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zoglo.net/blog/jinchanghe 블로그홈 | 로그인
김장혁
<< 11월 2024 >>
     12
3456789
10111213141516
17181920212223
24252627282930

방문자

조글로카테고리 :

나의카테고리 : 소설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77)
2017년 08월 16일 14시 54분  조회:1533  추천:5  작성자: 김장혁





                                       

                8. 수림 속의 통조림깡통

       가을바람에 수림의 누런 낙엽이 후루루 날아 떨어지고 드문드문 서리가 내리기 시작했다.

       상순은 함흥 촌에 있는 아버지와 아내가 가을걷이에 눈 코 뜰 새 없이 바삐 보내리라 생각되자 근심이 태산 같았다.

어느 날, 그는 부국장 천용구에게 청가를 맡고 함흥 촌으로 돌아왔다.

해가 거의 질 때 집에 들어서니 집에는 맏딸 춘자가 숙제를 하다가 봉자를 데리고 놀고 있었다.

“아버지, 엿 사탕을 사왔습니까?”

춘자는 봉자와 함께 두 팔을 벌리고 달려오면서 쌍까풀눈을 똑바로 뜨고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상순은 한 아름에 춘자와 봉자를 와락 끌어안고 뽀뽀를 해주었다. 애들을 구들에 내려놓고 진짜 미리 준비한 엿 알을 호주머니에서 꺼내 주었다.

애들은 엿 알을 입에 넣고 오물거리며 기뻐 퐁퐁 뛰었다.

“할아버지 엄마 어데 갔니?”

춘자는 엿 알을 넣어 볼이 볼록해 종알거렸다.
“저 소서구에 가을 하러 갔습니다.”

상순은 봉자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춘자야, 봉자를 데리고 놀아라. 아버지 밭에 가서 할아버지와 엄마를 데리고 올게.” 

춘자는 머리를 끄덕였다.

상순은 벽에서 낫을 벗겨가지고 소서구로 줄달음쳐 갔다.

해는 서산으로 맥없이 기울어져 산 그림자가 태평강 가에까지 가로 누워 있었다.

상순은 소서구 막바지에 있는 밭으로 헐금씨금 올라갔다. 그때까지 아버지는 허연 구레나룻을 흩날리면서 강냉이 단을 날라다 쌓느라고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지주 지학사에게 괭이에 찍혀 늑골이 세대나 끊어난 옆구리가 아픈지 기준은 허리를 짚고 서서 만지다가도 계속 일하는 것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상순은 불효의 죄책감을 느끼었다. 명옥은 잔등에 난지 서너 달 밖에 안 되는 물 애기 금자를 업고 강냉이 단을 이어다가 무지고 있었다. 둘째딸 금숙은 흰 콧물을 폴락거리면서 그래도 엄마를 돕느라고 강냉이 대를 하나하나 들어 모아 놓았다.

“아버지, 그간 얼만 바빴겠습니까?”

상순은 아버지 손에서 강냉이 단을 빼앗아 날라다 쌓았다.

“아빠!”

금숙은 포도 알 쌍까풀눈을 동그랗게 뜨고 두 팔을 벌리고 달려와 안겼다. 상순은 금숙을 안아 한바퀴 돌려주고 뽀뽀 해주고 내려놓았다.

그는 호주머니에서 엿 알을 꺼내 둘째 딸의 입에 밀어 넣어주었다.

“우리 귀여운 둘째딸아, 할아버지와 엄마한테도 먼저 권해라. 응?”

“예-”

금숙은 엿 알을 쥐고 할아버지한테 내밀었다.

“할아버지, 엿을 잡수세요.”

“오, 귀여운 내 손녀야.”

기준은 금숙의 발갛게 상기된 볼을 매만져 주면서 엿 알을 밀어 주었다.

“네나 먹어라.”

“안됩니다. 잡수시요.”

금숙은 기어이 엿 알을 쥐여 할아버지 입에 넣어주었다. 그리고 몸을 돌려 엄마 입에도 넣어주고서야 자기 입의 엿 알을 오독오독 깨물어 먹는 것이었다.

상순은 금숙이 귀여워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기준은 허리 쉼을 하면서 이상한 눈길로 물었다.

“얘, 어째 또 집으로 왔니? 옛날부터 효자는 충신으로 될 수 없다고 했느니라. 네가 공안국장을 하면서 자꾸 집 근심을 하다나면 어찌 사회 일을 잘 하겠니? 집 근심은 하지 말고 국장이나 잘 해라.”

상순은 일어나 강냉이 단을 와락와락 주어 쌓아 놓으면서 말했다.

“전선 같으면 내가 목숨을 걸고 싸우겠습니다. 그런데 후방에서 어디 내 재간을 쓸 데 있습니까? 집에 돌아와 아버지나 잘 모시면서 마을의 일을 하는 게 옳지 않은지 모르겠습꾸마. 괜히 아버지와 애 어미만 고생시키기나 했지.”

그 말에 기준은 강냉이 단을 왈 둘러메치면서 버럭 고함쳤다.

“얘, 이놈아, 누구나 다 하는 공안국 국장이냐? 집일은 그만두고 당장 공안국에 돌아가라.”

허나 상순은 대수로워 하지도 않고 중얼거렸다.

“공안국 일도 이젠 내 모집한 천용구 부국장이 잘 처리합구마. 근심할게 별로 없습구마."
그는 근엄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 조선족들이 어떻게 세운 연변조선족자치구입니까? 우리 1만여명이나 되는 조선족렬사들의 피로 바꿔온 조선족자치구입꾸마. 동북해방전쟁 때로부터 제4야전군 백만대군에는 우리 조선족장병들이 15만명이나 들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동북을 해방하고 북경을 해방하고 장강과 황하를 뛰여넘어 해남도까지 해방했습니다. 그때 우리 동북군정대학 선배 조남기동지랑 조선족 백성들을 동원해 동북해방전쟁 할 때 중국인민해방군 제4야전군에 쌀을 만여킬로그람이나 실어갔습니다. 홍학지 장군은 조남기를 자기 부대 후근부 간부로 채용했습니다. 지금 조남기 는 중국인민지원군 후근사령부 교통운송과 과장을 한답디다. 우린 선렬들의 피로 바꿔온 우리 조선족자치구를 목숨으로 지켜야 합꾸마.”
그 말을 듣자 기준은 밭고랑 같은 주름을 조금 폈다.
"그런 도리를 잘 알면 계속 공안국 국장을 하는게  우리 연변조선족자치구를 지키는데 낫지 않겠느냐? 뭐나 앞뒤를 잘 고려해라."
상순은 땅이 꺼지게 한숨을 후- 내쉬었다.
"잘 생각해보겠습구마. 여기서 미제와 남조선, 국민당특무를 잡는 후방보위공작도 중요합구마. 하지만 전선에 나가 미제를 몰아내야 합꾸마. 그래야 조선도 지키고 우리 연변, 아니, 중국을 지키는데 낫을 거 같습구마. 여기서 특무 오기를 기다리기보다 조선전선에 나가 미제와 남조선 놈들과 판가리싸움을 하고 싶습구마."

이때 패용천산 쪽에서 다급히 고함치는 소리가 쩌렁쩌렁 메아리쳤다.

“사람 살려요!”

“아이유, 곰이 사람을 물어 죽입니다.”

상순과 기준이 패용천산 쪽을 바라보니 강냉이 밭에서 울리는 애절한 여성의 비명소리였다.

상순과 기준은 낫을 쥐고 그쪽으로 황급히 달려갔다.

산비탈 강냉이 밭에서 곰 한 마리가 김창욱이네 처를 쫓아다니고 있었다. 창욱의 처는 진작 곰한테 엉덩이를 물려 피가 치맛자락 밑의 허벅다리를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상순은 “이 놈 곰 새끼!” 하고 고함치며 낫을 휘두르면서 곰에게 달려들었다.

곰은 창욱의 처를 뒤로 빼돌리면서 달려드는 상순을 보자 성이 날대로 났다.

곰은 강냉이 대를 마구 가로 타고 “끼깅!” 무서운 소리를 지르며 상순에게 덮쳐들었다. 곰은 상순이 휘두르는 낫을 잡아 훌 빼앗아 무릎에 대고 뚝 분질러 던졌다.

