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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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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85)
2017년 10월 17일 10시 09분  조회:1562  추천:0  작성자: 김장혁



                             12. 고무신 한 짝

      여름 해는 길었지만 대지를 더 데우지 못하는 것이 아쉬운 듯 서서히 넘어 갔다. 서산마루는 저녁노을에 누르스름하게 익다가 벌겋게 타 번졌다. 패용천산과 칼산은 톱날 같은 이빨로 뻘겋게 익은 해를 통채로 천천히 씹더니 꿀꺽 삼켜버렸다.
      상순은 사원들에게 감자랑 멧돼지고기랑 인구별로 고루고루 나눠준 후 집에 들어왔다.
애들은 뛰놀다가 아버지 세 귀 눈을 보자 겁이 나서 벽 밑에 두 손을 가져가며 물앉았다.
한 구들 들어앉은 딸애들을 보자 상순은 신경질부터 잔뜩 났다.
“이 쌍 가시나 새끼들이, 저리로 피하지 못해? 앉을 자리도 없이 한 무리나 들어앉아 있니?"
     그는 명옥을 가로보았다.
"낳으라는 아들은 낳지 못하고 맨 계집애들만 줄줄 낳았어. 신경질이 나 어디 살겠니!”
명옥은 남편의 독기어린 세귀눈을 보고 애들에게 나가 놀라고 가만히 손짓했다. 그녀는 남산만한 배를 뚱기적거리면서 고방에 들어갔다.
상순은 고방에 따라 들어가 드러누운 명옥을 보고 물었다.
“어째 해산할 거 같소?”
“양, 아마 그런 거 같소.”
상순은 아들을 보려는 일루의 희망을 품고 뒤울안에서 불쏘시개로 둔 누런 벼 짚 단을 들여다 풀어 고방 구들에 폈다. 그리고 아내를 부축해 두툼히 깐 벼 짚 우에 눕혔다.
상순이 고방에서 나와 손을 맞잡고 아들을 낳았으면 마음 속으로 빌었다.
한참 후에 고방에서 “응아, 응아.” 하고 울음소리가 났다.
“뭣이오?”
상순은 고방에 달아 들어가며 다급히 물었다.
한참 후 고방에서 맥없이 나오는 상순의 입에서는 푸념질인지 감탄인지 맥없이 흘러나왔다.
“점점 똑똑한 거 낳는구나.”
애 울음소리를 듣고 남동생을 낳았는가고 뛰어 들어온 순자는 아버지에게 “남동생입니까?” 하고 물었다.
상순은 “너 어미 그런 재간 있다더냐?” 하고 김빠진 공처럼 맥없는 말을 하며 집에서 훌쩍 나가버렸다.
저녁에 상순이 집에 들어왔을 때 명옥은 갓 낳은 다섯째 딸 정숙에게 젖을 먹이면서 안아보라는 말도 감히 하지 못했다.
2년 전에 금자를 낳았을 때 딸이라고 상순은 생일도 제대로 쇠지 않았다. 그런데 아들을 낳지 못하고 또 딸 정숙을 낳았으니 갓 난 딸은 태어나자마자 푸대접을 받기 마련이었다.
저녁을 대충 먹은 상순은 한숨을 땅이 꺼지게 후 내쉬면서 또 바깥으로 나갔다.
(웃새집 사랑 칸에 든 스님부터 처리해야겠어! 어디서 감히 미신사상을 퍼뜨려?!)
상순은 스님한테 속힌 것 같아 생각할수록 분통이 터졌다.
(이젠 마흔이 다 됐는데 아들이 어데서 생겨? 쳇, 괜히 헛소리를 해서 내 애간장만 태웠지.)
상순은 그 길로 웃새집으로 스적스적 걸어갔다.
그는 큰집 큰아버지와 새 큰어머니께 문안인사를 드리고 사랑에 든 스님을 찾아갔다.
스님은 우쭐 일어나기까지 하면서 “김 서기!” 하고 인사하였건만 상순은 어두운 그늘이 비낀 집안에서 그 놈의 빡빡 깎은 중대가리를 보기만 해도 역겨웠다.
“작작 너덜거려! 이게 언제라고 미신사상을 퍼뜨려? 구 사회 낡은 물건 짝들을 가지고 꺼져!”
“건 왜?”
중은 어안이 벙벙해 사랑방에서 나가려고 하지 않았다.
“우리 집 여편네가 마흔이 다 됐는데 아들을 어떻게 낳는다고 미신을 퍼뜨려?”
“아, 그 일 말인가요?”
중은 상순을 향해 합장하고 눈을 스르르 감더니 뭐라고 주문을 외우는 것이었다.
“뭐 하는 짓인가?”
중은 천천히 눈을 뜨더니 입을 무겁게 열었다.
“시주님, 관세음보살, 나무아미타불. 시주님은 꼭 몇 해 후에 금덩이 같은 아들을 얻게 되나이다.”
“흥! 또 그 소린가! 내 여편네는 이젠 서른 일곱인데!”
“녹태나 사슴 피 같은 보약을 쓰면 낳을 수 있느니라.”
상순은 곧이듣지 않았다.
“쳇, 우리 여편네 아들을 낳으면 해 서산에서 뜨겠다.”
“아니오. 몇 해 전에도 말씀 드렸지만 그 집엔 이제 천지신명을 타고 나서 황소가 밟아도 우그러들지 않을 옥동자가 태어날 게요!”
상순은 중을 삿대질하며 욕설을 퍼부었다.
“네 이 더러운 중놈아, 내게 그런 요망한 소리를 쳐서 이 마을에 남으려는 건가? 작작 거짓말을 하고 이 마을에서 꺼져! 내가 민병들을 데려다 끌어내다 처단하기 전에!”
중은 보짐을 싸들고 떠나면서도 합장하더니 상순을 보고 진심에 어린 말을 했다.
