어둑어둑 지기 시작했는데 단골손님인 코수염쟁이가 와서 헤벌죽거리면서 서 있지 않겠는가. “문을 여오. 단골손님을 이렇게 문 밖에 세워놓겠소?” “오늘부터 저녁엔 영업하지 않아요.” “야, 불시에 무슨 소리요? 난 이젠 이 집에 오지 않으면 병이 날 것 같소.” 코수염쟁이는 징글스레 금니를 드러내며 웃기까지 하며 수작을 부렸다. “야, 시꺼먼 구름이 몰려오는 걸 보니 소낙비 오겠는구나. 좀 비나 피하게 문을 여오.” “안돼요. 래일 낮에 오세요.” 영희는 문발을 꼭 닫기까지 하고 집안으로 들어가버렸다. “야, 비 오는구나. 너무 하는구먼.” 코수염쟁이는 별 수 없이 가버렸다. 멀쑥이도 왔다가 문발까지 꼭 친 상점을 기웃거리다가 도리머리를 흔들면서 가버렸다. 바깥에서는 소낙비가 대살처럼 창창 쏟아져내리기 시작했다. 영희는 일찌기 이불을 펴고 자려고 하다가 사랑에 치워둔 저금통장이 근심되였다. “내가 어떻게 번 돈이라고 그래?’ 영희는 우산을 들고 사랑방에 나가서 구석에 놓인 소금단지에서 9천원짜리 저금통장을 꺼내 품 속에 간직하고 집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집안을 돌아보다가 침대 밑이 안전할 것 같아 침대 아래 장판지를 들고 살짝 밀어넣었다. 거기에 눌러두면 침대 우에 누어서 수시로 감시할 수 있지 않는가. 그런데 침대에 누워서 생각해보니 그 곳도 안전한 것 같지 않아 천정을 쳐다보다가 무릎을 탁 쳤다. “그래, 저기야.” 그녀는 걸상을 들어다놓고 중천정 종이를 가위로 썩썩 금을 내고 그 위에 저금통장을 슬쩍 올려놓고 밥풀로 종이를 붙여놓았다. 그런데 그녀는 천정을 쳐다보다가 그것도 안전한 것 같지 않았다. 도적이나 강도가 들어와 천반을 쳐다보면 눈에 잘 띄여 인차 들통이 날 것 같았다. 한참 궁리하다가 그래도 사랑칸의 소금단지가 도적들의 눈에 잘 들지 않아 안전하다고 생각되였다. 그녀는 천정에서 저금통장을 꺼내 사랑칸으로 나갔다. 그녀는 소금단지에 저금통장을 파묻은 후 손으로 소금을 고루고루 공글러놓고서야 안도의 숨을 호~ 내쉬면서 돌아섰다. 집 안에 들어서자 그녀는 만일의 경우를 생각해 앞뒤 문께에 방치를 세워놓았다. 그리고 특별히 위험구역이라고 생각되는 뒤문께에는 녀성의 특유한 깐깐한 솜씨로 “반침략대책”을 댔다. 어느 놈인지 뒷문으로 덮쳐든다면 펄러덩 빠지라고 부엌의 널장판을 둬장 슬쩍 빼놓고 그 옆에 뜨물을 가득 담은 뜨물통을 놓아두었다. 밤이 깊어지자 대살 같은 소낙비가 창 밖에서 쫙쫙 쏟아졌다. 갑자기 뒤울 안에서 철써덕 소리 났다. “뭐지?” 영희는 침대에서 발딱 일어나면서 뒤울안을 경계했다. “혹시 비물에 사랑채 벽이 무너졌는가? 아니면 토성이?” 영희는 발뼘발뼘 뒤문께로 발끝 걸음으로 다가가 문발을 살며시 젖히고  창문으로 바깥을 내다보았다. “아니, 저 놈이!” 그녀는 하마트면 고함칠번했다. 웬 꺽다리놈이 글쎄 뒤담장을 넘어와 사랑칸의 자물쇠를 비트는 것 같았다. 피뜩 보니 코수염쟁이 같았다. “저 놈이, 저거! 그 안에 어떻게 번 돈이 있다고.” 영희는 황급히 문께에 세워둔 방치를 찾아들고 당장 뛰쳐나갈 판이였다. 그녀가 문 걸개를 절컥 벗겼다. 웬 걸, 그때를 기다리가나 한듯이 그놈이 홱 돌려 문을 활 열어제끼더니 집 안에 뛰어들어왔다. “어마나! 사람 살…” 외마디 비명도 지를 새도 없이 그 놈이 영희의 입을 손으로 막으며 장판바닥에 죄악적인 “침략”의 발을 내딛였다. 기다리기나 한듯이 그녀는 몸을 움츠려 살짝 뺐다. 덜커덩! 꽈다당! 그 놈이 장판널을 두개나 빼놓은 함정에 빠졌다. 그놈은 나자빠지면서 뜨물을 들썼다. 은희가 발길로 잽싸게 뜨물통을 걷어찼다. 쫘르르- 쏴- “에- 퉤, 퉤, 퉤!” “이 놈, 어디 된방매 맞아봐! 이 놈, 이 놈!” 영희는 문께에서 방망이를 찾아들고 그 놈의 대가리를 호되게 족쳤다. “아이구, 나 죽는다, 죽어. 그만, 그만! 아이고!” “뭐, 어찌고 어째, 이 놈, 죽어봐라! 이놈!” 욕지거리와 방망이벼락이 계속 안겨졌다. 그 놈이 머리를 싸쥐고 신음소리를 내며  엉거주춤 일어섰다. 방망이벼락을 막아내며 문께에 있던 스위치를 더듬어 쥐여당겼다. 찰칵! 졸지에 전등불이 대낮같이 켜졌다. “어마나!” 영희는 겁기어린 눈길로 그 “침략자”를 노려보다가 깜짝 놀랐다. 넌덜거리는 국수오리와 사래기를 푹 뒤집어 쓴 그 놈, 뻘 건 피가 줄줄 흐르는 대가리를 두손으로 싸쥔 그놈, 뜨물을 괴죄죄하게 푹 들쓴 그 음흉한 침략자, 그 놈이 바로 의심 많은 신랑 승호일줄이야! 영희는 방망이를 훌 던지고 풀렁 물앉았다. 그녀는 복잡한 심태를 이기지 못하고 흐느끼면서 한바탕 통곡쳤다. 그녀는 자기를 의심하는 승호가 괘씸했다. 자기를 믿지 못해 이런 음험한 수로  떠보는 승호가 야속했다. 의심이 많은 승호한테 시집온 것이 후회됐다. 의심병 환자를 어떻게 믿고 살겠는가. 생각할수록 앞날이 캄캄했다. 교단을 때려치우고 상점에 나앉은 것이 후회막급이였다. 영희가 가엽었다. 한참 후에야 영희는 제 정신이 들어 부엌바닥에서 기여나오는 승호의 멱살을 틀어쥐고 따지고 들었다. “왜 이래요? 절 믿지 못하겠어요? 예?” 승호는 수도물에 피투성이 된 더러운 머리통으로부터 온 몸을 툭툭 털고 쓱쓱 닦으면서 대답이 없었다. 한참 후에야 한다는 말은 삶은 소대가리 다 웃다 꾸러미 터질 지경이었다. “이번 고험에 만점이야! 경각성 O K!” 능구렁이 같은 승호는 능청스레 횡설수설했다. “지금 송파 깡패무리들이 날 찾아 보복하자고 쌍불을 켜도 쏘다니오. 우리 집에 왔던 코수염쟁이가 별로 허송파 깡패무리 같아더란 말이요. 경각성을 높이지 않고 되오? 강가에 내놓은 애처럼 난 항상 근심된단 말이요.” 방망이에 맞아 피투성이 돼가지고서도 입만은 성해 잔소리 끝이 없었다. “수건 가져 오지 못해? 이 지경으로 만들어놓고서도 잘한 것처럼. 눈길이 곱지 않소? 에이, 울어?” 영희는 더 할 말이 없었다. (세상에 이런 철면피한 인간도 있어?) 그녀의 눈길이 고울리 만무했다. 밤중까지 티격태격 말다툼이 끊지 않았다. “어쩜 사람을 그렇게 믿지 못해요?” 영희가 장판널을 제자리에 놓고 걸레로 뜨물이랑 국수오리랑 닦으면서 볼멘 소리를 했다. 승호는 할 말이 없었지만 영희를 구슬려야 했다. “경각성을 떠보았다지 않았소?” “아버지와 말해서 깡패들을 몽땅 붙잡아 감옥에 처넣으면 다죠.” 승호는 영희의 두덜거리는 소리를 귀등으로 흘려보냈다. 승호는 이젠 자기 일로 아버지를 더 애태우게 하고 싶지 않았다. 요즘 아버지가 허철만 서기와 암거래를 한 사건이 탄로났는지 공안국에서 아버지를 조사한다고 하지 않는가. 승호는 믿던 기둥이 와그르르 무너져가는 충격을 받았다. 그는 얼얼한 얼굴을 매만지면서 침대로 가서 벌렁 드러누웠다. 영희는 계속 도도거렸다. “나그네새끼, 허우대나 컸지, 허수아빌줄은 몰랐어. 깡패들 앞에서 벌벌 떨면서  색시나 떠보고 감시해라. 옛날부터 바깥에서 어쩌지 못하는 사내들이 집 안에서 안해하고나 우쭐거리다더라. 에이고, 내 눈이 멀었지. 저런 허수아비를 뭘 보고 시집 왔어? 아이고, 분해라. 원통해라. 엉~ 엉~” 그녀는 밤중까지 서럽게 울고불며 대성통곡쳤다. 며칠 후에 또 사단이 생겼다. 영희가 창고에서 맥주상자를 들고 상점에 들어갈 때였다. 갑자기 바깥이 소란스러워졌다. “개새끼, 이런 쥐굴에서 숨었구나.” 영희가 황급히 나가 보니 훤칠한 처녀가 옆구리에 두 손을 찌르고 콤파스처럼 벋티고 서서 떠들어댔다. “아니, 누군데요. 아침부터 재수없이 이래요? 경찰에 신고하겠어요.” “그래, 승호 애비한테 신고해. 날 잡아갈 거야. 흥!” 처녀는 허경옥이였는데 겁기 하나 없었다. “아마 승호 색시 같은데요. 몇번째 색신지? 불쌍하구나, 불쌍해.” 그때 승호가 집 안에서 나오다가 딱 마주쳤다. 승호는 깜짝 놀라 쥐구멍에라도 숨었으면 좋을 것 같았다. “어디로 도망쳐?!” 경옥은 승호의 팔소매를 붙잡고 늘어졌다. “이 놈, 얼마나 많은 처녀들을 짓밟았느냐? 뻔뻔스레 색시를 차고 사니?” 숱한 구경군들이 모여들자 경옥은 더 목청을 돋궈 승호의 죄악을 공소했다. “이 놈은 련애하는 척하면서 숱한 처녀들을 해쳤습니다. 이 놈의 녀동창생 홍희는 이 놈에게 무참히 짓밟혀 자살까지 했습니다. 은영이란 녀학생은 이 놈한테 짓밟혀서 정신병에  걸렸어요. 나도 이 놈에게 당해, 아이구. 이 놈을 어쩜 좋아? …” 경옥은 더 말이 나가지 않아 땅바닥에 물앉아 엉엉 대성통곡쳤다. 그 새 승호는  구경들 속으로 빠져나갔다. “이건 정신환자요. 무슨 구경할게 있다고 그러오?” 승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흩어지는 사람들 속으로 자취를 감춰버렸다. 영희는 멍해 서서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경옥은 땅바닥을 치면서 공소했다. “저 놈이 얼마나 많은 처녀들을 망쳐놓았는데 뻔뻔스레 법망 밖에서 산단 말입니까. 어이구, 하늘도 무심하지. 저런 놈을 어째 생벼락이 쳐가지 않는가?” 영희는 경옥의 공소를 듣고 불쌍했다. 또 눈이 멀어 승호한테 시집온 자기 신세가 한없이 가엾었다. (더러운 새끼, 제 놈  밑구멍이 더러워가지고 남을 내내 의심했구나.) 영희는 경옥한테서 승호의 과거사를 다 들었다. 한참 후 경옥은 간신히 일어나 떠나가버렸다. 영희는 구들에 펄러덩 물앉아 엉엉 대성통곡했다. 동네 망신을 당한 건 둘째고 앞날이 캄캄해 구들을 치면서 상치기 난 집 상주처럼 서럽게 울고 또 울었다. 그후부터 승호네 집은 밤낮 초상난 집처럼 티격태격 싸우는 소리, 투닥투닥 패대는 소리, 영희의 통곡소리 그칠 새 없었다. 영희는 막 자살하고 싶었다. 그러나 불어오르는 배 속에서 꿈틀거리는 태아가  불쌍했다. 몇번이고 긁어버릴가고 하다가도 차마 그러지 못했다. 그녀는 당장 승호와 리혼하고 싶었다. 그녀는 농촌시골에서 무남독녀로 자랐다. 부모가 불쌍해 그렇게 할 수도 없었다. (야, 농민의 딸이 불쌍하지.) 그녀는 잘 사는 총각한테 시집가 시내에 남아 부모에게 효도하려고 했다. 그런데 승호가 세상에 둘도 없는 색마일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그녀는 고민의 심연에서 갈팡질팡 사선을 헤맸다. 잘라당! 퉁탕! 코수염쟁이 쇠파이프를 든 깡패무리를 끌고 들이닥쳤다. 그런데 깡패무리 속에는  교활한 두목 송파나 경옥이 보이지 않았다. “왜 이래요?” 영희가 막아서자 코수염쟁이는 영희를 활 밀어제끼고 상점 안으로 쳐들어갔다. “어제 저녁에 왜 문을 열지 않았어?” 코수염쟁이는 멀쑥 등 무리한테 손을 홱 휘둘렀다. “박살냇!” “야!” 깡패무리들은 상점 유리창문과 매대를 쇠파이프로 퉁퉁 부셨다. 잘라당! 잘라당! 그 놈들은 매대에서 술병과 명태를 주머니에 넣어가지고 독사들처럼 꼬리를 감춰버렸다. 영희의 외씨같이 걀쭉한 얼굴은 새파랗게 질린 채 바위돌처럼 굳어져버렸다. 경찰들이 뛰여왔다. 경찰들은 사건현장을 일일이 사진을 찍고 영희한테서 사건경과와 깡패들의 생김새를 묻더니 파출소로 돌아갔다. 며칠 후에 코수염쟁이와 멀쑥은 파출소에 붙잡혀 치안구류를 당했고 상점을 파괴한 배상도 했다. 그러나 깡패들을 막후조종해 승호네 집과 상점을 부신 허송파는  의연히 법망 밖에서 너덜거리면서 유유히 싸다녔다. 이튿날, 승호와 영희는 남몰래 다른 세집에 이사해갔다. 깡패는 잠시 피할 수 있었지만 승호네 집에는 더 무서운 “정신깡패”가 들이닥쳤다. 그 “정신깡패”가 바로 그들 신혼부부의 “의심병”이였다. 경옥에게서 승호 과거를 알게 된 영희도 승호와 살면서도 색안경을 끼고 승호의 일거일동을 모두 의심하게 되였다. 승호의 의심병이야 더 말해 뭘 하겠는가. 치명적인 의심병에  걸린 그들 부부는 행복할 리 만무했다. 영희는 승호가 바깥에서 들어오면 친절히 마중하는 척하면서 끌어안고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코개처럼 웬 녀자 냄새 나는가고 냄새를 맡았다. 옷을 벗겨  걸면서도 다른 녀자의 긴 머리카락이 없는가, 수상한 쪽지나 사진 같은 것이 없는가를 서캐 훑듯 하였다. 또 집을 비운 틈에 승호가 외간녀자를 끌어들여 침대에서 뒹굴지나 않았는가 의심해 침대에 혹시 길다란 노란 머리카락이랑 없는가 살피군 했다. (한번만 들키는 날엔 그걸  밑둥까지 베버릴테야. 다신 바람을 피우지 못하게.) 승호는 의심병에 걸린 영희한테서 무서운 기운은 눈치채지 못하고 깡패들 때문에 장탄식했다. (송파 깡패무리를 제거하지 않고선 발편잠을 잘 수 없어. 아버지만 과장 자리에서 철직당하지 않았더라도 송파 무리를 무난히 제거하겠는데. 재수 없어. 아버지가 허서기와 짜고들어 송파와 나를 서로 봐준 일이 탄로날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웬 놈이 아버지가 허서기와 나눈 담화내용 록음테프마저 공안국에 제공했단 말인가? 웬 음흉한 놈이 우리 집과 허서기 집을 은밀히 노려보면서 도청했단 말인가? 강운룡 과장이 아버지 자리에 올라가더니 그런 짓 한게 아닐가? 성호는 소 궁둥이를 치러 갔으니 그럴 새 없고. 아니, 걔는 그런 사람이 아니지. 아무렴 성호는 착하고 순박한 농부의 아들인데.” 승호는 한숨을 후~ 내쉬였다. “성호, 그 자식만 곁에 있어도 겁날게 없는데. 헤이,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그 자식을 시내에 들여와야지.” 승호는 온 시내에 바람둥이로 소문나서 취직하기도 힘들었다. 게다가 송파네 깡패무리가 시시각각 보복하려고 혈안이 돼 미쳐 날뛰는 바람에 항상 자기 목에 칼이 날아들지 않는가 조심해야 했다. 집에서도 영희가 칼로 목이거나 그 걸 썩뚝 자를가봐 겁났다. 그는 공포에 휩싸인 어두운 밤에 집에서도 항상 다리를 옹송그리고 새우잠을 자야 했다. (진짜 생지옥살이구나. 숱한 처녀들한테 진 죄값을 치르는 걸가?)  승호는 그제야 모든 것은 인과보응이란 말이 맞는다는 것을 느꼈다. 무참히 짓밟힌 경옥과 은영 그리고 자살까지 한 홍희의 혼이 유령처럼 떠돌아다니면서 무시로 공포에 몰아넣고 있는 것 같았다. 의심병에 걸린 승호와 영희의 예측하기 어려운 앞날은 칠칠흑야처럼 캄캄했다. 구경 그들이 어떻게 암흑한 앞날을 저벅저벅 걸어나갈가? 하늘도 땅도 모두 다 짐작하기 어려웠다.                                              33. 구입과장 승호는 이젠 지옥 같은 집으로 들어가기도 싫었다. 영희의 의심에 찬 눈길을 받으면서 하루를 사는 것이 딱 징역살이를 하는 것만 같았다. 심지어 밤에 잠을 자다가도 영희가 면도칼로 자기 뭘 베버릴가봐 겁났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의심병에  걸린 것은 털끝만치도 반성하지 않았다.  설상가상 그는 사회나 단위에서도 립지가 점점 졻아졌다. 아버지가 과장을 하는 세월에는 대학교에서 숱한 처녀를 참혹하게 짓밟고서도 퇴학과 당적제명 처분을 피했다. 그러나 이젠 승호의 아버지도 철직받고 감옥의 문지기로 된 처지여서 더 바바볼 수 없게 됐다. 대학교 규률검사위원회 허철만 서기도 리철갑 과장과 짜고들어 승호와 깡패두목 아들을 덮어준 일이 탄로나서 서기직에서 철직당했다. 승호는 이젠 뿌리가 허망 뽑힌 나무로 돼버렸다. 그는 취직하려고 헤매다가  백화상점 구입과에 간신히 들어갔다. 그런데 원쑤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백화상점 총경리는 바로 경옥의 어머니일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뜻밖에 안수련 총경리는 승호에게 눈을 흘기지 않았다. (아무리 흉금이 넓어도 이럴 수야?) 승호는 안수련 총경리가 더욱 두려웠다. (속담에도 짖지 않는 개 더 문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렇다. 안수련 총경리라고 왜 자기 무남독녀를 짓밟은 승냥이 같은 승호가 곱겠는가. 그러나 그녀는 여태껏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승호는 바늘방석에 앉은 것처럼 조마조마하고 불안했다. 어느날, 안수련 총경리가 승호를 불렀다. (끝내 올게 왔구나.) 승호는 한숨을 후~ 내쉬며 승강기를 타고 총경리실로 올라가면서 오만가지 생각을 다했다. (경옥 때문일가? 극상해야 백화상점에서 쫓겨나겠지.) 순간 이상하게 홀가분해짐을 느꼈다. 승호는 총경리실에 들어서면서 높다란 의자에 틀스럽게 앉아 있는 안총경리한테 마지막이라고 허리를 구십도로 굽혀 인사했다. “여기 쏘파에 와 앉소.” 생각 밖으로 안총경리는 반색하면서 맞아주었다. (호랑이 사슴을 잡아먹기 전에 베푸는 선심인가?) 승호는 치를 떨었다. 세상에서 내노라던 자기가 이렇게까지 취약해질줄은 몰랐다. 그는 안총경리 뜻밖의 말에 놀랐다. “승호, 난 개인 감정으로 사업을 대하지 않소. 물론 승호가 경옥과 련애하다가 헌신짝처럼 차버린 건 괘씸하오. 그러나 사랑을 어찌 강요할 수 있겠소.” 그녀는 컵에 따뜻한 차물까지 부어주면서 뒤말을 이었다.  “경옥의 아버지나 내나 승호를 용서하기로 했소. 깡패들이 저네 집에 가서 행패를 부린 것과 우리 일가는 아무런 관계가 없소.” 성호는 머리를 점점 더 숙이면서 콩크리트바닥을 쏘아보았다. 안총경리는 높다란 의자에 돌아가 앉으면서 정색했다. “승호, 구입과 과장을 맡아주오.” “예?” 승호는 자기 귀를 의심하면서 안총경리를 쳐다보았다. “웬 말씀을? 전 죄인입니다.” 안총경리는 분명히 말했다. “나는 인간적으로는 승호를 곱게 보지 않지만 사업에선 승호를 믿소. 승호는 구입 과장을 잘 해낼 수 있는 재목이오. 대학교 때  학생총회 부회장에 체육위원이였다지?” 승호는 머리를 숙였다. “경력이 얼마나 출중하오. 조직능력 있고 장사도 잘하지. 구입과를 이끌어 질 좋은 현대상품을 잘 구입해들여오오.” 승호는 손사래를 쳤다. “감사합니다. 안총경리, 전 과장 재목이 아닙니다. 다시 고려해보십시오.” “사내대장부가 어찌 연약한 말을 하오? 오래동안 고민해보고 내린 결정이오. 잘해보오.” 안수련 총경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오더니 승호의 어깨까지 툭툭  다독여주면서 말했다. 승호는 재삼 “감사합니다.” 하고 허리를 굽신거리고 나서 총경리실에서 비실비실 물러나왔다. 그는 꼭 닫긴 총경리실 문을 되돌아보면서 도리머리를 절레절레 가로 저었다. (도대체 어쩌자는 거야. 병 주고 약 주고. 혹시 나를 안심시켜놓고 잡아먹자는 건가?) 승호는 더 깊은 고민의 수렁에 빠졌다. (어떤 때는 ‘바람둥이 과부네 아들’이라는지, ‘더러운 피 섞인 과부네 새끼’라는지 별의별 욕을 다하더니, 오늘 짧은 바지를 잔뜩 춰올려? 불여우 같은 년. 내게 인심을 베풀어주고 깡패무리들 행패는 자기네 일가와 무관하다는 걸 말하자는 건가?) 그는 엘레베이터를 타고 구입과로 내려가면서 중얼거렸다. “우리 엄마를 그렇게 업신여기지 않았어도 경옥하구 그 지경까진 되지 않았을 거요.”  승호는 구입과 과장으로 제발되긴 했지만 항상 바늘방석에 앉은 것처럼 안절부절하지 못했다. 그는 이번 기회에 자기 사람들을 구입과에 끌어다넣고 기반을 닦을 예산이였다. 승호의 시선에 제일 먼저 성호가 떠올랐다. (자식, 소궁둥이를 친다던데. 그 놈만 곁에 있으면야 세상 무서울게 없이 든든하겠는데.) 승호는 인차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이전에 아버와 말해서 공안국 경찰대대에 넣어주겠다고 했을 때도 성호는 배부른 흥정하던 일이 속에 걸렸다. (자식, 이번에야 말을 듣겠지. 소궁둥이를 치고 있겠어? 시내에 들어와서 구입원을 하면 돈도 벌고 정희와 함께 한 시내에서 살면 좀 좋아서? 흥!) 승호는 그날로 구입과 소형자동차를 몰고 행인들한테 길을 물으면서 태평거촌으로 쏜살같이 달려갔다. 그는 태평거촌에 이르러 늙은 비술나무 아래 차를 세워놓고 마을을 둘러보았다. 천지꽃산의 칼날 같은 절벽이 병풍처럼 둘러선 성호의 고향 마을은 진짜 범이 새끼를 칠 듯한 심심산골이였다. (진짜 개천에서 룡이 났구나. 못난 자식, 대학을 졸업하고 이런 골 안에서 소궁둥이를 쳐?” 그는 비술나무 그늘 아래에서 한창 한담하는 로인들한테로 다가가 공손히 물었다. “말씀 물읍시다. 성호네 집을 알려주겠습니까?” 때마침 상진이 로인들 속에서 일어나 승호의  아래우를 훑어보았다. 딱 누구 같은데 기억 속에서 아물거렸다. “어디서 왔소?” “성호 대학동창생입니다.” “오, 그렇소? 난 성호 아버지요.” “안녕하십니까? 처음 뵙습니다.” 상진은 속으로 어쩜 성호처럼 생긴 동창생이 다 있는가고 이사야릇했다. 승호가 볼라니 어깨가 쩍 벌어지고 세귀눈이 부리부리한 성호 아버지는 젊었을 때 호랑이도 때려잡았을 것 같았다. “자, 우리 집에 가기요.” “성호는 어데 있습니까?” “저기 천지꽃산 골안 어구지 우사에 있을게요.” 승호는 성호 아버지를 찌프에 모시고 성호네 집으로 가면서 그간 성호의 형편을 대충 들었다. 승호는 성호네 집 마당에 이르러 찌프 뒤바곤에서 돼지고기를 꺼내 상진한테 주었다. “처음 뵙는데요. 적은대로 성의를 받으십시오.” “아니, 뭘 들고 왔소? 잘 먹겠소.” 드디여 승호는 찌프를 몰고 먼지를 새뽀얗게 일구며 곧추 서쪽 천지꽃산 골짜기 어귀로 달려갔다. 상진은 찌프차가 아물거릴 때까지 눈바램을 했다. 처음 보는 청년이지만 성호처럼 생겨서 퍽 인상이 깊었다. 진흙탕 호박길이여서 찌프차는 소사양실을 얼마 두지 않고 덜커덩 멈춰섰다. 승호는 찌프에서 내려 골안으로 헐금씨금  걸어갔다. (자식, 이런 골 안에서 소궁둥이를 쳐? 짐승은 골안으로 들이몰고 사람은 시내로 몰아라는데. 진짜 호박을 쓰고 돼지 굴에 들어온 격이구나.) 승호는 돌토성안 대문으로 들어가 커다란 우사를 들여다보고 너무 한심해 입을 쫙 벌렸다. 토성 안에 돼지무리가 우글거리고 개들이 “왕, 왕, 왕” 짖어댔다. 승호는 개들이 두려워 코 싸쥐고 멀직이 서서 우사 안을 재차 들여다보았다. “지개!” 성호는 소똥 구린내 물씬 풍기는 우사에서 한창 소똥을 치다가 주춤 일손을 멈추고 내다보았다. “승호야!” 뜻밖에 나타난 승호를 보고 성호는 소똥을 치던 삽을 구유에 기대세워놓고 대문어귀로 달려나왔다.  “성호야!”  “얘, 네가 어떻게 돼 이런 우사에 다 왔니?” 성호는 반년만에 만난 승호를 보자 손을 내밀다가 그만뒀다. “소똥이 묻은 손이 돼서…” “자식!” 승호는 성호의 손을 덥썩 잡아 흔들었다. “어떻게 사는가 보고 싶더라.” 승호는 소똥물이 튕긴 성호의 옷을 보고 상을 찡그렸다. “야, 이게 뭐야? 시내에 가서 함께 살자.” 성호는 삽을 구유에 기대 세워놓으면서 허구픈 웃음을 지었다. “난 시골이 편안해 좋아. 물고뜯는 시낸 딱 질색이야.” “에이구, 대학 졸업생이 소궁둥이를 쳐?” 성호는 기다란 소채찍을 들더니 대문을 열어제끼고 소무리를 몰아 천지꽃산으로 떠났다. 승호는 하는 수 없이 성호를 따라 천지꽃산으로 스적스적  걸어갔다.  소들은 풀을 뜯어먹으면서 천지꽃산 기슭으로 올라갔다. 어떤 소들은 성호의 눈치를 흘끔흘끔 보다가 옥수수밭으로 뛰여 들어가 옥수수이파리를 뜯어먹었다. 어떤 소들은 산기슭에 있는 혁명렬사기념비와 그  옆에 누워 있는 산소에 마구 뛰여올라가 밟았다. “저 놈 소새끼!” 성호는 돌팔매를 휙휙 날렸다. 한마리는 산소에서 달아났지만 몇마리는 계속 옥수수 이파리를 뜯어먹었다. 황급해난 성호는 사냥개들을 추겼다. “축! 축!” 사자 같은 누렁이들은 왕왕왕 짖으면서 소들한테 덮쳐갔다. 그러나 소들은 대가리를 낮추더니 사냥개들을 뜰 상했다. 황급해난 성호는 채찍을 휘두르면서 옥수수밭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금방 눈 소똥을 밟고 미끌어져 그만 허망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성호는 창피해 승호의 눈치를 흘끔 보면서 제꺽 뛰여일어났다. 궁둥이에는 시누런 소똥이 묻어 꼴불견이였다. 그는 이젠 습관됐는지 소똥을 닦을 새도 없이 소들한테로 쏜살같이 달려갔다. 옥수수밭으로 들어간 소들을 쫓아내고나니 성호의 옷은 이슬에 흠뻑 젖어버렸다. 성호는 옥수수 이파리를 훑어 엉덩이에 묻은 시누런 소똥을 쓱쓱 닦고 대수롭지도 않아했다. 그는 승호를 건너다보면서 헐레벌쭉 웃었다. “성호야, 뉘네 저렇게 밭 가운데 산소를 썼니?” 승호는 묘지 옆의 진달래를 손으로 쭉 훑다가 “아가!” 하고 새된 소리를 쳤다. 진달래 나무가시에 찔렸다. “봐라! 우리 조상들하구 큰형님이 자기 묘지 진달래를 꺾었다고 노여워 하는 모양이야.” “이건 네 형님 묘지냐?” “응, 그래. 밭도 우리 밭이야. 우리 아버진 제 집 밭에 항일투사들을 모셨구 그 아래쪽에 맏아들 산소를 썼지.” “네 큰형님은 언제 세상떴냐?” “내 나기도 전에 뇌출혈로 사망했다더라.” “오- 그래?” “큰형님은 사돈보기까지 한 약혼녀도 있었다는데 결혼도 하지 못하고 사망했다더라.” “쯧쯧, 참 안됐구나.” 승호는 그 산소를 바라보면서 머리를 끄덕였다. 그는 머리를 돌려 성호를 바라보면서 본 화제를 꺼냈다. “백화상점 구입과에 들어가서 나와 함께 일하자. 잘하면 한해에 상금까지 한 2천원 탈수 있을 거야. 정희도 아마  54원 밖에 못타는데. 2천원이면 어디 적은 돈이냐? ” “그만 둬라! 난 우사가 제일 좋아. 깡패들하구 악연을 끊으니 얼마나  편안한지 모르겠어.” 승호는 성호를 비웃었다. “대학졸업생이라는게 이런 골 안에서 소궁둥이나 쳐? 부모와 고향 사람들 볼 면목이 있니?” 성호에게는 그따위 격장법이 근본 통하지도 않았다. “빛갈 좋은 개살구 따위 무슨 소용있어? 이제 한해만 소를 치면 2천원이겠니?” 승호는 어이없어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에이유, 돈 밖에 모르는 새끼, 수전노로 돼버렸어? 사람이 돈만 따지면 눈이 어두워지는 법이야.” “돈보다 시골이 편안해서 좋단 말이야. 날마다 순진한 소들과 동무해 고향 산에 올라 시원한 산공기를 들이켜면 얼마나 가슴이 뿌듯한지 몰라. 하하하.” 승호는 자극하면 말을 듣겠는가 오해했다. “너 인생관에 문제 있어. 골 안에서 범이 물어가도 모르겠다. 우리 백화상점에 가서 한데 뭉치자.” “야, 임마, 네나 련애관을 고쳐라.” 그 말에 심장이 찔린 승호는 머리를 좀 숙이더니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였다. “고쳐야지. 네처럼 진짜 서로 사랑하는 녀자를 만나 진정한 사랑을 하면서 살고 싶구나.” 성호는 자기 귀를 의심했다. 소들은 풀을 뜯어먹으면서 순순히 천지꽃산 기슭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그들은 시름놓고 너럭바위 우에 앉아서 잠간이나마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래, 송파 깡패무리는 어떻게 됐니?” 승호는 또 한숨을 길게 내쉬였다. “전번에 은영일 륜간한 놈들은 처단됐어.” “송파는 어떻게 됐니?” “증거가 부족해 놔준 것 같아. 주악은 처음엔 송파가 시켰다해놓고 후엔 몽땅 부인했어.” “후환을 남겼구나.” 성호는 한숨을 길게 내쉬였다. “이번엔 뿌리 뽑혔다. 허철만 서기도 철직맞았어. 그런데 그 놈새끼 계속 코수염쟁이랑 멀쑥이랑 시켜서 날 못살게 굴어.” 그는 전번에 코수염쟁이와 멀쑥이 등 무리가 집에까지 찾아와 행패를 부린 일을 쭉 이야기했다. 성호는 바위 우에 서서 멀리 내다보더니 한숨을 길게 내쉬였다. (자식, 허서기랑 누구한테 끝장 난 걸 알기나 하면서 종알거려? 흥!) 그는 코방귀를 뀌더니 몸을 승호 쪽으로 돌렸다. “승호야, 백화상점을 즉시 떠나라. 지금 위험해.” “무슨 소리야? 경옥의 어머닌 생각 밖으로 흉금이 넓은 분이더라.” 그는 안수련 총경리와 나눈 이야기도 상세히 말했다. 성호는 도리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니야. 안팎이 다른 사람이 더 무섭다. 미운 개한테 떡을 더 줄 수도 있잖니?” “흥!” 승호는 코방귀를 꼈다. “안경리는 딸을 짓밟은 건 괘씸하지만 사업을 개인감정으로 대하지 않는다고 하더라.” 성호는 어린애처럼 천진한 승호를 보고 갑갑했다. “생각해보았니? 널 슬쩍 제발시켜 놓고 송파 무리가 널 못살게 구는 건 나와 상관없어. 이런 묘한 발뺌 말이야.” 승호도 바보는 아니였다. “간대로?” 그는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송파가 살아있는 한 내가 무사할 리 없어. 내 옆에 네가 있으면 든든하겠는데 말이야. 우리 시내에 가서 한데 뭉치자.” 성호는 구렁텅이에 빠진 승호를 도와주고 싶었지만 소와 돼지, 개들을 어쩌고 간단 말인가? 진짜 난감했다. 그보다도 어쩐지 승호와 가까이 지내고 싶지 않았다. “넌 지금 위험하다. 백화상점을 인차 떠나라. 아무리 세집을 옮겨도 쓸데 없어. 깡패들은 네 뒤를 밟아 계속 박살낼 거야.” 승호는 성호의 예리한 분석에 머리를 끄덕였다. 승호는 자기 설계한 방어선이 물거품으로 되는 것을 실감했다. 그는 성이 나 씩씨거리면서 발길로 바위 틈에 자란 애어린 진달래를 마구 걷어찼다. “야, 바위틈에서 얼마나 의악스레 자란 진달랜데 걷어차?” 승호는 개의치 않고 “권총만 있었으면 그 놈새끼들이 무섭지 않겠는데.” 하고 또 걷어찼다. “앗!” 승호는 발길질하다가 그만 소똥을 밟고 허망 엉덩방아를 찧었다. 재수없는 놈은 뒤로 번져져도 코등을 깬다고 승호는 칼날같이 뾰족뾰족한 나무그루가시에 엉덩이를  찔려 오만상을 다 찡그렸다. 성호는 코웃음쳤다. “야, 야들야들한 진달래라고 업신여기지 말라. 우리 고향산에 자란 진달래는 키는 크지 않고 수수하게 생겼지만 생명력이 아주 강한 꽃나무야. 걸 봐라, 바위틈에도 뿌리 박고 악착같이 살아남지 않았니? ” 승호는 진달래를 산에서 처음 보았다. 꽃은 진지 오래고 수수한 이파리만 앙상한 가지에 붙어있을뿐이였다. 그리 희한한 꽃도 아니건만 성호가 장황히 춰올리는 것이 우스웠다. “진달래도 가시 돋쳤나?” “아니야. 그러나 자기를 못살게 구는 놈만 보면 사정없이 찔러주지. 허허허.” 승호는 피 즐벅한 엉덩이를 씃더니 일어나면서 “어참, 재수 없어.” 하고 두덜거렸다. 말 속에 말이 있는 성호의 그 말은 바늘처럼 승호의 마음을 아프게 찔렀다. 성호는 너럭바위 우에 올라가 서더니 길다란 채찍을 잽싸게 휙휙 휘둘렀다. 쨩! 쨩! 쨩! 성호는 소를 몰면서 노래를 구성지게 불렀다.   진달래 곱게 피면 다시 온다고 이 손을 잡던 그 사람 갈대가 흐느끼는 가을이 가도 울리고 떠나간 그 사람…   성호는 천지꽃산에서 소를 방목할 때도 답답한 심정을 달래려고 항상 바위에 서서 고향산 아래 들과 벌 그리고 사래긴 밭을 내려다보면서 어떻게 하면 돈을 벌어 이 농촌을 떠나겠는가 궁리하며 노래를 부르고 또 불렀다. 노래를 부르고나면 이상하게 갑갑하던 가슴이 열리고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이 시각 성호는 승호와 자기 처지가 너무 갑갑해 노래를 부르고 또 불렀다. 승호도 멋을 모르고 성호를 따라 코노래를 흥얼거렸다. 그렇다. 승호가 경옥이, 은영이, 홍희를 짓밟은 대가가 얼마나 큰가? 이제 또 무슨 경을 치를지 누가 알겠는가? 승호는 성호와 갈라져 돌아온 후에도 불운의 운명을 순순히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성호한테 코를 떼우자 궁리 끝에 범송을 방패막이로 점찍었다. “꺽다린 씨름도 잘했지.” 일요일에 승호는 종수를 불러 정희와 범송이 교편을 잡은 천수해중학교로 놀러 갔다. 승호는 찌프에 돼지고기랑 맥주상자랑 주어싣고 신문사에 들려 종수를 싣고 천수해로 쏜살같이 달려갔다. 천수해중학교 당징실에서 쉽게 범송을 찾을 수 있었다. 범송은 당직실 문을 열고 그들을 데리고 들어갔다. “이게 숙사야.” 승호와 종수는 입을 딱 벌렸다. 6평방메터 되나마나 한 당직실 외통방에서 당직교원이 앉아 있는 책상 옆에 침대가 놓여있고 침대 머리에 놓인 자그마한 책궤 우에 이불과 요가 달랑 놓여있었다. 범송이 그들을 데리고 들어가자 당직교원은 바깥으로 훌 나가버렸다. “간고하구나.” 승호는 돼지고기를 들고 어디에 놓을가 서성거리면서 당직실 구석에 놓인 쟁개비와 전기밥가마를 보면서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뭘 사들고 왔니?” 범송은 돼지고기를 쟁개비 안에 놓고 돌아서더니 “우리 식당에 가서 한잔 하자. 여기서 언제 저 걸 끓여 먹겠니?”라고 했다. 범송은 일요일에 불시에 나타난 승호와 종수를 보고 반갑게 인사하면서도  이상해했다. (무슨 바람이 불어서 여기까지 찾아왔지?) 범송은 대학교 때부터 승호를 인간적으로 썩 좋아하지 않았다. 미꾸라지처럼 매그러운 승호한테 꼭 밑지고 마니깐. 승호는 종수와 범송을 찌프에 태우고 천수해식당으로 달려갔다. “정희도 데리고 오겠는 걸.” 종수의 말에 승호는 코방귀를 뀌였다. “놔둬라. 괜히 주흥을 깨뜨리겠다.” 승호의 말이 지나치긴 했지만 모두 함구무언하였다. 그들도 승호와 정희 알륵을 알고 있었다. 원래 승호는 교수네 규수이자 예쁘고 활발한 정희를 눈독 들이고 호시탐탐 손에 넣을 기회를 노렸다. 그는 문예위원인 정희를 학생회에서 회의를 할 때면 스리슬쩍 건드렸다. 그러나 정희는 홍희를 치근거리면서도 자기를 지껄이는 승호가 역겨워 곁을 주지 않았다. 비록 과장네 아들이고 학생회 체육위원이였지만 그녀는 승호와  금을 그어놓고 지냈다. 정희는 승호가 찌프를 몰고 교정에 들어서는 것을 진작 보았다. 또 한 교연실의  범송을 복도에서 만나 데리고 가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왕따 된 기분보다도 부르지 않아 더 홀가분했다. 승호는 곁을 주지 않는 정희가 아니꼬와 부르지도 않았던 것이다. 해가 서쪽에서 뜨는가? 뜻밖에도 승호가 통이 크게 한상 차리지 않겠는가. 범송은 성호 생각이 났다. “야, 정희도 우리 학교에 있는데 일요일이 돼서 아마 성호네 집으로 간 것 같아. 정희와 성호도 데려오면 좋겠는데.” 승호는 코방귀를 뀌였다. “그만둬라. 언제 걔까지 데려오겠니.” 범송은 일어나 승호의 팔소매를 당겨 일궈세우려고 했다. “좋은 찌프를 뒀다 뭘 하니? 10분에서 더 걸리겠니? 어서 갔다가 오라.” 승호는 일어설 념도 하지 않았다. “어제 갔다 왔어. 걔는 소궁둥이를 치다나니 올 새도 없어.”  그는 찌프에 싣고 간 맥주를 한병 따서 종수와 범송의 잔에 찰찰 넘치게 따랐다. “자, 오랜만에 만났는데 시원하게 한잔 마시자.” “감사하다.” 범송이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 종수는 술잔을 들고 승호를 마주 보았다. “승호가 이번에 백화상점 구입과 과장으로 제발된 걸 축하해 한잔 들자.” 사실 “승호가 깡패들한테 병신이 된 내막”을 종수가 삐라로 찍어 온 시내에 뿌리지 않았더라도 가능하게 성호는 수사대대로 들어갔을지도 모른다. 종수는 악의적으로 삐라를 날린 건 아니였지만 성호에게 죄송했다. 승호는 범송의 앞에 돼지고기점을 집어놓았다. “당직실에 있으면서 얼마나 고생했니? 많이 먹어라.” 범송은 돼지고기점을 우물우물 씹더니 고생살이를 늘여놓았다. “야, 이 놈 독신생활이 언제 끝나겠는지 진짜 말이 아니야. 코흘리개들과 맨날 교탁이나 두드려대면서 장난치지 말라고 목이 쉬게 경찰질을 해야지. 자기절로  전기밥가마에 밥을 해먹어야지. 강에 가서 옷을 씻어입어야지. 이젠 신물이 난다.” 승호는 찾아온 본의를 말할까하다가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꿀꺽 삼켜버렸다. 너무 이른 것 같아서였다. “자, 그간 고생했는데 한잔 들자.” 승호는 범송과 종수의 잔에 술을 따랐다. 그들 셋은 맥주잔을 들어 꿀꺽꿀꺽 마셨다. 범송은 학교 숙사생활이 힘들어 술맛이 없어 한숨을 풀풀 내쉬였다. 그때라고 승호가 홀딱 벗고 나섰다. “범송아, 이 학교에 어떻게 있겠니? 차라리 우리 백화상점에 가자.” 종수도 맞장구를 쳤다. “옳다. 당장 전근해라. 우리 시내에 모여 살자.” 범송은 승호를 멍하니 건너다보면서 “감사하다. 갈 수만 있으면 얼마나 좋겠니?”라고 하더니 승호의 맥주잔에 술을 따랐다. “근심하지 말라. 내 총경리하구 부탁하면 될거야. 우리 서로 의지해 살자.” 범송은 승호의 두 손을 꽉 잡았다. 흐뭇해난 승호는 그날 점심에 술을 취토록 마시고 찌프를 어떻게 몰고 백화상점으로 돌아왔는지 몰랐다. 이튿날 그는 범송을 데리고 안수련 총경리한테 가서 범송을 구입과에 전근시킬 의향을 회보했다. 안수련 총경리는 훤칠한 범송을 첫눈에 마음에 들어 동의했다. 승호는 아예 범송을 자기 매부로 만들어 혈연적으로 얽어놓으려고 마음먹었다. 그가 의향을 내비치자 범송은 대뜸 이게 웬 떡이냐고 맞선을 보자고 나섰다. 일이 되자고 그랬는지 선금도 훤칠한 범송을 보자마자 마음에 들어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범송과 선금은 부모의 동의를 거쳐 국경절 쯤에 사돈보기를 하고 양력설 쯤에 결혼하기로 했다. 범송은 승호 덕분에 백화상점 구입과에 진출했을뿐만아니라 승호의 녀동생 선금과 결혼하게 돼 입이 합박만해질 지경이였다. 승호는 코노래를 흥얼거리며 일하는 범송의 모습을 보다가 불시에  성호의 모습이 떠올랐다. 자전거를 타고 물고기를 팔러 다니는 보따리장사군, 천지꽃산에서 소채찍을 쨩쨩 울리며 소방목을 하는 루추한 꼴이  떠올랐던 것이다. (흥, 성호야, 세상에 후회약은 없어.)  
