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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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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7    아동소설 꿈 많은 향화 김장혁 댓글:  조회:701  추천:0  2024-02-23
       아동소설       꿈 많은 향화                      김장혁                                     1     향화, 참말 이름처럼 어여쁜 애지요. 외씨같이 걀쭉한 얼굴에 예지로 반짝이는 새별눈, 항상 응석을 부리는 작은 앵두입, 실로 비너스 버금으로 곱게 생겼다고 할 수 있겠지요.    옥에 티라고나할까요. 그 걀쭉한 얼굴 왼쪽볼에는 좁쌀만한 기미가 괘씸하게 나 있었어요. 말도 말아요. 그 기미 때문에 우리 귀여운 향화가 닭똥 같은 눈물을 얼마나 흘렸는지 알아요?    향화는 원래 계산문제풀이는 번개불이 번쩍나게 풀어 학급에서 엄지손가락으로 꼽히였고 “패뜩골”이란 별명까지 딱 들어붙었어요. 그런데 요즘 그는 영희랑 무용써클실에서 디스코와 발레무용을 배워 신나게 추는 것을 흠모의 눈길로 바라보았지요. 그 후부터 그는 어쩐지 응용문제풀이가 딱 싫어졌어요. 공부하기보다 춤추는 것이야 말로 세상에서 제일 아름답고 고상하다고 생각됐던 것이지요.   어느 날, 향화는 영희를 앞세우고 무용선생님을 찾아갔어요.    “저를 무용써클에 받아주겠어요?”   향화는 간절한 눈길로 무용선생님을 바라보며 애원했어요.  무용선생님은 향화의 얼굴로부터 발끝까지 참빗질했어요. 그런데 무용선생님의 눈길이 향화의 볼에 피뜩 멎더니 도리머리질했어요. “돌아가 공부나 잘 하세요.” “녜? 요 기미 때문인가요?” 향화의 손이 기미에 가 멎었어요. “동문 무용하긴 좀 그래요.”   향화는 무용교연실에서 나온 후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허나 패뜩골인 그의 머리에는 패뜩 한 가지 꾀가 떠올랐어요. 그는 침대에서 바시시 일어나서 어머니 화장품통을 들춰 가지고 거울에 마주 섰어요. 뒤이어 눈물이 가랑가랑 맺혔던 눈언저리를 싹 닦고 그 얄미운 까만 기미에 새하얀 분을 발랐어요. 그러나 청어름에 서리 내린듯해 괘씸한 기미 형체를 감출 길 없었어요.    애탄 나머지 그는 아예 분세수를 하다시피했어요. 거울을 들여다보니 실로 온 얼굴은 밀가루주머니에 빠졌다 나온 것 같지 않겠어요. 눈섭은 서리를 맞은 것 같았고 오똑한 코마루 량옆의 물기어린 깜장눈만 가려볼 수 있었어요.     순간 향화는 입술을 꼭 깨물었어요. 량볼 우로는 줄 끊어진 구술처럼 눈물이 주르르 흘렀어요. 이튿날 아침, 향화는 세수를 하고 거울을 들여다보며 머리카락을 훔치다가 걀쭉한 얼굴에 웃움기가 서서히 퍼지기 시작했어요. 어여쁘게 생긴 얼굴과 몸매를 보고 자신감이 생겨났어요.    (무대와 열대여섯미터 밖에 있는 관중들이 어찌 화장하고 뺑뺑 돌아치는 요 작은 기미를 보아낸단 말인가! 우리 어머니 주근깨 다닥다닥해도 열다섯미터 밖에서 보면 미인이여서 “열댓미터 밖 미인” 아닌가. 나도 이제, 호호호.)     그는 축 처졌던 어깨가 당금 으쓱해졌어요. 무용수로 될 꿈이 새록새록 다시 싹 텄어요. 하여 그는 새 희망을 품고 재차 무용선생님을 찾아가 울먹울먹해서 기미 있어도 괜찮다고 실토정하면서 애원했어요.    그러나 무용선생님의 말씀은 이러했어요.   “향화, 꿈은 좋은데요. 누구나 춤추고 싶으면 다 무대에 오를 수 있는 건 아닙니다. 딱 기미 때문만이 아닌데요. 향화는 예쁘긴 한데요. 키가 좀 작아서 무용하기는 좀 그래요.”    원래 무용선생님은 처음에는 향화의 인격을 무시하는 것 같아 완곡하게 거절했지요. 그러나 한 학생의 전도와 관계되기에 이 자리에서는 솔직하게 말해주지 않을 수 없었어요.    향화는 어깨가 맥없이 축 늘어졌어요.    엎친데 덮친 격으로 자기보다 한뼘씩이나 더 큰 무용써클 애들이 춤을 추며 골리는듯한 눈길로 힐끔거리는 것이 아니겠어요.   향화는 그만 위축감이 들어 엉엉 울음보를 터뜨리고 말았어요.  그는 책상다리라도 발 밑에 이어놓고 싶은 애절한 심정이었어요. “울지 마세요. 정 무용을 배우고 싶다면 오후부터 배우세요.” “예? 정말입니까? 야, 좋아라!”     향화는 언제 울었는가 싶게 눈물을 싹싹 닦고 무용선생님의 손을 잡고 퐁퐁 뛰다가 와락 안겼어요. 오후부터 향화는 영희네와 함께 아름답고 경쾌한 선률에 맞춰 무용을 배웠어요. 얼마나 신났는지 몰랐어요.    요즘 그는 벌써 명무용수로 돼 오색찬연한 무대에 올라 선녀처럼 날씬한 몸매를 놀리면서 장고를 둥기당당 치며 장고춤을 추는 꿈을 몇 번이나 꾸었는지 몰라요.    그러나 무용배우기도 향화의 생각처럼 순풍에 돛을 단 격이 아니었어요. 아니, 하늘의 별따기처럼 느껴졌어요. 날마다 무용선생님의 장고를 치는 박자에 맞춰 반시간씩 련속 팔다리를 놀리면서 기본동작을 익히느라면 온몸이 해나른해졌어요. 좀 고달프긴 했지만요. 향화는 한학기 배운 후 어지간한 춤은 출 수 있어 고달픔을 어지간히 참아낼 수 있었어요. 한창 자랄 나이여서 그런지 그새 문턱에 올라 키를 재여보니 둬센치미터는 더 자란 것이 아니겠어요.    (그럼 그렇지. 이제 반년 지나 솜옷을 입을 땐 더 크겠지. 등산복도 언니 것만큼 큰 걸로 사야지.)    그런데 뜻밖의 시련을 겪게 됐어요.    무용선생님은 발레무용 기본동작을 배워주기 시작했어요. 발끝으로 서기를 배울 때 실로 참기 어려운 아픔을 참아내야 했어요. 향화는 열개를 셀 때까지도 서지 못하고 엉덩방아를 찧으며 물앉고 말았어요. 향화는 발가락이 바늘로 쑤시는듯이 아파 널장판에 물앉아 두 손으로 발가락을 붙잡고 만지면서 눈물을 주르르 흘렸어요.    “울긴? 어서 서요. 이번엔 열다섯개 셀 때까지 서야 돼요.”   “선생님, 발가락이 아파서 못 서겠어요.”   향화는 집에서 부모한테 응석을 부리듯이 어깨마저 흔들며 칭얼거렸어요.    무용선생님은 향화의 발을 매만지면서 차근차근 일깨워줬어요.     “향화, 무용써클에 올 때 그 강렬하던 욕망은 어디 갔어요? 왜 요만한 아픔도 참지 못하고 물앉아요? 음악에 맞춰 춤을 추려면 몇분씩 서야 하는데요. 몇초 밖에 서지 못하고서야 어찌 무대에 오를 수 있겠어요? 자, 강자가 돼야죠. 견지하면 아픔이란 놈도 달아나요.” 향화는 마지 못해 일어나서 또 연습했어요. 그러나 나흘도 못돼 발가락이 부어오르더니 이젠 발목까지 팅팅 부어올랐어요. 발가락 뼈가 땅바닥에 닿기만 하면 뼈 속까지 바늘로 찌르는 것 같아 눈물을 찔끔찔끔 짰어요. 게다가 발가락 끝은 이젠 걷기만 해도 아파났어요.    고통에 모대기는 향화의 내심을 꿰뚤어본듯이 무용선생님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충고했어요.    “꼭 견지해야 해요. 이 고비만 넘기면 썩살이 생겨 괜찮아요.”    (흥! 남은 아파서 이가 다 쫓기는데. 춤? 무슨 놈의 뚱딴지 같은 바레무용이야!)   향화는 무용선생님의 충고를 들을 염도 하지 않았어요. 게사니무리 속의 병아리처럼 키 큰 영희랑 애들 속에서 춤을 출라니 얼마나 위축감이 들었는지 몰라요. 향화는 자존심이 허락되지 않았는지 분이 콱 치밀었어요.    그 후 영희가 와서 무용실로 가자고 잡아끌었어요. 그러나 향화는 눈물만 하염없이 흘리면서 다시는 무용실로 가지 않았어요.                                         2       한편 무용실에 발길을 끊으니 진절머리나게 매서운 무용선생님의 엄한 눈길을 받지 않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 몰랐어요.     어느 날, 청신한 아침 공기에 답답한 마음을 말끔히 씻으려고 향화는 운동장에 나갔어요. 자오록한 안개 속에서 어디에선가 둥기당당 가야금을 타는 은은한 선률에 맞춰 청아한 목소리로 부르는 노래소리가 향화를 확 잡아 끌었어요.     천천히 다가가 보니 안개 속에 명암이 분명하게 실실이 내리드리운 수양버들가지 아래에서 이웃집 은희가 쪽걸상에 앉아 가야금을 둥기당당 타고 있지 않겠어요.     (호- 저렇게 걸상에 착 앉아 가야금을 타니 얼마나 편안해. 뼈마디 아프게 발레무용을 출게 뭐야?)    향화는 또 패뜩골이 패뜩, 꿈도 패뜩 바뀌었어요.   그는 은희와 지청구를 들이대 그날 오전에 가야금선생님을 만나보게 됐어요.   “오- 아주 곱게 생겼구먼.”   가야금선생님은 향화의 량손을 쥐어 손가락을 찬찬히 뜯어보더니 말했어요.    “손가락도 길죽하니 실로 가야금타기에는 훌륭한 싹인 것 같아요.” 가야금선생님은 향화를 끌어당겨 맞은켠에 앉히면서 당부했어요.   “가야금타기도 이를 악물고 배우지 않으면 발레무용공부처럼 중도낭패하게 되오. 견지할만 하오?”   “예! 어떤 곤난이 있어도 꼭 견지하겠어요.”    한참만에야 향화는 해말쑥한 얼굴을 귀 밑까지 붉히면서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대답했어요.   (무용선생님이 벌써 뭐라고 쑥덕거렸는가?)     가야금선생님의 짙은 눈섭 아래 맑은 눈은 무용선생님의 엄한 눈과는 달리 상냥해 보이었어요. 향화는 머리를 푹 떨구고 집으로 돌아왔어요.    생각할수록 별로 무용선생님이 자기를 무용써클에 받기 싫어서 마지 못해 받고서는 고의적으로 발이 아프게 굴어 저절로 물앉게 했을지도 모를 일이라고 생각됐어요.    사실 무용선생님은 향화를 잘 배워주라고 가야금선생한테 주탁했는데도 말이지요.   향화가 뾰로통해 침대에 걸터 앉아 있을 때었어요.   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어머니가 들가방에 뭘 들고 들어왔어요.   “향화, 월병!”   “야, 내 좋아하는 월병!”    향화는 어느결에 들가방을 채다가 월병을 량손에 쥐고 게걸스레 먹어댔어요.    “어머니, 가야금을 사줘요? 예?”   “얘, 얹히겠다. 천천히 먹어라.” 향화는 월병을 량볼이 볼록하게 넣고 오물거리다 콜록콜록 기침을 깇었어요. 그는 어머니 품에 안겨 칭얼거렸어요.    “어머니- 가야금을. 예?”   어머니는 향화 잔등을 다독여주면서 의아한 표정을 지었어요.   “춤을 추는데 가야금을 해선 뭘 하느냐?”   향화는 입이 뾰로통해졌어요.   “어머니, 발가락이 아파 발레무용을 추지 못하겠어요. 이젠 가야금써클에 갈래요.”   “그래?”   어머니는 한참 뭔가 생각하더니 무겁게 입을 열었어요.   “얘야, 한창 꿈이 많을 때지만 자꾸 꿈을 바꿔서 되겠니? 뭐 하나 한 가지를 꾸준히 해야지. 우물을 파도 한 곳을 파라고 하잖았니?”   향화는 발을 들어 속살까지 파난 발가락을 보이면서 불평을 털어놓았어요. “보세요. 발가락이 끊어질 지경인데요. 그래도 계속 발레무용을 춰야 하는가요?”    어머니는 놀란 표정을 지으면서 도리머리를 홰홰 저었어요.   “아이고, 이게 웬 일이냐? 아프겠구나.” 어머니는 입으로 호호 발가락을 불어주면서 중얼거렸어요. “아프면 가지 말아야지. 괜히 발가락을 다 잃어먹겠다. 내 가슴이 막 미여지는 것 같아. 가야금을 사줄게. 가야금타기는 앉아서 하는 거니깐. 아프잖겠지.” “가야금을 사주겠다는 말씀이죠?” “그래, 우리 요 무남독녀를 사주고 말고.” “야- 좋아라.” 향화는 기뻐 퐁퐁 뛰었어요.    그때 아버지가 들어왔어요.    사연을 안 아버지는 입에 빗장을 지르고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어요.   그날 밤 향화는 꿈을 꾸었어요.   은하수가 거꾸로 쏟아지는 듯한 새하얀 백두폭포가 청석옥석을 부시면서 천길만길 하늘가에서 쏟아져내리고 단풍이 울긋불긋 물들어가는 무대배경 앞에서 향화가 걸상에 편안히 앉아 칠색단색동저고리 옷고름을 날리면서 송학이 나래치듯 둥기당당 가야금을 타는데요. 박수갈채가 장내가 떠다갈듯했어요.   “아갸갸!”   비명소리와 함께 향화는 발딱 뛰쳐 일어났어요. 꿈이었어요.   무용선생님이 억지로 무대에 끌어내가는 바람에 향화는 발레무용을 추게 됐어요. 그런데 얼마 추지 못하고 무대에서 뾰족한 못을 꽉 밟고 말았어요.     실로 진저리나는 춤이 그의 황홀한 미몽을 깨뜨렸어요. 그 후 향화는 가야금선생님의 상냥한 눈길을 받으면서 쪽걸상에 편안히 앉아 어머니가 사준 새 가야금을 재미나게 튕겼어요. 무용써클에 가서 은희랑 함께 달타령 곡조에 맞춰 걸상에 착 앉아 가야금타기를 배우는 것이 발레무용배우기보다 식은 죽 먹기로 느껴졌어요.    그러나 오선보 우에 다닥다닥 들어붙은 콩나물대가리를 익히기는 실로 머리가 아픈 일이었어요. 성급한 향화는 그 놈의 콩나물대가리를 쟁개비에 기름을 달이다가 볶아 먹으면 머리에 곡조가 막 떠올랐으면 좋을 것 같았어요. 그럼 얼마나 쉽고도 신나게 가야금을 타겠어요.    가야금선생님은 향화의 곁에 다가와서 차근차근 타일렀어요.    “향화, 어찌 단숨에 배를 불리겠소. 하나하나 차근차근 배워야지.”    뒤이어 식보지식을 개별보도까지 해주었어요.    향화는 울며 겨자먹기로 도레미 콩나물대가리를 익히기 시작했어요.     오선보 악보에 따라 가야금을 타자고 하니 이번엔 두 손이 착착 배합되지 않았어요. 은희랑 다른 애들은 노래를 부르면서 둥기당당 신나게 탔어요.    그런데 향화가 타는 소리는 애처로운 외마디 비명소리에 달가닥거리며 가야금줄을 받쳐 든 나무 조각이 공명밑판을 두드려 듣기도 역정 났어요.     애탄 향화는 가야금줄을 마구 쥐어뜯다가 꽝 밀어버렸어요. 심지어 어떤 때에는 신경질적으로 가야금을 마구 발로 차버렸어요.    그때 가야금선생님의 말씀이 귀전을 아프게 때렸어요.    “이를 악물고 배우지 않으면 춤배우기처럼 중간낭패를 하게 되오.”    향화는 눈물을 훔치고 마지못해 다시 가야금을 탔어요.    련 며칠 가야금을 탔기에 오른손 식지와 중지 끝에는 콩알만한 물집이 생겼어요. 가야금줄을 튕길 때면 손가락으로부터 팔을 타고 심장마저 바늘로 찌르는듯 찡찡 아파났어요.   “선생님, 이걸 보세요.”   “오-”  선생님은 다가와 향화의 손가락을 쥐고 여겨보더니 책상 서랍에서 성냥곽을 들고 왔어요. “터치기오.” “어마나, 아프지 않습니까?” 향화는 새별눈에 겁기를 꽉 싣더니 손을 뒤로 움츠려뜨렸어요. “겁쟁이야, 우리도 몇 번씩 터치우고 이젠 아프잖아.” “호호호!” 은희랑 코까지 싸쥐고 웃었어요. 선생님은 억지로 향화의 손을 쥐어다가 식지 물집 우에 성냥가치 꼬투리를 대고 화약껍데기를 쪽 문질러 딱총을 놓았어요. 피씩- “아이고머니! 선생님, 살랑살랑!”     향화가 엄살을 부리는 사이에 피씩- 소리와 함께 딱총을 맞은 물집이 데여 터지면서 진물이 주르르 흘렀어요.   “엄살쟁이야, 이제도 두개 더 터치워야 해.” 은희랑 떠들었어요. 피씩- 피씩- 향화는 비명을 지르며 눈물을 줄줄 흘렸어요. 집에 돌아온 후에도 손가락으로부터 가슴까지 찡찡 아려났어요. “아이유, 아파라. 아이고-” “뭐? 어째?”    향화가 문을 떼고 들어서면서 싸맨 손을 쥐고 죽는 상을 했어요.     어머니는 물기어린 눈으로 향화의 싸맨 손을 보더니 호호 불어줬어요. 뒤이어 어머니는 향화를 집에 데리고 들어가 밥상을 마주 앉혔어요. 손수 어린애처럼 밥과 국을 입에 한술한술 떠넣어주기까지 했어요.   말수 적은 아버지는 못마땅한 눈길을 보내더니 건가래를 뗐어요. “그렇게 어린애처럼 키우니깐. 의력이 없지.” 향화는 아버지가 얄미워 새별눈을 곱게 흘겼어요.     이튿날 향화는 손가락을 싸맨채 가야금써클실에 갔어요. “싸맨 걸 풀고 가야금을 타오.” “예?”    순간 향화는 새별눈이 화등잔처럼 휘둥그래졌어요. 상냥해보이던 가야금선생님의 눈길이 무용선생님의 엄한 눈길로 변해 겹쳐보이었어요.    그는 흐릿한 눈길로 가야금줄을 내려다보다가 곡조고 뭐고 마구 쥐어뜯었어요. 물집이 터진 손가락에서 피고름이 흘러내려 가야금줄을 타고 눈물이 흥건한 향화의 얼굴에 마구 튕겼어요. 손가락, 팔, 가슴, 머리에까지 줄이 뻗치며 바늘로 찌르는듯이 아파났어요. 가야금줄은 신경질적으로 비명을 질렀어요.    향화는 가야금을 활 팽개치고 집으로 돌아와 침대에 쿵 쓰러졌어요. 두 손으로 얼굴을 싸쥐고 섧게 엉엉 울었어요.                       3      이젠 당장 초중입학시험을 쳐야 하는데요. 향화는 응용문제풀기는 싫고 발레무용 꿈도 가야금 꿈도 다 수포로 돌아갔어요. 이젠 어떻게 해야 하는가요?      어느 날 저녁, 향화는 텔레비죤에서 이런 장면을 보았어요. 