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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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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수필 륙십청춘 닐리리 김장혁 댓글:  조회:1038  추천:1  2021-11-09
                                                         수필                 륙십청춘 닐리리                                                  김장혁       대학을 졸업하고 새파란 청춘으로 사회의 대문에 첫발자욱을 들여놓은 일이 어제 같다. 어느덧 40년 세월이 청산류수처럼 흘러 예순고개를 넘어 앞으로 나가노라니  여느 때보다 감회가 깊다.       파란만장한 인생행로에 선후하여 교원, 방송국 기자 사업을 하다가 리성권 전임사장의 방조하에 1997년에  연변인민출판사에 전근된 후부터 나의  인생이 바뀌였다. 특히 2002년부터 나는 편집부에서 17년 동안 편집사업을 하면서부터 사업과 문학창작에서 황금기를 맞이했다. 때문에 나는 22년 동안 몸을 담그고 사업해온 사랑하는 연변인민출판사에 항상  감사한 마음으로 옷깃을 여미군 한다.       연변인민출판사 지도부와 전국각지 조선족로인협회 지도일군들의 지극한 관심 그리고 력임 주필, 편집발행일군들의 다함없는 노력으로 하여1997년 1월에 창간된    《로년세계》는 중국조선족로인들의 정다운 《길동무》, 친근한 벗으로 되였으며 중국조선족로인협회친목회의 기관지로, 중국조선문잡지 가운데서 최고발행량을 자랑하는 잡지로 되였다. 나는《로년세계》주필로 10여년 동안 혼신을 다한 것으로 하여 긍지감을 느낀다. 나는《로년세계》를 로령화시대의 요구에 따라 로년군체를 리드해나갈 잡지로 꾸리기 위해 국내의 수많은 한문간행물과 전문도서를 구독한 외에 거의 해마다 자비로 한국에 나가 교보문고 등 서점에 붙박혀 우리 로인들에게 유익한 양생보건, 조선 력사 등에 관계되는 전문도서를 한 트렁크씩 구입해들여왔다. 어떤 때에는 30권을 넘어 중국 공항해관의 세금징수관을 넘느라고 여간 애를 떼지 않았다. 나는 편집들과 함께 수많은 전문도서를 읽은 후 로령화시대, 장수시대의 진입과 더불어 로인들에 제기된 양로방식문제, 복지문제, 의료위생보건문제, 주택문제, 소비문제, 재산상속권문제, 자녀문제, 재혼문제, 로인권익문제, 복장과 미용 문제, 오락관광문제, 교통문제 등 일련의 문제를 풀어나가는데 유익한 내용을 선제하여 잡지에 실었다. 또  60여명 장년과 로인 문인들로 특약저자대오를 조직하고 지방원고를 널리 편집해 잡지에 실었다. 한편 나는 직접 필을 들어 방문기, 론설문, 재담, 소품, 유모아, 수필, 수기 등 로인들이 즐겨보는 다양한 쟝르의 글을 써서 잡지내용을 실용적이고도 다채롭게 하였으며 로인독자들의 정신문화생활을 풍부히 하였다. 나는 아직도 아직도 17년 전인 2004년에 단동시에서 열린  《로년세계》발행회의를 잊을 수 없다. 유유히 흐르는 유서 깊은 압록강변에서 열린 회의에는 전국각지 조선족로인협회의 100여명 회장님들이 참가했다. 그번  《로년세계》발행회의와 문예오락은 단동지구 조선족들의 큰 잔치나 다름없이 일대 성황을 이루었다. 로인들은 자손들과 함께  한복을 떨쳐입고 발행회의에 오셨고 단동지구의 동항시, 관전현, 본계시 등지  조선족로인협회에서는 다채로운 문예공연을 하였다. 주필인 나는 편집부를 대표해 편집사업보고를 하였고 어르신들께 “황금마차” 노래를 한곡 선물하고나서 “《로년세계》는 저 유유히 흐르는 압록강처럼 영원히 어르신들의 다정한 길동무로 될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2004년《로년세계》발행량은 1만 5천 247부로 껑충 뛰여올랐다. 2006년 발행위원회 주임 윤진주, 부주임 전성자, 판공실 주임 박증범 등 동지들의 노력으로 발행량은 1만 6천 302부라는 최고기록을 창조하였다.  나는《로년세계》편집사업을 하면서 제일 힘들게 보낸 2004년과 2005년을 잊을 수 없다. 그때 나는 20대 중반 처녀실습생과 로편집 도합  2명을 이끌고  《로년세계》잡지 외에도 《농가》잡지까지 두개 잡지를 꾸렸다. 일손이 딸리는 형편에서 나는 《로년세계》와 《농가》 두 잡지의 주필이자 편집, 광고업무원으로 밤낮이 따로 없이 뛰였다. 어떤 때에는 정신을 잃고 달아다니다나니 짝짝신을 신고 단위로 뛰여가서 동료들이 웃음보를 터뜨릴 때도 있었다. 그때 진짜 밤  12시전에 자본 적이 없이 편집사업과 원고심열을 하면서 눈코뜰새 없이 보냈다. 장시기 날마다 밤낮 10여시간씩 책을 읽으면서 선제하거나 원고를 심열하고 편집사업을 하면서 활동량이 적어 체중이 180근으로 올라갔으며 고혈압, 고혈지, 고혈당 증상까지 나타났다. 너무 피곤해 눈에 항상 피지고 고기가 동공에까지 씌워 두번이나 눈수술을 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항상 너무 곤하고 혈소판이 갑작스레 내려가면서 단위 식당에서 코피를 줄줄 흘린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년세가 계시는 발행일군들이 출장가기 힘들어하는 형편에서 목단강시, 교하시 등지 발행회의에 달려가서 발행선전도 협조해주었으며 심양, 영구, 길림, 할빈, 청도 등지에 취재하러 갔다가 밤차로 달려와 집에도 들리지 않고 출근해 편집사업을 하였다. 어떤 때에는 된감기에 걸려 안해 보고 단위에 와서 점적주사를 놔달라고 부탁하고 점적주사바늘을 꽂은 채 편집사업을 견지했다. 길림신문사에서 수필문학상을 타게 됐는데도 나는 잡지를 제때에 내보내기 위해 시상식에도 참가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 보고 대신 타오게 한 적도 있다. 나의 머리 속에는 오직 잡지 편집의 사명감과 의무감 밖에 없었다.       나는《로년세계》주필사업을 하면서 항상 편집이 적은 사람고생을 많이 하였고 잡지를 제때에 출간하려고 시간에 딸리고 원고가 딸리는 고생을 많이 하였다. 그러나 나는 후회하지 않으며《로년세계》편집사업을 한 것을 보람차게 생각한다.      《로년세계》잡지는 20년 동안 바로 이같은 력임편집발행일군들의 눈물겨운 지극정성에 의해 민족성과 지식성, 지방성, 실용성, 취미성이 있게 꾸려졌으며 해마다 새로운 모습으로 조선족중로년들의 길동무로 친근하게 다가갔다.        나는 십여년 동안 《로년세계》광고사업을 직접 틀어쥐여 적지 않은 광고수입도 창조해 민족문화출판사업에 기여하였다. 모두 다 알다싶이 시장경제시대에 공익성문화사업단위에서의 광고사업은 아주 중요한 사업이며 또한 아주 간고한 경제사업이다. 나는 당시 《로년세계》주필 김철환선생과 발행위원회 주임 류옥철선생에게 제의해 갓 출간된《로년세계》광고를 개척하였으며 부지런히 광고도 얻어다 제공했다. 내가 갓 주필을 맡았을 때만 해도 림시공한테 광고를 맡긴데다가  광고에 대한 관리가 따라가지 못해 광고경제효과가 좋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나는 대담히 출판사 지도부에 광고개혁을 할 것을 제기하고 림시공을 내보낸 후 직접 광고를 책임졌다. 광고사업은 여러 매체의 경쟁이 아주 심한 업종이였다. 또 락후한 특정경제환경에서 광고는 결코 마가을 길거리에 널린 가랑잎처럼 흔해 빠진 것이 아니였다. 편집사업에 눈코 뜰새 없이 보내면서도 나는 비가 오거나 눈풍설이 불어치거나 항상 잡지를 가지고 다니면서 낯선 기업소와 병원을 찾아가서 총경리실과 원장실 문을 두드리고 들어가 주필의 체면도 잃고 우리 잡지에 광고를 실으라고  동원하면서 바다에서 바늘을 건지듯이 광고를 하나, 하나 개척해나갔다. 달마다 수십명 의사들의 수십개 광고수개요구를 일일이 적어두었다가 빈틈없이 락착하였다. 또 감정투자를 아끼지 않고 광고주들의 생일, 결혼, 장례 등 대소사에 참가하면서 그들과 끈끈한 감정토대와 믿음을 쌓아왔다. 그리하여《로년세계》광고는 해마다 증가됐는바 2016년에는 60여개 광고주와 광고계약을 맺고 최고경제효과를 거두었다.      나는 《로년세계》가 진정 전국각지 조선족로인협회와 조선족로인들 속에 뿌리를 깊이 내린 한 발전전도는 영원히 찬란하리라는 것을 굳게 믿는다.      나는《로년세계》편집사업에 드바삐 보내면서도 우리 위대한 조선민족에게 자그마한 력사적 기념비라도 세워주고 조선족들 삶의 희로애락을 형상적으로 반영하기 위해 민족의 사명감으로 필승의 신념을 안고 문학창작을 견지해왔다.      나는 어디로 출장 가든지 핸드 컴퓨터거나 필기장과 필을 가지고 다니면서 창작을 멈추지 않았다. 한번은 인천공항에서 글 쓰기에 도 정신 하다나니 그만 항공편을 놓칠 번 한 적도 있었다. 제일 한심한 것은 그렇게 밤낮 애타게 창작한 파일이 컴퓨터 50만자나 없어졌을 때 나는 너무나도 애나고 실망한채 맥이 풀려 한주일이나 다시 컴퓨터에 마주 앉지 못했다. 나도 칠정육욕이 있는 사람이다. 남들처럼 술도 마음껏 마시고 장기도 놀고 싶고 아내와 함께 명승고적을 유람하기도 싶었다. 허나 항상 “놀 걸 다 놀고 언제 글을 쓰겠는가고 자기한테 채찍질하면서 부글부글 끓어번지는 놀고 싶은 야마를 정복하고 기나긴 “글 감방”에 갇혀 글을 쓰고 또 썼다. 나는 40여 년 기나긴 세월 “글감옥”에 갇혀 우리 조선민족을 위해 뭔가 자그마한 기념비라도 끝내 만들어 냈다는 긍지감으로 해  인생행로에서 아주 보람차게 살았다고 가슴깊이 느낀다.       나는 40년 동안 문학창작을 해 선후해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 대하소설 “진달래소야곡”, 3부작 대장편과학환상소설 “야망의 바다”와 “욕망의 천지”, “황천의 유령” 그리고 장편실화소설 “3.8선에서 싸우던 나날에”, 장편실화 “인민의 훌륭한 법관 록도유”, 수필집 “리별” 등 도합 20여권, 약 800여만자에 달하는 문학작품을 써냈다.       2018년 퇴직한 후 예순고개를 넘어도 나는 필을 멈추지 않고 두번째  대하소설 "진달래 소야곡"을 창작했고 심양시 고려경제문화교류유한회사 전정환 총경리와 료녕민족출판사 권춘철 사장님의  지성어린 방조하에 세상에 내놓았다. 그리고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과 대하소설 "진달래 소야곡"을 잘 수정하고 보충해 위챗에 올렸다. 심지어 어떤 장절은 재창착한 것이나 다름없다. 나의 조글로와 위챗에 올렸는데 하여 국내외 수많은 독자들이 감상하고 댓글도 아주 많이 달아주면서 나를 고무해주었다. 이는 나의 창작에 대한 편달과 격려가 아닐 수 없다 . 근년에 나는 수많은 동화, 아동소설을 창작해 잡지와 "아동문학" 총서 , 한국 등 국내외 간행물에 발표했다. 김장혁 동화아동소설선집, 
14    수필 친구 김장혁 댓글:  조회:1440  추천:0  2021-03-10
                                           수필                                                           친구                                                                        김장혁         한번은 백산호텔연회청에서 여느 생일보다도 굉장히 쇠였다. 다른 해 생일에는 국외에 나간 형제들을 빼고나면 극상해야 형제자매와 조카들, 친구들까지 합해서 고작 세상이면 다였다. 그러나 이번 생일에는 손님이 전례없이 여섯상이나 되였다. 그럼 형제자매와 조카들을 빼고 나머지 숱한 손님들이 몽땅 내 친구란 말인가? 아니다. 절대 아니다. 그 속에는 사회관계로 찾아온 손님이 대부분이고 중소학교와 대학교 동창생들도 있었다.  생일 손님은 많아졌지만 친구가 많아졌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속에 진정한 친구는 몇몇 밖에 없었다. 그럼 왜 생일상은 많아졌지만 징정한 친구는 늘어나지 않았는가? 한마디로 진정한 친구는 세상에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정말 시련을 겪고 시간과 공간, 리해득실, 의리의 고험을 거친 그런 진정한 친구는 드물다. 20몇년 전 일이다. 나는 대학을 졸업하였지만 평소에 내가 형님으로 높이 모시고 따르던 형님은 “착오”를 지고 학교에 남아 아래학급생들과 함께 숙사에 들어 있어야 했다. 나는 정신상, 경제상 어려운 처지에 처한 형님이 어찌나 불쌍하였던지 자주 찾아가 술대접을 하면서 독한 술로 마음속의 고통을 위안해주었고 달마다 로임 45원을 타면 반을 나눠 그 형님에게 주군 하였다. 그런데 형님은 몇십년이 지나도록 그 일을 두고 동창생들을 만나기만 하면 외우군 하였다. 그러나 나는 형님이 나를 도와준 은덕에 비하면 형님에게 해준 것이 너무나도 보잘 것 없다고 본다. 형님은 여섯살이나 지하인 철부지 나에게 삶의 도리와 의리란 무엇인가를 가르쳐주었고 내가 어려운 일에 부딪히면 항상 친형님처럼 처처에서 나를 도와주군 하였다. 스물다섯 돼도 약혼 하나 못한 것을 보고 숱한 녀대생들을 소개해주었고 졸업배치 때에도 발벗고 나서서 밤중까지 달아다녔었지. 형님은 지금 이 세상에 계시지 않지만 내가 어찌 형님의 은정을 잊겠는가. 하기에 사업관계로 천리 떨어져있을 때에도 형님과 나는 늘 지척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었다. 자주 만나지 못하고 생일상에는 서로 다니지 못하였지만 한해에 한두번, 아니 몇해에 한두번 만나도 우리는 그렇게 기쁘고 마음이 통하였다. 나는 형님을 알면서부터 남자란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였고 형님을 알면서부터 형제의 정과 친구의 의리를 알게 되였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어려울 때에는 간도 다 빼줄 상을 하면서 도와달라고 애원한다. 딱 연극배우 같다. 그러나 일단 강을 건느면 다리를 뜯어버린다. 강을 건늘 때 다리의 은정을 다 잊어버린다. 한 고중동창생은 과수원을 다루는데 돈이 딸려 뀌워달라고 비난사정을 다하였다. 나도 새 집을 샀기에 장식을 해야겠기에 돈이 딸렸다. 그러나 그 친구의 과수농사를 망칠가봐 심사숙고 끝에 10여년 전 돈으로 만원을 뀌워주었다. 후에 알고 보니 그 친구는 다른 친구들한테서도 만원씩 꾸어 차를 사서 타고 돌아다니였다. 그 친구는 돈을 꿔서 차를 산 신세에 동창생들을 만나면 어깨 으쓱해 한해에 과수수입이 15만원씩이나 된다고 한바탕 불어댔다. 그러나 10여년이 되도록 친구들에게서 꾼 돈을 갚지도 않았다. 흥청망청 유흥놀이에 돈을 마구 쓰다나니 나중에 과수원마저 다 말아먹고 한국으로 훌 달아나버렸다. 10여년이 되여서도 친구들의 돈을 돌려주지도 않고 오히려 자기 쪽에서 “친구라는게 무정하게 빚재촉을 한다”면서 친구관계를 끊겠다고 횡설수설하였다. 이렇게 실용을 앞세우고 리해득실만 따져가면서 허위적으로 친하는 그런 “친구”는 진짜 친구가 아니다. 그래서 성인께서는 “친구간에 절대 돈거래를 하지 말라. 돈거래하면 언젠가는 친구가 벌어진다”고 하시였는 모양이다.  어떤 사람들은 평소에는 제일 가까운 친구인것처럼 하지만 관건적인 시각에는 나는 몰라라 하고 발뺌을 한다. 한번은 장기를 놀다가 말썽이 생겼다. 청년애들은 장기에 지고나서 승풀이를 하려고 핸드폰으로 친구들을 불렀다. 그러자 평소에는 친구라고 그림자처럼 묻어다니면서 맥주나 얻어먹던자가  그 자리에서 바람결처럼 사라져버렸다. 다행히 한단위의 동료가 파출소에 전화를 쳐서야 처참한 물매질이 끝났다. 그후부터 나는 그자를 친구로도 상종하지 않았을뿐만아니라 사람으로도  보지 않았다. 어떤 사람들은 평소에는 “친구”, “형님” 하지만 일단 자기가 나가는 앞길에 걸림돌이 되기만 하면 가차없이 잘라버리거나 팔아먹는다. 그런자들은 자기에게 리득이 될만하다고 생각하면 친구라고 찾아다니지만 기회만 있으면 형제도 팔아먹고 민족도 팔아먹고 나라도 팔아먹을수 있는자들이다. 평소에 먹어라, 써라 하는 “친구”는 술친구에 지나지 않는다. 날마다 코를 맞대고 그림자처럼 붙어다니면서 술이나 먹고 노래방이나 다니고 안마나 받고 해서 딱친구인것이 아니다. 평소에 아주 친한것처럼 생일에나 다니고 술친구를 하지만 관건적인 시각에, 어려운 시각에 나는 몰라라 하고 발뺌을 하는 “친구”는 친구가 아니다.  리해득실을 따져가면서 실용적으로 친하고 불리할 때는 친구를 팔아먹는 “친구”는 친구가 아니라 “역적”이고 간신배이다. 부은 살은 자기 살이 아니다. 리해득실을 토대로 하여 맺어진 “친구”는 리해득실에 의해 갈라지고만다. 물렁물렁한 논두렁에 아무리 흙을 퍼올려도 사람이 밟으면 모래성처럼 무너지고만다. 세상에 정말 자기 마음에 드는 진짜 믿을만한 친구는 몇이 없다. 세상만물이 모두 상대적인것만큼 절대적친구란 존재하지 않는다. 너무 절대적인 친구를 추구하면 자기와 똑같이 생기고 성질도 같고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함께 움직이는 친구—자기 그림자밖에 없게 되고만다. 그렇게 되면 점점 친구는 줄어들고 고독해지고 우울해지게 된다. 하기에 상대적으로 마음에 드는  친구, 이러저러한 여러 류형의 친구를 사귀게 되는것이다. 장기친구, 트럼프친구, 술친구, 문학친구,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라고 비밀이 없을 정도로 가장 절친한 죽마고우, 숙명처럼 물과 고기의 삶을 한 수어지교(水漁之交)의 친구, 무쇠와 돌처럼 견고한 철석지교(铁石之交)의 친구, 서로 의기가 모여 편안한 막역지교(莫逆之交)의 친구, 허물이 없는 관포지교(管鮑之交)의 친구, 목숨 내걸고 맺은 신의(信義)의 친구,  문경지우(刎頸之友)… 어떠한 친구라도 한명쯤 곁에 두고 산다면 성공한 인생이라고 할수 있다. 진실한 감정과 의리에 토대하여 정을 쌓아가고 곡절과 시련을 겪어야만 진정한 친구로 될수 있으리라. 환히 드러난 지상에서 잎사귀만 맞대고 사귈것이 아니라 남들이 보이지 않는 지하에서 뿌리와 뿌리가 잇닿고 사귄것처럼 사귄 친구야 말로 진정한 친구이다. 관건적인 시각에, 어려운 시각에 걱정해주고 따뜻한 말 한마디라도 해주면서 도와나서는 그런 친구가 진정한 친구이다. 아무리 멀리 있어도 지척에 있는것처럼 느껴지며  아무리 한해에 한두번 만나도 마음속에 와닿는 친구가 진정한 친구이다. 아무런 대가도 조건부도 필요없는 친구, 인생의 동반자와도 같이 희로애락을 같이 하는 친구가 진정한 친구이다. 그 어떤 시련과 곡절을 겪더라도 끄떡하지 않고 변함이 없는 친구, 인간적이고 량심적인 친구, 아무런 리해득실도 따지지 않고 의리심이 강한 그런 친구가 진정한 친구가 아니겠는가!              
