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 창작 후기
반만년의 핏줄을 이어온 우리 조선민족은 찬란한 력사와 문화가 있다. 우리 조선족은 지난 세기 초 일제의 핍박에 못이겨 정든 고향을 떠나 쪽박 차고 두만강과 압록강을 넘어 중국 동북지역에 들어왔다. 우리 조선족들이 이 땅에 첫 괭이를 박아서부터 해를 지고 나가 달을 지고 돌아오면서 황무지를 개간했고 이 땅을 보호하기 위해 형제민족들과 함께 목숨걸고 피어린 항일투쟁을 하였다. 한반도와 만주에는 홍범도, 김좌진, 안중근 등 항일 장군령들과 항일투사들의 혼이 살아숨쉬고 있다. 우리 조선족들은 당의 현명한 민족정책 아래 이 땅에 두번째 고향을 건설하였으며 연변조선족자치주를 일떠세우고 나라의 주인이 된 행복한 생활을 하고 있다.
나는 대학시절에 리기영의 장편소설 "두만강"을 읽은 후 지난 세기 초부터 말기까지 아우르는 조선족 백년 력사 한페지를 보여준 장편소설을 써서 조선족 조상들에게 자그마한 기념비라도 세워주고 싶은 강한 충동을 받았다. 파란곡절 끝에 나는 평생 정력을 다해 끝내 350여만자, 총 7권으로 된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을 써냈다.
나의 평생 정력이 깃든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이 대한민국 교문사 이완표 회장님과 편집선생님들의 지성어린 사랑에 의해 세상에 고고성을 올리고 조글로에 련재한 후 국내외에서 반향이 아주 컸다. 선후하여 한국의 네이버, 다음, 중국의 조글로와 모이자에 출간소식과 함께 련재되여 수많은 국내외 네티즌들이 열람하였다. 요즘엔 위챗-온로인세상이라 숱한 애독자들이 나의 소설을 보고 감상이나 따끔한 지적도 해주고 있다. 이는 중국 조선민족에게 자그마한 기념비라도 세우려고 외로운 문학사막에서 마라톤에 나선 나에게는 더 없는 위안과 고무가 아닐 수 없다. 이 대하소설의 창작과 출판을 지지해준 한국 교문사, 국내외 수많은 유지인사들, 그리고 이 대하소설을 열람한 독자, 네티즌들께 충심으로 되는 경의를 드린다. 또 이 대하소설에 흠집이 있다면 드넓은 민족심으로 널리 량해할 것을 바란다.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 창작과 출판과정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은 내 평생에 걸쳐 쓴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시골마을에서 태여나 고중을 졸업한 후 소 궁둥이를 치는 목동도 해 보았으며 농사일이란 농사일은 가리지 않고 다 해보았다. 교원, 기자, 택시 업주도 해보았으며 종합간행물 주필과 광고 사업도 해보았다. 물론 자주 일터를 바꾸다나니 항상 모든 것을 령으로부터 시작해야 했기에 힘들었다. 그러나 나는 여러가지 사업을 하면서 문학창작을 위해 우리 민족의 피눈물나는 력사와 사회 생활을 널리 료해하고 체험할 수 있은 기회를 가진 것을 다행으로 생각한다. 내 한생에 시내 주급 간부의 귀공주로, 국장의 셋째딸로, 부총편의 막내딸로 38명이나 되는 부동한 신분의 처녀들도 수두룩이 만나 련애도 많이 해보았다. 부주장의 귀공주와 결혼했더라면 내 인생이 그렇게 고달프진 않았으리라. 하지만 나는 시내 으리으리한 고위급간부네 고중졸업생처녀한테 장가들고 싶지 않았다. 더구나 자기 리상의 돛을 부주장이나 국장네 딸의 치마폭에 매달고 싶지 않았다. 나는 자기 지식과 노력으로 문화단위에 들어가 문학창작을 하고 작가의 꿈을 실현하고 싶었다. 자기 노력으로 오늘 정교수급 편심으로 된 것만 해도 나는 만족이다. 아마 여러가지 사회 생활을 풍부히 체험했고 부동한 신분의 수많은 사람들을 료해했기에 사실주의 창작방법으로 대하소설 속의 다양한 성격을 가진 인물들을 비교적 핍진하게 그려낼 수 있지 않았겠는가고 생각한다.
대학시절에 나는 문화대혁명시기(10년동란시기) 중학생들의 비참한 학습과 로동 생활을 보여준 장편소설 "려명의 전야"를 썼다. 허룡구 교수와 최문식 선생은 읽어보고 좋은 정평을 냈다. 룡정에서 교편을 잡을 때 나는 하루 강아지 범 무서운줄 모른다고 단통 “장백산 천지”라는 4권으로 된 대장편소설을 쓰려고 달려들었다. 엉뚱한 창작계획을 들은 김재권 관장과 리태수선생님은 희죽이 웃으면서 “장편부터 써서 성공한 작가도 있다.”고 하면서 나의 “엉뚱한 창작계획”을 지지해주었다. 힘을 얻은 나는 2권까지 50여만자를 썼다가 필을 접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때 두부모만한 단편소설도 발표가망이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대장편을 발표하겠는가고 저울질하다가 결국 자기절로 주저않고 말았던 것이다. 지금 보는 대하소설 "울고 웃은 고향"은 그때 쓴 것이였는데 지금 읽어봐도 젊은 시절에 쓴 대목이 더 형상적이고 환경과 인물 묘샤도 생동하고 재미 있다고 본다. 그때 필을 놓은 것이 자못 후회된다. 당시나 지금도 확실히 일부 편집들은 저자의 문단서렬이나 창작성과를 저울질하면서 작품을 편집하는 페단이 있다. 때문에 단편소설도 몇편 발표하지 못한 초보인 내가 숱한 중견작가들을 놔두고 장편을 발표한다는 것은 실로 하늘의 별따기처럼 어려웠던 것은 사실이였다.
나는 방송국과 출판사에 전근한 후 창작환경은 좋아졌만 스스로 당시 편집계통의 페단에 위축돼 문단서렬만 따지고 출판가능성을 저울질 하면서 대하소설을 계속 창작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원 창작계획대로 써놓아도 몇백만자에 달하는 대하소설을 국내에서 내자면 엄청 많은 출판자금이 수요됐고 국내에서의 출판여부도 미지수였다. 또 대하소설을 낼만한 넓은 흉금과 부담을 가질만한 책내는 곳도 별로 보이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결국 개혁개방과 한국 출판업계가 나의 대하소설 창작을 고무해주었고 용기를 주었고 대하소설 출판을 성공하게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때에도 김재권 선생이 자주 찾아와 대하소설 창작을 독촉했다.
"문단서렬과 출판가능성을 저울질해서야 언제 대작을 써내겠소? 우둔한게 범을 잡는다고 대담히 대작을 계속 쓰오. 문단서렬을 타파하고 우리 문단에 ‘원자탄'을 터뜨리고 '위성'을 쏘아올리지 못하겠소?"
