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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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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26) 댓글:  조회:2043  추천:0  2015-12-15
                9. 무고한 백성들         한길수는 스즈끼 국장을 등에 업고 영팔과 수길 등 졸개들을 시켜 병권일가의 사돈에 팔촌까지 몽땅 잡아들였다. 그러고도 성차지 않아 영월동과 운주동, 가마골, 신흥동, 신설동에서 경찰국 사무청사 짓기와 길닦이에 나오지 않은 사람, 일본 사람을 욕한 사람들을 붙잡아들였다. 심지어 어처구니도 없이 조선말을 한 서당방의 어린이들까지 마구 붙잡아 들이기로 했다.        응삼과 영팔이가 운주동 최구장의 집으로 쳐들어갔을 때였다. 최구장은 한창 서당 방에서 근덕 등 손자들과 마을의 애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있었다. “이 영감이 또 조선 글을 가르쳐? 몽땅 잡아가라.” 최구장은 구부정한 허리를 펴면서 일어나 서당 방에 뛰어 들어오는 영팔을 쏘아보며 물었다. “그래 조선 애들에게 조선 글을 가르치는데 안 되는가?” 응삼은 영팔의 뒤에 숨어 아니꼽게 쏘아보는 최구장의 눈길을 피하였다. “자네들도 내게서 조선 글을 배우지 않았는가?” 응삼은 못들은 척 하였다. 무지막지한 영팔은 “이게 언제라고 묵은 그루에 이밥 먹던 얘기를 합니까? 이젠 대일본제국시대여서 조선어는 필요 없습니다.” 하고 지분거렸다. 응삼도 뾰족한 턱을 쳐들더니 한마디 보탰다. “이젠 조선말을 해도 안 되고 조선어를 배워주거나 배우는 사람들도 몽땅 반일불온분자라고 잡아갑니다.” 최구장은 겁을 먹은 애들을 돌아보면서 “오늘 공부 이만하자. 집에 돌아가라.”라고 하였다. 그런데 영팔은 졸개들에게 홱 손짓하였다. “애들까지 몽땅 붙잡아라!” 그때 아래 방에 있던 경숙이랑 아래 방에서 후닥닥 뛰어 들어왔다. “이보, 영팔이, 한 고향 사람의 낯을 좀 봐주오. 서당 방이라도 꾸리지 않으면 우리 뭘 먹고 살겠소?" “누가 반일활동을 하라고 했는가?!” 영팔이 고함치며 졸개들에게 손짓하였다. “뭘 해?!” 최구장은 그 자리에 뻗치고 서서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았다. “내 무슨 죄 있느냐?” 영팔은 퉁명스레 한마디 내뱉었다. “몰라서 묻습둥? 이젠 몇 번 와서 말렸습둥? 그래도 내내 애들에게 조선어를 배워주고 조선말을 합둥?” 그때 근형이 외까풀 눈을 부릅뜨고 말똥말똥 영팔을 쳐다보다 입을 오물거리더니 욕지거리하였다. “별, 자기도 조선말을 하면서 검정개 돼지 흉을 한다 해라.” 애들은 깔깔 웃어댔다. “정말 검정개 돼지 흉을 한다.” “저게 검정개야.” “호호호” “깔깔깔” 영팔은 애들에게 놀림을 당하자 근형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딱 튕겨놓았다. “아가! 왜 때려?” 영팔은 졸개들에게 고래고래 고함쳤다. “이 반일불온분자 새끼들을 몽땅 체포해 자동차에 실어라.” 애들은 잡혀가는 줄도 모르고 “아하, 자동차에 앉아보게 됐구나.” 하고 떠들며 좋아라고 스스로 자동차에 뛰어올랐다. 주춤주춤 하던 졸개들은 우르르 덮쳐들어 최구장과 경숙, 근형 그리고 애들까지 몽땅 붙잡아 자동차에 실었다. 그러고도 성차지 않아 자위대 놈들은 자동차를 몰고 온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최구장네 아들딸들과 며느리, 사위에 어린애들까지 몽땅 붙잡아 한자동차 꼴딱 싣고서도 모자라 마을에서 조선말을 한 사람들도 몽땅 붙잡아 실었다. 운전실에서 응삼은 영팔에게 “운주동에서만 너무 많이 붙잡지 않았는가?” 하고 물었다. 영팔은 “한 대대장은 많이 잡아올수록 좋다고 했네. 끼무라 대대장의 명령이라네.” 하고 대수롭잖게 말하였다. “애들을 부린 후 어른들만 잡아가면 어때? 이제도 영월동과 신흥동, 가마골에 놈들도 잡아가야지. 괜히 감방이 모자라겠어.” “에이, 아무래나 무고한 백성들이라도 반일불온분자들이라고 많이 잡아가면 공을 세우는 거야. 가마골에선 형만만 내놓고 다 잡아가야 돼.” “그 놈은 왜?” 영팔은 운전수를 보고 차를 몰라 한 후 자기가 더 아는 상 했다. “그것도 몰라? 형만은 포수대에 갔다가 도망쳐 돌아오지 않았어?” 응삼은 실 돌피 같은 몸뚱이를 영팔 쪽으로 기울이면서 귀속 말로 “너 혹시 형만과 함께 최구장에게서 글을 배운 동창생이라고 그러지 않니?” 라고 하며 손가락으로 옆구리를 찔렀다. 영팔은 응삼을 훌 밀어버렸다. “아니야! 무슨 쓸데없는 소리! 끼무라 대대장이나 한 대대장이 수자가 모자란다고 하면 그 놈까지 붙잡아갈 예산이야. 필경 그 놈도 의병 포수대로 달아났던 놈이니까!” 그제야 응삼은 실 돌피 같은 목에 붙은 자그마한 머리를 끄덕였다. 일주일 동안 한길수의 포치대로 영팔과 응삼, 수길은 자동차를 몰고 영월동, 운주동, 가마골, 신흥동에 다니면서 숱한 “반일불온분자”들을 붙잡아 실어다가 우시장 자위대 감옥에 가둬 넣고 혹독한 고문을 들이댔다. 제일 먼저 병권 일가부터 고문했다. 졸개들이 관준과 태화영, 상철과 손비 박만식을 자위대 고문실에 끌어왔다. 영팔은 그들에게 겁을 주려고 호통 쳤다. “몽땅 형틀에 처매라.” “옛!” 졸개들은 우르를 덮쳐들어 병권일가를 몽땅 형틀에 달아맸다. 영팔은 채찍을 들어 손바닥을 툭툭 치면서 호통 쳤다. “관준이, 아버지도 일본 헌병대에 갇혀 있다는 걸 알지? 여기 자위대에서 심문해 자네 애비 같은 엄중한 반일불온분자는 헌병대감옥에 들어가게 되였네. 자네 애비는 중범이야, 애비하구 온 일가를 살리겠는가? 죽이겠는가?" 영팔은 다가오더니 다짜고짜로 관준의 가슴을 채찍으로 짱짱 후려갈겼다. “말해! 반일 파괴분자 병완이 어데 갔어?!” 관준은 머리도 들지 않고 “난 모르오?” 하고 대답하였다. 이때 기겁한 상철의 처 박만식이가 새된 소리를 쳤다. “내 말하겠습니다. 전번에 기준 삼촌이 우리 집에 왔는데 간도로 간다고 했습꾸마.” 관준은 며느리에게 눈을 흘겼고 상철은 만식을 정신 나갔는가 욕하였다. 그래도 상철의 처는 자기 옳다고 우겼다. “그래 병완을 살게 하노라고 우리 죽을게 뭐요?” 응삼은 실눈으로 그들 일가를 살피며 깨 고소해 했다. “옳아, 병완을 살리느라고 하다가 사돈에 팔촌까지 고생할 게 있소? 말하오. 간도 어디로 간다고 했소?” 하고 만식에게 물었다. 만식은 자위대 놈들에게 총 탁에 얻어맞은 후 골병에 걸려 점점 주책없이 부실하게 번져갔다. “내 문께서 다 들었다. 기준 시삼촌은 뭐 석은 영감을 따라 간도로 간다고 했소.” “닥치지 못해?! 저 머저리 같은 년을 어쩌니?” 관준은 며느리 쪽을 가로 쏘아보며 고함쳤다. 그러나 상철의 처 만식은 계속 중얼거렸다. “우리 무슨 시삼촌 때문에 죽을게 있습둥? 난 똑똑히 들었소. 간도로 간다고 했는데도. 모르는척하면서 무슨.” 상철도 욕설을 퍼부었다. “여보, 그만 주둥이를 다물지 못하겠소?” 그래도 만식은 똑똑히 들었노라고 계속 우겼다. 영팔은 관준의 얼굴을 채찍으로 짱 후려갈겼다. “오, 옳지. 그래 이제야 드러났구나. 네놈들이 병완을 삼촌이라고 간도로 빼돌렸구나.” “확실히 그랬소. 장국을 끓여 먹이고 간도로 보냈습구마. 됐소? 다 말했으니 우릴 놔줍소.” 영팔의 호통소리는 만식의 생각과는 정반대였다. “이 반일불온분자를 헌병대감옥에 처넣어라!” “옛!” 졸개들이 우르르 달려들어 관준과 상철을 결박 지어 일본 헌병대 쪽으로 끌고 갔다. 상철의 처가 불기 시작해 병완 일가가 간도로 갔다는 것을 알아냈다고 하자 한길수는 어깨가 으쓱해 자위대 고문실에 나타났다. 그는 번들 이마의 땀을 손수건으로 쓱쓱 닦더니 사무 상에 거만하게 비뚤서 앉아 게슴츠레한 외눈깔로 관준의 처 태화영과 상철의 부실사한 처 만식을 쏘아보았다. “살고 싶은가?” 상철의 처는 “살고 싶 잖고. 내 쉰도 안 돼 죽을 순 없지요. 시어머님도 빨리 얘기하오. 그래야 감옥에서 나가지. 날 풀어줍소.” 하고 애원하며 한길수를 쳐다보았다. 태화영은 옆으로 며느리를 흘겨보면서 말하였다. “그 개 주둥이를 다물어라. 다 말했다고 놔주던? 남정네 잡혀간 걸 보고서도 계속 말하겠니?” 상철의 처는 입을 다물지 않았다. “그래도 말하면 놔준다는데도? 말하지 않고 어쩌겠소? 아버지엄마 가죽이 모자라 째개서 입을 만들었겠소? 말하라고 만들었지. 입 가진 게 말도 못하겠소?” “그래, 말 잘했네. 이후에도 병완과 성칠이 나타나면 우리한테 알리오. 그럼 우린 상으로 황금까지 주겠소.” 한길수는 영팔을 보고 “상철의 처를 풀어주게.” 하고 인정을 베푸는 척 했다. 상철의 처는 바 줄을 풀어주자 손목을 만지면서 두덜거렸다. “어찌나 꽉 동여매놓았는지 아파 죽겠다. 씨, 다 말했으니 집으로 보내줍소. 집만 보내주면 내 기장밥에 장국을 끓여 대접하겠소.” 한길수는 허무한 냉소를 피씩 지었다. “허허허, 그래 좋소. 집에 보내주지.” “감사합니다. 절을 해랍니까?” 상철의 처가 부실하게 절까지 꼽싹 하였다. 며느리의 그 추태를 보고 태화영은 눈을 무섭게 흘기었다. 한길수는 영팔을 불러 뭐라고 쑤군거렸다. “예, 예~ 알았습구마.” 만식이가 고문실에서 슬몃슬몃 걸어 나가자고 할 때였다. 영팔이 뛰어와 만식의 팔을 잡고 옆 간으로 들어갔다. 한길수도 권총집을 뒤로 보내 잡으며 일어나더니 옆간으로 스적스적 걸어 나갔다. “내 며느리를 다치는 날엔 하늘이 용서하지 않을 거야!” 병권이 한길수를 욕설하자 한길수는 “퉤! 미친 연을 메스꺼워 왼눈으로 보지도 않는다.” 하고 욕하더니 문을 쾅 닫고 나갔다. 한길수는 자기 사무실 사무 상에 가 거만스럽게 앉아 만식에게 오른 손 편에 있는 걸상에 앉으라고 하였다. 그는 정신이 드나드는 만식을 돌파구로 삼아 병완과 성칠의 뒤를 캐려고 물었다. “묻는 말만 대답하면 집에 돌려보내겠소. 병완이랑 석은 영감을 따라 간도에 갔다는데 석은 영감이란 누구요?” 만식은 절반은 정신 나간 사람이여서 놔주겠다고 하자 묻는 말을 고지고식대로 대답해버렸다. “석은 영감은 운주동에 있는 우리 집안 작은 시할아버지 벌 됩꾸마.” “음.” 한길수는 세수도 온전히 하지 못해 어수선한 만식의 낯과 헝클어진 머리를 두루 훑다가 물었다. “간도 어디로 갔소?” 만식은 주전자를 보며 “에이씨, 집에 보내 준다고 해놓고 또 가둬? 씨, 목이 말라 죽겠다. 물 좀 주오.” 하고 말하며 목을 매만졌다. 한길수는 고의적으로 친절을 보여주느라고 자리에서 일어나 손수 주전자를 들어 찬 물을 찰찰 넘치게 사발에 부어 주었다. “말하오. 묻는 말을 대답만 하면 밭도 주고 돈도 주고 온 집 식구들을 몽땅 집에 돌려보내주겠소.” 만식은 물을 꿀떡꿀떡 마시고나서 사발을 상 위에 올려놓으면서 눈을 흘겼다. “건데 왜 금방 저쪽 매단 칸에서 내 말했는데도 내 남정 잡아갔소? 이제 풀어주지?” “오, 그래. 다 풀어주지. 말하오. 석은은 간도 어데 있소?” 그러자 만식은 신경질을 화닥닥 썼다. “내 간도라는 데를 가보지도 못한 게 어떻게 아오? 간도가 어느 누구 궁둥이에 붙었는지 누가 아오? 해 넘어가는데 이젠 집으로 보내주오.” 한길수는 음흉한 눈길로 만식을 쏘아보면서 꼬치꼬치 캐물었다. “혹시 그들이 간도 어디로 간다고 외운 적은 없소?” 만식은 곰곰이 생각하는 것 같더니 뭣이 피뜩 떠올랐는지 말했다. “오, 소서구 어쩌고 태평강이 어찌고 합더구마.” “소서구? 태평강?” 한길수가 벌떡 일어났다. 그러나 천천히 냉정해지더니 억지로 상냥한 표정을 지었다. “다시 말하오. 혹시 잘 못 듣지 못했소?” 만식은 머리를 끄덕이면서 “옳습구마. 이태 전에 우리 시할아버지 우리 남정과 소시거우 어쩌고 태평강이 저쩌고 합더구마.” 하고 대답하였다. 한길수와 영팔은 서로 눈길을 마주 치더니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올리 얹는 만식을 뚫어지게 쏘아보았다. “어째 그렇게 보오? 무서워 죽겠다. 씨, 머절싸하게 뉘 아내를 그렇게 게걸스레 음충한 눈깔로 보오?” 한길수는 종이에 소시거우와 태평강을 적어놓은 후 만식에게 또 한 발자국 다가섰다. “성칠은 어데 있는지 모르오?” 만식은 눈으로 한길수와 영팔을 번갈아보며 생각하더니 아무래나 중얼거렸다. “아, 그 작은집 큰 시삼촌을 그러겠구나. 무슨 항일의병이라든가 독립군이라든가 하는데 들어서 뭐 총을 메고 사냥한다던데. 아마 어느 산에 있겠지 뭐?” 만식은 어둑어둑해지는 창문 밖을 내다보더니 “해 지는구나. 이젠 집에 보내주오. 애들이 기다리오.” 하고 애원하였다. 한길수는 횡설수설하는 만식을 쏘아보며 허무한 웃음을 씩 웃었다. “좋소. 놓아주지.” 영팔은 황급히 “아니, 놓아주다니요?” 하고 만식의 앞을 가로 막아 나섰다. 한길수는 영팔을 쏘아보며 끼무라가 항상 자기를 욕하던 말을 써먹었다. “에이,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놈, 여기 오라.” 한길수는 다가온 영팔의 귀에 대고 “저년을 미끼로 내놔야 후에도 병완이나 성칠의 행방을 알지? 저런 미친년이 아니고서야 어데서 알아내겠니?” 하고 쑤군거렸다. 영팔은 연신 머리를 끄덕이면서 “예, 대대장, 참말 묘합니다. 예, 알았습니다.” 하고 감탄하였다. 한길수의 지시대로 영팔은 만식을 보고 가라고 하며 놓아주었다. 그러자 만식은 “내 남정두 놔주오.” 하고 애원하였다. 영팔은 희죽이 웃으면서 “조금 알아볼게 있어 그러는데 인차 보내 줄게.”하고 얼려 보냈다. 만식은 우시장자위대 사무실에서 나가면서 좋아 애들처럼 퐁퐁 뛰며 야단쳤다. 그는 빠금히 열린 고문실 문틈으로 안에 대고 소리쳤다. “시아버님, 고집 쓰지 말구 얼른 말해버리구 집에 가깁소.” 그 소리에 관준은 정신 나간 며느리 쪽을 흘겨보면서 혀를 끌끌 찼다. 만식이가 되돌아서며 뭐라고 또 말하려는 것을 옆에서 영팔이 마구 떠밀어 사무실에서 내보냈다. 만식은 황야에서 뉘엿뉘엿 지는 해를 바라보며 둘째아들 용구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걸음을 재우쳤다. 10. 혹독한 고문 한길수는 개를 잡은 포수처럼 우쭐해서 일본헌병대 고문실에 건너갔다. 거기에는 스즈끼 신임 경찰국장과 끼무라 헌병대대장이 위엄 있게 앉아있고 형틀에는 관준과 상철이가 묶여있었다. 끼무라는 득의양양해 스즈끼 국장의 귀에 대고 뭐라고 하는 한길수를 아니꼽게 흘겨보았다. (개자식! 간에 가 붙었다 슬개에 가 붙었다 해봐라. 개똥이나 생기는가?) 끼무라는 위엄을 돋우느라고 고래고래 고함쳤다. “네놈들이 짜고 들어 기준과 병완을 간도에 빼돌린 죄악이 백일하에 드러났다. 살겠으면 묻는 말을 이실직고하라.” 류강철도 목청을 높여 통역하였다. 끼무라는 노기등등해 묻기 시작하였다. “우린 다 알아! 병완이네가 들어간 간도 소시거우 어데 있쏘까?” 관준은 거들떠도 보지 않고 “우리 부자간이 간도로 가본 적도 없는데 어떻게 아오? ”하고 대답하였다. 끼무라는 스즈끼 앞에서 잔인함을 보여주려고 악을 썼다. “저 놈들을 족쳣!” “하잇!” 가메다와 헌병졸개가 가죽채찍으로 관준과 상철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가죽채찍은 뱀처럼 휴~휴~ 비명을 지르며 그들 부자의 잔등이고 얼굴이고 사정없이 핥아갔다. 고문실안에는 비명소리와 신음소리가 반죽 져 소름이 끼칠 지경이었다. 그러나 살인악마 같은 끼무라와 스즈끼는 통쾌한 낯에 웃음이 넘실거렸다. 가까스로 견디던 관준과 상철은 끝내 까무러치며 머리를 툭 떨어뜨렸다. 끼무라가 손을 쳐들자 채찍질이 멈춰졌다. “물을 쳐!” “하이!” 가메다가 찬물을 퍼 치자 이윽고 상철이가 먼저 머리를 천천히 뜨고 고문실안을 두리번거렸다. 끼무라는 군도자루를 잡고 상철에게 다가가 물었다. “말해! 병완 놈이 어데 갔는가? 소서구란 어딘가? 네 여편네가 이미 다 불었는데도 말하지 않겠는가? 엉?!” 상철은 입귀로 가는 신음소리를 흘리며 겨우 입을 열었다. “간도로 가보지 못한 우리가 어떻게 아오?” 류강철에게서 통역받자 끼무라는 열이 후끈 올랐다. 그는 군도를 쓱 뽑아들더니 처맨 상철의 손을 탁 쳤다. “앗!” 비명소리와 함께 상철의 손가락이 썩 뚝 잘리어 사처로 뿌리어 나갔다. 고문실벽에 뻘건 피가 휘 뿌리었다. 그 비명소리에 관준이 깨났다. “우리 어떻게 아오? 기준은 한길수에게 쫓기어 정처 없이 떠나갔는데 우릴 보고 어델 간다고 말할 수 있었겠소?” 류강철이 관준의 말을 통역하자 스즈끼가 한마디 하였다. “그래도 네놈은 맏조카 아닌가? 병완 놈이 꼭 네놈에게 어데서 산다고 기별했을 게 아닌가?” 관준은 한마디로 뚝 잘라 모르쇠를 댔다. “모르오.” “석은은 어디로 갔어?” “모르오.” “경찰국 감방에 끌어가!” 스쯔끼의 명령이 내리자 가메다와 졸개들은 관준과 상철을 경찰국 감옥에 끌어가뒀다. 감방 안에서 상철은 잘리어나간 왼손에 대고 오줌을 눴다. 그제야 지혈은 됐지만 밤중까지 너무 아파 참을수 없는 고통을 겪어야만 하였다. 한편 헌병대 고문실에서 스즈끼와 끼무라, 한길수가 모여앉아 쑤군거렸다. 끼무라는 병권이 혹시 관준과 상철을 혹독하게 고문한 일을 알면 자기에게 독약이라도 먹일까봐 슬그머니 근심됐다. 그러나 스즈끼에게 뭔가 보여주려고 잔혹한 본성을 감추지 못했던 것이다. 스즈끼는 한길수를 돌아보며 “참 수고 많았소. 진작 한대대장처럼 혹독하게 줴 짜야 뭔가 받아 낼 수 있어.” 하고나서 끼무라를 흘끔 곁눈질해보았다. 끼무라는 헛기침을 하며 한길수를 쏘아보며 물었다. “석은의 친척이 누군지 알아냈는가?” “예. 석은의 가시애비가 바로 운주동의 반일불온분자 최구장입니다.” 끼무라는 “잘 됐네. 최구장을 끌어오라.” 하고 명령하였다. 이윽고 고문실 철문이 쩔꺼덩 열리였다. 하얀 수염이 더부룩한 최구장이 결박당한 채 끌려 들어왔다. 끼무라는 도끼눈으로 최구장을 쏘아보았다. “최 영감, 당신은 대일본제국에 무슨 죄를 졌는지 아는가?” 류강철이 통역해주면서 둬마디 보탰다. “묻는 대로 대답하시오. 새 경찰국장은 독한 사람입니다. 목을 매달아 죽일 수도 있습니다. 옛 스승이라고 생각해 하는 말입니다.” 최구장은 피씩 코웃음을 쳤다. “조선 애들에게 조선어를 가르친 게 무슨 죄냐? 그래 손자들에게 자기 말을 가르친 게 넌 죄라고 생각되니?” 스즈끼가 눈을 뚝 부릅떴다. “뭐라고 지껄여?” 류강철은 그래도 옛날 최구장의 서당 방에서 “가, 갸, 거, 겨.”를 배운 사제 간의 정분이 남아있었는지 그대로 통역해주지 않았다. “무슨 일로 우리 자손들까지 이러는지 모르겠다고 합니다.” 끼무라는 스즈끼 앞에서 직접 심문하면서 먼저 한바탕 노화교육연설을 퍼부었다. “조선이 일본에 합병된 지도 17년도 다 되어간다. 너희들의 이씨 조선의 왕이 자원해서 한일합병서에 도장을 찍었다. 일조합병 후 조선의 땅은 일본의 땅이 되였어. 조선의 백성들은 몽땅 대일본제국의 국민으로 된지 오래된다. 너희들의 조국은 대일본제국이다. 조선 땅의 일본 국민들은 마땅히 제국의 일본말을 해야 하지 조선말을 해선 안 돼. 최구장은 이젠 애들에게 조선말을 가르치지 말고 일본말을 배워줘야 돼.” 최구장은 억이 막혀 단마디로 거절해버렸다. “난 일본 말 모르오.” 끼무라는 조금 부드러운 어조로 바꿔 속내를 내비췄다. “이제부터 류 선생에게서 일어를 배우오. 당신의 제자한테서 일어를 배우면 좀 좋소. 이후에 운주동에 일본 서당을 차리면 최구장을 일어 선생 시킬 예산이오. 애들에게 일본 소설 같은 구수한 얘기를 해줘 보오. 얼마나 재미나 했쏘까? 당신도 애들의 자재 끝에 붙은 밥알이라도 더 뜯어먹는 게 일거양득이 아니겠쏘까?” 스즈끼는 옆에서 듣다 못 해 사무 상을 꽝 치며 벌떡 일어났다. “나니까(뭔가)? 반일불온분자에게 일어 선생을 시켜?!” 스즈끼는 너무 격분해 군도를 잡고 씩씩거리며 헌병대고문실안을 왔다 갔다 하면서 을러멨다. “항상 조선 놈들을 어루만지기만 하니 업신여겨 아무 짓이나 하지. 명천과 우시장이 뭔가? 조선어를 배워주는 서당이 사처에 와글거리고 대일본제국을 모독하지 않았는가? 심지어 우리 삼림파출소를 습격하고 경찰과 헌병들을 살해하기까지 했다. 이게 다 끼무라 대대장이 이제껏 조선 놈들을 어루만지기만 하구 무자비하게 진압하지 못한 때문이 아닌가?” 류강철은 스즈끼의 욕설만은 통역하지 않았다. “하이! 마지가이오 와까리마시다(잘못을 알았습니다).” 끼무라는 숱한 졸개들 앞인 것도 있고 머리를 연신 조아렸다. 가메다나 한길수나 모두 평소에 안하무인격이던 끼무라의 그 모양을 보고 속으로 못내 우스워 터져 나오는 웃음을 겨우 참아냈다. 시어미 역정에 개배때기를 찬다고 끼무라는 졸개들에게 고문실이 떠나가게 호령하였다. "다다끼쯔께(호되게 족쳐라)!" 가메다와 졸개들은 최구장에게 우르르 덮쳐왔다. 그러자 경숙과 경욱이 양옆에서 아버지를 막아 나섰다. “이 놈들이, 어디라고 언감?!” 한길수은 외눈깔을 번뜩거렸다. 영팔과 수길이 달려들어 경숙이네 형제들마저 형틀에 달아맸다. “족쳐라!” “하이!” 졸개들은 호랑이 같은 고함소리가 떨어지자 채찍으로 최구장 부자들을 짱짱 후려갈겼다. 성단과 애들은 비명소리를 치며 아우성쳤다. 여기저기에서 신음소리가 났다. 최구장과 경숙이, 경욱의 얼굴과 해어진 허연 홑옷으로 드러난 잔등과 허리, 가슴과 배에 피로 얼룩진 채찍자국이 얼럭 뱀처럼 쭉쭉 갔다. 끼무라는 성차지 않아 엉거주춤 일어나 직접 채찍을 휘둘렀다. 짱! 짱! 짱! 끼무라는 채찍질하며 욕질했다. “이 놈! 먹물개나 먹었다고 상대접했더니.” 짱! 짱! “늙다리 대갈통이 개X 같구나.” 짱! 짱! “그만!” 끼무라가 하얀 장갑을 낀 손을 쳐들더니 최구장에게 다가갔다. 그 놈은 군도를 빼들더니 시퍼런 군도 끝으로 최구장의 턱을 쳐들었다. “영감태기, 다시 조선말을 하겠소까?” 최구장은 피가 낭자한 얼굴을 겨우 쳐들고 헝클어진 머리카락 밑으로 독기어린 눈길로 끼무라를 쏘아보았다. “조선 사람이 조선말을 하지 않으면 개소리를 치겠는가?” 끼무라는 이를 득득 갈며 “계속 애들에게 조선어를 배워 줄 텐가?” 하고 물었다. 최구장은 한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았다. “밭에다 나무를 몽땅 심게 했지. 서당 방도 없애면 뭘 먹고 살란 말인가?” 끼무라는 악이 날대로 나 “네놈은 조선어를 배워주는 척 하면서 애들에게 반일사상을 불어넣었단 말이야.” 하고 고래고래 고함치며 군도를 휘둘렀다. “그만!” 스즈끼가 하얀 장갑을 낀 손을 들어 제지하였다. 그러나 군도는 최구장의 숫구멍을 빗 씻으며 상투를 썩둑 잘라버렸다. 허연 머리카락이 얼굴이고 어깨고 가슴이고 마구 덮으면서 땅바닥에 흩어져 내렸다. “아버지!” “할아버지!” 이윽고 군도에 숫구멍 가죽에서 피가 주르르 흘렀다. 뻘건 피는 얼굴과 볼을 뒤덮으며 흘러내렸다. 스즈끼가 명령했다. “저 반일불온분자를 경찰국 지옥에 처넣어!” “하이!” 놈들은 최구장과 경숙, 경욱을 경찰국 감옥으로 끌고 가 처넣었다. 스즈끼는 안경 너머 끼무라와 한길수를 둘러보면서 물었다. “저런 불온분자들을 모두 몇 명이나 체포했는가?” 끼무라는 한길수에게 눈을 찔끔 해보였다. 한길수는 외눈깔로도 눈치 챘다. “백여명 체포했습니다.” 스즈끼는 만족한 웃음을 지었다. “참 좋소. 저런 악질 놈부터 없애 버려야 하네. 이걸 두고 닭을 잡아 원숭이를 길들인다는 거네.” 스즈끼는 열 살도 안 되는 근형과 근덕을 둘러보면서 물었다. “이 철부지 애들도 백명 속에 든 반일불온분자란 말인가?” 한길수은 “하이! 요놈 새끼들도 몽땅 최구장 놈의 물을 먹어서 반일불온분자로 됐습니다.” 하고 되는대로 고해바쳤다. “무슨 죄장인가?” “조선 글을 배우고 자위대와 헌병을 욕했습니다.” 스즈끼는 군도자루를 툭툭 치더니 한숨을 길게 몰아쉬었다. “대사는 대사야. 조선 땅의 요런 조선 놈 새끼들마저 반일기치를 들게 하면 큰일이다. 당장 풀어줘라!” 한길수은 외눈깔 통이 떼꾼해 졌다. “풀어주다니요? 어떻게 잡은 놈들인데 풀어줬쏘까?” 끼무라는 눈알을 떼굴 굴렸다. “풀어주라면 풀어 줄 게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놈들. 스즈끼 경찰국장께서는 너무 압박하면 반항할 까봐 걱정한다. 요까지 도리도 몰라?” 그러나 한길수는 이를 뻑뻑 갈면서 납득돼하지 않았다. “저런 놈 새끼들에게 무슨 선정을 베풀었쏘까?” 스쯔끼는 끼무라와 한길수를 둘러보며 말하였다. “악질반일분자만 잡으면 돼? 경찰국마저 무너졌는데 저런 놈 새끼들마저 다 붙잡아 넣자면 감옥이 모자라겠다.” 근형과 근덕은 성단이 등을 따라 감옥에서 풀려나갔다. 한길수는 아쉬운 눈길로 감옥에서 나가는 아녀자들과 애들을 노려보았다. 그는 끼무라와 스즈끼에게 끝없이 병완과 최구장네 일가를 비롯한 고향의 무고한 사람들을 물어먹었다. “최구장과 병완은 사돈 간입니다. 에, 최구장의 둘째며느리는 병완의 큰손녀입니다. 병완놈의 맏아들은 우시장 부근 상우남면 일대에서 포수대를 조직해 항일의병대에 들어간 놈입니다. 지금 그 의병은 몽땅 간도 항일유격대로 번져 먹었습니다. 듣는 말에 의하면 병완 일가는 지금 간도 소시거우란 곳으로 갔다고 합니다.” 스즈끼는 끼무라를 쏘아보며 책망하였다. “음, 언제부터 끼무라 대대장은 그물을 널리 쳐서 큰 고기를 잡은 전술을 쓴다더니. 아직도 고기는 잡지 못하고 그물만 계속 칠 예산인가? 그물도 물에 던져봐서 고기가 없으면 고기가 있음직한 자리를 옮겨 그물을 쳐야 한단 말이오?” “옛, 알았습니다.” 끼무라는 가메다에게 명령했다. “간도 소서구나 소시거우란 지명을 알아보도록 하라.” 그러자 옆에서 류강철이 끼어들었다. “제가 어려서부터 한자를 배워 좀 압니다만. ‘소시거우’라면 가능하게 작을 ‘소’ 자에 서쪽 ‘서’ 자, 골짜기란 ‘구’ 자라 ‘소시거우’란 ‘소서구’란 지명인 것 같습니다." 그는 땅바닥에 손가락으로 한자로 “소서구(小西沟)”라고 쓰기까지 하였다. 그때 응삼이 나섰다. “‘구’가 어디 골짜기 ‘구’ 자냐? 도랑 ‘구’지.” 난처하게 된 강철이 반격을 가했다. “도랑 ‘구’자가 그래 골짜기를 말하지 않니? 국장 앞에서 작작 아는 척 해.” 뒤이어 그는 끼무라와 스즈끼 국장 쪽으로 머리를 돌렸다. “간도 지명이기에 한어음대로 발음에 서쪽 골짜기를 ‘소시거우’, ‘소시거우’라고 부른 거 같습니다.” 그러자 스즈끼와 끼무라는 이구동성으로 “소시거우”, “소서구.” 하고 되 뇌였다. “좋아, 우리 관동군과 간도 헌병대에 소서구를 찾아봐달라고 기별하지.” 끼무라의 말에 스즈끼가 도리머리 질 하였다. “에이고. 또 넓은 물에 큰 그물을 치구 마는 격이 될 거야.” 끼무라마저 눈이 떼꾼해졌다. “건 무슨 말입니까?” 스즈끼는 “간도에 서쪽 골짜기가 얼마나 많다고 어느 서쪽 골짜기에 병완이 자빠져있는지 알겠는가?” 하고 한숨을 후 내쉬었다. 끼무라는 “소서구를 찾는 건 간도 헌병이 할 일이죠. 우린 명천과 우시장 일대 반일분자부터 숙청하면 됩니다.” 하고 말하였다. “무슨 소린가?” 스즈끼는 버럭 성을 냈다. “그런 지역적인 생각을 버리란 말이야. 반일불온분자들을 소탕하는 전반 국면을 고려해야 해. 알만한가? 빠까 요로!” “하이!” 끼무라는 차렷 자세로 군례까지 붙였다. “이제 간도 수도로 불리는 용정 간도파출소 사이또 소장에게 연락해서 간도를 서캐 훑듯 해서라도 반일 괴수 병완 놈과 기준 놈, 성칠 놈을 줄줄이 체포해 서울 남대문감옥에 보내야 해! 밥통 같은 놈들.” “하이!” 끼무라를 따라 한길수, 가메다, 응삼, 영팔, 수길 등 졸개들이 차렷하고 군례를 올렸다. 스즈끼는 끼무라와 한길수이 이른바 “반일불온분자”라고 들씌워 무고한 백성들을 수태 체포해 수자를 채우느라고 감옥에 압송해 온 것도 모르고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흐린 하늘에 먹장구름이 어지러이 흩날리는 을씨년스러운 날씨에 궂은 가을비가 구질구질 내렸다. 11. 닭을 잡아 원숭이를 훈계 스즈끼는 끼무라가 숱한 “반일불온분자”를 체포해오자 끼무라의 숙청에 머리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종적으로 보아 이전에 비해 낫다는 평판이지 절대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었다. 끼무라는 그저 무고한 백성들로 “반일불온분자” 수자를 채워 체포만 해서는 스즈끼의 눈에 들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다시 경찰국장에 복귀할 수 없다는 것을 느꼈다. (닭을 잡아 원숭이를 길들어야지.) 한편 그는 스즈끼 국장이 업동 경찰총국 부국장이기에 여기 몇 해고 우시장에 눌러 앉아있을 놈은 아니라고 생각되면서도 자기의 표현을 지켜보고 있는 그 눈길이 두려웠던 것이다. 그는 시골의 유학자선비로 알려진 최구장이 그렇게 강하게 반발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항상 중용지도를 선양한다던 최구장이 군도 앞에서도 낯빛 하나 변하지 않고 맞장을 뜰 줄은 몰랐다. (최구장을 교수형에 처한다? 아니야, 그는 우리 명천과 우시장에서 너무나도 영향력이 있는 시골선비야.) 착잡한 생각에 잠겼던 끼무라는 사무상에서 일어나 헌병대 사무실 안에서 뚜벅뚜벅 거닐면서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누굴 없애 치우면 좋을가?" 그때 한길수가 헌병대 사무실에 들어왔다. “한 대대장, 중대항일불온분자를 체포한 놈 없는가? 스즈끼 앞에서 처형해야겠네.” 이때라고 한길수는 단도직입적으로 “병권 영감을 죽여 버리시오.” 하고 들이댔다. 그러나 끼무라는 도리머리 질 했다. “안 되오. 그 영감을 무슨 죄로 죽이겠는가?” 한길수는 이를 빡빡 갈면서 말했다. “몰라 묻습니까? 그 영감은 병완의 형이고 성칠의 큰아버집니다. 반일괴수를 돕거나 덮어 감추는 자는 사돈에 팔촌까지 몽땅 처단해야 합니다.” “단지 반일괴수의 형이라는 것만으로 병권을 처단하면 안 돼. 숱한 원수를 만들 게 아닌가? 여긴 대일본제국이지 이씨 조선이 아니야. 자네들 이씨 조선에서는 한사람이 죄를 범하면 사돈의 팔촌까지 처형하였지만 우린 아니야. 우린 서양문명을 받아들인 문명한 제국이야. 법도 사리 밝게 집행하네.” 한길수는 말상으로 도리머리 질 하며 외눈깔을 번뜩거리자 끼무라는 슬슬 구슬렸다. “한 대대장, 병권을 곱다고 살려두는 거 같은가? 아니야. 내 병을 치료한 후 처형하자는 거네. 그 영감태기를 숙사에 인질로 연금해두면 그 엄청난 미끼로 성칠 같은 포수대 출신 항일유격대를 유인해 무자비한 타격을 가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끼무라는 한길수가 외눈깔을 판들거리면서 흥미진진하게 듣는 것을 보고 속내를 더 드러냈다. “내 생각이 틀리지 않아. 조선인들은 마구 압박하고 진압만 하기보다는 얼리고 닥치고 기동영활하게 다스려야 해. 자네의 아들 철주의 주장이 맞네. 핍박하면 할수록 반항이 드세게 되는 법이지. 철주의 말처럼 문명하게 조선인을 다스리는 게 상책이야. 우리 대일본 제국에서는 이젠 무치로부터 문치로 넘어 갔어. 말하자면 일본 문화로 조선 사ㄹ마들을 다스린단 말이네. 장차 내 계획대로 운주동에 일본학교를 차리고 최구장을 회유해서 일어 선생을 시켜. 우리는 한손에 총칼을 들고 한손으로 붓을 들고 조선인들을 다스려야 해. 무력진압도 중요하지만 조선인들의 반일사상을 무너뜨리고 마음을 굴복시켜야 하네. 그장차 노화교육도 염두에 둬야 해. 스즈끼 국장은 사무라이에 불과해. 무사는 싸울 줄 밖에 몰라. 두고 보게. 내 말이 맞지 않는가.” 한길수는 한순간에 납득되지 않았다. 시골의 조직폭력배나 다름없는 그가 어찌 전문훈련을 받은 사무라이 끼무라의 능글스런 계책을 다 터득하랴. 자기 아들도 따라가지 못하는 주제에. 한참 후 한길수는 “최구장을 죽이십시오.” 하고 불쑥 내뱉었다. “최구장도 안 돼.” 한길수는 외눈깔을 내리깔았다. 하여 끼무라는 또 한사람을 물어냈다. “최구장네 막내아들 경석이란 놈이 약 담배장사를 한답디다. 약 담배가 만연되면 대일본제국의 담장을 썩게 할 수도 있습니다. 엄청 큰 청나라도 말기에 아편으로 해 망하나 다름없었지 않았습니까?” “그래, 그 놈도 처단하자. 스즈끼 앞에서 무자비하게 학살해야겠어. 으흐흐. 그놈이 어데 있는가?” “갑산에 감자농사를 지으러 갔다가 약 담배 인이 너무 올라 운주동에 돌아와 최구장네 집에 들어있습니다.” 끼무라는 군도자루를 잡으면서 명령했다. “당장 체포해!” “하이!” 류강철이 옆에서 통역해주자 한길수는 개 잡은 포수처럼 우쭐해 군례를 올리고 바깥으로 나갔다. 당날로 경석이가 일본헌병대 자동차에 압송돼 우시장헌병대 고문실에 끌려 들어왔다. 그때까지도 경석은 약 담배에 취해 흐리터분한 정신상태였다. 한길수은 경석의 집에서 둘 춰 낸 약 담배를 수태 꺼내 끼무라의 책상 앞에 가져다놓았다. 경석은 “내 약 담배를 가져오라!” 하고 손을 내밀었다. 끼무라는 경석의 약 담배 인이 올라 괴죄죄한 낯을 보고 사무상을 땅 쳤다. “심문이 필요 없다. 스즈끼 국장을 모셔오라.” 스즈끼 국장이 헐금씨금 뛰어왔다. 그가 자리를 잡고 앉자 끼무라는 고문실에서 선포했다. “아편의 만연은 온역처럼 우리 대일본제국을 붕괴에 몰아갈 수 있다. 아편장사를 일삼은 최경석을 교수형에 처한다! 즉시 끌어내 처형하라!” “하이!” 일본 헌병들은 다짜고짜로 경석을 끌고 무너진 새 경찰 사무 청사 자리로 끌고 갔다. 거기에는 벌써 명천과 우시장의 숱한 조선 사람들이 끌려와있었다. 교수대에 벌써 두 팔을 꽁꽁 결박당한 경석이가 목에 올가미를 건채 비틀거리면서 쪽걸상 위에 서있었다. 양옆에서 일본헌병들이 팔을 딱 붙잡고 서있었다. 끼무라와 스즈끼는 높은 둔덕 위에 군도자루를 잡고 의자에 앉아있었다. 한길수가 조선말로 고래고래 고함쳤다. “약 담배의 만연은 온역처럼 우리 대일본제국을 붕괴에 몰아갈 수 있다. 약 담배를 심고 약 담배장사를 한데다가 약 담배를 피우는데 인이 박힌 최경석을 교수형에 처한다! 이후에 누가 감히 아편을 심거나 아편장사를 하거나 아편을 흡인하면 최경석처럼 무자비하게 교수형에 처한다!” 끼무라가 하얀 장갑을 낀 오른손을 홱 휘둘렀다. 영팔은 경석이가 밟고 선 발밑의 걸상을 툭 차버렸다. 경석은 올가미에 목이 조여지면서 두 다리를 뻐둑거렸다. 사형장에 끌려나온 최구장과 경인이, 경숙이, 경민은 모두 차마 눈 뜨고 볼수 없어 머리를 숙였다. “경석아!” “경석아!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경숙과 경인이가 참다못해 교수대에서 버둑거리는 경석쪽으로 마구 떠밀고 나가려고 했다. 자위대 놈들이 총칼로 나가지 못하게 막았다. 최구장과 경민이, 경욱은 모두 구슬픈 눈물을 줄줄 흘리며 어깨들 들먹였다. 그러나 스즈끼는 안경을 낀 잔혹한 눈깔을 깜짝하지 않고 얼굴에 살인마의 만족한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끄덕였다. 옆에서 지하상전의 눈치를 살피던 끼무라는 깨 고소해 하더니 사무상을 짚고 벌떡 일어났다. “명천과 우시장의 조선인들은 들어라! 누구든 항일유격대 괴수 김성칠 놈과 김병완 놈을 따라 우리 대일본제국과 맞선다면 저 교수대에 매달린 경석 놈처럼 처단할 것이다. 사돈에 팔촌까지 몽땅 처단한다! 만약 누가 장백산 항일유격대 김용천, 최진달래, 김성칠, 김병완, 김기준을 고발하면 평생 복을 누릴 상금을 줄 것이다.” 교수형은 끝났지만 끼무라는 경석의 아내와 최구장, 경석의 형제들이 경석의 시체를 풀어 내리지 못하게 했다. “썩어 떨어질 때까지 효시해!” “하이!” 한길수는 자위대 놈들에게 “아무도 시체를 다치지 못하게 주야로 지키라.” “예!” 자위대 놈들과 일본 헌병 놈들은 그날부터 교수대에 매단 경석의 시체를 번갈아 지켰다. 끼무라와 한길수는 헌병대와 자위대 졸개들을 풀어 날마다 명천과 우시장 일대 조선 사람들을 강제로 끌어다가 교수대에 둥둥 매달린 채 효시된 경석의 유체를 구경시키면서 겁을 먹였다. “누구든지 항일하고 약 담배에 손을 대면 저렇게 처형할 것이다!” 놈들은 조선백성들로 하여금 죽음으로 공포에 떨게 하려고 획책했다. 한길수는 교수대에 매달린 경석의 유체를 올려다보더니 말 이발을 부득부득 갈면서 끼무라와 지껄였다. “이전에 엄상호와 엄은희도 저렇게 효시했더라면 좋았을 걸 그랬습니다.” 끼무라는 겁에 질린 조선 사람들을 내려다보고 너털웃음을 지으면서 지껄여댔다. “으흐흐, 이게 바로 닭을 잡아 원숭이들을 훈계한다는 걸세! 허허허.” 땅거미가 어둑어둑 지는 우시장 뒷산 기슭 둔덕에 쑥대밭이 돼버린 무너진 경찰국 자리 교수대에 매달린 채 경석의 유체가 가을바람에 처량하게 울고 있었다.  
46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25) 댓글:  조회:1846  추천:0  2015-12-04
                                              6. 개구쟁이의 꿈         기준은 아버지 생일에 대접하려고 상순과 상길을 불러 풀 뽑기를 그만두고 태평강에 가서 물고기를 잡아오라고 하였다.         상순과 상길은 다래끼를 들고 태평강에 고함치며 달려갔다. 조약돌이 다 들여다보이는 강물 속에서는 모래무치랑 잉어랑 버들치랑 은빛비늘을 반짝이면서 지느러미를 한들거리며 노닐었다.         “야, 형님, 물고기 영 많소.” 상순은 물 덤벙 술 덤벙 강물에 뛰어들어 물속의 손바닥만 한 잉어를 잡자고 손을 쑥 내밀었다. 그러나 잉어가 놀라 푸닥닥 튕겨 올랐다가 깊은 물속으로 달아났다. 상순이가 손을 넣어 마구 휘저어도 물고기는 잡히지 않았다. “아~ 씨, 못 잡겠어. 아버지랑 손을 넣으면 물고기를 훌훌 잡아내던데.” 그런데 상길은 그래도 물속에서 손잡이를 하면 간혹 모래무치랑 잡아 버들가지에 꿰었다. 이때 상순도 “어우, 나도 잡았어.” 하고 고함치며 어쩌다 잡은 버들치를 쳐들고 자랑하였다. 그런데 버들치가 매끄러워 두 손에서 쪽 미끄러져 물속에 촐랑 떨어졌다. “아야, 고기 달아났다. 이씨!” 상순은 애나서 자갈을 쥐여 마구 물속에 뿌렸다. 상길은 “그러게 물고기를 잡아서 모래에 뿌리든지 버들가지에 꿰든지 해라.” 하고 일러주었다. 상순은 놓친 물고기 아까워 입이 뽀로통해 손으로 물속을 더듬었다. 상길은 숱한 물고기를 잡았는데 상순은 겨우 딱 잉어 한 마리를 잡고 흐뭇해하였다. “으흐, 끝내 잡았구나.” “또 놓치겠다. 얼른 버들가지에 꿰놔!” “오, 옳소.” 그제야 상순은 제정신이 펄쩍 들어 강변의 가는 버들나무가지를 꿰었다. 반나절이나 고기잡이를 했는데 상순은 겨우 딱 다섯 마리를 잡고 상길은 다섯 꼬챙이나 잡았다. “이걸 가져다 삼춘을 줘.” 상길은 어른스레 자기 고기꼬챙이 두개를 상순 앞에 내밀었다. “형님, 고맙소.” 상순은 고기꼬챙이를 받아 쳐들고 흐뭇해하였다. 상순은 집에 돌아오면서 어쩐지 형님이 준 물고기 두 꼬챙이 보다 자기가 잡은 다섯 마리를 자꾸 쳐들고 보았다. 점심에 기준이랑 밭에서 돌아오자 상순은 물고기꼬챙이를 쳐들어 보이면서 “아버지, 이걸 보오.” 하고 자랑하였다. 기준은 물고기 뀀을 받아 쳐들고 보면서 “에이고, 우리 상순이 물고기를 다 잡아오다니. 참말 장하구나.” 하고 치하하였다. 상우도 싱글벙글 웃으면서 “너 혼자 잡았니?” 하고 물었다. 상순은 흐뭇해 쌔물쌔물 웃으며 “아니, 두 뀀은 상길형님이 준 게요. 난 딱 다섯 마리 밖에 잡지 못했소." 하고 말하면서 자기 잡은 물고기 뀀을 쳐들어보였다. “보란 말이야. 흐흐흐.” 그러자 기준은 “이걸 네 잡은 게야? 혹시 죽은 고기는 아닌지?” 하고 농담을 하였다. “아닙꾸마. 다 산 고긴데.” “응, 눈 먼 고긴 아니야?” “아닌데도. 봅소. 다 눈이 두개씩 있는데.” 기준은 일부러 “눈이 멀지 않고서야 어찌 네한테 잡혔겠니?” 하고 말하였다. 그 말에 상순은 입이 뾰로통해 앵돌아졌다. “아닌데도.” 상순은 입을 빼쭉거리더니 엉~엉~ 울었다. 바빠 맞은 기준은 “아니야. 아니. 아빠가 일부러 농담한 거야. 우리 상순이 이젠 다 컸어. 물고기도 잡고. 울지도 않고." 하고 얼리면서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기준은 상우더러 한 꼬챙이를 장지주네 집으로 가져가게 하였다. 그러자 상순은 막 달려 나와 상우의 손에서 고기 꼬챙이를 빼앗으려고 하였다. “우리 어떻게 잡은 거라고 장 지주한테 가져가오?” 상우는 물고기를 뒤에 치우면서 말렸다. “얘, 제 것만 제 게라면 못 써. 장 지주가 이 숱한 황무지를 주지 않았더라면 우리 어떻게 저 숱한 밭을 일 굴 수 있었겠니? 장 지주에게 물고기도 주고 쌀도 줘야 우리도 잘 살 수 있는 게야.” 상순은 초롱초롱한 포도 눈으로 형을 쳐다보며 재차 물었다. “우리 물고기를 자꾸 가져가면 밭을 하늘만이 주오?” “그래.” “그럼 가져가오.” 상순은 자기 잡은 물고기 대여섯 마리는 아까워 가져가지 못하게 하고 형이 잡은 물고기 뀀을 가져가게 하였다. 이튿날 기준이네와 창준이네는 함흥촌 웃새집에 모여 병완의 생일을 쇠어드렸다. 생일상에는 차 좁쌀떡에 물고기국도 올랐다. 병완은 생선국을 후후 불며 마시고나서 “손자들 덕분에 생선물고기국을 잘 먹었다.” 하고 상길과 상순을 치하해 주었다. 장학산 지주네도 생선국을 배불리 먹고 입이 함박만 해진 것은 두 말할 것도 없다. 그 후부터 장학산의 맏아들 장충국과 둘째아들 장리국, 딸 장미련은 상길과 상순을 따라 태평강에 가서 물고기잡이를 하였다. 애들이 잡아온 물고기가 꽤나 보탬이 되였다. 그러자 창준과 기준은 아예 버드나무가지를 베다가 통발을 만들어 태평강을 따라 내려가면서 한 1 리에 하나씩 서너 개 놓아주었다. 물론 장지주네 충국과 리국의 몫으로 통발을 하나 놓아주었다. 그리하여 애들은 모래톱에 버드나무로 막을 쳐놓고 모래에서 놀다가도 통발에 든 물고기를 걸이어 집으로 가져 오군 하였다. 장학산은 물고기를 좋아하였다. 그는 충국과 상순이랑 물고기를 걸이여가지고 돌아오는 해질녘이면 꼭꼭 마중 와서는 물고기를 받아 들고 보면서 입이 함박만 해 귀밑까지 째질 지경이었다. 밤이면 창준과 기준이 아니면 상훈이나 상우가 통발에 와서 통발의 물고기를 걸여 나무초롱에 담아 들고 돌아 오군 하였다. 장학산도 자기 통발의 물고기를 걸여 들고 가면서 항상 기준과 창준에게 엄지를 내 휘두르곤 하였다. 고향을 떠나 소서구에 온 후 병완 일가와 중국 지주 장학산은 비록 민족이 다르고 빈부차이가 있었지만 형제처럼 가깝게 보냈다. 병완은 항상 자손들을 타일렀다. “고향에서 일본 놈들과 개다리 한길수 성화에 살지 못하게 되였는데 간도에 와서는 될 수 있는 한 새 원수를 만들지 말아야 한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꾹 참구 살아야 한다. 타향에서 땅주인인 장 지주와 화목하게 보내야 한다.” 자식들은 고향에서 한길수와 일본 놈들의 핍박에 배기지 못해 간도로 오게 된 피의 교훈을 회상만 해도 진절머리가 났다. 하여 장학산과 형제처럼 가까이 지내려고 무등 애를 썼다. 그것이 생존을 위해 안간힘을 쓰는 병완 일가의 일방적인 노력으로 치닫고 있었다. 개구쟁이 상순은 꿈도 많았다. 그는 수레바퀴 테를 굴리다 못해 굴렁쇠로 하늘의 태양도 굴려보고 달도 굴려보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웠다. 그 애는 마른 해바라기대로 달도 찔러 떨어뜨려 보려고 휘둘러댔다. 해바라기대로 별을 찔러보려고 하였으나 키가 모자란다고 큰집인 웃새집 돼지우리에 올라가 날창 질을 해보았다. 봄바람도 세찬 하늘에 연을 띄우면서 연에 매달려 하늘을 훨훨 나래치는 노란 꿈도 꾸었고 풍선에 동동 매달려 고향의 칼산에 날아오를 푸른 꿈도 꾸었다. 참말 생각만 해보면 되지도 않을 우습고도 허황한 꿈 이야기이다. 그러나 공상과 모험을 실은 꿈이 있는 상순의 개구쟁이시절은 참말 멋있었다. 모험적인 꿈이 있고 시도하는 것이 있는 어린이는 그만큼 장차 이루는 것도 많게 되는 법이였다. 그래서 병완은 상순의 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허황한 꿈이라도 꿔야 해. 그런 꿈마저 없는 애는 불행한 아이이다. 달도 쫓고 무지개도 쫓아 봐.”라고 했다. 무더운 해볕이 쨍쨍 내리쬐는 여름의 어느 하루였다. 상순은 소서구 남쪽 천지산중턱에서 형수 지새금 앞에서 나가며 밭고랑의 풀을 뽑다가 그만 햇비를 맞게 됐다. 서쪽 하늘에는 해가 두둥실 떠 있었지만 동쪽 하늘에는 검은 구름이 뭉게뭉게 덮쳐오더니 호두알만큼 한 비방울이 후둑후둑 떨어지는 것이었다. 웬 일일까? 한참 내리던 해 비가 멎더니 동녘하늘에 아름다운 칠색무지개가 정말 멋있게 걸렸다. 신선화백이 그림을 그려놓은 듯이 칠색무지개는 북쪽뿌리를 태평강에 박고 남쪽뿌리를 저 멀리 남쪽 벌에서 동으로 흐르는 부르하통하에 박은 채 반공중에 반달처럼 걸려있었다. 그때 상순은 간도에 온 후 처음 그렇게 아름다운 칠색무지개를 보았다. “야, 곱다!” 상순의 소리에 상길이도 함께 비를 맞을 위험도 무릅쓰고 산에서 환성을 질렀다. 그런데 그 칠색무지개가 상순과 상길이 쪽에서 점점 동쪽 계수동쪽으로 움직여갔다. “저러다가 칠색무지개 저 멀리 동쪽으로 달아나버리면 보지 못하겠어!” 상길이 근심하자 상순은 고함쳤다. “우리 저 무지개를 쫓아가보자!” 상길도 이구동성으로 고함쳤다. “옳다! 무지개를 쫓아가보자!” 애들은 무지개를 하나라도 가까이에서 보려고 고함치며 산기슭 아래로 달려 내려가면서 무지개를 쫓아가기 시작하였다. 기준과 창준은 소서구 골 안으로 달아내려가는 애들을 보고 “쯧쯧.” 하고 혀를 찼다. 상순과 상길은 닫다가 진흙탕에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 계속 쫓아갔다. 그러나 아무리 쫓아가도 무지개가 점점 멀리 달아나 지척에 두고서도 붙잡을 수 없었다. 애들은 날지 못하는 것을 한탄하면서 계속 무지개를 쫓아갔다. 그 아름다운 칠색무지개가 졸지에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려서야 모두 실망한 얼굴로 물앉아들 할딱거렸다. 개구쟁이시절은 어찌하여 모든 것이 그렇게도 신비하였는지 몰라. 허황한 일이라는 것도 모르고 무지개를 쫓아가는 꿈도 많은 개구쟁이여서 그렇겠지. 차개 돌로 소서구 남쪽의 칼산도 차 넘어뜨리고 딱지로 소서구 육간 초가집도 날려 보내려는 우둔한 도깨비 시절이었다. 무지개도 쫓고 달도 쫓아가는 꿈도 많은 모험의 시절이었던 것이다. 상순은 잠을 자고나면 새록새록 새 꿈이 생겼다. “아빠, 우리 연을 만들어 타구 저 패용천산 우에 올라가 놀기요.” “정신 나갔니? 연을 얼마나 크게 만들면 사람이 타니?” 상순은 뒷덜미를 긁적거리었다. 며칠이 지나자 상순은 아빠랑 어머니랑 따라 밭에 가서 기음을 매는 형수의 앞에서 곡식포기속의 풀을 뽑다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무슨 생각을 골똘히 하였다. “아빠, 이제 또 칠색무지개가 하늘에 걸리면 아빠 무지개를 붙잡아 우리 집에 숨겨뒀다가 보고 싶을 때 보면 좋겠는데요.” 기준은 너무 어이없어 상순을 피뜩 곁눈질해보며 피씩 코웃음을 쳤다. “이 자식아, 쓸데없는 궁리 말구 풀이나 뽑아라.” “아버진 그저 일 밖에 모르면서. 할아버진 애들은 꿈이 있어야 한다고 했는데.” 한참 풀을 뽑던 상순은 형수를 도와 풀을 뽑다가 아빠한테 달려가 이런 엉뚱한 말을 하였다. “아빠, 난 고향에서 살던 때처럼 상길 형님이랑 서당 방에서 공부하고 싶습구마.” 기준은 상순이가 불쌍해 호미질을 멈추더니 허리를 펴고 상순에게 다가가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알만하다. 우리 집이 가난해 너를 공부를 시키지 못하는 걸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그러나 아침을 먹으면 저녁밥을 먹을 걱정하는 세월에 언제 공부를 시키겠니? 황차 여기 소서구에는 최구장네 서당 방도 없잖니? 너두 풀이랑 뽑아야 밥벌이를 하지?” 그러자 상순은 엉엉 섧게 울었다. “안 돼. 난 공부를 하겠습니다.” “입 다물지 못하겠냐? 공부를 해 밥이 생기냐? 빨리 풀이나 뽑아!” 아빠가 눈을 부라리며 꽥 소리치자 상순은 흑흑 흐느끼면서도 애고사리 손으로 옥수수 포기속의 풀을 뽁뽁 뽑았다. 또 한참 지나자 상순은 주먹을 쥐고 아빠한테 달려갔다. “아빠, 이제 무지개 뜨면 칠색무지개를 타구 고향에 가서 최구장 선생님 서당 방에 날아가 공부를 하면 안 되겠습니까?” 그 허황한 말에 모두들 김을 매다가 호미를 놓고 허리와 배를 붙안고 “껄 껄 껄” “깔 깔 깔” 웃었다. “상순아, 무지개를 타고 어떻게 고향에 가니?” 그러자 상순은 “무지개 우리보다 얼마나 빠르다고 그럽니까?” 하고 정색해 종알거렸다. 사련은 상순이가 기특해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무지개는 탈수 없어. 저 구름이랑 무지개랑 다 올라 탈 수 없는 거야.” 최사련은 상순이가 기죽어 입이 뾰로통해 하자 구슬리였다. “이담 최구장 선생님이 우리 소서구에 오면 널 꼭 공부를 시킬게. 풀만 부지런히 뽑아라. 아빠하구 엄만 꼭 너를 공부시킨다.” 하고 얼렸다. 상순은 많고 많은 꿈은 아빠와 엄마가 안 될 꿈이라고 하자 다 단념해버렸지만 공부를 할 꿈만은 버리지 않았다. 기준은 공부를 하지 못해 항상 눈물 흘리며 징징거리는 막내아들이 불쌍해 서당 방에서 꽤나 공부를 한 조카 상길을 보고 배워주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상순은 쉼마다 상길이가 땅바닥에 꼬챙이로 한글을 쓰면서 배워주면 따라 꼬챙이로 진흙이거나 모래바닥에 글을 쓰면서 재미나게 배웠다. 어느 날, 상순은 아빠에게 “큰집에서 황소를 샀다는데 가서 구경하겠습꾸마.” 하고 떼를 썼다. 그러자 기준은 “오전에 풀을 뽑고 상길 형님과 함께 가 봐라.”라고 했다. “어- 좋다. 난 큰집 황소를 본다.” 상순은 좋아서 깡충깡충 뛰더니 일 밭에 나가 형수의 밭고랑을 타고 조이속의 가라지를 뽑았다. 그런데 기준이가 볼나니 가라지를 뽑지 못하고 조를 뽑은 것을 발견하였다. “이 자식아, 이게 뭐냐? 풀을 뽑는다는 게 조를 다 뽑아버리면 뭘 먹고 살아?” 기준은 애나 상순의 엉덩이를 때렸다. 상순은 너무 아파 상을 찡그리면서 이 밭고랑 저 밭고랑 뛰어넘어 달아났다. 사련은 쫓아가는 기준을 막으면서 뒤에 상순을 숨겼다. “여보, 어느 게 조이이고 어느 게 가라진지 알려 줄 게지. 때리긴?” 그러자 상우가 다가와 조와 가라지를 뽑아 쥐고 상순에게 어떤 게 조고 가라지라는 걸 차근차근 가르쳐주었다. 점심에 상순은 상길을 따라 웃새집으로 놀러 갔다. 그들이 우사에 들어서니 달랑달랑 소 방울소리가 귀맛 좋게 들리었다. 상순은 호기심에 찬 세 귀 눈을 치뜨고 가만히 우사 문을 열고 들어가 두리번두리번 살피였다. 구유에서 먹이를 먹고 있는 황소 목에 건 노란 구리방울에서 달라당달라당 그렇게 귀맛 좋은 소리가 울리는 것이었다. (저 구리방울을 뜯어 가져야지.) 상순은 사위를 기웃기웃 살펴보아도 누가 보이지 않자 구유에 기어 올라갔다. 그는 오동통한 손으로 소대가리를 살살 쓰다듬어주었다. 그러자 둥글 소는 대가리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먹이를 계속 먹어댔다. 둥글 소가 삐죽한 뿌리로 박을 것 같지 않자 상순은 담이 커져서 소 목에 건 소 방울을 살랑 벗겨내 호주머니에 넣었다. 그는 콩, 콩 뛰는 가슴을 가까스로 눅잦히면서 구유 밑으로 앙금앙금 기어 나왔다. 그는 도적고양이처럼 살금살금 우사간 문 옆으로 다가가 빠금히 열고 바깥동정을 살펴보았다. 아무런 인기척도 나지 않는 것을 보고 상순은 문을 열고 꼬리 빳빳해 달아났다. 달랑! 달랑! 소 방울소리가 나자 웃새집 상순의 큰형님 상훈이가 집 문을 열고 소리쳤다. “소도적이야!” 원래 둥글소 목에 건 소 방울은 소도적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소방울이 울리기만 하면 소도적이 들었다고 여기게 되었던 것이다. 고함소리에 상순은 더 빨리 달아났다. 달랑 !달랑! 달랑달랑! 달랑달랑! 빨리 도망칠수록 소 방울 소리도 더 빠르고 높이 울렸다. 당황해난 상순은 호주머니에 손을 넣어 방울을 꽉 움켜쥐고 달아났다. 그러나 소 방울소리는 여전히 달랑달랑 요란하게 울렸다. 뒤에서 상훈 형님이 쫓아오면서 “거 상순이 소 방울을 훔친 게 아니냐?” 하고 고함쳤다. 바빠 맞은 상순은 호주머니의 소 방울을 꺼내 강냉이 밭에 활 던졌다. 그제야 소 방울소리가 울리지 않았다. 상훈 형님은 그가 강냉이 밭에 던진 소 방울을 주어들고 집으로 돌아갔다. 후에 상훈 형님은 집에까지 찾아왔다. 때마침 기준과 상우도 집에 있었다. “삼촌, 저놈이 글쎄 우리 소 방울을 훔치지 않았겠소?” 상순은 베개를 들어 얼굴을 가리면서 벽 구석에 숨었다. 기준이가 상순의 손에서 베개를 빼앗아내고 귀 쌈을 찰싹 갈겼다. “이 놈 새끼, 다시 훔쳐봐라. 네놈의 손목을 작두로 베 버리겠다. 옛날부터 바늘도적이 소도적으로 된다고 버릇을 떼지 않고 되겠니? 이 놈 새끼, 다시 훔치겠니?” 상순은 아픈 얼굴을 손으로 만지면서 겁기어린 눈으로 아버지를 올려다보면서 울었다. “다시 훔치지 않겠습구마.” “다시 훔치면 작두로 손을 베 버리겠어. 알았니?” 상순은 흑흑 흐느껴 울면서 “다신 훔치지 않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상훈은 그만하면 된 것 같았다. “상순아, 이 소 방울은 네가 훔친 거니까 주지 않겠다. 이후에 내 장마당에 가면 더 좋은 놀음 감 방울을 사다가 줄게.” 그러자 상순은 상훈 형님을 쳐다보면서 눈물범벅이 된 얼굴에 가는 미소의 그림자가 스쳐지나갔다. 후에 정말 상훈은 진수해 장마당에 갔다가 아주 고운 방울을 사다가 주었다. 상순은 입귀가 귀밑까지 째질 지경으로 함박꽃웃음을 지으며 흐뭇해하면서 방울을 가지고 애들 속으로 가서 달랑달랑 방울소리를 울리면서 즐겁게 놀았다. 그 후 상순은 정말 남의 물건이라면 손을 대지 않았다. 며칠 후 상순은 어머니 앞에서 풀을 뽑다가 아버지를 보고 “큰집에서는 황소를 샀던데 우리도 황소를 삽시다.” 하고 청을 들었다. 그러자 기준은 “큰집에는 할아버지가 목수 질해 모아두었던 돈이 있어 샀다. 허나 우리 집엔 황소를 살 돈이 어데 있니?” 하고 대답하였다. 며칠 후 병완이가 둥글 소를 몰고 기준이네 집에까지 찾아왔다. “너네도 황무지를 개간해 밭이 마흔 짐은 되는데 황소 없이 어떻게 농사를 짓겠니? 이 둥글 소를 거둬서 써라.” 그러자 기준은 아버지에게서 둥글 소고삐를 받아 쥐고 기뻐 어쩔 줄 몰라 하였다. “아버지, 고맙습꾸마.” 상순은 더구나 좋아서 손 벽까지 치면서 퐁퐁 뛰었다. “야, 좋아라. 우리도 황소가 있어!” 그는 집안으로 쌩 달려 들어가더니 농궤 속에서 구리방울을 꺼내왔다. “아버지, 이건 큰형님이 사 준 건데 둥글 소목에 겁시다. 달랑달랑 소리나 도적놈을 막게.” 기준은 소 방울을 받으면서 산이 떠나가게 웃었다. 병완은 막내손자 머리를 쓰다듬어주면서 “에이유, 요 귀여운 것아 다 컸구나.” 하고 치하해주었다. 황소에게 가대기를 메워 옥수수 밭에 가대기 질 하니 밭고랑이 깊숙이 패면서 흙이 퍽 부드러워졌다. 장 지주도 가대기질까지 하는 것을 보고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병완 온 일가가 죽기내기로 황무지를 일구고 밭을 옥답으로 가꿔나갔다. 상순은 코피 터지게 곤하도록 밭의 풀을 부지런히 뽑았다. 밥벌이를 하자는 것도 있었지만 어머니가 풀을 부지런히 뽑으면 이담 최구장이 오면 공부를 시키겠다고 하였기 때문이었다. 사실 사련은 만삭이 된 몸으로 앉은걸음을 하면서도 기음을 매며 일손을 도왔다. 그녀는 누구보다도 힘들어 기음을 맬 때면 항상 뒤에 떨어졌다. 그때마다 상순이 어머니 앞에서 곡식 포기 속의 풀을 뽑아 주어 얼마나 도움이 됐는지 모른다. 사련은 걀쭉하게 생긴 맏며느리가 사리에 밝다고 속으로 혀를 끌끌 차군 하였다. 상순은 풀을 뽑으면서도 고향이 그리웠다. 고향 최구장의 서당 방에서 공부를 하고 싶었다. “날개라도 있었으면 고향에 날아가 최구장 선생님 서당 방에서 공부하련만.” 상순은 별들이 총총한 밤이면 턱을 고이고 초롱초롱한 까만 포도 눈으로 고향이 있다는 남쪽 밤하늘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7. 주색에 미친 경찰국장 고향 명천에는 불볕이 쨍쨍 내리쪼이는 무더운 여름 대지를 휩쓸었다. 산과 들은 불로 지지는 듯이 홧홧 달아올랐다. 경찰국의 잿빛 기와들도 녹아내릴 듯이 열기를 뿜었다. 승냥이 아가리처럼 떡 벌린 경찰국 대문 양옆에서 번뜩이는 일본 보초병 놈들의 서슬 푸른 총칼과 혀를 길게 빼들고 헐떡거리는 사냥개 아가리도 행인들에게 무시무시한 공포감을 주었다. 병권은 묶인 채 영팔과 가메다한테 끌려 우시장 옛 경찰국 사무실로 들어갔다. (또 무슨 짓을 하자고 붙잡아 갈까?) 새 경찰국 사무청사가 무너졌지만 끼무라는 펀펀히 살아 있지 않겠는가. 병권이 들어서는 것을 보고 끼무라는 뜻밖에 의자에서 일어나 마중까지 했다. 옆에는 류강철이 기생 풀처럼 딱 붙어 따랐다. “어서 결박을 풀어주지 못할까?” 끼무라는 영팔에게 흰 눈알까지 데굴데굴 부라리면서 호통쳤다. 영팔은 눈을 내리깔고 내키지 않는대로 병권을 결박한 바줄을 풀어 주었다. 끼무라는 병권을 부축해 일궈 세우면서 부드러운 어조로 “오느라고 수고 많았소. 존경하는 김 의사, 어서 여기 앉으십시오.” 하고 너스레를 떨었다. 류강철의 통역을 들은 병권은 속으로 무엇이 울컥 치미는 것 같았다. (이 놈이 왜 이래? 메스꺼울 정도로.) 끼무라는 병권이가 걸상에 앉자 옆에 다가와 앉으면서 억지로 상냥한 표정을 지었다. “김 선생, 오늘 먼저 살벌한 현장부터 구경시키지.” 끼무라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가기요.” 하고 병완을 데리고 바깥으로 나갔다. 끼무라는 찌프차에 병완을 싣고 어디에론가 먼지를 새뽀얗게 일구면서 떠났다. 찌프차는 일각도 되지 않아 우시장 뒷산 둔덕진 곳으로 달려 올라갔다. 경찰국 새 사무청사 터는 벌거숭이기둥이 몇 대 세로 누어있었고 대들보랑 서까래랑 가로 세로 어지럽게 땅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병권은 무너진 경찰국을 보니 속이 시원했다. (이 놈도 꽉 깔려 썩어질 게지.) 끼무라는 무너진 경찰국 사무 청사에 제나 지내는 듯이 머리를 숙이고 묵념에 잠겨 있더니 한참 후에야 무겁게 입을 열었다. “김 선생, 우리 경찰국 사무 청사는 지은 지 3년 밖에 안 됐는데 이렇게 처참하게 무너지고 말았소이다. 큰 눈이 내려 무게를 감당 못한 것도 있네. 허나 그게 제일 큰 원인이 아니야. 저걸 보게. 기둥이랑 대들보랑 서까래랑 몽땅 벌레가 먹은 나무였단 말이네. 이런 썩박나무로 지었으니까 견들 리 있겠어?!” 끼무라는 무너진 터를 손가락질하면서 병권에게 하소연했다. “그날 찌프차를 타고 우시장시내에 간 다음 무너졌으니 다행이었지. 깔려죽지 않은 게 천명이네. 우리 대일본제국의 헌병과 경찰 십여 명이 깔려 죽었단 말이야.” 끼무라는 악몽에서 헤어나려는 듯이 말상을 홰홰 가로 흔들더니 욕지거리를 해댔다. “당신 동생, 병완 놈은 무너지라고 고의적으로 벌레 먹은 썩박나무로 지었네. 전번에 자동차가 새로 닦은 길에 놓은 다리를 지다다가 다리가 쿵 꺼졌단 말이야. 그 바람에 자동차가 강바닥에 처박히면서 숱한 수류탄이 폭발했네. 일본군 여섯에 자동차와 군수물자가 몽땅 하늘로 날아났네.” 끼무라는 발로 발밑의 돌멩이를 탁 걷어차 버리면서 고래고래 고함쳤다. “병완 놈은 천번만번 죽여도 원수를 못할 놈이야!” 그는 턱을 손으로 고이고 무너진 경찰국 터에서 뚜벅뚜벅 거닐면서 무슨 궁리를 한참 하다가 우뚝 멈춰 섰다. “병완이랑 두만강을 건너 간도로 도망쳤든 현해탄을 건너 우리 일본 섬에 갔든 이젠 추궁하지 않겠소이다. 전번에 김 선생을 혹독하게 매질했는데 미안하오다.” 한참 후 끼무라는 뒷말을 이었다. “성칠 놈도 이젠 내 추궁할 놈이 아니네. 몇 해째 우리 명천에 얼씬도 못해. 그 놈은 간도의 우리 관동군에서 척살할 놈이야.” 병권의 눈치를 흘끔 곁눈질하고 나서 끼무라는 코 수염을 쓰다듬더니 음탕한 웃음을 지었다. “김 선생, 인생이 얼마나 길다고? 선생이나 내나 이젠 다 늙은이가 됐구려. 오늘부터 우리 경찰국 숙사에 있으면서 나와 함께 질탕하게 놀아 봅세.” 강철이 통역하자 병권은 머리를 들고 가재수염을 쓰다듬는 끼무라 국장을 쳐다보았다. (왜 슬슬 감겨들기까지 하면서 이래?) 끼무라는 햐얀 장갑을 낀 손으로 병완을 찌프에 올라타라고 손짓했다. 찌프는 끼무라와 병권, 가메다, 류강철을 싣고 우시장 시내로 먼지를 새뽀얗게 일구면서 달려갔다. 군용 찌프가 멈춰 선 곳은 우시장에서 유명한 기생집(기실 위안소임) 사꾸라관이었다. 이층으로 된 사꾸라관은 높다란 토성 안에 파란 벽돌과 빨간 벽돌로 무늬를 놓아 지은 아담한 집이었다. 병관은 끼무라를 따라 처음 왔기에 무슨 곳인지 잘 알지 못했다. 이층으로 올라가는데 화복을 입고 요염하게 치장한 일본 기생(위안부)들이 와르르 쏟아져 나와 끼무라의 양팔을 껴안고 안으로 들어갔다. “끼무라 교꾸쬬(끼무라 국장), 혼또니 히사시부리데스네(정말 오랜만인데요)." 끼무라는 아양 떠는 기생년의 하얀 얼굴로부터 어깨, 허리까지 쭉 내리 매만지면서 "하나꼬, 우쯔꾸씨이데스네(아름답구나.)" 하고 말상을 끄덕였다. 병권은 오지 못할 곳에 끌려왔다고 속궁리하면서 주춤 멈춰 섰다. 그때 끼무라가 기생 년들에게 “오늘 김 선생을 잘 모셔라.” 하고 말하면서 뒤돌아보다가 말뚝처럼 서있는 병권을 손가락질 했다. “긴쎈세이(김선생), 하이레(들어와)!” 그래도 병권 영감이 머뭇거리자 끼무라는 기생 년들을 데리고 와서 병권의 팔을 마구 끌고 기생집 안으로 들어갔다. 끼무라는 미리 모든 것을 준비시킨 것 같았다. 커다란 널 바닥을 깐 방에 큼직한 요리상이 미리 차려져 있었다. 모두 조선에서는 보지도 못한 일본 요리였다. “김 선생, 앉게나. 오늘 이 예쁜 아가씨들을 끼고 실컷 마시고 놀아 보자고.” 강철의 통역을 듣자 병권은 일어나 가려고 했다. 끼무라는 억지로 마구 눌러 앉혔다. 뒤이어 일본 기생 년을 하나 옆에 앉혀놓고 우유 빛 얼굴을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요 아가씨 얼마나 예뻐? 아끼꼬, 김 선생을 잘 모셔.” 그러나 류강철은 왕청같이 통역했다. “영감, 원래 예쁜 조선 위안부들이 있었는데 옥설이랑 만금이랑 이젠 나이를 먹어서 간도에 종군위안부로 보내고 없습꾸마. 젊은 일본 아가씨들의 맛이나 보란 말이네. 우리 조선 사내들이 일본 아가씨들을 깔고 뭉개고 짓밟아버리잔 말입꾸마. 이건 성 보복이 아니고 뭡니까? 일본 놈들이 우리 조선 여성들을 얼마나 무참히 짓밟았습니까?” 병권은 듣다 못 해 제지했다. "됐네. 날 보고 일본 여성들을 유린하는 미친개로 되란 말인가?" 끼무라는 손수 술을 따라 병권에게 올렸다. “자, 자, 뭐라고 이래? 한잔 마셔.” 병권은 눌러 앉은 것만큼 술을 마시지 않을 수도 없어 한잔 받아 굽을 냈다. 처음에는 마시는척하자고 했는데 옆에 앉은 아끼꼬란 기생 년이 입에 요리를 짚어넣는다 술을 따른다하면서 어찌나 권하는지 마시지 않을 수 없었다. 한참 술을 마시다가 한 아가씨가 축음기를 틀어놓았다. 그러자 일본 노래 “사꾸라" 곡이 유유히 흘러나왔다.   사꾸라 사꾸라 아오이노 소라와 …   끼무라는 옆에 앉은 하나꼬의 허벅다리를 슬슬 매만지다가 벌떡 일어나 일본 춤을 추기 시작했다. 오른 손바닥을 짝 치며 왼발을 내딛고 손을 바꿔 짝 치고 오른발을 쳐들었다. 옆에 앉았던 하나꼬와 아끼꼬도 일어나 끼무라의 앞뒤에 잔등을 대고 딱 붙어서서 함께 춤을 짝짝 춰댔다. 뒤이어 강철과 가메다도 보다가 일어나 그럴듯하게 춤판에 어울렸다. “긴상(김군), 일어나 춤을 춰.” 류강철이 말하였으나 병권은 종잡을 수 없는 연회 판에 뒤숭숭해 구경만 했다. 끼무라는 기분이 좋아 입이 합박만 해 만면춘풍이었다. 한참 춤을 추고 나서 끼무라는 또 병권에게 술을 따랐다. “김 의사, 내 듣기로 당신은 조의에 유명하다더구먼. 내 몹쓸 병에 걸렸는데 잘 치료해주게나. 그럼 당신 동생과 조카 죄를 묻지 않겠네.” 그제야 병권은 오늘 끼무라가 자기를 불러 깎듯 대한 원인을 알게 됐다. “무슨 병이요?” 끼무라는 하나꼬의 허리를 껴안고 몸을 흔들거리었다. “건 조용할 때 얘기하지. 얘들 앞에선 사내 자존심에 말하지 못할 일이네.” 끼무라가 류강철의 귀에 대고 나직이 귀속 말을 했다. 류강철의 통역을 듣자 병권은 대개 끼무라가 무슨 병에 걸렸다는 것을 짐작했다. 하나꼬나 아이꼬는 고까짓 춤을 몇 번 추고 온몸에 땀을 줄줄 흘리는 끼무라를 번갈아보면서 키드득거렸다. 끼무라는 자기를 비웃는 것 같아 눈에 거슬렸다. “이 쌍년들, 웃긴 왜 웃어?” 기생들은 손으로 입을 딱 막고 웃음을 겨우 참았다. “아, 난 이 숱한 고운 아가씨들을 두고 늙어 죽을 거 생각하면 아쉽고 한스럽네. 안되겠어. 내 오늘 술을 마셨다만 네 년들을 하나하나 죽여 줘야겠어.” 끼무라는 옆에 있는 하나꼬를 붙들고 일어나 옆칸으로 들어갔다. 이윽고 안방에서 사내의 “윽, 윽, 윽.” 힘겨운 소리와 아가씨의 고양이 울음소리 같은 신음소리가 뒤섞여 흘러나왔다. 기생 년들은 서로 눈치를 맞추면서 키드득거리면서 뭐라고 몇 마디 주고받았다. 가메다도 낯이 지지벌개지더니 볼에 난 털 한 모숨을 슬슬 매만지면서 기생 년의 풍만하고 야들야들한 젖가슴에 손이 스르르 들어가 주물럭거렸다. 류강철도 게 침을 흘리면서 기생 년의 앵도 같은 입술에 키스를 뻑뻑 안겼다. 안방에서 황소숨소리가 멈추더니 “어휴-” 하고 맥 빠진 끼무라의 한숨소리인지 한탄소리인지 김빠진 공에서 새나오는 김 소리처럼 흘러나왔다. 이윽고 하나꼬가 기름에 얼룩진 얼굴을 닦으면서 끼무라를 부축해 나왔다. 끼무라는 아직도 김빠진 공처럼 후줄근한 허리를 손으로 매만지며 비틀거리면서 술상에 와서 버려지는 보리주머니처럼 훌러덩 물앉았다. “오늘 술을 그만 했소까. 김 의사, 내 병이 그저 병이 아닌 것 같네. 잘 치료해주면 당신네 일가를 다 부자로 만들어 줄게.” 기생 년들은 “그럼 얼마나 좋겠어요?” 하고 일본 말로 주고받으면서 섬섬옥수로 병권에게 술을 따라 권했다. 병권은 속으로 색마 끼무라가 기생집출입이 잦아 성기능이 쇠약해졌다는 것을 어림으로도 짐작할 수 있었다. 사실 끼무라는 성칠이나 진달래 같은 항일투사들을 잡지 못해 너무 정신압력을 받은데다 주색에까지 빠져 성기능이 엉망진창이 되었던 것이다. 술이 거나하게 된데다 하나꼬나 아끼꼬를 데리고 제대로 놀지 못한 끼무라는 신경질이 나 변태적으로 하나꼬와 아끼고의 허벅다리를 꽉 꼬집어놓았다. 하나꼬와 아끼꼬가 너무 아파 비명소리를 내자 끼무라는 재미있다고 변태적으로 "허허허" 하고 웃어댔다. 끼무라가 한창 흥에 겨워 가메다를 시켜 술상 옆에서 하나꼬를 재껴 놓고 강간하게 했다. 가메다는 처음에는 머슥머슥해 있다가 하나꼬의 치마를 걷어 올리고 자기 괴춤을 내리깠다. 하나꼬는 모로 얼굴을 살짝 돌리더니 이를 악물고 열이 후끈 가메다를 자기 몸 속으로 받아들였다. 가메다는 눈을 지그시 감고 하나꼬의 몸 위에서 온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미친듯이 요동쳤다. “핫, 하, 하!” 끼무라는 구경하면서 야욕이 발작해 좋다고 손 벽을 쳤다. 그때 미닫이문이 쫘르륵 열렸다. 뜻밖에 전신무장한 일본 헌병들이 눈알을 뚝 부릅뜨고 쏘아보며 서있었다. “누구야? 네놈들이 언감 끼무라 국장의 연회석에 뛰어들고도 살기를 바라겠느냐?!” 가메다가 황급히 바지를 춰 입으며 일어나 꽥꽥거렸다. 허나 헌병들은 물러서기는 고사하고 총신으로 가메다의 면상을 탁 쳤다. "아이쿠!" 군관인 듯한 자가 꽥꽥 을러메기까지 했다. “업동 경찰총국에서 내려왔어. 누가 끼무란가?” 그제야 정신이 펄쩍 든 끼무라는 “하이!” 하고 일어나 차렷 군례를 딱 붙였다. 그런데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옆의 하나꼬 엉덩이를 걷어차더니 몸을 가누지 못하고 쿵 넘어졌다. 가메다와 류강철이 양옆에서 끼무라를 부축해 일으켰다. 기생 년들은 화복을 바로잡으면서 자기 칸으로 우르를 달아나갔다. “빠까야로, 이른 아침부터 주색에 빠졌으니 정사를 그렇게 돌보지 못하지. 경찰국으로 끌고 가.” 이제껏 명천과 우시장에서 내노라고 우쭐거리던 끼무라는 안하무인격이던 경찰국장의 기가 어디로 사라졌을까. 다행히 기생 년들이 나갔기에 덜 창피스러웠다. 끼무라를 탄 찌프차를 압송하듯이 업동 경찰총국의 깜장승용차와 오토바이들이 앞뒤 양옆으로 에워싸고 옛 경찰국 사무청사로 먼지를 새뽀얗게 일구면서 달려갔다. 옛 경찰국 사무 청사로 들어가자 헌병연대의 한 군관은 끼무라 국장의 사무 상에 가 척 들어앉았다. 옆에서 문서관이 끼무라에게 소개했다. “이분은 신임 업동 경찰총국 부국장이며 헌병연대 스즈끼 부연대장이시오.” “하이!” 끼무라는 의자에 앉으려다가 엉거주춤 일어나 차렷 자세로 경례를 붙였다. 아까보다는 그래도 제정신이 펄쩍 들었는지 덜 비틀거렸다. 스즈끼는 끼무라가 창피해 할 것 같아 류강철과 가메다를 나가라고 손짓했다. 국장 사무실에는 스즈끼 부연대장이 데리고 온 전신무장한 헌병 십여 명과 술에 녹초가 된 끼무라만 남았다. 스즈끼는 사무상을 꽝 치며 벌떡 일어났다. “경찰 국장이란 자가 뭔가? 이른 아침부터 위안소에서 위안부들을 끼고 술을 퍼 마시다니? 엉?!” 끼무라는 머리를 조아리면서 “하이! 잘못했습니다.” 하고 중얼거렸다. “경찰국 사무청사 다 무너지고 군용트럭이 다리에서 떨어져 폭발했다. 그런데도 네놈은 여기서 술을 처먹고 X이나 하고 있어? 경찰국과 다리가 무너지게 한 원흉도 다 놓쳤다면서? 지금 어떤 땐가? 백두산을 중심으로 조선반도 북부 개마고원과 간도에는 항일유격대가 욱실거리고 있어. 그놈들은 중국대륙으로 진군하려는 우리 관동군을 위협하면서 뒷다리를 잡아당기고 있어. 자넨 명천과 우시장에서 조선 사람들을 참 잘도 다스렸다. 성칠은 유격대 한개 소대를 만들어 가직 도망했어.” 끼무라는 차렷 자세로 머리를 숙이면서 “잘못했습니다. 제발 목숨만 살려주십시오. 일본제국을 위해 목숨을 다 바치겠습니다.” 하고 말했다. 스즈끼는 끼무라의 귀쌈을 찰싹찰싹 갈겼다. “하이!” 끼무라는 차렷 자세로 군례를 척 붙였다. 스즈끼는 사무 상에 돌아가 앉더니 안경알 밑으로 끼무라를 쏘아보았다. “네놈도 대일본제국 군법을 알겠지? 네가 범한 죄과는 군법에 의해 총살해도 시원찮아.” 끼무라는 썩박나무 넘어가듯 풀썩 물앉으면서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는 스즈끼의 입에서 무슨 말이 튀어나올지 몰라 감히 쳐다보지도 못했다. “일어나!” “하이!” 끼무라는 일어나 군례를 척 붙이고 머리를 숙이면서 말했다. “죽을 죄를 졌습니다. 스즈끼 연대장, 난 군인입니다. 대일본제국을 위해 나절로 군도로 배를 가르게 해주십시오.” 스즈끼는 안경 알 밑의 눈알을 떼굴 굴리더니 사무 상에서 일어나면서 코 방귀를 뀌었다. “흥! 그렇게 쉽게 죽게 할 수 없어! 한번 기회를 더 주지. 너의 경찰국장을 철직하고 내가 잠시 대신하겠다. 너의 헌병대대 대대장직무만 보류한다. 하루빨리 경찰국 사무 청사와 다리 공정 총 도감 김병완의 행적을 찾아내 성칠이랑 유격대 꼬리를 밟아라!” “하이! 목숨 바쳐 임무를 완수하겠습니다.” 끼무라는 목숨을 겨우 부지하고 잔등에 식은땀이 쭉 끼쳤다. “이제 다시 실직하면 그땐 군법에 따라 처형할 것이다!” “하이!” 끼무라는 군례를 올리고 나서 그제야 머리를 들어 스즈끼의 안경알을 마주 바라보았다. 스즈끼는 사무 상에서 내려와 끼무라의 어깨를 다독이면서 조금 부드러운 어조로 바꿔 물었다. “아까 기생집에 있던 수염이 시허연 조선 영감은 누군가?” 끼무라는 기생집 말이 나오니 몸둘 바를 몰라 했다. 끼무라는 코 수염을 매만지더니 자기 좋게 돌려댔다. “그자는 총 도감 병완의 형입니다. 미인계를 써서 그 놈을 구슬려 병완의 꼬리를 밟으려고 그랬습니다.” “음, 미인계? 그런 촌구석 조선 놈들에게 무슨 미인계인가? 우리 일본 기생이 아깝다, 아까와!” 스즈끼는 안경을 춰올리면서 속으로 중얼거렸다. (나도 놀아보지 못한 예쁜 일본 기생을 죽일 놈들에게 놀라고 줘?) 스즈끼는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다. “자위대 한길수 대대장은 어떤가?” 스즈끼의 물음에 끼무라는 어떻게 대답했으면 좋겠는지 몰라 한참 궁리하다가 모든 책임을 한길수에게 떠밀어버렸다. “한길수 대대장은 그닥지 않습니다. 한대대장이 이 지방 조선 사람들을 어떻게 못살게 굴었는지 모두 불만을 품고 고향을 버리고 유격대를 찾아갔습니다.” “한 대대장의 핍박에 숱한 유격대가 생겼다는 말이지?” 스즈끼의 물음에 끼무라는 머리를 조아렸다. “하이. 다 한 대대장 탓입니다.” 스즈끼는 끼무라를 흘겨보았다. “아직도 자기 잘못이 뭔지 모르는구먼. 그런 한 대대장을 쓴 건 자네 아닌가?” “하이!” “한 대대장을 불러와!” 끼무라는 사무 상으로 돌아가서 전화를 걸었다. “한 대대장, 내 사무실로 잠간 오게나.” 이윽고 번들 이마 한길수가 개화장을 짚고 거들먹거리면서 들어섰다. 뜻밖에 사무 상에 젊은 일본 헌병군관이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끼무라에게 눈길을 돌렸다. “업동 헌병연대 스즈끼 부연대장이네.” 한길수는 허리를 꿉썩 굽히면서 "곤니찌와!(안녕하십니까?)" 하고 제법 일본말로 인사했다. 스즈끼는 거만하게 앉은자리에 앉아서 손을 들어 군례를 붙이고는 한길수의 아래우를 훑어보았다. 번들 이마아래 외눈박이였다. 흉측하게 생긴 말상이 보기만 해도 위엄스러웠다. 스즈끼는 천천히 일어나 뚜벅뚜벅 다가오더니 한길수에게 손을 내밀었다. “한 대대장, 그간 대일본제국을 위해 수고 많았네. 우린 한대대장 같은 사무라이가 필요하네.” 한길수는 연신 꿉석거리며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다 끼무라 국장님이 잘 지도한 덕분입니다.” 하고 치하에 감개무량해 하면서도 당 상전을 추는 것을 잊지 않았다. “끼무라 대대장!" 스즈끼는 불시에 의자에 앉아있는 끼무라 쪽으로 몸을 홱 돌렸다. “하이!” 끼무라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군례를 붙이면서도 어린 놈이 너무 거들먹거리는 것이 눈꼴 사나와 속으로는 욕지거리를 퍼부었다. 스즈끼는 한길수 앞에서 고래고래 고함쳤다. “한 대대장 참 잘했어. 자네처럼 조선 사람들을 어루만져서는 안 돼! 그놈들은 무자비하게 진압해야 돼! 그래야 겁을 집어먹고 유격대를 따라 가지 못한단 말이야!” “하이! 하지메데 와까리마시다(처음 알았습니다.)” 스즈끼는 명령을 내렸다. “당장 오늘부터 명천과 우시장 일대 반일불온분자들을 몽땅 숙청하게! 그 염소수염영감부터 고문해 병완 놈의 행방을 알아내도록 하라!” “하이!” 스즈끼는 “잘 했네.” 하고 머리를 끄덕이더니 뒷말을 이었다. “오늘부터 끼무라 헌병대대장은 경찰국 옆에 있는 헌병대대 사무실로 옮겨가게나.” “하이!” “한 대대장도 끼무라 대대장을 협조해.” 끼무라는 군례를 붙이고 경찰국사무실에서 나왔다. 그는 군모를 벗어들고 이마에 송골송골 내돋은 진땀을 손으로 쓱쓱 닦았다. 그는 목을 만지면서 백여 미터 뒤떨어진 경찰국 사무실을 되돌아보면서 두덜거렸다. “머리가 목우에 붙어있는 것만 해도 다행이야. 죄꼬만 놈 새끼 상사노라고 오자마자 떽떽거리긴? 쳇, 제 놈이 여기 명천이나 우시장이 어떤 곳인지 알기나 하면서 그래? 흥!” 성이 꼭뒤까지 치민 끼무라는 낯이 지지벌개 헌병대 사무실로 맥없이 뚜벅뚜벅 걸어갔다. 8. 조의의 비방 약 헌병대대 사무실로 옮겨간 끼무라는 스즈끼 부연대장이 원망스러웠다. “제기랄, 우리가 십여년 고생해 명천과 우시장 일대에서 반일불온분자들을 깡그리 몰아냈는데 어데 가서 불온분자들을 붙잡아오란 말인가? 얼리고 닥치고 해도 병완 놈과 성칠 놈의 행방을 알아낼 수 없어." 그래도 전투임무는 완수해야 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끼무라가 이마를 짚고 상을 찡그릴 때었다. 옆에 있던 한길수가 외눈깔을 굴리면서 계책을 올렸다. “포수대에 들어간 가족들을 몽땅 붙잡아들입시다.” 끼무라는 콧수염을 매만지면서 “병완의 사돈에 팔촌까지 다 잡아들여야 고작 몇이 되겠는가?” 하고 도리머리 질 했다. “운주동, 영월동, 신흥동, 신설동, 가마골루 두루 포수대에 간 놈들이 적잖습니다. 그 가족들을 몽땅 잡아들입시다.” 끼무라는 의연히 불만족해했다. “그래도 만족하겠는가? 뭔가 무자비하게 진압하구 처형한 걸 보여 줘야겠는데.” “일본 사람을 욕했거나 눈을 흘긴 놈들, 조선말을 한 놈들까지 수태 붙잡아다가 감옥에 처넣읍시다. 그런 놈들은 모두 반일불온분자들이죠. 스즈끼 부연대장이 꼭 만족해 할 걸요.” 그제야 끼무라는 사무 상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좋소까. 몽땅 잡아들여라.” 한길수가 우쭐거리며 나가려 할 때다. “잠간!” 한길수가 머리를 돌려 끼무라의 피발이 선 눈길을 쳐다보았다. 끼무라는 이를 뻑뻑 갈았다. “병권을 고문해! 병완 놈의 행방을 꼭 알아내!” “하이!” 한길수는 우레 같은 명령이 떨어지자 어깨가 으쓱해 나가며 속으로 끼무라를 욕했다. (제길할, 병권에게 잘 보이려고 기생집에까지 끌고 가서 질탕하게 놀더니 나보고 고문하라고?) 시어미 역정에 개 배때를 찬다고 끼무라와 한길수는 스즈끼에게 훈계를 받은 후 변태적으로 나왔다. 한길수는 병권을 자위대대 고문실에 붙잡아다 형틀에 달아맸다. 그는 졸개들을 시켜 가죽채찍으로 매질하고 고추 가루를 타서 고구멍에 쏟아 넣고 참대가시로 손톱눈을 찔렀다. 피못이 된 병권은 너무 아파 깨문 입술이 파랗게 질렸다. “말해! 병완 놈 어데 갔어?” 한길수가 직접 고문했다. “난 모르오.” 병완은 피가 낭자한 얼굴을 겨우 들고 맥없이 한길수를 쳐다보며 대답했다. “형제간인데 몰라? 우린 다 안다. 간도로 갔지?” “알면서 나한테 물을게 뭐요?” 한길수는 엉거주춤 일어나 졸개한테 다가가 가죽채찍을 빼앗아들고 병권을 쨩, 쨩 내리쳤다. 그때 고문실 쇠문이 쩔커덩 열리더니 콧수염 끼무라가 들어섰다. “잠간!” 끼무라는 한길수 손에서 채찍을 빼앗더니 한길수를 흘겨보았다. “김 선생을 매질하다니? 자넨 앓지 않겠는가? 쯧쯧.” 류강철이 통역하자 한길수는 저도 모르게 두덜거렸다. “금방 호되게 매질하면서 고문하라고 해놓고. 해뜩 번져 누우면서 인심을 내니 어느 도시 질에 맞추겠는가?” 끼무라는 한길수의 게두덜거리는 표정을 보고 대개 뭐라는 것을 짐작했다. 그러나 류강철은 그대로 통역하지 않았다. “아무리 채찍으로 때려도 탄백하지 않으니 참말 답답하답니다.” 끼무라는 한길수를 한쪽구석에 불러다가 귀속 말로 쑤군거렸다. “매로 쳐 말하겠나? 죽어도 동생을 불지 않을 거네. 내 얼리고 닥치고 할 테니 기다리게. 자넨 덕팔과 칠백의 가족이랑 몽땅 잡아다 고문하게.” “하이!” 한길수는 군례를 붙였다. 그러나 속으로는 욕지거리를 해댔다. (매는 내가 대구 인심은 네가 내구. 병권에게 잘 보이면 네놈의 XX 꿋꿋하게 살아나게 좋은 약을 줄 것 같으냐? 만성독약을 주지 않는가 봐라. 퉤, 더러운 자식.) 한길수는 게두덜거리면서도 말을 타고 영팔과 졸개들을 데리고 영월동쪽으로 덮쳐갔다. 끼무라는 손수 형틀에서 병권을 풀어주고나서 부축해 고문실에서 나왔다. 그는 헌병대대 의무실로 가서 간호사를 보고 병완의 상처를 처치해주라고 했다. 뒤이어 끼무라는 가메다를 보고 병권을 부축해 단칸방에 데려다 식사를 잘 대접한 후 푹 쉬게 했다. 한참 후에 끼무라는 단칸방에 찾아왔다. “한길수는 무정한 놈이오. 당신들을 못살게 핍박하면 할수록 반항하고 항일의병에 달아난다고 했는데도. 참, 내 말을 통 듣지 않는다니까. 암암리에 병완을 못살게 굴어 끝내 달아나게 만들었고. 성칠은 사냥마저 하지 못하게 하는 바람에 사냥꾼들을 데리고 포수대를 뭇고 의병을 따라다니더니 이젠 유격대를 찾아갔단 말이오. 한길수는 아이 때 공부를 못한 무지막지한 놈이란 말이오." 병권은 자기 앞에서 개다리를 물어뜯는 끼무라의 속심이 뭔지 알 수 없었다. (네 놈이 나한테 알락방귀를 먹여? 뭣 때문에?) 병권의 눈치는 모르고 끼무라는 고양이가 쥐를 생각하듯이 계속 지껄여댔다. “이게 뭐요? 온통 상처투성이구만.” 한참 알락방귀를 뀌던 끼무라는 본심을 드러냈다. “사실 난 요즘 그게 잘 되지 않아 애나네. 긴쎈세이는(김선생은) 유명한 조의라는 거 아네. 당신의 아버지는 궁정어의. 맥이 빠진 내 양기를 살려주게나. 이게 말을 듣지 않아 예쁜 위안부들을 두고서고 하지 못해 애나서 죽을 거 같단 말일세. 이전에도 말했지만 병완과 성칠의 죄를 추궁하지 않겠어. 내 관할구역에서 얼씬거리지 않으면 눈을 감아주겠네.” 병권은 가타부타 한마디 말도 없었다. 끼무라는 낯 색이 확 변했다. “잘 생각해보게. 지금 자네 일가에 사돈에 팔촌까지 몽땅 한 대장 고문실에 갇혔네.” 끼무라가 문을 쾅 닫고 나가버렸다. 류강철이 뒤에서 생각하는 척 했다. “영감, 의술이 뛰어난 덕에 이런 거래라도 할 수 있는 줄 아오. 지금 스즈끼라는 새 경찰국장이 와서 욕 한마디 해도 안 되오. 지어 조선말을 해도 반일불온분자로 잡아 죽일 잡도리요.” 류강철까지 나간 후 병권은 구들에 훌렁 드러누워 천정을 쳐다보면서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미운 놈을 떡을 더 준다고 가족 때문에 별 수 없구나.) 오후에 끼무라가 류강철만 데리고 다시 병권을 찾아왔다. “병을 봐주겠는가?” 끼무라가 무뚝뚝하게 묻는 말에 병권은 “봐주겠소.” 하고 대답했다. 그러자 까무라는 콧수염이 콧구멍에 들어갈 지경으로 헤벌쭉 웃었다. “글깨나 읽은 사람이 명지한 선택을 하리라 믿었네. 에헴.” 병권은 류강철을 보고 끼무라를 앉아 밥상 위에 팔을 빼들라 하라고 한 후 손가락으로 맥을 짚어보았다. 한참 후 병권은 끼무라에게서 눈길을 떼면서 류강철에게 돌리더니 “에이, 음위가 심하구먼. 이게 시래기처럼 싹 시들어서 성교를 하기 어렵게 됐네.” 하고 진단을 내렸다. 끼무라는 류강철의 통역을 듣고 병권의 손을 잡고 애원했다. “내 양물을 살려주게나. 사꾸라관에 숱한 미녀들을 두고 놀지 못하면 살아 뭘 하겠는가? 제발 살려주게. 돈이 필요하면 돈 내놓고 병완이랑 놔달라면 놔 줄게.” 병권은 끼무라의 손아귀에서 손을 뺐다. “이 감옥 같은 숙사에서 어떻게 병을 떼겠소? 약재도 없고, 약을 닳일 풍로나 약탕관도 없지. 날 집에 보내주오.” 류강철이 통역하자 끼무라는 단도직입적으로 뚝 잘라버렸다. “건 안 돼. 김 선생이 달아나면 어데 가 찾겠소? 처방만 떼 주게. 우리 헌병대 간호사나 의사 보고 약방에 가서 약을 져오라면 될게 아닌가?” 그 말에 병권은 더는 할 말이 없게 됐다. (이 놈이 나를 믿지 못하는구나.) 병권은 의심을 사지 않으려고 별수 없이 “그렇게 합세.”라고 했다. 그는 끼무라의 눈치를 슬슬 살피면서 뒷말을 이었다. “원래 음위가 온데다가 임질이란 더러운 성병까지 걸렸소. 약이 더러운 게라고 나무라지 않으면 써보지.” 끼무라는 듣고 나서 상을 찡그리면서 “병만 떨어지면 뭐라나.”라고 했다. 병권은 붓과 종이를 가져오라고 하여 신장을 보하는 약 처방을 줄줄 내리썼다. 뒤이어 그는 류강철을 보고 “끼무라 국장에게 물어보오.”라고 하면서 끼무라의 눈치를 힐끔 곁눈질 했다. 병권은 얻어맞아 피딱지 붙은 하얀 염소수염을 슬슬 내리쓸더니 뒤 말을 이었다. “양기를 살리려면 두 가지 민간요법을 써보는 게 좋소. 하나는 양기가 성한 사내대장부의 오줌에 인삼과 송이버섯, 물개 좆을 불거 먹는 게고 다른 하나는 자기가 제일 좋아하는 여자의 질에 대추와 인삼을 한 보름씩 넣어 퍼지었다가 먹는 게오.” 류강철이 통역해주자 끼무라는 오만상을 찡그렸다. “에헤헤. 별 약을 다 본다. 사내 오줌이야 어떻게 먹겠는가?” 류강철은 끼무라를 보고 “이 염소수염영감의 애비는 이씨 왕조 궁정어의였습니다. 병을 떼겠으면 더러운 대로 비방 약을 써보십시오.” 하고 권고했다. 한참 후 끼무라는 찡그렸던 상을 거두었다. “처방 약을 닳여 먹으면 안 되는가?” 병권은 고의로 자기 견해를 고집했다. “나도 별수 없소. 양기를 돋우자면 이 두 가지 처방가운데 한 가지 약을 꼭 써야 하네.” 끼무라는 눈깔을 질끈 감고 낯을 천정으로 향하더니 한숨을 후 내 쉬었다. “먹지. 하나꼬의 XX에 대추를 넣었다가 먹지.” 병권은 속으로 웃음보가 터져 나오는 것을 겨우 참아냈다. 그날로 끼무라와 류강철은 약 처방을 가지고 헌병대대 의원에 가서 의사들과 간호사들을 모여 놓고 약 효과를 알아보았다. 의사들이 모두 머리를 끄덕였다. “조선의 인삼과 송이는 신장을 돕고 기를 보하는 좋은 약재지요. 인삼과 송이, 대추를 질에 퍼지어 먹는다는 건 처음 듣는 처방입니다만.” 끼무라는 병권이가 약 처방대로 약을 달여 먼저 류강철에게 실험해본 후 먹기로 했다. 그날로 실험이 시작됐다. 헌병대대 약제사들은 병권의 약 처방대로 약방에 가서 약을 지어다가 먼저 류강철에게 먹여보았다.      며칠후 놀랍고도 우스운 일이 벌어질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45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24) 댓글:  조회:2150  추천:0  2015-11-25
           3. 정든 고향 집        여우도 추워 눈물을 흘리는 맵짜게 추운 동지섣달 어느 날 이른 아침이었다.        마당의 묵은 백양나무 가지에서 알락까치 두 마리가 앉아 꽁지를 달싹이면서 까까까 우짖다가 땅바닥에서 먹이를 찾아 미친 듯이 기어다니는 족제비를 보자 놀란 듯이 황급히 북쪽으로 날아가 버렸다.       성희는 마당에 바람 쏘이러 나왔다가 꼬부장한 허리를 펴고 눈 위에 손을 얹고 저 멀리 북쪽으로 날아가는 까치를 하염없이 바라보면서 중얼거렸다.        “북쪽에서 무슨 기별이 오려나? 아침부터 까치가 울어?” 아닌 게 아니라 글쎄 그날 아침에 뜻밖에도 간도에서 육촌시동생 석은이 찾아오지 않았겠는가. 석은은 최구장네 맏사위였는데 최죽순과 결혼한지 얼마 안 돼 간도로 들어갔던 것이다. 석은은 상우와 나이 차는 많지 않았지만 8촌 작은할아버지 벌이 되는 양반이었다. “에이유, 작은 할아버지 왔구먼. 그래 간도에서 잘 보냈소?” 상우가 반갑게 인사하면서 위방에 자리를 권했다. 안 식구들도 일일이 인사를 올렸다. 상우의 처 지새금이 죽 두 사발에 시라지 장국 두 사발을 올린 밥상을 들어 들여왔다. “밥을 들면서 천천히 얘기해줍소.” 석은은 따끈따끈한 죽을 후후 불며 먹으면서 말했다. “간도는 확실히 듣던 소리같이 땅이 많고 사람은 적구 살기 좋은 곳이네. 큰형님과 이상조카들이 장지주네 밭을 석 짐 붙이고 황무지를 한 서너짐 일궜는데 조 열 마대를 넘게 냈네. 조선 지주들만은 간도 한족지주들은 인심이 후하네. 중국지주들은 소작료도 절반 밖에 받지 않네. 황무지를 일군 밭에서 난 곡식은 2할만 가지구 8할은 큰형님 네를 주었어.” “야, 세상에 그런 지주도 다 있소? 우리 여기서야 지주가 8할을 가져가고 나면 죽물도 먹기 힘들지 않고 뭐요?” 정지에서 석은의 말을 엿듣던 기준의 아내 최사련은 “간도가 정말 그렇게 좋으면 가야 하겠구나.” 하고 감탄했다. 석은은 뒷말을 매듭지었다. “웃새집 큰 형님 네는 우리 집에서 멀지 않은 버드나무숲 속에 육간 집까지 척 지어놓고 기다린다. 기준은 소서구에 육간 집을 지어놓았어. 큰형님네는 날 보고 고향에 가면 자네하구 상훈에게 간도로 들어오라고 기별하라고 했네. 집이고 뭐고 빚으로 다 처리한 후 가마만 빼가지고 들어오면 된다고 하더라. 두만강이 떵떵 얼어붙었을 때 어서 간도로 들어갈 차비를 하게나. 내 이제 웃새집 상훈에게도 기별하겠다.” 상우는 그 자리에서 결단을 내렸다. “집안 조상들의 산소에 쓸 문중전(门中钱)을 변돈으로 300원 꿨다가 빚더미에 깔려 죽을 지경입구마. 밭이 없어 농사를 쫄딱 했지 문중전까지 다 썼지. 이젠 어떻게 살아갈 방법이 없습구마. 간도로 들어가야겠습구마.” 정지에서 지씨는 어글어글한 눈을 슴벅이며 시어머니와 함께 남편의 말을 듣더니 길쭉한 얼굴에 미소를 지으면서도 본가 집 근심을 했다. “그런데 시집을 따라가면 우리 본가집은 어찌 하겠습둥?” 사련은 맏며느리 손을 잡고 매만지면서 “애기네 근심하지 마오. 가기 전에 가마골에 기별해서 본가집도 간도로 들어가자고 하오.”라고 귀띔해 주었다. 그제야 지씨는 안도의 한숨을 호 내쉬었다. 상우는 석은을 따라 웃새집으로 반달음쳐 갔다. 한참 후 헐금씨금 돌아온 상우는 어머니와 토론했다. “웃새집 큰형님네도 간도로 들어가자고 합디다. 그런데 빚 꾼들이 문제입니다.” 사련이 말하기도 전에 지새금이 수를 내놓았다. “별 근심도 다 하오. 돈이 없는 걸 손가락을 빼주겠습니까? 빚 군들이 오면 ‘헌 집과 빈 궤짝을 훌 내놓고 우린 이것 밖에 없소. 마음대로 가져가오.’ 하고 간도에 가버리면 다지.” 병완과 기준과는 달리 너무 어진 상우는 너부죽한 이마를 숙이면서 기어들어가는 소리를 했다. “어떻게 낯을 들고 살겠소. 사람이 양심 없이. 이후에 누가 우리한테 돈을 꿔주자고 하겠소?” 그러나 새금은 계속 두덜거렸다. “간도로 쫓아와서 빚을 받겠으면 받으라지. 흥.” 사련은 옆에서 듣다가 동감을 표시했다. “며느리 말이 옳다. 집을 주구 간도에 가서 빚을 물겠다구 해라.” 상우는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사련과 새금은 옷궤에서 누더기 몇 벌을 보에 싸놓고 쌀독을 다락다락 긁어 길에서 먹을 주먹밥을 짓기 시작했다. 상우는 뒤울안에 돌아가서 지게를 메다가 집안에 들여다 정지 벽에 기대 세워 놓았다. 뒤이어 그는 마루에 나가 기둥에 달아매놓은 종자기장이삭묶음 두개를 풀어 들여다 지게 우에 올려놓았다. 급히 떠나면서 두고 갈까봐 미리 준비해두는 것이었다. 이튿날 날이 푸름히 밝자 사련과 새금은 덮고 자던 이불 세 개를 개여 보에 쌌다. 월금은 눈이 동그래 “엄마, 우리 정말 이 집을 던지고 갑니까?” 하고 물었다. “그래. 빚으로 주고 어서 가버리자.” 월금은 아까워 집안 대들보랑 말똥말똥 쳐다보았다. 풍설이 이는 날에도 성남집 기준이네가 간도로 들어간다는 기별을 듣자 집안 집 빚 꾼들이 팔을 걷어붙이고 몰려들었다. “아니, 집안 조상들의 산소에 쓸 돈을 다 먹어 치우고 훌 가면 어쩌오?” 상우는 성난 사자처럼 떠드는 빚 꾼들에게 쥐구멍으로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간도에 가서 농사를 지으면 문중전을 다 물겠습구마.” 그러나 억대우 같은 집안 집 사내는 곧이듣지 않았다. “간도에 가면 낟알이 하늘에서 막 쏟아져 내린다오? 듣기나마 좋지. 언제 빚을 갚는다고 그래. 흥!” 상우는 지새금이 옆에서 옆구리를 콕콕 찌르자 피뜩 정신을 차렸다. 그는 어데서 그런 용기 났던지 어진 성격과는 달리 나왔다. “우린 가진 게 이것뿐입구마. 집과 돌밭 밖에 없소. 빚 대신 마음대로 가져가오.” 그러자 빚 꾼들은 “와야!” 소리와 함께 달려들어 서로 가정기물을 빼앗을 내기 했다. 물독을 메가는 이로, 함지를 이고 가는 이로 야단법석 했다. 나중에는 사내 여럿이 바 줄을 집 기둥에 매 “허이야 차!” “허기영차!” “하나, 둘, 셋!” 하고 한창 바줄 당기기를 했다. 이윽고 쿵! 요란한 소리와 함께 집이 훌러덩 무너졌다. 순간 기둥을 빼가는 이로, 대들보를 메가는 이로, 문짝을 빼가는 이로 보기 흉측할 지경으로 살벌했다. 한 빚 꾼이 지게에 얹은 가마에 손을 대려고 하자 상우는 두 팔을 벌려 말렸다. “너무 하지 않소? 우리 간도에 가 뭣에 끓여먹고 살겠소? 가마만은 놔두오.” 그 빚 꾼은 스스로도 지나쳤던지 “그래, 간도에 가서 빚을 꼭 물어라. 안 무는 날엔 간도에 가서 가마까지 빼 갈 줄 알아라. 흥!” 하고 말했다. 정말 가난이 죄였다. 가난하면 친척도 쓸 데 없었다. 야속한 세사이여서 세상 뜬 조상의 산소에 돌을 사서 얹을지언정 산 친척에게 죽물을 사먹으라고 챙겨주는 친척은 없었다. 월금은 눈보라 휘몰아치는 매서운 날씨에 새뽀얀 먼지 속에 허물어져서 뜯어가는 고향 집을 보다가 머리를 돌려 외면하더니 옷고름으로 눈물을 닦으면서 어깨를 들먹였다. 어린 상순은 삽으로 괭이로 호미를 빼앗아 한 아름 묶어 메고 가는 빚 꾼들을 주먹을 쥐고 쫓아가 엉덩이를 마구 때렸다. “이 새끼야, 남의 삽을 왜 가져가니? 씨.” 그러자 빚 꾼은 내려다쏘아보면서 호통 쳤다. “요놈새끼, 못된 쇄지 엉덩이에서 뿔이 난다더니 애비를 닮아서 못 되냥 한다이. 그만두지 못하겠니?” 빚꾼이 계속 주먹질을 해대는 상순을 뒤발 질을 했다. 상순은 뒤로 엉덩방아를 찧으면서 엉엉 울었다. 상우가 황급히 뛰어가며 새된 소리를 쳤다. “아무리 빚을 졌다고 어린 걸 이게 뭐요?” 사련도 누더기 보를 던지고 달려와 상순을 껴안으면서 눈물을 탐방탐방 쏟았다. “어린애가 무슨 죄가 있다고 이러오? 남도 아니고 집안 집 어른들이. 흑흑.” 이때 최구장이 경숙이랑 자손들을 데리고 달려왔다. “아니, 이거 간다는 말은 들었는데 이렇게 갑작스레 떠나는가? 기어이 고향을 버리고 간도에 가야 살 수 있나요? 쯧쯧.” 최구장의 말에 사련은 누더기 보따리를 내려놓고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사돈어른 빚 대신 집과 가정기물을 처리한 후 인사나 하고 가자고 했습구마.” 최구장은 하얀 수염을 흩날리면서 눈보라 속에 무너진 성남 집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살벌한 정경에 도리머리 질 했다. “아야, 이게 웬 일인고? 사돈어른이 어떻게 지은 집인데.” 최구장은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더니 최사련에게 머리를 돌리더니 “헌데 경인은 압니까?” 하고 물었다. 최사련은 “맏딸과 사위한테 기별할 새도 없이 떠납니다.” 하고 대답하고는 귀속 말로 말했다. “좀 늦게 서둘면 한길수라도 오면 어찌 합니까? 가다가 불붙이에 들려 알리고 가겠습니다.” 그제야 최구장은 “그럼 무사히 가세요.” 하고 작별인사말을 했다. 경민과 경욱도 허리굽혀 인사했다. 기실 최사련은 개성 최 씨여서 최구장과는 사돈이자 본가집인 셈이어서 한 마을에서 수십 년 간 아주 정 들대로 든 사이였다. 이때 명옥이 뛰어왔다. “상순아, 어데 가니?” 상순은 주먹으로 두 눈을 비비면서 울먹울먹해 겨우 말했다. “이사해.” 명옥은 동갑인 송아지친구 상순에게 자꾸 물었다. “우리 할아버지 서당에 와서 공부하지 않을래?” 상순은 두 볼에 눈물을 주르르 흘리더니 두 주먹으로 눈을 비비며 흑흑 흐느껴 울었다. “울지 말라. 먼 길을 가겠는데 눈물에 낯이 얼겠다.” 그제야 상순은 억지로 울음을 참느라고 흑흑 흐느꼈다. 명옥은 상순의 손을 잡으면서 “이 다음 고향에 놀러오라.” 하고 말했다. 상순은 목이 메여 말은 못하고 머리만 끄덕였다. 이때 근형은 바람개비를 돌리면서 달려왔다. “상순아, 어데 가니?” 상순은 머리를 숙이고 “응.” 하고 목안으로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대답했다. 사련은 상순의 코밑에 흐르는 허연 콧물을 닦아주면서 달래였다. “우리 막내아들 상순아, 더 울지 마라. 이담 커서 꼭 고향에 돌아오자.” 근형은 상순을 보고 “너 어째 운주하에서 타던 썰매를 가지고 가지 않니?” 하고 말했다. 그러자 상순은 수깃했던 머리를 쳐들더니 허물어진 집터로 달려갔다. “썰매, 내 썰매를!” 상순이 두 손을 내밀어 허물어진 폐허를 가리키면서 울자 상우가 말리였다. “어데서 썰매를 찾는다고 그러니? 썰매를 어디까지 가지고 간다고? 가자.” 상우가 손을 잡아끌자 상순은 몸을 뒤 탈면서 발을 동동 굴렀다. “내 설매를!” “간도에 가면 더 좋은 걸 만들어줄게. 그 먼 간도로 어떻게 가지고 간다고 그래? 가자.” 상우가 하는 말에 상순은 별수 없이 입이 따발을 걸만큼 내밀고 돌아섰다. 상우는 폐허를 둘러보다가 물독을 놓았던 자리에서 쪽박을 주어 상순에게 주면서 “넌 이걸 가지고 가라.” 하고 말했다. 그러자 상순은 “이걸 해 뭘 하오?” 하고 물었다. 상순은 “이 쪽박으로 가다가 물도 퍼 먹잔 말이다. 손바닥에 물을 퍼 먹겠니?”라고 했다. 근형은 자기가 애지중지하며 가지고 놀던 바람개비를 상순에게 주면서 “이걸 가지고 놀면서 가라!”라고 했다. 그제야 상순은 양손에 쪽박과 바람개비를 쥐고 번갈아 보면서 기분이 조금 돌아섰다. 사련은 근형이 너무 귀해 얼굴을 만져주면서 “이담 간도에 오면 함께 놀아라.” 하고 말했다. “예. 잘 가라. 상순아.” “응.” 근형을 뒤이어 명옥도 애고사리 손을 흔들었다. “고향에 놀러오라.” “응, 너네두 간도로 오라. 우리 함께 썰매랑 타면서 놀자.” 그들은 서로 갈라지기 아쉬워하며 눈물을 머금고 머리를 끄덕였다. 성남 집 서쪽에 자리 잡았던 웃새집도 빚 꾼들에 의해 허망 무너졌다. 흩날리는 먼지와 눈보라 속에서 김수월이 상훈과 며느리를 데리고 휘청거리면서 길을 떠나고 있었다. 서쪽에서 웃새 집 상훈이가 “빨리 떠나가자!” 하고 소리치며 손을 저었다. 어진 상우는 빚 꾼들의 흉측한 몰골들을 보고 성이 날대로 나서 얼굴이 지지벌개 소리쳤다. “엄마, 가깁소. 간도로 가면 빚 꾼들이 보기 싫어 고향으로 다신 돌아오지도 말기요.” 그러자 빚 꾼들은 간도로 떠나가는 상우 쪽에 대고 주먹을 휘둘러댔다. “빚을 다 물지 않고서도 돌아오지 않겠다고?” “간도에 쫗아가서라도 꼭 빚을 받아오지 않는가 봐라!” “염치없는 놈 새끼들이! 흥.” 사련은 아들며느리와 딸을 데리고 야속하게도 빚받이 친척들의 욕지거리와 콧방귀소리 속에서 쓸쓸하게 고향을 떠나야만 했다. 상우는 언 주먹밥주머니를 넣은 가마를 지게에 얹어 지고 눈길로 빠드득빠드득 무거운 발걸음을 한걸음, 한걸음 옮겨 디뎠다. 최사련은 누더기보따리를 이고 어린 상순의 손목을 잡고 따라 걷고 지새금과 월금은 이불을 싼 보따리를 하나씩 이고 뒤따랐다. 상순은 바람개비를 쥐고 눈물이 글썽한 눈으로 허물어진 고향집터와 근형 그리고 명옥을 되돌아보면서 앙기장 앙기장 눈을 빠드득빠드득 밟으면서 고향을 떠나갔다. 근형과 명옥은 상순이네가 눈보라 속에 자그마한 흑점으로 아른거릴 때까지 눈으로 바랬다. 최구장과 경숙 등은 사돈들을 고향에서 떠나보내고 허무한 감이 들었다. 그는 미닫이문을 열고 마루에 나가더니 두 팔을 벌리고 눈보라가 휘몰아치며 몸부림치는 황야의 하늘에 대고 고래고래 고함쳤다. “이 어지러운 세상에 태어나 탯줄을 묻은 고향, 잘 살아보려는 희망과 꿈을 심었던 고향을 하루아침에 떠나다니. 아, 참 기막히고 가슴 아픈 일이로다. 창천이여, 세상이 왜 이다지도 험악한가! 조상의 뼈가 묻힌 고향에서 살려는 버러지 같은 창생들을 도와주옵소서!” 4. 고난의 길 대지를 봉쇄한 겨울은 뼈만 앙상하게 남은 나무 가지를 무섭게 울리면서 눈보라를 휘몰아쳤다. 눈 깊은 운주하 강반을 휩쓸어 산과 언덕에 부딪치는 설한풍은 그 소리만 들어도 등곬이 싸늘해지게 했다. 감때사나운 엄동설한 앞에서 만물이 부르르 몸부림쳤다. 을씨년스레 눈이 오다가도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엄동설한에 고향을 떠난 상우와 상순의 마음은 오리, 오리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게다가 운주동을 벗어나 불붙이에 있는 어금의 집에 이를 무렵에 성희가 허리를 펴고 걸어온 눈길을 되돌아보았다. 운주동의 산과 들을 눈에 다 담아가려는 상 싶었다. “안 돼, 이렇게 떠나 갈순 없어.” 성희가 중얼거리는 말을 듣고 사련은 급히 부축했다. “어머니, 시아버님이랑 모두 간도에 계시는데 가시지 않으면 어찌 하십니까?” 성희는 사련의 팔을 뿌리치며 고함쳤다. “아니야. 본가 집 성군 오라비와 명호 조카, 병수 손자를 한산면 고향에 두고 이렇게 갈 수 없어. 그 애들을 보고 갈란다.” 성희는 무릎까지 풍풍 빠지는 눈을 헤집고 운주동 쪽으로, 아니, 남쪽으로 마구 가려고 들었다. “난 고향으로 돌아가 봐야 해. 본가집 아버님 산소에 가봐야 돼. 이 운주동에 시집오지 말았어야 하는 건데. 고향을 떠나 천 리 밖 두메산골에 온 것만 해도 그런데 이제 두 번 째 고향을 버리고 간도에 가? 말도 안 돼.” 함지랑 지게에 진 상훈이가 성희를 붙잡으면서 말렸다. “할머니, 왜 이럽둥? 한길수의 패거리가 들이 닥치기 전에 빨리 명천을 떠나야 합구마. 여기서 이럴 새 어디 있습둥?” 상우는 지게를 벗어 작대기로 받쳐놓고 헐금씨금 돌아와 성희를 말리였다. “할머니, 우리 뭐 고향을 영영 떠나는 게 아닙니다. 이제 간도에 가서 농사를 잘 지어 돈을 벌면 조선에 돌아옵시다. 그때 작은 외할아버지와 삼촌을 찾아보면 안 됩니까?” 그러나 성희는 도리머리 질 하며 상우와 상훈의 어깨를 마구 조겨 댔다. “이 철없는 것들아, 내가 이제 살면 몇 해를 살겠나? 훌쩍 고향 떠나가면 언제 돌아올지 누가 알아?” 성희가 서럽게 울자 사련과 수월도 따라 눈물을 흘리었다. 그렇다, 그들도 본가 집을 고향에 두고 어찌 가고 싶지 않겠는가. 지어 본가 집에 들려 간도에 간다는 말도 못하고 떠나는 그녀들의 마음이야 오죽하겠는가! “할머니-” 상순은 할머니 허벅지를 붙잡고 쳐다보면서 엉엉 울었다. 성희는 정신 나간 여인처럼 계속 중얼거렸다, “한산 고향엔 못 가더라도 영월동에는 들려 가자. 어떻게 지은 팔간집인데 두고 가. 그 좋은 물레방아랑 어떻게 해?” 상우는 할머니를 위안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랑 간도 버드나무숲속에 육간 집을 지었다지 않습둥?” “난 안 가.” 사련이 성희를 부축하면서 “어머니, 우리도 어머니와 같은 심정입니다. 그런데 바늘 가는데 실이 간다고 시아버님이 계신 데 가야지 않겠습니까?” 하고 한마디 했다. 그 말에 성희는 한 숨을 땅이 꺼지게 후~ 내쉬더니 도리머리 질 하다가 간신히 북으로 걸음을 천천히 떼였다. 그녀는 혼자 계속 중얼거렸다. “그래, 바늘이 가는데 실이 따라가야지. 아이유, 하늘도 무심하지. 이 불쌍한 것들을 고향에서도 살지 못하게 하다니. 쯧쯧.” 그녀들은 정말 그랬다. 지새금이가 운주동 동북쪽에 있는 가마골 본가 집에 기별하고는 누구도 본가 집에 간도로 간다는 기별을 할 새도 없이 고향을 부랴부랴 떠났던 것이다. 한참 후 그들은 불붙이에 있는 어금네 집에 들리었다. 경인이 가시집식구들을 반갑게 맞아들였다. “할머님, 오늘 우리 집에서 푹 쉬고 내일 가십시오.” 성희는 “그래, 쉬고 가지.” 하고 반가워했다. 상우가 손사래를 저었다. “우린 빨리 명천 바닥을 벗어나야 하오. 길수 패거리가 눈치 채고 쫓아오면 오도 가도 못하고 봉변을 당할 거요.” 어금은 본가집에서 간도로 다 떠나가게 되자 코마루가 시큼해나 왼손으로 막고 벽 쪽으로 돌아서서 어깨를 들먹였다. 그는 손으로 눈물을 닦고 나서 돌아서서 어머니 손을 잡고 눈물을 줄줄 흘리었다. “엄마, 고향을 떠나가면 언제 보겠습니까?” 사련도도 눈물이 글썽해 사위 눈치를 살피다가 어금에게 귀속 말을 했다. “너희들도 간도로 가자.” 그러나 어금은 도리머리 질 했다. “어째?” 어금은 남편의 눈치를 보면서 “시아버님이 죽물을 먹으면서라도 고향에서 살잡구마.” 하고 안타까워했다. 서너 살 되는 근덕이 어금에게 안기면서 “엄마, 울지 말라는데도.”라고 하며 어머니 얼굴의 눈물을 애고사리 손으로 닦아주었다. “에이고, 요 거 귀여워 어쩌겠니?" 사련은 근덕을 안고 얼굴에 뽀뽀를 해주었다. 이윽고 일곱 살 난 상순은 서너 살 차 밖에 안 되는 외조카 근덕과 집안에서 좋다고 뛰놀았다. 한참 후 상훈이 일어나며 “모두 떠나기요. 어둡기 전에 병풍치기를 건너서 신설동을 지나가야 하오.” 하고 말했다. 모두들 일어나는데 사련은 자기 맏딸을 두고 가기 아쉬워 일어는 났지만 차마 바깥으로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얘야, 사위.” 그는 딸과 사위를 불러놓고 당부했다. “자네들도 여기서 살기 바쁘면 간도로 오게나.” “알았습니다.” 서로 마음 아픈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상우와 상훈은 지게를 지고 아낙네들은 보꾸러미를 이고 눈보라가 사납게 기승을 부리는 산길을 따라 북으로, 북으로 떠나갔다. 불붙이 산정까지 근덕을 업고 따라 나온 어금은 남편과 함께 본가집식구들이 눈보라 휘몰아치는 산간에서 사라질 때까지 눈물을 줄 끊어진 구슬처럼 줄줄 흘리며 손을 저었다. 해질녘에 그들은 몇십길이나 되는 절벽으로 둘러선 병풍치기 밑으로 빠져나가 신설동에 이르렀다. “큰집에 들리어 하루 밤 자고 떠나자.” 상우는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혹시 또 큰할아버지랑 연루시키지 않겠는지? 전번에도 아버지 때문에 자위대에 잡혀가 혼났는데.” “설마 그놈 새끼들이 여기까지 쫓아오겠냐? 죽이겠으면 진작 운주동에 쫓아와 열 번도 죽였겠다.” 성희의 말에 모두들 얼어든 몸을 녹이게 되여 좋아들 했다. 그런데 범이 자기 흉을 하면 온다고 상우는 저 멀리 큰집 앞마당에서 총을 메고 큰할아버지한테 꽥꽥 고함치는 자위대 놈들 서넛을 발견했다. “상우네 꼭 여게 들렸지?” “말해!” “그 놈 새끼들을 붙잡기만 해봐라. 종아리를 분질러놓겠다.” 그 소리에 상우는 뒤돌아보며 나직이 소리쳤다. “빨리 수림 속으로 피합시다.” 모두들 화들짝 놀라 눈 덮인 수림 속으로 헐금씨금 도망쳤다. 한참 도망쳐 신설집과 몇 백 미터 떨어진 눈 덮인 산정의 수림 속에 들어갔다. 신설집 쪽의 산기슭을 내려다보니 총을 둘러멘 자위대 놈들이 마을 어귀고 어디고 죽 늘어 서 있지 않겠는가. 상훈은 어둑어둑해지는 수림 속을 둘러보더니 지게를 나무에 기대 세워놓고 상우에게 물었다. “오늘 밤은 어데서 잔다니?” 상우는 “아버지와 할아버지처럼 눈 굴을 파고 마른 나무 잎을 깔고 이불을 덮고 눈을 붙이네 합시다.” 하고 말했다. 모두들 서로 쳐다보면서 쑤군거렸다. 그는 지게를 벗지도 않은 채 “형님, 빨리 길을 다그칩시다.” 하고 말했다. 그때 상순은 “형님, 난 맥이 없어 더 걷지 못하겠소.” 하고 떼를 썼다. 상우는 어린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지게를 벗어 나무에 기대 세웠다. 그는 아내한테서 누더기이불을 달라고 해 몇 벌로 겹쳐 개이더니 지게에 얹은 가마 위에 펴놓았다. “자, 상순아, 지게에 올라가 앉아라.” 상순은 “야, 좋다 야.” 하고 형님이 붙잡고 있는 지게 위로 기어 올라갔다. 상우는 동생이 지게우의 이불 위에 올라앉자 지게를 지고 일어나더니 길을 떠났다. 그런데 그것도 한참 가자 상순은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겨울밤에 온 몸이 얼어들어 춥다고 야단쳤다. 상순은 얼어드는 손이 시려 째진 바람개비를 들고 쳐다보다가 눈 덮인 수림 속에 던져버렸다. 그러나 형님의 부탁대로 물을 퍼 먹으려고 쪽박만은 손이 시려도 꼭 쥐고 있었다. 그들은 신설동과 한 십리 떨어진 산속에서 눈구덩이를 파고 마른 나무 잎을 깔고 이불을 덮고 잠을 청했다. 어린 상순은 어머니 품에 안겨 어찌나 곤하였는지 인차 코를 골며 잠들었다. 눈 굴 밖에서는 눈보라가 윙윙 휘몰아쳤다… 그들 여덟은 배고프면 언 주먹밥을 꺼내 먹고 갈증이 나면 산속의 눈을 움켜 쥐여 먹거나 쪽박으로 지나가던 마을의 우물에서 물을 퍼 마시면서 북으로, 북으로 걷고 또 걸었다. 보름 동안이나 걸어서 새해 1월 중순 어느 날 오후에야 겨우 두만강변에까지 이르렀다. 상우 일행 여덟은 회령에 감히 들어가지 못하고 회령을 에둘러 산줄기를 따라 강 하류 쪽으로 걸어갔다. “야, 두만강이다.” 상훈은 기뻐 소리쳤다. 그러자 상우는 “소리치지 마오. 누가 듣겠소.” 하고 말리였다. 그들 일행은 마중 나오기로 한 기준과 창준이 기별한대로 강변 버드나무 숲속에서 날이 어둡기를 기다렸다. “아이고, 배고파 죽겠다.” 상순이 눈 바닥에 폴싹 물앉으면서 상을 찡그렸다. 상우가 서쪽하늘을 쳐다보니 서쪽으로 기울어진 해가 넘어가자면 둬 식경 기다려야 할 것 같았다. 게다가 언 주먹밥마저 다 떨어져서 두만강을 건넌 후 낯선 만주국에 가면 중국말도 모르지 어데서 죽물도 얻어먹지 못하면 소서구까지 어떻게 가겠는가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상우는 쪼그리고 앉은 상순을 보고 “얘, 배고프면 전번처럼 월금 누나랑 함께 이 쪽박을 들고 저 산 아래 마을에 가서 밥을 좀 얻어다 먹으렴.” 하고 말했다. 상순은 쪽박과 산 아래 마을을 번갈아보면서 물었다. “이 쪽박 들고 가면 또 밥을 줄까? 형님과 함께 갈까? 혹시 개 달려들면 힘이 센 형님이 누나보다 낫겠는데.” 사련은 상순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타일렀다. “형님이 마을에 내려갔다가 혹시 한길수 놈의 졸개들을 만나면 잡아갈 게 아니야? 허나 너랑 어린애니까 조만해 알아보지 못한다. 애들이 밥을 좀 얻어먹자면 불쌍해 더 잘 줄 거야.” 그러자 상순은 발딱 일어나면서 “누나 가기요.” 하고 월금의 손을 잡고 산 아래로 내려갔다. 월금과 상순은 쪽박을 들고 산 아래 마을로 내려갔다. 산 아래 첫 집에 가서 문을 두드리자 웬 사내가 내다보더니 침을 퉤 뱉으면서 욕지거리를 해댔다. “에이, 퉤, 또 강을 건널 거지들이 왔구나. 우리 집엔 밥이 샘처럼 솟는가 하는 모양이지. 하루에도 거지들이 몇이 오니. 없다, 없어. 저쪽 부자 집에 가 봐라.” 상순은 입이 뾰로통해 월금 누나를 쳐다보았다. 월금은 코마루가 시큼해났다. “가자, 저 아래 집으로 가보자.” 그 집은 꽤나 잘 사는지 토성도 있었다. 그런데 그들이 대문어귀에 다가가기 바쁘게 왕, 왕, 왕 개 짖는 소리와 함께 황둥개가 뛰쳐나왔다. 월금은 몽둥이를 휘둘러댔다. 황둥개는 한대 얻어맞고 깨갱거리면서 대문 안쪽으로 뒷걸음 질 치면서 왕, 왕, 왕 짖어댔다. “누가 우리 황둥개를 때려? 에헴.” 안에서 건 가래를 떼는 소리가 나더니 뚱뚱한 영감이 대문어귀에 나타났다. 그러자 황둥개는 주인에게 다가가 꼬리를 흔들면서 더 짖지 않더니 주인의 태도가 어떤가 지켜보았다. 주인이 욕하면 황둥개는 당장 달려들 것만 같았다. “너네는 어데서 온 놈들이야?” 상순은 까만 머루알눈을 똑바로 뜨고 말했다. “배고파서 밥을 좀 얻어먹자고 왔습니다. 이 쪽박에다 잡숫다가 남은 밥이라도 있으면 한바가지만 줍소.” "누룽지를 주어도 됩구마." 뚱뚱보는 상순과 월금을 힐끔 곁눈질해보더니 “보아하니 먼 길을 온 것 같구나. 쯧쯧. 오너라.” 월금은 부자가 뜻밖에 밥을 줄 것 같아 기뻐 어쩔 줄 몰라 했다. 황둥개도 주인이 자기 대가리를 쓰다듬어주면서 월금의 오누이를 대하는 태도가 상냥한지라 더 짓지 않고 그들 오누이를 쳐다보며 꼬리를 흔들어대며 따라 토성 안으로 들어갔다. 부자는 쪽박을 들고 들어가더니 조금 있어 한바가지 밥을 꼴딱 담아가지고 나왔다. 뒤에서 주인집 아낙네가 젖은 누룽지도 두 덩이나 더 들고 나와 월금과 상순에게 쥐어주었다. “에이고, 이 추운 겨울에 바깥에서 떠돌며 고생이구나. 얼어 죽지 않겠니? 불쌍해라. 이런 애들을 두고 어미는 어데 있을까? 쯧쯧.” “또 간도로 들어가는 집 애들 같소. 아무리 그러니 애들을 혼자 두만강 가에 내보냈겠소?” 뚱뚱보부자가 짐작해 하는 말이었다. 부자라고 다 깍쟁인 건 아니었다. 