13    수필 생과 사를 가로 탄 용기 김장혁 댓글:  조회:529  추천:0  2021-01-29
                                     수필                            생과 사를 가로 탄 용기                                                                                                                                                                                                               김장혁        텔레비죤을 보니 한국에서 며칠 사이에 실련하였거나 실업당한 청년 넷이 삶의 용기를 잃은 나머지 연탄가스를 먹고 집단자살했다고 하였다. 일본 후지산에 유람 갔을 때 가이드의 말에 의하면,  해마다 수십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후지산 기슭 유령삼림에 와서 자살한다고 하였다. 자살한 사람들 가운데는 삶의 재미를 잃었거나  실련하였거나 실업당했거나 사업에서 실패한 사람들도 있고 심지어 자살이란 새로운 자극을 찾으려는 사람들도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대부분 기실 삶의 용기를 잃은 사람들이 후지산 기슭 유령살림에 가서자살한다고 하였다. 이러루한 비극적인 소식을 볼 때마다 자살하려고 한 적이 있는 나는감회가 남다르다.       열여섯살 때 초중을 졸업하면서 아래학년의 한 녀학생에게 어설프게 "련애쪽지"(기실 지금 보면 그저 그 녀자애와 함께 학습도 경쟁하고 이담 대학에 함께 가서 공부를 하자는 내용뿐이였다. 그런데 당시에는 련애편지로 각인됐다.)를 썼다가 들키운 일이 있었다. 이름도 밝히지 않았댔는데 스파이와도 같은 담임교원이 사건진상을 해명할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였다. 후에 안 일이지만 그 녀자애가 글쎄 그 련애쪽지를 받고 겁나 어머니한테 보였는데 어머니가 선생님한테 바치라고 해 바쳤다고 하였다. 그 때문에 나의 천진란만한 첫사랑이 처참하게 짓밟힌 것은 놔두고 애들에게 놀리움을 당해  머리도 들고 학교를 다닐수 없게 되였다. 그 녀자애 손 한번 쥐여도 보지 못하고, 조용히 말 한마디 해보지도 못하고 에덴 동산의 과일을 훔쳐 먹은듯이 애들한테 봉변을 당해야만 하였다. 그 일로 하여 날마다 집에서는 책가방을 메고 떠나갔지만 학교로 가지 못하고 고향 서쪽에 있는 칼산에 가서 소설책이나 읽다가도 집으로 돌아오군 하였다. 비가 오면 군용갱도에 들어가 비를 피했다. 어떤 때에는 점심에 돼도 련애쪽지 사건이 탄로났을가 봐, 아버지 부릅뜬 세귀눈을 보는 것만 같아 감히 집에 밥 먹으러 가지도 못했다. 배고프면 산 아래에 내려가 자기 집 남새밭에 가서 오이나 가지를 뜯어먹고 갱도에서 소설책이나 보면서 진짜 “백모녀처럼 살았다.” 몇달이 지나 나중에 담임교원까지 찾아와서 부모님께 내가 몇달 동안 학교로 가지 않았다고 고충을 들이대는 바람에 모든 것이 탄로나고 말았다. 성이 꼭두까지 치민 아버님께서는 너무나도 실망한 나머지 나를 물매질하다가 집에서 쫓아내기까지 하셨다. 엄동설한에 맨발바람으로 집에서 쫓겨난 나는 어데로 갈데 없었다. 다행히 막내누나가 가져다준 신을 신고 큰집에 들리여 사촌누나 옷이라도 주어입고 조양천역 대합실에까지 도망쳤다. 그런데 “뽕—” 하는 렬차의 경적소리에 머리를 쳐들고 허연 연기를 뭉게뭉게 피여올리면서 달리는 기차를 보자 피뜩 기차길에 뛰여들어 자살할 생각이 머리를 탁 쳤다. 그런데 화물처 대문으로 하여 플래트홈에 들어가다가 당직원에게 붙잡혀 대문 밖에 밀리워나왔다. 그 바람에 자살하지 못하고 말았다.  역에서 나오면서 나는 내가 죽으면 또 숱한 애들이 나를 비웃을 것을 생각하니 죽을 수 없다는 것을 새삼스레 느꼈다. (너네 보라고 내 공부를 잘해 대학에 꼭 갈거야! 장차 그 녀자애를 꼭 각시로 데려다가 잘 살고야 말겠다.) 그후 사회에 나온 후 문화단위로 전근이 리상적으로 되지 못할 때 또 자살하려고 한 적이 있었다. 나는 대학을 졸업한 후 현문화관에 들어가려던 최저한도의 희망마저 물거품이 되여 중학교에 가서 코흘리개들을 마주 했을 때 절망에 빠지고 말았다.       그때 룡정시 문련 주석으로 계신 김재권선생님은 나를 불러놓고 힘을 실어주었다.       “딱 문화관에 들어가야만 문학창작을 할 수 있느냐? 교원사업을 하면서도 얼마든지 문학창작을 할 수 있다.”       그의 말씀에 삶의 용기를 얻고 절망에서 간신히 헤쳐나온 나는 그때부터 룡정시 문화관 원로작가들인 김재권, 리태수, 황병락 등 선생님들을 모시고 “보름회”라는 문학단체에 다니면서 문학창작수업을 하였다.그런데 소속 중학교 일부 책임자들은 “교수연구를 하지 않으면서 자기 글만 쓴다.”고 비평하면서 글을 쓰지 못한다고 제한했다. 이는 작가를 꿈꾸는 나의 문학생명을 짓밟는 조폭한 간섭과 더러운 수작이 아니고 뭔가? 비록 생물로서의 목숨은 붙어 있어도 작가로서의 령혼과 생명은 죽고 말것이 아닌가. 문학의 자유, 표현의 자유가 없는 세상은 곧 죽음이 아닌가! 나는 그제야 알것 같았다, 창작자유가 얼마나 소중한가를, 아니, 민주와 자유가 없으면 얼마나 암담한가를!       나는 물 한모금도 없고 불볕이 홧홧 달아오는 문단사막에서 마라톤 달리기를 잠간 멈추고 애어린 문학생명을 살려내려고 무등 모지름을 쓰지 않으면 안됐다. 교편을 잡고 합법적으로 문학창작을 해나기 위해 나는 담임교원 사업에 눈코뜰새 없으면서도 초중과외작문써클 지도교원을 주동적으로 맡고 수많은 학생작문을 지도해 신문과 잡지에 발표하였다. 학생들은 주와 성, 전국급 여러가지 작문콩쿠르에서 우수중학생작문상을 수두룩이 안아왔다. 그때 학생들 속에서 수많은 대학생들이 배출됐으며 그들 속에는 오늘날의 대학교 학원 원장, 교수, 박사도 있고 국내외에서 활약하는 유명가수, 성악교수도 있으며 중국 조선족문단과 한국 문단에서 활약하는  어마어마한 작가, 시인도 있다. 나는 그들의 지명도가 너무 높아서 줄곧 내 입으로 누구, 누구는  나의  학생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마치 그들의 지명도를 빌어 후광을 보려고 하는 것 같아서였다. 그러나 오히려 그들은 언제 어디서나 나를 계몽스승이라고 널리 외우고 있다. 인간수양을 제대로 닦은 그들이 장하기만 하다. 당시 나도 수차 교육잡지사와 전주 교육론문발표회에서 우수작문지도교원상과 우수작문지도론문상을 탔으며 학교에서 우수담임교원상도 탔다. 학교 책임자들과 교원들은 전교 교원성과전시회 때 전시된 나의 수두룩한 작품과 전주 우수교연론문상 그리고 학생들의 작문과 상장들을 둘러보고 나의 작문지도교수사업을 충분히 긍정했다. 나는 그때라고 나는 “교원이 글을 잘 써야 학생작문을 잘 지도할 수 있다.”, “글감고르기에서 사로개척의 예술적인 비결” 등 교수론문을 써서 여론조성을 했다. 기실 “교원이 글을 잘 써야 학생작문을 더 잘 지도할 수 있다.”는 것은 어문교원으로서의 간단한 상식이지 그 무슨 철리가 아니다. 더욱이는 대서특필할 론문거리도 아니였다. 그러나 나는 아주 힘들게 따낸 작문지도 성과로 그 간단한 상식적인 도리를 증명하고 내가 과외로 문학창작을 하는 것을 합법화해야만 하였다. 나중에 학교에서는 나를 보고 중국조선족교육잡지에 발표된(주와 현 조선어문교수론문회의에서 우수상을  수상하기도 한) 작문지도교수론문을 전교 년말총화회의에서 교류하게 하였다.        그후부터 학교와 조선어문교연실에서 더는 나의 과외창작을 막지 않았다. 오히려 후에 부임돼온 주천을 교장과 유재환 교장은 나에게 고중교수와 전교 작문써글 지도교원을 맡기고 나의 문학창작을 지지해주었으며 어문교연실 교원들에게 문학창작활동을 폭넓게 벌릴 것을 호소하였다. 문학창작 연성환경을 마련한 후 나는 다시 용기를 얻고 퇴근한 후 세집에서 밥상을 놓고 곤한 눈을 집어뜯으면서 한편, 또 한편의 글을 써냈다. 그러나 작품은 써놓아도 발표하기는 아주 힘들었다. 중편련정소설 “사랑환상곡"은 지금 다시 읽어봐도 괜찮은 예술작품인 것 같다. 나는 소설원고를 가지고 숱한 잡시사를 찾아다녔고 편집들이 제기한 수개요구대로 16번이나 수개했다. 진짜 그 두툼하고 부동한 내용으로 된 수개원고로 전람회라도 열만 하였다. 하지만 그 중편소설은 국내에서 끝내 발표되지 못했다. 20년이 지난 후 나의 그 소설은 중단편소설수필집 "사랑환상곡"에 수록돼 한국에서 출판돼 한국에서도 제일 큰 서점인 교보문고에서 버젓이 팔렸다. 지금도 컴퓨터 인터넷에서 검색하면 나의 그 소설집 판매광고를 찾아볼 수 있다.    몇십년이 지난 후 결과가 보여주다싶이 작품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소설이 당시 편집들의 눈에 들지 못한 것 밖에 없다.       그 소설을 국내 편집부에서 퇴고를 맞은 그날 나는 뻐스를 타고 모아산 고개를 넘어 룡정에 돌아오면서 절망에 빠졌다. 필을 꺾으려고까지 했다. 나는 속으로 피눈물을 흘리면서 발표되지 못한 그 소설 원고를 한장 한장 찢어 차창 밖으로 날려 보냈다 날마다 교편을 잡고 코흘리개애들과 씨름하면서 너무나도 힘든데다가 리상대로 마음놓고 문학창작을 할 수도 없었고 혹시 아글타글 쓴 작품도 발표발표하기 아주 어려웠다. 설상가상으로 뜻대로 문화단위로 전근해가지 못해 사는 것이사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고 극단적인 선택까지 하려고도 했다. 그러나 머리 허연 부모에게 마지막하직인사를 하러 갔다가 외동아들인 내가 죽으면 누가 늙으신 부모를 모시겠는가는 생각이 피뜩 들었다. 그리하여 두번째에도 끝내 죽지 못하였다. 뒤따라 참을 “인”자 석자면 살인도 피한다고 모든 곤난과 시련이 닥칠 때마다 한발작  물러서 랭정하게 사고하고 대응하니 바다와도 같이 넓은 세상이 보였다. 룡정에서 교편을 잡다가 스승들과 지인들의 방조하에 끝내 모아산 열두 아리랑고개를 넘어 연변인민방송국에 전근해왔고 나중에 연변인민출판사에 전근해들어왔다. 훌륭한 창작환경을 만난 나는 마음껏 글을 쓸 수 있게 되여 리상의 창작세계로 한발자욱한발자욱 걸어나갈 수 있었다.       지금 회상하면 자살하려고 한 일이 얼마나 유치하였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그렇게 짧고도 졻은 바보 같은 생각을 하였을가? 나는 실련하고 자살하려는 녀학생을 내 경험교훈으로 구해준 적도 있다. 교수실습하러 갔을 때 녀학생이였는데 고중동창생과 2년 동안 열련하였는데 대학에 가면서 배신했다는 것이였다. 녀학생은 삶의 용기를 잃은 나머지 살 생각이 없다면서 자살까지 하겠다고 하였다. 그때 나는 녀학생에게 내가 두번이나 자살하려던 과거를 얘기해주고나서 여러 모로 삶의 용기를 북돋아주었다. “과거 내가 두번이나 자살하려 한 것은 얼마나 유치하고 짧은 생각이였는가. 그때 자살하지  않았기에 나는 초중때 그 녀자애보다 더 어리고 예쁜 안해를 얻어 행복하게 살게 되지 않았는가.” “또 배신자를 잃은 것으로 해 자살하려는 건 너무 무지한 선택이다. 배신한 자를 사랑할 가치가 없다. 하루 빨리 배신자 동창생을 잊으라. 이제 배신자보다 더 멋진 총각이 너를 기다릴 거야.” 그리하여 그 녀학생은 삶의 용기를 얻고 실련의 고통에서 벗어나 이듬해에 대학에 진학하였고  대학졸업한 후 류학생총각과 결혼해 연길에서 교편을 잡고 행복하게 살고 있다. 용기는 생과 사를 다 가로 타고 있다. 용기를 잘못 가지면 순식간에 자살하게 된다.   자살까지 하려는 용기가 있는 청년이라면 고만한 곤난도 이겨낼 용기가 없겠는가? 죽기를 각오하였던 청년은 삶의 용기와 의력이 더 강해지고 생명력도 더 강해지는 법이다. 자살할 용기까지 있다면 무엇 때문에 난관을 물리치면서 살 용기가 없겠는가! 