136    대하소설 진달래 소야곡(16) 댓글:  조회:1274  추천:0  2018-04-23
             30. 둥지 새들도 둥지가 있는데 황차 사랑하는 신혼부부야 첫날이불을 펼 자그마한 집이라도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성호와 정희의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시내에 엉덩이를 들여놓을 손바닥만한 집마저 없었다. 핍박에 의해 량산에 오른다고 그들은 태평거촌에 있는 부모의 집에서 밀월을 보내야만 했다. 개학하자 정희는 태평거촌에 있는 시부모의 집으로 부터 10여리 떨어진 천수해중학교로 통근해야 했다. 눈풍설이 미친듯이 이는 날에도 아녀자의 몸으로 자전거를 타고 통근하기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였다. 자전거를 타고 힘겹게 퇴근한 정희는 구들에 맥없이 물앉아 성호를 쳐다보며 조용히 물었다. “친정집에 가서 있으면 어떨가요?” 성호는 눈이 데꾼해졌다. “내 처가살이를 하란 말이요?” “그럼 난 출근하지 말고 태평거촌에서 당신만 쳐다보고 살란 말인가요?” 성호는 한숨을 후~ 내쉬였다. “천수해에 세집을 잡으면 어떻소?” 정희는 한참 궁리하더니 간신히 입을 열었다. “좋아요. 허나 세집도 어디 그리 쉽게 찾을 수 있겠어요?” 정희는 성호의 가래짝 같은 손을 잡고 정답게 입을 열었다. “세집 찾기 전에 친정집에 가 있으면 어때요? 녜? 친정집으로부터 천수해까진 포장도론데다 눈이 내리면 도로공사에서 말끔히 치니까. 자전거를 타고 통근하기 더 편리할 것 같아요. 여기 태평거촌으로부터 천수해까진 흙길인데다가 눈이 내리면 치지 않아 다니기 힘들어요. 이제 봄부터 비가 내리면 자전거를 어떻게 타요? 매일 왕복 20여리를 아녀자 몸으로 통근하는게 불쌍하지 않아요?” “어찌 처가살일 해?” “자리 보고 다리를 펴라고 가시집에 놀러 간 셈 치세요.” 성호는 뒤더수기를 긁적거렸다. “가시아버지 눈치 보인단 말이요. 원래 농민 아들이라고 우리 결혼 반대하지 않았소?” “또, 또.” 정희는 길다란 손으로 성호의 입을 막았다. “이젠 그런 말 하지 마. 결혼 전에 한 말 계속 외우는 건 좀 그렇죠.” “에헴.” 성호는 주먹으로 입을 막으면서 헛기침을 했다. 정희는 신랑의 두 손을 꼭 잡았다. “눈을 질끈 감고 우리 집에 가 한동안 있으면서 세집을 찾아보자요.’ 성호는 묵묵부답했다. 집 안에는 납덩이 같은 침묵이 흘렀다. 한참 후 성호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코구멍만한 세집으로 저 큰 이불장이랑 어떻게 끌고 다니겠소?” “여기 잠시 두면 되죠.” “이러면 어떻소?” 성호는 무슨 생각이 들었던지 “제나 본가집에 가서 출근하오.” 하고 말했다. “동문?” “여기서 소와 돼지를 치면서 경제토대를 닦아야겠소.” 정희는 어처구니 없어 앵두입을 함박만큼 짝 벌렸다. “이제 결혼한지 며칠이라고 생리별하겠어요? 저 보고 싶지 않겠나요?” “그립긴 하겠지. 별 수 있소? 일요일이면 우리 집에서 만나면 되지.” “일주일에 하루 부부로 되려는 건가요?” “일주일에 한번씩 만나도 리별의 아픔과 상봉의 기쁨을 맛볼 수 있는게 얼마나 좋소?” “쳇, 어처구니 없어서, 원.” 정희는 파랗게 질린 얼굴을 징그리면서 곱게 흘겨보았다. 그러나 성호는 개의치 않고 중얼거렸다. “어쩌다 만나면 사랑도 더 열렬할 거야. 그리운 정은 진한 사랑으로 승화하고.” “하루라도 떨어지기 싫은데요. 쉽지 않을 걸.” 정희는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는 창문 밖을 내다보면서 한숨을 호~ 내쉬였다. “눈이 내리면 뻐스가 통하지 않겠는데.” “하느님이 우릴 도울 거야.” 정희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면서 머리를 숙였다. 그녀는 성호는 고집이 웬간하지 않아 벽이라도 마구 차고 나갈 성질이라는 것을 알고도 남음이 있었다. 성호는 정희에게는 속에 걸리는 것이 많았다. 남들처럼 사돈보기를 해주었는가, 결혼기념품으로 금반지라도 사줬는가. 아무 것도 해준 것이 없지 않는가. 그러나 가시집에서는 정희가 무남독녀라고 옷장으로, 이불장으로, 례단까지 푸짐히 갖춰 보냈다. 더군다나 하나 밖에 없는 사위라고 자전거까지 사주었다. 결혼식날에 온 마을 사람들은 성호네 집에 모여 구경하고 색시가 예뻐서 술맛이 좋다고들 했다. 시내에 가서 복장점과 양고기뀀집을 차린 순희와 철주 부부는 음력설을 쇠려고 고향에 돌아왔다. 그녀는 성호가 자동차에 색시를 싣고 와서 내리는 것을 구경하면서 “질투”의 눈길까지 보냈다. 성호는 정희가 결혼식 이튿날에 젖값을 두고 벌어진 일을 잊을 수 없었다. 정희가 웃방에서 화장을 하고 있을 때 어머니가 들어와 보따리에서 옷감을 두개 꺼내 정희한테 주면서 “본가집 어머니 젖값으로 가져가오.”라고 했다. 그때 다섯째 은자가 문을 뚝 떼고 들어오더니 주책없이 끼여들었다. “엄마, 성호 가시어머니한테 옷감 한벌 더 보냅소. 올케 숱한 례단을 가지고 왔는데 젖값을 고걸 보내 됩둥?” 원래 그런 일은 어머니가 결정하면 그대로 하는 것이 옳았다. 또 만약 토론이 필요하다고 해도 새 색시가 없을 때 조용히 토론하는 것이 옳았다. 그런데 영옥은 딸이 주책없이 끼어드는 바람에 색시를 념두에 두지 못하고 핀잔을 주었다. “젖값은 내가 결정할 일이지. 네가 왜 끼여드니? 저게면 됐다.” 왜 그랬을가? 무남독녀 교수네 귀한 딸을 데려왔으면 고까짓 젖값으로 옷 한벌을 더 줘보내면 뭐라는가? 기어이 자기 소견대로 옷감 두개를 주고 말았다. 정희는 그 자리에서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은자가 주책없이 끼어드는 바람에 은자는 인심을 냈지만 시어머니 영옥은 미움개를 사게 되지 않았는가. 집안이 화목하려면 제일간 고부 사이가 화목해야 했다. 그런데 이 일로 해 고부 사이가 벌어질가봐 저으기 근심됐다. 비록 정희는 속에 꼭 넣고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성호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에서 그녀의 얼굴에서 모든 속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그는 미안해 될수 있는 한 처가살이를 하지 않으려고 했다. 더는 정희의 걀죽한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는 일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결혼 첫날밤에 정희의 걀죽한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보고 마음이 아팠다. 복잡한 결혼행사를 마치고 밤중이 되여서야 그들은 첫날이불을 편 조용한 웃방에 단둘이 마주 앉을 수 있었다. “곤하구만, 우리 잘가?” 정희는 머리를 끄덕이면서 성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성호는 희미한 전등불빛 아래 꽃너울을 쓴 정희가 그렇게 예쁠 수 없었다. 그는 저도 몰래 다가앉으면서 정희를 꽉 끌어안았다. “너울을 벗겨주세요.” “그래.” 성호는 정희의 머리 우에 10여시간이나 얹혀 있은 꽃노을을 벗겨 벽 옷 걸이에  걸어놓았다. 그때 첫날색시 대반을 섰던 막내누나 성숙이 노크하고 들어왔다. “성호, 각시 저고리 고름을 풀어줘라.” 성호는 씨무룩이 웃었고 정희는 부끄러워 머리를 숙였다. 막내누나가 나가자 성호는 시키는 서방질을 해나갔다. 그가 넉가래 같은 손으로 정희의 저고리 옷고름을 더듬어 풀어 스르르 당겼다. 그러자 정희는 걀죽한 얼굴에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지금 왜 우오?” 정희는 도리머리를 살래살래 저었다. “후회되오?” 정희는 저고리 팔소매를 잡아당겨 팔을 빼면서 성호의 귀에 대고 조용히 속삭였다. “너무 행복해서요. 이젠 끝내 당신 색시로 됐구만요. 널 끝내 내 신랑으로 만들었어.” “영원히 후회하지 않지?” “후회란 말 이젠 다시 하지 마세요. 너무너무 행복해요.” 정희는 성호의 품에 얼굴을 묻으면서 속삭였다. “사랑해, 내 신랑 성호!” “사랑하오, 정희.” 성호는 그녀를 누구한테 빼앗기기라도 할가봐 두려운듯이 꼭 껴안고 놓지 않았다. 정희는 분명 흐느끼면서 온몸을 떨고 있었다… 성호는 사랑스런 정희의 걀죽한 얼굴에 다신 눈물을 흘리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어찌 결혼하자마자 가시집에 기여든단 말인가.  그는 가시집에서 사준 자전거를 타기도 미안했다. (당당한 사내가 가시집 신세에 자전거를 타?) 정희는 성호의 그런 속내를 꿰뚫어보고 “개학 첫날에 지각하겠어요. 저를 천수해까지 자전거로 실어다주겠어요?”라고 했다. 성호는 눈이 내리는 바깥을 내다보면서 한숨을 후~ 내쉬였다. 뻐스를 기다려서는 근본 시간이 안됐다. 성호는 용빼는 수가 없어 자전거에 색시를 태우고 시내로 달려갔다. 눈길이여서 속도를 죽였지만 반시간 푼히 달려 시내 중학교 대문 앞에 이르렀다. “오늘 실어왔으면 다야. 본가집에 가서 있소.” “잠간만!” 정희는 자전거를 타고 돌아가려는 성호를 보고 한쪽 골목으로 데리고 가서 나직이 말했다. “시내에 일을 보러 오면 들러요. 그래 가시집에 놀러 오지도 않겠어요? 친정부모한테도 인사하면 좋지 않아요? 이모부가 송파 무리를 감시하라는 일 그만두면 어때요? 괜히 앞뒤집에서 사는 우리까지 보복당하겠어요.” 정희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고 있지 않겠는가. “공안국에 갈 거 같지도 못한데 괜히 삐치지 말아요. 승호 아버지 뒤처리를 하지 않으리라고 그래요?” 그러나 성호는 굳은 표정을 지었다. “아니요. 송파네 깡패무리를 제거하지 않고는 승호와 은영, 아니, 숱한 사람들이  편안히 살 수 없소.” 성호의 성질을 아는지라 정희는 화제를 돌렸다. “가시집에 살기 싫으면 세집이나 찾아봐요. 송파네를 감시하는 일은 아빠 보고 도와달라고 할게요.” “가시아버지?” 정희는 머리를 끄덕였다. “아버진 공학원 교수이기에 최첨단기술로 송파를 감시할 수 있어요.” 성호는 뜻밖의 말에 놀랐다. “눈길에 조심해 다녀가요.” 성호는 생글방글 웃음 지으며 손을 흔드는 색시를 뒤에 두고 눈풍설을 맞받아 힘겹게 페달을 밟았다. 성호는 가시집에 있기보다 세집을 잡으면 정희도 편리하고 고향의 부모를 자주 들여다볼 수 있어 좋을 것 같았다. 며칠 후 그는 천수해 시내에 내려와서 세집 같은 집이 있기만 하면 무작정 문을  두드리고 들어가 세집을 주지 않겠는가고 물었다. 그렇게 반나절이나 돌아다녀도 세집을 찾기란 참 힘들었다. 성호는 집 한칸도 없는 고통을 통절히 느꼈다. 새도 둥지가 있는데 황차 만물의 령장이란 사람이, 그것도 80년대 초 대학졸업생이 첫날이불을 펼만한 손바닥만한 집도 없으니 말이다. 딱 마치 허허벌판에 허망 나앉은 신세 같았다. 아니, 집구걸을 다니는 거지 같은 감까지 들었다. 이젠 남의 집 문을 두드리고 세집을 주지 않겠는가고 묻기도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래도 세집을 얻어야지.) 성호는 골목을 두루 살피면서 돌아다니다가 뉘네 원집 앞에 지은 낮다란 창고가 별로 세집 같아보였다. (그래, 구들만 있으면 요만한 창고에서라도 살 수 있지.) 성호는 일루의 희망을 품고 원집의 문을 똑똑똑 두드렸다. “계십니까?” 그는 문을 여는 사람을 보지도 않고 “세집을 주지 않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어마나!’ 그제야 머리를 든 성호도 놀랐다. 선녀음식점의 주인 선화가 아니겠는가. “어서 들어오세요.” 성호는 창피해 머리가 화끈 달아올랐다. “아니, 아니, 잘못 봤구먼.” 성호는 세집을 구하려 온 말을 하지도 못하고 황급히 몸을 돌려 도망쳤다. 그러나 선화는 끌신을 짝짝 끌고 뒤따라 나왔다. “성호, 결혼했나 보지? 세집 얻으러 다니는 걸 보니.” “아니야, 친구가 얻어달라고 해서. 그래.” “그래? 오빠, 잠간!” “?” 성호가 주춤 멈춰서자 뒤따라온 선화는 성호의 팔소매를 잡아당겼다. “온바하고 이 집 보고 가오.” 그녀는 성호의 비길데 없는 심정은 모르고 집문을 열어보였다. “오빠, 이걸 보오. 이 집은 내 시집가면 아빠가 세간내려던 집이요. 지금 비였으니까. 어떤 친구인지 세를 주지.” 성호가 들여다보니 10평방메터도 되나마나 한 창고 같은 집에 구들을 놓고 반질반질한 쇠가마까지 두개 걸어놓았었다. 그만한 집이면 세간살이는 넉근히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성호는 자존심이 상해 선화네 집 마당에 와서 세집살이를 할 수는 없었다. “감사하오. 친구하고 말해보고 다시 찾아오든지. 만약 소식이 없으면 그만 둔 걸로 아오.” “알았어요. 신문에까지 난 정의용사, 식당에 좀 자주 와요.” “그래오.” 성호는 날 살려라고 황급히 위축감과 창피함이 휘몰아치는 그 자리에서 간신히 발뺌을 했다. 다른 골목에 굽어들어 한숨을 후~ 내쉬였다. 순간 잔등에 식은땀이 후줄근히 내뱄다. (아, 제 집이 없이 세집살이 한다는 건 정말 피눈물 나는 일이구나. 창피해 어디 시내에서 살겠니?) 성호는 세집이고 뭐고 그만두고 자전거를 타고 시내에서 달아나고 말았다. 쏜살같이 달리는 자전거 뒤로 비운의 눈발이 흩날렸다. 아니, 돈 없고 집도 없는 성호의 쓸쓸한 마음이 갈기갈기 찢어져 하얗게 흩날리고 있었다. 집에 돌아와 성호는 텅텅 빈 웃방에 들누워 천정을 쳐다보았다. (세집살이는 피눈물 나는 하루살이야. 한 2~3천원이면 덩그런 집 한채를 사서 보란듯이 살겠는데.) 그는 더는 정희에게 실망을 안겨주고 싶지 않았다. 순간 일전에 정희가 하던 말소리가 귀전을 아프게 때렸다.  “일요일 쯤엔 세집에라도 들어 살자요. 신혼부부가 어떻게 항상 갈라 살겠어요?”                                                      31. 장사군 성호는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는 고향 산천을 둘러보면서 꿈과 현실의 지나친 불균형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떨쳐버리려고 모지름을 썼다. 웬 일일가? 갑자기 그의 눈 앞에 결혼 때 찾아왔던 20여명 조카들 가운데서 둘째누님네 맏아들 정춘의 하얀 우유빛얼굴이 떠올랐다. “자식, 이젠 열일곱살. 전 시에서 4등으로 고중에 입학했다면서. 성과 시 3호학생! 얼마나 우수한 조카인가. 정일도 이젠 초중 2학년생이라지. 이젠 다 컸구나.” 키가 훤칠한 정춘은 중학교 때부터 달래기를 아주 잘했다. 긴 다리로 성큼성큼 어찌나 가볍게 달리는지 전문 륙상선수를 방불케 했다. 순간 성호는 길림에 있는 둘째누나 춘자와 매형 홍수, 정춘과 정일, 넷째누나 봉금과 송준, 영희와 근봉이 보고 싶었다. 순간 그의 눈 앞에는 문뜩 초생달이 걸린 밤에 정춘을 앞세우고  아래집 영화를 만나보던 일도 떠올랐다. 그때 성호는 영화의 남동생 송철한테 권투를 배워주었다. 영화는 어글어글한 눈을 치켜뜨고 말렸다. “오빠, 싸움질해 머리 아픈데요. 권투까지 배워주면 매일 싸움질하라고?” 그러나 성호는 고집을 부렸다. “부모도 없이 불쌍하게 자라는 송철이 업신여김을 당하게 말아야지.” “맞아요. 내 주먹이 세면 정춘이랑 맞아대면 말려줅게요.” 송철은 어깨 으쓱해 했다. 성호는 자기 안속이 따로 있었다. (송철한테 권투를 배워주는 척하면서 영화를 만나볼 수 있어 일거량득이 아닌가.) 영화도 성호의 말에 일리 있어보였는지 더 말리지 않았다. 춘자와 홍수는 대학때 동창생이였다. 그들은 부모한테 빚을 지우지 않으려고 결혼잔치 큰상도 받지 않았다. 사람이 평생 첫돌생일상으로부터 결혼잔치 큰상, 회갑상까지 큰상을 모두 3개 받는다고 한다. 그런데 그들은 부모형제가 그렇게 받으라는 결혼잔치 큰상도 기어이 받지 않고 그저 결혼술상으로 대체했다. 춘자는 항상 막내동생인 성호의 학습을 지도해주었고 인생의 앞길을 밝혀주었다. 어떻게 보면 춘자는 성호의 앞길을 비춰주는 등대와도 같았고 파도가 세찬 망망한 인생의 바다를 헤가르며 나가는 성호의 키잡이나 다름없었다. 춘자는 막내동생이 영화를 좋아하는 것 같은 눈치를 채자 말렸다. “대학졸업생이 어찌 고중생 민영교원과 련애해? 장차 시내호구로 올리기도 힘들고 전도를 그르치게 돼.” 누나의 랭정한 말에 성호도 랭정히 고려하게 됐다. 이제껏 둘째누나의 말이라면 죽으라는 말 내놓고는 다 들어온 그였다. 춘자와 홍수는 북대황에 가서 대학교실습을 마치고 길림지구 한 자그마한 진의 농업보급소에 배치받았다. 춘자는 낮에는 남편과  한 책상에 마주 앉아 일하고 밤이면 임신한 몸으로 습한 사무실에서 새우잠을 자야 했다. 심지어 밥을 지을 부엌이  없어 직원들의 식당에 가서 근근득식하면서 살았다. 11월이면 당장 첫애를 낳게 돼 그들은 할 수 없이 39원을 주고 7평방메터 밖에 안되는 세집을 맡고 나갔다. 11월 11일에 그 비좁은 세집에서 본가집 어머니 영옥이 와서 조산부로 돼 손수 정춘을 받아냈다. 춘자는 낳은지 11달 밖에 안되는 정춘을 시집에 보내 시어머니를 보고 봐달라고 했다. 그런데 시어머니는 몇달이 안돼 애를 못 보겠다고 했다. 홍수는 난지 10달만에 아버지를 여의였다. 홍수는 크면서 다른 애들은 다 아버지 있는데 왜 자기는 아버지가 없는가고 하는가 했다. 심지어 어머니를 보고 돈 200원을 주고 아버지를 사달라고 떼를 쓰면서 울었다고 한다. 그런데 정춘이 밥을 먹을 때나 잘 때나 아버지 사진을 안고 울어서 불쌍해 못 보겠다고 했다. 설상가상 둘째 정일이 생겨서 춘자는 정일을 업고 정춘을 안고 소학교로 출근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본가집에서 한 마을에 이사해온 후 영옥이 애들을 봐주어서 한 1년은 무사히 보냈다. 정춘은 어릴 때부터 아주 참했다. 항상 할머니네 집에 갈 때면 꼭 기차표를 손에 쥐고야 렬차에 올랐다. 후에 커서도 절대 도적렬차를 타지 않은 참하고 성실한 애였다. 초중을 다닐 때 농촌의 한 동창생 부모가 좋은 종자를 사기 힘들어하자 현 종자공사에 다니는 아버지한테 부탁해 해결해주었다. 가을에 대풍작을 거둔 동창생의 아버지는 산에서 손수 캔 신선한 버섯을 아들한테 보내왔다… 성호의 마음은 어느덧 누나와 조카들이 있는 송화강변에 날아갔다. 순간 그의 머리 속에는 정춘을 시켜 영화를 불러내 초생달이 뜬 송화강변에 가서 빨래를 하며 이야기를 주고 받던 일이 삼삼히 떠올랐다. “쳇!’ 순간 성호는 모기에게 종아리를 물리면서도 영화 옆에 앉아 있던 자기 모습을 떠올리면서 허구픈 웃음을 지었다. “송화강, 송화호! 물고기도 많았지.” 그는 정춘과 송철을 데리고 물고기를 잡던 일로, 영화가 끓인 물고기 된장국을 후후 불면서 맛있게 먹던 일도 떠올랐다. “지금쯤은 송화강과 송화호가 떵떵 얼었겠지.” 순간 그는 무릎을 탁 쳤다. “그래, 지금 한창 겨울 물고기잡이철이야.’ 성호는 수많은 아이디어가 꼬리를 물고 떠올랐다. (송화호에 가서 물고기를 고향에 가져다 팔면 어떨가? 만약 장사가 잘 되면 세집 값이라도 장만할 수 있잖겠는가? 시내에 집을 한채 척 사놓고 정희를 데리고 보모를 모시고 남들이 보란듯이 알콩달콩 살아야지! 그래, 경제시대에는 돈이 살림살이 토대야.) 성호는 물고기장사를 할 일념에 가슴이 한껏 부풀어올랐다. 그는 집으로 돌아와 아버지와 부림소를 팔자는 말을 해야겠는데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부림소는 농사군의 목숨과 같았기 때문이였다. 그는 먼저 태평거촌에 있는 상점으로 가서 물고기 있는가 살펴보았다. 상점 매대에는 고마이로 보이는 물고기가 몇개 있긴 했다. 그러나 어찌나 들여온지 오랜지 절고 부스러져 물고기 원 모습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런 물고기 부스러기를 둬개 사왔다. 어머니가 정성스레 기름에 볶아 담아 밥상에 올렸지만 죽은지 오랜 물고기 부스러기가 어찌나 짠지 소금덩이를 씹는 것만 같아 고기맛이 나지 않았다. (송화호 생신한 물고기를 고향 사람들한테 가져다 팔면 좀 좋겠는가. 음력설과 보름에 잘 팔릴 거야.) 성호는 큰 마음을 먹고 물고기장사를 할 생각을 털어놓았다. “물고기장사라도 해서 집을 사야지. 어떻게 세집살이를 하겠습니까? 아버지, 소를 팔깁소.” 상진은 대뜸 화를 냈다. “야, 부림소를 팔고 새 해 농사를 어떻게 짓니?” 영옥도 말렸다. “야, 그만 둬라. 옛날 아버지 장사해서 쫄딱 망했다.” 상진도 사정했다. “넌 대학을 나왔으니 배운 지식으로 살 궁리를 해라. 장사라는게 어디 그리 쉬운 일이냐?” 영옥은 더 한심한 말을 했다. “장사를 해서 내남이 다 돈을 벌 수 있으면 다 부자로 됐지.” 상진은 “금의환향한다더니. 쯧쯧쯧, 어쩜 아버지를 초과하지 못하느냐?” 하고 여간 안타까워 하지 않았다. 성호는 아버지 고민을 짐작할 수 있었다. “아버지, 내라고 대학졸업장을 그저 버리겠습니까? 장사를 해서 살림집이나 갖춰놓고 아무 사업이라도 할 작정입니다.” “피는 못 속여. 어쩜 딱 날 떼닮았니?” 아버지가 아무리 말려도 성호는 자기 꿈을 접을 수 없었다. “아버지, 근심하지 맙소. 개혁개방세월에 그까짓 대학졸업장에 매달려 산다는 건 낡은 고정관념입구마. 장사 해서 경제토대를 닦으면 장차 월급쟁이들보다 부모를 더 잘 모시고 행복하게 살 수 있습구마.” 그는 부모가 말리는 것도 무릅쓰고 사랑방에 들어가더니 마대 둬개를 가방에 넣어가지고 길림으로 떠났다. 호주머니에는 “정의용사” 상금 100여원 밖에 없었다. 상진은 속으로 은근히 자기 능력으로 앞길을 개척하려는 막내아들을 장하게 생각하였다. 만약 그가 천룡해 국장과 한마디만 사정하면 성호가 공안국 수사대원으로 들어가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수도 있었다. 그러나 지청구를 들이대지 않는 막내아들이 장했다. 한편 성호는 둘째누나네 집에 들리지 않고 곧추 송화호로 달려갔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물고기장사를 하러 왔다고 하면 누나나 매형이 기필코 동의할리 만무했다. 또 영화와 더 걸버무리지 않으려는 다짐도 했다. 그는 해지기 전에 곧추 송화호에 달려갔다. 과연 바다와도 같이 넓은 송화호에는 물고기장사군들이 여러가지 물고기를 팔고 있었다. 성호는 언 련어 한근에 30전씩 250근 사서 두 마대에 꼴똑 담았다. 그는 아주 로련한 솜씨로 삯짐군에게 삯을 6원 주고 당나귀차에 물고기를 실어 길림역에 와서 고향에 부치기까지 했다. 그가 이튿날 아침에 고향 역에서 내려 화물처로 가 보니 글쎄 물고기 두마대가 벌써 화물처에 와 있었다. (살았다.) 성호는 곤기를 잊고 종주먹을 쥐고 반달음쳐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아침 숟가락을 놓기 바쁘게 외양간에 나가 소를 풀어 수레에 메웠다. “야, 어디로 가니? 소를 팔아선 절대 안돼!’ 상진은 근심이 태산 같았다. “근심맙소. 길림에서 사온 물고기를 실으러 갑구마.” “뭐라고? 벌써 물고기를 사왔다고?” 상진은 도리머리를 홰홰 저었다. 영옥은 뒤따라나와 눈깔린 땅바닥에 풀썩 물앉아버렸다. “아이구, 저 자식, 딱 애비를 닮았구나. 또 고생문이 열렸구나. 에이구, 저 놈을 어쩌니?” 점심 쯤에 성호는 소수레에 물고기 두 마대를 싣고 들어섰다. 온 아침 욕하던 상진과 영옥은 마대아구리를 열고 생신한 물고기를 들여다보고선 입을 딱 벌렸다. 순간 늙은 량주의 주름 진 얼굴에 만면춘풍이 흘러넘치고  할미꽃이 필 지경이다. “야, 물고기 먹음직하구나. 한근에 얼마에 샀어?” “어데서 사왔어?” 성호는 물고기마대를 훌 들어 집 안으로 들여가면서 동문서답했다. “한근에 1원 35전씩 팝소.” “애비한테도 비밀이냐?” 성호는 제법 물고기장사 티를 냈다. “장사는 애비도 속인다고 귀띔해주지 않았습니까? 허허허.” 상진은 머리를 끄덕였다. “그래, 장사를 하자면 그래야지. 넌 나보다 훨씬 나아. 난 남을 너무 믿고 장사를 하다가 쫄딱 망했어.” 성호가 물고기를 사왔단 소문이 한 집 건너 온 동네에 소문이 자자하게 퍼졌다.  마을사람들이 삼삼오오 몰려왔다. 그들은 생신하고 먹음직한 물고기를 보자 너도나도 몇개씩 사갔다. 사흘도 안돼 두 마대 물고기를 다 판 후 어머니가 돈을 세여 보니 250원이나 벌었다. 장사에 재미를 붙인 성호는 아버지와 사정해 부림소까지 800원에 팔아가지고 대련으로 가서 청어랑 홍어랑 낙지랑 새우랑 사다가 팔았다. 철주는 고향에 놀러 왔다가 저울과 물고기를 자전거에 싣고 시골마을을 누비면서 물고기를 사라고 소리치며 돌아다니는 성호를 보고 뒤에서 빈정거렸다. “대학을  밑구멍으로 다녔어? 물고기장사를 하다니?” 성호는 철주와 말다툼할 새도 없었다. 그는 고향에서 20여리 떨어진 골안까지 자전거를 타고 물고기를 팔러 돌아다녔다. 눈길이 막히면 자전거를 밀고 다니면서도  끝내 한수레나 되는 물고기를 다 팔았다. 보름이 지나 그는 아버지한테 부림소를 살 돈을 주고서도 천여원을 벌었다. 목돈을 손에 거머쥐자 성호는 생각이 달라졌다. (이젠 고향 사람들은 설과 보름도 쇴고 3.8절마저 쇴지. 이제 물고기를 사와도 금방 사먹었기에 더 사려고 하지도 않을 거야.) 사실 고향 마을 사람들뿐만아니라 거의 모든 농촌사람들은 한해에 설 같은 명절에 돼지고기나 물고기를 몇근 사먹으면 만족이였다. (봄에 언 물고기가 녹아서 차에 부치기도 힘들어. 장사를 바꿔보자.) 우둔한 놈이 범을 잡는다고 그는 암송아지를 사서 소새끼낳이를 하는 것이 어떨가고 궁리했다. (그래, 암송아지를 사서 한 1년 키우면 해마다 새끼를 낳을 것이 아닌가? 그 다음해부턴 새끼가 또 새끼를 낳을 거야. 그럼 몇해 후에는 소 몇마리 되겠는가? 둥글소 한마리에 한 800원부터 천원 좌우 하니까. 한 열마리 팔면 만원을 쥐게 된다. ) 성호는 벌떡 일어나 두주먹까지 불끈 쥐고 미친듯이 고함쳤다. “만원호! 난 부자로 될 거야!” 그의 눈앞에는 찬란한 미래가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덩실한 고래등 같은 벽돌기와집을 시내에 척 사놓는다. 부모를 모시고 효성을 다한다. 사랑하는 색시와 함께 애를 낳아 기르면서 알콩달콩 행복하게 산다. 희망이 눈 앞에 한들한들 춤추며 떠오른다. 심지어 그는 세집살이에 새파랗게 질렸던 정희의 걀죽한 얼굴에 행복의 금물결이 이는 환한 모습을 방불히 보는 것만 같았다. 상진과 영옥은 웃방에서 나는 고함소리에 미닫이를 열고 들여다보았다. “이제 소장사를 해서 갑부로 될 예산입구마.” “뭐라고? 대학을 졸업하고 소장사를 한다고?!” 영옥은 맥이 풀려 구들에 물앉아버렸다. “이젠 네가 뭘 사오든지 팔아주지 않겠다.” 상진은 미닫이를 쿵 닫아버리면서 혼자말로 두덜거렸다. “에이, 하뉘 소궁둥이나 칠 놈! 대학을  밑구멍으로 다녔어?” 그러나 성호는 기어이 자기 푸른 꿈을 향해 달려갔다. 고향의 천지꽃산의 잔설은 발버둥질치다가 끝내 녹고야 말았다. 겨우내 모진 풍설에도 끄떡하지 않고 엄동설한의 동장군을 이겨낸 진달래꽃이 만발했다. 천지쫓산은 마치 한송이 커다란 진달래 꽃송이 같았다. 꾀꼴새들이 지종지종 노래를 부르며 푸르른 창공을 훨훨 날아옜다.      
135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98) 댓글:  조회:1703  추천:0  2018-04-20
                         4.먹장하늘 감때사납게 불어치던 눈보라가 동장군과 함께 물러가 사람들이 좀 기를 펴고 살까 했다. 훈훈한 봄바람이 불어오고 만물이 소생하자 농민들은 또 희망의 씨앗을 심었다. 상순 서기의 지휘아래 사원들은 부르하통하를 가로 막고 산종을 개간했기에 올해에는 산종에서 난 벼를 찧어 먹으면서 보릿고개도 무난히 넘길 수 있었다. 이제야 살맛이 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하늘에 먹장구름이 뒤덮여 오며 마을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농사꾼들은 하늘을 쳐다보면서 밭으로 나가는데 그 놈의 하늘은 변화가 무쌍하고 심술궂었다. 맑은 하늘에서 불비를 퍼부어 대지를 불태우며 곡식을 시들어 죽게 하다가도 변덕스레 먹장구름을 몰고 와서 일하는 농사꾼들에게 생벼락을 내리치고 우박을 퍼붓고 소낙비를 퍼부었다. 룡호상박에 하늘에서는 번개 번쩍이고 우뢰가 으르릉거리며 요란하게 부산을 떨었다. 룡과 호랑이 모양의 먹장구름은 을씨년스런 하늘에서 아가리를 쫙 벌리고 서로 물고 뜯었다. 상아만큼한 커다란 껌정송곳이를 빼물고 불찌가 탁탁 튕긴다. 불꼬리로 높은 산마루를 툭 쳐 불찌가 튕긴다. 불비가 창대처럼 산과 들에 툭툭 떨어져 불찌가 사처로 튕긴다. 나중에 호랑이 구름이 패해 어디론가 형체도 찾아볼 수 없이 가뭇없이 사라졌다. 룡구름만이 하늘에서 룡트림하며 먹장구름 쪼각 사이를 유유히 날아예면서 패왕노릇을 한다.          농사군들은 그저 일방으로 변덕스런 하늘의 룡구름에 당하기만 하면서 하늘과 땅을 원망하며 살아야 했다.       용트림하는 것 같은 먹장구름이 하늘을 어둠침침하게 뒤덮더니 불용이 불을 뿜어 대지를 번쩍 채찍질 하더니 우레 소리가 천지를 진동했다. 룡구름은 어느 산마루가 높은 것 같거나 어느 산천초목이 자기 말을 고분고분 듣지 않는 것 같으면 불채찍을 휘둘러 사정없이 후려쳤다. 천지가 놀라 뒤짚일 지경이였다.        상순은 반 우파운동에 뒤이어 또 휘몰아쳐 오는 새로운 정치운동의 폭풍을 보고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이른바 "문화대혁명"이 홍수처럼 북경으로부터 전국에 범람하면서 감때사납게 터졌다.       상순은 도리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는 착오적인 한마디 말 때문에 한 사람에게 한뉘 우파나 현행반혁명이란 엄청나게 큰 모자를 씌워 투쟁하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정규상은 당총지 서기 포치대로 당 조직을 도와 군중들에게서 의견을 청취해 당총지에 바치지 않았는가. 그런데 아직도 투쟁하다니? 오옥선은 말을 한마디 잘못했다고 아직도 투쟁해? 그게 ‘병을 치료해 사람을 구하는 것’인가? 이젠 착오를 고치고 새 사람이 될 기회를 줘야 하는데. ) 그는 오옥선과 정규상이 불쌍했다. 그러나 무슨 회의에서나 눈을 지긋이 내리감고 남의 말을 듣기만하고  입장을 꽉 찌르고 묵묵히 침묵만 지켰다. 그는 집에 있는 물초롱과 반디를 찾아들고 정규상을 찾아갔다. 규상과 집식구들은 그를 반갑게 인사했다. 정규상 일가는 이 두메산골에 와서 상순 일가를 큰집처럼 믿고 살고 있었다. “동생, 속이 답답한데 오늘 우리 물고기잡이나 갈까?” “양?” 정규상은 시내에서 살면서 물고기 잡이를 해본 적이라고는 없었다. 허나 상순이 모처럼 찾아 왔는데 가지 않을 수 없었다. 허나 그는 몇걸음 걷지 못하고 주춤 멈춰서더니 먹장구름이 몰려오는 하늘을 쳐다보더니 적이 근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소낙비가 쏟아질 거 같은데도 가겠소?” “농촌에서 살면 소낙비를 맞는 것쯤은 예상사요. 어서 비닐박막이나 준비해 가지고 따라 오오.” 정규상은 집에 들어가더니 비닐박막을 들고 나오더니 상순의 손에서 물 초롱을 빼앗아 들고 따라 나섰다. 그들이 태평강을 건너갔을 때였다. 패용천산을 감싸면서 덮쳐들던 먹장구름 속에서 뻘건 불 뱀이 산허리를 번쩍 휘감아 채찍질했다. 꽈르릉! 천지를 진동하는 우레 소리가 울렸다. 패용천산의 천년 이끼 낀 벼랑도 마구 무너질 것만 같이 진동했다. 이윽고 대줄기 같은 소낙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정규상은 황급히 비닐박막을 쓰면서 물었다. “이렇게 소낙비가 쏟아지는데 물고기 있겠소?” 상순은 앞에서 비닐박막을 쓰고 걷다가 뒤돌아보면서 손까지 쳐들며 말했다. “걱정 마오. 이런 소낙비가 내린 뒤에 흙탕물에 미꾸라지들이 더 많소.” “오, 그렇구먼.” 정규상은 머리를 끄덕였다. 그들이 패용천산 앞의 차방까지 갔을 때다. 산기슭을 마구 휩쓸면서 내린 흙탕물이 허벅다리를 넘는 큰 물도랑에 마구 쏟아져 들어왔다. “어째 비가 끊을 거 같지 않소?” 상순은 여기저기 살피다가 반비를 들고 큰 물도랑 우에 놓은 나무다리를 가리켰다. “저기 가서 비를 피하기오.” 그들은 바지를 벗어 안고 나무다리 밑으로 들어갔다. 수레도 지나가게 놓은 나무다리 밑은 비 한 방울도 떨어지지 않아 좋은 은신처로 됐다. 한참 논과 산비탈을 강타하던 소낙비는 한 시간 후에야 뚝 그쳤다. 먹장구름이 동쪽으로 밀려가자 동쪽하늘에 칠색무지개가 아름답게 걸렸다. 서쪽 하늘이 건뜻 들리더니 활짝 트이면서 밝은 해가 부채살처럼 내리 비췄다. 상순은 소용돌이치면서 다리 밑으로 흘러내리는 흙탕물을 보더니 “빨리 저 다리 아래 골통으로 가기요.”라고 했다. “양.” 상순은 반디를 들고 둑으로 올라가 큰 물도랑의 골통으로 질척질척 뛰어갔다. “야, 고기 많소.” 정규상이 뒤따라 가보니 고패를 치는 흙탕물에 미꾸라지들이 마구 뛰노는 것이 보일 지경이었다. 어떤 미꾸라지들은 소용돌이치는 물 옆의 자갈 우에 마구 뛰어나와 구불거리면서 흙탕물 안으로 기어들어가고 있었다. 상순은 아랫목으로 해 반디를 들이대더니 소리쳤다. “빨리 고기를 쫓소.” “양.” 정규상은 물 초롱을 들고 흙탕물에 뛰어들어 발로 물을 구르면서 고기를 상순이가 아랫목에 댄 반디 쪽으로 몰아갔다. 상순이가 반디를 들자 미꾸라지랑 버들치랑 미꾸라지랑 한 사발은 들어있었다. “허허허. 오늘 물고기 탕을 배 터지게 먹게 생겼구먼.” 정규상은 처음 물고기를 잡는지라 희구해 입이 함박만이 벌어졌다. 그들은 한참 흙탕물에서 그렇게 반디를 대고 쫓으면서 반디 질을 해서 물고기를 한 초롱이나 잡았다. “이만 하면 되지 않았소?” “무슨 소리를 하오. 더 잡아야 하오.” 상순은 한참 쉬어 달아났던 물고기가 골통 쪽으로 다가오게 했다. “아차, 초롱이 차서 고기를 어디에 담겠소?” 규상의 말에 상순은 물 초롱의 고기를 들고 둑 저쪽 옥수수 밭에 올라가더니 밭고랑을 손바닥으로 단단히 다져놓고 물고기를 와르르 쏟아놓았다. “어째 이런 골통에 고기들이 이리 많소?” 규상의 물음에 상순은 반디를 들면서 대답했다. “대체로 물고기는 골통에서 쏜살같이 쏟아져나오는 소용돌이나 물살이 센 곳에 잘 모이는 거 같소. 특히 오늘과 같이 소낙비가 내린 후 흙탕물에 물고기가 많이 모이오. 아마 물이 흐려서 숨을 쉬기 바빠 물살이 센 곳으로 모이잖소?” “오- 도리 있소. 물이 흐리면 물에 산소가 결핍하니까.” 그들은 또 한식경이나 반디 질 해 한 초롱을 더 잡았다. 상순은 옥수수 밭고랑에 쏟아놓았던 물고기를 비닐박막에 담아 메고 정규상과 함께 물 초롱의 물고기를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상순은 물 초롱에 담았던 물고기를 정규상에게 주고 비닐박막에 담아 멘 물고기를 자기 집으로 가지고 왔다. 정규상의 아들딸들은 처음 숱한 보고 희구해 어쩔 줄 몰라 했다. 한편 집으로 돌아온 상순은 덕돌을 시켜 물고기를 작은 대야에 담아 할아버지를 잡수라고 먼저 가져가게 한 후 성욱과 동림, 순녀한테도 한 사발씩이라도 가져다주게 했다. 동림과 성욱은 물고기를 보고 군침까지 넘기면서 야단쳤다. 하지만 순녀는 구불거리는 거먼 미꾸라지를 보고 상을 찡그렸다. 그날 저녁에 명옥이 풍로 불에 물고기된장국을 보글보글 끓여놓자 상순은 정규상을 불렀다. 정규상은 대대 합작사에 가서 소주 한 근과 사탕과자를 사들고 왔다. 그들 둘은 윗방에서 물고기국을 퍼 후후 불며 마시면서 소주를 들었다. 순간 정규상은 우파 모자를 쓴 스트레스를 다 잊고 물고기국을 맛있게 먹었다. 상순은 술잔을 들더니 “자, 한잔 들기요.”라고 하더니 규상의 잔과 딱 마주치고 쭉 굽을 냈다. “우리 조개덕에 와서 고생이 많소. 동생이 아니면 우리 마을은 폐 염이 전염돼 몰살했을 거요.” 상순의 말에 정규상은 “형님도 별 말씀을 다 하오.”라고 겸손하게 말하며 물고기국을 후후 불며 맛있게 먹었다. 규상은 술을 별로 마시지 않던 상순이 술을 쭉쭉 마시는 것을 보고 한잔 쭉 냈다. “폐 염은 수그러들었는데 극산 병이 돌까봐 더 무섭소.” 정규상의 그늘진 얼굴을 바라보며 상순은 “극산 병?” 하고 눈을 치켜떴다. “양. 극산 병은 무서운 병이오. 별나게 여성들과 애들이 아침에 왈칵왈칵 토하다가도 저녁이면 죽소.” “뭐라오?.” 규상은 물고기를 떠서 맛있게 먹으면서 말했다. “이전에 내 돈화현 태평령과 현유공사, 안도현 명월구, 대전자(만보향)에 갔을 때 극산병 환자들을 많이 치료했소. 그때 돈화현에서 몇 백 명이 죽고 안도현 대전자에서도 17명이 죽었소.” 상순은 생선국도 먹을 맛이 없어 숟가락을 내려놓고 공포의 빛이 어린 얼굴로 정규상을 쳐다보았다. “허나 너무 근심하지 마오. 그때 나는 학생들을 데리고 거점을 잡고 기초조사를 해서 극산 병 근을 밝혀내고 현 방역소 협조를 받아 비타민C와 포도당, 강심제를 혈관 주사해 많은 환자를 구해냈소. 그 후부터 그 곳에서 극산 병으로 죽은 사람은 없소. 옥수수 대를 삶은 달달한 물에는 당분이 많은데 그 물을 먹으면 극산 병이나 폐 염을 예방하는데 아주 좋았소. 면역력이 높아지니까.” 그제야 상순은 한숨을 후 내쉬었다. 바깥에서는 우레가 울고 번개가 번쩍였다. 뒤이어 또 소낙비가 억수로 쏟아졌다. 초가집 추녀 끝 조이 짚대 끝에서 실 폭포수가 줄줄이 쏟아져 내렸다. “형님, 이럴 때 또 고기 많잖소?” “그래. 많지. 또 잡기 싶소?” 정규상은 머리를 가로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니오. 집에 숱한 물고기를 언제 다 먹겠소? 어쩜 그 골통에 물고기가 그렇게 많소?” 상순은 다시 숟가락을 들고 물고기국을 퍼 먹었다. 그때 벽에 간장 물 같은 빗물이 흘러내리고 천정에서 빗물이 새 물고기국에 방울방울 떨어졌다. “아니, 집에 비가 새는구먼. 형님도 이영을 잇을 게지.” 상순은 대야랑 큰 사기사발이랑 들어다가 여기 저기 벌려 놓아 빗물을 받으면서 대수롭잖게 말했다. “언제 자기 집 이영을 이을 새 있소? 난 밤낮 어떻게 하면 우리 마을 사원들을 이끌어 배를 곯지 않게 하겠는가고 달아다니기에 집 손질을 할 새 없소.” 정규상은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그래도 손질할 건 하고 일해야지. 쯧쯧.” 정규상은 빗물이 새는 천정 여기저기를 쳐다보았다. 꾸불꾸불한 나무대로 중 천정을 댄 여기저기에서 빗물이 새 물 도랑 형 지도를 그리면서 주르르 흐르다가 구들의 여기저기에 벌려 놓은 대야와 사발에 뚝뚝 떨어졌다. 실로 바깥에서 소낙비가 쏟아지면 집안에는 실 폭포수가 쏟아지는 격이었다. “형님, 할 말인지는 모르겠소만. 아무리 당원은 사심이 없다지만 그래 집 손질도 하지 말아야 하오?” 상순은 세 귀 눈으로 규상을 치켜보았다. “동생, 누구 앞이라고 그런 말을 하오? 또 우파 모자를 쓰고 싶은가?” 그러나 정규상은 시무룩이 웃었다. “형님 앞에서야 무슨 말인들 하지 못하겠소?” “허허허. 사람이. 아직도 덜 혼났구먼.” 상순은 통쾌하게 웃고 나서 속심을 털어놓았다. “참 답답하오. 정치운동이 끝이 없소. 우파를 한 10년 두드리더니 이번에는 또 뭘 타도하려는지 ‘문화대혁명’을 한다오. 자, 한잔 들어.” 그들은 또 한잔을 통쾌하게 마시고 생선국을 국자로 퍼서 사발채로 굽을 냈다. “어, 진짜 둘이 먹다가 하나 죽어도 모르겠구먼.” 상순의 말에 정규상은 생선국 사발을 내려놓으면서 입귀를 닦았다. “양. 헌데 심상치 않소. 내 전번에 시내 병원에 돌아가 보니 ‘문화대혁명’이 터져서 온 시내가 발칵 뒤집혔더구먼. ‘정성해 서기를 타도하자’는 대자보가 시내 한판에 나붙고 정성해 서기를 따라 사업하던 간부들마저 수태 잡혀 지하실에 갇힌 채 날마다 고문을 당한다오.” “양?” 상순은 놀라움과 격분을 금치 못하면서 상을 찡그렸다. “그분이 우리 지역 건설을 잘하려고 얼마나 고생하신 분이라고. 쳇, 말도 안 돼.” 상순과 정규상은 술맛이 다 떨어져 물러앉아 한숨을 땅이 꺼지게 후 내쉬었다. 상순은 속이 타 담배를 말아 붙이더니 담배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집안에는 담배연기로 꽉 차 매캐한 연기냄새가 코를 찔렀다. “정 서기는 항일전쟁 때 로 항일투사 아니고 뭐요? 해방전쟁에도 얼마나 뛰어난 지휘관이었소? 그런데 그를 타도한다고? 정말 무슨 혁명인지 모르겠소?” “말을 주의하오. 나를 보오. 혀끝을 한번 잘못 놀렸다가 한뉘 고생을 하는 거.” 상순은 코 방귀를 “흥” 하고 뀌었다. “정말 이해되지 않소. 이제 또 내리 내리 다 붙들어 투쟁하겠구먼.” “양. 돌아가는 정치형세가 심상치 않소. 군분구 지도자 조남기동지는 정성해 서기를 보호했다고 철직당하고 농학원에 가둬 넣고 변소청소나 시켰다오. 정성해 서기를 보호하던 정치문교를 주관하던 김부서기도 반란 파들에게 붙잡혀 갖은 고문을 다 받다가 자살까지 했다오.” “아니, 그게 무슨 말이오? 김부서기는 흑룡강성에서 정성해 서기를 따라 여기 나온 분이 아니오?” “양, 그게 문제로 된다오. 정성해 서기를 따라 흑룡강성에서 나와 제발된 숱한 간부들이 감옥에 들어가고 투쟁 받고 심문을 당한다오. 방송국에 간 김영만 국장도 아무런 죄도 없는데 반란 파들이 지금 그를 투쟁한다오. 김영만 국장은 정성해 서기를 따라 조선민족간부학교 동창생들과 함께 흑룡강성에서 나와 당교 교장을 하다가 방송국 국장으로 제발됐소. 그런데 터무니 없이 민족우파요, 반혁명분자요, 반역자 모자를 씌워놓고 투쟁한다오.” “말도 안 되오. 조선족간부들을 다 투쟁하는게 ‘문화혁명’이라오? 김부서기하구 김영만 국장이 뭘 잘 못했다오?” 정규상은 비가 새는 천정이 다 날아나게 한숨을 후 길게 내쉬었다. “참 답답하오. 김 부서기는 반란 파들이 정성해 서기를 나쁜 놈이라고 승인하라고 어찌나 핍박했는지 층집에서 뛰어내려 사망했다오. 반란파들은 그를 지하 감방에서 몽둥이로 때리고 코에 고추 물을 쏟아 넣고 손가락에 참대가시를 찌르면서 고문했다오. 그 놈들은 김부서기를 보고 정성해 서기가 나쁘다는 말만 하면 반동분자나 민족우파라는 모자를 벗겨주고 이른바 ‘해방’시키겠다고 얼리고 구슬렸다오. 그러나 김부서기는 끝까지 '정성해 서기는 중국 혁명에 공훈이 큰 훌륭한 조선족지도자'라고 했다오. 반란파들은 김부서기에게 하루만 고려할 시간을 더 주겠다고 최후통첩을 했다오. 김부서기는 그날 밤에 감방에서 나와 아픈 다리를 쩔룩쩔룩 끌며 하남다리를 건너면서 깊은 고민에 빠졌다오. 그는 방송국의 김영만 국장네 집을 가만히 찾아가서 울면서 반란 파들의 악독한 행위를 공소했다오. ‘난 절대 정성해 서기를 반동분자라고 말할 수 없소. 내가 살자고 어떻게 당과 인민의 훌륭한 정성해 서기를 나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단 말이오. 난 절대 양심을 어기고 그렇게 할 수 없소. 김국장, 나와 함께 목숨으로 꼭 정서기를 보호해 싸우기오.’ 그렇게 자기 굳은 결의를 말하고 나간 후 김 부서기는 홍색반란파들이 불을 질러 불길이 활활 불타는 층집에서 뛰어내려 사망했다오. 그는 목숨으로 정성해 서기를 보호했고 정의를 지켰다오.” “야, 불쌍한 지도일군들이오. 어쩜 세월이 이렇게 변했을까? 참 답답하오.” “군 분대의 조선족책임자 조남기동지와 김영만 국장도 정성해 서기를 보호했다고 투쟁을 받는다오.” “그 놈 반란파들은 무슨 담이 있어 그런다오?” “지금 시내에 할빈에서 나온 이 씨란 자가 반란파 두목이라오." 정규상은 허리를 굽히더니 입을 상순의 귀에 가까이 대고 나직이 말했다. "누구와도 말하지 마오. 그 이씨란 자는 모주석의 조카 모원신이라오. 모원신은 할빈공업대학 출신이라오..." "오- 그래?" "양." 정규상은 상순한테 나직이 뭐라고 중얼거리고 나서 뒷말을 이었다. "그 자가 할빈으로부터 팔에 '홍위병'이란 뻘건 완장을 낀 숱한 학생 반란파들을 데리고 연길에 기어들어 진상을 모르는 청년들로 홍위병이라는 무리를 조직해 가지고 노간부들을 돌아가면서 타도한다오. 백화상점으로부터 아래개방지로 쭉 내려가면서 정성해 서기 이른바 죄상을 적발비판한 대자보와 만화가 다닥다닥 나붙었습데. 이씨는 조남기동지를 보고 기어이 주덕해를 반역자라고 승인하라고 핍박했다오. 그러나 조남기동지는 주덕해동지는 중국 혁명에 공훈이 큰 중국 공산당 훌륭한 혁명간부라고 하면서 정의를 지켜 이씨와 견결히 맞서 싸웠다오. 그래서 조남기동지는 이씨라는 자의 정치피해를 받아 연변군분구 지도자에서 철직당하고 노동개조를 한다오. ” “이씨가 무슨 놈이기에 할빈에서 와서 우리 이 곳의 문화대혁명을 지휘하오?” “이씨는 대단한 인물 모주석의 친조카라지 않소. 흥!” “그렇게 대단한 인물이니깐. 우리 이 곳의 모모한 간부들도 다 타도하지.” “양, 참 답답하오. 후에 모원신은 심양군구 사령원이 되지 않았구 뭐요. 그러니깐 진상을 모르는 청년들은 모주석의 조카 모원신이 하는대로 하는게 혁명이라고 여겨 개 잡은 포수들처럼 우쭐렁거리면서 망종하지.” 그들은 답답한 이야기를 밤중까지 나누면서 생선국 쟁반이 굽이 난 후에야 헤어졌다. 풍로불도 다 죽어 재만 남았다. 상순은 정규상을 바래면서 먹장구름이 몰려오는 하늘을 쳐다보았다. 숱한 반란파들의 주먹에 얻어맞았는지 마을 상공의 먹장구름에 구멍이 펑펑 뚫렸다. 저쪽 패용천산과 칼산 쪽에는 벌써 먹장구름에 뒤덮여 공포의 어둠이 야수들처럼 슬금슬금 기어들어와 어디가 어딘지 분간하기 힘들었다. 한줄기 희망의 빛줄기를 기대하기는 허무맹랑한 먹장구름이 뒤덮인 하늘이 아닌가.        기막히고 침침하고 한심하기 짝이 없는 하늘이었다.                                         5. 여우파와 지주 아들       세찬 비바람에 태평강 가의 가는 버드나무들이 허리를 굽혔다 폈다 하면서 몸부림치고 있었다. 비탈 밭의 강냉이 대들은 폭풍우와 우박을 맞아 부러지고 담배 잎에 구멍이 펑펑 뚫려 살풍경을 이루었다.       오옥선은 우파 모자를 쓴 채 “문화대혁명”이란 12급 태풍에 날려 날 까봐 방황하고 있었다. (이 놈의 정치투쟁은 끝이 없구나. 우파 모자를 벗고 환한 날을 볼 거 같잖아.) 그녀는 몇 번이고 집 외양간에 감춰 둔 장 바를 쥐었다 놓았다 하면서도 부모 앞날이 불쌍하고 나이 아까워 차마 목을 매지 못하고 그만두었다. 한 것은 외동아들을 삼도만 토비숙청에서 잃은 데다 유일한 희망인 딸마저 잃으면 늙은 부모가 어떻게 살겠는가 걱정됐던 것이다. 요즘 옥선은 장충국이 자꾸 지분거려 퍽 귀찮았다. 며칠 전에도 옥선이 지친 몸으로 학교에서 마을로 돌아올 때었다. 충국은 함흥 촌과 조개덕으로 갈라지는 갈림길 어귀 늙은 비술나무 아래에서 사위를 둘러보더니 말을 걸었다. “오 선생, 오 선생은 우파, 나는 지주 아들. 오 선생은 노처녀, 나는 노총각. 우린 천생배필이오. 어찌 한뉘 노처녀로 늙어?” 충국은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이런 거 생각해 보았소?” “뭘?” 충국은 마흔 고개를 넘은 중년답지 않게 뒷더수기를 긁적이더니 겨우 입을 뗐다. “미련과 경주를 보오. 떡돌 같은 아들까지 보지 않았소? 지주 딸과 남조선특무 아들이지만 결혼해 얼마나 재미있게 살고 있소? 우리도 결혼하면…” 오옥선은 귀찮아 그의 말을 채 듣지도 않고 자리를 떴다. “됐소, 됐소. 누가 한뉘 고생하자고 지주 아들하고 살아? 정말 머리 뜨거워도 분수가 있어야지.” 그런데 오늘도 충국이 또 찾아와 올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충국은 여기저기 늙은 비술나무 주위를 맴돌며 살피더니 오옥선의 집 문을 뚝 떼고 들어와 또 그 말을 꺼냈다. “생각해 보았소?” 허나 오옥선은 단 마디에 딱 잡아뗐다. “싹 걷어 치워!” 허나 충국은 물러서려고 하지 않았다. “난 다른 지주 아들들과 달라. 우리 아버지와 난 모두 항일유격대에 쌀을 대준 애국항일투사란 말이다.” 오옥선은 입을 딱 벌렸다. “그래도 지주 아들은 지주 아들이야. 지주 성분을 고칠 순 없어. 내가 분명히 말해두지. 난 말 한마디 잘 못해 억울하게 모자를 쓴 것뿐이야. 허나 성분만은 깨끗한 빈농이야. 오빠는 해방전쟁 때 삼도만 토비숙청을 할 때 영용히 국민당 반동파와 싸우다가 장렬히 희생된 열사야! 그때 네놈은 국민당의 편에 서서 삼도만 토비 두목으로 되지 않았니?” 충국은 주위를 돌아보았다. “그때 잘못을 나는 뉘우친다. 계속 공산당이 영도하는 항일유격대 편에 서야 하는데 말이다. 그때 어찌 공산당이 국민당과 싸워 이길 거 알았겠냐?” “길게 말할게 없다. 절대 지주 아들과 결혼할 수 없어. 더욱이 우리 오빠를 죽인 삼도만 토비와 결혼하지 않는다.” 충국은 섬찍해났다. 사실 충국은 삼도만 토비무리에서 반장을 할 때 한 개 반의 토비들을 데리고 함흥촌 민병들의 정황을 정찰하러 왔다가 일성촌에서 한 가족을 몽땅 살해했던 것이다. 물론 그때 충국은 직접 손을 대지 않았지만 어쨌든 학살을 지휘한 죄악만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일성촌에서는 아직도 충국의 그 죄악을  밝혀내지 못했다. 충국은 아닌 보살을 떨면서 옥선한테 마지막으로 애원했다. “공산당 정책은 명확하다. 지주 아들도 현재표현을 봐서 지주 아버지와 계선을 나눠 본다고 했다. 제발 우리 둘이 결혼하자.” 충국은 떠나가려는 옥선의 팔을 와락 잡아 끌어당겼다. “왜 이래?” 옥선은 팔을 팽개치며 꼿꼿한 눈길로 충국을 쏘아보며 욕했다. “소릴 칠 테다! 오줌을 싸놓고 제 주제를 보고 덤벼들어라!” 충국은 입을 악물고 옥선을 노려보다가 저쪽에서 상순이 삽을 둘러메고 오는 것을 보고맥 없이 팔을 스르르 놓았다. 옥선은 충국을 뿌리치고 학교 쪽으로 뛰어갔다. 충국은 늙은 비술나무 아래에서 닭 쫓던 개 지붕을 쳐다보는 신세로 되고 말았다. 충국은 저 멀리 학교 쪽으로 달아나는 옥선을 멍해 서서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상순은 지나가다가 이상해 충국의 어깨를 툭 쳤다. “뭘 그렇게 쳐다보는가?” “어, 허허. 형님.” 충국은 상순을 돌아보고 어색하게 웃었다. “옥선을 작작 지껄여.” “형님은 어째 나를 관심하지 않소?” “감옥에서 끌어내왔으면 됐지. 그만 관심했는데도 모자라니?” 충국은 눈을 흘겼다. “형님은 아들딸이 한 구들이나 되지 않소? 허나 나는 이게 뭐요? 쉰 고개를 쳐다볼 때까지 홀아비로 늙는단 말이오.” “옥선을 건드리지 말라!” “어째? 지주 아들이라서? 국민당 토비 돼서?” “옥선은 너와 달라!” 상순은 눈을 똑바로 뜨고 똑똑히 말했다. “저 앤 언젠가는 우파 모자를 벗을 수 있다. 허나 넌 안 돼! 열사 여동생을 넘보지도 말아!” “개 XX 같다! 원!” 이때 흥수가 다가와 끼어들었다. “그래, 이 지주 놈 새끼, 아직도 갱, 갱 살아나서 대들겐?” 충국은 흥수의 뾰족 턱을 한 대 올리 쳐놓고 싶은 강한 충동을 느꼈다. 허나 억지로 참느라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어째 덤벼들 테냐? 어디 덤벼봐라!” 흥수는 손바닥을 쫙 편 채로 충국의 귀쌈을 쨩 후려 갈겼다. “누구를 쳐?!” 충국은 흥수의 팔을 틀어쥐고 콱 밀쳤다. 흥수는 저 만치 뿌리어나가 썩박나무 넘어가듯이 자빠지었다. 흥수는 엉덩이를 만지면서 상을 찡그리었다. 허나 자존심이 상한 나머지 벌떡 일어나 충국에게 달려들었다. 그들이 밀고 닥치고 하자 상순은 달려들어 뜯어놓았다. “손을 떼지 못하겠는가?!” 상순은 누구에게라 없이 소리쳤다. 그러자 흥수는 상순을 가로보면서 욕설을 퍼부었다. “서기라는게 지주 아들 말리잖고 날 욕해? 계급입장이 어데 갔어?” 상순은 흥수를 콱 밀어놓으면서 책망했다. “입은 뒀다 뭘 하고 쩍 하면 주먹질인가?!” 흥수는 조개턱을 쳐들고 외까풀 눈으로 상순을 무섭게 쏘아보면서 주먹을 휘둘렀다. “어, 잘한다, 잘해! 이제 보니 너희들 해방 전에 의형제였지?” 이때 충국이 흥수를 콱 밀어놓으면서 떠들어댔다. “옳다. 어째? 우린 항일전쟁 때 장백산에서 항일유격대와 함께 목숨을 내걸고 일본 놈들과 싸웠다. 그때 넌 낯짝도 보이지도 않았다! 어째?” 상순은 충국을 쏘아보면서 고함쳤다. “너 아무 개소리나 마구 치겐?!” “사실이 아니오?” “그래도 그렇지.” 흥수는 뒷걸음질을 쳐 모여드는 사람들 속으로 물러가면서 고함쳤다. “여러분, 보았지? 우리 저 김 서기를 보슈. 지주 아들과 전우라고 하지 않아? 계급입장을 완전히 상실한 사람이우.” 그때 학수와 성수 형제까지 와서 맏형 흥수 역성을 들었다. “당신, 치보주임이라는 게 누구 편을 들어?” 학수는 자기 맏형을 두둔해 나섰다. "맞지 않았어?” 성수는  흥수의 얼굴을 들여다보더니 우먹눈덕에 퍼런 자국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 새끼!" 성수는 주먹을 으스러지게 틀어쥐고 충국한테 달려들었다. 이성을 잃은 충국도 주먹을 쥐고 권투 자세를 취했다. 성수가 주먹질을 하면서 덮쳐들자 충국은 자세를 낮춰 날아드는 주먹을 피하며 주먹으로 성수의 아랫배를 강타했다. 성수는 “억!” 소리와 함께 맥없이 푹 꺼꾸러졌다. “이 새끼!” 뜻밖의 강타를 받은 성수는 배를 부둥켜안고 물앉아 헐떡거리었다. “지주 놈 새끼, 감히 주먹을 휘둘러?” 학수와 흥수가 단번에 충국에게 덮쳐들었다. 허나 필경 충국은 이전에 상순과 함께 장백산에서 항일유격대 성칠 대대장에게서 권투와 무술을 배웠기에 그들 둘이 달려들어도 식은 죽 먹기로 대처했다. 충국이 몸을 날려 덮쳐드는 학수와 흥수의 어깨 넘어 날아지나가면서 원앙 발길을 날리자 둘은 동시에 꺼꾸러졌다. “손을 떼지 못하겠니?” 상순이 충국에게 고함치면서 팔을 걷고 나섰다. “네 놈도 다 한가지야!” 충국은 상순에게 씽 덮쳐들었다. 독수리가 토끼를 덮치듯이 훌쩍 몸을 날려 상순의 목을 노리고 덮쳐들었다. 상순은 뒤로 몸을 슬쩍 번져 누우면서 토끼가 매를 걷어차는 동작을 취하며 두 발로 날아드는 충국의 아랫배를 탁 걷어차 올렸다. 사타구니를 찼더라면 *알이 툭 터졌을 것이다. 허나 상순은 모든 사람들 앞에서 그저 충국을 치는 시늉을 했을 뿐이다. 기세등등하게 덮쳐들던 충국은 저 만치 뿌리어나갔다. 상순은 몸을 뒤지기로 벌떡 일어나면서 쓰러진 충국의 목을 조였다. “언감 우리 대대 간부에게 달려들어?!” 충국은 희죽이 웃으면서 눈물까지 주르르 흘렸다. “날 죽여라! 총살해라! 죽기보다 못하단 말이야!” 일 밭으로 나가던 사원들은 상순이 충국을 쳐 눕히는 정채로운 장면을 보고 혀를 끌끌 찼다. 그러나 흥수는 픽 코웃음 쳤다. “의형제 간에 연극을 잘 노는구먼. 흥!” “그래야 대의멸친 하는 척 하지.” 학수도 맞장구를 치면서 흥수를 부축해 일으켜 세웠다. 성수도 가만있지 않았다. 그는 상순을 손가락질 하면서 “당신은 서기 자격이 없소. 당장 내놓소.” 하고 떠들어댔다. 형제들의 역성에 흥수가 일어나더니 또 나섰다. “금방 김 서기 충국을 보고 뭐라 했는지 아오? 감옥에서 끌어 내왔으면 됐지. 그 보다 어떻게 더 관심하는가 하지 않겠소? 분명 의형제를 암암리에 돕고 있소.” 그러자 상순은 시비를 똑똑히 가르려고 나섰다. “우리는 지주와 아들에 대해 계선을 나눠 봐야 하오. 충국은 지주 아들이지만 항일전쟁 때 목숨을 내걸고 항일투쟁을 한 사람이오. 비록 국민당 삼도만 토비무리에 들어갔지만 현재 개조표현을 봐서 지주와 아들은 갈라 봐야 하오. 황차 장학산은 다른 지주와는 다르오. 항일전쟁 때 자기 집 쌀을 몽땅 항일유격대에 지원한 애국주의 사상을 가진 지주였소. 후에 국민당의 입장에 선건 우리 당과 인민에게 죄를 지은 게요. 우리는 한 사람을 평가할 때 전면적으로 봐야 하오. 그의 죄만 볼게 아니라 혁명에 한 공헌도 봐야 하오. 그래서 우리 정부에서는 장학산과 장충국을 감옥에서 풀어주고 지방에서 노동개조를 하게 했소.” 흥수는 그래도 콧방귀를 뀌었다. “장 지주 팔자 얼마나 좋아? 거지로 중국에 들어온 상순이네 할애비부터 황무지를 줘서 개간해 살게 한 덕분에 감옥에서도 나오고. 한뉘 보호를 받는 게.” 상순은 분명히 말했다. “나는 절대 개인 인정으로 혁명과 계급투쟁을 대하지 않았소. 원칙을 견지했고 우리 당의 계급성분과 계급투쟁 정책대로 처사했소.” “서기를 내놓게. 계속 서기 할 예산인기여?” 흥수의 말에 학수도 맞장구를 쳤다. “옳다니까. 김 서기한테 권력이 너무 집중됐소.” 그 말에 상순은 머리를 숙이고 뭔가 궁리했다. 그들의 말에 일부 도리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머리를 들더니 사원들을 보고 소리쳤다. “모두 일하러 갑세!” 사원들은 구경하다가 그제야 일 밭으로 우르르 쓸어나갔다. 저쪽 패용천산 상공에 먹장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우박이거나 소낙비가 내리려는 모양이었다.  