그물 우로 쉭- 솟으면서 강타를 안기는 랑평, 지도원으로 된 랑평, 열렬한 박수소리 속에 수상대에 올라 금메달을 받는 중국여자배구팀 여자선수들.     웬 일일가요?    향화의 눈 앞이 흐릿해지는 것이 아니겠어요. 저게 뭐지요? 향화는 수상대 선수들 속에 서 있는 자기를 발견했어요. 관중석에서 부러운 눈길로 하염없이 자기를 바라보는 영희, 은희. 숱한 동창생들의 눈길이 따가웠어요.    향화는 가슴이 부풀어올라 보름달이 휘영청 밝은 운동장으로 나왔어요. 실실이 늘어진 수양버들가지들이 넘실넘실 춤추는 사이로 보름달이 두둥실 걸려 은빛이 부서졌어요. 그 선경 같은 경치 아래에서 노랑저고리에 연분홍치마를 입은 은희가 가야금을 둥기당당 타고 있었어요. 그 선률에 맞춰 칠색단저고리에 빨간 치마를 입은 영희가 선녀처럼 장고춤을 나풀나풀 추는 것이 아니겠어요.    무용선생님과 가야금선생님이 웃음을 지으며 팔을 홱 휘둘렀어요.    저건 웬 일인가요?    은희와 영희는 가야금을 타고 춤을 추면서 오선보 같은 오색령롱한 칠색무지개를 타고 하늘로 날아올라 고향의 산마루를 훨훨 날아넘더니 예술학원으로 날아가지 않겠어요.    학교 여자축구팀 말괄량이 경자 등 녀학생선수들은 축구공을 탕! 차더니 하늘로 날아오르는 축구공에 매달려 날아올라 체육학원으로 날아갔어요.    숱한 동창생들은 제마끔 입학시험지를 두 손에 들고 하늘로 쌩쌩 날아오르더니 자기 꿈대로 학교로 날아가고 있었어요.   “함께 가자! 영희야, 은희야-”    향화는 두 손을 입에 모아대고 발을 동동 구르면서 목놓아 소리쳤어요.    이때 쏴- 소리와 함께 난데없이 산더미 같은 쓰나미가 덮쳐왔어요. 선생님들이 주는 가야금과 장고를 급급히 받아쥐고 타기도 하고 두드려도 보았어요. 하지만 가야금타기와 장고춤 실력이 차해 한키쯤 몸이 솟다가 되떨어져 내려오군 했어요.     “향화, 뽈을 받소!”    졸지에 체육선생님이 툭 친 배구공이 씽- 날아왔어요.    (옳지. 배구명장으로 돼 내 꿈을 실현해야지.)    향화는 황급히 받아치려고 손을 내밀었어요. 그런데 배구공이 소녀의 가슴에 쨩 맞았어요. 숨이 컥 막히게 찡 아파났어요. 가야금줄을 튕길 때 생긴 물집보다 더 아파났어요.    “에잇, 배구도 못할 노릇이구나.”     이때 쓰나미가 당장 학교 담장을 박차고 들이닥칠 판이었어요.    향화는 발을 동동 구르면서 엉엉 울었어요.    저게 뭐지요?    갑자기 사나운 파도 속에서 고무풍선 세개나 불쑥 솟아올랐어요. 고무풍선 세개에는 각각 가야금, 장고, 배구공이 새겨져 있지 않겠어요.    향화는 머리 우에 둥둥 뜬 그 고무풍선 끈을 황급히 붙잡고 하늘로 두둥실 떠올랐어요. 이젠 고향의 산도 저 먼발치의 모래무지처럼   아득히 내려다보이었어요.    그런데 고무풍선은 영희와 은희가 간 예술학원이거나 경자가 간 체육학원 쪽으로도 날아가지 않았어요. 고무풍선은 아득히 높고 푸른 하늘 우의 먹장구름 속으로 날아들어갔어요. 그 먹장구름 속에 글쎄 올림픽 배구장이 있지 않겠어요. 향화가 구름과 고무풍선을 타고 바야흐로 배구장에 내리려는 순간이었어요.    펑! 퍼펑!   요란한 소리와 함께 고무풍선이 몽땅 터졌어요.   “앗!”   향화는 비명소리와 함께 끊어진 풍선 끈을 잡은채 두 다리를 바둥거리면서 떨어졌어요.   귀뿌리에서 윙윙- 소리났어요. 하늘 아래로 곤두박질쳐 내려갔어요.    “어머니!”      향화는 두 손에 식은 땀을 쥐고 고함쳤어요. 그는 몸부림치다가 그만 침대에서 방바닥에 뚝 떨어졌어요. 그제야 향화는 자기가 이제껏 황홀하면서도 무시무시한 꿈, 고무풍선 같은 꿈을 꾸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오- 꿈많은 향화가 이제 또 무슨 꿈을 꾸겠는지요?     아무리 패뜩골이라고 해도 자꾸 패뜩패뜩 꿈을 바꿔서야 되겠어요?   
366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22) 운주동 검객 김장혁 댓글:  조회:854  추천:0  2024-02-18
             김장혁 작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          5. 운주동 검객            해빛도 따사로운 새 봄이 왔다. 치마봉과 기운봉 기슭에 진달래꽃이 만발하여 온 산이 연분홍으로 파랗게 물들었다. 뻐꾹새들이 수림 속에서 뻐꾹뻐꾹 울고 들에는 종달새가 지종지종 울며 밭갈이를 재촉하고 있었다.      운주동 마을 옆의 운주하 개울물이 구름 싣고  파란 하늘을 싣고 조잘거리며 흐르고 있었다. 마을 동구 밖의 기운봉 협곡을 흐르는 맑은 벽계수는  조약돌과 민들레꽃과  뭐라고 조잘조잘 속삭이고는 누구를 또 만나 봄날의 사랑을 속삭이려는지 갈 길을 재촉하며 무거운 이별을 한다.          운주동 마을에서 그리 멀지 않은 기운봉은 누르스름한 바위와 토색 흙으로 단장한 뭇 산 위에 우뚝 솟아 있었다. 기운봉의 들쑥날쑥한 갈색바위절벽은 사시장철 구름 속에 안개 속에 잠겨있었다. 안개처럼 물기어린 구름들이 절벽을 씻어 올리다가도 풀렸다. 구름이 천천히 걷히면서 가파른 절벽이  드러나기도 하고 다시 모려오는 구름 속에 자취를 감추기도 하면서 절경을 이루었다.        천태만상의 구름송이는 기운봉의 허리에 감겨 한참씩 쉬다가는 갈 길이 바쁜지 어디론가 총망히 사라져버렸다. 기운봉과 치마봉에 먹장구름이 감돌고 번개가 산허리를 번쩍 칠 때는 꼭 얼마 안 있어 소낙비가 쏟아지군 했다.     비온 뒤면 기운봉과 치마봉 사이 산골짜기에서 쿨쿨 솟는 샘물과 비 물이 갈색바위를 부시며 쏟아져 쏜살같이 흘러 운주동 골짜기를 휩쓸며 흘러 신흥동 쪽으로 내달아간다.     운주하를 따라 내려가면서 몇 백미터씩 내려가면서 드문드문 통나무집들이 스산하게 널려있었다. 그 통나무집들은 대부분 기와나 벼 짚이거나 조 짚 대신 널판자를 기와처럼 지붕에 얹고 못으로 고정시킨 “널기와 집”이였다. 다만 서당을 차린 최구장의 집만은 청기와를 얹은 목조 팔간 집이었다.      어느 날, 병완은 자식들을 몽땅 안방에 불렀다. 쉰 고개에 오른 병완의 머리에 서리가 새하얗게 내리였다。      병완은 대통에 담배를 꿍꿍 쑤셔 넣고 붙여 물고 뻑뻑 빨더니 무겁게 입을 열었다.        “옛말에 팔촌이 한 구들이라고 우리 집은 커서 사대가 한 구들에서 살아도 된다. 요즘 한길수가 얼리고 닥치고 하는 수작을 봐라. 묵밭마저 더 일구지 못하게 하는데 어떻게 살겠느냐? 스물두 넘는 식구들이 한 구들에서 손바닥만 한 돌밭을 믿고선 입에 풀칠도 하지 못한다.”      병완은 눈 굽에 눈물마저 픽 돌았다.      그는 비장한 결심을 내린 듯이 뒷말을 이었다.     “이젠 별수 없구나. 난 맏이 성칠과 함께 여기서 살 테니까 창준과 기준은 운주동에 세간나 살아라.”      기준은 근심스러워 했다.      “우리 다 가면 저 길수가 아버지 네를 업신여기지 않겠습둥?”      병완은 대수로워하지도 않았다.      “까짓놈들, 흥!"      성칠이 옆에서 위안했다.     "나두 있으니까. 근심할게 없다.”     그리하여 며칠 후 창준과 기준 형제는 상우남면 운주동에 세간나갔다.      운주동에는 키 넘는 새가 들어 누워 있어 새골이라고도 불렀다. 새밭이 무연하게 펼쳐진 골 안에 창준은 아버지와 함께 집을 짓고 들었다. 그때로부터 창준네 집안은 웃새집이라고 불리웠다.    기준 네는 운주동 웃새집에서 한 300미터 떨어진 곳에 집을 짓고 살았다. 그때로부터 기준네 집은 성남집이라고 불리웠다.      기준은 맏아들 상우와 맏딸 어금이, 그리고 임신한 아내 사련을 데리고 봄에 누런 잔디가 말라붙은 바위틈새에 듬성듬성 난 묵은 풀에 불을 달아 태워 버리었다. 잔 나무들을 도끼로 찍어낸 후 소대가리 같은 나무뿌리들을 괭이로 파내고 도끼로 패서 집에 날라 갔다.    기준은 해뜨기만 하면 온 집 식구들을 데리고 바위 틈 사이에 재를 펴 놓고 나무로 구멍을 뚫고 기밀을 심었고 운주하 강변에 일군 황무지 밭에는 감자를 심었다.     어느 날, 어금은 사철 맑은 운주하 개울물에 빨래하러 나갔다.     빨래터 개울물이 어찌나 맑은지 조약돌이 다 들여다보였고 물고기 몇 마리가 조약돌 틈새에서 지느러미를 하느작거리는 것이 다 들여다보였다.     어금이 한창 개울물에 빨래를 휑구어 납작한 빨래 돌에 올려놓고 방치로 쨩쨩 칠 때다.     