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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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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72)
2017년 07월 03일 23시 15분  조회:1483  추천:0  작성자: 김장혁






                      8. 그리운 고향 산천
먹장구름이 걷히고 하늘의 꽃구름도 따뜻한 봄날의 햇빛을 받아 방실방실 웃었다.
며칠 후 병완은 촌 사무소 옆방에 있는 키 넘는 맏증손자 공학을 보다가 불렀다.
“할아버지, 벌써 촌 사무소에 나왔습니까?”
“오, 그래. 네 동생 설복과 동선을 불러오너라.”
“예. 갔다 오겠습니다.”
병완은 쌍까풀에 너부죽하게 생긴 맏증손자가 얼마나 장한지 몰랐다. 그는 공학의 너부죽한 잔등을 대견스레 보며 머리를 끄덕이었다.
이윽고 공학이 동생들인 설복과 동선을 데리고 왔다.
“할아버지, 편안히 계셨습니까?”
“오- 그래. 어서 올라와 앉아라.”
병완은 키 넘어가는 증손자들 셋을 반겨 맞았다.
이윽고 그는 증손자들을 둘러보며 입을 뗐다.
“이젠 너희들도 다 컸으니 뭔가 해야 될 때가 됐구나. 요즘 내 너희들 때문에 곰곰이 생각해보았느니라. 너희들 고조부할아버님은 궁정어의였느니라. 그런데 내 아버지는 의서를 내 맏형님한테만 물려주고 둘째인 나에게는 의학공부를 시키지 않고 목수질만 시켰다. 그래서 형님네 집은 대대로 의사를 물려받았지만 우린 목수를 물려받았다. 봐라, 큰집 식구들은 의사 질 해 얼마나 잘 사느냐? 너희들 대에 와서는 어떻게 그루를 바꿔 의사를 했으면 좋겠다. ”
그러자 그들 셋은 모두 머리를 숙이고 한참 궁리했다.
제일 먼저 동선이 외까풀 눈을 치뜨며 할아버지를 쳐다보았다.
“할아버지, 형님이나 의사를 하고 난 장사를 해서 돈을 많이 벌어서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에이, 큰 노릇을 못할 놈.”
병완이 나무라자 동선은 혀를 홀랑 내밀었다.
“증조부님, 난 기차를 몰았으면 좋겠습니다. 진수해역에 가서 보면 그 큰 기차를 모는 사람이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르겠습니다.”
“음, 건 장사하기보다는 좀 낫다. 어째 내 말대로 의학공부를 하지 않고 장사나 기관사로 되려는 거야?”
동선은 눈을 깜빡이더니 “삼형제가 다 의사로 되면 서로 환자 빼앗기를 하면서 다투지 않겠습니까?”하고 증조부의 눈치를 살폈다.
“바로 그거야. 내 아버님도 형제간에 같은 의사 재간을 배우면 다툴 가봐 의서를 맏이인 내 형님에게만 물려주고 나한테는 물려주지 않았다. 허나 지금 생각해보면 아무 일도 없어.”
“예?”
을혁과 공학의 눈에 의아한 빛이 서려 올랐다.
“내 전번에도 용정에 있는 의과전문학교에 가보았는데 숱한 학생들이 정성문의 아들 정규상한테서 의학을 배우더라. 정규상은 장춘에 가서, 음, 이전의 신경에 가서 일제 때 의과대학을 다닌 적이 있다. 그런데 정규상한테서 의학을 배운 숱한 학생들이 지금 제4야전군 병원에서 의사와 위생원 노릇을 한다. 그래 그 숱한 학생들이 똑같은 의학을 배워 모두 환자를 보아도 다투지 않는다. 그러니 너희 형제들 셋이 같은 선생에게서 의학을 배운들 다툴 일은 더욱 없을게 아니야?”
공학은 무겁게 머리를 끄덕이었다.
“할아버지, 의학을 배우겠습니다. 용정 정규상 선생한테 연줄을 달아줍소.”
“그러지.”
병완은 잠자코 앉아 있는 얼굴이 길쭉한 설복한테로 눈길을 돌렸다.
