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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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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    장편정탐실화소설 부르하통하강반 살인악마의 유령(1) 댓글:  조회:2671  추천:1  2018-09-21
                   장편정탐실화소설 부르하통하강반 살인악마의 유령                                                              김장혁        조양벌을 적시면서 유유히 흐르는 부르하통하는 오늘도 부르하트강반에 떠돌아다니던 살인악마의 유령을 기억한다. 사람들은 본세기 초에 부르하통하 강반에서 한때 변태적인 살인악마의 유령이 떠돌아다녔다니면서 연길과 조양천에서 살인사건 14건을 비롯해 강간, 강탈 등 악성 사건을 37건이나 련속 저질렀다는 것을  아직도 력력히 기억하고 있다. 그때 백성들은 그 살인악마 때문에 공포에 벌벌 떨면서 밤에 바깥에 나가 다니기를 무서워했다. 우연의 일치라고나 할가. 당시 빨간 등산복을 입은 녀성들이 악마한테 강간당하고 살해된 악성사건이 많이 발생했다. 그리하여 녀성들은 “빨간 등산복을 입으면 살해된다.”고 하면서 사람들의 눈에 환히 띄우는 빨갛거나 노란 등산복을 입고 거리에 나서기도 두려워할 지경이였다.        교활한 살인악마는 번마다 밤중에 악성 사건을 저지르고는 탈끝만한 단서도 남기지 않고 여우처럼 그물에서 빠져나가 어둠 속에 종적을 감추었다. 한동안 공안국에서도 숱한 수사일군들을 투입해 수사했지만 유령처럼 사라진 악마의 단서와 종적을 찾지 못했다. 나중에 기민한 수사일군들은 텔레비죤방송을 통해 공개수배령을 반포하고 과학수사수단을 쓰고 인민군중을 널리 발동해 끝내 악마의 종적을 추적해냈다. 아무리 교활한 여우도 사냥군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부르하통하강반의 살인악마는 끝내 수사일군들에게 덜미를 붙잡혔고 나중에 인민법률의 호된 징벌을 받고 말았다.        살인악마가 처단돼 악마의 유령이 사라진지도 어언간 16년이나 된다. 그러나 연변과 길림성, 나아가서 전국을 들썽한 이 악성 사건의 진상을 수많은 사람들이 알고 싶어하였다. 필자는 이 장편정탐실화소설을 요약해 2001년에 “법률과 생활” 잡지에 몇호를 나눠 련재하였으며 중대사건과 특대사건 줄거리만 요약해 2003년에 나의 실화집 “빨간 장미꽃함정”에 전재했으며 2010년에는 "로년세계"잡지에 10번에 나누어 련재하였다. 그때 독자들의 반향은 아주 강렬하였다. 지금  이 악성 살인, 강간, 강탈 계렬사건은 아직도 현념이 아주 강하다고 생각한다. 그럼 아래에 이 악성 살인, 강간, 강탈 계렬사건으로 쓴 장편정탐실화소설의 줄거리를 요약해 싣는다.  조양천진 “8.5”살인사건 2000년 8월 5일, 뜨거운 해가 불비를 퍼붓다가 피로한 하루 려행을 마치고 서산으로 뉘엿뉘엿 넘어갔다. 대지에는 뜨거운 밤장막이 뒤덮이면서 공포가 슬금슬금 기어들고 있었다. 룡정시 조양천진 조양가 강휘, 왕옥분 부부는 창 밖에서 살인악마의 유령이 기웃거리는 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딸애 홍연이 숙제를 하는 것을 지켜보며 텔레비죤을 보고 있었다. “하-” 홍연은 하품을 길게 하면서 기지개를 켰다. “엄마, 숙제 다 했습니다.” “그래? 그럼 밤도 깊었는데 어서 자자.” 왕옥분은 귀여운 딸애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숙제책을 가방에 넣는 것을 거들었다. 강휘도 하품을 하면서 텔레비죤을 여기저기 돌려보다가 꺼버렸다. 이때 살인악마는 어둠이 깔린 바깥에서 창문으로 집안의 동정에 귀를 도사리다가 이를 뿌드득뿌드득 갈았다. 강휘나 왕옥분한테 무슨 애비를 죽인 원쑤라도 진 일이 있어 그랬을가? 절대 아니다. 얼굴 한번 본적도 없는 사이였다. 변태적인 살인에 인이 박힌 살인악마는 오늘도 강간과 살인을 하지 않고서는 밤잠을 잘 수 없어 밤중에 유령처럼 떠돌아다니면서 사냥물을 노리다가 밤중까지 불이 켜져 있는 이 집 울안에 슬그머니 기여들었던 것이다. 집 안에서는 하품소리 대신 부부간에 정답게 주고 받는 도란도란 말소리와 호들갑을 떠는 웃음소리에 뒤이어 행복의 자장가소리가 한참 간간히 들렸다. (으흐흐, 더러운 년놈들, 퍽 행복하지? 너희들의 행복은 내 고통이야. 오늘 밤이 년놈들 마지막 밤이란 거 알고 놀아대라. 어디 오늘 저녁에 죽어봐라.) 한참 후 집 안에서는 코를 드렁드렁 고는 소리 밖에 들리지 않았다. 살인악마는 품 속에서 비수를 빼들더니 죄악의 발뒤축을 들고 도적고양이처럼 어슬렁어슬렁 한발자욱 한발자욱 출입문으로 다가갔다. 뒤이어 비수 끝으로 유리를 고정시킨 오리대를 뜯어내고 유리마저 들어내고 문걸개를 절컥 벗겼다. 악마가 출입문을 열고 집 안에 뛰여들어갈 때까지 곤해빠진 젊은 부부는 곯아떨어져 코를 곯며 꿈나라에서 깨여나지 못했다. 어둠 속에 비껴든 달빛 아래에서 악마는 세 식구를 노려보면서 흉악한 눈빛을 번뜩이였다. 악마는 벽돌장으로 굳잠에 빠진 강휘와 왕옥분의 머리를 사정없이 꽝꽝 내리깠다. 강휘와 왕옥분은 비명을 지르면서 눈을 번쩍 떴다. 설인악마는 비수로 강휘의 가슴을 푹푹 찔렀다. 강휘는 그 자리에서 까딱 못하고 쓰러졌다. “으흐흐, 네 녀편네는 내 거야.” 살인악마는 머리에서 뻘건 선지피를 흘리는 왕옥분을 노려보면서 변태적으로 달려들었다. 악마는 비수로 왕옥분의 적삼을 홱 젖히고 마수를 뻗쳐 더러운 릉욕을 가했다. 뒤이어 비수로 가슴과 목을 모두부 베듯 쭉쭉 그어놓았다. 삽시에 뻘건 피가 뿝겨나와 사처로 튕겼다. “허허허.” 살인악마는 왕옥분이 죽어가면서 지르는 비명과 신음소리를 들으면서 변태적으로 쾌감을 느끼며 징글스레 웃어댔다. 살인악마는 죄악적인 마수를 멈추지 않았다. 극악한 악마놈은 비수로 그녀의 피가 즐벅한 젖가슴을 마구 란도질해놓고 배도 10센치메터도 넘게 가로세로 쭉쭉 오려놓았다. 그러고도 성차지 않아 그녀의 팬티를 벗기고 비수를 음부에 찔러넣고 마구 휘저어놓았다. 나어린 홍연은 비명소리와 징글스런 웃음소리에 깜짝 놀라 깊은 잠에서 깨여나 벌떡 일어났다. 소녀애는 공포에 찬 눈길로 살인악마와 피못에 쓰러진 엄마와 아빠를 번갈아보면서 대성통곡쳤다. “엄마! 아빠! 엉엉엉.” “아차!’ 살인에 이골이 튼 악마였지만 이 돌연적인 광경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악마는 멍해 서서 통곡치는 소녀애를 내려다보다가 살인악마의 랭정함과 잔혹성을 회복했다. (안돼, 요년을 살려뒀다간 내가 죽어. 절대 화근을 남겨두지 말아야 해.) 살인악마는 이를 악물고 비수자루를 으스러지게 틀어쥐더니 울부짖어댔다. “네년도 애비에미를 따라 죽어라!” 악마는 비수로 홍연의 목을 내리쳤다. 빗맞은 홍연이 쓰러져 인차 숨을 거두지 않자 벽돌장을 쥐여 홍연의 머리를 탁탁 내리쳤다. 아홉살 밖에 안되는 강홍연은 이렇게 비참하게 살인악마한테 살해당하고 말았다. 소녀애는 다시는 빨간 넥타이를 매고 정다운 학교에 가서 공부하지 못하고 친구들과 뛰놀 수 없게 되였다. 살인악마는 뒤이어 돈을 찾으려고 옷장과 찬장을 들춰 옷견지와 이불을 쥐여 활활 구들에 뿌렸다. 헛탕을 쳤다. 악마는 일루의 희망을 품고 구들의 장판까지 다 뒤졌다. 허나 동전 하나 찾아내지 못하고 헛물만 켜고 말았다. (허, 이 썩어질 년놈들이 쌀상점을 차렸다는게 일전한푼 없는 거지들일 순 없겠는데. 이것들이 돈을 어디에 감췄지? 참 재수 없어.) 살인악마는 단서를 남기지 않으려고 습관적으로 걸레로 자기 발자욱을 닦아버렸다. 뒤이어 문을 열고 어둠 속의 동정을 기웃기웃 살피였다. 아무런 인기척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어둠 속으로 유령처럼 사라졌다. 창문으로 비껴든 서슬푸른 달빛이 이 집 안 피못 속에 이리저리 쓰러진 시체들을 비추었다. 그 참상은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만큼 처참하고 끔찍했다. 이튿날 아침, 이웃집 아주머니가 쌀을 사러 이 집에 찾아왔다. “옥분이, 쌀이 있소?” 그러나 상점은 문을 꼭 닫은 채 아무런 응대도 없었다. “옥분이, 집에 있소?!” 아무리 문을 두드리면서 목이 터지게 불러도 집 안에서는 대답이 없었다. “이리 일찌기 어데로 갔는가?” 항상 일찌기 문을 열던 쌀상점이 괴이하게 너무 쥐죽은듯이 고요했다. 그런데 여겨보니 출입문 유리마저 뜯어져 있지 않겠는가! 아주머니는 너무 이상해 문을 열고 집안을 들여다보았다. “아니, 이게 뭐야?!’ 피비린 내가 확 풍겨 나오는 집 안에는 세 식구 시체가 피못 속에 쓰러져 있지 않겠는가! 이웃집 아주머니는 집 안의 참상을 보고 깜짝 놀라 그 길로 종주먹을 쥐고 조양천진파출소에 뛰여가 사건보고를 하였다. 왕옥분과 강휘 부부는 원래 조양천진 시골에서 살다가 몇해 전에 조양천진에 들어와 량곡기름점을 차렸다. 그들 부부는 평소에 인심이 후하여서 남들보다 눅게 쌀과 기름을 팔아 이웃들이 모두 이 집에 와서 샀다. 장사도 잘 되여 농사를 짓기보다 짭짤한 수입을 올려 살만 하였다. 그런데 한창 재미나게 살라하니 이런 악변을 당할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경찰들이 경찰차를 몰고 달려왔을 때였다. 다 죽어가던 강휘가 피못 속에서 기적적으로 정신을 차리고 천천히 일어났다. 그는 처참하게 피못 속에 쓰러진 안해와 딸애, 뻘건 피가 랑자한 두 시체를 마구 껴안고 흔들면서 대성통곡쳤다. 조양천진파출소 경찰들은 사건현지를 보호하는 한편 인차 룡정시공안국 형사경찰대대에 사건을 보고하였다. 사건보고를 받은 룡정시 공안국 김기봉 부국장과 형사경찰대대 최성 대대장은 기술중대 박철 중대장(현임 부대대장)과 최경웅(현임 중대장), 법의 강룡학 등 수사일군들을 령솔해 사건현지로 달려갔다.       그들은 사건현지에서 세심하게 기술수사를 벌려 장판 우에서 파도무늬 간 운동화발자욱을 발견하고 카메라로 촬영해 서류에 보관했다. 이는 교활한 여우 같은 악마가 남긴 유일한 단서였다. 이 파도무늬 간 운동화발자욱은 사후에 사건을 해명하는 큰 단서로 되였다.      수사일군들은 병원에 가서 구급중인 피해자 강휘한테서 사건정황을 진일보 조사했다. 하지만 강휘는 잠결에 얻어맞아 정신을 잃다보니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다.     사건해명은 안개 속에 빠졌다. 살인악마는 혼잡한 안개 속에 묘연히 사라지고 말았다.        련속 발생한 악성 살인사건들 1998년부터 2001년 말까지 연길시와 당시 룡정시 조양천진에서 살인악마는 어둠의 장막이 두텁게 대지를 누르는 밤이 깃들기만 하면 도적고양이처럼 굴에서 슬금슬금 기여나와 악성 살인사건을 련속 저질렀다. 1999년 9월 25일, 황모와 최모 녀성은 한창 조양천제1중학교 정원에 세워진 기념비 계단에 앉아 친근히 속삭이고 있었다… 황모는 우연히 양고기뀀점에 가서 맥주를 마시다가 최모 녀성을 면목익혔다. 건너 상에서 삼십대 초반의 두 녀성이 양고기뀀을 먹으면서 자꾸 자기한테 눈길을 주는 것을 발견했다. 최모 녀성은 꽤나 예쁘게 생겼다. 생글생글 웃음을 보내는 눈길, 복스럽게 생긴 걀죽한 얼굴, 웃단추를 살짝 열어놓은 풍만한 젖가슴… (으흠, 이러지 말아야지.) 황모는 홧홧 불타오르는 정욕을 억누르면서 녀성들한테서 눈을 떼서 내리깔고 양고기뀀에 맥주만 마셨다. 그는 룡정에 집이 있었는데 사업의 수요에 의해 림시 조양천진에 와서 사업하게 됐다. 사랑하는 색시를 룡정에 두고 외지에 와서 일하면서 주말에나 집에 돌아가야만 했다. 하여 꽤나 적적하게 보냈다. 그는 외로울 때마다 양고기뀀에 맥주를 마시면서 고독을 달래군 했다. “여보세요. 우리 합상을 해 마시면 어떤가요?” 황모는 그 소리 자기와 무관하다고 여기고 개의치 않고 맥주를 들었다. “무슨 남자가 이래요? 우리 한상에 앉아 마실가요?” 이번엔 최모 녀성과 리모 녀성이 맥주잔을 들고 이쪽 상으로 다가와서 말을 걸었다. “남자 혼자 꽤나 쪽쪽하겠는데요. 우리도 맨 녀자들이 돼서 멋적은 거 아닌가요? 술상엔 사촌녀동생이라도 마주 앉아야 술맛이 난다고 하지 않았는가요? 합상하면 좋을 것 같아 그러는데요.” 황모는 다른 상 손님들의 눈길을 피하면서 어물어물했다. (이 녀자들 매춘부 아닌가? 나 보고 결산하게 하려고 이러는 거 아니야?) 황모는 그저 어색하게 웃어보이면서 우물쭈물했다. “알았어요. 묵인은 동의한 거라던데요.” 녀자 둘은 술도 마신지라 담대해져 맥주고 굽던 양고기뀀이고 다 들고 이쪽 상에 건너왔다. 황모는 그렇다고 쫓아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여서 진퇴량난에 빠지고 말았다. 최모가 통성명을 하더니 맥주잔을 들어 권했다. “오늘 제가 미남자를 면목익힌 인사로 한턱 내죠. 호호호.” 리모 녀성은 눈을 곱게 흘겼다.  “호호호. 넌 미남자를 만나서생 땡판이구나. 난 어쩌라니?” 황모는 확실히 키도 구척이요. 미목이 청수하게 잘 생겨서 미남자라고 할만한  30대 중반의 남자였다. 최모 녀성도 입이 걸죽했다. “호호호. 뭐, 술상에서 니 것, 내 것 할게 있느냐? 이 남자하구 즐겁게 마시면 오케이지!” 황모는 속으로 남자게걸에 든 녀자라 좀 께름직했지만 한턱 낸다는 말에 합상을 하고 말았다. (에라, 모르겠다. 적적한데 술도 얻어마시고 미녀들하구 놀면 좀 좋아서… 흐흐흐.) 그때 한쪽 구석에서 질투에 찬 악마의 곱지 않은 눈길이 그들을 노려보고 있을 줄을 누가 알았으랴. 양고기뀀점은 그리 크지 않았지만 손님들이 꽤나 많이 들어앉아 떠들썩했다. (년놈들이 꽤 좋아하는구나. 명년 오늘이 제사날이 돼야 알겠어?) 사람잡이에 이골이 튼 악마는 자기 눈에 거슬리는 사람만 보면 꼭 미행해 그날 밤으로 죽이고야 마는 악습이 있었다. 악마는 황모와 최모 녀성이 팔을 걸고 교배술까지 마시는 것을 보면서 이를 뿌드득뿌드득 갈았다. (년놈들 놀긴 논다. 오늘 어디 죽어봐라.) 악마는 살기찬 눈길로 이번엔 황모와 리모 녀성이 교배술을 마시는 것을 훔쳐보면서 맥주잔을 기울였다. 한창 권커니작커니 하던 황모와 최모녀성, 리모 녀성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겠는가! 악마도 바삐 결산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황급히 황모를 뒤따라 나섰다. 삑삑, 삑삑- 그들이 마당에 나섰을 때 BB기가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리모 녀성이 허리에서 BB기를 뽑아 들여다보더니 황급히 뀀점으로 들어갔다. 전화했는지 그녀가 이윽해서 되나왔다. “안되겠다. 딸애가 찾는다고 신랑이 꽥꽥거린단다. 집에 가봐야겠다. 황선생, 후에 다시 봅시다. 오늘 즐겁게 마셨습니다.” 그녀는 최모 녀성을 돌아보면서 “얘, 네나 황선생하구 함께 노래방에 가라. 난 가봐야겠다. 신랑한테 들키면 경을 치겠다.” 하고 손을 들어 흔들면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저도 가보오. 신랑이 찾겠소.” 황모는 속에 없는 말을 하고 저으기 놀랐다. 최모 녀성은 머리를 수깃하고 목구멍으로 기여들어가는 소리를 했다. “저의 남편 한국에 가고 없어요.” 황모는 머리를 끄덕였다. “신랑이 없어서 퍽 고독하겠소.” “네. 고독하면 맥주 마십니다.” “어쩜 나하구 똑 같은 처지요. 나도 룡정에 색시를 두고 여기 와서 일하면서 퍽 고독하오. 고독하면 항상 그 약고기뀀집에 맥주 마시러 가오.” “같은 처지군요. 그래서 말 못하는 벙어리 속은 벙어리 안다잖는가요?” 최모 녀성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하고나서 황모의 팔을 끼고 걸었다. 황모는 최모 녀성을 데리고 노래방 대신 어둠이 두텁게 뒤덮인 조양천제1중학교 운동장으로 들어갔다. 그리하여 이날 밤에 그들은 운동장 서쪽으로 해 세워진 비석에 다가가 계단에 앉아 한담하기 시작했다. 그때 악마는 뀀점에서 주어든 장작깨비를 들고 어둠을 은페물로 삼아 슬금슬금 비석 뒤로 해 황모와 최모 녀성한테로 다가갔다. 악마가 다가가는 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황모와 최모 녀성은 끓어오르는 욕정을 참지 못하고 서로 꽉 퐁옹하면서 뜨거운 키스를 했다. (썩어져라!) 악마는 장작깨비로 먼저 황모의 머리를 사정없이 내리쳤다. “앗!” 비명소리와 함께 황모가 푹 꼬꾸라졌다. 악마는 성차지 않아 황모의 가슴과 하신을 마구 내리쳤다. “살인이야! 사람 살려요!…” 최모 녀성은 화닥닥 일어나 도망쳤다. “소리치겠니?” 악마는 최모 녀성을 쫓아가 장작깨비로 서너번 머리를 쳤다. 최모 녀성도 비명소리와 함께 푹 쓰러졌다. 악마는 피못 속에 쓰러진 최모 녀성의 겉옷을 벗기고 젖가슴이랑 엉덩이랑 마구 만지면서 릉욕했다. 바지를 벗기고 강간까지 하려다가 학교 운동장이여서 그만두고 정신을 잃고 인사불성이 된 그녀의 겉옷을 벗겨냈다. 악마는 황모의 겉옷까지 벗겨가지고 부랴부랴 어둠 속으로 도망쳤다. (어디 콱 망신당해라!) 악마는 남녀의 겉옷을 안고 종주먹을 쥐고 북으로 도망쳤다. 그는 원래 옷을 가져다가 팔거나 집에 돌아가 애인 김후남한테 주려고 했다. 그러나 단서라도 잡힐가봐 그만두고 조양천진 북쪽에 있는 조양교 부근에 뛰여가서 부르하통하에 옷견지를 활활 쥐여 뿌리고 한오리 희오리바람처럼 묘연히 사라졌다. 얼마후 최모 녀성이 기적처럼 정신을 차렸다. 피못 속에 쓰러진 황모를 아무리 흔들면서 불러도 대답이 없었다. 그녀가 황모를 어둠 속에서 여겨보니 머리가 피투서이 된채 숨이 지지 않았겠는가. 그녀의 머리에서도 뜨거운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 그녀는 너무 놀라 화닥닥 일어났다. “이러고 앉아 있을 때가 아니야.” 그녀는 황급히 종주먹을 쥐고 친구 리모의 집으로 허둥지둥 뛰여갔다. “예, 큰일 났다. 황선생이 맞아죽엇다. 나도 이걸 봐라.” 리모 녀성은 피못이 된 친구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랐다. “아니, 이게 웬 일이냐? 어서 병원으로 가자.” 최모 녀성은 손사래를 쳤다. “나절로 병원에 갈게. 넌 빨리 학교에 알려라. 황모가 잘못됐다고.” 리모 녀성은 황급히 부근 상점에 들어가 전화를 걸어 학교에 알렸다. 뒤이어 최모 녀성을 데리고 부랴부랴 조양천진병원으로 뛰여갔다. 구급처치를 거쳐 최모녀성은 생명의 위험에서 벗어났다. 때는 2000년 4월 9일 새벽, 아직도 잔설이 깔린 대지의 새벽공기는 자못 싸늘했다. 사위가 깊이 잠든 껌껌한 새벽에 한 어두운 그림자가 유령처럼 어슬렁어슬렁 나타나 조양천진 술공장 부근에서 음흉한 눈길로 두리번거리면서 사냥물을 노리고 있었다. 그때 한 집 안의 전등불이 환하게 켜졌다. 악마는 황급히 낮은 토성 밑에 꿇어앉으면서 집 안의 동정을 살폈다. 전등불이 환히 켜진 집 안에서 30대 초반의 색시가 웃옷을 걸치더니 바닥에 내려가 신을 꿰더니 바깥으로 나오는 것이였다. (허, 이게 웬 떡이 넝쿨채로 굴러떨어지다니.) 악마는 토성 밑에 쪼그리고 앉아 사냥물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남쪽 출입문이 열리면서 끌신을 짝짝 끄는 소리가 귀전을 간지럽혔다. (저 년이 신새벽에 바깥에 나와 뭘해? 옷도 제대로 입지 않고. 으흐흐. 혹시 변소라도 가려는 건가?) 순간 악마는 온 몸에 정욕이 끓어번져 참을 수 없었다. 그는 밟힌 메주동이 같은 대가리를 토성 우로 스리슬쩍 내밀고 음충한 눈길로 토성 밑으로 다가오는 색시를 노려보았다. 그런데 저게 뭐야? 색시가 글쎄 토성 밑으로 오더니 좋은 변소에 가지 않고 물앉더니 쏴- 하고 오줌을 싸는 것이였다.       뿅-       "히히"       방귀소리에 악마는 저도 몰래 웃었다. .       그녀는 뒤에서 무슨 인기척을 느꼈던지 엉덩짝을 움쭐 쳐들었다. 악마는 토성 밑에 물앉으면서 몸을 옹송그렸다. 그 놈은 입을 싸쥐고 터지려는 웃음보를 가까스로 참아냈다.       뒤이어 토성 안에서는 대변을 보는 그녀의 신음소리가 났다. 그 신음소리에 악마는 온몸을 부르르 떨며 엉거주춤 일어나 색시의 허연 엉뎅이를 전등불빛을 빌어 한참이나 훔쳐보았다. 순간 정욕이 끓어번져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자못 흥분됐다.       (이년, 오늘 죽어봐라.) 악마가 토성의 벽돌쪼각을 뽑아 내리치려고 할 때였다. 색시가 우쭐 일어나 속옷을 춰입더니 집 쪽으로 한들한들 멀어져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더는 참을 수 없은 악마는 그 길로 뒤따라 들어가 강간하고 싶었다. 그러나 악마는 인차 랭정성을 회복하며 한숨을 후- 길게 내쉬였다.      (혹시 집 안에 나그네 있으면 어쩌는가?)       악마는 정욕을 가까스로 참으면서 토성 밑에 쪼그리고 앉아 내심하게 집 안 사람들이 잠들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출입문을 잠그는 절컥 소리가 들리고 집 안의 전등불도 꺼졌다. 악마는 토성을 훌쩍 뛰여넘었다. 그 놈은 어술렁어슬렁 구새목에 다가가 창문으로 집안 동정을 살폈다. 집 안은 쥐죽은듯이 무시무시하게 고요해졌다. 한참 후 집 안에서 코를 드렁드렁 고는 소리가 들렸다. 남쪽 출입문을 당겨보니 꼭 잠겨져 있었다. (썩어질 년, 문을 잠갔어?) 악마는 이를 사려물고 스리슬쩍 토성을 되뛰여넘어 바깥으로 나왔다. 그는 집 뒤로 스적스적 에돌아가서 이리저리 기웃거렸다. 때마침 그날 낮에 이 집 김모가 현관을 손질하느라고 현관문을 걸지 않고 자버렸다. 그리하여 악마는 현관 안으로 손쉽게 기여들어갔다. 손전지를 꺼내 켜들고 이리저리 비추다가 시퍼런 도끼가 눈에 띠였다. 악마는 대뜸 도끼를 주어들고 굶주린 늑대처럼 집안으로 어슬렁어슬렁 기여들었다. 그때까지도 김모 부부는 무슨 위험과 살기가 덮쳐오는지도 모르고 굳잠에 빠져 있었다. 악마는 손전지불빛을 빌어 살펴본 후 깊은 잠에 빠진 김모와 그의 색시 김경해(30세)의 머리를 도끼로 팍팍 내리찍었다. “앗!” 도끼에 빗맞은 김모는 잠결에 불시에 들이닥친 습격에 벌떡 일어났다. 살펴보니 웬 남자가 손전지로 문쪽을 어지럽게 비추면서 꽁무니를 빼는 것이였다. “강도야! 강도야!” 김모는 그 놈을 쫓아나가면서 고함쳤다. 그러자 이웃들이 여기저기에서 문을 벌컥벌컥 열고 뛰쳐나왔다. 그러나 살인악마는 진작 새벽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그날 김모의 안해 경경해는 도끼에 머리를 찍혀 당장에서 숨졌다. 일곱살난 아들애는 조양천진에서 멀리 떨어진 동성촌에 있는 처가집으로 보냈기에 다행히 살인악마의 마수에 걸려들지 않았다. 룡정시공안국 수사일군들은 수사를 거쳐 그때 흉수가 사건현지에 벗어놓은 신이 당지에서 파는 신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김기봉 부국장은 수십년 동안 수많은 악성 형사사건을 해명한 수사엘리트였다. 그는 신을 주어들고 보더니 경험에 근거해 과단성있게 결론지었다. “당지에서 파는 신을 신은 걸 보면 이 살인악마는 외지사람이 아니라 당지사람이오.” 조양천진에서 련속 악성 살인사건이 발생하자 룡정시공안국에서는 비상정황에 근거하여 아예 조양천진에 공안분국을 세운 후 김기봉 부국장을 국장으로 임명하고 한개 형사경찰중대를 조양천진에 주둔시켰다. 그외에도 수많은 경찰들을 조양천진에 파견하여 조양천진을 중심으로 주요 도로에 차단소를 설치하고 의심스러운 사람들을 검사하였으며 주민구역을 순라하면서 수상한자를 파출소에 불러다 심문하였다. 그러자 교활한 여우- 살인악마는 조양천진에서 더는 범행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2000년 6월부터 2001년 10월까지 또 연길에서 련속 10여건의 악성 살인, 상해, 강간, 략탈 사건을 저질렀다. 2000년 6월 19일 새벽 2시, 여름이라지만 새벽이여서 아직 어둡고 꽤나 싸늘했다. 조양천진과 연길시를 유유히 감돌아흐르는 부루하통하에 새로 놓인 신민교에서 한 700메터 떨어진 남쪽 강뚝에서 청년남녀 황모와 차모가 산보하고 있었다. 악마는 이날도 강도행각을 벌리려고 품 속에 시퍼런 비수를 품고 한메터나 되는 쇠몽둥이를 쥐고 사냥물을 노리면서 늑대처럼 어슬렁어슬렁 싸다녔다. 그 놈은 강뚝에서 황모와 차모가 도란도란 얘기하면서 지나가는 것을 보자 변태적으로 이를 갈았다. (꽤나 다정하구나. 새벽까지 련애해? 난 서른이 넘도록 장가도 들지 못했는데 너희들은 잘 놀아대는구나. 어디 죽어봐라.) 악마는 황모와 차모와 면목이 있는 것도 아니요, 무슨 애비를 죽인 원쑤를 진 것도 아니였다. 그저 스쳐지나가는 행인에 불과했다. 그러나 악마의 변태적인 눈에는 그들이 행복에 겨워 이야기를 주고 받는 모습만 봐도 거슬렸다. 심지어 강간해버리고 죽여치우고 싶어진다. 이런 악마를 만나면 진짜 묻지마 살해를 당해는 불운을, 아니, 비극을 겪게 된다. 악마는 밤 어둠을 타 그들의 뒤로 슬금슬금 다가갔다. 그런데도 황모와 차모는 열띤 대화에 도취돼 뒤에 들이닥치는 위험과 공포, 살기를 눈치채지 못하고 앞으로 걸어갔다. 악마는 불시에 뒤로부터 덮쳐들어 비수로 황모의 잔등과 복부를 찍었다. 그러고도 성차지 않아 한메터나 되는 쇠몽둥이로 황모의 머리를 사정없이 내리쳤다. “앗!” 황모는 찍소리도 못치고 당장에서 쓰러져 숨졌다. “앗!” 차모 녀성은 기겁해 두 손으로 눈을 가리면서 저도 몰래 비명을 질렀다. “헤헤헤. 겁나지?” 악마는 피묻은 시퍼런 비수로 차모의 턱을 쳐들면서 지껄여댔다. “나는 흑룡강성에서 온 살인범이야. 아무 것도 무서워하지 않아. 살겠거든 돈을 몽땅 내놧!” “다 줄게요. 제발 살려주세요.” 악마는 공포에 바들바들 떠는 차모 녀성의 손에서 손가방을 빼앗아내 쟈크를 쭉 열어보았다. “으흠, 150원? 요것 밖에 없어? 다 내놓지 못하겠어?” 악마는 이를 사려물면서 비수를 차모의 여린 목에 가져다댔다. “없어요. 그것 밖에 없어요. 제발 목숨만 살려주세요.” 악마는 비수로 차모 녀성의 젖가슴을 건드리면서 을러멨다. “살겠으면 고분고분 말 들어!” 악마는 차모 녀성을 끌고 버드나무숲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그때 차모 녀성은 어데서 그런 용기났는지 악마를 활 밀어놓고 다리야 날 살려라고 냅따뛰였다. “허, 재수없어.’ 악마는 입 안에 다 들어온 비게덩이를 놓친 것이 아쉬웠다. 그 놈은 차모 녀성이 선불맞은 노루처럼 달아난 어둠 속을 한참 멍해 바라보다가 손가방에서 돈만 꺼내고 손가방을 부르하통하에 활 던져버린 후 황급히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2000년 9월 5일, 이번 사건도 악마는 역시 새벽에 저질렀다. 새벽 3시 아직 어둠이 가시지 않은 시각이다. 이날 새벽까지도 악마는 비수를 품고 어슬렁어슬렁 사냥물을 찾아헤매였다. 그러다가 연길시 연서가 원광거 맥주공장 부근에서 빨간 적삼과 노란 적삼을 입은 처녀 둘이 어둠을 밟으면서 어데로 가는 것을 희미한 가로등불빛을 빌어 발견했다. (으흠, 끝내 먹이가 나타났군!) 악마는 그녀들을 미행하기 시작했다. 올망졸망한 세집들이 늘어선 골목을 따라 악마가 어슬렁어슬렁 뒤를 밟고 있었다. 축모 자매는 밤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미행을 따라붙은 악마가 있는 것도 모르고 낮다란 세집으로 들어가 문걸개를 걸었다. “에이구, 자자.” 그녀들은 침대에 올라가자마자 인차 굳잠에 빠졌다. 악마는 출입문을 슬렁 당겨보았다. 안으로 노끈으로 매놓아 열리지 않았다. 그 놈은 삐죽이 열린 문틈으로 비수를 넣어 노끈을 끊어버리고 집 안에 스리슬쩍 들어갔다. “누구야?!” 언니가 자기한테 접근하는 검은 그림자를 보고 황급히 전등 스위치를 찰칵 켰다. 탕! 악마는 비수로 일광등을 탁 쳤다. 유리파편들이 사처에 뿌리웠다. “까딱하면 다 죽여치우겠다!” 악마는 손전지로 이리저리 비추더니 식탁에서 식칼을 찾아들고 먼저 언니 축모의 머리를 내리찍었다. “앗!” 언니 축모는 손을 들어 내리찍는 식칼을 막았다. 엄지손가락이 썩뚝 잘려 뿌리워나갔다. 순간 머리와 손에서 뻘건 피가 줄줄 흘렀다. 온 구들에 피가 뻘겋게 뿌리웠다. 뒤이어 흉수는 구들에 앉아 바들바들 떠는 녀동생 축모한테 덮쳐가 비수로 머리를 푹푹 내리찍었다. “썩어졌니?” 손전지를 이리저리 비춰보던 악마는 휘두르던 식칼을 반공중에서 멈췄다. 비수ㅍ아래 처녀가 너무나 예뻤다. “허허. 그저 죽이긴 아깝구나.” 그 놈은 바들바들 떠는 녀동생 축모를 보고 을러멨다. “고분고분 말 들어!” “제발 살려주오!” “잔말 말고 엎디지 못하겠느냐?!” 악마는 그녀의 머리를 마구 잡아채 구들에 꿇어엎디게 했다. “말 들으면 살려줄게!” “구들에 깨진 유리쪼각이 있어 어떻게 엎디오?” 손전지불이 구들을 비추었다. 확실히 네온등전등이 깨진 쪼각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침대에 엎드려!” 악마는 한손에 시퍼런 비수를 든 채 한손으로 괴춤을 까면서 지껄여댔다. “나를 하오. 그 앤 숫처년데. 제발 다치지 마오.” 언니는 녀동생을 보호하려고 마지막 수를 썼다. 그러나 짐승보다 못한 악마한테 그 수가 들 수 있겠는가. “그래? 빳빳한 처녀 더 좋아. 더러운 년, 그렇게 하고 프면 좀 기다려. 네년도 어떤가 봐야지. 놔둘 거 같애?” 축모 녀성은 침대에 엎드려 온몸을 사시나무 떨듯 바들바들 떨었다. 악마는 꿇어엎딘 그녀를 고의로 언니가 보는데서 팬티를 뒤로 벗겨내리고 뒤로 강간하기 시작했다. "앗! 아갓!" 녀동생 축모는 너무 아파서 비명 치고 언니 축모는 동생이 처참하게 당하는 것을 보고 울었다. “끄치지 못해? 까딱 소리치면 둘다 죽어!” 악마는 강간하면서도 언니한테 손전지를 비추며 위협했다. 세집 안에서는 죄악의 거친 숨소리 씩씩거리고  녀성들의 비명소리와 신음소리가 공포에 반죽해 어둠 속의 고요를 괴롭혔다. 악마는 그녀들을 번갈아가면서 둬번씩 강간하고서도 성차지 않았다. “어르신님이 즐겁게 놀았기에 오늘만은 말한대로 죽이지 않겠어. 그러나 예쁜 네년들을 곱도록 남이 하라고 줄 순 없어. 으흐흐흐. 이 하얗고 보들보들한 잔등이랑 엉덩이랑 놔둘순 없지. 헤헤헤.” 악마는 싯누런 이빨을 악물고 징글스레 웃으면서 비수를 꺼내 그녀들의 하얀 잔등을 사정없이 쭉쭉 내리오려놓았다. “앗!” 처녀들의 아츠러운 비명소리 들렸다. 그 비명소리를 듣고 악마는 변태적으로 무한한 쾌감을 느꼈다. 그 놈은 손전지 희미한 불빛아래 축모 자매의 잔등이고 엉덩이고 사정없이  칼질하면서 싯누런 이빨을 드러내놓고 징글스럽게 낄낄 웃어댔다. 그 놈은 또 을러멨다. “돈을 몽땅 내놔! 거짓 피우면서 안 내놓는 날엔 둘 다 죽을줄 알아.” “제발 목숨만 살려주세요.” 언니가 목숨을 건지려고 피 흐르는 손으로 돈을 몽땅 털어 구들에 내놓았다. 악마는 피 묻은 돈을 주어 헤보고 씨벌였다. “더러운 년들, 밤중까지 싸다니면서 매음이라도 했냐? 아니면 나이트클럽에라도 다니느냐? 세집에서 사는 주제에 웬 돈이 이렇게 많아? 허허허. 어르신님이 잘 쓰겠다.” 악마는 돈을 염채기에 쑤셔넣고 비수를 든채 황망히 집 안에서 도망쳐나갔다. 피못이 된 집 안에서는 죽다가 만 축모 자매가 서럽게 울고 있었다. 그 애처로운 울음소리가 싸늘한 새벽공기를 아프게 헤가르며 울려퍼지고 있었다… 악마가 달아난 후 축모 자매는 부둥켜 안고 오열을 터뜨렸다. 짐승같은 악마한테 처참하게 릉욕당하고 정조마저 잃은 울분이 화산처럼 터졌다. 한참 울고나서 언니 축모가 머리를 들었다. “안돼. 이렇게 당하기만 하겠느냐? 그 놈을 파출소에 신고하자.” 그러나 녀동생은 도리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만두오. 괜히 그 놈한테 보복당하겠어.” 언니 축모 녀성은 머리를 수깃하고 궁리하다가 말했다. “파출소에 신고한 후 세집을 옮기자. 그럼 그 놈이 어떻게 우릴 찾는다고 그래?” “우린 밤일을 하기에 귀가길에 만날 수도 있어. 원쑤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하잖았어?” 그러나 언니 축모 녀성은 마음을 굳게 먹었다. “그 놈을 놔두고 울분이 터져 어떻게 살겠니? 기왕 모든 걸 다 잃었는데 죽기만 하겠느냐? 죽더라도 그 놈을 단두대에 올려세우자.” 녀동생이 말렸지만 언니 축모녀성은 피눈물을 삼키면서 기어이 파출소에 찾아가서 사건을 보고하였다. 파출소에서는 너무나도 악성 강간, 략탈 사건이기에 연길시공안국 형사경찰대대에 사건을 회보하였다. 사건보고를 받은 수사일군들과 민경들은 사건현지에서 세심한 수사를 벌렸다. 교활한 악마가 단서를 남기지 않으려고 축모 자매를 꿇어엎디게 한 후 몽땅 뒤로 달려들어 강간했다. 그리하여 사건현지에는 악마의 지문 한점 남지 않았다. 그러나 기민한 수사일군들은 축모 자매에게서 악마의 몰골을 대개 장악할 수 있게 됐다.   고수머리, 키 1.68메터 좌우, 누르스름한 잠바에 남색바지를 입었다.    수사일군들은 혹시 축모 자매의 몸 속에 아직도 죄악의 정액이 남아 있지 않겠는가하는 일루의 희망을 품고 축모 자매를 형사경찰대대에 데리고 가서 정액채취를 하기로 하였다. 아니나 다를가. 법의가 검사해보니 축모 자녀의 몸 속에는 피에 섞인 정액이 수두룩이 남아 있었다. 법의는 축모 자매의 몸 속에서 악마가 남긴 정액을 채취해 DNA감정을 해두었다. 악마는 꼬리가 서서히 드러나고 있는 것도 모르고 계속 밤에 쏘다니면서 악성 사건을 저질렀다. 2001년 여름의 어느날 밤 열시경이였다. 악마는 연길시 연서가 원광골목 연길시 맥주공장 부근을 쏘다니다가 한 낮다란 세집 앞을 지났다. 세집 안에서 두 녀성이 두런두런 주고 받는 말소리가 들렸다. “오늘 장마당에서 얼마나 벌었습니까?” 처녀의 말소리 같았다. “5원도 못 벌었다.” “에이유, 그렇게 벌어서야 시내 세집에서 어떻게 살겠습니까? 이 달에 또 반년 세집 값을 내야겠는데. 쯧쯧쯧.” 악마는 바깥에서 엿듣다가 피씩 코웃음쳤다. (진짜 거지들이구나.) 악마는 빈털털이 세집을 들이쳐봤자 걸여갈 것이 아무 것도 없겠다는 것을 알고 자리를 뜨려고 했다. 그러나 인차 생각이 바뀌였다. “돈은 없지만 처녀가 있잖은가? 으흐흐.” 악마는 이웃집 석탄창고에서 삽을 꺼내가지고 이 세집 벽에 붙어서서 집 안 모녀가 잠들기를 기다렸다. 이튿날 새벽, 집 안이 조용해지자 악마는 세집 문을 슬슬 당긴 후 문틈으로  문걸개노끈을 비수로 스리슬쩍 끊고 집 안에 뛰여들었다. “꼼짝 말앗!” “살려주오!” 어머니 리정금 녀성이 애걸하였다. 악마는 삽으로 머리를 싸쥐고 바들바들 떠는 리정금 녀성의 머리를 팍팍 찍었다. 리정금이 전등을 찰칵 켜자 악마는 삽으로 전등알을 탁 쳐 깨버렸다. 유리쪼각이 사처에 어지럽게 쏟아져 널렸다. “오늘 돈이 싫다. 몽땅 죽여치우겠다!” 악마는 고함치며 리정금 녀성의 머리를 잔인하게 삽으로 마구 찍어놓았다. 리정금 녀성은 처참하게 비명을 지르더니 피못 속에 쓰러졌다. 딸 김모 처녀는 “여기 호출기 있소. 제발 살려주오.” 하고 말하면서 허리띠에서 호출기를 빼서 내밀었다. 악마는 눈에 차지 않았다. 그놈은 삽으로 김모 처녀의 머리를 마구 내리치면서 을러멨다. “물건은 싫다. 돈을 내놧!” “돈이 일전도 없소.” “몸이라도 바쳣!” 막다른 골목에 이른 김모는 손으로 삽을 마구 밀어치면서 단말마적으로 반항했다. “사람 살려요! 사람 살려요!” 이웃집 문이 벌컥벌컥 열렸다. 악마는 더럭 겁을 집어먹고 꼬리빳빳해 새벽 어둠 속으로 도망쳤다. 사후에 수사일군들은 김모 녀성한테서 악마의 몰골특징을 장악했다.   고수머리, 키 1,68메터 좌우, 고수머리, 키 1.68메터, 누르스름한 잠바에 껌정바지를 입었다.    2001년 7월 15일, 연길시 연남가 최모 녀성은 낮에 장마당에서 온종일 너무 힘겹게 장사를 하고나서 곤해 밤 10시 쯤에 잠자리에 들려고 했다. 그녀는 먼저 바깥에 가나 울안에 있는 변소에 가서 소변을 보았다. 그때 악마는 독이 오른 삽살개처럼 쏘다니면서 사냥물을 찾다가 최모 녀성이 변소에서 나와 집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음충한 눈길로 그녀의 뒤꽁무니를 뒤쫓았다. 최모 녀성이 집안에 들어가 이불장에서 이불을 꺼내 구들에 활활 펴고 옷을 훌훌 벗는 것을 환한 전등불빛을 빌어 보고 정욕이 온 몸을 달구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아, 저 풍만한 젖가슴, 하들하들한 허벅다리.) 악마는 게걸스레 최모녀성의 반라체를 훔쳐보면서 색마의 게걸스런 입을 쩝쩝 다시였다. “개쌍년, 혼자 사는 모양이지. 나그네가 보이지 않는 걸 보면. 오늘 네년을 해치워야지.” 악마는 정욕을 이기지 못해 다른 날 밤과는 달리 오늘 밤에는 최모 녀성이 잠들기를 내심하게 기다리지 못했다. 무더운 여름이라 때마침 창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악마는 비수를 꺼내 창문 모기장을 쭉 째고 집 안에 뛰여들었다. “까딱 말라! 소리치면 죽인다.” 최모 녀성은 “제발 살려주오.” 하고 무릎을 꿇고 앉아 바들바들 떨었다. “그래, 으흐흐. 말 잘 들으면 살려주마.” 악마는 질겁해 바들바들 떠는 최모 녀성을 비수로 위협해 구들에 재껴놓고 을러멨다. “나그네 어데 갔어?” “나그네 없어요.” “과부냐?” “으흐흑, 흑흑.” 녀자는 대답 대신 설음이 북받쳐 울음을 터뜨렸다. 남편이 있었으면 이런 릉욕도 당하지 않을 수도 있지 않는가. 이것이 홀로 난 녀성의 섧음이리라. 악마는 또 습관적으로 뒤로 달려들어 강간했다. “제발 살려주세요.” “그래, 오늘 이 어른이 잘 놀고 기분이 좋기에 례외로 살려주마. 으흐흐흐. 파출소에 알리기만 해봐라. 돌아와 죽여버리겠다.” 악마는 더러운 야욕을 채우자 바지궤춤을 춰입고 창문으로 뛰여나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최모 녀성은 릉욕감을 참을 수 없어 인차 파출소에 달려가 사건을 신고했다. 기민한 민경과 수사일군들은 사건현지에 흘린 숱한 정액을 채취하고 악마의 체모특징을 장악했다.   30대 초반, 고수머리, 키 1,68메터 좌우, 고수머리, 키 1.68메터, 누르스름한 잠바에 남색바지를 입었다.    “또 그 놈이군.” 수사일군들의 정밀한 수사를 거쳐 정액 DNA도 체모특징도 똑 같은 한 놈이라는 것이 밝혀냈다. 당시 연길시공안국 국장 김광진은 인차 수사일군들을 포치해 전 시 범위 내에서 수사그물을 펼쳤다. 수사일군들은 악마의 체모특징에 근거해 고수머리를 한 1.68메터 좌우 되는 30대 초반의 흉수를 수사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악마는 수사일군들과 겨루어나 보려는듯이 수사망을 교묘하게 피해가면서 죄악의 마수를 멈추지 않았다.
166    대하소설 진달래 소야곡(23) 댓글:  조회:1393  추천:1  2018-09-16
                       44. 대천세상 무더운 찜통더위에 목 안까지 말라들 지경이다. 변변한 선풍기마저 갖춰놓지 못한 비좁은 집 안은 숨이 헉헉 막혔다. 류려평은 바깥의 찜통더위보다도 이 집안의 일이 더 갑갑했다. 비좁고 무더운 집 안에 시루 속의 콩나물대가리처럼 빼곡이 들어앉은 시집식구들을 보기만 해도 가슴이 갑갑해났고 숨통을 무엇으로 꽉 지지눌러놓은 것만 같았다. 그녀는 자기 팔자를 원망할뿐이다. 류려평은 국장의 딸이여서 어려서부터 자존심과 승벽심이 강했다. 그러나 부모  덕분에 남부럽잖게 입고 쓰면서 자라나서 공부는 별로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개혁개방 초기 해마다 대학입학시험을 쳤지만 번마다 락방했다. 그녀는 정신타격을 입어 두문불출하고 집구석에 붙박혀 담배까지 풀썩풀썩 피우면서 고민에 잠겼다. 심지어 독약을 풀어 마시고 자살하려고까지 했다. 다행히 어머니 왕숙홍이 제때에 발견하고 독약사발을 빼앗아 깨버렸기에 목숨을 구했다. “왜 멍청한 짓 하니?” “대학에 입학하지 못할바에 살아서 뭘 해요?” 왕숙홍은 딸의 손을 꼭 잡고 타일렀다. “얘야, 딱 대학에 가야만 사니? 대학에 가지 못해도 국장 아빠 있잖니? 근심할 게 뭐냐? 대학생과 결혼하면 돼.  아빠한테 부탁해 은행에 넣어주마.” 류려평은 울며불며 야단쳤다. “어느 대학생이 눈 멀어서 고중생하구 살자 하겠어요?” “근심하지 말라. 농촌에서 고생스레 자란 대학생을 찾으면 돼. 대학을 졸업해도 시내에 남으려면 국장 가시아버지 신세를 져야지.” 류려평은 아버지 면목으로 위생학교 간호원단기훈련반에 다니면서 백마왕자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류려평의 아버지 류문봉은 국장이다. 그의 수하들과 친척들이 농촌에서 온 대학생을 참빚질하다가 종수 외삼촌을 만나게 됐다. 류려평은 맞선을 보자 련애할 새도 없이 그저 대학생이라는 리유로 종수와 번개식 결혼을 했다. 종수네 가정 식솔구성에 대해 알아볼 새도 없이 먼저 결혼해 살면서 련애한다는가. 류려평은 끝내 대학생 종수한테 시집갔고 종수는 꿈대로 시내 자그마한  신문사  기자로 사업하게 됐다.  30여평방메터 되는 두칸짜리 집도 류려평의 본가집에서 사준 것이다. 그때만 해도 시내에서 그만한 집은 신혼부부로 말하면 꽃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시어머니에 시누이, 시동생까지 덮씌워 복잡하기 말이 아니였다. 려평은 조용할 때면 종수를 보고 종종 넉두리를 했다. “시집 식구들한테 세집을 잡아주면 어떻습니까? 어디 복잡해 살겠습니까?” “또, 또.” 종수는 종전처럼 안해의 푸념질에 취재가방을 들고 나가버리려고 서둘렀다. 류려평은 울먹거리며 종수의 가방을 빼앗았다. “여보, 어서 대책을 대세요. 동무…” “됐소, 됐어.” 종수는 색시의 손을 뿌리쳤다. “그래 부모형제들을 쫓아내겠소? 말도 되지 않는 말을 하지도 마오.” “글쎄, 그럼 우리 세 식구 세집에 나가 살든지?” “시끄럽소.” 종수가 나가려고 하자 류려평은 눈물을 흘리며 애원했다. “여보, 실제 문제가 아니고 뭔가요? 대책을 대세요.” 종수는 그저 뿌리쳐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와 숙희 우리 청화를 봐주니 그렇지. 어쩌오? 오늘도 보오. 엄마와 숙희가 청화를 유치원에 데려가지 않았소? 만수를 보오. 겨울이면 석탄을 실어다 6층집에 퍼올린다, 불소시개를 긁어온다, 쌀을 사 메올려온다 하면서 돕지 않고 뭐요?” 려평은 손등으로 눈물을 닦으면서 계속 푸념질을 했다. “다 필요없어요. 집을 따로 잡고 하루라도 살았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어째 좋아도 좋은줄도 모르오?” “뭐?” 려평은 종수를 마구 잡아흔들면서 성을 발칵 냈다. “누구 신세에 살아요? 이 집 누가 사줬어요? 동무 기자질 하는게 누구 덕분인가요?” “또, 또 시작한다. 됐소, 됐어.” 려평은 종수에게 종주먹을 안겼다. “이젠 문제보도나 형사사건보도를 작작 쓰세요. 괜히 숱한 사람들이 도끼를 들고 우리 집에 뛰어들겠어요.” 종수는 그녀를 힐끔 흘겨보더니 “그래도 신랑은 생각하는구만.”라고 하면서 려평의 볼을 매만져주었다. “요것아, 범은 죽으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으면 이름을 남겨. 난 억천만번 죽더라도 실제문제를 해결하는 그럴 듯한 기자로 될 거야.” 류려평은 종수의 떠나가나는 등뒤에 대고 손삿대질을 했다. “명심하라고. 범은 그 놈의 가죽 때문에 죽고 사람은 고 놈의 이름 날리려다 죽어.” 종수는 려평의 공격에 더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집문을 활 열고 나가버렸다. 등뒤에서는 려평의 푸념질과 울음소리 마음을 허비였다. 종수는 한숨을 후~ 내쉬면서 자전거에 올라타더니 페달을 황급히 밟았다. “에이구, 집에만 들어가면 답답해 죽겠다.” 그도 려평 못잖게 집안이 갑갑했고 집에서 훌 나와 단위로 가면 갑갑한 가슴이 활 열리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단위에 나와서도 종수는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았다. 어느 단위나 개인의 사적을 신문에 실었을 때는 별로 뒤근심이 없었을뿐만아니라  감사신까지 받을 때도 있었다. 그러나 백성들의 리익을 대변한 기사를 써서 실었을 때에는 백성들은 속이 씨원해 했지만 일부 사람들한테서는 칼을 맞을 각오를 해야 했다. 주위 사람들도 종수가 자꾸 말성을 일으키는 문제보도를 하는 것에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그러나 종수는 기어이 여론감독의 힘으로 실제문제를 해결해주려고 마음먹었다. 한번은 그가 취재길에 올라 뻐스를 타고 변경 마을로 질주할 때다. 30여명의  손님들이 뻐스 천정에 짐을 싣고 변경 마을로 달렸다. 그중 출국하려는 사람들은 짐을 해관까지 싣고 가야 했다. 그러나 뻐스 운전수와 승무원은 짜고들어 딱 100메터 떨어진 곳에 차를 세워놓았다. 해관까지 짐을 실어가려면 한 사람이 2원씩 더 내야 실어다준다고 했다. 시내에서 변경까지 뻐스표가 2원인데 100메터를 실어가고 2원을 더 받는다는 것은 어처구니 없었다. 종수는 처음에는 기자증을 빼들지 않고 운전수와 승무원에게 부당함을 지적했다. 그러나 손님들이 2원을 내고서라도 실어다달라고 사정하는 바람에 어쩌는 수 없었다. 손님들은 짐이 많든 적든 매인당 2원을 더 내고서야 해관까지 뻐스에 짐을 운송해갔다. 운전수와 차장은 부르는 것이 값이다. 사 후에 뻐스공사에 알아보니 운전수와 승무원은 그 돈을 호주머니에 슬쩍 걷어넣었던 것이다. 종수는 백성들의 리익을 해치는 그런 행위를 용서할 수 없었다. 자그마한 변경마을은 인심이 박하다못해 말이 아니였다. 그날은 일요일이기에   해관에서 문을 닫아 손님들이 출국할 수 없었다. 그런데 변경마을에는 자그마한 려관이 딱 두개 밖에 없었다. 문제는 거기에서 또 생겼다. 손님들이 그중 아무 려관에나 들었는데 공교롭게도 그 려관에서는 식당이 없어 밥을 지어줄 수 없었다. 두루 알아보니 길 건너편 려관에는 식당이 있었다. 손님들이 어둑어둑 지는 땅거미를 밟으면서 길 건너편 려관 식당으로 우르르 쓸어갔다. 그러나 그 려관에서는 다른 려관에 든 손님한테 밥을 주지 않는다고 했다. 종수가 알아보니 그 려관은 진공소합작판매합작사 소속 집체식당이 아니겠는가. 종수는 려관 주임을 찾아서 “먼 길을 온 손님들한테 어쩜 밥도 팔지 않습니까?” 하고 따지고 들었다. “뭐라고 말해도 쓸데없습니다. 그 려관에 든 손님한텐 밥을 주지 않습니다.” 려관 주임은 한 입으로 딱 잡아뗐다. 종수는 할수 없이 기자증을 꺼냈다. “전 신문사 기자입니다. 려관과 식당에서 이렇게 하는 건 잘못입니다. 식당도 이 마을에 찾아온 손님들을 위해 복무해야 하지 않습니까? 인민을 위해 복무한다는 취지는 어디로 갔습니까? 주임은 공산당원입니까? 아닙니까?” “허허허. 대단한 기자구만. 밥을 주지 않으면 어쩌겠단 말입니까? 우리 려관의 규정이니까. 기자라도 별 수 없습니다.” 려관 주임은 기자고 뭐고 떠들겠으면 떠들라는 심보가 아니고 무엇인가. 기자가 말해도 안되자 어떤 손님들은 짐을 챙겨들고 길 건너편 려관으로   건너갔다. 이쪽 개체려관 주인이 야단쳤다. 그는 건너편 려관 주임을 보고 손삿대질하며 펄펄 날뛰였다. “밥을 주는 날엔 밥가마를 다 깨놓지 않는가 봐라.” 질겁한 려관 주인은 자기네 려관에 옮겨온 손님을 보고 되나가라고 내몰았다. 손님들은 또 이쪽 개체려관으로 우르르 쓸어 돌아왔다. 개체려관 주인은 그들을 려관에 받아주지 않았다. “집체려관에 가볼게지. 왜 돌아왔어? 우리 려관엔 반변분자들을 받지 않는다니까.” “아니, 려관을 옮겨갔다가 왔는데 반변분자라니요?” 손님들이 아무리 사정해도 쓸데 없었다. 종수가 말해도 쓸데 없었다. “기자라고 대단한가 하오? 시비하겠거든 우리 려관에서 나가오. 말썽 많은 기자 딱 질색이라니까.” “아니, 자기 려관에 든 손님을 밤에 내쫓다니?” “나가라면 나갈거지. 내 려관 내 마음댑니다.” 종수는 참을 수 없어 “내 이제 시내에 가면 공상국에 반영하고 신문에 내지 않는가 보시오. 진짜 도덕이 없구만요. 이제 려관이 문을 닫아야 알겠습니까?” 그제야 려관방 주인은 좀 누그러들었다. “잠간, 기자만 려관에 드십시오.” 종수는 다른 손님을 몰라라 할 수는 없었다. “안됩니다. 이 손님들을 다 들게 하십시오. 안 그러면 가만 놔두지 않겠습니다.” 출국손님들은 어두운 밤에 두 려관에서 오도 가도 못하고 길바닥에 나앉았다. 그런 손님을 두고 두 려관주인을 놔둘 수 없었다. 그는 길 건너편 집체려관 주임을 찾아가 으름장을 놓기로 했다. “당신들 알고보니 진공소판매합작사 소속 집체려관이더구만. 공소판매합작사 주임을 불러오오. 당신네 행위를 신문에 내고 공상국에 반영해 문을 닫게 하라오?” 려관 주임은 그때까지도 태도가 뻣뻣했다. “그러겠으면 그러오. 우리 합작사 주임이 날 어쩐단 말이요?” 그는 멍청이 아닌 이상 공급판매합작사 주임을 부를리 만무했다. 밤은 깊어가는데 손님들은 길바닥에 나앉아 배를 촐촐 굶으며 앵-앵 매달리는 모기에게 시달려야 했다. (인심이 야박한 이 마을에서 손님들이 무슨 수로 하루 밤을 보낼 수 있을가?) 종수가 두루 살펴보아도 합작사 대문에는 주먹만큼한 자물쇠가 매달려 있었다. 개인 상점이라도 있으면 과자라도 사서 끼니를 에따질수 있겠는데 말이다. 그런데 이 편벽한 변경마을에는 상점도 없었다. 그때 손님들의 딱한 사정을 헤아려본 한 할아버지가 숱한 마을사람들 속에서 나섰다. “손님 여러분, 우리 집으로 가깁소. 우리 늙은 량주가 손님들한테 밥을 지어드립지.” 할아버지가 얼마나 고마운지 몰랐다. 20여명 손님들은 짐을 들고 마음씨 착한 할아버지를 따라 갔다. 두 려관 주인들이 할아버지 등뒤에 대고 욕설을 퍼부었다. “더러운 령감태기, 우리 손님을 빼앗아가?!” “진짜 어부지리야, 영업허가증도 없이 개인 집에 손님을 쳐? 벌금을 콱 안기라고 공상국에 고발하지 않는가 봐라.” 종수는 야박한 려관 주인들을 보고 도리머리를 홰홰 저었다. 그는 손님들과 함께 그 할아버지네 집에 가서 저녁을 에따지웠다. 할아버지네 집이 너무 비좁아 일부 손님들은 할아버지의 따님네 집에 나뉘여 가서 잤다. 이튿날 아침까지 할아버지네 집에서 먹고 종수는 손님들과 의논해 사례금을 모아 할아버지께 드렸다. 종수는 할아버지네 집을 나서자 곧추 공급판매합작사로 찾아갔다. 때마침 판공실에 주임이 나와 있었다. 종수가 기자증을 꺼내 보이자 주임은 아주 공손한 태도로 맞이했다. 종수는 어제 저녁에 려관에서 발생한 비렬한 사건을 렬거했다. “…강렬한 항의를 제기합니다. 려관 식당에서 어쩜 먼 길을 찾아온 손님들한테 밥도 팔지 않습니까? 아무리 두 려관에서 경쟁해도 그렇지. 어쩜 합작사에서 경영하는 식당이 이 지경입니까? 주임의 경영관리에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주임은 이마에 돋은 식은땀을 닦으면서 연신 사과했다. “기자 선생님, 미안합니다. 아래 사람들이 기자를 노엽힐줄은 몰랐습니다. 합작사를 대표해 반성합니다.” “반성? 한마디로 반성해서 끝날 일이 아닙니다. 그따위 식으로 경쟁해선 안된단 말입니다.” 주임은 자리에서 일어나 종수의 손을 잡아 끌었다. “식사나 하셨는지요? 우리 식당에 가서 주임을 검사하게 하고 아침이나 잡숫고 가십시오.” 보아하니 주임은 술이나 대접하고 얼렁뚱땅 고비를 넘기려고 했다. 종수는 그런 눈치를 채고 따라나서지 않았다. “딴 생각을 하지 말고 경영이나 잘 하십시오. 조사해보니 이런 일이 한두번 아니더구만요. 여태껏 두 려관이 비렬한 수단으로 경쟁하면서 손님들을 길바닥에 나앉게 해서야 됩니까?” “예, 예. 꼭 고치겠습니다.” “말로만 해선 안됩니다. 신문에 내서 톡톡히 여론의 비평을 받아야겠습니다. 그래야 고칠게 아닙니까?” “아이유, 절대 신문에 내지 마십시오.” 종수는 떠나면서 주임을 닦아세웠다. “후에도 찾아와 손님들의 의견을 들어보겠습니다. 이 려관 식당에서 계속 손님들한테 밥도 주지 않는가. 손님들이 길바닥에 쫓겨나는 일이 있는가?” “그럴 리 있겠습니까?” “공상국에도 반영하겠습니다.” “아이고, 우리 려관이 문을 닫게 됐구만. 제발 이번만 용서해줍소. 우리 집체려관에서 맞은켠 개인려관을 없애버리려고 비인도주의적인 경쟁을 한 건 잘 못됐습니다. 꼭 고치겠습니다.” 종수는 주임한테서 조사자료에 싸인하게 하고는 뻐스에 앉아 야박한 그 변경 마을을 떠났다. 며칠 후 뻐스 운전수와 차장이 짐운송비를 2원씩 더 받은 일과 두 려관에서 손님을 길바닥에 내몰고 밥도 주지 않은 일을 폭로, 비판한 기사가 신문에 톱기사로 실렸다. 론평원은 그 기사 뒤에 론평까지 실어 해당 부문의 관리가 인성화되지 못한  점을 호되게 비판했다. 신문이 나가고 종수의 반영을 들은 해당 현공상국에서는 공소판매합작사 소속 집체려관과 개체려관에 반년 동안 영업을 중지시키고 정돈하게 했다. 공소판매합작에서는 인차 려관 주임을 바꾸고 경영방식도 개선했다. 그 후부터  변경마을로 찾아간 손님들이 길바닥에 나앉은 일이 다신 발생하지 않게 됐다. 종수가 신문사에 출근해 사무실에 들어섰을 때였다. “오, 당신 정말 대단한 기자요.” 철직받은 려관방 주임이였다. 그는 앙금이 차서 종수를 삿대질하면서 야단쳤다. “밥 한끼 얻어 먹지 못했다고 째째하게 신문에 내는가? 남의 밥통까지 잃게 만들어?” 그는 숱한 기자들 앞에서 종수의 멱살을 틀어쥐고 행악질했다. 종수는 눈 한번 깜짝하지 않고 식당 주임을 질책했다. “철직받아 마땅합니다. 여기 와서 떠들지 말고 자기 잘못이나 반성하란 말입니다.” 찰싹! 그는 종수의 귀쌈을 한대 갈겼다. 김택수 주임을 비롯한 동료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려관 주임을 뜯어 말렸다. 보위과에서 올라와서야 려관 주임은 욕설을 퍼부으면서 물러갔다. 종수는 려관 주임한테서 귀쌈 한대 맞아 얼굴이 얼얼했지만 변경마을로 간 손님들을 대변해 비리를 폭로하고 뻐스와 려관 경영을 바로잡아놓은 것으로 해 긍지감을 느꼈다. 종수는 김택수 주임의 지령을 받고 타현 검찰원으로 취재하러 가게 됐다. 김택수 주임도 사적보다 문제기사를 쓰기 좋아하는 로기자출신이였다. 그러나 그는 종수를 보고 타일렀다. “이젠 문제보도를 좀 작작 쓰오.” “예?” 문제보도를 써야 신문의 여론감독을 할 수 있다던 김주임이 아닌가. 종수는 자기 귀를 의심할 지경이였다. “귀쌈을 또 맞으려고?” “귀쌈을 맞더라도 백성의 리익을 지킬 수만 있다면 전 달갑습니다.” 김택수 주임은 종수를 조용한 휴계실로 데리고 가서 타일렀다. “나도 그런 일 경과했소. 만약 편안히 기자질을 하겠거든 문제보도를 쓰지 마오. 그러나 기자답게 살려면 고생스럽더라도 문제보도를 써야 하오. 대가도 크게 치를 각오를 단단히 해야 하오.” (로기자의 아주 철리가 깊은 명언이야!) 종수는 뻐스를 타고 타현으로 달려가면서 마음속 깊이 그 말씀을 간직했다. 기자를 하기도 진짜 힘들고 어깨가 무거운 것을 느꼈다. 뻐스를 타고 차창 밖에서 뒤로 휙-휙- 밀려가는 축 늘어진 버드나무와 백양나무를 내다보며 종수는 깊은 사색에 잠겼다. 그날 종수는 검찰원에 가서 반부패사업에서 뚜렷한 성과를 거둔 한 검찰원의 사적을 취재하고 검찰원을 나서다가 깜짝 놀랐다. 복도에서 몇해 동안 사라졌던 대학교 후배 은영을 만날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은영이, 어떻게 돼 여기 있어?” “어마나, 누군데요? 전 모르겠는데요.” 분명 은영이였다. 그런데 모르는 척 했다. 종수는 애탄 목소리로 말했다. “은영이, 난 웃학년 박종수야, 알아보지 못하겠어?” 그녀는 종수의  아래우를 훑어보면서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은영이? 박종수? 난 몰라요.” “그래, 동무 이름 최은영 아니고 뭐요?” 대문 어귀 당직실 당직도 이상한 눈길을 종수한테 보냈다. “우린 선후밴데 진짜 몰라? 승호네 동창인데.” 그녀가 홱 돌아서면서 말했다. “전 최혜영인데요. 사람을 잘못 본 것 같애요. 미안해요.” 그녀는 말을 마치자 홱 돌아서서 걸어갔다. “아니, 은영이 맞는데?” 종수는 대문 어귀에 어두커니 서 있다가 자기 눈썰미를 믿고 다시 검찰원에 들어갔다. 그는 당직원과 최혜영이라고 부르는 검찰원의 사무실을 물어 찾아 들어갔다. “은영이 맞지 않습니까? 내 눈을 속이지 못합니다.” 종수는 웃으며 사무실에 들어섰다. 널직한 사무실에는 그녀 혼자 밖에 없었다. 그녀는 눈초리까지 꼿꼿해났다. “무슨 일인가요?” “은영이, 날 진짜 알아보지 못했소?” 그제야 그녀는 알은 체하면서 자리를 권했다. 그러나 뒤말은 선뜩선뜩하게 날이 섰다. “옛날 은영은 이 세상에 없어요. 전 당당한 녀검찰원 최혜영인데요.” “최씨 성만은 고치지 않았구만.” 그녀는 미소를 지으면서 종수를 보고 물었다. “금방 당직원과 은영이 어쩌고 말했나요?” “아니, 그저 최혜영 검찰원의 사무실을 물었을뿐이요.” 그녀는 외씨처럼 걀죽한 얼굴과 가녀린 어깨에 들어간 힘을 좀 푸는 듯했다. 뒤말은 의영희 날카로왔다. “현검찰원 최혜영은 옛날 그 은영이 아니예요. 절대 오해하지 마세요. 한가지 부탁합시다.” “뭘?” “이후엔 저 앞에서 승호 말을 꺼내지 마세요.” 종수는 머리를 끄덕이면서도 은영을 리해할 수 있었다. (물론 은영은 피해자지만 은영의 과거가 퍼지면 검찰원에서의 립지가 좁아질게 아닌가?) 은영은 삼십대중반이였지만 아직도 십년전 학창시절처럼 예쁨이 물씬 풍겼다. 녀검사복까지 척 입어서 더 멋지고 생기발랄해보였다. 다만 수척해진 걀죽한 얼굴에는 새물새물 웃는 표정은 찾아볼 수 없었고 청바위처럼 무섭게 날카롭고 굳어져 있었다. 게다가 눈길마저 아주 날카로와졌다. (피해를 많이 받아 저런가? 아니면, 녀검사여서 저렇게 날카롭게 번졌는가?) 운동선수 출신인 그녀의 몸매는 아직도 날렵해보였다. 종수는 벽시계를 쳐다보면서 우쭐 일어났다. 은영은 갈라지기 전에 한가지 물었다. “궁금한게 있는데요? 그 학급의 성호랑 잘 보내죠?” 종수는 잘 듣지 못했던지 동문서답했다. “잘 보내오. 승호는 백화청사 구입과 과장…” “아니, 성호를 물었는데요.” 그녀는 승호를 거드는 종수가 얄밉기까지 했다. 종수는 인차 말을 바꿨다. “오, 성호? 공안국에 들어가지 못했소. 지금 고향에 돌아가 소사양을 합데.” 은영의 얼굴에는 분명 실망에 찬 검은 그림자가 흘러지나갔다. “전번에 성호는 소장사를 하러 백성과 내몽골 부근에 갔댔어. 강도를 만나 죽을번했더구만.” 은영은 성호의 얘기를 쭉 듣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성호는 내몽골에서 백화청사 지하주차장 살인강탈참사와 내몽골 소강탈사건 흉수들을 나포하는데 큰 공을 세워 ‘정의용사’ 상장도 받았소.” 순간 은영의 차디찬 눈에 형언하지 못할 빛이 반짝였다. 종수는 은영한테 “시집 갔는가?”, “신랑은 뭘 하는 사람인가?”고 묻고 싶었다. 그러나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꿀꺽 삼켜버렸다. 은영은 덤덤하게 앉아 또다시 엄숙한 표정으로 굳어졌다. 그녀는 완전히 성격이 변하였다. 옛날 새물새물 웃고 활발하던 학창시절의 그녀의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었다. 종수는 뻐스에 앉아 돌아오면서도 그녀가 갈라지기 전에 부탁하던 말을 되뇌였다. “누구와도 절대 제가 여기 있단 말을 하지 마세요.” 종수는 은영의 처지를 생각하면서 땅이 꺼지게 한숨을 후~ 내쉬였다. 그는 뻐스를 타고 변경도시를 떠나 산기슭으로부터 굽이굽이 가파로운 령길을 힘겹게 넘어가는 뻐스를 보고 피뜩 은영이 힘겨운 인생고개길이 련상되였다. 마음  구석으로 그녀가 이제도 어떻게 인생아리랑 열두고개를 고달프게 넘을가 근심되였다. 종수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딸 청화가 반겨 맞았다. “아빠~ 맛있는 거 사왔어요?” “그래, 옛다!” 종수는 가방에서 엿사탕봉지를 꺼내 주면서 귀여운 볼에 뽀뽀를 해주었다. “와~ 좋다야. 이 후에도 꼭 엿사탕 사줘요. 예?” “그래, 우리 귀염둥이야.” 어머니와 숙희가 밥을 다 지어놓고 려평이 퇴근하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려평은 해가 넘어가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날 밤중에야 려평이 얼굴이 지지벌개서 비틀거리며 집에 들어섰다. “또 술을 마셨소?” 종수가 언짢은 눈길을 보냈다. 려평은 시부모와 시누이를 보고 합장하고 머리를 숙였다. “미안해요. 단위에 손님이 와서 술자리에 앉았댔어요.” 어머니는 근심됐다. “이후엔 늦어 오면 집에 전화라도 하오. 녀자 몸으로 밤중에 술을 마시고 홀로 집으로 오다가 일이 생기면 어쩌오?” 려평은 속이 괴여번저졌지만 “예, 알았다니까.” 하고 한마디 하고는 휑하니 웃방으로 올라가 미닫이를 꾹 닫아버렸다. 그녀는 성이 꼭두까지 치밀어 옷을 와락와락 벗어 구들에 훌훌 쥐어뿌려던지더니 청화 옆에 훌 드러누웠다. 종수는 꿀물을 풀어 들고 들어와 려평을 톡톡 다독였다. “꿀물이나 마시오. 이후엔 작작 마시오. 이게 뭐요?” “뭐 어쩐다고?” 순간 려평은 발딱 일어나 대들었다. “항상 집에 들어오면 답답해 술 한잔 마셨는데 무슨 잔소리 그리 많아요?” “아니,…” “내 주임을 쉽게 한 것 같아요? 우에서 우리 은행에 오면 술접대를 하지 않으면 돼요?” “술을 마시지 않는다고 주임을 못한다면 그런 주임을 그만 두오. 그까짓 주임을 못하면 뭐라오?” “오~ 그래, 이렇게 답답한 집 안에 붙박혀서 당신 부모형제를 위해서 밥이나 짓고 빨래나 하란 말인가요? 꿈도 꾸지 말아요.” 종수는 뭐라고 말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취한 색시와 말해보았자 아무런 효과가 없을 것이 아닌가. 그때 청화가 깨나 어머니 목에 매달려 징징거려서야 부부간에 말다툼은 끝났다. 종수는 어떻게 하나 이 놈의 집에 말썽이 없이 살려고 색시를 다독이군 했다. 그는 이불을 펴고 누웠다. 한참 후 청화가 어머니 목을 끌어안고 쌔근쌔근 잠들었다. 종수는 이불 밑의 공작을 시작하려고 손을 스르르 이불 밑에 가져갔다. 려평은 종수의 홱 뿌리쳤다. 그녀는 신랑의 귀에 입을 대고 재잴거렸다. “좀 작작 건드려. 더워 죽겠어. 숱한 보초군이 눈이 펀한데 좀 작작 주책없이 굴어요.” 종수는 손을 되찾아오면서 한숨을 후~ 내쉬였다. 한참 후 그는 려평을 스르르 끌어안고 귀속말로 구슬렸다. “여보, 만수가 대학 숙사로 갔지. 숙희도 혼사말이 들어오잖았소. 이제 부모만 모시고 우리 조용히 깨알이 쏟아지게 살기오.” “픽!” 려평은 코방귀를 뀌더니 종수의 가슴을 밀어내며 훌 돌아누웠다. “우린 그래도 자기 집이 있잖소. 우리 대학교 동창생들이 사는 걸 보오. 다 우리보다 못하단 말이요.” 려평은 돌아누운 채 잠잠했다. 종수는 계속 중얼거렸다. “성호는 고향에 돌아가 소궁둥이를 치지. 승호는 부부간에 서로 의심하면서 맨날 싸우면서 살지…” 려평은 훌 돌아누우면서 두 손으로 종수의 얼굴을 딱 잡고 날카롭게 물었다. “왜 동무네 동창생들은 다 그런가?” 종수는 려평을 꼭 끌어안고 어루쓸면서 조용히 구슬렸다. “당신의 남편은 전도가 창창한 기자란 말이요. 쥐구멍에도 해볕이 들 날이 있다고 두고 보오. 일을 칠 건 그래도 내란 말이요.” “픽!” 려평이 코방귀를 뀌며 돌아누우려고 했다. 종수는 려평을 꼭 껴안았다. “쨍 하고 해뜰 날 돌아올 거야.” 려평은 요 조그만 집에 홀가분하게 세간살이를 할 날이 돌아오기를 손꼽아 기다렸다. 삼복지간 찜통더위가 습격하는 어두운 집 안에는 갑갑한 침묵과 함께 잠시나마 황홀한 꿈이  흘렀다.                      45. 필마옹        가을바람이 선들선들 불어왔다. 길가의 수양버들나무들이 머리를 풀어헤치고 가을바람에 흐느적거리면서 행인들을 묵묵히 바래고 있다. 영희는 광훈을 업고 복화의 손을 잡고 큰 길을  건넜다. “학교에 갔다가 곧추 집에 돌아오라, 응?” “예.” 복화는 남동생한테 손을 저으면서 “빠이, 빠이!” 했다. “뽀뽀를 해줘라.” 영희는 몸을 낮춰주었다. 복화는 남동생의 발가우리한 볼에 뽁 뽀뽀를 해주고 손을 저었다. 영희는 저 멀리 행인들 속에 사라지는 복화를 바래고나서 한숨을 호~ 내쉬며 돌아섰다. (정말 오누이를 보고 이 놈의 집에 물앉았지. 바람둥이 나그네를 믿고 어떻게 살아?) 그녀는 진짜 승호의 과거를 묻지 않으려고 애썼지만 요즘 노는 꼴이 하도 괘씸해 참을 수 없었다. 그녀는 집에 들어서자마자 승호한테 바투 들이댔다. “당신, 요즘 왜 감옥에 자주 가요?” “그런 일이 있소.” 승호는 얼버무리면서 출근하려고 서둘렀다. 영희는 승호의 팔을 꽉 붙잡고 따지고 들었다. “모르는가 해요? 춘란이, 그 쌍년을 왜 자꾸 찾아가요?” 승호는 영희의 손을 뿌리치면서 두덜거렸다. “왜 쩍하면 의심해. 남편을 자꾸 의심하는 것도 병이야, 병!” 영희는 단말마적으로 대들었다. “당신이 먼저 의심했지. 내 먼저 의심했어?” 영희는 승호의 코대에 삿대질했다. “생각해보세요. 코수염쟁이랑 우릴 해치려고 코 밑에까지 슬슬 기여들었는데요.  깡패들 눈치는 채지 못하고 색시를 의심하면서 연극을 놀지 않았어요? 퉤! 더럽다. 그 주제에 경찰이 되려고?” “됐소, 됐어. 코수염쟁이한테 당하지 않았으면 됐지. 묵은 장부를 들춰 뭘 하오? 조과장을 방패막이로 내세워서 백화에 쳐들어온 코수염쟁이랑 멋지게 처치해버린 걸 모르오?” “픽!” 영희는 코웃음쳤다. “참 대단하군요. 당신 진짜 음흉하고 나쁜 사람이야.” 승호는 구들 끝에 앉아 신을 꿰다 말고 표독스레 쏘아보는 영희를 쳐다보았다. “아무 소리나 하겠소?” 질겁할 영희가 아니였다. “음흉하지 않아요? 조과장을 방패로 써먹고 뒤통수를 쳐?” “내가 살자면 조흥수를 재껴버려야지” 승호는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꿀꺽 삼켜버렸다. “왜 자꾸 춘란을 찾아가?” “…” 영희는 승호의 가슴을 떠밀며 무섭게 노려보았다. “감옥에서 나오면 첩이라도 삼을 작정인가?” 승호는 아무리 안해라고 해도 모든 것을 드러내놓고 말할 수 없었다. “이제 한번만 바람을 써보지. 그 잘난 물건부터 밑둥까지 썩뚝 잘라버릴테야!” “됐소, 됐어.” “공회주석이면 대단한가? 아무 수입도 없는 필마옹이지. 애 둘을 데리고 저런 나그네를 믿고 어떻게 살겠니? 그렇다고 한뉘 시부모한테 매달려 살겠는가? 시부모도 이젠 딸과 외손녀한테 엎어져서 지랄이지. 우리 광훈이하구 복화 이런 빌어먹을 집에서 태여난게 불쌍하지. 아이고, 원통해서 원, 못살겠다, 못살겠어.” “야, 그만하오. 동네 창피해 어떻게 살겠소?” “뭐라고? 숱한 깡패들이 우리 집을 박산낸게 누구 탓인가? 어쩜 깡패 겁나 온 시내를 돌면서 피난살이를 해?” 사실 승호와 영희는 온전한 집을 잡고 살 수 없었다. 깡패들이 뒤를 밟아서 세집을 알아내기만 하면 박살내군 했기 때문이다. 승호는 깡패와 영희한테 꼬리를 단단히 밟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바깥에서는 깡패들과 싸워야 했고 집 안에서는 영희를 구슬려야 했다. 그는 안해가 아무리 댕댕거려도 그저 한쪽귀로 듣고 한쪽귀로 흘려보내면서 참고 견디며 하루하루를 간신히 지탱해나갔다. 그는 댕댕거리는 안해한테서 벗어나 바깥으로 훌 나왔다. 얼마나 좋은지 몰랐다. 넘실거리는 수양버드나무들이 반겨맞지 않겠는가. 갑갑하던 가슴이 활 열리면서 홀가분해 살 것만 같았다. 그 기분도 잠시뿐, 백화상점에 가까와갈수록 그의 고민은 더 커갔다. 총경리 안수련은 “개인의 감정으로 사업을 대하지 않는다.”라고 하면서 과거를 묻지도 않고 승호를 구입과 과장으로부터 공회 주석으로 승급시켰다. 사실 승호는 공회 주석보다 보위과 과장을 하자고 작심했다. 그래서 천방백계로 조흥수한테 접근해 빈틈을 노려 잔등에 비수를 꽂았다. 안수련 총경리는 진작  승호의 음흉한 속내를 꿰뚫어보아냈다. 그녀는 승호를 보고 돈깨나 생기는 구입과 과장자리를 내놓게 하고 아무런 실권도 없는, 허명무실한 공회 주석으로 자리를 옮기게 했다. 무기를 휴대하는 보위과장 자리는 절대 음흉한 승호한테 넘겨줄 수 없었다. 그녀는 이젠 승호를 보기만 해도 속이 섬찍했다. 그 덕에 범송이 어부지리를 하였다. 안수련 총경리는 승호의 매부 범송한테 구입과 과장에 보위과장까지 시킴으로써 “개인의 감정으로 사업을 대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했다. 승호는 날이 감에 따라 더욱 불안했다. 이 후에 자기를 쥐도 새도 모르게 해치울 수도 있다는 의심이 더럭 들기도 했다. (공회 주석 자리야 필마옹이지.) 승호는 허구픈 웃음을 웃으면서 사무실에 들어섰다. 따르릉, 따르릉. 사무실에 들어서기 바쁘게 전화벨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승호가 바삐 전화를 들자 안경리 챙챙한 목소리 들려왔다. “리주석, 왔다 가오.” “예.” 승호는 전화를 놓고 황급히 총경리실로 반달음쳐갔다. 안총경리는 아주 엄숙한 표정으로 승호를 바라보았다. 승호는 무슨 지령이 떨어질지 몰라 조마조마했다. “리주석, 공회주석 자리는 아주 중요한 자리요.” 안총경리는 승호의 속내를 꿰뚫어볼듯이 쏘아보며 억지로 부드럽게 말머리를 뗐다. “시장경영과 인성화된 관리엔 꼭 훌륭한 기업문화가 안받침돼야 하오. 리주석,  백화상점 기업문화와 종업원들의 문화생활을 제고시키오.” 승호는 내심으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진짜 상업국 국장을 해도 될만한 녀중호걸이군.) 안총경리는 뒤말을 이었다. “리주석은 대학교 시절에도 운동을 잘해 소문이 높더구만. 동무 특장을 살려 공회 주석을 시킨 거요. 꼭 우리 백화상점의 기업문화를 멋지게 발전시키리라고 믿소.” 안수련 총경리는 이 시각만은 자기 딸의 정조를 짓밟은 짐승 같은 놈을 잊어버린  상 싶었다. “과부년의 더러운 새끼”라던지, “바람둥이 새끼”라던지 하고 승호를 욕하던 안수련 같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승호한테 몇발자욱 다가와 서서 아주 흥분된 어조로  부탁했다. “리주석, 온 시내 사람들의 눈길이 단번에 우리 백화상점에 확 쏠릴 그런 이벤트를 좀 구상해보오.” 안총경리가 “리주석”, “리주석” 하고 짧은 바지를 춰올릴수록 승호는 더욱 바늘방석에 앉은듯이 불안했다. (잠시야. 경옥은 삼십대 중반이 넘었는데 아직도 시집가지 못하고 있지 않는가. 과년해가는 딸을 볼 때마다 안총경리가 나에 대한 원한을 되새기면서 이를 복복 갈게 아닌가?) 순간 승호는 이전에 안수련 총경리를 주의하라던 성호나 종수의 충고가 상기됐다. 그는 드러내놓고 덮쳐드는 깡패들보다 안수련 총경리가 더 무서웠다. (청산은 좋으나 오래 있을 곳이 못되는구나.) 승호는 떠날 때는 떠나더라도 백화상점에 기념으로 뭔가 해놓고 싶었다. 어느 하루 선금과 범송이 아들애 영철을 데리고 승호네 집으로 놀러 왔다. “안아보자. 우리 조카님.” 승호는 영철을 안고 “뽀뽀, 뽀뽀.” 하고 길죽한 얼굴을 들이댔다. 영철은 승호의 꺼실꺼실한 수염투성이 얼굴에 뽁 뽀뽀했다. “물러나! 내 아빠야.” 광훈이 승호의 품에 안긴 영철을 마구 떠밀어냈다. “그러지 마. 영철은 네 동생이야.” 승호는 광훈과 영철을 한품에 끌어안았다. 영희도 귀여운 애들을 바라보면서 사과를 깎아 내밀었다. “아이고, 요것들이 귀해서 내 이 집에 붙어 살지. 그러찮으면 어떻게 살아?” 범송은 승호를 보고 “요즘 깡패들이 찾아왔니?” 하고 물었다. 승호는 영희와 선금을 흘끔 곁눈질했다. “오지 않았어. 세집을 바꿨더니 아마 찾지 못한 거 같아.” 범송은 머리를 끄덕였다. “개놈 새끼들, 10년도 넘었는데 계속 승풀이야. 깡패들의 뒤에는 경옥이 있는 거 같애.” “두목은 허송파 형제야.” 범송은 도리머리를 홰홰 둘렀다. “아직도 그 놈의 화근을 뽑아버리지 못해 야단인데. 어디 발편잠을 자겠니?” 승호는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였다. “대사는 대사야. 그 놈 새끼들은 번마다 미꾸라지처럼 법망을 빠져나갔단 말이야.” 그는 선금을 돌아보면서 물었다. “선금아, 넌 무용을 잘하잖니? 우리 백화상점에 군무를 보급했으면 좋겠다.” 선금은 영희를 바라보면서 “군무야 영희, 아니, 형님이 더 잘하지.”라고 했다. “백화상점에서 군무를 춰서 뭐 한다니? 또 안경리 수작이겠지. 아무리 군무를 춰서 시내 사람들의 눈길을 끌어도 필마옹 같은 너네 오빠한테 먹을 알이 있니? 안경리는 김치독을 다 파먹으면 헌 신짝 차버리듯 할 거야. 다 부질없는 짓이야.” 범송도 맞장구를 쳤다. “가끔 그런 생각이 들더라. 안경리는 겉으로는 승호와 나한테 무슨 주석이요,  과장이요 시켰지. 그러나 언젠가는 딸을 해친 보복을 할 거야.” 승호는 인차 제지시켰다. “그따위 생각하지 말라. 괜히 말썽을 일으키겠어.” 범송은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이전에 백화상점에 코수염쟁이랑 와서 행패를 부릴 때 왜 총경리실에 쳐들어가지 않았겠어? 어째 그녀가 꽥 고함치자 깡패들이 도망쳤어?” 승호는 범송을 흘겨보았다. “얘, 네까지 이럼 안돼. 그날 안총경리는 전화로 공안국에 신고했어.” 승호는 선금과 영희를 돌아보았다. “아무리 궁리해봐도 종업원들을 동원해 녀성축구대회나 배구경기를 해선 시내 사람들의 눈길을 확 끌 것 같잖아. 백화상점 광장에서 멋진 녀성군무를 추면 행인들의 눈길을 대뜸 끌 것 같다.” 선금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춰올리기 시작했다. “그래도 오빠 령감이 빨리 떠올라. 어쩜 운동만 하고 춤이라고 별로 춰보지 못한 오빠가 저런 궁리까지 해?” 범송도 맞장구를 쳤다. “그래, 승호가 백화상점 총경리를 하면 면모가 확 바뀔 거야.” “픽!” 영희는 코방귀를 뀌였다. “리주석? 필마옹이라고나 해라!” 선금은 보다못해 날카로운 눈길로 영희를 쏘아보았다. “얘, 넌 왜 오빨 그렇게 무시해? 오빠 섭섭하게 대한게 뭐야?!” “오늘 오빠 편을 들어 걸고 들겠니? 오빠한테 물앉아 사는게 어떤 심정인지 알기나 알고 이래?” “시골 농민의 딸이 오빠한테 시집온게 다 누구 덕이냐?” “오빠 아니면 내 시집가지 못했겠구나. 내만한 인물체격에 백마왕자한테라도 갈 수 있어.” “뭐라니? 오늘…” “그만두지 못하겠니?” 승호가 선금을 쏘아보았다. 영희는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또 넉두리를 했다. “다 쒀논 죽을 어쩌겠니?” “에이, 내 원 이 꼬락서니들 보기도 싫어.” 선금은 영철을 둘쳐업고 휭하니 바깥으로 나가버렸다. 범송도 멋적어 승호와 영희를 번갈아 살피다가 슬금슬금 선금을 뒤따라 나갔다. 승호는 권연을 꺼내 붙여물고 뻑뻑 피우며 속이 재가루로 타버린 연기를 물물  풍겼다. “아이고, 밉다, 밉다 하니 이젠 담배까지 피워? 애들이 페병에 걸리겠어.” “그만두지 못하겠소?!” 승호는 영희한테 눈 흰자위가 다 드러나게 눈알을 부라렸다. “어쩔 셈인가요?” 영희는 한발자욱도 물러서지 않았다. “계속 그래라. 이 놈 개굴 같은 집에서 나가지 않는가 봐라. 분해서 어떻게 살아? 아이구, 원통하다, 원통해!” “엄마!” “어머니~” 애들이 영희한테 안기면서 엉엉 울었다. “울지마. 울지마라.” 광훈이 애고사리손으로 엄마 얼굴의 눈물을 닦아주면서 “어머니, 울지마, 울지마. 응?” 하고 흐느껴 울었다. “응, 그래. 에이고, 불쌍한 새끼들아, 이런 집에서 깨난 너네 불쌍해 내 죽지 못한다, 죽지 못해.” 승호는 우는 처자들을 차마 보기 구차해 바깥으로 나갔다. 그는 청년시절에 일시적인 쾌감을 향수하려고 처녀의 정조를 짓밟은 후과가 얼마나 큰가를 새삼스레 느꼈다. 천추에 용서하지 못할 죄과가 피해녀들과 자기 가정에 비치는 검은 그림자가 얼마나 큰가를 골통이 빠개지게 맞혀왔다. “경옥이, 은영이, 홍희, 죽을 죄를 졌소. 죽여주오.” 그는 육신이 병신이 됐을뿐만아니라 정신상에서도 불구자로 돼가고 있다는 것을 가슴 아프게 느꼈다. “은영이, 타현의 검찰원에서 검찰원이 됐다지. 네 앞에 설 용기가 없구나. 너도 알아야 해. 한번 잘못 디딘 발로 해서 한평생 야수로 몰리면서 살아야 된다는 법은 없지 않느냐? 나도 새로운 출발을 하고 싶단 말이야.” 그는 강가 수양버들을 주먹으로 꽝꽝 치면서 고함쳤다. “나도 사람처럼 살고 싶다!” 그는 한없이 고통스러웠다. 누렇게 번져가는 수양버드나무가지들과 붉게 물든 저녁노을이 조용히 흐르는 강물에 비꼈다. 조약돌이 들여다보이는 강물이 누런 버두나무 락엽을 업고 맥없이 흐르고 있었다. 승호는 락엽이 쓸쓸히 지는 강가를 거닐다가 주춤 멈춰섰다. “어머니, 아버지, 내 처진 왜 이렇게 불쌍합니까?” 그는 부모를 찾아가 속시원히 하소연하고 싶었다. 고통스러울 때는 그래도 부모가 제일 기댈만한 마음의 기둥이요, 영구한 정신피난처였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를 떠올리자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아버지는 승호가 어릴 때 늘 자기 아들이 아니라고 하면서 어머니를 때리며 “누구 아들인가?”고 따지군 했다. 어떤 때에는 푹 취해서 시퍼런 식칼로 승호의 피를 받아 자기 피와 같은가 보겠다고 날뛰였다. 승호가 대학을 가자 아버지 태도는 확 바뀌여 승호 일이라면 특별한 관심을 보였다. 승호가 대학교를 졸업하자 대학교 규률검사위원회 허철만 서기에게 부탁해 공안국에 배치했다. 그러나 사위 범송을 데려온 다음에는 또 태도가 일변했다. 범송의 집에 뻔질나게 드나들면서 외손자 영철을 친손자 광훈보다 더 고와하였다. 더구나 외손자 돌생일에 친손자 돌생일 때보다 부조를 엄청 더 많이 했다. 선금한테 새 집도 사주었다. 승호는 녀동생을 질투하고 싶지 않았다. (걔들이 화목하게 잘 살면 돼.) 승호는 진짜 요지경 같은 이 세상이 자오록한 안개 속에 잠긴 장백산 상상봉처럼 아리숭했다. (언제면 모든 걸 다 깰가?) 부모네 집에 들어섰을 때였다. 때마침 부모가 다 집에 있었다. “어쩌다 왔니?” 어머니가 반갑게 맞았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저 훌 일어나서 서성거렸다. 승호는 아버지한테 “백화상점 공회주석을 그만두고 떠나려는데 어떻습니까?” 하고 물었다. “뭐라고?” 리철갑과 벽화는 모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아니, 그 좋은 백화상점에서 왜 나와?” “공회 주석을 내놓고 나와 뭘 하겠니?” 승호는 한숨을 후~ 땅이 꺼지게 내쉬였다. 그는 안수련 총경리가 자기를 대하는 태도와 근심을 싹 털어놓았다. 리철갑은 머리를 끄덕였다. 벽화는 도리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글쎄, 수련이 널 제발시켰지만 믿음이 가지 않더라. 널 그렇게 쉽게 용서할 수 있겠니? 다 가면이지, 가면! 걔는 어려서부터 묘하게 놀고 가면이 많았어. 속과 겉이 다른 년이야.” 승호는 단도직입적으로 자기 견해를 내놓았다. “남이 나를 버리기 전에 내가 남을 버리는게 낫습니다.” 리철갑은 상을 찡그리면서 “백화상점을 떠나 다른 단위로 간다고 잠잠할 것 같아?” 하고 도리머리를 저었다. 그 것은 경옥의 아버지 권력의 힘을 두고 한 말인 것 같았다. 경옥의 아버지도 이미 2선에 물러났고 안수련 총경리도 오래지 않아 퇴직할 나이였다. “너 어디로 간들 공회 주석이야 하지 못하겠니? 떠나라. 뭐나 감각대로 나가는 거야.’ 벽화는 승호의 견해에 찬동했다. 리철갑은 자기 말이 들지 않자 자리에서 일어나 어디론가 가려고 신짝을 꿰는 것이였다. “여보, 아들의 관건적인 시각에 어디로 갑니까?” 승회도 동을 달며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또 선금이네 집에 가겠지.” 리철갑은 그들 모자의 말을 마이동풍으로 흘려보냈다. “할 말 다했으니 모자간에 토론해 결정하오. 불시에 그 좋은 단위에서 나와 어디로 간단 말이요? 참 답답하오.” “저 나그넬 봐라. 딸 집에 작작 가세요. 사위 눈치 보이지 않아요?” “허허허. 남이야 딸집에 가든 말든 걱정도 상팔자다.” 철갑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바깥으로 나가버렸다. 승호는 어머니가 깎아놓은 사과배를 사각사각 갉아먹으며 물었다. “엄마, 안총경리와 무슨 악연이라도 있지 않습니까?” “악연 없어. 중학교 동창생일뿐이야.” 벽화는 안수련과의 과거를 알려는 승호의 물음에 회피하려고 했다. “아무래도 이상합니다. 어릴 때 기억이 지금도 나는데. 항상 나를 뭐 ‘더러운 과부네 아들’이라는지 ‘바람둥이네 놈새끼’라는지 하며 욕했습니다. 내 경옥과 좋아하는 걸 알았을 때도 그렇게 날 욕하면서 극구 반대했습니다. 여기에 뭔가 있는 거 같단 말입니다.” 승호는 어머니를 흘끔 쳐다보면서 물었다. “어머니 진짜 과붑니까? 울 아버진 친아버지 아닙니까?” “얘, 무슨 말이냐? 말도 안돼.” “그럼 왜 안경리는 그렇게 엄마를 욕합니까? 똑똑히 말해주십시오. 제대로 알아야 대책을 제대로 댈 수 있지 않겠습니까?” 순간 벽화의 얼굴에 복잡하게 얽힌 검은 그림자가 흘러지나갔다. 집 안에는 납덩이 같은 무거운 침묵이 한참 흘렀다. 그녀는 한참 쓰라린 추억에서 헤매다가 천천히 입을 뗐다. “너도 이젠 알아둘 필요있구나.” 승호는 어머니 말라든 입술을 마주 바라보면서 귀를 도사렸다. “나와 안수련은 소학교부터 고중까지 아주 친한 딱친구였지. 아니, 자매와도 같았어.  후에 우린 둘다 한 미남자를 사랑한 라이벌이였어. 그 일 때문에 우리 사인 라이벌로부터 원쑤로 벌어졌어.” “그래, 안경리도 우리 아버지를 사랑했습니까?” “아니야, 그런게 아니야.” 승호는 들을수록 오리무중에 빠졌다. “그럼?” “그 분은 훌륭한 청년이였어.” 승호는 들을수록 격분했다. “그래 그분은 뭘 하는 분입니까?” “그도 우리 고중 동창생인데 의사야. 그 분은 수련보다 나를 더 좋아했던 거야. 우리 둘은 함께 의학공부를 했던 거야. 수련은 그이를 짝사랑했어.” “의사 뭐 그리 대단해서? 흥! 공안국 과장을 한 우리 아버지 낫지.” 벽화는 도리머리를 흔들면서 눈물이 핑그르 돌았다. 눈물을 닦는 어머니를 바라보는 승호는 삽시에 당혹스러웠다. “그 의사한테 시집갔댔습니까?” 벽화는 도리머리를 흔들면서 눈물까지 주르르 흘렸다. “아니야.” 승호는 수건을 가져다 어머니 눈물을 닦아주었다. “어머니, 미안합니다. 혹시 어머니 옛 상처를 건드리지나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꼭 알아둬야 하겠습니다. 어째 그 의사한테 시집가지 않고 그만뒀습니까? 난 그 의사 아들입니까?” “후에 그 의사와 함께 농촌에 있는 그의 집에 가보았지. 놀랍게도 동생이 여덟이나 있더라. 그때 그의 어머니는 만삭이었어. 마흔도 넘었는데 말이야.” “오~ 들을수록 어리뻥뻥하군.” 승호는 도리머리를 홰홰 저었다. “그래 의사동창생과 살아서 나를 나았습니까? 한마디로 뚝 찍어 말하십시오.” 벽화는 눈물을 줄줄 흘리더니 두 손으로 승호의 얼굴을 붙잡고 쓰다듬었다. “얘야, 천천히 들어봐라. 우린 사돈보기를 하고 결혼날자까지 다 잡았는데 결혼하지 못했어.” 승호도 어머니 두 손을 잡고 정색해 물었다. “그 분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그 분은 다른 세상에 계셔. 결혼을 일주일 앞두고 불행하게도 세상을 떠나셨어. 흐흐흑, 흑흑.” 승호는 파도치는 어머니 가냘픈 어깨를 끌어안았다. “참 불행하구만요. 무슨 일로 돌아가셨습니까?” “갑자기 중풍에 걸려 사망했다. 아이고, 지금 생각만 해도 마음이 미여지는 것 같애.” 승호는 눈물이 글썽해 물었다. “어머니 시집가지 않았는데 안경리는 왜 어머니를 과부라고 욕합니까?” 벽화는 수건으로 눈물을 훔치고나서 뒤말을 이었다. “그 분은 수련보다 나를 더 좋아했지. 그래서 수련은 질투나서 나를 ‘과부’라고 소문을 퍼뜨린 거야. 됐다. 됐어. 네가 백상화점을 떠나면 그만이야.” 그녀는 훌 일어나 수건을 들고 세면실에 들어갔다. 승호는 따라가면서 물었다. “어머니, 그 분의 부모랑 지금 살아계십니까? 동생들은 다 지금 계십니까?” “됐다니까? 넌 그들과 아무런 상관없어. 넌 리철갑의 아들이야. 리선금의 친오빠야. 알만해?” 승호도 어머니 그 말뜻을 가슴깊이 아로 새기게 됐다. 그러나 궁금한게 너무나도 많았다. “한가지만 물어봅시다. 그 분의 이름은 뭡니까?” “그만둬. 현실을 중시해라. 아빠를 잘 모셔야 해. 그래야 우리 모자가 살아남는다.” 승호는 머리를 끄덕였다. “한가지 또 있습니다.” “됐다니까.” 벽화는 비누물을 먹여 수건을 쓱쓱 빨았다. “어머니, 왜 아버진 날 항상 자기 아들이 아니라고 욕하고 때렸습니까? 나와 그 의사 정말 무슨 관계 있는 건 아닙니까?” “야, 이 자식아, 날 뭘로 만들려는 거야? 진짜 바람둥이, 과부로 만들 예산이냐? 절대 그런 일 없어.” 그러나 승호는 의문을 꼭 풀고 싶었다. “나와 아버지 모색이 너무 다르니까. 아버진 키도 작달막하지만 난 꺽다리잖아요? 나도 아버지가 점점 친아버지 아니잖는가 의심됩니다.” “너까지 의심하니 이걸  어떡해? 제발 날 못살게 굴지 말라. 엄마 죽는 거 보자고 그래? 네 애비도 지금 널 점점 자기 아들 같지 않다고 날 구박하는데 너까지 왜 이래? 응? 제발 날 막다른 골목에 몰아넣지 말라.” 승호는 어머니를 더 핍박할 수 없었다. 그도 삼척동자가 아닌 이상 뭔가 짚이는 데 있었다. (내가 혹시 그 국장님의 손자, 의사의 아들일 수도 있어. 아무리 봐도 나와 아버진 생김새나 성격이나 뭐나 닮은 데 없어. 나는 훤칠한데 아버지는  작달막해. 나는 쌍까풀 세귀눈인데 아버지는 외가풀눈이야. 나는 메부리코인데 아버지는 납작코야. 그래, 그래서 아버진 어려서부터 날 자기 아들이 아니라고 했어. 그래서 자주 어머니를 구박하면서 뉘네 앤가고 따졌어.) 승호는 모든 것을 밝혀내고 싶었다. 아버지와 친자감정을 하고 싶었고 그 국장님을 찾아내 DNA를 감정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더는 어머니와 궁금한 것을 물을 수 없었다. 승호는 고통스레 세면실에서 나와 텔레비죤을 켰다. 그러나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음량을 높이 틀었다. 그러나 아무 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의 눈 앞에서는 번개가 번쩍이고 우뢰가 천지를 진감했다. 자기 팔자가 세상 둘다 없이 복잡하고 나빴다는 것을 점점 가슴 깊이 느꼈다. 또 과거보다 앞날이 점점 암담해지는 것만 같았다. 발목을 잡을 또 한가지 올가미가 서서히 드리워지는 것만 같았다. 승호는 눈물을 하염없이 흘리는 어머니를 뒤에 두고 바깥으로 나왔다. 을씨년스러운 가을하늘에서 가을비가 구질구질 지꿎게 쏟아져내렸다. 그는 어머니 집에 가서 혹을 떼려고 하다가 혹을 되붙여가지고 돌아왔다. 기분이 잡쳐 집으로 돌아오니 영희가 또 바가지를 긁어댔다. “나그네 백화점 공회 주석도 하지 않는다지. 깡패들이 찾아올가봐 상점도 마음놓고 차리지 못하지. 애들 둘이나 싸지르고 어떻게 살겠니?” 그녀는 묵묵히 창밖만 내다보는 승호를 흘끔 훔쳐보고나서 계속 도도거렸다. “저런 나그네를 믿고 어떻게 살겠니? 필마옹이라도 주어 할게지. 이제 어떤 단위를 전근하려고 그래? 참새처럼 어느 나무가지 높은가 여겨보면서 이 나무가지 저 나무가지 옮겨 날아다니다 말겠다.” 승호는 가타부타 묵묵부답이다. 그녀는 화를 왈칵 냈다. “어째 대답하지 않는가? 불시에 벙어리 됐는가? 이런 나그네 믿고 어떻게 살아?  한국이나 일본에 가버리지 않는가 봐라.” “그만두지 못하겠소?!” 승호가 고함치는 소리에 애들이 놀라 엉엉 대성통곡쳤다. 광훈은 엄마 품에 안겨 엉엉 울면서 놀란 눈길로 아빠를 쳐다보았다. “어이구, 어이구, 애들이 놀라 간이 다 떨어지겠다. 쯧쯧쯧, 바깥에선 어쩌지 못하고 집 안에서나 개 잡은 포수처럼 우쭐렁거리면서 꽥꽥 고함쳐라!” 승호는 용하게 꾹 참고 문을 벌칵 걷어차고 바깥으로 뛰쳐나왔다. (이 놈 집에서 어떻게 살아야 한단 말인가?) 퍼렇게 멍든 가을하늘은 대답 대신 지꿎은 쓰라린 비물만 내리쏟아부었다.    
165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 줄거리, 차례,인물표 댓글:  조회:2068  추천:0  2018-09-13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 차례 1/ 머리말 제1장 천하장사와 양반집 아들 1. 물레방아집 힘장사 2. 곰과의 생사박투 3. 달밤의 북장구 소리 4. 충신 김려생 5. 양반집 건달 6. 묵은 빚 7. 민족의 성산 백두산 8. 원시림의 총소리 9. 사냥꾼과 진달래 /제2장 고향 마을의 사람들 1. 샘물터에서 만난 처녀 2. 부엌 여 3. 호랑이와의 박투 4. 치마봉 전설 5. 운주동 서당 훈장 6. 수림에서 맺은 연분 7. 결혼 / 제3장 핍박에 의해 운주동으로 1. 경성 힘장사 2. 날강도 삼형제 3. 되찾은 딸 4. 겨를 주고 살점을 도려내는 격 5. 운주동 검객 6. 읽기 힘든 경 / 제4장 음모궤계 1. 친일주구 2. 먹은 소가 똥을 눠 3. 총도감의 꿈 4. 꼬임수 5. 고양이가 쥐 생각 6. 똥벼락을 맞은 지주 7. 일루의 희망 8. 인부모집 / 제5장 반항 1. 삯전 2. 불운한 애들 3. 토성안집의 큰 잔치 4. 눈물겨운 머슴살이 5. 무함 6. 조선의 원시림 7. 고향의 버들 8. 대결 9. 면회 /제6장 포수대 1. 남대치 2. 전우를 구출 3. 통나무 벌레의 비밀 4. 사냥꾼 5. 저목장을 습격 6. 일본 경찰국장의 수작 7. 힘장사 삼형제 / 제7장 흑야 1. 수림 속의 바위돌밭 2. 운주동 서당방 3. 오누이 4. 무당의 굿 5. 어미 없는 서러움 6. 뿌리 7. 사나이의 자존심 8. 암범과 늑대 9. 머슴 10. 어린 장사꾼과 부자 11. 뜻밖의 상봉 /제8장 영월동의 총소리 1. 개꼴망신 2. 생벼락 3. 역습 4. 오누이를 고문 5. 사형장을 습격 6. 정돈 7. 피비린 보복 8. “총 도감”의 묘수 9. 잠복 10. 야습 11. 밀모 /제9장 핍박에 의해 간도로 1. 농사꾼의 희망 2. 피난살이 3. 풍찬노숙 4. 친구와 원수 5. 이별의 두만강 6. 간도 소서구 7. 간도 땅의 유혹 8. 고별 9. 선바위 10. “꼬리 없는 소” 11. 유서 깊은 용드레촌 12. 둥지 /제10장 고난의 세월 1. 그물만 치고 고기를 놓쳐 2. 불쌍한 오누이 3. 정든 고향집 4. 고난의 길 5. 고향생각 6. 개구쟁이의 꿈 7. 주색에 미친 경찰국장 8. 조상의 비방 약 9. 무고한 백성들 10. 혹독한 고문 11. 닭을 잡아 원숭이를 훈계 12. 사꾸라관의 신음소리 13. 참살 /제11장 망국노의 한 1. 일제의 노화교육 2. 오누이의 생이별 3. 풍작을 거두었건만 4. 검은 그림자 5. 신음하는 용정 6. 가난한 집의 딸 7. 종적을 찾아 8. 군량미수레대오를 습격 9. 용정통감부 간도파출소 10. 호송대장과 밀정 /제12장 황야의 땅 1.극적상봉 2.항일의사들 3.토성안집 주인 4.망향의 한 5.중국 지주 6.무함 7.시비 8.송사 / 제13장 항일유격대 1.중국 형제민족들과 단합해야 2.안보촌에서 울린 총소리 3.항일유격대 본거지 4. “지게꾼”을 처단 5.밀정의 끝장 6.돌연습격 7.항일투사 8.함흥촌 9.원수 10.포위토벌 /제14장 한 많은 사랑 1.모범집단부락 2. 어린 누이 3.생이별 4.명천에서 온 사돈처녀 5.달밤의 연정 6.집안혼사 7.사위 8.첫사랑 9.뻐꾸기 뻐꾹 뻐꾹 10.효자와 사랑 /제 15장 피눈물 젖은 고향 1.유격대의 군량미 2.두만강과 밀림을 드나들며 3.신음하는 고향 4.험난한 고향 길 5.쑥밭이 된 고향 6.고향의 버섯과 딸기 7.큰물 8.먹장하늘 9.“무죄석방” 10.야습 11.핍박에 떠난 고향 /제 16장 조상들의 산소 1.부모의 산소 2.부모의 유골을 모시고 3.면례 4.친일주구의 끝장 5.경성 여관집 6.추포 7.흐느끼는 두만강 8.두만강 나루터 9.오랑캐령을 넘어 10.이국 타향에 모신 조상의 산소 /제17장 장백산에 피어난 진달래 1.음흉한 획책 2.사냥 3.특무 4.샘물터의 총소리 5.매복 6.전시 번개결혼 7.개싸움 8.대학살 9.밀림으로 진군 10.눈 함정 11.결사전 12.아, 장백산의 진달래 /제18장 여명의 전야 1.교하 여관 2.약 담배로 번신할 수 없어 3.효자 4.가난과 무지가 낳은 악과 5.열사들을 기리어 6.갈림길 7.급변하는 세상 8.친일 부자 집을 습격 9.조우전 10. 밀림의 최후매복습격전투 /제19장 광복의 나날에 1.일제의 최후거점을 점령 2.친일촌장을 처단 3.토지개혁 4.도가 집에서의 음모 5.지주를 청산 6.양아버지에게 충고 7.매복습격 8.토비두목을 총살 /제20장 토비숙청 1.갈림길 어귀 2.닭을 잡아 원숭이를 훈계 3.정들면 고향 4.토성 밑 개구멍의 비밀 5.허장성세 6.담판 7.삼도만 토비 소굴을 일망타진 8.추격 제21장 두 번째 고향 1.첫봄 2.첫사랑 3.서울 군영에서 만난 친일주구 4.동북군정대학 대학생 5.영월구 공안 국 준비소조 6.오두막의 부자간과 처녀애 7.자위대를 숙청 8.꿈에도 보고 싶은 고향 산천 9. 공안 국 준비소조 조장 10.민심 11.고향 행차 12.석별의 정 제22장 전우와 원수 그리고 형제 1.첫 전투 2.혀를 생포 3.맞불질 한 형제 4.친일주구 형제를 처단 5. 고지쟁탈전 6.동족상잔 7.장백산 원시림에 공중낙하 8.수림 속에서 발견한 통조림 깡통 9.함흥촌에 나타난 용천 대장 10.어둠속의 검은 그림자 11.대의멸친 12.일망타진 제23장 충신은 효자 1.귀향 2.압록강을 건너 3.군복공장 4.군복을 운송 5.한 많은 다발 령 6.무명고지 격전 7.효자의 마음 8.합작사 9.산등성이의 쓸쓸한 무덤 10.범바위골로 진군 11.올감자대풍작 12.고무신 한 짝 13.범바위골 생사박투 /제24장 폭풍우 1.조개덕으로 이사 2.덕대 위 덕돌 3. “한 헥타르에서 5만근 내라!” 4.우파분자 5.화선입당 6.집체식당 7.꽁 꼬투리 죽 한 사발 8.함정 9.추방 10. 3년 재해의 비극 11.폭풍우 속에서 쓰러져가는 사람들 12. 빗발치는 정치몽둥이 /제25장 시련 1.함흥대대 당지부 서기 2.개구쟁이 시절 3.원대한 설계도 4.“조선 특무”와 “한국 특무” 5.낙향한 교수 6. 싱그러운 사과 7.전염병을 전승 8.분권과 관용 9.특무의 아들과 지주 딸의 로맨스 10.시련 /제26장 폭란 1.폭풍우 전야 2.풍년의 희열 3.여자대장 4.먹장하늘 5.여우파와 지주 아들 6.외롭게 우는 외기러기 7.치보주임 8.밝은 달밤이 오면 9.사라진 여교원 10.청춘의 고백 11.사위 12.반란 13.돌을 들어 자기 발등을 까 14. 고향으로 날아간 혼 /제27장 암야 1.비밀사형 2.신음하는 꽃송이들 3. 청춘의 욕정 4.민주투표 5.삼십육계에 줄행랑이 제일 6.정든 고향을 떠나 7.“내 몫까지 공부해 달라” 8.교정의 종소리 9.우국우민의 충정 10.먹구름이 뒤덮인 광활한 천지 /제28장 동틀 무렵 1.어두운 장막아래 희극 2.학급의 작은 선생 3.묘지부근 혈안 4.경쟁 5.방화범의 말로 6.주먹세계로 7.암담한 세월 8.산에서 뛰쳐나온 맹호 9.혼돈시대 비극 10.소몰이꾼과 여무용수의 설음 제29장 천지개벽 1.파란만장한 인생길 2.탈출 3.개천에서 난 용 4.노호하는 하늘 땅 5.흉수의 그림자 6.꽃향기 풍기는 봄날 7.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 8.농촌 개혁의 봄바람 9.사랑환상곡 10.고민 제30장 망향 1.모험과 효성 2.백 프로 선생 3.설중매화 4.숲속에 피어난 나리꽃 5.우물 안에서 솟아난 용 6.토지 7.사랑의 여운 8.그리운 고향 산천 9.망향의 여한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 인물표 주인공:      김병완: 목수, 천하장사. 중공 지하당원,반일투사, 함흥촌 당지부 서기.        천하장사 김병완은 씨름을 잘하고 목수재간이 있다. 그는 친일주구, 자위대대 대대장 한길수놈과 1:1로 싸워 눈깔을 하나 빼 놓으며 목수총도감을 맡은후 둘째아들 창준과 셋째아들 기준과 함께 스즈끼국장의 눈을 피해 목재에 구멍을 뚫고 나무벌레를 집어 넣어 우시장 경찰국 사무청사와 숱한 군사도로의 다리가 무너지게 만든다. 뒤이어 핍박에 의해 간도 소서구에 도망하어 들어와 황무지를 억척스레 개간하고 농사를 지어 항일유격대에 쌀을 지원하며 맏아들, 항일유격대 대장 김성칠을 도와 자손들과 마을 사람들을 이끌고 지학사촌장을 비롯한 당지 친일주구들을 처단하고 가열처절한 항일투쟁을 직접 도와 나선다. 그는 또 당지 중국 지주들을 포함한 한족들과 형제관계를 윤활하게 맺으면서 안거락업하려고 한다.       광복후 김병완은 조선 고향으로 돌아가 운주동과 영월동, 가마골, 신흥동을 돌아 보았지만 일본 놈들이 산과 들의 황무지, 지어 밭이나 터밭에 몽땅 이깔나무를 심게 하어 밭이 하나도 없고 수림으로 돼버린 것을 보고 실망한다. 게다가 고향 사람들에게서 소외감을 느낀 그는 중국으로 돌아온다. 중국에서 지주를 청산하어 토지를 나눠 주고 집을 주자 자손들을 이끌어 함흥촌을 두 번째 고향으로 건설하려고 마음먹고 발 벗고 나선다. 그는 선후하여 함흥촌 촌장, 당지부 서기를 맡으며 어떻게 마을 사람들이 다 배불리 먹으면서 잘 살게 하려고 황무지도 일구고 경작법도 개진하면서 애를 쓴다. 허나 반우파투쟁과 문화대혁명 등 정치운동 때마다 생산만 틀어쥐고 혁명을 하지 않았다는지 조선특무라는지, 공지 총 도감이라는지 친일주구라는지 별의별 억울한 누명을 다 쓰고 투쟁을 받으며 눈물 겨운 고생을 다하며 전대미문의 비극적인 운명을 타고 비장한 인생비극을 엮어 간다. 주요인물:      김상순       항일투사, 지하당원, 간도 함흥촌 민병 대장, 민주동맹군 기관총반 반장, 주제2기당학교 졸업, 영월구공안국 준비소조 조장과 창설자, 부국장, 지원군 중대장(련장), 군복공장 공장장, 사단 비서과 과장 겸 사단장 통역, 후임 함흥촌 촌장, 당지부 서기. 생산대 정치대장. 광복후 리계삼과 김병완의 령도아래 토지개혁에 발 벗고 나서서 지학사 등 중국 지주청산에 한몫을 하며 토비숙청, 해방전쟁, 6.25한국전쟁에도 참가한다. 혁혁한 공훈을 세운 그는 당 간부로 양성되며 공안국 부국장까지 된다. 그러나 효성심과 초심에 의해 부모를 모시려고 함흥촌에 돌아와 당지부서기 김병완 할아버지를 도와 “인민공사화”에 힘쓰며 대약진시기 어떻게 하면 마을 사람들을 잘 살게 할것인가고 고민하며 마을 사람들을 이끌고 황무지를 개간하고 논을 푸지만 군중들의 생활난을 해결하지 못하며 문화대혁명시기 황무지를 개간한 것은 자본주의 싹을 키운 것이라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투쟁 받음. 개혁개방시대에 후임 당 지부 서기를 맡은 그는 도거리책임제에 대한 인식이 결핍하어 자본주의 구 사회를 복벽하지 않나 오해하며 나중에 치부해 보려고 힘쓰며 셋째아들 덕돌의 성장에서 자신의 부활을 꿈꾸며 쓸쓸한 간도의 황야에서 조상들의 산소가 묻힌 고향을 한없이 그린다… 최구장: 운주동 서당 훈장, 시골 애국적인 선비. 김성칠: 김병완의 맏아들, 사냥꾼, 조선독립군 분대장, 장백산 항일유격대 대장, 조선인민군 연대장, 동족상잔 전쟁의 열사. 김기준: 김병완의 셋째아들, 목수, 반일투사. 김용천: 한국 경상남도 경주 대지주의 아들, 조선독립군 중대장, 북만 항일유격대 대장, 한국 국군 연대장, 장백산 낙하 특무소조 조장. 이흥수: 중국인민지원군 패장, 함흥촌 당지부 선전위원, 치보주임. 간음죄와 살인죄로 총살당함. 황종연: 문화대혁명시기 반란 파 두목, 대대 혁명위원회 주임, 당 지부 서기, 공사 파출소 소장, 공사 혁명위원회 주임. 최진달래: 황해도 개성 출신. 장백산 사냥꾼. 항일유격대 여중대장, 우파, 조선 군 여성동맹위원장. 김인삼: 항일유격대 중대장, 조선인민군 대대장, 군 당 비서, 조선인민군 서부전선 포병부대 사단장. 덕돌: 김상순의 막내아들, 대학졸업생, 교원, 가도문화소 소장, 문화관 사업일꾼, 신문사 기자, 사장. 이계삼: 조선의용군 제3지대 간부, 간도 함흥촌 지하당지부 서기, 향 당위 서기, 현당위 부서기, “우파”로 몰리어 투쟁받음. 허영주: 조선의용군 제3지대 간부. 간도 함흥촌 지하당지부 부서기, 향장. 부현장. “우파”로 몰리어 고생. 허백호:민주연군 연장, 영월구당위 서기, 진수해 당위 서기, “우파” 누명을 쓰고 노동개조. 자살까지 시도. 억울한 누명을 벗을 때 뇌출혈로 비참하게 사망. 김창준: 김병완의 둘째아들, 목수. 반일투쟁에 참가. 최경숙: 최구장의 맏아들, 농민. 최명옥: 최구장의 딸, 김상순의 색시. 최경인: 최구장의 둘째아들, 검객. 항일 애국자. 이원삼: 순박한 농민, 힘장사, 반일투쟁에 참가. 최구철: 최진달래의 아버지. 개성 출신 장백산 사냥꾼, 항일열사. 정규상: 정성문의 아들, 일본 국비생으로 신경의과대학을 졸업, 의학원 부교수, 심장병전문가, “우파” 루명을 쓰고 한뉘 투쟁받고 노동개조를 함. 문화대혁명 후 지방인대 부주임, 교수. 김칠백: 김용천의 사촌동생, 농민, 사냥꾼, 조선독립군 대원, 항일유격대 중대장, 대대장, 조선인민군 대대장, 열사. 박영발:YB병원 당 총지 서기, “우파” 누명을 쓰고 함흥촌에 하향해 노동개조.함흥촌 위생소 소장. 최동욱: 농민, 사냥군, 조선독립군 대원. 항일유격대 중대장, 조선인민군 대대장. 박윤희: YB병원 간호사, 간호장, “우파”루명을 쓰고 함흥촌에 하향해 노동개조. 함흥촌 위생소 간호원. 엄은녀: 김성칠의 애인, 지주집 녀종, 항일육겨대 여대원, 우파, “조선특무”, 조선 면 여성동맹 위원장. 이송선: 가무단 무용수, 정성해 서기의 처남댁, 함흥촌에 내려와 노동개조. 한영수: 시 당위 판공실 주임, 문화혁명시기 항대 책임자, 지구 당위 접대처 처장. 이종호: 이원삼의 넷째아들, 농민, 힘장사. 김옥선: 이종호의 후처 이명숙: 리종호의 셋째 딸, 덕돌의 색시. 간호사. 김진선: 덕돌의 중학교 담임교원, 문학계몽스승. 김설봉: 농민, 교원. 상순의 오촌조카. 김성환: 김병완의 외조카, 편집, 김덕돌의 문학계몽스승. 김동선: 상순의 조카, 조선 함흥역 화물차 기관사, 화물 처 처장. 김공혁: 상순의 조카, 중국인민지원군 의사. 림호: 가마골 구장, 사냥군, 힘장사, 항일유격대 소대장. 리억복: 항일유격대 부소대장. 바위돌: 항일유격대 분대장 엄은희: 지주 집 부엌 여. 항일열사. 김상우: 김상순의 형님. 농민. 항일유격대에 쌀을 지원. 김상길: 김병완의 셋째손자. 항일유격대에 쌀을 지원. 최근형: 애명 봉인, 최구장의 장손. 허영호: 안보촌 민병련장, 영월구 공안국 과장, 진수해향 파출소 소장. 오병선: 민주련군 나팔수. 오옥선: 함흥소학교 교원, 우파. 박성근: 소련에서 이사해온 유식한 농민. “우파” 누명을 쓰고 사망. 지춘실: 이흥수의 아내, 김상순의 첫사랑. 해월: 이흥수의 딸, 덕돌의 중학교 동창생, 장충국의 연인. 여스님, 정신병환자. 강운룡: 시공안분국 형사경찰과 과장. 국장 김재군: 진수해공사 문화소 소장, 문화관 관장. 리인학: 진수해공사 무장부 부장. 진장. 김성욱: 김경학의 아들, 덕돌의 동창생. 한길수: 악패친일주구, 함경도 명천군 우시장 자위대대 대대장. 끼무라: 함경도 우시장경찰국 국장 겸 헌병대대 대대장. 한철주: 한길수의 장남, 일본와세다대학 유학생, 친일주구, 일본관동군 부사단장, 한국 국군 부사단장. 한선주: 서울 일제시기 파출소 소장, 한국 국군 연대장. 응삼: 한길수의 마름, 운주동 구장. 자위대 중대장. 이수길: 영월동 구장, 한길수의 수하 자위대 중대장, 일본군 별동대 부대장. 이영팔: 신흥동 구장, 한길수의 수하 자위대 중대장. 장충국: 중국지주 장학사의 장남, 김상순의 의형제, 항일투쟁에 참가, 국민당군 토비 반장, 국민당 자위대 패장. 월선: 기생집 행수 기생, 한길수의 후처. 야마모도: 명천군 림업파출소 소장, 일본군 별동대 대장. 스즈끼: 함경북도 우시장경찰국 후임 국장 겸 헌병대대 대대장, 업동경찰총국 부국장 겸 헌병총대 부대장. 가메다: 별명은 털 한모숨이, 일본헌병대대 소대장, 간도특파 특무소조 조장. 똘만: 친일주구, 우시장경찰국 경찰, 간도특파 특무. 허꺽쇠: 친일주구, 우시장경찰국 경찰, 간도특파 특무. 류강철: 친일주구, 끼무라의 통역. 백승철: 친일주구, 간도특파 조선인특무소조 조장. 지학사: 친일주구, 중국지주, 함흥집단부락 촌장. 장학산: 중국지주, 국민당 지하당원. 사이또: 일제 용정통감부 간도파출소 소장. 조덕림: 중국 지주, 국민당 지하당원. 조덕산: 국민당 영장, 토비두목. 이병진: 농민, 방화범. 장미련: 지주 장학산의 딸. 김경주의 아내. 황승연: 황종연의 동생, 반란 파 두목, 교원, 진수해중학교 교장. 등장인물: 박우성: 군정대학 반장, 상순의 동창생, 영월구 공안국 과장. 천용구: 영월구 흥기촌 민병련 련장, 월월구 공안국 과장, 부국장, 국장. 허군호: 항일의병 연대장, 한국 국군 사단장. 이병수: 김병완의 처조카, 한국 국군 소대장, 장백산 낙하 남조선 특무. 김창남: 동북군정대학 졸업, 영월구 공안국 과장, 현 공안국 부국장, 국장. 김용만: 문화대혁명시기 할빈에서 온 반란 파 두목 이 씨의 통역, 반란파 두목, 시 공안국 국장. 최사련: 김기준의 아내. 최죽순: 최구장의 맏딸, 석은의 아내. 최계순: 최구장의 작은 딸. 엄창렬: 엄은녀의 아버지. 덕팔: 운주동 병완의 친구, 유격대 철규의 아버지. 덕성: 목수, 김용천의 삼촌, “우파”, “한국특무” 루명을 쓰고 자살. 병수: 한길수의 머슴, 은녀의 남편, 항일열사. 득호: 한길수의 머슴, 항일열사. 정형만: 가마골 출신 사냥꾼, 일본 강박군대에 입대, 유격대 열사. 김병권: 김병완의 형님, 한의, 반일애국열사. 김관준: 김병권의 맏아들. 한의. 김상철: 김병권의 장손. 김형내: 김상철의 아들. 한의, 항일애국자. 이성희: 김병완의 아내. 윤하옥: 김성칠의 아내, 항일 여 열사. 김수월: 김창준의 본댁. 병수: 한길수 머슴, 은녀의 남편, 항일열사 득호: 한길수 머슴, 항일 열사. 조꼬마: 김성칠의 경위원, 항일열사. 조철호: 조선인민군 정찰병, 김옥선의 본 남편. 지새금: 김병완의 둘째손비. 김벽선: 김공혁의 미혼처. 정성문: 기준의 친구 독립군 나팔수. 월향: 기생집 행수기생. 김옥설: 김해 출신, 종군위안부. 뽕녀: 종군위안부. 만금: 인천 출신 종군위안부. 김석철: 김병완이 육촌동생. 김석은: 김병완의 육촌동생, 최구장의 맏사위. 리춘삼: 리원삼의 큰형님, 항일투쟁에 참가. 리인삼: 리원삼의 둘째형님. 리무삼: 리원삼의 동생. 엄상호: 영월동의 사냥꾼, 항일열사. 리성단: 최구장의 아내. 허옥실: 최구장의 맏며느리. 김어금: 최구장의 둘째며느리, 김기준의 맏딸 지새금: 기준의 맏며느리, 상우의 처. 허창수: 두만강변 나루터 조선 지주. 리창록: 두만강 어부. 죤슨: 룡정교회당 신부 김하규: 명동교회당 목사. 항일애국자. 이붕수: 이흥수의 큰형, 함흥촌 당지부 조직위원. 이희수: 이흥수의 둘째형, 중국인민지원군 소대장. 리병수: 이성희 오빠의 손자. 한국 국군 대대장, 한국 특무소조 대원. 허영희: 군복공장 식당 주임. 김경학: 형내의 동생. 김진욱: 시당위 사무실 간부, 문화혁명시기 항대 총무 주임, 투옥돼 노동개조. 장동원: 함흥중학교 당지부 서기. 오옥선: 함흥소학교 교원, “우파” 누명을 쓰고 투쟁받다가 조선에 나감, 면 여성동맹위원장. 허동원: 조개덕 생산대 대장. 허춘의 아버지. 김경주:김용천과 진달래의 아들, 한국에 도망치다가 투옥됨. 김경수:김성칠과 진달래의 아들. 상지민: 함흥촌 상해집체호 호장, 반란 두목. 수호: 상해 지식청년. 황련지: 상해 여지식청년, 수호의 아내. 장영웅: 장동원의 아들, 덕돌의 동창생, 반장. 방순희: 덕돌의 소꿉친구, 중학교 여동창생, 학습위원. 은숙: 덕돌의 여동창생, 첫사랑. 허동린: 덕돌의 고향 친구, 중학교 동창생. 조영희: 함흥촌 집체호 여지식청년, 덕돌의 연인. 허춘: 덕돌의 친구, 허동원의 아들. 철주: 덕돌의 고향 친구. 야마다: 명천 상우남면 면장. 류강철: 일본군 통역. 나까노라이찌로: 우시장헌변대대 소대장. 박성은: 명천 상우남면 후임면장. 스까다이찌분로: 일본경찰. 리달송:일제 룡정통감부 간도파출소 통역 허사달: 룡정조일파출소 소장 지학구: 일제 간도 해동분주소 소장 리영룡: 간도 물레박골 조선족악패지주. 허팔기: 간도 성지 촌 친일주구, 밀정. 손학정: 중국 지주. 조덕림: 중국 지주, 국민당 지하공작원 백승만: 백승철의 맏형, 웅진날강도, 친일주구. 백승핵: 백승철의 둘째형, 웅진날강도, 친일주구. 오가와: 천수해 종군위안접대소 소장. 하나꼬: 일본 종군위안부. 아끼꼬: 일본 종군위안부. 하루꼬: 일본 종군위안부. 유끼꼬: 일본 종군위안부. 야마꼬: 일본 종군위안부, 친일악패지주, 함흥촌 위촌장,  지학사의 첩. 장리국: 지주 장학사의 둘째아들, 대만으로 도주. 지은실: 지춘실의 녀동생, 만주 함흥촌 출신 종군위안부.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 줄거리 조선 함경북도 명천군의 한 산골 마을인 영월동에 김병완이란 천하장사가 있었다. 그는 조선궁정어의 김승중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는데 부지런한 목수었다. 그는 고향 마을의 숱한 집을 지어 주었고 자기 씨름적수었던 한길수의 팔간대청도 지어주었다. 한길수는 영월동의 지주었는데 린색하고 질투심이 많으며 음흉한 난봉군이었다. 그는 씨름판에서 씨름 1등을 한 병완에게 걸고 들었다가 연속 쥐새끼처럼 병완에게 깔리운다. 그러자 병완의 고향 운주동 집에까지 찾아와 씨름을 하자며 걸고 든다. 그리하여 병완은 그에게 고의로 지는척 해 준다. 그때부터 그들 둘은 의형제로 되며 한길수는 영월동을 자기 손에 완전히 넣으려고 힘이 센 의동생 병완을 자기 마을에 와서 함께 살자고 한다. 그러나 병완에게 차차 마을 민심이 쏠리는것을 보자 한길수는 병완을 라이벌로 점 찍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모해하려고 든다. 그후 병완의 아들이 사냥을 해 온 곰의 고기를 자기 집에 먼저 가져오지 않고 마을의 덕팔과 창렬, 송국 등을 청해 먹인 것을 구실로 마름 응삼과 졸개들인 영팔이, 수길이 등을 시켜 갓 이사해 왔을 때 자기 집에 1년 가까이 있으면서 신세 진 값을 내라고 한다. 그는 리자에 리자를 덧붙이고도 모자라 지어 자기 집에서 먹은 땅 밑의 물값에 하늘의 공기까지 값을 쳐 내라고 강요한다. 졸개 영팔 등은 몽둥이로 김병완을 때린다. 허나 병완에게 얻어 맞고 꼬리 빳빳해 도망친다. 김병완은 한길수가 꿍꿍이를 꾸미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영월동에서 떠나려고 하지 않으며 꿋꿋하게 감자농사와 사냥을 하면서 산다. 병완의 맏아들 성칠은 사냥을 잘하는 포수이다. 그는 나이가 들도록 자식을 보지 못하어 답답하면 말을 타고 검둥이를 데리고 사냥길에 들어서군 한다. 그는 눈보라 휘몰아 치는 백두산 수림속에서 우연히 움막을 짓고 사는 최구철과 최메돼지(진달래)를 만난다. 성칠과 진달래는 오누이처럼 친해지게 된다. 진달래는 그때부터 성칠에 대한 애틋한 사랑의 싹이 트기 시작한다. 알고 보니 최구철은 운주동의 서당방 훈장 최구장의 사촌동생이었다. 최구철은 원래 황해도 개성의 어느 산골마을에서 농사도 짓고 포수도 하면서 살았다. 그런데 일본 놈들은 최구철의 맏아들 경호를 강박으로 군대에 잡아간다. 설상가상으로 둘째아들 최경환이마저 강제징용하려고 놈들이 덮치어 왔다. 그러자 최구철은 김치움에 숨어 있다가 일본 놈들을 쏘아눕힌다. 그때 최구철의 아내와 경환이가 일본 놈들의 저주로운 총탄을 맞고 목숨을 잃는다. 최구철은 자기 집으로 뛰어드는 일본 놈들을 두놈 쏘아 눕히고 어린 소녀 진달래 손을 잡고 고향에서 달아나 줄곧 북으로 도망쳐 장백산 밀림 속에 들어와 사냥하면서 산다. 성칠과 최구철은 장백산에서 곰과 호랑이 무리와 싸우며 사냥하여 숱한 곰을 잡는다. 진달래는 나무가지를 구르며 이 나무 저 나무 원숭이처럼 날아 다니며 곰과 호랑이들에게 돌을 날려 사냥한다. 성칠과 진달래는 석별의 정을 나무며 백두산 밀림에서 헤어진다. 영월동 산비탈에서 성칠은 샘물터에서 물을 긷는 한 마을의 처녀 은녀를 만나 시원한 샘물을 마시고 집으로 돌아간다. 은녀도 성칠오빠에게 애틋한 사람의 싹이 움트고 있었다. 그러나 조강지처가 있는 성칠은 은녀나 진달래를 그저 누이동생으로만 볼뿐이었다. 그는 은녀의 아버지 엄창렬이가 앓는다고 사냥을 해서 얻은 곰의 열마저 주며 엄창렬이네 집 이영도 동생들인 기준과 창준을 데리고 가서 이어준다. 한길수는 병완이네와 가깝게 보내는 김덕팔, 엄창렬, 김덕성, 송국 등 마을 사람들을 하나하나 떼내려고 음흉한 꾀를 부리었다. 그는 엄창렬에게 빚재촉을 하면서 빚 대신 은녀와 은희마저 부엌데기로 끌어 들여 간다. 색마인 한길수는 후처 월선이가 늙었다고 나무리면서 은근히 음충한 눈길로 은녀와 은희에게 눈독을 들인다… 최구장은 원래 개성 서당방에서 훈장질을 하였다. 그러나 작은 집의 최구철이 도망친 후 일본 놈들의 성화에 고향에서 살 수 없어 머나먼 함경도 명천군 운주동 사골안에 도망하여 산다. 그러나 점차 일본 놈들이 창씨개명을 강요하고 조선 사람들이 조선말을 하지 못하게 하며 서당방에서 조선글도 배워 주지 못하게 한다. 그리하여 서당방에서 어린애들에게 천자문과 조선글을 배워 주면서 근근득식하며 살던 길이 막힌다. 게다가 한길수는 자위대 대대장질을 하면서 김병완과 사돈간인 최구장을 운주동 구장자리에서 몰아 내며 졸개 응삼을 구장자리에 앉힌다. 응삼은 원래 최구장의 제자었지만 친일주구로 되어 늘 최구장이 서당방에서 조선글을 배워 주는가고 감시하여일본 경찰국 끼무라국장에게 고발하군 하었다. 최구철의 맏아들 경숙과 둘째아들 경인은 땔나무를 하러 산속에 갔다가 산나물을 캐려고 온 신흥동의 허옥실과 영월동의 김어금을 우연히 만나게 된다. 산속 수림에서 무리 뱀을 만난 허옥실과 김어금이 달아나면서 구원을 요청할 때 땔나무를 하러 갔던 경숙과 경인은 그들을 구원한다. 그후 그들은 서로 련정을 맺으면서 나중에 최경숙과 허옥실, 최경인과 김어금은 재미나는 사랑이야기를 엮는다. 성칠은 엄창렬이네 빚을 물려고 또 사냥에 나간다. 그는 머나먼 동북쪽 수림으로 사냥하러 갔다가 수림 속에서 땔나무를 하는 리원삼, 리춘삼, 리인삼, 리무삼이네 사형제를 만난다. 리원삼은 어찌나 힘이 센지 어지간한 나무는 손으로 잡고 어깨로 떠밀어 뚝 끊는다. 성칠은 또 돌아 오는 길에 웅진에서 날강도질을 일 삼는 백승만, 백승핵, 백승철 삼형제를 만나 하마트면 목숨을 잃을번 한다. 그는 구사일생으로 박투 끝에 백승핵이네 삼형제를 굴복시키며 그 자들이 날강도질해 얻은 금은보화를 빼앗아 가난한 백성들게게 나눠 주며 마을에 돌아와 엄창렬의 빚을 갚아 주고 은녀를 빼내온다. 병완은 한길수와 계속 싸우기로 작심하고 맏아들 성칠과 며느리만 남기고 자손들을 모두 고향 운주동에 이사해 가 살게 한다. 한길수는 자기 수하들의 힘으로는 병완을 어쩌지 못하겠다고 느낀다. 그때 일본에 류학을 갔다가 돌아온 그의 맏아들 한철주가 고향으로 돌아와 일본 놈을 등에 업으라고 대책을 대준다. 한길수는 우시장에 갔다가 기생집에서 우연하게 술에 취한 끼무라를 만나게 된다. 조선 명천 우시장 기생집 행수 기생 월향과 젊은 기생 옥설, 뽕녀, 만금을 두고 다투다가 하마트면 끼무라의 군도에 찍히워 죽을번하다가 구사일생으로 도망친다. 후에 한길수는 통역 류강철에게 금덩이를 주고 일본 경찰국 국장 끼무라에게 연줄을 놓아 면목을 익히게 된다. 한길수는 또 끼무라국장에게도 금은보화 한보자기나 주고 그 놈을 등에 업고 친일주구로 되어 김병완과 성칠을 짓뭉개려고 갖은 음모궤계를 다 꾸민다. 일본 경찰국장 끼무라는 한길수를 이용해 새 경찰국 청사를 지으려고 한다. 한길수는 끼무라에게 충성심을 보이려고 사재를 털어 품삯을 선전으로 민공들에게 주면서 병완과 덕팔 등 목수들을 구슬리어 경찰국 사무청사를 짓는 공지에 데려 온다. 품삯을 딱딱 준다는 한길수의 얼림수에 속히워 병완은 마을 사람들을 동원하여 공지에 데려온다. 그러나 한길수는 원래 린색한인지라 계속 자기 돈으로 삯전을 주지 않으려고 하며 끼무라에게 삯전을 주게 돈을 달라고 요구한다. 그러자 끼무라는 대일본제국의 경찰국을 짓는데 무슨 놈의 삯전인가고 눈알을 부라린다. 삯전을 제대로 주지 않자 병완은 민공들과 함께 한길수에게 삯전을 주지 않으면 모두 집에 돌아가겠다고 떠든다. 그러자 한길수는 졸개들을 시켜 병완을 때리려고 든다. 병완은 졸개들을 때려 눕히고 나서 한길수와 1대 1로 싸우자고 나선다. 한길수는 우쭐해 병완을 주먹으로 치고 박고 하다가 최후일격으로 골받이를 한다. 그러나 병완이 훌 허리를 굽히면서 옆으로 피하자 이깔나무 옹이를 들이받아 눈깔이 빠지며 쓰러진다. 일본 놈들과 졸개들은 민공들을 선동해 삯전을 달라고 떠들며 반항하게 하였다고 병완을 바줄로 묶어 경찰국 감옥으로 끌어 간다. 성칠과 병권은 산삼마저 가져다 주면서 일본 헌병대를 얼려 병완을 감옥 면회실에서 면회한다. 병완은 아주 의미심장하게 성칠에게 “옹이나무와 나무벌레를 주의하라.”라고 암시한다. 성칠은 돌아와 목수인 기준과 아버지가 감옥에서 한 말의 의미를 풀이하고 기둥과 대들보, 가시오를 나무벌레 먹은 나무로 만들며 나무벌레가 먹지 않은 통나무에 넣으려고 나무벌레를 미리 잡아 톱밥에 감추어 둔다. 그는 채벌을 하면서 김칠백의 사촌형 용천을 알게 된다. 용천은 경상도 경주에서 온 지주의 아들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일본 놈들이 자기 고향 집을 몰수하어 촌공소를 앉히려고 하자 욕설을 퍼붓으며 반항한다. 일본 놈들은 군도로 용천의 아버지 팔을 찍는다. 그래도 용천의 아버지는 섬나라 오랑캐들을 계속 욕질하다가 장렬하게 학살당한다. 그리하여 용천은 북으로 도망쳐 독립군을 찾아 총을 들고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일본 놈들과 싸우기 시작한다. 후에 그는 독립군 중대장으로 된다. 그는 성칠에게 3.1독립운동이며 청산리에서 일본 놈들을 여지 없이 소멸한 청산리전역이며 안중근이 이등박문을 쏜 이야기며 룡정의 3.13운동이며를 들려 주며 성칠을 독립군에 들라고 선전한다. 그러나 성칠은 처음에는 어떻게 하나 고향에서 살 구멍을 찾으려고 인차 대답하지 않고 망설인다. 우시장 경찰국의 교활한 끼무라국장은 병완을 처벌할 대신 포승을 손수 풀어주며 한길수를 쳐눕힌 병완에게 오히려 한길수 대신 공지 총도감까지 시키며 경찰국을 지어 달라고 한다. 그러나 병완은 삯전을 한푼도 받지 못하기에 총도감은커녕 목수 일도 하지 않겠다고 거절한다. 끼무라는 손수 목수들에게 삯전으로 주라고 옆전을 한웅큼 쥐어 병완에게 준다. 한길수는 페인으로 되었다고 자기를 업신여기면서 총도감마저 시키지 않는 끼무라가 한스러웠다. 그러나 후에 끼무라는 한길수가 사람을 다스리는 능력만은 있다고 자위대대 대대장을 시킨다. 그러자 한길수는 다시 끼무라의 사냥개가 되어 영월동뿐만아니라 운주동, 신흥동, 가마골 아니, 전 우시장, 나아가서 명천을 쥐고 흔들고 미녀들을 독차지하려는 야심을 품으며 그 야심을 실현하려고 망녕되게 시도한다. 그는 영팔, 응삼, 수길 등 졸개들을 시켜 목수칸을 감시하게 한다. 지어 목수도 아닌 건달 곱사등이 백승만까지 불러다 목수칸에 잠입시켜 병완과 창준, 기준 등 목수들을 감시하게 한다. 끼무라는 직접 졸개들을 끌고 가을걷이를 하려고 공지에 나오기를 거부하는 신흥동과 가마골에 가서 구장 림호, 용기, 석수 등 수많은 농민들을 강제로 자동차에 실어다 부역을 시킨다. 가마골의 구장 림호는 굴에 들어가는 호랑이 꼬리를 꽉 잡아당기며 싸워 잡은 적이 있는 힘장사었다. 기둥을 세울 때 기준이네 부자와 리원삼, 리인삼, 리춘삼 삼형제, 림호가 합심해 아름드리통나무기둥을 척척 세운다. 병완은 일본놈들의 경찰국이 무너지게 하려고 두 아들과 고심하던 끝에 일부러 기준을 시켜 밀정 백승만과 싸움을 걸게 하며 그 틈을 타서 기둥과 대들보, 가시오에 미리 뚫어 놓은 구멍에 톱밥에 감추어 두었던 나무벌레를 집어 넣은후 나무쐐기를 박어넣고 아교를 살짝 발라 놓는다. 그후 병완은 명천으로부터 우시장과 경성으로 통하는 군사요충도로를 닦는 공지의 총도감을 맡게 된다. 삯전도 주지 않는 일을 하기 싫었지만 경찰국을 지을 때 쓴 수법 그대로 나무벌레가 먹은 나무로 숱한 도로다리를 놓는다. 그리하여 병완네 일가가 간도 소서구로 도망친 몇해 후 경찰국과 숱한 도로다리가 무너지게 만든다. 그런줄도 모르고 끼무라는 한길수를 경찰국을 아주 멋지게 짓고 숱한 다리를 놓고 군사도로를 잘 닦았다고 훌륭한 자위대대장이라고 치하하며 우시장에 벽돌기와집까지 한채 준다. 한길수는 끼무라국장 등 일본 놈들을 별장과도 같은 영월동의 토성안 집에 청해다 술대접하고 조선 기생들과 일본 기생들까지 데려다 춤판을 벌리며 기생대접까지 하며 아부한다. 그는 은녀를 희롱하는 응삼을 몽둥이로 쳐 눕히고 사랑방에 기어들어 응삼의 처를 간음한다. 그는 응삼이를 쳐 눕힌 죄를 득호에게 덮어 씌워 감옥에 가두게 하면서 진짜 울지도 웃지도 못할 희극을 논다. 최구장은 원래 유교에 충성한 선비로서 인, 의, 례, 의, 지, 례, 중용지도를 주장하면서 자손들에게 일본 놈들과도 날을 세우지 말자고 하었다. 일본 놈들의 만행을 보고서는 서당방이라도 잘 차려 어린이와 마을 사람들을 교육해 지식을 장악하고 반일사상과 애국사상을 키워 주려고 한다. 그는 일제 놈들의 눈을 피해 가만히 서당방에서 조선글을 가르치고 장백산과 같은 조선의 명산을 애들에게 소개해 준다. 그러나 일본 놈들과 응삼 등 친일주구들은 최구장의 서당방을 문을 닫게 하며 최구장을 감옥에 처넣고 혹형을 가한다. 그러나 끼무라는 대일본제국의 조선 문치정책대로 과도하기 위해 그더러 일본제국에서 마을에 꾸린 일본 학교에서 노화교육을 하라고 강요한다. 그러나 최구장은 단연히 거절하다가 옛제자인 류강철이 일본제국을 이기려면 일어를 배울 필요가 있다고 하자 칠순 고개를 바라보는 고령에 일어를 배우고 애들에게 일어를 가르칠 준비를 한다. 그러면서도 양대가리를 걸고 개고기를 파는 식으로 가만 가만 조선어를 배워 주고 애들의 마음 속에 항일투쟁의 불씨를 심어 놓는다. 그런데 허옥실이 집안 대들보에 사닥다리에 올라가 메주를 뜯다가 갑자기 서당방에 뛰여든 일본 놈들을 보다가 떨어져 뇌부종이 와서 쓰러진다. 일본 놈들은 며느리 병으로 하여 절당으로 가려는 시어머니 리성단을 붙잡고 일본제국에 충성하는 인사말을 일본말로 하라고 하며 창씨개명을 하라고 강요한다. 그리하여 리성단은 배를 끌어 안고 웃을 일본 놈들과 희극을 논다. 최구장이 소를 잡고 아무리 무당을 불러다 굿을 해도 맏며느리 허옥실은 다섯 살 난 근형과 네 살 난 딸애 최명옥을 두고 20대 후반의 꽃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만다. 어머니를 여읜 근형과 명옥은 눈치 밥을 먹으면서 갖은 눈물겨운 고생을 다 한다. 할머니를 따라 갑산에서 감자농사를 하는 작은삼촌 집에 갔다가 삼촌에게 밥 축을 낸다고 매를 맞고 침으로 찔러놓아 볼이 피투성이 된다. 그리하여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겨울에 함지를 지고 다리를 다 얼면서 몇 십리를 걸어 고향 운주동으로 돌아간다. 밥값이라도 하려고 그들 오누이는 지주 집 정미소에 가서 게 속의 쌀알을 눈이 시리게 주어 돈 2전을 벌기도 하고 일본 놈들이 길을 닦을 때 할머니와 작은 고모 계순과 함께 강변에서 조약돌을 주어 담기도 한다. 또 산나물도 캐고 이삭주이도 하고 손발이 쉴 새 없이 일하며 잔뼈를 굳혀 간다. 마을 사람들은 경찰국과 길닦이 공지에 나가 시달리면서 농사를 제대로 짓지 못한데다가 삯전 한푼 받지 못하나나니 살기 어렵게 되었다. 경인이네는 강변에서 버드나무 가지를 베여 성칠은 병완의 말대로 마을 사람들을 데리고 사냥이라도 해서 보탬하려고 한다. 그러나 림업파출소의 야마모도소장놈은 산짐승도 몽땅 일본 산짐승이라고 떠벌이며 사냥도 하지 못한다면서 사냥총을 빼앗아가려고 한다. 그러자 성칠은 총을 주지 않으려고 반항한다. 야마모도 소장 놈을 따라 간 일본 놈들과 영팔과 수길은 성칠을 총과 함께 마구 결박해 집에서 끌고 나간다. 그때 용천과 진달래가 이끈 독립군 용사들이 일본 놈들을 쏘아 눕히고 돌멩이로 까 눕히힌후 성칠을 구해낸다. 야마모도소장놈은 영팔과 수길을 데리고 겨우 목숨을 구해 달아난다. 성칠은 용천이가 이끈 조선독립군에 들어가며 용천과 진달래의 영도아래 명천 일대에서 사냥군들로 포수대를 조직해 일본 놈들과 맞서 싸우기 시작한다. 일본 놈들은 밭에, 지어 터밭에마저 곡식을 심지 못하게 하고 이깔나무를 심으라고 강요하었다. 영월동의 최동욱, 엄상호, 룡철, 룡구, 칠백, 철규, 신흥동의 장산, 운주동의 철석, 가마골의 림호 등 수많은 마을 사람들은 사냥이라도 하어 쌀을 사 먹으려고 성칠의 포수대에 든다. 그러나 영월동의 최동훈과 가마골의 정형만은 일본 놈들과 맞서기 싫어 사냥대에 들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동훈이가 땔나무를 하러 간 틈을 타서 야마도도소장놈이 동훈의 처를 짐승처럼 강간하었다. 치욕을 이기지 못해 동훈의 처는 자기 집 대들보에 목을 매 자살한다. 그러자 최동훈은 아내의 원쑤를 갚으려고 총을 들고 포수대에 들어간다. 포수대 사냥군들은 일본 놈들을 고향에서 몰아내지 않고서는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모두 조선독립군을 따라 일본 놈들을 사냥하는 항일 투쟁의 길에 들어선다. 성칠은 부모형제가 근심되고 한길수놈을 처단하지 않고서는 고향을 떠날 수 없다고 하면서 영월동으로 돌아간다. 그는 제일 가까운 엄창렬의 아들 상호를 시켜 부모와 하옥이가 무사한 것을 알아내며 은희를 시켜 한길수네 집 정황을 정찰하게 한후 내응하게 한다. 머슴 병수는 한길수 부부의 잠자리에 기어 들어 그들의 낯에 똥을 발라 놓아 개꼴 망신 시킨다. 성칠과 상우는 교묘하게 연에 초롱불을 달아 한길수네 집에 불을 질러 놓으며 불을 끄러 달려 들어가는 마을 사람들 속에 혼입하여 토성안의 한길수네 집에 들어가 집안에도 불을 질러 놓으며 한길수의 가시아버지(월선의 아버지)를 붙잡아 입을 틀어막고 마대안에 넣고 동여매 놓고 불을 지른 도적이라고 몽둥이로 때려 반주검을 만들어 놓고 도망친다. 한길수는 집에 달린 불을 끈후 마대안의 놈이 자기 가시아버지인줄도 모르고 몽둥이로 때려 죽이고서도 불을 지른 자인가고 개 잡은 포수처럼 우쭐거린다. 허나 마대를 열고 죽은 자를 쏟아 보고 아연실색한다. 그는 꼭 독립군에 간 성칠과 상호 등이 한 짓이라고 짐작하고 일본 놈들과 야합하여 상호네 집 주위에 매복진을 치고 있다가 저목장과 한길수네 집 정황을 정찰하러 왔다가 상호네 집으로 들어간 성칠과 상호 일가족에게 포위습격을 들이댄다. 성칠과 상호는 뒤문을 열고 울바자를 훌쩍 뛰어 넘어 사격하면서 포위를 뚫으려고 한다. 그러나 상호는 올가미에 걸리어 체포된다. 성칠은 맞사격을 하며 상호를 구하려고 하었지만 바드나무가 꽉 박아선 강가에 달려가 숨어서야 겨우 목숨을 구한다. 그러나 은희가 어머니 명숙을 부축해 도망치다가 총탄에 가슴을 맞고 비참하게 사망되며 은희도 종아리에 총알을 맞고 나포된다. 엄창렬도 놈들에게 참혹하게 살해된다. 은녀는 자기 일가가 몽땅 살해된 것을 알고 우시장 한길수네 집에서 더는 녀종으로 살 생각이 없어 우물에 뛰어들어 죽으려고 한다. 그러나 병수가 붙잡아 죽지 못하며 병수와 부부연을 맺고 독립군을 찾아 간다. 독립군 대원들은 원쑤를 갚으려고 수림속 깊이 철퇴하었다가 성칠과 대원을 파견하여 저목장 정황을 정찰한다. 적들은 독립군의 정황을 알아내려고 갖은 고문을 다 들이대다가 상호 앞에서 은희를 륜간하며 상호를 고문한다. 그러나 상호와 은희는 죽어도 독립군의 정황을 한마디도 말하지 않는다. 나중에 은희는 적들의 비인간적인 릉욕을 당하다가 교살된다. 적들은 저목장과 분주소로 돼버린 병완이네 집에 적은 적이 있다는것을 정찰해낸다. 용천중대장과 진달래소대장은 독립군을 지휘해 상호를 교살하려고 나온 일본 놈들의 사형장을 습격해 상호를 구하려고 한다. 그러나 조금 늦어 상호는 이미 교살되었다. 독립군 대원들은 용천과 성칠의 지휘아래 저목장을 습격한다. 림호는 총을 쏘기보다 힘을 믿고 총박죽으로 놈들의 대가리를 까부시지 않으면 주목으로 치고 발로 걷어 찼고 어떤 놈은 아예 날창채로 붙잡아 나무뿌리에 대가리를 처박아 죽여 버린다. 진달래는 이 나무 가지를 굴러 저 나무에 날아가며 적들에게 돌멩이를 날리어 대갈통을 까부시었다. 수많은 적들을 포위소멸하고 독립군은 용천의 지휘아래 기운봉을 거쳐 경성군 수림속으로 철퇴한다. 용천이가 장백산에서 이끌고 온 조선독립군은 20여명 밖에 안되었지만 성칠과 진달래의 조직동원으로 하여 명천 일대에서 20여명을 확충하여 40여명이나 되었다. 용천은 성칠이가 정찰임무를 완수한후 제때에 부대로 돌아오지 않고 개인 원쑤를 갚으려고 하다가 상호와 은희 그리고 엄창렬과 명숙이까지 희생시켰다는 책임을 묻고 군사기률을 지키지 않은 성칠의 분대장직무를 철직시킨다. 한길수는 독립군에게 복수하려고 병완과 기준, 창준 3부자를 결박해 자위대대에 끌고 간다. 그러나 음험한 끼무라는 큰 그물을 늘여 큰 고기를 잡는 격으로 병완이를 놓아 보내면서 꼬리를 밟아 성칠 등 독립군을 포위섬멸하라고 한다. 끼무라는 늘 개인 복수에 혈안이 되어 미쳐 날뛰는 한길수를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빠까모노(멍청이)다.”고 욕한다. 끼무라는 병완을 불러 그에게 자위대대 부대대장을 하라면서 성칠 등 사냥군들을 마을에 돌아오게 동원하라고 한다. 그러나 병완은 그 얼림수에 넘어가지 않고 거절하고 마을로 돌아간다. 한길수는 후환을 없애려고 끼무라 몰래 너럭바위가 더덕더덕한 산비탈 밭에 가서 일하는 병완네 일가족의 뒤를 밟아가 권총으로 병완을 쏘려고 한다. 기준이가 괭이로 한길수를 내리 찍어 놓고 바위돌 사이로 도망친다. 그때 한길수가 총으로 기준을 쏘았지만 바위돌에 맞으면서 죽이지 못한다. 한길수가 병완을 쏘려고 할 때 야마모도가 나타나 제지한다. 그리하여 병완이네는 겨우 구사일생으로 한길수의 마수에서 벗어난다. 병완과 창준은 한길수가 언제든지 자기 일가족을 죽이려고 들 수 있다는 것을 느끼었다. 기준은 그 길로 밥을 가져다 준 상길을 데리고 간도를 바라고 달아난다. 그들은 조선 독립군을 찾아가려고 나섰다. 그는 독립군을 찾지 못하면 땅이 넓어 지나가던 나그네에게도 기장밥에 장국을 대접한다고 소문난 간도에서 황무지를 개간해 살려고 하었다. 둘째딸이 준 주먹밥이 떨어지니 뱀과 개구리, 물고기를 잡아 먹고 마른 나무잎 속에 들어가 잔다. 그들은 수림 속에서 풍찬로숙하면서 천신만고 끝에 두만강을 건너 간도 소서구에 온다. 그는 중국 지주 장학산의 황무지를 소작 맡고 밭으로 일궈 날농사를 지었는데 소작료를 주고도 낟알 두마대나 남았다. 그리하여 인편에 집식구들을 간도에 들어오라고 기별한다. 이듬해에 병완네가 창준과 기준 자손들을 몽땅 데리고 가만히 도망쳐 간도로 들어온다. 그들은 집안에서 조상들의 산소를 지키고 족보를 만들 때 쓰는 문중전을 꿔 쓴 빚 대신 운주동의 집을 내놓으며 가정기물을 몽땅 빚군들이 가져가게 한다. 그들은 핍박에 의해 망국노의 한을 품은채 쪽박 차고 지게에 가마 한짝을 빼 달랑 지고 정든 고향을 떠나 피눈물이 흐르는 두만강을 건너 쓸쓸한 이국 타향으로 찾아 간다. 눈보라치는 맵짠 추운 겨울에 간도로 들어 올 때 일곱살 난 상순은 오줌이 마리웠지만 손이 얼가봐 어머니가 팔소매를 노끈으로 매놓아 바지에 오줌을 싼다. 꼬댕꼬댕 바지가랭이가 얼어 겨우 어정어정 걷다가도 형 상우의 지게에 앉기도 하면서 고난의 행군을 하었다. 그들은 길에서 리원삼과 리춘삼, 리인삼을 만나 함께 간도 선바위골 뒤 물레방아골에 들어선다. 그때 조선 지주 리영룡은 머슴 넷이서 한아름이나 되는 망돌짝을 올려 놓지 못해 비틀거린다. 그때 리원삼이 보자기로 허리를 질끈 동이고 그 큰 망돌짝을 안아 애기 다루듯이 망돌판에 올리어 놓는다. 그러자 리영룡은 힘장사인 리원삼이네 삼형제를 붙잡아 두면서 자기 집 밭에서 소작농사를 짓게 한다. 가을에 산비탈길이 너무 험해 소가 강냉이단을 실은 수레를 뻗치며 내리막길을 내려 가지 못하니 리원삼은 자기가 소 대신 수레멍에를 안고 내리막길을 내려갔다. 그렇게 꼬리 없는 황소처럼 일해 낟알을 다 타작해 놓았을 때었다. 리영룡은 조선지주 보다 못지 않게 각박한자로서 가을에 소작료를 8할이나 받아 갔다. 살 길이 없어 리인삼은 룡정의 정미소에 갔고 원삼은 일본 놈들이 입쌀을 개산툰을 거치어 조선에 실어 내가는 쌀수레를 몰러 가고 춘삼은 성이 나 물레박골을 떠나 위자구 쪽으로 이사해간다. 병완네 일가 식솔들은 소서구에 와서 움막집을 짓고 들어 세투리를 캐먹으면서 새벽 샛별을 이고 나가서 달을 지고 돌아오면서 장학산 지주의 천지꽃산 산비탈과 소서구의 황무지를 억척스레 개간하었다. 그런데 처음에는 황무지를 개간한 밭에서 난 소작료는 2할, 밭에서 난 곡식은 소작료로 절반만 받던 장학산은 황무지 밭에서도 소작료를 절반을 받아 갔다. 그러나 병완은 중국에서 새 원쑤를 맺지 말자고 곡식가머니를 하나 더 얹어 장학산지주에게 주면서 관계를 윤활하게 처리하자고 서둔다. 그럴수록 장학산은 소작료를 점점 더 각박하게 받아갔다. 지어 자기 황무지에서 땔나무를 해 공 때었고 태평강가에 집터를 공 가졌다고 그 값으로 소작료로 곡식을 더 가져 갔다. 병완이네가 간도로 도망친후 한길수는 병완의 형님 병권을 붙잡아다가 고문하면서 병완이네가 어데로 갔는가고 심문한다. 그러나 끼무라는 자기 성기능부전병을 치료하기 위해 병권을 숙사에 가둬 두고 그의 첩약을 지어다가 먹으며 대추와 인삼뿌리를 옥설의 질 안에 보름씩이나 넣어 퍼지워 먹는다. 성기능을 찾자 기생방을 문턱이 다슬게 찾아다니다가 그만 상부 업동 경찰총국에서 온 나젊은 스즈끼부국장에게 잡혀 국장직에서 철직당한다. 자위대대 대대장만 보류당한 끼무라는 악이 나서 조선 백성 백명을 죽이더라도 한명의 독립군을 놔두어서는 안되며 잔혹하게 학살하라는 지시에 좇아 선후하여 백여명 무고한 백성들을 붙잡아 오며 최구장의 넷째아들과 병권을 교살하며 시체가 썩어 떨어질 때까지 우시장 경찰국이 무너진 페허 앞에 효시한다. 한편 끼무라와 한길수는 가메다와 똘만경찰을 간도에 파견해 보내 병완과 성칠의 행방을 뒤 쫓아온다. 그런 줄도 모르고 병완은 콩을 먹고 배 불어 죽은 손호표지주네 소 값을 갚으려고 목수도구를 지고 천수해와 룡정에 가서 교회당에 가서 식장을 짜주면서 죤슨신부를 알게 되며 일거리를 찾다가 독립군 나풀수로 활약하던 정성문과 그의 아들 정규상을 알게 된다. 그리고 리인삼이 일하는 정미소에 가서 일하다가 룡정에서 관준을 만나 병권큰아버지가 일제 놈들에게 교살당한 비보도 듣는다. 병완은 원삼이를 도와 쌀수레를 몰다가 쌀수레를 탈취하러 유격대를 이끌고 온, 항일유격대 용천대장을 만나게 된다. 그리하여 함흥촌 토성안집에 있는 항일유격대 후근을 책임진 인삼중대장을 알게 된다. 그후 병완은 인삼중대장과 함께 친일주구 허팔기를 처단하며 허팔기의 집과 리원삼이네 집 주위에 매복해 있던 적들과 접전하여 몇몇 일본 놈들을 소멸한다. 친일주구 허팔기의 밀고로 하여 리원삼은 그 일로 유격대와 짜고 들어 쌀을 빼돌린 의심을 받아 룡정 감옥에 갇히며 혹형을 당하고 집에 돌아와 앓아 눕고 한 많은 세상을 떠나는 비운을 맞게 된다. 성칠대장은 경위원 몇을 데리고 함흥촌에 와서 아버지와 감격적인 상봉을 하게 된다. 성칠은 오랜만에 하옥을 만났는데 운우지정을 나눌 기회가 없었다. 그리하여 김치를 가지러 김치움에 들어간 하옥이를 따라 김치움에 들어가 운우지정을 잠간 나눈다. 쌀을 유격대에 실어 가며 상순이를 인삼에게 맡겨 항일구국도리를 깨닫게 교육받게 한다. 상순은 부근 중국 지주 장학산과 조덕림 등의 아들애들과 놀면서 중국 말도 아주 잘하게 된다. 후에 유격대 김성칠큰아버지를 찾아가 항일구국의 도리도 더 깨우치며 권투, 무술, 사격 등 군사훈련을 받으며 할아버지 김병완한테서 씨름재간도 배워 점차 힘도 세고 무예도 높으며 사상도 발전한 육격대 후비간부로 양성된다. 그는 마을에 돌아와 유격대 김성칠대장의 포치하에 민병을 조직하며 마을 사람들을 조직동원하여 쌀을 거둬 장백산 항일유격대를 지원한다. 유격대 가족들은 병완의 도움하에 함흥촌에 한집, 두집 함흥촌에 와서 토성안집을 빙 둘러 가면서 초가삼간을 지어놓고 살았다. 함흥촌은 완전히 고향을 떠난 조선 항일유격대의 가족들이 사는 후근마을이 돼버린다. 기준이네는 벼농사를 지으려고 패용천산 앞에 논을 풀었다. 그런데 중국 지주 지학사는 기준이네 논물도랑을 가만히 터치워 자기 배추밭에 대 놓고 기준이가 물을 터치워 놓았다고 야단치며 괭이로 기준의 옆구리를 찍어 놓는다. 그때 상순은 아버지가 억울하게 괭이에 찍히워 륵골 세대나 끊어난 일을 해동분주소에 고발한다. 그러나 지학사의 사촌동생인 해동분주 소장 지학구는 지학사가 괭이로 기준을 찍었다는 증인이 없다는 리유로 열여섯살난 상순이를 어리다고 업신여기며 소송을 기각한다. 조덕림, 제지주, 손호표지주, 장학산지주 등 숱한 중국 지주들이 병완이네 집에 찾아 와서 소송을 그만 두라고 권고한다. 지학사가 땅 한뙈기만 들이밀어도 소송은 질게 뻔하다고 하면서 얼리기도 하였다. 게다가 상순의 아버지와 아주머니를 비롯한 집안 식구들은 간도에 와서 중국 지주를 소송을 했다가 괜히 중국 지주들과 새로운 원쑤를 맺아서 못 살겠다고 하면서 상순을 말리었다. 그러나 상순은 할아버지 병완의 지지를 받아 “빚을 지고 살아도 시비에 지고 어찌 사는가?”고 하면서 계속 송사에 나선다. 그는 그날 지학사가 괭이로 아버지를 찍는 것을 본 손학정을 찾아가 시퍼런 비수를 대고 “네가 어째 우리 아버지를 찍었는가?”고 걸고 들었다. 그러자 송학정은 상순이가 겁나 제꺽 “지학사가 찍었지 언제 내가 찍었는가?”고 한다.상순은 “그럼 네가 찍지 않구 지학사가 찍었다는걸 증인으로 나설수 있는가? 그러잖으면 네가 찍은 거니 놔두지 않겠다.”고 을러메었다. 그리하여 상순은 손학정을 끌고 다시 해동분주소에 가서 지학구를 찾아갔다. 그는 지학구가 사촌형인 지학사의 검정 돈을 얼마나 얻어 먹었기에 법대로 처리하지 않는가? 천수해 조일파출소에 법을 집행하지 않는 소장을 고발하겠다고 질책하었다. 상순의 반발하는데다가 송학정이 증인으로 나서는 바람에 지학구는 지학사네 집에 가서 술까지 받아 처먹고서도 별 수 없이 지학사의 죄를 승인하고 그때 돈으로 40원의 치료비를 김기준에게 주어야 한다고 판결하였다. 그때 80원이면 소 한마리를 사는데 40원이면 적지 않은 돈이었다. 그리하여 중국 지주들 앞에서 간도에 이주해온 조선 이주민들의 기개를 떨치었다. 병완은 항일유격대가 일본 놈들을 이 땅과 조선에서 하루속히 몰아내야만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도리를 심심히 깨닫게 된다. 그는 목수도구를 메고 하옥을 데리고 장백산 항일유격대 밀영에 쌀까지 가져다 주며 유격대를 도와 통나무집을 지어주고 음페물로 쓸 가산을 만들고 동굴을 파주면서 항일유격대의 항전사기를 북돋아준다. 하옥은 남편 성칠의 곁에 남아 여전사로 밥을 짓고 옷을 빨아주기로 하고 남는다. 돌아오는 길에 병완은 유격대원 억복과 바우돌과 함께 영월구 부근의 친일주구 십가장과 지게군으로 가장한 밀정을 처단하고 산정을 넘어 안전하게 전이한다. 간도에 파견돼 온 친일주구 특무 똘만은 룡정과 국자가, 천수해 부근을 맴돌며 오랜 세월 뒤를 밟다가 소서구 어귀에 자리 잡은 함흥촌에까지 찾아온다. 그 놈은 함흥촌 동산에 매복해 있으면서 토성안 집을 근거지로 쌀과 소금 장사를 하는척 하면서 유격대 쌀을 장만해 운송해가는 인삼중대장을 발견하며 일제 주구들을 데리고 와서 인삼중대장을 결박해 천수해파출소로 끌고 간다. 그러나 인삼의 양아버지 장학산지주는 숱한 지주들의 무장을 이끌고 길에서 막고 천수해파출소까지 포위하며 인삼을 다치기만 하면 무장으로 구해가려고 서둔다. 그러자 일본 놈들은 인삼을 놓아보내며 큰 그물을 쳐 장백산 항일유격대를 일망타진하려고 획책한다. 똘만은 계속 함흥촌 동산과 계수동 근처에서 토성안 집의 김인삼이네 거동을 감시한다. 겨울 밤인지라 너무 추워 똘만은 어데가 좀 쉬려고 늙은 비술나무 근처에 왔다가 원쑤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오랜 세울 찾던 병완과 담배불을 맞붙이다가 딱 마주친다. 그런데 병완의 주먹에 맞아 쓰러지며 진달래중대장이 날린 돌멩이에 맞아 똘만은 권총을 빼든채 즉살한다. 자위대 졸개들은 똘만이 죽자 꼬리빳빳해 도망친다. 그리하여 관동군과 위만경찰 수십명이 함흥촌에 덮쳐들어 토벌한다. 적들은 계수동과 함흥촌, 소서구에서 살인하고 불을 지르고 가축을 약탈해 가는 만행을 저지른다. 일본 놈들의 포위토벌 소식을 들은 병완은 마을 사람들을 데리고 산중에 들어가 피신한다. 적들은 토성안집을 폭파해버리고 갱도까지 찾아내고 유격대의 쌀을 발견한다. 그러나 인삼중대장은 유격대원들을 데리고 산속으로 안전하게 피신한지 오래 되었다. 지학사는 대일본제국 시대에 일본 놈들과 무기를 들고 떠보았자 먹을 알이 없다고 생각하고 친일주구 함흥촌 일대 집단부락 촌장으로 된다. 그는 일본 놈들의 포치대로 함흥촌을 중심으로 소서구, 조개덕, 패랑천산을 망라한 커다란 집단부락을 모범집단부락으로 꾸리려고 애 쓴다. 그는 김인삼이 령솔한 항일유격대가 전이해 간후 유격대가 들어있던 함흥촌 토성안 집에 촌공소를 세운다. 장학산은 토성안 집은 자기가 양아들 김인삼에게 지어준 집이라면서 김인삼이 두고 간 유격대의 쌀을 자기 집에 퍼가면서 지학사에게 맞선다. 그러나 지학사는 일제를 등에 업고 토성안 집은 끝내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일본의 대동아공영권과 모범집단부락의 우월성을 선전하며 마을 사람들에게 일제의 협화회에 들어 “양민”으로 되라고 선전한다. 그는 지어 일제와의 야합하에 모범집단부락인 함흥촌에 전기도 가설하고 집집마다 전등불을 놓아 주면서 조선 사람들을 일제의 현대문명에 호감을 가지게 하며 지어 대일본제국에 충성하라고 선전한다. 그는 마을에서 병완의 기를 꺾고 병완과 그의 자손들을 꺾고 유격대가 발을 붙일 곳이 없이 하려고 상순이네 집 소구유에 양재물을 풀어 놓는다. 최경숙은 고향 운주동에 돌아가 최구장에게 고향을 떠나 간도 함흥촌에 들어가 살것을 간청한다. 그러나 최구장은 일제의 철발굽아래에서 고향을 지키기 위해 허리띠를 졸라메고서도 고향을 떠나려고 하지 않는다. 맏아들 근형은 다섯살에 여읜 어머니 산소를 두고 고향을 떠나려고 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최경숙은 후처와 명옥, 갓 태어난 둘째아들 근룡이를 업고 함흥촌으로 들어간다. 최경숙의 둘째동생 경인과 제수 어금의 중매로 명옥과 상순의 혼사말을 하게 되었다. 사실 오래전부터 상순은 그때 뒤집 지군선의 외동딸 지춘실이란 처녀를 사랑한지 오래다. 춘실은 인물체격이 명옥보다 훨씬 낫고 성격도 활달하여 상순의 마음을 사로 잡았다. 그들은 달밤이면 늘 뻐꾸기 소리거나 황둥개 귀에 쪽지를 끼워 넣는 등을 신호로 버들강변에 가서 밀회하고 열련에 빠진다. 그들은 눈물 겨운 사랑의 비극을 엮어간다. 기준은 집안집 혼사를 망치겠는가고 상순을 보고 명옥과 결혼할것을 강요한다. 최명옥은 최구장의 맏손녀, 최경숙의 맏딸로서 다섯살에 어머니를 여의고 눈치밥을 먹으면서 고생스레 자란 처녀로서 인물체격은 수수하나 부지런하고 인품이 좋고 성격은 내성적인 편이었다. 상순은 명옥을 왼눈으로도 보지 않는다. 그는 의연히 지춘실과 밀회하며 지어 춘실을 임신시켜 놓고 아버지를 보고 춘실과 결혼하게 허락할 것을 간청한다. 그러나 기준은 기어이 아버지 김병완, 창준형님 등 집안어른들과 협상하여 상순을 명옥과 결혼시킨다. 상순은 약담배장사를 하여 돈을 많이 벌면 국자가에 집을 지어놓고 춘실을 데리고 도망가서 살려고 한다. 그러나 후에 유격대 쌀을 장만하다나니 도망치지도 못한다. 지학사는 상순이네가 장학산의 허락을 받고 토성안 집 촌공소 앞에 초가삼간을 짓는다. 그러자 지학사는 촌공소 주위에 탐탐하게 집을 짓지 못한다고 딱 잡아뗀다. 그러나 장학산은 가병까지 데리고 우쭐거리는 고모사촌동생을 친일주구라고 욕하며서 말다툼하며 기준이네 집을 짓게 한다. 지학사는 또 기준이네와의 갈등에서 지고 말았다. 상순은 장백산 유격대 군영에 찾아가 큰아버지에게서 항일구국 사상교양을 받으며 무술, 권투, 사격 등 군사훈련을 받으며 지학사를 없앨 계획을 말한다. 그러나 성칠대장은 굴어귀 풀을 뜯어 먹어 치워 숱한 항일유격대 가속들이 있는 함흥촌을 로출시켜 일본 놈들에게 재차 토벌을 받을가봐 지학사를 잠시 놔두라고 한다. 유격대에 쌀을 지원하는것도 항일투쟁이라고 하는 큰아버지 말대로 하기 위해 상순은 병완의 구체적인 포치에 따라 장충국, 리희수 등 십여명 마을 청년들을 이끌고 일성촌과 구수하촌의 악패지주 집을 들이치어 쌀을 빼앗아 유격대에 보내고 기아에 허덕이는 가난한 백성들을 구제한다. 그는 또 마을 사람들에게서 쌀을 거둬 유격대에 가져간다. 그것도 몇백명 되는 유격대 쌀을 충족히 할 수 없자 상순은 간고한 약담배장사까지 하여 번 돈으로 쌀을 사서 유격대에 실어간다. 상순은 약담배장시길에서 날강도도 만나 결사적으로 싸워 목숨을 건지고 육격대 쌀값을 지켜내며 길림에서는 고향에서 온 기생집의 옥설, 만금, 뽕녀 등을 만나며 일본 관동군의 종군위안부로 끌려온 그녀들의 비참한 운명도 알고 구하려고 하지만 일본 놈들의 경계가 너무 심해 뜻을 이루지 못한다. 그는 원래 약담배장사를 하여 공부를 하려던 학비마저 다 털어내 유격대에 쌀을 사 간다. 그러다나니 그는 그렇게 하고싶던 공부를 하지 못하고 만다. 상순은 그렇게 사랑하는 첫사랑 지춘실과 결혼하지 못하고 마음에 없는 사돈 새기 명옥과 결혼한다. 결혼하던 날 상순이 백마를 타고 가마에 앉은 명옥을 데리고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갈 때 뒤집의 지춘실은 눈물속에 신음소리 속에 눈물을 머금고 아들 을준을 낳는다. 진짜 가슴을 허비는 첫사랑의 비극을 눈물 없이는 읽지 못하리라. 결혼후 상순이네 생활은 궁핍하기로 말이 아니였다. 딸 영자는 전염병에 걸려 볼에 부스럼이 생기더니 썩어나며 썩은 볼을 가위로 베니 이가 다 드러나고 죽물을 퍼넣으면 볼로 마구 흘러 나온다. 영자는 병원 문 앞에도 가 보지 못하고 한많은 세상을 떠난다. 그 전염병이 옮아 선후하여 아들 영혁, 선혁이가 앓는데 기준과 상순은 약담배물을 퍼 먹인다. 하여 병완의 손자와 손녀 셋이나 선후하여 전염병에 걸리어 죽어나간다. 상순은 명옥을 데리고 고향 운주동으로 찾아간다. 그런데 작은 처고모 계순과 명옥, 가시할머니 순금 등이 고향 버드나무숲에 가서 딸기와 나물을 캤다는 죄로 일본 놈들이 쳐들어와 야단치며 그녀들을 나포해 가려고 한다. 그때 상순이가 밸을 참지 못하고 일본 놈과 싸운다. 일본 놈들은 나중에 최구장네 일가를 몽땅 우시장경찰국에 끌어가며 상순의 행방을 대라고 한다. 최구장은 감옥에서도 자기 고향의 산나물과 딸기를 뜯어 먹은 것이 무슨 죄인가고 날카롭게 맞서며 혹형을 가해도 굴하지 않는다. 끼무라놈은 그물을 늘이어 상순과 유격대를 일망타진하려고 최구장네를 놔준다. 작은 고모 계순은 애 둘을 데리고 가마골 시집에 돌아간후 큰물에 산사태가 생겨 비참하게 죽으며 남편 정형만은 물막이에 강제로 내 모는 야마다면장을 죽이고 구장 림호와 친구 용기와 석수를 데리고 간도로 달아나 항일유격대에 들어간다. 한길수는 끼무라가 병완이네도 놔주고 최구장네마저 놔주는 것에 불만을 품고 밤도와 가만히 졸개들을 끌고 뒤쫓아 와서 최구장네를 죽이자고 든다. 그때 진달래는 유격대원들을 이끌고 매복전을 벌린다. 경인은 검을 휘둘러 한길수의 졸개이며 운주동 구장인 응삼을 찌르며 상순은 응삼을 비수로 찔러 죽이고 간도로 먼저 떠난다. 최구장은 핍박에 의해 일가 식솔들을 데리고 적들의 추격을 피해 간도로 들어가기로 작심한다. 그러나 최구장은 부모의 산소를 두고 간도로 갈 수 없었다. 그는 막내손자 근형과 함께 밤도와 부모의 산소를 파재끼고 유골을 담아 메고 간도를 바라고 떠나간다. 그러나 근형은 어머니 산소를 두고 갈 수 없어 혼자 가만히 어머니 산소를 파고 유골을 상자에 담아 지고 천신만고와 위험을 겪으며 외가집 산소가 있는 업동으로 떠난다. 길에서 자위대놈들의 추격을 받고 적들이 유격대인가고 사격하는 사선을 넘어 어머니 유골을 외가집에 안치하고 고향을 떠난다. 최구장과 근형은 관준과 규혁의 도움으로 유골을 수레에 싣고 떠나지만 한길수의 추격을 받는다. 그때 진달래 등 유격대원들은 매복진을 치고 있다가 한길수를 나포해 조선 인민들을 대표해 사형을 집행하며 돌멩이로 때려 처단한다. 한뉘 친일주구로 날뛰던 한길수는 피바다 속에서 더러운 끝장을 본다. 최구장과 진달래네는 웅진에서 날강도 삼형제 백승핵과 백승만, 백승철을 만나 봉변을 당할번 하며 백승만과 백승핵을 처단한다. 그러나 백승철만은 백마를 타고 도망친다. 최구장과 근형은 진달래의 방조를 받아 경계가 삼엄한 두만강을 건너 위만경찰들을 따돌리고 천신만고 끝에 부모의 유골을 간도 천수해 남산 황야에 모신다. 병완과 김기준, 김창준, 리원삼 등에 의해 경찰국 청사와 숱한 군용도로다리가 무너지고 병완 등이 달아난데다가 우시장 일대 30여명 사냥군들이 포수대에 들어 유격대에 들어 갔으며 저목장과 림업파출소가 유격대의 기습을 받아 불타 버리었고 자위대 한길수대대장과 간도 특파특무 똘만경찰이 피살 되였다. 끼무라는 그물만 치고 고기를 잡지 못하듯이 숱한 항일유격대 가속을 놓아 주었지만 번번히 유격대 꼬리도 붙잡지 못하었다. 그 죄를 물어 상부에서는 끼무라국장을 파면하고 할복해 자살하라는 처벌을 내린다. 또 업동 경찰총국 부국장 겸 헌병총대 부대대장 스즈끼를 강직 처벌하어 끼무라 대신 우시장 경찰국 국장 겸 헌병대대 대대장으로 임명하였다. 스즈끼국장은 야마모도소장을 별동대 대장으로 임명하고 수길을 자위대 부대대장 겸 별동대 부대장으로 임명하며 영팔을 한길수 대신 자위대대 대대장으로 임명한다. 그리고 백승철을 조선 특무소조 조장으로, 허꺽쇠를 부조장으로 임명하며 일본 특무소조 조장에 가메다를 임명한다. 그는 두 특무소조를 간도에 파견하여 장백산 항일유격대와 김병완 등 가속을 정탐해 오게 하며 별동대를 파견하어 일본 관동군을 협조하여 장백산 항일 유격대를 기습하여 일망타진하려고 한다. 한편 눈 덮인 장백산 밀림 속의 항일유격대 군영에는 식량이 떨어져 고생을 한다. 성칠은 사냥군 출신 유격대원들을 조직해 사냥하여 보충하려고 한다. 성칠은 진달래를 용천과 결혼하라고 한다. 그러나 진달래는 성칠을 사모하여 도리머리질 한다. 그들은 사냥하다가 특무를 발견하고 두 놈을 격살하고 한놈을 놓치고 박응세란 특무놈을 생포한다. 그들은 특무 박응세를 심문하여 관동군과 야마모도 별동대가 장백산 밀림 속의 군영을 토벌하러 온다는 정보를 장악한다. 그런데 하옥은 샘물터에서 백승철특무와 총싸움을 하다가 총탄에 가슴에 부상 당한다. 다행히 오줌약 덕분에 독이 빠지었다. 성칠과 억복 등은 눈 덮인 밀림에서 특무소조장 백승철을 나포하며 완고하게 발악하는 그 자를 돌멩이로 때려 죽인다. 하옥은 정신을 차리자마자 진달래를 보고 성칠을 잘 모시면서 행복하게 살것을 바란다. 그러나 진달래는 생사를 다투는 하옥을 보고 가엾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하옥과 성칠에게 울면서 자기는 용천대장과 결혼하겠다고 표시한다. 은녀와 진달래는 모두 성칠을 사모하면서도 하옥이가 있어 병수와 용천에게 시집가기로 하었던 것이다. 용천이가 오자 성칠은 그들을 중매하여 전시 번개식결혼을 하게 한다. 정말 그들 넷은 사랑 갈등을 옳바르게 풀어 나가면서 유격대 간부들의 비장한 사랑이야기를 엮는다. 한철주가 거느린 관동군이 영월구에까지 와서 장백산 밀림의 군영을 포위토벌하러 온다는 정보에 따라 용천과 성칠은 긴급 간부회의를 열고 장백산 밀림 속의 통나무집 군영을 미끼로 적들을 유인해 들여 매복습격전을 벌려 일제 놈들을 소멸하려고 일련의 반토벌작전계획을 세운다. 성칠은 적들을 밀림 속 군영에 깊숙이 끌어들이려고 혼란한 틈에 경위원 조꼬마를 시켜 잘 지키지 않은 것처럼 꾸미며 특무 박응세를 놔준다. 박응세에게서 거짓 정보를 제공받은 줄도 모르고 야마모도와 한철주는 토벌에 나선다. 성칠과 용천은 먼저 인삼중대장네 한개 중대를 파견하여 영월구에서 그리 멀지 않은 마을에서 영월구에서 떠난 관동군과 별동대를 선제기습하여 적들을 자지도 못하게 교란한다. 인삼중대는 밤도와 선후하여 도착한 별동대와 관동군 사이에 끼여 들어 두 무리의 적들 사이에 끼어들어 양쪽으로 사격하여 놓고 골짜기를 따라 신출귀몰한다. 그런줄도 모르고 별동대와 관동군은 서러 개싸움을 하다가 동녘하늘이 희붐해서야 뒤늦게야 자기들끼리 싸운 것을 알게 된다. 적들은 무고한 마을 사람 10여명을 끌어다 누가 공산당과 육격대인가고 심문한다. 그중 한 애어머니를 붙잡아 심문해도 공산당을 대지 않으니 애를 안아 불에 처넣는다. 애 어머니는 놈들이 간부를 대라고 하자 혀를 물어 끊어 적들에게 뱉으며 글을 써 고발하라고 하니 손을 마구 물어 끊었다. 그녀는 불시에 수길을 떠밀며 함께 불구덩이에 뛰어든다. 수길은 다행히 불구덩이에서 나온다. 그러나 그녀는 불타 죽는다. 야마모도는 진달래중대장을 잡았다고 상부에 거짓 보고를 하기 위해 그녀의 머리를 잘라 불길 속에서 꺼낸다. 적들이 소녀를 륜간하려고 하자 중천정에서 리성화가 뛰어 내리어 자기가 유격대 간부라고 하었다. 그러자 그들은 리성화마저 꺼꾸로 매달고 혹독하게 고문하다가 마을 사람들과 함께 집안에 가둬놓고 불에 태워 죽인다. 다행히 애들은 소 똥을 쳐내는 뒤구멍으로 하여 빠져 나가 살아난다. 이때 유격대가 불타는 마을과 군중들을 구하려고 재차 습격해 왔다. 적들은 유격대에게 또 혼줄이 난다. 적들은 행군길에서 상순과 규혁, 충국을 만난다. 적들은 그들에게 룡드레분주소에서 떼준 “소개신”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믿고 함께 군영을 찾아간다. 사실 그 소개신은 일어를 배운 규혁이가 가짜로 만든 것이었다. 그들은 일본 관동군과 별동대가 장백산 밀림 속의 군영을 토벌하러 가는 긴급군사정보를 유격대에 알리라는 병완의 말을 듣고 눈보라를 무릅쓰고 장백산으로 들어 갔던 것이다. 그리고 적들을 장백산 밀림 군영이 있는 협곡과 산꼴짜기에 유인해들이라는 성칠대장의 지시를 받고 장백산에서 내려와 고의적으로 일본 관동군부대를 찾아 왔던 것이다. 적들의 코를 꿰어 장백산 밀림 속 군영 부근의 눈 덮인 협곡과 골짜기에 끌어 들여 가기 위해 장백산에 올라 오기 전에 병완은 미리 장충국을 시켜 해동분주소 소장 지학구를 통해 룡드레분주소 소장의 이름이 스즈끼히로시마라는 것을 알아 내 소개신에 써 넣었다. 그리고 룡정 도장방에 가서 엄청난 돈을 주고 분주소 도장과 소장의 도장을 새긴후 소개신에 그럴듯하게 찍어 놓았던 것이다. 김진과 김형내는 각기 상순과 규혁의 지금 쓰는 이름이었다. 그러나 상순은 김진이라고 밝히지 않고 김호라고 가짜이름을 써넣었던 것이다. 적들은 그들 셋이 유격대 파견을 받고 하옥의 상처를 치료하고 제 놈들의 코를 꿰어 장백산 유격대 군영 부근의 함정 같은 산골짜기와 협곡에 끌고 가는줄도 모르고 따라 간다. 결과 적들은 협곡과 산골짜기의 눈함정에 빠져 숱한 놈들이 죽으며 유격대의 포위섬멸전에 걸려 숱한 주검을 낸다. 나머지 놈들은 놀라 밀림 속에서 사기가 여지 없이 떨어지었다. 그때 야마모도가 별동대가 덮쳐와 기습하는 바람에 병수와 득호, 최구장 등은 수많은 적들과 영용하게 싸우다가 비참하게 희생되었다. 산등성이에서 싸울 때 상순이가 업고 달아난 하옥은 적탄에 머리를 맞아 불행하게도 희생되었다. 성칠의 사냥개 검둥이도 하옥에게 기관총을 쏜 3중대장놈에게 덮쳐 들어 목을 꽉 깨물어 죽이며 7소대장놈에게 총을 맞고 비참하게 죽는다. 검둥이는 죽어가면서도 3중대장놈의 목주래를 꽉 물고 놓지 않았다. 진달래는 나무가지를 구르며 이 나무 저 나무 귀신처럼 날아다니며 적들에게 돌멩이를 날리어 대갈통을 까눕힌다. 칠백과 동욱 중대장이 거느린 두개 중대가 성칠대장이 령솔한 장백산유격대와 용천대장이 이끈 북만 유격대는 포위권을 좁히며 적들에게 포위섬멸전을 벌리어 수많은 일본 놈들을 소멸한다. 하얀 옷을 입은 백호 같은 유격대에 적들은 무리죽음을 당한다. 한철주는 애비 원쑤를 갚으려고 포위토벌에 나섰다가 숱한 주검을 내고 패잔병을 끌고 구사일생으로 영월구 쪽으로 도망친다. 유격대는 성칠과 용천의 령솔하에 기동영활하게 장백산 밀림을 떠나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머너먼 북만으로 전이하며 이윽고 중쏘변경에까지 이른다. 함흥촌의 상공에는 먹장구름이 침침하게 내리드리워 있었다. 적들은 장백산 밀림에서 참패를 당하고 무고한 마을 사람들을 포위 토벌해 살인하고 약탈하고 방화한다. 집으로 돌아온 상순은 누구도 몰래 하옥의 권총을 집에 가지고 와서 중천정에 감춰 둔다. 그는 약담배장사를 하여 빚을 물고 유격대에 쌀을 사가고 공부할 학비를 마련하려고 한다. 그러나 교하에서 려관 주인에게 약담배를 떼우고 본전도 찾지 못하고만다. 그후 약담배에서 번 돈 3,300원어치 약담배를 이불장 안에 넣어 동불사 역에 뒀다가 겨우 일본 놈들의 감시밑에서 빼내왔지만 몽땅 얼었다 녹았다하면서 못쓰게 되었다. 쫄딱 망한 상순이네는 산더미 같은 빚더미에 깔리워 죽물도 먹지 못한다. 명옥은 큰 딸애 춘자를 업고 이집 저집 돌아다니면서 두부콩을 갈아주고 콩물이나 한사발 얻어 먹으면서 겨울을 난다. 명옥은 생활고를 해결하려고 시어머니 사련과 함께 술을 걸어 겨우 35원을 벌며 집에 불이 나 들어 살 집도 없이 허망 나앉고 만다. 그러자 지학사는 좋다고 야단친다. 지학사는 껍질이 없는 전기줄을 병완과 상순이네 집에 낮다랗게 늘여 상순이네 식구들이 모두 전기에 붙어 죽게 하려고 한다. 명옥은 전기줄에 빨래를 널다가 감전되어 죽음의 변두리 전기 줄에 매달린다. 다행히 상순이가 괭이로 전기 줄을 탁 치어 끊었기에 겨우 살아난다. 그 사건으로 마을 사람들은 전기에 대한 반감이 생기며 지학사는 결국 인심을 얻지 못하게 된다. 병완과 기준, 창준, 석철 등은 일본 놈들이 늘인 전기를 이용해 석마간을 지어 마을 여성들을 절구 공이에서 해방시켜 인심을 얻는다. 상순은 할아버지 병완의 말대로 오직 공산당을 따라 유격대를 도와 일본 놈들을 이 땅에서 몰아내고 계속 혁명해야 잘 살 수 있다는 도리를 깨닫게 된다. 생활고에 허덕일 때 상순은 큰집 상우형님네 쌀고생이 막심해 어려워 할 때 여동생 금옥이까지 데리고 부모를 집에 모셔 온다. 하어 큰집 아주머니 지새금의 미움깨를 산다. 지새금은 그렇게 어려운 시절에 부모를 이제껏 모시었는데 시동생이 자기 더 잘 모실 것처럼 수레에 모셔간다고 욕설을 퍼부었다. 그 세월에 서로 부모를 모시려는 그들의 효성이 얼마나 감동적인가! 상순은 병완의 말대로 마을의 민병들을 조직하여 무예를 익히며 그들을 이끌고 다른 마을의 친일악패지주들의 집을 치고 들어가 창고를 열고 쌀을 빼앗아 가난한 백성들을 구제하며 집에도 가져간다. 그런데 지학사는 병완이네 집식구들의 영향력이 커가자 일본 특설부대를 징병하는 기회에 상순을 강제징병에 보내려고 한다. 그러나 상순은 면도칼날로 엉뎅이를 긁어 문구멍에 내대 얼궈 가짜 팅팅 붓게 만든후 치질에 걸려 강제징병을 모면한다. 지학사를 죽이고 싶었지만 숱한 유격대 가속을 무사히 살게 하려고 병완의 말대로 놔둔다. 그러자 지학사는 상순이네 집 애들이 셋이나 전염병에 걸리어 죽자 집에 새끼줄을 띄우고 누구도 나들지 못하게 하며 그들을 가둬 죽이려고 한다. 그래도 명옥은 상순과 규혁이 지어다 준 중약을 먹고 구사일생으로 기적같이 전염병을 이기고 살아난다. 그녀는 집도 없어 큰집 사랑간에 구들을 놓고 근근득식하면서도 시부모에게 효성을 다해 동네방네에 소문이 높다. 청명을 앞두고 상순은 병완과 함께 충국을 데리고 장백산 밀림에 가서 성칠과 용천, 진달래, 은녀, 조꼬마 등과 함께 열사들의 시체를 묻어준다. 조선의용군 제3지대에서 파견한 리계삼과 허영주는 병완과 상순을 공산당 조직에 발전시키려고 은근히 접근한다. 항일전쟁이 곧 승리하게 되는 려명의 전야에 국민당군은 특파원 조덕산영장을 동만에 파견해 공산당의 항일전쟁 승리과실을 빼앗으려고 장학산, 조덕림, 지어 친일주구 지학사까지 끌어들인다. 그들은 당지 지주무장들로 국민당 토비군을 조직하며 조선 사람들과 한족들의 민족리간술로 조선사람들을 위주로 조직된 동만의 공산당과 유격대 조직을 일거에 소멸하려고 꿈꾸기 시작한다. 상순은 병완의 포치대로 밤에 나무우에 매달리어 엿듣고 성칠큰아버지를 만나 회보하고 대책을 대려고 상길과 함께 장백산 밀림에 간다. 그때 병완은 적들의 새로운 움직임을 알려준다. 그들은 아직 항일전쟁이 끝나지 않은 정황하에서 국공합작과 중국 평화에 영향을 주지 말기 위해 리계삼과 허영주의 영도아래 조덕산 등의 움직임을 면밀히 감시하라고 한다. 한철주는 지난 겨울의 전투에서 유격대에 한개 중대나 되는 병력을 잃고 부련대장에서 철직받고 부중대장으로 강직된다. 우시장경찰국 스즈끼국장도 야마모도와 별동대가 전멸당한 죄가 발각나 할복처단당하었던것이다. 한달 전에 한철주는 원래 자기 수하었던 재1대대 대대장의 명령을 받고 야마모도 등 장교들의 시체를 묻어 주려고 왔다가 협곡과 산둔덕, 군영 부근 통나무집 앞의 유격대 무덤에 가토를 한 것을 보고 유격대 대원들이 왔다 간 자취를 알게 된다.그는 한마을에 살던 성칠의 아내 하옥이가 기관총에 맞아 죽는 것을 자기 눈으로 똑똑히 보았기에 꼭 하옥의 무덤이 이 묘지 가운데 있을 것인바 성칠이가 한가위날이면 조강지처 무덤을 찾아 올 것이라고 추측하었던 것이다.그리하여 상부에 보고하고 한달전부터 밀림 속 무덤 주위에 매복진을 치고 언제까지라도 유격대원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리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며칠전에 약재를 캐는척 하면서 산소 주위를 감시하던 조선 밀정들은 하옥의 무덤에서 벌초를 하는 상순을 발견하고 한철주에게 보고하었던 것이다. 그때 상순은 노루가 달아나면서 산새들이 날아났는가고 착각하었던 것이다.그러나 한철주는 풀을 건드려 뱀을 놀래우지 않는 전제하에서 상순의 움직임을 밤낮 면밀히 감시하다가 나포하며 더 큰 고기가 그물에 뛰어 들기를 기다리라고 명령하었다. 적들은 산소 주위를 샅샅이 훑다가 다래넝쿨 속에서 자는 상순을 발견하었다.그러나 상순이가 예민한 감각으로 어데론가 사라지면서 놓치고 말았던 것이다. 그 놈들은 상순이가 골짜기 일본 놈들의 해골 속에 구덩이를 파고 나무가지를 덮고 숨어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었던 것이다. 그러던차 성칠이랑 협곡에 들어서자 한철주는 사격명령을 내린다. 그러나 슬기로운 성칠대장은 기다렸다는듯이 갱도에 숨어 들어간다. 그들은 분조를 나눠 서로 엄호하며 한철주놈의 포위망을 뚫고 갱도에서 빠지어 나가려고 한다. 그때 총소리가 자지러지게 나고 유격대 중대가 한철주 등 한개 소대 적들을 포위해 돌격해온다… 갱도어귀가 폭파되었는데 용천대장은 시체도 보이지 않았다. 성칠이랑 아무리 손으로 파보아도 일본 놈들의 시체만 나온다. 광복의 전야와 후에 병완과 상순, 용천과 진달래, 성칠과 은녀 그리고 유격대의 운명은 어떻게 될 가? 북만 중소 변경에서 그리 멀지 않은 수림 속 령 길을 따라 소련 홍군과 함께 성칠 대장이 거느린 동만 장백산 유격대와 용천이 거느리었던 북만 유격대는 대담하게 대낮에 동만으로 강행군 했다. 그들은 한 산마루에서 일본 놈들의 최후거점을 발견한다. 소련 홍군은 병력이 우세한 것을 믿고 마구 돌격해 올라가다가 수많은 희생을 낸다. 성칠은 림호 소대장 등으로 폭파소조를 무어 또치카를 폭파시킨다. 상순과 정형만 등은 기관총으로 또치까의 일본 놈들에게 맹사격을 가하며 엄호한다. 림호는 홀몸으로 또치까 안에 쳐들어가 최후발악을 하는 일본 놈들과 백병전을 벌려 소멸한다. 림호 등을 엄호하던 기관총수 정형만은 장렬히 희생된다. 상순과 철석 그리고 바위돌이 경기관총 세대를 걸어 놓고 사격한다. 적들은 갱도어귀에서 배기지 못하고 갱도 안으로 도망친다. 성칠은 갱도 안의 일본 놈들에게 투항하라고 소리친다. 갱도 안에는 강제로 징용된 조선인 강제 병들의 일본 놈들을 설득해 투항하게 한다. 그리고 갱도 밖의 항일유격대와 일본 놈들이 투항하겠다고 연락한다. 한참 후 일본 놈들이 손을 들고 나온다. 유격대원들은 전투에서 승리하고 포로들을 압송해가지고 동만으로 진군한다. 중조 인민들은 조국의 광복을 맞이해 새 사회에서 살게 됐다. 그 얼마나 오매에도 그리던 광복이고 새 사회였던가? 성칠 대장은 막내조카 상순에게서 친일주구 지학사랑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들었다. 그는 인삼 중대장과 토론한 후 함께 백마기병 소대를 이끌고 소련 홍군과 유격대 부대를 앞질러 밤도와 함흥 촌에 진주했다. 그는 밤중에 먼저 함흥 촌을 물샐 틈 없이 포위하고 소분대를 데리고 토성 안 집 촌공소를 멀리 포위했다. 그들은 일제히 함흥촌 토성안집 일제 촌공소를 들이치고 발악하는 친일주구들을 처단한다. 성칠과 병완 등은 일제 지학사 촌장을 투쟁대회를 열고 죄악을 공소한 후 총살한다. 그들은 지주 무장을 해제하며 토지개혁을 해 지학사, 장학산 등 중국 지주들의 재산을 몰수하고 토지를 가난한 중조 인민들에게 나눠준다. 토지개혁 속에서 김병완과 상순은 중공 지하당원들인 이계삼과 허영주의 소개로 영광스럽게 입당한다. 병완은 함흥촌 촌장으로 되고 상순은 민병 대장으로 돼 마을의 민병들을 조직해 군사훈련을 한다. 국민당 영장 조덕산은 장춘으로부터 도망쳐 고향에 돌아와 삼도만 등지의 토비들과 손잡고 지주무장을 재조직하고 공산당이 건립한 지방정권을 뒤엎으려고 시도한다. 상순은 국민당 토비 놈들과 지주들이 지주 조덕림의 집과 계수동 뒷산 도가 집에서 무장습격을 감행하려고 한다는 정보를 수집해 성칠에게 보고한다. 성칠은 유격대를 이끌고 진수해 부근 해동파출소와 진수해파출소를 기습하는 척 하다가 말머리를 되돌려 창을 찌르는 식의 성동격서전술로 함흥촌에 기어든 토비들을 매복 습격해 일망타진한다. 조덕산은 계수동 도가집 부근에서 인삼 중대장과 성칠 대장이 이끈 항일유격대와 상순이 이끈 민병들에게 포위돼 생포 당한다. 나머지 장충국 등 토비 패잔병들은 밤도와 삼도만으로 도망친다. 병완 촌장과 상순 등은 조덕산을 태평강반에서 공개심판하고 총살한다. 유격대 대부대는 김성칠을 따라 동만을 떠나 조선으로 나간다. 그 대오 속에는 김인삼, 김칠백, 진달래, 은녀도 들어 있었다. 진달래는 용천에게서 얻은 아들애 경주를 업고 중소 변경 북만에서 혹시 용천 대장을 만나겠는가고 기다리다가 함흥촌에 와서 김성칠과 함께 국민당 잔여세력과 싸우는 전투에서 나무 위에서 날아다니면서 적들을 족치는 전과를 올렸던 것이다. 유격대 대오 속에는 또 종군 위안부로 잡혀 왔던 옥녀와 만금도 끼어 조선으로 나갔다. 진달래는 떠나갔는데 후에 용천대장이 함흥촌에 나타났다. 그는 북만을 갔다가 그 곳에서 진달래와 경주의 종적을 감지하고 삼도만 소굴을 거쳐 함흥촌에 왔지만 처자들이 유격대를 떠나간 뒤였다. 용천은 공산당들이 지주를 청산해 재산을 몰수하고 땅을 나눠가지는 것을 보고 공산당의 토지개혁정책을 동의하지 않는다. 그는 더는 공산당이 통치하는 동만 함흥촌에 머물려고 하지 않고 고향 경주로 가야 하겠다는 생각을 굳힌다. 그는 삼촌 김덕성이 말리는 것도 마다하고 처자를 찾으려고 함흥촌을 떠나 조선으로 나간다. 그러나 조선에서 성칠이 이끈 유격대가 있을 것 같은 조선인민군 부대를 찾아갔으나 찾을 길이 없다. 하여 그는 혹시 진달래가 고향 개성으로 나가지 않았을까고 개성에 가본다. 그러나 개성의 어느 곳에서도 진달래와 경주를 찾을 길이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고향 경주에 돌아가 보고 다시 진달래를 찾기로 하고 남한으로 나간다. 그는 삼촌 덕성을 보고 조선이 광복됐기에 고향 경주로 돌아가자고 했다. 그러나 덕성은 친구 병완 등과 함께 조선 형편이 어떻게 돌아가는가 보고 다시 결정하겠다고 했다. 더욱이 만주 함흥촌에 일궈놓은 밭이 아까웠고 남조선에 나가도 밭 한 뙈기도 없이 살만하겠는가고 망설였다. 황차 병완은 조선에 나가 돌아보고 돌아와서 자기들의 고향에는 일본 놈들이 강제로 나무를 심게 해서 바위 돌밭에도 나무가 들어서서 원시림을 방불케 해 밭을 일굴 자리도 없다고 했다. 더욱이 누구도 자기 밭을 내놓으면서 함께 살자고 하지 않는데다가 소외감이 너무 심해 살기 힘들다고 했다. 병완은 함흥촌에 두 번째 고향을 개척하고 살자고 덕성을 비롯한 마을 사람들을 권고했다. 그리하여 덕성을 비롯한 대부분 마을 사람들은 함흥촌에 남고 조선에 돌아가지 않았다. 중국 동만에는 삼도만과 묘령, 천교령, 로흑산 일대에 토비들이 욱실거렸다. 그들은 공산당 지방정부를 습격하고 민가에 방화하고 약탈하며 살인했다. 함흥촌의 장학산은 토성 밑구멍으로 빠져나가 마을의 군사방어정보를 삼도만에서 온 아들 장충국 토비 반장에게 알려준다. 상순은 민병들을 조직해 매복해 뒤를 밟아 산길에 눈에 난 발자국을 보고 장학산이 암암리에 삼도만토비들과 내통한 정황을 짐작하게 된다. 그러나 그는 땔나무를 하러 나온 척하는 장학산을 모르는 척 하며 비밀리에 마을 민병들을 조직해 마을에 방어 공사를 구축하고 순라하며 토비들의 돌연습격을 한차례 또 한차례 짓부신다. 인민들의 생명재산을 보위하기 위해 1946년 11월, 동만 민주련군 18퇀과 19퇀은 삼도만 토비를 숙청하는 전투를 하게 되었다. 상순은 기광총 사수 실력으로 당당하게 민주련군 제19퇀 기관총 반 반장으로 돼 부대를 따라 영월구로부터 삼도만으로 진군한다. 민주련군 19퇀 방락권 단장은 련의 김 지도원을 보고 한 개 반을 데리고 삼도만 토비소굴에 들어가 담판하게 한다. 김 지도원은 삼도만 토비소굴에 들어가 민주련군 2천여 명이 들이치기 전에 투항하라고 국민당 토비 두목 전소교를 보고 권고한다. 그러나 극악무도한 전소교는 김지도원 등 한 개 반 전사들을 눈보라 휘몰아치는 엄동설한에 산기슭에 끌아내 한명, 한명 총살하거나 생매장해 버리게 한다. 전소교는 두 사람만 살려 옷을 몽땅 벗겨 영월구에 가서 자기들이 투항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리게 한다. 민주련군 18퇀이 연길에서 출발해 팔도를 거쳐 삼도만 토비소굴을 치고 19퇀이 영월구에서 산을 넘어 삼도만을 들이쳤다. 그런데 산등성이에서 허백호 련장의 옆에서 적탄통이 토비소굴에 떨어져 작렬하는 것을 구경하던 나팔수가 적탄에 맞아 가슴을 부여잡고 희생된다. 그러자 상순은 직상급인 허백호를 보고 부대를 적탄이 우박치 듯 하는 산비탈에서 철거해 산 너머에 매복시키자고 권고한다. 허나 허백호는 상급을 무시하고 아는 척 한다고 상순을 처분하려고 한다. 허나 상순이 단장에게 회보한다. 단장은 즉시 허백호 련장을 보고 소속련을 산 넘어에 철수해 은페시키라고 명령하며 상순을 부 연장으로 제발시키려고 한다. 허나 상순은 상급을 고발해 직위를 얻은 것 같아 사양한다. “전 아직 아는 게 적어 한 개 련을 거느릴 수 없습니다. 이후에 내가 군사재능을 많이 키운 후에 맡겠습니다.” 민주련군 전사들은 땅크를 앞세워 삼도만 토비소굴 대문을 부시고 쳐들어간다. 삼도만 토비들은 일망타진당한다. 상순은 기관총 반 전사들을 이끌어 산등성이에 기관총을 걸어놓고 산 아래 토비소굴의 적들에게 맹렬한 소사를 진행한다. 황급해난 전소교는 북으로 철거해 평안촌 거점에서 자기 일본인 아내의 만삭이 된 배를 군도로 갈라 죽이고 장충국 등 패잔병들을 데리고 천교령 쪽으로 도망쳤다. 민주련군은 적들에게 숨을 돌릴 새를 주지 않고 묘령으로 추격해 그 곳의 적들을 소멸한다. 뒤이어 천교령과 중소변경의 잔여 토비들도 추격해 소멸한다. 상순은 전투마다에서 기관총 반을 지휘해 적들의 퇴로를 차단하고 전우들의 진공을 엄호했으며 적들에게 훼멸성적인 타격을 가한다. 조선인민군 연대장으로 된 성칠과 함께 한 부대 군영에 있는 진달래와 은녀는 모두 성칠을 사모한다. 은녀는 남편 득호가 희생된 후 첫사랑인 성칠을 재차 사모하며 재결합하려고 한다. 진달래는 용천이 종무소식이자 죽었다고 단정하고 첫사랑인 성칠과 재결합하자고 한다. 그러나 성칠은 용천대장이 종무소식이어서 진달래가 재결합하자는 말에 망설인다. 성칠과 은녀, 진달래, 그리고 용천과 진달래, 삼각, 아니, 그들의 다각 연애는 어떻게 될가? 용천은 고향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이북 개성에 들어가 진달래를 찾으려고 서울에 들린다. 그런데 서울 바닥에서 눈에 익은 친일주구 한철주의 동생 한선주를 만난다. 그런데 한선주를 뒤따라 서울 교외 군영에 가서 기웃거리다가 병사들에게 체포된다. 그가 항일 의병과 유격대 장교출신인데다 뛰어난 사격술을 본 의병 출신 허 연대장은 그를 북에 들어가지 말고 한국 국군 부대에 남아 사격교관을 해달라고 한다. 그러나 성칠은 북에 들어가 처자를 찾은 후 부대에 돌아오겠다고 한다. 용천의 인생프로그램은 어떻게 될 것인가? 광복후 새 봄을 맞아 병완은 마을 사람들을 이끌어 황무지를 개간해 부대를 일궈 농사를 지어 해방전쟁 전선을 지원한다. 상순은 공사 당위 서기 이계삼과 향장 허영주의 추천으로 동북군정대학에 들어가 정치리론과 군사실전술을 배우며 연변전원공서의 배치대로 영월구 공안국 준비소조 조장으로 배치된다. 그런데 영월구당위 서기는 민주련군 련장 허백호일 줄이야. 허백호 서기는 단장에게 자기를 “고발”한 적이 있는 상순을 미워하면서 처처에서 그의 흠집을 꼬집었다. 그러나 상순은 각촌 민병 련장들을 이끌어 군사훈련을 하면서 천용구와 같은 유능한 인재를 공안국에 받아들인다. 허나 허백호 서기는 자기 사촌동생 허영호를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상순이 독단, 독행했다고 비평한다. 상순은 허영호를 재차 고찰하고 씨름 재간이 있고 아주 가난한 청상과부의 아들인 것을 보고 보충 모집해 공안국에 받아들인다. 상순은 김창남과 천용구와 허영호 등 경찰들을 이끌어 여러 마을에서 국민당 자위대 놈들을 나포하며 안보촌 부근 원시림 속의 한 오두막에서 처녀애를 간음한 부자자간을 실마리로 해 국민당 자위대의 장충국 등 특무놈들을 일망타진한다. 그런데 군정대학교 동창생 반장 박우성이 와서 허백호 서기에게 아첨해 선물도 사가고 술도 사먹이면서 국장자리를 차지하려고 한다. 상순은 와세다 대학출신 박우성을 국장을 시키라고 하면서 옴니 암니 싸우려 하지 않으며 고향에 돌아가 시골에서 당과 백성들을 위해 일하면서 부모에게 효성을 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계삼 서기와 허영주 부 현장 그리고 상급 공안국 손 국장의 비평을 받으며 병완도 말린다. 상순은 영월구 공안국 국장으로 제발되며 금의환향해 함흥촌에 놀러온다. 그런데 고향의 태평강에서 첫사랑 지춘실을 만날 줄이야. 상순은 이미 딸 춘자와 금숙 둘이나 보고 셋째 딸이 오래지 않아 태어날 지경이었다. 허나 춘실은 아직도 사랑의 마음을 죽이지 못하고 상순을 원망하며 어째 명옥과 결혼했는가고 빨래방치로 상순의 뒤통수를 친다. 상순은 그제야 춘실에게 부명을 어기지 못해 춘실과 결혼하지 못했다는 것을 고백한다. 그러자 춘실은 상순을 부명도 이기지 못해 첫사랑을 버렸다고 욕한다. 상순이 떠나가는 길에 춘실은 눈물을 팡팡 쏟으면서 쓸쓸하게 “아리랑”을 부른다. 그 눈물겨운 쓸쓸한 대목을 한 번 좀 볼까? “춘실은 종주먹으로 상순의 넓은 가슴을 마구 두드리며 어깨를 들먹이고 코를 풀쩍거렸다. “이 나쁜 놈아, 무능한 놈아, 무골충아, 아버지를 이기지 못해 나를 버리니?” 상순은 춘실을 떠밀어내었다. “흥수와 잘 살아라.” 상순이도 눈물범벅이 된 춘실을 보고 코마루가 시큼해나고 눈에 뜨겁고 맑은 눈물이 핑그르 돌았다. 그는 치마폭을 들어 눈물을 닦으며 흑흑 흐느끼는 춘실을 외면하며 돌아서서 무거운 발걸음을 떼였다.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태평강 징검다리를 건너선 후 머리를 돌려 강 건너 쪽을 피끗 되돌아보았다. 그때까지 춘실은 반쯤 몸을 탈고 서서 치마폭으로 눈물을 닦으면서 어깨를 들먹이었다. 상순이 패용천산 쪽으로 발걸음을 뗄 때였다. 뒤에서 느닷없이 춘실의 간간한 노래 소리가 귀전을 아프게 때리고 가슴을 긁어댔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오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임은 십리도 못 가서 발병이 난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오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 … 상순은 그 쓸쓸한 노래를 들으며 걷다가 주먹으로 길옆의 아름드리비술나무를 꽝꽝 쳐댔다. 정녕 그들의 첫사랑 로맨스는 어디까지일까? 한편 조선에 나온 진달래는 성칠을 보고 용천이가 희생됐기에 더는 기다리지 말고 자기와 첫사랑의 꽃을 피우자고 한다. 성칠도 광복이 된지도 2년 세월이 거의 흘러가는데 용천의 소식이 없자 마음속으로부터 그렇게 사랑하던 진달래와 재혼한다. 그들이 사랑의 연을 맺고 꽃피우는 날, 달밤에 은녀는 군영 바자굽에서 실망의 눈물을 흘린다. 원래는 성칠 오빠의 행복을 축하해야 하건만 누가 사랑을 자사, 자리한 물건으로 만들라고 했던가! 성칠은 진달래와 재혼해 늘그막 아들 경수까지 본다. 비록 은녀와 결합하지 않았지만 그는 생활상 여러 모로 은녀와 그녀의 아들애를 보살펴 준다. 허나 은녀는 부대를 떠나 고향 명천 우시장 상우남면 여성동맹위원회에서 사업하기로 작심하고 한 마을 고향의 오빠 성칠과 마음 아픈 이별을 하게 된다. 그 쓸쓸한 이별에 까치도 까, 까, 까 슬프게 운다. 한반도에서는 남북한 간의 동족상잔의 6.25전쟁이 폭발했다. 성칠은 조선인민군 부대를 이끌고 남부전선으로 진격해 나가게 됐다. 그는 진달래를 보고 경주와 경수를 데리고 안전한 후방인 중국 함흥촌에 가서 피신하라고 한다. 처자들을 피신시킨 후 성칠은 부대를 이끌고 마천령을 넘어 남부전선 무명고지를 지키게 됐다. 한국군은 모 사단 허사단장은 연대장 한선주를 보고 무명고지를 탈환할 것을 명령한다. 허나 대부대작전을 해보지 못한 한선주는 연이어 조선인민군의 무명고지 아래 학의 나래처럼 펼친 매복습격전에 걸려들어 미군의 탱크를 앞세우고서도 무리주검을 내주고 패배해 도망친다. 그러나 용천이 이끈 연대는 유격대 출신의 조선인민군의 매복전술을 알고 있었기에 대부대 공격을 하는 척 하면서 정면을 에돌아 양측면의 매복 진부터 공격해 들어가 조선인민군의 손에서 무명고지를 탈환한다. 성칠 연대장은 신출귀몰하는 조선인민군의 전술을 잘 아는 한국 국군부대에 너무나도 놀라 한다. 그는 김인삼 대대장, 칠백 대대장, 최동국 대대장과 토론하고 바위돌과 조철호와 신기철을 빼앗긴 무명고지에 가서 혀를 잡아 오게 한다. 바위돌은 조철호와 신기철을 이끌고 야밤삼경에 무명고지에 잠복해 있다가 소변보러 나온 장교를 붙잡아 온다. 신기철과 조철호는 바위돌을 엄호하며 한국군과 조우전을 벌린다. 