“꼭 명심하오. 그 집 사람에게 녹태를 사다가 대접하오. 그럼 꼭 아들을 얻을 수 있소.”
상순은 반신반의하면서도 호주머니에서 엽전 몇 잎을 꺼내 주었다.
“로비로 쓰오."
그는 목소리를 낮췄다.
"내 줬다고 누구하고도 말하지 마오.”
“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시주는 꼭 복을 받아 아들을 받아안을 거요. 화음청주,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중은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더니 바깥을 나가더니 팔을 휘휘 활개 치며 마을을 떠나갔다.
상순은 웃새집에서 나와 토성 쪽으로 오면서도 중의 말을 생각하며 중얼거렸다.
“마흔에 아들을 낳는다고? 흥! 서산에서 해 뜨겠다.”
“아들을 낳으면 낳았지. 나를 보오.”
상순은 머리를 돌려 여자 목소리 나는 토성 옆의 우물을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 물동이를 인 춘실이 눈에 띄었다.
상순이 지나치려 할 때다.
춘실은 물동이에서 흘러내리는 물방울을 손으로 훔치면서 그를 불러 세웠다.
“여보, 어째 우리 집 나그넨 데리고 오지 않았소?”
“여보라니?!”
“우리 해월이 앓는데 좀 봐주지 않겠소?”
"아니, 모질 앓소?”
"양, 병원에 실어가야 되잖겠는지 모르겠소."
"그래 어쩌오?"
“당원이란게 인민군중 곤난도 관심하잖겠소?”
상순은 가자하다가 주춤 멈춰 섰다.
“난 의사도 아닌데 어쩌오? 래일 낮에 병원에 데리고 가 보이오.”
“밤중에 급병이 도서면 어쩌오? 밤에 무서워 어떻게 진수해까지 혼자 앨 데리고 가오?”
상순은 마지못해 춘실을 따라 갔다.
어둠이 두툼하게 깔린 마당에 들어서니 집안은 등불도 켜지 않아 어둠 컴컴했다. 춘실이네 황둥개가 꼬리를 치며 달려오자 상순이네 검둥이가 달려와 안고 깨물고 하며 함께 끼깅거리며 뛰놀았다.
상순은 좀 주춤거리었다.
춘실은 집안 물독에 물을 부어놓고 마당에 나와 상순의 팔소매를 끌어 집안으로 들어갔다.
“앓는 애는?”
상순이 윗방에 들어가면서 물을 때었다.
"여기 애 있소.”
상순이 수들에 올라가려고 할 때다. 어둠 속에서 춘실은  상순을 와락 끌어안으며 뒤로 물앉는 것이었다.
“왜 이래?”
“내가 앓는 단 말이오. 그래 옛 정분을 다 잊었소?”
상순은 덴겁한 나머지 춘실의 손을 뿌리치며 화닥닥 일어났다.
“가정이 있는 사람들이 웬 옛 정분이오?”
“나가면 소릴 칠 테야!”
상순은 마구 끌어당기는 춘실을 뿌리치며 문께로 나갔다.
“도적이야!”
“도적을 붙잡아라!”
뒤에서 춘실의 고함소리가 울렸다.
“아차! 잘 못 걸리겠다!”
상순은 함정에 빠질까봐 한 짝 신을 신지도 못한 채 후닥닥 냅다 뛰었다.
“사람 살리오! 도적이야!”
춘실의 고함소리에 숱한 사람들이 꾸역꾸역 모여들었다.
사람들은 춘실이네 집에 등불을 밝히고 여기 저기 살피면서 춘실과 사건 경과를 물었다.
“나도 모르오! 어떤 도적이 우리 집에 기어들지 않았겠소? 내 소리 치니 달아났소!”
마을 사람들은 웅성거렸다.
“누굴까?”
“글쎄. 무슨 도적이 왔을까?”
“아마 멧돼지고기 욕심나 나그네 없는 집에 뛰어들었겠지.”
“이게 누구 신이오? 분명 남자 신인데.”
그때 성수가 마루바닥에서 허연 고무신 한 짝을 주어들고 소리쳤다.
“그게 도적놈의 신이겠소.”
“옳소. 도적놈이 미처 신지 못하고 도망친게 분명하오.”
“무슨 도적놈이 신을 벗고 이 집 안에 들어갔겠소?”
마을 사람들이 이러쿵저러쿵 의논이 분분했다.
“아마 도적이 급히 도망치다나니 문턱에 걸려 벗겨졌겠지.”
모두들 보니 춘실이네 집 문턱이 확실히 높았다.
성수는 신짝을 들고 등불을 빌어 두루 살피면서 “이 신짝의 주인이 누군가 밝혀내면 도적을 붙잡을 수 있을 게요. 이제 김 서기한테 이 신짝을 가지고 가서 사건을 보고해야지.”라고 하며 상순이네 집 쪽으로 걸어갔다.
한편 상순은 선불 맞은 사슴처럼 춘실이네 집에서 빠져나와 저 멀리 태평강 가로 달아났다.
때마침 금옥이 맏아들 칠군과 함께 오빠네 집으로 놀라오다가 밤중에 누군가 춘실이네 집에서 와닥닥 뛰어나와 닫는 것을 보았던 것이다.
금옥은 뒤에서 “도적이야!” 하는 소리를 듣고 십중팔구 짐작이 가는지라 칠군을 오빠네 집에 보내고 자기는 춘실이네 집에 갔다가 마을 사람들의 신짝 말을 하는 것을 보았다.
(저걸 어쩌나? 분명 오빠 신인데.)
그녀는 급히 오빠네 집에 가서 다른 고무신을 주어들고 오빠가 달아난 태평강 가로 남 몰래 달려갔다.
그는 아름드리 버드나무숲 속을 돌아다니면서 나직이 “오빠, 오빠-” 하고 불렀다.