“넌 뭘 하겠느냐?”
“난 문학공부를 해서 장차 문학교원이 돼 시도 쓰고 싶습니다.”
“에이고, 증손들 다 뜻이 다르구나.”
병완은 별 수 없다는 듯이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럼 너희들 뜻대로 해라. 공학은 오늘 용정으로 가자.”
그러자 설복과 동선은 부러워 왁작 떠들었다.
“야, 형님은 좋겠다. 용정에 가서 공부하는 게.”
“에끼, 이 놈들, 너희들도 공부하고 싶으면 해라. 내 너희들 어시들과 말해 공부를 시키게 할게.”
증손자들은 환성을 지르며 자기 부모의 허락을 받으러 흩어져 갔다.
그날로 병완은 공학을 데리고 용정 의학전문학교 교무처 주임으로 일하는 정규상을 찾아 갔다.
초봄 날씨가 싸늘한데 난로에 불도 온전히 피우지 못해 사무실 안은 꽤나 싸늘했다.
정규상은 아주 반갑게 그들을 맞이했다. 병완이 찾아오게 된 의향을 말하자 그는 당장에서 학교에 받아들였다.
병완은 한시름을 턱 놓고 다른 교원들이 시간 보러 갔는지 사무실이 조용한지라 정규상에게 물었다.
“어째 초봄인데 벌써 난로에 불을 때지 않소?”
정규상은 한숨부터 후 내쉬었다.
“말도 마십시오. 지금은 그래도 군정대학 의학학교로 됐기에 우에서 경비가 좀 내려와 괜찮습니다. 학교가 갓 섰을 때에는 땔나무가 없어서 그 추운 초겨울에 학생들을 데리고 저 해란강 강물에 뛰어들어 다리기둥을 다 뽑아다 땐 적이 있습니다.”
정규상은 한참 의학학교를 어렵게 세우던 이야기를 하고나서 이렇게 뒷말을 달았다.
"우리 학교 졸업생들은 동북에서 관내로 쳐나간 제4야전군 후근병원에서 숱한 부상자들을 구해내 빛나는 전공을 세우고 있습니다. 지금 동북 제4야전군 백만대군에서 조선족 장병이 10만명도 넘습니다. 군의와 간호사는 대부분 우리 룡정 위생학교에서 입대한 조선족졸업생들입니다."
병완은 정규상 등 선생들이 중국의 해방을 위해 큰 공헌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특히 정규상은 부모형제를 따라 조선 고향에 나가지도 않고 중국 용정에 남아 민족의 철저한 해방과 중국의 해방 사업을 위해 힘쓰고 있는 것에 적이 감동됐다.
정규상은 교무처 주임사업에 바쁘면서도 그들에게 점심까지 대접했다…
며칠 후 병완은 봄밭갈이 준비를 하느라고 가대기랑 꺼내 손질했다.
그때 진수해에서 맏손녀 어금이 찾아왔다.
“할아버지, 시아버님이 위태로워요.”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스치고 지나가는 어금의 얼굴을 보자 대뜸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병완은 기준과 창준까지 데리고 맏손녀를 따라 부랴부랴 진수해로 주먹을 불끈 쥐고 줄달음쳐 갔다.
사실 최구장은 조선 고향을 떠나 간도에 갓 발을 들여 놓은 후 맏사위 석은과 맏딸 죽순이네가 사는 함흥 촌에 왔었다. 허나 맏손녀 명옥이 상순과 결혼한 후 변소와 사돈집과는 멀리 떨어져 사는 것이 좋다면서 진수해에 있는 둘째아들 경인네 집에 내려가 살았다. 최구장의 맏아들 경숙은 조개덕 조덕림의 밭까지 청산받아 가졌지만 부모 옆에서 조석으로 모실 생각으로 진수해로 내려가 진수해 남산에 밭을 일구고 살았다. 셋째아들 경민은 조개덕에 밭이 얼마간 있었지만 한 팔을 잃었기에 농사를 짓기 힘들었다. 넷째며느리는 아들 근호를 데리고 국자가로 내려가 시내에서 잡일을 하면서 힘겹게 살았다.