여러 선생님들과 조남기 장군, 그리고 조룡호, 김영만 등 중국 조선족 로지도자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나는 민족의 사명감과 의무감으로 필승의 신념을 안고 또다시 글감옥 적막강산에, 사막에 들어가 필을 들고 마라톤창작을 견지했다. 문학창작이란 실로 뼈를 깎아내는 작업이었다. 나는 항상 손바닥만한 노트를 호주머니에 넣어가지고 다니다가도 령감이 떠오르면 노트에 간단히 적어놓군 하고 집에 돌아와 컴퓨터에 마주 앉아 소설 한대목으로 엮어나갔다. 출장가도 나는 원고지거나 노트북을 가지고 다니면서 소설창작을 멈추지 않았다. 한번은 인청공항에서 도정신해 글을 쓰다다니 항공편을 놓칠번한 적도 있다. 나는 밤중이고 새벽이고 출근시간 전이고 날마다 엉덩이가 배기게 소설창작을 멈추지 않았다. 한번은 소설을 쓰다가 출근시간이 돼 그만 짝짝 신을 신고 단위에 출근해 동료들을 웃긴 적도 있다. 또 한번은 시계를 들여다보면서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쓰고 하다나니 시계가 잔줄도 몰라 그만 대학교 동창생네 손자 돌생일잔치가 끝난 뒤에야 달려가는 실수도 했다. 토요일과 일요일은 내 문학창작을 하는 황금시기였다. 토요일과 일요일에 친구나 무슨 행사가 있는 것이 딱 질색이였다. 내 창작시간을 잡아가기 때문이었다. 날마다 종합잡지 편집을 하고나서 퇴근해서도 몇시간씩(토요일과 일요일엔 10여시간씩) 컴퓨터에 맞우 앉아 책 보고 글을 쓰다나니 체중이 90킬로그람으로 올라가도 혈당, 혈압이 올라갔다. 심지어 너무 피곤해 단위 식당에서 동료들 앞에서 밥 먹다가 코피를 한사발씩이나 흘린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눈도 너무 피곤해 피지다 못해 고기가 동공 부근에까지 뒤덮여 눈 수술을 두번이나 했다. 수술칼이 내 눈으로 들어올 때 그 공포도 감내하면서도 필을 멈추지 못했다. 민족과 조상들에게 진 빚을 갚아야 했다. 밤중까지 몰입해 소설을 쓰다가 곤해 잠즐면 꿈에서도 항일투사들과 작중 주인공들이 무시로 나타나 일본 놈들과 싸우지 않겠는가. 심지어 그들이 나와 웃고 떠들며 대화를 나누는 목소리마저 귀에서 들리는듯 하였다. 그러면 와닥닥 깨나선 소설을 구상하고나서 슬그머니 일어나 안해를 깨울세라 컴퓨터를 가지고 주방에 가서 대목을 가지고 건판을 두드리군 하였다. 나는 사명감과 의무감은 나를 장장 20여년 동안 글감방에 갇혀 문학창작에 몰두하게 하였다. 이렇게 간고하게 글감방에서 자아와 싸우면서 나는 끝내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을 창작해냈다. 최초에는 4권으로 된 대장편을 창작하려고 했고 제목도 “백두산 천지”라고 달았었다. 후에 출판사에 온 후 어벌이 커져서 제목을 “울고 웃는 고향”으로 고치고 400여만자 써서 소설을 12권으로 묶어내려고 했다. 그러나 자금도 문제고 너무 덩치 커서 국내는 물론 국외에서도 출판하기 어려운 형편이고 각 력사시기 내용의 균형을 유지해야 했다. 그리하여 현시대 사랑과 련애, 혼인, 가정 제재는 두번째 대하소설 "진달래소야곡"에 넣기로 마음을 고쳐 먹고 300여만자, 7권으로 끝냈다.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의 출판도 진짜 사막에서 마라톤을 하는 계속이라고 할 수 있었다. 우리 민족의 이민사를 다룬 대하소설을 국내에서 출판했으면 얼마나 좋았으랴. 허나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문단에서 대하소설을 낼만큼한 서렬의 작가가 아니었다. 또 이미 나의 저서를 여러권 내준 사랑하는 국내 출판사에, 힘겹게 운영해나가는 국내 출판사에 막대한 경제적부담을 지게 하기도 미안한 일이였다. 이런 저런 원인으로 하여 부득불 이 대하소설을 한국에서 출판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 얼마나 많은, 전도 창창한 작가들이 사막에서 달리다가 우물을 지키는 관문 문지기들의 편견과 시기, 유기로 해 중도에서 사막의 모래바람에 매몰되였던가.
사막에서 누가 물을 주려니 하고 더는 기다릴 수 없었다. 물 한방울 없는 사막에서 마라톤을 하려면 자기 절로 우물을 파야 했다. 샘물을 찾지 못하면 락타처럼 자기 몸의 물이라도 피눈물과 함께 삼키면서라도 계속 앞으로 달려야 했다.
그런데 최초에 처자들은 애나게 택시업을 해서 번 숱한 돈을 밀어넣으면서 저서를 내는 것을 반대했다. 문학의 중요성을 잘 모르는 처자들의 태도에 안타까웠다. 몇몇 녀성문우들과 “그대가 만약 내 안해라고 할 때 돈을 내고 저서를 내는 것을 동의할 수 있겠는가”라고 자문했다. 그러자 녀류 작가, 시인들도 “집 한채를 쓸어넣고 저서를 내는 건 동의할 것 같잖아요. 돈을 내지 않고 신문이나 잡지 그리고 인터넷이나 위쳇에 얼마든지 작품을 낼 수 있는데요. 왜 하필 돈을 내고 작품을 내야 하는가요?”라고 했다. 심지어 일부 친구들은 바보 짓을 하지 말라고 충고했다. 물론 인터넷 시대에 친구들의 말에도 도리가 있었다. 그러나 어찌 사이버문학과 전통문학을 혼돈해 비할 수 있단 말인가. 그렇고 보면 내 처자를 나무랄 일도 아니였다. 나는 친구들과 처자들의 고마운 충고를 뒤로 하고 그예 가람을 건넜고 그런 "바보"로 달갑게 되였다.
나는 “아파트 한채를 더 장만하기보다 우리 민족의 정신기둥을, 기념비를 세우는 것이 더 중요하다. 우리 민족 후손들에게 정신재부를 남겨주는 것이 더 보람차다”고 생각하였다. 나의 설득을 받은 처자들도 더는 반대하지 않고 오히려 한국 출장에 보태라고 꼬깃꼬깃 치워뒀던 한화를 내놓았다. 그래도 과외로 택시업을 한데다가 연변인민방송국과 연변인민출판사 지도부의 지지와 관심아래 다년간 기자와 주필로 사업하면서 광고사업을 겸해 한 덕분에 출판자금을 넉넉히 마련할 수 있었다. 연변인민방송국과 연변인민출판사 지도부에 삼가 감사를 드린다. 국내 사막을 벗어나 한국 사막 마라톤에 당돌하게 나섰지만 그래도 처자들까지 지지해 출판자금이 넉넉히 있어 마음이 든든했다.
40여년 문학창작을 하면서 나는 애나게 택시업과 광고를 해 번 돈을, 진짜 아빠트 한채를 쓸어넣고 문학작품을 22권이나 써냈다. 진짜 물 한 모금 없는 사막에 물을 통채로 부어넣은 격이다. 그러나 나는 절대 후회하지 않는다. 다만 사막에서 힘겹게 마라톤을 하는 조선족마라토너한테 높은 문턱을 지키는 전갈들, 물 한모금도 주지 않고 외면해버린 그랑데들, 송곳이를 사려물고 사막의 우물을 지키는 호랑이들, 흉금이 비좁은 관문 문지기들, 주산알만 딸깍딸깍 튕기며 민족의 정신기둥을 세우는 사업에는 꼬물만치도 관심이 없는 수전노들이 가소롭고 안타깝기만 하다.
나는 이른바 문단서렬이나 출판서렬을 더는 기다릴 수 없었다. 김재권 선생님의 말씀대로 그 문단서렬과 출판서렬을 타파하기 위해 새로 도전하고 싶었다. 김재권 선생님의 기대처럼 문단에 “위성을 쏘아올리고” “원자탄을 꽝 터뜨리고” 싶었다. 우물 안에서 뛰쳐나가 한국 문단으로 진출해 나의 작품을 세상에 널리 알리고 싶었다. 그 강렬한 욕망이, 지하에서 부글거리는 시뻘건 용암이 사막에서 끝내 폭발하였다. 황홀하고 푸른 문학 꿈을 위해서라면 집 한채겠는가? 혁명선렬들은 민족의 독립과 해방을 위해 목숨마저 바쳤는데 아낄 것이 그 무엇인가!
그러나 한국 사막에서 도서출판의 마라톤도 하늘의 별따기처럼 어려웠다.나는 최초에 눈보라를 무릅쓰고 두툼한 원고와 유판을 가지고 한국 파주출판단지에 가서 면목도 모르는 이 출판사 저 출판사를 돌아다니면서 문을 두드리고 들어가 출판을 주문하였다.
한국의 어떤 출판사 사장은 어이없다는듯이 도리머리를 절레절레 저으며 출판을 단마디로 거절했다.
“중국 조선족이민사 소설이 우리 한국과 무슨 관계 있어요? 이리 긴 대하소설을 잘못 냈다가 판매 안되면 우리 출판사 부도나요.”
이전에 내 중단편소설집을 출판한 적이 있는 한 출판사 사장은 꽤나 동정하면서도 의아해했다.
“왜 중국 조선족이민사를 좋은 자기 출판사에서 출판하지 않고 한국에서 출판하려고 해요? 돈도 많이 들고 출판될 가능성도 아주 희박한데요.”
나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당황해났다.
물론 국내 출판사에서 내면 한국에서보다 인맥도 있고 출판환경도 순리여서 쉬울 수도 있었다. 그러나 여지껏 리성권 사장과 김철환 선생 등 지인들의 방조하에 우리 연변인민출판사에서만 해도 국내 조선족문단의 첫 장편과학환상소설로 불리우는 나의 소설 "야망의 바다", 문학작품집 "사랑은 요술쟁이야", 수필집 "리별", 장편실화소설 "38선에서 싸우던 나날에", 장편실화 '인민의 훌륭한 법관 록도유", 장편실화소설 "부르하통하강반 살인악마의 유령" 등 숱한 문학도서를 내주었다. 진짜 문학사막에서 외롭게 달리는 나에게 단비를 뿌려주어 목을 추기고 용기를 얻어 계속 문학작품을 창작하게 여린 등을 밀어주군 하였다. 진짜 한평생 잊지 못할 감사한 일이다. 그러나 나는 우리 출판사에 더 손을 내밀어 엄청 부담을 주면서 신세를 지기도 미안한 일이였다. 그리하여 내가 한국 출판시장이란 사막에 와서 마라톤을 힘겹게 하고 있지 않는가! 나는 기어이 이 한국 사막에서 부딪혀 뒹굴고 쓰러지더라도 한국 문단에서 밝은 해가 쨍하고 뜨는 날을, 모래바람이 불지 않는 푸르른 하늘을 보고 싶었다.