이 집 부자는 인심이 후한 편이였다. 월금은 밥을 담은 쪽박을 받아들고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잘 먹겠습구마.” 상순도 누룽지덩이를 들고 누나처럼 인사했다. “고맙습구마.” 상순은 누룽지를 맛있게 먹으면서 산으로 올라왔다. 월금은 꽤나 묵직한 쪽박바가지를 들고 해시시 웃으면서 산으로 톺아 올라왔다. 그들 오누이가 산으로 올라오는 것을 먼발치에서 보고 상우가 마중해 내려가 쪽박의 밥을 받아들고 올라왔다. 토끼꼬리만한 겨울해가 꼴깍 넘어갔다. 그들은 오누이가 얻어온 묵은 밥으로 요기나 하고 두만강 맞은편만 주시해 살폈다. 한참 후 때마침 대안의 버드나무숲속에 모닥불이 피어올랐다. 상우는 지게를 지고 일어나면서 “가기요. 아버지네 마중하러 와서 저기서 기다리고 있는 거 같소.”하고 말했다. 그러자 사련은 “이젠 살았구나.” 하고 나직이 중얼거렸다. 상순은 두만강을 건너면서 빤들빤들한 얼음 강판을 보자 두 발로 짤짤 미끈다 쪽박을 얼음 위에 대고 밀어본다 하면서 뛰놀며 건너갔다. “야, 썰매나 있었으면 여기서 타면서 놀았으면 좋겠다야.” 상순이가 떠들어대자 상우는 “쉿- 빨리 가자.” 하고 재촉했다. 그러자 사련은 누더기보따리를 인 채 상순을 제꺽 업고 부랴부랴 치마 자락에 비파 소리 나게 반달음쳤다. 어린 상순은 엄마 잔등에 업혀서 종알거렸다. “이 빤들빤들한 얼음에 팽이도 뱅글뱅글 치면서 놀았으면.” 사련은 잔등을 되돌아보면서 “언제 그런 궁리를 다 할 새 있니?”라고 했다. “엄마, 난 손이 시리우. 이 쪽박을 두만강에 던질까?” 그러자 상우는 “야, 던지다니? 길에서 이 쪽박신세를 얼마나 보았니?” 하고 말하더니 상순의 손에서 쪽박을 빼앗아 지게우의 가마 안에 달랑 올려놓았다. 사련은 상순의 손이 얼까봐 팔소매 안에 넣고 끈으로 팔소매를 꽁꽁 매놓았다. 그들이 약속대로 모닥불에서 강 하류 쪽으로 한 1 리 떨어진 곳으로 두만강을 건너가자 눈 덮인 버드나무숲속에서 하얀 옷을 입은 두 그림자가 나타났다. “아버지! 삼촌!” 상훈이가 제일 먼저 기준과 창준을 알아보고 지게를 진 채 마주 달려 나갔다. “할머니도 왔니?” “예. 작은 엄마도 다 왔습니다.” 기준은 마주 달려 나오면서 “엄마! 아주머니!” 하고 소리치며 달려와 넙적 엎드리며 큰절을 올렸다. “엄마, 그간 이태 동안이나 보살펴드리지 못한 이 불효자식을 용서합소.” 창준도 달려와 어머니한테 큰 절을 올렸다. “엄마, 무사했습둥?” 성희는 기준과 창준의 잔등을 툭툭 치며 한탄했다. “얘들아, 너희들이 무사히 살아 있으니 됐어. 이 어미 너희들 얼마나 근심했는지 알고 그려? 그러나 저러나 이렇게 두만강을 훌쩍 건너 왔으니 언제면 또 고향땅에 돌아가겠어? 응?” 기준은 천천히 일어나면서 “엄마, 근심하지 마십시오. 우리 농사를 많이 지어 돈을 벌어가지고 고향에 돌아가 엄마를 모시고 잘 살겠습구마.” 성희는 허리를 구부정하고 “말이 그렇지 언제 조국에 돌아가? 외가집 식구들은 언제 만나겠어? 외삼촌이랑 외사촌동생이랑. 쯧쯧.” 하고 푸념 질을 끝이 없이 했다. “아버지! 이태동안 무고했습둥?” 상우가 지게를 세워놓고 큰아버지와 아버지에게 절을 올렸다. 그러자 상훈과 월금, 상순 등도 모두 상우를 따라 큰절을 올렸다. “응. 빨리 이 곳을 벗어나가야 해.” 기준의 말에 모두들 두만강변 버드나무 숲속에서 부랴부랴 빠져나갔다. 기준은 아예 어머니를 훌 업고 눈가슴을 헤쳐 나가며 걸음을 다그쳤다. 창준과 기준은 집식구 여덟을 이끌고 재빨리 오랑캐 령을 넘어섰다. 칼날같이 맵짠 설한풍이 기승스레 불어쳐 언 얼굴을 긁어가고 숨이 헉헉 막혔다. “어째 간도 눈보라가 더 맵짜네.” 성희는 기준의 잔등에서 허리를 구부정하고 기침을 콜록콜록 했다. 기준은 “간도의 겨울은 고향보다 퍽 춥습구마.” 하고 말하며 씨엉씨엉 걸음을 다그쳤다. 그래도 성희는 기준의 넙죽한 잔등에서 기침을 콜록콜록 깇었다. 그때 월금은 두 팔을 쳐들고 어정어정 걷는 상순을 보고 이상해 “얘, 넌 왜 그렇게 느리게 어정어정 걷느냐? ” 하고 말했다. 사련이가 상순을 내려다보았다. “엄마, 얘 바지에 오줌을 쌌습구마.” “응?” 상순은 발을 동동 구르면서 “팔소매를 매놔서 손을 꺼내지 못해 바지에 오줌을 쌌습니다.” 하고 말하며 엉엉 울었다. “에구머니나!” “쯧쯧.” 사련과 월금이 상순의 바지를 만져보니 오줌에 얼어서 바지가 꼬댕꼬댕 얼어 말이 아니었다. “에이고, 그래서 어정어정 걸었구나. 쯧쯧.” 상우는 상순을 제꺽 지게에 올려놓고 걸었다. 상순은 지게 위에서 추워나자 “형님, 모닥불이라도 피워 옷을 말리어 입구 가기요.” 하고 종알거렸다. 사련이 옆에서 상순의 몸에 이불을 감아주면서 “조금만 이를 악물고 참아라.” 하고 말했다. 옆에서 기준의 잔등에 업히어 가던 성희는 중얼거리며 핀잔을 주었다. “이 철없는 것아, 이 눈 가슴 속에서 어데서 나무를 주어다 모닥불을 피우는 기여?” 기준은 집식구들이 잠자리를 근심할 까봐 일부러 높은 소리로 말했다. “내 마중 나올 때 명동교회당의 김하규한테 잠자리를 말해놨으니까 모두 금심하지 말구 빨리 걷기요. 이제 서너 시간만 걸으면 명동교회당에 도착하오.” 그들은 온 밤 걸어 밤중에 명동교회당에 이르렀다. 김하규는 구면이 된 기준이네 일가를 극진히 대접했다. 기준은 잠들어버린 상순의 언 바지를 벗겨가지고 부엌에 내려가 활활 피어오르는 장작불에 말리었다. 얼었던 바지가 녹으면서 김이 몰, 몰 피어올랐다. 기준이네 일행 열은 명동교회당에서 하루 밤 푹 자고 이른 아침에 죽을 들고 다시 길을 떠났다. 상순은 마른 바지를 입었는지라 좋아서 용케도 걸음을 잘 걸었다. 그들은 물레방아 골의 원삼이네 집에 들리지 않았다. 그들이 온 하루 걸어 삼봉동 고개에 올라섰다. 골 안을 따라 북쪽을 내려가면서 올망졸망한 움막들이 여기저기 널려있고 저 먼 북쪽에 진수해 시내가 내려다보였다. 해는 서산으로 뉘엿뉘엿 기울어져가는데 이제두 한 35리 걸어야 했다. 그런데 김하규가 준 언 주먹밥도 거덜이 났다. 월금은 주린 배를 걷어안고 비칠거리면서 겨우 걸었다. “아버지, 배고파 이젠 더 걷지 못하겠습구마.” 기준은 월금의 곁에 와서 “그래도 이를 악물고 걸어야 한다. 물앉으면 얼어 죽고 만다.” 하고 말하고 나서 한숨을 푸 길게 내쉬었다. 성희는 손녀의 언 얼굴을 만져주면서 걸었다. “요 어린 것도 이젠 보름 너머 걷지 않았어?” 기준은 못마땅한 눈길을 월금에게 주면서 “자꾸 응석을 부리게 하지 맙소. 열대여섯 살이나 먹었으면 이젠 어린애 아닙구마.” 하고 말했다. 그는 앞에서 아장아장 걸어 나가는 상순을 가리키면서 “상순을 봐라. 얼마나 장하게 잘 걷는가?” 하고 치하했다. 이때 뒤에서 서너 사람들이 아주 빨리 걸어 기준이네를 점점 가까이 따라잡았다. 기준이가 몸을 돌려 뒤돌아보고 깜짝 놀랐다. “아니, 저분들이 석철 칠촌숙 아니오?” 그 말에 모두들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뒤에서 확실히 석철이네 부부가 어린 아들 보준을 데리고 석은을 따라 삼봉동 고개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아래사랑집 시삼촌네구나.” 사련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기준과 창준이네 일가는 모두 석철과 석은에게 인사를 올렸다. “칠촌숙 무사하오? 고향에서 서로 토론도 하지 않고 떠났는데 약속이나 한 듯이 여기서 딱 만났구먼.” 기준의 말에 석철은 이상 조카네를 둘러보면서 “글쎄 말이요. 여기서 만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소. 잘 됐소.” 이때 상순이가 뛰어와 아버지를 쳐다보면서 “배고픕구마.” 하고 종알거렸다. 사련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대뜸 눈치 챈 석철은 지게를 내리워 받쳐놓으면서 말했다. “여기 언 주먹밥이 남은 게 있소. 우리 여기서 나눠 먹고 소서구까지 가기요.” 석철의 아내도 반색하면서 지게에서 언 주먹밥덩이랑 마늘과 고추장이랑 내려놓았다. 상순은 체면을 차릴 새 없이 언 주먹밥덩이를 두개나 양손에 쥐고 오도독오도독 씹어댔다. “굶고 보면 양반이 없다지 않소. 빨리 먹기요.” 이리하여 그들 두 집안 집에서는 삼봉동 고개에서 극적으로 만나 석철이 준 언 주먹밥을 나눠 먹은 후 풍설이 이는 을씨년스러운 겨울추위를 무릅쓰고 또다시 길을 떠났다. 5. 고향 생각 기준이네 일행 열은 그날 밤 아홉시쯤 되여서야 눈보라가 윙윙 휘몰아치는 태평강 반의 아름드리나무숲속에 자리 잡은 큰집에 도착했다. 벌건 적송으로 지은 육간 방틀 집은 꽤나 아담해보였다. 그 집을 짓느라고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모른다. 한것은 집터를 준 값으로 장학산은 자기 집을 먼저 지어달라고 생떼를 썼다. 어쩌는 수 있는가? 마음이 후해보이던 장학산이 깍쟁이본심을 드러내기 시작하는데야. 그들은 마을 사람들과 함께 봄부터 여름까지 농사일을 뒤에 밀어놓고  마을 사람들과 함께 소서구 어귀에 고래등 같은 집을 지어놓고 높다란 토성까지 쌓아올리지 않으면 안됐다.    “아유, 집이 정말 좋구나.” 월금이 감탄하면서 집 문을 열고 제일 먼저 들어갔다. “둘째손녀가 왔구나.” 문이 벌컥 열리더니 병완이 상길을 데리고 마루 위에 나섰다. “할아버지!” 상순이가 두 팔을 벌리고 달려가 병완에게 안겼다. “오, 우리 막내손자도 왔구나.” 창준과 기준 일행은 모두 병완 앞에 넙적 엎드리면서 큰절들을 올렸다.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오, 그래, 무사히 왔으면 됐다. 추운데 어서 집안에 들어오라.” 병완은 점잖게 절을 받고 손으로 집안을 가리켰다. 모두들 집에 들어갔다. 상길은 아버지와 어머니 품에 번갈아 안기면서 응석을 부렸다. 창준은 상길을 번쩍 들어 안고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우리 막내아들이 다 컸구나.” 하고 말하면서 집안으로 들어갔다. 병완이 집안에 장작불을 많이 때놓아서 큼직한 집안이 훈훈했다. 사련이가 등불 아래로 피뜩 여겨보니 시아버지도 이젠 더부룩한 구레나룻에 턱수염에마저 흰서리가 내리어서 고향에서 보던 때보다 퍽 겉늙어보였다. 석철과 석은 형제 내외간이 애들을 데리고 집에 잠간 들리었다가 병완에게 인사하러 찾아왔다. “형님, 그간 무사했습니까?” “오, 반갑소. 작은집 육촌 동생네도 왔구먼. 옛날부터 팔촌이 한 구들이라는데 참 잘 됐소. 우리 여기서 함께 잘 살아 보기요. 그래 고향형편은 어떻소?” 병완이 인사하면서 석철 형제간에게 위방에 맞아들여 윗자리를 권했다. 석철은 병완이가 이상인지라 아래 자리에 앉았다. 석철은 도리머리 질 하더니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었다. “말도 마오. 우리 집에서 떠나기 전날에 일본 놈의 개 같은 한길수랑 숱한 졸개들을 끌고 운주동에 와서 야단쳤소.” 병완은 눈썹까지 곤두세우고 들었다. “그래, 어쩌던가?” 석철은 언성을 낮추더니 이렇게 귀속 말로 나직이 말했다. “형님이랑 지은 경찰국이 무너졌다고 생 야단쳤소.” “어허, 그렇게 빨리 무너질 줄은 몰랐는데. 거 참 잘 됐다, 잘 됐어. 한 5년은 가겠나 했는데.” 병완은 그 기쁜 소식을 듣고 기준과 창준을 둘러보면서 왼눈을 찔끔 했다. “지붕틀이 툭 끊어졌다오. 아마 이번 큰 눈에 무게가 실리면서 지붕틀이 견디지 못한 거 같소. 기둥도 벌레가 먹어 다 기울었소.” 기준과 창준은 너무도 기뻐 턱수염을 슬슬 만지면서 통쾌하게 껄껄껄 웃었다. “그래 한길수 어찌던가?” 옆에서 석은이 입을 열었다. “어찌 하겠소? 경찰국의 일본 놈들과 한길수 패거리들은 큰집형님네 삼부자가 벌레 먹은 통나무로 집을 지어서 경찰국이 무너졌다고 떠들고 다니었소. 하늘 끝까지라도 찾아가 붙잡는 날이면 칼탕을 쳐놓겠다고 했소.” 석철은 너무한 말을 하는 것 같아 동생의 허벅지를 툭툭 쳤다. “괜찮아. 계속 말하게나.” 석철은 도리머리 질 했다. “형님네 며칠 전에 몽땅 달아나서 붙잡지 못하게 되자 대신 큰집 병권 형님 일가를 놔두지 않겠다고 야단쳤소. 불붙이에 있는 어금이랑 무사할지 모르겠소.” 그 말에 상우는 “그래서 우리 큰집에 들리려 했을 때 일본 놈들이 자위대 놈들이 큰집에 와서 야단쳤겠구나. 전번에도 큰집 할아버지를 붙잡아 갔소. 상철 형님의 아내 머리를 총 박죽으로 쳐놓아서 골병이 들었을 겁니다.”라고 했다. 병완은 머리를 숙이고 곰방대에 담배를 쑤셔놓고 부시를 켜 달아 길게 쭉 빨아들였다가 연기를 후 내뿜었다. 석은은 “형님네 때마침 잘 떠났소. 거기 있었다간 큰 봉변을 당했을 거요.” 하고 말했다. 병완은 한참 궁리하더니 조용히 말했다. “이전에도 창준과 기준에게 말해두었지만 절대 우리가 명천에서 왔다는 말을 하지 말라. 그리고 이름도 애명을 불러라.” 그러자 석철은 아쉬운 듯이 말했다. “야, 난 그래도 우리 여기 후에 큰 마을이 되면 고향의 이름을 따다가 영월동이라거나 운주동이라고 짓자고 했는데 다 틀렸구먼. 형님 말대로 자칫하면 한길수놈새끼 명천이나 운주동이라는 마을이 있다는 소문을 들으면 여기까지 쫓아올 수도 있습니다.” “그렇네.” 병완은 머리를 조금 들더니 한 마디 한 마디 힘주어 말했다. “그래서 우리 마을을 함흥촌이라고 부르고 우린 함흥에서 왔다고 하기요.” 석은은 대뜸 동의해 나섰다. “그게 좋겠소. 함흥촌, 함흥촌이라. 거 이름이 참 좋소. 그러지 않아도 한길수 새끼랑 형님네를 찾지 못하니 우리를 보고 대지 않는 날엔 잡아가겠다고 했소. 그래서 이번에 우리 형님네도 이번에 나를 따라 불시에 들어왔습니다.” 창준은 석철을 보면서 머리를 끄덕였다. 석은은 기준과 창준을 돌아보면서 “이상 조카들의 애명이 뭐던가? 알아야 이후에 말이 엇나가지 않지.” 하고 물었다. 창준은 “내 애명은 문칠이고 기준은 경칠이요.” 하고 말했다. 기준은 뒷말을 이렇게 덧붙였다. “상우는 김우라고 부르고 상순은 김순이라든지 김진이라고 부르면 되오.” “알았소.” 석철과 석은은 머리를 끄덕였다. 그들은 병완의 삼부자는 밤중까지 이야기를 나누다가 돌아갔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 병완은 창준과 기준을 보고 “병권 형님네 근심스럽구나.” 하고 근심하면서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었다. 기준은 “큰아버지도 간도로 들어 올 게지. 이전에 내 고향을 떠날 때 권고했는데 병이나 보면서 고향에서 살 궁리를 합디다.” 하고 말하면서 길쭉한 얼굴을 가로 저었다. 그러자 창준은 “일본 놈들의 성화에 큰아버님도 꼭 간도에 들어 올 겁니다. 근심하지 마십시오.” 하고 말했다. 그들 삼부자는 오래 동안 이 말 저 말 하며 한숨을 푸푸 내쉬다가 밤중에야 겨우 눈을 붙이네 했다. 이튿날 병완은 아침숟가락을 들지 않고 머리를 숙이고 흑흑 흐느껴 우는 것이었다. “아버지, 자손들이 다 무사히 왔는데 왜 우십니까?” 기준이가 의아해 하는 말에 병완은 가래 같은 손으로 눈물을 닦더니 머리를 들어 자손들을 둘러보면서 무겁게 입을 열었다. “오늘 따뜻한 온돌에 앉아 밥술을 들게 되니 고향 명천의 언 땅에 계시는 아버님하구 할아버님, 조상님들 생각에 애간장이 끊어지는 것 같구나.” 그제야 자손들은 숟가락을 들었다가 모두 밥상에 놓고 병완을 정색해 바라보았다. 병완은 산등성이 같은 넙죽한 어깨를 들먹이면서 말했다. “간도에 온 후 난 풍설이 일거나 소낙비가 내릴 때나 고향 땅에 모셔두고 온 아버님하구 할아버님 그리고 조상님들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다. 저 눈보라치는 고향 성남 언 땅에 모셔둔 아버님을 생각하면 가슴을 째지게 피눈물이 흐른다. 지금 우린 일본 놈들과 그 개다리 한길수에게 쫓기는 형편에서 고향에 돌아가기 힘들게 됐다. 그러나 이후에 누구든지 고향 명천 땅에 돌아간다면 꼭 아버님과 할아버지, 조상님들의 산소를 찾아가 꼭 그간 조상들의 산소를 모시지 못한 것을 사죄하고 인사를 드려라.” 기준과 창준은 이구동성으로 “알았습니다.” 하고 말했다. 상훈과 상우도 이구동성으로 “근심하지 마십시오.” “꼭 조상님들의 산소를 잘 모시겠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죄꼬만 상순이가 좋다고 숟가락을 쥐고 구들에서 퐁퐁 뛰면서 “할아버지, 이 담 내 크면 꼭 할아버지한테 인사드릴게요.” 하고 말해 모두들 웃음을 겨우 참았다. 병완은 상순을 오라고 손짓해 무릎에 앉혀놓고 귀여워 길쭉한 얼굴을 쓰다듬어주었다. 상길은 열 살이나 되였는지라 어른스레 상순의 옆에 앉아서 쌔물쌔물 웃기만 했다. 그제야 모두 아침숟가락을 들었다. 간도에 들어온 후 처음으로 일가 식구들이 몽땅 한 구들에 앉아서 식사를 하자 그간 보름 넘어 걸은 피곤이 다 사라지는 듯이 웃음꽃이 피어났다. 바깥에서는 눈보라가 창살을 무섭게 두드리면서 기승을 부렸다. 아름드리 버드나무와 비술나무가 우거진 눈 덮인 황야에 외롭게 자리 잡은 집은 야밤에 굶주린 승냥이의 울음소리까지 들리어 적막함과 공포감이 온 집안을 칭칭 휘감았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1926년 희망의 새 봄이 왔다. 병완 일가는 황무지를 개간하고 고향에서 가져온 씨앗을 뿌려 배불리 먹고 살리라는 희망으로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간도 황야에 봄 장군이 다가오자 기세 사납던 동장군도 무릎 꿇더니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은세계를 방불케 하던 황야의 눈보라를 윙윙 휘몰아치며 기승스레 파도치던 눈 바다가 사라졌고 얼어서 탁탁 튀던 땅도 따뜻한 봄볕에 뾰족뾰족 돋아나는 새 싹을 어린애들처럼 껴안고 흥겨운 봄노래에 웃음 짓고 있었다. 소서구의 남산에는 연분홍 천지꽃이 만발하여 온 산을 분홍빛으로 물들여 하나의 커다란 천지꽃 산더미를 방불케 했다. 종달새가 남산 하늘에서 날아예며 지종지종 풍작을 기약하는 새 봄 희망의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병완의 일가 사내들은 모두 괭이로 나무를 뿌리 채로 찍어내고 누런 황무지에 밭을 일궜다. 아낙네들은 부식토를 버치에 이어 날라다 밭고랑에 편다, 고향에서 가져온 옥수수와 기장 씨앗을 뿌린다 하며 분주했다. 그들은 새 희망과 함께 생명의 씨앗을 황야에 일군 밭에 심었다. 기준은 괭이질을 하다가 서서 골 어귀의 장지주네 집을 가리키면서 “장학사라는 지주는 인품이 아주 좋은 사람입니다. 조선 고향의 지주들은 소작료로 8할씩 받지 않고 뭐입둥? 그런데 밭에서 난 곡식을 딱딱 절반씩 나눠가집니다.” 하고 혀를 끌끌 찼다. 그러자 병완은 “그 것보다도 황무지를 개간한 땅에서 난 곡식은 8할을 우리가 먹게 하니 얼마나 대단한 양반이냐?” 하고 덧붙였다. 창준은 “쌀독에서 인심이 난다고 이렇게 황무지가 가득하니까 인심도 낼만도 한 거죠. 우리 부지런히 황무지를 개간해 농사를 지으면 조선 고향에서 진 문중전을 이자까지 싹 물 거 같습구마.” 하고 동을 달았다. 병완은 “그럼 오죽 좋겠느냐?” 하고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앗! 뱀!” 기준이가 괭이질하다가 발목을 붙잡으면서 물앉았다. 병완이 보니 꺼먼 점이 박힌 얼룩 독사가 대가리를 쳐들고 기준한테 달려드는 것이었다. “이 놈 뱀이!” 병완이 괭이로 찍으려 할 때었다. 기준은 손을 붙잡았던 손으로 꼿꼿이 쳐든 독사의 대가리를 덥석 잡아 홱 뿌리쳤다. 그때 병완이 괭이로 독사의 목을 콱 내리찍었다. 독사는 꼼짝 못 하고 목이 끊어졌다. 그래도 그 놈의 독사는 의연히 꾸불거렸다. 창준은 황급히 달려가 기준의 발목을 꽉 잡고 입을 뱀에게 물린 상처에 대고 독이 든 피를 몇 번 빨아 뱉어냈다. 뒤이어 자기 옷자락을 쭉 찢어 뱀에게 물린 기준의 상처 발목을 아래 위 꽉 동여매주었다. 병완은 기준을 보고 “빨리 뱀에게 물린 자리에 오줌을 눠라.”고 재촉했다. 기준이 괴춤을 잡고 숲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상우와 사련의 얼굴에는 근심스러운 그림자가 흘러 지나가고 있었다. “야, 곱다. 엄마, 저 앞산 꽃은 무슨 꽃이오?” 이때 셈이 들지 못한 상순이가 아버지가 독사에게 물린 것도 모르고 묵밭에서 세투리를 캐다가 남산을 가리키면서 물었다. 사련은 “천지꽃이다. 우리 고향 명천에서는 천지꽃이나 철쭉꽃이라고도 한다. 얼마나 예쁜 고향의 꽃인데 여기서도 철쭉꽃이 피였구나.” 하고 말했다. “엄마, 저 남쪽 산을 무슨 산이라고 하오?” 그러자 괭이로 묵밭을 일구던 기준이가 “그 산을 할아버지는 고향의 천지꽃이 많이 핀다고 천지꽃산이라고 이름 지어 불렀다.” 하고 대답했다. “아, 천지꽃산의 천지꽃이 정말 곱습꾸마. 가서 꽃을 꺾어 오겠습니다.” “에이고, 놀 궁리만 하다나면 언제 제 밥값을 하겠냐?” 어머니의 핀잔에 상순은 함지안의 능재를 가리키면서 종알거렸다. “내하구 누나 한 함지나 캤는데도.” “오, 그래 우리 막내아들 장하다. 그래야 밥값을 하지.” 그러자 월금과 상순은 “야, 가서 꽃을 꺾으면서 놀아도 된다.” 하고 천지꽃산 쪽으로 달려갔다. “아이고, 조것들을 어찌 하겠냐? 천지꽃산에 범이나 승냥이들이 드나드는데도.” 기준은 개암나무를 찍어내고 묵밭을 일구다가 괭이를 버리고 애들이 근심돼 쩔뚝거리며 쫓아갔다. 하루 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고 애들은 천지꽃산 기슭에 달려가 천지꽃을 꺾어 꽃다발을 틀어 머리에 쓰고도 모자라는지 천지꽃을 둬줌씩 꺾어들고 뛰놀았다. 병완과 창준은 쉴 참도 된지라 애들을 따라 천지꽃산에 달려 올라갔다. 어른들이 산으로 달려 올라오자 나무숲속에 엎드려 애들을 노려보던 승냥이들이 겁을 집어 먹고 슬금슬금 달아났다. 병완은 천지꽃산에 올라가더니 돌멩이를 쥐여 뿌리면서 승냥이들을 쫓아버렸다. 어른들의 돌 총 질에 곰들도 숲속에서 안 되겠다싶어 엉기적엉기적 도망쳤다. 기준과 창준은 애들을 불러 온 후 산에서 내려가려고 했다. 그런데 병완은 산마루에 서서 먼 남쪽을 바라보면서 긴 한숨을 후 내쉬면서 착잡한 생각에 잠기는 것이었다. “아버지, 뭘 근심합니까?” 병완은 눈물이 글썽해진 눈을 남쪽하늘에서 천천히 뗐다. “청명이 다가오니 고향에 계신 조상님들의 산소 생각이 난다. 지난해부터 청명이나 한식에나 조상님들에게 제도 올리지 못하는 불효를 저질러서 얼마나 죄송스러운지 모르겠구나.” 기준은 아버지 아픈 심정을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아버지, 근심하지 마시오. 일본 놈들 때문인 거 조상님들도 양해할 겁니다. 언젠가 고향에 가면 그때 꼭 용서를 구합시다.” 병완은 머리를 무겁게 끄덕였다. 그는 천지꽃산 동쪽 골짜기 어귀 나무숲속에 자리 잡은 자기 집 앞의 높다란 토성을 유심히 내려다보더니 기준을 돌아보면서 물었다. “저 토성 안 부자 집은 굉장하더구나. 무슨 식구가 그렇게 많은지 열 간 집도 모자라서 옆에 사랑방을 짓고 또 앞마당에 저렇게 숱한 곁방을 짓는다니?” 기준도 산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글쎄 말입니다. 요즘에는 숱한 일군들을 어데서 데려왔는지 토성바깥에다가 우물을 팝디다.” 하고 시답잖아 했다. 병완은 피씩 코웃음을 쳤다. “토성 바깥에다 우물을 파면 제 집에서 물을 긷기는 불편하겠는데. 하긴 우리 집에서 길어 먹기는 좋겠더라.” “토성안집 주인이 어떤 사람인지 본적은 없소만 그 우물물을 길어먹으라고 하겠는지 두고 봐야지요.” 병완은 머리를 끄덕였다. 그들은 한 쉼 숨을 돌린 후 월금과 상길, 상순을 데리고 천지꽃 산에서 내려와 황무지개간에 일손을 다그쳤다. 점심에 기준이네 일가는 서까래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죽물을 후루룩후루룩 마시었다. “에이고, 이런 죽물을 먹고 한 쉼만 괭이질 하구 나면 배 훌쭉해 어떻게 일하겠습니까?” 상우의 말에 사련은 월금과 상순이랑 캐온 능재를 데워 시 멀건 죽물에 담아 상에 올렸다. 그러자 상우는 데운 능재를 저가락으로 집어 우물우물 씹으면서 “이제야 죽거리가 있구나.” 하고 말하며 맛있게 먹었다. “우리 상순이 장하다. 쌀이 모자라는데 많이 보탬이 되는구나.” 기준은 상순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상순은 흐뭇해 걀쭉한 얼굴을 갸우뚱하며 죽 그릇을 들어 호로록 마셨다. 상우는 집 기둥과 대들보를 돌아보더니 의아해 했다. “이 집을 짓느라고 고생했겠습니다. 그런데 어째 큰집처럼 적송으로 짓지 않고 소나무로 지었습니까?” 기준은 마른기침을 하더니 “이 산골에 적송이 어디 그리 많니? 그래 큰집만 홍송으로 지으라고 했다. 소나무도 모자라서 저 천지꽃산 남쪽에 있는 패용천산과 칼산에까지 가서 헤맸다.” 하고 대답했다. 상우는 그제야 “예-큰집을 적송으로 잘 지은 게 옳습니다. 할아버지를 모시는데.” 하고 찬탄했다. 낮잠도 쉴 새 없이 병완 일가는 몽땅 괭이와 호미를 들고 소서구 막바지에 나갔다. 기준은 괭이를 휘둘러 비술나무와 개암나무를 뿌리 채로 뽑아냈다. 어떤 때에는 괭이에 걸려 뿌리가 잘 뽑아지지 않자 베적삼 팔소매를 훌훌 걷어붙이고 두 손으로 나무를 휘여 잡고 힘을 끙 쓰며 쥐어 당겼다. 팔뚝에 힘줄이 불끈불끈 튀어나오게 힘을 쓰더니 기준의 키만큼 한 나무가 송두리 채 뽑혀 나왔다. 벌써 기준의 베적삼잔등은 땀에 후줄근히 뱄다. 상우는 원래 어질고 말수가 적어 진종일 별로 말도 하지 않고 부지런히 괭이로 나무뿌리를 빼내고 누런 흙을 파헤쳐 밭고랑을 만들었다. 사련과 지새금은 남정들이 뽑아낸 나무랑 개암나무랑 소나무랑 끌어다 한쪽에 쌓아 놓고 밭고랑에 희망의 씨앗을 심었다. 황무지에서 뽑아낸 나무를 말리면 여름쯤에는 땔 수 있을 것 같았다. 장학산 지주는 골 막바지까지 올라와 병완 일가가 황무지를 일구는 것을 바라보면서 흐뭇해 중국말로 중얼거렸다. “허허, 저 소같이 부지런한 실농군들을 만나서 소서구 황무지가 숱한 밭으로 돼가는구나. 잘 살 날두 멀지 않겠다. 허허허. 숱한 곡식을 거둬들이면 어떻게 건사하지? 곡식창고부터 더 지어야 하겠군.” 병완 일가는 이 봄에 황무지에 밭을 일궈 가문의 문중전을 꾼 빚을 다 물고 배불리 먹고 살 새 희망에 가슴이 부풀어 올라 이른 아침 해살을 맞으면서 나가 달을 이고 집으로 돌아 오군 했다. 해가 저문 천지꽃산에서 뻐꾸기가 뻐국 뻐꾹 봄소식을 전하며 노래하고 있었다. 그 봄기분과는 달리 칠흑 같은 어둠속에서 굶주린 승냥이들이 무섭게 울부짖고 어둠속에서 악착스러운 야수들의 눈에서 비치는 불빛이 여기저기 왔다갔다 달아 다녀 소서구에 공포의 밤기운을 더했다. 한 여름이 되자 병완네 일가가 땀 동이를 부어 일군 소서구의 황무지 밭에서 고향에서 가져온 옥수수와 기장, 조이 희망의 씨앗들이 움트더니 어느덧 무릎까지 올라오게 자라 파란 이파리들이 넘실거리며 춤을 추고 있었다. 더욱이 기준이네 일가가 천지꽃산 중턱까지 일군 몇짐 되는 감자밭에 탐스러운 연분홍 감자 꽃과 하얀 감자 꽃이 넘실거려 흐뭇하게 했다. 소서구 양지바른 북쪽산비탈에는 창준이네가 일군 황무지 밭에 고구마넌출과 호박넌출이 쭉쭉 활개 치며 뻗어 나가고 있어 기분을 돋우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고향을 떠나 간도 황야에서 악착스레 황무지를 점점 많이 일궈나가며 살려고 안간힘을 다해 모지름을 쓰는 병완 일가를 상징하는 상 싶었다. 쉴 참에 병완은 기준이네 밭쪽에 와서 남쪽하늘을 쳐다보면서 한숨을 후 땅이 꺼지게 내쉬었다. “병권 형님은 무사히 있는지 모르겠구나. 일본 놈 새끼들과 한길수 새끼 못살게 굴 건데.” 기준도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었다. “글쎄 말입구마. 우리에게 연루돼 큰아버지랑 꼭 고생할겁니다. 인편에 함흥촌에 들어오라고 기별하깁소.” 병완은 저 멀리 남쪽 하늘 끝까지 겹겹이 겹쳐 펼쳐진 산마루 줄기들을 하염없이 눈 뿌리 시리게 바라보면서 중얼거렸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그립구나. 집식구들을 이 천지꽃 산에 다 불러오라.” 기준은 아버지가 청명과 추석 때처럼 천지꽃산에서 뭘 하려는 것을 알고 집식구들을 몽땅 불러왔다. 병완은 남쪽 하늘을 향해 합장배례하고 눈물을 머금고 목청을 가다듬어 말했다. “고향 명천에 계시는 아버님, 어머님, 조상님 여러분, 고향을 떠나 이역만리 떠나와 제때에 산소를 돌보지 못하는 이 불효자식들을 용서해 주옵소서. 우리 일가 자손들이 고향에 계시는 부모님과 조상님들께 인사드립니다.” 모두들 병완을 따라 고향 명천 쪽의 남쪽 하늘을 마주하고 큰절을 아홉 번씩 드렸다. 병완은 뜨거운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을 감고 한참 고향과 부모를 생각에 묵념에 잠겼다. 한참 후 병완은 자손들을 돌아보면서 말했다. “이 다음 누구든지 고향에 가게 되면 꼭 아버님과 어머님, 조부모님과 조상들의 산소에 가토하고 제를 지내라.” 자손들은 이구동성으로 “예. 꼭 제사를 올리겠습구마.” 하고 대답했다. 병완은 창준, 기준과 오래도록 고향 회포를 토로했다. 기러기들이 줄지어 남으로 남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병완이네는 날개가 돋히지 못한 것이 한이었다.  
44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23) 댓글:  조회:2243  추천:0  2015-11-13
                                                                     12. 둥지       이튿날 동녘이 푸름이 밝아오자 병완이 바깥에 나와 움막으로 올라가려고 했다. 그러자 장학산은 서쪽 방을 가리키면서 자라는 시늉을 했다.       병완은 머리를 끄덕이면서 장학산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할 대신 한족 말을 몰라 엄지를 내둘렀다. 그는 기준을 돌아보았다.       “어찌 주인집에 계속 얹혀살겠느냐? 바깥에 나가 돌아보면서 집터를 잡아 놓고 명년 봄에는 집을 짓고 나가자.”       그들은 장학산에게 인사하고 문밖을 나섰다.        간도의 눈보라는 황야를 휩쓸고 기세 사납게 윙윙 휘몰아쳤다. 모래알 같은 눈가루가 얼굴을 마구 두드리고 목에도 마구 날아 들어갔다. 엄동설한 세찬 강바람에 소서구로 들어가는 그들은 숨이 헉헉 막혀 바로 숨을 쉬기조차 힘들었다. 게다가 무릎까지 펑펑 빠지는 눈 위로 황야를 걷는다는 것은 실로 힘들었다.        병완은 눈 덮인 골 안을 돌아보면서 기준에게 “네가 지은 움막은 어데 있느냐?” 하고 물었다. 기준은 소서구 막바지를 가리키면서 “저기 막바지에 있습니다. 이제도 한 2 리 올라가야 됩꾸마.” 하고 대답했다. 창준은 상길을 둘쳐 업고 걷다가 골 안 중간에 있는 움막을 가리키며 “저건 누구네 움막이냐?” 하고 물었다. “건 재작년에 회령에서 들어온 주현경이란 조선 사람의 움막이요.” 병완은 걸음을 멈추고 눈썹을 치켜 올리며 창준과 기준을 보더니 정색해 말했다. “누구든지 우리 정체를 모르게 해야 한다. 명천에서 온 말을 하지 말고 함흥에서 왔다고 해라. 이제부터 너희들도 애명을 써라. 창준의 애명은 문칠이고 기준의 애명은 경칠이다.” 창준은 “예.” 하고 인차 대답했다. 기준은 이렇게 동을 달았다. “아버지 말씀이 맞습니다. 진수해 위안 소 위안부 년들이 아버지를 알아 본 후 어쩐지 한길수의 패거리들이 여기까지 눈에 난 발자국을 밟아 찾아올까봐 꽤나 근심됩꾸마.” 그러나 창준은 도리머리를 가로 저었다. “눈보라 휘몰아치는데, 발자국 어데 남겠어?  일본 놈들이 제 아무리 코 개라 해도 이 골 안까지야 찾아오겠느냐?” 기준은 창준의 잔등에 업힌 상길을 돌아보면서 신신당부했다. “상길아, 누구와도 우리 명천에서 온 말을 해선 안 된다. 알만하지?” “예. 우린 함흥에서 왔잖았습둥?” 기준은 상길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오, 그래. 우린 함흥에서 왔지. 상길은 참 총명한 애지. 최구장네 서당에서 공부할 때도 공부를 제일 잘했지. 한자도 참 잘 쓰고. 영특한 조카지.” 그때 주현경이 움막에서 나와 소리쳤다. “어이, 돌아왔소?” “그래, 돌아왔어. 아버지와 형님만 들어왔소.” 움막 안에서 애들이 머리를 내밀고 그들을 내다보았다. 병완은 주현경의 움막까지 올라가 인사했다. “함흥에서 왔소. 이웃사촌이라고 이후에 형제처럼 서로 도우면서 살기요.” “예. 그래얍지. 다 살 길을 찾아서 이런 골 안으로 왔는데 서로 도우면서 살아야지.” 주현경은 움막 안을 가리키었다. “스산한 움막이라도 잠간 숨을 돌리고 올라가오.”        그러나 병완은 “아니, 기준이 지은 움막이랑 밭이랑 올라가 봐야겠소.” 하고 움막에서 내려왔다.        그들은 한참 걸어서야 겨우 막바지에 지은 움막에까지 올라갔다. 병완과 기준은 목수였지만 반토굴이나 다름없는 움막을 보고 도리머리 질을 할 지경이었다. 병완은 기준의 소개를 들으면서 움막 주위를 둘러보았다. 움막 옆 눈 속에 얼지 않은 샘터에서 샘물이 흘러 골 안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서쪽으로 쭉 뻗어온 소서구 막바지 서쪽과 남쪽, 북쪽에는 눈 덮인 산등성이였는데 싸리나무와 개암나무가 꽉 들어선 황무지였다. 다만 동쪽에만 골 안이 열려 있었다. “밭이 얼마나 되냐?” 병완의 물음에 기준은 “한 서너 짐 밖에 안 됩니다.” 하고 대답했다. 병완은 남산등성이와 서산등성이와 북산등성이를 둘러보았다. “제일간 저 황무지가 욕심나는구나. 저걸 괭이로 부대를 일구면 좋은 밭이 될 것 같다.” 병완의 말에 기준은 “그렇습니다. 고향의 너럭바위 깔린 산 비탈밭보다 훨씬 낫습니다. 봄에 장 지주와 말해 저 황무지를 일궈 반작을 하깁소.” 하고 동을 달았다. “그렇게 하자겠니?” 창준의 말에 기준은 “내 지난해 괭이로 황무지를 떠서 몇 고랑 더 만들었더니 장 지주가 좋아 입이 함박만해집데.” 하고 말했다. “그럼 됐어. 그런데 움막만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 황무지하구 가까워서 일하기는 좋겠는데 살림살이를 장구하게 할 곳은 아닌 것 같아. 소낙비가 내려도 그렇고 산사태가 지면 경사진 곳에 집을 지어서야 견디겠냐?” 기준은 머리를 끄덕이었다. “나도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그런데 당분간에야 어찔 방도가 있습둥?” 병완은 멀리 골 안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말했다. “어제 소서구에 오면서 보니 태평강이라던가 그 강이 흘러나간 저 아래 큰 골 안 어귀에 버드나무우거진 평평한 곳이 있더구나. 거기 버드나무와 비술나무를 베서 집을 지으면 좋을 것 같더라. 풍수를 봐도 앞이 트인 곳이 좋아.” 창준은 인차 “좋을 거 같습구마.” 하고 찬동해 나섰다. 기준은 좀 심중한 표정을 지으면서 “아버지 말하는 거기에 웬 부자가 집터를 잡구 지난해 토성을 둬 키도 넘게 쌓아 놓았습니다. 별난 집이요. 먼저 토성을 쌓고 올 봄에 집을 지을 예산인 거 같습더구마.” 하고 말했다. “조선 지주더냐?” 병완이 묻는 말에 기준은 “듣는 말에 의하면 조선 지주라는 것 같습더구마.” 하고 대답했다. “조선에서도 잘 살 수 있겠는데 이상해. 조선 지주가 고향을 떠나서 이런 간도 산골에 와서 뭘 한다느냐?” 병완은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이 절레절레 도리머리를 저었다. “우리 저 골짜기 어구 나무숲 속으로 가 돌아보자.” 병완의 말에 창준과 기준은 따라나섰다. 풍설이 일었지만 그래도 서북풍을 등지고 산을 타고 골짜기를 내려가기가 올라올 때보다는 걸음이 빨라졌다. 그들은 추워서 오돌오돌 떠는 상길을 장학산네 집에 두고 3부자만 다시 바깥으로 나왔다. 어느 결에 그들은 태평강 반에 아름드리 버드나무와 비술나무가 우거진 골짜기 어귀 평평한 곳에 이르렀다. 병완은 사위를 둘러보면서 말했다. “내 풍수를 잘 모르지만 여기가 집터로는 좋은 곳이다. 산을 등지고 서쪽에는 태평강을 끼고 저 멀리 남쪽으로 부르하통하가 내다보이는 이 골 안 어귀는 제일 좋은 집터야. 뒤에 골짜기 빠져나갔기에 장차 뒤로 황무지를 끝없이 개간할 수도 있다.” 병완은 눈보라 휘몰아치는 비술나무숲속에 우뚝 솟은 키 넘는 토성을 보면서 덧보탰다. “다만 조선부자 집 옆에 집을 짓기 싫다. 이리 좋은 자리를 중국 지주들이 주겠는가는 것도 그렇구.” 기준은 아버지와 형님에게 안심시켰다. “근심하지 맙소. 여기 지주들은 산의 황무지는 한 치도 양보하지 않지만 별나게 이 강바닥은 아름드리나무들이 꽉 박아서서 그러는지 저 부자 집에서 여기다 집을 지어도 말하는 지주 하나도 없습꾸마.” 기준은 근심거리를 수태 털어놓았다. “저기 소서구 밭과 너무 먼 게 흠입구마. 저렇게 먼데 어떻게 일하러 다니고 곡식을 실어 들이겠습둥?” 창준도 자기 생각을 털어놓았다. “낟알이야 거기 움막에 있으면서 털어서 절반 장 지주를 주고 나머지만 달랑 메고 오면 된다. 집터는 아버지 말씀대로 편안한데다 잡는 게 옳다.” 형님까지 좋다고 하자 기준은 입을 다물어버렸다. 병완은 조선 부자 집 토성 앞에 한 일리 되는 곳에 육십 자는 실히 되게 하늘을 찌르고 서있는 비술나무를 보더니 창준과 기준을 돌아보았다. “저기 묵은 비술나무 밑에 집을 지어도 좋을 거 같아. 부자 집과도 멀리 떨어졌고 골 안 딱 어구지지. 뒷산을 등져서 산의 정기는 낫을 것 같다. 갇힌 감도 없이 앞과 좌우가 확 트여서 여기보다는 벌방인 감이 나겠다.” 기준은 단마디로 반대해 나섰다. “아버지는 어째 점점 소서구와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자고 이럽둥? 묵은 비술나무에서 동북쪽으로 한 200미터 쯤 떨어진 곳에 조지주가 있습구마. 그래서 그 둔덕진 곳을 모두 조개덕(조가덕)이라고 합더구마. 이전에 누가 그 비술나무 밑에다 집을 짓자고 하니 한 풍수를 볼 줄 아는 중이 지나가다가 이런 말을 했답더구마. ‘거기에 집을 지으면 잘 되면 아주 큰 부자 되고 못 되면 망한다.’ 좋긴 소서구 골 안에 숨어 사는 게 좋습구마.” 병완은 언짢아했다. “그럼 넌 소서구에서 살아라. 우리 집은 여기다 짓겠다.” 기준은 뒷덜미를 긁적거렸다. “차라리 그게 낫겠습구마. 소서구 움막에서 농사를 짓고 별일이 없는 겨울에는 여기 내려와 살고.” 병완 삼부자는 일단 집터를 정하고 장 지주네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병완은 기준을 돌아보았다. “장 지주와 먼저 말해보고 집 지을 차비를 하자.” 그는 창준에게 머리를 돌리면서 뒷말을 이었다. “통나무들을 베다가 장 지주를 주면 좀 좋아하겠니? 장 지주는 어쩜 저 좋은 나무를 두구 베다 때지 않았다니?”        이튿날부터 병완은 장 지주에게서 톱과 도끼를 얻어들고 창준과 기준을 데리고 태평강 가에 집터라고 잡고 아름드리나무를 베서 톱으로 토막토막 끊어 팡팡 팼다. 그러자 석은 형제도 찾아와서 일손을 거들어주었다. 병완 삼부자는 지게를 만들어가지고 땔나무를 지게에 담아 장지주네 집 울안에 져갔다. 장 지주는 입이 헤벌쭉해 그들에게 엄지손가락을 내둘렀다. 여우도 얼어 죽을 맵짠 엄동설한 날씨에 눈보라가 휘몰아쳐도 간도 황야에 집을 짓고 황무지를 일구면서 끈질기게 살아나가려는 그들의 강렬한 생존욕망을 막을 수는 없었다.      저쪽 아름드리나무 가지에 새 두 마리가 남쪽에서 날아와 앉아 둥지를 틀려는지 꼬리를 달싹거리면서 지저귀고 있었다.                                                         제10장 고난의 세월 1. 그물만 치고 고기를 놓쳐           한편 명천 우시장에서는 야단났다.         기준과 상길을 놓친 뒤를 이어 병완과 창준마저 운주동에서 사라진 것을 알고 한길수는 경찰국 옆에 있는 자위대 사무실에서 외눈깔로 영팔과 수길을 쏘아보면서 닦아세웠다.         “뭐라던가? 병완이 어디로 가는가 잘 감시하라는데. 네놈들이 끝내 놓치다니? 밥통 같은 것들. 내 어떻게 끼무라 국장의 낯을 보겠느냐?” 영팔과 수길은 머리를 숙인 채 찍소리 하지 못하고 장대기처럼 꼿꼿이 서 있었다. “왜 자네들을 중대장으로 임명했나? 어이고, 등신 같은 놈들. 이제라도 병완의 형 병권 영감네 일가를 잡아들여서 신문해. 병완의 종적을 밝혀 내지 못해 봐!  네놈들을 놔두는가 봐라!” “옛!” 영팔과 수길은 차렷 자세로 경례를 붙이고 사무실을 나갔다. 수길은 자위대 한개 중대를 풀어 명천군을 서캐 훑듯 하기 시작했다. 영팔은 자기 수하 자위대원 십여 명이나 끌고 곧게 신설동으로 덮쳐갔다. 그들은 나무숲속의 신설동 마을 어귀에 자리 잡은 병권이네 집 삽작문을 걷어차고 미친개처럼 뛰어들었다. “병권은 나와서 우리 영팔 중대장의 심문을 받아라!” 딱 옛날 포도군사들과 같았다. 미닫이문이 스르륵 열리면서 병권이 하얀 수염을 흩날리면서 나와 의아한 눈길로 영팔과 자위대원들을 둘러보았다. “대체 무슨 일이오?” 병권의 뒤로 관준과 상철이가 방문을 열고 나와 마루에 죽 섰다. 형내도 이젠 스무살 되는 청년인지라 허리에 양손을 찌르고 자위대원들을 쏘아보았다. 그때 영팔이 졸개들에게 호령했다. “땅바닥에 꿇려라!” 졸개들이 병권에게 덮쳐들자 관준과 형내가 막아 나서면서 졸개들을 마루 아래로 콱 밀었다. 영팔은 목에 지렁이 같은 피 줄을 세우면서 고함쳤다. “저 놈들을 몽땅 묶어라!” “예이!” 십여 명 졸개들은 욱 몰려왔다. 관준과 형내, 상철까지 졸개들을 밀치면서 반항했지만 몽땅 포승에 결박당했다. “꿇려라!" 영팔이 고함치자 졸개들이 발길로 관준과 상철, 형내의 종아리를 내리 걷어차 꿇어앉혔다. “말해! 병완이 어디로 갔어?!” 병권은 시치미를 따고 영팔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병완이 어데 갔는가?!” 영팔은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네놈이 분명 병완 네를 숨겨뒀어. 얘들아, 매우 쳐라!” 그러자 졸개들이 예순이 훨씬 넘은 병관에게 물매를 안겼다. “아버지!” 관준이 벌떡 일어나며 아버지 몸에 날아드는 몽둥이를 몸으로 막아섰다. 그러자 졸개들은 관준이고 상철이고 형내까지 몽둥이로 마구 조겨 댔다. 그때 부엌간에서 관준의 처 리화영과 상철의 처 박만식이가 뛰어나왔다. “아이고, 우리 영감이 무슨 죄가 있다고 이러오?” “작은집에서 달아난 게 우리캉(우리와) 무슨 관계있소?” 그러자 영팔은 “그만!” 하고 외치더니 채찍으로 손바닥을 툭툭 치면서 병권에게 다가갔다. “봐! 노친의 말 들었지? 병완 네가 도망친 사실을 모르면 어떻게 저렇게 말하겠는가?” 상철은 영팔을 손가락질 하면서 “배은망덕한 놈이라고. 어디 이런 놈이 있는가? 이전에 너 어미 폐병에 걸렀을 때 우리 할아버지가 병을 봐준 일을 잊었는가?” 하고 욕했다. 그러자 영팔은 밸이 울꺽 치밀었다. “몽땅 끌고 가!” 졸개들이 결박한 그들 삼대를 끌고 갔다. “어디로 끌고 가?!” 상철의 처 박만식이가 소리치면서 삽작문 밖까지 뛰쳐나왔다. 한 졸개가 상철의 다리를 붙잡고 놓지 않는 만식의 머리를 총 박죽으로 내리깠다. “아이고!” 상철의 처가 외마디 비명소리와 함께 땅바닥에 폭 쓰러졌다. 총 박죽에 타박상을 입어 머리에서 피가 줄줄 흘렀다. “여보!” 상철은 아내를 되돌아보며 애간장을 끊는 소리로 불렀다. “걸어!” 졸개들이 상철의 양팔을 잡아 홱 나꿔채며 떠밀었다. 마음이 약한 상철이가 눈물을 흘리면서 머리를 숙이더니 중얼거렸다. “우리 조손삼대가 무슨 죄 있다고 이러는가?” 영팔은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면서 을러멨다. “계속 개소릴 치겠는가? 한 대장한테 가서 계속 개소릴 쳐봐라! 주둥이를 찢어놓지 않는가.” 형내는 세 귀 눈을 부릅뜨고 영팔과 졸개들을 쏘아보며 마루기둥에 걸어놓은 낫을 벗겨들었다. “무슨 일을 치려고 이러니?” 할머니가 형내의 손에서 낫을 빼앗아 치웠다. 형내는 의사공부를 한 선비와는 달리 주먹을 으스러지게 틀어쥐고 씩씩거리면서 졸개들에게 끌리어 멀어져가는 아버지 네를 바라보았다. 해가 질 무렵에야 영팔 등은 병권 조손삼대를 끌고 자위대 사무실에 들어섰다. 한길수는 불똥이 뚝뚝 떨어지는 눈길로 병권이네를 쏘아보았다. 한참 후 한길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병권에게로 다가왔다. “말하오. 동생네는 어디로 갔소?” 병권은 한길수를 눈귀로 흘려보고 눈길을 먼 천정에로 돌리었다. “난 동생과 한마을에서 살지도 않는데 어떻게 알겠소?” 한길수는 형틀에서 채찍을 내리워 들고 손바닥을 툭툭 치면서 지껄였다. “시치미를 떼겠는가? 기준이가 간도로 들어갈 때 당신네 집에 들린 걸 내가 모르는 것 같소?” 한길수는 눈길을 병권에게 쏘며 표정변화를 읽고 있었다. 그러나 병권의 대답은 “알면서 물을게 뭐요?” 라고 할 뿐이었다. “영감! 어째 아들과 손자를 죽여야 입을 열겠소?” 한길수가 고함쳐도 병권은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았다. “죄 없는 내 동생과 조카들을 왜 못살게 구오? 자네가 어지간히 놔두었어도 그 애들이 왜 고향을 떠나 헤매겠소?” 한길수는 제자리에 뚜벅뚜벅 걸어가 앉더니 사무실이 떠나가게 고함쳤다. “호되게 족쳐라!” “예이!” 영팔은 졸개들과 함께 우르를 덮쳐가 병권이네를 형틀에 거꾸로 달아맸다. 뒤이어 사무실안에서는 채찍을 휘두르는 휴~휴~ 소리와 처량한 비명소리가 들리었다. 이때 사무실문이 벌컥 열리였다. “무슨 짓인가!” 모두들 보니 끼무라 국장이 군도를 들고 사무실에 들어섰다. 한길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굽혔다. “끼 국장님, 죄인들을 족치고 있습니다.” 류강철이 번역하자 끼무라는 한길수를 한쪽으로 불러가더니 귀속 말로 쑥덕거렸다. 끼무라는 병완 쪽으로 돌아서서 졸개들에게 손짓했다. “명천의 유명한 의사 김병관 어른을 풀어줘라!” 한길수는 못마땅한 눈길로 끼무라를 흘끔흘끔 곁눈질해보았다. 병권이네가 상을 찡그리면서 일어나자 한길수는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내 조선 팔도를 다 뒤져서라도 병완의 새끼들을 몽땅 붙잡아 칼탕을 쳐놓지 않는가 봐라! 씨를 말릴 놈들!” 끼무라가 휭 하니 나가자 열을 받은 한길수는 채찍을 들고 씽 달려오더니 병권과 관준에게 채찍을 짱, 짱 안겼다. 병권은 상을 찡그리면서 신음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며 참았다. 한길수는 시어머니 역정에 개 배때를 차듯이 영팔에게 화를 냈다. “자넨 왜 일을 이따위로 해? 이따위 무용지물들을 잡아다 뭘 해? 성칠의 유일한 단서 검둥개가 보이지 않네. 당장 병완네 새끼들을 붙잡아오지 못할까!” “옛!” 영팔은 졸개들을 끌고 사무실을 부랴부랴 나갔다. 한길수는 졸개들을 시켜 병권이네를 놓아주고 의자에 털썩 주저앉으면서 두덜거렸다. “더러운 일본 놈의 두상! 한의나 하는 병권네게 잘 보여서 만년장수 하겠다고? 흥! 그물만 치고 고기를 잡지 않으니 이거야 원. 그래, 놔주지, 놔줘. 병완 놈아, 네 놈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한길수는 외눈깔을 딱 감고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이튿날 점심 무렵에야 영팔은 졸개들과 함께 병완의 둘째손자 상우를 붙잡아가지고 왔다. 한길수는 상우를 보자 이를 부득부득 갈면서 눈에서 불티가 튕겼다. “말해! 너 애비랑 어데 갔어? 엉?!” 실팍하게 생긴 상우는 한길수를 흘끔 쳐다보더니 “낫을 들고 나무하러 갔수다. 우리도 찾는 중입구마. 어데 있는지 알면 알려줍소.” 하고 입안소리로 중얼거렸다. 한길수는 벌떡 일어나며 버럭 고함쳤다. “이 능청스러운 놈, 매를 들이대지 않고서는 어디 바른 말을 하겠느냐? 호되게 족쳐라!” 영팔은 졸개들과 함께 상우를 형틀에 매고 몽둥이로 사정없이 때렸다. 상우의 머리고 잔등이고 엉덩이고 다 터져서 뻘건 피가 낭자하고 상처투성이로 돼버렸다. 드디어 그는 머리를 툭 떨어뜨리더니 정신을 잃고 까무러쳤다. 이때 끼무라가 류강철과 함께 또 고문실에 나타났다. “한 대장, 말하던가?” 한길수는 머리를 푹 수그리더니 절레절레 가로 흔들었다. “물어보나마나. 어느 빠까 모노(멍청이)가 제 애비를 물어먹겠는가? ‘간도로 갔소.’ 이렇게?” 끼무라는 오늘 따라 더욱 빈정거렸다. 그는 한길수를 데리고 사무실에 들어가더니 조용히 말했다. “다 풀어주게. 갈 테면 가라지. 한 대장, 한대장의 눈에 든 가시 같은 철천지원수가 가버렸으니 얼마나 좋아? 한대장이 고향에서 그놈들과 싸워 끝내 이긴 것이 아니고 뭐야? 으흐흐흐. 그 놈들도 여기서는 우리 대일본제국과 한 대 장이 있는 한 살수 없다는 걸 뒤늦게나마 알게 된 걸세. 그 놈들이 우리와 등을 지고 살 수 있어? 흥! 으흐흐, 하하하하!” 외눈깔을 띠룩띠룩 굴리던 한길수도 몇 해만에 징글맞게 너털웃음을 웃었다. “으흐흐, 어, 어허, 허허허허.” 한길수는 흥이 나서 자리에서 일어나 두 손을 하늘로 쳐들어 쫙 벌리며 소리쳤다. “병완, 이 놈아! 난 끝내 네놈을 이겼다! 우리 고향에서 네놈을 몰아내고 내 세상을 만들었어! 병완아, 산에서 얼어 죽고 굶어나 죽어라!” 끼무라는 정신 나간 것 같은 한길수를 멍하니 바라보면서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에이, 사람이. 이제야 스꼬시(조금) 아는군.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놈. 대일본제국 황군이 있는 한 고까짓 병완이나 성칠을 겁나할 게 뭔가? 황군은 독립군도 안중에 없어.” 한길수는 끼무라의 발밑에 입이 닿을 지경으로 넙적 엎드려 절을 하였다. 그런데 잘 보이려고 절을 한다는 게 세번이나 해버렸다. 그런 줄도 모르고 끼무라는 입이 헤벌쭉해서 어쩔 줄 몰라했다. “상우도 풀어주게나. 간도로 가겠으면 가구 우리 일본제국에는 좋은 일이야. 그 놈의 꼬리를 따라 병완과 성칠 놈의 행적을 찾아내고. 한편 조선 사람들을 간도에 들여보내 간도 황무지를 개간하면서 간도 땅을 차지하면 좀 좋은 일인가? 우리 일본제국이나 조선에나 다 꿩 먹고 알 먹고 둥지 털어 불을 때는 격이지.” 한길수는 일어나 차렷 자세를 취하더니 군례를 척 붙이였다. “하이(옛)!” “허허허. 사람이 역은 같은데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거든. 참.” 통역을 듣고 한길수는 중얼거렸다. “승리의 비애를 느껴야 하겠구먼. 원수가 없어져 할 일도 없게 됐지 않았는가!” 뒤이어 그는 고문실에 들어가 상우를 풀어주라고 했다. 피 못이 된 상우는 쩔룩거리면서 고문실에서 겨우 나갔다. 비틀거리며 나가는 상우를 보면서 한길수는 이를 부드득 갈았다. (무슨 놈의 심문이야. 대갈통에다 총 한방이면 단데. 에이 참.) 한길수는 후회하면서 허리에 찬 권총집을 탁탁 쳤다. 한편 상우는 눈보라를 무릅쓰고 비틀거리면서 안간힘을 다해 해질녘에야 집으로 돌아갔다. 집에는 병권큰할아버지와 관준 큰아버지가 와있었다. “아니, 그 놈들이 이게 뭐냐?” 병권이 둘째손자를 부축하는데 사련은 맏아들이 불쌍해 얼굴을 매만지면서 눈물을 줄줄 흘렸다. “이게 웬 일이냐? 얘가 무슨 죄가 있다고 이 지경으로 만들어?” 19세의 성인이 다 된 상우는 구들에 꽈당 쓰러지더니 어린애처럼 엉엉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지새금은 숱한 어른들 앞이라 그저 손으로 입을 막고 벽 쪽으로 돌아앉아 어깨를 들먹이면서 눈물만 하염없이 흘렸다. 그녀는 옷고름으로 눈물을 닦고 천천히 돌아서서 피 못이 된 남편을 마음 아파 바라보았다. 일곱 살 난 상순은 “형님-” 하고 상우를 붙잡고 와 울음보를 터뜨렸다. 성질이 어진 상우는 구들에서 간신히 일어나더니 상순을 품에 껴안고 흑흑 흐느끼면서 말했다. “우린 이젠 고향에서 살 길이 없습니다. 아버지를 따라 간도로 가야 합니다.” 상우의 누이동생 월금은 오빠를 측은한 눈길로 바라보며 손바닥으로 눈물을 닦았다. 사련은 손사래를 저으면서 “좀 기다려보자. 시아버지하구 시형이 기별을 보내면 들어오라고 하지 않았니?” 하고 만류했다. 그러나 상우는 상우대로 고집을 부렸다. “한길수 등살에 할아버지네 기별을 기다리다가는 온집 식구들이 맞아 죽겠습니다. 아버지가 간도에 간지 1년이 거의 되는데 그래 아버지를 간도에 두고 여기서 살겠습니까?” 병권은 한숨을 길게 후- 내쉬었다. “이전에 동생이나 조카들이 간도에 가자고 했을 때 난 말렸소. 그런데 지금 보면 동생네는 간도로 가는 것도 옳은 것 같소. 우리 집은 글쎄 여기서 두루 병을 보면서 살겠지만 동생네는 뭘 먹구 살겠소? 일본 놈들은 터 밭에까지 나무를 심으라지. 손바닥만 한 밭도 없이 어디다 곡식을 심어 먹고 살겠소?” 그 말에 여기저기서 한숨소리가 들렸다. 이튿날 병권과 관준은 신설동으로 떠나갔다. 점심쯤에 경인과 어금이 소문을 듣고 근덕을 업고 몇 리 밖에 있는 불붙이에서 황급히 내리달려왔다. 어금은 본가 집 문을 떼고 들어서기 바쁘게 “오라버니가 잡혀갔다더니 상하지 않았소?” 하고 황황해 물었다. 상우의 상처투성이 된 얼굴을 보자 어금은 얼굴을 매만지면서 섧게 울었다. 그는 올케 지생금에게서 상우가 자위대에 끌려가 당한 일을 듣고 격분을 금치 못했다. “한길수는 어째 한 고향 사람을 이 지경으로 만든다니?” 그러자 경인은 외까풀 눈을 똑바로 뜨며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그 놈 한길수를 비수로 콱 찔러 죽이고 말겠다.” 상우는 매형이 일을 저지를까봐 “그만두오. 똥이 무서워 피하오? 더러워 피하지. 간도로 훌 떠나가면 단 걸. 괜히 매형이 그 놈에게 앙갚음을 당하겠소.” 하고 말리였다. 어금은 “본가 집에서 몽땅 간도로 가면 우린 어찌 혼자 여기 남아 사오? 그러나 저러나 엄마네 간도로 들어갈 때면 우리한테 기별하구 떠나가오. 우리도 조만간에 간도로 들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하고 말하면서 근심이 태산 같았다. 경인 부부는 점심을 먹으면서 어머니와 온 집 식구들을 위안하고 나서 최구장네 집으로 갔다. 최구장은 가만히 서당방 애들에게 조선 글을 배워주다가 경인 부부를 보고 그만두고 아래 방으로 내려와 앉았다. “아버님,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경인 부부가 절을 올리였다. 어금은 시어머니에게 문안을 드리러 아래 방으로 내려갔다. 경인이가 자리를 잡고 앉자 최구장은 둘째손자 근덕을 품에 안으면서 물었다. “그래 가시어머니랑 무사하더냐?” “무사할 리 있습니까? 한길수에게 모질 얻어맞았습디다. 가시집은 여기서 살 거 같지 못합니다. 아마 간도로 들어갈 거 같습니다.” “음, 내 오후에 문안하러 가야 하겠다.” 최구장은 눈보라가 창호지를 들 부시는 창밖을 물끄러미 내다보다가 머리를 돌리더니 경인과 경숙을 둘러보며 말했다. “사돈어른 네는 한길수 눈에 나서 못살 때를 만나게 된 게다. 이전에도 말했지만 너희들은 절대 한길수를 건드리지 말라. 남에게 원수를 지면 아무 때든 앙갚음을 당하게 돼. 그래서 공맹지도에 중용이 제일이라고 하였느니라. 성인들의 말씀대로 언제 어디서나 뾰족하게 나서지 말구 날이 세우지 말라. 이런 흐리터분하고 암흑한 혼돈세상에서는 그저 두루뭉실하게 사는 게 제일이니라.” 경숙은 “예, 옳은 말씀입니다.” 하고 대답했다. 그러나 최구장이 경인에게 눈길을 돌려보니 별로 납득돼하는 것 같지 않아 한마디 보탰다. “넌 검술을 믿고 한길수나 일본 사람들과 우쭐거리지 말라. 그럴 때면 우리도 사돈어른처럼 고향에서 살지 못하고 쫓겨나는 날이야. 사위와 죽순이랑 간도에 가서 잘 지낸다만 우린 간도에 가지 말아야 해. 어떻게 하나 고향에서 살아야 해.” 그러자 경인은 아버지에게 조용히 말씀드렸다. “계순이랑 가서 사는데서 그리 멀지 않은 소서구란 골 안에서 가시아버지랑 움막을 짓고 산답구마. 네댓 짐 되는 지주 밭에 소작 농사를 지었는데 기장쌀을 대여섯 마대를 거뒀답니다.” “음~ 정말 대단하구나. 여기 돌밭 쉰 짐에 심은 것만 소출이 더 낫구나. 확실히 간도는 땅이 많고 비옥해서 농사를 짓기 좋은 모양이구나.” 최구장은 머리를 끄덕이면서 곰방대를 뻑뻑 빨았다. 창밖에서는 눈보라가 사납게 휘몰아치는 윙윙 소리만 들리었다. 2. 불쌍한 오누이 지루한 봄이 가고 불볕이 쨍쨍 쪼이는 무더운 여름이 다가왔다. 어느 날 할머니 리성단은 근형과 명옥을 불러놓고 “얘들아, 병풍치기에 가서 돌이나 주어 돈을 벌자구나.” 하고 말했다. 그러자 계순은 “나도 가겠소.” 하고 말하면서 따라나섰다. 근형과 명옥은 작은고모 계순과 함께 할머니를 따라 병풍치기에 가서 운주하 강바닥의 돌을 주었다. 당시 일본 놈들은 명천으로부터 갑산 쪽으로 가는 큰길과 북으로 간도 쪽에 통하는 함흥-길주-명천-회룡 철길을 닦느라고 조약돌을 숱해 써야 했다. 강바닥의 돌을 한 하꼬(한 상자)를 주어 바치면 일본사람들이 돈 5전을 주었다. 할머니는 애들을 데리고 자그마한 둔덕에 광목을 딱 벌려 위가 둥그렇게 천막을 쳤다. 소낙비가 올 때면 돌을 모으다가도 천막 안에 들어가 비를 끊었다. 다른 집들에서도 돌을 주우러 와서 천막을 둥그렇게 치다나니 여기저기 그런 둥그런 천막이 옹기종기 널려있었다. 애들은 온 하루 강바닥에 들어가 조약돌을 주어 함지에 담아 놓으면 할머니가 함지를 들어 나무상자 안에 부어놓았다. 어떤 때에는 명옥과 계순은 상자 옆의 조약돌을 자기절로 주어 상자 안에 담았다. 그렇게 온종일 손가락이 다슬 지경으로 자갈을 주어 상자에 주어도 넷이 한나절에 겨우 한 상자를 주었다. 그런데 할머니가 일본 십장 놈에게 가서 한 상자를 다주었다고 손짓을 해가면서 알리면 십장 놈이 와서 상자를 움쭉움쭉 흔들어놓았다. 그러자 상자안의 자갈과 조약돌이 쑥 꺼져 내려갔다. 맥이 풀리는 대로 계순과 명옥은 별수 없이 또다시 조약돌을 부지런히 주어 상자에 담았다. “에이고, 못해 먹겠다.” 근형은 한 상자를 채우기 아름차서 강물에 손을 훌훌 횡구어서는 둔덕에 올라가 핸들 드러누워 다리를 한들거리면서 놀았다. 할머니가 “야, 근형아, 얼른 와서 자갈을 주어라. 우리 셋이서 언제 한 상자를 줏겠니?” 하고 소리쳤다. 그러나 근형은 둔덕에 반듯이 누워 못들은 척 했다. 그러나 한참 있다가 안 되였는지 둔덕에서 일어나 강변에 내려와 자갈을 주어 상자 안에 담았다. 하긴 일여덟 살 밖에 안 되는 애들은 한창 놀 때인데 지루하게 일하기 정말 싫기 마련이었다. 밤이면 자그마한 천막 안에 넷이 들어 누어 비좁아 몸을 옹그리고 자야 했다. 우르릉 꽝! 천지를 진동하는 우레 소리와 함께 번개 불이 천막 안에까지 들어왔다갔다했다. 명옥과 근형은 질겁해 할머니 옆구리에 딱 들어붙어 옹송그리고 누워 숨이 한줌만 해했다. “저리 비켜! 이건 내 엄마야!” 계순이 명옥을 밀어내면 명옥은 화가 나서 소리쳤다. “내 할머니다!” 서로 밀고 닥치고 할 때면 할머니가 말리였다. “싸우지 말라! 근형과 명옥은 내 손자손녀고 계순에게는 엄마가 맞아. 누구도 다 내 자손들이니까. 싸우지 마라.” 할머니는 딸과 손자손녀를 양팔로 꼭 껴안아주었다. 그러면 애들은 모두 좋아서 싱글벙글거리면서 잠들려고 했다. 그러나 장대 같은 소낙비가 쏟아져 어찌나 천막을 우당탕우당탕 치는지 잠들 수 없었다. 그래도 낮에 너무 곤하게 조약돌을 주었기에 애들은 인차 잠들어버렸다. 남들은 자갈을 주어 번 돈으로 물고기나 명태를 사다 냄비에 끓여서 먹었다. 그러나 성단은 애나게 번 돈이 아까워 남들이 강변에 잘라버린 고마이 대가리와 명태 밸을 주어다가 끓였다. 애들은 명태 내라도 구수하게 나는지라 호호 불면서 국물을 맛있게 먹어 다행이었다. 할머니는 애들을 데리고 자갈을 주어 돈을 몇 전이라도 버는데다가 입 살이라도 할 수 있어 흐뭇해했다. (날마다 그래도 쌀 두근 값은 벌수 있잖은가? 우리 고향 한산 같으면 명태 두 마리는 사는데. 쯧쯧) 할머니는 조롱조롱 옹송그리고 누운 딸과 손자손녀들이 귀여워 얼굴을 매만져주기도 하고 머리를 쓰다듬어주기도 했다. 할머니는 봄과 여름 한철에는 늘 명옥과 계순을 데리고 강변이거나 묵밭에 가서 능쟁이를 캤고 산에 올라가 산짐승들의 위험도 무릅쓰고 삽지, 도라지, 더덕 같은 산나물을 캐다가 데쳐 보탰다. 낙엽이 우수수 지는 가을에는 할머니는 명옥과 계순을 데리고 기운봉 기슭에까지 가서 돌에 돋아난 돌 버섯을 캐고 솔 송치를 뜯어왔다. 단풍이 어제 지는 것 같더니 어느 결에 가을이 스쳐 지가나고 눈이 펑펑 쏟아지는 엄동설한이 다가왔다. 최구장과 리성단 내외간은 다섯째아들 경석이 갑산에서 감자농사를 지어 살림살이가 괜찮다는 말을 듣고 황무지를 일궈 감자농사를 하려고 갑산으로 들어갔다. 경석이네는 나무가 꽉 박아선 산에서 좀 나무가 드문 황무의 나무를 베 내고 밭을 일구었다. 몇 백년 나무 잎이 떨어져 썩은 부식토가 뒤덮여 비옥한 흙속에 감자 씨를 넣고 묻었다. 7월이나 8월이 되여 온 산에 감자 꽃이 하얗고 파랗게 피였다. 약 담배를 너무 피워 아내마저 자살하자고 한 후 경석은 그래도 정신을 잠시나마 차리고 아내를 데리고 일본 놈들이 들어도 가지 않는 갑산 심심산골에 가서 감자농사를 지어 성공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소문을 들은 최구장 내외간은 서당도 일본 놈들의 성화에 잘 차릴 수 없어 갑산으로 들어가기로 마음을 먹었던 것이다. 그들은 막내딸 계순과 어미 없이 자라는 근형과 명옥을 데리고 갑산으로 갔다. 그런데 경석은 의사공부도 하였지만 사람은 덜돼먹은 사내였다. 약 담배를 뻑뻑 피우면서 항상 가슴츠레 뜬 눈으로 밥 축을 내는 근형과 명옥을 곱게 보지 않았다. (별 것들이 와서 밥을 축내는구나. 미워 못살겠어.) 한편 근형과 명옥은 삼촌이 기장밥을 보글보글 끓는 감자장에 말아 먹는 것을 보고 먹고 싶어서 닭 알 침을 꼴깍꼴깍 넘겨야만 했다. 그럴수록 경석은 미워서 때리곤 했다. 어느 하루 최구장 내외가 바깥에 나간 틈에 경석은 빗자루를 들고 근형과 명옥을 쫓아다녔다. “요 새끼들아, 밥축을 내자고 왔니? 가라, 가!” 근형은 와닥닥 일어나 바깥으로 달아나갔다. 그러나 명옥은 두 무릅 사이에 머리를 파묻고 두 팔로 싸쥐고 앉아 있다나니 서정 없이 휘두르는 빗자루에 얼굴과 잔등을 맞아대며 엉엉 섧게 울었다. “엄마, 엄마~” 그래도 모자라 경석은 서너 치씩이나 되는 긴 침을 빼들더니 명옥을 깔고 들어앉아 양볼과 이마 사처에 마구 찔러댔다. 명옥은 피를 흘리며 너무 아파 엉엉 서럽게 울었다. “야, 뭘 하는 짓이냐? 엄마를 잃은 불쌍한 조카애들을. 너도 사람이냐? 엉?!” 최구장은 사람 같지 않은 경석을 꾸짖으면서 명옥의 우에서 밀어치웠다. “이렇게 살아선 안 되겠다. 우리 집으로 돌아가자.” 성단은 손자와 동갑인 막내딸을 떼 두고 오누이를 손목을 쥐고 길을 떠났다. 그러자 죽순은 발을 동동 구르면서 “안 돼, 엄마 가면 난 어찌 하겠소? 엄마, 엉엉.” 하고 울어댔다. 그러자 할머니는 어린 막내딸의 얼굴을 매만지면서 눈물을 흘리었다. “얘, 근형과 명옥은 네 조카가 아니고 뭐야? 얘들은 엄마가 없어 얼마나 불쌍하니? 아버지와 함께 여기 있어라. 응?” 그때 최구장이 죽순을 껴안으면서 얼렸다. “그래, 오빠는 널 때리지 않을 거야. 아버지와 함께 여기 있자.” 죽순은 아버지 품에 안겨 두 손으로 눈을 비비면서 어머니를 보고 “그럼 엄마 설전에 돌아오우. 예?” 하고 말하며 흑흑 흐느꼈다. “오, 그래. 내 막내딸 말을 잘 들어 귀엽지.”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고 산바람이 윙-윙- 휘몰아치는 엄동설한에 할머니는 최구장이 파놓은 함지 세 개나 이고 죄꼬만 근형은 두 개나 지고 명옥은 한 개를 겨우 지고 길을 떠났다. 할머니와 명옥은 박달나무도 얼어터질 그 추운 엄동설한에 치마저고리바람에 무릎까지 푹푹 빠지는 산림속의 눈길을 힘겹게 걸었다. 명옥은 키가 너무 작아서 함지가 종아리를 툭툭 쳤다. 두메산골이라 인적이 없고 딱딱 40 리에 막이 하나 있었다. 버선을 신은 다리가 얼어서 꼿꼿해나 더는 걸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할머니는 방법 없어 주막집에 애들을 데리고 들어갔다. 함지를 벗어놓고 언 다리를 붙들고 엉엉 우는데 외할머니는 주막집 주인이 시키는 대로 부엌 앞에 앉은 명옥의 종아리에 찬물을 바가지로 퍼 쳤다. 그러자 다리에 돌아가면서 얼어붙은 얼음이 버선과 신 같은 것이 쭉 벗겨져나갔다. 발이고 다리고 얼어서 파랗다 못해 보기 흉물스러웠다. 할머니는 주막에서 콩알 몇 알에 쌀을 얼마간 넣고 끓인 죽 두 사발을 샀다. 할머니는 먹는 입내나 내고는 거의 두 사발을 모두 근형과 명옥에게 주었다. 배고팠던지라 애들은 죽 한 사발씩 눈 깜짝할 새에 호록호록 다 마셔버렸다. 이윽고 그들 셋은 죽에 취해 잠이 호르르 들어버렸다. 이튿날 할머니가 먼저 깨여나 “얘들아, 일어나 가자.” 하고 말해서야 애들은 곤하게 자다가 두 손으로 눈을 비비며 겨우 일어났다. 그들은 아침을 먹지도 못하고 굶어서 길을 떠나 병풍치기를 건너와 한 15 리를 걸어 사돈집인 신설집 병권네 집에 들리었다. 병권은 원래 인품이 좋은 사람인지라 그들 셋을 보자 환한 웃음을 지으면서 마중했다. "어서 들어옵소. 안사돈어른, 아이구, 이 추운 겨울에 함지까지 이고 지고 어떻게 여기까지 왔습둥?" 병권영감과 관준영감은 마루바닥에서 성단이가 인 함지 세개나 받아내리웠다. 상철의 내외간도 나와서 마중했다. 상철이가 명옥이와 근형의 잔등에서 함지를 벗겨 내릴 때었다. 상철의 처 박만식이 함지를 받아들더니 “아이고, 이리 좋은 함지를 우리를 주자고 가져왔소?” 하고 주책없이 말했다. 성단은 그 말에 아주 난처해했다. 관준이 만식을 흘겨보았다. 그러자 상철은 안쓰러워 아내 손을 툭 치면서 “이리 놓소. 남이 집에 가지고 가려는 게요.” 하고 말했다. 성단은 “아니 함지 하날 사돈며느리에게 줄 테니 쓰오.” 하고 말하여 어색한 장면을 타개했다. “아이고, 함지를 잘 쓰겠소.” 상철의 처 만식은 좋아라고 함지를 안고 달려 들어갔다. 병권은 너무 난처해 손비를 나무랐다. “안사돈, 허물하지 마시오. 자위대 놈들의 총 박죽에 머리를 맞은 후부터 저 손비는 골병이 들어 드문드문 저렇게 주책없이 놉구마.” 성단은 사람 좋게 “별 말씀을 다 합니다. 좋은 의사가문에서 약을 쓰면 낫겠지요.” 하고 화제를 돌렸다. 관준의 아내는 성단이네를 아래 방에 모셔 들여갔다. “시아버님과 우리 집 영감의 약을 썼는데도 어찌나 세게 맞았는지 골병이 통 낫지 않습니다.” “쯧쯧, 자위대 놈들이 나쁜 놈들입니다.” 성단은 손자손녀를 데리고 그 집에서 점심과 저녁까지 잘 먹고 따뜻한 구들에서 편안히 잤다. 이튿날 아침까지 잘 얻어먹고 길을 떠나려고 할 때 경숙이가 말을 몰고 찾아왔다. 원래 전날 상철이가 불붙이에 달려가 성단이네가 신설동에 왔다는 것을 알렸던 것이다. “엄마, 길에서 고생했습꾸마.” “응, 마중 와서 이젠 살았구나.” 경숙은 뒤이어 병권 조손 삼대에게도 인사를 올렸다. “여기 와서 폐를 끼쳤습꾸마.” “천만에 말씀을. 사돈이 한 호적이라고. 내의를 하지 맙시오.” 상철이가 인사를 받았다. 이때 명옥과 근형이 “아버지!” 하고 소리치며 경숙의 품에 와락 안겼다. “오, 그래. 근형아, 명옥아.” 경숙은 어미 없이 불쌍하게 자라는 어린 아들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는 함지 네 개를 말 잔등에 싣고 제일 우의 함지에 근형과 명옥을 싣고 바 줄로 함지를 꽉꽉 동여맸다. 경숙은 말고삐를 잡고 사돈들에게 다시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어머니를 모시고 길을 떠났다. “감사합니다. 운주동에 오면 들리시오.” 경숙의 인사말에 병권은 손을 들어 흔들면서 인사를 받았다. “잘 가오. 아차, 사돈네는 간도로 갈 예산이오?” 경숙은 “갈 거 같지 않습니다. 아버진 굶어 죽어도 고향에서 살겠답니다. 사돈어른은 간도로 가겠습니까?” 하고 되물었다. “우리도 여기서 병이나 보면서 살 예산이오. 될수록 고향을 떠나지 말구 사는 게 옳소.” 병권의 말에 경숙은 머리를 끄덕이면서 “옳습니다. 그럼 편안히 계십시요.” 하고 인사하고는 고삐로 말 잔등을 툭 쳤다. 이때 상철의 처 만식이가 따라 나와 또 주책없는 소리를 했다. “함지 하나만 주고 다 가지고 가오?” “또 무슨 소리를? 에이고, 저걸 어쩌겠니?” 상철은 멍청이가 돼버린 아내를 마구 집안 정지로 떠밀어 넣었다. 경숙 등이 신설동에서 반나절 내려가니 눈보라 속에 불붙이가 나졌다. “경인 네 집에 들러 하루 밤 쉬고 가깁소.” “그래, 그게 좋겠다. 둘째네도 본지 오래다.” 그들이 집에 들어서자 경인과 어금은 반가와 어쩔 줄 몰라 했다. 근덕은 형님과 누나가 왔다고 좋아 퐁퐁 뛰며 짝짜꿍까지 짱짱 쳐댔다. 근형과 명옥 오누이는 난생처음 밥을 배불리 먹었다. 저녁에 잠자리에 눕자 경숙은 명옥과 근형의 얼굴을 번갈아 어루만지면서 “이 추운 겨울에 너희들이 얼어 죽지 않고 돌아왔구나.” 하고 말하더니 오래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튿날에야 성단과 경숙은 오누이를 데리고 고향 운주동에 돌아왔다. 집 앞의 늙은 비술나무 위에서 까마귀 한마리가 눈보라 속에서도 그들의 불길한 앞날을 예고하듯이 이 나무 가지 저 나무 가지 옮겨 앉으면서 까욱, 까욱 하고 울부짖었다.  
43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22) 댓글:  조회:2258  추천:0  2015-11-04
                                                8. 고별         낙엽이 우스스 지던 가을이 어제 같은데 벌써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는 엄동설한이 대지를 엄습해왔다. 병완은 노친과 함께 일가 자손들을 몽땅 데리고 조상들의 산소를 모신 운주동 뒤 성산에 있는 고성에 올라갔다. 병완의 노친과 며느리는 제사상을 이고 상훈은 괭이를 쥐고 상우는 막걸리단지를 들고 돌 토성 안으로 들어갔다. 산을 둥그렇게 에워싼 이 돌 토성은 고구려의 옛 토성이라고 한다. 돌 토성 안 양지바른 산비탈에 조상들의 산소와 병완의 부모 산소가 모셔져 있었다.        병완은 노친과 며느리가 제사상을 다 차리자 무릎을 꿇고 김수종 할아버지와 아버지 김승중의 산소에 제주를 부어 올리고 정중히 말씀 드렸다.        “할아버님, 아버님, 일본 놈들과 그 주구 한길수 놈의 핍박에 의해 자손들이 부득불 간도로 잠시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되였습니다. 조상들의 산소를 잘 모시지 못하고 먼 길을 떠나가는 이 불효 자손들을 널리 양해하옵소서. 이제 간도에 가서 농사를 지어 돈을 많이 벌어가지고 고향에 돌아와 조상님들의 산소를 잘 모시겠습니다. 구천에서 자손들이 가는 섭섭한 길에 도움을 주옵소서. 그간 편안히 계십소.”         말을 마치자 병완은 처자들과 함께 조상님들에게 일일이 큰절 아홉 번 씩 올렸다.        고별제사를 마친 병완과 자손들의 눈에는 뜨거운 눈물이 글썽했다. 병완과 창준은 산을 내려오면서도 자꾸 조상들의 산소를 되돌아보았다. 쓸쓸한 조상들의 산소에서는 하얀 눈보라가 윙윙 휘몰아쳐 날려가며 윙윙 애처로운 울음소리가 울려왔다. 이튿날 이른 아침 병완은 일찍이 마루에 나가 기둥에 매놓은 종자옥수수 다섯 이삭을 쥐고 들어와 배낭 속에 걷어 넣었다. 간도 황야에 가더라도 황무지를 개간하고 고향의 씨앗을 뿌려 농사를 지으면서 살고 싶었던 것이다. 아침 식사후 병완과 창준은 언 주먹밥꾸러미와 종자옥수수가 든 배낭 하나씩 둘러메고 낫 한 자루 씩 들고 바깥으로 나섰다. 남들이 얼핏 보면 산속으로 나무하러 떠나는 나그네들 같아 보였다. 남들의 눈이 싫어 집식구들과 집안에서 작별하고 바깥에 따라 나오지 못하게 했다. 눈보라치는 엄동설한에 대대로 탯줄을 묻고 살아온 고향을 떠나는 병완과 창준의 발자국마다 이별의 피눈물이 고였다. 기준과 상길이가 고향을 떠나 간도로 들어갈 때와는 달리 병완과 창준은 어린 애들을 데리고 가지 않았기에 거침없이 회령을 바라고 걸음이 빨랐다.         주위를 살펴보아도 다행히 한길수네 자위대나 끼무라네 일본 헌병들도 눈치를 채지 못하였는지 얼씬거리지도 않아 마음이 놓였다.        한 이틀 걸어 경성군 주을면에 도착하니 병완은 의리가 강한 원삼이네 삼형제 생각이 났다.       “여기까지 온바하고는 용천동에 들려 원삼이네 삼형제를 만나보자.”        “예.”        병완과 창준은 점심때가 지나서야 용천동 산골에까지 찾아갔다. 눈이 어찌나 펑펑 쏟아지는지 눈에 뒤덮인 산골마을은 어느 것이 눈에 덮인 집이고 어느 것이 둔덕인지 분간하기 힘들었다. 그들은 마을 어귀에 있는 한 집이 나졌다.        병완은 두말없이 문을 잡아 두드렸다.        문이 삐꺽 열리더니 나그네가 내다보며 웬 나그네들이냐는 듯이 눈이 떼꾼해졌다. 하기야 살기 어려운 세월에 지나가던 길손이 싫은 것은 당연했다. “여기 원삼이네 집이 어느 것입둥?” 병완이 묻자 그 나그네는 시름이 놓이는지 표정을 느슨히 풀었다. “이게 원래 원삼이네 집이오.” “그럼 원삼이네 삼형제는 어데 있소?” 그러자 그 나그네는 “집도 다 팔아먹고 살 길을 찾아 간도로 떠나갔소. 그런데 원삼이네 사형제중 막내동생이 이 마을에 남아 있소.” 하고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아니, 원삼이네는 삼형제가 아니오?” 마을 나그네는 병완이네 아래위를 훑어보더니 “당신들은 원삼이네를 어떻게 아오?” 하고 되물었다. 병완은 “우시장 경찰국을 지을 때 가까운 친구들이오.” 하고 대답했다. 그러자 나그네는 머리를 끄덕이면서 “그렇구먼. 명함을 어떻게 쓰시오?” 하고 물었다. “난 병완이라고 부르오.” 그러자 그 나그네는 반색하면서 손을 내밀었다. “내가 바로 원삼 형님의 막내 동생 무삼입구마. 그때 나를 내놓고 세 형님이 경찰국 공지에 갔댔소. 어서 들어가깁소.” 하고 인사했다. 병완은 무삼의 집으로 들어가면서 “글쎄 어딘가 원삼을 닮은 사람도 다 있다 하였더니. 참, 원삼의 막내 동생이구먼.” 하고 중얼거렸다. 무삼은 처자들을 불러 병완과 창준에게 인사시켰다. 그는 반가와 어쩔 줄 몰라 했다. “나도 원삼 형님에게서 어른네 부자  말을 많이 들었습구마. 병완 어른은 대단한 힘장사라던데. 자위 대장 놈과 싸워 눈깔도 빼놓지 않았소. 이렇게 만나니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습구마. 춘삼 형님은 기준 형님이랑 창준 형님이랑 대단히 인심 좋고 사내대장부다운 분들이라고 합더구마.” 무삼의 아내가 부엌에 내려가 불을 피웠다. 이윽고 무삼의 아내가 따뜻한 죽사발 세 개를 위방에 들여왔다. 집이 어찌나 헌지 부엌에 불을 땠는데도 추워 덜덜 떨 지경이었다. “이런 집에서 우리 큰집식구들까지 스물이나 살았소. 집이 추워도 불을 땔 나무를 하게 해야 때지. 일본 놈새끼들이 마른 풀만 때라오. 추워서 어디 살겠소?” 병완은 혼자 남은 무삼이 이상했다. “형님네는 다 간도에 갔는데 어째 혼자 여기 남았소?” 무삼은 형들과는 달리 말을 꽤나 잘했다. “난 항상 세 형님들과는 달리 사오. 전번에 경찰국 공지나 길닦이도 형님네를 따라 가지 았았소. 일본 놈들을 믿고 어떻게 돈을 버오? 그 놈들이 어떤 놈들이라고 삯전을 주겠소? 이번에 글쎄 간도에 가면 이밥이나 조밥이 하늘에서 막 떨어지오? 고향을 떠나 무슨 개고생을 하자고 가겠소?  죽어도 고향에서 살다가 죽겠습구마. 애나게 살다나면 일본 놈들도 망하는 날이 있겠지. 그때면 우리도 잘 살 날이 있겠소.” 병완과 창준은 따뜻한 죽까지 얻어먹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갈 길이 바빠서 떠나가야겠소. 미안하네. 폐를 끼쳐서.” 무삼도 따라 일어났다.        “천만에 말씀을 다 하오. 빨리 따라가면 우리 형님네를 따라 잡을 수 있을게요. 이른 새벽에 가만히 간도로 떠나갔소.” 그가 정지에 나가더니 뭐라고 하더니 아내가 주먹밥 한보자기를 싸 주었다. “적은 대로 길에서 요기나 하오. 형님네를 주고 나머지가 요것 밖에 없소.” 병완은 받기 미안한대로 받고 무삼과 아내에게 인사했다. 병완은 무삼과 작별한 후 창준을 돌아보면서 “원삼이 멀리 가지 못했을 게다. 빨리 쫓아가자.” 하고 말했다. 병완과 창준은 마을 북쪽 령길로 올라갔다. 휘몰아치는 눈보라 속에서도 눈 우에 어지럽게 북쪽으로 뻗어나간 발자국들이 보였다. “발자국이 파묻히지 않은 걸 보면 멀리 가지 못한 것 같다.” 그들 부자는 발자국을 따라 불이 나게 뒤쫓아 갔다. 그들이 해가 거의 질 무렵에 수림속의 산길을 따라 한 눈 덮인 산정에까지 올라가니 저 앞에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산기슭으로 검은 그림자들이 얼른거리며 내려가는 것이 보였다. “원삼이-” “원삼이!” 검은 그림자들이 멈춰서더니 이쪽을 바라보는 것 같았다. 병완이 네가 달리다 시피 가자 원삼은 마주 달려오면서 고함쳤다. “삼촌!” 병완과 창준은 원삼이네 삼형제 집식구들과 눈보라치는 산기슭에서 반갑게 만났다. “몇 년 만에 만났소?” 원삼의 말에 병완은 “그래, 이태 만에 만나니 반갑구먼.”라고 하면서 원삼이네 삼형제의 손을 굳게 잡아주었다. 원삼은 안식구들을 불러 인사시키면서 “어떻게 여기까지 왔소?” 하고 물었다. 병완은 “간도로 들어가는 길일세. 오늘 오전에 무삼을 만났네.” 하고 말머리를 떼고 간도로 들어가게 된 연유와 무삼을 만난 이야기까지 죽 말했다. “잘 생각했습니다. 우리도 일본 놈들의 성화에 배기지 못해 간도로 들어갑니다. 글쎄 밭에다 나무를 심으라는 바람에 뭘 먹고 사오? 이 추운 겨울에 땔나무도 못하게 하니 얼어 죽으라는 게지.” 모두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었다. 병완은 원삼이네 삼형제와 함께 걸으면서 무삼을 걱정했다. “막내 동생은 왜 따라오지 않았소?” 병완의 묻는 말에 원삼은 한숨을 후 길게 내쉬었다. “에이, 무삼은 고향을 떠나기 싫어 그러오.” 병완은 머리를 끄덕이면서 한숨을 후 내쉬었다. 토끼꼬리만한 겨울해가 꼴깍 넘어가고 땅거미가 지기 시작했다. 둘러보니 눈보라 치는 수림이여서 마을이라고는 보이지도 않았다. 그들은 생각하다 못해 눈구덩이를 파고 누더기와 마른 나무 잎을 깔고 새우잠을 잤다. 그들은 눈보라 속에서 눈구덩이에서 자네와 해가 뜨면 언 주먹밥을 눈에 녹여 먹으면서 고난의 행군을 하여 해가 질 무렵에야 두만강 변에까지 왔다. 사람들과 물어보니 산 아래 마을이 바로 회령이라고 했다. 산 아래를 바라보니 얼어붙은 두만강 얼음 위에 흰 눈보라가 윙윙 휘몰아치고 있었다. 호리호리하게 생긴 창준은 여우 엉덩이도 얼어터질 맵짠 추위에 온몸이 오싹해내 몸을 옹송그리었다. “저기 두만강 맞은 켠이 간도겠지?” 병완의 말에 원삼은 넓은 어깨를 으쓱하면서 “그렇소. 간도가 땅이 넓어 살기 좋다는데 어떻겠는지?” 하고 중얼거렸다. 병완은 눈 덮인 두만강 맞은 켠의 낯선 간도 땅을 바라보았다. 간도의 황야는 어디에도 정이 붙을 데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두만강 저쪽 어디에선가 막내아들 기준이가 기다릴 것을 생각하니 그래도 조금 위안이 됐다. “해지기 전에 일찍이 두만강을 건너가기요.” 원삼의 말에 병완은 머리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해 진후 건너기오. 저쪽 만주국경찰에게 잡히면 변방 노역을 시킨다오. 저쪽에 기준이가 마중 나왔을 거요. 저쪽에서 기준이가 모닥불을 피우면 건너기요.” 병완은 원삼이네 삼형제에게 기준이가 석철 영감에게 인편으로 보내온 모닥불을 신호로 건너가기로 한 것을 알려주었다. “그런데 기준 형님이 여기 우리 온 걸 어떻게 알겠소?” 춘삼의 말에 병완은 “아마 저쪽에 경찰이 없으면 날마다 모닥불을 피우겠지.” 하고 추축해 말했다. 그제야 춘삼은 머리를 끄덕였다. 그들은 산정 소나무속에 숨어서 두만강 맞은 켠만 내려다보았다. 차디찬 겨울해가 꼴깍 넘어가고 두만강 변 산과 들에는 눈보라가 윙윙 휘몰아치는 무시무시한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그들이 숨을 죽이고 두만강대안을 살필 때였다. “저길 보오. 모닥불이 피어오르오.” 원삼의 환성을 질렀다. 모두들 그가 가리키는 쪽을 바라보았다. 두만강 반 저쪽에 자그마한 모닥불이 피어올랐다. “가자!” 병완이 일어났다. 그들은 병안의 말대로 모닥불이 피어오르는 곳에서 두만강을 따라 아래쪽 한 일리 남짓한 곳으로 갔다. 원삼에게 업힌 네 살짜리 넷째아들 종호는 윙윙 휘몰아치는 두만강 반 눈보라 바람소리에 무서워 아버지 잔등에 언 얼굴을 꼭 댔다. 병완은 조국 땅에서 마지막 발을 떼며 두만강 얼음 우에 들어서면서 되돌아보았다. 순간 조선의 산과 들이 어둠속 눈보라 속에서 희미하게 바라보였다. (어떻게 하면 조상들의 뼈가 묻힌 내 조선이 우리를 먹여 살리지 못해 떠나 저 낯선 간도로 들어가야만 하는가?) 두만강 변까지 병완과 창준의 걸음은 아주 빨랐다. 그러나 두만강을 건널 때에는 병완의 걸음이 어찌나 느린지 원삼이네가 자꾸 재촉했다. “삼촌, 빨리 건너기요. 강 건너 쪽에 만주국 경찰이 나타나면 어쩌자고?” “음, 그래. 빨리 건너지.” 병완은 그제야 걸음을 다그쳤다. 그러나 몇 발자국 걷지 않고 또 모로 걸으면서 조선쪽을 돌아보군 했다. 쇠기둥 같던 병완도 정작 고향을 떠나 살 길을 찾아 핍박에 의해 간도로 들어갈 때에는 코마루가 시큼해났다. 그는 일본 섬나라 오랑캐와 개다리 한길수에게 지고 만 느낌이 들었다. 잇따라 땅을 밟고 하늘을 떠인 사내대장부로서 자존심이 여지없이 짓밟힌 능욕 감을 참을 수 없었다. 병완은 주먹을 불끈 쥐고 두만강 얼음우로 눈보라를 무릅쓰고 비틀거리면서 건넜다. 그는 낯선 간도 땅을 밟으면서 두만강 변 버드나무숲을 두리번거리면서 살폈다. 그러나 기준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병완은 몸을 돌려 두만강 저쪽에 두고 온 조선의 산과 들을 돌아보았다. (꼭 조상의 뼈가 묻힌 조선으로 되돌아가야 해. 정든 고향에 돌아가 조상들의 산소를 잘 모시고 죽을 때까지 살 테야.) “삼촌, 뭘 자꾸 돌아봅니까? 빨리 해지기전에 오랑캐령을 넘어야 합꾸마.” 앞에서 걷던 춘삼이가 되돌아보며 재촉했다. “그래, 그런데 기준이가 여기서 우릴 마중하겠다고 했는데 보이지 않네. 자네들이 먼저 가게나.” 그 말에 원삼이네 삼형제는 걸음을 멈추고 어둠속의 두만 강변 여기저기를 살피였다. 그래도 기준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모두 애타게 기준이가 나타나기를 바랐다. “아버지!” 그때 어둠속 아름드리버드나무숲속에서 구척이나 되는 기준이가 나타나더니 무릎까지 눈에 푹푹 빠지면서 허우적허우적 달려왔다. 기준은 아버지를 만나자마자 넙적 엎드려 큰절을 올렸다. “아버님, 그간 무사했습니까? 내 여기서 연 며칠 모닥불을 피우면서 기다렸습니다.” 기준은 일어나 손바닥에 묻은 눈가를 툭툭 털면서 창준을 보고 “형님, 어째 집식구들을 몽땅 데리고 오지 않았소?” 하고 애탄 목소리로 물었다. 병완은 “간도가 어떤 데인지도 모르고 어떻게 데려오니?” 하고 대답했다. 원삼이네 삼형제네 식구들도 다가와 인사했다. “기준 형님, 간도에서 만나니 더 기쁘오.” 기준과 원삼이네 삼형제는 친형제처럼 서로 포옹했다. “잘 됐소. 내 움막을 친 소서구에 가서 함께 황무지를 일구면서 살기요.” “그러면 오죽 좋겠소.” 병완의 삼부자와 원삼의 삼형제 식구들은 두만강 변에서 만나 한 집안 식구들처럼 돼 살 길을 찾아 간도의 황야에 묻힌 소서구를 바라고 발걸음을 다그쳤다. 뒤에서는 눈보라가 기승스레 불어치며 아우성치고 무시무시한 어둠이 도적고양이처럼 뒤따랐다. 9. 선바위 병완 일행은 두만강 변을 떠난 후 조선에서 가지고 온 언 주먹밥이 다 떨어졌다. 그래도 기준이가 가져온 옥수수떡이 있어 나눠 먹으면서 두만강 변에서 그리 멀지 않은 높다란 령을 넘어섰다. “여긴 어디냐?” 병완의 물음에 기준은 령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오랑캐령이라는 곳입니다.” 하고 대답했다. “그래?” 병완은 맵짠 엄동설한의 강추위 바람에 숨이 헉헉 막히는 감이 들었다. 게다가 모래알 같은 눈보라가 휘몰아쳐 눈도 뜨기 어려워 걷기 힘들었다. “우리 고향보다는 혹독하게 춥구나.” 병완의 말에 기준은 옆에서 걸으면서 “무섭게 춥습니다.” 하고 말하면서 자기가 썼던 개털 모자를 아버지에게 씌워주었다. “날 벗어주고 넌 어찌겠니?” 아버지 말에 기준은 목도리를 벗어 귀를 싸매고 터벅터벅 걸어 나갔다. “이제도 머냐?” 병완은 서쪽으로 기울어져가는 해를 쳐다보면서 물었다. 기준은 속구구를 해보더니 “예, 소서구까지 여기서 한 200리 좌우 될 겁니다.” 하고 대답했다. 해가 뉘엿뉘엿 져갈 무렵에 그들 일행은 령길아래 골짜기에 자리 잡은 자그마한 마을에 이르렀다. 기준은 병완과 춘삼을 돌아보며 말했다. “명동이란 마을입꾸마. 며칠 전에 두만강 변에 마중나갈 때도 이 마을에서 하루 밤 자고 나갔댔습꾸마. 이 마을을 지나면 한 십여 리 내려가야 마을이 있습니다.” “이 마을에서 하루 밤 자고 가자.” 병완의 말에 모두들 그렇게 하자고 했다. 기준은 마을이 들어앉은 둔덕 뒤쪽에 우뚝 앉아있는 집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저 집에 가깁소. 인품이 좋습더꾸마.” 그 말에 원삼은 “저 집이 교회당이 아니오?” 하고 말하면서 집 꼭대기에 꽂혀있는 십자를 가리켰다. “십자가 있는 거 보면 교회당인 것 같소.” 기준은 “옳소. 저 교회당의 김하규란 분은 인품이 좋습디다. 교회당이 널찍해서 우리 열 몇이 하루 밤 잘 수 있습니다.” 하고 덧붙였다. 그들이 교회당 앞에 간 후 기준이 먼저 노크했다. 그러자 하얀 한복차림의 머리가 허연 분이 나와 반갑게 인사했다. “에이고, 아버지랑 모시고 왔소?” “예. 저분이 저의 아버집니다.” 기준은 김하규에게 일일이 인사시켰다. “전날 기준한테서 형장 일가의 일을 잘 들었소. 추운데 어서 집안으로 들어가기요.” 병완은 마을 주위를 습관적으로 둘러보더니 “저 동쪽에 큰 집은 무슨 집이오?” 하고 손으로 가리키면서 물었다. 김하규는 병완이가 손가락질하는 동쪽을 내려다보면서 말했다. “그건 명동학교요. 일본 놈들이 심술이 나서 불을 질러 다 타버린 걸 우리 교회당에서 조선 사람들을 데리고 다시 복구해 놓았소.” 병완은 명동학교도 고향 최구장의 서당처럼 일본 놈들의 피해를 입은 것을 보고 온몸이 식어드는 느낌이 들었다. 교회당은 꽤나 널찍한 온돌집이였기에 병완과 리춘삼 삼형제 십여 명이 들어갔는데도 비좁은 감이 들지 않았다. 이윽고 저녁밥상이 들어왔다. 큰 잔치나 벌어진 것 같았다. “이거 지나가는 길에 들려서 폐를 끼쳐 미안하오.” 하고 병완이 말하자 김하규는 아주 통이 넓은 말로 인사를 받았다. “천만에 말씀을, 듣자니 귀댁 큰아들과 우리 사위나 다 빼앗긴 나라를 찾으려고 일본 놈들과 싸운다는 게 아니겠소? 우린 한 집안이나 다름없소. 내의를 하지 마오.” 그 말에 병완은 숟가락을 들다가 말고 기준과 김하규를 번갈아보았다. 김하규는 호리호리하게 생겼지만 안경을 건 눈은 예지로 번쩍이고 있었다. 기준이 옆에서 아버지에게 저 아래 선바위부근에서 항일투사들이 일본 놈들의 돈 15만원이나 지혜롭게 탈취해 총을 사려 울라지보스또크에 도망친 일도 있었다고 했다. 병완이가 머리를 끄덕이면서 “대단하구먼.” 하고 감탄했다. 그는 혹시 성칠이 이끄는 독립군이 한 장거가 아닐까 알아보고 싶었다. “거 15만원 탈취사건을 알면 얘기해줍소.” 김하규는 옆에서 묵묵히 듣고 있는 원삼이네 삼형제 눈치를 보면서 “어서 식사나 하오.” 하고 기준에게 눈치 했다. 눈치를 차린 기준은 김하규에게 “이 원삼 삼형제는 내 친형제나 다름없는 친구들이오.” 하고 말했다. “그러지 않고.” 병완도 옆에서 맞장구를 쳤다. “이 원삼 삼형제는 우시장 경찰국 사무 청사를 지을 때나 길을 닦을 때나 우리와 한마음 한뜻이 돼서 일본 놈들과 맞섰소.” 그러자 김하규는 막걸리를 부어 병완 삼부자와 원삼 삼형제에게 일일이 붓고 나서 잔을 들었다. “자, 막걸리나 한 잔 마시고 얘기하기요.” 모두들 막걸리 잔을 굽냈다. “그게 그러니까 1919년 섣달 그믐날에 철혈광복단의 윤준희를 비롯한 항일 투사들은 조선은행 회령지행에서 일하는 지하항일투사 전홍섭에게서 일제가 용정 주재 일본 영사관으로 항일 투사를 진압할 경비를 보낸다는 정보를 입수하였지요. 그 돈을 탈취하려고 윤준희 단장을 비롯한 림국정, 최봉설, 박웅세, 김준 같은 반일 투사 다섯은 1920년 1월 3일 이른 새벽에 선바위부근 동량일대에로 달려갔소. 윤준희 등 셋은 흰옷을 입고 눈 덮인 동량 버들방천에 숨어 기다리고 최봉설 등 두 반일투사들은 선바위 골로 올라가 선바위 밑에 매복해있었지요.” 김하규는 그때 정경을 눈으로 방불히 본 듯이 말했다. 그날 밤 여덟시쯤에 일제 경비호송대 다섯 놈이 동량 선바위 골에 들어섰다. 그들 일행 앞으로 총을 멘 경찰관이 말을 타고 터벅터벅 선바위 골 눈길을 더듬어 들어왔다. 그 뒤를 따라 두 무장경찰이 마바리의 양옆에 서서 뚜벅뚜벅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마바리 뒤에는 신사복차림을 한 일본관리가 말을 끌고 오는 경마잡이와 함께 터벅터벅 걷고 있었다. 선바위 밑에서 최봉설 등은 경비호송대 뒤에 후위가 따라오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자 슬그머니 그 놈들을 미행했다. 일제 호송대 놈들이 동량 버들방천에 들어섰을 때였다. 땅! 땅! 땅! 야무진 총소리가 겨울밤의 정적을 깨뜨렸다. 동량버들방천에 매복해있던 윤준희 등은 길 양옆에서 권총으로 사격하고 그곳까지 미행해온 최봉설 등은 뒤에서 권총으로 사격하면서 협공했다. 일제의 경비호송대 다섯 놈을 순식간에 몽땅 눈 바닥에 쓸어 눕혔다. “참 멋지구먼.” 원삼이가 쾌자를 불렀다. 김하규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렇지요. 참 멋진 속결전이였지요. 그들은 시체를 처치해버리고 돈 15만원을 세 마대에 나눠 넣어 지고 재빨리 용정 동흥 마을에 있는 비밀연락지점으로 달아났소. 다른 두 투사는 놈들을 왕청 같은 데로 유인해 가려고 말 세필을 반대쪽 산속에 가져다 매놓고 동흥 비밀연락지점으로 찾아갔지요. 그들은 거기서 돈 짐을 나눠 메고 와룡동에 있는 최봉설의 집으로 달아났지. 거기서 최봉설의 동생 최명옥을 보고 돈을 실은 소달구지를 몰게 하고 그들 다섯은 호송하면서 왕청 군관학교에까지 갔소.” “정말 대단하구만.” 병완이가 감탄했다. 김하규는 막걸리 잔을 들어 권했다. “자, 또 한잔 마시면서 얘기하기요.” 그리하여 모두들 흥이 나서 통쾌하게 막걸리를 마시면서 항일투사들을 찬탄했다. “그래 그 돈을 어쨌을까?” 그러자 김하규는 한숨을 후 내쉬더니 뒷말을 이었다. “무기를 사자고 윤준희와 최봉설은 돈 짐을 메고 쏘련 울라지보스또크시로 가서 총을 사려고 하였지. 그런데 엄인섭이란 일제 조선특무의 밀고로 해서 최봉설만 도망치고 몽땅 일제 군경들에게 체포됐지요. 후에 그들은 몽땅 서울 서대문감옥에 압송돼 교살당했다고 하더군.” 모두들 길게 탄식하면서 머리를 끄덕였다. 병완은 궁금했다. “최봉설은 후에 어떻게 되였소?” 김하규는 막걸리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더니 조용히 말했다. “최봉설은 신한촌 려관에서 죽기내기로 도망칠 때 일본 놈들이 쏜 탄알에 어깨와 왼쪽발뒤축을 부상당하였지요. 그래도 탈주에 성공해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최봉설은 후에 쏘련 홍군에 가입해 흑하 북쪽에서 벌어진 이만전투에도 뛰어들어 로씨야 백파군을 족쳤지요. 그 후에 그는 레닌까지 만났고 적기단 단장도 했소.” “오. 어떻게 그 일을 그렇게 잘 아오?” 기준의 물음에 김하규는 사위를 두리번거리다가 말했다. “믿고 하는 말이지만. 그때 일본 놈들이 경비를 호송해 선바위 골을 지난다는 정보를 회령지행의 전홍섭이 보낸 걸 내 최봉설에게 알려주었소.” 병완은 머리를 끄덕였다. “그런데 최봉설이랑 항일투사라는 걸 어떻게 알고 알려주었소?” 그러자 김하규는 조용히 “최봉설은 내 사위요.” 하고 말하고 주위를 둘러보며 눈을 질끔 해보였다. “아, 원래 그런 일이구만. 영감은 정말 사위만 못하지 않은 반일투사요.” 병완은 김하규를 믿고 말했다. “내 맏아들 성칠도 어데서 일본 놈들과 싸우겠는데 몇 해 되도록 종무소식이요.” 김하규는 병완을 바라보면서 정색해 말했다. “근심맙소. 기준한테서 성칠의 말을 들었는데 참 장한 사내대장부더구먼. 그런 할 일이 많은 사람은 명도 긴 법이오.” 하고 말했다. “글쎄 말이오. 그래도 어시 된 사람은 늘 장년이 된 아들놈도 근심하게 되오.” 김하규는 머리를 끄덕이면서 “후에 내 사위에게서 성칠의 기별이 있으면 알려주리다. 어데 가 살더라도 주소는 알려주오.” 하고 말했다. 그러자 기준이가 시원히 대답했다. “양. 지금 우리 사는 데는 저 진수해에서 한 이십 리 떨어진 소서구란 곳이오.” 김하규는 한숨을 쉬면서 “여기서 마음이 통하는 사람들이 모여 살았으면 좋겠는데 그러오.” 하고 말했다. 병완은 “고맙소. 우린 아마 기준이 개간해 놓은 소서구로 가야 될 거 같소.” 하고 완곡하게 사양하더니 원삼이네 삼형제의 의향을 묻는 듯이 건너다보았다. 그러나 원삼이도 사양했다. “아니오. 난 여기서 살기 싫소. 일본 놈들의 성화에 배기지 못해 간도에 왔는데. 일본 놈들이 명동 서당에 불을 지르고 야단쳤다는데. 이 마을에서 어떻게 산다고 그러오? 우린 일본 놈들이 보이지 않는 심심산골에 가서 살겠소.” “정 그렇다면 별수 없지.” 김하규는 아주 서운해 하는 눈치였다. 바깥에서는 눈보라가 모래알처럼 교회당의 넓은 창문의 창호지를 두드리며 윙윙 무섭게 아우성쳤다.                    10.꼬리 없는 소        교회당에서 하루 밤 묵고 병완 등은 김하규와 작별하고 길을 떠나게 됐다. 김하규는 례배당에서 일을 하는 사람이여서 목사처럼 작별인사를 했다. “하느님이 당신들을 잘 살게 하고 일본 놈들을 조국 땅과 간도 땅에서 몰아내게 도울게요.” 기준은 동전 두 닢을 하규에게 쥐어주면서 인사했다. “숱한 사람들이 와서 폐를 끼쳤소.” 그러나 김하규는 사양하면서 받지 않았다. “뒀다가 요긴할 때 쓰오. 교회당은 어려운 사람을 돕는 것을 낙으로 여기요. 다 하느님이 베푼 은총이라고 생각하면 되오.” 뒤이어 그는 서쪽으로 쭉 뻗어나간 산골짜기를 가리키면서 당부했다. “이 육도하를 따라 산골짜기를 서쪽으로 한참 내려가면 물레방아골이 있소. 점심 때쯤이면 용드레촌이라는 시내가 나질게요. 용정이라고도 부르는데 거기에는 일본 영사관까지 있소. 좋기는 일본놈들이 욱실거리는 시내에 들어가지 말구 에돌아가오." 눈보라가 윙윙 휘몰아치는 눈길을 떠나가는 병완이네 일행을 바래면서 하규는 가슴에 십자가를 그리며 기도를 드리었다. “하느님께서 저 불쌍한 착한 분들을 도와주옵소서. 가는 길이 잘 사는 길로 열리게 도와주옵소서.” 병완 등은 애들을 데리고 골 안을 따라 걸어 내려가니 눈 덮인 버들 방천 속에 묻힌 얼음 강판 길옆에 깎아 세운 듯이 선바위가 우뚝 솟아있었다. 마치 그날의 항일투사들의 업적을 기리여 땅을 차고 우뚝 솟아 있는 상 싶었다. “이게 선바위겠소. 실로 칼로 깎아 세운 거 같구먼.” 그들이 선바위 밑으로 뻗은 길을 걸어지나가자 선바위부근에 자그마한 마을이 나타났다. 병완이 마을 사람과 “이 마을은 뭐라고 부르는 마을입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그 사내는 “물레방아 골이요.” 하고 말하고 나서 황급히 어디로 달려갔다. 기준이가 머리를 긁적이면서 “이 마을이 김하규 어른이 말하던 물레방아 골이구먼. 이 마을에 물레방아가 있는 모양이지?” 하고 중얼거렸다. 그때 두리번거리던 인삼이가 개울가에 떡 서버린 커다란 물레방아를 가리켰다. “저기 물레방아가 있소.” 모두들 개울가를 바라보았다. 병완 삼부자는 강가에 굳어버린 물레방아를 보자 저도 몰래 고향 영월동에 두고 온 고향집 물레방아 생각이 났다. (고향집 물레방아를 내 손으로 얼마나 고생스레 만든 건데. 다 두고 왔다. 아니, 일본 놈들 림산파출소에 다 빼앗기고 말았구나.) 병완은 속으로 이렇게 통탄하면서 땅이 꺼지게 한숨을 후- 내쉬었다. 하얀 입김이 눈보라 속에 서리서리 풍겨나갔다. 그러나 춘삼의 아내랑 삼동서는 물레방아를 보자 아주 희귀해했다. “이 마을 아낙네들은 손바닥에 털이 나겠다. 절구공이질을 하지 않고 물레방아에 쌀을 찧으면 얼마나 편안하겠소?” “글쎄 말이오.” 물레방아소리에 종호가 아버지 잔등에서 “물레방아를 가지고 노자.” 하고 응석을 부렸다. 원삼은 넉가래 같은 손바닥으로 종호의 엉덩이를 툭툭 치면서 “지금은 겨울이 돼서 물이 얼어 물레방아를 돌리지 못해”라고 했다. “예. 내 일이 바빠 길손들과 길게 말할 새 없소.” 그 사람은 주먹을 쥐고 마을 복판으로 달려갔다. “무슨 일이 있는 모양이지?” 병완의 말에 기준이가 “가 보기요.” 하고 말했다. 마을 복판으로 하여 괜찮게 사는 부자 집 마당에서 숱한 사람들이 커다란 매돌을 매돌 판에 올려놓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런데 넷이 육중한 매돌을 들어 올리지 못해 낑낑 거리고 있었다. 아무리 목에 지렁이 같은 피 줄을 세우면서 낑낑 거려도 매돌을 들어 올리어 놓지 못했다. 그러자 뚱뚱한 부자는 “에이고, 밥값도 못하겠다. 야, 야. 넷이서 매돌 하나 들어 올리지 못하다니?” 하고 도리머리를 가로 흔들었다. 그런 장면을 보던 원삼이가 사람들 앞에 썩 나섰다. “물러나오.” 그러자 뚱뚱보부자는 마루 위에서 원삼의 아래위를 훑어보더니 “길손은 덩치는 크다만 어찌 네 사람이 들어 올리지 못한 걸 들어 올린다고 그러오?”라고 하며 못 미더워 도리머리를 가로 흔들었다. “모두 물러나오. 매돌 하나 드는데 무슨 숱한 사람이 필요하오?” 말을 마치자 원삼은 보자기로 허리를 질끈 동여매더니 매돌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는 허리를 굽혀 한 아름이나 되는 매돌을 덥석 안더니 버쩍 들어 매돌판 위에 올려놓았다. “아따! 천하장사구나!” 뚱뚱보 부자가 감탄하면서 마루에서 내려왔다. 마을 사람들도 입을 딱 벌리더니 여기저기서 감탄소리가 술렁거렸다. “어이구, 꼬리 없는 황소로구먼!” “꼬리 없는 범이구나!” 뚱뚱보부자는 원삼의 손을 잡으면서 “고맙소. 어데서 오는 길손인지 알고지내기오. 난 물레 골의 리영룡이오.” 하고 인사했다. 원삼도 푸접 좋게 “난 조선 경성 주을면에서 온 리원삼이요.” 하고 인사를 받았다. “저 사람들은 누구요?” 그러자 원삼은 돌아서 일일이 인사시켰다. 뚱뚱보부자는 성격이 시원한 사람인 것 같았다. “난 조선 길주에서 들어온 리영룡이라고 부르오. 아마 살 길을 찾아 간도로 들어온 것 같은데 우리 집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살지 않겠소? 우리 집엔 저 산 바위 뒤에 밭도 많고 밭을 일굴 황무지도 많소.” 그러자 원삼은 두 형님과 병완 등을 돌아보았다. “그러오. 여기서 살면 좋을 것 같소.” 병완의 말에 원삼은 기분이 좋아했다. “그럼 리 주인을 믿고 여기서 살겠습꾸마.” 리영룡은 원삼이네 형제를 돌아보면서 사람 좋게 웃으며 물었다. “난 리씨 왕조의 후대 전주 리씨요. 자넨 무슨 리씨오?" 원삼은 제꺽 “우린 공주 리 씨요.” 하고 대답하고 나서 뒤이어 “우리 형님네도 여기서 살게 해주오.” 하고 청을 들었다. 그러자 리영룡은 원삼의 두형을 훑어보는 것이었다. 어깨가 쩍 벌어진 원삼과는 달리 하나는 보통 키이고 하나는 키가 작아 힘을 쓸 것 같지 못했다. 그 눈치를 차린 원삼이가 리영룡에게 “형님들은 나보다 힘이 더 세오. 받아 줍소.” 하고 말했다. “정말?” 그러자 춘삼이가 둥글 넙쩍한 매돌 판 위에 뛰어올라가 원삼이 들어 올려 놓은 매돌을 안더니 버쩍 들어 매돌 판 아래에 내던졌다. 리영룡은 기절초풍할 지경이었다. “아이구! 내 매돌을 깨겠소.” 그러자 인삼이가 그 매돌을 안아 꽁기돌을 다루듯이 버쩍 들어 매돌 판 우에 슬쩍 올려놓았다. 마을사람들은 모두 놀라 눈알이 뒤집힐 지경이었다. “어쩜 형제들이 다 소 같은 힘장사들인가!” 리영룡은 입이 함박만 해졌다. “알았소. 자네들만 있으면 내 평생 농사걱정하지 않아도 되겠구먼. 추운데 집안으로 들어가기요.” 원삼이네 삼형제와 병완이네 부자 일행 수무나문이 모두 들어갔다. 원삼이네 삼형제네 아내들은 좋아 입이 함박만 해졌다. 제일간 물레방아 골의 물레방아 있어 좋았고 정처 없이 떠돌지 않아도 됐다. 병완은 원삼이네가 물레방아 골에 자리를 잡자 한시름 놓았다. 점심 숟가락을 놓기 바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린 손자가 기다려서 우린 빨리 떠나야 하겠소.” 원삼이네 삼형제는 마을 동구 밖에까지 따라나와 석별의 정을 나누었다. 병완은 갈라지면서 “무슨 일이 생기면 알리오.” 하고 말했다. 원삼은 “이렇게 갈라지면 언제 또 만나겠소?” 하고 갈라지기 아쉬워했다. “산 사람이 만날 날은 있겠지. 우리 소서구에 놀러 오오. 혹시 성칠을 만나면 우리가 소서구에 있다고 알려주오.” 머리를 끄덕이는 원삼이네 삼형제의 철색얼굴에는 석별의 정이 헤염치고 있었다. 그들은 눈보라치는 선바위 밑에서 아쉬운 대로 갈라져야 했다. 11. 유서 깊은 용드레촌 병완 삼부자는 풍설이 이는 산골 안을 따라 한 둬 시간 걸었다. 도중에 오두막이 흩어져있는 마을 몇개를 지나니 저 앞에 자그마한 시내가 나타났다. “저긴 어디야?” 병완의 물음에 기준은 “용드레촌이라는 곳입꾸마.” 하고 대답했다. “오, 저게 고향에서도 항상 들어오던 용드레 촌이구나. 김하규 어른의 말이 용드레촌을 지금 용정이라고 부른다지?” “예. 용정에 용드레 우물이 있는데 물이 영 시원합디다. 그 우물 이름을 달아서 시내 이름도 용드레촌이라구 불렀다고 합꾸마. 후에 한어이름으로 고쳐서 용정이라고 부른답니다.” 기준의 말에 병완은 “목도 축일 겸 그 우물로 가볼까?” 하고 말했다. 그러자 창준은 겁기가 꽉 찬 얼굴로 병완을 바라보면서 “용정 시내에 들어갔다가 일본 놈들이라도 만나면 어쩌자고 그럽둥?” 하고 근심했다. “그럼 아쉬운 대로 용정에 들리지 말고 돌아가자.” 그 말에 창준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병완은 산길을 용정 동쪽 산 둔덕에 올라가 시내를 내려다보더니 기준을 돌아보면서 “얘, 저 번화한 용드레 촌 궁금하구나.” 하고 말했다. “저 용드레 촌에는 이런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답꾸마.” 기준은 그간 들은 얘기를 했다. “1883년 봄에 회령에서 들어온 장인석이하구 박윤언이라고 하는 사람이 처음으로 륙도구에 들어왔다가 세전이벌의 비옥한 땅을 보고 황무지를 일구고 농사를 짓기 시작하였답니다. 그 후 저기 보이는 저 일본 영사관 서쪽에서 옛 우물자리를 발견하고 우물을 가셔내고 우물 벽을 수리하였답니다. 그들이 우물가에 초가집을 짓고 살았는데 후에 조선에서 들어온 사람들이 하나둘 와서 물을 마시고 쉬기도 하고 그 옆에 집을 짓고 살았답니다. 그래서 한 집 두 집 늘어나서 큰 마을이 되였답니다. 후에 그 우물에 한족농민 충서방이 길손들의 편리를 생각해 용드레박을 만들어 세워놓았답니다. 그래서 그 우물을 용드레우물이라고 불렀고 그 마을도 용드레촌이라고 했답니다.” 기준의 말에 병완은 “오, 그런 일이였구나.” 하고 머리를 끄덕였다. “용정 우물에서 용이 하늘로 올라갔다고 용정이라고 불렀다고도 합니다. 그런데 모두 그건 후에 사람들이 용드레우물이 맛있다는 걸 멋있게 말하느라고 전해 말한 것 같습니다. 이 세상에 어디 용이라는 게 어디 있습니까?" 기준의 말에 창준은 “그 말이 옳다.” 하고 끼어들었다. 용정 말을 하다나니 어느새 용정을 에돌아 해란강을 건너고 서북쪽산기슭에 이르렀다. 서쪽에 높은 산이 막아서서 눈보라가 덜 휘몰아쳤다. 그들은 산에 오르다가 숨을 돌리면서 휘몰아치는 눈보라속의 용정을 되돌아보았다. 검 칙칙한 사가지 여기저기에서 밥을 짓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병완 삼부자는 눈보라를 무릎 쓰고 부지런히 북으로 걸어 해가 어슬어슬 질 때에야 진수해에 이르렀다. 진수해는 용정보다 퍽 작은 시내였다. 이 시내에도 흰 옷을 입은 조선 사람들 속에 화복을 입은 일본 녀인들과 만또를 걸친 만족인들과 한족인들이 드문드문 눈에 띄었다. 병완은 기준을 돌아보고 나직이 “혹시 한길수의 아들 철주가 여기에 있는지 빨리 빠져나가자.” 하고 귀속 말을 했다. 병완은 머리를 끄덕이면서 걸음을 다그쳤다. “모시모시(여보세요), 하이레데 아손데 이끼마쇼(들어와서 놀고 가세요.)” 병완이가 머리를 들어보니 높은 토성 옆에 난 대문 옆에서 불여우처럼 화장을 한 화복바람의 일본 여인이 뭐라고 알아듣지 못할 일본말로 지껄였다. “기생집이구나. 일본 놈들이 여기까지 위안부들을 달고 왔구나.” 병완은 중얼거리면서 그 일본 여인들을 보다가 그 속에서 면목이 있는 여인이 피뜩 눈에 띄었다. “아니, 총도감 어른이 아닌가요?” 이번에는 조선말을 하는 여인이 지껄여댔다. 병완은 간도에 와서 자기를 알아보는 여인의 목소리를 듣고 자기 귀를 의심할 지경이었다. 순간 잔등에 식은땀이 나며 섬찍해 머리를 들지도 못하고 걸음을 재우쳤다. “난 뽕녀예요.” “난 명천 기생집의 만금이구요.” (뽕녀라니?) 병완은 걸음을 멈추고 머리를 들어 그쪽을 바라보았다. “잊었는가요? 몇 해 전에 끼무라 국장님과 함께 우리 기생집에 놀러왔다가 달아나지 않았던가요?” 뽕녀가 몸을 배배 탈면서 하는 말에 만금이가 입귀를 쫑긋 하면서 동을 달았다. “그래, 그때 사내대장부 같잖게 도망쳤지요. 호호호.” 병완은 “사람을 잘못 봤소.” 하고 한마디 하고는 황급히 그 자리를 떠나버렸다. 토성안의 기생집 앞을 떠나 한 일리 간 후에야 병완은 숨을 돌리면 토성 쪽을 되돌아보았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여기 간도에 명천 위안부들이 오다니. 혹시 한철주랑 저안에 있으면 어쩌니? 눈에 난 발자국을 따라 쫓아오면 어쩌니? 빨리 피신해야 해.”        그들은 눈보라치는 강변 아름드리버드나무 숲속으로 자취를 감춰버렸다. 그들은 원시림을 방불케 하는 아름드리 버드나무와 비술나무 숲속을 헤치며 허둥지둥 빠져나가 부르하통하를 건너 뒷산에 올랐다. 산등성이에서 벌거숭이 나무 가지들이 추워 눈보라 속에서 맞절을 하는 들판을 내려다보았다. 뒤를 쫓아오는 그림자가 보이지 않자 그들은 한시름 놓고 산을 타고 서쪽으로 걸었다. 둬 식경을 너머 헤매서야 계수동에까지 이르렀다. "여긴 어디메냐?" 기준은 동쪽골안막바지를 가리키었다. “계수동 골안입니다. 인심이 어찌나 박한지 들리지 맙시다.” 그리하여 병완은 기준을 따라 산등성이 길을 걸어 움막이 여기저기 흩어져있는 계수동 골안을 들리지 않고 지나갔다. 기준은 산등성이에 서서 골짜기 너머 서쪽 골안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저 서쪽 골안이 바로 소서구입구마.” “어느 골안이라느냐?” 병완은 기준이가 손으로 가리키는 서쪽 골짜기를 바라보았다. “저기 서쪽으로 쭉 뻗어나간 짧은 골짜기입니다.” 병완은 머리를 끄덕였다. 눈 덮인 가느다란 골짜기를 바라보면서 한숨을 후 길게 내쉬었다. 천신만고를 겪으면서 찾아온 새 삶의 터전이 바로 저 황야에 묻힌 눈 덮인 골짜기였다. “빨리 가자. 어린 손자가 애타게 기다리겠다.” “예.” 창준은 둘째아들 상길이 생각에 발걸음이 바빠졌다. 기준은 제일 앞에 서서 산비탈을 내려가면서 말했다. “내 주현경과 장학산 주인에게 잘 부탁했으니 별 일은 없을게요.” 병완은 창준의 부축임을 받으며 산비탈을 내려오자 아름드리 버드나무와 비술나무들을 둘러보았다. “기준아, 이 아름드리나무로 집을 지으면 팔간대청도 멋있게 짓겠다.” 아버지 말에 기준은 도리머리 질 했다. “이곳 지주들이 다치게 하겠습니까?” “글쎄 말이다. 제 고향의 나무도 마음대로 다치게 못했는데 이국의 나무도 마음대로 채벌해 쓰지 못하게 하면 어떻게 사니? 목수는 나무만 보면 가슴이 부풀어 오르지. 집도 짓고 싶고 절구통도 파구 싶고 함지도 만들고 싶다. 사람이 욕심은 끝이 없지비.” 아버지가 끝없이 중얼거리자 아들들은 마음이 안쓰럽기만 했다. 그들은 해질녘에야 무릎까지 풍풍 빠지는 눈을 헤집고 나무숲속을 꿰뚫고 나가 끝내 소서구 어귀 장학산 지주네 집 앞에 이르렀다. 인기척을 들은 황둥개가 뛰쳐나오면서 요란하게 짖어댔다. 그러자 안에서 뚱뚱한 장학산이 나왔다. 그는 기준을 보자 반갑게 두 팔을 벌리며 환성을 질렀다. “라이라(왔구만). 왜 이제야 왔는가? 딱 보름만이구만. 어서 들어오게나.” 기준은 뒤돌아보면서 “장주인입구마.” 하고 인사시켰다. 말이 통하지 않아 허리를 굽혀 인사하고 손을 굳게 잡는 것으로 대체했다. “할아버지! 아버지!” 이때 집안에서 상길이가 뛰쳐나왔다. “오, 그래, 상길아!” 창준은 어린 상길을 덥석 안아 쳐들어 꼭 껴안았다. 병완도 다가와 셋째손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무사하니 됐다. 에이유, 이젠 다 컸구나. 어시를 떨어져도 울지 않고.” 상길은 아버지 품에서 내려 기준에게 두 팔을 벌리었다. 기준과 병완은 번갈아가면서 상길을 안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저녁에 강냉이떡을 배불리 든 후 병완은 기준에게 “간도의 인심이 참 후하구나.” 하고 말했다. 기준은 장학산에게 엄지를 내보이었다.        “장 어른은 참 좋은 사람입니다. 소작료도 절반만 받았습니다. 우리 조선에서야 8할씩 받는데 말입니다.”        장학산은 기준이 쳐든 엄지손가락을 보고 대개 뭐라는지 짐작하고 헤벌쭉 웃으면서 기준의 앞에 엄지를 흔들어보였다.       그날 밤 병완 삼부자는 상길을 데리고 서쪽 방에서 자게 됐다. 병완은 간도에 들어와 처음 따뜻한 구들에서 자게 돼 한숨을 후~ 길게 내쉬었다.  