성칠은 혀를 심문하다가 놀랍게도 잡아온 혀가 자기 외오촌조카 이병수라는 것을 발견한다. 더욱 놀랍게도 자기 손에서 무명고지를 탈환해간 한국군 연대장이 바로 항전시기 자기 전우 용천대장이라는 것을 발견한다. 얼마나 애타게 찾던 형님이며 전우였던가! 또 대방 한국군 부사단장은 철천지 원수 한 고향의 한철주이며 한선주 연대장은 한철주의 친동생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너무 충격적인 사실에 성칠은 다시 한번 동족상잔의 전쟁의 아픔을 느끼게 되며 원수에 대한 원한과 격분이 사무치게 된다. 그는 이병수에게 용천 연대장을 동원해 친일주구 한철주 형제를 처단하라고 비밀리에 귀띔해준다. 성칠은 용천 연대장이 유격전술을 아는 형편에 근거해 유격대 시절 매복 습격 전 전술을 고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는 피로전술을 써서 낮에는 쉬고 밤이면 한국군이 쉬지 못하게 습격전을 들이대군 했다. 용천 연대장은 한선주 연대장과 토론하고 대부대 포위전술을 써서 성칠 연대가 점령한 508고지를 포위해 진공한다. 물자 공급이 제대로 되지 않은 형편에서 조선인민군 장병들은 수많은 피의 대가를 치른다. 정찰패 소대장 바위돌과 정찰병 조철호, 임호 중대장도 고지에서 장렬히 희생된다. 508고지를 사수하던 칠백은 사촌형님 용천 연대장이 이끈 한국군과 맞서 육박전을 벌린다. 용천 연대장은 날창을 쥐고 제일 먼저 덮쳐오는 조선인민군 장교가 자기 작은 집 사촌동생 칠백이라는 것을 보고 고함친다. 그러나 한국군의 피로 칠을 하고 눈에 달이 오른 칠백의 총창이 어느결에 용천의 가슴을 겨누고 찔러 들어왔다. 그때 경호원이 쏜 총탄에 칠백은 피 흐르는 가슴을 붙안고 쓰러진다. 동족상잔, 아니, 피를 나눈 형제간의 그 처절한 가슴아픈 전투장면을 한번 볼까? 용천 연대장은 권총으로 코앞에까지 돌격해 내려온 인민군 병사를 쏘아 눕혔다. “영용한 한국군 장병들! 돌격!” 용천 연대장은 쓰러진 인민군 전사의 손에서 총창을 주어들고 제일 앞에서 연신 숱한 국군을 찌르며 짓쳐 내려오는 그 꺽다리군관을 쏘아보며 덮쳐갔다. 인민군 군관이 용천 연대장 앞에서 뒤로 물러서는 1대대 대대장을 푹 찔러 눕히고 발로 시체를 차며 총창을 빼내는 순간이었다. 용천 대장이 총창으로 그 군관의 옆구리를 푹 찔렀다. 허나 인민군 군관은 재빨리 옆구리를 탈아 용천의 총창을 피하며 총창으로 용천을 찔렀다. 용천이 총창으로 찔러 들어오는 총창을 탁 쳤다. 쟁강! 총창과 총창이 마주치며 무서운 죽음의 쇠 소리를 냈다. (아차!) (뭐야?!) 서로 이를 악문 상대방의 낯을 보는 순간 둘 다 들쑤시던 총창을 멈췄다. “칠백아!” “형!” 그 틈에 용천의 경호원이 권총을 휘둘러 칠백을 쏘았다. 땅! 야무진 총소리와 함께 칠백은 총창을 진창에 툭 떨어뜨렸다. “관둬!” 땅! 땅! 뒤따라온 한철주도 총을 쏘았다. 칠백은 가슴을 붙안고 빙그르 몸을 비틀더니 밑 둥이 잘린 썩박나무 넘어가듯 풀썩 쓰러졌다. 한철주가 다시 권총으로 쓰러진 칠백을 겨눌 때다. “관둬!” 용천은 총창으로 한철주와 경호원의 권총을 탁탁 쳐올렸다. 그는 다급히 물앉으며 칠백을 끌어안았다. “아우야! 이게 웬 일이냐?” 한철주와 경호원은 눈이 휘 동그래져 권총을 쥐고 비실비실 뒷걸음질 치다가 총창을 꼬나들고 덮쳐드는 다른 인민군 전사를 쏘았다. 칠백의 가슴에서 선지피가 쿨쿨 솟구쳐 뻘건 빗물과 함께 땅바닥을 뻘겋게 물들이며 흘렀다. “형, 형님, 쿨룩쿨룩, 경, 경주는 함흥 촌에 갔소.” “칠백아!” 칠백은 감겨지는 눈을 겨우 뜨고 손으로 자기 뒤를 가리키었다. “성, 성칠 형님이 저, 저 뒤에…” “아우야! 칠백아!” 용천은 칠백을 끌어안고 흔들며 대성통곡 쳤다. 허나 칠백은 빗물이 흐르는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눈을 스르르 감았다. 다시는 형님의 피타는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아, 아니야. 이럴 수 없어!” 용천은 칠백을 끌어안고 풍덩 물앉아 얼굴에 얼굴을 미친 듯이 비벼댔다… 고지를 지키던 성칠과 칠백이 영솔한 조선인민군 한 개 연대는 전멸했다. 용천은 고지를 점령했지만 무명고지에는 동족끼리 싸워 희생된 시체에서 흘러내린 뻘건 피로 뻘겋게 물들어버렸다. 총을 맞대고 싸운 적이, 전멸시킨 적의 부대가 바로 자기가 전우 성칠과 그렇게 찾지 못해 헤매던 사촌동생 칠백이 이끄는 조선인민군 한 개 연대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는 전우 성칠과 동생마저 죽인 것으로 해 동족상잔 전쟁을 용천은 염오하기 시작한다. 휴전시기에야 병수는 조선인민군에 있는 성칠 등 유격대 출신 장교들의 정황을 말하려고 했지만 감히 입을 열지 못한다. 포로로 됐던 일을 알리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허나 그는 용천 연대장과 서울 옥녀가 꾸리는 술집에 가서 밀모해 술집에 기어든 친일주구 한선주와 한철주 형제를 쇠몽둥이로 때려 죽인다. 옥녀의 술집 부근에서 기생집을 꾸리던 월향은 아들의 주검을 붙안고 통곡을 친다. 허나 경찰당국에서는 한철주 형제를 처단한 사건단서를 장악하지 못한다. 그러나 허 사단장은 용천 연대장이 소행이라는 것을 짐작한다. 허나 용천과 병수를 보고 입공속죄하라고 장백산 원시림에 특무로 들어가라고 명령한다. 부상당해 사선에서 겨우 살아남아 부산 육군부대병원에서 갓 나온 용천은 운명의 중국 장백산 행을 결심한다. 그는 동족상잔의 전쟁을 더 하고 싶지 않았다. 다만 칠백이 림종 전에 진달래와 경주가 간도 함흥촌에 피신해가 있다고 알려주었기에 처자를 찾아 가지고 남한에 돌아가려는 일념 밖에 없었다. 그는 비행기를 타고 오끼나와 미군 특무훈련소에서 특종훈련을 받는다. 몇 달 후 용천과 이병수는 미군 전투기에 실려 한반도를 날아 넘어 야밤삼경에 장백산 원시림에 낙하한다. 미군이 파견한 한국국군 특무소조 용천과 이병수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연변조선족자치주 공안국과 길림성 변방총대에서는 일찍 미군 비행기 한 대를 장백산 원시림 상공에서 격추한 적이 있었고 수많은 미군이 파견한 대만 국민당특무들을 나포했다. 한국 특무들이 장백산 천지 부근 원시림에 낙하한 정보를 장악한 경찰들과 주변 여러 지역의 민병들은 마을마다 그물을 치고 한국 특무들을 나포하기에 주야로 경각성을 높여 지키고 있었다. 상순은 가을에 옥수수 밭에 가서 옥수수를 실어오려다가 패랑천산과 칼산 사이 골짜기 마른 수풀속에서 영어문자가 박힌 통조림 깡통을 발견하며 옥수수를 구워먹은 듯한 재무지를 발견한다. 그는 병완과 토론하고 인차 민병들을 동원해 경각성을 높여 마을 주위를 보초를 서게 한다. 그런데 용천과 이병수가 뜻밖에 함흥촌 마을에 나타난다. 남한의 고향 경주로 나간다던 용천이가 이 두메산골에 나타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였다. 용천은 함흥촌 삼촌 집에서 진달래와 경주와 감격적인 상봉을 한다. 그러나 진달래는 그간 조선에서 성칠한테 재가해 경수까지 낳았기에 어색한 기분이였다. 특히 투쟁의 예민한 후각을 가진 진달래는 용천의 출현을 수상하게 여기게 된다. 이에 병완과 상순도 동감이었다. 리병수도 병완이가 바로 자기 할아버지가 생전에 그렇게 외우던 할아버지라는 것을 안다. 할머니 리성희가 이미 사망한 것을 알고 그 사실을 확인한 그는 병완과 상순 일가와 감격적인 상봉을 한다. 그러나 한 피줄의 상봉의 기쁨은 그 것도 일순간뿐이었다. 병완과 상순 그리고 이병수와 용천은 모두 각기 다른 자기 고향과 조국을 보위하기 위해 서로 잡을 내기 하면서 생사결단하고 싸워야 했다. 용천은 삼촌 김덕성을, 리병수는 할아버지 병완과 고종육촌형님 상순을 이용해 중국 군사정보를 수집해 한국에 전하려고 하다가 꼬리를 밟히게 된다. 김치움에 들어가 무전기를 치던 리병수가 들키웠던 것이다. 그리하여 병완과 상순은 범을 굴에서 끌어내는 수를 써서 용천을 토성 안 집 촌공소에 불러내다가 붙잡는다. 그때 진달래가 촌공소에 들어온다. 그녀는 구경 전 남편을 나포하는데 동조하겠는가? 전 남편을, 자기 아들 경주의 아버지를 보호하겠는가? 또 병완은 자기 처손자를 나포할까? 상순은 자기 친 육촌동생 병수를 상대해 대의멸친할까? 상순은 허백호 서기 아래에서 사업하기 불편한데다가 늙으신 부모와 애 넷이나 기르는 아내가 고생하는 것을 보고 함흥촌에 돌아와 혁명사업을 하면서 부모에게 효도할 결단을 내린다. 예로부터 충신은 효자가 아니라고 하지만 상순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충신처럼 나라와 백성들을 위해 헌신적으로 일하면서도 부모에게 효성을 다하는 참다운 효자로 돼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으로 해 그는 벼슬을 초개와도 같이 여기고 영월구 공안국장을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온다. 진수해파출소 소장을 하라는 현당위 조직부장 이계삼의 지시도 사양하고 함흥촌에 돌아와 민병대장을 맡는다. 허나 조선(한국)전쟁이 끝나지 않은 형편에서 후방보다도 중국인민지원군에 참가해 미군 양키들과 본때 나게 싸워보리라 다짐한다. 영월구 공안국 국장사업을 한 경력이 있는 상순은 지원군에 입대하자마자 지원군 련장(중대장)을 담임한다. 함흥촌에서 함께 입대한 이흥수와 이희수는 상순의 수하 소대장을 맡는다. 그런데 압록강을 건느자마자 이흥수가 미군 전투기를 구경하다가 소사를 맞는다. 다행히 상순이 밀어부쳤기에 흥수는 팔에 총상을 입을 뿐 목숨을 건졌다. 상순은 전선에 나가지 못하고 부대의 명령에 따라 압록강변 군복공장에 남아 공장장 사업을 하게 된다. 어느 하루, 상순은 식당주임 허영희와 흥수, 희수와 함께 압록강을 되 건너 중국에 가서 양식과 돼지를 얻어가지고 되돌아오다가 또 미군 전투기의 소사와 폭격을 당한다. 급해 맞은 상순은 허영희 손을 잡고 커다란 시멘트 물 도관에 들어가 숨는다. 그런데 폭탄이 시멘트 물 도관이 막히고 만다. 그런데 평소에 추파를 보내던 영희가 상순의 손을 그러쥐어 자기 가슴에 넣으려고 한다. 아차, 그 뭉글뭉글하고 따뜻한 젖가슴의 유혹, 과연 상순은 그 유혹을 이겨낼까? 그 후에도 허영희는 상순을 보고 김치를 내오자고 해놓고 김치움에 끌어당겨 떨어뜨려 놓고 또 유혹한다. 과연 상순은 또 그 유혹적인 “함정”에서 헤어 나올 수 있을까? 상순은 군복생산임무를 원만히 완수하고 영희와 애절한 이별을 하고 상부의 지시대로 군복을 싣고 남부전선으로 밤도와 떠난다. 그런데 한 많은 다발령에서 또 미군 폭격기의 폭격을 당한다. 희수의 자동차 바퀴가 폭격에 터져 고생하며 다발령을 에돌아 남부전선으로 달려 나간다. 그런데 이번에는 싣고 간 양곡이 떨어져 상순은 부득불 충청도 서천군 어느 산에서 휴식하며 쌀을 얻으러 마을로 내려간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찾아간 그 집이 바로 리병수의 집이었다. 리병수의 부모형제는 병수를 그리면서 거제도 한산면을 떠나 서천에 이사와서 있으면서 소식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자기 손으로 리병수를 함흥촌에서 체포한 일이 있어 상순은 차마 신분을 밝히지 못하고 밥과 쌀만 얻어 가지고 산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어느 결에 지원군이 산에 있는 소식을 알고 미군과 한국 국군이 들이닥친다. 상순은 운송대 전사들을 이끌어 자동차운송대를 목숨을 걸고 엄호하면서 싸우다가 이병수네 아버지가 사는 마을에 도망쳐 내려갔다가 흥수와 함께 김치 움에 은폐한다. 이희수는 돼지굴에 은폐한다. 미군과 한국군이 마을에 쫓아와 수색하지만 이병수의 아버지는 상순이네를 대지 않는다. 이에 감동된 상순은 김치 움에서 이병수가 함흥촌에서 체포된 일을 쪽지로 써서 함지에 담아두고 나와 도망친다. 그 비보를 접한 병수의 부모형제의 마음인들 오죽하랴! 동족상잔의 전쟁의 비극, 그 자체 충격은 얼마나 컸겠는가! 상순은 군복을 남부전선에 운송한 후 지원군 모 사 사단자의 통역원으로 뛰어다니다가 정전이 돼 조선에 남지도 않고 두 번째 고향 함흥촌으로 돌아온다. 그는 공산당의 지시에 따라 할아버지 병완을 도와 호조조와 합작사를 차리며 백성들이 쌀고생을 덜 하게 하려고 함흥촌과 100여 킬로미터 범바위골로 들어가 호랑이와 곰 그리고 멧돼지와 싸우면서 황무지를 일궈 감자농사와 옥수수 농사를 짓는다. 가을에 곰고기와 감자와 옥수수를 분배 받은 백성들은 병완과 상순을 믿기 시작하며 그들 조손의 말이면 다 들었다. 그런데 상순의 첫사랑 지춘실은 그때까지도 마음을 죽이지 않고 상순을 보고 딸애 미선이가 앓는데 봐달라고 하며 꾀어 자기 집에 데리고 간다. 상순은 춘실이가 파놓은 또 하나의 감정 함정에 빠지고 만다. 그는 춘실이네 집에서 도망하면서 검정고무신 한짝을 미처 신지 못하고 달아나는 바람에 치보주임 흥수에게 꼬리를 밟히고 만다. 과연 상순은 춘실이 파놓은 그 감정 함정을 무사히 빠져나왔을까? 중국의 대지에는 서북풍이 먹장구름을 몰아왔다. 전례 없는 반 우파투쟁이 시작된 것이다. 반우파 투쟁의 기회를 타서 입당하려고 서두르는 흥수는 상순이가 사원들을 데리고 범바위골에 가서 황무지를 일구고 감자농사를 지은 것은 자본주의 새 싹을 기른 행위라고 물어먹는다. 그러나 사원들은 모두 상순의 덕에 감자떡을 먹었다고 하면서 흥수를 아니꼬와 하며 상순을 동정한다. 상순은 똥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더러워 함흥대대를 떠나 조개덕대대로 이사해가며 이계삼 부서기와 허영주 부현장의 주선으로 상순은 조개덕생산대대 당 지부 서기를 담임한다. 상순이 조개덕으로 간다고 하자 당원 진달래와 새로 입당한 이붕수 외에도 창걸, 최병수, 경학 등 숱한 사원들이 백성들을 배불리 먹고 살게 하는 상순을 따라 조개덕으로 이사해 간다. 당시 인민공사, 대약진, 반 우파 투쟁 세폭의 붉은기가 동풍을 타고 중국의 대지를 붉게 물들였다. 공사 당위 서기로 전근해온 허백호 서기는 함흥촌에 와서 헥타르 당 5만근을 내라고 강요한다. 사원들은 그 말에 입을 딱 벌린다. 허나 허백호 서기는 신문에 난, “한 헥타르에 10만근을 낸 농민이 벼이삭 위에 올라 앉아 담배를 피우는 사진”을 보이면서 소서구 산비탈 밭을 한 미터 깊이로 파고 둼을 채워 넣고 그 위에 밀식을 해서, 이른바 “심갱밀식농사법”을 도입하면 꼭 5만근을 낼 수 있다고 역설한다. 그에 맞서 반박하다가 이계삼 부서기와 허영주 부 현장마저 우파분자로 몰리게 된다. 병완과 상순은 농사꾼으로서 도리로 따지며 1 헥타르에 절대 5만근을 낼 수 없다고 진실을 밝힌다. 그러나 허백호 서기와 그 졸개 함흥촌의 이흥수가 어찌나 고집하는지 병완과 상순은 허백호의 말대로 소서구 산비탈 밭 1 헥타르를 떼내 허백호의 말대로 한 미터 깊이로 깊게 판 후 둼을 쓸어 넣은 후 옥수수를 심갱밀식을 한다. 그리고 그 시험 전 옆에 보통 농사법으로 옥수수를 심는다. 그런데 가을에 결과가 나왔다. 허백호 서기의 지시대로 심은 심갱밀식 밭에서는 옥수수를 몇 이삭을 거두지 못한다. 둼이 발효하면서 김이 문문 나는 우에서 근본 옥수수는 살아남을 수도 없었다. 그러나 병완이가 심은 보통 밭에서는 1 헥타르에 옥수수 몇 천근을 거둔다. 허백호는 분명 자기 말대로 하면 안 되는 것을 빤히 알면서도 자기 심갱밀식을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돌아가면서 모자를 들씌웠다. 오옥선 여 교원이 “공산당은 특수자료로 만들어졌다고 해도 남자의 정자와 여자의 란자가 결합돼 만들어졌겠지.”라고 했다가 우파 모자를 쓰고 일밭에서 날마다 투쟁을 당한다. 이거야 말로 닭을 잡아 원숭이를 훈계하는 격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입을 건사하기에 신경을 도사리기 시작했다. 허백호는 오옥선과 병완과의 투쟁에서 앞장선 이흥수네 집에 들어 지춘실이 찰찰 넘치게 부어주는 술이나 얻어먹고 이흥수를 입당시키려고 한다. 허나 병완과 상순, 허영주와 이계삼 지어 진달래마저 반대하는 바람에 흥수는 입당하지 못한다. 허나 허백호는 비열한 수단으로 조직원칙을 떠나 흥수를 반 우파 투쟁 마당에서 이른바 “화선입당”을 시킨다. 마을에서는 허백호 서기의 지시대로 마을에 집체식당을 차려놓고 온 마을 남녀노소가 식당에 와서 천정이 들여다 보이는 죽물을 한 사발씩 얻어먹는다. 소련에서 돌아온 박성근은 소련에서 살면서 사회주의의 우월성과 흠집을 알고 있었기에 인민공사를 하기보다 개체농사를 짓는 것이 낫다고 말한다. 그는 소련의 꼴호츠의 허물을 말하면서 인민공사 집체농사가 틀렸다고 몇 마디 했다가 허백호와 이흥수가 들씌우는 우파 모자를 쓰고 오옥선 그리고 함흥촌에 와서 노동개조를 하는 이계삼, 허영주 등과 함께 투쟁을 당한다. YB병원의 정규상 교수는 서기 박영발의 포치대로 당조직을 돕자고 교원들을 동원해 당에 대한 의견을 청취해 12가지로 종합해 바친다. 그런데 의학부문에서 당조직에 의견이 많은 더러운 우파 모자를 억울하게 쓸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그는 쇠줄에 매단 돌을 목에 걸고 날마다 사생들 앞에서 투쟁 맞고 지어 걸상을 쌓아 놓은 걸상 무지 위에 올라가 서서 투쟁 받다가도 학생들이 걸상 밑을 툭 차면 허망 거꾸로 떨어진다. 그는 환자를 볼 권리마저 빼앗기고 병원의 청소공으로 노동개조를 한다. 어느 하루 저녁 퇴근하기 전에 정규상이 복도를 청소할 때었다. “박 서기, 이러지 마세요. 누가 보면 큰 일 나겠습니다.” “떠들지 마오.” “그래도 어찌 서기가 이럽니까? 이걸 놓으십시오.” 박영발 서기 사무실에서 여성의 애원소리가 간간히 들리었다. “입당하겠다면서 어째 정치민감성이 없소?” “…” “내 말을 고분고분 들으면 입당시킨 후 우리 내과 간호사장을 시킬게.” “저는 처녀예요. 전도를 망치고 어떻게 시집갑니까?” “나와 제 밖에 모르는데. 어째 시집가지 못한다고 그러오?” “야, 이걸 놓으십시오.” “내 말을 좀 들어라. 내 제꺽, 응?” “어찌 사무실에서 이럽니까?” “잔말 말고 내 말을 고분고분 들어라. 내 말을 듣지 않으면 너도 정규상처럼 우파로 몰리어 투쟁 받을 줄 알아라.” “아, 아, 집안 집 삼촌이라는 게. 이게 뭐, 뭔가요?” “좀 참아라. 오, 호.” “이러지 마, 마십시오. 윽, 윽, 아, 아!” 정규상은 복도를 두리번거리었다. 누구도 복도에 없었다. 다만 저쪽에 당직의사가 한창 환자서류철을 뒤적이고 있을 뿐이었다. 정규상은 살금살금 사무실에 다가가 귀를 기울였다. 밀봉된 문이 꼭 닫힌 사무실 안에서 후닥닥 후닥닥 하는 소리와 여성의 비명인지 신음소리인지 침대가 삐꺼덕삐꺼덕 하는 소리에 섞여 귀청을 아프게 때렸다. (더러운 개 자식!) 정규상은 고의로 복도를 청소하면서 가는 척 하면서 걸레대로 사무실 문을 퉁퉁 쳐놓았다. 박영발이 간호원 박윤희를 강간한 사실을 안다고 해 정규상은 광명위생원으로 쫓겨난다. 나중에 정규상 교수는 함흥촌에 낙향해 노동개조를 하게 된다. 반 우파 투쟁이 백열화된데다가 인민공사, 대약진 바람에 사원들은 굶어서 하나, 둘 쓰러져간다. 병완의 셋째아들 김기준은 굶어서 7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다. 아들을 앞세운 어시 병완은 못 볼 것을 보고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아 죽을 지경이다. 병완의 둘째손자 상우마저 상순네 집에 가서 제수가 끓여준 콩꼬투리 죽 한 사발을 얻어 먹고 기뻐 오늘은 살 수 있겠다고 할 지경이 됐다. 며칠 후 그는 주린 배를 움켜쥐고 굶어 세상을 떠난다. 병완은 범바위골에 가서 황무지도 일구지도 못하게 하면서 인민공사를 해서 백성들을 굶어 죽게 하는 것이 사회주의 우월성인가고 하늘을 우러러 “공산 풍”을 의심하기 시작한다. 구경 병완과 상순 백성들은 백열화된 반 우파 투쟁과 “공산 풍” 바람 속에서 어떻게 살아남을까? 그렇게 남에게 우파 모자를 씌면서 날뛰던 허백호 서기도 심갱밀식농사법으로 농사를 망쳤다는 죄명이 들어붙어 그만 우파 모자를 쓰고 오옥선과 함께 투쟁을 받는 희극이 벌어졌다. 인민공사와 대약진, 반 우파 투쟁의 불길이 대지를 휩쓸고 지나간 후 이계삼과 허영주는 우파 모자를 벗고 다시 현 당위 부서기와 부 현장을 담임한다. 그러나 인심을 잃을대로 잃은 허백호 서기는 계속 우파 모자를 쓰고 투쟁을 받는다. 흥수는 이번에는 자기를 화선입당시킨 허백호를 투쟁하는데 앞장선다. 병완 서기가 년세가 많은 이유로 대대 당지부 서기를 하지 못하겠다고 하자 흥수는 주책 넘게 자기가 하려고 나선다. 그러나 절대 대부분 당원, 지어 그의 형 붕수마저 반대하는 바람에 하지 못하고 상순이가 함흥대대 당지부 서기로 당선된다. 새로 대대 당지부 서기로 된 상순은 할아버지 병완과 토론한후 밭을 가가호호에 떼맡겨 농사를 짓게 하며 대대 로동력을 동원해 부르하통하 물길을 돌리고 모래 불 밭에 논을 풀어 벼수확고를 올리며 사원들이 쌀 한알이라도 더 나눠가지게 한다. 병완은 상순과 토론해 칼산과 패용천산 사이 골짜기에 과수나무를 심고 다락밭을 만들어 과수나무 사이에 콩을 심기로 한다. 그러나 진달래와 은녀를 “조선특무”라고 몰아주고 지어 병완과 상순마저 “조선특무”라고 몰아대며 김덕성은 한국 특무 용천의 삼촌이라고 “한국특무”라고 몰아 투쟁하려고 든다. 지어 병완이 일본 우시장경찰국을 짓는 공지 총도감을 맡은적이 있다고 친일주구라고 물어먹는다. 허나 병완은 당시 나무벌레가 있는 나무로 경찰국을 지어 무너지게 한 사실을 밝힌다. “고향이 조선이라고 조선특무라고 한다면 온 마을 사람들이 다 고향이 조선에 있는데 그래 모두 조선특무란 말인가? 전주 이씨인 흥수는 그래 고향이 조선 전주가 아닌가? 그럼 자네도 조선특무인가?” 그 말에 투쟁대회에 혈안이 돼 날뛰던 흥수도 입을 다물고 말며 미친듯이 휘두르던 정치몽둥이가 주춤 멈춰서며 백열화된 정치풍랑이 잠시 잠잠해진다. 그러나 우파 모자를 쓰고 투쟁을 맞으면서 고생하던 여교원 오옥선은 조선으로 도망친다. 후에 그는 인삼을 찾아가 조선에서 교원 사업을 한다. 진달래마저 용천과 낳은 아들 경주를 함흥촌에 남겨두고 성칠과 낳은 경수를 데리고 조선으로 도망친다. 남편 성칠이 희생된 형편에서 전우 인삼을 찾아가 다시 모 군 여성동맹위원장을 한다. 흥수는 그 책임을 진달래의 시아버지 병완과 시조카상순에게 떠밀며 조선특무를 놓아버린 이른바 정치책임을 물으려고 한다. 그런데 상순의 조타 동선이가 조선 함흥시 기차역에 나가 기관사로 일하는가 하면 둘째 딸 금숙마저 조선 회룡에 도망쳐 가는 바람에 흥수에게 상순을 물어먹을 빌미를 제공한다. 과연 상순은 한차례 또 한차례 덮쳐드는 정치풍파 속을 어떻게 뚫고 나갈까? 상순은 흥수에게 당지부 서기를 내주려고 할아버지 병완에게 말씀 올린다. 그에 병완은 동의하지 않으며 대대 치보 주임을 흥수에게 시키라고 한다. 그리하여 전에 없이 대대 당지부 서기와 치보 주임의 분권과 관용의 치세가 나타나게 된다. 이흥수는 병완의 고향 친구 덕성을 “계속 한국 특무 모자를 쓰고 투쟁받겠는가? 감옥에 가겠는가? 아니면 자기 시키는대로 하겠는가?”고 위협한다. 흥수의 위협을 받은 덕성은 흥수가 시킨대로 병완은 일제시기 경찰국을 지은 친일총도감이라고 거짓증명을 선다. 그 바람에 병완과 상순은 또 한차례 정치 위기를 겪게 된다. 그런데 덕성은 양심의 가책을 받고 병완은 일제 경찰국과 군용다리를 무너지게 만든 항일애국자라며 자기가 무함했다는 쪽지를 남기고 토성 안집 동쪽 우물 드레박줄에 목을 매고 자살한다. 그 처참한 정경은 눈 뜨고 볼 수 없다. 한국 특무 용천과 진달래가 낳은 아들 경주는 노총각이 되도록 성분이 나빠서 결혼하지 못한다. 그는 지주 장학산의 딸 장미련이 자기보다 열 살도 이상인데도 옥수수 밭에서 끌어안고 사랑을 고백한다. 구경 지주 딸과 한국 특무 아들의 사랑이 이뤄질까? 흥수는 성분이 나쁘다고 그들의 결혼소개신을 떼주지 않는다. 그런데 경주와 미련은 애까지 만들어 놓았다. 그리하여 장미련은 날마다 불어 오르는 배를 가지고 사원들 앞에서 세상 희한한 투쟁대회에서 투쟁을 받으면서 사람들을 요절폭소를 터뜨리게 한다. 그 희한한 장면을 보고 싶지 않은가? 백열화된 정치 투쟁 속에서, 지루한 정치투쟁 속에서 투쟁을 받은 허백호는 그 시련을 이겨내지 못해 휘영청 밝은 달밤에 묘지 부근 백양나무에 목을 매 자살하려고 한다. 지나가던 상순이 발견하고 황급히 백양나무에 올라가 올가미를 풀어주어서야 허백호 서기는 구사일생으로 살아난다. 그는 그제야 양심적이며 인간미가 진한 상순과 병완을 정치적으로 압제하고 무함한 자기 잘못을 알게 되며 뉘우치게 된다. 아, 반 우파 투쟁과 뒤이어 들이닥친 전례 없는 “문화대혁명” 정치 풍랑 속에 시련을 이겨내지 못한 노 간부가 그 얼마였던가? 정규상 교수가 병원에 돌아가 보니 ‘문화대혁명’이 터져서 온 시내가 발칵 뒤집혔다. “정성해 서기를 타도하자”는 대자보가 시내 한판에 다닥 나붙었고 정성해 서기를 따라 사업하던 간부들마저 수태 잡혀 지하실에 갇힌 채 날마다 고문을 당한다. 연변군 분구 책임자들도 정성해 서기를 보호했다고 철직하고 농학원에 가둬 놓고 변소청소나 시킨다. 정성해 서기를 보호하던 정치문교를 주관하던 김 서기도 반란 파들에게 붙잡혀 갖은 고문을 다 받다가 자살했다. 정성해 서기를 따라 흑룡강성에서 나와 제발된 숱한 간부들이 감옥에 들어가고 투쟁 받고 심문을 당한다오. 방송국에 간 김국장도 아무런 죄도 없는데 반란 파들이 지금 그를 투쟁한다오. 김 국장은 정성해 서기를 따라 조선민족간부학교 동창생들과 함께 흑룡강성에서 나와 당교 교장을 하다가 방송국 국장으로 제발 됐소. 그런데 터무니없는 민족우파요, 반혁명분자요, 반역자라고 모자를 씌워 투쟁한다. 시내에 할빈에서 나온 이 씨란 자가 반란 파 두목이였다. 그자가 할빈으로부터 숱한 학생반란 파들을 데리고 연길에 기어들어 진상을 모르는 청년들로 홍위병이라는 무리를 조직해 가지고 로 간부들을 돌아가면서 타도한다. 백화상점으로부터 아래로 쭉 내려가면서 대자보와 만화가 다닥다닥 나붙었다. 정성해 서기는 타도당하고 그의 처남은 농학원 일어교수도 하지 못하고 노동개도를 하러 심심산골에 내려가며 처남댁 이송선은 함흥촌에 노동개조를 하러 내려온다. 치보주임으로 된 대대 발란 파 두목이며 혁명위원회 주임 황종연에게 아첨하며 여 우파 오옥선과 장충국의 결혼을 방해하며 장미련과 경주의 결혼소개신을 떼주겠다는 구실로 장미련을 간음한다. 치보주임의 권력을 빌어 지주의 딸을 짐승처럼 비열하게 간음하는 그 장면을 한번 볼까? 흥수는 혼이 나간 사람처럼 미련의 가슴을 노려보았다. “세상에 별일이야. 지주네 딸이 이렇게 고와보이다니?” “예?” 그 말을 미련이 듣고 웃었다. “응? 어, 그래 어째 네가 영 곱구나.” “어마나, 치보주임도.” 미련은 눈을 곱게 흘기면서 물 초롱을 들고 집으로 떠나갔다. “네가 힘들겠구나. 내 들어다 줄게.” 흥수는 능글맞게 물 초롱을 들고 앞서 미련의 집으로 들어갔다. 미련은 여기저기 사처를 둘러보면서 입을 싸쥐고 따라 집으로 들어갔다. “치보 주임, 남들이 지주네 딸을 도와주었다고 말을 듣지 않겠습니까?” “괜찮다. 난 너를 위해서라면 뭐든 해주고 싶구나.” “어마야.” 미련은 허리를 비꼬며 손으로 낯을 가리면서 부엌으로 들어와 물을 물독에 부으려고 했다. “가만 내가 부으마.” 흥수는 물독에 물을 부어주면서 중얼거렸다. “미련아, 내 소개 신을 떼주지 않았더라면 네가 이렇게 저 애를 낳고 살 수 있었겠냐?” “감사합니다. 치보 주임.” 흥수는 물을 다 붓고 음충한 눈길로 미련을 돌아보면서 능글맞게 구슬렸다. “너 이런 말을 알아?” 미련은 이상해 물었다. “뭘 말인가요?” “우물의 물을 마실 때 우물을 판 사람을 잊지 말라고.” “예? 저 토성 밖의 우물은 병완 할아버지네 부자들이 조선에서 이 마을에 처음 왔을 때 팠다던데요.” “그래, 허나 너 네 살 게 만든 건 누구야?” “그거야 치보 주임이죠.” “그래.” 흥수는 미련을 활 채 부엌에 끌어내리었다. “왜 이래요?” 흥수는 탐나는 미련의 젖가슴에 손을 쑥 넣어 꽉 움켜쥐면서 호통 쳤다. “사람이 은공을 갚을 줄도 알아야지. 함흥대대에서 이 치보주임을 모르고 살 수 있니?” “이러지 마세요!” 미련은 흥수의 손을 빼려고 안간힘을 다해 몸부림쳤다. 허나 자기를 꽉 껴안아 부엌 장판밑에 깔고 올라타는 흥수의 억센 팔을 이길 수 없었다. 물 초롱이 넘어져 물이 와르르 부엌바닥에 흘러내렸다. 흥수는 거센 숨을 몰아쉬면서 소리치는 미련의 입을 손으로 막았다. “쉿- 한번만 참아 달라. 그럼 널 투쟁 맞지도 않고 편안히 살게 할게.” 허나 미련은 발버둥 치면서 발악했다. 흥수가 치마를 걷어 올린 후 괴춤을 까는 새에 미련은 소리쳤다. “애가 깨나 울겠습니다. 동네에서 알면 난 어떻게 살아? 우리 오빠 치보 주임을 놔 둘거 같은가?!” “지주 아들놈이 감히 이 어른을 어쩐다고?” 흥수는 발버둥질 치는 미련을 어찌할 수 없어 통사정했다. “얘, 내 말을 고분고분 들어라. 그럼 네 오빠하고 옥선도 결혼시켜주마.” “예?” 미련은 자기 귀를 의심하면서 발버둥질을 멈췄다. 그새 흥수의 그 기적적으로 일어선 포신이 미련의 벌린 다리 두 새로 쑥 미끄러져 들어갔다. “아으, 아으 아, 아, 아호호호.” 미련은 반사적으로 소리가 나갔다… 허나 그때 춘실이 문을 벌칵 열고 뛰어든다. 흥수는 이전에도 여우파 오옥선과 장충국이 살아서 임신했는가를 검사한다는 미명하에 대대 치보주임 사무실에서 오옥선을 간음하려다가 오옥선의 반항을 받아 야욕을 채우지 못한 일이 한두번이 아니며 오옥선마저 조선으로 달아나버렸던 것이다. 흥수는 대대 당 지부 서기를 하려고 먼저 반란 파들의 힘을 빌어 병완과 상순을 쓸어뜨리려고 반란 파들을 조직해 상순의 집으로 쳐들어간다. 미쳐 날뛴다. 허나 상순의 도리 있는 연설에 반란 파 무리에 가담했던 양심적인 청년들은 병완과 상순의 영도하에 배불리 먹던 일과 목숨 걸고 싸워 이 땅을 지킨 그들 조손의 공적을 생각하고 흩어져가 버린다. 상순은 전지불로 지학사의 아들의 낯빤대기를 비추면서 지주들이 일어나 공산당을 반란할텐가고 대성질호한다. 장충국을 비롯한 지주들이 질겁해 벌벌 떨며 흩어져간다. 이튿날부터 상순은 지학사의 아들과 장학산 등 지주들을 투쟁하며 계급투쟁을 잊지 말도록 사원들을 교육하며 다시 자기 주위에 뭉쳐세운다. 흥수는 결국 돌을 들어 자기 발등을 까고 만다. 그러나 병완은 흥수 등 반란파들이 미쳐 날뛰는 것을 보고 앓아 눕는다. 조금 차도가 있을 때 상순은 할아버지를 수레에 모시고 두 번째 고향 함흥대대 산천을 구경시킨다. 병완은 상순과 함께 수레 위에 앉아 돌아다니면서 함흥대대 웅위로운 발전설계도를 그린다. 그런데 병완은 그 웅위로운 설계도가 현실로 되는 날을 보지 못하고 다시 앓아눕게 되고 나중에 문화대혁명의 정치몽둥이가 날아다니는 세상에서 상순마저 혹독하게 얻어맞는 것을 보고 너무 억울해 한 많은 세상을 떠난다. 자손들은 모두 묘 앞에 꿇어앉아 대성통곡을 치었다. 애절한 울음소리는 눈이 풀풀 흩날리는 황야에 처량하게 울려 퍼지었다. 산소 남쪽의 백양나무 가지에서 까마귀가 까욱까욱 스산하게 울고 있었다. 고향을 그렇게도 사랑하고 조상들의 산소가 계시는 고향을 그렇게도 사무치게 그리던 조선의 한 효자가, 고향을 지키려고 목숨을 걸고 싸우던 한 용사가 노친과 함께 타향의 황야에 영영 묻히었다. 아, 태 줄을 묻은 고향이여, 희망과 사랑을 묻어 두고 조상들의 산소를 모셔둔 고향이여, 사망하면서도 고향이 그리워 눈을 감지 못한 이 고독한 영령들을 위로해 주시라. 육신은 죽었어도 혼이라도 고향 명천으로 훨훨 날아가고 있으리라. 문화대혁명이 백열화되면서 정성해를 보호하려는 조선족군중들은 정성해 서기의 집 부근에 보루를 쌓고 정성해를 체포해 투쟁하려는 반란파들과 조약돌을 뿌리면서 싸운다. 코신을 신은 조선족 여성들은 “코신부대”를 조직해 가지고 치마에 강바닥의 돌을 주어다가 반란파들과 돌을 뿌리며 싸운다. 허나 “코신부대”와 “항대”는 중앙에 뒤심까지 있는 반란파 두목 이씨(모원신)의 지휘하는 “홍색” 반란파들에게 밀리어 구락부 천정에 갇히며 반란 파들이 불을 지르는 바람에 구락부를 버리고 의학원 2층 집에 철거해 반란파들에게 갇히게 된다. 이씨의 명령에 따라 기관총으로 무장한 반란 파들은 기관총 엄호를 받으면서 토성을 폭파한후 2층 집에 진격해 “코신부대” 여성들과 “항대”의 용사들을 몽땅 체포해 공안국에 감옥에 가둔다. 항대의 총무를 맡은 김진욱과 한영수 그리고 병원 서기 박영발은 갖은 고문을 받다가 모아산 비밀 사형장에 끌려나가 비밀사형을 당한다. 그들은 사형당하기전에도 무덤 구멍앞에 꿇어앉지 않으며 “정성해 서기 만세!” “공산당 만세!”를 부른다. 그들이 “공산당 만세!”를 부르자 반란 파들도 차마 총을 쏘지 못한다. 한 것은 그들도 이른바 공산당을 따라 혁명하는 반란파들로서 “공산당 만세!”를 부르는 자들을 총살하면 자기들이 나쁜 놈으로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결국 박영발과 박윤희는 함흥대대에 내려와 노동개조를 하게 되고 한영수는 5.7간부학교에 가서 노동개조를 하게 된다. 김진욱은 구락부에 불을 질렀다는 억울한 죄명을 들쓰고 사평 감옥에 가서 감옥살이를 하면서 날마다 낮에는 쇠물을 녹이는 노동개조를 하고 저녁마에는 정치투쟁을 받고 검사한다. 정성해 서기의 아내 김영희와 처남댁 이송선은 자기 옷을 넣은 옷궤를 이고 지고 시내 거리를 반란 파들에게 개처럼 끌려 다니면서 투쟁을 받는다. 가무단의 반란 파 일룡이란 자는 반란 파 두목 용만과 대학 동창생이었다. 색마 같은 일룡은 쩍하면 송선을 심문하면서 젖가슴을 매만지고 비열한 수단으로 고문한다. 그 놈은 지어 송선의 젖꼭지를 농끈으로 문 고리에 매놓고 쥐어 당기며 책상에 엎드려 놓고 뒤로 두 팔을 책상다리에 묶어놓고 바지를 벗기고 강간한다. 갖은 능욕을 받을 대로 받은 송선은 나중에 함흥대대에 쫓겨 내려와 노동개조를 받는다. 아무리 날랜 척 하는 흥수도 역은 새 방앗간을 지날 때도 있었다. 미련이가 경주의 애를 밴 것은 모주석의 산아제한정책(계획생육)을 어겼다고 하면서 흥수는 정규상을 데리고 가서 수술해 애를 꺼내 버리려고 한다. 장충국이 덮쳐들어 수술 칼로 흥수의 불알을 까자고 덤벼들어 날치는 바람에 흥수는 혼 빵 나며 불 중태마저 충국의 가래 같은 손에 쥐어 당기여 늘어나 그후 부터 남자 구실마저 제대로 하지 못하게 된다. 흥수는 마을에 내려온 선녀 같은 송선이가 상해지식청년들을 환영하는 마을 환영회의에서 춤을 너울너울 추는 것을 보자 야욕이 발정한다. 그는 송선을 손에 넣으려고 치보주임의 권력으로 그를 대대 선전대 대장을 시킨다. 그러나 송선은 땔나무를 해 메고 기신기신 집에 기어드는 흥수를 송충이처럼 역겨워 하며 그의 야욕을 거절해버린다. 그러자 흥수는 송선을 대전에 나가 옥수수단을 수레에 실어들이라고 강요한다. 가무단에서 춤이나 추던 송선은 수레라고는 본적도 없어 옥수수단을 싣고 돌아오다가 수레를 산비탈길에서 허망 번져먹는다. 다행히 상순의 아들 덕돌이 도와주어 간신히 목숨은 건지고 옥수수단을 생산대 탈곡장에까지 실어간다. 그쯤 하면 혼났다고 생각한 흥수는 대대 혁명위원회 주임 황종연과 토론하고 송선을 대대 위생소에 넣어준다. 그렇게 병 주고 약 주면서 얼리고 닥치어도 송선은 흥수의 수청을 거절한다. 그러나 위생소에 있던 노처녀 윤희는 송선과는 달랐다. 그녀는 문화대혁명이란 정치폭풍우 속에서 살아남으려면 대대 혁명위원회 주임 황종연과 치보주임 이흥수에게 잘 보여야 하며 지어 몸마저 바쳐야 한다고 여긴다. 그리하여 황종연에게도 몸을 주고 흥수에게도 비밀리에 몸을 내주면서 잘 보인다. 지어 정치상에서 황종연이 입당하는데도 박영발과 함께 도와주며 투표한다. 그러나 박영발은 대대 당 지부 서기를 선거할 때 발언할 때에는 흥수를 선거하지만 정작 투표를 할 때에는 상순에게 한 표를 보낸다. 그러면서도 박영발은 흥수와 종연을 속여 제일 먼저 노동개조를 끝내고 시내 YB병원으로 돌아간다. 그 경험교훈을 접수해 박윤희는 어느 하루 흥수에게 한창 몸을 주어 한판 벌리다가 뒤에 찾아온 황종연이 두려워 흥수를 침대 밑에 숨겨두고 그 침대 위에서 황종연과 희극을 벌린다. 그러다 침대가 꽝 꺼지는 바람에 깔린 흥수가 너무 아파 어망간에 고함친다. 그 바람에 장막아래 세상 보기 힘든 짐승들의 희극이 벌어졌다고 할까? 그런 희극 끝에 윤희도 함흥촌에서 노동개조를 끝내고 시내 YB병원으로 돌아간다. 세상 이런 일도 있는가? 문화대혁명 때만 있을 수 있는 희극이 아닌가! 상순은 흥수와 종연과의 정치투쟁이 싫은데다 쌀고생을 하기 싫어 머나먼 교하로 이사해간다. 허나 함흥대대 사원들이 배를 굶으면서 사는 어려운 처지를 개변하려고 다시 함흥대대로 돌아온다. 그는 병완 할아버지와 함께 생전에 세운 함흥대대의 웅대한 설계도대로 조개덕 생산대 동구에 벽돌공장을 차려 벽돌을 구워 대대 판공실도 벽돌로 지으며 빈곤한 한족사원들로부터 시작해 벽돌집을 지어준다. 그리고 칼산 양지바른 곳에 양삼장을 차려 부어을 하며 철공소도 차리어 부업으로 자력갱생해 대대 경제를 춰 세우며 황무지를 일궈 쌀 농사를 잘 지어 백성들이 배불리 먹게 하려고 무등 애를 쓴다. 그런데 그때 황종연과 이흥수는 모주석에 대한 개인 우상화를 하면서 패용천산과 칼산 사이에 차려놓은 과수원 다락밭의 돌마저 헐어 패용천산 양지바른 곳에 몇십 미터 크기의 한자로 “모주석 만세!”라는 글씨를 새긴다. 어찌나 크게 새겼는지 몇십리 밖에서도 그 “모주석 만세!”라는 글씨를 볼수 있었다. 상순은 황종연과 이흥수에게 “모주석 만세!”를 새겨도 왜 다락밭의 돌을 허물어 새기는가? 산에 숱한 돌을 두고 그러는가? 상순은 따지고 들었다가 또 정치적으로 당한다. 어디 그뿐인가? 모주석의 지시대로 “농업에서는 대채를 따라배운다.”고 평평한 밭을 파서 대채대대처럼 다락밭을 쌓으라는 황종연과 이흥수와 맞서 싸우다가 상순은 처처에서 비판받고 당한다. 암담한 세월에 상순이 정치상에서 당한 일을 어찌 다 말할 수 있으랴! 상순의 말을 듣지 않았기에 과수원에 수토유실이 심해 과수원이 파괴되고 과수원의 콩밭은 엉망진창이 돼버리며 그해 대채전을 한 평지의 농사를 망쳐 먹어 사원들은 또 배를 굶으면서 살아야 했다. 지지리 혹독하고 못난 그 세월에 사원들이 고생문이 터진 것이 아니겠는가! 마을에 내려온 정규상은 공사 파출소 소장으로 제발된 황종연과 대대 혁명위원회 주임으로 된 흥수의의 핍박에 위생소에서 쫓겨나 날마다 돼지똥과 인분을 퍼 날라다가 제형 둼 무지를 만든다. 노동개조를 하던 박성근은 원한을 품고 세상을 고독하게 떠난다. 페염으로 죽은 그를 불쌍히 여겨 상순이 가서 염습해 관작까지 짜서 아들 숭길과 함께 산에 실어내간다. 허나 우파이자 폐 염 환자라고 마을 사람들은 누구도 성근의 장례에 나서지 않는다. 정말 험악한 세월에 눈이 펑펑 쏟아지는 날에 숭길의 처량한 울음소리 속에서 성근은 이 세상을 쓸쓸하고 외롭게 떠나간다. 우파 모자를 쓰고 노동개조를 하던 허백호는 황종연과 흥수가 하는 정치행세에 더는 참을 수 없어 보복하려고 한다. 자살까지 하려다가 상순에게서 구원된 그는 독한 마음을 먹고 어두운 밤에 묘지 부근에서 송선의 뒤를 밟아 능욕을 하려는 황종연의 대가리를 돌멩이로 내리깐다. 경찰들의 수사방향이 억울한 상순에게 돌려지자 헙백호는 대담히 자기가 한 일이라고 나서며 결국 철창 속에 갇히게 된다. 아, 암담한 세월, 동틀 무렵에 연이어 일어나는 사건들은 또 어떤 것일까? 이병진은 소싸움을 시켜 소뿔을 빼 몇 백 원을 배상한 앙갚음으로 생산대 탈곡장 벼낟가리에 불을 지른다. 상순은 현 공안 국 창남 국장(상순의 동북군정대학시절 동창생, 영월구 공안국시절 상순의 수하 과장)과 함께 사건을 해명하고 방화범 이병진을 나포해 감옥에 보낸다. 상해지신청념 상지민은 “광활한 농촌에 할 일이 많다.”는 지시를 반대해 상해지식청년들을 동원해 시위행진을 하며 지어 비수와 도끼를 들고 당지 정부를 쳐들어가 폭동을 일으키려고 하다가 나포된다. 상순은 감옥에 간 상지민과 수호를 자기기 책임지고 교육하겠다고 공안 국에 찾아가 창남 국장과 말해 감옥에서 데려 내다 생활상에서 관심하면서 교육한다. 그리고 군내를 먹은 상지민의 색시 황련지를 구해내 상지민을 감정상에서 감화시켜 교육목적에 도달한다. 면내를 먹은 수호의 각시 황련지를 자기 집에 업어다 김치 물을 퍼 먹이고 자기 친딸처럼 맛있는 음식을 접대하면서 구해낸다. 그 바람에 상순은 마을 사원들의 인심을 얻으며 위신이 아주 높아졌다. 상순은 아들을 교육해 자기가 하지 못한 일을 계승시키려고 무등 신경을 쓴다. “얘야, 나는 어려서 아침을 먹으면 저녁쌀을 근심해야 하는 일제 시대여서 학비도 내지 못해 그렇게 하고 싶은 공부도 하지 못했다. 내가 만약 공부만 했어도 현장도 했을 거야. 넌 얼마나 좋니? 집에서 밥을 먹을 근심하지 않아도 되지, 나라에서 학비도 다 대주는데 내가 하지 못한 공부까지 네가 해라. 당부한다.” 허나 덕돌은 애는 총명한데 개구쟁이 시절부터 까불면서 좀 부모를 속을 태웠다. 늙은 비술나무 밑에서 학교로 가는 조개덕의 순희랑 함흥촌의 은숙이랑 학교 가는 길을 막고 날마다 젖은 누룽지를 바치지 않으면 학교에 가지 못하게 했다. 초중에 가서는 공부를 잘해 “학급의 작은 선생”으로 불리웠다. 허나 성격이 여자 같은 덕돌은 항상 나이 서너살씩 더 먹은 낙제생- “묵은 돼지”들에게 얻어맞는다. 지어 잔등에 어찌나 잉크를 얻어 맞았는지 옷을 입고 학교에 가기 부끄러울 정도로 됐다. 게다가 학습위원을 하면서 순희와 함께 시험지를 매긴데다 순희와 은숙에게 공부를 함께 잘해 대학으로 가자는 쪽지를 썼다가 연애편지를 썼다는 누명을 들쓰고 머리를 들고 학교에 가지도 못하게 된다. 지어 그는 자결하려고 진수해 역으로 가서 기차 앞에 뛰어들려고 했다가 역 일군에게 잡히고 말며 역파출소 경찰에 잡혀 진수해파출소 황종연 소장앞으로 끌려간다. 간신히 파출소에서 나온 덕돌은 고모와 외삼촌 집으로 찾아다니면서 피신해 있다가 찾아온 막내 누나 정숙의 뒤를 따라 집으로 들어간다. 생각 밖으로 상순은 이전처럼 혹독하게 때리지 않고 내심하게 교육한다. 그 사건은 덕돌의 성격을 바꿔 놓은 전환점으로 됐다. 덕돌은 이를 악물고 주먹세계로 들어가 보복의 칼을 간다. 여자 같던 덕돌은 진수해와 연길의 한다하는 싸움꾼들을 친해 무예를 연마하며 싸움꾼 무리를 데리고 학교로 쳐들어가 자기를 놀려대던 애들을 무리로 패댄다. 영화 보러 진수해로 간 승학이랑 집에 돌아가는 길목을 막아 때려눕히며 다리 위에서 내리 떨어뜨린다. 덕돌은 꿈도 많았다. 그는 제일 먼저 반도체 조립 책을 보고 용돈을 아껴 쓰며 모은 돈으로 반도체 부속품을 사서 자체로 반도체 라지오를 조립한다. 동린과 함께 패용천산에 올라가 연 쇠줄로 안테나를 늘이고 반도체 보름을 높이자 “연변인민방송입니다.”는 여 아나운서의 고운 목소리가 울리는 순간 덕돌은 곤두박질치며 환성을 지른다. 무선전전문가의 꿈을 이룬듯이 환호했다. 허나 무선 전 기술을 배워 봐야 라디오수리부에나 들어가 앉아 있을 뿐이라고 생각하자 점차 다른 애호- 글짓기를 하기 시작한다. 그는 경산과 성환, 설봉 형님의 지도아래 소식을 쓰기 시작하며 그들이 주는 싯누런 소설책을 탐독한다. 그는 공부를 너무 잘해, 지어 수학은 평균 100점을 맞고 학교 수학콩쿠르에서도 100점의 성적으로 단연 1등을 따내게 된다. 허나 사인방이 살판 치던 나날에 공부를 아무리 잘해도 고중에도 가기 힘들었다. 경산 선생과 성환은 대대 빈하중농 대표 이흥수와 반란 파 두목이며 공사혁명위원회 주임으로 승급한 황종연이 첩첩히 늘인 장애물을 제거하고 덕돌을 고중에 입학시켰다. 그는 경산선생과 공사당위 선전위원으로 승급한 성환의 추천으로 공사 방송소로 들어가 견학기자로 돼 본격적으로 기자 수업을 한다. 고중을 졸업한 덕돌은 고향에 돌아와 아버치 포치대로 목동으로 돼 소몰이를 하게 된다. 진짜 소궁둥이를 치게 된다. 그는 너무 속이 갑갑해 소를 패용천산 꼭대기에 몰아 놓고 자체로 조립한 반도체라디오를 틀어놓고 노래를 흥얼흥얼 부른다. 상순은 덕돌을 진짜 농사꾼으로 양성하려고 밭갈이로부터 벼 모 내기, 김매기, 낟알 실이를 시켰다. 그때 송선과 함께 싣걱질을 하게 된다. 그는 가무단의 저명한 무용수 송선과 함께 일하면서 자기 전도를 어떻게 개척하겠는가고 고민에 빠진다. 덕돌은 상지민과 수호, 황련지 등 상해지식청년들과 친하면서 대도시 선진적인 생활습관과 문화에 대해 흡모하기 시작한다. 그는 어떻게 하나 어지로운 농촌을 벗어나기 위해 일밭에 가서도 쉼이면 남들은 희희닥거리며 놀아도 남들이 보지 못하는 한쪽 구석에 가서 책을 손에서 놓지 않고 들여다 보았다. “4인 무리”를 짓 부시고 문화대혁명을 청산하기 시작했다. 정규상은 의학원으로 되돌아가 20여년이나 억울하게 썼던 우파 모자를 벗게 된다. 그의 검은 자료 여섯 마대나 쌓아놓고 휘발유를 치고 불을 지르니 삼단 같은 연기가 하늘을 찌른다. 정규상은 내성적인 지식인이어서 한뉘 평생 말을 한 것을 다 적어놓아도 여섯 마대나 될 수는 없었다. 한 지식인을 타도하자니까 검은 자료를 여섯마대나 해놓았던 것이다. 허백호는 이흥수를 투쟁하고 자기 억울한 모자를 벗기는 날에 너무 격동돼 그만 중풍을 맞아 뇌출혈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소련에서 온, 고인이 된 우파 박성근의 우파 모자도 벗겨준다. 대신 그의 아들 박숭길은 입당도 하고 대대 혁명위원회 주임으로 된다. 그는 로 서기 상순의 지시대로 사원들을 이끌어 부유하게 사는 길로 나가려고 힘쓴다. 정녕 농촌 개혁의 봄바람은 이 대지의 백성들을 다 부유하게 살게 할 수 있을까? 흥수네 집에 희한한 일이 벌어졌다. 그의 딸 미선이가 불시에 골 암에 걸려 머리를 붙들고 진종일 운다. 그녀는 남자가 어떤 건지도 모르고 죽는 것이 안타깝다며 자기 첫사랑은 덕돌이라면서 불러오라고 한다. 덕돌은 아버지가 인도주의 원칙에서 출발해 가보라고 해 마지 못해 찾아가서 병 문안을 한다. 허나 미선이가 그걸 하자고 달려들 때 단연히 엉덩이 먼지를 툭툭 털고 가버린다. 마지못해 흥수는 미선을 자기 무릎위에 올려 놓고 위로한다. 그래도 미선은 동네에 나가 총각을 얻어오라고 떼를 쓴다. 허나 흥수가 아무리 온동네를 돌아다니면서 알아봐도 암에 걸린 미선을 공 준다는 데도 와서 살을 섞어주려는 남자는 없었다. 마지막에 미선의 제의대로 아버지벌이 되는 지주 집 노총각 장충국을 흥수가 불러 오게 된다. 쉰이 넘도록 여자를 모르고 살던 노총각 충국은 이게 웬 떡이냐고 흥수네 고방에 들어가 미선을 처음으로 여자로 만든다. 그날부터 충국은 날마다 뒤 울바자를 헤집고 흥수네 고방에 들어가 미선과 살을 섞는다. 그제야 흥수네 고방에서 미선의 울음소리가 잠잠해지고 대신 고양이가 우는 소리간 간간히 들렸다. 그런데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흥수는 충국의 동생 미련을 데리고 살아 임신시키고 류산마저 시켜놓는다. 허나 그는 미선이가 충국의 애를 가지는 바람에 동네에서 머리를 들고 살수 없다고 충국에게 악감을 먹는다. 그리하여 그는 눈 내리는 밤에 술에 취해 미선을 간음하고 벽돌공장 당직실에 가서 쓰러져 자는 충국의 뒤를 밟아가 호미로 머리를 쳐 죽인다. 사원들은 모두 충국이 얼어 죽었다고 생각한다. 허나 경찰과 치보주임을 한 기민한 상순은 사건현장을 깐깐히 살피고 타살이라고 인정하며 파출소에 의문을 제기한다. 공안국 창남 국장과 허영호 소장은 즉시 수사 일꾼들을 데리고 와서 수사 끝에 흥수네 집에 있는 피 먹은 호미자루와 충국의 깨진 두개골 그리고 당직실의 피 흔적 등을 단서로 DNA검사마저 해 이 사건을 해명한다. 결국 흥수는 보복살인죄로 총살당한다. 대학입학제도가 바뀌자 덕돌은 저수지에서 탈출해 대학시험을쳐 대학에 가게 된다. 정말 기적이 아닐 수 없었다. 덕돌은 정치학부 학생이지만 문학을 사랑해 소식과 재담 같은 것을 쓰기 좋아한다. 학교 뒤 소나무숲 속에서 노래를 부르는 처녀애 영자를 만나면서 덕돌은 열련에 빠진다. 덕돌은 영자를 가수로 되게 하려고 가무단 단장으로 복귀한 송선에게 부탁해 무용과 노래를 배워주게 한다. 그 후 송선의 도움으로 영자는 예술학교에 입학해 무용을 배운다. 그러나 무용지도교사의 음흉한 술책에 의해 간음당한다. 그러자 송선은 애절한 이별의 편지 한 장을 남기고 어디론가 자취를 감춘다. 실련의 고배를 마신 덕돌은 자기보다 나이 더 많은 봉선과도 연애실험을 한다. 그후 은숙과도 재차 만나 어린 시절 시들었던 사랑을 꽃피우려고 한다. 덕돌은 은숙과 영자, 봉선 등과 선후해 연애에 도취되면서 꽃마다 향기가 싱그럽고 부드럽다는 것을 느끼며 사랑의 쓴맛과 단맛을 맛본다. 덕돌이 한숨과 처녀들의 눈물로 엮어 놓은 사랑환상곡의 로맨틱하고 애절한 이야기는 어디까지일까? 십여 년 후에 되찾아온 첫사랑의 흔적들은? 허나 결국 덕돌은 병원의 간호사로 일하는 이명숙과 결혼하게 된다. 덕돌은 교원으로부터 시내 한 가도의 문화소 소장으로 되며 나중에 문화관 보두원으로 들어갔다가 나중에 모 신문사 기자, 주임기자, 사장으로 발탁된다. 그가 보아온 우리 조선족사회의 문화세계는 또 어떤 것일까? 상순은 풍을 맞아 드러눕게 된다. 아들 집에도 가지 않고 다만 할아버지 대부터 쪽박을 차고 고향을 떠나 두만강을 건너와 개척한 두 번째 고향 함흥촌을 지키려고 무등 애를 쓴다. 허나 이병진의 아들 철주랑 짜고 들어 상순은 노동력을 잃었다고 밭을 회수하고 주지 않으려고 한다. 그리하여 덕돌은 아버지에게 보복하려고 드는 철주 일당들과 토지분쟁을 하게 된다. 토지국에 가서 토지법을 자문하고 이계삼 로서기와 허영주 부현장, 한영수 토지국장의 지도아래 함흥촌에 가서 철주와 대판 토지법에 근거해 시비해 아버지 밭을 찾아낸다. 대대로 이 마을 황무지를 개간해 밭을 일군 상순에게 먹을 쌀을 지을 밭마저 주지 않겠다는 것이 도리 있는가? 나라에서는 호구가 어디 있으면 어디에서 밭을 줘야 한다고 하지 않았는가? 상순과 덕돌은 날 따라 삭막해가는 두 번째 고향의 인심을 볼라고 도리머리를 흔든다. 천지개벽은 일어났지만 농촌 로인들의 양로문제는 의연히 커다란 사회문제로 되고 있었다. 칠순이 넘은 부모도 온전히 모시지 못하는 덕돌은 가슴이 아팠고 고민에 빠진다. 어떻게 돈을 벌어 부모에게 벽돌집을 사주고 한집에 모실까? 허나 일은 잘 풀리지 않는다. 한뉘 백성들을 어떻게 배불리 먹고 살게 하려고 애를 써온 로 당지부 서기 아버지는 끝내 환한 날을 보지도 못하고 고향에도 다시 돌아 가보지 세상을 떠난다. 덕돌은 아버지 상순의 부탁대로 부모의 고향 명천에도 가본다. 부모의 고향은 그렇게도 물에 씻은듯이 아름다웠다. 허나 부모는 고향에 가보지 못하고 아들만이 되돌아와 바다가의 모래를 쥐어 매만지며 눈물을 줄줄 흘린다. 덕돌은 한국의 단종 능이 모셔진 강원도 영월군의 장능과 경주의 알지 출생원시림, 내물왕 능 등이 모셔진 고분공원도 돌아본다. 조상들의 뼈가 묻힌 고향은 그같이 아름다웠다. 경순대왕을 비롯한 조상들도 옛날부터 살던 생존을 위해 천년사직을 하루 아침에 내놓고 몇 십 대를 대대로 내리 살아온 정든 고향 경주를 떠나 개경(개성)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어디에 가서 정을 붙이면 그 곳이 바로 고향이라는 것은 이해가 갔다. 허나 반쪽으로 된 한반도를 귀국하는 비행기에 앉아 내려다 보는 덕돌의 마음은 아팠다. 깨진 한반도는 커다란 거울로 되어 내 얼굴을, 아니 우리 민족의 얼굴을 비춘다. 우리 민족의 얼굴도 반쪽으로 깨어져 볼 품 없이 되었다. 고향 마을에 내려가 보아도 조상들의 산소를 볼 면목이 없었다. 조선족 고향마을이 날이 감에 따라 무너져 가고 학교는 돼지 굴로, 소 외양간으로 돼버리는 가슴 아팠다. 옛날 친일주구 촌장 지학사의 아들놈이 “복벽”해 새로운 농장주로 된 후 촌장까지 되려고 하는 현실을 덕돌은 차마 눈을 뜨고 보고만 있을 수 없어 깊은 수렁과 같은 고민에 빠지고 만다. 고향은 분명 웃고 있었다. 귀를 기울여 들어보니 일 제정 때 촌장 지학사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상 싶었다. 정신 나간 미선이가 유령처럼 묘지부근에 나돌아 다니며 미친 듯이 웃고 떠들어댄다. 충국의 혼이 떠도는 것 같아 덕돌은 온 몸이 오싹해났다. 무너져 가는 고향은 분명 울고 있었다. 귀를 강구고 들어보니 조상들이 구천에서 우는 소리가 들려오는 상 싶었다. 고향 사람들은 고향에서는 찾아 볼 수 없었다. 한국과 조선, 중국의 연해 대도시 사처에 흩어져 울고 웃으면서 살고 있었다. 언제면 고향이 다시 웃을까? 덕돌은 말 못할 민족의 사명감과 의무감을 뼈저리게 느끼면서 조상들의 산소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대성통곡 쳤다… 아, 고향이여, 우리 민족의 조상들이여!                                                                                  (끝)
164    대하소설 진달래 소야곡(22) 댓글:  조회:1357  추천:0  2018-09-07
      42.지하주차장 특대살인강탈사건의 내막 백화청사 지하주차장 특대살인강탈사건을 저지른 흉수들을 나포했다는 희소식은  재빨리  YB시공안국에 전달됐다. 강운룡 과장이 직접 창남과 수길을 데리고 찌프를 타고 수천리 떨어진 초원으로 쏜살같이 달려갔다. 류치실에서 강과장을 본 조흥수는 머리를 푹 떨어뜨렸다. “나쁜 놈!” 조흥수는 천천히 머리를 들었다. “강과장, 담배를 한대 줍소.” “탄백하고 발편잠을 자게나.” 조흥수는 쇠고랑이를 찬 손으로 권연을 받아 입에 물고 수길이 켜댄 라이터 불을 붙여 물고 길게 들이빨았다. 그는 담배연기를 후- 내뿜더니 쥐구멍에 들어가는 소리로 말했다. “고려할 시간을 좀 줍소.” “뭐라고? 증거가 다 있는데도 탄백하지 않겠는가?” 조흥수는 머리를 푹 숙이고 입에 빗장을 지른 채 담배만 풀썩풀썩 피웠다. 강과장은 류치실에서 나와 몽골족 대대장과 토론한 후 조흥수와 조길수 형제를 YB시로 압송하기로 했다. 몽골족대대장은 강운룡 과장한테 성호를 혀끝이 다슬게 칭찬했다. “성호가 매려관에 잠복했기에 화살 하나로 독수리 두마리를 잡게 됐습니다. 성호는 적수공권으로 총을 쏘는 흉수와 용감히 싸운 조선족청년영웅입니다. 성호야 말로 우리 초원에서 날아예는 매입니다. 매는 우리 몽골족들의 영웅을 상징합니다.” 그는 사건경과를 쭉 얘기하면서 성호의 영웅적사적을 쭉 이야기했다. 강과장은 몽골족 수사대대장과 경찰들의 손을 일일이 굳게 잡고나서 조흥수와 조길수를 찌프에 압송해 가지고 먼 길을 떠났다. 이튿날, 강운룡 과장은 반정탐능력이 강한 조흥수를 놔두고 먼저 그의 동생 조길 수를 돌파구로 삼고 심문했다. 심문실에 들어선 조길수는 강운룡 과장을 흘끔 도적질해보았다. 강운룡 과장은 날카로운 눈길로 조길수를 쏘아보면서 기선제압을 했다. 조길수는 머리를 수깃하며 눈을 깔더니 맥없이 걸상에 풀썩 물앉았다. “빨리 죽이오. 사람을 시달리게 하지 말고.” “죽을 죄를 진 걸 아는가?!” 조길수는 육중한 몸뚱아리를 들썩해 바로앉으면서 두덜거렸다. “죽이라지 않소? 죽으면 다지.” 꽝! 강운룡 과장은 77식권총을 사무상에 꽝 내놓았다. “이건 누구 권총인가?!” “모르오.” “네가 쓴 권총인데도 몰라.” “죽어도 모르오. 형이 어디서 얻어온 건지.” 조길수는 모르쇠를 댔다. 강운룡 과장은 수길과 눈길을 마주쳤다. “우린 조흥수를 심문해서 모든 증거를 확보했어. 백화청사 지하주차장 특대살인강탈 사건 범죄과정을 로실하게 탄백해라.” “다 안다면서 묻소?” 조길수는 천정을 멍하니 바라보더니 두덜거렸다. “바보. 파출소 소장을 했다는게 몇마디 안팎에 벌써 다 불어버렸어?” 조길수는 형이 탄백했다는 말에 정신방선이 와그르르 무너졌다. “극상해 죽겠지 뭐.” “죽기 전에 탄백해라.” 조길수는 코방귀를 뀌면서 입에 빗장을 꽉 지르더니 눈마저 딱 감아버렸다. 강과장은 정책교육을 해서 조길수를 내보냈다. 뒤이어 끌려들어온 조흥수는 더 완고했다. 반정탐능력이 있는 그는 입을 닫아매고  한마디도 탄백하지 않았다. 고의적으로 강운룡 과장 등을 애를 먹이면서 겨뤄보려는 심산 같았다. 강운룡 과장은 사무실에서 뒤짐을 지고 왔다갔다 거닐면서 궁리하다가 주춤 멈춰섰다. 몇해 전에 보험공사 보위과 최영일 과장이 77식권총을 강탈당한 일이 피뜩 떠올랐다. “가능하게 그 권총이 아닐가? 조흥수는 최과장과 잘 알지 않는가?” 강과장은 먼저 77식권총을 돌파구로 삼으려고 최영일 과장을 불러왔다. 당시 최영일 과장은 마작을 놀고 집으로 돌아오다가 1층 현관에서 웬 강도놈한테 둔기에 맞아 쓰러졌고 77식권총을 강탈당했다. 최과장은 다행히 둔기에 슬 맞았기에 몇달 동안 입원치료를 받고서야 간신히 목숨만은 구했다. 그러나 뇌진탕후유증으로 해 출근도 하지 못하고 내부퇴직해 치료받고 있었다. 최영일 과장은 강운룡 과장 사무상의 77식권총을 들고 번호를 찬찬히 살펴보더니 반색했다. “맞소. 이건 내 권총이요.” 강과장은 수길을 보고 77식권총을 무기고에 가져다 보관하게 하고나서 최과장을 돌아보고  “77식권총을 분실한 날에 조흥수를 만난 적이 있소?” 하고 물었다. 최 과장은 한참 사색을 더듬더니 무릎을 탁 쳤다. “그날 조흥수와 함께 한 친구네 집에 가서 마작을 놀았소.” “조흥수가 손을 쓸 틈이 없었는데.” 강과장은 뒤짐을 지고 사무실을 왔다갔다 거닐었다. 그는 주춤 걸음을 멈추더니 최과장한테 물었다. “혹시 그날 조흥수한테서 의심스러운게 없었소?” 최영일 과장은 권연을 꺼내 붙여물고 한참 사색을 더듬더니 머리를 천천히 들었다. “그날 마작을 놀 때오. 난 옆구리에 찬 권총이 불편해 끌러서 앞에 당겨 돌려놓고 놀았소. 그런데 조흥수가 이상한 눈길로 내 권총을 자꾸 여겨보더란 말이요.” “이상한게 더 없소?” 한참 생각에 잠겼던 최 과장은 강과장을 물끄러미 쳐다보면서 입을 열었다. “그날 저녁에 마작을 한창 놀다가 조흥수가 갑자기 배 아프다면서 먼저 집으로 가겠다고 했소. 다른 때 같으면 마작을 놀고 우리와 함께 한잔 마시고 갔겠는데 말이요. 그날엔 어쩐지 식은땀을 줄줄 흘리면서 먼저 가버렸소.” “음. 문제 있소.” 강운룡 과장은 최과장을 돌려보낸 후 천일을 보고 병원에 가서 춘란의 병세가 어떻게 됐는가 알아보게 했다. (관건은 춘란이 정신을 차려야겠는데…) 이튿날 강과장은 조길수를 재차 심문했다. 심문실 철문이 드르릉 열리자 조길수가 쇠고랑이를 찬 채 머리를 푹 숙이고 들어섰다. 강과장은 매서운 눈길로 조길수를 한참 쏘아보다가 콩크리트바닥에 쇠덩이를 굴리는 듯한 목소리로 심문했다. “조길수, 백화청사 피해자 중에 한 사람이 살았어! 탄백해!” “썰매떼기 작작 하오. 우리 언제 뭐 살인했소?” “살인범은 어떻게 된다는 걸 알지?” “야~ 이거 미치겠어. 내 강탈했소?” “아직도 생떼질을 쓰겠는가? 그래 피해자를 데려다 대질시키지 못할 것 같은가?” “누가 겁나?” “조흥수는 네가 보위간사를 쳐죽였다고 했어.” “뭐라고?” 조길수는 흘끔 강과장을 쳐다보더니 도리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형은 절대 날 물어먹을 수 없어.) 강과장은 조길수의 허점을 찔러 피가 흐르게 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흥! 그래, 내 죽였어. 형과는 관계 없어! 됐지?” 조길수가 뜻밖에 달리 나올줄이야. “바보, 총살맞을줄 알어.” 조길수는 정신방선이 와그르르 무너졌다. 이젠 진짜 미친 놈처럼 정신이 오락가락했다. 강과장은 창남과 눈길을 맞추고나서 심문했다. “네가 보위간사를 둔기로 쳐서 죽였지? 출납은 네 형이 쳐 죽이고." “내 보위간사를 단매에 쳐죽였소. 으하하하, 단매에 작살을 냈지.” 조길수는 미친듯이 희스테리가 발작했다. 그는 의아한 눈길로 강과장을 쳐다보았다. “보위간사가 살았다고? 단매에 쳐눕혔는데 어떻게 살 수 있어?” 그는 믿을 수 없다는듯이 도리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네 형은 고혈압에 심장병까지 있어 팔에 힘이 없어.” “아무리 힘이 없으니 고까짓 계집애를 단매에 쳐죽이지 못해. 참, 후환을 남겼구만.” “어떤가? 사건경과를 말하고 며칠 푹 발편잠을 자란 말이오.” “다 털어놓겠습니다..” 조길수는 권연을 한대 달라고 해 풀썩풀썩 피우더니 죄행을 낱낱이 탄백하기 시작했다. 조흥수는 진짜 죽음의 궁지에 몰려 공포에 떨었다. 오후에 강운룡 과장은 조흥수를 심문하기 시작했다. 처음에 조흥수는 생떼를 쓰면서 죄행을 승인하지 않고 계속 뻗치려고 악을 딱딱 썼다. “조흥수, 죄행을 탄백하라.” “픽, 생사람을 잡지 맙소. 당당한 보위과장을 이게 뭡니까? 여지껏 백화상점을 보호한 걸 모르고. 흥! 범죄자로 몰아?” 퉁퉁하던 조흥수의 얼굴은 개한테 핥킨 것처럼 수척해졌고 검은 그림자로 얼룩졌다. 강과장은 단도직입해 심문했다. “흥수, 길수가 다 탄백했네. 아직도 생떼를 쓸텐가?” 조흥수는 피씩 웃으면서 허리를 쭉 폈다. “멋지게 추측하는구만. 생사람을 작작 잡소.” “왜 내몽골로 도망쳤는가?” “누가 도망쳤는가? 생사람을 잡아도 한두가지 안니구만. 쳇!” 조흥수는 억울하다는듯이 코방귀를 뀌고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보위 과장도 사직했지. 음식점도 잘 되지 않지. 어떻게 살겠소? 소장사나 할가고 내몽골에 간게지.” “자기 죄가 두려워 도망친 거야. 그대로 도망치면 공안국의 의심을 받을가봐 보위 과장을 사직했지. 그때 네 집에 77식권총이 있었으니까. 보위과장 권총은 필요없다고 바쳤어. 위장술에 지나지 않았어.” “옛말이면 듣기나 좋지. 77식권총은 내 동생이 얻어온게요.” 강과장은 비웃었다. “서로 물고 뜯는 건 심통해. 동생은 형이 얻어온 거라 하고 넌 동생이 얻어온게라고. 흥!” 그 말에 기가 꺾였던지 조흥수는 머리를 좀 떨어뜨렸다. 아마 동생이 확실히 범죄과정을 탄백했다고 직감한 것 같았다. “어떤가? 자네도 파출소 소장을 했으니까. 이쯤 하면 탄백할 때 됐다는 걸 알 수 있지 않는가? 괜히 우리까지 피곤하게 굴지 말고. 툭 털어놓게.” “권총은 어데서 난겐지 진짜 모르오.” “우리 말해야 알겠나?” 강운룡 과장은 창남을 보고 무기고에 가서 77식권총을 가져오게 했다. 그는 77식 권총을 들고 흥수를 쏘아보았다. 조흥수가 머리를 푹 떨어뜨렸다. 강과장은 콩크리트바닥에 쇠공을 굴리는 듯한 목소리로 간단히 물었다. “자넨 그날 마작을 놀면서 왜 자꾸 보험공사 최과장의 권총을 흘끔흘끔 건너다 보았는가?” “…” “자넨 그날 왜 불시에 배 아프다면서 먼저 마작판을 떠났는가?” “확실히 배 아파 더 놀지 못했소.” “거짓말!” 흥수는 억울한듯이 눈까지 흘겼다. “자넨 숱한 단서를 남겼네.” 강과장은 미리 준비한 그날 범죄자가 사건현장에 남긴 피묻은 도끼를 쳐들어보였다. “이건 자네가 친구네 집 부엌에서 장작을 패는 도끼를 쥐고 사건현장에 갔던  도끼야. 그때 우린 자네가 버리고 간 도끼에서 지문을 채취했었네. 그러나 당시 우린 상해총기강탈범죄자가 보위 과장인 자넬줄은 몰랐네. 그래서 자넨 수사망에서 잠시 빠져나갔지. 그러나 이젠 도망칠 수 없게 됐네. 이제라도 자네 지문을 채취해 대조해보면 끝이 아니겠는가!” 강과장은 창남과 수길을 보고 조흥수의 지문을 채취하게 했다. 그때까지도 조흥수는 요행을 바라고 코방귀를 뀌면서 순순히 지문을 채취하게 했다. 그러나 몇분 지나지 않아 도끼자루의 지문과 조흥수의 지문이 일치한 걸 환등에서 본 후 조흥수는 머리를 툭 떨어뜨렸다. “아직도 떼를 쓰겠는가? 최 과장네 집을 아는 사람은 자네 밖에 없어. 다른 사람들은 최 과장네 집이 어데 있는 것도 모르는데 어떻게 최 과장네 집 현관에 미리 잠복해 기다리다가 범행할 수 있었겠는가? ” 아무리 반정탐능력이 있는 조흥수도 철 같은 증거와 인증 앞에서 승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흥수는 머리를 툭 떨어뜨리며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였다. “야,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됐을가?” 정신방선이 와그르르 무너지는 순간, 그는 쇠고랑이를 찬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쥐고 대성통곡쳤다. 한참 후 그는 77식권총을 강탈한 죄부터 탄백했다. “그날 나는 마작을 놀면서 최과장 권총을 뺏자고 궁리했소. 집의 식당도 잘 안돼 녀편네 바가지를 긁지. 아가씨들도 돈을 달라고 징징거리지. 권총을 빼앗아뒀다가 후에 강탈할 때 쓰자고 했지. 내 권총으로 강탈하면 며칠 못 가 들통날 것 같아 그런 궁리를 했소. 난 배 아프다고 핑게 대고 마작판에서 먼저 자리를 털고 일어났소.  친구네 부엌에서 도끼를 주어들고 먼저 최과장네 집에 가서 현관 문 뒤에 숨어 있었지. 한참 후 최과장이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도끼등으로 머리를 쳤지. 난 쓰러진  최과장 옆구리에서 권총을 빼내가지고 도망쳤소.” 강과장은 조흥수를 쏘아보면서 한마디 했다. “자넨 범행은 아주 치밀하게 계획을 세우고 저질렀네. 그러나 백화청사 지하주차장에 숱한 단서를 남겼네. 어서 탄백하라.” 조흥수는 바보처럼 강과장을 흘끔 쳐다보았다. 강과장의 말마디마다 비수로 돼 그의 심장을 찔렀다. “첫째, 자넨 동생을 시켜 지하주차장에 미리 숨어 있게 했고 살인강탈한 후 차를 몰고 도망치게 했네. 그러나 주차장 출입구 몰카와 당직원한테 체모특징이 드러났네.” “?!” “둘째, 자넨 백화상점 안으로 해서 지하주차장에 들어가면 누구도 자넨줄 모르리라 오산했네.” 강과장은 도리머리질하는 흥수를 쏘아보며 계속했다. “셋째, 자넨 춘란이 머리를 권총박죽으로 쳤네. 춘란의 머리에 난 옴폭한 상처는 총박죽으로 친 좋은 단서야.” “옛말이면 듣기나 좋지.” “어떤가? 이만하면 증거가 충분하지 않는가? 탄백하게나.” “쳇, 쉽게 밥을 벌어먹자고 드는구만. 난 아무 죄도 없소.” 강과장은 도리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오해했구만, 자넬 사내대장분가 했더니. 알고보니 비굴하기 짝이 없구만. 아직도 살기를 바라는가? 허허허.” “그따위로 죽음에 내몰지 말게.” “좋아. 마지막 증거를 내놓지. 자넨 심장병과 고혈압이 있어 팔에 힘이 없어. 때문에 권총박죽으로 춘란을 단매에 쳐죽이지 못했어…” 조흥수는 쪽걸상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니, 그래 춘란이 살았단 말인가?!” “놀랐지?” 그제야 빈틈을 보인 것을 알고 조흥수는 쪽걸상에 슬쩍 되앉아버렸다. 그러나 때는 늦었다. 그는 속으로 강과장의 허를 찌르는 수작에 놀아났다고 후회했다. “쭉 말하라는가? 그래도 자네 탄백하는게 낫지.” “춘란이, 춘란인 절대 살 수 없어.” 그때 강과장이 손을 홱 휘두르자 창남이 우쭐 일어나 나갔다. 이윽고 철문이 드르릉 열리더니 뜻밖에도 머리에 붕대를 감은 춘란이 녀경찰의  부축을 받으며 비칠거리면서 나타났다. “야, 조흥수, 네 놈은 천벌받을 거야!” 깜짝 놀란 조흥수는 뒤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한참 후에 일어난 그는 춘란을 물고 뜯었다. “네년도 감옥에 들어갈 거야. 절도죄를 덮어감싸줬더니 날 물어먹어?” 춘란은 조흥수를 손가락질하면서 욕설을 퍼부었다. “네놈한테 얼마나 협박당하고 릉욕당했는지 몰라. 돈도 2만원이나 빼앗겼지. 그 피나는 돈 2만원 마련하느라고 부모집까지 다 팔았어. 어허헉, 헉헉.” 춘란은 격분해 엉엉 대성통곡치며 비틀거렸다. 녀경찰이 황급히 춘란을 부축해 쪽 걸상에 앉혔다. 이윽고 춘란은 천천히 머리를 쳐들었다. “지금도 의심돼. 세집 석탄무지에 파묻어놓은 돈가방을 네놈이 재차 도적질해갔지?” 조흥수는 미친듯이 “으흐흐, 하하하.” 하고 너털웃음을 웃었다. “당장 총살당할 판에 뭘 숨기겠느냐? 확실히 내가 지혜롭게 가져갔댔어. 감사해, 춘란아, 그 돈 아주 잘 썼어. 숱한 아가씨들과 술 처먹고 질탕하게 놀았어. 당장 죽어도 후회되지 않아. 네년 숫처녀도 먹어치웠지. 춘란아, 다만 너하구 더 놀지 못하는게 한이구나.” “더러운 개새끼, 네놈 때문에 피눈물인들 얼마나 흘렸는지 아느냐?” 춘란은 피눈물을 줄줄 흘리며 대성통곡하더니 철창 너머 손삿대질을 했다. “살인악마야, 날 죽이고 네가 살아남으리라 했어? 네놈을 붙잡지 않고선 눈을 감을 수 없었어. 염라국에 가서라도 네놈을 물어뜯을 거야.” “야, 후환을 남겼구나. 단매에 쳐죽이지 못한게 한이야!” 조흥수는 살인악마의 몰골을 드러내면서 쇠고랑이를 찬 두 손으로 쪽걸상을 꽝꽝 두드렸다. “네년도 무사하진 못해. 백화상점 출납원이라는게 돈 만원을 도적질했지. 살인강탈범의 애인으로, 아니, 정부로 놀아났지. 감옥밥을 콱 처먹어라.” 춘란은 이를 옥물고 한마디 한마디 뱉어냈다. “네놈은 당장 천당으로 갈 거야. 호호호.” 말을 마치자 춘란은 미친듯이 웃으면서 압송돼나갔다. 원래 춘란의 안전을 고려해 흥수와 삼조대면을 시키지 말아야 했다. 그러나 조흥수가 총살받을 사형수로 확정될 수 있기에 례외로 삼조대면을 시켰다. 조흥수의 정신방선은 완전히 무너졌다. 그제야 그는 자기 죄상이 이미 천하에 다 밝혀졌다는 강과장의 말을 믿게 되였다. “랭수 한사발 줍소.” 창남이 랭수를 한컵 주었다. 조흥수는 랭수를 벌컥벌컥 들이켜더니 자기 죄행을 천천히 털어놓기 시작했다. 조흥수는 돈이 말라 아가씨들을 데리고 놀지도 못하게 되자 어데 가서 돈을 강탈할 궁리를 했다. 궁리 끝에 그는 동생과 함께 백화상점에서 로임을 주는 날에 손을 쓰자고 했다. 조길수는 동생한테 보험공사 최과장한테서 강탈한 77식권총까지 주면서 막부득이한 긴급사항이 아니면 권총을 쏘지 말라고 했다. 그날 조흥수는 춘란이 백화청사에서 로임을 주는 것을 보호하는 척하면서 기웃기웃 살피다가 백화청사 바깥에 나와 조길수한테 손을 쓰라고 암시했다. 조길수는 마스크를 끼고 팔소매에 쇠파이프를 감추고 2층에 올라와 로임을 주는 춘란을 보면서도 서뿔리 손을 쓰지 못했다. 로임을 타러 온 직원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였다. 조흥수가 자꾸 손을 쓰라고 손으로 암시해도 조길수는 까딱하지 못했다. 조흥수는 조길수한테 눈짓해 바깥으로 나갔다. “아무리 봐도 출납이 오늘 로임을 다 줄 거 같지 못해. 남은 돈이라도 빼앗자. 먼저 지하주차장에 들어가 기다려라.” 조길수는 백화청사 승강기를 타고 지하주차장에 손쉽게 내려갈 수 있었다. 그는 지하주차장 구석으로 가서 차 사이에 숨어 승강기를 노려보았다. 한참 후 승강기문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보위간사와 춘란이 나타났다. 춘란의 손에는 묵직한 노란색 트렁크가 들려 있지 않겠는가! 조길수는 숨을 죽이고 손 쓸 기회를 노렸다. 그런데 보위간사가 춘란의 곁에 딱 붙어서 있어 어쩔 수 없었다. 그때 승강기 쪽에서 조흥수가 나타났다. 조길수는 보위간사가 차문을 열려는 순간차 뒤에서 뛰쳐나가 쇠파이프로 단매에 까눕혔다. “사람 살려요!” 그때 조흥수가 권총박죽으로 춘란의 정수리를 강타했다. 조길수는 땅바닥에 쓰러진 춘란의 손에서 트렁크를 빼앗아 차 안에 들이뿌렸다. 그는 흥수가 보위간사 손에서 들춰내 넘겨준 키를 받아 차를 몰고 도망쳤다. 1분도 안되는 사이에 모든 죄행을 끝냈다. 그날 저녁, 조흥수는 동생의 집에 가서 돈 5만원이 든 트렁크를 보면서 기쁨보다 근심이 앞섰다. (굴어귀 풀을 뜯어먹는게 아닌데.) 그는 죄행을 감추려고 안수련 총경리를 찾아가 사직하고 권총까지 바친 후 길수와 함께 도주의 길에 올랐다. 반정탐능력이 강한 조흥수는 안해한테 고향으로 간다고 해놓고 동생을 데리고 내몽골로 도망쳤다. 그 곳은 그가 입대해 근무하던 곳이기에 지형을 손금 보듯 했다. 목민들은 항상 양떼를 몰고 방목하면서 초원에서 옮겨다니면서 살기에 낯선 사람을 관리하기 힘들었다. 그런 허점을 노려 조흥수와 조길수는 아무도 모르는 초원에서 류동식강도질을 하면서 법망을 피하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원쑤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초원에서 성호를 만날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조흥수는 두 손을 쳐들고 미친듯이 고래고래 고함쳤다. “염라국에 가서라도 네놈을 물어뜯겠어! 하하하!”              43. 사랑의 한계 땡볕이 대지를 홧홧 달구는 여름이 짙어가고 있었다. 여린 꽃잎들은 재글재글 내리쬐는 해볕에 볼 품 없이 시들어갔다. 집집마다 밤에 에어콘이나 선풍기나 켜지 않으면 찜통더위에 견딜 수 없었다. 어느날 밤, 뜻밖에 예화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최선생님, 지금 막 죽고 파요.” “무슨 소리요?” 범송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예화, 진정하오. 내 곧 갈게. 지금 어데 있소?” “예술극장 부근인데요. 오지 마세요.” “아니, 꼭 기다리오. 만나 얘기하기요.” 범송은 다신 예화를 만나지 않겠다고 다짐했건만 죽고 싶다는 말에 그 다짐은 물 먹은 요술쟁이 모래성처럼 사르르 무너지고 말았다. “또 그 애를 만나요?” 선금이 눈을 흘겼다. “어쩌겠소? 무슨 일인지 막 죽겠다오. 사람 살려내는게 급선무지.” 선금은 남편을 흘겨보면서 도도거렸다. “그까짓 실습 때 녀학생이 그리 중해요? 한밤중에 줄 나가긴?” “말이라고 해? 지나가던 처녀애라도 길바닥에 쓰러진 걸 보면 살려줘야지 않소? 어째 인도주의라곤 꼬물만치도 없소. 흥!” 범송은 짧은 바지와 반팔 와이셔츠를 주섬주섬 주어입고 부랴부랴 문 밖으로 달려나갔다. 탕, 탕, 탕. 선금은 한밤중에 층계를 내리뛰여가는 남편의 등뒤에 종주먹을 내휘두르며 입을 삐쭉 했다. 범송은 바삐 택시를 잡아타고 질풍같이 예술극장 부근으로 달려갔다. 으스름한 달빛이 깔린 예술극장 마당에 가서 여기저기 기웃거리는데 층계 쪽에서 흐느낌소리가 간간히 들려왔다. 누군가 층계에 쪼그리고 앉아 흐느껴 울고 있지 않겠는가! “예화, 웬 일이요?” “선생님, 전 어쩜 좋아요?” 예화는 천천히 일어나더니 범송의 품에 어린애처럼 안겨 몸을 기대고 흑흑 흐느껴 울었다. 범송은 무더운 여름이였지만 예화를 꼭 안아주었다. “무슨 일인지? 바깥에서 이러지 말고 다방에 가서 조용히 얘기하면 어때?” 예화는 머리를 끄덕였다. 조용한 다방의 희미한 불빛은 짙은 슬픔을 부셔 은은히 발산했다. 예화는 가방을 소파에 내려놓았다. 그녀는 커피잔을 들어 홀짝 마시더니 조용히 입을 열었다. “진짜 앞날이 캄캄해요.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고 사랑하던 님을 잃었어요. 정만 주고 몸만 가려거든 저를 만나지도 말 것이지. 이게 뭔가요? 그인 저를 이 세상에 홀로 남겨놓고 훌 가버렸어요. 육신은 까만 연기로 사라지고 시혼만 남아 내 마음을 오리오리 찢어놓으면서 괴롭혀요. 이 세상에 홀로 남은 병신 같은 이 육신은 어이 하리오?” 진짜 정신나간 것처럼 넉두리를 하는 그녀를 보고 범송은 망연자실했다. “대체 무슨 일이요? 원 남편이 잘못됐소?” “남편? 쳇, 그 개 같은 자식을 잊은지도 오랜데요.” 예화는 신경이 까실까실해 눈까지 흘겼다. 범송은 순한 예화가 오늘 밤처럼 거칠게 노는 건 처음 보았다. 예화는 커피를 들어 후후 불더니 홀랑 마셔버리고 뒤말을 이었다. “제가 아무리 남편을 살갑게 굴면서 해선을 혼자 키우다 싶이 했지만요. 무슨 소용이 있어요? 숫처녀 맛을 보려고 수캐처럼 뭇 처녀애들 뒤꽁무니를 쫓아다니는데. 이젠 그 개 놈한테 아무 미련도 없어요.” “박철을 잃어서 그러오?” “아니예요. 그렇게 야박한 바람둥이와 누가 살아요? 갈라진지도 오랜데요.” (남편도 아니고 박철도 아니라면 누구란 말인가?) 범송은 오리무중에 빠졌다. 예화는 손수건으로 두 볼에 끊어진 구슬처럼 주르르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선생님께 속일게 없어요. 웃지 말고 들어보세요. 박철과 갈라진 후 저는 선생님을 찾아 답답한 얘기나 하려고 했어요. 항상 부모와 못하는 말도 선생님과 다 말하고나면 마음이 홀가분하고 후련했지요. 어쩐지 선생님을 만나기 미안했어요. 사모님께 미안했죠.” “예화, 그런 말 하지 마오. 우리 뭐 도덕에 어긋난 범죄활동이라도 했소? 사제간에 속심의 말을 하는 건 정상이요.” “고마워요.” 예화는 점점 진정하더니 속심의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저는 친정집에도 갈 면목이 없어요. 젊어서 청상과부로 나앉아 우리 오누이를 기른 어머니를 볼 면목이 없었죠. 어머니 그렇게 말리는 것도 해선이 아빠와 갈라졌지요. 또 박철하구 동거하지 말라는 걸 동거하다가 갈라졌지요. 어머닌 제가 혹시 네번째 남자와 살 팔자 아닌지 모르겠다고 하지 않겠어요.” 그녀는 조용히 뒤말을 이었다. “미용원도 잘 되지 않지. 참 답답했지요. 그때 내 생활에 과거에 급제를 하지 못한 한 선비가 뛰여들었어요. 웃지 마세요.” “그래, 말해봐.” 범송은 커피잔을 들어 마시며 하회를 기다렸다. “그인 저보다도 수무살이나 이상이였어요. 그 분은 한국에 나간 적도 있어 서양의 현대생활에 푹 물들었더군요. 그런데 가정생할이 엉망이죠. 본댁은 늘 시시콜콜 앓지. 아들딸도 잘 풀리지 않았지. 그분의 일생은 분투한 일생이고 성과가 없는 일생이고 감옥 같은 가정을 떠나고 싶어도 부모와 자식들이 불쌍해 떠나지 못한 망가진 일생이였어요.” 예화는 범송의 눈치를 보지도 않고 넋을 잃고 선비 말을 했다. “그 분은 고생살이를 했지만요. 모든 걸 락관적으로 대했대요. 답답할 때면 조용한 산길을 걷고 령마루에 올라 시를 십여수 읊조리면 모든 고민이 다 사라진대요. 그런데 그인 저만 만나면 시를 읊기보다도 고민이 더 말끔히 없어지고 즐거워진다고 했어요.” “그래 그분은 어떻게 돼 만나게 됐소?” “간단해요. 제가 통신대학을 다니면서 알게 됐죠. 그 선생님은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다나니 쉰고개를 넘어서 저와 함께 한 학급 한 책상에 나란히 앉아 공부하게 됐지요. 간혹 집중수업을 받을 때면 우린 항상 한 책상에 앉아 공부했지요. 그는 아주 박식한 분이죠. 성격도 아주 활발하고 통쾌했지요. 비록 가정생활은 빈곤했지만요. 항상 맥주값은 자기 호주머니를 털어 결산했지요. 우린 밤이 깊어가는줄도 모르고 시를 담론하고 인생을 담론했지요. 우리 둘이 밤이면 밤마다 나눈 인생론은 그의 말처럼 아마 데카메론의 인생론문집보다도 더 많았을 거예요. 그 분은 자기 집 부근에 세집을 잡고 시나 지어 읊으면서 재미나게 지내자고 제의했어요. 저는 랑만적인 그 분이 좋았지요. 저는 큰 마음을 먹고 해선을 어머니한테 보내고  세집에 동거했죠.” 성호는 한숨을 후~ 내쉬었다. 예화는 담담하게 앉아 듣기만 하는 성호 눈치를 할끔 건너다보고 뒤말을 이었다. “호~ 작년부터 그 분한테서 리백과 두보, 백거이 시도 배우고 간혹 시도 지어 읊었어요. 전 그 반년이 얼마나 행복했는지 몰라요. 그 분은 간혹 제가 차린 음식점에도 왔지요. 그때 최 선생님도 자주 왔고요. 정말 고마운 분들인데요. 그 분은 쉰고개를 넘었지만요. 놀랍게도 진짜 남자였어요. 그 분과 함께 밤을 지낼 때면 아주 랑만적이였지요. 딱 속세를 벗어난 시선과 함께 사는 듯한 감이 들었지요. 그 분과의 사랑은 진짜 년령과 지위, 학력의 차이를 벗어난 순결한 사랑이죠. 그분과 함께 한 밤은 시혼과 남녀 육신이 융합된 행복한 밤이죠. 참말로 너무나도 짧고 아쉬운 밤이죠. 그 분은 다신 돌아오지 못하게 됐어요. 흐흐흑, 흑흑…” 범송은 혼이 나간 듯한 예화의 넉두리에 울지도 웃지도 못하고 우두커니 앉아 듣기만 했다. “그래 그 분이 어떻게 됐단 말이요?” 예화는 다시 비통에 잠겨 울었다. “그 분은 그만 교통사고로 숨졌어요. 정말 그렇게 비참하게 저의 곁을 떠나리란 걸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어요. 그날 저와 음식점에서 함께 맥주를 좀 과하게 마셨지요. 그분은 술을 마신다하면 이태백처럼 랑만적인 기분에 잠겨 취토록 마시군 했지요. 그날도 위생실로 나갔는가 했는데요. 밖에서 왁짝 떠드는 소리에 나가보았더니 그이가 큰 길에 쓰러져 있지 않겠어요. 얼음과자를 사들고 큰 길을  건너다가 차에 치운 거 같았어요. 그때 저는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달려가 숱한 사람들을 비집고 들어가 그이를 붙안고 대성통곡치면서 부르고 또 불렀죠. 그이께선 애타게 부르는 저의 목소리를 다신 듣지 못했어요. 다신 저를 정겹게 껴안고 눈이 뚫어지게 바라보지도 못하게 됐어요. 꼭 감으신 눈은 영영 뜨지 못했어요. 어허헉, 전 어쩌면 좋아요. 막 죽고 파요. 흐흐흑, 흑흑흑…” 예화는 범송의 품에 맥없이 안겨 어린애처럼 엉엉 울었다. 한참 후 머리를 든 예화는 가방 안에서 회색양복과 까만 안경을 꺼내 차탁 우에 올려놓았다. “이건 그 분이 저한테 남겨놓은 유일한 유물이예요. 그날 저와 함께 맥주를 마시면서 더워서 이 양복을 벗어 벽에 걸어놓았지요. 아마 사고를 치자고 그랬던지 나가면서 이 근시안경을 벗어놓고 나갔지요. 안경만 끼고 나갔어도 사고를 치지 않았을 수도 있었는데요. 저는 이 귀중한 유물을 한평생 간직하려고 해요. 아니, 저도 이 유물을 가지고 그 분을 찾아가 저승에서 만났으면 좋겠어요.” “바보 같은 소리!” “이 가죽가방과 안경을 보면 항상 이 가죽가방을 옆구리에 끼고 찾아와 웃음짓던 그 분의 눈길을 보는 상 싶어요. 이 안경을 낀 자애로운 눈길을 보는 것만 같아요. 그 분은 무더운 날씨에도 꼭 넥타이를 매고 이 양복을 팔에 걸고 아주 점잖고 멋진 모습으로 저와 데이트를 했지요. 지금 이 시각에도 그이가 사무치게 그리워요. 난 어쩜 좋아요? 최선생님~” 예화는 그 희색양복을 끌어안고 얼굴에 비비면서 서럽게 울었다. “세상뜬 분이 다 가져가게 보내줘야지. 슬퍼하는 제 모습을 보면 그 분도 슬퍼할게 아니요?” 범송의 말에 예화는 쓰라린 눈물을 손수건으로 닦았다. 그러나 그녀는 양복을 꼭 껴안았다. “아니예요. 전 원래 그분의 장례날에 이걸 줘보내려고 장의관에 갔댔어요.  제사를 지낼 때 제가 무슨 명분으로 그 분의 유체 앞에 나서야 하는가요? 녀학생으로? 정부로? 애인으로? 참 우습지 않아요? 그분의 처자와 친척, 친구들이 다 저를 모르는데 말이예요. 마음 같아선 그분을 마지막으로 보고 싶고 눈물젖은 얼굴로 그이의 얼굴을 애무해줘 보내고 싶었어요. 그러나 숱한 사람들 앞에서 그럴 용기는 없었어요.” 그제야 범송은 별로 예화가 말하는 그 분이 혹시 자기 담임교원 최성균 선생님이 아니겠는가 하는 의혹이 들었다. 그날 범송은 장례날에 장의관 문어귀에서 서성거리는 예화를 보고 “무슨 일로 여길 왔는가?”고 물은 적이 있었다. 그때 예화는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얼버무리더니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 분의 성함은 뭐냐?” “최성균 선생님을 아는가요?” “알다뿐이겠소? 그 분은 우리 대학교때 담임교원이였어.” 범송은 이렇게 대답하려다가 목구멍으로 올라온 말을 꿀꺽 삼켜버렸다. 이윽고 딴전을 피웠다. “모르는 분이요.” 예화는 포도알깜장눈을 째질듯 뜨더니 기절할 지경이였다. 범송도 저으기 놀랐다. 참말 어처구니 없었다. (항상 정치경제학을 담론하던 대학교 교수님께서도 암암리에 세집을 잡고 자기보다 20여세나 지하인 새파란 색시를 숨겨놓고 즐겼단 말인가? 이것이 사랑의 진실이란 말인가?) 희미한 전등불빛 아래 복잡한 침묵이 조용히 흘렀다. 범송은 생각할수록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진짜 지하에서 흐르는 사랑에는 한계가 없구나. 년령과 지위에 관계없이 사제간에도, 애비와 딸 같은 사이에도 이런 이변이 벌어지는구나.) 벙송은 수필과 시를 쓰기 좋아하는 예화는 좀 주관이 세고 괴벽하고 이상하게 남들의 눈치를 보지도 않고 제 좋은 궁리를 하거나 제 좋은 소리를 잘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잖고서야 어찌 자기 애비벌 되는 최성균교수와 그런 일을 벌린단 말인가?) 예화는 범송의 내면에서 흐르는 복잡한 심리를 알지 못하고 자기 얘기만 늘여놓았다. 그녀는 눈물을 손수건으로 닦더니 한참 후에야 또다시 조용히 입을 열고 자기 좋은 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모두 그 분은 저와 맥주를 마셨기에 사고를 쳤다고 하는데요. 지어 공안국에서도 제가 그 분을 모살했는가고 의심해 자꾸 불러갔어요.” 그 말에 범송은 좀 의문이 들었다. 풍문에 공안국에서 료해하건대 최성균 선생은 교통사고로 죽은 것이 아니라 다방에서 죽었다고 한다. 어떤 사람들은 정부와 놀다가 심장병이 도져서 복상사(腹上死)를 했다고 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심장질환이 있은 최성균 선생이 정부와 맥주를 마시다가 심장병이 도져서 사망했다고도 했다. 범송은 무슨 원인으로 사망했든 최성균 선생님이 사망하신 것을 아직도 섭섭하고 애석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예화가 모든 걸 속시원히 말해버리고 모든 고통을 잊고 홀가분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모든 걸 받아들일뿐이였다.  “장례날에 저는 유리창 너머 먼 발치에서 뻘건 불이 활활 피여오르는 화가마에 들어가는 그이를 멍해 바라보았어요. 소소리 높은 꿀뚝에서 뭉게뭉게 피여오르는 까만 연기를 바라보면서 전 발을 동동 구르며 대성통곡쳤어요. 저의 사랑과 행복, 사랑하는 님 모두 한순간에 까만 연기로 타래쳐올라 사라졌어요. 그이는 저의 제주도 받지도 못하고 총망히 떠나갔어요. 그이는 갔어도 시혼만은 파란 하늘에서 둥둥 외롭게 떠돌았어요. 그이를 따라가 저세상에서라도 혼과 육신이 다시 융합됐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흐흐흑, 흑흑흑…” 범송은 파도치는 예화의 가냘픈 어깨를 내려다보니 처량하기 그지없었다. (아무리 정으로 사는 세상이라고 해도 일년 밖에 사귀지 못한 애비 같은 선생을 잊지 못해 정사(情死)까지 하려고?) 그는 이해되지 않아 도리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무슨 말로 예화를 위로할지 몰라 망설이였다. 이때 다방문을 똑똑똑 두드리더니 주인이 문을 열고 들어섰다. “여보세요. 좀 조용히 얘기할 수 없어요? 저 녀자손님이 너무 울고 떠들어서 다른 방의 손님들이 좋아하지 않아요.” 범송은 연신 “죄송해요.”라고 하며 결산하고는 예화를 데리고 다른 다방으로 옮겨가려다가 말고 택시를 타고 공원으로 달려갔다. 무더운 밤이 깊어가는데 예화의 처량한 울음소리가 쓸쓸한 기분을 더해주었다. 그들은 공원 정자에 가서 장의자에 나란히 앉았다. 범송은 재생의 용기를 북돋구어주려고 했다. “예화, 생리별의 아픔을 달래기란 쉽지 않소. 마음을 비우는 기쁨을 아는지 모르겠소. 모든 정욕과 물욕을 다 버리요. 마음을 비우면 모든 슬픔과 고민이 말끔히 사라지고 마치 흐리터분한 구름이 걷히고 새파란 하늘이 나타나듯이 머리가 상쾌해질게요. 속세를 벗어난 선녀처럼 말이요.” 예화는 머리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예화는 완강한 의지로 모든 비통을 이기리라 믿소. 새파란 나이에 무슨 떠나간 사람을 따라갈 소릴 다 하오? 인물체격이 물 찬 제비 같은 예화는 앞날이 창창하오. 꼭 멀지 않은 앞날에 새로운 사랑과 행복이 파란 전등 켜고 한들한들 날아올게요.” “호호호. 진짜 달콤한 말인데요. 동화 속에서 반짝반짝 반디불이 파른 전등 켜고 오는 상싶군요.” 예화는 땅이 꺼지게 한숨을 호~ 내쉬였다. 그녀는 한두마디 위로의 말에 슬픔과 작별할 수 없었다. “새로운 행복과 사랑? 저에겐 이젠 없어요. 강간당하고 바람둥이 남편을 만나 세상 더 없는 마음고생을 다한 인생이 애달파요. 내 혼을 다 가져간 사랑하는 님마저 가버렸는데 이제 사랑과 행복이 다 뭔가요? 사는게 정말 귀찮고 고달파요. 그분은 제가 가서 동무해주길 기다리고 있어요. 우리 둘은 만나면 그렇게 즐거우니까. 저승에 가서도 서로 넋을 잃고 혼을 위로해줄 수 있어요. 으흐흑, 흑흑흑…” “그만두오! 좀 정신차리요!” 범송은 대뜸 언성을 높였다. 그 바람에 나무에 앉았던 먼발치 새들이 놀라 포로롱 날아날 지경이다. “그분이 예화를 그렇게 사랑했다면 예화가 죽어서 만나길 바라지 않을 거요. 예화가 굳게 살아서 행복하게 사는 걸 보면 기뻐 할 거요. 시랑 수필이랑 발표하는 걸 보려고 할 거요.” “그래요? 그럴 수도 있겠어요.” 그 말 한마디가 효과를 좀 보기 시작했다. “정말 그 분이야 제가 행복하기를 바랄 거예요. 그렇죠. 제가 그 분을 그리고 추모하는 시라도 써서 발표하면 꼭 기뻐할 거죠. 그런데 자기를 따라 저승에 가지 않는다고 욕하지 않을가요?” 그 한심한 소리에 범송은 억이 막혔다. 그러나 이윽고 용케도 뒤말을 이었다. “욕하긴, 그분은 지금 네 못난 생각을 하는거 보고 욕하고 있어. 네가 굳게 행복하게 살아야 그분의 혼을 위로할 수 있어. 네가 잘못되는 날엔 그분 황천에 가서도 마음이 아파 눈을 감지 못할거야. 저승에서 만나도 끌어안고 맨날 고통스레 울 거야.” “그래서야 안되죠.” 예화는 흐트러진 머리를 두손으로 쓰다듬어올리더니 옷매무새도 바로 잡아놓았다. “언제나 고통스러울 땐 선생님 말씀 들으면 고민도 비통도 말끔히 사라지는군요. 그 분은 참말로 제가 행복하길 바라는 거죠? 오늘 말씀 고마워요. 종종 찾아 만병통치약 같은 보귀한 말씀 듣겠어요.” 범송은 비칠거리는 예화를 부축해 택시에 앉혀 집에까지 데려다주었다. 이튿날 아침에 범송은 예화를 불러 최성균 선생의 유물- 양복과 안경을 가지고 택시를 잡아타고 그 분이 떠나간 북망강산으로 달려갔다. 한참 달려 그들은 쓸쓸한 화장터가 덩실하게 자리잡은 동산마루 수림으로 올라갔다. 예화는 가방에서 희색양복과 안경을 꺼내 얼굴에 대고 막 비비면서 어린애처럼 서럽게 엉엉 울었다. 범송이 재촉해서야 그녀는 무릎을 꿇고 양복과 안경을 마른 장작더미 우에 사르르 가볍게 놓았다. “님이여, 당신의 마지막 유물을 보냅니다. 비록 당신은 저승에 있으시고 전 이 세상에 남아 있어도 그대가 저에게 준 사랑은 잊지 않을 것이옵니다. 제가 꼭 당신의 뜻대로 행복하게 살고 당신을 그리는 좋은 시를 써서 세상에 발표할 것입니다. 이 옷을 보내오니 곧 닥쳐올 찬 가을바람을 조금이나마 막아주옵소서. 저승에서라도 꼭 이 안경을 끼고 부디 큰 길을 건널 땐 조심, 조심해주옵소서…” 범송이 양복과 안경에 휘발유를 치고 성냥을 득 그어대자 시뻘 건 불길이 치솟아올랐다. “최성균 선생님, 하늘나라에서 부디 편안히 사세요. 선생님의 명복을 빕니다.” 범송이 중얼거리는데 예화는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맞잡고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기도나 드리는듯이 앵두입을 열었다. “내 사랑은 새까만 연기로 사라졌어도 그대 사랑과 시혼만은 마음 속에서 영원히 노래할 것이옵니다. 살겠다고 발버둥질치는 간사한 저를 용서하옵소서. 부디 황천길에서 혼이나마 안정하고요. 명복을 비나이다…”
163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 김장혁(종장) 댓글:  조회:2481  추천:3  2018-08-23
                                         10. 망향의 한       얼마나 그리운 조상들의 고향 산천인가?        그 얼마나 꿈에도 가보고 싶은 부모의 고향이던가?       꼭 4년이나 기다려서야 덕돌은 끝내 아내 명숙을 데리고 부모들의 고향 명천 땅을 밟아보게 됐다. 덕돌의 아버지는 7세에, 어머니는 18세에 일제의 철 발굽아래 살 길을 찾아 탯줄을 묻은 정든 고향인 조선 함경북도 명천군 상우남면 운주동을 떠나 만주의 허허벌판에 들어왔다. 그때 그들은 쪽박을 차고 눈보라를 무릅쓰고 주먹밥을 얻어 드시면서 보름동안이나 걸어서 쓸쓸한 두만강을 건넜다. 덕돌의 아버지는 그때 일곱 살 밖에 안됐는데 형님의 지게 우에 놓은 쇠솥에 이불을 깔고 앉아 두만강을 건넜다. 너무 추우면 지게에서 내려 걷기고 하였다. 그때부터 덕돌의 부모들은 한시도 고향 산천을 잊은 적이 없었다. 보모들은 결혼한 이듬해인 1938년에 함께 고향의 산천을 밟아 본 후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 그들은 항상 6남매에게 고향 산천을 외우군 했다. 어려서 고향 기운봉 아래에 가서 돌 버섯이랑 다래랑 머루랑 깸이랑 뜯어먹던 이야기로 치마를 씌워 놓은 듯 기상천외한 치마봉의 전설도 들려 주군 하였다. 또 누런 모래가 깔린 모래밭에 홈을 파놓고 기다리면 밀물에 밀려들어온 고등어며 명태며 홈채기에 빠져 바다로 되돌아가지 못하고 풀떡풀떡 뛰노는 것을 붙잡아 삶아 먹던 동화 같은 이야기도 늘 들려주었다. 세상을 뜨기 전에도 고향 산천이 그리워 세상을 뜨면 골회로 돼서라도 고향으로 돌아가게 두만강에 띄워 보내 달라고 했다. 허나 덕돌은 부모를 차마 두만강에 띄워 보낼 수 없어 부모의 소원대로 고향 산천에 보내드리지 못하고 고향 뒤산에 모셨다. 그것이 내내 속에 내려가지 않았다. 칠보산 관광코스가 열린지도 오래됐지만 덕돌은 칠보산이 바로 부모가 그렇게 외우던 고향 명천의 옛날 기운봉과 치마봉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하여 라진과 선봉, 묘향산과 평양에는 관광을 갔지만 칠보산관광은 가지 않았던 것이다. 허나 우연한 기회에 한 호텔에서 조선 지도를 사서 두루 살펴보다가 아버지 고향이 바로 명천군안에 있는 칠보산 부근에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튿날부터 덕돌은 칠보산 관광을 하려고 서둘렀다. 90세도 넘도록 부모가 74년 동안이나 그리면서도 가지 못한 부모를 모시고 고향의 산천을 구경시키려고 했다. 허나 려행사 측에서는 늙은이는 안전문제로 해 모시고 갈수 없다고 했다. 그리하여 덕돌은 최저한도로 부모가 너무나도 그리워하고 보고 싶어 항상 외워온 부모의 고향 산천을 비디오촬영이라도 해서 부모에게 보여드리려고 비디오촬영기까지 사놓았다. 허나 관광코스가 취소되지 않으면 단위의 월간잡지를 꾸리는 일로 몸을 뺄 수 없었다. 또 기타 여러 가지 여건이 모자라 수속하지 못해 부모 생전에 칠보산 관광을 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그는 부모님 생전에 부모에게 고향 산천 구경도 시켜드리지도 못했고 비디오촬영이라도 해서 구경시키려던 최저한도의 꿈마저 실현하지 못하는 불효를 저지르고 말았다. 4년 동안이나 애 쓴 끝에 끝내 부모 고향 땅을 밟아보는 꿈을 이루었다. 거의 한세기 전 옛날에 부모가 주먹밥을 주어 자시면서 보름동안 눈보라를 무릅쓰고 걸어 두만강을 건넌 길로 새까만 밤에 기차를 타고 온 밤 달려 이른 새벽에야 부모의 고향 명천 땅에 내려섰다. 순간 덕돌은 가슴이 울컥 하고 코마루가 시큼해났다. 끝내 부모가 생전에 그렇게 보고파 외우던 부모의 고향 산천에 왔지만 부모를 모시고 오지 못한 것이 얼마나 한스러운지 몰랐다. “아버지, 어머니, 이 도리깨아들이 이제야 끝내 부모들의 고향에 왔습니다.” 그는 울먹이며 속으로 외치면서 부모님의 고향 산천을 돌아보았다. 입북시조 김려생 할아버지대로부터 14세 고조부에 이르기까지 조상들의 뼈가 대대로 묻힌 조상들의 고향 명천의 산천을 눈물이 없이는 볼 수 없었다.       (어느 산이 입북 시조 김려생 할아버지 산소가 계시는 산일까?)       아무리 둘러보면서 물어 봐도 뭇산들은 반겨 맞아줄뿐 대답이 없었다. 안개 속에 칼로 깎아지른 듯이 백여 미터씩이나 소소리 높이 치솟은 칠보산의 절벽, 천길 벼랑에 하늘을 찌르면서 펼쳐져있는 울울창창한 소나무원시림, 부모의 고향 산천은 그야말로 가는 곳마다 물로 씻은 듯이 감탄이 나올 지경으로 말쑥하고 수려했다. 아마 조상들의 고향 산천이어서 그렇듯 아름답게 보였으리라. 흰 구름이 감돌아 흐르는 천하절경 절벽위에 우뚝 솟아 있는 부부바위와 피아노바위를 보는 순간 덕돌은 아버지가 항상 외우던 치마바위와 어머니가 항상 돌버섯을 따던 기운봉은 어느 것일 까고 둘러보았으나 찾을 길이 없었다. 가이드도 모른다며 도리머리를 흔들었고 산천도 대답이 없었다. 그는 부모 생전에 부모를 모시고 오지 못해 알 길이 없는 치마봉과 기운봉으로 해 또다시 초조하고 마음이 아파났다. 파도가 넘실거리는 바다가의 새하얀 백사장을 밟아보는 순간 만감이 교차했다.        (이 곳이 밀물에 밀려들어왔다가 되나가지 못한 고등어를 줏던 바다가일까?). 수백 년 동안 조선에서 명태의 고향으로 불리어 온 명천에는 낙지와 생복, 명태 등 수산물이 아주 풍부했다. 바다 가에서 덕돌은 눈물과 함께 생신하고 쫄깃쫄깃한 해산물을 씹어 삼켰다. 그의 가시아버지 고향 함경북도 경성군 주을면 해변 가에서 파도가 출렁이는 푸르른 바다를 보는 순간 가시아버지가 고향에 돌아가게 임종 전에 골회를 두만강에 띄워 보내라고 하시던 말씀을 외웠다. 그러자 명숙은 아버지 고향 산천을 돌아보면서 “아버지는 두만강을 따라 동해로 나와 여기 고향에까지 왔을 거예요. 아버지도 우리를 보고 기뻐하실 겁니다.”라고 하며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으면서 울먹였다.        덕돌은 명천의 칠보산과 해변 가를 돌아다니면서 아내와 함께 숱한 영원한 기념사진을 남겼다. 가는 곳마다에서 기념으로 반들반들한 조약돌과 하얀 모래, 그리고 누런 흙을 한 가방 가득 넣었다. 가이드와 관광객들이 이상해 도리머리를 흔들었지만 그들은 해산물 한 마리도 사 넣지 않고 대신 아내의 들 가방에까지 조상들의 고향 산천의 흙과 돌을 불룩하게 넣어 메고 돌아왔다.       조상들의 고향 산천을 사랑하는 덕돌의 마음을 알아주는 아내가 눈물이 나도록 고마웠다. 해관 일군들도 돌과 흙이 가득 찬 가방들을 열어보고 이상하고 이해되지 않아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그들은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증조부모와 조부모, 부모의 산소로 달려가서 고향의 흙과 돌을 산소에 일일이 정중히 얹어드렸다. 덕돌은 뜨거운 눈물을 흘리면서 조상들에게 말씀드렸다. “제가 끝내 부모가 그렇게 그리고 외우던 조상들의 고향에 갔습니다. 부모들을 생전에 모시고 고향의 산천을 돌아보지 못한 이 불효자식을 널리 용서하옵소서. 대신 조상들의 뼈와 혼이 묻혀있는 고향의 흙과 돌이나마 얹어드려 망향의 혼을 위로해드립니다.” 입북시조 김려생 할아버지가 단종을 보호하기 위해 궁정의 호조정랑 벼슬마저 버리고 천신만고를 겪었다. 덕돌은  한국 강원도 영월군에 가서 단종이 묻힌 장릉도 찾아보았다.         그가 영월군으로 떠나는 날, 아침에만 해도 소낙비가 억수로 쏟아졌다. 막내 누나와 매형은 큰물에 영월군 산골에 산사태도 터져 바위돌이 굴러내려 큰길마저 막혔다면서 가지 말라고 했다.        "왜 위험한 곳에 가?"        "편안히 있다가 집에 돌아가."        사실 한국에 떠나올 때 도망칠가봐 려행사에서는 가옥소유증까지 차압해두었다. 만약 이튿날 제때에 출국해 중국에 돌아가지 못하는 날엔 124평방미터나 되는 가옥을 내놔야 할지도 몰랐다.       그러나 언제 다시 올지 모를 형국인지라 덕돌은 기어이 우산 하나 달랑 들고 멜가방에 제주만 챙겨가지고 서울 청량리에서 영월행 렬차에 몸을 실었다. 그런데 웬 일인가? 그가 천신만고를 겪으면서 찾아왔다고 조상님이 도와주시는 건가? 그가 영월역에 내리자 언제 소낙비 내렸나 싶게  해가 바짝 뜨지 않겠는가.       그는 오후에 강릉에서 서울로 돌아가는 막차를 놓칠가봐 역 앞에서 택시를 잡아타고 운전수와 물어 대번에 영월역 서북쪽 한 5, 6리 떨어진 장릉에 달려갔다.         아늑한 양지바른 곳에 자리 잡은 단종 왕릉을 찾은 덕돌은 무릎을 꿇고 절을 올리면서 인사드렸다.        “저의 입북시조 김려생 할아버지가 그렇게도 충성한 단종 왕이시여, 그대의 충신 호조정랑 통정대부 김려생의 18세손 덕돌이 이제야 찾아와 인사 올립니다. 려생 할아버지께서는 임종 시에도 자손들에게 누구라도 살아남으면 꼭 대왕님을 찾아뵈라고 했습니다. 이제야 인사드릴 수 있어 죄송합니다.”        뒤이어 제주를 부어 올리고 큰 절을 올린 뒤 계속 살아 있는 단종 대왕에게 말하듯이 뇌까렸다.        “대왕님은 아십니까? 당신의 충신 김려생 할아버지는 이 곳에서 당신을 보호하려고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습니까? 우린 원래 경순대왕의 후손 경주 김 씨입니다. 려생 할아버지는 충신 엄흥도 호장 함께 단종 대왕임을 이 곳에 모시였다가 세조왕의 눈에 났습니다. 그래서 할아버지는 처자들을 데리고 함경도 명천군 상우남면에 달아나 감자를 심어먹고 바다의 명태를 잡아자시면서 숨어 살지 않으면 안됐습니다. 임종 시에도 그이께서는 우리 경주 김 씨 본마저 당신이 계신 영월로 고쳤습니다. 그때부터 우리는 경주 김 씨로부터 영월 김 씨로 됐습니다. 저 아래를 보십시오. 엄흥도 호장은 충신으로 추대돼 충신기념관마저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어째 저의 할아버지 김려생 통정대부께서는 기념관은커녕 역사에 이름 세 글자도 없습니까? 물론 저의 김려생 할아버지께서 명예나 지위를 바라고 당신께 충성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 후손은 섭섭함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명예나 궁정 통정대부 대신 벼슬도 버리고 간 할아버지신데.”       한참 단종 왕릉에 대고 넉두리를 하고나니 덕돌은 가슴이 후련했다.       참 귀신이 곡할듯이 이상했다. 그가 영월역에 돌아와 렬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올 때 그렇게 맑던 하늘이 갑자기 흐리더니 소낙비가 창대처럼 쫙쫙 쏟아지는 것이 아니겠는가.       진짜 조상님들이 보우해준 것 같아 덕돌은 이를데 없이 감개무량했다.        덕돌은 이듬해에 또 경주로 내려가서 시조 알지님이 태어난 허허벌판의 원시림- 계림을 찾아보았다. 2천여년 전 옛날 밤중에 신라 석탈해 왕의 궁전은 궁터만 남고 그 뒤에 계림이 있었다. 그 원시림이 바로 석탈해왕이 호공을 시켜 밤중에 우는 닭을 찾아보라고 보냈던 원시림,  시조님의 출생지였다.       (그럼 누가 알지를 낳아 금궤에 담아 이 원시림 나무에 걸어놓았을까? 알지의 아버지, 아니, 조상은 누구일가?)        덕돌은 천고의 비밀이 잠긴, 알지를 금궤에 담아 걸어두었던 2천여년 전 계림의 고목을 유심히 살폈다. 철갑을 두른듯 터덕터덕한 고목, 그 유서 깊은 고목을 쓰다듬으며 고민에 빠졌다. 드디어 시조의 숨결이 살아 숨 쉬는 계림에 엎드려 큰 절을 올렸다.       반나절이나 계림을 돌아본 뒤 덕돌은 선덕여왕임이 애써 세운 첨성대도 감명 깊게 우러러 보았고 택시를 잡아타고 천년 신라의 정신기둥이었던 불국사에 가보았다. 턱턱 갈라터진 나무바닥을 밟고 조상왕님들이 기도를 드렸던 대웅전 아미타불에 무릎을 꿇었다. 그는 천년 묵은 부처님께 조상왕님들의 명복과 우리 겨레의 행운 그리고 집안 후손만대 행복을 빌고 또 빌었다.       덕돌은 기부함에 만원을 기부하고 기록부에 이름을 남겼다.       그는 토함산에 올라 신라 유명한 천년 묵은 에밀레종도 울려보고 석굴암에 들어가 2천년 묵은 돌부처한테도 똑 같은 례를 갖추었다. 부처님께 조상왕님들의 명복과 우리 겨레의 행운 그리고 집안 후손만대 행복을 빌고 또 빌었다.       덕돌은 기부금 만원을 석굴암에 드렸다. 적은 돈이지만 조상님들의 정신기둥에 자그마한 디딤돌이라도 되고 싶은 성의였다.      관리일군들은 석가모니 오시는 날에 련꽃등에 이름을 박아 천날기도를 드려주겠다고 하였다.       석굴암에서 불국사로 내려가는 등산길 수림 속에는 놀랍게도 파란 대나무가 마치 신라 대바른 기상을 자랑하듯 하늘을 찌르면서 꼿꼿이 서 있었다.      그는 점심에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신라 력사를 돌아보았다. 점심식사를 한 후 천년 신라를 통치한 미추 대왕과 내물 대왕을 비롯한 조상 대왕님들의 혼이 살아 숨 쉬는 경주의 고분-왕릉, 계림 수림 남쪽의 조상대왕 내물 대왕 왕릉도 일일이 찾아뵙고 큰 절을 올렸다.     산더미 같은 조상 대왕님들의 왕릉을 우러러 보는 순간 덕돌은 폐부에서 흘러나오는 격정을 즉흥시로 읊었다. 천년 신라의 으리으리한 금빛 왕궁은 어디로 가고 쓸쓸한 옛 산소만 적막한 허허벌판에 외롭게 남아 있는가요 천하를 호령하던 조상 임금들은 어디로 가시고 금빛 왕관과 갑옷만이 진토 속에 조용히 누워 있으시오 처량하게도 잡초 속에 비바람 속에 목 메여 애타게 조상임금들을 불러 봐도 옛 산소 잔디에서 들려오는 풀벌레들의 울음소리 내 가슴을 아프게 허벼요 너울너울 춤추던 궁녀들은 어디로 가고 나뭇가지에서 쓸쓸히 들려오는 참새들의 울음소리만 나를 울려요 그대들의 혼을 애타게 불러요 그만 쉬시고 어서 일어나세요 당신의 서자와 같은 이 선비후손 눈물이 넘치는 제주를 부어 드리옵니다 천년 신라의 찬란한 문화를 빛낸 조상 대왕님들을 하느님이 보우해 주세요 조상 대왕님들의 명복을 빌고 또 빕니다 그대들의 이 가난한 선비후손은 정녕 들립니다 불국사의 종소리 한가슴에 메아리칩니다 천하를 호령하던 대왕님들의 목소리 고전노래로 들립니다 선덕여왕님, 진덕여왕님, 진성여왕님의 치마소리에 방불히 보이는 것 같습니다 자애롭고 당당한 그대들의 용안이 마음속에 뿌리 내립니다 경주 땅에 살아 숨 쉬는 조상 왕님들의 얼과 혼이 한가슴 뿌듯이 벅 찹니다 천년 신라의 유연한 외교와 민주주의 기상이!       봄날씨가 어찌나 따뜻한지 경주 곳곳 옛 집 울안에 벚꽃이 활짝 피어 그윽한 향기를 풍기었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경주에는 감도 난다고 했다.      (용천 대장은 이렇게 좋은 고향에도 돌아오지 못하고 이국 타향에 묻혔구나. 모두다 동존상잔의 희생물이야. 쳇.)      그는 산더미 같은 내물왕 왕릉과 선덕여왕 대에 축조했다는 첨성대를 배경으로 저 멀리 바라보이는 옛집을 둘러보면서 이런 생각이 피뜩 들었다.      (혹시 저게 김용천 대장의 옛 고향집이 아닐까? 남조선 특무네 집? 용천과 경주가 고향에 돌아오지 못하고 장미련이 뭐가 돼서 아들 토함산을 데리고 한국 경주에 와? 용천대장의 유산을 상속한다면서? 대만으로 달아난 둘째오빠 장리국과 죽은 남편 경주 덕에 일약 갑부로 된 지주의 딸. 어허. 옛말이나 신화로군.) 덕돌은 토함산에 가서 천년 석굴암에 들어가 천년 돌부처님을 보고서야 용천이 아들 경주와 토함산의 이름에 담긴 깊은 사향의 철리를 알듯 했다.        덕돌은 조상들의 혼이 살아 있는 천년 신라 경주를 돌아보면서 가슴이 알알하게 사뭇 괴로워 났다.  천년 신라 사직을 하루 아침에 내놓고 이런 좋은 고향을 떠나 처자들과 신하들을 데리고 개경으로 올라가야만 했던 경순대왕 김부식 할어버지, 경순대왕의 마음이야 오죽했겠는가.       불현듯 만주에 남조선특무로 들어갔다가 정든 고향에 돌아오지도 못한 용천 대장이  유령처럼 떠올랐다.      덕돌은 머리를 가로 절레절레 저었다. 비극적인 동족상잔 전쟁으로 인해 죽어서도 돌아오지 못한 원혼이 비치지 않았을까?      돌이켜보면 신라 말대왕 경순대왕을 비롯한 조상들은 천년이나 살던 이 고향을 등지고 핍박에 의해 개경에 올라가야 했다. 나라가 망해 고려 시조 왕건한테 천년을 대를 이어온 신라왕국을 내주고 처자들을 거느리고 개경으로 떠나갈 때 얼마나 고통스러웠겠는가. 조상대왕들께 얼마나 죄송했겠는가. 또 이 씨 조선 세조왕 대에 려생 할아버지는 단종 왕을 보호하다가 세조왕에게 쫓기어 입북해 함경도 명천군 골 안에 들어가 감자농사를 지으면서 숨어 살아야 했다. 일제 때 병완 증조부와 김기준 조부, 아버지 상순은 일본 놈들의 등살에 배기지 못해 눈보라 휘몰아치는 엄동설한에 정든 함경도 명천군 고향 마을을 떠나 두만강을 넘어 만주로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되였다.        시조 알지님으로부터 김려생 할아버지, 아버지 김상순 대까지 2천여년 역사를 돌이켜보면 경주로부터 개경(개성)으로, 한양(서울)으로, 명천군으로, 만주 함흥촌까지 고향을 이별한 발자욱마다 망향의 피눈물이 고여 있지 않겠는가. 고향을 떠난 천년비극의 사연과 함께 새 고향을 건설한 개척의 역사가 깃들어 있지 않는가!       덕돌은 착잡한 생각에 잠긴 채 한국을 떠나기 전에 또 한국 경기도 장단 군에 가서 신라 마지막  대왕 경순대왕 조상임의 왕릉도 찾아보았다. 3.8선 경비초소와도 아주 가까와 민통선(민간인통제구역)에서 한국 군인들이 총가목을 부여잡고 길목을 지키고 있었다. 종친회 인사들이 한참 해석해서야 덕돌 일행은 장단군 동북쪽에 있는 성거산에 달려갔다. 장단 고부에서 남쪽으로 한 8리 좌우 떨어진 지점에 왕릉이 모셔져 있었다.       릉이 계시는 곳은 38선 부근에서 유유히 감돌아흐르는 림진강을 끼고 우뚝 솟은 성거산(圣居山)의 한 주령이 서남으로 뻗어내려온 자리, 명당이였다. 이북 개성(고려 수도 개경)에서 그리 멀지 않은 성거산의 아늑한  기슭에 향기로운 꽃내음 속에 룡이 하늘로 승천하는 형국으로 발좌정향이였다. 둘러보니  하늘의 기운이 마치 밀물파도가 밀려오는듯 하고 주위의 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싸여 있었다. 릉은 활짝 핀 련꽃을 연상케 하였고 황금알을 품은 격이 아니겠는가. 성가산에는 마치 룡호가 교태하는듯이 살아 꿈틀거리는 모습이 떠오른 상 싶었다. 참말로 아늑한 명당이였다.        조상대왕님- 김부 경순대왕 왕릉을 보는 순간 덕돌은 눈앞을 가릴 수 없이 눈물을 줄줄 흘렸다. 덕돌은 중국에 있는 경주 김씨 종친들의 마음을 담아 어깨를 들먹이며 제주를 부어 올리고 나서 큰절을 아홉 번 올렸다. 경순 대왕임은 싯누런 족보에서도 제일 마지막 왕으로 명함을 찾아 볼 수 있던 조상 할아버지가 아닌가.        (난 경순대왕 김부할아버지 32세손이 아닌가. 아흐야. 슬프도다.)        덕돌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경순 대왕님은 나라를 두 손으로 왕건에게 바치고 조상대왕님들을 볼 면목이 없어 경주에 돌아가 묻힐 엄두도 내지 않고 여기 산골에 조용히 묻히기를 바랐을 거야.        고려조 제3대 왕은 김부 경순대왕의 외손자였다. 그는 외할아버지, 신라 말대왕 김부 경순대왕을 고인의유언대로 이 곳에 대왕의 례로 후하게 장례를 지내주었다.        1910년 한일합방 후 왜놈들의 철발굽 아래에서 나라를 빼앗기고 경순대왕의 묘비마저 잃어졌다. 후손들도 뿔뿔히 흩어지고 왕릉을 감히 지키는 사람도 없었다.        1973년 한국 륙군 려길도 대위가 38선 부근을 순라하다가 비물에 씻겨 드러난 경순 대왕의 엄청 큰 묘비와 지석을 발견하였다. 그후부터 대한 경주김씨대종친회의 주최하에 수많은 종친후손들이 해마다 청명과 추석이면 이 왕릉에 찾아와서 대제례를 지낸다고 하였다.   그때면  하얀 한복을 입은 경순 대왕 김부 할아버님의 후손 경주 김씨들 수만명이 성가산 서남쪽  기슭에 자리 잡은 산소 주위를 새하얗게 뒤덮을 지경이라고 한다.       뉘엿뉘엿 지는 해를 보고 덕돌은 엉거주춤 일어나 저녁 낙조를 밟으며 귀로에 올랐다. 해마다 찾아뵙지 못할 산골에 묻힌 조상 대왕임의 산소를 떠나는 덕돌의 발걸음은 무겁기만 했다.      드디어 조상의 뼈와 살이 묻힌 한국을 떠나야만 하는 날이 다가왔다.      인천 국제공항 출입국 사무일군이 독돌의 려권을 들추보면서 째려보는 눈길로 치켜보면서 영어로 물었다.      "what's your name(이름은 뭔가요)?"     "My name is derk doll kim.(저의 이름은 덕돌입니다.)"      "What's your job?(당신의 직업은 무엇인가요?)"      덕돌은 영어로 심문하는 듯한 안경쟁이가 얄미웠다. 그래서 그 다음부터 조선말로 대답했다.     "나는 기자입니다.(I'm a journalist(Reporter)."  안경쟁이는 흘끔 치떠보며 또 물었다.       "Which Soul hotel are you staying in? (서울 어느 호텔에 투숙했는가요?)"       "...서울 햇빛호텔에 들었어요(I stay in Soul's sunshine hotel) ."       그자는 안경 넘어 덕돌을 째려보면서 두덜거렸다.       "영어 a lttle(좀) 아는 같구먼. 왜 영어로 답하지 않지?'      덕돌은 스트레스를 주는 안경쟁이가 슬그머니 괘씸해 화를 버럭 냈다.      "누가 할 말을 누가 하는가요? 왜 좋은 한국말 두고 몰상식하게 영어로 물어보는가요? 당신도 한국인인가?!"      그제야 그 자는 도장을 쾅 찍어 내보냈다.       번마다 한국에 출입국할 때면 출입국 일꾼들이 까다롭게 굴었다. 자기 조상들 나라에도 마음대로 드나들게 하지 못하였다. 지난 세기, 그때만 해도 한국에 입국하려면 도망간다고 가옥소유증과 돈 몇만원을 차압당해야 했다. 어데 가나 한국 인들은 중국에 사는 조선족들을 깔보고 천시하고 업신여겼다. 진짜 서자 대접하였다. 조상들의 고향에서 소외감, 그것이 서러웠다.       해외에서도 한국 인들은 처처에서 조선족들을 업신여겼다. 한국이 조금 조선인들보다 더 잘 사는 것 같아 으시대는거였다.        덕돌이 일본 오사까에 갔을 때였다. 덕돌이네 부부는 일본 인이 차린 호텔보다 그래도 동포니깐 한국 인이 차린 호텔이 나으리라고 여겨 한국 인이 차린 호텔에 투숙하게 됐다. 그런데 카운터의 아가씨는 분명 한국 인이 돼가지고서도 일어도 아니고 영어로 종알거리면서 려권이랑 이것 저것 요구했다. 덕돌은 처음엔 한국인이 차린 호텔에 온다는 것이 잘못 오지 않았는가 미심해 일어로 말했다. "분명 동양인인데 왜 일어로 말하지 않고 영어로 물어요?" 그래도 아가씨는덕돌을 할끔 치켜보더니 "일어 알아듣지 못해요." 하고 계속 영어로 물어댔다.       덕돌 부부를 째려보는 그 표정, 아주 얕잡아보는 못난 얼굴. 덕돌은 영어를 좀 알아서 겨우 투숙수속을 하고 호텔방 열쇠를 가지고서야 한숨이 후 나왔다.      이튿날 희극이 벌어졌다. 중국 한족관광단도 그 호텔에 투숙했다가 떠나가게 됐다. 카운터 그 아가씨가 바빠맞아 관광뻐스께로 뛰어나왔다. 중국 관광단 가이드가 어디로 갔는지 몰라 허둥지둥 찾아헤맸다.  "가이드 어데 갔어요. 결산도 채하지 않고 어데 갔단 말인가요?" 그 아가씨가 한어를 몰라 일어로 뭐라고 떠들었지만 중국관광객 속에는 일어를 아는 이가 없어 모두 멍해 앉아 있었다.      바빠맞은 그 아가씨는 덕돌을 보고 한국어로 사정했다.      "오빠, 도와주세요. 이 중국인관광단에서 호텔비도 채 결산하지 않은 부분 있어요. 가이드 어데 갔는지 중국(한족) 손님들과 알아봐주겠어요? " "한국 인이구만. 어젠 한국말도 일어도 알아듣지 못하더니 갑자기 한국 말도 아주 잘하네요." 그러자 그 아가씨는 얼굴을 붉히면서 머리를 숙였다. 덕돌은 전날 아가씨 행위는 괘씸했지만 중국 손님들과 가이드 전화 번호 물어서 그 아가씨한테 알려주었다.      "아가씨, 우린 다 같은 피 흐르는 한국 동포인데요. 언제 어디서나 서로 도우면서 살아야지. 몰상식하게 남을 깔보고 시기해선 안돼요."      그 아가씨는 창피해 감사하다는 인사말도 못 남기고 도망치듯 호텔로 뛰어갔다.      어찌 그 아가씨만 나무람하겠는가. 우리 세상에는 이런 아가씨들, 안경쟁이들이 많으니깐. 다 동포애란 하나도 없는 랭혈인간들이 아닌가. 우리 민족은 총명하고 슬기롭고 용감하지만 단합되지 못하고 항상 모래알처럼 산산히 흩어지는 것이 큰 흠이 아닌가.        (야, 이 놈들아, 난 조선반도를 천년이나 통치한 신라 대왕님들 당당한 후손이야. 옛날 우리 조상대왕님들 언저리에도 얼씬하지 못 하던 놈들 후손, 옛날 우리 조상왕님들 왕궁 헛간이나 지켰는지도 모를 놈의 후손놈들, 네놈 따위들이 다 뭐냐? 괘씸한 것들! "        덕돌은 비행기에 올라 스스로 위안하였지만 소용없었다. 어쩐지 한국 사람들의 째려보는 눈길, 업신여기는 눈길, 그 곱지 않은 눈길이 자꾸 섭섭해 가슴이 알알해났다. 조상들의 뼈와 령혼이 묻힌 고국에서 받은 소외감이 심장을 파고 들어 헐어먹고 있었다. 진짜 심부전에 걸렸을 때보다도 더 아파났다.       조상들의 고향이 촘촘히 들어앉은 한국 땅을 둘러보는 순간 덕돌은 코마루가 시큼해나며 어깨를 조용히 들먹였다.        (아, 나는 떠나야만 했다. 조상의 뼈와 살이 묻힌 고국을 끝내 떠나야 했다. 어째 자기 고국을 떠나야만 하나? 조상님들께 미안하지 않게 뭔가 하려고 돌아가야만 하는게 아닌가? 아, 이제 가면 또 언제 고국 땅을 밟아 볼까?)        비행기에 앉아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솜뭉치 같은 구름 위로 날면서 덕돌은 조상의 얼과 혼이 살아 숨 쉬는 한반도를 다시 내려다보았다.       홀연 금궤에서 나오신 알지 시조님, 미추왕, 내물왕과 고구려와 백제, 신라를 통일한 태종무열왕 김춘추 대왕님과 문무대왕의 늠름한 용안, 평화를 사랑하고 유연한 민주주의 기상을 떨치고 백성들을 위해 천년 사직을 내놓은 경순대왕 김부 대왕님, 충신 김려생 할아버지의 충혼이 푸른 하늘에 나타났다. 이상하게도 그이들의 빛나는 령혼은 하나의 거대한 갈무리로 두둥실 떠올랐다. 드디여 그들의 거대한 왕혼이  밝은 거울로 돼 온 누리를 밝게 비추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 밝은 거대한 거울로 한반도를 비춰보니 서글프기 그지없었다. 두 조각 난 한반도는 깨어진 거울 같지 않겠는가! 하늘에서도 쟁그랑 댕그랑, 옥신각신 헐뜯고 야단치지 않겠는가? 조상들이 남겨준 거울이  두 토막 났건만 이제도 너야, 내야 옥신각신 싸우다나면 이제도 몇으로 더 깨질지 누가 알겠는가!      그 깨진 두 쪼각 거울로 자기 얼굴을, 아니, 우리 모두의 얼굴을 비춰보니 험상궂고 엉망진창이 된 두 쪼각 얼굴로 보였다. 그 깨어진 거울 같은 한반도가 가슴 아팠고 깨어진 모두의 얼굴이 안타까웠다.        덕돌은 그 깨어진 거울로 한국에서 서자 대접을 받은 가난한 선비 얼굴을 비춰 보니 더구나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이 모든 것을 어찌 덕돌이 한 사람의 비극이라고만 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우리 지구촌 8천만 겨레의 력사 비극이 아닌가!       덕돌은 그새 꿈만 같이 조선 회령에 네 번이나 나가 하나 밖에 없는 사촌형님 김동선을 만났다. 아버지와 어머니 생전에 형님을 만났더라면 얼마나 좋았으랴?        상순은 사망하기 전 일주일전에도 하나 밖에 없는 조카를 외우면서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어째 오지 못한다니? 조선에 나가 형을 만나봐라.”라고 하며        아버지 생전의 유언대로 덕돌은 사촌누나 순애와 함께 숱한 식품과 옷, 가전제품 등을 한 자동차 꽉 박아 싣고 회룡에 나갔다.      옛날 아버지와 조상들이 망국노 설음을 안고 쪽박 차고 피눈물 흘리면서 건느던 두만강, 그 피눈물의 두만강을 넘으면서 덕돌은 콧마루가 시큼해났다. 그가 어찌 두만강다리를 어찌 무심히 건늘 수 있겠는가.      두만강 저쪽에서 흰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사촌형님 동선이 손 저으며 마주 나오고 있었다. 다섯살에 헤여진 사촌형님이었다. 예순 고개를 넘은 동선 형님을 처음 만나는 순간 서로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굳게 굳게 포옹했다. 조카 성국이, 성일이, 성춘이 그리고 여조카 애숙과 애화를 처음 보는 순간 덕돌은 희구해 입을 다물지 못했다.      동선은 벌써 등마저 휘고 파뿌리노인으로 됐었다. 그는 삼촌 생전에 찾아뵙지 못해 죄송하다고 연이어 말했다. 너무 짧고 짧은 사흘 상봉 기간에 동선은 덕돌에게 고향에 있는 형제들과 마을 사람들의 형편을 자꾸 물어보았다.       “집안 집 조카 성욱이랑 잘 있느냐?”      동선은 고향 마을의 형편도 자꾸 물어보면서 고향을 몹시 그리는 것이었다.      그들은 금방 상봉의 기쁨을 채 누리기도 전에 사흘 만에 그 백여년 서린 한도 많은 두만강 다리에서 석별의 정을 나누어야만 했다. 옛날 조상들이 피눈물을 휘뿌리며 부모형제와 이별하던 그 피눈물로 얼룩진 두만강다리에서 혈육의 이별, 아, 그 이별은 눈물의 바다였다.     (이제 갈라지면 언제 다시 만날가?)     덕돌은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두만강다리 이쪽에 건너와서도  두만강다리 저쪽에서 손을 젓고 있을 파뿌리형님과 조카들 쪽에 자꾸 눈길을 보내면서 눈물을 훔치였다. 다만 사정없는 두만강 흙탕물이 두만강다리 교각을 처절썩처절썩 무정하게 치며 구슬프게 통곡치는 소리가 애처롭게 들릴뿐이었다.      덕돌은 몇 천원 먹여 1미터 반도 넘는 용과 봉황 쌍기둥을 세운 육중한 기념비를 세운 조상들과 부모님 산소, 그들의 고향의 흙과 돌을 얹어드린 산소들을 바라보면서 한국과 조선에 갔다 온 얘기를 죽 해드렸다. 딱 마치 살아계시는 조상님들과 부모님에게 회보하듯이 하나도 빠짐없이 쭉 말씀 드렸다.       덕돌은 부모님 생전에 다하지 못한 효성의 빈 구석을 너무나도 많이 발견하고 아픈 마음을 달랠 길 없었다.       그는 속으로 부르짖었다.       (이제 불효자식이 부모님 계신 구천에 가게 되면 다시는 불효를 저지르지 않고 영원히 부모님 옆에서 조석으로 효성을 다해 모셔드리렵니다. 아, 정말로 부모님께 불효를 저지른 빈 구석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그 효성의 빈 구석을 다 채울 길도 기회도 이젠 없습니다. 이 불효자식은 그저 효성을 다하지 못한 빈 구석을 돌아보면서 후회에 후회를 거듭하면서 안타깝고 쓸쓸하기만 합니다. 세상에 후회약이 있다면 후회로 만리장성이라도 쌓으련만.)        덕돌은 부모의 산소를 끌어안고 어린애처럼 엉엉 대성통곡을 쳤다. 부모와 조상들도 산소 속에서 나와 함께 흐느껴 우는 상 싶었다.       부모님의  고향 산천과 조상들의 산소를 바라보는 순간 마치 조상들의 넋이 맑은 하늘에 솟아오르더니 그리운 고향 산천으로 훨훨 날아가는 상 싶었다.      조상들의 산소에 얹어준 조상들의 고향 산천의 흙과 돌에는 고향 산천에 대한 조상들의 향토애와 우리 민족의 피눈물 나는 이민의 역사이야기가 깃들어 있다. 고향 산천에 대한 조상들의 절절한 그리움과 망향의 서러움이 서려 있고 일제 식민지통치하에서도 길가의 잔디처럼 그 어떤 폭압에도 끈질기고 억세게 살아온 우리 민족의 넋이 살아 숨 쉰다. 고향의 흙과 돌에는 조상들 생전에 고향의 산천을 구경시키지도 못한 불효자들의 후회의 눈물과 한이 배어 있다.      아, 고향의 흙과 돌을 산소에 얹어드려 조상들 망향의 혼을 위로해 드릴 수만 있다면 조상들 고향의 칠보산이라도 옮겨다 얹어드리리다. 아니, 조상들의 고향 산천을 몽땅 옮겨다 산소에 얹어 드리련만.      덕돌은 조상들의 산소를 모신 산등성이에서 고향 사람들이 대대로 한뉘 고생하면서 건설한 고향 마을과 피땀을 몰 부어 개간한 황무지 밭을 돌아보면서 한 숨을 길게 내쉬며 착잡한 생각에 잠겼다.      이 땅을 개척하고 이 땅을 지키기 위해 피땀을 흘린 병완 증조부와 기준 조부, 아버지 상순과 어머니 명옥을 비롯한 우리 민족의 조상들과 부모들은 모두 고향을 떠나 북망산에 갔다. 그들은 북망산에서도 고향의 변화를 지켜보고 있으며 고향을 지키고 있다.      고향 마을에는 태평강 모래톱에서 물도랑을 파고 흐르는 강물에 물레방아를 돌리며 놀던 동림과 성욱도 순녀도 없다. 버들방축에서 버들모자와 꽃다발을 쓰고 숨박곡질을 놀던 순희, 연애쪽지를 받고 당황해하던 누룽지 친구 은숙도 보이지 않는다. 달밤에 꽃 담배쌈지를 주던 조영희 등 집체호 처녀 조영희도 자취를 감추어버렸다.       다만 정신이 좋지 못한 해월이 관내 어느 절당에 갔다가 함흥촌에 되돌아와 충국과 살아서 낳은 아들과 함께 살고 있다. 그녀는 충국의 아들 덕분에 미련과 함께 학교 자리 널찍한 집에 들어 호광을 누리며 살고 있었다.      해월은 청명이거나 추석이면 고향으로 돌아와 덕돌의 할아버지 산소 옆에 있는 부모 흥수와 춘실을 합장한 묘지에 찾아와서 절을 했다.      그는 산마루에 있는 산소 앞에서 덕돌을 만나기만 얘기타령이다.        “세상에 사내들은 다 색마야. 이 놈의 세상을 떠나 절에 갔더니 어쩌는지 아니? 살생하지 않고 간통을 하지 않는다던 중들이 밤이면 어찌나 달려드는지 내 혼자 몸으로 배겨내기 힘들더라. 중들도 고기 맛을 보면 빈대도 잡아먹는다더니 여자 맛을 들이니 세간의 사내들보다 더 색마더라. 내 하마터면 숱한 중들에게 깔리어 세 쌍둥이를 낳을 번했다.”       분향하러 온 숱한 사람들이 듣고 웃는 데도 해월은 계속 자랑 삼아 구렁이가 나가는지 뱀이 나가는지도 모르고 잔뜩 늘여놓았다.      “절에서 애비 누군지도 모르는 애를 세 쌍둥이나 낳을 번했어. 아무튼 중들의 애겠지. 유산한 게 다행이다. 야, 야! 호호호!”      해월은 손으로 낯을 가리며 웃고 떠들었다.      “그래서 절에서 겨우 빠져 나와 마을로 달아났다. 그래도 내 고향이 제일이야. 언제 저렇게 큰 집을 쓰고 살리라 꿈에나 생각했겠니? 다행히 충국에게 몸을 맡긴 덕분이지. 팔자를 고쳤다. 내 팔자 상팔자지? 호호호.”       덕돌은 허무한 웃음만 나갔다.       고향에 아무리 뻘건 벽돌집이 들어앉은들 무슨 소용이 있는가! 조선족들이 살 둥지가 다 허물어지고 흩어지고 있지 않는가. 후대들이 고향을 버리고 다 떠나가 버렸는데. 고향 사람들이 돌아오자고 해도 돌아와 살 집과 터전마저 없어졌다. 지괴호랑 조선족들이 살던 집을 다 헐어버리고 토성을 높이 쌓고 살고 있다.       아들 운선도 대학을 졸업하고 머나먼 상해로 가버렸다. 다행히 한족 곳에 가서도 조선족색시 정하나를 만난 것이다. 그 애들의 자손들은 조선족학교도 없는 한족 곳에서 조선어를 배우기 힘든데 조선족처럼 살 수 있을까? 이제 내가 죽으면 조상들의 산소를 누가 지킬까? 그 애들이 비행기를 타고 성묘를 하러 올 수야 없지 않는가?      덕돌은 고향 마을을 내려다보면서 퇴직하면 고향 마을 조개덕에 지괴호랑 보란듯이 조선 옛 목조팔간 집을 덩실하게 짓고 살고 싶었다. 마당에 절반은 남새를 심어 먹고 절반은 갖가지 꽃을 심어 놓으면 꽃향기가 그윽해 얼마나 좋을까! 무더운 여름이면 팔간 집 널마루에 앉아 동네 노인들과 장기를 두거나 책을 보면 얼마나 좋으랴. 널마루에서 목침을 베고 척 들어누워 고향의 시원한 공기를 한껏 마시면서 낮잠을 잔다면 얼마나 황홀하고 낭만적이랴!       그러나 지괴호와 말해 보니 한 평방에 천금을 준다고 해도 집터를 손바닥만큼도 팔 수 없다고 지껄였다.      (개자식!)      그는 어처구니없어 쓸쓸한 고향 마을에서 눈길을 떼 조상들의 산소에 돌리더니 천천히 머리를 숙였다.       순간 덕돌은 저도 몰래 두 어깨가 무거워나는 감을 느끼면서 코마루가 시큼해났다. 그는 말 못할 민족의 사명감과 의무감을 뼈저리게 느끼면서 조상들의 산소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대성통곡 쳤다…      아, 고향이여, 우리 민족의 조상들이여!                                (끝)                                                                                                                           2013년 1월 31일                                                                                        
162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119) 댓글:  조회:1844  추천:2  2018-08-21
                                     8. 그리운 고향 산천 덕돌은 두부모만한 공연 자료라도 쓴데다가 성환 형님이 힘써 준 덕에 문화관으로부터 다시 신문사로 옮겨갔다. 지방기관지는 아니지만 소보 치고는 그래도 영향력이 있었다. 어려서부터 교원사업을 하면서도 계속 보도기사를 썼기에 그는 인차 신문사 기자 생활과 업무에 적응됐다. 그는 요즘 아버지가 자꾸 편찮아서 돼지고기랑 소고기랑 물고기랑 남새랑 한 꾸럭 사서 자전거에 달고 집으로 달려가지 않으면 안 됐다. 그는 부모를 잘 모시자고 일본으로 유학을 가려던 이상도 꺾고 세상에 얽매여 살았는데 기자로 되려는 이상은 실현했지만 부모도 제대로 모시지 못해 속이 적이 걸렸다. 덕돌은 집에 가서 아버지의 더부룩한 수염을 빡빡 말끔히 깎아드렸다. 그때 상순은 고향 명천을 자꾸 외웠다. “우리 고향 명천에는 바위도 많고 수림도 많았지. 수무살 때 네 어미와 함께 고향에 갔을 때 우리 살던 고향마을 운주동은 없어지고 수림이 무성하더라. 일본 놈들 때 소잔등 같은 바위 돌 틈에 재를 펴놓고 구멍을 내 보리라도 심어 먹던 돌밭에마저 나무를 심으라고 강박했지. 그래서 우린 17대 채 대대로 태를 묻어온 정든 고향을 떠나 풍설이 이는 날에 가마를 빼 메고 누더기를 보에 싸 이고 지고 두만강을 건너 이 만주로 왔다. 공산당 덕분에 이 땅에서 황무지를 개간해 밭을 만들고 밥을 배불리 먹고 살게 됐다. 지금도 눈을 스르르 감으면 고향 마을 뒷산에 그 바위돌이 들어 누운 돌밭이 생각나고 선산에 묻힌 조상들의 산소가 삼삼히 떠오른다. 내 약 담배 장사를 할 때 울고 넘던 고향 명천의 박달령 고개 길이 보이는듯하고 강도들과 싸우던 수림도 보이는 듯하구나. 구름이 흐르는 박달령이랑 치마봉이랑 기운봉이랑 장군봉이랑 눈앞에 선하다." "지금 조선에서는 명천의 그 산을 칠보산이라고 부른답디다." 덕돌의 말에 상순은 한숨을 땅이 꺼지에 내쉬었다. "그러데?  이젠 육신을 쓰지 못하게 됐으니 고향으로 다 돌아갔구나. 이전에 삼도만 토비를 숙청하는 전투 때만 해도 난 스물여섯 살이랬지. 그때만 해도 기관총에 쌀과 이불 짐 해서 백 근도 넘어 지고 메고서도 한 미터 넘는 전호를 훌쩍훌쩍 뛰어 넘었지. 세월이라는 게 무섭구나.” 덕돌은 눈물을 주르르 흘리는 아버지를 보면서 위안해 드렸다. “아버지, 이제 병을 잘 치료한 후 병마를 훌훌 털고 일어나십시오. 그때 꼭 저와 함께 고향에 돌아가 봅시다. 명천 고향 해변 가에 가서 고향의 명태도 구워 자시고 미역국도 끓여 잡숩시다. 치마봉과 기운봉도 구경합시다.” “고향 문이 열리지 않았는데 갈 수 있겠니? 소문에 라진하구 선봉, 칠보산에는 갈수 있다더구나. 아마 옛날의 웅진이 아니겠는지 모르겠다.” 그때 명옥도 고향을 그리며 말했다. “우리 고향에는 이전에 운주하 강변 버드나무 숲속에 버들버섯과 딸기가 많았다. 비 온 뒤면 나와 작은고모 계순이랑 할머니를 따라 나가서 버드나무 밑에 새하얗게 돋아난 버들버섯을 캐왔지. 버드나무 숲에는 또 빨간 딸기가 다닥다닥 열렸지. 우린 배고플 때 강변에 가서 딸기를 뜯어먹고 기운봉 기슭에 가서 바위 돌에서 돌버섯도 칼로 긁어내고 도토리랑 뜯어 가져다 먹었지.” 명옥은 원래 말을 참 구수하게 해 운선과 명숙도 귀가 솔깃해 들었다. “우리 고향 해변 가에는 항상 집채 같은 파도가 하얀 백사장을 툭 치고 나가군 했지. 우린 할머니를 따라 해변 가에 가서 모래에 깊숙한 구덩이를 파놓고 기다렸다. 파도가 치면서 바닷물이 덮쳐 왔다가 나갈 때 어떤 고등어는 물구덩이에서 미처 바다로 빠져나가지 못해 모래구덩이에서 펄떡펄떡 뛰지. 그때 우린 구덩이에서 고등어나 명태를 붙잡아 불을 피워놓고 구워 먹었지. 우리 명천 바다에는 물고기가 많았지. 명태의 고향이라니깐. 옛날 명천의 한 어부가 물고기를 잡아서 왕궁에 바쳤단다. 임금은 그 고기를 어찌나 맛있게 먹었는지 명천에서 난 그 물고기를 명태란 이름을 지어주었단다.” “오~ 그럼 명태는 아버지와 엄마 고향 명천의 특산물이구먼.” “그래. 명태를 먹을 때면 우린 고향 생각을 하군 한다.” 덕돌은 아버지가 자꾸 고향을 외우는 것을 보고 별로 쓸쓸한 예감이 들었다. 가고 싶어도 가 볼 수 없는 고향에 대한 아버지의 깊고 깊은 향토애는 덕돌을 안타깝고 서글프게 만들기만 했다. 그는 명숙과 토론하고 그날로 아버지와 어머니를 자기 새 집으로 모셔 가 치료하기로 했다. 명숙은 전화로 이모사촌동생 경철을 불러 자동차를 몰고 함흥 촌에 달려왔다. 그녀는 남편과 함께 시아버지를 자동차에 모시고 시내로 달려갔다. 장대 같은 소낙비가 억수로 쏟아졌다. 그래도 그들의 효성의 앞길은 막지 못했다. 운전석 뒷좌석에서 혼미가 온 아버지를 부축하는 덕돌은 어깨를 들먹이며 흐느껴 울었다. (어쩜 그렇게 날래고 힘도 세던 아버지가 이런 몹쓸 병에 걸렸단 말인가?) 상순을 모셔간 그날부터 하나 밖에 없는 아들과 며느리는 정성을 다해 아버지와 어머니를 새로 든 벽돌집 윗방에 모시고 살뜰히 보살피고 효성을 다해 모시였다. 명숙은 병원에 출근하면서 용하다는 교수와 말하고 좋다는 약을 여러 가지를 탄 링겔주사를 시아버지께 놓아드렸다. 덕돌은 신문사에 출근했다가도 중간에 집에 돌아와 아버지 대소변을 받아내고 명숙을 도와 똥 묻은 빨래를 씻었다. 후에는 세탁기를 사서 씻으니 훨씬 편리했다. 상순은 한 달 동안 며느리의 지극정성으로 치료한 덕에 다시 정신을 차리고 좀 걸을 수 있게 됐다. 그러자 함흥 촌으로 돌아가겠다고 고집했다. 덕돌과 명숙은 이구동성으로 “이젠 일신을 쓰기 불편한데 윗방에 계십시오. 우리한테도 효성을 할 기회를 주십시오.”라고 했다. 허나 상순은 기어이 함흥촌으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아버지, 고향 인심이 그렇게 각박한데 뭘 보고 돌아가렵니까?” “그러니까 내가 더욱 돌아가야 한다. 난 죽어서라도 우리 증조할아버지와 할아버지, 아버지가 개척한 우리 두번째 고향을 지키련다. 난 일곱 살에 고향을 떠나 두만강을 건너 와서 60여년을 함흥 촌을 개척해왔다. 내 한뉘 피땀이 고인 함흥 촌을 두고 시내에 와서 뭘 한단 말이냐?” 덕돌은 그래도 아버지를 말렸다. “아버지 심정은 이해됩니다. 그럼 여기 사시다가도 함흥촌이 보고 싶을 때 드문드문 모시고 가면 안 되겠습니까?” “건 달라. 난 내 눈으로 날마다 변해가고 있는 마을을 지켜 볼 것이다. 비뚤어진 시비와 삭막해가는 인심을 바로 잡고 싶다. 덕돌아, 부탁할 게 있다.” “뭔데요?” 상순은 아주 흥분돼 있었다. “네가 날 함흥 촌에 데려다 달라. 함흥촌에 가서 말해주마.” 상순은 며느리 이모사촌오빠 현철이 모는 찌프에 앉아 함흥 촌으로 가면서 덕돌에게 물었다. “조선에 나간 동선은 어째 오지 못한다니? 그 애들이 오지 못하면 네라도 가보아라. 살기 힘들다는데 좀 도와주렴.” 아버지의 눈귀에 이슬이 맺힌 것을 보고 덕돌은 아버지가 조카를 그리는 진한 그리움을 읽었다. “아버지, 이제 한번 회룡에 나가 형님을 만나 보겠습니다.” “그래, 참말 장하다. 하나밖에 남지 않은 조카야. 내 이 세상에 없어도 너희들은 영원히 친형제처럼 보내야 한다. 물론 국경선이 가로 막혀 불편할지라도 혈육의 정이야 어찌 잊을 수 있느냐?” “예. 명심하겠습니다.” 덕돌은 자기 집에 부모를 모시지 못하고 시골 고향 마을에 보내는 것에 마음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더구나 멀지 않은 앞날에도 조카를 생각하는 마음이 너무나도 눈물겨웠다. 고향 마을에 들어서자 덕돌의 마음은 더욱더 비길 데 없이 아려났다. 옛날 담배창고 자리에 30평방미터 되나마나하게 막은 칸에 둘째 매형 경만과 함께 구들을 놓은 초가집에 부모를 모시고 간 아들과 며느리는 마을 사람들을 볼 면목이 없었다. 그때 병진이 우멍눈을 흘기었다. “허허허. 아들이 대학을 졸업해도 초가집 신세를 면하지 못하는구먼. 우리 아들은 나를 벽돌집에 모시는데.” 그러자 철주도 저 아비와 맞장구를 쳤다. “대학을 졸업시켜 뭘 하오? 농부보다도 부모를 잘 모시지 못하는데. 허허허.” 허나 덕돌은 못 들은 척 할 수밖에 없었다. 놀라운 것은 담배창고자리 앞마당까지 지괴호가 돌담과 벽돌담을 두 키도 넘게 쌓고 있는 것이었다. 덕돌은 창고자리 벽을 바르면서 지괴호를 보고 물었다. "넌 패용천마을에서 살면서 우리 마을에다 왜 토성을 쌓니?”  지괴호는 커다란 돌로 담 기초를 쌓으면서 코웃음을 칠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때 상순이 덕돌을 데리고 집으로 들어가 말했다. “듣는 말에 의하면 이전에 경주랑 함께 달아난 장리국이 끝내 대만으로 달아났단다. 그 놈 새끼는 대만에 가서 한자리 하는 모양이더라. 장리국은 지괴호에게 돈을 엄청 보내 우리 마을을 몽땅 사라고 했단다. 게다가 지학사네 일본 첩년 야마꼬라던가. 그 일본 첩년이 낳은 지학사의 배다른 아들이 제 에미 부탁대로 지괴호를 형이라고 숱한 일본 돈을 부쳐보냈단다.저걸 봐라. 지괴호는 그 돈으로 우리 마을 조선족들 집을 사서 허물고 새 지주 울안을 만들고 있단다. 토성 안 대대 사무실 자리도 사서 딱 옛날 토성대로 올리 쌓고 토성안집에 들어가 우릴 보란듯이 산단다. 고의로 대대 사무실을 빼앗아내고 뭐라는지 아니? 대대 사무실은 원래 옛날 자기 아버지가 함흥촌 촌장을 할 때 들었던 집이란다. 그래서 기어이 사서 찾아 자기가 들어 산다고 한다. 이게 돈으로 복벽하는 게 아니고 뭐냐? 그 뿐인줄 아니? 저 지괴호는 고의로 이 마을에 기어들어 조선족들이 살던 집을 하나, 하나 사서 허물고 저렇게 커다란 토성을 쌓고 있다.” 상순은 격분해 숨을 바삐 몰아쉬다가 숨을 돌려 다시 뒤말을 이었다. “장미련은 더 한심하다. 대만으로 달아난 장리국이 보낸 돈으로 함흥중학교 자리를 사서 너네 공부하던 숱한 교실에 돼지와 소를 기르고 있다. 이제 토함산이 용천의 종가집 유산을 계승하는 날이면 미련은 우리 마을을 통째로 사자고 하지 않겠는지 모른다. 미련은 재산상속을 하려고 토함산을 데리고 요즘 한국으로 갔다. 듣는 말에 의하면 용천 대장의 동생이 있는데 아들이 없어 유산을 대부분 토함산에게 주겠다고 한단다. 그래서 미련은 용천이네 경주 김씨 종친회로부터 초청장을 받아 토함산을 데리고 한국으로 갔다. 옛날 지주네 자제들은 목적 있고 의도 있게 우리 조선족 마을과 학교를 점령하고 있다. 이전에 계급투쟁을 할 때 얻어맞은 원한을 내놓고 풀지 못하니 돈으로 우리 마을 땅과 집을 사들이는 걸로 보복하고 있다. 얼마나 격분할 일이냐?” 덕돌은 그저 개탄만 할 수 밖에 없었다. “쳇, 일본 놈들이 2차 대전 때 전투기로 싸워서는 하와이를 점령하지 못하고 돈으로 사서 4분의 3이나 점령했다더니. 심통하구먼. 진짜 그 놈들이 옛날의 꿈을 꾸고 있구먼. 쯧쯧쯧.” 이튿날 상순은 힘을 내 겨우 걸으면서도 낫을 찾아들고 덕돌에게 삽을 메워 데리고 뒷산 쪽으로 갔다. 덕돌은 아버지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조상들의 산소로 간다는 것을 짐작했다. 상순은 맥이 없고 숨이 차 별로 가파르지도 않은 뒷산을 몇 번이고 쉬면서 올라갔다. 옆에서 덕돌이 부축해서야 겨우 뒷산에 오른 상순은 한숨을 후 내쉬면서 산 아래 함흥 촌을 둘러보는 것이었다. “하~ 우리 마을이 어떻게 돼 저렇게 황폐해 가는지 모르겠다. 참 마음이 아프다. 학교는 무너지고 조선족들은 우리가 황무지를 애나게 일궈 피땀으로 걸군 밭을 버리고 한국으로, 시내로 다 달아났다. 그러다나니 한족지주들의 자녀들이 우리 마을을 몽땅 먹어치우고 밭을 차지했다. 저 장미란이랑 지괴호랑 숱한 밭을 사들였다. 말로는 양도받았다지만 숱한 밭을 사들여서 조선족농사군들을 고용해 농사를 짓는다. 진짜 신판 지주 같다. 이전에는 머슴이라고 하지만 지금은 삯전을 주고 머슴이 아닌 머슴을 수태 쓰면서 지주 질을 한다. 요즘 저 지괴호랑 장미란이랑 합작해서 무슨 농업합작사를 꾸린단다. 신판 지주 장원을 꾸리는 게지 뭐야? 흥! 참 모를 일이다.” 상순은 덕돌을 데리고 아버지 산소 앞으로 다가갔다. 쓸쓸한 묘지 주위에는 한 키씩이나 되는 쑥대가 자라나 있어 더욱 처량했다. 상순은 낫으로 쑥대를 베고 덕돌은 삽으로 흙을 퍼 올렸다. 우르릉, 우르르릉. 불시에 고개 넘어 저쪽에서 트랙터 엔진 소리가 울렸다. 영길에 나타난 트랙터를 보니 지괴호가 운전석에 앉아 다가왔다. 트랙터 위에는 숱한 한족 농사꾼들이 실려 있었다. 트랙터가 산소 옆에 턱 멈춰 섰다. 애비를 닮은 지괴호가 삐죽한 개턱을 쳐들고 비웃음이 가득 찬 우멍눈을 부라리며 장갑을 벗어 탁탁 털면서 빈정거렸다. “어우, 김 서기 어르신님, 안녕하십니까? 눈이 있어도 태산을 알아보지 못해 미안합네다. 헤헤헤.” 상순은 거들떠도 보지도 않았다. “아무리 바빠도 어찌 천하를 호령하던 김 서기를 못 본체 하고 그저 지나가겠습니까?” 덕돌의 눈길이 곱지 않은 것을 보면서 지괴호는 조심스레 상순한테 다가서면서 횡설수설 지껄였다. “사람이 늙는 건 별 수 없구먼. 우리 마을을 쥐락펴락하던 김 대머리도 이젠 함흥촌 광범한 사원들을 다 잃어버려서 얼마나 쪽쪽하겠습니까? 허나 나를 보십시오. 옛날 김 서기 영도하던 사원들이 이젠 다 내 말을 듣습니다. 무슨 지주 아들이고 뭐고 잘 사는 게 영웅이지. 옛날 김 서기랑 혁명을 한답시고 토지개혁 때 우리 집 밭을 몽땅 빼앗아 빈농들에게 나눠줬지. 건데 우리 집 밭을 몽땅 사서 내 걸로 만들었습니다. 나는 옛날 우리 아버지 때 지은 집보다 더 크고 더 멋있는 고래등 같은 벽돌집을 짓고 김 서기 보란 듯이 삽니다. 어떻습니까?” 상순은 그제야 지괴호의 심보를 알 것 같았다. 며칠 전에 그가 창고 앞에 있는 옛날 자기 집 자리를 사려고 하자 기어이 비싼 값으로 사버리지 않았는가. “그래 나와 기 싸움을 할 예산이냐? 넌 친일주구 촌장놈의 새끼야!” 상순은 지괴호를 무섭게 쏘아보았다. 그러자 지괴호는 능글거리며 두 손을 높이 추겨들었다. “투항, 투항! 지금도 지주를 타도하고 재산을 청산해 빈농들에게 나눠주는 토지개혁 땐가 하오? 지금은 경제시대라던가? 아, 시장경제시대지. 참 좋은 세월이 왔지. 허허허. 계급투쟁시대가 아니오. 나와 미련은 장리국 동생 덕에 대만, 향항, 오문 연합회에 들 거요. 세상에서 대만동포를 지지하는데 내가 왜 정부를 옹호하지 않겠습니까? 허허허. 한뉘 혁명을 해봤자 김 서기는 어쩜 늘그막에 그럴듯한 집도 없습니까? 지금은 자기 능력에 따라 돈을 버는 세월이니까. 이제야 우리 지씨가 앞선 경제 의식과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지? 흥!” 그는 트랙터 쪽으로 가서 핸들을 잡고 툭툭 치며 연설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머리가 좋아 경제 의식과 능력이 있는 사람이 땅의 주인, 아니 지주로 된 게 아닙니까? 김 서기? 아니오? 허허허. 안녕히!” 이때 덕돌이 삽으로 흙을 푹 퍼서 트랙터 위에 높이 올라앉은 지괴호의 여우상에 탁 쳤다. “친일주구 개놈새끼! 우쭐거렸다간 뼈대를 분질러 놓겠다.” 질겁한 지괴호는 트랙터를 몰고 먼지를 새뽀얗게 일구며 달아났다. “참 이해되지 않는다. 저런 새끼들이 우쭐거리니.” 덕돌은 아버지를 위로하면서 설명해주었다. “계급투쟁을 기본 고리로 하던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지금 경제건설을 중심공작으로 삼아 번영하고 부강한 나라를 건설하려면 이전의 원한을 잊고 일체 단결할 수 있는 역량을 다 단결해야 합니다. 그래서 지주들의 모자를 벗겨준 겁니다.” 허나 상순은 풀을 베면서 거친 숨을 씩씩 톱아 올렸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총까지 쥐고 덤벼들던 놈들을 어찌 용서한단 말이냐? 장리국은 분명 나라를 배반하고 국민당이 득실거리는 대만으로 도망한 도주범이야. 미란이나 지괴호 같은 새끼들이 돈이 있다고 정협에 들어가 우쭐거리게 해선 안 돼.” 덕돌은 아버지를 위안해 드렸다. “아버지, 미란이나 지괴호 헛소릴 믿지 마십시오. 그 놈이 아무리 돈이 있다고 해도 정협 위원으로 되는가 보십시오. 정부가 눈이 멀었다고 그런 역사문제 있는 무식쟁이 놈을 정협 위원으로 쓰겠습니까? 꼭 엄격히 위원자격을 심사할 겁니다.” “글쎄 그럼 그렇겠지.” 상순은 풀을 다 베자 허리를 펴면서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그 개놈새끼 기를 채우는 바람에 할 말을 잊을 번했다.” 덕돌도 삽을 놓고 아버지를 따라 할아버지 산소에 절을 올리고 곡을 했다. 뒤이어 상순은 덕돌을 데리고 아버지 산소 뒤쪽으로 300미터 떨어진 둔덕에 있는 어머니 산소로 갔다. 딱 예전에 하듯이 그는 덕돌을 데리고 아버지와 어머니 산소를 찾아갔다. “문화대혁명을 거치면서 지금 우리 조선민족 전통이 다 깨졌다. 산소를 아무 때나 다치지 말아야 한다는 건 다 게으른 놈들의 개소리다. 자기 조상들의 산소로 아무 때나 찾아보면 어떠냐? 귀신이 물어 간다니? 자식들이 부모를 찾아 뵙는데 무슨 시간표가 따로 있니?” 상순은 할머니 산소 북쪽으로 10미터도 되나마나한 둔덕아래 양지바른 곳으로 스적스적 걸어갔다. 뒤이어 그는 덕돌의 손에서 삽을 받아 쥐더니 너럭바위 옆을 파는 것이었다. 허나 잔디와 쑥대가 뒤엉켜 삽질이 잘 되지 않았다. “제가 팝시다.” 덕돌이 몇 삽 푹푹 파자 상순은 무릎을 꿇고 앉더니 “조심해 파라.”라고 하면 손으로 두루 누런 흙을 파보는 것이었다. 누런 흙속에 거꾸로 파묻은 오지단지가 나졌다. 상순과 덕돌이 조심스레 삽으로 살살 오지단지 옆의 흙을 파내고 손으로 오지단지를 꺼냈다. 상순은 오지단지 옆에 묻은 누런 흙을 손으로 쓱쓱 씻어버리고 꽉 동인 기름종이를 조심스레 뜯어냈다. 오지단지 안에서 기름종이로 싼 누런 책 세권이나 나왔다. “이게 뭡니까?” “다행이다. 우리 집안 족보가 살아남았구나.” “예? 족보입니까?” “응. 그래. 우리 집에 건 문화혁명 때 태우고 큰집에 걸 상길 형님을 보고 잘 건사하라고 했던 거다. 이걸 내가 철봉을 보고 달라고 해서 여기다 파묻어 뒀다. 썩지 않고 남았구나.” 상순은 족보를 어루만지더니 덕돌에게 두 손으로 넘겨주었다. “잘 건사해라. 조상들이 2천년이나 대대로 내리 보관한 대물림 보배 족보이다. 넌 대학문을 나왔으니 한자를 잘 알지 않니? 이담 시간이 있으면 잘 읽어보고 조선어로 번역해 책을 찍어라. 네 대에서 자손들을 이 책에 계속 적지 않으면 우리 집안 역사가 대를 잇지 못하고 끝나는 거야. 우리 자손들이 자기 조상들이 누군지도 몰라서야 되겠니? 족보가 있어도 대체 자기는 어느 분의 자손인지도 볼 줄 몰라.” 상순은 직접 덕돌에게 족보를 보는 방법을 알려 주었다. 덕돌이 여겨 보니 자기는 알지의 후손이고 천년 신라를 통치한 경주 김 씨의 후손이었다. 놀라운 것은 자기는 경순대왕의 후손이었다. 시조 알지로부터 경순대왕까지 29대나 왕 아니면 각한이 아니었겠는가. “오, 그래 내가 왕의 후손이란 말입니까?” “그래, 이전에 형내가 하는 말이 우리 가문이 왕의 후손이라고 하더라.” 덕돌은 누렇게 색 바랜 족보를 들고 보며 가슴이 높뛰면서 부풀어 올랐다. 뒤이어 상순은 덕돌에게 족보를 파낸 자리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여긴 옛날 사람들이 부처님과 하느님께 빌던 상공단 자리다. 진짜 명당자리지. 내가 죽으면 될 수 있으면 여기다 묻어 달라. 난 여기 묻혀서 저 아래 우리 마을과 이 뒷산에 묻힌 조상들과 부모의 산소를 지키겠다. 우리 마을 사람들이 잘 사는 모습과 앞날을 지켜보겠다. 저쪽 천지꽃산 중턱에는 네 증조부 산소가 있다. 내 걷지 못해 너를 데리고 가지는 못하지만 네가 잘 모셔라. 마지막으로 부탁한다.” 상순은 숨이 차 좀 쉬어 뒷말을 이었다. “내 조부모와 부모, 나까지 모두 일본 놈들의 핍박에 못 이겨 조선의 정든 고향을 떠나 이 땅에 들어와 두 번째 고향 함흥 촌을 개척했다. 모두 고향을 그리다가 돌아가지도 못하고 여기서 눈을 감았다. 우리 조손 3대가 살아온 이야기는 우리 민족의 산 역사다. 넌 조상들 산소를 잘 모셔라. 그게 우리 집안의 역사를 존중하고 민족의 역사를 존중하는 거야. 조상들이 살아온 역사와 지혜를 대대로 전해야 자손들도 잘 된다. 나라와 민족에게 역사전통이 있어야 하고 한 집안도 역사전통을 세워야 한다. 그게 바로 집안을 살리고 민족을 살리고 나라를 구하는 정신기둥이 될 수 있는 거다. 알만하니?” 덕돌은 의미심장한 아버지 말을 들으면서 눈물을 머금고 조부모의 산소와 저 골짜기 건너 천지꽃산 중턱의 증조부 산소 쪽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예, 명심하겠습니다. 아버지는 백세를 넘어 앉을 수 있습니다. 이제 운선의 어미와 제가 좋은 약을 가져다 대접하겠습니다.” 허나 상순은 한숨을 후~ 내쉬었다. “아무리 좋은 약을 써도 갈 사람은 가게 됐다. 내가 가더라도 기회가 있으면 조선의 내 고향 명천에 꼭 가봐라. 될 수 있으면 조선 함흥에 있는 동선이랑 만나봐라. 너희들 둘 다 친형제가 없지 않니? 사촌형님 동선과 친형제처럼 지내라. 이담 운선이가 큰 다음 동선의 애들과도 친형제처럼 지내라.” 아버지가 너무 비장하게 말씀해 덕돌은 저도 몰래 눈물이 글썽해졌다. 그는 족보를 담은 오지단지를 품에 안고 아버지를 모시고 집으로 돌아가며 고향을 두고 착잡한 생각에 잠기고 말았다.      전번에 고향에 돌아왔을 때 촌 회계가 불러 가보니 촌장부에 부모가 빚 500원을 지고 있지 않겠는가.       (아버지는 한뉘 촌과 촌민들을 위해 대공무사하게 고생했는데 마지막엔 빚만 남지 않았는가. 참 억이 막힌 일이다.)      상순은 그 일을 알고 결연히 말했다. "얘야, 이 헌 집을 팔아서라도 촌 빚을 갚아라. 공산당원인 난 집체에 미안하게 빚을 지고 북망산에 갈 순 없다." "알았습구마." 며칠 후 덕돌은 아버지한테 오는 로군관 무휼금(영장 무휼금)에서 남은 돈과 자기 돈으로 빚을 다 갚았다. 그제야 상순은 시름을 놓은 듯이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상순은 그렇게 청렴하고 철저하고 대공무사한 보통공산당원이었다. 그는 당시 자기에게 내려오는 로군인, 로군관  무휼금을 받지 않겠다고 했다.      "왜 그럽니까?"      민정일군이 묻자 상순은 이렇게 대답했다. "난 무휼금을 타려고 참군한게 아니오. 내가 뭘 했다고 무휼금을 다 주오? 우리 마을 옥선이 오빠, 오병선은 삼도만토비숙청전투에서 나팔수였소. 오병선은 내 눈앞에서 토비 흉탄에 가슴을 맞고 처참하게 희생됐소. 지금도 눈앞에 선하오. 오병선 같은 숱한 렬사들 유가족들이 무휼금도 타지 못하는데 눈을 펀히 뜨고 살아 있는 내가 무슨 리유로 무휼금을 탄단 말이오? 그 무휼금을 의지가지 없는 병선이 부모 같은 렬사유가족들에  주오."       "병선이 부모한테도 국가에서 렬사유가족무휼금을 드립니다. 이건 로군인 무휼금입니다. 국가 규정입니다. 꼭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상순은 무휼금을 타러 가지 않았다. 별수 없어 대신 명옥이 타왔다. 상순은 노발대발하며 되가져가라고 했다. 그러자 명옥은 령감과 토론하고 무휼금을 병선의 부모 등 렬사유가족들한테 나눠주고 나머지로 상순의 병을 치료하기로 했다.       상순은 림종 전까지도 당비를 꼭꼭 냈고 당조직의 기률을 지켰다. 그는 교하 딸집으로 병치료를 가면서도 촌당지부에 청가서를 써냈다. 병치료가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그는 촌당지부에 청가 맡은 기일이 찼다면서 부랴부랴 집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딸 홍자는 리해되지 않아 도리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버지, 이젠 아버지 촌에서 할 일도 없는데 청가를 맡지 않아도 됩니다. 뭐 직장에 다닌다고 농촌 당원은 청가를 다 맡아야 되는가요?"    "안된다. 농촌 보통당원이라고 조직기률을 지키지 않아서야 되느냐? 그게 보통백성과 다른 점이야."     딸 홍자는 못내 감탄하면서 머리를 끄덕였다. 아버지한테서 한차례 심각한 당과학습을 하고 웃지도 울지도 못하고 아버지 뜻을 따를 수 밖에 없었다.      상순은 딸이 청가서를 써서 우편으로 보내는 걸 보고서야  마지못해 딸집에 눌러 앉아 치료를 계속했다.          상순은 그처럼 언제 어디서나 어떤 경우에도 중국 공산당에 충성했다.       어느 날, 웬 머리 새하얀 로파와 훤칠한 중년사나이를 데리고 상순네 창고집에 찾아왔다.      "안녕하세요? 김지도원."      로파는  서투른 한어로 인사하면서 허리굽혀 인사했다. 뒤이어 로파는 데리고 온 중년사내를 돌아보면서 일본말로 말했다.      "고노까다와 와디시노 스구호시다.(이 분은 내 구성이다.)"      그러자 그 꺽다리 중년사내는 코를 싸쥐고 두리번거리다가 마지못해 반색하면서 허리굽혀 인사했다.      "곤니찌와(안녕하십니까)?"      뒤이어 로파는 중년사나이를 데리고 구들에 올라왔다. 그 중년사내는 어지러운 구들을 보고 올라오기 싫어 우먹눈을 슴벅이면서 서성거렸다. "하야꾸!(발리)"     로파는 중년사내를 마구 끌고 상순의 앞에 와 꿇어앉았다. 그녀는 앓아누운 상순의 손을 잡고 눈물을 주르르 흘리면서 한어로 말했다.     "김지도원, 난 김지도원이 삼도만에서 구해준 야마꼬입니다. 그때 김지도원이 저를 구해 일본에 보내주지 않았더라면 이 애도 세상에 태여나기 전에 우리 모자가 다 죽었을 겁니다... 흐흐흑."     그제야 상순은 안간힘을 다해 일어나 앉았다.    "야마꼬? 야마꼬 살아서 일본에 돌아갔댔구나. 살아있어 고맙소. 이 앤 그때 뱃 속 애요?"     야마꼬는 머리를 끄덕였다.     "하이(네). 저의 아들  야마다예요."     야마다는 우먹눈이라던가, 심통히도 지학사를  떼닮지 않았겠는가.    상순은 야마꼬 모자를 보고 감격해 울먹였다. 그는 생강처럼 마른 손을 내밀어 일본 중년사내의 손을 잡았다.    "그래, 그게 45년도 해방날 때였으니까. 이젠 마흔도 썩 넘었겠구나. 얘야, 너희들 모자는 다 일본 제국주의 침략전쟁의 피해자들이다."     야마꼬가 일본말로 통역해주자 아들애 야마다는 머리를 끄덕였다.     "일본 인민들은 세세대대로 다신 일본 제국주의나 군국주의자들 전쟁의 피해자로 되지 말고 중국 인민과 함께 평화흘 옹호하고 서로 화목하게 살아야 한다."    그때 뒤에 지괴호가 우먹눈을 부라리며 들어섰다.    "하하(엄마), 돌아갑시다. 썩은 내 나는 여길 와 뭘 합니까?"    "빠까모노(바보 같은 놈)! 이 분은 날 구해준 은인이야."    지괴호는 일본 청년을 보고 두덜거렸다.   "쳇, 동생, 이 늙은인 우리 아버질 죽인 원쑤라고나 해라. 엄마하구 동생한테 또 빨갱이물을 먹이자고 그러오."   명옥은 지괴호가 들어서자 좀 경계했다. 그는 바깥에 나가 사위 영만과 서기 숭길을 데려와야 하겠다고 생각하고 바삐 자리를 떴다.   야마꼬는 지괴호를 흘겨보면서 훈계했다.   "네 애비는 우리 모자간의 죄인이야. 이 분이 우리 모자를 구해줫으니 말이지. 토비들과 장학사지주한테 릉욕당하고 자살햇을거야." "흥!" 지괴호는 콧방귀를 뀌었다. "이 늙은이 한평생 공산당 간부 했지만 얻은게 뭐요? 늘그막에 사는게 이게 무슨 꼴이오?" "닥쳐라!" 야마꼬는 지괴호를 욕하면서 가방에서 상순이 벤 목침만큼 두툼한 걸 꺼냈다. "내 오늘 우리 모자 구명은인을  벼락부자로 만들테다!" 야마꼬는 말을 마치자 빨간 종이에 싼 걸 상순에게 두 손으로 드렸다. "받으세요. 5만딸라예요. 이걸로 새 벽돌집도 짓고 가구도 몽땅 새 걸로 갖추세요. 그리고 보모도 고용해 만년을 행복하게 보내세요." "엄마!" 지괴호는 두툼한 딸라 뭉치를 보고 아까와 마구 구들에 올라와 말리면서 지어 채가려고까지 날뛰었다. "닥쳐! 이건 은인의 은정을 갚자고 우리 모자간이 모은 거야. 넌 일전한푼 다치지 못해!" 그때 경만과 숭길이 들어섰다. 상순은 깡마른 손으로 딸라뭉치를 스르르 야마꼬 앞에 되밀어주었다. "이 돈은 받을 수 없소. " 야마꼬는 애원했다. "아니, 꼭 받아야 해요. 저는 당신의 은정을 갚으려고 천신만고 끝에 여기까지 찾아왔는데요." "받읍소." "받아도 됩구마." 경만과 숭길도 받으라고 권했다. 그러나 상순은 도리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성의만은 받겠소. 감사하오.  난 그때 전쟁 피해자 모자를 구해줬을 뿐이오. 절대 대가를 받을 순 없소." 이윽고 상순은 야마꼬를 보고 말했다. "이 돈을 마련하느라고 홀로 아들애를 데리고 얼마나 고생 많이 했겠소. 가지고 돌아가 가정살림에 보태오. 감사하오." 야마꼬는 도리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 일본에 귀국한 후 처음엔 나가사끼가 원폭에 날아나서 집도 없이 고생 많았어요. 그러나 지금은 아들이 기업을 잘 꾸려서 이젠 살기 괜찮아요. 근심없이 잘 사는데요. 어서 받으세요." 그러나 상순의 태도는 일관하였다. "아니, 절대 대가를 받을 수 없소." 야마꼬는 한어를 아직도 제대로 하였다. "절대 대가 아니죠. 보은인데요. 세상에 이렇게 량심적인 은인을 어찌 늙어서도 이 지경으로 살게 할 수 있겠는가요? 세상이 각박해져 모든 사람들이 다 당신을 포기해도 저만은 당신을, 구명은인을 잊을 수 없어요." 그러나 상순은 기어이 그 딸라뭉치를 받지 않았다. 다만 야마꼬가 사온 일본 과자와 사탕, 그리고 돼지고기만은 받았다. "우리 당원은 자기 안위나 차례진 리익을 따지는 게 아니라 세상 백성들을 위해 해놓은 일이 뭔가를 따지면서 사오. 나는 세상에 가난한 백성들을 위해 해놓은 일도 없이 세상을 떠나게 된 것을 아쉽게 생각할 뿐이오."  야마꼬는 떠나가면서 상순의 손을 잡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결국 그 딸라뭉치는 지괴호가 채다가 토성안 대대사무실도 사갔고 함흥촌과 조개덕의 숱한 조선족들의 초가집을 사서 허물고 토성을 쌓았던 것이다...         상순은 림종의 시각에 덕돌과 자식들을 곁에 오라고 한 후 나직이 말했다.      " 우리 가족은 일본 놈들의 핍박에 의해 조선 고향에서 살지 못하고 두만강을 건너 중국에 들어왔다. 할아버지로부터 아버지, 나까지 모두 한평생 중국 공산당을 따라 혁명했고 당에 충성했다.  오직 중국 공산당을 믿고 따라 나가야 가난한 백성들은 행복하게 살 수 있다. 너희들도 대대로 중국 공산당에 충성하고 당을 따라 영원히 나가야 한다."        덕돌은 아버지 손을 잡고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상순은 생강처럼 마른 손으로 덕돌의 손을 힘겹게 잡고 신신당부했다.        "덕돌아, 사내대장부가 눈물을 헤프게 흘리지 말라.  너도 하루 빨리 입당해라. 기자니깐 당과 백성들을 위한 글을 많이 써라."        덕돌은 목메여 대답했다.         "아버지, 아버지 말씀 꼭 명심하겠습니다."         상순은 한평생 당에 충성하였으며 "빚을 지고 살아도 시비 지고 못 산다."는 그의 인생좌우명처럼  원칙을 지키면서 당을 따라 백성들을 위해 일하였으며 벼슬을 초개처럼 여기면서 청렴하고 결백하게 살았다. 그는 자기 결백한 삶처럼 티없이 새하얀 상시옷을 입고 조상들의 곁으로 조용히 떠나갔다.      함흥촌 백성들은 항상 집체와 백성들의 리익을 위해 한뉘 자기 직위나 안위, 리익을 돌보지 않고 발벗고 분투해온 대공무사한 코기러기를 잃었다. 마을 사람들은 함흥촌을 건설하려고 아글타글 애쓰던  우수한 보통당원을 잃은 것으로 해 더 없는 슬픔에 잠겼다. 그들은 뜨거운 눈물과 함께 뒷산에 자기들이 존경하는 촌 서기, 생산대 대장을 묻어주었다.             덕돌은 아버지 산소를 보면서 피눈물을 흘렸다. 덕돌은 그런 아버지, 대공무사한 보통당원 아버지를 잃고 목놓아 대성통곡쳤다.      "아, 아버지! 아버진 진짜 하늘땅에 티뜰만치도 미안한 점 없는 량심적인 중국 공산당 당원입니다."        상순은 구천에 묻혀서도 자기가 한뉘 건설하고 일해온 함흥촌을 굽어보고 있었다. 저기 뻘건 벽돌로 지은 대대사무청사, 그의 일가가 대대로 일군 함흥촌 서북쪽 소서구 사래긴 황무지 밭, 저기 마을 서쪽 멍지뫼산 앞 산종논밭, 비새는 함흥학교, 저기 동쪽 조개덕의 벽돌공장, 저기 서쪽 칼산의 과수원을 지키고 있다. 그의 혼은 마을 상공을 날아예면서 마을을 철석처럼 지키고 있다.  그는 염라전에 갔지만 의연히 조선족들의 삶과 앞날을 근심하고 계신다.         ...  ...       장미련은 계급투쟁 때 투쟁 맞고 가난하게 살던 지주의 딸 같지도 않았다. 대만으로 달아난 둘째오빠 장리국과 한국 경주에 있는 경주의 삼촌들이 숱한 돈을 보내와서 덕돌의 모교인 함흥중학교를 사서 들고 둘레에 덕돌이랑 학생 때 심은 백양나무들을 마구 찍어내고 높다란 토성을 지었다. 그녀는 고향 농민들을 삯 내여 옛날 소서구 어구에 있던 토성보다도 얼마나 높고 둘레 길이가 열배도 되는 농장의 새 벽돌토성을 쌓았다.       덕돌은 장미련이 모교 함흥중학교를 무슨 꼴로 만들었는가 둘러보러 갔다. 농장주 장미련과 아들 김토함산은 한국 경주로 가고 없고 대신 대문 어귀에서 사냥개가 “왕, 왕, 왕!” 요란하게 짖어댔다. 이윽고 고용된 농공이 대문의 자그마한 문을 열고 바깥을 기웃거렸다. 덕돌이 찾아간 연유를 말하자 고용농공이 그를 들여 놓으면서 구경하고 인차 나가라고 각박하게 굴었다.       덕돌은 고용된 농공의 안내 하에 학교 자리를 돌아보았다.       학교 단층 교수청사의 빨갛던 기와는 거멓게 그은 것처럼 돼버렸다.       이전에 애들과 함께 뛰놀던 학교 운동장에는 소를 가득 매놓아 풀을 뜯게 하고 있었다. 소똥이 여기저기 널려 덕돌은 조심조심 발을 옮겨 놓지 않으면 안 됐다.       교수청사 중간에 높이 모셨던, 미술선생이 그린 모택동 주석 초상화는 온데간데없었다. 창문과 문이 너덜거리는 옛날 자기 학급 교실 자리를 들여다보니 교실 벽에 간장물 같은 빗물이 흘러 얼럭덜럭해 꼴불견이었다. 우글거리는 돼지들이 주둥이로 돼지 똥이 물렁거리는 땅바닥을 뒤지고 있었다. 역한 돼지 똥 냄새가 코를 찔렀다.       다른 교실 자리를 들여다보니 소똥 냄새가 코를 찌르는데 황소들이 “음-메” 하고 영각하며 내다보는가 하면 닭이 푸닥닥 풍기어 오르고 거위와 오리가 괙괙 거렸다. 마을에는 조선족 청년들을 찾아볼 수 없었다. 더구나 조선족색시와 처녀들은 찾아 볼길이 없었고 골목에서 뛰노는 애들을 구경할 수 없었다. 다만 한족 애들이 뛰노는 것은 드문드문 보였다. 마을에는 덕돌의 둘째매형 경만과 대대 당지부 서기 겸 촌 주임을 하는 숭길을 내놓고는 조선족들은 찾아 볼 수 없었다. 숭길도 한족색시와 살기에 색시가 본가 집 식구들과 떨어져서 살기 싫어하기에 진수해로 잠시 가지 않고 있었다. 조선족들은 모두 진수해로 가지 않으면 자식들을 관내 북경, 천진, 청도, 위해, 연태, 상해, 소주, 항주 일대로 나갔다고 했다. 수많은 사람들은 한국에 나가 일하고 있었고 돈을 벌어가지고 돌아오면 연길이거나 용정, 진수해에 새 집을 사고 살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러다나니 마을은 지괴호와 장학산 등 지주 자제들이 조선족 집을 사서 허물고 새로운 장원을 차리고 점령해버렸던 것이다. 일부 조선족들이 시내에서 살기 어려워 마을로 돌아오려고 해도 이젠 집을 지을 손바닥만 한 땅마저 없어 돌아올 길이 전혀 없었다. 덕돌의 둘째누나 은숙이 한국에 나간지 몇 해 돼 매형이 혼자 면내를 자주 먹으면서도 조선족 말동무도 없는 이 쓸쓸한 마을에서 외롭게 살고 있었다. 요즘 둘째딸 주옥이 연길에 내려와 자기 집에서 살자고 자주 졸라대서 경만은 한창 집문에 널장을 대고 대못을 땅땅 치고 있었다. “정말 한심한 판이구나. 어쩜 내 고향이 이 모양으로 됐단 말인가?” 덕돌의 마음은 아주 쓸쓸하고 무거웠다. 고향을 그리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절절한 마음을 읽을수록 그는 마음속으로 피눈물을 흘리면서 자기 어깨가 점점 무거워 지는 것을 심심히 느꼈다…                       9. 미로 비단결로 얼굴을 만지는 듯한 부드러운 봄바람이 뒷동산에 봄 아가씨를 모시고 조용히 다가왔다. 화창한 봄날을 맞아 연분홍 진달래꽃과 살구꽃이 활짝 꽃피었다. 덕돌은 설레게 하는 봄빛을 담뿍 받으며 시내 골목길을 걷다가 고독을 몰아내려고 조용한 다방에 들어갔다. 으리으리하게 서양식으로 장식한 다방에서는 은은한 음악이 부드럽게 흐르고 있어 우아한 분위기를 더해주었다. (“정다운 밤거리” 노래 흐르고 있지 않는가? 저 노래는 내가 제일 사랑하던 여학생 선화가 부른 노래 아닌가?) 예쁘게 생긴 처녀가 생글 웃음 지으며 다가와 허리굽혀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뭘로 시킬까요?” “원두커피 주오.” 덕돌은 커피와 맥주에 건과를 주문했다. “예, 알았어요. 잠간 기다려 주세요.” 이윽하여 그 처녀가 원두커피를 갈아가지고 사뿐사뿐 다가왔다. “맛있게 드세요.” “가만!” 쟁반을 들고 돌아서던 처녀가 의아해하며 탄력 있는 몸을 되돌리며 생글 웃음 지어보이었다. “이 집 주인 저 노래 즐기는 모양이죠?” 그제야 처녀는 부드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래요. 저 노래는 저의 주인이 처녀시절에 부른 노랜데요.” “오- 그래요? 유명한 가수였지.” 처녀는 또 의아해했다. “혹시 우리 주인 알아요?” “아, 아니, 그저 그렇다는 말이오.” 덕돌은 부담을 줄까봐 손사래를 치면서 도리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선생님!” 그때 청아한 부름소리가 귀전을 때렸다. 덕돌은 머리를 들어보고 깜짝 놀랐다. “아니, 선화?” “선생님, 제가 갓 다방을 차려놓고 인사 늦어 미안해요. 저의 다방에서 이렇게 만나니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어요.” 선화는 옛날 빨간 등산복을 입고 문화관에 노래공부하러 다니던 소녀가 아니었다. 그녀는 빨간 등산복을 입고 학교에 갔다가 무지한 황승연이 가위로 바지 가랑이를 찢어놓은 후 모욕감을 느껴 초중을 중퇴하고 예술학원 소년성악반에 입학해 노래공부를 했다. 하여 일약 동북 3성 청년가수 노래콩쿠르에서 1등을 따내고 시예술단 가수로 맹활약했다. 선화는 고급양주와 맥주에 안주를 몇 접시 올리게 하고 덕돌의 맞은편에 앉았다. 언제나 생글거리는 쌍까풀눈에 애수에 잠긴 듯 했지만 걀쭉한 얼굴에 가수의 가느다랗고 긴 목은 아주 매력적이었다. 은은한 음악 속에 훤칠하고 풍만한 선화의 몸매를 보는 순간 처음으로 여학생이 아니라 한 처녀와 마주 앉은 느낌이 들었다. “선생님, 오늘 제가 은사님께 한잔 드리겠어요.” 그녀는 맥주를 찰찰 넘치게 부어 올리고 잔을 들었다. “선생님은 저한테 가수 꿈을 심어주고 도와주셨지요. 제가 등산복 때문에 곡절을 겪을 때도 저를 동정하고 앞길을 비춰준 등대와 같은 분이었어요. 오늘 제자가 드리는 감정 술을 마음껏 드세요.” 덕돌은 아주 기쁜 마음으로 잔을 기울였다. 선화는 처녀를 불러다가 인사시켰다. “인사하오. 저를 젤 예뻐해 준 선생님이시오.” “언니가 항상 외우던 선생님이시군요. 내내 행복하고 건강하세요.” “고맙소. 선화한테 여동생이 있었던가? 남동생이 있었잖았소?” “예, 사촌여동생인데요.” 그날 덕돌은 선화가 권하는 술을 마시면서 그녀의 이왕지사를 들었다. 선화는 시 예술단에서 활약하다가 예술학원 성악학부 성악 강사로 사업하다가 한국으로 갔었다. 후에 한국에서 고향에 돌아와 다방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런데 경제가 낙후한 고향의 특정된 환경에서 한동안 다방이 잘 되지 않았다. 그녀는 손님들을 위해 어떤 때에는 직접 노래를 불러주기도 하고 높은 차원의 서비스를 했다. 그리하여 손님들이 점점 많아졌다… 성호는 집에 돌아와서도 선화를 두고 옛 추억의 돛배를 타고 미끄러져 가다가도 별의별 현실적인 낭만에 빠지기도 했다. 그는 선화 생각만 나면 다방으로 달려가 선화와 마주 앉아 맥주도 마시고 추억도 마시고 노래감상도 했다… 세월이 흐를수록 덕돌과 선화는 사생간의 한계를 넘어 청춘로맨스를 엮어갔다. 그러나 덕돌은 생활의 부렉끼를 밟아야 하겠다고 자책했다. 그는 밤중에 서재에 들어가 컴퓨터를 켜고 자판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들리지 않는 은은한 음악 속에 감정의 파도를 헤가르고 피아노 건판을 두드리듯 했다. 현광판에는 기막힌 서정수필이 흘러가고 있었다.   미스 화야, 어제날 우리는 네가 제일 좋아하는 해물관에 가서 골뱅이 살도 이쑤시개로 뽁뽁 뽑아 먹으면서 생글방글 싱글방글 즐겼다. 빠알간 포도술잔을 댕 마주치며 가는 눈웃음을 짓는 너의 예쁜 모습을 보면서 나는 마냥 흥겨웠다. 우리는 찜질방에서 시원히 목욕도 하고 적외선체험실에서 땀을 흘리며 자지러진 쟈즈곡에 맞춰 처녀총각들과 함께 미칠듯이 디스코를 추었지. 서늘한 찜질방의 구들에 나란히 누워 소설 같은 인생살이도 이야기하고 세상 못하는 말이 없이 밤새도록 이야기꽃을 피웠다. 우리는 이상야릇한 감정에 폭 빠져 다방의 희미한 불빛아래에, 공원의 드높은 밤하늘에 격조 높은 사랑의 서정시를 쓰고 또 썼다.  너는 나를 보고 한번쯤은 취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고 했댔지. 그러나 나는 영원히 너의 스승이라는 것을 지켰다. 그건 아주 힘들게 지킨 영예이다. 또 너의 순결한 마음과 그 옛날의 수양 있는 여학생의 섹시한 모습을 지켜주었고 한 남자의 색시, 한 딸애의 위대한 조선족어머니라는 숭고한 명예와 위신을 지켜주었다. 너는 나를 미워하였을 수도 있다. 나도 몰라, 너는 정한 나를 존경하고 따랐을 수도 있는데 나는 너를 순결하지 못한 마음으로 대한 것이나 아닌지?  네가 나와 더불어 이 밤을 새우고 싶다고 조용히 속삭일 때 혹시 나를 스승이 아니라 남자로 보지나 않았는지? 나는 네가 의연히 옛날 빨간 골덴옷을 입고 글을 지어가지고 찾아오던 그때의 그 천진한 소녀로만 보였다. 너의 처녀작수필이 발표됐을 때 우리는 애들처럼 입이 합박만해 기뻐 어쩔줄 몰라했다. 그러나 나는 점차 네가 예쁜 여자로, 섹시한 미스로 보일 때도 있었다. 그러는 내가 미웠고 불쌍하였다. 어데 여자가 없어서 자기 옛 학생을 그러는가고 자기를 책망하기도 하였다. 그러는 내가 두려웠고 스스로 도리머리질을 하면서 “그러면 안되지.” 하고 중얼거리였다. 그러나 아무리 마음을 죽이려고 하여도 마음이 흔들리는 것을 어찌할 수 없었다. 그런 나를 욕하지 말아 달라. 점차 네가 옛 학생이라기보다도 아주 가까운 여자 친구로 보였고 지어 애인을 하면 어떨가고 망연하게 생각하기도 하였다.  네가 다른 남자와 핸드폰으로 친절히 대화하는 것을 보아도 속이 별스럽더라. 마치 네가 내 색시거나 애인이기나 한듯이 다른 남자와 노는것이 축나는 것처럼 좋지 않더라. 그러나 네가 모든 사내친구들의 요청도 다 뿌리치고 나와 친구들이 노는 노래방에 찾아와서 밤새껏 나와 함께 춤을 추고 노래부를 때 나는 사춘기소년으로 된 나를 볼고 깜짝 놀랐다. 해물관의 유리창문 옆에 너와 마주앉아 빨간 포도주를 마실 때 나는 너를 흐리마리하게 애인으로 착각하기도 하였다. 얼마나 엉뚱하였니? 예쁘고 섹시한 너를 마주 바라보며 음미하면서 한수 또 한수의 사랑의 노래를 엮는 것이 아주 유쾌하였다. 참 우습지? 사내들의 마음이란 왜 이래? 산꼭대기에 부어놓은 물과 같이 산산이 부서져 산기슭으로 내달리지. 어느 때인가는 부서지고 흩어졌던 마음이 한곬으로 흘러 강을 이루고 나중에 저수지로 되고 바다로 흘러들어가는 것이겠지.  네가 내 팔을 정겹게 끼고 귀가 간지럽게 어깨너머 파도치는 머리카락을 흩날리면서 네온등이 반짝이는 정다운 밤거리를 거닐 때, 시내 제일 동쪽으로부터 서쪽 끝까지 택시도 타지 않고 걸어가면서 웃고 떠들 때, 난 어쩐지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남자였지. 나는 청춘을 되찾은듯이 더운 피가 온몸에서 끓어번지는 것을 어찌할 수 없었다.  예쁜 미스 화야, 넌 정말 기막히게 귀여운 미스야. 네가 그 쌍까풀 깜장눈으로 나를 정겹게 마주 바라보면서 생글 웃을 때, “선생님”, “우리 선생님” 하고 애교섞인 어조로 나를 부를 때, 나를 마주하고 포도술잔을 마주치고 빨간 립스틱이 진한 작은 입으로 굽을 낸 후 깔깔 웃어대며 못하는 말이 없을 때 나는 온 몸의 세포가 흥분에 떠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너도 알았지? 난 그렇게 훌륭한 아들을 두었건만 딸비위를 얼마나 하였더냐? 그런 나를 동정하던 너를 고맙다고 하여야 할가? 어쩌면 좋을가? 내가 이런 엉뚱한 질문을 건넸던 거 기억나느냐? 넌 만약 너를 너무너무 사랑하는 어떤 남자와 재혼하게 되면 딸애 하나 낳아줄수 있는가? 그때 넌 나를 빤히 쳐다보면서 들었던 포도술잔을 내려놓고 한동안 놀란 표정을 지었더랬지. 나중에 너는 생글 웃으면서 뭐라고 하였더냐?  “감정이 깊어지고 행복하면 딸 하나겠어요? 아들까지 하나 척 낳아줄 수도 있지요.”  그 말에 나는 전율하였다. 네가 두렵고 부풀어 오르는 내 마음이 두려워지더라. 너를 자주 만날수록 네앞에서 엉뚱한 꿈도 많아지고 말이 빨라지고 많아지고 혈액순환이 숨이 바쁘게 빨라지고 옴 몸이 해나른해지는 감을 느꼈다. 나는 너와 나를 이길 것 같지 못하였다. 너의 매력에 취해 너를 멍하니 마주 바라볼 때가 많아졌고 언젠가는 네 앞에 맥없이 쓰러질 것 같더라. 나는 너를 깊이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온 몸과 마음으로 느꼈다. 지어 너를 마구 애인으로, 후처로 만들고도 싶어졌다. 그러는 내가 스스로 참 두려웠다.  하기에 나는 너를 떠나야만 하였다. 만나고 싶어질수록 너를 기어이 떠나야만 하였다. 너를 내 사람으로 만들지 못할 바에야 엉뚱한 마음을 혹독하게 죽이고 또 죽여야 하였다. 마치 콩물이 부글부글 끓어 가마를 넘치려고 할 때면 찬물을 끼얹듯이 말이다. 아니, 콩물이 끓지 못하게 불을 때지도 말고 물을 쳐서 불을 죽여 버려야 하였다. 계속 그대로 끓어 번지면 너와 내가 언제든지 마음을 크게 다칠 것만 같았다. 만나고 싶어도 만나지 않는 것은 갈라지기 아쉬워서였다. 혹독한 이별의 아픔을 받아 당할 것 같지 않아서였다.  그런 독한 마음을 먹은 나를 너는 몰랐다. 기분이 엉망이 되여 마지막으로 너의 다방을 쓸쓸하고 무거운 심정으로 떠나는 나를 보고 너는 어째 선생님은 기분이 썩 좋지 않은 것 같다고 하면서 자기가 잘못한 일이 있잖는가고 물었다. 그래, 화야, 누군들 만나기만 하면 좋고 갈라지기만 하면 아쉬운 여자를 떠나야만 할 때 기분이 좋겠느냐? 나는 그런 이별의 아픔이 싫어서 다시는 너를 포함한 미스들을 만나지도 사귀려고도 하지 않는다. 차라리 내 홀로 외롭게 실련 같은 쓸쓸하고 비참한 기분을 안고 한숨 속에서 살더라도 너같은 미스들에게 리별의 눈물을 흘리게 하고 싶지 않다. 나는 아무리 섹시한 미스라고 해도 더는 사귀고 싶지 않다. 만남의 기쁨과 즐거움 끝에 언젠가는 눈물어린 리별의 슬픔과 아픔을 맛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미스들에게 환상으로 가슴이 부풀게 하고 싶지 않고 환락 뒤에 외로움의 심연 속에 몰아놓고 살짝 빠져나오기 싫었다. 나는 “빠이빠이!”라는 말을 제일 듣기 싫어한다. 그만큼 이별이 싫고 마음이 아프기 때문이리라.  아, 리별이란 이다지도 마음이 아픈줄을 몰랐다. 리별의 아픔을 해소하려고 너의 약속대로 택시를 타고 항상 만나던 너의 다방 앞에까지 달려갔다가도 , 택시문고리에 식지를 걸고 열려고 하다가도 마음을 죽이고 그대로 되돌아오군 하였다. 너는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고 전화로 나무랐지만 나는 만나고 싶어도 만나서는 안되었다. 너의 그 정답고 부드러운 전화마저 받지 않으려고 전화번호마저 바꿔버렸다. 그럴수록 이전에 너를 수수한 음식점에 끌고 다니면서 잘 챙겨주지 못한 것이 못내 후회된다.  자주 만나도 싫어지는 사람이 있지만 한평생 다시 만나지 않아도 잊지 못할 미스가 있지 않는가! 너를 오래동안 만나지 않았지만 내 마음속에 항상 날씬하고 예쁘고 섹시하고 수양있고 활발한 미스 네가 있는 것으로 하여 마냥 즐겁고 기쁘다. 너와 함께 엮은 아름다운 추억의 멜로디를 고독하게 홀로 감상하면서 추억 속에 잠겨 사는 것이 행복하고 즐겁기만 하다. 그것이 아름다운 사랑에 대한 갈망과 망상으로 엮은 비극적인 사랑의 멜로디라고 하여도 우리의 비할 바 없이 순결하고 아름다운 서정시이다.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 없이 떳떳하고 한가슴 뿌듯하다.  미스 화야, 너에게 혹독하고 비참한 이별의 아픔을 준 이 못난 스승을 용서해 달라. 이 못난 스승을 외로운 심연 속에 그냥 놔 달라. 래세가 있다면 근사한 해물관에 예쁘고 섹시한 너를 데리고 가서 빨간 포도술을 마시자. 세속에서 벗어나 낭만적으로 사랑도 해보자. 화야, 한가지 깜빡 잊을 번했구나. 나한테는 연인이 많았어. 첫사랑 은숙, 순희, 그리고 영희, 영자, 봉선, 명숙, 예화가 있어. 난 언젠가 너희들을 한 연회석에 불러 연인파티를 하고 싶다. 생각해봐라. 꽃 같은 연인들로 꽃다발을 엮어 내 목에, 아니 내 온몸에 감고 또 감고 싶구나. 연인 꽃다발을 감고 죽어도 후회 없을 것 같아. 허허허. 연인파티, 상상만 해봐라. 얼마나 환상적이고 황홀하고 낭만적이겠는가! 화야, 한가지 부탁하자. 염치없는 부탁이더라도 꼭 들어 달라. 내 연인들 가운데서 네가 제일 어리지 않니? 내가 죽으면 묘지 위에 내 평생 사랑해온 연인들로 엮은 꽃다발을 얹어 달라. 나는 구천에서도 내가 사랑해온 연인들 꽃다발 속에 누워 연영원히 너희들의 체취를 맡으면서 행복하게 살리라. 이것이 네가 그렇게 따르던 못난 스승의 마음 아픈 고별인사이고 한동안 너로 하여 청춘의 꿈으로 가슴이 부풀었던 나의 페부 속에서 우러나오는 고백이다.  아, 좋아하면서도 혹독하게 정을 떼야 하고 만나고 싶어도 만나지 말아야 하는 마음의 아픔이 오죽하랴. 그리워도 그리지 말아야 하고 사랑하면서도 사랑해서는 안 되는 그 지독한 내 마음의 고통을 그 누가 알랴.