134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97) 댓글:  조회:1236  추천:0  2018-04-12
                    2. 풍년의 희열 풍년이 왔다. 사원들이 흘린 신근한 땀방울이 알알이 여문 벼알로 황금물결로 변신했다. 사원들은 멍지뫼산 앞의 산종에서 거둔 벼부터 수레에 실어다 물레방아로 돌리는 수동탈곡기에 신나게 탈곡했다. 멍지뫼산 앞에 새로 푼 논 이름을 산종(散种)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벼 씨를 모래 논에 마구 뿌려 벼농사를 지은 논이기 때문이었다. 풍년에 탈곡을 하는 사원들의 일손은 성수 났다. 상순은 물레방아로 돌아가는 수동탈곡기 앞에서 걸이대로 검불을 슬슬 누비어버리면서 사원들에게 소리쳤다. “물레방아 물이 얼기 전에 벼 탈곡을 끝내야 하오.” “예.” “발마선으로 탈곡하자면 얼마나 힘드오." "물레방아 돌아갈 때 일손을 다그쳐야 하오!” “예!” 사원들은 저쪽에 척척 쌓아올린 벼 마대를 보고 사기났다. 상순의 말대로 그 벼는 제일 어려운 보리고개를 넘을 때 먹을 벼라고 한다. 박성근은 기침을 쿨룩쿨룩 깇으면서도 기쁘니까 또 횡설수설하는 본병이 드러났다. 그는 탈곡기 앞에서 벼단을 들어 마선에 먹이면서 싹아 빠져 싯누런 이발을 다 드러내며 너털웃음을 웃었다. “허허허, 이제야 소련 꼴호쯔에서 벗어나서 살 때를 만났소.” 말수가 적은 경학이도 검불을 걷어내면서 흥이 났다. “올해처럼만 풍작이 들면 쌀 고생은 하지 않을 거 같소.” 그러자 성근은 우파 모자를 쓴 것도 다 잊은듯이 횡설수설 흥이 도도해졌다. “다 위 정책 탓이오. 개체농사를 지으면 다 자기 일이기에 더 알뜰하게 농사를 짓는단 말이오. 허나 집체로 농사를 지으면 모두 건성으로 일한단 말이오. 죽게 일하나 노라리를 치나 그러루하게 평등하게 사니까. 누가 일할 열정이 있겠소? 또 편한 날 없이 자꾸 고깔모자를 씌워 투쟁만 자꾸 하다나니 언제 농사를 짓겠소?” 경학은 계급투쟁 말이 나오자 입에 빗장을 지르고 못 들은 척했다. 덕성은 마선 옆에서 성근이 내던지는 벼 짚단을 거두어 메면서 주위를 흘끔거렸다. 그는 저쪽에서 벼짚단을 메 나르는 흥수 눈치를 힐끔 곁눈질하더니 벼 짚단으로 성근의 다리를 툭 쳤다. “그만해. 또 어째 투쟁 받을락꼬?” 허나 성근은 대수로워 하지도 않았다. “밥 먹듯 투쟁받아 그런지. 이젠 습관 돼 괜찮소. 투쟁하겠으면 하라지. 뭐. 흥!” 그때 흥수가 이쪽으로 다가와 고래고래 고함쳤다. “일하잖고 뭘 쑤군거려?!” 그 고함소리에 쥐도 새도 죽은 듯이 말소리가 뚝 끊어졌다. 다만 물레방아로 돌아가는 탈곡기에 벼를 터는 쯔르르 소리 밖에 들리지 않았다. 탈곡이 끝나자 상순은 창걸과 경학, 학수 등을 데리고 홀로 살아 제일 가난한 “오보 호(五保户)” 마반산 집 할머니 집에부터 쌀 마대를 수레에 실어갔다. 마반산 집 할머니는 쌀 마대를 윗방에 메 들여오는 상순을 보고 감격에 목이 메여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아이고, 이럴 법이라고야. 김서기, 고맙소, 정말 고맙소.” “이 쌀로 보릿고개를 넘읍소.” 마반산집 할머니는 상순의 어깨에 묻은 쌀 먼지를 말라버린 삭정이 같은 두 손으로 툭툭 털어주면서 연신 치하했다. 상순은 오히려 허리굽히며 인사말을 했다. “옛날에 마반산 집 할머니 아니었으면 우리 덕돌이 살아남았겠습니까?”  그러자 학수는 뒤에서 콧방귀를 뀌면서 두덜거렸다. “농사는 누가 짓고 인사는 누가 내오? 덕돌을 구해준 은혜를 집체 쌀로 인사를 내긴?”  그 소리에 상순은 수레에 바줄을 거둬실으면서 희죽이 웃었다. “당신네 주봉은 저 할머니 덕분에 세상에 나오지 않았소? 이 마을 숱한 어린이들을 받아냈는데 마반산 집 할머니 은공을 어찌 쌀 몇 마대로 다 갚을 수 있겠소?” 그 말에 학수는 말문이 막혔다. 확실히 주봉은 학수의 아내가 난산에 걸린 것을 마반산 집 할머니가 손으로 빼내 살려냈던 것이다. 학수의 아내가 난산으로 사망한 후 상순의 아내가 은숙과 주봉을 젖을 한 짝씩 먹여 키우지 않았던가! 그 일로 해 학수는 명옥을 주봉의 양어머니라고 하면서 내내 감사하게 생각해왔다. 허나 이젠 주봉이 다 크자 큰아버지 흥수 편에 서서 그 은정을 잊기 시작했던 것이다. 하긴 흥수한테서 자기 동생이 남조선 유격대원한테, 그것도 상순의 외육촌동생한테 사살당했다는 말을 들은 후부터 상순을 눈에 든 가시처럼 여기기 시작했던 것이다. 상순이 오후에 우파 오옥선의 집에 쌀을 실어가자는 말을 듣고 학수는 수레에 싣던 쌀 마대를 활 던지고 탈곡장에 씽 달려가서 흥수한테 일러바쳤다. “저 상순이 제 정신이 있니?” 흥수는 벼짚단을 메나르다가 조개턱을 쳐들었다. “어째 그러오?” “아, 글쎄 우파 오 선생네 집에 쌀을 실어가자고 하오. 쌀이 썩어났니? 빈농들도 먹을 게 빳빳한데.” 흥수는 벼단을 주어 메려다가 활 팽개쳤다. “가 보자.” 흥수는 학수를 따라 정미소에까지 씽 달려왔다. “아니, 김서기, 우파 오선생 엉덩이에 꿀이 붙었어? 아까운 입쌀을 왜 우파네 집에 가져 가? 어째 오 선생이 덕돌의 담임교원이라고 면목을 내려고 그래?” 상순은 흥수를 거들떠보지도 않으면서 말했다. “속에 없는 소리를 하지 마오. 우파는 사람이 아니오? 황차 오 선생의 오빠는 해방전쟁에서 목숨을 바친 혁명열사고, 오 선생의 부모는 열사의 부모요. 오 선생이 혼자 일해서 살기 어려운데 생산대에서 도와주는 게 잘 못이오?” 그 말에 흥수는 입을 쫙 벌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수레에 실은 세 마대나 되는 쌀을 보자 흥수는 수레에 뛰어 올라가 쌀 마대를 마구 부리려고 날뛰었다. “아무리 열사유가족이라도 두 마대 주면 됐지. 세마대나 줘?” 상순은 한 치의 양보도 하지 않고 소리쳤다. “손을 떼지 못하겠는가? 오 할아버지네 농사도 제대로 짓지 못했는데 어떻게 두 마대로 보릿고개까지 넘는단 말이오? 부리기만 해봐라!” 흥수는 상순의 독기서린 세 귀 눈에 기 꺾여 찍 소리 못하고 수레에서 내리면서 두덜거렸다. “오 선생에게 잘 보여서 먹을알이 있을 거 같소? 흥!” 상순은 못 들은 척하고 쌀 수레를 몰고 오옥선 선생의 집으로 갔다. 오 선생의 집은 상순이네 뒷집이었다. 외아들을 중국 해방전쟁에서 잃고 무남독녀 외딸 오옥선 선생에 의지해 사는 일흔도 넘은 오철석 양주는 정말 불쌍했다. 그리하여 상순은 평소에도 항상 그들을 돌보군 했다. 그는 자기 집에 비가 새도 이영을 제때에 잇지 못했다. 그러나 해마다 봄이면 온 마을에서 제일 먼저 오 할아버지네 이영을 산뜻하게 이어주군 했다. 그리하여 흥수랑 뒤에서 상순이가 오옥선한테 눈독을 들여 슬그머니 호감을 사고 있다고 헐뜯었던 것이다. 오옥선은 옆에 말해주는 사람이 없어 그렇게 쉬쉬 거리는 줄도 모르고 덕돌을 제일 고와하고 공부도 열심히 배워주었다. 상순이가 쌀 마대를 실어다 주자 오철석 양주가 너무 반가와 주름살이 쪽쪽 간 얼굴에 비꼈던 어두운 그림자가 사라져버렸다. 오옥선 선생은 너무 반가와 금방 길어온 찬 샘물을 한 바가지나 퍼 상순에게 드렸다. 상순은 오옥선의 손에서 물바가지를 받아 꿀떡꿀떡 밑굽을 내 버렸다. 풍작을 거둔 마을에서는 기쁨의 물결이 출렁거렸다. 집집마다 찰떡을 치는 떵, 떵 떡메 질 소리가 들렸다. 상순은 마을 식당에 큰 잔치를 베풀기로 했다. 덕팔과 병완은 흰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마당의 상순과 상길이 떡을 치는 것을 구경하면서 만면에 웃음꽃을 활짝 피웠다. 그 바람에 수심이 어렸던 검은 그림자가 어렸던 주름살도 쫙 펴지는 상 싶었다. “오랜 만에 찰떡을 치는구나. 우리도 떡을 쳐보자.” 병완은 흰 팔소매를 걷고 나서 상순한테 손을 내밀었다. 상순은 떡메 질을 멈추더니 말렸다. “할아버지, 쉬십시오. 떡은 우리 쳐도 됩니다.” 그러나 병완은 상순의 손에서 떡메를 빼앗다 시피 했다. “우리도 떡을 치는 기쁨을 함께 맛보려는 게다.” 그제야 상순과 상길은 떡메를 내주었다. 병완과 덕팔은 떡메를 받아 쥐자 힘 있게 떵떵 쳤다. 아직도 당년에 고향에서 떡을 치던 힘이 남아있었다. 그 뒤로 박성근과 학수도 떡메를 받아 쥐어 쳤다. 그때 흥수가 성근의 손에서 떡메를 빼앗았다. “아니, 이거 떡을 한매도 쳐보지 못했네.” “놓으라면 놔!” “왜 이래?” “이 자식, 몰라 물어? 폐병을 앓으면서 떡을 더럽히려고?” “우파는 떡도 마음대로 못 치는가?” 폐병이라는 소리에 모두들 상을 찡그렸다. 상순은 딱한 표정을 지었다. 흥수는 떡메를 빼앗아 내고 성근을 저쪽으로 밀어놓고 떡을 떵떵 치면서 두덜거렸다. “제 주제를 알고 아무데나 덤벼들라고!” 흥수와 학수가 마주 서서 떡을 쳤다. 그때 성수도 이쪽으로 다가왔다. 그 바람에 모두들 떡을 치는 떡돌 옆에서 물러섰다. 어째 그랬는지 흥수네 삼형제가 나타나면 모두들 뒷걸음질을 쳤다. 명옥이랑 지새금이랑 지춘실이랑 모두들 새하얀 찰떡을 베 숱한 밥상에 올렸다. 덕돌이랑 성욱이랑 어른들이 베서 고물에 묻혀주는 찰떡을 받아 입에 물고 바깥에 나가 먹으면서 뛰놀았다.   양양 맛있다 오래오래 맛있다   덕돌이랑 성욱이랑 부른 노래에 순녀랑 미선이랑 마주 보며 화답이나 하듯이 노래를 불렀다.   아갈 딱딱 벌려라 영채김치 쑤셔 넣게   “하하하.” “호호호.” 집안에서는 막걸리를 서너 잔씩 마시고 미역국에 찰떡을 잡순 동네 어른들이 어깨춤을 덩실덩실 추면서 노래와 춤판을 벌렸다. 상순은 동네 남녀노소 앞에서 오랜만에 애창하던 노래 “호미가”를 목청껏 불렀다. 동산천리 돋으신 해는 점심때가 되어 온다 에라 에라 에라 호미야 호미 호미를 메고 가자 알뜰하게 가꾸어라 땀에서 나오는 곡식이로다 에라 에라 에라 호미야 호미 호미를 메고 가자   상순이 부른 그 노래 소리에 맞춰 병완과 덕팔이 그리고 덕성을 비롯한 동네 어른들이 어깨춤을 덩실덩실 추었다. 아래쪽의 명옥이랑 춘실이랑 지새금이랑 웃새집 이연옥이랑 도라지 춤을 너울너울 추었다. “쩌, 쩌, 쩌.” 흥수는 춘실이가 상순이 부른 노래에 흥이 나 너불대는 것이 눈꼴 사나와 외까풀 뱁새눈으로 흘겨보았다. 그는 한쪽으로 돌아앉아 미역국 사발을 들어 후루룩 후루룩 마시더니 바깥으로 훌 나가버렸다. 마을 사람들은 점심때부터 해가 지고 밤이 깊도록 먹고 마시며 춤을 추고 노래하며 풍작을 거둔 희열을 만끽했다.             3. 여자대장 오옥선 선생은 요즘 덕돌이가 남자애들에게 자주 얻어맞는 것을 어떻게 말려 줄 것인가 궁리했다. 사실 덕돌은 너무 총명해 공부는 산수나 어문이나 모두 평균 100점을 맞았지만 일곱 살에 학교에 붙다나니 낙제생 애들보다 너무 어리고 힘이 약해서 쩍 하면 얻어맞곤 했다. 그때마다 오옥선 선생은 덕돌을 때린 꺽다리 애들을 교실에서 끌어내 숱한 애들 앞에서 훈계했다. “공부는 꼴찌고 어린 덕돌과나 센 척 해라. 다시 때리겠니?!” 정덕이랑 오 선생에게 얻어맞으면서 연신 비명을 질렀다. “아이고, 다신 아이 때리겠습니다.” “다시 때리기만 해봐라! 가만 놔두지 않겠어!” 혼쭐이 난 낙제생 애들은 선생만 없으면 덕돌을 “산수골”이라는지 “남북골”이라는지 별의별 입에 담지 못할 말로 놀려주었다. 원순의 동생 송철은 덕돌과 한반에 다니는 동갑이었다. 그런데 형인 원순이가 두 번이나 낙제를 하는 바람에 형제가 한반에 다닐 수 없어 부득불 아래 학년에 내려가고 말았다. 낙제생 정덕이랑 원순이랑은 자기 동생만한 덕돌을 학교에서 돌아올 때면 가만가만 주먹이나 나무꼬챙이로 머리나 종아리를 때리면서 “다시 선생한테 일러바치겠니?” 하고 족 따지군 했다. 그때마다 덕돌은 “아이, 아이 말하겠다.”라고 했다. 덕돌은 더 얻 맞을 까봐 정말 오 선생뿐만 아니라 부모에게도 낙제생 애들에게 얻어맞은 소리를 하지 못했다. 그러나 부모나 오선생은 터진 머리나 긁힌 얼굴을 보고 덕돌이 또 얻어맞은 것을 알고 뒤조사를 해내 호되게 족치곤 했다. 개구쟁이 덕돌은 낙제생애들에게 자꾸 얻어맞으면서부터 점차 남자애들과 놀지 않고 미선이랑 순녀랑 여자애들과 놀기 좋아했고 차츰 여자애들과 우쭐거리는 “여자대장”으로 돼버렸다. 덕돌은 집에서 밥을 대충 먹고서는 학교에 젖은 누룽지를 가지고 가서 난로 연통에 쪽쪽 비벼 김이 몰몰 나는 누룽지를 먹기 좋아했다. 그해 따라 생산대에서 과수원의 애 어린 사과배나무 사이에 심은 감자를 걷어 들여 몇 마대씩 나눠 주어 집집마다 감자떡을 해먹는다, 숯불에 감자를 구워 먹는다, 감자밥을 해먹는다 하면서 배불리 살았다. 덕돌은 어머니가 빨간 열콩 알을 딲딱 박고 만든 감자떡을 아주 맛있게 먹었다. 더욱이 노랗게 구워진 감자 누룽지를 바싹바싹 씹어 먹기를 좋아했다. 그런데 막내누나 성숙과 나누고 나면 덕돌은 배가 차지 않았다. 그리하여 생각해낸 것이 미선이랑 순녀랑 은숙이랑 월금이랑 금란이랑 족쳐서 감자누룽지를 얻어먹는 것이었다. 덕돌은 성욱과 동림과 짜고 들어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조개덕과 함흥 촌으로 가는 갈림길 목에 서 있는 늙은 비술나무아래에서 미선이랑 순녀랑 붙잡았다. “어째 이러니?” 성욱과 동림이 미선이랑 순녀랑 팔을 비틀어 쥐었다. 은숙이랑 월금이랑 놀라서 함흥 촌 쪽으로 달려가다가 저 먼 발치에서 이쪽을 되돌아보았다. 덕돌은 나무꼬챙이를 쥐고 여자애들 앞에서 왔다 갔다 하면서 호통 쳤다. “내일 젖은 감자누룽지를 가져오라. 안 그럼 학교에 다 간다. 이 어르신들이 여기서 기다릴 테니 순순히 길세를 가져다 바쳐라.” 순녀와 미선은 죽는 상을 했다. “가져 오겠니? 안 가져 오겠니?” 순녀는 제꺽 “응, 가져올게.” 하고 대답했다. 그런데 사무러운 미선은 입술을 쫑긋거리면서 인차 대답하지 않았다. 덕돌은 나무꼬챙이로 미선의 잔등을 치면서 호통 쳤다. “왜 대답하지 않니?” 미선은 울까 말까 울먹거리었다. “가져오겠니? 안 가져오겠어? 가져 안 오면 내일 학교를 다 갈 줄 알아!” “흑, 흑, 흑. 이씨, 내 우리 엄마하고 다 말하겠어.” 미선은 흑흑 흐느껴 울면서 어름 장을 놓았다. “뭐라고? 그래만 봐라! 내 오 선생과 말해서 네가 내 숙제 베낀 걸 다 말하겠다.” 그러자 미선은 머리를 숙이더니 “내 말하지 않을 게.”라고 했다. “감자누룽지는?!” 미선은 머리를 까딱였다. 덕돌은 나무꼬챙이를 휘두르면서 개 잡은 포수처럼 우쭐거렸다. “그럼 그렇겠지! 흥! 내일 이 늙은 비술나무아래에서 기다릴 테다! 감자누룽지를 꼭 가져다 길세로 바쳐라!” 덕돌은 성욱과 동림을 보고 말했다. “놔줘라!” 그제야 미선과 순녀는 풀려났다. 저쪽에서 지켜보던 은숙이랑 미선을 기다려 함께 함흥 촌쪽으로 달아났다. 순녀는 혼자 집으로 돌아갔다. 이튿날 덕돌은 정말 성욱이랑 동림이랑 함께 아침 일찍이 함흥 촌에서 내려오는 늙은 비술나무 아래에서 나무꼬챙이를 쥐고 왔다 갔다 하면서 기다렸다. 저쪽에서 순녀가 다가왔다. “가마치를 가져 왔니?” 덕돌이 나무꼬챙이를 쳐들고 물었다. “응.” 덕돌은 우쭐해서 “그래. 난 순녀가 말을 잘 들어서 제일 곱다.”라고 했다. 그 말에 순녀는 귀밑까지 붉히면서 눈을 곱게 흘겼다. “넌 학교로 가도 된다.” 순녀를 놓아 보내고 덕돌은 감자누룽지를 세 쪼각으로 나눠 성욱과 동림과 함께 먹으면서 종알거렸다. “어째 미선이 가시나 새끼 아직도 오지 않니?” 범이 자기 흉을 하면 온다고 윗마을의 미선이랑 은숙이랑 월금이랑 금란이랑 살금살금 다가왔다. “서라, 섯!” 이번에는 성욱이 우쭐해 나섰다. “누룽지를 가져왔니?” “가져왔다.” 미선이랑 이구동성으로 대답하며 호주머니에서 젖은 감자누룽지를 꺼내 내밀었다. “그럼 그렇겠지. 길세를 바치지 않고 학교로 갈수 있어? 흥!” 덕돌은 누룽지를 일일이 받아 챙기면서 쌍까풀 깜장 눈을 부라렸다. “너네도 학교로 가도 된다.” “야, 좋다. 학교로 가자!” 미선이랑 은숙이랑 와 소리치면서 다리야 날 살리라고 학교 쪽으로 달아났다. “가만, 가만!” “어째?” 미선은 걀죽한 철색얼굴을 잔뜩 찌푸리면서 딱 멈춰 서서 되돌아보았다. 덕돌은 김이 몰몰 나는 누룽지를 먹으면서 호령했다. “내일부턴 샛노란 감자누룽지를 가져오라! 알았니?” “우리 집엔 요즘 감자누룽지 없는데 어떻게 하니?‘ 미선이 죽는 상을 하자 덕돌은 양미간을 찌푸리더니 말했다. “방법은 생각하면 있는 법이야. 너네 엄마 보고 아침밥을 지을 때 감자누룽지를 꼭꼭 앉히라고 해라.” “엄마 말을 듣지 않으면 어쩌니?” “그럼 학교를 다 갔다. 알아?” 덕돌은 미선의 코 앞에 주먹을 쳐들어보였다. “알았다, 꼭 가져올게.” 그제야 덕돌은 머리를 흔들면서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성욱과 동림과 함께 학교로 갔다. 누룽지를 먹으면서 학교로 가다나니 눈보라가 휘몰아쳐도 추운 줄을 몰랐다. 학교에서 수업을 마치고 점심시간이거나 휴식시간이면 덕돌과 성욱, 동림은 먹다 나머지 젖은 누룽지를 꺼내 달아오른 난로 연통에 쪽쪽 문댔다. 그들은 김이 몰몰 나는 누룽지를 먹으면서 콧노래를 흥얼흥얼 불렀다. 그런데 그 멋도 오래가지 못했다. 어느 날, 덕돌은 엄마를 따라 함흥 촌에 군일이 있어 갔다. 그런데 미선이 엄마 춘실이 숱한 어머니들의 앞에서 덕돌의 엄마 명옥에게 고충을 털어 놓을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조 놈 덕돌이 몹쓸 놈이오.” 그 말에 명옥은 적이 기분이 잡쳤다. “어째 남이 금이야, 옥이야 하면서 쥐면 부서질 까봐 애지중지 하는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그렇게 욕하오?‘ “아무리 금이야, 옥이야 해도 그렇지. 우리 미선을 못 살게 군다는데. 요즘 미선이 별나게 날마다 아침이면 가마 옆에 붙어 있다가도 누룽지를 꼭꼭 뭉쳐 주면 가지고서야 학교로 가는가 했지. 그런데 어느 날 내가 밥을 다 푸고 그만 물을 부어넣었더니만 우리 미선이 가마를 붙들고 왕왕 울지 않겠소? 그래 어째 그러는가 물었더니 뭐라는지 아오?” 춘실은 표독스러운 눈길로 명옥과 덕돌을 쏘아보면서 뒷말을 이었다. “우리 미선이 왕왕 울면서 ‘누룽지를 가지고 가지 않으면 덕돌이 학료로 가지 못하게 하오.’라고 하지 않겠소? 못된 쇄지 엉덩이에서 뿔부터 난다고 미선이 누룽지를 받아먹고 자지 얼마나 컸는가 보자.” 춘실이 정말 덕돌이 바지를 벗기려고 달려들자 명옥이 두 팔을 벌려 막으면서 말렸다. “덕돌아, 다시는 그러지 말라. 엄마 감자누룽지를 많이 해줄 테니 미선이랑과 달라 하지 말라.” 은숙의 엄마랑 순녀 엄마랑 월금의 엄마랑 다 자기 딸들을 못살게 굴었다고 덕돌을 욕했다. 덕돌은 밥상 밑으로 기어들어가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었다. 그 후부터 덕돌은 다시는 여자대장 질을 하지 못하고 미선이랑 여자애들에게서 누룽지를 얻어먹지 못했다. 대신 엄마가 뭉쳐 주는 감자누룽지만 먹게 됐다. 눈보라가 윙윙 휘몰아치는 맵짠 추운 겨울 날씨에도 애들은 썰매를 탄다, 스케트를 탄다, 외날박이 쪽바기를 탄다 하면서 강판에서 놀았다. 허나 덕돌은 외날박이 쪽바기가 없어 타지 못해 집에서 굴면서 떼 질을 썼다. “나도 쪽바기를 만들어주오.”  “내 언제 그런 걸 다 만들 시간이 있니?”        상순은하고 퉁명스레 말하고는 곡괭이를 둘러메고 둼을 끄러 나가려고 했다. “아버지, 남들의 아버지는 다 자기 아들을 만들어주는데 왜 아버지는 만들어주지 않소? 엉, 엉, 엉.” 허나 상순은 대수로워하지 않고 문 밖으로 나가버렸다. “엄마, 쪽바기를 만들어주오.” “쪽바기라는 게 어떤 게야?” 명옥은 덕돌의 손을 쥐고 얼음판으로 나갔다.  애들이 한창 얼음판에서 쪽바기를 타고 있었다. 그걸 보고 명옥은 덕돌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인차 대답했다. “응, 알았다. 네 양형님에게 말해서 만들어줄 게.” 덕돌은 엄마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물었다. “내게두 형님이 있소?” “응, 그래. 네게도 양형님이 있지.” 덕돌은 호기심이 부쩍 동했다. “어디 있소?” “우리 마을 이주봉이 네 양형님이야.” “예? 내게도 형님이 있구나. 야, 좋다!” 덕돌은 너무 좋아 깡충깡충 뛰었다. 그는 흥분된 나머지 길바닥의 눈을 쥐어 마구 뿌렸다. “내게도 형님이 있다. 누가 덤벼봐라! 주봉형님과 다 말하겠다. 씨!” 순간 덕돌은 낙제생 원순이나 정덕에게 맞아대도 친형님이 없어서 말하지 못하던 울분이 터졌다. 이제부터는 양형님이 있어 단통 업신여김을 당하지 않을 거 같아 좋았다. “엄마, 주봉형님은 어떻게 돼 내 양형님이 됐소?” 명옥은 덕돌의 손을 잡고 마을로 돌아오면서 천천히 말했다. “주봉 형님의 어머니는 주봉을 난산으로 낳고 세상을 떠났단다. 그래서 엄마가 주봉 형님을 안아다가 둘째누나와 함께 한쪽 젖씩 먹여 키워주었단다. 그래서 그 집에서는 나는 주봉의 양어머니로 됐단다.” “오. 그랬구나. 그럼 정말 내 형님이구나. 야, 정말 좋다야.” 덕돌은 너무 기뻐 외발 뜀으로 눈길을 퐁퐁 뛰다가 그만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그거 봐라. 애들이 좋아하면 울 일이 생긴다고.” 덕돌은 상을 찡그리면서 일어나 서적을 부렸다. “엄마, 빨리 주봉형님을 보고 쪽바기를 만들어 달라고 하오. 이제 방학도 며칠 남지 않았는데 얼음이 녹으면 언제 타겠소?‘ “응, 그래.” 덕돌에게 엄마가 대답한지도 며칠 지났는데도 주봉 형님이 쪽바기는 가져오지 않았다. 그러자 덕돌은 또 구들에서 땔땔 굴면서 울며불며 떼를 썼다. “어째 형님이 쪽바기를 만들어 가져오지 않소? 빨리 가져오라고 하오.” “인차 가져온다고 했다. 근심하지 말라.” “빨리 가져오오.” 바빠 맞은 명옥은 떼를 쓰는 덕돌을 떼놓고 주봉이네 집으로 달려갔다. 이윽고 문을 뚝 떼는 소리에 덕돌은 떼를 쓰다가 눈을 떴다. 헌데 주봉형님은 쪽바기를 가져오지 않았다. “형님, 쪽바기를 만들어주오.” 그러자 수무살이 다 된 주봉은 쇳날을 하나 꺼내 보이었다. “덕돌아, 이거 봐라. 쪽바기 날이다. 내 금방 대대 철공소에 가서 쪽바기 날을 반들반들하게 갈아왔다.” 그러나 덕돌은 쪽바기 날을 쥐어 보고 또 떼 질을 썼다. “이걸로 어떻게 타오?” 주봉은 황급히 쪼그리고 앉아 설명해주었다. “이제 여기에 나무를 대패질해서 대면 된다. 그런데 내 지금 대패 없어서 빌려고 마을에 나가는 길이다.” 그제야 덕돌은 눈물을 조막손으로 닦더니 떼질을 멈추었다. “그럼 오늘 탈 수 있소?” “탈 수 있어.” “그럼 우리 집에서 지금 만드오.” “응, 그래.” 주봉은 명옥의 부탁대로 덕돌이 조급해하니까 덕돌이네 집에 대패랑 빌어 오고 나무판자랑 쇠못이랑 가져다가 만들기 시작했다. 온 오전 만들어 해가 중천에 걸려서야 쪽바기를 다 만들었다. 신난 덕돌은 쇠 송곳 자루에 쪽바기를 걸어 둘러메고 양형님과 엄마와 함께 강판으로 나갔다. 애들이 와 몰려 왔다. “야, 덕돌의 쪽바기 좋구나.” “제일 멋있다야.” 덕돌은 사기 나서 얼음 강판에서 쪽바기를 타고 씽씽 달렸다. 성욱이랑 동림이랑 덕돌의 뒤에서 쪽바기를 타고 뒤따라 왔다. 저쪽 먼발치에서 덕돌이 쪽바기를 씽씽 타고 달아 다니면서 좋아하는 모습을 보면서 주봉과 명옥은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런데 덕돌은 교실에서 사달을 쳤다. 그만 교과서에 있는 모주석의 초상화를 보고 쓸데없는 말을 해서 학교 교무실에 불리어 갔다. 교무처 허 주임은 덕돌에게 교과서 첫 페지에 있는 모주석의 채색초상화를 내밀면서 안경알 너머로 쏘아보면서 따졌다. “애들이 그러던데 넌 모주석의 키가 이렇게 클 수 있는가고 했다던데 옳니?” “그랬습니다.” “어째 위대한 영수를 모욕했니?” “모욕이라는 건 무슨 말입니까?” “응? 어째 모 주석을 욕했는가는 말이다!” “내 언제 욕했습니까?” “그게 욕이 아니고 뭐니?” “내 언제 욕했습니까? 모주석의 키가 다른 사람의 키보다 열배나 클 수 있는가고 물었지?” 사실 교과서에 그린 그림은 모주석이 서서 손을 젓는데 그 발밑으로 해 밥알만큼 밖에 안 되는 숱한 군중들이 박수를 치면서 환호하는 장면을 그린 것이었다. 아마 모 주석을 돌출하게 나타내느라고 군중들보다 열배나 더 크게 그린 것 같았는데. 그걸 보고 천진한 덕돌은 그런 의문을 제기했던 것이다. 그런데 미선이랑 누룽지를 빼앗아 먹은 악감을 갚으려고 한어선생에게 일러바쳤는데 교무처 허주임에게까지 올라갔던 것이다. 교무처 허 주임은 오옥선 선생을 불러다가 훈계했다. “담임교원이 우파니까 애들을 어떻게 교육을 잘 했으면 위대한 혁명도사이며 위대한 혁명령수이시며 위대한 키잡이시며 위대한 뭐더라 모 주석을 이렇게 욕하게 한단 말이오?” 그러자 오옥선도 지려고 하지 않았다. “애들이 뭘 안다고 그럽니까? 그저 그림을 보고 키 비례가 맞지 않는다고 한 말을 가지고 그럽니까. 쩍하면 정치투쟁에 귀결시킬 건 뭡니까? 물론 제가 애들에게 주의를 주지 못한 건 잘못입니다. 후에 주의를 주겠습니다.” “이런, 이런! 이렇게 정치 민감성이 없으니까. 처녀시절에 우파 모자를 썼지. 우파 모자를 쓰고 10년 가까이 고생을 했으면 정치 두뇌가 명석해야지. 아무리 우리 대대당지부 서기 아들이라고 해도 이 일은 그저 넘어갈 수 없소.” 그는 덕돌에게 눈길을 돌리더니 “덕돌이라 했지? 검사 서를 써 바쳐라.”라고 했다. “검사서? 건 뭡니까?” “네가 모 주석을 모욕한 죄를 승인하고 잘못했다고 써라.” 교무처 허 주임은 책상을 꽝 치면서 덕돌에게 겁을 주었다. 덕돌은 울면서 교실에 돌아와 머리를 책상에 파묻고 홀짝홀짝 울었다. 그날 저녁에 오옥선 선생은 앞집인 덕돌의 집에 찾아와 대낮에 있은 일을 상순과 명옥에게 죽 말하고 나서 격분해 했다. “애들에게마저 억울하게 모자를 씌우는 작법은 잘못이라고 봅니다. 저렇게 천진난만한 애들의 가슴에 옹이 박히는 일을 해서야 됩니까?” 상순은 한숨을 후 내쉬더니 천천히 무거운 입을 열었다. “오 선생, 올라와 천천히 얘기하기요. 지금 세월에는 입을 놀리기 정말 무섭소. 더운 밥을 먹고 식은 소리를 해서 생이를 상할 게 있소. 애들도 어려서부터 이런 환경에서 살면서 주의하게 검사 서를 쓰게 하기요.” “아니, 절대 그렇게 할 수 없어요. 세상을 모르는 어린 가슴에 억울한 못을 박을 순 없어요.” 명옥과 홍자나 은숙도 저으기 긴장해 하면서도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상순은 담배쌈지를 꺼내 담배를 말았다. “방법이 하나 있소. 검사서지만 사건경과를 그대로 밝히면 되오. 과분하게 모 주석을 모욕했다고 억지로 과장해 검사할 필요는 없다고 보오.” “예~” 오옥선은 구들에서 일어났다. “그럼 먼저 그러루하게 써서 바치고 봅시다.” 그리하여 상순이가 먼저 이른바 검사서를 쓴 후 덕돌이 그대로 베껴 썼다. (김 서긴 진짜 로련한 정치9단이야.) 이튿날 오 선생은 덕돌의 손을 잡고 교무실에 허 주임을 찾아갔다. 덕돌이 이른바 “검사서”를 바쳤다. 허 주임은 안경너머 그 “검사서”를 읽어보더니 “네가 읽어라.”하고 쌀쌀하게 말했다. 덕돌은 검사서를 받아 그대로 내리 읽었다. “검사서, 나는 모 주석이 우리 위대한 영수인 걸 몰랐습니다. 그저 모 주석과 사람들의 키가 어째 너무 차나는 것 같아 잘 못 말했습니다. 이후에는 모 주석께 충성을 다하고 아무 말을 함부로 하지 않겠습니다. 덕돌.” “흥!” 허주임은 콧방귀를 뀌더니 “이게 어디 검사서요?” 하고 소리쳤다. 그는 덕돌의 손에서 검사 서를 와락 채다가 안경 너머로 두루 여겨보더니 사무상 한쪽에 훌 던져버렸다. 이윽고 허 주임은 오선생을 훑어 보더니 “혹시 오선생이 대신해 쓰지 않았소?” 하고 물었다. “아닙니다.” 그러나 허 주임은 뭔가 짚이는 데가 있었든지 오선생을 안경너머 꼿꼿한 눈길로 콕콕 찌를 듯이 쏘아보았다. “애가 이렇게 간단하고도 중점이 돌출하게 쓸 수 있소? 변명도 심통하게.” 옆에 서있던 덕돌이 어망간에 입을 열었다. “아닙니다. 그 검사서는…” 옆에 서있던 오 선생이 제꺽 덕돌의 입을 막았다. 허 주임은 숨이 막혀 상을 찡그리며 벌개져 가는 덕돌의 얼굴과 오 선생의 복숭아 같은 얼굴을 번갈아보았다. “오 선생, 지금 뭐 하는 거요?” 오 선생은 덕돌의 입을 막았던 손을 떼면서 눈을 질끔 해보였다. 영리한 덕돌은 인차 그 뜻을 알아차렸다. 허 주임은 덕돌을 쏘아보면서 겁을 주더니 가까이 다가와 무릎까지 꺾고 앉아 따졌다. “그래, 넌 김서기네 아들이지. 거짓말을 할 줄 모르지?” 덕돌은 머리를 끄덕이었다. “그럼 사실대로 말해라. 이 검사 서를 누가 썼니? 오 선생이 써주었지?” “아닙니다. 그 검사서는 내 썼습니다.” “누가 쓴 걸 베끼지 않았니?” “아닙니다. 내 썼습니다." 주임은 머리를 흔들더니 일어나 사무상에 돌아가 앉았다. “고 놈 죄꼬만 자식, 애비를 닮아서 속에 영감이 들어찼구나.” 허주임은 의자 등받이에 잔등을 대며 틀을 차리며 거만하게  말했다. “못된 놈새끼, 좌우간 덕돌은 우파 혐의가 있소. 난 상급 교육기관에 회보해야겠소.” 이때 오옥선은 더는 참을 수 없었다. “허 주임, 내게 우파 모자를 씌워놓고서도 모자랍니까?! 이젠 세상을 모르는 어린 애한테마저 우파 모자를 씌우자고 미쳐 날뜁니까?! 절대 안됩니다.” 허주임은 오 선생을 멍해 쳐다보다가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너, 가만히 보자보자 하니 아직도 속은 파속처럼 새파랗구나. 내 말을 듣지 않은 후과가 얼마나 큰 줄을 아직도 모르니? 노처녀로 늙도록 시집도 못가자고 그러니?” “말 한마디를 잘 못한 걸 가지고 한평생 우파 모자를 씌워놓고 투쟁하면 속이 풀리겠구먼.” “어디 네가 이기는가 두고 보자! 자초부터 내 말을 고분고분 들었더라면 우파 모자도 쓰지 않았지?” “더럽다!” 오옥선은 땅바닥에 침을 택 뱉고 덕돌의 손을 쥐고 나왔다. 원래 유부남인 허 주임은 오옥선에게 치근거리었다. 조용할 때면 오옥선에게 자기 아내의 허물을 한바탕 늘여놓으면서 이혼하고 싶다고 했다. 어느 날 해 질 무렵에 허주임은 교무실에 아무도 없을 때 한창 숙제책을 검사하는 오옥선에게 뒤로 다가와 와락 끌어안았다. 깜짝 놀란 오옥선이 와닥닥 일어나면서 허시종의 두 팔을 뿌리치었다. “왜 이래요?” 그 바람에 허씨의 안경이 땅바닥에 떨어져 잘라당 깨졌다. 오옥선은 쌍까풀눈으로 허 주임의 대머리를 쏘아보았다. “히히히, 옥선이, 딱 한번만이라도 오선생과 살아 보고 싶소.” “픽!” 오옥선은 쓴 웃음을 지었다. “저를 어떻게 보고 하는 말인가요? 허 선생은 애 셋이나 달린 나그넨데요. 열 살 이상이면 페물이 다 된 나그넨데요.” “뭐라고?" 허주임은 성이 꼭두까지 치밀었다. 그러나 용케도 참아냈다. 그는 한숨을 길게 내쉬더니 " 사랑에도 나이나 가정이 문제요?” 하고 덧걸이를 걸었다. “큰 문제죠." 옥선은 교무실에서 나오면서 두덜거렸다. "픽! 오줌을 싸놓고 제 즛쌀이나 보고 개지랄해라.” 옥선은 그 후부터 허씨를 경계하면서 멀리했다. 허 주임은 꽃 같이 예쁜 쌍태머리 처녀를 앞에 두고 먹어치우지 못하는 것이 한이었다.  허 주임은 그게 속에 내려가지 않아 먹지 못할바에는 아예 그녀를 짓밟아버리려고 앙심을 먹었다. 그러던 차 옥선이 “당원은 특수재료 강철로 만들어졌다는게 뭐요? 당원도 남자의 정자와 여자의 난자가 결합돼 만들어진 사람이겠지.”라고 말했다. 허씨는 그 꼬리를 틀어쥐고 상급당위에 물어먹어 오옥선에게 우파 모자를 들씌워 투쟁받게 해 10년 거의 고생시켰던 것이다. 허 주임은 덕돌의 사건이 터진 그날로 오옥선의 담임교원직을 철직시켰다. 파직 이유는 간단했다. 우파 여선생에게 애들을 맡겼다가는  숱한 우파학생들을 길러내겠다는 것이었다. 함흥소학교에는 또다시 세찬 흑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어린 덕돌은 세찬 눈보라 앞에 나선 등잔불처럼 몸부림치고 있었다. 그런데 그날 저녁에 상순이 직접 찾아 뭐라고 해 놓았던지 교무처 허 주임의 태도는 급변했다. 그는 교무실에서 교원대회를 열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문화대혁명의 뚜껑을 열려면 교원들 내부부터 파재껴야 한다면서 애들을 가지고 이러쿵저러쿵 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덕돌의 일은 다시 묻지 말기를 바랍니다.” 그후터 허주임은 그 일을 더 거론하려고 하지 않았다. 하긴 “빈하중농이 없으면 혁명도 없다. 빈하중농이 일체를 영도한다.”는 위대한 수령님의 지시가 있는 한 함흥대대 서기자 빈하중농 대표인 상순을 등지고 허씨는 교무처 주임은커녕 함흥소학교에서 교원을 하기도 어려울 것은 불 보듯이 빤한 일이었다. 자칫하면 소 궁둥이나 쳐야 할지 누가 알겠는가? 허씨는 상순이 하던 말을 떠올리기조차 싫었다. 정말 잔등에 식은땀이 나고 온 몸에 소름이 쫙 끼치는 말이었다. 말마디마다 선뜩선뜩한 면도칼날이 되어 자기 온 몸을 찌르는 것만 같이 날카로웠던 것이다. 철부지 덕돌은 하마터면 10대도 되기 전에 우파나 반혁명분자로 몰리어 억울한 모자를 쓸 번했다. 다행히 로련한 아버지 힘에 의해 겨우 그 번 “정치곤경”을 모면했던 것이다.