애래 쪽 개울가 백사장에 머 태가 치렁치렁한 한 총각이 나타났다. 어금은 누군지 똑똑히 볼 새 없이 빨래를 방치로 땅땅 두드려 개울물에 활활 휑궈 버드나무가지에 널어 말리었다.     그녀는 피뜩 아래쪽을 바라보다가 한 총각이 검술을 익히는 멋진 모습을 보았다.    “어덴가 퍽 눈 익은데?”     그 총각은 시퍼런 검로 몸 주위를 휘감으면서 휘두르는데 서리발이 사처로 빛발쳤다. 총각은 훌 뛰어 날면서 칼로 내리찍었다. 두 다리를 앞뒤로 모래바닥에 쭉 펴고 앉았다가도 훌쩍 뛰어 일어나면서 턱을 발로 차는 동시에 옆으로 칼로 가로 찔렀다.      총각이 검술을 연습하는 장면은 정말 신출귀몰해 보기 장관이었다. 마치 호랑이가 앞발을 쳐들고 구름 속의 하늘로 날아올라 사라졌다가도 구름 속에서 날아 내려오면서 꼬리로 땅을 치는듯하고 닭이 외발로 선후 원숭이가 왼팔을 이마 위에 얹고 해를 가리고 먼 곳을 보는 듯 했다. 꿈틀거리는 용이 대가리를 쳐들고 영용무쌍하게 앞으로 무찔러 나가는 듯이 검을 춤추면서 앞으로 찔러나갔다.       그 날랜 검술장면을 보다나니 어금은 그만 손에 쥐였던 빨래를 모래바닥에 뚝 떨어뜨렸다.        “어마나!”       어금은 화뜰 놀라면서 혀를 홀랑 내밀었다. 그녀는 인차 모래가 다닥다닥 매달린 빨래를 들고 개울물가에 가서 훌훌 씻어 버두나무 숲에 널어 말리었다.     이때 허옥실이 봉인을 업은 채 빨래함지를 이고 사뿐사뿐 빨래터에 다가왔다.     “아니, 언니, 참 오랜만이요.”     어금은 방치를 놓고 옥실한테로 다가가 빨래함지를 받아 내려놓고 어린애의 볼에 뽀뽀를 했다.     “아이유, 애기 곱다야, 봉인아, 뽀뽀하자.”     옥실은 빨래 돌을 바로잡아 놓으면서 “봉인이 이름을 우리 시아버지가 근형이라고 고쳤소. 봉인이라는 이름은 애명이라오. 그래서      우리 요 14대 장손부터는 뿌리 근자 돌림으로 애들의 이름을 짓는다오.”라고 했다.     “근형이, 그 이름 좋다. 최구장어른이야 훈장이기에 아무튼 이름도 잘 지을 분이죠.”     그들이 한창 빨래를 하는데 징검다리로 한 총각이 검을 들고 건너왔다.     어금과 옥실이 여겨보니 칼을 둘러멘 총각은 다름 아닌 옥실의 시동생인 경인이었다. 어금이가 바라보니 아까 저기에서 검술을 익히던 그 총각 같았다. 그리하여 어금은 대뜸 머리를 숙이는데 넙죽한 얼굴이 귀밑까지 홍당무가 돼버렸다.     “아주머니, 아직 빨래하자면 물이 차갑겠는데 어째 애까지 업고 나왔소?”     훤칠하게 생긴 경인은 성큼성큼 빨래터에 다가왔다.     “일없소. 시동생, 검술을 익혔소?”     옥실은 미소를 지으면서 시동생을 바라보며 빨래를 했다. 그런데 어금은 경인이가 다가오자 머리를 점점 더 수굿하고 몸을 외로 탈면서 빨래를 했다. 어금은 웬 일인지 경인을 보는 순간 가슴이 쿵쾅쿵쾅 높뛰는 것을 느끼었다.    그 어색한 분위기를 눈치 챈 옥실은 어금의 어깨를 톡 밀었다.    “얘, 우리 시동생이야. 은인을 보고서도 모르는 척 해서야 되니?”    어금은 경인을 바라보지도 못하고 쥐구멍으로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인사했다.    “그간 잘 지냈소?”    경인은 검을 뒤로 가져가면서 인사를 받았다.    “양, 그쪽에서도 잘 보냈소.”    그는 서리발치는 칼을 모래바닥에 놓고 개울물에 근육이 울뚝 뿔뚝 한 팔부터 썩썩 씻더니 푸푸 물을 불면서 세수하는 것이었다.     “어, 시원하다.”    옥실이 자기 머리 수건을 벗어주려다가 어금의 옆구리를 톡 건드렸다.     어금은 몸을 좌우로 흔들면서 눈을 곱게 흘기며 옥실을 바라보았다.      옥실은 어금의 옆구리를 더 세게 서너 번이나 톡톡톡 다쳤다.      어금은 그제야 별수 없다는 듯이 머리 수건을 벗어 경인에게 내밀었다.      “옜소. 수건으로 얼굴을 닦소.”     경인은 인차 그 수건을 받지 못하고 옥실을 건너다보았다.    옥실은 눈을 찔끔해보였다.     “아주머니, 이래도 되오?”     “별소리를 다한다. 초면도 아닌 오랍누이 같은 사이에."     옥실은 말을 마치자 어금의 눈치를 살피었다.        어금은 그 자리에 앉아있기 어색해 빨래를 대충 휑구어 꽉꽉 짜더니 함지에 담아 이고 일어났다. 그녀는 몽당치마를 걷어 안은 채 바람이 일게 버드나무숲에 가서 그 곳의 빨래도 걷어 함지에 담아 이더니 머리를 이쪽에 돌렸다.     “언니, 먼저 집에 가겠소.”     “응, 그래라.”     어금은 경인에게 눈인사를 곱게 하고는 머리를 돌려 사락사락 모래를 밟으면서 동네 쪽으로 멀어져갔다.     옥실과 경인은 토론이나 한 듯이 엉거주춤 일어나서 동네 쪽으로 빨래함지를 이고 몽당치마자락을 휘날리면서 가는 어금의 뒤 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한참 후 옥실은 빨래를 물에 활활 휑구면서 옆에 앉아 칼자루를 매만지는 경인을 보고 넌짓이 말했다.    “시동생, 저 어금은 예쁜데다가 마음씨 또 착한 애요. 저 애를 내 둘째동서로 삶았으면 좋겠는데 아주버니 생각에는 어떻소?”     경인은 외까풀 눈을 끔뻑했다.     “그럼 오죽 좋겠소? 그런데 명천의 울뚝이라고 소문난 기준이라는 양반이 맏딸을 쉽게 줄까?”     그러자 옥실은 정색하여 경인을 바라보면서 힘 주어 말했다.     “걱정하지 마오. 시부모와 말해볼게.”     경인은 신심이 한 가슴 뿌듯이 생겨났다.     “글쎄 우리 아버지와 병완 영감은 아주 가까운 사이 돼서 아버지가 나서면 설득시킬 것 같기도 하오만.”    청명절이 다가왔다. 사람들은 모두 한복차림에 지지고 볶은 제물을 갖춰가지고 조상의 산소로들 갔다.     운주동 뒤 산에는 성처럼 돌담을 쌓은 옛성이 있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그 옛 성은 고구려 옛성이라고도 했다. 최구장은 그 성안을 명당자리라고 했다. 그 바람에 운주동과 영월동, 신흥동의 사람들은 그 성안 평평한 산중턱에 앞 다투어 산소를 썼다.      청명이 되자 사람들은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조상들의 산소에 와서 가토를 하고 제주를 올리고 절을 올렸다. 성안 평평한 산중턱에서는 무당들이 한창 굿을 하느라고 야단법석이었다.     사람들은 제사를 끝내자 이 곳에 모여들어 무당들이 굿을 하는 것을 구경하고 있었다.     요염하게 치장한 무당이 무대에 올라서서 굿을 했다.     “천지신명이시여, 천하의 악귀들을 몰아내고 천하의 어진이들을 잘살게 도와주옵소서. 남자귀신이면 지고 나가고 여자귀신이면 이고 가주옵소서. 조상신들이여, 이 불쌍한 후손들을 도와주옵소서. 병마를 몰아내고 오곡이 풍성하게 복을 내리옵소서.”     무당의 굿이 끝나자 사람들은 제사상에 올렸던 통돼지를 칼로 저며 내 간장에 찍어 먹었다. 그래야 굿이 잘 든다고 했다.    뒤이어 악귀를 몰아내는 검술표현이 있었다.    그때 산소에 갔던 병완이 일가도 굿 구경을 하러 사람들 틈에 끼여 있었다. 검객 경인이 나서서 머리태를 휘날리며 훌 날아오르면서 앞으로 검으로 내찔렀다. 그는 땅바닥에 앞뒤다리를 펴서 대고 앉았다가도 하늘로 훌쩍 뛰어 오르면서 옆으로 찍었다.  발로 턱 차기를 하고 뱀이 굴속에서 나오듯이 앞으로 검을 찌르면서 나가다가도  뒷발질을 하며 몸을 홱 돌려 뒤를 찌르기도 했다.     그 날랜 장면을 보고 모두들 혀를 끌끌 찼다.        어금도 아버지 기준의 옆에서 경인오빠의 서리발치는 날랜 검술표현을 보고 박수를 연신 치였다.      “잘한다!”     기준도 그 놀란 검술표현에 고함치며 박수갈채를 보냈다.    장내 숱한 사람들은 경인의 검술솜씨에 연신 찬탄을 금치 못했다.     병완이 기준을 보고 검객을 손가락질하며 물었다.    "눈에 익은데. 누군지 모르겠냐?”      기준은 아버지를 보고 조용히 말했다.      "최구장네 둘째아들이 아닙니까? 전번에 최구장 네 맏아들이 큰잔치를 할 때 신랑의 말고삐를 잡았던 그 총각 말입구마.”        병완은 검술재주를 피우는 경인을 보고 머리를 끄덕였다. 경인은 곤두박질재주를 부리며 칼을 휘두르기도 하고 서리발치는 칼로 악귀를 찍어 토막 내는 시늉을 하기도 했다.