기준이 뒤에서 달려오면서 창욱의 처가 무를 뽑느라고 쓰던 삽을 쥐여 휘두르며 곰을 막아 나섰다. 곰은 기준의 손에서 삽마저 빼앗아 뚝 분질러 내던졌다. 상순과 기준은 곰을 당할 수 없어 돌멩이를 쥐어 뿌렸다. 그 새 창욱의 처는 저 멀리 산 아래로 달아났다.

상순은 진작 권총을 쏘려다가 그만 두었던 것이다. 괜히 권총을 쏘아 곰 무리를 놀라게 해 몽땅 이쪽으로 덮쳐들어 더 큰 화를 당하게 할 가봐 서였다.

“아버지, 됐습니다. 창욱의 처를 구했으니 달아 나깁소.”

“응.”

상순과 기준은 곰을 이리저리 피해 강냉이 밭에서 달아났다. 곰도 숱한 사람이 몰려오는 것을 보고 강냉이 밭에서 달아나 칼산 쪽 골짜기 수림 속에 우둔한 몸뚱이를 숨겼다.

곰을 쫓고 나니 해가 뉘엿뉘엿 칼산 쪽으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어둑어둑 할 때까지 일하고 상순은 저녁에 강냉이 단을 수레에 싣고 아버지와 처자들과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저녁 숟가락을 놓기 바쁘게 상순은 먼저 토성 안 집에 들어가 형님과 아주머니 그리고 여조카 순애를 만나보고 웃새집에 가서 할아버지와 큰아버지 등 웃어른들을 일일이 뵈었다. 특히 사랑방에 가서 조선에서 피신해온 새 큰어머니 진달래와 막내동생 경수와 용천 대장의 아들 경주도 일일이 만나보고 엿 알까지 주었다.

병완은 상순을 데리고 토성 안의 촌공소에 갔다. 그러자 집안 웃어른들과 마을의 숱한 사람들이 낮에 일하고 곤한 것도 잊고 촌공소에 모여왔다. 그들은 조선전쟁터 무명고지에서 성칠이 희생된 일은 아직 모르고 상순의 곁에 모여 앉았다.

병완은 막내손자를 대견스레 바라보았다.

“얘야, 요즘 듣자니까. 미군과 장개석 국민당이 우리 연변에 특무를 많이 파견했다가 붙잡혔다고 하더구나. 네가 공안국을 비우고 여기 와서 되겠니?”

“괜찮습니다. 이젠 안도현 공안국이 서면서 내 공안국에 모집해 들여온 천용구가 부국장으로 됐습니다. 오래잖아 국장으로 올라갈 겁니다. 미군 특무들도 여기 와서 맥살도 못 추고 하나하나 잡혔습니다. 근심하지 마십시오.”

진달래는 경주와 경수를 양 무릎에 올려놓고 끌어안으면서 상순에게 물었다.

“미군 특무를 붙잡던 이야기를 좀 해 줘요.”

“옳소. 얘기해주오.”

그리하여 상순은 그간 연변에서 특무 잡이를 한 주요한 이야기만 하기 시작했다.

“지난번에 송강에서 있을 일입니다. 송강여관에 한 ‘지원군’이 숙박하러 와서 둔전개간판사처에서 내준 소개신을 내보이더랍니다. 송강파출소의 민경이 어디로 가는 길인가고 물으니 그자는 송강에서 료동성 무송까지 가는 길이라고 하더랍구마. 민경은 길림에서 무송으로 가자면 기차를 타고 가면 쉽겠는데 이렇게 에돌아 험한 수림 속 산길로 가려 한 것에 도리머리를 흔들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자가 수상했습니다. 그래서 문 밖에 보초를 세웠습니다. 이튿날 그 자는 현장을 찾아가겠다고 하더랍니다. 옛날 광복 전에는 안도현 소재지가 송강이었지만 지금은 아니 잖고 뭣입니까. 그래서 민경은 수상하다고 계속 심문을 들이댔습니다. 드센 정치공세에 결국 그자는 미군이 파견한 남조선특무 이군영이라고 탄백했습니다.”

모두들 웅성거렸다.

“에이, 허수아비 같은 특무 놈이야.”

이윽고 모두들 상순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계속 재미나게 들었다.

일찍 1952년 6월에 미군과 한국이승만 국군은 비행기로 “문대”로 부르는 5명 무장간첩소조를 로야령에 낙하시켰고 무송에도 “심대”라는 무장간첩소조를 낙하시켰던 것이다. 이군영은 문대와 심대의 특무들의 활동을 감독하고 순찰하라는 명령을 받고 장백산에 비행기를 타고 와서 낙하하였던 것이다.

그해 9월 중순에 그는 먼저 문대를 순찰하고 그 다음 무송에 가서 “심대”를 순찰하러 로야령으로 들어가려고 하였다. 그러나 갓 일떠선 연변조선족자치구 서기 주덕해와 공안국 책임자 요흔, 무장부 부장 풍립신의 령도 아래 연길현과 화룡현, 안도현 공안국에서는 숱한 병력을 투입하여 산을 봉쇄하고 수색했다. 그 바람에 그는 특무들과의 연계가 끊어진 바람에 송강려관에 들었다가 나포됐던 것이다.

이군영의 탄백에 근거해 공안부문에서는 미군 비행기와 문대, 심대의 연락시간은 하루 건너 기수일이며 연락지점은 로야령과 화라자라는 단서를 잡게 됐다. 안도현 공안국에서는 천용구 부국장의 인솔하에 공안일군들이 삼도백하로부터 로야령으로 수색하고 화룡현에서는 공안국장 강성만이 대오를 인솔해 청산리로부터 로야령 방향으로 수색해나갔으며 연길현에서는 공안국장 이창엽의 인솔하에 와룡골과 갑산을 거쳐 로야령으로 수색해 들어갔다. 주요 연락지점인 로야령과 화라자에 숱한 공안일군들을 매복시켰으며 일부 전사들을 나무꾼처럼 가장시켜 산에 올라가 관찰하게 했다. 나무꾼으로 가장한 전사들이 나무를 하는데 수상한 놈 둘이 산에서 내려와 화라자로 가는 길과 산 아래 정황을 물었다. 그자들이 매복 권에 들어가자 매복했던 전사들은 일제히 사격하여 당장에서 한 놈을 격살하고 문대의 대장 장대문이라는 놈을 생포했다. 천용구 부국장은 공안일군들을 이끌고 장대문을 앞세우고 화라자에 쳐놓은 초막을 기습하여 한창 공급물자를 보내라고 무전을 치던 특무 우송림을 나포했다. 원래 우송림과 두 특무는 밭 전(田)자로 삭정이에 불을 지를 준비를 해놓고 서울에서 날아온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우송림이 나포되자 나머지 두 놈은 수림 속으로 달아났던 것이다.

이윽고 비행기가 날아오자 공안일군들은 네 무지의 삭정이무지에 불을 질렀다. 이윽고 비행기는 낙하산 7개나 투하했다. 낙하산과 함께 떨어진 보따리를 헤쳐 보니 먹을 것과 옷이었고 위조한 돈과 소개신 따위였다. 그 후 달아난 두 특무 중에 한 특무는 도망치는 길에 한 아주머니를 보고 먹을 것을 달라고 빌었다. 그 녀성은 특무에게 먹을 것을 가져오겠으니 기다리라고 한 후 마을에 내려가 민병들을 데리고 와서 나포했다. 다른 한 특무는 너무 배고파 한 개인 집의 김치 움에 들어갔다가 주인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이렇게 문대와 심대의 특무들은 몽땅 붙잡히었던 것이다.

연변자치구 공안부문 책임자들인 요흔은 우송림을 설득하여 자기네 특무 본부에 무전으로 비행기를 보내 안도현 삼도구의 벌판에서 이군영을 데려가며 신호는 3발의 신호탄으로 하기로 했다. 동북공안부대 반 사령원이 거느리고 온 고사기관총으로 무장한 한 개 영은 미리 수림 속에 은폐해 미군 간첩비행기를 격추할 만반의 전투준비를 다했다.