12    수필집 리별 머리말 김장혁 댓글:  조회:475  추천:0  2020-12-21
                                                                                             수필집 “리별” 머리말                                                                          김장혁        그대는 어찌하여 그렇게도 매혹적이고 사랑스러울가? 나는 청춘시절부터 절벽 우에 피여난 아름다운 꽃송이 같은 그대를 짝사랑하지 않았던가. 실련의 쓴 맛을 볼대로 본 나는 그대를 잊지 못해 별들이 총총한 밤하늘을 바라보면서 한숨인들 얼마나 쉬였던가. 그 애탄 한숨에 모아산마저 날아날 지경이 아니였던가. 새벽 잠을 설치고 뛰여 일어나 그대를 그리여 열변을 토한 적이 어찌 한두번이였겠는가. 그대에게 티없이 맑고 깨끗한 사랑의 메아리를 연주해주고 피끓는 청춘의 심장마저 다 바쳐 사랑하겠다고 맹세하지 않았던가. 허나 그대는 그저 담담한 표정만 지으면서 침묵을 지켰을뿐 내 절절한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세월이 흐르고 흘러 그대는 내 사랑이 소중한 것을 알기 시작한 것 같았다. 실련의 아픔을 씻어버리고 한발자욱한발자욱 그대에게 다가가는 나를, 사회의 용광로 속에서 까만 먼지를 들쓰면서도 끊임없이 탈바꿈하며 일편단심 그대만을 사랑하는 나를 외면하지 않았다. 그대는 까만 머리에 서리가 어설프게 내린 선비를 뒤늦게나마 끝내 인정해주었다. 그대는 항상 솔직하고 숨길줄 몰라 사랑스러웠다. 그대는 세속에서 허우적대면서 몸부림치는 이 나그네의 사랑을 차츰차츰  받아들이였다.       때로는 애절한 리별의 아픔도 쓸쓸히 받아들이면서 그대의 순진한 마음에 기대여 흐느껴 울었다. 때로는 절절한 사랑도 호소하고 이루지 못한 첫사랑도 애닲아 정자나무 아래에서 그대와 함께 밤새도록 목메여 울었다. 그때마다 그대는 내 심장과 함께 울고 흐느끼고 대성통곡쳤다. 때로는 그대에게 애틋한 사랑이야기로 한 수의 아름다운 사랑의 서정시로 멜로디를 연주해주다가도 화산폭발 같은 사랑을 고백하기도 하였다. 그때마다 그대는 나와 함께 사랑환상곡을 부르면서 오색령롱한 샨데리야 아래에서 사교무를 추면서 빙글빙글 돌아갔다.       참말로 그대는 나와 함께 울고 웃고 통곡치고 노래하는 친구였다. 때로는 정의의 기발을 들고 바른 총질을 하고 도전의 돌격나팔도 불었다.       나는 그대와 함께 밤을 패가면서 이야기 속의 자그마한 인생철리를 발견해내고서도 마치 신기루나 발견한듯이 환성을 지르기도 하였다. 나의 그림자 같은 그대와 함께 제주도와 한나선, 묘향산을 유람하면서 금수강산을 목청껏 노래하였다. 조상들이 몇천년 살아온 경주와 영월, 명천을 돌아다니면서 조상들의 숨소리를 들으며 한탄하였다…       아, 사랑스러운 그대여. 그대는 내 생활의 씩씩한 발자취이며 살을 에이는 아픔이고 진심에 찬 목소리이여라.        반백이 지난 오늘에야 나는 사랑스러운 그대들로 첫수필집을 세상에 내놓노라.                                                                                                      저자 김장혁                                                                                                                  2010년 2월 6일                                                    
11    수필 조약돌과 모난 돌 김장혁 댓글:  조회:906  추천:0  2020-10-21
                                 수필                                     조약돌과 모난 돌                                            김장혁         “빚을 지고 살아도 시비 지고 못살아.”        이것은 나의 아버님 인생좌우명으로서 아주 철리가 있는 말씀이다. 아버님께서는 이렇게 모나게 말씀하셨고 또 한평생 사사건건 시비에서 이기면서 모나게 사셨다. 일제의 철발굽 밑에서도 아버지께서는 송사를 걸어 이겨 할아버지 옆구리를 괭이로 찍어 륵대를 세대나 분질러 놓은 지학사란 악패지주놈에게서 치료비로 30원을 받아내시고야 말았다. 그 때 돈 20원이면 소 한마리를 샀다고 하였다. 아버님께서는 한평생 시비에 질 노릇을 하지 않으셨고 시비를 이기면서 모나게 사셨던것이다. 아버님께는 명언 몇마디가 있으셨다. 원칙도 없고 자기 주대가 없이 이랬다저랬다 하는것을 보면 “소불알처럼 이 다리 쳤다 저 다리 쳤다 한다.”고 유모아적으로 비난하였다. 또 실속없이 큰 소리만 치는 것을 보면 “빈 양철통이 소리만 높다.”고 비웃군 하셨다. 아버님의 영향을 받아 청년시절까지 나는 자존심도 강하였고 성질도 면도칼날 같이 날카로왔고 시비에 밝게 살려고 애썼다. 나는 청년 때는 몸도 날래여 고도도 한메터 반 쯤은 개구리가 물에 뛰여드는 동작으로 날아넘었고 말도 아주 빠르고 강하고 모나고 날이 서게 하였다. 아마 부모와 고모들이 어려서부터 나에게 항상 네귀퉁이의 두부모만 먹이면서 “쟤는 장차 모나게 공부를 잘하고 모나게 살아야 해.” 하고 타이른 영향 때문도 있는 것 같다. 청년때 누가 감히 내 앞에서 나쁜짓을 하고 배겨냈겠는가? 학교의 나무를 꺾는 건달무리를 교정에서 쫓아냈다가 칼에 옆구리를 찔려 생명위협도 받았지만 나는 청년교원으로서 정의를 위해 싸운 것으로 하여 떳떳하였다. 학교와 교육국에서는 정의를 위해 용감히 싸웠다고 교원인 나를 표창하였고 공안국에 사건보고를 하여 깡패무리를 나포하여 법에 의해 처벌하였다. 자존심이 면도칼날보다도 더 날카로운 나는 비리를 보고 용서하지 않았다. 독신교원들을 업신여겨 눈알을 부라리면서 비 내리는 날에 독신교원들의 이불짐마저 운동장에 내던지던 학교 책임자와도 맞서 시비를 하지 않았던가? 누나가 억울함을 당하자 법원에 소송해 끝내 재산을 찾아주지 않았던가! 나는 정의의 기치를 들고 바른 총질도 잘하였다. 그래서 한 친구는 나를 보고 “ 사람은 빈 정의만 가지고서는 이 세상에서 살기 어렵다. 그저 눈에 거슬리는 걸 보는 척 마는 척 하며 참고 살아라.”고 충고해 주었다. 그러나 나는 항상 시비를 걸고 끝장보고야 말군 하였다. 모난 돌에는 항상 정이 오기 마련이였다. 원칙과 정의를 지키면서 모를 세우면 세울수록 시기와 질투, 시샘, 지어 음해, 무함까지 당해 한발자국도 나가기 힘들었다. 그래 정말 편안하게 살려면 정의고 시비고 뭣이고 다 버리고 어떤 때에는 비리를 보고서도 못 본 척 하고 시비를 걸지 말아야 한단 말인가. 만약 정의를 위해 사람답고 모나게 살려면 항상 칼도마에 오를 각오가 돼있어야 하였다. 그러나 나는 이 세상에서 그렇게 사는 것이 너무나도 피곤하였다. 모난 돌에 정이 간다고 정의를 위해 시비를 걸어도 오히려 나를 고발쟁이요 뭐요 하고 떠들어대서 나만 인심을 잃었다. 그것이 싫었고 힘들고 피곤하였다. 사사건건 면도칼날 같이 날카로운 자존심을 세워보고 모나게 놀아보았자 시퍼런 면도칼날도 돌멩이와 쇠붙이에 부딪쳐 날이 더덕더덕 떨어지고 선뜩선뜩하던 칼날도 세월의 숫돌에 갈아져 도끼등이 되고 말았다. 결국 나는 세파에 부대끼여 땅을 밟고 하늘을 떠인 네모반듯한 인격의 열혈청년으로부터 둥글둥글한 조약돌 같은 늙은이로 돼버렸다. 나는 점차 모난 돌로부터 둥글둥글한 조약돌 같은 인생행로를 걸어왔다. 면도칼날 같이 날카롭던 자존심도 도끼등처럼 무뎌졌고 날래던 몸도 뚱기적거리는 데다가 말마저 두루뭉실하고 느릿느릿하게 하였고 자기 앞의 말도 방정히 하지 않고 가려서 하였다. 이길 시비도 지고 억울한 말을 들으면서도 자그마한 철밥통을 지키기 위해 둥근 조약돌이 되지 않았던가? 그러면서도 스스로 속으로는 어떤 때에는 둥근 조약돌처럼 둥글둥글하게 사는 것이 모난 돌처럼 모나게 살기보다 더 모나게 살수 있다고 하면서 자기를 위안하기도 하였다. 조약돌인생은 둥근 세상에서 원칙도 없이 명철보신하면서 둥글둥글 잘 구을어갈 수 있다. 그러나 모난 돌처럼 이 세상에서 원칙을 세우면서 모난 돌 인생을 살아나가자면 아주 힘들고 고독하고 외롭다. 세상리치를 따져보면 모난 속에 둥근 것이 있고 둥근 속에 모가 있다. 둥근 조약돌 속에 모를 감추고 사는 것이 얼마나 철학적 의미지가 깊은 기동령활한 처세철학인가? 그래 나는 끝내 양광목을 쓰고 더러운 세속에 푹 잠겨들고 말았다. 잠시 남에게 머리를 숙이는 것은 남들 앞에서 더 오래동안 허리를 꿋꿋하게 펴고 살기 위함이였다. 그러나 결과는 정반대였다. 이젠 어찌나 남에게 모도 없고 날도 없고 자존심도 없고 시비도 하기 싫어하는 둥글둥글한 조약돌 같은 사람처럼 보였던지 쓸데 없는 억울한 말을 자주 듣군 하였다. 지어 억울하게 무함까지 당한 적이 한두번이 아니였다. 그래서 산동성 연태에 갔을 때 봉화대 옆에 있는 관운장사당에 가서 필리핀에서 왔다는 스님에게 관상을 보였다. 그러자 그 스님은 내 납작코를 보고 남에게 당할 팔자라고 하면서 내 주위에는 항상 소인배들이 많아서 억울한 말을 많이 듣는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나는 미용원에 가서 그 놈의 납작코를 모나고 날이 서게 성형수술을 하면 안되는가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납작코는 아무리 수술해 지울 수 있지만 타고난 팔자와 운명은 고치지 못한다는 것이였다. 듣고보니 아마 운명의 조화라고나 할가. 나는 남에게서 없는 말을 듣지 않으려고 젖은 옷을 입지 않았고 말을 들을 일을 하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썼다. 그러나 쓸데없는 말은 끊칠 새 없었다. 그럼 타고난 팔자는 고칠 수 없는 숙명인가? 아니다. 타고난 팔자도 노력으로 고칠 수 있다. 납작코를 수술하기보다 날도 모도 없이 시비도 하지 않고 둥글둥글하게 살려는 인생철학부터 수술해야 한다. 원칙도 없고 모도 없는 조약돌인생을 살 바에야 죽어버리는 것이 좋으리라. 천하의 근심을 다 끌어안고 세상의 시비를 다 하면서 그렇게 모만 세우면서 산다는 것도 쉽지 않다. 자기만 정직하면 쓸데없는 말을 하겠으면 하라지. 한쪽귀로 듣고 한쪽귀로 흘려보내면 다 아닌가? 속담에 참을 “인” 자 세번 외우면 살인도 피한다고 하지 않았는가. 낮은 문턱도 머리를 숙이고 들어가야 낮은 문선에 머리가 터지지 않는 법이다. 세상의 리치에 맞게 둥근 조약돌 속에 모난 것을 감추고 모난 돌에 둥근것을 숨기며 무르면서도 강하여 휘여들지언정 끊어지지 말고 굳고 끈질기게 살아야 하지. 어떤 때에는 휘여지는 버드나무 속에 참대의 강직성을 감췄다가도 보여주어야 하지. 어떤 때에는 너그럽고 남을 용서할 줄도 알고 베풀기도 하고 양보도 하면서 살아야 하지. 속담에 한발자국 물러서면 세상이 바다와 같이 넓고 하늘 같이 높아진다고 하였다. 어떤 때에는 남에게 양보하고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일 수도 있다. 어떤 때에는 머리를 숙이는 것이 오히려 쳐든 머리보다 더 돋보일 수도 있다. 어떤 때에는 어진 것이 독한 것보다 남을 전승하는 힘이 될 수도 있다. 어떤 때에는 둔한 것이 너무 역은 것보다 낫을 수도 있다. 그래서 둔한 것이 다행이라고 하지 않는가. 또 아버지처럼 강하게 나올 때는 한치의 양보도 없이 강하게 나오고 시비를 걸고 날이 서고 모나게 살고 싶다. 속시원하게 바른 말도 꽝꽝 하면서 통쾌하게 살고 싶다. 정말 사람이 짧게 살더라도 강하고 굵게 살고 시비에 이기면서 정정당당하고 날이 서고 모나게 사는 것만큼 가치있는 삶은 없으리라.               주: 본 수필은 "문화시대"잡지에 실린 수필임.    
10    수필 제주도 며느리 김장혁 댓글:  조회:735  추천:0  2019-10-11
                수필           제주도 며느리       한국 제주도를 사나흘 유람하면서 아름다운 경치구경도 좋았지만 제주도 한 려행사의 가이드 성아가씨가 들려준 시집살이이야기가 퍽 인상이 깊었다. 성아가씨는 네 며느리가운데서 셋째며느리였다. 그녀는 시부모와 한 층집에서 살면서 슬그머니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하였다. 그녀는 제주도나 한국 대륙의 사람들 앞에서는 시집 말을 하지 못하고 늘 바다가에 가서 출렁이는 파도에 조약돌을 쥐여뿌리면서 한참 고함치고나면 스트레스가 조금 풀린다고 하였다. “시어머니, 어떻게 그렇게 할수 있어요? 녜?” “셋째며느리 뭘 잘 못해서 큰며느리 발바닥 취급해요? 녜?” 그러고도 스트레스가 풀리지 않는 날엔 늘 다시 볼지 말지 한 중국관광객들과 한바탕 시집말을 하고나면 시어머니에게서 받은 스트레스가 풀려 마음이 후련하다고 하였다. 성아가씨는 맏며느리도 아니고 셋째며느리인데 시부모와 한 층집에서 사는 것에 불만이 많았다. 제주도의 성읍민속마을을 참관하면서 들을라니 제주도에는 전통적인 미풍량속이 있었다. 어느 아들며느리든지 하나는 시부모와 함께 살아야 한다는 것이였다. 난생처음 들어 알게 되였다. 옛날부터 이제껏 제주도의 부모와 아들며느리 한 집에서 부엌을 따로 두고 세간살이도 따로 하여왔다고 한다. 그리하여 아들며느리가 옆에서 조석으로 부모를 돌봐드릴수 있고 세간살이도 따로 하니까 상대적으로 독립된 가정과 같아 아들며느리에게도 아주 편리하였다. 누가 부모를 모시는가는 아들며느리와 토론도 없이 부모가 일방적으로 결정한다고 하였다. 제주도의 그 미풍량속은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어 제주도의 아들며느리들은 대부분 시부모를 모시고 한 집에서 산다고 하였다. 보통키에 꽤 예쁘장하게 생긴 성아가씨는 셋째며느리였지만 마음씨가 좋은데다가 가이드를 하면서 돈을 꽤나 버는 것 같았다. 그리하여 그녀는 제주도의 풍속대로 시부모의 선택을 받아 시부모를 모시고 살게 되였다. 생활의 편리를 위하여 성아가씨네는 2층에서 살고 시부모는 1층에 모시였다. 성아가씨가 가이드를 하고 집으로 돌아올 때면 밤중에라도 꼭 1층에 들려서 시부모에게 인사하고 선물을  드리고서야 2층 자기 집으로 올라가군 하였다. 그녀는 처음에는 별로 신경쓰지 않다나니 시부모에게 선물만 챙겨주고 자기네가 먹을 것만 들고 2층에 있는 자기 집으로 올라갈 때도 있었다. 그런데 시어머니는 며느리가 주는 선물을 받아 챙기고서도 자기들이 먹을 것만 사왔다고 노여워하기가 일쑤였다. 어떤 때 시어머니는 마루바닥에 나앉아있다가도 “셋째며느리, 저쪽손에 든 건 뭐냐?” 하고 물으면서 시부모들의 몫을 사오지 않았다고 훈계하기도 한다는 것이였다. 그리하여 그녀는 어데를 갔다오면 뭐나 꼭꼭 두몫을 사서 들고 집으로 가는 것이 이젠 습관되였다고 한다. 시어머니는 명절에 어느 며느리가 무엇을 가져왔는가고 눈박아 보군 한단다. 그래도 옆에서 모시는 셋째며느리가 더 고생을 하였건만 시누이나 다른 며느리들이 어쩌다가 놀러 오면서 옷견지나 돈 몇십만원(한화)을 가져오면 시어머니는 그것을 크다고 혀를 끌끌 찬단다. 그럴 때면 성아가씨는 열이 욱 치밀어오르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는 것이였다. 그리하여 일본 도꾜에서 온 맏시누이와 섧은 말을 하였단다. 