42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21) 댓글:  조회:2289  추천:1  2015-10-26
                      김장혁 작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                         제6장 핍박에 의해 간도로                     6. 이별의 두만강      먹장구름이 감돌며 무시무시한 공포를 퍼뜨린다. 야수의 승냥이 검은 그림자가 악마처럼 가가리를 쩍 벌리고 시뻘건 이빨을 들러내고 죽음의 노래를 부르며 그들의 뒤를 뒤쫓고 있다.       기준은 상길을 업고 걷고 또 걸어 어느 날 해질 녘에 한 이름 모를 넓은 강가에 이르렀다.     피뜩 보아도 흙탕물이 사품 쳐 흐르르는 강폭은 몇 백 미터는 실히 될 것 같았다. 버드나무숲이 우거진 대안에는 인가라고는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혹시 두만강이 아닐까?)      기준은 상길을 둘쳐업고 가시덩굴을 헤치며 무시무시한 수림을 버스럭버스럭 한참 걸어나갔다.    이윽고 그는 발걸음을 멈추고 산 아래 강가를 두리번두리번 살폈다.     그는 사위를 두리번거리면서 한참 또 걸었다. 그제야 저쪽 산 아래에 마을이 보이고 나루터에 쪽배 몇 개도 보였다.     기준은 상길을 보고 이불 짐을 지키라고 당부했다. 뒤이어 그는 낫으로 싸리나무 둬 단을 해 메고 스적스적 마을에 내려갔다.      (고향을 떠나 저쪽 낯선 만주로 들어가면 다 잘 산다고 할 수야 없지.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건너자. 될 수 있으면 이쪽 제 조선 땅에서 사는 게 좋은데, 참.)      기준은 마을에 내려 간 후 헌병이나 자위대 놈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자 대담히 마을 어귀의 한 집 앞에 들어섰다.     “계십둥?”     "있습꾸마."     뒤이어 웬 나그네가 쩔룩거리면서 문 밖에 나왔다.     그는 나무 단을 메고 서 있는 도척 같은 기준을 보고 깜짝 놀랐다.     “무슨 일이오?”    기준은 삽작문을 열고 들어섰다.    “난 지나가던 길손이오. 땔나무나 받아두고 밥 한 끼 줄 수 없소?”    나그네는 앞뒤를 두루 살피더니 생각 밖으로 “내려놓고 들어오오.” 하고 말했다.     나그네는 기준이 벗어놓은 나무 단을 황급히 메여다가 헛간에 처넣고 문을 닫아걸었다.    나그네가 쩔룩거리며 집에 들어가자고 했다.    기준은 주춤 멈춰섰다.    “저, 어린애 하나 더 있소. 나무 둬단 더 해오겠소.”      나그네는 손사래쳤다.    “그러지 마오. 지금 삼림경찰들이 나무를 다친다고 산에 얼씬도 하지 못하게 하오.”     “알았소. 내 알아서 할게.”    기준은 씨엉씨엉 뒷산에 올라갔다.    이윽고 기준은 나무를 둬단 더해 이불 짐에 옷 보따리까지 메고 상길을 데리고 다시 나타났다.    주인나그네가 나무 단을 받아 메자고 했다.    “놔두오.”    기준은 혼자 나무단을 훌 들어갔다.    그때 정지 문 안에서 아낙네와 애들 서넛이 기준과 상길을 흘끔흘끔 내다보는 것이었다. 그들은 숱한 짐을 지고서도 싸리나무를 훌 들어가는 기준을 보고 입을 딱 벌렸다. 힘장사라며 혀를 끌끌 차기도 했다.    기준이 위방에 들어가며 보니 마루 위 벽에는 고기그물도 걸려있고 마른고기도 처마 밑과 벽에 줄느런히 걸려있었다. 보아하니 나룻배나 다루는 같았다.   정지에서 한참 분주하더니 밥상이 들어왔다.   “자 시골이라서 변변히 갖춘 게 없소. 시장하겠는데 허물 말고 많이 드시우.”   기준과 상길은 오랜만에 생선국에 조밥을 한때 배불리 먹었다.    식사 후에 주인나그네는 기준에게 “어데서 오는 길이오?” 하고 물었다.    기준은 숭늉물에 양치질까지 하고나서 가래짝 같은 손을 내밀었다.    “난 명천의 김기준이오. 오늘 대접 고맙수다.”   주인나그네는 기준의 손을 잡아 흔들면서 “미안하오. 난 종성의 리창록이라고 부르오.” 하고 말했다.   그는 조금 쑥스러워하면서 뒷말을 이었다.   “이전에는 우리 집에서 지나가는 나그네들을 푼푼히 대접했소. 그런데 이젠 간도로 들어가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공밥을 주지 못하오. 여긴 저 맞은 켠 간도에 건너가서 농사를 져 날라다 먹는 형편이니 말이오.”    “오, 그래 저 간도로 들어가도 목을 치지 않소?”    리창록은 도리머리를 가로 저었다.    “목을 치다니? 이젠 괜찮소. 이전에는 만청에서 이주민들이 저 두만강을 건너가면 붙잡아 목을 치지 않으면 저쪽에서 노역을 시켰소. 그런데 지금은 건너가서 농사를 지어다가 사는 사람이 많소. 이젠 간도에 건너가 사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죽이지도 못하고 놔두고 있소.”    기준은 한숨을 후~ 내쉬었다.    “나도 저 간도로 건너가야 겠는데 나룻배를 좀 얻을 수 없겠소? 삯전은 내가 내리다.”    창록은 기준을 정색해 마주 바라보더니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쉽지 않소. 나룻배를 얻을 생각이면 허창수 영감을 찾아가야 되오. 우리 가난한 집에야 어디 배 있소? 나루터의 배는 몽땅 허 영감네 배오.”    기준은 상길을 데리고 쩔룩거리며 앞장서 나가는 창록을 따라 나섰다. 한참 창록을 뒤따라 마을 아래쪽으로 가니 높다란 토성안집이 나타났다.    기준은 토성안집 대문 안에 들어서기 전에 창록의 손을 잡고 물었다.    “부자 집에서 나룻배를 내놓을까?”    창록은 기준을 돌아보며  말했다.   “허영감은 깍쟁이요. 나룻배를 얻기 힘드오. 그래도 말해 보기오.”   기준은 머리를 끄덕이면서 상길의 손을 잡고 창록을 뒤따라 토성 안에 성큼 들어섰다.   황둥개들이 마루 앞에서 왕왕 짓다가 창록을 보고는 꼬리를 흔들거리면서 짖지 않았다.    “주인님, 계십둥?”    “웬 일인가?”    마른 기침소리에 뒤이어 미닫이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퉁퉁하게 생긴 양반이 마루에 나섰다. 개기름이 유들유들한 퉁퉁한 얼굴이나 퉁 사발 같은 눈을 보면 무정해보였다.   “나룻배를 빌리러 왔습꾸마.”   부자는 생각 밖으로 첫마디부터 살갑게 굴었다.   “아, 먼 길을 걸어 온 것 같은데 어서 올라오오.”    기준은 짚신감발한 처지라 어지러워 질까봐 올라가지 않고 마루 앞에 서서 말했다.    "간도에 건너가게 나룻배를 삯 내줍소.”    허 영감은 마루에서 내려왔다.   "원 참, 사람이 급하긴, 우물에 가서 숭늉 달라할 양반이군. 해 저물어야 두만강을 건널 수 있네.”    “먼저 이불 짐이나 내려놓고 천천히 보기요.”    기준은 이불 짐을 벗어 마루에 내려놓았다.    허창수는 기준이네를 데리고 나루터 쪽으로 걸어 나갔다.    버드나무 우거진 강변으로 나가자 맞은 켠 논밭에서 간도 농사꾼들이 논밭에서 일하는 모습이 피뜩피뜩 보였다.    기준은 창수가 창록의 말과는 달리 사람됨이 훈훈한 것을 보고 한마디 물었다.    “맞은 켠 간도라는 건 어떻게 돼 생긴 거요?”    창수는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더니 “한입으로 말하자면 기오.” 하고 말꼭지를 뗐다.    “저 맞은 켠을 간도라는 건 사실 우리 마을 저 아래쪽으로 두만강 건너편의 한 2천무나 될 넓다란 논밭을 말하는게요. 두만강반에 있는 섬 같은 땅이라고 해서 ‘간도’라고도 했소. 어떤 사람들은 또 개간한 땅이라고 ‘간토’라고 했는데 비슷하게 ‘간도’라고 부르기도 했소. 그런데 일본 사람들은 저 간도로 이곳 농사꾼들이 마음대로 나들자 간도를 확대해서 온 두만강변 동만을 간도라 했소. 지금은 두만강변 동만으로부터 동간도, 북간도, 남간도, 서간도라고 하면서 사방 7만여 리나 되는 만주를 몽땅 간도라고 한다오. 한일합방 후에는 일본 사람들이 우리 조선 사람들을 보호하는 척 하면서 간도에 경찰과 헌병들을 들여보내 만청중국을 밀어내고 간도통치권을 점차 차지하고 있소.”     기준은 내놓고 말할 수 없어 머리만 끄덕였다.     그러나 허창수 영감은 막 내놓고 욕지거리를 해댔다.     “섬나라 오랑캐들이 욕심꾸러기야. 제 섬에서 살 게지. 개 놈 새끼들이, 우리 조선을 다 삼키고서도 모자라서 조선 사람들을 보호하는 척 하면서 묻어가서 간도까지 삼키려고 개지랄이 아니고 뭐요?”     준은 두만강변에서 이렇게 민족 심이 있는 부자를 만난 것이 다행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허창수는 기준의 어깨를 툭툭 치면서 말했다.    “해가 지면 맞은 켠으로 건네줄게. 낮엔 안 되네. 일본 순사 놈들에게 붙잡히면 경을 칠라구.”    리창록도 곁에서 끼어들었다.    “우리 마을에서는 원래 두만강에서 물고기를 잡아 쌀을 사 보탰소. 그런데 일본 놈들은 두만강에서 물고기마저 마음대로 잡아먹지 못하게 하오. 쩍하면 쫓아와서 조선이 통 채로 일본 거로 됐기에 물고기도 일본 거라오. 날강도 같은 개 새끼들을, 원, 괘씸해서 어떻게 살겠소?”     그들은 두만강 변 버드나무숲에 숨어 숱한 이야기를 했다.    기준과 상길은 배 삯전을 주고 허 영감네 집에서 점심까지 얻어먹고 해지기를 기다렸다.    지루한 오후가 흘러가고 무시무시한 밤장막이 서서히 드리웠다.    기준과 상길은 허 영감을 따라 두만강 변 나루터에 나갔다.   허 영감은 기준의 옷 보따리까지 들고 나루터까지 따라 나와 배웅했다.   “겨울에 왔더라면 배 삯도 낼 필요 없이 얼음우로 두만강을 건너면 됐겠는데 미안하오. 잘 가게나.”   기준은 나룻배에 올라타기 전에 허 영감의 손을 꽉 잡았다.   “천만에 말씀을, 두만강을 건네주어 고맙소.”   허 영감은 손을 저으면서 “이렇게 고향을 떠나가면 언제 다시 돌아오겠소?” 하고 말했다.   기준은 머리를 들어 버드나무 우거진 두만강 변 그리고 종성의 산천을 둘러보았다. 종성의 산을 너머 저 멀리 고향 쪽의 하늘을 쳐다보았다. 순간 눈앞이 흐려지고 코마루가 시큼해났다. 강하기로 무쇠 같던 기준이도 정작 핍박에 의해 태 줄을 묻은 정다운 고향을 떠난 지 거의 한 달 만에 두만강을 건너게 되자 목이 꽉 멨다. 그는 가래 같은 손으로 눈시울을 쓱 닦더니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나룻배에 올랐다.   그는 나루터에서 손짓하는 허 영감에게 손을 저었다. 조국산천에 대고 머리 숙여 작별인사를 했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흐느껴 울었다. 가슴을 쾅쾅 마구 쳐댔다.    (이젠 진짜 부모형제와 고향 땅을 떠나야 한단 말인가? 처자와 생이별해 이국 땅에서 살아야 한단 말인가?)    가슴이 미여지는 것만 같았다.    구척 장신 사나이 기준도 처자와의 이별엔 눈물을 주르를 흘렸다. 씁쓸한 눈물이 콧마루를 적시며 입 안에 흘러들었다.    창록이 삿대로 강바닥을 찍어 떠밀자 나룻배가 강심으로 유유히 미끄러져 들어갔다. 조선 땅과 떨어져 강심으로 밀려나가자 기준의 마음은 더없이 쓸쓸해졌다.   (탯줄을 묻고 대대로 살아온 내 정든 고향아, 조상의 뼈가 묻힌 조선 땅아, 이렇게 가면 언제 또 찾아올까?)    순간 기준의 눈 앞에 콧수염쟁이와 번대머리가 피뜩피뜩 떠올랐다. 그는 고향에서 못살게 쫓아다니는 일본 놈새끼 끼무라와 졸개 한길수가 한없이 가증스러웠다.    기준이 이를 쁙쁙 가는데 창록은 노를 저으면서 월강곡을 나직이 흥얼흥얼 불렀다.       월편에 나붓기는 갈잎은     애타는 내 가슴을 불러야 보건만    이 몸이 건너면 월강 죄라오      기러기 갈 때마다 일러야 보내며    꿈길에 그대와는 늘 같이 다녀도    이 몸이 건너면 월강 죄라오      그때 두만강 하류 쪽에서 빨래방치 질하는 소리와 함께 월강곡에 화답이나 하듯이 웬 여인의 구슬픈 노래 소리가 들려왔다.      새 봄이 다 가도록 기별조차 없는 임을      또 어찌 명년 봄까지 기다려야 하나요     두만강 눈얼음은 다 풀렸는데      기다리는 임은 언제 돌아오랴        새 봄이 아니오라 열세 봄 넘어와도      못 참을 내랴만은 가신 님 낯 잊을까     강남의 제비들은 제 집을 찾아왔는데     간도로 들어간 내 님은 언제 돌아오랴       두만강 변 버드나무숲속에서 뻐꾸기도 망국노의 슬픔에 겨워 처량하게 우는가? 뻐꾸기 뻐꾹뻐꾹 구슬피 우는데 봄바람에 버드나무숲이 슬픔에 겨워 와스스 몸부림친다.    먹장구름 속에서 뻘건 독사가 쭉 뻗쳐내려오더니 강폭을 핥아갔다.    꽈르릉, 꽝! 꽝!    두만강을 삼킬듯한 우뢰소리가 천지를 들었다 놓는다.     상길은 질겁해 배전을 잡고 바들바들 떨며 흑흑 흐느껴 울었다.   "엄마~ 엄마~"   창록이 다급히 손사래쳤다.   "울지마! 마적이나 만청 순사놈들을 불러오면 목이 떨어져!"   그 소리에 상길은 울음을 뚝 그쳤다.    댓살 같은 소낙비가 억수로 쏟아져내렸다.     기준은 어린 조카 불쌍해 품에 꼭 끌어안안았다.      광풍폭우가 휘몰아쳐 두만강 폭을 무섭게 휩쓸었다. 쪽배가 흔들리며 당장 뒤엎어질 것 같았다.  기준은 상길을 꽉 끌어안고 가래짝 손으로 가냘픈 걀죽한 얼굴의 비물과 눈물을 닦아주었다.    쓸쓸한 이 밤에 피눈물에 젖은 두만강은 조국을 이별해가는 그들 숙질간을 업어 건늬며 쓸쓸히 바래고 있다.               7. 간도 소서구     쪽배가 억수로 쏟아지는 소낙비를 맞으며 사품 치는 두만강 물에 정처 없이 둥둥 떠내려갔다.  광풍폭우가 미친듯이 불어쳐 쪽배가 기우뚱거리고 불어 버드나무들이 무섭게 우수수 떨고 있었다.     쪽배는 그래도 능숙한 키잡이에 의해 간신히 대안에 다가갔다.  창록은 노젖기를 멈추고 두만강 물에 고기그물을 꺼내 슬슬 치면서  대안의 동정을 살피였다. 쪽배는 급물살을 타고 하류 쪽으로 둥둥 떠내려갔다.    “건너가도 되겠소. 맞은 쪽에 만주국 놈들이 없는 거 같소.”   기준은 상길을 안고 대살 같은 빗발 새로 창록을 돌아보며 물었다.   “만주국 놈들이 붙잡으면 정말 목을 쳐 머리를 두만강에 처넣소?”   창록은 배를 버드나무숲이 우거진 뭍에 댔다.   “이전엔 그랬소. 지금은 그러잖소. 붙잡히면 극상 해야 노역을 시킬 뿐이오. 빨리 내려 달아나오."   기준은 창록의 손을 굳게 잡았다.   “고맙소. 이제 갈라지면 언제 만나겠는지.”    창록은 비물에 젖은 이불 짐과 옷 짐을 대안에 마구 던졌다.   기준은 창록한테 동전 두잎을 건네주고 상길을 안고 뭍에 성큼 내려섰다.   창록은 삿대로 뭍을 떠밀면서 조용히 말했다.   “간도에서 살기 힘들면 조선에 돌아오오. 언제든지 두만강을 건네줄게.”   “양. 고맙소.”   순간 쇠기둥처럼 강한 기준이도 코마루가 시큼해났다. 낯선 간도 땅을 딛고 멀어져가는 창록과 배를 보다가 머리를 들어 조선의 산천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마음이 비길 데 없이 괴롭고 쓸쓸했다.   기준은 이불 짐과 옷 짐을 다시 한데 잘 묶어 둘러메고 상길마저 목매를 태우고 일어났다.   “가자! 빨리 가자!”   상길은 기준의 말대로 오줌으로 발바닥의 상처를 처치해 좀 낳았지만 아직도 걷기 힘들어 삼촌의 잔등 신세를 입어야만 했다.   기준은 두만강 변에서 멀리 달아나면 안전할 것만 같았다. 별 일이었다. 일제 놈들의 압박과 추격에서 해탈된 감도 뒤따랐다.   비록 낯선 간도 땅이지만 고향과 조선에서 멀면 멀수록 쫓아오는 놈이 없을 것만 같았다.     기준은 늙은 버드나무 밑에서 소낙비가 멎기를 기다렸다. 소낙비가 멎자 그들은 간도라고 불리는 논밭굽이를 굽이굽이 감돌아 흐르는 두만강 변의 버드나무숲을 헤치면서 한참 하류 쪽으로 걸어갔다. 드디어 원시림을 온 몸에 들쓴 한 산기슭에 이르렀다.     그때 난데 없는 말을 탄 놈들이 달려왔다.     (마적들이?)     맞았다. 당시 마적들은 말을 타고 두만강변을 돌아다니면서 전문 불법도강한 조선 백성들을 미친듯이 수탈했다.     기준은 황급히 목마를 태웠던 상길을 제꺽 내리워 안고 길 옆 숲속에 엎드렸다.     말발굽소리가 딸까닥 딸까닥 가까워왔다.    상길은 겁나 또 울라울라 했다.    "울지 마라!"    기준은 상길을 꼭 껴안았다.    "他妈的,躲到哪儿去了?“    대여섯이나 되는 마적들은 기준과 상길의 앞에 와서 멈춰서서 꽥꽥거렸다.    그 놈들은 숲에 마구 채찍을 휘둘로 쨩쨩 후려갈겼다.    "아가! 엄마!"    채찍에 얻어맞은 상길이 그만 너무 아파 울음보를 터뜨렸다.     "하하하, 이놈들, 어서 나왓!"   마적들은  다가와 마구 채찍을 휘둘러댔다.   기준은 벌떡 일어나 휙휙 날아드는 채찍을 거머쥐고 홱 나꿔챘다.   마적이 보기좋게 말에서 떨어져 곤두박혔다.   기준은 그 놈의 허리에서 긴 칼을 쑥 뽑아 내리찍었다.    "아이마얏!"    그 놈은 외마디 비명소리와 함께 뒈졌다.    뜻밖의 반격에 마적들은 깜짝 놀랐다.    그러나 그 놈들은 수적 우세를 믿고 칼을 뽑아들고  덮쳐왔다.    기준은 번개같이 날아나가며 칼을 휘둘러 찌르고 찍어댔다. 칼과 칼이 부딪히며 무수한 불찌가 튕겼다.    또 한 놈이 칼을 맞고 보기 좋게 말 위에서 내리곤두박혔다.    "아야, 마야!"    "포우(달아나)!   마적들은 상대를 잘 못 골랐다는 걸 뒤늦게나마 눈치챘다.   나머지 서너 놈은 비명소리 치더니 우르르 꽁무니를 뺐다.   그제야 기준은 한숨을 후 내쉬었다.  그는 칼을 들고 뒈진 두 놈의 몸을 이리저리 들췄다. 다행히 은전 일여덮잎을 들춰냈다.   기준은 상길을 목마 태우고 이불짐을 들춰메고 두만강 맞은 켠을 바라보았다.    이젠 두만강 너머 조국의 산이 희미하게 보일 뿐이었다. 그는 도리머리 질 하더니 머리를 숙였다. 순간 코마루가 시큼해났다.    그간 오줌찜질을 했기에 상길은 개암나무를 휘어잡으면서 산으로 조금씩 오를 수 있어 다행이었다.    갑자기 먹장구름이 뒤덮여오더니 하늘에서 또 번개가 번쩍이며 우르릉거렸다.     우르릉 꽈르릉 꽝꽝!    우뢰가 하늘땅을 진동하면서 무섭게 울리더니 때 아닌 봄에 소낙비가 물을 퍼붓듯이 쏟아져 내렸다.    기준은 솜저고리를 벗어 상길에게 씌워주었다. 인가라고는 하나도 없는 산길에서 비를 피할 곳도 없었다.    한참 개암나무 뒤덮인 산발을 타고 걷는데 다행히 뜻밖에 나졌다.    "이건 하늘이 내린 구명동굴이야."    기준은 상길을 데리고 동굴에 엉금엉금 기어들어가 비를 피했다.     바깥에서 억수로 쏟아져 내린 빗물이 그들이 쪼그리고 앉은 동굴바닥에도 흘러들었다. 그러나 몸에 비를 맞지 않아 다행이었다.     오뉴월의 비는 소잔등을 다툰다고 금방 기세 사납던 소낙비는 한참 후에 뚝 그쳐버렸다.     기준은 동굴바깥에 나가 검칙칙한 밤하늘을 둘러보았다. 아직도 비가 곤두박질쳐 날아내리고 있었다.     “오늘 밤은 여기서 자든지 하자.”    기준은 손 더듬 하면서 동굴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한 십 미터 들어갔는데도 끝에 닿지 못했다.    (됐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하느님이 우리를 자라고 여기에 이런 동굴을 만들어 놓은 것 같구나.)   그는 이불 짐을 들고 상길을 데리고 동굴 안쪽으로 들어갔다. 축축한 동굴바닥에 속이 젖지 않은 이부자리를 두 겹으로 펴고 잠자리에 숙질간이 나란히 드러누웠다.    이윽고 상길은 곤해 코를 콜콜 골았다. 동굴 안에는 기준의 한숨소리가 길게 울려 퍼졌다.    이튿날 이른 아침. 기준은 먼저 일어나 동굴을 두루 살펴보았다. 누르스름한 토색 동굴 벽을 매만지면서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동굴 안에 모닥불을 피웠던 흔적이 있었다.    한참 들어가니 시원한 바람이 불어 들어오고 이윽고 검고 칙칙한 둥근 하늘이 보였다. 이 동굴에 들어오면 천연적으로 다른 곳으로 달아나기 좋은 동굴이이였다. 아마 숱한 피난민들이 두만강을 건너와 여기 숨어있다가도 동간도, 서간도, 북간도로 들어간 동굴인 것 같았다. 후에 기준이가 안 일이지만 그 동굴에는 조선독립군 투사들이 숨어 항전을 벌려온 전적지였다고 했다.    이때 동굴 저쪽에서 상길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상길아, 울지 말라. 삼촌 여기 있다.”    그래도 상길은 흑흑 흐느껴 울었다.     기준은 황급히 되돌아가 상길을 안고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삼촌이 무슨 귀여운 조카를 두고 어디로 가겠니? 울지 마.”   상길은 울음은 끊었다. 하지만 고사리 손으로 눈물을 닦으면서 흑흑 흐느끼며 어깨를 들먹였다. 기준은 보짐에서 구운 개구리를 꺼내 상길과 함께 바작바작 씹어 먹었다.    그들은 련 며칠 풍찬노숙하면서 산을 넘고 강을 건너 서쪽 산에 올라 령 길을 따라 걸었다.    해질녘이 되여 어떤 골짜기에 이르니 골 안 막받이 움막들에서 저녁밥을 짓는 연기가 자오록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기준은 저 양반들도 자기처럼 모두 핍박에 의해 고향을 떠나 이 곳에 왔으리라고 생각되자 마음이 쓸쓸해보였다.    제일 가까운 움막에 다가가니 한 나그네가 기준의 아래위를 훑어보며 “누굴 찾소?” 하고 물었다.    “아니오. 여긴 어디요?”    나그네는 기준을 흘끔 가늠해보았다.    “계수동이오.”     대답해버리고 나그네는 귀찮다는 듯이 거들떠보지도 않으며 움막 안으로 훌 들어가 버렸다.    움막 안에서 벌거숭이 애들이 때투성이 낯들을 내밀고 상길을 보고 주먹을 코 마루에 댔다가 쳐들어 보이었다.   상길이 주먹을 쳐들어 덤비라는 시늉을 했다.   그 모양을 보고 기준은 허구픈 웃음을 피씩 지었다.   (조선에서 듣던 소리와는 다르구나. 뭐 ‘만주에서는 지나가던 나그네에게도 기장밥에 장국을 먹인다고?’ 뭐 ‘땅이 많아서 살기 좋다고?’)    기준은 쌀독에서 인심이 난다고 살기 힘드니까 야박하게 구는 것이라고 생각되자 도리머리를 흔들며 그 자리를 부랴부랴 뜨고 말았다.     해는 그물그물 져 가는데 고향을 떠난 기준과 상길은 어데서 이 밤을 자야 하는가?    기준은 계수동 산정에 올라 산 아래를 내려다 둘러보았다. 남쪽에는 버드나무가 우거진 들판이 펼쳐져있고 서쪽에는 아름드리 버드나무가 우거진 자그마한 골짜기가 남북으로 길게 누워 있었다. 서남쪽에는 깎아지른 산이 두개가 나란히 서있었고 그 뒤로 누르스름한 산들이 주마등처럼 울룩불룩 줄느런히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골짜기에는 인가라고는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옳다, 이쯤이면 끼무라나 한길수가 찾아오기 힘들 거 같아. 저 서쪽 골 안에 가서 황무지를 일구면서 살면 안 될까?)    동산을 내려 골짜기에 들어서니 해가 뉘엿뉘엿 져갔다. 설상가상으로 아름드리버드나무숲속 하늘에 까마귀가 날아와 무시무시한 감을 더해줬다.    상길은 겁을 집어먹고 기준의 옆구리에 딱 붙어서 숨이 한줌만 해 걸었다.    기준은 버드나무에 앉아 울어대는 까마귀들에게 돌을 뿌렸다. 까마귀들이 후닥닥 하늘에 풍겨 올라가면서 까욱, 까욱 요란하게 울어댔다.    그제야 상길도 돌을 주어 까마귀들에게 뿌리며 장난쳤다.    그들이 개울물에 들어서니 종아리를 뭔가 톡톡 치는 것이었다. 무심결에 물속을 내려다보니 손바닥만한 허연 물고기들이 놀라 마구 뛰놀고 있었다.    “이게 웬 떡이냐? 물고기야!”    기준은 이불 짐과 옷 보따리를 강 건너 모래불우에 내던지고 팔을 걷어 올리더니 강물에 뛰어들었다. 그는 강가의 풀숲을 손 더듬질 해 손바닥만한 붕어를 잡아 모래바닥에 훌훌 내뿌렸다. 상길은 들었던 낫을 버리고 버들가지를 꺾어들고 모래바닥에서 팔딱거리는 손바닥만한 물고기들을 붙잡아 꿰기에 여념이 없었다.    원래 이 자그마한 시내 물은 부르하통하에 흘러들어가는 강이었다. 강에는 물고기도 많았지만 잡을 줄 아는 사람이 없어 이제껏 물고기들이 늙어죽을 지경이었다. 그러다나니 물고기들은 사람을 무서워 피해 달아날 줄도 몰랐다.     기준이 한참 손더듬질 해 잡으니 손바닥만 한 물고기가 몇 꼬챙이나 됐다. 기준은 물고기가 잘 잡히지 않자 시내 물에 손을 씻고 모래톱으로 올라왔다. 상길은 먹음직한 손바닥만 한 물고기들을 들고 보면서 혀를 감빨면서 걀쭉한 얼굴에 입이 함박만 해졌다.     “이거면 몇 때는 실컷 먹겠어.”     기준은 상길을 데리고 마른 삭정이를 주어다 쌓아놓고 부시를 쳐서 모닥불을 피웠다.    상길은 너무 흐뭇해 입귀가 귀밑까지 째질 지경이었다.    “야, 여기 간도에 이렇게 고기가 많은 좋은 강도 있습니다. 예?”    상길도 모닥불에 삭정이를 주어다가 자꾸 올려놓았다.    기준은 맑은 강물을 돌아다보면서 “그래, 우리 이 고기도 많은 강을 태평강이라고 이름을 짓자.” 하고 말했다.    “어째 태평강입니까? 우리 고향의 운주하라구 하면 더 좋지 않습니까?”    “아니야. 운주하라고 하면 우리가 운주동에서 온 걸로 의심 받을 수 있어. 간도에 와서는 태평무사하게 살아야지. 그래 태평강이라고 짓자는 거야.”    “예~ 태평무사하라. 태평강. 이 강 이름이 아주 멋있습꾸마.”    이때 갑자기 먹장구름 속에서 뻘건 불 뱀이 서산에 뻗치고 우레 소리가 천지를 뒤흔들며 울렸다. 불시에 소낙비가 와르르 쏟아져 모닥불이 꺼져버렸다.    “안 되겠어. 비를 피하자.”    기준은 두리번거리다가 서쪽 골 안 쪽에 검 칙칙한 집안에서 등불이 가물거리는 것을 발견했다.    “저 집으로 가보자.”    “예.”    그들이 소낙비를 무릅쓰고 서쪽 골 안 어귀에 가보니 만주국 한족집이 하나 나타났다.    처음 보는 한족집이여서 신기해보였다. 집 울안에서 개가 왕왕 짓는데 만복을 걸친 뚱뚱한 나그네가 문을 열고 내다보았다.    “에이, 꿔라이바(오게나)!”    뚱뚱보는 기준이네를 보자 뜻밖에도 오라는 손시늉을 했다. 상길은 겁나 기준의 옆구리에 머리를 파묻을 지경이었다.    기준은 뚱뚱보주인의 말을 알아듣지는 못하였다. 허나 손시늉을 보고 아무튼 소낙비나 피해 하루 밤 자려고 마음먹었다. 그는 상길의 손목을 잡고 성큼성큼 울바자 안으로 집에 들어갔다.     뚱뚱보는 알아듣지 못할 중국말을 하면서 손시늉을 했다. 기준은 이불 짐과 옷 보따리를 구들에 내려놓고 상길의 손에서 물고기 뀀 하나를 뚱뚱보 주인에게 넘겨주었다. 그러자 뚱뚱보는 처음 물고기를 보고 희귀해 어쩔 줄 몰라 하며 아내한테 줘 보내며 뭐라고 분부했다.     기준이 남쪽구들에 올라가 앉아 집안을 둘러보니 넉넉한 집 같아 보였다. 남북으로 갈라진 높은 중국 구들, 벽 쪽에는 뻘건 칠을 한 농궤가 서너 개나 놓여있었고 농궤 위에 비단이불이 겹겹이 쌓여있었다.    이윽고 뚱뚱보주인의 아내가 김이 몰, 몰 나는 옥수수떡 대여섯 개에 파와 된장을 들여왔다.   뚱뚱보주인은 먹으라는 손시늉을 했다. 기준과 상길은 만주국의 후한 인심을 처음 느끼면서 옥수수떡을 맛있게 먹었다.   그런데 뚱뚱보는 높은 한족구들에 앉아 옥수수떡을 떼먹다가도 누런 건 가래를 구들아래 땅바닥에 퉤퉤 내뱉었다.   기준과 상길은 더러워서 겨우 옥수수떡을 목구멍으로 넘겼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배고픈 놈이 가릴 것 없이 옥수수떡을 굶은 승냥이가 사냥물을 뜯어먹듯이 마구 우겨먹었다.   한참 후 뚱뚱보주인은 기준이네를 서쪽 방으로 데리고 들어가더니 손으로 구들을 툭툭 치며 거기에서 자라는 손시늉을 했다.   기준은 상길을 데리고 고향을 떠난 후 만주국의 한족 집에서 처음으로 배불리 먹고 한잠 잘 잤다.   이튿날 아침 기준은 공밥을 얻어먹기 싫어 상길을 보고 이불 짐과 옷보다리를 지키라고 하고는 마당에 나가 도끼를 들고 통나무를 팍팍 패주었다.    뚱뚱보주인은 마당에 따라 나와 엄지손가락을 내둘렀다. 한참 통나무를 팬 후 기준은 부엌간에 들어가더니 물 초롱을 들어 쳐들어 보이면서 물이 어데 있나 손시늉을 하며 물었다. 뚱뚱보주인은 물 초롱을 들고 기준을 데리고 우물터에 갔다. 두 번 째로 갈 때는 뚱뚱 보 주인이 멜대를 메고 가더니 물 초롱 두개에 물을 꼴딱꼴딱 퍼 담아 멜대로 어깨에 척 메고 식은 죽 먹기로 아주 절주 있게 집으로 돌아왔다.    기준도 배워 멜대로 물을 길어보았다. 그러나 뚱뚱보주인처럼 멜대를 메고 걸을 때 멜대가 아래위로 흔드는 절주감과 발이 맞지 않아 물을 많이 흘렸다.    아침에 뜨끈뜨끈한 장국에 조밥까지 배불리 먹은후 기준은 뚱뚱보주인이 준 괭이를 쥐고 소서구(小西沟)라는 골 안으로 들어갔다. 좁은 골 안은 길이가 한 3 리는 실이 됐다. 골 안을 따라 중간쯤 가자 움막이 나타났다.    뚱뚱보주인이 다가가자 움막 안에서 새하얀 한복을 입은 조선나그네가 나타나더니 허리를 꿉썩 하면서 인사했다.   뚱뚱보주인이 중국말로 뭐라고 말하자 조선나그네가 기준을 돌아보면서 말했다.    “이 양반은 이 골 안의 주인인데 장학산이란 지주요. 난 조선 회령에서 온 주현경이요. 우린 장지주네 밭에서 소작 농사를 지은 지 이태나 되오. 우리 집 주인 장학산 지주는 마음이 후하오. 장 지주는 당신과 함께 여기서 소작 농사를 지으면서 살라고 하오.”    그 말에 기준은 장 지주에게 허리를 굽혀 고마운 인사를 올렸다.    “고맙소. 난 올해 몇 년 몇 월 며칠인 지도 모르오.”   주현경이 장학산 지주와 뭐라고 묻더니 기준에게 “오늘은 1925년 4월 19일이라고 하오.” 하고 알려주었다.    기준은 머리를 끄덕이면서 “거의 한 달 반이나 걸어왔구먼.” 하고 중얼거렸다.    기준은 그날부터 장학산 지주네 톱과 괭이, 삽을 빌어다가 소시거우 막치기 샘물터 부근 양지바른 경사면에 움막을 짓고 장지주네 가마를 빌어다 건 후 좁쌀을 한주머니 꿔다 죽물을 쑤어먹으면서 소작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기준이가 괭이로 황무지를 번지는 사이에 상길은 묵밭에 듬성듬성 자란 능쟁이랑 캐느라고 여념이 없었다. 그런 푸성귀를 데쳐서 죽물에 버무려 먹으니 꽤나 보탬이 됐다.    쉴 때 기준은 소서구 산정에 올라가 간도의 인적이 드문 황야를 둘러보았다. 아름드리버드나무가 우거진 누르므레한 들판, 원시림을 방불케 나무와 소나무가 꽉 들어선 야산, 인적이 드문 황야는 정이 붙을 데가 하나도 없었다.    그래도 소서구 남쪽에 우뚝 솟은 천지꽃산에는 고향의 산처럼 봄을 맞아 진달래가 듬성듬성 피어 있어 조금 위안됐다. 천지꽃산 줄기를 타고 앉아 남쪽으로 내다보면 깎아지른 절벽으로 이뤄진 패랑천산이 있고 그 서쪽에는 세모칼날이 비스듬히 세로 박혀있는 듯이 칼산이 패랑천산보다도 두 배나 높게 솟아있고 칼산 서쪽에는 산무루가 방추 돌처럼 평평한 멍지뫼 산이 있었다. 누르무레한 황야에 우뚝 솟은 패랑천산과 칼산 그리고 멍지뫼 산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기준은 허구픈 웃음을 지었다.    (섬나라 오랑캐들이 살판을 치는 세상에서 정말 저 칼산처럼 자존심을 세우면서 살 수 없을까?)   그는 머리를 돌려 머나먼 고향이 있는 동남쪽 하늘을 멀리멀리 하염없이 바라보면서 착잡한 생각에 잠기였다.    (고향의 부모형제들은 무사한지? 만주국에 들어온 성칠 형님과 진달래 사돈 새기는 어데 있을까?) 남산 하늘에서 훨훨 날아예는 새들을 보는 순간 기준은 새처럼 날개라도 돋혔으면 고향에 훨훨 날아가 부모형제들을 만나고 싶은 생각이 불붙듯 했다.   (성칠 형님을 만나면 조선독립군에 들어가는 게 옳지 않을까?)      8. 땅의 유혹     병완은 길닦이를 하면서도 막내아들과 셋째손자 생각에 늘 얼굴에 어두운 그늘이 져 있었다. 또 북으로 독립군을 따라 떠나간 맏아들 생각을 하면 가슴이 더욱 아팠다.     (그 놈이 무사한지? 배짱 있는 장한 놈이긴 하지.)    창준도 동생과 둘째아들 생각에 밤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집식구들은 기준과 상길이 가능하게 만주국으로 들어갔겠다고 짐작했다.    병완은 소낙비 오는 날이면 이놈들은 어데서 자고 있을까, 밥상을 마주 앉으면 이 놈들은 죽물이라도 얻어먹는지를 근심하군 했다.   길닦이공지에서 쉴 때 병완은 창준을 불러 소변보러 가는 척 하면서 수림 속에 들어갔다.    병완은 나무가지를 쳐들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귀속 말을 했다.    “창준아, 아무리 생각해 봐도 가을걷이나 해가지고 만주국으로 달아나야 될 것 같다. 한길수 성화에 어디 고향에서 살겠니?”    창준은 한마디 보탰다.    “그 놈은 한 하늘을 쓰고 살지 못할 철천지원숩구마.”    병완은 주위를 다시 살펴본 후 괴춤을 춰 입더니 뒷말을 이었다.    “그 놈은 일본 놈들을 등에 업고 우리 일가를 몽땅 죽이잔다. 이제 다리 몇 개에 기둥마다 나무벌레를 집어넣으면 다 된다. 개놈새끼들, 경찰국이구 다리구 몽땅 무너지는 꼴 보기 좋겠어. ”     창준은 한숨을 후- 내쉬었다.    “전번에 뒷산에 가보니 바위 돌 틈에 심은 메밀 이삭이 꼿꼿이 쳐든 게 몇 마대 날거 같지 않습더구마.”    병완은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었다.    “큰 일 났다. 문중 전을 꿔 쓴 걸 어떻게 물겠니? 가을이면 이제 빚꾼들이 와야 몰려들 텐데. 어찌겠느냐?”     병완과 창준은 한숨을 푸푸 내쉬며 두런두런 얘기하다가 수림 속에서 나왔다. 그들은 목수 일을 하면서도 한길수의 눈치가 보여 한 곳에 가서 일하지 않았다.     이때 한 무리 기병이 먼지를 새뽀얗게 날리면서 달려왔다. 모두들 또 한길수가 자위대를 끌고 오는가고 생각했다. 그런데 가까이에 온 것을 보니 자위대가 아니라 몽땅 일본군의 군복을 입은 조선 사람들로 된 군인들이었다.    일부 일군들은 희한해 일손을 멈추고 괭이자루를 짚고 멍해 서서 구경했다.   그때 일본군 군관 복을 입은 자가 나서 목을 빼들고 꽥꽥 고함쳤다.    “여보게들. 나를 알만합둥?”   병완과 창준이 쳐다보니 한길수 맏아들 한철주가 아니겠는가.   “퉤!"    "에이고, 그 애비에 그 아들놈이구나.”    인부들은 힐끔힐끔 곁눈질하면서 나직이 욕지거리를 했다.    그런 눈치도 모르고 한철주는 말 잔등 위에서 하얀 장갑을 낀 손으로 삿대질하면서 연설을 해댔다.     “여러분, 새 살길을 알려드리겠습꾸마. 여긴 일본 사람들까지 들어와 욱실거리기에 땅이 비좁아 살기 힘들어졌습구마. 그렇채임둥?”    길닦이를 하던 인부들은 삽질을 그만 두고 삽자루를 짚고 서서 귀 뻘쭉해 한철주의 입을 쳐다보았다.    사기 난 철주는 개 턱 쳐들고 고래고래 고함쳤다.    “일본 사람들을 뜰 필요 없습꾸마. 그들은 메이찌유신 후에 유럽의 선진적인 과학기술과 문화를 인입해 아주 강대한 군사강국으로 되였습니다. 강국을 떠서 먹을알이 있습니까? 그들은 우리 조선을 통 채로 먹어버렸습니다. 그러니 우린 여기 조선에서 살기 어려운 형편에서 만주국으로 가서 황무지를 일궈 밭을 만들고 사는 게 명지한 선택입니다.” 그 말에 병완은 속으로 그 놈 친일파 개다리 놈 새끼, 일본에 유학해 배운 게 저따위 개 소리 뿐인가 욕했다. 한철주의 고함소리는 그치지 않았다. “만주는 땅이 넓고 사람이 적어서 지나가던 나그네에게도 기장밥에 된장국을 대접합구마. 내 간도에 가봤는데 확실히 땅이 넓더구먼요. 우린 일본제국을 등에 업고 간도에 가서 농사를 짓고 둥지를 틀고 새끼를 치면서 사는 게 새 살길입니다. 일찍 본 세기 초에 우리 조선에서 종삼품 리범윤을 간도관찰사로 임명해 일진회를 영솔해 간도에 쳐들어가게 했습니다. 우리는 리범윤과 같은 선배님들의 뒤를 이어 일본제국이 간도로 진출한 기회에 간도라는 이 보배 땅으로 진출해 조선인 농장도 차리고 황무지를 개간하면서 살아야 합구마. 일본 집단농장에 가기 싫으면 개별적으로 간도에 가도 괜찮습구마. 일본 집체농장에서는 벼농사도 배워주고 일본 은행에서는 원세개 대가리가 박힌 만주국 돈도 꿔 줍니다. 일본군은 우리 조선 사람들을 2등공민으로 높이 생각하면서 잘 보호해 줄 것입니다. 우리 조선 청년들은 일본군에 들어가 일본제국의 대동아공동경영권을 수호하고 간도에 우리 두 번째 고향을 건설해야 합니다. 여러분, 어떻습둥?” 그러자 어떤 사람들은 옳다고 하였고 어떤 사람들은 그럴듯하나 불여우 같은 한길수를 봐도 어찌 그 아들놈의 말을 믿고 간도로 가겠는가고 했다. 그때 가마골의 정형만이란 인부가 나서서 물었다. “당신은 일본에 유학 갔다 왔다는 걸 아오. 그런데 지금 일본군에서 무슨 일을 하오?" "걸 물어 뭘 합둥?" 한철주는 입을 헤 벌리고 쳐다보는 정형만을 말위에서 내리보았다. "그걸 알아야 당신 말을 믿고 간도로 가지.” 그러자 철주는 말 잔등에서 내려 정형만의 어깨를 다독여주면서 지껄여댔다. “난 지금 간도로 진출하는 일본군 대대장이요. 날 따라 간도로 들어갈 생각이 있소?” 그 말에 형만은 머리를 절레절레 가로저으면서 뒤로 물러섰다. “아, 아니오.” 일부 살 길이 없는 인부들은 철주에게 다가가 일본농장에 가면 어떤가를 알아보고 가겠다고 나섰다. 그 바람에 수십 명 되는 인부들이 그 자리에서 농장에 가겠다고 나섰는데 철주는 그들이 집식구들을 만날 새도 주지 않고 강박으로 군복을 입혀 끌고 가버렸다. 아들놈의 꼬리가 보이지 않자 이번에는 한길수가 백마를 타고 자위대를 끌고 들이닥쳤다. 그는 병완과 창준을 곧추 찾아와서 외눈깔을 부라리면서 을러멨다. “병완이, 내 아들 말처럼 자네도 간도로 들어가게. 자네 일가가 내 고향을 떠나 간도에 가버리면 다신 당신을 다치지 않겠네.” (개자식, 이젠 내놓고 쫓는 판이구나. 흥!)      한길수는  톱질 하는 병완에게 다가와 흉악한 외눈깔로 쏘아보면서 채찍으로 통나무를 툭툭 치면서 선뜩선뜩한 말로 지껄였다.      “당신의 아들 성칠과 기준은 용서할 수 없네. 내 집에 불을 지르고 내 잔등을 괭이로 찍지 않았는가. 뼈다귀를 콩가루를 내도 원수를 다 못하겠어.”       병완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길수는 혼자 지껄이기 멋 적었던지 말 잔등에 오르더니 고래고래 고함쳤다. “그 놈들을 잡기만 해봐라. 대가리를 떼서 두만강에 처넣지 않는가!”   병완은 먼지를 새뽀얗게 일구면서 멀어져가는 한길수의 뒤에 대고 침을 퉤 뱉었다. “개 새끼들의 성화에 어디 살겠냐?” 그는 창준의 귀에 대고 말했다. “저놈들이 우리를 간도에 보낸 후 뒤를 밟아 성칠과 기준을 잡아 죽이려는구나. 유인수작이지.” 그 말에 창준은 머리를 끄덕이면서 “예. 지금 내색을 내지 말구 꾹 참깁소.”라고 말했다. 병완은 그저 긴 한숨을 후 길게 내쉬었다. 그는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고 창준의 귀에 대고 “다리나 무너지게 다 세워놓고 가을걷이를 해가지고 간도로 달아나자.” 하고 말했다. 그들 부자간은 이를 악물고 수모를 당하면서도 참으면서 고의적으로 나무벌레가 먹은 통나무로 다리기둥을 하나하나 세워놓았다. 혹시 나무벌레가 없는 나무에는 꼭꼭 끌로 구멍을 파고 나무벌레를 집어 걷어 넣고 나무구멍을 막아놓았다. 병완과는 달리 논어나 읽어온 최구장은 “중용지도”를 처세 좌우명으로 삼았다. 그는 자식들을 불러놓고 엄숙하게 말했다. “내 말을 명심해라. 너희들은 절대 남과 싸울 궁리를 하지 말라. 특별히 한길수나 일본 사람들과 주먹질 하지 말라. 주먹을 들이대면 주먹이 날아 들어오는 법이다. 폭력은 또 새로운 폭력을 낳는다는 걸 알아라. 우린 살기 힘들어도 꾹 참아야 이 고향에 살아남을 수 있느니라. 너무 강하면 꺾어지는 법이다. 병완 사돈어른이나 기준사돈이랑 봐라. 뜨개 소처럼 이 고향 우두머리 한길수나 일본 놈들을 뜨더니 고향에서 편안히 사는가. 버드나무가지는 휘어들어도 끊어지지 않는다. 허나 대살처럼 너무 내놓고 곧게만 뻗고 휘어들 줄을 모르면 부러지기 마련이다.” 최구장은 숨을 돌린 후 뒷말을 이었다. “사람이 사느라면 울퉁불퉁한 버드나무속에 대나무 같은 곧은 마음을 숨길 줄도 알아야 한다. 한길수나 일본 놈들이 고와서 머리를 숙이라는 게 아니야. 뜰 줄 아는 소는 말 한마디 없이 뜨고 무는 개는 짓지 않고 무느니라.” 경숙과 경욱은 아버지의 심원한 처세철학을 다 알아듣지는 못하고 그저 도리머리만 가로저었다. 을씨년스러운 늦가을이 다가왔다. 기운봉 기슭에 낙엽이 우스스 지고 다람쥐들도 겨울나이준비에 나무를 오르내리며 분주히 가댁질하며 돌아쳤다. 병완은 너럭바위가 누운 바위 돌밭에 심은 메밀을 거둬야 하겠는데 끼무라가 길닦이에 어찌나 내모는지 몸을 뺄 수 없었다. (총 도감? 개자식! 필마 옹을 시키면서 나를 얼려 네 놈의 강도욕심을 차려? 천만에! 대대로 살아온 고향에서 살지 못하게 한 놈이 누군데? 태 줄을 묻은 고향에서 간도 황야에 쫓아내는 놈이 누군데?) 속에서 용암이 부글거리듯이 분노가 부글부글 끌어 번졌다. 그러나 그는 이전과는 달리 우시장 경찰국 국장 사무실에 들어설 때는 아무 일도 없는 듯이 억지로 얼굴에 미소를 지어보였다. 대문 옆의 보초병들도 병완에게 군례를 척 붙이더니 안으로 들어가게 했다. 병완이 피뜩 경찰국 사무 청사 용마루를 바라보니 조금 휘어 든 감이 들었다. 그것은 목수 특유의 눈으로만 보아낼 수 있는 것이다. 병완이 들어서자 끼무라는 자리에서 일어나 마주 걸어 나왔다. “오, 범이 자기 흉을 하면 온다더니 총도감이 왔구먼.” 끼무라는 하얀 장갑을 낀 손을 내밀었다. 병완은 승냥이 족때기를 잡은 감을 느껴 끼무라의 손을 인차 놓았다. “끼무라 국장, 눈이 내리기전에 너럭바위돌밭에서 메밀을 거둬들여야겠소. 며칠만 말미를 주오.” “그래?” 끼무라 국장은 안경너머 병완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병완은 아주 태연자약하게 말했다. “가을걷이를 해야 하겠는데 한길수가 무섭소.” 끼무라는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천하장사 병완이가 한길수를 무섭다 하면 누가 곧이듣겠는가? 허허.” 병완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우리 막내아들 기준이가 봄에 산속에 들어가 황무지를 개간할 때 한길수가 총으로 쏘아 죽이려 한 일을 모르오? 그 애에게 무슨 죄 있다고 이러오? 그 애를 고향에서 살지도 못하고 바깥에서 헤매게 했단 말이오?” 끼무라는 병완의 말을 류강철의 통역을 듣고나서 뚜벅뚜벅 사무실안을 거닐면서 속궁리를 굴렸다. 그의 머리에서는 번개가 번쩍이고 우레가 쳤다. 사실 끼무라는 병완이네 일가를 잡아가두거나 몰살시키려면 손을 뒤집듯이 쉬웠다. 그러나 병완이네 일가를 미끼로 성칠, 나아가서 독립군의 꼬리를 밟아 독립군을 일망타진하려는 것이었다. 올 봄에 한길수가 개인보복을 하려고 끼무라 몰래 기준이네를 죽이려고 날뛰는 바람에 기준이가 조카를 데리고 달아났고 병완이네 일가를 놀래놓았다. 결과 성칠과 독립군은 두 해 되도록 조선반도 명천군내에 얼씬하지도 않았다. 이젠 저 우직한 병완을 미끼로 성칠의 포수대나 독립군을 명천에 유인해 끌어들여 잡아 죽일 수 없게 됐다. 밸이 난 것 같아서는 한 마리 개에 지나지 않는 한길수를 단칼에 죽여치우고 싶었다. (길수는 수단이 모자라. 저 병완도 이젠 메밀이나 거둬가지고 간도로 달아날 것 같아. 길수 손에 언제 죽을 지도 모르는데 눌러 있을 리 만무해. 저 놈은 그렇게 우둔하지 않으니까.) 끼무라는 거닐던 발걸음을 우뚝 멈추더니 병완에게 낯을 돌리면서 말했다. “그 일로 내 전번에 한길수의 귀 쌈을 얼마나 세게 쳤는지 몰라. 이번 가을걷이는 시름 놓고 하게나. 한길수가 다시 시키지도 않은 일을 하면 가만 놔두지 않겠소.” 이러루하게 눅잦혀놓고 뒤 말을 달았다. “지금도 늦지 않소. 난 자네를 자위대 한길수 버금자리에 앉히고 싶네. 내 손을 잡으면 대대로 고향에서 복을 누리면서 살 수 있지. 그러지 않으면 초상집 개처럼 이리저리 쫓기면서 개나 돼지처럼 살걸.” 그러나 병완은 “관심해줘 고맙네. 난 총을 차구 거들먹거릴 재목이 아니오. 땅에 곡식이나 심어먹고 살 사람이니 다신 그 말을 꺼내지도 마오.” 하고 무뚝뚝하게 거절해버렸다. 그 무자비한 말을 듣자 끼무라는 군도자루를 매만지며 독한 마음을 먹었다. (제 발로 찾아왔을 때 오늘 저 놈을 가둘까? 죽여 버릴까?) 그는 몸을 홱 돌렸다. 그러나 얼굴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떡 서있는 병완을 보는 순간 피뜩 뇌리를 치는 생각이 있었다. (간도로 가게 놔주자. 저 놈의 뒤를 밟아 간도에서 성칠과 독립군을 찾아내 일망타진해야 한다.) 마음을 정하자 끼무라는 군도자루를 스르르 놓으면서 팽팽하게 굳어진 얼굴근육을 느슨히 풀더니 나오지 않는 웃음을 지어보였다. “요로씨이(좋아)! 가을걷이 하게나. 총도감이야 인부들을 동원해 일을 시키고 감독하면 되는 거야.” 그 소리에 병완은 몸을 돌려 바깥으로 나가려고 했다. “잠간!” 끼무라는 병완을 불러 세웠다. “난 자네가 우리 경찰국 사무 청사를 짓고 길에 숱한 다리를 놓은걸 잊지 않겠네. 그런데 경찰국 사무 청사에 무슨 소리가 자꾸 나서 귀찮네.” 병완은 경찰국 천정을 쳐다보았다. 여기저기 비가 샌 검은 흔적이 있었다. “어데서 소리가 난다고 그러오?” 병완은 시치미를 뗐다. 그때 때마침 까드득 까드득 소리 났다. “저 소리네.” 끼무라가 천정과 병완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그러나 병완은 아주 태연자약한 표정을 지었다. “아마 쥐가 노는 것 같구먼.” “해결방법이 없을까?” 끼무라는 병완의 얼굴을 읽으면서 속심을 빼보려고 했다. 병완은 의연히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고양이를 기르오. 쥐를 쫓게.” 끼무라는 “쥐? 허허허.” 하고 냉소하더니 손사래를 쳤다. “잘 가게나.” 병완은 그 말에 속이 섬찍해났다. 마치 자기 속마음을 다 안듯이 작별인사를 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개자식! 네 놈을 무서워하는 것 같아? 경찰국이 쾅 무너져라! 깔려 썩어져라! 그 날이 멀지 않다!) 병완이 경찰국 사무청사를 나서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던 가메다는 끼무라 옆에 다가갔다. “저 놈 후환을 없애버립시다.” 류강철은 그 말에 섬찍해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끼무라 국장은 머리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놈, 그물을 널리 쳐서 큰 고기를 낚아야 해. 큰 고기는 바로 성칠과 항일독립군이야. 알만해?” “하이!” 가메다는 속으로는 내키지 않았지만 일단 차렷 자세로 군례만은 보기 좋게 척 붙였다. 이튿날부터 병완은 창준 등을 데리고 운주동 뒷산에 올라 너럭바위돌밭에 가서 메밀을 거둬들였다. 5헥타르나 되는 너럭바위돌밭에 재와 오줌을 섞어 돌 틈에 걷어 넣고 메밀을 심고 온 한해 정성 다해 가꿨지만 가을걷이를 하고나니 셋이 먹을 메밀도 거두지 못했다. 그리하여 병완은 메밀을 껍데기채로 가루를 내 먹기로 했다. “요걸로 열대엿 식구가 명년 보릿고개도 넘기지 못하겠구나.” 병완은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었다. 설상가상으로 빚 군들이 문이 떨어지게 찾아들었다. “이 집에서는 언제 빚을 갚소?” “사람이 염치 있소? 조상들의 산소를 가꿀 돈을 꾸고서도 갚을 염을 하지 않다니?” 빚군들은 빈손으로 돌아가면서 별 소리를 다 했다. 병완은 착잡한 생각에 잠겼다. “간도로 가야 할 것 같구나. 이렇게 숱한 식구가 그저 앉아 굶어 죽기를 기다릴 수야 없지 않겠는가?” 병완이 잠자리에 누우면서 중얼거리었다. 그러자 성희는 앵돌아지었다. “난 안 가. 고향 떠나 당신한테 시집와서 명천 산골까지 왔잖아. 그런데 조선을 떠나 만주국으로 가? 안 가. 갈려면 당신 혼자 가. 난 성군 오빠랑 명호조카랑 있는 고향 한산에 돌아갈 거야.” 병완은 돌아누워 성희를 마주 보며 말했다. “누가 고향을 떠나기 좋아 떠나려오? 일본 놈들의 성화에 먹을 게 없어 잠시 간도에 피해 가서 살자는 게지. 일본 놈들이 한평생 조선에 있겠소? 저 놈들이 물러가면 다시 고향에 돌아오자는 거요.” 그래도 성희는 잠자리에서 일어나 창문 밖을 멍하니 내다보면서 도리머리 질을 했다. “그래도 안 가! 조선을 떠나면 언제 돌아온다고 그래요? 영감도. 죽어도 여기 조선에서 살제이.” 병완은 더 할 말이 없었다. 이튿날 병완이가 바깥으로 나가니 거위 털 같은 흰 눈이 풀풀 흩날려 내렸다. 그런데 성남집 기준이네 집 쪽으로부터 석철 영감이 이쪽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저 영감이 간도로 갔다던 게 언제 왔는가? 또 빚 재촉을 하러 오는가?) 석철 영감은 병완의 작은집 육촌동생이었다. 병완의 할아버지 김수중은 석철 영감의 할아버지 김득중의 큰 형님이었다. 팔촌이 한 구들이라고 아주 가까운 집안이었다. “형님, 오랜만이오.” 석철이 허리를 굽히며 인사하자 병완도 반갑게 맞았다. “오, 그래. 어서 집으로 들어가자.” 창준이도 소리를 듣고 나와 반갑게 인사했다. “칠촌 숙 그새 무사했소?” “양.” 위방에 올라가 자리를 정하고 앉자 석철은 정주간을 내려다보더니 미닫이문을 닫고 병완에게 다가앉으면서 귀속 말을 했다. “형님, 간도에 간 기준에게서 기별이 왔소.” “양? 그래 그 놈들이 어데 있다오.” 병완은 저도 몰래 목소리를 높였다. 석철은 입에 식지를 대며 “쉬-” 하더니 뒷말을 이었다. “빨리 형님네를 보고 간도로 들어오라고 합데. 진수해라는 곳과 한 20리 떨어진 소서구란 곳이오.” 병완은 석철에게 다가앉으면서 물었다. “그래 확실히 땅이 넓어 배불리 먹고 살만 하다오?” 석철은 허리를 뒤로 쭉 폈다. “양. 기준이 날 농사를 했는데 중국 주인에게 소작료를 주고도 상길과 둘이 먹고 서너 마대 좁쌀이 남을게라오.” “그래?” 창준은 “기준과 상길이가 무사하니 시름 놨소.” 하고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정지에서 성희도 그 말을 듣다가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왔다. “생원이 그게 정말인 거요? 그 애들이 잘 있데이?” “양. 움막을 짓고 아주 잘 있소. 우리 동생도 아래 동네서 잘 있습데. 우리도 올 겨울에 간도로 들어갈 예산이오.” 병완은 머리를 끄덕였다. 그러나 성희는 간도로 간다는 말에만은 상을 찡그리었다. “배고픈 고생은 할 수 있어도 고향을 떠나 낯선 만주에 가서 어떻게 살아?” 병완은 푸념 질을 하는 성희를 돌아보았다. “누가 고향을 떠나고 싶어 떠나겠소? 일본 놈들과 한길수 성화에 고향에서 배기지 못해 가는 거지.” 석철 영감도 맞장구를 쳤다. “누가 고향을 떠나고 싶겠소? 우리 간도에 가서 농사를 잘 지어 가지고 언젠가 조국에서 일본 놈들이 그림자도 보이지 않을 때 고향으로 다시 돌아오기요.” 창준은 머리를 숙이고 듣다가 “그게 어디 쉽겠소?” 하고 말했다. “그래 고향에서 굶어 죽겠느냐?” 병완의 말에 석철 영감이 뭔가 떠올랐는지 숟가락질을 멈췄다. “아차 잊을번 했소. 기준이 회령 맞은 켠까지 마중 나오겠답데. 두만강 변 버드나무숲속에 모닥불을 피워놓은 걸 보면 건너오라고 합데. 혹시 만주국 경찰에게 잡힐까봐 모닥불에서 강물을 따라 아래쪽으로 한 1리 떨어진 곳으로 두만강을 건너오라고 했소.” “알았소. 막내 놈이 아주 세밀하게 타산했구나.” 병완은 석철에게 아침을 대접시켜 보낸 후 집식구들을 불렀다. 상훈이 아래 성남집에 가서 삼촌댁 최사련과 큰 동생 상우를 불러왔다. 사련은 남편과 시조카가 무사하다니 근심 어렸던 얼굴이 조금 풀렸다. 상우는 아버지가 간도에서 무사히 농사를 짓고 있다는 말을 듣고 “할아버지, 우리도 간도로 가깁소. 뭘 보고 여기 있겠습둥?” 하고 말했다. 창준도 머리를 끄덕였다. “동생과 둘째아들을 간도에 두고 여기 편안히 눌러 앉아있을 수 없습구마. 석철이 말하지 않았습둥? 우리 들어가면 기준이 두만강 변 회령까지 마중 나오겠다지 않았습니까?” 병완은 집시구들을 둘러보면서 말했다. “이렇게 하자. 나와 창준이 먼저 간도에 들어가 볼 테니 다른 식구들은 기다리고 있다가 따라 들어오라.” 그러자 성희는 왕왕 대성통곡 쳤다. “아이고, 그예 정말 가? 아이고, 본가집 오라버님과 조카들과 생이별하라고. 조상들의 산소랑 우짤락꼬?” 그 넉두리에 병완도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었다. “조상들과 아버지 산소가 대사긴 대사요. 다 모시고 간도로 들어가는 수도 없고. 그러나 우린 잠시 일본 놈들을 피해 간도로 가는 게지. 이제 농사를 지어 돈이랑 많이 벌면 조상들의 산소가 계시는 고향에 돌아와야 하오. 우리 탯줄을 묻은 고향을 꼭 돌아와야 한단 말이오.” 성희는 계속 울면서 말렸다. “사람의 일을 어떻게 알아요? 이제 간도로 들어가면 명천에 돌아올 수 있겠는지 말겠는지? 간도 귀신이 되겠는지 누가 알아요? 가지 말자요. 예?” “작작 떠드오. 길을 떠나는 사람을 놓구 무슨 방정맞은 소리요?” 병완이가 목에 지렁이 같은 피 줄을 세우면서 고래고래 고함쳤다. “누구한테도 우리가 간도로 들어간 말은 하지 마오.” 병완과 창준이가 먼저 간도로 떠나가고 기별을 보내면 나머지 온 집 식구들이 간도로 들어오기로 했다. 바깥에서는 눈보라가 휘몰아쳐 창호지를 뒤흔들면서 무서운 비명 소리를 냈다. 간도로 들어갈 막연한 앞길에 도사리고 있는 무시무시한 공포가 사처로 몰려왔다.  
41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20) 댓글:  조회:2103  추천:2  2015-10-14
          김장혁 작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    제9장 핍박에 의해 간도로                     2. 기습          봄바람에 무섭게 술렁대는 갈대숲에 누렁이가 어슬렁어슬렁 다가왔다. 그 누렁이는 한길수가 성칠의 검둥이를 대처하려고 일본 헌병들에게서 산 사냥개였다. 누렁이는 코를 풀밭에 대고 씩씩 냄새를 맡아보더니 기준이 벗어놓은 피 묻은 바지를 물고 달아나버렸다.     이튿날 아침 상길은 집 구새 목에 와서 오줌을 누면서 갈대밭을 내다보았다. 그는 흘끔흘끔  어제 저녁에 삼촌과 만났던 자리를 여겨보았다.     (아니, 저게 하얀 게 뭐야? 삼촌 옷이잖니?)     상길은 오줌을 누다 말고 새밭 속으로 달려 들어갔다. 새밭 속에 널려있는 허연 옷을 주어들고 보았다. 피 묻은 것을 보면 삼촌이 벗어놓은 것 같은 홑저고리였다.     (삼촌댁을 줘야지.) 상길은 삼촌의 저고리를 들고 불이 나게 아래 집으로 뛰어갔다.     “삼촌댁! 삼촌댁!”     상길이 문을 열고 들어가자 사련은 깜짝 놀랐다.      “건 뭐냐?”     “삼촌이 어제 밤에 벗어두고 간 저고리입구마.”    상우와 지새금도 부랴부랴 고방에서 나왔다. 그들은 아버지 저고리를 받아들고 피 자국을 보면서 도리머리 질 했다.    "형님!’'    상순은 달려와 하고 상길의 손을 잡았다. 상순도 이젠 여섯 살이나 되여 제법 아홉 살인 상길과 어깨동무 할만 했다.     모두들 어제 밤에 웃새 집 둘째아주머니와 상길에게서 들어 사연을 알았다. 하지만 정작 피 묻은 옷을 보고서는 마음이 아팠다. 그들은 모두 대책을 대느라고 의논이 분분했다.     그런데 누가 알았으랴, 벽에도 귀가 있다는 것을.      이때 한길수는 자위대 놈들을 끌고 운주동 남산에 올라 망원경으로 운주동 동쪽어구에 있는 최구장네 집으로부터 서쪽 끝에 있는 웃새 집 창준과 성남집 기준이네 집을 살피고 있지 않았겠는가.     사실 그들은 어제 밤에 누렁이가 피 묻은 바지를 물어온 후 어제 밤부터 운주동에 매복 권을 치고 웃새 집과 성남 집을 면밀히 감시하고 있었다. 그런데 반나절이나 지켜도 기준은 그림자도 얼씬하지 않았다. 다만 상길이가 허연 저고리를 들고 아래쪽의 성남 집에 들어가고 기준이네 식구들이 들락날락하고 웃새 집의 창준이 부부가 아래 집으로 내려가 들어가는 것 밖에 보이지 않았다.     한길수는 병완을 제거하기 전에 먼저 기준을 없애버리려고 독한 마음을 먹었던 것이다.     (기준을 없애버려 병완의 한팔을 잘라버려야지. 그럼 병완인들 이 어른을 어쩌겠어? ㅋㅋ"     그런데 온종일 숱한 군사를 운주동 남산과 북산에 매복시켰는데 헛물만 켠 것 같았다. 멀쩡히 수림 속에서 마른 풀을 깔고 일어났다 앉았다 하면서 망원경을 들고 지루하게 살펴도 억대우 같은 기준의 그림자도 얼씬하지 않는 것이었다.     영팔은 심드렁해져 도리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한대장님, 밤에나 오겠는지 낮에 올것 같지 않습니다.”      “그런 맥빠진 소릴 작작 해라. 기준은 배 고파 대낮에 내려올 수도 있어.”    응삼은 실눈을 해가지고 머리를 끄덕이었다.    “그럴 수도 있습니다. 이상한 건 그 놈이 왜 바지만 바꿔입고 저고리는…”    “흥!”   한길수가 코웃음쳤다.    “내 망원경으로 보니 기준의 둘째조카가 아침에 집 뒤 새밭에서 허연 옷 같은 걸 들고 아래 성남 집으로 들어갔어. 분명 옷을 갈아 입었어.”    응삼과 영팔은 한길수의 고견에 머리를 조아렸다.    “우리 한 대장님은 타고난 경찰이라니깐.”    “그렇고말고.”    한길수는 별로 고명한 것처럼 턱을 쳐들고 산 아래를 망원경으로 살피다가 망원경을 내리우면서 말했다.    “해 지는군. 그 놈이 밥 얻어먹으러 내려올 걸세. 운주동 서쪽과 북쪽의 새밭이구 갈밭이구 버드나무숲이구 몽땅 그물을 쳐놓고 큰 고기가 뛰어들기를 기다리자.”     운주동을 둘러싼 새밭과 갈대밭에 어둠의 장막이 무시무시하게 드리웠다. 공포가 갈대 잎 새에 숨어 싸늘한 바람에 죽음의 노래를 부른다.    한길수는 졸개들을 끌고 영월동 토성안 집에 가서 저녁을 대충 먹고 남쪽에 있는 운주동에로 덮쳐가 갈밭과 새밭에 매복해 있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기준은 초저녁에 서산에서 내려와 운주하 강변의 버드나무숲을 헤가르면서 스적스적 마을 제일 서쪽 끝에 있는 웃새집 뒤 갈대숲속으로 접근해갔다.    그는 혹시나 하여 몇 발자국 걷다가는 멈춰 서서 주위의 동정을 살피였다. 마른 갈대숲이 밤 바람에 설레는 소리 밖에 들리지 않았다. 그는 몇 발자국 걷다가도 자기 발 밑에서 마른 새가 밟히는 소리에도 신경을 도사리였다.     병완은 전날 밤에 상길을 만났던 자리에서 갈대숲에 허리를 구부정하고 상길을 기다렸다.    이때 고방 문이 열리면서 상길이 뭔가 들고 나와 두리번거리더니 새밭을 헤집고 갈대밭으로 다가왔다.    기준이 마중 나갔다.     “상길이 왔니?”    그 때다.    “이 놈! 어디로 도망쳐! 저 울뚝이를 붙잡아라!”    청청백일에 마른 우레 소리처럼 난데없는 한길수가 웃새집 마당에 뛰쳐나오며 고함쳤다.    “허허허, 명년 오늘은 울뚝이 제삿날이야.”    땅!   한길수는 전번에 기준을 놓친 교훈도 있는지라 아예 권총을 쏴댔다.   총알이 죽음의 노래를 부르면서 기준의 귀전을 스쳤다.    기준은 황급히 상길의 손에서 밥보자기를 빼앗아들고 어정쩡해 서있는 상길의 손목을 덥석 잡고 갈대밭 속으로 냅다 뛰었다.    그런데 갈대숲을 벗어나 버드나무숲속으로 뛰어 들어 갈 때다.   “섯!”   영팔이 장총을 꼬나들고 앞을 막아섰다.   “에끼, 이놈!”   기준은 발길을 날려 영팔의 아래 배를 걷어찼다.    영팔이 급히 피해 서느라고 하였다. 허나 기준의 날렵한 발길에 채워 쓰러졌다. 그 틈을 타서 기준은 버드나무숲속에서 이리저리 몸을 숨기면서 도망쳤다.    사실 기준이가 서산에서 내려 버드나무숲과 갈대밭을 헤집고 집에 다가갈 때는 조심조심 걸었기에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상길을 끌고 허둥지둥 도망칠 때는 50미터 안에서는 그들의 닫는 발자국소리와 숨소리마저 마구 들릴 지경이었다. 하여 영팔에게 발각됐던 것이다.    기준이네가 버드나무 숲을 따라 서쪽으로 헐레벌떡 도망쳤다. 뒤에서는 왝왝 고함치는 소리가 여기저기에서 들리었다. 한참 후에는 그 소리마저 점점 멀어져가고 버드나무숲을 스치는 봄바람의 처량한 소리만이 들릴 뿐이었다.                              3. 눈물 젖은 고향    기준은 상길을 데리고 칠흑 같은 어둠을 타  마른 갈대숲을 헤치고 버드나무숲 속으로 스며들었다. 어둠과 버드나무숲을 헤집고 천방지축 도망쳤다. 어둠과 공포에 잠긴 운주동에서 멀리, 멀리 멀어져갔다.    기운봉 기슭에 오른 기준은 헐떡거리며 멈춰 서서 상길을 내려다보았다.    “상길아, 좀 쉬어가자.”    상길도 헐레벌떡거리며 주저앉았다.    기준은 밥보자기를 내려놓으면서 상길에게 권했다.    “놈들이 쫓아올 거 같잖다. 밥을 먹고 보자.”    기준은 밥을 먹으면서 기운봉 기슭의 고향 마을과 고향 마을을 감돌아 흐르는 운주하를 내려다 보면서 한참 착잡한 생각에 잠겼다.    (이젠 진정 내 고향에서 살지 못하게 됐단 말인가? 우리 집 안이 대대로 살아온 이 고향 땅에 내 발을 붙이고 살 곳이 없단 말인가?)    기준은 정작 핍박에 의해 탯줄을 묻은 고향을 떠나게 되니 씁쓸하기만 했다. 사랑하는 부모형제, 처자들을 두고 원한을 품고 고향을 떠나는 그의 심정인들 오죽하랴? 진짜 칼로 오장륙부를 한점, 한점 베는 아픔에 쓰리기만 했다.     병완은 이를 악물었다.    (한길수 대가리만 도끼로 팍 찍어 죽이면 계속 고향에서 살수 있지 않을까?)    그의 눈 앞에는 박바가지 같은 번대머리에 음흉한 우멍눈이 피뜩 떠올랐다.      그러나 그는 인차 도리머리질 했다.     (한길수를 죽이긴 쉽지비. 허나 그 놈이 한애비처럼 등에 업은 일본 놈들이 가만 놔두겠는가? 한길수를 죽이면 또 한길수가 아닌 영팔과 응삼, 수길이 나서서 우리를 못 살게 굴 거야. 그렇다면 정말 고향을 떠나 만주로 가야 하는가? 아, 아니야, 그래도 어떻게 하나 내 고향에서 살아야 한다. 만주에도 일본 놈들이 벌레처럼 욱실거린다고 하지 않는가? 만주가 땅이 넓다고 해도 그 곳도 조만간에는 우리 고향처럼 일본 놈들의 세상으로 될 거야. 우리 가난한 조선 사람이 살 곳은 없을 거야.)     기준은 산기슭으로 굽이굽이 흐르는 허연 운주하 강물을 굽어보면서 쓸쓸한 생각이 들었다.      (우리에게 무슨 죄가 있다고 대대로 살아온 고향에서도 살지 못하게 하는가? 김려생 할아버지가 명천에 입북해서부터 내대까지 15대 채 거의 400년이나 대대로 살아온 내 고향이 아닌가? 이런 내 정다운 고향을 떠나야만 한단 말인가?)     여기까지 생각하자 그는 쓸쓸한 나머지 상길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속으로 흐느껴 울었다.     뒤이어 그는 밥을 다 먹자 밥보자기를 싸서 상길의 앞에 내밀었다.     “상길아, 집에 데려다 줄게. 넌 애니까 그놈들이 어쩌지 않을 거야. 네가 무슨 죄가 있다고 삼촌과 함께 쫓겨 다니겠냐? 고향 아버지하구 엄마 있는데 남아서 살아라.”     그런데 상길은 도리머리 질 했다.     “삼촌, 난 삼촌을 따라 가겠습구마. 그 놈들이 날 놔두지 않을 거요.”     상길은 삼촌의 품에 머리를 파묻었다.     기준은 상길을 꼭 껴안아주었다.     “그래, 그렇구나. 야수 놈들이 애들이라고 놔두겠느냐?"     기준은 상길을 품에 안고 얼굴을 쓰다듬어주었다.     “괜히 너도 고생시키는구나.”     “아닙구마. 난 죽어도 삼촌을 따라다니겠습구마.”     기준은 상길이 가긍해 품에 꽉 껴안아주었다.     “그래,  같이 가자. 내가 널 꼭 지킬 거야.”     기준은  어디로 갔으면 좋을지 몰라 망설이며 주춤 멈춰 섰다.    (불붙이에 있는 큰 사위 경인한테 가볼까? 그러지 않으면 신설동에 있는 큰 집 병권 큰아버지네 집에 갈까?)     그러나 놈들이 형님네 웃새집을 감시했을 때처럼 미리 쳐놓은 그물에 걸려 들까봐 근심됐다.     “그래도 큰사위네 집으로 가자. 큰사위는 검술이 뛰어난데다가 용감하지 않는가?”     기준은 퍽 서글펐다.     (왜 수종 증조부나 승중 조부는 맏이 밖에 몰랐을까? 이씨 왕조 궁중 어의였던 수종 증조부는 승중조부와 득중 작은 조부 가운데서 큰아드님 되는 우리 승중조부께 집안의 의서를 물려주셨고. 우리 승중 조부는 병권 큰아버지와 우리 아버지 가운데서 큰아드님 되는 병권큰아버지께 의서를 물려주시지 않았던가. 그 바람에 큰집 관준 형님도 의사요, 큰집 맏손자 형내도 의학공부를 시키고 있지 않는가? 참 공평하지 못한 일이 많고도 많아. 그래두 우리 아버지는 공정한분이야. 자기 목수재간을 형님과 내게 고루고루 배워주었지.) 여기까지 생각하자 서당 글이나 읽은 선비들이 모인 큰아버지네 집으로 가기보다 무인다운 큰사위네 집으로 가는 게 낫을 것 같았다. (그래 목숨이 왔다 갔다 할 땐 내 사위한테 가는 게 옳지. 괜히 큰집가문까지 연루시킬 필요 없다.)    생각이 잡히자 기준은 상길의 손목을 잡고 “가자, 불붙이에 있는 큰 누나네 집으로 가자.” 하고 말했다.     “알았습니다.”    상길은 삼촌이 가자는 데는 무조건 어디라도 갈 잡도리였다.   기준은 어린 상길의 손목을 잡고 어둠 속에서 가시덤불을 헤치면서 뒷산을 넘어 영월동 서북쪽 산을 지나 불붙이로 향했다.       정든 고향을 떠나 어둠과 허연 눈을 밟으면서 정처없이 떠나가는 기준과 상길의 발 밑에서 빠드득빠드득 망국노의 설음이 목멘 비명소리로 울렸다.     밤중에야 불붙이 뒷산에 이른 그들은 숨을 죽이고 산기슭에 자리 잡은 사위 최경인의 오두막 같은 집을 내려다보았다.    상길은 나무숲 속에서 봄바람에 와스스 소리 나도 두려워 삼촌의 손을 더욱 꼭 그러쥐면서 두리번두리번 나무숲 속을 살피였다.    기준은 아무런 인기척도 없음을 확인하자 상길의 귀에 대고 뭐라고 귀속 말을 했다. 그리하여 상길은 기준을 따라 내려가다가 나무숲속 바위돌 틈에 숨어 숨을 죽이고 납작 엎드려 있었다.    기준은 허리띠를 질끈 조여 매고 슬금슬금 집 쪽으로 내려가다가도 주춤 멈춰서 한참씩이나 주위의 동정을 살피곤 했다. 그렇게 몇 번 해서야 겨우 집 뒤울안에 다가갔다. 그는 바자굽을 살금살금 에돌아 집 동쪽으로 돌아가 돼지우리에 다가가 벽에 기대서서 집 안 동정과 앞마당을 살피였다.    앞마당은 쥐 죽은 듯이 고요했다. 이따금씩 집안에서 기침소리가 들릴 뿐이였다. 초저녁이여서 아직 집식구들이 잠들지 않은 것 같았다.    그는 돼지우리 벽에 붙어서 살피다가 집 동쪽 벽에 슬쩍 건너갔다. 그는 벽에 붙어 서서 집 주위를 두리번거리면 동정을 살폈다. 파리 한 마리 날아오는 소리도 없었다. 그런데 머리가 벽에 걸어놓은 무엇에 닿는 감이 들었다. 머리를 들어보니 벽에 낫이 몇 자루 걸려있었다.    (옳지. 낫이라도 있으면 좀 좋아.)    낫을 벗겨들자 마음이 좀 든든해졌다. 맨 주먹으로라도 영팔 같은 놈은 둬 놈 쳐 눕힐 만했지만 낫까지 들면 총칼도 무섭지 않을 것 같았던 것이다.    기준은 앞마당으로는 가지 못하고 동쪽 벽에 붙어 뒤울안으로 들어가 뒷문가로 슬금슬금 다가갔다.    그는 입에 손을 나팔처럼 해달고 목구멍으로 기어드는 소리로 불렀다.    “사위.”    “사위~”    안에서 뭐라는 말소리가 들리더니 뒤 문이 벌컥 열렸다.    “아니!”    “쉿-”    “어서 들어 옵소.”    경인은 놀라 주춤 하다가 안으로 가시아버지를 모셨다.    어금도 잠자리에서 일어나는지 바스락 바스락 소리 들렸다.    “여보, 등잔불을 밝히오. 가시아버님께서 오셨소.”    “예? 아버집둥?”    어금이 놀라면서 일어나 조왕간 쪽으로 다가갔다.    “불 켜지 말라. 난 지금 상길과 함께 한길수 놈에게 쫓기고 있다. 내일 먹을거나 싸 달라.”    “예.”    어금은 인차 아버지가 준 밥그릇에 묵은 밥을 퍼 담았다. 그새 기준은 경인에게 요 며칠 새 있은 일을 대충 나직이 얘기해주었다.    이때 어금이가 어둠속에서 흑흑 흐느끼며 밥보자기를 아버지 앞에 내밀었다.    “아버지, 새 밥을 해 드려야겠는데 묵은 밥입구마. 아이고, 불쌍한 내 아버지, 무슨 죄가 있다고 그 놈들이 이렇게 쫓소? 아이고,  아버지.”    “딱 그쳐. 누가 듣겠다.”    기준은 밥보자기를 들고 나가려고 했다.    그때 경인이가 말했다.     “가시아버님, 어떻게 바깥에서 쉬겠습둥?”     “일없네.”     “좀 기다립소.”    경인은 위방에 올라갔다. 농궤를 뒤지는 것 같더니 내려와 기준의 손에 동전잎을 한줌 쥐어주었다.    “가지고 갑소.”    “고맙소.”    “내일부턴 우리가 밥을 나르겠습니다. 위험한데 오지 않아도 됩구마.”    기준은 사양했다.   “사위네를 연루시키면 어쩌오?”   “괜찮습구마. 발각되면 그놈들과 결판낼 판이지비.”   경인은 고방에 들어가 검을 벗겨들고 먼저 뒷문으로 나가 바깥동정을 살폈다. 그때 어금은 자기가 덮었던 이불을 꿍꿍 묶어 아버지에게 건네주었다.    기준은 받지 않으려다가 안고 나왔다.    경인은 한손에 검을 들고 한손으로 이불을 둘러메고 가시아버지를 모시고 상길이가 있는 데까지 왔다.    상길은 그때까지 숨을 죽이고 엎드려 있다가 기준이랑 다가가자 겨우 일어났다.    “됐네. 돌아가게나. 오래 지체하지 말게.”    “아버님, 이 검을 가지고 가시겠습둥?”   기준은 낫을 쳐들어 흔들어 보이었다.   “이게면 됐네. 낮에 산속에서 들고 다니기도 편하네.”    “천만 조심 합소.”   경인은 내일 산속에서 만날 장소와 암호를 귀속 말로 말씀드렸다.    기준은 딸과 외손자들을 눈물 젖은고향에 두고 정처없이 떠나가야 할 생각을 하니 눈 앞이 칠칠흑야처럼 까마아득해났다. 순간 그는 콧마루가 시큼해나 인차 딸을 외면하면서 휙 돌아섰다...     봄바람이 수림을 사납게 스치면서 쓸쓸한 귀신들을 안아다 팽개친다. 유령이 골짜기를 메우며 무섭게 비명을 질러대 무시무시하기만 했다.      4. 풍찬노숙    이튿날 초저녁에 경인은 밥보자기를 싸들고 검을 거머쥐고 가만히 뒷산으로 올랐다.   그는 한참 오르다가도 걸음을 주춤 멈추고 사위를 둘러보았다. 그는 뒤에 꼬리 없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약속지점인 불붙이 뒷산 수림 속 절벽 부근에 다가갔다.    뻐꾹뻐꾹    경인은 두 손을 입에 모아대고 뻐구기 울음소리를 내었다. 암호였다.    어둠 속에서 기준이 나타났다.   경인은 밥보자기를 내놓은 후 “어제 밤에 추워서 어떻게 쉬셨습둥?” 하고 문안을 올렸다.    “괜찮네.”   기준은 너럭바위 우에 덜렁 들어앉으면서 물었다.   “마을 형편은 어떻소?”   “낮에 영팔이 자위대 놈들을 끌고 와서 가시아버님을 보지 못했는가고 따집더구마.”   “그래?”    순간 기준은 사위를 둘러보았다.    “따라온 꼬리는 보이지 않습더구마. 그런데 마을에다 아버님과 저 작은 처남을 고발하라는 우시장자위대 포고를 숱해 붙여놓고 갔습구마.”    기준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이렇게 쫓겨 다니면서 사는 게 장구지책은 아닌데.”   한참 후 기준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고향을 떠나야 할 거 같네. 한길수는 나를 딱 잡아 죽이자고 잡도리 했네.”   “가시아버님, 쉬파리 무서워 장을 담그지 못하겠습둥? 고향에서 어떻게 하나 뻗치면서 우리 함께 살깁소.”   기준은 어둠 속에서 머리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형님네를 연루시킨 것만 해도 죄송한데. 자네나 큰아버지 네까지 연루시킬 순 없네.”   “연루는 무슨?”   “이미 마음을 정했으니 아버님과 형님한테 알리게나.”   “어디로 가신다고 그러십둥?”   “될 수만 있으면 한동안 먼 곳에 피해 눈치를 보다가 고향에 돌아올 생각이오. 정 안되면  만주에 가보겠소. 땅이 많아서 먹고 살기 좋다는데. 한해 후에 살기 좋은데 있으면 인편에 기별을 보내겠소.”    경인은 긴 한숨을 후- 내쉬었다.   “밤도 깊었으니까 어서 집으로 돌아가오. 괜히 어금을 근심시켰소. 영팔의 의심을 받을 수도 있소.”   경인은 돌아가기 전에 넙적 엎드려 절을 올렸다.   “어떻게 하든 무사히 다녀가십시오.”   기준은 절을 받고 가라고 손을 저었다.   경인은 상길의 머리를 매만지고 나서 느릿느릿 기준과 상길의 곁을 떠났다.    한마장거리를 갔을까 말까 할 때 경인은 검을 쥐고 되돌아 왔다. 차마 정처없이 떠나가는 가시아버지를 보내기는 마음에 걸렸다.    “가시아버님, 어디로 가시든 모셔 드리겠습니다.”    기준은 큰사위 어깨를 다독이면서 말했다.    “고맙네. 돌아가게나. 난 생사가 기약 없네. 더는 사위나 일가친척 누구든지 연루시키고 싶지 않네. 어서 돌아가 처자를 잘 지키게나.” 말을 마치자 기준은 경인의 뒤 잔등을 떠밀었다. 경인은 또 꿇어 엎드리더니 큰절을 올리었다.     그의 온몸이 슬픔에 부르르 떨었다. 사위도 반자식이 아닌가. 부모형제, 자식들을 두고 고향을 떠나야 하는 그의 마음인들 오죽하랴.    그래도 기준은 겉으로 그런 절망의 내색을 드러내지 않고 그저 시큼해나는 코마루를 벌름거릴뿐이었다.    “꼭 몸조심 하십시오.”     경인은 할 수 없이 무거운 발걸음으로 수림 속으로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물러갔다.     소나무들도 쓸쓸한 이별의 밤 바람에 몸부림치며 휴~휴~ 구슬프게 아우성쳤다.     기준은 큰딸이 준 이불 짐을 메고 낫을 든 채 앞에서 어둠과 가시덤불을 헤치면서 걸었다. 그 뒤에 밥보자기를 든 상길이가 겁이 나서 오돌오돌 떨면서 뒤따랐다.    고향을 잃고 어둠과 마른 풀잎을 밟으면서 정처 없이 떠나가는 나그네 발자국마다에는 낯선 고장으로 가는 아픔이 역력히 찍혀 있었다. 아니, 부모형제를 고향에 두고 떠나가는 이별의 피눈물이 고여 있었다. 그들의 발자국마다에는 일제의 식민지통치하에 망국노로 된 섧음이 슬프게 울고 있었고 한길수 같은 매국노들에 대한 원한이 몸서리 치고 있었다.    봄바람에 휴~휴~ 슬픈 노래를 부르는 수림 속에서 그들이 힘겹게 터벅터벅 걷는 고향의 산등성이도 발밑에서 굽이굽이 멀어져가면서 흐느껴 울고 있었다. 운주하도 봄의 희망을 물거품으로 만들면서 소용돌이치며 흘러가며 흐느끼고 있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그들은 한시 급히 한길수 개다리가 살판 치는 이 한 많은 고향을 떠나야만 했다. 고향이 멀어갈수록 섧음과 공포가 짙어갔다.      길주 길주 불 길주야    명천 명천 불 명천아    말해다오 말해다오    무슨 죄가 있다고    고향을 떠나야만 한다오?       기준이 숙질간은 차디찬 밤에 쓸쓸히 헤매면서 걸어 고향 명천을 한 20여리 멀리 떨어진 곳에까지 간 것 같았다. 기준이 혼자면 온밤 산길을 걸어도 괜찮았겠지만 아홉 살 밖에 안 되는 상길이 더 걸을 수 없었다.    기준은 아직도 여기저기 잔설이 깔려있는 산 중턱 남쪽에 바람이 잦은 너럭바위 우에 앉아 여기저기 살피였다.   (오늘 밤은 어데서 자야 하는가?)   발 밑에 우묵한 웅덩이가 있었다.   “얘, 상길아, 오늘 밤은 여기서 자자꾸나.”   “예. 알았습구마.”   상길은 밥그릇을 내려놓고 너럭바위에 물앉아 집신감발한 발이 아픈지 주물렀다.   그새 기준은 이불을 너럭바위 우에 벗어놓고 웅덩이에 들어가서 마른 나무 잎을 더듬어보았다. 웅덩이밑굽에 물도 고이지 않았다. 마른 나무 잎을 여기저기에서 긁어다가 펴니 좀 축축하긴 해도 대충 잘만할 것 같았다.   “상길아, 오라. 여기서 하루 밤 자자.”   “예.”    기준은 너럭바위 위에서 이불을 들어다가 마른 나무잎 위에 펴고 밥보자기를 웅덩이 안에 들어다놓은 후 상길을 안고 이불 안에 드러누웠다. 기준은 오른손에 낫을 쥔 채 들어누웠다. 그는 찬 바람이 스치는 별이 총총한 밤하늘을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눈을 스르르 감았다. 추위에 바르르 떠는 별을 바라보는 순간 고향을 떠나 풍찬노숙 하는 나그네의 처지가 서글프고 쓸쓸하기 그지없었다.    이윽고 상길은 곤한 나머지 코를 골며 잠들어버렸다. 기준은 어린 조카가 불쌍해 이불깃을 꽁꽁 여며주고나서 긴 한숨을 후 내쉬었다. 그는 불쌍한 조카와 고향의 쓸쓸한 쪼각달을 한품에 안고 새우잠을 잤다.    이튿날 새벽 동녘이 희붐히 밝아왔다. 차디찬 하늘의 구름 속을 헤가르면서 아침 해가 불끈 솟아올랐다. 피로 물든 것 같은 뻘건 아침 해는 산과 들을 쓸쓸히 매만져주었다.    기준은 피곤 기에 벌겋게 충혈 된 눈을 왼손으로 비비더니 눈을 떴다. 그는 주위를 두리번두리번 살피였다. 옆에서 상길은 곤하게 자고 있고 밥그릇도 놓인 대로 있었다. 잔설이 여기저기 남은 나무숲속 저쪽에서 다람쥐 한마리가 먹이를 구하기에 급급해 뛰어다니고 있었다.    기준은 상길을 깨울세라 살그머니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 이게 뭐냐?)   온밤 수림 속을 걸었는데 고향의 기운봉 기슭으로 되돌아온 게 아니겠는가?   기준은 너무나도 실망해 너럭바위에 물앉아 무릎을 탁 쳤다.   어둠 속에서 헤매다나니 북으로 간다는 것이 기운봉과 치마봉을 한 고패 빙 돌아 겨우 신설동 부근으로 갔던 것이다.   (헤이, 이것도 하느님의 안내겠다. 병권 큰아버님께서 큰 집에 들리라는 거겠어.)   시퍼런 대낮에 들어갔다가 큰집을 연루시킬 까봐 기준은 상길을 데리고 수림 속에 까딱하지 않고 숨어 있기로 했다.   한참 후 상길이가 기준의 속이 탄 한숨소리에 깨나 두 손으로 눈을 비비면서 이불을 비집고 기지개를 켜더니 발딱 일어났다.   “삼촌, 밤새 편히 쉬셨습둥?”    “응, 그래.”   기준은 상길이가 맥이 빠져할까 봐 한 고패 빙 돌아 신설동에 왔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아침밥이나 먹자.”   그래도 다행이었다. 맏딸이 보낸 밥이 있어 하루는 먹을 것 같았다.   지루한 하루를 나무숲속에 숨어 있은 기준은 어둡기를 기다려 이불 짐은 너럭바위 우에 놔두고 낫만 쥐고 상길을 데리고 신설동에로 슬금슬금 내려갔다.    초저녁이여서 울바자에 달린 삽작문 안으로 큰집 안에서 등불이 어둑시그레 내비치는 것이 보였다. 혹시나 하여 기준은 상길을 수림 속에 남겨둬 망을 보게 하고 혼자 큰집 주위를 한 고패 빙 돌면서 다른 놈들이 매복해있지나 않은가 깐깐히 살펴보았다.    확실히 아무런 동정도 없자 그는 울바자에 달린 삽작문을 슬쩍 열고 큰집에 가만히 들어갔다.   “아니, 이게 기준이 아니냐?”   기준이 위방에 들어서자 병관은 하얀 수염을 날리며 놀라하면서도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는 기준의 두 손을 맞잡고 아래위를 보면서  반색했다.    “그래, 무사하구나.”   “큰아버지도 우리 일을 알았습둥?”   병권은 머리를 무겁게 끄덕였다.   “그래, 낮에 수길이 자위대를 끌고 와서 온 마을을 싸다니면서 너희들이 왔는가 살피다가 우시장 경찰국의 포고문을 붙여놓고 가버렸다. 너희들의 용모파기까지 그려놓은 포고문엔 도주범인 성칠과 너를 고발하라고 했더라. 여기뿐이 아니란다. 온 명천과 우시장에 포고를 붙여 놓은 거 같더라.”     기준은 더 앉아있지 못 하고 벌떡 일어났다.    “이 밤중에 어디로 가자고 이러니?”    “여기도 오래 앉아있을 곳이 못됩니다. 난 상길을 데리고 밤도와 명천을 벗어나야 하겠습니다. 당분간 경성군이나 회령 쪽에 멀리 피해있든지 아예 만주로 가든지 하겠습니다. 정 안 되면 성칠 형님을 찾아가 독립군에 들어가든지.”    병권은 하얀 염소수염을 매만지면서 “만주에 들어가더라도 성칠처럼 독립군에는 가지 말라. 일본 놈들이 조선 땅도 다 먹어치운 놈들인데. 어떻게 이긴다고 그러니? 괜히 집안 문을 닫게 하겠다. 쯧쯧.” 하고 말리였다.    그때 바깥에 나갔던 관준과 상철이 집에 들어와 인사했다.    상철의 아내가 밥상을 들고 들어와 반겼다.   “시삼촌님, 저녁 듭소.”   형내도 작은집 작은할아버지를 보러 들어와 인사했다. 열서너 살 되는 형내는 꽤나 일찌기 셈이 된 것 같았다.   기준은 큰 집 식구들이 말리는 것도 마다하고 기어이 떠나려고 했다. 그러자 관준은 며느리에게 밥보자기를 싸주라고 당부했다. 이윽고 상철의 아내가 묵직한 밥보자기를 들여오자 기준은 밥보자기를 받아들고 큰아버지께 큰절을 올리고는 황급히 삽작문을 나섰다.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기준의 검은 그림자를 목송하면서 병권과 관준은 긴 한숨을 몰아쉬었다.   병권은 도리머리 질 하면서 중얼거렸다.    “고향을 떠나 만주에 간다고 살 길이 있겠냐? 참, 앞길이 막막하구나.”    한편 기준은 부랴부랴 숲속으로 들어가 상길을 데리고 바지에 바람이 일게 이불 짐을 둔 너럭바위 쪽으로 돌아갔다.    “상길아, 가자.”   “예.”   상길은 뒤에서 따라가면서 물었다.   “삼촌, 어째 큰 집에서 자면 안 됩둥?”   기준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디 고향에서 편히 자겠니? 온 명천과 우시장 사처에 우리를 붙잡으라고 포고를 붙여 놓았단다. 낮에 큰 집에도 자위대 개다리들이 왔다갔단다.”    그는 상길을 뒤돌아보며 뒷말을 이었다.   “범이 자기 흉을 하면 온다고 이제부터 아무 말두 하지 말라.”   “예.”   진짜 범이 오나 해 상길은 간이 콩알만 해졌다.   기준은 이번에는 어제 밤처럼 기운봉과 치마봉 부근을 한 바퀴 빙 돌지 않으려고 걷다가도 먼 앞과 주위를 둘러보면서 북으로, 북으로 걸었다.   소나무 숲이 우거진 수림 속 산등성이 길을 한 세 시간 걸었을까? 기준은 상길이가 기진맥진해 배틀거리는 것을 보고 소잔등같이 커다란 바위 돌을 보자 아래에 다가갔다.   “오늘밤엔 여기서 자자.”   “예.”   상길은 자자는 말만 나오면 좋아했다. 기준은 자기를 따라 고생하는 어린 상길이 불쌍해 이불을 대충 덮고 꼭 끌어안아주었다.   이튿날 이른 아침, 기준은 깨여나 자기 눈을 의심할 정도로 초풍할만큼 놀랐다.   (저게 뭐냐?)   너럭바위 밑으로 겨우내 얼며 고생스레 살아온 뱀 한마리가 혀를 날름거리면서 기어 나오고 있었다.   “에크!”   기준은 상길을 놓고 낫을 쥐고 일어나 뱀을 낫날로 썩 뚝 내리쳤다. 얼었다가 갓 기어 나온 뱀은 쳐들었던 대가리를 잘리어나가 피를 흘리면서도 땅바닥에서 꾸불거리었다.   상길도 깨여나 눈을 비비다가 기준이가 누런 뱀의 껍질을 벗기는 것을 보고 소스라쳤다.   “뭡입둥?”   기준은 껍질을 벗겨내 하얀 뱀을 들고 보면서 중얼거리었다.   “배고픈데 뱀 고기나 구워 먹자구나.”   상길은 삼촌의 손에 껍질이 채 벗겨지지 않은 뱀의 꼬리가 아직도 꼬불거리는 것을 보고 너무나 징그러워 눈살을 찌푸렸다.   기준은 뱀 고기를 바위 돌 위에 올려놓은 후 여기저기 다니면서 삭정이를 주어다놓고 부시를 쳐서 불을 달았다. 뒤이어 나무꼬챙이에 뱀 고기를 댈댈 감아 활활 타오르는 불길에 이리저리 굴리면서 구웠다. 뱀의 고기는 까마 노르스럼하게 구워지면서 꼬불꼬불 감기며 구수한 냄새를 풍겼다.    상길은 두 손을 내밀어 삭정이불에 몸을 녹이더니 밥보자기를 풀고 밥그릇을 바위 돌 위에 내놓았다. 기준은 뱀의 고기를 입에 대고 후후 탄 먼지를 불어버리고 손으로 몇 토막 뚝뚝 끊더니 한 토막을 상길에게 내밀었다.    “옛다. 이리 맛 좋은 고기 어데 있겠니?”   상길은 상을 징그리다가 입에 넣고 씹어보았다. 구운 명태 같은 게 꽤나 맛있었다. 숙질간은 삭정이불을 마주하고 앉아 아침밥을 맛있게 먹었다.   기준은 어제 밤길을 걸어 명천을 이미 벗어난 것을 보고 대담하게 낮에도 걷기로 하고 이불 짐을 둘러메고 상길을 데리고 길을 재촉했다.    그들은 온종일 쉬다가도 걷고 하면서 어떤 마을 뒷산에 이르렀다. 이젠 밥보자기의 밥도 거들이 났다.    기준은 차마 마을에 내려가 밥 동냥을 하자다가 체면에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는 배고파 길에 쪼그리고 앉아있는 상길을 보고 낫을 쥐여들더니 나무를 하기 시작했다. 기준이가 싸리나무를 베 놓으면 상길이가 따라가면서 싸리를 쌓아놓았다.    한참 나무를 하니 땔나무 몇 단은 됐다.    “아이코!”    “어째?”   기준이 나무 단을 묶다가 돌아다보니 싸리를 모으던 상길이 발을 붙잡고 물앉아 있었다. 분명 싸리 긁을 디뎠던 것이다.   “여기 조상이 물려준 좋은 약이 있다.”    상길이 삼촌의 얼굴과 손을 번갈아 쳐다보았는데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기준은 상길을 보고 “짚신을 벗어라.”라고 했다.   상길이 짚신을 벗자 긁을 디딘 자리에서 빨간 피가 조르르 흘러내렸다.    “거게 오줌을 눠라.”   상길이 괴춤을 까고 발에 오줌을 쏘자 기적과도 같이 피가 멎었다.   “됐다. 이제 몇 번 오줌을 더 누면 괜찮을 거야.”   기준은 나무단을 두 단씩 한데 묶더니 상길에게 말했다.   “네가 여기서 이불짐을 지켜라. 땔나무를 메다주고 밥을 얻어올게.”   기준은 상길에게 소나무 위에 바라 올라가 숨어있으라고 하고는 나무 단을 양어깨에 둘러메고 산 아래 마을로 씨엉씨엉 내려갔다.   상길은 숨을 죽이고 바위 옆의 커다란 소나무 위에 바라 올라가 나무 가지에 걸터앉아 산 아래를 내려다보며 삼촌이 밥을 가지고 돌아오기를 눈 뿌리 빠지게 기다렸다.    한참 후 기준이가 산 아래로부터 보자기를 들고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기준이 밥을 가져오자 숙질간은 또 산에서 한때 끼니를 에웠다.   그들은 풍찬노숙하면서 핏빛 해와 북두칠성을 이고 북으로 걷고 또 걸었다.   며칠 후 경성군에 이르러 시내를 지날 때였다. 숱한 사람들이 모여 뭔가 보고 있었다.   상길이 다가가 사람들을 비비고 들어가 들여다보았다. 글쎄 성칠 큰아버지와 기준 삼촌의 용모파기를 그린 경성경찰국의 포고문이 붙어있지 않겠는가!   “안되겠다. 명천을 떠나면 일 없겠는가 했는데. 빨리 이 시내를 벗어나가자.”    부랴부랴 시가지를 벗어난 그들은 또다시 산길을 타고 북으로, 북으로 허둥지둥 반 달음박질쳤다. 머리속에는 일본 놈들이 독사들처럼 욱실거리는 조선에서는 살 길이 없기에 만주로 가야겠다는 일념 밖에 없었다. 어머니 품 같던 조선 정체가 철조망을 두른 일본 놈들 하나의 커다란 감옥 같았다.    (만주에 가서 성칠 형님을 찾아가 독립군이 되든지, 농사를 짓든지 뭘 하면 지금처럼 쫓겨 다니면서 목숨을 부지하기보단 나을 거야.)   별을 이고 달빛을 빌어 힘들게 걸어가는 크고 작은 숙질의 어두운 그림자가 수림 속 산등성이 령 길에서 처량하게 비틀비틀 북으로, 북으로 느리게 움직이고 있었다.             5. 친구와 원수    북으로 들어가면서 날이 감에 따라 낮에는 제법 훈훈한 봄바람이 불어왔다. 봄아가씨의 훈훈한 입김이 지나가더니 산에도 이젠 진달래꽃이 피어나기 시작하고 양지바른 언덕에는 새싹들이  뾰족뾰족 돋아나 땅 위로 머리를 내밀기 시작했다. 나무들에도 파란 애잎사귀가 움트는데 나무숲 속에서는 뻐꾸기가 뻐꾹뻐꾹 짝을 찾아 외롭게 운다. 종달새도 하늘에서 지종지종 쓸쓸한 봄소식을 알리고 있다.    기준은 솜옷만 입고 길을 떠나서 낮에는 좀 더운 감을 어찌 할 수 없었다. 솜옷의 솜을 빼고 입을까 하다가 밤에 아직도 추운 감이 들어 그대로 입고 길을 재촉했다.    명천군을 벗어나 경성군에 들어선 후부터는 아무리 포고문이 나붙어도 그래도 고향에서보다는 달리 낮에도 령길을 타고 걸을 수 있어 다행이었다.    그들이 한참 이른 아침부터 수림 속 령 길을 바삐 걷는데 앞에서 나무를 뚝뚝 끊는 소리가 들리었다. 기준과 상길은 걸음을 멈추고 나무 뒤에 숨어 앞을 살폈다. 웬 사내가 애들을 데리고 나무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도끼도 아니고 어지간한 사발만큼 실한 나무도 어깨를 들이대고 떠밀어 뚝뚝 끊어내는 것이었다. 얼핏 보니 실팍한 허리라든가 넙죽한 어깨가 눈에 익어보였다. 찬찬히 여겨보니 원삼인 것 같았다. 기준은 앞으로 몇 발자국 더 걸어 나갔다. 그러나 상길은 잔뜩 겁나 나무숲속에 숨어 갸웃거렸다. “아니, 이게 원삼이 아닌가?” 나무를 하던 사내도 허리를 펴고 올려다보더니 놀라했다. “아니, 기준 형님이 아니오? 얘들아, 인사해라. 명천의 힘장사 기준큰아버지다.” 이불 짐을 멘 기준을 보고 심상찮아 보였던 것이다. 애들은 인사했다. “어떻게 돼 여기까지 왔소?” 기준은 이불 짐을 내려놓으면서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었다. “한마디로 말하기 바쁘오. 여긴 어딘가?” “여긴 내 고향인데 경성군 주을면 용천동이라는 곳이오.” “두만강까지 아직도 먼가?” “아직도 애를 데리고 가자면 한 보름이나 스무날도 더 걸어야 될 거 같소.” 원삼의 말을 듣고 기준은 한숨을 후 내쉬었다. “한길수 놈과 어떻게 한 하늘을 쓰고 살겠소? 경찰국을 짓고 길닦이를 해도 어디 삯전을 줍데?” 기준은 상길을 불러 인사시켰다. 그제야 상길은 나무숲속에서 나왔다. 원삼은 산 아래 편벽한 산골마을을 가리키면서 “저게 우리 고향이오. 내려가 아침 식사도 하고 그간 얘기도 나누기요.” 하고 말했다. 기준은 손사래를 저으면서 말했다. “괜히 자네한테 연루시키겠소. 날 주먹밥이나 좀 가져다 주면 되네.” 원삼은 “야, 형님도, 어느 놈이 내 눈앞에서 형님을 어찐다오? 단매에 때려죽이겠소. 가기요. 집 문 앞까지 왔다가 들리지도 않겠소?” 하고 말했다. 그리하여 기준은 원삼을 도와 나무 단을 해 끌고 산 아래로 내려갔다. 그런데 마을 어귀에 웬 사람들이 모여 구구거리면서 뭘 구경하고 있었다. 기준과 원삼이가 다가가 보니 성칠과 기준의 용모파기를 그린 경성군 경찰국 포고문이었다. 그런데 한 마을 사람이 기준을 힐끔힐끔 곁눈질 해보는 것이었다. 기준은 원삼과 눈치를 맞추고 나서 나무 단을 내려놓고 상길을 데리고 산으로 되올라갔다. 원삼이가 따라와 팔소매를 잡아끌었다. “걱정하지 마오. 여기 저 사람들은 형을 고발할 사람들이 아니오.” 기준은 팔소매를 뺏다. “자넬 연루시킬 필요야 없지 않는가? 그저 주먹밥을 해서 저 산속에 가져다주게나.” 원삼이도 별수 없어 팔소매를 놓았다. “형님, 시장한대로 산속에서 기다리오.” 원삼은 기준과 상길이가 산속 수림으로 올라가는 뒷모습을 눈으로 바래면서 도리머리 질을 했다. 기준은 수림 속에 숨어 낫을 쥐고 마을 쪽을 살피였다. 아무래도 아까 자기를 힐끔 곁눈질하던 사람이 근심됐던 것이다. 한식경이 퍽 지나 원삼은 주머니를 둘러메고 성큼성큼 서산으로 올라왔다. 그의 뒤에 훤칠한 막내 동생 무삼과 작달막한 형 인삼이가 뒤따라 올라왔다. 상길은 올라오는 사람들을 보고 점점 삼촌의 옆구리에 달라붙어 바들바들 떨었다. “겁내지 말라. 저분들은 금방 만났던 삼촌의 형제들이다.” 그제야 상길은 겁기 띤 얼굴에 긴장을 풀면서 한숨을 호 내쉬었다. “아니, 형님, 여기까지 왔다가 집에도 들리지 않고. 이거 안 됐소.” 춘삼은 너부죽한 얼굴에 헤벌쭉 웃으며 다가와 옷 보따리를 넘겨주고 손을 내밀었다. “입던 옷이라도 여름옷으로 바꿔 입소. 얘 옷이 맞겠는지 모르겠소.” “감사하오. 사정이 그렇게 돼서 이번엔 집에 들지 못하겠소.” 그러자 인삼이도 다가와 손을 굳게 잡았다. “형님, 마을 사람들은 일없소. 내려가기요.” 허나 기준은 “안 되오. 요즘 일본 놈들이 온 후부터 세상인심은 모를 일이오.” 원삼은 밥주머니를 내려놓았다. “이거면 며칠 먹을 수 있을 거요. 그런데 이젠 날씨가 따가워져서 밥이 쉴까봐 근심되오.” 그는 주머니에서 동전 여섯 개를 꺼내 기준의 손바닥에 쥐어주었다. “이건 우리 사형제가 주는 거요. 로비로 쓰오.” “야, 이거 고맙소. 모두 살기 힘들겠는데 미안하오. 바쁠 때 도와준 은정을 잊지 않겠소.” 그러자 기준과 첫 면목을 익힌 춘삼의 막내 동생 무삼이가 말했다. “형님, 우리 형님들이 명천 우시장에 가서 경찰국을 지을 때 귀댁 부친님과 형님의 도움을 받았다는 말을 많이 들었소. 너무 적어서 미안하오. 아직도 퍽 오래 걸어야 두만강에 가겠는데 보태 쓰오.” 기준이가 동전을 사양하자고 하자 원삼이 말리였다. “우리 적은 성의이니 받소.” 그러고 나서 뒷말을 이었다. “내 이전에 뭐라 했소? 그놈 한길수를 때려죽여 버리자는데. 지금 그놈 때문에 고향에서도 살지 못하고 만주라니, 에참, 고향을 떠나서 어떻게 살겠소. 우리도 아마 명년에는 고향을 떠나 만주로 가야 될 것 같소. 일본 놈 새끼들이 여기 편벽한 산골에까지 들어와 몇 짐 되지 않는 돌밭에 나무를 심어라오. 게다가 땔나무마저 해선 안 된다니 어디 살겠소? 마른 풀만 긁어서 불을 때라오.” 그때 인삼이가 말했다. “솜옷이 다 해졌구먼. 아직도 솜옷을 어떻게 입겠소? 내 입던 옷이라도 바꿔 입고 가게나.” 기준은 “밤엔 아직도 춥소. 이제 두만강을 건너가 더우면 솜을 빼고 입으면 되오. 인차 길을 떠나야 하겠소.” 그러자 그들 삼형제도 더는 만류하지 않았다. 원삼은 기준의 손을 굳게 잡았다. “그럼 몸조심해 두만강을 건너오. 나도 이제 조만간에 만주로 들어가야 할 것 같소. 그때 만나기오.” 그러자 무삼이 근심했다. “듣는 말에 의하면 두만강 저쪽의 중국 놈들이 두만강을 건너는 사람을 붙잡기만 하면 목을 쳐서 머리를 두만강에 처넣는다던데. 어떻게 건너겠소. 애까지 데리고.” 그 말에 상길은 겁을 집어먹고 머리를 싸쥐고 매만지었다. 인삼도 걱정했다. “좀 일찍 강이 땅땅 얼었을 때 왔더라면 아무데라도 가만히 두만강을 건너갔겠는데. 그래도 인가가 보이는 웅진 쪽으로 해 가오. 무인지경 산골로 가면 수림 속 야수도 무섭지만 먹을 게 떨어지면 어찌겠소. 아차, 잊을번 했소. 웅진이란 절벽아래 길목에 주막집에 백승만이란 자가 있는데 주의하오." “그 놈을 몰라서? 고맙네. 이젠 돌아들 가게나.” “이렇게 갈라지면 언제 다시 만나겠소.” 그들 삼형제는 석별의 정에 겨워 계속 이말 저말 하면서 산길을 따라 마을이 보이지 않는 령 마루 길에까지 바래여주고서야 갈라지기 아쉬운 대로 멈춰 섰다. 기준은 이불 짐과 밥주머니까지 혼자 둘러메고 령 마루 길을 씨엉씨엉 걸어 나갔다. 그 뒤로 상길이가 낫을 쥐고 힘겹게 따라 가고 있었다. 며칠 후 상길은 발바닥에 물퉁이까지 쳐서 쩔뚝거리면서 점점 걷지 못했다. 기준은 이불 짐 위에 상길을 목마처럼 태워가지고 걷기도 했다. 설상가상으로 원삼이네가 준 주먹밥과 누룽지마저 다 떨어졌다. 해가 어슬어슬 지는데 눈앞에는 깎아지른 절벽아래 마을 하나가 나타났다. 그 절벽아래 마을 어귀에 주막 같은 외딴 집이 눈에 유표하게 띄었다. 기준은 풀숲에 멈춰서더니 쪼그리고 앉으면서 상길과 이불 짐을 내려놓았다. 그는 엉거주춤 일어나 호주머니에 손을 넣어 동전을 만지작거리면서 기진맥진한 상길을 내려다보더니 속궁리를 했다. (뭘 사 먹이지 않고선 안 되겠다. 동전도 다 떨어지면 낯선 만주에 가서 어찌 하겠는가?) 그는 동전을 몇 푼이라도 남기려고 상길을 데리고 그 주막집 같은 집으로 다가갔다. 높다란 토성에 대문이 턱 들어박혔는데 꼭 닫힌 대문은 주인의 깍쟁이 성격을 보여주는 상 싶었다. 기준은 부자 집에 들어가 땔나무를 해주거나 패주든지 아니면 물을 길어주고서라도 한 끼 밥을 얻어먹으려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가 대문 안을 기웃거리다가 흠칠 놀랐다. 토성 울안에서 곱사등이가 뭐라고 하인들에게 잔소리질을 하고 있었는데 그 목소리가 백승만의 목소리처럼 귀에 익었다. “안 되겠다. 돌아가자.” “삼촌, 배고파 죽겠는데.” “저 놈은 한길수 졸개다.” 상길은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기준은 상길의 손을 잡아 어깨 위에 올려놓고 걸음아 날 살리라고 서쪽 산으로 달아났다. 그는 세상에 원수를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이런 산골에 와서 백승만과 마주 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한참 헐금씨금 산기슭 수림을 톺아 올라서야 기준은 숨이 차 헐떡거리면서 상길을 내려놓았다. 그는 절벽아래 광솔 불이 환한 백승만의 집을 내려다보았다. 순간 복수심이 치솟아 참을 수 없었다. 생각 같아서는 토성 안집에 불을 콱 싸지르고 싶었다. 낫을 들고 내려가서 백승만 삼형제 일가친척들을 다 찍어 죽이고 싶었다. 그러나 바로 걷지도 못하는 상길이 달린데다 여기에서마저 일본 놈들과 자위대 놈들에게 쫓기면 만주에 들어가지 못할까봐 그만두기로 했다. 그는 상길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숨을 돌렸다. 맥이 진한 그는 상길을 업고 비틀비틀 힘겹게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산을 넘어 골짜기 아래로 내려갔다. 개울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리고 어디선가 “개굴, 개굴” 하고 개구리가 우는 소리가 들리었다. “살았어.” 기준은 이불 짐을 벗어 내려놓고 상길에게 지키라고 하고는 골짜기아래 개울로 내려갔다. 기준이가 개울가에 다가가자 갑자기 개구리 울음소리가 딱 그쳤다. 기준은 살금살금 개울가에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살금살금 다가가며 귀를 도사리였다. 톨랑! 톨랑! 개구리가 개울물에 뛰어들었다. 기준은 바지를 걷어 올리고 개울물에 들어가 물속 풀 섶에 숨어있는 손으로 더듬어 손잡이로 개구리를 한 마리 잡았다. 배 뚱뚱한 개구리는 오래잖아 알을 낳을 어미개구리 같아 보였다. 꽤나 먹음직했다. 순간 살아날 희망이 마음속에서 솟구쳐 올랐다. “상길아, 여기 오너라.” “예.” 기준은 개구리를 땅바닥에 메쳐 상길에게 주었다. “잘 지켜라.” “예.” 기준은 개울물에서 개울가를 따라 내려가면서 손 더듬질 해 연속 개구리를 잡아 손바닥에 놓고 탁탁 쳐 죽인 후 상길에게 넘겨주었다. 상길은 개구리를 받아 개구리무지에 가져다놓았다. 한참 후 기준은 개울에서 나와 상길에게로 다가갔다. 그는 달빛을 빌어 여기저기에서 마른 삭정이를 주어다가 부시를 쳐 모닥불을 피웠다. 싸늘하던 산골짜기 밤에 모닥불이 활활 피어올랐다. 기준과 상길은 나모꼬챙이에 개구리 일여덟 마리씩 꿰여 굽기 시작했다. 빠지직 빠지직 소리와 함께 개구리를 구운 고소한 냄새가 풍겼다. “이게 오늘 저녁이다. 먹어라.” 기준이가 잘 구워진 개구리를 뽑아 주자 상길은 까만 얼굴에 화기가 돌았다. 그는 배고파 가릴 새 없이 구은 개구리다리부터 맛나게 먹었다. 모닥불 빛에 그들 숙질간이 개구리를 넋을 잃고 먹는 모습이 비치였다. 혹시 산골짜기에 불이나 달리면 자위대나 삼림경찰들을 불러 올까봐 그들은 인차 모닥불을 껐다. “오늘은 여기서 자자.” 기준은 모닥불이 꺼진 옆에 마른 나무 잎사귀를 한 아름 긁어다가 펴고 그 우에 이불을 풀어 훌훌 폈다. “상길아, 자라.” “예.” 기준은 산 너머에 철천지 원수 백승만이 있어 위험한줄 알면서도 내일 해가 뜨면 개구리를 더 잡아가지고 길을 떠나려고 이 개울가에서 자기로 했던 것이다. 기준은 상길을 재워놓고 검 칙칙한 구름 속으로 달리는 달과 별을 바라보면서 고향생각을 하염없이 했다. 그는 땅이 꺼지게 한숨을 후 길게 내쉬었다. (부모처자들은 다 무사한지? 내 땜에 고생할거야. 한길수 놈을 놔둬선 안 되는데 원수도 갚지 못하고 이렇게 쫓기는 신세가 돼 만주로 가다니. 에이 참.) 여기까지 생각하자 그는 벌떡 일어나 앉았다. 밸 같았으면 고향에 돌아가 한길수를 단매에 쳐 죽이고 싶었다. 그러나 총을 가진 한길수, 그보다도 일본경찰 놈들을 등에 업고 행패하는 한길수, 무리승냥이 같은 자위대까지 끌고 다니는 한길수를 어떻게 처단하면 원수를 다 갚는단 말인가? 기준은 주먹으로 땅바닥을 꽝꽝 치다가 가슴을 쳐댔다. 그 바람에 상길이가 악몽을 꾸는지 잡소리를 마구 쳐댔다. 기준은 자기에게 연루돼 여기까지 쫓기며 따라온 상길이가 불쌍해 가래짝 같은 손으로 애 어린 얼굴을 쓰다듬어주었다. (상순이랑 무사한지? 그 놈은 상길처럼 얌전한 놈이 아니야. 어쩜 삼대로 모두 울뚝밸이 그렇게 셀까?) 그는 저도 몰래 피씩 웃음이 나갔다. 그때 개울가에서 개구리 울음소리가 개굴개굴 나기 시작했다. 기준은 이불을 사르르 들고 일어나 버드나무가지를 꺾어들고 개울가로 슬금슬금 다가갔다. 그는 개울에 들어가 개구리를 잡는 족족 목을 버들가지에 꿰맸다. 한참 역사질을 하니 개구리를 몇 뀀 잡았다. 그런데 개구리도 사람이 있는 줄 알고 다들 도망쳐버렸는지 이젠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제야 기준은 개울에서 나와 수림 속에 들어가서 마른 나뭇가지를 주어다 우등불을 피워놓고 상길의 옆에 누웠다. 그는 나라를 빼앗긴 수림에서 고향의 쪼각달을 품에 안고 쓸쓸하게 새우잠을 잤다. 저쪽 수림 속에서 놀란 새들이 푸드득 푸드득 날아나면서 고요한 정적을 깨뜨렸다.  