원시림에 어둠이 깃들고 약정한 시간이 됐다. 과연 동북쪽으로부터 비행기가 우릉우릉 날아왔다. 우송림은 공안일군들이 시키는 대로 메가폰을 가지고 영어로 비행기에 대고 고도를 낮추라고 고함쳤다. 비행기는 점점 지면에 다가왔다.

이때 반사령이 팔을 홱 저으며 명령했다.

“사격!”

고사기관총이 불을 토했다. 비행기는 불길한 징조를 눈치 채고 고도를 높이면서 도망치려고 했다. 허나 때는 늦었다. 고사기관총의 밀집사격에 비행기는 불길을 뒤집어 쓴채 내리 꽂혔다.

꽝!

요란한 소리와 함께 비행기는 산산 쪼각이 나고 말았다. 미군 비행기조종사 둘은 즉살하고 나머지 도널과 픽터우는 비행기가 폭발되려는 찰나에 자동장치를 눌러 기체 밖으로 튕겨 나왔다. 공안전사들이 덮쳐나가 그들 둘을 생포했다.

그런데 “도널, 픽터우 사건”이 발생한 후 미국 국방장관 델레스는 성명을 발표했다. 그는 “격추된 비행기는 상인들의 무역비행기로서 중국 영공 장백산 림해에 잘못 날아들어갔다. 중국정부에서 도널과 픽터우를 즉시 석방해야 한다.”고 억지주장을 했다.

“도널과 픽터우는 중국인민군사법정에 의해 이제 우리 나라 영공에 침투한 간첩죄로 무기징역에 언도될 것입니다.”

상순의 말에 병완은 머리를 끄덕이었다.

“설마 했는데. 미국 놈들이 확실히 여기 연변까지 쳐들어올 궁리를 했구나.”

창준도 한숨을 후 내쉬었다.

“해방이 나서 좀 잘 살까 하니 그 놈들이 개지랄이구나.”

마을 사람들도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는 것을 둘러보고 상순은 손을 내저었다.

“여러분, 근심하지 마십시오. 우리 공안일군들이 변방부대 전사들과 함께 미국과 한국, 중국 대만 특무들을 몽땅 잡아치우니까 근심하지 마십시오. 누구나 다 경각성을 높여 인민전쟁의 넓은 특무잡이 그물을 늘여 놓는다면 하늘에서 날아 내린 특무들도 용빼는 수가 없을 겁니다. 혹시 그 놈들이 우리 지방의 지주들이거나 국민당 악질들의 가족들과 악랄한 반 중화인민공화국 음모를 꾸밀지도 모릅니다. 만약 의심스러운 일이 있으면 나한테 알리십시오.”

“그래야지.”

병완도 마을 사람들한테 특무들의 행적을 발견하면 촌공소에 보고하라고 일일이 신신당부했다.

이튿날 이른 아침에 상순은 숟가락을 놓기 바쁘게 아버지를 쉬라고 한 후 소 수레를 메워 몰고 명옥과 함께 소서구 밭으로 올라갔다.

이게 웬 일인가?

강냉이 단을 싣다가 보니 강냉이이삭을 거의 다 따가지 않았겠는가!

“이걸 보오. 강냉이 이삭이 하나도 보이지 않소.”

명옥도 강냉이 단을 살펴보다가 맥없이 물앉았다.

“초겨울이 되도록 제때에 실어가지 못해 이렇게 됐소. 남들처럼 남정이 있는가? 온 산에 뉘 집 곡식 단이 널린 게 있소?”

“곰 소행인가? 도둑놈들 소행인가?”

상순은 강냉이 단 옆에 난 발자국을 피뜩 보다가 무릎을 꿇고 앉아 자세히 살펴보았다. 깊이 푹푹 찍힌 구두 발자국을 보자 그는 혹시 특무들의 소행이 아닌가는 생각이 피뜩 들었다.

상순은 하얀 서리 살짝 깔린 옥수수 밭에 난 발자국을 따라 가보았다.

“여보, 빈 강냉이 대라도 싣구 가기요. 어디로 가오?”

“당신 혼자 싣고 가오.”

상순은 권총집에서 권총을 뽑아들고 어지러운 발자국을 따라 천지꽃산을 넘어 패용천산과 칼산 사이 골짜기를 따라 내려갔다. 아침 해가 뜨자 서리발이 녹으면서 발자국을 찾을 길이 없었다.

그는 조심스레 가둑나무가 우거진 수림 속을 둘러보았다. 갑자기 나무숲 속에서 무슨 바스락바스락 소리가 들리었다. 상순이 허리를 숙이면서 바스락 소리 나는 쪽을 살피었다. 누런 마른 나무 잎 속에서 다람쥐가 뛰어다니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머리를 돌려 가려다가 주춤 멈춰 섰다. 다람쥐가 노는 누런 마른 나무 잎 무지 옆에 통졸임 깡통과 강냉이 알을 다 뜯어 먹다 남은 강냉이 이삭이 눈에 띄었다. 그리고 삭정이를 주어다 불을 피웠던 것 같은 자리에 재무지가 있었다. 그는 버스락 버스락 마른 나무 잎을 밟으며 다가가 불에 구워진 마른 강냉이 이삭을 쥐어 보았다. 사람이 뜯어 먹다가 버린 것을 다람쥐가 뜯어 먹다 남은 것 같았다. 통졸임 깡통은 영어가 들어박힌 게 아닌가.

기민한 상순은 이 근방에도 미군이 아니면 남조선 특무들이 내려 왔다는 예감이 들었다.

(무장간첩?)

상순은 인차 슬금슬금 나무숲을 헤치고 골짜기를 벗어났다. 그는 권총을 허리춤에 차고 아무 것도 모르는 척 하면서 강냉이 밭에 가서 명옥과 함께 강냉이 단을 소 수레에 싣고 소서구에서 내려왔다.

그는 집 울안에 들어서자 인차 소 수레를 벗겨 놓고 정미소에 가서 할아버지를 찾았다.

병완은 겨 먼지를 툭툭 털면서 상순을 따라 촌공소로 갔다.

상순은 할아버지한테 금방 발견한 일을 죽 이야기했다.

“할아버지, 우리 지방에도 특무들이 활동하고 있는 거 같습니다. 마을에 소문을 내지 말고 암암리에 민병들을 무장시켜 천지꽃산 주위를 포위해 특무를 붙잡아야 하겠습니다. 밤이면 마을에 보초를 서고 이상한 놈이 있으면 체포해 심문해야 하겠습니다. 특히 금방 감방에서 나온 장충국과 장학산 같은 당지 지주들을 주의해야 하겠습니다.”

병완은 머리를 끄덕였다.

“그러자. 밤이면 무슨 비행기가 자꾸 서남 쪽으로 날아갔지만 우리 비행기인지 특무들이 침투하는 비행기인지 구별할 수 있어야 어쩌지.”

“건 우리 변방부대와 공안부문에서 할 일입니다. 특무들이 하늘에서 얼마 내려오든지 우린 몽땅 체포해야 합니다.”

병완은 막내손자를 대견스레 바라보았다.

“넌 공안국에 돌아가렴.”

“아닙니다. 여기 특무들을 내 손으로 잡아야겠습니다. 이 일을 인차 천용구 부국장에게 알려 사람을 보내라고 하겠습니다.”

병완은 머리를 끄덕였다.

할아버지 병완과 손자 상순은 한참이나 특무들을 붙잡을 계획을 면밀히 토론했다.

상순은 촌공소에서 나오다가 금방 위생학교에서 돌아온 촌공소 옆집에 있는 큰조카 공학을 만났다. 공학의 옆에는 얼굴이 보름달같이 환한 처녀애가 서서 웃고 떠들다가 생글거리는 눈길로 쳐다보는 것이었다.

“벽선이, 인사하오. 내 삼촌이오. 영월구 공안국 국장을 하오.”

공학은 인사시키면서 싱글벙글 웃었다.

벽선은 허리를 구십도로 굽히면서 인사를 올렸다.

“안녕하십니까? 삼촌님.”

“엉? 오.”

상순이 놀라 하는데 옆에서 너부죽한 공학이 싱글벙글거렸다.

