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소설
졸혼
제5권
김장혁
89. 미녀들의 추파
신경을 느슨하게 만는 일요일, 흐리멍텅한 하늘에 어쩌다가 희미한 아침해가 흐리마리하게 나타났다.
똑,똑, 똑,
휴가일을 알리는 노크소리와 함께 여느 때처럼 리화가 들어섰다.
"어머니!"
애들은 기다렸다는듯이 엄마를 보자 환성을 지르며 두 팔을 벌리고 문께로 달려나갔다.
리나는 눈물이 글썽해 두 아들을 와락 끌어안았다. 그 정경을 보는 군철의 코마루가 시큼해났다.
둘째 길림은 어머니 목을 꼭 끌어안고 애원했다.
“어머니, 이젠 일요일에만 오지 말고 날마다 와.”
형인 송림은 더구나 한심한 소리를 했다.
“엄마, 오늘부터 저녁에 가지 마. 우리 한 집에서 자자.”
길림이 맞장구를 쳤다.
“그래. 엄마, 난 엄마 목을 꼭 끌어안고 잘테야.”
리나는 멍해 서 있는 군철을 힐끔 곁눈질하며 대답했다.
“오, 건데 엄마 일이 바빠 저녁에 가야 돼.”
리나는 한 손에 하나씩 애들의 손을 잡고 침실로 들어갔다.
군철은 세 모자를 돌아보면서 마음이 쓰려났다.
(애들을 보면 리나와 복혼해야 해. 졸혼도 한도 있지. 애리싸도 미국 경제간첩으로 잡혀갔지. 언제까지 졸혼을 끌어야 한단 말인가? 어머니와 양아버지를 봐라. 졸혼하고 뭐 자기 인생을 산다더니. 엄마는 암으로 사망했지. 양아버지는 정신병에 걸리지 않았는가. 친아버지는 졸혼하고 숱한 젊은 미녀들한테 푹 빠지더니 감옥에 들어가지 않았는가. 졸혼이란 가정을 깨는 허황한 개짓이야. 자손들한테 오물을 들씌워주는 짓거리야. 애들이 있고야 무슨 졸혼인가? )
군철은 쏘파에 앉아 한숨을 후- 내쉬였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그렇다고 리나와 딱 복혼해야 하는가? 도대체 나하구 리나에겐 사랑이 남아 있는가? 리나 말처럼 사랑의 불씨는 의연히 남아 있는 건가? 아니면 뭔가? 근근히 사랑의 열매 둘 밖에 남은게 더 있는가? 글쎄 리나하구 복혼하면 애들한테도 좋고 회사에 주는 영향도 좋을 수 있지. 나는 당위 서긴데. 차마 아버지처럼 그렇게 못 살아... 나는 절대 부패분자 아버지처럼 살아선 안돼. 색마로 살아선 안돼. 인생의 가치가 그저 육감적으로 주색을 즐기는 건가? 너무나도 저렬한게 아닌가? 숱한 녀자들을 얼려내려고 각종 비렬한 수단을 다 써가면서 부정축재를 하고. 나중에는 감옥에 들어가고. )
군철은 내심의 갈등이 심하게 격돌했다.
(언제 아버지를 면회하러 고향 감옥에 가봐야는데. 양아버지도 병문안하고.)
바깥에서는 먹장구름이 파도치며 밀려왔다. 번개가 번쩍이며 집 안에까지 쳐들어왔다가 하늘 땅을 진동하는 우뢰소리를 남기고 사라졌다.
순간 뜻밖에 그의 눈 앞에는 회사의 숱한 숫처녀들의 추파가 빛나는 눈길이 떠올랐다.
제일 먼저 비서 경희가 떠올랐다. 하나도 떠오르고 추파를 보내던 마끼도 떠올랐다.
(그 녀자애들은 모두 훌륭하고 참한 녀자들이지.)
경희는 항상 군철이 출근하면 새물새물 웃는 얼굴로 맞이하고 커피를 타온다, 사무상을 닦는다 하면서 군철의 주위를 젤 근거리에서 맴돌았다.
한번은 경희가 군철의 사무상을 닦다가 그만 탄력있는 엉덩이가 그만 의자 앞에 서 있는 군철의 팔을 스쳤다.
“어허.”
군철은 감전이나 된듯이 어색하게 웃었다.
경희는 머리를 다소곳이 숙이더니 침묵하며 사무상을 대충 닦고 물러갔다.