그때 태평강가 버들방천에서 서성거리던 상순은 뜻밖에 조개덕의 금옥의 목소리가 나는 것을 듣고 놀랐다.
그는 달빛을 빌어 확실히 금옥인 것을 보고서야 다가왔다.
“넌 어째 여기 왔니?”
금옥은 달빛 속에 고무신을 내밀었다.
“이걸 신고 그 짝짝 신을 태평강에 버리오.”
“음, 알았다.”
상순은 한 짝 밖에 없는 신짝을 태평강 물에 던졌다.
출렁!
고무신은 억울함과 달빛과 함께 출렁이는 강물에 실려 떠내려갔다.
상순은 고무신을 갈아 신고 금옥과 함께 마을로 들어갔다.
그때 토성 밑에서 자기를 찾아다니던 성수를 만났다.
“어, 김 서기, 어디를 갔다 오오?”
상순은 짐짓 모르는 척하면서 “양, 내 조개덕 여동생네 집으로 갔다 오는 길이오. 무슨 일이 있소?”라고 되물었다.
성수는 상순의 발부터 내려다보더니 한 짝 고무신을 내밀었다.
“이 신을 보오. 웬 도적놈이 집에 뛰어들었다가 신짝이 벗겨진 채 도망쳤소?”
상순은 신짝을 받아 두루 살펴보는 척 하더니 “허, 도적이라니? 뉘네 집에 도적이 들었댔소?” 하고 반문했다.
“내 형네 집에 도적이 들었잖아.”
“음, 그랬구먼. 내 조사해볼게. 이 신 임자만 찾으면 도둑이 밝혀질 게요. 근심하지 말고 모두 돌아가오. 동네 부산하게 떠들지 말고.”
“양, 파출소에 알리던지.”
“내 알아서 처리할게.”
성수는 상순의 발에 고무신이 신겨져 있는 것을 본 후 시름 놓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는 나머지 고무신짝을 부엌에 걷어 넣고 불을 달았다.
(춘실이 왜 저러지? 진짜 날 함정에 빠뜨리려고 그랬을까? 부부 인연은 없어도 원수는 아닌데. 알고도 모를 일이야.)
이튿날 상순은 범바위골로 떠나게 됐다. 그는 고무신짝을 개 물어 갔는지 없다 하고 그 사건을 얼버무려 버렸다.
성수나 학수나 모두 그 말을 반신반의하면서도 어쩌는 수 없었다.
      상순은 물을 길으러 우물로 갔다가 춘실과 딱 마주쳤다.
      "어마나!"
춘실은 지은 죄 있는지라 주춤 멈춰섰다가 동이를 내리워 안고 집 쪽으로 발뺌하려고 했다.
"서오."
춘실은 몸을 홱 돌렸다.
"아이구머니, 간 떨어지겠다."
그녀는 버들잎 같은 눈섭을 치켜올리며 대들었다.
"왜? 날 때려죽이겠니?"
상순은 주위를 둘럴보고 인기척이 없자 춘실한테 한발 다가서며 나직이 말했다.
"어쩜 그럴 수 있소? 어째 날 바람 피웠다고 물어먹을 예산이오? 어쩜 함정을 파놓고 빠뜨리자고까지 하오? 진짜 그렇게 음험할줄은 몰랐소. 제 량심 있소? 그런다고 내 당신과 살 거 같소. 우린 둘 다 이젠 가정이 있고 자식들도 많잖고 뭐요? 이젠 내하구 살 궁리는 단념하오. 제발 날 좀 놔주오."
춘실도 할 말이 있었다.
"야, 누가 너처럼 제 친아들도 모르구 가정 살림살이도 모르는 놈과 산더더니, 퉤, 더럽다, 더러워!"
상순은 "친아들"이란 말에 드레박을 잣다가 주춤 멈춰 섰다.
"백준이 이젠 연길에서 중학교를 다니는데. 흥! 이때까지 해준게 뭐냐? 언제 한번 찾아가 본적이라도 있니?"
그 말에 상순은 그만 드레박 자새를 활 놓았다. 자새가 핑그르르 돌아갔다. 드레박이 우물 안에 철렁 떨어졌다. 상순도 마음이 아팠다. 백준은 그와 지춘실의 첫사랑 쓴 열매가 아닌가. 아버지 반대로 파혼하다나니  연길 백과부네 집에 주었던 것이다. 그 일을 생각할 때마다 상순은 가슴이 미여지는 것만 같았다.
상순은 우물 안을 들여다보면서 드레박을 간신히 줄에 걸어 자아 올리며 말했다.
"미안하오. 백준이 이름이나 고치오."
지춘실은 새된 소릴 질렀다.
"뭐라고?  안돼."
"우리 아버지 벌은 다 '준'자 돌림이야. 기준, 창준, 관준..."
지춘실은 허리에 손을 찌르고 앙천대소했다.
"야, 야, 내 애를 낳으면 딱딱 너네 애비벌 된다. 너네 애비 생각만 해도 악이 난다. 그 영감 아니면 백준을 남을 줬겠니?"
상순은 세귀눈을 흘겼다.
"명옥이 나보다 뭐 더 좋다고 너 애비 날 막았다니?"
"또, 또, 그 말 꺼내겠니?"
"흥! 꺼내면 어째?"
춘실은 어글어글한 눈을 치켜뜨며 두덜거렸다.
"하긴 명옥이 인물이 나보다 예쁘고 딸을 명태드럼처럼 줄줄 나아서 오죽 좋겠느냐? 호호호."
상순은 춘실을 쏘아보며 정색했다.
"명옥은 못 생겼지만 너처럼 간사하고 음험하진 않아. 량심과 효성이 있고 너처럼 변덕스럽진 않아." 
춘실은 억울한듯이 입을 쫙 벌리고 상순을 손가락질하며 한참동안 말하지도 못했다.