133    대하소설 진달래 소야곡(15) 댓글:  조회:1351  추천:0  2018-04-12
                         28. 미궁        함박눈이 펑펑 쏟아져내리는 동장군이 덮쳐와 대지를 휩쓸었다. 삼라만상이 새하얀 이불과 자오록한 연기를 들쓰고 자취를 감추었다. 흩날리는 눈발 속에 모든 단서가 오리무중에 빠져 헤맸다.       성호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번 사건이 미궁에 빠진 듯한 감을 느꼈다.       그는 이모부네 집에서 아침을 먹으면서 이상한 점을 말했다.        “승호와 은영을 해친 깡패들의 뒤에 뭔가 더 묻어나올 것 같습니다.”        운룡은 버릇처럼 주먹으로 메부리코를 쓱 씃으며 “뭘?” 하고 물었다. “하나는 어느 놈이 승호의 귀두를 잘랐을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번 사건 배후가 궁금합니다. 혹시 주악의 말대로 송파가 시켰는지?” “문제를 제대로 봤다. 우린 계속 수사하고 있다.” 운룡은 속으로 성호의 예리한 판단에 감탄했다. “넌 우리 수사대원들을 협조해 은영과 승호한테 접근해 실마리를 찾아 봐라.” “예.” 순옥은 돼지고기점을 성호 국그릇에 더 떠주면서 대견하게 조카를 바라보며 혀를 끌끌 찼다. “텔레비죤방송에서 네가 ‘정의용사패’를 타는 장면을 보고 얼머나 기뻤는지 몰라. 넌 천생 수사대원 감이야.” 그녀는 남편을 보고 성호를 수사대대에 받아들여 달라고 여러번 부탁했다. 열다섯살 난 강호는 “나도 크면 성호 형님처럼 경찰이 될 거야.”라고 하면서 돼지고기국을 쭉 들이켰다. 순옥은 “그래, 우리 강호 장해.”라고 하면서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성호는 어깨가 무거워나는 감을 느끼면서 이모네 집을 나섰다. 그가 골목길에 나서자마자 기다린듯이 파랑새 정희가 뛰여나왔다. “축하해. 정의용사!” 그녀는 들가방에서 신문을 꺼내 보였다. 성호가 신문을 받아보니 그가 “정의용사패”쪽을 받는 사진, 수길과 함께 김광일을 나포한 사적이 큼직하게 실려 있지 않겠는가. “아버지는 학교에서 신문을 보고 너무 기뻐 집으로 가져 오지 않았겠어. 농민의  아들이지만 아주 전도 있는 청년이라고 했어.” 정희는 걀죽한 얼굴에 홍조를 띄우더니 어린애처럼 애교를 부렸다. “아버지 또 뭐라고 했는지 알아?” 성호는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정희는 골목에 행인들이 없는지라 성호의 팔을 끼고 딱 붙어서서 걸으면서 나직이 말했다. “오늘 널 우리 집에 데려오라고 하더라.” “?!” 성호는 저으기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가 오매에도 기다린 반가운 소식이 아닌가. 그러나 짐짓 아닌 보살을 떨었다. “건 왜?” 정희는 성호의 팔을 쥐여 흔들면서 교태섞인 어조로 말했다. “가보면 알겠지.” 성호는 모든 일이 슬슬 풀리는 것이 속으로 못내 흐뭇했다. “깡패들을 깊이 파 봐야지.” 정희는 성호에게 바싹 붙어서서 나란히 걸었다. “공안국에서 널 받겠다더니?” “아직 몰라.” 정희는 주춤 멈춰서더니 성호를 희망의 빛이 반짝이는 눈길로 바라보았다. “전번에 학교에서 퇴근해 집으로 가다가 종수를 만났어. 그 앤 소식공개회에 참가했다더군요.” “뭐라던?” “천국장이 너에게 직접 ‘정의용사상패’와 상금을 수여했다더구나. 또 수사대대에 받겠다고까지 했다더구나. 맞지?” “음-” “잘 됐어. 우리 부모 얼마나 기뻐하는지 알아? 이젠 우리 집에 가 있으면서 공안국에 출근하렴.” “결혼하기 전에 가시집에 가 있으면 남들이 뭐라고 하겠느냐? 이모부네 집에 있으면 수시로 이모부한테서 수사재간을 배울 수 있어 좋아.” “내 언제 너와 한 이불에 든다고 했니?” “그래도 그렇지. 온 동네에 소문을 놓으라고?” “별 소릴 다해. 결혼하면 다지. 안 그래?” “그래도 어쩐지…” “이모네 집보다 좀 좋아 그래? 로임도 타지 못하면서 언제까지 이모네 집에 얹혀 살 예산이냐?” “그래도 어찌 결혼 전부터 처가살이를 한단 말이냐? 아직 이모네 집에 있는 것이 편안해.” “글쎄, 정 그럼 편리할대로 해.” “감사하다고 전해라. 사돈보기는 취소! 아예 음력설 이튿날 쯤에 결혼해버리자!” “어머나. 진짜 급하구나. 진짜 우물에 가서 숭늉 달라는 판이군요. 호호호.” 성호는 시무룩이 웃으면서 화제를 돌렸다. “은영이 참 불쌍해.” 정희는 성호의 아픈 마음을 조금이라도 리해할 것 같았다. 빙장에서 은제비처럼 쌩쌩 나래치던 생기발랄한 처녀대학생이 극악무도한 깡패들에게 무참히 짓밟히지 않았는가. “문안이라도 해야겠는데. 좀 도와달라.” “아직도 걜 잊지 못했어?” “아니, 동정해서 그래. 같은 녀자로서 불쌍하지도 않아?” “불쌍하죠.” 정희는 혀를 홀랄 내밀면서 성호의 눈치를 살짝 살폈다. “뭘 사가지고 갈가? 때마침 어제 로임을 탔어.” “언제까지 네 돈을 쓰겠니? 상금으로 꽃이나 사가지.” 정희는 대뜸 백지장 같던 우유빛얼굴이 새파래났다. “병문안을 하러 가는데 웬 꽃이냐? 과일이나 사가지.” 성호는 들었는지 마는지 “진달래꽃이 있으면 더 좋겠는데.” 하고 꽃가게에 다가갔다.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는 엄동설한에 웬 진달래꽃이냐?” 성호는 고집을 부렸다. “인조꽃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는데.” “그래?” 그들은 병원 근처에 있는 여러 생화점을 돌아다녔다. 허나 겨울에 진달래꽃이 있을리 만무했다. 더구나 인조진달래꽃도 보이지 않았다. 성호는 맥이 풀려 정희를 데리고 마지막 생화집에서 나오면서 아쉬워했다. “야, 봄이면 얼마나 좋겠니? 우리 고향 천지꽃산에는 진달래꽃이 많은데.” 생화점 녀주인이 그들을 불러세웠다. “잠간만요. 우리 집 애들이 병에 꽂아놓은 거라도 사겠어요?” 성호는 정희를 마주 보며 싱글벙글 웃었다. “고맙습니다.” 성호와 정희는 끝내 연분홍 진달래꽃을 얻어 들고 병원으로 향했다. “진달래꽃에도 가시가 돋혔나?” 정희는 진달래꽃을 두루 살펴보았다. “진달래꽃에 웬 가시냐?” 정희의 말에 성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가시야 뭐 있겠냐? 그러나 진달래꽃에도 분명 가시가 있다고 생각해.” “호호호. 문학적인 상상일뿐이야.” 성호는 주춤 멈춰서더니 정희에게 진달래꽃을 쥐여주었다. “네가 가지고 가서 대신 문안해라.” “왜?” 성호는 정색했다. “은영은 날 보기 불편해 할 거야. 네가 한가지만 알아봐달라.” 성호는 정희의 귀에 대고 뭐라고 귀속말을 했다. “알았어요. 친애하는 정의용사동지.” “이 사건을 끝까지 해명해 깡패무리를 일망타진하지 않고선 승호나 은영이나 한뉘 편안히 살 수 없어.” “야~ 네 같은 친구를 만난 승호나 은영이 얼마나 행복해?” “걔들이 언제까지 부모와 경찰들의 보호를 받으면서 살아야 하니?” 정희는 눈을 살풋이 내리깔며 꽃다발을 내려다 보더니 비장한 마음다짐을 하였다. 정희는 종종 걸음을 쳐 병원으로 향했다. 정희가 꽃다발을 들고 입원실 2층복도로 올라가자 경찰들이 삼엄한 경계를 서고 있었다. 낯선 그녀가 은영이 든 병실에 다가가자 경찰이 막아섰다. “누굴 찾습니까?” “최은영을 문안하러 왔어요.” “어떤 관계입니까?” 경찰은 꼬치꼬치 캐여 물었다. “대학교 친군데요. 한 침실에서 근 3년이나 지냈어요.” 경찰은 머리를 끄덕였다. “잠간 여기서 기다리십시오.” 경찰은 병실에 들어가더니 이윽해 복도로 나왔다. “들어가보십시오. 환자 정신상태가 좋지 못하니까. 10분을 초과하지 마십시오.” 정희는 꽃다발을 들고 들어가려고 했다. “잠간!” 그때 뒤에서 경찰이 불러세웠다. 경찰은 다가와 정희의 손에서 꽃다발을 받아들고 이리저리 헤쳐보더니 되주었다. “미안합니다. 들어가십시요.” 정희는 조용히 문을 열고 병실에 들어섰다. 새하얀 병실 문어귀 침대에 녀경찰이 앉아 있었다. 정면 침대에 은영이 누워 있고 그 옆에 어머니가 앉아 있다가 엉거주춤 일어섰다. “은영아, 괜찮니?” 은영은 머리까지 덮었던 이불을 훌렁 내리더니 발딱 일어났다. “언니!” 은영은 정희가 내민 진달래꽃다발을 받아 향기를 맡더니 탁상에 올려놓았다. 그녀는 꽃다발에 걸린 글쪽지에 눈길이 갔다. “하루속히  건강과 행복을 찾기를 바래. 리성호, 엄정희.”  은영은 정희를 끌어안더니 눈물을 펑펑 쏟으면서 왕왕 대성통곡쳤다. 정희는 은영이 생각보다 정신상태가 호전된 것 같았다. 그녀는 성호의 부탁을 받았는지라 두루 문안을 둬마디 하고는 인차 관심사부터 물었다. “수사가 아직 끝나지 않았어. 언제까지 경찰들의 보호를 받으면서 살아야 하겠니? 깡패놈들을 일망타진하지 않고선 편안한 날이 없어.” “원쑤는 갚아야죠. 언니, 성호 오빠랑 수사대원들을 도와 강도들을 몽땅 나포했단 말을 들었소.” “얘, 우리 손잡고 깡패들의 죄상을 몽땅 밝혀내는게 어때?” “좋죠. 내 할 수 있는 일이 뭐요?” “승호도 모질 상했는 모양이더라.” 은영은 녀경찰한테 머리를 돌리더니 “잠간 자리를 피해줄 수 없어요?” 하고 물었다. 녀경찰이 나갔다. “어머니도 자리를 내줘요.” 어머니도 병실을 천천히 나갔다. 정희는 계속해 물었다. “승호가 병문안을 왔댔느냐?” 은영은 머리를 가로저었다. “며칠 전에 다른 병원으로 가버렸대요.” “웬 일이냐? 모질 상했는 모양이지. 아, 그날 너희들 련애하러 학교 뒤산에 갔다면서?” “그랬어요.” “네가 처음부터 사실 제대로 말했더라면 사건해명을 더 빨리 했을 걸 그랬어.” “그렇지요.” 은영은 이불을 훌훌 개이면서 혼자말처럼 중얼거렸다. “승호는 아마 종신병신이 됐을 걸. 그런 개자식은 귀두뿐이겠소? 개XX 같은 걸 썩뚝 잘라버려도 속이 씨원찮아.” “야, 무슨 소리냐? 너희들은 모두 피해자들인데.” “그 개놈 새끼!” 은영은 대뜸 눈에서 불찌가 탁탁 튈 지경이였다. “승호, 그 수캐 같은 놈이 얼마나 많은 처녀들을 짓밟았는지 아오? 경옥이, 홍희. 홍희는 비참하게도 목숨으로 사회에 도덕이 없는 놈을 처벌할 걸 호소했어요. 그러나  승호는 아무런 처분도 받지 않고 뻔뻔스레 살고 있소.” 정희가 한마디 했다. “승호는 공안국 감옥관리대대에 들어갔다가 쫓겨났다더라.” 정희는 정신이 아주 말쑥한 은영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경옥이나 내나 다 얼마나 고통 속에서 사는지 아는가요? 죽지 못해 억지로 이를 악물고 살아요. 원쑤 갚을 날을 기다리면서. 기실 이번 사건도 우연히 생긴 건 아니예요. 다 승호 때문이죠. 경옥이 사촌오빠들 깡패무리를 시켜 보복한 것 같아요. 자존심이 면도칼날처럼 시퍼런 송파 깡패무리가 승호를 놔둘리 없겠어요? 송파를 놔두는 한 승호나 내나 하루도 편안히 살 수 없어요.” 정희는 성호한테서 들은 말을 했다. “그런데 주범과 광일은 죽어도 송파가 시킨 일이 아니라고 딱 잡아뗀단다. 오히려 자기넨 네가 시켜서 보복했다고 물고 늘어진단다.” 은영은 쓰거운 비웃음을 입귀로 흘렸다. “쳇, 내 깡패들을 시켜 나를 강간하게 했단 말이요?” 정희는 말이 나온바하고는 끝까지 나갔다. “승호의 귀두도 자기네 자른게 아니라고 딱 잡아뗀단다. 오히려 너, 은영이 짓일지 모른다고 했단다. 정말 너와 승호 앞날이 걱정이야. 어쩜 좋아? 호~” 정희가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면서 은영의 반응을 살폈다. 은영은 자꾸 혼자말처럼 중얼거렸다. “승호, 그 개새끼, 잘 됐소. 그렇찮으면 이제도 얼마나 많은 처녀들이 짓밟힐지 누가 아오? 이 세상에 도덕법정이 없는 것이 한이죠.” 정희도 동감이 갔다. “약자들인 우리 녀성들은 자기절로 자기를 보호할줄 알아야 해. 진짜 자기를 사랑하는 남자인지 아닌지 잘 판단해야지.” “정말 후회돼요. 어쩌다 참된 다른 오빠 순진한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고 저런 미친 개를 좋아했던지. 으흐흑, 눈이 멀었지, 멀었어. 으흐흑, 흑흑, 야~ 억울해 못살겠어.” 병실문이 열리면서 어머니와 경찰이 들어왔다. “됐습니다. 환자의 심리안정에 불리합니다.” “예, 알았습니다.” 정희는 자리에서 일어나 은영을 꼭 껴안았다. “공안국을 믿어라. 강도들은 법망에서 벗어나지 못해.” 은영은 엉~엉~ 서럽게 울었다. 그녀는 이불을 머리까지 훌 뒤집어쓰더니 훌렁  들어누웠다. 정희는 차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입원실 대문을 나서자 성호가 서성거리다가 마중했다. “어떻게 됐니?” 정희는 머리를 끄덕이였다. “조용한데 가서 말하죠.” 그들 둘이 금방 병원 대문을 나설 때였다. 난데없이 종수가 병원으로 들어오다가 그들과 맞띄였다. 그는 사건을 좀 더 알아보려고 승호를 찾아간다고 했다. “승호는 다른 병원으로 갔대요.” 정희의 말에 종수는 도리머리를 흔들면서 “불시에 어데 가서 그 자식을 찾아?” 하고 성호를 쳐다보았다. “너희들 어디로 갔댔어?” “은영 병문안했죠.” “음, 가자. 한잔 하면서 얘기나 하자.” 성호는 손사래를 쳤다. “형님, 좀 일이 바쁘오. 전번에 신문에 내줘서 고맙소.” 종수는 성호의 팔소매를 잡아끌었다. “가자, 금강산구경도 식후라고 하잖았어?” 성호와 정희는 종수한테 끌려 선녀음식점으로 들어갔다. “아니, 정의용사 아냐?” 선화가 마중하면서 아양을 떨었다. “조용해라.” 성호는 선화를 보고 구석의 조용한 방을 내게 했다. “이후엔 좀 모르는 척해라. 그래야 널 보호할 수 있어.” 선화는 섬찍해났다. “아니, 오빠 무슨 죄라도 졌어?” 성호는 자못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 “깡패들이 나와 친한 걸 알면 큰 일 나.” 선화는 머리를 끄덕였다. 성호는 선화를 안심시켰다. “공안국이 있는 한 그까짓 깡패들이 어쩌지 못할 거요. 송파 깡패무리들 거동을 살펴주오.” 선화는 머리를 무겁게 끄덕였다. 종수는 자리에 앉자마자 료리메뉴를 들추며 말했다. “어제 로임 탔는데 한턱 내지.” “형님한테 얻어먹기만 하는군.” “형제지간에 사양하지 말기.” 선화가 나가자 종수는 기자의 직업병처럼 성호와 정희한테 물었다. “은영인 정신상태 어떻소?” “많이 나아졌어요.” “그래? 다행이야.” 종수는 캡을 벗어 걸어놓고나서 또 물었다. “처음에 은영인 책을 보러 뒤산에 갔다고 수사대원들한테 거짓말을 했잖아. 왜 그랬을가?” “거야 창피해 그랬겠지.” “아니야, 여기에 뭔가 있어. 승호와 함께 갔다는 걸 말하면 은영한테 뭔가 불리할 수도 있다는 거야. 은영이 얼마나 약삭빠른데 꼭 뭔가 따져가면서 말한 같아.” “글쎄.” 정희가 끼여들었다. “제가 금방 병원에 갔을 때 은영이 승호를 대하는 태도가 아주 반상적이더군요. 그들 둘은 피해자가 아니고 뭐예요? 그런데 승호를 저주하고 증오했어요.” 정희는 은영한테서 들은 말을 하다가 못마땅해 하는 성호의 눈길을 보고서야 입을 다물었다. “바로 그거야!” 종수는 아주 탐정가처럼 추측을 늘여놓았다. “숱한 처녀들의 정조를 짓밟았는데도 승호를 처벌할 수 없지. 그래서 은영이 보복했다는 생각 들잖니?” 그는 성호를 마주보았다. “글쎄. 짓밟힌 숱한 처녀들을 대신해 은영이 승호의 귀두를 잘랐을 수도 있소. 그러나 은영이 깡패를 불러다 승호를 치게 했다는 건 성립될 수 없소. 이제 은영이나 승호가 입을 열면 알 것 같소. 그런데 창피해 통 입을 열어야 말이지.” “고육계를 썼다면?” 종수는 상상 외의 질문을 던졌다. “고육계?” 성호는 놀랐다. 정희가 도리머리를 흔들며 끼여들었다. “그럴 순 없어요. 은영이 아무리 악이 난들 깡패들이 자기를 륜간하게 하면서 승호를 해쳤겠어요? 은영은 수술칼로 광일의 허벅지를 찌르고 베고 했다던데요.” 종수는 안주가 들어오자 잔에 술을 부어 성호와 정희에게 권했다. “자, 한잔 들면서 얘기하자.” 종수와 성호는 한잔씩 굽내고 정희는 입술에 술잔을 대고 홀짝 드네하고 잔을 내려놓았다. 종수의 추측과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흘러나왔다. “사건혐의는 경옥한테 넘어갔어. 그녀가 이전에도 깡패들을 불러 기숙사에 뛰어들어 은영을 해치려고 들지 않았어? 주악과 주범, 김광일, 이 세 깡패는 송파가 시켰어.” “지금 추측으로 간단히 결론짓기 어렵소.” “왜?” 종수는 개고기를 집은 저가락을 입에 가져다가 되내려놓으면서 물었다. “주악은 송파가 시킨 거라고 승인했소. 그런데 주범과 광일은 딱 잡아떼고 있다오.” “송파를 잡아다가 심문하면 알 거 아닌가?” “그렇소.” 종수는 머리를 끄덕이더니 또 한잔 권했다. “야, 성호야, 너희들 잔치술은 언제 마실 수 있니?” “차차. 청하지.” “성호야, 넌 정말 복이 넝쿨채로 떨어졌어.” 종수가 정희를 힐끔 훔쳐보면서 춰올렸다. “농민의 아들인데 교수네 귀공주를 따먹었으니 말이야.” 성호는 역정을 냈다. “형님, 그런 말 작작 하오. 농민의 아들이 뭐가 모자라오? 어째 지금도 반상이요, 문벌이요, 그런 말 하오?” 종수는 머리를 끄덕였다. “모르고 하는 소리. 지금 농민과 국장은 천차만별이야. 부부간도 짝이 너무 기울지 말아야 해. 우리 부부를 보면 너 아주머니 한족인데다가 고중 밖에 다니지 못했는데 말이야. 국장네 딸이느라고 어쩌나 턱을 쳐들고 세도를 부리는지. 원, 시집살이 정말 피곤해.” 성호는 정희를 바라보면서 정색했다. “에이, 난 죽어도 형님처럼 처가집엔 기여들지 않겠소.” 정희는 대뜸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딱 처가살일 못한다는 법은 없잖아요?” “됐다, 됐어.” 종수는 술잔을 쳐들었다. “그만하고 술이나 마시자.” 성호는 종수와 갈라져 정희를 데리고 바깥으로 나왔다. 흐리터분한 바깥을 둘러보면서 이번 사건의 실마리가 잡힐듯 말듯 해 골치아팠다.                                                                                                 29. “한뉘 소궁둥이나 칠 놈” 성호는 강운룡 부과장의 지시에 따라 승호를 찾아가 직접 사건정황을 알아보기로 하였다. 그는 먼저 리철갑 과장을 찾아가 자기 의향을 말했다. 리철갑 과장은 이전에는 허송파 깡패무리에 관계되는 사건이라면 대충 얼버무려버렸다. 그런데 이번에는 승호가 상해받았기에 송파네 깡패무리를 놔두려고 하지 않았다. “우리 수사사업을 협조해서 감사하오. 전번에 사회치안질서정돈회의에서 시정법위원회 서기 허철군은 이번 사건을 철저히 수사해 사회질서를 엄중히 교란하는 깡패무리를 견결히, 철저히 척결하라고 지시했소. 주관부시장 최웅봉은 누가 면목을 봐주면 법에 의해 처리해야 한다고 강조해 지적했소. 시 주요지도자들의 지지가 있는 한 송파 깡패무리는 큰 길에 나선 쥐새끼들로 될 거요. 이 사건에서 수사 중점은  배후 교사범들이오.” “예~ 알겠습니다.” 성호는 머리를 끄덕였다. 이때만큼은 리철갑 과장이 달리 보였다. “한가지 더 부탁하기오. 송파 일당을 은밀히 감시하오.” “예, 알겠습니다.” 리철갑과장은 성호한테 다가오더니 뜨거운 물까지 부어주었다.                                                                                                                                                                                                     “전번에 승호가 말한 적이 있는데. 우리 집 사위를 하면 어떠오?” 성호는 허구픈 웃음을 지었다. “전 이미 결혼날자까지 정한 약혼녀가 있습니다.” 리철갑 과장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승호도 압니다. 정희라는 녀동창생입니다.” 성호는 뒤를 달지 못하게 했다. “오~ 그렇구만. 아까운 사위감을 놓쳤네 그려. 허허.” 리철갑 과장은 실망하면서 속으로 욕했다. (흥, 한뉘 소 궁둥이나 칠 놈, 주제에 배 부른 타령을 해? 두고 보자.  이 리과장을 모르고 형사정찰대대에 들어오는가? 아무리 정의용사니 떡대가리니 어쩌겠니? 퉤!) 이때 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천국장이 신문을 들고 들어와 노발대발했다. “이게 뭐요?! 온 시내에 이런 삐라가 날아다닌단 말이요. 소식공개회를 열 때면 보도의 신중성을 강조하란 말이요. 엄격한 심열제도를 세워서 절대 우리 수사사업에 저애되는 보도를 하지 못하게 해야 하오.” 리철갑은 성호를 나가라고 하였다. 성호는 삐라내용이 궁금했지만 복도로 해 공안국 대문 밖으로 나갔다.  그는 그 길로 상점에 가서 바나나며 사과며 사 들고 승호가 들어 있다는 시병원으로 총총히 갔다. 병실 복도에는 사복경찰이 늘어서서 삼엄하게 경계를 서고 있었다. 성호가 다가가자 불러세웠다. “무슨 일로 찾아왔소?” “난 승호 친구입니다. 병문안을 하러 왔습니다.” “오~ 정의용사구만.” 경찰은 들어가라고 병실 문까지 열어주었다. 성호는 병실에 들어가 과일꾸럭을 침대머리 탁상 우에 올려놓으면서 승호를 보고 “어떠냐?” 하고 문안하였다. 승호는 몸이 많이 나았는지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이젠 괜찮아.” 선금은 성호를 보고 알은 체하더니 어색한지 자리를 피했다. 성호는 승호의 옆에 앉으면서 손을 잡고 말했다. “그날 너와 은영을 상해한 세 강도는 아마 몽땅 총살당할 거야.” “어, 속이 씨원하다.” 승호는 성호의 손을 꽉 잡고 진정으로 말했다. “성호야, 뭐니 뭐니 해도 너 같은 친구가 있어 든든하구나. 관건적인 때는 그래도 너야.” “아니야. 네가 수사에 잘 협조했기 때문이야.” 성호의 말에 일리가 없는 건 아니였다. 승호는 성호나 수사대원들에게는 창피해 말하지 않았지만 아버지한테는 허송파 일당의 많은 단서를 제공했다. “에이, 이젠 병실에 누워 있기 지긋지긋해.” 성호는 승호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한가지 궁금한게 있다. 추측해 보면 이번 사건은 뒤에서 누군가 주악이랑 시킨 것 같아.” 승호는 이불을 훌 걷어치우면서 혼자말처럼 중얼거렸다. “만약 송파가 시켰다면 이번에 송파네 깡패무리를 일망타진할 수 있겠는데. 그럼 얼마나 좋겠니? 내 언제까지 경찰의 보호를 받으면서 살아야 하니?” 승호는 두팔을 머리뒤로 해 깍지 걸이를 해 끼고 침대머리에 기대앉으면서 분명히 말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송파새끼 나와 경옥의 일로 앙심을 먹고 시킨 것 같아.” “그런데 세 흉수의 공술은 달라. 주악은 송파가 시킨 일이라고 했다. 몇번 심문해도 주범은 은영이 시켰다 하고 괄일은 네가 시킨 것이라고 했단다.” “개새끼들이 누굴 무함해? 주범과 광일은 죽어도 송파를 불지 않을 거야. 송파 눈에 나면 주범이나 광일이 집식구들이 살고 남을 것 같니? 썩어져도 나와 은영을 물고 늘어지지.” 성호는 바나나를 뜯어 승호한테 건넸다. “나도 짐작했어. 썩어지기 전에 남을 물어뜯는 승냥이지. 그런데 셋이 말이 다  다른데다 주범과 광일이 송파의 교사죄를 승인하지 않는 거야. 이제 송파를 잡아다가 심문하면 알겠는지. 그 놈이 승인하겠니?” 성호는 조용한 틈에 귀속말로 물었다. “너 귀두는 주악이네 자른 거야?” 승호는 창피해 외면했다. “그래. 주악이랑 한 짓이야. 뭐, ‘숱한 처녀들의 정조를 해친 놈에 대한 복수’라던가. 한뉘 장가도 가지 못하고  고통 속에서 살게 한다.’는지. 한바탕 개소릴 치더라.” 생각 밖으로 승호는 상세히 얘기했다. 성호는 호주머니에서 노트를 꺼내 뭐라고 적더니 승호 앞에 내밀었다. “야, 여기에 서명해라.” 승호는 노트를 받아쥐고 들여다보더니 “이건 몽땅 사실이다.” 하고 썩썩썩 서명하고나서 “아직도 견습수사대원질을 하니?”하고 놀라했다. 승호는 성호를 간절한 눈길로 마주보면서 입을 천천히 열었다. “야, 이젠 귀두문제를 작작 파라. 창피해 못 살겠다. 전번에도 홍희가 자살한 사건 때문에 난 감옥관리대대에서 쫓겨났어. 이제 귀두를 잘린 추문이 온 시내에 퍼지면 어떻게 머리를 들고 사니?” “사건진상을 조사해 흉수를 징벌하려는 것뿐이야.” 이때 노크소리와 함께 사복경찰이 통화기를 들고 들어왔다. “성호, 지도부에서 찾소.” 성호는 황급히 통화기를 받아쥐고 복도에 나갔다. “성호, 급히 사무실로 오오.” 승호 아버지였다. 성호는 황급히 승호와 몇마디 위안의 말을 하고는 부랴부랴 리철갑 과장의 사무실로 달려갔다. 성호가 노크하고 사무실에 들어서자 리철갑 과장은 자못 엄숙한 표정으로 쏘아보았다. “성호, 이젠 수사에서 손을 떼오.” “예? 절 수사대대에 받겠다고 하잖았습니까?” 성호는 어깨가 맥없이 축 처졌다. “수사사업에 도움은커녕 방애작용을 놀고 있단 말이요.” “예? 무슨 말씀입니까?” 성호는 맥없이 리과장 사무상 맞은 켠의  걸상에 물앉았다. 리과장은 삐라를 들어 흔들어댔다. “이게 뭐요? 온 시내에 우리 수사비밀을 공개했단 말이요.” 성호는 황급히 신문을 받아 뜯어보았다. 신문에는 성호와 수사대원들의 사진과 함께 이번 사건해명기가 실렸다. 그런데 삐라에는 “피해자 리모의 귀두에 숨겨진 비밀”이란 소제목 아래 숱한 추측이 란무했다. 게다가 공안국 수사대대에서 이번 사건 배후를 파고들어 교사범을 꼭 나포하리라는 것도 씌여 있지 않겠는가. (이건 진짜 수사비밀을 몽땅 폭로한 것이 아닌가?) 성호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전날 종수와 한 말이 사단을 일이켰다는 직감이 들었다. (자식, 어쩜 이런 짓을 한단 말인가?) 그러나 성호는 리지를 상실하지 않고 종수를 물어먹지 않았다. “이 삐라와 제가 무슨 관계 있습니까?” “우린 증거를 쥐기 전에 추측해 누가 한 짓이라고 판단을 내리지 않소. 그러나 수사비밀루설은 누가 한 것이라는 걸 대개 알 수 있소.” 리철갑 과장은 안경알 너머 가슴츠레한 눈길로 성호를 마주 보았다. “…” “더 추궁하지 않겠소. 수사대원을 하려면 수사비밀을 지켜야 하오. 이후엔 수사에 절대 손을 대지 마오.” 성호는 두손을 맞잡고 공손히 물었다. “이제부터 주의하면 안되겠습니까?” 리과장은 사무상에 돌아가 앉았다. “늦었소.” “리과장님, 한번만 용서해주십시오. 모르고 한 일이니까.” 리과장은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모든게 끝났소. 설상가상으로 동무는 신분이 너무 로출됐소. 신분이 로출될수록 수사사업에 불리하오. 모든 건 운명이 아니겠소? ” 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내 사위감이면 몰라도. 농부의 아들놈 주제에 언감 내 딸을 나무려. 배부른 흥정을 해도 유분수지. 흥!) 성호는 비틀거리면서 문 밖에 나섰다. 그는 곧추 복도 건너편에 있는 이모부의 사무실로 들어갔다. 때마침 이모부가 서류를 정리하고 있었다. “이모부, 난 경찰대대에 들어오지 못하게 됐습니까?” “음. 들었다.” 운룡은 성호를 자기 옆의 소파에 앉게 하고 따가운 물까지 따라주었다. “너무 락심하지 말라. 사람이 사노라면 그런 곡절 쯤은 아무 것도 아니야.” 성호는 따뜻한 물을 받아 말라붙는 목을 축이고나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는 농민의 아들입니다. 그저 자기 밭에 농사나 지어 차례진만큼 먹고 사는 농민의 자식입니다. 아무리 봐도 여긴 제가 있을 곳이 못되는구만요.” 운룡은 눈물을 줄줄 흘리는 성호를 보고 마음이 아팠다. “자식, 사내대장부가 고까짓 일로 눈물을 흘려? 좌절당할수록 허리를 꿋꿋이 펴고 살아야 해. 교훈으로 삼고 이제 천천히 기회를 보자. 계속 이번 사건을 수사해라.” “아니, 난 수사대원을 할 사람이 아닙니다.” “넌 수사대원을 할 천부적인 자질이 있는 놈이야.” “아니, 한뉘 소 궁둥이나 치면서 살 놈입니다.” “못난 놈, 다시 그런 말 했다간 날 찾지도 말라.” 운룡은 사사로이 성호를 계속 견습수사대원으로 쓸 예산을 하고 송파를 감시하라는 임무를 주었다. 성호는 맥이 풀려 이모부의 사무실에서 나왔다. 그는 결혼을 며칠 앞두고 청천벽력 같은 좌절을 당하고보니 량가집 부모와 정희를 볼 면목이 없었다. (시내란 참 더러운 곳이구나. 어디 사람이 살 곳인가? 자칫하면 철직당하고 밥통이 날아나구. 이런 신세에 어떻게 정희와 결혼한단 말인가? 아예 속시원히 정희와 다 털어놓고 태평거촌에 돌아가 쇠나 돼지를 치면서 살자.) 순간 그는 이상하게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그는 씨엉씨엉 정희네 집으로 찾아갔다. 그는 엄교수를 볼 면목이 없어 집 부근에서 서성거리며 정희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원쑤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그 골목에서 송파 형제와 딱 마주칠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송파는 우멍눈으로 그를 유심히 쏘아보다가 도리머리를 흔들더니 송호한테 눈짓했다. 순간 성호는 경계심이 들어 주먹을 으스러지게 쥐고 일부러 대학교 울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이상하게 송파와 송호는 성호를 놔두고 정희네 집 뒤 2층집 울안으로 들어가버리는 것이였다. (쳇, 예전 같으면 다짜고짜 덤벼들 놈들인데 무슨 일일가?) 성호는 수림 속에 숨어 그자들이 들어간 정희네 뒤집을 주시해보았다. (저게 송파네 집인가?) 성호는 송파를 감시하라던 이모부의 말이 귀전을 아프게 때리는지라 아름드리 비술나무가지를 잡으면서 바라올라갔다. 그는 비술나무아지에 다리를 걸고 나무가지 사이 잎새로 그 2층 집을 유심히 살폈다. 이윽고 땅딸보로, 뚱뚱보로, 꺽다리로 성호의 발 밑으로 지나가 그 2층집으로 들어가는 것이였다. 깡패무리는 이상하게도 표나 해놓은 것처럼 몽땅 코수염을 기르지 않았으면 하이칼라머리를 하고 있었다. (또 무슨 꿍꿍이야?) 땅딸보가 나오더니 정희네 앞집 상점에 가서 술 몇병을 사들고 갔다. 한참 비술나무에서 감시하던 성호는 자전거 방울소리와 함께 정희가 자기 발 밑으로 지나가려고 하는 것을 발견했다. “정희-” 나지막한 부름소리에 정희는 자전거에서 내려 사처를 두리번거렸다. 자기 머리 우의 비술나무 가지에서 성호가 쭉 미끌어져 내려왔다. “아이구머니. 간 떨어지겠어.” 정희는 얼굴이 대뜸 새파랗게 질렸다. “집에 들어가지 않고 나무에 올라가 뭐 해?” “쉿-” 성호는 식지를 입술에 대고 2층 집을 눈길로 가리키면서 귀속말을 했다. “저기 저 집에 송파무리가 들어갔어.” “픽- 난 또 무슨 큰 비밀이나 안다고. 저건 송파네 집이야.’ “그래? 진작 알려줄게지.” 성호는 이모부가 송파를 감시하라고 준 임무를 알려주었다. 순간 그는 수사비밀을 또 루출한 것 같아 말끝을 얼버무렸다. (진짜 소궁둥이나 치면서 살 놈인가 봐.) 그는 화제를 돌려야 했다. 그런데 정희와 결혼을 그만두자는 말을 하자니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성호는 정희의 자전거 방울을 만지작거리면서 머리를 숙이였다. 정희는 성호의 팔을 끼면서  “집에 들어가자요. 우리 집에서 뒤집을 감시하기 더 쉬울 거예요.” 하고 집 쪽으로 걸어갔다. “정희, 할 말이 있소.” 정희 성호의 두 눈을 유심히 마주보았다. 마음의 창문이라는 쌍까풀눈에서 무슨 비밀이라도 찾아내려는듯이 뚫어지게 들여다보았다. “정희, 미안하오. 우리 결혼 그만두자.” “무슨 소리냐?” 성호는 정희를 교정의 수림 속으로 데리고 들어가 나직이 오전에 있었던 일을 쭉 말했다. “난 또 큰일 났다고? 그 일로 결혼 그만둬?” 정희는 종주먹으로 성호의 가슴을 쳐댔다. “나쁜 놈, 수사대원을 못하면 말라지. 취직이야 아무 거나 하면 되지. 우리 아빤  광고회사 김경리하고 교섭 중인데.” 성호는 정색했다. “난 시내에서 살기 싫어.” 정희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더니 앵돌아졌다. “혹시 아직도 은영일 련민하는 거 아니야?” “아니야. 잊은지도 오래. 은영의 비참한 처지를 동정할뿐 사랑한 건 아니야?” “그럼 뭐야?” 성호는 정희의 손을 잡고 정중히 말했다. “나처럼 눈치 도끼등처럼 무디고 안팎이 같은 사람은 시내에서 살기 힘들 거 같아. 아예 고향에 돌아가서 돼지나 소를 치면서 살기보다도 못해.” “못난 놈, 그 것도 말이라고 해?” 정희는 어처구니 없어 멍든 퍼런 하늘을 쳐다보면서 허구픈 웃음을 지었다. “대학을 어디로 다녔어? 어째 자그마한 곡절을 겪자마자 호박을 쓰고 돼지굴로 들어갈 궁리냐? 너 정말 한뉘 소궁둥이나 치면서 살 놈이란 말이냐? 난 소 똥 구린내 나는 농촌에 가서 못 살아.” “그러니까. 결혼하지 말자는 거야. 너한테 미안해 어떻게 살아? 난 시내에  엉덩이를 들여놓을만한 집도 없어. 널 괜히 데려다 고생시키자고 결혼해? 난 부모를 모셔야 해.” 정희는 분해서 새파랗게 질린 걀쭉한 얼굴에 눈물을 좔좔 쏟았다. 성호는 멈추지 않았다. “결혼해도 말썽이 많을 거야. 농부 아들이라고 깔보는 교수님 부부 말이야. 결혼했다가 리혼할 거면 아예 결혼하지 않는게 낫아. 괜히 세상 사람들을 웃기지 말자…” “말하지 말라니까. 엉~ 엉~” 정희는 한참 서럽게 울더니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네가 어디로 가든 결혼은 포기 못해. 집이 없으면 세집살이를 하지 뭐. 정 안되면 우리 집에 들어와 살아도 돼.” 그녀는 비장한 결의를 다졌다. “이러자. 농촌에 가 사는가, 시내에서 사는가 하는 건 천천히 토론하자. 어디서 사는게 더 좋으면 어디서 사는 걸로 하자. 허나 결혼은 절대 미루지 못해. 시내서…” “널 한평생 고생시키고 싶지 않아.” “봐라. 마음 속으로부터 날 아끼고 사랑하고 있잖아. 그 사랑심이면 족해!” “소똥 구린내 나서 어떻게…” “소똥 구린내 나는 시골이라도 죽어라고 따라 갈거야.” “뭘 보고 고생 사서 하려니?” 정희는 성호의 품 속에서 머리를 들더니 눈물이 그윽한 포도알눈으로 성호의 두 눈을 찬찬히 들여다보면서 종알거렸다. “성호야, 요 진정어린 쌍까풀눈이 좋단 말이야. 교활한 빛이 하나도 없는 진정어린 요 눈, 도끼등처럼 무딘 요 눈, 눈치코치 없는 커다란 요 눈 말이야.” 그녀는 성호의 넓은 가슴에 얼굴을 파묻으면서 조용히 흐르는 노래처럼 종알종알 속삭였다. “거짓없이 로실한 네 마음이 좋아.” “마음 하나면 다야? 내 마음 따위 몇푼 간다고? 남들처럼 해줄 힘도 없고 돈 한푼도 없어. 부모를 모셔야지. 너에겐 미안한 일만 생길 것 같아. 이제라도 절대  후회될 일을 하지 말라. 부탁이야.” 허나 정희는 굳은 마음을 보여주는 짙은 사랑의 감정을 토로했다. “후회라니? 네 사랑을 차지한 것만 해도 행복해. 진정한 사랑이 있는 한 그 어떤 곤난과 곡절도 우리 사랑을 깨뜨릴 순 없어. 정 농촌이 살기 좋으면 널 따라가마. 난 뭐나 자기 능력으로 살려는 네 능력을 믿어.” 성호는 정희가 이 순간처럼 사랑스러운 적이 없었다. 그는 눈물범벅이 된 정희를 꽉 껴안았다. “사랑해, 정희야, 이 목숨 다 바쳐 변함없이 사랑할 거야.” “고마워. 성호야, 널 하늘과 땅 끝까지 따라가면서 영원히 사랑할 거야.” 분명 사랑하는 처녀총각의 피끓는 두 심장이 하나로 되여 쿵쾅쿵쾅 높뛰면서 티없이 맑은 순정으로 사랑의 멜로디를 울리고 있지 않는가! 그 사랑의 멜로디는 세상에서 제일 격조 높고 가장 아름다운 선률이 아니겠는가!  