40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19) 댓글:  조회:1897  추천:2  2015-10-02
                            10. 야습     이튿날 이른 아침, 차디찬 아침 햇살이 수림 속의 은세계를 은바늘로 송곳질하며 산마루로 기어 올라가고 있었다.     성칠은 눈구덩이에서 제일 먼저 나와 용천에게 말한 후 동욱을 데리고 영월동 뒷산에 살금살금 접근해 갔다. 그는 정찰의 편리를 위해 소나무에 바라 올라가 나무 가지에 걸터앉아 도고하게 높은 토성 안 한길수네 집과 가시철조망 속의 저목장 그리고 자기 집 자리를 면밀히 주시했다.      한참 후 토성 안에서 적토마를 탄 끼무라 대부대가 우르르 쏟아져 나오더니 우시장 쪽으로 떠나가는 것이었다. 그런데 저목장과 림산파출소의 놈들은 개미새끼 하나 얼씬거리지 않았다.     성칠은 저쪽 소나무가지의 동욱을 보면서 중얼거렸다.     “뒈질 놈 새끼들, 바라가는구나. 그런데 저 놈들이 은희를 저목장 사무실에 가뒀을까? 내 집 자리에 가뒀을까?”     동욱은 성칠을 건너다보면서 중얼거렸다.     “글쎄 말이오. 어디다 가뒀겠는지 제대로 알아야 구하지.”     동욱은 성칠네 집 쪽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성칠의 집 통나무 굴뚝에서 허연 연기가 꾸역꾸역 솟구쳐 오르고 집 앞의 눈 덮인 물방아가 말없이 우뚝 멈춰서 있었다. 물방아 옆에서 자위대 보초 놈들이 서성거리며 도적눈길을 여기저기 팔고 있었다.    한참 후 우두머리 놈이 몇몇 졸개들을 데리고 나왔다. 그 놈들은 전날 밤 누렁이들이 모여들어 주먹밥을 빼앗아 먹던 자리에 가보고 뭐라고 쑤군거리더니 집 안으로 되들어가는 것이었다.     이때였다.     성칠은 저목장을 가리키며 나직이 말했다.     “저걸 봐라! 저게 은희 아니야?”     동욱이 바라보니 헌병 두 놈이 피로 얼룩진 허연 치마저고리를 입은 은희를 끌고 나왔다. 은희가 집 뒤에 물앉자 헌병들은 뭐라고 떽떽거리며 은희를 가리면서 질탕하게 웃어댔다.     아마 은희를 소변보게 하고 구경하며 지껄이는 것 같았다.     “개 놈 새끼들, 은희를 저목장에 가뒀구나!”     갑자기 두 헌병이 치마를 춰 입는 은희한테 덮쳐들었다. 승냥이들이 양에게 덮쳐드는 격이랄가. 그 놈들은 은희 양팔을 발로 짓밟고 가슴이랑 엉덩이랑 마구 만지였다. 한 놈은 치마를 걷어올리고 짐승처럼 달려 들었다. 은희가 아무리 단말마적으로 발로 차고 바둑거려도 어찌 야수 같은 두 놈을 당할 수 있겠는가.    "저놈 새끼들!"    성칠이 나무 가지에서 뛰어내렸다.    "가만!"    동욱이 나무가지에서 뛰어내렸다. 그는 덮쳐나가는 성칠을 뒤쫓아가 팔을 붙잡아 당겼다.    "안돼! 우리 둘이 어떻게 무리 승냥이들을 당해?" 성칠은 몸부림치며 고함쳤다.    "저 놈들을 어찌 가만 놔둘 수 있어. 놔라!"    "안된다니까. 날이 어두운 담에 복수하자."    그제야 성칠은 주춤 멈춰 섰다.       이윽고 놈들은 은희를 질질 끌고 철조망을 두른 저목장 사무실에 들어갔다.     성칠은 그 처참한 장면을 뻔히 보면서도 구하지 못하는 것이 못내 안타까웠다. 그는 주먹으로 소나무를 꽝꽝 쳤다. 허연 눈이 우수수 땅바닥에 흩날려 떨어졌다.     성칠은 동욱과 함께 소나무에서 내려와 허리를 굽히고 무릎까지 푹푹 빠지는 눈을 헤집으면서 용천 등이 숨은 눈구덩이 쪽으로 돌아갔다.    성칠은 용천의 눈구덩이에 다가가 옆에 눕더니 금방 본 정황을 죽 말했다.     용천은 성칠의 말을 유심히 귀담아 들은 후 입을 열었다.     “은희가 저목장 사무실에 있는 걸 보면 야마모도 놈이 거게 있는 게 분명해. 그 놈은 은희를 부하들에게 넘겨줄 놈이 아냐.”     눈구덩이 바깥에서는 눈보라가 쓸쓸히 윙윙 휘몰아치고 눈가루가 나무 가지에서 흩날려 구덩이를 삼킬 것만 같았다.    성칠은 용천의 철색얼굴을 보며 물었다.     “끼무라 대부대는 이미 우시장 쪽으로 가버렸네. 은희를 어떻게 하면 구해낼까?”    용천은 한숨을 후 내쉬었다. 입김이 서리서리 눈보라 속에 흩어지며 사라졌다.    한참 생각하던 용천은 자못 어두운 그림자가 비낀 철색얼굴에 준엄한 표정을 지으면서 근심스레 말했다.     “은희도 은희지만 자네 아버지 근심되네.”    성칠은 벌떡 일어나 앉았다.    “우리 대여섯이 어떻게 구하겠소? 괜히 사상자만 낼 게 아니오?”    용천도 일어나 앉았다.    “우린 수수방관할 수 없어. 그쪽으로 가봅세.”    “괜히 구하지도 못하면서 다치겠소.”    용천은 고집쓰면서 동욱과 바우돌 등을 데리고 운주동 뒷산으로 떠나갔다. 성칠은 용천의 명령대로 병수와 함께 남아서 이곳 저목장과 자기 집 자리에 남은 놈들을 감시하기로 했다.    용천 일행 셋은 그날 운주동 뒤 산에 숨어서 병완 등이 자위대 놈들에게 잡혀 우시장 쪽으로 끌려가는 것을 뻔히 보면서도 용빼는 수가 없었다. 셋이서 몇 십 명 놈들을 자칫 잘못 건드렸다간 몇 명 안 되는 병사들을 상할까봐 소홀히 움직이지 못했던 것이다.     해질 녘에 성칠은 용천한테서 아버지와 어머니가 우시장 쪽으로 잡혀갔다는 말을 듣게 됐다.     성칠은 머리를 푹 숙이더니 한숨을 후 내쉬었다.     “다 내 잘못이네.”    용천이 맥없이 말했다.     “어제 저녁에 덕팔을 구출한 후에 운주동에 가서 자네 아버지께 달아나라고 알려야 했네.”    성칠은 도리머리 질 했다.    “아니야. 아버지는 놈들을 묘한 수로 따돌리고 아무 일도 없을 거네. 끼무라는 아직 아버지를 어쩌지 못할 거네.”    이윽고 용천은 혹시 놈들이 어제 저녁에 난 눈 우의 발자국을 따라 추격해올 까봐 성칠 등을 데리고 영월동 북쪽 산으로 살금살금 전이했다.    용천은 수림 속으로 전이하면서도 줄곧 어떻게 은희를 구출하겠는가를 궁리했다.   용천은 뒤 산에 올라서서 성칠의 집과 저목장의 환한 광솔불을 내려다보더니 성칠 쪽에 몸을 돌렸다.   “먼저 내 바우돌을 데리고 자네 집에 불을 지르겠네.”    뒤이어 그는 성칠한테 물었다.    “자네 집에 불 질러 괜찮겠나?”    성칠은 머리를 끄덕였다.   “오랑캐 놈들의 소굴로 됐는데 아까울게 없지비.”   용천은 성칠의 귀에 대고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귀속 말을 했다.   성칠은 머리를 끄덕였다.    용천이 이끈 독립군 병사들은 수림 속에서 숨을 죽이고 저목장과 성칠의 집 쪽을 살피면서 밤이 깊어지기를 기다렸다. 다만 눈보라가 윙윙 휘몰아치면서 소나무 끝 초리를 스치는 소리만 휴~ 휴~ 들릴 뿐이었다.    자정이 다가오자 용천과 바우돌이 먼저 성칠의 집 쪽으로 내려갔다. 한참 후 성칠의 집에 불길이 활활 불타 올랐다.    “불이야!”    보초를 서던 놈들이 뛰어다니며 야단쳤다.    땅! 땅!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수림 속에서 야무진 총소리가 울렸다. 물레방아 옆과 마루에서 서성거리던 보초병이 보기 좋게 푹푹 꺼꾸러졌다.    집 안에서 자위대 놈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마당에서 왝왝 소리치며 야단쳤다.    “빨리 저목장과 토성 안에 알려라.”    우두머리 놈이 권총을 빼들고 고래고래 고함쳤다.    한 놈이 저목장 쪽으로 뛰어가고 한 놈이 토성안쪽으로 뛰어갔다. 우두머리 놈은 불이 달리지 않은 사랑채에 뛰어 들어가 숨어버렸다. 졸개들은 질겁해 눈먼 총을 수림 쪽에 쏴댔다. 저목장 놈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와 성칠의 집 쪽으로 몰려왔다. 토성안의 놈들도 개울을 건너 총소리 난 이쪽으로 덮쳐왔다.    이때라고 생각한 성칠은 기회를 타 저목장 안에 스며들었다. 그들은 철조망을 뛰어넘어 통나무를 은폐물로 삼아 살금살금 저목장 사무실에 박근했다.    “다레까(누구야)!”    성칠은 허리춤에서 비수를 뽑아 날렸다.    보초병이 목에 비수를 맞고 푹 꼬꾸라졌다.    그때를 틈타 그들은 저목장사무실로 덮쳐들어갔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저목장 안에는 한 놈도 없었다. 눈앞에는 피로 물든 허연 치마저고리를 입은 은희가 대들보의 올가미에 목이 매달린 채 머리를 툭 떨어뜨리고 있었다.    “야, 은희야!”    성칠은 은희의 두 다리를 끌어안고 머리를 대고 대성통곡 쳤다. 성칠과 동욱이 은희를 풀어 내리려고 할 때였다. 바깥으로부터 왝- 왝- 고함소리 터지고 총소리 자지러지게 울렸다.    성칠과 동욱은 바삐 뒤 창문을 차 깨고 바깥으로 뛰어나갔다.    놈들이 사무실로 쳐들어갔을 때는 성칠과 동욱은 통나무 무지 사이에 뛰어 들어 갔다.    푱 푱!    일본 삼림경찰 놈들이 사격하면서 포위권을 좁혀왔다.    이때 철조망 바깥에서 야무진 총소리가 자지러지게 울렸다. 몇몇 삼림경찰 놈들이 보기 좋게 쓰러졌다.    원래 용천 등은 작전계획대로 성칠의 집 뒤쪽으로 접근해가 불을 질러놓고 보초병 두 놈을 쏴 눕힌 후 저목장 북쪽 눈 속에 달려가 매복해 있다가 성칠 등을 엄호하여 놈들을 쏴 눕혔던 것이다.    놈들이 깜짝 놀라 멈칫 하는 틈을 타 성칠과 동욱은 통나무무지에서 몸을 날려 철조망을 뛰어넘어 수림 속으로 도망쳤다. 뒤에서는 일본 경찰 놈들이 고래고래 고함치는 소리와 총소리가 어지럽게 울렸다. 용천 등은 성칠과 동욱을 접응하여 어둠을 타 수림 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11. 밀모     밤중에 영월동 삼림경찰주재파출소와 저목장이 습격당했다고 하자 깜짝 놀란 끼무라 국장과 경찰들은 질겁해 벌벌 떨었다. 야마모도 소장은 저목장에서 토성 안 한길수의 폐허 같은 집에 옮겨 숨어있었기에 다행이 죽지 않았던 것이다.     끼무라는 병완이 눈치 채지 못하게 태연자약한 척 했다.    그는 병완을 경찰국 사무실에 불렀다. 한길수는 끼무라가 번마다 병완을 불러 일을 의논하고 큰 일을 맡기는 것이 눈에 거슬렸다. 허연 구레나룻이 더부룩한 병완을 보면서 끼무라는 속으로 무척 속이 타는 모양이구나고 생각했다.     “너무 속 태우지 말게나. 우리 큰길닦이는 몇 십 년 해야 될 큰일이네. 이 일은 우리 대일본제국 조선에서의 근본 이익과 조선백성들의 생활과 밀접한 관계가 있네. 그러니 큰 길만 잘 닦으면 자네 온 가족 신상을 내가 지켜주겠네.”     병완은 끼무라를 힐끔 쳐다보았다.    “무슨 일이 있는지 뚝 찍어 말하오.”    끼무라는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우리 길닦이에도 자네 같은 목수가 필요하네. 말하자면 골짜기나 개울을 지나가는 길에는 다리를 놓아야 하네. 자네 목수들을 데리고 가서 다리를 잘 놓아달란 말이오.”    병완은 흰 수염을 슬슬 쓸었다.    “거야 어려울 게 없지요. 제일 좋은 통나무로 멋진 다리를 척척 놔드립지비.”   이때 경찰국 사무 청사 기둥인지 대들보에서 또 이상한 소리가 났다. 끼무라도 의상한지 천정과 기둥 쪽을 두리번거리더니 병완에게 눈길을 돌렸다. “병완이, 이 집에서 이상하게 저런 까드득 까드득 소리가 자주 나네. 쥐가 노는 것도 아닌 것 같은데 뭘까?” 병완은 천정을 쳐다보며 능청을 떨었다.     “글쎄 무슨 소릴까?”    끼무라는 교활한 눈길로 병완의 표정변화를 살피고 있었다.   병완은 아무 일도 없는 듯이 천정에 귀를 기울이는 척 했다.   “무슨 소릴까? 혹시 천정에 쥐가 노는가? 경찰들을 보고 올라가 보라고 하오.”   끼무라는 머리를 끄덕였다.   끼무라는 제자리에 가서 앉더니 뒷말을 이었다.   “병완 총도감, 한 가지 부탁이 있네.”   류강철의 통역을 들은 병완은 끼무라를 똑바로 마주보았다.    끼무라는 독기 번쩍이는 눈길로 병완을 보며 독사의 혀와 같은 혀를 날름거리였다.    “성칠은 우리 헌병들을 살해했네. 아직 늦지 않았네. 자네가 성칠을 설복해서 우리 대일본제국에 귀순한다면 이전의 죄를 묻지 않겠네. 총도감의 낯을 봐서 말이네.”    끼무라는 교활한 눈빛이 얼른거리는 눈길로 병완의 얼굴을 살피었다.    무뚝뚝하게 덤덤히 앉아있는 병완의 얼굴에서는 아무런 변화도 읽을 수 없었다.    “이전에도 말했지만 난 자네 부자를 아주 흠상하오. 그 천하장사다운 근력에 숱한 마을 사람들의 믿음을 받는 높은 위망에 솔직한 성격에 바위 돌처럼 움직이지 않는 심성 말이오. 자네가 사양하니 그런데 난 자네에게 자위대 부대장을 맡길 수도 있네. 저 한길수 대신 자위대 대장도 맡길 수 있네.”    한길수는 언짢은 눈길로 끼무라를 힐끔 쳐다보다가 머리를 푹 수그렸다.    (강철의 말이 맞구나. 저 두상이 눈을 상했다고 나를 폐물짝이라고 한다더니. 흥!  정말 헌신짝 버리듯 하려는구나. 내 대신 병완 녀석을 대장까지 시키련다. 쳇, 정신 나갔지. 병완 부자가 자기를 잡자고 시퍼런 칼을 썩썩 가는 것도 모르고.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놈, 흥! 낮은 돌을 밟다가 이제 큰 코 다치지 않는가 봐라!)    이때 끼무라가 무거운 침묵을 깨뜨리면서 병완에게 물었다.    “어떤가? 성칠을 산에 가서 데려오게나. 그가 포수대를 데리고 돌아오면 성칠에게도 중대장쯤 맡기겠네. 사격술도 대단하지 않은가! 포수대는 우리 자위대에 몽땅 받아들이고. 그까짓 독립군을 쫓아다녀봤자 날마다 산과 들판에서 우리 대일본제국의 경찰들과 헌병들에게 쫓기는 개 신세지. 우리 대일본제국 자위대에서 벼슬을 한다면 근심할게 뭔가? 복이란 복을 다 누릴게 아닌가?”    병완은 끼무라를 정색해 마주 보았다.    “전번에도 말했지만 난 총칼을 휘두를 사람이 아니오. 난 목수이기에 집을 짓거나 다리를 놓을 수 있을 뿐이오.”    끼무라는 땅이 꺼지게 한숨을 길게 토해냈다.    “참 답답하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 줄도 모르고 부처님 상을 하니까.”    끼무라는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와 병완의 손까지 잡았다.    “강요하진 않겠네. 세상이 돌아가는 걸 아는 사람이라면 우리 일본제국을 등에 업는 게 얼마나 명지한 선택이란 걸 알거네. 이면에선 한길수 대장이 선생이야. 허허허.”    끼무라는 한길수를 힐끔 엿보았다. 한길수는 그제야 조금 미소를 짓는 듯이 보였다.   “가서 길을 잘 닦아주게나. 단 한 가지. 다리에서는 까드득 까드득 하는 소리 나지 않게 잘 놓게나.”    병완은 엉덩이를 툭 털고 일어났다.    “한 가지 요구 있소.”   끼무라는 대뜸 반색하면서 콧수염을 쓰다듬으며 다가섰다.   “뭘 말인가?”   병완은 끼무라의 가재수염을 마주보았다.   “농사철에 나도 집에 돌아가 농사도 돌보게 해줍소.”   끼무라는 선선히 대답했다.    “오. 거야 되고 말고. 당신에겐 특수대우를 해주지. 내 부탁만 잊지 말구 곰곰이 생각해보게나.”    병완이 경찰국을 나서자 끼무라는 볼이 부어 머리를 숙이고 서있는 한길수에게 다가갔다.    “골났는가?”   그는 한길수의 어깨를 툭툭 다독여주었다.   “자존심 좀 상했을 거야. 허나 난 자네 자존심을 좀 팔아서 병완의 마음을 움직여놓자고 했을 뿐이네. 내 마음속에는 한길수 대장 밖에 없네. 성칠이 놈을 산에서 내려오게 유인해 체포하기 위해서라면 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거네. 알만한가? 하나 알고 둘은 모르는 놈들. 허허허.”    한길수는 얼리고 닥치는 끼무라에게 놀아나는 자기가 너무나도 가련해보였다.    (병완 놈을 내 손으로 없애버려야 해.)    한편 집으로 돌아간 병완은 길닦이를 하러 떠나갔다.   그는 목수들을 모집하려고 이 마을 저 마을 돌다가 운주동 맏아들네 집에 들렸다.    창준과 기준이네는 한 백 미터 사이 두고 아래 윗집에 살고 있었다. 기준은 아버지가 서쪽에 있는 웃새집에 왔다는 말을 듣자 형네 웃새집으로 달려가다 시피 바지에 바람소리 나게 주먹을 쥐고 뛰어갔다.    “아버지, 무사합둥?”   기준이가 헐떡거리면서 위방에 들어섰다.   “오, 그래. 너 그래도 전번에 그 울뚝밸을 어떻게 참았니?”   병완의 말에 기준은 뒷덜미를 긁적거리면서 아래 자리에 앉았다.   “밸 같았으면 도끼로 한길수 졸개들 대갈통을 팍팍 패놓고 싶습디다. 참는 게 속에서 밸이 목구멍까지 욱, 욱 치밉더구마.”   병완은 정색해 말했다.    “잘 참았다.”    “그깟 놈들 도끼로 대갈통을 콱콱 찍어놓고 만주로 가면 다입니다.”    “쯧쯧쯧, 또, 또 그 말이다.”   병완은 기준에게 눈을 흘기었다.   “여기 명천은 우리 집안이 려생 할아버지 대부터 대대손손 14대나 살아온 고향이야. 얘들아, 400여년이나 살아온 고향에서 될 수 있으면 꾹 참고 살아야 한다. 고향을 어떻게 그렇게 쉽게 버리고 가느냐?”    창준은 생각 밖으로 이렇게 말했다.    “일본 놈들의 등살에 밭도 없는데 어떻게 삽니까? 전날 밤에는 영월동의 우리 집마저 다 불타 버렸습니다.”    "무슨 소리냐?”   “우리 우시장 경찰국에 붙잡혀간 날 밤이랍니다.”   병완은 곰방대에 담배를 쑤셔 넣으면서 머리를 끄덕였다.   “일본 경찰 놈들에게 빼앗긴 바엔 불난들 뭐라느냐?”   기준은 답답해 가슴을 꽝꽝 쳤다.   “그러나 저러나 새해에는 어떻게 삽니까? 밭에다 나무만 심으라지. 또 농사는 제쳐 놓고 길닦이를 나가라고 못살게 굴겠지.”   병완은 성냥을 득 그어 곰방대에 대더니 뻑뻑 빨았다.   “바로 거 때문에 왔다.”    창준과 기준이가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병완은 담배를 길게 빨아 연기를 내뿜었다.    “내 생각엔 문중 전을 꿔서 너럭바위 널린 황무지 한 마흔 짐이나 붙여보면 좋을 거 같다.”     그러나 창준은 답답해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버지, 지난해 묵밭을 붙여보지 못했습니까? 올해에는 어떻게 보릿고개를 넘겠습니까?”    병완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한참 후 기준이가 물었다.    “글쎄 그럼 먼저 집안의 문중전을 꿔서 농사를 지어 보기요. 뭐.”   창준도 머리를 끄덕였다.   “옳다. 될 수 있는 한 고향에서 사는 게 옳다. 일본 놈들이라고 우리 고향에서, 우리 나라에서 영영 살겠느냐? 정 안되면 그때 만주로 가든지.”    삼부자는 집안에서 조상들의 산소를 가꾸고 족보를 찍는데 쓰는 문중전(门中钱)을 꿔서 너럭바위가 널린 황무지를 일본 놈들에게서 사서 농사를 짓기로 했다.    “성칠은 소식이 없느냐?”    병완이 물었다.   “소식이 없습구마.”   기준은 며칠 전에 생긴 저목장습격과 영월동 큰집에 불이 달린 일을 들은 소문대로 죽 이야기했다.    “아무리 생각해 봐두 별로 형님하구 독립군이 한 거 같습니다.”   병완은 머리를 끄덕이더니 그간 끼무라가 자기를 얼리려고 하던 짓을 죽 이야기해주었다.   “기준아, 넌 할 일이 있다.”   병완은 허리를 굽히고 목소리를 낮추더니 두 아들에게 귀속 말을 했다.    “일본 놈들의 큰길 다리에도 나무벌레를 잡아넣고 다 무너지게 만들어야겠다.”    기준이 머리를 가로 저었다.   “나무벌레를 믿어서야 언제 무너지겠습둥? 경찰국을 보십시요. 멀쩡하게 지금도 서있지 않습니까? 아예 다리를 놔주지 않는 게 낫지.”    병완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모르는 소릴. 경찰국 사무 청사 기둥과 대들보에서 까드득 까드득 소리 나더라. 조만간에 무너질 거야.”    그는 바깥을 내다보더니 뒤 말을 조용히 했다.     “지금 다리를 놔주는 척 하지 않고서야 고향에서 살게 하겠니? 겉으론 놔 주는 척 하고 무너지게 하는 게 상책이다. 좌우간 올해 한해 농사를 지으면서 보자.”     삼부자는 오래 동안 의논하고 나서 저녁상을 받았다.     어둠의 장막이 공포를 실은 채 내리 드린 바깥에서는 눈보라가 무섭게 아우성치며 기승스레 휘몰아쳤다. 눈가루가 모래알처럼 창호지를 공포에 떨게 무섭게 두드렸다.                   제9장 핍박에 의해 간도로                       1. 농사꾼의 희망      고향의 들에 기약 없이 찾아온 봄에 농사꾼들은 배불리 먹고 살려는 일루의 희망을 품고 농사 차비에 분주했다.      병완은 목수들과 인부들을 데리고 우시장 부근의 큰길닦이에 나섰다. 길닦이 일터에는 일본 헌병과 자위대 놈들이 욱실거렸고 시공을 감시하는 십장들이 득실거렸다.      그때 한길수가 말을 타고 자위대를 한 무리나 끌고 와서 병완이 다리를 놓는 곳에 와서 살피더니 어디론가 휑하니 가벼렸다.      한편 기준은 문중전(门中钱: 가문에서 조상들의 산소관리와 족보 편찬등 모아둔 돈)을 변돈으로 맡아 내오려고 했다.      “문중전을 꿨다가 제때에 갚지 못하면 이자 위 이자에 깔리어 어떻게 삽둥?"     상우가 하는 말에 기준도 답답했지만 별수 없었다.    “그래 앉아 굶어 죽길 기다리겠느냐? 황무지라도 일궈 살아야지.”    기준은 원래 벽이라고 차고 나가는 성격인지라 자손들이 뭐라고 해도 통 곧이듣지 않았다. 그는 집안 어른인 큰집 병권 큰아버지와  작은 집 병은 삼촌이 관리하는 문중전을 300원이나 맡아 내왔다.    병권은 조카에게 문중전을 뀌어주면서 기막혀 새하얀 염소수염을 쓰다듬으면서 물었다.   “무슨 돈을 이렇게 많이 꾸느냐? 80원이면 소 한 마리를 사는데 300원이 적은 돈이냐?”     기준은 대수로워 하지도 않았다.     “밭은 없지 어쩝둥? 숱한 식구들이 굶어죽겠습둥? 이걸로 황무지를 세 맡아 개간해 감자하구 강냉이를 심어야겠습구마.”    기준은 혹시나 하여 300원을 다 쓰지 않으려고 마음먹었다. 그는 야마모도 소장에게 250원을 주고 너럭바위가 널린 황무지 쉰 짐이나 세를 맡아 내왔다.     창준과 기준은 상훈과 상우를 데리고 괭이랑 삽이랑 둘러메고 아낙네들은 낫을 들고 너럭바위가 널린 운주동 뒷산에 올라갔다.    그들은 산에 오르자 쉴 새도 없이 황무지를 일구느라고 바삐 맴돌기 시작했다.    “이 넓은 황무지에 부지런히 농사를 잘 지으면 설마 산 사람 입에 거미줄이야 치겠느냐?”     푸르른 하늘에서는 종달새가 지종지종 봄소식을 알리면서 노래하며 날고 있었다.     마른 쑥대가 한 키도 넘게 뻣뻣이 고개를 쳐들고 소잔등 같은 너럭바위가 쭉쭉 누워 있는 황무지를 마주보자 모두들 한숨부터 나갔다. 그들은 그래도 일루의 희망을 품고 부지런히 쑥대를 낫으로 베 날라 내가고 갓 녹은 너럭바위 사이 땅을 괭이로 파고 삽으로 골고루 펴놓기도 했다.    이때 갑자기 너럭바위 사이에서 버스럭버스럭 마른 풀을 헤치는 소리가 났다. 기준은 혹시 산속의 야수가 덮쳐올 까봐 괭이를 든 채 허리를 굽히면서 버스럭거리는 풀숲 속을 살폈다.    “아니, 웬 놈이야!”    기준의 소리에 모두들 산기슭 쑥대숲속에 머리를 돌렸다.    글쎄 한길수가 권총을 빼들고 숱한 쑥대를 헤치면서 자위대 놈들을 끌고  어슬렁어슬렁 다가오고 있지 않겠는가.    “몽땅 체포해라!” "예꾸마!"    한 무리 자위대 놈들이 이리떼처럼 고함치며 덮쳐왔다.    그 놈들은 창준과 기준, 상훈과 상우를 붙잡아 팔을 뒤로 비틀어 결박하려고 미쳐 날뛰었다.    기준은 성난 사자처럼 펄쩍 뛰었다.    “아니, 놔라!"    그의 눈에서는 시뻘건 불길이 무섭게 이글거렸다.    "왜 이래? 우린 돈을 꿔서 야마모도 소장에게서 이 황무지를 세 맡았단 말이오.”   한길수는 우멍눈으로 기준을 쏘아보더니 말 이발을 드러내면서 냉소했다.    “이건 대일본제국 자위대장인 내 땅이란 말이야. 도둑놈 같은 것들. 언감 내 발등을 딛여?”    기준과 창준은 억이 막혀 이를 사려 물고 온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기준은 씩씩 거리면서 괭이를 쳐들어 치려 하였다. 하지만 창준이가 눈짓 하는 바람에 그만두었다.    그러나 자위대 놈들이 결박하려고 들자 생각을 고쳐먹었다.    “왜 이래? 야마모도 소장과 묻기나 하고 이래?!”    기준이 한길수를 쏘아보며 물었다.    한길수는 권총을 뽑아 기준의 가슴에 겨누면서 너털웃음을 웃었다.    “저승에 가서 물어 봐! 성칠이란 놈은 내 토성안집에 두 번이나 불을 질렀고 이젠 독립군을 무어 날 죽이려고 미쳐 날뛰고 있어. 죽고 살고 하는 판에 무슨 놈의 시비 할 게 있냐? 네 놈들 온 집안을 몽땅 도륙내도 시원찮겠어!”    그제야 기준은 한길수의 독에 찬 속심을 대개 알았다.    사실 한길수는 병완을 먼저 죽이려고 하였지만 길닦이 공지에 일본 헌병들의 눈이 무서워 손을 쓰지 못하고 기준한테 먼저 분풀이를 하려고 들었던 것이다.    눈을 내리뜨고 궁리하던 기준은 자기를 결박하는 자위대를 보고 사정했다.    “죽기 전에 오줌은 누구 죽게 해주오.”     악독하기 그지없는 한길수도 자비를 베푸는 척 했다.    “그래, 오줌을 눈 후에 묶어도 늦지 않다. 풀어 줘라.”    오라가 풀리기 바쁘게 기준은 괭이를 들어 한길수의 번대머리를 내리 콱 찍었다. 그러나 한길수는 그럴 줄 알았다는듯이 날아드는 괭이를 슬쩍 피했다. 그 바람에 한길수는 다행히 괭이에 대갈통은 안 찍히고 잔등을 빗찍혔다.     “아이쿠!”    한길수가 비명을 지르는 사이에 기준은 허리를 굽히며 냅다 뛰어나가 너럭바위 뒤로 몸을 피했다.    푱! 푱!    탄알이 너럭바위에 맞혀 불똥을 튕기며 죽음의 노래를 불렀다.    한길수는 왼손으로 빗 찍힌 잔등을 만지며 고래고래 고함쳤다.    “붙잡아라!”    땅! 땅!   자위대 놈들도 너럭바위와 쑥대밭에 총을 쏘며 추격했다.    기준은 괭이를 버리고 너럭바위 사이로 이리저리 피하며 다리야 날 살리라고 도망쳤다.   그때 누렁이가 기준을 뒤쫓아 쏜살같이 달려들었다. 그 놈 누렁이는 기준이 피할 새 없이 종아리를 물고 늘어졌다. 다행히 바지가 넓어서 종아리를 빗물고 바지를 꽉 물고 놓지 않았다.    “이 놈 개새끼!”   기준은 아픔을 참으면서 가래짝 같은 왼손으로 사냥개 누렁이의 목을 틀어쥐고 소 발쪽 같은 오른 주먹을 휘둘러 누렁이 대가리를 호되게 내리쳤다.    사냥개 누렁이는 깨갱거리더니 물었던 바지를 놓고 냅다 뛰었다. 그런데 그놈 누렁이는 계속 기준의 뒤를 쫓아오면서 왕왕 짖어댔다.    기준은 주먹만 한 돌멩이를 쥐어 사냥개 누렁이에게 힘 있게 뿌렸다.   누렁이는 주인이 보이지 않자 겁을 집어먹고 꼬리를 사리고 풀숲 속으로 달아나버렸다.   기준은 그제야 개에게 빗 물린 종아리에서 피가 흘러 하얀 바지를 뻘겋게 적시는 것을 발견했다. 그런 걸 돌볼 새 없이 쩔룩거리며 풀숲 속에 숨어버렸다.    사냥개 누렁이가 왕왕 짖어대는 풀숲 속으로 추격하던 한길수는 기준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자 사냥개 누렁이를 불러가지고 되돌아왔다.    그런데 이쪽 수림에서는 창준이고 상훈이고 상우고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두 자위대원이 상우의 처 지새금과 상훈의 처 리신옥을 붙잡고 있을 뿐이었다.    “제길할, 끌고 갓!”   한길수는 잔등의 상처를 대충 천으로 싸맨 후 아녀자들인 지씨와 리씨를 붙잡고 우쭐해 산기슭으로 내려갔다.   그때 야마모도 소장이 한 무리 경찰들이 나타나더니 한길수의 앞을 막았다.    “뭐 하는 짓인가?”   한길수는 허리 굽혀 야마모도에게 허리를 굽신하고 나서 말 이발을 드러내며 널어놓았다.   “이 놈들이 내 황무지를 마음대로 개간한단 말입니다.”   야마모도는 금이빨을 드러내며 냉소했다.    “자네 황무지? 저 산비탈의 황무지, 아니, 이 우둔한 사람아,  조선 땅이 몽땅 일본 땅이 돼 버린 지도 십년 넘었어. 무슨 놈의 당신 땅?!”   한길수는 머리를 툭 떨어뜨리었다.    “당장 풀어놓게. 누구 안전이라고 감히! 내게서 황무지를 세 맡은 사람들을 다쳐? 끼무라 국장에게 보고하기 전에 당장 저 황무지에서 손을 떼. 우리와 병완 총도감이 어떤 관계인지 알고 지랄인가?”    한길수는 울며 겨자 먹기로 수하들을 보고 지새금과 리신옥을 풀어놓게 했다. 그제야 잔등이 아파 왼손을 허리에 대고 만지면서 오만상을 다 찡그렸다.    풀숲 속에 숨어 이 광경을 지켜보던 창준과 상훈, 상우도 결박당한 채 나왔다. 야마모도는 졸개들을 시켜 일일이 풀어줘 집에 보냈다.    한길수는 일본 놈들의 개다리질을 하면서도 섭섭함을 금치 못해 번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씩씩거렸다. 금방 단방에 기준을 쏴죽이지 않은 것이 후회막급이었다.    해가 서산으로 뉘엿뉘엿 기울어져갔다.    그러나 기준만은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창준을 비롯한 사람들은 사처로 찾아 헤맸다. 상우와 상훈은 근심돼 메밀밥과 산나물 채를 보자기에 싸들고 기준을 찾으려고 밭을 일구던 황무지에도 가보고 기운봉 기슭에까지 찾아가보았다. 그러나 기준의 그림자는 보이지도 않았다.    집 사람들이 찾을 때 기준은 수림 속에 피해 있었다. 그는 어둠의 장막이 내리기를 기다려 슬렁슬렁 뒷산을 성큼성큼 내려갔다.   (길수 놈은 나를 죽이고 말 작정이구나. 그 놈은 꼭 우리 집을 감시하고 있을 거야.)    그는 숨을 죽이고 운주하를 건너갔다. 종아리를 치는 봄물은 뼈 속까지 시리여 이발을 덜덜 마주 쪼을 지경이었다. 설상가상으로 개에게 물린 상처에 물이 들어가 아리였다.    운주하를 건너자 그는 괴춤을 까고 종아리 상처에 오줌을 내리 쌌다. 즉시에 아릿하다가 피가 멎었다. 오줌 약은 어의를 한 김수종 증조부와 김승중 할아버지 대부터 대대로 물려받은 전통 묘약이었다. 그 덕분에 개에게 물린 후 인차 오줌을 손바닥에 눠 개에게 물린 자리에 발랐기에 개 독을 타지 않고 지혈도 됐던 것이다.     그는 자기 집에는 가지 않고 서쪽에 이웃해 있는 웃새 집에 다가가 기회를 빌려 밥이나 가져오라고 해 얻어먹을 예산이었다.     그는 운주하 강반에 무연하게 펼쳐진 버드나무숲속의 마른 새를 헤치면서 웃새집 구새 목 쪽으로 다가갔다. 울바자바깥을 두루 살펴보아도 수상한 그림자가 얼씬하지도 않았다.     이때 때마침 웃새 집 둘째조카 상길이가 소변 보러 구새목 쪽으로 쫑드르 달려 나왔다. 조카 상길은 아홉 살 밖에 안 됐지만 최구장에게서 어려서부터 천자문이요, 소학이요, 론어요, 중용이요, 대학까지 배워서 영월 김씨 네 가문에서 큰집 형내 버금으로 어린 수재로 불리었다. 그는 특별히 호랑이 같이 무서운 남성 성격을 가진 기준을 좋아하고 따랐다.     기준은 상길이 놀랄 까봐 오줌을 다 누고 괴춤을 춰 입기를 기다려 조용히 불렀다.    “상길아~”    원래 목소리가 실한 기준은 겨우 가는 목소리를 내 불렀다.    “양? 삼촌입둥?”    깜짝 놀란 상길은 가는 허리를 굽히고 두리번거렸다.     “그래, 내야.”    기준은 새 숲 속에서 슬쩍 나왔다.    “삼촌!”    그제야 상길은 어둠 속에서도 새 숲 속에 서있는 어두운 삼촌의 그림자를 알아보고 기뻐 다가왔다.    “삼촌!”    상길은 삼촌 기준의 품에 와락 안겼다.    “쉿!”   기준은 상길을 껴안고 새 숲속으로 살금살금 물러갔다.    “한길수놈이 여길 또 찾아왔더냐?”   상길은 기준의 품속에서 얼굴을 떼였다.   “아니, 지금 아버지랑 사처로 삼촌을 찾아갔습니다. 아버지는 나와 엄마랑 집을 지키라고 했소.”   “음~”   기준은 머리를 끄덕이더니 나직이 말했다.   “아버지랑 형님이랑 근심하지 말라고 일러라.”   “가만, 삼촌, 아직도 저녁밥을 잡숫지 못하지 않았습둥? 아버지랑 형님이랑 삼촌의 밥을 보자기에 싸가지고 찾아갔습구마.”    “그래, 난 점심과 저녁을 먹지 못했다.”    상길은 발딱 일어났다.    “내 가서 밥을 가져오겠습구마.”     기준은 떠나가려는 상길의 손목을 잡고 말했다.    “바깥동정을 잘 살피면서 가져오너라. 너만 오구 엄마랑 어른들은 오지 말라고 해라. 한길수 패거리들에게 들키면 큰일 난다.”    상길은 머리를 끄덕이더니 봄바람에 설레는 버드나무숲과 새밭을 둘러보면서 집으로 들어갔다.    기준은 몇 발자국 물러가서 숨을 죽이고 사위를 두리번두리번 둘러보았다.    아무런 인기척은 없었다. 애꿎은 봄바람만 와스락,  와스락 버드나무숲을 스치면서 불어왔다. 쓸쓸한 바람이 버드나무 잎새에서 흐느껴 울며 공포가 도사리고 앉아 있는 숲속으로 다가왔다.    조용하던 웃새집 안에서 조금 떠드는 소리가 났다가 다시 잠잠해졌다.   이윽고 고방 문이 살며시 열리면서 구새 목으로 죄꼬만 그림자가 허리를 꼬부장하고 이쪽으로 살금살금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삼촌~”   상길이 새 풀속을 헤치면서 다가와 나직이 불렀다.   기준은 새풀 속에서 다가갔다.   “상길아, 여기 오라.”     “히히히, 삼촌, 삼촌을 보니 영 좋습구마.”    “그래, 나도 널 보니 영 좋다. 내 밥을 먹을게. 망 좀 봐 달라.”    “예.”    상길은 일어나 괴춤을 춰 입더니 살금살금 새와 갈대를 헤치고 앞으로 가서 주위를 초롱초롱한 눈을 똑바로 뜨고 도리반도리반 살폈다.    기준은 촐촐했던지라 메밀밥 한 그릇을 게눈 감추듯이 했다. 그러고 나서 목이 말라 마른 침을 꿀꺽 넘기고 혀로 입술을 감빨았다.    그는 새밭과 갈대숲을 살피는 상길을 나직이 불렀다.    “상길아, 오너라.”   상길이 다가오자 기준은 상길의 귀에 대고 귀속 말을 했다.    “가서 솜옷을 가져오너라.”    “이불도 가져오겠습구마. 추워서 어떻게 바깥에서 쉬겠습둥?”    “아니야. 솜옷을 가져오면 돼.”    상길은 머리를 끄덕이고 떠나가려다가 되돌아섰다.    “삼촌, 내일 밥도 가져오랍둥?”    “오, 그래.”    한참 후 상길의 어머니가 고방 문으로 솜옷을 이고 밥보자기를 들고 왔다. 상길은 물까지 떠들고 왔다.    “아니, 아주머님, 들키면 어쩌자고?”   “별 소릴. 그놈들이 우리 생원이 무슨 죄가 있다고 제 집에도 못 들게 하오?”    김수월은 대수로워 하지도 않았다.   기준은 한숨을 후 내쉬었다.   “아주머니, 이젠 우린 한길수 놈 때문에 고향에서 살 것 같지 못하오.”   “글쎄 말이오. 대낮에 하는 상을 보면 생원을 잡아먹을 상이데. 어데 안전한데 피신해 있소.”   기준은 머리를 끄덕였다.    “어떻게 날마다 피난살이를 하겠소? 간도로 피해 가는 게 상책인 거 같소. 아버지하구 형님에게 말하오.”    김수월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기준은 자기 생각을 터놓았다.    “오늘 온종일 산림에서 곰곰이 생각해보니까요. 일본 놈들도 임시 아버지를 이용해 길닦이를 하려고 볼모로 우시장에 잡아두고 있소. 성칠 형님이랑 체포하자는 거 같소. 성칠 형님만 잡히면 조만간에 우리 일가를 몽땅 살해할 거 같소.”    기준은 어둠 속에서 봄바람에 설레는 새밭을 둘러보면서 나직이 말했다.    “내일 밤에도 이때 쯤 뻐꾸기 소리를 낼게. 상길을 시켜 밥을 가져오오. 어른들이 드나들면 자취를 눈치 챌 수도 있으니까.”     수월은 상길과 함께 떠나면서 “알았소. 꼭 조심하오.” 하고 당부했다.    기준은 젖은 홑옷을 새밭에 벗어버리고 솜옷을 갈아입었다.    그는 젖은 홑옷을 쳐들고 웃새집 쪽을 바라보았다. 그는 새밭을 헤치면서 운주하 강반 버드나무숲 쪽으로 갔다. 뒤이어 뼈 속을 파고드는 아픔도 참으며 차디찬 운주하를 건너 운주동 뒷산 수림 속에 잠적해버렸다.     공포가 뒤지개를 지더니 하품을 길게 하면서 늦잠을 청한다.  
39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18) 댓글:  조회:1933  추천:0  2015-09-25
                7. 피비린 보복 저목장에는 눈보라가 윙윙 휘몰아치며 비명소리를 냈다. 끼무라는 저목장에서 피비린 보복행위를 감행하기 시작했다.  끼무라가  군도를 빼들어 짚고 사무상에 앉아 있다. 그 옆에 야마모도가 오른손목에 흰 붕대로 팔꿈치까지 딜 딜 감아 어깨에 올려 처맨 채 도사리고 앉아 있었다. 그의 콩알 눈에서는 야수와 같은 불길이 이글이글거렸다. 끼무라는 이를 뿌득뿌득 갈았다. "간다이죠(한대장)." “하이!” 길수가 상한 왼팔을 받쳐들고 나섰다. “포수대 놈들은 여기서 꼭 덫에 치우게 해야 하네. 저목장과 림산파출소에 보초병을 증가하게!” “예!” 길수가 나가자 끼무라는 은희를 끌어오라고 했다. 피로 만신창이 된 은희가 겨우 몸을 휘청거리며 끌리어 들어왔다.  끼무라는 무섭게 쏘아보며 추상같이 고함쳤다. “고추물 가져와!” 호령소리에 유리창문이 다 부르르 떨렸다. 가메다가 주전자에 고추물을 걸쭉하게 풀어 가져왔다. 야마모도가 자리에서 엉거주춤 일어나더니 가메다한테로 다가가 주전자를 받아 쥐었다. 가메다와 똘만이 악착스럽게 은희 팔을 뒤로 비틀어 내리누르고 자위대원 허꺽쇠가 은희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뒤로 홱 젖혔다. 야마모도는 이발을 사려 물고 주전자를 흔들면서 지분거렸다. “이년, 성칠과 내통해 우리 한 대장 집에 불을 질렀지? 말했쏘까!” 은희는 악이 치받쳐 날카롭게 쏘아볼 뿐 이를 옥물었다. “말하지 않았쏘까!” 야마모도는 은희의 입에 고추 물을 마구 쏟아넣었다. 그러나 은희가 숨을 딱 죽이고 입을 벌리지 않았다.  고추물이 입에 들어가지 않고 입귀로 흘러 볼을 적시며 땅바닥에 좔좔 흘러내렸다. “요 죽일 년!” 야마모도는 고추 물을 더 붓지 않고 가메다를 돌아보며 고함쳤다. “코 꽉 집게!” 가메다가 몸부림치는 은희의 코를 꽉 비틀어 집었다.  은희는 숨이 막혀 입을 빠금히 벌리며 할딱거렸다. 야마모도는 주전자를 기울여 은희의 입과 코에 마구 부었다. 은희는 너무 매워 온몸을 바둑거리며 캑캑거리다가 꼴딱꼴딱 고추 물을 삼켰다. 야마모도는 고추물을 붓던 손을 멈췄다. “말해! 내통했지?” 은희는 야마모도 낯에 고추 물을 퉤 뱉었다. “죽여라! 네놈들한테 엄마, 상호가 다 목숨을 잃었다. 네놈들은 꼭 천벌을 받을게다. 성칠 오빠는 꼭 독립군을 데리고 와서 원수를 갚을게다!” 야마모도는 은희  머리를 틀어쥐어 마구 흔들었다. “요년, 정말 지독한 년이구나.” 그는 왼손으로 은희 턱을 쳐들었다. “말해! 성칠의 다음 계획은 뭐냐?” 그때였다. 은희는 야마모도의 손을 꽉 깨물었다. ‘아야, 이다이(아파)! 요년 죽어, 죽었쏘까!“ 야마모도는 이발 새로 소리치며 오만상을 찡그리더니 군도를 쓱 뽑아들었다. “그만!” 그때까지 음흉한 눈길로 은희를 노려보던 끼무라가 손을 쳐들며 일어났다. 그러자 야마모도는 군도를 칼집에 꽂아 넣으면서 머리를 홰홰 휘저었다. 끼무라는 야마모도를 한쪽 구석에 데리고 가서 나직이 쑤군거렸다. “저년을 죄 짜서야 뭐가 더 나오겠어? 성칠과 내통한 게야 불 보듯 빤하지 않아.” 그제야 야마모도는 머리를 끄덕였다. 끼무라는 자리에 가서 앉았다. 야마모도도 자리에 가서 앉았다. 끼무라가 추상같이 호령했다. “저년을 끌어내가라. 도적을 잡으려면 우두머리부터 잡아야 해. 똘만이, 운주동에 가서 성칠의 애비와 기준을 끌어오라!” “이 밤중에?” 똘만이 불쑥 부르튼 소리를 했다. “웬 잔소리냐? 국장 어른이 잡아오라면 잡아올 거지.” 한길수가 일어나면서 똘만을 핀잔하며 자리에서 엉거주춤 일어섰다. “자위대원들 데리고 가서 잡아오리다.” 병완 일가를 족치는 일이라면 한길수는 언제나 급선봉으로 나섰다. 길수의 거동에 끼무라 국장은 아주 흡족한 표정을 짓더니 머리를 끄덕였다. “잠간!” 끼무라가 갑자기 손을 쳐들었다. 한길수는 의아해하면서 몸을 돌렸다. “무슨 일입니까?” 끼무라는 일어나 뚜벅뚜벅 거닐다가 창밖을 내다보았다. “우린 날이 개이면 우시장 경찰국에 돌아가자. 내일 아침에 운주동에 가서 병완을 끌고 가자.” 류강철이 통역하자 한길수는 말상을 절레절레 흔들었다. “밤중에 잠자리에서 납짝 나포하는 게 좋은데.” 그러나 끼무라는 저목장 초소 안에서 뚜벅뚜벅 왔다 갔다 하면서 말했다.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소리네. 혹시 자기 애비를 붙잡을 것 같아 성칠이 이끄는 포수대에서 매복이라도 했을 수도 있네.” 그 말에 한길수는 자리에 돌아와 앉았다. 순간 그는 초소 창문을 두드리는 눈보라소리에 공포감을 느꼈다. 이 죄꼬만 초소를 독립군이 들이 칠까봐 두려웠던 것이다. 그때 끼무라가 거닐던 발걸음을 우뚝 멈췄다. "이께(가자)!" 한길수도 일어나면서 어리둥절해 했다. "어디로 간다는 겁니까?" 끼무라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문을 나섰다. "요 죄꼬만 저목장에 저렇게 많은 헌병대와 자위대원들을 재울 순 없잖은가?" 그제야 한길수는 한숨을 후- 길게 내쉬었다. 야마모도 소장의 낯에 겁기가 요란하게 스쳐지나갔다. "국장님, 저목장에 스무나문 명만 남겼다가 혹시 그 놈들이 쳐들어오면…" "우리 즉시 협공할 거네. 개울 하나 사이 두고 어린애처럼 겁나? 독립군은 우리 수가 많은 걸 알기에 서뿔리 쳐들어오지 못해. 흥!" "핫(옛)!" 끼무라는 한길수를 데리고 상대적으로 안전하다고 생각된 토성 안에 들어갔다. 병졸들은 병완이 네 집자리 삼림경찰파출소에 들어갔다. 그런데 끼무라는 한길수의 집이 잿더미로 된 광경을 보고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한 대장, 이후에는 술을 작작 마시게나. 이게 뭐요?" 그제야 한길수는 자기가 술에 취해 늘어졌을 때 상호 네가 불을 지른 일에 연상이 가자 머리를 툭 떨어뜨렸다. 끼무라는 덜 탄 몸채 안으로 신을 신은채로 들어가 성냥을 득 그어댔다. 그는 성냥가치에 피어오르는 반딧불만한 불빛을 빌어 여기저기 비춰보더니 몸을 돌렸다. “여기서 자지.” “여기서?” “비상시기니깐. 언제 비단이불을 덮고 기생을 끼고 잘 궁리를 하는가?” “그래도 그렇지. 내 나가보리다.” 한길수는 바깥에 나가자 사랑방으로 가보았다. 거기에는 은희와 철규를 묶어 가둬뒀던 방이어서 성칠이 네가 불을 달지 않아 타지 않았던 것이다. 길수는 몸채에 달려 들어갔다. “국장님, 저기 사랑방으로 갑시다.” 류강철이 통역하자 끼무라 국장은 두덜거리면서도 할 수 없이 따라 나섰다. 야밤삼경에 끼무라 국장과 한길수는 처음으로 돼지굴 같은 사랑방에서 누더기를 덮고 다리를 굽힌 채 새우잠을 잤다.                          8. 총도감의 묘수          이튿날 이른 아침 해가 뜨기 바쁘게 끼무라 국장은 야마모도를 불러들여 손가락 질 하면서 명령했다.          “저목장을 잘 지키게. 단 한번만 실수하면 총살할 테야!”         “하이!” 야마모도는 차렷 자세로 군례를 올린 후 허리를 굽히며 고개를 숙였다. 끼무라는 말을 타고 헌병들을 끌고 곧추 우시장을 바라고 꼬리 빳빳해 달아났다. 그제야 야마모도는 눈보라 속에서 멀어져가는 끼무라의 뒤 잔등을 바라보면서 두덜거렸다. “진작 함정을 파 독립군을 빠뜨릴 예산이면 우리에게 말할 게지. 쳇, 괜히 우리만 호랑이 같은 독립군을 낚는 미끼로 됐지 뭐야? 자기들은 안전지대로 달아나고 나보고 이 사경을 지키라고? 흥!” 삼림헌병들이나 경찰들이나 대부대가 떠나가자 모두 질겁해 저목장이나 림산파출소나 한걸음도 얼씬거리지 못했다. 한길수는 자위대원들을 끌고 앞 고개를 넘어 운주동을 향해 덮쳐갔다. 눈보라 속에 삼켜진 운주동 마을 북쪽어귀에 까마귀무리가  백양나무에 앉아 요란하게 울어댔다. 까욱 까욱! 마당에서 도끼로 나무를 패던 병완과 창준은 불길한 징조도 느끼지 못하고 애꿎은 통나무토막에 도끼질만 팡팡 했다. 이때 어지러운 말발굽소리가 요란하게 들리더니 마당 앞에서 말 호용소리가 울리었다. “독립군 우두머리 애비를 결박해!” 한길수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병완이 머리를 들어보니 한길수가 수무나문명이나 되는 자위대 놈들을 끌고 와서 고함치는 것이었다. 자위대 놈들이 우르르 쓸어와 병완을 묶으려고 했다. 병완은 도끼를 든 채 한길수를 쏘아보며 물었다. “무슨 짓인가?” 한길수는 불티가 튀는 외눈깔을 데굴데굴 굴리면서 지분거렸다. “아닌 보살하겠는가? 성칠 놈은 마을 사람들로 포수대를 무어가지고 날뛰더니 독립군으로 끌어갔어. 내 집에 불을 지르고 우리 헌병들과 자위대원들을 대여섯이나 살상했다. 이젠 잡아가도 되겠지? 흥!” 그는 눈보라 속에 입김을 씩씩 내뿜으면서 호통 쳤다. “내 네놈의 구족을 멸망시키지 않는가 봐라!” 자위대 놈들이 병완에게 덮쳐들어 결박했다. 그러나 병완은 몸부림도 치지 않고 순순히 포박 당했다. 병완의 성격과는 이상할 정도였다. “손을 떼라!” 이때 울타리 밖에서 갈범의  울부짖음 소리 같은 고함소리가 울렸다. 모두 머리를 들어보니 기준이 도끼를 쥐고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사실 기준은 아버지와 창준형님을 도와 나무를 패주려고 오는 길이였다. 그런데 자위대원들이 집에 들이닥친 것을 발견하고 황급히 달려 오는 길이였다. 고함소리를 듣고 최구장네 집식구들과 마을 사람들이 울바자 밖에 와서 웅성거렸다. 한길수는 삽작문 앞으로 다가오는 기준을 보더니 을러멨다. “잘 왔다. 저 놈도 포박해라!” 자위대원 대여섯이나 이리떼처럼 덮쳐들었다. 그러나 기준은 끄떡하지 않고 고함쳤다. “우리 부자가 네놈들을 도와 경찰국을 짓고 큰길을 닦았는데 무슨 죄가 있단 말이야?” 한길수는 말이발을 사려물고 냉소했다. “소보다도 우둔한 놈! 성칠이 지금 독립군에 들어가 마을 포수대를 무어가지고 우리 림산파출소를 치고 헌병과 우리 자위대원 대여섯을 다치게 했다. 네놈들의 구족을 멸해도 원수를 다 갚지 못한다. 내 토성 안 집도 다 타버렸다.” 기준은 도끼를 쥔 채 몸부림치면서 아버지 병완의 눈치를 보았다. 아버지가 손을 쓰면 합세해 몇 놈 쳐 눕히고 도망칠 수 있었다. “아버지, 그저 이렇게 잡혀 가겠습둥?” 그러나 병완은 허구한 웃음을 지으면서 대수로워 하지도 않았다. “사람의 명은 하늘이 정해준 거야.” 기준은 헐떡거리다가 한숨을 후 내쉬었다. 도끼로 몇 놈 찍어 넘긴다고 해도 포박당한 아버지께 해가 더해질 까봐 걱정됐다. 하여 손에서 도끼를 빼앗아내도 마지못해 그만두었다. 한길수는 득의양양해 병완의 아내와 성칠의 아내를 둘러보면서 을러멨다. “저년들도 포박해라!” 자위대원들이 욱 달려들었다. 창준의 아내 김수월과 맏아들 상훈이 그리고 맏며느리 리신옥이가 아우성쳤다. 수월이 나서서 한길수에게 두 손을 싹싹 비비면서 빌었다. “한 영감, 한 마을에서 오래 산 친분을 보더라도 제발 살려줍소.” 한길수는 코웃음 쳤다. “한 마을에 산 친분? 흥! 그래 친분이 있지. 네 시형은 우리 토성안집을 불태웠고 나를 잡아 죽이려고 눈에 쌍불을 켜고 미쳐 날뛰어. 배은망덕할 놈들이라고. 이 영월동과 운주동 골 안에 누구 덕에 와서 살면서. 흥! 길러준 개 발뒤축을 물어?! 쳇.” 그는 말 잔등에 올라타면서 고래고래 고함쳤다. “몽땅 끌고 가자!” 그때 최구장이 하얀 수염을 흩날리며 말 잔등 위의 한길수에게 사정했다. “공자 성인께서 가로사대 자기를 억제하여 예에 맞게 행동하라고 했네. 길수, 우리 사돈을 좀 놔주게나.” 길수는 말채찍으로 최구장을 가리키며 고래고래 고함쳤다. “어째 네놈도 잡혀가고 싶은가? 옛날부터 우리 조선 법에 한 놈이 죄를 지으면 팔촌까지 연루된다는 말이 있지비. 병완 영감네 성칠이란 녀석이 포수대하구 독립군 끌고 와서 영월동에서 우리 집을 불태워버렸어. 자위대원과 헌병을 대여섯이나 죽이고 총까지 빼앗아갔다. 생사결판에 누가 원수를 용서한대? 흥!” 길수는 말 배때를 발로 툭 차며 고함쳤다. “썩 피해. 이제 두 말 했다간 두상도 잡혀갈 줄 아오.” 그래도 최구장은 손을 들면서 한길수에게 뭐라고 사정얘기를 하자고 했다. 그러나 한길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채찍을 쥔 손을 앞으로 홱 저었다. “가자!” 자위대 놈들이 병완과 기준 등을 포박해 말 뒤꽁무니에 매 끌고 눈보라 속으로 바람결처럼 사라져갔다. 아낙네과 애들이 삽작문을 나서 동구 밖으로 따라가면서 아우성쳤다. 최구장은 사라져가는 병완이 쪽에서 눈길을 떼더니 머리를 절레절레 저면서 경숙과 경민에게 타일렀다. “저래서 공자 성인께서는 중용지도를 제창한 거야. 사람이란 너무 앞찔러 나갈 필요도 없고 너무 뒤떨어질 필요도 없단다. 중용지도를 지켜야지.  맞설 필요 없다. 두루두루 지내면 저렇게 잡혀가는 일도 없었겠는데 말이다. 쯧쯧쯧, 너희들은 꼭 명심해라. 일본 놈들과도 등진 일을 할 필요 없고 못 본 척 하면서 자기에게 차례진 밥이나 먹고 살아라.” 경숙과 경민은 머리를 끄덕였다. 그러나 울뚝불뚝한 넷째 경욱과 다섯째 경석은 툴툴거렸다. “저런 놈들에게 허리를 굽힐수록 더 업신여김을 당하는데도. 언제까지 허리를 굽혀야 합둥? 흥!” 해질녘에야 한길수 무리는 우시장경찰국에 이르렀다. 그들이 당도했다는 소식을 듣고 뜻밖에도 끼무라 국장은 대문 밖에까지 와서 영접했다. 낯에 독기가 서릴 대신 만면에 춘풍이었다. “오, 한 대장 왔는가? 참 수고했네.” 끼무라는 머리를 돌려 병완과 기준이네 일행을 보더니 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 이게 뭐야? 우리 총 도감을 결박해 모셔오다니? 당장 풀어주지 못할까? 왜  시키지도 않은 일을 했어?” 류강철의 통역을 듣고 한길수나 병완이네 부자나 모두 어안이 벙벙해 두리번거렸다. “뭘 하는가? 당장 풀어주지 못할까? 가족까지 모셔오다니? 우리 총도감을 이 지경으로 푸대접해서야 되겠는가?” “옛!” 자위대원들은 황급히 병완만 풀어주었다. 끼무라가 또 을러멨다. “몽땅 풀어주고 안방에 정중히 모셔라!”    뜻밖에 병완 일가의 결박을 몽땅 풀어주었다. 그러자 한길수는 어이없어 도리머리 질 하면서 끼무라 국장의 뒤를 따라가며 두덜거렸다. “아니, 끼 국장님, 이건 너무 합니다. 저 놈들은 철천지원수입니다.” “그만두지 못할까?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놈!” 끼무라 국장은 수갑을 벗어 바지에 묻은 눈가루를 툭툭 털더니 병완을 돌아다보며 구슬렸다. “총도감, 고생이 많았네. 사무실에 들어가 조용히 의논할 일이 있어 모셔오라고 했더니. 참.” 한길수가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면서 묻어 들어가려고 했다. 그런데 끼무라 국장이 장갑을 쥔 손을 밖으로 흔들면서 한길수를 막았다. “이이에(아니), 간상은 오지 마.” “예? 뭐랍니까?” 한길수는 자기 귀를 의심할 정도였다. “못 들었는가? 김병완 총도감과 단둘이서 의논할 일이 있네. 자넨 빨리 자위대원들을 보고 빈 칸에 불을 때고 밥과 안주를 갖춰 우리 총도감 일행을 상 대접할 준비나 하게나.” “예?!” 한길수는 그 말에 초풍 할만치 놀라 외눈깔이 데꾼 해졌다. 그는 병완을 데리고 이층으로 올라가는 끼무라의 뒤 잔등을 쳐다보면서 속으로 욕했다. (저 자식, 정신 나갔어? 얼빠진 놈, 누굴 믿고 살려는 거냐? 흥! 낮은 돌을 디뎌도 유분수지.) 한편 이층으로 올라간 끼무라는 병완에게 자기 앞 벽에 기댄 걸상에 자리를 권했다. 그는 한참이나 병완을 내려다보면서 속궁리를 굴렸다. (저 우둔한 놈 어디를 찌르면 순순히 우리 말을 들을까?) 하긴 끼무라가 경찰국 사무 청사를 지을 때부터 큰길을 닦을 때에 이르기까지 병완에게 총도감을 시키면서 얼려보았다. 그런데 병완은 삯전을 주지 않는다는 구실로 총도감을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갔다. 쓸모없게 됐다고 느낀 끼무라는 술책을 바꿔 야마모도 소장과 한길수를 시켜 병완의 집을 빼앗아 림산파출소를 들여앉혔고 그의 밭을 빼앗아 나무를 심게 했다. 살기 힘들게 핍박하면 허리를 굽히겠는가 했더니 다른 결과를 가져왔다. 먹고 살겠다고 사냥질하던 성칠의 사냥총을 뺏는 바람에 상우남면 영월동 부근에서 사냥대가 조직됐고 나중에 독립군에 흡수되지 않았는가! 저 놈들은 한길수의 집을 두 번이나 불태웠고 이번에는 헌병과 자위대를 여섯이나 살상하고 총 여섯 자루를 빼앗아갔다. (그래, 얼리고 닥쳐도 안 되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저 놈들이 중국 만주 청산리에서 독립군이 우리 황군을 참패를 시킨 일을 알고 독립군에 다 들어가면 큰 일이야. 몇 해 전부터 독립군 놈들은 국내에도 24차나 무장기습하지 않았는가? 절대 독립군에서 저런 힘장사를 끌어가게 할 순 없어. 미운 놈 떡 한개 더 주라는 조선 속담이 있지 않는가? 마지막으로 얼려보자.) 마음을 정하자 끼무라는 교활한 낯에 나오지 않는 웃음을 게 바르면서 무겁게 입을 열었다. “병완이, 난 지금도 천하장사인 당신을 흠상하네. 전번에 자넨 이 경찰국 사무 청사를 지을 때도 멋지게 했네. 길닦이에도 한몫 했고. 한길수는 안 돼. 채찍을 휘두를 줄 밖에 몰라. 자넨 참 아까운 사람이지. 우리 일본제국의 벼슬을 해보지 않겠는가? 집도 주고 쌀도 대주고 임금도 푼푼히 주겠소?” 병완은 경찰국 사무 청사가 눈을 감고 묵묵히 앉아 있다가 뜻밖의 말에 눈을 천천히 뜨고 끼무라를 쳐다보았다. (날 뭘로 보고 하는 소리야? 소나 말처럼 일하다가 굶어죽을지언정 네 놈의 수하가 돼 잘 살기를 바랄 것 같으냐?) 병완은 속으로는 욕하였지만 온 집 식구들의 목숨이 걸려있는지라 입 밖에 한마디도 번지지 못할 처지였다. “난 마지막으로 기회를 주는 거네. 권하는 술을 마시지 않고 벌주를 들겠는가?” 끼무라의 말에 류강철은 한마디 더 보태 통역했다. “마지막 기회오. 벼슬을 하면 좀 좋아서 그러오? 빨리 대답하오. 그래야 당신 온 집 식구들이 살아남을 수 있소. 한 고향 조선 사람으로서 진심으로 충고하오.” 병완은 한참이나 속궁리를 굴렸다. (야, 이게 망국노의 설음이구나. 내 조국이여, 말해다오. 내가 어찌해야 하는가?)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허나 방안에서는 끼무라와 병완의 사이에 보이지 않는 먹장구름이 몰려오고 번개가 번쩍였다. 들리지 않는 우레 소리가 하늘땅을 뒤흔들었다. 이때 이따금 대들보와 기둥 여기저기서 까드득 까드득 하는 소리가 들렸다. 병완이가 머리를 천천히 들었다. (이게 나무벌레가 대들보하구 기둥을 파먹는 소리가 아닌가? 조만간에 일이구나. 경찰국은 무너지겠구나.) 병완의 얼굴에는 희망의 빛이 뿜겨 나오고 있었다. 병완의 속내는 모르고 끼무라는 병완의 표정변화를 오해해 읽고 의자등받이에서 어깨를 슬그머니 떼고 사무 상에 팔굽을 대더니 물었다. “뜻을 정했는가?” 병완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래, 나에게 무슨 일을 시키자고 그러오?” 그 말을 통역 받은 끼무라는 아주 흡족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병완의 앞에까지 뚜벅뚜벅 다가와서 아주 진지한 표정을 짓더니 말했다. “자위대 부대장!” 끼무라는 병완이 만족해하겠는가 하였는데 천만뜻밖에도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왜? 관직이 낮은가?” 병완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럼 자위대 대장을 시키지.” 병완은 코웃음을 쳤다. “한길수는 어쩌고?” “난 자네와 한길수를 저울질하여보았네. 한길수는 재목이 아냐. 자초에 그를 선택한건 잘못이었네. 황차 한길수는 이젠 외눈깔박이 폐물 짝이 됐네.” 병완은 끼무라가 가소로워 “허허허.” 하고 허구한 웃음을 지었다. “알만합니다. 난 큰길닦이나 시키겠는가 했더니만.” 끼무라는 흡족한 표정을 짓더니 제자리에 가 천천히 앉으면서 말했다. “오, 이이에(아니), 큰 재목을 어찌 부지깽이로 쓰겠는가?” 그러나 병완은 완곡하게 거절했다. “내 맏아들은 독립군에 들어갔소다. 날 차라리 죽이십시오. 자위대 대장을 맡기다니. 말도 안 됩니다.” 끼무라는 의자에 앉은 채 앞뒤로 몸을 흔들거리더니 병완의 속을 꿰뚫어 볼 듯이 유심히 바라보았다. “성칠을 독립군에서 나와 대일본제국에 귀순하라고 권하게나. 그럼 난 성칠까지 용서하구 우리 자위대 중대장쯤은 시킬 테니.” 병완은 끼무라가 벼슬로 자기 깨끗한 마음을 유린하고 기를 꺾어놓자고 드는 것을 간파했다. “끼무라 국장님, 날 잘 모르는 것 같군요. 난 한뉘 농사나 짓고 나무 깎개질이나 하면서 살았습구마. 총칼을 휘두르면서 사람을 죽일 재료가 아닙꾸마. 자위대 대장이라니 당치도 않은 말을. 건 한길수 같은 자나 할 짓이지. 어질고도 어진 내가 어찌 하겠소?” 그러자 끼무라도 더 강권하지 않았다. 그는 병완이 같은 자도 가족의 죽음 앞에서는 기가 죽고 마는 자이구나고 생각하자 병완을 다스릴 새로운 방도가 눈앞에 가물거렸던 것이다. “좋네. 총칼을 휘두르지 못하겠다니 강권하지 않겠네. 대신 큰길닦이 총도감을 맡기겠네. 우시장 한길수 대장네 옆에 팔간기와집을 마련해놓았네. 여종에 머슴도 둘을 보내겠으니 복이나 누리게나. 기준이네와 창준이네 두 집 식구들은 집에 돌려보내겠네. 단 맏며느리를 자네 집에 두게나. 보초병까지 파견해 주야로 보위할거니 아주 안전할 거네. 황차 한길수대장도 옆에 있으니까.” 병완은 끼무라의 속심을 간파했다. (교활한 놈, 나와 며느리를 볼모로 잡아두고 성칠을 유인해 붙잡으려는 게구나. ) 끼무라는 자기 좋은 생각을 하면서 헌병들과 류강철을 시켜 병완 일가를 몽땅 한길수의 옆에 마련해놓은 기와집에 데려갔다. 아니, 그것은 감옥이 아닌 감옥에 압송된 것이었다.                                       9. 잠복        끼무라 대군과 접전하던 용천과 성칠은 진달래 등을 보낸 날밤에 이 지역 포수대 출신 독립군 병사들을 데리고 영월동 부근 수림에 잠복했던 것이다.       용천과 성칠은 한자두께나 된 굳은 눈 속에 구덩이를 파고 들어가 마른 나무 잎을 깔고 덮고 새우잠을 잤다. 그들은 이젠 눈구덩이에서 자는 것이 습관돼 그리 추운 감도 없었다.       수림 속에서는 눈보라가 무섭게 아우성치며 불어치며 눈가루를 흩날려 그들이 숨어들어간 눈구덩이를 판 흔적들을 메워주었다. 바깥에서 병수가 나무 우에 올라가 나무 가지를 가로 타고 앉아 보초섰다. 굳어진 눈을 얼핏 보아서는 그들을 발견할 수 없었다. 굳어진 눈구덩이에 주먹만큼 한 공기통을 뚫어놓아 숨도 막히지 않았다.        성칠은 언 주먹밥이나 누룽지로 때를 에우네 하였지만 배가 촐촐했다. 용천과 성칠은 두 눈구덩이 사이의 눈을 파내 구멍을 내고 서로 통화했다. 칠흑 같은 눈구덩이 안에서 용천은 성칠의 손을 굳게 잡으면서 말했다. “잠이 오지 않지?” “그래. 부모형제들과 마을 사람들이 근심되네. 림산파출소에 갇힌 은희가 놈들에게 능욕당할 걸 생각하니 잠이 오지 않네.” “근심하지 말게. 놈들이 도정신하는 초저녁에 자고 놈들이 굳잠에 곯아떨어졌을 때 신출귀몰하면서 가족들을 구해내고 놈들을 족칩세.” “좋은 전략전술이구먼.” 성칠은 독립군 중대장 용천은 농사군인 자기들과 다르긴 퍽 다르다고 속으로 못내 감탄했다. “일본 놈들이 조선을 먹어치우고도 간도까지 쳐들어갔다면서?” 성칠이 묻자 용천은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었다. “그래. 그 놈들은 우리 조선을 발판으로 삼아 중국 대륙까지 삼켜버리자고 하네.” “섬나라 오랑캐들, 욕심이 시꺼먼 구새통 같구먼.” “그래.” “중국은 나라도 큰데 그래 자그마한 섬나라 일본 놈들을 가만 놔둔단 말이요?” “지금 중국에서는 군벌내전을 하다나니 만주로 일본 놈들이 침입하는 걸 관계할 새 없어. 만주에는 장작림이라는 군벌이 있는데 일본 놈들과 꽤나 기 싸움을 하는 모양이네. 그의 아들 장학량은 더구나 일본 놈들과 생불을 켠다네. 그러나 아직은 정면충돌을 극력 피하고 있네.” 용천은 한숨을 후- 내쉬더니 뒤 말을 이었다. “일본 놈들이 중국 만주로 쳐들어갈 때 얼마나 묘한 수를 썼다고 그래. 1920년 10월 2일 새벽에 일본 놈들은 400여명이나 되는 한 무리 토비들을 추겨 두만강 하류에 자리 잡은 훈춘시내를 들이치게 했네. 그 통에 일본 영사관이 불타버리고 일본인 11명이 피살됐지. ‘훈춘사건’ 당일로 일본군은 만주 영사관과 일본 사람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구실로 경찰수비대를 선봉으로 만주에 침입하기 시작했어. 건데 중국 군벌들은 눈을 뻔히 뜨고서도 일본 군대가 들어가는 것도 구경만 했다네.” “별 머저리들을 다 보겠어.” “그래. 중국 군벌은 명철보신했지만 있자노. 우리 조선독립군은 일본군들을 좌시하지 않았네. 훈춘사건이 발생해서 일주일후네. 그러니까 아마 10월 9일일 거야. 일본 육군 대신 명의로 일본군은 조선독립군 사령부를 습격하라는 출병명령을 하달하였네. 간도에 침입한 동쪽지대는 17일 화룡현 청산리와 이도구 일대에 반일부대들이 집결해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선후하여 토벌대를 파견해 청산리일대 김좌진 장군의 부대를 추격하였지. 한 갈래 놈들은 또 이도구에서 남완루와 북완루라는 곳에 주둔한 홍범도 연합부대를 포위하였네. 그래서 우리 독립군에서는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토벌하러 온 일본 놈들을 매복 습격했네. 화룡현 삼도구와 이도구 일대에서는 백운평전투를 내놓고도 약수동전투, 완루구전투, 맹가구전투, 어랑촌전투, 고동하곡전투, 맹가구전투, 서구전투, 천보산전투까지 해 10여 차례 치열한 싸움을 벌렸어. 그때 나도 중대를 이끌고 그번 매복습격전투에 뛰어들어 싸웠네. 일본 놈들은 청산리전역에서 수백 명 살상당했어.  참패당했어. 우리 매복습격전투에 일본 놈들 대가리가 가을 호박밭의 호박처럼 널려 있었네. 얼마나 통쾌했는지 몰라.” 성칠은 용천의 손을 굳게 잡았다. "얼마나 통쾌했겠소. 우리도 언제 또다시 대부대를 이끌고 고향에서 일본 놈들을 통쾌하게 족치겠소.“           용천은 한숨을 푸- 내쉬었다. “근심하지 말게나. 꼭 일본 놈들을 통쾌하게 족칠 날이 올 거네. 우린 우시장일대 뿐만 아니라 경성군, 회령군 그리고 경주의 일본 놈들을 몽땅 몰아내야 하네. 장차 우리 모두의 고향에서 일본 놈들을 깡그리 몰아내자고. 우리 조국을 되찾는 그 날까지 싸워야 하네. 그래야 우리 조선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 편안히 행복하게 살 수 있네.” 성칠은 용천의 말을 듣고 이제껏 자기 부모형제와 고향사람들만 생각하고 자기 고향의 일본 놈들만 몰아내려고 한 자기 흉금이 얼마나 좁았는가 하는 것을 처음으로 느꼈다.       (용천도 일본 놈들이 욱실거리는 고향 경주에 큰아버지와 형제자매들을 두고 왔지. 용천이라고 그들을 근심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고향보다 더 큰 우리 모두의 고향에서 일본 놈들을 몰아내는 날을 위해 모든 걸 잊고 참으면서 싸우지 않는가?)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수림속의 눈구덩이에 누워있어도 앞으로 싸워나가야 할 길이 환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 난 자네를 따라 우리 고향, 아니, 우리 조국에서 일본 놈들을 몰아내고 조국을 찾는 그날까지 싸우겠네.” “고맙네. 암, 그래야지.” 용천은 성칠의 손을 굳게 잡았다. 이때 눈구덩이 옆에서 나무잎을 파헤치는 바스락바스락 소리가 났다. 아마 다람쥐들인 것 같았다. 밤중이 되여 눈보라가 더 기승을 부렸다. “이젠 놈들이 곯아떨어졌을 거네.” 성칠은 용천의 이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눈구덩이에서 벌떡 일어나 눈을 툭툭 털었다. 칠백과 동욱도 뒤이어 눈구덩이에서 나왔다. 병수도 망을 보다가 나무 가지에서 뛰어내렸다. 용천은 성칠을 돌아보면서 나직이 물었다. “먼저 운주동에 자네 집식구들 쪽으로 갈가?” 그러나 성칠은 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먼저 덕팔의 처와 은희를 먼저 구하기오. 상호시체부터 눈에라도 묻어주고.” 용천은 허리춤에서 권총을 빼들고 손을 저었다. “먼저 덕팔의 처부터 빼내기요.” 이리하여 그들은 수림속의 어둠을 빌어 영월동에로 접근해갔다. 용천의 지휘아래 그들은 영월동 서쪽 수림에 이르러 눈 위에 납작 엎드렸다. 찬찬히 살펴보니 저목장과 성칠의 집 자리에 있는 림산파출소에는 광솔 불과 모닥불이 대낮같이 환한데 헌병들과 자위대원들이 삼엄하게 보초를 서고 있었다. 그런데 어떤 보초병 놈들은 아예 쭈크리고 앉아 꺼떡꺼떡 자불고 있었다. 성칠은 용천의 귓속말대로 덕팔과 함께 덕팔이네 집으로 접근해갔다. 사위를 둘러보니 숨 막힐 듯 조용하고 아무런 인기척도 없었다. 덕팔은 울바자를 조심스레 헤치고 구새 목으로 다가갔다. 그는 벽에 붙어 서서 슬금슬금 고방 문으로 다가가 문고리를 당겨 보았다. 안으로 노끈으로 매 걸어 놓았다. 바스락! 덕팔은 숨을 딱 죽이고 주위를 살펴보았다. 5미터 뒤에 성칠이 울바자 옆에 붙어 서있었다. 쥐 새끼 놀라 울바자 안에서 쪼르르 달아났다. 성칠과 덕팔은 서로 마주보고 나서 머리를 끄덕였다. 덕팔은 창호지를 손가락으로 구멍 내고 손을 넣어 노끈을 풀었다.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고방문을 스르르 열고 들어가자 아내가 기침을 쿨룩거리면서 일어났다. “누구야?” “나요, 나.” 어둠 속에서 필순은 덕팔에게 다가와 찬 몸에 기대서 흐느꼈다. “이게 꿈이 아닌가요? 낮에도 자위대 놈들이 우리 집에 왔다 갔어요. 남정네가 잘못 됐나 했어요.” “그래, 난 무사하오. 길게 말할 새 없소. 빨리 날 따라 만주로 가기요.” 그 소리에 놀란 필순은 덕팔의 품에서 머리를 떼더니 “어디로 간다고 그래?” 하고 물었다. 그 소리에 점순도 깨나 “아버지!” 하고 부르면서 조용히 일어나 덕팔의 손을 잡았다. 덕팔은 필순과 점순의 손을 잡아 고방문 쪽으로 끌면서 말했다. “길게 말할 새 없소. 빨리 만주로 가자.” “그 낯선 만주로 간다고? 난 안가. 죽으면 죽었지 어데로 가?” “여기 있으면 일본 놈들에 죽어.” 점순마저 몸을 탈며 끼어들었다. “죽긴? 지금까지 멀쩡한데도.” 필순과 점순이 가지 않으려고 하는 걸 덕팔은 한손에 하나씩 끌다 싶이 고방 문까지 갔다. “지금 놈들은 당신 모녀를 미끼로 나를 붙잡으려고 잠시 놔둔 거야. 은희랑 상호 때문에 지금도 갇혀 갖은 능욕을 다 당해.” 그제야  필순은 정신이 펄쩍 들었다. “그래?”  그는 점순에게 “아버지를 따라 가자!” 하고 마구 끌고 따라나섰다. “우메, 사냥은 무슨 사냥한다고 그래? 괜히 일본사람들 비위를 거슬려놔 고향서두 살지 못함매.” “빨리 가자! 잔말 말고.” 덕팔이 필순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잠간! 저기 궤안의 걸 가지고 갔제이.” “또 뭐야?” “이 고방 까래 밑에 둔 걸 잊었어요?” 필순은 덕팔의 귀에 대고 귀속 말을 했다. “병완 아주버니가 준 금덩이.” “오, 깜빡 잊었군.” 덕팔은 까래를 훌 들고 구석에 천으로 싼 성냥 곽만 한 금덩이를 척 주어 호주머니에 넣었다. 성칠은 주위를 면밀히 감시하다가 덕팔이가 필순과 점순이를 데리고 나오는 것을 보고 뒤로 돌아서서 용천 쪽을 뒤돌아보았다. 용천은 한 30미터 떨어진 동욱의 집 쪽에 숨어 이쪽 동향을 살피였다. 그들은 이쪽에서 이변이 생기면 엄호하면서 접응하기로 하였던 것이다. 이윽고 덕팔과 성칠이가 필순을 데리고 다가왔다. 그런데 필순은 기침을 콜록콜록 하며 야단났다. “기침을 작작 해라. 놈들이 듣겠소.” 필순은 성칠과 용천을 쳐다보더니 손으로 입을 싸쥐었다. 그래도 기침은 계속 나와 나직이 콜록거렸다. 성칠은 필순을 구출하자 한시름 놓았다. 그는 자기가 포수대를 조직하였기에 상호네 일가가 피해를 입은 것 같아 마음이 아픈데다가 또 다른 집에 피해를 줄까봐 여간 속이 타지 않았다. 용천은 성칠과 함께 그들을 이끌고 영월동 서산에 올라 수림속 으로 사라졌다. 안전한 지대에까지 가자 용천은 덕팔을 돌아보면서 나직이 말했다. “덕팔 형님은 처자를 데리고 수림 속에 숨어있어요." 뒤이어 성칠과 바위돌을 돌아다보면서 말했다. “우린 은희를 구출합세.” 그리하여 덕팔은 필순과 점순을 데리고 밤중까지 숨었던 수림 속에 가서 눈구덩이를 파고 숨어 있었다. 거기에는 병수가 서성거리면서 보초를 서고 있었다. 산바람이 무섭게 아우성치면서 불어쳐 눈보라가 휘몰아쳐 눈구덩이를 삼켜버렸다. 한편 덕팔 등을 보낸 후 용천은 성칠과 동욱, 바우돌을 데리고 은희가 갇힌 성칠의 집 자리를 향해 조심스레 접근해갔다. 왕 왕 왕! 갑자기 성칠의 집 서쪽 수림에서 개가 요란스레 짖어댔다. “엎드렷!” 용천은 손을 홱 젓더니 눈 우에 살짝 엎드렸다. 모두들 따라 엎드리면서 성칠이네 집 쪽으로 총을 겨냥하면서 동향을 살폈다. 바깥에서 서성거리던 자위대 놈들이 우뚝 멈춰서더니 우뚝 멈춰서 수림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이때 성칠은 호주머니에서 주먹밥 하나를 꺼내 누렁이에게 던졌다. 검둥이를 데리고 다니면서 사냥에 미립이 튼 그는 개를 얼릴 줄 알았다. 개들은 왕왕 짖으면서 달려와 주먹밥을 둘러싸고 꼬리를 젖더니 짖어대지 않았다. “뭐야? 분명 사냥개 짖었잖았느냐?” 이쪽을 기웃거리던 보초병 놈이 중얼거렸다. “아무것도 보이잖아. 괜히 산짐승이 뛰여다니는 소리에 놀란 거 같아." 집 안에서 우두머린 것 같은 놈이 뛰어나와 권총을 뽑아 휘두르면서 물었다. “무슨 일이냐?” “아무 일도 없소. 이 자식이 제 방귀에 놀라서.” “뭐 분명 사냥개 누렁이들이 짖었댔는데. 꼬리를 흔들면서 뭘 먹는 거 같소.” 그러자 우두머리도 이쪽 개들이 모인 곳을 두리번거리더니 을러멨다. “개미 하나 얼씬 해도 저목장과 저 아래 토성 안 알리라 했네. 그래야 야마모도 소장과 끼무라 국장이 대부대를 인차 파견해 우릴 구하지.”        용천은 팔꿈치로 옆에 엎드린 성칠의 팔을 슬쩍 건드리더니 손을 성칠의 귀에 대고 귀속 말을 했다.        “끼무라 놈과 야마모도 놈의 대부대가 아직 저목장과 토성안집에 있네. 서뿔리 건드렸다간 봉변을 당하기 십상이네. 철거했다가 내일 밤에 다시 봅세.”        성칠은 머리를 끄덕였다. 그들은 눈 우에서 몸을 일으켜 허리를 굽히고 수림 속으로 철거했다.       뒤에서는 또다시 누렁이들이 왕왕 짖어댔다.  
38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17) 댓글:  조회:1618  추천:0  2015-09-25
                  4. 오누이를 고문        이튿날아침. 차디찬 겨울해가 눈 덮인 영월동을 싸늘하게 비추었다. 삼림경찰주재파출소로 쓰는 성칠이네 집과 그 서쪽 산기슭에 자리 잡은 저목장에는 눈보라가 사납게 휘몰아쳤다.        가시철망을 두른 저목장은 눈보라 속에서 무서운 비명을 앵-앵 지르고 있었다. 망루와 대문에는 일본 헌병들이 총창을 비껴들고 보초를 서고 있었고 사냥개 누렁이가 귀를 뻘쭉하고 사처를 두리번거렸다. 저목장 안에는 아름드리통나무들이 눈을 들쓰고 쓰러져 있었고 시체 같은 통나무 무지들 가운데 통나무로 지은 보초막이 들어앉아 있었다. 이쪽 성칠이네 집에서는 화로 안에서 불이 이글이글 타 번지고 윤디가 벌겋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검정가죽장화를 신은 야마모도 소장과 한길수 자위대장이 영팔과 가메다 등 숱한 졸개들을 데리고 상호를 묶어놓고 심문했다. 상호의 눈에서는 분노의 불길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길수는 말 상판에 말 이발을 사려 물고 악에 받쳐 고함쳤다. “이 놈아! 네 놈들 몇 해 전에도 우리 집에 불을 싸질렀지? 이번에 독립군이 몇 놈이 왔냐?” 상호는 침을 퉤 뱉을 뿐이다. “성칠을 따라 포수대에 들어가더니 꼴 보기 좋다. 이런 끝장이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지?” 길수는 독기어린 우먹눈을 부라리면서 이리처럼 으르렁거렸다. “얘들아, 채찍으로 호되게 후려갈겨라! 가죽을 벗겨놔야 탄백할 거야!” 영팔이 채찍을 물통에 넣어 휘저어 들고 상호한테 다가가더니 이를 악물고 짱짱 사정없이 후려갈겼다. 짱! 짱! 상호는 이를 악물고 신음소리를 냈다. 상호의 팔이고 얼굴이고 굴 뱀이 쭉쭉 갔고 목의 살가죽이 뜯기어 터졌다. “말해! 성칠이랑 그 놈들 몽땅 어데 있어?! 독립군 몇 놈이 왔는가? 네 놈들이 이번 출마목적은 무엇이냐?” 그러나 상호는 이를 악물고 아픔을 참으면서도 한마디도 대꾸하지 않았다. 나중에 상호는 까무러치더니 머리를 툭 떨어뜨렸다. “그만!” 야마모도가 흰 장갑을 낀 손을 들었다. “더 치면 죽었소까. 저 놈에게서 꼭 독립군 놈들의 행방을 알아내야 했소.” 영팔은 자위대원 놈을 시켜 바가지에 찬물을 퍼서 상호의 얼굴에 퍼 치게 했다. 그래도 상호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한참 후에야 상호는 간신히 정신을 차리더니 숙였던 머리를 천천히 드는 것이었다. 한길수는 또 고래고래 고함쳤다. “말햇! 네 놈들이 그간 어데 있었는가? 독립군은 지금 어데 있는가?” 한길수가 다가와서 줄 질문했다. “여기 온 목적 뭐냐? 모두 몇이 왔는가?” 허나 상호는 입에 빗장을 지른 채 한길수를 무섭게 쏘아볼 뿐이었다. 야마모도 소장이 음흉한 눈길로 상호를 쏘아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왔다. “네 놈 말이 안 해 죽어, 죽었소. 네 놈들 몇 해 전에 저목장과 한 대장 집을 불태웠다. 내 소장 철직 당했다. 네 놈들을 천만번 죽여도 시원찮겠쏘다.” 그는 상호의 피 흘리는 턱을 쳐들고 윽박질렀다. “말해! 독립군 어데 있쏘까?” 상호가 희죽이 웃으면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 놈들을 우리 고향에서 몰아내려고 천병이 내려왔다. 퉤!” 야마모도 소장은 흰 장갑을 낀 손으로 낯에 묻은 침을 쓱 닦았다. 악에 치받쳐 이빨을 사려물며 뒤로 몇 발자국 물러서면서 군도를 쓱 뽑아들었다. “죽어, 죽었소.” 군도가 반원을 그으면서 날아 내려왔다. 그런데 군도는 상호를 묶어놓은 나무기둥을 탁 찍었다. 상호의 머리 위에 군도가 들이박히면서 부르릉 무서운 비명소리를 냈다. “이 놈을 지져라!" 야마모도의 추상 같은 명령이 떨어졌다. 영팔은 화로 불에서 뻘겋게 단 쇠갈고리로 상호의 가슴을 뿌지직 지졌다. 살이 타는 매캐한 냄새와 함께 연기가 피어올랐다. 상호는 반사적으로 "으윽" 소리치며 고개를 몇 번 위로 재끼다가 아래로 툭 떨어뜨리며 까무러쳤다. “물을 쳐!” 영팔이가 또 바가지로 물을 퍼 다가 상호의 낯에 쳤다. 상호가 머리를 들었을 때에는 맞은 켠 벽에 머리를 풀어헤친 채 꽁꽁 묶이어 달아맨 은희가 어슴푸레 보였다. 야마모도는 상호 앞에서 목을 자르는 손시늉을 해보이면서 지분거렸다. “은희가 맞아대는 걸 보겠소까? 독립군 몇이 왔는가 말이 했쏘까?" 상호가 머리를 천천히 들었다. 은희는 이미 맞아 입술이 터져 피 흘렀고 얼굴에도 손자리 나있었다. “어떤가? 말하겠는가? 이번에 독립군 몇이 왔어? 말하지 않으면 은희를 윤간하고 죽여 버릴 테야.” 은희는 증오의 빛이 번쩍이는 눈길로 짐승 같은 영팔을 쏘아보았다. 상호는 영팔을 부릅뜬 눈길로 쏘아보면서 욕했다.  "넌  한 고향 사람인데. 왜 저 일본 사람들을 돕는가? 언젠가는 우리 마을 사람들에게 맞아 죽고 말게다.” “흥!” 영팔은 대수롭잖게 콧방귀를 뀌였다. “네깐 놈들에게 쉽게 죽을 자위대 중대장이 아니야. 네놈들은 대일본제국에서 사냥하지 말라는데 사냥해 죄를 자청해 저질렀다. 성칠을 따라 독립군에 들어갔지. 탄백하지 않으면 살려 둘 것 같아? 말해! 몇이 왔니?” 그러나 상호는 더욱 기세 사납게 말했다. “이제 우리 대부대가 와서 네 놈들을 몽땅 천당으로 보내주지 않는가 봐라! 네 놈을 절대 용서하지 않을 테다!” 야마모도는 하얀 장갑을 낀 손을 쳐들었다. “그저 물어서야 어디 말하겠는가?” 뒤이어 은희한테 어슬렁어슬렁 다가가더니 은희의 머리를 틀어쥐고 왼손가락으로 은희의 입술을 집어 비틀었다. “이년을 윤디로 지져!” “하이!” 일본 헌병 가메다 놈이 털 한 모숨을 쓱 문지르더니 화로 불에서 시뻘건 쇠갈고리를 뽑아들고 다가섰다. “나니오(어데를)?” “무네(가슴)!” “하이!” 가메다는 은희의 저고리를 와락와락 벌리고 하얀 젖가슴을 뻘건 쇠갈고리로 지졌다. 찌-직 은희의 가슴에서 하얀 연기가 타래 쳐 올랐다. 은희는 죽어가는 비명소리를 질렀다. “닥쳐! 이 짐승 같은 놈들아. 날 지져라!” 야마모도는 숨을 헐떡거리며 고통스레 얼굴을 찡그리는 상호를 보고 깨 고소해 했다. “그만!” 그는 교활한 웃음을 지으면서 은희 곁에서 상호한테로 다가왔다. “그래도 말하지 않겠냐? 네 놈이 말하지 않으면 은희가 어떻게 될지 몰라.” 그때 은희가 머리를 쳐들더니 흐트러진 머릿 속 다 터진 입술을 감빨더니 겨우 말했다. “오빠야, 말해도 죽인다.” “가시나 새끼, 죽어 봐라!” 야마모도는 꽥 고함치더니 뒤에 가메다에게 손짓했다. “저년을 강간해!” 가메다는 은희에게 덮쳐들어 치마를 훌렁 벗겼다. 속옷도 마구 벗겨 버리고 괴춤을 깠다. 야마모도는 음충한 눈길로 은희와 상호를 번갈아보면서 누런 이발이 드러나게 징글스레 웃었다. 가메다는 짐슴처럼 은희의 뒤로 달려들어 하신에 쇠꼬챙이 같은 그것을 박아 넣고 하신을 미친 듯이 흔들었다. 은희는 비명을 지르더니 발길질하면서 단말마적으로 발악했다. 그때 상호는 머리를 숙이고 뭔가 생각하더니 머리를 천천히 들었다. “닥쳐!” 그 소리에 야마모도가 가메다에게 손을 쳐들어 제지했다. 가메다는 몇 번 더 요동치다가 아쉬운 대로 그만 뒀다. “그래, 말하겠냐?” 상호는 머리를 끄덕였다. “은희를 풀어놔라. 그래야 말하겠다.” 야마모도는 털 한 모숨이 가메다의 귀에 대고 뭐라고 일본 말로 쑤군거렸다. 털 한 모숨은  아쉬운 대로  은희를 놔두고 괴춤을 춰 입었다. 은희의 허벅다리에서는 뻘건 피가 주르르 흘러내렸다. 털 한 모숨은 은희를 묶은 바 줄을 슬슬 풀어 문 밖으로 떠밀었다. 은희는 절룩거리면서 겨우 심문 실에서 나가며 상호를 뒤돌아보았다. “죽어도 절대 말해선 안 돼.” “이년, 주둥이를 다물지 못 할까?" 가메다는 은희의 뒤 잔등을 바깥으로 떠밀었다. 은희가 문밖에 나가자 영팔은 상호에게 물었다. “그래, 어서 말해봐! 독립군 몇이 왔는가? 그 놈들은 어데 있는가? 응?” “여기 오오.” 영팔은 상호에게 다가가 귀를 들이댔다. “말해 봐!” 상호는 가슴을 뻗치고 우렁우렁하게 말했다. “독립군이 한 오백여명 왔다. 먼저 네 놈 같은 일본 앞잡이들부터 작두로 목을 썩 베 버릴 예산이야!” “뭐 어쩌고 어째?” 영팔은 목을 움츠리더니 채찍으로 상호를 짱 내리쳤다. “그만!” 야마모도가 류강철의 통역을 듣고 손을 쳐들어 제지하더니 다가왔다. “좋아, 그래 언제 여길 치는가?” 그러자 상호가 야마모도에게 말할 것처럼 입을 내밀어 오물오물했다. 야마모도는 상호의 앞으로 다가가 귀를 들이댔다. “퉤! 이 썩어질 놈아!” 상호는 야마모도의 귀구멍에 피비린 침을 퉤 뱉으면서 발길을 날려 야마모도의 다리 사타구니를 탁 걷어찼다. “억! 산다마야(불알이야)!” 야마모도는 사타구니를 싸쥐고 뒤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 놈은 너무 아파 오만상을 찡그리면서 대굴대굴 굴렀다. 상호는 불길이 이글거리는 눈길로 놈들을 둘러보면서 욕설을 마구 퍼부었다. “이 놈들아, 네 놈들은 우리 고향에 둥지를 틀고 앉아서 밭에 곡식도 심지 못하게 하고 사냥도 하지 못하게 하지 않았는가? 우릴 못살게 굴던 놈들아, 독립군들은 네 놈들을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다!” 야마모도는 성난 사자처럼 펄펄 날뛰는 상호를 보고 질겁해 뒤로 엉덩이 걸음을 치다가 벌떡 일어났다. 그 놈은 군도를 쓱 빼들더니 상호에게 덮쳐들어 팔을 탁 내리찍었다. “앗!” 상호의 왼팔이 썩 뚝 잘리어 땅바닥에 떨어졌다. 잘려 나간 손가락이 땅바닥에서 바들바들 떨었다. 상호는 까무러치고 남은 왼팔에서 피가 쌕 소리를 내면서 뿜겼다. “저 놈들을 끌어내다 총살해버려!” “하이!” 영팔은 까무러친 상호의 머리를 툭툭 건드렸다. 상호가 조금 움직거렸다. 이때 정지에서 은희가 단말마적으로 발악하는 소리에 뒤이어 비명소리가 들렸다. 야마모도가 군도를 잡고 뛰어가 문을 열고 들여다보니 야욕이 발작한 가메다가 한창 은희를 깔고 들어앉아 강간하고 있었다. “콕칙쇼(닥쳣)!” 야마모도는 우에 깔고 누운 가메다를 마구 떠밀어냈다. 대신 자기가 괴춤을 까고 눈물범벅, 피범벅이 된 은희를 깔고 들어앉았다. 정지에서는 은희의 애처로운 통곡소리와 욕설이 울려 퍼졌다. 영팔은 대개 정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다는 것을 짐작하고 마른 침을 꼴깍 삼켰다. 그는 상호를 형틀에 달아맨 피 묻은 바 줄을 풀어내면서 지껄여댔다. “성칠 놈을 따라 독립군에 가더니 잘 됐다. 은희는 일본 황군에게 윤간당하고 있어.” “개놈들, 제 명에 죽는가 봐라!” 상호는 격노해 입술을 깨물었다. 두 줄기 피가 입술에서 흘러내렸다. 입안에서는 이를 뿌드득뿌드득 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바깥에서는 눈보라가 무섭게 휘몰아쳤다. 상호는 눈 덮인 서산 수림 속에 끌려가면서 뒤돌아보니 은희도 정지에서 끌려 나가고 있었다. 은희의 흩날리는 머리카락에 듬성듬성 북데기가 묻어 있었다. 헤어진 허연 치마에는 뻘건 피가 얼룩덜룩하고 허벅다리와 종아리에는 아직도 뻘건 피가 흐르고 있었다.” 은희는 머리를 돌려 상호를 보며 절룩거리면서 사형장에 끌려 나갔다. 그녀는 수림 속에서 피뜩 나무 뒤에 숨는 검둥이를 발견했다. 가만히 눈길을 주어 수림 속을 여기저기 살피었다. (혹시 성칠 오빠가 오지 않았을까? 오빠는 절대 우리 오누이를 버리고 달아나지 않았을 거야.) 은희는 샘물터를 지나면서 며칠 전에 성칠 오빠와 상호 오빠를 만나던 생각을 하니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려 두 볼을 뜨겁게 적시였다. (이팔청춘 꽃나이에 성칠 오빠의 사랑을 받아보지도 못하고 저세상에 가야 하는 건가?) 은희는 흐릿한 하늘을 쳐다보면서 속으로 울부짖었다. (야속하다, 야속해. 저주로운 이 세상에 생벼락이 내려라!) 5. 사형장을 습격        은희와 상호는 어느덧 하늘을 찌르는 적송들이 꽉 들어선 산골짜기 막바지까지 끌리어갔다. 드문드문 나무그루터기가 보이었다.       야마모도는 하얀 장갑을 낀 손으로 군도자루를 잡더니 상호 앞으로 쓱 나섰다.       “이제라도 늦지 않아. 말해, 독립군 지금 어데 있쏘까?”       “카악, 퉤!”       상호는 피 묻은 가래를 아먀모도 놈의 낯에 뱉었다.       “빠까모노! 죽어, 죽었쏘다!”       야마모도는 군도를 빼들어 상호의 목을 탁 쳤다. 그런데 상호가 키를 낮추자 옆에서 상호를 붙잡고 섰던 자위대원의 팔이 썩뚝 잘려나갔다. “아이고!” 자위대원이 눈 바닥에 쓰러져 대굴대굴 굴렀다. 야마모도가 재차 군도를 쳐드는데 영팔이 말리면서 오도도한 바 줄을 쳐들었다. “소장님, 이 놈을 쉽게 죽게 할 게 있습니까? 목 매달아 죽입시다.헤헤헤.” 류강철이 통역하자 야마모도는 군도를 내리고 목을 매달라고 손으로 아름드리소나무의 가로 질러 뻗은 적송 나무 가지를 가리켰다. 영팔과 가메다는 오른팔 밖에 남지 않은 상호를 밀고 닥치며 소나무 밑으로 갔다. 상호는 목에 올가미가 걸리자 흐릿한 눈길로 눈보라 속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오빠-” “오빠-” 하고 우는 은희를 바라보았다. 상호는 가슴을 쑥 내밀고 고함쳤다. “조선독립 만세!” “섬나라 오랑캐 놈들을 몰아내자!” 야마모도가 손을 홱 휘두르자 올가미가 상호의 목을 달고 쑥 올라갔다. 버둥거리는 상호를 보면서 헌병들과 자위대원 놈들이 악착스럽게 웃어댔다. 영팔이 야마모도에게 은희의 목도 올가미에 걸자고 했다. 야마모도가 손을 저으며 도리머리 질 했다. “아니야, 우리 황군이 저 년을 데리고 놀면 좀 좋아. 또 미끼로 가둬두면 독립군을 낚을 수도 있어!” 영팔이 머리를 끄덕이고 가메다는 야욕에 찬 눈길로 은희의 몸을 노렸다. 이때다. 쒹- 어디선가 비수가 날아왔다. 상호를 달아맨 올가미가 뚝 끊어졌다. 상호가 나무 가지에서 툭 떨어졌다. 야마모도는 권총을 빼들고 여기저기 살폈다. 쒹- 이번에는 돌멩이가 날아와 야마모도의 권총을 쥔 손을 딱 쳤다. 진달래가 달려오면서 돌팔매질을 했다. 자위대원들은 이마빼기나 낯을 맞고 머리를 싸쥐고 황급히 도망쳤다. 독립군 병사들이 용천 중대장과 진달래의 지휘 하에 사냥총으로 사격하면서 돌격해왔다. 소나무가 눈보라에 몸부림치고 사처에서 푱 푱! 총알이 죽음의 노래를 불렀다. 여기저기서 비명소리가 요란스러웠다. 용천 중대장이 손을 홱 휘두르며 골짜기가 떠나갈듯이 고함쳤다. “일 소대 좌측으로! 이 소대 우측으로 포위하라!” 성칠도 노한 사자 같이 권총을 휘두르며 한패의 병사들을 이끌고 골짜기 아래로 짓쳐 내려왔다. 병사들 속에 영월동의 동욱과 칠백, 덕팔도 사냥총을 쏘면서 덮쳐드는 것이 피뜩피뜩 보이었다. 그런데 포수대 출신의 병사들은 금방 독립군에 들어가 총을 쓰는데 습관되지 않아 총을 쓸 궁리는 하지 않고 급한 나머지 총대를 몽둥이처럼 휘둘렀다. 야마모도가 어정쩡해 서 있는데 검둥이가 성난 표범처럼 야마모도에게 덮쳐들었다. 야마모도는 그제야 군도를 휘둘러 검둥이를 비껴 쳤다. 검둥이가 옆으로 슬쩍 피하더니 다시 덮쳐들어 야마모도의 종아리를 꽉 깨물었다. “아이쿠!” 야마모도는 비명을 지르며 군도를 달라당 떨어뜨렸다. 그 놈은 발길을 날려 검둥이를 걷어찼다. “도쯔께끼(돌격)!” 야마모도는 개에게 물려 피가 질벅한 손으로 권총을 뽑아 검둥이를 탕! 쏘았다. 검둥이는 “깨갱!” 비명소리를 치며 번개같이 아름드리소나무 뒤에 뛰어 들어갔다. 총알이 아름드리소나무에 박혀 소나무껍질이 튕겨 눈 바닥에 흩날려 떨어졌다. 스무나문 명 밖에 안 되는 헌병놈들과 자위대원들은 질겁해 뿔뿔이 흩어져 골짜기 아래로 도망쳤다. 야마모도는 대세가 기운 것을 보고 허리를 구부정하고 아름드리소나무에 기대여 사격하면서 허둥지둥 철퇴했다. 영팔과 가메다는 은희를 끌고 골짜기 아래로 냅다 뛰었다. 그들의 앞뒤에 총알이 날아와 눈 꼬치를 튕겼다. 성칠은 소나무숲 속에서 눈 바닥에 쓰러진 상호를 안아 일으켰다. “상호야! 상호!” 그러나 상호는 부릅뜬 눈으로 한곳을 응시한 채 아무런 대답도 영영 없었다. 왼팔이 절반이나 잘리어나간 상호를 보고 성칠은 흠칠 놀랐다. 코마루가 시큼해난 성칠은 상호의 코에 손을 대보았다. 그러나 상호는 숨이 없었다. 가슴에 얼굴을 대보니 이미 심장도 박동을 멈추었던 것이다. “상호야! 내가 너를 죽였구나. 어허, 헉, 헉, 헉!” 성칠이 상호를 붙안고 흔들면서 대성통곡 칠 때였다. 용천이 권총을 빼들고 뛰어오면서 소리쳤다. “이럴 새 없어. 놈들을 추격해라!” 성칠은 상호를 눈 바닥에 내려놓고 악이 치받쳐 이를 뿌드득 갈며 일어섰다. “이 놈들아! 어디 죽어봐라!” 성칠이 모젤권총을 빼드는데 갑자기 뒤에서 무슨 소리가 나며 살기가 느껴졌다. 용천과 성칠이 뒤로 몸을 홱 돌리는 순간 헌병 두 놈이 총창을 비껴들고 덮쳐들었다. 성칠이 권총을 쏠 새도 없이 총창이 날아 들어왔다. 성칠은 몸을 옆으로 틀면서 옆구리에 찔러 들어 온 총창을 왼손으로 거머쥐고 권총으로 대가리를 내리깠다. 그새 다른 놈이 용천을 총창으로 푹 찔렀다. 룡천이 권총을 든 손으로 막았다. 그러나 총창이 팔을 빗 찔러 나갔다. 그 놈이 재차 찌르려고 할 때였다. 검둥이가 씽 날아오면서 헌병 놈의 대가리를 앞발로 차며 코를 물어뜯었다. “앗! 이다이(아파라)!” 헌병 놈은 한손으로 낯을 싸안고 뺑뺑 맴돌았다. 헌병 놈은 한손으로 총창을 들어 재차 달려드는 검둥이를 찔렀다. 검둥이는 허벅다리를 푹 찔리었다. “깨갱!” 검둥이는 다리를 찔리어 어정어정 도망쳤다. 일본 놈이 도망치자 검둥이는 재차 덮쳐들었다. 용천은 수림 속으로 도망치는 헌병 놈에게 권총을 겨누고 방아쇠를 당겼다. 땅! 그 일본 놈은 보기 좋게 푹 꼬꾸라졌다. 독립군 병사들이 헌병들과 자위대원 놈들을 추격해 저목장부근까지 이르렀다. 동욱은 철천지원수 야마모도 놈만 노리고 추격했다. 그러나 다른 헌병 놈들이 닫다가도 돌아서면서 맹렬히 사격하는 바람에 붙잡지 못했다. 야마모도는 저목장에 채 들어가지 못한 놈들을 돌볼 새 없이 대문을 닫아 걸어 버렸다. 용천은 대문 쪽으로 달려가는 헌병 놈을 쫓아갔다. 그런데 권총 탄창에 탄알이 비어 있었다. 용천은 뒤에서 몸을 날려 덮치면서 권총으로 대갈통을 내리깠다. 순간 그 놈은 잽싸게 허리를 굽히며 피했다. 그 놈은 돌아서면서 용천의 멱살을 틀어쥐고 태를 쳤다. 불의의 역습에 용천은 저만치 뿌리어나가 엎어졌다. 용천은 그 놈이 유도를 하는 놈이라는 것을 눈치 챘다. 그 놈이 총창을 비껴들고 용천에게 재차 덮쳐들 때였다. 갑자기 딱! 소리와 함께 그 놈이 대갈통을 싸쥐고 휘청거렸다. 진달래가 재차 돌을 날렸다. 그 놈은 대갈통을 얻어맞고 푹 꼬꾸라졌다. 진달래가 잽싸게 달려와 그 놈의 장총을 빼앗아 한방 안겼다. 땅! 덕팔은 사냥총을 쏘지 않고 마구 돌진해나가다가 한 자위대원을 붙잡았다. 실팍한 덕팔은 그 놈을 깔고 들어앉아 사냥총으로 마구 패댔다. 밑에 깔린 놈은 날아드는 사냥총을 손으로 막으면서 우는 소리를 쳤다. “제발 살려주오. 내 죽으면 집에 있는 늙은 엄마가 죽소.” 그러자 덕팔은 주먹을 내리우면서 욕설을 퍼부었다. “너도 조선 사람인데 어째 일본 놈들의 개다리질 하느냐?” 그때 자위대원 놈이 손을 아래로 뻗쳐 종아리 각반에서 비수를 쓱 뽑아 덕팔의 잔등을 푹 찔렀다. 그때 뒤따르던 칠백이 발견하고 그 놈의 손목을 발길로 걷어찼다. 비수는 덕팔의 잔등을 빗 찍고 저만치 멀리 뿌리어나갔다. 덕팔은 잔등 상처의 아픔은 둘째고 그 놈에게 속히운 것이 분했다. “에끼, 이놈 썩어져라!” 덕팔은 사냥총으로 그 놈의 대갈통을 마구 패댔다. 그 놈은 쳐들었던 팔을 천천히 툭 떨어뜨리더니 잠잠해졌다. “도쯔께끼 마에(돌격 앞으로)!” 갑자기 숱한 일본 헌병들이 저목장으로 포위해 덮쳐왔다. 용천이가 눈구덩이에서 일어나면서 보니 끼무라가 적토마까지 타고 뒤에서 군도를 휘두르면서 고래고래 고함치는 것이 보였다. 그 적토마는 성칠이가 진달래 아버지에게서 가진 것이었다. 그런데 전번 습격에 한길수가 빼앗아 간 걸 끼무라에게 바쳤던 것이다. 그 옆에는 백마를 탄 한길수가 권총을 휘두르면서 자위대원 놈들을 앞으로 내몰았다. 피뜩 보아도 100여명이 총창을 비껴들고 포위권을 좁혀왔다. 한길수는 외눈깔을 부라리며 성칠과 용천이 그리고 포수대의 마을 사람들을 보고 고함쳤다. “네 놈들이 올 줄 알고 여기서 기다린 지 오래다!” 그는 사냥총을 쥐고 자기를 쏘아보는 병수를 보고 빈정거리었다. “오, 달아났던 병수도 왔구나.”  뒤이어 수림속의 독립군을 향해 목청을 가다듬어 고래고래 고함쳤다. “빨리 투항해라! 사냥총을 내려놓으면 황군은 살려준다!” 용천은 “함정이야!” 하고 고함쳤다. 그는 벌떡 일어나 권총을 뒤로 휘두르며 명령했다. “철퇴!” 헌병과 역습을 받은 30여명 밖에 안 되는 독립군 병사들은 아름드리나무에 기대 사격을 가하면서 수림 속으로 철퇴하기 시작했다. 검둥이도 쩔룩거리면서 성칠을 따라 끄긍거리며 수림 속으로 달아났다. 이때 몇 마리 사냥개 누렁이들이 덮쳐와 검둥이를 둘러싸고 혈투를 벌렸다. 성칠은 피 흐르는 팔을 휘둘러 비수를 날렸다. 제일 앞에서 덮쳐오던 누렁이가 비수에 목을 찔리어 깨갱거리며 푹 꼬꾸라져 버둥거렸다. 그러자 다른 누렁이들은 헌병 놈들 쪽으로 꼬리 빳빳해 도망쳤다. 독립군 병사들은 간신히 헌병 놈들과 자위대원 놈들을 따돌리고 기운봉 수림 속으로 철퇴했다. 해가 넘어가고 어둠의 장막이 내리드리웠다. 영팔은 백마를 탄 한길수 앞으로 달려가 허리를 굽혔다. “대장님, 더 쫓지 맙시다. 상호가 하는 말이 독립군이 500여명이나 왔답니다.” “음, 그래. 독립군이 대체 얼마나 왔는지 통 알 수 없군.” 한길수는 뒤에서 끼무라가 말을 타고 다가오자 머리를 조아리면서 말했다. “혹시 독립군이 파놓은 함정에 빠져 매복습격을 당할 까봐 근심됩니다.” 류강철이 통역하자 끼무라는 살기 찬 어둠속의 수림 속을 기웃기웃 살피더니 손을 뒤로 홱 젓더니 말머리를 돌렸다. “가에레(돌아가자)!” 헌병들과 자위대원들은 독립군을 더 쫓지 않고 저목장으로 허겁지겁 들어가 대문을 꼭 닫아걸고 대갈통도 하나 내밀지 않았다. 다만 보초병과 누렁이들이 저목장 부근을 왔다 갔다 달아 다니면서 삼엄하게 경계할 뿐이었다. 6. 정돈 독립군 병사들은 용천의 지휘 하에 바우돌과 몇몇 병사들이 말을 지키고 있는 기운봉 기슭 수림 속에 이르렀다. 그 곳에서 독립군 병사들은 말을 잡아타고 박달령을 넘어 명천을 거쳐 경성군 수림 쪽으로 전이했다. 용천 중대장은 사형장을 기습할 때 고의적으로 말을 타지 않고 보행했던 것이다. 말을 타면 목표가 쉽게 드러나는데다가 일단 독립군 기병이 드러나면 다른 지역에서 내놓고 말을 타고 행동하기에 불편했던 것이다. 명천지역에 나온 용천이 영솔한 독립군은 20여명 밖에 안됐다. 그러나 성칠이가 성공적으로 영월동 부근의 사냥군들로 포수대를 조직해 대원들을 16명이나 확충해 40여명으로 장대해졌다. 그러자 용천 중대장과 진달래 소대장은 림산파출소와 저목장을 습격할 작전방안을 세우고 기운봉 기슭 수림 속에 독립군대오를 매복시켜놓고 성칠과 상호를 파견해 우시장과 명천 일대 헌병과 자위대 정황 그리고 영월동에 갓선 림산파출소와 저목장 정황을 정찰해오게 했다. 정찰하러 간지 열흘기한이 지났는데도 성칠과 상호가 종무소식이였다. 룡천과 진달래는 조마조마해 어쩔 줄 몰랐다. 그런데 성칠이가 홀로 포위를 뚫고 기운봉 기슭에 도망쳐왔던 것이다. 사연을 알게 된 용천 중대장은 임기응변하여 저목장을 기습하여 상호와 은희를 구출하기로 결정하고 출마했던 것이다. 그런데 상호와 은희를 교살하러 나온 야마모도 놈이 이끄는 헌병과 자위대 20여명 놈들을 만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용천 중대장은 과단성 있게 사형장을 기습하기로 했던 것이다. 그는 샘물터 사형장을 기습할 때 40여명 병사들을 지휘하면서도 대부대가 온 것처럼 “일 소대 좌측으로! 이 소대는 우측으로 포위하라!” 하고 고함쳐 적들을 질겁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기습전에서 헌병 서너 놈에 자위대 대여섯 놈을 살상하고 장총 여섯 자루를 노획하였다. 하지만 상호가 장렬히 희생되고 포수대 출신 독립군 병사 덕팔이가 부상당한데다 은희를 구출하지 못했다. 은희는 범의 굴에 갇혀 야수와 같은 놈들에게 능욕을 당할 대로 다 당하고 있을 것은 빤한 일이었다. 용천은 경성부근 수림 속에서 대오를 멈춰 세웠다. 그는 말에서 내리자 성칠을 모든 병사들 앞에서 닦아세웠다. “이번에 성칠은 아주 큰 잘못을 저질렀네. 정찰임무는 제대로 완수하지 못하고 개인 복수심에 들떠 뭔가? 사사로이 복수하다가 자기도 붙잡힐 번 한건 둘째고 상호는 놈들에게 처참히 교살됐어. 여기에는 분대장인 성칠의 책임이 크단 말일세. 지휘원은 군사 기율을 지켜야지 뭐야?!” 용천은 성칠의 어깨를 툭툭 치면서 말했다. “자네 분대장 직무를 철수하겠네. 잘 반성하라고.” 성칠은 머리를 끄덕였다. “나를 죽여주오. 상호는 내 때문에 죽었소.” 룡천은 머리를 가로저었다. “아니야. 자넬 죽이자는 게 아냐. 문제는 이후에도 계속 군사 기율을 지키지 않으면 우리 독립군에는 두 번째, 세 번째 상호가 처참히 희생될 거네. 곰곰이 반성해.” 성칠은 “알았소. 다신 군사 기율을 어기지 않겠소.” 하고 무겁게 말하더니 한숨을 후- 길게 내쉬었다. 진달래는 용천을 한쪽 구석에 끌고 가서 나직이 말했다. “상호가 희생돼 비감에 빠졌는데 영월동 부근의 포수대 출신들은 성칠이가 이끌지 않으면 사기 떨어질 거예요. 분대장철직은 다시 고려해보는 게 어떤가요?” 그러나 용천은 단호히 거절했다. “안 돼. 기율이 없는 군대는 항상 패배만 하게 돼.” 그러자 진달래도 더 말하지 못했다. 용천은 대원들 앞에 와서 말했다. “이번 상호구출작전에서 하마터면 끼무라의 함정에 빠져 전군이 전멸될 번했데이. 이 책임은 전적으로 내게 있데이. 적정을 제대로 정찰하지도 못하고 소홀히 기습한 잘못을 저질렀소. 때문에 나는 중대장을 할 자격이 없데이. 지금 이 시각부터 중대장은 진달래 소대장이 맡으라니께.” 진달래는 용천이 모젤권총을 벗어 주는 것을 밀막았다. “이러지 마세요. 우리 중대는 김 중대장이 이끌지 않으면 안돼요. 전 산골의 아녀자예요. 집안에서 암탉이 울어대면 재수 없다고 아녀자가 머슴아들을 영솔할 수 없어요.” 그러나 용천은 고집을 부렸다. “아니요. 부대의 군사기율을 엄히 하기 위해 이렇게 하기요. 중대장부터 군사기율을 잘 지켜야 한데이. 이제 만주에 전이해 들어가면 홍범도 장군께 회보하겠어.” 이렇게 되여 진달래가 잠시 지휘를 맡았다. “부대는 만주로 전이하겠어요. 자, 모두 말에 오르세요.” 진달래의 명령에 모두 말에 올라타고 출발하려 할 때였다. 덕팔이 말에 오르지 않고 두덜거렸다. “고향에 앓는 아내를 두고 그렇게 먼 만주로 난 가지 않겠소.” 그 말에 동욱도 말에서 뛰어내렸다. “그래, 아내 원수도 갚지 못하고 이렇게 떠날 순 없어. 림산파출소에는 아직도 은희가 짐승 같은 놈들에게 능욕을 당할 대로 다 당하고 있어. 은희랑 내 버려두고 절대 갈수 없어!” 그때 용천이 말에서 내려 말했다. “원수는 꼭 갚아야 해요. 그러나 지금 우린 놈들에게 발각돼 언제든지 검둥이가 흘린 피 자국을 따라 우리를 역습할 수 있어요. 우리는 놈들을 두려워서가 아니죠. 신출귀몰전술로 잠시 철퇴하는 거요. 우리가 철퇴했다고 저놈들이 경계가 허술할 때 재차 일망타진할 거예요. 자, 모두들 떠나 가자요.” 그때 진달래가 말에서 내려 덕팔에게 다가가 상냥하게 말했다. “오빠, 아주머니를 두고 간다는 것도 말이 아니요. 철규는 여기 왔기에 다행이예요. 오빠네 아주머니를 데리고 가자요.” 그래도 덕팔은 성칠이를 쳐다보면서 말했다. “형님은 부모와 아내, 동생들과 조카들이 몽땅 고향에 있지 않소? 다 데리고 가야 되오. 놈들은 꼭 우리 가족들에게 보복할 거요.” 모두들 성칠을 쳐다보았지만 성칠은 말을 탄 채 묵묵히 수림 속만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용천은 긴 한숨을 후- 내쉬었다. “다 내 잘못이요. 포수대 출신 대원들의 가족을 생각하지 못했던 거요. 진달래 중대장과 성칠 분대장 여기 보세.” 용천은 말에서 내렸다. 그는 진달래를 중대장으로 부르고 성칠이를 의연희 분대장으로 불렀다. 성칠과 진달래도 말에서 내려 용천을 따라갔다. 용천은 진달래와 성칠과 상의했다. “포수대 가족을 버리고 돌아갈 순 없어. 어떡하면 좋겠어?” 진달래와 성칠은 서로 쳐다보면서 한참이나 말하지 않았다. 진달래가 성칠을 마주 쳐다보더니 침묵을 깼다. “포수대 출신 대원들을 남겨 가족을 보호해 만주로 이동하는 게 좋을 거 같아요.” 용천도 동감이었다. “맞아, 거 아량 있는 처리야.” 용천과 진달래는 성칠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제야 성칠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전번에도 개인 복수심으로 경솔히 날뛰다가 결국 상호가 목숨 잃고 은희마저 짐승 같은 놈들에게 짓밟히게 만들었소. 다신 그렇게 경솔히 행동하지 말아야 하오. 비록 가족이 중요하지만 우린 독립군을 보존하는 게 더 급선무요. 우리 독립군이 보존돼야 우리 가족이 영원히 놈들의 능욕을 받지 않을 수 있게 할 수 있소. 절대 또다시 경솔히 행동하지 말고 철거하는 게 옳다고 보오. 이제껏 일본 놈들 앞에서 굴하지 않고 임기응변으로 대응하면서 살아온 아버님이요. 아버님께서는 꼭 놈들을 재치 있게 물리치고 가족을 보호하리라고 믿소. 다만 덕팔의 아내와 은희가 마음에 걸리오. 상호를 잃고 묻어주지도 못했는데 은희마저 잃을 순 없소.” 용천이는 머리를 끄덕였다. 그는 마음속으로 성칠의 웅숭깊은 생각에 감탄했던 것이다. 그러나 진달래는 이렇게 말했다. “성칠 오빠의 말도 옳아요. 검둥이 다리에서 흘린 피 자국을 따라 적들이 추격해올 수도 있어요. 제 생각에는 대부분 대원들은 용천 중대장이 직접 영솔해 장백산 근거지로 철거하고 저하고 성칠 오빠가 덕팔과 동욱, 칠백, 가마골의 형만이 그리고 유격대원 바우돌 등을 데리고 가족을 구출하지요.” 용천은 동의했다. “진달래 중대장 말이 옳아. 나도 남겠소. 나도 진달래 중대장과 성칠 분대장을 사지에 남겨두고 갈수는 없네. 부대는 하루도 지휘관이 없어선 안 돼. 진달래 중대장이 부대를 이끌고 만주로 들어가고 내 성칠 분대장과 함께 여기 남아 가족을 구출하겠네.” 그러자 성칠이 막아 나섰다. “안되오. 내 가족 때문에 용천 중대장까지 고생시키지 않겠네. 누구나 다 제 가족을 구하다나면 우리 독립군이 언제 작전계획대로 행동할 수 있겠는가? 덕팔이 가족과 은희만 구출하면 되오. 동욱은 안 되오. 아내가 자살한 상처 때문에 냉정하지 못할 수도 있소. 대신 이 지방과 한길수의 집 부근 정황에 익숙한 병수를 남기기요. 우리 가족은 아버님과 기준 동생이 있으니까 근심하지 말게나.” 용천이 과단성 있게 말했다. “오래 토론할 새 없네. 이렇게 하기요. 진달래 중대장이 부대를 이끌고 장백산 지역으로 철퇴하고 나와 성칠 분대장이 남아서 가족을 구출하기요.” 이렇게 돼 진달래는 말을 타고 부대를 이끌고 장백산 지역에로 전이하게 됐다. 성칠과 용천은 덕팔과 칠백, 동욱, 그리고 바우돌 등을 영솔해 명천 지역에 계속 잠복해있으며 소분대 활동을 하면서 영월동과 운주동 주위의 독립군 가족을 보호하고 구출하기로 했다. 진달래는 말에 오르기 전에 성칠과 용천에게 “안전에 주의하세요." 하고 신신당부 했다. 성칠은 진달래의 손을 잡아주었다. “우리 근심은 하지 말라. 부대만 안전하게 전이시켜라.” 용천은 진달래의 손을 굳게 잡고 나서 기대에 찬 눈길로 말에 오르는 진달래를 바라보았다. 부대가 진달래 영솔 하에 눈보라가 무섭게 윙윙 휘몰아치는 수림 속으로 숨어들어갔다. 성칠은 조상이 물려준 비방 오줌 약으로 검둥이의 상처를 치료해주기로 했다. 그가 검둥이의 허벅다리에 대고 오줌을 싸주었다. 귀신이 곡할 듯이 즉석에서 검둥이의 상처에서 흐르던 피가 멎었다. “됐네. 이젠 검둥이가 눈 우에 피 자국을 내지 않을 것이니까 우리 뒤를 미행하는 수도 없을 거네.” 용천이 여겨보아도 검둥이가 오줌을 상처에 누어 치료한 후 기적적으로 허벅지에 피가 멎었다. 그리하여 눈 우에 검둥이의 피 발자국이 가뭇없이 사라졌다. 그리하여 아무런 의심도 받지 않고 기운봉 기슭 수림 속에 잠복할 수 있었다. 산바람이 터져 장백산의 밀림은 눈보라 속에 뒤덮여 무섭게 아우성치며 몸부림 치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이 영월동 부근에 갔을 때 가마골의 형만이 보이지 않았다. 사실 형만은 사냥하려고 포수대에 들었는데 처음으로 마지못해 전투에 뛰어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상호가 죽은 것을 본데다가 포수대에서 사냥은 하지 않고 만주지역의 백두산 일대로 철거한다고 하자 고향을 떠나기 싫어 말을 타고 집으로 달아나 숨었던 것이다. 용천은 도리머리 질 하더니 “형만의 집에 찾아가 데려다가 처벌하자.” 하고 말했다. 그러나 성칠은 손을 들어 말리였다. “놔두게나. 억지로 데려다가 일본 놈들과 싸우게 할 순 없네. 언젠가 그도 일본 놈들의 핍박에 의해 우리 독립군에 다시 찾아올지도 모르오.” 모두들 머리를 끄덕였다. 수림 속에서는 눈보라가 무섭게 아우성치며 하늘을 가릴 듯이 불어쳤다.  