이윽고 그녀는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더니 숨을 돌려 간신히 입을 열었다.
"얘, 상순아, 내 아들 낳지 않았으면 너네 영월 김씨네 무슨 개판 됐는지 아니? 대 끊어질번 했다는 걸 잊지 말라. 백준인 너네 집 기둥이라는 걸 잊지 말라. 홀대하기만 해봐라. 가만놔두지 않겠다. 명옥이 그런 떡돌 같은 아들 낳는 재간이나 있니? 이젠 마흔이 다 됐으니 모든게 끊났다. 백준이 아니면 넌 아들이나 있겠구나. 흥!"
상순도 물러서지 않았다.
"싹 걷어치워. 명옥이 아들 낳는 재간없다구? 순자 우에 아들 셋이나 낳은 거 잊었느냐? 지금 생각해도 그때 일본 놈들 세상에 너무 가난해 약도 온전히 못 쓰고 굶겨 죽인게 불쌍하다. 다신 그 말 꺼내지 말라."
춘실은 깨고소해하는 표정을 지으며 입귀로 계속 횡설수설 악담을 흘렸다.
"너 애비 도깨비 의사돼서 그랬다. 왜 약담배 먹여 죽였다는 말은 안해?"  
"악담 그만하지 못하겠니?"
상순이 세귀눈을 부릅떴다.
"에그머니!"
춘실은 저쪽에 물동이 안고 도망치려고 했다.
상순은 나지막이 부탁했다.
"내 말 좀 듣소. 그 애 이름 백호라고 고쳐라."
"백호?"
춘실은 동이 안고 되돌아섰다.
"그래, 우리 맏아들 얼마나 좋은 이름이냐?"
지춘실이 뜻밖에 수긍했다.
"'우리 맏아들'?  뭐? 백호? 호호호. 그래, 백호로 키워서 네놈새끼를 잡아먹게 하지 않는가 봐라. 호호호."
상순은 자못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
"마을에 돌아다니면서 쓸데 없는 소릴 작작 해라."
"어째? 겁나니? 내 입이 터지면 넌 끝장날줄 알아라. 너 고무신짝 한짝 어쨌니? 허, 어느새 새 신 사다 싣었어?  신짝 바꿔 신고 다니면 단가 해? 마을 사람들 숱한 눈 못 속여."
"쉿-"
상순도 저쪽에서 다가오는 명옥을 보자 식지를 입술에 가져다 댔다.
"어째 겁나니? 흥! 당지부 서기는 고사하고 이 마을에서 쫓겨날 줄 알아라."
상순은 드레박을 우물에 드리우며 대수롭잖아했다.
"내 무슨 나쁜 짓 한 것도 없는데."
춘실은 동이를 안고 우물 가에 다가와 나직이 말하며 깔깔깔 웃었다.
"어쩜 어디 가나 그렇게 여자들한테 인기 높니?"
상순은 드레박을 자아올리며 물었다.
"건 또 무슨 소리야?"
춘실은 입귀를 실룩거리더니 빈정거렸다.
"조선에 나가 양키놈들하구 싸우진 않구. 뒤고방에서 허영희란 여자하구 잘 살았지? 배수관에 들어가 뭐 했니? 또 김치움에 들어가선 뭐 했니?"
명옥은 그들의 말을 듣다가 집 쪽으로 되돌아갔다. 아마 듣기도 싫었던 것 같다.
상순은 명옥이 사라지자 드레박을 받아쥐며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쓸데 없는 소릴 작작 하오. 아무 일도 없었다."
"픽!"
춘실은 믿지 않았다.
"바람 피웠지? 온 동네 소문이 짜짱한데두. 흥!"
"진짜 아무 일도 없었소."
상순은 춘실의 물동이를 쥐어당겨다놓고 드레박 물을 쏴 쏟아주었다.
"그런 쓸데 없는 소문 믿지 말고 작작 떠드오."
뒤이어 상순은 주위를 둘러본 후 자못 엄숙하게 춘실을 마주 보았다.
"춘실이, 우리 셈 없을 때 서로 사랑했지만 부모 반대로 부부 연은 지 못했소. 그러나 서로 원수 치부는 하지 말기오."
"..."
      춘실은 포도알눈을 살며시 내리깔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물동이를 이었다. 그녀는 물동이를 이어주는 상순을 가로 보더니 맑은 눈물을 주루룩 흘렸다. 두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은 그처럼 맑고 쓸쓸할 수 없었다. 춘실은 볼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을 손으로 훔치며 동이를 이고 비칠거리며 떠나갔다.
     물동이에서 물이 찰랑거리며 튕겨나왔다. 파도치는 그녀의 가녀린 어깨를 바라보는 상순의 가슴은  미여지는듯 때끔때끔 아파났다.
     이튿날 상순은 마을 사람들과 갈라져 청년들과 함께 수레를 몰고 범바위골로 떠나게 되었다.
저쪽에서 명옥과 춘실이 애를 업고 못 박힌 듯이 서서 떠나가는 그들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춘실은 상순을 보고 해시시 웃으면서 혀를 홀랑 내밀었다가 침을 퉥 뱉었다.
상순은 춘실을 흘겨보며  수레를 몰고 무거운 발걸음으로 떠나갔다. 
        "변덕스런 년이라구야, 원, 어쩜 저럴 수 있어? 흥!)
         삼복염천 땡볕이 아침부터 쨍쨍 내리쪼여 곡식과 버드나무잎사귀들이 축 늘어졌다. 상순은 수레를 몰고  범바위골로 길을 다그쳤다. 
                               
                       13. 범바위골 생사박투


       석양이 비낀 범바위골의 기름지고 푸르른 풀밭에서 학수의 아들 주봉과 상순의 둘째딸 금숙은 곤두뿔과 비녀뿔을 타고 버들피리를 구성지게 불었다. 푸르른 하늘아래 흰 구름이 감도는 울창한 수림 속에 우뚝 솟은 범바위산도 즐거워 반기고 산새들도 피리소리에 맞춰 푸르른 가을 하늘을 훨훨 날며 춤을 췄다.