132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96) 댓글:  조회:1303  추천:0  2018-04-03
                         9. 특무의 아들과 지주 딸의 로맨스      함흥대대 사무실을 둘러싼 토성이 아무리 높아도 잡아먹으려는 듯이 기승스레 휘몰아치는 눈보라를 당해내기 어려웠다. 토성 밖은 엄동설한의 추위로 하여 비술나무도 얼어서 탁탁 튈 지경이었다. 하지만 토성 안의 대대사무실 안서에는  용광로 같은 정치 열기가 끓어번지고 노루꼬리만큼한 권세를 턱대고 음충한 정치몽둥이가 음험하게 난무하고 있었다. 흥수는 토성 안 함흥대대 사무실에서 개 잡은 포수처럼 사무 상을 두드려댔다. “너희들 결혼 못해!” 허나 경주는 머리를 숙이지 않았다. “어째 결혼하지 못하오?" "너희들 지주 딸과 남조선 특무 아들이야." "그걸루 결혼하지 못한다는 법이 있소?” 경주의 결혼 꿈은 어수선한 하늘에서 잠꼬대를 하고 미련의 아름다운 사랑의 추억은 눈보라를 따라 룡트림하며 흩날렸다.  흥수는 조개턱을 쳐들고 경주에게 손사래를 쳐댔다. “너 이놈, 감히 대대 간부한테 말 대꾸질할래?” “왜 결혼하지 못하오.” 흥수는 허리를 쭉 펴면서 걸상 등받이에 잔등을 대더니 틀을 차리며 말했다. “너 정말 답답해. 미련은 너보다 열 살도 넘어 이상이잖아? 네겐 누나라도 한창 위 누나야. 게다가 너희들은 지주와 특무 새끼야. 가정 성분이 나빠도 한참 나빠.” “그런다고 결혼하지 못한다는 법이야 없잖소?” “야, 이 자식아. 너 할배캉(할아버지하고) 물어봤어?” 이때 기다렸다는 듯이 덕성이 철규와 함께 사무실에 들어섰다. “부르지도 않았는데 왜 왔어?” 덕성은 들어오자마자 울상이 돼 흥수의 두 손을 덥석 잡고 구부정한 허리를 꿉썩거렸다. “리간부, 제발 얘들이 결혼하게 소개신을 떼 주오. 얘들이 그만, 야, 어떻게 말하겠어?” 그는 사위를 둘러보고 흥수한테 다가가 나직이 뒷말을 이었다. "우린 다 남조선이 고향이 아니오? 좀 봐달라고." 흥수는 외까풀 눈을 가슴츠레 뜨고 경주와 미련을 번갈아 보면서 물었다. “뭐 어째?” “작은할아버지!” 경주가 벌떡 일어나 황급히 손으로 덕성의 입을 마구 막아버렸다. 흥수는 세 사람을 흘금 훑어보더니 여기에 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버릇처럼 조개턱을 쳐들고 경주를 뚫어지게 쏘아보았다. “사실대로 말해. 뭐 속이면 경칠라.” 허나 경주는 식은땀을 줄줄 흘리면서도 이로 입술을 깨물며 한마디도 토설하지 않았다. 흥수는 외까풀 눈을 가슴츠레 뜨고 눈길을 미련에게 돌렸다. 그는 우먹한 신눈으로 미련의 아랫배를 흘금흘금 곁눈질 해보았다. “혹시 너희들이 우리 대대 비준도 없이 그걸 하지 않았니?” 경주는 “아니오.” 하고 한사코 능청을 부리면서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허나 노처녀 미련은 능청을 떨지 못하고 머리를 숙이었다. “네 놈들 잘하는구나. 우리 대대 비준도 없이 사통한단 말이냐? 감히 계획생육정책을 위반해?” 흥수는 일어나더니 미련의 앞으로 다가갔다. “너, 일어서 봐!” 미련이 경주의 눈치를 흘금흘금 보면서 일어나지 않았다. “못 들었어? 일어나라니께!” 허나 미련은 흥수를 쏘아볼 뿐 일어날 염을 하지 않았다. “일어나지 못할까?!” 흥수는 다가가 미련의 손을 잡아 억지로 일궈 세웠다. “어디 보자!” 흥수는 불시에 미련의 치포자락을 활 줴 들었다. 순간 허옇고 불룩한 아랫배가 훌 드러났다. “아야 마야! 애 떨어지겠다!” 미련은 불시에 당한 일에 놀라 소리치면서 치포를 내리었다. “반동 놈 새끼, 어디 보자.” 흥수는 치마우로 미련의 아랫배를 슬슬 만져 보더니 입을 짝 벌렸다. “이 연놈들이 정말 비준도 없이 남조선특무 놈의 새끼 씨를 심었구나.” 그는 사무상에 돌아가 앉으면서 미련을 쏘아보았다. “벌써 한 서너 달 되는 것 같구나. 능청스러운 연놈들, 오늘 저녁부터 투쟁을 단단히 받아야겠어. 집에 돌아가 검사서나 준비해.” 덕성은 두 손을 발이 되게 싹싹 비비면서 빌었다. “애들이 주책없어 사고를 쳤는데 양해하시우. 제발 창피하게 투쟁은 하지 마시우. 제발, 비나이다.” 흥수는 목에 지렁이 같은 핏줄을 세우고 고함쳤다. “개소릴 작작 쳐! 이게 어디 양해할 일인고? 우리 나라 산아제한정책을 어겼어. 개짓해?” 덕성은 흥수 앞에 넓적 엎드려 절을 마구 하면서 빌었다. “제발 투쟁하지 말게나.” “이 영감이, 누구한테 반말로 명령해? 영감도 오늘저녁부터 투쟁 받아야겠구먼.” 덕팔은 옆에서 보다가 말렸다. “이 선전위원, 아니, 이 대대간부, 덕성 영감의 맏아들 칠백은 항일유격대 중대장이었고 조선인민군 대대장이 아니었소? 조선전쟁에서 목숨까지 바치지 않았소? 혁명열사 아버지 낯을 봐서 경주를 용서해주오.” “영감, 중뿔나네 삐치지 말라니께. 됐소, 됐어. 더 말하지 말란께. 영감, 계선을 분명히 갈라야지. 왜 특무의 삼촌을 대신해 말해? 어째 영감도 특무 새끼를 보호했다는 모자 쓰고 투쟁을 받자고 그래?” 그러자 덕팔은 허리를 구부정하고 돌아서더니 사무실에서 나가버렸다. 그날 저녁이었다. 해가 어슬어슬 져가기 바쁘게 흥수는 돌멩이를 들어 토성 안 아름드리 비술나무에 처맨 종을 두드려댔다. 댕! 댕! 댕! 댕! “투쟁대회를 합니다. 대대 사무실 마당에 모이십시오.” 흥수가 왜가리 목을 빼들고 소리치자 토성안집 새금이 집에서 나와 물었다. “생원이, 오늘은 누굴 투쟁하오?” 흥수는 종을 서너 번 더 치고 돌멩이를 던지더니 두 손을 툭툭 마주  털었다. “미련이 반동 놈의 새끼를 가졌시우.” “뭐라오? 결혼도 하지 않고 노처녀가 애를 배다니? 세상에 별 희한한 일도 다 보겠다.” 새금이 마을에 나가 소문을 퍼뜨리는 바람에 사원들은 구경거리 생겼다고 야단쳤다. 그들은 곤한 대로 일찍이 대대 마당에 모여들었다. 토성 주위에서는 눈보라가 윙윙 휘몰아쳤지만 토성 안은 투쟁대회 열기로 끓어 번졌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지주 장학산과 지주의 아들들인 장충국, 지괴호 등이 사원들 앞에 고깔모자를 쓰고 죽 늘어서서 머리를 숙였다. 흥수는 나서서 투쟁대회를 사회했다. “반동 놈의 연놈들을 끌어내라!‘ 흥수의 “명령”이 떨어지자 민병들이 경주와 미련을 숱한 사원들이 모인 투쟁마당 앞에 끌어냈다. 흥수는 투박한 손으로 경주와 미련의 뺨부터 찰싹찰싹 갈겼다. “이 반동 놈의 새끼들아, 연놈들이 감히 대대 비준도 없이 반동 놈의 새끼를 배? 엉? 로실히 탄백해라!” 숱한 사원들은 지주 장학산네 노처녀 미련이 결혼도 하지 않고 배가 불룩한 것을 보고 쑤군거렸다. “아이고, 어쩜 노처녀가 임신을 해?” “못된 쇄지 엉덩이에서부터 뿔이 난다더니? 저 경주 새끼를 보오. 아비를 닮아서 못된 짓부터 하지 않소?” “글쎄 말이오. 어쩜 자기보다 열 살도 더 많은 어미 같은 년을 들쑤셔 저런 사고를 다 치오?” 그 소리에 경주는 머리를 들고 떳떳이 말했다. “좋은 약혼자들끼리 애를 뱄는데 무슨 죄가 있다고 이러오?” 그러자 흥수는 손가락으로 경주의 이마빼기를 쿡쿡 찌르며 야단쳤다. “이걸 봐라! 자기 지은 죄도 모르고 허둥대겠냐? 여기 네놈의 아비 고향인가 해? 여긴 한국, 아니, 남조선 경주인가 해? 여긴 중국 사회주의 조국 땅이야. 비준도 받지 않고 마구 애를 배는 건 반동 죄야. 나라 국책을 어긴 반동 죄. 알만해?” 흥수는 숱한 사람들의 앞인지라 꽤나 점잔을 빼며 투쟁대회를 이끌어나갔다. “범죄경과를 얘기해.” “뭘 말이오?” 흥수는 경주와 미련의 턱을 손가락 끝으로 쳐들고 뚫어지게 쏘아보면서 고함쳤다. “누가 먼저 그 짓을 하자고 했어? 상세히 탄백하란 말이여.” 경주와 미련은 서로 쳐다보며 부끄러워 시물새물 웃으면서 누구도 먼저 입을 떼지 못했다. 이윽고 경주는 제꺽 말해 버리고 시름 놓으려고 했다. “난 미련을 진짜 사랑하오. 지난해 여름에 태평강에서 목욕하다가 태평강을 건너 지나가는 미련을 붙잡아 가지고 옥수수 밭으로 갔지. 그런데 미련은 고모사촌 지괴호한테 시집가겠다고 하지 않겠소.” “가만!” 흥수가 손을 쳐들었다. “가만! 미련아, 저 말이 맞어?” 그러자 미련은 머리를 약간 들었다. “맞소. 우리 아버지는 나를 고모사촌 오빠한테 시집가라고 했소.” 미련은 다시 머리를 숙여버렸다. 흥수는 사원들 앞에 머리를 숙이고 마주 서있는 지괴호한테 물었다. “저 계집애 네한테 시집가려고 했다는데 사실이 맞는가?” “예.” 지괴호는 목구멍으로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겨우 대답하였다. 장학산은 미련을 흘겨보았다. 그 눈길은 “아비 말도 듣지 않고 이게 무슨 일이냐?”고 하는 상 싶었다. 흥수는 경주에게 몸을 돌렸다. “계속 탄백해!” 경주는 뒷덜미를 긁적거리더니 자랑삼아 뒤 말을 이었다. “그래서 괘씸해서 그랬소.” “뭐? 상세히 말해라! 모두 다 듣게.” 흥수의 핍박에 못이겨 경주는 머뭇거리다가 천천히 입을 뗐다. “옥수수 밭에서 미련을 와락 끌어안았소.” “어마나! 그런 거 왜 다 얘기해? 창피하게!” 미련은 옆에 선 경주의 팔을 툭 쳤다. “너 이년, 입 다물지 못해!" 흥수는 미련을 쏘아보면서 을러메고나서 경주한테 돌아섰다. "계속 말해!” “그래서…” “아니다! 이 대목은 노처녀 미련이 말하면 더 재미있겠다.” 흥수가 기발한 생각을 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좋습니다.” 학수도 사원들 앞에 나서서 소리쳤다. “지주놈의 년, 아니, 딸년, 탄백해라!” 미련은 마지못해 머리를 숙인 채 떠듬떠듬 한어로 얘기했다. 그 목소리는 모기 소리 같았다. “나는 지괴호 오빠한테 시집가야 한다고 했소. 그런데도 경주는 계속 자기와 결혼하자고 했소. 난 나이도 열 살이나 이상이지. 지주 딸이자 국민당 특무의 여동생인데 괜히 고생하자고 그러는가 했소. 그런데 경주는 지주네 딸과 특무네 아들은 사랑하지 않고 시집장가 가지 않겠는가고 했소. 그래더니 나를 와락 끌어안지 않겠습니까?” 흥수는 옆에서 경주의 머리카락을 쥐여 쳐들면서 “그랬어?” 하고 따졌다. “예. 그랬소." “그래서 어떠럭하데이(어쩌더냐)?” 미련은 죽어 들어가는 소리로 뒷말을 이었다. “그래서 그렇게 됐습니다.” 흥수는 들볶아댔다. “뭐야! 얼버무려 넘어 가려고 하지 말랑께. 가장 관건적인 죄행을 낱낱이 탄백해라! 이 추운 겨울에 모두 일찍이 끝내야 집에 가 쉬고 내일 일하러 가지.” 미련은 갑자기 머리를 쳐들더니 젖 먹던 힘까지 다해 고래고래 고함쳤다. “자기 몸에 달린 걸로 하는 것도 당신 비준받고 해야 하오!? 당신 비준받아야 애를 밴다는 도리 세상에 어디 있소?!” “이 년이 이거 정말 호랑이 담 짝이구나! 죽을 죄도 모르고 언감 누구한테 고함질이냐?” 흥수가 미련의 긴 머리카락을 마구 쥐여 흔들었다. 그러자 흥수의 손이 끄당기는 대로 미련의 불룩한 배가 휘청거렸다. “저 쌍년의 보*짝에 고춧가루를 쑤셔넣어라!” 이때 숱한 사원들 속에서 누군가 쌍욕을 들이댔다. “옳다!” “고추가루를 쑤셔 넣어라!” “쑤셔 넣어라!” 허나 흥수가 구호를 부르는 사원들에게 손사래쳤다. “건 안 돼. 도리 없이 그럼 안 돼.” 뜻밖에도 흥수는 점잔을 뺐다. “죄범 미련은 계속 탄백해라. 그래서 경주가 먼저 널 건드렸니? 아니면 노처녀인 네가 남자 맛을 보려고 경주를 얼렸니?” “별 걸 다 묻소?” “건 누가 주범인가를 가리기 위해서이다. 어서 말해!” 그리하여 미련은 별 수 없었다. “경주가 먼저 나를 와락 끌어안더니 입술로 내 볼을 마구 핥고 빨고 했습니다.” "저런, 저런!" “또 어쩌더니?” 미련은 몸을 탈면서 뒷말을 잇지 못했다. “그래 어쨌니?” 흥수가 족따지자 옆에서 지켜보던 경주가 머리를 들고 떳떳이 말했다. “미련은 지괴호한테 시집가겠다면서 그래는 거 내 막 깔고 들어앉아 그랬소.” “그랬다는 건 뭐야?” “남자와 여자가 하는 걸 했소.” “몇 번 했니?” “그날 옥수수 밭에선 한번 밖에 하지 못했소.” “거짓말!. 노처녀와 노총각이 처음 하는 게 딱 한번만 했다고? 누가 곧이들어?” “미련의 치마에 피 질벅하게 묻어 겁나 더 못했소.” 흥수는 머리를 끄덕이다가 또 따지고 들었다. "아니, 그걸 했는데 어째 피 다 나왔어? 거짓말이야." "리간부. 진짜라니까. 미련은 노처녀지만 숫처녀였소." "내 결혼해 그럴 땐 피 나지 않았어. 너 거짓말 하겠어?" 그 말에 여기저기서 웅성거렸다. 춘실은 머리를 푹 수그렸다. 경주는 억울하다는듯이 머리를 절레절레 젓다가 춘실한테 눈길을 박았다. "그 집 아줌마 숫처녀 아니여서 그랬겠지." "너, 이놈, 무슨  개소리야?" 경주는 입이 뿌죽해 두덜거렸다. "그래 그 집 아줌마 숯처녀요?" "이놈 새끼!" 찰싹! "왜 때려?" 경주는 뺨이 아파 손으로 만지면서 계속 게두덜거렸다. "그 집 아줌마 상순하구 어려서부터 바람 피워 애까지 낫지 않았소? 숫처녀 아니니깐  그렇지. 그런 것두 모르면서, 씨." 춘실은 너무 창피해 우쭐 일어나 회의실에서 훌 나가버렸다. 상순은 눈을 지그시 감고 모로는 척했다. 흥수는 개 잡은 포수처럼 우쭐해 경주를 보고 손사래를 쳤다. "너 이놈, 왕청 같은 생사람 물어메치겠어?! 죽을락꼬 환장했어?!" "어째 그 집 아줌마는 바람 피워 애까지 나았는데두 투쟁하지 않아? 씨, 아직 애두 안 낳았는데두 우리만 투쟁하면서, 흥!" 여기저기서 키득거렸다. "조용해!" 흥수는 낯짝도 황소 엉덩짝보다도 더 두꺼웠다. 그는 창피한줄도 모르고 계속 경주를 족따지면서 투쟁했다. “그 후에는 몇 번 했니?” “한 스무번?” “어디서?” “패용천산에서도 했고 강냉이 밭에서도 했소. 태평강변 버드나무 숲속에서도 했고 소서구 천지꽃산에서도 가만히 했소.” 흥수는 경주의 뺨을 찰싹 갈겼다. “무치한 놈! 이 놈, 자랑 삼아 얘기하는 거 봐! 우리 마을 산과 들, 밭을 몽땅 네놈들이 돌아다니면서 더럽혔구나. 반동년놈들이라구. 쯧쯧쯧.” 그러자 경주는 흥수를 쏘아보면서 두덜거렸다. “당신들이 일하고 곤한데 저녁에 이런 누추한 얘기를 들어야 집에 가서 잠도 잘 오지. 흥!” “이 놈 새끼, 죽을 죄는 모르고 통통한 소릴 줴쳐? 우리 신성한 투쟁대회를 모욕하겠어?” 흥수는 주먹으로 경주의 면상을 꿍 쳐박았다. 경주는 코피를 랑자하게 흘렸다. 그 바람에 그날 투쟁대회는 놀라움과 호기심, 웃음 속에서 흐지부지해서 끝나버렸다.                  10. 시련 이튿날 흥수는 대대 위생소 정규상을 찾아갔다. 정규상은 간호사가 없어 한창 주사기를 소독하다가 흥수를 보고 알은체 했다. “누가 또 앓소?” “어, 아니오.” 흥수는 정규상이 폐 염에 걸려 죽어가던 미선을 구해 준 후부터 마구 투쟁하지 않고 은근히 보호해 주었다. “정 의사, 미련의 배속의 애를 떼버리자고 왔소.” “양? 어째?” “그 반동의 씨를 없애 버려야 하겠소. 속담에 풀을 베자면 뿌리부터 뽑아버려야 한다고 하지 않았소?” 그러나 정규상은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흥수는 조개턱을 쳐들더니 눈초리마저 꼿꼿해났다. “왜?” “아무리 지주 딸이라고 해도 어떻게 배속의 애를 마구 떼버리겠소?” 정규상은 소독한 주사기를 꺼내 주사기 통에 넣으면서 심중하게 말했다. 흥수는 화가 치밀었다. “미련이란 년이, 내 비준도 없이 애를 배고서도 뭐라고 했는지 아오? ‘자기 몸에 달린 걸로 하는 것도 당신의 비준을 받아야 하오!? 내 몸도 당신의 비준을 받아야 애를 밴다는 게 어디 있소?!’ 이 말은 자기 몸도 정부의 건가고 따지고 드는 거 아니겠어? 원, 무정부주의자라도 그런 무정부주의자가 어디 있어?” 흥수는 정규상의 눈치를 흘금 살폈다. “사람은 항상 평화로울 때일수록 간고하던 전쟁 년대를 잊지 말아야 하오. 가겠소? 가지 않겠소?” 정규상이 그 말귀를 알아듣지 못할 수 있겠는가! 정규상이 위생가방을 메고 따라 나서자 흥수는 개 잡은 포수처럼 어깨 으쓱해 위생소를 나갔다. (내 말을 듣지 않으면 네 놈을 놔 둘 거 같으냐? 미선이 앓으면 큰 병원에 가면 되지. 흥! 더러운 우파분자!) 흥수는 건 가래를 땅바닥에 뱉고 나서 정규상을 되돌아보면서 물었다. “뭘로 애를 떼버리오?” “애가 대여섯 달 됐다면서? 약물로도 바쁘고 수술칼로 배를 째고 꺼낼까 하오.” “음, 그래? 그년이 칼을 맞을 노릇을 했지. 이런 걸 두고 쌍통, 맨통, 꼬부랑 통, 영감 노친 담배통, 우정국의 전화통, 노처녀 젖통이라는 거야. 음메- 하하하, 허허허. 꽤나 볼만하겠구먼. 배를 쭉 째고 피가 뻘건 애를 꺼내? 어허허, 허허허. 지주 놈의 새끼는 씨를 말려야 해.” 흥수가 흥이 나서 어깨춤까지 추면서 눈보라치는 소서구로 올라 갈 때다. “여보시오, 대대 선전위원동지, 나 좀 보소.” 흥수가 되돌아보니 미련의 오빠 충국이 뒤따라오지 않았겠는가? “왜 그래?” 충국은 규상이 뒤에 있는 것을 보고 흥수를 한쪽으로 끌고 가서 털외투 단추를 열고 품속에서 대들보 같은 술병을 꺼내 보였다. “사실, 난 형님을 찾아 갔소. 그런데 없더구먼.” “뭐? 형님? 그래 어쩔 셈이야?” 흥수는 조개턱을 쳐들고 가물에 실 돌피 같은 허리를 쭉 펴면서 틀을 차렸다. 충국은 술병을 꺼내 주면서 “형님, 이 술을 마시고 미련을 놔주오. 우리 집안에는 걔까지 애를 낳지 못하면 대가 끊어지오.” 그 말에 흥수는 술병을 받아 땅바닥에 꽝 메치면서 발끈 성을 냈다. “이놈 새끼! 날 보기를. 이까짓 술병 보고 한국 특무놈 씨를 남기게 할 거 같아?” 충국도 자존심이 있었다. “그럼 어찔 예산이야?” “배를 째고 특무놈 씨를 꺼내 얼궈 죽이겠다.” 충국은 깜짝 놀라 입을 항아리 아가리만큼 쫙 벌리더니 헐금씨금 소서구로 올라갔다. 윙윙 휘몰아치는 눈보라에 외투자락을 날리면서 씽씽 앞서 가는 충국의 잔등을 보면서 정규상은 싸늘한 살기가 느껴졌다. 허나 흥수를 따라가지 않을 수 없었다. 한참 후 소서구 어귀 토성 안에 들어서자 황둥개가 씽 달려 나오면서 왕왕 짖었다. 황둥개 목 바를 풀어 놓지 않았겠는가! “개자식, 우리를 물라고 개까지 풀어놨구나.” 흥수는 대문에서 빗장을 빼들고 달려드는 개를 탁 쳐 눕혔다. 황둥개는 깨갱거리더니 대갈통이 터져 쓰러졌다. 대가리에서 흐른 피가 허연 눈을 뻘겋게 물들였다. 흥수가 정규상을 데리고 집안에 들어서자 미련은 보이지 않고 충국이 쏘아보며 구들에 말뚝처럼 박혀있었다. “야, 미련을 어디에 숨겨 놓았어? 당장 내놓지 못해?” 흥수는 외까풀 눈에 독살을 피우면서 충국을 쏘아보았다. “저 윗방에 있소.” 장충국은 아주 유창한 조선말로 말했다. 장학산은 흥수의 팔을 붙잡고 비난사정을 했다. “몇 십년 만에 보는 앤데 낳게 해주오.” 그러자 흥수는 장학산을 활 밀어재꼈다. “물러나지 못해? 더러운 지주놈 새끼, 옛날에 우리가 조선에서 갓 왔을 때 네놈들이 우리를 사람으로 보았어? 그저 병완 영감과 기준영감 밖에 모르더니. 흥, 어때? 그 영감들이 널 구해줘? 네놈을 청산하고 투쟁했지. 쌍통이야! 흥!” 장학산은 넘어졌다가도 허연 수염을 끌면서 일어나 가냘픈 손을 뻗쳐 흥수의 바지가랭이를 잡고 빌었다. “흥수! 제발, 제발, 애를 다치지 마오.” 흥수는 발길로 장학산을 걷어차 번져 놓고 다짜고짜로 서쪽 윗방으로 올라갔다. 흥수가 윗방에 들어가 보니 미련이 이불을 덮고 반듯이 누워 까딱하지 않고 있었다. (아니, 이 년, 이거.) 실한 오리도 걸치지 않은 미련의 허연 허벅다리가 이불 밑으로 반쯤 드러나 있지 않겠는가. “이년, 얼른 옷 입고 일어나지 못해?!” 흥수는 혼 나간 사람처럼 미련에게 덮쳐나가더니 이불을 와락 걷어치웠다. 순간 실 한 오리도 걸치지 않은 미련의 하얀 알몸이 백일하에 드러났다. 집안의 해빛을 받아 미련의 풍만한 우유 빛 젖가슴이 숨결을 따라 출렁이면서 오르내렸다. (저 야들야들한 젖가슴.) 순간 흥수는 뒤에 정규상이 있다는 것도 잊고 발가벗은 미련의 야들야들한 허벅지를 슬슬 매만지면서 중얼거렸다. “싯허연 대낮에 왜 벗고 있어? 이년 미인계를 써서 간부를 유혹해 함정에 빠뜨리려고?! 어림도 없다!” 그때 미련은 내리깔았던 눈을 살며시 뜨고 흘겨보면서 버럭 고함쳤다. “만지긴?!” 그제야 제 정신 좀 들었는가. 흥수는 쏘아보는 미련에게서 눈을 떼고 정규상을 되돌아보더니 호령했다. “멍해 서서 뭘 해? 빨리 배를 째고 애를 꺼내지 않고.” “양. 알았소.” 정규상은 위생 상자를 열고 약솜을 꺼내 미련의 배를 슬슬 닦았다. 그리고 청진기를 불룩한 배에 대고 도정신해 들었다. 이때 문이 벌컥 열렸다. “이 놈들! 뭐 하는 짓이야!” 충국이 성난 사자처럼 고함치면서 덮쳐들었다. 그는 정규상의 위생상자에서 수술 칼을 빼들고 흥수에게 덮쳐들었다. “이 놈, 네 놈 불알부터 까버리겠다.” 뒤에서 장학산이 수염을 흩날리면서 들어와 흥수를 깔고 들어앉아 바지 괴춤을 벗기는 충국을 뜯어 말리려고 손을 뻗쳤다. “충국아, 그만둬라! 어쩌자고 이러니? 대대 간부를 깔고 들어앉아 이러면 되니?” “우리 지주는 사람이 아니오? 어쩜 애마저 낳지 못하게 하오?” 충국은 아버지에게 잡힌 팔을 빼더니 흥수를 깔고 들어앉아 바지를 벗기고 사타구니에 쇠갈퀴 같은 시꺼먼 손을 넣었다. “아이고, 나 죽는다, 죽어. 정의사, 날 살려주오.” 그제야 정규상은 충국의 팔을 잡아 뒤로 잡아당기면서 말렸다. “충국이, 이걸 놓소. 이러면 안 되네. 청진기를 대보니 애가 아주 건강하오.” “건강해 뭐라오? 빼버리겠는데.” 장충국은 흥수의 그걸 꽉 거머쥐었는데 정규상과 장학산은 말리느라고 잡아당겼다. 그 미세 당기세 판에 밑에 깔린 흥수가 죽는 소리를 쳤다. “아이고! 알이 다 터진다, 터져! 제발 날 살려라.” 그러자 충국은 시퍼런 수술칼을 들고 불알을 꽉 움켜쥐면서 위협 절반, 흥정 절반 들이댔다. “내 여동생 애를 빼내겠는가?!” “아, 아니, 이걸 놔라. 내 눈 감아 줄게.” “결혼 소개 신을 떼 주겠는가?” “응, 응, 이젠 이걸 놔라.” “여기서 당장 써라.” “아, 아, 그래. 어- 나 죽는다. 아야.” 충국이 놓아주자 그제야 흥수는 숨이 올라왔다. 충국은 수술칼을 든 채 저쪽 칸에 가서 종이와 연필을 가져왔다. “어서 써!” 흥수는 너무 아파 왼손으로 사타구니를 감싸 쥐고 오만상을 찡그리면서 겨우 일어나 누런 종이에 몇 글자를 썼다.   소개신 함흥대대 김경주와 장미련의 결혼을 소개하오니 공사에서는 등록해 줄것을 바랍니다. 함흥대대 당 지부 선전위원 이흥수.                                             1965년 12월.   이흥수는 소개신을 써주고나서 절룩거리면서 방에서 나가려고 헤덤볐다. “아, 아, 아파 죽겠다.” “난 조선어를 몰라. 옳게 썼는가 보오.” 장충국이 정규상에게 소개신을 내밀어보였다. 정규상이 대충 내리 훑어보고 머리를 끄덕였다. 흥수는 충국이 괘씸하면서도 힘으로 용빼는 수 없었다. 한시 급히 이 마귀 굴 같은 지주네 집에서 벗어나야 했던 것이다. “정 의사, 빨리 위생소에 돌아가서 나를 검사해 주오. 아이고, 아파 죽겠소.” 정규상은 좋아라고 충국에게 왼눈을 찔끔 감아 보이면서 흥수를 따라 나갔다. 흥수는 절룩거리면서 토성 밖으로 나간 후에야 뒤돌아보면서 악에 받쳐 이를 뿌드득 갈았다. “내 저 지주놈 새끼를 가만 놔두는가 봐라.” 위생소에 돌아 온 후였다. 아파서 상을 찡그리는 흥수를 침대 위에 눕히고 나서 정규상은 바지 괴춤을 까고 검사해 보았다. 그런데 정말 거짓말을 보태 **중태가  한뼘이나 늘어나지 않았겠는가? 그건 두개 다 붙어 있나 주물러 보니 있긴 있는데 쓰게 된 것 같지 않았다. “어떤가? 아가. 아파라.” 흥수는 외까풀 눈을 거슴츠레 뜨고 정규상을 올려다보았다. 어쩐지 정규상의 표정이 굳어져 있는 것이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어째?” “자기절로 잘 보오, 어떻게 됐는가?” 흥수는 일어나 앉아 가지고서도 감히 내려다보지 못해 한참만에야 조개턱을 내리우면서 외까풀 눈을 슬며시 내리 깔았다. “어! 이게 뭐야? 아이고!” 흥수는 울상이 돼 정규상을 붙잡고 야단쳤다. “이보, 이게 아픈 건 둘째고 써먹을 수 있을까?” 정규상은 속으로 터져 나오는 웃음보를 겨우 참느라고 돌아서서 대답했다. “그거야 아주머니한테 물어봐야지.” “아갸갸. 이걸 어쩌나?” 흥수는 너무 아파 공양이가 불알을 앓는 상을 짓고 죽어가는 소리를 질렀다. 이튿날 이른 아침에 흥수는 아픔을 참으면서 상순을 찾아갔다. 그는 전날에 있은 일 자초지종을 쭉 말하고 나서 민병을 데리고 가서 충국을 붙잡아오겠다고 했다. 상순도 아주 분개해 자리에서 일어나 중얼거렸다. “그 놈 자식이 언감 대대 간부에게 손을 대? 당장 붙잡아야지.” “그러게 내 뭐라고 했소? 지주 딸이라도 결혼하고 애를 낳는 거까지야 어떻게 막소? 이젠 이 일을 막지 마오.” 흥수는 후회막급이었다. 괜히 저네 좋아하는 판에 끼어들어 심술을 부리다가 미련의 살맛도 보지 못하고 그것까지 상했으니 좆 떼우고 불 떼우고 뒤로 엎어져도 콧등을 깼으니 말이다. 상순과 흥수가 총까지 든 철국이랑 성환이랑 청년민병들을 대여섯 데리고 소서구 어귀로 달려갔다. 그들이 소서구 어귀 토성안집을 포위하고 뛰어 들어가니 충국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상순은 미련을 보고 물었다. “충국인 어디로 갔어?” “말로는 내 결혼 증을 떼러 간다던데요.” 허나 장학산은 밭고랑 같은 주름이 잡힌 얼굴에 죽을상을 지었다. “저기 쪽지 써놓고 갔소.” 상순은 장학산이 가리키는 창턱에서 종이쪽지 한 장을 주어 들고 내리 훑어보았다. 흥수는 한자를 몰라 상순이 보는 옆에서 들여다보면서 물었다. “뭐라고 했소?” “이 놈이 기고만장하기로서니. 흥수와 대대 간부들이 경주와 미련의 결혼을 막는 날엔 언제든지 나타나 가만 놔두지 않겠다고 했소. 가자, 공사에 가서라도 이 놈을 잡아야 해.” 상순은 민병들을 데리고 눈보라가 윙윙 휘몰아치는 산길을 따라 달렸다. “가만!” 상순은 토성안집에 달려 들어가 전화로 공사 파출소 허영호 소장에게 정황을 알렸다. 허 소장이 다음과 같은 정황을 알려주었다. “김서기, 장충국은 확실히 공사 민정소에 와서 경주와 미련의 결혼 증을 냈습니다. 그런데 지금 어디로 갔는지 우리 민경들이 추적해도 찾을 수 없습니다. 우전국 치보주임이 금방 전화가 왔는데 충국과 비슷하게 생긴 마흔이 푼한 한족사내가 소포에 결혼증을 넣어 함흥대대 소서구에 부치고는 어디로 가버렸다고 합니다. 우리 파출소에서 계속 추적하겠습니다. 함흥대대에서 군중들의 생명안전을 주의해 보위하십시오.” “알았소.” 상순은 전화를 놓으면서 흥수의 낯에 대고 삿대질했다. “다 당신 탓이오. 미친 개는 막다른 골목에 이르면 지붕을 뛰어 넘는다는 거 모르오? 괜히 긁어서 부스럼을 만들지 않고 뭐요? 흥!” 흥수는 아직도 아파 상을 찡그리면서 상순의 칼날 같은 세 귀 눈길을 피해 머리를 숙였다. 어느덧 추운 겨울은 가고 비단결로 얼굴을 만지는 듯이 부드러운 봄바람이 불어치는 새 봄이 왔다. 상순은 사원들을 세개 대로 나눠 이끌고 조개덕 앞의 체전 논밭머리에 물도랑을 파고 그 우에 커다란 물레방아를 놓는다, 과수원에 사과 배나무를 심는다, 멍지메산 앞에 새로 논을 푼다 하면서 분망히 보내고 있었다. 사원들은 상순의 호소에 따라 일을 하면 할수록 성수났다. 하긴 밭이랑 개인에게 나눠줘 개인도급제로 농사를 지은 후 웬 일인지 집체로 농사를 지을 때보다도 사원들의 쌀독에 쌀이 꼴딱꼴딱 찼다. 마을에는 찰떡이랑 감자누룽지랑 먹으면서 “양양 맛있다. 오래오래 맛있다.”고 동요를 부르면서 뛰노는 애들이 많아지지 않는가! (별 일이야. 아무튼 집체로 농사를 지을 때보다 개인으로 농사를 지으면 지은 것만큼 자기에게 차례지니까. 더 열정이 나고 책임지고 농사를 지은 모양이지? 허, 참. 알고도 모를 일이야.) 어느 날, 상순이 멍지뫼산 앞에서 논을 풀고 돌아오는 길에 태평강에서 손을 훌훌 씻을 때었다. 지춘실이 옆에 와서 손을 씻으면서 말을 걸었다. “여보, 난 어쩌라오?” “여보라니? 사람을 웃기지 마오.” 허나 춘실은 주위를 핼끔 둘러보더니 사람이 없는 것을 보고 “정색해 말했다.  "저 나그네 몇달 채 그걸 꼼짝하지 못하오. 난 생과부로 되지 않겠소?” “그걸 나하고 말하면 어쩌오?” 상순은 싱거워하면서 우쭐 일어나 가려고 했다. “여보, 당신은 내 첫사랑이오. 남의 고통도 알아줘야 하지 않소?” “그런 일은 모르오. 흥!” 상순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아름드리 버드나무 숲속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춘실은 허연 머리 수건을 벗어 쥐고 뒤따라 달려가 상순을 붙잡아 풀밭 속으로 끌고 가려고 했다. “어째 이러오? 또 이전처럼 나를 함정에 빠뜨리자고 이러오? 어림도 없어. 내가 함정에 빠진다고 흥수가 서기로 될 거 같소.” 상순이 쌀쌀하게 말하면서 붙잡힌 팔을 홱 뿌리쳤다. 허나 춘실은 울상을 지으면서 애원했다. “상순아, 야, 이 놈 새끼야. 너무 청백한 것처럼 놀지 말라. 넌 사람이 아니야? 감정이 없는 돌부처야? 난 네가 명옥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거 다 안다. 또 나를 사랑하는 것도 안다. 어찌 감정을 속이고 살아야 하니?” 상순은 자기 약점이라고 할까 아픈 데를 푹 찌른 그 한마디 말에 정신방선이 와그르르 무너지는 감을 느꼈다. 그는 몸이 달아 자기에게 안겨오는 춘실을 꽉 껴안았다. 야드르르한 이파리가 뾰족뾰족 돋아나는 버드나무 가지들이 그들의 머리 우에서 봄바람에 하느작거렸다. 이윽고 제 정신을 차린 상순은 껴안았던 춘실을 훌 풀어놓으면서 중얼거렸다. “안 돼, 우린 합법적인 부부가 아니야. 난 어려서 셈이 없어 널 임신시킨 거야. 절대 사랑한 거 아니야. 난 한평생 너에게 미안할 뿐이다. 이젠 모든 게 끝났어. 무슨 사랑이고 바람이고? 난 당원간부야. 내 인생에 다시는 남의 유부녀를 다치지 않을 거야. 모든 건 무덤으로 가지고 가자.” 상순은 해가 뉘엿뉘엿 져가는 버드나무숲 속에 춘실을 혼자 남겨두고 성큼성큼 조개덕으로 떠나갔다. 사랑의 시련을 이겨낸 상순은 버드나무 숲속을 빠져 나오자 홀가분한 감을 느꼈다. 허나 인차 애석함이 물결쳐오는 감을 어찌 할 수 없어 땅이 꺼지게 한숨을 내쉬었다. 실로 정치투쟁의 시련 못지 않게 사랑이 시련도 이겨내기 쉽지 않은 것이었다. 춘실은 설레는 버드나무에 몸을 맡긴 채 오도카니 서서 눈물이 글썽한 눈으로 멀어져가는 상순의 너부죽한 잔등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이윽고 그녀는 가냘픈 어깨를 들먹이면서 허연 머리 수건으로 두 볼을 타고 줄 끊어진 구술처럼 줄줄 흘러내리는 뜨거운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그녀의 머리 위로 빨간 잠자리가 날개를 하느작거리면서 하늘하늘 날아예고 있었다.                               (지금까지 여러분께서는 김장혁 작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 제5권까지 읽었습니다. 이제껏 저의 대하소설 향연을 음미한 여러분께 경의를 드립니다.        이제부터 김장혁 작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 제6권이 시작됩니다.)                   김장혁 작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                                                                                                                  제6권                       제26장 폭란                                1. 폭풍우 전야       황금물결이 출렁이는 가을이 왔다. 이태동안 사원들이 애쓰면서 멍지뫼산 앞에 새 논을 푼 보람으로 사원들은 이전보다 쌀 고생을 덜하게 되어 가을걷이에 신바람이 났다.       병완은 손자가 모는 소수레에 앉아 흰 수염을 흩날리면서 풍년 가을을 하는 사원들을 바라보면서 밭고랑 같은 주름살이 잡힌 얼굴에 춘풍이 넘실거렸다. “참 좋구나. 올해는 풍작이 들었구나. 허허허.” 병완은 수레를 멈추게 하고 머리를 숙인 벼이삭들이 넘실거리는 멍지뫼산 앞의 산종 논을 바라보았다. “모래밭이어서 벼농사가 될가 근심했댔는데 괜찮구나. 올해는 산종을 했지만 명년에는 둼을 많이 내고 산종보다 줄이 가쯘하게 벼모를 꽂게 해라.” “예. 할아버지, 과수원에 가 보겠습둥?” “그래, 그래.” 상순은 소수레를 돌려 칼산과 패랑산 사이에 차린 과수원으로 향했다. 상순은 할아버지가 지팽이를 짚고 여기까지 벼농사 구경하러 오려는 것을 말리면서 수레에 모시고 왔던 것이다. 세월이 무서웠다. 호랑이도 단매에 때려눕힌 할아버지가 이젠 허리도 구부정하고 걸음걸이도 점점 못해가는 모습을 보고 마음이 아팠다. 그리하여 명옥과 함께 종종 닭을 잡아 고아 할아버지에게 드리라고 웃새집에 올려 가군 했다. 아버지를 여의고 할아버지를 모시는 상길 부부는 효성을 다해 극진히 대접했다. 그간 후할머니마저 세상을 떠서 상길은 할아버지가 외로워 할 까봐 정신적으로도 위안될까 해 옛날 고향에서 살던 얘기랑 들려주었다. 수레가 덜커덕거리면서 어느 덧 새로 가꾼 대대 과수원에 이르렀다. 아직 애어린 과수나무들이 누런 이파리를 나풀거리면서 돌로 쌓은 다락밭에 서 있었다. 그 사과배묘목은 상순이 몇몇 사원들을 데리고 사과배종수가 있는 로투구진 소기촌에 가서 최령감에게서 가져다 심은 것이었다. 병완은 방불히 누런 사과배가 주렁주렁 달린 과수나무들을 보는 상 싶었다. “허허허. 이제 5, 6년 있으면 그럴듯한 과수원이 되겠구나. 그때면 우리 대대 사원들이 조선 고향에서 먹던 배 맛을 보겠구나. 우리 조선에서는 북청에 사과배가 많이 난다더구나. 그것도 조선의 위대한 수령 김일성 주석께서 지시한대로 함경북도 북청 땅에 사과를 많이 심었는데 해마다 사과풍작이 든다고 하더구나. 이제 우리 대대 과수원에서 조선 고향보다 못지 않은 사과배가 주렁주렁 달리겠구나.” “예. 할아버지, 오래오래 앉으셔서 꼭 우리 과수원 사과배를 맛 보셔야 합니다.” 손자의 말에 병완은 기침을 쿨룩쿨룩 하더니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내 이만 살았으면 더 바랄게 뭐냐? 아들 셋이나 앞세우고 더 살아 뭘 하겠느냐? 이젠 네가 나를 대신해 우리 대대 사원들을 배불리 먹고 살게 하니까. 한시름이 놓인다. 이젠 죽어도 한이 없을 거 같아.” 병완은 버릇처럼 곰방대에 담배를 재우려다가 생강같이 마른 손을 거두었다. “아차, 가을에 야산에서 담배를 피우다가 경 치겠다.” 병완은 바싹 마른 나무이파리들에 불이라도 달릴까봐 그만 두었다. 그는 과수원을 둘러보다가 상순을 돌아보더니 곰방대로 과수원둘레를 동서북으로 둥그렇게 돌아간 칼산과 패용천산 뒤의 산마루를 가리켰다. “상순아, 저기 산마루 길을 따라 돌아가면서 길 양옆에 비술나무를 두줄로 쭉 심어 놓았으면 좋겠구나.” “예. 그거 정말 좋은 생각입니다.” “이전에 대약진 때 가물어서 얼마나 고생했니? 사원들과 소들이 무더운 여름에 나무그늘도 없어 더위를 먹고 마구 쓰러지지 않았니? 밭머리에 나무그늘도 있으면 얼마나 좋니? 그리고 이담 비술나무가 크면 구불렁한 비술나무를 드문드문 베여다가 가대기랑 농쟁기를 만들면 얼마나 좋겠느냐?” 상순은 연신 머리를 끄덕였다. “예- 아무튼 할아버지께선 목수이셔서 생각이 넓으십니다.” 병완은 덜컥거리는 수레에 앉아서도 집 식구들의 근심을 했다. “은숙이랑 돌아왔다니 시름놓았다. 그 놈 계집애 어쩜 조선으로 달아날 궁리를 다 했니? 정신 있니? 제 어시들을 다 잡아 먹고 혼자 잘 살아보려고? 망할년의 계집애. 흥!” 병완은 욕설을 하고 나서 상순을 보고 “소수레를 세워라.”라고 부탁했다. 이윽고 병완은 수레에서 내리더니 칼산과 패랑산 사이 골짜기를 두루 살펴보더니 양지바른 언덕아래 평평한 곳을 지팽이로 가리켰다. “상순아, 저기 저 곳을 봐라. 저 둔덕아래에 과수원 보초막을 지으면 좋을 거 같아. 저 곳은 칼산과 패랑산 중간 골짜기에 있기에 두 산을 다 살피기에 안성 맞춤한 보초막자리야.” “예. 정말 하늘이 내린 보초막자리입니다.” 그들 조손 두 사람은 해가 뉘엿뉘엿 져가는 것도 잊고 함흥대대를 지상낙원으로 건설할 웅대한 설계도를 그려갔다. 해가 서산에 져서야 상순은 수레에 할아버지를 모시고 돌아왔다. 상순이 저녁 식사 후에 토성안 대대 사무실에 나갔을 때였다. 흥수가 편지봉투를 사무상에 휙 뿌리면서 야단쳤다. “조선 특무한테서 또 편지 왔어.” “누구 편지요?” “김인섭한테서 왔소.” “뭐? 아즈바이한테서 왔다구?” 상순은 부랴부랴 편지봉투를 보다가 흥수를 흘겨보았다. “자네 남의 편지를 뜯어보지 않았소?” 흥수는 말상을 외면하면서 “모르고 그랬어.” 하고 대충 대답했다. 상순은 편지봉투를 뜯어 전등불 밑에 가지고 가서 단숨에 읽어 내려갔다.   보고 싶은 병완 큰아버지, 그간 건강한 몸으로 잘 계십니까? 세 자식을 앞세우고 고통이 많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칠 형님은 우리 조선인민과 중국인민의 이익을 위해 몸 바쳐 싸운 장령입니다. 나는 개인적으로 대장부답고 장군다운 성칠 형님을 우러러 따랐고 존경해왔습니다. 정말 중조 인민들에게 미안하지 않은 훌륭한 군인입니다. 그런 열사 아드님을 둔 것으로 하여 큰아버지는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러움도 없이 자호 감을 느끼리라고 믿습니다. 큰아버지는 고향 명천 적후에서 경찰국을 무너지게 만들었고 군사요충지의 교통교를 무너지게 놓으면서 일본 놈들과 지혜롭게 싸워온 로 항일투사입니다. 그리고 핍박에 의해 고향을 떠나 우리 함흥 촌에 들어와 자손들과 마을 사람들을 이끌어 일제와 그 주구들과 싸웠고 항일유격대에 쌀을 지원하면서 항일투쟁을 지원했습니다. 해방 후에도 중국 공산당의 영도아래 상순이랑 상길이랑 자손들을 데리고 토지개혁을 해 지주를 청산하고 가난한 빈고농민들에게 토지를 나눠주었습니다. 큰아버지는 함흥 촌 인민들을 영도해 토비를 숙청하고 국민당 잔여세력과 지주무장과의 투쟁을 했고 사회주의 새 농촌을 건설하는데 한몫을 톡톡히 해왔습니다. 참말로 큰아버지가 걸어온 인생길은 조선족이민사의 력사적인 축도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조선족인민들은 조선에서 고생하던 우리 조선족 빈고농민들이 간도에 들어와 황무지를 개간하고 일본 놈들과 당지 지주와 싸우고 사회주의 혁명과 건설을 해왔습니다. 큰아버지, 오래오래 앉으셔서 상순이랑 상길이랑 함흥촌 백성들이 사회주의 한길에서 새 농촌을 건설하고 부유하게 사는 그 날을 지켜 봐주십시오. 전도가 유망한 상순아, 그간 넌 공안국 국장 벼슬도 버리고 함흥촌에 돌아와 당 지부 서기를 맡고 마을 사람들을 이끌어 사회주의 새 농촌 건설을 잘 하고 있다는 말도 진달래아주머니한테서 듣고 알았다. 효성이 지극한 너의 마음도 내가 다 안다. 함흥 촌에 돌아와 조부모와 부모에게 효성을 하면서 사회주의 새 농촌을 건설하려는 너 효성과 혁명성을 나는 아주 높이 평가하고 싶다. 자기 부모도 온전히 모시지 않는 불효자식이 어찌 군중들을 위해 일할 수 있겠느냐? 아무튼 네가 수고가 많다. 지금도 나는 항일투쟁의 어려운 나날에 네가 할아버지와 아버지와 함께 어두운 밤에 쌀수레를 몰고 항일유격대를 찾아오다가 멍지메 산 앞에서 우리와 만나던 일이며 상길이랑 상우랑 함께 쌀수레를 몰고 수림에 나타나던 일이며, 백두산 밀림에 들어와 나와 성칠형님에게서 권술을 배우고 할아버지와 아버지와 함께 밀림에 통나무집을 지어주고 형내랑 함께 약이랑 항일유격대에 가져다 주던 일이며, 토비숙청에서 한몫을 톡톡히 하던 네 모습을 보는 상 싶구나. 그런데 들을라니 흥수라는지 하는 진상을 잘 모르는 애들이 진달래랑 은녀랑 심지어 나까지 조선특무라고 몰아댄다니 참말 답답하구나. 조상들이 대대로 살아온 조선과 고향을 위해 목숨 바쳐 일본 놈들과 싸우다가 조선에 나온 우리가 어찌 조선특무냐? 지금 중조 두 나라는 피로써 맺어진 전통적인 친선을 아주 귀중히 여기고 대대로 전해내려가려고 정성을 다하고 있다. 중조 두 나라는 형제국가인데 흥수랑 무슨 특무고 뭐고 하면서 떠들게 있느냐? 그런 행위는 피로써 맺어진 중조 친선에 먹칠을 하는 불량한 행위로서 중조 인민들의 질책을 받아야 하며 제지해야 한다. 진달래 대대장은 항일투사야. 남조선특무 김용천을 나포할 때도 듣자니 너희를 협조했다더구나. 그런데 어찌 조선특무로 몰아 함흥대대에서 살지 못하고 조선에 도망쳐 오게 한단 말이냐? 더구나 열사 성칠 형님의 친척이라고 너네 일가까지 조선특무라고 마구 몰아대는 것은 하늘이 용납하지 못할 착오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용천 대장도 이전에는 항일투사였기에 그의 아들 경주를 남조선특무라고 마구 몰아대는 것은 잘못이다. 경주는 어려서 자기 아버지 얼굴을 보았을 뿐인데 어찌 그가 아버지 대신 특무 질을 했다고 억지로 특무로 몰아 투쟁한단 말인가? 특무 아버지와 아들은 계선을 똑똑히 나눠 투쟁해야 한다. 물론 남조선특무의 아들에 대해 경각성을 높여 현실표현을 잘 관찰하고 감독할 필요는 있지만 과도하게 근거도 없이 특무로 몰아대는 것은 잘 못이다. 지금 진달래는 군당위원회에서 여성동맹위원회 위원장으로 되었다. 은녀도 고향에서 여성동맹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사업하고 있다. 학준 동생은 김일성종합대학을 졸업하고 내가 있던 군에 돌아와 중학교 교장사업을 하고 있다. 나는 군당위원회 위원장으로 사업하다가 군부대로 돌아가 서부전선 모 포병부대로 나가게 됐다. 떠나기 전에 나는 도당위원회에 제기해 함흥대대에서 이른바 조선특무를 투쟁하는 운동을 확대하는 폐단을 얘기했다. 꼭 타당한 처리가 있으리라고 믿는다. 상순아, 어떠한 시련이 오더라도 너는 꼭 냉정하게 매사를 처리해야 한다. 명석한 정치두뇌로 매사를 분석한 후 기본 원칙과 양심을 어기지 말고 인민의 이익을 보호하면서 한 발작 한 발작 온당하게 나가야 한다. 모든 시련과 곡절, 폭란 앞에서 굳세게 살리라 믿는다. 중국에 있는 친척 여러분 안녕히 계십시오. 아차 잊었구먼요. 오늘은 연변조선족자치주 성립 14주년이 되는 경사스러운 날이구먼요. 그 얼마나 많은 우리 조선족 선열들의 피로 바꿔온 연변조선족자치주인가요? 우리 민족은 중국 대지에 뿌리를 깊이 내리고 굳세게 살아나가야 하겠습니다. 언제 다시 만나 그간 회포를 나누겠는지요? 그날까지 친척들과 함흥촌 여러분 안녕히 계십시오. 군례! 조선인민군 노전사 김인섭 1966년 9월 3일.   흥수는 씩씩거리면서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당신들은 한 집안 친척이니까. 숙질간이 아니고 뭐요? 한 편이 돼서 서로 감싸고 도는 걸 눈꼴 사나와 보기도 싫어.” 상순은 흥수를 쏘아보면서 말했다. “흥수, 계급투쟁을 잊지 않고 잘 하겠으면 지주나 부농, 국민당 잔여세력과나 싸우오. 투쟁방향을 절대 잊지 말게. 쩍하면 왜 우리 할아버지나 나하고 투쟁하려고 하오? 우린 다 공산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분투하는 당원들이오. 당원들끼리 단결할 대신 물고 뜯어서야 되오?” 그러나 흥수는 걸상에 물앉아 담배쌈지를 꺼내 담배를 말면서 피씩 쓴 웃음을 지었다. “지금 지주나 부농들이 문제요? 그 놈들은 죽은 듯이 가만있는데.” “그래 이 마을을 개척한 우리 집안이 문제요? 우리 당원간부가 문제요?” “그렇소. 당내 투쟁이 더 치열하단 말이오.” 상순은 말을 시작한 바 하고는 시비를 따지려고 들었다. “우리 당원들끼리 싸우면 좋아 하는 게 누구요? 결국 계급의 적들이 좋아 하지 않겠소?” 그러나 흥수는 담배 연기를 후 내뿜으면서 대수로워 하지 않았다. “만약 당신이 내 서기 자리가 욕심나면 내주겠소.” 상순의 뜻밖의 말에 흥수는 상순의 얼굴을 힐끔 곁눈질해 보았다. 그는 엄숙한 표정을 훔쳐보면서 정말인가 아니면 속뽑이를 하는가를 시탐하려는 것 같았다. 말하지는 않아도 “정말 물러나겠소?”라고 묻는 상 싶었다. 상순은 분명히 말했다. “올해까지 과수원도 다 차려놓았고 멍지뫼산 앞에 논도 다 풀어놓았소. 올 가을에 벼를 거둬들이면 사원들이 배를 곯을 것 같지 않소. 지난해 토지를 개인에게 떼주어 농사를 지었기에 풍작을 거두지 않았소? 이전에는 모두 보리 고개도 넘기기 전에 쌀이 떨어져 죽물도 온전히 먹지 못하지 않았소? 그런데 올해는 이제야 묵은 벼를 정미소에 가져다 찧는 집도 있소. 물레방아도 저 앞 체전에 놓았으니까 발마선이나 도리깨로 벼 탈곡을 하지 않아도 될 거 같소. 그러니 난 우리 마을을 위해 해놓을 일을 이젠 다 한 거 같소. 누가 당지부 서기를 하든지 문제 없을 거 같소.” “안 된다! 절대 안 돼!” 상순과 흥수가 고함소리가 나는 문 께를 돌아보니 병완이 지팽이를 짚고 들어오는 것이었다. “할아버지, 흥수가 서기를 하더라도 우리 마을만 잘 건설하면 나는 서기를 내놓아도 아깝지 않겠습니다.‘ 허나 병완은 지팡이로 사무실 널판을 탕탕 치며 호통쳤다. “당내 투쟁에 혈안이 된 흥수에게 서기를 내줘서는 안 된다. 저 애게 서기를 맡기면 날마다 투쟁대회만 하다나면 언제 마을을 건설한다고 그러니?” 흥수도 지려고 하지 않았다. “아바이, 말씀을 주의하시오. 이 마을이 그래 당신네 조손이 아니면 돌아가지 않을 거 같습니까?” 병완은 주름살이 죽죽 간 목에 지렁이 같은 피 줄을 세우면서 호통쳤다. “얘게 서기를 시켰다간 한지에 방아를 걸겠다.” “뭐라고?!” 흥수는 버릇없이 병완에게 외까풀 뱁새눈으로 가로 쏘아보았다. 그러자 상순은 흥수를 마주 쏘아보며 양보하지 않았다. “서기 자리를 탐내지도 말라. 네가 하는 꼴을 보니 서기 자리를 내놓을 생각이 없어졌다.” 흥수는 꼴이 보기 싫다는 듯이 “흥!” 하고 코 방귀를 뀌더니 휑 바깥으로 나가 버렸다. 병완은 상순을 나무랐다. “얘야, 왜 이렇게 약하게 나오느냐? 그까짓 파리 새끼 무서워 장을 담그지 못하겠느냐?” 상순은 머리를 숙이었다. “할아버지, 똥이 무서워 피합니까? 더러워 피하지.” 병완은 이가 빠져 혀가 들여다보이는 입으로 똑똑히 말했다. “정치라는 건 무원칙하게 물러서는 게 상수가 아니야. 청렴하고 벼슬을 중히 여기지 않는 것도 좋지만 원칙을 지켜야 한다. 흥수에게 지부서기를 맡겨서는 우리 마을에 날마다 투쟁대회나 열고 말썽이 생기게 될 거다. 어떻게 그런 지부서기 밑에서 사원들이 마음 놓고 살 수 있겠니?” 상순은 한숨을 후 내쉬었다. “할아버지, 내가 잘 못 생각했습니다. 흥수와 다투기 너무 피로해 그만두려고 했습니다. 사원들의 평안을 념두에 두지 못해 미안합니다.” “그래, 이제야 내 손자답구나. 손을 싹 씻고 나앉아서 자기 혼자 편안히 살아서야 어디 공산당원 간부냐? 아무리 힘들어도 사원군중들을 위해 강하게 살아야 한다. 알만 하지?” “예. 사원군중들부터 먼저 생각하는 할아버지 깊은 마음을 이제야 알만 합니다. 꼭 명심하겠습니다.” 병완은 한숨을 후 내쉬였다. "은숙이 돌아왔다니 시름놓게 됐다. 계집애 조선에 가면 덕대 돈을 번다더니?" 상순은 허구픈 웃음을 지었다. "그 놈 계집애 조선에 가는 바람에 흥수한테 물리웠잖고 뭡니까? 저 두만강 변에 있는 학준이네 집에 가서 있으면서 어떻게 호미를 버리고 노동자로 될가 했답니다. 그런데 겨우 농업중학교를 졸업하구 어데 가서 취직하겠습니까? 여기 저기 어떨까 다니다가 소외감에 서러워서 되돌아왔답니다." "그래, 두만강 저 쪽에서 우리 보다 더 잘 살더라니?" "예. 조선에서는 우리보다 확실히 더 잘 살더랍니다. 그러니깐 대학생들도 밤을 자고나면 달아난다 하잖습니까?" "조선 인민들은 위대한 인민들이야. 물론 쏘련과 중국 두 사회주의 대국의 원조를 받기도 했지. 조선로동당의 영명한 영도아래 전쟁 후 잿더미 위에 사회주의 새 마을이랑 건설하고 잘 살잖니?" "예. 우리 여기 잘 살기만 하면 은숙이랑 정옥이랑 자꾸 달아나지 않겠는데." 병완과 상순은 대대 사무실에서 인섭에게서 온 편지로, 함흥대대를 건설할 계획으로 한참이나 얘기를 나우었다. 나중에 병완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상순아, 내 부탁할 말이 있다.” “예. 얘기하십시오.‘ 상순은 바로 앉으면서 할아버지 얼굴을 바라보았다. 상순은 두툼한 입술을 무겁게 열었다. “지금 무슨 ‘문화대혁명’을 한다고 하는데 심상치 않구나. 어떤 일이 있어도 당과 인민을 믿고 당과 백성을 마음속에 품고 양심적으로 처사하고 일하면 된다.” “명심하겠습니다.” 상순은 할아버지인 것도 있지만 더욱이 로당원의 민감성과 드높은 각오를 존경했다. 그는 할아버지를 집에까지 부축해 모셔간 후에야 조개덕으로 내리 걸었다. 그가 숱한 한족 묘지들 속을 지나갈 때었다. 희미한 달빛아래 범이 새끼 칠 지경으로 풀이 한 키도 넘게 자란 한족묘지에서 매미들이 찌르륵찌르륵 울어 꽤나 무시무시했다. 그런데 어둠속에서 보니 웬 검은 그림자가 달빛이 비추는 백양나무 우에 바라 올라가는 것이었다. “뭐 하려는 거야?” 상순은 호기심이 부쩍 동했다. “혹시 계급의 적이?” 순간 상순은 경각성을 높여 달빛을 빌어 백양나무 위를 뚫어지게 올려다보았다. 저게 뭔가? 백양나무 가다리까지 올라간 검은 그림자는 무얼 꿈지럭 거리더니 바줄을 나무아지에 거는 것이었다. “혹시 목을 매려고 저러는 게 아니야?” 진짜 바 줄로 올가미를 치는 것 같더니 목에 걸려고 서두르는 것이었다. “누구야?!” “어!” 퍽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 “뭐 하는 거야? 어서 내리지 못하겠는가?” 그러나 검은 그림자는 내릴 궁리를 하지 않고 목에 올가미를 거는 것이었다. 털렁! 검은 그림자는 올가미를 건채 둥둥 달렸다. “아니, 저 사람이.” 상순은 황급히 백양나무에 올라갔다. 그런데 나무지가 툭 끊어지는 바람에 상순은 검은 그림자와 함께 땅바닥에 퉁 떨어졌다. 상순은 검은 그림자를 안아 일으키고 달빛을 빌어 찬찬히 보다가 깜짝 놀랐다. “아니, 이게 아주바이 아닙니까?!” 상순은 안타까워 덕성을 흔들면서 애타게 부르짖었다. 이윽고 덕성은 길게 숨을 들이 그었다가 후 하고 한숨을 토해냈다. “아니, 삼촌, 어떻게 돼 이렇게 짧은 생각을 다 합니까?” 이윽고 천천히 눈을 뜬 덕성은 어둠속에서 사위를 둘러보더니 “오, 자네가 어떻게…” 하고는 인차 눈을 스르르 감았다. “왜 이렇게 못난 짓을 합니까?” 점차 정신이 들어가는 덕성은 맥없이 상순의 팔을 잡고 나직이 진정을 토로했다. “난, 난 이 세상에서 살, 살 멋이 없네.” 상순은 황급히 식칼을 빼앗아냈다. “무슨 소리를 합니까? 우린 삼촌을 기시한 적이 없습니다. 왜 이렇게 짧은 생각을 했습니까?” 덕성은 맥없이 일어나 앉더니 한숨을 후 내쉬었다. “삼촌? 우리 마을 사람들이 자네처럼 나를 삼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소? 우린 필경 한 고향에서 쪽박을 차고 이 함흥 촌에 와서 이 땅을 개척했네. 그리고 일본 놈들을 몰아내고 이 땅을 국민당군의 손아귀에 빼앗기지 않게 보위하려고 난 아들 둘이나 잃었네. 칠백과 칠석이 다 조선전쟁에 나가 희생됐지 않았어? 칠백과 칠석은 다 항일유격대에서 중대장과 소대장을 했고 항미원조 전쟁에서 조선인민군 대대장을 했네. 내가 무슨 죄가 있다고 조선 특무라고 투쟁하느냐? 또 용천이가 한국특무이었다고 나를 남조선 특무라고 몰아서 투쟁해서야 되느냐?” 그 말에 상순은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확실히 억울하게 됐소. 흥수랑 제 정신이 아니오. 흥수가 남조선태생이지만 난 그를 남조선특무라고 몰아준 적도 없습니다. 무고한 사람을 자꾸 무니깐. 어쩌오? 정말 답답하오. 우린 아즈바이와 흥수가 남조선 태생이지만 남조선 특무로 생각한 적도 없습니다. 절대 좁은 생각을 하지 말고 용기를 내서 살아가야 합니다. 언젠가는 억울한 루명을 벗을 날이 있을 겁니다.” 그러나 덕성은 픽 코웃음을 쳤다. “아니, 언제 훤한 날이 온다고 그래? 날 왜 죽게 놔두지 않았는가?” 상순은 덕성의 두 손을 꽉 잡았다. “무슨 말씀을 이렇게 합니까? 경주를 봐서라도 살아야 합니다. 그 어린 놈이 남조선 특무로 몰리우면서도 꿋꿋이 사는데 왜 살지 못합니까? 죽을 용기가 있으면 왜 목숨을 내걸고 억세게 역경을 이기고 살아갈 용기는 없습니까?” 덕성은 한숨을 땅이 꺼지게 후 내쉬었다. 태평강 가의 버드나무들이 쉼 없이 써늘한 가을바람에 흐느적거렸다.