경인의 맏아들 근덕은 조선에서 최구장의 가르침을 받아 일어와 천자문을 익힌 덕에 진수해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는데 결혼까지 하여 맏아들 길운을 보기까지 했다. 그러다나니 경인네 집에서는 근덕의 교원 로임에 경인과 어금이 삯일을 해 번 돈으로 4대가 살다나니 쌀 고생도 모질 했다. 최구장의 노친은 터 밭도 없는 마당에 식칼로 땅을 파고 옥수수 알을 심어 몇 이삭이라도 거두려고 할 지경이었다. 그렇게 어려운 형편에서도 경인과 어금은 삯일을 해 푼돈을 모아 부모를 조석으로 잘 모셨다.
병완이네가 어금을 따라 경인네 집에 황급히 들어갔다. 그때까지만 해도 최구장은 자식들이 둘러싼 누운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을 마중하려고 무진 애를 썼다.
“사돈 어른, 일어나지 맙소.”
병완은 바삐 최구장의 손을 잡아주었다.
최구장은 맥없는 눈길로 그들을 둘러보며 가는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사돈, 앞길이 멀지 않은 거 같으니 고향, 개, 개성이 그리워요. 개성에는 내 조부, 증조부, 산소까지 있어요. 아, 개성은 조상들께서 대대로 살아온 고향이죠.”
최구장은 눈귀로 맑고 뜨거운 눈물을 주르르 흘리었다. 그러자 경숙과 경인, 근덕도 입귀를 씰룩이며 눈물로 두 볼을 적시었다. 어금이랑 명옥이랑 해옥이랑 옷고름으로 눈물을 닦으면서 어깨를 들먹이었다.
“개성은 38선을 그을 때 한국에 들어 갔다는구먼. 그 놈 미국 놈들이 천년 력사가 살아 숨쉬는 개성을 남조선에 그어넣자고 생떼질을 썼다는구만. 쏘련도 동맹국인 미국을 어쩌지 못하고 내줬다는구만. 이젠 얘들도 개성에 있는 조상의 산소를 가 볼 수 없게 됐어요. 하, 어쩌다가 조선이 이 지경이 됐나요?”
병완은 최구장의 손을 잡고 위안했다.
“사돈어른, 근심 말고 치료 잘 하십시오. 이 다음 개성이 또 북조선에 돌아오겠는지 어떻게 압니까? 아무데서나 배불리 먹고 잘 살면 다 고향입니다. 우린 여기에서 두 번째 고향을 건설하고 악착스레 살아나가야 합니다.”
최구장은 맥없이 머리를 끄덕이더니 자손들을 눈 빗질 했다.
경숙은 바삐 “아버지, 우리 여기 있습니다.”라고 하며 다가가 아버지 손을 잡았다.
최구장은 왼손을 힘없이 들어 바깥을 자꾸 가리켰다.
경인과 경숙은 아버지를 부축해 일으켜 마루에 나가 안고 앉았다.
최구장은 남쪽 하늘을 하염없이 바라보더니 입술을 실룩실룩하더니 겨우 말했다.
“너희들의 고향, 명, 명천에나마 갈 수 있어 다, 다행이다. 너, 너희들 될 수 있으면 조선 고향에 돌아가 살아라. 내 죽으면 아버지와 어, 어머니 산소 옆에 묻, 묻어다오.”
“아버님!”
“할아버님!”
최구장은 경인과 경숙의 품에 안긴 채 눈물이 글썽한 두 눈을 스르르 감으니 영영 다시 뜨지 못했다.
며칠 후 진수해 남산의 쓸쓸한 산비탈 황야에는 옛 무덤의 아래에 새 무덤 하나가 생겼다.