       주봉은 명옥이 젖을 먹여 키운 양아들이었다. 아들을 낳지 못한 명옥은 특별히 주봉을 친 아들처럼 사랑하고 아끼었다. 그와 금숙은 그녀의 양 젖을 한 짝씩 먹고 자라서 친 오누이처럼 다정했다.
저쪽에서 감자를 파던 상순이 호미를 쥔 채 허리를 펴고 이쪽을 두루 살피더니 입가에 손을 모아대고 소리쳤다.
“얘들아, 너무 멀리 가지 마라! 범이 오면 어쩌니-”
옆에서 학수가 중얼거렸다.
“범 말을 하지 마오. 자기 흉을 하면 범이 온다지 않소.”
“음, 애들이 먼데 가면 어쩌오?”
주봉은 양아버지 말을 듣고 고삐를 쥐여 당겼다. 그러나 아무리 고삐를 당겨도 곤두뿔은 대가리를 흔들면서 돌아서지 않고 자꾸 멀리 달아났다.
성이 꼭뒤까지 치민 주봉은 곤두뿔의 잔등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이 놈 곤두뿔, 말을 듣지 않겠니?”
주봉은 을러메면서 고삐로 곤두뿔의 대가리며 잔등이며 쨩쨩 때렸다. 곤두뿔은 눈깔을 부릅뜨고 주봉을 당장 뜰 상을 했다.
“때리지 마라!”
어느 결에 상순이 뛰어왔다.
상순은 주봉의 손에서 고삐를 빼앗아내면서 타일렀다.
“얘들아, 소는 말을 하지 못하지만 이 놈도 자기를 아끼면 말을 잘 듣는다. 자기를 못살게 굴면 심술을 쓴다. 이후엔 소를 아껴라.”
상순이 바지 호주머니에서 소금 몇 알을 꺼내 손바닥을 펴 보이자 곤두뿔은 쯥쯥 핥아 먹더니 꼬리를 휘휘 휘젓는 것이었다.
“오, 알았습니다.”
후에 주봉과 금숙은 아버지들과 말하고 소금이나 콩알을 조금 호주머니에 넣어가지고 가서 곤두뿔과 비녀뿔에게 먹이었다. 그때마다 곤두뿔과 비녀뿔은 친절한 눈길로 애들을 보면서 껄껄한 혀로 소금알을 핥아 먹으면서 꼬리를 휘휘 휘저었다.
황혼 무렵이었다.
갑작스레 먹장구름이 범바위산 쪽으로 몰려오더니 구불구불한 불 뱀이 범바위산 허리를 번쩍 내리쳤다.
우르릉 꽝꽝!
하늘땅을 뒤흔드는 우레 소리에 뒤이어 호두알만한 비방울이 후둑후둑 떨어졌다. 뒤이어 밤알만큼 한 우박이 수림과 감자밭을 내리 조기기 시작했다. 각일각 소낙비는 폭우로 번져 대야로 퍼붓는 듯이 억수로 쏟아졌다.
한 시간이 지나자 언제 폭우가 기승을 부렸는가 싶게 동녘하늘에 고운 칠색무지개가 척 걸렸다.
그 날 밤에 마을 사람들이 잠들려고 할 때다.
따웅~
호랑이 울부짖는 천둥 같은 소리와 함께 바깥에서 송아지들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상순과 병수 등이 황급히 벽에 걸어 놓았던 사냥총을 벗겨 들고 뛰어나갔다.
금숙은 집구석에서 사시나무 떨듯 하면서 옹크리고 앉아 있었다. 허나 주봉은 그래도 사내자식이어서 거적을 살짝 들고 가만히 내다보았다.
검둥이와 황둥개가 먹칠한 듯한 수림 속에서 언뜰 언뜰 하는 쌍불들을 내다보며 왕왕 짖어댔다. 곤두뿔과 비녀뿔 아빠 소 어미 소들이 초가집을 중심으로 서너 마리 송아지들을 복판에 둘러싸고 호랑이들과 맞섰다. 곤두뿔이랑 대가리를 수그리고 앞발로 땅바닥을 허벼 잔등에 퍼 치면서 호랑이들과 싸울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상순과 성수는 사냥총을 들어 수림 속의 노란 쌍불들을 겨눠 쏘았다.
땅! 땅!
따-웅!
수림 속을 울리는 호랑이 울음소리와 함께 쌍불들이 사처로 흩어져 달아났다.
상순은 시름 놓지 못하고 초가집 마당에 삭정이를 모아 놓고 우등불을 피웠다. 활활 타오르는 우등불 빛을 빌어 소들을 살펴보니 송아지 한 마리가 목을 물리어 피가 흘렀다.
곤두뿔이랑 어미 소들은 송아지와 초가집을 똬리처럼 둘러싸고 대가리를 바깥쪽으로 향하고 웅크리고 앉아 온밤 우등불 빛이 비추는 수림 속을 노려보았다. 호랑이들과 승냥이들은 다시는 감히 덮쳐들지 못했다.
상순과 성수 등은 곤두뿔이랑 비녀뿔이랑 얼마나 대견스러운지 몰랐다.
서늘한 가을바람이 불어오자 만물이 누렇게 번져가고 오곡백과가 무르녹기 시작했다. 풀밭이 아무리 푸른 신록을 지키려고 부질없이 발버둥질 쳐도 날이 갈수록 누런 색깔에 물들어버렸다.
상순은 마을 사원들을 이끌고 곤두뿔과 비녀뿔이랑 소 수레에 메워 가지고 감자와 강냉이 이삭들을 초가집 마당에 실어 들였다.