37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16) 댓글:  조회:1733  추천:0  2015-09-21
                                                                            제8장 영월동의 총소리                                                          1. 개꼴망신        물고 비늘구름이 물결치는 엷은 구름바다에서 쪼각달이 서쪽으로 서서히 달리고 삼태성도 숨을 죽이고 눈보라 휘몰아치는 영월동의 동정을 엷은 구름 새를 살며시 열고 살펴보고 있었다.        토성안집 울안은 금방까지도 술을 처마신 중정꾼들로 떠들썩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모두들 녹아떨어졌는지 쥐 죽은 듯이 고요해졌다. 높이 쌓아올린 토성 네 귀 망루에서 자위대원들이 을씨년스럽게 불어치는 눈보라 속에서 왔다갔다 거닐며 보초를 서고 있었다.       별안간 중문이 살짝 열렸다. 철규가 무엇인가 들고 들어왔다. 그는 토성에 기대 망루를 쳐다보더니 보초를 서는 자위대원의 눈길을 피해 몸채 쪽으로 살금살금 다가갔다. 보초들은 토성 밖의 동정을 살피느라고 집안의 동정은 별로 살피지도 않았다. 몸채 안에서는 코를 드렁드렁 고는 소리만 들리었다. 그가 살금살금 다가가자 안에서 은희가  미닫이를 스르륵 열어주었다. 철규는 쥐도 새도 모르게 몸채 정주간에 들어간 후 다시 신을 벗고 윗방으로 올라갔다. 달이 구름바다에서 헤어 나오자 집안도 희읍스름하게 윤곽이 드러났다. 희한한 장면이 펼쳐졌다. 술에 만취한 길수와 월선이 속옷 바람에 얼싸 안고 드러누워 코를 드렁드렁 골고 있는 것이 달빛에 어슴푸레 보였다. 철규는 나무꼬챙이에 묻혀 들여간 것을 월선의 낯에 살짝 발라놓았다. “에이, 차라.” 월선은 손으로 낯을 쓱 닦으면서 돌아누웠다. 철규는 길수의 번들 이마에 쓱 발랐다. 만취된 길수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달도 보기 우스웠던지 코를 싸쥐고 구름 속으로 살며시 들어갔다. 철규는 나무꼬챙이로 비단이불과 요에도 줄줄 발라놓고 나무꼬챙이를 쥔 채로 미닫이문을 사르르 열고 나갔다. 문 밖을 나서자 그는 나무꼬챙이를 지붕에 훌 뿌렸다. 달라당! 나무꼬챙이가 기와에 부딪치는 소리 났다. “뭐야?!” 망루 위에서 보초를 서는 자위대원들이 주고받는 놀란 소리. “왜?” “분명 울안 쪽에서 달라당 소리 났는데.” “고양이 지붕에서 뛰어내렸겠지.” “글쎄 말이야. 토성 안에서 소리 났으니 놀랄 게 없어.” 철규와 은희는 사랑방에 살금살금 다가가 문을 살며시 열고 숨어버렸다. 이튿날 아침. 해가 엉덩이를 비춘 지 오래다. 은희는 정주간에서 밥을 다 지어 아침상을 한창 차리고 있었다. 월선이 먼저 깨나 바사지는 소리를 질렀다. “이게 뭐야? 아니, 취해도 정신 있어요? 똥을 다 싸?” 길수 일어나 앉더니 요대기의 똥과 자기를 손가락질하는 월선을 번갈아보면서 두덜거렸다.       “누가 똥을 쌌어? 그 낯을 보오. 검정개 돼지 흉을 해?” “뭐라고요? 당신 엉덩이와 번대 머리를 봐요.” “당신 낯이나 보오.” “뭐라고?” 월선은 거울에 비낀 똥 묻은 자기 낯을 보고 소스라치었다. “이게 웬 일이야? 영감 두상이 똥을 쏴도 별나게 쌌다. 자기 낯에다 싸다 못해 남의 낯에까지 싸질러?” 그들 둘은 코를 싸쥐고 서로 상대방을 삿대질하면서 코웃음 쳤다. “아무리 생각해도 당신 엊저녁에 만취돼 뒤가 풀린 게지.” “쉿— 누가 듣겠소. 망신스럽게.” 월선이 살이 져서 유들유들하고 똥이 묻은 목을 빼들더니 소리쳤다. “은희야, 거 얼른 세수물 떠오라.” “예.” 월선이 미닫이를 쭉 열고 내다보니 은희가 머리를 다소곳이 숙이고 씨물씨물 웃고 있었다. “이년아, 웃기는 왜 웃어? 얼른 떠오지 못할까?” (속이 시원해 웃는다. 어째? 저게 성칠 오빠 사냥총에 맞아 콱 썩어나졌으면.) 은희는 속으로 욕하면서 얻어맞은 상처가 아파 이를 옥 물고 간신히 일어나 물독 옆으로 갔다. 뒤에서 월선이가 두덜거렸다. “네년이 은녀처럼 달아나 봐. 가랑이를 찢어 죽여 버리겠어.” (뭐라고? 이제 누가 죽나 두고 보자.) 은희는 대야에 물동이 물을 퍼 담으면서 허리에 손을 지르고 두 다리를 저 가락처럼 벌리고 서 있는 월선을 흘끔 곁눈질해보았다. “아니, 이 년이 늘쩡거리기도 하긴. 빨랑빨랑 가져오지 못해?” 월선은 서서 다른 궁리 했다. (영감이 큰 그물을 쳐서 큰 고기를 잡으려니 그렇지. 밸 같았으면 저 년을 영영 달아나지 못하게 개처럼 고삐를 해 매놓고 한뉘 부려 먹어도 성차지 않겠어.) 월선은 능구렁이 같은 영감이 은희를 욕심내는 것을 안 후부터는 은희를 슬그머니 미워했다. 참말로 은희는 먹지 못하고 얻어맞아 사처가 터지고 수척하였지만 박씨 같이 하얗고 걀쭉한 얼굴에는 젊음의 생기가 어려 있어 퍽 매력이 있었다. 순간 월선은 날이 감에 따라 피어나는 꽃 속에서 시들어가는 자기가 한없이 안타까웠다. (걷잡을 수 없는 게 세월이야, 세월이 무정한 원수야.) 월선은 대야에 세수를 하는 길수를 거들어주는 은희를 보면서 속상해 한숨을 호- 가늘게 내쉬었다. 한편 한길수는 요 위에 똥이 많이 묻은 것도 아니고 팬티 안에 똥이 묻지 않은 것을 두루 살펴보고 나서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올랐다. 진종일 울안에서 왔다 갔다 하면서 궁리하다가 토성 서북쪽 망루 위에 올라가 전날 저녁에 보초를 선 자위대원들과 수상한 인기척이 있었는가를 알아보았다. 보초병들은 무슨 소리가 달라당 난적이 있은 것이 떠올라 지붕을 쳐다보았다. 두 보초병은 지붕에 똥이 묻은 나무꼬챙이를 보고 눈길을 마주치더니 도리머리 질 했다. “아닙니다요. 어제 저녁에 쥐 한 마리 얼씬거리지 않았습니다요.”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얼씬거리겠습니까?” 보초병들은 자기들이 책임질 까봐 모르쇠를 댔다. 길수는 망루에 서서 우멍눈깔로 성칠의 집과 골짜기 쪽의 샘물터를 바라보면서 보초병들에게 말했다. “잘 살피게. 엊저녁에 성칠의 집 부근과 샘물터에 개발자국이 찍혔더라고 똘만이가 보고했네. 혹시 성칠의 검둥이가 아닌지 모르겠어. 그 놈의 검둥이는 항상 성칠의 뒤를 따라 다니잖아.” 성칠이가 나타났는지 모를 일이였다. 그제야 보초병들은 눈이 떼꾼해졌다. “알았습니다. 꼭 보초를 잘 서겠습니다.” 길수는 두 보초병의 어깨를 툭툭 쳤다. “보초를 잘 서게나.” “예!” 길수는 토성 네 귀의 망루를 돌아다니면서 이것저것 명령하고는 영팔과 똘만, 허꺽쇠를 데리고 림산파출소로 야마모도 소장을 찾아 떠나갔다. 그들의 뒤에서는 용같이 꿈틀거리며 세찬 눈보라가 휘몰아쳤다.   2. 생벼락 성칠은 독립군에서 분대장을 맡고 포수대에 들었던 영월동의 상호, 덕팔, 칠백, 동욱, 가마골의 정형만, 신흥동의 장산, 운주동의 철석 등 10여명 병사를 이끌었다. 이번에 그는 김용천 중대장의 포치에 따라 상호를 데리고 장사꾼으로 가장하고 우시장 경찰국과 명천 경찰국 그리고 상우남면 파출소와 영월동에 자리 잡고 있는 림산파출소 정황을 정찰하러 왔었다. 그는 정찰하러 가는 길에 먼저 림산파출소와 저목장을 정찰한 후 상호네 집과 운주동에 있는 부모와 동생들을 가만히 만나보려고 했다. 영월동의 자기 집에 주재한 일본 림산파출소와 저목장을 정찰한 후 먼저 상호의 어머니와 은녀, 은희를 만나보기로 했던 것이다. 그들은 직접 상호네 집으로 가지 못하고 지혜롭게 은희가 물을 길으러 다니기에 언제든지 올 것 같은 샘물터 부근에 숨어 있다가 은희를 만났던 것이다. 성칠은 은희를 토성 안에 먼저 들여보내 철규와 함께 내응하게 하고 상호와 함께 기회를 빌어 영월동 토성안집에 있는 한길수를 처단해 우시장 백성들의 원수를 갚으려고 했다. 그는 사흘이나 숨어 있으면서 밤에 잠입할 기회를 호시탐탐 노렸다. 하지만 토성 네 귀에 우뚝 치솟은 망루에서 보초를 어찌나 삼엄하게 서는지 좀처럼 기회가 없었다. 은세계를 방불케 하는 산과 들에 어둠의 장막이 뉘엿뉘엿 드리웠다. 토성 안에서 내비치는 대낮 같은 광솔 불빛이 하늘을 찌를듯하고 토성 네 귀 망루에서 보총을 메고 왔다 갔다 하는 보초병들이 뒷산에서도 어슴푸레 보였다. 성칠이 상호와 어떻게 정찰하겠는가를 토론하는 사이에 검둥이가 냄새를 맡으면서 토성 쪽으로 뛰어갔다. 검둥이는 토성주위를 돌면서 냄새를 맡는데 웬 대문 안에서 사냥개로 보이는 누렁이가 뛰어나와 왕왕 짓더니 검둥개를 덮쳤다. 검둥개는 누렁이와 물고 뜯고 하다가 끝내 쫓기어 도망쳤다. 검둥개는 달아나는척하다가도 돌아서서 누렁이를 마구 물어댔다. 그러다가도 다른 사냥개 누렁이들이 쫓아오면 돌아서서 네 굽을 안고 달아났다. 뒷산에서 눈이 깔린 개울가에서 검둥이가 숱한 사냥개 누렁이들에게 쫓기어 오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보던 상호는 허리춤에서 모젤권총을 쑥 뽑아들었다. “뭘 하려고?” 옆에서 성칠이가 가래 같은 손으로 상호의 손을 내리누르면서 머리를 가로저었다. “안 된다.” 상호는 씩씩거리면서 두덜거렸다. “씹할 일본 놈의 개새끼들마저 우리 검둥이를 업신여겨. 괘씸해 죽겠소.” “총소리를 들으면 우리가 폭로된다. 그럼 모든 계획이 끝이야.” 그제야 상호는 모젤권총 총신을 후 불더니 허리춤에 되 찼다. 검둥이는 계속 누렁이에게 쫓기어 수림 속에까지 뛰어왔다. 그 순간이다. 토성 안에서 은희가 나오더니 “워리, 워리.” 하고 사냥개 누렁이들을 토성 안으로 불러들여갔다. 뛰어온 검둥이를 어루만지면서 여겨보니 귀에 뜯긴 상처가 있었다. 검둥이는 아직도 투지가 식지 않아 피 흐르는 귀를 삐쭉 쳐들고 토성안쪽을 내려다보면서 으르렁거렸다. 성칠은 눈보라 치는 하늘을 유심히 쳐다보더니 무릎을 탁 치더니 말했다. “됐다. 우린 이 바람에 불을 단 연을 띄워 토성안집에 떨어뜨리자.” 상호도 신기해 “양? 거 참 묘하오.” 하고 말했다. 상호는 가만히 은녀와 함께 상호네 집에 가서 풀을 끓여 종이로 연을 만들고 실 팽이를 맸다. 병수는 반신반의하면서도 그들을 도와 실을 풀어 연 끈을 만들었다. “됐다. 병수, 연이 서북풍을 타고 토성 안에 거의 닿을 것 같으면 줄을 놔버려라.” “알았소.” “난 토성부근 개울가 버들방천에 숨어 있다가 불이 난 틈을 타서 토성 안에 들어가야 하겠다.” 성칠은 뒷산 소나무숲속에서 나와 운주하 버들방천으로 하여 길수의 토성 안 집 쪽으로 다가갔다. 상호는 병수와 은녀와 함께 뒷산 수림 속에서 껍질을 바른 피마주 한 뀀을 꿰서 연에 달아맸다. 그들은 토성 안에 서북풍을 빌어 연을 띄워 드리울 각도를 살피면서 연을 들고 풍풍 빠지는 눈을 밟으며 산기슭으로 산중턱으로 내려갔다. “연에 불을 달아 띄우기요.” 상호가 말하자 병수는 부시를 탁탁 쳐 연에 매단 피마주에 불을 달았다. 연을 띄우자 서북풍에 몸에 불이 붙은 채 하늘 높이 날아올라갔다. 상호가 연 끈을 슬슬 놓자 연은 곧장 토성 쪽으로 점점 다가갔다. 한편 그런 줄도 모르고 토성 안에서는 한길수의가 가시아버지 생일이라고 한상 차리고 한창 술이 거나하게 되어 갔다. 한길수의 가시아버지와 야마모도 소장과 한길수 그리고 월선이 상좌에 나란히 앉고 그 아래 자리에 가메다, 길수의 맏아들 철주와 류강철이 앉았고 그 아래 응삼, 영팔, 수길 이런 서열로 죽 늘어앉았다. 똘만과 꺽쇠는 자위대원들을 영솔해 보초를 서느라고 군침을 꼴깍 넘길 뿐 자리에 앉지도 못했다. 그런데 마루 위 기둥에는 철규가 묶이어 있었다. 은희가 부엌에서 채그릇을 들고 상에 올려가면서 기둥에 묶인 철규의 입에 돼지고기 점을 집어넣었다. 철규는 오물오물 씹어 꼴깍 넘겼다. 이젠 은희가 준 고기 점과 기름떡을 적잖게 먹었던 것이다. 이때 응삼이 거들먹거리면서 정주간에 내려왔다. “은희야, 안주가 모자란다. 윗방에 빨리 안주를 덧돌이로 올려가라.” “예.” 은희가 올라가니 한길수가 음충한 눈길로 은희를 노려보더니 을러멨다. “은희야, 오늘 내 말대로 하지 않으면 네년의 젖가슴에서 살 고기 한 근을 떼 내지 않는가 봐라.” 길수의 눈에서는 야수의 흉악한 눈빛이 번뜩였다. 그는 허리춤에서 서슬 푸른 비수를 쓱 뽑아 영팔에게 주었다. “자, 이걸 저년에게 줘라.” 영팔은 비수를 받아들고 은희에게 다가갔다. “은희, 비수로 저 도둑놈 철규의 오른 손목을 베라.” 은희는 비수를 받았지만 차마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저 애가 무슨 죄가 있다고 이래요? 난 못하겠어요.” “닥쳐!” 한길수는 술상을 탕 내리치며 호통 쳤다. 그 바람에 술상에서 채 물이 주르르 구들바닥에 흘러내렸다. “얼른 걸레를 가져다가 구들을 닦아라.” 은희는 비수를 달랑 구들에 놓고 바삐 정주간에 내려가서 걸레를 가져다가 한길수 앞의 구들의 채 물을 훌훌 닦았다. 취기가 오른 길수는 은희의 흔드는 몸을 노려보며 마른 군침을 꼴깍 삼켰다. 은희가 나가자 철주가 안경알을 춰올리면서 말했다. “아버지, 이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아무리 종년이라고 해도 사람대접을 해줍소. 일본에 유학가 보니까 많은걸 느꼈어요. 조선을 통채로 빼앗은 일본 제국도 파쑈통치보다도 지금 문명통치를 선호해요. 아버지도 폭력보다도 인정으로 문명하게 집안과 영월동을 다스리는 게 좋아요. 은희 같은 여종이나 철규 같은 애들에게 폭력으로 겁을 줄게 아닙니다. 삯전도 푼푼히 주고 좀 먹이고 입히기도 하면서 일을 시켜 보세요. 아버님이 채찍을 들지 않아도 일을 잘 할 겁니다. 그러지 않으면 저 애들이 겉으로는 무서워 하는척하지만 보세요. 은녀나 병수처럼 달아납니다. 그럼 이 집의 일을 누가 하겠습니까? 자꾸 매질을 하면 또 달아나지 않으면 불이나 싸지를 겁니다. 지어 우리 일가를 다 죽이자고 달려들 겁니다.” “됐다, 됐어. 네가 손님들 앞에서 날 훈계하는 거냐?” 한길수는 철주를 흘겨보더니 술잔을 들고 월선의 아버지 쪽으로 우멍눈을 돌리었다. 그의 외눈깔에는 고기가 씌워 보기도 흉물스러웠다. “자, 가시아버님, 생신을 축하합니다. 옥체 건강하옵소서.” “오, 그래.” 월선의 아버지는 술잔을 들어 마시네 하고는 내려놓았다. “사위, 저, 이젠 채찍을 그만 들게나. 생일날에 보기도 흉물스럽네.” 그리하여 은희를 보고 비수로 철규의 오른 손을 베라고 더는 말하지 않았다. 그런데 바깥 철규 쪽을 힐끔 가로보더니 두덜거렸다. “저 쬐꼬만 새끼를 그저 어린애루 보지 말아야 하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저 놈 새끼 우리 둥글 소를 뚱뚱보 놈에게 50원에 헐값으로 팔아먹은 것 같습니다. 개자식, 삼조대면에서 분명 뚱뚱보가 50원에 샀다고 했네. 어떤 장꾼들은 그게 실 말이라고 증명서고 어떤 장꾼들은 뚱뚱보가 비수로 저놈새끼 쥔 고삐를 베 버리고 빼앗아갔다고 합니다. 십중팔구는 도둑놈들하구 짜고 들어 빼돌리 것 같고 저 놈 새끼 팔아먹은 것도 같습니다.” “사위 취했구먼. 대체 무슨 말인지 듣고서도 모르겠소.” 월선의 아버지가 머리를 홰홰 손사래를 쳤다. 이때 야마모도가 그들이 주고받는 소리가 뭔지 알아듣지 못해 답답해났다. “죠센고데 하나쟈나이(조선말로 말하지 말라)! 와까리마센(알아듣지 못하겠네).” 류강철이 통역해주자 한길수는 “와깟다, 와깟다(알았다, 알았어).”하고 하대말로 말해버렸다. 야마모도는 안경알 밑의 눈알이 못마땅해 떼구르르 한 바퀴 돌다가 제자리에 검은자위가 돌아와 앉았다. 철주가 옆에 앉은 응삼의 귀에 대고 뭐라구 쑤군거렸다. 그러자 응삼이가 은희까지 사랑방에 가져다가 기둥에 꽁꽁 묶어놓았다. 길수가 술잔을 쳐들었을 때었다. 응삼이가 바깥으로부터 뛰여 들어오면서 고함쳤다. “한 대장님, 괴상합니다. 저 서북쪽하늘에서 벌건 불덩이가 이쪽으로 날아오고 있습니다.” “응? 귀신이 곡할 노릇이야.” 영팔과 수길은 와닥닥 뛰어나갔다. 서북쪽 하늘에서 확실히 초롱불만한 불덩이가 이쪽으로 천천히 날아오고 있었다. 보초병들도 망루에서 올려다보면서 신기해했다. “저건 무슨 불이냐?” “글쎄 말이다. 점점 커지는군.” “한해가 지나가니 우리 한대장님 가시아버지 생일을 축하해 하느님이 초롱불을 내려 보낸 거야.” 그런데 저게 뭐야? 불꽃이 가까이 날아오더니 점점 낮춰지는 것이었다. 드디어 토성 안 한길수의 지붕 위에 와 불씨에 뚝 떨어졌다. 대번에 지붕 우에 삼단 같은 불이 확 달렸다. “아, 불이야! 불!” "이건 무슨 날벼락이야?!" 불길은 순식간에 집 옆에 있는 짚무지에도 달리면서 몸채 추녀를 노리고 덮쳐들어 핥으려고 날름거렸다. 길수와 월선도 마루에 나와 서서 “저걸 어쩌냐? 저걸. 아이고, 망했다. 망했어.” 하고 마루를 탕탕 굴렀다. “빨리 불을 꺼라. 저 불을 봐라. 지붕을 다 태운다.” 마을 사람들이 “불이야!” “불이야!” 하고 외치면서 불을 끄려고 함지며 대야며 삽이며 들고 토성 안으로 달려 들어왔다. 불을 끄러 달려 들어가는 마을사람들의 틈에 끼여 성칠과 상호도 토성 안으로 달려 들어왔다. 야마모도 소장은 한길수와 함께 헌병과 자위대까지 다 동원해 불을 끄느라고 야단쳤다. 성칠과 상호는 각기 길수의 몸채와 응삼과 자위대원들의 곁채에 뛰어 들어가 불을 질렀다. 그때 월선의 가시애비가 창문턱을 짚고 내다보면서 활활 타 번지는 불길을 보면서 뭐라고 중얼거리며 와들와들 떨었다. “에끼, 이 두상 놈.” 성칠은 영감의 목을 틀어쥐고 마루에 있는 마대 안에 걷어 넣고 아가리를 꽉 동여매놓았다. 그때 마을사람들이 달려와서 “이건 뭐요?” 하고 물었다. 성칠은 머리를 숙인 채 “불을 단 도적이오.” 하고 소리쳤다. 성칠은 은희와 철규를 찾느라고 사랑방으로 달아났다. 그 사람이 “불을 단 도적을 붙잡았다. 때려라!” 하고 외쳤다. 그러자 숱한 사람들이 모여와서 “도적이다.” 하고 발길로 차고 몽둥이로 물매를 안겼다. 이때 한길수가 뛰어왔다. “뭐냐?” “불을 단 도적입니다.” “에끼, 이놈, 죽어봐라!” 길수가 발길로 걷어찼다. 마대 안에서 “내다, 내!” 하고 죽어가는 비명소리를 질렀다. “옳다, 바로 네놈을 때려죽이겠다.” 한길수는 손바닥에 침을 뱉더니 한 마을 사람이 쥔 삽을 빼앗아 쥐고 사정없이 “도둑놈”을 찍어댔다. 마대 안의 영감태기는 비명소리를 질렀다. 몸채 앞에서 당황해 왔다 갔다 하던 월선이가 달려와 호미로 찍고 응삼까지 괭이를 들고 와서 마구 물매를 안겼다. 마대 안에서 뭐라고 소리치며 꾸불거리더니 한참 후 움직이지 않았다. 한길수는 취 김에 손이 근질거려 “도둑놈”을 실컷 찍고 나니 속이 후련했다. 이때 길수의 맏아들 철주가 옷에 묻은 재가루를 탁탁 털면서 마주 달려왔다. 한길수는 철주가 뭔가 말하려는지 입을 열려는데 손을 홱 들었다 내리치면서 말했다. “보았지? 네 말대로 문명하게 슬슬 어루만져서 되니? 무력으로 짓밟아버려야 한다.” 그런데도 철주는 애비 손을 잡으면서 말했다. “아버지, 이럴수록 어루만져야 해요. 제대로 어루만져주지 않았기에 이런 일이 생깁니다. 창고에 썩어나는 쌀이랑 굶고 있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 줘 보세요. 이러겠는가? 채찍질을 하면 할수록 그들은 두려워하는 척하지만 속으론 복수하려고 듭니다. 그 놈들은 기회만 있으면 불을 지르고 사람까지 죽이면서라도 복수하려고 해요.” 그러나  한길수는 들을 리 만무했다. “개소릴 작작 쳐!” 한길수는 철주의 손을 뿌리치고 중문 쪽으로 나갔다. 불길은 활활 타 번져 몸채에도 달려 기와 장마저 우당탕 탁탁 튕겼다. 성칠은 황급히 초라한 사랑방에 다가갔다. 불길이 타는 사랑방 앞에는 보초병이 총을 쥐고 지키고 서있었다. 성칠은 상호의 귀에 대고 뭐라고 말하더니 뒤로 돌아갔다. 상호가 “불이야!” 하면서 삽을 들고 보초병한테로 달아갔다. 그러자 보초병은 팔을 벌려 막아서며 소리쳤다. “오지 말라!” 푹! 뒤로 돌아간 성칠이 어느새 보초병의 허리에 시퍼런 비수로 푹 찔렀다. 보초병이 쓰러지자 상호가 보초를 서고 성칠은 사랑방문을 살며시 열고 쑥 들어갔다. 딱! 불시에 날아드는 몽둥이에 성칠의 눈앞에 불티가 튕겼다. 재차 날아드는 몽둥이를 팔로 막았다. 여겨보니 어린애가 몽둥이를 쥐고 눈을 부릅뜨고 쏘아보는 것이었다. “오빠!” 저쪽에서 묶인 채 앉아있던 은녀가 다급히 소리쳤다. “은녀야.” 성칠은 은희를 묶은 바 줄을 풀고 부축해 일으켜 세웠다. “저 앤 누구냐?” 성칠이 묻자 은녀는 “저앤 덕팔 오빠네 아들 철규오.” “오, 그래.” 성칠은 철규한테 다가가 “떡 서있지 말구 빨리 여길 나가자.” 하고 말하면서 손을 잡아끌었다. 그들은 사랑방에서 나와 곧추 왁작거리는 사람들 틈새로 빠져 대문 밖으로 달아났다. 자위대 병졸들과 보초병들마저 불을 끄다나니 그들을 살필 겨를이 없었다. 그들의 등 뒤 토성 안에서 불길이 세차게 타 번져 눈에 뒤덮인 들판과 산이 대낮 같았다. 실로 통쾌하게 타 번지는 불길이 캄캄한 야밤을 오래 동안 기적처럼 밝게 비추었다. 철규와 은희는 묶이었다. 그러나 큰 쥐 한마리가 대들보를 타고 쪼르르 내려오더니 철규를 묶은 바 줄을 싸각싸각 갉아먹었다. 한참 후에는 손목을 묶은 바 줄이 뚝 끊어졌다. 그리하여 자기절로 바 줄을 푼 철규가 은희의 바 줄을 풀자고 하는데 바깥에서 왁 짝 떠드는 소리가 났다. 철규는 부지깽이를 찾아들고 문 뒤에 숨었다가 문을 열고 성큼 들어온 사람의 머리를 딱 내리쳤던 것이다. 그런데 들어온 사람이 자기기 그렇게 존경하는 성칠 큰아버지일 줄은 생각지도 하지 못했다. 한참 후 불길이 조금 수그러들었다. 악이 날대로 난 한길수는 집이 불에 탄 분풀이를 하려고 몽둥이로 꾸물거리지도 않는 마대안의 놈을 재차 죽으라고 땅땅 팼다. 맥이 빠져 더 칠 수 없자 한길수는 헐헐거리면서 응삼을 보고 “마대를 풀어라. 도둑놈이 어떤 놈인가 보자.” 하고 말했다. 영팔이 피가 질벅이 물든 마대 아궁이를 풀고 마대를 거꾸로 들었다. 타오르는 불길에 거꾸로 떨어진 자의 뇌 장이 다 흘러나온 것이 피뜩 보였다. 피 못이 된 머리를 발로 툭 차 번져 보는 순간 모두 자기 눈을 의심했다. “아이고, 이게 가시아버지 아니요? 아이고.” 그 소리에 월선은 저쪽 부엌간으로 들어가 손을 씻다가 황급히 바깥으로 달려 나왔다. 그는 봉이눈을 부릅뜨고 피 못속에 쓰러진 친정아버지를 보자 눈 바닥에 풀썩 엉덩방아를 찧었다. “아이고, 불쌍한 우리 아버지, 저 우둔한 영감에게 맞아 세상 떠났소. 아이고, 내 아버지야. 흐흐흑, 흑흑, 아이고.” 그러자 한길수는 몽둥이며 괭이자루를 툭툭 차면서 두덜거렸다. “젠장, 자기도 때려가지고 무슨. 에이 참. 재수 없어.” 그러다 말고 그는 머리를 돌리더니 영팔을 불렀다. “오늘 불이 난 게 거저 일이 아니야. 내 가시아버지를 누가 마대 안에 넣고 제일 먼저 쳤는가? 당장 붙잡아내라.” “예. 당장 조사해 내겠습니다.” 청청 하늘이여, 눈보라치는 하늘이여, 이 야밤에 때 아닌 겨울밤에 마른 불벼락이 내리다니. 참말로 옛말 같고 전설 같은 생벼락이 아니겠는가!                                                         3. 역습        산더미 같은 불길이 활활 타 번져 영월동 토성 안 한씨네 집을 또 삼켜버렸다. 몇 해 전에 뒤이어 두 번 채 불이 달렸던 것이다. 몸채 팔간대청과 사랑방, 마구간이 불에 탄데다 불을 끄면서 물을 쳐놓아 집안은 더구나 쑥대밭이 돼버렸다. 성칠이 집안에도 불을 질러놓아 비단옷과 이불을 얹어놓은 농짝과 옷궤가 몽땅 불타버렸다.       한길수는 엉망진창이 된 집을 돌아보고 가슴을 탕탕 쳤다. 저쪽에서는 월선이가 친정아버지 시체를 안고 “아이고.” 데이고를 부르면서 땅바닥을 신짝으로 짝짝 쳐댔다.      막다른 개 담장을 뛰어넘는다고 한길수는 이대로 한숨이나 쉬고 물앉고 말 위인이 아니었다. 그는 말상을 찡그리고 말 이발을 사려 물고 뿌드득 뿌드득 갈더니 발길로 불이 붙는 기둥을 탕 차 넘겼다. “영팔아! 사랑채 년 놈들을 끌어오라. 껍데기를 발라 버릴 테야.” 그런데 영팔은 중문을 나가 사랑채 앞에 나갔다가 "앗!" 비명을 질렀다. 보초병이 피 못 속에 쓰러졌던 것이다. 사랑방에는 토막토막 끊어진 바 줄이 남았을 뿐 은희와 철규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영팔은 황급히 중문을 꿰질러 불길이 타오르는 몸채 앞에서 노발대발하는 한길수 앞으로 헐레벌떡 달려왔다. “한 대장, 다 달아 났습니구마!” 길수는 번대 머리를 손바닥으로 탁 쳤다. “뭐라고? 보초병은?” “허리에 비수를 맞고 죽었습구마.” “맞구나. 독립군이 아니면 성칠이 포수대 사냥꾼들을 데리고 와서 한 짓일 게다. 검둥이가 왔다 갔다 하더니 정말 성칠 놈이 왔구나.” 펄쩍 뛰는 한길수의 우멍 눈에서 불티가 일었다. “맞아, 그 놈들이 멀리 달아나지 못했다. 그 놈들도 이 엄동설한에 자지 않고 수림 속으로 달아났겠느냐?” 그는 영팔의 귀에 대고 뭐라고 쑤군거렸다. “예.” 한길수는 허리춤에서 권총을 쓱 뽑아 철컥 장탄하고는 말에 올라탔다. 그는 자위단 병졸들을 끌고 대문 밖을 달려 나갔다. 야마모도 소장은 “재수 없이 주흥을 깼어.” 하고 두덜거리더니 가메다와 류강철을 데리고 화재현지를 떠나 림산파출소로 쓰는 병완의 집으로 돌아가 버렸다. 한편 성칠은 그만하면 복수했다고 생각했다. 비록 한길수는 죽이지 못했지만  집을 불태워 버렸고 한길수의 가시애비를 죽이지 않았는가.         성칠 등은 수림 속으로 달아나려고 상호네 집에서 서두르고 있었다.        그들이 문을 열고 나설 때였다.        땅땅! 말의 호용소리  들리고 총소리까지 울렸다. 피뜩 보니 한길수가 적토마를 타고 손을 홱 휘둘렀다. 자위대원들이 울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성칠 놈아, 네놈이 여기 있은 거 안지 오래다. 빨리 오라를 받아라!” 성칠은 문을 닫고 상호 네를 보고 뒷문으로 달아나라고 하고는 뒤에서 총을 쏘면서 엄호했다. “집에 불을 질러라! 몽땅 죽여라!” 한길수의 고함소리에 자위대원들이 불을 질렀다. 바깥에서 불길이 활활 타올랐다. 검둥이가 바깥에서 한길수가 탄 말에 덮쳐들어 뒷다리를 물었다. 놀란 적토마가 “오 호 홍-” 하고 앞다리를 쳐들었다가 내리며 냅다 달아났다. 성칠이가 뒤를 피뜩 돌아보니 상호랑 뒷문을 열고 울타리를 거의 벗어나고 있었다. 이때 뒤에서 또 요란한 총소리가 들렸다. 벽에 와 총알이 푱 푱 박히는 소리가 들리고 비명소리도 들렸다. 성칠은 황급히 뒤울안으로 뛰어갔다. 숱한 자위대원 놈들이 총창을 비껴들고 상호와 육박전을 벌리고 있었다. 명순은 총알에 맞았는지 가슴을 움켜쥔 채 머리를 한쪽으로 기울였고 은녀의 부축을 받으면서 겨우 서있었다. 성칠은 모젤권총으로 자위대원들에게 연발사격했다. 땅! 땅! 땅! 자위대 병졸 몇 놈이 쓰러졌다. 겁을 먹은 나머지 놈들은 와 하고 흩어져 달아났다. “빨리 뒷산으로 뛰어라!” 성칠의 고함소리에 병수가 명순을 제꺽 업고 뒷산으로 달려갔다. 은녀와 은희, 철규도 뒤따라 종 주먹을 쥐고 달아났다. 땅! 야무진 총소리와 함께 은희가 종아리를 붙잡고 폭 꼬꾸라졌다. 은녀가 되돌아와 은희를 껴안아 일으켜 부축해가지고 달아났다. 말을 탄 자위대원 놈들이 쫓아왔다. 은희는 은녀를 활 밀어내면서 고함쳤다. “날 관계하지 말고 빨리 달아나. 다 붙잡히겠어.” “아니야. 어찌 널 두고 달아나니?” 은녀가 되돌아와 은희를 부축하려고 했다. 은희가 새된 소리를 쳤다. “빨리 달아나라.” 그때 자위대원 놈들이 주린 이리떼처럼 덮쳐와 은희의 팔을 비틀어 땅바닥에 꺼꾸러뜨렸다. 은녀는 은희가 끌려가는 것을 보면서도 할 수 없이 언 버드나무가지들을 헤가르면서 개울가 쪽으로 도망쳤다. 성칠과 상호는 벽에 붙어 서서 자위대 놈들에게 사격을 가하면서 철퇴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서쪽 구새 목 쪽으로 굽이를 돌면서 울타리를 벗어나려는 순간 바 줄이 날아와 상호의 목을 옭아맸다. 구새 목에 숨었던 자위대원 놈들이 던진 올가미에 걸렸던 것이다. 성칠이 모젤권총 방아쇠를 당겼다. 절컥, 절컥, 총알이 없었다. “저 놈이 총알이 없어!” “하하하. 어디로 달아나?!” 자위대원 놈들은 총창을 비껴들고 모여오더니 또다시 포위망을 좁혀왔다. 한길수도 적토마를 타고 되돌아 덮쳐오면서 고함쳤다. “저놈들을 생포해라!” 성칠은 비수를 꺼내 자위대원 놈이 상호의 목을 올가미로 끌어당기는 바 줄을 끊으려고 내리찍었다. 그러나 끊어지지 않았다. 당황해난 성칠은 자위대원 한 놈을 찍어 눕혔다. 그때 다른 놈들이 일제히 총창으로 성칠의 가슴을 겨누고 찔렀다. 성칠은 구새통을 탁 차면서 몸을 날려 울타리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는 끌려가는 상호를 보면서도 독불장군이라고 용빼는 수가 없었다. 복수심으로 불타오른 그는 마지막으로 적토마를 탄 한길수에게 비수를 날렸다. “오- 호- 홍!” 한길수가 납작 엎드리자 말이 쳐든 목에 비수를 맞고 네 굽을 안고 냅다 뛰었다. 그 바람에 몇몇 자위대원 놈이 말발굽에 짓밟혀 비명을 지르면서 꺼꾸러졌다. 성칠은 손에 쇠붙이도 없는지라 눈 깔린 버들방천 속으로 뛰어갔다. 푱 푱! 푱! 푱! 성칠의 옆과 앞에서 날아오는 총알에 눈꽃이 튕겼다. 성칠은 날아오는 탄알을 피해 운주하강바닥으로 해 뻗은 뒷산골짜기로 달아났다. 영팔이 자위대원들을 끌고 골짜기로 쫓아가려 할 때다. “뒤쫓지 말라!” 영팔은 권총으로 중절모자 채양을 춰올리며 물었다. “성칠은 탄알 다 떨어졌습구마. 추격하면 생포할 수 있습구마.” “매복이 있을 수도 있다. 돌아가자!” “예.” 영팔은 권총을 쥔 손을 홱 저었다. 놈들은 상호와 은희를 끌고 개울가를 에돌아 천천히 나갔다. 원래 한길수는 전날 검둥이가 토성 밑에 왔다가 자기 사냥개 누렁이들과 싸우다가 쫓기어가기까지 한 것을 알고 영팔을 보고 검둥이 발자국을 따라가 보게 했다. 그리하여 일부 자위대원 놈들은 엄창렬의 집에 수상한 자들이 있다는 것으로 추측하고 매복 진을 치고 감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집에는 명순 밖에 없고 의심스러운 자들이 나타나지 않아 손을 쓰지 못하였었다. 그러다가 밤중에 토성 안에 불길이 타오르고 검은 그림자들이 엄창렬네 집쪽으로 우르르  끌어다가왔다. 뒤이어 한길수와 영팔 등이 덮쳐오자 포위권을 좁히면서 기습했던 것이다.        올가미에 목을 매운 상호는 두 손으로 올가미를 잡고 아무리 안간힘을 다 써서 풀려고 해도 용빼는 수가 없었다.         영팔 일당은 개 잡은 포수들처럼 득의양양해 꽁꽁 묶인 상호와 은희를 끌고 림산파출소로 돌아갔다.           눈보라 치는 개울가의 언 버드나무가지들이 몸부림치면서 윙윙 애처로운 비명을 질렀다.  
36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15) 댓글:  조회:1808  추천:0  2015-09-09
                   김장혁 작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 제2권                  제7장 흑야                               9. 머슴       먹장구름이 고향의 하늘을 지지누르면서 을씨년스럽게 기운봉을 핥으며 오만하게 흘러갔다. 산과 들은 먹장구름의 야만적인 억눌림을 받아 침침해 견디기 어력게 돼가고 길 옆의 눈더미에 깔린 진달래는 언 허리를 굽힌 채 쇠 발굽에 밟혀 간간히 신음하고 있었다.     월선은 날이 감에 따라 은희를 더 못 살게 굴었다. 쩍 하면 밥이 설었다, 눅다, 되다, 돌이 씹힌다, 뭐니 뭐니 하면서 허물을 잡고 머리를 잡아 뜯어놓았다.    암범은 늑대가 가만히 은희와 치근거릴까 봐 물을 길으러 가도 자위대원을 따라 보내 감시하게 했다.    어느 날 월선은 입을 앙다물고 아침 설거지를 하는 은희를 들볶아댔다.    “다시 우리 영감과 치근거려 봐라. 가랑이를 찢어놓지 않는가.”    월선은 선처의 맏아들 철주 녀석과 함께 마차에 앉아 우시장으로 본가 집 아버지를 모시러 떠나갔다.    철주는 일본에 유학을 갔었다. 그는 금방 서울로 돌아왔다가 아버지를 보러 고향으로 내려왔던 것이다.    딸랑딸랑    구리방울소리 절주 있게 들렸다. 네 필 말은 네 굽을 안고 우시장을 향해 달려갔다.   그만하면 마차 빠른데도 암범은 재촉이 성화 같았다.    “빨리 몰아. 해지기 전에 돌아와야겠어.”   어찌나 재촉하는지 머슴 병수는 연신 닫는 말에 채찍을 쨩쨩 안겼다.    뭇 산들은 하얀 눈옷을 떨쳐입은 채 뒤로 물러갔다. 은세계를 방불케 하는 산들에서 흰 용들이 하얀 물보라를 일으키면서 엎치락뒤치락 싸우는 듯이 눈보라가 무섭게 비명을 지르면서 휘몰아쳤다.    “철주, 저 눈보라 치는 산을 보오. 우린 신선들이 날아다니는 별유천지를 마차 타고 훨훨 날아예는 거 같지 않아요?”    “그런 거 같네요.”    철주는 크림 내 확확 풍기는 월선을 피뜩 곁눈질하면서 비위를 맞추면서 씽긋 웃어 보이었다.    “작은어머니, 짚고 넘어갈 게 한 가지 있는데요. 맏아들과 무슨 ‘이랬어요’, ‘저래요’인가요? ‘야’, ‘자’ 하세요.”    “호호호.”    월선은 입을 싸쥐고 캐득캐득 웃었다.    “맏아들? 그저 맏아들과 같이 꽃마차를 타고 아버지 모시러 가니 기분이 좋아 그래요.”    “또, 또. 에이 참, 어머님도. 원.”    월선은 개의치 않고 철주의 손을 슬그머니 잡았다. 철주는 덴겁해 손을 훌 빼갔다.    월선은 취한 듯이 몸을 철주에게 기대면서 나직이 소곤거렸다.     “왜 안 되나? 어머니가 맏아들이 고와서 그래. 호호호.”     철주는 황급히 몸을 피하면서 상을 찡그렸다.     (늙으신 아버님 마음고생 많겠구나.)    순간 월선은 깨 고소해 했다.     (등신 같은 영감태기, 당신은 은희를 좋아하지? 내 당신 맏아들을 좋아한들 뭐래? 흥, 애 나지? 풍이나 맞고 콱 뒤져!)     병수는 마차를 몰면서 뒤에서 연놈들이 하는 수작이 메스꺼워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 잔등에 채찍을 안기며 박차를 가했다.     마차는 모자간의 추잡한 희극을 싣고 눈보라 속으로 질풍같이 달렸다.     한편, 한길수는 월선이가 우시장을 간 틈을 타서 은희를 고분고분 말을 듣게 길을 들이고 싶었다.     그는 몸채 마루에 나가 앉더니 호통 쳤다.     “영팔이, 은희를 끌어오게!”     “예!”    영팔은 응삼과 함께 사랑방에 가서 은희의 양팔을 잡아끌고 왔다.    한길수가 독기어린 우멍 눈을 무섭게 부릅뜨고 고래고래 고함쳤다.     “더러운 년, 자기를 생각하는 거 모르고 언감 그런 연극을 놀다니? 저 년을 기둥에 달아매라!”     영팔과 응삼은 바 줄로 은희를 기둥에 끌어맸다.     “주인어른, 왜 이랩둥? 난 아무 죄도 없어요. 제발 풀어 줍소.”     “흥, 어디 주인의 비위를 거슬러 봐. 흥, 대가를 톡톡히 치를줄 알어.”    한길수는 기둥에 매놓은 은희의 귀 쌈을 찰싹 찰싹 갈겼다.   은희의 여윈 얼굴에 뻘건 손자리가 났다. 한길수는 손찌검질도 분을 풀기는 모자랐는지 손에 침을 퉤 뱉더니 가죽채찍을 찾아 들고 번들 이마를 번쩍이면서 은희에게 어슬렁어슬렁 다가갔다. 이를 사려 문 한길수의 우멍 눈에는 늑대 독기와 변태의 음충한 눈빛이 서려 있었다.   쨩! 쨩!   한길수는 채찍으로 그 여린 은희의 종아리고 허벅다리고 가슴이고 사정없이 후려쳤다.   “앗, 아가!”   신음소리가 애처롭게 울렸다.   한길수는 채찍질하면서 을러멨다.   “주는 떡을 먹지 않더니 어떠냐? 응? 내 말을 고분고분 듣겠니? 안 듣겠니? 응?!”   은희는 채찍소리 쨩! 쨩! 날 때마다 죽어가는 비명소리를 쳤다. 은희가 머리를 가로 툭 떨어뜨린 채 대답이 없었다. 한길수가 채찍자루로 턱을 쳐들어보니 은희는 눈을 겨우 가늘게 뜨고 올려다보는 것이었다.   “경 칠 년, 다시 내 말을 듣지 않아 봐!”   은희는 대답 대신 머리를 툭 떨어뜨리더니 눈을 내리깔며 까무러쳤다. 그녀의 목과 팔, 종아리에 마디진 퍼런 굴뱀이 쭉쭉 갔다.   한길수는 은희가 죽겠으면 죽어라고 모든 것을 개의치 않았다.   그는 채찍을 놓자 마루에 앉아 곰방대를 꺼내 담배를 재워 넣었다. 눈치 빠른 아첨쟁이 응삼이가 부시를 척 꺼내 올리었다.   한길수는 응삼의 손을 밀어버리고 호주머니에서 성냥 곽을 꺼내더니 성냥가치를 득 그어 담배 불을 붙여 물었다.   “주인님, 건 뭣입둥?”   응삼과 영팔은 신기해하자 한길수는 어깨 으쓱해 입을 널어댔다.   “이 시골 놈들아, 끼무라 국장님이 나에게 준 성냥이야. 이거면 부시를 백번 치지 않아도 돼.”   한길수는 “에헴.” 하고 마른기침을 하며 안방에 들어갔다. 이윽고  나온 그느 성냥을  졸개 응삼과 영팔, 수길에게 한 통씩 나눠주었다.    “와~ 신기하다.”   응삼은 성냥 곽을 쥐고 이리저리 보면서 야단쳤다.   한길수는 영월동에서 병완을 몰아낸 후 병완의 집에 림산파출소를 세우고 들어앉아있는 야마모도 소장을 등에 업고 마구 칼을 휘둘렀다.   “저년에게 물을 치게.”   영팔은 까무러친 은희를 풀어놓고 부엌에 들어가 바가지로 물을 퍼다 얼굴에 탁 쳤다. 그래도 은희는 깨여나지 못했다. 짐승 같은 놈 들은 초겨울 널마루바닥에 은희를 눕혀놓고 정신을 차리기를 기다렸다.   한길수는 은희 생사는 관계하지 않고 차디 찬 마루에 내버려둔 채 영팔, 응삼과 자위대 대원들을 끌고 덕팔이네 집으로 우르르 몰려갔다.    “개자식, 성칠을 따라 사냥하러 갔지. 몽땅 독립군으로 처단할 테다. 네놈들의 처자들을 몽땅 내 종년을 만들테야. 으흐흐.”    한길수는 득의양양해 덕팔이네 집으로 다가갔다.   눈에 용마루가 짓눌려 푹 꺼진 집 안에서 필순의 쿨룩쿨룩 기침소리 들렸다.   길수가 졸개들을 끌고 기척도 없이 뛰어들자 필순의 아들 철규와 딸 점순이가 화닥닥 일어나면서 공포에 바들바들 떨었다.   “무슨 일입둥?”   한길수는 필순의 창백해진 여윈 얼굴을 쏘아보며 고래고래 을러멨다.    “철규, 넌 오늘부터  우리 집에 가서 말을 먹여야 돼!”     “안 됩구마.”   필순은 손으로 철규를 잔등 뒤에 빼돌렸다.   “나그네가 사냥하러 가구 없는데 이제 열 살 푼한 애마저 머슴으로 끌어가면 어떻게 합둥?”   한길수는 음흉한 우멍 눈으로 겨릅대 같은 필순을 쏘아보면서 을러멨다.   “덕팔은 독립군에 들어갔기에 죽은 목숨이야. 처자들도 다 목을 매 죽여 버려야 한다. 하지만 이 어른이 야마모도 소장과 말해서 살려 줬으니 고마운 줄 알아라. 흥!”   영팔과 응삼은 와락 달려들어 필순을 활 밀어버리고 승냥이 어린 양을 채가듯이 철규를 훌 끌고 바깥으로 나갔다.   “철규야, 철규!”   필순은 따라 나가면서 손을 들어 철규를 불렀다. 마흔이 거의 돼서 어떻게 낳은 외동아들을 빼앗기고만 것이다.   “오빠~ 응, 응~”   점순도 따라 나가면서 통곡 쳤다.   한길수는 음충한 눈길로 점순의 애티 나는 몸을 훑었다.   (너무 애호박이야.)   한길수는 우멍 눈을 점순에게서 떼더니 코를 싸쥐고 퀴퀴한 냄새 나는 집안에서 바람결처럼 나가버렸다.  집 안에서는 필순이 모녀의 처량한 울음소리가 흘러나왔다…  토끼꼬리 같은 겨울 해가 눈 덮인 서산으로 뉘엿뉘엿 넘어갈 때에야 병수가 모는 마차가 토성 안에 들어섰다.   마차 풍을 젖히고 살진 월선의 낯이 쑥 나왔다.   “여보, 아버님이 오셨어요.”   위방 문이 삐꺼덕 열리더니 한길수가 끌신을 짝짝 끌고 바삐 나갔다.   마차 우에서 백발이 성성한 염소수염이 풍막을 젖히고 나타났다.   “가시아버지, 그간 무사했습둥?”   “오, 그래.”   염소수염을 기른 월선의 아버지는 거만하게 거들먹거리면서 병수가 가져다놓은 나무 궤를 딛고 마차에서 내렸다.   헌병 가메다가 마차를 뒤따라 들어왔다. 그자는 한길수를 보고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곤방와(안녕하십니까)?"   그자는 월선의 아버지에게도 허리 굽혀 인사했다.    “하이, 오까께 사마데(예, 덕분에).”   한길수는  이젠 제법 섬나라 오랑캐처럼 일본 말로 인사말을 받았다.   이때 저쪽 토성 밑 우사에서 철규는 굽실거리는 한길수를 쓴 오이 보듯 하면서 피씩 쓴 웃음을 지었다.   “철규야, 말을 마구간에 들여다 먹이를 줘라!”   “알았습구마.”   철규는 병수와 함께 말을 풀어 마구간에 들여다 매고 구유에 먹이풀을 주었다.   “에구, 요 어린것까지 붙잡아왔구나. 쯧쯧.”   열세 살 밖에 안 되는 철규는 고된 일에 지쳐 비틀거렸다. 그는 일을 마치고 마구간에서 나오면서 높이 쳐들린 몸채 추녀를 올려다 쏘아보며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그는 자기에게 차려진 밥그릇을 들고 사랑방에 들어가 누워 신음소리를 내고 있는 은희 앞에 내밀었다.   은희는 뜨거운 눈물을 주르르 흘리면서 “네나 먹어라.” 하고 목구멍으로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겨우 말했다.   이때 병수도 밥그릇을 들고 사랑방에 들어섰다.   “은희, 이건 네 몫을 가져 온 거야. 어서 억지로라도 먹어라. 이러다간 앓아눕겠다.”   병수는 은희가 이를 옥 물고 간신히 일어나 앉아 밥술을 드는 은희를 보고서야 자기 곁방으로 나갔다.   철규는 채찍 자국이 난 은희 팔을 보고 눈물이 글썽해지더니 이를 옥 물었다. 너무 힘들어 은희의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내뱄다.   은희는 숟가락을 드네 마네 하다가 한숨소리에 신음소리를 섞어내더니 철규의 부축을 받으면서야 간신히 자리에 들어 누웠다.   철규는 은희의 귀에 대고 뭐라고 소곤거렸다.   창고 같은 사랑방에는 남녀 머슴들이 모이어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었다.                10. 어린 장사꾼과 부자   어느 날, 한길수가 병수와 철규를 데리고 말을 팔러 우시장 장터로 갔다.   한길수는 번대 머리에 중절모자를 눌러쓰고 개화장까지 척 짚고 자위대 대원까지 끌고 나섰다. 돈주머니를 찼던 옆구리에 권총을 척 찼고 외눈깔박이로 된 것이 이전 한길수의 행차보다 달랐다.   그는 걷기 싫어 자전거를 가져오라고 한 후 자위대원 둘을 떼 두면서 병수와 철규가 모는 소와 말을 잘 지키면서 우시장 장터까지 오라고 했다.   병수와 철규는 자전거를 타고 바람결처럼 달려가는 길수와 자위대원의 뒤꽁무니를 보면서 두덜거렸다.   지어 자위대원들도 볼 부은 소리를 했다.   “쳇. 재수 없어. 우린 걸어서 언제 가겠냐?”   철규가 뒤 덜미를 긁적거리다가 말했다.   “이보시오, 우리도 말과 소라도 타구 갑시다. 아무튼 남에게 팔아야 될 소가 아닙니까?”   자위대원 똘만은 철규의 머리를 어루만지면서 “허허, 요놈이. 옳다. 우리라고 다리 아픈데 걸어가겠니?” 하고 말하면서 토성 안 쪽을 돌아다보았다.   “대문이 꼭 닫겼네. 우리 둘이 말을 타고 자네들은 소를 타게.”   똘만의 말대로 자위대원들은 말을 타고 병수와 철규는 소를 타고 우시장으로 떠났다.   그들은 소와 말을 타고 닫다가도 걷고 걷다가도 달았기에 점심 전에 우시장에 이르렀다. 골목마다 이전에 비해 게다짝을 걸고 딸까  닥거리면서 다니는 일본인들이 눈에 뜨이게 많아졌다. 하얀 백의를 입은 조선인들 속에 상시 옷 같은 화복을 입은 일본인들이 섞여있는 골목은 정말로 조밭에 가라지가 섞인 것 같고 꽃밭 속에 쑥대가 섞여 넘실대는 것 같았다.   드디어 그들은 우시장 장터에 이르렀다. 이 도시의 이름을 우시장이라고 단것은 말 그대로 소장마당이 소문났기 때문이다. 소문대로   우시장 소장마당에는 숱한 살이 피둥피둥 진 소들과 말들이 말뚝에 매여져있었고 숱한 장군들이 한창 흥정을 하느라고 야단법석 했다.   어떤 소는 “음메—” 하고 영각소리 울리었다.   덩치 큰 수소는 다른 수소만 보면 앞발로 흙을 긁어 잔등에 퍼 치며 싸움질하자고 뿌리를 곤두세우고 생 지랄이었다. 어떤 수소는 암소가 지나가면 노려보며 덮쳐들다가도 말뚝에 매놓은 고삐에 끌리어 입을 짝 벌리며 대가리를 쳐들고 눈알을 흡떴다. 어떤 둥글소는 암소를 쳐다보다가 아예 매놓은 말뚝에 매달리다가 뿌리로 말뚝을 떵떵 들이받기도 했다.   늦어 가다나니 소와 말을 맬 자리가 없었다. 한참 소와 말 고삐를 잡고 있는데 요행 어떤 소장사군의 소가 팔리면서 말뚝 하나가 나졌다. 하여 눈치 빠른 철규가 제꺽 손에 쥐고 있던 말을 끌어다가 말뚝에 고삐를 매놓았다. 이렇게 한참 싱갱이 질 하며 눈치노름을 하여 겨우 말 두필에 소 한 마리를 말뚝에 매놓았다. 이제 소 두 마리만 말뚝에 고삐를 매놓으면 됐다.   (팔리겠으면 팔리구. 나 하구 무슨 상관인가? 배고픈데 점심도 먹지 못한 판에 말뚝에 매놓고 편안히 앉아 쉬자.)   소나 말을 하나도 팔지 못하였는데 점심때가 돼버렸다. 길수는 불룩해진 배를 어루만지면서 자위대원들을 데리고 점심 먹으러 가면서 병수와 철규에게 부탁했다.   “소와 말을 잘 지켜라. 이 놈의 소장마당은 생사람 눈을 빼먹는 곳이야.”   "네?"  철규는 눈이 데꾼해지었다.  병수는  “예, 예.” 하고 꿉썩거리었다.  그러나 천진한 철규는 핼끔핼끔 길수의 눈치를 보면서 소고삐로 땅바닥을 두드리면서 두덜거렸다.   “배고픈데 소만 지키라고?”   “요놈새끼, 뭐라고? 소만 잃어버려 봐라. 네 놈 목을 쑥 뽑아버리겠다.”   길수는 을러메고 나서 자위대원들을 끌고 가버렸다. 그는 점심도 점심이거니와 우시장 기생집의 옥설과 놀고 싶었던 것이다. 장터에는 병수와 철규만 남아 배를 촐촐 굶으면서 소와 말을 지켰다.   철규는너무 배고파 배를 끌어안고 수척한 얼굴마저 찡그리었다.   병수는 보다 못해 소고삐를 철규에게 주면서 부탁했다.   “내 가서 기름떡을 얻어와야겠다. 소 고삐를 단단히 쥐고 있어라. 소를 잃어버리는 날엔 우린 죽은 목숨이다.”   “예. 알았습구마.”   병수가 떠나간 후 비단솜옷을 입은 한 부자가 다가와 수소를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철규에게 물었다.   “얘, 소 주인은 어데 갔냐?”   “점심 먹으러 갔습구마.”   부자는 소를 사지 못해 아쉬운 듯이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철규는 배고파 병수가 간 쪽만 바라보면서 부자가 자꾸 묻는 것마저 시끄러워 했다.   그런데도 그 부자는 살진 수소가 욕심나 빙빙 맴돌면서 자꾸 물었다.   “얘, 네 주인이 이 소를 얼마에 판다더냐?”   “한 백 원에 판다던데.”   비싸게 말해 부자를 쫓아 보낼 속셈이었다.   “오, 너무 비싸구나. 주인이 어데 갔냐?”   부자는 주인을 찾아낼 듯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뒤이어 철규 밖에 없는 것을 보고 말뚝의 소고삐를 슬슬 풀었다.   “왜 이럽둥?”   “요 망할 놈 새끼! 입 다물지 못할까?”   부자는 자기 팔에 매달린 철규를 탁 밀쳤다.   “이게 누구 손지 알고 이럽둥?”   “누구 소냐?”   부자는 소고삐를 풀던 손을 주춤 멈추더니 철규 쪽에 살진 낯을 돌렸다.   “우시장 자위대장 한길수네 소입구마.”   “엉?!”   악명 높은 한길수의 소라고 하자 부자는 잔등에 식은땀을 쪽 흘렸다. 그러나 어린 애밖에 없다는 현실에 다시 도둑놈의 침착성을 되찾았다.   “에끼, 이 놈 새끼, 한대장은 내 잘 안다. 겁낼게 뭐냐?”   부자는 살진 머리통을 이리저리 돌리면서 주위를 슬슬 살폈다.   “야, 이 놈아, 주인이 백 원에 판다는데 좀 눅게 팔면 안 되겠니?”   “내 어찌 소를 팝둥?”  철규는 이런 생각이 피뜩 떠올랐다.  (저 놈 소를 제꺽 눅게 팔아 엄마 병을 치료해주었으면 얼마나 좋겠니?)   철규는 발딱 일어났다.   “한 50원에 사겠습둥?”   “그럼 오죽 좋겠느냐? 그런데 서울깍쟁이도 울고 갈 한영감이 그렇게 눅게 팔겠냐?”   “내게 50원 내놓고 소를 풀어 갑소.”   부자는 자기 귀를 의심했다.   (이게 웬 떡이냐?)   부자는 동전을 스무나문 잎 꺼내 대충 세는 척하다가 돈주머니에 넣어 철규에게 주고 소고삐를 풀려고 했다.   철규는 돈주머니를 제꺽 호주머니에 넣고 다급히 소 고삐를 잡았다.   “이보소. 우리 주인 오기 전엔 소를 풀어가지 못합구마.”   “이 자식, 왜 이래?”   “안 됩구마. 못 갑구마.”   숱한 장군들이 이쪽을 눈길을 보냈다.   철규가 소고삐를 놓지 않자 부자는 허리춤에서 비수를 꺼내 철규가 잡은 소고삐를 썩 뚝 잘라 버리고 소를 몰고 달아났다.   철규는 부자를 쫓아가면서 소리쳤다.   “어디로 가?! 우리 주인에게 어디 혼나 봐라!”   철규가 소리 칠수록 부자는 고삐로 소잔등을 쨩쨩 치면서 부랴부랴 장마당을 떠나갔다.   철규는 부자를 쫓아가는척하면서 장마당을 벗어났다. 그는 사위를 두리번두리번 살펴도 사람이 보이지 않자 뉘 집 동쪽의 재무지에 덮인 눈 속에 동전을 파묻어 놓았다. 그리고는 황급히 장마당으로 달아 왔다.    그제야 장마당에 병수가 돌아와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기름떡 한 장을 내밀면서 황급히 철규에게 물었다.    “수소 한 마리는 어쨌느냐?”   철규는 기름떡을 뜯어먹으면서 병수의 귀에 대고 종알거렸다.   “어떤 부자가 빼앗아가지고 달아났습니다.”   “야, 이놈 새끼, 이걸 어찌니? 우린 목이 날아났다.”  병수는 목을 매만지면서 풀썩 물앉았다.   “겁도 많기도 많습구마.”   철규는 병수의 귀에 대고 쏘근거렸다.   그러나 병수는 질겁해 물앉은 채 와들와들 떨었다.   “개소릴 치지 말라. 그러고도 살아 남을 거 같니? 난 도망갈 테다.”    병수는 진짜 장마당에서 달아나 어디론가 바람결처럼 사라졌다. 그러나 철규는 말뚝에 매지 않은 나머지 소 한 마리의 고삐와 부자의 비수에 썩 뚝 잘린 소고삐를 한손에 쥐고 한손으로는 눈을 싸쥐고 머리를 숙인 채 쪼그리고 앉아있었다.    한참 후에 기생집에서 실컷 논 한길수가 자위대원들을 데리고 장마당에 나타났다.   그는 철규의 모양을 보고 우스워하면서 소와 말을 세여 보았다.   “아니, 요 놈 새끼야, 소는 어찌 하고 눈을 싸쥐고 앉아 있느냐?”   그제야 철규는 눈을 싸쥔 채 일어나면서 종알거렸다.    “주인님, 생사람 눈을 빼먹는 세상이라기에 눈을 싸쥐고 있습구마.”   “요놈새끼, 소는 어쩌구 빈 소 고삐를 쥐고 있니?"   한길수는 불그락푸르락 해 세길네길 뛰며 고함쳤다.   "소를 어쨌니? 엉? 요놈 새끼, 가죽을 벗겨놓지 않는가 봐라.”   철규는 한길수의 독기서린 외눈깔을 올려다보면서 말했다.    “그래도 병수 삼촌의 말대로 소고삐를 단단히 쥐고 있었으니 그렇지. 안 그럼 나머지 소도 잃어버릴 줄 압소.”   “에끼, 요 놈 새끼, 주둥이만 까진 놈 새낄 어쩌겠니?”   길수는 철규를 한바탕 욕지거리를 하면서 발길로 걷어찼다.   그때 장군들이 몰려 왔다.   “어떤 뚱뚱한 부자가 와서 소를 빼앗아 갔습구마.”    철규는 발길에 채워 대굴대굴 굴면서도 익살을 피웠다.   “옳습구마. 내 그 뚱뚱보를 말리면서 소고삐를 놓지 않으니 비수로 소고삐를 베 버리구 소를 끌고 달아났습구마. 아이고, 그놈을 쫓아가면서 소를 놔라고 했는뎁슈. 더 따라오면 비수로 찍어죽이겠다고 을러메지 않겠습둥? 난 나머지 마소를 잃어버릴 가봐  장마당에 되달아 왔댔습구마.”    철규는 속으로 병수 삼촌과 함께 달아나지 않은 것을 못내 후회했다.    “요놈새끼야, 병수는 어데 갔니?!”   똘만은 눈을 가슴츠레 뜨고 주위를 살펴보다가 길수에게 의문을 들이댔다.   “혹시 그 놈이 소를 풀어가지고 도망가지 않았는지?”   “엉? 그래, 빨리 자전거를 타고 그 놈을 당장 붙잡아라. 소를 끌고 멀리는 가지 못했을 거야!”   “예!”   한길수는 자위대원들을 보내놓고서도 시름이 놓이지 않아 똘만을 불러 세웠다.   “헌병대에 돌아가 넌 오토바이를 타고 큰 길을 따라 쫓아가라.”   “예. 알았습구마.”   땅딸보 똘만은 자전거에 뛰어올라 부랴부랴 우시장 경찰국 사무청사 쪽으로 달려갔다.   철규는 집에 돌아가 혼 낼 궁리를 하면서 길수는 먼저 자위대에 헌병대까지 동원해 수소와 병수부터 찾아내자고 날뛰었다.   한참 후에 똘만과 자위대원이 장마당으로 자전거를 타고 돌아왔다.   “주인님, 소를 찾았습구마.”   길수는 우멍 눈의 주름살이 쫙 펴졌다.   “그래? 병수는?”   똘만은 땀을 훔치면서 도리멀리 질 했다.   “찾지 못했습구마. 명천에 사는 놈이 둥글 소를 끌고 큰길로 돌아가는 걸 헌병대오토바이를 타고 쫓아가 붙잡았습니다. 그런데 그놈의 말이 어린 애에게서 소를 50원에 사갔다고 합더구마.”    “뭐라고? 그럼 병수가 도둑질 한 게 아니란 말이지?”    순간 길수는 의심에 가득 찬 외눈깔박이로 쪼그리고 앉아 흐느끼는 철규를 내려다보았다.   “요놈새끼, 소를 팔았단 말인가?”   그러자 철규는 핼끔 길수를 쳐다보더니 쿨쩍이며 말했다.    “아무리 어리다고 억울하게 굴지 맙소. 소도적놈이 철부지에게 죄를 덮어씌우는 것도 모릅둥?”   그때 옆에서 구경하며 장을 보던 사나이가 끼어들었다.   “아까 보니까 확실히 비수로 고삐를 베면서 위협합디다.”   “그러잖고. 어린 애가 비수를 휘두르는 도적놈을 어찌 하겠소?”   길수는 뭔가 짐작됐는지 머리를 끄덕였다.   “좌우간 요 놈 새끼하구 소를 끌고 가던 놈을 경찰국에 가서 삼조대면시키자. 모든 게 드러날게 아니냐? 둥글소를 끌고 간 놈은 어데 있냐?”   똘만은 자전거를 장마당 눈 바닥에 세워놓으면서 말했다.   “가메다 헌병소대장이 둥글 소와 함께 경찰국으로 끌고 갔습니다.”    “음, 잘 됐다.”   길수는 쾌자를 부르다가 무릎을 탁 쳤다.   “아차, 이젠 둥글소는 잃어버렸구나.”    똘만은 중절모자를 벗어 쥐고 한숨을 땅이 꺼지게 쉬는 주인의 번들 이마를 응시했다.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놈, 경찰국 울안에는 소도적보다 더 무서운 날강도들이 득실거리는 걸 모르느냐? 아, 아냐?”   길수는 손바닥으로 입을 막더니 혀끝을 감빨면서 누가 듣지 않았나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넌 자위대원 몇을 데리고 나머지 마소들을 집에 몰아가라. 못 팔면 못 팔았지. 일본 사람들에게 몽땅 먹히겠다.”   그제야 대장의 말속의 말을 알았는지 똘만은 머리를 끄덕이면서 소고삐를 말뚝에서 풀었다.   “쥐에게 먹혀서는 아깝지만 고양이에게 쌀을 먹여선 아깝지 않다는데 난 쥐에게나 고양이에게나 다 아깝다. 아까워. 내가 어떻게 긁  어모은 재산이냐?”   “예, 안 됐습구마. 꼭 실수 없이 마소를 집에 끌고 가겠습구마.”   “장마당에 왔다가 둥글 소도 잃어먹고 병수까지 잃어버렸다. 그런데 이 놈은 어디로 갔을까?”   길수는 이를 악물고 자위대월들 서넛과 함께 철규를 끌고 경찰국 사무 청사 울 안으로 갔다.   벌건 벽돌토성을 두른 울안에 들어가자 검정 비단솜옷을 입은 뚱뚱한자가 둥글 소와 함께 늙은 느티나무 아래 묶여 있는 것이 우멍 눈에 안겨왔다.   한길수의 눈에 시뻘건 불티가 마구 튕겼다.   “이 놈 새낀가?”   그는 똘만에게 물으면서 뚱뚱한 부자한테로 다가갔다.   “아니, 왜 이럽니까? 난 그 집 소를 샀을 뿐인데.”   부자의 말에 길수는 우멍 눈으로 뒤에 머리를 숙이고 끌려오는 철규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요 놈 새끼, 이 놈 새끼 맞니?”   “예.”   철규는 부자를 보자 머리부터 숙이며 쥐구멍으로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대답했다.   부자는 철규를 보자 망망한 대해에서 지푸라기라도 만난 듯이 허우적거렸다.   “난 저 애에게 50원을 주고 샀습구마.”   철규는 입이 뽀로통해지더니 도도거렸다.   “난 돈을 받은 적도 없습구마. 자위대 한대장네 소라면서 빼앗아 가지 말라구 했는데  저 부자놈이 비수로 나를 위협하면서 소 고삐까지 잘라놓고 소를 끌고 달아났댔습구마. 어린애라고 깔보구 거짓말 작작 합소.”   부자는 눈을 뚝 부릅뜨고 고래고래 고함쳤다.   “죄꼬만 새끼, 경찰국에서 나가기만 해라. 네놈 대갈통을 잘라버릴테다.”   한길수는 부자의 귀쌈을 찰싹찰싹 갈기면서 욕했다.   “이 죽일 놈 새끼, 네가 감히 내 소를 빼앗아가? 비수로 소고삐를 자르고 어린애라고 업신여겨 비수로 위협까지 했다지? 개를 쳐도 주인을 보고 쳐라. 이놈, 어디 죽어봐라.”   부자는 철규에게서 소를 눅게 사가려다가 헌병대에 잡혀 한길수에게 반 주검이 되게 얻어맞았다.   길수는 도적놈은 붙잡았지만 둥글소를 헌병대에 빼앗기고 말았다. 끼무라 국장이 잃어버렸던 둥글 소를 잃어버린 셈 치고 헌병대에서 잡아먹게 선물하라고 하였던 것이다.    깍쟁이 한길수는 소를 잃고 병수마저 사라져 속을 끙끙 앓았다.         11. 뜻밖의 상봉   사실 병수는 점심 때 우시장에 있는 길수의 집에 가서 은녀를 만나 기름떡을 얻어가지고 장마당으로 돌아왔던 것이다.   그때 은녀는 병수에게서 아버지가 아들딸 근심에 속을 태우다가 기막혀 사망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애고, 우리 아버지, 기침을 쿨룩쿨룩 하며 시름시름 앓더니 이렇게 불쌍하게 돌아가시다니. 아이고, 내 아버지, 불쌍한 내 아버지, 흐 흐 흑, 흑 흑.”    은녀는 대성통곡하면서 “아버지 장례에 가겠어요.” 하고 길수에게 사정했다.   한길수는 소를 잃어버렸는데 은녀마저 달아날까 봐 근심됐다.   “가긴 어디로 가? 네년이 가면 우리 집 밥은 누가 해?”   은녀는 한길수 앞에 꿇어 엎드려 두 손을 싹싹 비비면서 빌었다.   “아버지 마지막 길을 바래드리게 보내 줍소. 제발, 주인님.”   인정머리라곤 꼬물만치도 없는 길수는 건 가래를 떼면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토성대문을 나서더니 기생집으로 가버렸다.   아버지 장례에도 가지 못한 은녀는 더는 살고 싶지도 않았다.   그날 저녁, 달밤에 그는 저녁도 먹지 못하고 월선의 호령에 못 이겨 물동이를 팔에 끼고 물을 길으러 비칠비칠 걸어갔다.   (아버지 폐병치료에 일전 한 푼 돕지 못하고 장례에도 가지 못할 바엔 아예 죽는 게 낫지. 상호도 종무소식이고 은희마저 한 영감의 영월동 집에 머슴으로 끌려갔다지. 뭘 보고 이 세상에서 산단 말인가?)   철렁!   드레박이 우물에 떨어지면서 죽음의 비명소리를 질렀다.   순간 은녀는 드레박처럼 우물에 철렁 떨어지면 모든 것이 끝장 나겠는 걸 하는 생각이 피뜩 들었다.   은녀는 두 손으로 머리를 쓰다듬더니 우물 틀 우에 간신히 올라섰다.   그녀는 얼음 쪼각 같은 눈썹달을 쳐다보며 맥없이 중얼거렸다.   “하느님이시여, 아버지와 엄마를 제대로 모시지 못하고 먼저 가는 불효녀를 용서해주옵소서.”   말을 마치자 은녀는 치마폭을 뒤집어쓰고 우물에 뛰어들려고 했다.  그 때다.   순간 뒤에서 꺽쇠 같은 팔이 은녀를 꽉 끌어안아 우물 틀 우에서 내리웠다.   가슴을 할딱이던 은녀는 자기를 안아 내리운 마차몰이군 병수의 거머틱틱한 얼굴이 어슴푸레 보이었다.   병수는 소를 잃어버리자 장마당에서 도망쳐 우시장 경찰국 뒷산 수림 속에 가서 동정을 살피면서 숨어있었다. 그는 뒷산 수림 속에서 똘만이가 자전거를 타고 경찰국 울안에 달려 들어오고 헌병대원들이 오토바이를 타고 눈보라를 흩날리면서 달려 나가는 것을 다 보았다.    한참 후에 경찰국 대문 안에 뚱뚱보와 소가 들어오고 한길수가 똘만이 등 자위대원들과 함께 철규를 끌고 오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나중에 묶인 뚱뚱보를 때리며 심문하고 철규는 묶이지 않은 것을 보았던 것이다.    (정말 철규 말처럼 소를 빼앗긴 걸까?)   그러나 병수는 소를 잃어버렸기에 악마 같은 한길수에게 죽을지 살지 몰라 영월동에 돌아가지 못했다.   병수는 겨울해가 뉘엿뉘엿 지자 산속에서 슬금슬금 내려왔다. 허기증을 달래려고 우물가에서 서성거리면서 은녀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그가 혹시 은녀 뒤를 밟는 자가 있을까봐 사위를 둘러보고 머리를 우물터에 머리를 돌리는 순간 물을 길으러 온 은녀가 우물에 빠지려고 할 줄은 천만뜻밖이었다. 그가 황급히 달려가 은녀를 안아 내리우지 않았더라면 은녀는 한 많은 세상을 떠났을 것이다.    길수는 이전에는 득호나 마을사람들을 일을 시키면 품삯을 주는 척 하였지만 지금은 일본 놈들에게서 강도행세를 배워가지고 아예 일전 한푼 주지도 않고 강제로 일을 시켰다. 은녀나 은희나 일전 한푼 받지 못하고 여종으로 뼈가 물러나도록 일했다. 아버지가 병환에 계셨지만 딸로서 일전 한푼 치료비로 보태주지 못한 은녀와 은희의 아픈 마음이야 이루 더 말할 수 있겠는가? 그렇게 살 바에야 우물에 뛰어들어 죽고 싶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병수는 은녀가 우물에 뛰어들려 한 얘기를 듣고 말리였다.   “은녀, 죽어서는 안 돼. 우린 지금 아무것도 없이 힘들게 살지만 이를 악물고 살아나가야 하오.”    은녀는 우물 턱에 기댄 채 맥없이 머리를 가로저었다.   “한길수 물이나 긷자구 살라오?”    “집엔 엄마와 은희, 상호가 있지 않소?”   그제야 은녀는 한숨을 땅이 꺼지 후~ 내 쉬었다.   “오빠는 어떻게 돼 여기 왔소?”   병수는 한숨을 내쉬더니 오늘 낮에 장마당에서 있은 이야기를 했다.   “그럼 저녁도 못 잡쉈겠구먼. 내 물을 길어가지고 갔다가 올게.”   병수는 드레박으로 물을 길어 쏟아 붓네 하고 안아 한길수의 집 쪽으로 들어다주었다.   “됐소. 괜히 자위대에 들키겠소. 어서 우물에 가서 기다리오.”   은녀 말에 병수는 은녀의 머리 우에 물동이를 올려놔주고 뒤로 물러섰다. 그는 눈으로 비칠비칠 토성에 난 대문 쪽으로 물동이를 이고 걸어 들어가는 은희의 뒷모습이 불쌍했다.   한참 후 은녀가 물동이를 팔에 끼고 우물터에 나타났다.   은녀는 물동이 안에 주먹밥과 누룽지 그리고 기름떡까지 넣어 왔다. 그것으로도 며칠은 먹을 것 같았다.   “배고프겠는데 어서 잡숫소.”   훤칠하게 생긴 병수는 기름떡을 먹으면서 말했다.   “금방 은녀를 보내고 곰곰이 생각해보았소. 여기서 종살이를 한뉘 할게면 우리 간도로 달아날까?”   뜻밖의 말에 은희는 깜짝 놀랐다.   이윽고 그녀는 머리를 다소곳이 숙이며 반신반의했다.   “만주로 간다고 잘 살겠소? 엄마와 은희랑 어찌 하고? 들키는 날엔 한길수가 잡아먹자고 할게오.”   병수는 대수롭잖게 말했다.   “우리 달아났다고 어쩔 거 같소? 상호가 달아나도 어쨌소? 은희를 부려 먹으려고 어쩌지 못하오.”   은녀는 숙였던 머리를 천천히 들었다.   “손에 쥔 게 없이 산 설고 낯선 간도에 갔다가 굶어 죽으면 어쩌겠소. 가지 말기요. 이 추운 겨울에 간도로 갔다가 얼어 죽겠소.”   병수는 은녀의 손을 꼭 잡고 간곡히 말했다.   “나를 믿소. 우린 아직 젊소. 간도에 가서 우리 함께 잘 살아 보기요.”   은녀는 온몸을 바르르 떨면서 희읍스름한 달빛아래 희미하게 보이는 병수의 길쭉한 얼굴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오늘 오빠가 아니었으면 난 이미 죽은 사람일 게요. 구명은인 오빠를 따라 이 놈 지옥에서 훌 달아났으면 좋겠소.”   병수는 은녀를 꼭 끌어안고 잔등을 다독여주었다.   “어서 집에 들어가 옷이랑 먹을 걸 물동이에 넣어가지고 나오오.”   “알았소. 내 인차 갔다가 나올게.”   병수는 우물터와 좀 떨어진 으슥한 골목에 들어가 숨어 우물터에 은녀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한참 후 은녀가 사위를 둘러보면서 눈을 빠드득빠드득 눈을 밟는 소리와 함께 우물터에 나타났다.   병수와 은녀는 골목에 들어가 옷을 보에 싸안고 희읍스름한 달빛이 깔린 골목으로 바람결처럼 사라졌다.   은희는 병수를 따라 눈길로 달아나면서 말했다.   “오빠, 금방 집에 돌아가니까 한영감이 ‘잃어버린 소를 찾았는데 병수를 잃어버려 큰일 났다.’고 하더군요.”   “누가 그 개소리를 믿어. 나를 한뉘 마차몰이꾼으로 부려 먹자는 게지.”   병수는 은녀의 손을 잡고 더 빨리 달으면서 물었다.   “철규는 무사하오?”   은희는 숨이 차 할딱거리면서 대답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물매를 맞았습니다. 영팔이랑 죽여 버리자고 하니까 누가 소를 먹이겠는가 하면서 철규를 잡아두고 덕팔이 삼촌이랑 잡자고 합데.”    병수는 닫다가 주춤 멈춰 섰다.   “아차, 한 가지 잊었다. 이대로 달아나지 말구 한영감 집에 불이라도 콱 싸질러 놓을 거 그랬다.”   은희는 병수의 손을 잡아챘다.   “그만두오. 헌병들이랑 자위대원들이랑 욱실거리는데 붙잡히겠소.”   병수는 우시장 저 멀리 한길수의 집 쪽을 바라보다가 몸을 돌려 은녀의 손을 잡고 다시 달아났다.   은녀는 달아나면서도 속으로 고향마을에 있는 엄마와 은희가 근심됐다.   (엄마랑 무사한지 모르겠다. 빨리 가서 같이 간도로 달아나자고 해야지)   한편 은희는 고향마을 사람들과 함께 아버지를 뒷산 기슭에 장례지낸 후 날마다 악몽 속에서 허덕이었다.   은희는 심란한 김에 이날 밤에도 내일 밥을 지을 물을 더 길으려고 일어나 몸채 부엌간으로 들어갔다. 그는 손 더듬으로 물동이를 더듬어 팔에 끼였다.   “누구야!”  위방 밀창문이 열리면서 한길수가 반쯤 몸뚱이를 일으키고 이쪽을 내려다보는 것이 달빛에 희미하게 보였다.   “은희예요.”   “이 밤중에 뭘 떨꺽거리느냐? 잠을 깨우면서 성가시게. 에이 참.”   “물을 긷자고 그래요.”   “음, 알았다. 내일부턴 우리 잘 때 떨꺽거리자 말아라.”   탁 미닫이문이 닫기는 소리 나고 두덜거리는 소리와 도도고리는 소리가 엇바꿔 들리었다.   은희는 머리채를 뒤로 젖히고 물동이를 팔에 끼고 바깥으로 조심조심 나왔다. 그러나 연 며칠 자위대원을 시켜 은희 뒤를 밟게 해보아도 아무런 기미도 보이지 않자 월선이도 심드렁해져 오늘은 미행을 그만두게 했다.   그녀는 희읍스름한 달빛과 눈을 사뿐사뿐 밟으면서 골짜기 막치기에 있는 우물가에 다가갔다. 가을바람에 나무들이 무섭게 비명을 질러 공포를 자아냈다.   우물가에서 동이를 내려놓고 물을 푸려고 바가지를 우물에 넣던 은희는 처량한 반달이 비껴있는 우물을 들여다보다가 문뜩 이런 생각이 났다.   (이 세상에서 자유롭게 살지 못하고 도망치지도 못할 바에는 이 우물에 빠져 죽고 말았으면 좋겠다. 그럼 모든 게 끝이겠는데.)   그런데 샘물에 비낀 달 옆에 총총 박힌 뭇별들이 차디찬 샘물에 잠겨 추위에 바르르 떨고 있는 것을 보았을 때였다.   그 순간 몇 해 전 여름에 은녀가 들려준 이야기가 떠올랐다. 이 우물가에서 성칠 오빠가 은녀의 눈을 두 손으로 싸쥐고 누군가 알아 맞추라던 장면이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그때 오빠는 은녀가 떠준 샘물을 두 바가지나 마시고 시원하다고 하면서 너부죽한 얼굴에 웃음을 지었다지. 호, 오빠, 이젠 다시 볼 것 같지 않소. 성칠 오빠, 상호는 지금 어데 있소?”    어려울 때마다 자기네 일가를 도와 나서던 성칠 오빠가 이 순간 더욱 그리웠다. 기실 성칠과 은희는 열대여섯 살이나 차 있기에 기실 삼촌 벌이 됐지만 어려서부터 성칠이 그렇게 습관을 시켜 은녀나 은희나 다 오빠라고 불렀고 상호는 형님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은희는 착잡한 생각에 잠겨 흑흑 흐느껴 울면서 바가지로 우물속의 달과 별들이 담긴 물을 한 바가지 한 바가지 퍼서 물동이에 담았다. 물동이안의 달과 별들이 점점 물동이 아구리 쪽으로 올라와 차 넘쳤다.    은희가 물동이안의 달과 별들의 우에 바가지를 동동 띄워놓고 물동이를 이려고 할 때였다.    버스럭버스럭 소리가 났다.   은희가 머리를 돌려보니 골짜기에서 난데없는 검둥이가 뛰어나왔다.   “아니, 검둥아, 네가 어떻게 돼 왔니?”   검둥이는 은희의 치맛자락을 물어 당기더니 끼깅거리며 뒤를 돌아다보았다.   이때 뒤에서 휘파람소리가 들리었다.   “이게 은희 아니냐?”    나직한 부름소리가 들리었다.   (아니, 이게 성칠 오빠의 목소리가 아닌가!)   몸을 돌리는 순간 은희는 자기 앞에 두 사내가 달 빛 속에 서 있는 것을 보았다.   “아니, 상호!”   은희는 놀라 풀렁 물앉았다.   “쉿~”   상호가 식지를 입에 대면서 은희를 안아 일으키더니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 옆에는 성칠 오빠가 서있지 않는가?   은희는 대번에 상호오빠의 품에 와락 안기면서 흑흑 흐느껴 울었다.   “범이 자기 흉을 하면 온다더니 정말 왔구먼. 이게 꿈이요, 생시요?”   “그래 이건 생시요.”    상호는 은희의 파도치는 어깨를 다독이면서 어떻게 위안했으면 좋을지 몰라 했다.    “샘물터에 오면 너를 만날 거 같아 여기 왔다.”   은희는 머리를 끄덕이면서 성칠을 쳐다보았다. 뒤이어 은희는 상호의 품에 안기면서 주먹으로 가슴을 마구 쳐댔다.   “어데 갔다 이제야 왔니?”   “사냥하러 갔지.”   은희는 여기저기 살피면서 서있는 성칠을 돌아보면서 말했다.    “오빠, 오빠가 사라진 후 저 한길수가 오빠네 집을 빼앗아 림산파출소라는 걸 들여앉히고 일본 헌병들이 들어 살고 있소.”   “그랬니? 여긴 얘기하기 위험하니깐. 저쪽 숲 속으로 가자.”   성칠은 물동이를 안고 상호네 오누이를 데리고 숲 속으로 들어갔다.   “오빠, 그간 한길수란 놈은 별의별 악독한 짓을 다했소. 흐 흑 흑.”   은희에게서 그간 고향마을에 있은 일들을 죽 들은 성칠은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이 원수는 꼭 갚아야 한다.”   성칠은 은희에게서 한길수의 영월동 토성안집의 형편도 묻고 나서 말했다.   “넌 아무 일도 없은 듯이 물동이를 이고 토성 안에 들어가라. 그 다음 철규와 함께 이렇게 해라.”   성칠은 사위를 둘러보더니 은희의 귀에 대고 뭐라고 중얼거렸다.   “예~ 알았소. 그렇게 할게.”   은희는 물동이에 물을 퍼 담아 이고 허연 눈 위에 깔린 희읍스름한 달빛을 밟으면서 토성 안 집 쪽으로 내려갔다.   이윽고 성칠과 상호가 우물터 옆 소나무숲속에서 보복행동계획대로 손을 쓸 준비를 다그칠 때다.   우물터 아래쪽에서 눈을 빠드득빠드득 밟는 소리가 들리었다.   “쉿!”   소나무숲 속에서 성칠이 입에 식지를 가져다대면서 허리춤에서 모젤권총을 쓱 뺐다. 상호는 시퍼런 비수를 빼들었다.   저쪽에서는 그런 줄도 모르고 이쪽으로 빠드득빠드득 계속 걸어오면서 도란도란 말까지 했다.   “은희는 늘 저녁에 여기로 물 길으러 올게오.”   “글쎄 말이오. 한길수나 영팔이나 이렇게 추운 날에 여기로 오겠소?”   귀에 익은 여자의 목소리.   소나무 뒤에 몸을 숨긴 상호는 성칠에게 다가서면서 “어째 은녀 누나 목소리 같소.” 하고 나직이 말했다.   성칠은 머리를 끄덕이면서 샘물터에 눈길을 돌렸다.   두 검은 그림자가 샘물터에 가까워 올수록 여자의 목소리는 더 똑똑히 들리었다.   “여기서 은희를 만나면 얼마나 좋겠소?”   남자가 하는 말소리.   “은희를 만나 고향 마을 정황을 안 후 엄마를 만나는 게 옳소.”   분명 은녀의 목소리 아니겠는가.   상호는 성칠에게 “은녀 누나요." 하고 말하고 나서 비수를 허리춤에 꽂아 넣고 나가려고 했다.   그러나 성칠은 상호의 팔을 걷잡고 주위를 살펴보았다.   휴-휴-   소나무가 설레는 소리 밖에 다른 동태가 없었다.   “나가봐라. 옆의 사내를 주의해라.”   상호는 머리를 끄덕이고 나서 천천히 소나무 숲에서 나가면서 조용히 불렀다.   “누나, 은녀 누나.”   “엇, 누나라니?”   다가오던 남녀가 주춤 멈춰서더니 뒤로 비실비실 물러섰다.   “누나, 상호요.”   “뭐라고? 상호?”   은녀는 품에 안았던 보꾸러미를 툭 떨어뜨리더니 이쪽으로 달려왔다.   은녀와 상호는 달려 나가 와락 끌어안았다. 뒤에 선 사내도 다가왔다.   “누구요?”   그러자 저쪽 사내가 다가오면서 말했다.   “상호야, 난 병수다.”   성칠도 슬금슬금 소나무숲속에서 무릎까지 빠지는 눈을 밟으면서 나갔다.   “저건 누구냐?”   은녀의 물음에 상호가 나직이 대답했다.   “성칠 형님이오.”   “오빠라고? 오빠가 살아 있어?”   “그래, 난 살아있다.”   성칠은 성큼성큼 걸어 나가 은녀와 병수를 일일이 손잡아주었다.   “너희들이 얼마나 고생했니?”   은녀는 너무 기쁨과 설음에 마음이 설레어 떨어뜨린 보꾸러미를 주어 안더니 돌아서서 어깨를 들먹였다.   성칠은 은녀의 어깨를 다독이더니 말했다.   “됐다, 금방 은희도 여기 왔다가 갔다. 다시 오지 않을 거다. 여긴 오래 있을 곳이 못된다. 소나무숲속으로 들어가 이야기하자.”   뜻밖에 상봉한 그들은 소나무숲속으로 깊숙이 들어가 그간 서로들 있은 이야기를 했다.  성칠은 은녀와 병수  말을 듣고 나서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었다.   “간도로 무턱 대고 어떻게 간다고 그래?”   병수는 초신 감발한 발로 소나무 밑 둥을 탁 걷어차면서 성칠을 보고 물었다.   “간도에 가지 않으면 여기서 어떻게 사오?”   “우리 독립군에 들어가야 산다.”   “독립군에?”   병수는 놀란 나머지 소나무 숲이 쩌렁쩌렁 울리게 소리쳤다.   성칠이 식지를 입에 대고 사위를 둘러보자 병수가 물었다.   “형님과 상호랑 독립군에 들어갔소?”   “그래. 너희들도 독립군에 들어가 총을 쥐고 일본 놈들과 한길수 같은 개다리들을 이 고향에서 몰아내야 잘 살 수 있다.”   은녀는 소스러치 듯 놀라했다.   “상호야, 너도 독립군이냐?”   상호가 머리를 끄덕이자 생각 밖으로 은녀는 상호의 손으로 잔등을 톡톡 쳤다.   “참 장하다! 우리 철천지원수 한길수를 처단해 우리 원수를 갚아라!”   이윽고 병수는 이렇게 말했다.   “말몰이군도 독립군에서 받아주면 들겠소. 그런데 은녀랑 은희랑은 고향마을에 둘 수 없소. 한뉘 어떻게 한길수의 종살이를 하게 내  버려두겠소? 여자들도 독립군에서 받았으면 좋겠는데.”   성칠은 선뜻이 대답했다.   “독립군에 들어오라. 독립군에도 여자대원이 할 일이 가득하다. 밥을 짓고 빨래를 하고 총도 쏴야지.”   성칠은 은녀에게 물었다.   “독립군 소대장 진달래의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니?”    은녀는 머리를 끄덕였다.   “들었소. 그 돌멩이를 잘 뿌리는 처녀장군 말이 아니오?”   “맞다. 지난 번에도 나를 구할 때 돌멩이로 일본 놈과 자위대 놈들을 여럿을 까 눕혔다.”   “나도 진달래 언니처럼 독리군 여대원이 되겠소.”   성칠은 은녀의 손을 잡으면서 말했다.   “좋다. 우리 힘을 합쳐 우리 고향마을에서 한길수와 야마모도 소장 같은 일본 놈들을 몰아내자. 원수를 꼭 갚고야 말자.”    뒤이어 그들은 성칠의 영솔 하에 은희가 알려 준대로 엄창렬의 산소로 떠나갔다. 그들은 눈이 무릎까지 펑펑 빠지는 뒷산 비탈로 올라갔다.   한참 후 아버지 산소에 이르자 상호와 은녀는 아버지 산소에 절을 세 번 올리고 나서 풀쩍 엎드려 엉엉 통곡 쳤다.   성칠이 다가가 은녀와 상호의 어깨를 다독였다.   “여기도 오래 있을 곳이 아니다.”   그들은 다시 눈보라를 무릅쓰고 담대하게도 은녀의 집으로 내려가 삽작문을 열고 들어섰다.   바깥에서는 눈보라가 쌩쌩 휘몰아쳤다.    한길수나 응삼이 지어 야마모도소장도 이 눈보라치는 야밤삼경에 성칠과 상호 그리고 은녀와 병수가 이 마을에 숨어들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하긴 반년 넘어 영월동의 성칠과 덕팔, 동욱, 상호네 집에 넓은 그물을 치고 밤낮없이 지켰지만 그들의 그림자도 얼씬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 놈들은 겨울에 접어들자 몇 달째 경계가 허술해졌던 것이다.    한편 야밤삼경에 명순은 은녀와 이태 남짓이 사라졌던 상호를 꿈결에서처럼 만나자 부둥켜안고 엉엉 운 것은 더 말할 것도 없다.    바깥에서 보초를 서는 성칠은 그들 삼모녀의 통곡소리에 마음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35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14) 댓글:  조회:1690  추천:0  2015-08-31
                                       5. 어미 없는 설음        네댓 살에 어머니를 여읜 봉인과 명옥은 날개 부러진 제비 새끼 같았다. 그들 오누이는 어려서부터 눈치 밥을 먹으면서 자랐고 밥값이라도 하느라고 베실을 뽑고 나물을 캐오고 다른 일도 시키는 대로 부지런히 했다. 어느 날 애들이 마당에서 놀고 있었다. 숱한 애들이 손을 잡고 둥그렇게 서서 돌아가면서 소리를 먹인다.         여우야, 여우야!       나와 놀자         둥그런 원 안에서 두 손으로 눈을 막고 쪼그리고 앉은 오니(귀신)로 된 애가 화답한다.         밥 먹는 중이다        애들이 손을 잡고 오니애를 안에 넣고 둥그렇게 돌아가며  또 묻는다.             반찬은 무엇이냐?        원 안의 오니애가 화답한다.       산 뱀이다!         원 안에 앉아있던 오니(귀신)애가 손을 눈에서 떼면서 애들을 쫓아간다. 애들은 “으악!” 소리치면서 종 주먹을 쥐고 산지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났다. 그러다가 오니(귀신)로 된 애가 그중의 어느 애를 잡으면 그 애가 대신 오니(귀신)로 되여 애들이 손잡고 돌아가는 원 안으로 들어가 두 손으로 눈을 막고 쪼그리고 앉는다. 봉인은 애들과 놀고 싶어 가만히 명옥을 데리고 애들 속에 가서 손을 잡았다. 그때 할아버지 최구장이 헐금씨금 와서 곰방대로 봉인과 명옥의 이마를 똑똑 때렸다. “이 놈 새끼들아, 일 하지 않고 누가 밥을 주니? 어서 석마간으로 가서 좁쌀알을 주워 모으지 못해?!” 봉인과 명옥은 아파서 눈물을 찔끔찔끔 쏟으면서 석마간으로 갔다. 네댓 살 되는 오누이는 다른 집 애들처럼 놀지도 못하고 할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운주동 석마 칸에 가서 겨 속의 쌀알을 주워 모으기 시작했다. 아침부터 눈이 시리게 먼지가 새뽀얗게 이는 석마간 겨 무지에서 좁쌀알을 한 알 한 알 주었지만 한바가지를 채운다는 것은 실로 쉽지 않은 일이었다. 온종일 주어 한바가지를 채울라 할 때다.  주인이 나와서  힐끔 바가지를 들여다보더니 바가지를 쥐여 마구 흔들어놓는 것이 아니겠는가. 진짜 얄밉게 놀기도 했다. 바가지 안에서 쌀알들이 훌렁 꺼져 내려가서 다시 채우자니 아름찼다. 애나게 주어 겨우 한바가지를 채워 바치자 주인은 먼저 성냥가치만한 나무꼬챙이를 한 개를 내주었다. 그렇게 다섯 바가지를 주어 나무꼬챙이 다섯 개를 채우면 구리돈 1전을 주었다. 온종일 둘이서 애나게 겨 무지 속에서 좁쌀알 다섯 바가지를 주어야 1전을 벌수 있었다. 3전이면 커다란 고마이 한 마리를 살 수 있었다. 봉인과 명옥이가 서너 날 겨 무지에서 좁쌀알을 한 알 한 알 주어 구리돈 2전이나 3전을 가져오면 할머니 성단은 오누이의 머리를 두 손으로 정겹게 쓰다듬어 주군 했다. “에이유, 요 귀한 내 새끼들아, 얼마나 장하냐? 쯧쯧.” 경숙도 어미 잃은 자식들이 귀하고 불쌍해 얼굴을 매만지면서 뽀뽀까지 해주군 했다. 오누이는 어머니를 잃고도 뜻밖에 어른들의 말을 잘 듣고 일도 잘하면서 강하고도 건실하게 자랐다. 군일이 있을 때면 봉인과 명옥은 어머니를 잃은 섧음을 가슴 아프게 느끼곤 했다. 다른 애들은 다 어머니들이 불러내다가 떡이랑 고기국이랑 먹이는가 하면 엿사탕이랑 먹였다. 봉인과 명옥은 언제면 자기들을 부르겠는가고 목이 빠지게 기다렸다. 위방에 누워서 머리를 들고 정지를 내려다보군 했다. 그러나 해가 지고 달이 떠도 어머니가 없다보니 부르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봉문아, 여기 나오너라.” 봉문은 넷째 삼촌댁 성단이 벌써 두 번째 불러내다가 돼지고기 점을 입에 넣어줬다. 봉문이 입에 돼지고기 살점을 물고 와서 고의로 봉인과 명옥이가 부럽게 하느라고 손으로 살코기 실을 쪽쪽 찢어서 입에 넣고 잘근잘근 씹으면서 짹짹거렸다. “양, 양, 맛있다. 오래오래 맛있다.” 봉인과 명옥은 어린 사촌동생이 먹는 살 고기가 너무나도 먹고 싶어 목구멍에서 군침을 꼴깍 삼켰다. 어찌나 배고팠는지 배에서 꼬르륵 소리까지 자꾸 났다. 이때 아래 방에서 위방으로 누군가 다가오는 소리가 나자 명옥은 머리를 들고 아래방 쪽을 내려다보았다. “봉순아, 여기 오너라.” 이번에는 둘째삼촌댁 김어금이 위방 미닫이를 쭈르륵 열고 들어섰다. 손에는 돼지갈비뼈가 쥐여져있었다. 그는 자기 아들 봉순에게 주려다가 주춤 멈췄다. “아니, 너네 오누이도 여기 있구나. 아직 아무 것도 먹지 못하잖았냐?” “예, 삼촌댁.” 봉인은 코마루가 시큼해 울먹울먹하면서 대답했다. 어금은 갈비뼈를 손으로 뚝 비탈아 끊더니 명옥과 봉인을 나눠 주었다. 그러자 봉순이 칭얼거렸다. “아냐, 엄마, 날  달라. 응~응~” 봉인은 서너 살 지하인 동생이 불쌍하다고 자기에게 차려진 갈비를 주었다. 그래서 명옥은 자기에게 차려진 갈비를 오빠와 엇바꿔가면서 나눠 먹었다. 어금이 나가 할머니 성단에게 뭐라고 중얼거렸다. 한참 후 할머니 성단이가 떡과 국물을 들고 와서 봉인과 명옥도 저녁을 먹었다. 할머니는 어미 없는 그들 오누이가 불쌍해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뜨거운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뒤이어 할머니는 며느리들을 시켜 애들에게 몽땅 저녁을 먹이게 했다. 그 후부터 할머니 성단은 연년생들인 자기 막내딸 계순과 똑같이 봉인, 명옥 오누이를  보살폈다. 물은 에우기에 가고 애들은 거둬 주는 데를 따라 간다고 어머니를 일찍이 여읜 봉인과 명옥은 자기들을 어머니처럼 아끼고 고와하고 보살펴주는 할머니를 어머니처럼 따르면서 할머니 말씀이라면 아주 잘 들었다. 가을이 오자 할머니는 애들을 데리고 산속에 가서 다 파간 감자밭을 돌아다니면서 파가지 못한 감자를 팠다. 삽자루만큼도 안 되는 봉인은 사내애노라고 삽을 둘러메고 달아 다니면서 감자가 있을 만한 데는 폭폭 팠다. “할머니, 감자!” “오, 그래, 에이고, 우리 봉인이 용하다. 제 얼굴만 한 감자를 다 파내고.” 성단은 봉인이가 파낸 큼직한 감자를 쥐여 흙을 싹싹 닦아 광주리에 담고 나서 봉인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봉인은 할머니의 칭찬을 받고 좋아서 외까풀 눈이 실눈으로 되고 입이 귀밑까지 쭉 째질 지경이었다. 그 모양을 보고 봉인보다 한살 이상인 계순이 시샘이 나 도도거렸다. “어머니는 그저 봉인 밖에 모르면서. 나와 명옥은 칭찬 한마디 하지 않으면서. 원, 분해 죽겠다.” 성단은 허리를 펴고 일어나 수건으로 땀을 닦고 나서 초롱초롱한 쌍까풀눈을 흘기는 계순의 얼굴을 만져주었다. “에이구나. 내 딸아, 우리 막내딸을 누가 미워하겠냐? 응? 난 우리 딸이 영 곱다.” 성단이가 쪼그리고 앉으면서 이마에 이마를 대고 “도글도글” 하면서 얼렸다. 그제야 계순은 배시시 웃었다. 계순과 명옥은 할머니를 따라다니다가 “여기 감자가 있는 것 같다.” 하고 말하면서 할머니가 호미로 파려고 하면 “할머니, 놔 둡소. 우리 파 보게.” 하고 바삐 소리치고는 손으로 파보군 했다. 닭 알만한 감자알이 흙속에서 드러나자 애들은 환성을 올렸다. “할머니, 감자 나왔습니다.” 성단은 계순과 명옥이 고사리 손으로 파는 흙속에 드러난 감자알을 보고 대견해했다. “오, 그래? 계집애들도 장하다.” 계순과 명옥이 손으로 파는데 저쪽에 갔던 봉인이가 뛰어왔다. “물러나라. 삽으로 파자.” “안 돼, 이건 우리 파낸 거야.” 그러나 봉인은 계순을 활 밀어내고 삽으로 푹 팠다. 그런데 바삐 삽질하다나니 감자가 한쪽이 쓱 잘리어나갔다. “봐라, 감자알이 찍혔어. 어머니, 얘를 보시요.” 성단은 눈을 흘기는 계순을 말리였다. “응, 알았다. 이미 그렇게 된 걸 어찌 하겠니? 싸우지 말라.” 그래도 계순은 도도도 거렸다. “항상 자기 더 잘 하는 척 하긴.” 봉인도 지지 않으려고 했다. “그래, 어떻게 너네 계집애들과 비하겠니? 할아버지 말씀하던데. 난 이 집안의 14대 장손이란다. 넌 뭐냐?” 성단은 우쭐해서 삽자루를 왼손에 쥐고 허리에 오른손을 찌르고 선 봉인을 보면서 우스워 코를 싸쥐고 웃었다. 계순은 눈이 동그래 어머니에게 물었다. “어머니, 14대 장손이란 건 뭣입둥?” “그래, 우리 봉인은 우리 개성 최씨네 집안 열네 번째로 대를 이은 기둥손자란 말이다. 집으로 말하면 기둥과 같지. 기둥이 없으면 집이 무너지고 말지.” 명옥은 두 손의 흙을 털면서 봉인을 쳐다보면서 “와~ 오빠 정말 대단하구나. 우리 집의 기둥이라고 하지 않니?” 하고 감탄했다. 그래도 계순은 앵두입술을 옥물더니 뾰로통해 했다. “쟤가 우리 집 기둥이라고? 쟤가 없는 날엔 우리 집안이 무너지겠구나. 흥! 누가 그 말을 곧이듣는다더니? 픽!” 그래도 봉인은 옆구리에 손을 찌르고 턱을 바짝 쳐들고 외까풀 눈으로 계순과 명옥을 한참이나 내려다보았다. 반나절을 헤매 성단은 애들을 데리고 감자를 반 광주리나 파서 이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덕대 위에서 감자갈이를 내려다가 감자를 갈기 시작했다. 계순이 “어머니, 내 갈아 보깁소.” 하고 응석을 부렸다. “그래라.” 성단은 함지 안에 놓은 감자갈이를 훌 넘겨주면서 주의를 주었다. “이 양철 판 뾰족뾰족한데 손이 맞히면 베져. 주의해.” “양.” 성단은 밖에 나가 땔나무를 안아 들여다 놓고 저녁준비를 했다. 계순은 어머니가 그렇게 주의를 주었건만 끝내 감자갈이 판에 애고사리 손을 스치고 말았다. “아, 아파라.” “어디 보자.” 성단이가 부엌에서 솥을 부시다가 솔을 놓고 와서 손을 쥐고 보니 무명지등에 빨간 피가 돋아 나오고 있었다. 성단은 입으로 피를 뽁 빨고는 헝겊을 주어다가 싸매주었다. 대신 명옥이가 나머지 감자 몇 알을 싹싹 갈았다. 해가 질 무렵이 되자 솥에서 구수한 감자떡 냄새가 났다. 둘째, 셋째, 넷째까지 세간나고 다섯째마저 갑산으로 감자농사 하러 가다나니 집에는 최구장 내외에 경숙과 계순, 봉인이네 오누이만 남았다. 반나절 역사 질 해 발간 장물 콩을 딱딱 박아놓고 시루 가마에 얹어 쪄낸 감자떡은 여섯 식구가 먹고도 남을 것 같았다. 그래서 성단은 감자떡을 그릇에 담아 운주동 한마을에 있는 셋째아들과 넷째아들네 집으로 가져갔다. 서걱서걱 해도 감자떡은 별 맛이었다. 계순과 봉인은 감자떡을 먹으면서 너무 맛이 있어 “양, 양, 맛있다. 오래 오래 맛있다.” 하고 노래 부르듯 했다. 그런데 봉인은 쩍 하면 한살 이상인 작은 고모와 말다툼을 하다가도 손찌검 질을 하면서 싸우기도 했다. 오늘 저녁에는 떡을 먹으면서 봉인이가 먼저 말썽을 일으켰다. “내 계순보다 감자를 더 많이 팠어!” 그러자 계순은 봉인을 손가락질하면서 피씩 웃었다. “우스워라. 삽으로 푹 판 게 감자가 잘리어나가지 않았니?” “너희들이 파지 못한 걸 내 삽으로 팠지?” “아까운 감자를 네가 찍어 버렸기에 절반이나 잃어버렸다.” “아니야!” “옳아!” “아니야!” “옳다!” 봉인과 계순이 마주서서 입씨름을 하자 최구장은 저로 밥상을 탕 치면서 고함쳤다. “그만하지 못해?!” 그래도 봉인은 입이 뾰족해 중얼거렸다. “이 놈새끼들이! 어디 맞겠냐?” 최구장이 곰방대를 뽑아 치려고 하자 봉인은 달아났다. 그러나 명옥과 계순은 달아나지 않고 앉아 있다나니 최구장이 치는 곰방대에 머리를 딱딱 맞았다. 계순은 성단의 품에 안기면서 울고 명옥은 머리를 싸쥐고 울었다. “엄마~ 엄마~” 성단은 명옥이 불쌍해 계순과 함께 품에 껴안고 영감을 흘겨보았다. “어미 없는 애를 왜 쳐요?” 성단이가 애들을 껴안고 눈물을 흘렸다. 최구장은 안 되였던지 쳐들었던 곰방대를 내리워 담배를 채워 부시를 쳐 물고 빨며 “에헴, 에헴.” 하고 마른기침을 하며 훌 일어나 바깥으로 나가버렸다. 그도 어미 없는 오누이의 설음을 느꼈던 것이리라. 쓸쓸한 팔간집 마당에는 벌거스름한 낙조가 삐겨들어 오누이의 설음을 더 짙게 만들었다.                                                      6. 뿌리       최구장이 운주동에 차린 서당은 요즘 또 일본 헌병 놈들 때문에 위기를 겪게 됐다. 응삼과 영팔, 수길은 스승 최구장을 도울 대신 배은망덕하고 최구장의 가르치는 내용을 염탐해 나까노라 소대장에게 고발했다. 나까노라 소대장은 문제가 된다고 생각하면 인차 끼무라 국장에게 보고했다.    교활한 헌병대와 개다리 응삼의 감시 밑에 최구장은 운주동 서당을 진지로 민족주의 전통교양을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어느 날 오전, 최구장은 아침 숟가락을 놓은 후 바깥 날씨가 유난히 따뜻해 마루에 앉아 대통을 길게 뻑뻑 빨아 들이켰다가 담배 연기를 후 내뿜었다. 그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일본 놈들은 우리를 점점 살기 어렵게 만든다. 목을 조이다 못 해 이젠 조선말을 하지 못하고 조선 글을 가르치지 못한다고 하지 않는가. 이름도 일본 놈들의 이름처럼 창씨개명을 하라고? 개놈들, 우리가 어찌 네 놈들의 섬나라 오랑캐 같은 대화민족으로 된단 말이냐? 흥!)         최구장은 생각할수록 가슴이 갑갑해났다. 운주동 서당이 위기를 겪고 조선 사람들의 대화민족으로 동화될 것을 강요하는 일본 놈들의 성화에 견디기 어려웠다. 설상가사상으로 요즘 며느리를 잃은 아픈 마음의 상처에마저 소금을 맞은 듯 했다.         그는 담배대통으로 마루턱을 툭툭 치더니 담배연기를 푸~ 푸~ 내뿜었다.         “응삼과 영팔은 사람새끼 아니야. 자기들이 배운 서당 방을 지켜줄 대신 뭐야? 배은망덕하게도 섬나라 오랑캐들 밀정질을 하면서 고발까지 하다니? 에잇, 길러준 개 주인의 발뒤축을 문다고, 에잇, 참, 개만도 못한 놈 새끼들! 개라면 주인을 보면 꼬리나 치지. 퉤! 개새끼면 잡아먹지. 흥!” 그는 성이 꼭뒤까지 치밀어 올라 벌떡 일어났다. 그는 대통을 옆구리에 찌르고 은빛구레나룻을 흩날리며 글방으로 들어갔다. 이윽고 선후하여 봉인과 봉순, 봉문이 어시들과 함께 들어왔다. 최구장은 오늘 따라 손자들을 일일이 둘러보면서 어시들이 다 온지라 자못 엄숙하게 말했다. “모두 바쁘더라도 거기 앉소. 긴히 할 말이 있소.” 경숙과 어금이 그리고 셋째며느리가 앉았다. 좌석을 다 정하고 앉자 최구장은 앞자리에 좌정하더니 아주 엄숙하고도 무겁게 입을 열었다. “오늘 우리 손자들에게 이름을 지어줘야 하겠소. 명심들 하오.” 그러자 경숙이가 최구장에게 물었다. “이름이라니요? 우리 앤 봉인이 아닙니까?” 그 말에 어금도 의아해 했다. “혹시 시아버님도 일본 사람들의 말대로 창씨개명을 하려는 게 아닙니까?” 셋째며느리는 묵묵히 시아버지의 눈치만 살펴보고 있었다. 최구장은 건 가래를 떼더니 한마디, 한마디 똑똑히 말했다. “무슨 놈의 생벼락을 맞을 창씨개명이야. 일본 놈들이 창씨개명을 하라는 바람에 급급히 우리 조선 이름을 똑바로 지어주겠다는 말이요.” 그제야 아들며느리들은 머리를 끄덕였다. 최구장은 정중하게 말했다. “이제껏 저 애들이 부른 이름은 모두 어린애 때 부르는 애명이었소. 그러니 정식이름을 지어주겠소. 봉인은 근형, 봉순은 근덕, 봉문은 근활이라고 지었소. ‘근’ 자는 뿌리라는 ’근’ 자요. 저 애들이 이담 커서 우리 개성 최 씨네 뿌리, 나아가서 우리 조선민족의 뿌리를 잊지 말라는 뜻에서 뿌리 ‘근’ 자 돌림으로 지은 게요. 이담 손자를 몇을 낳든지 모두 뿌리를, 근본을 잊지 말도록 ‘근’ 자 돌림으로 짓도록 하라.” “예-” 모두들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어시들은 이젠 집으로 가도 된다. 근형과 근덕, 근활아,” “예!” “이제 마을 애들이 오면 함께 조선 글을 공부하자.” “야~ 좋다.” 손자들은 어려운 천자문을 배우다가 천자문보다 조금 쉬운 조선 글을 배운다니 좋아서 환성을 질렀다. 최구장은 애들이 오기 전에 흑판에 석회덩이로 백두산과 천지를 그려놓고 백두산이라고 큼직하게 써놓았다. 드디어 애들이 삼삼오오 어른들의 손을 잡고 서당에 들어와 자리에 앉았다. “그럼 오늘 공부를 시작하겠다. 여기 흑판에 써놓은 글자를 어떻게 읽느냐?” 그때 아래 방에서 웬 애가 “백두산!” 하는 소리가 울렸다. 애들이 머리를 돌려 아래 방 쪽을 보니 문에 난 옹이구멍으로 들여다보던 명옥이 문까지 빠금히 열고 소리쳤던 것이다. “거 계집애가 웬 소리냐? 얼른 문 닫지 못할까? 삼실이나 뽑을 게지.” 최구장이 고함치면서 옆구리에서 대통을 빼들자 질겁한 명옥은 입을 빼쭉 하더니 문을 닫고 아래 방으로 내려갔다. 상순은 허연 코 물을 풀쩍거리면서 히히 웃었다. “가시나가 무슨 공부야. 삼실이나 뽑을 게지. 흥!” 우쭐하는 상순을 보고 최구장은 눈을 무섭게 흘기었다. “상순아, 그럼 못 써. 계집애라고 깔보면 안 돼. 에헴.” 그러자 상순은 머리를 숙이었다. “계속 배우자. 따라 읽어라. 백두산!” “백두산!” 애들이 따라 읽는 낭랑한 소리가 서당에 차고 넘쳤다. 뒤이어 최구장은 “‘백두산’이란 글자를 읽으면서 모래판에 열 번씩 써라.” “예~” “뭐? 백두산?!” 이때 서당 밖에서 새된 소리가 울렸다. 모두들 바깥을 내다보니 나까노라 소대장이 응삼과 영팔을 앞세우고 뛰어 들어오고 있었다. 응삼은 들어서자마자 삿대질하며 가물에 실 돌피 같은 목에 지렁이 같은 피 줄을 세우면서 고래고래 고함쳤다. “최구장, 왜 또 조선 글을 가르쳐?” 그러자 최구장은 앉은 자리에서 응삼을 손가락질하면서 질책했다. “너 정말 점점 말이 아니구나. 버르장머리 없는 놈이라고. 누구 보고 삿대질하며 반말이냐?” 나까노라 소대장은 군도 자루를 잡으면서 거들먹거렸다. “최군 목에 개패를 걸어!” 류강철이 따라 들어와 통역하자 응삼과 영팔이 줄이 달린 패쪽을 들고 들어와 주춤주춤 하다가 최구장의 목에 걸어놓았다. “무슨 짓이냐?” 나까노라는 말해주라고 영팔에게 손짓했다. 영팔은 개다리질을 곧잘 했다. 차렷 자세까지 취하고 목에 핏줄을 세우면서 고아댔다. “이젠 조선말을 하지 못해. 대일본 제국의 법을 어긴 죄인놈에겐 이런 패쪽을 걸어준다.” 그 말에 최구장은 천천히 일어나더니 나까노라와 영팔을 쏘아보면서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다가갔다. “왜 이래?” 영팔은 기가 눌리어 뒤로 물러서려고 했다. 찰나 최구장은 목의 패쪽을 벗겨 제꺽 영팔의 목에 걸어놓았다. 영팔은 개패를 벗어 쥐고 최구장에게 달려들었다. “이건 영감에게 건 거야.” 그러자 최구장은 무섭게 영팔과 응삼을 손가락질하며 욕했다. “이 일본 놈들 발바리놈들아, 너희들은 조선 사람이 아니냐? 너희들이야 말로 조선 사람들을 팔아먹는 죄범들이야.  일본 놈의 개놈들게게 개패를 걸어야 해! 개놈새끼들!” 영팔은 개패를 들고 최구장과 나까노라 소대장을 번갈아보면서 머리를 숙였다. 나까노라 소장이 간사한 웃음을 지으며 코밑 가재수염을 쓰다듬더니 “허허허.” 하고 허무한 웃음을 웃었다. “이 영감이 미쳤나? 허허, 단단히 경을 치러야 하겠구먼.” 그래도 최구장은 한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았다. “무슨 개 뼈다귀 같은 새 소리야! 우리 조선 사람들이 조선말을 하지 않고 그래 섬나라 오랑캐들의 개소리를 치라는 거야? 너희들 죄꼬만 섬나라 오랑캐들 개소리를 우린 모른다.” 최구장이 고함치자 나까노라는 군도 자루를 거머쥐어 군도를 뽑으려다가 도로 뒤로 밀어재끼었다. “최구장, 당신은 이 부근에서 제일 유식한 양반이 아니고 뭐요? 당신은 앞장서 대일본 제국의 말을 배우고 일어를 애들에게 가르치란 말이요. 우린 당신이 우리 대일본 제국에 공로를 세우면 서당을 계속 꾸리게 하겠네. 잘하면 서당 방이 아니라 이 마을에 커다란 벽돌학교를 지어주겠소이다. 알겠소까?” 나까노라는 이쯤 말하고 나서 옆에 선 류강철을 보고 통역해주라고 눈치 했다. 통역을 듣고 난 최구장은 피씩 쓴 웃음을 지었다. “안 된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그런 일은 없다. 안 된다, 안 돼, 절대 안 되지.” 류강철이 그 말을 통역해주자 나까노라는 군도를 쑥 뽑아들더니 고래고래 고함쳤다. “이 영감두상을 붙잡아가!” “하이!” 영팔과 응삼은 최구장의 양팔을 붙잡고 류강철은 뒤에서 마구 밖으로 떠밀었다. 뒤에서 나까노라는 빼들었던 군도로 통나무흑판을 탁 내리찍었다. 그러고도 성차지 않아 발길로 흑판과 석회 덩이 통을 탁 차 넘기고 밖으로 나왔다. 뒤늦게 소문을 듣고 달려온 경숙과 경민 등이 영팔의 손을 붙잡고 사정했다. 그러나 사정을 봐주기는커녕 나까노라 소대장의 안전에서 최구장의 두 팔을 바 줄로 꽁꽁 묶어 문 밖으로 마구 떠밀었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근형과 근덕, 근활 그리고 명옥까지 달려와 끌려가는 할아버지 다리를 붙잡고 꿇어앉아 엉엉 울었다. 나까노라는 사정없이 애들을 마구 뜯어 내쳤다. 최구장은 애들을 내려다보면서 힘주어 말했다. “할아버지가 없어도 너희들은 우리 조선 사람의 뿌리를 잊지 말아야 한다. 꼭 조선어를 배우고 조선말을 해야 한다. 알겠느냐?” 애들은 머리를 끄덕이더니 주먹으로 눈물을 닦으면서 주먹 밑으로 할아버지를 붙잡아가는 일본 놈과 영팔 등을 쏘아보았다. 최구장은 마을 사람들을 둘러보더니 머리를 들어 먹장구름이 뒤덮인 하늘을 쳐다보며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었다. 그는 가슴을 쭉 뻗치고 은발을 흩날리면서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저 멀리 먹장구름 밑에서 불뱀이 기운봉 산허리를 내리치더니 먹장구름 속으로 사라졌다. 뒤이어 대지에는 새뽀얗게 소낙비가 억수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7. 사내 자존심      거무칙칙한 밤하늘에서 고기비늘구름떼가 총망히 흘러가고 간혹 하현달이 구름 사이를 비집고 얼굴을 내밀어 대지의 쓸쓸한 산과 들에 여기저기 널린 오두막들을 비추며 뭐라고 중얼거리다가도 뭣이 그렇게 두려운지 구름 속으로 사라지군 했다.    일본 놈들은 기운봉 기슭 뭇 산들에 꽉 들어선 수림을 눈독들였다.  목재를 실어내가기 위해 우시장으로부터 영월동과 운주동을 거쳐 명천과 경성에까지 통하는 길을 닦기 시작한지도 이젠 몇 해 잘됐다.    일본 놈들은 자기 야욕을 채우려고 농사꾼들을 강제로 인부로 끌어다가 운주동 북산과 영월동 서산 부근의 아름드리 원목을 난벌해 길옆에 실어내려 저목장에 쌓아두었다. 그 놈들은 저목장의 아름드리 원목을 마차와 자동차에 실어 우시장 역에 실어갔다. 거기서 기차에 원목을 꽉 박아 싣고 남으로, 남으로 달려 서울에 가고 부산에 갔다. 또 일부 원목은 부산에서 기선에 실어 일본 본토에까지 실어다가 목조건축물을 짓는데 썼다.    일본 놈들의 야만적인 난벌로 해 영월동 서산과 운주동 북산은 오래지 않아 벌거숭이로 돼갔다. 총을 멘 일본 헌병들은 야마모도 소장의 지시대로 밤낮 저목장에 우등 불을 피워놓고 지켰다. 거무칙칙한 산등성이에까지도 우등불빛이 어려 붉게 물들어있었다. 영월동 병완의 집 굴뚝에도 게딱지 같은 고약딱지기발이 꽂혀 펄럭이고 있었다.    며칠 전에 야마모도와 한길수가 헌병들과 영팔 등 졸개들을 끌고 영월동 병완의 집에 뛰어들었다.    야마모도는 거만스럽게 군도자루를 잡고 병완의 집구들에 올라서서 대들보를 기웃기웃 올려다 살피더니 마른기침을 했다.   “에헴, 오늘 내로 이 집을 내란 말이야. 여기에 우리 림산파출소를 앉히겠어.”   류강철의 통역을 들은 병완은 기막혀 야마모도를 부릅뜬 눈으로 쏘아보았다.   “아니, 정신 나갔는가? 제 집에서 내쫓으면 어데서 살란 말인가?”   한길수는 옆에서 깨 고소해 말 이발을 드러내고 헤벌쭉거렸다.   야마모도는 군도로 구들바닥을 쿡 찔러 짚고 서서 호령했다.   “어데서 살든 관계없어. 조선이 통 채로 우리 대일본 제국 거로 됐네. 우리 황군이 어데 군사시설을 앉히려면 자네 집이 아니라 군청이나 서울이라도 내놔야 해. 알만 해?!”   병완은 아무리 말해도 쓸데없다는 것을 알았다. 헌병들은 농짝이랑 파출소에 쓸데없는 가정기물을 마구 내던졌다.   병완은 한마디 말도 해보지 못하고 일본 헌병 놈들의 총창에 떠밀리어 울며 겨자 먹기로 자기 집에서 쫓기어났다. 끼무라 국장과 야  마모도 소장은 병완이 길닦이공지 총 도감도 그만둔 데다 종무소식인 성칠을 잡는 미끼로도 써먹을 수 없다고 인정하고 집을 빼앗은 것이었다.   병완은 자존심을 꺾고 솔가해 영월동을 떠나 운주동에 가서 맏아들 창준의 집에 한데 들 수밖에 없었다.   기준은 주먹을 부르르 떨면서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개놈 새끼들, 남의 집을 마구 빼앗다니? 내 아무 때든 그 놈들을 도끼로 대갈통을 찍어놓고 말지 않는가 봐라.”   창준은 도리머리 질 하면서 울뚝밸이 센 동생을 말렸다.   “그러지 말라. 무리승냥이 같은 일본 놈 새끼들을 다쳤다가 어떻게 산다고 그러니? 온 집안이 몰살을 당하자고 그러니? 아버지 말씀대로 만주에 가면 다야. 똥이 무서워 피하니? 더러워서 피하지.”   병완은 두 아들의 말을 묵묵히 들으면서 앉아 있다가 한숨을 구들바닥이 꺼지게 내쉬었다. 뒤이어 그는 기준을 따라 바깥으로 나갔다.   병완은 기준을 불러 세웠다.   “얘야, 울뚝밸을 쓰지 말고 꾹 참아라. 항상 네 울뚝밸이 근심된다. 내라고 밸이 없어 그 놈들에게 집을 빼앗기고 쫓기어 난 거 같니? 임시 자존심을 꺾고 원수를 갚을 기회를 기다리자.”   기준은 성이 꼭뒤까지 치밀어 황소숨을 푸푸 몰아쉬었다.   병완은 기준의 어깨를 다독였다.   기준은 머리를 숙이고 툴툴거리면서 집으로 돌아갔다.   이튿날 병완은 두 아들 집 자손들을 데리고 올해 새로 개간한 바위돌밭으로 메밀을 거두러 운주동 뒷산으로 갔다.   “아버지, 영월동 서산에는 가보지 않겠습니까?”   기준의 물음에 병완은 바위돌 틈 새로 해 산으로 올라가면서 “며칠 후에 가보자. 한영감이 불에 탄 집을 손질한다더라. 그놈새끼 보기 싫다.” 하고 말했다.   “쉬파리 무서워서 장을 담그지 못하겠습니까?”   그들이 이런 말을 주고받으면서 소잔등 같은 너럭바위가 소 무리처럼 누워있는 바위돌밭에 갔다. 바위 돌 틈새에 재를 펴놓고 심은 메밀은 끝 초리가 꼿꼿이 쳐들고 있었다.   “좋은 밭을 두고 이게 뭐냐? 우린 뭘 먹고 살아야 하느냐?”   병완이 답답해하자 기준은 “이젠 여기서 일본 놈들의 수하에서 못 삽니다. 만주로 들어갑시다.” 하고 말했다.   병완은 말라버린 메밀을 베면서 말했다.   “정작 고향을 떠나자니까 고향 모든 게 아깝구나. 김려생 할아버지께서 명천에 입북한 후 4백여 년이나 대대로 살아온 우리 고향이 아니냐? 어쩌면 우리 고향이 이렇게 됐느냐? 참 안타깝다.”    기준과 창준은 코마루가 시큼해났다. 그들은 4헥타르나 되는 바위 틈새의 메밀을 베였지만 몇 십 단이 되지 않았다.   며칠간 온 집 식구들이 메밀을 거둬들여 마당에서 도리깨로 두드려 낟알을 마대에 담고 보니 대여섯 마대 밖에 안 됐다.   아낙네들이 메밀을 껍데기채로 절구통에 넣고 찧어 죽물이라고 끓였다.   모두들 밥상에 둘러앉아 천정이 환히 들여다보이는 메밀죽물도 아주 맛있게 후룩후룩 마시였다. 그런데 목에 꺼슬꺼슬한 까만 메밀 겨가 걸려 자꾸 물을 마셔야만 했다. 그래도 쌀알이 들어간 죽물이라도 마실 수 있어 모두들 다행으로 생각했다.   한편 영월동에서 병완을 몰아낸 한길수는 삼년 앓던 이빨을 뺀 것 같았다.   그는 개 잡은 포수처럼 어깨 으쓱해 쏘다니면서 곁을 쳐서 복판을 울리는 수를 써서 병완을 따르던 사람들을 하나하나 못살게 굴었다.   (독불장군이라고 제 아무리 천하장사 병완과 성칠이라고 해도 용빼는 수가 있겠는가?)   그는 권총까지 차고 거들먹거리면서 희미한 등잔불이 창문으로 내비치는 엄창렬의 집으로 다가갔다.   늑대를 만난 개울가의 버드나무 초리들이 초겨울 바람을 얻어맞아 아츠러운 비명소리를 질렀다.   징검다리를 건너가다가 한길수는 졸지에 매끄러운 돌을 빗디뎌 핸들 넘어가 엉덩방아를 쿵 찧었다.   “아이쿠!”   개울물에 물앉은 한길수는 어찌나 아팠던지 어슴푸레 뜬 달빛아래 오만상을 다 찡그리며 말 이발이 다 드러났다.   “아니, 주인님, 어떻게 하면 이리 좁은 개울물에 다 빠졌습니까?”   한길수는 너무 아파 왜가리 목을 배배 틀며 오만상을 찡그리면서 엉덩이를 만졌다.   “이놈아, 남은 아파 죽을 지경인데 무슨 개소리냐?! 얼른 부착하지 않고!”   수길은 길수를 부축해 일으켰다.   “주인님, 내 등에 업히시오.”   “에끼 이 놈아, 토끼가 어찌 호랑이를 업느냐?”   길수는 이젠 덜 아픈지 입씨름 질을 하면서도 수길의 등에 업혀 타다 남은 토성안집으로 되돌아갔다.   이윽고 옷을 갈아입은 한길수는 다시 수길의 부축을 받으면서 창렬의 집으로 발걸음을 쩔룩쩔룩 옮겼다.   저쪽 오두막 같은 집 쪽에서는 반딧불만한 등잔불빛이 가물거리고 있었다.   수길은 옆에서 한길수를 부축하며 불쑥 이런 말을 꺼냈다.   “주인님, 우시장에 기와집을 여러 채나 두고 어째 이런 두메산골 다 탄 집을 수리하자고 합니까?”   “이 놈아, 이 두메산골을 보잘 것 없는 것이라고만 보지 말라. 여긴 병완과 내가 사내대장부의 자존심을 내걸고 싸운 산골짜기야. 그  놈을 고향에서 몰아내고 그 놈들이 보란 듯이 번듯하게 살아야 해.”   “오, 참 고명합구마.”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놈이라구야. 토끼도 굴이 여러 개느니라. 시내와 산골에 집을 두고 사는 재미가 얼마나 좋은지 알아?”   “참 좋지요.”   “종년들을 가득 두고 사는 재미 또 얼마나 꿀맛인지 아는가?. 하하하, 네편네도 보지 못하는 골 안에서 말이야. 하하하. 알만해?”   “오, 건 몰랐구먼요.”   그제야 수길은 주인이 이 두메산골에 특별히 신경을 쓰는 까닭을 조금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놈.”   이젠 귀못이 박힐 지경인 그 말에는 수길도 속으로  웃음이 피씩 났다.   (건 끼무라 국장이 당신에게 늘 하는 말이 아닌가요? 배운 게 고작인가요? 우리에게 그 말을 고대로 써먹으면서. 쳇.)   창렬의 집 삽작문을 열고 들어선 길수는 건 가래를 떼면서 틀스레 고래고래 소리쳤다.   “창렬이 있어?!”   안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한길수는 수길에게 들어가자고 머리 짓을 하더니 안에서 들어오라는 말도 하기 전에 건 가래를 떼면서 다짜고짜로 문을 뚝 떼고 들어섰다.   그는 말 이발을 드러내놓고 헤헤 웃으면서 등불을 빌어 은희를 힐끔힐끔 곁눈질했다.   은희는 등 곬에 소름이 쪽 끼쳐 누더기로 얼굴을 반쯤 가리면서 돌아앉았다. 창렬은 누더기를 덮고 누어 있다가 몸을 겨우 반쯤 일으켰다. 그는 길수가 또 무슨 수작을 피울지 몰라 뒤숭숭하고 겁이 났다.   “밤중에 웬 일이오?”   창렬이 기침을 쿨룩쿨룩 하며 일어났다.   “에헴, 놀랄게 없네.”   한길수는 거만하게 신을 신은 채 구들에 올라섰다. 그런데 무슨 역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한길수는 호주머니에서 하얀 손수건을 꺼내 코를 싸쥐었다.   “음, 웬 썩은 냄새야, 딱 개굴 같군.”   한길수는 단도직입했다.   “이 집에서 내게 진 빚을 물자면 이제도 삼대가 대대로 물어도 다 갚지 못하네.”   창렬과 명순은 몸 둘 바를 몰랐다.   “밭에다 곡식도 심지 못하게 해서 죽물도 먹지 못하는데 뭘 어찌 하라는 말이요?”   길수는 옆구리에 찬 권총집을 앞으로 당겨다 끌어안고 앉으면서 은희를 힐끔 건너다보며 호통쳤다.   “내일부터 우리 집에 가서 탄 집을 손질하는 일이나 하게나.”   명순이 말렸다.   “어이구, 우리 나그네 폐병에 오늘일가 내일일가 하는데 어떻게 일한다고 그럽둥?”   수길이 끼어들었다.   “허허, 병완이 밖에 모르는 놈들, 참 잘 됐소. 보오. 우리 마을에서 쫓겨난 병완을 믿고 살 수 있소? 우리 주인은 이젠 일본 자위대 대장이 됐단 말이오. 우리 주인 말을 잘 들으란 말이오.”   한길수는 득의양양해 이번엔 수길을 번쩍 춰 올렸다.   “수길은 이젠 영월동 구장으로 됐어. 이후부터 병완의 말을 듣지 말고 이구장 말을 꼽싹꼽싹 들으라구.”   창렬이 기침을 쿨룩쿨룩 하며 사정했다.   “구장인지 돼지 구신지, 제발 사람 좀 들볶지 마오."   "뭐라고? 감히 구장님을 놀려? 엉?"   "은녀가 이젠 일곱 해나 부엌더기로 살았는데 다 죽게 된 나까지 이럴게 있소?”   한길수는 이때라고 은희를 힐끔 건너다보면서 본심을 드러냈다.   “그럼 저 은희를 우리 집에 부엌데기로 들여보내오.”   “양?”   창렬 내외는 기절초풍할 지경이었다. 은희는 질겁해 누더기를 쓰고 온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안 되오.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엔 은희를 데려가지 못하오.”   “허허허, 정신이 있는가?”   한길수가 너털웃음을 하더니 위협하기 시작했다.   “똑똑히 들어. 상호가 성칠의 포수대를 따라 독립군에 들어갔어. 이 집식구들을 몽땅 죽여도 속이 시원치 않아. 알만 해!?”   옆에서 수길도 맞장구를 치며 으르렁거렸다.   “이게 어디 장마당인가 해? 누구와 흥정을 하는 건가?”   창렬은 입을 딱 벌린 채 멍하니 집 한쪽 구석을 쏘아 볼뿐이었다.   “장마당처럼 흥정할 셈인가? 하도 내가 고향 사람들이라고 끼무라 경찰국장에게 숱한 돈을 팔면서 잘 말했기에 오늘까지 살아 있는 줄 알게나. 독립군 가족은 몽땅 죽일 수도 있어. 노비로 되려가는 건 생각해준 거야.”   수길이 주인을 도와 짜개진 나무에 쐐기를 깊숙이 박았다.   “이젠 우리 한대장의 말을 잘 듣게나. 너희 일가를 살려 준 우리 주인님이 은희를 첩으로 삼은들 무방하지 않는가. 안 그래? 흥!”   온 집안이 쥐 죽은 듯이 고요해졌다.   한길수는 때가 됐다고 생각하고 권총집을 뒤로 홱 젖히면서 을러멨다.   “밤이 깊었어. 은희를 데리고 가자.”   머리를 다소곳이 숙이고 있던 은희는 그 청천벽력 같은 소리에 “와~” 하고 울음보를 터뜨리면서 어머니 잔등 뒤에 숨으려고 했다.   “가자, 이년. 어시를 살리겠니? 어찔래?”   수길은 달려들어 은희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아이고, 엄마, 아버지~”   그러나 수길이 잡아끌고 뒤에서 한길수가 잔등을 떠미는데 나약한 은희가 어찌는 수가 있겠는가?   뒤에서는 울음소리를 반주하여 쿨룩쿨룩 기침소리가 들릴 뿐이었다.   저걸 보소, 은희와 그녀 부모의 가긍한 처지를. 자기 자녀마저 한밤중에 도살장 같은 한길수네 집에 부엌데기로 끌려가도 구할 수 없는 어시의 마음인들 오죽 아프겠는가?   집 밖에서는 을씨년스러운 초겨울 바람이 휴, 휴 무서운 비명을 지르면서 스쳐 지나갔다.            8. 암범과 늑대        싸늘한 달밤에 처량한 달빛이 한길수의 차디찬 사랑채 안을 비추었다.      은희는 다 타버린 폐허 같은 길수네 토성 안 사랑채에 들어가 누더기이불을 쓰고 자리에 들었다. 온 여름 불도 때지 않아 습기 찬 구들에 누더기이불마저 축축해 누어있을 수 없었다. 한길수가 마을 사람들을 강제로 끌어다가 연 십여 일 동안 대충 손질한 몸채에 한길수와 월선이 들어있고 줄느런히 들어선 곁채에 영팔과 응삼, 수길이 들어있었다.      은희는  야밤에 짐승보다도 못한 그자들이 더 무서워 종시 잠들 수 없었다.     (아버지 엄마만 아니면 이 놈의 승냥이 굴에서 도망치고 말건데. 그렇게 할 수도 없고.)    은희는 스르르 일어나 밖을 내다보았다.   희읍스름한 달빛이 가을바람이 이영 초리를 스치는 와스스 소리 속에 쓸쓸히 집안을 비추었다.   삐꺼덕 대문의 작은 문짝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길수가 응삼을 데리고 대문 안에 들어서더니 개 잡은 포수처럼 우쭐거리면서 어깨 으쓱해 우멍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성큼성큼 몸채에로 걸어갔다.   희읍스름한 달빛이 깔린 마당에 허연 무명저고리에 까만 몽당치마를 입은 은희가 물동이를 팔에 끼고 사뿐사뿐 걸어 나왔다.   은희를 보는 순간 한길수는 길쭉한 말상에 말 이발을 드러내며 웃었다.   “응삼이, 오늘 일은 끝났네. 자넨 집으로 들어가게나. 에헴.”   “예.”   응삼은 좋아라고 사랑채 곁방에 들어가 버렸다. 춘실이 맛있는 명태 국을 끓여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한길수는 머리를 다소곳이 숙이고 다가오는 은희의 왼팔을 붙잡았다.   “얘, 주인을 보고 인사할 줄도 몰라?”   “주인님, 무사합둥?”   “오, 그래, 밤중에 동이를 이고 물 길으러 가냐?”   은희는 쥐구멍으로 들어가는 가는 소리로 “예.” 하고 대답했다.   그녀는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길수의 팔을 살짝 뿌리쳤다.   한길수는 고양이 쥐나 생각하듯 말리었다.   “밤중에 무슨 물을 긷는다고 이러니? 내일 길어라.”    “예, 알았습꾸마.”   은희는 길수가 팔을 놓기를 기다려 부엌에 동이를 들여다 내려놓고 나와 사랑채에 들어갔다.   이튿날 아침, 한길수가 음충한 눈길로 물을 길으러 가는 은희의 엉덩이를 우멍 눈으로 힐끔힐끔 곁눈질해보더니 다른 궁리를 했다.    그는 몸채에 월선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자 은희의 뒤를 슬금슬금 밟았다.   은희는 어제 저녁에 자기에게 특별한 “은혜”를 베푼 주인이 징글스러웠다. 그런데 이른 아침에 물을 길으러 가는 자기 뒤를 따라 오는 것이 여간 상서롭지 못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도 아침 밥을 지으려고 물을 당장 길어오라고 월선이 소리쳤는지라 물을 길으러 가지 않을수 없었다.   (아무리 하면 시퍼런 대낮에야 어찌 하겠느냐?)   은희가 우물가에 가서 동이를 내려놓고 바가지로 물을 퍼 담는데 길수가 사위를 둘러보더니 마른기침을 하며 다가왔다. 은희는 온몸에 소름이 끼쳐 동이에 물을 빨리 퍼 담았다.   “은희, 헤헤. 너도 눈이 있고 귀 가졌으니 알겠지? 널 얼마나 귀여워하고 아끼는가를.”   은희는 다리에 거머리 매달린 것 같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방망이질하듯이 높뛰는 가슴을 눅잦히면서 물동이를 이쪽으로 돌려놓고 물만 퍼담았다.   한길수는 제꺽 물동이를 빼앗아 내려놓으면서 지껄여댔다.   “은희야, 한뉘 종년이나 하고 살겠니? 이팔청춘이 너무 아깝다, 아까와.”   은희는 고양이 쥐 생각을 하는 것이 메스꺼웠다.   (며칠 전 밤중에 집에 뛰어 들어와 뭐라 했는가? 상호와 성칠 오빠가 독립군에 들어가 의병이 됐다고 호통 치면서 우리 일가를 몽땅 죽일 수도 있다고 위협하지 않았던가?)   음충스레 힐끔거리는 눈길, 살기어린 우멍 눈, 헤헤 웃으면서 드러낸 말 이발…   은희는 온 몸에 소름이 끼쳐 한길수를 외면하면서 살금살금 우물 쪽으로 돌아앉아 물을 한바가지, 한바가지 퍼 담았다.   은희 속내는 모르고 한길수는 계속 지껄여댔다.   “나만 믿어라. 그럼 상호 죄도 눈감아주고 네 일가를 몽땅 잘 살게 해주겠어. 알았지?”  은희가 머리를 다소곳이 숙이고 물을 퍼 담다가 무슨 생각에 잠긴 듯이 잠간 멈추자 한길수가 이제 수가 드나 해 속심을 드러냈다.   한길수가 은희의 어깨를 껴안으면서 열변을 토해냈다.   “널 첩으로 들여앉힐게. 그러면 저 토성안 집도 주고 너희들 온 집 식구들도 우리 토성안집에 들어와 평생 먹고 입을 근심 없이 복 방에 앉혀놓을게.”   은희가 몸부림치며 “이걸 놓으세요. 놓아!” 하고 고함칠 때였다.   뒤에서 앙칼진 목소리가 골짜기를 꽉 메우며 울려왔다.   “년 놈들! 잘 놀긴 놀아!”   뒤를 돌아보니 암범 같은 월선이가 옆구리에 두 손을 지르고 표독스런 눈길로 쏘아보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년, 물은 긷지 않고 웬 서방질이냐?”   월선은 시어미 역정에 개 배때기를 차듯이 영감과는 어쩌지 못하고 덮쳐들어 은희의 머리채를 틀어쥐고 마구 끌고 당겼다.   은희는 억울하게 머리를 당기우면서도 반항 한번 하지 못하고 너무 아파 신음소리를 냈다. 한길수는 그저 머리를 홰홰 내저으면서 어슬렁어슬렁 그 자리를 피해 달아났다.   아침 숟가락을 놓자 한길수가 앵돌아진 월선을 슬슬 구슬리였다.   “여보, 아무렴. 내가 당신을 저버릴까? 당신이야 말로 조강지처나 다름없소.”   “또, 또, 누굴 얼려요?  뭐 세살 짜리 앤가 해요?”   월선은 입귀를 비쭉거리면서 훌 일어나 바깥으로 나가려고 했다.   한길수가 일어나 따라 나가면서 월선의 손을 잡아 집안으로 끌어 당겨 물앉혀 놓았다.   “여보, 은희가 이 집에서 부엌데기를 못하겠다고 도망칠 까봐 슬쩍 얼려 발목을 잡은 것뿐이오.”   월선은 피씩 쓴 웃었다.   “당신이 콩으로 메주를 쓴다고 해도 곧이들을 거 같아요? 우물가에서 분명 ‘소실로 들여앉히겠다’는 걸 똑똑히 들었어요. 뭐, 이 토성   안 집을 주겠으니 들어와 살라고?”   “건 그저 얼리느라구 한 거짓말이요.”   “이전에도 나를 그렇게 얼렸지. 본댁을 서울에 두고 얼려 내캉 여기서 살았죠. 이젠 내 나이 드니까 새파랗고 야들야들한 계집애들에게 눈독 들여?”    한길수는 딱 잡아뗐다.    두터운 어둠의 장막이 높은 토성 안에 서서히 두텁게 드리웠다. 허연 달이 뜨면서 달빛이 추녀 끝을 핥으면서 희롱하며 창문턱에까지 내리비치자 길수는 아래배로부터 가슴까지 찡 해나면서 끓어오르는 정욕을 참을 길이 없어 이발을 지그시 깨물었다. 낯이 화끈화끈 달아오르고 입에서는 단김이 푸푸 터져나갔다.    그때 사랑방에서 문을 닫는 덜커덕 소리가 났다.    (그래, 은녀가 설거지를 마치고 들어가는 모양이야. 마침 월선이가 가시아버지를 모시러 우시장에 가고 없지. 이때야. 히히히.)   한길수는 잠옷 바람에 하이칼라 번들 이마를 떡 쳐들고 바깥으로 나갔다.   그는 몸채를 한 바퀴 빙 돌아가면서 살펴도 인기척이 없자 닭을 훔쳐 먹으러 가는 쪽 제비처럼 슬금슬금 사랑 방 쪽으로 다가갔다. 빠드득빠드득 눈을 밟는 소리보다도 한길수의 거친 숨소리가 더 높았다.   은희가 이튿날 아침밥을 지을 물을 길어놓고 금방 사랑방에 들어갔을 때다.   번들이마가 슬금슬금 다가가 문고리를 당겨보니 집안에서 노끈으로 매놓은 것이었다.   그는 마른 침을 꼴깍 삼키며 몸채 쪽을 흘끔흘끔 살피더니 문고리를 잡아 당겼다 밀었다 했다. 이윽고 노끈이 풀리면서 사랑방문이 훌러덩 열리였다.    한길수는 도적놈처럼 집안에 들어간 후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까만 방안 벽을 더듬질하면서 구들 쪽으로 올라갔다.     “야밤에 누군가요? 소리치겠습꾸마.”   은희 화닥닥 일어나면서 불을 켜자고 바스락거렸다.   “쉿- 주인이야.”   한길수가 바삐 나직이 말했다.   “불을 켜야지.”   은녀 말에 한길수는 너스레를 떨었다.   “헤헤헤. 두려워 말라. 난 너를 위해서라면 간이라도 빼주겠다. 요 귀여운 것아.”   별스레 키득키득 웃는 소리와 누더기를 뒤척이는 소리가 들리었다.   “기쁠 테지. 온 우시장이 내 말이라면 다야. 난 너 같은 종년도 천당 같은데서 살게 할 수도 있고 18층 지옥에 처넣어 뼈다귀도 추리지 못하게 할 수도 있어.”   한길수가 을러메면서 기신기신 구들에 올라왔다.   “찍소리 치지 말고 고분고분 내 말 들어. 이렇게 누추한 방에서 한뉘 물이나 긷고 변소 똥이나 치면서 살게 있니? 내일부터 응삼과 수길을 보고 우리 작은댁 방에 불을 때라고 할 테야.”   한길수가 입에 엿이나 발라 문 것처럼 달달한 말로 구슬리면서 슬슬 기어 올라왔다. 뒤이어 이불안에 손을 쓱 들이밀어 더듬었다.   “요 귀여운 것아, 널 소실로 맞아들이면 몸채를 다 손질하는 날로 들여앉히마.”   “키득키득”   이불 안에서 들리는 웃음소리에 한길수는 황망히 손 더듬질 했다.   “요것아, 좋지? 그래,  널 평생 복을 누리게 할 수 있어. 본댁은 이젠 쉰이 다 돼서 날 싫어해. 이젠 여자로 써먹기는 다 틀렸어. 통 정이 떨어져서 못살겠단 말이다. 진작 소실을 들일 때가 된지 오래다. 에구, 넌 참 탄탄하고 몽글몽글 하구나. 너와 백년을 살았으면 오죽 좋겠느냐.”    한길수가 웃통을 와락와락 벗으면서도 스리슬쩍 계속 늘여놓았다.   “네가 소실로 들어오면 네 애비 폐병도 뚝 떼게 돈을 대줄게. 너도 애비에게 효도를 해야 하지 않겠느냐? 애비를 생각해서라도 내 말 고분고분 들어라.”   한길수는 옷을 다 벗자 이불 안에 스리슬쩍 들어가 이불안 여자의 탄력 있고 매끌매끌한 몸을 가로탔다.   그가 막 달려들 때였다. 밑에 깔린 여자가 불시에 두 발로 한길수를 마구 탁탁 차버렸다. 한길수가 채워 여체 위에서 누더기 우에 나뒹굴었다.   “이년이, 감히 누굴 차? 이러고도 살기를 바라느냐?”   한길수가 벌거숭이 몸뚱이를 일으키면서 마귀의 손을 뻗쳐 은희를 붙잡으려고 손 더듬질 했다.   “하하하, 이 놈 두상이, 하긴 잘한다, 잘해!”   이게 웬 일인가?   집 안에 광솔불이 환하게 켜졌다.   실 한오리도 걸치지 않은 알몸뚱이 월선이가 누더기이불 위에서 허리에 한쪽 손을 지른 채 장승처럼 떡 뻗치고 서서 암범처럼 길길이 날뛰었다.   “뭐? 이젠 나와 통 정이 떨어져서 못 살겠다고? 소실을 들일 때라? 아이유, 분해라.”   월선은 구석에 머리를 숙이고 서있는 은희를 활 밀치었다.   “이 년과 백년을 살았으면 좋겠다던 게 콱 살아봐라!”    월선은 한길수를 표독스레 쏘아보았다. 어두운 집 안에서도 눈에서 불찌가 툭툭 떨어지는 것이 보일 지경이었다.   “더러운 영감, 아이유, 분해라. 누구 덕에 이 골 안에 발붙이고 이 토성안집을 지었기에? 응? 이 토성안집을 저년에게 줘?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엔 안 돼!”   “에이유, 에이유. 저년을 얼리느라구 한 농담을 가지고 왜 그래?”   “로망이지 로망, 미쳤어? 저년의 엉덩이가 그렇게 꿀맛일 것 같아? 며칠 전에 내 우물가에서 치근덕거리는걸 보고 싹 다 눈치 챘어. 주책머리 없는 영감태기. 에이유, 아버지~ 저런 못난 놈을 사위라고 서울에서 올라올 때마다 황금덩이를 줬어요? 아버지, 불쌍한 아버지~  내 처지 얼마나  불쌍하오. 에이유, 에이유~ 아버지, 어머니~”   “이보, 왜 이래? 동네에 소문나겠소. 이런 패가망신이라구야, 원, 토성 안에 보초를 서는 숱한 자위대원들이 있소. 그만하지 못할까! 쯧쯧.”   월선은 누더기를 와락 안아 벌거숭이 한길수에게 마구 들씌워 놓았다.   한길수가 주섬주섬 잠옷을 주어 입으면서 은희를 힐끔힐끔 곁눈질하며 중얼거렸다.   “에이, 막돼먹은 쌍년처럼 계속 떼를 써?! 에헴, 참. 재수 없어.”   한길수는 길쭉한 말상을 절레절레 흔들면서 월선을 죽도록 미워했다. 밸 같았으면 허리춤의 권총을 뽑아 한방에 쏴죽이고 젊고 예쁜 은희를 데리고 살았으면 좋을 것만 같았다.   암범 같은 여편네 앞에서 방귀도 하나 못 뀌고 실컷 개꼴망신당한 늑대 같은 한길수는 괜히 시어미 역정에 개 배때를 차듯 했다.   그는 괜히 은희를 보고 “후에 두고 보자.” 하고 한마디 내뱉고 나서 능구렁이처럼 슬금슬금 바깥으로 빠져나가버렸다.   한길수가 꼬리를 빼자 월선은 시에미 역정에 개 배깨끼 차듯했다. 그년은 바들바들 떠는 은희의 머리채를 잡아 마구 벽에 쿵쿵 짓 쪼아놓으면서 암범처럼 펄펄 날뛰었다.    아이고, 불쌍해라. 저 맞아대는 은희를 보라. 두 손으로 머리를 틀어쥔 월선의 우악스러운 손을 붙잡고  애원하였다.    “제발 살려주세요.”    허나 월선은 사정없이 매질을 멈추지 않았다.   은희는 머리채를 끗기면서 매만 맞는데 눈물, 코피 흐르고 애원소리 갑갑한 사랑방에 울려 퍼졌다.   월선은 나중에 맥이 모자라 더 때리지 못하고 구들바닥에 물앉아 헐떡거리다가 돼지 멱 따는 소리를 질렀다.   “다시 우리 영감을 넘보았다간 가다리를 찢어 죽여치우겠다. 알겠니?”   그는 표독스러운 눈길로 은희를 쏘아보더니 광솔 불을 훌 불어 끄고 훌쩍 일어나 횡 하니 바깥으로 나갔다.   사실 월선은 우물가에서 한길수가 은희와 치근덕거리는 것을 본 후 며칠 전 한길수가 한 거짓말을 한마디도 믿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월선은 본가 집 아버지를 모시러 우시장으로 가는 척 하면서 이날 가만히 은희의 방에 숨어들었던 것이다. 그는 은희를 보고 한쪽구석에 서 있다가 한길수가 들어오면 시키는 대로 이리이리 하라고 했다. 뒤이어 월선은 은희 대신 누더기이불속에 누워 한길수가 하는 짓거리를 다 듣고 키득키득 웃었던 것이다.    은희는 월선의 행악질에 헝클어진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먹칠한 듯이 캄캄한 방안에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면서 쓸쓸히 어깨를 들먹였다.    (성칠 오빠랑 없으니까 한길수 승냥이처럼 살판 치잖아.  저승  같은 여기에서 어떻게 산단 말인가?)   은희는 생각할수록 살아갈 앞길이 막막했다. 사랑방에서는 그녀가 흑흑 흐느껴 우는 소리가 쓸쓸하게 납덩이같은 밤 정적을 톱질할 뿐이었다.  