“용정위생학교 여동창생 김벽선입니다. 부모와 삼촌의 허락을 받고 약혼식을 할까 해서 데리고 왔습니다.”

“그래? 거 참 좋은 일이구나. 먼저 할아버지와 노할아버지께 인사해라.”

그리하여 상우네 부처간과 상순은 촌공소에 들어가 병완에게 벽선을 인사시켰다.

병완은 깎듯이 인사를 올리는 활발한 증손비감을 보고 수염을 어루 쓸었다.

“새 애기 올해 나이 어떻게 됐소?”

“열여덟 살입니다.”

“그래? 음, 맏증손자 공학이 올해 스무 살이니까 나이도 맞구나. 우리 집안에 공학이 의학공부를 하니까 또 의사 증손비가 들어서는구나. 내 오래 사니까 증손비도 다 보는구나. 허허허.”

병완은 반가와 어쩔 줄 모르면서 벽선과 이것저것 물었다.

“요즘 의학공부 바쁘지?”

벽선은 머리를 다소곳이 숙이었다.
“맨 공부만 하면 괜찮아요. 조선에서 숱한 부상병들이 들어와서 치료해 주다나니 공부할 새도 별로 없습니다. 우린 요즘엔 도문과 개산툰에 가서 부상병들을 구급합니다.”

“그래? 부상병들을 구급하는 게 좋은 의사공부지. 허허허.”

한참 후 상우는 공학과 벽선을 데리고 상순이네 집으로 찾아가 아버지께 인사시켰다. 기준과 명옥이 반가와 한 것은 두 말할 것도 없었다.

상순은 공학을 조용히 불러 천지꽃산에서 발견한 일을 말해주고 나서 벽선을 데리고 유람하는 셈 치고 영월구에 가서 천용구 부국장에게 정황을 알리고 민경들을 데리고 오라고 기별하게 했다. 한편 길림에 기관사 기술을 배우러 갔던 둘째조카 열대여섯 살 밖에 안 되는 동선을 시켜 진수해파출소와 용정 공안국에 가서 함흥 촌 부근의 적정을 알리라고 했다.

특무들을 놀라게 하지 않으려고 상순은 아무 일도 없는 듯이 소 수레를 몰고 명옥과 함께 소서구로 강냉이 단을 실으러 느릿느릿 올라갔다.

                9. 함흥 촌에 나타난 용천 대장

초겨울의 싸늘한 해가 중천에 걸렸을 때다. 범이 자기 흉을 하면 온다고 진짜 남조선 특무 세놈이  조선인민군 복색을 하고  핳흥촌에 접근해 오고 있었다.
그 놈들이 칼산을 넘어 령길을 타고 천지꽃산 기슭에 이르러 함흥촌에 다가갈 때다.
"아니, 함흥촌으로 가 뭘 해요?"
뒤에서 따라오던 뱁새눈이 주춤 멈춰섰다.
용천은 깜짝 놀랐다.

(이 놈 뱁새눈이 어떻게 함흥촌을 알지?)

용천이 뒤돌아보니 뱁새눈은 똑 마치 얼음강판에 들어선 황소 눈깔 같이 부릅뜨지 않았겠는가.. 그 뱁새눈에는 당황함과 공포의 그림자가 스쳐지나가고 있었다.

하긴 똘만은 함흥촌은 살아남기 힘든 사지로 기억됐던 것이다. 항일전쟁시기에 함흥촌 동쪽에 있는 늙은 비술나무 밑에서 밤중에 기준과 딱 마주쳤다. 제딴에는 빨리 반응해 권총으로 기준을 제압했다. 그러나 진달래가 날린 돌멩이에 맞아 권총을 떨어뜨렸다. 뒤이이 날아온 돌멩이에 머리를 맞았다.  그 틈에 기준도 홱 돌아서  무쇠주먹으로 똘만의 대가리를 썩은 호박 치듯 했다. 똘만은 밤중에 들이닥친 홍두깨에 얻어맞고 당장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함흥촌에 들어가는 날엔 기준과 병완이 날 알아볼텐데 살아남을 수 있어? 안간다. 안가.)
뱁새눈은 친일주구 신분이 드러날 위험도 무릅쓰고 생떼질 썼다.
"함흥촌에 가지 말깁소."
용천이나 병수나 다시 한번 놀랐다.
(이 놈이 황해도 놈이라더니? 함경도 사투리를 써?)
병수는 외까풀눈을 가슴츠레 뜨고 뱁새눈을 쏘아보았다.
(점점 더 수상해. 이 놈도 분명 한철주와 한 고향 친일주구인 거 같아.)
병수는 어떻게 처치할가 궁리했다.
그는 용천을 한쪽 구석에 데리고 가서 저쪽에 멀쩡히 서 있는 똘만을 쳐다보며 나직이 말했다.
"저 놈 뱁새눈이 분명 한철주가 김연대장을 암살하려고 파견하겠다던 놈인 거 같아요."
"그래? 나도 의심했어."
땅!
총소리와 함께 용천이 왼팔을 붙잡고 쓰러졌다.
자기를 의심하는 눈치를 챈 똘만이 선손을 썼다.
용천은 쓰러져서도 번개같이 권총을 꺼내들었다. 그때 병수가 권총을 뽑아 똘만을 쏘았다. 똘만이 손목을 붙잡으며 권총을 툭 떨어뜨렸다. 
병수가 재차 쏘려할 때다.
"잠간!" 
용천이 말렸다.
그는 천천히 일어나 권총으로 똘만을 겨누며 다가갔다.
"왜 날 쏘았어?"
"네놈은 한철주 형제를 암살한 놈이야. 죽어 싸다."
"넌 누구냐? 어떻게 함흥촌까지 알어?"

똘만은 뱁새눈을 무섭게 부라렸다.
"한사단장 생전 명을 받고 네놈들을 죽이러 따라왔다.  한사단장 형제 원쑤를 갚지 못하고 죽는게 한일 뿐이야,"
"똘만?"
용천과 병수는 놀라며 서로 눈길을 맞추었다. 크나큰 충격이었다.
그 찰나 똘만은 발길을 날려 용천의 손목을 걷어찼다. 권총이 저만치 날려갔다. 똘만은 어데서 그런 힘이 생겼을가. 머리로 병수를 헤딩해 쓰러넘어 뜨렸다. 그리고는 곤두박질쳐 산골짜기로 데굴데굴 굴러내려갔다.
"서랏!"
병수가 똘만을 추격했다.
"관둬!"
용천은 병수를 불러세웠다.
"왜?"
병수는 의아해했다.
"저 놈을 살려뒀다간 우리 당해요."
용천은 똘만이 떨어뜨린 권총을 주어들고 허구픈 웃음을 지었다.
"그 놈이 빈손으로 어쩐다고? 흥! 저 놈은 함흥촌 민병들한테 맡기고 우린 함흥촌으로 간다." 
용천은 아픔을 참으며 권총을 허리춤에 찼다.
"어서 마을에 내려가자구." 

"아니, 총소리를 듣고 숱한 놈들이 포위할 텐데."
"민병들이 왁작거리며 저 놈을 포위하는 틈에 우린 마을에 내려가 배터지게 밥이나 먹구 봅세."

용천은 병수를 돌아보며 대수롭잖게 말했다.
"남조선 특무캉 싸우다 부상당한 조선인민군인데 뭐가 두려워?"
"오- 알겠어요."
병수는 로련한 용천한테 머리를 숙이었다.
용천은 진달래와 아들을 만나는 것이 우선이었다. 병수는 또 혼자 삼촌 성칠을 살해한 용천을 처단해버리긴 힘들다는 것을 알고도 남음이 있었다. 격투나 사격이나 다 용천에 비해 열세였기 때문이다. 그는 마을에 내려가면 친척들의 힘을 빌어 용천을 죽이기로 작심하고 용천을 따라 나섰다. 

용천은 병수를 데리고 태평강 버들숲속으로 달려가 숨어들어갔다. 뒤이어 번개같이  함흥촌 남쪽에 있는 한족 묘지에 이르러 마른 풀 숲에 숨어서 망원경을 들고 마을 안의 동정을 꼼꼼히 살폈다. 마을 사람들은 마당에서 도리깨질을 하다가 그만두고  종소리나는 토성안 촌공소로 달려갔다. 뒤이어 민병들이  총을 들고 우르르 쓸어나왔다. 그들은 금방 총소리 울린 서쪽 천지꽃 산쪽으로 달려가는 것 같았다.
"때가 왔어. 마을엔 무장민병들이 나나가 텅  비었을 거네."