부식토로 뒤덮인 땅이 어찌나 비옥한지 토실토실한 감자와 방치 같은 누런 강냉이 이삭들이 잘 열려 탐스럽게 대풍작이 들었다. 사원들은 풍작의 기쁨에 겨워 힘 드는 줄도 모르고 이른 아침부터 해질 무렵까지 감자를 파고 강냉이 이삭을 뜯어 수레에 실어 들였다. 그 숱한 낟알을 실어들이느라고 곤두뿔과 비녀뿔은 목에 피 고드름이 지기까지 했다.
상순은 곤두뿔의 피 고드름이 진 목을 매만지면서 불쌍한 나머지 가만히 강냉이 이삭을 주둥이에 넣어주었다. 곤두뿔은 맛나게 먹으면서 커다란 눈알로 상순을 정답게 쳐다보았다.
어느 날, 그들이 한창 강냉이 이삭을 뜯을 때다.
“앗! 곰이다!”
금숙과 성수네 맏딸 정옥이 비명소리를 질렀다.
상순이 뛰어나가 보니 엄청 큰 곰 두 마리가 강냉이를 가로 타고 나가며 이삭을 뜯어 겨드랑이 밑에 끼며 야단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 놈 곰새끼!”
상순과 성수는 황급히 소리치며 밭머리에 세워 놓은 사냥총을 들고 뛰어왔다. 그런데 곰은 상순과 성수에게 하나씩 덮쳐들어 사냥총을 빼앗아 무릎에 대고 뚝 분질러 던졌다.
급해 맞은 상순은 밭머리로 뛰어나가 곤두뿔과 비녀뿔의 고삐를 수레 채에서 풀어놓았다. 성수와 학수랑 다른 소들의 고삐를 풀어놓았다.
곤두뿔은 모진 고함을 지르면서 앞발로 흙을 긁어 잔등에 퍼치더니 곤두뿔을 낮추며 곰에게 덮쳐들었다. 둔한 것 같던 곰은 소 무리들이 덮쳐오자 강냉이 둬 이삭을 쥐고 꼬리 빳빳해 수림 속으로 달아났다. 그러나 곤두뿔이랑 비녀뿔이랑 곰을 놓칠세라 수림 속으로 뒤쫓아 들어갔다.
“염, 염, 염!”
상순이 아무리 손에 소금을 들고 불러도 소들은 계속 고함치며 곰들을 쫓아갔다. 상순과 성수는 소들이 상할까봐 다른 사람에게서 사냥총을 빼앗아 들고 수림 속으로 쫓아갔다.
그들이 단풍나무숲이 우거지고 집채 같은 바위가 우뚝 솟은 범바위골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다. 갑자기 노린내가 코를 찔렀다. 살펴보니 나뭇가지에 누런 소털과 범의 털이 묻어 선들바람에 살살 나붓기고 있었다. 후에 안 일이지만 범바위 뒤에는 범의 굴이 있었다. 허나 누구도 모르고 범바위 근처에까지 황무지를 일궜기에 범들은 죽기내기로 굴과 영지를 지키려고 “불청객”들에게 덮쳐들었던 것이다.
이때 앞에서 코로 냄새를 씩씩 맡던 검둥이와 황둥개가 대가리를 쳐들고 왕왕 짖으면서 꼬리를 흔들었다. 상순이네가 나무숲 속을 살펴보니 곤두뿔이 이쪽으로 걸어오며 꼬리를 휘휘 젓다가 우뚝 멈춰서는 것이 아니겠는가?
곤두뿔은 귀를 뻘쭉 세우고 이쪽을 의아한 눈길로 바라보더니 “음-메- 헝-” 하고 수림이 떠나갈듯이 영각하며 꼬리를 휘휘 휘저었다.
상순은 앞으로 나가며 호주머니에서 소금 알을 쥐어 손바닥을 펴 보이면서 “염, 염, 곤두뿔아, 돌아가자!”라고 했다.
허나 곤두뿔은 귀를 뻘쭉 하더니 오던 쪽으로 냅다 뛰어가는 것이었다.
이때 검둥이도 왕, 왕, 왕 짖어댔다.
상순은 수림에서 불길한 예감이 들어 두리번거렸다.
아차, 저게 뭔가? 가을바람이 불어치며 낙엽이 우수수 지는 속에 누런 이마빼기에 꺼먼 왕자를 박은 얼룩 범이 범바위 뒤에서 뛰쳐나오지 않겠는가.
그 놈은 상순이네가 사냥총을 겨누기도 전에 “따~ 웅!” 하고 울더니 사납게 덮쳐들었다. 호랑이는 앞발로 상순의 어깨를 탁 치고 날아지나갔다. 뒤이어 몽둥이 같은 꼬리로 휘파람소리를 내며 휙 휘둘러 갈겼다. 다행히 상순이 넘어지면서 맞지 않고 대신 팔뚝 같은 나뭇가지가 맞아 낙엽이 우수수 떨어졌다.
땅! 땅!
상순과 성수는 재차 덮쳐드는 호랑이의 쫙 벌린 아가리를 조준해 총을 쏘았다.
옆구리에 총알을 빗맞은 호랑이는 화약 냄새를 맡자 돛 바늘과도 같은 흰 수염을 곤두세우며 “따웅-” 하고 으르렁거렸다.
이때 어디로 간 것 같던 곤두뿔이 덮쳐와 합세하면서 전세는 역전됐다. 곤두뿔과 비녀뿔은 뿌리를 곤두세우고 호랑이한테 사납게 덮쳐들며 배때기를 들이박았다.
“따-웅!”
호랑이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면서 김빠진 공처럼 쓰러졌다. 검둥이는 호랑이의 꼬리를 물어 마구 뜯었다.
따~웅!