생전에 조선의 고향을 지키면서 어떻게 하나 고향에서 살려고 아득바득 하던 시골 선비 최구장, 고향에 부모를 두고 떠날 수 없어 유골을 파 모시고 간도까지 들어온 최구장, 빼앗긴 나라를 되찾으려고 자손들과 마을의 애들에게 “가,나, 다, 라”에 하늘 천, 따지, 감을 현, 누른 황을 배워주며 애쓰던 한 애국선비가 타향 땅에서 영영 잠들었다. 그렇게 고향을 사랑하고 그리워하던 한 영혼이 쓸쓸히 구름을 타고 두만강을 넘고 대동강을 날아 넘어 저 멀리 남쪽 고향 산천으로 훨훨 날아가고 있었다…
       9. 영월구 공안국 준비소조 조장
봄 아가씨가 날마다 산과 들을 더 푸르게 칠을 하고 있었다. 부르하통하가 굽이굽이 흘러가는 개울가에 푸른 칠을 슬슬 해 올라가더니 영월산에 연분홍 천지꽃밭을 척 그려 놓았다. 봄비를 맞은 나무 잎사귀들이 더욱 파랗게 윤기들 났다. 비단결로 얼굴을 만지는 듯한 부드러운 봄바람이 들판과 산들을 품에 안고 다독이자 영월구에는 따뜻한 봄기운으로 차 넘치고 할미꽃과 천지꽃 갖가지 꽃들이 아름다움을 자랑하며 노래하고 하늘하늘 춤을 췄다. 겨우내 잠들었던 삼라만상은 더는 참을 수 없어 봄 마당에 뛰어 나와 봄 아가씨와 어울리어 노닐었다.
상순은 창남과 만호와 함께 지주 집들을 수사하면서 새로운 동향이 없는가를 살폈다.
영월구에서 전번에 국민당 잔여세력과 악질지주들을 대거 검거하여 처단하고 감옥에 처넣었지만 지방에 남은 지주들 때문에 한시도 시름을 놓을 수 없었던 것이다.
점심때가 다 돼 그들은 사무실로 돌아왔다.
“바삐 보내는구먼.”
뜻밖에도 군정대학 때 반장 박성우가 상순의 자리에 앉았다가 일어났다.
“반장! 어떻게 돼 여기 왔소?”
그들 둘은 서로 끌어안고 잔등을 두드렸다.
박성우는 상순을 놓고 마주 바라보았다.
“영월구는 내 고향이 아니고 뭐요? 부모형제들이 다 여기 있는데 왕청으로 가서 어떻게 시름 놓고 일하겠소? 난 조직에 말해 영월구 공안국으로 전근돼 왔소.”
“양?!  잘 됐구먼.”
상순은 입이 함박만 해 걸상을 자기 책상 옆에 끌어당겨 놓았다.
“앉소. 그러잖아도 현과 구에서 이번 국민당 잔여세력을 숙청한 보고 자료를 쓰라고 하는데 골치 아프오. 내나 창남이나 만호나 글을 쓰라면 얼음 강판에 나선 황소처럼 눈깔을 뒤집힐 지경이오. 이젠 일본 유학생 반장이 왔으니까. 한시름 턱 놓게 됐소.”
성우는 상순과 창남, 만호를 둘러보더니 “허허허, 난 또 동무들과 반대로 총을 쏘고 권투를 하라면 등곬에 식은 땀이 줄줄 흐른다오. 그래, 동무들은 나를 문서로 쓸 예산이오? 임무가 과중한데. 허허허.” 라고 하며 사람 좋게 웃었다.
상순은 성미가 불덩이 같고 급한지라 성우를 재촉했다.
“아예 내 사업정황을 말하면 받아쓰오.”
성우는 마지못해 연필과 필기장을 꺼내 들었다. 
“이 사람, 정말 우물에 가서 숭늉 달라 할 지경이구먼. 금방 온 사람 숨 돌릴 새도 없이 부려먹네.”
상순은 습관처럼 세 귀 눈을 지그시 감고 그간 국민당 잔여세력과 악질지주들을 숙청한 경과를 상세하게 죽 이야기했다. 성우는 연신 감탄하면서 상순이 말하는 대로 한어로 줄줄 적어 내려갔다. 
상순은 만호와 창남을 보고 “보충할 게 없소?” 하고 물었다.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없소.” 라고 했다.
자료가 다 정리되자 박성우는 다시 한 번 소리 내 읽었다.