맏시누이는 셋째올케를 위안하면서 어머니에게 그러지 말라고 귀띰해주었다고 한다. 시어머니는 맏시누이가 귀띰해주는 말을 들은 후부터는 극력 네 며느리들을 똑같이 대하느라고 여간 신경쓰지 않았다고 하였다. 외지에 관광하러 갔다가도 네 며느리와 두 시누이에게 똑 같은 선물을 사다가 준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며느리 넷은 누구를 더 좋은 걸 주는가고 여겨보다가도 똑같은 선물을 받고서는 서로 마주 보면서 폭소를 터뜨린 적이 한두번이 아니라고 하였다. 그뿐이 아니였다. 시부모는 그래도 네 아들며느리 가운데서 셋째아들과 며느리가 제일 믿음직하기에 함께 살자고 한것 같다고 하였다. 그것만으로도 우리에 대한 믿음으로 해 영광을 느끼면서 스스로 위안해야 하였다. 그런데 한번은 시아버지가 중풍에 걸려 일신을 쓸 수  없게 되여 병원으로 모셔가야 하였다. 그런데 시아버지는 셋째아들과 며느리를 옆에 두고서도 다른 세 아들과 며느리를 다 불러 왔다. (이번에 누구 등에 업혀 승용차에 앉는가 보자. 의례 제일 믿는 우리 신랑의 잔등에 업혀 나가야지.) 성아가씨는 속으로 이렇게 궁리하면서 시아버지 거동을 살폈다. 아들들은 서로 자기한테 업히우라면서 잔등을 들이댔다. 그런데 시아버지는 잘 말을 듣지 않는 손으로 맏아들을 손짓하여 불러 업히워 나갔다. 그러자 시아버지 마음 속에는 그래도 맏아들을 믿는다는 서운한 감이 별스레 들더라는가! 하여간 성아가씨는 제주도 제일 남쪽 천지연폭포를 구경하고 제주도 제일 북쪽에 있는 룡두암에까지 달리는 길에서 뻐스에서 한식경이나 시집 말을 하였다. 나는 눈을 감고 성아가씨의 말을 들으면서 제주도의 미풍량속이 무너지는 것을 마음이 아프게 느꼈다. 뭐나 변증법적인 통일인가 봐! 아들며느리와 함께 한 아빠트에서 살기에 부모는 편리하지만 며느리는 몇갑절 스트레스를 받는 것이 아닌가! 한 구들도 아니고 1, 2층에 나뉘여 부엌이 따로 있고 세간살이도 따로 하건만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한다. 만약 한 집에서 부모와 함께 산다면 어떨가? 실로 생각만 해도 기막힌다. 옛날 한 구들에서 팔촌이 함께 살았다는 우리 민족의 전통은 깨여진지도 오랜 옛말로 됐다. 이젠 한 구들에서 부모와 자식마저 함께 살지 못하게 되였다. 제주도의 며느리들은 대륙의 며느리들을 아주 부러워한다고 하였다. 그것은 대륙의 며느리들은 부모와 함께 살지 않고 남편들도 아주 살갑게 대해주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반면에 삼다도(돌과 바람, 녀자가 많은 섬) 제주도에서는 녀자(며느리)가 벌어서 남편을 먹여살리는 페단이 많다고 한다. 해녀들은 일흔이 넘도록 잠수복을 입고 바다물 밑에 들어가 굴조개도 건지고 해삼도 건져내 팔아서 온집식구들을 먹여살린다고 한다. 제주도 며느리 성아가씨도 날마다 가이드를 하면서 동분서주한다고 하였다. 그러기에 제주도의 남편들은 안해가 대륙의 남자들에게 유혹될가봐 혼자 대륙으로 보내지 않는다고 한다. 아뿔싸! 이젠 부모와 자식이 한 룡마루 아래에서 사는 제주도의 오랜 전통미풍량속마저 지키내기 어렵게 되였구나.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9    수필 버릴줄 알아야 김장혁 댓글:  조회:766  추천:0  2019-07-19
  수필             버릴줄 알아야                                                 김장혁            나의 안해는 무엇이나 버리기를 좋아하였다. 몇번 입지 않은 옷도 자기에게 조금만 어울리지 않는것 같으면 남에게 훌훌 줘버리는가 하면 가지겠다는 사람이 없으면 쓰레기무지에다 여지없이 버렸다. 쓸만한 가구도 역시 헌것이라고 버림을 당하는 운명을 면할수 없었다. 반면에 나는 뭐나 건사하기를 좋아한다. 어머니를 닮아 그런지 버리기 아까와하고 건사해두군 하였다. 그리하여 우리 부부는 수많은 재미나는 에피쑈드를 낳기도 하였다.           어느날 안해는  내가 쓰는 사무상 의자가 헐었다고 눈에 거슬려 버리려고 하였다. 그러자 나는 쓸만한 것을 왜 버리겠는가 하면서 버리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자 내가 집에 없는 틈을 타서 안해는 아들을 시켜 끝내 내다버리게 하고야 말았다.   이전에 나는 없는 재간을 다하여 나무를 대패질하여 부엌틀도 세우고 세멘트로  매질도 하고 자기타일도 붙여 그럴 듯하게 주방가구를 만들어놓았다. 그런데 안해의 마음에 들지 않을줄을 누가 알았겠는가. 나를 동경성에 있는 막내누나네 집에 가을걷이를 보낸 후 일군을 불러다가 내가 그렇게 정성들여 만든 주방가구를 다 뜯어버리고 몽땅 자기 마음에 들게 다시 만들고 야말았다.   이번에 새 집에 이사하면서 또 숱한 가구들이 버림을 당하고 말았다. 나는 쓰던 책장과 사무상, 침대, 쏘파, 밥상만은  꼭 가지고 이사하자고 하였다. 그러나 안해는 고급침대를 내놓고 쓰던 가정기물은 일률로 버리고 가고 새 집에는 몽땅 새 가구를 사놓고 산다고 선포하였다.   “아니, 여보, 참대쏘파는 9년전에 2천 1백원이나 주고 산 거구. 책장은 2천 9백원이나 주고 산 거잖소? 왜 쓸만한 걸 가지고 안가오? 저 밥상두 천원 돈을 넘어 주고 산 건데 왜 버리오? 그리구 저 사무상두…” “여보세요, 낡은 걸 버리지 않구서야 어찌 새 것이 차례질 수 있어요? 다 버리구 갑시다.” 안해는 끝내 자기 주견대로 쓰던 가구를 버리고 여기저기 다니면서 새 쏘파, 새 밥상을 사다가 새 집에 척척 들여놓았다. 새 집안은 침대를 내놓고는 몽땅 새 가구를 사놓다나니 참말로 황홀하게 눈부실 정도였다. 알른알른하는 새 집에서 사니 나도 새 사람이 된 것 같고 우리 부부도 새 부부로 된 기분에 잠겨 살게 되였다. 그리고 낡은 가구들을 원래 집에 버리고 왔댔는데 세집살이를 하는 젊은 부부들이 쓰게 하고 보니 실로 일거량득이 아닐 수 없었다.   안해와는 정반대로 옛날부터 가난하고 어렵게 살아오신 나의 어머님께서는 무엇이나 버리기 아까와하였다. 어머님께서는 쌀독과 물독은 늘 꼴똑꼴똑 채워놓고 살고 가구나 그릇은 낡아도 마스거나 버리지 말고 뺑뺑 돌려놓으면서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하기에 어머님께서는 무엇이나 집의 물건을 내다 버리는 습관이 없었다. 정말 프팡스 대작가 발자끄의 소설 “고리오령감”에서 나오는 주인공 고리오령감처럼 몇푼어치도 되지 않는 잡동사니들을 온 집안 가득 무져놓았다. 오십년 전에 마반산에서 가져왔다는 매돌로, 어머님께서 시집오실 때 외할아버지께서 만들어주신 농궤와 나무함지로… 몇십년씩 묵은 골동품을 다 보관하면서 92년세월을 살아오셨다. 물론 그 골동품들에는 지나간 이야기와 추억이 깃들어 있어 돈으로 헤아릴 수 없이 어머님께는 아주 귀중하다는 것은 조금 리해된다. 그런 골동품쯤은 그래도 건사가치가 조금 있다고 하자. 그러나 지금 어머님의 방에 들어가보면 그 좋은 옷궤와 침대궤를 두고서도 침대 옆에 크고 작은 종이상자에 옷견지를 가득 넣어 무져놓으신 것을 볼 수 있다. 또 여기저기에서 나무꼬챙이마저 주어다가 깎아서 무엇에 쓰려는지 여기저기 주룽주룽 걸어놓으셨다. 어머님의 방은 참말로 페품상점을 방불케 하였다. 쓰레기무지에 내다버려도 주어갈 사람이 없는 그런 잡동사니를 무져놓다나니 새 가구를 사다가 놓을 자리마저 없었다. 어머님께서는 그런 종이상자마저 재부로 생각하면서 만족해하시였다.   어느 하루 내가 어머님께서 몇해 모으신 잡동사니를 하나도 남기지 않고 버리였다. 어머님께서는 내가 없을 때 아까와 그것들을 하나하나 집으로 되주어들여오셨다. 이렇게 어머님의 소비관념은 일조일석에 고치실 수 없었다. 어느 잡지에서 나는 이런 만화를 본적이 있다. 어떤 나그네가 헌신짝으로 잔등긁개로, 이발 빠진 빗으로, 쓰레바키로, 장대걸레로, 몽당비자루 등을 가득 넣은 커다란 대바구니를 구부정한 허리에 지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힘겹게 걷는 장면을 그린 만화였다. 그 만화 설명문도 퍽 인상깊었다.   “대부분 늙은이들이 잘 살지 못하는 원인은 버릴줄 모르기 때문.” 곰곰히 생각해보면 참말로 철리가 있는 만화였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건사할줄 알아야 할뿐만아니라 낡은 것을 버릴줄 알아야 한다. 그렇다고 밑굽이 빠진 항아리처럼 버리기만 하고 건사하지 말라는 말은 아니다. 정말 안해의 말처럼 낡은것을 버리지 않으면 새것이 생기지 않는다. 낡은 것들을 다 버리지 않으면 새 것을 놓을 자리마저 없게 된다. 낡은 것을 깨끗이 버리면 기분도 홀가분하고 새것을 바꿔 쓰면 그만큼 기분도 새로와지게 된다. 물건과 환경이 새로와지면 사람도 자연히 새로와지게 되며 낡은 것에 대한 만족감과 미련을 버리고 새로운 목표를 세우고 새로운 추구를 하게 되며 분발노력하게 된다.   이전에 나는 그 보잘 것 없는 졸작수필이나 소설들을 발표하고 어깨가 으쓱해하였고 아주 정성스레 나의 작품이 발표된 신문과 잡지를 건사하였다. 나는 그런 두부모만한 보잘 것 없는 졸작들에 만족하면서 그럴듯한 새로운 탐구작을 써내지 못하였다. 그러나 요즘 이사하면서 내가 쓴 두부모만한 졸작들이 실린 신문과 잡지들을 들춰보고서야 정말 보잘 것 없는 졸작들이라는 것을 발견하고 몽땅 버리려고 하였다. 그러다가 나는 그것들을 주머니에 넣어서 고향마을 로인활동실에 가져다 주었다. 고향마을을 떠나 오면서 나는 이제부터 새로운 의식과 시각으로 사회를 관찰하고 문학작품 같은 글을 써야 하겠다고 마음먹으면서 많은 생각에 잠기였다.   사람은 없는것을 추구하기 마련이다. 우리는 낡은 물건을 버리듯이 케케 묵은 사상과 관념, 낡은 의식과 가치관을 말끔히 버려야 한다. 그래야만 새 사상과 관념, 새 의식과 가치관을 받아들여 자기를 새 시대에 맞는  새 사람으로 만들 수 있다. 자질구레한 일을 마음에 넣고 끙끙거리지 말고 머리도 마음도  비우고 바꿀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만 속세에서 벗어나 굵직굵직한 일을 마음에 담고 해나갈 수 있지 않겠는가!                                                    본 수필은 한국 KBS방송 2021년 수기우수상을 받았음                                                    
8    수필 유와 무 김장혁 댓글:  조회:1117  추천:0  2019-06-12
       수필                           유와 무                                                                                                                                                김장혁     요즘 단위 편집사업만 해도 눈코뜰새 없이 채바퀴 돌듯이 뺑뺑 맴돌아칠 때였다. 설상가상으로 세방살이하는 청년이 세집의 하수도가 막혔다고 날마다 전화를 몇번씩이나 걸어왔다. 고까짓 돈 몇백원을 받고 세집을 내주었더니 얼마나 시끄럽고 스트레스를 받는지 모르겠다. “집주인입니까? 전등이 고장났습니다. 고쳐주십시오.” “하수도가 막혔습니다. 뚫어주십시오.” “화장실의 거울이 깨졌습니다. 새 거울을 달아주십시오.” 지어 이런것까지 요구하였다. “주인님, 석현에 있는 할머니가 불시에 급병에 걸려 가보아야 하겠는데 먼저 돈을 선대해줄수 없습니까? 일주일후에 상해에 있는 어머니가 돈을 부쳐오면 물게요.” (별, 세집주인 보고 마지막엔 별 요구를 다 제기한다. 아, 진짜 미치겠다.) 나는 너무 열통이 터져서 안해를 보고 당장 “저 집을 팔아버리고 홀가분하게 살자.”고 말하였다. 세집을 주고 이렇게 스트레스를 받았는가 하면 그외에도 택시를 경영할 때에도 별의별 스트레스를 다 받았다. 교통경찰대대 차량관리소와 교통운수관리소에 가서 계도검사, 년도검사를 맞아야 하였다. 그런데 한번에 통과될 때가 아주 적었다. 흔히 몇번 검사를 맞혀야 하였다. 게다가 택시는 고정된 장소에서 경영하는 레스토랑이나 슈퍼마켓이나 나이트클럽과는 달랐다. 쩍하면 차사고를 냈다. 그러면 네탈 내탈 하면서 교통경찰대대에 가서 시비를 한후 차수리비를 배상하고 자기 택시도  수리하여야 하였다. 어떤 때에는 차사고가 나서 개명치 못한 대상을 만나면 혼쭐났다. 유관 부문에 인맥이 있느라고 세워놓은 차에 부딛쳐 넘어간 애를, 아무 상처도 없는 애를 입원시켜놓고서 치료비를 내라고 생떼질을 쓰는 애비에미로, 분명 자기 차의 주요 책임인데도 모든 책임을 남에게 들씌우는 차임자로 별의별 작자들과 만나 옥신각신 다퉈야 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에게서 별의별 스트레스를 다 받아야 하였다. 그러다나니 어데 가 앉아있어도 항상 오늘 또 차사고나 나지 않았는가고 근심을 하다나니 마음이 편안할 새 없었다. 한번은 딴 마음을 먹은 운전수가 택시를 몰고 손님도 싣지 않고 돈화시를 벗어나 길림쪽으로 가는척하다가 길을 바꿔 흑룡강성쪽으로 도망쳤댔다. 다행히 내가 잡지 기자사업을 하면서 전주 각 현, 시 공안국 책임자들을 잘 알았기에 돈화 교통경찰대대 교도원에게 전화를 걸었기에 경찰들이 택시를 쫓아가 운전수를 붙잡아 택시를 연길에로 되돌려보냈다. 그러지 않았더라면 가옥소유증을 눌러두고 대부금을 맡아 산 9만원짜리 택시를 잃어버렸을지도 모른다. 정말 택시를 경영한 8년, 차가 있은 10년 사이에 나는 그 놈의 차로 하여 근심걱정에 싸여 살면서 그 얼마나 많은 스트레스를 받고 속을 태웠는지 모른다. 자기 집에 택시가 있어 가시집에 가거나 고향에 갈 때 편리한것만은 사실이였다. 그러나 택시가 있어 편리하고 즐거울 때보다도 택시로 하여 받은 스트레스와 차사고가 날가봐 근심걱정할 때가 몇십배나 더 많았다. 사람은 사노라면 없는것을 추구하기 마련이다. 집이 없이 세집살이를 할 때에는 자그마한 집이라도 있었으면 하고 갈망하고 차가 없을 때에는 남들이 자가용을 몰고 다니는것을 보면 부럽다. 그러나 그런것들이 있을 때에만이 없을 때의 “무(无)” 가 얼마나 홀가분하고 편안하고 좋았는가를 알수 있다. 나는 자가용을 다시 사지 않을 예산이다. 택시가 없어지자 온갖 스트레스에서 해탈되여 근심스러운 일이 없어 얼마나 홀가분하고 좋은지 모르겠다. 아무리 택시까지 있어도 택시가 없는 사람보다도 편안하지 못하고 별의별 당해보지 못한 고생을 다 해야 하지 않았던가! 세집살이를 하다가 40평방짜리 집이 있는것도 얼마나 만족해하면서 알콩달콩 깨알이 쏟아지게 살았는지 모른다. 그러나 자기 집이 있고 세집까지 주었지만 세집값의 노예가 되고 세방살이군들의 “종”으로 되여 하수도구멍을 뚫고 전등을 수리하면서 받는 스트레스는 얼마나 곤혹한가! “유”와 “무”는 변증법적 대립물이자 통일물이다. “무”로부터 “유”에 이르자면 그만큼 속을 태우고 고생하여야 하고 근심걱정을 하여야 한다. 아무리 부자라고 하여도 있어서 즐겁기만 한것이 아니라 날마다 밤중까지 그만큼 고생과 근심걱정을 하여야 하고 대가를 치러야 한다. 없어서(“无” 여서) 고생을 조금 하지만 마음을 비우고 베풀줄 안다면 그만큼 편안하고 홀가분하고 근심없이 살수 있을것이 아닌가.   그래서 경이나 읽고 죽이나 마시는 중이 세상에서 제일 편안하다고 하는것일가? 반면에 권세욕과 탐욕에 눈이 어두워 뭐나 다 가지려고 욕심을 차리면 남의 미움을 받을수 있고 마음이 편안하지 못하고 항상 근심걱정속에서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살것이다. 세도를 부리면 그만큼 원쑤도 많아지고 지어 목숨을 잃는 일까지도 있을  것이다.                                              주: 본 수필은 2011년  "연변문학"에  발표된 수필임