이때 범의 굴에서 숱한 범들이 뛰어나와 덮쳐왔다. 비녀뿔과 곤두뿔은 호랑이 무리와 일대 혼전을 벌렸다. 비녀뿔은 제일 앞에서 덮쳐드는 범의 배때기를 턱 떠받아 하늘공중에 날려버렸다. 호랑이들도 자기 굴 어귀까지 몰려온 사람들과 황소들 앞에서 더 물러설 자리가 없게 됐다. 그 놈들은 단말마적으로 덮쳐들어 황소들의 잔등 위로 마구 날뛰면서 물어 재꼈다. 곤두뿔은 덮쳐드는 호랑이 옆구리를 연속 떠서 나무숲 속에 처박았다. 나머지 호랑이들은 동료들이 피를 토하며 맥없이 쓰러지는 것을 보고 수림 속으로 달아나버렸다.
그 틈에도 곰들은 강냉이 이삭을 뜯기에 여념이 없었다. 비녀뿔은 무섭게 고함치더니 비녀뿔을 곤두세우고 강냉이 밭으로 덮쳐갔다. 곰들은 배때를 들이박는 비녀뿔의 뿌리를 떡 잡아 내리누르며 목을 비틀려고 버둑버둑 애썼다. 다른 곰은 비녀뿔의 불 중태를 물어뜯으려고 뒤로 덮쳐들었다. 이때 곤부뿔이 영각하며 사납게 덮쳐들어 비녀뿔의 꼬리를 잡은 다른 곰의 엉덩이를 탁탁 박았다. 다른 곰은 질겁해 비녀뿔의 뿌리를 활 놓고 강냉이 밭을 와락와락 헤치며 도망쳤다.
뒤이어 상순이네가 곤두뿔이랑 검둥이랑 데리고 밭으로 돌아왔다.
“빨리 강냉이 이삭을 담아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기요!”
사원들은 황급히 강냉이 이삭을 주어 수레에 싣고 초가집으로 내려왔다.
호랑이에게 물린 곤두뿔의 깊숙한 상처에서 뻘건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 상순은 수레를 벗긴 후 집 뒤에 끌고 가서 오줌을 싸 상처에 발라주었다. 오줌은 상순이네 조상이 물려준 묘약이었다. 소 상처에도 소염이 될지는 모를 일이지만 상순으로서는 그 외에 별다른 방도는 없었던 것이다.
어느 하루, 모두들 점심을 먹을 때었다.
허영주 향장이 사무실 주임 박청산과 함께 범바위골로 불시에 찾아왔다.
상순은 오래 동안 갈라졌던 형님을 만난 듯이 반갑게 맞았다.
“허 향장, 어떻게 돼 이런 산골로 왔습니까?”
허영주는 상순의 손을 꽉 잡으면서 소탈하게 웃었다.
“어제 함흥 촌에 찾아갔다가 범바위산에 부업하러 갔다는 말을 듣고 찾아왔네.”
상순은 허영주와 박청산 주임을 윗방에 모시고 올라가 앉으면서 금숙과 정옥을 보고 밥상을 새로 차려오라고 했다.
숟가락을 들고 밥상을 둘러보던 허영주는 반색했다.
“허허허, 대단하구먼, 여긴 무릉도원 같군 그래.”
“오시느라고 시장하겠는데 자, 막걸리나 드십시오.”
허영주와 박청산은 사양하지 않고 막걸리를 들고 안주를 짚었다.
“이건 뭔가? 멧돼지 고기 아닌가?”
허영주의 말에 박청산은 우물우물 고기점을 씹으면서 “썩썩하고 쫄깃쫄깃한 게 진짜 별맛이구먼.”라고 했다.
“우리 향 식당에도 없는 멧돼지 고기 아닌가?”
그 말에 상순과 청산은 머리를 숙였다.
허영주는 멧돼지고기 사발에 저로 연신 창질을 해대며 말했다.
“사원들이 배불리 먹고 잘 살면 좋지. 김 서기 참 잘 했소. 합작사에서 부업이라도 해서 사원들을 배불리 먹고 살게 해야 하오. 이제 함흥 촌 합작사의 경험을 전 향에 널리 선전해서 황무지를 개간하게 해야겠소.”
허 향장은 숟가락을 놓으면서 상순을 마주 바라보았다.
“향내 여러 촌 서기와 합작사 주임들을 범바위산에 청해다 황무지개간현지회의를 하면 어떻소? 김 서기가 범바위산의 황무지와 묵밭을 개간해 풍작을 거둔 경험도 소개하오.”
그런데 상상 밖으로 상순은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그러지 마십시오. 옛날부터 소문난 잔치 먹을알이 없다고.”
그 말에 허 향장은 자못 불쾌해 했다.
“함흥 촌 합작사들에서만 황무지를 개간해 배불리 먹고 살겠소? 다른 마을에서도 잘 살게 도와 줘야하지.”
“허 향장의 생각은 옳습니다. 그런데 소문이 나면 범바위산은 우리 향의 산이 아니기에 쫓겨날 겁니다.”
상순의 말에 허 향장은 머리를 끄덕이었다.
한참 궁리하던 허 향장은 “이렇게 합세.”라고 말머리를 떼더니 뒤 말을 이었다.
“진수해에서 전 향 황무지개간사업회의를 열면 김 서기가 범바위산을 밝히지 말고 황무지를 개간해 대풍작을 거둔 경험을 소개하오.”
상순은 양미간을 찌푸리면서 한참 궁리하더니 “건 좋습니다. 전 향 인민들이 배불리 먹게 사는데 유리하다면 경험을 소개하겠습니다.”라고 했다.