161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118) 댓글:  조회:1510  추천:1  2018-08-18
                 6. 토지       햇볕이 쨍쨍 내리쬐던 무더운 여름의 열기가 휩쓸고 지나간 대지에는 선들선들 가을바람이 불어오더니 대지에 누런 칠을 해놓고 서서히 뒤로 물러났다. 벌써 낙엽이 우수수 지고 앙상한 나무 가지들이 초겨울 바람에 몸부림치고 있었다. 개혁개방하고 토지도급제를 실시해 좋은 세월을 만나 농민들은 자기 밭에 마음껏 농사를 짓고 돼지랑 오리랑 닭이랑 개랑 마음대로 치면서 부유하게 잘 살아야 했다. 그러나 세월이 청산유수와 같아 상순은 이미 칠순고개를 넘은 허리가 구부정한 고희의 연령이 됐다. 덕돌은 머리 허연 아버지가 농사를 짓는 모습을 차마 볼 수 없었다. 부모의 칠갑생일을 쇠드린 후 시내 자기 집에 모셔가겠다고 했다. 허나 상순은 도리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니야, 내 아직 손에 풀이 있을 때 농사를 지어 자손에게 입쌀이라도 가져다 줘야지.” 갓 시내에 들어간 아들과 며느리가 “올해 아버지 칠갑생일에는 꼭 환갑상을 차려 드리겠습니다.”라고 하자 상순은 눈을 지그시 감고 한참 생각하더니 천천히 한마디 했다. “칠갑생일을 쇠지 않겠다.” “무엇 때문입니까? 환갑 때에도 상을 받지 않겠다고 해서 차려드리지 못했는데 칠갑에는 꼭 상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상순은 극구 반대했다. “우리 집안에서는 옛날부터 환갑을 쇠지 않았다. 난 생활이 가난해 아버지 환갑도 쇠 드리지 못했다. 금방 광복이 나서 환갑상을 차려드리자고 했다. 허나 아버지는 할아버지도 환갑상을 받지 않았다면서 환갑상을 받는 돈이면 몇 달 먹을 쌀을 사겠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 집안에서는 대대로 환갑상을 받지 않았다.” 덕돌은 명숙을 한쪽에 데리고 가서 뭐라고 토론하더니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간청했다. “옛날 증조할아버지와 할아버지 때는 생활이 가난해 환갑을 쇠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아들 며느리 로임을 타는데 환갑상을 차려드려도 살 근심이 없습니다." 그래도 상순은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어찌 아버지께 환갑상도 차려 드리지 못했는데 내가 환갑상을 받겠느냐? 절대 받지 않겠다.” 허나 덕돌도 물러서지 않았다. “옛날은 옛날이고 이제부터 우리 집안에서 환갑을 쇠면 됩니다. 부모님께 환갑을 쇠 드리지 못하면 자식들이 한뉘 후회하게 됩니다. 아들며느리, 딸과 사위들이 차려드리는 환갑상을 뒤늦게라도 받으십시오.” 그리하여 상순은 부득불 환갑상을 받게 됐다. 상순은 며느리가 손수 지은 회색 옷을 입고 회색 모자를 쓰고 척 앉고 그 옆에 딸들이 지어준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명옥이 나란히 앉았다. 그 옆에 화룡에서 온 명옥의 오빠 근형의 노친과 마을 집안 집 하청 등이 나란히 앉았다. 병풍도 없어 맨 벽에 커다란 꽃보를 둘렀다. 아들딸과 며느리와 사위들이 정성을 다해 차린 환갑상을 마주해 앉은 상순과 명옥은 반가운 표정보다도 옛날 자기들을 낳아준 아버지와 어머니 생각에 코마루가 시큼해났다. 아들과 며느리가 절을 곱게 하고 술잔을 올렸다. “나도! 나도!” 세 살 밖에 안 되는 손자 운선이 아장아장 걸어 나오면서 술잔을 고사리 손에 쥐고 나섰다. 덕돌이 운선의 술잔에 술을 부어주자 명숙이 운선의 손에 잡은 접시위에 술잔을 담아 주었다. “어서 할아버지, 할머니께 드려라.” “내 절로. 저 절로.” 운선은 술잔을 담은 접시를 들고 할아버지와 할머니 앞으로 아장아장 다가갔다. 상순과 명순은 너무 반가와 “에이고, 고맙다. 우리 손자.”라고 하며 술잔을 받아 마셨다. 운선은 옆에 앉은 외할아버지한테도 술잔을 올렸다. “어쩜 네 살 밖에 안 되는 애가 술잔을 다 올려. 쯧쯧쯧.” 친척들은 혀를 끌끌 찼다. 종호는 반가와 외손자가 올리는 술잔을 들어 마시었다. 뒤이어 운선은 집에서 부모들이 배워 준대로 엎드려 절을 꼽싹 하였다. 운선이 엎드려 머리를 조아리며 절을 하는데 고추가 다 들여다보여 어른들이 뒤에서 “허허허” 웃었다. 친척들은 어린 손자 운선의 양반 같은 인사를 보고 혀를 끌끌 찼다. 뒤이어 은숙과 경만이, 홍자와 동준이, 은자, 성숙과 광선이 이런 순서로 딸과 사위가 큰절을 올렸다. 뒤이어 외손자와 외손녀들의 순서였다. 한마을의 외손녀들인 혜옥과 주옥, 옥희에 뒤이어 교하에서 온 외손녀 연희와 외손자 은봉, 한 마을의 외손자 철호, 경박호에서 온 외손자들인 영남과 영춘이 이런 순서로 죽 절을 올렸다. 맏딸 춘자네는 아쉽게도 남편이 앓아서 부조를 하고 오지 못했다. 상순의 큰누나 맏아들 근덕(봉순) 부부, 명옥의 남동생들인 근룡과 근삼 부부가 차례로 절을 했다. 뒤이어 조카 순애네 부부와 외조카들인 광석의 해진과 삼진 부부 등이 죽 내리 절을 올렸다. 점심에 시작한 환갑상(기실 칠갑상)은 저녁까지 물리지 않고 술을 마시고 부었다. 그날 오랜만에 상순은 또 유일한 주제가 호미가를 불렀다. 동산천리 돋으신 해는 점심때가 되어 온다 에라 에라 에라 호미야 호미 호미를 메고 가자 알뜰하게 가꾸어라 땀에서 나오는 곡식이다 에라 에라 에라 호미야 호미 호미를 메고 가자 덕돌은 아버지가 흥겹게 노래를 부르고 어머니가 덩실덩실 춤을 추는 감격적인 장면을 보고 일어나 어깨춤을 추며 녹음기를 가지고 일일이 녹음해 두었다. 명옥은 일년 사시절 열두달 노래를 단숨에 죽 내리 불렀다. 덕돌과 명숙, 그리고 성숙은 흥겨워 연신 부모의 노래에 맞춰 춤을 추었다. 가정오락은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모르고 계속 됐다… 부모에게 환갑상을 차려 드린 후에도 덕돌은 어쩐지 효성을 다하지 못한 감을 느꼈다. (환갑상을 차려드려서야 어찌 자기를 낳아주고 길러준 부모, 자기에게 모든 것을 다 준 부모에게 효성을 다 했다고 할 수 있으랴. 칠순이 된 부모는 하나라도 맥이 있을 때 농사를 지어 아들며느리에게 입쌀 한 마대라도 가져다주려고 아직도 곡식밭에 얽매여 있지 않는가? 어머니는 눈 풍설이 이는 날에 고추와 물고기를 이고 다니면서 팔아 번 돈으로 재봉침과 첫날 비단이불 세채까지 해주고서도 지금도 자녀들에게 하나라도 보태주려고 애를 쓰고 있다. 허나 대학까지 졸업한 나는 부모에게 해드린 것이 무엇인가?) 덕돌은 생각할수록 마음이 아팠다. (옛날에 부모들은 아침밥을 드시고 나면 저녁에 솥에 얹을 쌀을 근심하면서도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모시고 여동생까지 시집보내지 않았는가? 그때에 비하면 우린 먹을 근심은 없지 않는가? 살기 어렵더라도 부모를 모셔가야 한다. 후회를 남기지 말고 부모에게 효성을 다 해보자.) 덕돌은 아내와 토론하고 손님들이 다 돌아가기를 기다려 부모에게 정식으로 시내로 모셔가겠다는 의향을 말씀드렸다. 그러자 상순은 한숨을 후 내쉬면서 밭고랑 같은 얼굴에 근심어린 표정을 지었다. “얘야, 모셔가겠다고 하니 고맙긴 하다. 허나 아직 우린 농사를 지을 수 있다. 시내에 가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어떻게 사니?" 덕돌은 한사코 고집했다. “아버지, 한뉘 농사를 지으면서 자식들을 키우느라고 고생했는데 이젠 그만 두고 아들며느리 집에 가서 편안히 계십시오. 우리에게도 효성을 할 기회를 주십시오.” 그러나 명옥도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얘야, 시내에 가서 손발을 싸매고 있으면 속이 타서 어떻게 사니? 우린 땅을 떨어져서 살지 못한다. 밭에 나가 허비며 일하고 나면 하루가 어떻게 가는 줄도 모르고 좋다.” 속으로 그 말에 도리가 좀 있다고 생각했지만 덕돌은 아들의 체모를 세우고 불효자로 되지 않으려고 한사코 모셔가겠다고 했다. “잘 고려해보십시오. 불시에 가자고 하면 잘 납득이 되지 않겠지만 한데 가시는 건 도리에 맞는 것 같습니다.” 상순과 명옥은 한참 궁리하더니 “우리도 잘 생각해보고 가겠다.”라고 하면서 며느리 명숙의 눈치를 살피는 것이었다. 눈치 빠른 명숙은 제꺽 “부모님, 오세요. 따뜻한 장국에 이밥이라도 드리면서라도 잘 모시겠습니다.”라고 했다. 허나 말이 쉽지 부모를 모시는 일이 그리 쉬운가? 덕돌은 집에 갔다가 일주일 후에 쉬는 일요일에 다시 부모를 찾아갔다. 허나 상순은 엄숙하고 냉정한 표정을 지었다. “얘야, 너희들 둘의 월급을 가지고 우리 늙은이 둘에 애까지 다섯이 살만 하냐? 너넨 엉덩이를 들여놓을 집도 없이 세집에서 살림살이를 하면서 우리를 데려다 어떻게 한집에서 산다고 그러니?” 그 말에 덕돌은 머리를 숙였다. 사실 덕돌은 신물이 나게 세집살림을 했다. 명숙이가 다닌 위생학교 앞에 뉘 네 허덕칸에 구들을 놓은 9평방미터도 되나 마나한 세집에서 살았다. 그런데 수돗물도 없어 그 추운 겨울에도 뒤문을 열고 주인집에 들어가 명숙이 날마다 물을 길어 와야 했다. 뒷문이 누게 차고 얼어붙어 잘 닫을 수 없어 종이함을 뜯어다 세워 놓았지만 의연히 겉바람이 들어와 집안의 물독이 떵떵 얼어붙을 지경이었다. 그리하여 덕돌과 명숙은 석탄을 사다 불을 죽으라고 때였다. 그러니 구들은 따갑고 겉바람은 의연히 있어 말이 아니었다. 네살 밖에 안 되는 운선은 자기 살 도리를 하느라고 머리를 썼다. “아버지, 그쪽 문 쪽이 추워서 감기에 걸리겠습니다. 나와 자리를 바꿀까?” “저애가 구들이 따가워 저러는 모양이구나.” 덕돌은 인차 “그러자.” 하고 운선과 자리를 바꿔 누웠다. 그런데 운선은 한참 누워보니 겉바람이 있어 이마까지 시려나 인차 “아버지, 아버지, 그쪽이 따가워 어떻게 쉬겠습니까? 내 거기 누울까?”라고 했다. “추운 모양이구나. 바꿔 눕자.” 어린애도 자기를 따라 세집에서 추운 고생을 하는 처자가 불쌍했다. 밤이 깊어도 덕돌은 바깥에서 불어치는 눈보라 소리를 들으면서 잠이 오지 않았다. 그는 옆에 누운 처자의 얼굴을 살살 만지면서 속으로 피눈물을 흘렸다. “언제 집 고생을 하지 않을까?” 덕돌은 이를 악물고 꼭 자기 집을 장만하려고 마음먹었다. 후에 그들은 단위로부터 교외에 있는 집도 집이라고 나가 들었다. 단위에서 농업기지의 소와 말을 기르던 우사 자리에 손바닥만한 구들을 놓은 두간짜리 집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자기 집이라고 있게 돼 기뻤다. 허나 출퇴근이 문제였다. 여름에 소낙비가 내리거나 겨울에 눈이 오면 자전거를 타고 5킬로미터나 떨어진 교외에서 출퇴근하기란 조련치 않은 일이었다. 시내 큰길의 눈은 쳤지만 교외 큰 길의 눈은 치지 않았다. 그리하여 큰 눈만 오면 버스도 미끄러워 오르막길을 톺아 오르지 못해 통하지 않았다. 자전거도 방아 호박처럼 오목하게 파인 자동차 바퀴자국을 따라 타야 했다. 그러다가 맞은편이나 뒤에서 차가 달려오면 급히 자전거에서 내려 밀고 길옆으로 피해야 했다. 어떤 때에는 날이 갈수록 자동차바퀴자국이고 큰길 전체가 얼면서 빤질빤질한 얼음판이 돼서 명숙은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몇 번이고 차에 치일 번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병원 유치원에 다니던 운선을 떼서 눈물을 머금고 교외 농촌 유치원에 보내지 않으면 안됐다. 농촌 유치원에서 속산반을 꾸렸는데 운선은 머리가 총명해서 주산을 놓으면서 계산공부를 하더니 나중에는 주산을 치지 않고서도 손가락을 꼽았다 폈다 하면서도 세자리 수 20~30개씩 합해냈다. “야, 우리 아들 정말 장하다!” 덕돌과 명숙은 운선을 껴안고 기뻐 어쩔 줄 몰라 했다. 자기를 따라 그렇게 고생하는 처자가 불쌍해 덕돌은 자기 무능력함에 속이 아팠다. 상순은 아들과 며느리가 그렇게 고생스레 살아나가는 것을 알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시내에 한데 가는 것을 소홀히 결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시내에서는 남새고 뭐고 지어 쓰레기를 버려도 다 돈이 든다던데 잘 고려해보아라. 살기 어려우면 가정이 화목하지 못하고 우리도 며느리 눈치를 보면서 살자면 여기 있기보다 더 불편하다.” 그때 명옥은 속심의 말을 이렇게 했다. “시내 어느 교외에라도 밭이 있는 마을에 가서 남새농사를 지으면서 살면 좋겠는데. 너희들 집과 가까이에 집을 잡으면 자주 귀여운 손자도 안아보면 좋겠는데.” 덕돌은 생각지도 않은 그 말에 한참 궁리하다가 “그런 자리는 아직 없습니다. 한뉘 농사를 지었는데 아직도 그렇게 밭에서 헤매고 싶습니까?”라고 물었다. 그러자 상순은 머리를 끄덕였다. “그래, 한뉘 농사를 지으면서 살았기에 불시에 밭을 떠나서 살기 어렵다. 자기 손으로 심은 가지나 오이를 똑 뜯어 된장에 찍어 먹으면 좀 좋니?" 부모의 말씀에 도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교외에 밭이 있는 집을 파는 게 없는가 알아봅지요.” 상순은 담배를 굵직하게 말아 피우면서 속심의 말을 털어놓았다. “정작 떠나자니 밭이 아깝구나.” “밭이 얼마라고 그럽니까?” “논 3짐 9푼에 한전 2짐 1푼, 모두 6짐이다.” “고까지 거 가지고 그럽니까? 교외에 가서 그만한 밭을 얻어 놓겠습니다.” 허나 상순은 아주 아쉬워했다. “저 소서구 밭은 다른 밭이다. 저 밭에는 너의 증조할아버지대부터 우리 집안 식구들이 대대로 피땀을 몰 부어 일군 밭이다. 저 밭의 어느 밭고랑엔들 우리 발자국이 찍혀 있지 않은 게 있겠느냐?” 그 말에 덕돌도 머리를 숙이었다. 아버지 그 깊은 마음, 토지에 대한 깊은 애정을 알지 못한 자기를 속으로 통탄했다. 이때 문이 벌컥 열리더니 뜻밖에도 해월이 들어섰다. “아이고, 대학생이 왔구먼.” 해월은 해시시 웃으면서 “어째 그 예쁜 새 각시는 데리고 오지 않았소?” 하고 물었다. 덕돌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해월은 횡설수설 허튼 소리를 쳤다. “각시를 너무 똑똑한 거 얻어도 부모를 모시기는 틀립네. 보오. 머리 시허연 시부모를 여기 두고 시내에서 혼자 잘 살자는 거. 쯧쯧쯧." “얘, 무슨 험한 말을 해?” 덕돌은 아니꼬운 눈길로 해월을 흘겨보았다. 해월은 정규상 교수의 치료를 받은 후 정신이 많이 나아졌다. 허나 아직도 주책없이 말할 때도 있었다. “덕돌, 봐라, 내하고 결혼했더라면 네 부모를 포대기에 싸 업고 다닐 지경이었겠는데. 후회되지?” 덕돌은 그 말에 어이없어 입을 하 벌리고 말았다. 허나 해월은 계속 앙탈을 부렸다. “어째, 대학생이 되더니 나를 깔보니?” “…” 덕돌과 상순은 정신병자의 말이라고 탄해듣지도 않고 그저 듣는 척 했다. “덕돌아, 내 정신병을 앓았다고 업신여기겠니? 농민과부라고 웃지 말라. 너네 부자간이 정교수한테 소개해 치료해서 이젠 완전히 정신병이 나았다.” 덕돌이 머리를 들어 해월을 바라보았다. 해월은 진지한 표정을 지은 철색얼굴에 눈물을 주르르 흘리는 것이었다. “나도 악몽에서 깨나고 보니 세상이 어지러워 못 살겠다. 고통스럽다. 이 세상이 저주롭기만 하다. 어쩜 우리 부모는 정신 나간 딸을 지주네 늙다리 아들놈에게 깔리게 놔뒀단 말이냐? 시집보낸 것도 아니고. 우리 아버지 썩어져 싸다. 절대 아까와 하지 않아. 절대 네 아버지 우리 아버지를 총살 받게 했다고 원수로 여기지 않아. 제 딸을 짓밟게 놔둔 아빠나 엄마나 몽땅 총살해도 싸다. 짐승보다도 못한 것들이야. 엉, 엉, 엉~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원통해 분통이 터진단 말이야. 엉~ 엉~ 엉~” 덕돌은 해월이 불쌍해났다. “얘, 지나간 일은 몽땅 잊어라. 넌 이제야 30대 초반인데 새 출발을 해라.” “새 출발?” “그래. 인생은 마라톤과 같아. 스타트에선 발목을 풀쳤지만 이제부터라도 정신을 차리고 새 출발을 해라.” 그러나 해월은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그런 듣기 좋은 소리는 하지 말라. 넨들 늙다리지주아들놈에게 짓밟힐대로 짓밟힌 나 같은 년을 색시로 데려가겠니? 처녀 때 지주 아들놈의 아들까지 낳은 개 쌍년을?” 해월은 훌쩍 일어나면서 “미안하다. 또 주책없는 소리를 해서. 난 충국의 새끼를 남에게 주고 이 더러운 세상을 영영 떠나 버리겠다.”라고 했다. 상순은 일어나 따라 나가면서 해월을 불러 세웠다. “얘, 짧은 생각은 절대 하지 말라. 네 엄마는 자식이라고는 너 밖에 없잖니? 네까지 어떻다고 하면 어떻게 살겠니?” 허나 해월은 냉소했다. “쳇, 덕돌이 아빠와 해서 낳은 아들 을준이 있지 않습니까?” 덕돌은 바깥에 따라나가 해월을 보고 “그래 어찌 할 예산이냐?” 하고 물었다. 해월은 생글방글 웃으면서 말했다. “이 더러운 속세를 벗어나 저 머나먼 관내로 가서 절당에 들어가야지. 중들이 사는 세상이야 말로 색깔도 없고 탐욕도 없고 평화로운 세상일 거야. 호호호. 얼마나 좋아? 까까머리를 하고 끓여놓은 죽물을 마시면서 경이나 읽고. 둥둥둥. 북쳐라.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해월은 합장하며 상순과 덕돌에게 허리 굽혀 인사하고는 큰길에 나가더니 바람결처럼 함흥촌 쪽으로 사라져갔다. 상순은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었다. 흥수로 인해 새파란 나이에 인간대접을 받지 못한 해월의 앞날이 근심스럽기만 했다. 덕돌은 몇달 동안 돌아다니다가 사촌처남 종수에게서 교외 실현촌에 밭 4짐이나 있는 집을 팔려고 한다는 말을 듣고 아버지를 데리고 가서 사기로 했다. 상순도 아들에게 효성을 할 기회를 주지 않으면 장차 후회하게 만들까봐 속에 썩 내키지 않으면서도 이사해 갔던 것이다. 그것은 새로운 생활에 대한 실험이기도 했다. 그런데 조개덕에서 말썽이 생겼다. “여기서 농사를 짓지 않고 시내로 이사해 가면서 어떻게 우리 촌 밭을 계속 가지오?” 흥수네 형제들은 원래 흥수 일로 해 상순에게 원한이 있는데다가 이번에 보복할 아주 좋은 기회라고 앙심을 먹었다. 상순한테 앙심을 먹은 병진도 떠들어댔다. “실현 촌에서 밭을 가졌으면 여기 밭을 내놔야지. 앞뒤치기를 할 예산이요?” “양심이 있소?” 설상가상으로 지주 장학산의 딸 장미란과 지학사의 아들 지괴호마저 한바지를 입고 뛰쳐나와 춤췄다. “아무리 공산당원이라고 두 곳에서 밭을 가지면 되는가? 우리 지주들을 타도하더니 당원들이 새 지주로 되려는 게 아니고 뭔가?" 상순은 촌에서 회의를 열고 후계자로 배양한 신입당원 숭길에게 당지부 서기를 넘겨주고 자기 입장을 분명히 했다. “내 완전히 이사 가는가 하지 말라. 아들이 모셔가겠다고 해서 집을 팔고 교외에 가서 잠시 심심풀이로 남새농사를 지어보려는 것뿐이다. 나는 한뉘 이 곳에서 농사를 짓던 사람이다. 저기 소서구 밭이랑 우리 증조할아버지 때부터 황무지를 개간해 일군 밭이다. 내 결코 저 밭을 던지고 갈 사람이 아니다. 올해는 사위한테 밭을 붙이게 하고 사위 집에 있으면서 함께 농사를 지을 예산이다. 난 죽어도 함흥촌의 귀신이 될 것이고 저 뒤 산에 묻혀 우리 마을을 살펴보고 이 땅을 지킬 것이다. 이제 누가 감히 내 밭을 가지고 말하면 용서하지 않을 테다.” 그러자 지주들은 겁을 집어 먹고 입을 딱 다물고 찍 소리도 하지 못했다. 허나 병진과 지춘실은 뒤에서 계속 여론조성을 했다. 허나 상순의 후임 촌서기 숭길이 “상순 일가는 함흥촌에 한 공훈이 아주 크다”고 말하면서 말리였다. 상순의 둘째사위 경만은 눈을 부라리면서 누가 감히 가시아버지네 밭을 나눠가지겠다고 하면 가만 놔두지 않겠다고 을러멨다. 더구나 잠시 체면을 봐서 한마디 말도 하지 않지만 동네 사람들의 동향을 슬슬 살피며 무슨 궁리를 하는지 모를 덕돌이 더욱 무서웠다. 그래서 두부 콩물처럼 부글부글 끓어 번지던 여론은 죽 내려가 버렸다. 한뉘 한평생 토지에 얽매여 사는 농민들의 토지에 대한 욕심은 형언하기 어려웠다. 상순이 이사 간다고 하자 일부 사원들은 리대득실에 눈이 어두워 그 기회에 상순 일가의 몇 푼 안 되는 토지라도 빼앗아 나눠가지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한 동안 서로 눈치를 보면서 상순의 토지에 대한 말은 입 밖에 감히 내지 못했다. 상순은 농사가 바쁜 계절마다 사위 집 위방에 있으면서 사위를 도와 농사를 지었다. 둘째사위 경만은 우사간에서 넘어지는 바람에 무릎을 다쳐 다리를 절었다. 상순은 불쌍한 사위를 대신해 밭갈이를 하고 벼 모를 수레에 실어 나르고 가을을 하고 탈곡까지 해주었다. 그러자 첫해에는 누구도 감히 상순이네 밭을 넘보지 못했다. 이듬해 봄에 상순이 자식들을 도우려고 교외 실현촌에서 남새를 심고 함흥촌에 가서 벼농사를 지으며 분망히 보냈다. 덕돌과 명숙은 일요일이면 돼지고기를 사 들고 운선을 자전거에 싣고 교외로 나가 부모 네를 도와 남새밭 기음을 매고 고추랑 가지랑 뜯어 주었다. 운선은 집에서는 돼지고기 한 점도 먹지 못했다. 실현촌 할아버지네 집으로 가면 돼지고기를 먹을 수 있어 늘 할아버지 집으로 가자고 떼를 썼다. 그리하여 운선은 자전거에 앉아 할아버지네 집으로 갈 때면 흥이 났다. 그 애는 울퉁불퉁한 길로 달리는 아버지나 어머니 자전거에 앉아 자기절로 노래를 지어 콧노래를 흥얼흥얼 불렀다. 실현촌엔 울퉁불퉁한 오르막도 많고 돌멩이도 많고 많다야 할아버지네 집에 가면 돼지고기랑 먹을 수 있어 일요일마다 할아버지네 집에 가면 참말 좋다야 조꼬만 애의 노래소리를 듣고 덕돌과 명숙은 자전거를 타면서 웃음보를 터뜨렸다. 운선도 아버지 어머니를 따라 밭에 나가 키를 넘는 큰 가지 사이로 아장아장 다니면서 애고사리 손으로 길쭉길쭉한 가지를 뜯어 비닐 주머니에 걷어 넣었다. 덕돌은 이른 아침이면 출근하기 전에 자전거에 가지를 가득 실어 장마당에 가져다 어머니가 팔게 했다. 어떤 때에는 전날 저녁에 자전거로 남새주머니 서너개를 실어다 자기 집에 두었다가 어머니가 오기를 기다려 장마당에 실어다 주군 했다. 소낙비가 억수로 퍼부어 혼자 실현촌의 가파른 오르막길을 올라가지 못해 명숙이까지 비옷을 쓰고 달려와 자전거를 밀어 주군 할 때도 있었다. 명숙은 병원에서 밤 직일을 서고서도 곤해 눈을 집어 뜯으면서도 찹쌀을 가지고 가서 시부모가 잡수라고 시루에 찹쌀을 얹어 끓여 퍼내 떡메로 찰떡을 떵떵 쳤다. 실현촌의 아낙네들이나 동네 어른들은 “어쩜 시내 각시 저렇게 효성이 지극하고 부지런하오?”라고 혀를 끌끌 찼다. 그런데 어려운 살림을 사는 아들과 며느리를 하나라도 도우려고 남새농사를 짓느라고 애를 쓰던 그만 불행하게도 중풍에 걸릴줄을 누가 알았겠는가. 덕돌은 이상해 했다. (아버진 혈압이 낮은데 어떻게 중풍에 걸렸을까?) 덕돌은 썩 후에야 중풍은 혈압이 낮아도 걸린다는 것을 뒤늦게나마 알게 됐다. 그는 자기가 의학상식이 모자란 것을 못내 통탄했다. 아버지는 혈압이 낮은데 전록환이란 사슴피로 만든 약을 잡수면 혈압이 올라가 중풍을 맞게 된다고 전록환을 잡숫지 말라고 말린 것을 후회하고 또 했다. 전날에 상순은 남새밭에 물을 대려고 물도랑 둑을 손질했다. 부지런히 삽질을 하다가 별스레 손이 부들부들 떨리면서 삽질이 온전히 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쉬면서 담배를 말아 피우려고 해도 손이 떨려 좀처럼 말기 힘들었다. 그때 원래 좀 더 쉬였으면 모르겠는데 물도랑의 물이 새는 것을 보고 가만 둘 수 없어 계속 삽질해 흙을 둑에 파 올려 새는 물을 막았다. 이튿날 아침에 밭으로 나가려고 일어나려고 하니 왼쪽으로 비실비실 넘어가면서 걸음이 온전히 되지 않았다. 명옥은 황급히 한 2리 떨어진 시내에 가서 덕돌을 불러 왔다. 덕돌이 와서 아버지를 보니 완전히 걷지 못했다. 덕돌은 바삐 삼륜차에 아버지를 싣고 집에 돌아와 병원 내과에서 일하는 명숙에게 보였다. 명숙은 내과 간호사로 오래 일했기에 어진간한 의사와 마찬가지였다. 그는 인차 풍이 왔다면서 중풍을 맞은 시아버지를 보고 집에서 움직이지 말고 기다리라고 했다. 한참 후 그녀는 병원에 가서 의사와 토론하고 여러가지 약을 섞어 넣은 점적주사를 가지고 와서 상순의 팔에 놓아주었다. 흘러 떨어지는 링겔 방울을 올려다보면서 상순은 아들에게 “난 옛날 아버지 앓아도 이런 링겔을 한대도 맞혀보지 못했다. 지금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라고 했다. 며칠 동안 며느리의 살뜰한 치료를 받고 상순은 일어나 바깥출입을 할 수 있게 됐다. “야, 이젠 일없으니 집으로 가 남새밭에 물을 대야겠소.” 시아버지 말에 명숙은 말렸다. “아버님, 가지 마십시오. 잘 치료하지 않아 재차 풍이 오면 정말 일어도 나지 못하게 됩니다.” “다 나았는데 뭘 치료한다고 그러오? 가겠소.” 덕돌도 막아 나섰다. “아버지, 남새 밭 물은 잘 볼 테니 근심하지 말고 계속 치료 받으시오.” 그런데도 상순은 고집을 쓰고 집으로 돌아갔다. 벽이라도 차고 마구 나가는 상순의 고집을 누가 말리겠는가! 상순은 돌아가 이틀도 안 돼 재차 풍이 와서 사지를 완전히 놀리지 못하게 됐다. 다행히 며느리가 시름을 놓지 못해 신랑을 딸려 보내 시아버지를 일을 하지 못하게 말리라고 하고 저녁이면 주사를 놓아주러 다녔기에 제때에 발견해 목숨만은 구해냈다. 덕돌과 명숙은 그날 저녁으로 아버지를 삼륜차에 실어 시내 병원으로 모시고 가서 명숙이네 과에 입원시켰다. 덕돌과 명숙은 윤번으로 아버지를 살뜰히 간호했다. 덕돌은 단위의 글을 쓸 걸 병원에 가지고 가서 쓰면서 아버지 대소변을 받아내고 세수를 시켜 주었다. 명숙은 대야에 따뜻한 물을 퍼다 시아버지 얼굴과 발을 깨끗이 씻어주고 발톱까지 똑똑 깎아드렸다. 한 병실에 입원한 환자들은 모두 명숙을 효성이 지극한 며느리라고 혀를 끌끌 찼다. 저 멀리 교하에서 맏딸 춘자와 셋째사위 동준이 병문안을 하러 달려왔다. 춘자는 울면서 늘그막에 일을 하다가 중풍에까지 걸린 아버지 손을 만지었다. 상순이 중풍을 맞아 병원에 입원했는데 사지를 까딱 움직이지 못한다는 소문이 함흥 촌에 퍼지자 또다시 상순 네 토지문제가 터졌다. 상순이 없는 사이에 감옥에 갔다 온 병진의 아들 철주가 촌민소조 조장을 맡았다. 그는 생산 대 원 대장 허동원과 상순의 토지를 촌민들에게 나눠줘야 한다고 제기했다. 그때 허동원은 덕돌과 돌을 제방 둑으로 메 올리다가 허리를 상한 일이 있어 속으로는 앙심을 먹고 상순의 토지를 빼앗고 싶었지만 겉으로는 그런 내색을 내지 못했다. 상순의 둘째사위 경만과 은숙의 눈치가 보였지만 그보다도 그 뒤에 호랑이 같은 덕돌이 무서웠다. 촌민소조의 일부 사람들이 목숨과 같은 토지를 빼앗으려고 한다는 말을 들은 후 상순은 병상에 누워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아버지가 낙루하는 모습을 본 덕돌은 가슴을 칼로 한 오리 한 오리 찢어내는 것 같아 당장 뛰어가 철주와 동원의 멱살을 틀어쥐고 치고 싶었다. 하지만 금방 가도 문화소로부터 신문사로 전근해 갔기에 몸을 뺄 수 없었다. 덕돌은 병상에 누운 아버지의 허연 수염을 깎아드리면서 위안의 말씀을 해드렸다. “아버지, 근심하지 마십시오. 누가 감히 아버지 밭을 뺏는다고? 이제 내가 쉬는 날에 가서 해결할 터이니 근심하지 말고 병이나 잘 치료해 빨리 일어납소. 가을에는 고향 마을에 가서 과수원에 주렁주렁 달린 사과배랑 구경합시다.” 그 말을 듣고 상순은 눈을 스르르 감았다. 그의 눈확에서 눈물이 솟아올라 밭고랑 같은 주름살이 진 얼굴에 주르르 흘러내려갔다. 덕돌은 아버지의 인생좌우명을 알고도 남음이 있었다. "사람이 빚을 지고는 살아도 시비에 지고는 못 산다." 이 시각 아버지는 뻔한 시비에 질 수 없었다. 그러나 중풍에 걸려 마을에 가서 시비를 밝히지 못하는 것이 한이었다. 아버지의 마음을 읽대로 읽은 조왕돌의 격분에 넘치는 뜨거운 눈물이 아버지의 주릅잡힌 얼굴에 방울방울 떨어졌다. 그는 속으로 번개 불처럼 복잡한 생각이 번쩍이고 있었다. “현 공안국 국장벼슬도 다 초개같이 여기고 내팽개친 후 함흥촌 백성들을 잘 살게 하려고 한평생 애쓴 아버지 밭을 빼앗아? 배은망덕한 사람들, 량심이 있는가? 내 기필코 용서하지 않을 테다!” 그는 현 정부로 찾아갔다. 원래는 이계삼 부서기나 허영주 부현장을 찾아 가려고 했지만 그만 두었다. 그들은 이미 현 지도자 자리를 내놓았지만 덕돌이 찾아가면 상순의 토지문제를 해결해주려고 힘써줄 것이었다. 허나 덕돌은 요만한 일로 해 노간부들을 찾아가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 그리하여 먼저 현 토지국에 가서 국가 토지정책을 알아보았다. 그때 그를 맞아준 토지국 국장은 문화대혁명 시기에 반혁명으로 억울하게 몰리어 감옥에 들어갔던 한영수였다. 한영수는 한창 민정국 국장 김진욱과 문화대혁명 때 사형장에 끌려 나가 총살 맞다가 살아남아 돌아온 얘기를 하다가 덕돌을 접대했다. 덕돌은 자기 고향 마을의 일부 농민들이 아버지 토지를 빼앗으려고 하는 정황을 죽 이야기했다. 한영수 국장은 토지정책 자료를 꺼내 보이었다. “호적이 어데 있으면 어데서 밭을 줘야 하오. 늙고 노동력을 상실했다고 함흥촌 개척자나 다름없는 동무의 아버지에게 토지를 주지 않는 것은 국가 토지정책을 위반한 행위요.” 그 자리에 있던 민정국 국장 김진욱도 한마디 했다. “함흥촌에서 정말 한심하구먼. 어떻게 촌 당지부 노서기가 중풍에 걸렸는데 보조해주기는커녕 밭마저 빼앗아내려고 한단 말이오?” 그는 뒷말을 이었다. “진수해 공사 민정소에 말해서 동무 아버지에게 병을 치료하라고 치료비를 얼마간 내주라고 하겠소.” “감사합니다.” 한영수 국장은 과단하게 태도표시를 했다. “먼저 촌에 가서 국가 토지정책을 말하고 상순 노서기의 밭을 빼앗으려는 무지막지한 행위를 제지시키오. 만약 동무가 말해서 안 되면 내 진수해공사 토지관리소에 말해 해결해 주겠소.” “감사합니다.” 두 분에게 인사하고 토지국에서 나온 덕돌은 온 몸에 힘이 솟구치는 감이 들었다. 당과 정부에서는 올바른 토지정책을 제정해놓았고 한뉘 공산당을 따라 혁명해온 그의 아버지를 잊지 않고 있었다. 그는 단위에 일이 많아 먼저 고향 마을에 갈 수 없었다. 하여 집에 돌아오자마자 먼저 전체 촌민들에게 알리는 편지를 써서 띄웠다. 존경하는 고향 마을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지척에 있어도 사업이 바빠 무례하게 편지를 먼저 띄우는 것을 널리 양해하십시오. 듣는 말에 의하면 일부 촌민들이 언감 우리 아버지의 토지를 날강도처럼 빼앗으려고 한다는데 당장 날강도 행위를 그만둘 것을 미리 경고합니다. 현 토지국에 가서 알아본데 의하면, 국가 토지정책에는“어느 곳에 호적이 있으면 어느 곳에서 토지를 나눠줘야 한다.”라고 명확히 규정해 놓았습니다. 누가 감히 국가 토지 정책을 어기고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 토지를 빼앗아간단 말입니까? 도리에 맞지 않는 날강도 행위를 멈추십시오. 다음 저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조선에서 정든 고향을 떠나 7세에 소서구에 와서 증조할아버지와 할아버지, 부모들과 함께 황무지를 일궈 밭을 만들었습니다. 고향 마을 사원들이 쌀 고생을 덜 하게 하려고 당신들의 부모들을 이끌어 멍지뫼산 앞의 부르하통하 강을 막고 산종 논밭을 만들었고 이펑거 습지를 채워 넣고 논밭을 풀었으며 장개골 안에 옥답을 일궜습니다. 저 소서구나 장개골 안, 산종, 우리 함흥촌의 어느 밭고랑에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의 발자국이 찍혀있지 않은 것이 있습니까? 어느 밭에 우리 아버지 땀방울이 배지 않은 밭이 있겠습니까? 누가 과수원과 양봉장, 인삼장을 꾸렸고 벽돌공장을 차렸습니까? 당신들이 들어 살고 있는 벽돌집은 누가 벽돌공장을 차려 벽돌을 구워 지은 것입니까? 양심적으로 생각하리라 믿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범바위골에 가서 감자농사를 지어 감자 한 알이라도 더 사원들에게 나눠주느라고 애썼습니다. 어디 이뿐입니까? 고향 마을의 땅을 보호하기 위해 십대 어린 시절부터 항일유격대에 쌀을 메다주고 일제 놈들과 싸웠고 우리 마을 백성들의 생명과 재산을 국민당 토비들의 철 발굽 아래에서 보호하려고 삼도만 토비를 숙청하고 국민당 반동파 잔여세력을 숙청했습니다. 우리 마을 인민들을 배불리 먹고 잘 살게 하려고 호조조, 인민공사의 생산대대를 꾸려왔습니다. 당신들을 배불리 먹게 하려고 애써온 우리 아버지에게 차려진 밭도 한고랑 주지 않는 것이 도리에나 양심에나 맞습니까? 우리 아버지 밭을 빼앗자는 것은 우리 마을 건설에 한생을 다 바친 우리 아버지를 쌀도 없이 굶어 세상 뜨라는 거나 뭐가 다를 바 있습니까? 나는 우리 고향 마을의 양심적인 백성들은 앓아 눈 우리 아버지 밭을 빼앗아가지 않으리라고 굳게 믿겠습니다. 허나 만약 누가 계속 지엄한 국가 토지법을 어기고 우리 아버지 토지를 빼앗으려는 날강도행위를 고집스레 감행한다면 하늘땅이 용서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늘땅이 매돌 질을 해 육 밥을 만들 것입니다. 희망하건대 우리 아버지 토지에 대한 헛된 욕심을 버리고 명지한 처사를 하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며칠 후면 이 덕돌과 만날 날이 있을 것입니다. 그때 이 덕돌이 무정하다고 나무라지 말기를 바랍니다. 고향의 못난 아들 덕돌 올림 덕돌은 또 편지를 따로 써서 아버지 토지를 기어이 빼앗아내려는 철주와 허동원, 장미란, 지괴호 등 몇몇 시비 없는 무지막지한 자들에게도 보냈다. 다만 사원들에게 보낸 편지와는 달리 공포하리만큼 “목숨을 내걸고 우리 아버지 토지를 빼앗아봐라.”, “대가리가 성해 있겠으면 작작 떠들어라!”, “돌을 들어 제 발등을 까지 말라.” “대가리 목 위에 붙어 있는 게 원수냐?” 등등 위협적인 말을 딱딱 박아 넣었다. 또 아버지 양성 하에 입당하고 아버지 후임으로 촌 당지부 서기로 된 숭길 등에게는 토지를 빼앗아내려는 이전의 지주 아들딸들과 감옥에 갔다가 와서 공산당에 앙심을 먹은 자들의 날강도행위를 제지시켜달라고 부탁했다. 편지가 날아간 후 과연 고향 마을에서 돌풍을 일으켰다. 너무나도 국법을 인용해가면서 설득력 있게 도리를 따지었는지 대부분 사람들은 함흥 촌 건설과 고향 마을 사람들을 위해 한생을 다 바친 상순의 토지를 빼앗는 것은 잘못이라면서 토지를 줘야 한다고 했다. 또 무시무시하고 날이 선뜩선뜩하게 선 위협과 공갈을 섞어가면서 보낸 공포의 편지를 받은 지괴호나 장미란은 입에 빗장을 질렀다. 허나 전임 생산대 대장 허동원과 현임 촌민소조 조장 이철주는 지주 아들딸과는 달리 두려운 것이 없다는듯 계속 상순의 토지를 사원들에게 나눠 줘야 한다고 앞에서는 감히 말하지 못하고 가만가만 뒷공론을 했다. 덕돌은 둘째누나 은숙과 매형 경만에게서 그 말을 들은 후 휴식하는 날에 고향 마을로 자전거를 타고 올라갔다. 그는 마을에 들어서자 매형네 집에 들지도 않고 다짜고짜 철주를 찾아갔다. 문을 뚝 떼고 들어서자 철주는 한창 부엌아궁이에 불을 때고 있고 여편네는 쌀을 일어 가마에 얹고 있었다. “형님이 왔소?” 철주는 덕돌을 보자 때 아닌 시퍼런 대낮에 덮쳐드는 호랑이를 본 듯이 질겁했다. “이 새끼야, 누가 감히 우리 부모 땅을 빼앗니? 네 놈 새끼냐?” “아, 형님, 그래 노동력을 다 잃은 그 집 아바이 농사도 짓지 못하는데 밭을 해 뭘 하오?” 철주는 겁이 나 손으로 낯을 막고 풍무 쪽으로 몸을 기울이면서 주둥이만은 살아서 게속 너펄거렸다. “뭐라고? 아직도 주둥이질이냐?” 덕돌은 다짜고짜로 철주의 멱살을 틀어쥐어 흔들면서 버럭 고함쳤다. “네가 감히 국가토지정책을 어기고 땅을 빼앗으려고 미쳐 날뛰겠느냐? 어째 우리 아버지가 일신을 쓰지 못한다고 업신여기니?! 우리 아버지 일군 밭이 얼마인데 네가 타고장에서 굴러 온 놈이 감히 뺏어? 네 아비 감옥에 간 게 우리 아버지 탓이냐? 탈곡장 낟가리에 불을 지른 네 아비 탓이지. 악감 먹고 감히 우리 아버지 밭을 빼앗아?!” 철주는 쇠 집게 같은 덕돌의 손에 멱살이 꽉 조여져 숨도 겨우 쌕쌕 쉬면서 낯이 거멓게 질려갔다. 이때 마을 사람들이 모여왔다. 그 속에는 병진도 있었다. 덕돌은 숱한 사람들 앞에서 먼저 편지내용처럼 도리를 따졌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들 덕돌의 말에 머리를 끄덕였다. “김 서기한테 밭을 줘야 하오. 뺏는 건 도리 없소.” 숭길도 팔을 걷고 나서서 구들에 올라와 말했다. “모두들 모인바 하고는 촌민회의라고 열기오.” 덕돌은 숱한 사람들 앞에서 손을 더럽히지 않으려고 철주의 멱살을 놓았다. 허춘은 돌아다니면서 마을 사람들을 불러 왔다. 박숭길은 서기 각도로 나서 촌민회의를 사회했다. “여러분, 김 서기 밭을 줘야 하오. 우리 마을을 건설한 공적을 봐서라도 새해에 밭을 더 줘야 하오. 노동력이 없다고 주지 않아서야 되오? 국가 토지정책에도 어디에 호구 있으면 어디에서 밭을 줘야 한다고 규정해놓았소. 모두들 어떻소? 동의하오?” “동의하오!” 사원들은 모두 동의했다. 명옥의 양아들 이수봉은 두 손을 들어 찬성했다. 허나 덕돌이 여겨보니 철주는 부엌에 불을 때면서 뭐라고 계속 볼 멘 소리를 했다. 허동원은 역은 사람이어서 덕돌의 시뻘건 눈길이 곱지 않은 것을 보고 자리에서 먼저 허리를 붙들고 상이 일그러뜨리더니 우쭐 일어났다. “아이고, 허리 아파 죽겠소. 김 대장에게 밭을 주는데 나는 두 손을 들어 찬동하오. 김 대장이 일궈놓은 밭이 얼마라고 그러오?” 덕돌은 한숨을 땅이 꺼지게 쉬면서 허동원의 입에서 눈을 돌려 촌민들을 둘러보았다. 어떤 촌민들은 모두 “상순 서기에게 밭을 줘야 하오. 새해에 더 줘도 의견이 없소.”라고 했다. 덕돌은 우쭐 일어나 마을 사람들에게 태산이 무너지듯이 넙적 엎드려 절을 올렸다. “고맙습니다. 우리 고향 마을 분들이 그래도 우리 아버지를 잊지 않아 감사합니다. 저의 증조부 대부터 할아버지, 아버지가 이 소서구에 와서 황무지를 일구느라고 얼마나 고생했습니까? 앓아누운 우리 아버지를 문안하고 동정할 대신 밭을 뺏는단 말입니까? 저 철주의 날강도 행위를 제지해주어 고맙습니다. 그래도 우리 마을에는 아직도 정의가 살아 있고 양심이 살아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지춘실이 허연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뭐라고 중얼거리었지만 덕돌은 개의치 않았다. 그날 덕돌은 자전거를 타고 진수해에 내려가 술과 돼지고기, 건 두부, 부추, 물고기를 한 꾸러미를 사왔다. 그는 둘째누나를 보고 채를 볶게 해 아버지 어머니가 살던 집에서 큰 잔치를 차리고 마을 분들을 청해 술을 대접했다. 이수봉과 숭길을 비롯한 고향 마을 사람들은 다 와서 덕돌과 함께 실컷 술을 마시면서 웃고 떠들었다. 허나 철주만은 오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은 밤중까지 술을 마시고 웃고 떠들면서 얘기를 나누다가 다 헤어져 갔다. 덕돌은 그들을 일일이 바래주고 나서 달빛이 깔린 고향 마을을 둘러보았다. 덩실한 벽돌집들 속에 게딱지같은 몇몇 초가집들이 거무칙칙하게 보이는 고향 마을, 아버지와 어머니가 살던 초가집을 돌아보는 덕돌의 마음은 비길 데 없이 쓸쓸하고 아팠다. “아버지는 고향 마을의 숱한 사원들에게 벽돌집을 지어주었다. 하지만 대공 무사한 아버지는 이 마을 떠나는 날까지 이런 초가집에서 살아오지 않았던가? 그런데 우리 아버지에게 먹을 쌀을 줄망정 밭마저 빼앗으려고? 어찌 하여 우리 고향 마을의 인심이 이렇게까지 각박해졌단 말인가?” 덕돌은 땅이 꺼지게 한숨을 후 내쉬었다. 달빛이 깔린 벌거숭이 뒷산과 천지꽃산 중턱을 바라보면서 증조할어바지와 할아버지한테 머리 숙여졌다. 일본 놈들과 국민당 반동파, 지주세력들의 철 발굽 아래에서 지켜낸 토지를, 그것도 자기 아버지에게 차려진 토지, 마땅히 가져야 할 토지를 지키기도 이렇게 힘 든 걸 생각하니 너무나도 가소롭고도 억울해났다. 덕돌은 너무나도 한심한 일을 당하고 나니 마음이 비길 데 없이 허탈하고 쓸쓸해나는 것을 어찌할 수 없었다.                     7. 사랑의 여운 문화관에 전근돼 일할 때 덕돌은 공연재료를 쓰기도 하고 직접 무대에 올라가 희극배우로 활약하기도 했다. 훈훈한 봄바람이 산들산들 불어오는 어느 봄날이었다. 덕돌이 소품 극본을 쓰는데 똑똑똑 노크소리가 들리었다. “들어오십시오.” 덕돌이 컴퓨터 건판에서 손을 떼면서 보니 문을 조용히 떼고 들어온 사람은 뜻밖에도 봉선이 아니겠는가. “아니, 오랜 만이오.” 순간 덕돌은 혈액순환이 빨라지는 감이 났다. 허나 옆에 동료들이 있었으므로 봉선을 데리고 복도에 나갔다. “어떻게 돼 내 문화관에 있는 거 알았소?” 봉선은 쌍까풀 눈을 곱게 흘기었다. “극장 무대에 올라 꽤나 웃기데.” 덕돌은 원래 무슨 미련을 남기지 않으려고 “당장 공연하러 가야 하오. 무슨 일인지 어서 말하오.”라고 축객 령을 내리려고 했다. 허나 사람의 감정은 이상한 괴물이었다. 금방 먹은 마음을 돌려세우게 했다. “우리 조용한 차집에 가서 차나 마실까?” “일이 바쁘지 않아요?” “괜찮소.” 덕돌은 봉선을 데리고 부근의 조용한 차집으로 들어갔다. 희미한 불빛아래 오랜만에 봉선을 마주하고 찻잔을 드니 감회가 깊었다. 별스럽게 가슴이 설레었다. 봉선은 호두알을 까서 덕돌의 앞에 놓으면서 물었다. “대학생처녀한테 장가들었겠지?” 덕돌은 냉소했다. “남의 색시를 헐뜯지 마오. 너무나 예쁘고 효성이 지극한 현처양모요. 아들까지 낳아주고.” “지금 저를 약을 올려주는가요?” 핼끔 가로보는 봉선의 눈길을 보고 덕돌은 허구픈 웃음을 지었다. “내 색시가 예쁜 데 왜 이러오?” 봉선은 덕돌의 가슴을 탕탕 치면서 울었다. “너 아니? 그간 너를 얼마나 그렸는지? 어떻게 한 입으로 다 말하겠느냐? 상사병에 걸려 시달린 거, 내 앞에서 색시 자랑을 늘여놔?” 그제야 덕돌은 봉선의 마음을 읽고 한숨을 후 내쉬었다. 그도 알았다. 사실 봉선은 그날 달밤에 오빠한테 붙잡혀 자전거에 실려 끌려갔지만 그 후에도 덕돌에 대한 사랑의 미련을 버리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덕돌은 그날 달밤에 봉선을 데리고 부르하통하 강둑으로 가다가 봉선의 오빠한테 수모를 당한 후 생각을 바꿨던 것이다. 봉선은 예쁘고 수양이 있고 늙은 부모의 슬하에서 자라 부모를 잘 모실 것 같았다. 하지만 한살 이상인데다가 대학시험을 3년이나 쳤지만 번마다 낙방한 고중졸업생에 불과했다. (아무렴 70년대 말 대학생이 한 살 이상인 고중 졸업생 처녀를 사랑해?) 그는 그날 그때부터 다시는 봉선을 찾아가지 않았다. 그러나 봉선은 덕돌의 고모사촌누나인 아랫집 해옥을 찾아가 덕돌과 약혼하게 해달라고 했다. 그때 해옥은 봉선이 덕돌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고 여겼다. (우리 외삼촌의 하나 밖에 없는 아들 덕돌이 무슨 고중 졸업생과 약혼하겠는가?) 하여 해옥은 봉선이 마음을 돌리게 하려고 수를 썼다. “저는 몰라도 덕돌은 애 때부터 한다하는 싸움꾼이요. 게다가 부모를 모셔야 하는데 제 어떻게 시집가서 고생한다고 그러오?” 허나 봉선은 해옥의 손을 꼭 잡고 엉엉 대성통곡 쳤다. “싸움꾼이라도 좋아요. 얼마나 사내대장부 같아요? 덕돌에게 시집가면 난 시부모를 잘 모실래요.” 해옥은 봉선이 불쌍해 덕돌을 설득시켜 볼까도 생각했다. 허나 덕돌은 놀러 오지도 않는데 어떻게 억지로 붙여놓는단 말인가? “덕돌은 이미 다른 대학생여자와 사귀고 있소. 전번에 보니 예술학원에 다니는 영자라는 가수처녀를 사귀는 거 같았소. 공연표도 가지고 와서 덕돌과 함께 보았소.” “거짓말 하지 마세요. 그는 나를 두고 다른 처녀를 사귈 남자가 아닌데요. 그가 나를 얼마나 사랑했다고. 어허허, 헉, 헉.” 해옥은 나중에 이런 말로 봉선의 마음을 돌려세우려고 했다. “내 도문에 있는 우리 시집조카한테 소개해 줄게. 덕돌보다 더 멋지고 잘 생겼소.” “그만 둬요. 그만 둬.” 봉선은 눈물을 훔치며 일어서 비칠거리며 집으로 돌아갔다. 그 후 봉선은 다시는 해옥이네 집으로 놀러 가지 않았던 것이다. 덕돌과 자기를 떼놓으려는 해옥이 괘씸했다. 봉선은 여기까지 말하고 나서 눈물을 훔치며 머리를 들어 덕돌을 바라보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내 마음을 아는가?”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덕돌은 한숨을 후 내쉬었다. “이젠 다 잊소. 난 이미 결혼해 아들까지 본 애 아버지요. 저도 시집을 갔겠지?” “픽, 내 그래 서른이 넘도록 시집도 가지 않았겠어요? 동무보다 훨씬 낫은 신랑을 얻었다고.” 봉선은 적이 덕돌 앞에서 가련하게 나온 거 같았던지 신랑 자랑을 늘여놓기 시작했다. “우리 신랑은 나보다 두 살 이상인데 ‘문화대혁명’후 첫 패 대학 졸업생이오. 졸업한 후에 중학교 단위 서기 사업을 하다가 지금 정부 기관의 처장으로 일하오. 키도 동무보다 더 크고 호리호리하게 생겼어요. 그런데 시집이 아주 멀리 있어요. 통화에 있는데 장백산을 넘어 가야 한단 말이오.” 덕돌은 찻잔을 들어 쭉 마시고나서 천천히 말했다. “좋은 신랑한테 시집갔다니 시름 놓았소. 원래 사랑은 인연과 궁합이 따로 있는 법이오. 인연이 아니고 궁합이 맞지 못하면 원래 어울릴 수 없으니까. 그래서 아마 저네 오빠와 우리 아재가 우리 둘을 떼놓느라고 그렇게 애를 쓴 모양이오.” 봉선은 쌍까풀눈을 곱게 흘기었다. “픽, 그것도 말이라고 해요? 전 어쩐지 살기는 지금 신랑과 살지만 마음은 그래도 항상 덕돌이란 사람한테 가 있단 말이오. 어떤 때는 신랑과 그걸 하면서도 눈을 지긋이 감고 덕돌과 산다고 생각하고 그럴 때도 있단 말이오. 꿈에도 자주 떠오르고. 그래서 오늘도 찾아 온 거요.” 처녀 때와은 달리 봉선은 아주 담대해졌다. “동상이몽을 작작 꾸고 가정에 충실하오. 이젠 애 어미겠지?” “하긴 그렇지요. 아들의 어머니로 됐지만 아직도 처녀 때 생각이 그대로 있는 걸요. 오늘 이렇게 시원히 말하고 나니 속이 시원해요.” “우린 모든 미련을 끊어버리고 각자 자기 가정에 충성하기요.” 덕돌은 차를 다 마시자 일어나려고 서둘렀다. 그러자 봉선은 덕돌을 꽉 끌어안더니 똑바로 마주 보았다. “나를 마지막으로 소원 성취해 주겠어요?” “이제 와서 뭘?” “키스를 한번만 열렬하게 해줄 수 없나요?” 봉선은 눈을 살풋이 감고 하얀 복숭아 얼굴을 내밀었다. 허나 덕돌은 차집 미닫이를 쭈르륵 밀고 훌쩍 나가버렸다. 카운터에 가서 결산을 마치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렸다. 뒤에서 봉선은 덕돌을 매정한 놈이라고 한참 욕하고 눈물을 훔치며 적막한 차집을 비칠거리며 나섰다. 어느 날 가도에 내려가 소품공연을 지도하러 갔을 때다. 놀랍게도 가도 판사 처 복도에서 중학교 때 첫사랑 은숙과 딱 마주 쳤다. 순간 덕돌은 깜짝 놀라 걸음을 주춤 멈췄다. “아니, 네가 어떻게?” 덕돌은 너무 꿈밖이어서 어망 간에 야, 자가 나갔다. 허나 다른 사람들 앞인지라 제꺽 말투를 바꿨다. “저기 가기요.” 뒤따라오는 은숙은 여전히 그렇게 예뻤다. 덕돌은 문 밖에 나가 판사처 울안에서 물었다. “어떻게 돼 여기 왔니?” 그러자 은숙은 외까풀 눈을 생글거리면서 “어째, 이 시내에서 너만 살라는 도리는 없지 않니?”라고 했다. “이 시내에서 사니?” “아니야. 심양에 있어.” “그래? 언제 여기 왔어?” “이제 막 오는 길이야. 차에서 내리자마자 널 찾아 문화관에 갔다가 또 신문사로 쫓아갔다가 여기 쫓아왔어.” “그래?” “일 바쁘니?” “좀 기다려. 내 좀 소품 공연 지도하고.” 덕돌은 은숙을 데리고 부근의 자그마한 려관에 자리 잡아주었다. 은숙은 눈을 살풋이 내리뜨며 애교를 부렸다. “먼 길에 온 나를 고독하게 이런 여관에 두고 가버리는 거냐?” 덕돌은 “한 시간 후면 올게.”라고 하며 손을 저어보이며 나갔다. 그는 여관에 꽃 같은 은숙을 감춰 두고 가도 판사처에 가서 무슨 정신으로 소품공연을 지도했는지 몰랐다. 여관에 돌아오자 은숙은 입이 뾰로통해 가슴마저 흔들며 서적을 썼다. “난 밤차를 타고 와서 아침에야 역에 내렸다. 배 고프다야.” 덕돌은 웃음을 지으면서 “그래, 맛있는 거 사줄게.”라고 했다. 덕돌은 은숙을 데리고 가면서 본지 20년 만에 30대 된 그녀가 아직도 중학교 시절의 첫사랑처럼 예쁜데 놀랐다. 나란히 걸으면서 풍만한 젖가슴을 훔쳐보니 꽤나 탐났다. “에잇, 사내는 다 승냥이야.” 어망결에 이렇게 씨부리다가 “뭐라고?” 하는 은숙의 물음에 제 정신이 드는 것 같았다. “아, 아니야, 아니.” “사내들이 승냥인걸 누가 몰라?” 덕돌과 은숙은 유리창문이 환한 해물관에 가서 환한 유리창문 옆 자리에 앉았다. 해물로 뜨끈뜨끈한 장국을 끓여 후후 불며 마시면서 빨간 포도술 잔을 쟁강 맞부딪쳤다. 그들은 조개 살을 이쑤시개로 뽁뽁 뽑아 먹으면서 웃음꽃을 피웠다. “어떻게 돼 여기까지 왔니?” “널 보고 싶어 왔다. 그래 재미나게 사니?” “그럼, 아들도 보고.” “부모는 모두 편안히 계시니?” “그래. 아버지가 풍을 맞았지만 며느리가 좋다는 약은 다 사다드리고 링겔주사랑 자주 놔줘서 인젠 바깥출입을 한다.” “그래? 지금 어디 계시냐?” “그렇게 가지 말라고 했는데도 고향 마을에 돌아가셨다. 둘째누나와 매형이 없으면 진짜 고향에 늙으신 부모님들을 보낼 엄두도 내지 못하지.” “그랬구나. 농사꾼들은 시내에 와서 못 살아. 땅을 떠나면 곡식의 뿌리를 빼 시멘트바닥에 옮겨 놓은 거 같아. 오래 살지 못해. 농촌에서 밭의 곡식이 자라나는 것도 보면 농사군의 가슴은 설레고 혈액순환이 빨라지면서 좋은 거여. 밭에서 새 해 풍작의 희망의 꿈을 꾸면서 사는 게 농사꾼이지.” 은숙의 놀라운 말에 덕돌은 적이 놀랐다. “그럼 너도 심양시내 아니고 농촌에서 농사를 짓니?” “그래. 대흥진은 심양시 교외에 있어. 거기 시집갔어. 나도 시골 농민 딸이지만 난 이젠 그놈의 농사 신물이 나.” “신랑은?” 덕돌의 물음에 은숙은 침울해 있더니 한참 후에야 입을 뗐다. “신랑 좋으면 네 생각을 덜 했을 거야. 여기도 왔을까?” 은숙은 하소연하듯 했다. “너도 알겠지만 난 시골 고향 마을 마개동으로부터 두만강변에 자리 잡은 도문시 량수진으로 이사 갔댔어. 넌 대학에 갔지. 난 농촌의 농포로 돼버려 감히 너를 찾아가지 못했지. 너무 나도 내 모습이 초라했지 뭐야?” 그녀는 덕돌의 눈치를 흘끔 살피며 물었다. “네 진심으로 대답해라. 그때 내가 널 찾아가 너와 한사코 살겠다고 떼질 쓰면 네가 날 받아주었겠어?” 허나 덕돌이 잠잠히 앉아 있자 은숙은 포도술 잔을 들어 덕돌의 앞에 내밀었다. “자, 마시자. 지나간 말을 물어 뭘 하겠니? 오늘 너와 만나 맛 나는 해물에 포도술 잔을 들 수 있는 것만 해도 아주 기쁘다.” 덕돌은 은숙에게 살아온 얘기를 물었다.         "그래, 첫날 밤에랑 재미있게 살았겠지?"         은숙은 "별 거 다 묻는다." 하고 별 눈을 곱게 흘기었다. 그러나 이윽고 옛말이나 하는 듯이 살아온 얘기를 술술 했다. “심양시라고 하니 좋아라고 난 시집갔댔어. 농사군 치면 우리 신랑 잘 생겼어. 우리 집 오빠 학권처럼 키도 크고 눈이 부리부리한 게 남자 같았어. 헌데 뭐야 맏며느리로 시집갔는데 어쩐지 첫날밤에 네 생각이 나 신랑이 달려들자 눈물을 흘리면서 거부감이 나더라. 신랑인데도 첫날밤에 강간하러 드는 승냥이 같더라. 마구 발버둥질 치면서 밀어냈지. 어쨌는지 아니?” 그녀는 조갯살을 이수씨개로 뽁 뽁 뽑아 먹으면서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나서 외까풀 눈을 상글거리며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첫날 밤에 퍽 행복했지?” "흥! 행복이 다 뭐냐? 엉망이지." 은숙은 능청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넌 첫날 밤에 재미 좋았겠지? 나이 어린 예쁜 색시를 죽여 줬겠다."  “정말. 첫날 밤에 술을 가득 마셨지. 온 하루 가시집에 갔다가 진수해로부터 걸어서 고향 마을에 간데다가 숱한 친척과 친구들한테 술대접을 하고 곤해서 그러네 했다.” 그제야 믿어지는지 은숙은 머리를 끄덕였다. "네 첫날밤 궁금한데.” “정말?” “응, 그래. 정말.” 은숙은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정말 엉망. 내 어찌나 발광했는지 몰라. 신랑을 구들에서 발로 차서 바닥에 다 떨어지게 했다. 신랑은 달려들다 못해 한 번도 하지 못하고 나를 욕하고 때리기까지 했다. 그런데 벌써 창문이 희붐히 밝아오지 않겠니? 그래 신랑은 이불을 안고 쏘파에 가서 들 누워 잠들어버리더구나. 나도 새벽에야 곤해 잠들어버렸어.” 은숙은 재미나는 이야기나 하는 듯이 뒷말을 이었다. “신랑이 또 깨나서 달려들었지만 해가 궁둥이를 비추고 아침이어서 시집 일가 어른들께 인사해야 하는 판에. 내가 또 발길로 차 버리겠는데. 호호호. 지금 생각해 봐도 우스워. 호호호호.” “그래 애는 몇을 낳았어?” 덕돌의 물음에 은숙은 해물 국을 떠서 후루룩 마시고나서 “아들 하나 딸 하나 낳았어.”라고 대답했다. 덕돌은 웃으면서 “헌데 어떻게 애는 나보다 더 많이 낳았니?” 하고 웃었다. “미운대로 어떻게 하겠니? 내가 방비하다가 잠들어버린 후이면 신랑이란 놈이 도적질해 가지는 걸. 속담에 사람 열이 도적 하나를 지키지 못한다고 하지 않았니? 낸들 무슨 수가 있어. 시시탐탐 내 몸만 노리는 데야. 호호호.” 덕돌은 어릴 때 온순하고 내성적인 것 같던 은숙이가 완전히 다르게 시원시원하게 번졌구나 생각했다. 덕돌은 은숙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런 말을 꺼냈다. “야, 은숙아, 네 손 한번 쥐어 보지도 못하고 애들에게 얼마나 놀림을 당했는지 아니?” “그럼 지금이라도 실컷 쥐어보렴.” 은숙은 손을 내밀면서 중얼거렸다. “네 때문에 머리를 들고 학교를 다니지 못했다.” 덕돌은 정말 은숙의 새하얗고 보들보들한 손을 꼭 쥐고 매만지면서 물었다. “편지를 왜 엄마한테 보이고 황승연에게 가져다 바쳤니?” 은숙은 손을 맡긴 채 두덜거렸다. “열대여섯 밖에 안 되는 소녀가 그런 편지를 받고 겁나지 않았겠니? 그 일로 내가 제대로 공부하지 못해 대학에도 가지 못했다. 다 네 탓이다.” 은숙은 손을 훌 빼갔다. “편지 쓴 건 내 탓이라고 치고. 함께 공부를 잘해 대학 가자 한게 무슨 죄냐? 그때 너무 놀림을 당해 학교에도 가지 못했다. 온순한 여자애 같던 난 싸움꾼으로 돼버렸다.” “호호호호. 그 일 때문에 네가 사내로 됐지. 옛날 같으면 어디 남자 같았니? 코를 풀럭거리면서 공부나 잘 하는 계집애 같았지.” 은숙의 그 유머에 덕돌은 웃고 말았다. 덕돌은 은숙의 우유빛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능청스레 은숙의 보들보들한 손을 잡아끌었다. "이전에 그렇게 안아보고 싶던 널 한번 안아보자.”  “우-메, 딱 사춘기 소년 같다. 얘, 딱 한 번만이다. 더 하면 안 돼.” “그래.” 이윽고 은숙은 몸을 뺐다.  “내일 딸이 온다. 한번 보겠니?”  “그래?” 덕돌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외할머니 한돌 제사여서 오라고 했다. 난 널 보려고 살짝 먼저 빠져오고.” 덕돌은 일어나면서 중얼거렸다. “그 노친이 내 편지를 황승연에게 가져다 바칠 건 뭐야? 안 그랬으면 은숙이 내 색시 됐겠는지 어떻게 알아?” 은숙은 말귀를 알아듣고 도도거렸다. “쳇, 대학생이노라고 날 데려가겠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생각 있어? 나그네는 한국에 간지 몇 해나 돼. 근본 나한테 관심이 없어. 그러니까 네 생각이 더 난다. 네 색시 됐더라면 네 부모 잘 모셨을 거야.” 덕돌은 결산하고 해물관을 나서면서 한숨을 후 내쉴 뿐이었다. 그날 은숙을 데리고 서시장에 갔다가 놀랍게도 조영희를 만나지 않았겠는가? “아니, 어떻게 돼 여기 있어? 도문에 시집갔다더니?” 영희는 옆에 선 은숙을 바라보며 천을 가위로 쭉 끊어 손님에게 주고 돈을 받아 세면서 반기었다. “정말 오랜만이구먼. 색시오?” 덕돌은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서성거릴 뿐이었다. 그러자 은숙이 저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내 동창생이요.” 여인들의 눈은 아주 민감했다. “그저 관계 같지 않구먼.” “시샘이 나오?” 덕돌은 옆에 손님이 없자 목소리를 낮춰 능청스레 말했다. “첫사랑이오.” 그러자 조영희는 저쪽에 서서 이쪽을 돌아보는 은숙을 핼금 보더니 소리를 죽여 빈정거렸다. “나만 낫소?” “에끼, 무슨 소리?” 조영희는 천 필을 둘둘 말아 놓으면서 종알거렸다. “기자로 됐다면서? 뜻을 이뤄 좋겠소.” 뒤이어 조영희는 눈을 곱게 흘기며 비쭉거렸다. “어떠오? 지금 색시 퍽 어리고 예쁘다면서? 색시로는 어려서 좋을지 모르지만 부모를 모시기는 나보다 못할 거야. 전번에 조개덕에 갔다가 보았소. 저네 아버지와 어머니가 우리가 담배조리를 하던 창고에서 살더구먼. 저네 영감도 후회할 거요. 나를 며느리로 삼았더라면 시내 벽돌집에 모시고 청보자기에 싸서 이고 다닐 지경이었겠는데.” 덕돌은 영희의 그런 꼬집는 말을 더 듣기 싫었다. 저쪽에서 은숙이도 기다리고 있어 덕돌은 자리를 떴다. “잘 있소.” “잘 사오. 허나, … 오, 됐소, 됐어. 가보오.” 영희는 무슨 말을 하려다가 그만 두고 혀끝을 흐리었다. 그날 저녁, 덕돌은 퇴근하자 은숙을 데리고 극장에 가서 문예공연을 구경시켰다. 한참 구경하다가 덕돌은 프로안내를 듣고 깜짝 놀랐다. “아래에 저명한 향항 인기가수 송영자녀사의 노래를 감상하시겠습니다.” 집중된 동그란 조명을 한 몸에 받으면서 한복을 입고 사뿐사뿐 무대로 나오는 여가수는 조영자가 아니겠는가! “아니, 저게 영자 아니야? 뭐 향항가수? 그럼 향항에 갔단 말인가?” “뭐? 아는 사이오?” “어, 아, 아니오. 인기 있는 여가수지.” 덕돌은 속으로 자기에게 왔다는 말도 하지 않은 조영자가 얄미웠다. 극장에는 영자의 “사랑의 미로”라는 한국 노래 소리가 격조 높이 울렸다. 옆에서 은숙은 머리카락이 덕돌의 귀를 간지를 지경으로 얼굴을 가까이 하고 나직이 말했다. “저 가수 확실히 노래 잘 불러.” “음. 그래.” 덕돌은 머리를 끄덕이면서도 머리가 착잡하기로 그지없었다. 거의 잊어버렸던 또 하나의 추억 속의 사랑상처가 눈앞에 나타나 노래를 부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어떻게 그날 저녁 공연을 보았는지 몰랐다. 옆에 은숙을 두고 무대에 올라가 영자를 찾을 수도 없었다. 이튿날 오전에 단위에 갔다가 덕돌은 승용차를 몰고 가무단에 가서 영자를 찾았다. 허나 영자는 금방 공항으로 나갔다고 한 처녀 가수가 알려 주었다. 시계를 보니 오래지 않아 은숙의 딸이 기차역에 도착할 시간이 됐다. 허나 덕돌은 승용차를 몰고 공항으로 쏜살 같이 달려갔다. 공항 대합실을 올리 뛰고 내리 뛰며 인파속을 서캐 훑듯 했으나 영자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한창 개찰구로 나가는 사람들 쪽으로 뛰어가 보아도 영자는 보이지 않았다. (야, 어쩜 지척까지 왔다가 찾지도 않아? 얼마나 그렸다고?) 덕돌은 영자가 원망스러웠다. 혹시 대학을 졸업한 후 내가 어디로 갔는가를 모를 수도 있지 않는가? 또 피뜩 왔다가 공연에 참가했을 수도 있어 못 찾아왔겠지? 이러루하게 자기를 위안하면서도 혹시나 해 인파 속을 헤맸다. 허나 끝내 영자를 찾지 못했다. 그때 비행기가 공항 상공으로 이륙하는 아츠런 소리가 들렸다. 덕돌은 공항 대합실에서 뛰어나와 꽃구름이 둥실 뜬 푸른 하늘로 솟아오르는 은백색의 비행기를 넋을 잃고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잘 가라! 향항에서라도 잘 살아라! 나도 너를 깡그리 잊을게.” 덕돌은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아차!” 덕돌은 승용차를 몰고 황급히 은숙이 든 호텔로 쏜살같이 달려갔다. 그는 애타게 자기를 기다리던 은숙을 싣고 함께 역에 달려갔다. 덕돌은 자기 눈을 의심할 정도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플래토홈에서 나온 열 서너 살 돼 보이는 은숙의 딸 선희는 딱 어렸을 때 은숙의 모양을 빼닮았던 것이다. (아, 저 애가 내 첫사랑 은숙이 아닌가?) 덕돌은 선희가 너무 사랑스러워 덥석 끌어안고 뽀뽀를 해주었다. 선희는 너무 과격하게 열정적인 덕돌을 밀어내며 은숙에게 물었다. “어머니, 이분은 누구신가요?” “내 늘 외우던 덕돌 아저씨다.” “오, 그래요?” 외까풀 눈을 살풋이 내리뜨며 상글 웃는 선희는 정말 예뻤다. 심지어 이상하게도 덕돌의 첫사랑 은숙을 연상시키지 않겠는가. 덕돌은 이상하리만치 착각인가고 자꾸 선희를 쳐다보았다. “왜 자꾸 쳐다봐요?” “정말 어린 시절 너 어머니를 똑 떼 닮았구나.” “당연하죠.” 덕돌은 이제야 첫사랑을 되찾은 거 같아 은숙과 선희를 사진을 찍어 두었다. 은숙의 어릴 때 사진과 선희의 사진을 놓고 보아도 누가 은숙이고 누가 선희인지 구분하기조차 어려웠다. 며칠 후 덕돌은 아쉬운 대로 은숙과 선희 모녀간을 심양으로 돌려보냈다. 은숙은 눈물을 흘렸고 선희는 옆에 나란히 앉아 어머니 얼굴의 눈물을 닦아주다가도 덕돌에게 손을 저었다. 무정한 열차는 덕돌과 은숙의 애끓는 석별의 정을 차단하며 사정없이 떠나갔다. 덕돌은 은숙의 모녀를 보내고 승용차에 몸을 싣자 홀가분한 감이 났다. 아무리 어째도 유치한 첫사랑 은숙이나 짝사랑 영희나 봉선이나 그리고 사랑했던 영자는 추억의 돛배에 실린 사랑의 흉터일 뿐이었다. 그녀들은 덕돌의 마음 속에서 운선의 어머니, 조강지처 명숙과 비할 바 되지도 못했다. (어느 놈이 조강지처를 버리고 잘 된다더니?) 덕돌은 마음을 정리하자 착잡하던 머리가 한결 개운해졌다…  
160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117) 댓글:  조회:1193  추천:0  2018-08-16
                4. 숲속에 피어난 나리꽃 떵떵 얼어붙은 대지는 온통 새하얀 눈으로 단장돼 은세계를 방불케 했다. 풍설도 기세 사나왔지만 덕돌은 이젠 악렬한 환경에 습관돼 모든 것을 당해낼 수 있었다. 황승연의 정신압력도, 힘든 담임교원의 엄청난 부담도, 물독이 얼어 터질 지경으로 추운 당직실의 혹한도 완강한 의력과 생명력을 가진 덕돌을 꺾어버리지 못했다. 그는 청춘의 뜨거운 정열로 모든 것을 불태우며 용감히 앞길로 나가며 교원사업을 참답게 해나갔다. 정성이 지극하면 돌 위에도 꽃이 핀다고 애들의 기말성적도 놀랄 지경으로 올라갔다. 게다가 그가 맡은 학급은 전 교 “문명학급”, “선진학급”의 상까지 탔다. 그때 그는 얼마나 기뻤는지 몰랐다. 정말 반년 전에는 전교 교원들 앞에서 비판받았는데 전교 교원들 앞에서 두 개 상장을 타는 그 기쁨은 코마루가 시큼해날 지경으로 눈물겨웠다. 방학식을 마치고 해가 뉘엿뉘엿 지는 것을 보고 덕돌은 수일과 해숙, 해금을 데리고 집으로 데려다 주었다. 그들이 철교를 지날 때었다. “서라!” 눈보라 휘몰아치는 다리목에서 한 무리 애들이 뛰쳐나오며 그들의 앞길을 막았다. 허나 덕돌을 보는 순간 애들은 다 달아났다. 허나 억대우 같은 동철과 그의 삼촌 철석은 다리목에 두 다리를 떡 뻗치고 서서 덕돌을 노려보았다. “김 선생, 주먹이 그리 세다는데. 어험, 어째 붙어볼까? 겁나오?” 철석이 어깨 으쓱해 주먹으로 손바닥을 탁탁 치며 거들먹거렸다. “사내 대 사내로 자웅을 나누기요.” (이 자식, 정말 놔둬선 안 되겠구나.) 덕돌은 애들 보고 먼저 집 쪽으로 달아나라고 나직이 말하고나서 희죽이 웃었다. “그래, 그 새 몸을 뺄 새 없었는데 오늘 붙어보자.” 애들이 무사히 지나가기를 기다려 덕돌은 스적스적 다가가며 손짓으로 철석을 오라고 불렀다. “야, 한번 붙어보자.” 그러자 철석은 다리 아래를 가리키면서 “저기서 붙자!”라고 했다. 덕돌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스적스적 다가갔다. 그가 4미터 가까이까지 가서 다리 아래로 내려가려고 잔등을 보이는 순간이었다. 철석은 불시에 둑의 돌을 쥐어 덕돌의 뒤통수 노리고 탁 쳤다. 수일은 저쪽에서 “선생님, 주의하십시오!” 하고 고함쳤다. “억!” 덕돌은 어느 결에 자세를 낮춰 뒤에서 날아드는 주먹을 피했다. 재차 날아드는 주먹을 몸을 돌리면서 꽉 틀어쥐어 비틀며 발길로 철석의 발뒤꿈치를 탁 걷어찼다. 손에 쥔 돌이 저만치 날아났다. 재차 발길로 면상을 휘감아 찼다. 절구통 같은 철석은 썩박나무 쓰러지듯 쿵 넘어갔다. “야, 멋있다!” 저쪽에서 수일이랑 해숙이랑 박수갈채를 보냈다. 허나 동철이 철길 옆의 돌을 쥐어뿌리자 겁을 집어먹고 그만 웃고 떠들었다. 덕돌은 발길로 철석의 면상을 툭 걷어찼다. “일어나! 비열한 놈!” 덕돌은 더 치지 않고 철석이 일어나기를 기다렸다. 철석은 불의습격에 패하자 창피하고 자존심이 꺾여 씩씩거리며 눈 바닥을 짚고 일어났다. “평평한 강바닥에 내려가 해보자!” 덕돌은 콧방귀를 뀌었다. “흥! 그 주제에 장소 탓도 많구나.” 그런데 저게 뭐야? 철석은 자기가 근본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철다리 위로 냅다 도망쳤다. “어디로 도망가?!” 저걸 어떻게 해? 덕돌이 뒤쫓아 뛰어가다가 몸을 훌쩍 날려 머리 위로 날아 곤두박질치며 뒤발로 철석의 면상을 걷어찼다. “앗!” 비명소리와 함께 철석이 낯을 싸쥐고 푹 꺼꾸러졌다. 덕돌은 무송이 호랑이를 무쇠주먹으로 치듯이 쓰러진 철석을 가로 타고 앉아 한매를 치고 한마디씩 먹였다. “다시 우리 수일을 때리겠니?” “아, 살려주오.” “말해? 다시 동철이랑 시켜 여기서 우리 학급 애들을 막겠니?” “아, 아니, 살려만 주십시오.” 그제야 덕돌은 허연 눈 위에 뻘건 피범벅이 된 철석의 대가리를 툭 걷어차며 중얼거렸다. “얼빠진 건달 놈 새끼, 언감 나를 건드려?” “다신 아닙니다.” “교원이니 어째 업신여겨?” “아니, 눈이 있어도 태산을 몰랐습니다. 살려 주십시오.” 덕돌은 무릎을 꿇고 두 손을 싹싹 비비는 철석을 쏘아보며 호통쳤다. “다시 우리 학급의 애들을 건드리기만 해봐라. 너네 집에까지 쳐들어가 없애치울 줄 알아.” 덕돌은 눈을 쥐어 철석의 낯에 푹 치며 을러멨다. “동철이랑 데리고 꺼져!” “예, 예, 예.” 수일이랑 꽤나 고소해 하는데 철석은 죽는 상을 하며 꿇어앉은 채 신음소리를 냈다. 저쪽에서 동철이랑 숱한 애들은 눈보라 속에서 멀어져가는 수일이랑 보며 무서워 벌벌 떨었다. 그 후 동철이랑 다시는 진짜 수일을 건드리지 못했다. 그제야 덕돌은 한시름을 놓았다. 방학이 되자 덕돌은 신문사 기자로 전근돼 간 성환 형님이 소개한 교외 한 공사병원의 간호사 처녀를 만나러 자전거를 타고 눈 덮인 은세계를 방불케 하는 진수해 교외로 달려갔다. 22세 밖에 안 된 그 간호사 처녀는 성환의 동료기자 명수의 사촌여동생인데 꽤나 예쁘다고 했다. 중등전문학교를 졸업하고 간호사로 일하는 처녀라고 하니 처음에는 그리 썩 마음이 끌리지 않았던 것이다. 하긴 덕돌이 만난 여자가 어디 한둘인가? 별의별 처녀 서른일곱이나 만나보았다. 이번 처녀가 딱 서른여덟 번째 처녀였던 것이다. 뭐 향진 기업국 국장의 막내딸로, 텔레비전방송국 부총편의 딸로, 한 살 이상 대학교 여동창생으로, 자기보다 세살이나 지하인 예술학원의 학생 송영자로 처녀들을 얼마나 많이 만났던가? 그러나 이치저치 해서 약혼하지 못했다. 더구나 어떤 처녀들은 덕돌이 농민 부모를 모실 외동아들이라고 나무라면서 그만두기도 했다. 상순은 덕돌이 방학에 집으로 가기만 하면 며느리비위가 동해 자꾸 며느리 감을 데리고 오라고 재촉했다. 명옥도 스물여섯이나 먹은 아들이 노총각으로 늙을까봐 일찍이 손을 써 각시 감을 찾아두라고 했다. 허나 덕돌은 부모가 아무리 졸라대도 학교 일이 잘 되지 않는데다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결혼은 하고 싶지 않았다. 더구나 공사마을을 벗어나 시내로 들어가려고 국장이나 인대 주임 네 딸이라고 해도 치마사다리를 타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차일피일 대상문제를 미루어 왔던 것이다. 어떻게 말하면 진수해중학교를 벗어난 후 대상문제를 고려하고 싶었던 것이다. 덕돌은 눈 위로 자전거를 힘겹게 타고 평란촌으로 달려가면서 피씩 웃었다. “사람의 욕심이란 이상한 거야. 어쩜 어떤 간호사처녀인가고 보고 싶은 호기심이 동할까? 진수해중학교 그런 악렬한 환경에서는 약혼이고 결혼이고 다 그만둬야 하는 건데. 우리 학교에 와서 조사하면 누가 날 좋은 교원이라고 하겠나? 전교 교원들 앞에서 비판까지 받은 사람인데.” 공사병원에 가서 물어보니 그 간호사처녀 이명숙은 전날 직일을 서고 집에서 쉰다고 했다. 그리하여 난생 처음 눈길에 자전거를 타다가도 눈더미에 길이 마겨 자전거를 밀고 힘겹게 평란촌으로 갔다. 가는 길에 이 사람 저 사람 물어 4촌민소조 제일 앞집으로 다가갔다. 그때 낮다란 초가집 앞에서는 웬 육십대 노인과 청년이 작두로 소먹이 벼 짚을 썩썩 썰고 있었다. 노인이 앉아 작두에 벼 짚을 먹이면 훤칠하게 생긴 청년이 추녀 끝에 달린 바 줄을 잡고 서서 발로 작두를 밟아 벼 짚을 썩 뚝 썩 뚝 썰고 있었다. 덕돌은 자전거를 밀고 다가가 가죽털모자까지 벗고 “말씀을 물읍시다. 여기 이명숙이 네 집이 어느 겁니까?” 하고 물었다. 노인은 벼 짚을 먹이다가 말고 “우리 집이오. 어디서 오오?”라고 하며 덕돌을 유심히 살폈다. 청년의 눈길도 덕돌에게 쏠렸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진수해중학교에 있는데 명수선생이 보내서 왔습니다. 명숙이 있습니까?” “오, 집안에 있소. 들어가 보오.” 덕돌은 자기에게서 눈을 떼지 않는 청년을 보고 “오빠요?” 하고 물었다. 그러자 그 청년은 “동생입니다.”라고 대답하며 집안에 들어가 먼저 알렸다. 덕돌은 어떻게 생긴 처녀인가고 보려고 염치를 불구하고 문을 뚝 떼고 들여다보았다. 어깨 넘는 머리를 풀어헤친 처녀가 덕돌을 놀랍게 쳐다보았다. “들어오십시오. 누굽니까?” “아, 난 진수해중학교 교원입니다. 명수선생이 보내서 왔습니다.” “우리 오빠 무슨 일이 있습니까?” “감기에 걸려서 페니실린 주사를 얻어오라고 해서 왔습니다.” 덕돌은 능청스럽게 둘러대면서 처녀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스리슬쩍 여겨보았다. 부엌 널판 위에서 바깥을 내다보는데 어쩜 저렇게 예쁠까? 어깨 넘어 풀어헤친 파도치는 머리카락, 훤칠하고 호리호리한 체격, 우유빛 얼굴에 복스러운 이마, 어글어글한 눈… 참말로 숲속에 핀 나리꽃 같았다. (어쩜 이런 초가집에 저렇게 예쁜 처녀가 있을까?) “들어오십시오.” 그 처녀가 말했지만 덕돌은 문고리를 놓으면서 “아니, 저기 나가서 얘기 합시다.”라고 했다. 첫눈에 반한 덕돌은 몇다미 말이나 나누고 싶어졌다. 그는 자전거를 밀고 북데기 속에서 낟알을 쪼아 먹는 닭들이 모여 있는 탈곡장에 가서 집 쪽을 바라보았다. 한참 후에 파란 조끼를 입은 처녀가 사뿐사뿐 탈곡장으로 다가왔다. 다시 여겨 보아도 훤칠한 체격이나 하얀 박 씨같이 걀쭉한 우유 빛 얼굴, 어글어글한 외까풀 눈, 오똑한 코, 작은 입이나 예쁘기로 그지없었다. 목소리 또한 청동방울을 굴리는 듯이 예뻤다. “오시느라고 수고했습니다. 오빠 무슨 일이 있습니까?” 덕돌은 선의적인 거짓말을 얼버무렸다.  "명수선생이 아파서 페니실린 주사를 가져다 달랍디다. 난 신문사에 갔다가 심부름을 시키니 왔습니다.” “어디 있습니까?” “대학을 졸업하고 진수해중학교에서 교원사업을 합니다.” “그럼 집에 들어갑시다.” “괜찮습니다.” 허나 덕돌은 처녀의 몸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의 눈길은 코신에 양말도 신지 않은 발에 가서 멎었다. “발이 시리겠구먼. 양말도 신지 않고.” “괜찮습니다.” 덕돌은 모자를 벗어 쥐고 저도 몰래 지나친 관심을 보였다. 연애에서는 금기었다. 특히 처음 만난 녀자한테 너무 넘어지면 한 수 지고(빌고)들어가는 것이었다. “솜옷도 입지 않았구먼. 추운데 길게 말할 게 없지. 후에 명수선생을 찾아가 보십시오.” “예, 심부름을 하느라고 수고했습니다. 눈길에 어떻게 가겠습니까?” “추운데 안됐습니다. 안녕히!” 덕돌은 게걸스레 명숙을 한번 또 훑어보고 자전거를 밀고 탈곡장을 떠났다. 명숙이도 덕돌을 유심히 바라보다가 돌아서서 사뿐사뿐 떠나갔다. 눈보라가 싸늘한 숙사 창문을 두드렸다. 덕돌은 싸늘한 당직실에 돌아왔지만 빨간 나리꽃 같은 예쁜 명숙을 만나본 기쁨에 겨워 마음이 흐뭇해났다. (이렇게 악렬한 환경에서 명숙이 내 생활에 뛰어들었구나.) 덕돌은 가슴이 후련하게 한숨을 후 내쉬었다. 방학에 집으로 돌아가자 덕돌은 명숙에게 첫 꽃 편지를 써서 날려 보냈다. 명숙동무, 전번에 페니실린 심부름을 갔던 덕돌입니다. 피 끓는 청춘의 심장이 서로 보기 시작했습니다. 눈보라는 휘몰아쳤지만 피 끓는 더운 심장을 식히지 못했습니다. 마라토너의 첫 신호탄이 울렸습니다. 이 코스에 처녀총각선수가 나섰습니다. 잘 달리면 마라톤처럼 기나긴 여정을 달릴 수도 있다고 봅니다. 사랑이란 두 청춘의 맑은 순정의 결합이며 진정으로 피 끓는 두 심장으로 연주하는 아름다운 사랑의 멜로디라고 봅니다. 나는 대학을 졸업한지 1년이 됐지만 문학창작에 뜻을 둔 열혈청년입니다. 이 땅을 밟고 하늘을 떠인 사나이는 세상에 아직 해놓은 일도 써놓은 글도 없습니다. 개학 전 18일 오전에 XX역에서 만나는 것이 어떻습니까? 한편 덕돌의 편지까지 받은 명숙은 집에 가져다 부모형제에게 보였다. 집에서는 덕돌을 두고 의론이 분분했다. 명숙의 아버지 종호는 “인기야 우리 두 사위보다 썩 낫지.”라고 했다. 동생 춘수도 “그만 하면 잘 생겼지. 그런데 키 그리 크지 않소.”라고 한마디 했다. 옥선도 “나는 보지 못해 모르겠다. 키 커서 뭘 하니? 천표나 많이 들었지.”라고 했다. 그러자 종호는 “대학생이지. 키 그만하면 됐지. 키를 떼먹고 살겠냐?”라고 했다. 명숙은 편지를 구들에 놓으면서 “편지도 아주 수준이 있게 썼습니다.”라고 한마디 보탰다. 그러나 명숙의 큰언니 은자는 “그래도 종신대사인데 신중해야지. 나와 함께 명수 오빠를 찾아가 어떻게 아는 선생인가 알아보고 사귀든지 해라.”라고 했다. 이튿날에 은자와 명숙은 신문사에 가서 명수를 찾았다. 명수는 원래 현당위 비서과 과장을 하면서 이계삼 부서기의 비서를 하다가 서로 물고 뜯는 정객들이 싫어 그의 말처럼 “죽은 글을 다루는 문자 사업을 하려고 신문사에 왔던 것이다.” 명수는 자기 견해를 말했다. “그 청년이 남자 같더라. 성격도 시원시원하고.” 그러나 명숙은 덕돌에게 이런 편지로 화답해 보냈다. 저는 이제 겨우 22살을 먹었어요. 아직 시집갈 생각은 하지도 않았어요. 허나 만약 만나보려는 의향이 있으면 그날 아침차를 타고 역에 나오세요. 그리하여 스무날 후에 덕돌은 진수해역에서 기차를 타고 약속한 역으로 달려갔다. 역에서 내려 은세계를 방불케 하는 역 주위를 둘러보는데 저쪽에서 회색외투를 입은 훤칠한 처녀가 덕돌을 불렀다. “김 선생님, 오시느라고 수고했습니다.” 그제야 서로를 확인하고 철길을 따라 뚜벅 또박 걸으면서 서로 집안 부모형제 형편이랑 사업에 관한 얘기를 물어보았다. 그런데 덕돌은 첫눈에 반한 명숙을 놓칠까봐 외동아들이라는 것을 속이고 슬쩍 화룡 림업국에 형님이 있다고 했다. 기실 그에게는 한 마을에 있다가 화룡 투도진에 이사 간 이수봉 양형님이 있었다. 그런데도 슬쩍 친형님처럼 착한 거짓말을 했던 것이다. 어떤 때에는 착한 거짓말은 우정을 지키는 술수로 될 수도 있었다. 덕돌은 처음 만난 명숙을 놓치기 싫어 애정관과 혼인관, 가정관에 대한 이야기를 숱한 소설에서 본 말을 인용해 늘어놓았다. 간호사처녀는 하얀 눈에 눈이 시린데다가 어린 나이에 부끄러워 덕돌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했다. 어느덧 해가 숫구멍을 비췄다. 덕돌은 갈라지면서 처녀의 새하얗고 긴 손을 잡고 나서 불쑥 이런 말 한마디 했다. “남이 헐뜯는 말을 소홀히 믿지 말고 자기 절로 서로 지내보고 결론을 지읍시다.” (이 선생이 도대체 단위에서 다른 사람들한테 어떻게 보이었기에 이렇게 말할까?) 그날 덕돌과 갈라진 후 그녀는 오빠에게 편지로 학교에 가서 덕돌을 알아봐 달라고 했다. 명수는 황승연과 아는 사이인지라 알아보았다. 황승연이 좋은 말을 했을 수 있었겠는가! 싸움꾼이요, 깡패 두목이라는지, 술주정뱅이라는지, 교원사업에 열중하지 않고 글이나 쓸 궁리나 하는 불량배라는지 별의별 상말로 한바탕 욕설을 퍼부었다. 지어 교원들에게 비판받은 일까지 다 말했다. 명수는 편지로 자기가 한 단위 동료 성환의 말을 믿고 사람을 잘 못 소개했으니 명숙을 보고 과단성 있게 덕돌과 그만두라고 했다. 명숙은 편지를 써서 자기 복잡한 심정을 토로했다. 주풍이 나쁘면 흔히 가족들에게 상처를 입힐 수도 있고 사업도 안착해 하지 않고 교내외에 나쁜 영향을 끼칠 수 있어요. 허나 선생님을 만나고부터 일반청년들과 완전히 다른 뭔가 있어 소홀이 결론을 내리지 못해요… 덕돌도 자존심이 면도칼처럼 시퍼래 노기등등해 편지를 날렸다. 동무는 내 옛 상처를 건드리는구먼. 남의 말을 믿고 나를 주풍이 나쁘다는 것은 어처구니없는 모욕입니다. 그만 두겠으면 그만 두오. 그래도 나는 눈 한번 깜짝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랑은 공동한 이상, 흥취, 언어로 이뤄지는 것이지 결코 구걸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전근과 외교를 하려고 술을 마신 것은 사실입니다. 술 재간이 없어 술을 조금만 마시면 얼굴에 펴서 홍당무가 되고 토합니다. 그러다나니 우리 학교 술은 제가 혼자 마신 것으로 소문나고 주풍이 나쁘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이건 변명이거나 동정을 바라는 해석도 아닙니다. 다만 나쁜 놈들이 여린 동무의 마음에마저 대고 나를 헐뜯으니 애 타고 억울할 뿐입니다. 한편 어쩐지 나는 명숙동무와의 만남을 소홀히 버리고 싶지 않구먼. 그래서… 사실 명수선생은 자기 여동생을 딸처럼 아끼었다. 그는 명숙이 농촌학교에서 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할까봐 자기 집에 데려다 공부를 시켰다. 집에는 명숙보다 세 살 지하인 아들 문걸이 있었다. 그들 둘은 기실 아재와 조카였지만 오누이처럼 한 구들에서 자랐다. 집이라야 15평방미터도 되나마나 한 외통 온돌방이었는데 중간에 미닫이문이 하나 있었다. 명숙의 전도를 위해 명수 부부는 불편함을 무릅쓰고 공부시켰다. 시내 학교에 붙여주고 인맥을 통해 명숙을 도와달라고 담임과 과임 한족선생들에게 술도 사 대접하면서 부탁했다. 명숙이 부탁하자 명수는 덕돌이 어떤 청년인가고 알아보려고 황승연을 찾았는데 반영이 아주 나빴던 것이다. 그리하여 명숙에게 편지를 써서 덕돌과 그만두라고 했다. 며칠 후 덕돌에게 명숙한테서 편지가 날아왔다. 미안해요. 선생님의 옛 상처를 건드렸다고 하니 더욱 그래요. 편지를 받고 보니 기뻤는데 읽고 보니 괴로워요. 전 요해하려고 물은 것 뿐이예요. 그래 요해도 하지 못해요? 맑스의 부인 옌니는 한 사람을 요해하려면 1, 2년은 아무것도 아니고 4~5년, 지어 더 오랜 시간이 걸린다고 했어요. 저도 어쩐지 우리 이 우정을 소홀히 그만두려고 하지 않아요. 사람들은 모두 첫사랑이 평생에서 가장 소중하다고 해요. 물론 아직 우정에 불과해요. 그렇지만 저는 선생님과 오래 사귀여보면서 호상 요해하고 싶어요… “이 처녀 나를 좋아하는구나.” 덕돌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담임교원을 하느라고 어찌나 바빴던지 덕돌은 명숙과 편지로 우정을 주고받았다. 그러다나니 사귄지 넉 달이 다 돼가지만 세 번 밖에 만나보지 못했다. 덕돌은 점심시간을 이용해 시내 우전국에 가서 공용전화로 공사병원에 걸어 명숙과 몇 마디 전화를 주고받았다. 그래도 그들의 순결한 우정은 점차 훈훈한 봄바람을 맞아 사랑의 싹을 틔우기 시작했다. 그런데 소 웃다가 꾸러미 터질 우스운 일도 다 벌어졌다. 어느 하루, 황승연이 덕돌을 불렀다. “또 뭘 잘 못했다고 훈계하려는 걸까?” 교장실로 불리어 가면서 덕돌은 이것저것 잘 못한 데 없나 생각해보았다. 그가 문을 떼고 들어서자 황승연은 생각 밖으로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우멍눈에 별스런 빛이 번쩍이었다. “앉소, 앉아. 긴히 할 말이 있어 불렀소.” 덕돌은 항상 우멍눈으로 쏘아보던 황승연이 불시에 웃음을 짓자 적이 어리둥절하다 못해 더욱 당황해났다. “무슨 일입니까?” 황승연은 이전과는 달리 자기 자리에 가서 앉지 않고 덕돌의 옆에 나란히 앉으면서 친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일 우리 집에서 이사하는데 짐을 좀 들어줄 수 없소?” “예? 됩니다. 황 교장은 스승인데 무슨 일이 있으면 알려 주십시오. 제가 성심껏 해드리겠습니다.” 덕돌은 한시름을 놓으면서 흔쾌히 대답했다. 사실 말이지. 덕돌은 황승연 교장은 자기 스승이기에 옛날에 어떻게 대했든지 간에 관계를 개선하려고 술도 사가고 노력했다. 허나 황승연이 제자의 정성을 받아 주지 않았던 것이다. 아비를 죽인 원수를 진 일도 없었다. 다만 반란파 두목을 한 황종연은 자기절로 자초해 감옥에 갔을 뿐인데 황승연은 덕돌의 아버지와 원수 취급을 하면서 덕돌을 미워했던 것이다. 한편 덕돌은 황승연이 이사한다는 것을 알면 학교에서 숱한 아첨쟁이들이 달려가 짐을 메고 뇌물을 사갈 것이었다. 허나 황승연은 태도를 일변해 이런 일에 딱 자기를 알리는 것이 도리어 이상할 정도였다. 덕돌은 속으로 명숙에게마저 자기를 헐뜯을 수 있는 사람은 황승연 밖에 없다고 짐작했다. 허나 명숙이 누구한테서 들었다고 명확하게 말하지 않은 형편에서 딱 그렇다할 증거도 쥔 것이 없어 추측에 불과했다. 이튿날은 일요일이어서 덕돌은 이사 짐을 메러 황승연네 집으로 갔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학교에서 온 교원은 자기 밖에 없고 나머지 사람들은 알고 보니 황승연의 가시집 식구들뿐이었다. 덕돌은 땀을 뻘뻘 흘리며 황교장의 이사 짐을 날라주었다. 키가 훤칠하고 얼굴이 넙죽한 처녀애가 환하게 웃으면서 덕돌이 짐을 둘러멜 때마다 뒤에서 춰올려주면서 “혼자 멜만 해요?”라고 하며 어색한 한국말로 문안하군 했다. 뒤에서 그 처녀애는 “힘도 장사로구먼. 딱 로지심 같아요.” 라고 찬사를 혀끝이 다슬게 하곤 했다. 일할 때 다리를 살짝살짝 젓는 10대 처녀애였지만 춰주니 덕돌은 힘이 드는 줄도 모르고 이사 짐을 날랐다. 그날 처음으로 덕돌은 식당에 가서 황승연 교장과 마주 앉아 손수 따라주는 술까지 받아 실컷 마시고 게트림을 하면서 당직실로 돌아왔다. 만순과는 황 교장네 집으로 갔다는 말을 입 밖에 내지도 않았다. 어느날 황승연이 또 교장실에 불렀다. 덕돌은 이젠 황교장이 자기를 욕하지 않겠지 하면서 교장실에 스스럼없이 들어갔다. 아닌 게 아니라 황승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열정적으로 맞아 주었다. 그는 덕돌의 옆에 다가와 나란히 앉으면서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꺼냈다. “다른 일이 아니오. 난 덕돌이 말썽을 일으켰지만 사내대장부답다고 보오.” 욕만 하던 황승연이 스리슬쩍 춰주자 덕돌은 오히려 부자연스러워했다. “정말이오. 여자들도 덕돌 같은 사내대장부한테 시집가면 행복할 거요.” 그제야 덕돌은 황승연이 명수선생에게 자기 말을 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끼게 됐다. (배후에선 나를 주정뱅이요, 깡패요, 부랑배라고 헐뜯고 앞에서는 슬쩍 춰주면서 양면 파 수법을 써? 가랑잎으로 작작 제 눈을 가리우거라.) 덕돌은 속으로 황승연의 낯에 침을 뱉었다. 황승연은 그런 줄도 모르고 계속 지껄였다. “나한테 처조카 여자애가 있소. 인물이 아주 이쁘오.” 그는 침묵을 지키는 덕돌을 쳐다보며 계속 늘여놓았다. “아마 너도 어제 이사 짐을 나르면서 보았을 거다. 그 해사하고 활발하고 예쁘게 생긴 여자애 말이다. 다리를 살짝살짝 젓지만 사는 데야 대수냐? 남녀가 어디 다리로만 사니?” 덕돌은 대뜸 염오감이 울컥 치밀어 그 자리에 더 있고 싶지도 않았다. 생각 같아선 “나를 어떻게 보고 하는 말입니까? 다리를 젓는 당신 병신 처조카와 살라고?!” 하고 욕설을 시원히 퍼붓고 싶었지만 점잖고도 완곡하게 거절했다. “전 이미 말이 있는 처녀가 있습니다. 처조카 말은 듣지 않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뭐라고?” 황승연은 노여워 우멍눈을 부릅뜨고 광대뼈에 붙은 살까지 푸들푸들 떨었다. “사람으로 봐주니 좋은 줄을 모르고 그 주제에 누구 네 귀한 처조카를 차버려? 내 처조카딸과 결혼해봐라. 내 너한테 학교 단위 서기를 시킬 테다. 그뿐이겠냐? 우리 학교에서 몇해 단위 서기로 있으면 내 현 단위에 말해서 부서기로 추천할 테다.” 허나 덕돌은 “감사합니다. 허나 사랑과 벼슬은 다릅니다. 마음에 없는 여자와 어떻게 삽니까? 아무리 서기요 부장인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라고 하면서 나가려고 했다. 그러자 황승연은 “가만 한마디만 더 듣고 나가라.”라고 하며 덕돌의 가까이로 다가왔다. “네 같은 주정뱅이, 깡패와 누가 결혼하자고 하겠니? 너 약혼하려니 하니? 쉽지 않을 거야. 우리 처조카를 소개할 때 약혼해라. 그럼 네 전도는 창창하다. 그러지 않아 봐라. 어떻게 되는가?” 덕돌은 황승연을 똑바로 쏘아보며 냉소했다. “처조카 딸과 약혼시키자고 혼사반간을 놓았겠구먼. 알만합니까? 남의 혼사반간을 놓으면 죽어 파묻어도 묘지 꼭대기에 풀이 나지 않는답디다.” 말을 마치자 덕돌은 문을 열고 나와 버렸다. 뒤에서 “너 약혼이나 하는가 두고 보자.”라고 하며 욕하는 황승연이 복도에서도 다 들리었다. 어느 날, 덕돌이 전 시 학생육상경기대회를 앞두고 애들을 데리고 운동장에서 훈련하고 있을 때었다. 고중 고도선수 넷이 와서 고도 뛰기를 연습했다. 남자선수들이 1.5미터를 겨우 뛰어넘는 것이었다. “한창 씽씽 날 애들이 고작 그것밖에 뛰지 못하니?” 그러자 그 선수 애들이 “선생님은 뭐 얼마나 뛰기에? 큰 소립니까?”라고 했다. 그러자 수일이랑 선화랑 학급의 애들도 모두 덕돌을 쳐다보았다. “선생님, 한번 본때를 보여주십시오.” 덕돌은 핍박에 의해 고도 앞으로 가서 고도대를 쥐어 단번에 1.55미터 올려놓고 이쪽으로 스적스적 걸어왔다. 체육교원들과 애들의 눈길이 몽땅 덕돌에게 쏠렸다. 덕돌은 별로 몸 풀기도 하지 않고 속도를 내 달리다가 두 손을 머리 앞에 대고 개구리가 물에 뛰어드는 동작으로 씽 날아 넘어가 살짝 모래에 손을 대며 내려 곤두박질쳤다. “우~와!” 사생들은 모두 초풍할 지경으로 놀랐다. 고도선수들은 날렵한 덕돌을 보고 뒷덜미를 긁적거렸다. 그런데 바지가 쫙 찢어졌다. “저걸 어쩌니?” 수일은 얼른 달려와 선생님의 바지를 여미어주었다. 그래도 안 되자 선화가 제꺽 달려와 빈침으로 잡아매주었다. 그날 애들을 다 훈련시키자 덕돌은 바느실도 없어 바지를 기워 입을 수도 없어 바삐 백화상점에 가서 새 바지를 사 입었다. 점심때가 되자 그는 간장에 파를 찍어 묵은 밥을 대충 먹네 하고는 황급히 버스 역으로 달려갔다. 사실 덕돌과 명숙은 모두 사업을 하느라고 언제 연애할 새도 없었다. 덕돌은 담임교원을 하느라고 눈코 뜰 새 없이 바삐 돌아치다나니 일요일에만 시간이 있었는데 명숙은 대부분 일요일에 병원 당직을 서는 때가 많았다. 만난 지 반년이 다 돼갔지만 네 번 밖에 만나지 못했다. 그러다나니 늘 편지거래를 많이 하다가 오늘에야 시간이 나서 전날에 전화로 소나무 숲이 우거진 망아산 기슭에서 만나기로 했던 것이다. 덕돌이 버스를 타고 굽이굽이 망아산 고개를 올라가며 보니 저 멀리 고목아래 자전거를 세워놓고 땀을 들이는 명숙이 보였다. 덕돌은 버스에서 내려 스적스적 명숙한테 다가갔다. 고목 아래에서 일어나 환하게 웃으며 마중하는 명숙은 진짜 숲속에 피어난 나리꽃 같았다. “안녕하십니까? 오래 기다리지 않았습니까?” “아니, 아직도 ‘예’, ‘예’ 입니까? 이젠 허물없이 말합시다.” “알았습니다. 그러지요.” “또, 또.” 명숙은 외까풀 눈을 곱게 흘기었다. “양, 알았소. 허허허.” 순간 그들 사이에 있던 담이 허물어지며 가까워 진 감이 들었다. 명숙은 우리 사랑을 기도하듯이 습관적으로 두 손을 모아 가슴 앞에 쥐고 덕돌을 따라 훈훈한 봄바람에 술렁거리는 소나무 숲 속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산새들이 지저귀는 소나무 숲 속에서 한 뼘 간격을 두고 나란히 앉았다. 이 말 저 말 하다가 덕돌은 명숙을 보고 “동무는 사람들이 붐비는 대도시가 좋소? 아니면 조용한 농촌이 좋소?” 하고 물었다. “전 조용한 시골 농촌이 좋아요. 생각 밖이죠?” 명숙은 고이로 그렇게 말했을 수도 있었다. 허나 덕돌은 속으로 호리호리하게 생긴 숲속의 나리꽃 같은 명숙은 나이는 어려도 자기 관점이 있고 똑똑하다는 것을 재차 느꼈다. 침묵이 흐르는데 소나무 숲이 설레는 소리와 산새들이 지저귀는 소리 밖에 들리지 않았다. 명숙은 나무꼬챙이로 땅바닥을 쪽쪽 긁더니 “이런 거 물으면 실례인거 같은데요. 키는 얼마나 돼요?” 하고 물었다. 덕돌은 피씩 웃으며 “1.68. 키 작다고 나무라는 거요?” 하고 물었다. 자존심을 건드리는 거 같았다. 조금만 더 건드리면 “키 작아 나무라면 그만 두기요.”라고 하며 바지엉덩이를 툭툭 털고 소나무 숲에서 달아날 것 같았다. “아니. 그만하면 작은 키 아닌데요. 그저 궁금해서 물어본 거예요.” 그제야 덕돌도 명숙도 한숨을 후~, 호~ 내쉬었다. 덕돌은 이쁜 명숙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물기 어린 큰 눈, 날이 선 코, 작은 입, 복성스레 생긴 이마! 아, 실로 어쩌면 숲 속에 피어난 나리꽃처럼 이렇게 예쁠까! 삽시에 덕돌은 가슴이 뭉클 했다. 부글부글 끓어 번지는 감정 같아서는 그녀를 마구 포옹하고 털이 보송보송한 복성스러운 하얀 이마에 뽀뽀를 하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허나 덕돌은 감정을 이기지 못해 저도 몰래 어망 간에 명숙의 손을 그러쥐었다. 명숙은 처음에는 본능적으로 손을 움츠렸다가 가만있었다. 어색한 분위기를 풀려고 덕돌은 “내 손금을 봐 줄까?” 하고 능청스레 물었다. 그녀는 덕돌을 똑바로 마주보다가 손을 뽑아가면서 “전 그런 미신을 믿지 않아요.”라고 하더니 머리를 다소곳이 숙이었다. 속으로 덕돌은 명숙을 보기만 하면 감정이 북받치고 흥분되고 격동되면서도 임기응변도 척척 하고 에둘러대는 자기를 발견했다. 후에 덕돌은 명숙을 만나는데 편리하게 자전거를 샀다. 하여 그 후부터 덕돌은 새 자전거를 타고 비 내리는 날이나 밤이나 가리지 않고 명숙을 약속해 만났다. 그리하여 그 후에 그들은 버드나무숲이 우거진 해란강변에서, 지어 비 오는 날에는 수술실에서 자주 만나 사랑을 속삭였다. 청춘 남녀의 사랑은 뜨거운 두 심장 속에서 싹 트고 우썩우썩 자라나 얼기설기 뻗쳐나가고 있었다. 은빛 달빛이 반짝이는 어느 날 밤에 덕돌은 자전거를 타고 명숙을 불러내 바깥에서 만나려고 했다. 명숙은 습관처럼 두 손을 모아 쥐고 해란강 둑으로 나아갔다. 덕돌은 그녀를 따라 자전거를 밀고 해란강 둑에 가서 세워놓고 나란히 앉았다. 그런데 덕돌은 저도 몰래 그녀의 어깨에 팔을 올려놓았다. 그러다가 인차 내리웠다. “미안하오. 팔을 올려놓아서.” “별 말씀을.” 명숙은 덕돌 쪽으로 머리를 돌렸다가 다소곳이 숙이더니 손가락으로 콩크리트 바닥을 긁었다. 해란강물은 수천만 개의 은파가 부서지며 뛰노는 은 잔디 금잔디를 싣고 세차게 굽이쳐 흐르고 있었다. 조용한 강변에는 철썩 철썩 강둑을 치는 물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덕돌은 뭉클 하는 가슴을 진정하지 못하고 덥석 그녀를 끌어안고 한손으로는 그녀의 따스한 손을 잡았다. “난 명숙을 마음속으로 사랑하오. 영원히 사랑하겠소.” “예? 참말인가요?” “양. 난 피 끓는 청춘의 티 없이 맑은 마음으로 명숙을 사랑하오.” “예. 고마워요.” 그녀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렸다. 토론하지도 않았는데 그들 둘은 함께 일어나 뜨거운 포옹과 함께 첫 키스를 나누었다. 그녀의 촉촉한 입술은 덕돌을 황홀하게 만들었다. 달님도 지켜보다가 부끄러운 듯이 얇은 구름 속으로 살짝 들어가며 구리바라 같은 둥근 얼굴을 가리었다…               5. 우물 안에서 솟아난 용        세월이 유수와도 같이 흘러 덕돌이 명숙과 결혼한지도 어언간 2년이 다 돼가고 그들의 아들 운선이가 돌 생일을 쇠게 됐다. 상순은 얼마나 손자가 귀여운지 몰라 아장아장 걷는 손자 놈이 희구해서 “이리 오라, 할아버지 안아보자.”라고 했다. 운선이가 “할아버지! 할아버지!” 하면서 두 팔을 벌리고 아장아장 걸어와서 할아버지 품에 안겨 애고사리 손으로 할아버지 주름이 밭고랑같이 파인 얼굴의 허연 수염을 매만졌다. “에이고, 이 놈아, 이걸 희구해서 어쩌겠니? 이 놈아, 넌 우리 영월 김 씨네 19대 장손이야.” 상순은 운선의 엉덩이를 툭툭 다독이며 장해 희죽이 웃었다. 그는 사돈보기를 할 때 사돈집과 며느리 명숙이 3년 후에 결혼하겠다고 하자 펄쩍 뛰었었다. (3년 후라니? 내 칠순이 다 돼도 손자 놈 하나 보지도 못하겠다.) 상순은 발끈 성을 냈다. 그래도 덕돌이 난 놈이었다. 상순은 아들의 수완을 탄복했다. (그 놈이 사돈보기 때부터 자꾸 가시집에 가서 명숙을 얼려 데리고 자더니 끝내 이겼구나. 본가 집에 벽돌집을 지어주고 3년 후에 시집오겠다던 명숙은 인차 시집가겠다고 했다. 사돈도 사돈보기를 할 때와는 달리 “줄 건 줘보내고 시름을 놓자.”고 하면서 막내딸을 시집보내겠다고 했던 것이다. 그래서 상순이 음력설 이튿날로 결혼 택일을 해 보냈더니 인차 동의했다. 운선을 임신했을 때 명숙은 이상한 태몽을 둘이나 꾸었다. 별나게 나무 구멍에서 뱀 같은 것(용)이 두 마리나 대가리를 내미는 것이었다. 또 하나는 소다리 새에 커다란 소불알이 보이더라는 것이었다. 덕돌의 태몽에는 웬 커다란 호랑이가 “따웅” 하고 울면서 뛰어 왔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아들을 척 낳았지. 명옥의 태몽에는 덕돌이 용정으로부터 황소를 가져 왔다고 했다. 덕돌의 넷째누나 은자의 태몽에는 높은 층집에서 덕돌이 웬 여자들 셋에게서 총 세 자루를 받아가지는 것을 보았다고 했다. 상순은 약한 명숙을 처음 보는 순간 앞에 세워놓고 넌지시 아들에게 “저리 약한 여자 애내기를 할 만 할까?” 하고 근심한 적이 있었다. 며느리가 임신했다고 하자 상순은 닭을 고아 먹이려고 잡아가지고 아들 집으로 찾아 갔다. 허나 며느리가 신랑과 함께 본가 집으로 가고 없으니 닭을 가지고 사돈집에까지 찾아 간 적도 있다. 기어이 당신의 손으로 잡은 닭고기를 며느리를 먹이고서야 시름 놓고 집으로 돌아갔다. 덕돌은 명숙을 모로 눕혀놓고 불룩한 배를 어루만지면서 “요게 아들일가? 딸일까?” 하고 물었다. “글쎄 다 동무 재간에 달렸지. 뭐.” “아니요. 내 뿌린 씨를 동무가 선정하기에 달렸지.” “생리학적으로 말하면…” “됐소. 돼. 다 명숙에게 달린 게요.” 이럴 때가 많았다. 명숙은 독자신랑을 만나 꽤나 딸을 낳을 까봐 근심했다. 총명한 애를 낳으려면 태아교육부터 잘 해야 한다고 덕돌과 명숙은 늘 불룩한 배에 녹음기를 틀어놓고 은은한 음악을 감상하군 했다. 명숙은 배속의 애도 음악소리 좋은지 움직이는 감이 난다면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1985년 양력설을 쇠고 며칠 안 돼 해가 질 무렵에 드디어 운선이가 태어났다. 덕돌이 집에 가서 애 포대기를 가지고 산원으로 가는데 바깥에서부터 애가 “응아” “응아” 하고 우는 소리가 아주 쟁쟁하고 높이 들렸다. “뭘 낳았을까?” 덕돌은 궁금하고도 딸을 낳았을까봐 긴장해 황급히 산원으로 들어갔다. 명옥은 싱글벙글 웃으면서 애를 안고 와서 “아들이오. 애 아버지 안아보오.”라고 했다. “정말 아들입니까?” 그러자 가시어머니 옥선도 웃으면서 “아들이지 않고. 7근 2냥이나 되는 큰 아들이오. 애 아버지, 빨리 안아보오.”라고 했다. 덕돌은 포대기에 싼 갓난 아들을 꼭 껴안자 속이 든든한 감이 들었다. (이젠 나에게도 든든한 아들이 있다. 대를 이을 후계자가 있단 말이야.) 덕돌은 아들을 껴안고 얼굴에 꼭 대고 있다가 명숙이 나오자 “애 어미도 안아보오.”라고 했다. “예. 안아보지.” 명숙도 갓난애를 꼭 안았다. 허나 산후 피를 너무 많이 흘려 바지에 뻘건 피가 아직도 줄줄 흘렀다. 그리하여 황급히 애를 본가 집 어머니에게 안겨주고 바지를 갈아입었다. 애지중지 한해를 키운 아들애가 벌써 생일을 쇠게 됐다. 상순과 명옥은 손자 운선의 생일을 잘 쇠려고 집에 있는 닭 12마리나 몽땅 잡아 튀를 해 심장과 똥집까지 하나도 다치지 않고 몽땅 가져다 손자 생일상에 올렸다. 그러고도 모자라 중국의 액수가 다른 돈을 대표하는 18원 88전을 생일상에 올렸다. 가시집 부모와 형제들인 은자와 순자, 경수, 춘수, 춘식까지 몽땅 와서 생일상에 부조를 내놓았다. 덕돌의 누나들인 춘자와 은숙, 홍자와 은자, 성숙까지 몽땅 와서 운선의 생일을 축하해주었다. 그날 덕돌과 명숙은 운선을 안고 영원한 기념사진을 찰칵 찍었다. 운선은 공부를 잘하겠는지 제일 먼저 만년필을 쥐었다. “야, 그 놈이 아비를 닮아 공부를 잘하겠는 모양이다.” 상순이 희구해서 혀를 끌끌 찼다. 운선은 다음에 돈을 쥐었고 주산과 만년필을 쥐고 오곡그릇을 마구 휘 저어놓았다. 그러자 상순과 명옥은 “아비가 이전에 돌 생일에 저러더니 딱 닮았구나.”라고 하며 웃으며 사진을 찍었다. 종호와 옥선도 외손자를 안고 사진을 찍으면서 “이렇게 할아버지 때부터 면목을 안 세교지간에 사돈을 맺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라고 하며 통쾌하게 웃었다. 사진사가 외손자를 안은 종호와 옥선을 찰깍 찍었다. 덕돌과 명숙은 학교와 병원의 소님을 다 접대해 보내고 나니 밤 8시가 다 됐다. 그들은 부모로 된 의무를 하는 첫 발걸음을 떼고 나서 부모를 하기 쉽지 않다는 것을 처음으로 느끼게 됐다. 덕돌은 아들까지 보았지만 글을 쓰려는 꿈을 행동에 옮기기 시작했다. (전근이 어디 식은 죽 먹기처럼 쉬운가? 하늘의 별따기보다도 더 어렵지.) 전근하려고 애를 쓰면서 덕돌은 이렇게 깊이 느꼈다. 명숙은 “공사병원에서 진수해로 전근해오느라고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또 전근을 해?” 하고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허나 덕돌은 “전근해왔기에 얼마나 평안해?”라고 했다. 하긴 만삭이 돼가지고서도 버스를 타고 15리 길을 통근하느라고 첫애까지 유산했다. 그리하여 덕돌은 항상 퇴근해 밥과 장국을 다 끓여놓고 어두운 저녁이면 시병원에까지 마중 가서 팔을 끼고 부축해 조심조심 집으로 데려왔다. 혹시 만삭이 된 몸으로 얼음 진 길을 걷다가 넘어져 애라도 떨어질 까봐 서였다. 그러나 전근해 온 다음에는 500미터도 되나 마나 한 거리에 있는 병원에 출근해 아주 편리해졌다. 명숙은 진수해가 너무 좋다고 했다. “동창생들과 친척들도 많아서 정이 들어 살기 좋은데 전근해 뭘 하는가?” 허나 덕돌은 황승연과는 “문화대혁명”때부터 아버지와 원수를 맺어놓아서 진수해중학교에서 기를 펴고 살기 힘들다고 하면서 기어이 전근하려고 했다. 황차 학교에서 코흘리개들과 씨름하다나면 글을 쓸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덕돌은 육촌형인 성환을 찾아가 도움을 청했다. “형님, 어떻게 신문사 기자로 전근시켜 주오. 어릴 때부터 이상이 기자로 되는 건데 도와주오. 형님은 주임이니까 힘을 쓰면 내 전근 안 되겠소?” 성환은 한숨을 후 내쉬면서도 흔쾌히 대답했다. “노력해보자. 기회 있으면 전근해오라.” 덕돌은 형님이 동의하자 아주 기뻐했다. 성환 형님은 대답한 일을 실언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 후 성환은 자기 제자이자 동생인 덕돌을 텔레비전방송국으로, 라디오방송국으로 소개했다. 그 단위들에서 글을 몇 편이라도 쓴 덕돌을 받으려고 했지만 번번히 진수해중학교 황승연 교장이 훼방을 놓으면서 덕돌의 뒤다리를 꽉 잡고 놓지 않는 바람에 전근수속 기회를 놓쳐 전근하지 못했다. 열이 불끈 오른 덕돌은 황승연을 찾아가 바른 말을 했다. “선생님, 진수해중학교에서 써주지도 않으면서 왜 남의 뒷다리를 붙잡고 놓지 않습니까?” 허나 황승연은 능청스레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이렇게 말했다. “덕돌이, 옛날 일은 다 잊고 우리 학교에 있소. 그럼 내 학교 단위서기로 써 줄게. 몇 해 단서기를 하다나면 교도 처 주임도 할 수 있고 나아가서 교장도 할 수 있소. 저는 재간도 있고 지식도 있지 않고 뭐요?” 그 감언이설에 얼릴 세 살짜리 덕돌이 아니었다. 분명 “벼슬”을 미끼로 덕돌을 낚아 학교에 얽어매놓으려는 수작이었다. 덕돌은 궁리 끝에 명숙을 먼저 전근시키기로 했다. 명숙의 육촌형부의 고모사촌형님이 시내 모 국의 과장을 한다고 했다. “에이고, 우리와는 먼 사돈의 팔촌이구먼. 힘을 써주겠소?” 덕돌이 허구픈 웃음을 지었다. 허나 명숙은 길고 짧은 것은 대봐야 안다고 했다. 덕돌은 한달 로임에서 절반이나 되는 25원을 가지고 가서 다리를 놔보라고 했다. 며칠 후 생각 밖으로 전근시켜주겠다는 회답이 왔다. 그리하여 덕돌은 명숙을 데리고 가서 시내 병원 원장과 서기, 인사과장을 만나 인사로 술상을 한상 차려 드렸다. 이젠 진수해진병원에서 명숙을 놓아야 했다. 그런데 진병원의 채 원장은 간호사지식콩쿠르에서 1등을 연속 해 기준병으로 까지 된 명숙을 놓으려고 하지 않았다. 전근하기 위해 덕돌과 명숙은 로임만 나오면 거의 한달 로임 어치나 술과 돼지고기 등을 한 꾸러미씩 채 원장네 집으로 사 들고 가 명숙을 전근시켜달라고 통사정을 들이댔다. “어디 여자가 남편 먼저 전근해 가는 법이 있소?” 허나 탐욕스런 큰 배를 채우지 못한 채 원장은 술이나 돼지고기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는 번쩍번쩍 하는 라이터를 찰칵 켜 담뱃불을 붙이면서 덕돌을 보고 으스댔다. “내 친구가 사온 이 라이터 얼만지 아오? 120원이나 하오.” 그 말인즉 시시하게 그따위 술병이나 사오지 말고 현금을 몇 백원 내놓으라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세집 살림을 하는 그들이 언제 그렇게 많은 돈을 내놓을 수 있었겠는가? “탐관오리 같은 자식, 배때 탁 터져 썩어져라! 얻어먹지 못해 기를 쓰는구나!” 밸이 난 덕돌은 맥이 풀려 몇 달 동안 찾아가지도 않았다. 후에 덕돌은 채원장의 동생이자 한 실에 있는 채 선생네 이사 짐을 날라주고 점심술상에서 우연히 채원장과 마주 앉게 됐다. 그때 뚱뚱하게 생긴 채 원장이 한다는 말은 이러했다. “어떤 사람들은 물질이 의식을 촉진한다는 것을 아직도 잘 모르오. 또 알아도 물질이 풍부하지 못해놓으니까 뒤를 꼬지 못한단 말이오.” 그 말뜻은 불을 보듯이 빤했다. 배때 뚱뚱해서 탐욕스러운 채 원장은 아직도 더 얻어먹어야 전근시켜 주겠다는 암시 아니고 무엇인가. “개새끼, 잔뜩 얻어먹고도 전근시켜 주지 않으면서 더 얻어먹으려고 하는구나. 배때나 탁 터져 썩어져라!” 덕돌은 그렇게 욕하면서도 명숙을 보고 채 원장에게 계속 사가라고 했다. 그 후부터는 명숙을 시켜 애를 업고 가져가게 했다. 그는 뚱뚱한 채 원장의 유들유들한 낯을 보기도 싫었다. 그렇게 반년이나 사 들고 가자 채 원장은 끝내 미적지근한 대답이라도 했다. “진수해중학교 교장이 동의하면 보내겠소. 저를 보낸다는 건 진수해중학교 교원의 전근을 동의한다는 거 아니고 뭐요?” 그리하여 공은 다시 덕돌네 어린 부부에게로 넘어왔다. 덕돌은 가만히 아무리 생각해 봐도 황승연이 동의할 리 만무하다는 것을 느꼈다. (무슨 수를 써야 하겠는데…) 양미간을 찌푸리고 궁리하던 덕돌은 피뜩 옛날에 무도장을 새겨가지고 일본까지 유학을 간 사람도 있다던 말이 떠올랐다. 무릎을 탁 치고 일어난 덕돌은 진수해 시내 거리에서 개인도장집을 찾아가 돈을 주고 진수해중학교 도장과 교장 황승연의 도장을 새겼다. 그리고 밤중에 학교 교장 사무실에 다가가 가만히 유리를 뜯어내고 기어들어가 황승연의 서랍에서 공백 소개신을 뜯어냈다. 그런데 서랍에 진짜 학교 도장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도장집을 열고 소개신 서너장에 뚝뚝 찍어 찢어내 가지고 나왔다. 그리고 유리창문을 제대로 맞춰 놓고 창문틀과 창문턱을 쓱쓱 닦아 흔적을 없애버렸다. 집에 돌아와 소개신에 황승연의 필체를 본 따 한어로 이렇게 썼다. 채 원장, 우리 학교에서는 덕돌 교원의 아내 명숙 동무가 먼저 전근하는 것을 동의합니다. 명숙 동무의 전근수속을 도와줄 것을 바랍니다.             진수해중학교 교장 황승연.                                              XX년 6월 17일 덕돌은 황승연의 이름 옆에 돈을 주고 새긴 황승연의 네모난 도장을 꾹 찍었다. 덕돌은 명숙이 돌아오자 희죽이 웃으면서 자작 소개신을 내밀었다. “자, 얼마나 멋있는 소개신이요? 내일 채 원장에게 가져다주오.” 명숙은 소개 신을 보고 아주 기뻐하면서 물었다. "그래, 황 교장이 어떻게 돼 동의했어요?”  덕돌은 가짜 소개신인 것을 명숙이 알면 떨려서 채 원장에게 들킬 같아 속이었던 것이다. “허허허. 황 교장이 그래도 옛 사제 간의 정을 생각해 동의하더구먼.” 허나 명숙은 황승연의 말은 콩으로 메주를 쓴다고 해도 믿어지지 않아할 지경이었다. 소개신을 들고 이리저리 살피던 명숙은 비슷해 보였던지 별 다른 말이 없이 애 기저귀를 넣는 가방에 걷어 넣었다. 이튿날 저녁때까지 덕돌은 집에서 명숙이 퇴근하기를 속을 바질바질 태우면서 기다렸다. 저녁에 명숙이 운선을 업고 집에 들어서자 덕돌은 마주 나가면서 다급히 물었다. “채 원장이 동의하던가?” “동의합디다.” “뭐라고?” “동의했어요.” “야, 이젠 살았다!” 덕돌은 너무 기뻐 두 돐이 되는 운선을 업은 명숙을 안아 한 바퀴 빙 돌렸다가 내려놓았다. 뒤이어 그는 명숙의 귀에 대고 나직이 말했다. “그 소개신은 가짜요. 내가 만든 거요.” “뭐래요? 가짜라고?” “쉿~” 덕돌은 식지를 입술에 댔다. “살자니 그렇게 하는 수밖에 없었소. 숱한 탐관오리들이 배때 터지게 얻어먹자고 악어 주둥이처럼 짝 벌리고 있는 세월에 머리를 써서 속여 넘기지 않고 어쩌겠소? 그래 소개신을 보고 어쩌던가? 다른 말은 없었소?” 명숙은 운선을 구들에 내려놓으면서 말했다. “그 소개신을 들고 보더니 ‘내일 전근수속을 하오.’라고 합디다. 소개신은 가지고 갑디다.” “허허허. “세상에 살자면 별 수를 다 써야 하는구먼.” “들키는 날엔 큰일인데.” “무슨 일? 얻어먹은 소가 똥을 눈다고 배때 터지게 얻어먹은 채 원장인들 무슨 할 말이 있겠소?” 정말 후에 채 원장은 그 가짜 소개신을 알았는지 몰랐는지 다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거의 1년 동안 몇 백원을 팔아 예물작전을 벌려서야 첫 문턱을 겨우 간신히 넘어 섰다. 경험교훈을 쌓은 덕돌은 시내 사돈인 김 과장의 면목을 빌어 위생국 인사과장에게 통사정을 들이대 전근수속지에 도장을 뚱 찍게 했다. 물론 또 덕돌이 인사과장이 퇴근하기를 기다려 그의 집을 정찰해 놓은 후 명숙을 내세워 예물을 가득 가져다주었던 것이다. 일이 되려니까 하느님이 돕는 것 같았다. 인사국의 김 과장이 간병으로 입원해 치료를 받게 됐는데 우연히도 명숙의 내과에 입원했다. 그 기회를 틀어쥐고 덕돌은 명숙을 보고 인사 과장을 살뜰히 보살피며 친해놓으라고 했다. 그 후 덕돌은 거짓으로 신랑이 예술학원에 있는 교원이라고 써넣은 전근 수속 지를 들고 과장을 찾아갔다. 물론 사전에 또 한 꾸럭 사들고 갔었다. 국장은 전근 수속지를 읽어보더니 도장을 꽝 찍어주었다. "젊고 예쁜 색시가 신랑과 두 곳에 나뉘어 사느라고 고생했구먼. 어서 시내에 전근해 가서 신랑과 함께 깨알이 쏟아지게 사오.” 한 문턱, 한 문턱 넘어 덕돌은 명숙을 시내 병원으로 전근시켰다. 관리들은 직위를 빌어 문턱을 높여 놓고 각종 수속을 하려고 찾아오는 사람들에게서 배때 터지게 얻어먹고서야 수속을 해주었다. 썩어빠진 관리들은 고기잡이꾼이 채발을 놓고 물고기가 뛰어들기를 기다리는 격이었다. 재수 좋게 통이 큰 자를 만나면 잉어도 잡고 허연 붕어도 채발에 뛰어든 놈을 건져 먹을 수 있었다. 그때마다 벼슬의 짭짤한 맛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재수 없으면 채발에 뛰어든 물고기가 오히려 채발을 뛰어넘으면서 고기잡이꾼에게 물똥을 튕기게 할 때도 있었다. 얻어먹다가 들키어 부패분자로 몰리어 철직 받고 당내 처분을 받기도 했다. 덕돌은 그런 부패분자들이 지키는 관문을 하나하나 아리랑 고개를 넘듯이 힘겹게 넘어가야만 했다. 그는 황승연을 찾아가 색시가 시내에 전근해간 일을 당당하게 알려주고 두 곳에 나뉘어 살지 못하겠다고 하면서 전근수속을 하겠다고 들이밀었다. 그러자 황승연은 펄쩍 뛰었다. “야, 염치 있니? 어떻게 아내를 먼저 전근시키니? 완전 불법이야!” 그는 사무 상을 꽝 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씩씩 거친 숨을 몰아쉬며 두덜거렸다. “채 원장도 말이 아니야.” 그는 전화를 들더니 욕설을 퍼부었다. “채 원장이오? 당신 뭐요? 어찌 남의 학교 교원의 아내를 먼저 전근시킨단 말인가!” 저쪽의 격한 대답소리도 덕돌 귀에까지 챙챙 하게 들리었다. “우리 병원의 간호사를 전근시키든 말든 당신이 무슨 상관이오? 당신이 우리 병원의 원장인가!” 저쪽에서 전화를 쾅 놓아버렸는지 황승연은 전화를 들고 쳐다보다가 쾅 놓았다. “나쁜 놈 새끼, 수태 얻어먹은 모양이구나.” 그는 시어미 역정에 개 배때기를 차듯이 덕돌을 손가락질을 하며 꽥 소리쳤다. “얼른 꺼져라! 보기도 싫다!” 그러자 덕돌은 황승연을 부축해 의자에 앉히며 기를 채워주었다. “황 교장, 작작 밸을 쓰십시오. 괜히 혈압이 올라가 중풍에라도 걸리겠습니다. 아무 때 놔도 놓아야 할 나를 그만 붙잡고 늘어지십시오.” 그러나 황승연은 악이 나 이를 딱딱 다시었다. “개새끼,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 시내에 들어가는가 봐라.” 덕돌도 어디 두고 보자는 듯이 냉소하며 교장실에서 나왔다. 그가 교연 실에 돌아가 교수안을 착실히 쓸 때었다. 총무처에 쫗겨 간 남철수 선생이 그를 찾아왔다. “좀 보기요.” 덕돌은 교수시간도 없는지라 남선생을 따라 교사 뒤로 돌아갔다. 남철수는 교사를 두리번거리며 살피다가 나직이 말했다. “전근해 가려면 먼저 나와 함께 저 황승연을 꺼꾸러뜨려야 하오.” “무슨 수로 꺼꾸러뜨린단 말입니까?” 남철수는 덕돌에게 귓속말을 했다. “저 황승연이 우리 학교 낡은 교사를 허문 목재를 두 자동차나 실어서 처남 네 집을 짓는 데 빼돌렸소. 내 눈으로 직접 보았소. 그뿐인 줄 아오? 내하고 장춘에 갔을 때 학교 돈으로 실컷 술을 먹자고 했소. 내가 학교 돈을 맹탕 낭비하지 말자고 했다고 황승연은 말을 듣지 않는다고 별 야단을 다 쳤소. 또 학교 지신청년공장에 자기 바람쟁이 딸과 절름발이 처조카를 받아주지 않았다고 신공장장을 내쫓았소. 학교 공장의 돈도 수태 탐오해내 먹었소. 저 황승연은 ‘문화대혁명’때 반란 파 두목이오…” 한참 죄장을 말하고 난 남철수는 “우리 연명으로 고발 신을 써 올려 보내면 꼭 당의 기율로 저 황승연을 말에서 끌어내릴 수 있을 거요. 한번 해보기오.”라고 했다. 덕돌과 남철수는 황승연의 죄상을 낱낱이 깨알처럼 써서 현 당위 기율검사위원회와 선전부, 조직부 그리고 교육국 당위에 올려 보냈다. 물론 그 고발 신에 덕돌은 “문화대혁명”때 반란파 두목 황승연이 청년 교원인 덕돌을 억울하게 비판한 일도 죄증으로 적어 넣었다. 고발신을 받아본데다가 덕돌이 찾아가 직접 검거하는 말을 듣고 이계삼 부서기와 허영주 부 현장은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었다. 이계삼은 덕돌을 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김 서기네 아들도 똑똑하구먼. 언제 이렇게 컸을까?” 허영주도 차를 마시고 나서 결단성 있게 말했다. “황승연은 안 되겠소. 우린 그래도 반란파 두목 황종연을 감옥에 보내고 졸개 황승연은 ‘병을 치료해 사람을 구하는 방침’으로 구하려고 들었는데 말이오. 사상개조를 하기는커녕 아직도 ‘문화대혁명’ 때 개 버릇을 고치지 못하고 쩍하면 교원들에게 억울한 모자를 씌워 비판투쟁한단 말이오.” 덕돌은 깨 고소했다. 이때만큼은 그도 고독감을 훌훌 털어버리고 자기 주위에는 그래도 좋은 간부들이 있다는 것을 깊이 느끼면서 현인민정부 울안에서 나왔다. 며칠 후 현 당위 기율검사위원회 조사소조가 학교에 내려왔다. 그날부터 학교 교장실은 발칵 뒤집혔다. 황승연은 이전처럼 개 잡은 포수처럼 우쭐거리지 못하고 복도에서 덕돌을 봐도 머리를 숙인 채 한쪽으로 피해 걸었다. 덕돌은 그래도 옛 스승이라고 다른 교원들 앞에서는 황승연과 체면과 예의를 지켜주었다. 한 달 후 현 현 당위 기율검사위원회와 현 교육국의 책임자가 진수해중학교에 내려와 교원대회를 열고 황승연 교장에 대한 처분결정을 공포했다. “부패분자 황승연을 출당시키며 진수해중학교 교장 직을 철직한다. 황승연을 현 도서관 일반직원으로 전근시킨다.” 황승연은 미쳐 날뛰며 교원들을 못 살게 굴던 그제 날과는 달리 머리를 두 다리 새에 푹 파묻고 쳐들지도 못했다. 숱한 교원들은 평시에 혹독한 황승연이 나떨어지자 속이 시원해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를 보냈다. 남철수 선생은 교원들을 대표해 앞으로 뛰어나가 황승연을 손가락질하며 발언했다. “황승연아, 너도 이런 날이 있고나. 네가 어디 교장이냐? 넌 도적놈이다. 넌 우리 학교 목재를 도적질해 처남에게 집을 짓게 준 도적놈이다. 넌 악감을 먹고 정치적으로 교원을 탄압한 독재자이다. 네가 고중도 온전히 졸업하지 못하고 교원을 해도 괜찮았지. 교장을 어떻게 해먹었느냐? 문화대혁명이 지나간지 얼마라고 계속 대학문을 나온 교원들을 변태적으로 못살게 굴고 배척하고 타격하고 못 살게 굴었는가! 네놈이 학교 돈을 맹탕 술을 사 처마신다고 내가 말렸다고 보복해 교수사업을 하지 못하고 총무처에 쫓아 보내지 않았는가? 덕돌 청년교원이 뭘 잘 못했다고 교원대회에서 비판했는가! 네 같은 놈은 더 엄중한 처분을 받아 싸다. 네 같은 놈이 어떻게 당원 자격이 있느냐?! 진작 타도 맞아야 할 놈이다!” 덕돌을 비롯한 교원들은 속이 시원해 또다시 박수를 쳤다. 며칠 후 황승연은 쉰도 안 돼 중풍을 맞아 입원했다. 새 교장 천을주 교장은 학교에 와서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덕돌이 시내로 전근해 가려고 하자 처음에는 인차 동의하지 않았다. “기실 동무가 전근해가면 우리 학교에는 손실이오. 우리 학교에 본과생이 몇이 남소? 재간 있는 본과생들이 다 가면 우리 학교는 어쩌오?” 그러나 덕돌이 문화관 관장으로 있는 옛 은사 김재국 선생을 찾아가 전근에 도움을 청하는 바람에 정황은 달라졌다. 재국 선생은 친히 자기 이상 처남 주교장에게 쪽지를 써서 덕돌을 보고 가져다주게 했다. “천 교장, 청년들이 문학창작을 하겠다고 전근하려는데 보내는 것이 옳다고 보오. 우리 늙은이들은 청년들의 전도에 디딤돌이 돼야지 장애물이 돼선 안 되오. 덕을 많이 쌓읍시다…” 쪽지를 훑어보더니 천 교장은 “허허. 이 나그네 바로 우리 학교 교장인 상 다 하오. 우리 학교 일에 삐칠 게 뭐요?”라고 했다. 그러나 쪽지를 사무 상에 넣더니 덕돌을 웃는 얼굴로 바라보면서 정중하게 말했다. “동무는 재간도 있고 사업열성도 있소. 허나 어떻게 하겠소. 보내기 아깝지만. 동무는 정치학부를 졸업하고 어째 글을 그렇게 쓰기 좋아하오? 기자로 되는 것이 소원인데. 색시와 두 곳에 나뉘어 통근하게 해서야 되겠소? 가서 좋은 글을 많이 쓰오. 그럼 나도 기쁘겠소.” 덕돌은 너무 기뻐 허리 굽혀 인사했다. “천 교장선생님, 감사합니다. 꼭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글을 쓰겠습니다.” 덕돌은 아주 기쁜 심정으로 시내로 달려가 성환 형님을 찾았다. 허나 성환은 김빠진 소리를 했다. “얘야, 신문사에서 급히 사람이 수요 돼 그새 다른 사람을 받아 넣었단다.” 덕돌은 눈앞이 캄캄해 났다. 그러나 성환은 덕돌의 어깨를 다독이었다. “천천히 어데 자리 있는가 알아보자. 제수가 시내에 들어왔으니까. 조만간에 너도 들어올 수 있다. 근심하지 말라.” 덕돌은 그날 성환과 명수 두 형님과 술을 실컷 마시고 집으로 돌아왔다. 몇 달 후에 결국 성환 형님과 이상처남 명수가 힘쓴 덕분에 덕돌은 시내 어느 가도의 문화소로 전근해 가게 됐다. 성환은 시내 문화소 소장의 작품집을 출판사에서 내게 주선해주고 대신 덕돌을 문화소에 받게 했던 것이다. 명수는 현 교육국과 진수해중학교에서 본과대학생을 다 빼간다고 덕돌을 놓지 않는 것을 보고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엄동설한에 교육국 국장을 하는 자기 학생과 교장을 하는 동창생 천을주 교장도 찾아가 말해 놓게 했던 것이다. 덕돌이 인사국에 전근 소개신을 들고 갔을 때다. 전근 령을 떼는 인사일군은 덕돌을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 “문화소에 편제 없소. 자그마한 가도 문화 소에 대학 본과생을 받아 넣을 필요 없소. 문화국에서는 뭘 하는 거요? 욕심이 대단하구먼. 전근하려면 연구할 시간이 걸리오.” 덕돌은 맥이 풀려 걸상에 주저앉았다. 듣는 말에 의하면 관청의 인사부문 문턱을 드나들면서 들을라니 이른바 “연구하자”는 말은 담배(연)와 술(주)을 가져오라는 말이라고 들었다. (아니, 현교육국과 인사국에서 다 동의했는데 인사국에서는 또 연구하자면서 술과 담배를 한 아름 사다 안겨줘야 전근 령을 떼 주겠단 말인가? 한심한 사람들이라고. 부처 간이 두 곳에 나뉘어 몇 해나 살았는데 또 이런 문턱에 올가미를 걸어 놓고 얻어먹으려 한단 말인가?) 덕돌은 너무 기가 막혀 인사일군이 훌 쥐어뿌려주는 전근 소개신을 들고 인사국 문을 나섰다. 아내 전근수속을 하면서 병원과 위생국, 인사국 문턱을 넘을 때마다 돈을 얼마나 썼던가? 전근도장을 하나 찍는데 힘이 들지 않건만 간부들은 얻어먹지 않으면 근본 전근도장을 찍어주지 않았다. 그자들은 바로 그런 기회에 치사하게 얻어먹어야 권리를 향수했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짭짤한 수입은 퍽 유혹이었다. 돈이 있으면 술도 있고 돼지고기도 있고 미녀도 있는 시장경제 시대다. 권리를 팔아 금전을 챙기는 작업을 관사의 부패한 나으리들은 잊지 않고 있었다. 덕돌은 더러운 부패관리들이 득실거리는 관청의 문들을 돌아보면서 한숨을 후 내쉬었다. 관청의 문들은 그에게 쫙 벌린 범의 아가리처럼 보였고 뭔가 먹으려고 벌린 독가시 터덜터덜한 악어의 주둥이처럼 보였다. 허나 별수 없었다. 자기 뜻을 이루려면 뻔히 알면서도 그 악어 입에 뭔가 집어 던져줘야 했으니까. 듣는 말에 의하면 악어는 뭐라도 받아 물기만 놓칠까 봐 다시 아가리를 벌리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는가. 허허허. 이게 관사 악어들의 현실이었다. 그러다가도 기율검사위원회나 반탐오국에 걸려 으리으리한 관사로부터 쥐굴 같은 감방에 이사가는 비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는 정부청사에서 처장으로 사업하는 최일웅 형님이 피뜩 떠올랐다. (옳지, 형님을 찾아가 말해 보자.) 덕돌은 용기를 내 으리으리한 정부청사를 찾아갔다. 일웅은 덕돌의 큰고모의 맏아들 근덕(봉순)의 아들이자 둘째외할아버지의 맏손자여서 덕돌에게는 아주 가까운 친척집 형님이었다. 일웅은 아주 열정적으로 동생을 맞아주었다. 그는 덕돌에게서 사연을 들은 후 한숨을 후 내쉬었다. “무슨 연구, 연구가 필요해?” 그는 사업에 분망하면서도 정부 회의 쉼 시간에 다시 인사국에 달려가 말해 주고 돌아왔다.  “당장 인사국에 가봐라. 문화소에 가서 일을 잘 해라.” “형님, 감사하오. 관청에 들어오니 백성들이 아내와 만나 한 곳에서 살자고 해도 일이 잘 안되오. 쩍하면 연구, 연구 하면서.” 그러자 일웅은 희죽이 웃으면서 “세상 일이 그렇다.”라고 하며 덕돌의 손을 잡아 주고나서 부랴부랴 정부 회의실로 바삐 들어가는 것이었다. 덕돌이 다시 인사국으로 가니 그 인사일군은 “정부의 최 처장은 어떻게 아오?”라고 묻는 것이었다. “친척집 형님입니다.” 그러자 그 인사일군은 두 말 없이 전근령을 쓱쓱 써서 도장을 뚝 찍어 떼 주었다. 인사국에서 나오면서 덕돌은 도리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인사, 인사라고 인사국에 가면 인사하지 않으면 일이 안 된다던데. 형님이 말하니 인사도 하지 않고 처음 도장을 찍었네 그려.” (그 인사일군은 얻어먹지 못해 속이 좋지 않았을 거야. 혹시 일웅 형님을 속으로 욕했을 수도 있었을 거야. 얻어먹을 기회를 망가뜨렸다고.) 덕돌을 시내에 전근시키려고 숱한 친척들이 도와주었다. 덕돌의 고모사촌매형 차대균은 일웅의 고모부였다. 그는 선후하여 덕돌을 자기 일하는 예술학원 정치교연실에 전근시키려고 연줄을 달아 본적도 있었다. 그는 연극단 서기로 있을 때에는 덕돌을 연극단 창작조에 받아들이려고 연줄을 달았다. 허나 세집살이를 하는데다가 명숙의 전근에 돈을 너무 많이 쓸어놓고나서 덕돌이 제때에 해당 부문 코밑 치성을 하지 못해 일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일은 되지 않았지만 덕돌은 자기를 도와주는 그들의 마음이 고마웠다. 덕돌은 여러 형님과 친척들의 방조를 받아 가도 문화소로 전근했다. 문화소에 가서 일을 하면서도 그들이 항상 고마웠고 그들을 영원히 잊지 않았다. 덕돌은 비록 자그마한 가도 문화소지만 재담이거나 소품이나 가사 같은 문예공연 자료라도 쓰는 단위어서 마음에 들었고 열심히 일했다. 코흘리개 애들과 씨름하는 학교보다 책을 보고 글을 쓸 시간이 많아 아주 좋았다. 더구나 생지옥과 같던 진수해중학교 쇠살창을 까부시고 벗어나 시내로 들어가게 된 것이 얼마나 기뻤는지 몰랐다. 덕돌에게는 우물 속에 갇혔던 용이 솟아 난 것보다 못하지 않게 기뻤던 것이다. 실로 지옥 같던 진수해중학교에 있던 나날들을, 아니 악몽 같던 그 한 많은 나날들을 돌이켜 생각하기조차 소름이 오싹 끼쳤다. 진수해중학교를 떠날 때 교단에 다시 오르게 된 남철수 선생이 덕돌을 바랬다. “덕돌이, 문화소에 가서 잘 하오. 마귀굴에서 벗어났으니 이제야 진짜 살만한 때 왔소. 나도 이젠 교수사업을 하게 됐소.” 덕돌은 남철수 선생의 손을 꼭 잡았다. “제일 어려울 때 남선생님이 저를 동정했고 악마 같은 황승연을 제거해주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때 예술학원 입학통지서를 받고 기뻐 어쩔 줄 모르는 선화와 현 체육학교 씨름선수로 된 수일이 등 애들의 환송을 받으면서 떠났다. 시내로 가는 버스를 타기 전에 덕돌은 용이 하늘로 솟아올라 갔다는 유서 깊은 용정 우물터에 가서 남선생님을 모시고 학생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찰칵 찍었다. 마치 하늘로 솟아오른 용이나 된 것처럼. 버스가 달려 왔다. 덕돌은 흐릿한 하늘 아래 진흙탕 속 같은 진수해를 다시 돌아보았다. 차에 오르면서 그는 남철수 선생과 선화, 순희, 홍화, 수일 등 사랑하는 제자들을 바라보면서 콧마루가 시큼해나고 가슴이 울먹여 손을 저었다. 버스는 조용히 스르르 미끄러져 나갔다. 그는 눈을 딱 감았다. 뜨거운 눈물이 두 볼을 타고 주르르 흘렀다. 선화와 순희, 홍화 등 애들은 사내대장부 덕돌 선생이 눈물을 흘리는 것을 처음 보고 손등으로 눈시울을 닦고 또 닦았다.      버스는 어느덧 사랑스러운 선화와 수일, 순희를 진수해에 남겨두고 굽이굽이 열두 아리랑 고개 망아산 고개를 부르릉 부르릉 힘겹게 넘어가고 있었다…                        