용천은 멜가방에서 붕대를 꺼내 왼팔을 싸매 어깨에 처매었다. 그는 뒤에 엎뎌 있는 병수를 돌아보면서 머리를 끄떡 하더니 마을 어귀로 스적스적 걸어갔다.

원래 용천은 늦가을에 장백산에 날아와 내린 후 인적이 없는 원시림을 이용해 유격대를 확대하고 유격전을 벌리려고 했다. 갓 연변에 날아와 내렸을 때에는 가을이기에 그래도 밭에서 강냉이랑 고구마랑 감자랑 구워 먹으며 기상과 적정을 정찰해 무전으로 무난히 도꾜 미군 본부와 서울의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고할 수 있었다. 맥아더 장군은 장백산에서 보낸 군사정보를 도꾜 안방에서 속속들이 보고 받고 나서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나 장백산 일대에서 공안부문과 변방부대에 숱한 특무들이 붙잡히고 장백산 일대에 대한 봉쇄와 토벌이 심해지자 더는 장백산 일대에서 활동할 수 없었다. 게다가 서울 본부와 왕복 비행기와의 연계도 잘 되지 않아 압축과자와 동복을 제때에 공중투하해주지 않은데다가 설상가상으로 초겨울에 들어서면서 산에서 추워 견딜 수 없었다. 그리하여 용천은 울며 겨자 먹기로 절벽 끝 전술을 써서 대담히 삼촌 김덕성과 진달래가 있는 함흥 촌으로 침투해 잠복해 있으면서 정보를 제공하고 삼도만과 왕청 로야령을 거쳐 자기가 활동하던 북만까지 손을 뻗칠 생각을 했다. 그는 먼저 대담히 이병수를 데리고 함흥 촌으로 슬금슬금 다가왔던 것이다. 그는 꼬리가 밟힐 것 같으면 삼촌과 진달래와 경주를 데리고 남조선으로 날아가려고 마음먹기까지 했다.

그들은 먼저 곰과 범이 무리를 쳐 다녀 마을 사람들이 별로 다니지 않는 패용천산과 칼산에 숨어 있으면서 진수해와 함흥 촌 일대의 정황을 살폈다. 아무리 망원경으로 살펴 보아도 진수해에 옛날처럼 유격대나 군부대가 들어 있지 않는 것 같았고 함흥 촌에는 집단부락 때거나 토비숙청 때처럼 경계가 삼엄하지 않았다. 이전에 마을에 세웠던 망루도 보이지 않았으며 둘레에 세운 목책은 수레를 몰고 드나들기 편리하게 드문드문 끊어나 있었다. 정말 경각성은 흐지부지하고 평화로운 분위기에 푹 빠져 있는 시골 마을로 보였다. 용천은 네 특무를 데리고 패용천산과 칼산 사이 깊숙한 골짜기에 숨어 낮에는 까딱하지 않고 나무 잎을 들쓰고 숨어 있었다. 밤이면 강냉이 밭에 가서 마른 강냉이를 뜯어다가 삭정이로 불을 피워놓고 구워 우두둑 우두둑 뜯어 먹으면서 주린 배를 달래고 추위를 물리치면서 견디었던 것이다. 불도 너무 오래 피우면 발각될 거 같아 추운 대로 과수원의 농막에 들어가 우둘우둘 떨면서 윤번으로 자거나 나무 숲속에 들어가 나뭇잎을 덮고 새우잠을 자군 했다. 기아와 추위에 허덕이던 나날을 생각만 해도 진절머리났다.

용천은 마을에 들어가 인차 토성 안 집 앞에 자리 잡은 삼촌 덕성이네 집 마당으로 스적스적 다가갔다.

“아니, 이게 누구냐? 용천아...”

“쉬-”

용천은 식지를 입술에 대며 아래 위 집을 살피더니 황급히 삼촌의 팔을 잡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집집마다 마당에 수수대바자를 높이 해 세워 그들을 본 것 같지 않아 다행이었다.

윗방 구들에 올라가자마자 용천은 눈물을 줄줄 흘리며 삼촌에게 넙적 꿇어 앉아 절을 올렸다.

“삼촌, 그간 잘 계셨어요?”

“오, 그래, 넌 고향에 갔나? 어떻게 돼 여기까지 왔어?”

용천은 구들에 앉으면서 병수를 인사시켰다.

“내 전우예요. 이 대대장 인사하게나. 내 작은아버지야.”

병수도 속으로 살려 주십사하고 넙적 큰절을 올렸다.

“어떻게 한 입으로 말하겠어요? 진달래와 경주를 찾아 조선 팔도를 다 돌았어요. 개성에도 가서 돌아보았지만 끝내 찾지 못했어요.”

덕성은 용천의 손을 잡고 물었다.

“그래, 조선에서 칠백을 만났어?”

“만났어요.”

용천은 “칠백은 죽었어요.” 하고 말하려다가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응어리진 마음의 어혈과 함께 겨우 꿀꺽 삼켜버리었다.

그는 작은아버지 갈망에 찬 눈길을 피하며 머리를 툭 숙이었다.

“그래 그 자식 지금 어디에 있어?”

“우리 조선 인민군은 우리 고향 경주를 점령하고 부산을 향해 마구 밀고 나갔어요. 그때 칠백은 부대를 따라 경주를 거쳐 부산에 나가다가 미군의 폭격에 막혀 북으로 철퇴했지요. 그때 칠백은 산에 갇히었다가 당지 유격대와 함께 경주에까지 철거해왔다가 고향에서 나를 만났던 거예요.”

“그래 그 자식 지금 경주에 있어?”

“예. 경주에서 작은아버지 오기를 기다리고 있어요.”

“이 난장판에 어떻게 그리 먼 곳에 가?”

덕성은 너부죽한 얼굴에 수심의 그림자가 흐르고 있었다.

“지금 가지 않으면 3.8선이 가로 막히는 날엔 못 나가. 아무뜨므(아루래도) 이 내 조카 방법을 대 보지라.”

“저 뒤 웃새집 성칠 대장을 만났댔어?”

그 말에 용천은 옆에 앉은 병수의 눈치를 힐금 곁눈질해 보았다.

“만나지 않고요.”

“그래 용천은 다 잘 있나?”

“에이, 이 난시 판에 미군 놈들의 폭격에 즉살했어요.”

“음, 그랬구나. 그런데도 진달래 조카며느린 성칠 대장이 살고 네가 죽었다고 했어.”

“말도 안 돼요. 이렇게 펀펀히 살았구먼요. 진달랜 지금 확실히 함흥 촌에 있어요?”

“저 뒤 창준이네 사랑방에 있는 기여.”

“경주는 잘 있는기오?”

“그래, 진달래캉 잘 있어.”

용천은 머리를 끄덕이더니 덕성을 쳐다보았다.

“건 왜 삼촌 집에 있지 않고 그리로 갔어?”

“너를 기다리다가 죽었다고 성칠 대장한테 재가 가서 경수라는 애까지 낳았어. 자기 시집에 간 거야. 병완 영감은 새 맏며느리를 얼마나 귀해 한다고.”

그 말에 병수는 속으로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비롯한 친척들이 이 마을에 살고 있다는 것을 대뜸 알게 됐다. 허나 그런 내색을 내지 않고 덕성 앞에서 연극을 심통하게도 노는 용천을 속으로 웃으며 얄미운 웃음을 지었다.

“삼촌, 내캉 왔다는 말 누구한테도 알리지 말라우. 가만히 웃새집에 들어가서 진달래캉(진달래와) 경주만 조용히 데리고 오시라우.”

“음, 그래. 뭐 훔친 색시냐? 원래 네 색신 걸.”

덕성은 그 자리로 일어나 웃새집으로 들어갔다.

병수는 따라 가고 싶었지만 용천의 눈치가 무서워 생색을 내지 못했다.