출판자유를 부르짖는 한국에서도 90년대까지도 문학작품에 대한 이데올로기심사제도가 엄했다고 한다. 특히 북방사회주의 프로레타리아 사상경향을 가진 국내 유명작가 작품에 대해서도 출판을 견제(통제)했다고 한다. 또 출판한 후에도 재심사를 하고 작가를 호출해 처분하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물론 지금은 정황이 많이 달라지긴 하였다.) 그러나 아직도 일부 출판사 사장들은 그 이데올로기 영향이 있어 "돈을 엄청 내서 빨갱이들을 선전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하하여 그들은 수고스럽게 내 소설을 다 읽어본 후 내 소설작품을 도끼질하려고 들었다. 중국공산당의 령도아래 토지개혁을 하고 사회주의 혁명과 건설을 한 내용을 보여준 5권부터 7권까지 찍어버리고 항일전쟁시기 유격대 항일투쟁과 조선족이민사를 보여준 1권부터 4권까지만 내자고 한 출판사도 있었다. 그래도 대하소설은 된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작가로서 자존심을 지켰다. 못 내면 못냈지 내 작품을 두동강 낼순 없었다.
한국이라는 랭혹한 출판 사막에서 외롭게 달리는 마라토너의 처참한 모습은 눈물겹기만 했다. 혹시 국내에서 마라톤을 계속 했더라면 한국의 모래바람이 매섭게 이는 사막에서 달리기보다 훨씬 나았을 수도 있지 않았을가. 나는 한국과 국내 사막의 갈림길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고달프게 망설이면서 허덕이게 되였다.
바빠맞은 나는 심양에 있는 절친한테 손을 내밀었다. 그 친구는 중앙번역국과 료녕출판사 조문편집실 주임과 "새마을"잡지 주필도 한 빛나는 경력이 있었고 문단에서 소설가로 두각을 내밀고 있었다. 그는 심양시 경제문화교류유한회사를 차리고 한국과 중국 조선족사회에서도 이름난 출판통 엘리트로서 숱한 도서를 한국과 중국에서 출판하였다. 그는 한국에서 인맥을 통해 여러 출판사에 연줄을 달고 한국 작가들한테도 부탁해 사막에서 퐁퐁 솟는 샘물을 찾아내 나한테 주려고 물심량면으로 아낌없는 노력을 다하였다. 일찍 그는 한국 조정래 작가와도 안면이 있었고 그에게서 선물받은 대하소설 "아리랑"도 나보고 참고하라고 부쳐보내주었다. 후에 나의 대하소설 "진달래 소야곡'도 그 친구가 연줄을 달아 료녕민족출판사에서 출판하게 도와주었다. 몇달 후 그 친구한테서 기쁜 소식이 날아왔다. 한국의 한 출판사에서 몇몇 한국의 저명한 작가들을 보고 나의 소설원고를 심열하게 했는데 작품은 좋은 정평이 나왔고 발행까지 점검했는데 만부매출이 가능해 출판 가능성이 많아졌다고 했다. 그때 나는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그런데 후에 그 한국 모 출판사에서는 중국 조선족이민사를 다룬 대하소설이 한국 독자들을 끌수 있겠는가, 만부 판매되겠는가고 재차 고려하게 되였다. 나의 친구는 만부는 팔릴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랭혹한 한국 도서시장에 우리 조선족이민사를 다룬 대하소설은 발을 붙히기는 힘들었다. 그 한국 출판사 발행일군들의 세밀한 도서시장조사를 거쳐 만부 발행이 불가능하다는 쪽으로 기울어졌다. 한국 출판상들의 머리 속에서 나의 대하소설은 진짜 문학으로가 아니라 상업으로 번져졌다. 비록 소설출판엔 성공하진 못했지만 나는 물심량면으로 내 소설 출판을 진심으로 지원한 친구가 마음 속으로 감사했다. 또 친구를 헛수고시킨 것이 못내 미안했다.
나는 절망에 빠져 한국 출판사막에 홀로 물앉고 말았다. 눈보라는 끝도 보이지 않는 사막의 모래폭풍으로 불어치며 눈과 얼굴, 온몸을 무섭게 때렸다.
(그래 한국의 만여개나 되는 출판사 중에 우리 조선족의 눈물겨운 이민사를 낼만한 출판사가 하나도 없단 말인가? 이 넓은 세상에 드넓은 흉금을 가진 선지선각 유지인사가 없단 말인가?!)
사막에서 절망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 한국의 민족심과 동포애가 깊고 흉금도 드넓은 유지인사들이 신화처럼 나타나 사랑의 손길을 뻗쳤다. 한국 새천년민주당 전임 당대표 서영훈 어르신님, 한국 이웃사랑협회 이정호 회장님과 한국 경기도교육삼락회 채순목 회장님 등 유지인사들은 이 대하소설출판을 위해 나섰다. 이정호 회장과 당뇨병합병증으로 병환에 계신 채순목 회장님은 몸소 나를 데리고 수원시에 있는 교문사 이완표 회장님 사무실을 찾아가 민족심으로 이 대하소설을 내줄 것을 간청했다. 이완표 회장님은 시간을 짜내 내 대하소설을 몽땅 깐깐히 읽어보고 나서 나의 “하늘을 찌르는 민족애와 불굴의 창작정신에 감동됐다”면서 이 대하소설을 출판하기로 결정하였다. 교문사의 출판속도는 국내에서는 상상조차 어렵게 놀라울 정도로 쾌속적이였다. 편집선생님들은 반년도 완돼 편집과 인쇄까지 끝냈다. 이완표 회장님께서 대하소설이 출판됐다는 기쁜 소식을 듣고 나는 꿈인가, 생시인가, 얼마나 기뻤는지 몰랐다.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의 력사반영 예술수법
나는 우리 조선족의 백년력사를 보여준 장편소설을 쓰려고 리기영의 "두만강", 천세봉의 "고난의 세월", 조경래의 "아리랑"과 "태백산맥", 박경리의 "토지", 리근전의 "고난의 년대", 라관중의 "삼국연의", 시내암의 "수호전" 등 수많은 력사소설을 열독하고 이런 력사소설에서 력사반영의 예술특징을 연구하고 학습하였다. 나는 이 소설을 창작할 때 사회주의 사실주의 창작원칙을 위주로 국내외 작가들의 력사반영의 예술수법을 답습해 력사진실과 예술의 진실을 구현하면서 지난 세기부터 본세기 초 격변기에 이르는 조선족의 백년 력사를 보여주려고 시도하였다.
어떤 문학평론가들은 나의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은 력사반영의 예술수법상 리기영의 "두만강"과 비습한 감이 난다고 했다. 사실 력사반영의 예술수법은 리기영의 "두만강"을 읽으면서 많이 답습했다. 일찍 대학시절에 몇번이고 "두만강"을 읽었고 졸업론문도 "리기영의 '두만강'에서 력사반영의 예술특징'을 썼다. 하문섭교수는 나의 론문을 보고 "일정한 연구 성과가 보인다."고 고무해주었다. 재직기간에는 리근전의 " '고난의 년대'에서 력사반영의 예술특징"이란 론문도 써서 "문화시대"에 발표하였다. 나는 확실히 리기영과 리근전의 소설에서 력사반영의 예술수법을 많이 참고해 이 소설 창작을 했다.
나는 우선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에서 전형형상창조수법으로 특정된 지난 세기 초부터 말까지 이르는 기나긴 력사시기 전형환경에서의 주인공 병완, 상순, 덕돌을 비롯해 부동한 력사시기 각계 각층 수많은 전형인물을 창조해 조선족의 백년 력사시기를 보여주려고 시도했다.
전형자연환경도 중국 만주에 국한 시키지 않고 조선반도와 동북을 아울러 배경으 조선 함경북도 명천군 영월동과 중국 동만 영월동을 축도로 설정했다.
조선 북부 명천군 영월동은 우시장이라는 허구된 곳으로 설정하고 당시 일제 철발굽에서 신음하는 조선반도, 그에 반항하는 항일의병들의 의거활동, 핍박에 의해 정든 고향을 떠나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 만주에 들어온 대이주 축도를 보여주려고 시도하였다. 중국 조선족들의 력사에서 조선에서 중국에 이주해 들어오게 된 계기, 력사를 빼놓을 수 없었다.
영월동에 이어 중국 동만의 축도로 함흥촌을 설정했다. 함흥촌은 당시 중국 조선족들이 처한 삶의 자연환경의 축도였다. 함흥촌에서 김병완, 김상순을 비롯한 조선족들이 항일투쟁, 당지 지주들과의 투쟁, 국민당 토비들과의 전투, 토지개혁, 인민공사, 대약진, 반우파투쟁, "문화대혁명", 개혁개방 격변기 등 력사사건을 겪는다.