(경희는 30대 초반인데다가 북경대학 졸업생이지. 리나에 비하면 나이는 일여덟살 어려도 참 수양있지.)
순간 경희가 박문의 비서로 있을 때 술상에서 박문이 허벅다리를 막 만지면서 치근거려도 들이대고 있던 일이 불쑥 떠오르며 마음을 비길데 없이 했다.
(그땐 어쩔 수 없어 들이대고 있은 거야.)
군철은 너그럽게 량해하려고 들었다.
그는 경희의 항상 맑고 밝은 표정이 마음에 들었다. 환한 웃음을 새물새물 짓는 것이 녀신처럼 퍽 사랑스러웠다. 항생 생글방글 웃는 눈길로 자기를 바라보는 모습이 좋았다. 그 눈길 속에 들어가보고 군철은 놀랐다.
(경희가 날 사랑하고 있는 건가?)
군철이 회사에서 아무리 좋은 총각들을 소개해주면서 대상에 대한 요구가 어떤지 물으며 속뽑이를 해보았다.
그때마다 경희는 다 거절했다.
“전 시집 안가요.”
경희는 새무룩이 웃으면서 사양했다.
“쳇, 처녀 시집가지 않는다는 거야 다 새빨간 거짓말이지.”
군철은 넌짓이 물어보았다.
“경희는 도대체 어떤 총각한테 시집가려고 그러오?”
경희는 자기 대상문제에 무척 관심 가지는 군철이 은근히 좋았다. 그러나 그녀는 속과는 달리 머리를 들며 정색했다.
“전무님, 다신 저의 결혼문제를 묻지 마세요. 전 독신주의자예요. 전 최전무님의 비서로 이렇게 있는 것만으로도 족해요.”
군철은 능청스레 물었다.
“그래 한뉘평생 시집가지 않고 내 비서로 늙을 수야 없잖소? 말도 안돼.”
경희도 꽤나 흥분된 것 같았다.
“괜찮아요. 한평생 최전무님 곁에 있어도 행복해요.”
경희는 속을 뒤번져보인 걸 느끼고 빨간 혀를 홀랑 내밀며 머리를 다소곳이 숙였다.
군철은 속으로 웃었다.
“누굴 속여? 누구한테 곁에서 항상 추파를 보내더니, 참, 누구한테 꼬리를 쳐들어보여?”
경희는 그런 군철의 마음을 읽었을가?
“결혼해 뭘 해요? 전무님처럼 애들 둘이나 낳고 리혼하자고 결혼해요? 미안해요. 제가 그만...”
그녀는 혀를 홀랑 내밀었다.
“괜찮소. 나하구 솔직하게 말하는 모습 참 좋소.”
그제야 경희는 한숨을 호 내쉬였다.
경희는 내심으로 군철을 탄복하였다.
그녀는 속으로 이렇게 종알거렸다.
(전무님, 저는 전무님 같은 총각이면 시집 갈 거예요. 애 둘이 없어도 어떻게 될지 몰라요. 리나 언니가 옆에 없어도 또 몰라요... 아니, 내가 무슨 못된 생각을.)
경희는 스스로 귀 밑까지 붉히였다.
그녀는 군철의 우멍눈이 자기 속마음을 꿰둟어본 것 같아 바늘방석에 앉은듯이 불안해 안절부절하지 못했다.
“전무님, 다른 일 없으면 나가보겠습니다.”
“잠간, 경희, 이젠 내겐 바라볼게 하나도 없소. 이번에 직원들의 아파트 건축비용으로 내 전재산을 다 내놓은 걸 저도 알잖소?”
경희의 쌍까풀눈 귀에 조서가 섞인 독살이 흘러지나갔다.
"저를 뭐로 보고 하는 말입니까? 제가 뭘, 최전무 재산이나 넘보고 따르는 저렬한 녀자로 보입니까?"
경희는 군철을 곱게 흘겨보고는 오쫄 일어나 비서실로 종종걸음쳐 나가버렸다.
(조, 핼끔 흘겨보는 모습, 오-호-, 톡톡 쏘는 모습 얼마나 이쁜가? 아버지도 저렇게 이쁜 녀자들 추파에 유혹됐겠다. 오, 어쩌나? 안돼, 난 아빠처럼 주섹에 빠져 살아선 절대 안돼. 아빠 결과는 얼마나 비참한가? 절대 아빠 전철을 밟아선 안돼.)
군철도 사내대장부였다. 그에게도 칠정육욕이 있었다. 그에게도 사랑도 있고 리별의 아픔도 있고 눈물도 있었다. 그에게는 소설 같은 인생사가 있었다.