365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21) 꿍꿍이 김장혁 댓글:  조회:702  추천:0  2024-02-18
    김장혁 작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             4. 꿍꿍이                 바깥에서는 아직도 눈보라가 윙윙 사납게 휘몰아쳐 게딱지 같은 초가집들이 날려 갈 것만 같았다. 엄동설한에 여우가 눈물을 다 흘리고 박달나무가 얼어서 탁탁 터질 지경이었다. 허나 높다란 토성 안에 자리 잡은 한길수의 집 안에는 불을 어찌나 땠는지 봄날처럼 후끈후끈했다.     본 채에서 응삼은 한길수와 마주 앉아 음흉한 꿍꿍이를 꾸미고 있었다.    그는 뱁새눈이 실눈이 돼가지고 길쭉한 말상을 찌푸리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병완이 우리 집 도감을 하지 않을 거 같소이다.”      길수는 반쯤 모로 돌아앉으면서 도리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건 무슨 소리야? 먹은 소 똥을 눈다고 은덩이까지 받았지. 은녀까지 찾아갔는데 안해?”     그는 속으로 응삼이 괜히 병완이가 들어와 자기 위에 앉는 것을 시샘한다고 여겼다.     한길수의 속내를 모르는 응삼은 뱁새눈을 콩알처럼 동그랗게 뜨고 정색해 말했다.     “옛날에 토끼새끼가 용왕을 속여 넘긴 이야기 기억나지 않습둥? 토끼는 거부기 등에 앉아 바다에서 빠져나가 뭍으로 오르자마자 간이고 뭐고 하나도 주지 않고 달아나지 않았고 뭡둥?”     길수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건 다 옛말이지. 병완이 그렇게 쉽게 신의를 저버릴 사람은 아니야. 내가 그렇게 잘 대해주는데 언감 변심한단 말이요?”     그래도 응삼은 계속 쏭알거렸다.    “은덩이는 주더라도 은녀는 인질처럼 붙잡아둘 걸 그랬소이다.”     월선은 길수 옆에 앉아 며느리와 함께 밥상을 손수 거두다가 신경질을 썼다.      “뭐 어째? 그년을 내보낸 건 잘된 일이야. 그 굼뜬 년을 내보내고 이제 나이도 듬직하고 역빠른 여자를 들여와야네.”     월선은 밥상을 거두면서 속으로 두덜거렸다.    (저 나그네 곰의 열을 먹더니 그게 놀랍게 세졌단 말이야. 항상 은녀 몸을 흘끔흘끔 훔쳐보군 하던데 언제 일을 칠지 몰라. 은녀를 첩으로라도 들여앉히기 전에 내보낸 건 잘된 일이야.)    “닥치지 못할까!”    한길수가 밥상을 탁 치는 바람에 국물그릇들이 왱그랑 절그랑 부딪쳐 국물이 주르르 구들에 흘러 떨어졌다.    “제길 할, 은녀를 빼가고도 들어오지 않아만 봐라. 내 살려두는가!”     길수는 퉁방울눈알을 부라리었다. 번들이마의 피줄마저 노기에 지렁이처럼 살아나 풀떡풀떡 뛰었다.     뜻밖에도 이튿날에 병완이 또 찾아왔다.     그는 너부죽한 얼굴에 웃음을 짓고 길수의 집에 들어와 밤중에 홍두깨 내밀듯이 물었다.      “오늘 무슨 할 일이 없소?”     한길수는 응삼을 흘겨보았다.     (봐, 내 말 맞지? 신의를 저버릴 병완이 아니지? 흥!)     길수는 병완을 돌아보며 알은체 했다.     “오, 왔는가? 병완이, 자넨 낯만 보이면 되네.”     병완은 허리에서 보자기를 풀어내더니 길수 앞에 쓱 밀어주는 것이었다.     “이건 뭐요?”     한길수는 우멍눈이 휘둥그래났다.     “은녀를 내갔으면 됐지. 친구지간에 은덩이는? 어련히 한 주인의 도감이 되지 않을라고.”     병완의 말에 길수는 어쨌으면 좋을지 몰라 했다. 은덩이를 도로 받자니 자존심에 허락되지 않았고 도로 줘 보내자니 병완이 말을 들을 것 같지 않았다. 그런데 백설같이 반짝이는 은덩이가 아깝기도 했다.      그때 응삼이 뽀족한 턱을 쳐들고 끼여들었다.       “주인어른, 정 받지 않겠다면 먼저 받아 둡소.”     길수는 짐짓 “에끼, 이 사람아, 내 어찌 줬던 걸 도로 받는단 말인가!” 하고 능청스레 아닌 보살을 떨었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그는 은덩이를 싼 보자기를 스리슬쩍 응삼의 앞에 밀어 보냈다.    주인의 눈치를 챈 응삼은 제꺽 그 보자기를 받아 쥐었다.    “이후에 수고비로 드려도 늦지 않을 것 같소.”    철주는 병완이 빈 손으로 문 밖을 나가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다가 자기 꾀가 드는 것 같아 속으로 흐뭇해했다.     한길수는 응삼과 철주를 불러놓고 다음 일을 상논 했다.     “얘들아, 아무리 봐도 성칠에게 속힌 것 같다. 창렬 네 빚 대신 그 곰의 열을 받아 먹은 게 영 속에 내려가지 않는단 말이야.”      응삼은 뱁새눈을 간사하게 뜨며 끼어들었다.     “이젠 병완이 우리 사람이 됐으니 창렬이 누굴 믿고 빚을 갚지 않는단 말입니까? 이번 기회에 창렬을 보고 은녀를 되돌려 보내라고 하든지, 아니면 빚 문서를 다시 꾸며 돈을 내라고 하든지 합세다.”     길수는 조왕 쪽의 월선과 며느리 눈치를 힐끔 보면서 중얼거렸다.     “에이고, 빚 문서를 다시 꾸며서야 언제 그 가난뱅이한테서 받아내겠소? 아예 다시 은녀를 붙잡아 오는 게 상책이야.”     “안돼! 그년을 데려다 첩년이라도 시킬 예산인가요? 이제 내보낸 지 며칠이라고 그년을 또 끌어들인단 말이요? 그저 은녀, 은녀 하면서. 원,  더러운 꼬락서니를 못 보겠어.”     월선은 구들에서 일어나 호랑이 궁둥이를 흔들면서 발까지 탕탕 구르며 야단쳤다.     그때 철주가 나서서 난처한 기분을 돌려세웠다.     “엄마 말에도 도리 있습니다. 이제 은녀를 들여다 앉히려면 병완이가 또 은녀 역세를 들 수도 있습니다. 그 일은 덮어놓고 있다가 우리 빚 문서에 그대로 적어두었다가 아무 때 건 병완이 눈을 감아주게 한 후 받아내면 됩니다. 문제는 병완이 이 마을 가난뱅이들의 역세를 들기에 우리 집에서 빚을 받아내기 어려운 것입니다.”     응삼은 그러지 않아도 그 놈 우직한 병완이 자기 우에 와서 누르고 앉는 것이 속에 걸렸는데  한술 더 떴다.    “아예 저 병완 놈을 없애치우면 우리가 이 마을에서 쥐락펴락 하면서 살겠는데.”    그러자 철주 손사래를 치며 말렸다.    “누가 듣겠습니다. 이 일은 천천히 의논해봅시다. 그래도 병완이 우리 집에 들어와 도감을 하겠다고 하니 천만다행입니다. 이후에는 창렬의 빚을 받아도 아버지가 나설게 없습니다.”     “그럼 누굴 내세우겠니?”     “병완을 내세우십시오. 빚도 받아내고 병완과 창렬을 리간 놀면 일거량득이 아니겠습니까? 흐흐흐.”     철주 말에 길수는 번들이마를 끄덕였다.     며칠 후 길수는 병완을 불렀다.     병완이 길수네 으리으리한 울안에 들어서니 길수가 번들 이마에 환한 웃음을 지으면서 아주 반갑게 맞아주었다.     “우리 집 도감이 왔소? 오늘 내 요긴한 일이 있어 자네를 불렀네. 자, 안에 들어가 의논합세.”    길수는 병완의 손을 잡고 안방으로 들어가 마주 앉았다.     “이런 일이오. 저, 전번에도 말이 있었지만 그 곰의 열이 되면 몇 원이나 되겠소? 그러니 자네가 응삼과 함께 창렬의 집에 가서 빚으로 한 십 원이라도 받아오게나.”    병완은 건 가래를 떼더니 도리머리질했다.    “이보,  너무 염치없이 놀지 마오. 그 곰의 열은 우리 성칠이 창렬의 폐병을 떼라고 준 게요. 그걸 가져다 먹고 빚을 받지 않겠다구 했으면 다지. 이제 와서 또 번져 누우면 이후에 영월동의 몇 백 집에서 누가 자네의 말을 믿겠소. 난 그런 일을 돕지 못하겠네.”     병완은 아예 엉덩이를 툭툭 털고 일어나려고 했다. 길수는 어이없다는 듯이 멍해 앉아서 떠나가는 병완의 떡돌같이 넓은 뒤 잔등을 닭 쫓던 개 지붕 쳐다 보듯 했다.     