한참 후 진달래가 경주의 손을 쥐고 경주를 업은 채 덕성을 따라 허둥지둥 집안에 들어섰다.

“어떻게 된 일이예요? 그렇게 애타게 기다려도 나타나지 않던 당신이 귀신처럼 나타났어요?”

용천은 진달래를 와락 끌어안으려고 했다. 허나 진달래가 경주를 안겨주면서 밀막았다.
“경주야, 아빠야.”
"아!"
용천은 왼팔 총상이 아파 상을 찡그리며 경주를 받아안았다.
"어머! 팔 다쳤어요?"
"오. 남조선 특무캉 싸우다가 다쳤어. 서산에서 총소리 나는 걸 듣지 못했어?"
"그래요. 그래 특무놈은 어떻게 됐어요."
"그 놈도 손목 다쳤어. 노루보담 더 빨리 도망쳐 버렸어."
"그 놈이 도망치면 어데 도망쳐? 상순이 서산에 있는데. 숱한 민병들도 포위하러 갔는데. "

경주는 용천에게 안겨 말똥말똥 쳐다보다가 몸부림치며 진달래한테 되돌아가려고 했다.

“얘가 경주지? 맞지?”

“어떻게 이름까지 알아요?”

진달래는 철색얼굴에 이상해하는 그림자가 언뜻 비치었다.

“성칠이 알려주었지.”

“그래 성칠 연대장은 어떻게 됐어요?”
용천은 얼렁뚱땅 얼려넘기려고 엮어댔다.

“무명고지에서 미군 폭격기에 폭사했어.”

“진짜예요?”

용천은 머리를 무겁게 끄덕였다.

“그래, 무명고지에서 처참히 희생됐지라우.”
"아니야, 저 놈이 죽였어."
병수는 이렇게 까밝히고 싶었다. 그러나 억지로 참았다.

진달래는 잔등에 업혔던 경수를 내리워 끌어안고 엉엉 대성통곡 쳤다.

“경수야, 불쌍한 경수야, 으흐흑, 흑흑.”

진달래는 등에 업었던 경수를 품에 돌려 안고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불쌍해 울었다. 어머니가 울자 경주와 경수도 덩달아 잉잉 울었다.

셈이 없는 경수는 울며 어머니의 얼굴을 고사리 손으로 매만지면서 “엄마, 금방 형님 보고 아빠 왔다 해놓고. 경주 아빠 내 아빠 아냐?” 하고 종알거렸다.

그 말에 진달래는 더욱 슬피 엉엉 울었다.

그때 용천이 경주와 경수를 한 품에 와락 끌어안았다.

“그래, 난 너희들 아빠야. 젬만(어머닌) 아빠를 만나 기뻐 이러는기여. 울지 마.”

병수는 진달래와 용천 그리고 애들을 둘러보며 오리무중에 빠졌다.

(도대체 무슨 갈래 판이야? 할아버지를 만나면 진상과 내막을 다 알 수 있겠지.)

진달래는 한참 후에야 울음을 그치고 용천과 마주 앉았다. 경주는 어머니 잔등에 매달려 아버지라는 용천을 말똥말똥 쳐다보고 경수는 어머니 무릎에 앉아 어머니 볼을 고사리 손으로 매만지면서 놀았다.

진달래는 저고리 고름으로 눈물을 훔치면서 병수를 곁눈질해 보더니 용천에게 물었다.

“그래, 그간 어디 갔댔어요?”

용천은 그제야 꺽꺽거리며 병수에게 찔끔 눈짓했다.
“부상병을 함께 데리고 들어온 내 수하 병수야.” 

진달래는 병수에게 눈인사를 했다.

그러자 병수는 “사모님, 천천히 얘기하세요.”라고 하고는 권총집을 뒤로 하며 윗방으로 올라가 미닫이문을 꾹 닫고 덕성과 한담했다.

용천은 진달래 손을 덥석 잡았다.

“여보, 당신을 찾아 조선 팔도를 다 헤맸어. 여기 있는 줄도 모르고.”

용천은 진달래를 찾아 헤매던 얘기를 죽 했다.

그러자 진달래도 용천을 기다리던 얘기를 죽 이야기하고 나서 울먹이며 뒷말을 이었다.

“당신을 기다리다 못해 전 장백산 밀영에서 희생됐다고 여기고 성칠 오빠한테 재가했던 거예요. 용서해요. 그래 성칠 오빠와 한 부대에 있었어요?”

“아니야, 난 혹시 당신 경주에라도 올까 해 고향에 갔다가 철퇴하던 조선인민군 속에서 성칠 형을 만났던 거야. 그런데 만난 날이 장날이라고 그간 지난 이야기를 듣다가 그만 미군 폭격기 공습을 받아 무명고지에서 성칠 형이 폭사당한 거야."
(아니야, 성칠 삼촌은 저 놈이 죽였어요.)
병수는 방에서 듣다가 몇번이고 성칠 삼촌이 피살된 진상을 까밝히고 싶었다. 진달래와 함께 삼촌을 살해한 원수놈을 당장 척살하고 싶었다. 그러나 둘이선 용천을 당할 것 같지 못해 억지로 꾹 참았다.
용천은 그럴듯하게 엮어나갔다.
"지나간 일은 어쩌겠나. 난세에 이런 일이 기수부지니까. 이젠 성칠 히야(형) 잊고 날 따라 가자. 애들을 어떻게 하겠나? 며칠 후 기차에 앉아 가지.”
땅!
갑자기 서산쪽에서 총소리 울렸다.
땅! 땅! 

용천은 습관적으로 허리춤에 손이 갔다.
"허허. 상순이 특무 잡는 모양이군 그래."
사실 그때 상순이 똘만과 싸우는 시각이 맞았다.
용천은 자꾸 바깥 동정에 귀를 기울이곤 했다. 급촉한 발걸음 소리가 나도 자꾸 말을 중단하는 것이었다.

진달래는 유격대 노련한 중대장의 예민한 눈길로 수상한 감을 느꼈다. 그녀는 짐짓 아무 것도 눈치 채지 못한 척 하면서 물었다.

“그래 가면 어디로 가요?”

용천은 진달래의 눈치를 흘금 보다가 중얼거리었다.

“부상병 호송임무는 완수했으니까. 시름 놓고 돌아가야제. 지금 전쟁은 한국군, 아니, 남조선 괴뢰군과 조선인민군이 대치상태에 처했어. 아무리 생각해 봐도 3.8선이 꽉 막히기 전에 고향 경주를 돌아갔으면 좋겠는디. 작은아버지도 모시고 가야제.”

진달래는 도리머리를 보일락 말락 흔들었다.

“이 난세에 어디로 가요? 황차 당신의 고향 경주는 남조선인데 우리 같은 빨갱이출신이 어떻게 가요?”

그 말에 용천은 진달래의 손을 놓았다.

“우리 모두 이념을 버려야제. 내 고향 경주에는 경주와 경수한테 물려줄 수십 헥타르 땅에 고풍스런 팔간 집 몇 채 있어. 내 고향에 돌아가자.”

진달래는 한숨을 후 내쉬었다.

“이 난세에 여기 함흥 촌에 있다가 전쟁이 끝나자마자 나가면 어때요?”

“안된다니까. 전쟁 끝나면 3.8선이 꽉 막혀버려. 지금 한창 정전담판중이야. 지금 같은 난시에 나가지 않으면 못 나가. 이번만 내 말 들으라니께.”

진달래는 마음이 한 곬으로 달리지 못하다가 나중에 틈이 깊숙이 벌어지고 있음을 직감했다.

그렇다. 남북 갈등이 최고조에 이른 시절에 그들 부부는 이념의 높은 장벽을 넘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애들을 사이에 놓고 매만지면서 한참이나 이 이야기 저 이야기 했다.

진달래는 권총을 벗어 벽에 걸어놓고 부엌에 내려가 점심을 지었다. 쌀을 가마에 앉혀놓고 부엌에 내려가 아궁이에 불을 지피자 풍무를 웅웅 돌리는 진달래의 내심은 복잡하기로 비길 데 없었다.