그는 전무 사무실에서 탄력있는 몸매를 흔들며 나가는 경희 뒷모습을 보면서 한숨을 길게 토해냈다.
(저 탄력 있는 몸매, 항상 추파를 보내는듯한 까만 포도눈, 저 밝은 표정, 얼마나 매력적인가. 그러나 내가 어찌 경희한테 다른 생각을 할 수 있어? 경희보다 거의 열살이나 이상인데. 나에겐 애 둘이나 달려 있어. 나에게는 정신환자 양아버지에 감옥살이를 하는 친아버지가 있어. 아니, 그것보다도 난 당위 서기이고 당대표야, 수천명 직원들의 신임을 받는 당대표야. 그들의 리익을 대변하는 당위 서기, 전무야. 그럼 난 어쩜 좋아?..)
리나와 애들을 집에 두고서도 군철은 기나긴 묵념에 잠겼다.
그의 눈 앞에는 피뜩 하나의 어글어글한 쌍겹눈이 떠올랐다.
군철은 온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할끗 할끗 쳐다보는 눈길, 아, 그윽한 추파 담긴 그 눈길, 꼭 깨문 입, 항상 군철에게 소름이 끼치게 하던 그 조그마한 입, 공포 자체의 칼날 같은 입이였지.)
문뜩 뚫어지라고 쳐다보는 하나의 쌍겹눈에 운선의 부릅뜬 눈이 겹놓여 보였다.
(안돼, 하나는 운선의 녀친이야. 그들은 하버드대 동창생이자 10여년이나 사귀여온 죽자살자 하는 련인이야. 절대 의리도 없이 비도덕적으로 아우의 녀자를 가로챌 수 없어.”
군철은 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나는 련애관이 이상한 녀자야. 미국에 있을 때 흑인지도교수와 좋아했다지 않는가? 그것도 함께 미국 하버드대에 류학간 남친 김운선을 옆에 두고 톰이란 흑인교수와? 으흐흐, 량심없는 년, 배신자야, 애비와 똑 닮았어. 애비는 내 아빠를 배신하고 물어먹고 잡아가고. 흥, 네년은 운선을 배신한 년, 배를 갈아타고 톰교수한테 올라타고 이젠 또 나한테? 어림도 없어. 안그래도 배신자 같은 년 너무 섬찍해서 박총경리한테 비서로 보내버렸는데. 절대 그년의 추파에 유혹돼선 안돼.)
군철은 숱한 미녀들이 추파를 보내는 것이 도저히 리해되지 않았다.
(혹시 내가 돈깨나 버는 걸 보고 숱한 처녀애들이 추파를 보내는 걸가? 30대 경희, 하나, 심지어 20대 마끼까지... 아니면, 내가 오해했는가? 하나는 물론 능력은 있어. 직원들의 아파트도 하나가 건축설계를 하지 않으면 어떻게 짓겠는가? 미국 하버드 대학을 석사생이 달라. 동양과 서양 건축 예술을 결합하고 우리 조선족의 전통건축예술을 계승하는 풍격으로 설계하지 않았겠는가. 이제 고향의 진달래까지 아프트 울안에 심어놓으면 고향 조선족마을 같겠는데. ㅎㅎㅎ. 하나는 운선의 련인이 아닌가? 더구나 하나 애비는 일본과 한국에까지 쫓아가 내 친아버지를 나포하지 않았던가? 어찌 친아버지 원쑤를 용서한단 말인가? 어찌 원쑤의 딸과 한 이불을 쓰고 산단 말인가? 안돼, 절대 안돼!)
그는 쏘파에 앉아 차탁을 탕 쳤다.
커피잔이 번져지면서 커피가 주르르 흘러내렸다.
군철은 황급히 걸레를 가져다가 커피를 닦아버렸다.
그는 창 밖을 내다보면서 착잡한 생각에 잠겼다.
(성호는 배신자야, 죽마고운데 어찌 내 아버지를 붙잡으려고 미쳐 날뛴단 말인가? 뭐? 정의용사 위용을 떨치려고? 흥, 아버지가 하도 날래서 한국 홍대입구에서 화장실에 들어가는 척 하면서 정철의 차에 앉아 도망쳤으니 말이지. 정철은 미희란 한국 기생 오빠라는가. 아버진 기생 덕에 도망친 거지. 아버지도 참, 어쩜 태평양 무인도에까지 도망쳤다가 붙잡혀 온단 말인가?)