34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13) 댓글:  조회:2357  추천:1  2015-08-28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제2권)                                                                         김장혁 저                                                                                                            제7장 흑야                1. 수림 속의 바위돌 밭        먹물을 뿌려놓은듯 한 칠칠흑야, 서쪽 밤하늘에 걸려있는 가냘픈 눈썹 초생 달이 봄바람에 스쳐 바르르 떨고 있었다. 잔설이 뒤덮인 아득히 먼 기운봉 아래 뭇산들은 검은 장막 속에 파묻혀 거뭇거뭇한 몸뚱이를 웅크린 채 취한 듯이 굳잠에 빠져 있었다. 늦잠을 자던 기운봉 기슭의 산발들이 무섭게 내리누르는 어둠을 털어버리고 창공을 떠받고 일어서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어둠의 장막은 걷힐줄 모르고 점점 더 어둡게 고향의 산발들을 감쌌다. 어찌나 어두컴컴한 밤인지 주먹으로 불시에 얼굴을 들이쳐도 눈치 채지 못할 캄캄하고 갑갑한 흑야였다.        어둠에 짓눌린 방안에서 병완은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가담, 가담 한숨만 길게 내쉬었다. 겨우내 길닦이를 하지 않은 동안이나마 집에서 조용히 잠자리에 들 수 있었지만 근심스러운 일은 태산 같았다.        끼무라는 그가 총 도감이라고 영월동이나 운주동에 마음대로 드나들게 하였고 그의 아내 성희나 며느리 하옥을 옥에서 풀어주었다. 그 “덕분”에 지지리 지루한 이태 사이에 그는 집에서 잠시나마  한집 식구들과 함께 살 수 있었다. 그는  이태나 인부들을 데리고 경성으로 통하는 큰길 닦기에 나섰다. 하지만 끼무라가 인부들의 삯전을 차일피일 미루면서 제대로 주지 않아 골치 아팠다.    (삯전을 주지 않으면 인부들이 뭘 먹고 산단 말인가? 원삼이네 삼형제가 길닦이 공지에서 빠져 집으로 잘 달아났지. 일본 놈들을 믿다간 한지에 방아를 걸 지경이야. 언제 삯전을 줄지 알 턱이 있느냐? 쳇, 일본 놈들은 이젠 사냥도 하지 못한다지 않는가. 성칠과 숱한 사냥꾼들을 체포하려고 미쳐 날뛰지! 성칠은 어데 가서 헤매는지? 그 놈이 무사해야 되겠는데. 자식, 이태 동안이나 종무소식이니 속이 타서 이거 원 어디 살겠는가? 자식이 상호와 동욱이랑 숱한 마을 청년들을 데리고 갔잖은가. 기별이라도 할 게지. 원, 서른도 넘은 놈이 이젠 부모들 심정도좀 알아야겠는데. 참, 애를 낳아 길러 보지 못한 놈이 돼서 저럴까. 쯧쯧.)     병완은 너무 답답해 자리에서 일어나 성희를 깨울세라 조심조심 담배통을 당겨다놓고 담배를 한 대 말아 물었다. 부시까지 손더듬질해 찾아 쥔 그는 부시를 척척 켜서 겨우 담배를 붙였다.     속이 탄 그는 담배를 길게 빨았다 후- 내뿜었다.    (일본 놈들의 경찰국 사무 청사는 무너지지도 않고 아직도 보기 싫게 서있지 않는가. 나무벌레들이 몇 해 지붕틀과 대들보, 기둥이랑 구멍을 뚫어 무너지게 만들까? 확실히 나무벌레가 기둥뿌리를 파먹는 소리가 까닥까닥 났는데. 언제 쾅 무너지겠냐?)    후~ 병완은 땅이 꺼지게 한숨을 후- 내쉬었다.    (일본 놈들이 이 고향에 있는 한 배불리 먹고 살 날은 없어. 그런데 무슨 힘으로 일본 놈들을 몰아낸단 말인가!)    병완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요즘엔 황무지에 일군 밭에마저 나무를 심어라고 지랄이지 않는가? 어떻게 일군 밭이라고 그래. 이건 굶어 죽으라는 게 아니고 뭔가?)    병완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분통이 터지고 살 길이 막막했다. 온밤 잠을 설치다가 새벽녘에야 겨우 자리에 누워 눈을 조금 붙였다. 동녘이 푸름해지자 그는 잠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는 바깥에 나가 지게에 재를 퍼 담아 메고 산기슭으로 올라갔다.     그는 지게의 재를 쏟아 바위와 바위 사이에 가면서 삽으로 펴놓았다.     싸늘한 해가 뜨자 성희가 문을 열고 나와 재를 버리려다가 삽으로 재를 지게에 퍼 담는 병완을 발견했다.    “여보, 신 새벽부터 어쩌자고 이래요?”    병완은 삽으로 재를 지게에 퍼 담으면서 볼 부은 소리를 했다.   “밭에 나무를 심으라는데 어디 입에 풀칠이나 하겠소? 바위 돌 틈에라도 재를 펴놓고 메밀이라도 심어야겠소.”    성희는 함지의 재를 버리려다가 말고 땅바닥에 내려놓으면서 말했다.    “바위돌 틈새에 메밀을 심어서야 몇 알 거둔다고 그래요?”    “그래도 어쩌겠소. 한 마대라도 거두면 얼마나 좋겠소?”    그때 하옥이도 밥을 지어놓고 나와 시부모를 따라 함지에 재를 담아 이여다가 바위돌 틈새에 폈다.     병완은 십여 일 동안 낮에는 마을 앞에 가서 길을 닦는 일을 감독하고 이른 아침이면 재를 지게에 져다가 바위돌 틈새에 펴놓았다.      그 덕에 한헥타르나 되는 새 “바위돌 밭”을 일구었다.    한달 푼히 지나니 기운봉 기슭의 뭇 산에 드문드문 뒤덮였던 잔설이 녹고 봄바람이 훈훈히 불어왔다.    서산의 수림 속 어디선가 뻐꾸기가 “뻐꾹" "뻐꾹” 봄소식을 알리고 하늘에서는 종달새가 지종지종 제창 좋은 파종 계절이 왔다고 기별을 전했다.    봄은 농사꾼들에게는 희망의 계절이었다. 봄에 씨앗을 많이 뿌리면 올해는 풍작을 거둬들여 배불리 먹고 살리라는 희망이 가슴을  부풀게 했다. 그러나 일제 놈들에게 짓밟힌 가을에는 농사군들의 봄에 싹튼 희망과는 달리 실망을 안겨 주군 하였다.    (올해는 어떨지?)    병완 일가는 몽땅 동원돼 바위 돌 틈새에 재를 펴고 나무꼬챙이로 재를 찔러 구멍을 낸 후 메밀 씨를 뿌려 넣고 잘 파묻어놓았다.   병완은 쉼에 나무꼬챙이를 너럭바위에 놓고 셋째 며느리 잔등에서 넷째 손자 상순을 뽑아 높이 쳐들었다가 품에 꼭 끌어안고 볼을 자기 얼굴에 대고 비볐다.    “낯이 길쭉한 게 제 애비를 똑 떼 닮았구나. 이 쌍까풀눈을 봐라.”    기준은 옆에서 허리 쉼을 하면서 아버지에게 말했다.   “거 세 귀 눈을 보시오. 딱 아버지 안질 같지 않은가.”   그 말에 병완은 밭고랑 같은 주름살을 쫙 펴고 환하게 웃음 지었다.   “그래? 어디 보자. 이 놈이 정말 세 귀 눈이구나. 허허허. 한대 건너 날 닮았구나. 이 놈이. 정말 고와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겠다.”   “할아버지, 앵~코, 앵~코 하자.”   “그래, 그래. 앵~코 하자.”   병완은 상순을 안고 너럭바위에 누워 발우에 상순을 올려놓고 “앵~코-” “앵코-” 하면서 다리를 올렸다 내리웠다 했다.   상순은 좋다고 야단쳤다.   그 모습을 보고 기준과 사련은 마주 바라보며 얼굴에 웃음꽃을 피웠다.   한참 후 병완은 상순을 안고 일어났다.   사련이 상순을 안아갔다.   병완은 기준과 창준을 불렀다.   “얘들아, 너희들도 운주동 산기슭 바위돌 틈에 재를 펴고 메밀을 심어라.”   기준은 볼 부은 소리로 말했다.   “이런 바위틈에 메밀을 심어 몇 알 거두겠습둥?”   병완은 눈을 흘겼다.   “한 마대라도 거둬 보리고개를 넘는데 보태야지. 새해부터 일본 놈 새끼들이 밭에 나무를 심으라는데 뭘 먹구 살겠냐?”   기준은 땅이 꺼지게 한숨을 후- 내쉬었다.   “이거 일본 놈들 성화에 어디 견디겠습니까? 일본 놈들을 몰아내지 못할 바에야 아버지 말씀대로 만주에 가면 어떻습둥?”   병완은 한숨을 후 내쉬었다.   “글쎄 말이다. 헌데 한평생 살아온 고향을 버리고 어떻게 만주로 간단 말이냐? 려생 할아버지 대부터 조상들의 산소가 모두 여기 명천에 모셔졌는데 어떻게 버리고 가? 불효자식이라고야.”   그때 성희가 끼어들었다.   “난 안가. 남쪽 충청도 한산면에 둔 고향을 떠나 입북한 것만 해도 그런데 또 두 번째 고향 같은 명천을 버리고 만주로 가? 안가, 난 안가!”    그 말에 병완은 눈을 흘기었다.    “또, 또 그 말이야. 그러지 않으면 애들이 당신 한산 리씬 걸 몰라 줄까 봐 그러오? 쳇, 지금 충청도나 서울엔 여기보다 일본 놈들이 더 욱실거린다오. 거기 가 살겠으면 살아보우.”    성희는 독기어린 영감의 눈길을 피하더니 굽은 허리를 쭉 펴면서 기준과 창준에게 손으로 삿대질 했다.   “너거(너네), 내 눈에 흙 들어가기 전엔 다신 만주로 간단 말 하지 마! 만주에 가 아내를 되놈들에게 빼앗기려고 기래? 애들도 몽땅 되놈 색시 얻으려고 기래? 안 된다. 안 돼!”    무두들 한숨을 땅이 꺼지게 쉬였다.   한참 납덩이처럼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이거 총 도감이 아닌가? 길닦이는 하잖고 여기서 뭘 하는가?”   바위돌 틈새에서 기어 나왔나. 능구렁이 같은 한길수가 야마모도 소장과 함께 일본 헌병들과 자위대 놈들을 끌고 이 깊은 야산에까지 나타날 줄이야.   “여기서 뭘 해?”   병완은 너럭바위에서 일어나 손바닥의 먼지를 툭툭 쳤다.   “입에 풀칠이나 하자고 메밀을 심네.”   야마모도 소장이 안경을 벗어 안경알을 수건으로 닦아 다시 눈에 걸었다.   “으흠, 조선 사람 말이 아냐. 산에 나무를 심지 않고 자꾸 곡식 심어?”   뒤이어 야마모도는 손사래를 쳐댔다.   “안 돼, 안 돼. 몽땅 나무를 심어야 돼!”   그러자 괭이자루를 꽉 틀어쥔 병완의 소발쪽 같은 손이 부르르 떨렸다. 생각 같아서는 괭이로 야마모도 놈을 콱 찍어 죽이고 싶었다.  그러나 애들의 장래를 봐서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는 용케도 참아 냈다.   “당신 말대로 밭에 나무를 다 심구 그래 우리 굶어 죽으래? 되지도 않을 소릴 하지도 말라.”   기준은 옆에서 황소숨을 몰아쉬더니 참지 못하고 마구 욕설을 퍼부었다.   “여긴 내 고향이야. 네깐 일본 놈들이 뭔데 내 고향 땅에 메밀마저 심지 못하게 하느냐?!”   류강철이 그 말을 통역해주자 야마모도는 군도를 뽑아들고 기준한테 달려들었다.   “바새끼! 죽어, 죽었소까!”   기준은 병완의 손에서 괭이를 빼앗아 쥐고 날아드는 군도를 막아냈다.   “그만 둿!”   이때 등 뒤에서 고함소리가 들렸다. 모두 머리를 돌려보니 끼무라가 경찰들을 데리고 나타났다. 기준과 야마모도는 괭이와 군도를 거두었다.   끼무라는 군도자루를 잡고 헐금씨금 병완의 앞에 다가왔다.   “총도감, 근심하지 말게나. 여기에 메밀을 심어 먹었소. 길만 잘 닦으면 돼.”   그러나 병완은 오히려 오만상을 찡그렸다.   (내 굶어 죽어도 네 놈들 쌀을 먹을 것 같으냐?)   교활한 끼무라는 야마모도 소장을 책망하는 척 했다.   “자넨, 림장이나 잘 지키라고. 하필 총도감이 묵밭을 일구는 걸 가지고 시비할건 뭔가? 빨랑빨랑 림장에 가.”   이번엔 몸뚱이를 한길수에게 돌렸다.   “한 대장, 자꾸 총도감과 이러지 말게나. 둘이 힘을 합쳐 대일본 제국의 일을 많이많이 도우란 말이야.”   “하이!”   한길수가 일본 말로 대답하면서 군례까지 척 붙이었다.   병완은 구역질이 나 침을 “퉤!” 뱉었다.   “원, 더러워서 못살겠어.”   병완은 떠나가 버리는 일본 놈들과 발발이 같은 한길수 뒤에 대고 줄 욕을 퍼부었다.   “흥! 나를 우습게 보는구나. 총 도감? 길만 다 닦으면 헌 신짝 버리듯 할 게 뻔하다. 쳇, 저 놈들이 보기 싫어서 만주국에 가버려야겠다.”   성희는 병완을 말리였다.   “만주에 간다고 잘 살 것 같아요? 전번에 본가 집에 가보니 서울이나 충청도 한산은 몽땅 일본 놈들의 세상으로 됐더구먼요. 오랍동생이 말하던데요. 우리 고향 마을에서 만주로 간 사람들이 그러더라나요. 만주에선 만족과 되놈 강도들이 여편네를 마구 빼앗아 간다던데요. 괜히 만주로 가서…”    병원은 단마디로 노친의 말을 잘라버리었다.   “됐소, 됐어. 물론 여기서 저 놈들의 비위를 맞춰 주면 그럭저럭 살 수는 있소. 그러나 만주의 개나 돼지처럼 살지언정 일본 놈들의 총 도감이나 하면서 살진 못하겠소.”   병완은 얼굴을 기준에게 돌리었다.   “기준아, 내 먼저 만주로 들어가 어떤가 두루 돌아보고 오마.”   기준은 말려 나섰다.   “아버지, 내 들어가 보겠습꾸마. 아무래도 여기 고향에서 살 것 같지 못합꾸마. 아버지가 한길수를 외눈깔을 만들어놨지. 이태 전에 내 또 영팔과 승만을 때려눕히지 않았습둥? 저 놈들은 우릴 눈에 든 가시처럼 여기면서 자꾸 걸고들어 못살게 굴게 뻔합꾸마.”   병완은 한참 먼 남산을 쳐다보면서 묵묵히 고민하더니 머리를 힘없이 끄덕였다.   갑자기 성희는 바위 돌 사이에 폴싹 물앉더니 엉엉 대성통곡 쳤다.   “만주에라고 일본 놈들이 없겠느냐? 전번에 고향에 갔다가 들었는데 간도 용드레촌에도 일본 놈들이 득실거린다더라.”   그래도 병완은 고집을 부렸다.     “일본 놈들이 만주 산골에까지 갔겠소? 일본 놈들이 없는 산골에 가서 땅굴을 파고 살면 그 놈들인들 어쩐대?”    말이 쉽지 고향 땅을 버리고 이국의 낯선 타향에 가서 어떻게 살겠는지 기약이 없었다.   모두들 맥이 풀려 더 일하지 못하고 성희를 부축해 괭이를 메고 메밀 씨 함지랑 이고 안고 집으로 내려갔다.     소 잔등 같은 바위돌들만이 엉거주춤들 물러 앉아 한숨을 풀풀 쉬면서, 멀어져가는 불쌍한 주인들을 바래고 있었다.         2. 운주동 서당방     가지 많은 큰 나무 바람에 잘 새 없다고 최구장은 점점 많이 늘어난 자손들의 앞날이 막막하기만 했다. 최구장은 곰방대를 뻑뻑 빨면서 네 살 밖에 안 되는 명옥이 베실을 삼다가 까딱까딱 자부는 것을 보고 곰방대로 이마를 딱 쳤다.     “아가!”    “요년 가시나, 초저녁부터 자고 언제 밥값을 하겠냐?”    자불다가 명옥은 너무 아파 눈물을 똑똑 떨어뜨리었다. 그 애는 눈을 비비더니 베실을 삼아 모대기에 감았다. 허나 14대 장손 봉인은 정주간에서 단잠에 빠져 코를 다랑다랑 골고 있었다.   명옥은 잠기 가득한 눈을 똥그랗게 뜨고 저녁 늦게까지 베실을 뽑아내 감고 또 감았다.   최구장은 자불면서 베실을 뽑는 조그만 손녀가 불쌍해났다.   “명옥아, 너도 자고 내일 일찍이 일어나 베실을 뽑아라. 가시나, 밥값을 해야 죽이라도 먹지.”   “예, 내일 베실을 많이 뽑겠습꾸마.”   명옥은 좋아라고 일어나 베실을 감아치우고 봉인의 곁에 가서 두 다리를 꼬부리고 굳 잠에 빠져버렸다.   최구장은 집 안에서 갑갑하여 바깥으로 나가 검은 구름 속에 어슴푸레 보이는 달을 쳐다보았다.   이윽고 검은 하늘에서 보슬비가 보슬보슬 떨어졌다. 최구장은 가슴이 옥죄여 드는 것 같아 마루에 내려 보슬비를 온몸으로 맞았다. 차라리 비를 흠뻑 맞아 온몸의 근심을 씻어버리기라도 했으면 좋을 것 같았다. 그는 이일 저일 생각하니 당장 숨이 넘어 갈 것만 같았다.    “이젠 묵밭도 마음대로 일구지 못한다지. 밭에다 나무를 심어야 한다지. 사냥도 하지 못하고 버드나무를 베지도 못한다지. 뭘 먹고 살아야 한단 말인가? 그래 이 땅이 일본 놈의 땅으로 됐단 말인가? 아, 나라가 망하더니 망국노 신세로구나. 이게 바로 망국노 설음이구나.)    최구장은 바쁠 때일수록 병완과 답답한 마음을 털어놓고 싶었다.   (그러나 난 이 고향 땅을 쉽게 버리고 만주로 들어갈 수 없어. 지식으로 이 땅에서 일본 놈들과 싸워보자. 일본 놈들은 메이찌 유신 후에 세계 선진 지식과 기술을 끌어들여서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었다. 그 놈들은 우리보다 먼저 세상 아는 것이 많고 힘이 있기에 우리 나라를 먹어치우고 우리 땅에 발을 붙인 게 아닌가? 무지몽매는 오랑캐 놈들에게 짓밟히는 제일 큰 원인인 거야. 우리 후손들을 더는 무식해 오랑캐 놈들에게 억눌리면서 살게 할 수는 없다.)   그는 주먹을 으스러지게 틀어쥐고 부르르 떨었다. 지루한 어둠속에 흩날리는 보기 좋던 은빛구레나룻도 원형을 잃고 말았다.   (이 지루한 밤이 언제면 개일까?)   최구장은 한숨을 길게 쉬면서 마루에 올라가 갓을 벗어 비 물을 툭툭 털어 마루기둥에 걸어 놓았고 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갔다. 이른 아침 먹장구름이 뒤덮인 동녘하늘이 희붐히 밝아왔다. 얼음조각 같은 해라도 조금 떠서 비췄으면 좋으련만 좀처럼 얼굴을 내밀지 않았다.   아침술이 떨어지기 바쁘게 최구장은 맏아들 경숙을 보고 흑판을 만들라고 했다. 아버지 뜻을 안 경숙은 아버지와 함께 구새 목에 몇 해 놔두었던 통나무 몇 개를 맞들어 마당에 가져왔다. 그는 큰 자귀로 통나무를 풍풍 찍어낸 후 대패로 빤빤하게 밀어 다듬었다. 이윽고 나무판자를 대고 숯 검댕이 칠을 하니 제법 자그마한 흑판이 됐다.   한동안 일본헌병들이 서당에서 조선 글을 가르치지 못하게 하여 최구장은 흑판마저 없애 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백절불굴하고 제일 위방에 흑판을 다시 만들어 세웠다.   그날부터 그는 서너살 밖에 안 되는 손자들인 봉인과 봉순, 봉문을 흑판 앞에 앉혀놓고 글을 가르쳤다.   며칠 지나자 소문을 듣고 마을의 사돈 기준이 아들 상우와 상순을 데리고 왔고 신설동의 열서너 살 되는 형내도 다시 서당에 왔다.   “얘들아, 글을 배워야 한다. 글을 모르면 남들에게 짓밟히게 되느니라. 성현들의 글에는 우리가 모르는 지혜와 새 세상이 있느니라.” 학부모들인 기준과 상철이 등도 모두 개학하는 날에 모여와 애들과 함께 공부했다.   “오늘부터 천자문을 가르치겠다. 처음 글자는 ‘천’이라고 읽는다. ‘천’ 자는 하늘이라는 뜻을 나타낸다. 따라 읽어보자. 하늘 ‘천’.”   “하늘 ‘천’!”   서당에는 최구장을 따라 애들이 글 읽는 소리가 낭랑하게 들려왔다. 그 낭랑한 글 읽는 소리는 절에서 중이 염불하는 소리처럼 느릿느릿하면서도 노래 소리처럼 절주 있게 들려왔다.    “하늘 천, 따 지, 누를 ‘황’, 가물 ‘현’.”    “참 잘 읽었다. 그럼 한 글자 한 글자 읽으면서 써 봐라.”    애들은 종이나 붓이 없는지라 미리 준비해가지고 온 모래판에 나무꼬챙이나 손가락으로 한 글자 한 글자 읽으면서 써내려갔다. 애들이 제대로 쓰지 못하면 최구장이 돌아가면서 손을 잡고 한 획 한 획 쓰는 연습을 했다.    형내는 몇 해 전에 배운 적이 있어 작은 선생이 되여 옆에 앉은 애들의 손을 잡고 쓰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좀 큰 애들은 괜찮았는데     봉문이랑은 세 살 밖에 안 되는지라 제대로 따라 쓰지 못했다.    이때 아래방에서 “잉잉” 여자애가 우는 소리가 들렸다.    “웬 일이냐?”   모두들 아래 방을 내려다보았다. 네 살 밖에 안 되는 명옥이 두 손으로 눈을 비비면서 서당 문어귀에 서있었다. 최구장이 성난 눈길로 명옥을 보면서 물었다.    “저 년 가시나, 어째 떠드느냐?”   명옥은 어머니의 손에서 빠져나와 서당에 뛰어 들어오면서 소리쳤다.   “할아버지, 나도 공부하겠습구마.”   그러자 최구장은 명옥을 쫓아내면서 꾸짖었다.   “이 년 가시나, 계집애가 공부를 해 뭘 해? 넌 가서 베실이나 뽑아라.”   그러나 명옥은 몸을 뱅뱅 탈면서 떼를 썼다.   “싫습니다. 나도 봉인 오빠처럼 공부를 하겠다 ~ ”   “이 가시나, 나가지 못 할까?!”   순간, 상순이가 코를 풀쩍거리면서 “명옥아, 여기 내 옆에 앉아 공부해라.”라고 하면서 엉덩이를 옆으로 움직여 앉을 자리를 내놓았다.    기준은 상순의 말에 어이없어 희죽이 웃기만 했다.   경숙이 보다 못해 달려와 칭얼거리는 명옥을 안아 정지로 내려갔다.   그는 명옥을 옥실에게 안겨주면서 책망했다.   “애를 보지 못 하고 뭘 하오?”   옥실은 손으로 눈을 비비면서 우는 명옥을 받아 안으면서 남편에게 눈을 흘기었다.   “계집애는 공부를 하면 못씁둥?”   “가시나가 공부를 해 뭘 해? 베실이나 뽑고 빨래나 하고 밥이나 지으면 되는 거지. 쯧쯧. 아버지가 화를 내면 어쩌자고. 다신 그런 소릴 하지 마오.”    옥실은 명옥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면서 도도 거렸다.   “공부는 뭘 사내들만 하라고 날 때부터 써 놓았다오?”   “그만 하오. 숱한 사람이 듣는데.”   경숙은 위방을 올려다보면서 눈까지 끔쩍해보이었다.   그러자 옥실은 입을 다물고 명옥을 안고 달래였다.   “일 없어. 오빠가 먼저 글을 배우면 오빠한테서 배우면 된다. 울지 말라. 이젠 끝여라.”   그래도 명옥은 흑흑 흐느껴 울었다.   위방에서는 문을 꼭 닫았는데 최구장이 글을 설명하는 소리만이 들리었다.   “‘천지황현’이란 뜻은 이러하느니라. 옛날에 하늘땅이 가물고 몽땅 누르러 갔다는 뜻이니라. 생각해봐라. 이런 하늘아래 누런 땅에서 가물어 곡식이 여물 수 있겠느냐?”   “없습구마.”   형내는 배운 적이 있어 제꺽 대답했다. 옆에서 듣던 상철과 기준은 머리를 끄덕였다.   최구장은 마른기침을 하며 애들에게 말했다.   “아래에 하늘 ‘천’자에 깃든 ‘녀아의 전설’을 이야기해주겠다.”   “와우, 좋다.”   애들이고 어른이고 귀를 가시고 들었다.   “먼 옛날 태고 적에 하늘에 구멍이 펑 뚫렸지. 그래서 하늘에는 불이 활활 타오르고 땅에는 가뭄이 형편없이 들어 곡식이 다 쓰러졌단다. 그래서 녀아는 중국 곤륜이란 산에 가서 바위 돌을 깨서 불에 녹여서 파 난 하늘을 기웠단다.”   “와~ 대단한 여자야.”   애들이 감탄했다.   “그런데 마지막에 한사람이 드나들 만큼 기울 녹인 용암이 모자랐단다. 그래서 녀아는 사람들을 살게 하려고 자기 몸으로 나머지 하늘 구멍을 막았단다. 그때부터 하늘 구멍이 막혀 사람들이 곡식을 심어도 잘 자라서 잘 살게 되였단다.”    “와~ 정말 대단한 녀아로구나.”    “그래, 참말 대단해.”   최구장은 눈을 지그시 감고 애들의 감탄소리를 들으면서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오늘 공부는 이만하자.”   애들은 집으로 돌아가면서 옛말을 들으니 재미있다고들 했다.   며칠 후 최구장은 애들이 배운 것을 다 익히자 그다음 글자를 배워주었다.   “오늘 배울 첫 글자는 영글 측자이다. 먼저 따라 읽기를 하자. 영글 ‘측’!”   “영글 ‘측’!”   몇 번 따라 읽기를 한후 애들은 한 획 한 획 따라 “측” 자를 써나갔다.   최구장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면서 애들 속을 왔다 갔다 하면서 애들이 모래판에 글씨를 쓰는 것을 돌아보았다.   (영팔과 응삼이랑 다 얘들처럼 배워주었건만 우리 조선 사람을 도울 대신 일본 놈들의 개다리로 돼버렸단 말이야. 무식도 죄지만 유  식해도 지식을 누굴 위해 쓰는가는 것이 더 중요한 거야.)   최구장은 응삼이랑 떠올리자 마음이 아프고 자기 노력이 결과가 빗나와 서글펐다.   한참 후 최구장은 책상을 똑똑 쳤다.   “그만, 그만 쓰고 오늘 배운 영글 ‘측’자의 뜻을 알도록 하자.”   애들은 모두 똑바로 앉아 초롱초롱한 눈을 한 번도 깜짝하지 않고 최구장 선생님을 바라보면서 하회를 기다렸다.   최구장은 미리 마련해놓은 둥근 채 바퀴를 두 손으로 쥐여 안으로 힘껏 우겼다. 그러자 채 바퀴는 타원형으로 이그러져 버렸다.   “봐라. 이렇게 된 걸 이그러졌다고 한다. 영글 측자는 바로 이그러진다는 뜻이느니라.”   그러자 애들은 “오~” 하고 알았다는 듯이 감탄소리를 내면서 머리를 끄덕였다.   그때 형내가 손을 들었다.   “뭐냐? 말해라.”   형내는 이런 요구를 제기했다.   “선생님, 땅에 깃든 얘기도 들려줍소.”   그러자 애들은 좋다고 박수까지 쳤다.   “그래, 그렇게 하자. 에헴, 따 ‘지’라. 땅이란 원래 울퉁불퉁하게 생겼지. 높이 우뚝 솟은 건 산이요, 깊이 패인 건 골짜기지. 우리 사는 명천 여기서부터 몇 백리 떨어진 북쪽에는 백두산이란 높은 산이 우뚝 솟아있다.”    최구장은 흑판에 석회 돌로 백두산을 그려놓고 백두산을 일일이 설명하고 뒤이어 백두산에 깃든 전설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에헴, 최구장, 안녕하오?”   이때 나까노라이찌로 헌병 소대장이 서당에 불쑥 들어섰다.   불청객이 들어오자 최구장은 백두산 그림 아래에 썼던 백두산이란 글을 지우고 후지산이라고 써놓았다.   “오, 후지산, 우리 대일본 제국의 아주 아름다운 산이야.”   나까노라이찌로 소대장은 손으로 턱을 고인 채 흑판을 들여다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자는 코 수염을 쓱 닦더니 거들먹거렸다.   “좋소까. 계속 얘기했소까.”   최구장은 계속 백두산 전설을 얘기했다. 그러나 나까노라이찌로 소대장은 뭐라고 말하는지 알아듣지 못하겠는지라 서당에서 나가버렸다.    그는 떠나가면서 조선말을 알아듣는 영팔과 수길과 같은 조선 앞잡이들을 데리고 와야 제대로 감시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최구장은 애들이 흥미진진하게 듣자 다른 얘기도 들려주었다. 애들을 데리러 일찍 왔던 학부모들도 최구장의 얘기가 재미있어 흥미진진하게 들었다.   명옥은 오빠 봉인이랑 공부하는 것이 너무 부러워 꼭 닫긴 문에 난 옹이구멍으로 들여다보면서 귀를 강구고 듣고는 애고사리 같은 손가락으로 손바닥에 글자를 써보면서 하늘 천, 따지를 귀동냥해 익혀나갔다.    그런데 어떤 때에는 봉인오빠한테 들킬 때가 있었다. 못된 봉인이가 손가락으로 옹이구멍으로 쏙 내지르면 눈이 찔렸다. 설상가상으로 할아버지 최구장은 명옥이 옹이구멍으로 들여다보는데다가 애들이 옹이구멍에 대고 손가락질하면서 작난 친다고 나무꼬챙이를 깎아 옹이구멍에 박아넣어 꽁꽁 막아버렸다.    옹이구멍까지 딱 막히자 명옥의 글공부는 꽉 막혀버렸다.   서당에는 날이 갈수록 신흥동과 영월동, 가마골, 신설동의 숱한 애들이 모여와 흥성흥성해져 가고 있었다.   최구장은 아예 팔간 집 제일 서쪽 간에 “운주동 서당”이란 편액까지 내 건 후 서당 학생들을 널리 모집했다.        3. 오누이    흐릿한 하늘이 운주동을 지지 누르고 있었다. 비도 내리지 않고 갑갑하게 대지를 덮고 있는 먹장구름이 밉살스러울 지경이었다.    어느날 명옥은 봉인 오빠랑 공부하는 서당 방 문 뒤에 달려갔다. 그런데 할아버지가 붓으로 쭉 그어놓은 듯 짙은 버들잎 눈썹아래 엄한 눈길로 나가라고 눈짓했다.   최구장은 은빛수염을 슬슬 쓸며 못 마땅한 눈길로 명옥을 쏘아보았다.   할아버지가 겁나 명옥은 아래 방으로 해서 정주간으로 달아났다.   그는 엄마의 품에 안기면서 칭얼거렸다.   “엄마, 나두 오빠랑 함께 공부할래. 응~응.”   옥실은 철없는 어린 딸이 불쌍해 명옥의 눈물범벅이 된 얼굴에 얼굴을 대고 상냥한 어조로 달래였다.   “얘야, 옛날부터 여자애들은 공부를 하지 못한단다. 여자애들은 베실을 뽑고 밥을 지어야 해.”   명옥은 머리를 도리도리 하면서 떼를 썼다.    “난 베실 뽑기 싫습니다. 나도 오빠처럼 공부하겠소. 엉~엉, 흐흑.”   옥실은 눈물줄기가 쏟아지는 명옥의 얼굴을 쓰다듬으면서 달래였다.    “응, 할아버지한테서 배우지 못하면 오빠 먼저 배운 다음에 오빠한테서 배우자. 그만 그쳐라. 할아버지가 듣고 위방에서 나와 또 곰방대로 이마를 치겠다. 딱 그쳐라.”     명옥은 흑흑 흐느끼면서 울음을 그치더니 옥실의 품에 안겼다.    한참 칭얼거리던 명옥은 옥실의 품에 안긴 채 조용히 잠들어버렸다.   옥실은 쌔근쌔근 잠자는 딸을 꼭 껴안고 다독이면서 한숨을 호~ 내쉬었다.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명옥은 쌔근쌔근 자면서도 흑흑 흐느끼곤 했다. 옥실은 명옥이를 구들에 내려놓고 베개를 베워주고 누더기이불을 덮어주었다.   뒤이어 그녀는 헛간에 나가 사다리를 가져다가 천정 대들보에 기대여 놓고 올라가 메주덩이를 뜯어 북데기를 펴놓은 바닥에 내리 떨어뜨렸다.    마지막에 손이 닿을락 말락 하는 메주덩이가 천정에 매달린 채 남아있었다. 아무리 손을 뻗쳐도 손가라 끝도 닿지 않아 이마에 콩알 같은 땅방울이 송골송골 내돋았다.   드디어 그녀는 눈앞이 아찔해나며 무수한 별빛이 반짝거리며 두 다리가 덜덜 떨렸다.   그녀가 마지막 메주덩이를 달아맨 새끼에 손을 뻗쳐 뜯으려는 순간 졸지에 바깥에서 나까노라 소대장의 고함소리가 들렸다.    “뭘 해?!”   옥실이 바깥으로 머리를 돌리면서 내다보다가 몸이 기우뚱하며 사다리에서 허공 퉁 떨어졌다.   “앗!”    그 모진 소리에 미닫이문이 쫘르륵 열리면서 서당에서 어른들이 무슨 일인가고 부엌간 쪽으로 달려 내려왔다.   옥실은 메주덩이가 널린 북데기 위에 떨어지면서 그만 땅바닥에 머리를 탕 부딪치고 말았던 것이다.   “엄마!”   명옥도 깨나서 방바닥에 떨어져 쓰러져 있는 엄마를 보고 달려가 흔들며 울었다.   경숙과 경민은 부랴부랴 옥실을 안아다가 가마 목에 눕혔다.   “여보, 이게 웬 일이요? 어이구, 이 일을 어쩌오?”   뒤늦게 정주간에 내려온 최구장은 정주칸 바닥에 널린 메주덩이를 둘러보고 경숙을 나무랐다.   “너 메주를 뜯어 줄 게지 이게 뭐냐? 아녀자가 저렇게 높은 대들보의 메주를 뜯다가 잘못되다니. 엉? 이런 일이 또 어데 있냐?”   경숙은 수건으로 옥실의 얼굴의 먼지를 닦아주면서 중얼거렸다.   “메주를 뜯겠으면 말할 게지. 이게 뭐요? 저 높은 대들보에 올라가다니? 흑, 흑.”   옥실은 정신을 잃은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눈을 꼭 감고 조용히 누워있었다. 다행이 북데기 위에 떨어져 어데 피가 터진 곳은 없었다.   한식경이 지나자 옥실의 얼굴이 점점 팅팅 부어올랐다. 눈언저리는 까맣게 번지어 갔다. 거품을 문 입술은 창백하다 못해 백지장 같았다.   “어이구, 여보, 깨나오. 일어나오. 저 오누이를 두고 누워있으면 어쩌오? 어이구.”  경숙은 울상이 되여 구들을 치면서 땅이 꺼지게 한숨을 푸푸 몰아쉬었다.  봉인과 명옥은 옥실의 양손을 쥐고 흔들면서 “엄마~”, “엄마~” 하고 대성통곡 쳤다.   “엄마, 일어나.”   “엄마~ 깨나~”   이때 형내가 사람들 틈을 비집고 들어와 쪼그리고 앉아 옥실을 들여다보다가 일어나면서 최구장에게 말했다.    “스승님, 저 높은 데서 떨어졌는데 머리 터진데 없급꾸마.  피 안터졌지만  내상은 더 위험합니다. 오히려 나쁜 피가 밖으로 터져 나왔다면 덜 위험한데요. 어혈이 머리 안에 있기에 더 나쁩니다. 부중이 와서 머리가 붓긴 걸 보시오. 목숨이 위험합니다. 빨리 우리 할   아버지한테 보입소.”   그러나 최구장은 피씩 입귀로 쓴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뭘 알아 그래? 분명 가난이 덮씌운 이 집안에 병 귀신이 덮친 게다. 이건 의학이나 약으로 치료해 살릴 수 있는 병이 아니야.”   최구장은 의학보다 신을 믿었던 것이다. 그도 옥실의 상처는 약으로 치료해 될 게 아니다. 하느님과 신께 맡겨야 될 것 같았던 모양이다. 그는 맏며느리를 구하기 위해 마지막노력을 하고 싶었다.    옥실을 둘러본 마을사람들과 학부모들은 모두 혀를 끌끌 차더니 집으로 돌아가 쌀독에서 좁쌀 한바가지, 감자 한 대야라도 들고 와    옥실을 구하는데 보태 쓰라고 했다. 뒤늦게 병완은 불붙이에서 사는 맏손녀 어금에게서 최구장 맏며느리의 불행한 소문을 듣고 부랴부랴 달려와 금덩이 몇 덩이를 내놓았다.   “맏며느리 이렇게 상해 안 됐소. 이걸로 사돈며느리 치료를 해줍소.”   “이건 어데서 난 금덩어리들이오?”   “이건 이전에 성칠이 웅진의 날강도 백승만의 걸 빼앗은 거요. 근심하지 말고 쓰오.”   최구장은 병완에게 “감사합니다.” 하고 인사하고는 사돈어른의 금덩이를 받아 경숙에게 넘겨주었다.   이때 창준과 기준 두 집 식구들도 소문을 듣고 각기 동전을 가지고 와서 보태 쓰라면서 문안을 여쭈었다.   최구장은 문안하러 온 동네어른들에게 일일이 인사하면서 며느리가 불쌍하여 중얼거렸다.   “요즘 쌀독을 빡빡 긁더니 분명 죽물도 모자란다고 애 어미 제대로 잡숫지 못했을 거야. 그러니 굶은 며느리가 저 높은 대들보에서    메주를 뜯다가 어지름 증에 떨어진 거다.”   최구장은 눈물을 주르르 흘리더니 마루에 나가 까마귀가 우는 하늘을 바라보면서 장탄식을 하며 주먹으로 가슴을 탕탕 치였다.   “천지신명이시여, 우린 대대로 양심 어긴 적 없소이다. 하늘과 땅에 미안한 일을 한 적이 없고 남을 해친 일은 더욱 없소이다. 그런데 우리 집에 이 웬 날벼락인고. 아이고~”    최구장이 마루에 물앉아 대성통곡치자 자녀들이 달려가 아버지를 부축해 위방에 모셨다.   봉인과 명옥이 할머니 품에 안기면서 서럽게 울었다.   최구장 댁 성단은 동전으로 눈물을 훔치더니 봉인과 명옥을 며느리에게 먹이려고 부엌 칸에 내려가 좁쌀을 씻어 솥에 얹었다. 그러자 둘째며느리 어금이 부엌에 내려가 불을 때였다.   이때 관준이 침통이랑 가지고 들어섰다.   “사돈어른, 큰며느리 상해 얼마나 비통하겠습니까? 봅시다. 어디를 상했는가?”   최구장은 멀찍이 서서 관준 영감이 옥실의 맥을 보고 팅팅 부어오르는 얼굴의 상처를 보는 것을 별로 희망을 두지 않고 볼 뿐이었다.   “어떻소?”   경숙의 물음에 관준 영감의 얼굴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비끼었다.   “약을 많이 써야 될 것 같소.”   뒤이어 관준은 경숙의 귀에 대고 뭐라고 여쭈었다.   경숙은 머리를 끄덕이더니 아내 손을 만지면서 눈물만 하염없이 흘렸다.   처량한 울음소리에 정신을 차렸는지 옥실이 입술을 옴직거리더니 눈귀로 눈물이 주르르 흘러 귀밑으로 줄줄 떨어졌다.   “여보, 정신을 차리오. 양? 새파란 나이에 애들을 두고 이게 무슨 일이요? 여보,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 ~”   경숙의 울부짖음 소리에 온 집 식구들은 흑흑 흐느껴 울었다. 그러나 나까노라는 서당을 감시하러 왔다가 옥실을 문안하기는커녕 개 닭 보듯 하더니 그 자리에서 꼬리를 빼는 것이었다.    경숙은 아내를 살려달라고 하늘에 빌고 땅에 빌고 신에게 빌었다.    “오, 청청 하늘이여, 부디 어질고 불쌍한 옥실을 굽어 살펴 살려주옵소서. 부지런하고 곱살하게 생긴 옥실이 무슨 죄가 있다고 이다지도 일찍이 서른 살도 안 된 꽃나이에 데려가려고 하는가? 아직 철도 들지 못한 다섯 살짜리 아들애 봉인과 네 살 밖에 안 되는 딸애 명옥을 두고 어떻게 갈수 있단 말인가? 그 귀한 오누이를 당신이 기르지 않고 떠나가면 어떻게 하는가?”    그는 하늘과 땅에 빌다 못해 이번에는 옥황상제와 염라대왕에게 빌고 또 빌었다.    “염라대왕이여, 불쌍한 오누이를 생각해서라도 옥실을 살려주옵소서. 당신도 눈이 있고 귀가 있잖은가? 염라대왕님이여, 이 딱하고 어려운 옥실의 사정을 봐서라도 살려 주옵소서. 제발 살려 주옵소서.”    허나 어린 오누이는 뜻밖의 사고로 끝내 어머니를 여의는 불운한 운명을 벗어나지 못했다.   옥실은 숨이 붙어 있었지만 의식을 잃은 채 각일각 경각을 다투고 있어 이미 세상을 뜨나 다름이 없었던 것이다. 세상에 어린 오누이가 불쌍하기만 했다.     4. 무당의 굿   맏아들 경숙이가 하늘과 땅에 비는 불쌍한 정경을 보면서 안타까워하던 최구장은 무당을 청해 천지신명에게 빌기로 했다.   (며느리야, 내가 너를 위해 할수 있는 일이란 이것 밖에 없구나. 자고로 인생 팔자나 목숨이나 모든 것이 하늘이 정해준 것이오니 하늘의 명에 기탁할 수 밖에 없다.)    “여보, 당신 무당을 청해오오. 우리 무당을 청해 며느리를 위해 최후노력을 해보기오.”   노친 리성단은 이제껏 영감의 말이라면 오직 순종만 해왔지만 이번만은 자기 생각을 말하고 싶었다.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할까 말까 하다가 끝내 목구멍을 열고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여보, 무당을 청하기보다 신설동의 관준 사돈어른을 청해 저 팅팅 부어오른 머리의 어혈을 뽑아볼까요? 관준 어른은 이 부근에 이름난 의원이 아니고 뭐예요?”   충청남도 서현에서 놀러 왔던 성단의 남동생 리병호도 충고했다.   “옳아요. 매형, 그깟 무당을 청해 뭘 해요? 의원을 청해 병을 보이는 게 낫을 거 같아요.”   최구장의 처조카 리철근도 말리였다.   “아까운 돈을 무당을 줄게면 병 치료나 하세요.”   “관둬!”   최구장은 기어코 그들의 충고를 듣지 않았다.   “너희들이 뭘 알아서 끼어드나? 사람의 목숨은 하늘이 정해준 거야. 무당을 청해 하늘에 비는 수밖에 없다.”   성단이나 남동생은 모두 입을 다물고 말았다.   최구장은 노친 성단을 보고 재삼 부탁했다.   “어서 사찰에 가서 무당을 청해 오오.”   누구의 명이라고 거절하겠는가.   리성단은 은전을 몇 개 주머니에 넣어가지고 맏아들 경숙과 함께 무당을 청하러 떠났다.   최구장은 경인과 경민이 등을 시켜 집안의 돈을 다 모아가지고 소 한 마리를 사다 잡게 했다. 그 다음 바깥에 대국가마를 걸고 소고기를 저며 앉히고 불을 때 끓이게 했다.    한편 허리 꼬부장한 성단과 눈물범벅이 된 경숙이가 사찰로 가는 도중에 별 희한한 변을 당할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그들은 운주동을 벗어나 마을동쪽의 산기슭 길 굽인 돌이를 지나려는 때였다. 헌병소대장 나까노라가 지휘도를 거들거리며 검정가죽장화를 번쩍거리며 거들먹거리면서 통역 류강철과 함께 오다가 딱 마주쳤다.    “쏘까, 나니에 이꾸(어데로 가)?”   최구장 댁과 경숙이 주춤 멈춰 섰다.   “에이, 노친, 어디로 가?”   나까노라의 말을 통역해 주자 경숙은 머리를 숙였지만 리성단은 성을 냈다.   “네 이놈, 넌 어미도 없이 자랐니? 제 어미 같은 사람보고 노친이라니? 내가 그래 네 여편네라도 돼?”   “뭣이? 어째? 감히 황군한테 대들 텐가?”   리성단은 손으로 삿대질하면서 류강철을 욕했다.   “너 이 버릇없는 놈을 봐라. 네놈이 우리 영감한테서 천자문을 배우던 때가 어제 같은데 스승 댁과 반말을 쓰다니? 배은망덕한 놈 같은 게 잘 되는가 봐라.”   “나니(뭣이)? 나니(뭣이)?”   “예. 이 노친은 내가 자기를 욕했다고 성을 냅니다.”   류강철의 일본어로 하는 말에 나까노라는 머리를 끄덕였지만 성단과 경숙은 뭐라고 지껄이는지 알아듣지 못하고 갈 길을 가려고 앞을 막아선 그자들을 에돌아 가려고 했다.    "빠까(바보), 아이사쯔오 시나싸이(인사말을 하게나)."   드디어 최구장 댁 모자가 허리를 굽혀 인사하자 나까노라는 또 자기들이 만들어낸 면례 말을 암송하라고 강요했다.   면례 말이란 일본 놈들을 만나면 해야 되는 인사말 비슷한 것이었다.    “인사했으면 됐지. 면롄지 뭔지 우린 모른다. 맏며느리가 아파 사찰에 급히 갔다 와야겠는데 앞길을 막지 말구 피해라.”    그러나 류강철은 피할 염을 하지 않고 오히려 앞길을 막으면서 을러멨다.    “면례 말을 암송하지 못하면 소대장이 가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럼 자네 배워주게나. 빨리 가게 말이야.”   류강철은 최구장 댁 앞에서 허리를 굽히며 “예, 예.” 하고나서 정식으로 배워주려고 들었다.   “고꼬노 진민노 이찌 와레라와 닛뽄노 덴노노 진민니 나리(이곳 백성의 하나인 우리는 일본 천황의 백성으로 된다).”   그 면례 말은 진짜 우리 조선 사람들을 일본의 망국노로 만드는 식민지교육의 한 단락이었다.   최구장댁은 굽은 허리를 꿋꿋이 펴고 물었다.   “죽으라는지 살라는지 모를 소릴. 어떻게 암송해? 엉? 집에 앓는 사람을 눕혀놔서 갈 길이 바빠. 듣고도 모를 소릴 할 새 있냐?”   “바 새끼, 못 간다, 못 가!”    나까노라는 벌컥 성 내면서 기어이 암송시키라고 류강철을 보고 을러멨다.   그러자 류강철은 일본 상전 앞에 허리를 굽히더니 최구장 댁한테로 홱 돌아섰다.    “지금 어느 때라고 아직도 면례 말도 모르고 어디로 간다고 그럽니까? 내 말을 들으시오. 한일합방 후 조선은 이미 일본에 속했단 말입니다. 그러니 일본 어른들이 하라는 대로 면례 말을 암송하라면 암송하세요. 그러지 않으면 이담 길도 못 다닙니다.”    최구장 댁은 억이 막혀 하얀 머리를 홰홰 돌리다가 “그래 면례 말이 무슨 뜻이냐?” 하고 물었다.   류강철은 배를 쓱 내밀었다.   “이런 말이요. ‘여기 백성의 하나인 우리는 일본의 이곳 백성으로 된다.’는 말입니다. 알만 합둥?”   최구장 댁은 류강철을 마구 밀면서 사정했다.   “어이구, 죽어가는 며느리를 두고 하루 새에 일본 백성이 되라니, 될 수 있냐? 원, 이담 암송할 테니 이번엔 보내다오.”    경숙도 나서 빌었다.   “자네 이전에 아버지 제자인 옛정을 봐서라도 일본 사람과 말해주게나. 어떻게 알아듣지 못하는 면례 말을 이 자리에서 암송하겠나?”   그러나 류강철은 도리머리 질 했다.   “안 되오. 꼭 암송하구야 갈수 있소. 벌금 10원을 내거나 귀 쌈을 피나도록 맞지 않고선 못 가오.”   “어이구, 이 일을 어쩌느냐?”   최구장 댁은 무릎을 꿇고 물앉더니 한참 후에 일어나 외워보겠다고 일어섰다.   “음, 좋소. 암송하오.”   최구장 댁은 마른 침을 꼴깍 넘기더니 나까노라와 류강철을 엇갈아 훔쳐보더니 입을 열었다.   “꼬꼬댁 꼬꼬. 개 똥 같은 지지미가 와르르 쏟아져 나오니 미운 사람이나 콱 채워라. 자, 다 외웠으니 자네 통역을 잘해주게나. 우리 가게 말이야.”    류강철은 어처구니없어 입을 딱 벌리면서 웃으려다가 나까노라의 눈치를 흘끔 쳐다보고는 손으로 입을 꽉 싸쥐었다.   옆에서 듣던 나까노라는 류강철의 배때를 툭툭 치면서 "나니까(뭐야)?" 하고 물었다.   류강철은 너무 우스워서 눈물이 글썽해졌고 코 물까지 흘러내려 손수건을 꺼내 닦고 나서 말했다.   “참, 묘한 조선말로 암송하였지요.”   “소우까(그래?). 요로씨이(좋아).”   그들이 웃고 나서 돌아보았을 때에는 최구장 댁은 벌써 베치마를 팔락이면서 저 멀리 굽인 돌을 돌고 있었다. 그 뒤로 경숙도 종아리에 바람이 일게 가 버리고 있었다.   이튿날 사찰에서 온 요염하게 생긴 무당이 최구장 댁 모자의 안내 하에 운주동 최구장의 집에 나타났다.   신선인 듯이 하얀 비단으로 아래위를 감고 누런 비단으로 머리카락을 질끈 동인 뚱뚱한 얼굴, 분을 너무 쳐 발라 하얗고 살진 얼굴, 복숭아얼굴에 짙은 버들 잎 눈썹, 큼직한 쌍까풀눈, 축 늘어진 두 볼의 살은 꽤나 위엄스러워 보였다.   최구장이 마중 나가 허리 굽혀 인사했다.   “무당 마나님, 먼 곳에서 오시느라고 수고 많았습니다.”   무당은 왼손을 가슴에 대고 허리 굽혀 인사를 받더니 하얀 치마 자락을 날리면서 여기저기 다니면서 살펴보더니 물었다.   “환자는 어데 있어요?”    최구장 댁과 둘째며느리 어금이 무당을 안내해 정주간에 들어갔다.   무당은 합장하고 환자 옥실의 관상을 여기저기 살펴보더니 염불하듯 중얼거렸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이여. 그대의 귀여운 딸이 몹쓸 병에 걸렸나니 부디 구해주옵소서.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뒤이어 무당은 목소리를 높여 굿을 하기 시작하었다.    “창생이여, 화음청주, 일어나. 화음청주, 이런 몹쓸 병에 걸리다니. 화음청주, 귀여운 이 딸은 너무 젊습니다. 화음청주, 아직 천당으로 갈 때는 아닌뎁쇼. 화음청주, 화음청주,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화음청주, 화음청주.”   무당의 굿은 무속인의 굿에다가 중놈의 염불을 섞어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그 진가를 알아듣지 못하고 있었다.     드디어 무당은 옥실을 마주하여 합장하고 허리 굽혀 인사한 후 사뿐사뿐 걸어 나와 미리 무어놓은 나무 대에 올라가 남쪽을 향해 똑바로 섰다. 최구장 내외를 비롯한 온 집 식구들은 모두들 남쪽을 향해 꿇어 엎드렸다.   요염하게 화장치례를 한 무당은 머리를 풀어헤치고 북채를 거머쥐더니 둥둥 당 둥둥 당 북을 절주 있게 쳐댔다. 그러자 부근의 숱한 구경꾼들이 몰려와 무당이 굿을 하는 것을 구경했다.   이날 하늘이 유난히 맑고 구름 한 점 없었다. 저 멀리에 까마귀 떼가 날아와 백양나무 위에 앉아 까욱, 까욱 처량하게 울어댔다.   무당은 북치기를 멈추더니 머리를 풀어헤치고 남쪽하늘을 향해 두 팔을 벌리고 휘젓더니 합장배례 하더니 두 눈을 내리깔고 소리높이 굿을 하기 시작했다.   “태극천상 워니 하니 사방이여, 어쩜 나비들도 내려앉을 꽃 같은 나이에 저렇게 몹쓸 병을 여린 창생에게 주었나이까. 화음청주,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굽어 살피옵소서. 불쌍한 저 창생을 해치지 말고 살려주옵소서. 관세음보살이여, 남자 귀신이면 지고 가고 여자 귀신이면 이고 가옵소서.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여린 창생을 보좌해주옵소서. 화음청주, 화음청주…”   무당은 한참 굿을 하다가 북을 둥둥 당 둥둥 당당 당 당 당 치고는 멈추더니 삶은 소고기점을 여기 저기 쥐어뿌리면서 뭐라고 중얼거렸다.   마을의 애들은 소고기를 주어가느라고 야단쳤다.   무당은 회초리로 애들을 찌를 상하며 가리키면서 고래고래 고함쳤다.   “저 불충스런 못된 놈 새끼들에게 천벌을 내리옵소서. 제물을 더럽히는 이단자들에게 날벼락을 내리옵소서.”   웬 일인가?   좀 전까지만 해도 맑던 하늘에 먹장구름이 뒤덮여오더니 번개가 번쩍이고 날벼락이 마구 쳤다.   어른들은 자기 집 애들에게 내리는 천벌이라고 여겼던지 소고기를 줏지 못하게 말려가지고 집으로 바삐 달아났다.   최구장은 무당이 아주 영험하다고 생각하고 맏며느리가 살 것 같아 무당에게인지 남쪽하늘에인지 꾸벅꾸벅 연신 절을 올렸다. 그러자 온 집 식구들이 장대처럼 쏟아지는 소낙비를 무릅쓰고 모두 최구장을 따라 절을 꾸벅꾸벅 올렸다.   무당은 염불이 영험한 것 같아 소낙비를 무릅쓰고 나무 대에 풍덩 꿇어앉아 눈을 딱 감고 합장배례 한채 계속 소리 높여 염불하면서 치성을 드렸다.   최구장과 경숙이가 바삐 기름종이를 바른 우산을 들고 올라가 무당을 비바람 속에서 가리어주었다.   한참 후 무당은 천천히 일어나 소고기점 칼로 저며 내 여기저기에 쥐어뿌렸다. 그리고 소고기점을 저며 간장에 찍어 먹으면서 집식구들도 굿을 한 제물을 먹으라고 주었다. 최구장과 경숙은 먹을 생각이 없었지만 굿이 영험하지 못할까봐 억지로 조그만 소고기점을 눈물과 함께 삼키였다.    비바람도 무릅쓰고 정성을 다해 굿을 했다고 최구장은 무당에게 병완이가 부조로 가져온 금덩이에서 큰 것을 골라 주었다.    최구장네 일가는 무당도 청해 정성을 다해 하늘에 굿을 하면서 빌었고 경숙은 관준의 귀띔대로 행여나 하고 오줌을 받아 끓여 옥실의 머리를 씻어주고 닦아주었다. 하건만 그들의 정성과는 달리 옥실의 머리는 조금 내린 것 같았지만 온 몸이 팅팅 붓기기 시작하고 살에서 찐득찐득한 땀인지 물인지 내배였다.    한 열흘이 지나도 옥실은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로 저고리도 입히지 못할 정도로 온 몸이 팅팅 부어올랐다. 경숙은 하루 삼시로 대    소변을 받아 냈다. 피가 섞였는지 벌건 소변을 받아내는 경숙은 요강에 눈물 방울을 뚝뚝 떨어뜨렸다.   경숙은 날마다 못해가는 옥실을 보고 구들에 물앉아 한숨을 구들 고래 꺼지게 후~ 내쉬었다. 옥실은 어떤 때에는 정신이 드는지 간혹 눈물을 흘리었다. 친인들을 두고 떠나가기 싫어 흘리는 생이별의 피눈물이었다.   그럴 때면 경숙은 다가가 앉아 옥실의 손을 쥐여 흔들면서 “여보, 일어나오. 정신 차리오.” 하고 넉두리를 하듯 말했다.   어린 오누이 봉인과 명옥은 엄마의 한 팔씩 쥐어당기면서 “이차, 이차. 엄마, 일어나시오. 엄마~” 하고 울었다.   불쌍한 애들이 하는 모양을 보고 최구장 내외는 주글주글 주름살이 진 눈 확에 눈물이 글썽해 안질이 희미해졌다.   “엄마, 일어나, 응? 일어나!”   봉인은 엄마 손을 잡고 당기면서 울었다. 그러나 셈이 들지 못한 명옥은 엄마가 살아났다고 좋아 퐁퐁 뛰면서 놀았다.   옥실은 가쁜 숨을 몰아쉬기 시작했다.   관준을 청해 맥을 보이니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최구장을 조용히 한쪽구석에 불러다가 나직이 말했다.   “해지기 전까지 넘길 것 같지 못합니다. 빨리 후사를 준비하시오.”   그러자 최구장은 돌아서서 어깨를 들먹였고 경숙은 손으로 구들을 치면서 울었다. 그러나 숨이 지지 않은 옥실이 놀랄까봐 소리치지 못하고 흑흑흑 흐느껴 울었다.   모두 후사준비에 바삐 돌아쳤다.   바깥에 어둠의 장막이 내리 드리고 번개가 번쩍이더니 우뢰가 꽈르릉 꽝꽝 울렸다. 뒤이어 바깥에서 소낙비가 우르르 쏟아지는 소리, 추녀에서 장대 같은 비 물이 쏟아져 내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옥실은 모진 한숨을 길게 내쉬더니 숨을 조용히 거두었다. 볼품없이 팅팅 부은 얼굴과 손, 네댓 살 밖에 안 되는 오누이를 다 키우지도 못하고 저세상으로 떠나가는 옥실은 정말 천하에 둘도 없이 불쌍했다. 온집 식구들은 곡성을 높여 옥실의 사망에 애도를 드렸다. 다섯 살 밖에 안 되는 봉인은 엄마가 세상 떴다고 “엄마, 엄마!” 하고 구들에서 발버둥질 치면서 울었다.     그러나 연년생인 네 살짜리 명옥은 셈이 들지 못해 엄마가 세상뜬것도 몰랐다. 철부지 명옥은 이제 엄마가 저세상으로 가면 다시 되돌아오지 못 한다는 것도 모르고 장례 집에 몰려든 사람들이 많이 왔다고 좋다고 방구석에 세워놓은 조주머니에 올라갔다가는 뚝 뛰어내리면서 놀았다. 그것이 그의 한생에 얼마나 후회되는 일인지도 모르고 철부지처럼 외발로 뚝뚝 뛰면서 뛰놀았다.     그들 오누이는 네댓 살 난 어린 나이에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어머니, 세상에서 제일 사랑스러운 어머니를 여의였다. 어린 나이에 어머니가 없는 세상에서 갖은 시련과 굴욕, 천대, 시기를 다 겪어야만 했다. 그들 오누의 앞날은 어두운 장막이 뒤덮인 이 세상에서 더 참담하고 암흑하고 막막했다.     사흘 후 옥실의 장례를 치르게 됐다.   최구장의 제의대로 조상의 성산이 모셔져있는 성남의 양지바른 곳에 묘지를 썼다. 비록 먼저 떠나간 맏며느리였지만 14대 장손을    낳은 맏며느리기에 최구장의 아버님을 모신 성남 성안에 모셨던 것이다.    장례식 날에 경숙은 사랑하는 아내를 차마 비 물이 고이는 차가운 땅에, 무덤에 묻지 못해 떨리는 손으로 첫 삽을 떠 흙을 관 네 귀에 스르르 쏟아놓았다. 그의 줄 끊어진 구슬처럼 흐르는 눈물도 누런 흙과 함께 관위에 쏟아져 들어갔다. 옥실의 부모와 남동생 허성룡도 무두 흑흑 흐느껴 울었다. 처량한 통곡소리 남산둔덕을 메아리쳤다…   장례를 다 치르고 경숙이가 비틀비틀 집으로 돌아와 보니 봉인이 명옥의 손을 잡고 그때까지도 “엄마~ 엄마!” 하고 대성통곡 치고 있었다.    경숙은 어린 오누이가 불쌍해 한품에 끌어안고 꺼이꺼이 울었다.    “어미 없는 애들을 어찌 하오. 어, 허, 헉, 흐~으~흑, 흑. 어째 내게 이런 일이 생기오. 당신이 없이 어떻게 살라오? 이 오누이는 어찌 하라오? 으흐흑, 흑, 흑, 하늘도 무심하지. 아~ 하~”   최구장이 위방에서 나와 경숙의 어깨를 다독이면서  위로해주었다.   “어찌겠니? 갈 사람이 돼서 간 걸. 애들을 굳건히 잘 키워라.”   경숙은 주먹으로 가슴을 탕탕 치며 먹장구름이 뒤덮인 하늘을 쳐다보면서 쓰라린 눈물을 하염없이 흘렸다.  
33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12) 댓글:  조회:2319  추천:1  2015-08-13
                                6. 끼무라 국장        우시장 공포가 넘치는 경찰국 사무실.        끼무라 국장은눈깔을 부릅뜨고 책상을 탕탕 치면서 노발대발했다.        “ 빠가요로!!”      끼무라는 이발을 사려물고 야마모도의 낯빤대기를 찰싹찰싹 갈기며 욕설을 퍼부었다.     "하잇!"     “하잇!”      야마모도 소장은 이마와 팔을 허연 붕대로 감은 채 발뒤꿈치를 딱 붙이고 얻어맞으면서도 머리를 푹푹 숙였다.    한길수는 외눈깔로 영팔과 수길을 둘러보다가 머리를 숙였다.    끼무라 국장은 의자에서 일어나 왼손으로 군도자루를 잡고 거들먹거리면서 다가왔다.    “저목장이 다 불타버렸어. 통나무를 어디 가서 얻어다 경찰국 사무청사를 짓는단 말인가?! 한무리 밥통!”    끼무라 국장은 독기어린 눈길로 야마모도소장을 쏘아보면서 욕설을 퍼부었다.    “야마모도 소장은 왜 저목장 경비를 허술히 했어? 당장 림산파출소 소장을 철직한다. 대신 오늘부터 가메다 경관이 잠시 삼림경비를 책임지라!”    “하이!”    (이게 웬 떡이냐? 복이 넝쿨 채로 떨어졌잖아. 으흐흐, 흐흐) 털 한 모숨은  입이 함박만 해 끼무라 국장에게 군례를 척 붙였다.    끼무라 국장은 한길수를 내려다보면서 빈정거렸다.    “천하의 한길수도 이젠 늙었구먼. 병완에게 당해 외눈깔 신세로 되다니? 흥! 페물짝!”   한길수는 이를 뻑뻑 갈았다.    “우리 집에 불이 난건 분명 독립군과 사냥대 놈들이 한 짓입니다. 끼 국장님, 아니, 끼무라 국장님, 원수를 갚게 해주십시오.”    끼무라 국장은 오른손으로 한길수의 어깨를 다독여주었다.    “한 대장, 참 안 됐네. 자네에게 원수를 갚을 기회를 주겠네. 난 오늘 자네를 자위대 부대장으로부터 대장으로 승급시키겠네. 우리 헌병대를 도와 성칠이랑 사냥대 놈들을 몽땅 잡아오게나.”    끼무라 국장은 허리춤에서 권총을 쑥 뽑아 친히 한길수에게 내밀었다.    “총을 쏘는 방법은 류 통역이 배워 주게나.”    한길수는 어깨가 으쓱해서 연신 허리를 굽혔다.   “옛! 목숨을 바쳐 대일본제국을 위해 싸우겠습니다.”    끼무라 국장은 선심을 쓰는 척 했다.    “한대장, 자넨 이젠 영월동에서 발을 붙이기 힘들어. 아예 우시장에 이사해 사오. 조용한 골목에 기와집 서너 채를 마련해놓았네. 집 부근에 응삼과 영팔, 수길의 집도 마련해놓았어. 근심하지 말게.”    “감사합니다. 끼 국장, 아, 끼무라 국장님!”    한길수는 아예 마루에 넙적 꿇어 엎드리더니 끼무라의 발끝을 핥을 상을 하면서 연신 절까지 했다. 응삼과 영팔, 수길까지 한길수를 따라 마루에 꿇어 엎드려 절을 올렸다.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목숨 바쳐 천왕페하께 충성을 바치겠습구마."    “에헴.”   끼무라는 건 가래를 떼더니 두 손으로 한길수를 일으켜 세우면서 음충한 눈길로 외눈깔을 들여다보았다.    “당신 집에 쓰빠라씨이 무스메(예쁜 처녀애)를 데리구 왔지?”   한길수는 외눈깔로 힐끔 끼무라의 눈치를 훔쳐보았다.    "은녀란 계집애 말입니까? 데려 오구 말구요. 당장 가져다 바칩죠. 헤헤헤.”     “아주 예쁜 계집이야. 자네 집에 두고 살게나.”   한길수는 그제야 한숨을 후 내쉬었다.   (은녀를 빼가려는가 했더니, 괜히 놀랐구나.)   순간 한길수는 끼무라 국장이 아주 우러러보였다.   (정말 진심으로 모실 분이야.)   끼무라는 바로 이 순간을 위해 모든 것을 내려 놓은 것이다.   한길수는 끼무라 국장에게 계책을 올렸다.   “성칠의 동생 기준과 창준이란 놈들이 상우남면 운주동에 왔습니다. 성칠이란 놈은 꼭 운주동에 찾아 올겁니다. 그때 납작 나포하면 됩니다.”    제 딴에는 좋은 계책을 드렸는가 하였는데 끼무라 국장은 도리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이에(아니오). 이이에(아니오). 건 모르는 소리야.”   모두 의아한 눈길을 끼무라 국장에게 보냈다.   그때 끼무라 국장이 사무 상에 돌아가 의자에 앉더니 천천히 두툼한 입술을 뗐다.   “곰곰이 생각해 봤소까. 한대장이 눈을 잃었어. 저목장과 한길수 대장 집이 불타버렸네. 이 모든 게 뭘 말해주는가. 알고 보면 아주 간단해. 우직한 놈들을 핍박할수록 그 놈들은 반항한단 말이야?”   류강철은 옆에서 그 말을 마구 보태 통역하였다.   “조선 속담에 ‘막다른 골목에 이른 개가 담장을 뛰어넘는다.’고 하지 않았는가.”   일본 헌병대 놈들은 모두 머리를 끄덕였다. 여기저기서 수군거리면서 의논하다가 끼무라 국장의 칼날 같은 시선을 맞자 조용해졌다.    한참 자기 말을 터득하도록 침묵을 지키면서 부하들을 바라보던 끼무라 국장이 흡족한 표정을 지으면서 사무 상을 똑똑똑 두드렸다.    “보라고. 한 대장이 품삯을 주지 않는다고 병완은 한 대장의 눈알을 뽑아 놓았어. 병완을 가뒀다고 성칠 일당이 저목장을 불태웠고 한길수 집에 불을 질렀네. 분명 그 놈들이 반항한 거야.”    모두들 머리를 끄덕이면서 수군거렸다. 그러나 한길수만은 속이 앙알했다.    (종놈을 부려도 유분수지. 일본 경찰국 사무 청사를 지으면서 날 보고 삯전을 대라니. 그간 적잖게 사재를 털어 품삯을 줬건만 또 욕지거리군.)    정말 자위대 대장자리를 주었으니 그렇지. 한길수는 억울해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이때 끼무라 국장이 또 입을 열었다.    “난 병완을 풀어주고 공지 총 도감을 맡기겠네.”    “우와~”    모두들 뜻밖의 결정에 놀라 소스라쳤다.    한길수는 입이 함박만큼 딱 벌리고 우멍눈을 가슴츠레 뜬 채 끼무라를 의아한 눈길로 쳐다보았다.    수길과 영팔은 한길수의 불쾌해하는 우멍눈을 보고 입을 딱 다물었다.    한길수는 한참만에야 겨우 입을 열었다.     “아니, 그 놈을 풀어줘도 그런데. 총도감까지 맡기다니? 제 정신 있습둥? 우리를 뜨는 놈 말입니다. 놔주선 안됩구마. 안되구 말구. 그 말씀만은 거둡소.”    그러나 끼무라 국장은 이미 결단을 내렸다.    “이건 명령이야. 감히 거역해!”    그는 사무상을 꽝 쳤다.    끼무라는 군도자루를 힘있게 잡고 한길수를 쏘아보았다. 코밑 수염마저 푸들거렸다.    “하나 밖에 모르고 둘은 모르는 놈들. 이 명천과 우시장 바닥에서 병완을 모르고 사는가? 그 놈에게 필마옹 벼슬이라도 줘서 슬슬 얼려야 해. 그래야 경찰국 사무 청사가 여름이면 덩실하게 일떠설게 아닌가? 또 한 가지 있어. 병완을 내놓으면 성칠이랑 경계심이 허술해지면서 영월동이나 운주동에 찾아올게 아닌가? 이게 바로 그물을 널리 쳐서 큰 고기를 잡는 거야. 알만한가?”      그제야 한길수는 머리를 끄덕이었다.     그는 외눈깔이 뒤집힐 정도로 떼꾼해 끼무라를 쳐다보았다. 뒤이어 사무 상에 돌아가 앉는 끼무라를 뒤따라가면서 볼 부은 소리를 했다.    “그럼 난 뭘 하랍니까?” 하고     “자넨, 경찰국 사무 청사 공지일은 그만두고 이제 봄부터 닦을 큰 길 공지 총 도감을 맡게. 자넨 이젠 어깨가 무겁게 됐네. 총도감 보다도 자위대 대장을 잘하게나. 어느 놈이 대일본제국을 반대하면 그런 놈들을 몽땅 잡아드리게나. 우선 성칠 놈부터 한 달 내에 잡아오란 말이야.”    끼무라의 독기어린 음험한 눈길을 피하면서 한길수는 허리를 굽혔다.    “옛!”    한길수는 속으로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겉으로는 명령을 거역할 수 없었다.   끼무라는 가메다와 한길수를 쏘아보았다.    “감방에 가서 병완 영감을 데려오게!”    감방에서 갖은 고생을 다한 병완은 구레나룻이 더부룩했다. 한길수를 보자 그의 눈에 불티가 이글거렸다.    “죽이겠으면 단매에 쳐 죽일 거지. 작작 능욕해라.”    그러자 한길수는 외눈깔로 흘겨보면서 욕지거리를 해댔다.    “네 놈을 그리 쉽게 죽게 할 거 같니? 실컷 부려먹고 죽여도 늦지 않아!”    병완은 감방 문설주를 짚고 서서 물었다.    “도대체 어쩌자는 거냐?”     한길수는 휙 돌아서면서 볼 부은 소리를 했다.    “끼무라 국장에게 가보면 알 거다. 흥!”    병완은 한길수의 코 방귀 소리를 들으면서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이 놈들이 무슨 짓인들 못하겠느냐. 죽는 거 외에 다른 일이 더 있겠냐.)    병완이 가메다와 한길수를 따라 경찰국장 사무실로 갔다.    뜻밖에 끼무라 국장이 복도에까지 나와 기다리다가 반색을 하면서 마중할 줄이야.    “병완이, 감옥에서 얼마나 고생했겠는가. 어서 안으로 들게나.”    류강철의 통역을 듣고 병완은 자기 귀를 의심할 정도이었다.    병완은 코웃음쳤다.    끼무라는 의자를 손으로 가리키었다.    “병완이, 여기 앉게나.”    그는 병완의 옆에 나란히 앉았다.    병완이 둘러보니 이전과는 달리 심문할 헌병도 보이지 않고 가메다와 한길수 밖에 없었다.    “에헴, 병완이, 당신은 우시장의 천하장수네. 자네야 말로 우리 우시장의 이거야!”    끼무라는 두 손으로 주먹과 엄지를 병완의 앞에 쳐들어보였다.    그 말에 병완은 피씩 코웃음을 쳤다. 순간 한길수는 코 방귀를 뀌었다.    “길수, 이건 자네들의 격투에서 이미 결론이 났네.”   길수는 더는 참을 수 없었다.   “국장님, 전번에 내가 그만 골 박이를 한다는 게 나무옹이를 들이박아 상한게지. 결코 저 놈이 천하제일주먹이 돼서 그런 건 아닙니다.”    끼무라는 두 팔을 장의자에 걸치어 놓으면서 웃었다.    “에이, 사람이 옹졸하기로서니. 참,  자네가 날린 골박이를 살짝 피한다는 건 권투고수고서야 할 수 있는 재간이야.”    끼무라는 한길수를 내리깎고 병완을 잔뜩 춰 올렸다.    뒤이어 그는 병완이 쪽으로 몸을 반쯤 돌리면서 무겁게 입을 뗐다.    “병완이, 한 가지 상의할 일이 있네. 자네에게 품삯은 배로 줄 테니까. 우리 경찰국 사무 청사 짓는 공지의 총 도감을 맡게나. 부총 도감으로부터 총 도감으로 승급시킨 거네.”     끼무라 국장이 뒷말을 이었다.    “한길수 영감은 자위대 대장으로 승급시켰네. 김총도감은 올해 안으로 2층 경찰국 사무 청사를 지어주게나. 이전에 3층을 짓자고 했는데 무린 것 같아. 안전도 고려해야 해야겠고 저목장이 타버려서 목재도 당분간 그렇게 많이 마련할 것 같지 못하네. 올 겨울 전에 새 경찰국 사무청사에 드는 날엔 자네에게 자위대 부대장쯤 시킬 예산이네. 어떤가?”     갑자기 들이닥친 뜻밖의 제안에 병완은 어리둥절해졌다.    한참 후 병완은 볼 부은 소리로 말했다.    “총도감을 할 수 없소. 전번에 숱한 마을 사람들을 불러 왔다가 괜히 삯전도 주지 못해서 죄송해 죽겠소. 이젠 마을 사람들이 내 말을 듣지도 않을 게요.”    끼무라 국장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이전에 한총도감을 보고 삯전을 주라고 했는데 주지 못해 미안하네. 이번엔 꼭 줄 테야. 근심하지 말고 총 도감을 맡게나.”    한참이나 궁리하던 병완이 무거운 입을 뗐다.    “군자 협의를 하깁소. 경찰국에서 책임지고 날마다 삯전을 딱딱 결산해 준다는 계약서를 쓰오. 삯전을 주지 않으면 인부들은 집에 돌아가서 농사를 지을 수 있다고.”      끼무라 국장은 의자에서 일어나 사무 상으로 돌아가 의자에 앉아 병완을 곁눈질하면서 한참이나 궁리하다가 쇠 덩이 같은 침묵을 깨뜨렸다.    “계약서를 쓰지. 허나 날마다 삯전을 준다는 건 시끄러운 일이네. 달마다 삯전을 한 번씩 결산해 주기로 하게나. 난 한길수 영감과 자네를 우시장에서 내 두 팔로 생각하네. 잘 하면 일본 대제국은 당신들에게 최고무상의 권력과 부유를 줄 것이요. 어서 인부들을 빨리 되불러 오오. 눈이 녹기 전에 목재를 베 오고 봄이 돌아오면 토목공사를 시작하잔 말이요.”     끼무라는 병완이가 제기한 품삯 계약서를 쓱쓱 써서 병완에게 주었다. 분명 끼무라의 친필 계약서에는 우시장 경찰국장 끼무라의 이름이 씌어 있었고 경찰국 도장과 끼무라의 손지장도 찍혀 있었다.     병완은 계약서를 둬번이나 찬찬히 들여다본 후에야 머리를 끄덕이었다.     “계약을 꼭 지키오. 그러잖으면 이후에 콩으로 메주를 쓴다고 해도 인부들은 말을 듣지 않으니까.”    병완은 뜻밖에도 선선히 대답하는 것이었다. 끼무라와 길수는 그 이상할 만치 선선한 대답에 자기들의 귀를 의심할 정도였다.    (권세욕과 탐욕 앞에선 누구나 용빼는 수가 없지.)    끼무라는 득의양양해 미리 준비한 동전을 몇 십 개를 책상 우에 달랑 꺼내놓았다.    “병완 총도감, 이전에 일한 삯전이네. 당신이 먹고 나머지를 나눠주면서 공지에 불러오게나.”   병완은 자기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양이 쥐 생각하는군.)   병완은 동전을 거들떠도 보지 않으면서 투정질을 했다.   “고까짓 걸로 턱도 안 되우.”   끼무라 국장은 옹졸한 마음을 드러냈다.    “그만해도 대단하지. 저목장이 다 타버려 목재 하나도 건지지 못하였는데 삯전은 무슨 삯전. 흥! 삯전을 주지 않아도 인부들을 붙잡아 일을 시킬 수 있어!”    “총 도감을 못 하겠소. 이담에도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삯전을 주지 않으면 우린 어데 가서 말한단 말이요?”    끼무라는 안 되겠는지 서랍에서 또 동전을 한줌 쥐여 내놓았다.    “먼저 가져가져다 나눠 주게나. 이후엔 꼭 줄 테니 근심하지 말게. 지금 경찰국에도 독립군을 방비할 무기를 들여오고 자위대를 묶어세우느라고 돈이 판 부족이란 말이요. 대일본 제국을 위해 잠시 경제난을 함께 극복합세.”     한길수는 끼무라 국장이 자기보다 병완을 더 대단히 여기는데 여간 불쾌하지 않았다.     (내 눈을 상했다고 감히 페물짝 취급해? 이젠 병완을 진짜 중용할 속심인가? 일본 놈들은 개새끼야. 믿지 못할 개새끼들이야.)    길수는 질투심이 나서 두덜거렸다.    “삯전만 저렇게 척척 내놓으면 나도 총 도감을 잘 할 수 있습구마. 흥! 젠장, 인부들이 반항을 해 볼만 하구나.”    그 소리에 병완은 쓴 웃음을 지었다. 류강철은 그 두덜거리는 소리만은 통역해주지 않았다.    그러나 교활한 끼무라는 한길수의 속을 꿰뚫어 볼대로 보았기에 그 두덜거리는 소리가 대개 무슨 뜻이란 걸 알아듣고도 남음이 있었다.    이렇든 저렇든 병완은 삯전 주머니를 들고 경찰국 문을 나섰다.    그는 삯전주머니를 든 손을 부르르 떨었다. 밸 같으면 쥐어 던지고 가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품삯 한 푼도 받지 못하고 쌀 고생을 할 마을 사람들을 생각하자 밸을 눅잦히고 마을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이젠 봄이 다가오려나. 눈보라가 휘몰아치는데도 날씨는 그리 춥지 않았다. 아마 병완은 마을 사람들에게 적으나마 삯전을 줄 수 있어 그랬던지 추운 줄도 모르고 씨엉씨엉 걸었다.     병완은 가슴 속에서 일루의 희망이 신기루처럼 솟아오로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그것이 안개 속에서 꿈틀거리는 유혹이건만, 일시나마 마을 사람들에게 밀린 삯전을 조금이라도 나눠 줄 수 있어 생기는 기쁨이리라.    그의 가슴 속에서는 총도감을 하는 편리를 리용해 경찰국 사무청사를 무너뜨리려는 교묘한 계획이 무르익고 있었다.                       7. 성동격서    병완은 쌩쌩 휘몰아치는 눈보라를 무릅쓰고 온 오전 걸어서야 운주동에 이르렀다.    병완이 집에 들어서자 기준의 부부는 기뻐 어쩔 줄 몰라 했다.     “아이고, 아버님, 돌아왔습둥?”     “ 시아버님, 그새 감방에서 얼마나 고생했겠습둥?”    기준 부부는 병완을 위방에 모시고 넙적 절을 올렸다.    그때 고방에서 성희와 하옥이 나왔다.    “이게 웬 일이요? 어떻게 돼 여기 있소?”    성희가 허리를 펴면서  대답했다.    “그간 무사했어요? 일본 놈들의 등살에 견디지 못해 하는 거 보고 둘째아들이 데려왔어요.”     “음, 그러나 저러나 넷째손자를 안아보자."    최사련은 갓 난지 반년도 되지 않는 상순을 고방에서 안아 내오고 저녁 준비하러 부엌으로 내려갔다.    “어이유, 이 놈, 딱 제 애비를 닮았구나. 얼굴이 길쭉한 게 참 잘 생겼구나. 아~그, 딱.”    병완은 손자가 고와서 안아보고 싶었지만 금방 바깥에서 들어온 찬 몸에 닿아 감기에 걸릴 까봐 그저 들여다보기만 했다.    한참 후 몸이 녹은 후 병완은 넷째손자 상순을 안고 볼에 뽀뽀를 했다.    상우는 웃새 집으로 기별하러 달려갔다.    그새 병완은 성희에게서 성칠과 집식구들이 그새 일본 놈들에게 당한 봉변을 대충 들었다.    “성칠은 검둥이 귀에다 쪽지를 보내 왔더군요. 뭐 고향 마을 사람들과 함께 사냥을 하면서 무사하다고 하지 않았겠어요.”    “사냥해도 범죄라고 잡아가니까요. 이젠 어떻게 살아요? 호-”    병완도 천정을 쳐다보면서 천정이 날아나게 한숨을 후- 내쉬었다.    이때 기별을 받은 창준 부부가 자손들을 데리고 들어와 일일이 인사를 나누었다.    병완은 벽에 기대 앉으면서 기준이 말아주는 담배를 입에 물었다.    “일본 놈들은 정말 교활한 놈들이야. 나를 이용해 경찰국 사무 청사를 짓자는 게지. 눈깔이 뽑힌 길수가 쓸모없게 됐다고 여긴 것도 있고.”    직통배기 기준이가 툭 내쏘았다.    “누가 그 놈들의 둥지를 지어준다오?”    병완은 창준이가 부시를 쳐서 부쳐주는 담배를 한껏 빨아 연기를 후~ 길게 내뿜더니 말했다.    “그 놈들이 삯전을 준다 해도 짓지 않겠니?”   기준은 울뚝 밸을 썼다.   “그 놈들 얼림 수에 들 거 같소? 쳇, 목을 매 끌어가도 공지에 가지 않겠소.”    병완은 그저 마른기침을 하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저녁을 대충 들고 밤이 깊어 창준이랑 떠나간 후 병완은 기준만 불러 조용히 위방에서 귀속말을 했다.    “면회하러 왔을 때 이전에 내가 말한 말이 기억나니?”    기준은 한참 궁리하더니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나무옹이와 벌레 말씀입둥?”    “응.”    “예, 벌레 있는 통나무로 경찰국 사무 청사를 지으면 몇 해 가지 못해 무너지고 말겁니다. 중심대들보에 쐐기를 하나 박아주든지.”    병완은 머리를 끄덕였다.    “그래, 일본 놈들이 곱다고 사무 청사를 지어주겠느냐? 그 놈들은 사무 청사를 다 짓기 전까지 마을 사람들을 들볶을 게 아니냐? 성칠은 분명 진달래사돈이랑 영솔하는 독립군과 연계있는 거야. 성칠처럼 총을 들고 맞서 싸우는 것도 좋아. 또 일본 놈을 도와 사무 청사를 지어주는 척 하면서 무너지게 만드는 것도 상책이 아니겠느냐? 으흠.”    밤이 깊도록 위방에서는 두런두런 주고받는 말소리가 가담가담 들리었다. 그러나 누구도 그들 부자가 무슨 말을 주고받는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위방에서 등잔불까지 끄고 병완은 셋째아들 기준에게 귀속 말을 계속 했다.    “가을 쯤에 경찰국을 다 짓는 날엔 네가 먼저 만주에 가 봐라. 감방에서 수감자들에게서 들었는데 만주에는 묵밭도 많고 기장밥에 장국을 먹으면서 잘 살수 있다더라. 지나가는 나그네에게도 찰밥에 장국을 대접시킨다고 하더라.”    “나도 우시장이나 명천 장마당에서 그런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활 팽개치고 몽땅 만주에 가서 살깁소.”    안주인들은 그 소리에 숨이 한 줌만 해졌다.    “나도 감방에서 그렇게 생각했다. 한길수의 눈알을 뽑아놓아서 일본 놈들은 나를 눈에 든 가시처럼 여겨. 총 도감을 시킨 건 날 이용해 사무 청사를 지으려는데 지나지 않아. 경찰국 사무 청사를 다 지으면 그 놈들은 나를 죽일지도 모른다. 게다가 성칠이 독립군과 연계 있다고 잡아 죽이자고 미쳐 날뛰고 있지 않느냐. 이 고향에서 살긴 다 틀렸어. 후— 이 일을 어쩜 좋겠느냐?”     “알았습구마. 내 이미 나무벌레를 자귀질하면서 가득 붙들어서 치워 놓았습구마.”    “잘 했다. 밤도 깊었으니 가서 자라. 내일부터 다시 마을 사람들을 동원해 공지로 가자. 벌레를 대들보에 넣는 건 우리 부자간이 비밀리에 하자.”    “예. 알았습니다. 편안히 쉽소.”    미닫이문이 쓰르륵 쓰르륵 닫는 소리가 들리면서 기준이가 고방으로 들어갔다.    빼앗긴 들에도 봄이 왔다. 여기저기 잔설들이 남아있었지만 자연스레 계절이 바뀌면서 찾아온 따뜻한 봄기운을 어찌 할 수 없었다. 여기저기 산에서 종달새가 “지종”, “지종” 애처롭게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우시장 경찰국 사무 청사 공지는 사면에서 일본 헌병들과 자위대 놈들이 총칼을 빼들고 삼엄하게 지키는 바람에 자못 삼엄한 분위기 속에 잠겨있었다. 공지 뒤쪽 산꼭대기 망루에서 철갑모와 털모자를 쓴 일본 헌병들과 자위대 대원들이 서슬 푸른 총칼을 들고 왔다 갔다 하며 보초를 서고 있었고 산중턱 벽돌로 쌓은 보루에 기관총까지 걸어놓고 독립군의 습격을 막으려고 시도했다. 삼엄한 경계를 밟으며 숱한 인부들이 개미떼처럼 바글거리면서 일하고 있었다.    병완이 삯전을 가져다 마을 사람들에게 나눠 준데다 사냥하면 일본 놈들이 잡아 가두는 바람에 숱한 마을 사람들이 공지로 다시 몰려왔던 것이다.    일을 다시 시작한 후 끼무라 국장은 직접 공지를 자주 드나들면서 살폈다.    이른 아침인데 저 둔덕 아래서 오토바이 몇대가 먼지를 보얗게 일구면서 부릉부릉 달려왔다.    끼무라 국장이 통역 류강철과 한길수 대장 그리고 몇몇 졸개들을 데리고 오토바이 몇 대에 갈라 앉아 달려왔다.     오토바이에서 내리자 끼무라 국장은 군도자루를 왼손으로 잡고 독기어린 눈으로 주위를 쓱 둘러보더니 곧추 병완 등이 한창 지붕틀을 짜는 목수 간 앞으로 다가왔다.    병완은 쐐기를 박을 구멍을 파다가 멈추고 끼무라 국장에게 눈인사를 했다.    끼무라 국장은 다가와 흰 장갑까지 벗고 병완에게 손을 내밀었다.   “김 총도감, 수고 많네. 보라니깐. 내가 사람 보는 눈만은 있지. 당신이 총 도감을 맡으니까 인부들이 모여들고 일이 척척 돼가지 않는가! 허허허.”    끼무라 국장은 넉가래 같은 병완의 손을 잡아 흔들면서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옆에서 류강철이 통역하자 뒤따라온 길수는 입에 다발을 세 개나 걸 지경으로 불만스러워 했다.   (쳇, 병완을 믿다가 이제 한지에 방아를 걸지 않나 두고 봐라.)   그런데 끼무라 국장은 계속 병완과 지껄여댔다. “김총도감이 경찰국 사무 청사를 짓느라고 수고 많은데 우시장에 기와집 한 채를 마련해 줄까? 여기 우시장에 와서 살 생각은 없는가?”     병완은 짐짓 미소까지 지으면서 대답했다.    “끼무라 국장, 호의는 감사합구마. 난 시골 눔이 돼 영월동 시골이 좋단 말입구마.”   “허허허.”   끼무라 국장은 너털웃음을 웃더니 머리를 길수 쪽으로 되돌렸다.   “김총도감은 한대장과는 판판 달랐쏘까. 한대장은 시내에 오니 기생집이 가까워 입이 함박만 해졌는데.  자넨 진짜 땅을 밟고 하늘을 떠인 사내대장부야. 호한은 여색을 멀리 하는 법이야. 허허허.”    한길수는 눈을 흘기면서 두덜거렸다.    “흥, 녀자라면 오금을 못쓰다가두. 검정개 돼지 흉을 한다고 해라?  ”   끼무라는 그 두덜거리는 소리가 무슨 뜻인지 알아들을 리 만무했다.   뒤이어 그는 코 수염을 손으로 쓱 문질렀다.    “올해 가을에 새 경찰국 사무 청사에 들게 해주게나. 늦어도 명년 봄 안에는 새집들이를 하게 말이네.”    류강철이 통역하자 그때라고 생각한 병완은 끼무라 국장을 마주 보면서 시원히 대답했다.   “끼무라 국장, 경찰국 사무 청사는 올 가을 전에 다 끝낼 테니까. 근심하지 마오. 그런데 한 가지 청 들 일이 있소.”    류강철이 통역해주자 끼무라 국장은 “요로씨이(좋아). 무슨 요구?” 하고 한걸음 다가섰다.    병완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기준과 창준을 비롯한 여러 목수들이 대패질과 자귀질을 하는 것을 둘러보고 나서 끼무라의 오른팔을 잡고 한쪽으로 가서 조용히 말했다.    “내 맏아들 성칠을 풀어 줍소. 그 애가 사냥을 한 것뿐인데 독립군으로 몰아 죽일 셈입니까?”    “뭐? 성칠이?!”    끼무라 국장의 눈이 갑자기 떼꾼해졌다.    “안 돼! 그 놈을 잡으러 갔다가 우리 헌병대원들이 수태 죽었쏘다. 성칠이, 독립군과 이거네.”   끼무라는 엄지와 식지를 붙였다 뗐다 해 보였다.    “그 앤 아무 죄도 없습구마. 독립군인지 뭔지 아직도 모르고 이날 이때까지 살아왔단 말이요. 그날 독립군이 왔는지 어쨌는지 모르지만 그 애와 아무런 상관이 없소이다.”    “안 돼! 성칠만은 안 된단 말이야!”    한길수는 깨 고소해하는 눈길로 병완을 쏘아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밸 같아선 병완을 개화장으로 단매에 쳐눕히고 싶었다. 그러나 끼무라 앞인지라 용 빼는 수 없어 속을 끙끙 앓았다.   병완은 그 눈치를 모를 리 없었다. 그러나 그는 끼무라한테 다가서면서 기를 쓰고 성칠을 구하려고 청을 들었다.    “끼 국장님, 내가 어쩌다가 청을 드는데 요만한 것도 안 되오? 내 맏아들을 용서해줍소. 예?”   그러나 끼무라는 딱 잡아뗐다.   “안 돼! 그 놈을 생각하면 자네도 용서할 수 없어. 조선에는 한 놈이 역적의 죄를 지으면 구족을 멸한다는 말이 있잖은가! 성칠이 그 놈이 지은 죄는 절대 용서할 수 없어. 자넨 우리 경찰국 사무 청사를 짓는데 없어서는 안 될 목수이고 총 도감이기에 용서해 준거니까 그만하게. 괜히 내 생각이 바뀌게 하지 말게나.”    병완은 안 되겠다 싶어 한숨을 땅이 꺼지게 후— 내쉬었다.   한길수는 멀찍이 서서 우멍 눈을 가슴츠레 뜨고 끼무라 국장과 병완이가 쑤군거리는 것을 아니꼽게 곁눈질해보았다.   뒤이어 한길수는 영팔의 팔을 잡고 한쪽으로 가서 쑤군거렸다.    “영팔이, 저 병완에게 딱 붙어 다니면서 지붕틀을 제대로 짜나 감시하게나. 좋기는 한사람을 목수무리 속에 잠입시켜 암암리에 감시하게 해라.”    그러자 영팔은 머리를 끄덕였다.    한길수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병완의 꼬리를 잡아 내동댕이치고 싶었다. 그래야만이 일본군 속에서 자기 권위를 수호할 것만 같았다. 병완이 끼무라 국장의 신임을 얻는다면 자기 자리를 빼앗길 것만 같은 위기감이 들었던 것이다.     목수 간에서는 병완과 기준, 창준을 비롯해 목수 일여덟이 부지런히 지붕틀을 짜고 있었다. 그때 영팔은 그들 사이로 왔다 갔다 하면서 힐끔힐끔 감시하고 있었다.     요즘 낯선 목수 하나 목수간에 들어왔는데 꽤나 까다로웠다. 병완이가 시키는 일은 하지 않고 힐끔힐끔 병완만 살피는 눈치 같았다.     병완은 그자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기준과 창준에게 눈짓했다.    한참 일하고 나서 병완은 뒷간으로 가는 척 하면서 기준에게 뒤쪽을 머리짓 했다.     병완은 뒷간에 가서 대변을 보는 척 하면서  조용히 귀속 말을 했다.     “아무래도 새로 온 목수란 자가 한길수 끄나불인 거 같아. 운주동 사람도 아니고, 신흥동이나 가마골 사람도 아니잖니? 어떻게 하나 그 놈들의 눈을 피해 나무벌레를 지붕틀 중심에 넣어야겠는데. 그 놈이 걸리는구나.”    기준은 머리를 끄덕였다.    한참 후 기준이 수를 내놓았다.    “아버지, 내 그 놈 끄나불과 걸고들어 싸우면서 그 놈들의 눈길을 돌리는 틈에 손을 쓰면 어떻습둥?”    “오, 그게 참 묘수구나.”     그들 부자는 영팔의 의심을 살까 봐 인차 뒷간에서 나왔다. 그런데 뜻밖에도 영팔이 벽 밑에서 이쪽을 흘끔거리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저 놈이 저게!”    기준은 주먹을 으스러지게 틀어쥐었다.    병완은 기준의 팔소매를 슬쩍 쥐어 당기며 말리였다.     그들이 목수 간으로 들어가는데 영팔이 뒤에서 불평스레 투덜거렸다.     “변소간에 한시에 둘씩이나 가다니. 흥! 그러구서야 언제 경찰국을 다 짓겠는가?”    새로 온 목수가 또 힐끔거리면서 그들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때라고 기준은 그 자한테로 다가갔다.    “당신은 어디서 왔소?”   그 목수는 힐끔 병완을 쳐다본 후 눈을 내리깔면서 대충 대답했다.   “웅진에서 왔소."   "오- 그래? 어째 웅진에서 본적이 없는데."    그 자는 허구픈 웃음을 지었다.    "웅진에서 이 백승만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소.”    “어데서 듣던 이름인데.”    병완이 피뜩 보니 웬 곱사등이였다.    순간 병완은 기준과 눈길을 마주쳤다.    쉼에 병완은 기준과 창준을 불러 바깥에 나갔다.    “승만이란 자는  웅진 길 어귀 도둑놈이야. 이전에 성칠에게 혼난 적이 있어."    기준은 양미간을 찌푸리면서 “저 놈이 어떻게 돼 여기까지 왔을까?” 하고 의문스러워 했다.    창준은 수재답게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추측했다.    “분명 한길수가 끌어들인 밀정입니다. 우리를 힐끔힐끔 감시하고 있잖습둥?”     “한길수는 도둑놈들이나 강도패거리들을 다 끌어들여 일본 놈의 개를 만들고 있어.”    병완은 기준과 창준에게 뭐라고 귀띔해주었다.    다음 쉼에 기준이가 한창 지붕틀에 구멍을 뺄 때였다.    승만이가 대충 자귀질하는 척 하면서 기준을 힐끔힐끔 곁눈질했다.    그러자 기준이가 끌을 쥔 채 고함쳤다.     “네 놈은 어데서 굴러온 놈인데 일은 하지 않고 눈깔만 힐끔거려?”    “뭐라고?”    “네가 감히 대들 테냐?”    기준은 두 마디 안짝에 그 자의 멱살을 거머쥐고 주먹으로 눈통을 쳤다. 곱사등이 승만은 눈 통을 싸쥐고 오만상을 찡그리다가 마구 주먹질을 해댔다.    그가 어찌 기준의 상대가 되겠는가!    기준이 승만에게 한발 안기자 저쪽 기초구덩이에 뿌리어나가 보기 좋게 나부라졌다.    둘이 맞붙어 싸우자 숱한 목수들이 그리로 욱 쓸어갔다. 영팔과 수길은 승만과 합세하려고 그쪽으로 뛰어갔다. 그들 둘은 말리척하면서 기준의 양팔을 붙잡았지만 기준의 발길질은 멈추지 않았다. 결과 승만은 낯이 쥐마당이 되게 얻어맞았다.     순간 병완과 창준은 톱밥 속에 감춰 둔 나무벌레를 파냈다. 기준이가 영팔까지 쳐 눕힐 때 그들 둘은 지붕틀의 중간 구멍마다에 나무벌레를 걷어 넣고 애교를 바른 쐐기까지 슬쩍 박아 넣었다.    이때 한길수는 자위대원과 헌병 대여섯을 데리고 달려왔다. 병완과 창준은 그 놈들이 밀고 닥치면서 싸움을 말리는 것을 곁눈질해보면서 또 대여섯 개 지붕틀 중간에 벌레를 집어넣고 쐐기를 박아 넣었다. 실로 눈 깜짝 할 새에 일을 끝냈다.    병완과 기준, 창준은 며칠 전에 미리 벌레가 있는 원목을 슬 슬 톱질해 노란 나무벌레를 나오는 족족 영팔이 패거리들의 눈을 피해 슬슬 집어 톱밥 속에 감춰 두었던 것이다.     애교를 바른 쐐기는 한식경 지나자 딱 들어붙어서 다시 뽑자고 하여도 뽑을 수 없게 굳어져 버렸다. 그때쯤 되어 기준이 쪽의 싸움질도 여럿이 뜯어 말리는 바람에 끝나갔다.    기준은 병완이 네가 지붕틀에서 손을 떼는 눈치를 채고 주먹의 먼지를 탁탁 털며 을러멨다.    “이 놈새끼, 일하지 않았다간 죽여 버리겠다.”     백승만은 눈통이 닭 알만큼 부어올라 참말 꼴불견이었다.    목수들이나 인부들은 속이 시원해 했다.    “개자식, 눈깔을 힐끔거리면서 우릴 살피더니 쌍 통 했다. 히히.”    “눈깔이 터졌으니 이젠 밑구멍으로 우릴 살핀다니? 흥.”    “허허허.”    “하하하.”    “저 놈이 우시장 천하장수 병완도 몰라본 모양이지?”    “글쎄 말이야. 하룻 강아지 범 무서운 줄도 모른다더니 명천 울뚝이도 모르구 덤벼? 쳇!”    “그러게 말이야.”    병완은 인부들이 주고받는 말을 들으면서 창준과 기준을 바라보더니 만족한 듯이 머리를 끄덕이며 씨무룩이 웃었다.    한길수도 끼무라 국장의 부탁이 있는지라 기준을 어쩌지 못하고 외눈깔로 쏘아볼 뿐이었다.    끼무라는 도리어 기준의 어깨를 툭툭 치면서 책망인지 치하인지 분간하지 못할 말을 했다.    “자식, 꽤나 주먹질을 잘하던데. 쳇, 자네 부자간은 사람을 치면 눈 통부터 잘 치는구먼. 그 애비에 그 아들놈이야.”     “하하하”    끼무라가 뭐라고 지껄이는 걸 알아듣지 못한 기준은 주먹을 으스러지게 쥐고 부르르 떨며 부릅뜬 눈으로 영팔과 곱사등이 승만을 쏘아보았다.     (개놈새끼들, 몽땅 외눈깔을 만들어놓고 말리라. 퉤!)    기준은 더러워서 영팔이 쪽에 가래를 탁 뱉고 나서 씩씩 거렸다. 영팔은 옆구리에 찬 권총집에 손을 댔다 뗐다 하면서 단방에 기준을 쏴 죽이지 못하는 것을 한스러워 했다. 그러나 끼무라의 눈치를 슬슬 보면서 끝내 손을 쓰지 못했다 .      병완이 눈짓하자 기준은 지붕틀을 돌아보더니 목수 간 쪽으로 휭 하니 가버렸다.    저쪽에서 뻐꾹새가 처량하게 울고 있었다.    뻐꾹-    뻐꾹-           8. 힘장사 삼형제     일제의 쇠발굽 아래에서 신음하는 땅에도 봄은 찾아와 겨우내 모진 추위를 이겨낸 풀싹들이 파릇파릇 움텄다.     경찰국 사무청사 공지에서 인부들은 기둥을 세울 원목을 목도로 메여 날라 왔다. 그때 한 아름이나 되는 원목은 누구도 목도를 하려고 나설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때 키가 훤칠하고 어깨가 떡 벌어진 한 중년사나이가 나섰다.     “원삼아, 우리 삼형제 메자.”     “양, 형님.”     모두 어깨가 떡 벌어진 사내들이였다.     “기준아, 우리도 함께 메자.”    그때 병완도 기준을 불렀다.     원삼이라는 사내대장부가 웃통을 벗어버리고 용이 꿈틀거리는 것 같이 울뚝불뚝한 팔로 한 아름이나 되는 원목 한쪽머리를 건뜻 쳐들었다.     “와- 천하에 둘도 없는 힘장사로구나.”     모두들 저도 몰래 감탄했다.     병완과 기준, 창준이 장대기로 들린 원목 대가리를 떠받쳤다. 그러자 나머지 사내들이 목도를 틈 사이에 제꺽 들이밀어 넣었다. 뒤이어 그들 여섯이 세 곳에서 그 한 아름이나 되는 원목을 목도를 해 기초돌 쪽으로 “허기영차” “허기영차” 절주 맞게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메여갔다.     그들은 한번도 허리 쉼을 하지 않고 “허기영차” “허기영차” 단숨에 메여갔다.     장사들의 모습에 끼무라마저 입을 딱 벌렸다.    원삼이라는 사나이가 목도채를 내려놓으면서  병완에게 물었다.    “우리 알고 지내깁소. 들을나니 총도감은 영월동에서 왔다던데 혹시 성칠 힘장사의 아버지가 아닙둥?”    병완은 그들과 일일이 악수하면서 물었다.    “맞소. 당신들은 어데서 왔소?”    원삼은 병완의 손을 굳게 잡아 흔들면서 일일이 소개했다.    “우린 경성군 주을 면에서 온 삼형젭니다.”    그는 나이 제일 많은 사나이를 가리키면서 “이분은 내 큰형님 리춘삼입니다.” 하고 이쪽 키 좀 작은 사나이를 가리켰다.    “이분은 둘째형 리인삼입니다. 난 셋째 리원삼이고 막내 무삼은 집에 있습니다.”    병완은 그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눈 후 창준과 기준을 불러 일일이 인사시켰다.    병완은 원삼의 삼형제를 둘러보면서 인사말을 했다.    “이전에 성칠이 사냥하러 갔다가 신세 진 얘기를 합데. 성칠의 은인들을 이렇게 만날 줄은 정말 몰랐소. 우리 생사고락을 함께 하기요.”     원삼은 사람 좋게 웃었다.     “호한은 천하를 자기 집으로 생각한다는데 고만한 거야 뭐.”     병완은 “사람이 어려울 때 밥 한술이라도 도와 준 게 잊어지지 않지.” 하고 말했다.    원삼은 병완과 함께 원목 위에 나란히 앉아 궁금한 것을 물었다.    “성칠 형님은 어째 공지에 나오지 않았습니까?”    그러자 병완은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더니 성칠에게 그간 있은 일을 죽 이야기했다.    이때 끼무라 국장이 군도자루를 잡고 이쪽으로 다가왔다.    “아니, 원목 한 개를 메 오고 한식경이나 앉아 쉬는가? 언제 사무 청사를 다 짓겠는가?”    “에이유, 저 놈들이 보기 싫어서 어디 살겠소?”    원삼은 엉덩이를 툭툭 털고 일어나면서 어깨를 들썩거리며 저목장 쪽으로 떠나갔다.    끼무라 국장은 한길수를 데리고 와서 인부들을 쉴 새도 없이 공지에 마구 내몰았다.     끼무라는 인부들의 밭이 묵어가고 농사가 망가지는 것은 뒷전이고 경찰국 사무청사 건축에만 신경을 쓰면서 날마다 밤낮 숱한 헌병들을 파견해 공지를 지키게 해놓고서도 시름이 놓이지 않아 공지에 나와 직접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차질이 없는가를 살폈다.    “총 도감, 가을 전에 사무 청사를 다 지을 수 있소?”    병완은 한발 나서면서  대답했다.    “가을이면 새 청사에 들도록 하겠습니다. 이젠 지붕틀까지 다 짜 놓아서 너무 근심할 필요 없습구마.”      끼무라 국장은 머리를 끄덕이고 나서 코 수염을 슬슬 어루만지었다.    끼무라 눈치를 슬슬 살펴보던 병완은 슬쩍 이런 말을 꺼냈다.    “이젠 목수들의 일만 남았소다. 농번기에 인부들을 더러 집으로 돌려보내 밭갈이도 하게 돌려보내도 됩니다.”    끼무라 국장은 병완에게 낯을 돌리면서 “그래도 되겠는가?” 하고 물었다.    “예.”   그때 한길수가 외눈깔을 부라리면서 꽥 소리쳤다.    “관둬. 어떻게 데려온 인부들인데 돌려보내?!”   병완은 자기 얼굴에 대고 삿대질하는 한길수의 손을 탁 쳐버리면서 맞고함을 쳤다.    “인부들을 내 데려왔지. 네가 데려왔냐?!”    “가마골 인부들은 나와 영팔이 억지로 끌어온 거야.”    병완은 한길수의 외눈깔통에 대고 손가락질하면서 고함쳤다.    “그럼 가마골의 인부들만 여기에 남기고. 나머지 인부들은 집에 보내면 돼.”    한길수는 외눈깔을 무섭게 부릅떴다.    “그래, 네 아들놈부터 집에 보내 농사짓게 해라. 안 그래도 네놈들 삼부자가 눈에 거슬린다.”    병완은 한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았다.   “공지 총도감은 내야. 니 가라면 가구 가지 말라면 가지 않을 거 같은가?”    옆에서 류강철의 통역을 들은 끼무라 국장이 하얀 장갑을 낀 손을 흔들며 말리였다.    “에이, 됐네, 됐어. 분공대로 공지 일은 병완 총도감이 하라는 대로 하게. 한 대장은 공지보호만 잘하면 돼. 병완 총도감, 조용히 할 말이 있네.”    한길수는 병완을 흘겨보고는 영팔이랑 데리고 저쪽으로 휭- 하니 가버렸다.    끼무라 국장은 기둥을 세울 기초 돌을 둘러보면서 병완에게 물었다.    “총도감, 이젠 기둥을 세우고 지붕틀을 올려야 되겠구먼.”    병완은 솔직하게 말했다.   “예, 그래야 합지. 지붕틀을 올리려면 기준이나 원삼이네 사형제 같은 힘장사들만 남기고 나머지 웅진에서 온 약골 백승만이랑 쓸데 없습니다. 품삯이 아깝지 않습둥?”    끼무라 국장은 머리를 끄덕였다.    “그것도 그렇군. 그러나 백승만이만은 여기에 남겨둬야 하겠네. 저 사람은 웅진 부근의 한다하는 우두머리네.”    (우리 짐작이 맞았구나. 승만 놈은 확실히 끼무라 놈이 박아놓은 밀정이야. 개놈새끼.)    병완은 끼무라를 뒤따라 뚜벅뚜벅 걸으면서 말했다.    “그런데 난 일본식으로 지은 적이 없어 근심됩구마. 아마 조선식으로 지어야 할 것 같습구마.”    “어험, 거 말인가?”    끼무라는 병완을 힐끔 곁눈질해 보더니 너스레를 떨었다.    “건 이 땅에 우리 대일본 제국의 자존심을 세우려는 거네. 꼭 일본식으로 지어야네.”   (개놈들, 내 고향에 뭐 네 놈들의 자존심을 세워? 흥, 내 그 놈의 자존심을 개 좆대가리 부러지듯 꺽어놓아야지.)    병완은 일본식 경찰국 사무 청사를 짓는데 파악이 없어 기초 돌에 앉아 왼손으로 머리를 붙안고 고민했다.    기준은 옆에 와 털썩 주저앉으면서 귀속 말을 두런두런 했다.    “아버지, 잘 됐습구마. 오래 견디는 조선식 방틀 집을 지을게 있습둥? 일본식으로 아무래나 져 놓고 가버립시다. 쾅 무너졌으면 속이 시원하겠습구마. 흥!”     병완은 주위를 두루 살펴본 후 기준에게 머리를 돌렸다.    “아냐. 우리 만주로 떠나가기 전까지는 이놈 청사가 서 있어야 돼.”     기준은 긴 한숨을 후- 내쉬었다.    한참 후 기준은 흙을 한줌 쥐여 줴뿌리면서 말했다.    “일본식이든 조선식이든 간에 무슨 관계있습둥? 저놈들이 지으라는 대로 아무래나 꽝 무너지게 지어놓고 가깁소.”    병완은 기준의 훤한 이마를 마주 보더니 머리를 끄덕였다.    이때 끼무라가 군도자루를 잡고 웬 얄팍하게 생긴 자를 데리고 이쪽으로 다가왔다.    그 바람에 병완은 기준에게 일어나 가라고 고개 짓을 했다.    “에헴, 총도감 수고하네. 이젠 근심하지 않아도 되겠소.”    그는 몸을 돌려 뒤따라온 말라꽹이를 돌아보더니 뒤 말을 이었다.    “자, 소개해주지. 일본식 건축 설계사오.”   병완이 인사하자 그 자는 손을 내밀었다. 병완은 억지로 손을 내밀었다가 말라꽹이의 차가운 손이 싫어 인차 놓아버렸다.    끼무라 국장은 그자를 보고 가방 안에서 커다란 종이 한 장 꺼내놓게 했다.     “이보게, 이건 경찰국 사무청사 설계도요. 이대로 지으면 되오.”     보아하니 2층으로 된 집이였다.     “끼 국장님, 난 이제껏 단층집을 지었지 2층짜리 집을 지은 적이 없습니다.”    류강철이 통역하자 끼무라는 도리머리 질 했다.    “당신은 그저 이대로 지으면 되오. 설계사는 총 도감에게 설계도를 설명해주게나.”    일본 설계사는 반나절이나 구조에 대해 설명하고 짓는 방법까지 일일이 알려주었다.     이튿날부터 병완은 기준이네 형제와 원삼이네 사형제를 불렀다.     “우리 여기서 만난 것두 운명인 것 같소. 우리 의형제로 지내는 게 어떻소?”      병완의 말에 원삼은 천근 무게도 들듯이 힘줄이 불뚝불뚝한 팔을 휘휘 저으면서 병완을 따라 성큼성큼 걸었다.     “좋습구마. 성칠 장사의 아버지는 우리 윗벌이니까 양아버지처럼 모시고 우리 사형제와 성칠 형님, 그리고 기준형님과 의형제로 보내깁소.”     병완은 믿음에 차 원삼의 어깨를 툭툭 쳤다.     원삼은 병완을 바라보며 말했다.     “총도감을 처음 봤을 때 힘깨나 쓰니까. 혹시 성칠 양반의 아버지가 아닌가 했습구마.”    병완은 원삼의 시원시원한 성격이 마음에 들어 어깨를 툭툭 쳤다.    "자네들은 무슨 리씬가? 혹시 리씨왕조 전주 리씨 아닌가?"    “아니, 우린 공주 리씹구마."    "그래? 공주 리씨들은 무두 힘깨나 쓴다더니 정말이구먼. 어떻게 돼 이 먼데까지 인부로 왔소?”    그 물음에 원삼은 황소숨을 몰아쉬었다.    “별수 있습둥? 산골에서 사냥이나 하구 살았는데 일본 사람들은 이젠 사냥도 하지 못한다꾸마. 게다가 지주는 소작료를 8할씩이나 받아먹지. 그런 소작농사두 밭이 있어야 해먹지. 일본사람들이 밭에다 적송을 심으랍꾸마. 이젠 뭘 먹고 삽둥? 그런데 저 승만이란 놈이 우리 고향까지 와서 삯전을 푼푼히 준다면서 인부를 모집하지 않겠습둥.”     “음, 어디나 다 한가지구먼.”    병완은 속으로 승만이 정말 일본 놈을 단단히 등에 업은 밀정 놈이라는 것을 새삼스레 느꼈다.    어느날, 경찰국 사무 청사 기틀이 선 것을 보자 끼무라 국장은 기뻐서 입이 함박만큼 벌어졌다. 그는 원삼이네 3형제한테 엄지를 내둘렀다.     한길수는 끼무라 국장을 보고 두덜거렸다.     “쳇, 끼 국장님께선 그래 정말 병완 놈을 나보다도 더 믿구 중용하겠니까? 그것도 모자라서 원삼까지 넘보는 겁니까? 그 놈들은 속에 비수를 품은 자들입니다요.”     끼무라는 코 수염을 어루만지면서 간사한 웃음 띤 눈길로 한길수를 쏘아보았다.      “한 대장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몰라. 그래 병완을 믿는다고 봐? 흥, 이 놈아, 저 놈들이 경찰국 사무 청사만 다 지으면 후환을 없애야겠다. 저 놈은 이 지방을 쥐락펴락할 놈이야. 성칠을 붙잡는 날이면 일거에 저 악당들을 몽땅 처단해버려야지. 내버려둬선 절대 안 돼. 우리 대일본제국이 이 지방에 뿌리를 박는데 큰 후환거리로 될 거야.”      그제야 한길수는 실눈을 지은 외눈깔에 배시시 웃음기가 새어났다.     온 몸에 힘을 얻은 한길수는 피 눈이 돼 병완의 꼬리를 밟으려고 미쳐 날뛰었다.     어느 날 이른 아침, 한길수는 영팔을 데리고 갓 세워놓은 기둥들과 가름대로 갓 얹어놓은 대들보를 일일이 검사했다.       그때로부터 또 두 달이 지났다. 경찰국 사무청사가 일떠섰다. 1층은 조선식 방틀집이고 2층은 일본식 판자집으로 돼 진짜 짜구배 집 같았다.         무더운 여름이 가고 서늘한 가을에 갓 들어섰다. 우시장과 명천을 둘러선 치마봉과 기운봉에 울긋불긋 단풍이 들었다.   경찰국 사무 청사는 보기에는 그럴듯했다. 건뜻 쳐들린 추녀, 아름드리 기둥과 대들보, 초대형지붕틀…     끼무라 국장은 2층으로 된 새 경찰국 사무 청사를 보면서 입이 함박만 해졌다. 그는 군도자루를 잡고 나까노라 헌병소대장과 림산파출소 소장에 갓 복직시킨 야마모도소장, 야마다 면장, 헌병 분대장 가메다, 그리고 조선 졸개들인 자위대장 한길수, 자위대 중대장 영팔과 수길, 경찰 허꺽쇠, 똘만 등을 거느리고 새 경찰국 사무 청사에 들어갔다. 서른 간도 넘는 경찰국 사무 청사를 일일이 돌아본 끼무라 국장 일행은 2층에 올라 우시장시내를 내려다보다 멀리 보이는 울긋불긋 단풍이 들기 시작한 남산을 쳐다보더니 만족한 웃음을 지었다.     한길수는 이 경사로운 새집들이잔치에 끼무라 국장이 병완과 삼부자와 원삼 삼형제를 부르지 않은 것을 보고 깨고소했다.     (그럼 그렇겠지. 아무렴 우리 끼무라 국장님이 저 놈들을 더 믿어? 어림도 없지. 흐흐흐.)    끼무라는 2층 난간에 뚱뚱한 배를 대고 옆에 선 한길수를 돌아보면서 말했다.    “병완이를 우시장으로부터 회령까지 통하는 길닦이공지 우시장 구역 총 도감으로 내몰게나.”    그 말에 한길수는 외눈깔이 뒤로 번져 질 지경이었다.    “또 총도감입둥?”    끼무라 국장은 눈귀로 한길수를 내리 흘겨보면서 중얼거렸다.    “그래, 아직 성칠을 잡지 못하였네. 알만한가?”    “예~ 허허허. 그물을 넓게 쳐서 큰 고기를 잡아야죠. 거 참 묘한 수입니다. 또 하마터면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를 번했습니다.”    한길수는 우멍한 외눈깔을 데굴거리면서 손으로 뒷덜미를 긁적거렸다.    병완은 진작 끼무라 국장 놈의 속심을 빤히 들여다 본데다가 일본 놈들의 믿음 따위나 칭찬 따위를 바라지 않았으므로 별로 개의치 않았다. 다만 한 달 채 주지 않은 인부들의 삯전이 근심스러웠고 개 코처럼 우뚝 솟은 경찰국 사무 청사가 계획대로 나무벌레들에게 무너지지 않을까봐 손바닥에 땀을 그러쥐고 근심할 뿐이었다.     이때 한길수가 2층에서 내려오더니 외눈깔에 득의양양한 빛을 띤 채 다가왔다.    “병완이, 내일부터 인부들을 데리고 길닦이에 나가게나. 끼 국장께서 자넬 길닦이 총 도감으로 중용한다네. 참, 좋겠다. 에헴.”     그러자 병완은 침을 탁 뱉었다.     “가서 전하게나. 한 달 삯전을 빨리 내달라고. 삯전을 주기 전엔 길닦이에 나가지 않겠네.”    “닥쳐!”    끼무라 국장이 군도자루를 잡고 2층에서 내려와 인부들 앞에 오더니 군도를 쓱 뽑아들고 돼지 멱따는 소리로 고함쳤다.     “대일본 제국의 길을 닦으라는데 무슨 삯전소릴?! 누가 감이 안 나가?! 몽땅 죽여치우겠다!”    병완 삼부자와 원삼 삼형제는 끼무라 국장이 빼든 서슬 푸른 군도를 쏘아보면서 주먹을 으스러지게 틀어쥐고 부르르 떨었다.    여기저기에서 땅이 꺼질 듯 한숨소리가 났다.    퍼렇게 딩딩한 가을하늘이 둥근 천정처럼 이 땅덩어리를 칭칭 둘러 감았다. 산기슭에 자리 잡은 공지의 가을하늘은 넓었지만 끼무라의 서슬 푸른 군도아래 찜통 속처럼 숨이 막힐 듯이 좁고 갑갑했다.     을씨년스럽게 불어오는 가을바람에 낙엽이 우수수 떨어졌다. 멀리 바라보이는 산 봉오리들은 변덕스러운 조화를 부리는 비구름 속에 숨박꼭질을 하듯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사라졌다가는 다시 나타나군 했다. 길닦이에 끌려 나갈 원삼 삼형제를 비롯한 인부들은 머리를 숙이고 투덜거리면서 긴 한숨만 내쉴 뿐이었다.     (고향 산골에 심어 놓은 감자가 멧돼지들이 다 파먹겠는데 어쩌는가? 길닦이에 발목을 잡혀서. 원 일본 놈들의 성화에 어떻게 살아가겠는가?)    원삼은 어둑어둑해지는 저 멀리 동북쪽의 고향 쪽의 검푸른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에서 날아지나가는 기러기 떼들의 애처로운 울음소리가 쓸쓸하게 들리어왔다. 마치 기러기들도 인부들의 가긍한 신세를 동정이나 하는 듯이 구슬프게 울면서 줄지어 날아 지나갔다.       저자의 말:        이제까지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 제1권을 마지막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부터는 제2권을 실어드리도록 약속하겠습니다. 기대하세요. 감사합니다.                              