7    수필 한국 모범택시 운전수아가씨 김장혁 댓글:  조회:686  추천:0  2019-04-26
                                   수필                            한국 모범택시 운전수아가씨                                                         김장혁         지난해 한국 경기도 안양시에 갔다가 별난 택시 운전수아가씨를 만난 적이 있다.         그날 서울에서 지하철1호선을 타고 안양역에 내리자 폭우가 쏟아져 앞길을 막았다. 나는 7년만에 매형과 누님을 만나려고 그들이 오라고 하는 덕천시장 입구로 가려고 앞뒤를 가릴 새 없이 우산을 들고 묵직한 짐을 끌고 가까이에 있는 택시 쪽으로 다가갔다. 그런데 안양역 앞에는 그날따라 몽땅 모범택시였다. 나는 그런 것을 가릴 새 없이 한 모범택시 뒤문을 열고 짐을 올려놓고 한국 택시문화를 지켜 점잖게 운전수 옆의 문을 열고 앉으려고 하였다. 보통 보스나 지위가 높은 사람이 운전수 뒤좌석 오른쪽에 앉고 손님이나 친구, 련인들은 운전수 옆에 앉는 것이 한국 택시문화의 례절이였다. 그런데 내가 앉기 바쁘게 아츠러운 목소리가 울렸다. “아니, 저 젖은 짐! 보아하니 중국 교포 같구만요.” 그 목소리에는 분명 중국조선족을 멸시하는 감정이 다분하였다. 나는 택시에서 되내려 짐을 좌석에서 바닥에 내리워놓고 다시 택시운전수아가씨 옆에 앉았다. “중국 교포는 택시에 앉으면 안됩니까?” “택시에 앉아도 알고 앉으세요. 이건 모범택시예요.” “모범택시에 앉으면 안돼요?” “모범택시는 택시료금이 엄청나게 더 비싼걸요. 보통 개인택시 기본료금은 3천원, 모범택시는 4천 500원이예요. 그래도 앉을래요?” “모범택시료금을 알고 있어요. 아무리 중국조선족이라고 하여도 택시료금도 가지고 다니지 앉는가 합니까? 자, 갑시다, 덕천시장 입구로.” 한국 택시운전수아가씨는 택시를 휭하니 몰았다. 입에서는 계속 뭐라고 도도거렸다. “중국 교포들 참 살기 어려운 모양이지요? 지하철을 타도 표를 사지 않고 개찰구 란간을 뛰여넘어 도마뱀처럼 빠져나가죠. 돈을 남으려면 모범택시보다 개인택시를 타는게 낫죠.” 나는 이 한국 택시운전수아가씨를 그대로 두고 스쳐지나갈 수 없었다. 중국조선족의 위신을 봐서 반격을 가해야만 하였다. “아마 운전수아가씨는 중국에 가보지 못한 것 같습니다.” “예?” “하긴 요 죄꼬만 안양에서 택시를 몰고 밤낮 뺑뺑 맴돌아치다나니 그 넓은 중국에 가볼 새나 있었겠습니까? 그러니 한다는 말이 전탕 우물 안의 개구리 소리지.” “아니, 이런 중국 교포 첨 본다니까. 보통 중국 교포들은 더러운 일, 힘든 일, 위험한 일 다 하잖아요? 남에게 당해도 불법체류라고 신고할가 봐 쩔쩔 매면서 찍소리도 못하더구만요. 손님은 큰 소리만 빵빵 치면서 정 별론데요.” “이보세요. 중국 조선족이라고 너무 업신여기지 마십시오. 난 관광하러 왔지 불법체류하러 온게 아닙니다. 중국 사람들이 다 그렇게 살기 어려운가 합니까? 난 중국에서 편집기자를 하면서 과외로 택시업도 하는 보스입니다. 살기 어려운 편이 아닙니다. 그러나 난 아가씨처럼 잘 산다고, 보스노라고 손님들과 잘난 척하면서 큰소리 쳐 본 적이 없습니다. 한국에서는 남편이 벌어서 산다던데 이렇게 폭우가 쏟아지는 날에 택시를 몰고 달아다닌는 걸 보면 아마 운전수아가씨는 퍽 살기 어려운 모양입니다. 전 중국에서 택시업을 해도 운전수를 고용해 몰게 하지 내가 택시를 운전한 적이 없습니다.” “쳇!” “여기 한국에서는 소고기 한킬로에 15딸라도 넘지만 중국에서는 10딸라도 안해요. 여기선 소갈비국도 변변히 못 먹지만 우리 중국에선 일반 로동자도 한대야씩 사먹을 수 있습니다. 여기 물가가 비싸기에 실제 생활순준은 중국보다 별로 높은게 없습니다.” “그런데 왜 중국 교포들이 예 와서 글케 더러운 일을 해요?” “여기는 로임이 높고 중국은 물가가 낮습니다. 여기 돈을 벌어서 중국에 가서 살면 좋으니까. 여기 와서 더러운 일이고 힘든 일이고 위험한 일이고 다 하는 겁니다. 지금 중국은 눈뜨이게 발전하고 있습니다. 살기도 그렇게 어려운게 아니라 풍요롭게 살고 있습니다. 언제 한번 중국에 놀러 오십시요. 웅위로운 백두산도 구경하고 우리 연변에 오면 제가 소갈비국을 한대야 대접하겠습니다.” 그제야 한국 택시운전수아가씨는 아무 말도 없이 잠잠해졌다. 어느덧 덕천시장 입구에 닿았다. 우리 말도 자연히 끝났다. 짐을 들고 택시에서 내리면서 여겨보니 그렇게도 오만하던 한국 택시 운전수아가씨의 표정은 부드럽게 변해 있었다. 그러나 나는 한국 택시운전수아가씨의 택시가 비 내리는 안양시 덕천시장에서 멀어져갔어도 착잡한 생각을 걷잡을 수 없었다. 살다가 보면 한국 택시아가씨처럼 세상물정을 모르면서도, 자기 본신은 별나지도 않으면서도 개 잡은 포수처럼 우쭐렁거리며 남을 깔보는 그런 인간들을 흔히 볼 수 있다. 중국 조선족가운데서 한다하는 문인이 한국 서울에 갔을 때 일이라고 한다. 서울의 한 교수는 그 문인에게 양복 세벌을 가져다주면서 “몇번 입지 않은 양복인데 중국에 가 입으세요.”라고 하면서 주더라는 것이였다. 그 문인은 너무나도 어처구니 없어 그 자리에서 양복을 되돌려주면서 “우리 중국이 이 지경으로 가난하지는 않습니다.”라고 하였다고 한다. 서울의 그 교수는 악의적으로 모욕하느라고 그렇게 밤중에 홍두깨 내밀듯이 양복을 주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는 중국 인테리들의 생활형편을 모르고 선의적인 의미에서 주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중국 조선족문인이 양복을 받지 않는다고 어안이 벙벙해하였다는 그 서울 교수의 무지한 모습에서 우리는 뭔가 보이지 않은가! 세상물정도 모르는 사람들의 초라한 모습을 엿볼수 있지 않는가! 서울에서 한다하는 교수가 어쩌면 중국 조선족들의 생활형편을 어진간히 몰랐으면 양복도 없이 사는가 하고 입던 양복을 선물하였을가! 또 입던 양복을 선물한 교수의 품위가 얼마나 낮은가! 그 교수는 중국 조선족문인이 모욕감을 느끼리라는 것을 짐작도 못하였을가! 하긴 우물 안의 개구리가 쳐다본 하늘은 둥글기만 하니까. 한국 택시아가씨나 서울 교수의 색안경을 낀 눈에는 중국 사람들이 모범택시료금도 못내고 양복도 변변히 입지 못하는 가난뱅이로 밖에 보이지 않았을 수도 있다. 문제는 그들이 자기 견해가 우물 안의 개구리들이 하늘을 쳐다본 편견이라는 것을 아주 모르고 있다. 우물 안에서 조금만 폴짝폴짝 뛰여나오면 높고 푸른 하늘과 꽃구름이 두둥실 뜬 하늘, 그리고 깎아지른 듯한 절벽과 돌돌 흐르는 시내물도 볼 수 있을것이다. 그러나 우물 안에 앉아서 하늘을 둥글다고 여기듯이 한국의 적지 않은 사람들이 중국 조선족들을 가난뱅이라고 업신여기는 것이 참 가증스럽고 저주롭다. 한국 모범택시 운전수아가씨와 서울 교수를 욕하고나니 가슴이 후련할 대신 우리 주변에도 이런 “우물 안의 개구리”들이 많은 것에 련상이 가자 가슴이 아프다. 중국 조선족들은 가난한 나라에서 온 동포들을 업신여기지 않았는가! 한 나라 한 지역이라고 하여도 가난한 사람을 업신여기지 않았는가! 그들에게 사람대접을 제대로 하고 있는가! 친척이라도 친척대접을 제대로 하는가! 그보다도 우리 주위에는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자아도취되여 자기만 위대하고 지고무상이라고 여기는 사람이 없는가! 이런 우물 안의 개구리들은 많고도 많다. 실로 자기절로 자기 머리를 틀어쥐여 억지로 하늘로 끌어올리여 키를 높이려는 페단, 이런 어처구니 없는 페단을 삼가하였으면 좋겠다. 이런 행위는 남을 해치고 자기를 해치는 결과 밖에 있을 수 없다. 여문 곡식일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말도 있지 않는가! 혹시 이런 말을 하는 내 본인도 우물 안의 개구리일 수도 있고 “50보가 100보를 웃는 격”이 될지도 모르겠다. 옛날부터 “문인은 서로 깔본다.”고 하였지만 남을 존중하는 것이 자기를 존중하는 것이라는것을 잊지 말았으면 좋겠다. 쳐든 머리 보다 숙인 머리가 더 멋질 수도 있다. 항상 개턱처럼 쳐들고 다니는 것만큼 꼴불견이 없다.  한국 모범택시 운전수아가씨나 서울 교수처럼 남을 웃기는 초라한 “우물 안의 개구리”로 되지 말았으면 얼마나 좋을가!                     
6    수필 아들비위 딸비위 김장혁 댓글:  조회:471  추천:0  2019-03-17
                            수필                            아들비위 딸비위                                                                                                                      김장혁         나는 전통파인데다가 외동아들이여서 특별히 아들비위를 몹시 한것 같다. 세집살이를 하면서 아이를 낳지 말자고 색시와 진작 약속해놓았건만 정작 첫 애를 류산하자 가시집에 아파 누워 있는 색시를 주의하지 않았다고 노발대발하면서 서너길씩 펄쩍펄쩍 뛴적이 있다. 아버지가 사돈보기를 할 때 처음 내 약혼녀를 보자 “약해서 애내기를 할수 있겠는가?”라고 근심하던 말씀을 떠올리기도 하였다. 아버지는 지어 며느리가 약해서 애를 낳지 못할가봐 근심하던 나머지 어머니를 보고 닭고음을 해달라고 해서 들고 몇십리 밖의 내 가시집에까지 찾아가 갓 류산하고 앓아 누워 있는 며느리를 문안하기까지 하였댔다. 한해 후에 사랑스러운 내 색시가 아들을 낳자 온 집안은 경사나 난듯하였다. 나는 포대기에 싼 갓난애를 꼭 껴안으면서 얼마나 속이 든든했는지 몰랐다. 아들이 있으니 집안의 대를 잇게 되였다. 장차 우리 가문이 날따라 번성해지리라는 신심이 생겼다. 돌생일날에 아버지와 어머니는 한해 기른 닭을 씨암탁도 남기지 않고 몽땅 잡아 손자의 돌생일 손님상에 올렸다. 청년교원들이 술상에 앉아도 항상 아들을 낳은 우리들은 상좌에 앉아서 딸을 낳은 애아버지들을 아래상에 쫓아보내기까지 하면서 개 잡은 포수처럼 우쭐렁거리였다. 그만큼 아들이 있어 기뻤고 어깨가 으쓱하였고 행복하였다. 그만큼 아들이 있어 속이 든든하였고 일을 하고 돈을 벌 힘이 용용 솟구쳤다. 또 아들이 있어 문학작품도 많이 쓰고싶었고 뭔가 해놓고싶은 강한 충동을 느꼈다. 아들은 내 기쁨이였고 행복이였고 희망이였다. 그러나 지금까지 아들을 위해 해놓은 일이 너무나도 적은것이 마음에 내려가지 않는다. 한메터 팔십도 거의 되는 장한 길림대학생 아들을 낳아준 안해를 위해 해놓은 일이 너무 적은것이 속에 내려가지 않는다. 아들애를 낳고 하혈을 너무 많이 해 홀쪽해진 안해의 그때 사진을 볼 때마다 마음이 갈기갈기 찢어지는듯이 아프다. 아들을 본 기쁨에 머리가 뜨겁기만 하였지만 아들 그리고 그 아들을 낳은 안해를 너무나도 등한하고 쨍하게 사랑해주지 못한것으로 하여 마음이 아프다. 어찌하면 한구들에서 20여년 살면서 안해의 허약해지는 몸도 잘 살피지 못하였을가? 이제라도 전에 주지 못한 사랑을 처자에게 몰부어주자. 알콩달콩 처자를 사랑하면서 깨알이 쏟아지게 랑만적으로 살아보자. 사람이란 만족이 없는가봐. 나는 장한 아들을 보았는데도 딸비위를 얼마나 하였는지 몰라. 텔레비죤이거나 길거리에서 칠색색동저고리를 입은 녀자애들을 보면 나도 저런 딸을 봤으면 얼마나 좋겠는가고 비위를 썼다. 그래, 덕대 같은 아들에 예쁜 딸애까지 있으면 얼마나 좋으랴. 그러나 내 혼자서야 어찌 딸애를 낳을수 있겠는가? 아들애가 대여섯살이 되여서부터 줄곧 두번째애를 낳자는 내 요구를 들었지만 안해는 요 핑게 조 핑게 대면서 낳아주지 않았다. “여보세요. 아빠트 한채도 온전한게 없이 애를 낳아서 뭘 해요. 고생시키자고 또 낳아요? 나도 애 둘을 키우느라고 사업을 잘 하지 못하면 무슨 출로가 있겠어요? 아예 생각지도 말아요.” 그래서 나는 기자와 편집 사업을 하느라고 밤낮없이 맴돌면서도 과외로 택시업을 하여 백평방메터도 넘는 집을 갖춰놓고 딸애를 보자고 안해를 동원하였다. 그러나 안해가 하는 말은 얼마나 실망스러웠던가? “아빠트만 있으면 저금 한푼도 없이 애 둘을 어떻게 길러요?” 나는 또 몇해 아득바득해 돈을 마련해놓고 두번째 애를 낳자고 하였다. 그러나 안해는 또 요런 핑게를 대는것이 아니겠는가! “여보세요. 나를 죽이자고 그래요. 우리 병원 의사네 40고개에 당장 오를  안해가 애를 낳다가 산대우에서 출혈해 죽은걸 몰라요. 좀 주책머리 없는 말을 하지도 마세요. 이젠 며느리를 삶아서 손자와 손녀를 안아볼 궁리나 하세요.” 그렇다, 이젠 40고개에 오른 안해를 보고 애를 낳으라고 강요하는것은 산대우에서 애를 낳다가 죽으라는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24살이나 되는 아들이 이제 몇해 아니면 장가갈 판인데 두번째 애를 보려는것은 얼마나 때가 지난 말인가. 그렇게 묘한 핑게를 대고 이제껏 두번째 애를 낳아주지 않은 안해가 얄밉기만 하다. 이제 애원하고 원망하고 욕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이젠 널직한 아빠트가 있고 생활조건이 훨씬  좋아졌지만 나에게는 딸애란 있을수 없게 되였다. 나는 한평생 딸이 없는 유감을 안고 살아야 한다. 장차 아들며느리를 보면, 아니 우리 조선족 새 신랑과 신부들을 보면 나는 이런 속심의 말을 하고싶다. 내 평생 유감은 아들에게 동생을 낳아주지 못하고 2대 외동아들을 만들어놓은것이다. 너희들은 절대 우리 부부의 유감을 재연하지 말아라. 애들도 형제간이 있어야 한다. 애들 둘이면 더 분발하여 그 애들을 키울 돈을 벌수 있는 법이다. 옛날 우리 어머니는 아침에 죽물이라도 마시고나면 저녁에 솥에 앉힐 쌀이 없어  근심하면서도 애들을 열이나 낳아서 넷이나 병으로 죽이면서도 여섯을 남겼다. 바로 우리 어머니와 같은 조선족어머니들이 계셨기에 오늘 우리 민족이 살아남아있다. 한족들은 전국춘추시기부터 애들을 많이 낳는 녀성들에게 상으로 밭이나 황금을 내렸고 생육년령이 되여도 애를 낳지 않거나 낳지 못하는 녀성에게는 벌을 주는 정책을 써서 세계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위대한 민족으로 되지 않았는가? 너희들은 아들이든 딸이든 낳기만 해라. 우리 부모들이 너희들을 도와 손군들을 한둘은 길러줄게. 나는 애들을 둘 이상 키운 조선족의 어머니들을 보면 “우리 조선민족의 위대한 어머니들”이라고 소리높이 찬탄하고 싶다. 바로 그들이 있으므로 하여 인구마이나스장성을 기록하고 있는 우리 중국조선족이 인구위기를 넘기고 날따라 번성할 것이 아닌가? 그렇고 보면 아들비위 딸비위는 가족을 살리고 민족을 살리는 아름다운 야망이 아니겠는가!                                             본 수필은 “연변녀성”잡지 수필상 수상작임.                          