항일투쟁의 전형자연환경은 민족의 성산 장백산 밀림을 중심으로 한 함흥촌으로, 항미원조 전쟁의 전형환경은 무명고지로 설정했다.
인물이 처한 환경 설정과 활동경력도 력사반영의 수요에 의해 설정해놓았다.
례하면, 항일전쟁과 6.25 한반도 동족상잔전쟁을 보여주기 위해 제1권에서 미리 이남 경주 출신 김용천을 이북 명천군에 와서 항일활동하는 복선을 미리 쳐놓았다.
항일전쟁시기 김용천은 김성칠, 사촌동생 칠백 등을 이끌어 조선반도에서부터 어깨겯고 일제들과 싸웠고 두만강을 건너 장백산 밀림 숙영지에 전이한 후 일본놈들을 눈함정에 유인해 빠지게 하며 매복습격해 첩보를 올린다. 그들은 일본 놈들의 포위를 구사일생으로 뚫고 나오는 피눈물겹고 처절한 항일투쟁사를 엮는다. 그러나 항미원조 전쟁 시기 무명고지에서 전우들인 김용천은 남조선괴뢰군을 이끌고 조선인민군 련대장 김성칠이 이끈 조선인민군과 총칼을 맞대고 결사전을 벌린다. 김용천은 사촌동생 권칠백과 총칼을 맞대고 육박전을 벌리면서 서로 옆구리를 찌른다. 전쟁은 무정했다. 용천은 사촌동생마저 죽이고 만다. 또 뒤이어 무명고지에서 항일전쟁시기 전우 김성칠을 격살한다. 동족상전의 전쟁은 전우와 동생도 살해하게 하였다.
항미원조전쟁시기 남조선특무를 나포하는 전투에서도 주인공 병완은 상순과 함께 대의멸친해 친처남의 손자, 남조선 특무 이병수를 나포한다. 주인공 병완의 대공무사하고 대의멸친하는 형상을 부각하기 위해 제1권에서 벌써 병완의 처남이 아들 이명호(이병수의 아버지)를 데리고 고향 충청도 서천군에서 명천 영월동 병완의 집에 놀러 오는 복선을 쳐놓았었다. 또 후에 항미원조시기 상순이 충청도 서천군 따발령에서의 격전을 보여주기 위해 이병수의 아버지 명호와 상순이 함께 뛰노는 장면을 미리 복선으로 쳐놓았다. 이밖에도 소설에서는 이남출신 중국인민지원군 반장 리흥수와 남조선 괴뢰군 영장 동생이 따발령 격전에서 극적으로 날창을 맞잡고 적대적으로 싸우면서 만나게 되는 장면, 상봉 몇시간도 못돼 동생의 죽음을 맞이한 흥수의 비극도 예술적으로 그려넣었다.
이처럼 인물형상 부각과 력사반영을 하기 위해 모든 인물과 자연환경을 미리 설정하고 복선을 쳐놓기도 했다. 나는 이렇게 전형환경에서의 개성이 독특한 인물들의 갈등과 행동로선을 통해 동족상잔의 참혹한 전쟁을 보여주고 평화란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여운으로 남겨주려고 시도했다. 같은 전쟁제재 소설이라도 작가의 창작의도가 다름에 따라 전쟁도 다르게 묘사되기 마련이다. 나는 항미원조전쟁도 단지 치렬한 전투를 렵기적으로 보여주려고 필묵을 들이지 않았고 전투를 통해 동족상잔의 참혹성을 보여주고 평화를 극구 선양하는데 필묵과 예술기교를 아끼지 않았다.
성칠은 수하들이 잡아온 혀가 바로 어머니가 생전에 그렇게 외우던 친정오빠네 손자, 자기 5촌조카 이병수라는 것을 알게 된다. 또 이병수를 통해 무명고지 상대편 괴뢰군부대는 몇년동안 그렇게 찾던 전우 김용천의 련대라는 것도 안다. 용천은 또 무명고지격전에서 확성기로 대화해 진달래가 성칠한테 재가해 애까지 낳았다는 것을 알고 결투를 벌리듯 무명고지를 쳐서 원쑤(사랑라이벌) 성칠을 참살한다. 이 대목을 읽으면 독자들은 전쟁은 항전시기 전우끼리도 서로 참살하게 한 장본인이라는 것을 느끼게 되며 또 전쟁의 참혹성과 분단의 아픔, 평화의 소중함을 깊이 느끼게 될 것이다.
이 대하소설을 창작하면서 주인공 설정에서도 부딪친 난제도 있었다. 대하소설이라면 보통 한 주인공으로 한시기 력사시기를 보여주어야 한다는 틀이 있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나는 리기영의 "두만강", 리근전의 "고난의 년대" 등 소설에서 앞세대 주인공을 뒤세대가 이어받았다는 것을 보고 그 답안을 찾아냈다.
리근전의 장편소설 "고난의 년대"에서는 늙은 세대 주인공으로 박천수를 설정하였다. 작자는 이상의 늙은세대 인물형상을 통해 주요하게 19세기말부터 20세기 10년대말의 력사와 그제반특성 및 각 계층 특성들을 반영하였다.
다음, 소설에서 이런 늙은세대에 의해 보여준 미적리상과 인민투쟁력사의 계승자로서 슬기롭고 용감하며 심중하고 강직한 당원 박윤민을 개성적으로 부각하면서 부정인물 오창수, 오창덕 및 일제놈들과의 갈등과 투쟁을 통해 1919년 5.4운동이후로부터 1945년 8.15해방이전 력사시기 당의 령도아래 조한 형제민족 인민들이 단결하여 진행한 반제, 반봉건 투쟁력사를 예술적으로 반영하였다.
작품 결말에 제3세대 인물인 귀섭이 형상을 등장시킴으로써 조선족인민들의 투쟁력사는 계속됨을 암시해주고있다.
이런 3세대에 걸친 수많은 인물형상체계의 중심에는 박천수와 박윤민이 련이어 서서 끌고나가고있으며 이들과 기타 인물들의 혈연적, 사회적, 계급적 련결과 갈등속에서 인물성격을 발전시키고 해당 시기 력사를 예술적으로 반영하고있다. 때문에 매개 력사사건은 동떨어진감이 없이 련결되여 독자들로 하여금 형상적이고도 체계적으로 매 시기 력사정형을 리해하게 하였다.
나는 리기영 작가와 리근전 작가가 3세대 주인공을 설정해 부동한 력사시기글 보여준 력사반영의 예술수법을 답습하여 대담히 주인공을 병완으로부터 상순, 나중엔 덕돌이 대를 이이받는 새로운 기법으로 대담히 력사소설을 창작하였다.
작중 주인공 병완은 지난세기 이주민족인 중국 조선족을 대표하는 보통공산당원의 형상이다.
병완은 개성도 독특한 인물이다. 나는 병완을 순박한 농민으로만 부각한 것이 아니다. 소설 제1권을 펼쳐들면 병완은 림꺾정 비슷한 인물로 부각한 것을 볼 수 있다. 목수 출신인 병완은 목수재간이 있을뿐만 아니라 힘도 엄청 세고 이름난 씨름군으로 소문났다. 한길수의 집을 지을 때 넷이 목도를 해 메기 힘들어하는 주추돌을 혼자 둘러메다가 쿵 놓는다. 또 씨름재간도 있어 한길수를 몇번이고 둘러메치고 집에 찾아온 한길성을 창문 밖으로 내동댕이친다.
병완은 힘장수일뿐만 아니라 슬기로운 일면도 있었다. 그는 통나무에 벌레를 집어넣고 땜질해 놓아 벌레가 통나무를 파먹게 해 경찰국 청사와 다리가 몽땅 무너지게 한다.
병완은 강직한 성격의 소유자이다. 끼무라 국장이 그를 얼리도 닥쳐도 일제에 굴종하지 않고 한길수와 판가리 싸움해 눈깔까지 빼놓는다. 나중에 병완은 일제놈들의 핍박에 못이겨 가족을 데리고 쪽박 차고 조선 고향을 떠나 두만강을 건너 함흥촌에 도망쳐 들어온다.
병완은 대공무사한 농촌기층 조선족농민당원의 형상이다. 그는 함흥촌을 거점으로 자손들과 마을 농민들을 조직해 성칠과 용천의 항일유격대에 량곡을 비밀리에 대준다. 토지개혁 때엔 지하당조직에 가입하며 마을 농민들을 령도해 토비숙청, 항미원조를 지원했으며 대약진, 인민공사, 반우파투쟁, 문화대혁명의 시련도 껶으면서 두번째 고향을 건설하는데 이바지한다.
소설 후반기 주인공으로 등장한 상순도 개성이 독특하며 강직하고 대공무사하고 벼슬도 초개같이 여긴 청렴한 농촌 보통당원간부의 형상이다.