32    장편과학환상소설 황천의 유령(7) 댓글:  조회:2458  추천:6  2015-07-30
                               제23장 하늘땅이 진노        클론바우 18세와 19세가 지하왕궁에 불을 지르고 바깥에 나왔을 때었어요.        하늘땅이 진노하기 시작했어요. 얼기설기 금이 실린 뱀 섬나라 지진대에서 화산이 폭발했어요. 세인들의 눈을 피해 얼기설기 금이 실린 지진대에서 암암리에 핵실험을 한 뱀 섬나라에 보응하기 시작했어요.        우르릉 꽝! 꽝! 우레 같은 폭음과 함께 뱀 섬나라 수십 개 활화산이 거의 동시에 폭발했어요. 시꺼먼 화염과 함께 불 뱀들이 하늘로 치솟아 올랐어요.         우르릉 꽝! 꽝! 꽝꽝!        버섯구름이 치솟아 오르고 화산재가 수백 키로 미터 밖에까지 날아가 떨어졌어요. 화산 기슭 갱도에 숨겨 놓은 원자탄이 화산 폭발에 진동을 받아 폭파됐던 것이죠. 무서운 방사선이 째듯이 비추면서 지상만물이 불타버리었어요. 아니, 용광로 화가마 같은 땅덩어리 위의 건물이 마구 녹아 내렸어요. 뒤이어 덮쳐오는 강풍의 충격에 폐허 같은 앙상한 콘크리트 건물들이 싹쓸이를 당했어요.        아니, 저건 뭐예요?        글쎄 뱀 섬나라 땅덩어리가 쿵 꺼져 들어가기 시작했어요. 왕궁과 지하벙커가 먼저 푹 꺼져 들어갔어요. 몇 십 길이나 되는 검푸른 해일이 덮쳐오더니 왕궁을 삼켜버렸어요. 미녀들이 꽃밭을 이루던 왕궁 금룡마루가 쿵 무너지었어요. 금빛 금 기둥과 벌건 나무기둥도 줄줄이 무너지면서 야자나무를 깔고 넘어 갔어요. 군국주의 더러운 혼이 묻힌 야스쿠니신사의 더러운 피를 발라놓은 벌건 기둥이 거센 파도에 밀려 둥둥 떠서 망망한 바닷물에 떠돌아다니어 꼴불견이었어요. “철퇴!” 클론바우 18세는 각종 동물 인으로 구성된 연합군에 철군명령을 내리었어요. 그는 조왕돌 대통령 일가를 둘러보고 말했어요. “삼촌, 우리 아마존 열대우림으로 갑시다. 코치아는 이젠 핵 방사능 오염으로 살 수 없게 됐소.” 옆에 있던 아들이 괴물 꼬마대통령의 파초 같은 귀에 코끼리 코를 가져다 대고 그들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코끼리 말로 나직이 두덜거리었어요. “저 자는 임해와 동족상잔을 했는가 하면 자기 고모마저 체포해 감옥에 가뒀습니다. 육친도 모르는 자를 데려갔다가 괜히 아버지와 대통령 자리다툼을 하면 어쩌자고 그럽니까?” 괴물 꼬마대통령도 아들의 귀에 코끼리 코를 대고 코끼리 말을 했어요. “닥쳐라! 조왕돌 외삼촌은 전선에 나온 금붕어 고모를 압송하는 척 하면서 안전한 후방에 피신시켰던 거야.” 그때 생물학자 금붕어만이 그 말을 알아듣고 웃으면서 말했어요. “맞아. 조왕돌은 고모도 모르는 독재자가 아니야.” 그들이 주고받는 말은 알아듣지 못했지만요. 조왕돌은 제꺽 눈치 챘어요. “위대한 클론바우 대통령이여, 근심하지 말라. 우린 코치아에 돌아가 하루속히 방사능오염을 제거하고 식수조림하면서 사랑의 오아시스를 재건할 거야.” 말을 마치자 조왕돌과 금붕어는 일가족과 코치아의 원숭이 인과 복제 조왕돌 부대를 거느리고 귀국 길에 올랐어요. 클론바우 18세는 머리를 끄덕이더니 클론바우 가족을 거느리고 하늘로 날아오르면서 원폭에 피폭된 뱀 섬나라 대지를 굽어보았어요. 뱀 섬나라 산골짜기와 온 들판에는 자외선을 맞아 쓰러진 시체와 해골이 너저분히 널려 있어 진짜 인간 생지옥이라고 할까요? 골고다나 황천의 무덤이라고 할까요? 하늘 어디에서인가 이런 말이 들릴지 말지 간간히 울렸어요. 태초에 만물이 빛으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그가 없이는 지은 것이 하나도 된 것이 없어요.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을 따뜻이 비추는 빛이지요. 악마들이 조물주를 노엽혀 하늘의 빛이 잘 못되는 날이면 지상 악마와 만물의 목숨을 거둬 갈 것이죠.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군요. 참 빛이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치는 빛이 있었어요. 그가 세상에 계셔서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 했지요 … 진리를 쫓는 자는 빛으로 오는 것이죠. 태양이 너무 강렬한 빛을 뿌리면 지구촌이 불바다로 되고 태양열이 식으면 지구촌이 얼어붙어 모든 생물이 살기 힘들게 되지요. 때문에 인간들이 인위적으로 태양을 노엽히지 말아야 하지요. 중국 고대신화에 예가 화살로 대지를 불태우는 아홉 개나 되는 태양을 쏘아 떨어뜨렸다고 해요. 상고시기에 뱀 섬나라에는 아마테라스오미카미라가 있었어요. 그는 이 나라의 이세신궁에 모셔진 황족의 조상으로도 알려졌어요. 그의 어머니 이자나기노미코도는 왼쪽 눈으로 그녀를 낳았고 오른쪽 눈에서는 강력한 힘을 가진 귀공자 쓰쿠요미노미코토와 스사노오노미코토를 낳았지요. 그런데 아마테라스오미카미와 스사노오미코토 오누이는 각각 자신이 가진 것을 교환해 입에 넣고 잘게 씹어서 뱉어내 존귀한 사람들을 수태 낳았다고 해요. 그런데 스사노오노미코토가 시녀를 죽이는 난폭한 짓을 하자 아마테라스오미카미는 항의하면서 “하늘의 바위굴”이라 불리는 동굴 속에 들어가 나오지 않았지요. 태양신으로 불린 그녀가 숨어버리자 세상은 암흑으로 뒤덮이고 얼어붙기 시작했지요. 그같이 태양이 없으면 살기 어렵지요. 괴물 크론바우 18세 꼬마대통령은 사자머리를 끄덕이더니 아들에게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었어요. "옛날 지구촌은 여러 차례 망했다고 전해지고 있어. 상고시기에 아메리카에는 태양신이 다섯 개나 있었지. 흙 태양신, 바람의 태양신, 비의 태양신, 물의 태양신, 동(动) 태양신이 윤번으로 몇 백 년씩 세상을 통치했다고 해…" 흙의 태양 시대에는 암흑천지여서 먹을 것이 없어 사나운 재규어 무리가 나타나 거인들을 잡아먹는 바람에 세상이 멸망했다고 해요. 바람의 태양 시대에는 강풍에 사람들이 날아갔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원숭이로 돼 겨우 생존했다고 했어요. 비의 태양 시대에는 하늘에서 불비를 내려 세상은 멸망하고 말았다고 해요. 불비는 아마 화산 폭발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돼요. 물의 태양 시대에는 52년 동안이나 줄 비가 내려 아마존 열대우림이 물바다로 돼버려 모든 것이 떠내려갔고 하늘도 무너져 버렸다고 해요. 그때 육지의 큰물이 빠지면서 지구촌에서 제일 큰 강인 아마존 강이 생겼다고 해요. 그때 지상의 동물들이 살길을 잃었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물고기처럼 물속에 들어가 고기를 잡아먹으면서 아주 간고하게 연명했다고 해요. "에이고, 옛날 태양신의 이야기 아닌가요?" "그래. 비록 옛날이야기지만 곰곰이 명심해야 한다. 하늘과 땅, 바람과 비, 물 등이 인류의 생존에 아주 중요한 작용을 한다. 때문에 그것들을 잘 모시지 않고 노엽히는 날엔 하늘땅이 진노해 인류는 살 길이 없게 된다는 철리가 깃들어 있는 거야." "예- 이제야 뭔가 좀 알리는 거 같습니다." 클론바우 18세는 아들과 말을 마치자 클론바우 가족과 호랑이, 사자, 멧돼지 그리고 지하벙커에서 살아남은 얼마 안 되는 정상인들을 이끌고 자외선 방지 우산을 쓰고 북극주로 대이동을 했어요. 동(动) 태양신의 가르침을 받아 대이동을 한 것이죠. 괴물 꼬마대통령은 깊은 고민에 빠졌어요. (그래, 해 빛을 받아 만물이 생겼고 또 그 빛을 모르면 살지 못하였다. 허나 빛을 잘 못 이용하면 지구촌의 생태환경을 해치고 나아가 인류자체의 무덤을 스스로 파는 것이 아니겠는가? 할아버지가 오존층에 구멍을 낸 건 나를 도운 게 아니야. 아니, 인류를 해치는 용서하지 못할 죄를 지었어. 이제 지구촌에서 못 살게 된 인간들이 우리 조손삼대를 뭐라고 욕하겠어? 아버지가 유리 할머니의 말을 듣고 천여 년 전에 오존층을 구멍 내 지구를 통일했는데 할아버지마저 또 그 수를 쓰지 않았는가? 비록 악마들을 징벌했지만 인류에게는 또다시 천벌을 맞을 죄를 지었어.) 클론바우 18세는 코끼리 코를 죽 늘어뜨린 채 죄책감에 사자머리를 숙이었어요. (수풀처럼 일떠선 공장과 핵발전소, 사람들이 살기는 편안하고 좋을 거야. 그러나 지구에는 위협으로 밖에 될 수 없지 않는가? 금이 얼기설기 간 지진대 화산 밑에 뱀 섬나라 악마들이 핵실험을 끊임없이 해 지구에서 화산폭발이 끊이지 않고 지진과 해일이 인류가 생존할 서식지를 위협하고 있지 않는가? 인간의 끊임없는 무절제한 욕심은 스스로 자기 무덤을 파고 있다. 지구촌에 해 빛과 산소가 많은 공기, 물, 땅이 없으면 만물이 살지 못할 것이 아닌가? 또 에너지와 식물, 동물이 없어진다면 사람들이 뭘 먹고 어떻게 생존한단 말인가?…) 클론바우 18세는 망가져가는 지구촌 대지를 바라보면서 고함쳤어요. “지구촌에서 제일 독종은 버새 형제 악마야. 인류야 말로 지구촌의 생태환경을 파괴하고 동식물의 서식지를 여지없이 망가뜨린 범죄자다. 인류가 무절제한 욕심을 버려야 지구촌의 생태환경을 보호하고 동식물의 보금자리를 보호할 수 있어!” 지구촌에서 상대적으로 오존층이 덜 파괴된 남극주는 그래도 잠시나마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어요. 지구온난화로 북극의 빙산과 눈도 거의 녹아 태평양의 수위가 엄청 올라갔어요. 끊임없는 핵전쟁으로 지진과 화산 폭발이 자주 일어나 얼기설기 금이 실린 지구촌의 해변 가 땅이 꺼지면서 아카시아 뉴욕과 뱀 섬나라 소꼬, 코치아반도의 후산 등 인적이 없는 유령 대도시가 바닷물에 잠기고 말았던 것이죠. “어허허, 이게 오존층을 파괴해 얻은 자유 왕국이로구나. 이제부터 우린 여기서 평안하게 살게 됐구나.” 클론바우 18세는 민심과 군심이 혼란해질까 봐 두려워 될수록 사자 얼굴에 억지로 웃음을 지으면서 낙관적인 말을 했어요. “이젠 이 지구촌의 황금과 은덩이, 미녀들이 다 우리 것이야. 허허허, 우리 이 푸른 언덕에 황금과 은덩이로 집을 짓고 바다의 물고기를 잡아먹으면서 잘 살아보자.” 허나 지구촌은 정상인들이 방독 면구를 쓰지 않으면 자외선과 방사선을 막을 수 없어 살지 못할 무덤으로 되었어요. 무더운 여름에도 겨우 목숨을 건진 클론바우 계열 인들과 호랑이와 사자, 멧돼지, 원숭이 무거운 방독 면구와 육중한 방독 옷을 입고 미역이라도 건져 먹고 살려고 바다로 나가면 불편한 건 둘째이고 숨 쉬기조차 힘들었어요. 몇몇 고기잡이에 능한 어부들을 보고 방독 면구를 쓰고 물고기를 잡아 오려고 했어요. 허나 시꺼먼 원유가 둥둥 뜬 바다는 진작 사막화로 됐고 죽고 썩어서 둥둥 떠다니는 물고기 시체 밖에 없었어요. 빈손으로 돌아온 어부들은 괴물 앞에 머리를 툭 떨어뜨리었어요. 방독 옷을 벗으니 땀이 한 초롱씩이나 쏟아져 도랑물처럼 좔좔 흘렀어요. "에이구, 물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하면서 오히려 더워서 우리가 먼저 물고기 밥이 되겠어." 어부들은 두덜거리면서 방독 면구를 벗어 쥐고 머리를 겨우 들었어요. “대통령님, 바다에는 물고기 꼬리도 보이지 않습니다. 이젠 뭘 먹고 삽니까?” 괴물 꼬마대통령은 사발 눈을 부라리다가 될수록 온화한 눈길을 보내려고 모질음을 쓰려고 간신히 매 부리 입을 뗐어요. “빈손으로 돌아온 그대들의 잘 못이 아니야. 모두 내가 부덕하고 무지한 탓이야. 뱀 섬나라 악마를 제거하려고 왼 심을 쓰다나니 할아버지가 오존층을 파괴하리라는 걸 제때에 간파하지 못했어.” “아니야, 건 내 손자가 한 짓이 아니야!” 이때 어디에 사라졌던 클론바우 16세가 나타났어요. 그는 긴 코끼리 코를 휘두르며 고함쳤어요. “내가 뱀 섬나라와 노르망디를 정복한 통일된 지구촌을 손자에게 넘겨주려고 오존층을 파괴했어!” 클론바우 18세는 할아버지를 정말 죽여치우고 싶어 사발 눈에 불길이 이글거리었어요. 허나 수하들 앞에서 불효한 짓을 할 수 없어 경호원들을 보고 할아버지를 체포해 북극의 감옥에 가두게 했어요. “인류에 죽을죄를 진 자는 누구든 용서하지 못해!” 뒤이어 괴물 꼬마대통령은 어부들을 보고 억지로 웃으며 신신당부했어요. “우린 이제부터 펭귄이라도 잡아먹으면서 오존층 회복에 주력해야 해.” “펭귄을 잡으면 우리나라 동물보호법을 어긴 것이 아닙니까?” 사발 눈을 부라리는 괴물을 보자 어부는 황급히 머리를 숙이면서 입에 빗장을 질렀어요. 그제야 어부들은 서로 쳐다보더니 방독 면구를 눌러쓰고 펭귄을 잡아먹으러 뛰어 나갔어요. 그런데 어부들은 고래마자 마구 잡았어요. “안 돼! 고래는 내 아빠 클론바우 17세를 낳은 친 어머니야!” 허나 굶어 당장 죽게 된 어부들은 그 소리를 듣지도 않고 계속 고래를 잡아 큰 어선에 끌고 돌아왔어요. 클론바우 18세의 혼자 힘으로는 굶주린 이리 같이 날뛰는 사람들을 말리는 재간이 없었어요. 그는 황금빛으로 번쩍번쩍 하는 황금 집을 짓고 은 사발에 은 저를 쓰면서 살아도 지상낙원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딱 황천에 빠진 듯 했어요. 괴물 꼬마대통령은 어쩐지 아마존 열대우림에서 추장처럼 살기보다 못한 감이 느껴졌어요. 문제는 먹을 게 없는데다 수하들이 방독 면구와 자외선방지 옷이 없어 자외선에 피폭이 돼 날마다 무리로 죽어가고 있었어요. 이젠 수하가 몇이 없어서 원시부족의 추장보다도 못했던 것이었어요. 설상가상으로 오존층이 파괴되면서 제트기류가 마구 남하해 여름인지 겨울인지 분간하기 힘들게 만들어버렸어요. 원래 제트기류는 북극의 찬 기류를 끌어안고 있었어요. 허나 지구온난화로 해 제트기류가 통제를 잃어 엄동설한 같이 찬 기류가 마구 남쪽으로 남하해 범람하기 시작했어요. 솜옷도 미처 입지 못한 맥도 총사령관은 글쎄 으리으리한 황금 아파트에서 그만 얼어 죽고 말지 않았겠어요. 숱한 장병들이 미사일과 총을 부여안은 채 얼음조각상으로 변해 버렸어요. 호랑이 왕 카시마는 잡아먹을 사슴과 줄 말이 없는 남극주를 떠나 사슴 떼들이 줄지어 달리는 아마존 열대우림을 그려보면서 폐허로 된 아마존 유역으로 돌아가는 길에 굶어 죽고 말았어요. 그래도 호랑이는 죽어서도 가죽이라도 남기는 것을 잊지 않았어요. 사자 왕 비컨은 너무 배고파 해변 가에 너럭바위 위에 앉아 풀을 뜯어먹는 꽃사슴무리가 호수가를 헤엄쳐 건너가던 옛날 아마존 열대우림을 눈앞에 그리다가 굶어 두 눈을 스르르 감더니 영영 뜨지 못하고 말았어요. 고기잡이를 나갔던 어부들은 방독 면구를 쓰고 자외선 방지 옷을 입었건만 장시간 자외선과 방사선에 노출된 손이 벌건 멍이 든 것처럼 팅팅 부어오르다가 물퉁이 생기더니 나중에 썩어 떨어져 나갔어요. 방사능과 자외선에 피폭된 지구촌의 사람들은 피부암에 걸려 통증에 고생하다가 살이 뭉텅뭉텅 썩어나가 해골만 남게 됐어요. 풀 한포기 찾아 볼 수 없는 북극의 산골짝과 들판, 앙상한 마른 나뭇가지만 남은 이른바 아마존 열대우림에는 방사선과 자외선의 직사에 목숨을 잃은 원혼이 둥둥 떠다녔어요. 염라 전에 바쳐진 제물처럼 돼버린 해골들이 눈구멍이 펑 뚫린 채 원망스레 구멍이 뚫린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어요.       허나 대자연은 이상했어요. 지구상의 인간을 비롯한 수많은 생령들이 해골이 돼 유령으로 떠다녀도 북극의 하늘에는 마치 축복이라도 하는듯이 파랗고 바알갛고 노란 오로라가  춤 추면서 눈부시게 빛발쳐 황홀경을 이루었어요.       그 광경에 괴물 꼬마대통령을 비롯한 사람들은 너무나도 허무해 진짜 미치겠네요.       제24장 황천   우성 대통령은 코치아의 방사능오염이 심한데다가 자기 충고를 듣지 않고 코치아를 망쳐 먹은 조왕돌을 보기도 싫어 처자를 데리고 폐허로 된 임해 후산에서 돛배에 올랐어요. 그는 이 세상에서 제일 착한 왕은 그래도 뱀 섬나라 뱀 왕이라고 생각했던 것이죠. (괴물 클론바우 가족은 우리 지구촌의 하늘에 구멍을 낸 악마들이야. 조왕돌은 양심적인 과학자로부터 독재자로 돼 버리었어. 물론 뱀의 여자 시우코아틀은 인간에게 로동의 고통을 안겨 줘서 악귀의 여신으로 평가받았지. 하지만 못 생기고 독해 보이는 냉혈동물인 뱀 인이야 말로 사람의 낯가죽을 쓴 사악한 인간들보다 썩 착해.) 그들이 뱀 섬나라 화산 동굴과 가까운 암초언덕 아래에 이르렀을 때었어요. 갑자기 먹장구름이 하늘을 사납게 뒤덮더니 세찬 폭풍우가 불어치면서 물결을 감때사납게 일으키면서 아우성을 치었어요. 저쪽에서 검푸른 용이 덮쳐오듯 집채 같은 파도를 용두로 해일이 사납게 덮쳐왔어요. 각일각 높아지는 사나운 파도는 배를 키질 하듯 들었다 놓았다 하면서 뒤흔들었어요. 오존층이 파괴돼 우성과 하루꼬, 연체기형아 아들은 숫구멍을 직사하는 자위선이 두려워 무거운 방독면구와 방독 옷을 입고 섬나라를 향한 돛배에 올랐어요. 그런데 몸은 하나이지만 머리와 윗몸이 둘인 연체기형아가 입을 특제방독 옷이 없었어요. 울며 겨자 먹기로 연체기형아는 한쪽 머리와 윗몸에만 방독 옷을 입어야만 했어요. 그들은 배 위에서 몸을 가눌 수 없어 이리 비틀 저리 비틀 했어요. 쏴- 사나운 파도에 배가 하늘 공중에 건뜻 쳐들렸다가 허망 전복됐어요. 그들 세 식구는 사나운 파도에 휘말려 자취를 감추었어요. 웬 일일까요? 사납게 기승을 부리던 집채 같은 파도가 양쪽에 바람벽처럼 얼어붙어 세찬 강풍을 막아 주는 것이 아니겠어요. 순간 용트림을 하던 바다 물이 잠잠해졌어요. 우성 부자는 살얼음이 가기 시작한 바다 물에서 기어 나오려고 안간힘을 다 썼어요. 이때 바다 밑에서 난데없는 온천이 솟구치면서 살얼음을 녹이면서 그들을 포근히 감싸주지 않겠어요. 그들이 물 위에 허우적거리며 되 솟아나와 암초를 부여잡으면서 나가려고 할 때었어요. 갑자기 제트기류가 남하하면서 한파가 기습해 왔어요. 암초 언덕에는 해골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어요. 설상가상으로 이제껏 부글부글 끓을 듯 더워나던 바닷물이 이상기후로 하여 느닷없이 들이닥친 한파에 꽁꽁 얼어붙지 않겠어요. 아열대 지역인 동해가 얼어붙기는 지구가 생겨나서 처음 있은 일이었어요. 그들 일가 셋은 살얼음이 진 바닷물에 빠져 지푸라기라도 잡으려고 허우적거리었어요. 허나 살얼음은 기어오르는 그들의 몸을 받쳐주지 못하고 풍풍 꺼지기만 했어요. 소식을 듣고 뱀 왕은 뱀 인들을 둘러보면서 “어서 구세주 우성 대통령을 구하라!” 하고 명령했어요. 몇몇 뱀 인들이 황급히 굴 밖으로 기어나갔어요. 허나 숱한 뱀 인들은 멍해 서는 것이 아니겠어요. 그중 한 뱀 인이 두덜거리었어요. “먹을 게 없는데 우성인지 무성인지 개뼈다귀를 하나라도 구해서 뭐 하는지? 원.” "입이 하나 불면 뭘 먹어?" “뭐라고?” 뱀 왕은 사발 눈으로 쏘아보면서 말했어요. “나까 왕족은 우리 뱀 섬나라와 인류에 해만 주는 악종이야. 우린 뱀 섬나라 왕족의 씨를 갈아야 해. 우성 대통령이야 말로 우리 구세주로 될 분이야. 그는 코치아와 뱀 섬나라 평화를 위해 힘써온 분이야.” “연체기형아 아들이 어떻게 뱀 섬나라 왕위를 계승해요? 그런 자를 왕으로 모셨다가 우리나라 망하겠습니다.” “그러게. 우린 뱀 왕이 제일 좋구먼.” “잔소릴 작작 하고 어서 우성 부자를 구하러 가지 못할까?” 그제야 나머지 뱀 인들은 마지못해 우르르 굴 밖으로 기어나갔어요. 먼저 헤어간 뱀 인이 우성 대통령과 아내 하루꼬 그리고 연체기형아 아들을 얼음구멍에서 건뜻 들어 얼룩덜룩한 잔등에 태웠어요. 뱀 왕은 손수 뭍에서 주은 마른 뱀의 껍질을 주어다가 우성 대통령의 몸을 감싸 주었어요. “이 놈 날씨가 대통령을 얼어 죽이겠습니다.” 늙은 우성 대통령은 뱀의 껍질을 들쓰고 우들우들 떨며 해골이 널려 있는 암초언덕에 기어오르지 못했어요. 연체 아들은 그래도 팔이 네 개어서 얼음과 검정 눈이 얼어붙은 암초언덕을 기어오르기 시작했어요. 허나 발이 쭉 미끄러지어 내려와 바다 얼음 위에 퉁 떨어지었어요. 그때 뱀 인들은 숱한 몸을 바처럼 타래타래 새끼를 꼬아 바다 얼음으로부터 암초언덕 위에까지 긴 뱀들의 몽뚱이로 된 동아줄 같은 커다란 뱀 다리를 놓았어요. 우성 대통령 네는 그 길고 실팍한 뱀 다리의 뱀 인들의 터덜터덜하고 얼룩덜룩한 잔등을 밟으면서 간신히 화산재가 뒤덮인 암초언덕에 올랐어요. 그런데 앞에는 또 몇 키 높이의 바람 벽 같은 절벽이 막아 나섰어요. 길이 10여 미터씩이나 되는 뱀 인들은 식은 죽 먹기로 스르르 절벽을 기어 올라갔지만 우성 등은 눈보라 속에 얼어붙은 절벽을 쳐다볼 뿐 기어 오를 엄두도 내지 못했어요. 이번에도 한 무리 뱀 인들이 또 숱한 몸을 바처럼 타래타래 비꼬아 동아줄 같은 사닥다리를 절벽 위에까지 걸쳐놓았어요. 우성 대통령 일가 셋은 두 뱀 인의 부축을 받아 겨우 일어나 터덜터덜한 뱀 인체 사닥다리를 밟으면서 뱀 인들의 손을 잡고 간신히 절벽을 한 발자국 한 발자국 톺아 올라갔어요. 우성은 뭍에 서서 검푸른 산성 눈보라가 휘몰아치고 해골이 널려 있는 바다의 얼음판을 멍하니 바라보면서 한숨을 후 내쉬었어요. 뱀 인들의 손에 이끌리어 화산 동굴로 향한 가파른 언덕으로 올라가면서 보니 숱한 얼룩 뱀들의 마른 시체가 아가리를 쩍 벌리고 여기저기 나무 위에 걸려 있었어요. 게다가 언덕 위에는 뱀 인과 사람들의 해골로 산더미처럼 쌓여 있어 악취를 풍기고 있었어요. 그 속에는 진작 고인이 돼버린 하나꼬의 아버지 스즈끼의 해골도 있었어요. 사랑의 오아시스와 같던 하나꼬의 고향마을은 방사능 피해로 진작 페허로 돼버렸던 것이죠. 풀어헤친 소녀의 머리카락 같던 수양버들은 마른 삭정이 시체로 돼 마을 길 양옆에 죽 늘어서 있었어요. 하늘에서 숱한 굶주린 독수리들이 깍깍 울며 날아 내리더니 해골에 말라붙은 고기 점을 톡톡 찍어먹는 것이었어요. 어떤 해골의 눈 구멍에서는 구더기가 욱실거리는가 하면 뱀들이 해골 몸뚱아리에 들어가 내장을 빼앗아 뜯어 먹느라고 몸 부림치고 꼬리를 치고 생 야단이었어요. 사처에 주린 이리 같은 개들이 왕왕 짖으면서 썩다가 남은 처녀들의 젖가슴이랑 엉덩이랑 뜯어 물고 달아 다녔어요. 시체가 썩어 악취를 풍기고 구더기가 욱실거리고 파리들이 앵앵 날아다녔어요.  진짜 살풍경이었어요.       그래 방사능에 오염된 지구촌에서 해골이 된 인간의 목숨은 구더기나 파리들의 목숨보다도 질기지 못하단 말인가? 그래 인간들은 차라리 지구를 어지럽힐 바에는 구더기나 파리로 돼 목숨을 부지할 각오를 하는 것이 옳지 않았을가?       “에이크!” 언덕 위의 해골더미가 와그르르 무너지면서 데굴데굴 굴러 내리어 왔어요. “피해!” 우성은 몸으로 처자를 막으면서 옆으로 끌어당겨 피하였어요. 숱한 해골이 언덕 아래로 굴러 내려가 바다 얼음 위에 떨어지어 데굴데굴 굴렀어요. 스즈끼의 해골은 바다 얼음판에 떨어지어 억울한 듯 아가리를 쩍 벌리어 이발을 사리어 문 채 우멍한 눈 확으로 먹장구름이 뒤덮여 오는 하늘과 딸 일가 셋을 멍하니 쳐다보는 것만 같았어요. “아버지!” 하루꼬는 바다 얼음 위에 굴러 떨어진 해골을 바라보면서 대성통곡을 쳤어요. 진짜 화산 동굴 어귀는 황천길로 통한 해골언덕을 방불케 했어요. “아버지, 우린 왜 코치아에서 살지 않고 황천 같은 이런 화산 동굴로 옵니까?” 우성 대통령은 못 박힌 듯 서있는 아내의 팔을 잡아끌며 쓸쓸한 말을 했어요. “하늘에 구멍이 뚫린 지구촌에서 그래도 이 화산 동굴만한 곳도 없어. 뱀 섬나라 사람들은 옛날부터 지하를 황천으로 오해했어. 허나 악마들에게 망가진 지구촌은 온통 황천으로 돼버렸어. 뱀 섬나라에서 황천 같은 화산 동굴이야 말로 유일한 오아시스야. 뱀 왕은 뱀 인이지만 착한 분이야.” 연체기형아 아들은 머리를 끄덕이었어요. 그제야 그는 아버지가 버새 악마 형제를 피해 코치아에 갔다가 악마가 처단되자 뱀 섬나라 동굴로 되찾아 온 뜻을 알 것만 같았어요. 우성 대통령은 처자를 데리고 화산재 위에 해골이 뒤덮인 골고다 같은 언덕을 넘어 천신만고 끝에 화산 동굴 안에 있는 뱀 왕궁에 들어섰어요. 바깥보다 춥지 않아 살 것 같았어요. 뱀 왕의 아량 있는 접대를 받아 화산 동굴 막장의 온천에 목욕까지 하고나니 정신이 개운해졌어요. 뱀 왕은 돌기둥에서 스르르 기어 내려오더니 우성 대통령의 두 손을 잡고 너럭바위 위에 올라갔어요. “연회 상을 차려라!” 뱀 미녀들이 주안상을 너럭바위 위에 들어다 갖춰 놓았어요. 이전과는 달리 물고기 한 마리도 없고 미역 몇 꼬리가 놓여 있을 뿐이었어요. 뱀 왕은 어둠침침한 동굴 안에 빼곡히 들어선 뱀 인들을 내려다보더니 입을 열었어요. “이젠 악마는 몽땅 죽어 백골더미로 됐어. 뱀 섬나라 사람들과 동물들은 이런 어둠침침한 화산 동굴이 아니면 바다 물속에서 살 수 밖에 없게 됐어. 난 진작 하늘이 끝없는 욕심을 부리는 버새 형제와 모든 인간들에게 이런 무덤을 파놓으리라는 걸 짐작했어. 그래서 왕위를 내놓고 이 화산 동굴을 떠났던 거야.” 그는 화산 동굴 기둥에 스르르 기어 올라가 몸뚱이를 감더니 수신인면으로 좌중을 둘러보면서 혀를 날름거리었어요. “이후에도 인류가 또 욕심을 부려 서로 정복전쟁을 할지 누가 알겠는가? 우린 우성 대통령을 수호신으로 모시고 우리 서식지와 생존을 보호해야 한다. 모두들 알았는가?!” “안 됩니다.” 우성 대통령이 손사래를 쳤지만 어둠침침한 화산 동굴에는 뱀 왕의 우레 같은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리었어요. “뱀 미녀들이여, 새 세상을 여는 뜻 깊은 오늘을 경축해 마음껏 춤을 추라!” 인면수신의 뱀 미녀들은 화산 동굴이 떠나갈 듯이 웃고 떠들며 음침한 뱀 왕궁 너럭바위 위에서 미친 듯이 꼬리를 흔들면서 춤을 추었어요. 언제 죽을지 모를 판에 죽을 때는 죽더라도 사는 날까지는 즐겁게 살자는 거였지요. 휘날리는 꼬리에 스트레스가 오리오리 찢어져 훨훨 날아나는 듯 했어요. 뱀 섬나라는 핵 오염과 자외선의 피폭으로 해 사람이 살 곳이 못 됐어요. 그리하여 사람들이 살던 마을이나 시가지에는 유령 마을과 시가지로 돼버리었어요. 특별히 하나꼬의 고향 마을은 말이 아니었어요. 찌그러들거나 무너진 집 안에는 죽고 나머지 도망친 사람들 대신 뱀과 멧돼지들이 욱실거렸고 사람들의 버림을 받은 개들이 마당에서 왕왕 짖어댔어요. 멧돼지들이 그래도 생존과 번식 능력이 강해 제일 많이 살아남고 그 수는 눈 뜨이게 늘어나고 있었어요. 개들은 무리를 지어 야산이나 동네를 돌아다니다가 번식이 꽤나 빠른 돼지새끼들을 잡아먹고 살았어요. 그 놈들은 멧돼지 어미들을 보고 자기들이 잡아먹을 멧돼지새끼를 많이 낳으라고 살려 두고 멧돼지 새끼들만 골라 쫓아다니면서 잡아먹었어요. 멧돼지들은 자기 새끼들을 보호하려고 입귀에 삐죽이 뻗어 나온 송곳니를 빼물고 개들과 생사박투를 벌렸어요. 개들은 멧돼지 새끼를 잡아먹을 전략을 짜고나 든 듯이 멧돼지 새끼들을 보호하려고 덮쳐드는 멧돼지 어미를 공격하는 척 하면서 유인해 다른 곳으로 간 틈을 타서 멧돼지새끼들을 잡아먹었어요. 생존을 위한 짐승들의 피어린 생사박투 장면은 정말 처참했어요. 뱀 왕은 자기를 쳐다보는 개들과 멧돼지들을 내려다보면서 기둥에서 스르르 기어 내려 왔어요. “인간들이 욕심을 부려 너야 내야 하면서 싸우더니 다 죽고 어둡고 깊은 화산 동굴에 은퇴해 있던 우리 뱀 인들만 살아남았구나.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역어빠진 사람들이 욕심을 쓰더니 자기 무덤을 깊숙이도 팠구먼. 이제 지구에는 정상인들은 씨도 없이 사라지고 우리 같은 가죽이 두꺼운 뱀 인들이나 클론바우 같은 괴물들만 살아남겠구나. 아, 그래, 털이 부스스한 사자 왕이나 호랑이 왕 같은 동물들도 살아남고. 허허허. 시끄러운 자들이 훼멸됐으니 이제야 편안히 살겠구나. 하하하.” 뱀 왕의 저주로운 말을 들은 우성 대통령은 하늘에서 본 뉴스를 떠올리며 장차 화산 동굴의 뱀 인들을 어떻게 구할까 궁리하고 있었어요. 사실 우성 대통령이 생물이 생존할 여지가 없이 된 코치아를 떠나면서 우주 형광판에서 시간에 따라 밝기가 변하는 별을 발견했던 것이죠. 지구에서 약 6500광년 떨어진 "RS Puppis"라는 별은 마치 거미줄에 묶인 듯 두꺼운 먼지 구름에 휘감겨 있는 것이 특징인데 시간에 따라 밝기가 변하는 별이라는 것이었어요. 특히 이 별의 “스케일”은 그야말로 입을 다물지 못하게 만드는 수준이었죠. RS Puppis 별의 질량은 우리 태양의 10배나 되며 크기는 200배에 달한다고 했어요. 더욱 놀라운 것은 빛의 밝기가 태양보다 무려 1만 5천배나 밝다는 사실이죠. 허블망원경으로 관찰한 결과 이 별이 팽창하며 밝아질 때는 말로 표현하지 못할 정도로 놀라운 장관을 보여 준다고 했어요. “그래, 정말 짐작조차 하기 힘든 게 우주이지. 참말 우주는 광활해. 지구촌에서 살기 힘들면 우리 인간들은 다른 별에 가서라도 살아야 하는가? 어느 별에 가서 살면 다시는 생태환경을 파괴하는 일이 없을까? 이제 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우성 대통령은 자기 앞길이 멀지 않은 것을 보고 연체기형아 아들에게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었어요. “뱀 섬나라 미에노(三重)현 구마노(熊野)의 아리마무라(有马村)에 황천 궁전이 있었지. 이자나기노미코도는 아내 신 아리마무라 황천에 찾아갔지. 그가 황천 궁전 앞에 이르러 ‘사랑하는 이여! 아직 뱀 섬나라를 모두 만들지 못했소. 나와 함께 돌아가기요.” 하고 외쳤대. 그러자 궁전 안에서 아내는 ‘저는 황천의 음식을 먹어버렸기 때문에 이곳의 주인이 됐어요. 하지만 아직도 당신을 사랑하기에 황천의 신과 의논해보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의논하는 동안 절대로 궁전 안으로 들어오지 마세요.’ 하고 대답이 들려왔지.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동정이 없었어. 가만히 있을 수 없어 이자나가노미코도는 횃불을 들고 황천 궁전 안으로 들어가 보았어. 저게 뭔가? 아내 이자나미노미코도 여신은 구더기에 뒤덮여 썩어가고 있었어. ‘이크!’ 그는 완전히 변해버린 아내의 모습이 너무나도 무서워 황급히 도망쳤어. 우성 대통령은 뱀 섬나라 이런 얘기 한 토막을 말했어요. 그러자 연체기형아 아들은 “아버지, 화산 동굴에 들어오지 말 걸 그러지 않았어요? 이자나미노미코도 창조신처럼 환천 같은 화산 동굴에 들어온 거 같아요. 괜히 황천 같은 화산 동굴에 묻혀 데 죽겠어요. 아버지, 우린 재생할 수 없다는 걸 잊지 마십시오. 화산이 폭발하면 화산 동굴에 들어갔다가 빠져나오지 못 할 수도 있습니다.” 허나 우성 대통령은 도리머리를 가로저었어요. “넌 그 뒷이야기를 모르는 것 같구나. 이자나가노미코토는 아내가 악귀로 돼 쫓아와 죽이려고 하자 황천에서 탈출해 거대한 바위로 황천 입구를 막아버렸어. 그래서 황천과 현재 세상이 막혀버린 거야. 남편 이자나가노미코토는 아내 악귀가 그렇게 저주를 해도 죽지 않았고 지팽이를 휘둘러 숱한 뱀 섬나라 섬을 만들었고 아내 악귀가 하루에 사람을 천 명씩 죽이면 하루에 사람을 천 5백 명씩 만들어냈던 거야! 허나 여신 이자나미노미코도는 아무리 지팡이를 휘둘러 뱀 섬나라 땅을 만들고 숱한 신들을 낳았지만 불의 신을 낳다가 하신에 화상을 입고 황천에서 죽고 말았다고 한다.” 연체 아들은 아버지를 말리었어요. “걸 보세요. 우리도 황천 같은 이 위험천만한 화산 동굴에서 살지 맙시다. 황차 우린 재생할 수 있는 신도 아닙니다. 언제 화산 폭발로 이 화산 동굴에 갇혀 죽을 지도 몰라요!” 하루꼬도 창백한 얼굴을 들어 남편에게 말했어요. “저의 고향에 가서 삽시다. 그 곳은 식수조림도 잘 돼 사랑의 오아시스 같았는데요.” 우성 대통령은 도리머리를 흔들었어요. “지구촌은 방사능과 자외선의 피폭으로 몽땅 황천으로 돼버리었어. 어디에 간들 살 수 있겠느냐?” 그는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면서 연체기형아 아들의 손을 잡고 골고다 같은 언덕을 간신히 넘어 황천 같은 어둠침침한 화산 동굴로 들어갔어요. 며칠 후 우성 대통령도 바다에서 자외선을 맞은 부위가 방사능에 오염 된 것처럼 벌겋게 부어오르더니 썩어 떨어지기 시작했어요. 그는 연체 아들과 예쁜 아내 하루꼬를 두고 이 세상을 떠나기 아쉬웠어요. 어둠침침한 화산 동굴에는 금과 은, 보석이 석유등잔불에도 오색영롱하게 반짝이고 있었어요. 몇 달 후, 우성 대통령의 연체기형아 아들은 코치아의 금은보화가 탐나서 우주비행선을 타고 코치아 수도 연화시에 갔어요. 그가 해골 천지인 지하 대통령궁 침실에 들어가 보니 침대 위에 어린 애 해골을 끌어안은 여인의 것 같은 해골이 누워 있었어요. “이게 조왕돌 꼬마대통령 부인이 아니야?” 그래요. 건 딸애를 꼭 껴안은 채 죽어간 보름의 처참한 해골이었어요. 코치아의 유명한 과학자 조왕돌 꼬마대통령도 핵과 자외선 피폭에는 용 배는 수가 없었어요. 보름은 볼우물이 옴폭 파이던 그 사랑스런 얼굴이 썩어 들어가 처참하게 딸애 해골을 안은 채 해골로 된 채 지하대통령궁에서 뒹굴고 있었어요. 조왕돌은 사랑스런 아내의 얼굴이 벌겋게 번지다가 점차 종기가 생기는 것을 보고 가슴이 너무너무 아팠어요. 하여 그는 생물학자인 고모 금붕어 소장의 말을 듣고 하마의 몸에서 분비된 갈색분비물을 받아 왔지요. 금붕어의 말에 의하면, 그 갈색분비물은 방 피폭 크림보다 낫다고 해요. 조왕돌은 하마의 갈색분비물을 벌겋게 달아오르면서 종기가 나는 보름의 볼에 살살 발라주었다고 해요. 그런데 핵과 자외선 피폭이 너무 심해 효과를 보지 못하고 보름의 볼은 썩어 떨어지었고 나중에 딸애를 꼭 껴안은 채 목숨마저 잃었다고 해요. 다만 꼬마대통령 조왕돌인지 복제 조왕돌인지 살아남아 고모 금붕어의 말을 따라 감방 문을 열고 고모를 데리고 방사능오염이 덜한 심해 수중 잠수함식 아파트에 숨어 산다고 했어요. 그 잠수함은 금붕어의 어머니 해양 동물학자 박수혜가 남겨놓은 유일한 유산이었는데요. 방사능 오염이 심한 지구촌에서 조왕돌과 금붕어의 생존은 참말로 기적이 아닐 수 없었어요. 조왕돌은 동족상잔의 군사정치의 잘못을 뉘우치고 고모와 함께 그 잠수함식 아파트에서 인류의 생존을 위해 지구촌의 생태환경 보호를 연구하고 핵 피폭 방지제 연구생산에 몰두하고 있대요. 사막화가 대가는 바다에도 핵 오염이 심해 그들이 이제 얼마나 살 수 있겠는가 하는 것도 미지수라고 해요. 우성의 연체기형아 아들은 폐허로 된 조왕돌의 지하 대통령궁에 파묻혀 있던 금은보화를 몽땅 파내 실어왔어요. 조왕돌 꼬마대통령은 악마 버새 형제들을 제거한 후 악마들이 코치아에서 빼앗아다 화산 동굴에 숨겨 놓은 코치아의 금은보화를 되찾아내 싣고 귀국했었지요. 저 무더기로 쌓인 금과 은을 보세요. 진짜 토함산 석굴암의 석불만큼 큰 금불상이 연체기형아 아들을 멍해 보고 있었어요. 어디 그뿐인가요? 경주에서 빼앗아온 옛 신라왕들의 금관, 금 허리띠, 금 갑옷, 금 검, 왕후들의 금비녀, 금팔찌, 금 귀걸이, 금 발찌, 금반지가 금빛을 반짝이고 있었어요. 파랗고 빨간 보석을 보세요. 보석의 종류도 놀라웠어요. 남보석, 홍보석, 황금사과, 쥬얼리, 금에 보석을 박은 목걸이, 남보석과 홍보석이 반짝이는 팔찌와 발찌, 목걸이가 눈부시게 반짝이었어요. 뱀 왕이 목욕을 하던 온천 물 함지에는 마노와 진주 액세서리가 불거져 있었어요. 자마노, 홍마노 귀걸이, 홍호마노 목걸이, 사드오닉스, 태마노 밥상, 모기 마노 반지, 경치마노로, 갈색마노 목걸이, 빨간 마노 팔찌가 수중에 잠들어 있었어요. 동굴에는 이 세상을 떠나간 지구촌 방방곡곡 인간들이 남긴 금은보화로 눈부시었어요. 뱀 섬나라 왕궁에서 노획하여 온 천연진주, 흑진주, 담수진주, 야코야 진주가 무더기로 쌓여 있었어요. 화산 동굴 너럭바위 위에 널려 있는 저 옥 무더기를 보세요. 백옥, 홍옥, 분홍옥, 청옥, 황옥, 자옥, 남옥 없는 것이 없어요. 옥 액세서리도 수두룩했어요. 뭐, 은과 옥, 호안석을 금줄에 박아 만든 합자주옥 팔찌와 목걸이, 옥과 자수정, 옥석, 비취로 만든 팔찌와 발찌가 무언의 빛을 반짝이고 있었어요. “저 산더미 같은 금은보화가 다 무슨 쓸데 있어?” 우성 대통령은 숨을 거두기 전에 연체 아들을 손을 들어 불렀어요. 그는 연체기형아 아들에게 다음과 같이 띄엄띄엄 말했어요. “저 화산 동굴 아래 절벽에 내 말을 새겨 둬라.” 연체기형아 아들의 머리 둘이 다 끄덕였어요. 우성 대통령은 목구멍으로 기어들어가는 모기 소리만이 가는 목소리로 간신히 말했어요. “인간의 무절제한 욕, 욕심은 스스로 지구촌에 무, 무덤을 파게 된다. 오존층을 파괴하는 것은 인류가 자기 무덤을 파는 자, 자멸행위…” 그이는 아들에게 할 말이 너무나도 많았어요. 허나 무정한 자외선은 쓸쓸한 화산 동굴에 숨어든 우성 대통령이 말도 채 하지 못했어요. 그의 가냘픈 목숨은 저 화산 동굴의 등잔불처럼 가물거리고 있었어요. 우성 대통령의 아내 하루꼬는 자외선과 핵 복사로 해 피부암에 걸리었던 것이죠. 우유 빛의 하얗던 얼굴에 벌건 종기가 생기더니 거먼 자줏빛으로 번지더니 썩기 시작했어요. 신음소리를 내는 아내의 고름이 줄줄 흐르는 얼굴을 보는 우성의 마음은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만 같았어요. 그의 연체기형아 아들은 방독 면구를 쓰고 방독 옷을 챙겨 입고 화산 동굴 아래 절벽으로 가서 뱀 인들이 긴 몸뚱이로 비꼬아 만든 사닥다리를 타고 정으로 아버지 유언을 절벽에 한 글자, 한 글자 딱딱 새겨 갔어요. 방독 면구를 쓰고 방독 옷을 입어서 자외선은 막았지만 온 몸은 땀으로 물자루가 되다 시피 돼 버렸어요. 지어 바위 돌에 긁히어 째진 방독 옷에서 김이 문문 나는 땀이 도랑물처럼 줄줄 흘러 내렸어요. 그 모습을 보는 뱀 왕은 인간들이 아예 뱀 인으로 태어났더라면 방독 옷을 입지 않아도 되겠는데 하고 안타까운 생각이 떠올라 기린의 목 같은 얼룩 목을 빼들고 대가리를 홰홰 저었어요. 마지막 힘을 다해 절벽에 글씨를 다 새기자 연체기형아 아들은 정과 망치를 쥔 채 스르르 물앉더니 숨을 거두며 절벽아래에 떨어지고 말았어요. 연체기형아가 입을 특제 방독 옷이 없어 늘 한쪽 머리와 윗몸에만 방독 모자와 옷을 착용했기에 자외선과 방사선에 몹시 피폭됐던 것이 화를 불러왔던 것이죠. 뱀 인들은 황급히 연체기형아 아들을 안아 어둠침침한 화산 동굴에 들여다 너럭바위 위에 눕혔어요. 뱀 왕과 뱀 인들이 구세조로 여기는 우성 대통령도 하늘이 내린 천벌의 마수에서 자기 귀여운 아들을 구할 수 없었어요. 황천 같은 화산 동굴 아래 절벽에 새긴 글발이 세인들에게 무엇인가 암시하는 듯이 휘몰아치는 눈보라 속에서 금빛을 잔잔히 뿌리고 있었어요.                   제25장 유령 핵폭탄에 피폭돼 아마존 열대우림은 폐허로 돼버리었어요. 정상 토착민들은 대부분 해골로 돼 황천으로 갔어요. 타다 남은 열대우림에는 매발톱 1호를 비롯한 원숭이 인들과 맬쓴 1호 등 개 인, 사자 인, 호랑이 인, 뱀 인 등 인면수신의 괴물만 남았어요. 살아남은 호랑이 왕 카시마는 따-웅- 하고 한탄하였어요. “천국 같던 우리 아마존 열대우림이 이게 뭐야? 황천으로 돼버리었구나. 잡아먹을 사슴도 없어 뭘 먹고 사는가? 어험,” 그러자 사냥개 사람은 “왕, 왕, 왕!” 짖다가도 사람의 목소리로 고함을 질렀어요. “우리 팔자도 사나워! 도망쳐 아마존 열대우림에 오면 잘 살겠는가 했더니 못 살고 나앉게 됐구나. 우리 원숭이 조상들이 조왕돌에게 꼬이어 수렴 동에서 연화시 국립공원에 내리어 간 게 잘못이었지. 참말 후회막급이야.” 핍박에 의해 양산에 오른다고 클론바우 18세는 클론바우 가족과 함께 인면수신의 괴물들과 짐승들을 이끌고 폐허 같은 열대우림을 떠나 북극주에 가지 않으면 안 됐던 것이죠. 그는 파초 같은 날개를 퍼덕이며 북 태평양을 훨훨 날아 새로 개발된 북극주를 한 바퀴 빙 돌아보았어요. 북극주는 옛날처럼 눈 덮인 무인지경이 아니었어요. 지구온난화로 해 북극의 빙산이 녹아내려 새로운 인간의 서식지가 생긴 것이죠. 아마존 열대우림에 비하면 춥고 나무를 보고 죽자고 해도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어요. 그래도 지구촌의 처녀지인데다가 핵 피폭을 받지 않아서 좋았어요. 더욱이 인간의 발자취가 적어 조용해 좋았어요. 물론 그의 할아버지가 오존층을 구멍 내놓아 자외선의 피해는 막을 길이 없었지만요. 인류가 지구촌에서 몇 번이나 대이동을 했을까요? 만여년 전에 아프리카의 열대우림이 점차 사막으로 돼버리자 인간들은 아프리카를 버리고 동으로 가나안으로, 바빌론으로 이사해 갔고 나중에 원동에까지 내려왔지요. 북으로는 지중해를 건너 유럽 땅에 들어갔지요. 그 후 인간들은 아메리카에도 들어갔지요. 아마존 열대우림에서 북극으로 이사해 온 괴물들이 생존하려고 최후 발악하는 그 처참한 정경 진짜 눈물겨웠어요. 괴물 꼬마대통령은 북극에 새로 지은 대통령궁에 날아 내리었어요. 저 멀리 금과 은 벽돌로 쌓아올린 벽에 보석을 박아 새로 지어놓은 금빛이 번쩍이는 대통령궁에서 호위병들이 문을 활짝 열고 괴물 꼬마대통령을 맞았어요. 클론바우 18세는 파초 같은 나래를 가두더니 금 소파에 앉아 눈부신 대통령궁을 둘러보았어요. 이 대통령궁은 안나 여사께서 특별히 백악관을 장식할 때 쓰려던 금은보화를 몽땅 날라다 지은 것이었어요. 그녀는 백악관을 새로 지으려고 아마존 열대우림을 난벌한 죄를 뉘우치는 의미도 있었지만요. 더욱이는 지구촌을 통일한 클론바우 18세에게 아첨하려는 게 더 다분했어요. 대부분 정상인들은 다 무리죽음을 당했지만요. 안나 여사는 지하벙커에 숨어 애를 낳아 기르다나니 방사능에 피복되지 않아 간신히 살아남아 있었어요. 그녀는 자기 안속이 따로 있었죠. 클론바우 18세가 조만간에 죽으면 갓 태어난 자기 아들애 필리프에게 통일된 지구촌의 2대 대통령 보좌를 물려주려는 것이었죠. 금돌로 지은 대통령궁과 산더미처럼 쌓인 금은보화, 아니, 지구촌의 모든 것이 그녀의 아들 필리프의 것이 아니겠어요. 기실 그녀는 자기 아들애 필리프를 위해 대통령궁을 세계 최고로 화사하게 꾸려놓은 것이죠. 안나 여사는 괴물 꼬마대통령의 고문이라는 막강한 세도를 휘둘러 남편 죤스카를 시켜 지질학자들을 데리고 오스트리아의 비취를 파오게 했어요. 그것도 모자라는지 노르망디에 가서 고대 로마 왕들의 고분을 파서 금은보화를 몽땅 대통령궁에 날라 오게 했어요. 노르망디의 생물학자 클론 박사가 고분발굴에 한몫을 톡톡히 했지요. 클론바우 18세는 대통령 금 보좌에 앉아 로마 고분의 금은보화를 둘러보았어요. 남보석과 홍보석을 다닥다닥 박은 산더미 같은 고대 귀족의 목걸이와 팔찌, 발찌 무더기는 진짜 눈이 부실 정도였어요. “어, 저건 해골 아닌가?” 갑옷처럼 두른 금실로 결은 금옥 옷에 갈비뼈가 드러나 있었어요. 안나 여사는 다가와 부드럽게 속삭이듯 했어요. “놀라지 마세요. 고고학자들이 고대 로마 왕들의 해골에 감싼 금은보화를 그대로 가져 와야 고대 서구 왕의 미가 다분하다고 해서…” 괴물 클론바우는 사발 눈을 부라리고 고대 로마 왕의 해골을 감싼 반짝이는 금, 은, 보석, 진주, 비취 장신구를 둘러보았어요. 해골의 옴폭 패인 눈과 코에마저 비취와 옥, 남보석 조각으로 막아 놓지 않았겠어요. 다 썩어 뼈 밖에 없는 목에는 홍보석과 남보석으로 반짝이는 목걸이가 거미줄처럼 얼기설기 묶여 있었어요. 앙상한 다리뼈에는 금 발찌가 여러 겹으로 감겨 있었어요. 발톱 대신 아까운 비취조각을 다닥다닥 박아 놓지 않았겠어요. 고대 로마 왕의 해골에 뒤덮인 반짝이는 금은보화를 내놓고서도 그리스 신들의 신궁, 고대 이집트 금자탑, 고대 바빌론의 왕궁, 인도 왕궁, 등 왕과 황제, 귀족들의 능을 도굴해 날라 온 금은보화로 대통령궁 천정에 닿게 쌓여 있었어요. “흥!” 괴물 클론바우 18세가 콧방귀를 뀌었어요. 그 콧바람에 금 소파 앞에 쌓여 있던 금은보화 산더미가 훌 바깥에 날려 나가 툭툭 떨어졌어요. 호위병들은 와야 하고 달려들어 금은보화를 두어가다가 대통령궁 안에서 독기가 빛 발치는 사발 눈깔을 돌아보고 겁을 집어먹고 금은보화를 대통령 궁 안으로 들여다 되 쌓아놓았어요. 안나 여사는 필리프를 안고 죤스카와 조용히 눈을 맞추더니 미소를 지으면서 괴물한테 눈길을 돌렸어요. “꼬마대통령님, 어째 만족하지 않는가요? 그럼 이제 뱀 섬나라 화산 동굴에 가서 우성이란 놈의 금은보화도 빼앗아 오지요.” “됐어!” 클론바우 18세는 눈을 부릅뜨고 안나 여사를 마주 보면서 일어났어요. “저 산더미 같은 금은보화가 무슨 소용 있습니까? 이 금으로 지은 대통령궁이 무슨 쓸데 있단 말입니까? 우성 대통령이 전번에 화산 동굴의 금은보화를 가져오라는 걸 가져 오지도 않았습니다.” “건 웬 말인가요? 줄 때 가져오지 않고.” “그만! 여대통령을 꿈꾼 여사께서 아직도 그런 도리도 모르고 계십니까?” “…” 괴물 꼬마대통령은 한심한 듯 안나 여사와 죤스카를 둘러보며 뒷말을 이었어요. “금돌로 대통령궁을 지어놓고 금은보화를 산더미처럼 쌓아놓아도 쓸데없는 폐물 짝들입니다. 보십시오. 오존층을 구멍을 뚫어놓았기에 모든 게 끝장났습니다. 정상인들이 무리죽음을 당하고 있습니다. 지구촌은 산과 들에 해골더미로 쌓인 황천이 됐습니다. 백성이 없는 지구란 이 황천에서 대통령을 해서 뭘 하고 금은으로 대통령궁을 지어서 뭘 합니까? 저 금은 보화가 쌀 무지보다 낫습니까? 저 금은보화로 산소가 결핍한 지구촌에서 아마존 열대우림을 바꿔 올수 있습니까? 사람이 없는 지구촌에서 누가 농사를 짓고 과학을 발전시켜 새로운 에너지를 발굴합니까? 방사선과 자외선이 강하게 내리쪼이는 지구촌에서 사람이고 가축이고 모든 동물이 살 수 있습니까? 금은보화를 해서 저 로마 왕들처럼 온 몸에 감고 방사선과 자외선에 쪼여 해골로 될 것 밖에 뭐가 있습니까? 어서 살아남은 인력이라도 동원해서 지구촌의 폐와 같은 아마존 열대우림을 복구합시다. 이게 산소가 결핍해 숨이 꽉 막혀 어떻게 살아? 흥!” 말을 마치자 괴물 클론바우 꼬마대통령은 코끼리 코를 휙 휘두르며 솥 뚜껑 같은 발로 지축을 쿵쿵 울리며 바깥에 나왔어요. 그는 파초 같은 나래를 힘차게 구르더니 남쪽을 바라고 날아가 버렸어요. 그런데 뭐예요? 안나 여사는 낯이 벌겋게 달아오르더니 며칠도 안 돼 필리프를 안은 채 점차 해골로 변해 버리었어요. “여보, 여보!” 죤슨이 여겨보니 금은보화 무지에 쓰러져 해골로 돼버린 안나의 품에 안겼던 필리프도 옹송그린 채 자그마한 해골로 돼버리지 않았겠어요. 순간, 자기도 얼굴이 뜨거워나는 감이 들었어요. 바깥에 달려 나와 보니 호위병들은 모두 해골로 된 채 쓰러져 있지 않겠어요. “야, 괴물아!” 죤스카는 클론바우 18세의 소행인가고 오해하면서 천천히 해골로 돼버렸어요. 허나 실은 오존층이 파괴되면서 자외선의 직사를 받아 모든 정상인들은 죽고 만 것이었어요. 이 시각 괴물의 가족은 어떻게 됐을까요? 클론바우 가족은 온 몸에 몇 겹이나 되는 껍질로 해 강렬한 자외선에도 목숨을 간신히 부지했어요. 악어와 고래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터덜터덜한 껍질에 사자와 호랑이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한자나 되는 털이 자외선을 막는데 한 몫을 단단히 했던 것이죠. “안 돼! 지구촌의 평화를 위해 대통령 자리도 내놓고 이국 타향에서 떠돌던 김 우성 대통령 일가를 이렇게 죽게 놔둘 순 없어! 우리 북극에 모셔 와야지.” 클론바우 18세는 자기 안위를 돌보지 않고 뱀 섬나라 화산 동굴에 갇혀 있는 우성과 연체기형아 아들을 구하려고 북극으로부터 유라시아대륙을 가로 날아 지나갔어요. 나무숲으로 우거졌던 유라시아 대륙은 뱀 섬나라로 인해 난벌과 핵전쟁으로 해 원자탄 폭발의 구덩이가 펑펑 뚫린 시뻘건 벌거숭이로 돼버렸어요. 아직도 여기저기서 열대우림이 화마의 엄습을 받아 불타오르고 있었어요. 산골짜기와 들에는 살자고 애를 쓰던 사람들이 여러 가지 자태로 쓰러진 채 썩은 해골로 돼 무시무시하게 널려 있었어요. 해골 위로는 악취가 풍기었고 밤이면 유령인지 귀신불인지 떠다니고 있었어요. 진나라의 땅덩어리는 절반 넘어 사막이 대버리고 있었어요. 난벌로 인해 서부 사막의 모래가 날아내려 누런 땅을 사정없이 뒤 덮어 버리었어요. 만여년의 문명을 자랑하던 문명고국은 모래 밑에 깔려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어요. 전쟁으로 인해 공장 굴뚝이 몽땅 무너지다나니 공업연기는 없었어요. 대신 황사가 하늘을 뒤덮고 있어 사막 상공으로 날기 힘들었어요. 코치아를 굽어보니 백산의 열대우림은 온데간데없고 시꺼먼 연기 속에 타다 남은 잿빛 미인 송 그루터기 밖에 남지 않았어요. 해안선을 따라 늘어섰던 원전 반응노가 뱀 섬나라와의 전쟁에서 콘크리트 가루로 돼버렸어요. “코치아와 뱀 섬나라에서 원전시설이 없어진 건 아깝지 않아.” 클론바우 18세는 뒤따라 날아오는 아들을 뒤돌아보며 말했어요. 수도 연화시는 전쟁 폐허로 돼버렸어요. 진나라에서 날아오는 황사가 하늘을 뒤덮고 있었는데요. 즐비하게 늘어섰던 아파트는 어디로 사라지고 없었어요. 대신 황사 먼지 자오록하고 함박눈이 풀풀 흩날리는 하늘 아래에 콘크리트 조각과 농구공만큼 한 우박이 지저분하게 널려있고 눈이 2미터 두께도 넘게 뒤덮여 있었어요. “얘야, 이게 우리가 태어난 고향 연화시야!” 아들 클론바우 19세는 날개를 퍼덕이면서 아버지 뒤를 따라 날아가며 폐허를 내리 가리켰어요. “어쩜 우리 고향이 이 지경이 됐습니까?” “글쎄 말이야. 사계절이 분명한 살기 좋은 아열대 지역이었는데. 한 여름에 눈이 내리다니 웬 일이냐? 이게 하늘을 노엽힌 악과로구나.” 그들은 어느 결에 뱀 섬나라 지경에 이르렀어요. 눈 덮인 코치아와는 달리 뱀 섬나라는 자기 눈을 의심할 정도로 아직도 무더운 여름 날씨였어요. 불시에 목이 매캐해 그들이 내려다보니 규슈 구마모도현과 오이타현 사이의 아소산 화산이 폭발해 살벌한 지경이 펼쳐지었어요. 시뻘건 화산 용암 불꽃이 3킬로미터 하늘 높이 솟구쳐 올랐다가 떨어지면서 뻘건 용암이 검은 바위로 떵떵 굳어지었어요. 화산재가 뒤덮인 시뿌연 땅덩어리에 마그마가 날아와 떨어지어 불꽃을 탕탕 피웠어요. 시뿌연 화산재가 구마모토현과 오이카현 근방 60킬로미터에까지 뒤덮으면서 날아가 내렸어요. “또 화산 폭발이야! 하늘땅이 진노했어!” 저쪽을 보니 섬나라 나가노현과 기후현 사이 온타케산 화산도 폭발하지 않았겠어요. 불꽃과 화산재가 징글스럽게 하늘을 찌르며 뿜겨 오르고 있었어요. 화산 분출구는 시뻘건 용암이 부글부글 끓어 번지고 있었어요. “에이고, 뱀 섬나라는 어디 살 곳이냐? 저렇게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활화산만 해도 270여개나 된단다. 사화산도 450개나 된단다. 자연재해보다도 활화산이 폭발할 때 버새랑 활화산 밑에서 지하핵실험을 했기에 화산 폭발과 지진을 더 촉동한 거야. 얼기설기 금이 간 뱀 섬나라 숱한 섬에서 1년에도 화산폭발이 몇 십번 일어나고 지진은 몇 백번씩 일어난단다.” 클론바우 18세가 내려다보니 숱한 화산이 분출하는 뱀 섬나라 숱한 섬은 온통 시뿌연 화산재로 뒤덮여 딱 마치 잿빛 재무지 섬들 같았어요. 더럽게 뻘건 야스쿠니신사의 더러운 편액조각과 기둥들이 화산 재 먼지로 뒤덮인 바닷물에 둥둥 떠다니고 있었어요. 하늘에서 뭔가 긴 불꼬리를 달고 날아왔어요. “아버지! 저걸 보시오. 핵미사일이 아닌가요?” 괴물 꼬마대통령은 하늘을 피뜩 쳐다보더니 “별 찌야!” 라고 했어요. 이때 숱한 커다란 운석이 불꼬리를 물고 화산 근처에 떨어지면서 우레 같은 굉음과 함께 사처로 불꽃이 튕기었어요. 클론바우 19세는 겁기 어린 사발 눈으로 뻘건 불줄기를 내 뿜으면서 연이어 쏟아지는 별똥들을 둘러보면서 “큰 혜성이 지구에 떨어지면 큰일 나지 않겠습니까?” 하고 물었어요. 괴물 꼬마대통령은 “핵미사일로 쏘아 폭파해야 해. 그런데 사람들끼리 싸우다나니 언제 소행성을 막을 새 있었느냐?” 하고 감탄했어요. 그들은 이리저리 하늘까지 치솟는 화산재와 불티를 피해 날면서 마침내 우성 대통령 부자가 피신해 들어간 화산 동굴을 간신히 찾아냈어요. 화산 동굴은 딱 마치 골고다의 언덕에 파인 황천 같기도 하고 히로시마와 시네마현 사이 히와산(比婆山)에 있는 창조의 여신 이자나미노미코도의 무덤 같기도 하고 뱀 섬나라 조상들이 말하는 황천 같았어요. “흥! 허나 우리 클론바우 가족은 이렇게 살아 있어. 신이 별거 있나? 지구촌을 구한 절세의 영웅도 후세에는 지구보호 신으로 떠받들릴 거야.” 그 의미심장한 말씀에 클론바우 19세는 더 할 말을 잃었어요. 클론바우 18세는 아들을 뒤돌아보며 “우성 대통령 부자를 구해내야 한다. 얼마나 평화를 위해 애써온 착한 국제주의 인물이야?!” 라고 하더니 야자나무 이파리 같은 커다란 날개를 힘차게 퍼덕이었어요. 부자 괴물은 해골이 뒤덮여 황천으로 돼버린 뱀 섬나라 산과 들을 굽어보았어요. 화산재가 뒤덮인 히로시마와 시마네, 미에, 후꾸시마는 핵전쟁 폐허로, 잿더미로, 유령도시로 돼버렸어요. 여기저기에 해골들이 이발을 악물고 아가리를 짝 벌리고 움푹 팬 눈구멍으로 그들을 쏘아보는 것이었어요. 하늘에서 깍~ 깍~ 울면서 날아예던 까마귀 떼들이 갓 죽은 사람의 시체를 뜯어먹느라고 진짜 황천의 살풍경을 이루었어요. 끊임없는 전쟁으로 인해 생태환경이 전례 없이 파괴되면서 인류는 멸종의 위기를 겪고 있었어요. 해골이 뒤덮여 황천으로 된 산과 들에서 유령들이 너울너울 춤추며 떠돌아다니고 있었어요. “어쩜 살기 좋던 우리 지구촌이 이 지경이 됐단 말이냐? 후~” “다 클론바우 16세 할아버지 때문입니다. 오존층을 구멍 내지 않아도 우리 클론바우 부대의 지혜와 군사력으로 얼마든지 뱀 섬나라 악마들을 이길 수 있었는데 말입니다.” “다 할아버지가 욕심을 부린 탓인 거야!” 그들 부자는 우주비행선보다도 더 빨리 날아 순식간에 화산 동굴에 이르렀어요. “아버지, 위험한 화산 동굴에 들어가지 맙시다. 화산이 폭발하자고 그러는지 저걸 보세요. 화산재가 움씰움씰하고 해골과 바위들이 아래로 굴러 내려갑니다.” 그들이 바다에 포위된 화산 동굴을 굽어보니 살풍경이었어요. 해골더미가 무너지고 시체를 뜯어먹던 까마귀들이 놀라 하늘로 화닥닥 풍기어 날아올라갔어요. 갑자기 캄캄하던 바다가 밝아지면서 불화살이 바다를 쩍 가르며 하늘로 솟아오르듯 바다 밑에서 뻘건 용암 불기둥이 신기루처럼 불끈 치솟아 올라 하늘을 찔렀어요. “아버지, 제발 화산 동굴에 들어가지 마십시오. 화산이 언제 폭발할지 어떻게 압니까? 위험합니다!” 허나 괴물 꼬마대통령은 비장한 결심을 했어요. “우리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지구의 오존층을 구멍 내서 인류를 해친 천추에 용서하지 못할 죄를 지었다. 내가 모든 죄를 지고 화산 동굴에 들어가 우성과 연체기형아 아들이라도 구해야겠어." "아버지, 저걸 보세요. 화산이 움찔거립니다." 진짜 화산동굴 위의 바위들이 굴러 떨어지고 화산동굴에서 김이 문문 피어올랐어요. "피해라!” 클론바우 18세는 화산 동굴 어귀를 막아선 아들을 밀어재끼고 서슴없이 파초 같은 날개를 퍼덕이면서 시꺼먼 화산 동굴로 훨훨 날아 들어갔어요. 괴물이 파초 같은 날개를 퍼덕이며 날아 들어가는 바람에 우성 대통령이 누워 마지막 숨을 몰아쉬는 침대 옆에 걸어놓은 석유등잔불이 꺼져 버렸어요. 그가 우성 대통령과 연체 애들을 껴안고 날개를 퍼덕이면서 화산 동굴어귀로 날아 갈 때었어요. 꽈르릉! 꽝꽝! 화산 폭발? 버새 왕이 화산 동굴에 숨겨둔 원자탄이 폭발? 굉음과 함께 시뻘건 용암이 화산 동굴을 메우며 뿜겨 나왔어요. 뜨거운 기운이 클론바우 18세를 힘차게 떠밀었어요. 괴물 클론바우 18세는 괴력으로 날개를 퍼덕이면서 화산 동굴 어귀로 날아갔어요. 시뻘건 용암의 포위와 추격을 받는 클론바우 18세, 우성 대통령과 연체기형아 아들을 구하려고 안고 날아나가는 괴물의 최후발악은 눈물겹게 비장했어요. 뿜겨 나오는 화마와 스피드를 비기는 괴물의 그 처절한 경쟁은 너무나도 비극적이 아니고 무엇이겠어요?! 꽈르릉! 화산 동굴 옆에서 화산이 지축을 울리면서 폭발했어요. 시뻘건 용암이 화산 동굴을 메우면서 치솟아 올라 출렁이는 바다로 흘러 들어갔어요. 순간 산더미 같은 검푸른 해일이 쏴- 화산 동굴을 덮치었어요. 뿜겨 나오는 시뻘건 용암이 화산 동굴의 금은보화, 해골… 모든 것을 휩쓸어갔어요. 버새 왕과 우성 대통령 부자 등이 한평생 모아둔 금은보화도 시뻘건 용암에 휩싸여 녹아 거대한 해일 속에 사라져버렸어요. 바다 위에는 시뻘건 기둥과 편액들이 유령처럼 둥둥 떠돌았어요. 아마 머나먼 소꼬 바다에서 밀려온 야스쿠니신사와 왕궁의 더럽게 썩어가는 시뻘건 기둥들인 거 같았어요. 몇 십 년 후에 어떤 사람들은 지구보위 신 괴물 클론바우 18세가 동물들의 수령이 돼 저녁노을이 붉게 타오르는 아마존 열대우림 상공에서 유령처럼 훨훨 날아다니는 것을 발견했다고도 했어요. 어떤 고고학자들은 뱀 섬나라 용암으로 막혀버린 화산 동굴에서 우성 대통령과 연체기형아 아들을 안은 채 화석으로 굳어진 괴물 클론바우 18세를 발견했다고 해요. 화산이 폭발하자마자 해일이 덮쳐 괴물 꼬마대통령의 비장한 최후의 순간은 영원한 비취조각상으로 굳어졌다고도 했어요. 또 화산 동굴에서 살겠다고 기어 나오던 숱한 뱀 인들의 유골 속에서 인면수신의 뱀 왕의 화석도 발견됐다고 했어요. 뱀 왕의 그 화석을 보는 후세 사람들은 진짜 비장하고 눈물겹기만 했어요. 구경 괴물 클론바우 꼬마대통령이 황천으로 돼버린 지구촌에 살아 있는지, 아니면 그가 생전에 살던 백산 원시림과 아마존 열대우림에서 훨훨 날아 떠돌아다니는 유령으로 남았는지. 누구도 모를 일이죠. 오존층이 파괴된 황천 같은 지구촌의 몇 천 년 후 일을 누가 알겠어요. 황천으로 돼버린 지구촌에 유일하게 생존한 새로 개발된 특종인간들인 코치아의 원숭이 인 매발톱 1호, 뱀 섬나라의 개 인 멜쓴 1호, 뱀 미녀들 등은 화산 동굴 언덕 위에 지구촌 보호신인 괴물 클론바우 꼬마대통령에게 높이 99미터나 되는 동상과 999미터나 되는 대형 기념비를 세워 주었다고 해요. 클론바우 18세가 우성 대통령과 연체 아들을 껴안고 하늘로 날아오르는 거룩한 모습이 남보석 속에 비취조각상으로 굳어진 채 빛나고 있었어요. 비문에는 이런 글발이 새겨져 있었어요.   무엇을 위해 모든 죄를 지시고 화산 동굴에 날아 들어가시었을까? 화산 폭발에 얼마나 무서웠을까? 용암에 불타며 얼마나 뜨거우시었을까?   생령 하나라도 구하려고 목숨 던져 황천에 뛰어드신 괴물 클론바우 꼬마대통령 아, 지구촌 보호 신이시여 거룩한 그  장거 청사에 길이길이 빛나시리라 화산 동굴 위에 세워진 동상과 기념비는 머리를 숙여 출렁이는 검푸른  바다를 바라보며 지구촌 인류에게 무엇인가 암시하는 상 싶었어요.                                                         (끝)                             마지막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31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11) 댓글:  조회:1998  추천:1  2015-07-17
                              3. 통나무 벌레의 비밀       토끼 꼬리만한 늦겨울의 해는 어느새 수림 속의 엄동설한에 밀리어 맥없이 넘어가고 하얀 눈이 뒤덮인 수림에 어둠의 장막이 무섭게 어둑어둑 내리 드리었다.       일본 놈들은 성칠의 사냥총을 빼앗으러 갔다가 독립군의 습격을 받아 동료 몇을 잃었다. 그 놈들은 림산파출소 경찰까지 다 동원해 수림을 서캐 훑듯 했지만 독립군의 그림자도 찾지 못하고 닭 쫓던 개 신세로 됐다. 다만 동서로 갈라진 어지러운 말발자국 밖에 보지 못했다.      일본 놈들은 보병으로 기병을 쫓아 붙잡는다는 것은 어림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놈들은 공포에 찬 어둠이 깃들자 매복습격이라도 받을까봐 황급히 꼬리 빳빳해 림산파출소로 내려왔다.      한편 진달래와 성칠은 독립군 대원들과 함께 백마를 타고 일본 놈들을 수림 속으로 이리저리 끌고 다니다가 역습을 가하려고 했다. 그런데 교활한 일본 놈들이 수림 속에서 철거하는 바람에 성사하지 못했다.     성칠은 진달래를 보고 말했다.     “최 부소대장, 부모형제들이 어떻게 됐는지 영월동에 가 봐야겠네.”     진달래는 어둠 속에서 거친 숨을 몰아쉬는 성칠을 쳐다보면서 나직이 말했다.     “원수는 꼭 갚아야 해요. 그러나 오늘 영월동에 내려가선 안돼요.  위험해오. 놈들은 꼭 오빠네 집에 그물을 치고 뛰어들기를 기다릴 거요.”     진달래 말을 듣고 한참 생각하던 성칠은 옆에 앉아있는 검둥이를 내려다보더니 말했다.     “그럼 다른 수를 쓰지. 검둥이를 집에 보내겠소. 검둥이가 무사한걸 보면 내가 무사한 걸 짐작할 거요.”     성칠은 무릎을 꺾으면서 쪼그리고 앉더니 검둥이의 대가리를 손으로 어루만지면서 중얼거렸다.    “검둥아, 네가 집에 가라.”     검둥이는 알아들었다 듯이 낑낑거리면서 꼬리를 휘휘 내저었다. 검둥이는 눈이 시허옇게 뒤덮인 수림 속으로 사라졌다.     “최 부소대장, 영월동에는 며칠 후에 가기로 하구 운주동에 가 봐야겠소.”    진달래는 성칠의 손을 굳게 잡으면서 말했다.     “오빠, ‘최 소대장’, ‘최 소대장’ 하지 말고 ‘진달래야’ 하세요. 종전처럼 야, 자 하세요. 운주동엔 뭘 하려고요?”     성칠은 진달래를 한쪽으로 데리고 가서 목소리를 낮췄다.     “ 넌 부소대장이야. 숱한 사람들 앞에서 야, 자, 해서야 되겠니?”    “괜찮아요. 운주동에 있는 동생들과 조카들을 만나려고 그래요?”    성칠은 머리를 끄덕였다.     “아버지를 면회하러 갔을 때 아버지는 기준한테 전하라더라. ‘통나무 옹이나 벌레를 조심하라구.’ 목수인 기준은 그 말귀를 알아들었을 거야.”     진달래는 머리를 끄덕이었다.    “오빠, 나도 운주동에 갈래요. 큰아버지도 만나 보고.”     “최구장을 만나러?”    “예, 그집 둘째오빠는 검술에도 능하니까. 우리 독립군에 합세하자고 말해야겠어요.”     “네가 어떻게 가겠니? 그곳은 위험해.”     성칠의 말에 진달래는 머리를 가로저었다.     “누구도 아녀자가 이런 일을 하는 걸 모를 거요. 우리 오누이 부부처럼 가장하고 밤에 운주동에 들어가면 의심하지 않을 거예요.”     성칠은 그제야 한숨을 후 내쉬었다.     진달래는 독립군 대원들과 함께 말을 타고 어둠을 타 운주동으로 가만히 달려갔다.     독립군 대원들은 말에서 내려 마을 근처 버들방천에 숨어 대기하게 하고 성칠과 진달래가 운주동으로 스적스적 들어갔다.     제일 동쪽어구에 있는 최구장네 집에는 진달래가 대원 한명만 데리고 들어갔다. 거의 동시에 성칠은 서쪽에 자리 잡은 기준네 집 앞에 이르렀다. 성칠은 사위를 둘러보고 나서 독립군 대원을 구새목에서 보초를 서게 하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초저녁이지만 성칠이가 사냥총을 들고 웃방에 들어서자 기준은 적이 놀라면서 우쭐 일어나 문안했다.     “형님, 집에 무슨 일이 생겼소?”      제수 최사련이 난지 몇 달 안 되는 상순을 안고 위방에 올라와 인사했다.     성칠은 제수가 올린 술상에 마주 앉자마자 막걸리사발을 들어 마시면서 그간 우시장과 영월동에서 있은 일을 쭉 말했다.    기준은 원래 아버지보다도 성질이 우락부락했다. 그는 맏형의 말을 듣고 펄펄 뛰었다.    “작두날로 찍어 죽일 놈들, 언감 아버지를 가두고서도 형님께도 손을 댄단 말이요? 개놈새끼들이 사냥도 하지 못하게 하면 입에 거미줄을 치라오?”    성칠은 땅이 꺼지게 한숨을 지었다.    뒤이어 성칠은 기준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엊그저께 면회하러 갔을 때 아버지는 ‘통나무의 옹이나 벌레를 주의해라.’고 하더라잖았니? 감옥이여서 말씀하기 불편해 암시한 말씀 같구나. 넌 목수니까 전번에 내 아버지 말씀 전했는데 뭘 암시했는지 알았지?”     “통나무 옹이나 벌레를 주의하라? 알긴 알았소.”     기준은 담배를 말아 뻑뻑 빨면서 아버지 말씀을 되새기면서 곰곰이 생각했다.     한참 후 기준은 머리를 들어 성칠을 바라보면서 무겁게 입을 떼였다.     “그 말을 그대로 풀어보면 통나무의 옹이나 벌레를 주의해 경찰국 사무 청사가 무너지지 말게 하라는 말씀인 거 같소. 자칫 탄로나면 아버지처럼 해를 입을 수도 있지.”     “음.”     기준은 마른기침을 하며 뒷말을 이었다.     “감옥에 갇힌 아버지가 일본 놈들 사무 청사인지 개나발인지 잘 되기를 바라겠소?”     기준은 형의 귀가에 입을 가까이 대고 귀속 말을 했다.     “이전에 목수 간에서 일할 때두 아버지는 통나무 벌레를 파서 물초롱에 던지면서 늘 이랬소.  ‘이런 벌레 먹은 통나무로 집을 지어서 몇해 가겠는가?’ 이렇게 말씀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소. 그 말씀을 연계해 곰곰이 생각해보면 아버지는 분명‘통나무 벌레를 기둥에 박아 넣어 일본 놈들 사무 청사가 무너지게 하라.’고 귀띔한 것 같소.”     성칠은 머리를 끄덕이면서 물었다.    “그럼 옹이는 뭐냐?”    기준은 목수로서 짐작되는바가 있었다.    “옹이 많은 나무를 쓰면 눈에 날게고. 주의는 해야지. 그러나 우리에게 기둥이나 대들보에 옹이 대신 쐐기를 묘하게 박아 넣어 무너지게 하라는 게 같소. 쐐기 하나만 대들보에 박으면 천정무게가 한쪽으로 기울어 몇 해 되지 않으면 아무리 번듯한 청사도 무너질게 아니요?”     성칠은 연신 끄덕이었다.     "오, 거 참 묘수로구나.”      뒤이어 그는 기준의 귀에 대고 뭐라고 쑤군거렸다.     기준은 연신 개탄했다.     “옳소, 옳소, 알았소.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근심하지 마오.”     "아버지 말씀 알아들었으면 이젠 늦추지 말구 경찰국청사를 와르르 무너지게 만들어라."     "알았소."     일이 이쯤 되자 성칠은 이 추운 겨울에 바깥에 말을 쥐고 서있을 독립군 대원들이 근심돼 바깥에 나갔다.    그는 보초를 서는 대원더러 가서 최 소대장에게 운주하 버들방천에 숨어있는 독립군 대원들을 집에 데려다 자게 하는 게 어떻겠는가고 물어보라고 부탁했다.     성칠이 집에 재차 들어간 후 대원은 곧추 마을 동쪽의 최구장의 집으로 달려갔다.     바깥에는 독립군 대원 바우돌이 망을 보고 있었다.    집 안에서는 진달래가 한창 큰아버지 최구장과 맏오빠 경숙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바우돌이 바깥에서 들어와 연통하자 진달래는 바깥에 나갔다.   그는 성칠이 쪽에서 온 독립군 대원의 말을 듣고 좀 생각하다가 말했다.    “성칠 오빠는 쫓기는 몸이어서 동생네 집에 들어가 자긴 틀렸어요. 오히려 여기 우리 큰아버지네 집이 더 편리해요. 내 이제 들어가 큰아버지한테 사냥꾼 친구들이라고 말해보고 여기 와서 하루 밤 묵어 가자요.”     진달래가 집 안에 들어갔다가 인차 나왔다.    “대원들에게 말을 끌고 오라고 하세요.”     “말까지 끌어오면 혹시 일본 헌병 놈들이나 오면 의심을 받지 않겠소?”    “괜찮아요. 큰아버지는 아직 그 놈들 눈에 나지 않았으니까요.”    진달래는 성칠까지 불러다가 독립군 대원들과 함께 최구장의 집에서 하루 밤 묵으면서 푹 쉬었다.    이튿날 장국까지 맛있게 마시고 진달래는 떠나게 됐다.    이른 아침에 최구장은 뒷간에 가다가 총을 잡고 망을 서며 숱한 백마를 지키는 바우돌을 보고 심상치 않은 감을 느꼈다.    최구장은 떠나가려는 진달래를 한쪽으로 조용히 불러 귀속 말로 물었다.    “너희들은 혹시 일본 놈들을 사냥하는 거 아니냐?”    진달래는 한기에 언 철색얼굴에 미소를 지으면서 머리를 끄덕였다.    최구장은 조카에게 마음먹고 귀띔해주었다.    “옛 성인들이 가로사되 ‘자기를 억제하고 례에 맞게 행동하라.’고 하였느니라. 뭐나 중용을 지키는 게 좋아. 일본 사람들이 무력으로    우리를 짓밟으니 좋으냐? 뭐나 무력으로 해결하자고 말아라. 남의 피를 보면 자기도 피를 흘려야 하느니라. 스물도 넘은 계집애 시집은 가지 않고 엉뚱한 일에 삐칠게 뭐냐?”    진달래는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    “귀띔에 고마워요. 너무 근심하지 마세요.”    최구장은 백마를 타고 멀어져가는 진달래를 보고 도리머리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달려가는 백마들의 말발굽소리 요란하고 그 뒤로 하얀 눈꽃이 새뽀얗게 흩날렸다. 눈 덮인 기운봉 저쪽으로 백마들이 자그마한 하얀 점들로 아물거렸다.                                                                        4. 사냥꾼     엄동설한은 새끼를 쳐서 대지에 한기를 내리뜨렸다. 그러나 독립군 대원들의 항일에 달아오른 가슴을 얼구지는 못했다.     진달래는 그날 밤에 바우돌을 데리고 불붙이에 있는 경인오빠한테 찾아갔다.    진달래가 밤중에 문을 두드리고 들어서자 경인은 놀랍기만 했다.    “아니, 얘, 어찌 이 추운 겨울에 왔느냐?”     진달래는 경인오빠와 형님 어금에게 인사를 드린 후 정주간에 앉았다.     어금은 부엌에 내려가 칼 모태에 감자를 돔박돔박 썰어 솥에 넣고 장국을 끓였다. 이윽고 솥에서 김이 쌕 빠져나오면서 구수한 감자장국 냄새가 좁은 방에 구수하게 풍기었다.    한참 경인에게서 그간 이야기를 들은 후 진달래는 비로소 경인도 버치를 결을 버들을 베다가 일본 놈들에게 당한 것을 알게 됐다.    진달래는 어금과 함께 제꺽 아침상을 갖춰 놓은 후 바깥의 바우돌도 불러들였다.    진달래는 아침을 들면서 단도직입적으로 경인에게 말했다.    “오빠, 일본 놈들의 성화에 어디 살겠어요? 우리 함께 일본 놈들을 사냥하면 어때요?”    경인은 진달래를 흘끔 내려다보면서 나지막이 말했다.    “무슨 힘으로 그 많은 일본 놈들을 사냥한다니?”    섬찍해 난 어금은 숟가락을 들다가 말고 신랑을 건너다보았다.    경인은 색시 어금의 눈치를 슬슬 보면서 도리머리 질 했다.    “삯전을 주지 않지 버치마저 결어 팔지 못하게 하니 어떻게 살겠냐?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살 구멍이 나지겠지.”    “일본 놈들을 몰아내지 않고서야 어찌 마음 편히 잘 살 수 있겠는가요?”    “말이 쉽지. 칼이나 사냥총 몇 자루로 어떻게 일본 놈들을 몰아내겠니? 서뿔리 일본 놈들에게 칼을 휘둘렀다가 부모형제들이 다 잘못되면 어쩌겠니? 아버지 말씀처럼 중용을 지키는 게 이 난리에는 제일이야.”    진달래는 한숨을 호 내쉬었다. 그녀는 격양된 목소리로 말했다.    “오빠는 검술이 출중하잖아요? 그 검술이면 얼마든지 일본 놈들의 목을 칠 수 있지 않아요. 사람마다 일떠나 몇 놈씩 잡으면 일본 놈들을 몽땅 쳐 죽일 수 있어요.”    경인은 손을 들어 손사래를 저었다.    “얘, 언성 좀 낮춰라. 요즘 영팔이랑 우리 집을 기웃거린다.”    그제야 진달래는 더 말해도 경인의 머리에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을 직감하였다. 그녀는 감자장국이나 몇 숟가락 뜨네 하며 바우돌이 배불리 먹기를 기다렸다가 진달래는 맛 나는 장국도 먹을 맛이 없어 숟가락을 밥상에 달랑 내려놓았다.    진달래는 불붙이를 떠나면서 실망스러웠다.    성칠은 진달래에게서 조카사위 경인의 말을 듣고 한숨을 후- 쉬더니 진달래를 위안했다.    “사냥꾼들을 묶어세우는 일이 그렇게 식은 죽 먹기겠느냐? 천천히 방법을 대야겠다.”    진달래는 성칠을 믿음에 찬 눈길로 바라보았다.    이튿날 그들은 기운봉 기슭에서 룡천 중대장과 만났다. 룡천 중대장은 성칠과 진달래에게 우시장부근에서 사냥꾼으로 독립군 포수대를 조직할 임무를 맡기고 독립군 대원들과 함께 백마를 타고 장백산을 바라고 개마고원 쪽으로 출발했다.    성칠은 행동과 은신하는데 편리하게 하려고 진달래를 운주동 최구장의 집으로 가서 묵게 하고 혼자 사냥총을 쥐고 수림 속으로 들어갔다.    수림 속에서 성칠은 사냥하면서 어떤 방법으로 사냥꾼들을 묶어세우겠는가고 궁리했다.     토끼 꼬리만한 겨울해가 눈 덮인 서산의 수림 속으로 숨어버리고 영월동 서산에는 어둠의 장막이 내리 드리우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에서 굶은 이리들의 울음소리가 무섭게 들리었다.    성칠은 먼저 엄창렬의 집에 가서 상호를 만나려고 해싿. 상호는 명천 공지에서 도망쳐 집에 돌아왔던 것이다.  평소에 엄창렬 일가를 많이 도와왔기에 말하기 쉬울 것 같았다.    성칠은 사냥총을 들고 눈 덮인 사위를 둘러보았다. 숨이 막힐 듯이 고요했다. 쥐 죽은 듯이 고요한 어둠을 밟으면서 성칠은 슬금슬금 바자에 난 삽작문을 살짝 열었다.    문을 노크하려고 할 때 집 동쪽에서 인기척이 났다.    성칠이 삽작문 뒤에 붙어섰다. 그런데 찬찬히 여겨보니 바로 상호였다.   “상호야.”   “아니, 형님.”    “쉬—”   성칠은 입술에 손가락을 세로대면서 주위를 살폈다.   상호는 성칠의 팔소매를 잡아 집 쪽으로 끌었다.    “다른 식구들을 놀라게 할 게 없다.”    성칠은 상호와 함께 삽작문을 나섰다.   상호는 성칠을 따라 걸으면서 말했다.    “낮에 총소리를 듣고 형님이 근심돼서 아까 가보았소. 때마침 검둥이가 달려와서 꼬리를 휘청휘청 저으면서 끼깅 거리잖겠소. 그래서 큰어머니랑 아주머니랑 모두들 형님이 무사하다고 짐작하고 조금 근심을 덜었소. 그러나 형님을 보지 못해 근심이 태산 같소. 내 가서 형님이 무사하다고 전해야지.”    “먼저 내 말 듣고 가라.”    성칠은 상호의 팔소매를 잡아끌고 집 뒤 산기슭 수림 속으로 들어갔다.    “상호야, 왜 공지에서 돌아왔니?”   그러자 상호는 “흥!” 하고 코 방귀부터 뀌었다.   “그따위 공지에서 일해 봤자 삯전도 받지 못하는데. 차라리 집일을 하는 게 낫지.”   성칠은 머리를 끄덕이었다.   “잘 돌아왔다. 그러나 공지에서 도망치면 일본 놈들이 영팔이랑 시켜 붙잡아갈 게야.”    “하긴 큰아버지가 안 됐소. 우리 삯전을 주지 않는다고 한길수와 대판 싸우다가 감옥에 갇혔으니 말이오.”   성칠은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었다.   “상호야, 일본 놈들을 믿고 일한다는 건 괜한 짓이다. 내 이런 생각을 해봤다.”   그는 사냥총을 들어 보이면서 뒤 말을 이었다.    “우리 사냥이라도 해야 올해 보릿고개를 넘지 않겠니?”    상호는 어둠 속에서 성칠을 쳐다보면서 근심스레 말했다.    “형님, 사냥한다고 형님을 붙잡아가려고 미쳐 날뛰던데 사냥해 되겠소?”    “일본 놈들도 너무 하잖니? 사냥도 하지 못하면 우린 뭘 먹고 살겠니?”    그러자 상호는 이를 뻑뻑  갈았다.      “그 놈들이 어디 우리 생사를 돌보오?”    성칠은 사냥총을 힘 있게 높이 추켜들고 흔들면서 힘 있게 말했다.     “우리는 사냥총을 들고 짐승을 사냥해 연명해야 해. 사냥총으로 우리 고향에서 일본 놈들을 몰아내야 한다. 그래야 편안히 살 수 있다.”    상호는 한숨을 후 내쉬었다.    “그런데 우리 몇이 그 놈들을 다 몰아낼 수 있겠소? 황차 우리 고향에서 몰아낸다고 해도 인차 우시장이나 다른 곳 일본 놈들이 무리승냥이처럼 다시 쳐들어올게 아니오?”    성칠은 상호의 어깨를 꽉 움켜쥐어 흔들면서 신심 있게 말했다.   “우리 영월동과 운주동, 가마골, 신흥동에서 몽땅 들고 일어나면 우리 고향에서 일본 놈들을 몰아낼 수 있다. 생각해봐라. 우리 가만있으면 몽땅 우리 아버지처럼 붙잡혀 감옥에서 죽고 만다. 우리 조선 백성들이 몽땅 들고 일어나면 그 놈들을 몰아내지 못하겠니?”    성칠의 뜨거운 입김이 엄동설한을 날려 보내면서 상호의 얼굴에까지 풍겨갔다. 한참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뒤이어 상호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형님 말이 옳소. 공지에서 도망쳤다고 감옥에 갇히기 전에 사냥총을 들고 일본 놈들을 사냥하다 죽는 게 낫소.”    성칠은 룡천과 진달래 말을 하면서 장백산 항일독립군 말도 해주었다.   상호는 그 말에 힘을 얻었다.   “형님, 사냥총을 들고 형님을 따라 사냥하겠소.”   상호는 머리를 들어 집쪽을 보았다.   “형님, 잠간 집에 들어가서 부모에게 사냥하러 떠난다고 말하고 나올게.”    성칠은 상호의 팔소매를 붙잡았다.   “급히 서둘 필요 없다. 부모들과 하루 밤 더 자면서 잘 말한 후 내일쯤 치마봉 아래로 오너라.”   그러나 상호는 결단성 있게 말했다.    “아니오. 지금 형님은 혼자 위험하오.”     성칠은 더 말리지 않았다. 그는 어둠을 헤치면서 성큼성큼 집 쪽으로 걸어가는 상호의 어두운 뒷모습을 대견하게 지켜보았다.    상호는 집에 들어갔다가 인차 나왔다. 그는 김치 움에 들어가 감춰둔 사냥총을 들고 나왔다. 그는 사위를 둘러보더니 집 뒤 산기슭으로 달려왔다. 성칠과 상호가 김칠백의 집으로 향할 때다.    상호네 집 문이 열리면서 두 그림자가 삽작문을 열고 나왔다.    “상호야, 상호야.”    엄창렬이 허리를 구부정하고 손을 들어 흔들면서 삽작문 안에서 나왔다. 명순이 치마폭을 걷어안고 황급히 뒤따라 달려 나왔다.     상호는 사냥총을 들고 급히 마주 달려갔다.    “아버지, 어머니, 근심하지 마시오. 산짐승을 많이 사냥해야 아버지 기침병도 치료하지.”    명순은 손으로 상호의 얼굴을 만졌다.    “아무튼 몸조심하고 성칠 형님의 말을 잘 들어라.”   성칠은 성큼성큼 뒤따라와 엄창렬 부부에게 인사하고 나서 “근심하지 마오.” 하고 말했다.   엄창렬은 허리를 구부정하고 기침을 쿨룩쿨룩 하며 가쁜 숨을 몰아쉬며 겨우 말했다.   “아무튼 둘 다 몸조심하게. 사냥이야 성칠이 좋은 스승이니까. 시름 놓고 보내겠네.”   상호는 넙적 엎드려 부모께 절을 올리고 성칠을 따라 나섰다.    성칠은 상호와 함께 먼저 강 건너 자기 집으로 발길을 옮겼다.   성칠은 주춤 멈춰서더니 상호한테 귀속 말을 했다.   "우리 집으로 가서 내 무사하다고 기별해라. 만약 뜻밖의 정황이 생기면 서쪽 수림 속으로 달려가라.”    상호는 머리를 끄덕였다.    그는 사냥총을 성칠에게 맡기고 평소처럼 골짜기바닥의 허연 얼음을 스적스적 건너 성칠의 집으로 다가갔다.    성칠은 강둑 버드나무숲 속에서 눈을 깔고 엎드려 총 가목을 으스러지게 틀어잡고 집 쪽의 동정을 살폈다.   “왕, 왕, 왕!”   갑자기 검둥이가 덮쳐왔다.   “휙~ 휙—”   성칠이 휘파람을 불자 검둥이는 어둠속에서도 주인이 있는 곳으로 달려왔다.    “끼깅- ”   검둥이는 몸뚱이를 일으키더니 두발을 거인처럼 우뚝 선 성칠의 가슴에 얹고 끼깅거렸다. 성칠은 한손으로 검둥이 머리를 다독여주었다.    땅! 땅! 땅!   이때 집 쪽에서 총소리가 울렸다. 성칠은 강뚝에 엎드리면서 총소리 난 쪽으로 사냥총을 겨눴다. 어둠속에서 상호가 집안에서 뛰쳐나오고 집안 전등불이 꺼졌다. 상호 뒤로 검은 그림자 셋이 뛰쳐나왔다. 허나 성칠은 총을 쏠 수 없었다. 일본 놈들인지 집식구들인지 알수 없었다.    땅 땅 땅!   뒤따라 나온 검은 그림자들에게서 불빛이 번쩍였다.   땅!    성칠이 쏜 총에 뒤따라 나오면서 총을 쏜 놈 가운데서 한 놈이 푹 꺼꾸러졌다.    상호는 집 서쪽수림 속으로 도망쳤다. 나머지 두 놈이 상호 쪽으로 쫓아갔다.     후에 안 일이지만 일본 놈들은 성칠이네 집안에 미리 들어가 숨어 있다가 검둥이가 온 것을 보고 성칠이 부근에 있다는 것을 짐작하였던 것이다. 하여 성칠의 어머니와 아내를 바 줄로 묶고 수건으로 입을 틀어막은 후 고방에 가둬놓았다. 놈들은 벽에 붙어 서서 숨을 딱 죽이고 성칠이 집안에 들어서기를 기다렸다. 그때 상호가 들어섰다. 놈들은 성칠인가 오해한 채 붙잡으려고 욱 덮쳤다. 상호는 덮쳐드는 일본 놈들을 보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일본 놈들 셋이 뒤쫓아 나왔던 것이다.     땅 땅 땅!    이때 강둑에서 숱한 놈들이 총을 쏴대면서 다가왔다. 성칠의 옆에 있던 검둥이는 검은 그림자들에게 덮쳐나갔다.    “아이유! 이 놈 개새끼!”     영팔의 비명소리 같았다.     성칠은 사냥총으로 상호 뒤로 쫓아가는 두 그림자를 겨눠 또 사격했다.     땅!     한 놈이 푹 꺼꾸러졌다.     땅!    또 한 놈이 명중탄을 맞고 푹 꺼꾸러졌다.    성칠은 사냥꾼의 본능으로 총을 쏜 자리에서 일어나 한길수네 집 쪽으로 달아났다. 뒤에 검은 그림자가 보이지 않자 강을 슬쩍 건너 칠백이네 집 울바자 옆으로 달아났다. 그런 줄도 모르고 왜놈들은 왝왝 소리치면서 강둑에서 눈먼 총질을 해댔다.     그때였다.    총소리를 들은 칠백과 진달래, 칠석이 집안에서 뛰쳐나와 합세했다.    그때 덕성이 뒤따라 나오면서 발을 굴렀다.    “얘들아, 다 가면 난 누굴 믿고 살라니?”    옥녀도 뛰어나와 엉엉 울었다.    “오빠~”    칠백은 성칠의 손에서 사냥총을 받아 쥐고 쳐들어 보이면서 말했다.    “아버지, 근심하지 맙소. 만주에서 가서 만나깁소.”    성칠과 진달래는 서쪽 수림 속에서 상호와 회합했다. 모두들 진달래의 주밀하게 계획한 전술대로 수림 속으로 철퇴했다. 수림 속에     서 진작 바우돌을 비롯한 독립군 대원들이 백마들을 잡고 대기하고 있었다. 모두들 진달래의지휘대로 백마를 타고 수림 속으로 전이했다. 성칠은 달리는 백마를 탄 사람들이 많이 불어난 것을 보았다.     칠백과 칠석 형제는 벌목공지에 가서 헛고생을 하고나서야 형 룡천의 말처럼 성칠을 따라 사냥해야 살 길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그들은 일본 놈들이 무서운 물건짝들이지만 결코 그 놈들이 무서워 집에서 굶어 죽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칠백이네 형제가 최동욱과 그런 의향을 말했다.     그러나 동욱은 그들을 따라나서지 않았다. 아내가 앓는 것도 있고 무모하게 일본 놈들이 말리는 사냥을 하다가 일본 놈들에게 붙잡혀 혼날 까봐 그만뒀던 것이다.     칠백이 찾아가서 아무리 동원해도 동욱은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쌀은 다른 방도로 구할 수 있겠지만 총칼을 흔드는 일본 놈들의 등살에 하루도 살수 없을 거다.”      별수 없었다.     성칠은 도리머릴 질 했다.     (사냥은 강요할 수 없지.)    성칠 등은 백마를 잡아타고 눈 깜짝할 새에 치마봉 기슭에까지 달려갔다.    그 곳에서 룡천 중대장을 비롯한 2분대 독립군 병사들이 벌써 치마봉 기슭 수림 속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그들은 룡천 중대장의 지휘아래 즉시 박달령을 넘어 100여리 밖으로 쏜살같이 전이했다.     눈 덮인 수림 속 여기저기에서 굶주린 이리떼들이 울부짖고 있었다. 룡천과 진달래, 성칠은 조용한 곳에 가서 금후 대책을 의논했다.    룡천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여기서 잠시 휴식정돈한 후 내일 밤에 일본 놈들의 림산 작업소를 습격해 저목장을 기습하기오. 목재를 몽땅 불태워 버리기오.”    “글쎄요. 어쨌든 이번 임무를 빨리 완수하고 인차 장백산지구로 철퇴하는 거 상책인 거 같아요. 하루라도 더 끌면 일본 놈들이 덮쳐들 거요.”     진달래가 맞장구를 쳤다.    한참 생각에 잠겼던 성칠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니요. 우리는 더 많은 젊은이들을 우리 포수대에 묶어세워야 하오. 먼저 금방 포수대에 들어온 사람들의 마음을 잡아야 하오. 우선 말한 대로 사냥부터 해서 저 젊은이들의 집식구들을 기아에서 구해야 하오. 사냥한 단맛을 봐야 더 많은 젊은이들이 우리 포수대에 들어오게 되오.”    룡천은 성칠의 말에 머리를 끄덕였다.    “맞아. 난 미처 생각하지 못하였네. 내일 먼저 사냥부터 합세. 모레쯤 사냥물을 마을에 가져갑세. 저놈 저목장을 불태워 버립세.”    성칠은 칠백이랑 있는 데로 돌아왔다.    “우리 삭정이를 가져다가 우등 불을 피우자. 새우잠이라도 자야 내일 사냥하지.”    “형님 말이 옳다. 어디 추워서 견디겠니?”    바우돌이 보초서고  모두들 어둠을 무릅쓰고 삭정이를 주어왔다. 성칠이 부시를 쳐서 불꽃을 일구자 이윽고 수림 속에 우등불이 활활 피여 올랐다. 모두들 추워 우들우들 떨면서 이 밤을 어떻게 보낼까 근심하다가 욱 우등 불에 모여들어 불을 쪼였다.    이때 이리떼들이 슬금슬금 다가왔다.    땅!    성칠이 몸을 돌려 쏜 사냥 총알에 우등 불쪽으로 슬금슬금 기어오던 이리 한 놈이 폴싹 꺼꾸러졌다. 모두들 사냥총을 거머쥐고 불똥이 왔다 갔다 하는 수림 속을 노려보았다. 굶주린 이리떼는 자기 동료가 쓰러졌건 말건 물러서지 않았다. 그 놈들은 토론이나 한 듯이 울부짖더니 미친 듯이 덮쳐왔다.     땅 땅 땅!    독립군 대원들과 포수대 사냥꾼들이 일제히 총을 쏘았다.   사냥 경험이 없는 독립군 병사들과 칠백이랑 눈 위에 엎드리거나 무릎을 꿇고 총을 쏘아댔다.    성칠과 진달래만은 나무에 기댄 채 꿋꿋이 서서 총을 쏘아댔다.    “서서 사격해! 승냥이들과 싸울 땐 서서 사격해야 된다. 그래야 승냥이들이 달려들어도 머리나 목 같은 요해처를 물리지 않아!”    성칠의 말에 모두들 일어나 나무 뒤에 기대서서 악을 쓰면서 덮쳐오는 이리떼를 향해 사격했다. 십여 마리 이리가 쓰러지자 이리떼들은 물러갔다.     이튿날 동녘하늘이 희붐히 밝아올 돌아보니 아직도 숨이 채 지지 않은 이리들이 바둑거리면서 사람들을 노려보는 것이었다.    성칠은 비수로 바둑거리는 이리의 숨통을 찔러 죽이고 나서 웃으며 걸걸한 목소리로 말했다.    “첫 사냥물이 꽤나 많군. 허허허.”    칠백은 환한 웃음을 지으면서 동을 달았다.    “이거면 우리 집식구들이 한 보름은 실컷 잡숫겠다. 시장에 가서 팔아도 한 달 먹을 쌀은 사겠다.”    칠석이랑 좋아서 싱글벙글 웃었다.    “사냥해야 산다니까.”    “성칠 형님을 따라 사냥에 나선 게 옳아. 사냥해야 살 수 있어.”    “하하하.”    눈 덮인 밀림 속에서는 첫 사냥을 한 기쁨에 겨운 웃음소리가 호탕하게 울려 퍼졌다. 그들은 우등 불에 이리 고기를 구워 실컷 먹고 눈 속에 숨어 굳 잠에 곯아떨어졌다.    해가 다시 지면서 어둠의 장막이 서서히 드리우자 그들은 백마에 언 이리를 처매고 다시 명천의 고향을 바라고 말을 달렸다.                    5. 저목장을 습격    성칠은 눈보라가 윙윙 사납게 휘몰아치는 영월동 서쪽 수림까지 도착하자  무시무시한 공포가 도사리고 있는 고향 마을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하염없는 근심걱정이 부모형제들한테로 휘몰려가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한참 후 그는 진달래를 찾았다.    “아무래도 엄마와 처가 근심되는구나. 헌데 내 집에 가본다는 건 풀 섶을 지고 불구덩이에 뛰어드는 격이지. 온종일 궁리했는데 검둥이를 또 보내야겠다.”     진달래는 머리를 끄덕이면서 영월동쪽을 내려다보았다.    성칠은 쪽지를 개 귀구멍에 끼워 넣었고 개 잔등에 이리고기덩이 두개를 매달았다.    성칠은 개 대가리를 쓰다듬으면서 사람에게 말하듯이 일러주었다.    “검둥아, 집에 가서 꼬리를 흔들면서 어머님께 기별해라.”    “끼깅~”    검둥이는 꼬리를 휘청거리다가 수림 속을 떠나 영월동 쪽으로 씽 달려갔다.    룡천은 마을에서 온 사냥꾼들에게 조용히 말했다.    “칠백과 동욱은 사냥한 이리 고기를 마을 사람들에게 나눠줘라. 식량난으로 헤매는 마을사람들에게 사냥하는 길만이 살 길이라는 걸 알려줘야 해.”    모두들 머리를 끄덕였다.    진달래가 덧붙였다.    “금방 검둥이를 보냈지만 시름이 놓이지 않는군요.”   칠백은 성칠을 돌아보면서 말했다.    “내 아내를 시켜 형님네 집에 가서 큰엄마하구 아주머님을 보고 기준형님네 집에 가라고 전하겠소.”    성칠은 칠백의 어깨를 힘 있게 움켜쥐며 머리를 끄덕였다.    며칠 후에 칠백은 철규, 룡철, 룡구 동욱까지 데리고 산속으로 들어왔다. 일본 놈들의 총알을 먹고 죽을까봐 무서워서 사냥을 하지 못하겠다던 그들이 아닌가. 그들도 사냥을 해야만 살 길이 있다는 것을 피부로 느꼈기 때문이다.    최동욱이 포수대에 들어온 데는 피눈물 나는 사연이 있었다.    그의 처 박경돈은 앓는 몸이었지만 아주 자색이 예뻤다. 진작 눈독을 들이고 있던 야마모도 소장 놈이 음충한 눈길로 그녀를 노리고 있으리라고는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다.     어느날 오전, 야마모도는 마을의 서쪽산림을 돌다가 갈증이 나서 마을로 내려왔다. 그는 마을의 서쪽으로 첫 집인 동욱의 집을 보는 순간 아래배로부터 찡 하고 뻗는 정욕을 내리누를 길이 없었다.    그는 먼발치에서 한참이나 동욱이 있는가 집 안을 기웃기웃 살피다가 스적스적 다가갔다.     (어째 집안이 조용하지? 동욱의 처마저 없으면 어쩐다?)    그가 마른 침을 꼴깍 넘기면서 다가가 동욱의 집 안을 들여다보니 동욱은 보이지 않고 동욱의 처만 구들을 쓸고 있지 않겠는가? 검정치마 아래 드러난 새하얀 종아리와 수척해진 하얀 복숭아얼굴을 보는 순간 야마모도소장은 온 몸의 혈관에서 끓어 넘치는 정욕을 참지 못하면서 집안에 성큼 들어섰다.    “아니, 깜짝이야!”    최동욱의 아내가 구들을 쓸던 빗자루를 쥔 채 놀란 눈길로 야마모도를 쏘아보았다.    “에헴, 목이 말라. 냉수나 한바가지 주게나.”    야마모도는 마른기침을 하면서 목 단추부터 벗겼다.    동욱의 처는 빗자루를 놓고 물독에 가서 냉수 한바가지를 펐다. 그녀는 한손으로 바가지 밑굽에 흘러 떨어지는 물방울을 닦으면서 정주간 바닥에 선 야마모도 소장에게 주었다.     야마모도는 물바가지를 받아 냉수를 꿀떡꿀떡 마셔버렸다. 그는 왼손으로 입술에 묻은 물을 쓱 닦더니 집안을 흘끔흘끔 살피면서 지껄여댔다.     “으흠, 동욱이, 어데 갔소까?”    동욱의 처는 두 손을 마주 비비면서 바깥을 내다보았다.    “땔나무 하러 산으로 갔어요. 이제 곧 올거요.”    “땔나무? 그랬소까?"    그 놈은 야수의 눈빛을 번뜩였다.    "산의 나무를 마구 찍었쏘까? 안 되지. 허나 이 야마모도 소장이 이렇게 눈을 감아 보이면 일 없쏘다.”    야마모도 소장은 눈을 질끈 감아 보이면서 지껄였다.   그는 물바가지를 동욱의 처 앞에 내밀었다. 그는 물바가지를 받으려는 동욱의 처의 손을 잡아 확 나꿔챘다.    “왜 이래요? 소리칠래요.”    “그래, 소리쳐 봐. 산에 간 동욱이 와? 알면 너 목을 칠게다.”    “이 손 놓으세요.”    동욱의 처는 손을 빼려고 해도 안 되자 야마모도의 손을 꽉 깨물었다.    “아이고, 요년 정 죽고 싶어?”   야마모도는 물린 손이 아파 오만상을 찡그리면서 동욱의 처 손을 놓아버렸다. 동욱의 처가 경계심을 늦추고 바가지를 쥐고 돌아서는 순간이었다. 야마모도는 동욱의 처 허리를 꽉 껴안고 구들바닥에 쓰러 눕히었다. 갑자기 일어난 일이라 동욱의 처가 아무리 기를 쓰고 일어나려고 해도 우악스러운 야마모도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녀가 아무리 바둑거리고 깨물어도 용빼는 수가 없었다. 야마모도는 동욱의 처를 깔고 들어앉아 치마 자락을 올리기 시작했다. 집안에서는 악을 딱딱 쓰는 그녀의 모지름 소리에 울음소리가 반죽돼 울려 퍼졌다…    동욱이 산에서 땔나무를 해 지고 집 울안에 들어섰을 때에는 야마모도에게 처가 당한 후였다. 야마모도는 군도를 거들거리면서 집 울안에서 나와 산 쪽으로 올라가고 있었고 집안에서는 처의 울음소리가 간간히 들리었다.    나무 짐을 활 벗어던지고 집안으로 뛰어 들어간 동욱은 구들바닥에 꿇어 앉아 흐터러진 머리카락을 훔치며 엉엉 우는 처를 보고 모든 것을 짐작했다.     “그놈새끼 대가리를 콱 찍어놔야지.”    성이 날대로 난 동욱이 씩씩 바쁜 숨을 몰아쉬면서 화닥닥 바깥에 뛰쳐나가 땔나무 짐에서 도끼를 뽑아들고 뒤쫓아나갔다. 그때 칠백 형이 마을동구 밖에까지 뒤 쫓아가 동욱의 손에서 도끼를 빼앗아냈다.    “웬 일이야?”    동욱은 칠백 형의 손을 마구 뿌리치면서 “이걸 놓소.” 하고 고함치면서 몸부림쳤다.    “에이, 씨, 저 놈을 죽이고 나도 죽자.”    동욱은 형에게 도끼를 빼앗긴 후 팔소매로 눈물을 쓱쓱 닦았다.   칠백은 집 안에서 울고 있던 제수를 보고 인차 눈치 챘다. 호리호리하게 생긴 동욱의 눈에서도 복수의 불길이 이글거렸다.    “원수는 꼭 갚아야 해. 허나 우리 둘의 힘으로는 안 돼! 성칠 형님을 따라 포수대에 들어가자. 한데 뭉쳐 야마모도와 개다리들까지 몽땅 죽여 버리자.”    후에 동욱이 집으로 와보니 글쎄 아내가 대들보에 목을 매고 둥둥 달려있지 않겠는가?    동욱은 경돈을 대들보에서 풀어 내리어 구들바닥에 내리워놓았다. 그런데 경돈은 이미 숨이 떨어졌었다.   동욱은 형과 함께 아내를 뒷산에 묻고 핍박에 의해 포수대에 들어왔던 것이다.    성칠은 동욱의 어깨를 다독이며 문안했다.    “아내를 잃어 얼마나 비통하겠느냐? 우린 꼭 원수를 갚아야 한다.”     동욱은 머리를 끄덕였다. 그는 이젠 눈물이 더는 나오지 않았다. 머리에는 복수심 밖에 없었다.    성칠은 그제야 한숨을 후~ 내쉬었다.    그는 영월동쪽의 밤장막이 드리운 칠흑 같은 밤하늘을 멍하니 바라보면서 한길수의 집에서 시종 질을 하는 은녀랑 득호랑 근심됐다.    후-    성칠은 눈 덮인 땅바닥이 꺼지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룡천이 불러서 진달래와 성칠은 조용한 수림 속에 갔다.    룡천은 눈보라가 아우성치는 밀림의 어둠 속에서 진달래와 성칠을 둘러보면서 말했다.    “우린 성칠 성님 말대로 사냥부터 해서 마을사람들의 인심을 얻었고 포수대를 묶어세웠소. 돌아오는 봄에 일본 놈들이 경찰국 사무 청사를 짓지 못하게 해야 하오. 이젠 기회를 보아 저목장을 불태워 버리기요.”    성칠이 찬동해 나섰다.    “저목장을 불태워 버리기요. 개 같은 놈들이 우리 고향에서 독사처럼 똬리를 틀고 들어앉아있게 할 순 없소.”    그러고 나서 뒤 말을 덧붙였다.    “마을사람들이 먹을 쌀을 해결하게 계속 사냥하면서 기회를 봐 저목장에 불을 지르기요. 저 한길수놈도 가만 놔둘 수 없소. 그 놈은     일본 놈들의 개다리란 말이요. ”    룡천은 좀 궁리하다가 “그렇게 하자이.”라고 결단을 내렸다.    그들 셋은 사냥꾼들과 유격대 대원들을 이끌고 백마를 타고 치마봉 쪽으로 전이했다.     원시림에서는 맵짠 산바람에 눈보라가 흩날리며 무서운 소리를 냈다. 여기저기에서 주린 산짐승들의 울음소리가 무섭게 들려왔다.    룡천과 진달래, 성칠은 한쪽에 가서 작전을 꾸몄다. 룡천이 독립군 대원 몇을 데리고 저목장의 일본 보초병 놈들을 해치우고 성칠이 칠백과 동욱을 데리고 저목장에 불을 지르며 진달래는 나머지 대원들과 사냥군들을 데리고 돌발사태에 대비해 엄호하고 접응하도록 했다.    진달래는 대원들과 사냥꾼들을 몇 개 소조로 나눠 삼면으로 저목장 주위 수림 속에 매복해 저목장과 영월동의 동정을 면밀히 주시하게 한 후 룡천한테로 갔다.    “왜 왔어?”    진달래는 주머니에서 조약돌을 꺼내 쳐들어 보였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저 놈에게 접근하기 힘들 거 같아서 왔어요.”     룡천은 머리를 끄덕였다.    칠백과 칠석, 상호 등은 먼저 가만히 마을에 내려가 이리 고기를 집에 가져다 두고 돌아왔다.    그들이 무사히 돌아 온 것을 보자 룡천과 진달래는 바우돌과 억복 등 몇몇 건장한 대원들을 데리고 하얀 보를 어깨에 매고 비수를 뽑아들고 수림 속에서 살금살금 저목장 대문 어귀에서 보초를 서는 일본 놈들에게 다가갔다.    수림에서는 눈보라가 기승스레 윙윙 휘몰아치는 소리가 들릴 뿐이었다. 하얀 보를 들쓴 대원들을 보초병 놈은 발견하지 못하고 총창을 비껴들고 철조망 바깥에서 왔다 갔다 했다.    일본 보초놈은 휘몰아치는 눈보라 소리에 수림까지 다가간 룡천 등을 발견하지 못했다.    룡천이 나무 뒤에 붙어 서서 손을 홱 저었다.    바우돌과 억복이 쏜살같이 보초병 놈에게 덮쳐들어갔다.    “누구야?!”    그제야 나무 뒤에서 덮쳐 나오는 그들을 발견한 보초병 놈이 총을 벗겨들며 소리쳤다.    “쉭-”    딱!    “억!”    보초병놈은 진달래가 먼발치에서 뿌린 돌에 이마빼기를 맞고 총을 떨어뜨렸다. 억복과 바우돌이 번개같이 달려들어 비수를 몇 번 번쩍이었다. 보초병 놈은 네각을 쭉 뻗어버린 채 바우돌에게 줄줄 끌리어 허연 수림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억복이 어느 새 일본 보초병 놈의 옷을 입고 철갑모를 쓰고 총칼을 들고 저목장 대문 어귀를 지켰다.    성칠은 칠백과 동욱을 데리고 미리 준비한 기름통들을 들고 어둑컴컴한 저목장 통나무 무지에 다가갔다. 그때까지 등잔불이 켜진 임산주재소 저목장 사무실에서는 아무런 동정도 없었다.    성칠과 칠백, 동욱은 저목장 통나무 세 개 무지들에 나뉘어 가서 통나무들에 기름을 치고 거의 동시에 불을 싸질렀다.    그들이 대문 어귀를 벗어날 때에야 불을 발견했는지 저목장 사무실에서 일본 놈들이 총창을 빼들고 뛰어나왔다.    룡천과 진달래는 독립군 병사들과 사냥군을 지휘해 사격을 가했다.    땅! 땅! 땅땅!    요란한 총소리와 함께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뛰어나온 일본 놈들이 보기 좋게 쓰러졌다.    일본 놈들도 저목장 사무실 벽에 기대서서 맞총질을 했다. 그새 저목장 통나무 무지에는 집채 같은 불길이 활활 타올랐다.    놈들은 뭐라고 꽥꽥 소리치면서도 번져가는 불을 끌 새 없었다.    진달래는 활활 타오르는 불길을 빌어 저목장 사무실 구새 목에 기대서서 꽥꽥 고함치는 지휘관 놈에게 돌멩이를 날렸다.    쒹-    딱!   “아이고, 이다이(아파)!”   야마모도 소장 놈은 이마빼기를 붙들고 구새에 기대섰다.   땅!   그때 성칠이 나무에 기대서서 사냥총으로 한방 갈겼다.   “어이쿠!”   야마모도 소장 놈은 이마를 놓고 다시 쳐들었던 군도마저 뚝 떨어뜨렸다.    동욱은 성칠의 손에서 사냥총을 빼앗아 야마모도 소장 놈에게 겨누었다.    땅!   총소리와 함께 거의 동시에 야마모도 소장 놈이 구새 목에 쓰러졌는지 엎드렸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 놈이 통나무 쪽으로 엉금엉금 기어가면서 고함치는 것이 보였다.    “저 놈 새끼를!”    최동욱은 사냥총에 장탄해 그쪽으로 겨누었다.   그때 룡천이 명령했다.    “철퇴!”    최동욱은 시야에서 벗어나는 야마모도 놈에게 사격했다.    땅!    허나 야마모도는 통나무 뒤에 몸을 숨긴 뒤였다.   성칠은 사냥총을 틀어쥐고 악을 쓰며 고함치는 동욱을 마구 끌고 수림 속으로 들어갔다.    “원수는 후에 갚아도 돼! 가자!”    “이번에 저 원수 놈을 죽여야 해!”    “가자!”    성칠과 칠백은 양쪽에서 동욱을 마구 끌고 수림속으로 깊숙이 들어가버렸다.   뒤에서는 삼단 같은 세찬 불길이 수림과 영월동을 환히 밝히면서 보기 좋게 활활 타 번지고 있었다. 공포에 찬 저목장 안에서는 일본 놈들의 죽어가는 이리 소리 같은 비명소리가 간간히 들려왔다. 왝왝 고함치는 소리도 섞여 밤하늘을 괴롭혔다.  