5    수필 리별 김장혁 댓글:  조회:974  추천:2  2018-10-26
              수필                                                      리별                                                                                                                         김장혁        나는 아들을 저 멀리 소주로 보내면서 리별이란 그렇게 마음이 아픈 것을 처음 느꼈다.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은 검표구 앞에서 나와 안해를 끌어안고 작별인사를 하였다.        “아버지, 어머니, 플래트홈에 나가도 종당에는 갈라지겠는데 여기서 작별합시다. 몸이랑 주의하고 젊게 살면서 잘 있으십시요.” 작별인사를 끝내자 검표구로 해서 멀어져가는 아들의 훤칠한 뒤모습을 바라보면서 나와 안해는 뜨거운 눈물을 주르르 흘리였다. “이젠 영영 우리 품 속을 떠나가는구나.” 나는 인파 속으로 사라지는 아들의 뒤모습을 한없이 바라보다가 돌아서면서 땅이 꺼지게 한숨을 쉬며 리별에 아픈 마음을 토해냈다. 그러자 안해도 눈시울을 닦았다. “대학교로 갈 때는 갔다가 몇달 후에 방학하면 온다고 생각하니 모르겠던데요. 이번엔 저렇게 가면 언제 오겠는가고 생각하니 정말 마음이 비길데 없어요.” “아들을 3천원에 팔아먹었구나.” 나는 아들을 보내고 련 며칠동안 리별의 아픔을 쓸쓸히 감내하면서 이렇게 생각하였다. 설상가상으로 두달반이 지나 아들의 녀자친구마저 일본으로 류학보내게 되였다. 아들을 소주에 보낸 마음의 상처가 가시기도 전에 또 두번째로 당해야 할 리별의 아픔이다. 천하에 하지 못할 짓을 한 것 같았다. 장차 아들과 그 처녀애가 다 일본으로 류학을 간다고 한다. 다행히 아들과 아들의 녀자친구는 일본으로 류학을 가도 중국으로 돌아온다고 한 것이다. 몇번이고 속뽑이를 하여도 그 애들은 우리 부모 앞에서 중국으로 돌아온다고 하였다. 우리는 그 말을 믿어야 했다. 그러나 일본으로, 미국으로 나간 아들딸들이 돌아온 애들이 몇이나 되든가? 이제 이역만리 한족곳에 보낸 아들로 마음이 아픈데 국경 넘어 일본 섬에 아들의 녀자친구를 보내고 몇해를 지나야 다시 만날가? 국내 소주에 있는 아들도 한해에 한번 만나는데 아들은 국경 넘어 일본에 간 녀자친구를 몇해에 한번 만날가? 아들은 녀자친구를 사흘이 멀다하게 만나면서 달밝은 밤에 헤여질 때면 리별의 슬픔과 상봉의 기쁨을 처음 알게 되였다고 한다. 중국 소주와 일본 고베에 갈라져 시간과 공간의 시련을 이겨내면서 안타깝게 상봉을 기다릴 아들과 아들의 녀자친구가 처량하기도 하다. 그리고 우리와 아들 그리고 아들의 녀자친구의 리별을 생각하니 아득하기만하고 이번 리별이 아프기만 하다. 장차 그 애들이 중국에 돌아와서 또 어느 한족곳에 가겠는지? 장차 태여나게 될 손자손녀들이 한족곳에서 한족으로 동화될가봐 근심스럽다. 그런데도 아들은 졸업하자마자 3천원을 받으니 좋고 26년 사업한 아버지 보다도 더 많은 로임을 받으니 기쁘다고 소주로 떠나갔다. 그러나 나는 아들을 3천원 로임에 팔아먹은 듯하고 돈의 유혹에 아들을 사기당한듯한 기분이였다. 내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그래 3천원이면 사갈 수 있단 말인가? 나도 아들에게 3천원씩 대줄 힘이 없어 이러는가? 그럴 힘이 있어도 우리 애들은 이 산골에 눌리워 있지 않을 것이다. 종당에는 애들과의 리별의 아픔을 당해야 하는것이 현실이다. 아들은 기차를 타고 소주로 가고 아들의 녀자친구는 비행기를 타고 일본으로 가고 말았다. 그렇다,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금이야 옥이야 하면서 키워 길림대학까지 졸업시킨 아들을 이역만리 밖으로 보내는 부모의 심정이야 오죽하랴. 더우기 공주처럼 기른 딸을 길림대학까지 졸업시켜 일본에 보낸 아들의 녀자친구 부모의 마음이야 얼마나 눈물겹겠는가? 아들과 갈라지기 싫어서 우리는 아들을 보고 연길에 남아 함께 살자고 얼마나 설교하였는지 모른다. 아들의 녀자친구를 일본에 보내기 싫어서 우리는 아들을 시켜 소주에 붙잡아두려고 얼마나 많은 수를 써 봤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 처녀애는 기어이 일본으로 가게 되였다. 천여원씩 받으면서 연길 산골에 남아서 부모 곁을 지키려는 애들이 지금 몇이나 될가? 부모와 자식이 함께 한 도시에서 사는 것도 만복중의 하나이다. 모든 것은 돈으로 다 따지는게 아니건만 애들은 그런 것은 심중에도 없고 몇천원을 받는 관내 연해 대도시로 가려고 하였다. 이것도 지금 애들의 시대적 조류이니까. 우리 부모들이 그 조류를 거슬러 애들을 막으면 날아오르려는 새들의 가위를 짓누르는 격이 되고 만다. 우리 곁에 애들을 남기려고 해도 우리 연변의 경제가 락후하기에 남겨둘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애들이 잘되는 것을 보기 위해 부모는 리별의 아픔을 참으면서도 하나 밖에 없는 아들딸을 한족들이 득실거리는 이역만리 땅에 보내야 하였다. 이제야 나는 생사를 기약할수 없는 전쟁터에 아들딸을 서슴없이 내보낸 옛날 우리 부모들의 마음이 오죽하였겠는가를 알 것 같다. 그들이야말로 아들딸과의 생사를 모를 리별의 아픔을 여린 마음으로 고통스레 감당해온 대단한 애국주의 부모들이 아니겠는가! 이제야 나는 한 교수의 증조할아버지대부터 대대로 자식들을 무식쟁이 아닐 정도로 소학교 공부만 시켰다는 도리를 터득하게 되였다. 그들은 자식들을 너무 공부시키고 세상을 너무 널리 알면 고향과 부모를 떠나는 것이 싫었다고 한다.      그런데 부모들의 그런 심정을 하나도 모르고 나는 대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에 류학가려고 마음먹었댔다. 그것도 당시에는 지금처럼 돈을 내고 류학갈 수 없으므로 모험의 길을 걸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파뿌리처럼 하얀 머리를 흩날리는 어머니와 작별인사를 하러 가서 나는 뜻을 꺾지 않으면 안되였다. 내가 어머님을 보고 일본에 류학가려는데 어떤가고 묻자 어머님께서는 내 예상과는 달리 말리기는커녕 한참 생각하더니 “대학을 졸업하고 일본까지 류학가면 얼마나 좋겠느냐?” 하고 아주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겠는가. 어머님은 이 못난 아들이 생사를 기약할 수 없는 모험의 길을 걸으려고 날뛰는 것도 모르고 아들이 잘되기만을 바라고 계셨다. 주름살이 조글조글하고 머리 새하얀 어머니를 바라보자 나는 외동아들인 내가 없으면 늙으신 부모님은 누가 모시겠는가고 생각하고 그렇게 가고 싶던 일본류학의 꿈을 접고 뜻도 꺾고 말았다. 그렇다. 예로부터 충신은 효자가 아니라고 하지만 나는 효성도 잘하고 사업도 잘하려는 소박한 길을 선택하였다. 내가 잘 살겠다고 늙으신 부모를 고향에 남겨두고 일본으로 가는 불효를 저지를 수 없었다. 중국에서 수수하게 살더라도 부모를 모시고 효성을 다하면서 짤막한 글이라도 쓰면서 내 한생을 살자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지금 생각해봐도 부모를 위해서나 나를 위해서나 잘한 선택이라고 생각된다. 아버님께서 세상을 뜨시기 한주일전 아버님과의 리별은 정말 한평생을 두고두고 마음이 아픈 리별이였다. 아버님께서 평소에 맛있어하는 소고기 등을 사들고 병문안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날 때였다. 사업터로 돌아가야만 하는 나의 손을 잡고 아버님께서는 이렇게 신신당부하셨다. “꼭 사업에 성공하오. 사람은 빚을 지고 살아도 시비를 지고 못사오. 정의를 지키고 시비를 가려 글을 써야 진정한 기자이구 작가요. 내 말을 명심하오.” 그러고나서 아버님께서는 가래짝 같은 손을 들어 군례를 올리듯이 손을 들어 어서 가라고 손시늉을 하셨다. 나는 눈물을 훔치면서 문 밖을 나섰다. 그러나 별로 아버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너무 무겁고 마지막 리별을 앞둔 부탁 같아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자전거에 몸을 실으려다가 집으로 되들어갔다. 그러자 아버님께서는 몸을 일으키시면서 손을 척 들어 저으면서 신신당부하셨다. “왜 돌아왔소? 사내자식이 그리 눈물이 헤프구서야 어떻게 큰 일을 하겠소? 어서 돌아가오. 아들이 사업을 잘해 성공하면 난 구천에서도 웃겠소.” 아버님께서는 어서 떠나가라고 손시늉을 연신 하셨다. 나는 지금도 그 마지막 리별에 마음이 아프다. 일주일전만 해도 정신이 말쑥하셨던 아버님께서 이 불효자식을 두고 총망히 떠나가시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도 못하였다. 또 그것이 아버님께서 나에게 남기신 마지막 리별의 유언일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였다. 이제야 나는 부모와 자식의 리별의 아픔과 아들이 잘되기를 바라는 부모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알 것 같다.   나는 부모자식간에 불필요하고 무모한 애끓는 리별이나 별거를  바라지 않는다. 아니, 리별이란 영영 없었으면 한다. 물론 쓸쓸한 리별이 있어야 상봉의 기쁨을 알 수 있다고 하지만 조석으로 부모자식들이 한자리에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그러나 이 세상 부모들은 리별의 아픔을 속으로 피눈물을 흘리면서도 참아나간다. 자식이 이 세상 어데로 가든지 잘 되기만을 바라고 자식들이 잘 되면 기뻐한다. 부모는 자식의 뒤다리를 절대 잡아당기지 않는다. 조건이 되면 시대의 조류에 따라 자식을 따라갈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러나 자식으로서는 부모의 마음을 열분의 하나라도 알아야 하고 모든 것을 돈으로 계산해서는 안된다. 자기 혼자 잘 살겠다고 부모를 버리고 몇만리 밖의 외국으로 달아나는 것은 차마 못할 짓이 아니겠는가? 세상에 부모자식이 한 곳에서 사는만큼 행복하고 즐거운 천륜지락이 또 어데 있으랴? 그런 천륜지락은 황금산과도 바꿀수 없으리라! 충신은 효자가 아니라지만 부모를 잘 모시고 효성을 다하는 효자로 되면서 사업도 잘하는 사업가로 된다면 얼마나 자랑스럽겠는가?                      *본 수필은 2009년 연변작가협회, 연변인민방송국 주최, 한국 중부문학협회 후원                                         제1회 두만강수필문학상 수상작                       "연변녀성" 2019년 제2호에 실렸음             
4    수필 금강산 선녀를 만나 김장혁 댓글:  조회:2924  추천:4  2015-10-23
                                     수필                                          금강산 선녀와 만나                                                                               김장혁        안개 서리서리 서린 베일이 서서히 벗어지면서 울긋불긋 단풍이 든 수림 속에 숨었던 금강산의 기암괴석들이 서서히 수려한 모습을 드러냈다. 산새들이 절벽과 푸르른 창공 사이에서 날아예면서 지저귀며 노래하며 맞아준다. 순간 비행기를 타고 버스를 갈아타면서 낮과 밤을 10시간이나 날아오고 달려온 모든 피로가 가뭇없이 사라지고 눈이 번쩍 뜨인다. 우리는 시원한 금강산 공기를 가슴 뿌듯이 한껏 마시면서 환성을 질렀다.       "누가 제일 먼저 금강산에 오르면 금강산 선녀가 마중해요." 여가이드가 하는 말에 뭇 사내들은 뉘라 없이 돌층계를 바삐 톺으면서 산꼭대기를 바라고 가파로운 절벽 길로 돌진했다. 허나 내가 생각하매 금강산 선녀가 따로 있나? 금강산 가이드 처녀가 금강산에서 내린 선녀이지. 1미터 65나 되는 미끈한 체격, 파도치며 어깨 너머 흘러내린 머리카락, 이북 처녀의 보름달 얼굴에 짙은 버들잎 눈썹아래 어글어글한 눈매, 오똑 치솟은 콧마루, 촉촉하고 부드러운 입술, 강원도 금강산의 23세 처녀 특유의 금방울 굴리는듯 청아하고 부드러운 목소리… 그녀가 바로 뭇 사내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금강산 선녀가 아니겠는가? 금강산 선녀와 나란히 걸으면서 부드러운 설명을 들으며 푸른 벽계수가 출출 흘러내리는 계곡을 따라 금강산을 올라가는 4킬로미터 절벽 길도 가파로운 줄도 모르고 해발 1639미터 금강산에도 톺아 오를 수 있어 그 멋 또한 별미다. 하늘을 쳐다보는 깎아지른 절벽-앙천대는 푸르른 하늘을 떠받들고 있어 자못 눈 뿌리가 아찔했다. 절벽 위에 기어 올라가는 토끼와 거부기, 병풍 같은 절벽 위에 올라가 거부기와 서로 먼저 올라가려고 싸우다가 거북의 철갑 같은 등껍질을 걸친 채 바위로 굳어져 버렸다는 백길 절벽 위의 토끼 암, 아기를 안고 앉아 있는 여인 같은 모녀바위, 책을 보고 있는 선비 같은 선비바위, 달리는 말 같은 말 바위, 절벽을 달려 내려오는 기차 같은 기차절벽…신기하기만 하구나.   하늘을 찌르누나 천하명산 금강산아 화가도 묘사하기 어려워 붓 꺾으리 어화라 절승경개에 취하도록 놉새나       한 모금만 마시면 10년 젊어진다는 삼록수를 세 모금이나 마시고나니 이게 웬 일인고? 내 가습속에 금강산이 우뚝 치속고 민족의 기개가 하늘을 찌른다. 이건 또 뭐야? 60고개 마루에 오를 불혹의 나이에도 나란히 걸으며 귀 방울을 간지르는 금강산 선녀의 탄력 있는 몸이 탐나는 게 웬 일이냐? 아내를 손자한테 빼앗기고 홀아비 신세에 금강산 선녀가 팔을 끼고 대자연이 몇십톤이나 되는 바위로 만든 금강문을 빠져나가노라니 새 해에는 금강산 선녀가 웨딩드레스를 입고 품에 날아드는 미몽이나 꾸지 않을까? 무대같이 널따란 무대바위에 올라가 서서 양반들이 바위에 새겨놓은 이름자를 멍하니 두리번두리번. 너럭바위에 흐르는 맑은 물에 기생들이 술잔을 띄워 내려 보내면 시원한 옥류 물에 기생들을 껴안고 목욕하면서 술잔을 받아 마시며 노닐던 양반들과 황진이는  어디로 가고 조약돌이 다 들여다보이는 물 함지 같은 옥류담만 서글프게 누워있구나. 너럭바위를 핥으며 씻으며 흘러내리는 옥류동의 푸른 물, 연이어 폭포수가 쏟아져 내리는 련주폭포… 천하 절승경개를 굽어보노라니 먼 옛날 천하명기 여류시인 황진이가 그립구나. 아직도 그녀가 즐기던 옥류담 벽계수가 옥돌을 부시고 핥으면서 출렁출렁 흐르건만 그녀가 뜯는 가야금 아름다운 선율과  명시조 읊조리는 소리가 환각속에 구슬프게 들려오는데야...    황진이 시향 만리 오늘도 그윽컨만 명시조 녀류시선  어디에 숨었는고? 님이여 외로운 선비 울리지나 맙소서.         황진이 대신 금강산 선녀가 소곤거리며 허전한 내 마음 달래주어 다행이구나. 보고싶은 황진이는 보지 못하고 금강산 선녀의 손을 잡고 봉황이 춤추며 하늘로 올라가는 모양새를 갖춘 비봉폭포와 봉황이 춤추는 듯 한 무봉폭포를 바라보노라니 머리 허연 선비 가슴에서도 청춘의 노래를 부르누나. 금강산 절정 비로봉을 지척에 두었건만 금강산 선녀는 보이지 않고 병풍 같은 절벽 위에 웬 황금이 쌓여있고 등산객들이 시장기를 말리려고 기름떡을 쌓아놓았느냐? 층암절벽이 백길 넘어 치솟아 있는 데야, 천하 명기의 쩍 벌려 댄 두 다리 사이로 웬 흰 비단폭포가 쏟아지느냐? 허연 젖가슴을 드러내고 들어누운 금강산 선녀의 허연 다리 새로 74미터 높이로 흰 비단을 필채로 줄줄 낳는구나. 구룡폭포 층암절벽을 부시며 폭포수가 눈사태로 무너져 내리는구나. 금강산 선녀와 소곤소곤 속삭이며 금강산 절경에 취해 구경하노라니 이 아니 즐거우냐? 여봐라, 시선이여, 당신은 여산 폭포가 아름답다 했지만 묻노니, 예가 바로 천하명승 절승경개 아니겠나. 금강산 선녀가 새물새물 웃으며 못난 선비 허연 머리를 폭포수에 담가주며 번쩍번쩍 영원한 기념사진을 찍어주누나. 수려한 금강산에서 내려 갈 때 됐건만 어인 일인가?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아 모두들 머뭇거린다. 명기 황진이 노닐던 금강산은 보았지만 명기 아닌 여류시인으로서의 황진이가 남겨놓은 명 시조는 보지 못해 이내 선비는 서글프기만 했다. 자꾸 여기저기 두리번두리번 살펴봐도 찾아 볼 길이 없어 서자 같은 선비는 속으로 울면서 하산의 발걸음을 간신히 옮겨 놓는다. 그런데 저게 뭐야? 한참 내려오다 돌아보니 푸르른 창공과 금강산 주봉인 비루봉을 배경으로 황진이가 거대한 바위로 하얀 가슴을 드러내놓고 굳어진채 들어누워 구룡폭포수를, 벽계수를 뿜어대고 있지 않겠는가! 환각인가! 아니야, 진짜 그렇다, 수백년 동안 금강산- 선녀, 그녀는 그 얼마나 많은 사내들을 자기 품속 금강산 계곡에 받아들여 천하제일 사랑을 음미해보게 했던가!  시원한 공기로 답답한 사내 가슴을 달래주고 사랑의 폭포로 혼을 빼앗아가고.        비무장지대 철조망과 지뢰밭을 넘어 해금강으로 달려갔다. 출렁이는 파도는 해금강의 바윗돌에 부딪쳐 하얀 물보라를 일으키며 우리를 환호했다.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총대를 맞대고 쏘아보는 참혹한 비극을 70년이나 바라본 파도는 철썩철썩 쾅 쾅 바위에 얻어맞아 퍼렇게 멍들었고 바위들은 바다에 물앉아 안타까이 울고 있었으며 파도는 초석에 부딪쳐 하얀 슬픔으로 산산이 부서진다. 저기 2킬로미터 앞바다에 마주 보는 형제 같은 두 섬 중에 북쪽의 섬은 이북의 것이고 남쪽의 섬은 이남의 것이라고 한다. 남쪽 설악산에 올라 이북의 금강산 쪽을 바라보았을 때만큼 북쪽의 금강산에 올라 지척의 이남 설악산과 속초항을 바라보노라니 분단의 아픔이 마음을 톱질하며 괴롭힌다. 이북의 금강산과 이남의 설악산은 모두 백두대간의 산줄기로서 산맥이 한데 이어져 있건만 오늘은 철조망에 가로 막혀 형제 산을 지척에 두고서도 모두 울창한 수림 속에 대머리를 마주하고 서로 멍하니 마주 바로보고만 서 있었다. 해금강 바다 속의 독 바위산 층암절벽만이 자존심을 지키면서 우뚝 솟아 분단의 비극을 굽어보며 서럽게 통곡친다. 철썩 철썩 쿵-쏴 파도가 쓰라린 눈물방울로 부서지고 가슴 아픈 슬픔으로 산산이 흩어진다. 금강산 선녀는 비극적인 분단의 무대를 배경으로 머리 허연 선비의 초라한 모습을 카메라에 닮는데 늙은 선비는 통분해 가슴을 쾅쾅 치면서 즉흥으로 시조를 읊는다.   갈매기 자유로이 남북을 날아예고 물고기도 속초항과 해금강을 오가건만 여봐라 왜 겨레 형제 미사일을 맞쏘나?!   하늘이 높고 높아 넘나들지 못 하나 바다물 깊다 해도 드나들지 못 할가 3.8선아 8천만 동포 념원 안고 무너져라!    