길수는 어린 아들 철주의 말을 들어 병완에게 놀림을 당한 듯 하는 감이 들었다. “제길 할, 병완에게 도감을 맡기니 이 집안 일이 더 시끄러워!” 그 말에 철주의 색시 단춘이 정주에서 입귀를 비쭉했다.     안방에서 철주는 아버지를 일깨워 주려고 들었다.     “아버지, 지금 서울이고 어디고 일본 사람들이 게다짝을 딸까닥거리면서 욱실거리고 있습니다. 전번 3월 1일에 조선 사람들이 서울에서 독립하겠다고 ‘만세’를 부르면서 야단쳤습니다. 여기서는 아무도 ‘만세’를 부르지 않았습니까?”     길수는 우습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때 내 명천과 우시장에 내려가니까 몇몇 조선 사람들이 길거리에서 ‘만세!’ 하고 외치더라. ‘만세!’ 하고 소리쳐 뭘 한다니? 쪽발이들이 만세소릴 듣고 도망간다더니?”      철주는 답답하다는 듯이 머리를 홰홰 돌렸다.      “일본 사람들이 우리 나라를 빼앗았기에 장차 살기 더 힘들게 될 것입니다. 맨 우리 조선 사람들만 살아도 손바닥만 한 땅에서 살기 힘든데 일본 사람들까지 들어와 빼앗아 먹으니 말입구마.”      한철주는 한숨을 후 내쉬더니 뒷말을 이었다.     “사실 나도 3.1운동 때 서울 광화문 앞에서 시위행진을 했다가 일본 놈들한테 쫓겨 고향으로 피신해 왔습구마. 이다음 이 골 안에도 일본 사람들이 들어오지 않을 거 같습니까? 지금 우리는 이 마을의 인심을 틀어잡아야 합니다. 그래서 눈앞의 이익을 너무 차리지 말구 인심을 내야 합니다. 병완 같은 힘장사들도 도감자리를 주어서 손아귀에 쥐고 있는 것이 옳습니다. 이거야 말로 눈앞의 작은 이익을 버리고 이 골 안의 큰 이익을 통 채로 챙길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뭡니까? 인심이 천심이라고 이 골 안에서 병완에게 인심이 쏠렸기에 자칫하면 이 골 안의 실제 주인은 병완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자가 일본사람들과 먼저 손을 잡는 날엔 우리 땅이고 뭐고 다 빼앗아 낼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엄중한가? 그런데 네가 일본 사람들과 등을 졌으니 큰일이고나.”     철주는 개의치 않았다.     “근심 마십시오. 일본 사람들이 나를 알아볼 수 없을 겁니다.”     아들의 말에 길수는 번들이마에 흐르는 식은땀을 씃더니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었다.     한참 후 길수는 선수를 치려고 들었다.    “그럼 우리가 먼저 명천 고을에 가서 일본 사람들을 친해 놓는 게 옳지 않는가?"     철주는 입을 함박만큼 딱 벌리었다.      “아닙니다. 일본 사람들은 우리 나라를 통 채로 먹어버린 사람들입니다. 그자들이 삼림이 우거진 우리 이 골 안을 와서 보면 놔 둘 것 같습니까?”     “그럼 어찐단 말이냐?”    아버지가 난감해 상을 찡그리자 한철주는 마른기침을 하더니 뒷말을 이었다.     “당면에 이 골 안의 가난한 사람들에게서 빚을 받지 못할 까봐 너무 근심하지 마십시오. 기실 일본 사람들을 더 주의해야 합니다.”     “그러기에 내 말은 일본 사람들을 친해놓자는 게다.”     그 말에 응삼이가 말대가리를 흔들면서 찬동했다.     “주인어른의 말씀이 옳습구마. 일본 사람들도 사람이겠지요. 우리가 그자들을 잘 친해놓으면 등에 업고 병완의 눈치를 보지 않고 이 골 안을 쥐락펴락할 수 있습지요.”     “음.”    길수는 번들이마를 두 손으로 감싸 쥔 채 우멍 눈을 흡떴다가 떼룩거리면서 속궁리를 굴리고 있었다.    응삼이 길쭉한 말대가리를 길수의 귀에 대고 뭐라고 중얼거리자 길수는 말 이발을 드러내면서 음흉한 웃음을 지었다.    “음, 그렇지, 그래. 음, 그 수가 참 좋아. 눈앞에 이익만 볼게 아니구나. 음, 그래, 그거야 말로 돼지들에게 겨를 주고 통째로 잡아 돼지고기를 먹는 격이지. 허허허.”     토성 안 집에서는 해 질 때까지 간사한 웃음소리,  음흉한 꿍꿍이 끊이지 않았다.    토성 밖에서는 밤  늦게까지 음산한 눈보라가 온 마을에 공포와 날벼락을 휘몰아 오고 있었다. 공포에 얻어 맞은 벌거숭이 나무와 초가집들이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364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20) 부엌녀 은녀 김장혁 댓글:  조회:810  추천:0  2024-02-18
     김장혁 작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                   3. 부억녀 은녀          토끼꼬리만한 겨울 해가 눈보라 속에서 뒹굴다가 서산으로 그물그물 넘어가고 있었다. 겨울의 차디찬 황혼 빛도 꽤나 날카롭게 언 대지를 찔러놓고 지평선에서 사라져갔다. 참 이상했다. 황혼빛이 톱날 같은 서산마루를 치솔질할 수록 샛하얗게 되지 않고 누렇게 물들어갔다. 땅거미는 황혼빛을 한술한술 파먹고 먹물을 토해내 어둠의 장막으로 대지를 슬슬 뒤덮어놓는다.             성칠은 사냥에 나섰다가 경성 산골마을 여인숙에서 날강도 삼형제를 만나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번했다. 그는 살아 집으로 돌아온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성칠은 마을에 들어서자  한길수의 우멍눈을 떠올리자 잔등에 소름이 끼쳤다.       눈 덮인 마을 구석구석에 공포가 허연 눈을 베고 누워 저승사자 눈깔을 부릅뜨고 죽음의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성칠을 노려 보고 있었다.       그런데 집에 돌아와 보니 은녀가 되 붙잡혀 한길수 집에 부엌 여로 되들어가지 않았겠는가!      한길수는 성칠이 준 웅담을 다 달여 먹었지만 신기를 돕지 못했다고 하면서 가짜 웅담에 속았다고 생떼를 썼다. 그는 은녀가 이제도 3년은 부엌 여를 해야 빚을 물수 있다고 강다짐으로 은녀를 끌어갔던 것이다.     성칠은 분이 꼭두까지 치밀어올랐다. 그는 한길수를 찾아가 한바탕 따져보려고 했다. 하지만 아버지가 어찌나 말리는지 그 자리에 물앉았다.    밖에서 눈보라가 윙 윙 휘몰아치는 초겨울의 어느 날 달밤이었다.    검둥이가 요란스럽게 “왕, 왕, 왕.” 요란하게 짖어댔다.    기준이 문을 열고 내다보니 아닌 밤중에 상판이 길쭉한 응삼이 한길수를 부축해 개울을 건너 헐금씨금 올라오고 있었다.    기준은 집에 들어가 아버지한테 알렸다.     병완은 황급히 문밖에 나가 마중했다.     “이거 어떻게 돼 이 밤에 우리 집에 다 오오?”    한길수는 개화장으로 눈 덮인 땅바닥을 쿡쿡 찌르면서 거들먹거렸다.    "에헴, 그래 그간 잘 지냈는가?"    어조마저 전에 없는 친절을 보였다.    “양, 어서 집안에 들어가기요.”    병완은 팔을 들어 집 쪽으로 안내했다.     한길수와 응삼은 아주 거만스레 집에 들어가 틀스레 타리대를 치고 앉았다.     창준은 길수에게 인사하고 나서 무슨 일로 찾아 왔나 궁금해 눈치를 살폈다.     응삼은 산더미 같은 병완을 마주 바라보면서 한숨을 후 내쉬었다.     (이런 우직스러운 놈은 아들과 며느리 말처럼 얼리고 닥쳐야지. 맨 힘으로는 꺾을 수 없어.)    “에헴, 병완이, 우린 몇 십 년 전에 씨름판에서 익힌 친구지.”    병완은 아닌 밤중에 홍두깨를 내밀 듯 하는 그 한마디 말에 한길수를 흘끔 쳐다보았다.     “땅을 밟고 하늘을 떠인 사내대장부들이 친구 사이에 목숨을 내놓고 아까울 게 있는가? 이게 사내대장부의 의리심이란 말이요. 