30    장편과학환상소설 黄泉的幽灵(6) 댓글:  조회:2132  추천:0  2015-07-08
                                             제21장 지구촌의 우산        어느 날, 노르망디 예리나 여대통령은 하늘 대형형광판에서 아카시아가 뱀 섬나라와 평화협정을 맺는 특대뉴스를 보고 노발대발했어요.       “괴물 꼬마대통령이여, 진짜 버새 왕의 이간질에 놀아나겠어요? 정신 차려요. 아카시아와 노르망디가 싸우면 뱀 섬나라 오랑캐들 밖에 어부지리를 할 게 아닌가요.”        괴물 꼬마대통령도 맞대구했어요. “적반하장이라고 전번에 우리 열대우림에 헬기를 보내 호랑이 노왕 딸의 가죽을 벗기어 가려고 미쳐 날뛰지 않았어? 그러고서도 지금 평화적으로 보내려는 우리 아카시아와 뱀 섬나라를 삼촌 불란 지설로 이간질 하려는 건가요?” 예리나는 하늘 대형형광판이 모자랄 정도로 두 팔을 벌리어 보이었어요.         “NO! NO!"         " 건 뱀 섬나라 오랑캐들이 평화의 허울을 쓰고 암암리에 당신의 신하를 하나하나 없애기 시작한 거요. 당신은 천리 혜안을 가졌다고 해도 한 치 악마의 속과 착한 사람 속은 가려보지도 못하는구먼요. 난 아카시아의 악마 대명사인 죤슨의 딸이지만요. 지구촌과 인류생존을 위협하는 악마를 증오하고 평화를 사랑하는 노르망디의 여대통령이라는 걸 잊지 마세요.” “저도 아마존 열대우림, 아니, 지구촌의 평화를 위해 평화협정을 체결했을 뿐인 걸.” “평화를 위한 그대의 마음은 고마워요. 허나 뱀 같은 오랑캐들을 주의하세요.” 말을 마치자 예리나는 하늘 형광판에서 사라져 버리었어요. 괴물은 코끼리 코를 흔들며 열대우림에서 스적스적 걷다가 코가 간질간질 가려워서 견디기 힘들어 긴 코를 하늘에 대고 흔들어 보았어요. (왜 이래?) 클론바우 18세는 지축을 쿵쿵 울리면서 호수가로 걸어가 긴 코끼리코를 호수 물에 헹구어 보았어요. 그래도 자꾸 근질근질해났어요. 이게 뭐죠? 나중에 긴 코가 아파나더니 콧구멍에서 피가 쿨쿨 흘러 호수 물을 벌겋게 물들이었어요. 그가 호수 물에서 코끼리 코를 드는 순간 어디에서 나타난 쥐새끼들이 훈련이나 받은 듯이 긴 코끼리 코에 줄지어 달려 들어갔어요. “아이고, 이 놈 쥐새끼들이, 흥!” 클론바우 18세가 콧방귀를 뀌자 조그만 쥐새끼들이 콧구멍에서 튕겨 나와 호수 물에 날아가 촐랑촐랑 처박히었어요. 그런데 고 놈의 쥐새끼들이 물에서 폴짝폴짝 뛰어서는 또 한사코 괴물 클론바우 18세의 콧구멍을 노리고 딱딱 기를 쓰면서 달려들었어요. “야, 이 놈들아, 내 콧구멍에 꿀이라도 있다고 이래?” 클론바우 18세가 “흥!” 하고 쥐새끼들을 풀어 호수물에 처넣었어요. 그래도 소용 없었어요. 쥐새끼들은 또 긴 코에 결사적으로 달려들었어요. 신경질이 난 괴물은 코를 마구 휘둘러 쥐새끼들을 팽개치고 쇠기둥 같은 발로 마구 짓밟아 죽여 버리었어요. 그런데 저게 뭐예요? 이번에는 어데서 날아왔는지 숱한 땅콩 알 만한 똥 벌들이 마구 덮쳐들었어요. 똥 벌들은 털이 부스스한 괴물의 온 몸에 다닥다닥 매달리어 독침으로 쏙쏙 찔렀어요. “사람 살려요!” 괴물은 비명을 지르며 황급히 호수 물에 풍덩 뛰어들었어요. 새하얀 물기둥이 십여 미터나 치솟아 오르고 물보라가 사처에 튕기어났어요. 순간 글쎄 호수 물에서 불빛이 칙칙 반짝이더니 똥 벌들이 무리로 죽어 물 위에 둥둥 뜨는 것이 아니겠어요. 괴물의 그 모양을 왕궁 지하벙커에서 구경하던 버새는 입을 싸쥐고 키득거리었어요. “아무리 괴물이라고 해도 어찌 똥 벌이나 벼룩이, 쥐 같은 생물화학무기를 담당하겠어? 이제 온 몸에 독이 타들어가서 빈 가죽만 남을 거야.” 밴새 총사령관도 맞장구를 치었어요. “전번에 평화협정을 맺으러 가면서 비행기에서 뿌리어 놓은 생물무기가 이제야 효력을 보기 시작하는구먼. 저 놈들이 이제 몰살할 거야! 으하하하~” 버새 형제는 인류를 해칠 대단히 위험한 생물과학자들이었어요. 그는 조왕돌의 과학연구 성과를 약탈해 가져다 벼룩과 똥 벌, 쥐 등 미형로봇에 전염병이나 독 바이러스를 발라 숱한 생물화학무기를 생산해냈어요. 이런 벼룩과 똥 벌, 쥐 등 미형로봇은 지령에 따라 괴물을 돌연히 습격할 수 있었죠. 버새 왕은 슬그머니 동생을 경계하기 시작했어요. (이 놈이 언젠가는 저런 미세생물화학무기로 나를 죽이고 왕위를 찬탈할 수도 있어. 이 놈을 어쩌지? 그저 그냥…) 순간 버새 왕은 의심과 더불어 고독감과 죽음의 공포에 시달리기 시작했어요. 한편 아마존 열대우림에서 클론바우 18세 외에도 그의 아들 클론바우 19세 그리고 호랑이 왕 카시마, 사자 왕 비컨, 원숭이 왕 혹달개 등 숱한 야수들과 인디안 인들도 똥 벌이 아니면 쥐새끼, 벼룩 등 미형로봇의 공격을 받고 있었어요. 실로 로봇벼룩은 폴짝 폴짝 서너 미터 씩 뛰는 바람에 발견하기도 잡기도 힘들었어요. 괴물 같은 클론바우 가족이나 사자, 호랑이들은 벼룩이나 똥 벌에게 당하기만 했어요. “호수에 뛰어들라!” 괴물 꼬마대통령의 호령 소리를 듣고 호랑이들과 사자들은 몽땅 호수에 뛰어들었어요. 칙칙! 섬광이 번쩍번쩍 하더니 로봇벼룩과 로봇 똥 벌들이 합선돼 죽어 버리었어요. 그러나 벼룩로봇이 아닌 진짜 벼룩은 어찌 하는 수가 없었어요. “방역일군들을 불러 오라!” 클론바우 18세는 대통령궁에 돌아가 용상에 올라 앉아 호령했어요. 이윽고 뛰어든 하얀 옷을 입은 방역일군들은 꼬마대통령의 몸에 소독약을 치고 살충제를 쳤어요. 그제야 벼룩이가 죽어 땅바닥에 떨어졌어요. 클론바우 18세는 사발 눈을 슴벅이며 땅바닥에 한 벌 널린 벼룩을 보고 소름이 쭉 끼치었어요. “뛸 데 없이 간사한 뱀 섬나라 놈들이 뿌리고 간 생물화학무기야. 저 교활한 악마들이 평화협정서 먹물이 마르기도 전에 언감 호랑이 콧구멍을 들쑤시어?” 괴물은 방역일군들을 둘러보며 호령했어요. “이게 뭔가? 핵폭탄도 아니고 벼룩이, 쥐새끼, 똥 벌에 당해 이 꼴이 되다니? 당장 생물화학살상무기를 말끔히 제거해! 흥!” 그의 콧방귀에 앞에 놓였던 화분 통이 허망 씽- 날아나 쿵 떨어져 깨졌어요. 방역일군들이 우르르 뛰어 나간 후였어요. 꽈르릉 꽝꽝! 천둥 같은 요란한 소리가 울렸어요. “뭐야?!” 클론바우 18세 꼬마대통령이 파초 같은 귀가 뻘쭉해 소리 나는 쪽을 사발 눈으로 바라볼 때었어요. 맥도 총사령관이 헐떡거리면서 뛰어 들어왔어요. “뱀 섬나라 놈들이 우리 아카시아의 핵발전소를 폭격했습니다.” “뭐라고? 핵전쟁이구나!” 맥도 총사령관은 이마를 짚고 푹 수그린 괴물 꼬마대통령의 사자머리를 쳐다보며 뒷말을 이었어요. “보십시오. 뱀 섬나라 오랑캐들은 안팎이 다른 놈들입니다. 평화의 허울을 쓰고 군국주의 부활을 꿈꾸면서 시퍼런 칼을 갈아왔습니다. 간사한 놈들은 항상 다른 나라들을 이간질해놓고 어부지리를 했습니다. 진짜 남의 집에 불이 난 틈에 도둑질을 하는 못된 도둑놈들입니다.” 한참 후에야 클론바우 18세 꼬마대통령은 천천히 사자머리를 들었어요. “다 못난 내 탓이네. 이번엔 뱀 섬나라 오랑캐들을 절대 용서 못해!” 씨-융- 쾅! 미사일 한 방이 호수에 박혀 폭발했어요. 허연 물기둥이 몇 십 길이나 치솟아 올랐어요. 물방울들이 원목 대통령궁 마당에도 날아와 떨어졌어요. 맥도 총사령관은 괴물 꼬마대통령을 모시고 대통령 지하벙커로 들어간 후 사실대로 보고했어요. “노르망디 예리나 여대통령은 톰 사령관에게 뱀 섬나라 오랑캐들의 소굴을 치라고 명령했습니다. 톰 사령관의 동생 맬쓴 사단장은 뱀 섬나라 본토에 쳐들어가 원전부터 폭격했습니다. 뱀 섬나라 오랑캐들이 하와이를 공략하고 우리 본토에 상륙해 오래지 않으면 아마존 열대우림을 침범하게 됩니다. 독은 독으로 친다고 우리도 핵무기로 뱀 섬나라 왕궁을 까부십시다.” “핵전쟁은 안 돼! 지구촌이 진짜 끝장나겠어! 상규무기로 뱀 섬나라에 쳐들어가 오랑캐들을 응징하라!” “옛!” 괴물 꼬마대통령만 남은 지하벙커에는 납덩이같은 침묵이 한참 어둠의 장막을 지지누르면서 흘렀어요. 이때 뒤에서 마른 기침소리가 몇 번 들리었어요. 클론바우 16세가 동굴 막장에서 나왔어요. 괴물 꼬마대통령은 할아버지를 부축해 침대 같은 소파에 앉혔어요. “얘들아. 내게 뱀 섬나라 오랑캐들을 도륙 낼 묘책이 있다.” “예?” 희미한 등잔불빛에도 사발 같은 눈에 희망의 빛이 번뜩이는 것을 볼 수 있었어요. “맨 군사로는 뱀 섬나라 놈들의 씨를 말리지 못해.” 괴물 꼬마대통령은 호기심이 부쩍 동했어요. “어서 얘기해주십시오. 할아버지!” “누가 듣겠다. 언성을 낮춰라!” 클론바우 18세는 전지불로 지하벙커 구석구석을 비춰 보았어요. “파리나 벼룩이 없는지 잘 봐야지요. 뱀 섬나라 놈들은 미세로봇이 발달해 첨단도청기로 우리 대화를 도청할 수도 있어요.” 클론바우 18세는 지하벙크 구석에 가서 할아버지 손바닥에 손가락으로 “손바닥에 글을 써주십시오.”라고 썼어요. 클론바우 16세는 등잔불 밑에 가서 솥뚜껑 같은 손자의 손바닥에 글을 썼어요. “O3” 괴물 꼬마대통령도 할아버지 손에 “O3”을 쓰고 나서 “맞습니까?” 하고 귀속 말로 물었어요. 클론바우 16세는 대답 대신 손자의 두 손을 굳게 잡아 흔들었어요. “구체방도를 알려 주십시오.” 그들의 대화는 손바닥에 무형의 글로 연이어 씌어졌어요. “오존층을 구멍 내 뱀 섬나라 악마들을 없애라.” 클론바우 18세는 뒤로 주춤 물러섰어요. 그는 너무나도 당황해 그만 손바닥에 글씨를 쓸 새 없이 높은 소리로 떠들었어요. “아니, 오존층은 태양의 자외선을 막는 지구촌의 우산이 아니고 뭔가요? 그 보호 우산에 구멍이 나면 지구촌의 모든 생물이 몽땅 훼멸되지 않을까요? 오존층을 회복하려면 몇 백 년이 걸릴 텐데요. 자칫 우리 인류가 스스로 자기 무덤을 파는 거 아닙니까? 절대 안 됩니다.” 클론바우세는 황급히 손자의 입을 막더니 자기 손바닥에 또 뭔가 썼어요. “정상인들이 몽땅 죽을 만큼 오존층을 살짝 구멍 내면 돼. 정상인보다 가죽이 두터운 우리 클론바우 가족과 호랑이, 사자, 원숭이들은 살아 남을수 있어. 하마, 악어, 고래 같은 수중 동물까지도 살아남을 수 있어. 우리 가족이 먹고 살기는 문제없다.” 괴물 꼬마대통령은 사자머리를 가로 흔들었어요. “상규무기로라도 얼마든지 뱀 섬나라 오랑캐들을 소멸할 수 있습니다.” “NO! NO!” 클론바우 16세는 어깨를 들썩이더니 두 팔을 펴 보이었어요. “아니야, 난 1100년을 너머 살면서 계속 이 문제를 고려해 왔다. 지구촌에 악마가 존재하는 한 편안한 날이 없어. 만물의 영장이란 놈들이 세상 만물 가운데서 욕심이 제일 많고 제일 교활하고 악독해. 그 놈들이 존재하는 한 지구촌의 생태환경은 온전히 살아남을 수 없어. 고육지책으로 지구촌에서 그자들을 훼멸시키는 건 지구촌의 생태환경을 보호하는데 장구지책인 거 같아. 핵폭탄으로 얼마든지 해낼 수 있어.” 괴물 꼬마대통령은 사자머리를 세차게 흔들었어요. “NO!" 괴물 꼬마대통령은 할아버지의 두 손을 꽉 붙잡고 애원했어요. "건 절대 안 됩니다. 옛날에 아버지가 그 전술을 썼다가 천여 년을 두고 얼마나 세인들의 질타를 받았습니까? 지구촌을 통일해 통째로 가진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살 곳이 없는데 말입니다. 나는 아버지가 자기 냉동 관에 새겨 놓은 피의 교훈이 눈앞에 생생합니다. 제가 어찌 또 아버지 전철을 밟겠습니까?” 그러자 클론바우 16세는 더 말하지 않고 소파에서 일어나더니 지하벙커에서 나가버렸어요. 괴물 꼬마대통령도 할아버지를 따라 바깥으로 나와 보니 아마존 열대우림에는 깊어가는 밤하늘 여기저기에서 버섯구름이 피어오르고 천둥소리가 요란하게 울렸어요. 핵발전소가 파괴되면서 원전에서 공급하던 전기마저 없어 그슨 통나무집 대통령궁에는 전등불마저 밝히지 못했어요. 갑자기 할아버지 클론바우 16세가 커다란 날개를 퍼덕이더니 밤하늘로 날아 올라가지 않겠어요. “할아버지, 어디로 가십니까? 절대 오존층은 파괴하지 마십시오.” “인류의 죄인이 되더라도 악마들을 살려 둘 순 없어!” 괴물 꼬마대통령이 말릴 새도 없이 할아버지는 구름 속으로 사라졌어요. “지구촌이 망하겠어. 빨리, 쫓아가 할아버지를 제지하자!” 괴물 꼬마대통령은 아들을 데리고 황급히 하늘로 날아올라갔어요. 허나 할아버지는 보이지 않았어요. 할아버지 클론바우 16세는 구름 속에 숨어 있다가 손자와 증손이 하늘로 날아오르는 것을 보고 안나 전임 여대통령이 사는 백악관에 슬쩍 내리었어요. 그는 코끼리 코를 휘둘러 지하 핵무기창고 지기들을 죽여치우고 들어가 핵미사일을 뱀 섬나라 상공의 오존층을 겨누어 발사단추를 눌렀어요. 동녘하늘이 희붐히 밝아올 무렵이었어요. 북쪽 하늘과 서쪽 하늘에서 갑자기 요란한 폭발굉음이 울렸어요. 클론바우 18세 꼬마대통령은 할아버지를 뒤쫓아 날아가 아무리 찾아도 할아버지를 찾아내지 못했어요. 그러자 그는 날개 맥없이 열대우림으로 돌아왔어요. 지하벙커에서 핸드컴퓨터를 열고 보니 북극하늘과 하와이 서쪽하늘에 숱한 버섯구름이 일었어요. “할아버지가 끝내 일을 쳤구먼. 지구촌의 우산이 완전히 찢어졌어.” 괴물 꼬마대통령은 핵미사일 발사지점을 레이더로 추적해 백악관 지하벙커에 할아버지가 숨어 있는 것을 발견했어요. 그는 인차 아들을 데리고 하늘로 날아 올라갔어요. 아직도 백악관 쪽에서 숱한 핵미사일이 하늘로 날아 올라가고 있었어요. 황급해난 괴물은 하늘로 날아오르는 핵미사일을 안고 날개를 퍼덕이더니 초음속 우주비행선보다도 더 빨리 날아 백악관으로 날아갔어요. “아버지, 할아버지를 죽일 예산입니까?” “우리 지구촌을 해치는 자는 할아버지고 뭐고 모두 악마들이야.” “그래도 어찌 할아버지를?” 클론바우 19세는 뒤에서 쫓아가면서 경악했어요. 백악관 지하실 상공에 날아간 클론바우 18세가 우레같이 고함쳤어요. “할아버지, 손을 떼시오. 계속 오존층을 해치면 이 핵미사일이 용서하지 않을 겁니다!” 고함소리에 미사일 발사가 멈췄어요. 허나 괴물 꼬마대통령이 지하벙커에 들어섰을 때는 할아버지가 회오리바람처럼 어디론가 사라지고 그림자도 보이지 않을 때었어요. 하늘이 환해지었을 때 뱀 섬나라와 노르망디, 아카시아의 정상인들이 구멍이 뚫린 하늘에서 내리 직사하는 자외선을 맞아 삼대 쓰러지듯 했어요. 하늘이 진노했던 것이죠. 오존층이 얇아지고 구멍이 뚫린 지상의 정상인들은 살아남기 힘들었어요. 원자탄이나 질자 탄은 기껏해야 몇 십 키로 이내 생물을 방사능과 충격파로 훼멸시키지요. 허나 오존층이 파괴되면 온 지구촌의 지상에는 몇 백 년 동안 대부분 생물이 생존하기 힘들게 되지요. 근근이 심해 바닷물 속의 생물들이 살 수 있지요. 이번에도 진짜 클론바우 16세가 말한 것처럼 오존층을 살짝 구멍을 뚫어놓았기에 정상인들은 무덤으로 들어갔지만요. 클론바우 가족들과 호랑이와 사자, 원숭이 같은 동물들은 온 몸에 난 부스스한 털이 있어 용케도 살아남았어요. 꽈르릉 꽝꽝! 갑자기 하늘에서 번개 불이 번쩍이고 천둥이 울리었어요. 아무런 방비도 없던 노르망디와 뱀 섬나라 등 여러 나라에서는 그저 이상하게 하늘에서 버섯구름이 피고 번개가 친다고만 생각했어요. 그런데 밤장막이 드리운 하늘이 뻘겋게 타버리면서 온 대지를 대낮같이 비추었어요. 순식간에 유럽과 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 상공의 오존층이 구멍이 숭숭 뚫렸어요. 씨비리와 알프스산맥, 백산 그리고 아마존 열대우림에 큰 불이 달려 살림이 타버리었어요. 그 바람에 화마에 질겁한 호랑이와 사자, 사슴, 멧돼지 떼들이 놀라 들판으로 시내에까지 뛰어내려왔어요. 아라비아반도의 석유도관에서 몇 십 길씩이나 되는 불길이 뿜겨 올랐고 타다 남은 시꺼먼 원유가 대지를 누비며 강물과 바다 물에 흘러들어 둥둥 떠다니며 파도에 실려 정처 없이 퍼지었어요. 바다와 하천에서 죽은 물고기들이 허연 배때기를 드러낸 채 둥둥 떠다니면서 악취를 풍기었어요.                                                      제22장 악마의 끝장        노르망디 군은 톰 사령관의 지휘아래 대형폭격기로 화산에 은폐된 뱀 섬나라의 핵 실험장을 핵탄두로 폭격했어요. 톰 사령관은 버새 형제가 동생 맬쓴을 개 인 인종을 개발하는 실험 품으로 쓰려고 한 원수를 갚으려고 직접 폭격기에 올라 지휘했어요. “해안선을 따라 가면서 저 둥그런 솥뚜껑을 거꾸로 얹어놓은 것 같은 핵발전소를 몽땅 폭격하라!” 해안선에 세운 핵발전소는 표적이 환히 드러나 폭격하기도 퍽 쉬웠어요. 폭격기가 날아가면서 투하한 핵탄두를 맞아 핵발전소의 둥그런 핵반응노가 폭파되면서 굉음과 함께 여기저기에서 버섯구름이 일었어요. 핵폭발의 충격파와 방사선에 건축물이 모래성처럼 날려가고 사람들과 동물들이 삼대 쓰러지듯 쓰러졌어요. 방사선이 휩쓸고 지나간 지역에는 해골도 보이지 않고 뭉게뭉게 타오르는 연기와 재가루가 흩날릴 뿐이었어요. 저게 뭐예요? 톰 사령관과 동생 맬쓴은 노르망디 육군을 지휘해 나까아버새 왕궁으로 쳐들어가다가 장병들과 함께 금빛 왕궁의 옥돌로 깔아놓은 마당에 게거품을 물고 쓰러지었어요. 뱀 섬나라의 호위무사들도 왕궁 연못가에서 스르르 쓰러지었어요. 뱀 미녀들만이 날 살리라고 왕궁으로 뛰어 들어갔어요. 웬 일일까요? 오존층이 뚫렸기에 자외선을 맞았던 것이죠. 아카시아와 노르망디, 루스끼아 연합군은 앞사람이 쓰러지면 뒷사람이 이으면서 파죽지세로 악마의 소굴로 쳐 들어갔어요. “멧돼지 인과 사냥개 인들은 침략자들을 막아라!” 밴새 총사령관이 허리춤에서 레이저군도를 빼들어 휘두르며 독전했어요. "또쯔께끼 마이!" 멧돼지 인들은 송진을 잔뜩 처바르고 모래톱에서 뒹굴뒹굴 굴더니 갈고리 같은 송곳니를 빼물고 아카시아 괴물 꼬마대통령이 거느린 호랑이 왕 카시마와 사자 왕 비컨의 동물부대를 향해 돌진해나갔어요. 연합군 병사들이 기관총을 따르륵따르륵 갈겼어요. 푱, 푱, 푱! 총알은 멧돼지 인들의 두터운 가죽에 맞아 불티를 날릴 뿐 죽음의 노래를 부르면서 튕겨났어요. 그러나 사납게 덮쳐들던 멧돼지 인들은 카시마 호랑이 왕의 금강석 송곳니에 물리어 목덜미가 뭉텅뭉텅 떨어져 나갔어요. 어떤 멧돼지 인은 사자 왕 비컨에게 물리어 대가리가 서리를 맞은 애박바가지처럼 오그라들었어요. 어떤 멧돼지 인은 괴물 클론바우 계열 복제 괴물들의 코끼리 코에 휘감겨 허망 뿌리어 왕궁 앞의 연못에 날아가 풍덩 풍덩 처박히었어요. 괴물들은 왕궁 대문 어귀의 기둥을 코끼리 코로 휘감아 송두리째 뽑아버리었어요. 고래 인들은 바다로부터 왕궁 앞의 연못에까지 침투해 와서 물 대포로 레이자검을 휘두르는 뱀 섬나라 왕궁 호위무사들에게 물벼락을 안겼어요. 순간 레이자검이 물을 맞아 몽둥이에 불과한 무용지물이 돼버렸어요. “왕궁으로 진군!” 클론바우 18세가 고함치자 아들 클론바우 19세가 앞장서 클론바우 복제 괴물들을 이끌고 왕궁 대문으로 진격했어요. 이때 파리 로봇과 꿀벌 로봇이 독침을 빼들고 앵-앵- 덮쳐왔어요. 순간 아카시아 독수리 인들과 박쥐 인들은 왕궁 하늘을 새까맣게 뒤덮으면서 덮쳐나가면서 파리 로봇과 모기로봇, 꿀벌 로봇을 부리로 딱딱 쪼아 연못에 처넣었어요. 연못에서 고래와 악어와 하마가 기다렸다는 듯이 뱀 섬나라 미형로봇들을 조준해 물대포를 갈겼어요. 순간 물벼락을 흠씬 맞은 미형로봇들은 합선돼 칙칙 불꽃을 튕기더니 연못에 떨어져 물속으로 가라앉으면서 자취를 감추었어요. 왕궁 대문 안에서 쥐새끼 무리들이 찍찍거리며 쓸어 나와 클론바우 계열 복제 괴물들의 콧구멍을 노리고 덮쳐들었어요. 대부분 쥐새끼들은 콧구멍에 들어가기도 전에 복제 괴물들과 호랑이, 사자들의 육중한 발통에 밟히어 즉살했어요. 그러나 살아남은 쥐새끼들은 결사적으로 덮쳐들어 괴물들의 코끼리 콧구멍에 들어가기도 했어요. 클론바우 18세와 19세 등은 코끼리 코를 휘감아 높이 쳐들어 콧방귀를 흥! 흥! 뀌었어요. 순간 쥐새끼들은 콧구멍에서 날아나 연못이거나 땅바닥에 처박혀 뒈지었어요. 독수리 로봇들이 날아나가더니 부리에서 불줄기를 뿜어 쥐새끼들을 무리로 불태워 죽여 버리었어요. 저게 뭐예요? 뱀 섬나라 왕궁에서 이번엔 개 몸뚱이에 사람의 대가리를 단 사냥개 사람들이 멜쓴 1호를 앞세우고 왕왕 짖어대며 덮쳐 나왔어요. 그중 검둥개 사람 멜쓴 1호가 연못을 에돌아 나가다가 노르망디 군의 톰 총사령과 동생 맬쓴 장군을 보자 고함쳤어요. “이보시오! 내 꺼먼 머리를 보라. 난 당신의 분신이란 말이야. 우리 주인 버새 왕을 더는 욕보이지 말고 제 나라로 돌아가란 말이야.” 톰 사령관은 너털웃음을 웃었어요. “주인에게 충성하는 너의 충성심은 가상하구나. 허나 악마 주인에게 충성하지 말라! 그 놈은 코치아 반도와 아카시아에서 핵전쟁을 일으켜 숱한 무고한 사람들을 학살했어.” “?” 맬쓴 1호 사냥개 사람은 어리둥절해 멍청히 서 있었어요. 맬쓴 장군은 자기 머리를 손짓하면서 고함쳤어요. “봐라! 네 주인은 내 머리를 떼서 네 목에 달았어. 넌 개도 아니고 사람도 아닌 괴물로 돼버렸어. 버새 왕은 인륜을 해치고 핵전쟁을 일으켜 무고한 사람을 학살했고 지구촌 생태환경을 여지없이 파괴한 악마야. 총부리를 돌려 악마를 잡아라. 지구촌과 인류의 충신으로 남을 거야.” “잘 믿기지 않는데. 당신 머리 그대로 있지 않은가?” “난 코치아의 유명한 복제과학자 조왕돌이 나와 똑 같은 복제 인을 만들어 악마에게 넘겨주고 나를 감옥에서 가만히 빼냈어. 그래서 난 겨우 살아남았어.” 사냥개 사람 맬쓴 1호는 머리를 끄덕이더니 머리를 돌려 힐끔 왕궁 대문 쪽을 되돌아보았어요. 그가 앞발(손)을 홱 휘두르자 숱한 사냥개 사람들이 몸을 돌리더니 아가리를 쩍 벌리고 송곳니를 빼물고 “왕, 왕, 왕” 짖어대면서 왕궁으로 쳐들어갔어요. 사냥개 사람들은 클론바우 18세 괴물 대통령과 노르망디 톰 사령관 형제 연합군과 합세했어요. 왕궁 호위 무사들은 믿던 사냥개 사람들이 기의한 것을 보고 뒤로 비실비실 물러섰어요. 기 꺾인 밴새 총사령관은 왕궁 대문을 닫아걸고 호위 무사들을 보고 연합군을 막으라고 명령했어요. 허나 그들이 어찌 각종 동물 복제 인들로 조직된 아카시아 연합군을 막을 수 있겠어요? 지하벙커에 숨은 버새 왕은 그래도 목숨을 부지했어요. 그런데 사달은 동생 밴새 총사령관이었어요. 그 놈은 불난 틈에 지하 왕궁에 쳐들어와 옥에 가둬놓은 코치아 꼬마대통령의 부인 보름을 빼앗으려고 미쳐 날뛰었어요. 버새 왕은 실눈으로 동생을 쏘아보면서 질책했어요. “이 놈! 지금 미녀를 다툴 새 있느냐? 어서 노르망디 군을 막지 못할까!” 허나 동생 악마는 눈알을 부라리었어요. “몰라! 나가 싸우다가 죽으라는 거야?” 그는 감방의 자물쇠를 까부시고 뛰어 들어갔어요. 그는 보름을 와락 끌어안더니 “죽기 전에 요 옴폭 파이는 볼우물에 키스나 해봐야지.”라고 하면서 키스를 뻑뻑 안겼어요. “닥쳐!” 난데없는 고함소리, 지하 감방에 귀신처럼 조왕돌 꼬마대통령이 나타나지 않았겠어요. “아니, 넌 사람이야? 귀신이야? 분명 지하벙커에서 목을 쳐버렸잖아?” 밴새 총사령관은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자기 눈을 의심할 지경이었어요. “허허허, 어리석은 놈들!” 조왕돌의 너털웃음소리와 함께 감방에 숱한 복제 조왕돌이 레이저비수를 들고 나타났어요. 뒤에는 원숭이 인 매발톱 1호가 총칼을 든 숱한 원숭이 인들을 거느리고 들어서지 않겠어요. “내가 그렇게 쉽게 네놈들에게 당할 줄 알았어? 흥!” 기실 밴새 총사령관이 지하벙커에서 레이자비수로 목을 쳐버린 건 복제 조왕돌이었어요. 그때 조왕돌은 임해와 전쟁을 일으켰다가 뱀 섬나라 오랑캐들에게 어부지리를 할 틈을 준 것을 알고 조왕돌 1호로 변신해 지하벙커에서 일가족을 데리고 백산 원시림 속의 협곡에 숨어 버리었어요. 아카시아와 노르망디 연합군이 뱀 섬나라로 쳐들어가자 조왕돌 꼬마대통령은 맹호가 백산에서 내려오듯 귀신처럼 뱀 섬나라 지하 감방에 나타났던 것이죠. “그럼 보름도 가짜란 말인가!” “그래!” 제 정신이 펄쩍 든 버새는 보름을 훌 밀쳐 버리고 비실비실 뒤로 물러섰어요. “네 놈이 이전에도 맬쓴을 복제해 감옥에 바꿔 넣고 진짜 강간살인범 맬쓴을 바꿔치기 해 빼돌리더니.” “쳐라!” 밴새 총사령관의 고함소리에 따라 내시들이 복제 조왕돌에게 덮쳐들었어요. 그 틈에 악마 형제는 요사하게 뱀처럼 지하 감옥에서 스리슬쩍 꼬리를 빼 빠져나갔어요. 조왕돌은 감방 문을 까부시려고 레이자검을 휘둘렀어요. 쇠살창은 부시어졌지만 철근이 오그라들어 사람이 들어갈 수 없었어요. 그때 원숭이 인 매발톱 1호 등이 쇠살창 틈으로 기어들어가 내시들의 손에서 꼬마대통령의 어머니와 부인 보름 그리고 고모를 구해 보호하였어요. 복제 조왕돌 1호 등 몇몇이 레이자 검으로 내시들을 몽땅 척살하고 지하 감방 쇠살창을 완전히 부시고 꼬마대통령 일가를 구출해냈어요. 지하 감방의 꼬마대통령의 일가족은 진짜였죠. 총명한 꼬마대통령 조왕돌은 복제 가족이라고 형제 악마를 속여 넘겨 마수에서 벗어나게 했던 것이죠. 그들이 금방 지하 감방에서 나왔을 때 쿵쿵 육중한 발걸음 소리가 났어요. 조왕돌 꼬마대통령이 머리를 들어보니 몇 해 전에 코치아에서 종적을 감춘 괴물 클론바우 18세와 19세가 아니겠어요. “삼촌, 괜찮소? 악마들이 어디 있소?” 그들은 서로 간단히 인사를 나눈 후 악마형제를 찾느라고 참빗으로 서캐 훑듯 했어요. 괴물은 자외선과 방사선을 차단할 수 있는 옷을 입은 병졸들을 이끌고 지하 감방으로 내려가다 말았어요. 지하 왕궁 입구가 작아 괴물의 육중한 몸통이 들어갈래야 갈 수 없었어요. 솥뚜껑 같은 손으로 마구 지하왕궁 금문을 쥐어 비틀었어요. 허나 좀처럼 금문이 열리지 않았어요. 그때 조왕돌 꼬마대통령이 손을 홱 휘젓자 로봇파리와 로봇꿀벌들이 지하 왕궁으로 날아 들어갔어요. “에이!” 급해난 클론바우 18세는 코끼리 코로 금문을 후려쳐 구멍을 냈어요. 뒤이어 코끼리 코를 지레 대처럼 금문 구멍에 넣더니 기중기처럼 훌쩍 떠들었어요. 뚜두둑! 우지끈 탕! 요란한 소리와 함께 금문이 허망 뿍 빠져나오고 지하왕궁의 입구가 훌러덩 허물어졌어요. “악마 놈들아, 네 놈들은 스스로 무덤을 팠다. 네 놈들이 살아 있는 한 지구촌 사람들이 편안히 살 날이 없다. 오늘 지구촌의 생령들을 대표해 악마 놈들을 처단하러 왔다. 어서 나와 오라를 지지 못하겠는가!” 괴물 꼬마대통령은 휘발유통을 들어 지하 왕궁에 쏟았어요. “잠간!” 조왕돌이 말리었어요. 그때 악마 버새 왕과 밴새 총사령관이 두 손으로 온 몸에 새까맣게 매달린 로봇 꿀벌과 로봇 파리들을 털며 지하 왕궁 입구에 나타났어요. 그들 형제는 실눈으로 살기등등한 괴물들을 둘러보았어요. “선량한 괴물 꼬마대통령이여, 제발 살려 주십시오.” 그때 사냥개 사람 맬쓴 1호가 “왕”, “왕”, “왕” 짖어대면서 버새의 너펄대는 손을 꽉 깨물었어요. 호랑이 왕 카시마는 “내 딸의 원수를 갚을 테야!” 하고 으르렁거리면서 덮쳐나가 금강석 송곳니로 한쪽 다리를 물어 뜯어내 뼈다귀도 남기지 않고 씹어 먹었어요. “매발톱의 원수를 갚자!” 원숭이 인 혹달개와 매발톱1호가 몸을 날려 나가 악마 형제의 눈깔을 손가락으로 푹푹 찔렀어요. 그들은 튀어 나온 악마들의 눈깔을 깨물어 먹어 치었어요. 악마들의 처참한 비명소리가 들리었어요. 움푹 파인 악마의 눈 확에서 꺼먼 피가 줄줄 흘리었어요. 괴물 클론바우 18세는 코끼리 코로 악마 형제를 휘감아 왕궁 앞의 연못에 훌훌 뿌리어 던졌어요. 풍덩! 풍덩! 호수에 나타난 악어들은 악마들을 뼈다귀도 남기지 않고 씹어 먹어 치었어요. 순간 연못의 물이 악마들의 더러운 피로 벌겋게 물들었어요. 갖은 간계와 악행을 다하던 뱀 섬나라의 오랑캐, 악마 나까아버새 왕과 나까아밴새는 끝내 지구촌의 정의적인 성군과 동물들에 의해 처단되고 말았어요.  
29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10) 김장혁 댓글:  조회:2284  추천:0  2015-07-03
                                                                           9. 면회       성칠은 눈보라를 무릅쓰고 우시장 감옥 부근에 이르렀다.      가시철조망을 늘인 높다란 벽돌담장 정면에 승냥이 아가리처럼 궁형대문이 아가리를 쩍 벌리고 오가는 행인들을 노려보고 있다. 궁형대문 양옆에 일본 헌병 두 놈이 시퍼런 총칼을 비껴 들고  이리 눈깔을 희번뜩거리며 보초 서고 있었다.      성칠이 무거운 발걸음으로 터벅터벅 왜놈 보초병에게 다가갔다.     철꺽!     왜놈 보초병이 총창 열십자로 딱 막아섰다.     “바까요로(바보 놈)! 무슨 일이야?”      “아버지를 면회하러 왔수다.”      일본헌병은 사냥총부터 빼앗아내고 전화를 걸어 통역을 불렀다.     류강철이 안에서 뛰어나왔다.     “웬 일인가?"    그는 억대우 같은 성칠의 아래위를 훑어보면서 도리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사냥총을 들고 감옥에 찾아오다니? 정신 있는가?”    “아버지를 면회하러 왔소. 만나게 해주오.”    “누구요?”    “운주동 김성칠이오. 김병완, 그 분은 내 아버님이오.”    류강철은 한걸음 물러서면서 알은 체 했다.    “아, 힘장사 병완의 맏아들이구먼. 사냥을 잘 한다지? 그런데 소개신이 있어야 면회할 수 있소.”     “아니, 아버지를 만나보는데 무슨 개떡 같은 소개신이요?”     “이보, 말조심하라고. 어디라고 큰소리를 땅땅 쳐? 박 면장을 찾아가서 소개 신을 떼 가지고 오오.”     성칠은 류강철을 무섭게 쏘아보았다.    “아버지를 만나려는데 왜 까다롭게 구는가?”     류강철은 일본 헌병 모자를 꾹 눌러쓰면서 딱 잡아뗐다.    “이 양반, 지금 무슨 세월이라고 입술만 나불거리면서 그런 청 들어? 당신 아버진 대역죄인과 같으니까 쉽게 만날 순 없어.”    류강철은 불난 집에서 한턱 얻어먹으려다가 안되니 휭 하니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그러다가 호랑이 같은 병완 부자를 잘못 건드렸다가 안 될 것 같았다.      그는 목이 선뜩한 느낌이 들었다. 뒤이어 성칠한테 힐끔 곁눈질해보더니 길 건너쪽을 턱짓했다.     “저길 보오.  박면장이 헌병사무소에 들어가는구먼. 소개 신을 떼 가지고 오게나.”     성칠은 게딱지 같은 간판이 걸린 헌병사무소로 조끼를 입은 양반이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그는 달리는 인력거를 피해 길을 달려 건너가 헌병사무소 철창문을 삐꺽 열고 들어갔다.     사무소 복판 사무 상에는 검은 테 안경을 낀 일본 헌병 소대장 나까노라가 앉아 있었고 맞은 켠 걸상에는 금방 들어간 그 조끼 입은 호리호리한 자가 앉아 있었다.     사무 상 옆에는 누런 사냥개 누렁이가 귀를 벌쭉거리며 웅크리고 앉아 이쪽을 쏘아보고 있었다.     성칠은 단도직입으로 박성은 면장에게 청을 들었다.    “저, 아버지를 면회하러 왔는데 소개 신을 떼 줍소.”   “당신은 누군가?”    박성은 면장이 성칠의 아래 위를 훑어보면서 물었다.    성칠은 한걸음 나섰다.    “영월동의 김병완은 저의 아버님입니다. 보초병들이 소개신이 있어야 면회할 수 있답니다.”     박성은 면장은 나까노라 소대장의 눈치를 흘끔 쳐다보더니 성칠에게 낯을 돌렸다.    “당신의 아버진 참말 영웅호걸이오. 만나려는 사람이 어찌나 많은 지 참말 귀찮소. 당신 아버진 중죄범이어서 만날 수 없소. 언감 한길수 총도감의 눈알까지 빼놓다니. 참, 일본 어른들이 펄펄 뛰는데 낸들 어떻게 소개 신을 뗀단 말이요?”     성칠이 뭐라고 자꾸 사정하자 나까노라 소대장은 눈알을 부라리면서 고함쳤다.     “나갓!”     사냥개도 귀를 쫑긋 세우더니 불티가 뚝뚝 떨어지는 눈깔로 성칠을 노려보면서 으르렁거렸다.     성칠은 하는 수 없이 헌병사무소에서 나왔다.     (아버지를 만나는 일도 이렇게 힘들게 됐는가? 완전히 일본사람들의 세상으로 됐구나. 일본 놈들이 대대가릴 끄덕이잖으면 아버지도 만날 수 없게 됐군. 흥!)     그는 맥없이 가게방 기둥에 손을 짚고 기대섰다.     길 건너 저쪽에 철조망을 두른 높다란 토성이 보였다. 저 토성안의 어느 감방에서 아버지는 고문을 당하고 있으리라고 생각하니 가슴을 칼로 저며 내는 것 같았다. 날개라도 달렸으면 높다란 토성을 훨훨 날아 넘어 들어가 아버지를 만날 수 있으련만.     “얘, 잘 만났다.”     성칠이 머리를 돌려보니 큰아버지 김병권이었다.     “큰아버지가 어떻게 되여 여기 왔습니까?”    병권은 흰 수염을 흩날리면서 성칠을 잡아끌었다.    “먼저 저기 들어가 얘기하자.”     성칠은 큰아버지를 따라 죽 방에 들어갔다. 그들은 죽을 한 사발씩 청해 후루룩후루룩 먹으면서 이야기했다.     “아버지를 만나 봤니?”     성칠이 한숨을 후 내쉬면서 머리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음. 전번에 관준이하구 함께 동생을 만나자구 왔댔다."    그는 주위를 휘둘러보더니 나직이 귓속말을 했다.     "맨 입으로 말해선 안 돼.”    뒤이어 허리에서 보자기를 풀어내더니 종이 한 장과 산삼 몇 뿌리를 꺼냈다.     “치마봉에서 캔 산삼이야. 헌병사무소 소대장에게 몇 뿌리 가져다가 주었더니 이 소개신을 써주더구나. 이걸 가지고 가서 만나자.”    성칠이 뻘건 도장이 박힌 종이 장을 들여다보니 닭발로 오려놓은 것 같은 일어로 써 놓아서 통 알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마지막에 붓글씨로 써놓은 가운데 "中" 자에 들 "野" 자만은 알아 볼 수 있었다. 분명 나까노라이찌로의 친필소개신이였다.     “소개신이면 면회를 시켜주겠지.”     “큰아버지, 가 보깁소.”    병권과 성칠은 양치질할 새도 없이 죽집에서 나왔다.    그들은 총총히 길을 건너 왜놈 보초병들이 지키는 감옥 대문 어귀에 다시 조심스레 다가갔다.      왜놈 보초병들도 면목이 있는지라 처음처럼 떽떽거리지 않았다.     그 놈들은 총창으로 가로 막으면서 손을 내밀었다.     “쇼까이신!”    성칠은 소개신을 꺼내 건네었다.    보초병 놈은 소개 신을 들여다보았다.    "하이레(들어갓)!"    그 놈들은 총창을 거두고 양옆으로 물러섰다.    병관이네 대문 안에 들어서니 벌건 벽돌로 지은 감옥이 나섰다. 문어귀에서 지키는 보초병 놈들에게 소개 신을 내밀자 받아 보더니 안으로 들어가라고 길을 피해주었다.     복도에 들어서니 옆의 창문으로 안경을 낀 헌병이 오라고 손짓했다. 안경쟁이 헌병은 소개 신을 들여다보더니 뜻밖에 도리머리 질을 하면서 나가라고 손짓했다.     그때 병권이 보자기에서 나머지 인삼 몇 뿌리를 꺼내 안경쟁이에게 들이밀었다.     안경쟁이는 산삼 뿌리를 쥐여 코에 대고 코개처럼 냄새를 맡았다. 대번에 산삼 냄새가 코를 찔렀다.     “오, 요로씨이, 죠센(조선)산삼!”    그 자는 병권의 아래위를 훑어보더니 “아니다까?” 하고 물었다.    병권은 “아니라니요. 산삼 맞은데요. 웬 말입둥? 산삼 다니까.” 하고 억울해했다.    “아니다까(형님인가)?”     “산삼이 맞다니까. 이 얀반이, 참.”     그때 통역 류강철이 거들먹거리면서 다가왔다.     “아니, 형내 노할어버지 아닙니까? 헌병선생은 ‘산삼이 아니다’는 게 아니라 ‘형님인가?’고 물었습구마.”     “오,  그런 걸 난 또. 자꾸 ‘아니다까’ 하니까. 오해했지. 당연히 내가 여기 갇힌 동생을 만나러 온 형이지.”    류강철은 일본 헌병과 일본말로 뭐라고 쑤군거리었다.    안경쟁이가 뭐라고 소개신에 쓱쓱 써서 눌러두고 손을 내밀었다.    “면회 비로 3원을 냈쏘까.”    류강철이 옆에서 대신 말했다.    성칠은 옆전을 한줌 쥐여 세여보고 잘라당 사무 상우에 내놓았다. 그러자 안경쟁이는 옆전을 하나하나 세여 사무 상 안에 쓸어 넣고 다른 헌병을 불러 뭐라고 말하더니 병권이와 성칠을 안으로 들어가라고 손짓했다.    류강철은 병권과 성칠이를 돌아보고 말했다.    “이 헌병을 따라 갑소. 살림살이나 말하고 다른 말을 하지 맙소. 그러지 않으면 시끄러워집니다.”     류강철은 형내와 함께 상우남면 운주동 최구장의 서당에서 공부를 한 적이 있었다. 후에 일본으로 유학을 가서 일본 말을 배워가지고 일본 군을 따라 조선에 돌아와 헌병대 통역을 맡고 있었다.     성칠은 헌병을 따라 자그마한 면회실로 들어갔다.     면회실에는 쇠살창을 단 자그마한 창문이 있었다. 이윽고 건너 방에서 무거운 쇠고랑이 소리가 절그럭절그럭 들리었다. 병권과 성칠은 후닥닥 창문 앞에 마주섰다. 이윽고 헝클어진 머리카락아래 수척하고 상처투성인 얼굴에 수염이 더부룩한 병완이 나타났다.     “아버지!”     “성칠아!”      병완은 성칠과 병권을 보자 조금 웃음기를 띠면서도 목이 말라서인지 쉬여서인지 온전히 말을 하지 못했다.     “형님도 왔소?”     “응. 고생이 많았겠구나.”     병완은 형을 보고 머리를 끄덕이더니 성칠에게 머리를 돌렸다.     “집 식구들은 무사하냐?”      “예. 근심 맙소.”     “마을은?”     “은녀는 길수네 집에 되들어가고. 벌목한 삯전은 줄 거 같지 않습니다.”     “오, 그래?”     병권은 동생의 손을 잡고 부탁했다.     “동생, 이젠 쉰 고개도 넘었는데 싸움질을 그만 두게나. 한영감과 싸움질해 봤자 먹을 알이 있니?"     그러나 병완은 한숨을 후 내쉬었다.      뒤이어 그는 피진 눈으로 주위를 두리번두리번 살피더니 성칠의 손을 굳게 잡으면서 말소리를 낮추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기준이 보고 통나무 옹이나 벌레를 조심하라고 해라.”     “통나무 옹이나 벌레?”    병완은 머리를 끄덕였다.    "기준이나 창준은 목수니깐. 알아들을 거야."   성칠은 머리를 끄덕이었다.    “아버지는 언제쯤 나오게 됨둥?”     병완은 땅이 꺼지게 한숨을 쉬였다.    “강철이가 그러던데 무기징역일수도 있다더구나.”    “이 일을 어쩌는가? 거 한길수의 작간이겠다.”     병권의 말에 바깥에서 엿듣던 일본 앞잡이경찰 똘만이 문을 떼고 들어와 소리쳤다.     “면회 중지!”     통통하게 생긴 똘만은 험상궂은 표정을 지으면서 병권과 성칠을 잡아 문 밖으로 끌었다.     성칠은 똘만의 손을 홱 뿌리치면서 병완에게 머리를 돌렸다.     “아버지, 다시 만나는 날까지 편안히 계십소.”     병완은 굵직한 쇠고랑이를 채운 팔을 들어 주먹을 으스러지게 꽉 틀어쥐어 보였다. 성칠도 주먹을 쳐들어 보였다.    병권도 병완을 돌아보고 소리쳤다.    “다신 싸우지 말구 몸 조심하게.”    병권과 성칠은 일각도 만나보지 못하고 면회실에서 쫓겨 나왔다. 감옥 대문을 나오면서야 성칠은 아버지께 대접하려고 보자기에 싸 가지고 간 기름떡을 잊고 주지 못하고 나온 것을 알고 마음이 아팠다. 그때 때마침 강철이가 따라 나오는 것을 보고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류강철은 한 고향 사람의 면목을 봐주지 않을 수 없어 마지못해 받았다.     성칠은 류강철에게 후에 인사하겠으니 아버지를 잘 돌봐달라고 부탁하고 병권과 함께 원한을 품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들어섰다.     성칠은 큰아버지 앞에서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하늘에 어두운 구름장이 침침하게 덮쳐 오더니 하얀 눈이 깔린 고향의 대지를 지지누른다. 아마 또 큰 눈이 내리려는 상 싶었다.                                           제6장 포수대                                 1. 남도치     동녘하늘에 싸늘한 햇빛이 몇가닥 비추고 있다. 뭇산들이 눈 이불을 푹 뒤집어 쓴 하얀 잔등을 드러냈다.     금방 잠에서 깨여난 성칠은 어제 가메다에게서 수모를 당한 일이 떠오르자 가슴속에서 불덩이가 오르내리며 금방 툭 튀어나와 폭발할듯했다.     그는 한숨을 후 내쉬면서 억지로 분기를 억눌렀다.     (룡천을 이해하지 못하겠어. 먼저 불을 질러놓고 싸울까 봐 척 막아 나선단 말이야. 쳇!)    성칠은 도리머리 질을 절레절레 했다.    탕, 탕, 탕!    “누군가?”   “문 열어!”    분명 영팔의 목소리였다.    “이른 아침부터 뭔가? 성가시게!”    성칠과 하옥은 옷을 주섬주섬 입었다.    이윽고 성칠이  문을 열었다.    삼림파출소 야마모도 소장이 군도를 건들거리면서 들어섰다.    영팔과 통역 류강철이 뒤따라 들어오며 시뿌연 한기를 묻혀 들여왔다.    “오하이요 고자이마스(안녕하십니까?)”    성칠은 뭐라고 말하는지 몰라 그저 머리를 끄덕이면서 자리를 권했다.    다행히 옆에서 류강철이 통역했다.    야마모도는 앉지도 않고 뜻밖에 희죽이 웃어 보이며 말했다.     “김 군, 어제 가메다 너무 했쏘까. 양해하게나. 김군은 명포수라면서? 통나무를 베다니? 참, 오늘부터 황군을 위해 산짐승을 잡아오게나.”    성칠은 머리를 끄덕였다.   야마모도는 “거 사냥총을 봅세나.” 하고 말했다.  성칠은 조금 주저하다가 뒷고방에 들어가 사냥총을 벗겨다 주었다.   야마모도는 한 손에 사냥총을 들고 매만지더니 중얼거렸다.   “참 좋은 사냥총이구먼.”   그는 가재수염을 손끝으로 슬슬 만지다가 술잔을 드는 시늉하면서 뇌까렸다.   “산짐승을 많이 잡아오게나. 저녁에 한잔 마십세.”   야마모도는 선심을 쓰는 척 하더니 돌아서 나가려고 하다가 몸을 되돌렸다.   “깜빡 잊었소. 명포수 당신, 여기 영월동 구장 했쏘까네. 우리 황군 위해 일을 많이많이 했소까.”   성칠은 단마디로 “할 수 없소.” 하고 거절했다.    (고양이 쥐를 생각해?)    야마모도는 머리를 절레절레 저면서 성칠에게 사냥총을 돌려주었다.    성칠은 넌지시 야마모도 속을 떠보았다.    "어째 한 총 도감을 시키지 않소?”     야마모도는 성칠의 어깨를 다독이며 씨벌였다.    “한 영감은 끼무라 국장 사람이네. 장차 헌병대 아래 자위대가 서면 대장쯤 시킬 예산인 것 같네. 난 당신들 부자와 같은 힘장사가 많이, 많이 필요했쏘까. 와갔다가(알았는가)?”     성칠은 도리머리 질을 절레절레 하였다.    “사냥하러 룡천을 데리고 가도 되겠소?”     야마모도는 머리를 끄덕였다.    “거 가마골에서 왔다는 그 청년 말인가? 데리고 가게. 멧돼지랑 많이많이 잡아오게나.” .   야마모도 등이 우르르 쓸어나가자 성칠은 한숨을 후 내쉬었다.    “우리를 어린애들처럼 우습게 보는구나. 더러운 놈들, 흥!”    성칠은 기준을 찾아가 전날 아버지 감방에서 하던 말을 하고 무슨 뜻인가고 물었다.    기준은 머리를 수깃하고 곰곰히 생각해보았다.    한참 후에야 기준은 머리를 쳐들었다.    “아버지는 분명 통나무 옹이와 벌레를 암시했소. 이제라두 벌목할 때 벌레 먹은 통나무를 아무도 몰래 표시해 두기오.”    성칠은 기준과  불길이 이글거리는 눈길을 맞추면서 머리를 끄덕었다.     “삯전을 주지 않아보지. 벌레 먹은 통나무로 경찰사무청사를 짓게 해서 와르르 무너지게 해놓자."    "그러기오."   한참 후 성칠은 기준과 갈라졌다.   그는 집에 돌아가 사냥총을 둘러메고 검둥이를 데리고 룡천을 찾아갔다. 그들 둘은  눈 덮인 치마봉 기슭을 에돌아 울울창창한 소나무 밭 속으로 들어갔다.    영월동 부근의 기운봉(지금의 칠보산 병풍치기 절벽관광지 옆산)은 벌목 바람에 산짐승들이 거의 다 달아났다. 그리하여 머나먼 치마봉(지금 칠보산 장군봉) 근처에 갔던 것이다.    검둥이가 끼깅거리자 성칠은 사냥군의 특유한 눈길로 사위를 살폈다. 때마침 노루 한마리가 눈이 뒤덮인 수림속에서 그들을 보고    선불맞은것처럼 놀라 꼬리 빳빳해 도망쳤다. 그 놈은 눈우로 퐁퐁 뛰면서 아름드리나무새로 좌우충돌하면서 달아났다. 한다하는 사냥군 성칠도 그 놈을 겨냥해 쏠 수 없었다. 그 놈을 산우로 쫓아올라가게 한후 다시 내리쫓아 잡아보려고 했다. 노루란 놈은 앞다리가 뒷다리보다 짧기에 올리막 보다 내리막을 잘 뛰지 못했다.     노루가 아름드리나무들을 에돌아 이리저리 깡충깡충 뛰어다니다가 대가리를 반쯤 내밀었을 때다. 룡철이 사냥총을 번쩍 들어 방아쇠를 당겼다.     탕!    야무진 총소리와 함께 노루가 대갈통을 맞고 쓰러져 버둥거렸다. 검둥이가 씽 달려 나가 바둑거리는 노루를 물어뜯더니 컹컹 짖었다.    “깍, 깍”   하늘에서 아름드리나무 끝 초리를 스치면서 까마귀 두 마리가 날아지나갔다.   “오랑캐들이 자기 선조들로 까마귀 국이나 끓여 먹어라!”    탕!    성칠이 쏜 총탄에 떨어지는 까마귀.    탕!    룡천이 쏜 총탄에 도망치던 나머지 까마귀가 저쪽 하늘에서 줄 끊어진 연처럼 곤두박질쳐 떨어졌다.   성칠은 룡천의 사격술에 못내 혀를 끌끌 찼다. 시골사람처럼 아직도 외머리채를 땋아 어깨 너머 늘였지만 침착한 거동과 백발백중하는 사격술은 어딘가 남달랐다.     이날 그들은 반나절도 되나마나 해서 노루와 사슴, 까마귀 두 마리를 잡아 메고 돌아섰다.    그들은 치마봉을 에돌아 양지바른 바위 앞에 이르자 잠간 다리쉼을 하느라고 나란히 앉았다.    그들은 엽초를 굵직이 말아 물었다.    성칠은 부시를 쳐서 불을 붙인후 담배연기를 길게 빨아 후 내뿜더니 룡천에게 담배 대를 넘겨주었다.    “룡천이, 전번에 자네가 말렸으니 놔뒀네. 가메다란 놈을 도끼로 대가리를 찍어 놓았을게오.”    “글케 해선 안 돼.”    성칠은 이해되지 않아 “어째?” 하고 말하면서 룡천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룡천은 성칠을 마주보면서 진지하게 말했다.    “있자노, 가메다 한 놈 쯤은 찍어 죽이자면 쉽네. 그러나 그 놈을 찍어죽이고 뒷일을 생각했어?”    “이것저것 다 걱정하다나면 개처럼 매만 맞을게 아닌가? 어디 참고 살겠는가?”    룡천은 총가목을 으스러지게 틀어쥐면서 말했다.    “원쑤는 꼭 갚아야 해. 그러나 복수 시기와 수단을 잘 궁리해야 되네.”    그들은 둘 다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었다.    성칠은 담배를 한모금 길게 빨아 연기를 후 내뿜더니 물었다.    “듣자니 자넨 남쪽에서 왔다던데 남쪽에서도 일본 놈들이 저렇게 행패 질 하는가?”    “더 말할 데 있어? 우리 고향에는 이곳보다도 일본 놈들이 더 욱실거리네. 변소간의 구더기보다도 더 욱실거려. 난 경주 바닥에서 게 다짝을 짝짝 끌고 다니는 일본 놈들이 딱 질색이여.”    룡천은 고향이 있는 저 멀리 남쪽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면서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었다.    “내  고향은 있자노. 경상도 경주라는 곳이네. 경주는 우리 경주 김씨네 2천여년이나 세세대대로 살아오던 살기 좋은 고장이네. 세상에 천년이나 통치해온 나라가 몇이 있어? 우리 경주 김씨와 박씨, 석씨 세 큰 집안에서 돌아가며 왕질을 하면서 나라를 천년이나 통치해 왔던기여.”    “오, 그런가? 그 나라 이름이 뭔가?”   성칠은 호기심이 나서 룡철의 곁에 다가앉으면서 물었다.   “신라라는 나라네.”   “신라?”   룡천은 머리를 끄덕였다.    “그래. 천년력사를 자랑하는 신라네.”    룡천은 천천히 뒤 말을 이었다.    “내 고향 경주에는 우리 조상들의 뼈와 살이 묻힌 고장이야. 지금도 경주에는 우리 조상 왕들의 산더미 같은 산소가 가득하네. 우리 고향은 여기 함경도보다 날씨가 따스해. 지금도 여기처럼 그리 춥지 않아. 난 여름이면 고향마을에 우거진 참대 숲에서 애들과 함께 숨 박 꼭 질을 놀았제이. 가을이면 집 마당의 감나무에서 빨간 꽃 감을 따서 맛나게 먹었네. 정말 가을이면 고향마을에서는 빨간 꽃 감의 싱그러운 냄새가 풍겼어.”    성칠은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였다.    “그런데 왜 이렇게 춥고 살기 나쁜 함경도로 왔어? 듣는 말에 의하면 우리 함경도는 옛날부터 정배를 보낸 사람들이 와서 살던 곳이라던데.”    “누가 그렇게 살기 좋은 고향에서 떠나고 싶어 떠났겠나? 일본 놈들이 우리 고향에 들어온 다음에는 모든 게 끝장났어. 어지간하면 고향을 떠나 천리도 넘게 떨어진 여기 도둑놈이 욱실거리는 함경도에 입북했겠나? 와보니 함경도라고 다 그런 거 아니데. 자네 집을 보니 인심이 아주 후하데이. 저 동북쪽 웅진 정배살이 하던 곳이라데이,  이 곳은 괜찮아. 그래서 우리 사촌형 칠백이두 여기 와서 살잖나? 그러나 고향  떠나면 고생도 많고 자꾸 고향생각 나데이.”   성칠은 룡천을 따라 한숨을 후 내쉬면서 물었다.   “그래 어째 그 좋은 고향 떠나왔는가?”   “어찌 한마디로 다 말하겠어?”   룡천은 눈물이 글썽해 말했다.   “자넬 믿고 하는 말이네. 우리 아버지는 일본 놈들을 욕하다가 일본 놈이 휘두르는 군도에 잔인하게 살해됐네.”   “오, 그래? 괜히 묻지 않았는지 모르겠네.”   성칠은 남의 아픈 곳을 들춘 것 같아 미안해했다.    “괜찮아. 일본 놈들은 우리 고향에 들어오자마자 그 마을에서 제일 고풍스럽고 좋은 우리 집을 욕심냈네. 얼마 지나지 않아 파출소를 앉히겠다면서 집을 당장 내라고 했네. 그러자 우리 아버지는 내지 않겠다고 딱 잡아뗐네. 일본 놈들은 헌병을 끌고 와서 무력으로 우리 집식구들을 쫓아내고 차지하였지. 그러자 아버지는 마당에 서서 일본파출소 소장 놈을 손가락질하면서 욕설 퍼부었지. ‘이 놈 날강도들아, 남이 세세대대로 살아온 집을 빼앗고 잘 살것 같아 이러노?’  이렇게 욕설 퍼부었댔어. 파출소 소장 놈이 군도를 뽑아 손가락질을 하는 오른팔을 쳤어. 오른팔이 끊어지자 아버지는 왼팔을 쳐들어 손가락질을 하면서 계속 욕했어. 그러자 소장 놈은 나머지 왼팔마저 군도로 사정없이 찍었어. 헤이, 두 팔을 다 잃고 마당이 즐벅하게 피를 수태 흘린 아버지는 일본 놈들에게 원한을 품고 숨을 거두었네. 헤이 참.”    룡천은 너무 슬퍼 아래 말을 잇지 못했다.   수림 속에서는 눈보라가 무섭게 아우성치면서 불어쳤다.   성칠은 벌떡 일어났다.    “자넨 왜 그 좋은 사격술을 가지고 사냥총으로 몇 놈 쏴 눕히지 못했소?”     “내캉 왜 아버지 원수를 갚고 싶잖았겠어?. 몇 놈은 해치우구 글케 도망칠 수 있었어. 하지만 어머님이랑 동생들 우짤라고?”    룡천은 말을 마치자 노루를 둘러메고 떠날 차비 했다.    “일본 놈들은 무리승냥이들이야. 우리 사냥꾼들도 한데 뭉쳐 일본 놈들을 사냥하는 포수대를 무어야네. 알갔어? 그래야 섬나라 강도 놈들을 쓸어버리고 원수도 갚을 수 있는기여.”   “일본놈을 사냥하는 포수대?"   "그래."    성칠은 천천히 머리를 끄덕이었다.    "거 참, 그럴듯해. 나도 포수대에 들어가 일본 놈들과 통쾌하게 싸워 보고 싶네. 이게 어디 일본 놈들의 등살에 마음 놓고 살겠는가? 에이, 참!"    성칠도 사슴을 둘러메고 사냥총을 왼손에 쥐고 따라나섰다.    룡천은 산기슭으로 내려가면서 나직이 말했다.    “우리 힘으로 우시장일대 사냥꾼들로 포수대를 무읍세. 우리두 뭉쳐야 고향 땅에서 일본 놈들을 몰아내구 편안히 살 수 있네. 자네가 대장을 하구 내가 뒤에서 받들어 줄게.”     “아니, 포수대 대장은 자네 하게나.”    “아니. 우시장 일대에서 자네 가문과 자네 명성이 높네. 자네가 호소해야 사냥꾼들이 모일 수 있네.”    성칠은 불시에 포수대 말이 나오자 조금 주저하기도 했다.    “우리 우시장 일대 사냥꾼들이 몇이나 된다고 그러오? 어찌 무리승냥이 같은 일본 놈들을 다 몰아내겠는가? 또 사냥꾼마다 제 궁리를 하겠는데 다 따라오겠는가?”    룡천은 성칠과 나란히 걸으면서 말했다.    “우리 혼자로만 생각하지 말라고. 지금 장백산 일대에서는 홍범도 장군이 이끄는 몇 만 명이나 되는 조선 독립군이 일본 놈들을 간담이 서늘케 하고 있네.”    성칠은 귀가 번쩍 뜨였다.    “오, 그래?”   룡천은 성칠에게 힘을 불어 넣어주었다.    “일본 놈들은 을사조약을 체결한 후 우리 조선을 통 채로 삼키고 있네. 한일합방을 하면서 조선을 일본제국의 속국도 아닌 일본으로 만들고 있어. 지난해 3월 1일에 서울에서 조선 유지인사들이 모여서 독립선언을 하고 만세운동을 일으켰지. 비록 독립운동은 실패했네. 하지만 온 조선 땅에서 울려 퍼진 ‘조선독립 만세!’ 소리는 망국노로 된 조선 사람들을 뭉쳐 일어서게 깨우쳤어.” 룡천은 걸음을 멈추고 명심해 듣는 성칠을 보고 사위를 둘러 보고나서 천천히 뒷말을 이었다.     “이준 선생은 화란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까지 참가하여 을사조약이 체결된 내막을 전 세계에 까밝히고 국권을 되찾으려고 하였네. 그러나 간악한 일본 놈들이 미국 놈들과 짜고 들어 꿍꿍이를 꾸미는 바람에 회의장에서 떠밀리어 나오게 됐네.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고 말자 그는 회장 밖에서 자기 배를 갈라 일제에 대한 조선 민족의 반항심을 보여줬네. 조선에는 수많은 애국지사들과 유지인사들이 있네. 수많은 사람들은 나라를 구하려고 서당 방에서 계몽운동을 벌리고 있어. 다만 국제 외교 활동을 하거나 ‘3.1’독립운동 때처럼 ‘만세!’만 불러선 나라를 구하지 못해. 총으로 일본 놈들을 몰아내야 해.”     룡천은 성칠이 귀담아듣는 것을 보고 계속 열변을 토했다.    “내캉 간도에 가서 들었는데 말이게. 용드레촌을 중심으로 간도에서도 여기 ‘만세’운동영향을 받아 ‘3.13독립’운동을 벌렸더군. 림민호라는 13세 어린이가 교회당에 올라가 독립운동의 신호 종을 온 용드레촌이 다 들리게 울렸다네. 종소리를 듣자 조선 사람들은 거리에 뛰쳐나가서 시위행진하면서 ‘조선독립 만세!’를 목청껏 불렀다네. 그런데 일본 경찰 놈들이 총을 쏘면서 탄압해 실패로 돌아갔데. 숱한 애국지사들이 총탄에 맞아 희생되거나 붙잡혀 감옥에 갇히고 말았네. 이젠 홍범도장군의 의병대처럼 사냥꾼 포수대를 조직해 총칼을 들고 일본 놈들과 싸워야 할 때네. 일본 놈들을 내 고향에서 몰아내고 내 나라를 되찾아야 편안히 살 수 있네.”    룡천은 한날 한시에 불시에 너무 많이 말한 것 같아 그쯤 해 그만두었다.    성칠은 룡천을 따라 성큼성큼 걸으면서 사냥총을 으스러지게 꽉 쥐면서 속으로 못내 혀를 끌끌 찼다.   (이 양반  아는 것도 많구나. 그러나 우리 힘으로 무리승냥이 같은 일본 놈들을 몽땅 몰아낼 수 있을까?)                                                                                                                2. 전우를 구출               성칠은 룡천의 말을 듣고 착잡한 생각에 빠졌다.     한참 후 그는 무슨 마음을 먹은듯이 위방에 올라가 벽에 걸어둔 사냥총을 벗겨 마른 수건으로 쓱쓱 닦고 탄약과 시퍼런 비수를 꺼냈다.    그는 비수를 팔소매에 대고 쓱쓱 닦아 엄지로 날을 쓱쓱 훑어보며 윽별렀다.    (아버지를 감옥에 가둬? 일본 놈새끼들, 가만 놔두는가 봐라.)    하옥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성칠은 한숨을 후 내쉬었다.    (나는 싸우다가 죽어도 괜찮은데. 참, 부모형제를 연루시키면 어쩐단 말인가?)    아내 하옥은 남편이 우시장에 갔다 온 후 행동거지가 이상한 감을 육감적으로 느꼈다. 그녀의 얼굴에는 수심의 그림자가 물결쳤다. 호랑이 같은 남편에게 후대를 낳아주지 못한 죄책감이 늘 앞서군 하였다. 하여 남편과 바깥일을 묻기도 저어했다. 그러나 요즘 시아버지가 한길수의 눈알까지 뽑아버려 감옥에 갇힌 후 면회하러 갔다 와서 남편의 거동이 심상치 않아 묻지 않고서는 견디기 어려웠다.     그녀는 위방에 올라가 성칠한테 다가가 큰 마음 먹고 남편에게 물었다.     “시아버님은 무사하던가요?”    성칠은 머리도 들지 않고 대답했다.    “승냥이 굴에 들어간 분이 무사할리 있겠소?"   하옥은 남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한숨을 호 내쉬었다.    “혹시 돈을 좀 팔면 아버지를 모셔 내올 수 없을까요?”    “아버지를 면회하는데도 큰아버지 산삼하구 면회 비까지 냈소. 아버진 무기징역을 받을지도 모르오. 일본 놈들의 앞잡이 눈알을 뽑아 놨으니까.”     성칠은 사냥총을 벽에 걸어놓고 비수를 장단지 각반 속에 쓱 꽂아 넣었다.    “이 일을  어쩌는가요?”    성칠은 아내를 보고 무거운 어조로 말했다.    “여보, 당신은 나한테 시집와서 고생 많았소. 난 아마 집을 떠나 큰 사냥을 하러 가야 할 것 같소. 집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수고하오.”    이전에 성칠은 사냥하러 가도 전혀 작별인사를 한 적이 없었다.    하옥은 이상해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사냥을 한 둬달 하면 돌아오겠지요?”   성칠은 도리머리 질을 절레절레 했다.    “한두 달로 될 것 같지 않소. 무리승냥이들을 모조리 잡자면 몇 십 년이 걸릴 수도 있소.”    이때 미닫이문이 스르르 열리면서 어머니가 들어왔다.    “얘, 아까 내캉 말할 때 무심히 들었던 관데. 먼 곳에 사냥하러 가는가 베?”    성칠은 엉거주춤 일어나 엄마께 허리를 굽혀 인사하면서 대답했다.    “예, 엄마, 무사히 있읍소. 일이 있으면 동생들이나 조카들에게 말합소. 엄마, 동생들이 사는 운주동에 이사 가면 좋을 것 같습구마.”    성희는 구부정한 허리를 펴고 맏아들을 바라보다가 앉으라고 손시늉 했다.    “이사 말은 하지도 말어. 이 팔간 집을 어떻게 지은 집이라고 그래? 저 물방아는 어쩌고? 난 이집에서 죽더라도 너 아버지 올 때까지 기다릴 거야.”    성칠은 어머니와 아내를  번갈아보면서 한숨을 땅이 꺼지게 후- 내쉬었다.    이때 바깥에서 검둥이가 짓는 소리가 컹 컹 컹 들리고 문을 탕 탕 탕 두드리는 소리가 요란히 들렸다.    “문 열엇!” 성칠이 위방 문을 열자 허연 한기와 함께 영팔과 응삼, 수길 등이 집안으로 우르르 쓸어 들어왔다. 뒤에 털 한 모숨과 가메다 등 일본 헌병들도 따라 들어왔다.    영팔이 우쭐해서 성칠을 보고 지껄였다.    “사냥총을 내놓게.”     성칠은 벽 밑에 걸어놓은 사냥총을 벗겨 으스러지게 틀어쥐었다.     “사냥총을 내놓고 뭘 먹고 살라는 거요?”     “이 놈이, 사냥총을 내놓지 못할까?”     “안 된다. 벌목 삯전도 주지 않으면서 사냥총까지 내놓으라고? 사냥총은 우리 사냥군들의 목숨이야.”     “이젠 산짐승도 몽땅 일본 거야. 사냥은 무슨 놈의 사냥? 흥!”   가메다가 으르렁거리자 앞잡이들이 팔을 걷으며 다가섰다.   “얘들아, 사냥총을 빼앗아라!”   영팔의 호령소리에 수길과 응삼이 등 졸개들이 와르르 달려들었다. 그들은 성칠의 손에서 사냥총을 빼앗으려고 몸싸움을 벌렸다.   이때 가메다는 군도를 빼들고 꽥 고함쳤다.    “빠까요로(멍청아), 이 놈을 묶어!”    일본 헌병 놈들이 아예 성칠과 사냥총을 한데 바 줄로 꿍꿍 묶어 문밖으로 떠밀었다.    “여보, 여보!”   하옥이가 따라 나오면서 소리쳤다.    “성칠아! 이 놈들아, 내 맏아들 무슨 죄 있다고 마구 잡아가는 거냐?”    본가집에 놀러왔던 곰순도 정주간에서 뛰어나오면서 소리쳤다.    “오빠!”    성칠은 묶인 채 내리막길로 내려가면서 머리를 돌려 어머니와 여동생 곰순을 돌아보면서 소리쳤다.    “내가 돌아올 때까지 엄마를 잘 모셔라.”    검둥이도 어데 갔다가 주인이 묶여 가는 것을 보고 일본 놈들에게 달려들면서 왕왕 짖어댔다.    땅! 땅! 땅!    일본 놈들이 검둥이에게 사격했다. 검둥이는 날쌔게 피하면서 도망쳤다.    땅! 땅! 땅!    갑자기 물레방아 쪽에서 야무진 총소리가 울렸다.     일본 헌병 두 놈이 눈 바닥에 푹푹 꺼꾸러졌다. 방앗간 뒤에서 몇 사람의 그림자가 얼른거렸다.    땅! 땅! 땅!    가메다도 권총을 꺼내 맞불질을 했다. 총알이 물레방아 바퀴에 픽픽 박혀 눈꽃을 튕겼다.    영팔과 수길은 성칠을 활 놓고 다리야 날 살리라고 내리막으로 선불 맞은 노루처럼 도망쳤다.    “성칠이, 빨리 산속으로 뛰게나!”   물레방아 바퀴 뒤에서 분명 룡천의 웅글진 목소리가 울렸다.    그제야 제 정신이 펄쩍 든 성칠은 묶인 채 눈 덮인 산기슭 수림 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검둥이도 끼깅거리면서 성칠을 따라 뛰어갔다.    땅! 땅! 땅!    자지러진 총소리와 함께 성칠의 앞과 뒤에서 눈꽃이 튕기었다. 귀 뻘쭉해 달리는 검둥이 옆의 적송에 총알이 픽픽 박혀 나무껍질이 튕겼다.    성칠은 이리 저리 적송 사이로 몸을 빼면서 팔자 형으로 달려갔다.    헌병놈들은 가메다가 군도를 휘두르자 룡천과 성칠을 추격했다.   갑자기 일본 헌병 한 놈이 “억!” 비명소리와 함께 어데서 날아온 돌멩이에 맞아 이마를 감싸 쥐고 눈 위에 푹 꺼꾸러졌다.   쒹-    쒹-    연속 날아오는 돌멩이에 일본 헌병 몇 놈이 무릎을 안거나 대가리를 붙안고 꺼꾸러졌다.    그 사이 성칠은 수림 속으로 멀리 달아나면서 뒤를 돌아보았다. 웬 사람이 원숭이처럼 나무 가지를 쥐고 구르면서 이쪽저쪽 나무로 건너뛰면서 날아왔다.    “오빠!”    성칠은 자기 앞에 귀신처럼 나타난 사람이 진달래일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진달래야!”    진달래는 재빨리 허리춤에서 단도를 뽑아 성칠을 묶은 바 줄을 끊었다.    성칠은 손목을 만지면서 진달래를 보고 적이 놀랐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느냐?”    “오빠를 마중하러 왔댔어요. 일본 놈들이 쫓아오기 전에 이 고개를 넘어야 해요. 자, 어서 뛰자요.”    성칠은 바줄과 함께 눈 우에 떨어진 사냥총을 쥐고 진달래를 따라 산중턱을 따라 수림 속으로 뛰었다.    “그래 물레방아 간에서 일본 놈들에게 총을 쏜 룡천이랑 아는 사이냐?”     “그래요. 우린 장백산항일독립군 전우지요.”     “장백산 항일독립군?”    “예, 그래요.”    성칠은 듣기만 해도 신기하기만 했다.    그들이 한 골짜기에 들어섰을 때였다.    골짜기에는 진작 몇몇 독립군 대원들이 백마들의 고삐를 잡고 경계하고 있었다. 이윽고 룡천 등도 일본 헌병들을 따돌리고 달려왔다.     성칠은 룡천 등을 보자 굳게 악수를 나누었다.     “고맙네! 자네들이 구원하지 않았더라면 난 아버지처럼 한평생 우시장감옥에 갇힐 번 했소.”    “그 놈들은 진작 당신 부자간을 마음 놓지 못했어. 우린 당신을 만나러 가다가 때마침 당신을 결박해가는 일본 놈들과 마주 띄우게 됐네.”     성칠은 룡천과 진달래를 둘러보면서 무거운 어조로 말했다.    “나도 장백산 항일독립군에 들겠소. 꼭 아버지와 우리 고향 사람들의 원수를 갚겠네. 나를 받아주오.”    룡천은 성칠의 쩍 벌어진 어깨를 믿음에 찬 손으로 툭툭 쳤다.   “좋네. 당신은 진작 우리와 마음을 같이 했다이. 우리 조선 땅에서 우리 부모형제들이 일본 놈들의 철발굽 아래에서 해탈돼 행복하게 살게 하려면 총칼을 들고 일본 놈들을 우리 고향 땅에서, 아니, 우리 조선 땅에서 몽땅 몰아내야 하네.”    성칠은 룡천의 두 손을 굳게 잡았다.    “고맙소. 나를 구해줘서. 나는 독립군에서 솜씨를 보이겠소.”    룡천은 신임에 찬 눈길로 성칠을 바라보다가 독립군 대원들에게 몸을 돌렸다.    “우린 우시장 일대 사냥꾼들을 묶어세워야네.  일본 놈들이 우리 목재를 실어다가 경찰국 사무 청사를 짓는 걸 막아야지.”    성칠은 가슴을 쑥 내밀고 대답했다.    “근심하지 마오. 내 나서서 꼭 젊은이들을 묶어세우겠네.”    진달래는 성칠에게 다가와 백마 고삐를 넘겨주었다.    룡천은 백마에 올라타면서 손을 홱 저었다.    “빨리 이곳을 빠져 나갑세. 적들이 꼭 추격해올 거야.”   독립군 대원들은 모두 백마에 올라탔다.   성칠도 백마에 올라탔다. 검둥이도 주인을 따라 달려갔다.   한창 독립군 대원들을 따라 달리다가 성칠이 말고삐를 잡아당겼다.    “룡천이, 이 곳에서 할 일이 있네.”    룡천도 멈춰 섰다.   성칠은 입에서 김을 훅훅 풍기면서 말했다.   “한길수를 가만 놔두고 떠날 수 없어.”     “잠시 철퇴하는 거야! 일단 일본 놈들의 추격을 피해야 하이. 전술적인 철퇴를 했다가 다시 기회를 엿봐야 돼.”    룡천이가 전술적인 철퇴라고 했는데도 성칠은 고집을 썼다.    “아니야, 이대로 달아나면 눈에 난 발자국을 따라 인차 추격해올 거야.”   그 말에도 도리 있었다.   “인마를 갈라서 철퇴하자. 기회가 되면 매복습격도 하자.”    룡천은 머리를 끄덕였다.    그러자 진달래가 룡천에게 말했다.    “김 소대장, 내가 바우돌과 억복을 데리고 성칠 오빠와 함께 남으면 어때요?”    “좋아. 1분대는 진달래 소대장을 따르고 2분대는 날 따르라. 우린 놈들을 각자 따돌리고 사흘 후 치마봉 밑에서 만난다.”    “옛!”    독립군은 두 패로 나뉘어 백마를 타고 수림 속으로 달려 들어갔다.   윙윙 휘몰아치는 눈보라가 수림 속으로 사라지는 독립군 용사들의 종적을 지워버렸다.  
28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9) 댓글:  조회:2135  추천:0  2015-06-18
                  4. 눈물겨운 머슴살이       푸실푸실 내리는 눈발 속에 춤판이 어수선하게 끝났다. 북장고소리가 멎고 대나무피리 소리도 잠을 잤다. 울안에는 광솔불이 활활 타오르며 주정배들의 떠들썩하던 미친 소리 빈 자리를 메우고 있었다.      월선은 펑퍼짐한 엉덩이를 비뚤거리며 마루에 나가 앙칼진 목소리로 고래고래 고함쳤다.      “득호! ”     “예꾸마!”    득호가 허리를 구부정하고 마루 앞에 뛰어와 딱 멈춰 섰다.    “넌 무슨 일을 제대로 할 수 있니? 마당을 어떻게 쓸었으면 일본 귀빈이 미끄러져 넘어졌겠느냐? 일본 어른이 래일 일어나지 못하는 날엔 네 목이 날아나지 않는가 봐라.”     "아이쿠!"     득호는 뒤덜미를 긁적거리면서 두덜거렸다.     “아니, 술에 취해 자기절로 미끄러졌구만두.  흥, 하나 밖에 없는 목을 치면 어떻게 합둥?”    월선은 빗자루를 들고 버선발 바람으로 마루에서 뛰여내려와 득호를 마구 때렸다.     “이 놈, 네놈 믿다간 한지에 방아를 걸겠다.”     득호는 머리를 싸쥐고 피했다.     “아니, 가마니를 쪽 깐 마당에서 미끄러져 넘어진 게 누구 탓입둥? 막걸리를 배때 터지게 처먹고 너덜대다가 넘어갔는데두 내 탓입둥?”     월선은 득호를 따라가면서 조겨댔다.     “이 놈아, 이 놈, 전번엔 마차를 운주하에 처박더니. 흥! 이번엔 일본 어른신님을 넘어지게 하잖았나? 엉? 이 놈아, 일본 어르신님이 상하는 날엔 널 놔둘 것 같니? 엉? 엉? ”     월선은 숨이 차 헐떡거리면서 빗자루를 땅바닥에 내동댕이쳤다.     “빨리 마당을 말끔히 치워라. 눈 내린다.”     월선은 은녀가 부엌에서 부엌녀와 함께 설거지를 하는 것을 알면서도 불러냈다.     “은녀야, 여기 나오나.”     “얘-”     은녀가 앞치마에 손을 닦으면서 달려 나오자 월선은 책망부터 앞섰다.     “‘얘’는 무슨 얘나? 말버릇부터 고치라는데도.”     은녀는 혀를 홀랑 내밀면서 머리를 수깃했다.     “내일 아침 물을 물 독에 꼴딱 길어라. 이 집에 들어온 지 이젠 몇달 되는데 아직도 뭘 시켜야 하겠니? 자기절로 척척 해야지.”     “알았습구마.”    은녀는 두말없이 물동이를 안고 풀풀 흩날리는 눈을 밟으면서 대문 쪽으로 나갔다.    등뒤에서 월선의 귀 째질듯한 고함소리가 이어졌다.    “물독을 깨겠다. 주의해.”     “예.”    (먹을 땐 개 닭 보듯하다가도 저녁도 먹지 못한 은녀를 밤중에 물을 긷게 하다니? 한심한 년이라구야.)   득호는 마당에 깐 멍석을 왈왈 거두면서 속으로 월선을 욕했다. 그는 널린 종이까지 걷어 낸 후 눈을 빠득빠득 밟으면서 마당의 눈을 쓱쓱 쓸었다.    아무리 밤중까지 눈을 쓸고 또 쓸어도 하늘에서 푸실푸실 쏟아져내리는 눈을 어찌는 수가 없었다.    “에라, 모르겠다.”    득호는 빗자루를 쥐어뿌리고 대문 밖으로 나갔다.    (눈이 무릎까지 푹푹 빠지는 눈길에 은녀 어떻게 물을 긷겠니?)    득호가 뒤따라 가보니 저쪽 우물가에서 드레박을 잣는 소리가 삐꺼덕 삐꺼덕 들리었다. 뒤이어 드레박의 물을 물동이에 쪽 붓는 소리가 들리고 허연 그림자우에 꺼먼 물동이를 올려놓는 것이 보였다. 득호는 가까이 다가갔다. 그때 은녀가 비칠거리다가 우물가의 얼음에 미끄러져 넘어갈 번했다.    득호는 바삐 은녀를 부축하면서 물동이를 붙잡았다. 그는 은녀의 머리 우에 놓인 물동이를 내리워 안고 앞에서 씨엉씨엉 집 쪽으로 걸어갔다.    “오빠, 괜히 암펌이 보면 욕 먹겠소.”    은녀는 치마폭을 걷어안고 득호를 뒤따라 부랴부랴 대문 안에 들어섰다.    범이 자기 흉을 하면 온다고 몸채에서 나온 월선은 은녀의 물동이를 안고 대문 안에 들어서는 득호와 그 뒤를 따르는 은녀를 보고 앙칼진 목소리로 고함쳤다.    “아니, 득호, 마당을 쓸어라 하였지. 물을 길으라고 하였나? 꼴 보기 좋다. 그래 계집애를 뒤쫓아 다닌다고 바보가 장가갈 것 같냐?”    은녀는 바삐 득호의 손에서 물동이를 빼앗아 이고 부랴부랴 정주간으로 들어갔다.    득호는 뒤따라가면서 월선이쪽에 대고 입을 비쭉거렸다.    “패놓은 장작이 산더미 같은데 또 패라고? 암펌 같은게. 씨, 주둥이만 벌리면 마당을 쓸어라, 장작을 패라, 잔소리 끝이 없네. 이거 못 살겠다.”     월선은 득호의 잔등에 대고 삿대질하면서 고래고래 고함쳤다.     “뭣이 어찌구 어째? 꼽싹 꼽싹 들을 거지, 뭣이 어쩌고 어째? 그래 두지 같은 배에 공밥을 채우겠냐?”     그래도 뭐라고 투덜거리는 득호를 보고 월선은 곁방에 대고 소리쳤다.     “영팔아, 영팔씨!”    영팔이 바지멀춤을 쥐고 달려나와 가달두새를 긁적거렸다.    “왜 그랩둥?”   “초저녁부터 벌써 기생 년을 끼고 자겠나? 저 득호를 호되게 족쳐라!”     영팔은 득호를 노려보다가 월선을 보고 헤벌쭉 웃었다.    “숱한 손님들이 왔는데 방망이찜질까지 할 필요 있습둥? 집이 조용할 때 다시 버릇을 가르쳐주면 어떤가요?”    월선은 살기등등해 고함쳤다.    “너를 곱다고 숱한 돈을 먹여 길렀냐? 저런 놈을 매우 치지 못할가?”     영팔은 시어미 역정에 개 배때기를 차는 격으로 사랑방에 달려가 방망이를 들고 씽 달아나왔다. 그는 다짜고짜로 득호를 땅바닥에 개구리 메치듯 메쳐놓고 사정없이 방망이찜질을 해댔다. 투닥 투닥 방망이로 득호를 패는 소리 과부 집 떵메질 소리 같고 빨래터의 방치 질 소리 같기도 하다. 아니, 방망이로 다듬이돌우의 이불등을 다듬는 소리 같았다.     은녀가 물동이를 팔에 끼고 나오다가 그 광경을 차마 볼수 없어 "앗!" 비명소리를 내며 입술 속에 손가락을 넣고 깨물었다.     “요년, 넌 물을 긷지 않고 뭘 해?”    월선은 득호를 자기 손으로 때리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운지 은녀의 머리채를 틀어쥐고 휘두르면서 살진 손을 날려 귀썀을 챨싹 갈겼다. 머리채를 놓고 또 귀썀을 힘껏 쳤다. 은녀가 주춤하다가 뒤로 살짝 물러섰다. 월선은 지나치게 힘을 쓴 바람에 휘청거리다가 그만 마루에서 반 고패를 돌다가 마루 아래로 뚝 떨어졌다. 언 땅에 엉덩방아를 찧었는데 신짝마저 저 멀리 뿌리어 나가 상통이 가소롭기를 그지없었다.     떠들썩하는 소리에 구경나왔던 일본과 조선 기생 년들이 코를 싸쥐고 웃어댔다.     “바까 새끼, 다렝아 고찌라데 다까꾸 사껜다까?(누가 여기서 고래고래 고함쳐?)”    끼무라가 취해 뻐드려져 있다가 벌떡 일어나 비틀거리면서 마루에 나왔다. 그는 콧수염을 슬슬 매만지면서 사위를 둘러보더니 이상한 빛이 번쩍이는 눈알을 무섭게 부라리면서 꽥 고함쳤다.    한길수는 깜짝 놀라 아래방에서 마루에 뛰쳐 나왔다. 그는 끼무라의 무서운 눈길과 은녀의 머리채를 틀어쥐고 행악질하며 물앉아 있는 월선이를 번갈아보다가 월선에게 다가가 타일렀다.    “여보, 숱한 일본 손님들 앞에서 이게 뭐요? 집안 허물내메. 흥!”    월선은 은녀의 머리채를 더 힘껏 내동댕이치더니 어린애처럼 발버둥질 쳤다.    “년놈들, 잘도 놀아댄다. 이젠 숱한 사람들앞에서 요년의 역성까지 들어? 내 섧어서 어떻게 살아? 어, 헝.”    끼무라는 몸을 부르르 떨더니 추운지 고개를 돌려 들어가면서 대가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한길수는 끼무라를 따라 윗방에 들어가 바깥을 가리키면서 막걸리를 마시는 시늉을 하고 손으로 너무 많이 마셨다고 배를 가리키면서 손시늉을 했다.     그런데 눈치 빠른 끼무라는 자기를 많이 마셨다고 말한다고 피씩 웃었다.     한길수는 다시 마루아래 쓰러진 은녀 앞에 다가가 볼품없이 헝클어진 은녀 머리를 쓸어올려주며 나직이 말했다.     “밤도 깊었는데 이젠 물을 그만 길어라. 좀 있다가 끼무라 발이나 씻어드려라.”     그때까지 옆에 물앉아 발버둥질치며 엉엉 울던 월선은 은녀를 쏘아보면서 을러멨다.    “물 길으러 가지 못하겠냐?”    그런데 한길수의 고함소리 하늘땅을 진감했다.     “발을 씻어줘라!”     은녀는 두 손을 모아 쥐고 입에 대고 어쨌으면 좋을지 몰라 길수와 월선을 번갈아보았다.    길수는 월선을 쏘아보며 고함쳤다.    “옳다, 은녀는 물 길으러 가구. 당신이나 끼무라 발을 씻어주오.”     월선은 억이 막혀 입을 쫙 벌리었다가 천천히 다물더니 길수의 번대 머리에 대고 삿대질했다.    “옳다, 여편네라두 종처럼 팔아서 일본 졸개나 해 처먹어라. 원, 못난 영감이라구야. 쳇!”    길수는 황급히 웃방과 사랑방을 둘러보다가 낮은 소리로 말했다.    “끼 국장님이 알아듣지 못하는 게 다행이다. 에구, 이년을 어쩌겠냐?”     길수는 어린애 달래듯이 월선의 두 손을 잡아 끌어당기며 일으켰다. 월선은 영감을 못이기는 척하면서 아래 방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월선은 아래방문을 활 열고 머리를 내밀더니 방망이를 쥐고 떡 서있는 영팔에게 고래고래 고함쳤다.     “거기서 뭘해? 득호 그놈을 매우 치지 못하구.”     그제야 영팔은 꿈에서 깨여난듯이 방망이로 득호를 때리는 시늉했다. 월선이가 들어가자 영팔은 방망이를 홱 팽개치고 두덜거렸다.     “밤중까지 이 놈 종노릇을 못해먹겠다.”     영팔이 득호를 놓아주고 기생 뽕녀가 기다리는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그제야 득호는 눈을 털고 일어나 외딴 사랑채로 들어갔다. 은녀는 득호를 측은한 눈길로 바라보다가 물동이를 정주방으로 들여갔다.      그는 사랑채 제일 작은 칸으로 들어가 누더기 이불을 쿡 쓰고 드러누워 흑흑 흐느껴 울었다. 순간 그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그립고 멀리 사라진 성칠 오빠가 그리워났고 남동생 상호가 그리워났다. 그럴수록 더욱 슬프게 흑흑 흐느끼면서 울었다.      눈물이 하염없이 입귀에 흘러내렸다가 베개잇을 적셨다. 칠칠야밤에 어두컴컴한 사랑방에서는 은녀의 섧게 우는 소리와 흐느낌소리가 가냘프게 들릴 뿐이었다. 은녀는 울면서 짜개바람이 불어 손가락을 주물렀다.     벙어리 속은 벙어리가 안다고 득호는 은녀 처지에 마음이 미여지는 것 같았다. 그는 은녀를 어떻게 위안하였으면 좋을지 몰라 벽을 하나 사이 두고 서성거리면서 벙어리 냉가슴 앓듯 했다.     이때 은녀가 우는 방문이 벌컥 열리면서 문고락지 다치는 소리 떨꺼덩 들렸다.     “누구요?”      은녀는 황급히 어두운 방에 들어선 검은 그림자에게 물었다.     “영팔이다.”     “한밤중에 무슨 일이요? 나가오.”     “먹을 거 가져왔다.”     “필요 없소. 나가오.”    “이건 주인영감이 보낸 거야. 배 든든하게 먹어라.”    영팔은 구들 목에 뭔가 내려놓고 나가면서 두덜거렸다.     “언 감자 같은 년을 첩으로 들여앉힐 예산인가? 한밤중에 자지도 못하게 나까지 심부름시켜? 흥!”     영팔이 문을 닫는 소리가 들리였다. 뒤이어 눈을 빠드득빠드득 밟는 소리가 멀어져갔다. 은녀는 한숨을 호 내쉬었다.      이윽고 은녀는 누더기 이불속에서 나와 영팔이 가져온 것이 뭔가 기여가 손 더듬질 해보았다. 구수한 냄새와 함께 맞 덮은 그릇이 몇 개 만지었다.      점심부터 먹지 못한 은녀는 숟가락을 쥐고 몇숟가락 퍼먹다가 속으로 먹어서는 빚을 진 것 같아 안 되겠다 싶어서 숟가락을 내리어놓았다.     “은녀야, 여기 나오너라.”     월선이 부르는 소리.     월선은 하루 종일 눈을 감기 전에는 함지 같은 입을 다물지 않았다. 그 심부름을 시키는 앙칼진 소리 온 울안에 우박 치듯 쏟아졌다.       은녀는 간신히 일어나다가 눈앞이 아찔해나면서 불티가 반짝였다. 하긴 수십명의 음식을 마련하느라고 쓴 물을 혼자 추운 겨울에 한 동이 한 동이 길었으니 소 힘이라도 지치지 않을 수 없었다.      은녀는 안간힘을 다해 방바닥 쪽으로 벌벌 기여가 짚신을 찾아 신고 문설주를 잡고 간신히 일어나 비실비실 문 밖으로 나섰다.      밤송이 같은 눈송이가 성미도 급하게 펑펑 쏟아져 내렸다. 울 안에 쓸쓸하게 한 많은 세상을 뒤덮어버릴듯 하얀 눈이 한겹한겹 하얀 이불을 깔리고 있었다.      은녀가 정주간에 들어서니 등불 아래 수건으로 머리를 질끈 동인 월선이가 옆구리에 두손을 지른 월선이 콤파스처럼 두 다리를 쩍 벌리고 서 있었다.     “부른지 언젠데 왜 이제야 나와? 얼른 윗방에 들어가 끼무라 국장님의 발을 씻어드려라.”     “예?”     “얼른, 왜 그리 꾸물거려?”     은녀는 설거지를 하는 부엌여를 힐끔 곁눈질해보았다. 부엌여는 별수 없으니 어서 가라고 머리를 끄덕여보이며 눈짓했다. 은녀는 할 수 없이 풍로에 끓여두었던 물을 함지에 퍼들고 윗방으로 올라갔다.    은녀가 미닫이문을 사르르 열고 윗방 안에 들어서니 끼무라와 월향이 껴안고 코를 드렁드렁 구르고 있었다. 치마 바람에 드러누운 월향의 새하얀 허벅다리가 흘러내린 치마 밑으로 드러났다.     은녀가 물함지를 끼무라의 발치에 내려놓고 조심스레 각반을 풀기 시작했다.      “바까(바보)!”      갑자기 끼무라가 고함치면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는 본능적으로 벽에 기대여 세워놓았던 군도를 쥐였다. 그는 은녀를 가슴츠레한 눈으로 노려보았다. 은녀는 화뜰 놀라 뒤로 물앉으면서 엉덩방아를 찧었다. 끼무라는 세수 대야와 은녀의 수척한 얼굴을 번갈아보더니 군도를 스르르 놓았다.      흉악한 눈길이 차츰 음충스런 눈길로 변하면서 은녀의 탄탄한 몸을 노려보았다. 청춘의 싱싱한 매력을 풍기는  봉긋한 점 가슴, 누더기 치마에 가려진 허벅다리...      "오, 우쯔꾸씨이 무스메(예쁜 처녀구나.)"    끼무라는 싹아 떨어진 이발 새로 금 이발을 드러내며 은녀의 손을 잡으면서 색마의 본성을 드러냈다.    “놓읍소. 발을 씻어 드리겠습구마.”     은녀는 움추린 몸을 바들바들 떨면서 손을 빼내려고 안간힘을 다 썼다.     “뭘 놓으라?”     이때 길수가 윗방 문을 쭉 열고 들어왔다.     끼무라는 이젠 제법 조선말도 섞어 지껄였다.     “헤헤헤, 발을 씻으라고, 시켰소까.”     끼무라는 어색한 표정을 지으면서 코 수염 밑에 웃음을 지었으나 눈에는 아직도 아쉬움이 미친 듯이 스치고 있었다.    “난 또, 이년이 혹시 국장님을 해치려나 해서. 에헴, 헴.”    끼무라는 뭐라는지 알아듣지 못하면서도 “요로씨이, 요로씨이.” 하고 연신 헛 대답을 했다.     길수는 은녀에게 머리를 돌리더니 당부했다.    “끼국장님이 곤할 텐데 꾸물거리지 말고 얼른 발을 씻어주고 나가라.”     “얘.”     은녀는 길수 영감이 요때 방에 들어온 것이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바삐 끼무라의 각반을 풀고 양말을 벗긴 후 살진 발을 대야에 넣고 씻어주었다.    끼무라는 눈을 지그시 감고 연신 “요로씨이, 요로씨이.” 하고 감탄했다.    은녀는 발을 다 씻은 후 물 함지를 들고 부엌간으로 나갔다.     그때까지 은녀의 봉긋한 젖가슴이며 펑퍼짐한 엉덩이에 눈 뿌리를 박고 있던 끼무라는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듯이 입을 헤벌리더니 닭알 침을 꿀꺽 삼키면서 입마저 다시였다.    끼무라는 그때까지 옆에 우두커니 서있던 길수를 쳐다보면서 “저건 웬 새애기냐?” 하고 넌지시 물었다.    “예, 우리 집 부엌데기 은녀라는 계집앱죠.”    “오.”    끼무라는 색마의 눈알을 희번뜩거리더니 길수를 게슴츠레 바라보며 헤벌쭉 웃었다.    "내, 당신 사위하면 어떻소?“     "네?"    끼무라의 정신나간 소리에 한길수는 우멍눈이 다 튀여나올 지경이였다.    "무슨 말씀이신지?"     그때 월향이 깨여나면서 도도도 거리었다.     “밤중에 무슨 뉘네 사위한다고 이래요? 호호호. 촌수 개판이구먼. ㅎㅎㅎ. 소 웃다가 꾸러미 터질 일인데요. 국장이란 녀석이 우리 집 머슴여를 욕심내 사위 하겠다잖아? 호호호.”     길수도 월향의 말에 코를 싸쥐고 우멍 눈에 간교한 웃음을 지었다.     길수와 월향을 힐끔힐끔 번갈아보던 끼무라 국장은 취김에 그런 실수를 하고 너무나 창피해 비단요우에 스르르 너부러지더니 자는척했다.     집안에는 돼지 코고는 소리가 요란했다.     드르릉, 드르릉…                               5. 함정             길수는 마지못해 절구통 같은 월선의 옆에 들누우면서 앞방에서 속살에서 향기 풍기는 월향을 안고 놀 끼무라 국장을 떠올렸다.      순간 속으로 말하지 못할 무엇이 목구멍까지 울컥 치밀어올랐다. 맛있는 비게덩이를 개한테 빼앗긴 한이랄까, 자기 여동생이 왜놈에게 강간당한 치욕감이랄까, 날강도에 대한 증오심이라고 할까. 착잡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꼭뒤까지 치밀어 올랐다.      미닫이문을 하나 사이 두고 앞방에서 거친 숨소리와 신음소리가 높아갈수록 길수는 속이 비길 데 없었다.      “음, 여보, 냉수를 좀 주오.”     월선은 뭐라고 두덜거리면서 비단이불을 젖히고 일어나 정지로 나갔다.       어둠 속에서는 황소 숨소리가 거칠게 들려왔다.     “아, 아하, 으흐, 아우~”     월향의 신음소리가 집안 어둠속의 정적을 산산 박살냈다.     뒤이어 끼무라의 긴 한숨 소리가 방안을 메웠다. 속살이 째지는 월향의 아픈 신음소리도 잠잠해졌다.      길수는 월선이가 가져다준 냉수를 한 그릇을 꿀꺽꿀꺽 다 마시고나서 바가지를 월선에게 주었다.      이윽고 길수는 배를 끌어안으면서 상을 찡그리었다.      “아이고, 배 아파라. 내 뒷간에 갔다 와야겠소.”      길수가 엄살을 부리면서 털조끼를 껴입고 바깥으로 나가는 것을 알면서도 월선은 말리지 않았다. 그만큼 속으로는 어떻게 더러운 영감에게 보복할까 속궁리를 했다.     길수는 마루에 나가자 뒷간으로 가는 척 하면서 슬슬 뒤로 돌아가다가 슬금슬금 사랑채 쪽으로 다가갔다. 그 안에서는 옥설과 뽕녀, 만금 등 여러 기생 년들이 살 냄새를 풍기면서 자고 있었다.     이때 덜커덕 중대문이 여닫는 소리가 났다. 길수는 사랑채벽에 찰거머리처럼 딱 들어붙어 동정을 살폈다. 풀풀 눈가루가 흩날리는 눈발 속에 은녀가 물동이를 이고 맥없이 중대문안으로 들어왔다. 이때 웬 작은 그림자가 불쑥 나타나더니 은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     “어마나! ”     “히히히, 은녀,  항상 귀여워.”     “이걸 놓으라니까. 물독을 깨겠소.”     은녀가 머리우의 물동이를 붙잡으며 손을 뿌리쳤다.     자그마한 그림자는 놓으려고 하지 않고 호주머니에서 뭔가 꺼내 내밀었다.     “내 말을 들으면 이 돈을 가지고 머슴도 살지 않아도 돼. 내가 주인어른께 말해줄게.”     길수가 찬찬히 여겨보니 눈에 익은 자였다.    (아니, 저 놈, 응삼이, 저 눔두 은녀에게 눈독을 들였어? 내 맛도 보기 전에 은녀한테 치근거려?)    길수는 속에서 뜨거운 무엇이 욱 치밀어 머리꼭대기까지 치밀어 올랐다. 그는 사랑채 벽에 붙어 섰다. 손에 괭이자루가 만지웠다. 그는 괭이자루를 오른손에 단단히 틀어쥐고 왼손으로 벽을 스치면서 슬금슬금 중문가까이로 다가갔다.     이때 가물에 실 돌피 같은 응삼이 은녀에게 치근거리면서 다가왔다. 은녀는 응삼을 한손으로 밀어버리면서 머리 우의 물동이를 한손으로 붙잡고 부엌으로 발뼘발뼘 다가갔다.     응삼이 은녀에게서 조금 떨어져 사랑채 쪽으로 머리를 돌리더니 중대문으로 가려는 순간이다.    길수가가 괭이자루로 응삼의 머리를 힘껏 내리쳤다.     딱!     “억!”      외마디소리와 함께 응삼이 눈 바닥에 썩박나무 넘어가듯이 쓰러졌다.      이윽고 은녀가 물동이를 안고 나오다가 눈 바닥에 쓰러진 응삼을 보고 깜짝 놀랐다.      “앗!”     은녀는 식지를 깨물면서 못 박힌 듯이 눈 바닥에 서있었다. 그때 문 뒤에 키꺽다리가 까딱하지 않고 붙어 서있었다. 여기저기에서   문을 배시시 열고 검은 그림자들이 머리를 불쑥불쑥 내밀었다. 뒤이어 바깥의 일을 눈치 채지 못하였는지 덜컥덜컥 문을 닫는 소리가 들리었다.     은녀는 제 정신을 가다듬고 물동이를 이고 몸채로 들어갔다. 그는 월선에게 알리려고 하다가 응삼이 치근거리던 것이 생각난 데다 괜히 무슨 때라도 들쓸까봐 될 대로 되라고 그만두었다.     길수는 응삼의 손에서 돈이라던 걸 빼앗아냈다. 번쩍번쩍하는 은전 세잎이었다.     “개자식, 은전으로 은녀를 꼬시려고?”     그는 말이발을 사려 물고 은전을 부서지게 꽉 틀어 쥐였다. 이윽고 그는 홱 돌아서서 주위의 동정을 살피었다. 뒤이어  득호가 든 방 앞에 슬금슬금 다가가 은전을 처마 밑에 쑤셔 넣었다. 잠간 후 우멍 눈으로 사위를 둘러보고 쓰러진 응삼의 곁에 버려진 괭이를 쥐여 괭이자루로 응삼의 머리에서 눈 바닥에 흘러내린 뻘건 피를 문질러 발랐다. 그는 엉거주춤 일어나더니 눈을 빠드득빠드득 밟으면서 득호가 든 방 앞에 괭이를 슬쩍 내려놓고 사랑채 큰 방 앞에 슬슬 다가가 멈춰 섰다. 방안에서는 술에 취한 젊은 일본 기생 년들이 쌔근쌔근 잠들어있었다.     길수는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안 돼, 일본 기생들을 다쳤다간 끼무라 국장에게 잘못 보일수도 있어. 아무리 내가 색마라도 상전의 계집을 다칠 순 없어.)     길수는 사랑방안의 분내 나는 기생 년들을 먹지 못하는 것이 아쉬운 듯이 벽을 손으로 만지다가 피뜩 응삼의 사랑채에 눈길을 돌렸다.     “그래, 그 주제에 은녀를 지껄여?. 네놈의 여편네를 데리고 놀아주마.”    춘실은 응삼이 잠자리에서 나간 지 이슥해도 돌아오지 않아 이상해하며  기다렸다.    삐꺼덕    문 여는 소리 났다.    “이제 왔어요?”    “음.”    웬 그림자가 들어오더니 이불 안으로 쑥 들어왔다.    “으, 차가워. 왜 이렇게 얼면서 밖에 있었는가요?”    검은 그림자는 대답 대신 춘실의 몸에 와락 덮쳐들었다. 땀내와 술내가 메스껍게 확 풍겨왔다.    “아야, 찬 몸으로 왜 이리 성급해?”     허나 춘실은 인차 자기 남편보다 더 무거운 억대우라는 걸 알고 이상해했다. 머리를 만져보니 번대머리 아니겠는가.    “아니, 주인어른?!”    “쉿!"”    “양반어른이? 소리지를래!”    길수는 황망히 넉가래손으로 춘실의 입을 틀어막았다.     “소리 질러 봐라. 응삼이 아는 날엔 네년 살아남겠구나. 난 응삼을 우리 집에서 쫓아내면 그만이야."    그 소리에 춘실의 입이 꽁꽁 닫혀버렸다.    길수는 시름놓고 춘실의 속옷을 와락 벗겨버렸다.    "고분고분 말 들어. 길거리에서 굶어죽는 걸 데려다 키워줬으면 은혜를 보답할줄도 알아야지. 안 그래? 더러워질대로 다 더러워진 년한테 누가 열녀비라도 세워줄 거 같아?”    춘실은 팔다리를 바둥거리며 발악하다가 맥을 버리고 구슬픈 눈물을 볼에 주르르 흘렸다. 하신에 불에 단 절구공이 같은 것이 아프게 들어왔다. 뒤이어 쨍 아파나게 들쑤시는 것이었다. 춘실은 두 손으로 길수의 털이 부숭부숭한 몸뚱아리를 마구 올리 떠밀다가 손을 활 놓았다. 아프더니 점차 진짜 사내 맛이 저리게 부딪쳐 왔던 것이다.    “아우, 아, 아~”    어두운 방 안에는 춘실의 신음소리와 감탄소리가 끝이 없었다…    한참 후 길수는 흐느끼면서 섧게 우는 춘실의 손에 은전 몇 닢을 쥐여 주고 어슬렁어슬렁 나갔다. 문을 덜컥 닫자 춘실은 이불을 들쓰고 더 섧게 울었다. 즐거움은 잠시뿐 서러움이 파도처럼 밀려왔던 것이다.    (천하 사내들이란 다 개 같은 물건 짝이구나. 이모부, 길거리 건달들, 한길수. 다 색마야!)    쟁그랑!    춘실은 길수가 준 더러운 은전을 문 쪽에 홱 던졌다.   (내 어디 기생 년인가? 뭐.)   바깥에서는 눈이 펑펑 쏟아졌다. 그때까지 물동이를 안고 정주간에서 안절부절 하지 못하면서 서있던 은녀는 마루에 올라서는 길수를 보았고 사랑방에서 들려오는 춘실의 구슬픈 울음소리도 들었다.    “에헴, 물동이를 안고 서 있냐? 일찍이 들어가 자거라. 참, 일을 시켜도 분수가 있지.”    길수는 생각는 척 했다.   은녀는 물동이에서 흐르는 물방울을 손바닥으로 쓸어버리면서 길수의 지나친 관심에 몸 둘 바를 모르면서 뒷방에 들어가는 길수의 잔등을 바라보았다.   은녀는 물독마다 물이 꼴딱꼴딱 찬 것을 보고 곁방으로 나가려고 했다.    이때 빠금히 열린 미닫이 틈으로 등불 빛과 함께 두런두런 말소리가 흘러나왔다.   “어데 갔댔소? 몸이 이리 차오?”    “예. 저녁에 먹은 게 속탈이 뒷간에 가 앉아있었어요.”    “그래? 나도 속이 좋지 않아서 뒷간에 갔는데. 아니, 저.”    “호호호.”   그들 둘은 서로 거짓말을 한 걸 눈치 챘다. 뒷간은 하나인데 둘 다 이제껏 뒷간에 가 앉아 있었다는 것이 어디 말이나 될 소린가?    은녀는 코를 싸쥐고 터져 나올 것 같은 웃음을 참으면서 정주간을 나서려고 했다.   그런데 길수가 제꺽 화제를 바꿨다.    “은녀란 년이 웬 사내와 사통하려다가 들키게 되니 그 사내와 함께 마름을 쳐 눕히지 않겠소. 그 사내가 허리가 구부정한걸 보니 득호 같더라니까.”    “저런, 세상에.”    미닫이 쫙 열리더니 번들 이마와 함지 엉덩이가 정주간에 뛰쳐나왔다.    “고년이 금방 물독을 안고 여기 서있더니 어디로 갔어? 저기 나가는구나.”    “이년 거기 섯거라!”    길수는 독이 어린 우멍 사기눈을 부릅떴다. 그는 말이발을 사려 물고 씽 달려가 은녀의 치렁치렁한 머리채를 틀어쥐고 내동댕이쳤다. 은녀는 단통 마루에 나가 쓰러졌다.    길수는 끼무라를 깨울까 봐 높이 고함치지는 못하고 발길질만 했다. 암범 같은 월선은 은녀의 머리채를 쥐여 휘둘렀다.    “웬 일입둥?”    처량한 비명소리가 울리는데 영팔이 곁방에서 뛰쳐나왔다.    “저기 쓰러진 응삼을 봐라.”    길수는 물매질하고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손가락으로 눈 바닥에 쓰러진 음삼을 가리켰다.    영팔은 달려가 응삼을 끌어안아 일으켰다.    “마름, 마름!”   그제야 제정신이 들었는지 응삼은 맥없이 눈을 떴다.   “깨났어?”    허위적인 길수는 맨발바람으로 응삼에게 다가가 손을 잡아 일으키고 부축해 마루우로 올라왔다.    “분명 은녀가 어떤 사내와 함께 자넬 치는 걸 내 이 눈으로 보았어. 맞지?”     길수는 자기 쳐 넘기고서도 생사람한테 죄를 들씌워 잡아먹을 작정이었다. 참말로 열매는 자기가 먹고 가시로 남을 찌르는 격이었다.     응삼은 피가 낭자한 머리를 만지면서 중얼거리었다.    “글쎄. 이년을 저기 중문어귀에서 보고 몇 마디 말하는 새에 맞았습니다.”    길수는 영팔을 보고 고래고래 호령했다.     "흉수를 사출해! 꼭 발자국을 남겼을 거야.”     영팔은 순사처럼 응삼이 쓰러졌던 자리로부터 난 발자국들을 살펴보았다.    “금방 우리가 밟은 발자국 위에는 싸락눈이 덮일 수 없지. 다만 흉수의 발자국 위에만 싸락눈이 살짝 덮여 있을 거야.”    길수는 마루에서 신을 찾아 신고 내려와 그럴듯하게 인도해갔다.    “여기, 여기!”    길수는 싸락눈이 살짝 덮인 발자국을 가리켰다. 그 발자국을 따라 가면서 보니 몽둥이 같은 것을 질질 끌고 간 자리가 득호의 방문 앞으로 났다. 확실히 방문 앞에 자루에 피가 질벅하게 묻은 괭이가 있지 않겠는가.    “피 묻은 괭이자루! 분명, 득호 녀석이 응삼을 쳐 눕힌 거야!”    길수는 음흉한 눈길로 영팔을 보면서 쑤군거렸다. 영팔은 납작코를 벌름거리면서 머리를 끄덕였다.    길수는 득호 방문 앞으로 다가가 이영의 지푸라기가 부스러진 것을 손가락질했다.     "이 지푸라기 봐라."    영팔이 처마 밑을 살피다가 처마 밑에 움쭉 들린 틈새를 발견했다.    그는 손을 쑥 들이밀어 더듬더니 고함쳤다.    “이게 뭐냐?!”   영팔은 뭘 쑥 뽑아냈다.    “은전!”    은전이 등불에 백설같이 빛 뿌렸다.    영팔은 더 지체하지 않고 득호네 방문을 열어 재꼈다. 득호는 바깥에서 떠들썩한 영문을 모르고 주섬주섬 옷을 주어 입다가 영팔의 납작 코와 부딪쳤다.    “너 이놈, 마름을 몽둥이로 쳐 눕혔지?!”   영팔이 득호 팔을 붙잡고 을러멨다.   득호는 잠꼬대 같은 소리를 했다.    “난 나무를 패구 곤해서 쓰러져 쿨쿨 잤소. 건데 누구를 몽둥이로 쳐눕혔다구 그러오? 생똥 같은 소리를 좀 작작 하오.”    득호는 몸채 앞에까지 끌려나왔다.   길수는 득호 코 앞에 대고 삿대질했다.   “난 네놈이 응삼을 쳐 눕히는 걸 똑똑히 보았다. 거 괭이하구 은전을 여기 가져오너라.”    영팔이 피 묻은 괭이와 은전을 가져왔다.    “응삼이, 이 은전을 보게나. 이게 자네 게 맞는가?”    응삼은 머리를 싸쥐고 은전을 여겨보더니 머리를 끄덕이면서 득호를 노려보았다.    영팔은 응삼에게서 눈길을 득호에게 돌렸다.    “그래도 승인하지 않겠는가? 물증이 나왔는데. 응삼의 은전 세잎이 어떻게 돼 자네 처마 밑에 감춰졌어? 이 피 묻은 괭이도 네 방 앞에 있지 않았어? 발자국두 분명 네 방 앞으로  났구.”    득호는 억울하여 눈이 풀풀 흩날리는 하늘만 쳐다보면서 땅이 꺼지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게 웬 날벼락인가? 억울해 죽겠다. 씨, 곤해 잤는데 왜 생똥 같은 죄를 들씌움둥?”    “분명 저 허리구부정한 놈이 몽둥이로 우리 집 마름을 쳐 눕히는 걸 보았다. 은녀, 말해봐. 저 놈과 짜고 들었지?”    은녀는 월선에게 머리채를 틀어 쥐인 채 머리를 쳐들고 말했다.    “난 물을 긷고 돌아오면서 마름을 보았지 득호 오빠는 본적두 없습구마.”    찰싹!    영팔은 은녀의 볼에 한대 안기고 은녀와 득호에게 삿대질하면서 고래고래 고함쳤다.    “어째, 매우 맞아봐야 실토정하겠냐?"   길수는 영팔과 수길의 귀에 번갈아대고 끼무라 국장을 깨울까봐 득호와 은녀를 대문밖에 끌고나가 매우 치라고 귀속 말로 쑤군거리었다.    죄 없는 득호와 은녀는 대문 밖에 끌리어나가 언 눈 바닥에 엎드려 억울한 매를 맞았다. 세상에 이런 무함이 어디 있는가? 죄는 누가 짓고 매는 누가 맞는단 말인가?   매를 맞던 득호는 옆에서 방망이에 볼기짝을 맞는 은녀가 불쌍해 손을 쳐들며 고함쳤다.    “그만! 내 혼자 마름을 쳤소. 은녀하구는 관계없소.”    영팔과 수길은 매를 멈추고 너스레를 떨었다.    “그래, 진작 죄를 실토정할게지.”     “매나 덜 맞지. 흥!”    영팔과 수길은 개 잡은 포수처럼 우쭐거리면서 득호와 은녀를 끌고 집으로 들어왔다.   하늘에서는 아직도 어둠 속으로 눈을 펑펑 내리쏟아부었다. 어둠은 백설같이 흰 대지를 어둡게 감싸 안으려고 억지를 부렸다.                            6. 조선의 원시림      나무가지들에는 시허연 눈이 더부룩이 쌓여 있다. 박달나무도 탁탁 얼어터질 엄동설한이 다가왔다. 여우도 추워 눈물방울을 똑똑 떨어뜨리면서 발을 동동 구를 맵짠 추위가 덮쳐왔다. 화로불도 품 속으로 기여들 지경으로 매섭게 추웠다.     마을 사람들은 길수가 경찰국청사공지 삯전을 주지 않아 아침을 먹으면 저녁쌀이 없어 근심하면서 하루를 삼추와 같이 어렵게 살았다. 그러나 길수는 집에 일본 경찰국장과 기생 년들까지 불러다가 흔전만전 먹고 마시고 큰 잔치를 벌렸다.     마을 사람들은 뒤에서 모두 욕설을 퍼부었다.     "저 우멍눈을 까마귀 파먹었으면."      "어서 썩어질게지."      길수는 영팔과 수길 등 졸개들을 데리고 마을마다 돌아다니면서 벌목에 나오라고 을러멨다. 그의 말대로라면 통나무를 벌목해 우시장에까지 실어가면 꼭 삯전을 준다고 했다.     성칠은 크게 희망을 걸지 않으면서도 사냥도 하지 못하게 하는 판에 칠백과 덕성, 최동욱 등과 함께 무릎까지 푹푹 빠지는 산으로  벌목하러 올라갔다.     요즘 삼림분주소 야마모도 소장은 사냥도 마음대로 하지 못하게 했다. 그는 낮에는 삽살개처럼 졸개들을 데리고 산에서 벌목공들을 감시할 뿐만 아니라 누가 사냥을 하나 살피였다. 밤에는 마을로 싸다니면서 어느 집에서 혹시 산짐승을 사냥해 끓여 먹나 집집이 기웃거리면서 가마뚜껑까지 일일이 열어보았다.        스르륵 스르륵 톱질소리에 턱턱 도끼질소리에 조용하던 원시림이 시끌어워졌다.      “넘어간다!”       여기저기서 아름드리나무가 쿵 쿵 넘어갔다.      사기 나서 “넘어간다!”고 소리치는 것이 아니었다. 넘어가는 나무에 사람이 다칠 까봐 소리치는 소리였다.      마을 사람들은 넘어간 통나무를 집짓기에 좋을 만큼 토막 내 소 발기에 실어 산 아래에 끌어내려갔다. 거기서 다시 마차나 소수레에 실어 우시장 경찰서 사무청사 공지에 실어갔다.     산골마을 영월동은 벌목 일에 끌려온 사람들로 붐비었다. 집집마다 다른 마을사람들이 몇몇씩 들었다. 저기 버치 골에는 저목장이 들어앉아 아름드리 통나무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겨우내 몇 달 벌목하니 아름드리나무들이 하늘을 가리며 우중충하게 서있던 원시림은 거의 벌거숭이로 돼버렸다. 산도 옷을 홀랑 벗은 까까머리처럼 민둥산으로 보기 싫게 변해갔다.     “제길 할, 나라에서 몇 십 년이고 몇 백 년이고 부동림이라고 법령을 내리더니 결국 섬나라 오랑캐들이 좋은 노릇을 했네그려."      성칠이 볼 부은 소리를 했다.      “쉿-”     칠백이 턱으로 산기슭 쪽을 가리켰다.     야마모도소장이 가죽채찍을 감아쥐고 졸개들과 함께 눈에 푹푹 빠지며 이쪽을 흘끔흘끔 살피면서 다가왔다.     설겅설겅     성칠과 칠백은 마주 앉아 톱질했다.     “요로씨이(좋아)”      야마모도는 원숭이 엉덩이 같은 낯에 만족한 웃음을 지었다.     “깍- 깍-”    야마모도의 멋들어진 모자에 까마귀 똥 꽃이 허옇게 피었다.    성칠이 하늘을 쳐다보니 까마귀 한마리가 날아지나가면서 똥을 내리쏜 것이 틀림없었다.    “바까(바보) 새끼!”    야마모도 소장은 하늘 저 멀리 날아가는 까마귀를 쳐다보면서 욕지거리를 해댔다. 그는 모자를 벗어보고 까마귀 똥을 옆에 선 나무에 대고 문질렀다. 똥이 벗어지기는커녕 오히려 더 넓게 똥칠이 돼버렸다.    “제길 할!”    야마모도 소장은 모자를 홱 팽개치더니 뒤따라 온 졸개의 모자를 벗겨 쓰고 가버렸다.    졸개는 귀를 싸쥐었다가 옆에 선 졸개와 칠백이를 흘끔흘끔 쳐다보다가 칠백의 털모자를 빼앗아 쓰고 가버렸다.    김칠백은 수림 속으로 사라져가는 야마모도와 졸개들을 노려보다가 주먹을 으스러지게 쥐였다.    “개자식들, 아무 때건 도끼로 대갈통 찍어놓지 않는가 봐.”    칠백은 도끼자루에 침을 퉤 뱉어 틀어쥐더니 통나무를 탁탁 내리찍었다. 도끼밥들이 사처로 튕겨 눈 위에 툭툭 떨어졌다.    “일본 사람들은 이젠 기운봉이나 치마봉 수림의 주인행세를 하는구나. 경찰국 청사를 짓는 데 무슨 나무를 이렇게 많이 쓴다니?”    성칠의 말에 칠백은 투덜거렸다.     “내 사촌형 룡천이가 말하던데 철길과 길 닦는데도 쓴다더이.”    칠백의 말꼬리에는 경상도 사투리 줄줄 묻어나왔다.    “개자식들, 우리를 생각해 철도를 놓는 척 해도 자기네 좋은 노릇을 하려는 게 아니고 뭐냐?"    “글쎄 말인기여.”    “가만.”    성칠은  톱질을 하다가 손을 멈추고 칠백에게 물었다.    “네 사촌형은 뭘 하는 사람이냐?”    그러자 칠백은 사위를 둘러보더니 성칠의 귀에 대고 귀속 말을 했다.    “룡천은 경주 큰아버지네 맏아들인기여. 내 죄를 짓고 이 마을로 도망쳐 온 후 소식이 끊어졌댔어. 몇해 전 어느 날 밤중에 나를 찾아오지 않았겠어. 어떻게 알고 찾아왔는지? 장백산에 다니면서 사냥한다던데 친구들도 꽤 많은 것 같더이.”    “음, 언제 만났으면 좋겠다. 함께 사냥도 하고. 이게 어디 지긋지긋해 일본 사람들의 수하에서 살겠냐?”    “그러지. 이제 형이 오면 만나게나.”    그들은 말을 마치자 톱질을 슬슬 해댔다.    이윽고 아름드리통나무가 흔들거렸다.    성칠과 칠백은 엉거주춤 일어났다.    “넘어간다!”    산악을 뒤흔드는 소리와 함께 아름드리통나무가 다른 나무 가지들을 내리깔며 꽈당 쿵 넘어졌다.   이때 통나무를 살피던 칠백이 소리쳤다.   “아니, 이거 벌레 먹은 통나무 아냐!”    성칠이 여겨보니 톱으로 벤 나무 밑둥 여기저기에 손가락만큼 한 구멍이 숭숭 나 있었다. 손가락으로 구멍을 우비니 톱밥 같은 나무가루가 나왔다. 이윽고 까만 대가리에 누런 색을 띤 손가락만큼 굵은 벌레가 묻어 나왔다.   “아니, 이 흐물흐물한 벌레가 이 큰 아름드리통나무를 파먹었단 말인가?”    성칠이 놀라자 칠백이 성칠의 귀에 대고 쑤군거렸다.    “이런 나무로 경찰국 청사를 어떻게 짓는대? 쾅 무너져뿌려!”    성칠은 피뜩 무슨 생각이 들었던지 벌레를 벌레구멍에 되 넣고 나무가루로 잘 막아주었다.    “왜?”    의아한 칠백의 눈길에 성칠은 귀속 말로 "쉬-" 하고 식지를 입에 대고 사위를 살폈다.     “장차 알 도리가 있을 거야.”    그는 도끼로 나무가지를 툭툭 쳤다.     칠백도 알았다는 듯이 벌레구멍난 자리를 피해 도끼질했다.    “그런데 말이야. 벌레가 얼어 죽지 않을까?”    “아니야. 이 벌레는 춘하추동 나무구멍에서 살아온 끈질긴 놈이야. 우리 도끼나 톱에 죽지 않으면 얼마든지 겨울을 살아 나갈 수 있어.”     “오, 그래? 잘 됐어.”     “쉿-”    성칠은 입가에 식지를 댔다.    칠백은 머리를 끄덕였다.    그들 둘은 무슨 묘책이나 생각해낸 듯이 시름놓고 다른 나무를 찾아가 밑 둥에 대고 톱질만 부지런히 슬슬 했다.    한참 후 칠백이가 이렇게 넌지시 물었다.    “자네가 사냥하러 간 틈을 타서 길수가 은녀를 부엌데기로 들여갔잖아. 그런데 전번에 득호와 짜고 들어 응삼을 몽둥이로 쳐 눕혔다고 해. 득호와 은녀는 한바탕 두들겨 맞고 한평생 종살이를 해야 한다데이.”    “그게 될 말인가?”    성칠은 성나서 씩씩거렸다.    칠백은 톱질을 멈추고 산기슭을 내려다보았다.    소가 엄청나게 큰 통나무를 수레에 싣고 내리막을 받지 못하는지 덕성과 덕팔, 상호, 백룡 등 십여 명 장년들이 통나무를 멜대목도로 메고 산기슭으로 내려갔다. 덕성이 첫소리를 먹이면 모두들 소리를 받으면서 발을 맞춰 힘겹게 내려가고 있었다.      백년 묵은 통나무라    허기영차    썩둑 잘라 죽였어    허기영차    산 것보다 무거워라    허기영차    고향 떠나기 싫은가?    허기영차    가기 싫어 뻗치는가?    허기영차    무겁기도 무겁다    허기영차      고향 땅 떠나가면    허기영차    오랑캐 섬나라서 썩으리라    허기영차    오호 서럽다    허기영차    이제 가면 언제 오냐?    허기영차    얼씨구 서럽다   허기영차   절씨구 서럽구나   허기영차      목도소리를 듣고 성칠은 한숨을 땅이 꺼지게 후 — 내쉬었다.    이때 무릎까지 푹푹 빠지는 눈밭을 헤치면서 웬 장년이 다가오더니 칠백에게 인사했다.    “동생, 벌목해?”   칠백은 반가워 그 사내를 와락  끌어안았다.   “히야(형), 범이 자기 흉을 하면 온다더니.”   칠백은 몸을 돌리더니 성칠에게 인사시켰다.   “인사해. 우리 마을 힘장사 성칠 형이야.”   “내캉 한 고향 마을에 살던 사촌형 룡천이야.”    성칠은 룡천과 악수를 나누었다.     “나니까(뭐야)?”    그들이 머리를 돌려보니  헌병 가메다가 영팔과 수길을 꼬리에 달고 다가오고 있었다.    가메다는 별나게 볼때기에 검은 사마귀에 털 한 모숨이 나 있었다. 하여 사람들은 그 놈을 털 한모숨이라고 별명을 지어 불렀다.    칠백은 턱으로 털 한 모숨을 가리키면서 룡천에게 도끼를 쥐어 주었다.    “저 가메다는 대단히 교활한 놈이야. 일하는 척 해.”     칠백의 귀속말 뜻을 알아챈 룡천은 도끼로 나무 가지를 툭툭 치는 시늉을 했다.    가메다는 채찍을 쥐고 거들먹거리면서 세 사람과 통나무를 번갈아보았다.     “야, 이 놈들아, 아까부터 겨우 나무 한대를 벴냐? 엉?”    털 한 모숨은 다짜고짜로 채찍을 휘둘러 성칠의 잔등을 내리쳤다. 날아드는 채찍을 받아 거머쥔 성칠의 눈에는 분노의 불길이 무섭게 이글거렸다.    그때 뒤따라온 영팔이가 발길을 날려 성칠의 아래 배를 걷어찼다. 성칠은 날아드는 발을 받아 쥐어 내동댕이쳤다. 영팔은 바람개비처럼 저쪽에 날려가 눈속에 머리를 보기좋게 처박혔다.    “엉, 이 놈들, 언감 도감께 손을 대?”   수길이 눈깔에 불길이 이글거렸다.    룡천이 도끼를 놓고 두 팔을 벌리고 나서며 말리였다.    “다들 왜 이래? 우리 부지런히 일하면 끝 난 거 아뇨?”     수길은 주먹을 내리우더니 의아한 눈길로 룡천을 쏘아보았다.    “넌 어느 마을에서 온 놈이야?”    “저 뒤쪽 가마골에서 왔소.”    “오, 그래?”    수길은 도끼를 거머쥔 성칠과 칠백의 눈길에 이글거리는 불길을 보고 바삐 그 자리를 떴다.    “부지런히 일하게나.”    영팔은 눈구덩이에서 일어나 눈을 부릅뜨고 성칠에게 주먹을 쳐들고 흔들어 보이면서 꼬리 빳빳해 달아났다.              7. 고향의 버들     엄동설한에  눈 덮인 대지에 차가운 빛가루가 뿌려지고 있다. 윙-윙- 눈보라가 사납게 울부짖으며 눈 덮인 시골개천바닥을 휩쓸며 휘몰아친다.     경인과 어금은 불 붙이에 세간나 이럭저럭 근근득식하면서 살았다. 경인은  베옷바람에 초신 감발하고 윙윙 휘몰아치는 눈보라를 무릅쓰고 버들방천의 버들을 베러 발기를 끌고 나갔다. 소 버치를 결어 팔아 차좁쌀이라도 사 살림에 보태려는 것이였다.     눈보라가 어찌나 세찬지 날아오는 모래알 같은 눈가루에 얼굴을 맞아대는 듯하였다. 숨이 헉헉 막혀 발기를 끌기 힘들었다. 설상가상 맵짠 한기가 뼈 속까지 스며 들어 아래위이발이 더덕더덕 맞쪼길 지경이었다. 그래도 경인은 용케도 쓸만한 버들을 얻어만 보면 낫질 해 발기에 담았다.     “야, 이 놈새끼, 버드나무를 마구 베?!”    눈보라치는 겨울에 이게 무슨 마른 하늘 생벼락인가?    경인은 낫을 쥔 채 머리를 돌렸다. 소리임자를 보니 말을 타고 군도 찬 일본 사람이었다.    경인은 일본 사람이 뭐라고 하는지 알아듣지 못했다. 그는 머리를 숙이고 발기를 끌고 나가면서 계속 버들을 베였다.     쒹- 쒹-    가죽채찍이 날아와 경인의 잔등을 핥아 쨌다.    옷이 째지며 살갗이 드러났다. 드디여 살캋에 시뻘건 굴 뱀이 죽죽 졌다.    “아니, 왜 이래?”    “빠까 모노(바보 같은 자식)!”    일본 놈이 고래고래 고함치며 채찍을 휘둘렀다.    경인이 날아드는 채찍을 덥석 감아쥐어 홱 챘다.    일본 놈이 말잔등에서 휘청거리며 하마트면 떨어질 번했다.    이때 등뒤에서 말발굽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총을 든 일본 경찰 대여섯이 말 타고 달려왔다.    먼저 온자가 뭐라고 고래고래 고함치자 일본 경찰들은 경인을 붙잡아 묶었다. 그 놈들은 경인을 붙잡아끌고 개 잡은 포수들처럼 우쭐렁거리며 상우남면에 자리잡은 림산파출소로 끌고 갔다.    파출소에는 조선인 통역이 있었다.    통역은 사무상에 거만하게 앉아 있는 일본 사람을 가리키면서 조선말로 말하였다.    “이분은 림산파출소 야마모도소장이네. 당신 정신 있소? 감히 버들방천의 버들을 베다니?”    그제야 경인은 자기가 잡혀온 영문을 조금 알게 되였다.   잠간 후 그는 머리를 번쩍 쳐들었다.    “일본 사람들이 정신있소? 내가 나서 자란 고향에서 버들을 벴는데 무슨 죄 있단 말이오?”    경인의 뒤 말만 통역하자 야마모도 소장이 호통쳤다.    “뭐 어쩌고 어째? 법도 모르는 시골 놈들, 한일합방 후 조선은 일본에 귀속됐어. 조선의 땅과 물에서 자란 모든 게 일본 거란 말이야. 넌 일본 삼림법을 어겼기에 중대 범죄자야.”    경인은 억이 막혀 가슴을 쾅쾅 두드렸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요? 우리가 세세대대로 살아온 고향이 일본 거란 말이요?”    통역은 조용히 말했다.    “이보. 말해보았자 쓸데없소.벌금이나 하구 집에 가게 내 말해줄테니. 작작 떠드오.”   "벌금? 무슨 말이오?"   "감옥살이 대신 돈이나 내란 거요."    경인은 머리를 무겁게 툭 떨어뜨렸다.    (일본 사람들이 들어온 후 처음 듣는 소리야, 제기랄 벌금! 당장 먹을 쌀을 살 돈도 없는데 벌금 하라는 거야? )    경인이 속으로 두덜거리는데 일본 헌병 소대장 나까노라이찌로가 파출소에 들어왔다.     그는 야마모도 소장 곁으로 다가가 거적눈을 내리깔면서 뭐라고 쑹얼거렸다.     야마모도 소장은 경인을 내려다보며 머리를 끄덕이더니 권연 한대를 꺼내 가재수염아래에 꼬나물었다.    나까노라의 거적눈은 실눈으로 한데 붙더니 피어오르는 연기를 꿰뚫고 경인을 여겨보면서 무슨 속궁리를 굴리고 있었다.     이윽고 야마모도 소장은 희죽이 웃으며 씨부렸다.     “자넨 운주동 최구장네 둘째아들이라면서?”    경인은 머리를 들어 야마모도 소장을 쳐다보았다.    야마모도 소장은 가재수염을 슬슬 쓸더니 교활한 웃음을 지었다.    “여기 벌금서에 이름 석 자를 써넣고 돈을 가지고 오게나.”    경인은 번쩍 머리를 쳐들었다.     “아니, 보릿고개를 넘을 쌀을 살 돈도 없는데 무슨 벌금을 내라는 게요?”     야마모도소장은 통역이 번역해주자 책상을 꽝 쳤다.     “제기랄! 최구장 낯을 봐주는 건데도 모르는가? 어째 감옥살이를 하고 싶은가?”     경인은 억울한 대로 그렇게 하겠다고 벌금 서에 자기 이름 석 자를 써넣고 파출소에서 나왔다.     그는 앙알한 마음으로 발기를 끌고 운주동에서 서쪽으로 오리나 떨어져있는 불붙이의 집으로 돌아왔다.      이튿날 어금에게서 기별을 받고 최구장과 경숙이 달려왔다. 그들은 경인의 째진 옷 속에 드러난 잔등의 채찍자리를 보고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자기 고장의 버들을 벴는데 채찍으로 이다지도 때려?”    경숙이 경인의 상처를 보면서 불만을 토로했다.    “계십둥?”   이때 밖에서 성칠이 사냥총을 쥐고 불쑥 들어섰다.    눈보라가 살창문을 투르륵 두드린다.    “사돈어른 오셨구먼. 우리 조카사위가 일본 놈들에게 다쳤다더니 어떻소?”    성칠이 문안하러 오자 경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이유, 목재 일에 바쁜데 찾아 왔습니까?”    경인은 일어나 절을 올렸다. 그러자 성칠은 바삐 마주 앉으면서 답례했다.    “에이, 아픈데 무슨 절까지. 에이고, 어깨랑 다쳤구먼. 다른 덴 상하지 않았소?”    “괜찮습니다.”    어금은 눈물이 글썽해 두 손을 맞잡고 앉아 큰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성칠은 어금을 건너다보면서 당부했다.    "이후에는 일본 놈들의 눈을 피해 버들을 베오.”    경인은 피발이 선 눈을 뚝 부릅뜨고 바깥을 내다보면서 이를 북북 갈았다.    “에이유, 그 놈들의 성화에 어디 살겠습둥? 버치라도 결어서 쌀이나 사자 했더니. 그것마저 안 된다면 우리는 어떻게 삽둥? 전번에 경찰국공지의 삯전도 주지 않은 게 목재 일을 해도 주겠습둥? 살 길이 막막합구마.”     성칠은 여러분들을 둘러보면서 말했다.    “일본 놈들을 우리 고향에서 몰아내기 전에는 발편잠을 잘 수 없습구마.”    최구장은 도리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총칼을 쥔 일본 놈들을 어쩌겠수?”    성칠은 사냥총을 들어 보이면서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도 사냥총 들고 싸워야 합구마. 경인 조카사위는 검을 잘 쓰지 않소?”    그 소리에 모두 놀라 어안이 벙벙해졌다.   최구장은 한숨을 후 내쉬었다.     “우리 힘으로 언제 그 놈들과 싸워 이기겠소? 500년이나 이 나라를 통치해온 이씨 조선의 관군들도 어쩌지 못하고 나라를 다 빼앗기고 말았는데. 괜히 검을 휘두르다가 괜히 목숨이나 잃겠소.”      최구장은 앉아 김빠진 말만 했다. 성칠은 공자 왈 맹자 왈 밖에 모르는 선비들과 무력을 쓰자는 말이 잘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느꼈다.      (나도 주저하지 않았던가? 하물며 선비들이야 무슨 담에 총칼을 든 일본 놈들과 싸우겠는가?)     성칠은 장소나 사람을 봐가면서 말해야 되겠다는 것을 느끼고 다른 화제를 꺼냈다.     “사돈어른의 서당 방은 어떻게 돼갑둥?”     최구장은 머리를 홰홰 가로저었다.     “요즘부터 일본 사람들이 조선 글이나 한어를 가르치지 말구 일어를 배워서 가르치라고 해서 난리네.”    주름살이 밭고랑처럼 패이고 흰 수염이 더부룩하게 자란 최구장의 얼굴에는 수심의 그늘이 꽉 끼였다.    성칠은 세파에 모대기면서도 꿋꿋하게 살아가는 최구장에게 존경이 갔다.     “최구장은 서당 방을 차려서 우리 후대들의 눈을 틔워주는 게 민족을 위해 좋은 일을 하는 겝지유.”     “우린 아무리 가난해도 허리띠를 조이고서라도 자식들을 공부시켜야지.”     그쯤 되자 성칠은 후에 경인과 조용히 말해보기로 하고 문안 몇 마디 더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성칠은 사돈들과 인사하고는 집에 나와 성큼성큼 앞장대로 치달아 올랐다.     눈보라가 쌩쌩 나무초리를 스치며 무서운 비명소리를 쳐댔다.                                            8. 대결           한편 명천 경찰국 청사를 짓는 공지에서는 아직도 숱한 인부들이 삯전에 미련을 가지고 개미처럼 바글거렸다.    병완은 한창 목수 간에서 대패질하면서 속으로 별렀다.     (길수, 개놈새끼 오기만 해 봐라. 숱한 인부들의 삯전을 주지도 않고 네놈이 견딜 거 같아?)     범이 자기 흉을 하면 찾아온다고 한길수가 일본 헌병대의 오토바이에 앉아 먼지를 새뽀얗게 일구면서 둔덕우로 달려왔다. 그는 오토바이에서 내리자마자 개화장을 휘두르며 거들먹거리면서 졸개들과 뭐라고 떽떽거렸다.      그는 높이 세워진 기둥들과 문짝을 두루 살펴보고 나서 목수 간으로 다가왔다.     “어허, 병완이, 수고 많네.”    병완은 대패질하던 손을 멈추고 허리를 펴더니 길수를 쏘아보았다.     “자위대 부대장을 하더니 한 마을 사람도 잊었소?”    “왜 아침부터 걸고드는 말툰가? 바가 야로!”    “집식구들이 내일 먹을 쌀이 없는 판에 말투가 고울 수 있는가?!”    “살림살이를 어떻게 했으면 한다하는 목수가 굶어죽게 됐는가? 빠까야로! 흥!”   “자넨 언제부터 섬나라 오랑캐로 됐는가? ‘바가’, ‘바가’,  뭐라구? 박으란 말인가? 자네 골로 박기를 잘하더니만 쩍 하면 ‘바가’, ‘바가’야?”    길수는 우멍눈을 부라리었다.    “자네 정말 대일본제국의 철퇴 맛을 봐야 알겠는가?”    병완은 대패질하던 나무를 땅바닥에 내려놓으면서 조금 부드러운 말투로 바꿔 말했다.    “한 대장, 자네 끼무라 국장과 말해서 인부들의 삯전을 주게나. 창렬은 상호 품삯으로 병 치료도 하고 쌀도 사먹어야 할 형편이오. 온 마을에서 자네 말을 믿고 동원돼서 경찰국을 지으러 왔잖소?  품삯을 주지 않으면 온 마을 사람들이 이 추운 겨울을 어떻게 사오?”     한길수는 중절모자를 벗더니 번들 이마에 송골송골 내밴 땀을 수건으로 뚝뚝 찍으면서 코 방귀를 뀌었다.    “흥! 그따위 신용을 지키자고 내 집 기둥을 뽑아 삯전 줘?”    그 말에 병완은 눈을 뚝 부릅뜨고 한길수를 쏘아보았다.    “그것두 말이라고 하오? 그래 품삯을 주겠소? 안 주겠소?”    “안 주면 어째? 대일본제국 경찰국을 짓는데 무슨 놈의 삭전이야?”    한길수는 끼무라한테서 배운대로 지껄이지 않겠는가.    병완은 더는 참을 수 없었다.    “야, 이 놈, 일본 오랑캐 개다리야, 그것도 말이라고 하느냐? 네놈이 품삯을 준다고 하니 내 숱한 사람들을 동원해 왔지 않았느냐? 그런데 지금 와서 해뜩 번져 눕겠니?”     한길수는 숱한 인부들의 앞인지라 자존심에 허락되지 않아 억지로 틀을 차렸다.    “이 놈, 언감 자위대 대장 앞에서 큰소리를 치겠는가? 얘들아, 저 놈을 잡아 묶어 헌병대에 압송해라.”     병완도 서슬이 퍼래 펄펄 날뛰었다. 그는 제일 먼저 바줄을 쥐고 달려오는 졸개를 어깨 넘어 옷을 거머쥐어 바람개비처럼 휘둘러 뒤따라오는 졸개를 쳐 눕혔다.    졸개들은 그 근력에 겁을 집어먹고 뒷걸음질 쳤다.    병완은 오른손에 쥐였던 졸개를 서너 발 앞에 내동댕이치면서 호랑이처럼 쩌렁쩌렁 고함쳤다.    “이 개놈새끼야, 담이 있으면 시끄럽게 졸개들을 내세우지 말고 한판 붙어보자!”   한길수는 숱한 인부들과 졸개들 앞인지라 물러설 수 없었다.    “좋다. 네놈의 그 울뚝밸을 뽑아 땅바닥에 왈왈 널어놓지 않는가 봐라!”    한길수는 개화장을 땅바닥에 홱 팽개쳤다.    그는 중절모자를 벗어 영팔에게 넘겨주더니 공지에서 훤한 곳으로 썩 나갔다. 그는 단단히 잡도리를 하느라고 대가리를 돌려 목을 놀린다, 손으로 머리카락이 몇 대 없는 번대 머리를 쓱쓱 쓰다듬는다 하면서 예비 동작을 했다.    “이 명천 울뚝밸아, 어디 덤벼봐라!”    병완은 대패질하던 가래짝 같은 손을 툭툭 마주쳐 먼지를 털면서 부릅뜬 눈으로 한길수를 쏘아보며 마주 나갔다.    몇 십 년 후에 다시 주먹을 쥐고 마주선 그들은 정말 룡과 범 같은 적수였다.   병완이 제대로 자리 잡고 마주서기도 전에 한길수는 씽 덮쳐들며 주먹을 휘둘러 선제공격을 들이댔다.    병완은 준비가 없은건 아니였다. 하지만 한길수의 주먹에 얼굴을 몇 매 얻어맞았다. 뒤로 비칠거리며 물러서는 병완을 보고 졸개들은 굳어졌던 낯을 풀면서 머리를 끄덕였다.    기준과 창준은 연세 있는 아버지가 욕볼 까봐 조마조마해 손에 비지땀을 그러쥐었다.    병완은 한길수가 골박이를 잘 한다는 것을 알고 머리만 중시했다. 그런데 오늘 한길수는 번번히 대머리를 뒤로 젖혔다가 박는 시늉을 하다가도 발로 걷어차지 않으면 주먹을 날렸다.    한길수는 한매 치고는 슬쩍 피하면서 득의양양해했다. 한길수의 징그런 상판대기 역겨웠다. 한길수는 우쭐해서 병완을 치고 차면서 공지 적송과 잣나무 같은 통나무를 세워놓은 곳에 몰고 갔다. 불 보듯 빤한 짓거리였다.    한길수의 주먹이 휙 날아들 때 씨름재간이 있는 병완은 날아드는 주먹을 잡아 비틀면서 한길수를 보기 좋게 태를 쳤다.    한길수도 만만치 않았다. 내 동댕이치는 그대로 바람개비처럼 몸을 날려 서너 발자국 밖에 가서 척 섰다. 태권도 6단의 날랜 솜씨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길수는 쓴 웃음을 지으면서 침을 퉤 뱉었다.    병완이 두 번째 반응을 하기도 전에 한길수는 통나무 무지 앞에 서있는 병완에게 호랑이처럼 씽 덮쳐들었다. 한길수는 이번에는 주먹을 날리는척하다가 최후일격을 가했다. 그는 번들 이마를 뒤로 젖혔다가 병완의 너부죽한 얼굴에 미친 듯이 골 박이를 떵 했다.    “골받이!”    기준은 황급히 소리쳤다.    병완은 몸을 살짝 낮추며 머리를 왼쪽으로 슬쩍 피하면서 길수의 허리를 잡아 어깨 넘어 내동댕이쳤다.    “앗!”    날아들어 오던 한길수는 그만 나무 무지에 번대머리가 꽝 박혔다. 그자는 피 흐르는 낯을 싸쥐고 쿵 쓰러졌다.   병완이 다가가 보았다. 한길수의 왼쪽 우멍 눈에서 피가 주르르 흘러내렸다.   병완이 한길수의 번대머리가 박힌 나무무지를 살펴보니 피가 질벅한 나무옹이에 피 묻은 눈알이 한개 꽂혀 있지 않겠는가.   분명 한길수가 골박이를 하다가 병완이 피하는 바람에 허망 나무옹이를 들이받아 왼쪽눈알이 박혀 뿍 빠져 나왔던 것이 틀림 없었다.     땅! 땅!    영팔은 자기 상전이 상한 것을 보고 허공에 권총을 쏘았다.    그는 총으로 병완을 겨냥하면서 고함쳤다.    “이 놈! 언감 우리 대장을 다치게 해? 살아 남을 거 같애? 얘들아, 이 놈을 묶어라!”    졸개들은 바 줄을 쥐고 떡 버티고 선 병완을 보고 감히 덮쳐나가지 못하고 주춤주춤 했다.    땅! 땅!   영팔이 또 총을 쏘았다.   병완이 왼팔을 붙잡으면서 상을 찡그리었다.   “이 놈들아! 누구한테 총질이냐?”   기준이 도끼를 쳐들고 덤벼들었다. 인부들도 괭이와 도끼를 쳐들고 영팔의 주위로 몰려들었다.    땅! 땅!    영팔은 허공중에 총을 쏘았다.    “반란이다! 반란!”    병완이 썩 나서면서 말했다.    “잡겠으면 나를 잡아가라. 인부들관 아무 관계없다.”    창준과 기준이 나서면서 말리였다.    “아버지, 아버지께 무슨 죄 있습둥?”    “한대장이 덮쳐들다가 자기절로 적송나무가지에 박힌 건데!”     그러나 병완은 인부들이 상할까봐 가래 같은 두 손을 내밀어 스스로 바줄에 묶이었다.    “아버지!”    “아버지!!    병완은 온몸이 거미줄처럼 묶인 채 끌려가면서도 아들들과 인부들을 돌아보면서 머리를 끄덕였다.    “근심하지 말라, 내 무슨 죄가 있느냐? 난 한대장하구 공평한 결투를 했을뿐인데.”   인부들은 경찰국 사무 청사 둔덕 아래로 끌려내려가는 병완의 안전이 근심돼 웅성거리였다.   영팔은 한길수를 오토바이에 앉힌 후 먼지를 새뽀얗게 일구면서 꼬리 빳빳해 달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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