군철은 아버지 일을 생각하니 기막혔다.
(아버진 잘 있는지? 언제 애들을 데리고 감옥에 면회하러 가봐야는데. 아버진 친손자들을 한번도 보지 못했는데...)
그는 이일 저일 생각만 해도 골치 아팠다.
요즘엔 마끼가 꽤나 복잡하게 굴어 골치 아팠다.
(요먼저 봐라. 단둘이 남으니 꼬리를 치는 거. 고약한 년. 아버지를 정신병에 걸리게 해놓고 피해버린 춘희박사 때문에 그런게 아니야. 마끼가 어쩐지 꽉 씹어놓고 싶을 정도로 미운게 이상해. )
순간, 군철의 눈 앞에는 할끔할끔 쳐다보며 추파를 보내던 마끼 쌍까풀눈이 삼삼거렸다.
(유리알처럼 밝은 그 눈, 그 빛뿌리는 강렬한 추파, 오, 사람 죽인다, 죽여. 전번에는 다이로교수를 보내놓고 단둘이 남자 그게 뭔가? 홀딱 벗고 꼬리를 치지 않았던가.)
군철은 마끼한테 물었다.
“전번에 무슨 롱담을 그렇게 하오?”
마끼는 쌍까풀눈을 치켜떴다.
“뭘 말인가요?”
“뭐요? '첩'이구 뭣이구. 당대표를 어떻게 보고 그런 허망소릴 하오? 그래 내 첩을 둘 놈이라고 보오?”
그제야 마끼는 해시시 웃으며 머리를 다소곳이 숙였다.
“미안해요. '첩'소린 잘 못했습니다. 반성해요. 그러나 진심의 말을 했어요. 저는 최전무님을 존경하고 사랑는데요.”
“쳇, ㅉㅉㅉ.”
군철은 도리머리를 홰홰 저었다.
그러나 마끼의 빨간 립스틱을 바른 입은 계속 종알거렸다.
“최전무님은 진짜 땅을 밟고 하늘을 떠인 사내답습니다. 얼마나 모든 인간관계를 아량있게 처사했는가요. 이번에도 저를 천방백계로 보호해주었지요. 다이로교수 마음도 상하지 않게 해 백신생산에 의료기술지원을 계속 받게 됐지요. 그보다도 최전무는 인간적으로 그냥 좋아요...”
(그때 분명 내심장은 쿵쿵 높뛰고 있지 않았던가?)
군철은 마끼의 당돌한 말에 황급히 손사래를 쳤다.
“그만, 그만, 안 될 소릴. 이젠 볼 일 다 봤으니깐. 돌아가오.”
그때 군철은 어색한 국면을 타개하려고 화제를 바꿔 마끼를 회사 위생소 소장으로 임명한다고 했다.
마끼는 어색하게 히쭉 웃었다.
“혹시 저를 좋아하는가요? 나나, 아니, 복화도 있는데요. 복화를 소장으로 임명하는게 나을 거 같은데요. 저의 어머니는 최전무 양아버지를 괴롭힌 장본인인데요. 저도 밉겠는데요. 왜 저를 위생소 소장으로 임명하죠? ”
군철은 믿음에 찬 눈길로 마끼를 바라보며 정색했다.
“저네 어머니는 어머니고 마끼는 마끼지. 나는 간부를 제발할 때 절대 개인감정으로 대하지 않소. 주요하게 인간성과 도덕품질, 지식수준, 그리고 관리능력을 보오. 마끼는 이번에 다이로교수를 아주 지혜롭게 대처했소. 위생소 소장을 충분히 잘할만한 관리인재요.”
“어마나!”
마끼는 손으로 입을 막으며 감동을 먹었다.
“최전무님, 사랑해요. 꼭 저한테 숫처녀장가 들 생각 전혀 없는가요? 이건 한 숫처녀의 소박한 첫사랑인데요. 소중히 여기고 심중하게 고려하길 바래요. 기회는 단 한번뿐인데요. 기회를 놓치고 이담 가슴치며 후회하지 말아요.”
추파는 번대머리에 닻을 내리는데 유혹은 꼬리 치며 서정시를 쓴다.
(조 백지장처럼 새하얀 우유빛 얼굴을 봐. 얼마나 매력적인가.)
로맨틱하고 파격적인 사랑의 서정시는 황혼을 빨갛게 불태우더니 날개를 서서히 펴고 빨간 하늘을 훨훨 날고 있었다.