131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95) 댓글:  조회:1085  추천:0  2018-03-27
                                 7. 전염병        명옥이 순자와 성숙을 데리고 집의 살구를 다 뜯어 장마당에 가져다 팔았는데도 신자의 입원치료비는 엄청 부족했다. 궁리 끝에 상순은 집의 검둥이를 팔기로 했다.       덕돌은 검은 바탕에 흰 반점이 간 검둥이를 참말 귀여워했다.       그가 학교를 갔다 올 때면 저 멀리에서부터 보고 꼬리를 흔들면서 뛰어와 반겨 맞곤 했다. 그 놈은 덕돌의 몸에 앞발을 쳐들고 매달리는가 하면 “끼깅” 하고 소리치면서 주둥이로 바지 가랭이를 들추면서 응석을 부리기도 했다. 덕돌이 고기를 잡으러 갈 때면 늘 앞에서 물도랑 옆의 숲에 코를 대고 씩씩 냄새를 맡으면서 달아다녔고 소 방목을 갈 때에도 항상 그림자처럼 따라다니곤 했다. 덕돌은 검둥이가 어찌나 귀여운지 손으로 대가리를 쓰다듬어주고 끌어안고 그 놈의 볼에 볼을 비비기도 했다. 지어 어떤 때에는 검둥이와 누룽지를 나눠 먹기도 하고 이불안에서 검둥이를 안고 자기까지도 하여 어머니의 욕을 먹을 때도 있었다. 그런데 어느 하루, 아버지가 돈 19원을 받고 검둥이의 목에 올가미를 걸어 나무대기에 감아 개장사군에게 넘겨주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때까지도 검둥이는 자기를 팔아먹는다는 것도 눈치 채지 못했다. “검둥이야, 넌 팔려 가면 죽는다, 죽어. 저 개장사군이 너를 잡아먹자고 끌고 가련다.” 그러나 검둥이는 어안이 벙벙해 아버지를 주인이라고 믿고 올가미를 걸 때까지도 가만히 앉아 있지 않겠는가. “안 돼, 내 검둥이를 가져가지 못한다!” 덕돌은 고함치면서 끌려가는 검둥이를 끌어안고 발버둥질을 쳤다. 그러나 어머니는 덕돌을 마구 뜯어내 꽉 붙잡았다. “얘야, 저 검둥이와 넷째누나 중에 누가 더 곱니?” “당연히 넷째누나 더 곱지.” “그럼 됐다. 저 검둥이를 팔아 넷째누나 병을 치료해 집으로 데려와야지. 이젠 그만 떼를 써라.” 그러나 덕돌은 계속 발버둥질을 치며 떼를 썼다. “안 된다, 안 돼! 난 넷째누나와 검둥이 다 함께 살아야 해. 안 돼. 어~엉, 엉.” 그제야 뒤늦게 상서롭지 못한 것을 눈치 챈 검둥이는 올가미를 이발로 깨물어 끊으려고 애쓰면서 “끼깅” 하고 울부짖기 시작했다. 검둥이는 왕왕 울부짖으면서 개장사군에게 덮쳐들려고 했다. 허나 목을 조인 올가미를 감은 나무대기가 길어 개장사군을 물 수 없었다. 그러자 검둥이는 덕돌에게 구원을 요구하는 애원에 찬 눈길을 보냈다. “끼깅—” 검둥이는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쳤다. 그러나 덕돌은 어머니에게 두 팔을 붙잡힌 채 발버둥질을 칠뿐 개장사군에게 끌려가면서 슬프게 울부짖는 검둥이를 구할 수 없었다. 덕돌은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었다. 검둥이는 개장사군에게 끌려가면서 구원을 요구하는 애원에 찬 눈길을 보내며 비명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그렇게 믿고 따르던 검둥이를 구해내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웠다. 검둥이에게 미안했다. 마음이 미여지는듯이 죄송스러웠다.       세상에 사노라면 검둥이처럼 주인에게 충성을 다 하던 자가 주인의 올가미에 걸려 팔려가거나 죽은 자가 수두룩하리라. 항전시기에도 그러했다.  자기가 살려고 형제와 겨레, 동지의 의리도 버리고 뒷잔등에 총을 놓은 자가 어디 한둘인가? 항일영웅 조상지도 반역자의 총에 뒷잔등을 맞고 쓰러졌다. 항일영웅 양정우도 반역자의 밀고로 일본 놈들에게 발각돼 장렬하게 싸우다가 희생되지 않았던가! 검둥이의 비극에서 믿던 도끼에 발등을 찍힌다는 속담의 철리를 뼈저리게 음미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돌다리도 두드려보면서 건너라고 하였는가 보다.       며칠 후에 덕돌이 집안에서 성욱과 함께 숙제공부를 할 때다. “넷째누나 왔다.” “뭐라고? 넷째누나 왔다고?” 덕돌과 성숙은 황급히 바깥으로 뛰어나갔다. 바깥에 나와 보니 넷째누나 신자가 아버지가 모는 수레에 앉아 내리지 않겠는가! “누나!” 덕돌은 두 팔을 벌리고 수레 위에서 내려오는 넷째누나한테 뛰어갔다. 성숙도 “신자야! 살아났구나.” 하고 뛰어갔다. 덕돌은 신자에게 안긴 채 성숙을 보고 “막내누나는 어째 넷째누나를 보고 ‘응, 응’ 하니?” 하고 종알거렸다. 성숙은 어색하게 웃었다. 신자가 대신 대답했다. “막내누나는 넷째누나보다 두 살 밖에 차나지 않는다. 괜찮다.” “그래?” 애들이 좋아하는 것을 보고 상순과 명옥은 잠시나마 덩달아 웃음꽃을 피웠다. 홍자는 뒤늦게 돌아와 신자를 보고 기뻐 야단쳤다. 그래도 홍자는 이전처럼 헛웃음을 웃지 않았다. 형내와 자준 영감의 약을 좀 쓴데다가 마을에 내려온 정규상의 치료를 받아 많이 나았던 것이다. 마을에는 또 폐염이 무섭게 돌아가면서 전염됐다. 함흥촌에서 제일 먼저 흥수네 막내딸 미선이가 앓아누웠다. 정규상은 흥수가 미웠지만 그의 딸애를 알심 들여 치료했다. 춘실이 찾아와 울며불며 하자 정규상은 두 말을 하지 않고 함흥촌에 올라갔다. 그가 흥수네 집에 가서 미선의 가슴에 청진기를 대고 가르릉거리는 소리를 들으면서 진찰해 보더니 깜짝 놀라했다. “이거 큰 일 났구먼.” 흥수는 청진기를 거두는 정규상의 손을 잡고 황급히 물었다. "무슨 급병에라도 걸렸시우?" 하고  “폐염에 걸렸구먼. 조금만 치료를 늦추면 이제 피를 토하고 목숨도 잃을 수도 있소.” 정규상의 나직한 말에 흥수는 뒤로 쿵덩 엉덩방아를 찧었다. 춘실은 덴겁한 소리를 질렀다. “아니, 폐염이라니?” 이윽고 정신을 차린 흥수는 정규상의 두 손을 꽉 잡고 애원했다. “내 막내딸을 구해주시우. 양, 닭이라도. 아니, 필요하면 소라도 잡아주겠다니께.” 정규상은 그때라고 요구조건을 들이댔다. “닭이나 소는 필요 없소. 난 밭머리에서 투쟁을 받는 게 생 질색이오.” 그러자 흥수는 머리를 조아렸다. “근심하지 말라니께. 함흥촌의 투쟁대회야 대대 당 지부 선전위원인 내가 주도하지.” 정규상이 청진기를 되 꺼내면서 흥수를 슬쩍 곁눈질해보았다. 항상 물에 빠진 개처럼 조개턱을 쳐들고 다니던 흥수 같지 않았다. 조개턱을 떨어뜨리고 눈을 내리깐 채 풀이 죽은 것이 아니겠는가. “이젠 상순 서기를 작작 괴롭히오. 우린 아버지 세대부터 각근한 세교요. 내 보건대 상순 서기와 그의 할아버지는 이 마을을 건설하려고 20년대 초부터 얼마나 고생했소. 지금 사원군중들을 배불리 먹고 살게 하려고 얼마나 속을 태우고 있소? 당신도 상순 서기가 입당시켰다고 들었소. 그런데 어찌 자기를 길러 준 은인과 그럴 수 있단 말이오?” “잉(양), 알았시우. 말이 길면 구리다니께. 알아서 할 터이니까. 미선이만 살려달랑께(달라는데).” “네깐 놈이 정치를 뭘 알아서 그래? 그리 정치를 잘 했으면 우파 모자를 쓰고 이런 시골에 쫓겨 내려 왔겠어?” 흥수는 속으로는 정규상을 욕면서도 겉으로는 수긍하는 척 했다. “예. 부탁드리니까. 꼭 합심해 이 마을을 살기 좋은 고장으로 만들어 보오. 미선은 잘 치료해보지.” 정규상은 미선의 치료를 내걸고 묘한 정치 흥정을 끝냈다. 그날부터 며칠 동안 정규상이 왕진하면서 주사를 놓았더니 미선은 기침을 깇지도 않고 페병도 인차 나아져갔다. 그때부터 흥수의 태도는 좀 변하였다. 쌀 공작대가 찾아와 생산대 쌀을 더 걷어가려고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쌀독을 뒤지었다. 흥수는 쌀공작대 미워서 겨죽을 끓여 먹였지만 정규상이 오면 꼭꼭 밀가루를 얻어서 밀국수나 물만두를 빚어 대접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흥수는 후에 마을 사람들이 정규상을 우파라고 깔보거나 투쟁하자면  이런 저런 구실을 대면서 반대해 나섰다. 그러자 정규상은 의사재간으로 흥수와 같은 정치마귀의 손아귀에서 숱한 억울한 간부들을 보호면서 어려운 정치시련을 이겨내려고 마음먹었다. 그는 상순의 방조를 받아 식당자리를 수리하고 구들을 놓은 후 이사해 나갔다. 그는 무슨 일이 있으면 꼭 병완과 상순을 찾아와 의논하곤 했다. 정규상이 찾아와 온 마을에 전염병이 돌기 시작한다는 말을 하자 상순은 한참 궁리하더니 과단성 있게 결단을 내렸다. “토성 안 대대 사무실 옆에 대대 위생 소를 앉히기요. 동생이 위생소 소장을 맡고 이번 폐염이란 전염병을 전승하기요.” 정규상은 기뻐하면서도 적이 근심어린 표정을 지었다. 상순이 피뜩 보니 그의 얼굴에 검은 그늘이 비껴 있지 않겠는가. “어째? 뭐 근심되는 일 있소?” 상순은 눈을 치켜뜨면서 물었다. 그러자 정규상은 근심을 털어놓았다. “ 위생소 소장을 우파 맡아도 되겠소? 김서기 말을 듣지 않겠소? 괜히 흥수랑 또 뭐라고 형님을 헐뜯을까 봐 그러오.” 상순은 개의치 않았다. “괜찮소. 대담히 해보오. 동생은 우파 아니오. 내가 있는 한 근심하지 마오. 마을에 도는 전염병을 없애 버리지 못하면 빈농들의 생명이 위험하오. 황차 정 선생은 미선의 병까지 치료했으니 괜찮을 거요.” “그럼 손을 걷고 전염병을 치료해 보겠소.” 가을걷이가 끝나고 초겨울에 접어들면서 마을 길바닥에 널린 옥수수 대와 지푸라기에는 서리가 하얗게 내리었다. 그런데 어느 하루 성숙이 온 몸에 열이 나면서 기침을 쿨룩쿨룩 깇었다. “아니, 얘가 마가을비가 내리는 날에 신자 치료비를 만들자고 마른 도토리랑 솔씨랑 이고 장마당으로 다니다가 감기에 걸리지 않았는가?” 명옥은 당황해 구들에 쓰러지다 싶게 누워 있는 성숙을 안고 눈물을 줄줄 흘렸다. 상순은 성숙의 이마를 짚어보았다. “안 되겠소. 열이 후끈후끈한 게 큰일 나겠다.” 뒤이어 명옥을 보고 함지에 찬물을 퍼오라고 했다. “뭘 하자고?” “얘가 몸에 열이 나는데 찬 물로 씻어줘야겠소.” “뭐라오?” 명옥이 이마 살을 찌푸리며 상순을 쳐다보았다. 허나 상순은 성미가 성급해 재촉했다. “잔말 말구 찬 물 떠오라." 뒤이어 그는 명옥이 들어 온 찬물함지를 가리키면서 성숙을 재촉했다. "성숙아, 옷을 벗고 함지에 들어앉아라.” 성숙이 언감 아버지 말을 거역하겠는가? 그 애는 부끄러운 대로 인차 옷을 벗고 함지의 찬물에 들어섰다. “물에 앉아라. 앉아.” 상순은 성숙의 손을 잡아 함지에 억지로 앉히고는 찬물을 잔등이며 배에며 끼얹고 팔이랑 씻어주었다. “그래도 정의사한테 보이는 게 어떻소? 혹시 저 윗마을의 미선처럼 폐염에 걸린 건 아닌지?” “개뿔도 모르면서 작작 떠들어라!” 상순이 세귀눈을 부라리자 명옥은 찍 소리 못했다. 상순의 호통질에 막무가내로 연 며칠 몇 번씩 성숙을 함지에 들여 앉혀놓고 찬물로 온 몸을 씻어주었다. 그러나 열은 내리기는커녕 온몸이 점점 불덩이 같았다. (이러다간 성숙을 영자처럼 집에서 죽이겠다.) 명옥은 황급히 성숙을 업고 토성안집에 차린 대대 위생 소로 가서 정규상을 찾았다. “정 선생, 얘를 살려 주오.” “양?” 정규상은 자리에서 일어나 성숙을 받아 내리우면서 덴겁한 듯이 놀랐다. “애가 불덩이 같구먼.” 그는 청진기를 꺼내 성숙을 이리저리 진찰해보더니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아니, 왜 이제야 불렀소?” “무슨 병이오?” 정규상은 청진기를 거두면서 “감기는 감긴데 폐염으로 넘었구먼. 좀 늦추었더라면 애가 잘못 될 번했소.”라고 했다. 명옥은 눈물을 흘리면서 “정 선생, 얘를 살려 주오.”하고 간곡히 애원했다. 정규상은 바삐 성숙에게 주사를 놓은 후 중약을 준비하면서 말했다. “아주머니, 근심하지 마오. 며칠 치료하면 나을 게요.” 그제야 명옥은 눈물을 훔치면서 성숙의 불덩이 같은 얼굴을 매만졌다. 상순은 정규상을 볼 면목이 없었다. 정규상은 왕진을 왔다가 꼭 짚고 넘어가야 하겠다고 상순을 바깥으로 불러 조용히 말했다. “형님, 열을 빼려면 찬 물질을 하면 절대 안 되오. 좋은 의사 동생을 두고 왜 부르지 않고 그런 도깨비짓을 했소?” “자네 온 동네에 폐염이 돌아서 바람개비처럼 돌아치는데 찾기 미안해서 그랬네. 우리 애보다 폐염에 걸린 미선이랑 다른 애들을 구하라고 그랬소.” “야, 정말 형님도. 병 치료에는 시간이 생명이오. 이후에는 누가 앓으면 인차 알려주오.” 상순은 정규상의  두 손을 꽉 잡았다.  “고맙소. 동생, 온 마을에 도는 폐염을 무슨 수를 쓰든지 전승해야겠소. 온 마을에는 지금 전염병 공포가 살판치고 있단 말이오. 이러고서야 어찌 시름 놓고 일하겠소? 무슨 뾰족한 수가 없소?” 정규상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꼭 폐 염을 전승하기요. 지금 마을의 애들로부터 어른 쪽으로 올라가면서 폐염이 전염되고 있소. 쌀 고생 때문에 영양이 따라가지 못해 면역력이 떨어진 게 주요 원인이요. 형님이 사원들을 동원해 감자를 껍질 벗기지 말고 씻어 먹게 하오. 저 흔한 강냉이 대를 그저 소를 먹이지 말고 썰어서 가마에 푹 끓이라고 하오. 단백이 나오게 푹 끓인 물에 죽이나 밥을 지어 먹으라고 하오. 그러면 밤 맛과 죽 맛도 있는데다가 영양가도 높여 면역력을 높일 수 있소. 장기로 음식습관을 개변하면 폐 염을 예방하는데 효과가 있소. 이미 폐 염에 걸린 환자는 내가 책임지고 왕진하면서 치료해주겠소. 마을 사람들이 서로 내왕을 적게 하게 하는 게 좋소. 그래야 전염을 상대적으로 막을 수 있소. 투쟁대회 같은 회의를 작작 해야 하오.” “옳소. 그게 꿩 먹고 알 먹고 둥지 털어 불을 때는 격이오. 폐 염도 치료하고 투쟁대회도 작작 열면 겨우내 사원들과 간부들이 마음 놓고 살게 아니오.” 정규상은 자기 묘안이 서는 것을 마음속으로부터 기뻐했다. 정말 기적이 일어났다. 정규상에게서 연 며칠 주사를 몇 대씩 맞고 중약을 달여 먹였더니 폐 염에 걸렸던 애들이 열이 내리고 기침도 멎으면서 치료됐다. 마을 사람들은 집안에 들어박혀 옥수수 대를 우려낸 단 물에 죽이나 밥을 지어 먹으니 맛있다고 엄지를 내둘렀다. 한 둬달 정규상의 말대로 하니 다만 성근이가 계속 기침을 쿨룩쿨룩 할 뿐 전염 세는 수그러들었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정규상에게 엄지를 내둘렀다. 미선이랑 성숙이랑 앓던 애들의 병도 완전히 나아 밖에 나와 달아다니면서 눈을 쥐여 뿌리며 눈싸움을 하면서 놀았다. 애들이 달아다니면서 뛰노는 마을 길에 하얀 눈송이들이 춤을 추며 하늘하늘 내려앉으면서 춤추고 있었다. 강아지들도 애들과 함께 밤송이 같은 눈송이 내리는 속을 깡충깡충 뛰어 다니며 놀았다.                               8. 분권과 관용         어느 날, 덕돌의 눈앞에는 노란 배가 주렁주렁 달린 사과배를 방불히 눈으로 보는 상 싶었다. “그래, 큰어머니 보고 과수원에 가서 배를 따달라고 해야지.” 덕돌은 군침을 꼴깍 넘기면서 주먹을 쥐고 윗마을에 달려가 토성안집 큰어머니네 집 문 꼬리를 쥐여 당겼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덕돌은 몸까지 배배 탈면서 서적을 부리면서 졸라댔다. "어머니, 배를 먹고파 죽겠습니다. 빨리 과수원으로 가깁소.”  그러자 새금은 어처구니 없어했다. "얘, 덕돌아, 눈이 펑펑 쏟아지는 겨울에 사과 배라니? 겨울에는 추워서 배가 없다.”  “안 돼. 이전처럼 과수원에 가서 배를 뜯어줍소.” “이 떼꾼아, 겨울에 어데 가서 배를 뜯니?” “그래도 과수원에 가깁소. 과수원에는 노란 배가 다닥다닥 달렸구마.” 지새금은 동선이 조선으로 나간 후 작은집 덕돌 밖에 믿을게 없다고 생각하고 각별히 귀여워 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가을에 덕돌이 놀러만 오면 유서집 시형 상진이네 집에 가서 비난사정을 해 그 집 아들이 보초를 서는 과수원으로 덕돌을 데리고 가군 했다. 덕돌은 과수원에 가서 파란 잎 속에 주렁주렁 달린 사과 배랑 쪽지가 길쭉한 바가지 배를 보고 군침을 꼴깍 삼켰다. 새금은 덕돌이 먹고파 하는 배를 뚝 따서 내밀었다. “옜다, 먹어라.” 덕돌은 배를 사각사각 맛있게 먹으면서 쪽지가 길쭉한 배를 가리키면서 물었다. “큰어머니, 저건 무슨 배요?” 새금은 쪽지 달린 길죽한 배를 뜯어주었다. “이건 바가지 배야. 먹어.” 덕돌은 배를 받아 돌려가며 보면서 혀를 끌끌 찼다. "바가지배? 야, 이 많은 배를 몽땅 집에 가져다가 놓고 먹었으면 좋겠다.”  “근심하지 말라.” 새금은 버들광주리에 노란 배를 무루기 뜯어 담아 이면서 말했다. “이걸 몽땅 너를 줄게. 집에다 두고 먹어.”  덕돌은 실컷 먹고서도 숱한 배를 가지고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좋아서 어쩔 줄 몰랐다. 덕돌은 가을에 큰어머니를 따라가 배를 실컷 먹던 생각을 하면서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겨울에 노란 사과배를 내라고 야단쳤다. 순애 누나는 궁리 끝에 뒤 문을 열고 나가더니 까만 언 배를 바구니에 담아다가 주었다. 그러자 덕돌은 구들에 나누워 땔땔 굴면서 떼를 썼다. “안 된다, 안돼. 노란 바가지배를 달라- 으~ 응.” 새금은 순애한테 눈을 찔끔해 보였다.안 되겠다. "얘를 데리고 과수원에 가봐라.” 순애는 별수 없이 덕돌을 데리고 과수원으로 갔다. 가는 도중에 애들이 태평강 얼음판에서 썰매를 타면서 노는 것이 보였다. 순애는 눈 덮인 과수원의 벌거숭이 배나무들을 가리키면서 차근차근 말했다. “봐라, 나무 잎도 다 떨어지고 배가 없지? 눈이 오는 겨울에는 배 없다.” “어째 이러야? 이전에 큰어머니하구 함께 왔을 때는 배가 가득했는데.” 덕돌은 이상해 뒷덜미를 긁적거리었다. “겨울에는 추워서 배가 달리지 않는다.” “그래 배 나무 이파리는 다 어데 달아났소?” 순애는 눈 밑을 가리키면서 “저기 있다.” 하고 알려주었다. 그러자 덕돌은 눈 밑에 드러난 시꺼멓게 마른 배나무 이파리를 가리키면서 물었다. “그럼 배도 추워서 눈 밑에 숨어 자지 않을까?” 순애는 너무나도 어처구니없어 웃었다. 그녀는 덕돌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겨울엔 없다, 없어. 배나무 잎이 땅에 떨어진 걸 눈이 뒤덮어 놓은 거야. 호호호. 애도 정말.” “그게 이상하다. 나무 잎은 떨어져 땅 위에 있는데 배는 어째 땅 우에 떨어진게 없니?” “배는 사람들이 가을에 다 따가서 없지. 호호호.” 순애는 덕돌의 천진한 말에 코를 싸쥐고 웃었다. 덕돌은 별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뒤를 달았다. “누나, 그럼 언제 또 배를 먹을 수 있소?” “명년 가을에. 그러니까 백날 같은 게 세 번쯤 있어야 한다.” “그렇게 오래? 그때면 배가 하늘만 하오?” 덕돌은 두 팔을 벌려 뒤로 둥그렇게 그리면서 물었다. “응.” 덕돌은 눈이 동그래졌다. 돌아오는 길에 순애 누나는 덕돌을 되돌아보면서 썰매를 타는 애들을 가리키면서 물었다. “덕돌아, 너도 저 애들처럼 썰매나 타면서 놀겠니?”  “추운데 무슨 재미 있겠소?” 덕돌은 몸을 옹송그리면서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후에 지새금이 작은 집으로 놀러 내려왔다가 상순과 명옥 앞에서 덕돌이 겨울에 배를 뜯어내라고 떼를 쓰던 얘기를 해 모두들 배를 끌어안고 웃었다. 증조부 병완은 놀러 왔다가 윗방에서 그 말을 듣고 “허허허.” 하고 웃었다. “덕돌아, 이제 패용산과 칼산 골짜기에 새 과수원에 배나무를 심으면 배를 실컷 먹을 수 있을 게다.” 덕돌은 증조할아버지 무릎 우에 올라가 앉아 하얀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물었다. "노할아버지, 언제면 배를 먹을 수 있습니까?”   병완은 무릎 위의 덕돌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면서 “이제 오, 륙 년 기다리면 될 거야.”하고  몸을 좌우로 흔들었다. “5, 6년이면 몇 날이 있어야 됩니까?” “백날 같은 게 한 스무 번?” “그리 오래 기다려야 합니까?” “그래, 네가 중학교에 올라 갈 때면 배를 실컷 먹을 수 있다.” “야, 언제 중학교에 가겠니? 배를 실컷 먹게.” “하하하.” “호호호.” 모두들 덕돌이 우스워 웃음보를 터뜨렸다. 상순은 덕돌을 오라고 해 자기 무릎 우에 올려놓았다. “아버지, 나두 성욱이 털모자 같은 거 사주십시오. 귀 시립니다.” 이때 명옥이 정지에서 소리쳤다. “덕돌아, 여기 내려오라.” 덕돌은 오쫄 일어나 정지에 나가면서 소리쳤다. “엄마, 이전에 돈을 많이 벌어 성욱 거 같은 털모자를 사주겠다고 해놓고 어째 겨울이 돼도 사주지 않습니까?” “응, 그래. 엄마 꼭 사줄게.” 윗방에서 상순은 병완에게 정중하게 말했다. “할아버지, 흥수가 지부 서기를 하고 싶어 하는데 내놓을까 합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병완은 주름살이 밭고랑 같이 패인 얼굴에 못 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약한 소리를 하지도 말아.” 그러나 상순은 자기 생각을 털어놓았다. “지부 서기가 무슨 벼슬이 아닙니다. 벼슬을 하려면 영월구 공안국 국장 자리를 내놓았겠습니까?” “지부 서기를 내놓으면 무슨 잘못이나 있는가 할 게 아니냐? 그럼 흥수는 네 머리 위에 올라 앉아 똥을 싸자고 들게다.” 상순은 기어이 자리를 내놓는 것이 옳다고 주장했다. “이 정치투쟁에서 이기고 지는 걸 떠나서 내 한 사람이 물러나면 숱한 사람들이 피곤하게 살지 않아도 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도 듭디다. 흥수가 내 자리를 차지하면 투쟁대회를 자꾸 열지 않겠는 지도 모릅니다. 사원들이 투쟁대회에서 해탈돼 편안하게 살 수만 있다면 그까짓 서기 자리를 백번이라도 내놓을 수 있습니다.” 병완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오산이야. 너 하나의 붉은 마음으로 모든 걸 해결할 수 없는 거야. 흥수는 안 돼. 개 똥을 먹는 습관 고치겠니? 지부서기 자리를 차지하면 너를 다시 일어나지 못하게 물어뜯고 짓밟으려고 들게다. 정치는 물러설수록 피동이야. 절대 약하게 놀지 말라.” 철리 있는 할아버지 말씀에 상순은 머리를 끄덕이면서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었다. 바로 그 점이 근심스러웠던 것이다. 나중에 상순은 산전수전을 다 겪은 할아버지 말씀을 듣기로 했다. “그럼 지부 서기는 잠시 내놓지 않겠습니다. 결혼 비준서를 떼 주거나 흑판 보를 꾸리는 일을 흥수한테 시킬 예산입니다.” “그래, 모든 걸 끌어안지 않는 게 맞다.” 병완은 손자의 성장에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이때 정지 문이 열렸다. 모두들 머리를 들어 보니 성욱이었다. “덕돌아!” “어째?” 덕돌은 아버지 무릎에서 일어나 정지 문 쪽으로 달려 나갔다. 성욱은 털모자를 덕돌에게 내밀었다. “내 모자를 쓰고 학교로 가자!” “나를 주고 넌 어쩌니?” “우리 아버지 또 새 털모자를 사주었다. 봐라. 얼마나 좋니?” 성욱은 자기 머리우의 새 털모자를 벗어 자랑했다. “고맙다. 성욱아. 우리 엄마도 새 털모자를 싸줄게다. 씨.” 덕돌은 입이 뽀로통해 엄마를 쳐다보았다. 윗방에서 상순은 하나 밖에 없는 아들에게 털모자 하나 사주지 못해 남의 모자를 얻어 쓰게 하는 것이 못내 가슴이 아파 “음.” 하더니 땅이 꺼지게 한숨을 후 내쉬었다. 손자와 손비가 기분이 상해하는 것을 보고 병완은 정지에 서 있는 애들을 내다보면서 소리쳤다. “성욱이라고 했지? 우리 큰형님의 고손이 벌써 저렇게 컸구나. 병완은 하얀 구레나룻을 쓰다듬으면서 학교로 떠나가는 덕돌과 성욱을 내다보며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보자, 야, 어느새 대수가 이렇게 많이 뻗었느냐? 형님의 고손자 성욱이라. 내 증손 덕돌에겐 9촌 조카로구나. 8촌이 한 구들이라더니 정말 헛말이 아니구나. 너네 대엔 벌써 9촌이 다 됐구나. 허허허.” “예, 9촌이 어디 먼 친척입니까?” 상순은 정지 덕돌과 성욱을 내다보면서 타일렀다. “얘들아, 너희들은 9촌 숙질간이야. 알았어?” “예. 우리 둘은 친척이기에 어디 가나 한편을 합니다.” 성욱이 코를 훌쩍거리더니 손등으로 허연 콧물을 쓱 문질렀다. “우리 전번에도 조선 지도 새끼 접어드니 양쪽에서 다리 하나씩 들어 메쳐놓고 두드려 놓았습니다.” “조선 지도라는 건 누구냐?” “동림입니다. 그 새끼 이마에 조선 지도 새겨졌습니다.” “오, 그래? 허나 공부를 잘 해야지. 둘이 한 당이 돼 다른 애들을 때리면 안 돼? 동림하고도 딱친구로 놀아야 해. 알만해?” “예. 그런데 우리 조선 지도를 이기지 못하겠는 거 어쩌겠습니까?” “그래도 싸우면 나쁜 애야.” 성욱은 볼우물이 패일 지경으로 입을 악물었다. 덕돌과는 달리 그 애는 좀 성질이 꽁한 편이었다. 애들이 떠나간 후 병완은 물었다. “그런데 저 경주를 어쩌겠니?” “뭘 말입니까?” 상순은 눈초리를 꼿꼿이 치켜 올렸다. “경주가 미련과 결혼하잡니다. 정신 있습니까? 지주 아들과 결혼해? 우리 집안이 어떻게 됩니까?” “글쎄 말이야.” 병완은 한숨을 후 내쉬다 기침을 쿨룩쿨룩 했다. 상순은 황급히 일어나 할아버지 잔등을 자근자근 두드려 주었다. “됐다, 됐어.” 병완은 손을 들어 상순을 앉으라고 시늉했다. “경주 결혼문제는 심사숙고해야 한다. 우리 영월김씨는 원래 경주김씨와 한 핏줄이야. 황차 우리 막내손자 경수는 경주의 동복동생이 아니고 뭐니? 흥수가 자꾸 그걸 물고 늘어지니까 큰일 났다.” 상순은 한숨을 후 내쉬었다. “지주 딸이라고 해도 혼인을 간섭할 수 있습니까? 결혼 소개 신을 떼는 일은 이젠 흥수한테 맡기겠습니다. 뭐라도 시켜야 더 물지 않겠는지?” “옳다, 개는 먹이를 줘야 짓지 않는 법이다. 분권과 관용은 어느 정도 효과를 보겠는지 모를 일이다.” 상순은 할아버지를 부축해 윗마을 함흥 촌에 올라갔다가 흥수네 집에 들렸다. 흥수는 경계하는 눈초리로 상순의 아래 우를 훑어보더니 퉁명스럽게 물었다. “왜 왔소?” 흥수는 추운 겨울에 집안으로 들어가자는 말도 하지 않고 바깥에서 막아섰다. 그러든 말든 상순은 정지 창문으로 핼끔 내다보는 춘실의 눈길을 피하면서 정식으로 말했다. “지금까지 내 독단, 독행 한 거 같아 미안하오. 이제부터 결혼 소개 신을 떼는 일이랑 대대 당 지부 회의를 사회하는 일을 하오.” 흥수는 감사하다고 할 대신 “흥! 고양이 쥐를 생각하는구먼.”하고 쌀쌀하게 한마디 내뱉었다. 상순은 더 할 말도 없어 돌아가려고 했다. 그때 흥수가 뒤에서 내쏘는 말이 들려왔다. “그런 잔일만 내놓지 말라니까. 이젠 지부 서기도 윤번으로 하자니께.” 상순은 몸을 홱 돌려 정색해 말했다. “지금 하는 꼴을 보면 자네가 지부 서기를 하면 날마다 투쟁대회만 하노라고 한지에 방아를 걸겠소.” 흥수도 한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았다. “김 씨네 조손 3대가 없으면 함흥대대 돌아가지 못하겠구먼. 세습이라도 무서운 세습이라니께. 흥!” 상순은 말할 상대도 되지 않는다고 여겨 몸을 돌렸다. 이때 정지문이 벌컥 열리더니 춘실이 불쑥 뛰쳐나왔다. “여보, 또 시작하오? 당원들은 어째 맨날 싸우기만 하오?” 뒤이어 춘실은 상순에게 눈을 흘기며 입귀를 삐쭉했다.       상순은 몸을 홱 돌리더니 문을 쾅 박차고 나왔다.       그는 마을 사원들을 이끌어 아름다운 함흥촌을 건설하려고 잠시 대대당지부 서기를 내놓지 않기로 마음을 굳혔다. (이제 봄이 오면 마을 앞에 큰 물도랑을 파고 물레방아를 놓아야지. 그럼 논머리에서 벼 탈곡을 할 수 있을 거야.)  