3    수필 관념을 갱신해야 김장혁 댓글:  조회:2211  추천:3  2015-03-06
                  수필        관념을 갱신해야                                김장혁        잡지 주필로 15년 동안 편집 사업을 하면서 로인들의 생활을 찬찬히 관찰하면서 나는 관념을 갱신해야 하지 않겠는가는 생각이 들었다.      한 로인은 잡지를 주문하지 않고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그 추운 겨울에 5리나 떨어진 도서관에 가서 잡지를 빌어보군 하였다. 물론 그 로인은 돈을 절약하고 걸으면 운동도 돼 일거량득이라고 하였다. 한해에 84원을 내면 잡지를 집에까지 배달해주어 얼마나 편리한가? 그런데도 고만한 돈때문에 달마다 힘들게 걸어다닐것이 있는가? 눈이 내린 날 미끄러운 길을 걷다가 로년에 넘어져 골절이라도 생기면 치료비가 84원만 들겠는가? 골절로 오는 통증은 또 얼마나 고통스럽겠는가? 어떤 안로인은 돈을 아껴 화장실에서 위생종이가 아까와 낡은 옷을 가위로 베여 천쪼각을 썼다. 그녀는 자식이거나 손님이 집에 오면 체면때문에 천쪼각을 부랴부랴 치우고 아까운대로 위생지를 화장실에 갖춰놓는다고 하였다. 돈 한푼이라도 절약하려고 그러겠지만 틀린 소비관념이다. 별의별 세균이 다 슴배인 낡은 옷 천쪼각을 쓰면 항문과 하신에 세균이 침입해 염증 혹은 더 중한 병에 걸릴수도 있다. 특히 안로인들은 천쪼각으로 소변을 보고 하신을 닦으면 부산과병에 걸릴수도 있다. 옛날 해방전처럼 생활이 가난한 시기에 위생지도 없을 때 녀성들이 위생지 대신 천쪼각을 썼다는 말은 들었다. 생활수준이 제고된 지금 건강을 위해서라도 천쪼각을 쓰는 문명하지 못한 소비관념을 버려야 한다. 칠순고개를 바라보는 한 안로인은 집 가까이에 남새상점이 있건만 눅은 남새를 사려고 늘 자전거를 타고 몇킬로메터 떨어진 남새도매상점으로 다녔다. 국외에 있는 아들딸 셋이 어머니가 상할가봐 말리면서 남새를 살 돈을 푼푼히 부쳐보냈건만 그 로인의 소비관념은 개변되지 않았다. 하여 눈 내린 날에 자전거를 타고 남새도매상점으로 가다가 내리막길에서 미끌어넘어져 다리에 심한 골절상을 입었다. 결과 십여 년동안 남새도매상점으로 힘겹게 자전거를 타고 다니면서 절약한 돈을 다  처넣고서도 치료비가 모자라 자식들의 신세를 입어야 했다. 돈이 더 들어간것은 둘째이고 골절로 인해 생활을 자립하지 못해 본인은 두말할것 없이 고통스러웠고 로친을 간호하는 령감도 얼마나 힘겨웠겠는가? 이는 그릇된 소비관념이 낳은 비극이다. 한 안로인은 이른 남새철에 갓 장마당에 나온 생신한 오이나 가지는 비싸다고 사지 않고 저물어가는 늦가을이 다 돼 몇십전씩 할 때에야 늙고 시든 오이를 사서 먹는다고 하였다. 령감이 생신한 오이와 가지를 너무 먹고싶어서 어쩌다 사오면 비싼걸 사왔다고 야단친다고 하였다. 돈이 없어 그랬을가? 아니다. 부교수급 지식인의 월급이면 생신한 오이나 가지를 사잡숫지 못할 가긍한 처지는 아니지 않는가! 그 안로인은 령감에게 항상 제일 눅고 질이 차한 근들이소주를 사서 대접했고 아들이 왔다가 몇십원짜리거나 몇백원짜리 소주를 사다가 대접하면 기가 넘어갈 지경이였다. 지어 아들 덕분에 음식점에서 식사를 마친후 먹다가 남긴 멀건 국물마저 비닐주머니를 달라고 해 퍼담아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먹다남은 멀건 국물이 아까운것은 알아도 어찌 아들며느리 낯이 깎이우는것은 생각지도 못했을가! 웃지도 울지도 못할 이런 희극은 모두다 그 놈의 시대에 뒤떨어지고 좀스러운 소비관념이 머리에 꽉 들이박혀있기때문이 아니고 무었이겠는가! 한 안로인은 딸이 차린 양고기산적점에서 청소를 하고 양고기점을 꿰주면서 딸을 도와주다가 손님들이 탔다고 먹지 않고 남긴 양고기점을 아까워 주어뒀다가 먹군 하였다. 탄 양고기점에는 발암물질이 많았기에 안로인은 대장암에 걸려 사망하고말았다. 한 안로인은 병원에 가서 별의별 환자들을 간호하면서 환자가 먹다가 남긴 밥과 채를 아까와 버리지 않고 먹었으며 림종환자들이 준 옷을 입고 다녔다. 옛날부터 어렵게 살아온분이기에 옷값이나 밥값을 한푼이라도 남으려는것이였다. 그러나 간병환자에게서 간염이 전염될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결국 그 안로인은 간암과 간복수, 당뇨병합병증에까지 걸려 생명까지 잃고말았다. 지금 로인들에게 돈이 없어 이런 비극이 벌어진것이 아니다. 주요하게 일부 로인들의 소비관념에 문제가 있기때문이다. 로인들은 소비관념을 갱신해 눈앞에 돈이 나가는것만 생각하지 말고 좀 돈을 팔더라도 편안하고 건강하게 살면 좋지 않겠는가? 밀치락거리는 뻐스에 앉지 말고 택시에 척 앉아 가면 얼마나 어르신답고 신사답게 멋지고 편안하겠는가? 일본에서 해일이 휩쓸고 지나간 해변가에는 보험궤가 페허속에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그 보험궤는 일본 로인들이 생전에 쓰지 않고 한푼두푼 모은 돈을 넣은 유물이였다. 이 모든것은 돈이 모자라 쓰지 못한것이 아니라 목숨이 모자라 돈을 다 쓰지 못하고 이 세상을 총망히 떠나간 비극이 아니겠는가? 한번 가면 다시 못 오는 반디불 같은 짧은 한생에 아껴 먹고 쓰지 않고 이 세상을 떠나서야 무슨 락이 있겠는가! 다음, 시대에 뒤떨어진 전통양로관념도 갱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대부분 로인들은 전통양로관념을 벗어나 자식들과 한 집에서 살려고 하지 않고있다. 또 대부분 자식들도 부모에게 효성을 다하지만 한 집에서 살기는 서로 불편하다고 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일부 로인들은 아직도 전통양로관념을 벗어나지 못해 자손들과 한 집에서 살면서 천륜지락을 누리려고 한다. 한 늙은 량주는 전통관념으로 맏아들과 한 집에서 살 예산으로 젊을 때 한국에서 뼈빠지게 일해 번 돈으로 맏아들에게 매 평방메터에 2만원도 넘게 주고 3개 침실에 널직한 객방을 갖춘 120평방메터 되는 집과 고급승용차까지 사주었다. 그러나 항상 부모를 모시고 살겠다던 맏며느리가 늙은 시부모가 한국에서 돌아온지 한달도 안돼 한집에서 살지 못하겠다고 나누울줄을 누가 알았겠는가? 시아버지가 샤와욕을 하고 머리카락과 때가 지저분하게 널려있다는지, 창문옆에서 담배를 피워 갓난애에게 피해를 입힌다는지, 잘 때 코를 구들고래 꺼질 지경으로 곤다는지 별의별 허물을 다 트집잡으면서 나가서 따로 살았으면 좋겠다고 내놓고 떠들었다. 며느리는 시부모와 모든 관념이 맛지 않아 한시도 함께 살지 못하겠다면서 아예 반란이라도 일으킬 작정으로 갓난애를 싸업고 친정부모가 있는 한국으로 훌쩍 떠나가버리였다. 설상가상으로 둘째아들며느리도 부모와 한집에서 살지 못하겠다고 막아나섰다. 둘째아들과 며느리는 이전에 형과 보모의 돈을 빨아내는 경쟁을 벌린적이 있었다. 그들은 부모를 보고 “맏아들만 아들이고 둘째아들은 아들이 아닙니까? 늘그막에 두고봅시다.”라고 을러메면서 부모의 돈을 빨아내 100평방메터 되는 집을 샀다.  둘째아들은 부모를 보고 “부모의 돈을 더 많이 가진 맏아들이 모시지 않는데 둘째가 모실게 있는가?”라고 하면서 자기 집 근처에 세집을 맡고 살라고 하였다. 한국에서 애나게 번 돈을 몽땅 두 불효자에게 주고나니, 아니, 떼우고나니 주름살이 밭고랑처럼 파인 량주는 늘그막에 어느 아들 집에도 오지도 가지도 못하는 눈물겨운 처지로 돼버렸다. 뒤늦게야 정신을 펄쩍 차린 늙은 량주는 전통양로방식을 벗어나 과단성있게 아들 둘이나 사는 도시를 떠나 자기가 살던 마을로 돌아가 살기로 마음먹었다. 한족며느리를 삶은 늙은 량주는 전통양로방식대로 자식들과 살기 더욱 어렵다. 한족과 조선족의 음식습관이 다른데다가 동북과 남방의 모든 관념상 차이는 조선족시부모와 한족며느리 사이에 높은 장벽을 쌓아놓았다. 조선족시어머니는 조선족의 음식습관에 따라 항상 장국을 끓여 밥상에 올렸다. 그러나 한족며느리는 장국냄새를 맡기만 해도 상을 찡그리군 하였다. 한족며느리는 음식에 무슨 양념을 가득 넣고 기름에 볶아야 맛있어했지만 조선족시어머니는 양념냄새를 딱 싫어했고 아들이 살이 진다고 기름에 볶아 먹이지 않고 돼지고기도 물에 삶거나 고마이도 시루에 쪄서 먹였다. 늘 부동한 음식습관으로 해 고부 사이에는 날따라 깊은 금이 점점 실려갔다. 며느리는 언제 시어머니가 주방을 떠나겠는가, 아니, 자기 집에서 언제 떠나가겠는가고 기다리는 눈치였다. 남방의 한족며느리들은 우리 조선족들과는 물론이고 동북의 한족들과도 관념과 습관이 달랐다. 남방의 한족들은 대대로 친정집어머니가 보모처럼 집안청소까지 날마다 다 해주면서 딸집의 가무를 거들어주는 전통관념이 있다. 그러나 조선족시아버지는 늘 틀을 차리고 앉아 술을 마시고 집에서 담배를 피우는데다가 잔소리가 많았다. 남방의 한족며느리가 이런 대남자주의관념이 꽉 찬 시아버지를 좋아할리 있겠는가. 로인들과 자녀들은 가치관, 소비관, 자녀교양관 그리고 생활습관, 양로방식 등 여러 면에서 관념차이가 있다. 옛날 로인들은 몇십년 아글타글 돈을 벌어서 년세 들어서야 집을 사고나서 백발을 휘날리면서 “아, 나에게도 끝내는 자기 집이 있게 됐구나.”라고 감탄하였다. 그러나 지금 젊은이들은 손에 쥔 돈이 없으면서도 부모의 돈을 가져가거나 몇백만원 빚을 져서라도 집을 먼저 사놓고 들어 인생의 락을 향수하면서 돈을 벌어 몇십년후에 천천히 집값을 물 궁리를 한다. 빚을 다 문 날이면 “난 끝내 집값을 다 물었구나.”라고 한다. 이것이 바로 옛날 로인들과 현시대 젊은이들의 소비관념이 다른 점이다. 옛날 로인들은 묵은 소비관념에 의해 먼저 집값을 만드느라고 거의 반평생을 집 같은 집에서 살지 못하였으며 자기 집을 마련했을 때는 좋은 세월이 다 흘러지나가고 황혼을 맞는 비극이 기수부지였다. 때문에 로인들도 낡은 소비관념을 버리고 현시대 젊은이들에게서도 새로운 소비관념을 배울 필요가 있는것 같다. 일생이 얼마나 길다고 돈이란 거미줄에 얽매워 향수하지 못하고 살겠는가! 한집이란 졻은 공간에서 부모자식들이 함께 생활하면 천륜지락을 누리는 좋은 점외에 불편한점도 많은것 같다. 한 안로인은 한국에서 한푼이라도 남으려고 세집도 해빛이 잘 들지 않는 ,반토굴이나 다름없는 손바닥만한 월세집에서 살았다. 쌀도 항상 시장에서 누렇게 변질이 간 눅거리쌀을 사다 먹거나 곰팡이가 낀 쌀이거나 벌레가 먹은 쌀도 아까와 버리지 않고 벌레를 골라버리고 해볕에 말리워 먹군 하였다. 아들며느리가 오랜만에 한국에 놀러 갔을 때에도 시어머니는 돈을 남느라고 누렇게 뜬 쌀을 씻어 말리워 밥을 지어 밥상에 올렸다. 그러자 며느리는 밥을 먹지도 않고 쓰레기통에 왈 쏟아버리였다. 또 샘물병을 주어다가 수도물을 받아 마시는 시어머니를 보다못해 며느리는 시부모 몰래 샘물병을 내다 버렸다. 그 일로 하여 고부 사이에 말다툼이 생겼다. 며느리는 소비관념이 맞지 않아 째째한 시부모와 한 집에서 한시도 살지 못하겠다고 신랑을 끌고 모텔로 달아난 일도 있다. 이뿐이 아니다. 로인들은 잠이 적어서 신새벽이면 일어나 집안에서 서성거리거나 덜커덕리면서 늘 아침식사를 일찍이 했으면 하고 자식을 도와 밥을 지어놓고 지루하게 기다리기가 일쑤이다. 그러나 젊은 자식들은 휴식일이면 늦잠을 자기 좋아하며 아침도 먹네마네한다. 부동환 관념으로 인해 부모자식간에 불편한 점이 한두가지 아니며 심지어 말다툼이 생기기 일쑤이다. 반면에 조건이 허락되면 자식들과 한 시내에서 다른 집을 잡고 살면 편리하지 않겠는가는 생각이 든다. 부모와 자식이 멀리 떨어져있지 않고 지척에서 수시로 만나보고 로인들은 손자손녀들을 안아보면서 천륜지락을 누릴수 있어 좋다. 한 집이란 비좁은 공간에서 부모자식이 비비닥거리지 않고 일정한 공간을 두어서 말썽이 없어 좋다. 뭘 먹고싶은것이 있으면 내 손으로 사다가 끓여잡술수 있어 좋고 시장하면 아무 때나 식탁에서 훌훌 꺼내 잡술수 있어 좋다. 아무 때건 옷을 더 껴입지 않고서도 화장실에 갈수 있어 편리하다. 자식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밥을 지어먹을수 있어 좋다. 총적으로 자식들과 한집에서 살지 않으면 서로 편리해 좋을것 같다. 자식들이 효성을 다해 한집에서 잘 모시면 천륜지락을 누리면서 살수 있어 얼마나 행복하겠는가. 그러나 며느리들이나 사위가 효성을 하지 않을 때에는 믿던 정신기둥이 무너져 심지어 절망에 빠질수도 있다. 때문에 우리 로인들은 전통양로관념을 벗어나 자식들을 너무 믿거나 자식들에게 너무 기대여 살 생각을 버려야 한다. 로인들은 년세가 들어서도 자식들에게 손을 내밀지 않고 독립적으로 살기 위해 좀 젊어서부터 양로비를 푼푼히 마련해두는것이 선지선각적이며 명지한 처사라고 생각한다. 우리 로인들은 예로부터 아글타글 벌어서 아껴쓰면서 자식들을 키우면서 “자식들이 다 크면 행복하겠지.” 하고 아름다운 꿈을 꾸며 그날을 기다리면서 살아왔다. 그러나 애들이 다 시집장가를 간후에는 또 손자손녀들을 돌보면서 “손자손녀들이 다 크면 행복하겠지.” 하고 아직도 채바퀴처럼 맴도는분들이 적지 않다. 자식들이 다 시집장가를 가고 손자손녀들이 다 컸지만 우리 로인들이 자식들의 덕분에 행복하게 보내고있는가? 로인들은 자녀들에게서 독립해 자기 삶을 살아야 한다. 자녀들에게 의지하지 말고 스스로 만년의 행복을 만들어야 한다. 관념은 한 사람, 한 가정의 행복과 생사존망을 지배한다. 우리 로인들은 소비와 양로방식 등 여러 면에서 시대에 발맞춰 관념을 부단히 갱신해야 한다. 돈이란 거미줄에 너무 얽매우지 말고 쓸 일에는 푹푹 쓰면서 만년에 옥체  건강하게 살며 신사답게 젊고 유쾌하게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2    웰빙아동문학상 금상 수상소감 김장혁 댓글:  조회:1284  추천:5  2014-03-22