그는 부상병호송임무를 맡고 왔다는 용천이 혹시 남조선에서 파견한 특무가 아닌가고 의심하기 시작했다. 허나 경수가 이미 애비를 잃었는데 경주마저 애비를 잃게 할 수는 없었다. 순간 내심에서 화산이 폭발할 듯이 마음이 아프고 머릿속에서는 격렬한 사상투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용천과 병수는 오랜만에 진달래가 지은 새하얀 이밥에 따뜻한 장국을 배불리 먹었다. 대뜸 눈이 툭 불거져 나오는 듯 했다.

용천은 나머지 밥이 한 대야나 되는 것을 보고 산골짜기 수림 속에서 우둘우둘 떨며 주린 창자를 달랠 대만 특무들이 생각나 자꾸 바깥을 내다보았다.

“언제 돌아가요?”

진달래는 설거지를 하면서 피뜩 용천을 돌아보며 물었다.

“한 열흘 후에 가면 어떨 가? 작은아버지 타작이나 다해 낟알을 팔아 가지고 가면 좋을 거 같아. 작은아버진 영월동에서 일본 놈들에게 칠석과 옥녀를 잃었는데 이번에 칠백도 잃었어. 의지가지 없는 작은아버지도 모시고 가야제이.”

용천은 한숨을 후~ 땅이 꺼지게 내쉬었다. 그도 기실 빨갱이 물에 폭 젖은 진달래를 데리고 간다는 것은 식은 죽 먹기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도 남음이 있었다. 다만 어린 경주가 가는 뉴대로 돼 높은 장벽 양쪽에 있는 자기와 진달래를 억지로 한데 묶으려고 하고 있다는 것을 깊이 느꼈다.

(더러운 년, 안 갈라면 말라지. 경주만 빼 가면 다야.)

진달래는 경수를 둘 쳐 업더니 물었다.
“저 뒤에 성칠 오빠네 아버지를 만나보러 가지 않을래요?” 

용천은 가지 않으면 진달래와 병완의 의심을 받을 것 같아 마지못해 우쭐 일어났다.

“병수, 함께 성칠 연대장 아버지를 만나보러 갑세.”

“예.”

용천은 경주의 손을 잡고 병수와 함께 진달래를 따라 눈에 익은 토성 안 집을 지나 웃새집으로 들어갔다.

그때 뒤에서 귀에 익은 우렁우렁한 목소리가 울렸다.

“며느리, 보기요.”

용천과 병수가 본능적으로 권총집에 손이 갔다가 내리웠다.

억대우 같은 병완이 토성 안에서 나오며 그들을 이상한 눈길을 보는 것이었다. 병완과 용천은 거의 동시에 놀란 눈길을 보냈다.

“할아버지, 그간 무사했어요?”

“아니, 이게 몇 해만이오?”

그들 둘은 서로 굳게 악수를 나누었다.
"용천 대장은 금방 서산에서 남조선특무하고 싸우다가 놓쳤대요."
진달래는 시아버지를 보고 금방 들은 말을 쭉 했다.

“오, 그래? 왼팔을 그래 다쳤겠구나. 어서 들어가서 천천히 얘기하기요.”

병완은 용천을 데리고 토성 안 촌공소로 들어갔다. 병수는 자기 눈 앞에서 걸어가는 분이 바로 자기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그렇게 찾던 할아버지라는 것을 알고 놀랍기도 하고 반갑기도 했다. 그러나 자기 신분을 밝히기 어려운 형편에서 할아버지를 인사할 수도 없는 것이 너무나도 안타까웠다.

이때 상순이 소 수레를 몰고  민병들과 함께 토성 안에 들어섰다. 수레 우에는 군복을 입은 자가 실려 있었다.
       모두들 놀라운 눈길을 보냈다.
       특히 용천과 병수는 상순을 보고 깜짝 놀랐다. 마을에 군복을 입은 공안이 마을에 있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똘만이 끝내 당했구나.)
        용천은 가까스로 진정하며 수레에 다가갔다. 아니나 다를가. 똘만이 가슴에 피 랑자한 채 쓰러져 있었다. 
       
      원래 똘만은 용천과 병수의 마수에서 벗어나 산꼴자기로 굴러내려갔었다. 그는 손목 상처를 붙잡고 천지꽃산을 넘어 소서구 쪽으로 도망쳤다.그런데 원쑤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칼산 쪽으로 도망치려고 하다가 소서구 골짜기에서 상순과 맞딱드릴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상순은 총소리를 듣자 명옥과 함께 수수를 싣다가 권총을 빼들고 이쪽으로 달려왔었다. 그가 천지꽃산 중턱에서 볼라니 조선인민군 복색을 한 두 사람은 골짜기에  굴러들어간 자를 추격하다가 말고 태평강 쪽으로 내려가는 것을 보았다. 그는 나무숲 속에 엎드려 소서구 쪽으로 올라오는 자를  기다렸다. 그런데 가까이이 온 걸 보니 역시 조선인민군 복색을 하지 않았겠는가.
"헛참, 조선인민군끼리 싸워? 혹시 남조선 특무?"
번개처럼 뇌리를 치는 생각에 상순은 권총을 단단히 틀어쥐고 버스럭거리는 쪽을 주시했다.
한참후 한 자가 손목을 붙잡고 씩씩거리며 다가왔다.
"꼼짝 말엇!"
"억!"
그 자는 주춤 멈춰섰다. 뱁새눈으로 나무숲 속을 두리번거렸다.
"손 들엇!"
똘만은 손을 들었다. 
상순이 천천히 나무 숲속에서 나왔다.
(에크! 저게 기준이 아닌가!)
그는 기준과 똑같이 생긴 상순을 알리 없었다.
"헤헤헤. 장관님, 난 조선인민군입구마. 총을 거둡소."
상순은 총으로 겨누며 물었다.
"왜 마을로 내려가지 않고 이런 델 숨어 다니오?"
똘만은 잘도 둘러댔다.
"헤헤. 금방 남조선 특무들과 만나 싸웠소. 그 놈들은 둘인지라. 총도 있는데 난 맨손으로 혼자 어떻게 당하오? 부상도 당했지."
상순은 금방 본 정황과 맞아떨어진다고 여겼다. 그가 권총을 거두며 다가갔다.
"가이오. 함께 남조선 특무를 붙잡으러 가기오."
"그러기오."
똘만은 상순이   경각성을 늦추는 틈을 타 발길을 날려 상순의 아래배를 걷어찼다.
"억!"
상순은 허리를 굽혔다.
똘만이 재차 무릎을 쳐들어 턱을 걷어올리려고 할 때다.
땅!
상순은 허리를 굽히며 권총을 뽑아 갈겼다.
똘만은 본능적으로 옆으로 몸을 피했다. 총알이 빗나갔다.
상순은 재차 덤벼드는 똘만을 향해 련발 사격했다.
땅! 땅!
똘만은 아무리 특무훈련을 받았지만 상순의 총알을 피하지 못했다.
    몇십년 친일주구로 개처럼 뛰여다니다가 몇번이고 죽을 고비를 넘긴 똘만이였지만 끝내 영용한 공안국장 상순의 손아귀를 벗어나지 못하고 만주 땅에서 개죽움을 명하지 못하고  말았던 것이다. 
수수단을 널린 산기슭에서 민병들이 총을 겨누고 몰려들었다. 그들은 상순의 지휘 아래 특무 똘만의 시체를 수레에 싣고 마을로 내려 왔던 것이다. 
 
      병완은 소수레에 와서 시체를 이리저리 보더니 깜짝 놀랐다.
"이놈이 우리 고향부터 따라다니던 친일주구 똘만 놈이구나."
용천과 병수는 서로 눈길을 마주쳤다.
(똘만놈 맞구나.)

병수는 권총을 찬 상순이 뒤따라 들어오는 것을 보자 등곬이 싸늘해 주춤 멈춰 서며 자연히 허리춤에 손이 갔다. 그러자 상순도 멈칫하며 손을 권총집에 가져갔다.

그때 병완이 뒤돌아보며 손짓했다.
“상순아, 누가 왔는가 봐라!”

“아, 용천 대장!”

상순은 뛰어나가며 환성을 질렀다. 그러나 세귀눈만은 용천의 아래위를 무섭게 살폈다. 금방 특무를 붙잡은 시점에 불쑥 마을에 나타난 불청객이 아닌가. 