130    대하소설 진달래 소야곡(14) 댓글:  조회:1445  추천:0  2018-03-27
                              26. 소식공개회의 강운룡 부국장은 병원에 가서 승호에게서 직접 사건경과를 료해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병원 복도에서 피해자 은영과 맞부딪쳤다. 은영은 운룡을 보자 “경찰아저씨군요. 이 세상에는 숱한 처녀를 해친 건달놈을 징벌하는 도덕법정은 없어요?” 하고 중얼거렸다. 운룡은 강도들에게 짓밟힌 처녀애를 보고 머리 숙여졌다. 그가 급진 외과 사무실을 찾아갔다가 뜻밖의 정황에 부딪칠줄이야. YB병원에서 승호가 자취를 감추지 않았겠는가. 간호원들과 물어보아도 “다른 병원에 간 것 같아요.”라고 할뿐이었다. 그때 리철갑 과장한테서 전화가 왔다. “강과장, 빨리 돌아오오.” “무슨 일이요?” “소식공개회를 열겠소.” “아니, 지금 승호를 찾는데 병원에서 사라졌소. 걔가 어느 병원에 갔소?” “걸 알아 어쩌오? 혐의자도 아닌데.” “아니오. 알아볼 일이 있어 그러오.” “뭘 그러는지 소식공개회 끝난 후에 보기오. 빨리 돌아오오.” “알았소.” 강운룡 부과장은 급히 형사경찰대대로 돌아갔다. 그가 형사정찰대대 소회의실에 들어가보니 기자들이 빼곡이 들어앉아 있었다. 그 속에는 신문사 기자 종수도 있었다. 정치에 민감한 종수는 신문사에 배치받은 후 법률전문기자로 활약하고 있었다. 리철갑 과장은 형사정찰대대와 수사대원들의 공훈을 널리 선전하려고 한시급히 이번 소식공개회를 열려고 서둘렀다. 강운룡은 리과장을 복도에 데리고 나와 나직이 “나머지 혐의자 광일까지 나포한 후에 소식공개회를 열면 좋을 것 같소.”라고 했다. 그러나 리철갑은 고집을 부렸다. “숱한 기자들을 불러놓았는데 어쩌오?” “돌려보내든지?” “안되오. 주악을 나포했다는 걸 공포하기요. 하루라도 빨리 범죄자들의 기염을 꺾어놔야지.” 운룡은 계속 말렸다. “리과장, 괜히 풀을  건드려 뱀을 놀래지 마오. 깡패 우두머리를 놀라게 해서  나포하기 힘들겠소.” 그 말에 리과장은 좀 주저하면서 걸상에 물앉았다. “그 새끼들을 몽땅 붙잡아 총살해야 내 속이 풀리겠는데.” 운룡은 복수의 불길이 이글거리는 리철갑  과장의 눈길을 보고 입을 무겁게 열었다. “당신 심정은 리해되오. 멀쩡한 아들이 글쎄 무리승냥이 같은 놈들한테 귀두까지 잘리웠으니 말이오.” “이보, 그런 말은 하지도 마오. 얼마나 창피하오.” 운룡은 실수한 것을 알고 화제를 돌렸다. “리과장은 이 사건해명을 회피하는 것이 좋소.” “왜? 난 복수해야겠소.” “당신은 피해자 아버지가 아니고 뭐요? 피해자 가족이 해당 사건 수사에서 손을 떼는 건 형사수사사업의 준칙이요.” “음.” 리철갑 과장은 머리를 끄덕이더니 권연을 꺼내 물었다. 운룡도 한대 꺼내 물고 라이타를 꺼내 리과장에게 불을 붙여주었다. 리철갑 과장은 담배연기를 길게 빨아들였다가 후~ 내뿜었다. 그간 그는 대학교 규률검사위원회 허철만 서기와 암암리에 짜고들어 송파와 승호를 서로 봐주기를 했다. 기실 리철갑 과장은 허송파네 일가와 악연을 계속 맺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외나무다리에서 허철만 서기와 최웅봉 부시장 일가와 직접 가해자와 피해자 관계로 복잡하게 맞부딪치게 될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이번 특대상해륜간사건은 아무리 봐도 허송파 일당과 련관된 것 같았다. 승호가 시당위 정법위원회 허서기 딸 허경옥과 정법 부시장 최웅봉의 딸 최은영의 정조를 유린해 생긴 사건인 것 같아 더욱 골치아팠다. 리철갑 과장은 허철군 서기와 허철만 서기 형제를 봐서 눈 감고 지나가자니 최웅봉 부시장의 눈치가 보였다. 더구나 승호의 귀두까지 잘라낸 강도들을 생각하면  악이 날대로 났다. 그러나 이 사건을 깊이 파고들수록 승호가 귀두를 잘리운 추문이 퍼질가봐 저으기 근심됐다.  고민 끝에 그는 승호의 전도에도 영향이 가지 않고 당상급도 될 수 있는 한  건드리지 않을뿐만아니라 범죄자도 법에 의해 호되게 족칠 수 있는 묘안을 내왔다. 강운룡은 리철갑의 이런 속내는 알 수 없었다. 리철갑은 속궁리와는 달리 강운룡을 보고 강경하게 말했다. “먼저 소식공개회를 열어 강도들을 법에 의해 호되게 처단해야 한다는 사회여론을 조성해야 하오. 여론조성이란 무기로 허송파 깡패무리 우산과 수족을 잘라내야겠소.” 강운룡도 머리를 끄덕였다. 이때 복도 먼발치에서 성호가 서성거리고 있었다. 리철갑은 강운룡을 돌아보며 물었다. “저 앤 왜 이번 수사에 가담시켰소?” 강과장은 대수롭잖게 “견습시키자고.” 하고 대답했다. 리철갑 과장은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우린 사인정탐을 써선 절대 안되오. 괜히 쓸데없는 말을 듣겠소.” 사실 리철갑 과장은 성호가 아주 참한 청년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성호를 이번 사건수사에 가담시켰다가 승호의 귀두가 잘린 추문이 퍼질가봐 저으기 근심됐다. 리철갑 과장은 법의실에 가서 주범의 DNA검사단을 보았다. 은영의 질 안에서 검출된 정액중의 한 DNA와 일치했다. “주악, 주범. 이 개놈새끼들, 몽땅 어디 썩어져봐라!” 악이 날대로 난 리철갑 과장은 지하심문실에 씽 달려내려갔다. 그는 대가리를 두무릎 사이에 툭 떨어뜨린 주악과 주범을 보자 권총을 쑥 뽑아 단방에 쏘아죽이고 싶었다. 그는 국장 사무실에 올라가서 천룡해 국장과 주관부국장 김성광을 모시고 숱한 기자들이 빼곡이 들어앉은 형사정찰대대 회의실로 들어갔다. 리철갑 과장은 사무상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가더니 서류를 내려놓고 안경알  밑으로 여러 기자들을 둘러보았다. “여러분, ‘10.16특대상해륜간사건’은 기본상 해명됐습니다.” 순간 숱한 카메라가 리철갑 과장을 조준하더니 섬광들이 쉴새 없이 번쩍였다. “범죄혐의자 주악과 주범, 김광일은 10월 16일 저녁 7시반 좌 우에 련애하는 청년 리모(25세)와 녀대학생 최모(24세)의 뒤를 밟아 YB대학 뒤산 소나무숲에까지 갔다. 주범과 주악은 먼저 반항하며 박투한 리모의 허벅지와 얼굴을 수술칼로 찔러 상처를 입혔으며 미리 준비해가지고 간 헝겊바줄로 리모의 두팔을 뒤로 결박해 소나무에 묶어놓았다. 그새 범죄혐의자 김광일은 최모 처녀를 구뎅이에 처넣고 강간하려고 했다. 최모가 용감히 범죄혐의자와 박투하면서 수술칼로 범죄혐의자 김광일의 허벅지와 얼굴을 찔렀다. 김광일은 최모를 주먹으로 치고 목을 졸라 까무러치게 한 후 강간했다. 뒤이어 주악과 주범도 정신을 잃은 최모를 야수처럼 륜간했다.” 리철갑 과장은 기자들을 내려다보면서 자랑스럽게 소개했다. “우리 형사수사대대에서는 사건보고를 받자 즉시 사건현지에 가서 세심한 수사를 벌렸다. 피해자들의 진술에 근거해 과학수사방법으로 범죄혐의자들이 3명이라는 것을 수사해냈으며 이미 륜간범죄혐의자들인 주악과 주범을 체포했다. 나머지 범죄혐의자 김광일은 지금 수배 중에 있다.” 종수가 손을 들고 질문했다. “우선 이번 특대상해륜간사건을 해명한 것을 축하합니다. 리과장께 한가지 묻고 싶습니다. 어떤 과학수사방법으로 이번 사건의 단서를 쥐게 되였습니까?” 리철갑 과장은 난색한 표정을 지었다. “그건 수사비밀입니다. 수사방법을 다 공개하면 이 후에 범죄자들의 반정탐능력이 높아지기에 우리 수사사업에 거대한 장애로 될 수 있습니다.” 그는 한마디 덧붙였다. “기자들이 사건해명소식을 낼 때에도 딱 공안국에서 제공한 자료대로 기사를 쓰고 우리 심열받은 후 보도할 것을 바랍니다.” 텔레비죤방송국 기자가 또 손을 들었다. “사건해명자료를 제공할 수 없습니까?” 리철갑 과장은 랭정하게 말했다. “너무 총망히 소식공개회를 하다나니 자료를 미처 작성하지 못해 미안합니다. 제가 말한대로 보도하면 됩니다.” 리철갑 과장은 이젠 사건해명소식공개회를 여러차례 열었기에 로련한 전문가였다. 어떤 기자들은 범죄혐의자와 피해자의 성명을 꼬치꼬치 캐물어 필기장에 적었다. 어떤 기자들은 지어 자기 기록한 필기장에 서명해달라고 했다. 로련한 리철갑 과장은 완곡하게 사절하였다. 기자들은 아쉬운 표정을 지으면서 자리를 떠났다. 제2권 농민의 아들                             27. 흉수를 나포        성호는 수사대원 수길과 함께 우전국에 가서 김광일의 집식구들과 형제, 친척의 전화번호까지 다 장악한 후 공안국 제7처에 보내 전화감청을 의뢰했다.        그들은 추운 초겨울 밤에 광일의 집 부근에 잠복해 있으면서 그 자가 나타나기를 은밀히 감시했다. 초조한 밤이 무거운 침묵 속에서 흘러갔다. 희미한 초생달이 풍운조화를 부리는 먹장구름 속을 자맥질하며 서쪽으로 헤염치고 있었다.       그러나 초생달이 서쪽에 다 기울어가도 반정탐능력이 있는 교활한 광일의 그림자는 얼씬거리지도 않았다. 심지어 광일은 집식구들이거나 친척에게까지 전화 한마디 하지도 않았다. 뻐스터널과 기차역 대합실에도 수사대원들이 잠복해 있었지만 정황은 마찬가지였다. 광일의 꼬리도 보이지 않았다. 기타 현과 시에서도 광일의 종적을 발견하지 못했다. 속이 탄 성호는 옆에 잠복한 수길에게 광일의 정황을 자세히 물어보았다. “광일이랑 평소에 어데로 잘 드나듭니까?” “그 놈 깡패무리들은 늘 공원에 드나들면서 수림 속에서 부정당한 관계를 맺는 남녀들을 붙잡아 ‘파출소에 잡아가겠다.’고 협박하는 수단으로 돈을 략탈하거군 했지. 심지어 남자는 쫓아보내고 녀자를 륜간하는 일도 있었소. 그러나 피해자들이 신고하지 않았거나 피해자증명을 서지 않았소. 그래서  깡패들은 번마다 법망에서 빠졌네.” 성호는 머리에 피뜩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혹시 광일이 공원에 숨지 않았겠는지?” “공원에?’ 수길은 추위에 떠는 초생달을 쳐다보더니 머리를 절레절레 가로 흔들었다. “이 추운 초겨울에 얼어죽자고 공원에 있겠소?” “그 놈이 집이거나 친척과도 련계를 끊은 걸 보면 돈이 떨어져서 공원에서 불륜행위를 하는 남녀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릴지 어떻게 압니까?” “글쎄? 식당이거나 개인려관에 있을 수도 있지.” “죽지 않으면 살 소리군. 그 교활한 놈이 멀쩡히 식당이나 려관에서 우리 잡기를 기다리겠습니까?” “등잔불 밑이 어둡다고 항상 경찰들이 경계가 소홀한 틈을 탈수도 있지.” “글쎄.” 수길은 인차 통화기를 꺼내 나지막한 목소리로 강운룡 부과장에게 성호의 제의를 회보했다. 강운룡 부과장은 “즉시 공원부근 선녀음식점이랑 해운려관이랑 찾아가서 광일과 비슷한 놈이 나타나면 신고하라고 부탁하오.” 하고 포치했다. 강운룡 과장은 뒤이어 수사대원 창남과 천일을 광일이네 집 부근에 파견하고 수길과 성호를 공원과 식당, 려관에 파견했다. 수길과 성호는 먼저 공원부근 려관들과 식당을 돌아다니면서 범죄혐의자신고를 부탁했다. 선녀음식점에 들어서자 선화가 반겨 맞았다. “아니, 성호 오빠, 어떻게 돼 오랜만에 초라한 식당에 다 왔어요?” 성호는 한살 이상인 선화가 항상 “오빠”, “오빠” 하는 것이 안쓰러워 눈인사를 하였다. 뒤이어 조용한 경리실에 데리고 가서 귀속말로 사연을 말하고나서 부탁했다. “광일이 나타나면 알리오.” 선화는 단통 얼굴색이 새까매나더니 “아니, 깡패들을 건드렸다가 목이 날아나라고?” 하고 질겁해 바들바들 떨었다. “그 놈들은 륜간죄를 범해 몽땅 총살당할 거요. 겁내지 마오. 든든한 성호 있는데. 허허허.” 사람좋게 웃는 성호를 보고 선화가 물었다. “공안국에 들어갔소?” “아직은 아니.” “왜 그런 깡패를 건드리오?” “은영을 알지?” “양.” “그 놈들이 은영을 해쳤어.” 그제야 선화는 머리를 끄덕였다. 순간 같은 녀성으로서 은영에 대한 동정과 더불어 흉수에 대한 적개심이 북받쳐올랐다. “우리 식당에 나타나기만 하면 전화하죠.” “감사하오. 부탁이오.” 선화는 비장한 결심을 한듯 머리를 끄덕였다. 식당에서 나오자 성호와 수길은 어둠 속에 잠긴 공원으로 들어갔다. 을씨년스러운 겨울인데다 밤도 깊어서 공원 안에는 인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다만 벌거숭이 나무가지들이 초겨울 바람에 아츠러운 비명소리를 휴휴 지를뿐이였다. 수길은 주춤 걸음을 멈추었다. “그 놈이 이런 곳에 오겠소?” “더 수색해보기요.” 그들은 공원 둔덕을 타고 나무숲 속을 샅샅이 뒤지면서 올라갔다. 그러나 련애하는 련인들도 없었다. 그들이 수림을 벗어나려고 할 때였다. 쿨룩쿨룩 바람이 잔 둔덕 아래 정자에서 기침소리가 들렸다. 그들은 고양이 발걸음으로 정자에 살금살금 다가갔다. 초생달빛을 빌어 정자의 장의자에 웬 거지가 누워있는 것이 어슴프레 보였다. 수길은 성호의 옆구리를 툭 치더니 손으로 량쪽으로 덮쳐가서 포위해 목을 조이는 시늉을 했다. 성호는 머리를 끄덕였다. 수길과 성호는 량쪽으로 나뉘어 둔덕 아래로 접근해갔다. 한 대여섯메터 다가갔을 때다. 수길이 고의로 인기척을 냈다. 풀을 건드려 뱀을 놀래우는 수단이였다. 저게 뭐냐? 그 자는 화닥닥 놀라 벌떡 일어나더니 선불맞은 노루처럼 꼬리빳빳해 줄행랑을 치기 시작했다. “서랏!” 그 자는 수길을 피해 성호 쪽으로 달아났다. “어디로 도망쳐!” 성호는 번개같이 발길을 날려 그 자를 걸어 넘어뜨렸다. 그자는 떼구루루 굴러 벌떡 일어나면서 주먹을 날렸다. 성호는 날아드는 주먹을 받아쥐어 비틀면서 태를 탁 쳐놓았다. 그때 광일이 뛰여와 그 자의 팔을 뒤로 비틀었다. 수길과 성호가 쓰러져 버둑거리는 그 자의 대가리를 달빛을 빌어 여겨보니 광일이 틀림없었다. “김광일, 이 놈, 어디로 도망쳐?” 수길의 고함소리에 그 자는 꽥꽥 고함쳤다. “놔라, 야, 이렇게 붙잡힐줄은 정말 몰랐다.” 수길은 광일을 보고 “네놈을 특대상해륜간범죄혐의자로 체포한다.” 하고 말하면서 차거운 쇠고랑이를 꺼내 광일의 두 팔목에 철컥 채웠다. 이튿날 리철갑 과장은 또 두번째 소식공개회를 열었다. 형사정찰대대 회의실 정면에는 공안국의 천룡해 국장이 앉아 있었다. 숱한 기자들 속에는 종수도 눈에 띄였다. 리철갑 과장은 만면춘풍이 돼 사건해명소식을 공포했다. “어제 저녁 밤 9시에 우리 경찰대대 수사대원 최수길과 정의용사 리성호는 공원에 숨어 있던 범죄혐의자 김광일을 체포했다. 이로써 ‘10.16특대상해륜간사건’ 범죄혐의자 3명을 사흘만에 몽땅 나포했다. 이 사건은 지금 계속 심리중에 있다.” 그때 종수가 손을 들었다. 종수는 자기 동창생 이름이 공포되자 무척 호기심이 갔던 것이다. 그는 당날에 출간한 신문을 들고 앞으로 나왔다. “어제 소식공개회를 실은 신문입니다.” “양? 벌써 나왔소?” 리철갑 과장은 신문을 받아쥐여 안경알 밑으로 쭉 내리훑어보았다. 신문에는 “10.16특대상해륜간사건을 해명”이란 제목 아래 소식을 공개하는 자기 사진이 큼직이 실리지 않았겠는가. 리철갑은 내심으로 기뻤지만 신문을 종수에게 안팎이 다른 말을 했다. “아니, 내 사진을 실어 뭘 하오? 이번 사건은 우리 국장님들이 수사방향을 정확하고도 구체적으로 지시했고 수사대원들이 기민하고 영용하게 수사해 해명한 결과인데. 어제 신문과 방송에 내기 전에 형사정찰대대에 원고를 가지고 와서 심열을 받은후 내라잖았소? 이게 뭐요?” 종수는 뒤더수기를 긁적거리면서 “새벽에 신문을 찍는데 심열을 받고나면 오늘 나가지 못할가봐 그랬습니다.”라고 변명했다. “그래도 심열제도는 지켜야지. 이건 형사사건해명 소식보도의 원칙과 규률이란 말이요.” 리철갑 과장은 국장들한테 신문을 건네면서 “공훈이 제일 큰 국장님들의 이름 한번 언급하지도 않아 미안합니다.”라고 했다. 천룡해 국장과 김성광 부국장은 이구동성으로 “아니요.”라고 했다. 김성광 부국장은 자리에서 일어나 여러 기자들에게 정중하게 말했다. “이번 사건은 리철갑 과장과 강운룡 부과장이 수사대원들을 잘 지휘해 세심히 수사했기에 사흘만에 완전히 해명했습니다. 특히 정의용사 리성호는 수많은 단서를 제공하고 범죄혐의자를 용감히 나포해 공훈이 아주 큽니다.” 종수는 리철갑 과장에게 물었다. “수사대원과 정의용사의 얼굴을 신문에 내려고 합니다. 여기서 잠간 만나볼 수 없습니까?” “예. 곧 공개하겠습니다.” 리철갑 과장은 성호를 표창하는데 아주 적극적이였다. 승호의 원쑤를 나포한 친구라는 것도 있지만 사위감후보가 아닌가. 이윽고 수사대원 최수길과 정의용사 리성호가 소식공개회의장에 들어섰다. 숱한 카메라 섬광이 번쩍번쩍 번개쳤다. 종수는 성호에게 다가와 손을 잡았다. “축하합니다! 범죄자를 붙잡던 경과를 얘기해줄 수 없습니까?” 성호는 종수를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옆에 선 최수길을 가리켰다. “이분과 물어보십시오.” 수길은 간단히 경찰대대 리철갑 과장과 강운룡부 과장의 지시에 따라 김광일을 공원 정자에서 나포하게 된 경과를 말했다. “특히 정의용사 리성호가 김광일이 공원에 숨어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했기에 수사방향을 조절하게 됐습니다.” 천룡해 국장은 이번 사건해명에 공훈을 세운 최수길 등 수사대원들과 정의용사 리성호를 높이 평가하였다. “리성호와 같은 기민하고 용감한 정의용사가 있는 한 범죄자들은 인민의 법망을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그는 성호에게 “정의용사상패”와 상금봉투를 손수 드렸다. 기자들이 일제히 샷타를 눌렀다. 섬광이 번쩍번쩍 빛발쳤다. 수상감상을 말하라고 하자 성호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여러분, 미안합니다. 저는 근근히 수사대원들을 협조했을뿐입니다. 이 영광을 수사대대 전체 책임자들과 수사대원들께 드리겠습니다.” 종수가 다가가 샷타를 눌렀다. 그는 사진기를 거두고 필기장을 꺼내더니 천국장에게 물었다. “이 후에도 성호한테 수사사업을 시킬 예산입니까?” 천룡해 국장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정중하게 에둘러댔다. “우린 광범한 인민군중들이 계속 우리 수사사업을 협조할 것을 바랍니다.” 리철갑 과장은 희비가 엇갈린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아까운 사위감인데…) 성호의 앞날이 어떻게 될가?          
129    대하소설 진달래 소야곡(13) 댓글:  조회:1600  추천:0  2018-03-20
                                         24. 흉수와 피해자        련 며칠 주먹이 날아들어도 보지 못할 정도로 안개가 자오록이 끼어 어데가 어딘지 분간하기 힘들었다. 늦가을 하늘에 구멍이 뚫렸는가?        이날 따라 지꿎은 가을비가 구질구질 내리더니 가을바람에 락엽까지 우수수 져서 을씨년스럽기 그지없었다. 성호는 병원 1층 급진외과 간판을 보자 은영의 병실에 가서 문안하고 싶은 충동이 불붙 듯했다. 허나 사건해명이 급선무기에 승호부터 찾아봐야 했다. 그는 급진외과에 가서 간호원에게 이모부가 떼준 수사대대 소개신을 가만히 꺼내 보이고 이것저것 물었다. “승호라고 있습니까?” “승호? 있어요.” “증상은 어떤가요?” 간호원은 공안국 소개신을 본 뒤라 구애없이 말했다. “귀두가 절단된데다가 칼에 가슴과 허벅지를 깊게 찔렸어요.” “예?” 성호는 저으기 놀라 입을 쫙 벌렸다. (승호, 이 놈 새끼?) 그는 억지로 진정하면서 차근차근 물어나갔다. “그래 언제 입원했습니까?” 간호원은 서류철을 꺼내 보이었다. “지난 10월 16일 저녁 9시 쯤이죠. 그날 저녁에 제가 당직이였는데요. 깜짝 놀랐어요. 가슴과 다리 사처에 피를 줄줄 흘리면서 들어왔댔어요.” 그녀는 그날의 충격으로 목소리까지 가늘게 떨렸다. 성호는 안칸에 들어가 당직의사를 만나 계속 수사해나갔다. 남자의사이기에  간호원보다 묻기 편리했다. “승호가 잘린 귀두를 가지고 왔습디까?” 의사는 도리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안 가져왔습니다. 귀두가 한 2센치미턴 잘려 나갔습디다.” “이제라도 가져오면 이을 수 있습니까?” “혹시 귀두를 주었습니까?” “줏긴 주었는데 승호 건지 아직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의사는 희죽이 웃었다. 성호는 너무나도 우연이 필연으로 이어지고 있어 무엇인가 짐작됐다. 그는 황급히 벌떡 일어났다. “귀두를 가져올테니 이어보겠습니까?” 의사는 도리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젠 끊어진지 사흘이나 돼 다 썩었겠는데 어떻게 잇는다고 그럽니까?” “일루의 희망만 있다면 노력해주십시오.” “그럼 헛일 삼아 가지고 와보십시오.” “제가 수사하는 건 비밀로 해주십시오.” “그러지요.” 성호는 택시를 잡아타고 부랴부랴 수사대대로 달려갔다. 그가 복도에 달려들어갈 때 때마침 강운룡을 만났다. 성호는 강운룡을 따라 사무실에 들어가 병원에서 알아본 정황을 쭉 이야기했다. “이 사건은 분명 승호와 련관된 것 같구나.” 운룡은 랭장고에서 작은 랭동상자를 꺼내 책상에 올려놓고 조심스레 열었다. 귀두가 퍼렇게 변질되지 않았겠는가. 귀두에 콩알만한 검은 기미가 박혀 있었다. (분명 승호 거구나. 자식, 목욕할 때면 항상 제게 크다고 밑천을 자랑하더니, 꼴 보기 좋구나. 쳇, 이제 어데 가서 바람 피워?) 성호는 랭동상자 덮개를 닫으면서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운룡은 랭동상자를 들고 성호와 함께 찌푸를 타고 쏜살같이 병원으로 달려갔다. 그들은 황급히 급진외과에 곧추 들어가 의사를 만났다. 의사와 운룡은 은밀히 승호의 DNA와 귀두의 DNA가 일치한가 화험해보기로 했다. 성호는 문안하는 척하면서 승호의 병실에 들어갔다. 허연 병실에 홀로 들어누운  승호는 얼굴에 붕대를 딜딜 감은 채 쿨쿨 자고 있었다. 성호는 깨울세라 발뒤꿈치를  들고 발뼘발뼘 침대머리에 다가가 앉았다. 성호는 붕대 위로 헝클어진 승호의 머리를 슬슬 쓰다듬는 척하다가 머리카락 몇대를 쑥 뽑았다. "앗!" 승호는 눈을 번쩍 뜨고 쳐다보았다. "야, 뭐 하냐?" 승호는 상을 찡그리면서 간신히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다. "급히 오다나니 아무 것도 들고 오지 못했어." 성호는 머리카락을 호주머니에 슬쩍 걷어 넣으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잠간 나갔다가 올게." "야, 빈손이면 뭐라니? 농민 아들이 무슨 돈이 있니?" "야, 농민 아들이라고 말하지 말라." 성호가 부랴부랴 복도에 나왔을 때 승호 어머니가 저쪽에서 스레기통을 들고 마주 오는 것이 보였다. 성호는 급히 의사사무실로 들어갔다. 운룡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떻게 됐니?" "가져 왔습니다." "잘 됐어." 의사는 성호가 내민 비닐주머니를 받아가지고 화험실로 갔다. 화험 결과는 인차 나왔다. 놀랍게도 승호의 DNA와 귀두의 DNA가 일치했다. 은영의 질에서 검출된 정액중에 승호의 DNA와 일치한 정액도 들어있었다. 성호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승호의 귀두는 아쉽게도 변질해 잇지 못한다는 결론이 나왔다. 성호는 종신병신으로 된 승호가 측은했다. 운룡은 성호의 도움으로 사건해명에 실마리를 쥐게 돼 기뻤다. (은영이 제 아무리 입에 빗장을 지른들 쓸데 있어? 이 사건을 해명하려면 은영, 승호와 관계되는 자들을 수사해야 해. 특히 라이벌이거나 척진 자들을 수사해내야 한다.) 그는 자리를 뜨기 전에 성호에게 부탁했다. “수사대원들보다 네가 알아내기 더 편리할 거 같구나. 사건해명을 좀 협조해달라. 이 일은 아무도 몰래 은밀하게 조사해라." "예." "먼저 승호를 문안하면서 사건경과를 슬슬 알아봐라.” "예, 알겠습니다." 성호는 이모부와 총총히 갈라진 후 상점에 가면서 흉수와 피해자를 가린 베일을 어디로부터 벗길가 궁리했다. (이모부 말대로 은영의 애정 라이벌이거나 승호와 척진 자들이 흉수일 가능성이 아주 높지 않는가. 물론 우연히 은영과 승호가 련애하는 걸 발견한 강도들이 덮쳐들어 승호를 쳐눕히고 은영을 륜간했을 수도 있지. 그러나 우연성보다 필연성이 더 가깝다. 놀라운 건 은영의 질에서 검출된 정액 속에 승호의 DNA와 일치한 정액도 들어있다고 하지 않는가. 그날 분명 승호는 은영을 데리고 소나무숲에 가서 그 짓을 벌렸어. 혹시 그들이 한창 그 일을 벌릴 때 강도들이 덮쳐 들었을 수도 있어. 은영은 창피해 말하지 않아도 승호는 혹시 말할 수도  있지 않을가.) 성호는 승호를 돌파구로 삼기로 했다. 그는 병원 동대문 맞은 편에 있는 슈퍼마켓으로 들어갔다. 호주머니를 다 들춰 봐도 동전 몇푼 밖에 없었다. 련 며칠 이모네 집에 있으면서 술 한병 사들고 들어가지도 못했다. 그는 호주머니를 톡톡 털어 바나나를 몇줄 사들고 돌아섰다. 그가 입원실 복도에 들어섰을 때 갑자기 복도가 소란스러워졌다. "놔라니까! 왜 이래요?" "아니, 저게 은영이 아니야?!' 환자복을 입은 은영이 의사와 간호원들의 팔을 뿌리치며 야단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녀는 헝클어진 자기 머리카락을 마구 집어뜯으며 고함치면서 발광하고 있었다. 성호는 가슴을 칼로 에이는 듯했다. "놔! 이걸 놔! 또 륜간하려고? 난 처녀 아니야? 난 이 세상 짐승 같은 사내들을 몽땅 증오한단 말이야! 난 시집 안가! 정조를 짓밟힌 등신을 누가 데려가겠어? 으흐흐흐, 흑, 흑흑, 난 자살할 거야! 이 세상이 싫단 말이야! 홍희처럼 죽어버릴 거야!” 은영은 의사와 간호원들한테 붙잡혀 병실에 들어가면서도 팔을 휘두르며 발광했다. 이전에 체육머리를 흩날리면서 푸르른 잔디밭을 누비던 생기발랄한 은영이 아니였다. (어쩜 은영을 저 지경으로 만들었어? 꼭 흉수를 나포해 은영의 원쑤를 갚아야 해.) 성호는 복수심에 이를 뿌득뿌득 갈았다. 최웅봉 부시장은 은영의 병실에 들어가면서 울상을 지었다. 뒤따라 들어가며 손등으로 눈굽을 찍는 중년녀인은 아마 은영의 어머니 같아 보였다. 성호는 바나나꾸러미를 든 채 의사 사무실에 들어갔다. 그는 의사한테서 조용히 사건이 발생한 그날 은영과 승호의 정황을 두루 알아보았다. "수사대원들이 당날 밤에 조사했는데요.” “재차 확인할 것이 있습니다.” 그러자 의사가 입을 열었다. “그날 밤 110경찰들이 피범벅이 된 채 실 한오리 걸치지 못한 은영을 경찰차에 실어왔습디다." "가만, 몇시쯤 실어왔습니까?" 의사는 잠간 기억을 더듬더니 "아마 밤9시 쯤일 겁니다."라고 대답했다. "승호는 언제 들어왔습니까?" "그 환자가 먼저 들어왔습니다." 의사는 서류철을 뒤적이더니 "한 7시 반 쯤 들어왔습니다."라고 했다. "음~" 성호는 머리를 끄덕였다. (개자식, 은영을 버리고 혼자 살겠다고 도망쳤어?) "그때 은영이 정신을 차렸습디까?" "아니, 까무러친 채 허망소릴 마구 칩디다." "그날 정황을 좀 상세히 말해주십시오.' "예." 의사는 한숨을 후~ 내쉬더니 천천히 그 날 정황을 얘기했다. "우리가 은영을 실은 담가를 밀고 구급실에 들어가자 110경찰은 인차 형사수사대대에 사건보고를 하더구만요. 때마침 형사수사대대 리과장이 승호 문안을 달려왔던 차에 인차 구급실에 들어왔지요. 그는 강간사건 같다고 하면서 수사대원들을 시켜 피해자 은영의 온몸 상처를 촬영하고 법의를 시켜 질안의 정액을 검출해 화험하게 했습니다." "피해 정도는?" 의사는 터놓고 말했다. "하신이 다 터져 하혈이 심했습니다. 우린 황급히 수혈하면서 봉합수술을 했지요. 야, 그날 불시에 O형 피가 모자라 혼났습니다. 구급하려고 간호원의 피까지 뽑아 수혈했습니다." 성호는 머리를 끄덕이었다. 옆에서 간호원이 한마디 했다. "DNA 검사를 통해 법의는 질 안에 네 사람의 정액이 들어 있다는 결론을 내렸지요.” 의사가 보충했다. "예, 몇번이고 자살한다고 창문으로 마구 뛰여내리려고 했습니다. 어찌나 날랜지 간호원들이 조금만 늦었더라면 큰 일 날 번했습니다." "치료할 수 있겠습니까?" "예." 의사는 긍정적으로 대답했다. "네놈한테 륜간당했으니까. 정신충격이 아주 큽니다. 한동안 심리를 안정시키면서 약물치료를 하면 한 반년 후면 완쾌될 것 같습니다." 성호는 의사를 엄숙히 보면서 다른 정황을 물었다. "그날 저녁에 혹시 어덴가 상처를 입어 구급실에 온 사람들이 없습니까? 키 좀  큰 청년들이." "아, 있습니다." 의사는 서류철을 들추더니 성호한테 보였다. "보십시오. 그날 저녁에 꺽다리 청년 셋이 우리 구급실에 찾아와 처치를 받았습니다." 성호는 부지런히 필기장에 적다가 의사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어데 상처를 입었습디까?" "한 청년은 허벅지 안쪽을 예리한 칼날에 찔렸습디다. 낯을 벤 청년도 있었습니다. 별로 수술칼날에 찍힌 것 같습디다." "그렇지. 바로 그 놈들이야." "예?" 의사는 놀랐다. "그 자가 지금 병원에 입원해 있습니까?" "아니. 그날 처치를 받고는 다시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깊은 상처가 아니라서 지혈주사를 놓고 간단히 처치해 보냈습니다.” 성호는 서류를 들여다보다가 그 자들의 성명이 없고 다만 최씨 성에 나이만 24세라는 것이 적혀 있을 뿐이었다. 꽝! 성호는 책상을 쳤다. "왜 그 자의 성명을 기록하지 않았습니까?" "그 날 최모라 하던데 우리가 소홀해서 그만…" 의사는 뒤덜미를 긁적거렸다. 성호는 의사를 보고 목소리를 낮췄다. "미안합니다. 후에 그 자들이  다시 나타나면 보고하십시오." "예." "또 내가 수사하고 있는 걸 비밀로 해 주십시오." 그는 바나나 주머니를 들고 의사 사무실에서 나와 부랴부랴 승호네 병실에 들어갔다. 승호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녀동생 선금까지 와 있었다. 선금은 알은 체하며 귀밑까지 홍조를 피우더니 복도로 훌 나가버렸다. "에이고, 농민 아들이 무슨 돈이 있어 바나나까지 사들고 왔는가?" 리과장이 하는 말에 성호는 저으기 불쾌했지만 억지로 참으면서 바나나를 승호의 머리맡 차탁에 올려놓았다. 승호는 성호를 보고 놀랐다. 얼굴에 반창고를 더덕더덕 붙힌 그는 상처가 아파 오만상을 찡그리면서 간신히 일어나 앉았다. 리과장이 승호한테 물었다. "얘, 그날 널 칼로 찌른 새끼들이 어떻게 생긴 놈들이냐?" 승호는 성호를 흘끔 곁눈질 하더니 두덜거렸다. "잘 모르겠습니다. 후에 천천히 말합시다.” 그의 눈에서는 복수의 불길이 이글거렸다. 리철갑 과장은 이를 뻑뻑 갈았다. “꼭 원쑤를 진 놈들한테 당한 것 같아.” “아버지, 그만.” 승호는 아버지한테 불편한 눈짓을 보냈다. 그때라고 성호가 끼여들었다. “혹시 허송파네 깡패무리 아니더냐?” 승호는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아니야, 모를 놈들이였어. 송파보다 엄청 날래더라.” 성호는 한 발작 더 다가갔다. “그래 어데서 당했니?” “감옥으로 가는 뚝에서 당했어.” "먼저 상처나 잘 치료해라." “강과장이 찾아 왔댔지?” 아버지 묻는 말에 승호는 도리머리를 저으면서 눈을 흘겼다. 리철갑 과장은 불만을 토로했다. “강과장은 말이 아니야. 이번 사건을 맡겼더니 아직도 안 왔어.” “아까 왔다 갔습니다.” 벽화의 말을 듣고서야 리과장은 한숨을 후~ 내쉬였다. 이때 복도가 또 소란스러워났다. 승호는 "원 복잡해 어디 여기 있겠습니까? 당장 다른 병원으로 가야지." 하고 일어나 앉았다. (분명 은영이 있어 불편하지.) 리과장이 볼멘 소리를 했다. "어디로 간다고 그래? 어머니 일하는 병원이 좀 좋아 그래?” “여긴 위험합니다. 그 새끼들이 언제 들이칠지 누가 압니까?” “모르는 놈들이라면서. 어떻게 여기 있는 거 알고 찾아온다고 그러니?” “아버지, 병원을 옮깁시다.” 리철갑 과장은 고집을 썼다. “옮길 필요 없어. 수사원 몇을 보내 밤낮 지키게 할게. 그 놈새끼들이 나타나면 당장에서 나포하겠어.” 승호는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아버지, 날 미끼로 삼을 작정입니까? 자칫 무리승냥이들한테 죽을 수도 있잖습니까?” 리과장은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야, 수사대원들이 보초를 서는데도 무서워?” 리과장은 당장 통화기를 꺼내 지시했다. “나요. 이 병실에 그물을 쳐야 되겠소. 천일이, 수길이, 룡철이, 상길이 당장 여기 오오. 강도들이 나타나기만 하면 일망타진하오.” 벽화가 어디론가 나갔다가 이윽해 들어왔다. “저쪽 병실도 숱한 경찰들이 보초 서는 판이요. 뭐 최 시장네 딸이 륜간당해 입원했답니다. 며칠 전 밤에 반주검이 돼 온 걸 겨우 구급했습니다. 원, 그날 밤에 승호마저 구급실에 들어올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흐흑흑, 흑흑.” 벽화는 벽 쪽으로 돌아서서 어깨를 들먹였다. 리철갑 과장은 대개 짐작이 가는데 있어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그만 하오.” 그는 최시장네 딸의 병실도 지키라고 경찰들을 금방 포치해놓은 터였다. “흉수를 빨리 나포해야겠는데 단서가 통 잡히지 않는단 말이야.” 승호는 황급히 손사래를 쳐댔다. “아버지, 그만 수사하십시오.” “왜? 그래 그저 당하고 만단 말이냐?” “글쎄 그만 두십시오. 괜히 긁어서 부스럼을 만들지 말고.” “뭐라고?” “웬 놈인지 모르는 판에 괜히 더 보복을 당하지 않으면 다행입니다. 씨.” 승호는 가령 흉수를 잡았다고 해도 자기가 귀두를 잘린 추문이 만천하에 퍼질 수 있다는 것이 속에 걸렸다. 리철갑 과장은 승호의 속내는 모르고 당부했다. “겁내지 말라. 원쑤를 꼭 갚아줄게.” 승호는 가타부타 묵묵부답하고 상을 찡그리면서 가까스로 침대에 앉았다. 이때 간호원이 처치하려고 밀차를 밀고 들어왔다. “간호장도 있군요.” 그녀는 벽화를 보고 인사하면서 승호의 상처를 처치하려고 붕대랑 약을 꺼내면서 서둘렀다. 승호가 황급히 손사래를 쳤다. “가만, 손님이 있는데 좀 있다 처치하기요.” (야, 가랑잎으로 눈을 가리우고 야옹 하지 말라. 흥!) 성호는 속으로 코방귀를 끼면서 복도에 나왔다. 복도에는 벌써 경찰 둘이 삼엄히 보초를 서고 있었다.    성호는 병원 울안 나무숲에 가서 이모부가 주고 간 핸드폰을 꺼내 이모부한테 이제껏 알아낸 정황을 보고했다. 강운룡 부과장은 즉시 수사방향을 제시했다. “그날 승호가 은영과 성관계를 맺은 건 기정사실이 아니고 뭐냐? 계속 승호를 사건해명에 협조하게 이끌어내라.” “예, 알았습니다. 귀두가 잘린게 창피해서 승호가 쉽게 말할 것 같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나 알아내겠습니다.” 성호는 다 처치했으리라고 짐작하고 승호의 병실로 되돌아갔다. 병실에는 승호 모자간 밖에 보이지 않았다. “너 간첩이냐? 뭐냐? 지금 경찰로 위장해 뭐 하려고 병원에 와서 쏠락거리는 거냐?” 뜻밖에 승호가 성호를 쏘아보면서 야단쳤다. “오해하지 말라.” 성호의 말에 승호는 화를 벌컥 냈다. “썩 나가지 못해?” 성호는 노기를 띤 승호의 눈길을 피하지 않았다. 그는 승호의 침대에 다가가 앉아 툭 까놓고 말했다. “날 믿지 못하겠느냐? 난 하루속히 흉수를 붙잡아 원쑤를 갚아주려는 거뿐이야.” 승호는 오만상을 찡그리며 선금을 보고 손으로 바깥을 가리켰다. “나가라.” “야, 친구를 믿어라.” “엄마, 선금을 절대 이 새끼한테 주지 마오. 얼마나 음험한 놈이요?” 벽화는 도리머리를 흔들면서 복도로 나갔다. 승호는 성호를 쏘아보면서 “자꾸 남의 밑구멍을 파서 뭘 하려는 거야?” 하고 따지고 들었다. 성호는 뭔가 꿀꺽 삼키더니 하나하나 캐고들었다. “사실대로 말해라. 그날 은영과 련애했지?” 승호는 아닌 보살을 떨었다. “야, 임마, 그날 저녁에 강뚝에서 강도들을 만났어.” “관둬라. 법의 감정에 의하면 그날 은영의 몸에 네 정액이 들어있었다는 것이 확인됐다.” “진짜 생사람을 잡는구나.” 승호는 능청을 부리면서 베일로 진상을 가리려고들었다. 그러나 개똥은 청보자기에 싸도 구린 내를 가릴 수 없었다. 사건진상을 가리려는 베일이 인차 홀락 벗겨졌다. “아직도 시치미를 따겠니? 은영의 질에선 네 걸 말고도 세 놈의 정액이 검출됐어.” 승호는 되는대로 베일을 들어 가리려 했다. “글쎄 은영이 세 강도에게 륜간당했을 순 있어. 허나 어쩜 날 련루시킨단 말이야?” “더 시치미를 따지 말라. 과학수사는 못 속여. 분명 너와 은영이 학교 뒤산 수림에서 성관계를 발생할 때 세 강도들이 덮쳐든 거야. 수사대대를 협조해 흉수를 붙잡아 너와 은영의 원수를 갚자.” 승호는 머리를 툭 떨어뜨렸다. 성호는 승호의 정신방선이 무너지는 것을 보아냈다. “말해라! 그날 어떻게 된 일이냐?” 승호는 주먹으로 침대머리를 쾅 쳤다 “성호야, 원수를 갚아달라.” 성호는 승호의 두 손을 맞잡으면서 머리를 끄덕였다. 승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날 난 감옥관리대대에서 밀려나서 울적한 기분에 은영을 찾아갔댔다.  은영은 추운 가을에 뒤산으로 가지 않겠다고 했어. 그런데 내가 은영을 해쳤어. 걔를 데리고 가서 확실히 그랬어. 그런데 갑자기 세 강도들이 덮쳐들었어. 난 칼을 든 그 놈들과 맨 손으로 싸웠지. 헌데 한 놈이 은영을 제압하고 두 놈이 나한테 덮쳐들었어. 독불장군이라고 세 놈이나 칼을 휘두르는 바람에 가슴과 얼굴이 찔렸어. 그 새끼들은 날 바줄로 소나무에 꽁꽁 묶어놓고 은영을 구뎅이에 끌고 들어가 륜간했어. 내 앞에서 말이야.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었어. 엉엉엉~ 엉-엉-” 승호는 억울해 어린애처럼 한바탕 울고나서 로실하게 말했다. “그 놈들이 떠나간 후 난 손에 쥔 수술칼로 바줄을 끊었어. 그런데 은영은 구뎅이  안에서 피못 속에 까무러쳐 인사불성이 됐더라. 벌거벗은 하신에선 하혈이 심해 생명이 위험했어. 헌데 난 은영을 업고 병원에 갈 순 없더구나. 그래서 아버지한테 알렸지.” “야, 어찌 쓰러진 은영을 버리고 제 살겠다고 혼자 병원에 갈 수 있니?” “아니야. 경찰들한테 사건현장을 똑똑히 알려주고 병원에 갔어. 병원에 가서 얼마 안돼 은영도 들어왔다는 걸 엄마한테서 들어서 알게 됐어.” 성호는 관건적인 것을 물었다. “너 귀두는 어떻게 된 거야?” “창피해. 제발 누구한테도 말하지 말라. 걸 알면 어느 처녀 시집오겠느냐?" "응, 약속하마. 건데 묻는 말에 대답해라.“ “귀두는 그 놈들한테 잘렸어.” 승호는 머리를 끄덕이더니 숙이면서 악이 나 이를 뿌득뿌득 갈았다. “진짜 원한이 있는 놈들이야. 우연하게 지나가던 강도들이 한 짓 같잖아.” 성호는 전문 수사대원처럼 제법 그럴듯하게 추리해나갔다. “근년에 너와 척진 자가 없니?” “없어.” “그럼 넌 누가 한짓이라고 보니?” “타성에 있는 홍희 남동생이 한 짓일가?” “홍희 남동생을 본 적이 있니?” “응, 헌데 홍희 동생이 아닌 거 같기도 해. 홍희 동생은 키가 작았어. 그 놈들은 다 꺽다리들이야. 혹시 경옥이 누굴 시킨 건 아닐까?” “송파 형제는 아니라면서?” “깡패들을 시켰을 수도 있지.” “음~” 성호는 머리를 끄덕였다. 한참 궁리하던 승호는 성호를 쳐다보았다. “혹시 은영이 복수하려고 시킨 짓이 아닐가?” “야, 임마! 은영이 시킨 자들이 륜간했겠어? 괜히 생사람을 잡지 말라. 은영이 얼마나 불쌍한 피해자라고 걔를 의심해?” 이때 사복한 경찰들이 넷이나 병실에 들어섰다. 성호는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붕대를 감은 승호의 손을 잡고 당부했다. “잘 치료해라. 무슨 일이 있으면 알려라.” 승호는 머리를 끄덕였다. 병원에서 나온 성호는 하늘을 쳐다보았다. 구질구질 쏟아지는 가을비와 우수수 져서 날려다니는 락엽에 땅바닥의 어지러운  발자국들이 메워지고 있었다. “아, 흉수는 어떤 놈일가?”                                             25. 백일하에 드러난 륜간범들        강운룡은 성호가 수사한 정황을 다 듣고나서 사무상 우에 혐의자도표를 쭉 펴놓았다. 운룡은 도표를 가리키면서 상세히 설명했다. “혐의자들을 종합해보면 크게 2개 부류로 나눌 수 있다. 한개 부류는 은영, 승호와 척진 사람들일 수 있다. 여기에는 승호와 련인관계거나 척진 허경옥과 허송파, 허송호 깡패무리, 승호와 련인관계와 원한이 있는 홍희의 형제들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한개 부류는 은영과 승호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강도들일 수 있다. 그러나 우연히 만나 륜간한 강도일 가능성은 아주 적다. 중요한 혐의자는 홍희 가족보다도 허송파네 깡패무리인 것 같아.” 성호가 끼여들었다. “륜간범들 대단히 날래더랍디다.” 운룡은 머리를 끄덕였다. “물론 우연히 덮쳐든 강도들을 배제할 순 없어. 허나 지금 수사정황에 근거하면  YB병원 급진외과실에 허벅다리 상처를 처치하려고 나타났던 세 청년이 혐의가 제일 크다. 승호는 그날 수술칼로 한 강도의 허벅지와 낯을 찔렀다고 했잖았니? 급진실 의사와 간호사들을 통해 그자들의 용모팍을 장악해 모의초상화를 그려놓았어.” 운룡은 다른 종이말이를 사무상에 쭉 폈다. 짙은 눈섭에 우멍눈, 주먹코, 두툼한 입술이 퍽 인상적이 아닌가. 성호는 딱 어데서 피뜩 본 것 같았다. 강운룡 부과장은 혐의자들 도표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여러 병원에 수사대원들을 보내 그자들이 혹시 재차 병원에 나타나기만 하면 당장에서 나포하라고 했다. 그런데 며칠 되도록 통 나타나지 않는다.” 성호는 코수염쟁이가 피뜩 떠올랐다. “별로 이전에 은영의 눈을 빼가겠다고 송파와 함께 녀성숙사에 쳐들어왔던 깡패 같습니다.” “뭐라고?” “그때 복도에서 한번 붙었댔습니다. 그 놈일 수도 있습니다.” “알았다. 송파가 승호한테 보복하려고 뒤를 밟으면서 기회를 노리다가 깡패무리를 시켜 손을 썼을 수도 있어.” 운룡은 사무상 우의 모의초상화를 뚫어지게 쏘아보았다. “이젠 수사망을 졻혀야겠군.” 그는 창문께로 다가가 가을비가 구질구질 내리는 창 밖을 내다보더니 몸을 홱 돌렸다. “당장 허송파를 련행해야겠다.” 그때 문이 벌컥 열리면서 병원에 잠복했던 수사대원 창남이 들어왔다. “강과장, 시병원에서 한 놈을 나포했습니다.” “어떻게?” “그 놈이 급진외과에 처치받으로 온 거 같습디다.” “어딜 상한자요?” “허벅지를 상한 자입니다.” “창남이, 소뿔은 단김에 빼라고 몽땅 나포해야겠소.” “예.” 창남은 바람결처럼 나갔다. 운룡은 수사대원 천일과 성호를 데리고 지하심문실에 갔다. 성호는 심문실 밖 감시실에서 천일과 함께 텔레비죤 화면으로 심문실 안에서 강과장이 범죄혐의자를 심문하는 것을 보기로 했다. 지하심문실 철문이 드르릉 열리자 키꺽다리 하나 끌려왔다. 우멍눈에 주먹코, 나비코수염, 두툼한 입술…진짜 모의초상화에 그린 혐의자와 비슷했다. 성호는 이전에 녀대생숙사 복도에서 맞붙었던 코수염쟁이라는 직감이 들었다. 강과장은 비수마냥 예리한 눈길로 코수염쟁이 미묘한 표정변화도 놓치지 않고 쏘아보았다. 그 자는 운룡의 예리한 눈길을 피하더니 쪽걸상에 앉아 심문실 천정을 쳐다보았다. 억지로 태연자약한 척했다. (허파에 헛바람이 찬 놈이군.) “성명은?” “무슨 죄 있다고 이럽니까?” “묻는 말이나 대답하오. 성명?” “고주악입니다.” “나이?” “26세입니다.” “거주지?” “태평가.” 운룡과 창남은 눈길을 마주쳤다. “어째 여기 오게 됐는지 알만 하지?” “아니, 무슨 죄 있다고 이럽니까? 진짜 생사람을 잡을 예산이구나.” “닥쳣!” 운룡은 가래짝 같은 손으로 책상을 꽝 쳤다. “생떼질을 쓰지 말고 로실히 탄백햇!” “그날 밤에 뭘 했어?!” “10월 16일 밤에 그럽니까?” “뭘 했어?” “술을 마시러 갔지 뭐. 믿지 못하겠으면 내 친구들하구 물어봅소.” (어느 날이라는 걸 말하지 않았는데도 미리 답변할 준비를 다 해놓았구나. 교활한 놈, 역은 새 방아간을 지나갔군.) “누구와 술을 마셨는가?” 창남의 심문에 주악은 심드렁해했다. “친구들과 마셨습니다.” “누구와 마셨는가?” 운룡이 꽥 고함쳤다. “어서 대지 못할가?!” “야, 어째 이럽니까? 무슨 죄를 졌다고 이럽니까?” “묻는 말이나 대답해라.” “현광일과 마셨는데.” “또 하나는 누군가?” “내 다 어떻게 압니까?” “우린 다 알고 있어. 어서 대라.” “주범이.” 뻔뻔스럽던 주악은 점차 기꺾였다. 코수염을 쓱 씃고 무릎 우에 놓은 그의 커다란 손이 바르르 떨리는 것을 발견했다. “10월 16일 너희들이 무슨 짓을 한 걸 기억하겠지?” “기억합니다. 술을 마셨을뿐 아무 짓도 하지 않았습니다. 우린 깡패여서 싸울뿐  절대 도적질을 하지 않고 녀자들을 강간하지 않습니다.” “흥! 로실히 탄백하라. 그날 밤 대학교 뒤산 소나무숲 속에서 무슨 짓을 했는가?!” 창남의 그 일격에 고주악은 비수에 항문이나 찌린듯이 벌떡 일어섰다. “야, 어째 생사람을 잡습니까? 난 그 사건과 관계 없습니다.” “륜간죄는 무슨 죈지 아는가? 총살이야, 총살! 알아?!” 주악은 평소에 쇠고랑을 차고 파출소 문턱이 다슬게 잡혀다니면서 반정탐능력이  있는 깡패였다. 하지만 총살이란 말에 쪽걸상에서 썩박나무처럼 뒤로 자빠졌다. “일어낫!” 그제야 좀 제 정신을 차렸는지 그는 피기 없이 백지장처럼 질린 낯을 간신히 들고 두덜거리면서 억지로 태연자약한 척했다. “에이, 그 놈 쪽걸상이 너무 작구나. 재수 없이 허망 번져졌어.” 주악은 쪽 걸상에 되앉아 운룡과 창남을 흘끔 도적질해 보았다. “로실히 탄백해라. 허벅지는 어째 상했어?” 주악은 도리머리를 흔들면서 “술에 취해 우리끼리 싸우다가 다쳤습니다.” 하고 변명했다. “어떻게?” “광일이 손칼로 날 찔렀습니다.” “닥쳐! 우린 다 알고 있어.” “알면서 자꾸 심문할 건 뭡니까? 우린 진짜 소나무숲으로 간 적도 륜간한 적도 없습니다.” 운룡은 창남의 귀에 손을 대고 뭐라고 귀속말을 했다. 창남이 나가서 이윽해 성호가 들어왔다. “저 청년을 알만한가?” 주악은 성호를 찬찬히 뜯어보더니 흠칠 놀라했다. 그는 칼날같이 날카로운 성호의 눈길을 피하며 머리를 떨어뜨렸다. “알만한가?” “예, 한번 붙어본 적이 있습니다.” “대학 녀학생숙사에서, 맞지?” “예.” “허송파 누군지 알지?” “모릅니다.” “생떼를 쓰지 말고 로실히 대답해라.” “모릅니다. 우린 걔와 관계없습니다.” “허송파 이름도 몰라?” “이름은 들었습니다. 공원가에 이름난 깡패가 아닙니까?” “그날 송파가 너희들을 시켜서 승호와 련애하러 간 녀자를 륜간했지?” “야, 억울해 못 살겠다.” “우린 네놈들이 한 죄악을 다 알고 있어. 네놈들은 사건현장에 수많은 단서를 남겼어.” “쳇, 아무래나 합소. 좌우간 우린 그 사건과 관계없으니까. 흥!” 운룡은 창남과 귀속말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로실히 탄백해라. 그것만이 유일한 출로야. 주범과 공범의 형사처벌은 차이 있어.” 창남은 주악의 곁에 다가가더니 머리를 붙잡고 삼검불 같은 머리카락을 잡아 쑥쑥 뽑았다. “아갓! 어째? 갓나새끼들처럼 남의 머리를 끄당기긴? 정말 더럽게 노는구먼. 퉤!” 주악은 수사대원 수길에게 끌려 류치실에 가면서 두덜거렸다. 그러나 다리가 너무 떨려 비틀거리는 그 자의 뒤모습이 딱 허수아비 같았다. 창남은 주악의 머리카락을 비닐주머니에 넣어가지고 법의실로 갔다. 법의는 화험실에서 주악의 머리카락을 가지고 DNA를 분석했다. 분석결과 10.16특대상해륜간사건 때 은영의 질 안에 남긴 흉수의 DNA와 일치했다. “즉시 현광일과 주범을 나포하오!” 운룡의 명령에 따라 창남과 수길, 천일 등은 즉시 경찰차를 몰고 쏜살같이 공원가에 달려갔다. 운룡은 주악을 심문실에 끌어내 계속 심문했다. 주악은 의연히 억지로 태연자약한 척했다. “주악이, 곰곰히 생각해 봤는가?” “야~ 어째 자꾸 이럽니까? 륜간한 적이 없다는데.” “네가 10.16사건의 혐의자라는 결론이 나왔다. 피해녀 질 안의 정액과 네 DNA는 일치하다는 화험결과가 나왔어. 이제부터 묻는 말에 로실히 대답해라.” “야, 진짜 생사람을 잡네.” “그날 비수를 가지고 가서 뭘 했는가?” “아니! 난 비수로 찍은 적이 없습니다. 다 그 새끼들이 그랬지.” 주악은 어망간에 실수했음을 느끼고 딴전을 부렸다. “우린 정말 관계없습니다.” “탄백하든 말든 륜간죄는 총살이란 걸 알아라. 죽을바에는 로실히 탄백하고 하루라도 편안히 자라.” “아이고, 다 그 개새끼들 때문에 죽게 됐구나.” 정신방선이 와그르르 무너진 주악은 울상을 지으면서 통탄했다. “누가 시켰는가?” “담배하구 물을 주겠습니까? 다 탄백하겠습니다. 그 놈새끼도 나와 함께 죽어야 해.” 운룡은 수사기록원을 보고 가서 담배와 물을 가져오라고 했다. 이윽고 그는 수사기록원이 가져온 물고뿌를 손수 가져다 주악에게 주었다. 주악은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물고뿌를 받아 꿀꺽꿀꺽 들이켰다. 뒤이어 운룡의 넉가래 같은 손에서 담배를 받아 둬모금 들이빨아 길게 들이켜더니 후~ 내뿜었다. “몽땅 탄백하고 발편잠 자라.” “죽을 판에 몽땅 폭로하겠습니다. 이번 일은 허송파, 다 그 개새끼 시켰습니다.” 운룡은 수사기록원과 눈길을 마주쳤다. 주악의 탄백에 의하면 허송파는 지난 해에도 사촌녀동생 허경옥이 리승호한테  앙심을 품고 보복하려고 했다고 한다. 지난해 어느 날 밤에 허송파 형제는 주악이랑 주범이랑 광일이랑 데리고 대학 기숙사에 가서 승호를 찾아내 치려고 했다. 그러나 승호가 없자 녀학생 기숙사에 가서 허경옥의 요구대로 은영과 홍희의 눈을 빼가려고 했다. 그러나 그날 밤 기숙사 경비원과 성호가 막아나서는 바람에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그후 허송파는 항상 주악 등을 데리고 승호의 뒤를 밟으며 돌아다니면서 승호한테 손을 쓸 기회를 엿보았다. “그런데 그날 저녁에 승호가 은영이란 녀대학생과 함께 나타나자 우린 뒤를 밟았댔습니다. 그 애들이 학교 뒷산 소나무숲 으로 가는 걸 보자 송파는 우릴 보고 반주검이 되게 패놓으라고 했습니다.” “그래 송파는 보복하러 사건현장에 가지 않았는가?” “예. 승호가 자기를 알기에 인차 꼬리를 밟힌다고 하면서 빠집디다.” “범죄과정을 좀 상세히 말하라.” 승호는 물을 한고뿌를 더 달라고 해 꿀꺽꿀꺽 마시더니 계속 탄백했다. 그날 밤 주악과 주범, 광일이 승호와 은영의 뒤를 한 50메터 거리를 두고 따라갔다고 한다. 그런데 소나무숲 속 구뎅이에 들어가자마자 승호와 은영이 관계를 발생할 줄은 몰랐다고 한다. 그들이 어둠을 슬금슬금 소나무숲으로 다가갔을 때였다. 승호의 비명소리가 들렸고 승호가 은영을 마구 때리면서 “이 쌍간나새끼! 죽여버리겠다!”고 고함쳤다고 했다. 그때 주악이랑 덮쳐가 은영을 깔고 들어앉은 승호를 발길로 걷어차고 치고 박았다. 승호는 은영을 놓아주고 구뎅이에서 뛰여올라가 그들 셋과 맞붙어 주먹을 휘두르고 발길을 날렸다. 주악과 주범은 승호를 쳐눕히고 미리 준비해간 바줄로 승호를 결박해 소나무에 묶어놓고 물매를 안겼다. “누가 승호의 귀두를 잘랐는가?” “건 모릅니다. 승호 귀두가 잘리웠습니까? 허, 씨원하군. 숱한 처녀들을 해치더니, 잘코사니야.” “너희들이 승호를 보복하자고 귀두를 잘랐지?” “절대 우리 한 짓 아닙니다. 그저 승호를 한각 분질러놓으려고 했을뿐입니다.” “로실히 탄백하지 못할가?” “정말 죽어도 하지 않은 일은 안 한 짓입니다.” 주악은 도리머리를 가로 흔들었다. “아, 생각납니다. 내 승호 아래배를 주먹으로 치면서 볼라니 이상하게 벌거벗은 허벅지에 피 즐벅합디다.” 주악은 자기 죄가 아니라고 구구히 해석했다. “생각해보십시오. 주먹에  아래배를 맞아서야 어찌 허벅지에서 피가 날 수 있습니까? 혹시 은영이 한 짓이 아닌지도 모릅니다. 난 정말 모릅니다.” 며칠 후 잇따라 주범도 시내에서 빈들거리다가 경찰들에게 나포됐다. 수사대원들은 인차 지하심문실에서 주범을 심문했다. 그런데 그는 승호가 귀두를 잘린 일을 전혀 모른다고 딱 잡아뗐다. 주범과 주악은 몽땅 코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딱 깡패조직의 표징을 보는 것만 같았다. “피해녀를 누가 먼저 강간했는가?” 운룡의 심문에 주범은 무겁게 입을 열었다. “광일이 먼저 강간했습니다. 우린 원래 송파 요구대로 그저 승호를 한각 분질러 놓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나와 주악이 승호를 바줄로 묶어놓고 때리는 새에 광일은 녀대학생을 구뎅이에 처넣고 강간했습니다. 뒤따라 우리 둘도 륜번으로 강간했습니다. 그런데 녀대학생이 까무러치자 죽은 것 같아 겁을 먹고 승호와 녀대학생을 놔두고 도망쳤댔습니다.” 운룡은 주범의 낯에 멍이 든 것을 보고 또 심문했다. “누가 허벅다리를 찔렀는가?” “주악이 찔렀습니다. 아, 광일도 녀학생에게 얼굴을 칼에 찔렸습니다. 그래서 우린 인차 뒤산에서 시내에 내려오자마자 병원에 가서 처치했습니다.” “녀학생한테 칼이 있을 수 있는가?” “글쎄 말입니다. 광일은 확실히 녀학생을 강간하려고 덮쳐들었다가 구뎅이  안에서 녀학생한테 얼굴에 칼을 맞았다고 합디다. 주악은 아마 승호한테 찔린 것 같습니다.” 운룡은 주범에게 물었다. “왜 첫날 밤에 YB병원에 가서 처치한 후 자취를 감췄는가?” “주범은 송파는 승호의 어머니가 YB병원 외과급진실 간호장을 하기에 들킬가봐 가지 않기로 했습니다.” 운룡은 머리를 끄덕이더니 주범을 보고 심문기록에 서명하게 한 후 쇠고랑이를 채워 류치장에 가두었다. 베일에 가렸던 흉수와 피해자의 륜곽이 아른거리다가 서서히 백일하에 드러나기 시작했다. 대지를 을씨년스레 감쌌던 안개도 서서히 걷히더니 천하만상이 정체를 드러냈다.  