그날 오후에 허영주 향장과 박청산 주임은 상순과 함께 새로 개간한 범바위산의 밭을 일일이 돌아보고 상순이네가 주는 멧돼지 고기에 감자와 강냉이 등을 가지고 범바위산을 떠나갔다…
병완과 상순은 함흥 촌 마을 사원들을 이끌어 연속 4년 동안 범바위산에 들어가 감자와 강냉이 농사를 지어 마을 사람들의 쌀독을 꼴딱꼴딱 채워 사원들로 하여금 배불리 먹으면서 살게 했다. 하여 사원들의 생산 적극성을 대폭 높였을 뿐만 아니라 사원들로 하여금 사회주의 우월성을 마음속으로 느끼게 하였다.
마을 사람들은 범바위산에서 네 번째 수확의 가을을 맞이하게 됐다.
어느 날, 쉼에 상순이 한창 숫돌에 낫을 갈 때었다.
갑자기 저쪽에서 “불이야!” 하는 고함 소리가 들렸다.
모두들 벌떡 일어나며 머리를 돌려 그쪽을 바라보았다.
“아니, 저게 뭐야!”
삼단 같은 불길이 마른 풀숲을 핥으며 구렁이처럼 산비탈로 기어나가고 있었다. 동언이랑 동식이랑 허둥지둥 헤매면서 불을 끄기에 여념이 없었다.
상순이랑 모두들 낫을 버리고 그리로 뛰어갔다. 그들은 나무 회초리를 꺾어 들고 날름거리는 불을 쳐댔지만 산비탈을 핥으며 퍼져나가는 불길을 끌 수 없었다. 순식간에 한헥타르도 넘는 산비탈의 황무지가 잿더미로 돼버렸다. 산불은 야수처럼 다른 산비탈로 날아 넘어가 달렸다.
“이 일을 어쩌느냐?”
상순은 풀썩 물앉으면서 가슴을 탕탕 쳤다.
주봉이 뛰어와 헐떡거리며 말했다.
“저 동언이 쉼에 담배를 가만히 피우다가 그만 옷에 불을 떨어뜨렸습니다.”
학수는 주봉을 흘겨보면서 “네가 뭘 안다고 주둥이질이냐?” 하고 꾸지람했다.
그래도 주봉은 계속 말했다.
“내 맞은쪽에 앉아 보니 동언이 담배를 피우다가 담뱃재가 솜옷에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동언은 솜옷에 달린 불을 끄자고 벗어서 마구 풀밭에 털었습니다. 그래서 풀밭에 솜옷의 불이 옮겨 붙었습니다.”
동언의 아버지 득호는 떽 했다.
“그래 우리 동언이 산불을 달아놓았단 말이냐?!”
상순은 주봉과 고개를 숙인 동언을 번갈아 보다가 다급히 소리쳤다.
“누구 때문에 산불이 났든지간에 빨리 산불을 꺼야 하오! 큰 경을 치겠소.”
상순은 초가집에 달려가 삽을 찾아들고 한 키씩이나 타오르는 산불 쪽으로 뛰어갔다. 사원들도 모두들 삽과 괭이, 빗자루, 호미를 찾아들고 산불과 생사박투를 벌렸다. 허나 설상가상으로 가을바람까지 세차게 불어쳐 산불은 벌써 산비탈을 벌거숭이 잿더미로 만들어버렸다. 산불을 또 다른 산비탈들로 사정없이 덮쳐갔다.
이때 난데없이 숱한 낯선 사람들이 깍쟁이와 삽, 괭이와 빗자루를 들고 달려와 불끄기 생사박투에 뛰어들었다.
상순이 여겨보니 그 뒤에는 초봄에 갓 범바위산에 왔을 때 만났던 헌 초가집 주인 늙은이도 있었다.
상순이 급히 뛰어가 머리를 숙여 인사하자 그 늙은이는 욕부터 해재끼었다.
“내 뭐라던가? 산불을 주의하라는데.”
상순은 그저 목덜미를 긁적이면서 “어떻게 산불을 끌 방도가 없습니까?”
그러자 늙은이는 콧방귀를 뀌었다.
“흥, 이제 천사람 만사람을 동원해 와보오. 이 큰 산불을 끄는가?”
늙은이는 타오르는 불길을 보더니 무릎을 탁 치더니 눈길을 상순에게로 돌렸다.
“방도 있네.”
상순은 한걸음 다가섰다.
“예?”
“맞불을 놓아야 하네!”
“예?! 맞불을?”
“그렇소. 예로부터 산불에는 맞불을 놓아야만 끌 수 있다고 했소.”
“그럼 맞불을 놓아 보깁소.”
상순은 늙은이와 함께 돌아다니면서 불 뱀처럼 덮쳐가는 맞은켠 산비탈 마른 풀밭에 돌아가면서 맞불을 놓았다.
한식경 맞불을 놓았더니 산불은 기적적으로 꺼지기 시작했다. 해질 녘이 되어서는 산불이 몽땅 꺼지고 여기저기서 가는 몇 가닥의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를 뿐이었다.
“살았습니다. 할아버지!”
상순은 늙은의 주름살이 얼기설기 진 커다란 손을 잡아 흔들었다.
늙은이도 허연 수염을 쓰다듬으며 검댕이 칠을 한 꺼먼 얼굴에 만족한 웃음을 지었다.
셈평이 없는 동언은 주책머리 없이 재 더미로 된 산을 둘러보면서 “허허, 온 산이 말끔히 타버려 새해에 황무지를 개간하기 참 좋게 됐구먼.”라고 횡설수설 했다.
상순은 동언의 뒤통수를 손바닥으로 슬쩍 치면서 “에끼, 이 놈 자식!”하고 책망했다.
그제야 동언은 머리를 숙이며 삽으로 흙을 파 남은 불씨를 덮어 놓았다.
상순은 사원들을 이끌고 산골짜기의 샘물터에서 샘물을 길어다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연기를 찾아다니면서 샘물을 끼얹었다.
어느 결에 가을 하늘에 뻘건 황혼 낙조가 뒤덮여 잿더미로 돼버린 산비탈을 벌겋게 물들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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