그는 최초에 성깔이 사납고 강직했다. 그는 지주 지학사가 눈꼴사납게 놀자 작두로 소궁둥이를 찍어놓는다. 그는 아버지 기준을 괭이로 찍은 지주 지학사한데 굴복하지 않고 16세 어린 나이에 비수를 휘두르면서 지학사을 보필하려는 지주를 위협하며 일제 시기 파출소에 소송해 끝내 승소해 악패지주 지학사에게서 상해배상금 30원을 받아낸다. 당시 30원이면 소 한마리를 샀다고 한다.
그때부터 그는 "사람은 빚을 지고 살아도 시비 지고 못산다."는 것을 인생 좌우명으로 삼고 항상 그 어떤 권세에도 굴종하지 않고 원칙을 견지하고 시비에 지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대약진 시기 공사 허백호 서기가 한헥타르에 5만근 내라고 하자 그 허황한 지시에 맞서 시비를 따지면서 싸운다. 그는 병완과 함께 허백호의 지시대로 딱 한짐 시험지에 둼을 한자 두께로 펴고 그 위에 옥수수를 심어 백근도 내지 못했다는 것을 증명해낸다. 그리고 대약진시기 "한헥타르에 5만근을 내라."는 상부의 지시는 허황하다는 것을 농사실천으로 증명하고 심갱밀식의 불타당성을 호소한다.
상순은 청소년시절부터 유격대에 들어가 싸운 나어린 항일투사였다.
그는 할아버지 병완과 아버지 기준의 지시대로 장백산 항일유격대에 비밀리에 쌀을 날라가며 항일유격대 대장 성칠(큰아버지) 영향하에 항일구국의 혁명도리를 알게 되며 권술을 배워 마을 청년들을 훈련해 항일투쟁에 투신한다. 그는 장백산 밀림 매복전에서 기관총을 들고 일제 놈들에게 맹사격하면서 영용하게 싸웠다.
상순은 지하당조직 책임자 리계삼과 허영주의 소개로 청년시절에 지하당조직에 입당하며 마을 청년들을 조직해 토지개혁과 토비숙청에서 전공을 세운다.
그는 언제 어디서나 당조직의 사업수요에 복종했으며 벼슬을 초개같이 여긴 대공무사한 공산당원의 형상이다.
그는 삼도만 등지 토비숙청을 할 때도 퇀장이 그를 보고 부련장을 하라고 했지만 능력이 모자란다고 겸손하게 담당하지 않았다. 또 토비숙청이 끝난후 영장으로 제발시켰지만 접수하지 않고 함흥촌에 돌아와 민병련장을 하면서 할아버지 사업을 도와나선다.
상순은 동북군정대학을 졸업하고 당조직의 포치에 따라 영월구 공안국 준비소조 조장으로 돼 영월구 공안국을 세우며 당지 국민당 잔여세력을 숙청하고 항미원조시기에는 남조선특무들과 대만 국민당특무들을 나포하는데 공훈을 세운다. 국내에 잠시 평화가 깃들었지만 항미원조전쟁이 끝나지 않은 형세에서 그는 영월구 공안분국 국장마저 사직하고 결연히 조선전쟁터에 나간다.
그는 이처럼 혁명과 당조직의 수요라면 개인의 벼슬과 안위는 초개처럼 여겼다.
상순은 양키놈들을 본때나게 족치려고 조선에 나왔지만 부대에서 군복공장 공장장으로 임명했을 때 미제 양키놈들과 결사전해보려던 욕망을 참고 조직의 사업수요에 복종한다.
상순은 아주 용감하고 능란한 전투지휘원이였다. 그는 조선 최전선 따발령에서 포위해 쳐들어온 미제 양키놈들과 공병삽으로 용감히 육박전해 두놈이나 죽이며 전우들과 함께 로획한 탱크를 몰고 미제 탱크들 속에서 좌충우돌하면서 용감히 싸워 짓부셔버리며 군복운송임무를 승리적으로 완수한다.
상순은 계속 최전선에서 양키놈들과 맞서 싸우려고 했지만 부대에서 통역이 급히 수요되자 영장마저 그만두고 사단 비서과 과장으로 부임한다.
상순은 효성이 지극한 효자였다. 그는 퇴대한 후 향 파출소 소장이거나 향 합작판매상점 책임자로 부임하라고 했지만 벼슬을 초개같이 여기고 함흥촌에 돌아와 촌당지부 서기로 돼 그의 말대로 "농촌 건설사업도 잘하고 부모에게 조석으로 효성을 하는 효자", 농촌보통당원으로 된다.
상순은 언제나 백성들과 집체를 먼저 생각했고 고생은 앞서 하고 향수는 뒤로 했으며 청렴하고 대공무사하게 처사했다. 그는 마을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 살게 하려고 집에 이영을 제대로 잇지 않아 간장물 같은 비물이 천정과 벽을 타고 줄줄 흐르는 것도 마다하고 마을 사람들을 이끌고 두만강변 평두산에 가서 황무지를 일궈 감자와 수수 농사를 짓는다. 또 사원들을 이끌어 부르하통하 물길을 돌려 놓고 모래밭을 논으로 풀며 생산대대에 벽돌공장을 지어 대대사무실과 사원들의 집을 벽돌로 짓고 인삼장을 차리고 병완의 설계에 따라 과수원도 가꾼다. 그는 집체 일을 하면서 제 집 일은 할 새도 없었다. 그는 중풍에 걸려 누워 림종을 다투면서도 로군인, 영장 무휼금을 오보호나 렬사유가족에게 나눠준다.
상순은 한평생 당에 충성한 보통당원이였다. 그는 림종시 기자로 된 외아들 덕돌을 보고 "대를 이어 영원히 중국공산당에 충성하고 당을 따라 나가며" "당과 인민을 위해 글을 많이 쓰라."고 당부한다. 그는 한평생 청렴하고 소박한 당원의 고상한 품격을 지켰다.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 제6권과 제7권에서는 개혁개방시기 새 시대 주인공으로 덕돌의 전형형상이 부각되였다. 덕돌의 형상은 농촌환경을 떠나 진수해중학교와 도시 문화소를 배경으로 비교적 개성적으로, 독특한 경력으로 전형화하였다. 덕돌의 형상을 통해 개혁개방 이후 격변기의 시대상을 폭넓게 보여주고 있다. 개핵개방부터 현시대를 보여준 소재를 다 제대로 쓰자니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을 4권 좌우 더 써나가야 할 것 같았다. 그리하여 편폭상 력사시대 균형을 이루기 힘들었다. 이쯤하면 덕돌의 형상을 제대로 부각한 것 같아 개혁개방 후 격변기 현시대 조선족들의 시대상과 희노애락을 보여준 대하소설 "진달래 소야곡"을 따로 쓰기로 하고 소설을 마무리했다.
병완과 상순, 덕돌의 형상을 통해 지난 세기 각 력사시기 우리 중국 수많은 조선족백성들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며 아울러 조선족 이민사, 살아온 이야기를 자연히 돌이켜 볼수 있을 것이다. 또 덕돌의 형상을 통해 개혁개방 격변기에 교육과 문화 계통 인테리어들의 모습을 보여주었으며,나아가서 개혁개방시기 일련의 조선족들의 삶의 력사를 찾아볼 수 있게 하려고 시도했다.
작중에는 주인공 병완과 상순 외에도 김성칠, 김용천, 김인삼, 김기준, 최구장, 진달래, 최구형, 은녀, 칠백, 최동욱, 정규상 그리고 반면인물들인 끼무라, 친일주구 한길수와 한철주 부자, 똘만, 스즈끼, 또 당내 반면인물들인 리흥수, 황종연, 황승연, 박영발 등 전형환경에서의 부동한 계층 전형인물들을 수많이 창조해 당시 각계 각층 사람들의 모습을 그려냈으며 부동한 력사시기 부동한 계층의 모습과 력사를 반영했다.
조정래 작가는 대하소설 "아리랑"에서 깡깡 마른 직설적인 력사사건 서술을 피면하고 형상적으로 수많은 전형인물을 부각해 자연히 그 인물에 따른 력사를 보여주었다. 례하면 항전시기 미국 하와이에서의 리승만의 형상을 아주 생동하게 부각해 하와이에서의 리승만과 조선족 유지인사들의 항일투쟁사 형상적으로 보여주었다.
나는 전형인물을 형상적으로 부각하면서 력사사실을 반영한 한국 조정래 작가의 력사반영 예술수법을 답습하여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을 창작하였다.
인물의 갈등도 이데올로기갈등 외에도 사랑 갈등 등 여러가지로 원인으로 설정했다.