상순은 성우의 문필능력에 저도 몰래 감탄이 나갔다.
“야, 어쩜 내 말 대로 다 적었소? 그 글재간이 정말 부럽구먼.”
그러자 성우는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난 금방 한번 읽어보고 자네 기억력과 논리성에 탄복이 가네. 어쩜 자네 말한 대로 적었는데 참 판에 박은 듯 아주 훌륭헌 서면총화보고자료로 됐단 말이오.”
상순과 박성우가 영월구 허백호 서기한테 자료를 가지고 가서 보이자 혀를 끌끌 찼다.
“성우 동무가 오더니 공안국 준비소조 사업이 척척 돼가는구먼. 상순 동무를 보고 총화 보고 자료를 쓰라고 말한 지 일주일이 됐지만 한글자도 쓰지 못 했소. 그런데 성우 동무가 와서 반나절도 안 돼 벌써 자료가 내 손에 들어오다니. 성우 동무는 정말 얻기 힘든 인재요.”
“아니, 상순 동무가 있는데 제가 어찌 승리의 과실을 빼앗듯이 국장자리를 바라겠습니까? 이 성우는 고향 영월구에 와서 부모형제를 보살피고 문서나 하면 만족합니다.”
성우는 허백호 서기가 국장자리 말을 꺼내지도 않았는데 귀머거리 자기 좋은 소리를 하듯이 횡설수설 늘어놓았다.
상순은 그저 머리를 숙일 뿐이었다.
허나 허백호 서기는 책임일군 답지 않게 입을 잔뜩 널어놓았다.
“상순 동무는 국민당이나 일본 놈들과 싸우는 건 잘 하오. 그러나 공안공작이란 총만 잘 쏴서 되는 게 아니오. 이젠 전국이 거의 해방됐는데 평화 년대에는 싸움을 잘하지만 자료 하나 쓰지 못하고 이후에 어떻게 영월구 공안국 사업을 통솔해 나가겠소?”
성우는 바늘방석에 앉은 듯이 안절부절 못했다.
“저는 유학을 갔다 와서 한어나 조선어나 일어, 지어 영어까지 문제없습니다. 허나 공안국 사업은 반동파들을 잡아내고 진압하는 것이 중점사업이기에 저는 안 됩니다. 권총 하나 방정히 쏘지 못하는 선비입니다.”
“됐소. 동무들과 인사문제를 토론하는 게 아니오. 모든 건 내 머리에 딱 들어섰으니 더 의논하지 마오.”
상순은 기분이 상해 공안국 준비소조 사무실로 돌아왔다. 뒤에서는 창남과 만호가 씩씩거리면서 뒤따라 왔다.
창남은 사무실에 들어오자 문을 절컥 닫아걸고 두덜거렸다.
“일은 누가 했는데 연필을 한식경 밖에 놀리지 않은 선비를 공안국 국장으로 추천하겠다고 말하지 않소? 제길할.”
“공안국 국장을 시킬 거 염두에 두고 현위에 말해 성우를 전근시켰다고 하지 않겠소.”
상순은 세귀눈을 지그시 감고 한참 궁리하더니 천천히 눈을 떴다.
“동무들, 누가 공안국 국장이 되든 괜찮소. 우린 영월구 치안을 위해 계속 부지런히 사업하면 되오.”
“그래도 이건 아니잖소?”
“허백호 서기는 사람을 너무 억울하게 구오.”
창남과 만호는 한참이나 두덜거렸다.
“박씨는 얼굴마저 백지장 같은 게 여자애 얼굴 같아.”
“먹물 냄새나 풍겼지 적들이 덤벼들면 어디 싸울 거 같니? 흥!”
“전번에 가져 온 송이버섯을 잘 먹었다고 하는 걸 보면 허 서기는 박 반장한테서 얻어먹고 춰주는 거 같다니까.”
상순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만하오. 우린 한 마음으로 뭉쳐 원수 놈들과 싸워야 하오. 이후부터 조직의 결정에 복종하고 단결에 불리한 말을 절대 하지 마오.”