“또, 또, 또. 쓸데 없는 헛소릴, 횡설수설, 얼마나 사람 해치는가 생각이나 해보고 그러오? 돌아가 위생소나 잘 관리하오. ”
“전무님은 조만간에 한 숫처녀의 순박하고 로맨틱한 사랑을 느끼게 될 거예요. ㅎㅎㅎ”
마끼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문 밖으롤 뛰여나갔다.
그때 일을 생각하면서 군철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때 마끼의 강렬한 빛 뿌리는 밝은 눈길을 피하지 않고 그저 웃어보였다.
(같은 값에 분홍치마라고 사랑스런 어린 숫처녀를 사귀는게 낫지 않겠는가! 어허, 내 무슨 망년된 궁리, 렴치도 없어. 열살이나 지하 숫처녀를 어찌...)
그때 리화가 애들을 데리고 객실에 나왔다.
“아빠하구 함께 놀자. 아빠를 뽀뽀해줘라!”
길림이 먼저 달려갔다. 애들은 군철의 품에 안겨 량볼에 뽀뽀했다.
군철은 저쪽에서 자기를 쳐다보는 리나의 화기없는 눈길을 보면서 마음이 아팠다. 그 외까풀눈에는 신심도 없어보였다. 확실히 군철을 따르는 숱한 처녀애들을 이길 용기와 신심이 없었다.
(그래, 리나, 넌 다만 송림과 길림, 유일한 재산이자 무기이지. 두 아들을 무기로 삼아 피동적으로 방어만 할뿐이잖은가.)
리나는 두 아들의 어머니일뿐이지 그녀에 대한 군철의 불평은 많고도 많았았다.
(이전에 그게 뭔가? 머리 허연 문걸 양아버지 우릴 돕느라고 애들을 학교와 유치원에 데려가고 심지어 날마다 설겆이까지 해줬는데. 넌 뭐랬어? 애만 안고 놀고 잔소리만 해댔잖은가? 양아버지 고향에 돌아갈 때 넌 엉덩이도 들지 않고, 인사는커녕 내다보지도 않았지? 며느리로서 어쩜 인정도 없이 그럴 수 있어? 허나사나 대학 석사생까지 졸업한 문화가 있는 인간으로서 그럴 수 있어? 넌 양아버지 뭐란다고 '검정개 돼지 흉 한다고나 해라.'고 욕까지 하지 않았어? 참 인간수양이 너무 너무 모자라. 사람이 아니야. 지금 숱한 처녀들이 날 따르니 질투하고 떼버리려고 별 비렬한 수단을 다 쓰고 있잖니? 심지어 내 침실에 도청기까지 장치해놓고 도청까지 하고. 물론 애리싸를 붙잡은 건 잘 했지만. 그때 너의 추악한 본성은 끝내 드러났다. 네 같은 년과 복혼해도 절대 행복할 수 없어.)
그는 리나 벌린 추악하고 비렬한 일을 두루 생각하면 치떨리고 진절머리 났다. 그러나 애들을 보면 이상하게 또 마음이 약해지는 것이였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어쩌란 말인가? 계속 졸혼해 살아보았지만 그저 그래. 애리싸가 미국 경제간첩일줄이야. 으흐흐, 생각만 해도 치떨려.)
군철은 숱한 처녀들과 리화를 놓고 비교하면서 선택하는 관건적인 시각이 돌아왔다. 그 선택과정도 그리 쉽지 않다는 것을 가슴 깊이 느꼈다.
미녀들의 매력적인 추파가 핵충격파처럼 강렬한 빛 뿌리며 군철의 흉벽을 쿵, 쿵 쳤다. 두 아들을 내세운 리나의 심리방파제는 가련하게 한겹한겹 무너져갔다.
(아, 하느님이여, 사랑이란 무엇입니까? 조물주여, 당신은 왜 이 세상에 사랑을 만들어놓고 또 자유를 구속하는 가정을 만들어놓고 두 아들까지 만들어 주었습니까? 참된 사랑은 남녀 피끓는 두 심장으로 연주하는 사랑신의 멜로디 아닙니까? 두 아들을 위해 다 식어버린 옛 사랑에 다시 불을 달아야 합니까? 아니면, 참된 뭇 처녀들의 추파 오선보에 새 사랑의 노래를 엮어 목청껏 불러야 합니까?)
미녀들의 강렬한 추파가 핵복사마냥 군철의 마음을 지지고 볶는 콧노래소리 은은히 귀를 간음한다. 허허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