특히 전우였던 김용천과 김성칠의 갈등은 단지 남조선군 련대장과 조선인민군 련대장과의 적대관계뿐만이나라 사랑의 라이벌이라는데서 고조에 이르게 했다. 이 소설의 제1권부터 장백산 밀림 오두막에서 진달래는 처음으로 사냥하러 온 성칠을 우연하게 만나게 된다. 성칠은 유부남인데 진달래의 첫사랑으로 됐다. 그런데 성칠은 장백산 밀림 항일유격대 숙영지에서 본처 하옥을 두고 첩을 둘 수 없어, 진달래를 사랑하면서도 사랑할 수 없어 용천한테 중매를 서서 번개식결혼을 하게 한다. 진달래는 용천의 애까지 임신했는데 장백산 밀림 매복전에서 사라진 용천의 생사를 알 수 없게 된다. 진달래는 용천을 기다리다가 용천의 아들 경주를 데리고 성칠을 따라 조선에 나가며 본댁을 잃은 성칠과 재혼해 아들 경수까지 낳게 된다. 용천은 그런 줄도 모르고 그새 진달래를 찾아 조선 팔도를 헤매다가 남조선 괴뢰군에 입대해 련대장까지 된다. 그는 무명고지 격전에서 조선인민군 성칠의 련대에 혀로 잡혀갔던 수하 대대장 이병수를 통해 성칠이 진달래와 재혼한 사실을 알고 판가리싸움을 해 항일전쟁시기 전우, 형제와 같던 성칠을 격살한다.
소설에서 용천과 성칠, 진달래,그리고 하옥, 은녀, 사이 벌어진 삼각련애, 다각련애와 기나긴 세월의 굴곡적인 사랑갈등은 독자들에게 긴 여운을 주면서 소설을 재미나게 읽게 하였다. 더욱이는 자연히 이데올로기 의식이 있을뿐만아니라 피와 살이 있고 사랑도 있는 전형인물, 개성이 독특한 전형인물형상을 부각해 한반도 처참한 동족상잔 전쟁력사를 알게 한 면에서 비교적 성공적인 예술작용을 했다고 생각한다.
작중에서 상순과 첫사랑 지춘실, 그리고 명옥의 사랑갈등도 비교적 예술적으로 상순의 형상을 부각하는데 일정한 예술적 효과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이런 이런 주요인물들의 복잡한 사랑갈등은 독자들이 아주 재미나게 소설을 읽으면서 주인공의 형상에 감복하면서 당시 력사환경도 알게 하는데 일정하게 예술적 매력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작중 인물의 설정과 인물의 신분, 활동경력, 인물이 처한 사회와 자연환경 등은 모두 인물의 성격을 부각하고 생활론리에 맞으면서도 력사를 반영하기 위한데 복종시켰다.
다음, 작중인물들의 대화 속에 력사이야기를 삼입해 력사를 반영하는 예술수법을 썼다.
조정래의 대하소설 “태백산맥”은 광복후로부터 6. 25 전쟁 전후를 배경으로 분단이후 여순반란사건을 시작으로 하여 한국 태백산맥을 따라 남으로 나가면서 지리산구를 근거지로 삼고 남로당(박헌영의 령도하에 있은 남조선 주재 조선로동당의 약칭임.) 유격대의 유격투쟁활동과 한국 계엄사령본부와 경찰대, 토벌대가 지리신지역 남로당유격대를 진압한 과정의 력사이야기를 폭넓게 보여주었다.
이 소설에서 작가 조정래는 “실화소설” 같은 력사반영의 예술수법으로 당시 염상진대장, 안창민대장, 하대치 등 유격대 두목과 골간들의 투쟁이야기를 주선으로 소설로서의 진실한 인물화폭을 그리면서 진실한 력사를 반영하는 예술수법을 쓰고있다. 진짜 력사와 예술의 혼연일치를 보여준 걸작이라고 할수 있다.
작가는 실존한 력사인물들을 피도 있고 살도 있는 아주 전형화된 인물로 형상적이고도 생동하게 형상화해 유격대 투쟁과 정부군, 토벌대의 진압의 력사이야기를 반영했다. 작중에는 보성군 유격대 대장 염상진과 보성군당위원장 겸 후임 대장 안창민을 비롯한 하대치, 오판돌, 강동식, 이해룡, 고두만, 손승호, 강동기, 김임일, 이영생 그리고 계엄사령관 심재모, 신임사령관 백남식, 보성경찰서장 남인태, 토벌대장 임만수, 검찰총장 권승렬, 중부경찰서장 윤기병 등 실존한 전형인물들을 아주 성공적으로 부각하였다.
“태백산맥”에서 조정래 작가는 인물형상 창조외에 작중 인물의 대화를 통해 력사이야기를 보여주는 예술수법을 적지 않게 썼다. 례하면 작중인물 손승호와 김범우의 대화를 통해 백범 김구가 암살당한 력사사건을 보여주었다.
나는 조정래 작가의 대하소설 "아리랑"과 대하소설 "태백산맥"을 읽은 후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에서 전형인물형상을 창조해 력사를 반영한 외에 허구된 인물의 대화 속에 력사사건을 보여주거나 작자 서술로 된 력사환경을 삽입하는 력사반영의 예술수법으로 당시 력사를 보여주려고 시도하였다.
례하면, 작중 허구된 인물 김용천이 눈보라치는 밀림에서 숙영할 때 성칠한테 이야기한 형식을 빌어 리상설이 만국대회에 참가해 조선을 합병한 일제의 만행을 폭로하고 조선을 되돌려달라고 호소하면서 비수로 할복한 력사이야기를 보여주었다.
명동촌 교회당에서 김하규가 김기준 등에게 이야기하는 형식으로 선바위 부근에서 항일유격대원들이 일제 13만원 탈취한 력사사건을 보여주었다.
김성칠이 함흥촌에 돌아왔다가 유격대 숙영지로 돌아가는 길에 상길과 상순한테 하는 이야기 형식으로 항일의사들인 안중근, 윤봉길 등의 의거를 보여주었다.
나는 인물의 대화 속에 력사이야기를 보여주는 형식을 될 수 있는 한 적게 보여주려고 모지름을 썼다. 대화 속에 력사이야기를 삽입하는 수법을 너무 많이 쓰면 소설의 문학성을 흐리우고 자칫하면 력사소설이 아니라 축소된 력사책을 만들기 쉽기 때문이다. 력사소설은 어디까지나 력사소설의 쟝르특징을 살려야 하며 될수 있는 한 전형환경에서의 전형인물형상을 부각해, 인물형상을 통해 자연히 당시 력사시기를 알게 하여야 한다.
우리 문단의 일부 력사제재소설은 인물의 대화 속에 력사이야기를 너무 많이 삽입하거나 아예 적지 않은 편폭에 력사이야기를 작가가 직설적으로 서술한데서 소설이라기보다 력사책을 읽는 감이 든다. 그렇다면 력사소설을 쓰기보다 력사이야기책을 써내는게 편폭도 절약하고 독자들이 읽기도 간편할 것이 아닌가 싶다.
다음, 프랑스 대작가 발자끄는 90여부나 되는 소설로 된 "인간극장"에서 부동한 소설에 부동한 전형환경에 동일한 인물을 재현시킴으로써 인물형상을 심도있게 부각하고 해당 시기 프랑스 전반 력사를 폭넓게 보여주었다. 이를 참고해 나는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에서 주인공이 직접 력사사건을 참가시켜 사건을 발전시키면서 당시 력사를 펼쳐보였다.
례하면, 상순을 직접 삼도만, 묘령, 천교령, 로흑산 등지 토비숙청전투에 직접 참가하는 예술수법으로 연변의 토비숙청력사를 반영하였다.
나는 당시 삼도만토비숙청에 참가했던 로병사들에게서 삼도만 등지의 토비숙청을 전면적으롤 료해한 외에도 당시 토비들이 둥지를 틀고 있던 삼도만과 평강촌의 지리적 환경을 상세히 알려고 1979년 음력설을 앞두고 백여리 떨어진 심심산골 삼도만에 취재하러 갔댔다. 삼도만공사당위의 협조하에 당시 토비두목 전소흥의 문서(비서)질을 한 토비로인을 마구간에 가서 만나 함께 말먹이를 썰고 말을 먹이면서 당시 토비내부정황과 토비숙청전투정황 등을 상세히 취재했고 토비문서로인과 함께 삼도만 현지를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당시 토비들이 둥지틀었던 지리적위치도 알아보았다. 그리고 삼도만에서 30리나 떨어진 심심산골 평강촌에도 가서 지리적환경과 김지도원이 생매장당한 골안 등지를 일일이 답사하고 마을 사람들한테서 토비숙청전투 정형도 상세히 알아보았다. 그런데 돌아오는 뻐스를 놓히고 말았다. 함박눈이 쏟아지자 원래 오후에 돌아가는 뻐스가 점심전에 삼도만으로 되돌아갔던 것이다. 당시 마을엔 상점도 없었기에 나는 점심도 먹지 못하고 오후에 발목까지 푹푹 빠지니는 시골길을 걸어서 삼도만에 돌아가야 했다. 나는 목이 마르고 배고프면 길가의 눈을 한웅큼씩 쥐여 입에 넣고 녹여 먹으면서 걷고 또 걸어 밤중에야 삼도만으로 비칠거리면서 돌아온 적도 있었다. 그때 그렇게 간고하게 취재했기에 나는 이 소설에서 삼도만토비숙청을 아주 상세히 써낼 수 있었다.