그제야 그들 둘은 다발 서너 개나 걸듯 한 입을 억지로 다물어 버리었다.
“술이나 한잔 할까?”
뜻밖의 말에 만호나 창남이나 놀란 눈길로 상순을 쳐다보았다.
“가기요. 내 한턱 내지. 성우를 데리고 올 테니 가서 용구와 영호도 데리고 가기요.”
상순이 우쭐 일어나더니 바깥으로 나갔다.
만호는 뒤따라 나가면서 “왜 박 반장도 데리고 가오?” 하고 물었다.
상순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박 반장이 왔는데 한 잔 나눠야지.”라고 했다.
그런데 상순이 성우를 데리러 갔을 때다.
허 서기가 한창 성우와 조직담화를 하고 있었다.
사무실 안에서 성우의 목소리가 나직이 들리었다.
“상순은 무식해서 국장 감이 아닙니다. 저한테 국장을 맡기면 허 서기를 모시고 일을 잘 하겠습니다. 점심에 제가 술을 한잔 사지요.”
“그래? 술 좋지. 성우 동무는 전도 있는 동무요. 사람관계를 처리하는 거랑 보면 국장감이 옳소. 허허허. 상순에 비하면 어른이거든. 허허허.”
“천만에 말씀을. 하급으로서 웃어른을 잘 모시는 건 의례 예절이고 상식이지 않습니까?”
상순은 허구픈 웃음을 짓더니 발길을 돌려 사무실로 되돌아왔다.
창남은 혼자 돌아온 상순에게 물었다.
“어째 그 백지장선비는 오지 않았소?”
“성우는 허 서기와 한잔 하러 간다네.”
상순은 묵묵히 사무실에서 나가 시내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이윽고 그들은 밥상을 네 개 밖에 놓지 못하는 자그마한 음식점에 가서 둘러앉았다.
상순은 개고기와 소고기, 돼지고기에 물고기 각각 한 접시씩 청해 술상에 올리게 했다.
“그간 거의 한해 동안 동무들은 이 조장을 따라 고생했소. 자, 오늘 통쾌하게 마셔 보기요.”
모두들 술잔을 쥔 채 마시지 않고 근심스러운 눈길로 잔을 비우는 상순을 쳐다보았다.
상순은 빈 잔을 밥상 위에 달랑 놓았다.
“어서, 마시오. 그간 동무들이 술을 마시자고 해도 내가 마시지 못하게 했는데 미안해. 오늘 통쾌하게 마시자고.”
그제야 모두들 한 숨을 후 내쉬며 술잔을 비웠다.
서너 순배 술이 돌아가자 상순은 용구를 마주 보며 말했다.
“용구, 자넨 정말 용감하게 잘 싸웠소. 네가 진극신을 검거했기에 우린 영월구 국민당 반동파 잔여세력을 일거에 소탕할 수 있었네. 이후에 계속 골간이 돼 영월구 치안을 잘 하기를 바라네.”
상순은 용구의 손을 잡았다.
용구는 눈물이 글썽해 울먹거리었다.
“김 조장, 가르침을 잊지 않겠습니다.”
이번엔 영호의 손을 잡고 뒷말을 이었다.
“영호, 자네가 장부귀를 검거했기에 이번 국민당 잔여세력 숙청이 멋진 막을 내리게 됐네. 허나 자넬 제때에 발견해내지 못해 내내 속에 걸리었네.”
영호는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김 조장, 오늘 무슨 말씀을 이렇게 합니까? 김 조장이 우리 집까지 와서 나를 찾아보고 써주지 않았습니까? 이후에 치안사업을 잘 하겠습니다.”
“아, 아니야. 동무들은 우리 공안국의 골간들이오. 헌데 내가 동무들을 사업만 시키고 너무 관심해주지 못해 미안하오. 동무들은 장차 국장으로 될 박성우 동지를 잘 받들어 일해야 하오. 그는 우리 군정대학교 때 반장이고 일본 유학생이오. 그는 조선어는 물론 한어, 일어, 뭐 영어라든가? 다 안다오. 그는 군정대학교 때 내 선생이나 다름없었네. 영월구 공안국은 그와 같이 먹물이 고인 대학생이 영도해야 날따라 발전하는 국내외 정세에 맞게 공안국을 이끌어 치안사업을 잘 할 수 있네.”