159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116) 댓글:  조회:1340  추천:0  2018-08-14
                            2. 백프로선생  로맨스 따르릉 따르릉 교정의 종소리가 정답게 울렸다. 해가 어슬어슬 넘어가는데 학생들은 수양버드나무 가지가 휘늘어진 교정에서 뛰놀다가 교실로 와 하고 뛰어 들어갔다. 덕돌은 당직을 서게 돼 교정을 휘 한 바퀴 돌면서 자세히 살폈다. 그런데 3층 교실에 웬 남학생이 창문에 거마리처럼 매달려 안을 들여다보며 손을 휘두르는 것이 아니겠는가. “야, 창문에 매달려 뭐 하니? 그러다가 떨어지면 어쩌니? 어서 내려라!” 덕돌이 다가가면서 소리쳤다. 그런데 그 애는 창문에 매달려 교실에 뭔가 뿌리고 있었다. 교실 안에서는 여학생들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저 새끼, 모래를 뿌린다!” 교실 안에서 여학생들이 떠들어댔다. “얘, 떨어지겠다. 어서 내리지 못하겠니?” 그런데 그 애가 덕돌을 내려다보며 욕설을 퍼부었다. “에이, 씹할, 백프로 같은 게. 별 일을 다 삐친다.” “야, 내리지 못하겠니?” “제 무슨 우리 담임인가? 뭐나 다 삐치면서. 개 불알 같은 게!” 그 욕지거리에 덕돌은 울컥 치미는 분을 억지로 삼키었다. “야, 선생과 무슨 말버릇이냐? 창문에서 내려 교실에 들어가라. 떨어지면 상하겠다.” 덕돌은 그래도 그 애가 유리창문에서 내리지 않자 교수청사로 들어가 3층 교실로 올라갔다. “야, 떨어지겠다. 창문에서 천천히 내려서 들어오라.” 덕돌은 그 애가 떨어질 까봐 온화하게 말하며 손짓했다. 그때 그 애가 교실 안으로 뚝 뛰어내리며 “에이 씨, 백프로 같은 게 삐치기는?”라고 욕했다. 덕돌은 자습하던 숱한 학생들 앞인지라 “뭐라니? 너 여기 나오너라.”라고 한마디 하며 복도로 나갔다. “쾅!”  그 애가 문을 박차고 씽 뛰어나오더니 덕돌에게 헤딩을 들이댔다. 누가 학생이 교원에게 덤벼들려니 했겠는가? 덕돌은 반사적으로 피하면서 팔꿈치를 들이댔다. 그 애는 팔굽에 맞아 두 손으로 눈 통을 싸쥐고 쓰러져 땔, 땔 굴렀다. “너 감히 선생한테 손을 대겠니?” 덕돌이 을러메는 소리에 교실 문들이 벌컥 벌컥 열리며 교원들이 머리를 내밀었다. “김 선생, 어째 학생한테 손을 대오?” 덕돌이 머리를 들어보니 황승연 교장이었다. “황 교장, 얘가 내게 먼저 손을 댔습니다.” 덕돌의 변명에 황 교장은 노발대발 하면서 을러멨다. “그래도 교원은 참아야 하지. 학생과 싸우면 되오? 양?!” 황승연은 우멍한 눈으로 덕돌을 쏘아보았다. 덕돌은 억울해 참을 수 없어 대꾸했다. “선생님, 제가 때린 게 아닙니다. 얘가 헤딩을 들이대다가 내 팔꿈치에 맞았습니다.” 황 교장은 고래고래 고함쳤다. “계속 대답질 하겠니? 싸움에 이골이 튼 네가 팔꿈치를 들이대지 않으면 맞을 수 있니? 교원이면 참아야 되지. 학생들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지 말아야 한다는 걸 몰라?! 대학졸업생이라는 게 교육심리학을 밑구멍으로 배웠니?” “얘가 내 별명을 불렀는데 왜 나만 욕합니까? 학생이 교원의 별명을 불러도 됩니까? 교원은 그래 자존심도 없는 무골충이 돼야 합니까?”      “얘, 상하지 않았니? 어디 보자. 눈을 상하지 않았는지? 이게. 피 못이 됐구나.”       승연은 면상이 장마당이 된 학생애를 데리고 아래층으로 내려가면서 두덜거렸다. “개 꼬리를 3년 파묻어도 썩지 않는다더니. 아직도 주먹을 휘둘러? 어디 혼나 봐라.” 황 교장이 덕돌을 욕하자 그 애는 우쭐해  을러멨다. “교육국에 있는 큰아버지한테 다 말하겠다. 씨베.” 덕돌은 숱한 사생들 앞인지라 창피하기도 하고 분하기도 하고 억울하기도 했다. 그는 학교 대문 어귀에 있는 당직실에 돌아와 맥없이 드러누웠다. 9평도 되나마나한 손바닥만한 당직실이자 그의 숙사였다. 그는  사회에 첫발을 들여놓자마자 억울한 모자를 쓰게 됐다. (어쩜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황승연 선생이 교장을 하는 진수해중학교에 오게 됐을까? 황 선생은 고중 1학년이나 겨우 졸업한 학력에 ‘문화대혁명’ 때 진수해 시내 반란파 두목 황종연의 2인자 아닌가? 그런데도 처분 받지 않고 어떻게 진수해중학교 교장으로 됐을까?) 사실, 황승연은 시골 함흥중학교에서도 학력이 낮은데다가 “문화대혁명”시기 반란파 두목이었기에 정치 세파에 밀려 교정을 떠났다. 그런데 그는 미꾸라지처럼 진수해공사 기업소에 기어들어가 일하면서 공장 당지부 서기에게 코밑치성을 잘한 덕에 당내에 기어들기까지 했던 것이다. 그 후 뇌물 작전을 펼쳐 진수해중학교에 되 기어들어와 교무처 주임을 하다가 나중에 무슨 도깨비 변신술을 썼는지 교장으로까지 승급됐다. (진수해중학교에 사람이 없긴 없다. 정치를 한다하는 숱한 공농병 학원들도 황승연 앞에서는 비실비실 뒤로 물러서지 않는가? 진짜 ‘문무가 겸비’한 교장이니까! 위에 알락거리고 아래로는 교장 권세와 주먹을 휘두르는 판에 누가 감히 그와 엇서겠는가!) 덕돌은 한숨을 후- 내쉬었다. “황 선생한테 잘 못 걸렸어. 어떻게 하면 이번 고비를 넘을까? 그래도 사제 간인데 내가 황교장 선생을 존중하면 웃는 낯에 차마 침이야 뱉겠는가!” 덕돌이 중얼거리다가 당직실을 나섰다. 하늘에는 별들이 총총하고 보름달이 유난히도 밝아 교정 안에 은빛달빛이 대낮처럼 쫙 깔려 있었다. 덕돌은 달빛이 깔린 교정이 쓸쓸하게만 느껴졌다. 학생들은 저녁 보도를 다 받고 하학해 삼삼오오 교실에서 나와 대문 어귀로 꾸역꾸역 밀려나왔다. “백프로!” “백프로!” 애들이 덕돌의 별명을 불렀다. 덕돌은 백프로란 별명도 별나게 가지지 않았다. 덕돌은 정치시간마다 애들의 숙제를 일일이 검사했다. 어느 하루, 3개 반의 학생들이 몽땅 숙제를 했다. 너무나 기쁜 나머지 덕돌은 웃으면서 “야, 난 오늘 정말 기쁩니다.”라고 했다. 초중 1학년 학생들은 코를 풀럭거리며 “어째 기쁩니까?”라고 물었다. 덕돌은 “오늘 내가 맡은 3개 반의 학생들이 숙제를 백프로 다 했습니다.”라고 했다. 그러자 학생들 속에서 “어우, 저게 백프로야, 백프로!”라고 했다. 그 후부터 학생들은 뒤에서 가만가만 덕돌을 보면 “백프로!”하고 별명을 불렀다. 어떤 여학생들은 덕돌의 웃음 띤 얼굴을 보고 인상이 백프로라고 하기도 했다. 덕돌은 애들이 별명을 부르자 괘씸했지만 또 사달을 칠까봐 못 들은척하고 교실 쪽으로 가서 교실마다 돌아다니면서 문을 제대로 잠갔는가 검사했다. 교연실의 조장으로 사업하는 경산선생과 남철수를 비롯한 로교원들은 덕돌을 보고 애들이 놀리면 꾹 참고 못 들은 척 하면 제일이라고 했다. 애들도 교원이 애나 하는 걸 보면 더 놀린다는 것이었다. 덕돌도 청년교원의 자존심을 다 버리고 아Q처럼 꿈 참고 못 들은 척 해보았다. 밸은 났지만 효과는 아주 좋았다. 애들이 더 놀리지 않는 것이었다. 이튿날 야단났다. 덕돌에게 덤벼들어 헤딩을 하다가 스스로 덕돌의 팔꿈치를 들이받은 애의 삼촌 둘에 사촌형까지 셋이나 찾아왔다. 덕돌은 시간을 보러 가다가 운동장에서 그들과 딱 마주쳤다. “김 선생, 좀 보기요.” 덕돌은 주춤 멈춰 서며 학생들이 교실에 다 들어가고 텅텅 빈 운동장을 둘러보며 물었다. “누굽니까? 강의시간이 늦어서 오래 말할 시간이 없습니다.” “양, 오래 말할 필요 없소.” 그중 나이 서른 푼할 사내가 무릎을 꿇고 앉으면서 “여기 오오. 우리 앉아 얘기하기요”라고 했다. 덕돌은 별 생각이 없이 그 사내의 오른쪽에 앉으면서 자기를 쏘아보는 나머지 두 사람을 피뜩 쳐다보았다. 눈길이 그리 곱지 않았다. 아니, 살기등등했다. (혹시 어제 애 때문에 온 게 아닐까?) “난 수풀 림 자에 호랑이 호, 림호라고 하오. 사람들은 나를 수풀 속에서 뛰어나온 범이라고 하오.” 쪼그리고 앉은 사내가 말을 꺼냈다. “김 선생, 주먹이 그리 세오?” “무슨 말입니까?” “야, 이 새끼야!” 고함소리와 함께 그 사내는 팔 굽으로 덕돌의 면상을 들이박았다. 덕돌은 뒤로 누우며 팔굽을 피하며 발길로 그자의 면상을 걷어찼다. 그자는 뜻밖의 날랜 반격에 면상을 채워 쓰러졌다. 덕돌의 교수안도 운동장에 날려났다. “싸우러 왔어?” 덕돌은 뒤로 곤두박질쳐 벌떡 일어나며 싸울 태세를 갖췄다. “이 개새끼야! 어째 우리 조카를 쳤니?!” “죽어봐라!” 한사람은 시퍼런 칼을 빼들고 하나는 잔등에서 방치를 꺼내들고 동시에 덮쳐들었다. 덕돌이 날래게 허공잡이로 그자들의 어깨를 걷어차며 날아 넘어 갔다. 허나 칼에 종아리를 긁혔다. 셋이 호랑이들처럼 으르렁거리며 덮쳐들자 덕돌은 다리야 날 살려라 달아났다. 그자들은 덕돌을 쫓아 학교 숙사에까지 뛰어갔다. 덕돌은 숙사 식당에 뛰어 들어가 부엌에서 시퍼런 칼과 불갈고리를 들고 뛰어나왔다. “우리 조카를 때렸으니 죽어도 말하지 마라!” 그때 칼을 쥔 자가 덮쳐들며 칼을 휘둘렀다. 방망이도 날아들었다. 덕돌은 불갈고리로 날아드는 칼을 걷어내며 와닥닥 그 자들의 사이로 빠져나가 달아났다. 덕돌이 교정이어서 창피해 달아나자 셋은 겁을 먹은 것으로 오해하고 바싹 뒤쫓았다. 허나 그들 셋이 달리는 속도가 달라졌다. 칼을 쥔 자가 제일 먼저 쫓아오는 것을 보고 덕돌은 홱 돌아서서 날아드는 비수를 불갈고리로 막고 칼등으로 허벅다리를 쳤다. “앗!” 비명소리와 함께 그자가 비수를 떨어뜨리며 허벅다리를 붙잡고 푹 꼬꾸라졌다. 칼등으로 쳤기에 다행이었다. 그때 뒤따라온 자가 방망이로 덕돌의 머리를 내리쳤다. 덕돌이 급히 머리를 옆으로 피했지만 어깨를 탁 맞고 비칠거렸다. 덕돌은 쓰러지면서 그자의 재차 날아드는 방망이를 쳐냈다. 뒤이어 곤두박질쳐 일어나 어깨를 붙잡고 절뚝거리며 달아났다. 방망이를 휘두르던 자가 방망이를 버리고 쓰러진 자의 비수를 주어 들었다. 그자는 이를 악물고 덕돌을 뒤쫓았다. 림호도 헐떡거리며 뒤쫓아 갔다. 덕돌은 자기 학교 마당이어서 숱한 학생들과 교원들이 볼 까봐 학교 토성을 뛰어 넘어 달아났다. 둘은 비수와 방망이를 주어들고 뒤따라 토성에 기어올랐다. 그때 덕돌은 토성 넘어 딱 붙어 서 있다가 무쇠주먹을 휘둘러 토성을 붙잡은 손을 내리 쳤다. “아가! 이 새끼, 돌로 친다!” 무쇠주먹에 맞은 손이 어찌나 아팠으면 돌로 쳤나 했겠는가! 허나 그자들은 죽기내기로 키 넘는 토성을 기어 넘어왔다. 그들의 몸이 평형을 잡기도 전에 덕돌은 발길을 날려 아랫배를 걷어찼다. 림호가 비수를 휘두르며 덮쳐들자 덕돌은 훌쩍 날아 림호의 숫구멍 위로 날아지나가면서 비수를 걷어찼다. 쉬-툭, 부르르. 비수가 채워 백양나무에 박혀 무서운 비명을 지르며 부르르 떨렸다. 다른 자가 덮쳐드는 것을 덕돌이 씽 몸을 날려 맞받아 나가면서 아랫배를 걷어찼다. “휙” “휙” 소리와 함께 덕돌은 개구리가 물에 뛰어드는 동작으로 토성을 훌쩍 날아 넘어갔다 되 날아 넘어왔다. 그자들이 토성을 기어 넘어가자 덕돌이 로지심처럼 꿋꿋이 냉소하며 서 있었다. 그 자들은 눈이 뒤집혀질 지경으로 놀랐다. “네깐 놈들과 상대 해 교원의 명예를 더럽히기는 싫다. 어서 꺼져. 반주검이 되기 전에.” 림호는 겁을 집어 먹고 칼에 찍힌 동생을 업고 학교마당에서 비실비실 사라졌다. 그제야 덕돌은 칼에 찍힌 종아리와 방망이에 맞은 어깨가 아파 상을 찡그렸다. “잘한다, 잘해! 교원이라는 게 시간은 보지 않고 교정에서 학부모들과 싸워?” 덕돌이 돌아보니 황승연 교장이 우멍눈을 부라리며 다가왔다. “중학교 때부터 주먹질 하던 개 버릇을 개를 떼 주겠니?” 덕돌은 참다못해 한마디 했다. “교원은 그래 정당방위도 하지 못합니까?” “정당방위? 불갈고리를 휘두르고서도 정당방위를 했어? 학부모를 쳐? 완전히 형사범죄자야.” “내 먼저 칼에 찔렸는데도 정당방위를 하지 못합니까?” “교원 형상을 다 팔아먹었다. 잘 검토할 준비를 해.” “뭘 잘 못했다고 이럽니까?” 이때 경산 선생이 다가와 덕돌을 말렸다. “숱한 사생들이 보는데 싸워서야 되니? 교장을 존중해야지. 뭐야?” 황승연은 우쭐해 을러멨다. “보자, 보자 하니까. 덜 돼 먹은 놈 새끼군, 중학교 때도 나를 존중하지도 않더니. 흥, 어디 그래 봐라. 이번 일은 절대 용서할 수 없어. 학생을 때리고 학부모까지 칼과 불갈고리로 치다니. 흥!” 뒤이어 그는 머리를 돌려 경산을 흘겨보며 호통을 쳤다. “교연실 조장이 뭐 합니까? 잘 교육하오.” 경산 선생은 “알았소. 내 책임질 테니 이 일은 조용히 해결하는 게 어떻소?”라고 하며 덕돌의 피 묻은 바지를 걷고 종아리 상처를 손수건으로 닦아주고 싸매주었다. “얼른 병원에 가 처치해라.” 그는 덕돌을 얼려 병원에 보내고 대신 덕돌이 맡은 반에 들어가 대과교수를 해주었다. 덕돌이 공사병원에서 처치를 다 하고 학교로 돌아오는데 경산선생이 헐금씨금 달려 왔다. “황승연이 널 교원대회에서 비판하겠다고 하더라. 그러지 말고 술과 통졸임 같은 걸 사가지고 승연을 찾아가 비판대회를 열지 말라고 통사정을 들이대라. 명색이 너의 스승이 아니고 뭐야? 웃는 얼굴에 침을 뱉겠니?” 허나 덕돌은 듣지 않았다. “난 잘못한 게 없습니다. 황승연 교장께 코밑치성을 한다고 저를 봐줄 거 같습니까? 중학교 때부터 얼마나 수모를 당했다고 그럽니까?” 경산 선생은 덕돌의 손을 꼭 잡고 타일렀다. “낮은 문턱일수록 머리를 숙여야 한다. 그러잖으면 낮은 문턱에 머리가 터진다.” 선생이 어찌나 간곡히 타이르는지 덕돌은 마지 못해 수긍하지 않으면 안됐다. "점심에 그럼 찾아가 보겠습니다.” 허나 점심에 덕돌이 사탕과 과자, 술과 통졸임을 한 꾸럭 사들고 황승연 교장네 집으로 찾아갔다. 문을 두드리고 들어서자 황승연 교장은 손에 든 꾸럭을 보더니 훌 일어나 바깥으로 나가버렸다. “보기도 싫어.” 그러나 덕돌은 내심하게 황승연 아내한테 그 꾸럭을 내려놓고 나왔다. (웃는 낯에 침이야 뱉지 않겠지?) 덕돌은 한숨을 후 내쉬었다. 오후 2시가 되자 교연실의 스피카에서 전체 교원회의를 한다고 통지했다. 덕돌은 교원들과 함께 회의실에 갔다. 교원들이 다 회의실에 들어온 후 황승연 교장이 앞에 나가더니 다음과 같이 고래고래 고함쳤다. “오늘 교원회의에서 교원 덕돌이 학생 박송호와 학부모 박림호 등 4명을 때린 착오를 비판하겠습니다.” 깜짝 놀란 교원들의 눈길이 덕돌에게 쏠렸다. “우선 덕돌 선생으로부터 검사하겠습니다.” 덕돌도 뜻밖의 비판대회에 적이 놀랐다. 허나 그는 인차 진정하고 교원들 앞에 나가 서서 이른바 검토를 시작했다. “저는 우선 사건진상부터 말하겠습니다.” 덕돌이 전날 저녁과 오전에 있은 일을 죽 이야기고 나서 이렇게 말했다. “저는 박송호 학생이 불시에 헤딩하자 황급히 피하면서 몸부림쳤습니다. 그런데 송호가 스스로 저의 팔꿈치를 헤딩해 낯을 상했습니다. 저는 송호가 숱한 학생들 앞에서 내 별명을 부르고 결코 때린 적이 없습니다. 저는 당직으로서 책임을 다 했을 뿐입니다. 오히려 송호 학생이 3층 교실에서 떨어질 까봐 내리라고 조용히 타일렀습니다. 그래 3층 유리창문에 매달려 자습하는 여학생들에게 모래를 들이뿌리는 학생을 제지시킨 것이 잘못입니까? 전 정말 억울합니다. 저를 무슨 리유로 비판까지 합니까?” 그러자 교원들은 수군수군 했다. “박송호란 애는 원래 애군이오. 맞아 싸오.” “여자애들에게 모래를 치는 거 제지했는데 무슨 잘못이오?” “어떻게 학생이 선생을 헤딩하오?” “헤딩하다가 자기 힘에 김 선생의 팔꿈치를 들이받아 상한 게 누구 탓이오?” 그러자 황승연은 앞에 나가 교탁을 탕탕 두드렸다. “분명 덕돌이 학생을 때린 걸 내 눈으로 봤습니다. 우리 학교 교원들의 명예를 다 더럽혔습니다. 숱한 사생들이 보는데 오전에 학부모 셋이나 때렸습니다.” 그 말에 청년 교원들 속에서 이런 말도 오갔다. “‘문화대혁명’후 첫 패 대학생이 뭐 어떻고 어떻다더니 그저 그렇구먼.” “본과생이면 뭘 대단하오? 주먹이나 휘두르는 깡패지.” “그래도 우리 빈농의 재교육을 제대로 받은 공농병 학원이 사상이 제일이지.” 일부 공농병학원 출신 교원들은 평소에도 덕돌을 질투하더니 잘코사니야 하고 헐뜯어댔다. 그러자 황승연은 우쭐해 떠들어댔다. “박림호라는 학부모는 머리를 채워 뇌진탕이 올 지경이고 박영호라는 학부모는 불갈고리에 맞아 다리를 절게 됐습니다. 박송호 학생의 사촌형 박용호는 토성을 넘어 달아나다가 덕돌이 돌로 쳐놓은 게 손가락뼈가 다 끊어져 병신이 됐습니다. 그래 교원으로서 할 짓을 했습니까? 덕돌은 교원이 아니라 깡패입니다. 중학교 때부터 무서운 싸움꿈입니다. 우리 진수해에서 덕돌이네 굴 뱀이라면 누가 모릅니까? 세살짜리 애들도 굴 뱀이 온다고 하면 울음을 딱 그칠 지경입니다.” 그때 덕돌이 황승연과 따지고 들었다. “황 교장, 그래 교원은 학생과 학부모에게 들이대고 맞아대야 됩니까? ‘백프로’라고 별명을 부르면서 놀려대도 못 들은 척 하면서 아Q처럼 자기를 위안해야 합니까? 교원은 칼과 몽둥이를 휘두르는 학부모에게 찔리어 죽어도 정당방위를 하지 못합니까? 셋이 때리러 왔다가 피해 달아나면서 내 정당방위에 상한 게 누구 탓입니까?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예절교육을 하지 않고 모욕당한 교원을 비판하는 것이 맞습니까? ‘문화대혁명’이 끝난지 몇 해인데 아직도 잘못이 없는 교원을 비판, 투쟁하겠습니까?” 황승연은 이를 악물며 덕돌을 쏘아보며 호통쳤다. “이걸 보시오. 얼마나 완고한가? 자기 잘못을 검사하기는커녕 대드는 걸 보시오. 교원은 학생들에게 이신작칙의 모범을 보여야 해. 어떤 일이 있더라도 학생의 자존심을 상하게 해서는 안 되며 더욱이 손을 대서는 절대 안 돼!” 덕돌은 코웃음쳤다. “황 교장, 그런 말을 하기 부끄럽지 않습니까?” 덕돌은 교원들을 향해 허리 굽혀 경례를 했다. “제가 무례하게 중학교 스승의 잘못을 까밝히는 걸 양해해 주십시오. 황 선생은 함흥중학교에서 학생을 때린 적이 없습니까? 황 선생님은 저의 담임교원을 하면서 제가 종소리를 듣지 못하고 늦어 들어왔다고 저를 때려 코피를 흘리게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고서도 성차지 않아 저의 학습위원자격마저 취소하지 않았습니까? 선생님은 그렇게 학생의 자존심을 여지없이 짓밟고서도 오늘 저에게 이런 요구를 강요할 자격이 있습니까?” “이걸 봐라! 넌 교원자격도 없다. 없어! 오늘 이게 널 비판하는 회의지 나를 비판하는 회의가 아니야. 이 깡패 같은 새끼야, 네가 우리 학교에 발을 붙이나 두고 보자!” 황승연은 분을 참지 못해 씩씩거리며 주먹을 으스러지게 쥐고 부르르 떨며 우멍눈으로 덕돌을 쏘아보았다. 숱한 교원들 앞이 아니면 당장 칠상이다. 남철수 선생도 떠들어댔다. “이제 학교에 온지 몇 달 밖에 안 되는 신입교원을 비판하는 건 맞지 않소. 교육해야지 쩍 하면 사람을 비판하는 건 타당하지 않소. 교원은 그래 칼에 찍혀 죽어야 하오. 반항도 하지 못하고 정당방위도 하지 못한다는 게 세상에 어디 도리 있소?” 황승연은 회의를 계속 해 나가다나면 덕돌에게 망신당할 까봐 황급히 폐회를 선포했다. “오늘 회의는 끝났습니다. 덕돌에게 자기 잘못을 뉘우칠 사상준비를 시킨 후 다시 비판대회를 열도록 하겠습니다. 한번 열어 안 되면 두 번, 두 번 안 되면 열 번, 저 덕돌이 사상개조를 제대로 할 때까지 비판대회를 열겠습니다.” 그러자 덕돌은 황승연을 거들떠도 보지 않으며 회의실에서 나가면서 말했다. “백번이라도 여십시오. 난 끝까지 시비를 따질 것입니다.” 그날 회의는 그렇게 끝나버렸다. 경산 선생과 남철수 선생은 저녁에 당직실로  찾아와 덕돌을 타일렀다. “그저 검사나 하고 지나가면 그만일 걸. 왜 긁어서 부스럼을 만드오? 큰 일 쳤소. 이제 저 황승연은 저를 놔둘 거 같지 않소. 이 일을 어쩌오?” 남철수 선생의 말에 덕돌은 하루 강아지 범을 무서운 줄 모른다고 굽어들지 않았다. “제가 무슨 잘 못이 있어서 검사를 해야 한단 말입니까?” 경산선생은 그저 한숨만 후 내쉬다가 이렇게 말했다. “덕돌이 술이랑 사가도 황승연이 저러오.” “뭐라오?” 남철수는 저으기 놀라했다. “얻어먹고서도 저런단 말이오? 이제 회의만 해보오. 가만 놔두지 않겠소.” 그러나 교활한 황승연은 다시는 비판대회를 열지 않았다. 괘씸한 생각 같아서는 백번도 비판대회를 열고 싶었지만 회의를 열었다가 덕돌에게서 무슨 반격을 당할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숱한 교원들이 덕돌을 비판하는 것을 반대하는데다가 지어 교원들의 불만을 야기시킬 까봐 겁났던 것이다. 대신 혹독한 처벌을 감행했다. 그 이튿날부터 덕돌이 “착오를 지고서도 고치려고 하지 않고 태도가 나쁘다”는 이유로 교단에 오르지 못하며 반성하라고 했다. 그리고 “덕돌을 막후에서 조종한” 경산 선생은 농촌의 함흥중학교에 전근시키며 남철수선생도 교단에 오르지 못하며 총무처에 전근시킨다고 처분을 내렸다. 덕돌은 원래 문학창작에 뜻을 두었기에 교단에 오르지 못한다는 처분을 받은 것쯤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러나 그는 자기를 타이르다가 누명을 쓰고 처분 받은 경산 선생과 남철수 선생에게 미안했다. 농촌학교로 떠나가면서 경산 선생은 덕돌을 조용히 불렀다. 덕돌은 경산선생과 함께 이불 짐을 실은 소 수레를 몰고 시골 고향으로 내려갔다. 덕돌은 “선생님, 미안합니다. 저 때문에 이런 일이 생겨서.”라고 하며 머리를 숙였다. 경산 선생은 덕돌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으면서 조용히 말했다. “괜찮다. 네 탓이 아니다. 다 황승연 때문이야. 시내 학교면 별거냐? 농촌 고향마을 학교에 가도 마음이 편해 좋다. 어디 황승연의 밑에서 교원질을 하겠니? 넌 신문사에 간 성환이랑과 연줄을 놔서 신문사로 가라. 고중 때 뜻대로 글이나 써라. 진수해학교에 있으면서 정신타격을 받을 게 있니?” “알았습니다. 저는 아예 교원을 하지 말까고도 생각합니다. 제가 한 달만 대련에 가서 물고기를 사다가 장사하면 교원 일년 로임보다도 더 벌 수도 있습니다. 교원을 그만두고 장사나 하면서 살까 합니다.” 경산 선생은 주춤 멈춰서며 덕돌을 굳은 얼굴로 바라보았다. “무슨 소리냐? 우린 이런 일을 당할수록 넘어진 곳에서 일어나야 한다. 네가 교원을 그만두고 장사나 해봐라. 황승연이 얼마나 좋아하겠니? 우린 시련을 이겨내고 황승연을 이겨야 한다. 알만하니?” 덕돌은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어찌 세상에 얽매여 산단 말입니까?” “그렇다고 황승연 때문에 전도를 망치겠니? 꼭 황승연이 보라는 듯이 뜻을 펴야 한다. 알만하니?” 덕돌은 땅이 꺼지게 한숨을 후 내쉬었다. 머리를 들어 산을 바라보니 하늘이 꺼져 내린 듯이 눈앞이 온통 암흑천지로 변하고 있었다. 검퍼런 하늘에서 당장 우레 울고 번개 치면서 광풍폭우가 몰아치면서 소낙비가 억수로 쏟아질 것만 같았다.                3. 설중매화 땡볕이 쨍쨍 내리 쬐는 무더운 여름에 덕돌은 2킬로미터나 되게 길고 가파른 고개를 자전거를 타고 한 번도 내리지 않고 올라갔다. 자전거를 밀고 가던 행인들은 모두 덕돌을 쳐다보며 혀를 끌끌 찼다. “야, 그 청년이 맥이 좋긴 좋다.” “이 오르막을 어떻게 자전거를 타고 올라가오?” “글쎄 말이오.” 덕돌은 악을 딱 쓰고 오르막을 올라갔다. 령 마루에 오르자 진수해가 내려다보이며 눈앞이 캄캄해났다. 이때 남포소리가 꽈르릉 꽝꽝 울렸다. 순간 길 옆에 소소리 높이 치 솟은 쌍둥이 산 절벽에서 바위돌들이 와그르르 무너져 내려왔다. 자전거에서 내려 땀을 들이며 그 무너진 돌산을 바라보는 순간 자기 신세가 어쩜 저 돌산과 비슷한 감이 들어 즉흥시를 중얼중얼 읊었다.                외로운 산아            자욱한 안개 속에 잠겼나           잡초 속에 우뚝 솟은 외로운 산           흐리터분한 하늘아래 진창 속에 빠졌나          천길만길 소소리 높은 칼산           흐느끼며 서러움을 토하는구나         후둑 후둑 떨어지는 빗물에 눈물에          오, 모난 돌에 정이 온다더니        이 내 머리 몸 마음을        남포질로 폭파하고 정으로 깨버려       볼 품 없이 돼 버렸구나       푸른 이끼 낀 청청 바위 외로운 산         어찌 하얀 광목을 쓰고       더러운 뜨물에 뛰어들랴?            차라리 침묵 지키며        바위돌처럼  굳어지리라       저 외로운 산으로       차라리 꽈르릉 꽝꽝       화산으로 폭발하리라         개학날에 덕돌은 애들을 데리고 영화관에 가서 개학식에 참가했다. 그런데 숙사라고 당직실에 돌아와 보니 이불과 책궤가 없어지지 않았겠는가. “웬 일이야?” 구질구질 내리는 비를 무릅쓰고 여기 저기 두리번거리며 살펴보다가 덕돌은 자기 눈을 의심했다. 글쎄 학교 변소 옆의 쓰레기 무지 옆에 이불과 책궤가 비를 맞고 있지 않겠는가. “누가 이랬어?” 순간 덕돌은 코마루가 시큼해나며 서러움이 울컥 치솟아 올랐다. “뭘 보고 이 학교에 와서 이런 모욕을 다 당해? 아무리 집 없는 독신교원이라고 해도 이렇게까지 할 수 있단 말인가?” 화난 덕돌은 비를 무릅쓰고 책궤 위에 이불을 얹어 둘러메고 당직실로 돌아왔다. 그때 뒤에서 벼락 치듯 한 고함소리- “야, 누가 네 이불 짐을 당직실에 가져가라고 비준했냐?!” 돌아보니 황승연이었다. 덕돌은 성이 꼭뚜까지 치미는 것을 가까스로 참으며 거들떠보지도 않고 당직실에 이불 짐을 메고 들어갔다. 황승연은 뒤따라 들어오면서 고래고래 고함쳤다. “이게 당직실이지 숙사인가?” 덕돌은 이불 짐을 구들에 놓은 후 돌아서서 황승연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물었다. “그래 우리 독신교원들은 어디에 들랍니까? 학교 숙사를 두고 독신교원들을 들지도 못하게 하면서 당직실에도 들지 못하게 합니까?” “시내에 나가 세집에 들어라. 우리 학교는 너 같은 외톨이를 거두는 민정소가 아니야.” “그래서 내 이불을 비 오는 날에 변소 옆에 내던졌습니까? 당신도 인간입니까?” “우리 학교에서 썩 꺼져라. 보기도 싫다.” “정말 한 하늘을 쓰고 살지 못하겠습니까?” “무슨 말이냐?” 덕돌은 밸을 눅잦히며 조용히 말했다. “선생님, 제가 덕을 쌓지 못해 과거에 선생님을 제대로 존경하지 못한 건 잘 못입니다. 이제부터라도 저는 황 선생님을, 아니, 황교장 선생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참된 교원으로 되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허나 황승연은 한숨을 후- 내쉬더니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진심이냐? 너 아비와 물어봐라. 너 아비가 우리 형님을 감옥에 처넣고 나를 함흥중학교에서 쫓아냈다. 반란파라고. 그런데 지금 나를 보고 옛 제자로 받아 들여 달라고?” 황승연은 목구멍까지 올라온 이 말을 삼켜버리고 “흥!” 하고 콧방귀만 뀌더니 문을 쾅 박차고 나가버렸다. 덕돌은 어쩜 저런 원수 교장을 다 만났나 생각하니 속이 타 한숨이 연기로 돼 꾸역꾸역 뿜겨져나갔다. “황 교장은 어쩔 수 없구나. 진짜 악연이라도 저런 놈의 악연은 어디에 있어?” 개학에 담임교원을 시키자 덕돌은 황 교장이 자기를 그래도 신임해 시켰나 여겼다. 허나 남철수 선생이 다른 교원들에게서 들었는데 황 교장은 사업부담을 꽉 안겨 덕돌을 혼내자고 담임을 시켰다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듣고 누가 안착하고 이 학교에서 교단에 오르려고 하겠는가? 허나 덕돌은 마음속으로 “문화대혁명” 후 첫 패 대학졸업생의 본때를 보여주려고 담임을 맡아 나섰다. 숱한 학부모들이 자기를 믿고 귀여운 자식들을 보냈는데 학생들을 책임져야 했다. 덕돌은 학교 운동대회를 계기로 해 식전이면 애들을 데리고 달리기연습을 했다. 하학하면 애들을 데리고 진수해 다리목까지 달아갔다가 달려 왔다. 처음에는 애들이 달리기를 싫어했지만 차차 달리니 신체도 좋아지고 공부도 잘돼 좋아했다. 운동대회 전날에 불미스러운 일이 벌어졌다. 업간체조시간에 선화가 노란 등산복을 입고 나갔다고 황교장이 숱한 애들 앞에서 야단쳤다. “이게 누구네 반 애냐? 또 덕돌이네 반 애구나.” 그는 다짜고짜로 선화의 등산복을 벗겨내고 나팔바지 가랭이를 가위로 쭉쭉 째버렸다. “학교 규정을 몰라? 학생들은 남색교복 외에 다른 색깔 옷을 입지 못해!” 선화는 두 손으로 눈물을 훔치며 집으로 쫓기어 갔다. 너덜거리는 바지를 춰 입고 집으로 울며 쫓기어 가는 선화를 보고 덕돌은 마음이 아팠다. 그는 업간체조가 끝난 후 교장실에 찾아가 황승연과 따지고 들었다. “여학생이 고운 노란 옷을 입었는데 무슨 죄가 있습니까? 왜 바지까지 째서 쫓아 보냅니까?”  황승연은 삶은 소 대가리 웃다가 꾸러미 터질 소리를 쳤다. “원래 담임부터 사상이 틀려먹었구먼. 학생들이 노란 등산복을 입고 학교를 다니면 안되오. 애들이 벌써 멋을 따기 시작하면 양해난 암고양이처럼 아르릉거리며 연애하기 시작하오. 아주 위험한 신호요. 사상까지 변질한단 말이야.” “그래 학생들은 고운 노란 등산복이랑 입지 못한단 말입니까!” “노란 등산복 위에 남색 옷이거나 검정 옷을 껴입어야 해.” “학생들이라고 고운 옷을 입지 못하고 미운 옷을 입으라는 게 도리에 맞습니까? 학생들도 자기 개성에 맞는 미감에 따라 아름다운 옷을 입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너 지금 누굴 훈계하느냐?! 이제 그 여학생이 한번만 더 노란 등산복을 입고 학교에 오면 업간체조시간에 전교 사생 앞에서 비판하고 퇴학시키겠어!” "쳇! 두번째 문화대혁명을 하려는구만." "뭐라고? 어찌고 어째?" 황승연은 이를 악물고 주먹을 쳐들었다. 덕돌은 무지막지하고 야만적인 독재자와 더 할 말이 없어 교장실에서 나왔다. 뒤에서 황승연은 덕돌을 잡아먹을 상하면서 눈깔을 데굴거렸다. 한창 아름다움을 추구할 어린 여학생들의 노란 등산복을 벗겨내고 가위로 바지를 째 버리는 것은 얼마나 무지막지한 건달행위인가. 고운 옷을 입기 좋아하는 여린 여학생들을 보고 강박적으로 남색 옷을 입거나 노란 등산복 위에 까만 옷을 껴입으라는 것은 얼마나 야만적인 독재자인가? 학생들로 하여금 자기 개성에 맞는 미감에 따라 아름다운 옷을 입고 개성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할 수 있게 해야 하지 않는가? 덕돌은 생각할수록 황승연이 이해되지 않았다. “어쩜 저렇게 무지할까? 나를 보고 학생들의 자존심을 여지없이 짓밟는다고 하더니 자기는? 어린 선화의 마음에 얼마나 깊은 상처를 주었는가? 대학 문도 못 나온 무지, 정말 사생들을 해치는구나.” 이튿날 선화는 교실에 나타나지 않았다. 조바심이 난 덕돌은 선화 네 집으로 찾아가려고 학교 대문을 나섰다. “선생님!” 귀에 익은 선화의 목소리였다. 머리를 돌려 보니 학교 대문 저쪽 골목에 선화가 서 있었다. 다가가면서 보니 남색학생복을 입은 선화의 어깨에는 책가방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활발하고 예쁘게 생글방글 웃던 얼굴에는 검은 그림자가 어려 있었다. 덕돌은 그런 선화를 보고 마음이 아팠다. “어째 교실에 들어가지 않고 여기 서있니? 가자.” 덕돌이 손을 잡아끌면서 말하자 선화는 머리를 숙인 채 뜻밖에 “선생님, 전 학교를 그만 둘까 합니다.”라고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뭐라고? 그게 무슨 소리냐?” (학교에서 어떻게 애들을 들볶았으면 퇴학까지 하겠다고 하겠는가? 다 황승연의 죄악이야.) “넌 공부를 잘해 이담 여류작가로 돼야 한다.” 덕돌은 착잡한 생각에 잠긴 채 놀라움을 감추지 못해 목소리마저 떨렸다. 허나 선화는 검은 그림자가 흘러가는 얼굴을 폭 숙이더니 가녀린 어깨를 들먹이기 시작했다. “선생님, 미안합니다. 선생님의 기대대로 하지 못할 거 같습니다. 고운 옷도 입지 못하게 하는 이 학교를 다니기 정말 싫습니다. 공부도 하기 싫고 글쓰기도 싫습니다. 어머니가 하는 말이 글을 써서 성공하기 아주 힘들다고 합디다. 저는 학교를 그만두고 문화소에 다니면서 노래공부나 해 가수로 되렵니다.” “뭐라고 가수?” 순간 덕돌은 굳어졌던 얼굴이 점차 풀리었다. “그래, 가수도 좋지. 허나 가수로 되려면 문화지식도 배워야 한다.” 한식경이나 되는 덕돌의 따뜻한 사랑이 담긴 말에 감화된 선화는 학교를 그만두려는 생각을 잠시 접고 집에 돌아가 책가방을 메고 교실에 들어섰다. 그날부터 하학하면 덕돌은 선화를 문화소에 보내 성악공부를 시켰다. 일요일에 덕돌은 선화를 데리고 가무단의 송선 선생을 찾아갔다. 송선은 호리호리하고 훤칠해 물 찬 제비 같은 선화의 체격과 예쁘고 외씨같이 걀쭉한 얼굴을 보고 아주 흡족해 했다. 그녀는 덕돌을 한쪽 구석에 데리고 가서 조용히 말했다. “무용을 배워줄만한 애요. 허나 성악을 한다면서 무용을 배워 뭘 하오?” 덕돌은 비난사정을 했다. “무용과 음악이 뭐 그리 계선이 큽니까? 선화가 무용도 배워 장차 진짜 종합예술능력을 갖춘 가수로 됐으면 좋겠습니다.” 송선은 흔쾌히 대답했다. “정 그렇다면 무용을 배워주지.” 그녀는 애티를 벗고 숙성한 덕돌을 훑어보며 조용히 물었다. “영자는 소식이 있소?” “없습니다. 저는 영자를 잊었습니다. 매정한 처녀애지. 어쩜 소식 한마디조차 알리지 않는단 말입니까?” 순간 덕돌은 코마루가 시큼해났다. 허나 선화가 한쪽에 앉아 있어 더 말할수 없었고 눈물을 보일 수 없었다. 며칠 후 학교 운동대회 때 선화는 전교 사생들 앞에서 마이크를 잡고 아주 청아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노래를 간드러지게 불렀다. 덕돌은 흐뭇한 눈길로 김선화를 보면서 장차 유명한 여가수를 방불히 보는 상 싶어 흐뭇했다. 평시에 군사훈련처럼 장거리달리기를 한 덕돌의 학생들은 100미터 달리기로부터 모든 항목에서 거의 우승을 따내 경쟁자들을 뒤로 멀리 떨어뜨려 놓았다. 헌데 씨름시합에서 문제가 생겼다. 해동촌에서 왔다는 동철이란 애는 2년이나 낙제했는데 덕돌의 학급의 김수일 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컸다. 힘도 어찌나 센지 어지간한 애들은 아예 허리를 꽉 끌어안아 당겨 꺾으면서 재껴 버리곤 했다. 수일은 아예 기권하려고 했다. 그러자 덕돌은 감독처럼 수일을 교실에 데리고 가서 먼저 용기를 북돋아주었다. “씨름이나 싸움이나 덩치 따위에 있는 게 아니다. 뭐나 정신이 관건이다. 신심을 가지고 나서라.” “그 큰 애를 어떻게 이긴다고 그럽니까?” 덕돌은 그 애를 이길 씨름 몇 개 동작을 배워주었다. 그제야 수일은 다시 씨름판으로 돌아갔다. 수일은 결승전에서 끝내 해동촌의 동철과 맞붙게 됐다. 동철은 샷바를 잡을 때부터 어린 수일을 업신여기며 고의로 허리를 꽉 끌어 당겨 품안에 걷어 넣었다. 수일은 머리도 들지 못하고 눌리어 숨도 쉬기 어려웠다. 그런데 저게 뭐야? 시작 호각을 불자마자 수일이 성난 뜨개소처럼 동철을 머리로 콱 떠밀며 손으로 허벅다리를 탁 쳐 콱 당겼다. 동철은 덩치나 컸지 힘도 써보지 못하고 모래에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동철은 입을 허 벌리고 물앉아 수일을 쏘아봤다. 너무나도 억울해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3판 2승의 두번째 판이 시작됐다. 동철은 또 안손을 맞을까봐 이번에는 수일을 꽉 껴안지 못하고 두 손으로 수일의 허벅다리를 밀며 경계하며 일어났다. 이젠 됐다 싶어 동철은 또다시 수일을 마구 떠밀며 이리저리 밀었다 당겼다 하며 태를 치려고 서둘렀다. 동철이 또 떠밀며 다리마저 들어올 때었다. 수일은 두 손으로 다리를 꽉 잡아당기다가 오른손을 사타구니 밑에 넣어 동철을 허공 쳐들었다. 동철은 겁기를 띄우며 수일의 어깨 위에서 허공 돌다가 썩박나무처럼 처박혔다. “야, 수일이 이겼다!” 선화랑 지송남이랑 두 손을 쳐들고 퐁퐁 뛰며 환성을 질렀다. 덕돌은 씨름판으로 달려 들어가 수일을 껴안았다. “우리 수일이 1등이다! 일등!” 덕돌은 수일을 건뜻 들어 목마를 태우고 씨름판을 한바퀴 돌았다. 그때 웬 청년이 씨름판에 뛰어들어 덕돌과 수일을 쏘아보았다. “선생, 너덜거리지 마오! 한판 붙어 보기요.” 덕돌이 보니 그 청년은 눈에 독기가 어려 있었다. “여긴 학교 학생들의 씨름판이지 사회 청년들의 씨름판이 아니오.” 그 청년은 샷바를 쥐고 씨름판을 에돌면서 덕돌을 노려보는 것이었다. “어째? 겁나오?!” 덕돌은 냉소하며 수일을 목에서 내려놓았다. 사생들은 구경거리가 생길 거 같아 눈을 크게 뜨고 그 청년과 덕돌을 번갈아보았다. 선화랑 송남이랑 마음을 졸이며 근심했다. 허나 덕돌은 거들떠도 보지 않고 “자넨 누구요?”라고 물었다. “동철의 삼촌 철석이오.” 덕돌은 머리를 끄덕였다. 허나 대답은 왕청 같았다. “난 씨름 할 줄 모르오. 황차 내보다 어린 사람들과 놀지도 않소.” “어째 겁나오?” 약을 올리고 있었다. 그때 수일이 말렸다. “선생님, 하지 마십시오. 저 사람은 진수해에서도 이름난 씨름꾼입니다. 황소를 몇 번 탔답디다.”       덕돌은 철석과 한번 붙어보기 싶어졌다. 허나 학교 마당에서 붙기는 또 말썽을 일으킬까 봐 눈치 보였다. “후에 조용할 때 보기요.” “오늘 한판 붙어 보기요.” 허나 덕돌은 희죽이 웃으면서 나직이 말했다. “난 이날 이때까지 진수해에 철석이란 씨름꾼이 있다는 말은 들어 본적도 없소. 후에 보기요.” 동철도 삼촌을 말렸다. “삼촌, 저 선생은 진수해에서 굴뱀으로 이름났습니다.” “난 씨름판 싸움판 다 돌아다녀도 덕돌이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도 없다.” “아마 저 선생이 대학을 간 후여서 삼촌이 듣지 못했을 게요.” 동철은 덕돌과 수일을 흘겨보며 철석을 잡아끌며 씨름판을 떠났다. 체육교원들도 다른 학년의 씨름을 시작해야 하기에 철석을 말려 보냈다. 그때 황교장이 덕돌의 눈치를 흘끔흘끔 살피면서 슬그머니 미꾸라지처럼 사생들 속에서 빠져나가 동철과 철석이 가버린 쪽으로 사라졌다. 덕돌이네 반에서 운동성적은 거의 모든 항목의 우승을 따낼 지경이었다. 하지만 우승월계관은 차례지지 않았다. 이유는 황승연 교장 말에 있었다. “덕돌이네 반에서는 한 학생이 3개 항목 이상 경기에 참가하지 못한다는 경기 규정을 어겼다.” 덕돌은 황승연에게 무함당해 우승월계관은 타지 못해 억울했다. 체육위원인 지송남이랑 중대장인 수일이랑 보기 미안했고 황승연이 괘씸하기 짝이 없었다. (진짜 악연이구나. 아무리 은사님이라고 존중하고 잘 받들려고 했지만 소용없구나. 다른 방도가 있어야지.) 덕돌은 이런 생각을 굴리는데 생각지 않은 동철이 해동마을의 숱한 애들과 무리를 지어 다니면서 하학해 집으로 돌아가는 수일을 막아 자꾸 싸움을 걸고 물매를 안기곤 했다. 덕돌은 주먹을 으스러지게 틀어쥐었다. 허나 동철도 학생인지라 주먹을 휘두를 수 없어 조용히 동철이네 담임을 찾아가 정황을 말하고 애들이 더 싸우지 말게 말리게 했다. 허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애들은 담임교원 앞에서는 다시 때리지 않겠다고 했다. 하지만 하학하고 돌아갈 때면 해동다리를 막지 않으면 철교를 막고 홀로 집으로 돌아가는 수일을 때리곤 했다. 독불장군이라고 수일은 송남을 내놓고 마을 친구가 별로 없어 늘 얻어맞아 얼굴에 흉터가 생긴 채 학교를 다녔다. 덕돌은 어쩌는 수 없어 하학하면 수일을 집에 데려다 주곤 했다. 덕돌이 뉘엿뉘엿 지는 해를 바라보며 수일을 데리고 철교를 지날 때였다. “백프로 왔다!” 덕돌을 본 해동마을의 애들은 겁을 집어 먹고 버들방천으로 뛰어 들어가 자취를 감추어버렸다. 덕돌은 한 보름 동안 수일과 여학생들을 집에 데려다 주었다. 덕돌이 당직을 서던 어느 날이었다. 덕돌이 교정을 돌아보는데 키가 구척이나 되는 낯선 한족청년들 셋이 사냥총과 새총을 들고 들어와 나무에 앉은 새를 “땅!” “땅!” 쏘는 것이었다. 지어 교정의 애나무들을 마구 끊는 것이었다. (아니, 저 나무들은 우리 사생들이 어떻게 날라다 심은 거라고 꺾어? 열댓 살 나는 애들을 데리고 시내에서 15 리나 떨어진 눈 덮인 대포산에 가서 끌고 밀고 해 가져다 심은 건데.) 덕돌은 마음이 아파 사회 불량배들에게 다가가 처음에는 내심하게 부드러운 말로 말렸다. “학생들이 저녁에 공부를 하는데 학교 마당에서 총을 쏘면서 새를 잡아선 안 돼. 어서 교정에서 나가라!” “뭐라고?” “당신 누구야?” “당직교원이다. 어서 나가라. 나무를 꺾어선 안 돼.” 그 불량배들은 교정에 숱한 교원들이 있는지라 눈치를 흘금거리며 못이기는 척 하며 교정을 나갔다. 덕돌이 깊이 잠든 한 밤중에 바깥이 소란스러워졌다. “나오라!” 잘라당! 유리창문이 박살나 당직실 안에 유리 쪼각이 날려 들어왔다. 만순은 겁나 침대 밑에 숨고 덕돌은 바깥으로 눈을 비비며 문을 박차고 떠드는 불량배들한테 나갔다. 분명 낮에 왔던 불량배들이었다. 달빛에 서슬 푸른 빛이 번쩍했다. 칼이었다. 덕돌은 문 뒤에 슬쩍 물러섰다. 뒤에 섰던 다른 불량배의 두 번째로 칼이 날아들 때 덕돌은 미처 반응을 하지 못했다. 칼이 덕돌의 목을 겨누고 쉭 날아 내려왔다. 그 찰나 뒤에 있던 교원 차영천이 칼을 휘두르는 불량배의 손목을 딱 틀어쥐고 칼을 빼앗아냈다. “죽여라!” 바깥에서 불량배 셋이 몽둥이와 칼을 휘두르며 고래고래 고함쳤다. 그때 숱한 교원들이 달려왔다. 남철수 교원이 파출소에 알리자 새 불량배들은 교정에서 도망쳐버렸다. 그날 저녁에 장기를 놀러 왔던 차영천이 아니었더라면 덕돌은 교정의 나무를 지키려다가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다행히 불량배들이 휘두른 칼이 배 가죽을 가르고 지나갔던 것이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전날에 칼을 휘두르던 한 불량배가 이튿날 오후에 아무 일도 없는 듯이 또 교정에 나타나 사냥총으로 새를 잡고 있었다. 그때 덕돌이 뛰어나가 잡으려고 하자 교연실 주임 남철수가 말렸다. “안 되오. 당신이 가면 달아나오. 먼저 내 가서 사냥총을 뺏으면 그때 달려와서 붙잡소.” 말을 마치자 남철수는 슬금슬금 그 자의 곁으로 다가가 와닥닥 달려들어 사냥총을 꽉 잡았다. 그때 덕돌이 덮쳐나가 그 불량배를 붙잡았다. 교원들은 인차 부근의 파출소에 알려 불량배를 붙잡아 가게 했다. 허나 사흘도 지나지 않아 그 불량배가 또 교정에 나타나 애를 먹였다. 원래 한족민경이 그 불량배를 처리도 하지 않고 놔버렸던 것이다. 남철수와 덕돌은 진수해 공안국에 가서 김창남 국장과 진수해진 진장 이인학, 진수해 파출소 허영호 소장을 찾아가 반영했다. 이인학 진장은 그 자리로 파출소에 전화를 걸어 그 한족민경에게 호통치며 훈계했다. “오늘내로 그 불량배를 잡아 처리해. 안 그럼 경찰복을 벗을 줄 아오.”        덕돌에게 칼을 휘둘러 찌른 그 불량배들은 경찰들에게 다시 붙잡혀 법에 의해 처리됐다. 덕돌과 차영천, 남철수 교원은 용감히 불량배들과 싸운 “정의용사”로 교육계통에서 표창받았다.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겨울에는 큰 일이었다. 덕돌은 기말시험을 맞으면서 애들에게 하루 복습내용을 그어주고 암송하는 족족 집으로 보냈다. 차디찬 빛을 뿌리는 겨울 해가 서산으로 그물그물 넘어가면서 창문을 꿰뚫고 교실 안에 석조를 가늘게 비치었다. 학생들은 기말복습답안을 암송하느라고 머리를 싸쥐고 중이 경을 읽듯이 중얼중얼 했다. 애들이 다 암송하기를 기다리려 교탁 앞에서 검사하고 돌려보내노라면 흔히 토끼꼬리만한 겨울 해가 진 뒤였다. 그런데도 해동촌의 애들은 아직도 철교가 아니면 해동다리를 막고 수일을 때릴 기회를 노리었다. 눈보라 치는 날에도 덕돌은 어두운 밤에 집으로 돌아가기 겁이 나 하는 수일이랑 해금이랑 데리고 해동다리 아니면 철교를 건너 집으로 데려다 주었다. 덕돌이 나타나기만 하면 해동마을의 애들은 흩어져 집으로 달아났다. 눈보라가 윙윙 휘몰아치는 저쪽에 게딱지 같은 초가집들의 희미한 전등불이 보였다. “선생님, 이젠 돌아가십시오. 마을에 다 왔습니다.” 수일이 손을 잡고 사정했지만 덕돌은 시름이 놓이지 않았다. “안 돼. 일이 나면 어쩌니?” 이때 해금과 분옥도 말리었다. “선생님, 우리 아버지랑 집 앞에서 기다릴 겁니다. 근심하지 말고 돌아가십시오.” 그제야 덕돌은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그래, 내 여기 서서 너희들이 집에까지 가는 걸 지킬 테야. 해동마을 애들이 마을 어귀에 숨어 있으면 어쩌겠니? 어서 달려 집으로 달려가라! 집에 무사히 다 갔으면 소리쳐라!” “예, 선생님 감사합니다.” 애들 셋은 허리 굽혀 인사하고 눈보라 속으로 달려갔다. 학생들이 달려가는 발자국소리가 점점 낮아지고 그들 셋의 모습이 아물거리다가 눈보라 속에 사라져갔다. 덕돌은 눈보라 속에 흑점으로 돼 사라지는 애들을 보며 혹시 무슨 일이 있는가 계속 서서 어둑어둑한 마을 저쪽에서 눈을 떼지 않고 귀를 도사렸다.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윙윙 소리 밖에 들리지 않았다. 이때 애들의 목소리가 윙윙 휘몰아치는 눈보라 속에 들려왔다. “선생님, 돌아가십시오!” “우린 무사히 집으로 돌아 왔습니다!” "양, 내일 다시 만나기오. 복습을 잘 하오." “선생님, 감사합니다!” 그 마지막 외침소리 속에는 어른들의 목소리도 있었다. 밤하늘에는 사생들의 정어린 외침소리가 오래도록 메아리쳤다. 그제야 덕돌은 시름을 놓고 한숨을 후 내쉬며 시내 쪽으로 발목까지 풍풍 빠지는 눈길을 터벅터벅 발걸음을 옮겼다. 숙사라고 싸늘한 당직실로 돌아와 물을 먹으려고 보니 물독이 떵떵 얼어붙어 있지 않겠는가. 중천정을 얹지도 않고 대신 신문종이를 천정에 대충 붙여놓은 당직실은 겉바람이 세어서 개를 달 지경이었다. 소대가리도 얼어 터질 엄동설한에 바깥에서는 눈보라가 쌩쌩 휘몰아쳐 모래알 같은 눈가루가 성에장이 두툼하게 낀 유리창문을 때렸다. 덕돌은 허구픈 웃음을 웃고 나서 비닐바가지를 쥐고 주먹으로 살얼음을 툭툭 쳐 까고 얼음 쪼각이 둥둥 뜬 찬 물을 퍼서 꿀꺽꿀꺽 마셨다. 너무 추워서 덕돌은 언 손을 호호 불면서 풍설이 무섭게 이는 바깥에 나가 교실 뒤 눈 속에 파묻힌 싸리를 주어다가 아궁이에 쑤셔 넣고 석탄불을 일구어 죽으라고 땠다. 순간 구들 이 곳 저 곳에서 연기가 나고 가마 안에서 뜬 김이 쌕 뿜겨져 나오면서 매캐한 냄새가 목안을 찔렀고 뜬 김이 꽉 차 어디가 어딘지 분간하기 힘들었다. 부득불 문에 바오라기를 끼워 문틈을 내 군내와 뜬 김이 빠지게 문을 끌어매지 않으면 안 됐다. 그는 주린 배를 달래면서 씻은 찹쌀을 대야에 담아 물을 부은 가마 안에 넣었다. 한참 후에 물이 끓으면서 달랑달랑 소리를 내며 끓었다. 감자장도 끓일 데도 없고 그런 겨를도 없어 장에 마늘을 찍어 먹을 때가 많았다. 어떤 때에는 담임교원을 하느라고 눈 코 뜰 새 없이 돌아치다나니 미처 밥도 하지 못해 보온병의 뜨거운 물을 쏟아 놓고 숟가락으로 묵은 언 밥을 꾹꾹 찍어 녹여 대충 먹곤 했다. 그러니 위가 성하겠는가. 영양 결핍으로 해 늘 해나른하고 피곤하고 머리가 흐리터분했다. 저녁이라고 대충 간장 물에 마늘을 찍어 햄을 하면서 먹고 나서 이튿날 먹을 밥을 지을 쌀을 미리 씻어 놓았다. 그제야 한숨을 후 내쉬면서 덕돌은 이불을 들쓰고 겉바람이 세서 가죽 털모자까지 쓰고 소설책을 들었다. 아무리 고독하고 적막하고 쓸쓸해도 책만 들면 위안되고 소설 속의 이야기와 정서에 따라 마음을 움직이면서 온정을 찾곤 했다. 어떤 때에는 책을 보다가 너무 곤해 잠을 자려고 해도 연기를 먹고 죽을 것 같아 잘 수 없었다. 그리하여 덕돌은 궁리 끝에 문에 바를 끼워놓고 문틈을 낸 후 바줄로 문고리를 걸어 맸다. 잠든 후 군내를 먹지도 않고 문도 더 열리지 않아 좋을 것 같았다. 학교 탁아소에서 자는 미숙이란 처녀교원은 두 번이나 군내를 먹고 약혼한 철수에게 업히어 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은 적이 있었다. 그리하여 덕돌은 밤중까지 책을 보다가도 술을 둬 냥 쪽 마시고 다리를 옹송그린 채 새우잠을 자곤 했다. 후에 만순이 당직실에 들어와 함께 동무해 있을 때에는 항상 너무 추워 한 이불에 들어 서로 잔등을 대고 이불 두 채를 한데 겹쳐 덮고 잤다. 독신교원들이 이렇게 고생해도 교장 황승연은 근본 관심하기는커녕 교원숙사를 두고서도 독신교원들을 다 쫓아냈다. 대신 이른바 학교 명예를 지키는 축구선수 학생들을 넣어 길렀다. 만순과 덕돌이 학교에 돈을 내고 보이라 실의 석탄을 실어다 때겠다고 하자 황교장은 총무과에 시켜 독신청년교원들의 그 얇은 로임 봉투에서 석탄 6톤 값이나 잘라냈다. 온 동삼 9평방도 되나마나한 당직실에 석탄을 그렇게 땔 수 없을 것은 불 보듯 환한 일이었다. 아침에는 근본 불을 땔 새 없어 저녁에만 땐 형편이었다. 아무리 추워 불을 많이 때도 풍무 없는 아궁이에 한 달에 한톤 반씩이나 때였을까? 그것도 겨울방학에는 한 달 반이나 집에 가 있었는데. 아무리 홀로 사는 독신교원들이라고 업신여겨도 분수 있어야지.   문이 벌어진 당직실에 불을 때니 그래도 벽에 번들번들 얼었던 얼음이 뜬 김에 이슬이 맺히더니 드디어 물방울이 줄줄 흘러내리기 시작하고 창문에 얼어붙었던 성에장도 녹아 암흑천지인 바깥이 내다보였다. 그래도 집에 화기가 도니 천정의 쥐들도 좋다고 바스락거리며 뛰놀았다. 숙사보다도 교무실이거나 교실에 나가면 따뜻해 아주 좋았다. 정말 물독이 떵떵 어는 숙사에 돌아오면 추워서 으쓱 같았다. “엄동설한 냉혹한 환경에서 몇 해나 견뎌 낼까?” 덕돌은 허구픈 냉소를 지었다. “그대여, 생활이 그대를 아무리 어렵게 굴고 버리더라도 그대는 노여워하지 말고 참고 견디시라. 꼭 이겨내시리라.” 덕돌은 스스로 이렇게 마음을 다지면서 이불을 쿡 들쓰고 윙윙 휘몰아치는 바깥 눈보라의 아처런 울음소리를 들으며 아름다운 미래를 꿈꾸면서 소르르 잠이 들었다. 덕돌과 더불어 군내를 먹고 추운 고생을 하며 희노애락을 함께 한 쥐들이 당직실 천정에서 찍찍 소리 내며 비명을 질렀다. 그들이야 말로 황승연 교장보다 군내 나고 그은 천정 밑의 손바닥만한 당직실에서 외롭게 고생하는 덕돌과 만순과 동고동락하면서 동정해 우는 것이 아니겠는가! 불을 때 집안이 따뜻해지고 군내가 나지 않는 날에는 쥐들도 좋다고 천정에서 뛰놀았고 군내 나고 추우면 쥐들은 천정에서 찍찍거리며 비명을 질렀다. 이젠 덕돌은 쥐의 비명소리를 들으면 벌떡 일어나 코를 벌름거리며 “흡흡” 하고 면내 나지 않나 냄새를 맡아보고 문을 열어 군내를 빼곤 했다. 덕돌은 천정을 쳐다보면서 어처구니없어 중얼거렸다. “에이, 너네도 이 집 천정에 잘못 들었다. 나와 함께 이런 내군 고생을 할 게 뭐니? 나는 학교에 얽매인 몸이지만 너넨 군내 없는 집에 자유롭게 이사할 수 있잖느냐?” 순간 덕돌은 쥐들이 불쌍해 엉거주춤 일어나 천정종이를 칼로 손바닥만큼 도리어냈다. “뭐 하려고 그래?” 덕돌은 전기밥가마에서 밥과 돼지고기 점을 종지에 담아 천정에 올려놓으면서 중얼거렸다. “쥐들도 양력설을 쇠게 해야지.” 그제야 만순은 “허허허.” 하고 너털웃음을 치더니 “그래, 황승연을 줄 고기는 없어도 우리와 희노애락을 함께 하는 쥐를 주는 게 낫지.” 하고 덧붙였다. 덕돌은 속이 답답해 물고기 장사를 해 번 돈으로 싼 녹음기를 틀어놓았다. 바깥에서는 눈보라가 휘몰아쳤지만 오두막 같은 당직실에서는 세계 명곡이 격정 넘치게 메아리쳤다. 특히 주현미나 김용임 등 한국 여가수들의 정서적인 노래 소리는 그의 스트레스를 해소해주고 정서를 조절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최대의 정신위안을 해주었다. 음악을 듣노라면 모든 스트레스가 해소돼가고 그 시각만큼은 모든 고민과 불안을 다 잊고 아름다운 선율에 매혹돼 흥얼거리곤 했다. 천정에서 쥐들도 좋다고 찍찍 거리면서 돼지고기를 먹으면서 사교무를 추는지 바스락거리면서 야단 쳤다. 이튿날 아침 바깥에 나와 눈보라가 아우성치며 불어치는 주위를 둘러보던 그는 자기 눈을 의심하며 놀랐다. 흰 용이 꿈틀거리는 듯이 휘몰아치는 눈보라는 흰 룡이 꿈틀거리듯이 학교 운동장을 핥으면서 꿈틀거렸다. 하얀 눈 덮인 대지는 마치 흰 상복을 입은듯한데 눈보라가 무섭게 아우성치며 휘몰아치는 속에 앙상한 나무들이 눈송이들을 떠이고 몸부림치지 않겠는가. 그런데 그 눈송이들을 떠인 나무들이 마치 엄동설한에도 끄떡하지 않는 매화 같지 않겠는가!       아, 너무 혹독하고 처절한 엄동설한이여, 빼앗긴 들에도 새  봄은 오려는가? 언제면 혹한 속에서도 매화가 오동통 소담한 흰 꽃을 피우는 사랑의 새 봄이 오겠는가!
158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115) 댓글:  조회:1222  추천:0  2018-08-12
                                  10. 고민       여름의 신이 몰고 왔던 뜨거운 입김이 지나간 대지는 싸늘하게 식어가고 있었다. 가을바람에 낙엽이 우수수 지고 있었다. 누런 가랑잎들이 계절신이 누렇게 칠해가는 땅바닥에 떨어져 가을바람에 이리저리 나뒹굴고 있었다.      덕돌은 허구한 나날 여자애들을 쫓아다닌 것이 허무할 뿐이었다. 지는 낙엽과 함께 실련의 아픈 흔적이 나뒹구는 감이 아프게 느껴졌다. 사랑의 열풍을 몰고 왔던 처녀 영희도 영옥도 사라졌고 영자는 어디로 간다는 말도 없이 망아산 아래 이 시내에서 사라졌다. (사랑은 청춘 남녀가 티 없이 맑고 깨끗한 마음으로 연주하는 아름다운 사랑의 멜로디야. 정조는 사랑의 생명이 아닌가? 정조를 잃은 영자를 생각해 뭐 해?) 덕돌은 실련의 고배를 마시고 숙사 침대에 이불을 들쓰고 누워 고민하고 있었다. 소설을 읽으면서 착잡한 생각을 몰아내고 실련의 아픔을 이겨내려고 애썼지만 허사였다. 소설을 읽으려고 해도 작중 열연하는 주인공들의 이야기를 읽노라면 자연히 영자 생각이 나서 더 읽어내려 갈 수 없었다. 사라진 영자 때문에 실련의 고통으로 해 덕돌은 고민의 깊고 깊은 구렁텅이에 빠졌다. 그는 소설책을 팽개치고 일어책을 들고 보다가 불현듯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중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뭘 해봤자 하늘을 찌르겠는가? 소설을 애나게 쓴들 조선의 이기영이나 한설야를 초과하겠어? 아예 일본이나 유학 가는 게 좋겠다. 일본 같은 선진국에 가서 견식을 넓히고 돌아와 하늘을 찌르는 큰 일을 해야지. 정치 학부를 다니면서 기자로 되려는 이상도 현실에 맞지 않는 것 같았다. 에라, 모르겠다. 장사를 해 돈이라도 벌어 시내에서 사업을 해봐야지.” 덕돌은 망망한 대해에 빠져 허우적거리다가 지푸라기라도 잡은 것처럼 일루의 희망의 끈을 잡고 다시 생기를 띠기 시작했다. (그래, 일본으로 가야겠다. 큰 인물들은 청년 때 모두 유학을 가 견식을 넓히고 지식을 많이 쌓은 분들이야. 주덕이나 등소평이나 주은래, 진의 등은 모두 프랑스 유학생 출신이야. 세상의 도리를 먼저 안 사람이 수령이 되기 마련이지. 주은래는 일본으로 유학을 갔다가 프랑스에까지 유학을 갔다 온 인물이 아닌가?) 이런 생각이 자꾸 머리를 쳐들었다. 덕돌의 눈앞에는 외동아들인 자기를 믿고 살고 있는 머리가 흰 부모가 떠올랐다. (내 일본에 가면 부모는 어쩌는가?) 허나 한편 덕돌은 속으로 큰 일을 할 사람이 어찌 부모생각만 하겠는가고 생각했다. (자고로 충신은 효자가 아니잖은가!) 하지만 좀처럼 머릿속에서 부모를 지울 수 없었다. (내 일본에 가서 몇 해 일하면서 공부해 돈을 많이 벌어다 한평생 농촌에서 땅을 파면서 고생스레 살아온 부모님을 호광하게 살게 해야지. 귀국한 후 효성을 다해 모시면 되겠지.) 그는 자기를 위안하면서 부모의 동의를 받으려고 시골의 집으로 돌아갔다. 그 날, 상순은 밭으로 나가고 없고 명옥은 집에서 돼지먹이를 가마에 끓이고 있었다. 덕돌은 부엌에 앉아 한창 불을 때는 엄마의 손을 잡고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아 애꿎은 풍무만 돌렸다. 한참 후에야 큰 마음을 먹고 무거운 입을 뗐다. “엄마, 내 일본으로 유학가자고 그럽꾸마. 가도 되겠습둥?” 허나 엄마 명옥은 “일본으로 유학하러 가자고?”라고 하더니 일어나 가마뚜껑을 닦으면서 잠간 생각하는 것 같았다. 덕돌은 엄마가 꼭 반대하리라고 생각했다. 뜻밖에 어머니는 큰 마음을 먹은 것 같았다. 한참 후에 어머니는 이렇게 나직이 말했다. “유학까지 갔으면 얼마나 좋겠니? 대학을 보낸 것만 해도 기쁜데 유학까지 가면 우리 아들 얼마나 장하니? 가겠으면 가라. 부모 걱정은 말고.” 덕돌은 흰 머리를 쓸어 넘기며 비장한 결심을 하는듯한 머리에 흰서리 내린 어머니를 보는 순간 콧마루가 시큼해났다. (엄마는 내가 생사를 기약할 수 없는 모험으로 일본에 가련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다만 일본으로 유학 간다 하니 기뻐하고 있다. 그저 아들이 잘 되기만 바라는 것이 부모의 마음이 아닌가. 외동아들인 내가 가면 늙은 엄마는 누가 모시겠는가? 누나들이 다섯이나 있지만 다 멀리 시집가지 않았는가? 나를 믿고 사는 부모를 버리고 어디로 간단 말이야?) 한참 후 아버지 상순이 밭에서 돌아왔지만 덕돌은 일본 유학을 가련다는 말을 차마 꺼내지 못했다. 머리가 희슥한 부모를 보는 순간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는 드디여 자기 생각이 물을 건너는 흑보살처럼 와르르 무너지는 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숙사에 돌아와서도 덕돌은 깊은 생각을 거듭하지 않으면 안 되였다. (구경 전도를 어떻게 개척한단 말인가?) 겨울 방학이 되자 덕돌은 세상구경을 하자고 엄마와 여비를 달라고 했다. 명옥은 아들이 하자는 일이라면 열에 아홉은 안 된다는 말을 한 적이 없었다. 그는 돼지 한배를 판 돈 120원이나 꺼내 주었다. “세상 구경을 널리 하고 큰 뜻을 세워라.” 덕돌은 엄마가 주는 돈을 넙적 받으면서 이런 생각이 가슴을 후려쳤다. (이렇게 좋은 부모를 두고 내가 어디로 간단 말이냐?) 그때 상순은  덕돌이 무슨 고민에 빠진 것도 모르고 불쑥 이런 부탁을 했다. “얘, 저 윗마을 해월을 정규상한테 데리고 가서 치료해달라고 해라. 흥수는 비록 내 정치적수였지만 애들에게 무슨 죄가 있느냐? 불쌍한 애가 미쳐서 어쩌겠니?” 덕돌은 싫은 대로 대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버지, 해월은 암이 아닌 거 같습니다.” “그래도 정신병을 치료해야지.” “그럼 함께 갑시다. 정신 나간 해월을 어떻게 혼자 시내로 데리고 가겠습니까? 무슨 미친 짓을 하면 어쩝니까? 괜히 다른 소문이 나겠습꾸마.” “그것도 그렇구나.” 상순은 덕돌과 함께 윗마을에 가서 춘실과 함께 해월을 데리고 시내 정규상을 찾아 갔다. 해월은 미친 나머지 YJ병원에 들어가면서도 히히히 웃기도 하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상스러운 손짓을 마구 해대 경악케 했다. “히히히, 덕돌아, 이 사람들을 봐라.” 해월은 덕돌의 팔소매를 잡아당기면서 떠들어댔다. “함흥대대에서 한다하는 해월이 왔다고 구경하는 거 봐라. 해해해. 선녀가 내렸지. 이 집에. 흥, 집도 크다야. 헤헤.” 춘실은 창피해 해월의 허우적거리는 손을 꽉 잡고 덕돌을 따라 걸었다. 덕돌은 일단 먼저 해옥 아재를 찾아갔다. 그는 해옥의 귀에 대고 뭐라고 나직이 말했다. 그러자 해옥이 그들을 데리고 정규상의 사무실로 갔다. 정규상은 한창 병을 보다가 해월을 보더니 앉으라고 했다. 해월은 정규상을 보자 달려가 마구 끌어안으며 “충국아, 너 어째 여기 있니?”라고 미친 소리를 했다. 춘실은 황급히 해월의 팔을 마구 끌어당겨 떼 냈다. “정 선생, 양해하십시오. 얘 병을 꼭 떼 주십시오.” 정규상은 해월을 아래 위 바라보더니 우쭐 일어나 나갔다. 그러자 춘실은 속으로 남편 흥수가 함흥 대대에 하향해 내려간 정규상을 못 살게 굴었다고 나가버린 것으로 알고 실망해 했다. 허나 이윽고 정규상이 신경병 치료전문가 량수원 업무원장을 데리고 와서 함께 해월의 병을 보는 것이었다. 그제야 춘실은 젖어드는 눈 굽을 닦으면서 정규상한테 미안하고 그의 드넓은 흉금에 탄복했다.       기실 해월은 자초부터 암에 걸리지 않았었다. 정규상은 노간부들을 투쟁하면서 못 살게 구는 흥수를 혼빵내려고 해월이 암에 걸렸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흥수가 이미 처단돼 죽은 다음에는 해월이 불쌍해 정규상은 의사로서 인도주의를 발휘해 구하려고 나섰다.   그는 량원장을 데리고  한쪽으로 가서 한참 토론하더니 처방을 내렸다. 량원장은 첩약을 떼 주었고 정규상은 서약을 떼 주었다. 그리하여 해월은 정신병과에 입원해 주사도 맞고 첩약도 달여 먹었다. 정규상은 심장병과에서 권위로 돼 심장병환자들의 병을 보고 있었다. 그는 억울하게 우파 모자를 쓰고 20여 년 동안이나 농촌에서 투쟁 받으면서 고생하다가 이젠 우파 모자를 벗었을 뿐만 아니라 병원의 원장으로 됐고 인대 상무위원회 부주임, 직함평의위원회 의료전문주임위원으로 됐다. 그는 원장으로 된 후 자기에게 그렇게 억울한 우파 모자를 씌운 박영발에게 보복을 하지 않았다. 허나 병원 혁명위원회가 없어진 뒤 정부에서는 “문화대혁명” 후반기에 반란파 두목 황종연과 이흥수에게 빌붙어 간부들에게 박해를 가하고 정치투기를 해 병원에 올라온 박영발과 박윤희를 가도 병원으로 내보냈으며 출당시켰다. 덕돌이 해월의 병이 어떤 가고 찾아 갔을 때다. 정규상은 아주 반갑게 이야기했다. “근심하지 말라. 해월은 한 동안 치료받으면 나을 거야.” 그는 덕돌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넌 정말 개천에서 나온 용이다. 어쩜 그 함흥 촌 골 안에서 너 같은 대학생이 나왔니? 누가 소몰이를 하던 네가 대학에 가리라고 꿈에나 생각했겠느냐? 정말 총명한 내력이야.” 덕돌은 정규상 앞에서는 어린애처럼 주눅이 들어 머리를 숙였다. “가만, 졸업배치는 어디로 받을 예산이냐?” 덕돌은 제꺽 “일본 유학을 갈 예산입니다.”라고 말하려다가 목구멍까지 나온 말을 삼켜버렸다. “네가 내 말대로 의학원에 갔더라면 우리 병원에 배치받게 도와주겠는데.” “원래 의학원에 가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색맹이 돼서 지망을 고쳤댔습니다.” 정규상은 머리를 끄덕이면서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덕돌이 정규상과 갈라져 학교 숙사로 돌아 올 때었다. “덕돌이!” 불시에 등 뒤에서 자기를 부르는 처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머리를 돌려 보는 순간 덕돌은 깜짝 놀라며 자기 눈을 의심했다. 조영희가 아니겠는가! (아니, 집체호 영희는 어째 왔을까? 기다리는 순희는 소식도 없고 불청객은 불쑥. 흥!) 성욱이랑 순희랑 조영희랑 연속 대학시험을 네 번이나 쳤지만 연속 낙제를 맞았다. 성욱은 번마다 몇 백점도 모자랐기에 대학을 바라볼 게제도 되지 못했다. 하지만 순희와 영희는 번마다 딱딱 십여 점씩 모자라 대학에 입학하지 못해 아쉬웠다. 순희는 그후부터 가타부타 깜깜무소식이었다. (무정한 애라구야.) 혹시 순희는 덕돌을 볼 면목이 없은 것 같았다. 혹시 그녀는 점점 지위가 차나는 덕돌과의 사이를 느끼고 다시는 찾아올 엄두를 못냈을수도 있었다.       그런데 영희는 지위따위 차이는 개의치 않고 담대하게도 학교에까지 찾아왔다. 물론 처여애로서 아무리 자기 마음 속에 뒀던 총각이라고 해도 선뜻 대학교에까지 찾아오기는 조련찮았을 수도 있었다.      영희는 이젠 25세나 돼버렸다. 그간 집에 붓박혀 책과 씨름만 하면서 별로 활동도 하지 않아 그런지 호리호리하고 예쁜 영희와는 판판 다른 모습이었다. 더구나 엉덩이마저 농촌 아낙네처럼 펑퍼짐해 보기 민망스러울 지경이었다. 다만 예지로 반짝이는 까만 눈매만은 의연히 매력적이었다. 덕돌은 영자를 잃은 뒤 여자애들만 봐도 신경질이 나고 사귀고 싶은 마음이 하나도 없었다. 괜히 실련의 아픈 상처에 고춧가루를 맞을까봐 겁났다.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엄동설한에 차마 대학 한끝까지 자기를 찾아온 영희를 큰 거리에 세워 놓고 말해 보낼 수는 없었다. 그는 영희를 데리고 식당으로 갈까 하다가 괜히 열정적으로 대하면 계속 찾아 올 것 같아 그만두고 대학교 숙사 옆에 있는 자그마한 상점으로 들어갔다. 복판에 난로를 피워놓은 한족집 상점 안에는 다행히 한족 주인과 손님 몇이 있을 뿐이었다. 항상 다니던 상점이어서 주인은 사탕 한 알도 사지 않아도 덕돌과 영희에게 눈을 흘기지 않았다. 덕돌은 영희가 정을 떼게 하려고 차마 못할 말로 쌀쌀하게 했다. “어째 왔소?” 영희는 그 한마디에 새파랗게 언 얼굴에 눈물부터 왈칵 쏟더니 돌아서 어깨를 들먹이었다. 석탄이 타면서 탕탕 소리내는 화로를 마주해 서서 흑흑 흐느끼는 상 싶었다.     이윽고 영희는 가까스로 용기를 내 몸을 돌리더니 덕돌을 기대에 찬 눈길로 마주 바로보며 물었다. "이전에 제 대학에 올 때  준 담배꽃쌈진 어쨌소?" (밤중에 홍두깨라더니 웬 담배쌈지 얘기냐?) 덕돌은 이렇게 말하려다가 그만두고 딴전을 부렸다.  "학교에 가지고 오지도 않았소." "왜? 건 내 일편단심을 한코한코 새긴 꽃쌈진데." "너무 몇백년 전 담배쌈지처럼 촌스러워서..." "그래 버렸소?  "모르겠소. 어쨌던지?' "대학에 오더니 꽤나 제비 배때기처럼 희냥하며 비싸게 노는구만요." 조왕돌은 냉냉하게 물었다. "그래 그걸 찾으러 왔소?" "아니," 영희는 자기 마음을 모르는 덕돌이 한없이 원망스러웠다. "아직도 그 꽃삼지를 잊지 않았는가 해 왔소." 덕돌은 허구픈 웃음을 웃었다. 영희는 분명 직접 묻기는 그렇고 하니깐, 담배꽃삼지에 견주어 지금 자기를 잊지 않았는가, 사랑하는가를 묻고 있었다. 그녀는 미리 어떻게 말할가 많이 생각하고 찾아온 것 같았다.  "촌스러워 가지고 오지도 않았다고 말하지 않았소. 난 그걸 잊은지 오래오. 그런 담배쌈지를 줄 처녀가 수두룩하니까. 대학생처녀들도 가득한데 하필이면..." "알았소. 좋은 대학생처녀를 만나 콱 잘 사오." 그녀는 덕돌의 말을 중도무이하더니 머리를 숙인 채 상점 문을 박차고 나가 버렸다.        덕돌은 뒤늦게 따라 나가 보았다. 연애는 하기 싫어도 도의상 엄동설한에 그 먼 곳에서 찾아온 영희를 점심이라도 대접해야 하는 것이 사람의 도리가 아닌가. 영희는 오른 손으로 눈을 가린 채 달려가다가 비틀거리며 몸을 가누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큰길 옆에서 칼바람에 몸부림치는 벌거숭이 가로수를 손으로 짚고 겨우 몸을 지탱하는 것이었다. 덕돌은 가로수에 몸을 기댄 채 어깨를 들먹이는 영희를 보자 속이 뭉클해나고 콧마루가 시큼해났다. 그는 뒤따라가 영희를 위안하려고 하다가 인차 냉정하게 리성을 회복했다. (안 돼, 직업도 없는 고중생과 정을 뚝 떼버려야 한다. 또 찾아와서 졸졸 묻어 다니면 어쩌는가?) 덕돌은 마음을 모질게 먹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숙사로 발걸음을 옮겼다. 숙사에 돌아와서도 그는 너무 지나친 것 같아 창문으로 큰 길 쪽을 내다보았다. 영희는 쌩쌩 휘몰아치는 눈보라 속에서 가로수 옆에 쪼그리고 물앉아 왝왝 토하면서 우는 상 싶었다. 덕돌도 차마 정을 떼기 어려웠다. 허나 이상과 전도를 위해서는 무정하게 정을 떼버려야 했다. 한참 후 영희가 일어나 상점 부근과 숙사 쪽을 두리번거리다가 비칠거리면서 겨우 떠나가는 것이었다. (야, 영희야, 날 콱 욕해라! 난 나쁜 놈이야! 내 잘 살기 위해선 별 수 없구나.) 덕돌은 침대에 쿵 쓰러져 이불을 들쓰고 들어 누었다. 눈보라를 들쓰면서 울며불며 진수해로 돌아가는 영희를 보는 것 같아 속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야, 사랑은 정말 자사 자리한 거야. 사랑은 무서운 것이야. 사랑하지 않으면서 허위로 국밥 한 그릇이라도 사주면서 얼려 보낼 순 없어. 책임지지 못할 처녀는 아예 건드리지 말고 맺고 끊어야지. 분명 한생을 함께 할 사람이 아닌데 건드려 뭘 해? 영희, 나를 용서하오. 무정한 철석같은 사내를.) 덕돌이 “사랑전쟁터”에서 실련의 고배를 마시고 고민에 빠쪄 이불을 들쓰고 초저녁부터 책도 보지 않고 누어있을 때었다. 어느 날 밤중에 한 침실에 있는 성호가 침대에서 일어나 덕돌의 침대에 다가와 바깥에 나가 조용히 할 말이 있다고 했다. (무슨 일이 있을까? 이 책벌레가.) 료녕성에서 온 이 성호는 덕돌과 소박한 감정으로 가까이 보냈다. 숙사에서 나가자 성호는 덕돌을 조용히 불러 어깨에 오른 손을 올리고 말했다. “친구야, 그까짓 처녀애들 작작 쫓아다녀. 대학교 때 하나라도 책을 많이 봐라. 그래야 당장 사회에 나가 유용한 일을 하지.” 덕돌은 한숨만 땅이 꺼지게 내쉬었다. 성호는 “날 좀 도와줄래?”라고 평안도 말로 물었다. “뭔데?” 성호는 덕돌을 데리고 숙사 복도에 들어가더니 헌 침대를 가리켰다. “이걸 들고 가자.” 덕돌은 성호와 함께 헌 침대를 들고 교수청사로 올라갔다. 2층에 올라가 교실 저쪽으로 해 헌 위생실이 있었다. 그리로 침대를 맞들고 들어갔다. 성호는 오래 동안 쓰지 않은 위생실을 말끔히 정리해놓고 전기마저 장치해두었던 것이다. 대변실 세 칸이 있었는데 작은 책걸상을 들어다 놓고 탁상 등마저 켜놓으니 아주 조용한 독서실이 돼버렸다. “누구한테도 말하지 말라. 숙사에서 한 침실에 여덟이나 들어 떠들썩해서 어디 책을 제대로 보겠니? 난 시간이 아깝다. 언제 허튼소리나 할 새 있어? 책 한 폐지라도 더 봐야지.” 덕돌도 동감이 갔다. 숙사에서 반장 허운호가 통 말이 아니었다. 그는 기억력이 어찌나 좋은지 교실에서 집중해 책을 들고 보면 누가 지나가도 다치지 않는 한 헛눈을 팔지 않았다. 그런데 운호는 밤 12시에라도 공부를 마친 후 그 독한 술을 마시고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밤중에 숙사에 무슨 안주가 있겠는가? 운호는 쩍 하면 나이 제일 어린 덕돌을 담임 교원네 집에 가서 김치를 가져오라고 했다. 허나 덕돌은 평소에 담임교원을 보면 어려워 머리도 들지 못하는 지경이었다. 그러니 밤중에 어떻게 담임교원의 집 문을 두드리고 김치를 달라 하겠는가? 별 수 없이 침실에서 나이 지긋한 철산을 데리고 갔다. 철산이 담임교원네 집 문을 두드릴 때 덕돌은 문 뒤에 숨어 있었다.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밤중에 담임교원이 철산을 데리고 함께 김치움에 가서 김치를 대야에 담아 내오고 집에 들어간 후에야 덕돌은 김치 대야를 받아들고 숙사로 달아 나군 했다. 성호는 운호가 술을 마시는 게 딱 질색이었다. “술을 마시면 난 머리가 뗑해 암송한 것도 다 날아난다.” 성호는 덕돌과 함께 침대를 바로 잡아 놓은 후 뒤말을 이었다. “이젠 난 밤이면 여기서 홀로 자면서 책을 보겠다. 사회에 나가면 언제 일하면서 책을 보겠니? 지금 많이 봐 둬야 해. 지식은 만 가지 사업의 원동력이야. 에너지 충전을 많이 해야 돼.” 평소에 말수가 적은 성호는 이쯤하면 덕돌과 많이 말한 셈이었다. 그는 하루에 네댓 시간만 자고 동서고금의 수많은 명작과 한문도서를 읽기에 여념이 없었다. 덕돌은 성호의 독서실에서 나오면서 “신체를 돌보면서 공부해라.”라고 조용히 부탁했다. 성호는 희미한 전등 불 아래에서 철색얼굴에 미소를 지으면서 믿음에 찬 눈길로 바래었다. 집에 돌아오면서 덕돌은 성호에게 탄복했다. (진짜 세상에 둘도 없는 수재야. 저렇게 노력하니 모든 과문에 우수를 맞았지.” 뒤이어 그는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었다. (누가 책을 보면 좋은 거 몰라 그래? 실련의 구렁텅이에 빠져 이러지.) 방학이 되기 바쁘게 덕돌은 실련의 구렁텅이에서 벗어나려고 계획대로 세상구경을 나섰다. 세상구경을 널리 하노라면 실련의 고통을 잊을 수 있다고 하던 친구 성호와 승광의 말에 도리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는 화학학부에 다니는 상해지식청년에게 부탁해 학생증으로 상해까지 기차표 반표를 떼 달라고 부탁했다. 반표를 손에 쥐자 덕돌은 남방으로 달리는 열차에 올랐다. 북경에서도착하자 천안문과 고궁에 들어가 돌아보았고 만리장성에 오르고 의화원 호수에 가서 한적하게 뱃놀이도 했다. 다만 남들은 남녀들이 쌍쌍이 노를 저으면서 뱃놀이를 하는데 혼자 외롭게 노를 젓노라니 또 실련의 아픔이 가슴을 무정하게 찌른 것 같아 어쩔 수 없었다. 그는 천단공원 계단 앞에 가서 합장하고나서 하늘에 빌고 또 빌었다. “하늘에 빌어보기도 했다.대학생처녀와의 사랑과 아름다운 전도를 내려주옵소서.”  그는 천단공원 금은 장신구방에 들어갔다가 피뜩 기이한 영감이 떠올랐다. (만약 장사를 해서 숱한 돈을 벌어 금은 장신구를 사가지고 향항을 거쳐 일본으로 가면 어떨까? 향항이나 일본 돈이 없는 형편에서 세계 공동 화폐인 금을 사둬야 한다. 배를 타도 그렇고 금덩이를 내밀면 무슨 일이 안되겠는가?) 허나 덕돌은 인차 고향에 두고 온 늙으신 부모를 떠올렸다. (아니야. 내가 왜 이런 불효한 생각을 또 하지. 머리 파뿌리처럼 허연 부모를 고향에 두고 어디로 가? 넌 외동아들이야. 부모를 잘 모셔야 해.) 효도와 전도가 맞부딪치면서 모진 갈등 파도를 일어켜 속이 비길 데 없었다. (딱 일본으로 간다고 하지 말고 모든 것을 꼼꼼히 생각해보자.) 그는 천단공원의 너른 광장을 거닐면서 복잡한 생각에 잠겼다. (모든 게 가능한가고 따져 봐야지. 무슨 장사를 해서 숱한 돈을 벌어 금은 장신구를 산단 말인가? 아니, 절대 아니야. 정상적으로 출국할 수 없는데 향항을 도주해 외국상선에 올라 일본으로 건너가야 한다. 좋기는 일본 상선이지. 다른 나라의 상선이야 일본으로 가지 않고 아프리카라도 가면 큰일이 아닌가? 상선에 어떻게 올라? 가만히 헤염 쳐 동아줄을 타고 기어오르자. 올랐다가 들키면 어떻게 하지? 금은덩이를 쥐어주면 일본에 건네 줄까? 일본에 건너갔다고 해도 무슨 일을 해 학비를 대는가? 냉혹한 일본 자본주의 세상에서 일본 청년들도  취직하기 어려운데 취직 쉽겠는가? 민족기시가 심한 섬나라에서 거지행색을 하지 않으면 다행이지. 근공 검학은 어려운 거야. 누가 도주해 불법체류중인 너를 대학에 받아준다더니? 그저 떠돌아다니면서 일본 사회를 구경할 수 있을뿐이겠지. 그러고서야 어찌 발전된 일본 사회를 제대로 알 수 있어? 그럼 일본으로 도주해 간 가치가 있는가?) 덕돌은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또 부모는 어쩌지? 내가 일본에 유학을 간다고 속이고 이런 모험은 할 수 있다. 허나 내가 만약 잘못 되면 부모는 어쩌지? 한뉘 아들도 없이 딸집으로 돌아다니면서 살겠지? 물론 누나 다섯은 모두 효성이 지극하지만, 부모를 모셔야 할 아들인 내가 불효를 저질러서야 되겠는가? 혹시 일본으로 가서 돈을 많이 벌어 가지고 돌아오면 부모를 더 잘 모실 수 있지 않을까?) 허나 덕돌은 반중건중한 생각을 마무리하지 못하고 남방으로 달리는 열차에 몸을 실었다. 물론 상해지식청년대학생이 떼 준 반표를 내들고 열차에 올랐다. 침대차는 바라도 보지 못했고 좌석만 있어도 얼마나 좋으랴? 허나 그 무더운 여름에 건조실 같은 열차에 기대 설 자리조차 찾기 어려웠다. 오후에 올라 온 밤을 꼿꼿이 서서 꺼떡꺼떡 졸면서 달려 이튿날 오전에 남경에 도착했다. 덕돌은 남경에서 내려 곧추 남경대교 쪽으로 버스를 타고 달려갔다. 남경대교에 올라 도도한 장강의 물결을 보는 순간 저절로 감탄이 나왔다. (세상에 넓기도 넓은 강이 있어. 엄청 큰 강이로구나. 그래도 내 고향의 강이 더 좋아. 비록 장강에 비할바는 못 되지만 맑은 강물에 시원히 목욕하고 헤염치고. 허나 저 싯누런 장강이 몇 십 미터나 되게 깊다니 배를 타기는 좋지만 목욕하고 자맥질하기는 틀렸어.) 그는 다리 밑으로 지나가는 발 밑의 기선을 보면서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몇십미터 깊이 장강을 헤염치기도 겁나 하면서 어떻게 몇 백 미터 깊이나 되는 퍼런 바다 물에서 자맥질해 외국 상선에 다가가 올라?) 생각만 해도 모험의 대가가 아뜩하게만 생각됐다. 덕돌은 열차를 타고 한참 달리다가 소주에서 내렸다. 지도를 보니 상해를 한역 앞둔 옛 도시었다. 상해 역에 가서 괜히 반표를 내밀었다가 상해말도 온전히 하지 못하면 들키어 벌금이라도 당할 것 같았다. 소주만큼 이름난 옛 도시를 구경하고 싶었다. 소주는 옛날 2천 몇백년 전 오나라 서울이자 후에는 송나라 남쪽 임시도읍이었다. 옛날 송나라 임금도 금나라 군사들에게 쫓기어 여기 도망 와서 산적이 있었다. 하여 임금과 관리들이 미녀들을 수 없이 끌어 들여 소주와 항주에는 미녀가 많았다고 한다. 고대 오자서가 파견한 동방의 유명한 미녀 서시도 항주 부근 미녀가 아니었던가! 확실히 소주 시내에 내려 두리번거리는데 벌써 역 부근에서 왔다 갔다 하는 미녀들이 수태 눈에 띠었다. 옛날에 숱한 부패한 관리들이 소주에 낙향해 사유 원림을 건축해 고풍스러운 건축물과 원림이 유람객들의 발목을 잡고 눈길을 끌었다. 덕돌은 소주 역에서 내려 두리번거리다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옛 탑(북사탑)에 눈길을 멈추었다. (저 탑을 구경하자.) 덕돌은 그리로 발길을 돌렸다. 남방 날씨는 찜통같이 무더웠지만 다행히 그날만은 하늘이 흐려서 그리 덥지 않았다. 탑 밑에 가 보니 옛 탑은 눈 뿌리 아찔하게 높았다. 덕돌은 탑 꼭대기에 올라 가 시원한 공기를 한껏 마시면서 소주 시내를 내리 둘러보았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시내로 흐르는 강물과 울울창창한 대나무숲 속에 옛 집과 원림 그리고 인공호수가 한눈에 안겨 왔다. (그래, 저기도 들어가 보아야지.) 덕돌은 탑에서 내리자 그 원림을 찾아갔다. 원림에 들어서니 태호의 기괴한 돌로 만든 가산들이 둘러선 곳에 거울같이 맑은 연못이 누워 있고 담에는 옛 시인들의 시사를 새긴 까만 시석이 다닥다닥 박혀 있었다. 원림에는 쌍쌍이 거니는 연인들이 한 눈에 안겨왔다. 그래도 아름다운 소주 원림의 경치 때문에 덕돌은 외로움도 실련의 고민도 서서히 희석돼 사라져가고 있었다. (이 다음 연인을 데리고 와서 구경해야지. 에이, 영자 아니면 예쁜 처녀가 없을까봐? 쳇, 80년대 초 대학생이 어디서 예쁜 처녀를 얻지 못할까봐 걱정해?) 그는 영자를 잊어버리기로 하고 홀로 기념사진을 찍었다. 점심때가 되자 두터운 구름층에서 뻘겋게 활활 타오르는 해가 뜨거운 얼굴을 내밀면서 점차 무더워나기 시작했다. 얼음과자를 사서 와삭와삭 먹어도 먹을 때뿐이지 인차 목안마저 마구 마를 지경이었다. 덕돌은 상해로 가자고 아쉬운 발길을 돌려 역으로 돌아갔다. 때마침 역 부근에서 자그만 참대바구니에 물만두를 삶아 파는 처녀가 보였다. 눈에 띠는 대로 먹는데 습관 된 그였다. 물만두를 배불리 먹고 역에 들어가 상해로 가는 기차표를 사가지고 장의자에 앉자마자 저도 몰래 호로로 잠들고 말았다. “일어나!” “일어나지 못할까!” 덕돌이 눈을 뜨고 보니 웬 바싹 마른 경찰 둘이 눈을 부라리는 것이었다. “어째?” “호주머니와 가방 안의 걸 몽땅 꺼내놔!” 덕돌은 경찰이 죄인처럼 대하는 것이 괘씸했지만 별 수 없이 꺼내 놓았다. 일어교과서를 들고 보더니 “일어를 아는가?” 하고 물었다. 덕돌이 안다고 하자 “읽어보게!” 하고 을러멨다. 덕돌은 처음에는 제대로 일어로 읽다가 입을 헤 벌리고 우멍눈을 슴벅이면서 멍청히 듣는 경찰들이 일어를 알기나 하는 것 같지 않았다. 그는 경찰들의 눈치를 흘끔거리면서 조선말을 드문드문 섞어 읽었다. “네가 무슨 일어를 안다고 와다시와(나)를 못살게 굴고 있니? 개 같은 새끼!” 허나 경찰은 알아듣지 못하고 “그만! 참 잘 읽는구나!”라고 했다. 다른 경찰이 “대학생인가?”라고 하며 가슴에 단 대학마크를 건드렸다.  “그래, 난 대학생이야.” 덕돌은 당당하게 대답하면서도 속으로는 무지한 경찰을 보고 막 입 밖으로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겨우 참았다. 경찰들은 머리를 끄덕이더니 “자도 앉아 자게. 누워 자니까 괴상하게 보이지. 대학생, 양해하게.”라고 하고는 가버렸다. 덕돌은 무식한 경찰들이 우습고도 귀해 희죽이 웃었다. 그의 입귀에서는 비난의 조소가 흐르고 있었다. 상해에 도착하자마자 날씨는 찌는 듯이 무더웠다. 덕돌은 역에서 내리자마자 가방에 깊이 간직한 편지 한통을 꺼냈다. 그것은 상해지식청년 수호가 그의 아버지 상순에게 써 보낸 편지었다. 그 편지 주소 한통을 들고 그는 대도시 상해시에서 수호네 집을 찾아내 도움을 받으려고 했던 것이다. 허나 상해 사람들은 연변에 와서 빈하중농의 재교육을 받은 상해지식청년들과는 달랐다. 편지봉투에 적힌 주소를 내들고 길을 물어보아도 돈을 줘야 알려준다고 했다. 어떤 때에는 돈을 받고서도 왕청 같은 데로 틀리게 알려줘 애를 먹게 하기까지 했다. 그러다나니 인심이 야박하기로 그지 없는 상해에서 덕돌은 이틀 동안 편지봉투를 들고 길을 물으면서 찾아다녔지만 수호네 집을 찾을 길이 없었다. 편지봉투에 적힌 주소와 대조해보면 딱 길이나 집 번호나 똑 같았다. 황포구 사천북로가 소주로 612호, 딱 맞았다. 그런데 모른다 하거나 여기에는 이런 사람이 없다고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확실히 2층으로 된 그 집은 밑층에 손마선질을 하는 복장점 밖에 없었다. “딱 이 집이 맞는데.” 덕돌은 이번에는 자리를 뜰 염을 하지 않고 뻗치면서 아래 위를 두리번거렸다. 상해 사람들은 동북 사람으로서는 알아도 듣지 못할 상해 말로 저희들끼리 뭐라고 지껄이면서 땀을 뻘뻘 흐리며 서 있는 덕돌의 아래 위를 훑어보았다. 그중에 쌍까풀눈의 20대 초반의 처녀애가 편지봉투를 달라고 해 들여다보더니 뭐라고 말하면서 2층으로 올라가는 것이었다. “덕돌아!” 덕돌이 2층층계를 올려다보니 수호와 아내 황련지가 길림을 데리고 내려오면서 반갑게 인사했다. “야, 네가 어떻게 돼 여기까지 왔니?” “어서 우리 집에 올라 가자요.” 수호와 황련지는 덕돌을 데리고 2층으로 올라가다가 아까 편지봉투를 쥐고 2층으로 올라가던 처녀애를 보고 인사시켰다. “얘, 인사해라. 내 항상 외우던 우리 일가 은인 김 서기네 아들 덕돌이야.” 그러고 돌아서서 덕돌을 보고 “내 여동생 수매야.”라고 했다. 수호의 여동생 수매는 쌍까풀눈을 곱게 내리깔며 인사했다. 수호네 집은 10평방미터도 되나마나 했는데 누나까지 집이 없어 애들 둘이나 데리고 와서 얹혀살고 있었다. 그리하여 2층 침대를 놓고서도 잘 자리가 모자라 수호는 2층 지붕에 올라가 다른 층집과 자기 집 사이에 깔아놓은 3장의 널판 위에서 위험하게 자는 형편이었다. 그들은 먼 동북에서 온 은인의 아들을 열정적으로 접대했다. 먼저 땀벌창이 된 덕돌에게 찬 냉수를 마시게 하고 세수 대야에 찬물과 비누, 수건을 가져다주었다. 세수를 하고 찬 물까지 시원히 마시자 이번에는 돼지고기채에 닭알지짐까지 밥상에 올렸다. 덕돌은 오랜만에 맛있는 채에 밥을 맛있게 먹었다. 그리고 가방에서 마른 버섯이랑 노란 콩이랑 사탕과자랑 꺼내 놓았다. 수호네 길림은 이젠 열 살도 거의 돼 꽤나 컸다. 덕돌이 과자랑 사탕이란 주자 눈치를 할금거리다가 받아서 맛나게 먹는 길림을 보고 귀여워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수호네 조카애들도 과자를 맛나게 먹으면서 대뜸 덕돌과 가까워졌다. 허나 집이 비좁아 덕돌은 수매가 주선해준 부근의 지하 여인숙에 가서 들었다. 그게 오히려 부담스럽지 않고 자유스러워 더 좋았다. 수호는 낮에는 일본인이 꾸리는 신발공장에서 일하기에 대신 여동생 수매를 보고 덕돌을 데리고 여기저기 상해 구경을 시켰다. 상해 제일 번화한 남경로나 황포강변 황포공원 부근은 인파가 어찌나 붐비는지 발을 옮겨 놓을 자리도 없을 정도여서 덕돌은 도저히 수매를 따라 다닐 수 없었다. 수매는 사람들 속에서 뒤따라오는 덕돌한테 다가오더니 쌍까풀눈을 곱게 내리뜨더니 덕돌의 팔을 끼었다. 덕돌은 좀 불 자연스러워 스리슬쩍 팔을 뺐다. 그러자 수매는 맑은 눈으로 덕돌을 바라보며 웃었다. “호호호. 우리 상해에서는 동행자를 잃어버리지 않으려면 이렇게 팔을 끼거나 손을 잡고 다녀야 해. 개혁개방시기 80년대 대학생이 어쩜 아직도 개방되지 못했어? 봉건통!” 말을 마치자 수매는 이번에는 덕돌의 손을 잡았다. 덕돌은 이번에는 손을 빼지 않았다. 이렇게 돼 그들은 연인처럼 다정하게 손을 잡고 상해 서교공원과 황포공원 그리고 남경 로의 승리공원을 돌아다녔다. 일요일이 되자 수매 대신 수호가 덕돌을 데리고 상해 남경 로에 있는 제1백화상점과 국제 빈관을 구경시켰다. 국제빈관에는 상지민의 어머니가 있었다. 덕돌과 수호는 국제빈관 대청에서 소파에 앉아 차물을 마시면서 기다리었다. 기별을 받고 상지민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상지민은 덕돌을 보자 와락 끌어안으면서 “야, 우리 은인 김 서기 아들이 왔구나. 환영한다. 환영해.”라고 했다. 뒤이어 함흥대대 조개덕에 내려왔던 상해지식청년들인 홍모, 리민, 마대랑, 소승애 모두 왔다. 그들은 앞다퉈 자기들을 여러 모로 관심해준 상순의 은정을 말하면서 그의 건강형편과 마을의 형편을 물어보았다. 그날 점심. 덕돌은 아버지가 덕을 쌓은 덕분에 으리으리한 국제빈관 식당에서 상지민 어머니가 차려준 상해 고급요리에 술을 마음껏 마셨다. 허나 국제 빈관을 나서자 너무 더워서 견디기 어려웠다. 그때 상지민이 국제 빈관의 승용차를 빌어 덕돌과 수호를 집과 여인숙까지 실어다 주었다. 이튿날 수호는 덕돌을 데리고 자기가 출근하는 일본 신발공장으로 데리고 갔다. 규모는 그리 크지 않은 공장이었지만 상해바닥에서 일본 신식신발을 생산해 꽤나 인기가 있었다. 수호는 덕돌을 보고 “너 대학에서 일어를 배웠니?”하고 물었다. 덕돌이 머리를 끄덕이자 그는 “잘 됐다. 우리 일본 보스를 만나 일어로 대화해 보겠니?”하고 물었다. “그러기요. 일어를 써먹어 봐야지.” 덕돌은 수호를 따라 2층에 있는 보스 사무실로 올라갔다. 대머리 보스가 안경을 춰올리며 사무 상에서 일어나 수호와 덕돌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수호가 다가가 종이에 한어로 “대학생”, “일어”라고 썼다. 그러자 보스는 덕돌을 쳐다보면서 반겼다. 덕돌은 일어로 “안녕하세요? 처음 뵙습니다.”라고 인사했다. 일본 보스는 아주 기분 좋아졌다. “오랜만에 상해에서 우리 일어로 말하는 사람과 만나니 정말 기쁘오. 저기 걸상에 앉소.” 그는 손수 차 두 잔을 부어 수호와 덕돌의 앞 차탁에 놓았다. 여비서가 다가와 에어콘을 틀어놓아 영상 35도도 넘는 무더운 날씨와는 달리 아주 시원해 좋았다. “어느 대학교를 다니오?” 보스의 물음에 덕돌은 “YJ대학에 다닙니다.”라고 솔직히 대답했다. 일본 보스는 “그 대학은 유명한 대학이죠?” 하고 묻더니 무척 덕돌에게 관심을 보이면서 이것저것 물었다. 덕돌이 유창한 일어로 술술 대답하자 보스는 나중에 이런 말을 꺼냈다. “우리 공장에 와서 일어통역을 하지 않겠소? 높은 로임으로 초빙하지.” 그 말에 수호나 덕돌이나 너무 뜻밖이어서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덕돌은 한참이나 궁리했다. (이런 일본 공장에 있을 거면 일본에 건너가지. 아직 대학졸업장도 타지 못했는데 중도에 공장에 다닌단 말인가? 지금은 견식을 넓히고 많이 배울 때인데.) 그때 피뜩 이런 영감이 번개처럼 뇌리를 쳤다. (번화한 대도시 상해에서 일본기업소에 다니다가 저 보스를 등에 업고 일본에 건나 갈 기회를 마련하면 좋지 않을까?) 덕돌은 인차 “이제 대학을 졸업한 뒤 오면 어떨까요?”라고 헛일 삼아 말해보았다. “환영하오.” 보스는 대번에 얼굴에 화색을 띠었다. “헌데 난 지금 이 기업소를 경영하기 힘들어 죽겠소.” 알아듣지 못한 수호는 어리벙벙해 있는데 덕돌은 “무엇 때문입니까?” 하고 물었다. 일본 보스는 솔직히 말했다. “우리 기업에 일어통역이 없어 힘드네. 무슨 일을 시키려고 해도 기술자나 노동자들이나 내 말을 통 알아듣지 못하네. 그래서 나는 종이와 만년필을 들고 다니면서 한자어를 써서 그래도 의사를 얼마간 전하는 형편이네. 난 지금 당장 일어통역이 필요하네. 우리 기업에 와서 일하게나.” 일본 보스가 비난사정을 하는 것을 보고 덕돌은 응모조건을 엉뚱하게 슬쩍 높였다. “내가 여기 와서 일하면 장차 보스님께서 일본에 데리고 가서 유람도 시키고 연수도 시키겠습니까?” “그래, 될 수 있지. 여기 와서 3년만 일을 잘 하라고. 그럼 내가 일본에 돌아갈 때면 데리고 가서 일본 구경을 시키겠네.” 일본 보스는 시원하게 대답했다. 그는 뚱뚱한 몸을 일으키며 손수건으로 번들 이마의 땀을 훔치면서 안경알 너머로 덕돌을 슬쩍 곁눈질하더니 너스레를 떨었었다. “나 원, 참, 대도시 상해에서 일어를 아는 사람을 찾기 이렇게 힘들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어. 국제빈관에 가서 부탁했더니 진짜 일어를 아는 대학교 학생들이나 선생들은 우리 공장이 작다고 오지 않아. 외국어대학교 대학생들은 외교부나 영사관이 목표라고 해. 개혁개방한지 몇 해라고 일어인재가 이렇게도 없을 줄이야.” 일본 보스는 한참 신세타령을 하더니 이런 말을 꺼냈다. “덕돌이라 했던가? 여름방학에 유람을 나다니는 것 같은데 개학 전까지 우리 기업에서 임시 통역을 해 줄 수 없나?” 덕돌이 수호와 한어로 말하니 수호는 “대답해라. 차비라도 마련하면 좀 좋아서.”라고 했다. 덕돌은 흔쾌히 대답했다. 덕돌은 그날부터 지하여인숙에 뒀던 짐을 싸가지고 일본 기업인 교또신발공장에서 와서 실습 삼아 통역으로 일했다. 일반노동자인 수호와는 달리 덕돌은 보스를 그림자처럼 따라 다니면서 통역을 해주었다. 또 여비서와 함께 보스를 따라 상점에 가서 필요한 생활용품도 사오고 보모에게 음식부탁도 해야 했고 고급식당에도 따라다니면서 고급생활도 했다. 보스와 갈라져 공장 숙사에 돌아가면 곤한대로 가지고 간 일어교과서를 펼쳐들고 일어공부에 전념했다. 그런데 보스 이시가와씨는 아예 덕돌을 자기 집에 와서 함께 주숙하게 했다. 교또에서 건너온 그는 사모님도 데리고 오지 않아 전적으로 상해 당지에서 구한 보모가 끓여 주는 밥을 먹고 살아야 했다. 허나 말이 통하지 않아 음식습관이 다른데 음식주문을 하기 힘들어 골치 아팠던 것이다. 이젠 덕돌은 그의 입이 된 셈이어서 덕돌이 한시도 없이는 살기 어려웠던 것이다. 허나 개학이 오래지 않아 덕돌은 동북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이시가와 보스는 덕돌과 갈라 질 때 두툼한 봉투를 내밀면서 신신당부했다. “자네와 함께 있은 한달 동안은 아주 편리했네. 수고했어. 로임으로 인민페 200원을 넣었네. 대학을 졸업하면 우리 기업에 오게나. 꼭 더 높은 로임을 주겠네. 한 500원을 줄 예산이네.” 500원이면 대학을 갓 졸업한 대졸생의 1년 12개월 로임에 해당됐다. 수호가 받은 로임의 거의 10배는 됐던 것이다. 덕돌은 봉투를 받으면서  인사했다. “고맙습니다. 제가 대학을 졸업하면 그때 다시 봅시다.” 이시가와 보스는 덕돌의 손을 굳게 잡았다. “ 믿고 기다리겠네. 덕돌이 꼭 오겠지?” 덕돌은 허리를 굽혀 인사하며 머리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믿어줘서.” 덕돌이 떠나는 날 수호와 황련지는 어린 아들애 길림까지 데리고 상해 공평부두에까지 짐을 들어주며 바래였다. 그들은 길림성에 가서 재교육을 받으면서 낳은 애라고 아들애의 이름을 길림이라고 달았던 것이다. 수호는 줄 것이 없어 자기네 일본 교또신발공장에서 생산한 여름에 신는 산다를 스무 컬레나 가방에 넣어 보냈다. 공장에서 파는 가격은 1원도 되나 마나 했지만 연변에 가져다 팔면 3원 80전이나 4원씩 팔 수 있었던 것이다. 수호는 상해와 연변의 신 값을 손금을 보듯 했던 것이다. 그 신 스무 컬레를 팔면 로비를 하고도 남을 것이었다. 덕돌과 수호, 황련지는 눈물을 흘리면서 석별의 정을 나눴다. 덕돌은 신짝을 넣은 묵직한 가방을 메고 만 톤급 윤선에 올랐다. 흐린 날이어서 덥지 않아 좋았다. 윤선에 올라 시원한 바닷바람을 쏘이며 돌아 볼라니 저쪽 부두 입구에서 그때까지도 수호네 일가는 손을 젓고 있었다. 덕돌은 돌아가라고 연신 손을 저었다. 수호와 황련지는 눈물을 훔치며 손을 계속 흔들었다. 뿡- 만 톤급 장강호 윤선은 기나긴 경적을 울리더니 서서히 황포강 공평부두에서 미끄러져 강심으로 바다로 대련으로 미끌어져나갔다 “아름다운 상해여, 안녕히! 유정한 친구들아, 이제 가면 언제 다시 만나느냐? 꼭 다시 만나자!” 윤선은 깊고 깊은 석별의 정과 끝없는 고민을 싣고 푸르른 바다로 나아가고 있었다 …        제30장 망향(望乡)                   1. 모험과 효성        서늘한 가을바람이 선들선들 불어와 무더위가 핥고 간 대지를 시원한 세상으로 바꿔 놓았다.        상순의 집에는 경사나 난듯이 웃음꽃이 피었다. “나돌아 다닌 머저리 앉은 영웅보다 낫다는 말이 그른데 없다.” 명옥이 하는 말에 말수가 적은 상순도 희죽이 웃었다. “돼지 새끼 네개를 팔아 가지고 세상구경 떠나가더니 돼지 새끼 열 마리를 벌어가지고 왔구나.” 그때 본가집에 돌아온 막내누나 성숙이가 덕돌이 대련에서 가져온 생신한 물고기를 동네 아줌마들한테 파느라고 여념이 없었다. 성숙은 경박호 옆의 상수촌 김광선한테 시집갔다. 첫애를 잃고 그 아래로 아들 영남과 영춘을 낳았는데 이번 걸음에 애들을 데리고 놀러 왔다. 그녀는 하나 밖에 없는 남동생 덕돌이 가져온 산다와 물고기를 파는 재미에 웃음꽃을 피웠다. 덕돌은 윗방에 누워서 정지 부엌바닥에서 고기가 불이 펄 나게 팔리는 것을 보면서 흐뭇해 푸른 꿈을 익히고 있었다. 글쎄 대련에서 한 근에 20전에 산 청어를 이 시골에서 1원 30전에도 사서 먹으려고 해도 없었으니 말이다. 경제가 낙후하고 변경 시골에 자리 잡은 진수해는 시내라고 해도 하나 밖에 없는 식품상점에서 청어 한 근에 1원 50전 했지만 너무 오래서 다 썩은 것 같았고 부스러기뿐이었던 것이다. 그것에 비하면 대련에서 펄떡펄떡 뛰던 생신한 청어를 사서 가져왔기에 진수해 식품상점의 청어보다 값도 20전이나 덜 받았기에 마을 사람들은 앞 다퉈 사갔다. 하여 100근 되는 물고기를 하루 새에 불이 펄 나게 몽땅 팔았다. 이번 걸음에 덕돌은 실련의 고통에서 벗어났을 뿐만 아니라 세상을 널리 보았고 돈줄을 발견했다. “그래, 대련의 물고기에 상해 교또신발공장의 신을 가져다 팔아 목돈을 벌어야지.” 물고기와 신을 팔아 일약 200원도 넘는 돈을 벌었다. 얼굴의 밭고랑 같은 주름살마저 쪽 펴진 부모의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덕돌은 크게 장사를 벌려 부자로 돼 부모께 효도할 마음을 먹었다. 그는 머리가 희슥희슥한 부모를 바라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됐다. (상해에 다니면서 신 장사를 할지언정 일본으로 갈 궁리는 포기하자. 괜히 파악도 없는 일본유학을 모험했다가 늙으신 부모에게 불효를 저질러서야 안 되지. 외동아들인 나를 기둥처럼 믿고 있는데 내가 어찌 전도와 이상을 위해 부모를 버리고 일본으로 간단 말인가? 아무리 높은 로임을 준다고 해도 어찌 나를 믿고 바라보며 사는 늙으신 부모를 버리고 어찌 상해에 간단 말인가? 난 부모자식 간에 모모한 애끓는 이별이나 별거를 바라지 않는다. 아니, 이별이란 영영 없었으면 한다. 물론 이별이 있어야 상봉도 있다고 하지만 조석으로 부모자식들이 한자리에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그러나 이 세상 부모님들은 이별의 아픔을 속으로 피눈물을 흘리면서도 참아나간다. 부모님들은 자식이 이 세상 어디로 가든지 잘 되기만을 바라고 자식들이 잘 되면 기뻐한다. 부모님들은 자식의 뒷다리를 절대 잡아당기지 않는다. 그러나 자식으로서 부모님들의 마음을 십분의 일이라도 알아야 할 것이고 모든 것을 돈으로 계산해서는 안 된다. 모든 것을 자기 중심으로 생각하지 말고 늙어서 의지 가지 없을 부모님의 생각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자기 혼자 잘 살겠다고 늙으신 부모를 버리고 몇 만 리 밖의 일본으로 달아난다는 것은 차마 못할 짓이다! 세상에 부모자식이 한곳에서 사는 것만큼 행복하고 즐거운 천륜지락이 또 어디 있으랴? 그런 천륜지락은 황금산과도 바꿀 수 없으리라!) 이쯤 생각하자 덕돌은 바깥에 나가서 저 멀리 서쪽의 패용천산과 칼산을 하염없이 바라보면서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었다. (충신은 효자가 아니라고 하지만 난 부모님을 잘 모시고 효성을 다하는 효자이면서도 사업도 잘하는 사업가로 되련다. 그러면 얼마나 자랑스럽겠는가? 아버지도 부모에게 효성을 하고 처자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영월구 공안국 국장도 그만두고 함흥촌 시골로 돌아오지 않았던가! 그래, 그래. 나도 아버지처럼 효성이 지극했던 부모에게 지극정성을 다해 효성을 해야 한다. 아무리 가난해도 나에게 목숨과 모든 것을 주고 나를 키워준 부모 그리고 조국과 고향을 버릴 수 없다. 물론 내가 일본 유학을 하고 조국에 돌아와 조국과 고향을 위해 더 크게 일하려는 것이지만 한시도 고향과 부모를 떠날 수 없다. 모험의 길을 포기하자. 고향 연병 땅에 뿌리를 박고 부모님을 가까이에서 모시고 돼지고기 한 점이라도 대접해드리면서 효도하며 살자. 하늘을 찌르는 거창한 사업은 하지 못해도 부모와 고향 인민들에게 효도할 뿐만 아니라 향토애와 민족애에 묻혀 우리 고향 사람들을 위해 두부모만한 글이라도 쓰면서 참답게 살아보자.) 마음을 정하자 덕돌은 앞길이 환해지는 것 같았다. 효성과 부모사랑, 민족사랑, 고향사랑이 인생길에서 상상하기도 어려운 모험을 막았던 것이다. 순간 영자와의 실련의 아픔도 가뭇없이 사라졌고 패용천산과 칼산, 태평강과 부르하통하, 고향의 모든 산천이 아름답기만 했다. 둥둥 떠다닌 구름송이 같던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으면서 고향 땅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순간이었다. 그러자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때 부엌칸 쪽이 부산스러워져 내려가 보니 뒤늦게 소문을 듣고 물고기를 사러 온 병진이 아쉬워하며 떠들어대는 것이었다. “허참, 먹을 복이 없는 놈은 대련 물고기도 얻어먹지 못하는구먼.” 생산대 탈곡장 벼 낟가리에 불을 질렀다가 감옥에 갇혀있던 병진은 만기 석방돼 집에 돌아왔던 것이다. 그는 자기가 감옥에 간 것은 전적으로 자기 방화죄에 있다는 것이라고 생각할 대신 상순이가 자기를 붙잡아냈기 때문이라고 여기며 나쁜 감정을 품고 있었다. 그는 덕돌을 보자 물고기를 사지 못했다면서 빈정거리었다. “허이고, 대학생이 물고기장사를 다 하오? 이 집이야 원래 약담배장사로부터 소문 난 장사군 내력인 게 뭐. 이보, 대학생, 물고기 장사를 해 장가가면 살 집을 살 예산이오?” 덕돌은 누워 있다가 스르르 일어나더니 “철주 아버지야 사회대학을 졸업한 게 대학생 위 대학생이지.”라고 맞받아 쳤다. “저 새끼 요사한 게 말하는 거 봐라. 날 보고 사회대학을 다녔다고 비웃어?” 덕돌은 기싸움에서 물러서지 않았다. “그래 그 이상 더 좋은 대학이 어디 있소? 철조망을 두른 토성 안에 보초병들까지 보초를 서 주는 철창 속에서 법률공부를 하지 않았소? 철창 속에서 법을 잘 배웠으면 마을에 돌아와 말썽 작작 일으키고 노실하게 사오. 자칫 하면 돌을 들어 재차 자기 발을 깔게요!” 병진은 덕돌의 성격을 아는지라 무섭게 번뜩이는 눈길과 경고하는 것을 보고 두덜거리면서 고개를 숙이더니 비실비실 뒤로 물러서다가 돌아가 버렸다. 덕돌이 대학교 숙사에 돌아가니 졸업배치가 시작돼서 동창생들은 모두 각자 이상에 따라 지망을 쓰고 이른바 “공작”을 하느라고 달아 다녔다. 술과 과자를 사들고 담임교원을 찾아가고 학부 주임을 찾아가 통사정을 들이댔다. 담임교원들도 제자들의 졸업배치 때문에 머리 아팠다. 어느 제자의 이익에도 도움이 되게 해주고 싶은 것이 스승의 마음이었다. 마치 자식이 많은 아비가 자식 전도를 걱정하듯이. 허나 가지 많은 나무가 바람에 성할 때가 없는 법이었다. 제자들 속에는 별의별 해괴한 일이 다 벌어졌다. 어떤 제자는 상대방이 어디로 가려고 하는가는 정보를 장악해 가지고 자기 이해득실에 영향이 있으면 담임교원이나 학부장을 찾아가 물어뜯고 훼방을 놓았고 자기가 적임자임을 내세웠다. 덕돌은 글을 쓰는 신문사나 방송국이 아니면 출판사나 문화관 창작 실 같은데 가는 것이 소원이었다. 허나 농민의 아들이 그런 보도기관이거나 문화단위에 배치 받는다는 것이 어디 그리 쉬운 일이겠는가? 진짜 하늘의 별따기보다도 힘든 일이었다. 남들은 가문의 문벌이 높아서 기자나 편집 혹은 명작가의 아들딸이거나 사위가 아니면 며느리어서 그런 동창생들의 부모들이 이런 저런 관계를 통해 청탁을 하고 예물작전을 하는 판에 무슨 수로 경쟁이 치열한 그런 단위로 들어간단 말인가? 덕돌은 생각만 해도 골이 아팠다. 허나 세상에 얽매여 살지 않고 일본이나 상해에 가서 모험적으로 살아보려던 그여서 초현실적인 환상에 잠기면서 자기 위안하는 방법으로 암흑한 현실에서 해탈되려고 애썼다. (세상이 더러워서. 원, 그까짓 신문사나 방송국을 대단하게 생각하는 거 같아? 난 일본에 유학을 가려던 이상도 꺾고 이런 골 안에 물앉았는데. 상해 일본 기업소에서 오라는 것도 가지 않아. 여기 로임의 10배를 주겠다는 것도 그만 뒀는데. 너희들을 대단하게 보는 거 같아? 아무 일이나 하면서 부모를 잘 모시면 되지. 인생은 마라토너야. 꼭 내 능력과 노력으로 경쟁할 테야.) 덕돌이 머리 아파할 때다. 이모부 강운룡네 아들 강호가 찾아왔다. 덕돌은 울적해 있던 차라 오랜만에 찾아온 강호를 식당에 데리고 가서 채 두 접시를 마주하고 술잔을 기울였다. “무슨 일로 찾아왔니?” 강호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형님, 교통경찰을 하니 별의별 위법하는 운전수를 다 만나오. 언제 무슨 보복을 당할지 모르겠소. 그래서 형님한테서 호신술로 쓸 권투나 무술을 배워 달라고 찾아왔소.” 덕돌은 한숨을 후 내쉬었다. “강호야, 좋은 경찰을 하면서 딱 주먹을 휘둘러야 되니? 법으로 일을 처리해야지.” 강호는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형님, ‘문화대혁명’은 끝났지만 이 세상은 아직도 얼마나 어지럽다고 그러오? 모든 게 법으로 될 거 같소?” 강호는 술병을 들어 덕돌의 술잔에 부어주면서 뒷말을 이었다. “속담에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는 말이 그른데 없소. 경찰도 자기 몸을 보호하려면 호신술 닦아야 하오.” 그러자 덕돌은 한숨을 후 내쉬었다. “그 말에 도리는 있다. 그럼 어째 아버지한테서 배우지 않니? 네 아버지는 항미원조 전쟁 때부터 특종병 출신이 아니고 뭐냐?” 강호는 “주먹을 믿고 아무 짓이나 할까봐 배워주지 않소.”라고 하며 답답해했다. “지금 내 대학졸업배치로 해 골이 아프다. 배워 줄 새도 없다.” 강호는 머리를 들고 덕돌을 바라보며 말했다. “형님, 아버지와 말해서 형님을 시내에 남겨달라고 하라오? 국장인 아버지가 나서면 형님 졸업배치쯤은 문제없을 거요.” 허나 덕돌은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신문사나 문화관 같은데 갈수 있겠니?” “말해 볼게.” “고맙다.” 덕돌은 강호를 드문드문 학교 청사 뒤 소나무 숲이거나 부르하통하 버들방천에 데리고 가서 권투를 배워주었다. 실전에서 호신술로 쓸 실용적인 간단한 동작을 배워주었다. 한편 이모부는 여기저기 수소문해 덕돌의 졸업배치를 도와 나섰다. 그러나 이모부 강운룡은 공안국과 검찰원, 법원 같은 기관에는 면목이 넓었지만 문화단위나 보도기관에는 인맥이 뻗치지 못했다. 그리하여 시내 문화관에 남으려던 덕돌의 소박한 이상마저 물거품으로 돼버렸다. 핍박에 못 이겨 덕돌은 아버지에게 “이계삼 서기나 허영주 부 현장과 말해서 시내 학교에 남게 해주십시오.”라고 말했다. 그러나 상순은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사회에 첫걸음을 내딛기 시작하면서 뒷문거래에 의거해서야 장차 어떻게 제대로 일하겠느냐? 사람은 자기 능력을 믿고 살아야 한다.” 어지럽게 된 세상에서 광목천을 쓰고 진흙탕 속에 뛰어들지 않으려는 아버지가 고상하면서도 아들의 전도에 관계되는 일에도 나서지 않는 데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중에 덕돌은 진수해 당위 선전위원으로 사업하는 성환의 소개로 문화교육을 책임진 허영주 부 현장을 찾아가 도움을 받아 진수해중학교에 배치받았다. 중학교로 배치 받아 가기 전에 상해 일본 교또신발공장의 보스 이시가와 보스한테서 편지가 날아왔다. 보고 싶은 덕돌이, 안녕하오? 오랜만이오. 이젠 졸업할 때도 됐겠지? 약속대로 우리 기업에 오게나. 우린 한 달에 500원의 높은 로임으로 자네를 통역원으로 초빙하네. 만약 일반 통역이 지위가 낮다고 생각하면 장차 비서실장으로 제발시킬 수도 있네. 어때? 100명도 넘는 직원을 가진 우리 기업에 와서 일해보지 않겠나? 속히 회답하게나. 난 하루가 삼추 되게 자네가 오기를 기다리네. 잘 부탁 하네… 편지를 읽고 나서 덕돌은 희비가 겹치어 심란하기 그지없었다. 그는 편지를 꾸겨 호주머니에 넣고 고민에 빠졌다. (혹시 상해에 가서 높은 로임을 받아 부모한테 부쳐드리면 효성을 더 잘 하는 건 아닐까? 허나 옆에 외동아들이 없어도 되는 건가?) 그는 효성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곰곰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돈을 많이 드리는 것이 효성의 전부인가? 옆에 자식이 없이도 돈만 많이 가지고 근심 없이 잘 살게 하면 천륜지락을 누린 것인가? 아니다. 허나 옆에서 조석으로 모시고 있지만 부모께서 이 근심 저 걱정 다 하면서 온전히 입지도 못하고 늘그막까지 일을 해야 근근득식 한다면 자식 된 도리를 제대로 한 건가?) 칼바람이 덕돌의 얼굴을 쇠깍쟁이로 긁어내듯이 불어쳤다. 덕돌은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광야를 터벅터벅 걸어 진수해로부터 조개덕으로 돌아가면서 생각을 거듭했다. (아니야. 부자로 돼 부모를 부유하게 모시지는 못해도 하나 밖에 없는 외동아들인 내가 가까이에 있으면서 부모를 조석으로 모시는 것이 옳다. 이거야 말로 천륜지락이야. 아무리 황금산을 쌓아 놓고 산다한들 만리 떨어져 있어서야 무슨 효성인가? 무슨 천륜지락이란 말인가?) 이쯤 생각이 재차 잡히자 덕돌은 한숨을 후 내쉬었다. “돈이야 벌면 있겠지만 부모자식간의 천륜지락이야 돈을 주고서도 살 수 없다. 진수해중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으면서 여름방학과 겨울방학에 대련과 상해를 드나들면서 물고기와 신 장사를 하면 돈이야 얼마간 벌수 있지 않는가. 돈 줄이야 국내에 있으면서도 하나하나 발견할 수 있겠지. 딱 일본에 가야만 잘 살 수 있겠는가?” 집에 돌아가자 그는 진수해중학교에 배치 받은 일을 말하면서 아버지 앞에 인사국의 졸업배치 소개신을 꺼내 보였다. 상순은 소개신을 들고 보면서 머리를 끄덕였다. “됐다. 이게 너의 학습 성적과 능력으로 얻은 졸업배치이다. 옛날부터 훈장의 똥은 개도 먹지 않는다고 했다. 그만큼 훈장질을 하는 일이 힘들다는 얘기다. 혹시 네가 글을 쓰려는 이상과 모순될 수도 있다. 허나 그런 모순을 재빨리 해결하고 현실에 발을 붙이고 훈장을 잘해라. 우리 가문에 처음으로 훈장이 나온 거 아니냐? 아주 장하다.” 아버지는 항상 그러했다. 그 어떤 곤난도 완강한 의력으로 박차고 나가라고 신심을 주는 것이었다. 아직도 한 달이나 지나야 개학이었다. 덕돌은 아버지를 보고 소를 팔아달라고 했다. “뭘 하자고 그래? 졸업배치도 다 받았는데.” 덕돌은 우쭐 일어나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바깥을 내다보다가 머리를 돌렸다. “아버지, 대련에 가서 물고기를 사다 팔가 합니다.” “또 물고기장사를?” “예.” 상순은 놀라했다. “야, 이놈아, 저 혹달개소는 우리 집 목숨과 같다. 소를 팔아 본전도 못하면 황소 없이 새해 농사를 어떻게 짓니?” 명옥도 말렸다. “야, 이놈아, 대학을 졸업했으면 됐지. 뭐가 모자라서 황소를 팔아 물고기장사를 한단 말이냐?” 명옥은 저녁밥을 지으려고 쌀을 쌀 함박에 일다가 우는 상을 지었다. “야, 저 놈의 씨는 말리지 못한다. 딱 제 아비 닮았구나. 너 아비 젊어서 소금 장사를 하다가 나중에 약 담배 장사를 해 혼났다. 돈을 벌기는 고사하고 나중에 빚더미에 깔려 내 그 빚을 무는 게 혼났다. 농사를 지어서 물다 못해 술도 빚느라고 집에 불이 다 달렸지. 아비가 공산당 덕분에 장사를 하지 못하게 해 농사를 지으면서 장사를 그만두더니. 네가 왜 나서니? 이제 살만하니 또 황소를 팔아 물고기 장사를 해? 이 놈아, 대학을 졸업하고 한 달에 45원씩 타게 되면 살만하다. 몇해 전에 온 집 식구들이 한해 농사를 지어도 10원 돈도 타지 못했는데 네가 혼자 두 달이면 한해 농사 돈을 타는데 뭐가 모자라 그러니? 원, 장사란 말만 들어도 진절머리 난다. 그만둬라. 훈장질이나 잘 해라.” 덕돌이 뭘 하려고 해도 말리지 않고 다 받들어주던 어머니가 막아 나섰다. 덕돌이 아버지 눈치를 보았다. 아버지의 결단에 달렸던 것이다. 말수가 적은 상순은 한참 궁리하더니 뜻밖에 지지해 나섰다. “물고기장사를 해라. 내일 소를 팔아 줄게.” 그 말에 명옥은 기 막혀 불을 때다가 구들에 달려 올라와 죽는 상을 했다. “아니, 이 영감이 정신 있소? 하나 아들을 계속 장사를 시킬 예산이오? 이제 집을 팔아 장사를 하자고 하지 않는가 보오.” 허나 상순은 마음을 굳게 먹은 상 싶었다. “허참, 여자들이란 소견이 좁소. 전번에도 물고기를 팔아 200원을 벌지 않았소?” 그는 누가 들을까봐 목소리를 낮춰 뒷말을 이었다. “전번에 30전짜리 물고기를 가져다 1원 30전씩 팔지 않았소. 운 비를 제하고도 한 근에 70전 벌었소. 어디서 그런 목돈을 벌겠소? 할 만한 장사요.” 그리하여 덕돌은 며칠 후에 혹달개 소를 판 돈 500원을 가지고 대련 행 열차에 올랐다. 하루 밤낮을 꼿꼿이 앉아 대련에 도착해 내리니 해변가 날씨어서 장백산 아래 날씨와는 판판 달랐다. 덕돌이 추울까봐 가죽털모자를 쓰고 긴 군복외투를 입고 시내 전차에 탔더니 숱한 아가씨들이 핼금거리며 킥킥 거렸다. 음력설이 돼가는데 대련의 날씨는 춥지 않아 모두 털실내복에 홑옷바람이었다. 여름에 왔을 때는 해풍이 불어와 덥지 않더니 겨울에는 춥지 않아 살기 좋은 대도시였다. 호텔을 잡고 들자 덕돌은 대련 사람들처럼 털실내복에 홑옷바람으로 시내돌이를 나갔다. 그는 먼저 대련 역 화물처로 찾아 갔다. 거기서 한참 숱한 물건을 부치는 것을 여겨보았다. 혹시 젖은 물고기를 부치는 사람이있는가고 살펴 보았다. 허나 마른 고기를 부치는 사람은 있어도 젖은 물고기를 부치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반나절이나 살피다가 더 기다릴 수 없어 덕돌은 여직원에게 넌지시 “젖은 물고기를 부칠 수 있습니까?”고 물어보았다. “부칠 수 있어요.” 덕돌은 자기 귀를 의심할 정도였다. “젖은 물고기도 부칠 수 있습니까?” 재차 묻자 여직원은 덕돌을 흘금 쳐다보며 “금방 대답했잖아요? 부칠 수 있어요. 젖은 물고기든 언 고기든 다 부칠 수 있어요.”라고 했다. “감사합니다.” 덕돌은 너무 기뻐 허리를 굽히며 인사까지 했다. 그러자 그 여직원은 우스워 왼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어서 젖은 물고기를 실어와요. 어디로 부치려고 그래요?” “연변에 부치려고 그럽니다.” “부칠 물고기 얼마나 돼요?” “대여섯 마대 될 거 같습니다.” “음, 그럼 삼륜차군들을 보고 실어달라고 해요. 운비는 한 5~6원이면 돼요.” “감사합니다.‘ 말을 마치자 덕돌은 상해에서 돌아올 때 들리었던 대련 어물시장으로 시내전차를 타고 달려갔다. 먼저 돌아다니면서 생신한 청어와 갈치, 오징어, 낙지 등을 두루 돌면서 가격이랑 알아본 다음 시장 어귀에서 삼륜차꾼들 앞으로 찾아갔다. 삼륜차군들은 서로 일감을 빼앗을 내기 했다. 그리하여 덕돌은 운 비를 6원을 주기로 하고 손쉽게 삼륜차꾼을 구했다. 삼륜차꾼을 데리고 삼륜차를 끌고 물고기 장사꾼들 앞으로 갔다. 덕돌은 많이 산다는 조건을 앞세우고 물고기 값을 싹싹 깎아 생신한 청어는 한 근에 20전에, 갈치는 한 근에 50전에, 낙지는 몇 근씩 하는 한 근에 1원씩 흥정해 저울눈을 일일이 까근히 살펴가면서 도합 열 마대나 사놓았다. 그는 물고기장사군과 삼륜차군을 시켜 삼륜차에 싣게 하고 자기는 십장처럼 두 손을 허리에 지르고 물고기를 빼내가지 않는가 큼직한 눈을 뚝 부릅뜨고 살폈다. 물고기를 삼륜차에 다 실은 후에야 덕돌은 품속 호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물고기 값을 넘겨주었다. 뒤이어 삼륜차군이 밀다가 타는 삼륜차 옆 좌석에 걸터앉아 대련 역 화물 처로 달려갔다. 화물 처 여직원은 산더미 같은 물고기를 보고 입을 딱 벌렸다. “꽤나 한다하는 물고기장사군이군요. 이걸 연길에 가지고 가서 팔면 얼마나 벌까요?” 덕돌은 장사를 할 때엔 누구도 믿지 말라던 아버지 말을 떠올리자 거짓말을 꾸며댔다. “운비에 차비에 숙비까지 제하고 나면 한 근에 10전이나 떨어지겠는지 모르겠습니다.” 여직원은 물고기를 부쳐주면서 “그래도 이 숱한 물고기를 팔면 적어도 200원은 떨어지겠어요. 200원이면 내 여섯 달 로임이예요.”라고 하며 혀를 내둘렀다. “이걸 다 팔려면 그리 쉽겠습니까?” 이러루하게 대화를 하는 새 물고기도 다 부쳤다. 화물 처와 삼륜차군에게 운 비를 물고 나니 한숨이 후 나왔다. 화물 처를 떠나면서 여직원에게 인사를 하고 그 길로 귀로에 오를 가고 생각하다가 머나먼 대련에 왔다가 구경하지 않고 돌아가기는 너무 아쉬웠다. 그러나 겨울이어서 로호탄(老虎滩)공원이거나 성해(星海)공원으로 가서 바다구경을 해보았자 그저 그럴 것 같았다. 역 앞에서 서성거리다가 그는 발길을 돌렸다. (에라, 모르겠다. 식당에 들어가 한 때 잘 먹고 보자.) 그리하여 그는 역 광장 앞에 있는 해물식당으로 들어갔다. 그는 말쑥하게 생긴 여복무원을 불러 갈치볶음 한 사발에 술 반근, 밥 두 그릇을 주문했다. 도합 1원 10전을 내고 배터지게 먹었다. 진수해에서는 상상도 하기 어려웠다. 갈치 한 근에 거의 60전을 하는데 한 사발을, 그것도 볶은 갈치인데 한 사발에 50전 밖에 하지 않았다. “그래, 뭐나 원산지면 눅은 법이구나.” 덕돌은 술잔을 굽내고 갈치를 집어 먹으면서 피뜩 이런 생각이 들었다. “물고기는 대련에서 사면 눅어. 허나 이런 상업기밀은 누구한테도 말하지 말아야 해. 혹시 소문이 나가면 속심이 별난 사람들이 나를 장사를 하라고 물고기를 사겠니?” 덕돌은 대련의 물고기로 큰 장사를 할 푸르른 꿈을 꾸면서 열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덕돌은 이튿날 오후에 아버지와 함께 진수해 화물 처에 가보았는데 벌써 10마대나 되는 물고기가 한마대도 차나지 않고 도착했던 것이다. 한 수레에 산더미처럼 물고기를 꽉 박아 싣고 집으로 돌아오는 부자간은 단통 부자로 된 듯이 가슴이 부풀어 올라 둥둥 뜬 기분이었다. 시골 사람들은 덕돌이 또 물고기를 가져왔다고 하자 와 모여들어 설 준비로 물고기를 사갔다. 공것을 싫어하는 덕돌의 둘째누나 은숙은 계순을 업고 와서 청어에 갈치를 사갔다. 덕돌은 너무 한 것 같아 동네 사람들의 눈을 피해 슬그머니 청어 서너 마리를 가져다 주었다. 그때 성욱의 삼촌이 성욱과 함께 물고기를 사러 와서 구경했다. “형님이 왔소? 어서 올라오오.” 성욱의 삼촌 광학은 덕돌의 팔촌형벌이 됐다. “야, 우리 백성자에는 이런 물고기가 없다. 정말 희구하다야. 이 물고기를 어디서 샀니?” 덕돌은 상업기밀이 누설될까봐 “심양에서 샀소.”라고 했다. 그러자 광학은 성욱을 곁눈질하며 머리를 끄덕였다. (쳇, 너희들이 물고기장사라도 할 예산이냐?) 장사군은 제 아비도 속인다고 덕돌은 콧방귀를 뀌면서 8촌형도 감쪽같이 속였다. 그러는 덕돌을 보고 상순은 못 마땅한 눈길을 보냈다. “형님, 정말 한가지 묻기오? 백성자는 초원지구가 아니오?” 광학은 구들에 퍼더버리고 앉아 턱을 고인 채 머리를 끄덕였다. “그래, 가 본적이 있니?” “아니, 없소.” 덕돌은 피뜩 떠오르는 뭔가 있어 물었다. “그 곳에 말이나 젖소 값이 어떻소?” 그러자 광학은 “젖소 갑이 눅다. 젓소 한 마리에 한 600원 할까?”라고 했다. “젖을 짤 수 있는 젖소 한 마리에 600원?” “응, 그래.” 덕돌은 진수해 부근에서 젖소가 귀해 젖을 내는 한 마리에 2,000원씩 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귀가 번쩍 뜨인 덕돌은 젖소 장사를 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일주일 만에 대련에서 가져온 물고기를 다 팔았다. 물론 덕돌의 어머니가 나머지 물고기를 함지박에 담아 이고 눈보라가 이는 추운 날에 진수해 장마당에 가서 파느라고 고생을 했다. 하지만 한 열흘 온 집식구들이 고생해 소한마리를 팔아 1200원을 수입해 소 두 마리를 살 돈을 벌고도 물고기 얼마간 남아 집식구들이 음력설에 실컷 먹을 수 있었다. 새우는 온 여름까지 두고 먹어도 될 것 같았다. 그러자 덕돌은 용기를 얻고 대담히 큰 장사를 할 궁리를 내놓았다. “아버지, 내 광학형님네 백성에 가서 젖소를 사다가 팔아 일약 갑부로 되겠소. 물고기를 판 돈을 주시오.” 그러자 명옥이 먼저 반발했다. “야, 정신 있니? 돈을 벌었을 때 그만둬라. 난 풍설이 이는데 물고기를 이고 다니면서 파느라고 애 똑 떨어졌다. 이젠 난 물고기를 이고 다니면서 팔지 못하겠다. 장사를 싹 걷어치워라. 대학을 졸업했으면 교원이나 잘해 로임을 쪽쪽 타 살 궁리나 해라. 허욕을 작작 부려라. 내 네 아비 때문에 얼마나 고생했는지 아니?” 명옥은 남편의 눈치를 곁눈질 하면서 불평을 토로했다. “이전에 너 아비 약 담배 장사를 해서 3,000원이나 벌었다. 그 돈이면 소 50마리, 소서구를 통째로 살 수 있었다. 그런데 사람의 욕심이 끝이 없다. 그만하면 지주라도 됐겠다. 내 이젠 약 담배 장사를 그만두라고 하니 계속 하더니 그 번 돈을 다 떼우고도 빚 가리에 깔리어 죽을 고생을 다 했다. 너도 소 한 마리를 벌었을 때 그만 둬라.” 허나 덕돌은 계속 고집을 부렸다. “이번엔 소 두 마리만 사다가 팔면 4,000원을 벌면 소 한 마리를 팔아 여덟 마리를 얻는 게 되지 않소? 내 엄마를 보고 물고기를 이고 다니면서 팔라오?” 그때 옆에서 모자간을 보고만 있던 상순이 무겁게 입을 뗐다. “그만 둬라. 장사란 자기 눈으로 똑똑히 보고 해야 한다. 광학의 말을 귀 넓어서 믿었다가 젖소 값이 더 비싸면 어쩌니? 공 차비를 팔고 그 먼 백성자로 갈게 있니?” 덕돌은 멀거니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상순은 덕돌이 듣는 눈치인지라 뒷말을 이었다. “뭐나 냉정하게 고려해야 한다. 그저 젖소 두 마리를 사다가 팔면 4천원이나 번다고 산수만 하지 마라. 백성자의 젖소 값과 우유 값도 알아봐야 한다. 소젖이 잘 팔려야 젖소 값도 그렇게 비싼 거야. 또 여기 와서 정말 2천원을 받을 수 있는지? 만약 젖소가 팔리지 않으면 어쩌니? ” 상순은 덕돌의 어깨를 다독였다. “얘야, 돈에 눈이 어두워 자꾸 장사할 예산만 하지 마라. 돈 때 묻은 눈은 다른 게 잘 보이지 않는다. 탐욕은 부패와 재난을 나을 수도 있다. 난 해방 전에 집이 가난해 소학교 문에도 들어가 보지 못했다. 너 한 공부 10분의 1만 공부해도 난 현장도 했을 거야. 넌 내 몫까지 해 대학공부까지 했는데 사회 어엿한 간부로 돼야 한다. 교원으로 됐으니 우선 우리 고향 학생들을 위해 교원 사업을 착실히 해라.” 허나 덕돌은 자기 계획한 틀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방학에 장사를 한다고 교원 사업에 영향을 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상순은 자기 말을 다음과 같이 매듭지었다. “그만 해서 그만 둬라. 당장 밭갈이를 해야 하겠는데 황소 한 마리는 사놔야 되지 않겠니? 오래지 않으면 개학도 되는데 교원이나 잘 할 준비나 해라.” 모든 것이 결론이 난 셈이었다. 덕돌은 벽이라도 차고 나가는 아버지 성격을 알고도 남음이 있었다. 상순은 조만에 소홀히 먼저 입을 열지 않고 한참씩 여러 모로 궁리를 한 후 입을 열면 복판을 치는 얘기를 했다. 반박할 여지없이 정확한 결론을 내리곤 했다. 그 말을 들어서 언제나 후회할 일은 없었던 것이다. 덕돌은 유리창문으로 눈보라 윙윙 휘몰아치는 바깥을 내다보면서 뜨거워 오른 머리를 식히고 있었다. 눈보라가 백용처럼 파도치며 대지를 무섭게 휩쓸며 지나가고 있었다.