김성칠, 김인삼, 김용천, 진달래, 최구장, 김상순, 한길성, 한철주, 똘만 등 부동한 인물들을 장백산 항일전투, 항미원조전쟁에 직접 참가시키고 력사이야기를 이끌고 나가게 하는 예술수법으로 그 당시 부동한 력사를 반영하려고 시도하였다.
력사소설 창작에서 허구된 인물의 허구된 사건을 창작할 때 전형력사환경의 력사 진실성과 예술의 진실성을 지키려고 나는 조선반도와 동북 항일전쟁과 항미원조전쟁 력사책도 많이 읽고 당시 력사환경을 참고하였다.
조정래의 대하소설 “아리랑”은 조선반도와 중국, 로씨야(구쏘련), 태평양 미국의 하와이, 지어 싸이판과 괌, 동남아세아, 일본까지 배경으로 해 20세기 초엽으로부터 1945년 광복까지 력사시에 일제의 폭압에 맞서는 우리 민족의 피어린 항일투쟁과 민족의 이민사, 끈질긴 생존과 투쟁을 다룬 민족의 대서사시이다.
조정래 작가는 지삼출, 대근, 송수익, 신세호, 방영근, 남용석, 감골댁, 보름, 수국, 정분, 김창봉, 정재규, 장칠문, 장덕풍, 김봉구, 방태수, 무주대, 임덕구, 주성춘, 손판식, 기생 옥향; 백종두, 주재소장 하야가와, 요시다, 쓰지무라 등 허구된 수많은 전형인물들을 부각하여 반세기나 되는 그 시대 력사화폭을 형상적으로 보여주었다.
또 허구된 인물의 허구된 이야기와 력사적으로 실존한 리승만, 김구, 의병장 임병서, 최익현, 임병찬 등의 진실한 이야기를 유기적으로 결합하는 력사반영의 예술수법으로 이 시기 민족의 력사를 아주 넓은 화폭으로 예술적으로 반영하였다.
일부 력사이야기는 작중 허구된 인물의 대화속에서 예술적으로 삽입해 보여주었다. 례하면 작중의 방영근과 남용석의 대화에서 당시 하와이에서의 반일단체와 이승만의 항일투쟁사를 정면으로 보여주었다.
나는 조정래 작가의 력사반영 예술수법을 참고해 허구된 인물의 허구된 이야기와 력사적으로 실존한 인물의 진실한 이야기를 유기적으로 결합해 엮어나가면서 당시 력사를 반영하려고 시도하였다.
례하면 작중 허구된 인물 상순과 력사적으로 실재한 안도현공안국 국장 천용구가 함께 장백산 지구 밀림에 공중낙하한 남조선 특무들과 대만 특무들을 나포하는 이야기를 유기적으로 결합시켜 묘술하면서 아주 자연스럽게 당시 력사사건을 완정하게 보여주었다. 이 대목을 읽으면 어느 것이 력사사실이고 어느 것이 허구된 이야기인지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유기적으로 완정하게 반영하였다고 생각된다.
조정래의 대하소설 “태백산맥”은 광복후로부터 6. 25 전쟁 전후를 배경으로 분단이후 여순반란사건을 시작으로 하여 한국 태백산맥을 따라 남으로 나가면서 지리산구를 근거지로 삼고 남로당(박헌영의 령도하에 있은 남조선 주재 조선로동당의 약칭임.) 유격대의 유격투쟁활동과 한국 계엄사령본부와 경찰대, 토벌대가 지리신지역 남로당유격대를 진압한 과정의 력사이야기를 폭넓게 보여주었다.
이 소설에서 작가 조정래는 “실화소설” 같은 력사반영의 예술수법으로 당시 염상진대장, 안창민대장, 하대치 등 유격대 두목과 골간들의 투쟁이야기를 주선으로 소설로서의 진실한 인물화폭을 그리면서 진실한 력사를 반영하는 예술수법을 쓰고있다. 진짜 력사와 예술의 혼연일치를 보여준 걸작이라고 할수 있다.
우선 작가는 실존한 력사인물들을 피도 있고 살도 있는 아주 전형화된 인물로 형상적이고도 생동하게 형상화해 유격대 투쟁과 정부군, 토벌대의 진압의 력사이야기를 반영했다. 작중에는 보성군 유격대 대장 염상진과 보성군당위원장 겸 후임 대장 안창민을 비롯한 하대치, 오판돌, 강동식, 이해룡, 고두만, 손승호, 강동기, 김임일, 이영생 그리고 계엄사령관 심재모, 신임사령관 백남식, 보성경찰서장 남인태, 토벌대장 임만수, 검찰총장 권승렬, 중부경찰서장 윤기병 등 실존한 전형인물들을 아주 성공적으로 부각하였다.
“태백산맥”에서도 조정래 작가는 작중 인물의 대화를 통해 력사이야기를 보여주는 예술수법을 적지 않게 썼다. 례하면 작중인물 손승호와 김범우의 대화를 통해 백범 김구가 암살당한 력사사건을 보여주었다.
조정래 작가는 “태밴산맥”에서 허구된 인물의 허구된 에피소드를 양념처럼 많이 삽입해 독자들을 력사이야기를 감염력있께 읽게 흡인하는 예술수법을 보조적으로 썼다. 례하면, 염상구에게 강동기 안해가 장기적으로 강간당해 임신까지 한 에피소드, 허출세에게 외서댁이 강간당한 에피소드, 그외에도 작중 인물의 진한 사랑과 치정 에피소드 등을 들수 있다.
나는 조정래 작가의 대하소설 "아리랑", "태백산맥", 리기영의 "두만강" 등 장편력사소설을 여러번 통독하고 력사반영의 예술수법을 분석하고 학습해 나의 대하력사소설 "울고 웃는 고향"에서 전형인물창조해 력사를 반영하는 예술수법, 인물의 대화 속에 력사사건을 삼입하는 예술수법, 허구된 인물과 실재한 인물의 유기적인 련계 속에 동일한 인물을 부동한 력사사건에 참가시켜 이이끌고 나가게 하는 예술수법, 부동한 인물을 부동한 력사사건에 참여시키는 예술수법 등 력사반영의 예술수법으로 중국 조선족 백년력사를 보여주려고 시도하였다.
력사제재소설, 특히 300여만자에 달하는 대하소설에서 백년이나 되는 기나긴 력사를 반영하려면 그에 상응한 력사반영의 예술수법을 다양하게 써야 된다. 그러나 나의 수준제한으로 해 력사반영의 예술수법상 미흡한 점도 있다고 생각한다. 이후에 소설에서 력사반영의 예술수법을 더 연구한다면 력사제재소설을 쓰는데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이 남긴 메아리
단숨에 한국에 날아간 나는 이완표 회장님께 기념으로 대하소설책을 드리고나서 채순목 회장님께도 드리려고 했다.그런데 이완표 회장님은 뜻밖에도 비감에 잠긴 채 “채순목 회장님은 전번달에 사망했어요.” 라고 전하였다.채순목 회장님은 사망하기 전에도 이완표 회장님에게 여러번 전화해 나의 대하소설을 꼭 하루속히 내달라고 부탁했다고 하지 않겠는가.
아, 한달만 더 계셔도 채순목 회장님도 이 소설책을 보실 수 있었겠는데. 슬픔과 아쉬움으로 콧마루가 시큼해나고 눈물이 울컥 했다.
나는 한국이라는 출판 사막에서 끝내 "울고 웃는 고향"을 꽃피워냈다. 그 기쁨 이를데 없었다. 나는 트렁크에 갓 출판한 소설책을 메지게 넣어 가지고 수원에서 지하철을 타고 귀로에 올랐다. 신도림지하철 역이던가. 지하철을 갈아타려고 무거운 책짐을 안고 층계를 오르가다가 그만 혁띠가 툭 끊어졌다. 아마 배에다 힘을 너무 준 것 같았다. 괴춤이 내려가 책짐을 어쩌는 수 없어 멍해 서 있을 때였다. 낯도 모를 웬 녀대생이 보기 안타깝던지 다가와 "아저씨, 제가 도와드릴게요." 하고 트렁크 한쪽을 들었다. 나는 괴춤을 쥐고 짐을 들 수 없어 황망히 그 녀대생 보고 짐을 좀 봐달라고 부탁한 후 황급히 지하철에 벌려놓은 매대에 가서 가죽 혁때를 사 띠고 책짐을 다시 안고 층계를 올랐다.