웰빙아동문학상 수상소감             김장혁      우선 오늘 저의 졸작 장편과학환상소설 "욕망의 천지"에 웰빙아동문학상이라는 크나큰 영예를 안겨준 평심위원들과 김만석교수님을 비롯한 허두남부회장과 림철부회장 등 연변아동문학연구회 책임자 여러분 그리고 홍용암리사장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장편과학환상소설 "욕망의 천지"가 이 세상에 고고성을 울릴수 있게 된데는 많은 문학지성인들의 편책과 지지 그리고 창작용기를 주신것과 갈라놓을수 없습니다. 일찍 아동문학 주필로 있은 김현순선생과 당시 책임편집 리영철선생은 선후하여 저의 중편과학환상소설 "지구보위전"과 "괴물 클론바우꼬마대통령 모험기"를 "아동문학"지에 련재했으며 장편과학환상소설 "야망의 바다"를 편집출판했습니다. 한국 세계편클럽 회장, 한국 계몽아동문학학회 문삼석회장님과 연변아동문학회 김현순회장은 저의 중편과학환상소설 "지구보위전"에 "동심컵한중아동문학상"을 안겨주었고 한국아동문학학회 엄기원회장님과 김현순회장은 저의 장편과학환상소설 "야망의 바다"에 "옹달샘한중아동문학상"을 안겨주었습니다. 이에 창작용기를 얻은 저는 장편과학환상소설 "야망의 바다" 속편인 "욕망의 바천지"를 창작해 한국 교문사에서 출판하였습니다. 연변인민방송국 청소년편집부 채선 부장은 저의 장편과학환상소설 "야망의 바다"와 "욕망의 천지", 중편과학환상소설 "지구보위전", "괴물 클론보아꼬마대통령 모험기" 등을 통합해 대하방송드라마로 각색해 연변인민방송에 련속 방송하였습니다. 문학평론가 김룡운선생과 한국아동문학학회 김완기회장은 저의 미숙한 장편과학환상소설 "야망의 바다"에 대한 문학평론에서 "풍부한 상상력으로 창작된 "야망의 바다"는 공백을 메운 중국조선족문단의 첫장편과학환상소설이며 야망의 문학작품"이라고 과분한 평가를 주었습니다. 한국아동문학연구회 부회장이며 한국 "서울문학" 주필 서정일선생은 저의 장편과학환상소설 "야망의 바다"와 그 속편 "욕망의 천지"  줄거리를 한국 "서울문학"에 실어주었습니다. 수많은 네티즌들은 조글로 작가 불로그에 들어와 저의 장편과학환상소설 "야망의 바다"와 그 속편인 "욕망의 천지"를 열람하습니다. 특히 연병아동문학연구회 회장이시며 저명한 문학평론가, 아동문학가이신 김만석교수님께서는 저의 졸작에 아주 전면적인 문학평론을 쓰시여 창작용기를 북돋우어주시고 존재하는 문제점을 지적해주시였으며 오늘 또 웰빙아동문학상을 안겨주셨습니다. 김교수님의 고무와 편책은 앞으로 계속 과학환상소설을 창작하려는 저의 앞길을 밝혀주는 등대로 될 것입니다.       작가는 어디까지나 작품을 창작하고 작품으로 말하며 작품과 함께 생존한다고 생각합니다. 작가의 사명은 어지러운 문예정치를 하면서 명예나 작가협회의 직위나 따지고 문학상과 상금을 사냥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문예정치를 하면서 니야 내야 시야, 비야 하고 티각태각 다툴 새도 없습니다. 그 시간이면 작품을 하나라도 구상하겠습니다.  눈치나 슬슬 보면서 옴니 암니 자리다툼이나 하는 그런 사이비한 세상을 멀리하고싶습니다. 작품은 몇개를 써내지도 못하고 어깨에 별부터 달려고 혈안이 돼 문예정치에  신경을 곤두세우는 그런 가라지, 음침한 그늘밑에서 남의 작품에 이러쿵저러쿵 댓글이나 싸 갈겨대고 깨고소해하는 그런 소인배들과 멀리 하렵니다. 저는 영원히 일반작가로 , 글만 쓰는 그런 참다운 작가로 남겠다. 자기는 작품을 쓰지 못하는 주제에 남의 작품을 보지도 못해가지고 댓글부터 갈겨대는 그런 가련한 문외한, 소인배들이 가소롭기만 합니다. 그런 소인배들과 멀리하렵니다.  나는 집안 구석에 들어박혀 문학작품만 창작하겠습니다. 저는 요란한 폭포수로 되려고 하지 않습니다. 조용한 금강산 시골의 맑은 벽계수처럼 한방울의 시내물 물방울로 되고 싶습니다. 언제나 낮은 곳으로 조용히 흐르는 순결한 벽계수로 되고 싶습니다. 아니, 누구도 보지도 알지도 못하는 지하수로 되고 싶습니다. 북극의 솟아난 빙산보다 바다물 속에 자기 모습을 제대로 드러내지 않는 자그마한 얼음조각이 되고 싶습니다. 속대는 약하나 대가리만은 잔뜩 쳐든 가라지로 되지 않고 길가의 수수한 민들레가 되고 싶습니다.         작품창작에는 머리를 쓰지 않고, 그렇다할 작품도 저서도 없이 명예와 문예지위만 따지는 그런 비뚤렁한 문예정객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어지러운 문예정치에 삐치는 그 시간과 정력이 너무나도 아깝습니다. 저는 조용한 시골 세상에 파묻혀 오염되지 않은 산나물이나 캐 먹고 이슬을 마시면서 속세에 때가 묻어가는 마음을 수시로 정화하고 살어리랏다, 살아리랏다.  벽계수와 맑은 하늘의 초생달과 동무하면서 머리를 싸매고 하나라도 작품을 구상하고 창작하겠습니다. 작가의 사명은 어디까지나 사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문학작품을 부지런히 창작해내는것이니까.     오늘 지구촌은 끝없이 욕심을 부리는 인류에 의해 모진 몸살을 앓고있습니다. 인류의 절제없는 욕망에 의한 산업개발과 더불어 지구생태환경은 여지없이 파괴되여가고있습니다. 필리핀과 말레시아에서 해일이 몇만명의 목숨을 앗아갔고 일본 대지진과 해일로 해 수만명의 목숨을 앗아갔습니다. 더욱이 후꾸시마원전사고와 로씨야 체르노빌원전사고는 인류의 생존터전을 여지없이 위협하고 있습니다. 일부 부활된 군국주의자들은 령토확장과 국제정쟁의 목적으로 생억지를 부리며 얼기설기 금이 간 지구 지진대에서 미친 듯이 핵실험을 해 지진대에 금이 더 실려 벌어지면서 화산이 폭발하고 지진을 끊임없이 일으킬 위험이 날로 커지고 있습니다. 나라마다 군비경쟁과 핵무장, 대량살상 생물, 화학 무기를 암암리에 발전시킨다면 지구의 터전은 날따라 방사능오염과 독성으로 해 살기 힘들게 망가질것입니다. 도시를 메우는 자동차들의 페기와 수풀처럼 일떠선 굴뚝에서 내뿜는 허연 연기로 해 오존층이 파괴되고 태풍과 해일이 대지를 휩쓸고 있습니다. 황사와 연기, 미세먼지는 지구촌의 하늘을 가리울 지경입니다. 이제 멀지 않아 인류는 마스크와 안경을 끼지 않으면 안됩니다. 아니, 무더운 여름에도 방독면구를 쓰고 다니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인류는 끊임없는 욕심을 절제하지 않는다면 스스로 자기멸망의 무덤을 파고 말게 될것입니다.       어떤 나라에서는 스모그 미세먼지와 전쟁선언까지 한 상태입니다. 지구생태환경보호는 전 인류의 생존을 위한 급선무이며 중대한 공정으로 부상했습니다. 이 중대한 공정과 황홀한 꿈은 작가인 저를 부르고 있습니다. 저는 이 막연한 꿈을 향해 무조건 죽을둥살둥 모르고 달려갈 것입니다. 화산이 폭발하고 지진이 일어나고 해일이 덮쳐와도 나의 괴상한 꿈을 향해 달려갈 것입니다.       "야망의 바다"와 "욕망의 천지" 작중 인물들인 클론바우와 조왕돌, 뱀왕과 금붕어, 금별 대통령과 무빈총사령관이여, 그대들이 지구생태환경보위전에 바친 피의 노력은 헛되지 않으리라!       격변기에 처한 오늘 국내외 출판업계의 부진으로 작품집을 내기 힘든 살벌한 현실에, 출판문화환경이 어려운 현실, 그 참혹한 현실의 거미줄에 얽매이지 않고 저는 독특한 랑만적인 예술수법으로 자유분방한 상상의 나래를 펼쳐 더 엉뚱하고 괴상한 생태환경보호를 중심으로 한 과학환상소설을 써낼 것입니다. 지구촌의 운명에 통탄해  쓴 장편과학환상소설 "황천의 유령"이 곧 세상에 경종의 고고성을 울릴 것입니다. 3부작으로 된 대장편과학환상소설이 세상에 태여날 것입니다. 작      저는 작가의 사명감과 의무감으로 우리 민족과 나라, 지구촌의 번영과 발전을 위해  세속에 구애되지 않는 자유분방한 창작의 필을 끊임없이 날려 중화 민족의 위대한 부흥의 황홀한 꿈을 실현하는데 자그마한 보탬이라도 되는 문학작품을 써내겠습니다. 그것이 나의 필생의 정력을 대가로 하는 신성한 꿈이며 중화 민족의 위대한 부흥의 꿈 속의 하나로 될 것입니다.     여러분 기대해주십시오!     감사합니다.             2014년 3월 21일       주: 2014년 3월 21일 연길시 헤영식당에서 연변아동문학연구회 주최로 열린 웰빙아동문학상 시상식에서 나는 웰빙아동문학상 금상을 타는 영광을 받아안았습니다. 이 수상소감은 그날 시상식에서 말하려던 수상소감입니다. 그날 시상식 주최측에서 수상소감발표를 루락했기에 대신 여기에 올려 네티즌 독자들에게 조용히 전하려고 할뿐입니다.           - 김장혁         2014년 3월 21일 밤중        
1    청춘의 고백- 김장혁 댓글:  조회:1786  추천:8  2012-11-19
청춘의 고백 김장혁   나는 아무리 섹시한 미스라고 해도 더는 사귀고싶지 않다. 만남의 기쁨과 즐거움끝에 언젠가는 눈물어린 리별의 슬픔과 아픔을 맛보아야 하기때문이다.   어제날 우리는 네가 제일 좋아하는 해물관에 가서 골뱅이살도 이쑤시개로 뽁뽁 뽑아 먹으면서 생글방글 싱글방글 즐겼다. 바알간 포도술잔을 댕 마주치며 가는 눈웃음을 짓는 너의 예쁜 모습을 보면서 나는 마냥 흥겨웠다. 우리는 찜질방에서 시원히 목욕도 하고 적외선체험실에서 땀을 흘리며 자지러진 쟈즈곡에 맞춰 처녀총각들과 함께 미칠듯이 디스코를 추었지. 서늘한 찜질방의 구들에 나란히 누워 소설같은 인생살이도 이야기하고 세상 못하는 말이 없이 밤새도록 이야기꽃을 피웠다. 우리는 이상야릇한 감정에 폭빠져 다방의 희미한 불빛아래에, 공원의 드높은 밤하늘에 격조높은 사랑의 서정시를 쓰고 또 썼다.   너는 나를 보고 한번쯤은 취하는 모습을 보고싶다고 하였댔지. 그러나 나는 영원히 너의 스승이라는것을 지켰다. 그건 아주 힘들게 지킨 영예이다. 또 너의 순결한 마음과 그 옛날의 수양있는 녀학생의 섹시한 모습을 지켜주었고 한 남자의 색시, 한 딸애의 위대한 조선족어머니라는 숭고한 명예와 위신을 지켜주었다. 너는 나를 미워하였을수도 있다. 나도 몰라, 너는 정한 나를 존경하고 따랐을수도 있는데 나는 너를 순결하지 못한 마음으로 대한것이나 아닌지?   네가 나와 더불어 이 밤을 새우고싶다고 조용히 속삭일 때 혹시 나를 스승이 아니라 남자로 보지나 않았는지? 나는 네가 의연히 옛날 빨간 골덴옷을 입고 글을 지어가지고 찾아오던 그때의 그 천진한 소녀로만 보였다. 너의 처녀작수필이 발표되였을 때 우리는 애들처럼 입이 합박만해 기뻐 어쩔줄 몰라하였다. 그러나 나는 점차 네가 예쁜 녀자로, 섹시한 미스로 보일 때도 있었다. 그러는 내가 미웠고 불쌍하였다. 어데 녀자가 없어서 자기 옛 학생을 그러는가고 자기를 책망하기도 하였다. 그러는 내가 두려웠고 스스로 도리머리질을 하면서 “그러면 안되지.” 하고 중얼거리였다. 그러나 아무리 마음을 죽이려고 하여도 마음이 흔들리는것을 어찌할수 없었다. 그런 나를 욕하지 말아달라. 점차 네가 옛 학생이라기보다도 아주 가까운 녀자친구로 보였고 지어 애인을 하면 어떨가고 망연하게 생각하기도 하였다.   네가 다른 남자와 핸드폰으로 친절히 대화하는것을 보아도 속이 별스럽더라. 마치 네가 내 색시거나 애인이기나 한듯이 다른 남자와 노는것이 축나는것처럼 좋지 않더라. 그러나 네가 모든 사내친구들의 요청도 다 뿌리치고 나와 친구들이 노는 노래방에 찾아와서 밤새껏 나와 함께 춤을 추고 노래부를 때 나는 사춘기소년으로 된 나를 볼고 깜짝 놀랐다.   해물관의 유리창문옆에 너와 마주앉아 빨간 포도주를 마실 때 나는 너를 흐리마리하게 애인으로 착각하기도 하였다. 얼마나 엉뚱하였니? 예쁘고 섹시한 너를 마주 바라보며 음미하면서 한수 또 한수의 사랑의 노래를 엮는것이 아주 유쾌하였다. 참 우습지? 사내들의 마음이란 왜 이래? 산꼭대기에 부어놓은 물과 같이 산산이 부서져 산기슭으로 내달리다가도 어는 때인가는 부서지고 흩어졌던 마음이 한곬으로 흘러 강을 이루고 나중에 저수지로 되고 바다로 흘러들어가는것이지.     네가 내팔을 정겹게 끼고 귀가 간지럽게 어깨너머 파도치는 머리카락을 흩날리면서 네온등이 반짝이는 정다운 밤거리를 거닐 때, 시내 제일 동쪽으로부터 서쪽끝까지 택시도 타지 않고 걸어가면서 웃고 떠들 때, 난 어쩐지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남자였지. 나는 청춘을 되찾은듯이 더운 피가 온몸에서 끓어번지는것을 어찌할수 없었다.   예쁜 미스 화야, 넌 정말 기막히게 귀여운 미스야. 네가 그 쌍까풀깜장눈으로 나를 정겹게 마주 바라보면서 생글 웃을 때, “선생님”, “우리 선생님” 하고 애교섞인 어조로 나를 부를 때, 나를 마주하고 포도술잔을 마주치고 빨간 립스틱이 진한 작은 입으로 굽을 낸후 깔깔 웃어대며 못하는 말이 없을 때 나는 온 몸의 세포가 흥분에 떠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너도 알았지? 난 그렇게 훌륭한 아들을 두었건만 딸비위를 얼마나 하였더냐? 그런 나를 동정하던 너를 고맙다고 하여야 할가? 어찌면 좋을가? 내가 이런 엉뚱한 질문을 건네던거 기억나느냐? 넌 만약 너를 너무너무 사랑하는 어떤 남자와 재혼하게 되면 딸애 하나 낳아줄수 있는가? 그때 넌 나를 빤히 쳐다보면서 들었던 포도술잔을 내려놓고 한동안 놀란 표정을 지었더랬지. 나중에 너는 생글 웃으면서 뭐라고 하였더냐?   “감정이 깊어지고 행복하면 딸 하나겠어요? 아들까지 하나 척 낳아줄수도 있지요.”   그 말에 나는 전률하였다. 네가 두렵고 부풀어오르는 내 마음이 두려워지더라. 너를 자주 만날수록 네앞에서 엉뚱한 꿈도 많아지고 말이 빨라지고 많아지고 혈액순환이 숨이 바쁘게 빨라지고 옴몸이 해나른해지는 감을 느꼈다. 나는 너와 나를 이길것 같지 못하였다. 너의 매력에 취해 너를 멍하니 마주 바라볼 때가 많아졌고 언젠가는 네앞에 맥없이 쓰러질것 같더라. 나는 너를 깊이 사랑하고있다는것을 온 몸과 마음으로 느꼈다. 지어 너를 마구 애인으로, 후처로 만들고도 싶어졌다. 그러는 내가 스스로 참 두려웠다.   하기에 나는 너를 떠냐야만 하였다. 만나고싶어질수록 너를 기어이 떠나야만 하였다. 너를 내 사람으로 만들지 못할바에야 엉뚱한 마음을 혹독하게 죽이고 또 죽여야 하였다. 마치 콩물이 부글부글 끓어 가마를 넘치려고 할 때면 찬물을 끼얹듯이 말이다. 아니, 콩물이 끓지 못하게 불을 때지도 말고 물을 쳐서 불을 죽여버려야 하였다. 계속 그대로 끓어번지면 너와 내가 언제든지 마음을 크게 다칠것만 같았다. 만나고싶어도 만나지 않는것은 갈라지기 아쉬워서였다. 혹독한 리별의 아픔을 받아당할것 같지 않아서였다.   그런 독한 마음을 먹은 나를 너는 몰랐다. 기분이 엉망이 되여 마지막으로 너의 다방을 쓸쓸하고 무거운 심정으로 떠나는 나를 보고 너는 어째 선생님은 기분이 썩 좋지 않은것 같다고 하면서 자기가 잘못한 일이 있잖는가고 물었다. 그래, 화야, 누군들 만나기만 하면 좋고 갈라지기만 하면 아쉬운 녀자를 떠나야만 할 때 기분이 좋겠느냐? 나는 그런 리별의 아픔이 싫어서 다시는 너를 포함한 미스들을 만나지도 사귀려고도 하지 않는다. 차라리 내 홀로 외롭게 실련같은 쓸쓸하고 비참한 기분을 안고 한숨속에서 살더라도 너같은 미스들에게 리별의 눈물을 흘리게 하고싶지 않다. 미스들에게 환상으로 가슴이 부풀게 하고싶지 않고 환락뒤에 외로움의 심연속에 몰아놓고 살짝 빠져나오기 싫었다. 나는 “빠이빠이!”라는 말을 제일 듣기 싫어한다. 그만큼 리별이 싫고 마음이 아프기때문이리라.   아, 리별이란 이다지도 마음이 아픈줄을 몰랐다. 리별의 아픔을 해소하려고 너의 약속대로 택시를 타고 항상 만나던 다방앞에까지 달려갔다가도 , 택시문고리에 식지를 걸고 열려고 하다가도 마음을 죽이고 그대로 되돌아오군 하였다. 너는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고 전화로 나무랐지만 나는 만나고싶어도 만나서는 안되였다. 너의 그 정답고 부드러운 전화마저 받지 않으려고 전화번호마저 바꿔버렸다. 그럴수록 이전에 너를 수수한 음식점에 끌고 다니면서 잘 챙겨주지 못한것이 못내 후회된다.   자주 만나도 싫어지는 사람이 있지만 한평생 다시 만나지 않아도 잊지 못할 미스가 있지 않는가! 너를 오래동안 만나지 않았지만 내 마음속에 항상 날씬하고 예쁘고 섹시하고 수양있고 활발한 미스 네가 있는것으로 하여 마냥 즐겁고 기쁘다. 너와 함께 엮은 아름다운 추억의 멜로디를 고독하게 홀로 감상하면서 추억속에 잠겨 사는것이 행복하고 즐겁기만 하다. 그것이 아름다운 사랑에 대한 갈망과 망상으로 엮은 비극적인 사랑의 멜로디라고 하여도 우리의 비할바없이 순결하고 아름다운 서정시라는데서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없이 떳떳하고 한가슴 뿌듯하다.   미스 화야, 너에게 혹독하고 비참한 리별의 아픔을 준 이 못난 스승을 용서해달라. 이 못난 스승을 외로운 심연속에 그냥 놔달라. 래세가 있다면 근사한 해물관에 예쁘고 섹시한 너를 데리고 가서 빨간 포도술을 마시자. 세속에서 벗어나 랑만적으로 사랑도 해보자. 이것이 네가 그렇게 따르던 못난 스승의 마음아픈 고별인사이고 한동안 너로 하여 청춘의 꿈으로 가슴이 부풀었던 나의 페부속에서 우러나오는 고백이다.   아, 좋아하면서도 혹독하게 정을 떼야 하고 만나고싶어도 만나지 말아야 하는 마음의 아픔이 오죽하랴. 그리워도 그리지 말아야 하고 사랑하면서도 사랑해서는 안되는 그 지독한 내 마음의 고통을 그 누가 알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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