157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114) 댓글:  조회:1310  추천:0  2018-08-07
                                                                                                                                   8. 농촌 개혁의 봄바람        중국의 광활한 농촌 대지에서는 전면적인 개혁의 봄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4인무리”가 살판치던 세월에는 진짜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천지개벽이 일어났다. 농토를 개인들에게 떼 줘 개체농사책임제를 실시한다는 것이었다. 허동원이 제일 좋아했다. “정말 얼마나 좋소. 이전에는 많이 일하나 적게 일하나 가을이면 평균분배를 했기에 어디 일할 열정이 났소?” 허동원은 이전에 덕돌과 바위돌을 메다가 발판에서 떨어져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번했다. 겨우 되살아나 가지고서도 땅을 떼 준다니 기뻐 야단쳤다. “난 아무리 허리를 상했지만 내 땅에 많이 심으면 많이 먹는 판인데. 얼마든지 농사를 잘 지을 수 있소.” 허동원은 허리 아프면서도 자기에게 차례진 가대기를 훌 둘러 메가면서 입귀가 귀밑에 가 붙을 지경이었다. 상순도 자기에게 차례진 혹달개 고삐를 잡고 가대기를 메고 집으로 돌아왔다. 허나 상순의 얼굴에서는 그리 반기는 표정을 찾아 볼 수 없었다. (할아버지와 내가 어떻게 사원들을 이끌어 건설한 생산대대인데 다 허물어 개인에게 나눠준단 말인가?) 상순이 가대기를 사랑방에 걷어 넣고 문 밖으로 나섰을 때였다. 춘실이 상순의 코에 대고 삿대질하면서 야단쳤다. “내 나그네 죽이니 씨원해? 난 누굴 믿고 농사를 지으라니?” 상순은 춘실한테 다가가면서 분명히 말했다. “내 죽인게 아니라 흥수가 스스로 죽음의 길에 들어선 거요.” “뭐라고?” 춘실은 허연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넘기며 입술을 악물었다. 상순은 내심하게 말했다. “누가 그보고 충국을 죽이라고 했소? 장미련과는 그게 뭐요? 아무리 지주 아들이라도 그렇지. 죽이면 되오? 살인죄를 졌으니 죽어 싸지. 황차 지금 지주와 부농 모자를 다 벗겨준 판에...” “뭐라고? 계속 변명하겠느냐? 오늘 내 죽고 네 죽고 해보자!” 춘실은 더는 참을 수 없어 두 손을 가래짝처럼 펼쳐들고 머리를 끄잡아당기려고 덮쳐들었다. 숱한 사람들이 몰려왔다. 상순은 슬쩍슬쩍 피하면서 말했다. “흥수는 당원 처신을 했소? 마반산집 할머니는 기실 네랑 여동생이랑 다 같은 처지에서 억울했어. 일본 놈들한테 강제로 끌려가서 위안부로 됐지. 그런데 흥수는 그게 뭐요? 마반산집 할머니를 투쟁하고 법원에 넘겨 감옥에 보내지 않았소?” 그 말에 춘실은 무안한지 행악질을 멈추고 뒷집으로 슬금슬금 물러갔다.      일전에 상순은 감옥에 가서 마반산집  할머니 억울함을 호소했다.      몇 달 후 마반산집 할머니는 억울한 루명을 벗고 정책을 시달받아 마을로 돌아왔었다. 그러나 감옥에서 받은 고통으로 해 시들시들 앓다가 억울한 모자를 벗기는 대회를 연지 몇달 안돼 한을 품은채 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상순은 마을 사람들과 함께 후사를 치러주었다. 뜻밖에도 춘실이 찾아와 직접 옷을 갈아입히며 눈물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언니, 우리 나그네 죄를 졌소. 용서해주오. 어쩜 내 여동생은 아직도 돌아오지 않소? 흐흐흑흑.” 상순은 큰 자귀를 휘둘러 피나무를 팍팍 깎고 대패로 빡빡 밀어 손수 관작을 만들었다. 그는 두 손으로 마반산집 할머니를 렴습해 관작에 모셨다. 계수동 산골짜기에는 또 일본 놈들의 피해로 한을 품고 세상을 뜬 한 위안부 할머니의 자그마한 무덤이 생겨났다. 까마귀들이 원혼을 부르며 까욱까욱 퍼렇게 멍든 하늘을 나래치고 있었다… 허동원은 생산대 우사와 돼지 굴마저 허물어 나누려고 했다. 이젠 생산대 재산은 허울조차 없이 다 개인집으로 나뉘어 갈 판이었다. 상순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해되지 않았다. (이러다간 구사회로 되돌아가는 건 아닌가? 땅을 팔고 사고 하는 날엔 새로운 지주가 생길게 아닌가? 잘 사는 놈은 더 잘 살고 못 사는 사람은 밭도 없이 남 집의 머슴을 살아야 할 게 아닌가? 진짜 빈부차별이 심해지면 자본주의를 복벽하는 게 아닌가?) 그는 윗방에 누워 천정만 쳐다보면서 착잡한 생각에 잠겼다. (할아버지와 내가 어떻게 사원들을 이끌어 건설한 양봉장과 인삼장, 과수원, 벽돌공장마저 다 허물어 사원들에게 나눠준단 말인가?) 상순은 구들을 짚고 일어나 담배를 말아 피웠다. 온 집안에 담배연기가 새뽀얗게 피어올랐다. (안 된다. 이렇게 하는게 옳은지 현에 올라가 알아봐야 하겠다.) 그는 벌떡 일어나 마을 동구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때 허동원이 한창 사원들을 데리고 벽돌공장의 벽돌을 굽는 가마를 허물어 벽돌장을 나누려고 일손을 다그치고 있었다. 상순은 가까이 다가가 제지시켰다. “벽돌공장만은 다치지 마오! 아무리 개체농사를 짓는다고 해 집체 재산을 다 나눠 가지라는 건 아니오. 우리 대대 농민들이 잘 살자면 개체농사를 지어야 할뿐만 아니라 집체로 벽돌공장도 계속 꾸려 사원들에게 새 벽돌집을 지어 줘야 하오.” 그러나 허동원은 기를 쓰고 허물려고 들었다. “위에서 집체 재산을 사원들에게 나눠주라고 지시했는데 김 대장은 무슨 그런 소리를 하오?” 허나 상순은 허동원을 무섭게 쏘아보며 제지했다. “잠시 가만 놔두오. 벽돌공장을 어떻게 지은 게라고 허문단 말이오? 벽돌을 쓰겠으면 벽돌공장을 놔두고 구워 쓰는게 옳소. 내 위에 올라가 알아본 후에 허물어도 늦지 않소.” 그 말에 사원들도 머리를 끄덕였다. “김 서기 말이 맞소. 벽돌공장을 허물어야 고작 벽돌을 몇 장씩 나눠 가지겠소?” “며칠 기다려 허물어 가져도 늦지 않소.” “벽돌을 구워 나눠 가지기오.” 그리하여 허동원은 벽돌공장을 허물던 손을 툭툭 털더니 마을 안으로 휑하니 가버렸다. 상순은 벽돌공장에 다가가 허물리던 가마를 손으로 매만지면서 도리머리를 흔들면서 땅이 꺼지게 한숨을 후- 몰아쉬었다. 허나 몇몇 사원들은 벽돌공장을 허물어 벽돌이 생기면 돼지 굴을 지으려고 했다. 그들은 상순이 막아나서자 꽤나 아쉬운 표정을 지으면서 뒤에서 두덜거렸다. 상순은 그런 사원들에게 위엄있게 말했다. “내 현에 가서 알아보고 돌아올 때까지 누구도 벽돌 한장도 다치지 마오. 누가 만약 내가 돌아오기 전에 벽돌 가마의 벽돌을 한장이라도 허물어 간다면 함흥대대 당지부 서기이자 치보 주임인 내가 용서하지 않을 거요.” 모두들 머리를 끄덕이며 상순의 눈치를 흘금거렸다. “김상순, 아직도 큰 소린가?” 모두들 돌아보니 이때 장미련이 달려와 상순에게 삿대질을 해대며 으르렁거렸다. 상순은 억이 막혀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야, 미쳤니?” 숭길이 말렸다. 허나 미련은 옛날과는 달리 당돌하게도 양손을 허리에 지르고 상순에게 빡빡 대들었다. “계속 옛날 소릴 하겠는가? 나라에서 지주의 모자를 몽땅 벗겨줬는데 아직도 지주 딸이라고 업신여겨? 흥!” 상순은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확실히 위에서는 지주의 모자를 벗겨주고 그들을 일반 사원들과 마찬가지로 대해야 한다고 했던 것이다. 미련은 상순이 어정쩡해 서 있는 것을 보고 기고만장해 펄펄 날뛰었다. “이전에 우리 아버지랑 오라비랑 당신들이 가혹하게 투쟁해 죽였소. 마땅히 우리 아버지와 오라비 억울한 모자도 벗겨주고 돈으로 배상해야 하오. 우리 옛날 땅도 몽땅 돌려줘야 하오. 우리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대부터 지주라지만 모두 옛날 애써 번 돈으로 저 소서구를 샀어. 상순, 네 놈은 배은망덕한 나쁜 놈이야. 너희들 조손3대가 조선에서 빈 손으로 소서구에 들어왔을 때 우리 아버지 받아들여 저 소서구 황무지를 개간해 밭을 일구게 해 살게 하지 않았니? 우리 아버지 아니면 너희들이 굶어죽지 않고 지금까지 살아 있었겠구나.” 상순은 미련을 꾸짖었다. “주둥이를 다물지 못하겠느냐? 지주 모자를 벗겼다고 해도 너희들이 마음대로 옛날 땅을 되찾아 다시 지주로 되게 할 거 같으냐? 백일몽이다! 백일몽!” 허나 미련은 점점 기가 살아나 고함쳤다. “이제 봐라. 내 옛날 우리 아버지 땅을 몽땅 찾아내지 않는가? 무슨 수를 써서든지 저 소서구를 내 걸로 만들 테다.” “두고 보자! 그렇겐 되지 않을 걸!” 상순은 성이 꼭뒤까지 치밀었다. (이게 세상이 어떻게 변한 거야?! 엉?) 그는 도리머리를 흔들며 할아버지 산소를 찾아 천지꽃산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산중턱에 있는 산소에 이르자 상순은 산소 앞에 털썩 무릎을 꿇고 태산이 무너지듯 절을 꾸벅꾸벅 아홉 번이나 올렸다. “할아버지, 이게 세상이 별나게 변해갑니다. 할아버지와 제가 어떻게 건설한 우리 대대입니까? 그런데 요즘 집체 과수원이고 벽돌공장이고 몽땅 헐어 개인들에게 나눠준답니다. 지주들이 옛날 토지개혁 때 청산당한 밭을 되찾겠다고 미쳐 날뜁니다. 밭을 개인에게 몽땅 나눠준다면 또 옛날처럼 새로운 지주와 부농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허나 산소 위의 마른 풀잎이 봄바람에 한들거릴 뿐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상순은 산소 앞에 주저앉아 산 아래 무너져가는 함흥대대를 둘러보았다. 한참 후에야 일어난 그는 소서구의 밭을 돌아보았다. (야, 저 밭을 우리 집과 큰집에서 어떻게 일군 건데. 사회주의 건설을 위해 내놓았던 땅을 이제 누구한테 나눠줘? 토지개혁 때 청산한 밭을 지주의 딸 미련에게 되돌려 줘? 안 된다, 안돼, 절대 안 돼!) 상순은 하늘땅에 대고 고함치더니 그 길로 현인민정부로 찾아갔다. 허영주 부현장을 찾아가니 현지지도하러 두만강변 마을로 내려가고 없었다. 상순은 서기 사무실에 가서 이계삼 부서기를 찾았다. 이계삼 부서기는 상순을 반갑게 맞았다. 상순은 자리에 앉자 이계삼이 부어주는 따뜻한 차를 마실 새도 없이 탁상에 내려놓고 단도직입으로 의문 나는 것부터 물었다. “생산대 집체 재산을 사원들에게 몽땅 나눠주는 건 정말 이해되지 않습니다. 우리 대대 벽돌공장이랑 과수원이랑 우리 할아버지 때부터 어떻게 건설한 것인데 다 허물어 나눠준단 말입니까? 이젠 인민공사를 흔적도 없이 허물어 다 개체호에 나눠준단 말입니까? 참 리해되지 않습니다.” 이계삼 부서기는 상순의 말을 들으면서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소홀히 해답하지 않는 것이었다. “게다가 지주들의 모자를 벗겨 놓으니 지주 딸 장미련이랑 내 꼭뒤에 똥을 쌀 지경입니다. 그년은 옛날 우리가 토지개혁 때 지주들을 청산해 재산과 땅을 빈고농민들에게 나눠 준 것에 불만을 품고 우리 생산대 밭을 몽땅 되찾아 가겠답니다. 소서구는 옛날부터 자기 조상들의 땅이라면서 무슨 수를 써서든지 자기 땅으로 만들겠다고 미쳐 날뜁니다. 이렇게 되면 구사회로 되돌아가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 일은 없소.” 그제야 이계삼은 인내성 있게 새로운 개혁정책을 차근차근 설명하기 시작했다. “지금 지주들의 모자를 벗긴다고 해서 구사회로 돌아가거나 지주들이 옳았다는 것이 아니요. 옛날 봉건사회에서는 땅을 마음대로 팔고 살 수 있는 봉건토지정책을 썼기에 지주가 생겼고 머슴이 생겼소. 허나 지금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 토지정책은 봉건사회와 다르오. 토지를 마음대로 팔거나 살 수 없소. 농민들에게 토지를 나눠줘 농사를 짓지만 농민들은 사용권만 있을뿐 소유권은 없소. 말하자면 땅은 의연히 국가 소유이고 농민들은 나눠 가진 밭에서 농사를 지을 권리는 있지만 팔 권리는 없단 말이오.” 상순은 조금 눈앞이 환해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만약 노동력을 상실해 농사를 지을 수 없을 때에는 그 밭을 팔지 못하면 묵이겠습니까?” 상순의 물음에 이계삼 부서기는 내심하게 설명했다. “농사를 짓지 못하는 늙은이나 환자는 가히 다른 사람에게 토지를 양도하고 양도비를 받을 수 있소. 그러나 토지를 절대 팔고 사지는 못하오.” “오~ 그렇습니까?” 이계삼은 상냥한 눈길로 상순을 바라보며 정중하게 말했다. “우린 이젠 늙었소. 신생사물을 접수하자면 늙어서도 새로운 형세에서의 당의 새로운 개혁개방 노선과 방침, 정책에 대한 학습을 늦춰선 안 되오. 자칫하면 새로운 형세를 따라가지 못하게 되오. 우린 언제나 정치상에서 발걸음을 일치하게 해야 하오.” 그래도 상순은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지주들의 모자를 벗기는 것은 이전에 계급투쟁을 기본 고리로 하던 데로부터 우리 당의 중심공작을 경제건설에 두기 위함이오.” 이계삼은 사무 상에서 일어나 상순의 옆에 다가와 장의자에 나란히 앉아 조용히 말했다. “ 동무네 집도 보오. 아버지가 굶어 세상을 뜨지 않았소? 가난하고서야 무슨 사회주의 우월성이 있소? 백성들이 죽물도 온전히 먹지 못하고서야 인민들이 겉으로는 ‘만세!’를 높이 불러도 속으로야 좋다 하겠소? 우린 개체농사를 짓게 책임제를 실시해야 하오. 그래야 사원들의 생산적극성을 충분히 발휘시킬 수 있고 농업생산을 춰 세울 수 있소. 이전에 보오. 집체로 농사를 지을 때 아무리 모택동저작을 학습시키면서 사상동원을 해도 어디 모두 일축을 냈소? 허나 개체호로 농사를 지어 보오. 모두 자기 밭에 소출을 많이 내면 많이 먹을 수 있기에 누가 시키지 않아도 농사일을 깐지게 할 게 아니요?” 그 말은 상순의 마음에 들었다. 이계삼은 계속 얘기했다. “이전에 평균분배를 했기에 일을 하나 하지 않으나 다 같이 나눠 먹으니 생산적극성이 어디 있었소? 허나 지금은 다르오.” 그래도 상순은 터득되지 않는 점이 있었다. “허나 난 집체 벽돌공장이랑 양봉장이랑 허물어 다 개인에게 나눠주는 건 집체 경제를 파괴하는 거라고 봅니다. 벽돌공장에서 집체로 벽돌을 구워냈기에 우리 함흥대대 숱한 사원들이 새 벽돌집에 들게 되지 않았습니까?” 이계삼은 사무실 안을 뚜벅뚜벅 거닐면서 한참 궁리하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지금 과도계단이기에 가히 함흥대대에서 벽돌공장을 집체로 계속 경영해 사원들에게 벽돌집을 지어줄 수 있소. 허나 양봉장이나 인삼장, 과수원은 관리하기 힘든데 사원들에게 나눠주는게 옳소. 벽돌공장도 허물지는 말고 차차 집체에서 경영하던 데로부터 경영능력이 있는 어느 개인에게 도급 맡기는 게 옳소. 공장도 개인이 맡으면 자기 개인 벽돌공장이기에 벽돌 한장이라도 더 잘 굽고 깨지지 않게 다룰 게요.” 상순은 그제야 한숨을 후 내쉬었다. 이계삼 서기는 상순의 어깨를 툭툭 다독여주면서 말했다. “우린 평생 학습해야 하오. 옛날 사회주의 옛틀에 박힌 이론에서 벗어나 등소평동지가 개척한 중국 특색이 있는 사회주의 길을 학습하고 나가야 하오. 그래야 우린 인민들을 영도해 부강한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하고 백성들을 잘 살게 할 수 있소. 이게 우리가 개혁, 개방 하는 도리요. 등소평 동지께서는 ‘검은 고양이나 흰 고양이나 쥐를 잡으면 좋은 고양이다.’라고 하셨소. 백성들을 잘 살게 할 수 있다면 어떤 형식으로 농사를 짓든지 그것이 제일 좋은 사회주의인 거요. 실천은 진리를 검증하는 시금석이요. 개체농사를 지어 보면 집체로 할 때보다 좋은가 나쁜가는 자연히 가려질 것이오. 우리 당도 어떻게 하면 인민들을 배불리 먹고 잘 살게 하겠는가고 모색하고 또 모색하고 있소.” 그제야 상순은 눈앞이 훤히 밝아지면서 가슴이 후련해 나는 감을 느꼈다. “아무 때도 이 서기 말을 들으면 갑갑하던 가슴이 활 열리는 감이 듭니다. 돌아가 개체농사를 지어 보겠습니다.” 그때 허영주 부현장이 사무실에 들어섰다. “비서가 상순 서기가 왔다고 하더구먼. 내 농촌에 가서 밭을 나누는 걸 지도하다가 급히 돌아왔소.” 상순은 허영주 부현장과 굳게 악수를 나눴다. 이계삼 부서기와 허영주 부현장은 오랜만에 만난 상순과 함께 점심식사를 하면서 새로운 개체농사책임제에 대해 담론했다. 상순이 장미련이 우쭐거리던 얘기를 하자 허영주 부현장은 맺고 끊듯이 말했다. “지주 모자를 벗겨주고 계급투쟁을 기본 고리로 하지 않고 경제건설을 중심에 놓고 사업한다고 해서 지주들의 역청산을 수수방관해선 안 되오. 경제건설을 잘 하려면 의연히 사회 치안질서를 잘 유지해야 하오. 옛날 지주들이거나 그 자식들의 반발과 파괴 행위, 그리고 새로 나타나는 사회주의 건설을 파괴하는 범죄자들을 계속 호되게 타격해야 하오. 대대 당지부 서기이자 치보 주임인 상순 동무는 새로운 형세에서 농촌 공작을 잘 하자면 어깨가 무거울 거요. 잘해 보오.” 상순은 금후 사업방향이 명확해지자 거뜬한 마음으로 마을로 돌아왔다. 미련은 상순이 외출했다가 돌아왔다는 소문을 듣자 곧추 찾아가 행악질을 했다. “난 당신들 공산당 때문에 이젠 아버지도 없고 남편도 없고 오빠도 없고 자식도 없다. 누굴 믿고 농사를 짓겠는가? 지주 모자를 벗겼으니 우리 가정의 억울한 사건도 해명하고 모자를 벗겨 달라. 우리 오빠는 당신과 함께 항일투쟁을 하지 않았는가?” 그러자 상순은 세 귀 눈으로 미련을 무섭게 쏘아보면서 똑똑히 말해주었다. “미련아, 네 아버지와 오빠가 이전에 항일유격대를 위해 쌀을 대준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후에 국민당 반동파들의 편에 서서 악독하게 우리 공산당을 공격했다. 너희 오빠 장충국은 삼도만 토비무리에 들어 우리 마을을 여러 차례 습격해 불을 지르고 살인했고 나중에 국민당 반동파들을 따라 영구 쪽으로 도망치다가 돌아왔다. 그는 항미원조 전쟁 때에도 국민당잔여세력과 결탁해 우리 새 중국을 전복하려고 미쳐 날뛰었다. 국민당 특무였지만 항일전쟁 때 공헌을 봐서 살려두고 개조시킨 건 다행이야.” “반우파투쟁과 ‘문화대혁명’시기 노간부들의 억울한 모자를 다 벗겨주었는데 우리 아버지와 오빠의 억울한 모자도 벗겨주면 안 되오? 옛날 조선에서 왔을 때 우리 집에서 황무지를 개간하게 준 은정을 봐서 도와주면 안 되오?” 허나 상순은 미련이 울면서 통사정을 들이대는 것을 단칼로 베 버렸다. “네 아버지와 오빠가 어찌 노간부들과 같단 말이냐? 절대 안 된다. 너의 오빠는 제대로 사상개조를 하지 않고 항상 뒤에서 공산당을 비방하고 모욕했다.” “정말 완고하구먼. 아직도 그래 계급투쟁을 기본 고리로 꽉 틀어쥐고 놓지 않을 예산이오?” “아니다. 절대 흥수처럼 계급투쟁만 하지 않을 거다. 허나 역사는 어쨌든 역사이다. 네 아버지와 오빠가 우리 인민과 당에 지은 죄는 의연히 역사에서 지울 수 없다. 우린 원수와 은인을 분명히 하고 절대 잊지 않는다.” 허나 미련은 상순의 말에 콧방귀를 픽 뀌며 주름이 가기 시작하는 퉁퉁한 낯에 어두운 그림자가 비꼈다. “봐라! 우린 너를 유린하고 너의 오빠를 죽인 흥수를 법에 의해 처단했다. 사회주의 법이 얼마나 공평하니? 더 떠들지 말고 이제부터 차례진 밭을 잘 다루면서 조용히 살아라.” 미련은 왕왕 대성통곡 치면서 돌아갔다. 상순은 도리머리를 흔들면서 함흥촌 토성 안의 촌 사무실로 찾아가 돌덩이를 들어 종을 댕, 댕, 댕 두드렸다. 이윽고 숱한 사원들이 토성 안 마당에 모였다. 상순은 사원들에게 이계삼 부서기에게서 들은 당의 농촌개혁 정신을 죽 전달하고 나서 나중에 이렇게 말했다. “조개덕의 대대 벽돌공장은 절대 허물지 못합니다. 이계삼 서기는 개체농사를 지을 뿐만 아니라 옛날의 집체경제도 발전시켜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개체경제와 집체경제, 국가 경제 등 여러가지 형식의 경제를 동시에 발전시키는 것이 바로 우리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 개혁의 길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계속 대대 벽돌공장을 허물지 않을 뿐만 아니라 더 크게 확대 건설해 더 많은 벽돌을 구워 내서 아직도 새 벽돌집에 들지 못한 사원들의 새 벽돌집을 다그쳐 건설해야 합니다. 그래서 몇 해 후에는 우리 마을이 몽땅 벽돌집에서 사는 번영 부강한 사회주의 새 농촌마을로 건설해야 합니다.” 그는 사원들을 둘러보면서 물었다. “어떻습니까? 벽돌공장을 허물어 돼지 굴을 짓겠습니까? 아니면 벽돌공장을 그대로 두고 벽돌을 구워내 새 벽돌집을 짓겠습니까?!” 사원들은 한참 이해득실을 따져보았다. “벽돌을 계속 구워 내 새 벽돌집을 짓는 게 낫소.” “장원하게 타산하면 벽돌공장을 계속 꾸리는 게 옳소!” 그리하여 함흥 촌에서는 집체로 벽돌공장을 계속 꾸려 새해에도 벽돌공장을 구워내 새 벽돌집에 들지 못한 함흥 촌 농민들에게 나눠주었다. 그리고 나머지 벽돌공장의 수입은 촌의 집체 수입으로 올리고 나중에 연말에 각 촌민소조에 나눠주기로 했다. 촌민소조에서는 그 돈을 공금으로 쓰거나 사원들에게 나눠줬다. 상순은 위의 지시대로 마음이 아픈 대로 양봉장과 인삼장, 과수원은 도맡아 경영하려는 농민들에게 팔아 촌 수입으로 올렸고 다시 각 촌민소조 농민들에게 나눠주었다. 뭐나 건설하기는 어려워도 허물어 나눠 가지기는 식은 죽 먹기였다. 허동원이 사원들을 데리고 우사간 지붕 위의 이영을 벗기고 지붕틀에 바 줄을 걸어 당기자 지붕틀이 번져졌다. 쿵-! 요란한 소리와 함께 우사 지붕이 무너졌다. 새뽀얀 먼지 속에서 사원들은 지붕 위에 얹었던 가시오며 대들보며 기둥을 몽땅 뽑아내 한 대도 남기지 않고 말끔히 나눠 집으로 챙겨갔다. 생산대 우사와 돼지굴은 기초돌마저 다 뽑아가 소똥 물과 돼지똥 물이 고인 휑뎅그렁한 빈 터만 남았다. 수십년 건설한 집체 우사와 돼지굴이 한순간에 무너지고 자취를 감추어버렸다. 인삼장과 양봉장은 누가 맡아하려는 사람이 없었다. 그리하여 부득불 인삼장도 허물어 나눠주고 인삼은 뿌리를 단위로 세여 사원들에게 평균으로 나눠주었다. 그것이 상순이 마지막으로 평균분배를 한 일이었다. 양봉장과 인삼장이 허물어져 각이 날아나자 칼산과 패용천산 사이 산등성이는 벌거숭이로 돼버렸다. 상순이 할아버지와 함께 함흥대대를 건설할 웅위로운 설계도를 그리며 건설한 양봉장과 인삼장, 과수원이 며칠 사이에 빈 털털이로 돼버렸다. 상순은 그 살벌한 정경을 보고 가슴이 아프다 못해 자기 각을 뜯어가는 것 같이 느껴졌다. (과수원 다락밭을 어떻게 만든 거냐?) 상순은 자기를 “유일생산력론”의 영향이 깊어 계급투쟁을 틀어쥐지 않고 농토건설만 한다고 물어먹는 흥수와 싸우면서 사원들을 동원해 패용천산 돌을 캐내 다락 밭을 쌓았던 것이다. 그런데 사원들에게 과수원을 나눠주니 그 다락 밭의 돌을 허물어 자기 집이 아니면 돼지 굴 기초를 쌓지 않겠는가? 지어 패용천산 절벽 위에 “모주석 만세!”라는 커다란 글씨를 새겨놓고 회칠을 한 돌까지 허물어 자기 집 토성을 쌓는 판이었다. 사원들은 천지개벽과도 같은 개혁의 봄바람에 따라 숱한 나무와 농구 등을 나눠 자기 집에 끌어다 쌓아놓으니 입귀가 귀밑까지 째질 지경이었다. 집집마다 웃음이 차 넘쳤다. 상순이 벽돌공장 하나를 남겨놓고 몽땅 나눠주자 사원들의 한결 같은 대환영을 받았다. “집체 재산을 나누든 허물든 사원들한테 줘서 기뻐하면 잘한 건가?” 상순이 중얼거릴 때었다. 미련이 또 찾아와 야단쳤다. “김 서기, 소서구 밭을 나한테 나눠 주오. 저 병진이랑 허동원이랑 노동력도 없다면서 나한테 밭을 주지 않으려고 하오. 좀 옛날 은정을 생각해서라도 나를 불쌍히 여겨주오.” 미련은 전에 비해 마구 행악질 하지 않고 이번에는 분을 참으며 통사정을 들이댔다. 상순은 한참 궁리하다가 미련을 보고 “너에게 밭을 주지 않으려고 하는 건 우리 나라 토지정책에 맞지 않는다. 어디에 호적이 있으면 어디에서 밭을 줘야 한다. 근심하지 말고 가라.”라고 했다. “감사하오. 이제야 오빠 같다. 인심을 내는바 하곤 나에게 소서구 밭을 주오. 옛날 우리 집에서 대대대손 물려받은 골짜기 아니고 뭐요?” 미련은 언덕이 없어 더 비비지 못했다. 상순은 미련을 쏘아보면서 “안 돼. 소서구 밭은 절대 너에게 줄 수 없어.”라고 했다. “왜?” 미련이 앙칼진 목소리로 따지고 들자 상순은 도끼눈을 부라리며 을러멨다. “건 우리 빈농의 자존심이야!” 미련은 상순을 흘겨보다가 저쪽에서 지춘실이 오는 것을 보고 입을 삐쭉하며 자리를 떠났다. 춘실은 허연 머리를 흩날리면서 패용천산 인삼장 자리까지 달려와 야단쳤다. “난 누구를 믿고 농사를 짓소? 나그네는 총살당했고 큰딸은 시집갔고 해월은 미쳐버렸으니. 사내 없이 늙은 노친이 어떻게 농사를 짓는단 말이오?” 상순은 허연 머리카락을 흩날리는 춘실이 불쌍해났다. 그는 모든 사원들 앞에서 뭐라고 말할 수 없어 한숨을 후 내쉬면서 마을로 터벅터벅 걸어 내려가면서 고민에 빠졌다. 춘실은 뒤따라 내려오면서 계속 상순을 욕지거리했다. “너 이놈, 내 남편을 총살 했으니 이젠 속이 시원하겠구나.” 상순은 산 아래를 내려 올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춘실은 태평강 가로 거의 올 때까지 계속 줄 욕을 퍼부었다. “나쁜 놈 새끼, 아직도 다 늙어빠진 나를 탐내느냐?” “흥수를 죽이면 내가 너한테 속할 거 같아?” 상순은 버드나무와 비술나무가 우거진 태평강 가에 사원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자 돌아서서 입귀에 게거품을 물고 욕설을 퍼붓는 춘실을 쏘아보았다. “전번에도 말했지만. 흥수는 살인죄를 져서 총살당해 마땅하오. 건 흥수가 자기 스스로 지은 죄 값을 치른 거요. 흥수가 아무리 나와 수십 년 동안 정치적수였지만 죽이려는 마음은 절대 없었소. 필경 흥수는 나를 따라 삼도만 토비숙청으로부터 해방전쟁과 항미원조 전쟁을 했고 또 사회주의 새 농촌 건설에 함께 분투해온 당원이 아니었소? 흥수가 어째 당원인데 부화 타락해 여색을 탐내고 그런 살인까지 했는지 이해되지 않소.” 춘실은 콧방귀를 뀌며 침마저 상순의 발 머리에 “퉤!” 뱉었다. “더러워서, 원, 독사 입에서도 그런 말이 나와?” 상순은 눈물을 줄줄 흘리는 춘실이 불쌍해났다. “그만하오. 흥수가 미련을 탐낸 데는 아내 책임도 있소. 아내가 남편을 잘 모셨더라면 왜 외간여자와 오입하려고 미쳐 날뛰었겠소? 미련에게서 들어서 다 아오. 흥수는 미련을 협박해 겁간해 애까지 설었다는 걸. 애를 초롱에 내다 얼어 죽게 했다는 걸 다 아오. 흥수는 두 번이나 죽어 마땅한 죄를 지었소.” 춘실은 정신이 아뜩해 버들 방축에 물앉아 엉덩방아를 찧었다. 상순은 말을 꺼낸 바 하고는 계속 했다. “해월을 충국에게 붙여놓은 것도 흥수에게 책임이 있겠지만 당신도 잘못이 있소. 아무리 암에 걸려 죽어도 어찌 지주 아들에게, 그것도 애비 같은 지주 아들놈에게 딸을 맡기오?” “주둥이를 닥치지 못해? 이 버들방천에서 옛날 나와 사랑을 속삭이던 일을 잊지 않았겠지? 어떻게 우리 집에 그렇게 할 수 있니? 넌 사람이 아니다. 악마야!” 상순은 그런 춘실과 맞대구를 할 생각도 없었다. 그 자리를 떠나가면서 그는 이런 말을 한마디 했다. “밭갈이랑 낟알싣기랑 힘들 때 내 도와 줄게. ” “고양이 쥐 생각을 작작 해라구. 내 입에 거미줄을 쳐도 네 신세에 농사를 지을 거 같니? 퉤!” 상순은 진심으로 알려 줬다. “정 이 마을에서 살기 싫으면 연길의 을준을 찾아가 사오. 을준은 당신의 아들이 아니고 뭐요? 백과부가 죽었다니 생모인데 왜 백준을 찾아가지 못하오? 아차, 손자가 이젠 덕돌만큼 크다면서? 손자 신세도 좀 보면 안되오?” “퉤!” 춘실은 상순의 뒤잔등에 대고 욕설을 퍼부었다. “너도 손자 생각을 다 하니? 문빈이 이제 대학을 졸업하면 법원에 들어갈 거야. 걔가 법관이 되는 날엔 네놈부터 총살하게 할테야.” “해해해. 연애해?” 이때 가슴을 다 드러내 놓은 해월이가 애를 안고 강변에 나오다가 버들방축에서 상순과 딱 마주쳤다. 그녀는 저쪽에 물앉아 우는 엄마를 보자 히히히 웃으며 지껄이었다. “어마니, 우리 엄마하고 여기서 또 연애했어? 히히, 헤헤, 이제 금방 들을나니 둘이 이전에 여기 버들방축에서 이렇게 했다면서.” 해월은 왼손가락을 동그랗게 하고 오른손 식지를 쑤셔 넣었다 뺐다 하는 시늉을 하면서 씨물씨물 웃었다. “헤헤헤. 젊어서 재미 좋았겠구나. 히히히. 나도 해보니 좋더라. 아들도 낳고.” 상순은 어이없어 자리를 뜨려고 했다. “이 놈아! 어디로 가?!” 뒤에서 바람이 휙 일었다. 상순이 돌아서려 할 때었다. 해월은 상순의 목을 끌어안고 마구 물어댔다. 상순은 반사적으로 손으로 해월을 떠밀었다. 그런데 풀어헤친 벌거숭이 젖가슴을 떠밀었다. “오, 만져?! 내 젖가슴을? 이 늙다리 색마야? 충국이 죽었으니 이젠 네놈이 우리 모녀간의 신랑이 돼라! 너네 김씨네 너무너무 좋아해.” 상순은 미친 해월을 보고 어이없어 저쪽에 물앉아 그때까지 꺼이꺼이 울고 있는 춘실을 보고 말했다. “빨리 얘를 말리오. 괜히 동네 망신 당하겠소. 내 정규상과 말해서 해월의 병을 치료해줄게.” 말을 마치자 상순은 바람결처럼 떠나가버렸다. 뒤에서는 미친 해월이 따라 가면서 추잡한 욕설을 마구 퍼붓고 춘실은 땅을 치며 섧게 울고 있었다. 저쪽에서 인삼뿌리를 담은 바구니를 들고 벌통을 멘 사원들이 웃음꽃을 피우면서 다가오고 있었다…              9. 사랑환상곡 구리바라 같은 보름달이 동산에서 두둥실 떠오르기 바쁘게 구름 속으로 살짝 들어가 버렸다가도 예쁜 얼굴을 내밀었다. 은빛 달빛을 밟으며 봉선은 덕돌과 함께 부르하통하 강변으로 나갔다. 수양버들이 휘늘어진 버드나무가지 잎사귀들 사이로 은빛 달빛이 부서져 내린다. 저쪽 강바닥에서 출렁이는 물속에서 은빛 달빛이 은파로 부서진다. 수천만개 금잔디 은잔디가 은빛 달빛이 부서지는 물속에서 뛰논다. 부르하통하 강물은 은 쟁반 같은 달과 구름을 싣고 동으로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봉선은 두 손을 가슴에 안고 있다가 걸음을 멈추며 돌아섰다. “이후에는 나를 찾지 마오.” “왜?” 밤중에 홍두깨 내밀듯 하는 봉선의 말에 덕돌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대학시험에 낙방했소. 대학생의 대상도 안 되는데 찾아와 뭘 하오?” “뭐라오? 낙방이라니?” “사실이오. 낙제했소.” 덕돌은 돌아서서 어깨를 들먹이는 봉선을 어떻게 위안했으면 좋을지 몰라 했다. 그는 봉선의 팔을 잡아 돌려 세웠다. “괜찮소. 올해 입학하지 못하면 새해에 다시 시험을 치면 되지.” 허나 봉선은 머리를 숙이면서 한숨을 호- 내쉬었다. “이젠 신심이 없소. 시험을 세번씩이나 쳐도 낙제요. 여자 나이 스물넷이라. 생각이 복잡해 그런지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소. 난 저를 보면 속이 괴롭기만 하오.” 그 말에 덕돌은 몸둘 바를 몰라 했다. “그럼 나 때문에 낙제했단 말이오? 그렇다면 미안하오.” “아니오. 절대 아니오. 전 나를 진심으로 작문도 가르쳤고 복습제강도 빌려주면서 도왔소. 허나 어쩐지 나에게 속하지 못할 저를 보면 괜히 속이 비길 데 없단 말이오.” 말끝을 흐리면서 봉선은 돌아서며 어깨를 들먹였다. 덕돌은 어쩐지 봉선이 가엾었다. (오늘 나를 보자고 해놓고 이런 말을 하려고?) “봉선이, 어떻게 해야 저를 위로할 수 있겠소?” 그는 봉선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봉선은 몸을 빼지 않고 오히려 돌아서며 몸을 기댔다. 순간 덕돌은 가슴이 뭉클해나며 전기에라도 맞은듯 아랫배가 찡해났다. “꼭 안아주오. 난 고통스럽소.” 덕돌이 봉선의 풍만한 온몸을 꼭 포옹해주었다. 달빛아래 봉선의 고운 쌍까풀눈에 고인 눈물이 반짝였다. 그녀는 천천히 보름달 같은 얼굴을 가까이 하더니 야들야들하고 물기어린 입술을 덕돌의 입술에 가져다 댔다. 덕돌은 온몸을 부르르 떨며 목석처럼 가만히 서 있었다. 그녀의 촉촉하고 따갑고 말랑말랑한 입술과 혀가 덕돌의 입술을 감쌌다. 덕돌도 반사적으로 봉선이 내민 혀를 살짝 포개며 감빨았다. 꿀맛처럼 달콤한 첫키스였다. (안 돼, 이래선 절대 안 돼. 대학교 학생기율을 어겨선 안 돼.) 순간 덕돌은 인차 봉선을 떠밀어내면서 몸을 돌렸다. “왜? 고중생과 싫지?” “아, 아니, 두렵소.” “졸장부.” “우리 동창생들이 마구 연애했다가 별 처벌을 다 받았소. 졸업장을 타지 못할까 봐 두렵소.” “별, 이리 오오.” 봉선은 덕돌을 얽어매려고 덕돌의 손을 마구 잡아 자기 가슴에 살짝 걷어 넣었다. “이래도 모르겠소. 내 마음을?” 뭉클 하는 젖가슴에 손이 닿는 순간 덕돌은 전기에라도 붙은듯이 덴겁해 손을 뺐다. 봉선의 대담한 행동에 겁났다. “이러지 말기요. 난 중학교 때 한 여동창생한테 쪽지를 썼다가 손 한번 쥐어 보지도 못하고 숱한 애들에게 놀림을 당했단 말이오.” 그제야 봉선은 더는 대담한 행동을 하지 않았다. “오, 알았소. 중학교 때 첫사랑 있구나. 괜히 끼어들어 미안하오.” 이때 저쪽에서 자전거 방울소리 달랑달랑 울리었다. 나뭇가지 사이에 비껴드는 달빛을 빌어 웬 사내가 자전거를 타고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그게 봉선이 아니냐?” “오빠구나.” “집으로 가자! 가시나새끼 밤중에 어디로 싸다녀?!” 그 사내는 달려와 자전거에서 내리자마자 고함쳤다. 뒤이어 봉선을 다짜고짜 자전거에 마구 태워가지고 달아났다. “오빠, 날 내려놓소. 할 말이 있소.” “무슨 말? 가자! 어디 집에 가서 혼나봐라!” 덕돌은 처량한 달빛아래 우두커니 서서 버들방축 저쪽으로 자전거에 앉아 강제로 끌려가는 봉선의 그림자를 멍해 바라보았다. 그는 봉선의 오빠가 원망스러웠다. (누가 자기 여동생한테 붙여놓고 저래? 흥!) 숙사로 돌아오면서 꿈만 같이 봉선과 포옹한 채 첫키스를 하던 정경을 돌이켜 보았다. 아직도 입술에 물기어린 야들야들한 입술과 혀가 와 닿더니 감빨던 감각이 남아 있었다. 별스레 가슴이 뭉클하고 높뛰고 싱숭생숭해났다. 그 후 기말 복습이 바쁜데다가 봉선의 오빠가 두려워 오래 동안 봉선을 만나지 못했다. 처음에는 봉선을 만나고 싶었지만 시간이 흐르자 무슨 부담을 덜어버린 것처럼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그래, 대학생인 내가 한 살 위인 처녀애를 따라 다녀?) 이렇게 마음을 정하자 덕돌은 봉선을 점차 잊어 가고 있었다. 그때 덕돌의 시야에 다시 송영자가 나타났다. 덕돌이 힘써 주선해 준데서 송영자는 예술학원 무용학부에 입학했던 것이다. 방학에 송영자는 덕돌을 불러 조용히 망아산으로 갔다. 울울창창한 소나무가 산기슭을 뒤덮고 있어 장관을 이루었다. 덕돌은 소나무 숲속을 거닐며 청신하고 시원한 산 공기를 한껏 들이켜더니 영자를 돌아보았다. “축하한다. 영자, 네가 예술학원에 붙은 걸.” 영자는 쌍쌍이 거니는 연인들의 눈을 피하면서 덕돌의 옆에 따라서며 조용히 인사했다. “감사해요. 오빠, 오빠가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오늘 내가 있겠어요? 은공을 어떻게 갚으면 좋을까요?” 덕돌은 이전에 비해 퍽 성숙된 영자를 돌아보며 빙긋이 웃었다. “이젠 정말 처녀티가 나는구나.” “오빠는 이제껏 나를 여자애로 보지 않았어요?” “그래. 난 너를 보면 항상 우리 학교 뒤에서 도라지에 양산도를 연습하던 철부지애를 보는 거 같다.” 송영자는 눈을 곱게 흘기면서 “나도 이젠 수무 살인데도. 참.” 하고 앵돌아졌다. “오, 그래, 그래. 넌 정말 예쁜 대학생 처녀애야.” 그제야 송영자는 해시시 웃으면서 덕돌을 따라 소나무 숲속으로 들어갔다. “오빠, 할 말이 있어요.” 덕돌은 소나무 숲속을 둘러보더니 심각한 표정을 짓는 영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뭘?” 영자는 생글방글 웃으면서 다가와 “눈을 감아요.”라고 했다. 덕돌은 눈을 슬며시 감았다. 부연 눈앞에 영자가 얼굴을 귀밑에 가까이 하더니 “뽁.” 하고 얼굴에 키스를 살짝 안기는 것이었다. “왜 이래?” 덕돌이 눈을 뜨며 영자의 담대한 행동에 놀랐다. 영자는 혀를 홀랑 내밀더니 모로 돌아서 귀밑까지 빨간 사과 알처럼 붉혔다. 덕돌은 그 빨간 사과같이 상기된 얼굴을 한입 떼먹고 싶은 심정을 억누를 길 없어 몸을 바르르 떨었다. 덕돌은 황소와도 같이 한숨을 후 내쉬며 저쪽으로 스적스적 걸어갔다. 속으로 이런 생각도 해보았다. (저 키스는 예술학원에 입학하게 도와준 은공에 보답하는 장려인가? 아니면 나를 사랑한다는 건가?) 오리무중에 빠진 덕돌은 소홀하게 전번에 봉선처럼 맞불을 붙이고 싶지 않았다. 속으로는 봉선에 비해 송영자가 마음에 들었다. (대학생인데다가 나이도 세살 지하지. 인물체격도 예술미가 다분한 무용수답게 더 예쁘지 않는가.) 덕돌은 아직도 소나무 껍질을 손가락으로 건드리며 서 있는 영자를 참빗질했다. 호리호리한 체격에 성숙미를 자랑하듯이 부푼 가슴, 외씨같이 걀쭉한 얼굴, 버들잎 눈썹, 오똑한 코에 자그마한 앵두입… 소나무 숲속에 서 있는 영자는 정말 한포기의 빨간 장미꽃이랄까, 아니, 아니야. 숲속에 핀 나리꽃 같았다. 진짜 사랑스러운 처녀였다. 허나 덕돌은 자기 속마음을 감추며 영자에게 다가가 능청을 떨었다. “야, 대학생처녀가 뭐야? 담대하게 사내에게 키스를 해?” 그제야 영자는 고개를 돌리며 반문했다. “문제 되는가요?” “감사의 인사를 잘 받았다.” “감사의 인사를? 정말 눈치도 도끼 등이구먼요.” “그래 장려가 아니고 뭐야?” 영자는 그 말에 대답은 하지 않고 고개를 숙이고 발끝으로 애꿎은 땅바닥의 소나무 잎만 살살 긁었다. (너 혹시 날 사랑해?) 덕돌은 속으로 의문부호가 연이어 떠올랐다. 영자는 얼굴을 붉히더니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저쪽 소나무 숲속으로 한들한들 달아났다. 덕돌은 그제야 영자를 보고 모든 것을 알아차렸다. 덕돌은 소나무 숲속으로 달아가 영자를 붙잡았다. “말해? 맞니?” “뭘 말인가요?” “날 사랑해?” “오빠를 사랑하면 안 돼요? 처녀가 사내대장부를 사랑하는데 무슨 죄가 있어?” 영자는 이렇게 솔직히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차마 처녀로서 멋쩍게 먼저 사랑을 고백할 수 없어 입을 꼭 다물어버렸다. “그래?” 덕돌은 따지다 말고 영자를 꼭 끌어안았다. “영자, 널 사랑해. 예쁘고 마음씨 착하고. 너라면 함께 죽으라고 해도 죽을 거 같아.” 영자는 덕돌의 가슴을 주먹으로 통통 치며 속삭였다. “왜 그렇게 도깨비처럼 말해요? 정치와 문학을 배운다는 대학생총각이. 호호호.” “미안, 예술적이 못돼 미안~” 덕돌과 영자는 점점 몸을 밀착해갔다. 다른 연인들이 쌍쌍이 지나가면서 보든 말든 관계없이 오래 오래 포옹하고 키스벼락이 쏟아졌다… (어, 별 수 없어. 학교 학생기율을 위반하지 말아야 하는데. 예쁜 처녀의 유혹과 매력은 어찌 할 수 없어.) 번마다 영자와 열연하고 돌아와 침실에 누워 열연정경을 돌이켜보면서 덕돌은 후회 절반, 행복감 절반이었다. 덕돌은 일요일이 돼 벼모내기를 하러 집으로 돌아갔다. 하긴 막내딸 성숙마저 경박호 부근의 상수촌에 시집간 후 상순과 명옥은 일손이 딸려 쩔쩔 매면서 고양이 발도 빌어다 쓸 지경이었다. 덕돌이 논으로 나갔을 때었다. (아니, 저게 누구야? 우리 논에 왜 집체호의 조영희가 벼 모를 꽂아?) 먼발치에서 덕돌을 발견한 조영희는 머리 수건을 더 내리 쓰고 부지런히 벼 모만 꽂았다. 덕돌은 아버지 눈치를 보면서 손으로 앞에서 벼 모를 꽂아나가는 조영희 잔등을 가리키며 의문스런 표정을 보냈다. 상순은 희죽이 웃기만 했다. 한쉼 벼모를 꽂고 쉴 때에야 덕돌은 영희에게 인사했다. “집체호 새애기, 진수해에 돌아가지 않고 여기 와서 우리 집 벼 모를 꽂소?” 빈정거리는 그 인사말에 영희는 진정어린 눈길로 덕돌을 바라보며 정색했다. “내 집체호에 내려와서 저네 집에 신세를 많이 졌소. 저네 아버지는 나를 맨발의사로 제발시켰고 전 나를 방송과 신문에 내주었소. 그래 농번 계절에 그 은혜에 조금이라도 보답하려고 그러오.” “좌우간 감사하오.” 덕돌은 영희와 나란히 앉아 콧노래를 부르며 한 가슴 가득히 긍지감을 느꼈다. 한 것은 이전에 그렇게 도고하던 공주 영희가 자기 옆에 순순한 양처럼 앉아 있지 않는가? 점심에 덕돌은 자기 집에까지 따라 들어와 점심을 먹는 영희를 집안에 두고 가만히 아버지와 물어보았다. “저 영희 어째 저럽니까? 동네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아버지는 집 쪽을 살피더니 덕돌의 곁에 다가와 조용히 알려주었다. “영희는 우리 집 며느리 되겠단다.” “예? 그게 무슨 소립니까? 안 될 소리.” 덕돌은 자기 귀를 의심할 정도로 믿어지지 않았다. “어떤 시내 처녀가 이런 농촌에 시집오자 하겠습니까? 당치도 않은 말을.” 덕돌이 도리머리를 흔들자 상순은 정색했다. “며칠 전에 영희가 우리 집에 찾아와 나를 보고 이러더라. ‘내 김 대장 며느리를 하면 안 됩니까?’라고 하더라. 내가 ‘무슨 농담을 하는가? 어떻게 농촌 시부모를 모시고 살겠소?’라고 했더니 뭐랬는지 아니?” “?” 덕돌은 부쩍 신경을 도사렸다. 말수가 적은 상순이었지만 자랑 삼아 얘기했다. “이래더라. ‘저를 믿으십시오. 농촌이라도 덕돌만 저와 부부로 연을 맺고 살겠다면 전 꼭 시부모를 효성을 다해 잘 모실 겁니다. 김 대장 네는 여기 돼지 굴을 크게 짓고 굴암돼지 서너 마리 길러 새끼치기를 시키면 시내보다 못지 않게 살 수 있습니다.’ 그 효성스런 말이 얼마나 고맙던지 모르겠다. 네 생각은 어떠냐?” 덕돌은 어정쩡해 서서 놀라운 낯색을 감추지 못했다. “영희와 직접 말해보렴.” 덕돌은 허구픈 웃음을 지었다. (정말 대학에 갈만 하긴 하다. 소몰이군 출신 농포가 정말 시내 선비들의 공주들과 살만큼 차이가 없이 됐는가? 도시와 농촌, 노동자와 농민 차별이 얼마나 컸는데. 대학마크를 가슴에 척 달자마자 숱한 처녀들이 광목에 닥사리처럼 매달린단 말이야. 내가 소몰이를 할 때 저 집체 호 일등 가는 공주들이 나를 왼눈으로 보기나 했던가? 나는 농포고 저 처녀들은 시내에서 한다하는 진수해 고중 선생님들의 귀여운 공주들이 아닌가?) 허나 덕돌은 마음 속에 송영자가 있었기에 한 살 위인 영희가 들어설 자리가 좁았다. 그제야 그는 자기가 마음속으로 영자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가를 알게 됐다. 영자에 대한 사랑의 뿌리가 가슴속에 마음속에 뇌리에 뼈 속에까지 얼기설기 뿌리가 깊게 내렸다는 것을 폐부로 느끼게 됐다. (물론 영희는 예쁘고 똑똑하고 수양이 있고 참하지. 저 처녀는 꼭 부모를 효성을 다해 모실 거야. 허나 3년 동안 대학시험을 쳤는데 계속 10여 점씩 모자라 가지 못한 낙제생이야. 아무렴 대학생인 내가 저만한 처녀를 얻지 못할 까봐 소홀히 평생 대상문제를 결정한단 말인가? 절대 안 돼. 천천히 봐야지.) 사람의 마음은 비길 데 없이 고약했다. 아니야. 사랑은 원래 자사자리하기 때문이리라. (소를 몰면서 앞길이 새까말 때 같으면 저런 영희가 매달리면 얼싸 좋다고 한품에 껴안고 사랑폭풍을 안겼을 것이 아닌가?) 그날 덕돌은 이렇게 착잡한 생각에 잠겨 영희와 함께 자기 집 벼 모를 꽂았다. 영희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수걱수걱 벼모만 꽂았다. 허나 그녀의 머리 속에서도 보이지 않는 번개가 번쩍이고 들리지 않는 우레가 울었다. 복잡한 생각이 번개 치듯 흐르고 있었다. 저녁에 영희가 차마 덕돌의 집에서 자기는 불편해 저녁 숟가락이 떨어지자 집체호에 돌아가겠다고 조용히 엉덩이를 들었다. 덕돌은 집체호로 떠나가는 영희의 뒤를 따라갔다. 검푸른 바깥하늘에는 아기별이 하나 둘 반짝이기 시작하고 동녘하늘에서는 반달이 가냘프게 떠 있었다. 덕돌은 차마 자기를 따라 자기 집에 벼 모까지 꽂아주러 찾아온 영희에게 실망을 안겨주지 못해 뭐라고 말했으면 좋을지 몰라 망설였다. 그래, 일루의 희망이라도 걸고 찾아온 그녀에게 나이 “어떻소” “어떻소” 해서 돌려보낸다면 타격이 얼마나 크겠는가? 상순이 벽돌공장을 꾸려 구워낸 벽돌과 기와로 지은 집체호는 이젠 상지민까지 마지막으로 상해로 떠나 가다나니 상해지식청년들이고 진수해 조선족지식청년들이고 다 떠나가고 텅텅 비어 있었다. 영희가 어두운 집체호 문 꼬리를 잡아당기며 덕돌을 돌아보는 순간이다. 덕돌은 황급히 입을 열었다. “아버지한테서 들었소. 제가 우리 아버지 며느리가 되면 안되는가고 한 말을.” “그래요? 집에 들어가 조용히 얘기하면 어떠오? 누가 보겠소.” 영희는 기대에 찬 나머지 달빛아래 문을 열어 재끼더니 덕돌을 돌아보며 가슴을 할랑거리고 있었다. 허나 덕돌은 몸을 돌렸다. “너무 갑작스런 일이라…” 그러자 영희는 갑자기 떨리는 목소리로 나직이 말했다. “덕돌이, 내 꽃 담배쌈지를 줄 때부터 저를 사랑했소. 아니, 동무가 내 사적을 방송과 신문에 내던 그때부터 동무에 대한 사랑의 씨앗이 움트기 시작했던 거요. 그래서 동무를 따라 대학에 가려고 이를 악물고 대학시험을 쳤소. 허나 뜻대로 되지 않는구먼. 비록 낙제생이지만 난 효성을 다해 저네 부모를 모시고 덕돌을 낭군으로 잘 받들어 기자로 되려는 뜻을 이루게 하려오.” 덕돌도 감동돼 가슴이 뭉클해났다. 따르는 여자가 많아도 사내대장부도 난감할 때가 있다는 것을 처음 느꼈다. 처녀들과의 연애 장에서 감정싸움을 하기보다, 아니, 사랑싸움을 하기보다 사내들과 한바탕 싸워 때리고 얻어맞고 터지는 것이 오히려 더 통쾌하고 쉬울 것 같았다. 피를 흘리는 싸움판에서는 영웅호걸이었으나 처녀애들 앞에서는 졸장부라는 말을 들어 싸다. 중학교 시절에 은숙한테 쪽지를 썼다가 경을 친 미열 때문인가? 아니었다. “수호전”이랑 읽으면서 량산박의 호한들은 여색을 멀리했으니까. 그것이 생활의 신조로 가슴 속에 깊숙이 자리 잡았던 것이다. 뒤에서 실망에 찬 눈길로 자기를 바래며 흐느껴 우는 듯한 영희를 두고 덕돌도 가슴 속으로 피눈물을 흘렸다… 어느 날, 향화가 외사촌언니들인 미숙과 미란 지어 화룡에서 온 최송죽까지 데리고 숙사에 찾아왔다. 덕돌은 여동생들을 보자 아주 기뻐 손에서 떼지 않던 소설책을 놓고 그 애들을 데리고 문일 네 집으로 갔다. 문일은 그때 장춘의과대학에 가고 집에는 여동생 영애 밖에 없었다. 덕돌은 다른 여동생들은 시내에서 자주 만났지만 멀리에서 온 송죽은 오랜만에 만난 지라 반갑게 손잡고 인사했다. “야, 널 아홉 살 때 화룡에 가서 보고는 오랜만에 처음 보는구나. 근형 큰아버지는 편안히 계시니?” “양? 편안할 새 있소?” “어째?” 덕돌은 적이 놀라며 물었다. 송죽은 납죽한 얼굴에 생글 웃음꽃을 피웠다. “아버지는 진수해에서 화룡에 들어간 후 쌀 고생을 얼마나 했다고 그러오? 그래서 토지정책이 바뀐 뒤에 화룡에서도 남쪽으로 한 20리 올라가 있는 남산골에 들어가 감자농사를 지어 만원호로 됐소. 텔레비전방송과 신문에도 굉장하게 났소. 어째 신문에서 보지 못했소?” 덕돌은 한숨을 후 내쉬었다. “그럼 시름 놨다. 난 또 앓는가 했다. 그래 만길 형님이랑 천길 형님이랑 다 잘 있니?” “양, 만길 오빠는 림업국에 들어가 림산작업소 소장을 하고 천길 오빠는 남산 촌 당 지부 서기를 하오.” “모두 잘 있다니 기쁘다. 어쩌다가 너희들이 몽땅 왔니?” 그제야 맏이 미숙이가 입을 열었다. “순옥 아재가 너한테 좋은 색시 감을 물색해두었단다.” “대환영이다. 난 여기 숙사에서 공부하지만 너희들이 있어 외롭지 않아. 난 여동생 부자야, 부자!” 여동생들은 덕돌을 둘러싸고 앉아 “우린 오빠를 제일 좋아해.”라고 하는가 하면 “사내대장부답고.”라고 했다. 지어 “미남자지!”라고 하며 웃고 떠들고 했다. 향화는 덕돌의 손을 잡고 말했다. “오빠, 우리 엄마하고 토론하고 오빠한테 좋은 색시 감을 소개해주려오. 생각이 있소?” 덕돌은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어떤 여자이기에?” 불쑥 한마디 내던지고 덕돌은 속으로 자기를 욕했다. (엉큼한 놈, 넌 마음속에 영자가 있잖니?) 허나 어떤 여자일가 하는 아득한 호기심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을 어찌 할 수 없었다. 다른 여동생들도 호기심이 나서 물었다. “어느 대학을 다니니?” 향화는 동문서답했다. “내 친구야. 키는 1미터 65.” “와 모델체격이구나.” 애들이 혀를 끌끌 찼다. “나이는?” 송죽이 묻자 향화는 “19세.”라고 말했다. “와~ 오빠보다 네 살이나 어리구나.” 미란이 혀를 날름 내둘렀다. 덕돌은 호기심이 부쩍 당겨 향화의 손을 잡으면서 “무슨 대학을 다녀?” 하고 물었다. “오빠도~ 시내에 남아 우리랑 함께 살겠으면 학벌을 따지지 말아야지.” 덕돌은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80년대 대학생이 대학문도 나오지 않은 여자와 약혼해?” 그러자 여동생들은 “와-” 하고 서로 마주쳐다보다가 모여들어 덕돌을 주먹으로 윽박질렀다. “그럼 대학 문에 들어가지 못한 우리 모두 사람값에 가지도 못해?” “말해봐!” “아니다. 아니!” 덕돌은 애들의 구박을 피하며 구들에서 굴러 구석에 숨어버렸다. “됐다. 너희들을 말하는 게 아니야. 대상 표준을 말하는 거지.” 그쯤 되자 향화는 앵돌아지면서 눈을 곱게 흘겼다. “싫으면 만나지 마오. 괜히 남의 친구를 괴롭히지 말고.” 향화가 그렇게 나오니 오히려 덕돌은 이모네 호의를 저버릴 수 없어 만나기로 했다. 그날 저녁에 덕돌은 마음에 내키지 않았지만 향화네 집으로 갔다. 견물생심이라고 텔레비전을 보면서 희미한 텔레비전 빛을 빌어 방안에서 옆에 앉은 훤칠한 10대 청순한 미모의 처녀애를 훔쳐보는 순간 덕돌은 마음이 끌리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이튿날 덕돌은 향화의 소개로 정식으로 영옥이라고 부르는 그 처녀애를 만났다. 한참 후에 그 처녀애를 데리고 향화네 집에서 나와 공원 수림 속으로 갔다. 한 식경이나 이 얘기 저 얘기 하다나니 영옥을 찬찬히 뜯어 볼 수 있었다. 전날 저녁 희미한 텔레비전 빛을 빌어 볼 때보다 어쩐지 못해 보였다. 훤칠한 체격은 꽤나 특출해 보였다. 그러나 어쩐지 향화보다는 퍽 못해 보였다. 붓긴 듯한 눈덕이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차라리 얇은 외까풀눈이면 퍽 매력이 있을 처녀애였다. 허나 덕돌은 원래 훤칠한 여자애들을 좋아하는지라 영옥을 쉽게 놔버리고 싶지 않았다. 숱한 오빠들 속에서 귀한 막내외동딸로 자란 영옥은 꽤나 서적을 쓰면서 애교를 꽤나 잘 부리었다. 꺽다리 같은 처녀애가 어리광을 부리는 것이 꽤나 우습고도 재미났다. 지어 귀엽다 못해 웃음이 터져나왔다. “덕돌아, 어때? 영옥이 마음에 들지?” 순옥 이모가 물었다. “좀 더 지내봐야겠소.” 후에 그는 영옥을 여러 번 만나보면서도 마음에 확 드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 포기하기도 아까운 모순된 심리상태로 해 꽤나 속을 태웠다. (에라, 모르겠다. 부모들이 자꾸 빨리 한살 위인 영희와 약혼하라고 하는데 한번 집에 데리고 가서 부모와 누나들이 보고 마음에 드는가 보라고 할 판이다. 아무렴, 대학생인 내가 어디 처녀애가 없어 한살 위인 영희와 살아?) 그가 영옥을 만나 “우리 집에 놀러 가보지 않겠니?” 하고 물었다. 그러자 나어린 영옥은 천진할 만치 제꺽 대답했다. 대소한간이라 어쩜 그렇게 날씨도 추웠을까? 그들은 시내에서 버스를 타고 진수해에서 내린 후 쌩쌩 불어치는 칼바람을 맞받아 함흥 촌으로 걸었다. 19년 동안 시내에서 곱게 자란 영옥은 처음 농촌 길을, 그것도 여우도 추워 눈물을 흘릴 맵짠 추위를 무릎 쓰고 시골길을 15리나 걷는다는 것은 난생 처음 걷는 고난의 행군 길이었다. 덕돌은 자기를 따라 온 천진한 영옥이 가엾어 그녀의 손을 꼭 쥐어 자기 외투 호주머니에 넣고 둬 시간 걸어서야 집에 이르렀다. 기별도 없이 불쑥 훤칠한 시내 처녀애를 데리고 들어서자 당연히 부모와 누나 네는 기뻐 어쩔 줄 몰라 했다. 어떤가 보라고 데리고 갔더니 부모와 둘째누나는 좋다 궂다 평판은 둘째고 첫걸음이라고 돈부터 쥐어 주었다. “엄마, 누나, 그러지 마오. 난 선을 보라고 데려왔소. 아직  아니오.”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덕돌은 차마 영옥의 앞에서 그렇게 말할 수도 없었다. (이 일을 어찌나?) 엄마는 아들이 약혼이나 다 한 것처럼 동네에 나가 며느리 감 자랑을 하고 친척들도 알려 사람을 웃겼다. 덕돌은 찾아오는 친척들을 인사 시키다가 영옥이 아주 어리 궂은 것을 느꼈다. 숱한 사람들 앞에서 다리를 쭉 뻗고 앉거나 벽에 기대 앉아 어른들이 와도 인사할 줄도 잘 몰랐다. 아마 처음 추운 날에 먼 시골길을 걷고나니 다리도 아프고 피곤했겠지만 덕돌의 눈앞에는 안타까웠다. 금방 더워나던 덕돌의 마음이 갑자기 냉각되는 감이 들었다. (키나 컸지? 셈도 들지 못한 애야. 대학문도 나오지 못했지. 어떻게 저런 녀자와 살아야 해? 송영자보다 차가 많아. 영자는 대학생인데다가 얼마나 예쁘고 여물었다고.) 마음을 정하자 덕돌은 점심을 먹기 바쁘게 영옥을 데리고 귀로에 올랐다. 돌아가는 길에는 그래도 내려가는 버스가 있어 다행이었다. 빨리 보내주고 싶은 덕돌의 마음이라도 아는듯이 버스는 빨리도 달려 두 시간이나 힘겹게 걸어서 온 시골길을 반시간도 안 돼 진수해에 도착해 그들을 부리어 놓았다. 덕돌은 영옥을 버스에 태워 보내주고 한숨을 후 내쉬었다. 시름을 놓았던 것이다. 집에 돌아와 부모와 누나에게 자기 속내를 말했다. 부모와 누나는 맥이 풀려 꾸짖었다. “마음에 들지도 않은 여자애를 왜 집에까지 데리고 왔니?‘ 부모의 말에 뒤이어 둘째누나 은숙도 나무랐다. “원 저런! 괜히 아까운 돈을 줬다. 올케가 됐나 해서 줬더니. 쯧쯧쯧. 이후엔 마음을 정하기 전엔 절대 여자애들을 데리고 오지 말라.” 그러나 덕돌은 마음에 딱 들지 않는 처녀애와 오래 뒤를 달고도 싶지 않았다. 시내 처녀애를 사다리로 삼아 시내에 기여들기 위해 마음에 들지도 않는 영옥과 가짜로 약혼하고 결혼까지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 아버지를 봐라. 할아버지가 ‘집안 혼사를 망치겠는가?!’고 으름장을 놓았다고, 부명을 어길 수 없어 마음에 들지도 않는 내 어머니와 결혼해 자기와 어머니를 해쳤지 뭐야? 난 결코 그렇게 마음에 없는 약혼, 사랑이 없는 결혼비극을 재연할 수 없다.) 이튿날 집을 떠나 시내에 돌아와 이모와 향화를 찾아가 영옥이가 마음에 들지 않기에 그만 두겠다고 했다. 물론 이모와 향화에게 영옥을 집에까지 데리고 갔다고 욕까지 실컷 먹었다. 덕돌은 숙사에 돌아와 누워서도 한 달 푼히 자기가 무슨 그런 허황한 짓을 했나 생각되자 허구픈 웃음만 나왔다. 이젠 향화네 일가를 볼 면목이 없어 놀러 가지도 못했다. 그럴수록 그는 영자가 그리웠고 영자를 보기 미안해 찾아가지도 못했다. 덕돌은 대상문제로 해 연 며칠, 아니 몇 달이고 고민에 잠겼다. 자기에게 대상에 대한 기준을 정해야 했다. (그래, 아무렴, 난 대학생이니까 같은 값에 분홍치마라고 우선 어데 내놔도 눈에 환할 정도로 예뻐야 해. 숱한 사람들 앞에 나서도 그래도 내 색시가 눈에 뜨이게 예쁘고 키도 1미터 60은 넘게 훤칠해야지. 물 찬 제비 같은 처녀, 그런 처녀여야 해. 그런 처녀로는 누가 제일 적합한가? 영옥? 아니야. 그 애는 키는 크고 살색도 하얀데 별스레 눈덕이 붓긴 것처럼 미워. 그럼 누가 예뻐? 영자야. 그 앤 정말 자연미에 예술미가 다분한 애야. 물론 영희도 영자보도 못하지 않지. 예쁘고 수양이 있고 효성도 있어 내 부모가 농촌 분이라고 나무라지는 않을 거야. 그런데 나이가 한 살 위란 말이야. 봉선도 영희와 마찬가지야. 영희보다 더 나은 점이라면 시내에 살아.) 덕돌은 침실에서 이불을 들쓰고 벽 쪽으로 돌아누워 제 좋은 생각을 계속 했다. (요즘, 졸업배치를 앞두고 우리 동창생들이 시내에 남으려고 시내 처녀애들과 부랴부랴 약혼하고 결혼하지 않아? 봉선과 약혼하면 부모도 잘 모시고 시내에 남아 기자로 되려는 내 꿈을 실현하기 쉬울 건데. 허나 아무리 이상과 전도가 중하기로서니 연상 여자를 색시로 맞아? 색시는 그래도 나이도 어리고 예쁘고 야드르르한 멋이 있어야지. 나이나 들면 아내가 얼마나 왜버린 풀과 같이 미워? 지금 같아선 봉선과 영희는 나이를 먹어도 예쁠 거 같긴 한데. 그래도 안 돼. 연상 여자와 약혼 할 수 없어. 순희는 어쩐다? 내 대학에 오게 되자 집에 찾아와서 만년필을 주면서 사랑의 신호를 보내지 않았는가. 그러나 대학시험을 연속 네번이나 쳤는데 다 락방했어. 한족곳 구태현에서 한어로 시험친 게 락방한 주요 원인었지. 순희는 녀동창생일뿐, 농촌 처녀와 결혼할 일은 없어. 여자의 치마폭에 매달려 전도를 개척하려는 건 너무나도 졸장부 처세술이야. 사내대장부로서 기자로 되려는 이상은 글재간으로 실현해야지 뭐야?) 그 쯤 랭혹하게 분석하고 마음이 정해지자 덕돌은 색시 감에 대한 표준이 훨씬 높아졌다. 그만큼 스스로 자기가 어엿하고 당당해지는 것을 새삼스레 느꼈다. (대학생처녀여야지. 대학생처녀에게 장가들어야지. 너무 예쁘고 수양 있는 처녀라면 중등전문학교 처녀라도 고려할 수는 있지. 부모를 모셔야 하기에 표준을 좀 낮출 수는 있어. 그래도 어찌 대학생이 고등중학생과 함께 살아? 우리 부모 집에 들어설 하나 밖에 없는 며느리는 꼭 효성이 지극하고 수양이 있어야 해. 승냥이 같은 여자를 들여오는 날엔 고생 속에서 한뉘 살아온 우리 부모 어떻게 며느리 눈치를 보면서 살겠어?) 표준을 정하고 보니 상대적으로 영자가 제일 합당해 보였다. (영자는 대학생이기에 문화도 있고 예술세포도 있는데다가 수양도 있어. 인물체격이 물 찬 제비같이 예쁘고 대나무처럼 훤칠한데다가 나이도 세 살이나 어리지 않는가?) 순간 덕돌은 영자를 보고 싶어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허나 찾아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간 너무나도 맺고 끊지 못하고 숱한 처녀애들과 돌아다닌 것이 마음에 걸리었다. 어느 날, 뜻밖에도 영자가 불쑥 찾아와 극장표 두 장을 내놓았다. “뭐냐?” “공연 표요. 내일 극장에서 내 처음 무대에 오르게 돼요. 꼭 와서 보세요.” 영자는 얼굴에 함박꽃 같이 환한 웃음꽃을 피우며 애교 섞인 눈길을 보냈다. “그래, 가지.” 덕돌은 영자를 숙사에서 멀리 떨어진 곳까지 배웅해주었다. 갈라질 때 덕돌은 피뜩 “표 두 장이나 해 뭘 해? 누구를 데리고 가겠니?”라고 했다. “친척을 데리고 가든지 하세요.” “그런다?” 덕돌은 영자를 붙잡고 뭔가 밤새도록 말하고 싶었다. 허나 내일 공연준비를 해야 한다는 말에 그만두었다. “누구를 데리고 간다?” 이튿날 궁리 끝에 덕돌은 해옥 아재를 데리고 극장으로 갔다. 해옥은 덕돌의 고모사촌누나였다. 허나 덕돌은 해옥을 아재라고 불렀다. 엄마의 친사촌여동생이기에 아재라고 부르는 것이 더욱 편했던 것이다. 황차 해옥 아재의 맏아들 문일은 덕돌과 근근이 두 살 지하였으니 말이다. 그날따라 해옥은 병원에 가지 않고 쉬고 있어 공연이 있다고 하니 덕돌과 함께 구경하러 갔다. 예술학원의 학생들이 공연을 하는데 꽤나 볼만했다. 은은한 도라지 음악에 맞춰 학생무용수들은 여러 가지 조명색등이 명멸하는 무대에 올라 한복을 날리며 학처럼 너울너울 춤을 추었다. 문화대혁명시기 본보기극 “홍등기”를 보기보다 음악과 무용이 우리 민족의 특성에 맞아 얼마나 가슴이 뭉클하게 즐거운지 몰랐다. 아재는 걸상에 앉아 곡에 맞춰 몸을 흐느적거리었다. 그러는 아재를 보고 덕돌도 속으로 아재를 기쁘게 해드린 것 같아 즐거웠다. 더구나 연분홍 진달래꽃을 품에 안은 영자가 군복치마저고리 바람으로 무대에 올라 항일유격대 역을 하며 “장백의 진달래” 노래를 부를 때 덕돌은 그 우아한 노래 소리에 도취돼 눈을 스르르 감고 감상했다. 그러다가도 눈을 뜨고 예쁜 영자의 모습을 바라보노라니 장차 예술무대에 올라 나래치는 저명한 가수이자 무용수의 모습을 방불히 보는 상 싶었다. 영자가 백조의 차림으로 서양악곡에 맞춰 발레를 추는 예쁜 모습을 보며 흥분된 덕돌은 저도 몰래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갈채를 보냈다. 옆에서 구경하던 해옥은 덕돌을 마구 끌어당겨 앉혔고 관중들은 무슨 일인가 해 덕돌을 쳐다보며 눈을 흘겼다… 그 뒤 웬 일인지 몇 달 동안 영자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덕돌은 예술학원으로 찾아갈까도 생각해보았지만 그만 두었다. 괜히 영자에게 연애한다는 악영향을 줄까봐 서였다. 어느 날, 반장 운호가 또 편지 한 장을 건넸다. “웬 처녀한테서 온 편지 같아.” 덕돌은 편지를 받아보고 영자의 편지라는 것을 대뜸 알아보았다. 그는 황급히 세면실로 가서 혼자 편지를 뜯어보았다. “오빠, 모든 것이 끝났어요…”   “아니, 끝이라니?” 덕돌은 세면실에 동창생들이 드나드는 것을 보고 편지를 호주머니에 넣어가지고 교수 청사 뒤 산 소나무 숲속에 갔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영자의 눈물로 얼룩진 편지를 꺼내들었다.   “너무 놀라지 말고 끝까지 읽어주세요.”   공연무대에 오른 뒤 어느 날, 밤늦어 영자가 무용실에서 무용연습을 할 때다. 진작부터 눈독을 들인 무용교원이 군침을 흘리면서 그녀의 어여쁜 모습을 게걸스레 훔쳐보았다. 어깨 너머로 늘어뜨린 함치르르한 머리카락, 외씨같이 걀쭉한 얼굴, 흑진주같이 까만 포도 눈, 가늘고 하얀 목, 착 들어붙은 무용적삼 밑에서 달랑거리는 봉긋한 젖가슴, 야드르르하고 백설 같은 허벅다리… (오- 실로 보기 드문 선녀야! 사람을 막 미치게 만드는데.) 무용교원은 하마터면 미의 여신 같은 은희의 육체미에 그만 소리치며 감탄할 번해 황급히 손으로 입을 막으며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는 마른 침을 꼴깍 삼키면서 점잖게 무용연습장에 들어섰다. “영자, 영자는 참 나리꽃처럼 예쁘오. 전도가 있어.” “선생님, 많이 가르쳐주세요.” 무용선생은 무용을 가르치는 척 하면서 영자의 허리를 안고 허벅다리를 매만지기도 하고 엉덩이를 툭툭 치기도 하며 성희롱을 했다. 정욕에 불타는 무용선생의 음충스러운 눈길은 영자의 몸에서 떨어질 줄 몰랐고 거친 숨소리가 점점 높아갔다. “영자, 진정한 예술은 성해방이요. 여자애들이 스승과 책임자에게 자기 성을 해방해야 예술의 전당에 들어갈 수 있소. 알만하오? 전 번에 누구 덕에 무대에 올랐는지 아오?” 무용선생은 은희를 품에 숨 막힐 듯이 꽉 껴안고 잔등을 매만지면서 감언리설로 꾀였다.       “영자는 전도가 창창하오. 모든 건 자기에게 달렸소. 예술의 무대에 올라 아름다움을 한껏 자랑하면서 이름을 날리자면 자기를 희생할 줄도 알아야 하오. 은공을 갚을 줄 알아야 하오.” 그 놈은 영자가 뿌리치는 것도 무릅쓰고 문을 절컥 닫아걸고 전등까지 꺼버렸다. 그는 무용선생의 본능으로 아주 날래게 승냥이가 양을 덮치듯이 영자를 붙잡아 깔아뭉갰다. 영자가 아무리 그 놈을 떠밀며 소리를 치려고 했지만 입마저 죄악의 마수에 틀어 막혔다. “소리쳐봐라! 소문나면 넌 전도가 끝장나.” 어둠 속에서 그녀의 귀전을 때리는 무서운 악마의 징글스런 소리. 영자는 몸부림치고 발버둥 치며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무용연습실에는 그 놈의 거친 숨소리와 영자의 가는 울음소리가 고요한 정적을 거칠게 톱질했다…   “오빠, 저를 잊으세요. 전 처녀의 모든 것을 악마에게 빼앗겼어요. 저는 오빠의 맑은 눈길을 대할 면목이 없어요. 어쩌면, 세상이 이런가요? 저를 다시 찾지 말아요. 저는 한 많은 망아산 기슭에서 영영 사라지겠어요.”   “야- 칼 탕을 쳐도 원수를 하지 못할 놈아, 누구냐? 대체 누구야?!” 덕돌은 주먹으로 소나무를 꽝꽝 치며 갈 범처럼 날뛰며 고함쳤다. 드디어 분노에 언 얼굴에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영자, 어디로 갔소? 남방으로 갔소? 한국으로 갔소? 어, 허, 헉, 헉, 헉.” 한참 후 정신을 차린 덕돌은 눈물로 희미한 눈앞에 방불히 보는 듯 했다, 웨딩드레스를 입은 영자가 소나무숲 속의 눈보라 속에서 생글방글 웃으며 두 팔을 벌리고 자기에게로 훨훨 날아오는 것을. 어디에선가 쓸쓸한 사랑환상곡이 은은히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156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 (113) 댓글:  조회:992  추천:0  2018-08-05
                                 6. 꽃향기 풍기는 봄날 대학교 청사 뒷동산에는 알락달락한 꽃송이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그윽한 향기를 풍기고 있었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발로 부리를 싹싹 다시다가도 짹짹 노래하면서 꽃향기 풍기는 봄날의 맑은 아침을 알렸다. 청춘의 정열로 가득한 교정에서는 숱한 대학생들이 아침 달리기도 하고 태극권도 하고 철봉도 하면서 신체단련을 하고 있었다. 덕돌은 대학에 온 후 이전에 상지민에게서 배운 일어를 토대로 해 이른 아침 식전이면 일어학습에 열을 올렸다. 그는 엉뚱하게도 개혁개방의 바람을 타고 일본으로 유학을 갈 푸른 꿈을 꾸고 있었다. (큰 일을 하려면 일본쯤에 유학을 가야 해. 주은래는 일본에 유학해 공부하고서도 그 먼 프랑스에까지 유학가지 않았는가? 나도 유학을 해서 세상 견식을 넓혀 인류를 위해 엉뚱한 일을 해야지.) 그런 웅대한 포부를 품고 덕돌은 항상 일찍이 일어나 일어책을 쥐고 뒷동산으로 뛰어가 중얼중얼 일어문장을 암송했다. 대학에 온 후 덕돌은 처음에는 집에서처럼 아침 식전이면 꼭 달리기를 연습했고 밤이면 정치학부의 학생답지 않게 교실에서 두툼한 소설책을 읽었다. 대학에 오니 도서실에 조선과 중국의 명소설뿐만 아니라 세계 명작가의 명작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어 빌어내다 마음껏 볼 수 있어 얼마나 좋은지 몰랐다. 소설을 읽노라면 어찌나 재미있는지 어떤 때에는 새벽 한시가 넘었는데도 침실의 불을 끄지 않고 계속 읽었다. 이튿날 공부 때문에 어떤 때에는 아쉬운 대로 소설을 놓고 잤다. 어떤 때에는 소설책을 들고 공원 나무 숲속에 들어가 읽다가 소낙비가 쏟아져 벽돌공장 피장을 말리는 초막 아래에 들어가 소설을 읽은 적도 있었다. “아, 어쩜 이렇게 형상적으로 썼을까?” 덕돌은 리기영의 3부작 장편소설 “두만강”이나 장편소설 “고향”과 “땅”을 보면서 연신 감탄했다. 그는 전문 필기장을 갖춰 놓고 형상적으로 된 구절은 베껴두고 암송할 지경이었다. 조선의 작가 천세봉의 장편소설 “석개울의 새 봄”은 언어가 어찌나 세련되고 묘사가 형상적인지 숱한 명구를 필기장에 베껴 넣었다. 연애소설이 큰일이야. 덕돌은 짜릿한 소설을 연애소설을 보면서 간혹 별스레 설레이고 아랫배가 짜릿해 날 때도 있었다. 사춘기의 소년처럼 예쁜 처녀와 황홀한 연애도 해보고 싶어졌다. 허나 또 중학교 시절처럼 연애편지 썼다가 혼날까봐 억지로 참았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지. 황차 대학교에선 연애를 하지 못한다고 학생 기율을 정해 놓지 않았는가!” 덕돌은 이렇게 중얼거리며 도리머리를 흔들면서 책을 읽으려고 애썼다. 그는 저녁 9시 쯤이면 교실에서 소설책을 읽다가 숙사에 내려와 1미터도 넘는 검을 들고 남의 눈을 피해 뒷동산 소나무 숲속에 가서 검술과 무술을 연마했다. 그런 덕돌이건만 동창 형님과 누나들이 오해할 때도 있었다. 한번은 초여름에 학교에서 전교 장거리 릴레이경기를 할 때다. 반장 허운호는 학부 학생회 주석을 하다나니 남녀선수 10명을 뽑아야 하는데 남자선수 둘이나 모자랐다. 한 침실에 있으면서도 입학초기인지라 덕돌이 달리기를 하지 못 하는가 아예 눈길도 돌리지 않았다. 그러다 정 사람이 없으니까 마지못해 덕돌을 보고 헛일 삼아 달리기를 하지 않겠는가고 물었다. 덕돌은 다른 동창들이 얼마나 달리는지 몰라 “내 될까?”하고 반문했다. “어쩌겠니? 사람이 없는데 네라도 달려야지.” 운호는 덕돌에게 별로 희망을 걸지 않았다. 그런데 일부 여동창생들은 뒤에서 “덕돌이 때문에 이번 경기에서 우리 학부가 질건 뻔해.”라고 하는가 하면 “뚱뚱보 어떻게 달린다고?”라고 했고 지어 “허 반장은 눈이 멀었소. 아무리 사람이 없어도 덕돌을 선수로 뽑다니?”라고 하기까지 했다. 압력을 받은 허운호는 덕돌의 달리기실력을 떠보려고 들었다. 어느 날 식전에 덕돌을 불러내 함께 달렸다. 허운호는 앞에서 달리고 덕돌은 뒤에서 달렸다. 허운호는 점점 가속을 하며 드문드문 덕돌이 따라 오는가 되돌아보군 했다. 덕돌은 놀랍게도 자기가 아무리 빨리 달려도 계속 뒤따라 달려오지 않겠는가. 숨이 차 헐떡거리는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마지막에 최고속도로 달려 보았다. 덕돌은 그때 속도를 내 운호 앞으로 박질러 나가더니 100미터나 떨어뜨려 놓았다. 운호는 깜짝 놀랐다. “너 정말 잘 달리는구나. 여자애들이 뭘 안다고 널 헐뜯어?” 경기를 하는 날이 돌아왔다. 허운호가 영솔한 학부의 제일 처음 선수가 9명 선수가운데서 여섯번째로 들어왔다. 덕돌이 차례가 될 때는 꼴찌로 들어왔다. 릴레이봉을 받아 쥔 덕돌은 처음에는 바람을 맞받아 천천히 달리면서 호흡을 조절했다. 여학생들 속에서는 시끌벅적거렸다. “에이고, 저렇게 굼뜨게 달려서야 어쩌니?” “우린 꼴찌야! 꼴찌!” 허나 덕돌은 50여 미터 달려 나가더니 속도를 가하기 시작했다. 그는 점점 속도를 내면서 하나, 둘 따라 잡았다. 그는 순풍을 타고 되돌아오면서 달릴 때는 속도를 더 내 셋이나 따라 잡았다. 마지막에 종점을 앞두고 그는 숱한 여학생들에게 본때를 보이려고 최고속도를 냈다. 쏜살같이 달리며 앞에 선 선수를 따라 잡았다. 그제야 여학생들은 환성을 올렸다. “야, 저 실한게 잘도 달린다야.” “진짜 선수야, 선수!” “그러게 사람은 지내봐야 알아.” “글쎄. 일곱이나 따라잡다니.” 그 후부터 운동대회를 하면 덕돌이 첫손 꼽히었다. 수류탄던지기나 표창던지기나 장거리달리기는 모두 덕돌의 항목이었다. 한번은 전 교 육상대회에서 키가 한뼘씩이나 더 큰 꺽다리선수 무리 속에 작달막한 덕돌이 나섰다. 딱 마치 오리 무리 속의 햇병아리 같았다. 꺽다리선수들은 덕돌한테 업신여기는 눈길을 보냈다. 그들은 수류탄을 축구장 중간선 부근에까지 뿌렸다. 덕돌이 차례가 되었다. 정치학부 학생들은 덕돌이 진다고 인정하고 아예 기대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글쎄 덕돌이 뿌린 수류탄이 씽 날아가더니 축구장 중간선을 넘어가 탕 떨어졌다. 결과 57미터로 나왔다. 운동장에서 환성이 터졌다. “야, 진짜 박격포다. 박격포!” 허나 덕돌은 대학에 와서 운동선수로 될 것이 아니라 하나라도 책을 더 많이 읽어야 한다고 인정했다. 요즘 들어 유학바람이 불어 덕돌도 일본유학을 목표로 정하고 일어공부에 열중했다. 그가 한창 소나무 숲에서 일어를 암송할 때다. 느닷없이 노래를 연습하는 발성소리가 소나무 숲과 꽃송이 숲 속에서 귀를 때리며 울려 퍼졌다. 아~아~아아~ 아~아~아~아 뒤이어 금방울 은방울 굴리는 듯한 청아한 노래 소리가 들려왔다. 도라지 도라지 도라지 심심산천의 백도라지 에헤이야 데이야 에헤이야 한두 뿌리만 캐 내여 대바구니에 찬 백도라지 덕돌은 아무리 귀를 틀어막고 일어를 암송하려고 해도 꾀꼴새 소리 같은 간드러진 노래 소리에 도저히 암송할 수 없었다. 덕돌은 일어책을 쥐고 노래 소리를 피해 소나무숲 속으로 달려 멀리 떠나갔다. 그래도 노래 소리가 어찌나 맑은 고음인지 근본 일어공부를 할 수 없었다. 부득불 덕돌은 일어책을 놓고 사람들의 눈을 피해 권술을 연습했다. 발길질과 주먹질이 동작이 어찌나 빠르고 변화가 많은지 땀이 목을 적실 지경이었다. “야 멋있게 춤을 춘다.” 덕돌이 머리를 돌리고 보니 웬 열일여덟 살 돼 보이는 처녀애가 보랏빛 라이라크 꽃 무덤 속에 서 있지 않겠는가. 덕돌은 무술을 그만 연습하고 책을 쥐고 자리를 떠나려고 했다. 중학교 때 은숙에게 편지를 썼다가 혼난 적이 있은 후부터 여자애들과 가까이 하지 않았다. 자칫 여자애들의 함정에 빠지거나 감정을 억제하지 못해 대학공부에 영향을 줄까봐 서였다. 어떻게 애나게 입학한 대학인데 여자애로 인해 퇴학을 맞겠는가? “대학생, 나에게 그 멋진 춤을 배워주지 않겠소?” 덕돌은 그 당돌한 소리에 몸이 오싹해났다. “이건 춤이 아니야. 여자애들이 무술을 배워 뭘 해?” 덕돌은 일어책을 쥐고 라이라크 꽃송이 속에 서있는 여자애를 피뜩 쳐다보았다. 한 미터 육십도 넘는 훤칠한 키에 꽤나 예쁘게 생긴 처녀애였다. “그래 뭔가요?” 어쩐지 덕돌은 걸음이 늦어졌다. “무술이다!” 덕돌은 황급히 떠나가 버렸다. 이튿날 아침 식전에는 덕돌은 그 처녀애를 만났던 라이라크 숲속으로 들어가지 않고 다른 곳에서 일어공부를 했다. 그런데 또 온 뒷동산을 울리면서 그 처녀애의 노래 소리가 울려 퍼지지 않겠는가! “아니, 정말 저 계집애 성가신데. 어디 공부를 하겠니?” 덕돌은 일어책으로 머리를 툭툭 치면서 발을 땅땅 굴렀다. “쫓아버려야지.” 덕돌은 노래연습을 하는 목소리가 울리는 라이라크 숲속으로 스적스적 다가갔다. 그 여자애가 한창 한손을 가슴에 얹고 한손으로 라이라크 가지를 쥐고 서서 목을 빼들고 노래연습을 하는 것이었다. “야, 여기서 노래를 부르지 말라!” “별, 내 여기서 노래연습을 하는데 무슨 상관인가요?” 눈을 곱게 흘기며 폭폭 쏘는듯한 모습이 퍽 매력적이었다. “여기서 노래연습을 하니 일어가 머리에 들어가지 않는다.” 그러자 그 처녀애는 몸을 탈며 입이 뾰로통해 종알거렸다. “별, 레닌은 장마당에서 다 책을 읽었다는데 노래 소리에 공부를 하지 못해요?” 덕돌은 그 예쁜 모습에 욕하려던 말을 다 잊었다. 우유 빛 얼굴, 버들잎 같은 눈썹, 어글어글한 눈, 오똑한 코와 진한 립스틱의 작은 입술은 그야말로 예뻤다. 한참 후에야 덕돌은 “너 여기서 노래 부르면 숱한 대학생들이 정신이 분산돼 공부하지 못해.”라고 대충 욕이라고 했다. “오빠, 내 노래 그렇게 듣기 싫어요? 그럼 난 끝장인데.” “끝장이라니? 무슨 말이냐?” 그 처녀애는 몸을 탈더니 어깨를 들먹이었다. “난 예술학원에 가서 성악가수로 돼야겠는데 대학생오빠마저 듣기 싫다니 합격하지 못할 거 뻔하지 않은가요?”  순간 덕돌은 그 처녀애가 불쌍했다. 덕돌의 매서운 눈길이 느슨히 풀린 것을 본 처녀애는 당돌한 요구를 들이댔다. "오빠, 날 좀 도와줄 수 없어요?”  “뭘 어떻게 돕는다고 그래?”       그 처녀애는 더 가까이 다가섰다. “혹시 예술학원에랑가무 단에랑 면목 아는 사람이 없어요? 좀 뒷문거래라도 해서 예술학원에 갔으면 좋겠는데.” 덕돌은 그날 일어공부는 한 줄도 하지 못하고 그녀자애와 청년들의 이상과 전도에 대해 담론했다. 덕돌의 얘기를 듣고 영자라고 부르는 그 처녀애는 눈앞이 환해지는 것 같았고 덕돌은 이상이 있고 포부가 큰 대학생이라는 것을 느꼈다. 그 후부터 영자는 남몰래 덕돌을 묻어다니면서 이것저것 못하는 말이 없었다. 덕돌은 중학교 때 여자애들의 손 한번 쥐어보지도 못하고 혼난 적이 있어 영자와 멀리 하려고 했다. 허나 어쩐지 그러면 그럴수록 저도 몰래 뒷동산에 올라가 노래연습을 하는 영자를 만나고 싶고 싱숭생숭해났다. 어쩐지 영자에게 매료된 나머지 그녀를 도와 유명한 가수로 만들고 싶었다. 덕돌은 궁리 끝에 마을에 하향했던 송선 아줌마가 떠올랐다. “옳지. 송선 아줌마를 찾아가야지. 듣는 말에 의하면 송선 아줌마는 가무단 단장으로 됐다던데. 그 아줌마를 찾아가면 영자 하나쯤은 예술학원에 붙여주지 못하겠는가!” 사실, 송선은 정성해 서기의 처남댁이라는 인연으로 해 남편과 안해가 모두 “현행반혁명”, “보황파”, “민족반역자”라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지역 반란파 두목인 황종연과 그 졸개 이일룡에게 갖은 능욕을 다 당했다. 지어 이일룡은 송선의 탄력 있는 몸이 탐나 이른바 죄를 심문하는 척 하면서 젖꼭지랑 쇠줄로 매 문 고리에 달아매 놓고 당기거나 고추 물을 입과 코 구멍에 부어 넣으면서 고문들 들이대다 못해 나중에는 옷을 쫄딱 벗기고 윤간까지 했다. 그러고도 모자라 송선에게 숱한 옷을 넣은 옷궤를 지워 길거리를 돌아다니면서 투쟁했다. 반란파들의 피해를 받아 송선은 심심산골에 자리 잡은 함흥대대에 와서 난생처음 소수레를 몰고 낟알까지 실어드리면서 별의별 개고생을 다 했다. 또 흥수와 황종연의 갖은 기시와 능욕을 이겨내면서 죽지 못해 살았다. 그때 양말까지 목에 걸고 숱한 사람들 앞에 허리를 굽히고 투쟁 받던 일로 해 그녀는 지금도 악몽을 꾸다가도 화들짝 놀라 일어나 몸서리를 칠 지경이었다. 허나 “4인무리”가 타도돼 천지개벽이 일어난 후에야 송선과 남편은 시내에 돌아와 한 집에서 살 수 있게 됐던 것이다. 남편 최죽남은 영어 교원이었는데 정성해 서기의 처남이라는 이유로 터무니없이 “민족반역자”, “매국역적”, “보황파”, “현행반혁명분자” 별의별 억울한 모자를 다 쓰고 13년 동안이나 감옥에 갇혀 모진 고생을 다했던 것이다. 상급에서는 황종연과 이일룡 일당을 일거에 제거하고 그들에 의해 억울한 모자를 썼던 공안과 문화 계통의 숱한 억울한 간부들을 해방시켰던 것이다. 정책 락실을 받아 최죽남은 영어와 일어 교수로 교단에 오르게 됐고 송선은 문공단 단장으로 중용됐다. 어느 날 오후, 덕돌은 송영자를 데리고 송선 아줌마네 문공단 사무실로 찾아갔다. 가무단 연습실마다 피아노연주에 맞춰 노래를 연습하거나 무용실에서는 아름다운 멜로디에 맞춰 무용수들이 춤을 연습하고 있었다. 복도에서 여기저기 기웃거리다가 덕돌은 단장실을 찾아내 노크했다. “들어오세요.” 덕돌을 보자 송선은 자리에서 일어나 마주나오면서 반겨 맞았다. “와, 멋지다, 김 대장네 대학생아들이 왔구나.” 송선은 다 큰 덕돌을 어린애처럼 포옹해 주며 머리를 손으로 쓰다듬어주었다. “얘야, 내 함흥대대에 내려갔을 때 너네 아버지 관심을 얼마나 받았다고 그러니?” 그녀는 옆에 여학생이 서 있는 것을 보고 “어서 앉아라. 이 학생은 누구냐?”라고 하며 덕돌에게 물었다. 덕돌은 제꺽 “내 이모사촌 여동생이오.”라고 하며 영자를 되돌아보며 “어서 인사해라. 가무단 김단장이다.”라고 하며 인사를 시켰다. 영자는 허리를 굽혔다 펴며 생글 웃으면서 “김단장님, 안녕하십니까?”라고 했다. 송선은 영자의 아래 위를 훑어보더니 “덕돌아, 너 여동생 정말 예쁘구나. 무용수를 했으면 좋겠다.”라고 했다. 덕돌은 제꺽 임기응변했다. “김단장님, 그러잖아도 그 일로 해 찾아왔습니다. 얘를 어떻게 예술학원에 입학시킬 수 없겠습니까? 좀 도와주십시오.” 송선은 영자의 아래 위를 재차 훑어보았다. “글쎄 무용이라면 도와줄 수 있겠는데.. 이 학생은 뭘 지향하오?” 영자는 혀를 홀랑 내밀었다가 인차 입안에 숨기더니 대답했다. “가수를 지향해요.” “음, 그래? 노래를 불러보오.” 송선은 송영자가 부르는 간드러진 도라지를 들으면서 흥이 나서 몸을 흐느적거렸다. 송영자가 맑은 목청으로 부르는 노래가 끝나자 박수를 쳤다. “참 훌륭한 가수감이구먼. 예술학원에 추천해보지.” 송영자는 너무 기뻐 송선과 덕돌을 번갈아보면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 후부터 영자는 송선의 소개로 한 사영 예술학원의 유명한 가수 출신 성악교수 허송철을 모시고 노래공부를 하게 됐다. 또 송선의 제의에 따라 송선의 직접적인 가르침 밑에 무용도 학습했다. 어떤 때 송선이 가무단을 이끌고 외지로 공연을 나가면 대신 송선이 소개해준 무용 강사 마용봉에게서 무용의 기초동작부터 배웠다. 송영자는 덕돌에게 한없이 감사했다. 영자는 눈앞이 환해졌다. 전도가 창창해졌다. 당장 가수나 무용수가 되는 꿈을 꿔 보기도 했다. 덕돌은 자기의 미약한 힘이나마 한 여자애의 전도를 개척하는데 도움을 준 것만 같아 가슴이 뿌듯해났다. 어느 날, 덕돌은 해옥 아재네 아들 문일의 대학시험복습제강을 얻어다 주려고 찾아갔다. 헌데 널판장자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자물쇠가 잠겨 있었다. 별수 없어 덕돌은 “전쟁과 평화”란 소설을 보면서 기다렸다. 그때 자전거 방울소리 울리더니 웬 30대 사내가 오더니 덕돌을 보고 “누굴 찾소?”라고 물었다. 덕돌은 찾아온 사연을 말했다. "최의사 언제 오겠소. 우리 집에 들어가 기다리오." 덕돌은 그 사내를 따라 윗집에 들어갔다. 윗방에서 파란 게 내복을 입은 예쁜 쌍까풀 처녀애가 밥상에 마주 앉아 공부를 하고 있었다. 그녀는 덕돌을 쌍까풀눈으로 쳐다보다 살며시 내리깔며 책을 내려다보는 것이었다. 사내는 “최 의사네 어떻게 되는 친척이오?”하고 물었다. “5촌 아재입니다.” “고향은 어디요?” “진수해입니다.” 그러자 처녀애는 덕돌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으면서 책장을 번지는 것이었다. “그래 대학복습을 하오? 어째 복습제강을 가지고 다니오?” “아니, 난 대학생입니다. 문일한테 복습제강을 주자고 얻었습니다.” “오, 그래?” 그녀도 덕돌이 대학생이란 말에 머리를 들고 맑은 눈길을 보냈다. 그때 그녀의 보름달 같은 얼굴은 아주 예뻤다. 송영자의 걀죽한 얼굴보다 보름달 같은 동그스름한 얼굴이 짧은 쌍태 머리와 어울려 옛날 전통조선족 여인을 보는 상 싶게 예뻤다. “내 여동생이오. 후에 봉선의 대학입학복습도 배워주오.” 덕돌은 황망히 번대머리오빠게에 “예…”라고 하며 처녀애를 흘금 건너다보았다. 봉선은 함박꽃처럼 쌍겹눈으로 덕돌을 보며 생글방글 웃었다. “배워주세요. 어떻게 복습했으면 좋겠는지 통 모르겠소.” “글쎄 후에 시간이 나지면 오후쯤에 다시 찾아올게.” 덕돌은 시간도 퍼그나 흐른 것 같아 황망히 그 집에서 나왔다. (그 처녀애가 참 예쁘구나.) 그날 덕돌은 문일한테 복습제강을 건네주고 집으로 돌아오면서도 봉선이란 처녀애가 눈앞에 삼삼거렸다. 며칠 후 오후에 덕돌은 저도 몰래 작문을 한편 지어가지고 봉선을 찾아갔다. 봉선은 책을 내려다보다가 아주 반갑게 맞아주었다. “오, 문일의 형님이 왔구먼. 신용이 있구먼요.” 덕돌은 정성들여 쓴 작문을 내놓았다. “잘 쓰지 못했는데 참고하오.” 봉선은  작문을 쭉 내리 읽어보았다. “야, 정말 글을 잘 쓰는구먼요. 난 언제 이렇게 글을 쓸까?” “자꾸 써보면 되오.” 봉선은 작문지로 발갛게 상기된 얼굴을 가리며 덕돌을 보고 “부타가기오.  잘 배워주오.”라고 했다. 봉선은 식탁에서 사탕을 자그마한 대바구니에 담아 가져왔다. “문일의 형님이라는 걸 보면 오빠라고 불러야 되잖겠어요?” “아니, 난 이제 21세 밖에 안 되오.” “어마나. 이걸 어쩌나 .내보다 한 살 지하구먼요.” “그럼 내가 누나라고 불러야 하오?” “아니, 아니, 나이와 무슨 관계예요?” 봉선이 서운함을 금치 못하며 하는 말에 덕돌도 돌려댔다. “그래, 나이 지하라도 봉선의 대학입시복습을 가르칠만 한지?” “80년대 대학생, 얼마나 멋져요?” 봉선은 덕돌의 왼쪽 가슴에 단 대학 마크를 경모의 눈길로 쳐다보면서 한숨을 호 내쉬었다. “저도 복습을 잘해 대학에 붙으면 되지.” “언제 붙겠어요? 공부가 통 머리에 들어가지 않아요.” 그날 덕돌과 봉선은 대학복습에서 작문으로부터 이상과 전도 등에 대해 해 넘어갈 때까지 이야기를 나누고 나서 갈라지기 아쉬워하면서 갈라졌다. “작문을 한편 써놓소. 후에 내 와서 읽어보고 또 가르쳐 줄게.” “그래요. 써보지. 대학생 앞에서 손이 떨려 어디 쓰겠소?” “잘 쓰리라고 믿소.” “가정교사한테 한 턱 내야겠소.” 후에 덕돌은 시간을 내서 저녁에 봉선을 찾아갔다. 봉선은 아주 반겨 맞았다. “오빠는 어데 갔소?” “자리를 피했소.” 그런데 옆에는 봉선의 여자 친구 하나 앉아 있었다. 그리하여 덕돌은 점잖게 앉아 봉선이 또박또박 쓴 작문을 읽고 줄을 쪽쪽 그으면서 수개해주었다. 그러고 나서 작문을 잘 지으려면 평소에 인상 깊은 일들로 일기를 써야 한다고 했다. 봉선은 실용적인 물음을 제기했다. “대학시험에 제목을 떠나지 않자면 어떻게 하면 좋아요? 숱한 작문을 써보면서 준비했는데 그 제목이 나오지 않으면 대사인데요.” 덕돌은 제꺽 대답해주었다. “준비한 작문과 제목이 다르게 나오면 우선 그 제목과 맞는 내용의 작문을 골라 써야 하오. 다른 방법은 내용을 봐서 제목에 맞게 서두와 결말을 제목과 비슷한 말로 바꿔 둘러맞춰 써넣어야 하오.” “오, 그래. 그런 방법을 쓰면 되겠어. 얼마나 근심했는지 몰라요. 대학생선생이 있긴 있어야 되겠다.” 봉선은 어린애처럼 기뻐했다. 봉선은 친구한테 뭐라고 귀속말을 하더니 “내 오늘 감사해 대접을 해야겠소.”라고 하며 덕돌을 보고 가자고 했다. 덕돌은 술이나 한잔 얻어먹겠다고 어깨가 으쓱해 따라나섰다. 쌍태머리를 뒤로 넘기며 사뿐사뿐 걸어가는 봉선의 뒤를 따라가며 물었다. “어째 친구는 데리고 가지 않소?” “음, 옆에 사람 두고 어찌 상대접을 하겠소?” “?” 덕돌은 의문스러워 하면서 뒤따라갔다. 봉선은 달빛이 깔린 소학교 마당으로 들어갔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더니 덕돌 앞에 마주 섰다. “대학생이노라고 날 업신여길 테요?” 밤중에 홍두깨라더니 봉선은 불쑥 이런 말을 꺼냈다. “아니, 무슨 말이오? 난 아무 틀도 차린 게 없는데. 오해하지 마오.” 봉선은 덕돌의 손을 잡고 조용히 속삭였다. “내가 만약 덕돌을 좋아한다면 어쩌겠소?” 덕돌은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서며 손을 풀어냈다. “이러지 마오. 난 한창 대학공부를 하는 학생이란 말이오. 학교 규정에 대학생은 연애를 하지 못한다고 했소.” “어우, 천진한 어린애 같다. 속은 엉큼하면서도.” “무슨 소리요? 난 그저 제 오빠 부탁대로 절 도와줄 뿐이오.” “거짓말, 눈길이 날 좋아한다는 걸 말하던데요.” 봉선은 뜨거운 입김이 얼굴에 풍길 지경으로 가까이 다가서 똑바로 쳐다보았다. 달빛을 빌어서도 그 또렷한 쌍까풀눈에 은근한 정이 담뿍 담겨 반짝이는 것이 보일 지경이었다. “이러지 마오. 전 내보다 한 살 이상이오.” “나이가 그렇게 대단해요? 애정에 나이가 무슨 대사인가요?” “아, 이러지 마오.” “전 남자요? 왜 이렇게 졸장부처럼 놀아요? 저를 본 후부터 대학복습이 머리에 들어가지 않는단 말이오.” 덕돌은 다가드는 봉선을 밀어냈다. “그럼 다시 오지 않을게.” 봉선은 돌아서며 어깨를 들먹였다. “남자들이란 이렇단 말이야. 정인군자 상을 하다가도 책임지지 않고 달아날 궁리부터 한단 말이야. 흑, 흑, 흑.” 덕돌도 필경은 사내인지라 그런 봉선을 위로하지 않고 쥐구멍을 찾아 달아날 수는 없었다. “봉선이, 나를 양해하오. 저나 내나 전도를 개척할 때가 아니오. 복습을 잘해 대학에 붙소. 그때 다시 보기요. 지금은 이런 일로 해 전도를 그르칠 순 없소. 나도 대학공부를 해야 하고.” 그쯤 해서 덕돌은 그날 저녁에 몸에 열이 올라 울고불고 하는 봉선을 집에 보냈다. 침실에 돌아와서도 봉선이가 꽤나 부담스러웠다. (예쁘긴 예쁜데. 대학생도 아니고 나이도 한 살 위란 말이야.) 온 저녁 아무 책도 보지 못하고 눈앞에 삼삼거리는 봉선을 두고 궁리하다가 저도 몰래 잠이 들어버렸다. 후에 덕돌은 봉선을 찾지 않고 대신 문일을 찾아가 작문지도를 해주고 풀기 어려워하는 수학문제를 함께 풀기도 했다. 기말복습도 힘겨운 것이 있었지만 봉선을 괜히 책임지지 못하겠으면서도 들뜨게 해 대학입학시험복습에 영향을 줄까봐 두려웠던 것이다. (봉선이, 제발 정신을 집중해 복습을 잘해 대학에 입학하오.) 그것이 봉손에 대한 덕돌의 충심으로 되는 축원이었다.                           7.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     눈보라가 쌩쌩 휘몰아치는 어느 일요일 날 아침, 덕돌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스케이트를 타러 대학교 빙장으로 올라가려고 했다. 매화꽃이 핀듯이 눈꽃이 매달린 나무들이 둘러선 빙장에서 덕돌과 영화가 스케이트를 탄다고 하면 쌍제비가 쌍쌍이 나래치는 것 같다고 혀를 끌끌 찰 지경이었다. 한 살 위인 영화의 탄력적인 몸매는 뒤에서 따라가며 스케이트를 타는 덕돌의 마음을 싱숭생숭하게 만들었다. “얘, 함흥대대에서 편지가 왔다.” 덕돌이 스케이트를 둘러메고 침실 문을 열고 나가려고 할 때 반장 허운호가 편지 한통을 건네주었다. 덕돌이 받아보니 넷째누나 은자한테서 온 편지였다. “어쩌다 편지를 다 보내왔어?” 넷째누나는 덕돌이 어려서부터 따르던 누나였다. 어려서 다른 누나는 몰라도 넷째누나만은 부모에게 쫓겨난 것을 계속 “넷째누나 없어 재미없다.”라고 떼질 쓰며 불러들이던 덕돌이였다. 털모자도 없어 항상 넷째누나가 하학할 때면 복도에 나와서 머리에 수건을 꽁꽁 동여주군 했다. 덕돌이 대학교에 입학한 후 넷째누나와 매형 허학순은 학교 숙사에까지 찾아와서 생일을 축하해주었다. 그때 큰 매형도 한 달 로임 54원에서 15원을 가지고 몇 번이고 숙사에까지 찾아와 축하해주었다. 그런데 편지를 읽어보니 깜짝 놀랄 사연이 담겨 있었다. “…시삼촌과 시고모가 시아버지 생일에 왔었다. 그들은 내가 결혼한 지 5년이나 됐는데 애를 낳지 못한다고 양천 허 씨 가문의 대를 끊는다고 나를 욕하고 때렸다. 나는 지금 시삼촌에게 쫓기어 다니던 악몽을 꾸면서 자다가도 놀라 화닥닥 깨나 일어나곤 한다. 난 지금 이혼할 예산인데 네가 와서 시비를 갈라 달라. 난 시집갈 때 가져간 옷궤에 입던 옷을 수레에 싣고 본 가집에 와 있다. 내 무슨 죄를 졌다고 이런 봉변을 당했는지 모르겠다…” “누가 감히 누나를 때려?!” 덕돌은 스케이트를 숙사에 팽개치고 그 길로 시퍼런 검을 빼들고 곧추 함흥대대로 뛰어갔다. 눈보라 치는 날이어서 칼바람이 언 얼굴을 갉아 가는 것 같았다. 허나 덕돌은 분김에 추운 줄도 모르고 달음박질했다. 거의 40 리를 닫다가도 몇 발자국 걷고 걷다가도 달려갔다. (매형은 뭘 하는가? 여편네도 보호하지 못하다니. 흥! 머저리야!) 넷째누나가 아래 마을 계수동에 있는 허학순한테 시집 갈 때에도 덕돌은 상빈으로 갔었다. 허씨 집에 가서 상대접을 받았다. 허씨 일가에는 사내대장부 같은 싸움꾼과 씨름꾼들이 여럿이 있어 덕돌은 사돈이란 인맥으로 기반을 든든히 닦을 수 있었다. 한번은 학순의 조카 허민선이 진수해 영화관 앞에서 숱한 한족사내들에게 맞아 대고 있었다. 덕돌이 달려가 보니 한위신의 형 한위광이 주먹질을 하고 있었다. 옆에서 구경하던 조선족 청년들은 민선이 맞는 것을 보면서도 누구도 감히 나서 말리지 못했다. “형님, 때리지 마오!” 그때 덕돌이 나서 한위광의 팔을 잡으면서 말렸다. 덕돌을 피뜩 돌아보던 한위광은 휘두르던 주먹을 내렸다. “아는 새끼야? 꽤나 우쭐거린다. 좀 버릇을 가르쳐주자고 그래.” “형님, 친척 형님이오. 때리지 마오.” 한위광은 민선을 쏘아보며 “덕돌의 낯을 봐서 놔둔다. 다신 진수해에 와서 우쭐거리지 마라.”라고 했다. 그제야 한다하는 싸움꾼이자 씨름꾼인 민선을 비롯한 허씨 일가는 덕돌이 진수해 시내에서도 한다하는 싸움꾼과 휩쓸려 다닌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됐다. “허송근이 감히 내 누나를 때려?!” 덕돌은 생각할수록 부아통이 터졌다. “개산툰진에서 교원질을 한다는 사람이 조카며느리한테 손을 대? 네놈이 주먹이 얼마나 세기에 여자한테 손을 대?” 덕돌은 당장 개산툰으로 달려가 단매에 허송근을 때려눕히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웠다. 그가 씩씩거리며 달리다다니 어느 결에 계수동에 이르렀다. (나는 대학생이기에 절대 허씨네처럼 손을 대지 않겠다. 먼저 법률이란 무기로 넷째누나의 한을 풀어드리고 재산문제도 해결해야지.) 그는 울컥 치미는 밸을 꾹 참으면서 검을 집 울타리 바자 밑에 세워놓고 매형네 문을 꽝꽝 두드렸다. “누구요?” “내오!” 덕돌은 집문을 뚝 떼고 성큼 들어가 갖출 예의를 다 갖추고 점잖게 구들에 올라섰다. 학순과 부모들은 로지심 같은 덕돌이 들어서자 질겁해 어정쩡해 서있었다. “모두 서서 뭘 하오? 지나가던 나그네 왔는데 술상이나 내놓소.” 학순은 황급히 서둘러 식탁을 들춰 술상을 챙겨놓았다. 덕돌은 올방자를 치고 앉아 학순을 보고 “술을 붓소.”라고 했다. 학순이 술을 붓는데 술병이 덜덜 술잔을 쪼았다. “허. 이 사람, 술병이 부셔져 유리가루 술잔에 들어가겠소.” 덕돌은 아예 큰 사발에 술을 쿨럭쿨럭 부어 단모금에 60도짜리 술을 밑굽을 내고 밥상에 탕 메쳤다. “말해라! 이 새끼야. 삼촌과 함께 여편네를 때려 쫓아내고서도 발편잠을 자?!” 학순은 무릎을 꿇고 빌었다. “처남, 내 때린 게 아니다. 삼촌이 때렸다.” “그래, 당신은 제 여편네도 보호하지 못하는가? 삼촌을 말리지 못해? 그래 네 삼촌 허송근이 그렇게 주먹이 세니?! 내 어디 그 놈부터 한번 봐야겠구나!” 사돈영감이 뭐라고 끼어드는 것을 덕돌은 눈을 부라리면서 쏘아부쳤다. “개 소릴 작작 쳐! 너희들, 내 누나를 감히 때리고 쫓아내? 애를 낳지 못한 게 우리 누나 혼자 탓인가?” 덕돌은 학순을 쏘아보았다. “너 고자 때문이지.” 그래도 학순은 죄를 지었기에 아무 대꾸도 못했다. “내 마음이 독하게 변하기 전에 똑똑히 서둘러라. 울 누나 나가면서 가지지 못한 재산과 치료비로 500원을 당장 내놔! 어디 주먹맛을 보겠는가? 아니면 누나 피 값을 물 거야?!” 학순은 불길이 이글거리는 덕돌의 눈길을 감히 쳐다보지도 못하고 온몸을 사시나무 떨듯 부들부들 떨었다. 덕돌은 혹 참지 못해 주먹이라도 휘둘러 실수할까봐 훌쩍 일어나 자리를 떴다. 집으로 올라와 보니 넷째누나 은자는 마구 덕돌을 붙들고 원통해 울었다. 그에게서 들으니 시삼촌 허송근과 시고모는 음력설을 쇠러 와서 은자가 애를 낳지 못한다고 하면서 몰아주었다. 은자가 한마디 대꾸도 하지 않고 자리를 뜨자 그자들은 시동생 집에까지 쫓아와 때렸다. 은자는 바지마저 마구 벗긴 채 내복바람에 비명을 지르며 한마을에서 시집온 황인숙의 집에까지 달아났다. 허송근은 황인숙이네 집에까지 쫓아왔다. 황인숙은 은자를 고방으로 해 뒤문으로 빠져 달아나게 했다. 허송근이 고방에까지 쫓아 들어오자 은자는 뒤울안으로 해 황급히 개굴 안에 들어가 숨었다. 짐승 같은 허송근은 개굴에 들어간 은자를 찾아내 계속 때리며 “개굴에 들어가 숨어? 넌 개다.”라고 하며 온 동네 떠나가게 고함쳤다. 황인숙과 남편 그리고 동네 사람들이 모여들어 말려서야 은자는  마수에서 벗어 나게 됐다. 그녀는 그 길로 은자는 맨발 바람으로 본 가집에 달아났던 것이다. 이 얼마나 천인공노할 일인가? 덕돌은 그 말을 듣자 분이 치밀어 씩씩거렸다. 그때 상순은 덕돌을 보고 눅잦혔다. “너도 이젠 대학생이 아니냐? 철없이 주먹으로 일을 그르치지 말고 법으로 해결해야 한다. 지금 우리 쪽에서 피해자인데 자칫 주먹을 휘두르면 피고로 될 수도 있다.” “알았습니다. 내 먼저 법으로 해결하겠습니다.” 이튿날 상순은 덕돌과 은자를 데리고 법원으로 찾아갔다. 신소접대실의 법관은 덕돌이 쓴 신고서를 읽어보고 은자의 사건제보까지 듣고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허허허. 가내 말다툼이구먼. 이혼했으면 됐지. 이제 법놀음을 해서 뭘 하오?” 덕돌은 화가 나 언성을 높였다. “아니, 아녀자가 시삼촌에게 맞았는데 그래 법원에서 아무 처리도 안 합니까?” 그러자 법관은 안경알 밑으로 덕돌을 건너다보면서 사무상을 똑똑 두드리더니 말했다. “치안사건은 공안국에서 처리하지. 법원에서 처리하지 않소. 만약 형사사건이면 우리 법원에서 접수하오.” “그럼 이혼 재산분쟁 같은 민사사건도 법원에서 해결하지 않습니까?” “이혼재산분쟁 같은 건 집에 돌아가 자체로 해결하오.” “아니, 인민법원에서 백성들이 억울하게 얻어맞은 사건도 접수하지 않으면 뭘 합니까?” 그러자 법관은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보오. 오늘 찾아온 신고자만 해도 20여명이나 되는데 그런 작은 사건을 다 접수하다나면 법원에 법관이 학교의 교원만큼 많아도 다 처리하지 못하오. 정 억울하면 공안국에 가보시오.” 말을 마치자 그 법관은 아래 사람을 접대했다. 상순과 덕돌은 속에 내려가지 않았지만 별 수 없이 법원에서 나왔다. 법원 문어귀 부근의 자그마한 식당에서 정심을 대충 먹으면서 덕돌은 울분이 터져 견딜 수 없었다. 허나 꾹 참고 집으로 돌아오는 수밖에 없었다. 그는 귀로에 들어서면서 법원 대문에 걸어놓은 “인민법원”이란 커다란 간판을 쳐다보았다. (흥! 무슨 인민법원?) 덕돌은 불만이 가득해 집으로 돌아오면서 물었다. “아버지, 공안국에 제기하면 어떻습니까?” 그런데 뜻밖에도 상순은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소송놀음을 그만두자.” 그 말에 놀랐다. “한뉘 빚을 지고 살아도 시비에 지고 살지 못한다던 분이 무슨 말씀입니까? 어찌 소송을 그만 둡니까?” 그러자 상순은 한숨을 후 내쉬었다. “옛날부터 소송놀음에 집안이 망한다는 말이 있다. 소송에 이기자고 소를 팔고 땅을 팔고 나중에 집까지 다 팔아 망한 사람이 한두 사람이냐? 넌 아직 세상을 잘 모른다.” 상순은 옛날 지학사와 소송을 하던 일을 말하면서 법원 소송이 힘든 말을 했다. 그러나 천진한 덕돌은 자기 고집을 세웠다. “건 해방전 얘깁니다. 해방전 일본 놈의 세상에서도 아버진 지주한테 배상시켰는데. 황차 지금 사회주의 나라 법원은 아주 청백하지 않습니까?” “옛날이나 지금이나 법관은 최고무상의 권력이 있다. 문화대혁명을 거치면서 사법부문이 혼란해져 그 틈에 일부 법관들은 권력을 빌어 사리를 도모하려고 한다. 뭔가 검은 돈이나 술이라도 얻어먹어야 일을 본다더라.” “얼마나 주면 될까?” “그만 둬라. 법관들을 매수하는 사람도 청백하지 못한 거야. 도리 있는데 왜 먹여서 일 처리를 하겠냐? 안되면 그만두지. 물론 김창남 국장한테 말하면 허송근이나 학순 쯤은 혼낼 수도 있다. 허나 우린 절대 법대로 하지 뒷문거래는 하지 말아야 한다.” 덕돌은 아버지 성격을 알고 있어 더 말하지 않고 집에 돌아와 맥이 풀려 한잠 푹 잤다. 허나 자고 일어나 곰곰이 다시 생각해봐도 속으로 이 송사에 질수 없다고 생각했다. 양미간을 찌프리고 궁리하던 덕돌은 계수동에 가서 기사 취재를 하는 것처럼 여동창생 황인숙과 그녀의 남편 그리고 마을의 목격자들을 일일이 찾아 허송근이 은자를 때린 사실을 기록한 후 증명인 란에 서명하게 했다. 이튿날 아침 일찍 일어나 또 법원을 찾아가 들이밀었다. 마을 사람들의 두툼한 증명서들을 보더니 법관은 그제야 “ 이 사건은 영향이 아주 크구먼.”라고 하며 신고용지를 두개 주었다. 덕돌은 뜻밖에 일이 돼나가자 아주 기뻤다. 그는 그날 저녁으로 집에 돌아와 신고서를 썼다. “…허송근은 교원으로서 조카며느리를 온 동네를 쫓아다니면서 때렸다. 그 죄는 형사죄로 다스려야 하겠지만 교원이기에 스스로 반성하도록 하며 민사책임만 신고한다…” 보름 후에 허송근에게서 답변서가 왔다. 그는 답변서에 자기 잘못을 뉘우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은자가 재물에 눈이 어두워 소송했다면서 한치의 양보도 하지 않겠다고 떠벌였다. “이놈 새끼, 주먹맛을 봐야겠는가?” 덕돌은 잉잉 우는 주먹을 손바닥에 대고 탕탕 쳤다. 법원에서는 처리를 기다리라고 하는데다가 덕돌은 기말시험복습을 해야겠기에 법원의 처리를 믿고 기다리기로 하고 학교로 돌아갔다. 방학이 돼 집으로 돌아오면서도 법원에서 합당하게 처리했으리라고 믿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은자가 법원에서 소송을 철회했다고 했다. “아니, 그 소송을 어떻게 고생해 법원에서 접수하게 했는데 아무런 처리도 받지 못하고 철회한단 말이오?” 덕돌은 집구들에 엉덩이를 붙이지 않고 그 자리로 법원으로 씽 달려갔다. 담당 법관은 덕돌을 보자 따지고들었다. 법관은 철면피하게도 이렇게 말했다. “당사자 김은자가 그간 법원에 와서 소송을 철회하겠다고 해서 철회했소. 동무가 동생이겠구먼. 은자 동무는 동생이 어려서 세상물정을 모르고 소송을 자꾸 하자고 해서 억지로 했는데 철회하겠다고 했소.” 법관은 말을 마치자 회의 있다면서 자리를 피했다. “넷째누나가 이럴 수가있는가?” 덕돌은 주먹을 쥐고 집으로 향했다. 그런데 부르하통하 물이 녹아서 집채 같은 얼음장이 세찬 물결에 떠내려가고 있었다. 신을 벗고 찬 얼음물에 들어서 건너다가 허벅다리를 치는 강물은 더 건널 수 없었다. 그때 집구들장만한 얼음이 떠 내려오는 것을 보고 제꺽 뛰어 올랐다. 그는 얼음위에 선채 떠내려 오는 나뭇가지를 주어 삿대처럼 짚어 밀면서 간신히 사품 치면서 흐르는 깊은 강물을 건너갔다. 그제야 덕돌은 한숨을 후 내쉬었다. (에참, 아버지 말처럼 송사 길이 이렇게 험난할 줄은 몰랐구나.) 집에 들어서자마자 덕돌은 부모에게 법관에게서 들은 말을 하고나서 은자에게 따지고 들었다. “누나 소송을 철회했소?” 그러자 은자는 이실직고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쩌겠니? 담당법관이 이러더라. ‘소송놀음을 하면 원수로 돼 보복이 두렵지 않은가? 몇백원으로 해 원수를 맺을 게 없잖은가? 하루 부부 백일 은정이라고 하루 밤에도 만리장성을 쌓는다고 하지 않소? 필경 5년이나 산 부부지간에 원수를 맺어 무슨 좋은 일이 있겠소? 소송을 철회하오.’ 이래더라. 그래서 철회했다.” “누나가 어쩜 이렇게 할 수 있소? 야, 정말, 내 어떻게 천신만고 끝에 얻은 소송권을 내하고 토론도 하지 않고 포기한단 말이오? 어쩜 누난 시켜준 서방질도 못하오.” 덕돌은 억이 막혀 더 말이 나가지 않았다. 울분을 참으려 해도 참을 수 없었다. 상순은 분통이 터져 씩씩거리는 덕돌의 손을 잡고 말렸다. “얘야, 어떤 때에는 양보하고 지는 것이 이기는 거야. 법에서 해결해 주지 않는 것을 어떻게 하겠니?” “그래 당하고 만단 말입니까? 그 허씨들이 우리 김씨 가문을 어떻게 보고 누나를 짓밟는단 말이오?” 덕돌은 집을 나서자 그 길로 공안국에서 일하는 이모부 강운룡을 찾아갔다. 강운룡은 “4인무리”가 꺼꾸러진 후 반란파 두목 김용만이 공안국 국장자리로부터 감옥에 옮겨가고 김창남 국장이 국장으로 승진한 후 다시 김창남 국장의 부름을 받고 공안국에 와서 형사정찰과 과장으로 임명됐던 것이다. 한번은 시내 한 기계공장 사무실에 화재가 났다. 강운룡 과장은 수사 일꾼들을 이끌고 사건현지에 가서 세밀한 수사를 벌렸다. 그러나 수사 일꾼들은 아무런 단서도 잡지 못했다. 그때 강운룡은 물이 괴죄죄한 잿더미로 된 공장 사무실자리에 웬 축구공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저건 무슨 공이오?” 공장 사무실 주임과 물어보니 “화재가 나기 전날에 우리 공장 직원의 애가 공을 차다가 우리 사무실 유리창문을 깨버렸습니다. 그래서 그 애의 공을 배상 대신 빼앗아 둔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강운룡은 피뜩 가능하게 그 애가 자기 공을 빼앗았다고 악감을 먹고 불을 지르지 않았겠는가는 추측이 들었다. 과연 그 애를 데려다 심문했는데 강운룡 과장의 예측과 맞아 떨어졌다. 그리하여 한차례 방화사건을 신속하게 해명했다. 한번은 화룡시 복동진의 한 살인악마가 자동차를 빼앗아 타고 도주해 동불공사 사수대대에 잠입했다. 그때도 강운룡은 총지휘부의 제1선 정찰을 책임지고 직접 살인악마가 숨은 집 구새목에 가서 적정을 살피고 제1선 정보를 총지휘부에 보고했다. 그리고 처음에는 마을의 정치대장과 끌끌한 민병을 들여보내 떡을 치는 척, 트럼프를 노는 척 하다가 살인악마를 나포하려는 나포방안을 작성해 총지휘부에 교부했다. 그 작전방안대로 했지만 정치대장이 손이 떨려 떡메로 살인악마의 대가리를 치지 못했다. 그때 강운룡은 과단하게 제일 먼저 집안에 덮쳐들어가 살인악마를 깔고 들어앉아 목을 눌렀다. 살인악마가 호주머니에 손을 넣어 권총을 꺼내려는 순간 그는 무릎으로 살인악마의 대가리에 강타를 안기며 그 놈의 오른 손을 꽉 눌렀다. 그때 뒤따라 들어간 수사 일꾼들과 함께 살인악마를 제압하고 호주머니의 권총도 빼앗아내고 수갑을 철컥 채웠던 것이다. 하여 그는 2등공을 세우고 상금 200원을 탔던 것이다. 어려서부터 반도체부속품이랑 시계랑 사러 다니면서 덕돌은 이모부 강운룡을 하늘을 떠인 사내대장부로 존경하고 따랐다. 집안에 송사가 생기자 덕돌은 이모부를 찾아가 가르침을 받고 싶었다. 덕돌이 찾아가자 키 넘는 동생 강호가 경찰복차림으로 군례를 척 붙이며 인사했다. “형님! 경례!” 여동생 향화도 반겨 맞았다. “오빠!” 향화는 제법 처녀티가 났다. 1미터 65나 되는 호리호리한 체격에 정말 예뻤다. 이모는 조카가 오자 뜨끈뜨끈한 돼지고기장국을 끓이기에 이마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내밴 채 여념이 없었다. “아재, 강호는 경복을 입었구먼. 축하하오.” “응, 그래. 걔는 교통경찰대대에 들어갔다.” “음, 잘 됐구나.” 덕돌은 강호의 경모를 머리에 단정히 씌워주면서 어깨를 다독여주었다. “잘해라.” 그는 장의자에 앉아 한손에 하나씩 강호와 향화의 손을 꼭 잡고 그간 그립던 얘기를 한바탕 나누었다. 정심에 이모부가 왔다. 덕돌은 이모부에게 사들고 간 술병을 들어 부어드리며 단도직입적으로 은자가 당한 일을 죽 말했다. 그러자 강운룡은 술잔을 들어 마시며 한참 궁리했다. “가만 놔두지 말아야 해. 그런데 원래 소송놀음이 그리 쉽니? 담당법관이 가능하게 개산툰에 가서 답장을 받으면서 허송근이란 자와 뭔가 은밀히 단짝이 됐을 수 있다. 뻔히 은자가 억울하게 맞고 재산 한푼 가지지 못한 채 쫓기다 시피 나왔는데 조해도 시키지 않고 그게 뭐냐? 겁이 많은 아녀자에게 보복이 두렵지 않은가? 원수를 맺어 무엇이 좋겠는가? 겁을 먹여 소송을 철회한걸 봐라. 완전히 피고 허송근의 편을 들고 있잖니? 거기에 뭔가 감춰진 거래가 있었을 수 있다.” “그럼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덕돌이 술을 또 한잔 부어 올리면서 묻자 강운룡은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그쯤 해 그만둬라. 담당법관이 그렇게 편을 드는데 이제 철회한 소송을 다시 하자면 상급 법원에 기소해야 된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상급법원에서 아래 법원에서 철회한 소송을 재 접수하지 않고 아래 법원에 보낸다. 법관끼리 서로 눈치를 보면서 돕고 보호하고 짜고 든단 말이다. 툭 까놓고 말해 관장에선 관리끼리 서로 보호한단 말이야.” 그 말을 듣고 덕돌은 “야, 아직도 세상이 온통 새까맣구먼. 문화대혁명이 끝난지도 이젠 몇햅니까.” 하고 감탄했다. 강운룡은 한숨을 후 내쉬더니 “너희들 대학생들은 세상을 너무 천진란만하게 밝게 보는구나.”라고 했다. 덕돌은 “‘4인무리’를 타도하고 반란파 두목 김용만과 황종연 일당을 처리했는데도 아직도 그렇습니까?”라고 의문을 제기했다. “‘문화대혁명’ 바람에 법제풍기를 문란하게 만들어 그 여독이 한 동안 갈 거야. ‘문화대혁명’ 기간에 어디 법이 있었니? 죄도 없는 억울한 간부들을 마구 비판, 투쟁하고 투옥하고 총살까지 하지 않았니? 료녕성당위 선전부에서 간사로 일하던 장지신의 억울한 사건을 봐라. 문화대혁명기간에 장지신이 강청을 욕했다고 ‘4인무리’들은 장지신에게 갖은 혹형을 다가하다가 총살했지. 총살할 때 장지신이 구호를 부를 까봐 인후를 베 구멍을 낸 후 목수건을 둘러 가린 후 비밀사형장에 내다가 사형했지. 사형한 후 어쨌는지 아니? 사체를 기름 가마에 처넣어 부글부글 끓여 뼈를 건져내 의학원 사체해부실에 가져다 골격표본을 만들었단다. 후에 자녀들이 장지신의 뼈를 의학원에서 가져다 안장했단다.” 덕돌은 그 말에 몸서리를 쳤다. “야, 정말 가혹한 정치가 범보다 무섭다더니 세상에 그런 잔혹한 일도 다 있답니까?” 이모부는 오후에 출근하면서 말렸다. “법원에 절대 상소하지 말라. 쓸데없는 일이다. 성공가망이 없다. 학순인지 뭔지 하는 자를 직접 찾아가 도리를 따지고 이혼했으면 은자에게 재산을 얼마간 달라고 해보렴.” 덕돌은 그렇게 믿던 이모부에게서도 확답을 얻지 못하자 가슴이 갑갑해났다. 혹시 풍상고초를 다 겪은 아버지와 이모부의 말씀이 맞을 수도 있었다. 순간 법은 멀고 주먹이 가깝다는 말이 번개처럼 뇌리를 탁 쳤다. “그래, 법률로 안 되는 판에 내 손으로 해결해보자.” 덕돌은 비장한 결심을 내렸다. 그는 우선 지혜와 글로 허씨 일가를 공격하기로 했다. 그는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필을 들어 이런 최후통첩을 써 허학순에게 부쳐 보냈다. 최후통첩! 허송근, 네깐 놈이 내 어진 누나를 온 마을 쫓아다니면서 때리고 빈털터리 알몸으로 쫓아내고서도 잘 될 것 같으냐? 학순, 너는 남편으로서 자기 아내도 보호하지 못하고 맞게 놔둔 멍청이야. 보름 안으로 내 누나 치료비 300원에 이혼한 후 재산 값으로 200원을 가져오라. 그러지 않는 날엔 너 일가를 가만 놔두지 않을 것이다. 온전히 살고 싶으면 알아서 처리해라. 보름 후에도 가져오지 않으면 나를 원망하지 마라. 굴뱀 덕돌 허송근이 있는 개산툰의 한 소학교 당지부와 현 교육국에는 허송근이 조카며느리를 때린 죄악을 폭로하고 당 기율에 근거해 처분할 것을 요구하는 편지를 써 부쳐 보냈다. 일주일이 됐는데도 학순은 누나한테 돈을 가져오지 않았다. 후에 덕돌이 계수동에 가서 알아보니 최후통첩을 받고 겁을 집어먹은 학순은 부모를 데리고 마을을 떠나 진수해 시내에 세집을 맡고 숨어 버렸다. 덕돌은 진수해에 가서 한족친구 고이림과 류운봉 등을 동원해 학순이 숨은 세집을 찾으려고 온 시내를 참빗으로 서캐 훑듯 했다. 당 날 저녁에 은자가 집에 데려다 기르던 향화를 단서로 끝내 학순이 숨은 세집을 찾아냈다. 그리하여 덕돌은 한족친구들을 데리고 학순의 세집으로 쳐들어갔다. 질겁한 학순은 엉덩방아를 찧은 채 일어나지도 못했다. 영감이 뭐라고 떠드는 것을 고이림이 훌 안방에 메쳐버렸다. “학순아, 돈을 준비했는가? 고양이새끼처럼 시내에 숨으면 단가?” 학순은 벌벌 기면서 통사정 했다. "돈이 마련되면 가져가겠다. 불시에 어디 그렇게 많은 돈이 있니? 집을 팔아도 500원 밖에 하지 않는데.” “안 된다. 일주일 안에 돈을 가져오지 않으면 몰살당할 줄을 알아라. 우리 온 집안 식구들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잘못을 빌면서 누나한테 돈을 줘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죽을 줄 알아라.” “불시에 어디 돈이 있어 그렇게 많이 주겠니? 천천히 벌어 줄게.” “잔꾀를 작작 부려. 공사기업에 다니면서도 돈을 안내고 뻗칠 예산인가? 성의 있으면 꿔서라도 내야 해.” 학순은 아무리 꾀를 써도 안 되니 “돈을 줄게.”라고 했다. “오늘 먼저 100원을 당장 내놔라. 데리고 온 친구들을 술대접해야겠다.” 학순은 우는 상을 하면서 궤짝에서 겨우 80원을 내놓았다. “쳐라!” 덕돌의 호령이 떨어지자 고이림과 류운봉은 학순을 메주 밟듯 밟아줬다. 덕돌은 구들바닥에 널린 돈을 주어 가지고 가면서 을러멨다. “개새끼, 허송근 새끼 감히 우리 누나를 쳐? 가만 놔두는가 봐라! 그 놈 새끼한테 일러라. 우리 개산툰에 언제든지 가서 피 값을 받아온다고.” 겁을 집어먹은 학순은 다 터져 피 흐르는 낯을 쓱쓱 닦으면서 죽는 소리를 했다. 덕돌은 5원을 꺼내고 나머지는 은자에게 주었다. 그날 저녁 덕돌은 류운봉과 고이림, 한위신을 데리고 식당에 가서 술상을 차려 한바탕 술을 마셨다. 며칠 후 학순은 질겁해 끝내 200원을 꿔 가지고 함흥대대 조개덕에 은자를 찾아왔다. 허나 은자가 일하러 밭으로 갔다고 하자 밭에까지 찾아가서 건네주었다. 허나 덕돌은 불만이 가득해 피 값 300원 받으러 개산툰으로 홀몸으로 갔다. 원래 친구들을 데리고 갈까 하다가 그만뒀다. 주먹친구들은 자칫하면 사람을 쳐 병신이라도 만들까봐 그만두었다. (내 혼자라도 그깐 놈을 처치 못해?) 덕돌은 기차를 타고 개산툰에 가서 이 학교 저 학교 찾아다니다가 둔덕 위 소학교에서 허송근을 찾아냈다. 그는 곧추 학교당지부 사무실을 찾아가 허송근의 죄악을 공소했다. 그러자 당지부 서기선생은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전번에 편지를 보내와서 허송근 선생의 잘못을 알고 당지부 생활회의에서 비평한 적이 있소. 오늘 재차 들어보니 사실이 똑 같구먼.” “그저 비평만 해선 안 됩니다. 마땅히 우리 집안에 와서 허송근은 잘못을 사죄하고 피값으로 300원을 내놔야 합니다.” 소학교 서기는 안경 너머 혈기왕성한 덕돌을 보면서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법원에 민사소송을 해도 해결하지 못하는 것을 우리 학교에서 어떻게 받아내겠소?” “로임에서 잘라내면 안되겠습니까?” 서기는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법원의 판결이 없이는 절대 그렇게 못하오. 누나가 몹시 맞았다니 안 됐소. 내 말해서 치료비로 얼마간 주라고 해보지.” 그 말에 덕돌은 조금 가슴이 열리는 것 같았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글쎄 덕돌은 당지부 서기 사무실에서 나오다가 복도에서 덩치가 수범처럼 큰 허송근과 딱 마주쳤다. “네가 감히 내 누나를 업신여겨?!” 허송근은 보통 덩치인 덕돌을 업신보고 “애들이 뭘 안다고 여기 와서 떠드느냐?”하고 버럭 소리쳤다. “뭐라고? 이 놈, 네가 다 교원이냐? 조카며느리를 때려 쫓아내? 치료비도 내지 않고 당나귀 떼를 써?” “조용한데 가서 얘기하자.” “어째 온 학교 사생들이 네 죄악을 알까봐 겁나냐?” 덕돌이 왁짝 떠들자 교실과 교무실에서 교원들이 문을 열더니 머리를 내밀고 구경했다. “덕돌이, 여기 와서 어째 이러오?” (누군가?) 덕돌이 머리를 돌려보니 소학교 5학년 때 스승 리은규 선생이었다. 그리하여 덕돌은 허송근을 놓아주고 스승과 인사한 후 자초지종을 이야기했다. 그러자 리은규 선생은 덕돌을 말렸다. “복도에서 떠들면 영향이 나쁠뿐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오. 그래도 법으로 처리하오.” 덕돌은 곧이듣지 않았다. “법으로 처리할 수 있으면 내 무슨 이러겠습니까? 저 허송근이 소동작을 해서 법관이 소송을 철회하게 만들었습니다.” 리응규는 시간이 돼 들어가고 허송근은 어디론가 피해가고 없었다. 덕돌은 한숨만 나갔다. (네놈이 출근도 하지 않겠니?) 덕돌은 이번엔 만나기만 하면 끝장 볼 궁리를 하고 학교 대문을 막고 지켰다. 그때 사생들 속에서 허송근이 육중한 몸을 웅크리고 슬그머니 학교 대문을 빠져나가려고 했다. “어디로 가는가?” 덕돌은 다짜고짜로 허송근에게 덮쳐들어 멱살을 틀어쥐었다. “야, 저쪽으로 가서 얘기하자.” 그자는 사생들 앞인지라 창피를 당할까봐 죽는 상을 지으며 통사정을 했다. “그래, 가자.” 덕돌은 학교 담 뒤에 끌고 가서 따졌다. “오늘 내 누나 피 값을 받으러 왔다. 소송서에 쓴 대로 치료비 300원을 내놓아라.” “네가 뭔데 300원을 내라고 하니?” “뭐라고? 이 놈 새끼, 언감 개소리냐? 난 돈이 탐나 온 게 아니야. 네놈한테서 피 값을 받으러 왔다. 낼 테냐? 안 낼 테냐?” 허송근은 기세 사나운 덕돌을 보고 멱살을 틀어 잡힌 채 아무 말도 못하고 흔들리며 비명을 질렀다. “이 목을 놔라. 학순한테서 280원이나 받았으면 됐지. 나와 왜 이래?” “이 개새끼야, 사람 말이 잘 안 드는구나.” 덕돌은 불시에 틀어쥔 멱살을 콱 당기면서 머리를 뒤로 젖혔다가 헤딩을 안겼다. 떡! 모진 소리와 함께 허송근은 까무러칠 지경으로 휘청 하더니 면상이 장마당이 됐다. 떵! 떵! 떵! 네 번 헤딩을 안기자 허송근은 개목을 다는 소리를 치더니 보리자루처럼 나동그라졌다. 덕돌은 물앉은 허송근의 머리칼을 잡고 무릎으로 다 터진 면상을 짓쪼아 놓았다. 그때 리응규 선생이 달려와 말렸다. “덕돌이, 이러지 말라. 내 허송근의 처와 말해 돈을 주게 할게.” “미안합니다. 선생님한테까지 폐를 끼쳐.” 덕돌은 떠나가는 리응규 선생을 보내고 로지심처럼 식당에 가서 혼자 점심을 먹었다. 한참 후에 응규 선생이 돈 230원을 가져다주었다. “요걸로 피 값이 됩니까?” “너도 허송근을 때렸으니 엎음 갚음이 되지 않았니?” 그 말에 일리가 있었다. 응규 선생에게 감사를 드리고 차 시간이 돼 덕돌은 집으로 돌아왔다. 허나 학순을 놔둔 것이 속에 내려가지 않았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공사 운동대회를 하는 진수해중학교 중간 복도에서 학순을 딱 마주쳤다. “야, 이 새끼야, 피 값도 안내고 살 거 같니?” 학순은 대낮에 갈범처럼 으르렁거리는 덕돌을 보자 “에이크” 하고 비명을 지르며 돌아서서 도망치려고 했다. 그때 덕돌은 쫓아가면서 고함쳤다. "법은 멀고 주먹은 까깝다!”  그는 날아나가면서 발길로 달아나는 학순의 면상을 걷어찼다. 동시에 주먹이 휘감겨 날아 들어갔다. “앗!” 고함소리와 함께 학순은 시멘트 바닥에 풀썩 꺼꾸러졌다. 마구 엎딘 그의 대갈 밑에서 피가 줄줄 흘러 시멘트 바닥을 뻘겋게 적셨다. 덕돌은 눈에 불이 일어 당장 때려잡을 상을 하고 고함치며 학순의 대가리를 발길로 마구 걷어차고 밟아놓고 복도를 빠져나갔다. “서라! 사람을 치다니?!” 덕돌이 되돌아보니 안경을 건 늙은 경찰이 덕돌을 뒤쫓아 왔다. 덕돌은 도망치지 않고 순순히 그 경찰을 따라 파출소로 갔다. 파출소에서 덕돌은 자초지종을 죽 이야기했다. 그러자 경찰은 다음과 같은 "처리판결"을 내렸다. “법으로 문제를 해결해야지. 대학생이란게 사람을 때려서야 되는가? 대학생인데 이후부터 손을 대지 말고 도리를 따져라. 치안위반죄로 벌금 20원을 하라." “내 누나 맞았을 땐 왜 허학순을 벌금 시키지 않았습니까?" "그때 고발했으면 우리 파출소에서 처분했을 거야." "건데 내 한매 쳤다고 벌금시킵니까?” “그래야 네가 이후에 사람을 치지 않지? ” 경찰은 마치 덕돌을 돌보기나 하는 것처럼 말하는 것이었다. 별 수 없었다. 집에 돌아온 덕돌은 이튿날 돼지새끼 한 마리를 시장에 가지고 가서 팔아 파출소에 냈다. 아버지와 알아보니 그 안경을 건 퉁퉁한 경찰이 바로 아버지의 수하 허영호 소장이라는 것이었다. 상순도 확실히 덕돌을 교양하기 위한 것이라고 인정했다. 한차례 송사는 이렇게 법보다 가까운 주먹으로 종말을 고했다. 덕돌은 세상이 너무 허무해 너털웃음만 쳤다. “허허허. 원, 참, 법이 무른 이 놈 세상이 언제 밝아질까? 원, 더러워서 어떻게 살겠니? 하하하!” 그 너털웃음 소리에 길가 나무가지에 앉았던 참새들이 재잘거리며 날아나 버렸다.
155    대하소설 진달래 소야곡(21) 댓글:  조회:1376  추천:0  2018-08-02
                                            40. 강도들의 말로 눈보라가 윙윙 휘몰아치던 엄동설이 흘러가고 봄이 찾아왔건만 소장사를 한다고 내몽골로 떠난 성호는 소식이 전혀 없었다. 어느 하루 정희는 딸애를 데리고 태평거촌 시집에 왔다. 성호가 떠나간 후 이젠 몇십번 시집에 왔다갔는지 모른다. 시부모도 아들 소식이 없어 속을 태우고 있었다. “소식이 있소?” “없어요. 혹시 편지라도 왔는가 해서 왔는데요.” 입이 무거운 상진도 더는 참을 수 없었다. “그 놈이 꼭 살아 돌아오겠지.” 영옥은 눈물을 흘리면서 “살아있기만 했으면 얼마나 좋겠소.” 하고 정희와 손녀를 번갈아보았다. “꼭 살아 있어요. 쉽게 당할 사람이 아니죠. 전 그를 믿어요. 꼭 악착스레 살아있을 거예요.” 해지기 전에 정희는 눈물을 훔치면서 시부모와 갈라져 시내로 돌아왔다. 그녀는 실오리만한 희망을 안고 이번에는 시이모부를 찾아가 소식이 있는가 알아보았다. 뜻밖의 소식에 강운룡 과장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아니, 성호가 잃어지다니? 금시초문인데. 백성지구와 내몽골지구 공안기관에 련계를 달아보지.” “이모부, 꼭 신랑을 찾아주세요.” 강과장은 눈물을 하염없이 흘리는 처조카며느리를 측은히 바라보면서 머리를 끄덕였다. “소식을 기다리오.” 이튿날부터 정희는 사흘이 멀다하게 시집과 강과장한테로 오가면서 혹시 소식이 있는가를 기다렸다. 참말 하루가 삼추 같았다. 며칠 후 정희가 또 공안국에 이모부를 찾아갔을 때다. “성호 소식이 있소.” “어디 있대요?” 정희는 굳은 표정을 풀지 못하는 이모부의 입에서 무슨 소식이 전해질가 두렵기만 했다. 강운룡 과장은 무거운 어조로 뒤말을 이었다. “성호는 소장사를 하다가 강도들에게 소떼를 빼앗겼다오.” “살아있는가요?” “살아있구말구. 성호가 어떤 애오? 어려서부터 성호가 자라는 걸 봐서 아오. 돌 우에 올려놓아도 살아날 애지.” “아이유, 사람도!” 정희는 애나 발까지 동동 굴렀다. “어쩜 소식도 한마디 전하지 않는대요? 속을 싹 태우면서? 무정해도 정말…” 정희는 뜨거운 눈물을 줄 끊어진 구슬처럼 흘리면서 눈물범벅이 된 얼굴에 웃음을 지었다. “지금 날강도들을 나포하고 소를 찾으려고 한창 경찰들과 달아다닌다오.” “그까지 소야 있으면 어쩌고. 참, 살아 있다니 됐어요.” “감사해요. 인차 시부모께도 알려드려야 하겠어요. 시부모도 속이 타서 재가루 될 지경인데요.” “근심하지 말라고 하오. 우리도 몽골에 가서 강도 나포를 협조할 예산이요.” “예. 알았어요.” 정희가 숨가쁘게 시부모를 찾아 달려갔을 때다. 소식을 전하자 시부모는 기뻐하며 성호한테서 편지 한장이 왔다고 했다. 정희가 시어머니 손에서 받아보니 편지는 아주 간단했다.   존경하는 부모님, 그간 속을 태우게 해서 미안합니다. 정희한테도 문안을 전해 주십시오. 저는 날강고들한테 강탈당한 소를 찾아가지고 돌아갈 예산입니다. 당지 공안국에서 나섰기에 꼭 찾을 수 있을 겁니다. 근심하지 마십시오. 아들은 그 어떤 역경 속에서도 모든 곤난을 박차고 나갈 것입니다. 만나는 날까지  편안히 계십시오. 아들 리성호                                                       1988년 4월 29일.   사실 그날, 강도들은 징글스레 웃으며 말에 올라 소떼를 몰고 떠나갔다. 성호는 초원의 고목에 결박당해 사선에서 헤맸다. 해가 어둑어둑 져서 어둠의 공포가 조수처럼 밀려오고 만리 초원 마가을바람의 울부짖음소리가 악마처럼 엄습해왔다. 어둠컴컴한 하늘에 애처로운 초생달이 떠서 대지를 쓸쓸히 비추었다. 고목에 결박당한 성호의 애간장을 태웠다. 여기저기서 굶주린 이리떼들의 울음소리가 저승사자의 북소리처럼 다가오고 있었다. 성호는 고향의 부모형제들과 처자들을 떠올리자  속으로 부르짖었다. “절대 이렇게 초원에서 죽을 순 없어.” 저 멀리 강도들의 검은 그림자가 흑점으로 아물거리다가 어둠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그는 피뜩 종아리 각반에 꽂아둔 비수가 떠올랐다. (살았어.) 그는 안간힘을 다해 오른다리를 얼굴 가까이에까지 쳐들었다. 다리가 입가에 다가오자 이빨로 조심스레 비수자루를 꼭 깨물어 쓱 빼냈다. 그는 입으로 비수를 꽉 깨문 채 가슴과 팔을 얽맨 바줄을 싹싹싹 베기 시작했다. 한식경이나 역사질한 끝에 바줄이 발 앞에 주르르 흘러내렸다. 성호는 한숨을 후- 길게 내쉬었다. 고목 뒤로 꽁꽁 묶은 손목의 바줄을 끊을 방법이 없어 답답했다. 쨩! 이때 채찍소리와 함께 요란한 말발굽소리가 들렸다. “꼼짝 못하고 죽겠구나.” 성호가 중얼거리며 마지막으로 입에 문 비수를 날려 복수하려고 할 때다. “이 부근입니다.” 귀에 익은 몽골족 목소리 아닌가. “아, 저기 고목에 있구나!” 검은 그림자들이 다가왔다. “성호!” 성호가 희미한 달빛을 빌어 살펴보니 뜻밖에도 어둠 속에서 운두라바한과 쑤싼나, 테무치가 말에서 뛰여내리지 않겠는가. “개놈 새끼들!” 운두라바한은 옆구리에서 서슬푸른 반달도를 쓱 뽑아 조심스레 성호의 손목을 묶은 포승줄을 하나, 하나 베버렸다. “됐네.” 성호는 아픈 손목을 매만지면서 “구명은혜 백골난망입니다.”라고 했다. “미안하네. 재수없이 강도를 만나다니. 얼마나 놀랐겠는가? 에이, 참.” 운두라바한은 성호의 어깨를 툭툭 치면서 통쾌하게 말했다. “소와 말을 찾는게 급선무네.” 쑤싼나는 손수건을 꺼내 성호한테 내밀었다. “상처를 닦아요.” 성호가 미안해 손수건을 받지 못했다. 그러자 쑤싼나는 손수건으로 손수 성호 얼굴에 난 채찍 피자국을 닦아주었다. “그 놈들이 소떼를 몰았기에 멀리 가지 못했을거예요. 그 많은 소를 하루 밤새에 다 잡아 처리하기도 힘들게고요.” 그녀는 성호를 위로했다. “소귀마다 구멍을 뚫어놓았으니까. 어떻게 팔아먹는가 두고 보지.” 이윽고 운두라바한은 홰불을 해들고 강도들이 몰고간 소발자국을 따라 뒤쫓아갔다. 한참 눈덮인 초원을 누비며 말을 달려 갈 때였다. 앞에서 말 울음소리가 들렸다. 뒤이어 절주있게 말발굽소리가 점점 가까이 들려왔다. 그들은 말에서 뛰어내려 눈덮인 둔덕에 납짝 엎드려 어둠 속을 눈뿌리 빠지게 살폈다. 운두라바한은 옆구리에서 반월도을 빼들었다. 성호도 비수를 뽑아들었다. 쑤싼나와 테무치는 사냥총에 절컥 장탄했다. 말 한필이 이쪽으로 쏜살같이 뛰여왔다. “우리 집 말이 아냐?” 운두라한이 품에서 소라를 뽑아 들어 불었다. 그러자 백마는 앞발을 쳐들고 “오호홍~” 하고 울더니 네굽을 안고 곧추 이쪽으로 뛰여왔다. “우리 룡혈말이야!” 운두라바한은 기뻐 어쩔줄 몰라했다. “이 놈이 어떻게 돼 도망쳐왔을가?” 쑤싼나의 말은 더 귀맛을 돋구었다. “말도 배필을 찾아 돌아온 거죠.” 아닌게 아니라 룡혈말은 쑤싼나가 탄 암말한테로 다가와 좋다고 서로 핥고 야단쳤다. “멀지 않은 곳에 그놈들이 있을 거 같아.” 운두라바한은 말에 올라 룡혈말을 성호한테 넘겨주고 채찍을 휘둘렀다. “가자!” 도망쳐온 룡혈말은 성호를 태우고 네굽을 안고 쏜살같이 달렸다. 룡혈말은 강도들이 적토마를 끌고 도망친 곳으로 달리는 것 같았다. “아마 우리한테 적토마가 끌려간 곳을 알려주는거 같애. 이전에도 적토마가 잃어졌을 때 룡혈말이 적토마가 사라진 곳으로 데리고 간 적이 있네.” 그들은 룡혈말을 따라 눈덮인 초원을 한창 달렸다. 저 멀리 시내 전등불빛이 보였다. 초원에 잔설도 보이지 않고 누런 사막의 잔등이 드러났다. 이때 갑자기 룡혈말이 우뚝 멈춰서더니 앞발을 쳐들고 요란하게 울부짖었다. 그들은 말을 달려 나가보고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모래불이 흩날리는 모래바닥에 소대가리와 갈비뼈가 무더기로 어지러이 널려 있었다. “이게 웬 일이야?” 운두라바한이 말 잔등에서 굴러떨어지더니 풀썩 땅바닥에 내렸다. 쑤산나와 테무치도 아버지를 따라 뛰여내렸다. “늦었구나!” 성호가 뛰어내렸을 때 운두르바한은 무릎을 꿇고 소대가리를 매만지더니 장탄식했다. 강도들은 단서를 잡힐까봐 소를 잡아 고기만 도려내 가져갔던 것이다. “한두놈이 아닌 것 같아.” 성호는 소 귀를 일일이 살폈다. 몽땅 귀에 구멍이 뚫려 있었다. “아이고!” 성호는 주먹으로 모래바닥을 꽝꽝 쳤다. 그는 눈앞이 깜깜해났다. 어떻게 번 돈인가? 자존심을 다 버리고 고향에 돌아가 몇해 동안 소똥을 온 몸에 바르며 번 돈이 아닌가. 그런데 하루 새에 몽땅 날려 버리지 않았겠는가. 쑤싼나가 옆에서 위안해주었다. “오빠, 근심하지 말아요. 공안기관에 강탈사건을 신고하면 몽땅 나포할 수 있을 거예요.” 운두라바한이 벌떡 일어났다. “맞아, 빨리 파출소로 가자.” 그들은 말에 올라 곧추 진파출소로 달려갔다. 20분도 안돼 파출소 소장에게서 특대강탈사건을 제보받은 형사수사대대  수사대원들이 파출소에 모였다. 그들은 성호와 테무치한테서 사건경과를 상세히 료해한 후 즉시 찌프차를 타고 사건현지로 달려갔다. 모래불이 흩날리는 사막에 이르러 그들은 숱한 소 대가리와 뼈다귀들을 보고 아연실색했다. 수사대대장은 한참 현장을 수사한 후 무겁게 입을 열었다. “보십시요. 여기 자동차 바퀴자국이 나 있지 않습니까.” 모두 여겨보니 잔설이 뒤덮인 모래불 우에 확실히 자동차 바퀴자국이 시내 쪽으로 쭉 나있었다. “강도들은 여기서 소를 잡아 고기만 싣고 달아났습니다. 말고기는 팔아도 얼마 받지 못해 버렸을 수도 있습니다.” 그는 수사대원들을 둘러보았다. “우린 즉시 교통을 차단하고 일체 차량을 수색해 소고기를 밀반출하는 것을 막아야 하오. 내일부터 식당과 시장에 돌아다니면서 소고기를 파는 걸 수사해야겠소.” “옛!” 수사대원들은 분조를 나눠 시내와 교외 교통요로로 자전거를 타고 달려갔다. “성호, 우리 집으로 갑세.” 운두라바한이 뜨거운 손을 내밀었다. 성호는 따라가려고 하지 않았다. “어찌 계속 페를 끼치겠습니까? 구명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운두라바한은 사람좋게 성호의 손을 잡아끌었다. “에이, 사람이. 우린 다 같은 소수민족이요. 한 집안 사람이야. 자네 우리 집 소를 샀다가 이런 봉변을 당했는데 우리 어찌 팔짱 끼고 구경한단 말인가? 날강도들을 잡기 전까지 우리 집에 있게나.” “그래요. 오빠, 우리 집에 가자요.” 쑤싼나에 뒤이어 테무치도 성호를 가자고 했다. “형님과 난 생사를 같이 한 형제요. 가기요.” 운두라바한 일가가 부모형제처럼 열정적으로 대하는 바람에 성호는 운두라바한의 집으로 가서 눌러 있으면서 공안국의 사건수사를 협조했다. 눈보라가 휘몰아치던 동장군이 물러가고 초원에 신록이 짙어갔다. 그러나 사건수사는 아무런 진전도 없었다. 교활한 강도들은 단번에 많은 소고기를 팔면 꼬리를 밟힌다는 것을 알고 장물을 감추고 천천히 처리했거나 당지에서 처리하지 않고 외지에 가져다 팔았을 수 있었다. 몇달 동안 성호는 그저 남의 밥축을 낼 수 없었다. 그는 경찰들을 협조하는 한편  테무치를 도와 말을 타고 초원에서 양과 소를 몰아주었다. “계속 이렇게 눌러있을 순 업지.” 그는 말잔등에 앉아 소떼를 몰면서도 자기를 애타게 기다릴 부모형제와 처자들이 눈 앞에 선히 떠올랐다. 편지를 써놓고서도 우편국에 갈 새마저 없어 미처 인차 고향에 띄우지 못했다. 딸애를 업고 눈물이 그렁그렁해 자기를 바라보는 색시 정희의 새파랗게 질린 얼굴이 삼삼히 떠올랐다. 성호는 인차 도리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내가 어찌 알거지 신세로 고향으로 돌아간단 말인가. 날강도들을 잡기전엔 절대 돌아갈 수 없어.” 그는 말머리를 돌려 저쪽에서 양을 방목하는 테무치를 향해 고함쳤다. “시내 갔다 올게~!” “그래오. 조심하오, 형님~!” 성호는 말을 달려 곧추 진파출소로 달려갔다. 파출소 소장은 이젠 성호와 구면이 됐다. 그는 성호를 보고 땀에 흠뻑 젖은 얼굴을 닦으라고 수건을 주었다. “무슨 새로운 단서라도 있소?” 성호는 수건으로 얼굴을 대충 닦고 벽에 걸어놓았다. “제 보건데 기차역에 가서 더 수사했으면 좋겠습니다.” “뭘?” 소장은 성호한테 김이 몰몰 나는 물컵을 내밀며 눈을 치켜떴다. “강탈사건이 발생한 후 소고기를 외지에 부친 놈이 없는가 수사해보았으면 좋겠습니다.” 파출소 소장은 머리를 끄덕였다. “또 한가지. 려관 주인이 의심됩니다.” 성호의 말에 소장은 주춤 걸음을 멈췄다. “어느 려관 주인?” “매려관 주인.” “뭣 때문에?” 성호는 소장을 마주 바라보면서 무겁게 입을 열었다. “제가 소를 사러 온거 아는 사람은 매려관 주인 밖에 없습니다.” 소장은 한걸음 다가서며 물었다. “매려관 주인과 소를 사러 왔다는 걸 말했댔소?”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럼?” 성호는 물컵을 들어 한모금 마시고나서 뒤말을 이었다. “매려관 주인은 제가 장사하러 온 걸 알 수도 있습니다.” “참, 그럴 듯한데. 자네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가?” “장백산 기슭의 목동출신입니다.” 소장은 도리머리를 젓더니 홱 돌아섰다. “좋소. 돌아가오.” 성호가 파출소에서 나오면서 볼라니 소장은 다른 칸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뒤이어 숱한 경찰들이 소장과 함께 찌프와 자전거에 갈라타더니 어디론가 쏜살같이 달려갔다. 한참 후 경찰들은 빈손으로 돌아왔다. 교활한 날강도들은 기차역에 가서 소고기를 부치지 않았던 것이다. 사복한 경찰들이 매려관방에 가서 몰래 여기저기 살펴보고 려관방 주인의 눈치를 관찰해봐도 털끝만한 단서도 잡지 못했다. 난항을 겪게 돼 수사는 장기화될 가능성이 높게 됐다. 운두라바한은 성호를 보고 “소값을 절반 돌려주겠네. 자네나 나나 그저 재수없다고 생각하면 되오.”라고 하더니 궤짝에서 돈묶음을 꺼냈다. “이러지 마십시오.” 인심이 후한 운두라바한은 기어이 다 받지 않겠다고 고집했다. “우리 몽골족들은 의리를 중히 여기네. 이 돈을 받지 않으면 당장 우리 집을 떠나게나. 사람이 남의 마음을 받아줄도 알아야지.” 성호는 기어이 받으려고 하지 않았다. “지금 급선무는 날강도를 붙잡는 겁니다.” 운두라바한은 주춤 손을 멈추며 잠간 궁리하더니 무겁게 입을 뗐다. “날강도를 붙잡으려면 아마 시간이 걸릴 거 같네. 이걸로 수사경비로 쓰게나.” 운두라바한이 고집하자 성호는 더는 사양할 수 없게 됐다. “그럼 이렇게 합시다. 3천원만 먼저 선대주세요.” “아니, 다 받게. 우리 집에 와서 방목하느라고 수고했네.” 성호는 기어이 3천원만 받았다. “공안국에선 날 보고 매려관방에 가 주숙하면서 날강도들의 행방을 찾아보라고 했습니다. 이 돈을 주숙비와 식비로 잘 쓰겠습니다.” “그래, 진작 그래야지.” 운두라바한은 사막의 풍설에 시달린 얼굴의 주름살마저 쭉 펴지게 웃음을 지었다. 공안국에서는 사복한 경찰들이 매려관에 장기적으로 주숙해 수사할 수 없었다. 그들은 대신 성호를 보내 매려관을 감시하게 했다. “안되네.” “예?” 뜻밖에 운두라바한이 손사래를 쳤다. “생각해보게나. 만약 그 놈들이 강도라면 자네가 나타나면 경계할게 아닌가? 위험하네.” 성호는 머리를 끄덕였다. “예~ 건 생각지도 못했는데.” “이렇게 합세.” 운두라바한이 나섰다. “내 가서 살피면 어떨가?” “아무리 위험해도 제가 가야 합니다.” 성호가 고집을 쓰자 운두라바한은 한참이나 창문가에 서서 바깥의 푸르른 초원을 내다보면서 궁리했다. “됐네!” 운두라바한이 무릎을 탁 쳤다. “어째 생각이 돌지 않았을가? 매려관 뒤집에 내 매형이 있네. 매형집에 가서 주숙하면서 감시하든지 아니면 내 매형을 시켜 감시하게 하든지?” “그게 좋을 것 같습니다.” 해가 지기를 기다려 성호는 운두라바한과 함께 어두운 밤장막을 헤가르면서 운두라바한의 매형 집에 들어갔다. 운두라바한의 누이 운드라나와 매형 우란크한은 성호를 반갑게 맞았다. 애들은 모두 대학을 졸업하고 외지 대도시에서 일한다고 했다. 세칸 벽돌집은 꽤나 널직고 방이 여러개 돼서 성호가 들어 있어도 불편하지 않을 것 같았다. 성호는 그날 밤부터 어둠컴컴한 골목에 숨어서 매려관방 주인 조발귀를 감시하기 시작했다. 이른 봄인지라 새벽녘에는 꽤나 쌀쌀했다. 첫날 밤에는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이튿날 밤 9시만에 뚱뚱하게 생긴 사람 둘이 려관방에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밤중에도 려관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경계심이 든 성호는 발볌발볌 려관방 토성 가까이에 다가가 몸을 훌 날려 토성을 날아넘어갔다. 그는 고양이처럼 울 안에 살짝 날아내려 전등불이 환한 려관방 창문께로 살금살금 다가갔다. 벽에 착 붙어서서 려관방 창문으로 살며시 들여다보았다. 뚱뚱하게 생긴 두 사람은 방 안에서 량 침대에 갈라누워 뭐라고 두런두런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조선말로 대화하는 것 같았다. 성호는 벽에 몸을 찰싹 붙이고 귀를 도사려 방안의 말소리를 들었다. “참 재수없어. 요즘 소장사를 하러 다니는 놈들도 없지. 우린 뭘 뺏아먹고 산다오?” “주인집 령감은 숱한 소고기를 김치움에 숨겨두고 안줘.” “개자식, 정 더럽게 놀면 저 놈부터 털어 먹자.” “얘, 토끼도 굴어귀 풀을 먹지 않는다. 괜히 꼬리 밟히겠어.” “목장에 가서 룡혈말을 둬마리 훔쳐내오면 어떨가?” 순간 성호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날강도들이구나!” 성호는 하마트면 고함칠번했다. 그는 슬금슬금 마당에 있는 김치움에 다가갔다. 덮개에 자그마한 자물쇠가 당그라니 채워져 있지 않겠는가. 그는 사위를 두리번거리다가 품에서 쇠집게를 꺼내 자물쇠 고리를 비틀어 뜯어버린 후 덮개를 슬쩍 열고 김치움에 손쉽게 들어갔다. 손전지로 여기저기 비추었다. “아니!” 성호는 깜짝 놀랐다. 어둑컴컴한 김치움에 엄청 큰 랭장궤가 줄느런히 늘어서 있었다. 랭장궤를 열어보니 언 소고기가 차고 넘치지 않겠는가. 다른 랭장궤도 일일이 열어보아도 몽땅 언 소고기로 채워져 있었다. 성호가 김치움에서 나왔을 때까지도 방 안에서는 계속 두런두런 주고받는 말소리가 들렸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고 듣는다는데. 헛소릴 작작 쳐라!” “별 소릴! 형님, 여기 몽골초원에서 누가 우리 말을 알아듣는답데. 흥!” “전탕 도깨비 궁리만 해? 이제 꼬릴 잡히면 총살당할 판인데. 숱한 돈을 해서 뭘 해? 목숨이 더 커.” “돈이 있어야 살지. 사막에서 누가 공 먹여준대?” “야, 벽에도 귀 있어.” “사람이 한번 죽지 두번 죽소?” “계속 개소릴 치겠어?” “하, 곤하구나. 자자.” 보아하니 그 자들은 형제간 같았다. “오줌이나 누구 자자.” 한 놈이 일어나 복도로 나갔다. 그런데 어디서 본 적이 있는 것 같았다. “아니, 저게?!” 깜짝 놀란 성호는 구새목으로 돌아가 옆구리에서 대화기를 꺼내 들었다. 파출소 몽골소장이 유사시에 쓰라고 준 대화기였다. 그는 어둑컴컴한 울안 주위를 둘러보면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매려관에 쥐가 있다. 속히 출마하라.” “누구얏!” 갑자기 창문이 벌컥 열리면서 뚱뚱한 놈이 뛰쳐나왔다. 성호는 구새목에서 날아나가 그 자를 차넘겼다. 땅! 야무진 총소리가 고즈넉하던 밤정적을 깨뜨렸다. 그 자가 총을 쏘았다. 성호는 몸을 날려 토성 밖으로 날아넘어갔다. “도적이야!” 총을 쏜 자가 고함쳤다. “쳇, 도적이 ‘도적이야’를 고함쳐?” 성호는 두덜거리면서 옆구리에서 비수를 뽑아들고 매려관을 노려보았다. 이때 경찰들이 우르르 뛰여왔다. 파출소 소장은 매려관방 대문어귀에서 성호를 만나 간단히 정황을 들었다. 땅! 땅! “돌격!” 십여명 경찰들은 일제히 대문 안으로 쳐들어갔다. “경찰이야!” “투항하면 관대히 처리한다!” 경찰들은 매려관을 포위하고 고함쳤다. 총을 쏜 자들은 독 안의 쥐 신세로 됐다. 려관방 안에서 고함쳤다. “우리도 경찰이야!” “오해하지 말고 총을 거둬라!”  “경찰?! 그럼 총을 내던지고 나오라!” 파출소 소장은 의아해 머리를 버릇처럼 갸우뚱했다. “그러지. 우린 흑룡강성에서 온 경찰이야!” “뭘 하려고 여기 왔어?” “소도적을 붙잡으려고 왔습니다.” “총은 왜 쐈어?” “웬 수상한 놈이 려관방을 기웃거리다가 오줌 누러 나간 동생을, 아니, 동료를 다짜고짜로  발길로 찼어…” 파출소 소장은 그래도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그래? 그럼 경찰증을 내던져!” “그러지.” 방 안에서 창문을 열고 뭔가 내던졌다. 한 경찰이 창문 전등불빛을 빌어 어둠 속을 헤집고 손바닥만한 종이쪼박을 주어왔다. 소장이 전지불을 켜들고 그 종이쪼박을 찬찬히 보니 소개신이였다. “뭐? 파출소 소장 리봉수와 리성수?” 그는 중얼거리면서 소개신을 재차 확인하였다. 틀림없었다. 공안국에서 떼준 소개신이였다. “오해했군. 미안해.” 파출소 소장은 총을 옆구리에 찔러넣고 뒤를 돌아보았다. “안으로 들어가 봅세.” 경찰들은 총을 거두고 매려관에 들어갔다. 조발귀는 경찰들을 보자 반색했다. “야, 간이 다 떨어지겠어. 밤중에 웬 총소린가 했지.” 소장은 옆에 선 경찰을 보고 뭐라고 귀띰했다. 그러자 그 경찰은 조발귀를 데리고 저쪽으로 갔다. 소장 일행이 매려관방 안에 들어섰을 때 확실히 경찰복을 입은 뚱뚱한 두 사람이 총을 옆구리에 찌른채 서 있었다. 옆구리를 여겨보니 분명 77식자동권총이였다. “당신들은 왜 우릴 진공했는가?” 뚱뚱한 자의 항의에 소장은 “하하하.” 하고 통쾌하게 웃었다. “미안하오. 오해했구만.” “려관 주인이 우릴 파아먹었단 말이요?” “형님! 무슨 말이요? 신고했겠지.” 동생이란 자가 소장한테 물었다. “뭐라고 신고했는가? 온 파출소가 다 출동했구만.” 성호는 자기 추측을 의심하지 않았다. (금방 동료라더니 “형님”, “동생?” “소장사군이 없어 뭘 뺏아먹고 살겠는가?”) 동생인 듯한 사람이 말을 받아 얼렁뚱땅 둘러댔다. “실은 이 근방에서 소강탈사건이 발생했다더구먼. 그런데 들어보니 우리 고장에서 생긴 소강탈사건과 범죄수단이 비슷하단 말입니다. 그런 놈을 잡자면 소장사군이 있어야 미끼를 늘여서 강도들을 잡을 수 있지요.” 형이란 사람이 맞장구를 쳤다. “예~ 그렇죠. 절대 오해하지 마십시오.” “려관방 주인네 김치움에 숱한 소고기가 있다는 건 어떻게 아오?” 동생인 듯한 사람이 대답했다. “어느 하루 김치생각이 너무 나 주인 몰래 가만히 김치움에 들어가 본 적이 있습니다.” “그래?” 소장은 경찰들을 둘러보고 “됐군. 갑세.” 하고나서 그 두 사람을 놔두고 경찰들을 데리고 김치움으로 갔다. 김치움 덮개를 열고 전지불로 비춰보던 소장은 깜짝 놀랐다. 글쎄 지하창고 같은 널다란 김치움에 숱한 냉장고까지 갖춰놓았다. 경찰들이 사닥다리를 타고 들어가 랭장고마다 돌아가면서 문을 열고 보니 숱한 소고기를 무더기로 쌓아둔 것이 아니겠는가. 그들은 모두 입이 딱 벌어지고 말았다. 그들은 려관방 주인 조발귀를 파출소에 련행했다. “아니, 무슨 죄 있다고 이러는가?” “파출소에 가면 알 거요.”  옆에서 흑룡강성에서 왔다는 두 경찰은 시무룩이 웃었다. 조발귀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경찰들을 따라 가면서 자기 집에 들었던 파출소 소장이란 사람을 흘겨보았다. 흘겨보는 그 눈길은 마치 “네 놈들이 뭐라고 고발했지?” 하고 말하는 상 싶었다. 흑룡강성의 두 경찰은 씨무룩이 웃으면서 몽골족소장을 힐끔 곁눈질했다. 그때 어둠의 장막 속에 숨었던 성호가 흑룡강성에서 왔다는 경찰 둘을 찬찬히  뜯어보다가 자기 눈을 의심할 정도로 놀랐다. (아니, 저자가 혹시…) 아무리 재차 눈여겨보아도 맞는 것 같았다. 그는 당지 파출소 소장의 곁에 다가갔다. 그는 소장의 귀에 손을 대고 뭐라고 귀속말을 했다. “뭐라고?” 소장은 흑룡강성에서 온 두 경찰을 보고 뜻밖의 말을 했다. “당신들도 파출소에 가야겠소.” “예?” 의아해하는 두 경찰을 보고 소장은 분명히 말했다. “확인할게 있소.” “뭘?” 그 자는 성호를 쏘아보더니 조선말로 “당신 뭐라고 했기에 이 자들이 이러오? 조선사람끼리 물어먹겠는가?” 하고 따지고 들었다. “귀신은 속여도 날 못 속여. 순순히 쇠고랑이를 차지 못해?” 두 놈은 불찌가 튀는 눈길로 성호를 쏘아보았다. “파출소로 가자!” 소장이 손을 홱 휘두르며 몽골말로 웨치자 몽골족경찰들이 그 자들을 에워싸며 파출소로 련행했다.  조발귀는 억울하다고 꽥꽥 고함쳤다. “무슨 죄 있다고 이래?” “파출소에 가서도 억울하다고 고함치겠는가?” 구경 어떤 놈들인지? 숱한 의문부호가 어둑컴컴한 초원의 하늘에 날아내려 꽂혔다.                                                                                      41. 외나무다리에서 만난 원쑤 무시무시한 공포가 반죽된 칠흑같은 어둠이 해살을 다 갉아먹었다. 달도 어둠에 핥키워 처참하게 반쪽 얼굴 밖에 남지 않았다. 당장 뭔가 폭발할 듯한 위기일발의 순간이 긴장한 심장박동들과 함께 높뛰며 흘러가고 있다. 푸르른 초원으로 부엉이 한마리가 어둠 속에서 깃을 치며 푸드득 날아옛다. 쥐들과 뱀은 질겁해 어둠 속에 숨어버렸다. 그러나 어찌 부엉이의 예리한 눈길을 피할 수 있겠는가! 부엉이는 날카로운 발톱으로 어둠 속에서 할딱거리며 요리조리 도망치는 노랑쥐를 탁 챘다. 또 다른 부엉이가 나무에 기어올라가는 뱀의 허리를 날카로운 발로 탁 채 하늘로 올라갔다. 땅! 땅! 야무진 총소리가 고요한 어둠의 정적을 깨드렸다. 소장이라고 자처하던 자가 불시에 옆구리에서 권총을 뽑아 성호를 쏘았다. 성호는 허리를 굽히며 발길을 날려 권총을 걷어찼다. 그 놈이 재차 성호를 겨누는 순간 경찰들이 쏘았다. 땅! “아이쿠!” 그 놈이 총을 떨어뜨리며 손목을 부여잡았다. 땅! 그 놈이 허벅지를 잡으며 쓰러지더니 재차 총을 쏘았다. 땅! 동시에 다른 놈도 권총으로 몽골족소장을 겨누었다. 그 찰나 경찰들이 욱 몰려들어 그 자들을 사격했다. 그 놈들은 땅바닥에 쓰러져서도 연속 방아쇠를 당겼다. 절컥! 절컥! 그러나 격침소리만 들릴뿐. 몽골족소장은 그 놈을 깔고 들어앉아 권총을 빼앗아냈다. 성호가 잽싸게 덮쳐들어 동생이란 놈의 손목을 꽉 밟고 권총을 빼앗아냈다. 이 두 놈은 어떤 놈들일가? 파출소에 끌려간 그 놈들은 헐레벌떡거리다가도 땅이 꺼지게 한숨을 내쉬였다. “여기까지 쫓아왔어? ‘정의용사’. 허허허. 이런 내몽골 초원에서 네놈을  만날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구나.” 소장이라고 자처하던 놈이 성호를 쏘아보면서 조선말로 한탄했다. “허튼 소릴 작작 쳐. 죄행이나 낱낱이 탄백해.” 성호는 한어로 호통쳤다. 그 놈은 이를 뿌득뿌득 갈았다. “내 저승에서 염라대왕이 돼서라도 네놈을 갈기갈기 찢어놓을 거야.” 성호는 너털웃음을 웃었다. “내몽골초원이 아니라 하늘끝까지 도망쳐봐. 염라대왕도 용서하지 않아.” 몽골족 소장은 경찰들을 보고 두 놈의 몸을 샅샅이 수색하라고 지시했다. 경찰들은 두 놈의 허리춤에서 총알을 촘촘히 박아넣은 탄띠를 수색해냈다. 또 려관에서 숱한 돈묶음을 넣은 가방도 수색해냈다. 몽골족소장은 지명수배령을 꺼내 흉수 초상화와 소장이라는 자의 퉁퉁한 낯을 한참 대조해보고나서 77식권총을 뽑아 사무상에 꽝 내려놓았다. “네 놈들이 바로 YJ시 백화청사에서 살인강탈하고 도망친 날강도놈들이구나.” “뭐라고?” 소장이라는 자가 짐짓 놀라는 척했다. “백화청사 보위 과장 조흥수! 쥐새끼 같은 놈, 껍대기를 벗겨놔도 초원의 매 눈을 속이지 못해. 뭐? 흑룡강성에서 온 파출소 소장? 퉤!” 몽골족소장은 77식권총을 쳐들었다. “이건 어데서?” “…” 몽골족소장의 얼굴에 비웃음이 반죽돼 흘렀다. “조흥수, 비겁하게 놀지 말고 사실대로 탄백해라. 며칠이라도 발편잠을 자라구.” 조흥수는 코방귀를 “흥!” 뀌였다. “자, 어때? 밤도 깊었으니 툭 털어놓고 푹 자게나.” 조흥수는 마른 입술을 감빨더니 입에 꽂은 빗장을 천천히 뺐다. “찬물이나 주게.” “그래!” 조흥수는 경찰이 호로박에 퍼온 찬물을 받아 꿀떡꿀떡 들이켰다. “다리 총상을 처치해주면 말하지.” 몽골족소장은 경찰한테 몽골어로 뭐라고 부탁했다. 이윽고 법의가 들어와 흥수의 총상을 처치했다. “자, 시작하지. 저자는 누군가?” 그 자가 끝내 입을 열었다. “조길수요.” “형젠가?” 조흥수가 대답했다. “내 동생이야. 난 백화청사 살인강탈사건과 관계없네.” “아직도 떼를 쓸텐가?” 몽골족소장은 자리에서 일어나 조흥수한테 다가갔다. “죄 없는 자가 왜 총을 휘둘러? 권총은 어디서 난 건가?” 몽골족소장은 조흥수 낯빤대기에 대고 삿대질했다. “네놈은 권총으로 나하구 조선족증인을 죽이려 했어. 이미 살인미수죄를 졌어.” “흥! 어느 사람이 한번 죽지 않는가? 다만 사내대장부로서 승냥이무리과 멋지게 싸우다 죽지 못하는 것이 한일뿐.” “누가 흉수인가?” 몽골족소장이 아무리 심문해도 조흥수와 조길수는 한마디도 탄백하지 않았다. “참 지독한 놈들이구나.” 경찰들은 조흥수 형제를 류치장에 처넣고 주먹만큼한 자물쇠를 절컥 채워놓았다. 몽골족소장은 두덜거리더니 안방으로 들어가 즉시 상급 공안국에 전화로 사건해명정황을 회보했다. 뒤이어 그는 매려관 주인 조발귀를 끌어냈다. “낱낱이 탄백햇!” “무슨 죄 있다고 이러는가?” 몽골족소장은 조발귀를 쏘아보았다. “김치움의 숱한 소고기는 어디서 난 건가?” 뚱뚱한 조발귀는 벌떡 일어났다. “손님을 대접하려고 사둔 거요.” “누구한테서 샀어?”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왜 그렇게 많이 감춰뒀어?” “감춰두다니? 생 사람을 작작 잡으라고.” “로실히 탄백햇! 소고기 어데서 난 건가?” “아니, 건 확실히 산 거요.” 꽝! “식당도 아닌데 웬 숱한 소고긴가?! ” “눅게 팔기에 샀소. 정말이네.” “소고기를 판 놈들을 대라.” “모를 사람인데 어떻게 대라는가?” 조발귀는 황급히 둘러댔다. “면목 모를 사람이 당신 곱다고 숱한 소고길 눅게 팔아?” 몽골족소장은 사무상을 꽝 치면서 벌떡 일어났다. “누구와 공모해 소를 강탈했어?” “공모했다고? 진짜 생사람 잡네.” 몽골족소장은 태연한 척하는 조발귀의 삐죽한 코대에 대고 삿대질했다. “분명 네놈이 강도무리에 저 조선족청년이 소 사러 간다는 걸 알렸지?” “그날 근본 려관을 떠난 적이 없습니다.” “그래, 아직도 강탈사건이 벌어진 날을 기억할 수 있어?” “난 똑똑히 기억합니다. 믿지 못하겠으면 우리 려관에 가서 조사해보십시오. 려관 명세장에도 똑똑히 적혀 있습니다. 그날 손님이 어찌나 많은지 려관에서 한발자국도 나가지 못하고 뺑뺑 맴돌았댔습니다.” “그래, 날강도들을 불러들였으니까. 손님이 많았을테지.” “아이구, 왜 이럽니까?” 몽골족소장은 손끝으로 조발귀 턱을 쳐들면서 을러멨다. “로실히 탄백해. 아무리 떼를 써도 이 어른께 꼬리를 밟혔어. 강도들 용모파기를 다 기억하는 증인이 둘이나 살아 있어? 이제 면접하면 몽땅 드러날 걸.” 조발귀는 점점 대가리를 숙였다. “어떤가?” 몽골족소장은 하품을 하더니 “에이, 탄백하지 않겠으면 말아. 곤해 죽겠다.”라고 하더니 고함쳤다. “이 놈을 류치장에 처넣게. 관대히 처리받기 싫으면 말라지.” “저 소장님!” “왜?” 조발귀는 뭔가 말할 상 싶었다. 그러나 몽골족소장의 무서운 얼굴이 돌아서는 순간 침을 목구멍으로 꿀꺽 삼켰다. 몽골족 소장은 “총살당하고 싶으면 그만둬.” 하고 끌어내라고 손짓했다. 조발귀는 흘끔 몽골족소장을 훔쳐보더니 류치장으로 순순히 들어갔다. 그날 밤으로 수사대대에서 수사대원들이 달려왔다. 한어와 몽골어가 뒤섞여 들렸다. 몽골족소장한테서 회보받은 수사대대 지도부에서는 정황을 분석하고 성호와 테무치가 제공한 강탈범들의 용모파기에 근거해 모이초상화를 그린 후 수사대원들과 파출소 경찰들에게 나눠주고 구체적인 수사임무를 포치했다. 수사범위는 축소돼 조발귀 친척과 친구들 그리고 그와 사회관계가 있는 자들한테로 집중됐다. 다른 한편 수사대원들은 류치장에서 백화청사 특대살인강탈참사 중요 혐의자 조흥수와 조길수를 압송해 감옥에 처넣었다. 그들은 YJ시 공안국에 통지해 조흥수와 조길수를 이송하기로 했다. 이튿날 아침, 푸르른 초원에 아침해가 어둠을 불사르며 불끈 솟아올라 대지에 밝은 해살을 눈부시게 비추었다. 몽골족소장과 경찰은 우전국에 가서 참사발생 당날에 매려관의 전화와 통화한 전화번호부터 일일이 장악했다. 이웃 맹에서 걸어온 전화가 제일 많았다. 수사초점은 즉시 이웃 맹에로 집중됐다. 그들은 이웃 맹공안국 협조하에 즉시 자그마한 진에 있는 그 전화의 주인을 찾아냈다. 천라지망이 범죄혐의자들을 점점 조여갔다. 몽골족대대장은 새로운 정황에 근거해 직접 조발귀를 심문했다. “탄백햇! 우린 모든 증거를 장악했다.” “모르오. 소고기를 샀을뿐이라니까.” 조발귀는 퉁퉁한 낯빤대기마저 바위돌처럼 땅땅 굳어 있었다. 그는 낯빤대기 수수떡처럼 지지벌개서 단마디에 딱 잡아뗐다. “리귀, 칭키싸치, 마룡, 잘 알지?” “예?!” 조발귀는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기까지 했다. “앉엇!” 몽골족대대장은 날카로운 심문의 비수를 찔렀다. “리귀랑 몽땅 탄백했네. 아직도 생떼를 쓸텐가?” 조발귀는 낯에 흐르는 식은 땀을 쓱쓱 닦았다. 무릎 우에 놓은 두 손이 사시나무 떨듯 했다. “왜 탄백하지 않는가? 한평생 감옥에서 징역살이를 하겠는가? ” 조발귀는 땅바닥에 넙쩍 꿇어앉았다. “죄다 탄백하겠습니다. 관대히 처리해주십시오.” 조발귀는 개기름이 번드르한 퉁퉁한 낯빤대기에 돋은 식은땀을 팔소매로 연신 닦으면서 탄백하기 시작했다. “사실 난 소떼를 직접 강탈하진 않았습니다. 살려주십시오.” 조발귀는 리귀랑 나포됐다는 말에 탄백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나는 우리 려관에 온 조선족청년이 별로 큰 장사군인 것 같아 강탈할 궁리를 했습니다. 때마침 외사촌동생 마룡과 그의 친구들인 칭키싸치와 리귀가 찾아왔댔습니다. 그들은 술만 처마시면 시내에서 싸움질이나 하는 건달들입니다.  우리 려관에 진 주숙비와 식사비라도 받자고 그들을 보고 성호 뒤를 밟아 강탈하면 어떤가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 셋은 초원으로 가는 성호를 미행해 강탈했습니다.” 조발귀는 여기까지 말하고 두 손을 싹싹 빌었다. “장관, 제발 살려주십시오. 난 진짜 강도질하지 않았습니다. 마룡을 보고 소떼만 빼앗고 절대 성호랑 죽이진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잖으면 성호 지금까지 살아있었겠습니까?” 소뿔은 당긴 김에 빼라고 이때라고 몽골족대대장은 다잡아 심문했다. “숱한 소고기를 어디로 빼돌렸는가?” “예, 예, 다 탄백하겠습니다.” 조발귀는 입이 터진 바에 낱낱이 탄백했다. “나는 숱한 소를 통채로 팔면 꼭 꼬리를 밟힐 것 같아 그날 밤으로 몽땅 잡아서 고기만 자동차에 실어 왔습니다. 일부는 려관 김치움에 감췄고 나머진 몽땅 마룡이네 집에 실어갔습니다.” “적토마는 어쨌는가?” 몽골족소장의 심문에 조발귀는 속임없이 탄백했다. “마룡이 제 집으로 끌어갔습니다. 룡혈말은 우리 소를 잡는 새에 달아났습니다.” 조발귀는 한숨을 후~ 내쉬였다. “더 탄백할게 없는가?” 조발귀는 몽골족대대장을 흘끔 쳐다보면서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없습니다.” “탄백하지 않은 죄행이 있으면 낱낱이 탄백해라.” “예, 예.” 조발귀는 류치실에 끌려갔다. 몽골족대대장은 사무실에 돌아가 즉시 이웃 맹공안국에 전화로 강탈범죄혐의자 리귀와 마룡, 칭키싸치 등의 죄행을 통보했다. 며칠 후이웃 맹공안국의 협조하에 경찰들은 강탈범들을 몽땅 나포했다. 심문한 결과 조발귀의 탄백과 똑 같았다. 뒤이어 경찰들은 그 자들의 집에서 아직도 팔다 남은  소고기를 들춰냈으며 마룡이네 집에서 적토마도 찾아냈다. 강탈범들인 조발귀, 마룡, 리귀, 칭키싸치를 기다리는 것은 인민법률의 호된 엄벌뿐이였다. 성호는 시내 미술가게에 가서 축기를 만들어 형사수사대대와 파출소에 각각 드렸다. 그 축기에는 몽골어와 조선어로 다음과 같은 금빛 글발이 새겨져 있었다.   인민 위해 날강도들을 나포해 인민경찰의 위엄을 만천하에 떨쳤네   성호는 강운룡 과장의 귀띰을 듣고 당지 법원에 조발귀, 리귀, 마룡, 칭키싸치 등을 상대로 손해배상에 관한 민사소송을 제기했다. 당지 공안국에서는 백화청사 살인강탈사건과 소강탈사건을 해명하는 전역에서 중대한 공훈을 세운 리성호에게 “정의용사” 상패를 수여했다. 당지 법원에서는 또 다음과 같은 판결을 내렸다. “…강탈범 조발귀, 리귀, 마룡, 칭키싸치는 성호에게 손해금 도합 1만 5천원 배상해야 한다”. 법원에서는 강탈범들의 려관과 집을 강제판매해 일주일도 안돼 성호의 손에 배상금을 쥐워주었다. 법원에서는 또 강탈범들에게 각각 집단강탈형사범죄에 대한 상응한 징역형으로 엄벌에 처했다. 당시 이름이 더럽혀진 매려관을 사려는 사람이 인차 나지지 않아 운두라바한이 선뜻이 나섰다. 그는 성호를 보고 말했다. “이젠 소나 양만 키워선 살기 어려운데 려관방을 사야겠네. 쑤싼나 대학을  나오면 고향에서 려관이나 경영하게 할 예산이네.” 때마침 방학이기에 쑤싼나가 고향 초원에 돌아왔다. 그녀는 생글방글 웃음꽃을 피우면서 기뻐 어쩔줄 몰라했다. “오빠, 이담 우리 초원에 또 놀러 오세요. 그땐 저의 려관에 잘 모실게요. 따끈따끈한 쑤유차도 드릴테요.” “감사해.” 성호도 운드라바한을 돌아보더니 통큰 속셈을 내놓았다. “이러면 어떻습니까? 제가 려관에서 나온 배상금으로 소를 더 사겠습니다.” “또?” “예. 난 이번  걸음에 꼭 소를 사다가 성공하고 싶습니다. 그래야 고향에 계시는 부모형제들과 마을사람들을 볼 면목이 있을 거 같습니다.” “그래, 그럼 서로 좋지.” 성호는 수사비용으로 받았던 3천원에 감사비로 천원도 운두라바한한테 돌려주었다. “아니, 이거 되받을 수 없어.” “감사합니다. 정말 이번에 아저씨 일가가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사건을 해명하는 날을 보지 못했을 겁니다.” 성호는 운두라바한 일가에 진심으로 우러나오는 감사를 드렸다. “이담 우리 고향에 놀러 오십시오. 꼭 장백산을 구경시켜드리고 싶습니다.” “감사하네.” 이튿날 성호는 룡혈말을 타고 운두라바한 일가와 함께 소떼를 몰고 역으로 나갔다. 당지 공안국에서 나서서 화물차바곤을 미리 련계해 주어 아주 손쉽게 30여마리 소를 화물차에 부쳐보낼 수 있게 됐다. 성호는 눈물이 글썽해 운두라바한과 악수를 나누었다. “이제 갈라지면 언제 다시 보겠는가?” 운두라바한의 말에 성호는 뜨거운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꼭 만날 날이 있을 겁니다.” 그는 량손으로 쑤싼나와 테무치의 손을 꼭 잡고 흔들었다. “꼭 우리 고향에 놀러오너라.” 성호는 품 속에서 비수를 뽑아 테무치한테 주었다. “기념으로 받아라. 이 비수를 보면 날 보는 것과 같아.” “감사하오. 형님.” 테무치는 성호의 손을 잡고 놓을줄을 몰랐다. 쑤싼나는 쌍까풀눈에 글썽했던 눈물을 외씨같이 걀죽한 얼굴에 주르르 흘리면서 새하얀 하다를 성호의 목에  걸어주었다. “오빠, 우리 초원을 잊지 마세요. 아주머님이 얼마나 속이 탔겠어요. 아주머님한테 우리 몽골족일가의 문안을 전해주십시오.” “그래. 조선족청년의 절을 받으십시오.” 성호는 운두라바한 일가를 향해 태산이 무너지듯 넙쩍 엎드려 절을 꾸벅 올렸다. 초원의 풍설에 부대껴 터실터실한 주름살이 밭고랑같이 깊이 패인 운두라바한의 자애로운 얼굴을 바라보며 마음이 찡해나 뜨거운 눈물로 두 볼을 적셨다. 룡혈말에 오른 성호는 귀로에 올랐다. 그는 눈덮인 초원에 왔다가 반년 넘어 록음이 짙은 푸르른 초원을 떠나게 됐다. 푸르른 초원의 하늘을 훨훨 날아예는 매를 방불케 하는 운두라바한, 그의 깊은 은정과 의리에 저으기 감동됐다. 쑤산나와 테무치, 운두르바한은 룡혈말을 타고 먼지를 뽀얗게 흩날리면서  달려가는 성호가 흑점으로 돼 아물거릴 때까지 손을 저었다. 푸르른 초원을 배경으로 성호와 쑤싼나 일가의 석별의 정이 무더위를 부시면서  빛나고 있었다. 푸른 초원으로 매가 나래를 쫙 펴고 푸르른 하늘을 헤가르며 훨훨 날아가고 있었다.           