나는 그렇게 애나게 메고 온 나의 두툼한 대하소설책을 가족과 지인들에게 한부한부 선물하였다. 그 성공의 기쁨은 이를데 없었다. 한편 그렇게 애나게 쓰고 출판해 비행기에 실어온 소설책을 드렸는데 보지도 않고 한쪽 구석에 꽂아둔채로 있거나 전근해가면서, 퇴직하면서 챙겨가지도 않는 걸 보았을 때 내 마음은 비길데 없었다. 어쩜 그럴 수 있단 말인가?
이 대하소설을 창작하는데는 수많은 조상들과 스승들의 정성과 숨결이 깃들어있다. 나의 부모와 가시부모를 비롯한 수많은 조선족로인들은 나한테 일제의 철발굽 아래 신음하면서 어렵게 살아온 눈물겨운 가정사를 천하루날의 이야기처럼 들려주었다. 나는 소설을 쓰다가도 해방전 일제 때 창시개명 등 대목에 걸리면 아흔고개를 넘은 고령의 어머니와 묻군 하여 풀어나갔다.
부모들께서는 이 대하소설이 출판되기 몇해 전에 모두 나를 홀로 이 세상에 남겨두고 너무나도 총망히 떠나가셨다. 나는 대하소설 묶음을 부모님의 산소 앞에 놓고 안타까와 꺼이꺼이 대성통곡치면서 말씀드렸다.
“아버님, 어머님, 우리 민족의 조상님들이여, 그대들이 살아온 이야기를 쓴 저의 대하소설이 끝내 볕을 보게 됐습니다. 몇해만 더 계셔도 이 소설책을 보셨겠는데 안타깝기 그지 없습니다.”
김재권, 김설봉, 김철환, 김진산 등 계몽 스승들은 이 대하소설 창작정황을 수시로 알아보고 수많은 가르침과 조언을 주었으며 이 대하소설의 출판을 고대하였다. 그러나 김재권 선생님과 김철환 선생님은 이 대하소설 출판을 보지도 못하고 별세하였다. 참말 안타깝다. 그이들이 계시지 않는 세상은 쓸쓸하기 그지 없다.
당시 룡정시로인협회 부회장 리운학선생과 함께 병문안 갔을 때까지만 해도 김재권선생님은 간신히 일어나서 문선을 짚고 마중하셨다.나는 위문금과 과일을 드리고나서 김재권선생님의 손을 꼭 잡고 이렇게 말씀드렸다.
“할 일도 많은 선생님이신데 하루속히 몹쓸 병을 치료하고 오래오래 앉으십시오. 그래야 이 제자가 쓴 대하소설이 출판되는 것을 보지요.”
그때 김재권선생님은 환한 웃음을 지으시면서 진심어린 가르침을 하셨다.
"장혁이, 우리 민족을 위해 장한 일을 했소. 꼭 성공하오. 대작이 출판된 걸 보겠는지는 모르겠지만 미리 축하하오. 절대 만족하지 말고 계속해 두번째 대하소설을 쓰오. 절대 똥별을 달고 거들먹거리는 문예정객이 되지 마오. 명예욕과 권세욕을 버리고 글 한편을 쓰더라도 민성이란 필명처럼 민족과 백성의 목소리를 대변해 쓰오.”
나의 필명 민성은 원로시인 조룡남과 저명한 실화작가 리성권사장 그리고 김재권 선생이 내가 작가협회에 가입할 때 지어준 필명이다. 그때 그이들은 나를 보고 백성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작가로 되라고 필명을 민성으로 지어주셨다. 그런데 나는 지금 머리 숙여진다. 그이들의 기대에 걸맞는 그렇다할 작품을, 진정 백성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작품을 써내지 못했다.
그렇다. 김재권 선생님은 지위나 명예를 따지지 않은 명작가였다. 10권이나 되는 "황구연전집"을 비롯해 50여권의 저서를 낸 명작가이지만 문단에서의 지위나 정치에 관심이 없었고 항상 보통작가로 겸손하게 처신하면서 문학창작에만 정진하셨다. 진짜 참답고 훌륭한 본보기 작가라고 할 수 있다.
작가는 어디까지나 작품으로 말한다. 문단에서 니야 내야, 시야 비야, 티각태각 하고 스스로 문단의 제일이노라고 불어대고 스스로 자기 머리끄댕이를 잡아 춰올린다고 위상이 하늘만큼 날아올라갈 순 없다. 작품 몇개 써내지 못하고서도, 저서 한권도 내지 못하고서도 똥별이나 달고 창작보다는 문예정치에 눈이 새빨개지는 얼뜨기 문예정객을 보면 가슴이 아프다...
내가 출판된 소설책을 한묶음 들고 룡정시 문화관 리광평 관장과 함께 김재권 선생님을 다시 찾아갔을 때 김재권선생님도 리운학선생님도 계시지 않았다.악착스런 암병은 나의 스승님을 무정하게 빼앗아갔다. 나는 눈물을 머금고 소설책을 김재권선생님의 아드님 김문혁씨한테 드리고 눈물을 머금은 채 귀로에 올라야 했다.
(아, 만약 김재권선생님께서 고무해주고 독촉하지 않으셨더라면 내가 대하소설을 끝까지 써냈겠는가? 김재권선생님과 리운학선생님께서 몇달씩만 더 계셔도 8월에 출판된 내 대하소설을 보셨겠는데…)
나는 차를 몰고 모아산고개를 넘어오면서도 눈물을 금할 수 없어 차를 멈추고 한참이나 큰 길 옆에 서서 룡정 쪽을 멍해 바라보면서 가슴을 치며 통곡쳤다.
함박눈이 푸실푸실 내리는 날에 김철환 선생님의 소개로 조양공사 문화소에서 처음 만난 김재권 선생님의 상냥한 얼굴을 지금도 보는 것처럼 삼삼히 떠오른다.
그날 김재권선생님께서 하신 의미 심장한 부탁의 말씀이 아직도 귀전을 때린다.
“호랑이는 죽으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으면 이름을 남기오. 젊은이, 장차 우리 민족과 백성을 위해 열심히 글을 쓰는 작가로 되오.”
그때로부터 선생님께서는 늘 자전거를 타고 10대 애숭이를 찾아 집에도 오시고 밭머리까지도 찾아와 내가 쓴 습작품을 펼쳐들고 까근히 가르쳤다. 어떤 때에는 내가 소를 모는 고향의 칼산에까지 찾아와 문학을 가르쳤고 인생을 가르쳤다. 매 한편의 졸작이 볕을 볼 때마다 스승님은 아주 기뻐하면서 제일 먼저 축하해주군 하였다. 인생길에서 곡적을 겪을 때마다 항상 삶의 용기를 북돋아주시고 앞길을 비춰주는 망망대해의 등대, 모래바람이 살벌하게 불어치는 사막의 우물로 되셨던 은사님이 아니신가.
(아, 존경하는 김재권 선생님, 스승님께서 계시지 않는 세상은 너무나도 텅 비고 쓸쓸하기만 합니다…)
수많은 조상들과 지도자들, 은사님들, 지인들, 부모형제들, 친구들의 기대하던 저의 소설이 지금 온라인과 인터넷을 타고 국내외 수많은 독자들한테 문학의 향연을 드리고 민족의 과거와 현재를 돌이켜보게 하고 기나긴 메아리로 여운을 남겨줄 수만 있다면 위안될 것 같다.
나는 세상 사람들이 다 쳐다보는 소소리 높은 희말라야산 쵸몰랑마봉으로 되려고 하지 않는다. 장백의 아들로서 사람들이 볼 수 없는 백두산의 깊고 깊은 협곡에 숨어 살고 싶다.
나는 요란한 니까라과폭포로 되려고 하지 않는다. 금강산의 수풀로 가려진 계곡에서 촐랑촐랑 노래하면서 흐르는 벽계수, 맑디 맑고 이발 시리게 차거운 샘물로 되고 싶다.
나는 기세 사나운 황하로 되려고 하지 않는다. 항상 낮은 곳으로 잔잔히 흘러가는 티없이 맑은 한라산 벽계수로 되고 싶다.
때로는 세인들이 보지도 못하는 지하수로 소리없이 흐르다가도 사람들이 가뭄에 허덕이는 사막에 한줄기 생명수로 퐁퐁 솟아올라 삶의 오아시스를 가꾸고 진달래꽃을 활짝 꽃피우고 싶다.
내 령혼의 영원한 안식처는 문학창작에 있다. 사막에서 문학창작의 마라톤을 힘겹게 하던 나의 외로운 령혼이 둥둥 떠돌아다니며 사막에 감로수가 퐁퐁 솟는 오아시스를 가꾸어가면 백두산의 만병초와 진달래가 방실방실 웃으며 반길 것이다. 아리랑 열두 사막고개를 골고다고개처럼 외롭게 날아넘어간 나의 외로운 령혼을 수려한 금강산의 모란꽃과 한라산의 무궁화도 반겨맞으면서 아리랑을 부르며 나풀나풀 춤을 추리라.
저자 김장혁
2018년 8월 23일
중국 연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