128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94) 댓글:  조회:1141  추천:0  2018-03-11
             5. 낙향한 교수         쨍쨍 내리쪼이는 땡볕을 맞으면서 집으로 돌아온 상순은 신경질 밖에 나지 않았다.        멍지뫼산 앞에서 흥수에게 조선특무로 한참 몰리고 돌아왔는데 이게 뭔가? 덕돌이랑 성욱이랑 동림이랑 마을의 조무래기들이 글쎄 살구나무에 올라가 다닥다닥 달린 살구를 뜯어 먹느라고 야단치고 있지 않겠는가.        “야, 이 놈 새끼들아, 어서 내리지 못해?”       상순은 도끼눈을 부라리면서 버럭 호통쳤다.       애들은 질겁해 살구나무에서 엉금엉금 기여내렸다. 애들은 상순의 눈치를 흘끔흘끔 보며 바자 문을 열고 와르르 도망쳤다. 덕돌이 내리자마자 상순은 손바닥으로 엉덩이를 쨩쨩 쳤다. “이 놈 새끼, 집이 빈 틈에 잘했구나. 살구를 팔아 넷째누나 병을 치료하자고 했는데. 살구나무를 전페했구나. 다시 그러겠니? 이 놈아!” “아이 그러겠습구마.” 덕돌은 너무 아파 엉덩이를 왼손으로 만지며 울면서도 오른손에 잡은 노랗게 익어 톡톡 터진 참살구만은 놓지 않았다. 상순이 살구나무를 올려다보니 살구가 발갛고 노랗게 무르익다 못해 갈라 터져 꿀물을 흘리고 있었다. 살구 한 알 뜯어 입에 넣으니 시큼하고 달달해 천하의 별맛이었다. 살구나무에 노라발간 참살구가 다닥다닥 달려 있었다. 다행히 애들은 높은 가지에는 올라가지 못해 아직도 숱한 참살구가 살아남아 있어 다행이었다. 상순은 집에 들어와 명옥이 퍼주는 멀건 죽을 후루루 마시고 사발을 밥상에 탕 놓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앞길이 막막했다. 바깥에서는 자기가 소개해서 입당시킨 흥수가 피 눈이 돼 자기를 잡아치우고 지부서기를 하려고 미쳐 날뛰고 있었다. 흥수는 북조선으로 달아난 은숙의 꼬리마저 밟고 미쳐 날뛰지 않는가. 집에 돌아와보니 넷째딸 신자가 뇌막염에 걸려 앓아누워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셋째딸 홍자가 자꾸 실없이 웃다가도 죽어 누어 팔과 다리를 주물러 주어야 겨우 살아났다. 집안 집 형내 조카에게 물어보니 신경이 좋지 않다고 했다. “안팎에 시원한 날이라고는 없구나.” 상순은 농학원에서 집으로 돌아와 가마니를 똑딱똑딱 짜는 맏딸 순자를 보자 신경질이 났다. (또 돈을 달라고 왔니?) 성이 발칵 난 상순은 구들에 있는 낫을 쥐고 일어나더니 순자가 짜던 가마니 새끼줄을 쭉쭉 베 버렸다. “아버지, 왜 이래우?” “에이, 신경질이 나 죽겠다.” "가마니를 왜 이렇게 베버립니까?” “가마니를 짜 뭘 해?” “가마니 한 장에 29전인데요." 순자는 복숭아 얼굴에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두덜거렸다. “가마니를 짜서 홍자와 신자 병치료에 보태려고 그랬는데 아버지는 왜 신경질을 쓰면서 이럽니까?” “그랬니? 후-” 상순은 순자에게 미안해 다 큰 맏딸을 품에 꼭 껴안았다. “미안하다. 네 마음을 몰라줘서.” 상순은 자기를 도울 수 있는 애는 순자 밖에 없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럴수록 순자에게 미안하고 사회 압력에 너무 취약한 자기를 욕했다. 오후에 밭으로 일하러 가려고 하는데 밖에서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김서기 있소?” “있소. 누구요? 들어오오.” 상순이 바삐 대답하면서 바깥에 나가보니 뜻밖에도 정규상이 찾아오지 않았겠는가. “아니, 어떻게 돼 이런 산골에 다 왔소?” “형님. 한마디로 다 말하기 힘드오.” 정규상은 울안에 아무도 없는 것을 둘러보고 소리를 낮춰 말했다. “형님, 사실 YB병원에서 날 보고 농촌에 내려가 노동개조를 하라고 했소. 그때 형내 선생이 병원에 말해서 광명가도위생원에서 일하게 했댔소. 그런데 이번엔 안된다오. YB병원에선 기어이 농촌에 내려가 로동개조를 해야 한다오. 낯선 마을에 가기보다 형님이 대대당지부 서기를 하는 이 마을에 오면 여러 모로 도움을 받을 거 같아 찾아왔소. 이번에도 형내 어른이 나서서 병원에 간청을 드렸소. 날 이 마을에 보내달라고.” “어서 들어오오.” 상순은 정규상을 데리고 집안으로 들어오면서 명옥에게 인사시켰다. “여보, 동생 정규상교수 왔소.” “아주머니, 안녕하오?” 명옥이도 조왕에서 설걷이를 하다가 행주치마에 손을 닦으면서 인사했다. “전번에 시아버지 앓을 때 형내 조카와 함께 와서 수고 많았습니다.” 상순은 정규상을 데리고 위방에 자리를 정하고 앉자마자 중얼거렸다. “그래도 유명한 정교수를 이런 산골에 보내 노동개조를 시키다니? 에이, 정말. 이 놈의 세상이 무슨 세상이오?” 상순은 도리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좌우간 우리 서로 의지하면서 이 혼란한 세상에서 살아 나가기요.” “고맙소.” 정규상은 마음을 놓았다. 허나 상순의 얼굴에는 근심에 찬 어두운 그늘이 더 늘어났다. (정규상을 보호한다고 또 흥수나 학수가 꼬리를 물고 늘어지겠구나.) 허나 상순은 역경을 겪더라도 억울하게 우파로 몰린 정규상을 양심적으로 끝까지 보호하리라고 마음먹었다. “가족들을 데리고 와서 폐를 끼치겠소. 형님.” “무슨 소리를 하오. 가만 있자.” 상순은 한참 궁리하더니 뒤 말을 이었다. “우리 집이 비좁은대로 위방에 먼저 들어 있소. 이제 과수원과 멍지메 논밭을 다 푼 다음에는 식당 자리를 손질하고 들면 되오.” “어떻게 폐를 끼치겠는지 모르겠소.” “야, 형제간에 내의를 하지 마오. 옛날에 우리 아버지와 할아버지 용정에 가면 당신네 아버지 신세를 얼마나 졌소. 그때부터 우린 형제간으로 되지 않았소?” 정규상은 그저 머리만 끄덕였다. 이때 덕돌이 검둥이를 데리고 순자와 함께 정지로 들어왔다. “아들이 아니오?” 정규상이 묻는 말에 상순은 “옳소.”라고 하더니 “덕돌아, 삼촌이다. 얼른 인사해라.”라고 했다. 덕돌은 부엌 바닥에서 개 목을 끌어안고 놀다가 우쭐 일어나 허리를 굽히면서 “안녕하십니까? 덕돌입니다.”라고 했다. 정규상은 일어나면서 “에이구, 우리 조카 똑똑하구나.”라고 하더니 호주머니에서 2원짜리 돈을 꺼내 쥐어 주고 나서 구들 한쪽에 놓은 가방에서 사탕이랑 과자랑 꺼내 주었다. “옜다. 먹어라.” “야, 좋다.” 덕돌은 연신 경례하면서 사탕과 과자를 두 줌이나 쥐고 마당으로 뛰어나갔다. 성욱이랑 동림이한테 자랑하면서 함께 먹으려는 심사였다. 덕돌은 항상 먹을 것이 있으면 애들과 먼저 자랑한 후에는 나눠 먹군 했던 것이다. 그래서 동네 애들은 덕돌을 좋아하고 따랐다. 순자와 성숙도 일일이 정규상에게 인사했다. 홍자는 자꾸 “히히히” 하면서 웃었다. “얘, 웃지 말라.” “예? 헤헤헤.” 홍자는 하얀 얼굴에 싱거운 웃음을 자꾸 웃었다. “동생, 양해하오. 저 앤 웬 일인지 자꾸 싱거운 웃음만 웃소.” 정규상은 홍자의 납작하고 하얀 얼굴을 찬찬히 보더니 “얘 신경이 좋지 않구먼.”라고 하더니 “약을 쓰면 인차 낫을 수 있소. 너무 근심하지 마오.”라고 했다. “약을 먹기는 먹소. 저 맏딸이 얘를 데리고 용정에 있는 자준 의사에게 보이고 중약을 져다가 달여 먹이고 있소.” “오. 자준 영감이야 우리 간도에서도 이름 있는 의사지. 만약 낫지 않으면 내 서약으로 치료해줄게.” 상순은 정규상을 보고 “고맙소.”라고 하면서 정지에 누워 있는 신자를 가리켰다. “동생, 홍자보다도 저 넷째딸이 큰일이오. 머리에 열이 나더니 저렇게 누워만 있소. 정통편을 아무리 먹여도 쓸데없소.” “뭐라오?” 정규상은 정지에 내려와 신자의 손맥을 짚어보고 이마에 손을 얹고 열을 짚어 보더니 황급히 말했다. “큰 일 났소. 얘를 YB병원에 데리고 가서 치료해야 하겠소.” 그는 뒤이어 상순을 한쪽으로 데리고 가서 나직이 말했다. “그저 감기 같지 않소. 별로 뇌막염인 것 같소.” “뭐라오? 뇌막염?” 상순은 너무나도 놀라 눈을 치뜨며 정규상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정규상은 머리를 무겁게 끄덕였다. “빨리 치료해야 하오. 생명이 위험하오.” “에이고, 공부도 영 잘하고 얘기도 아주 잘해 선생들마다 머리 총명하다던 애를 이게 뭐요?” 명옥도 놀라 신자를 붙안으면서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인차 병원으로 데리고 가기요.” 상순은 황급히 우사에 가서 코깜쟁이 암소를 풀어 수레를 메워가지고 왔다. 명옥은 수레 우에 이불을 폈고 상순은 신자를 업어 수레 우에 실었다. 덕돌은 수레우에 누운 넷째누나의 손을 잡고 발을 동동 구르면서 눈물을 줄줄 흘리며 통곡 쳤다. “내 제일 좋아하는 누나를 어디로 데려가니? 엉, 엉, 엉.” 성숙도 “언니, 병을 잘 치료하고 오라.”라고 하며 눈물을 펑펑 쏟았다. 상순은 수레를 몰고 가면서 옆에서 걷는 정규상을 보고 “이 난장판세월에 이런 산골에 와서 어찌 고생하겠소?”라고 했다. 정규상은 “그래도 형님이 서기를 하는 함흥대대에 오니 괜찮소. 속이 든든하오.”라고 했다. 그 말에 상순은 “너무 근심하지 마오."라고 하더니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었다. "우리 함께 이 어려운 세월을 이를 악물고 넘어 가기요. 세월이 흐르노라면 억울한 누명을 벗을 날이 있겠지.” 상순과 명옥은 신자를 싣고 코깜쟁이야 우리 넷째 딸을 살려 달라고 바삐 정규상을 따라 YB병원으로 떠나갔다. 순자는 눈물을 닦으면서 신자를 실은 수레가 동구 밖 언덕 아래로 사라질 때까지 바래였다. 홍자는 그때까지도 자꾸 “헤헤헤.” 하고 웃었다. 순자는 홍자와 함께 풍로에 약을 달이려고 서둘렀다. 그러나 성냥마저 없어 풍로에 불을 피울 수 없었다. 두루 살펴보던 순자는 윗집 박성근의 맏아들 숭길이 풍로 불을 피우는 것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집에 들어가 이불의 솜을 뜯어 나무가지에 감아가지고 윗집으로 달려갔다. 순자와 홍자는 숭길과 말하고 풍로 불에 솜을 감은 나무가지에 불을 붙여 가지고 달려 내려왔다. 숭길과 홍자는 동갑이었다. 숭길은 홍자의 아버지가 자기 아버지를 보호해주는 것을 못내 고맙게 생각하던 차여서 홍자와 순자를 보고 인차 불을 붙이게 했다. 원시사회를 방불케 하는 이 놈의 세월에는 성냥갑마저 흔치 않아 이집 저집에서 불을 붙여 가는 일이 종종 있었다. 한편 YB병원에 간 상순은 수레에서 신자를 둘쳐 업었다. 그때 신자는 거의 죽어서 까무러친 채 두 다리를 아버지 엉덩이 뒤에 축 드리운 채 줄줄 끌리었다. 상순은 신자를 자꾸 춰 업으면서 정규상을 따라 신경과 진찰실을 찾아갔다. 정규상은 우파지만 인간적으로 놀았기에 가까운 의사들이 많았다. 정규상의 면목을 봐서 신경과 진찰실의 주임 량 의사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신자의 병세를 아주 세심히 진찰했다. 그는 청진기로 신자의 여기저기 이리 저리 대보고 머리에 손을 대보기도 하더니 “옳소. 정 선생의 진찰처럼 뇌막염이오. 입원해 좀 치료해야 하겠소.”라고 했다. 정규상은 상순을 보고 “형님, 근심하지 마오. 우리 량주임은 신경과 창시자요. 뇌병을 아주 잘 치료하오.”라고 했다. 상순은 량주임의 두 손을 잡고 “우리 넷째 딸을 살려 줍소.”라고 애원했다. “근심하지 마십시오. 치료하면 살 수 있습니다. 다만 이미 뇌가 손상받았기에 머리가 좀 부실할 거 같습니다.”라고 했다. “부실하더라도 살리기만 하면 됩니다.” “그렇잖고. 목숨만 붙어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리하여 상순은 신자를 입원치료받게 했다. 허나 입원비가 없어 병원에서는 입원병실에서 내보내 관찰실에 눕혀 놓았다. 관찰실이란 어떤 곳인가? 임종 전 환자를 사체실에 내가기 전에 눕혀 놓고 관찰만 하는 곳이었다. 그것도 모르고 명옥은 주사 한 대도 맞지 못하고 잠만 자는 신자를 들여다보면서 지키고 있었다. 어느 하루, 명옥의 사촌여동생 해옥이 찾아 왔다가 관찰실 침대에 누워있는 신자를 보고 놀랐다. “언니, 어째 신자를 여기 놔두오?” 그러자 명옥은 “에이고, 여기 혼자 있으니 너무나 좋소. 숱한 사람들 속에 있으니 신자 몸에서 이 자꾸 기어 나오지. 창피해 죽겠소.”라고 했다. “언니, 여기 관찰실은 죽기 전 환자를 관찰하는 곳이오.” “뭐라오? 그래 우리 신자가 죽게 됐단 말이오?” 해옥이 황급히 의사들과 알아보니 병원에서는 신자의 치료비를 대지 못한다고 량주임과 말도 하지 않고 주사 한 대 놔주지 않고 관찰실에 옮겨가게 했던 것이다. “앓는 사람을 돈이 없다고 치료를 하지 않는 것이 옳습니까?” 해옥은 해당 책임자에게 바투 들이댔다. “그래 치료비는 누구한테서 받겠소? 보아하니 그 집은 돈 일전 한 푼 없는 시골 농민들이더구먼.” 그러나 해옥은 신자를 살리려고 갈비뼈를 들이댔다. “아무리 농민의 딸이라고 해도 그렇지. 어찌 앓는 사람을 치료도 하지 않고 이럽니까? 제가 치료비를 담보할 터이니깐. 치료를 해주십시오.” 그리하여 신자는 다시 입원병실에 옮겨와 치료를 받게 됐다. 어느 날, 입원실에 눈에 퍽 익은 예쁜 간호사가 들어왔다. 눈길이 마주치는 순간 상순은 눈에 익은 간호사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어디에서 보던 간호사인데. 아, 옳지. 정규상네 심장내과에 있던 박윤희 간호사가 아닌가!) 상순은 하마터면 소리칠 번했다. 박윤희도 상순이 눈에 익어 자꾸 눈길을 주더니 먼저 말을 거는 것이었다. “아주버니, 이전에 공학이라던가 입원했을 때 여기 온 적이 있었지요?” “예, 혹시 심장내과에 있던 박 간호사 아니오?” “맞습니다. 저를 어떻게 기억합니까?” 박윤희는 외까풀 눈을 살짝 치뜨면서 생글 웃었다. “그때는 정규상 의사와 한 과에 있더니 어떻게 돼 신경외과에 왔습니까?” “그저 그렇게 됐습니다.” 삽시에 윤희의 걀죽한 얼굴이 어두워지더니 얼버무렸다. “한 병원 안에서는 과실을 자주 바꿀 수도 있습니다. 좌우간 넷째 딸이 저렇게 앓아서 어찌 하겠습니까? 크게 근심하지 마십시오. 우리 량 주임은 신경병과 뇌병을 아주 잘 치료하니 한 보름 입원해 있노라면 치료될 거예요.” 그 말에 상순은 “그랬으면 얼마나 좋겠소. 절이라도 하겠소.”라고 하며 한숨을 후 내쉬었다. 옆에서 정규상도 “형님, 너무 근심하지 마오. 링겔주사를 며칠 맞으면 소염될 거요.” 하고 안심시켰다. 윤희는 키도 작달막한 농촌의 보통 노동부녀 명옥과 훤칠한 키에 멋진 나그네 상순을 번갈아 보더니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짝이 엄청 기울어. 저렇게 멋진 나그네가 어떻게 하면 저렇게 작달막하고 인물이 없는 아낙네를 얻었을까?) 윤희는 신자에게 주사를 놓고 또 다시 한번 상순과 명옥을 번갈아 보고 몸을 돌려 나갔다. 명옥이 신자를 거들어 주고 상순은 정규상네 집으로 가서 이사 짐을 함께 싸 수레에 싣고 마을로 돌아왔다. 정규상의 아내는 속으로는 이런 시골에서 어떻게 살겠는가고 불안해하면서도 내색을 내지 않았다. 허나 아들 문성과 딸 순임은 농촌 마을의 소똥과 진흙탕을 피해 밟으면서 상을 찡그렸다. “에이, 더러워. 우리 시내 길을 걷다가 여기 오니 소똥이나 돼지 똥을 밟을 까봐 겁난다.” 순임의 말에 문성은 “난 진흙탕에 빠질 까봐 겁난다.”라고 했다. 정규상은 애들을 나무랐다. “어지럽다고 말만 하지 말고 내일부터 집으로 들어가는 길에 모래를 날라다가 펴라.” “예.” 상순은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정규상네 부부와 함께 이사 짐을 부리어 윗방에 들여 놓았다. “비좁은 대로 참고 견디오. 이제 언제를 다 쌓고 과수원을 다 만들면 식당짜리를 세 칸으로 막아서 정 선생을 들게 하겠소.” 상순의 말에 정규상 내외간은 얼마나 고마운지 몰랐다. 상순은 순자를 보고 점심밥을 짓게 했다. 그리고 홍자와 성숙이랑 시켜 신자의 입원비를 마련하게 무르익은 살구를 뜯으라고 했다. 덕돌과 성숙은 살구를 뜯어 한 사발을 문성과 순임한테 먹으라고 윗방에 올려다 주었다. “와, 맛있다.” “새콤하고 달구나.” 순임은 자기보다 세 살이나 지하인 덕돌에게 사탕이랑 과자랑 두 봉지나 주었다. 애들은 인차 친해졌다. 오후부터 그들은 함께 태평강에 뛰어가 놀기도 하고 모래를 대야에 담아 마당과 길에 펴기도 했다. 상순은 은숙과 동선의 일이 답답해 멍지메산 앞으로 가기 전에 윗마을 함흥 촌에 올라가 할아버지를 찾았다. 병완은 대대 사무실에서 신문을 읽고 있었다. “할아버지, 몸이 불편하겠는데요. 오후에는 일터에 나오지 마십시오.” 병완은 돋보기를 끼고 신문을 보다가 눈을 뗐다. “왔니? 요즘 머리 아프겠구나. 허나 너무 근심하지 말라. 사내대장부란 심지가 굵고 굳어야 한다. 그까짓 일이 다 뭐냐? 네 애비와 난 일제가 살판치던 시대에 일본 놈들의 총칼 밑에서도 굳세게 살아왔다. 알만 하니?” “예. 허나 너무 억울합니다.” 병완은 한숨을 후 내쉬었다. “나도 은숙과 동선의 일로 머리 아프다. 좋기는 이제라도 편지를 띄워 동선과 은숙을 집으로 데려오너라.” 그러자 상순은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더니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그랬으면 좋겠는데. 그 애들이 돌아오자 하겠습니까? 동선은 함흥에서 조선로동당에 가입한데다가 기관사질을 한다지 않았습니까?” “은숙이라도 데려오라.” “그 앤 혹시 아직 직업을 찾지 못했으니 돌아올지 모르겠습니다.” “편지를 써라는데 그러니?” “예?” 상순은 눈을 치떴다. “또 조선과 내통한다고 억울한 모자를 씌우지 않겠습니까?” 병완은 곰방대를 길게 빨더니 쿨룩쿨룩 기침을 깇으면서 곰방대 담뱃재를 재떨이에 툭툭 털었다. “애들을 시켜 가만히 국자가에 가서 부쳐라.” “예- 알았습니다.” 그제야 상순은 안도의 한숨을 후 내쉬면서 머리를 끄덕였다. 하늘이 그래도 잘 해주었다. 상순이 함흥 촌에 올라 올 때에는 먹장구름이 밀려오면서 번개가 번쩍이고 우레가 울었다. 허나 오후에는 우레가 울뿐 소낙비는 내리지 않고 비 꼬치를 내리 뿌릴 뿐이었다. (요만한 날씨에야 일할 수 있지.)                                                 6. 싱그러운 사과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삼복염천에도 사원들은 상순의 지휘아래 열심히 돌을 캐고 다락밭 언제를 쌓았기에 가을 전에 과수원은 모양을 드러냈다. 이제 명년에는 다락밭에 사과배나무를 사다가 심으면 됐다. “이제 5~6년 후면 우리 사원들이 사과를 먹을 수 있을 거요.” 상순은 정규상을 데리고 과수원 자리를 돌아보고 말했다. 그는 정규상을 근본 개조대상이거나 우파분자라고 여기지 않았고 대대 하향간부처럼 데리고 다녔다. 그들이 나란히 멍지뫼산 앞에 강 물곬을 돌리는 공사장에 가자 흥수가 눈알을 데굴데굴 부라리면서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쳇, 저렇게 정치각오가 낮아서야 어찌 지부 서기를 해?” 그 소리를 듣고 상순은 “자네가 그렇게 지부 서기를 하고 싶어 하는데 자리를 내놓을 게. 네 놈이 콱 해봐라!”라고 쏴주고 싶었다. 그러나 꾹 참는 수 밖에 없었다. 며칠 전에 그러루한 말을 했다가 할아버지한테서 들은 꾸지람소리가 귀전을 무섭게 때려 꿀꺽 삼켜버렸다. 학수는 옆에서 동생 흥수가 너무 하는 것 같아 못 마땅한 눈길을 보내더니 상순의 앞으로 다가갔다. “김서기, 그래 신자는 어떠렇게(어떻기에)?” “며칠 치료하면 나을 거요.” 학수는 머리를 끄덕이면서 상순과 나란히 걸어 언제를 쌓는 곳으로 다가갔다. 학수는 흥수의 동생이었지만 그래도 원칙을 지켰다. 무조건 형이라고 흥수를 지지하지는 않았다. 상순이 없는 사이에 흥수가 어찌나 우파들을 투쟁하는데 열을 올렸는지 언제공사는 별로 진척이 없었다. 돌을 처넣으면 거세찬 강물이 돌 밑의 모래를 파가면서 언제가 자꾸 무너지곤 했다. 상순은 소용돌이치며 세차게 흘러가는 강물을 보며 양미간을 찌푸리고 궁리했다. 한참 후 그는 끝내 묘안을 내놓았다. “돌을 하나하나 강물에 처넣어선 안 되오.” 그는 몸을 돌려 학수를 마주 보면서 과단성있게 말했다. “쇠줄망태기에 돌을 수태 넣어 한꺼번에 강물에 처넣잔 말이오. 강물이 아무리 세차도 밀어가지 못할 거요.” “오, 그게 좋은 방법이오. 우린 왜 진작 그런 좋은 방법을 생각하지 못했을까?” 과연 그 방법은 효과를 보았다. 이튿날에  상순은 학철이랑 경학이랑 데리고 진수해공사 공소합작사에 가서 외상으로 쇠줄을 몇 수레나 사왔다. 상순은 사원들을 데리고 쇠줄망태기를 만든 후 돌을 반 수레씩이나 넣고 강물에 굴려 처넣었다. 그러자 세찬 강물도 머리를 숙였다. 쇠줄망태기에 넣은 돌들은 태산마냥 강물을 떡 뻗치고 서서 물곬을 동남방향으로 돌렸다. 뒤이어 사원들은 상순의 말대로 물에 들어가 쇠줄망태기 돌 위에 올라서서 쇠줄그물을 트는 족족 쇠줄그물 안에 돌을 처넣어 차곡차곡 언제를 쌓아올렸다. 그리하여 한 보름 만에 “ㄱ”자모양의 20여 미터씩이나 되는 언제를 십여 개 쌓아 물곬을 완전히 동남방향으로 돌리었다. 연 몇달 동안에 1킬로미터도 넘는 언제를 쌓아 3헥타르나 되는 모래밭을 얻어냈다. 사원들은 환성을 올렸다. “여기에 논을 풀면 명년 후년에는 배불리 먹고 살겠다.” “김서기니깐. 이런 엉뚱한 궁리를 다 하지. 누가 하겠소?” “그러기에 말이오. 저 흥수는 김서기 발뒤축에도 가지 못하면서 김서기 자리를 탐내서 계속 문단 말이오.” “길러준 개 발뒤축을 문다고 정말 양심이 없소.” 뒤에서 일군들의 밥을 푸던 춘실은 화를 발칵 냈다. “남의 나그네 말을 어째 그렇게 험하게 하오? 김서기 병원에 딸을 싣고 간 후에 우리 나그네 돌언제 공사를 지휘했지. 누가 했소? 보자보자 하니까. 간에 가 붙고 슬개에 가 붙는다는데. 흥! ” 덕성이랑 춘실의 눈치를 흘끔흘끔 보면서 물러가 돌을 날랐다. 상순은 떡돌 같은 돌을 움쭉 들다가 그만 놓쳐 발등을 상했다. 돌을 들고 발을 빼보니 돌에 깔린 발에서 피가 흐르고 퉁퉁 부어올랐다. 춘실은 너무나도 섬직해 밥주걱을 든 채 달려와 치맛자락을 쭉 찢어 상순의 발을 싸매주었다. “쩌! 쩌! 쩌!” 흥수는 먼 발치에서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듯 하면서 입을 함박만이 벌리고 멍청하니 서서 엿보았다. 상순은 흥수를 흘끔 곁눈질해보며 나직이 말렸다. “이러지 마오. 제 나그네 눈길을 보오.” 그제야 춘실은 치마폭을 걷어안고 땅 가마를 건 부뚜막 쪽으로 달려갔다. 상순은 점심을 먹으면서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발을 싸맨 검정 치맛자락을 내려다보는 순간 춘실의 눈물에 젖은 그윽한 눈길이 멀건 죽사발에 떠올랐다. 부뚜막에서 엉덩이를 흔들면서 가마를 부시는 춘실의 뒷모습을 가만히 훔쳐보는 순간 아랫배로부터 가슴까지 무슨 줄이 뻗치면서 찡 저려났다. 상순은 참지 못할 옛정의 충동을 느끼면서 눈을 지그시 감았다. (안 돼? 난 당원이야. 딴 생각해선 안돼.) 그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순간 끓어 번지던 정욕도 안개처럼 실실이 흩어져버렸다. 그런데 그는 놀라운 장면에 자기 눈을 의심했다. 저쪽 강변 아름드리 버드나무 밑에서 경주가 미란이랑 충국이랑과 나란히 앉아 죽물을 마시면서 웃고 떠드는 것이었다. (허참, 지주네 딸과 놀다니? 투쟁 맞자고 눈치코치 없이 놀아?) 상순은 인차 “경주, 여기 오라!” 하고 소리치면서 손을 흔들었다. 경주가 헐레벌떡 뛰어오자 상순은 손바닥으로 머리를 눌러놓았다. “이 놈아, 정신 있니? 왜 지주네 아들딸들과 노니?” 상순은 주위를 둘러보더니 아무도 없는 것을 보고 목소리를 낮춰 “너 혹시 장미련을 좋아하니?” 하고 물었다. “에이고, 형님도 무슨 소리요? 미련은 내 보다 열 살도 더 먹은 노처녀인데. 되지도 않는 말을. 황차 미련은 지주네 딸이 아니오?” 상순은 경주를 한쪽으로 끌고 가서 엄숙하게 말했다. “미련과는 절대 안 된다. 저 지주네 아들딸 놈들이 서른이 넘도록 시집장가를 가지 못하더니 너를 꾀려는지 모르겠다. 그런 날엔 끝장이야. 너네 어미를 남조선특무로 몰아붙이는데 너까지 지주 딸을 좋아해서야 되니?” 경주는 한숨을 후 내쉬며 머리를 끄덕였다. “우리 엄마가 무슨 한국특무라고 그래오?" "이놈아, 무슨 뚱딴지 같은 한국이냐?" " 흥! 난 그래 장가도 가지 말란 말인가요?” 상순은 주위를 눈짓했다. 경주는 성이 꼭뒤까지 치밀어 씩씩거리더니 휭 하니 일터로 가버렸다. 상순은 남조선 특무 김용천의 아들이지만 부리부리하게 생긴 자식이 아비처럼 사내다운 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자식이 속은 파속처럼 시퍼런 놈이야.) 상순은 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리면서도 남들 앞에서는 경주와 거리를 두는 척 했다. 경주 김씨 후손인 경주는 기실 영월 김씨와 먼 한 집안이었다. 황차 경주는 상순의 사촌동생 김경수의 동복형제가 아닌가? (난 진달래 큰어머니가 특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비록 용천의 본댁이지만 남조선 특무 용천을 붙잡도록 정보를 우리한테 제공했다. 촌공소에서 용천을 제압할 때 돌을 날려 까 눕혔다. 우리를 도와 용천을 나포하지 않았던가! 진달래 큰어머니는 성칠 큰아버지를 항일유격대 대원으로 발전시킨 로항일투사이다.) “앗!” 이런 저런 생각을 끝이 없이 하다나니 상순은 그만 손이 미끄러져 돌을 들다가 툭 떨어뜨렸다. 상한 발등을 또 상했다. 춘실은 이번에는 먼발치에서 상을 찡그릴 뿐 다가와 싸매주지 못하고 흥수와 상순의 눈치만 번갈아 보면서 멍하니 서 있었다. 이때 뜻밖에도 절뚝거리다가 물앉은 상순의 앞으로 충국과 미련이 다가왔다. 충국은 상순의 피 묻은 치맛자락 천을 풀어냈다. 미련은 상순을 보고 전율했다. “아이고, 이걸 보오. 피가 질벅하구먼. 뼈가 부서지질 않았을까? 오빠, 모질 아프지 않소?” "오빠라니?" 그는 주위를 둘러보면서 “괜찮다. 가서 일이나 해라.”고 했다. 상순은 바늘로 쿡쿡 찌르는 같은 흥수의 눈길이 싫어서 충국과 미련에게 손사래를 쳤다. “놔두고 빨리 가래도? 오줌 약을 쓰면 괜찮다.” 상순은 상을 찡그리면서 충국의 팔을 붙잡고 일어나더니 쩔룩거리면서 외발 뜀으로 뚝뚝 뛰어 아름드리 버드나무 숲속으로 한발 두발 다가갔다. 모두들 상순이가 근심돼 눈길을 떼지 않았다. 그때 흥수가 이해영의 아들 병진을 보고 빈정거렸다. “일 할 줄 모르는 사람은 항상 재국 낸다니께. 픽!” 그러자 병진도 맞장구를 치면서 두덜거렸다. “항상 철저한상 하더니 당원의 영웅형상을 보여주자고 그러겠지. 뭐.” 병진은 이전에 5대 황소와 싸움을 시켜 죽인 일을 처분 받은 일이 속으로 내려가지 않았던 것이다. 상순은 병진의 가시집 집안 집 삼촌벌이 됐다. 병진은 자기를 좀 봐 주겠는가 했지만 꼬물만치도 봐주지 않고 배상시킨 상순이 원망스러웠던 것이다. 그때부터 병진은 겉으로는 “집안 집 삼촌, 삼촌.” 했지만 속으로는 기회가 있으면 보복하려고 속으로 이를 뿌득뿌득 갈고 있었다. 나그네 귀 석자라고 상순은 먼발치에서도 흥수와 병진이 주고받는 말을 바람에 실려오는 것을 듣고서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오줌을 상한 발등에 씩 내쏘았다. “개는 짖어도, 어, 시원하다, 시원해!” 상순은 중얼거리면서 머리를 들어 바람에 흐느적거리는 버들 방천을 보며 오줌을 손에 받아 피범벅이 된 발등을 씻었다. 단통 아픔이 누그러드는 감이 들었다. (조상들이 물려준 약이 좋긴 좋아.) 그가 오줌을 다 누고 돌아서자 명옥이 흰 머리 수건을 풀어 쥐고 다가왔다. “이걸로 동이기오.” “괜찮소.” 상순은 명옥의 이슬 맺힌 눈시울을 내려다보면서 “수건으로 우둔하게 동이고 어떻게 일하겠소?”라고 하며 말렸다. 허나 명옥은 상한 발을 수건으로 꽉꽉 동여맸다. “그래도 상처에 돌가루라도 들어가면 파상풍이라도 오면 어쩌오?” (사람의 마음은 고약한 거야.) 상순은 엉덩이를 쳐들고 엎디어 자기 발을 정성껏 동이는 명옥을 내려다보면서 어쩐지 별난 느낌이 들어 자기를 욕했다. (한 고향에서 자란 소꿉친구나 다름없는 조강지처건만 어째 춘실이 발을 동일 때보다 가슴이 울렁거리지 않을까?) 이래서 정은 애인에게 주고 가정은 조강지처에게 맡긴다고 했는가! 죽어도 조강지처와 함께 묻히겠건만. 사내들의 마음이란 고약하고 이상한 거야. 그는 저쪽 뒤 먼발치에서 설거지를 하고 나서 행주치마를 벗어 함지에 담는 춘실의 엉덩이를 힐끔 곁눈질했다. 이윽고 상순은 수건으로 똥똥하게 동여매 신발도 신지 못한 채 쩔뚝거리면서도 언제를 쌓는 제일선에서 계속 지휘하고 돌을 쌓아 나갔다. 노동이 사랑이라고 상순이 상해가지고서도 일하자 사원들은 마음속으로 감복하면서 일손을 다그쳤다. 그들은 멍지메산과 칼산의 돌을 캐 수레에 실어다 돌 제 언제를 부지런히 쌓았다. 돌을 실은 수레대오가 장사진을 치고 부르하통하 강가에 돌을 실어다 부리었다. 사원들은 돌로 제방을 쌓아 올리느라고 개미처럼 달라붙어 바글바글 맴 돌아쳤다. 계급투쟁이 백열화된 세월에도 상순은 사원들을 이끌고 장마철 전에 끝내 과수원 다락 밭 언제와 부르하통하 물곬을 돌리는 일을 끝냈다. 뒤이어 논물도랑까지 다 파놓고 아름드리 버드나무도 뿌리까지 뿍뿍 뽑아버렸다. 이제 가을 전에 모래밭의 능선을 따라 논두렁을 만들고 논판을 골고루 고루어 놓으면 새 해부터 논을 풀 수 있게 됐다. 짙은 신록이 점차 누르스름하게 물들어가는 가을에 접어들었다. 벌써 선들선들한 가을바람이 산골짜기를 핥으면서 불어치더니 어느덧 산비탈의 옥수수 밭이 누르스름하게 물들어가고 옥수수마다 애기를 업은 것 같은 강냉이 이삭에서 발간 수염을 흩날리고 있었다. 송이송이 해바라기 꽃이 태양을 따라 활짝 피어 웃고 있었다. 허나 기실 해바라기는 꽃 뒤통수가 해 빛을 너무 받으면 해를 입을 까봐 두려워 자꾸 태양을 따라 돈다고 했다. 그런데 수많은 사람들은 해바라기는 따사로운 해빛을 받으려고 아침으로부터 저녁까지 태양을 따라 돈다고 노래했다. 참 무지하고 가소로운 일이었다. 어느 날, 미련은 일 밭에서 돌아오다가 태평강에서 팬티 바람에 목욕하는 경주를 발견했다. 손을 씻는 척 하면서 경주를 여겨 보고 깜짝 놀랐다. (아, 저 뿔뚝뿔뚝한 팔뚝 근육을 봐라. 불뚝 튀어나온 넓은 가슴의 흉근, 아니, 그런데 저게 뭐야?) 팬티가 글쎄 앞의 그 꿋꿋한 물건에 걸려 더 내려가지 않았으니 말이지. 그러지 않으면 그 흉물스런 물건마저 드러날 거 같았다. 다행이 엉덩이만 반쯤 드러났을 뿐이었다. 순간 경주의 알몸을 곁눈질 해 본 노처녀 미련은 가슴이 뭉클 하더니 말 못할 충동이 생기는 것을 어찌 할 수 없었다. 미련은 못 본 척 하고 강을 건너 지나갔다. 그때 미련을 본 경주는 내려간 팬티를 춰 입고 헤벌쭉 웃으면서 말을 걸었다. “이제 오오?” 미련은 귀밑을 붉히면서 “응.” 하고 응대하고는 수건을 내리 눌러 고쳐 쓰고 바삐 소서구로 돌아갔다. “미련이, 미련이!” 경주가 소리치며 옷을 입고 뒤따라 달려왔다. “누가 보겠다. 어째 이래?” 미련은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며 걸음아 날 살리라고 달아났다. 허나 어찌 날듯이 뒤따라 달려오는 경주를 떼놓겠는가! “왜 이래?” 당황해난 미련은 지지벌개 따라온 경주를 곱게 흘겨보았다. “미련이, 내 사과를 뜯어 줄까?” “뭐라니? 생산대 과일을 도적질 했다가 들통 나 투쟁받자고 그래?” 경주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누르스름한 옥수수 이파리들이 펄럭일 뿐 과수원 주위에는 사람이라고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이래도 저래도 투쟁 받기는 매 일반이야. 똥집에 넣어야 자기 거야.” “그래도 경을 치자고 그래?” “걱정 마. 지금 모두 점심을 먹으러 가서 아무도 없다. 네가 여기 옥수수 밭에 숨어 한참만 있어 봐라. 내 노란 사과 한 아름 따다가 줄게.” 경주는 대수로워 하지도 않았다. 그는 주위를 도적눈으로 흘끔거리더니 미련의 손을 와락 잡아끌고 옥수수 밭으로 들어갔다. “야, 야, 이러지 마라.” 허나 경주는 미련을 옥수수 밭에 눌러 숨겨 놓고 도적고양이처럼 옥수수 밭에서 허리를 구부정하고 나갔다. 미련이가 보니 그는 옥수수 밭을 꿰질러 나가 조 밭에 이르자 엉금엉금 기여 과수원으로 접근하는 것이었다. 미련은 두 손을 가슴에 모아 쥐고 안절부절 못했다. 귀밑에서 혈관이 부풀어 오르고 가슴에서 심장이 높뛰는 감을 느꼈다. 한참 후 경주가 런닝구 가슴에 주먹만큼 한 사과를 불룩하게 넣어가지고 돌아왔다. “응, 먹어라!” “이래도 되니?” “따온 걸 먹지 않겠니? 지주 딸과 남조선 특무 아들은 먹지 않고 산다니? 먹고 보자.” “야, 이 놈아, 담짝도 크고나. 에덴동산의 과일도 마구 따 먹을 놈이구나.” "에덴동산이라니?" "그런 산이 있다. 아무나 들어가 그 산의 과일을 훔쳐선 안된다더라." "응~ 듣다 첫소리다." "울 아빠한테서 들었어." 미련은 누르스름한 사과에서 풍기는 향기를 맡자 군침을 꼴깍 삼켰다. 이윽고 참지 못하고 경주의 손에서 와락 빼앗다 시피 해 사각사각 먹기 시작했다. 사과의 달달하고 시큼한 물이 목구멍을 넘어가는 순간 모든 공포가 산산 박산 나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사과 맛만 좋구나!” “그래. 정말 맛있구나. 네 덕분에 사과 배 맛을 다 보는구나.” 경주는 사과를 먹다 말고 지지벌건 얼굴을 들어 미련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서글서글한 커다란 쌍까풀 눈과 상큼한 코, 우유 빛 얼굴은 밉지 않았다. 미련의 귀밑머리가 가늘게 흘러내려 하얀 볼을 간지르며 가을바람에 하늘거렸다. 빠금히 열린 적삼 속에 풍만한 젖무덤이 숨소리와 함께 한들거렸다. 하얀 젖통은 쥐면 톡 터질 것만 같았다. 순간 경주는 미련을 와락 끌어안으며 키스를 뻑 안겼다. “야, 왜 이래?” 미련은 사과를 먹다가 놀라 경주를 밀어내며 곱게 흘겨보더니 귀밑까지 붉혔다. 경주는 진지하게 사랑을 고백했다. “특무 아들이나 지주 딸은 사랑을 하지 못한다데? 널 사랑해! 우리 함께 살자!” “야, 너 정말 왜 이래?” “우리 둘이 결혼해 살자. 난 너를 배불리 먹일 자신이 있다.” “너 정말 아무 말이나 다 하는구나. 지주 딸이지 너보다 열 살이나 이상인데 뭘 보고 호박 쓰고 돼지 굴로 들어가려니?” 미련은 꽉 끌어안은 경주의 팔을 풀어내면서 솔직하게 말했다. “지주 딸과 특무 아들은 사람이 아니라더냐?” “그래도 그렇지. 넌 그래도 항일투사 어머니가 계시지 않느냐?” 얼굴에 홍조를 띤 미련은 마흔 고개를 바라봐도 늙어 보이지 않았다. 곱게 흘겨보는 미련이 예뻐 경주는 아랫배로부터 찡해 나는 감을 느꼈다. 그러나 경주는 용케도 참고 뒤 말을 이었다. “기실 우리 아버지도 항일투사였다. 북만의 한 항일유격대의 당당한 대장이었어. 허나 후에 우리 아버진 글쎄...” 미련은 사과를 뚝 떼 씹으면서 입귀에 괴나온 사과 물을 쓱 닦았다. “우리 오빠와 아버지한테서 네 아버지 말을 많이 들었다. 기실 우리 아버지는 성분이 지주지만 항일투쟁 때 유격대에 쌀을 가만가만 지원했다. 우리 집 쌀은 먹고 나머지는 거의 다 항일유격대에 실어갔다.” “나도 우리 엄마한테서 네 집의 말을 들었다. 그러기에 네 오빠와 아버지는 감옥에도 들어가지 않고 덜 투쟁을 받지 않느냐? 김서기는 지주라도 부모와 자식을 계선을 나눠 노동개조표현을 보는 것 같더구나.” “픽, 우리 오빠는 글쎄 후에 국민당군에 가입했으니까. 할 말이 없지만 우리 아버지는 항일에 공로가 있지 않니? 그런데도 성분이 나쁘다고 한뉘 투쟁을 받고 개조해야 할 대상이 되지 않았니?” 경주는 미련을 꽉 껴안으면서 정색해 말했다. “지주네 딸과 특무의 아들은 사람이 아니야? 우리 결혼해 살자.” 미련은 먹던 사과로 경주의 가슴을 두드렸다. “야, 황당하다. 황당해. 넌 나보다 열 살이나 어려.” “사랑에 나이가 관계있소?” “야. 우리 아빠는 지학사 고모부네 지괴호 오빠와 결혼하라고 한다.” “사촌끼리 결혼하니?” “그래서 노처녀로 늙지 않았니?” 경주는 입을 함박만이 벌리더니 개처럼 혀를 길게 빼 내둘렀다. “부르르, 그래 쥐괴호와 정말 결혼할거니?” “쥐는 무슨 쥐야? 지 씨를 가지고.” 미련은 조선 사람들과 함께 일하다나니 꽤나 조선말귀를 알아들었다. “경주야, 아무 말이나 했다간 경 친다.” “내일 죽어도 괜찮다.” 경주는 미련한테 다가앉았다. “쥐괴호고 뭐고 싹 걷어치우고 내게 시집오라.” 경주는 미련을 와락 끌어안고 키스벼락을 마구 퍼부었다. “이 새끼야, 야, 그만해. 정말 도깨비 수작을 하는구나!” “그래, 난 도깨비야. 너만 각시로 만들 수 있다면 아무 짓도 할 테다.” 누르스름한 옥수수 이파리들이 우수수 가을바람에 춤을 추었다. 저쪽 과수원에서 싱그러운 과일 향기가 풍겨 노처녀와 총각의 코를 건드렸다. 오곡백과 무르익고 황금물결이 출렁이는 가을, 사과 맛은 별맛, 지주네 노처녀와 남조선 특무 아들은 사랑 맛이 사과처럼 새콤하고 달고도 싱그러워 용트림할 지경이였다. 그들의 비장한 사랑은 넘실거리는 황금빛으로 무르익는 오곡백과와 함께 익어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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