154    대하소설 진달래 소야곡(20) 댓글:  조회:1385  추천:0  2018-07-30
                         38. 백화청사의 참사 선들선들 가을바람이 불던 가을이 흘러지나가자 대지를 꽁꽁 얼궈버리는 동장군이 기승스레 휘몰아치는 눈보라를 등에 업고 사납게 덮쳐왔다. 승호는 범송을 시켜 겨울철에 잘 팔리는 동복을 백화청사에 구입해 오게 하고 조흥수와 함께 아가씨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질탕하게 놀았다. 조흥수는 승호한테  진짜 푹 삶겨서 삶은 개다리처럼 문문하게 돼버렸다.  안수련 총경리는 한눈을 뜨고 한눈을 감아버렸다. 그녀는 흥수와 승호가 자기 앞의 일만 다하면 사무실에 엉덩이를 붙이지 않아도 괜찮다고 여겼다. 어떤 직원들은 안수련 총경리야 말로 시대를 따르는 인성화된 관리리념을 가진 훌륭한 관리일군이라면서 녀시장을 해도 될 분이라고 춰올렸다. 조흥수와 리승호는 안총경리가 눈을 감아주는 틈을 타서 고삐를 끊은 들말처럼 아가씨들과 함께 술에 곤드레만드레 취해 돌아다녔다. 직원들은 뒤에서 의론이 분분했다. “조과장과 리과장은 세상 상팔자야.” “날마다 술만 처마셔도 로임은 로임대로 타지. 얼마나 좋겠어?” “상금도 누구보다 더 많이 타잖아.” 춘란은 뒤공론을 들으면서도 못들은 척했다. 그녀는 조흥수한테 꼬리를 밟혀 보기만 해도 소름이 끼쳤다. 교활한 조흥수는 춘란의 꼬리를 밟고서도 안수련 총경리나 공안국에 사건을 진상대로 보고하지 않았고 한사코 춘란을 비호하였다. 비록 안수련 총경리의 신고로 수사대대에서 착수했지만 춘란의 저금통장에 나타난 1500원만으로는 절도혐의자라는 증거가 부족했다. 법망의 시야에서 잠시 벗어난 춘란은 대신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했다. 조흥수는 쩍하면 그녀를 은밀히 불러내 질탕하게 유린하고 릉욕했다. 어느날, 조흥수는 춘란을 보고 퇴근하면 이전에 만났던 선녀음식점에서 만나자고 했다. 조흥수는 필경 반정탐능력을 가진 파출소 소장출신이기에 매사에 신중했다. 그녀는 아가씨들을 데리고 놀아도 선희나 해연과는 순희네 불고기점에 데리고 가서 망탕 놀아댔고 춘란과는 항상 선녀음식점 단칸방에서 은밀히 만나 놀군 했다. 춘란은 이젠 출납이고 뭐고 다 팽개치고 백화청사를 훌 떠나고 싶었다. 그러나 알맞는 일자리가 없어 아직 떠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왜 이리 늦었어?” 춘란이 선녀음식점 단칸방에 들어서자 조과장은 눈알을 희번뜩거리며 화부터 냈다. “미안해요. 현금을 금고에 가져가다나니….” “그래? 여기 와 앉어.” 조과장은 춘란의 엉덩이를 끌어당겨 자기 무릎에 앉히더니 와락 끌어안았다. 춘란은 독사한테 휘감긴듯이 온몸이 오싹해나고 몸서리쳤다. 그러나 용빼는 수가 없어 눈을 지그시 감고 잠자코 있었다. “날마다 현금을 금고에 가져가야 되냐?” 조과장의 손은 너절하게 춘란의 몸을 오르내렸지만 왕청 같은 말을 꺼냈다. “그래요. 안총경리는 아직도 저를 믿어요.” “다 뉘 덕인지 아느냐?” 똑똑똑. 노크소리가 들리자 조과장은 제꺽 춘란을 옆여 내려놓았다. 복무원이 들어오자 조과장은 메뉴를 춘란한테 주면서 먹고 싶은 채를 주문하라고 했다. 조과장은 춘란이 푸짐히 차린 술상에 마주 앉아 게걸스레 개다리를 널었다. “요즘 용돈이 다 떨어졌어.” 춘란은 소고기점을 집어 조과장의 접시에 놓아드렸다. “저의 로임 다 줬는데 벌써 다 써버렸어요? 이젠 생활비도 남지 않았어요.” 조과장은 춘란한테 빚이나 지워준 것처럼 목에 지렁이 같은 피줄을 세우면서 을러멨다. “뭐라고? 어째 감옥에 가고 싶어?” “감옥에 가면 뭐래요?” “진짜?” “지금 신세, 감옥의 죄수보다 나은게 뭔가요?” “뭐, 어쩌고 어째? 이 년이 점점 목주래를 뽑힐 소릴 줴치는구나.” 춘란도 물러서지 않았다. “대가를 적게 치렀어요? 용돈이라고 5천원을 줬지. 처녀 몸까지 다 바치지 않았는가요? 그래도 모자라는가요?” “쉿-” 조과장은 문께를 힐끔 곁눈질하며 입에 식지를 댔다. “왜? 겁나요?” “이년이 이게.” 조과장은 황급히 손으로 춘란의 초들초들한 입을 마구 막았다. “어째 총살맞고 싶어?” 춘란은 차라리 총살맞고 죽고 싶다고 말하려는데 입을 틀어막아 말하지 못하고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이윽고 손을 떼자 춘란은 울며불며 야단쳤다. “의심돼요.” “뭐?” 조과장은 술맛이 없어 술잔을 탕 놓고 눈을 뚝 부릅뜨고 쏘아보았다. 춘란의 얼굴에서는 전례없이 겁기라곤 티끌만치도 찾아볼 수 없었다. “석탄무지에 파묻어둔 8500원이 잃어진게 이상해요. 혹시 조과장이  가져간 건  아닌가요?” “이년이 이게, 환장했어? 도적이 도적이야 한다고 지금  절도범 신세에 본 보위 과장을 의심해? 정말 죽고 싶어?” “차라리 죽여요. 이렇게 사는게 죽는 것보다 못해. 씨, 우리 엄마 불쌍해 죽지 못한다.” 조과장은 이젠 감옥이나 총살 따위 위협이 춘란한테 잘 들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됐다. 사선에서 헤매며 모진 마음을 먹은 춘란한테는 진짜 위협 따위가  무색해지고 있었다. 그날 조흥수 과장은 술을 석잔도 마시지 않고 난생처음으로 자기 호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밥값을 냈다. 춘란도 털끝 하나 다치지 않고 놓아주었다. 춘란은 독사 같은 조과장과 갈라지자 마음이 홀가분했다. 그러나 인차 마음이 불안해지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조과장의 반상적인 거동이 그녀를 섬찍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인차 승호를 불렀다. 승호는 영희한테 청가까지 맡았다. “춘란이 무슨 급한 일이 있소?” “호호호. 별 일 다 보겠어요.” 영희는 손으로 입을 가리면서 웃었다. 승호는 영희한테 다가가 “이제 춘란을 리용해 조과장 꼬리를 단단히 밟아야겠소.” 하고 으시댔다. 영희는 음험한 승호를 가슴츠레한 실눈으로 바라보았다. “또 누굴 잡으려고 그래요?” “이 세상은 양육강식이야. 우리 가정을 깡패들의 마수에서 보호하려면 조과장의 권총을 내가 빼앗아 차야 해.” “딱 그래야만 하나요? 어째 조과장과 의형제라도 맺고 도움을 받지 못해요. 못난 짓을 하지도 마세요.” 승호는 구두를 썩썩 닦아 쑥 꿰면서 너스레를 떨었다. “아녀자들이란 참,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른단 말이요.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는 걸 몰라? 깡패들이 갑자기 들이닥치면 언제 조과장이나 경찰을 부를 새 있소? 내 손에 권총이 있어야지.” 영희는 도리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맨날 깡패들한테 쫓기워 쩍 하면 이사짐을 사가지고 온 시내를 전전긍긍하면서 피난살이를 해야 했다. 떠돌이신세, 세집살이신세 진짜 신물이 났다. 승호는 집문을 나서며 군례까지 척 붙이면서 희극을 놀았다. 영희는 한숨을 호~ 내쉬며 물끄러미 남편을 목송했다. 승호는 종종 춘란을 만나 위로해주면서 조흥수 뒤를 파서 꼬리를 좀 밟게 됐다. 그는 조과장의 권총을 빼앗아 옆구리에 차게 될 날이 멀지 않은 것 같아 속으로  웃음주머니 흔들흔들해났다. 그는 조용한 다방에서 춘란을 만나자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어떻게 됐소?” 춘란은 승호한테 커피잔을 내밀며 수척해진 보름달얼굴에 새무룩이 웃음을 띠었다. “오빠 시켜준대로 죽음으로 위협하니까. 돈 달란 말도 더 하지 못하잖겠어요.” 승호는 한숨을 후~ 땅이 꺼지게 내쉬였다. “보오. 내 말이 맞지?” 춘란은 머리를 끄덕였다. “그 놈은 이젠 감옥이나 총살로 더 협박하지 못할거 같아요.” 승호는 춘란한테 주의를 주었다. “시름놔선 안돼. 조과장은 얼마나 음흉한 놈이라고. 이제 무슨 짓을 할지 몰라.” 춘란은 대수로워 하지도 않았다. “흥! 이젠 진짜 악이 나요. 생사결판을 내고 싶어요.” 승호는 춘란의 손을 잡고 매만지면서 충고했다. “이 좋은 세상에서 왜 죽겠소. 우릴 못살게 구는 자들을 먼저 제거하고 우리 잘 살아야지.” “어디 그리 쉽겠어요?” “날 믿소. 꼭 조과장을 제거하고 춘란을 보호해주겠소.” “몇번이고 역에 달려가서 기차 앞에 뛰여들려고 했어요. 오빠가 때때로 삶의 용기를 주지 않았더라면 진작 죽고말았을 거예요.” 승호는 이제 돈줄이 끊어진 조흥수가 무슨 짓을 할가 궁금했다. 이튿날 승호는 구입과에 들려 범송한테 일을 시켜놓고는 곧추 보위과로  건너갔다. 조흥수 과장은 금방 순라를 마치고 들어와 커피를 후후 불면서 마시고 있었다. “형님, 어제 또 술에 푹 절었겠구만.” 조과장은 푸석푸석한 얼굴을 매만지더니 손사래를 쳤다. “아니, 어젠 재수없이 한잔도 마시지 못했어. 술좌석에 동생이야 빼놓았을리 있나?” 승호는 속으로 웃었다. “용돈이 다 떨어졌소? 오늘 내 한턱 내지.” 조과장은 손수 커피를 타서 승호한테 내밀었다. “우리 형제간에 무슨 네 것 내 것 할게 있나? 속담에 담배와 술은 주인이 따로 없다고 하잖았는가?” 그들이 막 떠나가려고 할 때였다. 안수련 총경리가 보위과에 들어왔다. “오, 리과장이 여기 있구만. 내 사무실에 올라오오.” 승호가 뒤따라 사무실에 들어가자 안총경리는 손수건으로 안경을 닦아 끼더니 자못 엄숙하게 말했다. “리과장, 맨 동복만 구입하고 털모자랑 장갑이랑 구입하지 않아 되겠소?” 승호는 대수롭잖게 대답했다. “지금 시내 사람들이 누가 촌스럽게 털모자를 쓰고 다닙니까?” “농촌 사람들은 털모자를 사러 우리 백화에 올게요.” “차차 봅시다.” “뭐나 미리 준비해야지. 손님이 사러 오길 기다려서야 되오?” 그녀는 전에 없이 엄숙했다. “총경리실에 오오.” 안총경리가 문을 열고 나가려고 할 때였다. 갑자기 구입과 쪽에서 우당탕 퉁탕 메치고 깨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리과장 어디 갔어?” “개새끼, 우리 식료품상점을 망하게 했어.” “죽여버리겠다!” 승호가 황급히 안수련을 사무실 안 쪽으로 밀어보냈다. “피하십시요. 여긴 위험합니다.” “아이고, 깡패들이구나!” 안총경리는 승호 뒤에 숨으면서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금심하지 마십시오.” 승호가 주저없이 막 문을 떠밀고 나가려고 할 때다. 조과장이 승호를 막아나서더니 허리춤에서 권총을 빼들고 바깥으로 쏜살같이 뛰쳐나갔다. “이 놈들아!” 조흥수 과장이 쇠파이프를 휘두르는 괴한들한테 권총을 겨누었다. “어허, 총을 겨눠?” “죽고 파?!” “삐치지 말라!” “썩 꺼져!” 조과장의 권총 앞에서도 그 자들은 전혀 겁나하지 않았다. “어디 쏴봐라!” 괴한들은 쇠파이프로 손을 탁탁 치면서 다가들었다. 이때 범송과 구입과 일군들이 우르르 쓸어나왔다. 범송은 쇠파이프를 든 깡패들을 보자 질겁해 뒤로 비실비실 물러섰다. “승호 새끼, 나오라!” 이때 승호가 문 밖에 나서려고 했다. 범송은 문을 닫아 걸었다. “나오지 말라. 깡패들이야!” 허나 승호는 문을 박차고 나갔다. “도대체 무슨 일인가?” “저 놈이 승호 새끼다!” “쳐라!” 깡패들은 다짜고짜 쇠파이프를 휘두르면서 야수들처럼 덮쳐들었다. 그 속에는 코수염쟁이와 하이칼라들이 피뜩피뜩 띄였다. “송파네 개무리구나.” 승호는 싸울 태세를 갖추며 뒤로 한걸음 물러섰다. 땅! 조과장의 공중에 쳐든 권총구멍에서 연기가 몰몰 피여올랐다. “쳐라!” 깡패들은 쇠파이프를 휘두르면서 조과장과 승호를 포위하고 죄여들었다. 범송은 문 뒤에 숨어 얼음판에 나선 황소 눈깔로 내다보며 어쩔줄 몰라했다. 그는 근본 이런 싸움을 겪어보지 못해 겁나 벌벌 떨기만 했다. “범송아, 빨리 공안국에 알려라!” 그제야 정신을 펄쩍 차린 범송은 전화를 치러 뛰여들어갔다. 깡패들이 쇠파이프를 휘두르면서 구입과에 뛰여들어 전화기를 드는 범송에게 덮쳐들었다. 휙- 쇠파이프가 범송의 머리를 후려쳤다. 범송은 허리를 굽혀 피하면서 그 놈의 품에 머리를 틀어박고 팔을 사타구니에 넣어  건뜩 들어메쳤다. 다른 놈이 범송의 잔등을 쇠파이프로 탕 내리쳤다. “억!” 범송은 허리를 얻어맞고 쓰러졌다. 다른 구입원이 그 놈을 책상으로 내리깠다. 그 놈은 쇠파이프를 쥔 채 푹 꼬끄라졌다. 보위과에 숨은 안수련 총경리가 떨리는 손으로 공안국에 전화를 쳤다. 보위간사들이 우르르 뛰여왔다. “꼼짝 말엇!” “까딱하면 쏜다!” 조과장은 간사들과 합세하며 우쭐해 고함쳤다. 괴한들은 총구 앞에서도 승호를 쇠파이프로 후려겼다. 승호는 몸을 날려 피하며 한 놈을 차넘겼다. 그러나 얼마 지탱하지 못하고 무리 승냥이같은 깡패들이 휘두르는 쇠파이프에 맞아 비명을 지르면서 콩크리트바닥에 쓰러졌다. 백화청사는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판매원들은 질겁해 비명을 지르며 매대  밑에 납짝 엎드렸다. 땅! 조과장은 승호한테 쇠파이프를 휘두르는 괴한의 다리를 쐈다. 그 놈은  쇠파이프를 떨구고 썩박나무 넘아가듯이 쓰러졌다. 뒤이어 순라대대 경찰들과 엄충렬을 비롯한 보위간사들도 뛰여왔다. 땅! 엄충렬이 허공에 총을 쏘았다. 깡패들은 겁을 집어먹고 도망쳤다. 엄충렬이 도망치는 코수염쟁이를 안 걸이를  걸어 쓰러뜨렸다. “개새끼!” 코수염쟁이는 벌떡 일어나며 쇠파이프를 주어들어 충렬의 머리를 내리쳤다. 엄충렬이 옆으로 홱 피했다. 그러나 어깨를 쇠파이프에 빗맞고 쓰러졌다. 코수염쟁이 재차 내리치려고 하는 위기일발의 순간이였다. 승호가 씽 날아오가면서 발길을 날렸다. “어이쿠!” 코수염쟁이가 목을 붙들며 쓰러졌다. 쟁그랑! 쇠파이프가 저만치 뿌리여나가 콩크리트바닥에 떨어졌다. 엄충렬이 뛰여와 코수염쟁이 손목에 쇠고랑이를 채웠다. 승호는 반주검이 됐다. 다리뼈와 왼팔뼈가 부러졌고 두개골절도 당했다. 사 후에  여겨보니 조과장도 쇠파이프에 머리를 맞아 터졌던 것이다. 결국 조과장과 승호는 병원신세를 지지 않으면 안됐다. 며칠 후 덜 상한 조과장이 먼저 출원하게 되였다. 승호는 침대에 누운 채 조과장 손을 잡고 발라맞췄다. “형님, 형님의 은공은 평생 잊지 않겠소. 이제 출원하게 되면 한잔 마시기요.” 조과장은 승호의 손을 꽉 잡았다. “형제끼리 무슨 말? 이제 돈이 생기면 술이나 한잔 마시자. 손에 쥔게 없으니 사는 멋도 없구나.” 승호도 맞장구를 치면서 속뽑이를 해보았다. “돈이 있어야 주색을 밝히지.” 조흥수는 불평을 토로했다. “보위과에 무슨 돈이 있니? 목숨 걸고 싸워도 돈은 생기지 않아. 못된 안경리 어디 돈을 주니?” 그는 한숨을 후~ 내쉬더니 나가버렸다. 승호는 간사하게 미소를 지었다. (조과장, 당신은 꼭 무슨 일을 칠 사람이요. 돈이 없으면 선희, 해연이, 숱한 아가씨들이 계속 줄줄 묻어다니겠소? 춘란을 협박해 돈을 얻어쓰더니 이젠 어쩔 셈인가? 흥!) 승호는 완전히 양가죽을 쓴 음흉한 승냥이 몰골을 드러내며 교활한 미소를 지었다. 며칠 후 백화청사에서 온 시내 뒤흔든 살인 강탈 참사가 발생했다. 춘란이 퇴근시간에 백화청사 지하주차장에서 둔기에 맞아 쓰러졌고 현금 5만원을  강탈당했다. 보위간사 엄충렬도 출납원 춘란을 호위하던 중 둔기에 맞아 피못 속에 쓰러져 숨을 거두었다. 그날 춘란과 엄충렬은 종업원들의 로임을 내주고 나머지 돈을 은행에 가져다 저금하려다가 참살당했다. 보위과 간사들이 저녁에 순라하다가 지하주차장에서 머리가 피투성이 된 채 쓰러진 김춘란과 엄충렬을 발견하고 병원에 긴급 호송했다. 엄충렬은 이미 심장박동을 멈췄기에 사체실에 옮겨졌다. 춘란은 구급을 거쳐 산소관을 코구멍에 꽂고 간신히 숨만 붙어있는 상태였다. 안수련 총경리는 즉시 조흥수 과장을 사무실에 불렀다. “보위과에서 뭘 했소? 우리 백화청사에서 이런 참사가 다 생기다니? 원, 며칠 전엔 승호를 죽이겠다고 깡패들이 뛰여들더니 이번엔 살인강탈을 해?” 조과장은 뒤더수기를 썩썩 긁으면서 안총경리 눈치를 흘끔 살폈다. 안총경리는 사무상을 꽝 치면서 일어났다. “뭘 했는가? 우리 백화청사가 범행현장이 돼버렸단 말이요.” “예, 다 제 잘못입니다. 조사해봅시다.” 조흥수 과장은 목구멍으로 기여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하며 머리를 숙였다. “안돼! 즉시 수사대대에 신고해야겠소.” “우리 보위과에서 먼저 내부수사를 한 후에 보고해도 늦지 않습…” “싹 걷어치우오. 전번에 절도사건을 내부수사해서 어떻게 됐소?” 안총경리는 황급히 전화 다이얄을 돌렸다. “수사대댄가요? 예? 강과장, 우리 백화상점에 살인강탈사건이 생겼습니다. 예? 이미 알고 계신다고요? 수사하러 이미 왔다고요.” 똑똑똑. 노크소리가 들렸다. 안총경리가 머리를 들어보니 강운룡 과장이 수사대원들을 데리고 들어섰다. 강과장은 안총경리와 조과장에게서 사건 정황을 먼저 료해했다. (춘란이 살아나면 이 사건을 해명하기 퍽 쉬워질 거야.) 강과장은 수사대원 2명을 병원 구급실에 보내 춘란의 신변을 보호하게 했다. “함께 갑시다.” 조과장이 수사대원들과 함께 가려고 했다. “아니요.” 강운룡 과장은 조과장을 보고 “나와 함께 사건 현장에 가보기요.” 하고 지하주차장으로 떠났다. 조흥수 과장은 하는 수 없이 강과장과 수사대원 둘을 따라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갔다. 강과장과 수사대원들은 사건현장을 세심히 수색했다. 강과장은 어두커니 서 있는 조홍스 과장을 돌아보면서 물었다. “강도가 쓴 흉기는?” “춘란과 충렬은 모두 둔기에 맞은 것 같습니다.” 강과장은 머리를 끄덕이더니 또 물었다. “무슨 둔기?” “글쎄. 쇠파이프 같습니다.” “흉기를 발견했소?” “아니, 아닙니다. 추측입니다.” 사건현장은 지하주차장 입구에서 썩 구석진 곳에 들어가 있었다. 지하주차장에는  차 몇대 없었다. 백화상점 입구는 전문관리일군이 당직실에서 지키고 있었다. 강과장은 입구 당직실에 가서 관리일군에게 “그날 여기로 수상한 사람이 들어오는 걸 보지 못했습니까?” 하고 물었다. 관리일군은 “본 적이 없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분명 자리를 비운게지.” 조과장의 말에 중년관리일군은 두 손으로 손사래를 쳤다. “아닙니다, 아니. 난 자리를 딱 지켰습니다. 사건신고도 내 제일 먼저 보위과에 했습니다.” 조과장은 벌컥 화를 냈다. “그럼 강도가 지하주차장으로 날아들어왔겠는가!” 관리일군은 입을 짝 벌리고 더 할 말이 없었다. 한참 후 관리일군은 “그날 위생실로 간 적은 있습니다.” 하고 덧붙였다. “주차장 안에 위생실이 없소?” “없습니다. 백화청사 2층에 위생실이 있습니다. 위생실에서 내려와 보니까. 춘란과 충렬이 피못 속에 쓰러졌습디다.” “그날 드나든 차량번호를 등록한게 있습니까?” “예, 날마다 적어둡니다.” 강과장은 머리를 끄덕였다. 수사대원은 등록명세장을 받아 서류가방에 넣었다. 그는 춘란과 충렬이 맞아 쓰러진 피흔적이 즐벅하게 남은 자리에 가서 무릎을 꿇고 앉았다. 조과장은 뒤따라가면서 상을 찌프리면서 도리머리를 절레절레 가로 흔들었다. “관리일군을 바꿔야겠습니다. 림시공이 돼 그런지 제대로 지키지 못한단 말입니다.” “보위과에선 뭘 하고 림시공을 다 썼소?” 강과장의 책망에 조흥수 과장은 뒤더수기를 썩썩 긁었다. “다 제가 소홀한 탓입니다.” “련속 형사사건이 생길 때까지 보위과에서 뭘 했소?” “다 제가 경비를 소홀히 한 탓입니다.” 강과장은 조흥수 과장이 오늘처럼 자기 잘못을 뉘우치는 것을 처음 보았다. 이전에 공안국에서 내부보위회의를 할 때면 조흥수 과장은 파출소 소장이나 했다는 밑천을 믿고 강운룡 과장의 앞에서 책상에 걸터앉아 다리를 건들거리면서 항상 아는 척하며 앞찔러 이렇쿵저렇쿵 떠들어대군 했다. “주차장에 다른 입구는 없소?” 조흥수 과장은 인차 “있습니다.” 하고 일어서면서 한쪽 구석으로 데리고 갔다. 주차장 좁은 복도로 들어가 백화청사 안으로 통한 승강기가 있었다. 강과장은 수사대원들을 보고 사건현장을 계속 수사해 촬영하게 하고 조과장을 데리고 승강기를 타고 올라가 보았다. 강과장은 강도가 이 승강기로 들어갔을 가능성도 있다고 인정했다. 그러나 돈을 강탈한 강도가 숱한 사람들이 보는 백화청사안으로 해 도망칠 수 없지 않겠는가. 그는 조과장과 함께 지하주차장 관리원한테로 돌아갔다. “위생실에 갔을 때 사건이 발생했소?” “예, 그런 것 같습니다.” 강과장은 관리원을 쏘아보면서 한걸음 다가서며 물었다. “혹시 강도가 달아나는 걸 보지 못했소?” “아, 이제야 생각이 납니다. 제가 위생실에서 금방 당직실에 돌아왔을 때 웬 놈이 승용차를 몰고 달아났습니다.” “얼굴이 기억나오?” 관리원은 뒤더수기를 긁적거렸다. “마스크를 껴서 잘 모르겠습니다.” 조과장이 옆에서 관리원을 쏘아보면서 물었다. “얼굴 특징은 기억나오?” “좀 퉁퉁합디다…” 관리원은 조과장을 힐끔 쳐다보더니 뜻밖의 소리를 했다. “조과장처럼 낯이 퉁퉁합디다.” “이 자식, 지금 무슨 소릴 해?” 조과장은 주먹을 쳐들었다가 강과장을 힐끔 쳐다보더니 내리웠다. “어째? 난 책임을 다했습니다. 조과장은 어째 신고전화도 받지 않았습니까?” 주차장 관리원은 어떻게 하나 자긴 책임을 회피하려고 조과장을 똥구덩이에 업고 뛰여들었다. 조과장은 카리스마가 넘치는 눈길로 그를 쏘아보았다. 강운룡 과장은 즉시 사건수사정황을 천룡해 국장과 김성광 부국장에게 회보했다. 공안국에서는 전 시 공안계통에 시내에서 강탈당한 백화청사의 승용차를 찾으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외연을 확대해 타현시 공안국에 살인강탈사건을 통보해 날강도나포를 협조해줄 것을 요청했다. 한참 후 해남파출소로부터 강도가 몰고 달아난 승용차가 해남가에서 발견됐다는 제보가 들어왔다. 강과장은 급히 수사대원들의 수사정황을 회보받으러 수사대대로 돌아갔다. 조흥수 과장은 인차 병원으로 가보려고 보위과 문을 나섰다. 춘란의 신변안전이 걱정됐을가? “어디로 가?” “어!” 조과장은 흠칠 놀라 몸을 홱 돌리며 허리에 찬 권총에 손이 갔다. “자식, 고함질은?” 조과장은 승호를 보자 허리에서 손을 떼며 굳어졌던 얼굴 근육을 느슨히 풀었다. “춘란이 보러 가오.” “함께 가자.” 조과장과 승호는 동상이몽을 꾸면서 지하주차장에 가서 보위과 찌프에 앉아 병원으로 달려갔다. 승호는 생화를 사고 조과장은 과일을 사들고 구급실에 들어섰다. 수사대원 창남과 룡철이 구급실을 지키다가 조과장을 알아보고 문께에서 물러섰다. 승호와 조과장이 병실에 들어서보니 춘란은코에 산소관을 꽂은 채 두 눈을 꼭 감고 침대에 누워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야, 춘란이, 어쩌다 이렇게 됐소? 일어나오, 춘란이.” 조과장은 과일꾸럭을 침대 옆의 상자 위에 놓고 춘란한테 다가갔다. “이러지 마세요. 환자 안정에 불리해요.” 의사와 간호사가 말리자 조과장은 머리를 돌렸다. “의사, 춘란이 내 말을 알아듣습니까?” “오래지 않습니다. 생명위험은 벗어난 것 같습니다.” “뭐라구요?” 조과장은 저으기 놀랐다.  옆에서 여겨보던 승호는 미소를 지었다. “춘란이 살아나면 날강도는 그물에서 빠져나갈 수 없을 거야.” “그래, 그렇구말고. 잘 됐어.” 조흥수 과장은 춘란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천천히 일어섰다. 승호는 춘란의 머리맡에 생화묶음을 놓아주었다. “춘란이, 강도놈은 꼭 나포될 거요.” 조흥수 과장은 머리를 끄덕이면서 구급실을 나섰다. 바깥에서는 눈보라가 기승스레 윙윙 휘몰아쳤다. 보이지 않는 법망이 날강도를 향해 점점 좁혀지고 있었다.                                                                          39. 천라지망 승호와 범송은 조과장의 동태를 면밀히 감시하고 있었다. 조과장은 찌프를 몰고 머리를 수깃한 채 백화청사 지하주차장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겠는가. “승호, ‘개’ 왔다.” “알았다.” 승호는 범송의 기별을 듣고 복도에 나가 담배를 붙여 물고 조과장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승강기 어귀에 나타난 조흥수 과장은 승호와 눈인사나 하네마네 하고는 곧추 총경리 사무실로 들어갔다. 안수련 총경리는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사건수사는 진전이 있소?” 하고 물었다.  조과장은 대답 대신 허리춤에서 권총을 뽑아들었다.  “뭐요?” 안총경리는 질겁해 바들바들 떨었다. 불길한 징조를 느낀 승호는 사무실 문을 쾅 차고 들어갔다. 조과장은 승호를 흘끔 곁눈질하더니 권총을 안수련 총경리 사무상에 천천히 내려놓았다. “안총경리, 미안합니다. 제가 보위사업을 제대로 하지 못했기에 이번 사건이 생겼습니다. 보위과 과장 사직하겠습니다.” 승호는 속으로 잘코사니를 불렀다. (자식, 진작 권총을 내놔야지.) 안수련은 천천히 자리에 앉더니 마음을 가다듬으며 천천히 진정했다. “안되오. 비상사탠데. 사직이라니? 범죄자부터 붙잡은 다음 보기요.” 조흥수는 낯이 수수떡처럼 지지벌개났다. “안총경리와 직원들을 볼 면목이 없습니다. 백화청사에서 나가겠습니다.” “조과장이 없어면 보위과는 어쩌오?” 조흥수는 승호를 돌아보더니 희죽이 웃었다. “리과장이 있잖습니까. 리과장은 기동령활하고 무예가 출중하기에 더 잘 할 수 있습니다. 리과장 소원도 꺼주고 일거량득이 아니겠습니까. 허허허.” 승호는 손사래를 쳤다. “안됩니다. 전 구입과  과장이 좋습니다.” 그는 조흥수가 진작 자기 속심을 꿰뚫어보았다는 것에 소름이 끼쳤다. 안총경리는 권총을 받아 서랍에 넣으면서 침착하게 말했다. “천천히 고려해보기오.” “그간 못난 놈을 써주어서 감사합니다.” 조흥수는 허리를 꿉썩 굽혀 인사했다. 안수련은 조흥수를 쏘아보더니 무겁게 입을 열었다. “할 수 없군요.” 조흥수는 안총경리에게 재차 허리굽혀 인사하더니 승호를 돌아보았다. “동생, 안총경리를 잘 보좌하게나. 부탁이네.” “아니, 형님, 정말 안하겠단 말이요?” 승호는 속으로는 기뻐 어쩔줄 모르면서도 겉으로는 아쉬운듯이 지껄였다. 조흥수가 가버린 후 승호는 어깨가 으쓱해 재차 안총경리 사무실에 들어갔다. “안총경리, 이 비상사태에 보위과장이 없어서야 됩니까? 저한테 맡겨주십시요. 전  백화청사에서 다신 이같은 참사가 생기지 않도록 미연에 방지할 능력이 있습니다.” 안총경리는 권세욕에 열이 후끈 달아오른 승호를 날카로운 눈길로 쏘아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보위과장 인선은 따로 있소. 리과장은 구입과장을 해도 과한줄 아오.” “예?” 순간 승호는 쏘파에 털썩 주저앉으면서 어이없다는듯이 안총경리를 쳐다보았다. “아니, 제가 무슨 잘못이라도?” “가랑잎으로 눈을 가리고 야옹 하지 마오. 내 눈과 귀를 속일 것 같소?” “무슨 말씀인지요?” 승호는 속이 섬찍해났다. “집에 가서 곰곰히 생각해보오. 뭐나 본인이 더 잘 알게 아니요?” 승호는 정수리를 한대 얻어맞은 것처럼 비틀거리면서 총경리 사무실에서 나왔다. 그는 구입과로 돌아와 쏘파에 푹 물앉았다. “무슨 일이 있니?” 범송이 다가와 컵에 뜨거운 물을 부어주었다. “아니.” 승호는 머리를 부둥켜안고 울상을 지었다. 이튿날 안총경리는 중층책임자회의를 열고 과단성있게 인사조치를 단행했다. 승호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총경리 사무실로 올라갔다. 안수련 총경리는 안경을 춰올리고 건가래를 떼더니 인사결정을 공포했다. “최범송을 보위과 과장으로 임명합니다.” 뜻밖의 선포에 모두들 범송한테 눈길이 쏠렸다. 범송은 희죽거리며 승호를 힐끔 곁눈질했다. “리승호의 구입과장직을 면직합니다.” 승호는 속으로 올 것이 왔구나고 안총경리를 쳐다보았다. 안수련 총경리는 뜻밖에도 “리승호를 백화상점 공회 주석으로 임명합니다.” 하고 공포했다. 승호는 자기 귀를 의심했다. 그는 다행으로 여기면서도 속이 알알해났다. (고양이 쥐 생각해? 별로 승급시킨 것처럼 연극 놀아? 먹을 알이 없는 공회 주석을 시켜? 벼슬로 처남과 매부 지간을 리간놓는 판이군. 흥!) 승호는 극력 그런 내색을 내지 않으려고 빙그레 웃으면서 박수까지 쨕쨕 쳤다. 회의가 끝난 후에도 승호는 속이 알알해났다. (아, 진작 이럴줄 알았더라면 성호 말처럼 백화청사를 떠날 걸.) 범송은 싱글벙글 웃으면서 승호한테 손을 내밀기까지 했다. “축하해, 리주석.” “자식, 놀리니?” “아니야, 공회 주석은 백화상점의 지도자급이야. 허허허. 축하해줄만하지 않니? 공회주석도 주석인 거야. 똥꼬치도 똥이야. 리주석 안그래? 허허허.” 승호는 범송의 가슴을 툭 쳐놓으면서 “보위과장으로 된 걸 축하해. 매부!” 하고 어깨를 다독여주었다. 범송은 승호의 가슴을 주먹으로 쿵 치면서 “처남, 의심병부터 고쳐라”. 하고 입을 쭝긋해보였다. 범송은 공안국에 갔다가 허리에 권총을 지르고 나타나 으시댔다. “어때? 최범송 보위과장!” “매부가 보위과장으로 되니 마음이 든든하구나.” 승호는 “멀건 물에 거시같이 싱거운 자식, 꼴 보기도 싫어.”하고 욕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사흘만에 안수련 총경리는 또 놀라운 인사결정을 공포했다. 글쎄 범송이 구입과  과장을 겸해 한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진짜 범송과 승호에겐 희비가 엇갈린 인사가 아닐 수 없었다. 한편 백화청사 대참극에 대한 수사속도는 급물살을 탔다. 형사수사대대에서는 공개수배를 시작했다. 그들은 텔레비죤을 통해 전체 시민들에게 날강도의 모의초상을 공개했다. 당날에 한 운전수가 공안국 형사정찰대대에 편지로 다음과 같은 정황을 적발했다.   마스크를 끼고 퉁퉁하게 생긴 한 중년사내가 해남가 뻐스정류소 부근에서 찌프에서 내려 자기 택시에 앉아 북으로 달려 1중 부근에서 내렸다. 그는 피 묻은  토색가방을 꼭 끌어안고 차창 밖을 살폈다. 강운룡 과장은 수사분석회의에서 다음과 같이 날카롭게 분석했다. “범죄자는 반정탐능력이 있는 놈입니다. 백화청사 지하주차장에서 살인강탈한 후 백화상점의 찌프를 몰고 남쪽으로 도망쳤습니다. 다음 택시를 갈아타고 방향을 바꿔 북쪽으로 달려갔습니다. 이건 우리 수사방향을 전의시키려는 겁니다. 보통 범죄자는 사건을 저지른 후 자기 집 쪽으로 도망칩니다. 그러나 이 놈은 완전히 다른 행각을 벌렸습니다.” 천룡해 국장과 김성광 부국장은 이번 사건의 흉수는 일정한 반정탐능력을 가진 자라고 일치하게 인정하고 수사범위를 더 넓히기로 했다. 흉수는 확실히 백화청사 내부 지리정황과 로임을 발급하는 날자와 시간, 은행으로 저금하러 가는 경로까지 손금 보듯 하는 놈이였다. 그리하여 수사 초점은 다시 백화청사 내부로 집중됐다. 이때 승호가 백화청사에 진주한 수사지휘부에 찾아왔다. “무슨 일이요?” 강과장이 묻자 승호는 주위를 둘러보더니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저는 모의초상을 보면서 범죄혐의자는 우리 백화청사 보위과 과장 조흥수가 아닌가고 의심했습니다.” “조흥수?!” “예, 바로 조흥수라고 봅니다.” 승호는 범죄혐의자 모의초상을 들고 보다가 천천히 책상에 내려놓더니 신문으로 마스크를 가리었다. “보십시오, 이 안경 건 쌍까풀눈이나 퉁퉁한 얼굴. 얼마나 조과장과 비슷합니까?” 강과장은 도리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토끼도 굴어귀 풀을 먹지 않는다는데 간대로 조과장이 이럴수 있겠는가?” 승호는 자기 견해를 고집했다.  “요즘 조과장의 행각이 퍽 의심스럽습니다.” “뭐가?” 승호는 소파에 앉아 그간 관찰한대로 조흥수의 정황을 말했다. “우리 백화청사에 절도사건이 생겼댔습니다. 그때 조과장은 근본 공안부문에 신고하지도 않고 사건을 수사하는 척하면서 덮어두려고 했습니다. 조과장은 진짜 수상합니다. 그는 돈을 절도맞힌 출납원을 쩍하면 위협하면서 돈을 빨아냈습니다. 그번 절도사건의 장물을 조과장이 재차 절도하지 않았는가도 의심됩니다.” “무슨 증거라도 있소?” 강운룡 과장은 승호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승호는 아주 랭정하게 분석해나갔다. “저의 추측입니다. 사건이 발생한 당날에 춘란은 절도한 나머지 돈 8500원을 세집 부엌의 석탄무지에 치워뒀답니다. 그런데 몇시간도 지나지 않아 절도맞혔습니다. 이건 춘란의 집에 돈이 있다는 걸 아는 자의 절도행위라고 봅니다. 때문에 조과장과 련관되지 않는가 의심됩니다.” 강과장은 주먹코를 손으로 씃으면서 승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아주 중요한 정보요.” 승호는 허리를 펴면서 확신성있게 말했다. “그는 주색에 돈을 흔자만자 썼습니다. 항상 아가씨들을 불러다 술을 마시고 놀고 팁까지 몇장씩 줬습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2차, 3차로 노래방에 가고 안마를 하고 오입을 밥먹듯 했습니다. 그 숱한 돈이 어데서 생겼습니까?” 강과장은 머리를 끄덕였다. 그는 뜨거운 물을 후후 불어 마시더니 탁자에 컵을 놓으면서 물었다. “조과장 안해가 음식점을 차리지 않았소?” “에이, 조과장네 음식점은 불경기여서 안해가 항상 조과장이 손님을 데리고 가서 공짜로 먹는다고 말다툼했습니다. 평소에 우리랑 데리고 자기 집 음식점에 얼씬하지도 못하고 다른 음식점에 갔습니다.” 강과장은 승호를 보고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아주 세심히 관찰했구만.” 강과장의 치하에 승호는 어깨 으쓱해났다. 그때라고 슬쩍 속내를 비춰보였다. “전 원래 수사사업에 흥취가 있습니다. 경찰이 되지 못해도 백화청사 보위과에서라도 일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조과장이 돈을 물쓰듯하자 수상해 백화청사의 사건과 련계시켜 의식적으로 관찰했습니다. 이번 사건도 조과장이 한 짓이라고 봅니다. 보십시오. 사건수사가 좁혀지자 보위과장을 사직하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도적이 제 발등이 저린 거죠.” “오~ 조과장에겐 형제가 있소?” “예, 남동생과 녀동생이 있습니다. 조과장이 몽땅 시내에 끌어들였습니다.” 강과장은 승호의 얼굴 뒤에 리철갑 과장의 얼굴이 겹쳐보였다. 그런데 애비를 닮지 않은 승호는 사건해명에 아주 관건적인 단서를 척척 제공하지 않겠는가. 승호는 아주 기동령활하면서도 섬찍하게 놀았다. 그는 평소에 조흥수와 의형제까지 맺고 그림자처럼 붙어다니면서 아가씨들을 데리고 질탕하게 놀았다. 그런데 지금 형제의 가면구를 훌렁 벗어버리고 조흥수의 뒤통수를 치고 있지 않는가. 강운룡 과장은 승호의 량면성격을 모르고 능력과 재간이 아까와했다. 만약 온 시내가 들썽하게 바람을 피우면서 숱한 처녀들의 정조를 짓밟지만 않았어도 승호를 써주고 싶었다. 강과장은 승호를 보내놓고서도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올랐다. “조과장이 감히 굴어귀 풀을 먹어? 조과장은 숱한 직원들이 보는데 감히 백화청사에서 강도질해? 시간적여유가 있었는가? 이건 진짜 목숨을 내 건 모험이야.  조과장이 그렇게 무모한 자인가?” 그는 사무실에서 뒤짐을 짚고 왔다갔다 거닐다가 사무상에 놓인 강도의 흉기에 눈이 갔다. 그는 피묻은 쇠파이프를 들고 흔들어보면서 눈섭을 코마루로 쭝긋 모았다. “쇠파이프로 보위간사 충렬을 단매에 때려죽였단 말인가? 그런데 춘란은 때려죽이지 못했다? 두 피해자에게 가해진 힘이 다르지 않는가? 아녀자 두개골을 강타해 죽이지 못하는 힘이라.” 강과장은 오랜 경험으로부터 점차 이번 사건은 혼자 벌린 사건이 아니라 공범이 있다는 생각이 머리를 쳐들었다. “지하주차장 관리원은 그날 백화청사 지하주차장에 세워놓은 조흥수 과장의 찌프를 몰고 달아난 놈은 조과장과 비슷하게 생겼다고 하지 않는가? 혹시 조흥수 과장의 동생이 한 짓이 아닐가?” “창남이!” “예!” 창남이 옆방에서 들어왔다. “당장 조흥수와 그의 동생을 련행하오. 한시 급하오!” “예.” 강과장은 제일 큰 혐의자가 조과장 형제라고 점찍었다. 한참 후 창남과 수길이 빈손으로 들어왔다. “조흥수가 집에 없습디다. 조씨 처 말에 의하면 먼 곳에 려행을 간다면서 떠났다고 합디다.” “오- 진짜 수상하군.” 강과장은 즉시 혐의자들 가운데서 조흥수를 중점혐의자로 수사하기로 결정했다. “수길이, 가서 조흥수 안해를 데려오오.” “예.” 한참 후에 조흥수의 안해가 머리를 수깃하고 백화청사 현지수사 사무실에 들어섰다. 강운룡 과장은 사무상에 비스듬히 앉아 카리스마 넘치는 눈길로 매섭게 조흥수의 안해를 한참 쏘아보았다. 조흥수 안해의 기를 꺾어놓으려고 심리전을 쓰고 있었다. 한참 후 그는 콩크리트에 쇠공을 굴리는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여기 어째 온 걸 알만 하오?” “무슨 일인지요?” “이제부터 묻는 말을 사실대로 대답하오.” “예.” 강과장은 바위돌처럼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조흥수 어데 갔소?” 조흥수 안해는 태연자약한 표정을 지었다. “제가 어떻게 알아요? 그저 먼 곳에 려행을 떠난다고 말했을뿐인데요.” 강과장은 사무상에 팔굽을 대고 앞으로 몸을 숙이면서 물었다. “어디로 간다고 했소?” “말하지 않았어요.” “조흥수는 이번 백화청사 특대살인강탈사건의 중점혐의자로 돼 수사받고 있소. 그의 죄를 덮어감추거나 수사에 협조하지 않으면 형사죄를 덮어감춘 은닉죄로 사법기관의 엄벌을 면치 못하오.” 조흥수의 안해는 머리를 쳐들더니 왕청 같은 말을 했다. “우린 이미 리혼했어요. 이젠 저와 아무런 관계도 없는 사람인데요. 왜 저하고 이래요? 정말 피곤해요.” “리혼? 아주 솜씨 빠르군.” 강과장은 사무상을 꽝 쳤다. “리혼해도 조흥수 죄행을 은닉하면 은닉죄란 말이요!” 이윽고 창남이 천가방을 강과장의 사무상에 내놓았다. “조흥수네 집에서 발견한 돈보따리입니다. 1만 5천원이 들어 있습니다.” 순간 조흥수의 안해는 힐끔 그 천가방을 곁눈질하더니 머리를 폭 숙였다. “이건 어데서 난 돈이요?” “음식점에서 번 돈인데요.” “거짓말! 음식점이 밑져서 항상 조흥수와 옥신각신 말다툼하지 않았소?” 강과장은 조흥수 안해를 쏘아보면서 탄백을 유도했다. “이제라도 로실히 탄백하면 조흥수와 공범이 되지 않을 수 있소.” 조흥수 안해의 정신방어선은 와그르르 무너지기 시작했다. 한참 궁리하던 그녀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바늘이 떨어지는 소리도 다 들릴 것만 같은 심문실에서는 그녀의 거친 숨소리와 나직한 말소리만 들릴뿐이였다. “사실 그는 고향으로 간다고 했어요. 가기 전에 저한테 저 돈을 주면서 ‘그간 안해로 고생했다.’고 말했어요.” “리혼은 어떻게 된 일이요?” 그녀는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대답했다. “나그네 바깥에서 숱한 아가씨들과 뒹구는 걸 보고 제가 먼저 리혼하자고 했어요. 나그넨 질질 끌면서 안된다고 했어요. 그런데 사건이 발생한 날에 저보고 처자들이 편안하게 살게 하려고 리혼하겠다고 했어요. 흐흑흑.” 강과장은 수길과 창남을 돌아보면서 눈길을 맞추었다. “더 교대할게 없소?” “없어요. 아, 아니, 떠나갈 때 저를 보고 ‘언제 돌아올지 모르겠다’고 합디다.” “가짜리혼이구만. 떠나는 날에도 한 집에서 잤겠지?” 그녀는 위엄이 넘치는 강과장의 눈길을 감히 쳐다보지도 못하고 머리를   끄덕였다. 강과장은 조흥수가 가능하게 도마뱀이 꼬리를 떼놓고 달아나는 교활한 수법을 썼을 수 있다면서 속으로 코웃음쳤다. (흥! 진짜 가랑잎으로 자기 눈을 가리고 야옹 하는 격이군.) “시동생이 있다던데. 요즘 집에 왔소?” “오지도 않았는데요.” 강과장은 겁기 띤 그녀의 표정을 보아냈다. “이번 살인강탈범은 총살을 면치 못하오. 제대로 말하오? 요즘 자주 왔소? 우리 수사대원들은 동무네 집을 24시간 감시했소. 동무가 로실한가 볼뿐이요.” 그녀는 왕왕 대성통곡쳤다. “로실히 말할테니 제발 살려주십시오.” “로실히 얘기하오.” 그녀는 줄줄 두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손으로 훔치면서 말했다. “요즘 시동생이 자주 우리 집에 찾아왔어요. 아마 백화청사 살인사건이 생긴 날일 거예요. 시동생이 피뜩 왔다가 어디로 나가면서 ‘형님, 인차 오오.’라고 했어요. 그날 저녁에 나그네가 저한테 전화를 쳐서 ‘일이 생겼소. 과장을 다 한거 같소. 어디로 멀리 려행을 가야겠소. 옷이랑 준비하오.’라고 하더군요. 밤중에야 돌아온 그는 장밤 잠을 자지 못하고 한숨만 쉬더군요.” “시동생은 지금 집에 있소?” “시동생을 데리고 고향으로 려행 간다고 했어요. 아마 로씨야로 넘어가 려행할 예산인 거 같던데요.” 강과장은 사태가 시급함을 느끼고 그녀를 집에 돌려보냈다. “무슨 새로운 정황이 있으면 우리한테 알리오. 흥수한테서 전화나 편지가 와도 낱낱이 알려야 하오.” “예, 살려만 주세요.” 그녀가 눈물을 닦으면서 나간 후 강과장은 수길과 천일을 보고 장령자와 수분하, 흑하 여러 중로통상구로 가서 조흥수 형제가 빠져나갔는가 수사하라고 지시했다. 수사대원들은 분조를 나눠 모든 중로통상구로 떠나갔다. 강과장은 수사대대 사무실에 돌아와 버릇처럼 뒤짐을 지고 왔다갔다 거닐면서 번개같이 번쩍이는 사색을 굴렸다. 주춤 걸음을 멈춘 그는 저쪽에 진렬된 피 묻은 쇠파이프를 들고 휘둘러보면서 궁리했다. “이런 쇠파이프를 어지간히 휘둘러 쳐도 즉살할 거야. 그런데 춘란을 친 쇠파이프는 힘이 약했어.” 그는 쇠파이프를 놓고 경찰대대의 법의를 불렀다. 법의가 들어오자 강과장은 미심한 점을 물었다. “피해자의 두개골 상처 흔적이 같소?” “아닙니다.” 법의는 서류철을 가져다 일일이 펼쳐보였다. “이 사진을 보십시요. 엄충렬의 두개골 상흔인데 골절이 길게 났고 일부 두개골이 깨지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춘란의 두개골에 난 상흔은 우묵하게 들어갔습니다. 상대적으로 길지 않습니다. 쇠파이프로 때린 흔적과 다릅니다.” “혹시 권총박죽 흔적은 아닐가?” 강과장의 물음에 법의도 머리를 끄덕였다. “가능합니다. 힘도 충렬을 때린 것보다 약합니다. 상처도 덜합니다. 때문에  춘란은 죽지 않았습니다.” 강과장은 머리를 끄덕이면서 자기 생각이 맞다고 판단하고 한 걸음 더 나가 물었다. “사람이 뚱뚱해도 어떤 경우에 팔힘을 쓰지 못하오?” 법의는 한참 생각을 더듬다가 입을 천천히 열었다. “심장병환자면 힘이 없습니다. YB병원 심혈관내과 전문의사와 더 확인해봅시다.” “좋소.” 강과장과 법의는 즉시 YB병원에 가서 심혈관내과 오랜 주임의사를 찾아가 백화청사에서 발생한 사건을 간단히 말하고나서 미심한 점을 자문했다. “심장병환자는 팔힘이 약합니까?” 주임의사는 자못 신중하게 대답했다. “예, 팔힘을 쓰지 못합니다. 더욱이 범죄행위를 할 때 긴장하면 혈압이 올라가면서 심장병이 도져 팔힘이 쑥 빠집니다.” 법의와 강운룡 과장은 눈길을 마주치면서 머리를 끄덕였다. 그들은 입원실에 가서 피해자 춘란을 찾았다. 춘란이 눈을 뜨는 날에는 모든 것을 밝혀낼 수 있었다. 수사대대 건의에 따라 공안국에서는 이번 특대살인강탈 사건 수사정황을 시당위와 시정부 해당 지도자들에게 회보했다.  허철군부 서기와 최웅봉 부시장은 병원에서 모든 의료전문가들을 다 동원해 춘란을 구해낼 것을 협조하라고 지시했다. 기적이 일어났다. 구급실에서 일주일이나 중태에 빠져 누워 던 춘란이 이날 눈을 둬번 뜨지 않겠는가. 강과장과 법의가 수사대원들이 지키는 구급실에 들어섰을 때였다. 산소관을 코에 꽂은 춘란이 눈을 천천히 뜨더니 눈으로 여기 저기 둘러보는 것이 아니겠는가! 춘란은 강과장을 보자 “아버지! 사람 살려라!” 하고 고함쳤다. 그녀는 사람을 알아보지 못해 법의의 팔소매를 잡고 흔들면서 “아버지, 날 살려주십시요.”하고 떠들어댔다. 강운룡 과장과 법의는 실망에 찬 눈길을 마주치더니 병실을 나섰다. 강과장은 법의를 보고 “조흥수가 심장질환을 앓았는가 알아보기요.”하고 찌프에 몸을 실었다. 찌프는 새하얀 눈가루를 흩날리면서 질풍같이 백화청사로 달려갔다. 이윽고 그들은 백화청사 지하주차장 안으로 찌프를 몰고 들어가 세웠다. 그때 주차장 관리원이 부들부들 떨면서 다가와 경찰들인 걸 확인하고서야 한숨을 후 내쉬면서 당직실로 되돌아갔다. 강과장은 사건현장을 둘러보더니 승강기를 타고 백화청사 안으로 올라갔다. 승강기는 최고층 16층에 가 멈춰섰다. 총경리 사무실 간판이 보였다. 안수련 총경리는 강과장과 법의를 보자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강과장이 찾아온 연유를 말했다. 안수련 총경리는 안경을 벗어 안경알을 닦아 바로  걸더니 입을 천천히 열었다. “조흥수는 고혈압에 심장병이 있습니다. 항상 술을 처먹고 낯이 수수떡처럼 뻘개  다녔지요. 해마다 몇번이고 청가를 맡고 입원치료까지 받은 적이 있습니다.” 강과장은 버릇처럼 머리를 끄덕였다. “그래? 조흥수가 범죄자인가요?” 안총경리의 물음에 강과장은 수사비밀이 샐가봐 즉답을 피했다. “백화청사를 활딱 번지면서 수사해 미안합니다. 지금까지 협조해줘서 감사합니다.” 강과장과 법의가 총경리실 문을 열고 나가자 안총경리가 의자에 털썩 주저앉으면서 한탄했다. “내 눈이 멀었지. 쥐새끼한테 창고 자물쇠를 맡겼구나.” 강과장은 백화상점에서 현지수사소조를 철수했지만 여지를 두어야 했다. 춘란은 최악의 사선은 넘어섰지만 사람을 잘 알아보지 못하는 형편에 처해있지 않는가. 그녀를 믿고 어찌 흉악하고 교활한 흉수를 잡아내단 말인가. 모든 건 그래도 수사대원들의 수사력과 지혜에 의거해야 했다. 수사는 난항을 겪게 되였다. 수분하와 장령자에 갔던 수사대원들이 륙속 돌아왔지만 헛탕을 치고 말았다.  조흥수 형제가 출국한 기록이 없었다. 또 흑룡강성에 있는 그의 고향에도 가보았지만 그들 형제 종적이 없었다. “조흥수 수상하오. 안해한테 고의로 고향이나 로씨야로 간다고 속여놓았군. 우리 수사시선을 그쪽으로 돌려놓고 다른 곳으로 도망친 거 같소.” 허서기와 최시장은 공안국의 수사정황을 회보받은 후 조흥수 형제를 전국 범위내에서 지명수배를 하자는 공안국 제의에 동의했다. 당날로 성공안청을 거쳐 전국 각지 공안국에 특대살인강탈 범죄혐의자 조흥수 형제에 대한 지명수배령이 무선전으로 전파됐다. 전국에 보이지 않는 강력한 천라지망이 펼쳐졌다.       그 그물에서 먹장구름이 먼저 슬며시 빠져나갔다. 무지개도 빠져나가고 나중에는 해도 빠져나가고 이제 달만이 남아 있었다. 
153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 (112) 댓글:  조회:1703  추천:0  2018-07-29
                      4. 하늘땅이 노호한다       춘삼월이라고 하지만 옛 만주 하늘은 초봄에 눈을 퍼부으려는지 흐리터분해지며 두터운 구름이 깔리며 총총하던 별을 가리어갔다. 흥수는 신경질이 나서 머리를 쥐어뜯으면서 토성 동쪽에 있는 집으로 갔다. 어쩐지 요즘 세월이 뒤바뀐 후 흥수는 신경질이 나면서 모든 일이 잘 되지 않았다. 혁명위원회도 취소했지. 이전에 자기가 혁명해버린 이계삼과 허영주가 아무런 죄도 없이 억울한 모자를 썼다고 해명돼 모자를 벗고 현인민정부로 돌아가지 않았는가! 또 허백호도 무죄로 판결돼 감옥에서 나온다는 여론이 돌고 있다. 게다가 “문화대혁명” 때 일만 수걱수걱 하던 상순이 또 머리를 쳐들더니 자기와 시비를 걸지 않겠는가? 흥수는 생각할수록 신경질이 나고 속으로 뭔가 울컥거렸다. (마을 사람들도 상순이 양봉장이랑 인삼장이랑 벽돌공장이랑 과수원이랑 꾸린 것이 옳다고 해. 그래, “문화대혁명” 기간에 비판하던 “생산력유일론”이 맞는단 말인기여? “계급투쟁”을 하지 않아도 된단 말인고? 뭐? “3자1포”나 도급제가 맞아? 마음대로 장을 보고 밭도 개인에게 떼 주면 또 새로운 지주가 생기지 않겠노? 자본주의 싹이 온 마을에 무럭무럭 자랄 게 아닌교?) 그는 생각하면 할수록 이해되지 않아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그는 날이 갈수록 정치에 점점 관심이 없어지고 미련과 오입이라도 하면서 삼검불 같은 정신을 위안 받으려고 했다. 울안에 들어서자마자 불을 켜지 않은 집 안에서 개목을 다는 소리가 어지럽게 들렸다. “아이유, 아, 아악, 죽여준다야.” “개새끼, 오늘!” 흥수는 팔을 걷고 씩씩거리더니 문을 쾅 차고 집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전등불이 잘칵 켜지더니 정지에서 춘실이 황급히 발딱 일어났다. “어째 이제야 왔소?” “고방에서 개지랄 하는데 넌 뭘 하니?” 흥수가 고방에 뛰어들려는데 춘실이 두 팔을 벌리고 막아 나섰다. “쑤어놓은 죽을 어쩌겠소? 이젠 애까지 낳았는데. 그 에미에 그 딸이구나.” 흥수는 춘실의 팔을 탁 쳤다. “뭐라오? 당신.” “네년, 어려서 상순이하구 콩밭에서 개짓을 해 첫애를 낳았잖아.에이, 디러운 년.” “창피해 어떻게 살아? 그래 지주에게 딸을 짓밟게 놔 둬?” 춘실도 한발작도 물러서지 않았다. “검정개 돼지 흉을 보지 마오. 당신은 왜 지주 딸을 한밤중까지 간음했소? 흥!” “무슨 생이 부러질 소리야? 생사람을 작작 잡으라고.” “모르는 거 같아? 덕돌이네 집부터 뒤따라 왔는데도 시치미를 딸 예산이오? 내 입이 터지면 당신 대대당지부 서기겠소? 투쟁 받다가 감옥에 가…” 흥수는 황급히 생강같이 마른 손으로 여편네 입을 마구 틀어막았다. “그만, 그만!” 춘실은 손을 탁 쳐버리며 “어째 무서워?”라고 했다. 흥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위방에 올라가 이불을 들쓰고 드러누웠다. 이때 고방 문이 열리더니 해월이 실 한 오리도 걸치지 않고 뛰어 나와 춤을 덩실덩실 췄다. “아하, 좋다! 우리 신랑 좋고 좋다!” “아이고, 이거 동네 창피해 어떻게 살겠니? 고방에 들어가라!” 춘실은 애를 깔까봐 끌어안으며 해월을 고방에 마구 떠밀었다. 이때 충국이 괴춤을 춰올리며 고방에서 나와 때물이 괴죄죄 흐르는 낯을 쓱 닦으며 벌쭉거리었다. “가시 아버지, 언제 우리 잔치하오?” “가라! 썩 꺼지지 못해?! 꼴도 보기 싫어!” “아무리 늙은 사위라도 이럼 못쓰지. 내 당신보다 이상인데.” 충국은 너스레를 떨어댔다. “난 벽돌공장 춥다. 고방 참 따뜻해 좋다. 안 가겠다.” “썩 가지 못하겐?!” 흥수는 주먹을 쳐들었다. 허나 충국은 겁기라고는 꼬물만치도 없이 헤헤 웃으며 흥수의 쳐든 주먹을 내리었다. “권투! 당신, 안 돼! 난 상순 양형님에게서 무술 배웠어.” 흥수는 주먹으로 충국의 낯을 내질렀다. 충국은 잽싸게 주먹을 받아 쥐어 탁 밀었다. 흥수는 저쪽 벽 구석에 가서 엉덩방아를 쿵 찧었다. 충국은 기세등등해 지껄였다. “당신 내 여동생 했다. 이 치보, 당신 매부야? 가시아버지야? 허허허.” 흥수는 그 소리에 억이 막혀 멍청히 앉아 상을 찡그리며 미치광이 같은 충국을 쳐다보기만 했다. 충국은 춘실의 품에 안겨 “앙, 앙~”우는 애기 머리를 쓰다듬더니 고방으로 해 뒷문을 열고 나갔다. 그는 다 벌어진 뒤울안 바자를 꿰질러 조개덕으로 내려갔다. 한편 흥수는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충국을 놔두었다간 동네 창피해 살 것 같지 못했다. 새벽까지 이리 궁실 저리 궁실 하며 고민에 잠겼던 흥수는 결단을 내렸다. 그는 소변보러 나가는 척 하면서 바깥으로 나갔다. 그는 구새 목에 가서 벽에 걸어두었던 호미를 벗겨 들고 조개덕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마을 동구 둔덕 아래에 있는 벽돌공장이 가까워질수록 흥수는 손에 쥔 호미자루를 더욱 으스러지게 틀어쥐었다. 그가 벽돌공장 당직실에 다가가 벽에 기대 구멍이 펑 뚫린 안을 들여다보았다. 말이 당직실이지 문 쪽도 다 빠지고 창문 옆에 커다란 구멍까지 나서 우사보다도 못했다. 게다가 이불이 없어 충국은 당직실 안에 북데기를 들쓰고 자는 것이었다. 쿨쿨 자는 그 모습 딱 검정 돼지 같았다. “개 새끼, 다신 내 딸을 짓밟지 못하게 병신을 만들어주마!” 흥수는 이를 악물고 슬금슬금 당직실 문께로 다가가 문꼬리를 쥐어 당겨보았다. 문을 걸지 않아 삐꺼덕 열렸다. 술을 잔뜩 처먹은 충국은 그 추운 당직실에서 곯아떨어진 채 코를 드렁드렁 구르며 자고 있었다. 그는 흉악한 검은 그림자가 슬금슬금 다가드는 것도 아무런 기미도 차리지 못하고 잠에 완전히 곯아떨어졌다. 흥수는 호미를 쳐들고 슬금슬금 다가가 어둠 속에서 북데기를 들쓴 충국의 머리를 겨누고 힘껏 내리찍었다. “아이쿠! 발이야. 누구야?!” 충국이 벌떡 일어나 앉더니 발을 주무르며 땔, 땔 굴렀다. 흥수는 충국의 머리를 힘껏 내리찍었다. “앗!” 충국은 푹 꼬꾸라졌다. 흥수는 충국의 괴춤을 깐 후 불 중태를 더듬어 쥐고 호주머니에서 면도칼을 꺼내 째고 불알 한쪽을 베 내 입 안에 넣고 우물우물 씹었다. 순간 복수의 이발이 무섭게 맞쪼아댔다. (화근을 남기지 말아야지.) 흥수는 한쪽 불알마저 마저 썩 베 내 입 안에 넣고 우물우물 씹어 꿀떡 삼켰다. (이젠 네놈이 우리 해월을 더 밟아봐라! 흥! 네 불알을 먹고 이젠 미련을 죽여주마. 으흐흐.) 흥수는 충국의 괴춤을 춰올리고 발길로 툭 걷어찼다. 충국이 후- 한숨인지 뭔지 숨을 길게 내 쉬더니 아무런 동정도 없었다. 흥수가 충국의 코에 귀를 대보니 숨은 가늘게 쉬고 있었다. 그러나 더럭 겁이 났다. (이 놈이 정말 죽으면 어떻게 해? 제발 죽진 말라.) 흥수는 북데기를 왈왈 덮어놓고 황급히 문 밖으로 나가 어둠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그는 마을 동구 샘물터에 가서 옷과 손에 묻은 피를 샘물에 씻었다. (아차, 당직실에 호미를 두고 나왔구나. 단서로 될 수도 있어.) 그는 벽돌공장에 되돌아가 동정을 살피다가 당직실에 기어들어 어둠 속에서 호미를 더듬어 쥐고 나오려다가 주춤 멈춰 섰다. (혹시 죽지나 않았을까?) 그는 무릎을 꿇고 앉아 북데기 속에서 충국을 더듬어 흔들어보았다. “음~” 충국은 죽지 않았었다. 허나 정신을 아직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개 놈 새끼, 불알도 없는 주제에 이제 또 우리 해월을 희롱해?) 흥수는 침을 퉥 뱉고 당직실 문을 나섰다. 그는 샘물터로 슬금슬금 가서 피 묻은 호미마저 샘물에 말끔히 씻어들고 어둠을 밟으며 집으로 돌아왔다. 며칠 후 날씨가 훈훈해지자 상순의 포치에 따라 벽돌을 구워내려고 허동원은 숭길과 성욱을 데리고 벽돌공장에 왔다. 그들은 당직실에 들어가 북데기 속의 충국을 깨우려고 흔들었다. 그런데 충국이 꿋꿋이 굳어져 있지 않겠는가! “아니, 죽었어?” 성욱이 눈이 떼꾼해 소리쳤다. 허동원이 북데기를 와락와락 헤치자 상을 찡그린 충국의 낯이 드러났다. 그런데 이상하게 정수리에 피 터져 있었다. “빨리, 이 치보에게 알려라!” 허동원이 소리치자 성욱은 부랴부랴 당직실에서 뛰어나가 곧추 함흥 촌으로 달려 올라갔다. 이윽고 이흥수가 당직실에 들어섰다. 그는 충국의 피와 먼지가 덕지덕지 한데 엉켜 붙은 머리랑 두루 여겨보는 척 하더니 능청을 떨었다. “죽은 지 며칠 되는 거 같구먼. 이걸 봐.” 그는 북데기에 토한 고기랑 보고 중얼거렸다. “뭔 술 이따위로 처먹어? 아마 덕돌이 대학에 가는 날 술을 가득 처먹고 집에 와서 넘어지면서 벽에 머리를 쪼은 거 같아.” 허동원은 도리머리를 흔들며 반신반의했다. “아무리 세게 벽에 부딪친들 죽기까지야 하겠소?” 흥수는 손가락으로 조개턱을 고이고 한참 궁리하더니 또 다른 결론을 내렸다. “아마 벽에 부딪쳐 쓰러졌다가 얼어 죽은 거 같아. 구들이 찬 거 봐.” 동원은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그런 거 같지 않소. 그 추운 동삼에도 얼어 죽지 않았는데 봄에 얼어 죽었겠소? 파출소에 알리기요.” 흥수는 콧방귀를 뀌었다. “지주 아들, 국민당 특무 잘 죽었어. 파출소에 알려 뭘 해? 시체가 썩은 내 나는데 얼른 파묻어 버려.” “아무리 지주라 해도 인명사고인데 알리지 않아 되겠소?” 흥수는 엉거주춤 물앉으면서 “이 일은 내가 알아서 처리할테니 파묻고 보지.”라고 했다. 허동원은 충국의 시체를 북데기 속에서 들어 내가다가 바지에도 피가 발린 것을 발견했다. “허, 괴춤에 이 피를 보오.” 성욱은 북데기를 번지며 황급히 소리쳤다. “북데기에도 피가 발리었소.” 동원은 벽을 만지며 “이 벽에도 피가 묻어 있소.”라고 했다. 그러자 흥수는 황급히 “아무래도 머리의 피가 흘러내려 묻은 거 같아.”라고 했다. 허동원과 성욱, 숭길은 흥수의 말대로 지주라고 충국의 시체를 관을 짜서 넣지도 않고 건치에 둘둘 말아 수레에 실어 가지고 장개골 안에 올라갔다. 흥수는 고의로 시체가 빨리 썩어라고 동원과 성욱 등과 함께 장개골 안 습개에 구덩이를 파고 파묻어버렸다. 만사대필이라고 여긴 흥수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이때 뒤늦게 오빠가 죽은 소문을 듣고 미련이 팔소매를 걷고 흥수네 집으로 뛰어 들어왔다. “이 치보, 너도 사람이냐?” “왜 이래?” 흥수는 짐짓 시치미를 땄다. “오빠가 죽었는데 나한테 알리지도 않고 파묻어버려?!” 미련은 흥수에게 달려들어 머리를 마구 잡아 끄집어 당겼다. “이년이!” 흥수가 활 밀어놓자 미련은 저쪽에 나가 엉덩방아를 찧었다. “지주 아들놈을 파묻어 줘도 대단하지. 뭐 어쨌다고 지랄이냐?!” 바깥에 숱한 사람들이 구경하러 왔다. 미련은 단말마적으로 달려들며 고래고래 고함쳤다. “그래 지주네 아들이나 딸이라고 네놈이 마음대로 짓밟고 강간하고 파묻어도 되느냐?! 엉?!” “이년이, 진짜 환장했어? 주둥이를 함부로 놀리겐!” 미련은 흥수가 또 밀치려고 하자 손을 마구 물어놓았다. “아! 이년이, 이게.” 흥수는 너무 아파 물린 손을 빼내며 오만상을 찡그렸다. 마을 사람들은 웅성거렸다. “저 이 치보 미련을 강간했는 모양이오.” “글세, 강간하지 않았으면 저러겠소?” 흥수는 동네 창피해 문을 열고 마을 사람들을 향해 손 삿대질 했다. “뭘 구경해? 가지 못해? 누가 지주 딸을 비호하면 투쟁 받을 줄 알라.” 이 치보의 위협에 모두들 목을 움츠리고 집으로 돌아갔다. 흥수는 춘실과 함께 미련의 두 팔을 비틀어 줄줄 끌어 토성 앞에 가져다 훌 던졌다. 미련은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아예 길바닥에 퍼더버리고 앉아 발버둥질 치며 울며불며 고래고래 고함쳤다. “아이고, 불쌍한 내 오라비야. 아버지 엄마도 불쌍하게 투쟁만 받다가 죽었는데. 흐흐흐, 우리 오라비 장가도 가지 못하고 집도 없이 불쌍하게 죽었구나. 우리 오라비 어데 파묻었는지 날 보이지도 않고 버리느냐? 흥수, 잘 되는가 봐라. 해월이 낳은 애는 내 오라비 아들이야. 우리 오라비 해월을 백번, 천번 했다. 시원하다. 아무리 치보 주임이면 어째? 제 딸을 우리 오라비 했다고 그 승치로 나를 밤마다 찾아와 강간해? 세상에 지주 딸이라고 마음대로 강간해도 되는가? 엉~ 엉~” 온 동네에 소문나자 흥수는 그날부터 동네 창피해 마을에 얼씬하지 못했다. 그런데 집안에서도 야단났다. “내 서방을 내놔! 아버지가 해쳤어. 엉~엉~” 해월이가 발버둥질을 치면서 야단 쳤다. 바깥에서 아무리 떠들어도 괜찮았다. 허나 해월이가 미쳐 떠들어대자 흥수는 살길마저 막막해졌다. 설상가상으로 이계삼과 허영주가 함흥촌에 공작대로 내려왔다. 그들은 오자마자 토성 안 대대 사무실 앞마당에서 사원대회를 성대히 열었다. 이계삼 부서기는 대대 사무실 마루에 올라서서 다음과 같은 놀라운 상급의 정신을 전달했다. “우리 당에서는 억울한 모자를 쓰고 밥 먹듯 투쟁당하다가 억울하게 사망한 정성해 서기의 억울한 누명과 모자를 벗겨주었고 당과 사회주의를 위해 세운 풍공업적을 높이 평가해주셨습니다. 정성해동지는 일찍 우리 동만지역에서 공산당에 가입했고 지하당조직의 영도아래 조선족을 비롯한 형제 민족 반일투사들을 조직해 목숨을 걸고 간고한 항일투쟁을 해왔습니다. 그는 당 중앙의 파견을 받고 쏘련에 유학해 정치와 경제, 군사를 배웠으며 중국에 돌아온 후 당시 당 중앙이 자리잡은 연안으로 들어가 연안간부로 됐습니다. 그는 당 중앙의 지시에 따라 조선의용군 3지대를 이끌고 동북에 진출했고 우리 동만에 와서 주요 영도를 협조해 우리 지역 조선민족을 비롯한 여러 민족 인민들을 단결하고 영도해 중국 공산당을 따라 사회주의 혁명과 건설에서 풍공업적을 쌓았습니다. 그이께서 어찌 반당, 반사회주의 분자란 말입니까? 그이께서 어찌 지방민족주의를 고취하고 민족독립왕국을 꾀한 민족반역자란 말입니까?…” 상순과 학수 등은 모두 군중들 속에 서서 이날을 기다렸다는 듯이 기쁨의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그들이 어찌 기쁘지 않으랴? 그들은 그 지겨운 세월에 묵묵히 오늘이 오기를 얼마나 기다렸던가! 상순은 속에서 몇 십 년 응어리 졌던 어혈이 다 풀리는 것 같았고 가슴이 활 열리고 움켜잡혔던 목이 탁 트이는 것 같았다. 허나 흥수는 기분이 엉망이 돼버렸다. 그는 회의가 끝나자 서리를 맞은 뱀처럼 머리를 숙이고 목을 움츠린 채 집으로 돌아와 털썩 들어 누었다. (뭐? 이계삼은 현 당위 부서기로 복직됐다고? 허영주는 부현장으로? 으흐흐흐.) 그는 이불을 내리어 꼭뒤까지 푹 썼다. (하긴 잘해. 그들은 모두 나한테 투쟁 당하던 자들이 아닌가! 뭐? 뭐? 또 문화대혁명 기간에 노동개조를 하던 정규상, 김송선, 허백호의 억울한 사건을 해명하고 억울한 우파, 반혁명 모자를 벗겨 준다고 하지 않는가! 지어 항상 횡설수설하면서 처처에서 당의 기본 로선을 비웃던 우파 박성근의 우파모자도 벗겨준다고? 말도 안 돼!) 흥수는 생각할수록 세상이 완전히 바뀌어 간다는 것을 느꼈다. (이젠 상순이 우쭐하게 됐구나.) 흥수는 낯이 새까매 집에 들어 누어 입에 빗장을 지른 채 두문불출했다. 현에서 내려온 공작대에서는 연일 토성 안 대대 사무실 앞마당에서 대회를 열고 “반 우파투쟁”과 “문화대혁명”을 “청산”하기 시작했다. 회의장에는 온 대대 당원과 사원들이 시루 속의 콩나물 대가리처럼 빼곡하게 들어섰다. 회의장에는 우파로 몰리어 20여년이나 억울하게 우파 모자를 쓰고 별의별 모욕과 중상, 갖은 시달림을 받을 대로 받은 정규상과 박성근의 아들 박숭길도 서 있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감옥에 갔던 허백호 서기와 파출소 허영호 소장도 허영주 부현장의 옆에 서 있었다. 허나 이흥수는 회의장에 계속 보이지도 않았다. 사실 그는 겁을 집어먹고 대회장에 나오기는커녕 아내 지춘실을 시켜 대회장에 가서 동정을 살피게 하고 집에서 이불을 들쓰고 귀를 틀어막고 들어 누워 있었다. 그는 이불 속에서 다른 건 몰라도 충국을 죽인 일이 마음에 걸렸다. (혹시 시체 대갈통을 파내 깨진 상처 자국이라도 발견한다면 모든 게 끝장날게 아닌가? 젠장, 진작 대갈통을 잘라 없애버려야 했는데. 후-.) 그는 이불안이 뜨겁도록 한숨을 토해냈다. (아니야. 대갈통을 파서 잘라 버리면 더 의심받을 수 있어. 하느님께서 충국의 대갈 뼈에 호미에 맞은 상처를 남기지 말아주옵소서.) 흥수가 이런 생각을 하며 속을 끙끙 앓고 있을 때었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숭길을 비롯한 허춘, 성욱, 동림 등 민병들이 집에 들이닥쳤다. 그들은 다짜고짜 이불 속에서 이흥수를 끌어내 회의장으로 끌고 갔다. “왜 이래? 이걸 놔!” 흥수는 마치 도살장에 끌려 나가는 돼지처럼 몸부림치며 고래고래 고함쳤다. “허영주 부 현장의 지시다. 네놈을 투쟁대회장에 끌어낸다. 걸어!” 민병들은 이흥수를 회의장에 끌고 가 원 공사 혁명위원회 주임 황종연과 함께 숱한 군중들의 앞에 내세웠다. 허나 문화대혁명 때처럼 고깔모자를 씌우지는 않았다. “왜 이러는 거요?” 황종연은 몸부림치며 고함쳤다. “넌 문화대혁명시기 반란파 두목이다.” “억울합니다. 혁명자를 이렇게 억울하게 투쟁합니까?” 그러나 민병들은 황종연의 입에 수건을 틀어막았다. 그때 이계삼이 민병들을 말리었다. “우린 ‘문화대혁명’시기 이자들처럼 비인간적으로 가혹하게 굴지는 말아야 하오.” 민병들이 수건을 풀어주었다. 대회는 허영주 부현장이 직접 사회했다. “오늘 대회는 ‘반우파운동과 문화대혁명’을 청산하는 대회입니다. 우선 이계삼 부서기로부터 정치야심가 반란 파 두목들인 황종연과 이흥수의 죄악을 폭로, 비판하겠습니다.” 모두들 박수갈채를 보냈다. 이계삼 부서기는 함흥 대대의 이흥수와 황종연이 반 우파투쟁과 문화대혁명시기 죄악을 공개하고 다음과 같이 집중해 비판했다. “…이흥수는 항일투쟁과 해방전쟁시기 노간부들인 이계삼과 허영주, 정규상 등 동지, 지어 자기를 입당시킨 입당소개인 허백호동지마저 억울하게 우파분자로 몰아 비인간적으로 혹독하게 비판하고 투쟁하고 해쳤다. 허백호 서기 등 노 간부들은 함흥 대대 노 당지부 서기 김병완 동지와 김상순 동지와 함께 황종연과 이흥수의 착오적로선과 만행에 맞서 견결히 투쟁했다. 허백호 서기는 함흥중학교 동쪽 한족묘지 부근에서 김송선 동지를 강간하려고 덤비는 황종연을 돌멩이로 까부셔 황종연의 더러운 야욕을 제지시켰다. 한차례 강간범죄행위를 제지시키고서도 당시 허백호 서기는 황종연과 이흥수에 의해 억울하게 살인혐의를 쓰고 감옥에 가서 5년 동안이나 옥살이를 했다. 박성근 사원이 실사구시하게 말 몇 마디 했다고 이 두 놈은 우파 모자를 씌워 한뉘 고통 속에서 시달리게 했다. 박성근 동지는 20여년 비인간적인 심신타격에 견디지 못하고 폐병에 걸려 병마에 시달리다가 억울하게 사망했다. 반란파 두목 이흥수와 황종연은 청백한 노 간부와 사원들에게 반혁명분자, 우파분자 모자를 마구 들씌워 투쟁하고 박해했다. 이 두 놈은 투기적으로 입당한 정치야심가들이다. 황종연과 이흥수 두 정치야심가들은 정치투기를 일삼으면서 야합해 천방백계로 대대 노 당지부 서기이며 항일 로간부 김병완 그리고 그의 손자 김상순 서기가 ‘혁명을 틀어쥐고 생산을 촉진해야 한다’는 모주석의 지시에 따라 농업생산을 틀어쥐는 한편 타향 산골에 가서 감자농사와 옥수수 농사를 하고 대대에 인삼장과 양봉장, 벽돌공장을 꾸렸다고 류소기의 ‘생산유일력’과 ‘3자1포’를 집행한다고 억울한 모자를 들씌우고 반란 파들을 선동해 박해했으며 김상순 동지의 대대 당 지부 서기직무를 찬탈했다. 김상순 동지는 황종연과 이흥수의 연합박해를 피해 교하로 이사해 가지 않으면 안됐다. …” 이계삼 서기가 격앙된 목소리로 그들의 죄상을 읽어 내려갈수록 황종연과 이흥수는 평소에 개 턱처럼 쳐들었던 대가리를 툭 떨어뜨리고 온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군중들은 격분한 눈길로 이흥수와 황종연을 쏘아보았다. 이계삼은 계속해 흥수와 종연의 죄악을 폭로했다. “전임 공안국 국장 김용만과 황종연, 이흥수는 ‘4인무리’ 일파인 반란파 두목 모원신의 수하로서 악질반란파 두목들이다. 반란파 두목 김용만의 지시에 따라 이일룡, 황종연, 이흥수는 노간부들을 박해하고 무리싸움을 주도했으며 무고한 사람들을 마구 때리고 공공재산을 짓 부신 주범들이며 반당분자, 반혁명분자들이다. 황종연과 이흥수는 남녀작풍도 문란하다. 그들은 하향간부 박윤희를 여러차례 위생소에서 강간하거나 간음했다. 이흥수는 김송선이 자기 야욕을 거절한다고 위생소로부터 몰아내고 여자가 할 수 없는 산비탈 옥수수 실이를 시키면서 혼내려고 들었다.” 사람들은 흥수를 손가락질 하면서 마구 욕설을 퍼부었다. “이흥수는 사람도 아니다.” 이때 군중들 속에서 소란이 벌어졌다. 해월이가 젖통을 훌렁 드러낸 채 희희닥거리며 고래고래 고함쳤다. “우리 아버지는 늙어도 거시기가 대단해! 누가 당해?! 저기 저 미련을 거의 날마다 했다! 허허허. 우리 아빠 정말 대단한 수컷이야! 히히히.” 그 말에 모두 흥수를 쏘아보았다. 허영주는 인차 군중들 속에서 춘실을 불렀다. “춘실이, 빨리 해월을 데려 가오!” 춘실은 동네 창피해 해월을 마구 끌고 군중들 속을 빠져나가 집 쪽으로 달아났다. 허영주 부현장은 동림이랑 쪽에 대고 “민병들은 대회장 질서를 유지해 주십시오.”라고 했다. 뒤이어 이계삼이 계속 폭로했다. “이흥수는 미련을 장시기 강간, 간음했다. 또 후안무치하게도 지주, 국민당 토비, 특무인 장충국을 끌어들여 자기 딸 해월과 살게 해 계획외의 애까지 낳게 했다.” 그 말에 여기저기서 사원들이 흥수를 손가락질하며 코웃음을 쳤다. 허영주 부 현장이 군중들을 안정시키고 계속 대회를 집행했다. “아래에 함흥대대 간부와 군중들을 대표해 당지부 로서기 김상순동지가 발언하겠습니다.” 그러자 군중들 속에서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가 터졌다. 상순은 팔소매를 거두고 군중들 앞으로 나서 엄숙한 표정을 짓고 목청을 가다듬어 발언했다. “여러분, 억울한 모자를 쓰고 고생하던 수많은 간부들과 혁명적 군중들이 기다리던 역사적 천지개벽이 오고야 말았습니다. 림표와 ‘4인무리’의 죄악적인 노선과 김용만, 황종연과 이흥수 등 반란파 두목의 박해를 받아 수많은 간부들이 당정부문과 의료위생, 공안국과 파출소 전정기관, 농촌에서 철직 받았고 우파, 반혁명분자 억울한 모자를 쓰고 우리 대대에 와서 이른바 노동개조를 했습니다. 그래 빈농들이 일년 내내 농사를 지어도 죽물도 변변히 먹지 못하는데 들어앉아 간부를 타도하는 반혁명정치투쟁을 하는 것이 옳은 노선인가? 숱한 식구들이 겨우 이불 한 채에 다리나 촘촘히 걷어 넣고 자고 형이 입던 옷을 물려받아 입게 하는 것이 이른바 이흥수가 고집하는 계급투쟁, 혁명을 하는 사회주의 우월성인가?” 황종연과 이흥수는 점점 머리를 떨어뜨렸다. 상순의 말은 점점 날카롭게 두 놈의 썩어빠진 사상과 영혼, 죄악을 찌르기 시작했다. “황종연과 이흥수는 이름난 의학교수 정규상과 전 현을 영도하던 노간부들을 여지없이 박해해 돼지 똥을 모으지 않으면 밭에서 기음을 매게 강요했습니다. 장기적으로 간음하려는 더러운 야욕을 채우지 못하게 되자 한평생 무대에서 활약하던 유명한 무용수를 세상에 몰아도 보지 못한 소 수레를 몰고 옥수수를 실어들이게 했습니다. 위생소 위생원 자리로 여성들을 유혹하고 노동개조를 빌미로 강요하기도 하면서 더러운 야욕을 채우려고 했습니다. 당원 간부로서, 또 대대의 치안을 책임진 치보 주임으로서 이흥수는 암암리에 지주의 딸과 간통하고 강간과 간음을 일삼았습니다.” 상순이 이흥수와 황종연을 손가락질하며 “이흥수도 인간입니까? 저런 자가 당원간부입니까?”라고 소리치자 군중들은 “개새끼다!”라고 소리쳤다. “이흥수는 산아제한을 책임진 간부로서 딸 해월과 지주 아들 충국과 결혼등록도 하지 않고 간통해 애까지 낳게 했습니까? 이흥수는 정책관념이 있는가?” 흥수는 어찌나 당황했으면 말상은 찌그러지고 우묵눈은 감겨졌다. 박죽코는 거매지고 부르튼듯한 두툼한 입술은 거마리 매달린 같은데 썰어내면 한접시는 실히 될 것 같았다. 더구나 한심하게도 바지 밑으로 누런 오줌이 줄줄 흘러내렸다. “이전에 충국의 동생 장미련이 경주의 애를 가졌다고 수술 칼로 수술해보려고 미쳐 날뛴 자입니다. 이게 검정개 돼지 흉을 하는 게 아닙니까?” “옳습니다.” “사람을 물러 드는 똥개입니다.” 상순은 마른기침을 하더니 불길이 이글거리는 눈길로 이흥수와 황종연을 무섭게 쏘아보며 고래고래 고함쳤다. “이흥수와 황종연은 문화대혁명 시기 개 잡은 포수처럼 우쭐거리며 무섭게 정치반란의 칼을 휘둘러 무고한 노간부들을 타도하고 정권을 찬탈해 게바라 올랐습니다. 무고한 백성들을 짓밟고 더러운 야욕을 채우려고 미쳐 날뛰며 하늘과 땅이 용납하지 못할 죄를 지었습니다. 역사는 무정합니다. 정의는 승리하고 범죄자들은 역사의 심판을 면치 못하는 법입니다. 당과 인민의 역사적 죄인 황종연과 이흥수는 마땅히 역사의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이계삼은 상급 정법부문의 처분결정을 공포했다. “황종연과 이흥수는 당과 인민에게 하늘에 사무치는 죄악을 저질렀다. 상급 당위와 정법 부문의 결정에 따라 반당, 반혁명분자, 반란 파 두목 황종연의 공사 혁명위원회 주임 직을 철직시키고 영원히 공산당 조직에서 출당시키며 정법기관에 넘겨 형사 죄를 철저히 조사해 법에 의해 처리한다. 반당 반혁명분자, 반란 파 두목 이흥수를 영원히 출당시키며 대대 혁명위원회 주임, 치보 주임 직을 철직시키며 정법부문에 넘겨 죄상을 철저히 조사한 후 법에 의해 처리한다.” 모두들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를 보냈다. “저 놈들을 총살해야 한다!” 격분된 군중들은 흥수와 종연에게 주먹을 내휘두르며 고함쳤다. 복직된 허영호 소장은 민병들과 경찰들을 지휘해 황종연과 이흥수를 결박 지어 찌프에 싣고 대회장을 떠나 천수해 쪽으로 먼지를 새뽀얗게 일구며 달려갔다. 뒤이어 허영주 부 현장이 직접 노 간부들을 해방시키는 상급 당위의 결정을 공포했다. “억울하게 우파, 반혁명분자 모자를 쓴 이계삼, 허영주, 허백호, 김진욱, 한영수, 박영발, 박윤희, 정규상, 김송선 등 노간부들의 억울한 루명을 몽땅 벗겨 해방시키며 적당한 직위에 복직시킨다. 이미 세상을 떠난 박성근 동지와 조선에 나간 항일투사 진달래 중대장,그리고 오옥선 교원의 억울한 우파 모자와 누명을 몽땅 벗겨주며 해방시킨다. 마반산집할머니는 일제시기 일본 놈들의 핍박에 의해 조선 우시장위안소와 만주 진수해위안소에 끌려갔으며 신경과 봉천, 북평, 무한 등지까지 끌려가 갖은 릉욕을 다 당하였다. 그는 일본놈들과 전쟁의 피해자이다. 그러나 억울한 매국역적과 매민족반역자란 억울한 모자를 쓰고 투옥됐었다. 마반산집할머니의 억울한 모자를 벗겨준다. 그에게 억울한 모자를  씨운 반란파 두목 김용만과 황종연, 리흥수는 마반산집할머니에게 억울한 모자를 씌운 범죄자들로서 엄정히 처단해야 한다."    사람들 속에서 춘실도 진수해위안소에 끌려가 억울한 릉욕을 당한 일과 녀동생 은실을 생각하면서 손으로 비분에 찬 눈물을 닦았다. 허영주 부현장은 계속 상급당위의 결정을 공포했다. "과거를  ‘문화대혁명’시기 이흥수 반당노선과 맞서 견결히 투쟁한 함흥대대 당지부 노서기 김상순 동지를 중공 함흥대대 당 지부 서기로 임명한다.” 우레 소리와 같은 박수갈채가 장내를 진동했다. 이때 민경들과 민병들이 대대 사무실에서 그간 이흥수와 황종연이 조작한 노간부들의 이른바 검은 자료를 여섯 마대나 내다가 무져 놓고 석유를 치고 불을 콱 질렀다. 순간 삼단 같은 연기가 하늘로 치솟아 올랐다. 하늘 높이 타래치어 올라가는 시꺼먼 연기를 쳐다보며 노 간부들은 하늘이 날아날 지경으로 한숨을 후 내쉬었다. 정규상은 눈물이 글썽한 눈으로 시뻘겋게 타버리는 자료더미를 쏘아보며 치를 떨었다. (내가 한뉘 무슨 말을 저렇게 많이 했다고 숱한 자료를 했어? 한심한 일이었구나. 사람을 잡자니 못한 짓이 없었구나. 나쁜 놈들! 이 놈의 세상에 깊고도 어두운 동굴이 있었구나. 어쩜 20여년이나 기어서야 오늘 어두운 동굴을 헤쳐 나와 해 빛을 다시 보게 됐구나. 사람의 한뉘에 20년이 몇 번이나 있는가? ) 이때 허백호가 너털웃음을 웃으며 군중들 앞에 나서더니 주먹을 불끈 쥐고 하늘을 향해 힘껏 휘둘렀다. “위대한 중국 공산당 만세! 만만세!” 노간부들을 비롯한 군중들은 허백호를 따라 구호를 외쳤다. “아하하하, 난 오늘에야 해방됐단 말이야! 하하하하. 오늘 같은 날도 있구나! 흥수, 이놈, 널 입당시킨 내가 눈이 멀었지. 어허헉, 헉, 헉. 네놈은 천벌을 면치 못할 거야.” 허백호는 실성한 사람처럼 소리치며 비틀거리더니 상순을 붙안고 대성통곡쳤다. “상순이, 흥수 편에 서서 자네를 해친 내가 잘못했소. 나를 용서하지 마오!” 상순은 허백호 서기를 부축하며 위안시켰다. “허서기, 웬 말씀입니까? 우린 오늘 승리하지 않았습니까?” “허허허허. 승리했소. 우린 승리했소. 승리…” 갑자기 허백호는 뒤통수를 붙잡고 몸을 가누지 못했다. “허 서기! 허 서기!” 허나 허백호 서기는 게거품을 물고 까무러친 채 쓰러지고 말았다. 정규상이 황급히 뛰어와 상순의 품에 안긴 허백호의 손목을 잡고 진맥해보았다. “아차, 중풍을 맞았소.” 상순은 민병들 속에서 성욱을 돌아보며 소리쳤다. “빨리, 손잡이트랙터를 몰아오라!” 성욱은 집안 집 할아버지 상순의 소리가 떨어지기 바쁘게 조개덕으로 종주먹을 쥐고 뛰어갔다. 이윽고 성욱이가 손잡이 트랙터를 통통통 몰고 달려왔다. 상순은 눈물이 글썽해 허백호 서기를 업어 손잡이 트랙터에 실었다. 그때 허영주가 대대 위생소에 뛰어 들어가 침대에서 요와 이불을 안고 나와 손잡이 트랙터에 폈다. 규상과 상순이 그 위에 허백호를 눕혔다. 허백호 서기는 거품을 물고서도 기쁨에 겨운 미소를 지은 채 상순의 품에 안겨 손잡이 트랙터에 실려 진수해 병원으로 통 통 통 달려갔다. 맑은 하늘에 구름송이들이 바람에 동으로 흩날려 가고 있었다. 한 많은 하늘땅이 서서히 노호하고 있었다. 먹장구름이 덮쳐오더니 번개가 번쩍였다. 꽈르릉 꽝! 천지를 진동하는 봄 우레 소리가 울리더니 비방울이 후둑후둑 떨어져 허백호가 덮은 이불을 사납게 때렸다. 상순은 자기 몸으로 허백호의 위를 가리었다. 맑은 하늘에 뜬 커다란 먹장구름에서 떨어지는 비를 막을 길이 없었다. 허나 우르릉 거리던 하늘이 다시 맑아지기 시작했다. 손잡이트랙터가 달리는 길옆의 물기를 머금은 버드나무 가지들이 오동통한 버들개지들을 업고 사납게 불어치는 바람에 설레고 있었다.                            5.흉수의 그림자       먹장구름이 걷히고 찬란한 해 빛이 대지를 비추었다. 먹구름이 감돌던 하늘에는 꽃구름이 둥실 뜨고 만물이 기지개를 켜면서 새 싹이 뾰족뾰족 돋아나고 있었다. 조무래기들은 손칼이랑 나무꼬챙이를 가지고 조개덕의 양지바른 둔덕에서 오구작작 모여들어 나물을 캐 먹느라고 여념이 없었다. 마을 사람들은 상순의 포치대로 가대기랑 호리랑 창고에서 내리워 손질해 가지고 밭갈이를 나갔다. 그들의 머리 위로 봄을 알리는 제비들이 하늘하늘 날아다닌다. 제비들은 강변에서 진흙을 물어다 지붕과 처마아래에 둥지를 틀기에 여념이 없었다. 아직 초봄이어서 논밭을 깊게 갈수 없었다. 보습 날이 얼어붙은 논바닥 밑으로 더 들어갈 수 없었다. 소가 끄는 보습 날은 언 논바닥 위로 더 잘 미끄러져 나가 밭갈이를 하는 농부들의 기분이 적이 좋았다. 갓 갈아엎어놓은 번뜩번뜩하는 흙덩이들 속에서 흙냄새가 풍겨 올라 코를 찌르며 새해 풍년을 희망하는 상순의 가슴을 사뭇 부풀어 오르게 했다. 저쪽에서는 강남으로 날아가는 기러기 떼들이 패용천산과 칼산 상공을 헤가르며 끼룩끼룩 줄을 지어 훨훨 나래치고 있었다. 진짜 봄을 알리는 한 폭의 수채화와도 같았다. 상순은 밭갈이를 하면서도 마을에서 일어난 이 일 저 일을 생각하니 한숨만 자꾸 나왔다. 허백호 서기는 억울한 모자를 벗기고 명예를 회복해주자 너무 기뻐 뇌출혈까지 했다.  공사 병원에 실어갔지만 며칠 안 돼 사망하고 말았다. 게다가 충국이 무슨 감투끈인지 모르게 불시에 죽었다. 상순은 충국의 죽음에 의심이 부쩍 들었다. 젊어서 다년간 공안국 국장 사업을 해 온 그는 숭길과 허동원이 찾아와 충국의 시체에 피가 묻어있더라고 한 말을 그저 스치고 지나갈 수 없었다. 밭갈이를 떠나기 전에 집안 집 손자 성욱마저 찾아와 말했다. “벽돌공장 당직실에 피비린 냄새 물씬 납디다. 충국의 시체 외에도 덮고 쓰러진 북데기와 벽에도 피가 묻어 있습디다. 지어 바지에도 피가 묻어있습디다.” 상순은 자기가 아껴온 집안 손자 성욱이 불쌍했다. 덕돌처럼 대학에 가지 못하고 아직도 농촌에서 회계 따위나 하면서 흥수와 계급투쟁을 하자고 이를 악물고 달아 다니는 것이 가련했다. “얘, 넌 이젠 마을 일에 작작 삐치고 공부나 해서 덕돌처럼 대학에나 가라!” 그 말에 성욱은 뒷덜미를 쓱쓱 긁었다. “대학에 어디 아무나 갑니까?” 사실 성욱은 덕돌을 질투해 옥신각신 싸워왔지만 할아버지 벌 되는 상순은 아주 존경했다. 그가 아무리 덕돌을 헐뜯어도 상순은 넓은 마음으로 그를 아껴주었던 것이다. 상순은 사실 자기 아들은 소몰이를 시켰지만 성욱에게는 회계와 손잡이트랙터 운전수를 시켰던 것이다. 아무리 덕돌과 싸워도 상순의 그 점만은 성욱은 고맙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상순은 마을 사람들 앞에서는 아무런 내색을 내지 않았지만 밭갈이를 하면서도 흥수를 의심했다. (가능하게 충국을 놔뒀다간 해월을 계속 짓밟고 동네 창피하니깐 살해했을 가능성이 있다.) 허나 상순은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아무리 충국이 해월을 희롱해 눈꼴사나워도 치보 주임이란 사람이 살인까지 한단 말인가? 지주라고 해도 살인하면 총살당한다는 간단한 도리도 모를 수야 없겠는데. 황차 당 중앙에서는 계급투쟁을 기본 고리로 틀어쥐던 데로부터 경제건설을 중심사업으로 틀어쥐라고 하면서 전국의 지주와 부농의 모자를 다 벗겨주었고 동등한 대우를 해야 한다고 지시하지 않았는가? 흥수는 끝장났다. 만약 충국을 살해했다면 흥수는 …) “와-” 순간 상순은 밭갈이하는 소를 멈추었다. 그는 논두렁에 앉아 담배를 말아 붙여 물고 담배연기를 길게 빨아 들였다가 후 내 뿜었다. 비록 흥수와 정치상에서 모순은 있었지만 상순은 흥수가 그런 일을 했다고 생각하기는 싫었다. 아니, 생각하기조차 두려웠다. 허나 어쩐지 충국의 죽음이 동상이나 자살로는 생각되지 않고 피살이라는 생각이 머리를 쳐들었던 것이다. 밭갈이를 마치고 혹달개소를 풀어 몰고 집으로 돌아오면서도 계속 의혹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몰려들었다. 집으로 돌아오니 조선에서 조카 동선한테서 편지가 날아왔다. 상순은 소 채찍을 벽에 걸어두고 바삐 신을 벗고 명옥한테서 편지를 받아 바삐 훑어보았다. 존경하는 삼촌, 그간 안녕하십니까? 삼촌댁과 동생들은 모두 무사합니까? 덕돌은 이젠 어엿한 청년이 다 됐겠구나. 그간 삼촌일가에 구체 사항이 있어 편지 한 장 제때에 올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그간 삼촌 일가에서 저의 어머니로 해 수고 많았습니다. 칠순고개에 오른 어머니를 만주벌에 남겨두고 조선에 나와 버린 이 도리깨아들을 용서해 주옵소서. 일가친척도 하나 없는 저는 함경남도 함흥시에서 간부 일을 보는 노 항일투사 최진달래 큰할머님의 도움을 받아 항흥역 화물처에서 처장 사업을 줄곧 해왔습니다. 만주에 있을 때 신문사에서 교정을 보던 류정자와 결혼해 딸 애숙이, 애화에 그 아래로 아들 성국이, 성일이, 성춘이 셋이나 줄줄 낳았습니다. 애들이라도 많이 낳아 장차 그 애들끼리라도 조선에서 거래하면서 살라고 많이 낳았습니다. 그렇다고 결코 국경을 사이 둔 삼촌과 춘자를 비롯한 여동생들과 덕돌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덕돌은 이젠 어엿한 청년으로 됐겠구나. 물론 애 때부터 총기 좋던 덕돌은 이젠 대학으로 갔겠지? 얼굴도 보지 못한 이 형님은 네가 퍽 보고 싶구나. 삼촌, 여기 나온 친척들과 항일 노 투사들은 모두 나라 덕분에 잘 보내고 있습니다. 진달래큰할머니가 조선에 데리고 나온 둘째아들 상주도 조선로동당과 위대한 수령 김일성 주석의 현명한 령도아래 잘 나가고 있습니다. 상주의 원래 이름은 경수라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남조선특무 용천의 아들 경주의 이름자 "경"자를 따르지 않느라고 "상주"라고 이름을 고쳤습니다. 상주는 평양에 가서 김일성종합대학을 졸업한 후 "3대혁명붉은기소조" 소조장으로 돼 잘나가는 정치인물이 됐습니다. 가능하게 함경북도 쪽으로 나가서 어느 군 당위 위원장쯤은 할 것 같습니다. 그저 조선전쟁에서 희생된 성칠 큰할아버지가 불쌍하고 그립습니다. 큰할아버지도 살아계셨으면 함경북도 도당위원회 위원장쯤은 할 뿐이 아닙니까?     항일 로 투사 은녀 아주머니는 지금 함경북도 한 군에서 부녀사업을 하고 있고 아들도 청진시 한 대학을 졸업하고 장가도 가고 애도 낳고 근심 없이 보냅니다. 만주에서 우파로 몰리어 갖은 투쟁을 다 받아온 오옥선 선생도 여기 와서 보통 중학교에서 교장 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하여간 중국에서 우파요, 조선특무요 하고 몰려 투쟁받던 분들은 조선에 나와 모두 잘 됐습니다. 삼촌, 그간 제가 나라에 말해서 중국에 홀로 남겨둔 어머니를 모셔오자고 제기했습니다. 효성을 중시하는 나라에서는 저의 효성에 감복돼 요구를 기꺼이 동의했습니다. 그리하여 나라 외교부를 통해 중국 외사부문의 동의를 거쳐 어머니를 조선에 모셔 내오기로 됐습니다. 그간 삼촌일가와 여동생 순애가 어머니를 모시느라고 수고 많았습니다. 고맙습니다. 삼촌, 옥체 건강하게 오래오래 앉으십시오. 만나는 그날까지 안녕히 계십시오.” 상순은 오랜만에 하나 밖에 없는 조카의 편지를 받고 뜨거운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친 혈육의 정은 말리지 못해. 형수를 조선에 내 보내야 하는 순간 상순은 굵다란 눈물을 줄줄 흘렸다. 물론 상순은 큰조카 공혁이 못쓸 부스럼 병에 세상을 떠나가고 동선마저 조선에 나간 후 외롭게 사는 형수를 생각해 집 이영도 해마다 이어드리고 땔나무도 실어주고 했지만 어쩐지 아주머니에게 효성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 같아 마음이 쓰렸다. 조카들이 다 떠나가고 아주머니까지 조선에 돌아가게 되자 상순은 외롭고 허전하기 그지없었다. 상순은 아내와 토론하고 옷감 세벌을 떼서 조선에 나가는 형수에게 드리기로 했다. 형수가 떠나가는 날 상순은 유유히 흐르는 두만강 변 해관 앞에서 형수의 손목을 잡고 흐느껴 울었다. “형수님, 이제 가면 언제 만나겠소? 부디 조선에 가서 옥체 건강히 보내오.” 지새금은 말라 생강 같은 손으로 상순의 얼굴에 흐르는 뜨거운 눈물을 닦아주었다. “생원이, 그간 나 땜에 수고 많았소. 산 사람이 갈라져도 만나겠지. 난 아들의 효성을 받으러 가니까 좋은 길에 근심하지 마오.” “예. 예.” 상순은 눈물을 흘리며 형수와 이별인사를 했다. 옆에 있던 덕돌은 “이제 큰어머니 가면 언제 보겠습니까? 이 조카의 큰 절을 받으십시오.”라고 하며 산이 무너지듯 무릎을 꿇고 넙죽 절을 올렸다. 고모사촌 최해옥 누나는 옆에서 보다가 “덕돌은 언제나 보면 어른스럽단 말이오.”라고 하며 혀를 끌끌 찼다. 명옥은 지새금과 옥신각신 다투며 살아왔지만 미운 정 고운 정 그래도 동서간이라 헤어지게 되자 섭섭한 감정을 모두 잊어버리고 석별의 정을 금치 못했다. 상순은 두만강 저쪽으로 넘어가는 형수를 바래면서 흐느껴 울었다. 아, 두만강이어, 눈보라치던 엄동설한에 형님의 지게에 앉아 두만강 얼음우로 만주벌에 들어서던 일이 어제 그제 일같이 눈앞에 선하지 않는가! 그런데 오늘 또 형수를 피 눈물이 흐르는 이별의 강-두만강을 넘어가게 해야 한단 말인가! 상순의 가슴속에서는 이별의 피눈물이 사품 치며 흐르는 두만강의 푸른 물처럼 굽이쳐 흐르고 또 흘렀다… 형수를 조선에 보낸 후 상순은 아무래도 흥수의 살인혐의를 물리칠 수 없어 정식으로 파출소에 찾아가 신고했다. 복직된 허영호 소장은 상순의 신고를 듣고 뜨거운 물주전자를 들어 상순에게 뜨거운 물을 컵에 부어드리면서 머리를 끄덕였다. “김 국장의 말씀에 도리가 있습니다. 흥수는 충국이 자기 집에 드나들면서 해월을 희롱하는데 악감을 품었을 수 있습니다. 동네 창피해 살인했을 수 있습니다. 허나 이건 추측에 불과합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살인증거를 수집해야 하겠습니다.” 상순도 머리를 끄덕였다. “나도 그 생각을 했네. 살인증거가 없이 어찌 살인죄를 해명하겠소?” 뒤이어 상순은 그간 자기 고안해낸 해명수를 말했다. “우선 충국의 시체를 파내 살펴보면 모든 게 해명될 게요. 대퇴골에 상처가 없는지? 술을 많이 먹거나 추위에 얼어 죽을 수는 없다고 보오. 사건이 발생한 때는 이미 봄이였소. 그보다도 더 추운 엄동설한에도 충국은 벽돌공장 당직실에서 얼어 죽지 않았소. 그런데 봄에 얼어 죽었겠소. 분명 어데 맞아 죽은 거 같소. 북데기와 당직실 벽에 피가 여러 곳에 묻어 있었다오. 그리고 바지 괴춤에도 피가 발리어 있었다오.” 허영호 소장은 그 자리에서 현 공안국 김창남 국장에게 형사 수사 일군들을 보내 사건을 수사할 것을 요구했다. 오후에 찌프 두 대가 함흥 촌에 먼지를 새뽀얗게 일구며 달려왔다. 김창남 국장과 허영호 소장은 수사 일군들을 데리고 대대 사무실에 와서 당 지부 서기 겸 치보 주임인 상순을 만나본 후 마을의 증인들인 성욱과 허동원, 숭길과 함께 찌프에 앉아 충국의 시체가 매장된 장개골 안으로 곧추 달려갔다. 김창남 국장은 반란 파 두목 김용만이 국장에서 철직돼 감옥으로 들어간 후 국장으로 제발됐고 허영호 소장은 황종연이 철직돼 감옥에 간 후 소장으로 다시 복직됐던 것이다. 10분도 되지 않아 장개골 안 막바지 밑으로 해 찌프들이 멈춰 섰다. “충국의 시체를 묻은 곳이 어딥니까?” 창남의 물음에 숭길과 성욱은 거의 동시에 잔설이 뒤덮인 장개골 안 막바지 둔덕아래 얼음 강판 쪽을 가리켰다. “허, 이상하다. 어째 여긴 아직도 눈과 얼음이 녹지 않았지?” 김창남 국장은 모자를 벗어 쥐고 희슥희슥한 머리를 쓸어 올리면서 시체를 파묻은 곳을 둘러보며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그때 숭길과 성욱은 상순과 함께 충국의 눈을 치우고 얼음을 깐 후 시체를 파냈다. 겨우내 얼음 위에 산골의 샘물이 흘러내리면서 시체 위는 얼음이 꽁꽁 얼어붙었었다. 얼음 밑 샘물에 젖은 흙도 떵떵 얼어붙어 있었다. 놀랍게도 건치를 풀고 충국의 시체를 보니 꽁꽁 얼어 있지 않겠는가! “아니 이게 무슨 일이요? 시체가 썩지 않고 언 채로 있다니?” 상순은 충국의 일그러진 낯을 보더니 숫구멍으로부터 머리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이거 보오. 숫구멍에 무슨 둔기에 얻어맞은 상처가 있소.” 수사 일군들이 확대경으로 때와 피가 덕지덕지 묻은 머리를 찬찬히 살펴보니 두피가 무엇에 강하게 얻어맞아 터진 타박상처자국이 남아 있었다. 수사 일군들은 충국의 머리 상처자국을 카메라로 사진을 찰칵찰칵 찍었다. 바지에는 아직도 얼어붙은 피고드럼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수사 일꾼들은 도리머리를 흔들면서 연이어 샷타를 눌렀다. 그들은 불을 피워 얼어붙은 바지를 녹인 후 조심스레 벗겨냈다. “아니, 이게 뭔가!” 수사 일군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글쎄 충국의 고환이 둘 다 없어지지 않았겠는가! “정말 악한 놈이 한 짓이구나. 고환까지 빼가다니!” 김창남 국장은 치를 떨었다. 수사일군들은 녹은 시체에서 흐르는 충국의 혈액을 채취해내고 머리카락을 몇 오리 뽑아냈다. 이제 공안국 과학수사 실에 가져다 혈형과 DNA를 분석할 판이었다. 허영호 소장은 상순과 김창남을 번갈아 보면서 말했다. “꼭 이 고환을 염오하거나 거시기를 제대로 쓰지 못하는 자의 변태적소행입니다.” 상순은 김창남 국장과 허영호 소장을 한쪽으로 불러다가 자기 견해를 나직이 말했다. “내 보건대 이건 흥수가 범행했을 혐의가 크오.” 창남 국장과 허영호 소장은 동시에 상순의 세 귀 눈을 쳐다보았다. “충국은 평소에도 흥수네 고방에 기어들어 해월과 그런 관계를 했소. 그러니까 흥수가 동네 창피해 충국이 다신 해월한테 달려들지 못하게 불알을 베 버렸을 수 있소.” 둘은 서로 마주 보며 머리를 끄덕였다. 창남 국장은 연세가 들었지만 아직도 예리한 분석을 하는 옛 상전 상순을 속으로 경탄했다. “우리도 그런 생각이 듭니다. 흥수를 나포해 심문하는 한편 그가 충국을 때려죽인 흉기와 증거를 확보해야 하겠습니다.” 허영호 소장과 창남국장은 찌프를 타고 즉시 감옥에 돌아가서 흥수를 끌어내 직접 심문하기 시작했다. “이흥수, 무슨 죄를 졌는지 아는가?” 흥수는 실눈을 힐금거리며 눈치를 보더니 뻔뻔스레 떠벌였다 .“무슨 죄 있어? 난 위의 지시를 집행했을 뿐이야. 네깐 놈들이 뭘 알아 그래? 정치란 10년에 한 번씩 물곬을 바꾸는 법이야.” “닥쳐! 누가 장충국을 살해했는지 잘 알지?” “탄백하라!” 흥수는 덴겁하다가 인차 침착성을 회복했다. “아니, 지금 누구한테 똥바가지를 씌우려고 들어? 난 충국을 살해한 적이 없어!” 아무리 심문해도 흥수는 입에 빗장을 지르고 한마디도 말하지 않았다. 살인증거를 쥐지 못한 이상 더 용빼는 수가 없었다. 수사 일꾼들은 김창남 국장의 지시에 따라 상순과 함께 흥수네 집을 발칵 뒤지면서 흉기를 찾기 시작했다. 상순은 구새 목의 벽을 살피다가 처마 밑에 걸어놓은 호미에 눈길이 멎었다. 그는 호미를 벗겨 이리 저리 살펴보았다. 호미 날이나 호미 등에는 아무런 피 흔적도 없이 말끔했다. 상순은 호미를 되걸려다가 호미자루를 살피다가 피뜩 벌건 피 흔적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바로 이거다!” 흥수가 샘물에 가서 호미 날과 등은 말끔히 씻었지만 호미자루의 피는 스며들어 씻지 못했던 것이다. 수사 일군들은 즉시 호미를 찌프에 실었다. 이때 해월이 집에서 뛰쳐나와 덩실덩실 춤을 춰댔다. “경찰이 다 우리 집에 왔다. 아하, 재미있다야.” 상순과 수사 일꾼들은 도리머리를 흔들면서 집 울안에서 나왔다. 해월은 뒤에서 도라지를 추면서 횡설수설했다. "경찰아저씨, 가지 마세요. 우리 아빠 건달입니다. 우리 아빠 미련 아줌마 하고 날마다 씹을 했다. 애기까지 낳았다. 초롱에 넣어서 던졌다. 헤헤헤.”  수사 일꾼들은 해월의 아래 위를 훑어보고 상순에게 물었다. “저건 무슨 말입니까?” “저 애는 정신이 좀 나갔소. 허나 흥수가 미련을 간음한 일은 사실이오. 애를 낳았을 수도 있고.” 사실 흥수는 미련을 오랫동안 간음해 임신까지 덜컥 시켰던 것이다. 뒤늦게야 알게 돼 겁을 집어먹은 흥수는 미련의 집을 찾아가 불룩한 아랫배를 보자 전기에라도 붙은 듯이 덴겁했다. “아니, 이 년아, 어데 가서 바람을 피워 애까지 가졌어?” “더 물어서 아오? 당신 애요. 적반하장이라고 도적놈이 ‘도적이야’ 아니야? 불 지른 놈이 ‘불이야!’…” “닥쳐!” 미련이 뭐라고 계속 말하려고 하자 흥수는 손으로 미련의 입을 틀어막으며 바깥에 누가 오지 않는가 뒤를 돌아보았다. 다행히 그림자도 얼씬하지 않았다. “이년아, 넌 두렵지 않아? 경주가 남조선에 달아나다가 붙잡혀 감옥에 가지 않았느냐? 나그네도 없는데 어떻게 임신했냐? 동네 부끄럽지 않니? 유산해야 해! 미련은 흥수의 손을 쥐어 뿌리쳤다. “위선자! 네놈도 치보주임이냐? 난 네놈을 쫄딱 망신시키겠다! 네놈의 죄악을 만천하에 공개하겠다! 죽여치우지 못하는 게 한이다! 이 원수 놈아!” 흥수는 당황해 미련을 구들바닥에 깔고 들어앉아 벽 밑에 있는 이불을 들씌웠다. (이년을 이대로 뒀다간 개꼴망신당하겠다. 당장 손을 쓰지 않다간 안 돼!) 흥수가 미련에게 어떻게 손을 쓸 까고 궁리했다. 흥수의 메마른 엉덩이 밑에서 미련은 단말마적으로 엎치락뒤치락하며 발악했다. 그녀는 흥수가 자기를 딱 죽일 것만 같았다. 겨우 이불 밑에서 입을 내민 미련은 숨을 바삐 몰아쉬며 소리쳤다. “사람 좀 살려다오! 유산할 게.” “정말 내 말을 들을 테야?!” “그래. 유산할게.” 그제야 흥수는 미련을 놓아주며 엉덩이를 들었다. “네 여기 가만있어라. 내 널 유산시킬 때까지.” 흥수는 미련의 집에서 나와 토성 쪽으로 황급히 터벅터벅 걸어갔다. 정규상을 불러 유산시키자니 자칫 미련이 떠들면 발각날 것 같았다. (어쩐다?) 한참 궁리하다가 그는 토성 안에 있는 위생소에 들어가 정규상한테 가서 수술 칼을 빌려고 했다. 허나 그때 위생소 안에 정규상도 박윤희도 없었다. 그 틈을 타서 흥수는 위생소 주사실에 들어가 수술칼을 하나 훔쳐냈다. 미련의 집으로 돌아온 흥수는 공포에 질린 낯으로 자기를 보는 미련을 슬슬 얼렸다. “내 약을 가지고 왔다. 누워.” 미련은 흥수의 움츠린 손을 흘금거리며 눕는 수밖에 없었다. 흥수는 집안을 두리번거리다가 벽에 걸어놓은 각반에 가서 눈이 멎었다. 그는 각반을 벗겨내 일어나려는 미련을 깔고 들어앉아 두 손을 뒤로 꽁꽁 묶었다. “왜 이래? 죽이자고 이래?” “아니야. 네 배때에서 애를 꺼낼게. 이를 악물고 좀 참아라!” “어떻게 꺼낸다고 이래?” “걱정 마!” 흥수는 백정처럼 무섭게 미련을 깔고 들어앉아 미련의 배를 수술 칼로 째려고 들었다. “앗!” 흥수는 미련의 웃옷을 훌 걷어 올리고 수술 칼로 배를 째려고 들었다. “이러지 마! 애가 나올 거 같아.” 미련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그 소리에 흥수가 미련의 하신을 여겨보니 진득진득한 양수가 나오고 있었다. 애가 당장 나올 거 같았다. 그제야 흥수는 손을 떼고 미련의 하신을 살폈다. 이때 문이 벌컥 열리더니 해월이 들어왔다. 와들짝 놀란 두 사람은 해월을 보고서야 한숨을 몰아쉬었다. “또 했소? 히히히. 시퍼런 대낮에 또 했어?” “주둥이를 다물어!” 흥수는 해월을 붙잡아 앉혔다. 한참 후 미련의 하신에서 진짜 피 터지며 애가 나왔다. “응아~ 응아~” “해해해. 애기 나왔구나. 우리 아빠 정말 재간이 있어. 늙은 게 애기까지 낳았어. 이거 내 동생이야. 히히히. 불알이 달린 거 봐라. 얜 내 하구 충국이 낳은 아들의 삼촌이구나. ” 흥수는 바삐 해월의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주둥이를 다물어. 누가 듣겠어.” “응아~ 응아~” 흥수는 해월의 입을 막던 손을 떼 애기 입을 막았다. 그래도 안 되자 바깥을 내다보던 흥수는 애를 내려다 봤다. 고토리 달린 애가 너무나도 희구했다. (야, 평생 아들, 아들 했는데 얘를 키웠으면 얼마나 좋겠니? 저 정신병자 해월을 믿고 어떻게 살겠니?) 허나 흥수는 인차 냉정성을 회복했다. (안 돼! 절대 안 돼! 지주 딸과 낳은 애를, 바람 써 낳은 애야!) 흥수는 이를 악물고 우는 애를 안고 부엌에 내려가 부엌아궁이에 넣을까 하다가 물 초롱이 피뜩 눈에 띄었다. 그는 제꺽 애를 물 초롱에 담아 바깥에 내가려고 했다. 애가 바둥거리며 초롱 속에서 손으로 뭔가 잡으려고 하는 것 같았다. (얼어 죽게 해야지.) 흥수는 애 목을 졸라 죽인 후 부엌아궁이에서 재를 파내 초롱에 마구 담았다. 구들에서 미련은 어린 애처럼 엉엉 울었다. 해월은 “아버지 정말 지독하다!”라고 떠들어댔다. “주둥이 다물어.” 날이 어두워지기를 기다려 흥수는 죽은 애가 든 초롱과 괭이를 들고 어둠을 타 장개골 안으로 향했던 것이다… “붙잡아 가라. 우리 아빠 애기를 죽였어. 내 남동생을 죽였어. 붙잡아 가야해! 내 신랑 충국이 죽어서 나한테 오지 못해요. 헤헤헤. 난 하고 싶어 죽겠다. 우리 아비 정말 미워! 경찰이 어째 붙잡아가지 않아!” 상순과 수사 일꾼들은 정신병자 해월의 말에서도 흥수의 피의를 더욱 느끼면서 살인사건 현지 벽돌공장 당직실로 달려갔다. 당직실은 사원들이 창문과 문을 잘 손질해놓고 불까지 때 놓아서 들어가니 후끈후끈 했다. 그들이 벽을 살펴보니 정말 피 자국이 있었다. 수사일군들은 마른 피 흔적을 채집했다. 하지만 다른 물증은 얻을 수 없었다. 사원들이 북데기를 다 걷어 낸 데다가 구들바닥도 말끔히 손질하고 새 장판까지 펴놓았던 것이다. 당 날로 김창남 국장과 허영호 소장은 과학기술수사과로부터 호미자루의 혈흔과 충국의 시체 피의 흔적의 혈흔과 DNA는 일치하다는 화험 결과를 보고받았다. 혈흔의 DNA에 의해 과학수사를 하리라고는 오래 동안 치보 주임을 해온 흥수었지만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창남 국장과 허영호 소장은 흥수의 호미를 심문 실 사무 상에 꽝 놓으며 심문을 시작했다. “흥수! 그래도 살인범행을 승인하지 않겠는가!” “호미, 호미로 어떻게 내가 살인했다고 할 수 있어?” 허나 흥수의 정신방선은 철 같은 증거 앞에서 산산 쪼각이 나고 말았다. 그는 한나절도 뻗치지 못하고 자기 죄행을 시인하고 말았다. “난 어시로 생겨 충국이 귀여운 딸 해월을 짓밟는 것을 차마 더 볼 수 없어 죽였다! 그 개 불알을 까버리면 끝난다고 생각했어? 허나 죽이까지 하려고 한 적은 없어! 개나 돼지도 불을 까도 사는데 죽을 줄은 몰랐어. 충국이 개 보다 못한 놈 죽어도 싸!” 창남 국장과 허영호 소장은 경멸에 찬 눈길로 흥수를 쏘아보았다. “인민의 법률은 살인죄를 진 당신, 숱한 노 간부들을 박해한 당신을 호된 징벌을 할 것이다.” 흥수는 단말마적으로 수갑을 찬 손을 쳐들고 고래고래 고함쳤다. “난 목숨을 내걸고 해방전쟁과 토비숙청전투, 항미원조 전쟁에서 싸운 혁명전사야! 나를 총살해?! 어림도 없어!” 허나 수사 일군들은 쓴 외를 보듯이 쓴 웃음을 지으며 흥수를 철창 속에 처넣었다. 몇 달 후 반 우파투쟁과 문화대혁명 시기 못 된 짓이란 못된 짓을 다하면서 로간부들을 박해하고 충국을 살해한 흥수는 인민법률의 호된 징벌을 받아 살인죄로 총살당했다.
152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111) 댓글:  조회:1173  추천:0  2018-07-24
                       2. 탈출        5.7(함흥)대대에서 한 10킬로미터 떨어진 돌문 안에 깎아지른듯한 벼랑이 눈 뿌리 아찔하게 치솟아 있다. 덕돌이 돌문 안에 들어서자 병풍 같이 둘러선 저 멀리 두 벼랑 사이에 높은 저수지 언제가 바라보였다. 저수지 언제에서는 민공들이 개미처럼 바글거리고 있었다. 언제 아래 서쪽 산비탈에 게딱지처럼 자그마한 초막들이 서너줄 늘어섰다. 그 초막들에 진수해공사에서 뽑혀온 200여명 민공들이 들어 있었다. 말이 집이지 대충 지은 초막이어서 벽에 여기저기 구멍이 나 써늘한 가을바람이 초막에 스며들었다. 커다란 구들에 20여명 민공들이 두터운 이불을 들쓰고 드러누워 해가 밥상만한 뙤창문을 꿰뚫고 궁둥이를 비출 때까지 곤하게 자고 있었다. 전날 낮에 이어 새벽에도 흙짐을 지어 나르고 금방 들어와 곤해 떨어졌던 것이다. 저수지 공사장의 책임자 김영기는 공지를 얼기 전에 끝내려고 민공들을 낮과 초저녁 대대, 낮과 새벽대대로 나눠 윤번으로 흙을 파 올리게 하면서 마무리 공사를 다그치고 있었다.공사 무장부 부장 이인학은 전 진수해에서 모집해온 민공들 가운데 싸움꾼이 많은 형편에 따라 싸움꾼 두목들로 직속 반을 내왔다. 직속반 민공들로 민공들을 관리하는 묘수었다. 민공들은 싸우다가도 직속반 싸움꾼들이나 무장부 이인학 부장이 왔다고 하면 호랑이를 본 노루들처럼 와- 하고 몽땅 달아났다. 잡히기만 하면 또 숱한 여민공들 앞에서 창피하게 투쟁당해야 하니까.       숱한 민공들이 고된 흙짐메기에 시달려 생산대로 달아나군 했다. 그때마다 저수지공사의 힘꼴이나 쓰는 승환과 광철 등 직속반의 애들이 손잡이트랙터를 몰고 마을에 쫓아가서 도망친 민공을 붙잡아다가 200여명 민공들 앞에서 도망분자라고 비판했다. 직속반의 애들은 싸움을 잘한 덕에 고된 일을 하지 않고 초막과 돌문 안의 초소에서 보초만 서면서 거들먹거리며 세월을 보냈다. 그들은 민공들이 달아나지 못하게 감시했을 뿐만 아니라 도망친 민공들을 붙잡아 들이면서 갖은 행패를 다 부리었다. 그리하여 민공들은 힘들어도 감히 도망칠 엄두를 내지도 못했다. (쳇, 신형의 로투구 만인갱이구먼.) 덕돌은 한 마을의 친구 송철에게서 저수지 공지의 강압적인 관리방법을 듣고 납득되지 않았다. 그는 또 개 잡은 포수들처럼 거들먹거리는 직속반의 광철과 승환이 눈에 거슬렸다. 하지만 저수지 공지에서까지 싸우면 입단도 못하고 전도를 그르칠까봐 억지로 참으며 속을 끙끙 앓았다. 승환도 굴뱀 같은 덕돌을 아는지라 경거망동하지 못했다. 숱한 민공들이 밤에 낮을 이어 개미떼처럼 바글거리며 언제 아래 물 함지를 판 흙을 45도나 되게 가파른 발판을 타고 멜대로 메어 올렸다. 후에 덕돌을 따라 순임과 순희 그리고 동림과 허춘도 이렇게 힘든줄도 모르고 저수지 공지에로 올라왔다. "어째 생지옥 같은 델 왔니? 얼마나 일이 고된지 알기나 하고 왔니?" 덕돌이 근심돼 말하자 순희는 히쭉 웃으면서 개의치도 않았다. "다 사람 하는 일이겠지." .발판이 어찌나 가파른지 순희와 순임도 문푸레 광주리에 흙을 담아 멜대로 메고 발판을 밟으며 올라가기 힘들다는 것을 느꼈다. 한번은 흙짐을 메고 물 함지 위로 올라가다가 그만 발이 미끄러 철써덕물함지에  떨어졌다. 온 몸이 물함지에 빠져 물참봉이 돼버렸다. 그래도 순희와 순임은 초막에 돌아가 옷을 갈아입고 돌아와  계속 멜대로 흙을 메 올렸다. 공지 이론 보도원을 맡은 덕돌은 쉼에 한어신문을 당장에서 조선말로 번역해 민공들에게 읽어주었다. 민공들은 그의 높은 한어 수준에 입을 딱 벌릴 지경이었다. 덕돌은 신문을 다 읽자마자 조용히 일어나 소변을 보러 가는 척 하면서 산굽이를 에돌아가 민공들의 눈을 피해 버드나무 밑에 가서 드러누워 책을 보았다. 그때 순희도 소변을 보러 온 척 하면서 덕돌한테 살금살금 다가왔다. 덕돌은 책을 보다 말고 일어나 앉았다. “왜 이런 생지옥으로 왔니? 어서 구실을 대고 마을로 돌아가라.” 허나 순희는 덕돌의 옆에 와 나란히 앉더니 수건으로 어깨 먼지를 털며 생글방글 웃었다. “괜찮아. 난 네가 무슨 일을 하나 궁금하더라.” 덕돌은 콧방귀를 뀌었다. “여긴 진짜 일제 때 로투구 만인갱보다 나은 데 없다. 여기 와서 고생할 게 뭐야?” 허나 순희는 진정어린 말을 했다. “사실 네 입단을 하나라도 도와주고 싶더라.” 덕돌은 머리를 숙이고 나무꼬챙이로 발밑을 죽죽 긋는 방순희를 보고 코마루가 시큼해날 정도로 고마웠다. 허나 입으로는 투박하게 내쏘았다. “별 걱정을 다 한다. 남이 입단을 하든 말든 네가 쓸데없이 이런 골 안에 와서 고생할게 뭐야?” 순희는 머리를 들어 보름달 같은 얼굴로 덕돌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덕돌아, 넌 중학교에서 이미 입단할 자격을 갖추었다고 본다. 학교에서도 네 입단지원서를 공사에  올려보냈는데 어째 공사 단위에서 비준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원, 참. 널 입단시키지 않으면 어떤 청년을 입단시킨단 말이냐?"      순희는 덕돌의 입단사안이 왜 공사단위에서 비준되지 못한 내막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사실 장영웅은 입단소개인으로서 학교 단총지 서기 김명호선생의 지시에 따라 입단소개인 소개란에 "덕돌은 '독서벼슬론'에 물젖었기에 오래동안 고험이 필요한 동무이다. 때문에 소홀히 입단시킬수 없다."라고 써넣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덕돌의 입단은 비준되지 못했다.  그럼 김명호 단총지 서기는 왜 한사코 덕돌의 입단을 저지하려고 했는가? 그는 황승연한테서 덕돌의 뒷말을 들어 공감을 형성했었다. 그는 공부는 잘하지만 학교에서 이른바 말썽을 일으키는 덕돌이 눈에 거슬렸던 것이다. 그런데 덕돌이 학교에 돌아와 이전에 한족애들을 데리고 싸움질하던 잘못을 고치고 표현이 너무 좋은데다가 글짓기써클에서 소식이랑 써서 신문과 방송에 내 학교 위신도 올려가게 했다. 그 바람에 덕돌의 입단을 학교에서 비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덕돌의 입단을 저지하면 말을 듣기 쉬웠다. 그리하여 김명호는 학교에서는 부득불 비준하고 사생들의 눈을 피해  암암리에 장영웅을 시켜 새 입단지원서 소개인란에 덕돌을 나쁘게 써넣게 하고 공사 단위에 올려다가 덕돌의 입단을 부결해 저지했던 것이다. 힉교 단위에서 토론할 때 원 덕돌의 입단지원서에 영웅도 덕돌을 제대로 잘 평가해 써넣었었다. 순희도 그 지원서를 보았는지라 장영웅이 김명호의 지시에 따라 새 입단지원서를 바꿔 그렇게까지 나쁘게 평가해 써넣었을줄은 깜깜부지였던 것이다.       덕돌은 순희한테 모든 내막을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자기와 딱친구느라고 떠드는 장영웅을, 자기가 어떻게 입단을 도와 소개란에 좋은 말을 다 써넣었는데 입단이 비준 안돼 미안하다는 말을 횡설수설하는 "친구" 장영웅씨를 창피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덕돌은 그 내막을 전혀 모르는 척하며 한마디 말도 꺼내지 않고 장영웅이 언젠가는 량심의 가책을 느끼는 날 스스로 말할 때까지 몇년이고 몇십년이고 먼저 말하지 않고 사이좋게 보내려고 마음먹었다. 애들은 졸업할 때 영웅또 내막을 알려준 공사단위 조직위원 오영순 누나에게 루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     장영웅은 공부도 잘하고 정치도 아주 능란하게 했다. 그런데 애들은 영웅이 학교 당서기하는 아버지를 믿고  삐뚤렁정치를 하면서 으시댔다고 눈에 든 가시처럼 여겼다. 그래서이랑 때려놓을 궁리를 했다. 그리하여 영웅은 덕돌을 찾아와 보호해달라고 했다. 덕돌은 지금도 애들한테 보복당해 물매를 맞은 영웅을 제대로 보호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고 자책했다. 그래도 허울은 보기 좋은 개살구처럼 "친구"인데 왜 영웅을 빼돌리기만 하고 함께 집까지 가면서 보호하지 못했는가 검토하군 했다. 덕돌은 영웅을 너그럽게 량해했다. 영웅인들 "어찌 단서기선생의 지시를 어길 수 있었겠는가. 선생의 말대로 하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해 시키는대로 했을 것이었다. 그것이 한 청년의 전도엔 얼마나 큰 영향을 주었는가는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도 인간인만큼 덕돌한테 말하진 못해도 속으로 량심의 가책을 받을 날이 있으리라.      덕돌은 다만 영웅의 좋은 면만 생각했다. 다 함께 공부를 잘하는 친구라고 여겼다. 그의 아버지는 항상 "덕돌은 총명한 애야.  공부를 잘하지. 아무때든 덕돌은 사회에 쓰일 인재야."라고 외우군하면서 덕돌을 견결히 고중에도 입학시켜주었던 것이다. 덕돌은 영웅의 아버지 은공을 잊지 않고 후에도 종종 영웅의 아버지를 찾아가 인사했고 영웅의 아버지가 세상 떴을 때도 찾아가 관을 치면서 엉엉 어린애처럼 울었다. 그 불운의 시기에 곤경에 처한 덕돌을 제대로 평가하고 자기 앞날까지 내다봐준 영웅의 아버지를 생각하고 슬프게 울고 또 울었다. 덕돌은 영웅의 아버지 은공을 생각해서라도 넓은 흉금으로 영웅의  모든걸 양해했다. 덕돌은 시대를 잘못 만난 피해이다. 그 시대에는 공부를 너무 특출하게 해도 죄였다. 덕돌은 "독서벼슬론"이란 것이 뭔지도 몰랐다. 그런데 김명호 단서기는 그에게 "독서벼슬론"에 물전은 "사상이 나쁜 학생"이라는 억울한 모자를 씌워놓고 입단을 막아버렸다. 아니, 전도를 막아버리려고 혈안이 돼 미쳐 날뛰였다.      결코 영웅의 잘못이 아니었다. 공부를 너무 잘해도 "독서벼슬론"에 물젖은 애라고 보는 그 새대의 잘못된 판단이었다. 그리하여 덕돌은 영웅과 계속 친구로 사귀기로 마음먹었다. 다만 믿던 도끼에 발등을 찍히운다고 영웅이나 다른 애들과도 사귈 때는 너무 믿지 말고일정한 거리를 두고  주의해야 되겠다고 느꼈다.  덕돌은 마음 속으로 몇번이고 영웅에게 물었다. (영웅아, 친구라면 진심으로 도와야지. 뭐냐? 아무리 단서기선생이 압력을 가해도 그렇지. 어쩜 그렇게 입단소개란에 소개이란게, 친구라는게 그렇게 친구를 무함해 써넣는단 말이냐?)       덕돌은 순희한테 그 내막을 말하고 싶어도 친구를 헐뜯는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순희는 덕돌의 속내는 모르고 건의했다. " 이제라도 이 공지에서 입단하자고 노력해라. 내가영웅이랑 공지에 왔으면 좋겠다. 그와 내가 힘껏 도와줬으면 널 입단시키겠는데. 어쩌겠니? 내하고 동림이라도 소개인으로 나서서 널 꼭 입단시키련다.” 덕돌은 “고맙다.”라고 하고나서 산새들이 날아예는 맑고 푸르른 가을 하늘을 바라보며 이런 말을 꺼냈다. “공사 성환 형님이 그러던데. ‘4인무리’를 짓 부신 후 화국봉 주석을 위수로 한 당 중앙에서는 대학 입학 제도를 개혁해 이젠 시험을 쳐서 입학시킨다더라. 경산 선생님도 전번에 국경절에 갔을 때 나보고 공지에 가지 말고 대학시험복습이나 하라고 하더라. 전번에 순임도 아버지에게서 그런 말을 들었다고 하더라. 정규상 교수 말은 확실히 믿을 만한 정보다.” 순희도 동을 달았다. “전번에 생산대 맨발의사 조영희도 약재를 캐러 여기 산으로 왔다가 들려서 대학시험제도가 회복된다고 말하더라. 그 애 아버지는 진수해중학교 교도처 주임이 아니고 뭐냐?” “그럼 확실히 대학입학제도가 바뀐게 아니야?” 순희는 볼우물을 옴폭 파더니 머리를 끄덕였다. “나도 마을에서 도는 풍문을 들었다. 정규상 교수는 시내 병원으로 돌아간다더라. 그리고 송선 아줌마도 가무단으로 되돌아간다더라.” “진짜 천지개벽이 일어났는가?” “그럼 얼마나 좋겠니? 우리 둘은 이런 고생을 하지 않고 무조건 대학에 갈수 있지 않니?” 순희는 20세 청년이 아니라 천진난만한 10대 초반의 소녀 같았다. 그녀의 보름달 같은 얼굴에는 아름다운 미래가 사품쳐흐르고 있었다. 그녀는 부끄럼도 없이 턱을 고이고 옆에 앉은 덕돌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게 백일몽이라고나 해라. 아직도 ‘문화대혁명’ 여독이 독즙처럼 남아 있어 정치 밖에 모르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니?” 순희는 눈을 곱게 흘기면서 종알거렸다. “글쎄. 저수지 공지 책임자라는 사람을 봐라. 저수지에서 일을 잘 하면 대학에 무조건 추천해 보낸다고 사기친다.” “그게 얼리는 수작이 아니고 뭐야?” 덕돌과 순희는 한숨을 땅이 꺼지게 후 내쉬었다. 태평강 바닥의 조약돌마저 환히 들여다보이는 가을의 맑은 시내물이 조잘조잘 노래하며 흐르는 소리 밖에 들리지 않았다. "승환이랑 또 우리 연애한다고 놀리겠다." 덕돌의 말에 순희는 피씩 웃었다. "우리 무슨 어린애들이냐?" "그래도 이전에 우린 연애하지 않았다고 했잖아. 그런데 우리 지금 진짜 연애한다면 그때 억울함당한게 당연한 걸로 되잖겠니?" "그때는 철부지여서 그렇지만, 지금은 우리 선택에 달린 일이지. 누가 연애했다고 하겠으면 하라지. 호호호."  덕돌은 순희의 당돌함에 놀랐다. 순희는 또 뜻밖의 일을 알려주었다. "저 승환이 웃기지. 입단하겠다고 나한테 도움을 청하지 않겠니?" "그래?" "응, 나한테 코를 꿰웠어. 입단하지 못할가봐 우릴 놀리지 못해." "음." 덕돌은 허구픈 코웃음을 쳤다.     그들은 그래도 남들의 눈이 무서워 순희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가고 덕돌이 뒤에서 스적스적 물 함지를 파는 곳으로 다가갔다. “어험, 연애대장이 왔다.” 광철이가 빈정거리자 승환이가 맞장구를 쳤다. “원래 학교 때부터 연애야 이름이 있지? 누굴 속이려고 가만히 산굽이에 가서 연애를 해?” 덕돌은 호랑이 코를 슬슬 쑤시고 건드려도 가만 놔두었다. 그러자 승환이랑 꼭뒤에 올라 앉아 똥을 쌀 지경이었다. 숱한 애들 앞인지라 덕돌은 더는 물러 설 곳이 없었다. 허나 한숨을 길게 내쉬며 광철을 보고 나직이 말했다. “난 일하러 왔지 싸움질을 하러 오지 않았다. 이전에 덜 혼났구나. 작작 건드려라.” 덕돌이 멜대로 흙짐을 지려고 할 때었다. 갑자기 승환과 광철이 멜대로 양쪽에서 내리치고 찌르면서 덮쳐들었다. 덕돌은 발판 위에서 저쪽 발판 위로 시라소니처럼 껑충 뛰어 넘어가 냉소했다. “정말 싸우겠니? 조용한데 가서 붙어보자!” “개 소리 치지 말고 덤벼라!” 승환은 발판에 뛰어올라 멜대를 휘둘렀다. 허나 덕돌은 정수리를 겨누고 날아 내리는 멜대를 턱 받아 쥐어 콱 당겼다. 그 바람에 승환은 높은 발판에서 물 함지에 철써덕 떨어졌다. 순식간에 벌어진 사태에 광철은 감히 멜대를 휘두르지 못하고 을러메기만 했다. “오라, 둔덕에 나와 싸워보자! 네놈 새끼 이전엔 한족 애들을 믿고 우쭐거렸지. 그 새끼들이 없는 여기서 한번 붙어보자!” 덕돌은 빼앗은 멜대를 쥐고 발판에서 둔덕 위로 훌쩍 날아 올라갔다. 질겁한 광철은 멜대를 허망 휘두르며 뒤로 비실비실 물러섰다. “저녁에 다시 보자.” 말을 맞치자 덕돌은 동림과 함께 멜대로 문푸레광주리에 담은 흙을 메 날랐다. 승환은 숱한 사람들 앞에서 창피를 당하고 허리를 치는 물속에서 허우적거리며 겨우 물 함지에서 기어 둔덕에 올라갔다. “어디 두고 보자!” 승환은 비를 맞은 햇병아리처럼 돼가지고서도 입만은 살아 있었다. 덕돌은 물에 빠진 개 같은 승환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날 낮에 승환과 광철은 자기 패거리들과 함께 배를 타고 저수지의 물고기를 잡아 술이나 실컷 처먹으면서 덕돌을 까 눕힐 꿍꿍이를 쳤다. 해가 뉘엿뉘엿 지자 덕돌은 지친 몸을 끌고 공지 식당 쪽으로 걸어갔다. 동림과 덕돌이 금방 밥술을 들자 저쪽이 떠들썩하며 부산해졌다. 승환과 광철이 기세등등해 한 무리나 되는 직속반 애들을 끌고 이쪽으로 다가왔다. “야, 나와!” 덕돌은 밥사발을 놓고 일어섰다. “할 수 없구나. 사전에 똑똑히 말해둔다. 이번 싸움은 너희들이 먼저 걸었다. 누가 맞아 죽든지 서로 형사죄를 추궁하지 말자.” 서슬이 퍼런 말에 광철은 커다란 쌍까풀눈에 겁기를 띠더니 뒤로 비실비실 물러섰다. “저 새끼 지금 우리하고 죽기내기 하자구 걸고 들잖니?” “허허허.” 덕돌은 허구픈 웃음을 지으면서 독기어린 눈으로 직속반 애들을 쓸어보았다. “담이 있으면 숱한 여자들이 보는 식당에 와서 떠들지 말고 조용한 곳에 가서 사내 대 사내로 붙어보자." 승환은 덕돌을 노려보며 방망이로 왼손바닥을 탁탁 치며 빈정거렸다. “네 각시 순희랑 숱한 여자들이 있는 앞에서 사내노라고 큰 소리를 탕탕 치지 말라. 가자!” 덕돌이 싸우러 떠나려고 하자 옆에서 동림이 말렸다. “저 새끼들이 저렇게 많은데 가지 말라.” 허나 덕돌은 냉소했다. “저런 허수아비 같은 새끼들을 걱정하지 말라.” 허나 동림은 팔소매를 붙잡고 놓지 않았다. “밥이나 먹고 가라! 저 새끼들은 온 하루 고이 놀고 배때 터지게 먹고 왔다.” “괜찮다.” 덕돌은 저수지에 와서 싸우려고 하지 않았지만 더 이상 물러설 자리가 없는 것을 보고 핍박에 의해 양산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승환과 광철은 저수지 언제로 올라갔다. 덕돌이 나는 재간이 있어도 달아나지 못하게 퇴로를 막고 생사결단을 낼 꿍꿍이였다. 허나 덕돌은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동림과 허춘도 뒤따라 왔다. 직속반의 다른 민공들은 평소에 자기들과 우쭐거리는 승환과 광철의 솜씨를 구경할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고 승환의 포치대로 둑 양쪽을 막고 팔짱을 끼고 좋은 구경을 할 참이었다. 덕돌은 먼저 웃통을 벗고 나서는 승환을 보며 픽 코웃음을 쳤다. “야! 이 새끼야!” 승환은 악이 받쳐 고함치더니 몸을 좌우로 시계추처럼 흔들며 8자 형으로 쌩 덮쳐들었다. 덕돌은 까딱 하지 않고 서 있었다. 갑자기 그가 몸을 훌 날려 승환의 머리 위로 허공잡이로 뛰어 넘어서며 뒷발로 승환의 뒤 골을 탁 걷어찼다. “야따! 멋있다.” 직속반 민공들이 환성을 질렀다. 그러나 눈알을 부라리는 광철을 무서워 입을 싸쥐고 구경했다. 승환은 제 힘에 걷어 채워 앞으로 엎어질 듯이 몇 발자국 비틀거리다가 나가 떨어졌다. 허나 필경 승환도 한다하는 권투수기에 인차 몸을 홱 돌렸다. 그는 맹호처럼 덮쳐드는 덕돌의 면상을 후려쳤다. 덕돌은 슬쩍 자세를 낮추며 승환의 아랫배에 무쇠주먹으로 강타를 안겼다. “억!” 숨이 꺽 막힌 승환은 배를 부둥켜안고 허리를 꾸부리며 한쪽 무릎을 털썩 꿇었다. 덕돌은 숨돌릴 틈도 주지 않고 발길을 날려 승환의 턱주가리를 걷어 차올렸다. 쿵! 승환이 비명을 지르며 뒤로 대가리를 젖히며 엉덩방아를 찧고 너부러졌다. “개새끼!” 광철과 응철이 동시에 방망이를 휘두르며 덕돌에게 덮쳐들었다. 그러나 덕돌이 하늘 공중에 훌쩍 몸을 날리더니 두 발로 동시에 광철과 응철의 턱주가리를 차 넘겼다. “야! 멋있다!” "진짜 주먹왕은 저 놈이구나!" 직속반 애들은 구경하다가 저도 몰래 감탄이 나왔다. 그새 숨을 돌린 승환과 광철은 자기 짝패들을 돌아보며 고함쳤다. “뭐 하니?” 직속반 민공들은 사전 밀모대로 와 하고 동시에 덕돌에게 덮쳐들었다. “비겁한 새끼들!” 덕돌은 하나도 겁기 없이 몸을 훌 날려 직속반 민병들의 머리 위로 날아넘어갔다. 그는 둑을 타고 동으로 달아나다가도 말머리를 돌려 창으로 찌르는 회마창(回马枪)을 날리는 전술을 썼다. 어쨌든 애들은 많아도 닫는 속도가 다른지라 제일 먼저 추격하던 애는 주먹에 얻어맞지 않으면 발길에 채워 너부러졌다. 손을 쓸 새만 좀 있어도 덕돌은 날아드는 직속반 애들의 주먹을 잡아 비틀어 저수지 둑에 보기 좋게 둘러메쳐 태를 쳐 놓았다. 저쪽에서 동림과 허춘도 직속반 민병들을 말리는 척 하다가 덕돌의 편을 들어 싸웠다. 덕돌은 허수아비처럼 휘두르던 광철의 방망이를 빼앗아 둑 아래에 내던지며 무쇠주먹으로 정수리를 탁 내리쳤다. “앗!” 광철은 비명소리와 함께 푹 꺼꾸러졌다. “서라!” 웬 고함소리가 산골짜기를 메우며 울렸다. 덕돌이 머리를 들어보니 공사 무장부 이인학 부장이 권총을 빼 휘두르며 뛰어오는 것이 피뜩 보였다. 그제야 덕돌과 직속반 민병들이 손을 떼고 "우야-" 하고 달아났다. 어둑어둑해지는 뚝 저쪽으로 도망치는 민병들을 보고 이인학은 권총을 넣으며 옆에서 구경하는 애들과 물었다. "금방 싸움 솜씨 대단한 놈은 누구냐?" 민병들은 이구동성으로 “함흥대대 덕돌입니다.” 하고 소리치며 손가락질을 했다. 자초지종을 듣고 이인학 부장은 "아니, 그래 직속반 10여명이나 되는 민공들이 그까짓 덕돌을 당하지 못해!" 하고 믿어지지 않아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덕돌을 아는 민병들은 웅성거렸다. “리 부장은 잘 모릅니다. 저 덕돌 무리는 진수해에서 굴 뱀으로 불릴 지경으로 무서운 독사무리입니다.” “굴 뱀을 건드렸으니 직속 반 민공들이 이제 혼날 겁니다." “멍청이 같은 새끼들이, 덕돌을 하나 이기지 못해?” 이인학은 권총집을 뒤로 밀어붙이고 뚝 아래 민공들의 초막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 내려갔다. 덕돌은 파출소에 잡혀가거나 또 비판투쟁을 받을 생각을 하니 눈앞이 캄캄해 났다. (씨, 정 비판하려고 하면 교하로 도망쳐 대학시험복습이나 해야지. 이 골 안에서 입단을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 사실 덕돌이 국경절에 집으로 내려갔을 때었다. 그가 마을 앞의 샘물터에서 손을 씻는데 경산선생이 그를 보고 이렇게 말했다. “덕돌아, 대학입시제도가 회복됐다. 그 골 안에서 쓸데없는 일을 하지 말고 어서 내려와 대학시험복습을 해라.” 경산 선생까지 그렇게 말하자 덕돌은 세상에 상상도 하지 못한 천지개벽이 일어났다는 것을 뒤늦게나마 알게 됐다. 허나 저수지 공지에서는 민공들이 달아나면 직속반 애들을 시켜 손잡이트랙터를 몰고 와서 붙잡아 가고 있었다. “달아나도 되잡혀 갈 판인데 어떻게 달아난단 말인가? 간고한 대로 저수지에서 일하면서 복습도 하고 입단도 하자.” 요즘 날마다 이런 궁리를 하며 승환과 광철이 자꾸 집적거려도 참고 참다가 끝내 참지 못하고 대판 싸우고 말았던 것이다. (차라리 잘 됐다. 이젠 이 골 안에 아무런 미련을 둘게 없다.) 덕돌이 어떻게 투쟁을 받을까 이 근심 저 근심할 때었다. 저녁에 이인학 부장이 전등불이 희미한 초막으로 와 덕돌을 만났다. 그는 다른 민공들을 다 내보냈지만 동림과 허춘만은 놔두었다. 이인학 부장은 예상외의 말을 하는 것이었다. “덕돌이, 참 잘했소. 개 잡은 포수처럼 우쭐거리는 놈새끼들 기를 잘 꺾어놨소. 저는 정당방위를 했소. 아무런 잘못도 없소.” 그제야 동림과 허춘은 한숨을 후 내쉬었다. 덕돌은 손에 수갑이나 차려니 하고 바늘방석에 앉은 듯이 옴찔옴찔 했다. 그 말에 편안히 엉덩이를 차가운 구들에 떡 붙이고 앉았다. 원래 사태가 엄중하면 이인학 부장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교하로 도망치려고 했다. 여기서 붙잡혀 파출소에 가는 날에는 그렇게 고대하던 대학입학시험장에 가보지도 못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 덕돌은 이인학 부장의 옆구리에 찬 권총집을 흘금흘금 곁눈질하면서 혹시 안심시켜놓고 돌연 습격해 잡아갈까 봐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이인학 부장은 생각 외로 친절히 대하면서 덕돌의 손을 잡아 쥐고 손등을 매만지면서 소탈하게 웃었다. “허허허. 이 무쇠주먹을 보오. 썩 살이 더덕더덕한 게 어디 우리 공지 이론 총보도원의 손 같은가? 덕돌이 힘이 세단 말은 들었지만 그렇게 날랜 줄은 몰랐소.” 그는 덕돌을 진정어린 눈으로 바라보면서 뒷말을 이었다. “문무가 겸비된 아까운 인재 이 골 안에 파묻혔구먼. 덕돌처럼 땅을 밟고 하늘을 떠인 사내대장부를 좋아하오.” 덕돌은 오늘 직속반의 민병들을 데리고 오지 않은 것을 보고 적이 신경이 스르르 풀렸다. “덕돌이, 난 성환과는 친구요. 내일부터 우리 저수지공지 직속반 반장을 맡소.” “허허허. 사람을 잘 못 보았습니다.” 덕돌의 말에 이 부장은 인차 “아니, 낮다고 시시해 그러오? 그럼 민병 연 연장을 시킬까?” 하고 물었다. 그때 덕돌은 묵묵부답하고 앉아 있었다. 옆에서 동림과 허춘은 대답하라고 자꾸 눈짓했다. 허나 덕돌은 이 골안에서 민병 연장이 아니라 영장, 아니, 저수지 공정 책임자를 시켜도 할 생각이 없었다. 이 골 안을 하루 속히 벗어나 대학시험을 쳐서 질척질척한 진흙탕 속에서 짓밟히고 업신여김을 당하는 비참한 운명을 개변하고 기자로 되는 새 인생의 행로를 개척해야 했다. 그런 속내는 모르고 이인학 부장은 덕돌을 기어이 직속 반 반장을 하라고 명령했다. 덕돌은 이 부장의 지청구에 못 이겨 조건을 내걸었다. “승환이네하구 함께 직속 반에서 일하지 못하겠습니다. 싹 다 내보내십시오. 대신 동림과 허춘을 직속 반에 넣어 주십시오." 그러자 이 부장은 한참 궁리하더니 통쾌하게 대답했다. “좋소. 그렇게 하오. 지금 직속반 민병들로는 400여명이나 되는 민공들을 관리하기 어려우니까. 승환이네 직속반을 놔두고 한 개 반을 더 증가하겠소. 덕돌은 직속 2반 반장을 하오.” 이인학 부장은 분명 덕돌을 이용해 패왕노릇을 하는 직속 반 승환이랑 대치시켜 제약하고 또 승환을 이용해 신생 두목 덕돌을 제약하려는 의도였다. 동림은 다른 민공들이 일하러 나간 틈을 타서 이인학 부장에게 간곡히 부탁했다. “덕돌을 입단시켜 주십시오.” “덕돌이 아직도 입단하지 못했소? 내 저수지 단 총지 서기하고 부서기 방순희에게 말하겠소.” 그 말에 덕돌과 동림은 서로 눈을 맞추며 웃었다. 이튿날부터 덕돌은 직속반 반장으로 돼 팔자를 고쳐 흙짐을 메지 않고 동림과 허춘을 데리고 순라를 하게 됐고 입단지원서를 쓰게 됐다. 순희는 입단지원서를 가지고 와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고쳐 쓰라고 알려주고 나서 일어났다. “조금만 말썽을 부리지 말고 참아라. 입단이 비준되는 날까지만.” “허허허. 고맙다.” 덕돌은 갈퀴 같은 손으로 순희의 두 손을 덥석 잡았다. 그러자 순희는 귀밑까지 홍당무처럼 발개지더니 손을 빼냈다. “야, 또 연애했다고 놀림을 당하자고 이러니?” 덕돌은 코웃음 쳤다. “이제 누가 또 감히 나를 놀린다더니?” 순희는 초막 구들에서 일어나면서 비양거렸다. “주먹이 세니 좋구나. 직속 반 반장 되고 입단도 하고. 흙짐도 지지 않는 게.” 덕돌은 순희를 보고 속심의 말을 했다. “우리 이 저수지에서 달아나 대학시험을 치자.” 그러자 순희는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아니야. 정말 시험쳐 대학에 갈 수 있는지 누가 아니? 난 여기서 입당하고야 마을에 내려갈 테다.” 덕돌이 뭐라고 말하려는데 승환과 광철이 초막에 들어오더니 덕돌이 네를 눈에 든 가시처럼 쏘아보았다. 그러나 감히 건드리지 못하고 문을 쾅 닫고 가버렸다. 어느 날 공사에서 황종연 주임이 찌프를 타고 저수지에 와서 거들먹거리면서 공지를 둘러보았다. 공지 김 서기는 주먹 왕 덕돌을 보고 직속반 민병들을 데리고 배를 타고 저수지 물고기를 잡아오라고 했다. 덕돌은 동림과 허춘을 데리고 저수지에 가서 배를 타고 그물을 쳤다. 그때 승환과 광철이 빈들거리며 저수지에로 다가왔다. 그들도 다른 쪽배를 타고 노를 저어 그물을 늘이는 덕돌 네 배로 다가왔다. “물에서 한번 붙어보겠니?” 승환이 또 걸고 들었다. 덕돌은 그물을 치면서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 “이 개 새끼야, 헤염칠 줄 모르는 모양이구나. 덤벼들어라!” 광철은 노로 물을 탁 튕겨놓으면서 걸고 들었다. 허나 직속반의 다른 애들은 누구도 덕돌에게 덤벼들지 못했다. “작작 시끄럽게 굴어라. 어르신님이 물고기를 잡는 걸 방애했다간 네놈을 저수지 물귀신을 만들어 놓을 테다.” 덕돌의 두툼한 입에서 몇 마디 굵직굵직한 말이 나가자 질겁한 승환과 광철은 노를 저어 꼬리 빳빳해 도망쳤다. 덕돌이 네가 물에 뛰어들어 그물을 메고 헤염을 쳐 저수지 물이 낮은 막치기로 올라갈 때다. 점점 죄어드는 그물에 든 물고기들은 황급히 그물 옆으로 해 덕돌 네 허벅다리를 탁 치고 나갔다. 그물에서 빠져나간 물고기들은 이젠 살았다고 물 위에 한 키씩이나 풀렁 뛰었다가 떨어졌다. 아주 장관이었다. 그물을 다 걷고 보니 숟가락만한 허연 은빛비늘을 번쩍이는 물고기를 십여 마리나 잡았다. 그날 덕돌 네는 다섯 마리를 저수지 김 서기네 집에 가져다주고 나머지는 풀숲에 숨겨뒀다. 해질 녘에 그들은 풀숲의 물고기를 물초롱에 담아가지고 저수지 방목장에 가서 한가마나 부글부글 끓여 시뿌연 생선국을 배 세간나게 실컷 먹어줬다. 난생 처음 잘 먹고 나니 눈이 나오고 온 몸에 힘이 용용 솟구쳤다. 덕돌은 저수지에 하루도 더 물앉아 있을 수 없었다. 그는 이 생지옥 같은 저수지를 탈출할 구멍만 노리고 있었다. 어느 날, 덕돌은 공지에서 퇴근해 내려오는 순희를 만나 조용한 강변으로 데리고 갔다. "얘, 우리 오늘 밤에 공지를 탈출하자. 어렸을 때 말한대로 함께 시험쳐 대학에 입학하자." "오래잖으면 입단 비준 나오겠는데." "입단은 차차 해도 되지만 입학복습은 더 미룰 수 없어." 순희는 머리를 숙이고 한참 궁리했다. "오늘 저녁에 이 생지옥을 탈출하자." "네 가면 나도 여기 있을게 없지." "그럼 밤 10시쯤에 공지 서산 쪽에 오라." 순희는 머리를 끄덕였다. 그들은 누가 눈치채기라도 할가봐 인차 자리를 떴다. 덕돌은 해가 지기를 애타게 기다렸다. 마가을 해가 드디여 서산으로 맥없이 뉘엿뉘엿 넘어갔다. 덕돌은 저녁을 다 먹자 순라를 나가는 척하면서 덕돌은 동림과 허춘을 불러 바깥으로 나갔다. 마가을 하늘에는 뭇별이 총총하고 가냘픈 초생달이 걸려 초막과 산기슭에 은빛을 내리 뿌리고 있었다. 은빛 달빛을 밟으면서 저수지 언제에 오른 덕돌은 주위를 둘러보고 아무도 없는 것을 보고 한숨을 후 내쉬었다. “동림아, 허춘아, 난 아무래도 마을에 내려가 대학입학시험복습을 해야겠다. 너희들도 생각이 있으면 나와 함께 이 밤으로 도망치자.” 그러자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투쟁 맞자고 도망쳐?”라고 했다. 동림은 덕돌의 손까지 잡고 정중히 말했다. “내나 허춘이나 다 대학시험을 쳐도 희망이 없다. 너나 대학시험을 쳐라.” 덕돌은 진정을 토로했다. “그럼, 나를 좀 도와달라.” “무슨 일이 있으면 말해라. 우리 목숨을 걸고 너를 도울게.” 덕돌은 동림과 허춘의 손을 꽉 잡고 간곡히 부탁했다. “얘들아, 내가 도망치다가 승환이랑한테 들키면 다른 데로 유인해 뒤를 막아 달라.” “근심하지 말라.” “혹시 뒤쫓는 애들이 있어도 상하게 치지는 말라. 나를 뒤쫓아 오지 못하게 뒷다리나 붙잡으면 돼. 괜히 너네 연루돼 투쟁 받지 말라.” “걱정마라. 우리 알아서 할게.” 뒤이어 덕돌은 오랫동안 궁리한 도망칠 계획을 일일이 말하며 빈틈이 없는가 토론하고 재점검했다. 동림과 허춘은 덕돌의 면밀한 계획에 연신 머리를 끄덕였다.      한밤중이 돼 민공들은 지친 몸을 끌고 초막으로 들어와 털썩털썩 들어 눕자 코를 드렁드렁 골며 곯아빠졌다. (이 때면 직속반의 승환이랑 광철이랑 곯아 빠졌을 거야.) 옷도 벗지 않고 자는 척 하던 덕돌은 이불 밑에서 야광시계를 들여다보았다. 밤 10시정각이었다. 순희와 약속한 시간이 됐다. 덕돌은 옆에 누운 동림과 허춘의 이불 안에 손을 넣어 툭툭 쳤다. 동림과 허춘도 자는 척 하다가 슬그머니 일어났다. 덕돌은 동림과 허춘의 베개까지 자기 이불안에 넣고 이불을 덮어 놓고 슬그머니 일어나 바깥으로 나갔다. 등 뒤에서 누군가 하품을 하면서 두덜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밤중에조용히 나갈 게지. 씨, 잠을 깨우면서.” 허춘이 뒤에 남아 초막의 동정을 살폈다. 덕돌과 동림은 바깥에 나가자 오줌을 누는 척 하며 사위를 둘러보았다.      마가을 초생달빛이 어두운 하늘에 가냘프게 떠서 바르르 떨고 있었다. 적막한 사위에 인기척이라고는 없었다. 그런데 서산 기슭 절벽 밑에 이르렀는데 순희가 오지 않았다. 아무리 기다려도 보이지 않았다. (순희 다른 생각하는가?) “어서 떠나라!” 그러나 덕돌은 좀 더 기다리기로 했다.  “누구야?!” 갑자기 초막 앞에 승환과 광철이 나타났다. “동림이다!” 덕돌은 사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순희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별수 없다고 생각한 덕돌은 동림과 덕돌을 와락 끌어안고나서 황급히 초막 뒤로 해 서쪽산기슭으로 부랴부랴 사라졌다. “여기서 뭘 하니?” “보초 선다.” “어째 덕돌이 보이지 않니?” “잔다.” 승환은 좀 이상해 초막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그러자 허춘이 뚱뚱한 몸으로 막아섰다. “어디로 들어가? 민공들이 곤하게 잔다.” 광철도 이상한 감을 느꼈는지 전지로 사처를 이리 저리 비추었다. 그때 덕돌은 허리를 치는 마른 가둑나무 사이에 납작 엎드렸다. 전지불이 어지럽게 덕돌의 머리 위로 스쳐지나가며 허둥거렸다. 동림과 광철은 시간을 버느라고 고의로 승환과 광철과 걸고 들어 밀고 닥쳤다. 결국 그들은 승환이랑하구 치고 박으면서 다른 쪽으로 유인해갔다. “저수지 언제에 가서 한판 붙어 보자.” "이 새끼, 감히 덤벼?!" 승환이 동림의 멱살을 틀어쥐어 흔들었다. "승환아, 손을 떼지 못하겠니?!" 갑자기 순희가 나타나지 않았겠는가! 덕돌은 절벽을 기어올라가다가 안타까워 돌틈에서 손을 멈췄다. "어허, 방서기 어떻게 돼 왔소?" 승환은 입단이 걸려 순희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입단하겠으면 그만하고 직속반에 가서 당직이나 잘 서라." "덕돌이 보이지 않는데두." "당직실에서 기다리면 어데 갔는지 오겠지." 순희는 분명 승환을 떼서 말리고 있었다. (순희야, 여기 오라. 빨리 도망치자.) 덕돌은 절벽을 기어오르면서 몇번이고 속으로 이렇게 고함쳤다. 승환과 광철은 시어미 역정에 개 배때를 찬다고 덕돌이 보이지 않자 동림과 허춘을 업신여기면서 저수지 언제로 뒤따라 갔다. 동림과 허춘은 한밤중에 승환과 광철과 맞붙어 싸우면서 덕돌을 쫓아가지 못하게 뒷다리를 꽉 붙잡고 늘어졌다. 순희는 입단을 올가미로 승환의 추격을 가로막아섰다.       덕돌은 그 틈을 타서 사전 계획대로 경계가 제일 허술한 서산 절벽을 톱아올라 산꼭대기 보초망마저 교묘하게 벗어났다. 그는 산마루에 오르자  산아래를 바라보며 안타까움에 가슴을 탕탕 쳤다. (순희야, 왜 안와?) 덕돌은 자기를 탈출시키려고 도망치지 않고 엄호한 순희를 생각하자 코마루가 시큼해났다. 그때 전지불이 또다시 어지러이 절벽이며 산마루까지 어지러이 비췄다. (안돼. 어서 도망치자.) 그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령 길을 타고 쏜살같이 도망쳤다. 돌문 안 산꼭대기에 마주 서 있는 망루까지 벗어나자 덕돌은 어둠 속에 잠긴 저수지 쪽을 돌아보며 숨을 돌렸다. “생지옥을 승리적으로 탈출!” 허나 덕돌은 시름놓지 못했다. 주먹을 불끈 쥐고 10킬로미터나 떨어진 조개덕을 바라고 마라톤식 달리기를 계속했다. 어둠 속에서 돌부리를 걷어차 넘어져 발가락 끝에서 피 흘러 모질게 아파나도 상을 찡그리며 일어나 길 옆의 야들야들한 풀잎을 훑어 피를 쓱 닦아버리고는 절룩거리며 계속 끈질기게 달렸다. “달아나야지. 빨리 책을 가지고 고하로 달아나야지.” 닫다가 숨이 차 좀 걷다가도 중얼거리면서 또 달렸다. 한참 달릴 때었다. 묽어진 어둠 저편으로 동녘하늘이 희붐히 동트고 있었다. 새날을 갈망하던 덕돌의 한숨에 퍼렇게 멍이 들었던 하늘이 점차 어둠을 부시며 찬란한 햇빛을 빛 뿌리며 밝아오고 있었다. “날이 밝기 전에 조개덕을 벗어나야 해.” 덕돌은 연신 되뇌이며 조개덕을 바라고 달리고 또 달렸다. 그가 조개덕에 이를 때까지 령 길에서 달리면서 보니 손잡이트랙터 헤드라이트 불빛도 보이지 않았고 엔진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래도 덕돌은 조개덕 마을 어귀에 이르러 마을 동정을 살피다가 마을 서쪽 마른 수수대가 서있는 밭으로 해 슬금슬금 허춘의 집 구새 목에 이르렀다. 벽에 몸을 기대고 아무리 살펴봐도 자기 집 주위에 이상한 인기척이 없었다. 그제야 덕돌은 숨을 죽이고 허춘 네 집 앞마당을 꿰질러 나가 자기 집 뒤울안 바자 안으로 몸을 날려 뛰어 들어갔다. 뒤이어 그는 슬금슬금 뒷벽 밑에 다가가 고방 문을 살며시 열고 고방으로 들어갔다. 잠이 적은 상순은 고방에서 무슨 인기척이 나는 것을 듣고 윗방에서 문을 뚝 떼고 고방에 들어왔다. “누구야?!” 공안국 국장 출신인 상순은 순간 경각성을 높였다. “냅니다.” 나직이 대답하는 소리를 듣고 상순은 놀랐다. “아니, 덕돌이 아니냐? 어찌된 일이냐?” 덕돌은 어둠 속에서 책궤를 들춰 주머니를 찾아 쑤셔 넣었다. “길게 말할 새 없습니다. 직속 반에서 추격해 올 겁니다. 일체 모른다고 하십시오. 온 적도 없다고 하십시오.” 명옥도 정지에서 달려 들어왔다. “아니, 무슨 일을 쳤니?” “아니오. 난 대학시험 복습을 하러 교하로 달아나야겠습니다. 저수지 직속 반에 붙잡히면 난 전도를 망칩니다.” 덕돌은 정작 시험제도를 회복했는데도 시험을 한달 앞두고 쫗겨다니는 자기 신세가 서러워 어린 애처럼 아버지 품에 안겨 “엉엉.” 대성통곡쳤다. 진짜 싸움꾼 두목 같지 않게 어린 애처럼 엉엉 울었다. “이제 복습해 어떻게 대학에 붙는다고 이러니? 괜히 잡히면 투쟁 받겠다. 저수지로 돌아가렴.” “난 달아나야 합니다. 만약 저수지 직속 반 민병들이 들이닥치면 아버지와 어머니 그 놈들이 뒤 다리라도 붙잡아주십시오.” “알았다. 빨리 가라!” 명옥은 두 손으로 머리를 쓸어 뒤로 다듬어 올리더니 까래 밑을 들춰 치워 두었던 돈 5원을 꺼내 덕돌의 손에 쥐어 주었다. “차비를 해라.” 덕돌은 책 주머니를 둘러메고 고방 문을 살며시 열고 나가면서 “근심하지 말고 잘 있으십시오.”라고 하고는 문 밖으로 나갔다. 덕돌이 뒤울안 바자를 뛰어 넘어 동틀 무렵에 수수밭으로 사라졌다. 그는 혹시 직속 반 승환이랑 뒤쫓아 올까봐 진수해 기차역 쪽으로 가지 않고 진수해 서쪽 기차역을 바라고 뛰었다. 그가 패용천산 앞까지 뛰어 갔을 때다. 통통통 손잡이트랙터 다급한 엔진 소리가 조개덕 쪽에서 울리더니 마을 개들이 자지러지게 짖어댔다. 진짜 저수지 직속 반의 승환과 광철이 뒤쫓아 왔던 것이다. 사실 승환과 광철 등 직속1반의 민병들은 한밤중에 한 식경이나 싸워 동림과 허춘을 쳐 눕히고 황급히 초막에 돌아와 덕돌의 이부자리를 훌 들어보고 이불안의 베개 셋을 발견하고서야 꼬임 수에 든 것을 뒤늦게나마 알게 됐다. “이 새끼, 어디로 달아나!” 그들은 그 길로 손잡이트랙터를 몰고 조대덕으로 쫓아왔던 것이다. 허나 덕돌은 집에도 없었다. 덕돌의 부모와 물어보아도 시치미를 뚝 따는 것이었다. “어허, 이 자식이 하늘로 올라갔니? 땅 속에 기어들어갔니? 정말 신출귀몰하는구나. 우리 손잡이트랙터보다 더 빨리 뛰었단 말인가?” 그들은 닭 쫓던 개 지붕을 쳐다보는 격이 돼 맥없이 저수지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됐다. 덕돌은 책 주머니를 둘러메고 직속 반 민병들이 혹시나 쫓아올까봐 패용천산을 넘어 칼산 뒤 령길을 타고 줄행랑을 놓았다. 희뿌옇던 동녘하늘이 붉게 불타오르더니 구리바라 같은 뻘건 해가 불끈 솟아오르며 꽃구름송이들을 붉게 물들였다. 덕돌은 직속 반 민병들을 따돌리고 마수에서 벗어나자 훨훨 날듯이 홀가분함을 한 마음으로 느꼈다. 그는 시원한 이른 아침 산 공기를 한 가슴 뿌듯이 한껏 마시며 중얼거렸다. “아, 끝내 새 날이 밝아왔구나. 얼마나 기다리던 새날인가?” 그날은 덕돌의 한뉘에 잊을 수 없는 1977년 10월 25일이었다. 맑고 푸른 가을 하늘에 매 한 마리가 가없이 파도치는 황금물결 위로 자유로이 훨훨 날아예고 있었다. 산새들도 새날을 반겨 재잘거리며 노래하고 제비들도 강남으로 날아갈 준비로 나래를 굳히려고 훨훨 나래치고 있었다. 아, 새 가을날의 하늘은 형언하기 어렵게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3.개천에서 난 용     해 서쪽에서 떴는가?     생산대 빈농들의 추천을 받아 대학에 가려고 으스대던 성욱은 대학에 가기는커녕 대학입시 낙방의 고배를 마시게 됐다. 성욱은 생산대 회계에 손잡이트랙터 운전수이기에 가히 생산대 청년들 속에서 벼슬이 제일 높다고 할 수 있었다. 기실 상순은 뭘 보아도 성욱은 덕돌과 비할 바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 허나 그는 생산대 정치대장을 하면서 자기 아들을 회계나 손잡이트랙터 운전수를 시킬 수 없어 성욱을 시켰던 것이다. 남 보기도 좋고 집안 화합도 도모할 것 같았던 것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성욱은 자기 잘난 척 하면서 온 동네를 개 턱 쳐들고 돌아다니면서 청년들을 쥐락펴락 했던 것이다. 특히 집체호 조영희랑 앞에서 자기가 어떻게 대학시험을 잘 쳤노라고 한바탕 자랑했다. 반년 넘어 집에서 주산 알이나 튕기면서 공부한 그가 낙방하리라고는 누구도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데 한 달 밖에 복습하지 못한 덕돌이 시험을 쳐 대학에 입학할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 덕돌은 성욱이, 영웅이, 광철이, 순희가 첫해에 대학입시에 락방한 것을 못내 아쉬워했다. "아무리 옥신각신 다툴 땐 있었다 해도 좋은 시대에 다 함께 농촌을 벗어나 대학에 가면 얼마나 좋겠는가!" 덕돌은 모교 선생님들 말처럼 나는 놈은 나는 놈이었다. 그러나 덕돌은 아주 간고하게 복습해 대학으로 갔다는 것을 누가 알겠는가? 아, 글쎄 저수지 공지에 갇혀 흙짐을 메 나르다나니 시험 날자 11월 27일을 한 달 앞두고 교하로 도망쳐 복습하지 않았는가? 그것도 한 달 밖에 없는 복습시간에 처음에는 복습방향을 제대로 정하지 못해 리과를 복습하다가 반달 앞두고 문과로 대학입학 지망을 바꿨던 것이다. 사실 문과 복습은 반달 밖에 하지 못했던 것이다! 어느 날, 춘자는 초불을 두 대나 켜놓고 눈을 집어 뜯으면서 덕돌의 한문복습제강을 조선어로 번역했따. 그녀는 피뜩 “얘, 혹시 넌 눈이 일 없니?” 하고 물었다. 덕돌은 화확 문제를 풀다가 “괜찮소. 시력이 1.5인데. 어째 그러오?”라고 하며 개의치 않았다. 춘자는 귀여운 동생을 마주보며 근심했다. “아니야, 혹시 색맹이 아닌지 해서 묻는 거야. 이전에 나도 의학원에 가려고 했는데 색맹이 돼서 의학원으로 가지 못하고 농학원으로 갔다.”      덕돌은 화학책을 놓더니 얼굴이 굳어졌다. “전번에 군 입대 신체검사를 할 때 색맹이 돼서 입대하지 못했소.” 춘자는 번역하던 화학복습제강을 놓았다. “그럼 지망을 고쳐야 해. 색맹은 의학원에 가지 못해. 색깔을 가리지 못하면 약물이나 실험관 화험 결과를 제대로 볼 수 없어.” “양? 이젠 시험 날자가 반달 밖에 남지 않았는데?” “그래도 넌 문과를 해야 한다. 나처럼 농학원에 가겠니?” 덕돌은 반날 동안 궁리하다가 누나와 토론하고 문과시험을 치기로 하고 지망을 YB대학 정치학부로 고치기로 합의를 보았다. 지망을 고치기 위해 덕돌은 동곽 선생처럼 책 주머니를 둘러메고 다시 함흥 대대 조개덕으로 돌아왔다. 그때 함흥중학교로 가서 문과복습제강을 가지러 가니 경산 선생은 아주 맥이 풀려 했다. “어쩌겠니? 처음부터 문과를 해도 시간이 모자라겠는데 시험 날자를 반달 앞두고 문과로 치겠다고 하니.” 경산 선생은 복습제강을 내주면서 위안해 주었다. “괜찮다. 올해 입학하지 못하면 명년에 또 치지. 명년에는 천천히 잘 복습하면 꼭 입학할 수 있을 거야.” 덕돌은 현 교육국 학생모집 사무실에 찾아가 대학입학 지망을 YB대학 정치학부로 고쳤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위방 문을 탄자로 막고 두문불출하고 정치복습제강을 암송하고 나서 지리와 역사 교과서를 가져다 들여다보았다. 조선어 복습은 별로 하지도 못했다. 복습제강의 작문제목 40여개를 몇 개 유형으로 나눠 서너 개 작문을 지어보았을 뿐이다. 기실 평소에 조선어문법책과 문예창작이론 책을 놓지 않은데다가 평소에 소식이나 통신, 시, 소설도 써 보았기에 다시 별로 들여다보지 않아도 됐던 것이다.  문과 복습을 반달도 하지 못한 덕돌이 대학에 입학하다니? 온 마을 사람들과 함흥중학교의 사생들이 놀랄 일이 아니겠는가! “소몰이를 하던 덕돌이 대학에 붙을 줄은 누가 알았겠소.” 온 동네에 소문이 자자하게 났고 감탄이 끝이 없이 뒤따랐다. “덕돌은 총명한 놈이야.” “한 달도 복습을 하지 못하고 대학에 붙다니?” “글쎄 말이오. 집체호 애들은 모두 진수해중학교 교원 자식들이어서 시험제도가 회복될 거 안지도 오래오. 집체호 청년들은 반년 넘어 복습했는데도 입학하지 못했는데 소를 몰던 농사군의 아들 덕돌이 대학에 붙었단 말이오.” “기적이오. 기적!” “그래서 개천에서도 용이 난다는 거요.” 덕돌은 후에 친구 영웅과 순희가 대학입시에 락방했다는 비보를 듣고 마음이 아팠다. "공부를 잘한 학생들이 대학으로 가는 좋은 시대를 만나 영웅과 순희가 함께 대학에 갔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덕돌은 참 아쉬웠다. 후에 덕돌은 친구로서 영웅과 맹광철한테 대학입시복습자료랑 얻어 가져다 주면서 성심성의로 지원했다.      후에 안 일이지만, 순희는 그때 덕돌을 무사히 저수지 공지에서 탈출시킨 후 승환과 이인학 부장한테 일 보러 집에 간다고 청가맡고 공지를 유유히 떠나버렸다. 그녀는 그 길로 기차를 타고 둘째오빠가 있는  북경으로 도망쳐 복습했다. 그녀의 둘째오빠는 국가 모 부에서 사장을 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수도 북경 유명중학교 복습제강을 그녀에게 수두룩이 가져다 주어 복습시켰다. 그런데 한어로 시험치다나니 급제를 하지 못했던 것이다. 덕돌은 자기보다 공부도 잘하고 정치도 잘한 순희가 만약 연변에서 조선어로 쳤다면 꼭 첫해 대학입시에 입학했을 것라고 생각했다. 그러자 항상 손잡이트랙터를 몰고 공지에서 도망친 민공들을 쫓아가 공지로 붙잡아들이던 승환이랑 광철이랑 만행을 한없이 증오하게 됐다. 만약 그 애들이 공지로 붙잡아간다고 날치지만 않았어도 순희는 북경으로 도망칠 필요 없었고 뒷근심없이 연변에서 조선어로 시험치지 않았겠는가. (정말 괘씸한 놈새끼들이야. 입단도 하지 못하면서 숱한 애들을 노역화한 공지에 붙잡아들이고 전도를 해치면서 애먹이지 않았는가.)  사실 덕돌도 시험을 칠 때 아슬아슬한 고비른 넘긴 일도 있다. 시험을 친 첫날 오전에 수학을 치고 오후에 정치 시험을 치게 됐다. 덕돌은 점심에 둘째외삼촌 근룡의 집에서 점심을 대충 먹고 숟가락을 놓기 바쁘게 정치 복습제강을 쥐고 윗방에 들어가서 문을 꼭 닫고 복습했다. 그는 한 문제라도 더 복습하려고 드문드문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면서 복습제강을 한 문제 한 문제 암송해내려 갔다. “야, 어째 아직도 시험치러 가지 않았니?” 정옥이 바깥에서 들어오더니 소리쳤다. “엉?” 덕돌이 황급히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이제 12시 30분이구나. 한 10분 더 복습하고 가도 된다.” “야, 남들은 다 가더라. 어째 이제 12시 반이냐?” 그제야 덕돌은 손목시계를 다시 들여다보았다. “아차, 이게 손목시계 잤구나.” 뜻밖의 사변에 덕돌은 복습제강을 활 던지고 시험장으로 부랴부랴 손살같이 뛰어갔다. 시험장을 지키는 선생은 시계를 들여다보더니 빨리 뛰어들어가라고 했다. 1분만 더 늦어도 시험시간이 지난 지 10분 넘어 시험장에 들어가지 못할 번했다. 만약 정치시험성적이 없었더라면 대학에 입학하지 못했을 것이 아닌가? 손목시계가 우연히 잘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 외사촌 여동생 정옥이 들어와 알리지 않았어도 큰 일 날 번했던 것이다. 그러게 아버지 말이 맞지. "뭐나 여지를 둬야 한다."   그의 아버지 상순은 항상 이렇게 말하면서 회의를 가도 반시간전에 가서 앉아 기다렸다. 교통히 불편한 때 기차를 탈 때는 더했다. 한 둬 시간 전에 가서 기다린다. 그럴 필요없다면 항상 이렇게 말하군 했다.  "뭐나 여지를 둬야 해. 의외 일이 생기면 기차를 놓칠 게 아니냐?" 그 말은 완전히 맞았다. 딱 시간을 맞춰 여지를 두지 않으면 차를 놓치는 때가 수두룩하다. 외삼촌댁은 자기네 집에 들어있으면서 대학시험을 치는 덕돌이 저녁에 윗방에서 복습하면서 배고플 까봐 늘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와 깎은 무를 쪼개어 들여다 주군 했다. “목이 마르겠는데 무를 먹으면서 복습해라.” 덕돌은 코마루가 시큼할 정도로 외삼촌댁과 정옥이 고마웠고 은정을 잊을 수 없었다. 5.7(함흥)중학교 수학과, 물리과 선생들도 덕돌을 두고 의논이 분분했다. “아까운 애가 문과생으로 됐소.” “색맹이 아니었더라면 수학이랑 물리랑 공부를 잘한 덕돌은 의학원에 갔을 게요.” 덕돌은 대학입학통지서를 받아 쥐자 제일 처음으로 철봉과 성환 그리고 경산 선생을 찾아가 삶은 돼지고기와 닭 알로 간소하게나마 술상을 차려 드렸다. 그는 무릎을 꿇고 술잔을 찰찰 넘치게 세 분에게 부어 올리고 나서 감격에 넘쳐 인사말을 올렸다. “정말 고맙습니다. 선생님과 형님들의 가르침이 없었더라면 오늘 제가 소를 몰지 않고 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겠습니까? 정말 백골난망입니다.” 철봉은 의젓한 대학생으로 된 동생을 보면서 기쁜 술을 쭉 들며 연신 찬탄을 금치 못했다. “덕돌은 총명하고 은공을 잊지 않는 애야.” 성환도 고개를 끄덕이며 덕돌을 타일렀다. “충효와 의리는 이 세상에서도 위인의 기본인 거야. 꼭 명심해라.” 스승이자 형님들인 그들 셋은 마음껏 기쁜 술을 마셨다. 진수해중학교에 전근해간 경산 선생은 상순에게 소식과 통신 쓰기를 가릋쳤을뿐만 아니라 학교에서 작성한 역사, 지리, 정치 등 중점복습제강을 얻어다 덕돌에게 주었던 것이다. 철봉과 성환 두 형님은 동생에게 지식과 시, 재담 등 글쓰기만 가르친 것이 아니라 인생의 도리까지 가르쳤던 것이다. 덕돌은 그들의 은공을 한뉘 평생 잊을 수 없었다. 사제 간과 형제는 마음의 대문을 활짝 열고 소설 같은 인생살이와 세상만사를 좌담하며 소탈하게 마음껏 술을 마셨다. 한편 예순 고개에 오른 상순은 너무나도 기뻐 온 얼굴의 주름살이 쫙 펴지도록 무시로 혼자 웃었다. 명옥은 널다란 집 안 구들에서 너울너울 어깨춤까지 혼자 출 지경이었다. 상순은 외동아들이 대학에 간 것이 얼마나 기쁜지 몰랐다. 더구나 세상이 바뀌어 이계삼 서기와 허영주 부현장이 현인민정부로 돌아가게 된 것이 얼마나 기쁜지 몰랐다. 그는 자기를 위대한 중국 공산당 당원으로 양성해주었고 한뉘 수십 년 동안 희로애락을 함께 하면서 혁명해온 노간부들을 환송해야 했다. (진짜 천지개벽이 왔다. 우리 세상이 다시 온 것이 아닌가?) 상순과 덕돌은 한창 자라는 중돼지를 잡고 온 마을 남녀노소와 함흥중학교 교원들을 몽땅 청해 술잔치를 베풀고 함께 기쁨을 나눴다. 오랫동안 생산대에서 단지부 서기를 맡은 집체호 최희랑 덕수랑 덕돌의 입단소개인을 하면서 덕돌을 정치상에서 도왔다. 그들은 또 함께 소방목을 하던 소몰이군친구였다. 그들은 비록 대학에 입학하진 못했지만 친구의 입학소식에 기뻐 덕돌이네 집에 찾아왔다. 그런데 함께 기쁨을 즐겼으면 좋을 것 같은 친구 영웅과 맹광철, 심지어 순희도 오지 않은 것이 섭섭했다. (혹시 대학입시에 락방돼 오지 않았는가?)      이때 상순은 이계삼과 허영주 두 분을 위방 상좌에 모시고 술잔을 들었다. “김 대장, 있소?” 이때 뜻밖에도 흥수가 조개턱을 쳐들고 위방 문을 떼고 들어섰다. 모두들 눈을 흘길 뿐 앉을 자리를 내주지 않았다. “이 서기, 미안합니다.” 흥수는 옛날과는 달리 이계삼의 옆에 붙어 앉으면서 머리를 조아렸다. “다 ‘4인무리’의 죄악입니다. 그 놈들이 계급투쟁을 부르짖으면서 노 간부들을 못살게 굴게 했습니다. 한때 나는 착오적인 노선을 집행해 노 간부들을 푸대접했는데 용서하십시오.” 상순은 속으로 오뉴월 소불알처럼 이 다리 짝에 붙었다 저 다리 짝에 붙었다 하는 더러운 새끼라고 욕했다. 이계삼과 상순의 흘기는 눈길을 보고 흥수는 바늘방석에 앉은 것 같았다. 허나 오랜만에 생긴 술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더욱이 술상에 김이 몰몰 나는 돼지고기 점을 담은 사라를 보고 마른침을 꼴깍 삼키는 위인이었으니 되나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미운 놈을 떡 하나 더 준다고 상순은 흥수에게도 술잔을 권했다. 이계삼 서기는 흥수를 쓸어보면서 엄숙하게 말했다. “이날이 오리라는 걸 몰랐지? 과거 잘 못을 알았으면 됐소. 이후에는 권력다툼에 쌍불을 켜지 말고 권세욕을 작작 부리오. 백성들을 잘 살게 하는 게 최대의 정치요. 사람이 양심이 있어야 하지 시계추처럼 정치파도에 휘말려 이랬다저랬다 양면수법을 쓰면 못 쓰오. 정치라는 건 진리를 파악하고 올바른 길로 나가야 하지 눈앞의 세도에 아부굴종해선 안되오.” “예, 예, 예. 명심하겠습니다.” 옆에 앉은 허영주는 묵묵히 날카로운 눈길로 흥수를 쏘아볼 뿐이었다. 흥수는 오시러와 더 앉아 있지 못하고 정지에 나가 한쪽 구석으로 가서 앉았다. 허영주는 그제야 입을 열었다. “나쁜 놈 새끼, 문화대혁명 때 황종연이랑 황승연이랑 반란 파들과 짜고 들어 우리 간부들을 얼마나 못 살게 굴었소. 더러운 새끼, 이젠 우리한테 알락 거려? 허백호 서기랑 다 저 놈들의 피해를 받아 억울하게 감옥에 갔소.” 이계삼은 한숨을 후 내쉬었다. “이제 억울하게 고깔모자를 쓰고 투쟁 받고 피해 받은 노 간부들의 원한을 갚을 날이 오겠지.” 상순은 좌중을 둘러보더니 올 분들이 다 온 것을 보고 술잔을 들고 일어섰다. 그는 숱한 마을 사람들이 들어앉은 위방과 정지에 대고 목청을 돋우어 말했다. “여러분, 세상이 바뀌었습니다. 천지개벽이 일어났습니다. ‘4인무리’의 박해를 받아 우리 마을에 내려와 이른바 노동개조를 하던 이계삼 서기와 허영주 부현장께서 다시 현인민정부로 돌아가게 됐습니다. 또 겸사하여 오늘 내 아들 덕돌이 어엿한 대학생으로 됐습니다. 모두 여러분들이 도와준 덕분입니다. 여러분과 함께 이 두 가지 기쁜 일을 경축해 기쁨을 나누려고 이 자리에 청했습니다. 자, 여러분 오늘 실컷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춥시다!” 상순은 우선 이계삼과 허영주와 잔을 마주치고 마을 여러분께도 잔을 들어 인사했다. “자, 앞의 잔을 비웁시다.” 뒤이어 덕돌이 마을 여러분께 술을 부어 올리고 간단히 말했다. “여러분, 오늘 아주 기쁩니다. 여러분들의 방조에 힘을 입어 저는 파란만장한 어지러운 세상을 헤쳐오고 오늘 끝내 대학에 입학하게 됐습니다. 저는 ‘4인무리’를 짓 부시고 대학 입시 제도를 회복해 오늘의 찬란한 미래를 개척해준 화국봉 주석을 위수로 하는 당 중앙에 감사를 드립니다. 하늘땅이 지동치더니 천지개벽이 일어났습니다. 개천에서 용이 하늘로 날아오르고 가을에 칼산의 사과배꽃이 피었습니다. 해가 서쪽에서 뜨는 그날은 오고야 말았습니다. 이제껏 저를 사람으로 만드신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덕돌의 말에 모두들 “대학생이 다르긴 달라.” 하고 머리를 끄덕이며 엄지를 내 휘둘렀다. 덕돌은 여러분의 요청에 의해 “도라지”를 건드러지게 불렀다. 그 노래 소리는 마음속으로부터 우러나와 흐르는 기쁨의 노래, 축복의 노래여서 아주 건들건들 하고 흥겨웠다. 그 노래 소리에 맞춰 어머니 명옥은 어깨춤을 덩실덩실 추었다. 상순은 너무 기뻐 유일한 주제가 “호미가”를 흥겹게 불렀다. 동산천리 돋으신 해는 점심때가 되어 온다 에라 에라 에라 호미야 호미 호미를 메고 가자 알뜰하게 가꾸어라 땀에서 나오는 곡식이다 에라 에라 에라 호미야 호미 호미를 메고 가자 덕돌은 아버지가 노래를 그렇게 즐겁게 부르는 모습을 난생처음 보았다. 어머니가 흥겨워 도라지를 부르며 어깨춤을 추자 코마루가 시큼해났다. 허영주와 정규상도 일어나 어깨춤을 덩실덩실 추었다. 이계삼은 도라지를 출줄 몰랐으나 엉거주춤 일어나 팔과 다리를 들었다 놨다 하며 양걸 비슷하게 춤을 추었다. 그들이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천지개벽이 일어나 글쎄 며칠 후면 현인민정부로 돌아가게 됐다. 그보다도 역경 속에서 환난을 함께 겪으며 자기들을 보호해온 상순의 아들이 대학에 가게 된 것이 너무나도 기뻤다. 조영희와 순희 그리고 순임도 춤판에 끼어들었다. 그들은 대학 시험에 급제하지 못했지만 마음속으로부터 덕돌의 대학입학을 축하하며 너울너울 춤을 추었다. 정규상은 자기 딸 순임이가 대학에 가지 못해도 덕돌이랑 함께 놀면서 건실히 자라나서 마음이 놓였다. 동림과 허춘도 얼근히 마시고 어깨춤을 덩실덩실 추었다. 게다가 상선마저도 찾아와 목책까지 기념품으로 주고 축배를 들었다. 다만 성욱이가 왠지 덕돌이 청해도 낯도 내밀지 않았다. 송선은 오랜만에 일어나 도라지에 맞춰 우리 민족의 무용 도라지를 너울너울 추었다. 모두 눈이 휘둥그래 마흔 고개에 오른 송선이 날씬한 몸을 버들가지처럼 놀리며 추는 우아한 온돌무용을 구경하며 연신 박수갈채를 보냈다. 송선은 기쁨의 눈물을 머금고 마음속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기쁜 마음을 손과 몸에, 얼굴의 표정에 담아 최고의 기교로 도라지를 너울너울 춤추었다. 때로는 꽃나비 같이 나풀나풀, 때로는 경쾌하게 나래치는 학 같이 너울너울. “덕돌의 대학입학을 열렬히 축하해요.” 춤을 마친 송선은 덕돌과 상순을 번갈아 보면서 허리까지 굽혀 경례까지 올렸다. 상순과 덕돌도 바삐 벌떡 일어나 인사를 받으며 답례했다. 송선은덕돌과 함께 수레로 수수단을  실어오다가 소수레가  번져져 고생하던 일을 말하면서 덕돌을 치하했다.    이때 정지가 소란스러워졌다.  “나도 덕돌이 대학에 간 걸 축하한다.” 모두들 춤을 추다가  문께를 바라보았다. 덕돌은 기다리고 기다리던 순희나 영웅이 오는가고 눈뿌리 빠지게 내다보았다. 그런데  해월이 애를 업고 춤판에 끼어들었다. 그는 춤을 추다가 잔등 포대기에서 애를 꺼내 들어 덕돌에게 안겨주려고 내밀며 떠들어댔다. “야, 네 아들이다. 안아 봐라! 아들애도 당신이 대학에 간 걸 축하한다. 이걸 봐라, 헤쭉헤쭉 웃는다. 헤헤헤.” 순간 마을 사람들의 춤판은 깨졌다. 덕돌은 저으기 긴장해졌다. “야, 너 미쳤니? 건 네 장충국과 살아서 난 애야. 다 아는데 왜 생사람 잡니?” 허나 해월은 발을 동동 구르면서 떼를 썼다. “충국이 싸질렀든지 네가 만든 애든지 대학생인 네 아들이래야 잘 살게 아니야? 이 애를 책임져라!” 해월은 기어이 포대기에 싼 애를 덕돌에게 떠맡기려고 밀어주었다. 그때 장충국이 뛰어 들어와 야단쳤다. “정신 나갔어? 건 내 아들이야!” 해월은 때 괴죄죄한 충국의 낯빤대기를 찰싹 후려갈겼다. “이 더러운 지주 새끼야, 얘가 어찌 네 아들이야? 지주 손자라구, 전도 망친다, 망쳐! 얜 내 첫사랑 덕돌과 난 앤데.” 덕돌은 입을 하 벌리고 서 있었다. 순간 순희와 조영희 그리고 정순임의 눈길이 모두 해월과 덕돌에게 쏠렸다. 마을 사람들 수십 쌍의 눈길도 일시에 쏠렸다. 이때 흥수가 뛰어나와 어색한 장면을 타개했다. “여러분, 미안. 얘는 정신 나갔으니 양해하라니께.” 해월은 애기를 마구 덕돌에게 안겨주고 나가려고 했다. 허나 덕돌은 애를 흥수에게 안겨줬다. 돌도 안 된 불행아의 울음소리가 귀청을 아프게 때렸다. 마을 사람들은 흥수 뒤통수에 대고 손가락질 했다. “산아제한한다고 남의 아낙네 배를 가르겠다고 날뛰더니. 흥! 제 딸은?” “그러게 말이 아니오? 결혼도 하지 않고 지주네 애를 낳다니?” “쯧쯧쯧, 어쩜 저런 미친 딸을 두었소?” 개꼴 망신을 당한 흥수는 애를 해월에게 안겨 가지고 자리를 떴다. 춘실도 더 앉아 있을 면목이 없어 훌쩍 일어나 문을 쾅 닫고 바깥으로 나가버렸다. 충국은 때가 덕지덕지 붙은 허연 머리카락을 보란 듯이 손으로 쓱 씻어 올리더니 헤벌쭉 웃어 보이며 따라 나갔다. “너희들도 내처럼 늘그막에 새파란 처녀한테 장가들어 아들을 놔봐라!” 상순은 충국의 잔등을 흘겨보더니 술맛이 없어 머리를 홰홰 돌렸다. 한편 흥수는 뒤따라오는 충국을 보자 성이 꼭뒤까지 치밀어 올랐다. 밸 같아서는 죽여 치우고 싶었다. 이젠 충국은 집도 없이 벽돌공장 당직실에서 홀로 살다나니 때도 온전히 끓여먹지 못하고 세수도 하지 않아 때 투성이였다. 이젠 너무 투쟁을 받아 정신이 나갔는지 모든 장소에서 항상 중얼거리지 않으면 미친 소리를 마구 쳐댔다. 흥수는 충국과 같이 더러운 놈에게 딸이 짓밟힌 것을 생각하면 속에 불이 활활 타올랐다. “저 새끼를 어떻게 하면 원수를 갚을까?” 이때 충국이 또 따라와 팔소매를 잡아 당겼다. “가시아버지, 가시아버지, 우리 여동생 집에 가서 술이나 한잔, 응?” 충국은 손을 입에 가져다 대고 술을 마시는 시늉을 했다. “가라, 누가 가시아비냐? 다시 내 딸을 건드렸다간 목을 썩뚝 잘라버릴 테다!” 허나 충국이 팔소매를 잡고 놓지 않는 바람에 장미련 네 집 쪽으로 마지못해 끌려갔다. 그런데 뒤에서 해월은 충국을 보고 졸라댔다. “신랑, 빨리 우리 집에 가서 자자. 응?”  이때 애가 “앙~” 하고 자지러지게 울어댔다. 해월은 횡설수설했다. “오- 그래, 네 아빠 온다. 우리 먼저 가자. 장 서방, 인차 오라고. 괜히 술을 많이 마셔서 맥을 추지 못하겠다.” 해월은 앞서 토성 동쪽으로 허둥지둥 달려갔다. “근심하지 말라! 술 한 근 마셔도 문제없어! 뚫어놓은 구멍도 들어가지 못하겠니? 흐흐흐.” 충국의 개소리에 흥수는 눈앞에서 불티가 튕길 지경이었다. 충국에게 끌려 미련이네 시꺼먼 집 안에 들어섰다. 잘칵! 전등불이 켜졌다. “누구야?!” “내다, 내. 얼른 우리 가시아버지께 술상을 차려?” 미련은 자다가 일어나 앉아 흥수를 보자마자 겁부터 집어먹더니 이불부터 머리까지 감싸며 핸들 누워버렸다. “야, 일어나 김치에라도 술상을 차려! 옥 같은 딸을 내게 준 이 치보야.” 충국이 지껄여댈수록 흥수는 앙갚음을 하려고 이를 악물었다. 그는 집안을 둘러보다가 미련의 아들애가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기뻤다. “토함산은 어데 갔소?” 미련은 귀찮은듯이  “패용천촌 고모 집에 갔소.”라고 대답하고는 이불을 더 푹 들썼다. 흥수는 미련이 쪽을 쓸어보다가 불현듯 희미한 전등불을 빌어 이불 밑에 드러난 미련의 허연 허벅다리를 보는 순간 아래배로부터 야욕이 불타오르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오냐, 충국아. 내 딸을 짓밟은 원수를 열배, 백배로 갚아주마.) 그는 윽윽 벼르며 구들에 올라가 앉았다. 그래도 미련은 일어도 나지 않았다. 충국은 하는 수 없이 밥상을 내려놓고 술상이라고 차렸다. 김치 움에 들어가 배추김치 한통을 대야에 담아 가져다 식칼로 썩썩 썰어 대야채로 밥상에 덜렁 올려놓았다. 식탁을 아무리 들춰도 술이 보이지 않았다. “미련아, 술병을 어디에다 뒀니?” “몰라! 언제 사다 놓았소? 아낙네만 사는 집에 무슨 술이 있다고 그러오?” 미련은 몸을 들추더니 볼 멘 소리를 쳤다. 충국은 술상이고 뭐고 모르겠다고 일어나 바깥으로 나가버렸다. 그도 진작 흥수가 자기 여동생을 간음했다는 것을 알고 있는 터였다. 허나 네 좋고 나 좋고 엎음 갚음이라고 눈을 감아 주었다. 흥수도 매 한가지였다. 충국이 또 해월을 쫓아가는 것을 알면서도 때마침 잘 됐다고 여겼다. “가라!” 이때 미련이 돌아누우면서 발로 다가드는 흥수의 아랫배를 콱 걷어찼다. “으흠, 이 년아, 어디다 발길질이냐?” 절칵! 흥수는 일어나 문 걸개를 걸고 전등불마저 꺼버리었다. “어으, 차가라. 억, 억. 그만두지 못해?” 투 닥, 투 닥 소리에 뒤이어 이불을 마구 차버리는 소리가 들리었다. 먹칠한 집안에서는 고양이가 우는 것 같은 신음소리가 간간히 들려왔다. “그만 해! 시라지, 시라지 같은게 계속이야?” “좀 가만있지 못해?” 귀 쌈인지 엉덩인지 찰싹 치는 소리가 들렸다. 뒤이어 여인의 흐느낌 소리인지 신음소리인지 어둠 속에서 들리었다… 은빛 달빛이 서서히 온 동네를 비추었다. 한편 마을 사람들은 덕돌의 대학입학을 축하해 밤중까지 놀고 밤참까지 들고 하나 둘 헤어져 갔다. 덕돌과 상순은 문 밖에 나가 그들을 일일이 바래었다. 덕돌이 손님들을 다 바래고 집으로 들어가려고 할 때었다. 울바자 뒤에서 “덕돌이, 좀 보기요.”라고 하는 처녀의 나직한 목소리가 들리었다. (퍽 귀에 익은 목소리인데.) 덕돌이 돌아서는 순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집체호의 조영희가 머리를 다소곳이 숙인 채 사뿐사뿐 잔설을 밟으면서 나타났던 것이다. “어째 아직도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소?” 조영희는 대답 대신 호주머니에서 뭔가 꺼내 내밀었다. “대학입학을 축하하오. 이건 내 성의니까 받아주오.” 덕돌은 별로 다른 생각도 없이 “감사하오.”라고 하며 손수건에 싼 무엇을 받았다. “이게 뭐요?” 허나 조영희는 직답을 피하고 “풀어보면 알겠지요.”라고 하더니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은빛 달빛 속으로 뛰어 사라졌다. 덕돌은 가슴이 뭉클해나 손수건에 싼 것을 풀어 달빛을 빌어 보았다. 꽃담배쌈지가 아닌가. 정말 코바늘로 한 뜸 한 뜸 꽃을 수놓은 꽃담배쌈지였다. 덕돌은 꽃담배쌈지를 만지작거리며 조영희가 사라진 자기 집 동쪽에 있는 집체호 쪽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그는 꽃담배쌈지를 만지작거리다가 그 안에 무슨 종이가 들어있는 것 같은 감을 느겼다. 확실히 제비꼬리처럼 곱게 접은 쪽지가 들어 있었다. 펼쳐 보려고 했지만 달빛을 빌어 볼 수 없었다. “허, 대학생이 되니 좋기는 좋다. 집체호 처녀가 연애를 다 걸고.” 덕돌은 영원한 승자였다. 이전에 그가 소몰이를 할 때에는 어느 처녀가 연애를 걸었겠는가. 연애는커녕 농촌 둼무지에 박힐가봐 둼무지 피하듯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천지개벽이 일어나면서 대학입시제도를 개혁하자 대학에 입학하자 숱한 처녀들이, 집체호 시내 처녀들도 연애를 걸지 않겠는가.       덕돌이 흐뭇해 꽃담배쌈지를 만지작거리면서 윗방에 올라갔을 때다.      똑똑똑    윗방 문께서 노크소리가 조용히 들렸다.    덕돌은 착각인가고 하면서도 꽃쌈지를 치우고 문께로 다가갔다. "누구요?" (영웅인가? 맹광철인가?) "내야." 귀에 익은 목소리었다. 문을 열고 보니 이게 누구냐? 뜻밖에도 기다리고 기다리던 순희가 아니겠는가. "어서 들어오라."   "내 어찌 들어가겠니? 네 나오너라." 덕돌은 정지에 나가 신을 대충 꿰고 바깥으로 나갔다. 순희는 수깃했던 머리를 천천히 들더니 뭔가 내밀었다.  "너의 대학입학을 축하한다. 이걸 기념으로 받아라. 만년필이다." 덕돌은 미안한 마음으로 정이 폭 밴 만년필을 순희 손에서 받았다. "아니, 감사하면서도 미안하다. 네가 락방해 마음이 아프다. 우리 학창시절 꿈대로 함께 대학 갔으면 얼마나 좋겠니?" 덕돌은 어느결에 저도 몰래 순희 어깨에 손을 얹었다. "절대 포기하지 말라. 넌 공부 잘하기에 명년엔 꼭 입학할 거야." 달빛아래 순희 표정은 볼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분명 머리를 힘차게 끄덕였다. "그래, 내 근심은 말라." 그녀는 뒷말을 이었다. "한가지 기쁜 소식을 알려주마. 일성저수지공지 단총지서 네 입단 통과됐다. 이제 공사 단위 비준 받으면 돼." 그 뜻밖의 소식에 덕돌은 순희의 두 손을 덥썩 잡고 환성을 질렀다. "감사하다." "단서기인 집체호 최희랑 빅찰수랑 소개인으로 나서서 힘썼다." "오- 알았다. 네가 많이 힘쓴 거 짐작간다. 정말 감사하다. 입단은 얼마나 오랜 내 소원이었니?" "대학교에 가서 공부 잘해라." 순희는 머리를 수깃하며 몸을 돌렸다. 달빛아래 그녀의 가녀린 어깨가 들먹이는 것이 보였다. "우리 대학에서 다시 만나자." 덕돌은 이렇게 말하고나서 무슨 생각이 피뜩 떠올랐는지 순희를 만류했다.  "잠간 기다려라." 덕돌은 부랴부랴 집에 들어가더니 윗방에서 책 한꾸러미 들고 나왔다. "옛다. 내 복습하던 자료인데 복습할 때 참고해라. 넌 꼭 대학에 입학할 수 있어. 내보다 공부도 잘했고 정치도 잘하잖았니?" "감사하다. 믿어줘서. 건데..." 순희는 뭔가 말하려다가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꼴깍 삼키었다. 덕돌이 대학에 간 후에야 알게 됐는데 이튿날 순희네는 구대현으로 이사가게 됐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녀는 눈물이 앞을 가리어 차마 이사간다는 말을 덕돌한테 하지 못했던 것다.     모든 것은 불운한 운명의 조화랄까. 둘째오빠에게 얹혀살던 그녀는 부득불 둘째오빠네를 따라 한족곳인 구대현에 이사해가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래서 한어로 시험치다나니 이듬해에도, 그 이듬해에도 연속 시험쳤는데도 대학에 입학하지 못하고 말지 않았겠는가.         덕돌의 친구 장영웅과 맹광철은 다 이듬해 대학에 입학했다. 그런데 공부를 그렇게도 뛰여나게 잘하고 정치도 잘하던 순희가 락방되였다. 덕돌은  일성저수지에서 자기를 탈출하라고 엄호하던 순희, 대학에 입학하지 못한 순희를 두고  마음이 아팠다.        그는 두손 모아 빌고 또 빌었다.       "하느님이여, 비나이다. 비나이다, 순희를 꼭 대학에 가게 도와주십시오. "        