상순은 취하지 않았다. 복무원을 보고 술을 한병 더 가져오라고 해 일일이 손수 한잔씩 부어주고 나서 정중하게 말했다.
“동무들에게 부탁하오. 다 함께 박성우 국장을 받들어 치안사업을 잘 하오.”
“픽!”
용구가 코웃음을 쳤다.
“박성우가 뭐 국장이요? 우리 국장이야 김 조장이지.”
“김 조장이야 말로 당당한 국장이지. 군사실력이나 연설실력이나 사업실적이나 당할 자가 누구란 말이오?”
술상이 웅성웅성 했다.
“자, 자, 또 그 말이오? 단결에 불리한 말을 하지 말래도.”
상순은 더 마시면 단결에 불리한 말이 길어질 거 같아 따뜻한 개장국을 한 사발씩 청해 식사를 청했다.
이튿날 아침 상순은 사무실에 나가자마자 창남과 만호와 토론하고 새로운 결정을 내렸다.
공안국 준비소조의 십여 명 공안일군을 크게 네 개 과로 나누어 배치하고 창남과 만호, 용구와 만호를 각각 과장으로 임명했다.
상순은 차렷 자세로 서 있는 네 과장들의 손을 일일이 꽉 잡아들 주었다.
“동무들은 우리 영월구 공안국의 골간들이오. 명심하오. 사업만 사업이라고 하지 말고 이제부터라도 글을 배워야 하오. 허 서기 말처럼 전쟁 때는 목숨을 내걸고 용감하게 싸우는 용사가 필요하지만 전쟁을 하지 않는 평화시대에는 먹물이 꽉 배긴 선비를 요구한단 말이오. 명심해 공부를 하오. 난 집이 가난해 어려서 공부를 하지 못한 게 후회될 뿐이오.”
상순은 문 밖에 박성우가 얼른거리는 것을 보았지만 계속 하던 말을 했다.
“이후에 어떤 변동이 생기더라도 동무들은 공안사업에 충성하고 나라와 인민을 위해 치안사업을 잘 하오. 이후에 권력이 커져도 항상 마음 속에 인민을 품고 인민의 이익을 위해 일해야 하오. 절대 사심을 챙기지 말고 단결을 파괴하지 말고 창끝을 원수들에게 돌려야 하오. 내가 조장을 담임한 기간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일도, 당부도 이것 밖에 없소.”
“명심하겠습니다. 김 조장!”
용구는 머리를 숙이고 팔소매로 눈물을 닦기까지 했다.
“용구, 씨름 일등을 한 천하장사답지 않게 웬 눈물을? 쯧쯧.”
상순은 용구의 어깨를 툭툭 다독여주며 “일을 잘 하오.” 라고 하고나서 그들 넷을 일일이 믿음에 찬 눈길로 바라보며 한숨을 후 내쉬었다.
성우는 상순이 준비소조 조장의 직권을 행사하는 것을 눈을 뻔히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그는 불이 나게 구 당위 사무실로 달아갔다.
“허 서기, 상순 동무는 구 당위 비준도 없이 사사로이 공안국 과장들을 임명하고 있습니다.”
그때 금방 출근한 허 서기는 성우의 보고를 듣자마자 성이 꼭뒤까지 치밀어 노발대발했다.
그는 주먹을 으스러지게 틀어쥐어 책상을 꽝 치었다.
“보자보자 하니 안하무인이구만! 가기요!”
허 백호 서기는 박성우를 데리고 곧추 공안국 준비소조로 화살같이 뛰어갔다.
허 백호 서기는 준비소조 사무실 문을 쾅 박차고 들어가면서 목에 지렁이 같은 피 줄을 세웠다.
“야! 상순아, 삼도만 토비숙청 때도 안하무인이더니 계속 지랄하겠는가?!”
“뭘 잘 못했습니까?”