당신이 이 골 안에 나를 믿고 왔는데 잘 도와주지 못해 미안하네.”      선심을 쓰는 그 말에 병완은 해가 서산에서 뜨나 자기 귀를 의심할 정도였다.     정주에 앉아 두 어른의 말을 듣던 성칠과 창준을 비롯한 온 집식구들도 서로 마주 바라보면서 이상야릇해 했다.     병완은 가타부타 한마디 말도 하지 않고 담배 물 주리에 담배를 꿍꿍 쑤셔놓으면서 한길수의 뒷말을 기다렸다.     이때 길수는 번들이마에 돋는 식은땀을 뚝뚝 찍더니 응삼에게 눈짓했다.     응삼은 보자기에 싼 묵직한 무엇을 척 병완의 앞에 내놓았다.     “헤헤, 병완 어른, 받소. 이건 우리 주인어른이 겨울나이 쌀이나 사라고 주는 약소한 선물이오.”      응삼은 그 자리에서 보자기를 헤쳐 보였다.      백설같이 번쩍이는 흰 은덩이는 피뜩 보아도 스무 냥은 실히 되는 것 같았다. 은덩이는 등불 빛에 반사돼 눈부시게 반짝거렸다.     한길수 마름질을 십 여 년이나 해온 응삼도 이렇게 많은 은덩이를 선물로 가진 적이 없었다.     “이건 무슨 은덩이요?”     한길수는 담배대통을 길게 빨아 퍼런 연기를 후 내뿜더니 말했다.      “사내대장부끼리 에둘러서 말하지 않겠소. 자네가 우리 집 도감이 돼 주게나. 응삼은 장부나 관리하고 동생이 도감이 돼 날 도와 모든 걸 관리하면 오죽 좋겠나. 년 말에 땅값에서 이렇게 줄게.”      한길수는 두 손을 펴대더니 엄지손가락 하나를 꼽아 보였다. 뜻인즉 열 분의 하나를 주겠다는 뜻이었다.     참말로 돼지에게 겨를 주고 살점을 먹으려는 심보였다. 병완을 앞잡이로 내세워 영월동의 가난한 사람들을 쥐락펴락하면서 콩물주머니를 쥐여 짜듯 해보려는 심보가 아닌가!    “이 은전 받을 수 없소.”    병완은 은보자기를 길수의 앞으로 쓱 밀어주었다.    “이 사람아, 난 아주 좋은 뜻으로 주는 게거늘 뭔가?”     길수는 다시 은보자기를 병완의 앞에 밀어주었다.     “내가 그만하면 자네를 봐주는 건데 뭐가 모자라나? 이 영월동에서 일인지하 천인지상 자리에 올려 세우겠다는데도.”     대뜸 길수는 낯에 주름살이 쫙 퍼지더니 병완의 너부죽한 얼굴을 흘금거렸다.      담배만 뻑뻑 빨던 병완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난 당신네 집에 가서 머슴을 살지 못하겠소.”     그러자 길수는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건 근심하지 마오. 자네를 보고 우리 집에 와 있으라는 게 아니요. 그저 며칠에 한 번씩 일이 있을 때마다 와서 도와주면 되네.”     병완은 그저 묵묵히 앉아 애꿎은 담배물주리만 뻑뻑 빨았다.    옆에서 지켜보던 응삼이 혀를 날름거렸다.    “헤헤, 우리 주인어른은 넓은 마음을 먹고 선심을 쓰는데 이 은덩이를 받아주오. 세상에 후회 약은 없으니까.”     병완은 응삼을 쏘아보았다. 그러자 응삼이는 혀를 홀랑 내밀더니 얇은 입을 꼭 다물어버렸다.     병완의 얼굴에는 근심에 찬 검은 구름이 흐르고 있었다. 집안에는 쥐 죽은 듯이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한참 후 병완이가 담배 물 주리를 담배 재떨이에 툭툭 털어 짓눌러 꺼버리고는 쇠 덩이를 콘크리트바닥에 굴리는 듯 하는 우렁찬 목소리로 말했다.     “음, 먼저 요구가 있는데 들어주겠는가?”     길수는 병완의 앞으로 다가앉았다.     “어디 말해보게나. 내 어련히 들어주지 않을라고.”    “은녀를 돌려보내주게나.”    길수의 눈에는 은녀의 풍만한 젖가슴이 떠올랐다. 그리하여 아쉬운 목소리로 물었다.    “어째? 은녀를 며느리로라도 삼으려는가? 듣자니 이 집 맏아들과 은녀가 눈이 맞아 돈다던데.”    병완은 똑바로 한길수를 보면서 정색했다.     “자넨 생떼 질을 작작 쓰게나. 창렬이 페병에 먹으려던 곰의 열을 주고 빚을 다 물었는데도 약효가 없다고? 당장 은녀를 돌려보내주게나.”     길수는 신음에 가까운 소리를 냈다. 길수는 병완을 끌어당기려면 그 요구를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응삼이 옆에서 설설 기면서 슬그머니 길수의 무릎을 톡톡 치면서 뱁새눈을 질끈 감아보였다. 그러자 길수는 마음이 아픈 대로 대답해버렸다.     “그렇게 합세. 또 무슨 요구가 있는가?”     “없네. 이 은전은 가져가게. 이게 없어도 난 살만하네. 또 이담에 이자에 이자를 받으려고 들면 난 줄 은덩이가 없네.”      “아니, 이 길수가 언제 그렇게 옹졸했다고? 이건 선물로 주는 거네. 누가 빚 문서에 올렸는가? 에참, 그럼 이렇게 결정하구 난 가겠네.”     병완은 말리지 않았다.     응삼의 감아버린 듯 하는 뱁새눈에는 간사한 웃음이 어리어 있었다.    한길수가 은덩이를 두고 가버리자 성칠은 중간 방에서 안방으로 올라와 병완이 앞에 와 앉았다.     “아버지, 정말로 그 쥐새끼 같은 한길수네 집에 들어갈 예산입둥?”     병완은 담배 물 주리를 두고도 손 담배를 말아 불을 붙여 물었다.    “내 뭘 그 자식에게 허리를 굽힐 것 같으냐? 한길수는 나를 얼리려고 잔꾀를 쓰는 것 같아. 흥정은 붙이고 말은 하기에 달렸다구. 먼저 임기응변해 은녀를 빼 내오고 보자.”     그제야 성칠이 한숨을 후 내쉬었다.     부자지간에 하는 말을 성희와 하옥도 정지에서 듣고 한시름을 놓았다. 그녀들의 얼굴에서 감돌던 검은 구름이 점차 가시어졌다.     이튿날 은녀는 새 초롱 속에서 놓여나온 새처럼 겨울바람이 불어오듯 사뿐사뿐 개울물가에 난 길로 하여 자기 집으로 돌아왔다.    “에구, 내 딸아, 고생이 많았겠구나.”     창렬은 마루에 서 있다가 지팡이를 버리고 은녀를 와락 끌어안고 볼이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은녀는 몇 달 동안이지만 남의 집 종살이를 하여 양기가 죽었고 눈길에도 정기가 없었다. 때 이르게 은녀의 얼굴에는 잔주름이 이마를 타고 건너갔다.     뒤따라 나와 딸을 붙안은 명순도 딸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눈물을 질금 질금 쏟았다. 곁에서 지켜보던 성칠과 병완도 묵묵히 서로 붙안은 그들 세 식구를 바라보았다.     창렬의 세 식구는 한참이나 붙안고 울다가 병완 부자에게로 돌아서더니 일제히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정말 감사하오. 자네 부자간은 참말 우리 일가의 은인이오.”     병완은 창렬의 휘어 든 잔등을 툭툭 치면서 위안했다.     “별말을 다 하오. 우리 집안과 당신네 엄씨네는 세세대대로 형제처럼 지낸 한집안이 아니고 뭐요?”      엄창렬은 병이 다 나은듯 기침도 멎었다. 지팡이를 버리고 허리를 쭉 펴고 가슴을 쑥 내밀었다. 그는 병완의 부자간에게 안주를 끓여 막걸리라도 대접하려고 장작을 와락와락 안아 부엌에 들여갔다.      “이러지 말게나. 난 길수네 집에 볼 일이 있으니까 가봐야 하겠네.”     병완은 말을 마치자 발길을 돌렸다.     성칠은 허리춤에서 백설 같은 은덩이를 하나 꺼내 창렬의 손에 쥐어주었다.     “이걸로 겨울나이 쌀을 사서 잡숬소.”     “아니, 자네 이럴 변이라고.”     창렬은 눈이 휘둥그래졌다.     성칠은 입에 손가락을 댔다.      “쉬, 말씀 말고 씁소.”      그는 은녀를 되돌아보며 눈을 찔끔해보이고는 성큼성큼 개울가로 내려갔다.      은녀는 문설주를 잡고  믿음직한 성칠의 뒤잔등을 바라보다가 동전으로 눈굽을 찍으며 돌아섰다. 그녀의 가녀린 어깨가 가늘게 들먹이고 있었다.       가녀린 어깨 너머 슬픔이 처절하게 흘러내리고 있었다.        횡설수설 하는 눈발 속에 첫 사랑이 숨어 울고 있지 않는가! 