151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110) 댓글:  조회:1565  추천:1  2018-07-21
                                                      10. 소몰이군과 여무용수의 설음        진붉은 태양이 서서히 서산으로 넘어가면서 금빛을 뿌리었다. 황혼의 붉은 낙조로 물든 서산의 상공은 붓으로 그린듯이 검붉었다. 그래도 져가는 태양은 펑펑 구멍 뚫린 검은 구름 조각들 사이로 구름 변두리나마 노르스름하고 발갛게 물들이고 있었다. 그것도 잠시뿐 시간이 흐름에 따라 태양은 맥없이 지평선 아래로 꼴깍 넘어가면서 몇 가닥의 금빛을 비추다가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뒤이어 어둠이 능구렁이처럼 내달려오면서 산과 들을 무섭게 뒤덮고 지지눌렀다.      1976년은 중국으로 말하면 특별한 한 해였다. 초봄에는 당산시에서 7급도 훨씬 넘는 지진이 일어나 일대 재난이 벌어졌다. 8월 말부터 9월 초에는 패용천산과 칼산 사이에 있는 과수원의 살구꽃과 사과배꽃이 하얗게 피기까지 했다. 덕돌은 소 방목을 하면서 때 아니게 핀 살구꽃과 사과배꽃을 살펴보면서 이상해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저 패용천산 꼭대기 절벽 우에서 정규상이 싸리나무광주리를 잔등에 업고 괭이로 약초를 캐고 있었다. 그는 시오를 파서 잔등의 싸리나무광주리에 담고 허리를 펴고 산 아래 무연히 펼쳐진 들판을 내려다보며 한숨을 땅이 꺼지게 길게 토해냈다. 거미줄처럼 얼기설기 늘여진 논두렁, 무연히 넘실거리며 펼쳐진 사래긴 옥수수밭과 콩밭… 허나 세상이 아무리 넓어도 말 한마디 했다가 억울하게 우파 모자를 20년이나 쓴 정규상과 같은 우파분자가 숨이 나올 곳은 없었다. 덕돌이 너무 이상해 정규상에게 배꽃이 핀 사과배나무가지를 끊어다가 보였다. “정 교수, 이걸 보십시오. 가을에 배꽃이 다 피었습니다.” 정규상도 한숨을 쉬며 나뭇가지를 받아 쥐고 한참이나 여겨보더니 그리 멀지 않은 배꽃이 하얗게 핀 과수원을 내려다보았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덕돌이 신기해하자 정규상은 의연히 한숨만 내쉬며 흐리터분한 을씨년스러운 하늘만 쳐다볼 뿐이었다. 그런데 9월 9일에 뜻밖에도 중국 인민의 대구성이며 위대한 수령이며 진붉은 태양이신 모택동 주석께서 불행하게도 사망하셨다. 전국 각 민족 인민들은 모두 슬픔의 바다에 잠겼다. 추도대회를 하는 날 함흥대대 토성 안 마당에 검은 천을 두른 거폭의 모택동 주석 초상화를 모시고 사원들이 줄을 지어 추모활동을 벌렸다. 어떤 노인들은 대성통곡하다가 기절해 넘어가 정규상이 위생소에 데려다 주사를 놓으면서 구급해야 할 지경이었다. 덕돌은 5.7중학교를 졸업하고 상순의 포치대로 생산대 소 방목을 하다나니 경애하는 모주석의 추도대회에도 참가하지 못하고 패용천산에 가서 소몰이를 해야 했다. 그는 아버지가 원망스러웠다. 그의 아버지는 집안 집 손자 성욱을 생산대 대무위원 겸 회계를 시키면서도 자기 아들은 대전 일도 시키지 않고 글쎄 소 궁둥이를 치게 했던 것이었다. “참, 아버지는 이해 못하겠어. 내가 회계를 하면 성욱보다 못하게 할까봐 나를 소방목을 하래?” 더구나 상순은 소몰이를 시킨 첫날에 그를 보고 “정치가 백열화된 세상에서 정치를 잘 하지 못하면 소궁둥이나 쳤지 별 수 있니?”라고 비꼬는 투로 말하기까지 했다. 덕돌은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힌 격이었다. 고중 졸업을 앞두고 그는 학교에서 조직한 글짓기서클에 참가해 경산과 성환 형님, 그리고 철봉 형님까지 모시고 조선어문법과 일부 문학창작 이론까지 학습했고 소식과 통신, 소설과 시 등 문체의 글짓기를 배워 공사와 현, 주 방송과 신문에도 소식을 여러 편 발표했다. 게다가 장영웅과 맹광철 그리고 방순희의 도움으로 점차 학급의 애들과도 관계를 개선해 입단지원서까지 썼다. 물론 그때 담임교원 황승연은 학교 빈농 대표 이흥수와 짜고 들어 극력 덕돌의 입단을 저애했지만 학급에서 주먹 왕이자 글짓기를 잘한데다가 대채전을 만드는 중노동도 아주 잘해 학생들 속에서 위신이 높았다. 하여 학교 내에서 덕돌을 내놓고 다른 애들을 입단시키기 힘들었다. 덕돌은 고중에서 입단하고 농촌에 나가 생산대대를 위해 소식이나 통신을 잘 써 입당도 하고 대학에 갈 푸르른 꿈이 당장 실현 될 것 같아 가슴이 한껏 부풀어 올랐다. 그가 진수해 공사 방송소에 가서 견습기자로 뛰어 다닐 때 면목 익힌 아나운서 오영순은 그보다 한 살 위 여성이었는데 공사 단위 조직위원이었다. 덕돌은 그녀를 양누나로 모시고 소식쓰기를 배웠고 방송소를 떠날 때는 이제 입단지원서가 공사단위에 올라가면 토론할 때 도와달라고 체면을 잃고 부탁해놓기도 했다. 그리하여 입단문제는 문제없으리라고 시름 놓고 미몽만 꾸었다. 허나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전해져 왔다. 학교 단총지에서 온 것이 아니라 제일 믿던 양 누나 공사 방송소 아나운서 오영순한테서 먼저 편지가 날아왔던 것이다. 동생, 미안하오. 뜻밖의 불행한 소식에 놀라거나 격분해 하지 마오. 총명한 동생은 이성을 잃은 일을 하지 않으리라고 믿고 말하오. 생각 밖으로 동생이 제일 믿던 사람이 덕돌에 대한 평가가 좋지 못했기 때문에 입단 문제가 공사 단위에서 비준되지 못했소. 학교 기층단총지에서 올려 보낸 자료가 나쁘기에 나로서는 혼자 어찌는 수가 없소. 조직원칙이 있기에 구체적으로 전해주지 못하는 것을 양해하오. 항상 주변 사람들을 과분하게 믿지 마오. 허나 이번의 좌절에서 경험과 교훈을 섭취해 이후에 사상 상에서 입단하면 꼭 멀지 않은 장래에 입단하리라고 믿소… 덕돌은 그 아래 위안의 말들을 더 읽어 내려갈 수 없었다. 그는 김이 빠진 공처럼 편지를 스르르 떨어뜨리고 위 방안에서 이불을 들쓰고 들어 누었다. 진종일 들어 누운 채 천정 한 곳만 멍청히 쳐다보았다. 며칠 후 소를 먹이다가 덕돌은 영웅이 찾아와 말하는 말에서 피뜩 의심이 들었다. “어쩌겠니? 나도 별 수 없다. 학교 혁명위원회와 단위를 쥐고 흔드는 승연선생이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대가리도 꼬리도 없이 남기고 간 영웅의 말에서 덕돌은 희미하게나마 짐작이 갔다. 입단 소개인인 장영웅이 소개인 추천 란에 평가를 좋지 않게 써놓았을 수 있었다. 덕돌은 소를 먹이고 집에 돌아오자마자 오영순의 편지를 꺼내 다시 읽고 또 읽어 보았다. …동생이 학급에서 제일 믿던 사람이 덕돌에 대한 평가가 좋지 못했기 때문에 입단 문제가 공사 단위에서 비준되지 못했소. 학교 기층단총지에서 올려 보낸 자료가 나쁘기에 나로서는 혼자 어찌는 수가 없소… “‘내가 제일 믿던 사람이’ 누구겠는가? 영웅을 내놓고 또 누가 있는가? 영웅이야, 바로 영웅이야.” 제일 믿던 입단소개인마저 평판이 좋지 않은 덕돌을 공사단위 조직위원인 오영순인들 어떻게 입단시킨단 말인가! 순간 배신감과 허위성에 허탈감이 났다. “세상에 어찌 이런 일이 있단 말인가? 영웅이 어찌 이럴 수 있느냐? 내가 널 얼마나 믿었는데...” 사실 영웅과 덕돌은 모두 공부를 잘했다. 덕돌의 큰누나는 영웅의 아버지 제자였다. 영웅의 아버지는 진수해중학교 화학교원이었는데 춘자는 화학을 아주 잘해 맏제자나 다름 없었다. 영웅은 반장이고 덕돌은 학습위원을 하면서 아주 친하게 지냈다. 그런데 덕돌이 수학과 물리, 화학을 몽땅 100점을 맞은 후부터 영웅은 덕돌을 질투하기 시작했다. 학급에서 학습성적 일위를 내줬기 순간부터 생긴 삐뚤렁 정치의 물결이 인것이었다. 그러나 졸업을 앞두고 영웅은 자기를 물매를 치겠다는 뒷말을 듣고 주먹이 센 한족친구들이 많은 걸 보고 덕돌을 보고 자기를 보호해달라고 했다. 대신 덕돌을 꼭 입단시키겠다고 이른바 거래식 군자협의를 달성했다. 덕돌은 졸업할 때 영웅을 누가 다치는 날엔 가만놔두지 않겠다고 을러멨다. 그리고 사전에 영웅을 빼돌려 물매를 피하게 했다.그런데 영웅이 배은망덕하고 뒤에서 자기를 헐뜯어 소개인 소개란에 무함해 써넣을줄은 몰랐다.  허나 승연이가 영웅을 강박해 그런 허위소개를 했다고 생각하자 더욱 격분했다. 희망으로 부풀었던 덕돌의 마음에 남긴 상처는 깊고 깊었다. 세월이 흐르고 흘러도 그 상처는 아물 것 같지 않았다. 덕돌은 소몰이를 하다가 과수원에 흐드러지게 피어난 배꽃을 보고 소 궁둥이를 치던 회초리로 마구 후려갈겼다. 새하얀 배꽃잎사귀들이 질척질척한 땅바닥에 마구 떨어졌다. “너의 아름다움은 내 마음의 비애다. 때 아니게 핀 꽃은 필요 없어!” 덕돌은 이른 아침에 소 무리를 몰고 옥수수 밭을 지날 때면 제일 서러웠다. 옥수수 밭에 달려 들어가 옥수수 잎을 마구 뜯어먹는 소를 쫓아내려고 달려 들어가면 아침 이슬에 옷이 흠뻑 젖곤 했다. 늙은 소 콩 밭쪽으로 한다고 소들의 왕격인 혹달개는 오른쪽 뿌리에 혹이 달리었는데 괘씸하게도 덕돌의 눈치를 흘금흘금 보다가도 다른 소를 쫓아내는 사이면 콩밭에 뛰어 들어가 콩 꼬투리를 마구 뜯어먹었다. “이 놈 혹달개야! 나오지 못하겠니?!” 그 놈의 혹달개는 콩밭에서 뛰어나오며 똥을 빌빌 쏘면서도 콩잎을 마구 뜯어먹었다. “이라! 이놈 혹달개야!” 혹달개를 쫓아 뛰어가다가 덕돌은 혹달개가 갓 쏴놓은 똥물을 밟고 그만 엉덩방아를 찧었다. “에이, 씨!” 일어나 내려다보니 금방 씻어 입은 바지 엉덩이에 싯누런 소똥이 발리었다. 덕돌은 너무나도 서러워 패용천산 꼭대기 너럭바위에 올라서서 산 아래에서 사래 긴 옥수수 밭을 차고 키 넘는 옥수수 사이에서 기음을 매며 나가는 사원들을 내려다보며 장탄식을 했다. “어떻게 계속 이렇게 소궁둥이를 치면서 한뉘 산단 말인가?” 그는 앞길이 막막해 흐릿흐릿한 하늘을 한참씩이나 쳐다보며 주먹을 으스러지게 쥐고 마구 후려쳤다. “야! 이놈의 세상, 어쩜 고중을 졸업한 내가 소 궁둥이를 쳐야 한단 말이냐?! 광활한 천지에는 할 일도 많다는 게 이런 거냐?” 한편 아버지가 자기에게 소몰이를 시킨 것이 원망스러웠다. 순간 소몰이를 내보내며 아버지가 하던 말씀이 귀전을 아프게 때렸다. “별 수 있니? 싸움이나 하고 책도 온전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한뉘 소 궁둥이나 쳤지.” 순간 덕돌은 콧마루가 시큼해났다. 그는 하늘을 향해 두 손을 벌려 보이면서 목청껏 웨쳤다. “아버지, 두고 보십시오! 내가 소 궁둥이나 치면서 사는가? 어쩜 세상을 주름잡아 달릴 큰 뜻을 품은 아들에게 그런 말씀을 해 자극할 수 있습니까?!” 그는 끊임없이 하늘에 대고 주먹질을 하고 웨치고 산 아래 들판에 대고 고함쳤다. “아버지, 어쩜 성욱에겐 회계를 맡기고 당신의 아들에겐 소몰이를 시킬 수 있습니까? 농촌에서 농사를 배우지 않고 소몰이나 해서야 무슨 전도가 있습니까?” 덕돌은 아버지 그때 말씀이 이해되지 않아 날마다 끊임없이 넉두리를 했다. 넉두리를 하다가도 밭으로 달려가는 소들을 되몰아왔다. 어떤 때에는 자기가 조립한 반도체 라디오를 메고 칼산에 올라가서 조선노래를 들으면서 산우에서 목청이 터지라고 노래를 불렀다. 노래를 부르고 나면 그래도 잠시나마 가슴이 후련하고 마음이 홀가분해났다. 기실 상순은 아들 덕돌에게 격장법을 써서 정신을 차리고 농촌을 벗어나라고 일부러 소몰이를 시켜 자극했던 것이다. 허나 덕돌은 아버지의 그 깊은 마음을 알리 만무했다. 약재를 캐다가 덕돌의 그 모습을 지켜 보아온 정규상은 슬슬 다가와 광주리를 벗어 너럭바위 위에 놓고 산 아래를 둘러보았다. 사원들이 보이지도 않자 그는 너럭바위 위에 덕돌과 나란히 앉아 타일렀다. “운명을 한탄만 해서야 소몰이 신세를 고칠 수 있니?” “그래 무슨 방도가 있습니까?” 정규상은 덕돌의 어깨에 손을 얹더니 나직이 말했다. “지금 세월에 잠시 지식분자들을 써주지 않지만 장차는 써줄 거야. 지식분자를 멀리하고서야 사회가 어찌 발전하겠느냐? 그러니 소만 몰지 말고 여가를 타서 책을 보아라. 지식은 언제든지 네 운명을 개변시키는 힘이 될 거야.” 덕돌은 그 말에 정신이 들었다. “예. 그런데 책을 보자고 해도 소들이 밭으로 가서 볼 새 있습니까?” 정규상은 덕돌의 어깨를 다독이면서 귀띔해 주었다. “소몰이도 방법을 대라. 소는 소금을 먹기 좋아해. 소금을 사 호주머니에 넣어가지고 다니다가 ‘염, 염.’ 하고 조금씩 먹여라. 그럼 소들이 달아날 때마다 ‘염, 염’ 하고 부르면서 손을 내밀어봐라. 소들이 밭으로 가다가도 달려오지 않는가. 소들도 방법을 대 얼리고 길들이면 얼마든지 책을 볼 새 있느니라.” “예~ 그게 정말 방법입니다.” “그래, 뭐나 방법을 생각하면서 일해야 한다.” 덕돌은 “예, 알았습니다.”라고 하며 머리를 끄덕였다. 정규상은 뒤 말을 이었다. “내 알건대 네 고조부는 궁중 어의였다더라. 너도 의사공부를 하지 않겠느냐?” 덕돌은 김빠진 공처럼 물앉아 한숨만 내쉬었다. “내 언제 의사 질을 해서 농촌을 벗어나겠습니까?” 허나 정규상은 덕돌에게 힘을 불어넣어주었다. “넌 총명하기에 농촌에서 일하면서도 의료지식을 제대로 배울 수 있다. 공부라는 건 딱 학교에서만 하는 게 아니야. 지금 잠시 농촌에 있지만 먼저 책을 보면서 자습할 수도 있다. 이제 세상이 뒤바뀌면 언젠가는 내가 너를 의사로 되게 도와주마.” “예? 정말입니까?” “그래. 의료지식 책을 주면 누구에게도 보이지 말고 가만히 소몰이를 하면서 봐라.” “예. 감사합니다.” 덕돌은 새로운 희망으로 부풀어 올랐다. 이튿날부터 덕돌은 정규상 교수의 말대로 집에서 소금을 둬 줌씩 호주머니에 넣어가지고 소몰이를 했다. 그는 먼저 우사에 가서 소들의 우두머리 혹달개의 구유 앞에 가서 “염, 염” 하면서 소금을 손에 쥐어 내밀었다. 혹달개는 귀를 뻘쭉하더니 혀로 덕돌의 손바닥을 핥아 보더니 앞으로 육중한 몸뚱이를 움직이더니 쯥쯥 소금을 핥아 먹어버렸다. “염, 염, 염.” 덕돌은 소들을 하나하나 다가가 손바닥을 내밀어 소금을 먹였다. 다른 소들도 혹달개처럼 아주 맛있게 먹는 것이었다. 그런데 덕돌은 소에게 소금을 먹이다가 오줌이 마리어 괴춤을 내리고 쏴 갈겼다. 그런데 이게 뭐야? 혹달개는 그 오줌도 쩝쩝 받아 아주 맛있게 먹는 것이 아니겠는가? “오줌, 오줌, 오줌, 염, 염, 염.” 그 후부터 덕돌은 혹달개랑 옥수수 밭으로 달아나려고 하면 쫓아갈 필요없었다. “염, 염, 염.” 덕돌이 소리치면서 손바닥을 내밀기만 하면 옥수수 밭으로 달려가던 혹달개랑 소금을 먹으려고 덕돌한테로 뛰어왔다. 소금이 없을 때는 “오줌, 오줌, 오줌.” 하고 소리치면 소들은 귀 뻘죽해 멈춰 섰다가 이쪽으로 달려 왔다. 혹달개는 오줌도 쩝쩝 맛있게 먹는 것이었다. 진짜 우둔한 소들도 조건반사가 생겼다. 원시사회 기적이 아닌가! 소금을 몇 알만 얻어먹어도 혹달개랑 덕돌의 곁을 떠날줄 몰랐다. 그게 방법이었다. 덕돌은 혹달개랑 가파로운 패용천산에 소들을 올리 몰아놓고 꼭대기 쪽에 올라가 너럭바위에 핸들 들어 누워 목마른 사람이 물을 마시듯이 정규상에게서 가진 의학책을 걸탑스럽게 읽어보았다. 비록 재미로 볼 책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 농촌 구석을 벗어나려면 중초약책이라도 열심히 읽어야만 했다. 그 밖에도 그는 닥치는 대로경산 선생이 준 소설책도 보고 동화책도 보고 철봉 형님이 준 “문학창작의 길”이란 문예창작 이론책도 읽어보았다. 제일 재미나게 읽은 책은 그래도 고파의 “림해설원”이나 라관중의 “삼국연의”나 시내암의 “수호전”이었다. 무송이나 리규, 로지심과 같은 양산박의 호한들이나 류비, 관운장, 장비 같은 영웅들의 이야기에 끌려 덕돌은 소가 옥수수 밭으로 뛰어 들어간 것도 다 잊고 넋을 잃고 읽어 내려갔다. 혹시나 옥수수 밭으로 달려 들어간 소떼를 발견하면 산 중턱으로 달려 내려가면서 “염, 염, 염.” 하고 소리쳐 부르기만 하면 됐다. 소들이 옥수수 밭에서 뛰어나오는 것만 같으면 또 드러누워 책을 읽었다. 그는 지어 잘 된 구절은 목책에 적어놓고 암송하기도 했다. 그러나 조설근의 “홍루몽”이나 양말의 “청춘의 노래”, 조선 작가 리기영의 “고향”이나 “두만강” 같은 소설은 잔잔한 물 흐름과 같이 필치가 섬세한데다가 정감이 풍부해 읽는 재미가 달랐다. 점심이 되면 옥수수떡 둬개 꺼내 대충 요기하고는 소련 작가 고리끼의 자서전 그림책을 탐독했다. 고리끼의 “어린 시절”과 “인간수업”, “인간들 속에서” 등은 할머니 손에서 너무나도 고생스레 자란 고리끼 본인의 이야기를 너무나도 진실성이 강하게 펼쳐보였다.     때문에 덕돌로 하여금 어떤 때에는 고리끼의 비참한 운명에 눈물을 흘리게 했고 점차 사람이 사는 도리를 알게 했다.       어떤 때에는 소낙비가 쏟아지면 패용천산 군용 갱도 입귀에 들어가 계속 책을 읽었다. 소들은 풀을 먹다가도 소낙비를 피해 갱도에 들어간 덕돌을 따라와 갱도 어귀에 모여 서서 주인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해가 서산에 지기 시작하면 혹달개랑 벌써 배가 뿔룩하게 풀을 뜯어먹고 산꼭대기에 모여와 누워 새김질 하면서 덕돌이 책을 놓고 일어나 집으로 돌아가기를 기다렸다. 허나 덕돌이 집으로 돌아갈 염을 하지 않고 너럭바위에 누워 작중 이야기에 매료돼 “허허허” 하고 소리치며 호탕하게 웃기도 하고 무릎 팍을 때리기도 하며 야단쳤다. 그 모양을 보고 답답했는지 소들도 집으로 돌아가자고 덕돌의 곁으로 몰려왔다. 그래도 혹달개가 담이 있어서 스적스적 다가와 집에 가자고 누워 있는 덕돌의 얼굴에 대고 입김을 푸푸 내쉬며 냄새를 맡았다. 그래도 안 되면 대가리를 하늘 공중에 쳐들고 “음메-” “음메 헉!” 하고 산정이 떠나갈듯이 영각소리를 질렀다. 그제야 덕돌은 서산에 넘어간 해를 쳐다보며 일어나 소들을 몰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 후부터 덕돌은 황혼녘으로 해 소들이 벌써 몰려오면 갈 때 됐구나 하고 책을 호주머니에 질러 넣고 집으로 돌아왔다. 빌려온 책을 다 보고 없을 때에는 자기가 조립한 반도체 라디오를 틀어놓고 북조선과 남조선의 방송을 가만히 도적질해 들었다. 어쩐지 연변인민방송이나 중국 방송은 혁명적 본보기극에서 “둥, 둥, 당, 창” 하며 부르는 경극 노래 소리 밖에 나지 않아 듣기 싫었다. 조선 방송이나 한국 방송을 가만히 들으면 아주 귀맛이 당겼다. 당시 한국 방송이나 조선 방송을 들으면 정치문제에 걸리기가 십상이었다. 허나 덕돌은 그런 방송에 끌려들어가는 것을 어찌할 수 없었다. 부드럽고 경쾌한 노래 소리는 동질 민족의 미적감수가 같아 그런지 귀맛을 당겨 라디오 속의 가수들과 함께 흥얼흥얼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고중을 졸업하고 광활한 천지에서 소 궁둥이를 치게 된 덕돌에게는 책과 라디오방송이 큰 위안으로 됐다. 책을 읽고 방송을 듣노라면 모든 고독과 적막함, 실망, 고민이 흐리터분한 하늘로 날아가고 마음이 후련하고 온 몸에 힘이 솟구쳤다. 그러나 그런 좋은 날은 오래가지 못했다. 어느날 흥수는 덕돌의 집에 찾아와 반도체 라디오를 빼앗아냈다. 그는 보름을 높이 틀어놓았다. 반도체 라디오에서는 북조선의 노래 소리가 왕왕 울렸다. 샘물터에 물을 길러 동이 이고 나갔더니 빨래하던 군인동무 슬금슬금 돌아앉네 그 솜씨 너무나도 서툴러서 부끄러워도 말 했지요 내가 빨아줄게요 내가 빨아줄게요 “이게 뭐야? 북조선 노래 아니게?” 흥수는 박죽코를 벌름거리며 눈을 뚝 부릅뜨더니 금방 밥숟가락을 놓은 상순과 덕돌을 번갈아 보면서 왜가리 목을 빼들고 호통쳤다. “잘한다, 잘해! 패용천산에 날마다 올라가 외국 방송을 듣는다더구먼.” 흥수는 반도체 라디오를 쳐들어 보이면서 을러멨다. “이건 네가 조립했다면서? 어떻게 외국 방송을 듣기 싶으면 반도체까지 다 조립해? 몰수야, 몰수!” 상순도 할 말이 없어 덕돌을 욕했다. “뭐야? 소나 온전히 먹일 게지. 말썽을 일으켜?!” 덕돌은 그저 머리를 숙이고 묵묵히 앉아 있었다. “어서 치보 주임에게 잘 못했다고 하지 못하겠니?” “잘못했습니다." 그러나 흥수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반도체를 훌 들고 나가버렸다. 덕돌은 흥수를 쫓아나갔다. "반도체 라디오는 가져가지 맙소. 내 어떻게 점심을 굶으면서 부속품을 사다  조립한 게라고 그러오?” 허나 흥수는 귀등으로도 들은 척 만 척 하면서 휑 하니 가버렸다. “안 돼! 왈라카누(뭐 할려고 하나)? 가만 놔두든가 봐라!” 상순은 덕돌이 일을 칠까봐 뒤따라 나와 황급히 뛰어가 흥수의 손을 잡고 사정했다. “이 치보, 한번만 사정하기요. 덕돌이 잘못했는데 내 교육하겠으니까. 투쟁대회나 비판대회는 그만 두오.” “관둬! 당신 노서기라는 양반이 아들을 어떻게 교육했으면 적국의 방송까지 듣소? 남조선 방송을 누가 마음대로 들으라고 했어?” 흥수가 그렇게 비난사정해도 반도체 라디오를 들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자고 할 때었다. “서라!” 옆에 있던 덕돌이 로지심처럼 고함치며 웃통을 활 벗어버리며 뒤쫓아 갔다. 흥수가 우뢰 같은 고함소리에 깜짝 놀라 뒤돌아보니 덕돌이 세귀눈을 뚝 부릅뜨고 잡아먹을 상하고 덮쳐오는 것이었다. “이놈 새끼, 치보한테 대들 테냐?!” “반도체를 놔두고 가라!” “이놈 새끼, 버릇없이 누구보고 야, 자냐?” “반도체를 내려놓지 못하겠는가?!” 덕돌은 씽 덮쳐나가 반도체를 쥐여 당겼다. 흥수는 덕돌과 반도체를 잡고 밀고 닥치고 했다. 그 바람에 반도체 얇은 곽이 각이 툭 나갔다. 마사진 반도체를 보자 덕돌은 열이 후끈 올랐다. “내 반도체를 배상하오!” 덕돌은 흥수의 멱살을 쥐고 마구 흔들었다. 그날 일을 포치 받으려고 상순이네 집 앞으로 숱한 사원들이 몰려오면서 구경했다. 흥수도 자존심을 세우면서 고함쳤다. “네놈새끼, 감히 대대 혁명위원회 주임을 뜰 테냐? 대학에 영영 추천받을 거 같아?! 흥!” “못가도 좋소. 반도체를 내놓소!” 덕돌은 흥수를 톡톡히 망신주려고 바자굽에 마구 떠밀었다. “아이고, 뜨개 소 같은 놈, 두고 보자!” 흥수에게 버릇없이 구는 덕돌을 상순이 발길을 날려 궁둥이를 차 넘겼다. “이 새끼야, 네 어찌 아버지 벌 되는 분에게 몹쓸 버릇이야? 사람 질을 못할 놈 새끼, 뜨개소가 왕이 될 거 같아? 어찌 힘으로 세상을 쥐락펴락하려고 드니? 내일부터 소를 몰지 말고 대전 일을 해라! 곡식 실이나 해라!” 말을 마치자 상순은 흥수를 부축하면서 “어떠오? 모질 상하지 않았소. 함께 위생소로 가기요.”라고 했다. 흥수는 오만상을 찌푸리다가 외까풀 눈을 가슴츠레 뜨고 덕돌을 노려보며 지분거렸다. “이놈 새끼, 두고 보자. 네 놈 새끼 이 골 안에서 구더기처럼 썩어빠지지 않는가 봐라! 내일 투쟁대회를 하고 공사파출소에 잡아가겠어!” 허나 덕돌은 대수롭지 않게 두덜거리었다. “마음대로 하오. 누가 두려워 할 거 같소?” 그날로 흥수는 민병들인 성욱이랑 응철이랑 상선이랑 끌고 덕돌을 투쟁하겠다고 데리러 왔다. 그런데 희극적인 장면이 벌어졌다. 당장 죽는다 만다 하던 해월이가 소문 듣고 덕돌이네 집으로 달려와 앞을 막아 나섰던 것이다. “아버지! 그만 두십시오. 무슨 투쟁을 한다고 이래요?” 흥수는 해월을 밀어냈다. “뭘 삐쳐?” 그때 해월은 흥수 앞에 무릎을 꿇고 두 손을 싹싹 비볐다. “아버지, 제발 덕돌을 살려 주십시오. 덕돌은 내 첫사랑입니다. 내 뱃 속에는 덕돌의 애가 있습니다.” “뭐라고?” 흥수나 상순은 두 말할 것도 없고 덕돌은 그 뜻밖의 말에 눈이 동그래졌다. “야, 이건 무슨 생 똥 같은 말이냐? 난 너를 좋아한 적도 없어!” 그 말에 해월은 일어나면서 절절한 눈길로 덕돌을 쳐다보았다. “네 지난해 동삼에 우리 집에 오지 않았니? 그날부터 난 임신했어.” “뭐라고?” 덕돌은 어이없어 혀를 홰홰 내돌렸다. “생사람을 작작 잡아라! 병문안을 갔지? 언제 그랬니?” 허나 해월은 덕돌의 팔소매를 잡고 놓지 않았다. “생떼를 쓰지 말라! 넌 내 낭군임이야.” 해월은 흥수의 팔소매를 잡고 몸까지 흔들면서 떼를 썼다. “내 신랑감을 작작 투쟁하오. 그러잖으면 토성 아래 우물에 풀렁 뛰어들어 죽어버릴 거요. 덕성영감처럼! 알았지?” 흥수는 해월과 덕돌을 번갈아보더니 성욱이랑 돌아보면서 “너네 먼저 가. 내 먼저 알아봐야 할 게 있어.”라고 했다. 해월이 떠드는 바람에 흥수는 투쟁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동네 창피해 슬금슬금 자리를 떴다. 상순은 덕돌의 귀 쌈을 찰싹 갈겼다. “이놈 새끼, 어서 우사에 가서 수레를 메워가지고 옥수수실이나 해라!” 덕돌은 아무 말도 못하고 수레를 메우러 갔다. 그때 해월은 상순의 팔소매를 잡고 집안에 들어가 통사정을 들이댔다. “덕돌이 아버지, 내 이 집 며느리 하면 안 됩둥?” 상순은 해월의 불룩한 배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그래 배 속의 애는 정말 덕돌이 거냐?” 해월은 캐득캐득 웃어댔다. “아니. 난 장충국이한테 시집갔습니다. 그 늙은 영감이 그래도 노총각이어서 힘도 생각 밖으로 잘 쓰던데요.” 상순은 어이없어 정신이 나간 해월을 집에서 내쫓았다. “가라, 가. 왜 우리 덕돌을 물어먹니? 하긴 잘한다. 너 아비는 우리 덕돌을 투쟁하겠다고 떠들어대고. 딸은 배 속에 애를 만들었다고 생사람을 잡아먹고. 흥! 퉤!” 해월은 어처구니없는 말을 늘여놓으면서 바깥으로 밀려나갔다. “내 덕돌의 애를 가졌다고 말하지 않으면 우리 아빠 덕돌을 투쟁하지 않고 가만 놔둘 거 같았습둥?” 그제야 상순은 모든 것을 알았다. 해월은 충국에게 짓밟혀 확실히 정신이 나갔다. 허나 어떤 때에는 뜻밖의 어물 넙적한 소리를 했다. 좌우간 해월이 덕돌을 구하기도 해서 그리 밉지는 않았다. 한편 덕돌은 혹달개를 말뚝에서 풀어내 수레를 메워가지고 몰고 장개골 안으로 옥수수단을 실으러 갔다. 그런데 앞에서 송선이 수레를 몰고 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아주머니, 왜 돼지죽을 먹이지 않고 여기 왔습니까?” 송선은 주위를 뒤돌아보고 아무도 없는 것을 보자 “어쩌겠소? 이 치보가 나보고 돼지죽을 먹이는 일이 편안하다고 먹이지 말라는 거.” 하고 볼멘소리를 했다. 그녀는 머리를 또 돌려 물었다. “저는 어째 소를 몰지 않고 여기 왔소?” 덕돌은 어처구니없어 혀를 글끌 찼다. “아주머니나 내나 매한가집니다. 세상에 소몰이나 돼지치기를 좋아 할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들은 이말 저말 하면서 옥수수단을 수레에 싣고 바 줄로 꽁꽁 동여맸다. 그런데 아무래도 심상치 않았다. 금방 실었을 때는 괜찮았는데 어설프게 실은 옥수수단이 조금 덜렁 거리니 수레 위에서 옥수수단이 수레채 옆으로 여기저기 괴나오기 시작했다. “탈곡장까지만 견디면 되겠는데.” 덕돌이 꾀지는 수레 위 옥수수단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리었다. 뒤에서 수레를 몰며 따라오던 송선은 “그래도 제 덕분에 처음 수레에 옥수수를 다 실어보았소.”라고 웃고 떠들었다. 가파른 내리막으로 오자 혹달개는 겁을 집어 먹고 눈을 부릅뜨고 주춤거렸다. 그보다도 송선은 내리막을 보고 감히 수레를 몰 엄두를 내지 못했다. “아주머니, 여기 소고삐를 딱 쥐고 서 있으십시오. 내 다시 와서 함께 몰고 내려갑시다.” “양, 주의하오.” “예.” 덕돌은 소고삐를 바짝 틀어쥐어 당기며 수레 멍예를 팔꿈치로 꽉 눌렀다. “이라. 혹달개야, 천천히 내려가자. 염, 염, 염.” 혹달개는 자꾸 옆의 덕돌을 보며 소금을 주겠는가고 주둥이를 하 벌리고 침을 흘리며 천천히 내리막을 내려갔다. 덕돌이 “와, 와, 와.”하며 천천히 내리막을 용케도 내려갔다. 평소에 그래도 아버지를 따라 땔나무를 실으러 다녔던 건데 덕을 보았다. 그때까지 송선은 고삐를 쥐고 암소 대가리 털을 쓰다듬어 주면서 서있었다. 덕돌은 송선의 수레마저 몰고 천천히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암소여서 내리막을 받지 못해 마구 달려 내려갔다. “와, 와,” “염, 염, 와, 와, 와!” 덕돌이 아무리 소리쳐도 암소는 네 굽을 안고 아래로 달렸다. 송선이 뒤에서 아무리 가냘픈 손으로 수레를 뒤로 잡아당기며 끌려 내려갔지만 허사였다. “활 놓소. 위험하오.” 덕돌은 수레멍지를 부여안고 로지심 같은 힘으로 뒤로 뻗쳤지만 내리 달리기 시작한 수레를 막을 수 없었다. 굽인돌이에서 한쪽 수레바퀴가 빗물 곬에 빠지더니 수레가 허망 번져졌다. 다행히 덕돌과 송선은 상하지 않고 암소도 상하지 않았다. 소수레는 해뜩 번져 수레바퀴가 빙그르 돌아갔다. 덕돌과 송선은 둘 다 길 옆에 풀렁 엉덩방아를 찧었다. “이걸 어쩌오?” 송선은 울상이 돼 땅바닥을 쳤다. 그래도 스무 살 밖에 안 되는 덕돌이 사내느라고 위안했다. “괜찮습니다. 다시 실으면 됩니다.” 덕돌은 번진 수레에 다가가더니 웃통을 벗어버리는 것이었다. “어쩌자고 그러오?” 송선은 털이 부숭부숭 난 덕돌의 쩍 벌어진 가슴을 보고 놀래며 물었다. “근심 마십시오.” 덕돌은 가슴을 쭉 뻗고 산 공기를 한껏 심호흡을 하더니 수레바퀴를 쥐고 어깨를 들이댔다. “나도 밀라오? 어찌 혼자 세우겠소? 옥수수단을 부리고 세울까?” 옥수수단을 쥐는 송선을 보고 “저쪽으로 가 구경하십시오.”라고 했다. 그는 용처럼 꿈틀거리는 두 팔로 수레를 잡고 어깨로 들이대더니 “얏!” 하고 고함치며 떠밀었다. 옥수수단을 실은 수레가 움찔움찔 하더니 드디어 서서히 한쪽으로 번져지기 시작했다. 옆에서 두 손을 잡고 긴장하게 구경하던 송선은 경악하고 말았다. “아니, 힘이 어쩜 이리도 세오?” 산더미 같은 수레가 옥수수단이 마구 괴나오면서 되 번지어져 세워졌다. 덕돌은 얼굴이 지지벌개 씩씩거리며 욕지거리를 했다. “제길, 젖은 옥수수를 베서 실어들이라고 할 게 뭐야? 마른 담 실어들이면 사람이나 소나 다 쉽겠는데. 흥!” 덕돌은 수레를 되세워놓고 숨을 돌리지도 않고 옥수수를 수레에 실었다. 괴물 같은 덕돌의 힘에 밭으로 나가던 사원들의 눈이 떼꾼해졌다. “진짜 로지심이구먼.” “허참. 우둔한 게 범을 잡는다더니.” “우리 대대에 괴물이 생겼소. 쯧쯧.” 사원들은 혀를 내둘렀다. 송선과 덕돌은 암소가 끌지 못할 까봐 옥수수단을 채 싣지 않고 혹달개가 끄는 수레에 더 싣고 탈곡장으로 몰고 떠나갔다. 덕돌과 송선은 그 다음번에는 수레에 옥수수단을 서너 단 적게 싣고 내리막을 내려왔다. 그것도 덕돌이 먼저 자기 수레를 몰고 내려온 후 혹달개를 풀어 몰고 올라가 송선의 수레에 다시 메워 몰고 내려왔다. 그러다나니 일축이 별로 나지 않았다. 말을 들을까봐 송선도 덕돌이 모는 요령을 보고 차차 앞에서 수레를 몰기 시작하고 뒤에서 덕돌이 수레꽁지를 쥐어 당기면서 가파른 내리막을 내려왔다. 기실 흥수는 송선을 징벌하기 위해, 상순은 덕돌을 혼내려고 고의적으로 옥수수 싣기를 시켰던 것이다. 그날 저녁에 흥수는 이쯤하면 송선이 혼났으리라고 속구구를 하면서 송선 네 집으로 기신기신 기어들었다. “왜 왔어요? 어서 나가세요.” 송선은 치뜬 눈으로 박죽코마저 지지벌개진 흥수를 쏘아보았다. “애들은 어데 갔소?” “시내에 책을 사러 갔다가 오지 않았어요. 이제 인차 올 거예요.” 흥수는 애들이 없는 눈치이자 신을 벗고 구들에 올라섰다. “헤헤. 어떻소. 옥수수 싣기를 하자니 힘들지? 헤헤헤.” “…” “뭐랬어? 내 말을 고분고분 듣고 위생소에 들어앉아 있었더라면 얼마나 편안했겠어? 에참, 권주는 안 마시고 벌주를 마시다니. 호박 쓰고 돼지 굴에 들어갈거노(거나)?” 흥수는 머리 숙이고 뒤로 비실비실 물러서는 송선을 밀어 붙이면서 벽 밑에까지 다가섰다. “그래도 목욕받기만 낫습니다.” 흥수는 흘겨보는 송선의 예쁜 모습을 보고 끓어오르는 정욕으로 온 몸이 전율할 지경이었다. 가시 돋힌 장미꽃 같은 미녀의 모습은 희미한 전등불 아래 이름 못할 정욕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주먹으로 지지벌개진 박죽코를 쓱 닦으며 다가섰다. “이제라도 늦지 않았어. 내 말 고분고분 들어.” 흥수가 와락 끌어안으려는 순간 송선이 찰싹 귀 쌈을 갈겼다. “짐승 같은 놈아, 네가 다 당원이고 치보 주임이냐? 짐승 보다 못한 놈 새끼! 사람을 어떻게 보고 이 지랄이야? 미친 놈아!” 흥수는 창피를 당하고 주춤 물러섰다. 이윽고 방바닥에 내려가 신을 신으면서 중얼거렸다. “어디 두고 보자. 언제까지 뻗대는가? 네년이 죽어 물귀신이 돼도 이 골 안을 벗어나는가 두고 보랑께(보라는데)? 흥!” 허나 그의 등 뒤에서는 “퉤!” 하고 침을 뱉는 소리가 들릴 뿐이었다. 흥수가 송선의 집에서 맥없이 씩씩거리며 나와 울안을 나설 때었다. 집 안에서 매서운 소리가 귀전을 귀찮게 때렸다. “개 같은 놈, 나를 어떻게 보고, 미친 놈, 윤희를 짓밟고서도 모자라 나를 지껄여? 어림도 없어!” 저쪽에서 송선의 두 딸애가 공책이랑 사들고 돌아오는 것이 보였다. 흥수는 닭을 뒤쫓다가 지붕을 쳐다보는 개 격이 돼 툴툴거리며 어떻게 송선에게 보복할 것인가를 궁리하며 함흥촌으로 돌아갔다. 어둠이 무시무시하게 깔린 한족묘지꺼리에서는 마른 쑥대들이 을씨년스럽게 가을바람에 술렁거리고 있었다. 언제면 암흑한 이 세월이 끝날까?         저자 주: 지금까지 김장혁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총7권)의 제6권까지 감상한 여러분께 경의를 드립니다.      이제부터 계속해 제7권을 련재해드리겠습니다. 저의 홍색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의 향연을 계속 만끽할 것을 기대합니다.            김장혁 작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 (제7권)           제29장 천지개벽                            1. 파란만장한 인생길       깜깜한 밤하늘에 은하수가 비끼고 삼태성이 반짝이었다. 아기별들이 초봄의 밤바람에 스치어 숯불처럼 점점 밝아지며 반짝이었다. 지지리 먹장구름으로 뒤덮인 채 흐리터분하던 밤하늘에 어쩌다가 구름이 하나하나 가시어지고 별들이 하나 둘 드러났다. 허나 별빛으로 몇 천 킬로미터 두께로 두꺼운 어둠이 깔린 밤하늘을 밝히기는 어림도 없었다. 허나 끝내 먼동이 푸름 해지기 시작했다. 어둠층이 기적적으로 점차 연해지었다. 푸름 해지는 동녘의 하늘과 구불구불한 코끼리 잔등 같은 산정의 윤곽이 그림처럼 명암이 분명해지면서 진면모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대지의 삼라만상이 암흑 속에서 기지개를 켜더니 푸름 해지는 하늘아래 삼라만상을 하나하나 드러내려고 모질음을 썼다.       “꼬끼오~오~”        어디선가 새벽을 알리는 수탉의 울음소리가 거세찬 계급투쟁의 정치파도가 휩쓸고 지나가 피곤한 나머지 잠시 고요히 잠들어버린 함흥대대 마을의 적막을 깨뜨렸다.       동녘하늘이 각일각 환해지더니 노르스름한 구름들이 점점 붉어지었다. 소나무가 우거진 계수동의 구불구불한 능선 위로 붉은 태양이 불끈 솟아오르면서 금빛 몇 가닥을 뿌렸다. 새날이 밝아오기 시작하는 시각이었다.        지지리 숨 막힐듯이 대지의 만물을 내리누르던 암흑의 장막이 기적적으로 훌렁 걷히었다. 아직도 잔설이 듬성듬성 뒤덮인 소소리 높고 가파른 절벽으로 장식된 패용천산과 칼산이 름름한 원 모습을 되 찾아가고 패용천산과 칼산 사이의 돌 언제를 쌓은 다락밭과 과수원, 양봉장과 인삼 장, 그리고 조개덕의 벽돌공장과 함흥촌의 토성 안의 고래 등 같은 대대 새 청사가 한눈에 안겨왔다. 조개덕과 함흥촌, 계수동의 게딱지처럼 거무칙칙하고 올망졸망한 초가집 무리 속에 들어앉은 붉은 벽돌집이 쌀의 티처럼 드문드문 드러났다. 그 벽돌집은 상순이가 사원들을 조직해 벽돌공장을 지은 후 새 농촌을 건설하면서 한 해 동안에 가난한 사원들에게 지어준 벽돌집들이었다.      겨우내 꽁꽁 석자두께로 얼었던 태평강의 얼음도 뜨드득 갈라지고 녹으면서 얼음덩이 사이에서 봄날의 이른 아침을 알리는 봄 강물이 조잘조잘 노래하며 꽃구름송이들을 싣고 동으로 유유히 흘러갔다.       여기저기 굴뚝에서 밥을 짓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면서 시골 마을은 활기를 찾기 시작했다.       덕돌은 아침밥술을 놓기 바쁘게 멜대를 메고 가슴을 쭉 뻗치고 태평강 가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어디 허 대장이 얼마나 힘이 세기에 나를 헐뜯는가 보자. 뭐 나를 뼈대를 아껴서 일을 건성건성 한다고? 제기랄 당신 뼈대는 어느 만한가 두고 보자.” 그는 윽윽 벼르면서 태평강 언제를 쌓는 공지로 나갔다. 사실 덕돌은 지난해 초가을까지 소몰이를 하면서 책을 보거나 라디오를 듣다나니 소가 옥수수를 먹였다는 이유로 상순에게 한바탕 욕을 먹고 대전 일을 하기 시작했다. 덕돌은 아버지와 허 동원이 시키는대로 수걱수걱 농사일을 했다. 가을에 소수레로 벼를 탈곡장에 실어들이었다. 벼실이 끝나자 탈곡장에 가서 벼단을 메 탈곡기 옆에 가져가고 탈곡기에서 튕겨 나온 짚단을 메고 짚무지를 쌓는데 날라 갔다. 그는 힘이 셌기에 단번에 32 단씩 날랐다. 벼 짚단은 괜찮은데 벼 알이 늘어지게 달린 벼 짚단을 손아귀에 더 쥘 자리 없을 정도로 틀어쥐어 둘러메고 씨엉씨엉 날랐다. 아무도 한두 번은 그렇게 할 수 있었다. 허나 온 종일, 아니, 날마다 그렇게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여 벼단을 나르는 일을 성욱과 덕돌이 둘이 하던 것을 덕돌이 혼자 날랐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이 나르던 벼 짚마저 혼자 달아 다니면서 날랐다. 그런데도 “대채평공”을 할 때에는 갓 고중을 졸업하고 나온 풋내기농민이라고 공은 적게 매겨주었다. 이른바 “대채평공”을 할 때면 매개 사원들이 일 한 것을 하나하나 사원대회에서 토론해서 공을 기입하는 형식이었다. 사원들은 그 공에 따라 년 말 총화 때 돈을 타게 됐기에 공수이자 돈이었다. 덕돌은 입술이 따발을 걸 지경이 됐다. “허 대장, 둘이 하던 일을 했는데 왜서 다른 사람들보다 공을 더 적게 줍니까?” 허 대장은 덕돌의 말을 들었는지 말았는지 거들떠도 보지 않고 “그 다음 사람을 평합시다.”라고 했다. 덕돌은 벌떡 일어나 허동원 대장을 쏘아보며 “어째 사람의 말이 들리지 않습니까? 내걸 다시 평해줍소. 내 뼈 빠지게 둘의 몫을 일했는데 어째 남보다도 공을 적게 줍니까?”라고 직격탄을 날리었다. 그러자 허동원은 쌍까풀눈을 부릅뜨고 “넌 풋내기다. 뼈대를 아껴서 건성건성 일해 가지고 공을 더 타겠다고?”라고 맞불질 했다. 자존심이 작두날처럼 시퍼런 덕돌이 가만있을 리 없었다. “뭐랍니까? 아무리 풋내기라도 그렇지. 내가 언제 뼈대를 아꼈습니까? 여기 숱한 사원들이 보지 않았습니까?” 사원들은 모두 “덕돌이 힘이야 세지.”라고 하는가 하면 “일이야 많이 했지.”라고 했다. 그 바람에 허동원은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야, 빈농들의 재교육을 잘 받으려면 공수를 따지지 말고 힘든 일, 궂은일을 다 해야 한다. 일은 많이 하고 말은 적게 해라. 넌 힘은 셌지만 일을 한 게 질이 차하다, 차해. 지난해 가을에 옥수수를 실어들일 때 송선의 수레를 몰다가 희뜩 번져 하마터면 암소를 죽일 번 하지 않았니? 너를 팔아도 그 암소 한 마리를 사지 못한다.” 그 말에 덕돌은 억이 막혀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상순은 덕돌을 쏘아보며 욕했다. “이놈 새끼, 힘만 세면 왕이 되겠니? 허 대장 말이 옳다. 넌 힘은 세지만 아직 농사일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 잔말 말고 농사일이나 잘 배워라.” 그제야 덕돌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때 둘째누나 은숙마저 덕돌을 나무랐다. “그게 무슨 태도냐? 넌 확실히 건성건성 일하는 게 보인다. 허 대장이 공수를 얼마 주면 얼마 가질 것이지. 무슨 말이 그렇게 많니?” (남이 말해도 모르겠는데 자기 누나까지 그렇게 말하다니?) 덕돌은 어이없어 더 말이 나가지 않았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코 등으로 저도 몰래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리었다. 그는 뜨거운 눈물을 손등을 씻으면서 회의실문을 박차고 바깥으로 나와 버렸다. “허 대장, 어디 두고 봅시다. 당신 아들 허춘이 이제 농촌에 돌아와도 그렇게 말하겠습니까? 뭐? 뼈대를 아껴 건성건성 일했다고? 원, 사람이 억울해서 어떻게 살아?” 덕돌은 허대장의 아들 허춘과 앞뒤 집에서 사는 딱 친구였다. 그는 두 살 지하인 허춘을 친동생처럼 아끼고 역성을 들어주었다. 한번은 덕돌이 낮잠을 자는데 계수동의 애에게 얻어맞고 허춘이 찾아왔다. “형님, 계수동의 호일과 붙었는데 맞았소. 형님, 한번 혼내주오.” “뭐라고? 누가 감히 동생을 건드려?” 덕돌은 벌떡 일어났다. “가서 그 놈 새끼를 꼬여 저기 태평강 가에 데리고 오너라. ” 덕돌은 그림자차럼 붙어 다니던 동생 허춘을 때렸다는 말에 승치 해주려고 나섰던 것이다. 덕돌은 함께 나가다가 주춤 멈춰서 머리를 숙이고 뭔가 궁리하더니 “너 먼저 가라. 내 목욕하는 척 하면서 기다렸다가 갈게. 그 새끼를 데리고 태평강 가에 가서 붙어 싸우는 척해라. 내 뒤 따라 가서 그 놈 새끼를 없애치우겠다.” 형에게서 힘을 얻은 허춘은 주먹을 으스러지게 쥐고 씩씨거리며 마을 서남쪽에 있는 태평강 언제를 가로 막아서 호일이 5.7(함흥)중학교로 오기를 기다렸다. 덕돌은 뒤에서 스적스적 태평강에 가서 목욕하는 척 하면서 언제 쪽을 노려보았다. 이윽고 오후 한시가 가까올 때 저쪽에서 허춘이 호일을 꾀여 이쪽으로 오는 것이 보였다. 그들이 강둑 위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지나갈 때에도 덕돌은 속으로 어디 혼 나봐라 하면서도 능청스레 손으로 강물을 퍼서 털이 부숭부숭 난 가슴에 끼얹으면서 못 본척했다. 그들이 떠나간 지 반분도 안 돼 덕돌은 대돌 물에서 부랴부랴 나가 옷을 주섬주섬 주어 입으면서 호일의 뒤통수를 노려보았다. 덕돌이 뒤따라 가보니 허춘은 호일과 맞붙어 싸우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뚱뚱한 허춘은 호일을 몰아세우며 드센 공격을 퍼부었다. 허나 호일의 몸놀림이 어찌나 날랜지 허춘은 점점 이리저리 몸을 피하다가도 반격을 가했다. 호일은 공격을 들이대다가도 날래게 피하고 피하다가도 주먹질에 발길질까지 해댔다. 허춘은 힘이 세고 주먹질도 잘 했지만 몸놀림이 호일을 따르지 못해 얻어맞기 시작했다. 자칫하면 허춘이 얻어맞아 쓰러질 수도 있었다. 덕돌은 황급히 나가면서 고함부터 쳤다. “야, 누구 앞에서 감히 주먹질이냐?” 호일은 사자와도 같이 노호하는 덕돌을 보더니 주춤 멈춰서며 주먹을 내리웠다. “형님…” 어느 결에 덕돌은 주먹을 날려 호일의 턱주가리를 턱 쳤다. “엇!” 덕돌은 호일의 멱살을 틀어쥐더니 헤딩을 연속 들이댔다. 한번 헤딩에 호일은 얼이 빠지고 두 번째 헤딩에 호일은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헌데 이게 뭐야? 호일은 쓰러져 눈알이 뒤로 마구 뒤집히더니 숨도 바로 쉬지 못했다. 깜짝 놀란 덕돌은 “허춘아, 모자에 물을 담아도 쳐라!” 하고 소리쳤다. 저쪽에서 구경하던 양훈과 득만도 달려와 모자에 호일의 얼굴에 물을 쳤지만 정신을 차리지 모하는 것이었다. 덕돌은 살인이라도 내지 않았는가 겁을 집어먹었다. 그는 황급히 허춘을 보고 “야, 네가 호일을 업어 너네 집에 가져다 머리에 장이랑 붙여주고 간장물이라도 타서 먹여라!” 라고 했다. 두 살 지하인 허춘도 겁을 집어먹고 덕돌이 시킨 대로 했다. 허춘이 호일을 업고 떠나가자 덕돌은 과수원으로 가는 척 하다가 아무도 따라오지 않자 부랴부랴 패용천산 쪽으로 도망쳤다. (만약 호일이 죽으면 어쩌지? 파출소에 가서 자수할까? 아니야, 자수해도 총살을 면치 못할 거야. 그럼 어떡하지?) 순간 피뜩 장씨 모녀간을 업신여긴 부랑배를 혼줄 내주려다가 때려죽인 로지심이 핍박에 의해 양산박에 오른 일이 피뜩 떠올랐다. (개새끼들, 만약 살인죄를 쓰게 되면 도망쳐버리자. 교하로 달아날까? 그래 믿을 게 교하 큰누나와 셋째누나 밖에 있니?) 허나 덕돌은 인차 생각을 바꿨다. (안 돼, 누나한테 연루되게 해선 안 된다. 그럼 어디로 달아나? 그는 겹겹이 늘어선 산 등성이들을 둘러보았다. 장백산 원시림에 숨어 원숭이처럼 살더라도 살아야 한다. 우리 집에는 내가 외동아들인데 내가 죽으면 아버지와 어머니는 어쩌겠니?) 덕돌은 이쯤 마음을 먹자 손에 쇠붙이 하나 없는데 생각이 미쳤다. (그래 강도질을 하면서 살자 해도 비수가 있어야지.) 덕돌은 패용천산 벼랑 위에 납작 엎드려 한 1리 떨어진 자기 뒤 집 허춘이네 집의 동정을 살폈다. “제발 호일이가 잘못되지 말아야겠는데.” 덕돌은 손에 땀을 그러쥐고 엎디어 중얼거리며 속을 바질바질 태웠다. 허나 두식경이나 눈 뿌리 빠지게 동정을 살폈지만 허춘이네 집에서는 나왔다 들어갔다 하는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웬 일일까? 혹시 호일이 죽었을까? 아니면 기적적으로 살아났을까?) 덕돌은 그제야 너무 세게 헤딩한 것을 후회했다. 허나 친형제나 다름없는 허춘의 역성을 들어 싸운 건 하나도 후회하지 않았다. “수호전”을 읽으면서 무송이나 로지심, 이규를 비롯한 양산박 호한들이 의리를 위해 재물을 아끼지 않고 목숨까지 바쳐 싸운 이야기를 많이 본 후 인생의 좌우명을 새롭게 정한 그였다. 덕돌은 슬금슬금 산에서 내려 옥수수 밭과 수수 밭을 꿰질러 가 허춘 네 집 구새 목에까지 접근해가 집안의 동정을 살폈다. (그런데 이게 뭐야?) 윗방에서 호일의 목소리가 들리었다. “허춘아, 너 어찌 이럴 수 있니? 나하고 싸워 안 되니 어쩜 도깨비 같은 덕돌을 불러다 나를 치니?” (살았구나. 호일이 죽지 않았구나.) 덕돌은 기뻤다. 순간 먹었던 모진 마음의 탕개가 풀리면서 구새 목에 스르르 물앉았다. 이윽고 덕돌은 구새 목에서 뒤로 슬금슬금 물러섰다. 그는 허춘 네 집 서쪽에서 술렁대는 수수 밭으로 슬금슬금 숨어들었다. “뻐꾹, 뻐꾹, 뻑뻑꾹.” 허춘과 늘 써온 호출암호를 보냈다. 이윽고 허춘이 부랴부랴 수수 밭으로 들어와 두리번거렸다. 덕돌은 “여기 있다. 여기!” 하고 소리치며 손을 저었다. 허춘은  달아 왔다. “형님, 아무 일도 없소.” 덕돌은 허춘의 두 손을 맞잡고 사위를 둘러 보고나서 나직이 물었다. “그래 언제 정신을 차렸니?” 허춘은 “우리 집에 업어온 후 우리 엄마하고 내 형님 말처럼 된장도 머리에 붙여주고 간장 물도 타서 먹였소. 그랬더니 한참 있다가 정신을 차리지 않겠소. 이젠 일없소. 근심하지 마오.”라고 했다. 덕돌은 그래도 혹시나 해 수수밭에 숨어 있으면서 동정을 살피다가 호일이 흰 천을 머리에 감은 채 허춘 네 집에서 나가는 것을 보고서야 안도의 숨을 쉬었다. 허나 사달이 났다. 저녁에 호일이네 엄마가 덕돌의 집에 찾아와 구들바닥을 치면서 자기 아들을 때려 눕혔는데 치료비를 내라고 야단쳤다. “치료비를 내지 않으면 놔두는가 보자! 집을 팔아서라도 내라.” 덕돌은 “내 잘못했소. 치료비를 내겠소.”라고 했다. 그러자 호일의 엄마는 “집을 팔아서 내라.”라고 했다. “한 백원 내면 안 됩니까?”라고 했다. “어림도 없다. 이 집을 팔면 한 5백원 받겠지. 5백원을 내라.” “무슨 치료가 그렇게 비싸답니까?” 호일이 엄마가 한바탕 야단치고 가자 상순은 덕돌의 귀 쌈을 찰싹 갈겼다. “이 뜨개쇠처럼 우둔한 놈 새끼야. 사람을 어떻게 떴으면 정신을 잃게 만들었니? 네놈 새끼 혼자 벌어서 치료비를 내라.” 덕돌은 얼얼한 뺨을 매만지면서 할 말이 없어 바깥으로 나가버렸다. 호일의 엄마가 그러는 건 이해됐다. 자기 아들이 맞아 정신까지 잃었으니까. 허나 덕돌은 허춘의 엄마의 배신행실은 용서할 수 없었다. 그녀는 호일이네가 치료비를 내라고 하자 온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이런 여론을 조성했던 것이다. “우리 허춘은 싸울줄 모르오. 호일에게 맞으면 맞았지 그렇게 정신 잃게 때릴 애가 아니오. 다 덕돌이 뜨개쇠처럼 떠서 정신 잃었다니까. 우리 집에서 무슨 치료비를 물겠소.” 빚을 진 놈은 살려줘도 정을 버린 놈은 살려 줄 수 없었다. 덕돌은 배신감을 느끼며 다시는 의리심도 양심도 없는 허춘의 어머니와 같은 집 아들의 역성을 들지 않으리라고 마음먹었다. 덕돌은 허춘을 도와주고 혼자 치료비를 껴안게 됐다. 그리하여 첫해에 농촌에 돌아와 농사일을 해 번 돈 125원을 손목시계를 사자던 돈을 주기로 했다. 하여 시내 공안국에서 일하는 5촌 이모부 강운룡이네 집에 가져다 맡긴 걸 찾아와 배상하지 않으면 안됐다. 덕돌은 손목시계를 사자던 돈을 찾으러 이모네 집으로 갔다. 작은 호수 옆으로 해 고급관원들의 집이 즐비하게 늘어섰고 그 옆으로 해 공안국 형사과에서 일하는 강운룡의 집이 있었다. 강운룡은 원래 형사과의 수사 일군으로 있다가 반란 파 두목 김용만이 공안국 국장으로 온 후 피해를 입어 교통과에 전근해 교통민경으로 일했다. 허나 시내에서 형사사건이 너무 많이 발생해 황종연과 같은 형사수사에 까막눈인 파출소 소장이나 믿고서는 사건을 해명할 수 없었던 것이다. 김용만은 별 수 없어 실무파 수사능수 강운룡을 형사과 과장으로 임명하지 않으면 안됐다. 덕돌이 집 문을 떼고 들어서자 열대여섯 살 되는 향화와 열서너 살 되는 강철이가 반갑게 맞아주었다. “오빠-” “형님이 왔구나.” 덕돌은 동생네를 한 아름에 꽉 껴안고 기뻐 싱글벙글 웃었다. 번마다 반도체라디오 부속품을 사러 시내에 올 때마다 그는 애들과 한바탕 뛰놀아 꽤나 정이 붙었던 것이다. 이모 최순옥은 덕돌이 손목시계를 사자던 돈을 불시에 찾아가려고 하자 이상해 했다. “집에 무슨 일이 생겼니?” 이모 최순옥은 점심상을 차려 덕돌을 극진히 대하면서 “불시에 이 돈을 찾아 뭘 하겠니?” 하고 물으며 쌍까풀눈에 이상한 눈빛이 반짝였다. “내가 일을 쳤습니다.” 덕돌은 머리를 숙이며 점심 숟가락을 들었다. 그에게서 사건의 자초지종을 다 들은 강운룡은 술잔을 들어 덕돌에게 권했다. “쳇, 근심하지 말라. 사내들이란 싸울 때도 있지 뭐. 그래도 나는 공안국 국장을 한 적이 있는 너네 아버지와 말이 통한다. 이전에 내가 약혼해서 너 이모를 데리고 너 네 집에 놀러 갔다. 초가집에 죽물도 겨우 마시면서도 네 엄마와 아버지는 나를 하나라도 더 대접하려고 맴돌던 모습이 지금도 눈앞에 선하다. 너도 아마 아버지를 닮은 모양이구나. 꽤나 힘도 쓰는 모양이지?”라고 했다. 그러나 순옥 이모는 “남을 때려 치료비를 물어야 되는데 싸우라고 부추기오? 쯧쯧쯧.”라고 남편한테 눈을 흘기었다. 그러자 강운룡은 “치료비는 무슨 치료비 그렇게 많이 든다니? 달라는 대로 다 줄 필요 없다. 세상에 법도 없다니?”하고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순옥 이모는 “그래도 남을 정신 잃게 때렸으니 얼마간이라도 줘야 입을 막지. 괜히 부스럼을 긁어서 혹을 만들지 말라.”고 했다. 강운룡은 “물론 치안 죄를 물으면 15일 구류될 수도 있다. 심중히 고려하는 건 옳은 거 같다. 영양이나 보충하라고 한 20원 주면 될 거 같다. 만약 무슨 일이 있으면 내게 알려라. 파출소에서도 마음대로 치료비를 안기지 못한다.” 덕돌은 이모부의 말에 힘을 입어 치료비로 20원만 찾고 100원을 주고 상해표 손목시계를 사 차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 다음번에 호일의 어머니가 와서 야단치자 치료비로 20원을 주었다. “호일을 때려놔서 잘 못했습니다. 미안합니다.” 호일의 엄마가 5원짜리 돈 넉 장을 쥐어뿌리며 야단쳤다. “우리 귀한 아들을 때려 정신을 잃게 하고서도 요거 밖에 안 주고 어디 보자. 내 너를 망치로 쳐서 정신 잃게 하고 돈 20원을 줄게.” “아무 소리나 하지 말고 줄 때 가지고 순순히 가시오. 뭐나 법이 있지 달라는 대로 다 줄 거 같습니까?” 덕돌은 돈 넉 장을 주어 호일의 어머니 호주머니에 넣어 주면서 희죽이 웃었다. “누가 웃자니? 누굴 얼리려고?” 그러면서도 호일의 엄마는 매 값을 빼서 던지지는 않았다. 덕돌은 아무 일도 없은 듯이 바깥으로 나가버렸다. 잔등에서 호일의 엄마 욕설이 들렸다. 허나 단돈 20원 받아서인지 욕하는 소리가 이전보다 낮아진 감이 들었다. (저래서 배속의 애도 돈을 보면 손을 내민다고 하는 모양이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호일은 황승연의 6촌 동생이었던 것이다. 황승연은 뒤에서 학교 혁명위원회 명의와 대대 혁명위원회 명의로 덕돌을 치안 죄로 파출소에 고소했고 생산대에서 민병들을 동원해 투쟁하라고 지시했다. 공사 혁명위원회 주임 겸 파출소 소장으로 있는 황종연은 민경들을 파견해 덕돌을 잡아다 구류소에 치안구류하려고 들었다. 눈치 챈 덕돌은 아무에게도 온다간다는 말도 없이 마을에서 사라져버렸다. 황급해난 상순은 공안국의 사촌동서 강운룡과 부국장 김창남한테 가서 자초지종을 말하고 한번만 용서해달라고 통사정을 들이댔다. 그 덕에 파출소에서 감히 덕돌을 잡자고 날뛰지 못했다. 생산 대에서도 처음에는 집체호 애들이 비판하려다가 정치대장에 노지부 서기인 상순의 얼굴을 봐서 그만두게 됐던 것이다. 이전에도 상순은 상지민과 수호 그리고 억울하게 위안부, “기생”, “반역자”로 억울하게 몰린 마반산집 뽕녀 할머니 등을 감옥에서 꺼낸 적이 있었다… (제 아들이 맞는다고 역성을 들어 줬는데 배은망덕한 허 대장은 대채평공 할 때 날 공수를 적게 줘? 뭐 뼈대를 아껴 건성건성 일한다고? 어디 네놈의 뼈다귀는 얼마나 든든한가 보자.) 덕돌은 멜대를 메고 태평강 가에 가자마자 어느 돌을 함께 메면 허동원 대장을 혼내겠는가 둘러보았다. 그때 떡돌 같은 너럭바위돌이 눈에 피뜩 띠었다. (그렇지, 저걸 메자.) 덕돌이 이를 갈며 별렀지만 허동원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대장이노라고 우쭐거려?” (지난겨울에 둼을 끌 때도 그렇지. 내가 얻어놓은 남포로 둼 무지를 폭파해 껐는데. 뭘 뼈대를 아껴서 남포질을 했다고? 내 말이 틀린 게 뭔가? 둼이 꽝꽝 언 겨울에 둼을 끄지 말고 봄에 녹으면 수레에 실어내가면 얼마나 쉬운가? 온 동삼 할 일이 없어 언 둼을 끈단 말인가? 공수나 올렸지. 그 말을 했다고 나를 보고 뭐, 개뿔도 모르면서 뭐나 아는 척 한다고?) 덕돌은 생각할수록 밸이 났다. (내가 둼을 끄다가 쉼 시간에 책을 본 게 또 무슨 잘못이 있단 말인가? 뭐 일하기 싫어한다지? 또 농촌에 뿌리박고 빈농들의 재교육을 착실히 받으려 하지 않고 농촌을 벗어날 궁리만 한다고? 그럼 어떻단 말인가? 남보다 두 배씩이나 둼을 껐는데 무슨 할 말이 있단 말인가? 쳇, 쓸데없는 일을 온 동삼 하기보다 어떤가? 대채전이고 뭐고 하면서 평평한 논밭을 온 동삼 꺼서 쓸데없는 홈채기를 만들어 다락 밭으로 만드는 멍청이들 같으니. 정말 웃긴다. 대대 혁명위원회 흥수 영감의 말이면 다 꾸벅꾸벅 듣는 멍청이 같은 게. 꺼 놓은 언 논두렁 토막도 남들이 하날 멜 때 난 네 개씩이나 멨어. 그래도 내가 뼈대를 아낀다고? ‘4인무리’를 짓 부신 지도 반년이 다 돼가건만 아직도 문화대혁명의 여독이 있단 말인가? 이 치보와 짜고 들어 송선 아줌마를 아직도 투쟁하면서 여자 몸으로 떡함지 같은 돌을 메라고? 힘이 세면 오늘 나와 함께 메 보잔 말이오.) 덕돌은 사실 보름 전에 송선 아줌마 멜대를 빼앗아 쥐고 대신 메겠다고 나섰던 것이다. 이때 저쪽에서 허동원 생산대장이랑 정치대장 상순이랑 송선 아줌마랑 하나 둘 태평강으로 나오고 있었다. 허동원 대장은 오자마자 덕돌을 보고 “오라, 돌을 계속 메자.”라고 했다. 허동원도 덕돌의 기를 꺾어놓지 않으면 생산대에서 기를 펴지 못할 것을 알았던 것이다. 헌데 연 며칠 돌을 메 날랐는데 덕돌은 밤만 자고 나면 맥이 나는지 끄떡하지도 않았다. 허나 허 대장의 얼굴은 점점 부어오르고 눈에는 피가 가득 지기 시작했다. 허동원이 쇠줄그물을 쥐고 다가오자 덕돌은 멜대와 쇠줄그물을 들고 제일 큰 떡함지 같은 바위 돌 앞으로 갔다. 허동원은 200 키로는 실히 될 바위 돌을 보자 뒤로 주춤 물러섰다. 상순은 덕돌의 속심을 빤히 꿰뚫어보고 말리었다. “야, 그 큰 돌을 어떻게 가파른 발판으로 저 높은 언제 위로 나른다고 그러니? 그 돌로 언제 기초를 쌓으면 된다. 이쪽에 숱한 돌을 두고 하필이면 그 돌이냐?” 송선도 저쪽에서 땀을 그러쥐고 긴장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저 큰 돌을 어떻게 멘다고?) 그러나 허동원도 자존심을 꺾을 수 없었다. “괜찮소. 언제를 든든하게 쌓자면 이런 큰 돌을 날라다 쌓아야 하오.” 허동원이 쇠줄그물을 그 바위 돌에 들이댔다. 그러자 덕돌은 그 큰 바위 돌 한쪽을 혼자 움쭉 들어 굴려 쇠줄그물 위에 담았다. “야, 로지심이요.” 덕돌이 멜대를 메면서 볼라니 허동원의 얼굴이 퉁퉁 붓기고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런데 바위 돌을 담은 끈을 슬쩍 덕돌이 쪽으로 밀어놓는 것이었다. 허나 그까지 것 영상해 못 본 척하고 덕돌은 어깨를 안쪽으로 들이대고 떠멨다. 허동원도 젊어서는 꽤나 힘을 쓰는 뚱보여서 힘겨운 대로 멜대를 떠멨다. 그 큰 바위돌이 움쭉 들리었다. 숱한 사원들이 모두 그들 둘이 푹푹 빠지는 모래를 밟으면서 언제로 걸어 나가는 것을 구경했다. 덕돌은 넓은 가슴을 내밀고 허리를 쭉 펴고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허나 허동원은 점점 허리를 굽히면서 비틀거리더니 숨소리마저 힘겨워져갔다. 가파른 언제에 놓은 발판을 밟고 올라서자 허동원은 허리를 펴지도 못하고 한발자국을 겨우 내딛였다. 허나 덕돌은 평지 걷듯이 한발, 두발 가볍게 떼였다. 꽈당! 요란한 소리와 함께 미처 따라 걷지 못한 허동원은 비틀거리다가 발판 아래로 뚝 떨어졌다. 덕돌도 발판 아래로 떨어졌다. 허동원이 떨어지는 바람에 무거운 바위돌이 평형을 잡지 못해서 묻어 떨어졌다. 그런데 먼저 밑에 떨어진 허동원은 커다란 바위 돌에 슬쩍 깔리고 말았다. 덕돌과 상순이 황급히 바위 돌을 치우고 보니 허동원은 인사불성이 됐는데 입귀와 콧구멍에서 뻘건 피가 줄줄 흘렀다. “도깨비야, 사람을 죽이겠다. 메지 말라는데 기어이 메더니. 이 걸 어쩌니?” 그러나 덕돌은 “허 대장도 메자고 해 멨지? 내 억지로 멨습니까? 힘이 없으면 달려들지 말거지. 누가 메자고 해서 멨습니까?”라고 두덜거렸다. (당신 뼈대도 그저 그렇구먼. 어쩌지 못하면 덤벼나 들지 말 거지. 내 뼈대를 아껴 어찌 고? 흥!) 상순은 덕돌의 귀쌈을 찰싹 갈기면서 호통 쳤다. “빨리 공사 병원에 싣고 가라! 사람을 죽이겠다.” 덕돌은 멜대를 뽑아 쥐고 자리를 떴다. “손잡이트랙터를 몰 줄 아는 성욱이나 보내시오. 난 몰줄 모릅니다.” 상순은 노기충천해 소리를 버럭 쳤다. “너도 사람새끼냐? 어서 성욱과 함께 공사병원에 모셔가라!” 누구 명이라고 어길 수 있겠는가? 그날 덕돌은 성욱과 함께 인사불성이 된 허동원을 싣고 진수해 공사 병원으로 달려갔다. 허동원은 검사를 거쳐 요추간반탈출에 발목뼈 골절이란 진단을 받았다. 그런데 몇 시간 후 허리가 아파 덕돌도 검사해보니 요추간반탈출이 왔던 것이다. 분명 허동원이 먼저 떨어지는 바람에 묻어 떨어지면서 허리를 좀 상했던 것이다. 허나 20세 청년이어서 용용 솟구치는 힘에 의해 덕돌은 허리통증을 용케도 참아냈다. 덕돌이 허리를 쓰지 못하는 허동원을 공사 병원에 실어가고 집으로 돌아오자 상순이 노발대발 하면서 욕지거리를 했다. “이 놈 새끼, 작작 원수를 갚아라. 정 그러다간 이제 병진처럼 돼버리지 않는가 봐라. 병진도 너처럼 돌아가면서 쩍하면 원수를 맺고 보복하려고 탈곡장 벼 낟가리에 불을 지르고 감옥에 들어갔다.” 덕돌은 아버지 무서운 눈길을 피해 머리를 숙이었다. 상순은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잘 들어둬라. 힘이 세면 황소가 왕이 될 거 같니? 항우나 장비 같은 힘장사도 왕이 되지 못했다. 네 따위가 누굴 힘으로 꺾으려고 드니? 힘이 나 쓸 데 없으면 일성저수지에 가서 흙짐이나 메라.” 덕돌은 차라리 좋아했다. “가라면 못 갈 거 같습니까? 원래 이 시시한 생산 대에 쓸데없는 말을 들으면서 일하지 못하겠습니다.” 덕돌은 생산 대에 있기조차 싫었던 차 잘됐다고 생각했다. 덕돌은 넷째매형 학순이 다니는 공사 목재기업에 들어 갈 까고 그간 몇 번이고 찾아 갔다. 이태 전에 결혼한 은자의 신랑 허학순은 아랫마을 계수동에 있었는데 키가 자그마했지만 원체 약삭빠르고 일처리에 능했다. 그리하여 두루 알아보고 전기기구직장에서 직공을 모집할 가능성이 많다고 했다. 하여 덕돌은 전기기구직장에서 변압기를 조립하고 수리한다는 말을 듣고 서점에 가서 전기기구 조립과 수리에 관한 서적을 사다가 골똘히 자습했다. 원래 그는 반도체라디오도 조립한 적이 있어 전기와 무선전자에 일정한 기초가 있어 인차 변압기와 발전기, 발동기 원리와 수리, 조립을 일정하게 장악했다. 허나 공사 기업으로 들어가려고 해도 재간만 있어도 안 되고 생산 대에서 추천해야 됐다. 허나 허동원 생산 대장이 한사코 반대하는데다가 청렴하고 대공 무사한 정치대장인 상순이 자기 아들을 뒷문거래를 해 공사 기업에 보내 쓸데없는 말을 들을까봐 동의하지 않은 바람에 갈수 없게 됐던 것이다. (아버지는 대공무사한 틀만 차리면서 자기 아들을 생각할 줄 몰라. 어쩜 생산대 회계도 성욱에게 맡기고 손잡이트랙터 운전수도 성욱이야?) 덕돌은 슬그머니 좋은 일은 모두 성욱한테 맡기는 아버지가 원망스러웠다. 소몰이를 시키지 않으면 둼을 꺼 밭에 내는 일을 시켰고 언제를 쌓고 기음을 매고 돼지죽을 먹이라고 하지 않으면 이번에는 일성저수지에 가서 흙짐을 메라고 했다. 그때 종복도 입대한지 8개 월 만에 입당했다. 하여 지난 해 겨울에 덕돌은 군부대에 입대해 입당이나 하고 돌아오고 싶었다. 그런데 신체검사에서 다른 것은 몽땅 합격이었지만 색맹 때문에 물거품으로 되고 말았다. 행여나 해 덕돌은 공사당위 선전위원으로 있는 성환을 찾아갔다. 허나 성환 형님은 안경알을 춰올리면서 말리었다. “부대에 가서 뭘 하니? 넌 외동아들인데 부대에 갔다가 일이 생기면 네 부모는 어쩌니?” 덕돌은 지청구를 들이댔다. “형님, 지금 부대에 가지 않고 농촌에서 어떻게 전도를 개척할 수 있소? 난 생산대 손잡이 트랙터마저 몰 자격을 주지 않는데.” 허나 성환 형님은 극구 반대했다. “넌 아직 세상이 돌아가는 걸 모르는구나. ‘4인무리’가 분쇄된 후 세상이 급격히 변화하고 있다. 화국봉을 위수로 하는 당 중앙에서는 지식인들을 중시하기 시작했다. 이제 대학입학 제도도 바뀌어 가능하게 시험을 쳐 대학에 갈 가능성이 있다. 그까짓 손잡이트랙터 운전수 따위가 뭐 그리 대단하다고 부러워하니? 생산대 도서관리원이나 신문사 통신원이나 하면서 글이나 쓰고 책이나 많이 봐둬라. 넌 장차 문화공작을 할 사람이다.” 덕돌은 성환 형님의 말이라면 열에서 아홉은 다 들어왔던 것이다. 허나 강청과 장춘교, 요문원, 왕홍문을 위수로 하는 “4인무리”를 짓 부셨다고 해 세상이 바뀔 수 있다는 것에는 믿어지지 않았다. 눈이 풀풀 흩날리는 날에 성환 형님은 덕돌을 데리고 공사 문화소에 가서 철색얼굴에 눈 섭이 짙은 마흔 고개 오른 점잖은 분을 소개해주었다. “이분은 우리 공사 문화 소 소장 김재군 선생이다.” 덕돌은 허리를 굽혀 인사하면서 김재군 선생이 내민 손을 잡았다. “이분에게서 문학창작을 배워라. 이분은 특히 옛말을 잘 정리해 소문났다. 구수한 옛말을 많이 듣고 정리하노라면 너도 문학창작을 형상적으로 할 수 있을 거야.” 성환에게서 덕돌의 글짓기형편을 들은 김재군 선생은 우렁우렁한 말소리로 소탈하게 말했다. “싹수가 있구먼. 소식도 써야지만 한 차원 높은 민담정리도 하고 소설이랑 시랑 써야지. 대담하게 쓰오. 자꾸 써야 늘지. 안 그럼 두부모만한 소식 몇 편 방송이나 신문에 낸데 자만하면 제자리에서 답보하게 되오. 작가로 되려면 청년 때부터 목표가 있고 계획이 있게 살아야 하오. 놀 거 다 놀고 잘 잠을 다 자고서야 언제 글을 쓰겠소?” 덕돌은 김재군 선생과 갈라져 문화 소 문을 나서면서 얼굴이 뜨거워났다. 정말 소식 몇 편을 내고 이 골 안에서 내노라고 자만하고 뽐낸 자기가 너무나도 부끄러웠던 것이다. 성환 형님은 이에 그치지 않았다. 그때 출판사 편집들과 일보사 기자들도 농촌에 점을 잡고 일하면서 농촌사업을 하고 있었다. 출판사 편집들은 농촌 번역소조와 도시 번역소조를 내오고 농민과 노동자 번역일군들을 양성하고 있었다. 성환은 농촌 번역소조 조장을 맡고 여러가지 정치문교도서를 번역해 출판했다. 그는 그 후부터 공사 당위 선전위원 사업에 그렇게 바쁘면서도 시간만 나면 덕돌에게 번역이론을 전수하고 한문원고를 주어 번역공부를 시켰다. 성환은 또 일보사 농촌소조 조장 박하림 선생과 기자 허길룡 선생, 현 주재기자 소 기자 최찬 선생 등에게 덕돌을 소개해 주었고 일보사와 방송국에서 연 통신원양성반에도 참가시켜 기자수업을 시켰다. 덕돌은 박하림 등 기자들의 지도를 직접 받으면서 소식과 통신 쓰기를 높은 차원에서 익혀나갔고 여러 편의 소식과 통신을 써서 신문과 연변인민방송국 방송프로에 냈다. 허나 공사 혁명위원회 주임 황종연은 백방으로 성환에게 압력을 가해 덕돌이 소식을 써서 내는 것을 저애했다. 공사 혁명위원회의 비준 없이는 소식이랑 통신이랑 마음대로 내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덕돌은 기자들 가르침을 받은 뉴스 안으로 뉴스소재를 발견해도 뉴스를 쓰지 못하고 말았다. 진짜 뉴스 집필재간이 있어도 쓰지 못하게 덕돌의 두 손을 쇠사슬로 꽁꽁 동여 매놓았던 것이다. 덕돌은 소식을 쓰지 못하고 점차 옛말을 정리하거나 시를 써서 김재군 소장이 꾸리는 “진수해 문예”란 프린트소책자에 냈다. 정치에 관계되지 않는 문예창작에 집념하니 황종연이랑 간섭하지 못해 오히려 편안하고 자유로워 좋았던 것이다. 헌데 후에 알고 보니 성환의 동생이자 덕돌의 동창생인 철군이가 입대해 부대로 가게 된다고 하지 않겠는가? 허나 “4인무리”가 분쇄된 후 점차 정치열이 식어가는 시대의 변화를 감지하지 못한 덕돌은 그래도 부대를 가서 1년 만에 갑작스레 입당해 정치토대를 닦은 후 글을 써도 늦을 것 같지 않았다. (그래, 글이야 한뉘 써야 될 게 아닌가? 정치토대를 닦는 거야 말로 급선무야. 아직도 글쎄 입단도 못했으니까. 언제 입당하고 대학에 추천받아 가는가?) 덕돌은 이렇게 생각하자 공사 무장부 간사로 일하는 성환의 둘째 동생 철주를 찾아갔다. 무장부 사무실에서는 철주 형님 외에도 리인학 부장이 있었다. 덕돌은 난로 안에서 석탄덩이가 탕탕 튀는 소리를 들으면서 리인학 부장의 눈치를 흘금흘금 보면서 입이 무거워 열지 못했다. 눈치 빠른 리인학 부장은 훌쩍 자리를 비웠다. 그제야 덕돌은 철주 형님의 날카로운 콧날을 보면서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형님, 날 군부대에 보내주오.” 철주 형님은 두툼한 신체검사서 무지를 들춰 덕돌의 신체검사서를 여겨보더니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네가 어떻게 가니? 색맹이구나.” “철군인 고혈압이라도 부대에 보내면서 나를 어째 도와주지 못하오? 색맹이란 걸 슬쩍 고치면 안 되오?” 덕돌이 지청구를 들이대자 철주는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딱 잡아뗐다. “안 된다. 내 어떻게 그걸 고치니?” “한번 좀 살려주오. 한평생 그 은공을 잊지 않을게.” “야, 안 돼. 도와주고 싶지만 입대 신체검사서는 정치심사보다 더 엄하다. 자칫하면 내 무장부 간사 직을 떼울 수도 있다.”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더 청을 들 수 없는 노릇이었다. 형의 전도를 망치고 자기 앞길을 열 수는 없었다. 이 일 저일 생각하니 덕돌은 구름이 꽉 낀 하늘이 언제 열리겠는가고 갈망했다. 앞길이 막막하기만 했다. 덕돌은 이불 짐을 둘러메고 일성저수지 공정으로 떠났다. 물론 이불 속에는 동곽 선생처럼 항상 놓을 수 없는 책을 두툼히 감춰 넣었다. (차라리 아무런 인적관계 없는 수리공정에 가서 입단하고 입당하면 좀 좋아?) 사실 생산대 안에서는 서로 먼저 입당하고 간부로 되려고 쟁탈과 질투가 심해 입단하기도 힘든 세월이었다. 아무런 정치관계가 없는 저수지공지에 가서 입단하기는 별로 쉬워보였다. 그는 생산대 도서관리원을 버리고 아버지 말씀대로 저수지 공지에 떠나가는 조금 위안됐다. 생산 대 단 지부 서기를 하는 순희가 어떻게 소문을 듣고 조개덕 마을 서쪽 태평강 가에까지 덕돌을 뒤쫓아 와 말리었다. “얘, 무슨 궁리 하니? 이번에 널 입단적극분자로 정했는데 저수지로 가면 어떻게 하니?” “네나 입당하고 대학에 추천받아 가라.” 덕돌은 심드렁해 이불 짐을 메고 발길을 떼려고 했다. 순희는 이불 짐을 잡아 홱 나꿔챘다. “야, 그게 무슨 말이냐? 난 널 진심으로 생각해 하는 말이다.” “네 진심은 나도 안다. 남들의 눈이 무섭지 않니? 괜히 나하고 좋아한다는 말을 듣겠다.” “들으면 뭐라니? 우린 이젠 애들도 아닌데.” 덕돌은 순희의 복숭아얼굴이 발갛게 상기된 것을 곁눈질 해보았다. “진정은 고맙다. 나도 살길을 찾아 가니 근심하지 말고 생산대 일이나 잘 해라.” 이때 허춘이 허둥지둥 달려왔다. “형님, 우리 엄마 일이 노여워 그러오? 난 형님의 은정을 잊지 않소. 형님은 나한테 무예와 글짓기를 가르쳐주었소. 가지 마오. 저수지 공지에 가서 어떻게 고생하겠소?” 덕돌은 날따라 몰라보게 된 허춘을 묵묵히 바라보며 머리를 끄덕였다. 사실 덕돌은 마을에서 자기를 따르는 양훈과 허춘, 득만한테 무예도 가르치고 글도 배워주어 학교에서 머리를 들고 공부하게 했던 것이다. 그리고 사내대장부로 되는 의리 같은 도리를 가르쳐주었다. 하여 애들은 맏형처럼 믿고 따랐던 것이다. 허나 허춘의 엄마 세치 혀끝으로 해 덕돌의 가슴에 상처를 입힌 것만은 사실이었다. 이때 저쪽에서 생산대 민병패 패장을 하는 동림과 생산대 부녀 대장을 하는 정규상 교수의 딸 순임도 소문을 듣고 밭으로 나가다가 뛰어왔다. 순임은 덕돌보다 두 살이나 이상인 누나 격으로서 오누이처럼 지내던 덕돌이공지로 간다고 하자 섭섭해 뛰어왔던 것이다. “얘, 왜 호박을 쓰고 돼지 굴로 들어가니?” 동림도 말렸다. “가지 말라. 네가 가면 내 무슨 멋에 조개덕에 있겠니?” 허나 덕돌의 굳은 마음을 움직일 수 없었다. 뒤이어 집체호의 조영희도 뛰어왔다. 조영희는 지난해 덕돌이 처음 통신을 배우면서 취재해 방송에 낸 뉴스인물이었다. 그녀를 모델로 농촌 생산대 맨발의사(위생원)을 소설로 각색해 “진수해 문예”에 낸 적이 있었다. 그때부터 조영희는 살그머니 덕돌이네 집으로 찾아와 성숙과 놀기도 하고 상순을 찾아와 정치에 대한 가르침을 받으면서 덕돌을 건너다 보군했던 것이다. 사실 조영희는 시내 진수해중학교 교원의 딸, 자그만치 교도처 주임의 귀한 공주이었다. 덕돌은 은근히 맑은 눈길을 자기에게 보내는 조영희의 눈치를 채고서도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군 했다. (시골 개구리 같은 내가 어찌 푸른 하늘을 날아예는 학의 고기를 먹으려고 꿈꾸겠는가?) 조영희는 옆에 순희와 순임까지 있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직방배기로 말했다. “왜 이러니? 우리 셋이 힘써 널 입단시킬 게. 저수지 공지로 가지 마오.” 허나 덕돌은 셋과 일일이 작별인사를 했다. “고맙다. 가장 어려운 때 잊지 않아 평생 잊지 않을게.” 말을 마치자 덕돌은 홱 돌아서서 일성 골 안을 바라고 이불 짐을 둘러메고 성큼성큼 걸어갔다. 파란만장한 그의 인생길에는 또 무슨 일이 생기겠는지 아직도 막막하기만 했다. 친구들은 덕돌의 발걸음이 비틀거리고 어깨가 약간 파도치는 것을 발견했다. 그들은 코마루가 시큼해나 눈물이 글썽한 눈으로 점점 멀어져가는 덕돌의 뒤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덕돌의 그림자가 자그마한 흑점으로 변해가다가 함흥촌 저 멀리 넘어 소서구 어구 굽이를 돌아 사라질 때까지 바랬다.        저쪽 하늘에서 봄을 찾아온 제비들이 둥지를 틀려고 지지배배 울면서 쌍쌍이 날아옜다.                                          
150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109) 댓글:  조회:2074  추천:5  2018-07-10
                        8. 심산에서 뛰쳐나온 맹호       흐리멍텅한 하늘아래 함흥중학교 마당에는 범이 새끼를 칠 지경으로 풀이 듬성듬성 자라나 있고 여기저기에 장바로 매놓은 소들이 풀을 뜯어먹으면서 똥물을 찔찔 쏘아댔다. 학생들이 뛰놀며 공을 차야 할 운동장이 소를 먹이는 방목지로 돼버렸다. 참 한심한 판이 아닌가. 저 멀리 텅텅 빈 교실은 돌멩이에 얻어맞아 펑펑 구멍 뚫린 창문으로 허수아비처럼 멍하니 어지러운 세상을 바라볼 뿐이었다. 얼럭덜럭한 대자보가 펄럭거리는 학교 몸뚱이는 진짜 산신당에 놓인 화환을 들쓴 것 같기도 하고 무덤에 놓인 지전을 들쓰고 신음하고 있는 것 같았다. 교정에는 학생들의 명랑한 글소리 대신 “음-메-” 하는 소 영각소리가 여기 저기에서 들렸다. 학생들은 필 대신 호미와 괭이를 주어들고 풀밭에 머리를 파묻고 거꾸로 엎뎌 기음을 매고 땅 파기를 하면서 빈농들의 재교육을 받아야 했다. “어떻게 돼 우리 학교가 저 지경으로 됐을까?” 먼발치에서 모교의 참경을 바라보는 덕돌은 서글프기만 했다. 어쩌다가 학교에서는 내일 오후에 진수해에 가서 영화구경을 한다고 하지 않는가! 학교에 가지도 않은 덕돌은 근본 영화를 구경할 수 없었다. 순간 그는 자기를 놀리던 애새끼들을 보복하고 싶은 생각이 불끈 치밀어 올랐다. “옳다!” 그는 학교 마당 주변의 백양나무 밑에서 서성거리며 거닐다가 무릎을 탁 쳤다. “개 새끼들이 영화 구경하러 간 틈에 한족친구들을 시켜서 패주자.” 덕돌은 황급히 집으로 달려갔다. 그는 아버지가 일 밭을 나간 틈에 고방을 활딱 뒤번져 쌀 주머니를 찾아 들고 쌀독 뚜껑을 열어 재꼈다. 그는 바가지로 쌀을 푹푹 퍼서 주머니에 쏟아 넣었다. 이때 문이 벌컥 열리더니 어머니가 들어와 놀라 했다. “쌀을 퍼내 뭘 하니?” 덕돌은 아버지가 들어오는가 덴겁했다가 계속 쌀을 퍼 담았다. “급히 쓸 일이 있습니다.” 어머니는 아들이 하는 일을 막은 적이 없었다. 하지만 쌀 고생을 하는 때인지라 사정이 달랐다. “대체 뭘 하려고 그러니?” “진수해 친구들에게 쌀을 줘야겠습니다. 빨리 가야합니다. 막지 마쇼.” 어머니는 농오래기를 주어다 쌀 주머니를 꿍꿍 매주면서 혀를 끌끌 찼다. “무슨 일인지 몰라도 친구는 많이 친해야 해. 허나 절대 나쁜 친구를 친하지 마라. 도적놈을 친하면 도적놈이 되고 강도를 친하면 강도로 되느니라.” “양, 근심하지 마십시오.” 덕돌은 쌀 주머니를 메고 마을을 벗어나자 수수밭을 꿰질러 아무도 보지 못하는 뒤 장대에 올라 진수해로 뛰어갔다. 덕돌은 해동다리를 헐레벌떡 달려 건너면서 사품 치며 세차게 흐르는 강물을 보자 궁리가 피뜩 떠올랐다. “그래, 해동다리를 막아 승환이랑 설복이랑 패줘야지.” 그는 류운봉의 집으로 찾아가 쌀 주머니를 내려놓으면서 말했다. “사형, 오늘 원수 진 애들이 영화 보러 와. 개 새끼들을 패주자.” “그래. 쌀을 잘 먹겠다.” 운봉은 쌀 주머니를 들어 키가 자그마한 어머니께 보이고 나서 구들에 내려놓았다. 그는 팔소매를 거두더니 주먹을 불끈 틀어쥐고 바깥으로 씽 달려 나갔다. “근심하지 말라. 내 오늘 본때를 보여줄게.” 그때 운봉의 어머니는 쌀 주머니를 어루만지면서 반가와 하면서도 근심돼 뒤따라 나오면서 말렸다. “괜히 죽게 치진 마라!” 운봉은 들었는지 마는지 덕돌을 데리고 또 한 친구를 찾아갔다. 만난 청년은 운봉보다도 키가 훨씬 크고 눈이 우멍해 보기에도 흉측했다. “내 사형 한위신이야. 술 공장의 한위신이라면 우리 진수해에서는 길바닥에서 짓던 개도 짖지 못해.” 한위신은 다가와 덕돌의 아래위를 훑어보더니 손잡고 “누가 감히 내 사제들을 건드려! 가자!” 하고 손을 홱 저었다. 덕돌은 뒤따라가면서도 류운봉과 한위신 둘이서 어떻게 한다하는 주먹치기꾼들인 승환이나 일광, 설복, 광호랑 한무리 깡패들을 쳐 눕히겠는가고 적이 근심했다. 그는 뒤에서 운봉의 팔소매를 살짝 잡아당기더니 나직이 말했다. “우리 셋이서 그 숱한 놈 새끼들을 당할 만 하니? 친구들을 더 불러오면 어떠냐?” 그러자 운봉은 눈을 슴벅이면서 희죽이 웃었다. “근심하지 마라. 우리 셋이 아니라 내 혼자라도 통쾌하게 패줄 수 있어. 어떤 새끼들인지 어디 보자. 아직 함흥 촌에 싸움꾼들이 있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어.” 먼저 덕돌은 한위신과 운봉의 말대로 혼자 영화관에 가서 승환이랑 영화 보러 왔는가 살펴보았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영화관 문 앞에서 영화를 다 보고 나오는 승환 등과 눈길이 딱 마주쳤다. 덕돌은 속으로는 시퍼런 칼을 썩썩 갈면서도 걔들을 놀래지 않으려고 고의로 머리를 숙이며 슬슬 피해 골목길로 들어갔다. “서라! 어디로 달아나니?” 승환과 일광, 광호, 설복 넷이나 덕돌을 뒤쫓았다. 덕돌은 짐짓 겁을 집어먹은 것처럼 주먹을 쥐고 해동다리 쪽으로 달아났다. 뒤에서 쫓는 애들은 꼬임 수에 든 줄도 모르고 기를 쓰고 뒤쫓아 갔다. 허나 날마다 몇 천 미터씩 닫는 덕돌을 따라 잡기란 조련치 않은 일이었다. 허나 헐레벌떡 혼자 내뛰는 덕돌을 잡을 듯 말듯 쫓아가다가 놓칠 수 없어 계속 쫓아갔다. 승환이랑 숨이 차 좀 쉬며 걸으면 덕돌도 걷고 승환이랑 달아 오면 덕돌은 달아났다. 그들은 괘씸해 덕돌을 뒤쫓아 해동다리 중간까지 달려갔다. 그들이 덕돌을 거의 따라 잡을 때었다. 진작 류운봉이 해동다리에서 난간을 쥐고 강물을 구경하는 척하면서 덕돌을 쫓아 달려오는 애들이 다가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승환이랑 덕돌을 뒤쫓아 거의 따라잡을까 말까 할 때다. “서라!” 류운봉이 꽥 소리치며 덕돌의 뒤를 막아 썩 나섰다. 불시에 나타난 중등키에 호리호리한 류윤봉을 보고 승환이랑 하나둘 주춤 주춤 멈춰 섰다. 허나 수수한 한족 애 혼자인 것을 보고 꺽다리 승환이 손을 홱 저었다. “쳐라!” 애들이 왁 달려들었다. 허나 한위신은 그저 우멍눈을 슴벅이며 뒤에서 구경했다. “이 새끼들아!” 류운봉이 성난 사자처럼 고함치며 씽 승환과 광호의 키 넘어 날아지나가며 양쪽으로 발길질을 날렸다. “앗!” 비명소리와 함께 운봉의 발길에 걷어 채워 키꺽다리 승환과 광호가 거의 동시에 나가 너부러졌다. 뒤에서 덤벼들려던 일광과 설복은 그 뜻밖의 광경에 주춤 멈춰 섰다가 인차 앞뒤로 운봉을 공격했다. 그때 덕돌이 일광을 정면으로 파고들며 발길을 날렸다. 허나 일광은 주먹을 쥐고 개처럼 껑충 뛰어 옆으로 피하면서 주먹을 날렸다. 덕돌은 뜻밖의 주먹에 배를 맞고 뒤로 물앉았다. 그때 운봉이 어느 결에 설복의 아래 종아리를 탁 걷어차 넘겼다. 일광이 주먹을 휘두르며 운봉에게 덮쳐들었다. 운봉은 다시 날아오르며 일광의 대가리를 걷어찼다. 허나 일광도 필경은 권투를 배운 애답게 살짝 자세를 낮추며 두 손으로 날아오른 운봉의 다리를 틀어쥐었다. 운봉은 땅에 떨어지는 순간 허망 노출된 일광의 면상을 팔 굽으로 탁 내리쳤다. “앗!” 일광은 운봉의 다리를 틀어쥔 채 쓰러졌다. 그때 쓰러졌던 설복과 광호, 승환까지 와르르 일어나 덮쳐왔다. 그때 덕돌은 운봉에게 덮쳐드는 광호를 막아 싸웠다. 운봉은 일광에게 다리를 꽉 잡히고서도 무쇠주먹으로 일광의 뒤통수를 꽝꽝 내리쳤다. 무쇠주먹에 얻어맞은 일광은 “앗!” 소리와 함께 반 주검이 돼 푹 꺼꾸러져 버렸다. 설복과 승환이 동시에 운봉에게 덮쳐들었다. 허나 운봉은 자세를 낮추며 설복의 아랫배를 팔 굽으로 탁 쳤다. “억!” 아랫배를 부둥켜안고 꺼꾸러지는 설복이, 거의 동시에 승환은 운봉의 번개 같은 발길질에 무릎을 탁 걷어 채워 절룩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그때까지 한위신은 그저 희죽이 웃으며 구경하고 있었다. 힘을 입은 덕돌은 광호의 사타구니에 오른 팔을 쑥 넣더니 건뜻 들어 올려 한 바퀴 휘 휘 돌렸다. 허망 들려 두 다리를 버등거리던 광호는 비명소리와 함께 다리 아래로 거꾸로 처박혔다. “잘한다! 잘해!” 그때까지 저쪽 뒤에서 구경하던 한위신은 박수를 탁탁 치며 쾌자를 불렀다. 질겁한 승환과 설복은 다리야 날 살리라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허나 운봉이 씽드르 달려 나가 절룩거리며 달리던 승환의 뒷다리를 딴죽을 걸어 쓰러 눕혔다. “어디로 도망쳐?!” 한위신이 몸을 날려 설복의 꼭뒤로 날아 넘어가며 한발로 뒤발 질 해 쓰러 눕혔다. 저쪽에서 싸움을 도우려고 주먹을 쥐고 뛰어오던 승환의 패거리들은 겁을 집어먹고 도망쳤다. 그 속에는 성욱과 상선, 응철도 있었다. “야, 성욱아, 어디로 닫니? 넌 내 조카기에 때리지 않을테니 여기 오라! 그럼 살려준다.” 덕돌의 고함소리에 성욱이랑 주춤 멈춰 섰다. 그들은 서로 뭐라고 의논하더니 이쪽으로 다가왔다. 한위신은 주먹을 탁탁 치며 덕돌에게 물었다. “얘들은 왜 놔두니?” “내 조카야. 놔두자.” 한위신은 지나가려는 성욱을 붙잡고 우멍눈을 무섭게 슴벅이면서 위협했다. “봐라! 누구든 덕돌을 건드렸다간 죽는다! 죽어! 알았어?!” 한위신이 장측으로 내리치자 해동다리 나무난간이 뭉청 끊어져나갔다. 또 발길을 날리자 난간 가름대가 부서져 강물에 날아가 떨어졌다. 성욱은 겁을 집어 먹고 다리야 날 살리라고 도망쳤다. 덕돌은 깨고소해했다. 운봉은 한쪽에 대가리를 붙안고 물앉아 바들바들 떠는 승환과 설복, 일광의 대가리를 뚱뚱 치면서 위협했다. “네깐 놈들이 감히 이 어른께 덤벼들어! 또 덤벼들어라!” “아니, 다신 아니오!” “덕돌을 업신여기겠는가?!” “아니, 다신 아니오!” 한위신은 승환의 머리칼을 틀어쥐고 무릎에 대가리를 딱딱 짓쪼아놓았다. 승환은 단통 코피를 줄줄 흘리며 죽어가는 비명 소리를 쳤다. 설복과 일광은 겁을 집어먹고 무릎을 꿇고 마구 절을 하면서 두 손을 싹싹 비볐다. “살려주오! 제발 살려주오!” 허나 한위신은 “덕돌아, 뭐 해? 패라!”라고 했다. 덕돌은 무방비상태인 일광과 설복을 돌아가며 발길질을 하면서 고함쳤다. “이 새끼들이, 다시 날 연애한다고 놀리겐?!” “다신 아니다.” “또 놀려라!” “아니, 죽어도 아니다.” 운봉은 일광의 대가리를 땅바닥에 마구 쪼아 놓으면서 을러멨다. “이 개새끼야, 할아버지라고 불러!” 일광과 설복은 마주 보다가 한위신에게 한 대씩 더 얻어맞고 이구동성으로 “할아버지!” “할아버지!” 하고 부르며 살려 달라고 애걸복걸했다. 덕돌은 머리를 끄덕이고 나서 설복의 배때기를 탁 걷어차면서 을러멨다.  “이제 다시 덤벼 봐라. 죽는다. 죽어. 다시 놀리겐?” “아이다.” “가라!” 덕돌은 일광의 낯을 탁 걷어찼다. 일광은 상판을 붙잡고 일어나 가면서도 속으로는 이를 쁙쁙 갈았다. 설복의 올빼미 눈깔도 곱지 않게 선뜩했다. 광호는 어느 결에 강물에서 기어 나왔는지 다리 끝, 저쪽 강둑에서 이쪽을 기웃거렸다. 승환이랑 피범벅이 된 상통으로 다리를 절룩거리며 집 쪽으로 갈 때다. 뜻밖에 승연이가 자기 형 황종연 소장을 데리고 달려왔다. 분명 먼저 다리목에서 쫓겨 시내로 달려간 애들이 고발한 것이었다. “서라!” 덕돌은 황종연 소장보다 황승연 담임교원이 더 무서워 주먹을 쥐고 달아났다. 허나 닫다가 뒤를 돌아보니 한위신과 류운봉은 태연자약하게 황 소장과 뭐라고 웃고 떠들고 있지 않겠는가? 덕돌이 후에 안 일이었다. 황종연과 황승연은 한위신의 형 한위광이 무예가 출중한데다 그 무리가 “굴뱀”처럼 지독하고 많기에 감히 건드리지도 못했다. 그들은 진수해 큰길바닥에서 우쭐거리며 싸우다가도 한위광을 보기만 하면 꼬리 빳빳해 줄행랑을 놓곤 했던 것이다. 한번은 한위광이 한창 조양식당에서 친구들과 술을 마실 때다. 황종연은 술상에서 말다툼을 하다가 그 나그네 멱살을 틀어쥐고 헤딩을 떵 했다. 순간 그 나그네는 면상이 쥐마당이 돼 쓰러졌다. “언감 누구 앞에서 주먹질인가!” 한위광이 건너 상에서 씽 날아가더니 원앙새다리로 종연과 승연 형제를 한발에 하나씩 걷어차 넘겼다. 황종연과 황시연은 한위광을 두려워 선불 맞은 노루처럼 다리야 날 살려라고 도망쳤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황승연 형제는 여기서 또 한위광의 동생 한위신을 만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더욱이 덕돌이 진수해의 “주먹 왕” 한위신 형제와 친분이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한위신은 황종연과 황승연마저 위협했다. “이후에 누구든 내 사제 덕돌을 업신여기면서 못 살게 굴기만 하면 좌시하지 않을 거야.” 권총을 찬 황종연 소장도 굴 뱀과 같은 한위신 무리를 어찌는 수가 없어 물러갔다. 덕돌은 집에 돌아온 후 그날 해동다리실전에서 주먹과 발이 쾌속반응하지 못한 교훈을 더듬어냈다. 승환이나 일광은 그날 덕돌이 덤벼들자 두 손을 낯에 대고 자세를 낮추며 옆구리 밑으로 빠지면서 주먹으로 배를 강타했다. (이제까지 배운 무술은 보기 좋을뿐 실전에서 많이 써먹지 못할 물건이야. 자기를 알고 남을 알아야 백전백승한다. 나도 권투를 배워 무술과 권투의 장점과 약점을 다 장악해야지. 그래야 무술과 권투의 약점을 미봉하고 장점을 발양해 그 새끼들을 쳐 눕힐 수 있지.) 그는 동불사 6촌 형 김봉룡을 찾아갔다가 그의 친구 룡남이가 권투를 잘 한다는 말을 듣고 술과 담배를 사가져다 주고 권투를 배우기 시작했다. 룡남은 덕돌보다 두 살 이상이지만 호리호리한 몸매로 권투를 어찌나 날래게 하는지 눈이 시릴 정도였다. 이전에 무술로는 1미터 반 이내에 들어온 적수를 상대해 주먹질과 발길질, 무릎과 머리로 공격했다. 허나 권투는 적수를 4~5미터 거리에 두고서도 재빠른 몸놀림과 발놀림으로 덮쳐나가면서 연타를 안길 수 있는 실용적인 권법이었다. 용남에게서 몇 달 동안 상대방에게 공격해 들어가는 보법 그리고 상대방이 공격해 들어올 때 피하는 보법과 동작을 몇 개 배운 후 덕돌은 권투에 점차 눈을 뜨기 시작했다. 몸놀림도 매우 날렵해지고 진공속도도 빨라져 눈 깜짝할 새에 덮쳐들어가 상대를 쳐 눕힐 수 있게 됐다. 허나 덕돌은 권투가 맨 주먹을 쓰고 발길을 적게 쓰는 약점이 있다는 것을 느꼈다. (바로 이거야. 맨 주먹으로 발이 하는 노릇까지 할 수 있는가? 발을 잘 쓰지 못하는 권투쟁이들을 발길질로 차 눕혀야 해.) 덕돌이 한창 권투를 익히고 권투의 허점을 돌파할 실전무술을 연마할 때었다. 덕돌의 양형님 수봉이 찾아왔다. “덕돌아, 누가 너를 때리면 나한테 말해라.” “감사하오. 허나 애들의 싸움에 형님을 시켜 때리면 이긴 게 아니오. 그래 내 힘으로 개 새끼들을 하나하나 쳐 눕히겠소.” “글쎄, 당당한 주먹 왕이 되자면 그리 쉽니? 나와 경만 매형께 알려라. 어느 새끼 감히 너를 건드리면 혼 내줄게.” 수봉 양형이 고마웠다. 허나 덕돌은 수봉 형님이 돌아간 후에도 계속 무술과 권투를 익혀나갔다. 그는 패용천산 꼭대기 절벽 위에 올라가 썩 살이 배긴 무쇠주먹을 반공중에 대고 힘차게 휘두르면서 산악이 쩌렁쩌렁 울리게 고함쳤다. “개새끼들아! 이 주먹으로 날 놀린 놈들을 몽땅 쳐 눕히겠다! 이 놈의 더러운 세상을 평정할 거야!” 어느 날 저녁, 덕돌이 저녁술을 놓으려는데 경산 선생이 찾아와 조용히 타일렀다. “얘야, 주먹으로 세상을 개조하려고 하지 마라. 이젠 싸움꾼들과 놀지 말고 학교로 오너라.” (어쩜 우리 아버지 말과 똑 같을까?) “주먹세계에 들어서면 끝이 없다. 아까운 시간을 허비하지 말고 내 주는 책이나 봐라. 지금 ‘독서무용론’이 살판치지만 이후에는 지식이 꼭 필요하다.” 까부는 덕돌이었지만 자기를 친형님처럼 아끼고 이끌어주는 김경산 선생의 말만은 귀담아 들었다. (그래, 문무가 겸비된 남자, 땅을 밟고 하늘을 떠인 떳떳한 사내대장부로 돼야지.) 허나 덕돌은 근심되는 일이 한 두 가지 아니었다. “학교에 가면 애들이 또 놀리지 않겠는지 모르겠습니다. 학교라는 게 어디 공부를 시킵니까? 일이나 시켜 먹었지.” 경산 선생은 덕돌의 손까지 잡고 차근차근 타일렀다. “세월이 더럽긴 하지만 너 그래도 고중졸업장이야 타야지. 이렇게 고삐를 끊은 들소처럼 싸움질이나 하면서 떠돌아 다녀서야 되니? 고중도 졸업하지 않고 이후에 어떻게 대학에 가니?” 덕돌은 머리를 숙이며 “김 선생님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내일 당장 학교로 가겠습니다.”라고 했다. 경산 선생은 너무 기뻐 연신 “그래야지. 이제야 내가 희망하는 덕돌 답구나.”라고 했다. 그는 누런 책을 몇권 가방에서 꺼내 놓았다. “궤에 감춰놨던 책이야. 잘 읽어라. 넌 글도 잘 쓰지 않고 뭐야? 이제부터 나한테서 소식이나 통신 같은 짧은 문장부터 배워가지고 후에 기자나 작가로 됐으면 얼마나 좋겠니?” 그 말에 덕돌은 눈이 동그래졌다. “기자?” 김 선생은 확신에 찬 머리를 끄덕였다. “응, 그래.” “내가 어떻게 기자나 작가까지 되겠습니까?” 덕돌은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넌 될 수 있어. 이제부터 노력해라.” 덕돌은 가슴이 부풀어 올라 심장박동마저 세차게 높뛰었다. 정지에서 다 들은 아버지도 경산이 떠나간 후 타일렀다. “선생님의 말이 옳다. 네가 학교에 가지 않으면 누가 좋아하니? 학교서 일하더라도 가라. 집에서 가만히 책을 읽지 말고 학교에 가서 선생님들의 가르침도 받는 게 옳아.” 이튿날 아침, 흐리터분한 날씨에 덕돌은 공부도 하지 않는 학교에 슬슬 다가갔다. 그가 학교 마당에 일년만에 나타나자 애들은 신기한 괴물을 보듯 눈치를 흘금거리며 슬슬 피했다. 승환과 일광은 덕돌이 교실에 나타나자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순희랑 은숙이랑 신기한 눈길로 덕돌을 바라보다가 머리를 폭 숙였다. 덕돌은 뒤로 두 번째 줄, 옛날에 앉았던 자리에 앉았다. 왁작 떠들던 교실이 덕돌이 나타나는 바람에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짱! 덕돌은 불시에 귀뿌리가 윙 해났다. 덕돌이 우쭐 일어나 얼굴을 돌려 보았다. 뒤 줄에 일광이 하얀 낯이 퍼렇게 일그러졌다. “감히 나를 치니?” 옆에 앉았던 장영웅도 일어나 일광을 말렸다. “너 영상하게 교실에서 이러지 마라.” 덕돌은 “나오라.”라고 하며 일광에게 도전했다. 일광은 따라 나오면서 고함쳤다. “한족 애들을 믿고 작작 우쭐거려라!” 애들은 싸움을 구경하려고 우르르 쓸어 나왔다. 덕돌은 일광부터 처 넘겨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또 업신여김과 놀림을 당하게 될 것은 불을 보듯 빤한 노릇이었다. 선생님들과 애들이 보지 못하는 학교 뒷마당에 에돌아가자 일광은 해동다리에서 반 주검이 되게 얻어맞은 승치를 하려고 이를 뿌득뿌득 갈았다. “오늘 죽어봐라.” 덕돌이 웃옷을 벗어 땅바닥에 놓는 순간 일광이 쌩 덮쳐들어오면서 발길로 덕돌의 턱을 탁 걷어찼다. 덕돌은 날아드는 발을 번개같이 잡아 홱 뿌리쳤다. 그 바람에 일광은 달려들던 속도와 힘에 저쪽 광호 발밑에 뿌려 나가 거꾸로 처박혔다. 일광이 피와 흙 범벅이 된 낯을 쓱 닦으며 일어나려는 순간이었다. 덕돌이 씽 달려 들어가면서 땅을 짚은 팔을 툭 걷어찼다. “아이고!” 비명소리와 함께 일광은 접질린 팔을 붙안고 쓰러졌다. 덕돌은 호랑이를 때리는 무송처럼 덮쳐들어 일광의 덜미를 누르고 무쇠주먹을 휘둘러 뒤통수를 즉살 나게 꽝꽝 내리쳤다. 벽돌 두 장도 까부시는 덕돌의 주먹에 얻어맞아 일광은 죽는 소리도 못치고 너부러졌다. 일광이 맥도 쓰지 못하고 얻어맞아 쓰러진 것을 보고 광호와 승환이, 설복까지 동시에 덮쳐들었다. 허나 덕돌은 무서워하는 기색이 전혀 없이 접전했다. 그러자 동림과 성택, 영웅이 나서서 승환이랑 말렸다. “1대 1로 싸워라. 셋이나 달려들면 되니?!” “놔둬라! 다 때려눕히겠다.” 덕돌은 고함치며 몸을 날려 원앙새발길질로 덮쳐드는 광호와 설복을 동시에 대가리를 걷어찼다. “어우야!” “무술을 배운다더니 한각 쓰는구나!” 여자애 같던 덕돌이 일 년 동안 보이지 않더니 맹호가 산에서 덮쳐 내려온 듯한 강한 모습을 보고 애들은 모두 경악했다. 승환이 그새 권투자세를 취하면서 정면으로 덮쳐들었다. 덕돌은 자세를 낮추며 토끼뜀으로 몸을 옆으로 슬쩍 피했다. 승환의 몸이 오른 쪽으로 스쳐 지나갈 때 덕돌의 주먹이 아랫배를 강타했다. 승환이 비칠거리며 덕돌의 뒤에 겨우 멈춰 섰다. 덕돌이 뒤돌아서며 발길로 숙인 승환의 턱주가리를 걷어찼다. 승환은 옆으로 피하려고 했지만 번개같이 연신 날아드는 발길과 무르팍 강타에 비명소리와 함께 이발을 떡떡 맞 쪼아 피를 줄줄 흘렸다. 침을 퉤 뱉자 부러진 이빨이 피와 함께 튕겨났다. 설복과 일광, 광호가 동시에 덕돌에게 덮쳐들었다. 둬 매 얻어맞은 덕돌은 도망치는 척 하다가도 홱 돌아서며 발길을 날려 제일 먼저 따라 오는 광호부터 차 눕혔다. 그러고는 또 달아났다. 그는 온 학교 운동장을 달아 다니면서 승환이랑 일광이랑 치고 박았다. 허나 덕돌은 전혀 겁기가 보이지 않고 싸우면 싸울수록 용감해지고 날렵했다. 휴식시간이 돼 장옥이랑 장화랑 조신지랑 숱한 한족 애들이 교실에서 나와 이 장면을 보고 뛰어왔다. 그 애들이 승환이랑한테 물매를 안길 때 황승연과 흥수도 뛰어왔다. “덕돌아, 이게 뭐야?” 흥수가 을러멨다. 황승연은 이전에 해동다리에서 한위신에게 위협받은 일이 있어 감히 입도 벌리지 못했다. 그제야 싸움은 끝났다. 덕돌이나 광호네나 모두 여기 저기 얻어 터져 정도부동하게 피를 흘렸다. 허나 결국 덕돌은 이긴 것이다. 셋이 덕돌에게 얻어맞았으니까. 흥수가 그들 넷을 불러 교실에 들어간 후 학생들 앞에 세워놓고 비판했지만 덕돌은 속으로 은근히 너털웃음을 웃었다. (난 끝내 이겼어. 이젠 네 놈들이 무섭지 않아. 이 교실 안의 주먹 왕은 내다, 내.) 이튿날부터 덕돌은 기세등등해 학교로 다녔다. 다만 뒤에 앉은 일광이가 불시에 돌멩이 같은 것으로 돌연히 습격하는 것이 근심될 뿐이었다. 1분만 버텨내면 옆 교실에 있는 장옥이랑 달려 나오기에 무섭지도 않았다. 그런데 뜻밖의 사건이 벌어졌다. 광호랑 승환이랑 덕돌과 자옥이랑 두려워 학교에 오지 않았던 것이다. 오히려 그 놈 새끼들이 보이지 않자 덕돌은 불안하고 가슴이 답답하고 불쾌했다. 사실 덕돌의 짐작이 맞았다. 전번에 덕돌의 실력을 너무 깔보고 덮쳐들었다가 망신당한 광호랑 진수해의 부랑배들을 긁어모아 덕돌에게 보복할 획책을 꾸미고 있었다. 덕돌은 광호랑 궁금해 운봉과 함께 진수해에 내려와 돌다가 영화관 앞에서 또 딱 부딪치게 됐다. 면목도 없는 꺽다리 하나가 덕돌을 잡아끌었다. “여기 오라! 네가 함흥촌의 덕돌이냐?” “그렇다. 누구냐?” “너 광호를 알지?” “안다. 광호네 짝패냐?” “그래, 나 림영철이야. 성은 수풀 림, 이름은 쇠다. 한번 맞붙어 보겠니?” “수풀 속에서 뛰어나온 쇠라. 네 이름 그럴듯하구나. 어디 해보자.” 덕돌이 림영철을 뒤따라가는데 운봉이 저쪽 먼발치에서 눈치 채고 스적스적 따라가 철로소학교 마당으로 들어갔다. 림영철이 덕돌을 업신여기고 허리를 굽히더니 주먹을 둘러메고 씽 덮쳐들었다. 덕돌은 뒤로 풀쩍 뛰어 물러섰다가 앞으로 나가며 자세를 낮춰 옆으로 걷어차 올렸다. 씽 달려 들어오며 헤딩을 하려던 영철이 면바로 불알중태를 채워 두 손으로 사타구니를 싸쥐고 뺑뺑 돌았다. 덕돌이 영철의 더벅머리를 틀어쥐어 무릎에 대고 떵떵 짓 쪼아버렸다. 림영철은 단통 면상이 쥐마당이 돼버렸다. 구경하는 척 하던 다른 애가 그 틈에 덤벼들어 덕돌의 뒤통수를 강타했다. 덕돌이 뒤에서 휙 하는 바람소리를 듣고 훌쩍 물앉는 바람에 그 애의 몸이 앞으로 휘청거렸다. 덕돌은 뒤로 손을 뻗쳐 자기 머리 위에서 허우적거리는 몸뚱이를 휘감아 쥐여 태를 탁 쳤다. 짱 소리와 함께 언 땅 위에 그 애가 보기 좋게 뻐드러졌다. “개새끼들아! 어느 놈이 감히 내 형제를 건드려!” 운봉이 도끼눈을 부라리며 덮쳐들었다. “굴 뱀이 왔다!” 광호네 패거리들은 독수리를 본 참새들처럼 몽땅 도망쳤다. 덕돌은 달아나는 시내 애들에게 주먹을 휘두르며 철로소학교 마당이 쩌렁쩌렁 울리게 고래고래 고함쳤다. “야, 개새끼들아, 다 달려 들어봐라! 다 때려죽이겠다!” 그날부터 류운봉과 한위신, 고이림, 류지 등 친구들은 덕돌이 시키는 대로 진수해 온 시내를 돌아다니면서 광호네 친구라고 보이는 애들의 집을 하나하나 쳐들어가 패주었다. 그후부터 시내 애들도 광호를 두둔해 나서려고 하지 않았다. 자기를 놀려대며 개 같이 짖어대던 싸움군들을 다 때려눕히자 덕돌은 개를 치던 몽둥이를 팽개치고 안심하고 다시 학교로 다녔다. 허나 광호랑 일광이랑 덕돌과 한족 애들이 무서워 드문드문 학교로 왔다가 눈치를 흘금흘금 보다가도 돌아갔다. 덕돌은 장영웅과 함께 당당하게 제일 뒤 줄에 앉았다. 벽을 등지고 앉은 후부터 뒤에서 일광이 돌연히 습격해 주먹을 날릴 까봐 근심할 필요 없어 마음이 훌 놓였다. 한번은 광호가 학교 마당에서 불시에 덕돌의 뒤에서 주먹을 휘두르며 덮쳐들었다. 덕돌은 훌쩍 자세를 낮추며 팔꿈치로 아랫배를 탁 친 후 숙인 광호의 대가리를 탁 걷어찼다. “어이쿠!” 광호는 허망 저쪽으로 나가 꼬꾸라졌다. “비열한 새끼, 돌연습격해?” 덕돌은 광호에게 물매를 안기며 고함쳤다. 인젠 광호도 덕돌에게 마음속으로부터 굴복하지 않으면 안됐다. 정면으로 달려들어도 돌연습격해도 근본 적수가 아니었던 것이다. 이제부터 덕돌은 기죽은 적수들에게서 시선을 떼게 됐다. 더는 그 애들로 해 근심하지 않고 경산 선생을 모시고 글짓기에 전념해도 됐다. 경산은 덕돌을 자기 집에 가만히 불러 석유등잔불을 밝혀놓고 소식쓰기부터 배워주었다. “소식쓰기를 배워 함흥 대대나 우리 학교 사적을 신문이나 방소에 내면 얼마나 멋지니?” “예? 내 쓴 글이 언제 나겠습니까?” 경산은 아주 진지한 표정을 지으면서 “될 수 있다. 네가 무예를 익힐 때처럼 이걸 배우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다는 정신으로 열심히 배워라.”라고 하며 희망과 이상의 푸른 씨앗을 덕돌의 가슴에 심어주었다. 어쩐지 덕돌은 경산 선생의 말씀이 마음에 와 쏙쏙 들어박혔다. 그는 날마다 경산 선생 집에 찾아가 소식의 이론과 취재, 집필에 관한 공부를 체계적으로 해나갔다. 나중에 함흥 대대에서 혁명을 틀어쥐고 새 농촌건설을 잘 한 경험을 취재해 첫 소식을 썼다. 상순은 덕돌이 밤중까지 밥상을 놓고 원고지에 원고를 쓰다가도 몇 글자를 쓰지 못하고 쭉쭉 찢어 밥상 옆에 던지는 것을 보고 빈정거렸다. “에이고, 네가 쓴 글이 방송에 나는 날에는 해가 서산에서 뜨겠다.” 덕돌은 밸이 나 속으로 기어이 소식을 써서 방송에 내 아버지께 본때를 보이려고 쓰고 또 썼다. 나중에 그는 원고라고 써가지고 경산 선생한테 가서 검사를 맞혔다. “처음 썼는데 잘 썼구나. 되겠다.” 경산은 그 원고를 본 후 직접 만년필을 들어 새까맣게 수개해주었다. “이걸 정성들여 재필기를 해라.” 덕돌은 경산 선생님이 수개한 원고를 깐깐히 보면서 자기 원고의 결점을 봐내고 재학습했다. 두 번이나 경산 선생한테 검사 맞힌 후 수개하고 정리한 후 선생의 부탁대로 현 방송국에 보냈다. 하루가 지나고 일주일이 지나도 집에 걸린 스피카에서 기별도 없었다. 경산 선생은 덕돌을 찾아 집에 데려다 조용히 타일렀다. “조급해 하지 마라. 뭐나 단술에 어찌 배부르겠느냐? 천천히 학습하노라면 꼭 방송과 신문에 날 그 날이 있을 거야.” 덕돌은 자기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확성기에서 아나운서의 방송소리가 울려왔다. “아래에 덕돌 동무가 써 보낸 소식을 보내드리겠습니다.” “아니, 네 쓴 소식이 나온다.” 경산도 환성을 울리다가 덕돌과 함께 귀를 도사리고 들었다. “진수해공사 함흥대대 조개덕 생산대에서 혁명을 틀어쥐고 새 농촌건설을 촉진하고 있습니다. 조개덕 생산 대에서는 계급투쟁을 억세게 틀어쥔 한편 황무지에 인삼장과 양봉장을 꾸렸을 뿐만 아니라 마을 동구에 벽돌공장을 앉히고 칼산의 구들돌을 캐 부업수입을 올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 생산대 벽돌공장에서 생산한 벽돌과 기와로 선후해 대대 사무 청사와 조개덕 생산 대 우사와 회의실, 돼지우리를 지었으며 2년 동안 사원들에게 도합 20여 채 새 벽돌기와집을 지어 주었습니다. 새 마을 건설에서 고무된 사원들의 생산적극성이 전에 비해 높아져 생산도 혁명도 일대 앙양을 일으켜 올해 년 수입도 지난해에 비해 곱절로 올라갔습니다.” 경산 선생은 너무 반가워 밥상 너머 덕돌의 어깨를 다독여주었다. 덕돌도 너무 기뻐 연신 “선생님, 고맙습니다.”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인사했다. “그래, 이젠 네 새로운 인생이 시작된 거야. 절대 자만하지 말고 두 번째, 세 번째 원고를 계속 써내야 한다. 이젠 나이도 18세라 어리지 않아. 전도를 위해 꾸준히 글재간을 익혀나가야 한다.” “예, 알았습니다. 꼼 명심하겠습니다.” 집에 돌아오자 아버지 상순이 싱글벙글 맞으면서 “우리 기자 돌아왔소? 네 쓴 문장이 방송에 나더구나. 축하한다, 아들아.”라고 했다. “아버지, 해가 서산에서 뜰 날이 왔구먼요.” 덕돌이 우스개를 하자 상순은 덕돌을 껴안아주면서 “건 다 격장법을 써서 널 글을 마음먹고 써내게 한 거야. 허허허. 딱 곧이들었니? ”라고 하지 않겠는가! 억이 막혀 더 웃지 못 할 노릇이었다. 아버지의 속생각은 여래불의 마음 같이 넓고 깊을 줄은 몰랐다. 덕돌은 학교에서 공부는 하지 않고 일하러 다니는 것이 싫어 학교에 가기 싫어 가네마네 했다. 어느 날, 경산은 집에 찾아와 가방에서 “조선어문법” 책을 주면서 물었다. “내가 공사방송소에 가서 임시 기자로 일하게 됐다. 너도 가서 견습하는 게 어때?” “좋습니다. 허나 제 같은 학생이 방송소에 갈수 있겠습니까?” “내 학교 혁명위원회 대리 주임 성환과 말해 볼게.” 경산은 조개덕 앞 한육모판에 가서 성환을 찾았다. 한참 후 성환과 경산이 뭐라고 하며 벼 모상 판으로부터 마을 쪽으로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성환은 마을 앞 둔덕길에서 덕돌을 보자 손짓해 불렀다. 덕돌이 뛰어가자 성환은 그에게 신신당부했다. “덕돌아, 경산 선생을 따라 방송소에 가라. 견습 기자로 돼 견식도 넓히고 기자 수업을 잘해라. 장차 당과 인민을 위해 글을 쓰는 유명한 기자로 돼라.” “고맙습니다. 두 분 선생님.” 이튿날에 덕돌은 진수해 방송소에 가서 이광평 소장의 지도아래 소식이나 통신 등 보도기사를 쓰는 것을 배웠고 경산 선생과 함께 전 공사를 돌아다니면서 취재하고 보도기사를 썼다. 방송소에서 어떻게 아나운서의 말을 녹음해 방송하는가, 어떤 전자기계로 전 공사에 유선방송을 내보내는가도 알게 됐다. 덕돌은 약 두 달간의 실습을 거쳐 견습 기자의 실력을 갖춰나갔다. 한편 “조선어문법” 책도 열심히 읽어 집필수준도 눈에 뜨이게 제고시켰다. 한편 그는 맨 소식이나 인물통신만 써서는 장차 기자로 되기 힘들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빈농의 재교육을 잘 받아 입당해 대대 간부나 돼야 대학에 추천 받아 가는 세월에 농업상식도 배워야 해. 아니야, 누구도 몰래 무선전기술을 배워 시내에 가서 반도체라디오 수리공이 되면 어떨까? 그래, 그거야. 소식이나 통신은 아무 직업을 택하던 다 쓸 수 있지 않는가? 난 기자 하나만 바라고 살 수 없어. 여러 가지 재간을 익혀 가지고 이쪽 길로 가서 안 되면 저쪽 길로 나가야 해.) 그날부터 덕돌은 동림이 네 집에 있는 반도체 라디오 조립지식 책을 가져다 반도체 무선 전자 기술을 배우기 시작했다. 이극관과 삼극관, 저항기와 가변저항기, 소형변압기, 확성기, 등 부속품의 원리를 학습했다. 그는 용돈을 까래 밑에 치워두었다가 시내 오금상점에 가서 부속품을 사다 조립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부속품 하나에 몇 원씩 하는 세월에 농민의 아들이 반도체 부속품을 살 돈이 어데서 생기겠는가? 명옥은 항상 하나밖에 없는 아들의 꿈을 현실로 되게 뒷받침해주었다. 그녀는 돼지새끼를 판 돈을 남편 몰래 가만히 덕돌의 손에 쥐워 주었다. 덕돌은 기뻐 날듯 했다. 그는 돈을 남아 하나라도 부속품을 더 사려고 버스도 타지 않고 동림과 함께 이른 새벽에 시골마을에서 떠나 40 리나 걸어 네 시간 만에 연길에 도착했다. 오금상점에 들리어 소형변압기와 나발을 사서 품에 간직하고 나오니 점심때가 거의 돼갔다. 하늘을 바라보니 유난히 맑아 햇볕이 쨍쨍 내리쪼였다. 반도체 부속품을 사고 나니 그들의 호주머니 돈을 다 털어 모아보니 단돈 5전 밖에 없었다. 5전으로는 국수 한사발도 사 먹지 못할 판이었다. “운동 삼아 달려서 집으로 돌아가자.” 덕돌이 말하자 동림도 머리를 끄덕였다. “그러자. 운동을 따로 할 게 있니?” 그들은 단 돈 오전으로 도마도 두 근을 사서 점심 대신 먹으면서 귀로에 올랐다. 그들은 시내를 벗어나자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아스팔트길로 슬슬 달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찌나 무더운지 숨이 헉헉 막혀 달리기 힘들었다. 그때 불시에 먹장구름이 뒤덮여오더니 앞뒤를 분간하기 힘들게 소낙비가 새뽀얗게 와르르 쏟아졌다. “어, 시원하다!” 덕돌은 한편 소형 확성기의 종이가 비에 젖을까봐 옷을 벗어 둘둘 감아 꼭 껴안고 가로수 밑에 숨었다. 그러다가 열사의 영패를 모신 큰 길옆의 기와집에 들어가 비를 끊었다. 비가 멎자 그들은 또 닫다가도 숨이 차면 걷고 걷다가도 달으면서 끝내 40 리나 떨어진 집으로 돌아왔다. 덕돌은 연 며칠 동안 반도체조립수책을 보면서 비닐판에 송곳으로 구멍 뚫고 부속품과 전자회로를 하나하나 아연으로 땜질 해 고정시켰다. 조립을 끝마치자 덕돌은 맑게 갠 날을 골라 자체로 조립한 반도체 라디오를 자전거에 싣고 동림과 함께 패용천산 기슭에까지 갔다. 그들은 자전거를 세워놓고 패용천산 꼭대기에 단숨에 톺아 올랐다. 그들은 연 쇠줄로 소나무와 소나무 사이에 안테나를 늘여 반도체라디오에 연결시켜 놓았다. 덕돌은 두근두근 거리는 가슴을 억지로 진정시키며 자작 반도체 라디오에 전지약을 꽂고 보름을 똑 켜 돌리며 높였다. 순간 기적이 일어났다. “쌕-” 무선전 전파소리가 났다. 덕돌이 가변저항기를 돌리자 확성기에서 여아나운서와 남아나운서의 목소리가 엇갈아 똑똑히 울리지 않겠는가! “연변인민방송입니다.” “연변인민방송입니다.” 뒤이어 혁명적 본보기극 “흥등기”를 보내드리는 것이었다. 덕돌은 너무 기뻐 패용천산 꼭대기에서 하늘을 향해 두 손을 쫙 펴들고 목청을 가다듬어 고함쳤다. “성공했다! 내가 반도체 라디오를 조립해냈다!” 덕돌은 너무 기뻐 패용천산 꼭대기 벼랑 위에서 곤두박질을 몇 번이고 했다. 세상에 못해낼 일이 있는 것 같지 않은 꿈도 많은 랑만의 시절이었다. 패용천산 꼭대기에서는 덕돌이 조립한 반도체 라디오의 맑은 방송소리가 정답게 울렸다. 저녁에는 라디오 하나도 없는 마을의 이집 저집에서 그의 반도체 라디오 소리가 울렸다. 온 마을에서 돌아가면서 그 반도체 라디오를 들었고 나중에는 조대덕 생산대 회의실에서 전체 사원들이 듣기까지 했다. 여기저기서 덕돌에게 엄지를 내두르며 혀를 끌끌 찼다. “정말 괴상한 애오!” “어쩜 반도체를 다 조립하오?” “이담 농촌에서 살 애가 아니오.” 회의실에서는 반도체 라디오에서 밤중까지 방송소리가 맑게 울렸다. 다만 우리 조선족들에게 맞지 않는 “둥, 등, 등, 창!” 하며 울리는 본보기극 “홍등기”의 노래 소리가 귀맛을 잃어 아쉬웠을 뿐이었다.           9. 혼돈시대 비극 흐리터분한 하늘은 개일 듯 말듯 하면서 지지리도 개일 줄을 모르고 대지를 침침하게 짓눌렀다. 하늘의 여기저기 구멍이 펑펑 뚫리더니 먹장구름 속에서 가느다란 해 빛이 전지 불처럼 애처롭게 대지를 비추었다. 겨울을 앞둔 패용천산 벼랑 위에는 단풍이 빨갛게 물들었다. 패용천산 기슭 과수원에는 다락 밭을 만드는 일터에는 붉은 기가 펄펄 휘날리었다. 상순은 사원들을 데리고 패용천산 벼랑의 돌을 캐다가 무너진 과수원 다락 밭에 돌 둑을 쌓았다. 허나 종연 대신 대대 혁명위원회 주임으로 된 흥수는 득의양양해 대대 사무실에서 뒤지개를 짓고 왔다갔다 거닐면서 두덜거리었다. “상순은 대체 무슨 궁리를 하는지 모르겠어. 대채 전을 하는데 앞장서? 이전엔 다락 밭의 돌을 허물어 ‘모 주석 만세!’를 새긴다고 야단치더니. 별일이야.” 그는 주춤 멈춰 서더니 손을 휘둘렀다. “그래, 바로 그거야. 자기가 쌓은 과수원 다락 밭 언제를 제대로 만들어 놓기 위한 거야.” 며칠 후 공사 혁명위원회 주임으로 헬기를 타고 직상승한 종연이 잣대를 든 검사소조 일꾼들을 데리고 찌프를 타고 대대 사무실에 나타났다. 그는 흥수를 보자마자 입당소개인이라는 것도 잊은 듯이 훈계부터 시작했다. “함흥 대대에서 대채 전을 몇 헥타르 했소? 사원들은 ‘농업에서 대채를 따라 배우라.’는 모 주석의 지시에 호응해 대채전을 하느라고 눈코 뜰 새 없는데. 흥! 대대 혁명위원회 주임이 사무실에서 빈들거리다니? 쳇!” 그러자 흥수는 종연의 퉁퉁한 낯을 쳐다보다가 “미안하오. 내 밭으로 나가봐야 하겠소.”라고 하며 문 밖으로 나서려다가 돌아섰다. “공사 검사소조에서 왔을 때 반영할 일이 있네. 저 조개덕 생산 대 김 대장이 말이 아닌기여. 정치 수요에 의해 패용천산 과수원 다락 밭에 돌둑을 쌓네 하더니 계수동과 상우지 밭에 대채대대처럼 다락 밭을 만드는 걸 한사코 반대해서 우리 대대 대채전 면적을 완수할 거 같지 않아.” 종연은 검사소조 일꾼들을 둘러보면서 지시했다. “빨리 조개덕에 가서 김 대장을 혼쭐 내주게. 그 영감은 통 말이 들어가지 않아. 고집불통이야. 계급투쟁을 기본 고리로 혁명을 틀어쥐라면 뭐 벽돌공장이요, 양봉장이요 꾸리더니 이번엔 대채 전을 만드는 걸 방해한단 말이오. 정 안되면 파출소 경찰들을 불러다 위협하오. 이게 목전 농촌 정치란 말이오.” 그 말에 흥수는 어깨가 으쓱해 검사소조를 데리고 조개덕으로 달려갔다. 대대 사무실이 조용해지자 종연은 토성 안을 한 바퀴 삑 돌아보았다. 토성 안에는 위생소의 맨발의사 송선 밖에 없었다. 종연은 한숨을 후 내쉬더니 구렁이처럼 위생소에 슬쩍 기어들어갔다. 순간 주사기를 소독하던 송선은 깜짝 놀라 옴찔했다. “누구라고? 놀라 간 다 떨어지겠어요.” 송선이 눈을 곱게 흘기는 모습을 보고 종연은 온 몸에 욕정이 용암처럼 부글부글 끓어번졌다. 그 이글거리는 욕정의 용암은 어데라도 닿으면 당장 타 버릴 것만 같았다. 허나 종연은 20대 중반의 나이와는 달리 아주 노련한 늑대처럼 위생소 안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송선에게 지분거렸다. “저명한 무용수, 의사질하느라고 수고 많소.” “다 이 치보, 아니, 황주임 덕분이지요.” “걸 아오?” “…” “이전에도 말했지만 내 한마디면 송선 동무를 훅 날려 보낼 수도 있고 또 위생소 소장으로 만들 수도 있단 말이오." 송선은 못 들은 척 하고 입에 빗장을 지른 채 주사기 소독만 하고 있었다. 소귀에 경 읽기처럼 멋 적은 느낌을 받은 종연은 뒤로 슬금슬금 다가갔다. 송선은 온 몸에 소름이 끼치면서도 주사기를 소독하는 척 했다. 그때 종연이 뒤에서 불시에 송선의 허리를 와락 끌어안았다. “왜 이래요? 열 살이나 이상 되는 사람과 버릇없이 이게 뭐요?" 뜻밖에도 송선은 몸부림치며 돌아서더니 표독스럽게 쏘아보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대로 놓아줄 종연이 아니었다. 그는 다짜고짜 송선을 마구 안고 침대 쪽으로 떠밀고 가서 쓰러 눕혔다. “이걸 놔라! 소리치겠다! 아유, 이 짐승 같은 놈아! 승냥이야!” 송선은 마구 발버둥질 치며 고함쳤다. 종연은 징글스럽게 웃으며 송선의 얼굴을 마구 뻑뻑 빨고 개처럼 핥아댔다. “미녀무용수, 그대에게 난 미쳤어. 세상 둘도 없는 미인을 놔둘 거 같아?” 송선은 가슴에 손을 마구 넣어 매만지는 종연의 손을 마구 막으며 단말마적으로 반항했다. “사람 살리오! 사람…” 당황해난 종연은 황급히 오른손으로 송선의 입을 틀어막았다. 이때 문소리가 덜컥 났다. 그제야 종연은 스르르 놓아주며 벌떡 일어났다. 그는 능청스럽게 헛소리를 쳐댔다. "김 맨발의사, 짧은 시간 내에 위생소 일을 배워서 참 잘 했소. 계속 잘하오." 송선도 남들의 눈이 두려워 아무 말도 더 하지 않았다. 종연이 스리슬쩍 주사실에서 나와 보니 정규상이 의사실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아니, 당신은 왜 위생소에 드나들면서 시끄럽게 구오?" 정규상은 알은체 하며 “이흥수 주임이 빈농들의 병을 봐달라고 해서 다시 들어왔소.”라고 했다. "뭐라고? 이 서기는 제 마음대로 하는구먼. 내 함흥촌을 떠나간지 며칠이 됐다고 우파를 위생소에 끌어들여? 돼지 똥이나 모으라." 허나 정규상은 못 들은 척 하면서 의사사무실에 들어가 의서를 보는 것이었다. “정 의사를 놔두세요. 그가 없이 어떻게 환자를 봐요?” 송선이 뒤따라 나오면서 우는 상을 짓자 종연은 콧방귀를 뀌었다. “맨발의사라는 게 환자도 보지 못하오?” “감기 같은 거야 주사를 놓거나 정통편 몇 알을 주면 되겠지만요. 이제 겨울철에 들어서면 기관지염이나 폐 염 같은 중병이 돌면 정 의사 없어서야 됩니까?” 허나 종연은 대수로워 하지 않았다. “중병환자가 생기면 공사병원에 올려 보내면 되지.” 종연은 두덜거리며 나가려다가 정의사와 송선을 번갈아 보면서 속으로 혹시 저것들이 서로 좋아하지 않는가는 의심이 부쩍 들었다. 허나 송선의 말대로 위생소에서 윤희와 박영발이 떠나간 후 정규상이 없으면 될 것 같지도 않았다. 다만 흥수가 자기 비준도 없이 정 의사를 위생소에 들여앉힌 것만은 속에 내려가지 않았다. 황종연은 괘씸했으나 별 수 없었다. 토성 안 위생소 앞마당에서 찌프가 부르릉 엔진소리를 요란히 냈다. 찌프는 먼지를 새뽀얗게 일구며 토성 안을 벗어나 곧추 패용천산으로 달려갔다. 황종연이 패용천산 기슭에 이르러 찌프에서 내려 산비탈 밭을 바라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대채 전 같은 다락 밭은 근근이 가파른 과수원에 얼기설기 뻗어 있을 뿐 다른 산비탈에는 찾아 볼 수 없었다. “함흥 대대는 말이 아니구먼!” 종연은 틀스레 뒤짐을 짚고 숱한 사원들이 일하는 비탈 밭으로 올라갔다. 숱한 사원들이 모두 일하지 않고 상순과 흥수가 뭐라고 다투는 것을 구경하는 것이었다. “이게 뭐요?! 모두 일하지 않고!” 종연이 나타나자 흥수는 우쭐해 상순을 손가락질을 하며 야단쳤다. “김 대장은 말이 아니야! 우리 대대 대채 전 면적이 적은 건 다 이 김 대장 탓이야!” 상순은 종연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그래 평평한 밭을 다락밭으로 만들어 못쓰게 만들 게 뭐요?" "모 주석께서 '농업에서 대채를 따라 배우라.'고 한 최고지시를 반대하오?" “누가 반대하오? 과수원 같이 가파른 밭에는 다락 밭을 만들면 수토유실도 막고 좋단 말이오. 허나 평평한 밭을 파서 우정 다락 밭을 만들어 뭘 하오? 손바닥만한 밭이라도 더 일구지 못해 그러는데 뭐요? 숱한 뚝을 만들어 밭 면적을 하나라도 줄일 게 뭐요? 황차 검은 점토를 파서 둑을 쌓고 누런 생흙이 드러나 어떻게 생흙에 곡식을 심어 먹소? 정말 농사를 지은 사람 같지 않소. 우의 지시를 영활하게 집행해야 하지. 그저 밭도 살펴보지 않고 대채 전 면적만 늘여서 되오?!” 그 말에 사원들은 모두 머리를 끄덕이며 수군거리었다. 그러자 종연과 흥수는 서로 눈치를 마주 보면서도 할 말이 없었다. 한참 후에야 종연이 퉁퉁한 낯에 살기등등해 입을 열었다. “상급에서 하라면 할 게지. 무슨 잔소리가 이리 많습니까? 가만 보니 함흥대대 대채 전 문제는 지도부의 사상인식문제구먼. 허허. 이거 참. 대채 전 면적을 검사소조에서 검사해보면 어느 대대 인식이 어떤가 알 수 있단 말이오." 그는 아주 역게 상순과 흥수 어느 쪽에도 서지 않았다. "먼저 사상인식을 바로 잡고 통일해야겠구먼. 상급에서 하라면 하시오. 이게 당전 농촌의 최대정치란 말입니다. 이 숱한 사람들이 하루에 한 헥타르도 대채전을 못하고서야 어찌 얼기 전에 대채 전을 다 만들겠소?" 그는 본보기극 "홍등기" 중의 주인공 리옥화처럼 높은 둔덕에 올라서더니 지도자 틀을 차리며 손까지 흔들어대면서 고래고래 고함쳤다. “날마다 한 헥타르씩 대채 전을 꼭 꼭 만드십시오. 상급에서 명령하면 무조건 해야 합니다.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면 정치책임을 추궁하겠습니다.”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다가 종연이 손을 홱 젓자 물을 뿌린 듯이 조용해졌다. 황종연은 개 잡은 포수처럼 우쭐해 고래고래 고함쳤다. “함흥 대대 이름부터 조선의 이름을 달아서야 되겠습니까? 이제부터 함흥대대는 5.7대대로 이름을 고쳐야 하겠습니다. 우리 대대에서 모주석의 5.7지시를 잘 호응해 대채전을 잘 만든다는 것을 보여줘야 하겠습니다. 대대 이름부터 5.7대대로 고치겠습니다. 함흥중학교 이름도 5.7중학교로 고치겠습니다.” 이계삼이 뒤에서 허영주를 마주 보면서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우에서 5.7간부학교를 꾸리더니 이젠 우리 대대마저 5.7대대로 바꿀 예산이구먼. 흥!” 허영주도 나직이 맞장구를 쳤다. “쳇, 죄꼬만 반란파 애가 올라가더니 온통 빨갛게 물들이는 판이구먼. 어쩜 삐뚠 정치를 해도 저렇게 하오?” 상순은 어이없어 종연을 쏘아보았다. “우리 대대 이름을 고치지 못하오. 이 함흥촌은 우리 조상들이 정든 고향을 떠나 쪽박을 차고 이 고장에 온 후 개척한 마을이오. 모두 고향을 그리는 마음을 담아 함흥촌이라고 이름을 달았소. 헌데 젊은이들이 과거 전통을 모르고 이러는 건 틀리오.” 종연은 목에 지렁이 같은 핏줄을 세우고 을러멨다. “영감이, 뭘 알아 처처에서 혁명을 반대한단 말인가? 공사당위 서기이신 내가 고친다고 하셨으면 고치는 거지. 오늘부터 5.7대대, 5.7중학교로 부르라. 누가 반대하면 누굴 투쟁하겠소." 허나 여기저기서 계속 웅성거렸다. 이계삼과 허영주의 격분한 눈길까지 부딪치자 종연은 감히 상순을 건드리지 못하고 화제를 돌렸다. “오래지 않으면 눈이 내리겠는데 모두들 다그쳐 대채전을 만드십시오. 하루에 한 헥타르씩은 해야 임무를 완수합니다. 지금 함흥대대, 아니, 5.7대대는 대채전 만들기 전역에서 제일 꼴찌입니다.” 허나 상순은 종연이가 비판한다고 해도 결코 시비에 지고 말 사람이 아니었다. 할 말은 해야 했다. “채 걷어 들이지 못한 곡식이 가득한데 언제 평지에까지 다락 밭을 만드오? 이제 곡식을 눈 밑에 파묻으면 나라에 어찌 애국 곡식을 바치겠소? 사원들은 또 허리띠를 졸라매고 살라오? 좀 엄동설한에 한지에 방아를 걸 소릴 작작 치오!” 종연은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김 대장은 언제부터 정치는 불문하고 생산 밖에 모르는 사람으로 됐습니까? 공안국 국장까지 해본 사람 같지도 않게. 쯧쯧쯧.” 그러자 상순은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았다. “종연아, 개구리로 됐노라고 올챙이 때를 잊어선 안 된다. 지금 누구 앞에서 버릇없이 빈정거리느냐?” “뭣이랍니까?!” 종연은 숱한 사람들 앞에서 자존심이 꺾였지만 더 망신당할 것 같아 네모난 낯이 수수떡처럼 지지벌개 자리를 떴다. “어디 두고 봅시다! 흥!” (어 참, 오늘은 재수 없어. 송선과 상순에게 연속 당하고!) 종연은 더 할 말이 없다는 듯이 뒤지개를 짚고 둔덕에서 내려 공사 검사소조를 데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휑하니 산 아래로 내려갔다. 이계삼과 허영주는 속이 시원해 희죽이 웃었다. 종연도 상순을 어쩌지 못하자 흥수는 상순과 이계삼의 눈치를 흘금거리다가 종연의 꽁무니를 따라 달려 내려갔다. “황 주임, 황 주임!” “어째?” “회보할 일이 있네.” 종연은 홱 돌아섰다. “뭘?” 흥수는 머리를 되돌려 상순이네와 멀리 떨어진 것을 확인한 후에야 조개턱을 들더니 입을 열었다. “저 김 대장네 말이 아니네. 아비는 대채 전에 소극적이고 아들은 나서서 자기 아비 한 일을 방송에까지 내면서 야단이란 말이제이.” “무스 거(뭘)?” 황종연은 금방 잠에서 깨난 사람처럼 어리둥절해 했다. “어째 아직도 몰라? 덕돌은 조개덕 생산 대에서 벽돌공장을 꾸려 새 농촌건설을 잘 했다고 부쩍 춰올리는 글을 써서 공사 방송에까지 냈제이. 사원들이 다 듣고 덕돌을 그 아비에 그 아들이라고 하늘 공중에 뜨게 춰 올렸다니까.” “허, 세상에, 덕돌이 말성꾼이더구먼, 벌써 그렇게 컸는가?” “허, 정말, 황서기도 희구해 하는 거 같네 그려.” “이 서기, 나처럼 발랑거리던 애들이 이담 큰 일을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반란 파들이 득세하는 세월이니까. 반란에 도리가 있지.” 종연은 대대 혁명위원회 주임을 할 때 상순이가 벽돌공장을 꾸려 대대 사무실을 짓고 새 벽돌집을 지어 사원들을 들게 한 성과를 자기 성과로 만들어 공사 파출소 소장으로 올라갔고 이젠 공사당위 서기 겸 혁명위원회 주임으로 됐다. 그 사실을 흥수도 알고도 남음이 있었다. 황종연은 흥수의 외까풀 눈을 되돌아보며 물었다. “정규상, 그 우파는 어째 위생소에 들여보냈습니까?” “누가 병을 보겠어? 송선은 춤이나 잘 추겠지만 병이야 볼 수 있나?” 순간 종연은 금방 위생소에서 당한 일이 떠올라 가만 놔둘 수 없어 한입 꽉 깨물었다. “송선을 어찌 위생소에 계속 둔단 말입니까? 대채전을 하는 공지에나 보내시오. 위생소에는 정의사만 있어도 됩니다.” “불시에 왜?” “병도 볼 줄 모르는 여자를 위생소에 둬서 뭘 하오?” 흥수는 코웃음이 킬 나왔다. 하마터면 종연의 앞에서 콧물까지 튕길 번했다. (이 자식이 송선에게 코를 떼인 모양이구나. 안 글면 자기가 금방 위생소에 걷어 넣고 또 내치려 하겠나?) 흥수는 늙은 여우어서 인차 종연의 심사를 꿰뚫어보았던 것이다. (자식, 아직 이 어른도 송선이, 그 미녀를 먹어보지 못했어. 네가 제 어미 벌 되는 송선에게 다 눈독 들여? 더러운 놈 새끼.) 흥수는 종연이 찌프를 타고 먼지를 새뽀얗게 일구면서 떠나 가버리자 인차 토성 안에 들어가 위생소 문을 떼고 들어섰다. “이 주임, 어떻게 돼 오셨어요?” 송선은 흥수를 보자 인사했다. 그 목소리 어찌나 부드러운지 한쪽 간이 다 녹아떨어질 지경이었다. 흥수는 돌아서서 환자에게 주사를 놓는 송선의 뒷모습을 보면서 마른 침을 꼴깍 삼키었다. 하얀 위생복을 입은 탄력 있는 엉덩이를 보는 순간 흥수는 온 몸에 정욕이 끓어 사품 치는 것을 어찌 할 수 없어 온 몸을 바르르 떨었다.습관처럼 박죽코가 벌써 지지벌개졌다. “음, 어험.” 흥수는 환자가 일어나 가기를 기다려 주사실 문을 걸고 송선에게 다가섰다. “에헴, 송선이, 이제 금방 황주임이 동무 땜에 나하고 노발대발 하고 갔어.” “예?” (아무려면 이 영감과 말했을까?) 흥수는 적이 놀라는 눈치인 송선을 흘금 곁눈질하더니 창밖을 내다보았다. “황주임은 저를 대채전을 만드는 공지에 내보내라고 하더구먼.” 송선은 주사기를 씻어 소독 가마에 넣으면서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흥수는 이때라고 생각하고 창문 카텐을 주르륵 닫아버리고 송선에게 돌아섰다. 새파랗게 질린 송선의 얼굴을 보는 순간 박윤희처럼 마구 끌어안고 우유 빛처럼 하얀 얼굴이고 말랑말랑한 가슴이고 마구 빨고 핥아주고 싶었다. 허나 마른 나무 꺾듯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잘 아는 흥수였다. 마른 침을 꿀꺽 삼키면서 억지로 가까스로 눅잦히며 다가섰다. “송선이, 내 말만 고분고분 들어. 글면 황주임이 아무리 어쩔락꼬 해도 내 말이면 다야. 박윤희랑 어떻게 올라갔는지 알아? 이 복잡한 세월에 무슨 재간에 코신부대 부녀대장이 3년 만에 현행반혁명 모자를 벗고 시내 병원으로 돌아갔겠어?” 슬슬 구슬리며 흥수는 송선의 뒤로 가서 허리를 끌어안고 가슴에 손이 쑥 들어갔다. 탄력 있는 따뜻한 가슴을 움켜쥐는 순간 온몸이 전율했다. 허나 뜻밖에도 송선이 홱 돌아서며 몸부림쳤다. 찰싹! “개 같은 놈새끼! 나를 어떻게 보고 감히 이 지랄이냐?!” 뜻밖에 귀 쌈까지 한 대 얻어맞은 흥수는 개꼴 망신을 당했다. “좋다, 좋아!” 흥수는 분통이 터져 주사실 문고리를 쥐고 을러멨다. “좋다, 좋아! 권하는 술을 마시지 않고 어디 벌주를 마셔봐! 내일부터 당장 조개덕 생산대에 내려가 곡식 실어들여! 네 년, 노동개조하면서 혼 나봐야 순종할 거냐! 이 함흥 대대, 아니, 5.7 대대에서 나를 모르고 네까짓 거 개똥이나 생길 거 같아?! 흥!” 흥수가 주사실 문을 쾅 닫고 나간 후 송선은 어깨를 들먹이며 흐느껴 울었다. 건너 칸에 있는 정규상은 벽 너머 이쪽 칸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대개 짐작하고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었다. 그는 의사 사무실에서 흐리터분한 하늘에서 무너져 내리는 듯이 푸실푸실 내리는 눈송이들을 내다보며 중얼거리었다. “언제 이놈의 암흑한 세월이 끝날까?” 이튿날 아침 송선은 위생소에서 쫓기어 나와 조개덕 생산 대로 내려왔다. 상순은 일 포치를 받으러 회의실에 들어서는 송선을 보고 놀라했다. “어째 위생소에 가지 않고 여기 왔소?” “이흥수 주임이 노동개조해랐어요. 차라리 잘 됐어요. 위생소에서 굴욕을 당하기보다 대전에 나가 일을 왕왕 했으면 속이 덜 탈 거 같아요. 아무 일이나 시키세요.” 상순은 송선의 여린 몸을 보며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었다. “어떻게 일하겠소?” 상순은 한참이나 눈을 지그시 내리감고 앉아 궁리했다. 이윽고 그는 머리를 들더니 상의조로 물었다. “대전 일이야 어떻게 그 약한 몸으로 하겠소? 우사에서 돼지죽이나 끓여 먹이면 어떻소?”   송선이 반색을 하면서 “고맙습니다. 해보지요.”라고 했다. “안돼!” 이때 별안간 회의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흥수가 조개턱을 쳐들고 뛰어 들어오며 고함쳤다. 그는 낯이 퍼래 뎅뎅해 왁작 고아댔다. “노동개조를 시킬 년을 슬슬 어루만져서야 되는가? 오늘부터 눈 속에 가서 소 수레로 곡식을 실어들이란 말이야! 이건 공사 황주임과 대대 혁명위원회 주임인 내 결정이야! 누가 감히 뜯어고쳐?!” 상순은 어처구니없어 푸 하고 코웃음을 참지 못해 콧물과 침방울까지 튕겼다. “바로 대왕페하의 명이겠구먼. 별 것들이 다.” 그는 흥수를 멸시하는 눈길로 쏘아보며 일을 포치했다. “여긴 조개덕 생산대지. 당신들 5.7대대가 아니오. 김송선 동문 오늘부터 우리 생산대 돼지 사양원이오. 누구도 다치지 못하오.” “조개덕 생산 대는 그래 우리 5.7대대 생산 대 아니고 하늘에서 뚝 떨어진 생산대오?‘ 흥수도 숱한 사원들 앞에서 지려고 하지 않았다. “현행반혁명분자 송선은 오늘부터 소 수레로 곡식을 실어 들여! 내 말을 듣겠는가? 듣지 않겐?!” 상순은 코웃음 쳤다. “이 주임은 농사를 지어 본 사람 같지 않구먼.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는데 싣걱질을 어떻게 하오?” “저런 노동개조범에겐 눈 내리는 날에 싣걱질을 시켜 혼내야 돼! 김 대장은 왜 처처에서 나와 맞서? 어제는 대채전을 하지 못하게 하더니 오늘은 또 현행반혁명분자를 노동개조를 시키지 못하게 보황 파로 나서는 거야?!” 상순이 뭐라고 반박하려는데 송선이 썩 나섰다. “해 보겠습니다. 다 사람이 하는 일이겠지요.” 상순은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사람이나 소나 다 죽이겠소? 안 되오." 그는 흥수를 소아보았다. "어째 이전에 윤희 간호사를 혼내던 것처럼 혼내자고 그러오? 사람이. 원, 이 주임은 황주임처럼 철부지애도 아닌데 왜 그리 철이 없이 노오?” 항일전쟁시기로부터 해방전쟁, 항미원조 전쟁 기간과 해방 후에 오래 동안 부대와 공안국에서 지도사업을 해온 상순의 눈을 속일 수 있겠는가? 상순은 이미 황종연과 흥수의 더러운 소박치를 속속들이 꿰뚫어보고 있었다. 허나 근거를 잡지 못해 잠시 가만 놔두고 있었다. 이때 흥수의 동생 학수도 말리었다. “흥수, 그만 둬. 이 눈 가슴에 어데 가서 곡식을 실어 들인다고 그래? 사람이 도리 있게 놀아. 괜히 인심을 잃지 말고!” 성수도 못 마땅한 눈길로 흥수를 바라보며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숱한 사원들 앞에서 흥수는 더 창피당할 수 없었다. 그는 사원들을 둘러보더니 불시에 목에 핏대를 세우고 고함쳤다. “지금부터 현행반혁명분자 순선의 투쟁대회를 하겠수.” 송선은 흥수를 흘겨보았다. 눈귀에서 “별 더러운 새끼!” 하는 표정이 흘렀다. “뭐라오?” 상순은 너무 어처구니없어 회의실 문을 쾅 걷어차고 나가버리었다. 흥수는 상순이 가겠으면 가고 놔버리고 송선에게 도끼눈을 날렸다. “반혁명분자 송선은 앞에 나섯!” 누구의 명이라고 나서지 않고 배기겠는가. 대대 혁명위원회 주임이자 치보 주임인 흥수가 아닌가. 사원들은 흥수의 눈치를 흘금흘금 보며 웅성거리며 송선의 앞에 모여섰다. 흥수는 개 잡은 포수처럼 우쭐거리며 고래고래 고함쳤다. “현행반혁명분자 송선은 우리 함흥대대, 아니, 5.7대대에 온 후 개조 표현이 나쁘다. 위생소에 떡 들어앉아 해놓은 일이 뭔가? 의료지식이 없어 병도 제대로 보지 못했다. 대대 혁명위원회 주임의 말도 제대로, 엉, 험.” 흥수는 말 뒤끝을 얼버무리며 마른기침을 깇었다. 자기 말을 잘 듣지 않은 게 주요 투쟁내용을 만들면 꼬리가 드러날 것 같았던 것이다. 그는 인차 투쟁내용을 바꿨다. “저 년 발을 보슈. 이게 어느 때락꼬(때라고) 코신을 신고 다니오? 조선족들 코신을 보고 문화대혁명 시기에 코신 코가 오똑 일어선 건 조선족들이 독립하려고 만든 게라고 하지 않았소? 독립왕국을 진짜 꾸리려는 건가? 그런데 아직도 코신 신고 다녀. 이제부터 우리 대대 조선족들은 코가 오똑한 코신을 신지 못해. 괜히 독립왕국을 꾸리련다는 혐의를 쓰지 말라고.” 그때 박성근의 아들 숭길이 물었다. “그래 이제부터 조선족들은 무슨 신을 신어야 하오?” “우파 애비에 그 아들이구나. 코가 없는 검정고무신을 신으라고!” 사원들 속에서 웅성거렸다. "어떻게 검정고무신을 신고 다니오?” "보기 싫게스리." 흥수는 숭길을 외까풀 눈으로 쏘아보았다. “이 놈들아! 말조심해! 괜히 숭길이 아비 성근처럼 우파 모자를 쓸란다(쓰갰다).” 숭길은 혀를 홀랑 내밀더니 사원들 속으로 뒤로 물러섰다. 흥수는 건가래를 떼더니 계속 송선을 투쟁했다. “상모춤은 항상 머리를 가로 돌리지 않아? 문공단 상모춤 추는 걸 보고 우리 반란파 두목, 아니, 반란파 책임자 모원신, 아니, 이씨께선 저게 당과 사회주의가 나쁘다고 머리를 가로 젓는 게 아닌가고 비평한 적이 있어. 그런데도 현행반혁명분자 송선은 우리 대대에 온 첫날부터 상모춤을 추었고 우리 대대 문예선전대를 데리고 계속 머리를 가로 젓는 상모춤을 췄네. 왜 혁명적 본보기극을 내놓고 항상 우리 조선족들의 케케 묵어빠진 상모춤만 춰? 이게 모주석의 문예노선을 반대하는 게 아니고 뭔가? 이전에도 송선은 문공단에서 수정주의 물건짝들을 극력 주장하고 자본주의 썩어빠진 생활방식을 선전했지. 예, 글케(그렇게) 돼 현행반혁명 모자를 쓰고 우리 대대에 노동개조를 하러 내려왔는기여. 개조 표현이 아주 나쁘단 말이오.” 그때 이계삼은 옆에서 허영주가 한어로 통역해주는 말을 듣고 손사래를 쳤다. “아니오. 반대의견이 있소. 우리 한족간부들이라고 다 상모춤을 반대한 건 아니오. 상모 춤은 문화대혁명 전에도 조선족들이 즐겨 춘 춤이오. 지어 항일전쟁 때에도 풍년 든 농촌에서 상모 춤을 추었소. 내 알건대 상모춤은 예로부터 조선족들이 즐겨 춘 전통춤이오. 상모 춤이 본래 긴 댕기를 돌리느라고 머리를 돌린 거지. 당과 사회주의를 부정해 머리를 가로 흔든 게 아니오. 송선 동무를 너무 혹독하게 굴지 마라…” “뭘 알아 삐쳐?! 늙어 빠진 영감이, 어째 투쟁받기 싶어?” 흥수가 악을 딱딱 썼지만 허영주까지 나섰다. “상모춤을 췄다고 비판, 투쟁하는 건 잘못이오. 쩍 하면 우파요, 현행반혁명이라고 억울한 모자를 씌우는 건 착오란 말이요.”   그 바람에 회의실은 송선의 투쟁대회인 것이 아니라 흥수를 공소하는 공소마당처럼 돼버렸다. 흥수는 사원들마저 웅성거리자 회의를 부랴부랴 끝마쳤다. “모두 일이 바쁘겠는뎁쇼(데요). 오늘 회의 이만. 모두 일하러들 가라고.” 말을 마치자 흥수는 회의실 문을 쾅 걷어차고 나가 버렸다. 그가 맥없이 조개덕을 떠나 펑펑 쏟아지는 눈을 맞으며 한족묘지꺼리를 지나 함흥대대 마을로 올라갔을 때다. 지춘실이 눈 속을 헤치며 헐레벌떡 달려와 죽는 상을 했다. “여보, 어데 갔소? 해월이 다 죽어 가는데.” “뭐라고? 해월인 왜 갑자기?” “걔가 자꾸 골이 아프다고 했잖소? 그런데 골암이라오.” 춘실이 울상을 했다. “뭐라고? 누가 암이랬어?” 흥수는 믿어지지 않아 머리를 절레절레 가로 흔들었다. 춘실은 죽어가는 소리를 질렀다. “아이고, 정의사 진단했소. 골에 암 덩어리 생겼다고.” “정 우파 노동개조 하고 싶어 지랄이야. 누굴 위협해? 어림도 없어. 펀펀한 애가 어떻게 골암 걸려?” 춘실은 흥수의 가슴츠레 뜬 외까풀 눈에 삿대질을 해댔다. “어이구, 어이구, 정의사가 누구요? 시내에서도 이름난 의학교수야, 교수. 정 교수가 틀림없이 암이라는데.” 그제야 흥수는 울상을 지으면서 토성 동쪽을 굽이돌아 황급히 집으로 달려갔다. 그가 집안에 들어가 보니  해월이 머리를 붙안고 뺑뺑 맴돌고 있었다. “얘, 해월아, 아이고, 내 귀여운 막내딸아, 어디 아프니? 어디 보자.” 흥수는 구들에 올라가자마자 해월을 끌어안고 머리를 매만지면서 눈물을 흘렸다. “이게 무슨 날벼락인고? 아이고, 내 딸아.” “작작 남과 악한 짓 하오! 죄를 만나지 말게.” “뭐, 이 년아? 내가 악해 해월이 암에 걸렸어?” 울던 해월은 아버지를 활 밀어놓으며 야단쳤다. “뭐라고? 내가 암에 걸렸어?  아직 시집도 가보지 못했는데 암에 걸려 죽어? 아이고, 엄마, 난 사랑하는 사람을 가슴에 품고 이날 이때까지 살았는데 어쩌오? 암에 걸려 그한테 시집가지도 못하고 죽게 생기지 않았소?” 춘실은 흥수에게 주먹을 내둘렀다. “쓸데없는 소리를 해서 애를 겁 먹이오?” 그녀는 눈물을 훔치면서 해월을 끌어안고 다독였다. “해월아, 넌 죽지 않는다. 마음에 드는 총각한테 꼭 시집 보내줄게.” “옳소.” 엄마의 그 말에 해월을 울음을 딱 그치더니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을 떴다. “엄마, 나도 아오. 오래 살지 못한다는 거, 골이 뜨끔뜨끔 빠개지는 거 같소. 난 덕돌을 사랑하오. 덕돌은 첫사랑이오. 덕돌한테 시집보내주오. 양? 내 죽기 전에 소원을 꺼주오.” “뭐라니?” “뭐? 누굴 사랑한다고?” 흥수와 춘실은 서로 마주 보며 덴겁해났다. 허나 해월의 철색얼굴에 헤 벌린 입에서 울리는 분명한 소리. “덕돌을 우리 집에 데려오오. 빨리, 난 그 애를 죽도록 사랑한단 말이오.” 춘실은 기막혀 입을 딱 벌렸다. “왜 하필이면 딱 덕돌이냐? 세상에 둘도 없는 발개돌이를.” 흥수는 어이없어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음~ 음, 세상 몹쓸 놈을 좋아해? 안된다, 안돼.” 해월은 또 머리를 붙안고 구들에 들누워 땔땔 굴며 떼를 썼다. “아버진 나빠, 무슨 원수 졌다고 항상 덕돌 아버지와 싸워? 난 덕돌 아버지 대공무사하고 사원들 잘 살게 하는 훌륭한 시아버지 감으로 보는데. 다시 덕돌 아버지를 노엽혀 봐라. 내 저 토성아래 우물에 빠져 저 앞집 덕성 할아버지처럼 죽어버리겠어. 당장 내 신랑 덕돌을 데려오오. 엉, 엉, 엉.” 춘실은 구들에 훌 물러앉아 엉덩방아를 찧으면서 난감해 했다. “이 일을 어쩌오? 하필이면 덕돌이야?” 토성 아랫집에서는 해월의 통곡소리와 어시들의 울음 섞인 난감한 목소리가 그칠 줄 몰랐다. 흥수는 토성 안에 달려가 정규상을 보자마자 두 손을 잡고 “제발 우리 해월을 살려주오.”라고 빌고 또 빌었다. 정규상은 항상 자기를 흘겨보던 흥수의 외까풀 눈을 눈귀로 쓸어보았다. “남과 작작 악한 짓 하오. 이계삼 서기랑 허영주 부현장이랑 내랑 작작 투쟁하고 비판하란 말이오.” 그러자 흥수는 머리를 숙이고 속으로 “바로 그거구나.” 하고 이를 갈았지만 겉으로는 인차 헤헤 웃었다. “아, 알았네. 해월이만 살려주게. 정 우파, 아, 아니, 정 교수님.”      규상은 못이기는 척 하면서 흥수네 집에 가서 진맥도 해보고 해월의 머리에 침도 놓아주었다. 이윽고 해월은 골을 붙잡고 울지 않고 누워 잠에 곯아떨어지는 것이었다. 후에도 정의사가 침을 놓고 약을 달여 먹이었더니 해월은 그때만은 골이 아프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한편 상순은 펀펀하던 해월이 불시에 암에 걸렸다는 말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는 토성 안 위생소에 들어가 정 의사에게 물었다. “해월이 암에 걸렸다는 말이 정말이오?” 그러자 정의사는 희죽이 웃으면서 입귀로 이런 말을 얼버무려 나직이 흘렸다. “차차 알게 될게요.” 상순은 한숨을 후 내쉬었다. “어쩜 귀여운 애가 암에 걸린단 말이오?” 그러자 정규상은 “암이란 것도 집안에 악한 사람이 있으면 걸리는 법이오.”라고 했다. 상순은 아무리 흥수가 악한 짓을 해도 해월이 암에 걸린 건 불쌍하고 동정심이 갔다. 상순은 성질이 팩하고 과격했지만 원래 동정심도 많고 심성이 착했다. 위생소에서 나온 그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수호와 상지민을 공안국 류치소에 가둬 두고 노동개조를 시키는 것이 일이 아니라고 생각됐다. 황련지는 굴내를 먹은 후 상순이네 집에 있으면서 정규상의 치료를 받고 많이 나았다. 하지만 쌀이 귀한 세월이라 옥수수쌀에 푸성귀나 겨우 먹으면서 영양보충을 제대로 하지 못해 몸을 인차 춰 세우지 못했다. 게다가 남편마저 감옥에 가 있기에 충격을 받아 심란해 건강이 의연히 좋지 못했다. 궁리 끝에 상순은 흥수와 토론하지도 않고 현 공안국 류치소에 찾아갔다. 그는 책임자를 만나 사정얘기를 죽 하고나서 “제가 잘 교육하지 못해 이렇게 됐습니다. 이제 우리 생산 대에서 책임지고 잘 교육하겠습니다. 황차 상지민과 수호는 모두 재교육대상이 아니고 뭡니까? 병을 치료해 사람을 구해야지 않겠습니까?”라고 했다. 그러자 한참 궁리하던 류치소의 책임자는 무거운 입을 뗐다. “현행반혁명을 어떻게 놔 보낸다고 그럽니까? 또 이 일은 저 혼자 결정할 수 없습니다. 황종연 상급 혁명위원회 주임과 물어봐야 합니다.” 상순은 어이없어 했다. “아니, 공안국과 법원에서 하는 일을 왜 혁명위원회에 물어봐야 하오.” “지금은 혁명위원회가 일체를 영도하지 않습니까? 법원과 공안국도 혁명위원회 주임의 지도를 받아야 합니다.” 이때 뜻밖에 사무실에 웬 중년 경찰간부가 들어왔다. 류치소 책임자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인사했다. “김 국장 왔습니까?” 그런데 그 김국장이란 경찰간부가 상순을 찬찬히 보더니 놀라했다. “아니, 김국장이 아닙니까?” 그 경찰간부는 상순을 보고 아주 반가와 했다. “아니, 누구던가? 면목은 좀 있는데.” 상순이 걸상에서 일어나며 어리벙벙해 하자 그 경찰간부는 상순의 두 손을 잡았다. “김 국장, 저는 영월구 공안국에 있을 때 치안과장을 하던 김창남입니다.” “어, 창남인가? 그래. 참 오랜만이구먼. 여기서 무슨 사업을 하오?” 그러자 류치소의 책임자가 “새로 전근해온 우리 공안국 부국장입니다.”라고 했다. 그러자 김창남 국장은 “그때 영월구 공안국에서 김국장이 과장으로 제발시키지 않았더라면 오늘 제가 이 자리에 있겠습니까?”라고 하며 이왕지사를 이야기하며 감구지회에 잠겼다. 한참 후 상순은 창남 국장을 보고 부탁했다. “마침 잘 됐소. 우리 대 상지민과 수호 문제로 찾아왔는데 우리 생산 대에서 교육하게 놔주오.” 김창남 국장은 궁리하더니 결단성 있게 대답했다. “좋습니다. 아직 상지민과 수호네는 나이 어려서 일시 잘못했기에 적아모순까지는 아닙니다. 아무튼 병을 치료해 사람을 구하는 것이 우리 무산계급 전정의 목적이 아니겠습니까? 빈농이 없으면 혁명도 없습니다. 우린 김 국장을 믿고 그 애들을 내보내겠습니다. 1년 동안만 지방 관제를 합시다. 그래도 개조하지 못하면 다시 류치소에 데려오든지 그때에 가서 봅시다.” “감사하오. 꼭 책임지고 잘 교육하겠소.” 그러나 류치소 책임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김창남 국장을 바라보면서 근심했다. “김 국장, 황주임한테 회보하지 않고 되겠습니까?” “류치소 노동개조 대상은 뭐 법원에서 판결한 범죄자도 아니고 정치사상개조 대상이기에 우리 공안국에서 결정할 수 있소. 어떻게 사사건건 다 황주임에게 회보하겠소? 이 김 대장은 영월구 공안국 국장을 한 분이오. 근심 말고 내보내오. 사상 개조가 목적이지 류치소에 가두는 것이 목적이 아니오. 내보내는 게 그들의 개조에 유리하오. 류치소에 가둬두면 그들은 개조는커녕 사회에 악감을 가질 수도 있소.” “예, 알았습니다.” 그 책임자도 더 말하지 않았다. 그날로 상순은 류치소에서 상지민과 수호를 데리고 나왔다. 그들은 숱한 행인들이 오가는 큰 길에서 오래간만에 만난 부모 자식처럼 서로 끌어안고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상순은 아주 거뿐한 마음으로 그들 둘을 소수레에 싣고 마을로 돌아왔다. 수호는 상순이네 집에 와서 아내 황련지를 보는 순간 와락 끌어안고 엉엉 울었다. 뒤이어 황련지에게서 자초지종을 듣고 그간 자기 아내를 친딸처럼 보살펴준 상순에 일가에게 절을 하며 감사를 드렸다. “정말 감사합니다. 제가 꼭 노동을 잘해 김대장이 시름 놓는 훌륭한 지식청년으로 되겠습니다.” 상지민도 상순의 인정미에 눈물을 흘렸다. “김 대장은 우리 상해지식청년들의 친부모와 같은 분입니다. 우린 김 대장의 얼굴을 봐서라도 다신 말썽을 일으키지 않겠습니다.” 상순은 상지민과 수호네 부부를 친자식처럼 자기 집에서 계속 묵게 하면서 이제 봄이 돌아오면 집체 호와 수호네 집을 벽돌집으로 지어주겠다고 사원대회에서 결정했다. 그리하여 수호와 상지민, 황련지는 마을에 마음을 붙일 수 있게 됐다. 다른 상해지식청년들도 감동돼 상순의 말이라면 아주 잘 들었다. 상지민은 덕돌을 보고 “만약 누가 너를 업신여기기만 하면 말해라. 내 싹쓸이를 해 줄테다.”라고 했다. 덕돌은 상지민의 외국인 같은 쌍까풀 눈을 쳐다보았다. “감사하오, 상해 형님.”  덕돌은 상지민 형님이 싸움꾼 친구가 몇 십 명이 나 되는 우두머리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어 피뜩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상지민 형님, 한 가지 도와주겠소?” “뭘? 말해라. 도와줄게.” 덕돌은 자기 집 주위를 둘러보며 나직이 말했다. “이건 우리 아버지 알면 안 되오.” “그렇게 심각해?” “양.” “대체 뭔데?” 덕돌은 상지민을 한쪽으로 팔소매를 끌고 가서 말했다. “형님에게서 상해 권투나 무술을 배우고 싶소. 형님네 상해로 간 다음에 내 맞아대면 누구한테 말하겠소?” “음, 그것도 맞아. 내 오늘부터 상해 권투와 검술을 배워 줄게.” 말을 마치자 상지민은 덕돌을 데리고 상해집체호로 갔다. 그는 침실에 들어가 침대 밑에서 시퍼런 대도를 꺼내 찌르고 찍고 쒹쒹 휘둘러보였다. “어때? 배울래?” “양, 그리고 형님, 형님은 외국어랑 잘 한다던데. 내께 일어를 좀 배워주겠소?” “응? 걸 배워 뭘 해? 괜히 소문나면 나처럼 비판 받자고? 뭐, 서양의 달이 더 밝다 했다고.” “겁나지 않소. 누구도 모르는 일어를 배워두면 이담 남들이 못할 일을 할 게 아니오?‘ 그러자 상지민은 덕돌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면서 기특해 중얼거렸다. “어쩜 이 시골에 이런 애가 다 있냐? 넌 다른 시골 애들과 다른 뭔가 있고나. 그래, 내 너헌테 일어도 배워주지.” 덕돌은 그날부터 이른 아침이면 동녘이 희붐히 밝으면 상지민을 따라 장개골 안에 들어가 권투와 검술을 배웠다. 그리고 눈이 와서 일을 하지 않는 날에는 상해 집체호에 가서 가만히 일어를 배웠다. 상지민과 수호 네는 음력설에 집으로 갔다가 돌아올 때면 상해 라면이나 갈치, 물고기를 가득 사다가 상순과 마을 사람들에게 나눠주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 비준도 없이 상지민과 수호를 감옥에서 내왔다고 떠들어댄 흥수네 집에는 국수 오리 한 오리도 가져다주지 않았다. 해월이가 앓아도 상순을 내놓고 암이 옮는다고 누구도 병문안을 가지도 않았다. 어느 날, 상순은 덕돌을 보고 타일렀다. “얘야, 해월이 암에 걸려 죽는다 만다하는데 찾아가 문안해라.” “에이고, 해월이 아버지 도처에서 아버지 허물을 하는데 뭐 떼문에 문안해야 합니까?” “그래도 사람이 어찌 인정을 저버리겠니? 혹시 네가 찾아가보면 해월이 병이 낫겠는지 가봐라.” 덕돌은 아버지가 어찌나 해월을 찾아가서 병문안을 하라고 하는지 가기 싫은 대로 억지로 찾아갔다. “해월아, 덕돌이 왔어.” 춘실이 말하자마자 해월은 위방에서 울던 울음을 뚝 그쳤다. “어디, 어디 왔어? 내 사랑 덕돌이.” 덕돌은 흉측하게 눈이 쑥 꺼져 들어가고 마른 해월의 몰골을 보는 순간 온 몸이 오싹해났다. “해월아, 어떻니?” “응, 괜찮아. 너를 보니 병이 다 나은 거 같애. 이젠 부끄러운 게 없다. 난 너한테 시집가려고 했는데 이게 무슨 꼴이냐?” 해월은 덕돌을 보자 발딱 일어나 팔소매를 꼭 잡아 이불 쪽으로 끌어당겼다. “여기 앉아라. 내 고중에 가지 못했지만 너도 봐라. 고중에 가 배운 게 뭐야? 너도 마을에 돌아와 소 궁둥이를 치게 되지 않는가 봐라.” 춘실은 미닫이를 닫고 나가고 덕돌은 멀찍이 앉았다. 그러자 해월은 빨갛게 질린 얼굴에 서운함이 물결쳐 지나갔다. “왜 암이 전염될까봐 그러니? 일없다. 정의사 그러는데 암은 전염되지 않는대.” “그래 어떻게 하나 병을 치료해라. 넌 꼭 건강을 찾을 수 있다.” “그래, 너만 내 옆에 있어주면 난 살아날 거 같다.” 해월은 불시에 덕돌을 와락 끌어안더니 나누웠다. “왜 이래?” 덕돌은 깜짝 놀라 해월을 슬쩍 밀어놓았다. 허나 해월은 단말마적으로 덕돌을 놓으려고 하지 않고 얼굴을 비비며 애원했다. “덕돌아, 나도 알아. 제발 날 한번만이라도 여자로 만들어주면 안되니? 내 첫사랑은 너야. 이제껏 부끄러워 말하지 못했어. 딱 한번만, 응? 한번만.” 덕돌은 해월을 밀어놓으면서 일어났다. “해월아, 병이나 잘 치료해라.” 말을 마치자 덕돌은 정지에 나와 신을 찾아 신고 부랴부랴 바깥으로 달아나갔다. “얘, 덕돌아! 어데 가?!” 덕돌이 되돌아보니 해월은 맨발 바람으로 눈 덮인 바깥으로 뒤쫓아 오다가 풀렁 물앉아 발버둥질을 쳤다. 뒤에서 흥수와 춘실이 쫓아나와 해월을 겨우 끌고 돌아갔다. 덕돌은 속으로 해월이 불쌍하면서도 동네방네에 소문이 잘 못 날까봐 발걸음만 재우쳤다. 덕돌이 떠나간 후 해월은 울고 또 울었다. 해가 지고 달이 뜨고 밤이 깊어가도 울음소리가 끊을 줄 몰랐다. 해월은 아버지 흥수의 목을 끌어안고 생 떼를 쓰며 대성통곡 쳤다. “내 팔자가 기구하지. 어쩜 시집도 가지 못하고 죽어? 엉, 어 헝, 헝, 남자 그게 어떻게 생긴 줄도 모르고 죽어? 엉, 엉, 엉.” 흥수도 막내딸이 불쌍했다. 나이 열여덟 살이 되도록 남자 맛도 보지 못하고 죽게 놔두고 뻔히 쳐다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해월아, 아버진들 어찌 할 도리가 없는지라. 불쌍한 내 딸아, 우쩔락꼬 이래?” 흥수는 위방에서 해월을 끌어안아 자기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자 해월은 잠시 울음을 그쳤다가 또 가늘게 어깨를 들먹이면서 흐느껴 울었다. 흥수는 딸을 끌어안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갑자기 해월은 울음을 그치더니 머리를 되돌려 아버지를 뒤돌아보았다. “아버지, 아버지 무슨 내 신랑이냐? 어서 마을에 나가서 아무 총각이라도 남자면 돼. 빨리 데려오라. 나도 여자 한번 해보고 죽겠다.” “내 누굴 데려오겠니? 누가 오자 하니?” “덕돌이 오지 않을까?” “그 새낀 역어서 오겠니?” “그럼 장충국은 온다.” “뭐라고? 장충국?” 흥수는 어이없어 하면서도 자기 귀를 의심했다. “응, 그래. 지주 아들이면 어때? 한족이면 어때? 쉰이 넘으면 뭐라니? 남자면 돼. 아무리 봐도 노총각 장충국이 아니면 올 사람이 없소.” 해월은 아버지 무릎에 올라앉은 채 돌아앉아 아버지 목을 끌어안고 콧물, 눈물범벅이 된 얼굴을 아버지 낯에 비볐다. “아빠, 빨리 가 노총각 장충국을 데려와.” 흥수는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었다. 쉰도 넘은 장충국한테 열여덟살 밖에 안되는 딸애를 내줄 생각을 떠올리자 일종 모욕감이 무섭게 파도치며 덮쳐왔다. 그때 춘실이 들어와 흥수를 정지에 데려 내갔다. “노총각 장충국을 데려오는 거지?” 뒤에서 해월의 절절한 목소리가 늙은 부부의 마음을 재가루로 불태워 날려 보냈다. 춘실은 손등으로 눈물을 닦으면서 부탁했다. “빨리 충국을 데려오오. 딸의 마지막 소원을 꺼주오.” “당신도 정신 나갔어? 난 차마 못해. 어떻게 금이야 옥이야 하고 키운 말짱 숫처녀 딸인데 그 더러운 한족 지주 아들에게 깔리게 해?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짐승보다 못한 짓을 못해.” 흥수는 문을 쾅 차고 바깥으로 나가버렸다. 그는 흐리터분한 하늘을 쳐다보며 푸실푸실 낯에 내리는 눈을 마구 손으로 털어버렸다. 집안에서는 해월의 울음소리가 가슴을 칼로 어이는 듯이 울려 왔다. “에이, 세상에 어쩜 우리 집에 이런 일이 생겨?” (학수네 집에 가서 술이나 마셔야 속이 풀리겠다.) 흥수는 눈을 빠드득 빠드득 밟으면서 학수 네 집으로 가버렸다. 밤 늦도록 술을 마시고 집으로 비틀거리며 돌아왔다. 헌데 이상하게 해월의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아니, 얘가 혹시 죽지는 않았어?) 흥수는 부랴부랴 위방 문을 벌칵 열고 들어갔다. 허나 어두운 방안에는 해월의 자취가 없었다. “해월아, 해월아!” 흥수는 가슴에서 돌이 툭 떨어지는 상 싶었다. “떠들지 마오. 좀.” 정지에서 아내 춘실이 들어와 손을 끌어당겨 물 앉혀 놓았다. “해월은 어디 있소?” “고방에서 잠이 들었소.” “어쩌다 울지 않아? 고방은 춥겠는데.” “근심 마오. 오늘 불을 뜨끈뜨끈하게 땠으니까.” 흥수는 시름을 놓고 이불 위에 힌들 드러누워 한숨을 후 내쉬었다. “내 어디 자니?” “아니, 저게 해월이 깨나지 않았나?” 흥수는 아직도 전라도 남대 치 말을 조금 썼다. “그래요. 아빠,” 해월은 암으로 앓는 애 같지 않게 고방에서 뛰어나와 아버지 목을 끌어안았다. “아빠, 난 오늘 시집갔거든.” “엉?! 무슨 말이냐?” 흥수는 벌떡 일어나 전등불 스위치를 찰칵 쥐어 당겼다. 전등불 아래 해월은 암환자 같지 않게 기쁜 나머지 어깨춤을 덩실덩실 췄다. “노총각 장충국한테 시집 갔거든. 헤헤헤.  첨으로 남자 그걸 맛 봤어!” “엉?! 아이고,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춘실은 손으로 해월의 입을 틀어막았다. “아무 말도 하지 마라.” 흥수는 아내를 손가락질 하며 욕했다. “이년, 네년이 내 없을 때 개짓을 했구나. 아이고, 이 일을 어떠렇게 해(어떻게 해)?” 춘실은 흥수의 입을 틀어막으며 소리를 낮춰 중얼거렸다. “작작 떠드오. 이보, 이왕 일이 이렇게 된 거 어쩌오?” 흥수는 외까풀눈을 부릅뜨더니 챨싹 아내의 귀 쌈을 갈겼다. “어우, 어우, 이 미친 년들아.” 춘실은 볼을 매만지더니 황급히 해월을 끌고 정지로 뛰어나갔다. “어쩜 우리 집안 이 지경 됐어? 암이 그래 우리 이씨보다 더 세단 말인가? 거 더러운 장충국이 언감 대대 혁명위원회 주임을 어떻게 보고 내 딸을 언감 깔아뭉개? 치보주임 딸을 감히?! 어우, 어우, 망했다, 망해! 우리 집안 망했어!” 흥수는 너무 분통이 터져 주먹으로 자기 가슴을 쾅쾅 쳤다. 사실 춘실은 흥수가 나간 후 가만히 조개덕에 가서 집도 없어 헐망한 벽돌공장 당직실에서 자는 충국을 얼리고 닥치고 해서 데려다 해월과 합방하게 했던 것이다. 장충국은 여자 맛을 보지 못한 노총각인지라 흥수네 고방에 기어들어 이게 웬 떡이냐고 해월한테 덮쳐들어  반주검이 되게 깔아뭉갰던 것이다. “흥, 이치보, 넨들 어쩌겠니? 귀한 10대 처녀 딸도 내게 깔리었어. 네 번이나. 허허허.” 그 후부터 장충국은 춘실에게서 흥수가 집을 나갔다는 기별을 받기만 하면 밤낮을 가리지 않고 흥수네 집 뒤울안 바자를 슬쩍 벌리고 들어가 고방 문을 열고 기어들었다.       50대 중반이지만 충국은 처음 여자 맛을 보는지라 욕정이 뚝을 터진 홍수처럼 사납게 쏟아졌다. 번마다 해월을 넋을 잃게 해재끼었다. 해월이 흥분되다 못해 턱을 쳐들고 숨이 넘어가는듯이 신음소리를 내면서 오열하는지. 짐승 같은 늙다리 노총각 충국은  야수처럼 해월을 릉간했다. 가녀린 호박꽃에 우박이 치는듯 하기도 하고 진창에 발목까지 푹푹 빠졌다가 너무 빳빳해 겨우 겨우 뿍뿍  빼는듯하기도 했다... 충국은 한편 자기 일가를 투쟁하고 비판하던 흥수의 부릅뜬 외까풀 눈을 떠올리며 욕지거리를 해대면서 더욱 기승스레 몸부림쳤다. 어떤 때에는 춘실이 고방에 달려 들어와 제 딸을 좀 살살 다루라고 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춘실만 나가면 짐승남의 본능을 자제하기는커녕 정욕이 이씨 일가에 대한 보복심과 반죽돼 용암처럼 이글거리며 불타올랐다.  더욱 저돌적인 짓이 더 강렬하고 맹렬했다. 처음에는 흥수는 깜짝 놀라 세길네길 펄쩍 뛰었다. 그러나 나중엔 이상해했다.       (웬 일인가?)      충국이 나든 후부터 당장 죽을 것 같던 해월이가 점점 생기를 찾더니 앓음 소리도 내지 않았다. 대신 고방에서 해월의  노래까지 간혹 흥얼흥얼 새어나오는 것이 아니겠는가. 흥수는 충국이 드나드는 것을 알고 냉가슴을 앓았다. 처음에 황둥개는 낯선 충국이 나타나기만 하면 왕왕 사납게 짖어댔다. 흥수는 황둥개가 짓기만 하면 충국이 오는 걸 알고 냉가슴을 앓았다. (어 참, 멧돼지 잡으러 갔다가 집돼지 잃은 격이 돼버렸네. 이게 송선을 욕심낸 보응이라도 아닌가? 아니면 정 우파 말처럼 너무 악한 짓을 많이 해서 보응 받는 건가?) 허나 흥수는 인차 자포자기했다. (에라, 쑤어놓은 죽을 어찌랴?) 그 후부터 흥수마저 한 눈을 뜨고 한 눈을 감아버렸다.       그때로부터 충국은 흥수만 없으면 뒤울안 바자를 헤치고 비집고 들어가 고방에 기어 들군 했다. 온 한해 겨울 충국은 눈이 오나 눈보라 치나 날마다 시도 때도 없이 그렇게 흥수네 집에 드나들었다.         이젠 흥수네 집지킴이 황둥개도 장충국이  와도 짖지 않고 꼬리를 쳐들고 휘휘 저으며 반긴다. 오히려 충국을 보면 펄쩍 뛰어 품에 안기기도 하고 주둥이를 때 덕지덕지한 바지가랭이에 대고 끼깅거리기도 하며 애교를 부린다.          그 바람에 흥수네 집 뒤울안 수수대바자가 완전히 쩍 벌어졌고 고방문과  뒤울안으로부터 소서구 충국이네 집까지 허연 눈 위에 더러운 발작국이 더덕더덕 찍히었다. 나중에는 한가닥의 오솔길이 나고 말았다.      흥수네 집에서는 해월의 울음소리 대신 매일이다시피 봄 밤에 발정 나서 짝을 찾아 헤매며 우는 암고양이 울음소리 같은 신음소리가 간간히 들릴 뿐이었다...