“야, 이게. 누구 앞이라고! 내 비준도 없이 마음대로 과장을 임명하오?!”
상순은 결코 머리를 숙이지 않았다.
“허 서기! 난 지위 지도자의 파견을 받고 영월구 공안국을 세우러 온 준비소조 조장입니다. 난 영월구 공안국 중층간부를 임명할 권한이 있습니다.”
“지위에서 동무를 보고 지방 당위의 영도를 이탈하라고 했는가?! 당이 총을 지휘하지 총이 당을 지휘하는가?”
상순은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래 공안국은 공산당의 한 개 조직이 아니고 국민당 조직입니까? 당위만 당이고 공안국 당 조직은 당 조직이 아닙니까? 지금은 전쟁시기여서 군관제라는 걸 명심하십시오. 난 군정대학을 졸업한 당당한 중공 당원이고 영월구 공안국 준비소조 조장입니다. 나는 공안국을 건립하고 과장을 임명할 인사권이 있습니다.”
“참 그럴듯한 공산당원이구나. 조직 관념이이라곤 쥐꼬리만큼도 없구먼.”
“내 임명결과를 허 서기한테 회보하려고 하지 않은 게 아닙니다. 이 네 동무는 우리 영월구 공안국의 골간들입니다. 그들 넷은 모두 당당한 과장들입니다. 과장으로 임명한데는 잘 못이 하나도 없습니다.”
“쳇, 고까짓 토끼 꼬리만한 조장을 시키니 우쭐해서 안하무인이구만. 삼도만 토비숙청 때도 기관총 반장을 하면서 최낙현 퇀장한테 나를 고자질 하고 부 연장을 하려고 들더니? 이번에 콧대를 꺾여 봐야 알겠는가?”
상순은 책상을 꽝 치며 일어났다.
“허 서기! 생사람을 잡지 마십시오! 그때 그래 빤빤한 산비탈에 숱한 병사들을 세워 놓은 게 옳았습니까? 통신원도 바로 허 연장 때문에 총에 맞아 죽었습니다. 거기 세워 놓았더라면 우리 연의 숱한 동무들이 희생됐을 게 아닙니까! 마땅히 군법에 의해 허 연장을 처분해야 합니다.”
“이 동무, 이게! 배은망덕한 놈이로구나. 기관총 사격을 잘 한다고 반장으로 승급시켰더니 오히려 길러준 개 발 뒤축을 무는구먼!”
“시비 없고 원칙에 어긋난다면 상전이든 부하든 가차 없이 시비할 것입니다!”
“쳇, 기고만장하기로서니! 조직원칙이 있소? 없소? 사전에 구 당위와 토론도 없이 먼저 간부를 임명해놓고 회보하다니?!”
허백호 서기는 생각 밖으로 맞서는 상순 앞에서 용빼는 수가 없었다.
“어째 유능한 박성우 동무는 아무 관직도 임명하지 않았소?”
“허 서기는 박 반장을 국장으로 추천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상순의 얼굴에는 비웃음이 스치고 지나갔다.
“어째 자기절로 자기를 국장으로 임명하지 않았소?”
“난 용구 과장이 맡은 과에서 일반 공안일군으로 일할 각오가 돼 있습니다.”
허 서기는 물론 성우나 용구 모두들 깜짝 놀라 했다.
허 서기는 꼿꼿한 눈초리로 상순을 노려보았다.
“아마 그럴 각오를 해야 될 거야. 어디 두고 보자.”
상순은 사무실을 맥없이 나가는 허 서기의 잔등에 대고 코웃음을 쳤다.
“난 허 서기한테 송이버섯도 줄게 없고 다만 원칙을 내세우고 시비만 할 예산 밖에 없습니다.”
용구와 창남 지어 허영호까지 허 서기 뒤에 대고 두덜거리었다. 허 서기가 사라지자 그들의 눈길은 대뜸 박성우한테 돌려졌다. 박성우는 그 숱한 증오의 눈길을 받아 당하기 어려워 바깥으로 훌 나가 버렸다.
공안국 준비소조 사무실에는 보이지 않는 팽팽한 기분이 휩싸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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