“아니, 이거 우리 꼬마 유격대원 상순이 아닌가?”

용천은 상순을 와락 끌어안고 아닌 보살을 떨며 잔등을 툭툭 다독였다.

“야, 상순이 벌써 이렇게 컸어. 너거 공안국장을 한다더니 왜 여기 함흥 촌에 있어?”

“공안국장을 그만두자고 그러오. 이젠 미제와 남조선 괴뢰군 특무들도 다 붙잡았지. 할 노릇이 있습니까? 괜히 아버지께 효성도 하지 못할 거 같아 공안국 국장을 그만둘 예산입니다.”

상순은 박성우가 다른 현 공안국으로 전근돼가 일하기 편리해졌지만 집 근심만은 마음 속에서 내려놓을 수 없었다. 그는 잠시 함흥 촌에 돌아와 효성도 하고 사회주의 제2고향 건설 위업에도 힘쓰는 길을 가면 좋다는 결단을 내렸던 것이다. 또 기회를 보아 조선전선에 나가 제 손으로 미제와 이승만 괴뢰군을 까부시려고 마음 먹었다. 그는 공안국 국장이고 뭐고 자기  벼슬 같은 건 초개같이 여겼다. 오직 제2고향 연변조선족자치구와 새 중국을 보위하는데 낫으면 국장이고 뭐고 다 팽개치고 전선에 나갈 각오가 돼 있었다.

병수는 부리부리한 세귀눈에 예지와 독살이 번쩍이는 삼십대 초반의 이 사내가 성칠이 말하던 공안국장을 하는 상순 형님이라고 단정했다.
"어떻게 돼 여기 왔습니까?"
"오- 부상병을 호송해 개산툰에 왔댔어."

상순은 용천이 왼팔을 어깨에 처맨 걸 보고 의아해했다.
"전선에서 상했습니까? 피가 아직도 흐르네."
용천은 오른 손으로 상순의 어깨를 다독였다.
"금방 저 놈과 싸우다가 다쳤어."
그제야 상순은 짚이는 데 있어 머리를 끄덕였다.
"금방 저도 서산에서  저 놈하구 싸우는 걸 다 봤어요."
그 말에 용천과 병수는 등곬이 다 싸늘해졌다.

병완은 촌공소에 들어가 자리를 정하고 앉자마자 용천과 진달래 그리고 병수가 있는 것도 관계하지 않고 상순을 꾸짖었다.

“어떻게 공안국장 자리까지 올라갔다고 하지 않겠다고 하느냐? 너를 배양한 당 조직에 미안하지 않니? 너를 입당시킨 이계삼 부장과 허영주 서기에게 미안하지도 않니?”

상순은 머리를 수기고 듣더니 무겁게 입을 열었다.

“옆구리를 괭이에 찍힌 아버지가 상한 몸으로 늘그막에도 기음을 매는 걸 보니 죄송스럽습디다. 아무데서나 효성을 하면서 혁명을 하면 됩니다. 조직에 몇 번이나 천용구를 국장을 시키라고 했습니다. 천용구를 현공안국 부국장으로 제발시켰는데 아주 전도가 유망합니다. 오래잖아 국장으로 될 겁니다. 현공안국은 근심할게 없습구마. 이제 조선전선에 나가 미제와 남조선 괴뢰군과 생사결판을 내러 갈가 합꾸마.”

병완은 마지막으로 상순에게 나직이 말했다.

“예로부터 충신은 효자로 될 수 없다고 했다. 혁명을 하려면 너무 부모한테 뒷다리를 묶이워선 안 된다. 내일 당장 공안국으로 돌아가라.”

상순은 찍 소리 못하고 세 귀 눈으로 용천과 병수를 흘끔 곁눈질했다. 자꾸 눈이 용천과 병수가 땅바닥에 벗어놓은 군화에 갔다. 목이 긴 가죽군화였다.

병완은 허리를 펴고 용천과 병수를 번갈아보면서 물었다.

“어떻게 돼 김 대장은 여기까지 오게 됐소?”

용천은 또 한바탕 연극을 놀았다. 병수는 옆에서 웃음을 지으면서 용천의 연기에 속으로 감탄했다.

(빨갱이들 속에서 절어 난 놈 다르긴 달라. 어쩜 빨갱이들이 욱실거리는 마당에서 저렇게도 연극을 잘 놀아?)

병완은 성칠이 무명고지에서 미군 날강도비행기 폭격에 비참하게 희생됐다는 대목을 듣자 한숨을 후~ 땅이 꺼지게 내쉬더니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는 것이었다.

“끝내 전선에서 영광스럽게 희생됐구나. 충신은 효자가 아니지.”

그는 주름진 두 볼로 뜨거운 눈물을 주르르 흘리었다. 이윽고 떨리는 손으로 곰방대에 담배를 재워 넣더니 우쭐 일어나 바깥으로 나갔다.

상순은 불쌍한 동생 경주를 안고 대성통곡쳤다.
“큰아버지! 큰아버지!”

그때라고 용천은 병수에게 눈짓하더니 스르르 일어나 바깥으로 나가더니 덕성이네 집 쪽으로 걸어갔다.

병수는 측은한 눈길로 토성안집의 진달래와 상순을 되돌아보며 나갔다.

상순은 뒤따라 나가면서 먼발치에서 세귀눈으로 용천과 병수의 허리에 찬 미제 권총을 바라보았다. 또 그들이 발에 건 토색군화를 보며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황차 용천과 병수는 똘만과 똑 같은 군화를 신지 않았겠는가.
(이전에 도문이나 개산툰이나 국자가에 들어온 조선인민군 부상병들은 저런 목이 긴 군화를 신은 것을 보지 못했는데..."
상순은 도리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개산툰에서 오는 길이라는데 왜 천지꽃산 부근에서 똘만과 총싸움을 벌렸을까?  아무래도 수상해!)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487
번호 제목 날자 추천 조회
487 대하소설 황혼 제4권(79) 류씨네 애비와 아들 김장혁 2024-11-28 0 21
486 대하소설 황혼 제4권(78) 음모궤계 김장혁 2024-11-26 0 68
485 대하소설 황혼 제4권(77) 경악할 특대뉴스속보 김장혁 2024-11-23 0 78
484 대하소설 황혼 제4권(76) 색마 추억의 바다 김장혁 2024-11-21 0 133
483 대하소설 황혼 제4권(75) 첫사랑이 낳은 악과 김장혁 2024-11-18 0 101
482 대하소설 황혼 제4권(74) 녀자감옥의 나영이 김장혁 2024-11-16 0 73
481 대하소설 황혼 제4권(73) 정신감옥 김장혁 2024-11-13 0 75
480 대하소설 황혼 제4권(72) 불여우의 꼬리 김장혁 2024-11-10 0 101
479 대하소설 황혼 제4권(71) 리혼 딜레마 김장혁 2024-11-06 0 138
478 대하소설 황혼 제4권(70) 바보 사장과 그녀 김장혁 2024-11-05 0 103
477 대하소설 황혼 제4권(69) 가옥소유증 리스크 김장혁 2024-11-04 0 77
476 대하소설 황혼 제4권(68) "저승사자"와 "카시모도" 김장혁 2024-11-01 0 75
475 대하소설 황혼 제4권(67) 아가씨의 넉두리 김장혁 2024-10-30 1 139
474 대하소설 황혼 제4권(66) 직업소개소 소장과 아가씨 김장혁 2024-10-30 1 72
473 대하소설 황혼 제4권(65) 철창 속 애비 2024-10-27 0 142
472 대하소설 황혼 제4권(64) 괴상한 집들이 김장혁 2024-10-27 0 136
471 대하소설 황혼 제4권(63) 마지막 둥지 김장혁 2024-10-26 0 106
470 대하소설 황혼 제4권(62) 추억의 돛배 김장혁 2024-10-23 0 102
469 대하소설 황혼 제4권(61) 외나무다리에서 만난 악처 김장혁 2024-10-20 0 84
468 대하소설 황혼 제4권(60) "저승사자"와 녀죄수들 김장혁 2024-10-19 0 141
‹처음  이전 1 2 3 4 5 6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