149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108) 댓글:  조회:1474  추천:1  2018-07-08
                      5. 방화범의 말로        바싹 마른 황금 벼 낟가리가 우사 지붕을 넘어 우뚝 우뚝 솟아 있었다. 우사 마당에 있는 탈곡장에서는 사원들이 연합탈곡기로 탈곡을 하느라고 웃고 떠들며 개미 채 바퀴 돌듯 맴돌아 치고 있었다.      상순은 벽돌로 토성 안에 높다란 대대 사무실 청사를 덩실하게 지어놓고 빨간 기와까지 얹어 놓았다. 마을 어디서나 토성 안의 고래 등 같은 대대 사무실청사 지붕이 다 바라보이었다. 상순은 조개덕 1대 사원들을 데리고 벽돌공장을 차린 첫해에 대대 사무실대청 외에도 생활이 가난한 장팔래, 왕정해 등 몇몇 사원들의 벽돌기와집도 지어주었다. 사원들은 탈곡장에서 일하면서 모두 상순에게 엄지손가락을 대둘렀다. “김 대장 덕분에 우리 새 벽돌집에서 살게 됐네.” 장팔래가 벼단을 낟가리 무지에 올리며 하는 말에 왕정해도 벼 단을 무지고 나서 그 높은 낟가리 위에서 허리를 펴더니 엄지를 내둘렀다. “김 대머리(大脑袋)는 머리가 아주 좋아. 그 대머리에서 별의별 기발한 생각이 다 나온다니까.” “그러게 말이야.” 장팔래는 혀를 끌끌 찼다. “우리 대에서 김 대머리를 내놓고 누가 벽돌공장을 세울 생각이나 했겠소?” “글쎄 말이오.” 왕정해도 벼 단을 척척 무지면서 동을 달았다." "그런 엉뚱한 생각을 한 사람은 하나도 없소.”  그들은 벼 낟가리를 가리면서 자연히 종연이나 흥수를 의논하다가 비난하기에 이르렀다. “종연이랑 부대에 갔다가 와서 세상일을 다 아는 상 하잖고 뭐요?" "그 새끼들이 우리 대대에 해놓은 게 뭐야?” “어째 계급투쟁을 틀어쥐고 혁명을 잘하지 않았는가?” “입방아나 찧었지. 뭘 해놓은 게 있어? 흥!” “그래도 이번에 입당했다잖는가?” “그게 바로 우리 대대 정치야!” “삐뚤렁정치라고나 해라!” “김 대머린들 어쩌겠는가? 이계삼이나 허영주 두 사람만 믿어서야 되겠소? 영발과 윤희가 앞다퉈 시내로 돌아가려고 종연을 입당시키려고 기암을 쓰는 데야.” “글쎄 말이야. 종연은 그래도 김 대머리에게 아첨하느라고 덕돌이 고중에 붙을 때 손을 들어줬다더라.” “제 따위 감히 김 대머리를 모르고서야 이 함흥대대에 발이나 붙이겠어? 남들은 부대에 가서 8달이면 입당한다던데 한뉘 입당은커녕, 흥!” 왕정해가 주위를 둘러보더니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저 종연은 원래 간에가 붙고 슬개에 가 붙는 새끼야. 이런 일도 있다네. 종연이랑 승연이랑 숭길이랑 룡정에서 깡패들한테 마을까지 쫓기어 왔잖고 뭔가. 숭길과 승연은 황급히 종연이네 김치움에 숨었지. 황종연은 깡패들이 당장 집마당에 쳐들어게 되자 미처 김치움에 뛰어들지 못하고 집에 달아들어가 문을 닫아걸었지. 한무리 깡패들은 집문을 부시고 종연을 개패듯했지. 깡패들은 숭길과 승연이 어데 있는가 족따졌지. 그러자 종연은 자기 맞지 않으려고 제꺽 김치움에 있다고 물어먹었다오.” “제 동생도 김치움에 있는데.” “제 살려고 동생쯤 물어먹는 건 아무 것도 아니야. 그래서 숭길과 승연은 김치움에서 끌려나와 깡패들한테 물매를 맞았지.” “에이, 항일전쟁 때 같으면 한간이나 조간이나 해먹을 놈이구만. 쯧쯧쯧. 퉤!” “황승연도 똑 같은 물건짝이야. 깡패들한테 두들겨맞아대자 뭐라고 했는지 아는가?” 왕정해는 낟가리를 가리다가 벼단을 쥔채 물었다. “어쨌기에?” “다 종연과 숭길이 시켜서 한 일이지. 자기와 상관없다고 했다네.” “허허허. 형제간이 다 사람 물어먹는 미친개구만.” 이때 병진이가 벼 단을 꽉 박아 실은 소 수레를 몰고 탈곡장에 들어섰다. “이 새끼는 항상 뿌리 든든한 황소만 골라 쓴다니까.” 그 말에 병진은 소 수레를 멈춰 세우고 바 줄로 소수레 위의 벼 단들을 걸어 쥐어 당겼다. 그러자 벼 단들이 낟가리 쪽으로 후루루 무너졌다. “내사 소 싸움에 이름 있지 않는가?” 병진의 말에 장팔래가 배를 끌어안고 비웃어댔다. “허허허. 그래, 너야 말로 황소싸움에 집을 팔아 황소 값을 물고 허망 우리 한족 대에 나앉지 않았니?” 그러자 왕정해도 맞장구를 쳤다. “그래도 아니, 저기 김 대머리가 네게도 벽돌집을 지어줄지.” 병진은 소 수레 위의 벼 단을 훌훌 쥐어 내리뿌리며 두덜거렸다. “누가 생산대 소를 싸움시켜 뿔을 빼놓은 놈한테 벽돌집을 사준다더니?” 병진은 계속 두덜거렸다. “철주마저 고중에 붙지 못했지. 더러운 팔자야. 우리 철주 저 김 대머리네 덕돌을 얼마나 쫓아다녔소? 그를 도와 싸움질은 또 얼마나 했소? 덕돌을 따라다닌 애들은 다 붙고 우리 철주만 병신 같은 새끼 혼자 붙지 못했단 말이오. 재수 없는 놈은 뒤로 넘어져도 코 등을 깬다고. 쳇!” 이때 상순이 이쪽 벼 짚무지 쪽으로 벼 짚을 산더미처럼 둘러메고 스적스적 다가왔다. “병진이, 헛소리 작작 치고 빨리 벼 단이나 실어 들여! 저거, 저거! 소들이 또 싸워 뿌리 빠지겠어!” 병진은 허리를 굽혀 바를 주섬주섬 주어 수레에 훌 뿌리고 나서 상순의 독기어린 세 귀 눈을 흘끔 곁눈질했다. “이라!” 그는 고삐로 소 궁둥이를 탁 치며 수레를 몰고 꼬리빳빳해 탈곡장을 빠져나갔다. 저쪽에 가서 병진은 소 수레에 올라앉더니 상순 쪽을 돌아보며 누르스름한 개털 모자를 꾹 눌러 썼다. “이라! 저 놈을 보기 싫어서. 원!” 병진은 두덜거리며 소 수레에서 목이 긴 술병을 들어 꿀떡꿀떡 몇 모금 마시더니 애꿎은 소 궁둥이를 고삐로 사정없이 후려 갈겼다. 놀란 황소는 대가리를 마구 흔들며 네 굽을 안고 소 수레를 끌고 덜커덩덜커덩 뛰어갔다. 상순은 가을이 다가오자 벽돌 굽기를 그만 두고 사원들을 데리고 탈곡에 나섰던 것이다. 사원들은 벼 풍작을 거둔 것은 상순이 냉상모판을 잘 관리한데다가 논물까지 잘 보았고 사원들을 잘 이끌어 벼농사를 알뜰히 지은데 있다고 혀끝을 끌끌 찼다. 그 덕분에 올해부터는 이밥을 배불리 먹게 됐다고 했다. 하긴 이전에는 생산대장이 사원들을 잘 틀어쥐지 못한데다가 전체 사원의 절반도 넘는 지주와 부농들까지 심술을 부린데다 논물을 볼 줄 몰라 해마다 아까운 논에서 벼를 제대로 거둬들이지 못했다. 여름에 논을 내다보면 벼보다도 검은 돌피 이삭이 더 많아 도대체 벼 밭 인지 돌피 밭인지 분간하기도 힘들었다. 허나 상순이 이 생산대로 온 다음부터 지주와 부농들이 찍 소리 한마디 치지 못하고 상순이 말하는 대로 둥글소들처럼 논에 나가 기음을 매고 또 맺던 것이다. 하여 논밭에서 돌피를 찾아보기 힘들게 됐던 것이다. 사원들도 올해부터 새 벽돌집에 들어 배불리 먹으면서 잘 살게 됐다고 사기나 일손들을 다그쳤다. 그런데 화는 눈썹 끝에서 떨어진다고 야밤삼경에 탈곡장 벼 낟가리에 삼단 같은 불길이 치솟아 올랐다. “불이야!” “불이야!” 사원들은 탈곡을 하다가 벼 낟가리로 달려갔다. “빨리 물을 퍼 치오!” 상순은 가래 짝을 놓고 우사로 달려 들어가며 고함쳤다. 그는 물 초롱에 물을 꼴딱 담아 들고 불길이 치솟는 벼 낟가리 쪽으로 선참으로 뛰어 갔다.  “불이야! 불이야!”  병진이 개털 모자를 벗어쥔 채이 불 붙는 벼낟가리 쪽에서 고함치고 있었다. “빨리 물을 쳐라!” 병진은 상순을 보자 허리를 굽혀 굽석거리며 거수경례까지 척 했다. “김 대머리! 아니, 존경하는 김 대장!” 상순의 날카로운 세귀눈길이 이상하게 번쩍이자 그는 비실비실 뒤로 물러섰다. 사원들은 집에 달려가 물을 담은 대야며 초롱이며 들고 달려와 불이 붙는 낟가리에 물을 퍼 쳤다. 허나 바싹 마른 벼 낟가리 하나는 세차게 불어치는 겨울바람에 삽시간에 잿더미로 돼버렸다. 불이 났다는 소리를 듣고 흥수와 이계삼, 종연, 허영주, 박영발, 윤희까지 대대 간부들이 몽땅 뛰어와 불을 껐다. 허영주는 사원들에게 “불이 붙지 않은 낟가리에도 물을 쳐 보호하라!” 하고 연신 고함쳤다. 한족사원들은 몸에 물을 퍼치고 성한 벼 낟가리에 불이 옮겨 붙지 못하게 몸으로 막을 각오까지 하면서 물을 치고 또 쳤다. 둬 식경이나 사원들이 물을 퍼 쳐서야 불길은 점점 죽어갔다. 허나 한족 사원들이 한 해 동안 애나게 일해 수확한 벼낟가리 하나는 몽땅 타버렸다. 사원들과 후에 다행히 다른 낟가리에는 불이 옮겨 붙지 못했다. “어느 놈이 낟가리에 불을 질렀는가?” “붙잡기만 하면 껍질을 싹 벗겨놓겠다.” 탈곡장에는 아직도 재무지로 된 낟가리에서 삼단 같은 김이 물물 피어오르고 땅바닥에는 물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재물 같은 물은 겨울의 맵짠 바람에 인차 살얼음이 지더니 인차 얼어붙었다. 탈곡장 사처에 사원들의 마사진 대야며 초롱이며 장갑이며 지어 모자까지 널려있었다. 불이 붙은 잿더미 옆에서 병진은 물을 맞아 폭 젖은 개털 모자를 주어들고 희죽이 웃으며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여기저기서 절망에 빠진 소리가 들렸다. 장팔래는 왕정해와 마주 서서 “온 낮 가린 낟가리가 단번에 재무지로 됐구먼.”하고 실망했다. 왕정해는 “헤이, 올해는 배불리 먹겠다 했더니 쫄딱 망했어.”라고 맥이 빠진 소리를 하며 무릎을 꺾고 울상을 지었다. “올해 또 어떻게 쌀 고생을 하겠소?” 사원들이 맥없이 물앉거나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서서 두덜거렸다. 상순은 흥수를 조용히 불러 나직이 말했다. “빨리 전화로 파출소 허소장에게 사건 신고를 하오. 빨리!” “금방 여기 오기 전에 전화를 치려고 하니 통하지 않소. 어느 놈이 대대 전화선을 끊어 놓지 않았겠소.” “이건 계급투쟁의 새로운 동향이란 말이오! 안 되겠소.” 상순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왕정해! 장팔래!” 하고 불렀다. “어째?” 왕정해가 사람들 속에서 이쪽으로 걸어왔다. 상순은 “너희 둘이 빨리 마구간에서 말을 타고 파출소에 가서 사건 신고를 해라!” 하고 분부했다. 왕정해는 뒤를 돌아보며 “장팔래는 집에 갔소. 내 혼자 어떻게 가오?” 하고 늦장을 부렸다. “야! 고양이한테 불알이 떨어질까 봐 혼자 못 가니? 어서 빨리 가라!” 왕정해는 내키지 않았지만 성이 꼭뒤까지 치밀어 오른 상순의 명령을 거역하지 못해 마구간으로 뛰어갔다. 이윽고 말의 호용소리에 뒤이어 말 발굽소리가 다급히 떨꺼덕떨꺼덕 멀어져갔다. 상순은 종연과 흥수와 함께 사건현지를 돌면서 수상한 단서를 찾으려고 살폈다. 이튿날 이른 아침에 동녘이 희붐히 밝아올 무렵에 찌프가 조개덕에 달려와 아츠런 제동 소리와 함께 멈춰 섰다. 민병들을 데리고 탈곡장 주위를 돌며 보초 서던 상순이 찌프 소리와 인기척소리에 찌프 쪽으로 다가갔다. 허영호 소장은 상순을 만나자 화재정황을 물으면서 탈곡장 화재발생지 주위부터 돌아보았다. 상순은 “고의 방화혐의가 크오. 꼭 흉수를 붙잡아 징벌해야 하오.”라고 했다. 허영호 소장과 상순은 회의실에 들어가 조용히 수사방안을 의논했다. 허영호 소장은 “먼저 의심스러운 지주와 부농부터 어제 저녁에 뭘 했는가 하나하나 조사해야겠습니다.”라고 했다. 상순은 대머리를 숙이고 한참 궁리하더니 머리를 들었다. “옳소. 화재발생시간은 어제 그러니까 11월 23일 밤 12시 좀 넘어서요. 애들로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나이 별로 소조회의를 열고 사람마다 어제 뭘 했는가를 말하고 증명인을 대라고 하면 좋을 것 같소.” 허영호 소장도 한참 궁리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게 좋은 거 같습니다. 먼저 그물을 널리 쳐 고기 한 마리도 빠져 나가지 못하게 하는 게 옳습니다. 중점혐의대상이 생기면 어제 뭘 했는가를 서면으로 쓰게 하고 증명 인을 써넣으라고 합시다.” 이때 흥수가 소문을 듣고 아침도 먹지 못하고 달려왔다. 그는 회의실에 들어서자마자 상순에게 외까풀 눈을 흘겼다. “김 대장이 어떻게 경각성을 늦췄으면 탈곡장에 불이 다 달렸겠소? 그래도 계급투쟁을 하지 않고 되겠소? 벽돌만 구워내더니 보오. 무슨 쓸데 있소? 한해 농사를 다 태워버리지 않았소?” 상순은 세 귀 눈으로 흥수를 바라보며 어이없어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허영호 소장은 “지금 흉수를 나포해야지 여기서 서로 옥신각신할 때가 아닙니다.”라고 했다. 이때 바깥에서 찌프가 급정거하는 아츠런 소리가 들리더니 떠들썩하는 소리가 들렸다. 찌프에서는 뜻밖에도 김용만 국장이 공안국 수사일꾼들을 데리고 내렸다. 그는 틀스레 거들먹거리면서 재무지로 된 낟가리자리를 여기저기 휘둘러보았다. 그는 회의실에서 마중 나온 허영호 소장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재무지와 얼음 강판이 돼버린 탈곡장 쪽으로 터벅터벅 다가갔다. 벼 짚 재무지에서는 아직도 김이 무럭무럭 피어올랐다. 용만 국장은 거들먹거리며 땅바닥에 널린 양철초롱을 툭 걷어차면서 훈계하기 시작했다. “허 소장, 이게 뭐요? 어째 허 소장 관할 구역에서 연속 악성사건이 생기오?” 허영호 소장은 입을 다문 채 머리를 숙이고 꾹 참고 듣기만 했다. 이때 황종연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형님, 참 오래간만이오.” “오? 그래?” 용만은 종연을 와락 끌어안고 잔등을 툭툭 치며 문안했다. “머리가 요즘 어때?” 종연은 이젠 붕대도 다 풀었던 것이다. “붓긴 얼굴도 내리고 머리도 괜찮소. 그러나 저러나 우리 마을에 또 화재 나 큰일이오.” 종연과 용만은 부대 전우였다. 그들은 특별병종에서 특수훈련을 받아 힘깨나 쓰고 날랜 싸움꾼들이었다. 제대한 후에 용만은 대학에 추천받아 갔고 “문화대혁명”이 터지자 반란 파 조직을 무었고 사회에서 주먹깨나 쓴다하는 종연이랑 어중이떠중이들을 긁어모아 노 간부들을 타도하는데 앞장섰다. 그러다가 할빈에서 온 반란파 두목 이씨 가명을 단 모원신의 통역이자 신변호위 무사를 맡고 개다리행사를 하면서 개 잡은 포수처럼 우쭐거렸다. 그는 모주석의 조카인 모원신을 바싹 따라야만 벼슬길이 열린다고 여겼다. “호랑이 꼬리는 꽉 잡고 놓지 말아야 살아.” 그는 공부는 별로 하지 못했지만 반란파 두목 이 씨의 거천으로 “문화대혁명” 후기에 일약 공안국 국장자리까지 빼앗아 했다. 종연은 제대한 후 진수해 근방에서 소문난 주먹깨나 휘두르는 이름난 난봉꾼이었다. 허나 “문화대혁명”의 거세찬 “동풍”을 타고 용만을 등에 업고 진수해지역의 반란파 두목으로 됐다. 야심이 큰 종연은 용만을 “형님, 형님” 하면서도 속으로는 농촌에서 대대 혁명위원회 주임이나 하며 고생하는 자기를 봐주지 않는다고 은근히 투덜거렸다. 용만은 앞에서 설설 기는 종연과 무뚝뚝한 표정을 짓고 서 있는 허영호 소장을 번갈아보면서 계속 훈계했다. “함흥대대 말이 아니오! 전번에는 대대 혁명위원회 주임을 돌멩이로 머리를 까는 반혁명사건이 생기더니 이번에 탈곡장에 불을 싸지르다니! 대대 간부들이 뭘 했소? 계급투쟁을 얼마나 잘 했으면 이렇소?! 쯧쯧쯧!” 종연은 뒤에 서있는 상순과 허영호 소장을 흘금 돌아보더니 용만에게 머리를 조아리면서 제 좋은 소리를 했다. “워낙 이 조개덕 1대는 지주와 부농이 많은데다가 조개덕 2대에는 이른바 우파와 현행반혁명, 노 간부들이 많아서 정황이 꽤나 복잡합니다. 전번에도 허백호, 그 늙다리 우파 놈이 원한을 품고 돌멩이로 내 머리를 깠소!” “생산대 대장은 누구야?” 종연은 돌아서 상순을 가리켰다. “이분입니다. 김 대장, 공안국 김용만 국장입니다.” 상순이 앞으로 나가면서 인사했다. 김용만은 상순의 날이 서게 우뚝 솟은 코와 예지가 번쩍이는 부리부리한 세 귀 눈을 보면서 대충 인사했다. “아, 김 대장 말은 족히 들어 왔습니다. 공안국 국장 출신이라면서? 뭐 하고 밥을 먹었습니까? 항미원조땐 사단 비서과장까지 했다는 양반이 어째 미연에 이런 사건을 방지하지 못했습니까? 방화범을 붙잡을 좋은 방도는 생각해봤습니까?” 버르장머리 없는 용만의 말에 상순은 뒤로 떨어져 걸으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용만은 아예 종연과 물었다. “무슨 단서라도 쥔 게 있소?” 종연은 여러 사람들을 둘러보면서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오늘 오전부터 사람마다 그날 일정을 얘기하고 의심스러운 사람을 적발하기로 했소.” 용만은 머리를 끄덕이더니 “건 누가 내놓은 방안이오?” 하고 물었다. 종연은 상순의 눈치를 흘끔 보면서 “우리 대대 간부들이 내놓은 방법이오.”라고 하며 두터운 혀로 입귀를 슬쩍 핥았다. “좋소. 털끝만한 의심스러운 단서가 있으면 회보해라.” “양, 양.” 이때 허영호 소장은 재무지 북쪽에서 목이 긴 술병을 하나 주어들고 이리저리 보고 있었다. “여기에 무슨 라이터가!” 잘깍 켜보니 라이터에 불이 달렸다. 수사 일군들은 인차 하얀 장갑을 낀 손으로 특별히 크고 목이 긴 술병과 라이터를 쥐어 찌프에 있는 상자에 담았다. 허 소장은 “저게 중요한 단서로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고 김용만에게 말했다. 그러자 용만은 자기보다 스무 살이나 이상인 허 소장을 거들떠도 보지 않고 버릇없이 말하며 도리머리를 말대가리처럼 흔들었다. 이젠 허 소장도 늙었소. 그깟 병과 이 화재가 무슨 관계있단 말이오? 신경이 너무 예민하오. 예민해. 허 소장은 지금 계급투쟁의 안광으로 문제를 보는 게 아니라 술병을 들고 흉수를 잡으려 한단 말이오. 주책 있소? 말도 늙으면 달리지 못하는 법이오.”  “간부는 진수해파출소 소장도 젊은 간부로 시켜야 하겠소. 간부 연소화는 도리가 있단 말이오. 제 책임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은 철직시켜야 하오.” 그때 상순이 한발 나서면서 말했다. “허 소장은 한창 경험을 쌓고 일을 잘 할 때오. 어린 애들이 뭘 안다고 그러오?” 그러자 김용만은 무섭게 눈을 부라렸다. “영감이, 묵은 그루에 이밥 먹던 소리를 작작 하란 말이오.” 상순은 굽어들지 않았다. “사람을 성가시게 굴지 말고 방화범이나 잡소.” 용만이 억이 막혀 입을 짝 벌리고 쩝쩝 다시는데 저쪽에서 병진이랑 왕정해랑 장팔래랑 숱한 사원들이 구경하러 이쪽으로 다가와 그만뒀다. 허 소장은 병진이 여기 저기 기웃거리자 그의 일거일동을 쓸어보았다. 왼 손을 검정 천으로 싸매고 있었다. 왕정해는 그 옆에서 울상을 짓고 있었다. 그날 저녁에 왕정해가 상순이네 집으로 찾아왔다. 그는 구들머리에 걸터앉더니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아무래도 어제 병진의 거동이 의심스럽소.” “뭐요?” 상순은 담배를 말다가 다가앉았다. 왕정해는 목소리를 낮췄다. “어제 탈곡장에 불이난 후 병진은 우사에 와서 내가 잣던 펌프를 마구 빼앗아 잣지 않겠소. 마구 잣다가 펌프 자루가 훌 빠지니 자기 왼손가락을 마구 쐐기자리에 넣고 잣지 않겠소. 그러다가 ‘아이구! 손가락이 덴 걸 모르고 아파 죽겠다.”고 하더구먼. 손가락을 빼낸 걸 보니 껍질이 짓 이개졌더구먼. 낮에 소 수레 벼 단을 부릴 때에는 근본 손을 데지 않았고 손을 싸매지도 않았소.” 상순은 성냥을 득 그어 담배를 붙이더니“그런데 뭐가 의심스럽소?” 하고 묻고 나서 계속 왕정해의 말을 귀담아들었다. “술을 먹은 거 같더구먼. 거동이 정상이 아니었소.” “낮에 술을 마신 거 같지 않던데.” 왕정해는 무릎을 탁 쳤다. “병진은 소 수레에 술병을 가지고 다니지 않고 뭐요? 어제 오전에도 김 대장에게 욕을 먹고 탈곡장을 나갈 때 수레에서 술병을 꺼내 꿀떡꿀떡 마셨소.” 순간 상순은 공안국 수사 일꾼들이 재무지 옆에서 허 소장이 주은 목이 긴 술병을 주어간 일을 떠올리게 됐다. “술병이 어떻게 생긴 겐지 알만 하오?” 왕정해는 눈알을 굴리면서 생각하다가 “특별히 목이 긴 거 같았소. 일반 병보다는 뿔룩한 게 컸소.”라고 했다. 상순은 병진에게 점점 의심이 갔다. 탈곡장에서 오래 동안 철주가 학교에 붙지 못했고 소싸움을 시켜 빚을 가득 걸머지고 허망 나앉았다고 불만을 토로하지 않았던가! 상순은 엉거주춤 일어나면서 왕정해를 보고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고 요새 병진을 잘 감시하오. 병진의 소 수레에 아직도 목이 긴 술병과 라이터가 있는가 슬그머니 살펴보오.”라고 부탁했다. “알았소.” 상순은 우사 회의실에 허영호 소장을 찾아갔다. 회의실에는 수사 일꾼들 밖에 없었다. 알고 보니 용만은 종연이가 집에서 닭을 잡고 청해 술을 마시러 가고 없었던 것이다. “병진이가 소싸움을 시켜 배상하다나니 집도 없이 조개덕 1대에 허망 나앉은 일에 불만을 품고 불을 지르지 않았겠소?” 상순은 병진의 의심스러운 점을 일일이 제기했다. “아침에 허 소장이 타버린 낟가리 뒤에서 주은 술병은 병진이 항상 수레에 싣고 다니면서 마시던 술병과 비슷하오.” “예?” 허영호 소장은 숱한 종이 장들을 하나하나 뒤번지더니 병진의 자술을 찾아내 상순과 함께 읽어 보았다. 나는 불이 난 12월 14일에 아침부터 우후까지 수레로 벼를 탈곡장에 실어들이었다. 저녁에는 앞마을 계수동에 가서 동원이네 집에서 술을 마시고 밤늦게 집으로 돌아와 잤다. 난 이번 탈곡장 낟가리에 불을 단 일이 근본 없다. 이병진. 1974년 12월 15일 상순은 병진의 자술서를 서너 번 읽어보더니 손가락으로 한곳을 똑똑 쳤다. “병진은 확실히 의심스럽소. 누가 의심하지도 않고 묻지도 않았는데 여기에 ‘난 이번 탈곡장 낟가리에 불을 단 일이 근본 없다.’고 쓴 거 보오."      허영호 소장은 "정말, 도적이 제 발등이 저리다고." 하고 말하면서 자술서를 뚫어지게 들여다보았다. “이게 바로 여기에 황금 300냥이 없다는 거나 뭐가 다르단 말이오?” “허허허.” 상순은 허 소장을 보고 "혹시 다른 의심스러운 사람은 없소?" 하고 물었다. 허영호 소장은 한숨을 후 내쉬었다. “혹시 이번엔 하향한 노간부들이나 지주와 부농들 쪽에 문제는 없겠습니까?” 상순은 뒤로 물러앉으면서 심중하게 한참이나 착잡한 생각에 잠겼다. 한참 후에야 그는 무거운 입을 열었다. “노간부들이 무슨 그런 불장난을 했겠소? 이계삼 서기나 허영주 현장처럼 총칼을 들고 일제와 국민당과 싸워온 노간부들인데. 지주와 부농들 속에서는 충국을 좀 조사해봐야겠소.” 수사 일꾼들은 계급성분이 복잡한 이 마을에 와서 노서기 김상순 대장의 말을 듣는 수밖에 없었다. 상순이 나가 충국을 조사해보니 전날 저녁에 충국은 조개덕에 있는 단간 집이 내굴어서 우사 회의실에 와서 우사에서 일하는 상순의 둘째사위 경만과 양아들 수봉과 함께 잤던 것이다. 사위와 양아들을 찾아가 조사하고 대조해보아도 충국의 말과 똑 같았고 소변보러 밤중에 한번 피뜩 나갔다 들어온 외에 나간 적이 없다고 했다. 다른 지주와 부농들도 수사 일꾼들이 일일이 조사해보아도 별로 수상한 단서가 잡히지 않았다. 상순은 이튿날 아침에 자기 집 윗방에 올라가 임시로 들어있는 허영호 소장과 수사 일꾼들과 함께 아침상을 마주하고 말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병진이가 수상하오.” “나도 병진이란 자가 제일 수상하다고 생각합니다.” 허영호는 상순의 말에 동의하고 나서 “병진은 표현이 어떻습니까?” 하고 물었다. 상순은 장국을 한술 떠서 후후 불어 꿀떡 넘기더니 말했다. “병진은 일제의 개다리, 반역자 이화영의 맏아들이오. 허 소장이 영월구에 있을 때 일이오. 이전에 병진의 애비 이화영이 역사반혁명분자로 고깔모자를 쓰고 투쟁 받을 때오. 병진은 팔소매 안에 비수를 치워가지고 나가 제 애비를 찔러 죽인 무지막지한 호로 자식이오.” “예?” 수사 일꾼들은 그 말에 모두 숟가락을 든 채 놀라 입을 딱 벌렸다. “그 자가 실로 어지간히 독한 자가 아니구먼.” “어쩜 자기 아버지를 비수로 찔러 죽인단 말이오.” 상순은 뒤 말을 이었다. “당장에서 죽은 건 아니지만 비수에 찔려 피를 너무 많이 흘려 사흘 만에 죽었소. 당시 어째 죽였는가 하니까. 자기 아버지가 투쟁을 받으면서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보고 반역자인데 어서 죽으라고 찔렀다고 하지 않겠소?" “개보다도 못한 놈 새끼!” 허영호 소장은 아주 격분해 했다. “그자가 방화범일 가능성이 아주 많습니다. 김용만 국장과 말하고 즉시 불러다 심문해야 하겠습니다." ”상순도 “좋소. 그렇게 하기요.”라고 했다. 아침 숟가락을 놓기 바쁘게 허영호 소장과 상순은 종연이네 집으로 김용만을 찾아 갔다. 그런데 그들도 진작 밥을 다 먹고 새로 지은 덩그런 대대 사무실로 들어가고 있었다. 허영호가 다가가 수사방향을 말하자 김용만 국장은 이럴 때는 군인답게 과단하게 말했다. “즉시 병진을 불러다 심문하오. 난 황주임과 급히 의논할 일이 있어 함께 진수해로 내려가야겠소.” 저쪽에서 거만하게 뒤지개를 짚고 대대 위생소에 들어가고 있는 종연은 술을 마셨는지 퉁퉁한 낯이 귀밑까지 벌겋다 못해 홍당무 같았다. 그는 윤희와 송선을 보고 지껄여 댔다. “아무리 소장으로 가도 그렇지. 어떻게 요 미녀들이 아까워 가겠니? 야, 이 좋은 침대는 어쩌고? 으흐흐, 허허허.” 그 말에 송선은 “아니, 황 주임이 어디 소장으로 갑니까?” 하고 물었다. 윤희도 적이 놀랐다. “제가 시내로 돌아가는 일을 잊지 마십시오.” “그러지. 이 함흥대대에서, 아니, 진수해 공사에서 내 말이면 다오. 허허허. 이제 내 파출소 소장으로 가면 내 말만 잘 듣소. 시내로 돌아가는 일은 근심도 하지 마오.” 윤희와 송선은 마주 보며 웃었다. 이윽고 종연도 대대 사무실로 나오고 이흥수도 도착했다. 바깥에서 떠들썩하더니 병진이가 민병들과 함께 대대 사무실로 들어왔다. “어쨌다고 나를 이러오? 난 불을 단 적이 없단 말이오?” 병진이 행악질하는 것을 보고 허영호 소장과 상순은 서로 눈길을 맞췄다. 종연과 용만은 병진을 심문하는 일보다 무슨 일이 그렇게 중요한지 바깥으로 나가더니 찌프에 앉아 먼지를 새뽀얗게 일구며 떠나가 버렸다. 허영호 소장은 한참이나 병진을 무섭게 쏘아보더니 아래위를 훑어보았다. 아직도 왼손에 천을 감고 있었다. “어째 손은 감고 있는가?” 병진은 손을 움츠려 뜨리면서 “그날 저녁에 불을 끄다가 뎄소.” 하고 대답했다. “불을 끄는데 먼데서 물을 쳤겠는데 어떻게 손을 델 수 있는가?” 허영호 소장은 병진의 가까이에 다가가더니 손을 싸맨 천을 풀어내 들고 봤다. 물퉁이 친 손등이 벌겋게 부은 채 진물이 줄줄 흐르고 식지는 살갗이 벗겨져 있었다. “이 손가락은 어떻게 돼 이렇소?” 병진은 아무 고려도 없이 대답했다. “그날 펌프를 잣다가 핀이 나가 손가락을 넣고 자았소." 뒤이어 그는 "내 펌프를 자았으니 불을 껐지 물이 없어 불을 끄기나 했겠소?” 하고 자기 공을 내세웠다. 허 소장은 사무상을 꽝 치면서 호통 쳤다. “병진이! 어째 여기 불러왔는지 아는가!” 심지가 굳은 병진은 미리 사상준비를 한 듯이 태연자약하게 앉아 허 소장을 치켜보았다. “그래 내가 불을 질렀단 말입니까?” “시치미를 뗄 작정인가? 그날 저녁에 뭘 했는가?” 병진은 줄줄 주어 댔다. “그날 온 하루 뼈 빠지게 벼 싣기를 하고 저녁에 계수동에 가서 친구 동원이네 집에서 술을 마시고 집으로 돌아와 잤습니다. 난 불을 단 적이 근본 없습니다.” 상순이 옆에서 한마디 물었다. “동원이네 집에서 나올 때 몇 시였소?” “아즈바이, 지금 날 의심하오?” “묻는 말이나 대답하오.” 병진은 좀 생각하는 거 같더니 인차 “그때 한 11시 반일 거요.”라고 대답했다. “이제부터 묻는 말에 한마디도 거짓말이 없이 대답해야 하오. 우리 계수동의 동원과 조사하면 몇 시에 돌아온 게 빤하니까.” “난 거짓말 하지 않았소.” “좋소. 11시 반부터 12시까지 뭘 했소?” “술을 먹고 집에 와서 잤지 뭐 했겠소” “집에서 뭘 했소?” “잤다는데. 왜 이러오? 난 불을 지르지 않았소.” “자기 한 짓을 모르오?” “난 불을 지르지 않았소.” “지금 묻지도 않은 불을 지르지 않았다는 말만 반복하는 건 뭐요?” “불을 지르지 않았다는 거 말하는 거요. 야, 내 정말 정신병에 걸리겠다. 그만 하면 안 되오?” 상순은 그간 조사한 정황에 근거해 따지고 들었다. “네 옆집 왕정해는 네가 12시 넘어 집에 오지도 않았다는 거 알고 있다. 그래도 거짓말을 할 작정이냐? 생각해 봐라. 너는 근본 집에 가지도 않고 불이 붙은 화재현장에서 헛소리를 치면서 개털 모자를 주어가지고 우사 펌프를 자았다. 네가 집에서 잤다는 게 거짓말 아닌가? 넌 근본 술을 먹고 집에 들어가지 않았고 화재현장에 있었다. 그래도 떼질 쓸 테냐?” 그 말 한마디 한마디는 예리한 비수로 돼 허위와 거짓말로 감싼 병진의 추악한 몸뚱이를 하나하나 발가벗겨버리었다. 허영호 소장은 사무상을 꽝 치며 고함쳤다. “노실하게 탄백하라!” “내 불을 질렀다고 이럽니까?” “이게 누구 건가?!” 허영호 소장은 목이 긴 술병을 사무 상 위에 꽝 올려놓았다. 술병을 본 병진의 낯은 대번에 새까맣게 질렸다. 그는 버릇처럼 시꺼먼 눈썹아래 우멍 눈을 껌벅이며 번개같이 속궁리를 하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못 했다. “이 술병을 모르오?” 한참 후에야 제 정신이 들었던지 병진은 “그 술병과 무슨 관계있소?”하고 말끝을 얼버무렸다.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해. 누구 술병인가?” “내 거요.” “네 술병이 왜 불에 탄 낟가리 북쪽에 있는가?” “건, 건.” 병진은 꺽꺽거리다가 “어제 벼를 부리고 떨어뜨린 거 같습니다.” 하고 둘러댔다. 허 소장은 “우리 사원들은 네가 벼를 부린 후 술을 마시고 가는 걸 다 본 사람이 있다. 그래도 계속 거짓말을 해?” 하고 말하며 병진을 뚫어지게 쏘아보았다. 상순은 병진의 멱살을 틀어쥐고 흔들며 고함쳤다. “우린 증거를 다 장악했다. 노실하게 말해라! 네 라이터는 어쨌니?” 병진은 호주머니를 들추는 체 하다가 “아야, 내 라이터를 어쨌니?” 하고 상순을 쳐다보았다. 상순은 병진의 멱살을 틀어쥐어 흔들다가 콱 밀어놓았다. “네가 불을 질렀지?” 병진은 뒤로 엉덩방아를 찧으면서 “아니, 이거 생사람을 잡겠소.” 하고 억울한 척 했다. “이건 뭐냐?” 이때 허 소장은 라이터를 사무 상에 내놓았다. 병진은 “그 라이터 어디서?” 하고 빼앗으려고 허 소장한테 달려들었다. “이 놈, 노실하게 탄백해라.” “난 불을 단 적이 없소. 생사람을 잡지 마오.” 병진은 죽을상을 지으면서 최후발악하며 탄백을 거부했다. 그야말로 낚시에 걸린 물고기가 물에서 나오지 않으려고 자충 우돌 하면서 허우적거리는 상이었다. 이때 허영호 소장은 사무 상을 꽝 치면서 “어째 네 죄행을 다 말해야 승인하겠는가?” 라고 고함쳤다. 병진은 그저 “난 불을 지른 적이 없소. 생사람을 잡지 마오.” 이 말만 반복할 뿐이었다. “네가 손이 덴 것은 어떻게 된 영문인가?” 상순의 묻는 말에 병진은 흘끔 쳐다보며 “불을 끄다가 뎄소.”라고 대답했다. “거짓말!” 상순은 병진의 귀 쌈을 후려갈겼다. “너 이놈 새끼! 넌 불이 달린 낟가리에 가서 고함질이나 쳤지 근본 불 가까이에 가서 불을 끈 적이 없다. 어떻게 손을 데우니?” 허 소장도 책상을 꽝 쳤다. “너 이놈! 노실하게 탄백하지 못 하겠는가? 네 손은 어데서 덴 후 상한 거다. 말해! 손은 어데서 뎄는가? 네 라이터는 어째 벼 낟가리 옆에 떨궜어?” “또 한 가지 있다. 네 모자는 어째 불붙은 낟가리 옆에 있어?” “불을 끄다가 떨어뜨렸지. 뭐. 어쨌다고 자꾸 이러오? 난 불을 단적이 없소. 없어!” 병진은 비수에 심장을 찔려 피를 줄줄 흘리는 야수처럼 되고서도 한사코 불을 단적이 없다고 부인했다. 병진은 평소에 사내노라고 큰소리를 꽝꽝 쳤지만 이쯤 되자 걸상에 물앉아 도적고양이처럼 허 소장과 상순을 흘금거리면서 다리마저 부들부들 떨었다. 나중에 허영호 소장은 “자기 죄행을 낱낱이 교대하고 발편잠을 자라!” 하고 엄히 꾸짖었다. 뒤이어 허영호 소장은 병진을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하고 상순이네 윗방에 가둬 넣고 계속 심문하기로 했다. 허영호 소장과 상순은 혹시나 해 기타 지주들과 부농들의 정황도 조사했다. 그런데 충국이랑 근본 의심할 데가 없었다. 온 여름 집에 비가 새 대부분 시간 우사 회의실에 와서 잔 충국은 그날도 초저녁 팀으로 탈곡하고는 회의실에서 불이 달리기전에 자는 것을 사원들이 드문드문 쉬러 들어왔다가 보았다고 했다. 허영호 소장은 상순과 함께 상순이네 집 바깥에 나가 새 정황을 말했다. “김 국장, 전번에 허백호 형님이 말하던데 그날 종연은 묘지꺼리까지 송선을 쫓아가 겁탈하려고 했답니다. 그래서 백호 형님이 종연을 돌멩이로 깠답디다.” “그럼 송선을 겁탈하려는 형사범죄자를 돌로 깠는데 무슨 죄가 있단 말이오? 황차 종연은 죽지도 않고 그날로 정신을 차렸고 사흘 만에 공사병원에서 퇴원했는데.” 상순의 말에 허 소장은 한숨을 후 내쉬었다. “허백호 서기가 내 형이라고 김용만이 생사람을 잡는 겁니다. 공안국에서도 형사수사에 이름 있는 강운룡 과장을 교통대대에 쫓아버렸답니다. 기실 이번 방화사건도 강운룡 과장이면 진작 해명했을 겁니다.” 상순은 사촌동서가 그렇게 된데 마음이 아팠다. “방화사건이 해명된 거나 같소. 병진이 지른 게 분명하오.” “나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한편 병진은 허영호 소장의 수사방안대로 상순이네 집 위방에 있으면서 수사일꾼들과 함께 성숙과 명옥이 끓여주는 밥을 먹으면서 하루 10여 시간 씩 심문을 받았다. 날마다 수사 일꾼들이 윤번으로 똑 같은 심문을 했다. 그것이 짜증나 병진은 이젠 밥도 별로 먹지 않고 천정을 멍하니 쳐다보면서 무슨 궁리를 하고 있었다. 어느 날 점심, 병진은 숟가락을 놓자마자 뒤가 마려웠던지 구들 끝에 나가 앉아 신을 신었다. 그러다가 피끗 부엌 쪽으로 해 놓인 땔나무 패는 도끼가 눈에 뜨였다. 그는 도끼를 보는 순간 생사결판을 내고 도망치고 싶었다. 뒤를 돌아보니 수사 일꾼들은 바깥에 나가고 없었다. 부엌에서 명옥과 성숙이가 설거지를 하고 벽 밑에서 상순이가 솜옷을 껴입고 있었다. (이때 손을 쓰지 못하면 감옥에 가거나 총살 받을 거다.) 병진은 불시에 도끼를 쥐어들고 돌아섰다. “이놈 새끼!” 순간 어느 결에 덮쳐든 상순의 무쇠주먹이 병진의 면상을 떵 쳤다. 병진이 도끼를 휘두르기도 전에 상순에게 도끼를 쥔 팔이 뒤로 탈려 버렸다. “사람 살려라!” 명옥이 소리치자 문이 벌컥 열리며 허영호 소장이랑 뛰어 들어왔다. “꼼짝 말어!” 허영호 소장이 권총을 병진에게 들이댔다. 병진은 몸부림을 치다가 그만두었다. 수사 일꾼들은 병진에게 쇠고랑을 채웠다. “이 새끼 도끼를 들고 찍으려고 하지 않겠소.” 병진은 이를 악물며 고함쳤다. “네 놈들을 다 찍어죽이지 못한 게 한이다! 내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아버지 원수를 갚겠다. 상순이, 네 놈은 내 소싸움을 시켜 소뿔을 뺐다고 한족 대에 쫓아내 빚 구렁에 처넣었다. 난 허망에 나앉았기에 아까울 게 없다. 네놈들에게 원수를 갚지 못한 게 원통할 뿐이다!” “네 놈이 불을 달았지?” 상순은 병진의 귀 쌈을 후려갈겼다. 병진은 하늘땅도 두려워 하지 않았다. “네 놈들의 집까지 다 불 지르지 못한 게 한이다.” “탄백해라. 어떻게 불을 질렀는가?” 병진은 상순과 허영호 소장을 쏘아보며 버럭버럭 고함쳤다. “난 두려울 게 없다. 내가 불을 질렀다. 난 그날 계수동에서 술을 마시고 11시 반에 집 울안으로 돌아왔다. 술기운에 탈곡장에 밝힌 전등불을 보는 순간 소싸움을 시킨 바람에 소 값을 무느라고 집을 팔고도 모자라 빚을 가득지고 한족 생산 대에 쫓겨 온 게 괘씸하더라. 그래서 낟가리에 불을 콱 지르고 싶더라. 사원들이 먹을 쌀이 없게 만들어서 상순의 위신을 납작하게 만들자고 그랬다. 그래서 항상 쥐고 다니던 술병을 가지고 탈곡장에 가서 제일 서북풍이 센 서북쪽 낟가리에 불을 질렀다. 다 말했다. 죽이고프면 죽여라!” 허영호 소장은 수사 일꾼들을 잘 기록하게 하고 병진을 계속 심문했다. “불을 지른 경과를 상세히 말해라. 낟가리에 술을 치고 불을 달았지?” 병진은 구들에 펄렁 물앉더니 자랑삼아 대답했다. “낟가리에 불이 잘 붙으라고 벼 짚 단을 몇 단 빼낸 후 술을 치고 불을 질렀다. 불이 통쾌하게 확 달리더라.” “손에도 술이 묻은 채 불이 달려 뎄지?” “잘 아는구나. 술병에도 불이 확 달려 손이 뎄다. 그래 불이 붙은 술병을 낟가리 밑에 떨군 채 달아났다.” 상순은 성난 사자처럼 병진을 쏘아보며 따졌다. "라이터도 그래서 낟가리 밑에 떨어뜨렸지?”   “그렇다. 공안국 국장을 했다더니 공밥은 먹지 않았구나. 라이터에도 술이 묻었는지 불이 확 달려 그만 떨어뜨리고 달아났다.” 병진은 어린 애처럼 마구 발버둥질을 치며 대성통곡 쳤다. “네놈들의 집을 몽땅 불 지르고 죽여치우지 못하고 잡힌 게 한이다. 이 개새끼들아!” 그는 쇠고랑을 채운 두 손을 쳐들고 고래고래 고함쳤다. 진짜 방화범의 몰골이 백일하에 드러나고 만 것이다. 화재사건이 발생해 일주일 만에 사건이 다 해명된 뒤에야 김용만과 황종연이 돌아왔다. 김용만은 황종연이 사건을 해명했다고 상급에 거짓 보고를 하고 허영호 소장을 철직시킨다고 했다. 이유라면 허영호 소장의 관할구역에서 연속 살인, 상해, 방화 사건이 발생했지만 제때에 해명하지 못했고 이젠 늙어서 제대로 소장 구실을 못한다는 것이었다. 몇 달 후 방화범 이병진은 공개심판에서 유기징역 10년에 언도돼 감옥으로 압송됐다. 김용만 국장은 방화범을 나포한 허영호 소장을 철직하고 대신 황종연을 진수해파출소 소장으로 임명했다. 상순이나 허영호나 수사 일군들과 사원들까지 모두 그 인사변동에 삶은 소대가리 웃다 꾸러미 터질 노릇이라고 뒷공론을 했다.              6. 주먹세계       개일듯 말듯 하던 하늘이 조금 개이는 것 같더니 또다시 먹장구름이 뒤덮쳐 왔다. 거무칙칙한 하늘이 둥근 천정처럼 가없이 넓은 들을 칭칭 둘러 감아 숨 막히고 코막 힐 지경이었다. 하늘에는 덕돌의 근심어린 마음이 내려앉은 듯이 형체를 분간하기 어렵게 퍼렇게 덩덩한 구름들이 겹겹이 내려 앉았다. 먹장구름덩이들은 해가 대지를 비출 수 없게 심술을 부리는듯이 만물상을 지었다. 어떤 먹장구름은 아가리를 쩍 벌리고 으르렁거리는 호랑이 대가리 같고 어떤 구름은 때론 불상에 뛰어올라 천정을 쳐다보며 이를 잡아먹는 잰나비 같았다. 어떤 구름은 뭉쳤다가도 변화무쌍하게 흐트러지며 요술이나 피우는 상 싶었다. 먹장구름의 심술과 요술,롱간에 숨 막힐 듯한 대지의 만물은 파란 하늘과 따뜻한 햇볕을 볼 수 없었다. 패용천산과 칼산 사이 골짜기의 과수원 상공에서 난데없는 매지구름이 연기처럼 피어오르더니 감때사나운 바람에 먹장 같은 떼구름이 사납게 몰려왔다. 우르릉 꽝 요란한 천둥소리와 함께 소낙비가 새까만 구름이 고패를 치듯 하며 덮쳐왔다. 바람이 휙- 소용돌이치자마자 밤송이 같은 빗방울이 후둑후둑 떨어졌다. 그만 비바람과 함께 하늘이 무너져 내려 앉나 시피 먹장구름이 쏟아져 내리는 듯이 진창에 소낙비가 창창 들어박혔다. 덕돌은 패용천산 동굴 속에 숨어 장대비가 쏟아지는 검푸른 하늘을 쳐다보며 언제 구름 한 점 없이 하늘이 개이고 맑은 하늘아래 따뜻한 날이 오겠는가고 바랐다. 허나 당장 하늘이 개일 것 같지도 않았다. 패용천산 남쪽 산비탈의 이 동굴은 십여 년 전에 군부대에서 전쟁준비로 파놓은 군용 갱도였다. 이전에 덕돌은 애들을 데리고 군사훈련을 하면서 이 갱도 안에 들어가 횃불을 들고 끝까지 나가 본적이 있었다. 갱도가 남쪽 양지바른 벼랑으로부터 서쪽 과수원 쪽까지 통했던 것이다. 며칠 전에 덕돌은 집에서 아버지에게 쫓겨나 바깥에서 헤매다가 소낙비를 피해 이 갱도로 와서 숨었던 것이다. 사실 덕돌은 고중입학을 위해 여학생들이 자기에게 투표하게 동원하라고 순희와 은숙에게 쪽지를 써서 부친 일이 탄로 났던 것이다. 그것도 덕돌이 믿고 친하던 철주와 동림에게 그 쪽지를 썼기에 여자애들이 다 투표해 고중에 입학했다고 자랑삼아 얘기했던 것이다. 그런데 고중에 붙지 못한 철주가 그 일을 성욱과 상선에게 말하는 바람에 성욱이 새로 온 담임교원 황승연에게 고발했던 것이다. 공사 기업에 갔다가 형 황종연의 덕분에 학교에 되돌아온 황승연이 또다시 덕돌이네 학급에 와서 담임교원을 맡았던 것이다. 황승연은 공사 기업에서 일해봤자 승급도 하지 못하자 학교에서 놀면서 애들의 왕이나 되는 게 나을 거 같아 되돌아왔던 것이다. 황승연은 덕돌에게 선입견이 있었는바 덕돌은 노 간부 상순의 아들이기에 미워 했지만 류소기의 “독서벼슬론”에 폭 물들어 공부만 잘하지만 사상이 나쁜 애라고 더욱 미워했던 것이다. “나쁜 놈 새끼, 내 계속 이 학교에 있었더라면 고중에 가기나 했겠어? 흥! 하도 덕돌의 큰누나 춘자와 동창생인 경산이랑 성환이랑 도왔으니 그렇지. 거기다 6촌형 철봉까지 발을 벗고 나서는 판에 빈농 대표 흥순들 혼자 막을 수 있었겠는가! 손오공이 아무리 날래도 여래불의 손을 벗어나지 못해. 이제 내 손에 들었으니 혼나 봐라!” 승연이 속을 끙끙 앓으면서 벼르는데 때마침 덕돌이 순희와 은숙에게 쪽지를 썼다고 하지 않겠는가! “흥! 잘 걸려들었다. 못된 송아지 궁둥이에 뿔부터 난다더니. 너 이전에 나를 풍자하는 7언 율시까지 쓰더니 이번에 어디 두고 보자. 우리 학교에서 공부나 하는가?” 그는 학교 장동원 서기한테 말하면 괜히 또 덕돌의 편을 설 것 같아 먼저 은숙을 불러 사건을 확인했다. 은숙은 선생님의 앞인지라 얼굴이 대뜸 홍당무가 됐다. 승연은 은숙을 슬슬 구슬렸다. “괜찮아. 은숙아, 네 잘못은 없다. 덕돌이 그 못된 새끼 잘 못이지. 어찌 학생으로서 여학생에게 연애편지를 쓰니?” “연애편지 아닙니다. 그저 서로 학습을 도우면서 이담 대학에 가자는 편지를 썼을 뿐입니다.” “네 그 편지 있니?” “그거 해 뭐 합니까?” 은숙은 외까풀 눈을 살며시 치켜뜨며 득의양양해 하는 황승연의 날카로운 낯을 올려다 보았다. “너한테 관계없다. 덕돌이 쓴 그 편지를 내 보자. 뭐라고 썼는가?” 허나 은숙도 이젠 열일곱 살이나 되는 애여서 하라는 대로 할 소녀애가 아니었다. “그 편지를 애들이 보면 나까지 놀려댈 게 아닙니까?” “내 말릴게. 누가 감히 너를 놀리겠니?” “덕돌이 놀림을 당해도 그렇지.” 은숙은 눈물이 글썽해 황승연을 쳐다보면서 통사정을 들이댔다. “황 선생님, 제발 이 일을 없는 일로 덮어 감춰 주십시오. 예?” 그러자 황승연은 음충한 눈길로 귀밑까지 발갛게 물든 은숙의 얼굴을 보다가 손을 들어 슬슬 어루만지면서 빈정거렸다. “내가 담임교원인 이상 넌 근심하지 마라. 덕돌을 교육해 사람으로 만들자고 그런다. 이담 다신 여자애들과 집적거리지 못하게 말이다. 이게 바로 병을 치료해 사람을 구한다는 모주석의 교시를 학습 활용하는 거야.” 은숙은 자기 얼굴에서 벌레가 기는 것 같아 몸을 옹송그리면서도 황승연의 손을 감히 쳐버리지 못했다. 황승연도 너무 한 거 같았던지 은숙의 얼굴에서 손을 떼면서 “그 편지만 가져오라. 그 편지 있니?” 하고 물었다. 은숙은 덕돌의 “병을 치료해 사람을 구한다.”는 황승연의 말에 얼리어 깊은 고려도 없이 “있습니다. 우리 엄마 건사했을 겁니다.”라고 대답해버렸다. “네 엄마 그거 건사해둬 뭐한다니?” 은숙은 머리를 들지도 못하고 목구멍으로 기어들어가는 모기소리만한 목소리로 “우리 엄마는 편지를 두었다가 이제 다시 덕돌이 나를 지껄이면 그 편지를 꺼내 혼 내주겠다고 건사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내일 얼른 그 편지를 찾아 가져 오너라. 내 덕돌을 혼 내주마.” “덕돌을 놔두십시오. 서로 학습을 잘하자고 했는데 무슨 잘못이 있다고 그럽니까?” “넌 모른다. 학생들이 연애를 해선 안 돼.” “…” 그리하여 이튿날 은숙은 어머니와 말하고 그 편지를 가져다 황승연에게 바쳤다. 황승연은 덕돌의 큰 꼬리나 밟은 듯이 성욱이랑 상선이랑 응철이랑한테 이른바 연애편지를 돌려가면서 구경시켰다. 그리하여 삽시간에 온 학급 애들에게 덕돌이 연애편지를 은숙에게 썼다고 소문이 쫙 펴졌다. 화는 눈썹 끝에서 떨어진다더니 이런 맑은 하늘의 생벼락이 또 어디 있겠는가? 덕돌이 교실에 들어갔을 때었다. 은숙이랑 순희랑 두 손으로 얼굴을 싸쥐고 바깥으로 우르르 달려 나갔다. 남자애들은 “연애대장이 왔다!” 하고 고함쳤다. 덕돌은 무슨 감투 끈인 지도 모르고 책가방을 메고 교실에 들어가 제 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책상에 죽은 물고기 몇 마리가 놓여 있고 그 옆에 분필로 “덕돌아, 너와 은숙의 결혼잔치 부조다.”라고 써놓았다. 머리를 들고 앞을 보니 흑판에도 여자애 손을 잡은 남자애를 그려놓고 “난 은숙을 사랑한다. 우린 이 담 대학에 간 후 잔치해 잘 살자!”라고 써놓지 않았겠는가! “누가 그랬니?” 덕돌이 묻자 여기저기서 “연애대장!” 하고 고함쳤다. 성욱이랑 응철이랑 깨고소해 구경하고 있었다. “누가 그랬니? 나서라!” 덕돌이 눈을 부릅뜨고 고함치자 응철이 책상에 앉아 깨 그루에 앉은 참새처럼 재잘거렸다. “내 그랬다. 연애대장!” 덕돌은 분이 치밀어 으스러지게 틀어쥔 주먹으로 응철을 한 대 갈겼다. 응철은 허리를 슬쩍 틀어 피하면서 덕돌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덕돌과 응철은 땅바닥에서 엎치락뒤치락 하며 굴렀다. 그때 구경하는 숱한 애들 속에서 성욱이 발로 덕돌의 배를 걷어찼다. 그러자 상선이랑 설복이랑 일광이랑 달려들어 덕돌에게 물매를 안겼다. 그때 장영웅이랑 동림이랑 광철이랑 나서서 말려서야 덕돌은 다 터진 얼굴을 들고 겨우 일어났다. 덕돌은 눈물을 주르르 흘리면서 책상에 가서 가방을 메고 쩔룩거리면서 교실을 나갔다. “어디 두고 보자! 이 개새끼들아!” 상학종이 울렸다. 황승연은 교실에서 나가는 덕돌을 문어귀에서 딱 마주쳤다. “어디로 가?!” "..." 덕돌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휭 하니 가버렸다. 그런데 고중에 붙지 못한 철주랑 숱한 애들이 책가방을 메고 교실에 들어와 벽에 죽 붙어 서서 야단쳤다. “저런 연애대장을 다 고중에 붙이면서 왜 우릴 붙이지 않습니까?” “옳습니다. 덕돌을 퇴학시키고 우리를 고중에 입학시키십시오.” 철주랑 소리쳤다. 황승연은 코피를 흘리며 운동장으로 가버리는 덕돌을 보고 고소해 했다. 한참 후 황승연은 덕돌을 따라와 불러 세웠다. “네가 학생이 할 짓을 했니? 연애편지를 쓰다니? 넌 퇴학시켜야 해.” 덕돌은 허리 아파 나무에 기대서서 억울함을 하소연했다. “난 연애편지를 쓴 게 아닙니다. 그래 학습을 서로 돕자고 한 게 무슨 잘 못입니까?” 황승연은 날이 선 콧마루 위 우멍눈을 무섭게 부릅뜨고 고함쳤다. “너 아직도 승인하지 않겐?! 이 놈아, 꼴찌 같은 새끼, 죄꼬만 게 누구한테 연애편지를 써? 그 바람에 은숙이 공부를 하지 못하고 울고 있다.” 황승연은 덕돌의 귀쌈을 쨕 갈겼다. 덕돌은 눈앞이 캄캄해나며 숱한 별찌가 맴돌았다. “어째 칩니까? 선생이면 학생을 마음대로 때려도 됩니까?” 덕돌은 얼얼해나는 볼을 매만지면서 대들었다. “야, 이 놈 새끼, 아무리 사생이 ‘한 전호속의 전우’라지만 네 감히 선생한테 대들 테냐?” 덕돌의 눈에는 황승연이 선생이라기보다 편싸움을 하는 싸움 군 같아 보였다. “더 들을 말도 없습니다.” 덕돌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절뚝거리면서 집으로 가버렸던 것이다. 그런데 점심에 집에 와서 그 사실을 알게 된 상순은 자초지종을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무작정 덮어놓고 덕돌을 마구 때리며 쫓아다녔다. 성질이 괴벽한 상순은 낫을 마구 쥐어뿌리며 쫓아다녔다. 덕돌은 집에서 쫓겨난 후 여기저기 숨어 다니다가 배고프면 밤에 자기 집 가지 밭에 가만 가만 가서 가지를 뜯어먹고 추우면 가만히 집 뒤울안으로 해 고방에 들어가 가만히 잤다. 아버지가 겁나 어떤 때에는 교실의 창문 유리를 뜯어내고 살금살금 기어들어가 책상 위에서 자군 했다. 그런데 그만 아버지에게 들키어 집에 다시는 들어가지 못했다. 그리하여 머나먼 패용천산 갱도에 와서 숨어 있었던 것이다. 배고프면 마을 앞의 자기 집 가지 밭에 내려가서 가지나 오이를 뜯어 먹으면서 주린 배를 달래었다. 그는 아무리 배고파도 과수원에 주렁주렁 달린 배 하나 마을의 남의 가지를 하나도 훔쳐 먹지 않았다. (에이유. 이 더러운 세상에서 어떻게 살겠니? 아예 자살해 버리자.) 덕돌은 달리는 기차 앞에 뛰어들어 자살하려고 진수해 역으로 갔다. 허연 연기와 김을 물물 내뿜으며 칙칙 폭폭 달리는 열차 대가리를 보는 순간 더 살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덕돌은 열린 대합실 창문으로 뛰어나가 달리는 열차를 향해 뛰어갔다. “서라!” 그때 역 직원이 고함치며 쫓아가 덕돌의 팔소매를 잡았다. “놓으십시오! 난 살고 싶지 않습니다. 이 더러운 세상에서 살고 싶지 않단 말입니다!” 덕돌은 몸부림치며 고함쳤다. 여러 직원들이 덕돌의 허리를 끌어안고 팔을 뒤로 비틀어 역 파출소로 끌어갔다. 경찰까지 와서 덕돌을 보고 물었다. “너 이름이 뭐니? 왜 자살하려고 하니?” “난 살고 싶지 않습니다. 연애편지를 쓰지 않았는데도 연애편지를 썼다고 놀려주는 거 어쩝니까?” 경찰은 인차 진수해파출소에 전화로 알렸다. 이윽고 찌프가 달려와 역 파출소 마당에 와서 멈춰 섰다. 찌프에서 허영호와 황종연이 내렸다. 그들은 역파출소에 들어오자 대뜸 덕돌을 알아보고 “네가 어째 여기 왔니?” 하고 놀라했다. 역 파출소 경찰은 “얘를 아오? 얘가 자살하려고 달리는 열차에 뛰어들려는 거 겨우 붙잡았소.”라고 했다. 황종연은 허영호를 흘끔 곁눈질 해보더니 경찰에게 “얘는 우리 진수해 공사 함흥 대대 노 서기의 아들이오. 꽤나 말썽을 일으키는구먼.” 하고 말하면서 덕돌을 돌아보았다. “어째 자살하려고 했니?” 덕돌은 왕 울음보를 터뜨렸다. 이윽고 경찰들은 흑흑 흐느끼는 덕돌에게서 억울한 하소연을 듣고 머리를 끄덕였다. “김 서기가 어떻게 기른 외동아들인데 자살해서야 되니? 구체정황은 대개 알만한데 사내란 어떤 일이 있어도 허리를 꿋꿋이 펴고 떳떳이 살아야 한다. 알만하니? 자살할 용기가 있으면 어째 이를 악물고 살 결심이 없느냐?” 허영호 소장의 말에 덕돌은 머리를 점차 들었다. (그래, 옳다. 내가 자살하면 누가 좋아하니? 성욱이랑 응철이랑 내가 연애편지를 썼다고 두고두고 놀릴 게 아닌가? 난 억울한 누명을 쓴 채 귀신이 될 게 아닌가?) 순간 덕돌은 벌떡 일어나 “저를 집에 보내주십시오. 다신 머절싸하게 자살하지 않겠습니다.”라고 했다. 허영호는 “그래, 그래야지. 어서 집으로 가라.”라고 했다. 그때 황종연이 덕돌의 앞을 막아 나섰다. “안 되오. 우리 파출소 소장은 내지. 당신이오? 걔를 마음대로 돌려보낼 순 없소. 우리 파출소에 데리고 가서 잘 알아봐야겠소.” “뭘 말이오?” 종연은 소장 틀을 차리면서 제까진 멋있는 추리를 해댔다. “얘 말만 듣고 내보내 되오? 자살하려고 할 때엔 꼭 무슨 죄를 지었을 수 있소. 그간 집에서 쫓겨나 바깥에서 뭘 먹고 살았단 말이오? 꼭 뭘 훔쳐 먹었을 수도 있잖소?” 덕돌은 너무 억이 막혀 종연을 쏘아보면서 울분을 토했다. “어째 생사람을 잡으렵니까? 내 언제 훔쳐 먹었습니까? 난 배고프면 우리 집 가지 밭에 가서 가지를 뜯어 먹으면서 이제껏 살았습니다.” “걸 어떻게 믿니? 네 집 가지 밭이 얼마 크면 네가 가지를 뜯어먹으면서 열흘이나 넘게 살았단 말이냐? 남의 가지랑 훔쳐 먹었지?” “어떤 때엔 우리 엄마 가만히 옥수수떡을 가져다주어서 먹고 살았소.” “보오. 아무 문제도 없소. 얘는 김 서기를 닮아서 거짓말을 할 얘가 아니오.” 그제야 황종연도 죄 없는 덕돌을 어찌는 수 없어 내보냈다. 허영호는 비칠거리는 덕돌이 또 자살이라도 할까봐 근심돼 쫓아나가 데리고 진수해 시내에 하나 밖에 없는 대중식당에 대리고가서 한때 사 먹였다. 그는 이밥을 넋을 잃고 먹는 덕돌을 보고 코마루가 시큼해났다. (얼마나 굶었으면 이밥 두 사발이나 먹고서도 두부 국 한 사발을 게 눈 감추듯 할까?) “덕돌아, 날 알만하지?” 덕돌은 국물을 들어 쭉 마시고 나서 입귀를 쓱 닦으면서 “잘 모르겠습니다. 잘 먹었습니다.” 하고 허리 굽혀 인사했다. 그는 40대 중반인 허영호가 자기를 특별히 잘 대해주는 것이 고마워 연신 인사했다. 허영호는 덕돌의 손을 잡고 말했다. “난 진수해파출소 허영호라고 한다. 네 아버지는 이전에 영월구 공안국 국장이었다. 그때 나를 경찰로 뽑아줬다.” “예? 우리 아버지가 공안국 국장이었습니까?” 덕돌은 눈이 동그래졌다. “그래. 그때 내가 늙으신 어머니를 모시고 고생할 때 김 국장은 항상 우리 집에까지 찾아와 자기 호주머니를 들춰 어려운 생활에 보태라고 주었지. 네 아버지가 나를 공안국에 데려오지 않았더라면 내가 파출소 소장을 하기는커녕 영월구에서 소 궁둥이나 쳤을 거야.” “예~” 덕돌은 이제야 자기를 잘 대해주는 원인을 알고 머리를 끄덕이면서 미더운 눈길로 허영호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이후에 무슨 일이 있으면 내게 말해라. 넌 아직 어려서 모르는 게 많다. 황승연이나 저 파출소 소장 황종연은 네 아버지와 썩 좋지 않은 사이니까. 주의해라.” 덕돌은 허영호에게 허리 굽혀 인사했다. “예. 알았습니다. 명심하겠습니다.” 허영호는 그러고도 시름이 놓이지 않아 진수해를 벗어나 해동다리까지 덕돌을 바래다 주면서 여러 가지로 타일러 주었다. 허영호와 갈라진 덕돌은 집으로 들어가려다가 자기한테 낫을 마구 쥐어뿌리던 아버지 부릅뜬 세 귀 눈이 떠올라 주춤 멈춰 섰다. (아버지가 나를 용서할까?) 중도에서 덕돌은 오도 가도 못하고 길 한판에서 서성거렸다. (그럼 어디로 간단 말인가? 패랑산 갱도로 갈까? 아니야. 이젠 조꼬만 가지나 오이도 다 뜯어먹어 사흘 안엔 먹을 게 없다. 그렇다고 남의 거 뜯어 먹을 수도 없고.) 생각다 못해 덕돌은 가보지 못한 둘째외삼촌 집을 떠올렸다. (거기서 며칠 묵으면서 보자.) 덕돌은 진수해 영화관 근처에 있는 둘째외삼촌 집으로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겨우 옮겼다. 남루한 옷을 입고 집에 들어선 덕돌을 보고 둘째외삼촌 근룡이나 삼촌댁도 놀라했다. “네가 어떻게 돼 왔니?” “놀러 왔소.” 근룡은 키 넘게 큰 덕돌의 손을 잡고 반갑게 맞이했다. 그는 옛날 자기 애기때 어머니가 젖이 없어 먹지 못해 고생할 때 덕돌의 어머니가 자기를 업고 다니면서 동냥젖을 먹여 살렸고 염소를 길러 염소젖을 먹여 키웠다는 말을 했다. 삼촌댁은 덕돌을 먹이려고 없는 쌀독을 빡빡 긁어 찰밥을 해먹이었다. 덕돌은 고중입학준비를 한창 하는 한 살 지하 외사촌여동생 최정옥과 초중입학을 준비하는 외사촌남동생 최연길의 공부랑 배워주면서 사흘은 잘 놀았다. 허나 외삼촌 집에 계속 눌러 앉아 있는 것도 쌀이 귀한 세월에 말이 눈치 보여 엉덩이를 들고 일어났다. 근룡은 “얘, 어쩌다 놀러 왔다가 더 놀아라.”라고 했다. 허나 덕돌은 “학교에 가서 공부하겠소.”라고 하며 기어이 일어나 떠나갔다. 뒤에서 정옥은 “지금 어디 학교에서 공부를 한다고 그래? 농촌 학교에서야 농사일을 더 시키겠지 뭐? 더 놀면서 내 공부나 배워 줄 게지.”라고 했다. 허나 덕돌은 그들의 호의를 가슴에 담은 채 그들과 석별의 정을 나누며 좁은 골목길을 벗어났다. “이젠 어디로 가야지.” 몇 발자국만 더 내디디면 외할머니네 집이었다. 작은 외삼촌 근삼은 덕돌보다 열한 살 이상이었는데 둘째누나 은숙과 동갑이었다. 그는 금방 결혼해 여섯 살 난 딸애 순애를 키우면서 재미나게 살고 있었다. 허나 외할머니네 집 앞으로 가면서도 발걸음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쌀 고생을 모질게 하는 세월이여서 피뜩 보니 외할머니네 바람벽에 쌀 절약공약서가 나붙어 있었다. 둘째외삼촌댁에게서 들어서 알았는데 외할머니는 바람벽에 붙인 그 절약공약서에 “손님은 하루에 양표 한 근 두 냥에 5전을 내고 가라.”고 조목조목 써넣었다고 했다. 또 화룡의 맏아들 근형의 맏아들 만길이 어쩌다 놀러 가도 양표와 돈을 내지 않는다고 몇 번이고 외할머니가 꾸중했다는 말도 들은 적이 있었다. 여기까지 생각하자 덕돌은 발길을 돌렸다. 이때 뒤에서 문을 열며 누가 뭐라고 말하는 여인의 말소리가 들렸다. 덕돌은 혹시 외할머니께 들킬세라 황급히 발걸음을 재우쳐 그 골목길을 벗어났다. (그럼 어디로 간다? 영월구에 간 큰고모네도 계속 진수해에 있었더라면 며칠 묵을 수 있겠는데.) 진수해 골목길에서 오도 가도 못하고 방황하던 덕돌은 광석의 둘째고모네 집으로 갈까 궁리해보았다. (아니야. 거기 가도 며칠 있겠니? 아예 이 걸음으로 교하 누나네 집으로 달아나자. 누나야 날 몇 달이고 있어라 할 게 아닌가?) 무릎을 탁 치고 난 덕돌은 다시 진수해역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속으로 태산 같은 근심이 발걸음을 무겁게만 했다. (동전 한 푼도 없이 어떻게 교하까지 간단 말인가? 4원 50전이나 하는 차표를 사야 가지. 정 안되면 도적차를 타고 가지. 화물차에 숨어 갈까.) 마음을 다잡자 덕돌은 골목에서 큰길로 나와 역으로 빨리 걸어갔다. “어디로 가니? 덕돌아!” 이때 뒤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덕돌이 몸을 홱 돌려 보는 순간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막내 누나 성숙이가 아니겠는가? 덕돌은 황급히 달아나려고 했다. “야, 서라! 누나 어쩌니? 집으로 가자.” 덕돌은 겁을 집어먹고 우뚝 멈춰 서서 주위를 둘러보며 네 살 위인 성숙과 물었다. “아버지한테 잡히면 죽겠는데.” “아버지 너를 데려 오라고 했다. 때리지 않겠다고 하더라.” “정말?” 노기 띤 아버지 무서운 세 귀 눈이 떠올라 덕돌은 믿어지지 않았다. “정말이다! 아버지도 네가 억울하다는 거 알고 데려오라고 했다.” 그제야 덕돌은 성숙의 팔을 붙잡고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이윽고 덕돌은 성숙을 따라 집으로 돌아갔다. 아버지가 겁이 나서 가만히 들어가 보니 아버지가 보이지 않았다. 상순은 덕돌이 무서워 밥을 제대로 먹지 못할 까봐 자리를 우정 피해주었던 것이다. 밤이 깊어서야 아버지가 돌아왔지만 윗방에 누워 자는 척 하는 덕돌을 깨우지 않는 것이었다. 이튿날 아침 덕돌이 아버지를 감히 쳐다보지 못하고 머리를 숙이고 옥수수떡을 먹을 때 상순은 자기 그릇의 옥수수떡을 하나 집어 주면서 조용히 타일렀다. “사내란 큰일을 하자면 여자애들을 멀리 해야 한다. 알만하니?” “아니, 난 고중에 갈 때 여자애들을 투표하라고 편지를 썼지 연애편지를 쓴 게 아닌데 무슨? 원, 억울해 죽겠습니다.” 덕돌이 일어나자고 하자 붙들며 아버지는 계속 타일렀다. “네가 연애했다는 게 아니다. 이후에 어쨌든 여자애들과 주의해라는 말이다. 봐라. 말로 그저 투표해달라고 하면 될 걸 편지를 쓸게 뭐야? 네가 연애편지를 쓴 것도 아닌데 얼마나 곤혹을 겪니? 방법이 틀렸단 말이다. 이후엔 뭘 하나 주관동기와 방법을 잘 고려해야 한다. 알만하지?” 그 말에 덕돌은 뭔가 눈앞이 환해지는 것 같아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바로 그거다. 그거. 왜 하필 좋은 입을 두고 편지를 썼을까? 남에게 이상하게 연애편지를 썼다고 억울하게 놀림을 당하게.) “이젠 성욱과 싸우지 말라. 걘 네 9촌 조카 아니냐? 옛날부터 팔촌이 한 구들이라고 성욱의 아버지 증조부와 네 증조부는 친형제간이야.” “글쎄 난 친척이라고 그 애 공부도 배워주고 수학콩쿠르에서랑 시험지를 보여주면서 도와주었건만 내 학습위원을 한다고 질투해 처처에서 물어먹는단 말입니다. 그 새끼 내 나무를 꺾지 않은 것도 꺾었다고 선생한테 고발했습니다. 이번엔 내 연애편지를 쓴 게 아닌데도 선생한테 고발하고 애들한테 소문을 편 바람에 내 학교에 머리를 들고 가지 못합니다. 애들이 나를 어떻게 놀려주는지 알고 아버지는 그럽니까?” 순간 덕돌은 너무 억울해 옥수수떡을 먹지도 못하고 “엉엉.” 통곡 쳤다. 그제야 상순은 먼 손자 벌 되는 성욱이가 너무 했다는 것을 알고 더 말하지 않고 그저 한숨만 길게 내쉴 뿐이었다. 덕돌은 손으로 눈물을 닦으며 집을 나섰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학교 교실에 들어갈 일이 머리기 곤두설 지경이었다. “에라, 모르겠다. 교실에 들어가도 어디 공부 하니? 학교라는 게 전탕 농사일만 시키면서. 놀림을 당하자고 학교로 다녀? 안 가!” 덕돌은 주먹을 으스러지게 틀어쥐었다. “권투를 배워 나를 놀리던 새끼들을 몽땅 때려눕히고 다시 학교에 가자!” 덕돌은 아버지 눈길이 무서워 학교로 가는 척 하다가 아버지 엄마 그리고 누나 은자와 성숙이가 모두 밭으로 나간 후에 슬쩍 집으로 돌아와 들어 누워 교과서를 보면서 그간 뒤쳐진 공부를 했다. 지어 집식구들에게 들킬 까봐 철봉형님과 경산 선생이 준 “림해설원”이나 “수호전”이나 “삼국연의” 같은 두툼한 소설책을 가지고 패용천산 양지바른 절벽 위에 올라가 나무 그늘 밑에서 읽었다. 그는 소설책을 읽을수록 감칠맛이 나고 재미났다. 그는 소설을 읽으면서 소설속의 리규나 로지심 같이 무예가 출중한 무사가 돼 자기를 놀리는 애들을 때려눕힐 생각이 불쑥불쑥 치밀어 올랐다. (내 힘으로는 안 되겠고. 누굴 시켜 때린다?) 궁리 끝에 그는 조개덕의 소학교 때 한족친구들을 내세워 설복이랑 성욱이랑 때리기로 마음먹었다. 덕돌은 장옥이랑 조신지, 장선이랑 친하자고 그물로 잡은 물고기랑 집에 좀 남기고는 다 퍼다 주었다. 지어 한번은 대여섯 근이나 되는 잉어를 잡자마자 장옥이네 집에 가져다주었다. 장옥은 장팔래의 둘째아들이었다. 원래 장팔래와 상순은 아주 친하게 지냈기에 장옥도 덕돌과 인차 친해졌다. 그러자 장옥은 “덕돌아, 네 아버지는 우리 집에 새 벽돌집을 지어줬다. 너와 난 세세대대로 제일 가까운 친구야. 만약 어떤 새끼든 너를 건드리기만 하면 말해라. 이 형님이 죽여치우겠다.”라고 하며 주먹을 내휘둘렀다. 그때라고 생각한 덕돌은 장옥에게 한 마을의 친척인 성욱을 치면 또 아버지께 말을 들을 거 같아 가만 놔주고 계수동의 설복이랑 괘씸하게 굴던 일을 말했다. “당장 때려죽이겠다!” 장옥은 덕돌보다 두 살이나 이상이었다. 진수해중학교에 다니는 그는 그날 학교에 가지도 않고 인차 조신지랑 장선이랑 장화랑 한족 애들을 일여덟 불러가지고 함흥중학교로 뛰어갔다. 휴식시간에 교실에 뛰어든 장옥은 주먹을 휘두르며 고래고래 고함쳤다. “누가 감히 덕돌을 놀리는 거냐?! 어디 죽어봐라!” 몇 개 대대에서 손꼽히는 싸움꾼 장옥을 보는 순간 애들은 모두 목을 움츠리더니 서로 눈치 보며 뒤 구석으로 비실비실 피했다. 그때 덕돌이 쓱 나서며 설복을 손가락질 하며 고함쳤다. “저 새끼 쳐라!” “이 새끼야!” 장옥은 씽 덮쳐가 키가 훤칠한 설복을 발길로 차고 주먹으로 쳤다. 숱한 한족 애들이 우르르 덮쳐가 설복을 땅바닥에 쳐 눕히고 물매를 안겼다. 덕돌은 설복의 멱살을 쥐어 일으켜 보기 좋게 골받이를 딱딱 해댔다. 설복은 코피가 터져 낯이 쥐마당이 됐다. 덕돌은 숱한 애들에게 주먹을 휘두르며 우줄거리며 고함쳤다. “이후에 누가 나를 놀리기만 해봐라! 대갈통을 까버릴 테다!” 은숙은 여자애 같던 덕돌이 사납게 변한 데 놀라 바깥으로 달아났다. 순희도 나무라는 눈길로 덕돌을 흘겨보며 뒤따라 나가버렸다. 설복은 그래도 기가 시들지 않아 죽는 소리를 쳤다. “일광아, 성욱아, 뭐 하니?” 덕돌은 일광을 걷어찼다. “이 새끼도 때려라!” 덕돌의 소리치자 한족 애들은 일광마저 반주검이 되게 때렸다. 애들은 무서워 손을 쓰기는커녕 맞을 까봐 겁을 집어먹고 교실에서 와 소리치며 달아났다. 그때 황승연이 뛰어왔다. “이게 뭐야? 한족 애들을 시켜 우리 학급 애들을 치다니?” “치면 어째? 몽땅 때려죽이겠다!” 장옥이랑은 황승연마저 때리자고 덤벼들었다. 그때 덕돌이 두 팔을 벌려 앞을 막아섰다. “선생은 놔둬라. 오늘은 그만하고 돌아가자!” 교실은 장마당이 돼버렸고 온 학교가 공포에 떨었다. 덕돌은 속이 시원해 온 하루 장옥과 함께 진수해 대중식당에 가서 술까지 마시고 밤중에야 집으로 돌아왔다. 절칵 전등불이 켜지더니 아버지가 일어나 앉으며 노한 눈길로 덕돌을 쏘아보며 세 귀 눈을 흘겼다. “너 학교에 간 첫날부터 싸움질이냐? 숱한 애들이 네가 보낸 한족 애들에게 맞아댄 보복을 하자고 우리 집에 찾아와 사랑방까지 온 집안을 다 뒤번지고 갔다.” “뭐라고? 누가 감히 왔단 말이오?” 덕돌은 밸을 쓰면서 윗방에 들어갔다. 허나 상순은 이전과는 달리 덕돌을 마구 욕하지 않고 문을 열고 윗방에 들어와 앉더니 차근차근 타일렀다. “얘야, 복수심을 버려라. 저 병진을 봐라. 이전에 소싸움을 시켜 생산대 소뿔을 뺐다가 그때 돈으로 900원을 배상했다. 병진이 집까지 다 팔아 소 값을 물고 한족 대에 쫓겨나고 말았다. 그 승치를 하려고 생산 대 낟가리에 불을 질렀다가 감옥에 갔다. 사람이 복수심이 강하면 남을 해치고 자기마저 해치게 된다. 남과 단결할 줄도 알아야 한다. 자기를 헐뜯고 해치던 애들과도 단결해야 한다.” 허나 덕돌은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래 나를 죽이자고 드는 애들을 놔두란 말입니까? 난 그렇게 하지 못하겠습니다. 그 놈새끼들이 다신 나를 놀리지 못하게 몽땅 혼 줄을 내주겠습니다.” “에이유, 언제 철이 들겠니? 사람이 어찌 힘으로 세상을 개조하려고 하니? 힘이 센 게 왕이 된다면 황소가 왕이 되지? 네가 하나 쳐 눕히면 셋을 쳐 눕히는 싸움꾼이 너를 찾는다. 어쨌든 숱한 애들이 널 때리려고 찾아다니니까 주의해라.” 덕돌은 일어나려는 아버지 손을 두 손으로 잡고 졸라댔다. “아버지, 허영호라는 경찰이 말하던데 아버진 영월구 공안국 국장을 했답디다. 나한테 싸움재간을 배워주지 않겠습니까?” 상순은 손을 뿌리쳤다. “그만둬라! 금방 싸우지 말라고 했는데 진짜 싸움꾼이 될 작정이냐? 언제 사람이 되겠니? 힘이 나 쌔나면 내일부터 밭에 나가 기음이나 왕왕 매라. 네 학교에도 가지 않고 어쩔 예산이냐? 철봉이랑 성환이랑 경산이랑 다 네가 학교에 가지 않는다고 하면서 전도를 근심하더라.” 허나 이번에도 덕돌은 툴툴거렸다. “공부도 하지 않는 학교에 가서 놀림을 당하자고 가겠습니까? 내 놀리는 애들을 몽땅 버릇을 떼놓고야 학교에 가겠습니다. 어느 새끼 더 놀리는가 보겠습니다. 주둥이를 망치로 다 까 없애치우겠습니다.” 상순은 아들애가 세상에서 부딪치고 얻어맞더라도 스스로 세상 사는 도리를 깨닫게 하려고 더 말하지 않고 정지로 내려가 잠자리에 들었다. 이튿날 때마침 일요일이 돼 덕돌은 장옥이네 집으로 찾아가 어제 저녁에 애들이 자기를 때리려고 찾아온 일을 얘기했다. 그러자 장옥은 주먹으로 벽을 꽝 쳤다. 순간 땅땅한 벽에 움푹 주먹자리가 났다. “어느 새끼 감히 네 집까지 찾아간다니?! 때려죽이겠다!” 장옥은 주먹을 휘두르며 윽윽 별렀다. 그날 덕돌은 장옥과 조신지와 함께 반디를 들고 물고기를 잡으러 패용천산 앞으로 가면서 어떻게 집에 찾아온 애들에게 복수의 불벼락을 안기겠는가를 의논했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때마침 저쪽에서 일광과 설복이 반디를 들고 골통 쪽에서 금방 둑 위로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저길 봐라!” 덕돌이 가리키는 쪽을 보던 장옥은 반디를 쾅 내던지고 곧추 그리로 씽 덮쳐갔다. 뒤에서 조신지와 덕돌도 쫓아갔다. 덮쳐드는 장옥을 본 설복과 일광은 고양이를 본 쥐새끼처럼 두 손으로 낯을 가리고 발뺌을 하려고 허둥지둥 길옆의 옥수수 밭으로 달아 들어갔다. 좁은 옥수수 밭 옆은 논밭이어서 일광을 숨기기는 어림도 없었다. 숨을 곳이 없게 된 일광과 설복은 얼마 더 달아나지 못했다. 장옥의 안걸이에 걸려 일광이 논밭에 쿵 넘어졌다. 장옥은 한다하는 싸움꾼이어서 발길을 날려 넘어진 일광의 턱주가리를 탁 걷어차고 논밭에서 절벅절벅 달아나는 설복을 쫓아갔다. 뒤따르던 조신지와 덕돌이 뒤따라가 치고 박고 해 논밭에 거꾸로 처박아놓았다. 드디어 설복도 장옥의 무쇠주먹에 얻어맞아 코에서 쌍줄 코피가 줄줄 흘렀다. 장옥과 덕돌이 네는 설복과 일광을 논밭에서 이리 저리 쫓아다니며 반 주검이 되게 밟아주었다. “다시 덕돌을 놀리겠느냐?!” “다신 안 놀리겠다.” 설복과 일광은 두 손이 발이 되게 싹싹 비비며 빌었다. “네까짓 새끼들이 감히 덕돌의 집에까지 때리겠다고 찾아가? 다시 그래 겐?!” 장옥이 을러메자 일광과 설복은 쥐마당이 된 낯을 쳐들지도 못하고 논밭에 조아렸다. “안 찾아갈게.” 장옥은 발길로 일광과 설복의 턱을 걷아 차며 호령했다. “할아버지라고 불러!” 일광과 설복은 서로 눈치를 보았다. “빌지 못할까?!” 조신지가 주먹을 날렸다. “부르겠다. 할아버지!” “한어와 조선어로 불러!” 일광과 설복은 연신 피 흐르는 머리를 조아리면서 “할아버지! 할아버지!” 하고 불렀다. 그들은 여자애 같은 덕돌을 입으로는 “할아버지”라고 부르면서도 속으로는 언제든지 오늘의 치욕을 씻고 덕돌에게 보복하려고 궁리했다. 한매 얻어맞을 때마다 속으로 시퍼런 칼을 갈고 또 갈았다. 성질도 여자애 같고 이제껏 싸움이라고는 해 보지 못한 덕돌은 슬그머니 겁났다. “정말 엄마의 말씀처럼 맞은 놈은 다리를 펴고 자도 때린 놈은 다리를 꼬부리고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한다는 게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인가?” 덕돌은 장옥이랑 없을 때 혹시 설복이나 일광을 만나면 큰일이었던 것이다. 그는 낮에는 학교에 가지 않고 패용천산 절벽 위에 가만히 올라가 나무그늘 밑에 누워 책을 보다가도 애들이 뛰노는 함흥중학교 마당을 내려다보는 순간 학교로 가지 못하는 서러움이 괴여 올랐다. “날마다 이렇게 그 놈 새끼들을 피해 벼랑 위에 누워 있을 순 없어. 하루빨리 주먹치기를 배워 저 놈 새끼들을 다 때려눕히고 학교에 가야 한다! 내 무슨 죄인이라고 숨어 다녀?” 덕돌은 벼랑위에 앉아 학교를 내려다보면서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그는 핍박에 의해 양산박으로 올라가듯이 책을 잠시 놓고 싸움재간부터 배우지 않으면 안됐다. 황차 무슨 등소평의 “우경 번안 풍”을 배격하고 림표와 공자를 비판하는 운동을 하면서 학교에서는 근본 공부를 하지 않고 일만 하는 데야. 학교에 가서 농사만 지으니 갈 재미도 없었다. 그는 먼저 남몰래 장옥에게서 발로 걷어차기로부터 하나하나 익혀나갔고 집 사랑방 천정에 끈으로 모래를 꼴딱 넣은 농구공을 달아매놓고 주먹으로 치고 머리로 들이받기도 했다. 주먹으로 농구공을 처음 칠 때에는 손등이 아파 죽을 것 같았다. 허나 장옥이랑 없을 때 자기를 보호하고 적수를 쳐 눕히기 위해 이를 악물고 치고 박고 또 쳤다. 허나 그것만으로는 싸울 수 없었다. 설복과 일광은 다 축구선수인데다가 진수해에서 한다하는 싸움꾼들을 친해 권투를 어지간히 배운 애들이 아니었다. “그 새끼들을 싹 때려눕히자면 로지심처럼 힘 장수로 돼야 해.” 덕돌은 함흥 촌에 가서 쇠바퀴를 얻어다 뒤울 안에 숨겨두고 어두워진 밤이면 가만히 거중을 연습했다. 처음에는 25 킬로그램짜리 쇠바퀴 한 개씩 쇠막대기에 꽂아놓고 드는 연습을 했다. 팔에 힘이 오르자 나중에는 양쪽에 50킬로그램짜리 쇠바퀴 하나씩 달고 거중을 연습했다. 날마다 밤이면 100킬로그램짜리 쇠바퀴로 거중을 연습했기에 온 몸에 힘도 자라 단숨에 20차씩 인상할 수 있게 됐다. 그리하여 어지간한 애들은 외팔로 허리를 감아쥐어 내동댕이치거나 깔아 뭉개버릴 수 있게 됐다. 그러나 그는 누구 앞에서도 힘자랑을 하지 않았다. 겨울에는 태평강의 얼음을 까고 차디찬 강물에 발가벗고 팬티만 입고 냉수욕을 했고 날마다 식전에 패용천산 앞에까지 내복바람에 달아갔다 달려왔다. 낮에는 학교에 가지도 않고 패용천산에 달려 올라가 누구도 볼수 없는 양지바른 절벽 위거나 시꺼먼 갱도 안에 들어가 혼자 주먹치기와 발길질을 연습했다. 장옥은 덕돌이 그간 연습한 주먹치기와 발길질 그리고 거중하는 것까지 점검한 후 이렇게 말했다. “이만 하면 내게선 배울 거 다 배웠다. 맨 힘만 세고 주먹질과 발길질만 익혀선 안 돼. 이제 스승을 모시고 진짜 무술과 권투를 배워야 해. 단매치기 같은 결투재간을 두루 배워야 해.” 장옥은 이튿날 덕돌에게 무술스승을 찾아주겠다면서 데리고 진수해에 갔다. 진수해 동쪽으로 해 남새대대 부근으로 가서 키도 자그마한 한족 애를 만났다. “인사해라. 류운봉이라고 한다.” 덕돌은 류운봉과 악수하며 인사했다. 장옥은 운봉에게 “이 앤 내 한마을 친구야. 무술을 잘 가르쳐달라. 부탁한다.”라고 했다. 덕돌은 속으로 요 죄꼬만 애를 스승으로 모시고 무슨 무술을 배우겠는가고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그 눈치를 채고 류운봉은 집 뒤울안에 덕돌과 장옥을 데리고 갔다. 거중연습을 할 때 쓰는 육중한 쇠바퀴며 벽에 처매놓은 모래 마대가 보였다. 저쪽 땅바닥에는 아링과 숱한 쇠바퀴와 쇠모르쇠가 널려 있었고 벽에는 번뜩이는 검과 대도가 걸려 자루의 빨간 술이 바람에 하느작거리고 있었다. 운봉은 허리는 가늘었지만 어깨는 넓었다. 그는 덕돌을 보고 쇠바퀴를 들어보라고 했다. 덕돌은 거중연습을 해온터라 허리띠를 졸라매고 자신 있게 다가가 쇠바퀴를 “어차!” 소리와 함께 들려고 했다. 그러자 류운봉은 “그게 몇 킬로그램인지 아니? 150킬로그램이야.”라고 하더니 작은 쇠바퀴를 바꿔 맞추더니 “자, 이걸 들어봐라!”라고 했다. 덕돌은 자기가 연습하던 쇠바퀴보다 50킬로그램이나 무거운 것을 보고 놀라 입을 짝 벌렸다. “이건 몇 킬로그램이냐?” “120킬로그램이야. 이전에 내 연습하던 거야.” 덕돌은 자신이 없어 도리머리 질 하면서 다가가 가름대를 꽉 틀어잡고 건뜩 들어 올렸다가 가볍게 내려놓았다. 겨우 체면을 지켰던 것이다. “힘이 세구나! 괜찮아!” 류운봉은 150킬로그램 짜리 쇠바퀴를 다시 맞추고 나서 허리띠를 꽉 조여 매는 것이었다. 그는 가슴을 쭉 내밀고 하늘을 쳐다보면서 숨을 길게 들이쉬었다. 배는 홀쪽해지고 가슴이 무섭게 솟아올랐다. 그가 허리를 굽혀 가름대를 두 손으로 꽉 틀어쥐는 순간 근육과 힘줄이 울뚝불뚝한 팔뚝이 용처럼 꿈틀거리었다. “어-싸!” 고함소리와 함께 류운봉은 그 무거운 쇠바퀴를 건뜻 머리위로 추켜올렸다. 그는 숨도 돌리지 않고 들었던 쇠바퀴를 두 손으로 시계바늘이 돌아가는 방향으로 한 바퀴 돌리고 또 추겨 올렸다. 뒤이어 사람을 내동댕이치듯 저쪽에 활 내동댕이쳤다. 허나 숨이 차하거나 힘들어하는 기색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그제야 덕돌은 속으로 저 왜소한 키에 어데서 저런 괴력이 나올 까고 못내 감탄하면서 스승으로 모실만 하다고 머리를 끄덕였다. “야, 눈이 있어도 태산을 알아보지 못했구먼!” 덕돌은 감탄소리를 치며 박수까지 쳐댔다. 운봉은 표정도 별로 변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벽돌을 넓적한 돌 위에 넉 장이나 쌓아 놓더니 기를 장 측에 모으더니 힘껏 내리쳤다. “꽝!” 요란한 소리와 함께 벽돌 넉 장이 무쇠주먹에 맞아 몽땅 깨졌다. 류운봉은 무술에서 권술을 날렵하고도 힘차게 표연했다. 덕돌은 처음 보는 지라 깜짝 놀랐다. 뱀이 혀를 날름거리며 굴에서 기어 나오는 듯 하고 독소리가 나래를 퍼덕이며 먹이를 찍는 것 같기도 한 동작을 했다. 땅바닥에 살짝 몸을 기댔다가 토끼가 네발로 매를 차는 동작도 하고 원숭이가 나무위에 달려 올라가 팔을 들고 멀리 보는 듯하다가 살짝 뛰어내려 자세를 낮춰 몸을 씽 돌리며 발로 땅바닥을 쌩 쓸어버리고 일어나며 무쇠주먹을 내지르고 몸을 날렸다. 원앙새다리에 양다리로 뛰면서 발길을 연신 날렸다. 정말 무른 속에 강함이 돋보이고 강한 속에 유연한 동작이 깔려 있어 힘 있고도 날래고 보기도 멋졌다. 그날부터 덕돌은 날마다 진수해에 가서 류운봉을 스승으로 모시고 실전무술과 무술단매치기를 하나하나 배웠다. 그것은 나 어린 덕돌이 현실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고 압제받는 운명에 대한 반항이었다. 그는 까딱 소문 없이 패용천산 벼랑위 나무 숲속에서 무예를 익혀 이제 언젠가는 숲속에 숨었던 맹호가 산에서 덮쳐나가듯이 함흥중학교로 쳐들어갈 그날이 다가올 것이다…               7. 암담한 세월                구중천 하늘 높이 걸린 금빛태양은 뭇산들이 자기 발 밑을 찌르며 높이 솟으려고 하자 삽시에 얼굴이 퍼러뎅뎅해졌다. 검퍼런 태양은 먹장구릅 속에서 불채찍을 마구 휘둘러 쵸몰랑마봉이고 백두봉이고 칼산이고 마구 후려갈겼다.         꽈르릉 꽝꽝!         세상의 풍운조화는 변화무쌍해 마른 하늘에서 생벼락이 마구떨어졌다.         함흥대대에서는 하루 밤 자고 나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짐작하기도 어려웠다.         종연은 대대 혁명위원회 주임을 내놓고 진수해파출소 소장으로 갔지만 함흥 대대를 더 미친 듯이 쥐락펴락했다. 그는 박영발과 박윤희를 사상개조에 힘썼고 정치 표현이 아주 좋았다고 극구 찬양하면서 시내로 추천해 보냈다. 박영발은 시내로 떠나가면서 종연의 손을 꽉 잡고 눈물까지 흘렸다. “황주임, 아니, 황 소장. 이 은공을 영원히 잊지 않을 거요. 이 다음 어데 아프거나 하면 찾아오오. 내 힘껏 도와줄게.” 박영발은 림표처럼 양면파 수법을 아주 능란하게 썼다. 그는 기실 속으로 반란파 두목 출신인 황종연을 곱게 보지 않았다. 허나 이 진창에서 빠져나가 시내 병원으로 돌아가려면 별 수 없었다. 속에 내키지 않는 대로 윤희를 황종연에게 양보해야 했고 황종연의 입당소개인도 서주어야 했다. 전번에 화재사건이 생겨 김용만 국장이 찾아왔을 때에야 비로소 황종연은 철천지원수 김용만과 한 짝패라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그러나 안팎이 다르게 양면 파 수법을 썼기에 시내로 돌아가게 됐던 것이다. 윤희는 암흑으로 뒤덮인 이 산골에서 벗어나기 위해 너무나도 눈물겨운 모욕도 윤간도 참아야만 했던 것이다. 그녀는 시내 병원으로 돌아가게 됐지만 기쁜 줄도 몰랐다. 황종연과 흥수에게 짓밟히고 짐승처럼 모욕을 당할 대로 당한 그녀에게는 다만 깊고 깊은 인간생지옥에서 간신히 벗어났다는 감각 밖에 없었다. 그녀의 눈귀에는 어느덧 잔주름이 얼기설기 가기 시작했고 얼굴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먹장구름처럼 몰려 있었다. 그녀는 자기 대신 위생소에 남게 된 맨발의사 송선을 측은한 눈길로 바라보더니 주사실에 놓은 새 침대를 유심히 보다가 작별인사를 했다. “어떻게 고생하겠습니까?” 송선은 주사기를 소독하다가 말고 “어쩌겠소? 나도 햇볕을 볼 날이 오겠지.”하고 말하며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윤희는 속으로 송선이가 어떻게 자기 대신 저 침대에서 색마 황종연과 흥수에게 깔릴까 적이 근심됐다. 그녀는 황종연이 위생소에 들어와 헤헤 웃으며 내민 손을 잡지도 않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위생소 문을 쾅 닫고 함흥대대 마을을 총총히 떠났다. 영발은 그래도 떠나가기 전에 아래 마을 조개덕으로 가서 양심적으로 상순을 찾아보았다. 상순은 한창 울바자를 뽑아 안으로 해 세우고 있었다. 영발은 바자를 쥐어주면서 속심의 말을 했다. “김 서기, 정말 미안합니다. 나도 살자니까. 본의 아니게 황종연을 도와주고 김 서기에게 미안한 일을 많이 한 거 같습니다. 양해해 주십시오.” 상순은 흉금이 넓게도 영발을 포옹까지 해주었다. “우리 마을에 와서 고생했소. 살자면 마음에 없는 일을 할 때도 있소. 내 이 바자를 안으로 세우고 싶어 세우오? 흥수가 떠드는 바람에 이러지.” 영발은 이상해 물었다. “바자를 어째 안으로 세워야 한답니까?” 상순은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흥수는 우리 집 마당이 너무 넓어 자본주의 싹이 자랄 수 있다오.” “건 무슨 말입니까?” “남보다 더 심어 먹으면 배불러 자본주의 생각을 하게 돼 자본주의 싹을 아예 매버리느라고 이런다오. 대대 신임 혁명위원회 주임의 말을 듣지 않고 되오?” 영발은 상순이 삽으로 바자를 세우고 흙을 파묻자 발로 꽁꽁 밟아 주면서 중얼거렸다. “정말 이해되지 않는 게 많습니다." 여기까지만 말하고 그는 입에 빗장을 질렀다. 항상 량면파수법을 써온 박영발을 경계해야 했다.  그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한 고랑이라도 만들어 옥수수 몇 포기라도 더 심어먹으면 좀 좋아서? 돼지도 두 마리를 치면 안 된다지. 닭을 열 마리 이상 쳐도 자본주의를 복벽한다고 하지. 이 산골에서 어떻게 잘 살 수 있겠는가? 덕돌이 네 함흥중학교에서는 공부를 하지 않고 학생들이 농민들과 함께 밭에 나가 헤매니 이 사회가 어떻게 발전하겠는가? 손발에 똥을 발리여야 사상이 좋으니 뭘 해? 배를 촐촐 굶으면서도 무슨 밭고랑을 가로 타고 공산주의를 바라본다고 하니. 쯧쯧쯧.” 상순은 바자 굽을 꽁꽁 밟아놓으면서 누가 듣지 않나 살폈다. 길옆으로 지나가는 사람이 있어도 다행히 한족 마을이어서 누구도 알아듣지 못했다. 영발은 떠나가면서 말도 많이 했다. “김 서기, 내 간 다음에 내 들었던 집에 드십시오. 그 집이 길옆 제일 앞집이어서 멀리 저 앞이 바라보이고 환합니다. 그 집이 장래성이 있는 집입니다.” “이젠 조개덕의 한족 생산 대와 조선족 생산 대를 한데 합쳤기에 서쪽의 조선족들이 모여 사는 쪽으로 올라가야 할 거 같소.” 이 마을을 떠나게 된 영발은 무서운 것이 없었다. “조개덕 생산대를 두 개 대로 나누더니 또 합친답니까? 흥수가 또 무슨 수작을 부린답니까?” 상순은 영발이가 그래도 기본 양심은 잃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목까지 올라온 말을 꿀꺽 삼켰다. “자초에는 나를 지주와 부농들이 득실거리는 한족 대에 보내 고생시키자고 갈라놓고 나를 보냈지. 허나 벽돌공장을 세워 한족 생산 대에서 새 벽돌집을 짓기 시작하니까 합해버리는 거지. 그래야 자기 잘 영도한 걸로 되고 여기 조개덕 한족 사원들처럼 새 벽돌집에 들어 살지.” 영발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하늘을 쳐다보며 웃었다. 그 웃음소리는 혁명적 본보기극에서나 들을 수 있는 독수리의 웃음소리와도 흡사했다. 상순은 괭이를 쥐어 울바자 바깥의 밭고랑 자리를 골고루 고러 길바닥을 넓혀 놓았다. 그는 밭으로 갈 때 돼 영발의 손을 잡고 한 가지 부탁했다. "병원에 정규상을 데려가 주오. 이젠 정규상과 싸우지 말고 늘그막에 화목하게 보내오.” 영발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허나 인차 안경을 춰올리더니 카멜레온처럼 머리를 끄덕였다. “예. 그러지 않고. 내가 돕지 않으면 누가 정교수를 돕겠습니까? 우린 이전에는 옥신각신했지요. 허나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유치했습니까? 결국 우린 모두 이 산골에 와서 노동개조를 하면서 고생했는데. 정규상은 해마다 스무 수레나 되는 돼지 똥과 인분을 모아 커다란 제형 둼 무지를 만들었습니다. 아까운 원로교수가 병을 보지 않고 저게 뭡니까?” 영발이 가리키는 데를 바라보니 정규상이 싯누런 인분을 담은 밀차를 밀고 건조실 부근에 있는 둼 무지로 힘겹게 끌고 가고 있었다. “아무튼 시내 병원에 가면 정의사 일을 힘써 주오.” 영발은 이젠 더 할 말이 없는지 상순과 악수를 나누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늙은 비술나무 밑으로 가버렸다. 며칠 후 상순은 흥수와 말하고 영발이가 들었던 널찍한 집을 사고 이사했다. 그는 조개덕 1대와 2대 연합생산 대 대장으로 된 후 칼산의 양지바른 산 중턱 평평한 곳에 양봉장과 인삼 장을 차리기로 했다. 사원들은 이젠 상순의 말이라면 무조건 따랐다. 연합생산 대를 만드는 바람에 조선족사원들도 벽돌공장의 벽돌로 새 벽돌집도 짓고 들것이고 이제 인삼도 심고 꿀벌도 길러 잘 살 날이 다가올 것이기 때문이었다. 사원들은 코 기러기 같은 상순을 따라 괭이를 메고 패용천산과 칼산 사이에 난 골짜기를 따라 올라갔다. 그들은 싱그러운 냄새를 풍기는 과수원을 돌아보더니 뒤 덜미에 땀을 뻘뻘 흘리며 앞에서 걷는 상순의 등 뒤에 대고 엄지들을 내둘렀다. “김 대장! 이거요.” “이 과수원도 다 김 대머리 덕분이오.” “하도 김대장이 칼산과 패용천산의 돌을 캐서 다락 밭을 손질해 놓았으니 말이지 과수원을 골물이 몽땅 밀어버렸을 거요.” “흥수랑 제정신이 있소? 과수원 수토유실을 방지하자고 사원들이 쌓은 다락 밭인데 어쩜 걸 허물어서 ‘모 주석 만세!’를 새기오?” “그래야 모 주석에 대한 진붉은 충성심을 표현하지.” “저 김 대장이 아니면 우리 대대가 무슨 왜지 밭으로 갈지 모르오. 동지섣달에 한지에 방아를 걸 지경이오.” “어디 그뿐이오. 저기 멍지뫼산 앞의 산종논밭도 김 서기 덕분이지.” “이제 양봉장과 인삼 장을 차리면 꿀을 슬슬 마시면서 인삼을 팔아 수입을 톡톡히 거둘 거요.” “김 대장의 대머리를 누가 따르오.” 사원들은 상순을 따라 과수원 위로 해 서쪽으로 굽어들어 칼산으로 올라가면서 상순에 대한 찬사가 끝이 없었다. 그들은 상순을 따라 칼산의 남쪽 중턱에 올라가 괭이며 삽이며 짚고 멈춰 섰다. 상순은 손으로 산중턱을 가리키면서 사원들에게 원대한 설계도를 내놓았다. “여긴 산세가 가파르지 않은데다가 양지바른 비탈이어서 인삼 장을 차리기에 안성맞춤한 곳이오. 이제 저 칼산 뒤쪽의 돌을 캐서 구들돌로 팔면 그 수입도 톡톡할 거요.” “와- 김 대장이 돌아왔기에 살 때를 만났소.” “옳소.” 사원들은 온 몸에 힘이 나서 상순이 포치한대로 괭이를 휘둘러 잔 나무들을 뿌리 채로 뽑아 버리고 인삼 장을 만들기 시작했다. “김 대장! 큰 일 났소.” 이때 흥수가 헐레벌떡거리며 달려왔다. 상순은 괭이질을 멈추고 허리를 펴면서 황급히 물었다. “이보, 경주가 대련에 가서 배를 타고 한국으로 달아나다가 잡혀 왔소.” “그 새끼들이!” “이제 며칠 후에 반역자, 매국 적들을 공개심판하게 될 거요.” “사람 질을 못할 새끼들이 정신이 있소? 후-” 숱한 사원들도 일손을 멈추고 흥수와 상순 쪽으로 몰려왔다. 흥수는 터를 닦기 시작한 인삼 장을 둘러보며 물었다. “여기 뭘 하오?” “인삼장과 양봉장을 꾸리오.” “뭐요?! 이게 어느 때오?” 흥수는 어이없다는 듯이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김 서기, 아니, 김 대장, 당신 제정신이 있어? 당신 생산 대에서 숱한 일이 생겼는데 계급투쟁을 틀어쥐지는 않고 인삼장과 양봉장을 꾸리다니? 아무리 꾸린들 무슨 소용 있소? 붉은 기발이 꺼꾸러지고 위성이 하늘로 올라간들 무슨 소용이 있어? 우린 항상 계급투쟁이란 이 기본 고리를 잊지 말아야 한단 말이야.” 그 말에 상순은 개의치 않았다. “또 그 말이오? 사원들이 배를 곯고서야 붉은 기가 며칠 휘날릴 수 있다고 보오? 모 주석께서도 혁명만 틀어쥐라고 하지 않았소. 생산도 촉진하라고 했소.” “당신과 난 정말 완전히 다른 두 갈래 노선으로 달리고 있단 말이오. 말이 정말 통하지 않소. 당신네 생산대 상해지식청년 상지민과 수호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아오?” “생산대를 갓 합한 게 내 어떻게 아오?” 상순도 놀라하며 흥수의 외까풀 눈을 쳐다보았다. “상지민이랑 상해지식청년들을 몇 백 명이나 조직해 두만강 변에서 모 주석의 초상화까지 불태워 버렸소. 현행반혁명이오, 반혁명!” “뭐라오? 그 새끼들이. 쯧쯧쯧.” 흥수는 책임을 상순에게 덮어씌웠다. “당신이 생산만 생산이라더니 상해지식청년들을 제대로 교육하지 못한 때문이오. 수호는 전기 줄을 훔쳐 오늘 오전에 파출소에 잡혀 갔소. 마반산 집 아매는 일제 때 해동다리 건너 진수해 어구지에 있던 기생집의 소문난 ‘뽕녀’라는 미녀 기생이었어. 당장 위생소 조산사자리에서 몰아내야겠소. 맨발의사 송선이 혼자면 되오.” “글쎄 정 안되면 정 의사를 되 위생소에 쓰면 어떻소?” “보오. 그래 계급투쟁을 하지 않으면 되오? 당신은 이런 걸 도무지 모르고 있었단 말이오. 또 알려고도 하지 않았고. 모두 당신 탓이오.” “모두 내 잘못이겠구먼. 내 한족생산 대에 있다가 금방 온 게 알 턱이 뭐요? 치보 주임인 당신 뭐 했소? 이제 와서 네 탈 내 탈 할게 뭐요?” 상순은 무릎을 꺾고 쪼그리고 앉았다. 그는 담배쌈지를 꺼내 담배를 말아 붙이더니 담배 연기를 길게 후 내뿜으면서 뒤처리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궁리했다. 며칠 후 진짜 공안국 김용만 국장과 진수해파출소 황종연 소장 그리고 허영호 등 숱한 경찰들이 법관들과 함께 상지민과 수호, 김경주, 그리고 마반산집 아매까지 자동차에 싣고 와서 함흥중학교 운동장에서 공개심판대회를 열었다. 대회장에는 사람들이 시루 속의 콩나물대가리처럼 빼곡하게 들어 서 목을 왜가리 목처럼 빼들고 구경했다. 법관은 공판대회 주석 대 마이크 앞에 다가서더니 목청을 가다듬어 선포했다. “지금부터 일제 때 기생 마반산집 아매를 판결하겠습니다.” "어째 이름을 부르지 않고 마반산집 아매라니?" "옛날엔 남존녀비가 심해 이름 없는 여자들이 많았다오." "아무리 심문해도 마반산집 아매는 죽어도 이름을 대지 않는다오." "쯔쯔쯧."  경찰들이 마반산 집 할머니에게 “일제 매국, 매 민족 기생”이란 개패를 메워 자동차 위에 끌어 내세웠다. 허나 마반산집 할머니는 허연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머리를 숙이지도 않고 마을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모두들 수군거리었다. “저 할머니 별나게 남편도 없고 애도 없다고 했더니. 원래는 기생이었구먼.” “글쎄 말이오. 기생은 애를 낳지 못하오?” “그래. 피임약을 너무 써서 애도 가지지 못한다오.” "저 아매 우리 마을 숱한 애들을 받아냈는데." "글쎄 말이오. 덕돌이랑 성욱이랑 다 저 아매 받아내지 않았소?" "그렇지. 조산파아매 수고 은공이 많지." 법관은 판결문을 공포했다. “마반산집 아매, 녀, 조선족, 65세. 조선 함경북도 명천군 사람, 죄범은 일제 때부터 명천 우시장 일본 놈들의 기생집에서 기생 질을 했으며 우리 진수해 북쪽 어귀에 있던 유명한 일본 기생집에서 기생을 했다. 후에 일본군을 따라 교하, 길림, 장춘, 심양으로 따라다니면서 일본군을 위해 기생을 했으며 호북성 무한, 장사에 가서 기생을 했다. 일본 놈들이 투항한 후 죄범은 우리 군에 의해 체포됐으며 후에 신강개발 집체농장에 가서 노동개조를 했다. 죄범은 신강 집체농장에서 도망쳐 함흥대대 조개덕에 잠입한 뒤 마반산에서 온 사람처럼 신분을 속이고 조산사 노릇을 했다. 일제 군을 위해 기생노릇을 한 김뽕녀가 지은 죄는 하늘에 사무친다. 그러나 죄범은 해방 후 대대 위생소가 없는 형편에서 조산사를 하면서 빈농들을 위해 병을 치료해주었고 숱한 해산부의 애를 받아내 주었다. 그리하여 감형하여 일제 매국, 매 민족 기생 마반산집 아매에게 유기징역 5년에 언도한다.” “억울합니다! 억울해. 난 일본놈들의 피해잡인다. 난 정말 억울하단 말입니다!” 뜻밖에 마반산 집 할머니는 개패를 마구 벗어 자동차 위에서 내던지면서 고함쳤다. “아니, 감형 판결했는데도 뭐가 억울하다고 저래?” 여기저기서 웅성거렸다. 옆에서 여성경찰이 두 팔을 붙잡고 제지시키느라고 애를 썼지만 헛수고였다. 마반산 집 할머니는 팔을 뿌리치며 반발이 심했다. “난 자원해 기생이 된 게 아닙니다. 일제 때 일본 놈들이 명천 우시장 부근에서 빨래를 하는 나를 붙잡아 강제로 기생집에 걷어 넣었습니다. 내가 왜 정든 고향을 떠나 이 만주에 들어와야 했겠습니까? 일제 놈들이 군대를 위안하는 성노리개로 우리 조선 여성들을 짐승처럼 짓밟았습니다. 생각만 해도 원통합니다.” 여성경찰이 수건으로 마구 마반산 집 할머니 입을 틀어막으려고 했다. 마반산 집 할머니는 입을 막는 손을 마구 집어 팽개치며 안간힘을 다해 고함쳤다. “나는 일제 놈들의 피해자입니다. 절대 일본 놈들을 방조한 매국역적이 아닙니다. 난 억울합니다.” “주둥일 다물지 못해?!” 흥수가 마반산집 아매 얼굴을 쨩 갈겼다. 순간 마반산집 아매는 피흐르는 주름진 입귀를 사려물더니 가냘픈 어깨가 무섭게 파도쳤다. 할머니는 천천히 머리를 들더니 독기서린 눈길로 흥수를 쏘아보며 고함쳤다. “흥수, 너네 처 춘실도 네 처제 영실과 함께 위안소에 끌려갔다가 임신해서 풀로나왔다. 기억하느냐?” “뭐, 뭘? 영실인지, 은실인지 몰라. 춘실을 모욕하지 말라.” “난 네 처와 처제와 함께 일본군 위안소에 끌려간 피해자야!” “아니, 생사람을 물어먹어?” 흥수는 식은 땀이 흐르는 말상을 팔소매로 닦으면서 뒤로 비실비실 물러섰다. 군중들도 웅성거렸다. 춘실은 머리를 숙여 흥수의 우멍눈을 피해 슬슬 사람들 속을 빠져나갔다.  상순은 버릇처럼 대머리를 숙이더니 눈을 지그시 감고 뭔가 궁리하고 있었다. 이때 법관이 상해지식청년 상지민에 대한 판결서를 읽었다. 그제야 상순은 머리를 들었다. “현행반혁명, 상지민, 25세, 상해시 출생, 체포 전 진수해공사 함흥 대대 조개덕 생산 대 상해 지식청년. 죄범 상지민은 ‘지식청년들이 광활한 농촌에 하향해 빈농의 재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모주석의 지시에 불만을 품고 집체호 호장으로서 생산대 노동에 잘 참가하지 않고 항상 영어와 노어, 일어 책을 들고 보면서 외국의 달은 둥글고 밝은데 중국의 달은 왜 항쌍 쪼각달인가고 하면서 노골적으로 외국을 숭배하고 중국이 낙후하다고 씹어쳤다. 특히 상지민은 상해지식청년들 가운데서 사상이 온전하지 못한 수호 등과 결탁해 반동무리를 뭇고 모주석의 지시 때문에 고향 상해를 떠나 산골에 와서 고생한다면서 공개적으로 반동사상으로 반당, 반사회주의 여론을 조성했다. 심지어 수십 명의 사상이 불온한 상해지식청년들을 긁어 모아 두만강 변에 가서 당지 정부를 포위공격하려고 망녕되게 시도했다. 죄범 상지민과 수호는 반당, 반사회주의, 현행 반혁명 죄를 범했다. 허나 현행반혁명 상지민과 수호는 일시 실족해 기로에 들어선 상해지식청년들이기 때문에 회개할 기회를 주기 위해 감형 처분해 유기징역 3년, 노동개조 3년에 처한다.” 황련지랑 이행복이랑 뒤에서 뭐라고 쑤군거렸다. 상순이나 마을 군중들은 멀거니 상지민과 수호 그리고 뽕녀 할머니를 쳐다보았다. 뒤이어 경찰들이 결박 지은 장리국과 김경주를 자동차 위에 서있던 끌어내 자동차 바곤 앞머리에 설치한 두 쇠살창 사이에 머리를 넣고 채워놓았다. 그들의 목에 건 개패에는 “매국역적, 반역자”라고 쓴 글씨가 박혀 있었다. 특히 뻘건 승하기 표를 쳐놓은 것이 사람들의 눈을 놀랍게 자극했다. “아니, 총살한다는 표시 아니오?” “글쎄 말이오. 그 아비에 그 아들이오.” “주는 밥을 먹고 살 거지. 이제 남조선을 간다고 누가 공밥을 먹여준다오?” 법관이 김경주의 매국반역도주 죄행을 공술했다. “남조선 특무의 아들 김경주는 몇 해 전에 함흥대대에 암암리에 기여든 국민당 잔여특무 장리국을 따라 장백산으로 도망쳐 숨어 있다가 나중에 중국 대륙에서 남조선과 대만으로 도망칠 궁리를 했다. 리국은 향항을 거쳐 대만으로 달아나자고 하고 경주는 대련으로 해 남조선으로 달아나자고 했다. 대련으로 간 후 그들은 항구에 가서 외국상선을 본 후 비수로 경찰이나 군인을 살해하고 총을 빼앗은 후 외국상선에 잠입해 올라간 후 공해로 가서 외국상선을 납치해 경주는 남조선으로 가고 배 머리를 돌려 리국은 대만으로 달아날 매국도주계획을 꼼꼼히 세웠다. 하여 그들은 우선 오금상점에 가서 시퍼런 식칼 두 자루와 숫돌을 사 시퍼렇게 갈아 몸에 품고 파출소 부근에서 홀로 나오는 경찰을 노리며 기웃거리며 살폈다. 허나 시내에서 행인이 아주 많아 좀처럼 손을 쓸 수 없었다. 그들은 연 한달 동안이나 대련 시내와 군부대 숙영지 부근에 가서 총을 탈취하려고 시도했지만 죄악적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그러자 두 놈은 행동계획을 변경해 군부대에 기어 들어가 무기고 열쇠를 마스고 총을 도둑질하려다가 김경주는 붙잡히고 장리국은 도망쳐 행방불명이다. 김경주는 남조선으로 도망치려고 꿈꾸며 매국역적의 사상이 뼈 속까지 배긴 얼토 당토하지 않는 반동 시까지 썼다. 파도가 출렁이는 대련의 항구에 구리바라 보름달이 두둥실 떠있구나 고향의 저 달이 나를 반겨 웃나 나를 마중해 고향의 바닷물이 예까지 밀려왔나 산이 높아 가지 못하나 바다 깊어 날아가지 못 했나 이제 민주와 자유 고향 경주에 간다면 만주 타향에서 죽은 아버지 혼도 모시어 가리라 ...” “얼마나 경주의 매국반동사상을 보여준 시인가?” 군중들은 경주의 시를 법관이 읽자 웅성거렸다. 이때 법관이 목청을 가다듬어 판결서를 선포했다. “매국역적, 현행반혁명 김경주를 무기징역에 언도하고 정치권리를 종신토록 박탈한다.” 뒤이어 경적소리가 요란하게 울리고 장리국과 김경주를 실은 자동차가 먼지를 새뽀얗게 울리며 달려갔다. 장미련은 어린 아들애 토함산을 끌어안고 함흥중학교 마당에 벌렁 물앉아 왕왕 울었다.  장충국은 동생 장리국의 안위를 걱정되는데다가 남편을 잃은 미련이 불쌍해 때가 괴죄죄한 낯에 눈물을 줄줄 흘렸다. 숱한 산새들이 놀라 하늘로 새까맣게 날아오르고 까마귀 떼들이 까욱까욱 을씨년스럽게 울면서 먹장구름이 뒤덮인 계수동 골짜기 상공을 날아예고 있었다. 마반산집 할머니와 상지민, 수호를 실은 자동차는 다시 새뽀얀 먼지를 일구면서 진수해 쪽으로 떠나갔다. 상순은 찌그려져가는 초가집에서 아들 애 수길림을 데리고 홀로 사는 수호의 각시가 불쌍했다. 상해 대도시에서 살다가 고향을 떠나 이런 시골에서 배고프고 추운 고생에 이제 신랑까지 감옥에 갔으니 얼마나 고생하랴. 상순은 수호네 집에 찾아갔다. 수호 색시 황련지는 놀란 기색을 띄우며 문을 열고 구들 끝에 물러 “무슨 일이 있습니까?” 하고 물었다. 상순은 싸늘한 집안에 들어서면서 “집에 어째 면내 같은 냄새 난다.”라고 하며 코로 “흡, 흡” 하고 냄새를 맡았다. “아니, 며칠 불을 때지 않았소?” 황련지는 울상이 된 채 “땔나무가 없어서 이틀째 불을 때지 못했습니다.” 하고 말하며 반반히 빈 부엌을 내려다보았다. “추운데 겨울에 우리 집에 가 있는 게 어떻소?” 상순의 물음에 황련지는 도리머리를 가로 흔들었다. “호의는 감사하지만 애를 데리고 어떻게 가 있겠습니까? 김 대장, 어떻게 땔나무를 해결해 줄 수 없어요?” “되오.” 상순은 그 길로 생산대 탈곡장에 가서 수레에 벼 짚을 꽉 박아 실어 수호네 집 문 앞에 부리었다. 그리고 황련지와 함께 손수 부엌과 마당에 벼짚 무지를 가려 주었다. 황련지는 너무 감사해 상해에서 부쳐온 갈치를 네 개나 상순에게 줘 보냈다. 상순은 받지 않겠다고 사양했다.  “사의를 받아주십시오.”  황련지가 맨 발 바람으로 갈치를 들고 따라 나왔다.        상순은 동네 영상해 갈치를 받아가지고 집으로 갔다.        이윽고 수호네 집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그때부터 수호네 부부는 상순을 양아버지라고 부르고 존경했다. 그들은 상해에 설을 쇠러 갔다가 올 때면 항상 일주일 전에 편지로 오는 날을 기별했다. 그러면 상순이 아니면 덕돌이 수레를 메워 가지고 진수해 역에까지 마중 가서 짐을 실어왔다. 집에 돌아오면 수호네 부부간은 갈치나 돼지고기 그리고 상해국수를 꺼내 덕돌에게 줘 보내군 했다. 상순은 자기 생산 대에서 억울하게 노동개조를 하는 이계삼 서기와 허영주 부현장 그리고 정규상교수와 송선에게 특별한 관심을 돌렸다. 그는 항일투사출신 서기와 현장이 이런 농촌에 와서 억울하게 노동개조를 하는 것이 마음이 아팠던 것이다. 그는 봄과 여름 가을에는 이계삼 서기와 허영주 부현장을 보고 바쁜 대전의 일을 시키지 않고 과수원과 인삼 장과 양봉장을 지키게 했다. 하여 이계삼 서기와 허영주 부 현장은 복잡한 생산 대를 피해 경치도 좋고 공기도 좋은 과수원 보초막에서 시원한 샘물에 밥을 지어 들면서 신선처럼 지낼 수 있었다. 눈보라가 흩날리는 겨울이 돌아오면 상순은 그들을 보고 우사에 들어와 소 사양을 시켰던 것이다. 그리하여 추운 겨울에 사원들과 함께 농토개량을 하느라고 언 흙덩이를 끄거나 멜 필요 없이 따뜻한 사양 실에서 보낼 수 있었다. 또 흥수의 딸 해월을 치료해주는 기회를 타 흥수와 말해서 정규상을 위생소에 되넣었던 것이다. 또 위생소에서 밀려 나온 송선을 돼지사양을 시켜 대전의 힘든 노동에서 해탈시켰던 것이다. 그런데 또 이튿날 아침부터 일이 생겼다. 항상 기침을 쿨룩쿨룩 하며 우파 박성근이 글쎄 폐 염으로 피를 토하더니 한 많은 세상을 떠났던 것이다. 누구나 폐 염에 걸려 죽었다고 전염될까봐 성근의 조상도 하러 가지 않고 멀찍이 서서 구경했다. (말 한마디를 잘 못했다가 몇 십 년 동안이나 우파 모자를 쓰고 얼마나 고생하다가 저세상으로 갔는가?) 이렇게 생각하면서 상순은 우파를 돕는다는 말을 들을 각오를 하면서도 성근이네 집에 갔다. 집안에 들어서 보니 성근의 입귀에 아직도 피가 묻어 있었다. 아들 숭길은 옷도 갈아입히지 못하고 불쌍하게 돌아간 아버지를 끌어안고 어린애처럼 엉엉 울고 있었던 것이다. 상순은 눈도 감지 못하고 세상을 뜬 성근의 눈을 스스르 감겨 주고 헝겊 쪼박을 주어다 대야에 물을 떠다 놓고 입귀의 피부터 시작해 얼굴을 말끔히 닦아주고 나중에 손과 발까지 닦아 주고 나서 옷을 새것으로 갈아입혔다. 상순은 한숨을 후 쉬고 나서 숭길과 함께 널판을 한 쪼각 주어다 칠성판이라고 그 위에 성근을 눕혀놓았다. 숭길은 아버지 시체를 끌어안고 엉엉 울며 넉두리를 했다. “아버지, 보았습니까? 아버지가 세상 떠나도 누구도 들여다보지 않았지만 덕돌의 아버지가 찾아와 옷을 갈아입혀주었습니다. 어이구, 우리 아버지, 불쌍한 아버지.” 상순은 손등으로 볼에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으며 “얘야, 기다려라. 내 가서 관작 짜 올게.”라고 한마디 하고는 바깥에 나왔다. 마을 사람들은 상순마저 슬슬 피해 갔다. “폐병에 걸리면 어쩌자고?” “저 김 대장은 무섭지 않은 모양이지?” 이때 흥수는 콧방귀를 뀌었다. “흥! 어째 수호가 없으니 황련지에게 눈독을 들여? 쳇, 진짜 기름개구리가 학 고기를 먹으려는 격이지.” 상순은 남이 뭐 라든 개의치 않고 자귀와 대패, 톱, 망치를 가져다 성근이네 집 앞에서 널판을 주어다 관을 짰다. 대패를 빡빡 미는 상순과 멀찍이 떨어진 아래 이화영이네 집 근처에 서서 마을 사람들과 뒤 공론을 했다. “김 대장을 보오. 어디 계급투쟁의 안광이 있소? 우파분자에게 관까지 짜주오.” 참다못해 상순은 자귀를 쥐다가 말고 허리를 폈다. “우파 분자도 사람이오. 아무리 우파라고 해도 우리 마을에서 사람이 죽어나가는데 그래 들여다보지도 않고서도 사람이라고 할 수 있소? 짐승보다 못한 놈 새끼!” “아니, 당신 지금 누굴 욕하오?” 흥수는 상순에게 손가락으로 삿대질하며 조개턱을 흔들어댔다. “너도 사람새끼냐? 흥! 더러운 새끼들이.” 상순은 손바닥에 침을 퉥 뱉어 큰 자귀 자루를 쥐더니 팍팍 널판을 찍어댔다. 한참 후 관을 다 짜자 상순은 숭길과 함께 관작을 집 윗방에 맞들고 들어갔다. 그리고 손수 성근의 유체를 관안에 모셨다. 숭길은 상순의 손을 잡고 “정말 고맙습니다. 김 대장이 아니면 어쩝니까? 난 어떻게 할지 전혀 머리 뻥 한 게 생각나지도 않습디다.” 하고 말했다. 상근의 처도 손으로 눈물을 닦으면서 돌아서더니 어깨를 들먹였다. 이때 밖이 소란스러워 나더니 문을 삐꺽 열고 덕돌이 들어와 다급한 소리를 쳤다. “아버지, 아버지!” “무슨 일이냐?” “아버지, 수호네 각시 죽은 거 같습디다.” “뭐라고? 어제 금방 벼 짚을 실어다 불을 때게 했는데. 가보자!” 상순은 급히 덕돌을 데리고 수호네 집으로 뛰어갔다. “어떻게 알았니?” “내 상해에서 온 편지를 가지고 가서 ‘길림이 엄마!’ 하고 아무리 불러도 대답하지 않습디다.” 금방 덕돌이 갔을 때 아무리 불러도 대답을 하지 않으니 문을 당겨 보았다. 그런데 문안으로 노끈으로 느슨히 매놓지 않았겠는가! 하여 ‘길림이 엄마!’ 하고 연신 부르니 집안에서 가느다란 무슨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리하여 문을 콱 당겨 끈을 풀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황련지가 글쎄 팬티 바람에 문어귀 쪽으로 기어 나오다가 까무러친 것 같았다. 그런데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상순은 황급히 수호네 집으로 달려가 문을 뚝 떼고 들어갔다. “흡, 이게 뭐야? 면내구나.” 집안에는 면내가 지독했다. “면내 먹고 죽었지 않았니?” 상순은 바삐 마구 엎디어 있는 황련지를 마구 흔들며 불렀다. “황련지! 황련지!” 아무 대답도 없었다. 당황해난 상순은 황련지를 끌어안고 흔들며 애타게 불렀다. “황련지! 깨나라고!” 그래도 까딱하지 못했다. 허나 황련지의 몸은 따뜻했다. “안 되겠다.” 상순은 황련지에게 옷을 입힐 새도 없어 이불에 싸 업고 자기 집으로 달려갔다. 뒤에서 덕돌이 따라가면서 이불귀를 쥐어 밖에 드러난 어깨를 덮어주었다. 흥수는 마을 사람들 속에서 상순을 보고 코를 조개턱을 쳐들고 헐뜯어댔다. “흥! 잘해. 절다간 이제 황련지에게도 폐병이 옮겠어.” 상순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황련지를 업고 집에 들어갔다. “빨리 김치 물을!” “이게 무슨 일이오?” “면내를 먹은 거 같소.” 명옥은 황급히 조왕덕대에서 김치대야를 내리어 김치 물을 바가지에 부어들고 왔다. 상순은 바삐 황련지 입에 김치 물을 부어넣었다. 꼭 다문 입에 잘 들어가지 않자 명옥이가 손가락으로 입술을 벌리고 상순이 부어넣었다. 뒤이어 상순은 두 채나 내다가 따뜻한 구들 위에 이불을 펴고 그 위에 황련지를 눕히고 두터운 이불을 덮어주었다. 명옥은 부엌에 내려가 아궁이에 벼 짚을 넣고 불을 땠다. 드디어 가마에서 따가운 김이 쌕 나오며 구들이 뜨끈뜨끈해졌다. 이윽고 황련지 입귀가 실룩거리며 한숨을 길게 내쉬더니 신음소리가 났다. “살아났다. 살아나.” 황련지는 상순의 말을 들으며 쌍까풀눈을 스르르 뜨더니 “이게, 이, 이게 어딘가요?” 하고 물었다. “면내를 먹고 까무러친 거 업어왔어. 아들애를 상해에 보내기를 잘 했어. 하마터면 애까지 봉변을 당할 번했어.” 황련지는 그제야 자기가 팬티와 브래지어 바람인 거 알고 부끄러움을 타며 일어나려고 했다. 허나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일 없소. 나을 때까지 우리 집에 있소.” 상순은 황련지를 말리고 나서 성숙을 보고 “가서 옷을 가져오너라.” 하고 부탁했다. 이윽고 성숙과 은자가 수호네 집에 달려가 황련지의 옷을 가지고 달려왔다. 그녀들은 구들에 올라오기 바쁘게 황련지에게 옷을 입히고 이불을 덮어주었다. “근심 말고 우리 집에 있으라고. 부모를 떠나 이런 시골에 와서 얼마나 고생이냐?” 상순의 부모와도 같은 관심과 말에 황련지는 뜨거운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상순은 이불깃을 꼭꼭 여며주고 바깥으로 나갔다. 상순이가 아래로 한 집 건너 성근이네 문 앞으로 내려갈 때었다. 칠촌조카 위경이 그의 팔소매를 잡아 한쪽으로 끌고 갔다. “흥수랑 뒤에서 삼촌을 수호 색시한테서 갈치를 얻어먹더니 업고 달아 다닌다고 하오.” 그 말에 상순은 저쪽에서 삿대질하며 재재거리는 흥수를 쏘아보았다. “주둥이를 까부셔버려라. 저것도 사람새낀가? 당원은커녕 사람 새끼도 아니다. 죽어가는 사람을 그래 업어다 김치 물이라도 먹여 살려야지. 뭐요?” 상순은 성근네 문고리를 잡았다가 놓으면서 위경한테 다가와 말했다. “조카도 다른 일이 없으면 함께 성근의 장례를 지내기오. 성근은 글쎄 말을 한마디 잘 못했지만 우파도 사람이 아니오? 살겠다고 소련에서 여기까지 와서 얼마나 고생했소. 영영 떠나가는 마지막 길이 곁에 사람 하나 없이 얼마나 쓸쓸하오? 구천에 가서도 눈을 감지 못할 거 같소.” 위경은 뒤로 물러서면서 “폐 염이 전염되지 않을까? 마을 사람들이 우파라고 도리머리를 흔드는데 하필…”라고 할 때었다. “이 사람아, 아무리 우파라고 해도 가는 길에라도 사람대접을 하면 안 되냐? 폐 염에 걸리면 형내를 찾아 가 보면 되오.” 위경은 주춤거리다가 상순의 무서운 세 귀 눈길을 피해 머리를 숙이고 뒤따라 들어갔다. 이때 규상과 이계삼이 조상하러 찾아왔다. 뒤에 허영주도 오고 장축국마저 찾아왔다. 조개덕의 숱한 지주들도 먼발치에서 구경하면서 들어오려고 하는 것을 상순이가 바깥에 나가서 충국과 함께 돌아가라고 말렸다. 자칫하면 진짜 우파와 지주, 부농들은 원래 한통속이라고 뒤통수에 손가락질을 당할까 봐 그랬던 것이다. 해지기전에 상순은 노 간부들과 함께 괭이와 벼 짚을 메고 뒤 산에 올랐다. 그들은 벼 짚으로 불을 피워 언 땅을 녹이고 온 종일 역사 질 해 성근의 무덤을 팠다. 이튿날 아침에 쓸쓸하게 눈이 풀풀 흩날리었다. 성근의 시체를 실은 수레를 앞에서 상순이가 몰고 뒤에서 성근의 아내와 숭길이 수레 뒤에서 성근의 관을 짚고 꺼이꺼이 서럽게 울며 걸어 나갔다. 그 뒤에 노 간부들이 머리를 숙이고 뒤따라 걸어 나갔다. 대부분 마을 사람들은 저 먼 발치에서 쑤군거리면서 구경하며 성근이가 불쌍하게 죽었다고 속으로 외울 뿐 한마디 말도 하지 못했다. 상순은 성근의 장례 수레를 몰고 눈길을 걸으면서 속으로 정치투쟁의 참혹성을 뼈저리게 느꼈다. (정말, 참혹한 정치는 뼈를 부시는구나.) 뒤에서 성근의 아내와 아들 숭길의 대성통곡소리가 눈 덮인 북망산을 애절하게 울리며 천천히 산비탈로 올라가고 있었다. 저쪽 흐리멍텅한 하늘에서 허연 눈이 푸실푸실 흩날리며 쏟아지고 까마귀가 아직도 암담한 세월임을 알리기라도 하는 듯이 까욱까욱 울며 스산하게 배회하고 있었다.  
148    대하소설 진달래 소야곡(19) 댓글:  조회:1565  추천:0  2018-07-07
                       36. 국장의 사위 대지를 휩쓸던 무더위가 서서히 물러가고 선들선들 가을바람이 불어왔다. 지구촌  명화가는 벌써 산기슭으로부터 올라가면서 누렇게 산수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천지꽃산 중턱 바위틈에서 진달래가 새해 봄에 연분홍꽃을 피울 것을 기약하며 도라지춤을 추고 있었으며 울긋불긋 단풍이 물들기 시작했다. 참말로 한폭의 멋진 가을의 산수화를 방불케 했다. 종수는 황금물결이 출렁이는 전야를 둘러보자 아직도 농민 아들답게 가슴이 부풀어올랐다. 그는시원한 가을 공기를 한 가슴 가득히 한껏 들이켰다. “아, 올해도 만풍년이 들었구나.” 그는 일요일이 돌아오자 농촌에 내려가 낫을 들고 가을걷이를 하고 싶었다. 이전에 그는 가을만 되면 고향에 돌아가 부모를 도와 가을걷이를 하는데 습관되였다. 그러나 국장의 사위로 된 덕분에 운명을 탈바꿈해 낫을 들잖게 됐고 신문사 기자로 됐다. 중학교 때부터 글짓기를 잘한 그의 리상은 신문사 기자로 되는 것이였다. 그는 기자 꿈을 실현하려고 졸업 전야에 친척의 소개로 한족처녀 류려평과 눈을 질끈 감고  번개식 결혼을 했다. 국장 자리를 지키는 가시아버지 덕분에 그는 자그마한 신문사 기자로 됐을 뿐만 아니라 부모와 동생들까지 줄줄이 시내에 호적을 붙였다. 그리하여 세세대대 농촌에서 땅을 파던 부모형제의 팔자를 고쳐주었다. 한참 궁리하던 그의 머리에는 성호가 피뜩 떠올랐다. (성호네 집이야 말로 개혁개방 시기 신형농촌 만원호야. 신문에 내자.) 그는 성호를 불쌍한 놈이라고 여겼다. (어쩜 대학을 졸업하고 소궁둥이를 친단 말인가? 아무리 경제시대에 돈이 중하다고 해도 그렇지. 정치경제학을  밑구멍으로 배웠어? 못난 놈! 이게 언제라고 아직도 소농경제사상에 물젖어? 에이, 말도 안돼!) 종수는 성호를 시내에 데려오고 싶었다. 의리심도 강하고 소박한 성호를 가까이 두고 서로 도우면서 살고 싶었다. 그가 낫을 쥐고 자전거에 오르려 할 때다. “어디로 가오?” 언제 왔는지 뒤에서 가시어머니가 표독스런 눈길로 쏘아보며 두덜거렸다.  “쉬는 날에나 좀 집일을 했으면 얼마나 좋겠소? 빨래를 하고 집을 좀 거두오.” 종수는 자전거를 멈춰 세우면서 얼굴에 언짢은 기색을 띄였다. “빨래야 세탁기에 처넣으면 되는데 뭘 자꾸 그럽니까?” “어쩜 색시를 생각할줄 모르오? 가마목 소금도 줴놓아야 짜다고 빨래가 제절로 세탁기에 달아들어가오?.” 그때 안해 류려평이 딸애를 안고 나오면서 우방을 눈치질하면서 말렸다. “엄마, 그만해요.” 그녀는 남편을 보고 “어서 가봐요.”라고 했다. “뉘 덕에 기자로 됐는가? 부모형제들까지 다 시내에 들여오고서도. 쳇, 기자라는게  아직도 낫을 들고 돌아다녀?” “대학교 동창네 벼가을도 도와주고 취재도 하려고 그럽니다.” 가시어머니가 또 뭐라고 잔소리를 하려고 하자 종수는 자전거에 올라 뒤도 돌아보지 않고 씽 달아났다. “에이, 스트레스야.” 종수는 자전거를 타고 곧추 성호네 고향으로 달려갔다. 그는 가시집 신세를 좀 졌다고 해서 가시어머니가 항상 잔소리하는 것이 딱 질색이였다. 자전거를 타고 천수해를 지나다가 장마당에 가서 돼지고기 서너근 사 자전거 뒤에 달았다. 그가 사람들과 물어 처음 천지꽃산 기슭에 자리잡은 태평거촌에 이르러 보니 형편없는 시골마을이였다. 늙은 비술나무 아래 모여앉아 한담을 하는 로인들과 물어 겨우 성호네 집으로 찾아갔다. 성호네 초가집은 마을 제일 앞줄에 있었다. 돌로 쌓아올린 토성 밖에 실실이 늘어진 비술나무 가지들이 선들선들 불어오는 가을바람에 흐느적이며 춤을 추고며 반갑게 마중했다. 초가집 지붕에는 얼기설기 뻗친 박넝쿨에 드문드문 둥그런 박이 달려 있었고 빨간 고추도 널려 있었다. 마당에는 숱한 소들이 한창 여물을 먹고 새김질하고 있었고 닭들이 오구구 모여들어 먹이를 쪼아먹고 있었다. 진짜 한폭의 시골 산수화를 방불케 했다. 때마침 집 안에서 영옥이 구정물함지를 들고 나왔다. “성호 어머니 아닙둥? 안녕하십니까?” “양, 누구요?” “성호 대학교때 동창생 박종수입니다. 성호 어데 갔습둥?” 영옥은 함지를 내려놓고 “오, 반갑소. 성호는 저기 우사에 있소.” 하고 천지꽃산 골짜기 어귀를 가리켰다. 종수는 자전거 짐받이에서 돼지고기를 풀어 성호 어머니에게 드렸다. “가을에 반찬이나 합소.” “아니, 이럴 변이라구. 쯧쯧쯧.” 종수는 기뻐하는 영옥의 주름진 얼굴을 뒤로 하고 자전거에 몸을 싣고 천지꽃산을 바라고 페달을 힘차게 굴렀다. 그가 높다란 돌토성을 두른 널다란 우사칸 대문어귀에 이르자 사냥개들이 왕왕왕 짖으면서 뛰쳐나왔다. “지개! 이 놈 개새끼들이!” 때마침 성호가 소똥을 치다가 쫓아나와서 위기를 모면했다. 사냥개들은 성호한테 달려가 앞발로 매달리면서 꼬리를 흔들었다. “아니, 기자가 어떻게 돼 소똥냄새 나는 시골로 다 왔어?!” 성호는 대문 어귀를 내다보다가 저으기 놀라했다. “몇해만이냐?! 정말 반갑다!” 종수는 소똥이 발려서 움츠려뜨리는 성호의 손을 마구 잡아 흔들었다. 그는 우사칸에 차고 넘치는 30여마리 소를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야, 넌 이젠 한뉘 살 돈을 다 마련했구나. 난 한달에 74원 밖에 받지 못하는데.” 성호는 뒤더수기를 긁적거렸다. “건 수학적계산에 불과해. 손에 돈을 쥐여야 돈이야.” 그는 종수 자전거 짐받이에 달아맨 낫을 보면서 물었다. “무슨 바람이 불어 소똥냄새 나는 시골에 왔니?” 종수는 한숨을 후~ 내쉬더니 툭 털어놓고 말했다. “쉬는 날에 너네 집 가을을 도와줄 겸 취재도 할가 해 왔다.” 성호는 떽 했다. “그만 둬! 소문난 잔치 먹을 알이 없다고. 절대 신문에 내지 말라. 어쩌다 만났는데 가을은 무슨 놈의 가을이야. 산에 가서 놀자. 우리 집 가을걷이는 몽땅 삯을 줬다.” 그는 천지꽃산 앞의 누런 논밭을 가리켰다. “저 걸 봐라. 숱한 한족농민들이 우리 논밭에서 가을을 하고 있잖니?” “진짜 개혁개방 초기 신형 만원호야.” “에이, 자식!” 그들은 웃고 떠들면서 우사로 들어갔다. 숱한 개들이 성호네를 따라 우르르  뛰여들어갔다. “다빈치야, 게르만아! 나가 승냥이 오지 않는가 살펴라!” 다빈치라고 불리는 송아지만큼 큰 시꺼먼 사냥개와 게르만이란 호랑이 같은 누런 사냥개가 숱한 개들을 데리고 바깥에 나갔다. “아니, 여기 승냥이 있니?” 종수는 꽤나 섬찍해났다. “있구말구. 전번엔 호랑이까지 글쎄 토성을 날아넘어와 송아지를 물어가려고 하지 않았겠느냐?” “엉?” “게르만과 다빈치 련합진공을 받고 도망쳤어.” “저 사냥개를 게르만이라니? 혹시 독일 사냥개냐?” “그래, 독일 특종사냥견이야. 다빈치는 프랑스 특종사냥견인데 대단히 사나워.” 종수는 머리를 끄덕였다. “자식, 든든한 경호원들을 뒀구나.” 성호는 희죽이 웃으며 종수를 돌아봤다. “호랑이 자기 흉을 하면 온다고 호랑이 말을 작작 해라.” 종수가 우사 당직실을 둘러보니 벽에 사냥총이 걸려 있었다. “널 붙들고 앉아 있으면 어쩌냐? 내 온바에 뭔가 해야지.” 종수가 고집하는 바람에 성호는 당직실 벽에서 채찍을 벗겨 들었다. “형은 국장 사위로 되더니 팔자를 고쳤구만. 가시집에서 사준 벽돌집에 들어 살지,  기자로 됐지.” “야, 야, 말도 말라. 너처럼 자기 능력으로 사는게 제일 편안해.” “왜?” 종수는 성호의 어깨를 툭툭 쳤다. “우린 다 농부의 아들이 아니고 뭐냐?” “그런 소릴 작작 해라.” 성호는 우사칸으로 나가면서 성을 발칵 냈다. “사실 아니냐?” “농부의 아들이 어떻단 말이야? 난 ‘농부의 아들’이란 신분에 맞서 싸우는 투사로 되겠어.” “농부의 아들이 섧지.” 종수도 설음을 쏟아냈다. “팔자를 고치자고 한족 국장 집 사위로 됐지. 그런데 가시집 신세를 너무 져도 좋찮아.” 성호는 소채찍을 들고 소무리 쪽으로 가면서 머리를 끄덕였다. 종수는 계속 하소연했다. “가시엄마 하루 건너 찾아와서 잔소리를 한다. 이젠 잔소리 딱 진절머리난다.” 성호는 종수의 고충을 짐작할 수 있었다. “난 고향 우사에서 소나 개와 함께 뒹굴면 뒹굴었지 가시집엔 가지 않아.” 종수는 넉두리를 해댔다. “집이 따로 있어도 쓸데 없어. 가시집과 불과 5분거리니까. 엄마랑 동생들이랑 모두 30평방메터 박에 안되는 우리 집에서 함께 사는데 말이야. 가시엄만 쩍 하면 찾아와서 우리 살림살이를 현지지도한단 말이야. 우리 엄마랑 바늘방석에 앉은 것처럼 쩔쩔 맨다. 가시엄마는 딸한테 사준 비좁은 집에 숱한 사돈들까지 덮씌워 사는 걸 눈꼴 사나워 해. 이젠 가시엄마 온다하면 머리카락이 곤두설 지경이야. 안사돈이 온다하면 녀동생들은 슬슬 피해 바깥으로 나가버려. 남동생 만수는 어떤 땐 괘씸해 주먹으로 벽을 꽝꽝 친다. 후- 스트레스야, 스트레스.” 성호는 충고를 아끼지 않았다. “꾹 참고 살아야지.” “참고 견디다는게 하루가 삼추 같아.” 성호가 대문을 열자 소들과 개들은 좋다고 바깥으로 뛰여나갔다. 성호는 채찍을 재치있게 반공중에 한고패 휘둘러 갈겼다. 쨩! 쨩! 채찍소리에 소들은 겁을 집어먹고 앞으로 네굽을 안고 뛰여나갔다. 다빈치와 게르만을 우두머리로 한 사냥개들은 옥수수밭으로 뛰여가는 소들을 쫓아가 물 상하며 왕왕왕 짖어댔다. 성호와 종수는 옥수수밭에 뛰여들어 옥수수이파리를 먹는 소들을 몰아냈다. (소궁둥이를 치기 쉽잖구나.) 천지꽃산 기슭으로 가자 소들은 누렇게 번져가는 가을풀을 뜯어먹으면서 애를 덜 먹였다. 숨을 돌리자 종수는 성호한테 다가갔다. “얘, 대학을 졸업하고 이게 뭐냐? 소치기도 계속 할 일이 아니야.” “무슨 소리야?” 성호는 무연한 벌판을 내려다보면서 가을의 시원한 산공기를 한 가슴 가득 한껏 들이켰다. “이제 젖소를 사서 우유를 시내에 가져다 팔 예산이다.” “야, 야, 싹 그만둬!” 종수는 손사래를 쳤다. “이만하면 됐다. 싹 팔아가지고 시내에 벽돌집을 한채 사라. 우리 시내에서 함께 살자.” “제 손가락을 빨아먹고 살겠니?” “가시아버지한테 널 취직시켜달라고 말할게.” “싹 그만둬. 내 가시아버지 연줄을 달아보겠다는 것도 말렸다.” 성호는 산기슭으로부터 동서로 가로 왔다갔다하면서 풀을 뜯어먹으며 산중턱에까지 올라온 소떼를 내려다보며 코노래를 불렀다. 종수는 현실에 만족하는 성호를 두고 도리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성호는 종수의 속을 꿰뚤어나 본듯이 제 생각을 털어놓았다. “이모부와 말하면 파출소 민경쯤은 할 수 있을거 같애.” “좀 좋아서?” 성호는 도리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어쩐지 농민의 아들이 돼 그런지 시내 매끄러운 소시민들과 섞여서 살기 싫어.” 성호는 종수를 돌아보면서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난 남들이 다 동쪽으로 갈 때 홀로 서쪽으로 갈테야.” “쳇, 최서해가 이 시골에 재생했는가?” 종수는 그 말뜻을 오래도록 음미해보더니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시내 사람들이라고 다 매끄러운 건 아니야. 시내 사람들이 싫다고 교수네 규수마저 이런 소똥 구린내 나는 우사칸에 데려다 살 생각이냐?” “정희 오자고 하겠느냐? 지금 딸애를 데리고 가시집에 얹혀 산다.” 종수는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새파란 나이에 오래 갈라져 사는 건 도리 아니야.” “애까지 낳은 정희가 어쩔라구?” (건 몰라.) 종수는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꿀꺽 삼키고 말았다. 그는 속으로 죄책감을 느꼈다. 몇해 전에 자기가 승호와 은영의 일을 삐라로 찍어 온 시내에 널어놓은 일이 항상 마음에 걸렸다. 그 삐라사건만 없어도 성호는 수사대대에 무난히 들어갔을 것이 아닌가. 성호는 종수가 보도기률을 어길 수 없어 신문에는 내지 못하고 삐라를 찍어 널어났으리라는 것을 짐작했다. 은영과 승호의 은사를 공개한 건 타당하지 않지만 깡패들의 죄악을 폭로한 것이 씨원해 짐짓 모르는 척했다. 종수는 농민의 아들이기에 소박한 일면이 있었지만 입이 가볍고 속에 섬찍한 뭔가도 있었다. 그는 절벽 위로 스적스적 올라가는 성호를 따라가면서 화제를 돌렸다. “야, 은영이 어데 갔는지 궁금하지?” 성호는 버럭 화를 냈다. “은영이 말을 다시 하지도 말라!” “아니, 왜 이래?” 성호는 채찍을 휘둘러 쨩 내리후려치고나서 중얼거렸다. “난 은영을 사랑하지도 않았어. 황차 이젠 가정도 있는데 걔를 다 언제 생각할새 있니?” 기실 성호는 첫사랑 순희보다 은영을 더 사랑했다. 그런데 한마디 말도 하지 않고 이 세상에서 사라진 것이 안타까왔다. 그는 은영이 결코 정신병에  걸리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속으로는 은영의 행방을 알고 싶었지만 종수 앞에서 그런 내색을 내지 않았다. 갑자기 서북쪽 하늘로부터 먹장구름이 뭉쳤다 흐트러졌다 하면서 이쪽으로 덮쳐왔다. 쨩! 쨩! 성호는 종수한테 비닐박막을 뿌려주고는 황급히 채찍을 휙휙 휘둘러 소들을 산 아래로 몰고 내려갔다. 먹장구름 속에서 불뱀이 몇가닥 혀를 번쩍 날름거렸다. 불뱀은 천지꽃산 꼭대기를 휘감아 내동댕이쳤다. 우르릉 꽝! 꽝! 천지를 뒤흔드는 우뢰소리가 울리더니 열콩알만큼한 비방울들이 바위와 절벽에 후둑후둑 떨어졌다. 다빈치와 게르만은 소떼를 산 아래 몰아내려갔다. 소떼를 따라 산 아래로 내리닫던 성호는 그만 소똥을 밟고 썩박나무 넘어가듯 엉덩방아를 찧었다. 오만상을 찡그리면서 일어난 성호의 엉덩이에는 누런 소똥이 한벌 척 들어가붙었다. 그래도 성호는 개의치 않았다. 종수는 따라내려가면서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그도 농촌태생이지만 성호가 이런 시골에서 소궁둥이를 치는 것이 리해되지 않았다. 성호는 창창 쏟아지는 소낙비에 물병아리 돼가지고 간신히 소떼를 우사에 몰아넣고 대문을 채워버렸다. 그는 사양실에 들어와 옷을 벗어 꽉꽉 비틀어 짜면서 오히려 종수를 근심했다. “얘, 집에 다 갔구나. 래일 제때에 출근하지 못해 어쩌겠니?” “괜찮아.” 그들 둘은 젖은 옷을 맞쥐고 비틀어 짜서 널어놓고 우사의 커다란 솥에 끓여놓은 시라지국에 옥수수밥을 대충 먹었다. 그들이 한창 이야기할 때였다. 바깥이 훤하게 개이는 것이 아니겠는가. “야, 날이 개였을 때 시내에 돌아가라.” 종수는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자꾸 축객령을 내리지 말라. 오늘 온 밤 인생담이나 나누자.” 성호는 후~ 한숨을 몰아쉬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우사에 나가더니 소깔을 날라다준다, 개와 돼지한테 먹이를 준다 하면서 바삐 돌아쳤다. 종수도 뒤따라 나가 팬티 바람에 성호를 거들어주었다. “기자선생 오늘 로동개조를 톡톡이 하는구나.” “그런 소릴 하지 마. 내 뿌리도 농촌에 있잖니.” “허허허.” 성호는 어쩐지 종수나 범송은 흙냄새 나서 시내에서 자라 매끄러운 승호보다 마음이 통하는데가 있었다. 종수는 성호를 도와 온종일 그 넓은 우사  밑바닥에 널린 소똥을 다 쳐내고서야 저녁 밥상에 마주 앉았다. 불시에 바깥이 어두워지더니 또 대줄기 같은 비줄기가 좔좔 쏟아졌다. 초가을비가 장마철 비처럼 대지에 억수로 쏟아부었다. 이윽고 대지가 어둠의 장막 속에 서서히 휩싸여버렸다. 번개가 번쩍 하면서 시꺼먼 우사칸으로 날아들어왔다가 그들이 두려운듯 되달아나갔다. 꽈르릉! 무서운 천둥소리가 하늘땅을 진감했다. 금방 밥술을 놓았을 때다. 바깥에서 개 짖는 소리가 왕왕왕 다급하게 들렸다. 따웅- “이크, 또 호랑이가 왔구나!” 성호는 벽에  걸어둔 사냥총을 벗겨 들고 당직실 구들에서 뛰여나갔다. 참말 무시무시한 광경이였다. 종수는 당직실 구석에 놔뒀던 낫을 주어들고 따라나섰다. “나오지 말라.” “아니, 혼자 어떻게 호랑이와 싸워?” “위험해! 나오지 말래두.” 성호는 궁둥이로 문을 들이밀어 닫아버렸다. 종수는 문꼬리를 쥐고 바깥을 내다보았다. 우사 토성 안에 시퍼런 불찌가 왔다갔다 했다. 호랑이가 뛰어들어 송아지를 물고 토성 밖으로 나가려고 날뛰었다. 다빈치와 게르만이 왕왕 짖어대며 악착스레 덤벼들었다. 호랑이가 토성을 훌쩍 뛰여넘으려는 순간 다빈치가 호랑이 뒤다리를 물었다. 게르만도 꼬리를 덥석 물어당겼다. “따웅!” 호랑이는 송아지를 떨구면서 홱 돌아서며 다빈치에게 덮쳐들었다. 다빈치와 게르만은 잽싸게 몸을 피했다. “저 놈 호랑이새끼! 내 어떻게 키운 송아지라고!” 성호는 당직실 문을 살며시 열고 나가더니 공중에 대고 엄포를 놓았다. 땅! 호랑이는 물었던 송아지를 떨구더니 몸을 날려 토성을 훌쩍 뛰여 넘어갔다. 성호는 도망치는 호랑이 쪽에 대고 또 총을 쏘았다. 땅! 장개골안 중턱에서 시퍼런 불찌가 오락가락 하다가 뚝 멈춰섰다. 뒤따라오는  사냥군이 없자 호랑이는 아마 토성 안에 버리고 달아난 송아지가 아까워 서성거리고 있는 것 같았다. 성호는 사냥총을 들고 억수로 쏟아지는 가을비를 흠씬 맞으며 땅바닥에 쓰러진 송아지한테 달려갔다. “아이고, 죽었구나!” 성호는 진창에 풀썩 물앉아 송아지를 붙안고 야단쳤다. 호랑이는 송아지 목주래를  물어 끊었던 것이다. 끊어진 목에서 뻘 건 피가 흘러 진창에 고인 비물에 쭉 퍼져나갔다. 다빈치와 게르만은 왕왕왕 하고 애처롭게 짖어댔다. 자기들이 잘 보호하지 못해 죄송스러운듯이 짖고 또 짖어댔다. “사냥개 몇마리로는 호랑이를 말리지 못해.” 종수는 량미간을 찌프리더니 좋은 꾀를 내놓았다. “성호야, 암소만 우사에 가두고 수소를 토성 안에 풀어놔라. 호랑이도 황소를  두려워 해.” 성호는 사냥총을 짚고 간신히 일어났다. “그 말이 옳아. 새 해엔 토성도 높여야겠어.” 종수는 대문을 잘 채웠는가 돌아보는 성호 뒤를 따라 다니면서 또 한마디 충고했다. “성호야, 소사양을 아버지한테 넘겨주고 시내에 집을 잡고 살면 어때?” “말도 안돼. 아버진 근본 내 소사양하는 걸 도와주지 않아.” 성호는 당직실에 들어가 사냥총을 벽에 걸어두었다. 종수는 도리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왜 도와주지 않는다니?” 성호는 당직실에서 나가 가을비를 맞으면서 죽은 송아지를 안아다 사양실에 들여왔다. 그는 부엌에 걸어놓은 커다란 솥의 물에 피물이 묻은 손을 씻으면서 고충을 털어놓았다. “아버진 자손들을 무척 사랑하지. 그런데 소사양만은 돕지 않아.” 성호는 한숨을 후~ 내쉬더니 뒤말을 이었다. “아버진 내가 대학에 가니까 얼마나 기뻐했는지 몰라. 그런데 금의환향은커녕 귀행하자 너무나도 실망했지. 그래서 소사양하는 걸 도우면 시내에 돌아가지 않을가봐  돕지 않아.” 종수는 머리를 끄덕였다. 이윽고 그는 무릎을 탁 쳤다.  “얘, 부근의 농민들을 고용해 소사양을 하면 어떻니?” 성호는 대야에 물을 퍼놓고 죽은 송아지를 씻다가 종수한테 머리를 돌렸다. “좋은 생각이구나.” 그날 종수는 당직실에서 성호와 함께 밤이 깊어가도록 자지 못했다. 혹시 호랑이 다시 뛰어들가봐서다. 이튿날 종수는 성호가 준 송아지고기를 차마 받지 못했다. “얘, 이 소고긴 목에 걸려.” “별 소릴 다 한다. 가지고 가라.” 종수는 사양하다 못해 받아 가지고 자전거를 타고 가려고 했다. 그런데 질척질척한 진창길을 한발작도 움직이기 힘들었다. “걸어가야겠어.” “자전거는 어쩌니? 내 소수레에 실어다줄가.” “그만둬. 우사를 비우면 호랑이라도 오면 어쩌니? 후에 자전거 가지러 올게.” 종수는 바지가랭이를 걷더니 신을 벗어쥐고 맨발바람으로 길을 떠나려고 했다. “얘, 비닐박막을 가지고 가라.” 성호는 우사칸에 들어가더니 비닐박막을 들고 나왔다. “이 소고기도 가지고 가라. 네 가시엄마를 가져다주렴.” 성호가 기어이 손에 쥐어주는 바람에 종수는 마지못해 소고기를 들고 몸을 돌려 시골 진창길을 저벅저벅 걸어갔다. “얘, 절대 날 신문에 내지 말라.” “알았어.” 성호는 멀어져가는 종수의 뒤잔등을 바라보면서 한숨을 후~ 내쉬였다. 종수는 진창길을 밟으면서 마을 앞에 이르자 초가 팔간집을 들여다보았다. 때마침 성호 아버지가 낫을 들고 나왔다. “성호 아버지, 이걸 받읍소.” 상진은 비닐주머니를 받아들고 물었다. “이건 웬 소고기요?” “갈 길이 바빠서 들고 가지 못하겠습구마. 잡숩소.” 상진은 소고기를 들고 보더니 실망한 눈길로 종수를 바라보았다. “소 죽었소?” “예. 어제 호랑이 뛰어들었습구마.” 상진은 장개골안 쪽을 바라보면서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였다. “목에 걸려서 먹을 거 같지 못하우.” 상진은 소고기를 종수에게 되밀어주었다. “안녕히 계십시오.” 종수는 별 수 없이 소고기를 들고 질척한 진창길로 저벅저벅 걸어나갔다. 상진은 장개골안 우사 쪽을 돌아보면서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37. 소장사군 천지꽃산에는 울긋불긋 단풍숲이 푸르청청한 소나무숲과 어울려 조화를 이루고  들에는 황금나락이 가을바람에 설레며 춤을 추고 있었다. 해맑은 가을 하늘에 꽃구름들이 양떼처럼 서서히 흐르고 천지꽃산 칼날 같은 벼랑 사이로 산새들이  풍작을 노래하며 재잘재잘 지저귀고 있었다. 일요일에 정희가 한나를 데리고 시골 우사에 찾아왔다. 철주는 우사를 지나가면서 빈정거렸다. “함박꽃이 둼무지에 꽂혔구만.” 정희는 못들은척하면서 우사에 들어섰다. 그녀를 조롱이나 하는듯이 구린내가 물씬 풍겼다. 그녀는 황급히 코를 싸쥐고 오만상을 찡그렸다. “에이, 구린내야!” “아빠!” 한나는 두 팔을 쫙 벌리고 성호한테 달려갔다. 성호는 한나를 와락 끌어안고 뽁뽁 뽀뽀를 해주었다. “아빠 보고 싶더냐?” 한나는 성호의 품에 안겨 종달새처럼 종알거렸다. “예, 아빠, 이젠 시내 가서 어머니랑 함께 살자요.” 성호는 한나를 와락 끌어안고 정희를 흘끔 건너다보았다. “귀여운 우리 공주님, 거짓말을 하지 않지?” 한나는 머리를 까땍거렸다. “어머니 시켰지?” “예, 어머닌 아빠를 보면 ‘시내에 가서 어머니랑 함께 살자’고 말하라 했습니다. 밤이면 무섭습니다. 아빠 있으면 무섭지 않아 얼마나 좋겠어요?” “그래?” “6.1절에 다른 애들은 다 엄마, 아빠 량손을 쥐고 공원에 가서 노는데요. 난 아빠 없어 부럽습니다.” “그 말도 엄마 시켰지?” “예, 엄마도 아빠가 보고 싶다고 했습니다.” “아빠 돈 많이 벌어가지고 한나랑 엄마랑 함께 살자.” 성호가 정희를 뒤돌아보니 돌아서서 어깨를 가늘게 들먹이고 있었다. “정희, 그간 애를 데리고 고생했소. 내라고 시내에서 살면 좋은줄 몰라 이러겠소?  나도 칠정육욕이 있는 사내요. 왜 처자가 보고 싶지 않겠소? 그러나 저 서른마리도 넘는 소들을 누가 돌보겠소?” 정희는 돌아서서 손수 건으로 뜨거운 눈물을 훔쳤다. “시아버님이 좀 도와주면 얼마나 좋겠어요?” 성호는 손사래를 쳤다. “그런 말 절대 하지 마오.” “?” 정희는 어글어글한 외까풀눈이 데꾼해졌다. 걀죽한 얼굴에 의아한 표정이 사품쳐 흘렀다. “아버진 내가 소궁둥이를 치는 걸 반대하니까.” 성호는 제꺽 화제를 돌렸다. “한나를 키우느라고 고생했소.” 성호는 정희와 한나를 한품에 와락 끌어안았다. “이젠 다 때려치우고 시내로 가서 함께 삽시다. 예?” 성호는 정희와 한나를 끌어안았던 팔을 스르르 풀었다. “어찌 중도 랑패를 보겠소? 이제 소장사를 해서 돈을 많이 벌면 시내에 덩실한 벽돌집을 사놓고 잘 살아보기요.” “저 소30마리도 넘는데요. 저만하면 안돼요?” 정희는 우사칸 당직실을 거두면서 물었다. “난 원대한 꿈이 있소.” “무슨 꿈? 사람 욕심이 어디 끝이 있어요?” 성호는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꿀꺽 삼켜버렸다. 우사 사양실에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성호는 채찍을 들더니 우사 대문을 활짝 열어제끼고 소떼를 몰고  방목하러 떠났다. 성호는 시원한 산공기를 마시면서 다빈치와 게르만을 앞세우고 소떼를 몰고 천지꽃산 기슭에 오르면서 새로운 꿈을 무르익히고 있었다. (그래, 종수의 말이 맞아. 마을에서 끌끌한 장년을 고용해 소사양을 하게 하고 난    시내에 진출해야지.) 당면계획도 세웠다. (이제 황소를 처리해 내몽골에 가서 젖소를 사다가 우유를 팔아 돈을 벌어야지. 여기선 젖소 한마리에 2천원, 황소 두세배값이야. 진짜 집 한채 값이잖는가.) 정희는 여느 때처럼 시부모의 빨래도 해주고 집도 거둬주었다. 어떤 때는 시어머니를 도와 자류지 감자를 파왔고 가지를 뜯어다가 썰어 마당에 비닐박막을 펴놓고 널어 말리웠다. 정희가 고방에 들어가보니 일하고 벗어놓은 헌 옷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그녀는 구석구석 살피면서 어지러운 옷견지를 들춰 대야에 담아 이고 한나를 데리고 태평강에 나갔다. 높고 푸른 하늘아래 태평강물은 어찌나 맑은지 푸른 하늘과 하얀 목화송이 같은 구름이 둥둥 떠 흘렀다. 맑은 강물이 핥으며 흐르는 조약돌 사이에서 지느러미를 하느적거리는 모래무치랑 붕어랑 환히 들여다보였다. 빨래터에는 순희가 빨래를 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저 눈인사나 하며 계속 방치질했다. 정희는 대야의 빨래를 맑은 강물에 훌 쏟아불궈놓았다. 드디여 비누를 먹여 빨래돌 우에 놓고 방치로 팔이 시리게 투닥투닥 두드리기 시작했다. 일밭으로 나가던 마을 사람들은 빨래를 하는 정희를 보고 혀를 끌끌 찼다. “정말 시내 색시 같잖소.” “얼마나 부지런한 색시요.” 동불사댁의 말에 세린하댁도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글쎄 말이요. 일요일에 시집에 오기만 하면 저렇게 부지런히 일한단 말이요.” 순희는 정희와 나란히 앉아 빨래를 하면서 정희 처지가 가엾어 한숨을 후- 내쉬였다. (성호도 한심하지. 어쩜 시내 색시를 데려다가 저렇게 고생시켜?) 순희는 정희 처지가 남의 처지 같지 않았다. 그녀는 착잡한 생각을 빨래와 함께 강물에 훌훌 휑구어버리며 허구픈 웃음을 지었다. 정희는 상을 찡그리면서 때물이 줄줄 흐르는 빨래를 쭉쭉 짜서 대야에 담았다. 시내에서는 활활 주어버릴 헌 옷들이였다. 그러나 시부모는 일할 때 입겠다고 버리지 않았다. 온 오전 빨래를 한 그녀는 팔을 쉬울 새도 없이 시어머니를 따라 밭에 가서 고추도 따고 옥수수도 땄다. 고추대만큼도 안되는 한나는 빨간 고추 다닥다닥 달린 고추대 사이로 다니면서 빨간 고추를 따서 어머니 바구니에 담았다. “한나, 넌 그저 놀아.” “나도 고추 딸래.” “아니야, 고추 매워서 손으로 눈이랑 만지면 아려.” 정희는 한나의 손을 쥐고 개울가에 가서 말끔히 씻어주었다. 한나는 계속 고추를 따겠다고 발을 동동 구르며 떼를 썼다. “넌 여기서 놀아.” “아니야, 고추 딸래.” 정희는 한나를 달랬다. “말 잘 들으면 저녁에 할머니네 떡을 쳐준다.” 영옥이 맞장구를 쳤다. “그래, 우리 손녀 말 잘 듣지? 찰떡 쳐줄게.” “야, 좋아라. 떡이 냠냠 맛있다. 오래오래 맛있다.” 고추를 다 따자 정희는 시어머니를 따라 마늘밭에 가서 마늘도 쑥쑥 뽑았다. 이윽고 그녀는 자전거에 마늘을 실어 들였다. 그녀는 손이 쉴 새없이 시어머니한테서 배우면서 마늘양태를 따 처마 밑에 걸어놓았다. (시내 색시 어쩜 농촌 아낙네들처럼 일을 저렇게 잘할가?) 영옥은 원래 시내 처녀를 막내며느리로 삼고 싶지 않았다. 로동이 사랑이라고 차차 지내면서 보니 정희는 여느 시내 색시들처럼 매끄럽지 않고 부지런하고 마음씨도 곱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영옥은 쌀독에서 바가지로 찹쌀을 퍼서 쌀함박에 씼어  시루가마에 얹었고 돼지고기를 씻어 가마에 넣었다. 농촌에는 석탄도 없어 땔나무로 불을 때야 했다. 정희는 먼지  풀풀 이는 땔나무를 무릎에 대고 뚝뚝 끊어 부엌 아궁이에 쑤셔 넣고 불을 지폈다. 한참 후 가마에서 쌕김이 쌕- 뿜겨나왔다. 시어머니가 벽에 기대놓았던 떡돌을 번져놓자 정희는 떡똘을 싹싹 씻어냈다. 영옥이 김이 문문 나는 떡쌀을 퍼다 떡돌에 쏟아놓았다. 정희는 떡메를 싹싹 씻어 들고 손수 찰떡을 쿵쿵 쳤다. “야 –호- 맛있겠다.” 한나는 떡을 치는 어머니를 응원이나 하듯이 박수까지 쳐대며 환성을 질렀다. 해질 녘에야 시아버지가 일밭에서 돌아왔다. 정희는 찰떡을 베 사발에 담다가 일어나면서 인사했다. “아버님, 돌아오셨습니까? 로년에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괜찮소.” 정희는 시어머니를 도와 저녁상을 차렸다. 밥상에는 무룩이 담은 떡사발과 돼지고기장국이 올랐다. 저녁에 성호도 태평강을 건너 집에 들어섰다. “냠냠 맛있다. 오래오래 맛잇다.” 한나는 노래나 부르는듯이 흥얼거리며 떡과 돼지고기를 맛나게 먹었다. 한나는 할머니네 집에 오기를 좋아했다. 할머니네 집에 오면 집에서도 먹지 못하던 떡도 먹고 돼지고기도 먹을 수 있었기 때문이였다. 하긴 정희는 본가집에서는 돈이 아까와 돼지고기를 별로 사먹지도 않았지만 시집에 올 때면 꼭꼭 사왔다.  영옥도 일이 바빠서 평소에는 떡을 쳐먹을 새도 없었지만 며느리와 손녀가 오기만 하면 떡쌀을 퍼내군 했다. 저녁상을 물리자 상진은 성호를 마주보면서 무겁게 입을 열었다. “얘, 언제까지 농촌에서 소궁둥이 치겠느냐?” 정희는 말수 적은 시아버지가 엄숙하게 묻는 말씀에 동감이 갔다. “글쎄 말입니다. 제 생각엔 소를 팔아버리고 시내에 집을 잡고 부모를 모시고 사는게 옳다고 봅니다. 부모님들께서도 이젠 년세가 들어 어떻게 계속 힘겹게 농사를 지으면서 사시겠습니까?” 성호는 머리를 숙이고 한참 궁리하더니 천천히 머리를 들었다. “내라고 농촌에서 살고 싶어 이러오?” “그럼 왜?” 상진은 들을수록 화났다. 그는 꾹 참으면서 천천히 성호의 뒤말을  기다렸다. “돈 벌어 시내 가서 좀 더 환하게 살자고 그럽구마.” “어서 소를 팔아가지고 시내로 가라. 대학을 졸업하고 어찌 돈에 눈이 어두워 소궁둥이를 친단 말이냐?” 성호는 마을 사람들의 조롱도 비난도 다 개의치 않았다. 그러나 페부를 찌르는 아버지 충고는 심사숙고해야 했다. 상진은 답답해 땅이 꺼지게 한숨을 후~ 내쉬였다. 그때 웃마을 큰형님 백호가 찾아왔다. 그는 맏이였지만 아들이 없는 큰집에 앞을 서서 큰집 부모를 모셨다. “성호야, 아버지 말씀이 옳다. 이젠 시내로 가라. 공안국이거나 광고회사 같은데 들어가면 얼마나 좋겠니?” 성호는 정희의 눈치를 흘끔 살폈다. 외씨 같은 얼굴이 새파래지려니 했는데 다행히 무표정했다. 백호는 성호를 타일렀다. “넌 막내니까. 부모 근심은 하지 말라. 내 옆에서 부모를 모시면 돼.” 성호는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아니요. 현시대에 딱 맏아들이 부모를 모셔야 한다는 도린 없소. 막내도 부모  자식이 아니요? 어느 자식이 모시기 편리하면 어느 자식이 모시는게 옳소. 형님과 아주머니는 큰아버지와 큰어머니를 모시느라고 얼마나 고생했소. 내한테도 부모께 효성을 드릴 기회를 좀 주오.” 성호는 정희의 눈치를 흘끔흘끔 살피면서 뒤말을 이었다. “큰형님도 이젠 예순이 다 된 로인이요. 이젠 아들며느리 신세에 사는 신세에 어떻게 부모를 모신다고 그러오? 둘째형님은 조선에 가고 없지. 누나넨 출가집  외인이라고 어쩌겠소? 누나네도 다 시집부모를 모시고 있잖소? 이제 소장사를 해서  돈을 많이 벌면 부모를 얼마든지 잘 모실 수 있소.” “그만둬라. 우린 시내에 가서 살지 않겠다. 농촌이 편안해 좋다.” 상진이 허리를 펴면서 손사래를 쳤다. “우리 근심은 하지도 말라. 네가 대학을 졸업하고 소궁둥이를 치지 않는 걸 봤으면 얼마나 좋겠느냐?” 이때 은숙이 옥희를 업고 혜옥과 주옥까지 데리고 들어섰다. “아버지 말씀이 옳다.” 그녀는 잔등에서 옥희를 내리워 한나와 놀게 하고 뒤말을 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이게 뭐냐? 어서 시내에 가서 환한 일자리를 찾아라. 괜히 올케까지 고생시키지 말구.” “알았소. 알아서 한다니까.” 성호는 형님과 누나 말을 고맙게 받아들였다. 그러나 얼굴이 파랗게 질려가는 정희의 걀죽한 얼굴을 곁눈질해보고 누나 말을 중동무이했다. 은숙은 그래도 계속 충고했다. “큰오빠하구 우리 부모 곁에 있으니깐. 부모 근심하지 말고 시내로 가라. 황차 넌 막내니까. 부모를 모시지 않는다고 말할 사람도 없어.” 백호도 맞장구를 쳤다. “그래. 한집에 있으면서 모신다고 해서 효성을 다 하는게 아니야. 네가 대학을 졸업하고 소를 치면서 사는 건 부모에겐 최대의 불효야. 부모들은 자식들이 잘 되는 걸 보면 행복해.” “그래. 형님과 누나 말을 들어라. 우린 아직 자기절로 밥벌이는 할 수 있다. 내 손에 풀이 있을 때 너네 먹을 쌀까지 대줄 수 있다.” 엄마도 한마디 했다. “우린 네가 잘 되는 걸 보면 세상 좋겠다.” 성호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알았습니다.” 백호는 성호가 시내에 갈 의향이 있다는 것을 보아내고 내심으로 기뻐했다. 어둠이 깃들자 성호는 한나를 업고 정희와 함께 은빛달빛을 밟으면서 태평강 징검다리를  건너 우사로 돌아왔다. 창문으로 서글픈 달빛이 비껴드는 우사 사양실에 누운 정희는 쓸쓸하기만 했다. 골안에서 어둠의 적막을 깨우면서 드문드문 승냥이의 울부짖음소리가 들려왔다. 울 안에서 사냥개들이 무섭게 울부짖었다. 성호는 자리를 차고 벌떡 일어나더니 벽에서 사냥총을 벗겨들고 나갔다. “조심하세요.” “걱정 마오.” 정희는 조마조마해 창문으로 바깥을 내다보았다. 산기슭 어둠 속에서 시뻘건  불찌가 왔다갔다 달아다니는 것이 보였다. 이따금 승냥이의 울부짖음소리가 몸서리치게 들려왔다. 그녀는 달빛에 비낀 남편, 사냥총을 들고 나가는 남편의 뒤모습을 보고 한나를 꼭 끌어안고 뜨거운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며칠 후 성호는 마을에서 소사양을 할 농민일군을 물색했다. 그런데 시내 보통로동자들의 로임보다도 더 주겠다고 해도 조선족농민들은 왼눈으로 보지도 았았다. 늙은 비술나무 아래에서 마을 령감들은 의론이 분분하였다. 동불사 령감은 “누가 성호네 머슴살이를 하겠는가?”고 뒤에서 쑤근거렸다. 세린하 령감도 맞장구를 쳤다. “누군 바보요?” 나중에 이 고장에서 유명한 제지주네 아들 제경국이 나섰다. 돈이 있으면 귀신마저 매돌을 돌리게 부린다고 지주 아들마저 자존심을 버리고 소사양원으로 들어오려고 찾아왔다. 성호는 제경국을 쓰기 좀 주저했다. 혹시 아버지가 촌당지부 서기를 할 때 항상 자기 애비를 투쟁했다고 경국이 암암리에 보복할가봐 섬찍하였다. “경국을 써도 괜찮아. 내 옆에서 도와줄게.” 뜻밖에 아버지 나설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성호는 아버지와 경국한테 소사양을 맡긴 후 소를 팔아 손잡이뜨르로 벽돌을 울 안에 실어들였다. “얘, 당장 마당에서 탈곡해야겠는데 벽돌을 실어들여 뭘 하겠느냐?” 상진은 성호가 무슨 궁리를 하는지 답답했다. 성호는 벽돌장을 훌훌 부리워 놓으면서 빙그레 웃었다. “새 해 봄이면 알 수 있을 겁니다.” 성호는 통통통 손잡이뜨락또르를 몰고 벽돌공장으로 달려갔다. 그때 내몽골에서 집안집 팔촌형 광호가 놀러 왔다. 광호는 원래 태평거촌에서 살다가 쌀고생에 견디기 어려워 10여년 전에 내몽골에 이사갔던 것이다. 그는 성호네 산골짜기 어귀에 있는 널직한 우사를 두루 돌아보더니 머리를 끄덕였다. “우사를 잘 지었구나. 여기다 우리 내몽골 소를 사다가 길렀으면 돈을 벌거 같다.” 성호는 오랜만에 만난 광호를 보고 헛일 삼아 물었다. “내몽골에서 황소 한마리에 얼마나 하오?” “지금 한 4, 5백원 해.” “오~” “진짜 내몽골에 가서 소장사라도 할 예산이냐?” 순간 아버지 말씀이 떠올랐다. “장사군은 애비도 속인다. 장사를 하려면 누구도 믿어선 안된다.” 성호는 광호를 어색하게 바라보면서 말끝을 얼버무렸다.  “아니, 그저 물어보는 거요.” 그러나 광호는 짐작이 가는데가 있어 중얼거렸다. “내몽골이 멀어서 여기까지 소를 가져오는게 문제야. 몇달 동안 몰고 올 수도 없지.” 성호는 속궁리가 따로 있었다. 그는 광호를 집에 청해 술을 마시면서 내몽골 형편을 자세히 알아보았다. 광호는 내몽골 초원에 진달래꽃을 심어 꽃피우고 싶다고 하면서 성호와 함께 고향의 천지꽃산에 올라가 진달래 몇그루 뿌리채로 파가지고 내몽골로 돌아갔다. 며칠 후 성호는 소를 더 팔아가지고 소장사를 하려고 내몽골로 떠났다. 그는 혹시나 해서 각반을 친 장단지 안쪽에 비수까지 감췄다. 부모와 정희가 아무리 말려도 벽이라도 차고 나갈 성호의 앞길을 막을 수 없었다. 성호는 광호를 따라가지 않고 혼자 소장사길을 개척하고 싶었다. 성호는 렬차를 타고 밤낮을 달려 내몽골 어느 자그마한 진에 이르렀다. (혹시 여기에도 젖소가 있잖을가?) 그는 령감에 따라 무작정 생소한 역에서 내렸다. 해는 져서 어둑어둑한데 성호는 시내를 두루 살피다가 역에서 그리 멀지 않은 자그마한 려관에 잠자리를 잡았다. 그는 려관 한족주인 조발귀와 물었다. “여기 초원이 멉니까?” “멀잖소. 시내를 벗어나면 사처에 초원이요. 어디서 왔는지 초원구경을 왔소?” “예. 우리 장춘에선 초원을 볼래야 볼 수 없습니다.” “에이, 하필이면 늦가을에 왔소? 초원을 구경하려면 봄이나 여름에 와야지.” 성호는 그쯤 묻고나서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그는 침대에 누워 깍지손을 걸어 베고 천정을 쳐다보면서 한참 속궁리를 굴렸다.  그는 한참 후에야 려관방 문을 제대로 걸었는가 확인하고나서야 새우잠을 청했다. 이튿날 이른 아침에 성호는 려관방을 나섰다. 뚱뚱한 중년사나이 조발귀는 되창문으로 성호를 흘끔 내다보면서 물었다. “초원구경 가오?” “아니, 아침 먹고 돌아오겠습니다.” “오, 그래?” 조발귀는 인심을 쓰려고 했다. “우리 집에서 아침식사를 하오.” “감사합니다. 시내구경도 할 겸 나가 먹겠습니다.” 성호는 뚱뚱한 주인의 얼굴에 어째 살기가 서린감을 느껴 인차 자리를 뜨고 싶었다. 그는 려관방을 나서자 마차를 세 내가지고 교외로 쏜살같이 달려나갔다. “어디로 가려오?” “어디라 없이 초원 목장이면 됩니다. 목장 구경하러 왔습니다.” “쨔!” 마차 주인은 연신 말채찍을 쨩쨩 날렸다. “이런 말은 여기서 얼마나 합니까?” 성호는 마차 주인에게 넌지시 말값을 물어보았다. “오~ 한 1천 5백원쯤 하오.” “오-” 성호는 저도 몰래 감탄이 나갔다. 고향에서는 이런 말이면 3천원이나 4천원은 했다. 심지어 좋은 말 한필이면 만원씩 하는 어지간한 자동차와도 바꾼다는 말이 돌 정도였다. 마차를 타고 얼마나 달렸을가. 이윽고 누렇게 번져간 무연한 초원이 펼쳐졌다. 초원에는 양떼가 꽃구름송이들처럼 흐르고 말타고 양떼를 모는 운두라바한의 름름한 모습도 보였다. 성호는 양떼에 관심이 전혀 없었다. “소나 말을 사양을 하는 목장은 없습니까?” “뭐, 소 사려고 그러오?” “아니, 난 양띠여서 양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왜?’ 마차 주인은 마차를 몰면서 이상하다는 눈길을 보냈다. “양을 잡는 걸 련상하면 불쌍해서 보기조차 안쓰럽습니다.” “진짜 양처럼 착한 사람이구만.” 마차 주인은 채찍을 날래게 후려쳤다. 쨩! 쨩! 또 한식경이나 달리자 무연한 누런 초원에 하얀 목화송이 같은 양떼에 이어 젖소떼와 말떼가 나타났다. 사납게 달리는 말떼는 똑마치 노호하며 덮쳐오는 황하의 물결처럼 감때사나왔다. “됐습니다. 수고했습니다.” 성호는 용돈을 넣은 호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마차세를 주었다. “혹시 돌아갈 때 마차가 필요하지 않겠는지? 련계하게나.” 마차 주인은 전화번호까지 적어주었다. “예. 알았습니다.” 마차가 떠나가자 성호는 말을 타고 말떼와 젖소떼를 모는 운두라바한한테 다가갔다. 항아리 같은 젖통을 디룽디룽 단 채 풀을 뜯어먹는 젖소떼 속에는 황소도 수태 섞여 유유히 흘러가고 있었다. 말을 탄 운두라바한은 낯선 성호의 아래우를 유심히 훑어보았다. “여보시오. 젖소를 팔지 않겠습니까?” 그제야 운두라바한은 바위돌처럼 굳어졌던 얼굴 근육을 느슨히 풀면서 말에서 훌쩍 뛰여내렸다. “몇마리나 사겠소?” “값을 보고 흥정합시다.” 운두라바한은 초원의 바람에 꺼슬꺼슬한 낯에 활기를 띄였다. “한마리에 한 천원이야 받아야지.” “아니, 왜 그리 비싸오? 한 7백원이면 사겠는데.” 운두라바한은 성호를 힐끔 곁눈질하였다. (세상 물정은 좀 아는군.) 그는 먼 초원의 하늘을 쳐다보면서 입을 뗐다. “몇마리 사겠소?” “한 세마리.” 그들은 한어로 통화했다. “8백원에 사가오.” 한마리에 2천원에 판다면 운비와 로비를 떼고도 한 천원은 떨어질 것 같았다. 그래도 속내와는 달리 값을 깎아내렸다. “7백원에 파오.” “고까짓 세마리를 사면서 남의 소값을 자꾸 깎겠소? 어떻게 키운 소라고 그러오?” 성호는 기어이 고집했다. “7백원에 팔면 소와 말도 더 사겠소.” 운두라바한은 반색하면서도 성호을 믿지 않았다. “어디서 왔는지 모르겠소만 소와 말을 어떻게 가져가려고 그러오?” “장춘 교외에 있소. 기차에 부치면 얼마든지 가져갈 수 있소.” “그래?’ 운두라바한은 성호를 믿기 시작했다. “말과 황소는 몇마리 사겠소?” 성호는 한술 더 떴다. “소와 말을 기차역까지 실어다줄 수 있소?” “내겐 자동차 없소. 하필 차에 실을 필요있소? 소와 말을 기차역까지 몰고 가면 되겠는데.” 성호는 머리를 끄덕였다. 그는 운두라바한과 흥정해 황소 20마리, 젖소 3마리 말 2필을 사기로 했다. “이제 역에 가서 운비를  알아보고 오겠소.” “실언하지 마오.” 성호가 머리를 돌려 떠나려고 할 때였다. “가만!” 운두라바한이 불러세웠다. “역까진 한 150리나 되오. 내 아들과 함께 말을 타고 가오.” “난 말을 탈줄 모르오.” “내 아들이 탄 말에 앉아 가오.” 운두라바한은 옆구리에서 소뿔로 만든 나팔을 꺼내들더니 “뚜-” 하고 길게 불었다. 저쪽 누런 초원에서 웬 청년이 말을 타고 뽀얀 먼지를 일구면서 쏜살같이 달려왔다. 이윽고 성호는 운두라바한의 아들과 함께 말을 타고 쏜살같이 역으로 달려갔다. 그가 운두라바한의 아들과 함께 말을 타고 초원으로 돌아왔을 때는 점심때 거의 되였다. 그는 돌아올 때에는 말을 손수 타고 운두라바한을 뒤에 태우웠다. 말타기를 미리 익혀두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점심이나 먹고 소를 몰고 가오.” 운두라바한은 사람좋게 웃으면서 성호를 몽골포로 인도했다. 성호가 둘러보니 진짜 고향에서는 볼 수 없는 풍경이였다. 젖내가 진한 몽골포 안에 항아리에 하얀 우유가 불렁불렁 끓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성호가 돌아보니 문께로 이쁜 몽골처녀가 생글방글 웃음꽃을 피우며 들어섰다. 운두라바한이 소개했다. “우란호트대학을 다니는 딸 쑤싼나요. 쑤싼나라는 몽골말은 중국어로는 목란꽃이라는 뜻이오.” 그는 쑤싼나한테 돌아섰다. “얘, 장백산 기슭에서 온 조선족청년이야.” “리성호라고 부르오.” “예- 전 조선족청년을 아주 좋아해요. 언제 장백산을 구경했으면 좋겠는데요.” 성호가 손을 내밀었다. “기회가 있으면 우리 고장에 오면 장백산구경을 시켜주지.” 그녀는 성호의 손을 잡고 생글 웃었다.  “예~ 많이 도와주세요.”  그녀는 따뜻한 쑤유차를 손수 호로박에 부어 성호한테 드렸다. “우리 쑤유차는 몸에 좋아요. 자, 어서 마셔요.” 그녀는 노래를 부르듯이 종알거렸다. “우리 고장에 여름에 오면요. 푸르른 초원에 매가 날아예고 양떼와 소떼, 말떼가 구름송이처럼 흘러 진짜 장관이죠.” “난 소를 사려고 왔소.” 성호의 말에 쑤싼나는 혀를 한발이나 내둘렀다. “아니, 소를 사려고 여기까지 왔단 말인가요?” 성호는 대답 대신 머리를 끄덕였다. 운두라바한의 아내는 그새 나무대로 우유를 절러덩절러덩 젓더니 작은 대야에 하얀 우유를 퍼왔다. 밥상에는 삶은 양고기와 소고기가 무두룩이 쌓여 있었다. “자, 드오. 초원이라 장춘 시내와는 비길 수 없이 밥상이 스산하오.” 운두라바한은 호로박으로 자기 술잔에 술을 권했다. “먼 길을 가야기에 술은 그만두기요.” “한잔이야 들어야 하지.” 성호는 호의를 거절할 수 없어 한잔 들고 양고기와 밥을 게 걸스레 입에 퍼넣었다. 점심숟가락을 놓기 바쁘게 성호는 허리춤에 띠였던 돈따발을 꺼내 1만 3천원을 세여 운두라바한의 손에 건네주었다. 운두라바한은 식지에 침을 퉤퉤 뱉어서 두툼한 돈을 세면서 헤벌쭉거렸다. “하하하. 오늘 하늘에서 귀인이 나타나서 앉은 자리에서 만원 돈을 벌었군.” 성호는 바깥에 나가 자기가 산 소와 말의 귀에 집게로 구멍을 내 표적을 냈다. 그의 깐깐한 솜씨에 운두라바한은 못내 놀랐다. “테무치야, 저 소와 말을 역까지 몰아다줘라.” “예.” 성호는 아주 순조롭게 소와 말을 사가지고 귀로에 올랐다. 운두라바한 운두라바한은 말을 타고 한 십여리까지 따라오면서 바래였다. “이 후에 소와 말을 사러 또 오오.” “이번에 잘 되면 자주 오겠습니다.” 그들은 오랜 친구처럼 서로 포옹하고나서 헤여졌다. 성호가 운두라바한의 아들과 함께 가을 모래바람이 휘몰아 불어치는 누런 초원을 벗어나 어둑어둑한 황혼무렵에야 교외에서 그리 멀지 않은 산기슭 굽인돌이길에 들어섰다. 그때였다. 난데없는 괴한들이 말을 타고 쏜살같이 덮쳐왔다. “서라! 소와 말을 두고 가면 살려준다.” 성호는 품 속에서 비수를 뽑아들 새도 없었다. 쨩! 채찍소리와 함께 비수를 뽑으려던 성호의 손이 길다란 채찍에 휘감겼다. 성호는 채찍에 휘감긴 손을 홱 나꿔챘다. 채찍질한 놈이나 성호나 다 말잔등에서 퉁 떨어졌다. 쨩! 다른 놈이 채찍을 휘둘렀다. 순간 성호는 몸을 움츠리면서 날아드는 채찍을 피했다. 그는 팔을 뻗쳐 날아드는 채찍꼬리를 잡아챘다. 평소에 7절채찍과 3절곤봉을 휘두른 덕을 톡톡히 보았다. 테무치도 강도들한테 채찍을 날렸다. 쨩! 두번째 놈은 성호와 주인집 아들의 련합진공에 저만치 도망쳤다. 쨩! 쨩! 쨩! 채찍이 련속 날아와 성호의 면상과 손목을 후려갈겼다. 어찌나 날랜 채찍질인지 성호는 미처 피할새도 없었다. 테무치는 상서롭지 못한 것을 보고 말머리를 돌려 도망치는 것이 아니겠는가! 쨩! 채찍이 날아가 테무치의 머리를 후려갈겼다. “앗!” 모자가 땅바닥에 떨어졌다. 테무치는 그제야 정신이 펄쩍 들었다. 그는 몸을 날려 오른쪽 말배에 딱 들어붙더니 먼지를 새뽀얗게 일구면서 허겁지겁 도망쳐버렸다. 말을 탄 놈들과 싸워본 적이 없어 불리했다. 성호는 더 싸우지도 못하고 대뜸 말잔등에 뛰여올라 도망쳤다. 휙- 갑자기 뒤에서 올가미가 날아와 성호의 목을 걸었다. 진짜 이런 올가미에 당해본 적이 없었다. 성호는 올가미에 걸려 말잔등에서 퉁 떨어졌다. 강도들은 말 뒤에 성호를 달아매 줄줄 끌고 달려갔다. 성호는 왼손으로 목에 걸린 올가미를 틀어쥐고 오른손으로 각반에 감춘 비수를 뽑으려고 했지만 헛수고였다. “개자식! 죽어봐!” 저쪽에 쓰러졌던 두 놈도 일어나 말을 타고 따라오더니 성호에게 겨끔내기로 채찍을 안겼다. 강도들은 성호를 산기슭의 말라죽은 고목에 묶어놓았다. 성호는 조여드는 목을 추슬리며 한어로 겨우 한마디 흘렸다. “아이고, 여기서 죽으면 집에 있는 로모는 어찐단 말인가?” 강도들은 몽골말로 뭐라고 저희들끼리 지껄였다. 그중 한 놈이 성호의 목에 건 올가미는 풀어주고 두 팔을 뒤로 해 꽁꽁 묶어놓았다. 성호가 채찍을 나꿔채는 바람에 말에서 떨어졌던 놈이 다가왔다. 그 놈은  돌부리에 찔려 상처자국이 난 낯을 매만지면서 꽥꽥 소리 질렀다. “저 놈을 살려주면 우리 잡혀. 아예 화근을 없애버리자.” 다른 두 놈은 소와 말을 몰고 가면서 한어로 빈정거렸다. “우리 손을 더럽힐 필요없어. 승냥이 물어가지 않으리.” “허허허. 말과 소를 몰아가면 됐지. 살인죄까지 질 필요없지.” “하하하.” 그 놈들이 떠나가는 뒤에는 공포의 어둠이 점점 두텁게 깔리고 있었다. 어디라 없이 빈 공간이 없이 살기가 차넘쳤다. 어디선가 굶주린 이리떼들의 무서운 울부짖음소리가 울려왔다. 그 공포의 울부짖음소리가 성호의 황홀한 꿈을 산산히 까부시고 있었다. 어둠과 공포가 몰려오는 살벌한 초원의 고목에 묶인 성호한테 절망의 올가미가  몰려와 꽉 옥죄고 있었다. 성호가 절망의 심연에서 헤여나올 수 있을가? 죽음의 공포가 살벌하는 허허벌판은 아무 대답도 없다. 멍든 하늘은 저승사자마냥 랭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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