363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19) 날강도 삼형제 김장혁 댓글:  조회:803  추천:0  2024-02-18
              2. 날강도 삼형제     성칠이 눈이 뒤덮인 수림에서 사냥하면서 한 심심산골 마을의 앞산에 이르렀다. 적토마도 하루 동안이나 눈 덮인 산을 달리면서 풀 한줌 먹지 못하여 지칠 대로 지쳤다.       성칠은 열기라고는 없는 겨울해가 느릿느릿 져 가는지라 산 아래 바라보이는 마을로 내려갔다. 깎아지른 절벽아래 눈 덮인 마을 어귀에  고래등처럼 덩실한 토성 안 집 한 채가 있었다.       성칠은 마을 어귀에 있는 그 첫 집 대문을 쾅쾅쾅 두드렸다.       대문이 벌컥 열리더니 구레나룻이 더부룩한 곱사등이 중년사내가 마주 나왔다. 얼굴은 아주 시끄러워 하는 표정으로 바위돌처럼 퍼러덩덩하게 굳어 있었다.      “웬 일인가?”      성칠은 말 잔등에서 뛰어내리면서 대답했다.      “주인님, 말먹이 벼짚이라도 한 단 있으면 좀 주겠습둥. 말이 온 하루 굶어서 더 갈수 없구만.”       곱사등이 사내는 적토마를 아래 위 훑어보더니 만면에 환한 웃음을 지었다.       “아이고, 참 좋은 말이구먼. 말먹이 있고 말구요. 자, 저기 마구간으로 끌고 들어가 매 놓으라구. 말먹이를 내다주리다.”     성칠은 한숨을 후 내쉬면서 적토마를 마구간에 매놓았다. 이윽고 빠드득빠드득 눈을 밟는 소리 마구간쪽으로 다가갔다. 곱사등이 말먹이를 소쿠리에 담아다가  마구간 구유에 쏟아놓았다.     성칠은 곱사등에게 허리를 굽히면서 인사했다.     “고맙소이다. 주인어른, 훗날 내가 사냥을 하게 되면 꼭 그 은공을 갚아드리오리다.”     곱사등은 퉁퉁하게 생긴 생김새보다는 다르게 아주 해박하고 싹싹하게 놀았다.     그는 허리를 굽신거리면서개여올렸다.      “천만의 말씀을요. 지나가던 길손에게도 떡을 대접할 함경북도 인심에 요까지 거야 무슨.”     곱사등은 성칠의 손을 뜨겁게 잡아 집안으로 끌었다.     “자, 루추한 우리 집에 왔으니 막걸리라도 한잔 마셔야지요.”    그들이 집안으로 들어가자 검둥이는 밖에서 망을 보듯이 엉덩이를 땅바닥에 붙이고 귀가 뻘쭉해 꼿꼿이 세우고 사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성칠이 집안에 들어가 보니 아낙네도 없는 집안이 아주 으리으리했다. 이윽고 성칠이 곱사등과 함께 한창 막걸리를 마실 때였다.     밖에서 빠드득빠드득 눈을 밟는 어지러운 소리와 함께 검둥이가 짖어대는 소리가 “왕 왕 왕” 났고 말이 “오 호 홍” 하고 호용하는 소리가 났다.     불길한 느낌이 든 성칠은 벌떡 일어나 벽에 기대놓은 사냥총을 집어 들고 뛰쳐나갔다.     그가 문 밖으로 한발 내디뎠을 때였다. 뒤에서 쉭 바람소리가 났다. 성칠은 휙 몸을 돌려 돌아보았다. 허나 늦었다. 곱사등이 씽 달려나오면서 방망이로 성칠의 뒤통수를 딱 내리쳤다.     딱! 딱!    방망이가 이마를 아찔하게 내리쳤다. 순간 성칠은 눈에서 불찌가 일고 몸이 휘청거리었다.    곱사등은 입술을 깨물고 방망이로 재차 치려고 했다.      그때 검둥이가 아가리를 짝 벌리고 곱사등에게 다려들었다. 검둥이는 날카로운 톱이로 곱사등이 손목을 물어뜯었다.       "아이구! 이 놈 개새끼!"      곱사등은 방망이를 땅바닥에 떨어뜨렸다.      검둥이가 짖어대는 소리에 성칠은 정신을 차렸다. 성칠은 뒤 골을 손으로 만지더니 간신히 휘청거리는 몸을 가누면서 버티고 섰다.       그는 눈앞에 검둥이와 싱갱이 질 하는 곱사등을 보자 눈에서 복수의 불길이 타올랐다. 마구간에서 마적과도 같은 괴물의 사내가 둘이나 비수를 뽑아들고 뛰쳐나왔다.       마구간에서 적토마가 “오 호 홍!” 하고 고함치면서 뒤 발질로 키꺽다리를 차 넘겼다.     성칠은 그제야 정신을 가다듬고 정면으로 달려드는 난쟁이를 소발 통 같은 주먹으로 쳐 눕히었다.     그는 오른발을 들어 장단지에서 비수를 뽑아들었다.     말에 채워 쓰러졌던 꺽따리가 일어나면서 비수를 들고 허공 날아 나오면서 성칠의 목을 겨누고 찔렀다.      성칠은 옆으로 홱 피하면서 발길로 비수를 잡은 그자의 손목을 탁 찼다.       쒹-      비수가 마구간 천정에 날아가 꼽히면서 부르르 비명을 지르면서 떨었다.      성칠은 그자의 아랫배를 걷어찼다.      그자는 배를 끌어안고 “억!” 소리와 함께 앞으로 푹 쓰러졌다.      성칠은 키꺽다리 허벅다리에 비수를 콱 박았다.     동료가 쓰러지자 질겁한 난쟁이는 마구간 뒤 문을 박차고 삼십육계 줄행랑이 제일이라고 꼬리 빳빳해 줄행랑을 놓았다. 그러자 검둥이한테 귀를 물리어 떨어진 곱사등은 귀를 싸쥐고 무릎을 꿇고 애걸복걸했다.      “제발 살려주오.”      성칠은 한발을 날려 곱사등의 아래 배를 걷어찼다.      “아이쿠!”     곱사등은 아래 배를 붙안고 앞으로 쿵 무릎을 꿇었다.     성칠은 쪼그리고 앉아 비수로 곱사등의 턱을 쳐들고 위엄 있게 고함쳤다.      “봐라. 내가 누군가! 명천에서도 한다하는 씨름꾼 김병완의 맏아들이다. 네까짓 세 놈이 아니라 열 놈이라도 달려들어 봐라. 한주먹에 다 때려 죽여 버릴 테다.”      “아이고, 병완 장수의 선성은 들은 지 오래오. 제발 살려 주오. 저 적토마가 욕심나서 그랬지 장사를 살해하자는 생각은 없었소.”      성칠은 비수에 묻은 피를 곱사등의 팔소매에 쓱 닦은 후 장 단지 칼집에 찔러 넣고 을러멨다.     “네놈이름이 뭐냐?”     곱사등은 구레나룻을 어루만지었다. 그는 성칠이 자기를 죽이지 않을 눈치를 보자 삶의 용기가 났다. 그는 상을 찡그리며 아래 배를 붙안은 채 일어나 앉으면서 쥐구멍으로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간신히 대답했다.      “난 경성군 주을면 백승만이요.”      성칠은 머리를 돌려 마구간에 쓰러진 키꺽다리를 돌아보면서 물었다.     “저건 누구냐?”     “내 동생 승핵이오. 야, 승핵아, 일어나 형님께 살려달라고 절을 해라. ”    “아파 일어두 나지 못하겠는데 무슨 놈의 절이요. 형님, 살려줍소.”       성칠은 또 따지고 들었다.      “달아난 난쟁이새끼는?”      “내 막내 동생 승철이오. 이 주을면에서는 우리 삼형제만 나서면 울던 애들도 울음을 그쳤소. 그런데 오늘 적토마를 훔치려고 그만 형님을 몰라보고 건드렸는데 제발 목숨만 살려주오.”       성칠은 그제야 이마가 아파 손으로 만져보았다. 끈적끈적한 무엇이 만지었다. 손을 내리워 보니 손에는 검붉은 피가 즐벅했다.      “아이고, 장사, 제발 살려주오."      "누가 니 형님이야?"     "난 아직도 장가도 들어보지 못했소. 우에는 칠순에 나는 늙은 엄마가 있소. 내가 죽으면 누가 우리 엄마를 먹여 살리겠소?"      눈에서 복수의 불길이 이글거리던 성칠은 피씩 하고 웃음을 참지 못했다.     “가소로운 놈들, 너희들 노모를 생각해 목숨은 살려주겠다. 대신 집에 있는 금은붙이를 몽땅 꺼내 보자기에 싸놓아라. 네놈들이 훔친 금은붙이로 가난한 백성들을 구해야 하겠다.”      “살았구나.”     승만은 간사한 웃음을 흘리면서 집에 들어가 반들반들한 농궤에서 금빛이 번쩍번쩍하는 금덩이 몇 덩이와 새하얀 은 몇 덩이를 보자기에 싸서 성칠에게 건네주었다.     이때 밖에서 또 검둥이가 짖는 소리와 적토마의 호용수리가 들리었고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성칠은 사냥총과 금은보자기를 들고 밖에 나섰다. 마을 사람들이 먼발치에 서서 웅성거리면서 구경하고 있었다. 그러자 성칠은 마루에 올라서서 고함쳤다.      “이건 승만이 삼형제가 마을사람들과 길손들을 털어 모은 검은 금은붙이입니다. 마을에서 누가 곤난하면 썩 나서시오. 이 금은붙이를 가져다가 쓰시오. 자, 가져 가시오.”      그러나 누구도 감히 나서지 못했다. 옆에서 승만이 쏘아보는데 누가 감히 그 금은붙이를 가져간단 말인가?     눈치챈 성칠은 이렇게 말했다.     “알았소. 여기 이 도적놈 승만이 삼형제가 무서워 가져가지 못한단 말이지. 그럼 좋소. 이후에 가만히 명천군 상우남면 영월동에 있는 이 성칠의 집에 와서 금은붙이를 가져다가 써도 됩구마.”      이때 승만의 키꺽다리동생 승핵이 벌벌 기여마당에 나왔다.     원래 성칠은 승핵의 요해처를 찌르지 않고 허벅지를 찍어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쓰러 눕히기만 했던 것이다.      성칠은 적토마도 배불리 먹은 것을 보고 마구간에 가서 말 고비를 벗겨가지고 나왔다. 그는 사냥총으로 곱사등이 승만의 구레나룻을 가리키면서 다시 으름장을 놓았다.      “네 놈 삼형제 다시 무고한 길손을 해치기만 해봐라. 내 언제든지 달려와 주리를 틀어놓을 테다.”     승만은 기가 꺾여 허리를 굽신거리면서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     "예, 예. 다신 안 그러겠소.”     성칠은 적토마에 뛰어올라 검둥이를 앞세우고 눈길을 달려 그 마을을 떠났다.     적토마가 뛰어가는 뒤에서는 눈보라가 무서운 비명소리를 질렀다. 공포가 사납게 덮쳐들어 절벽아래 눈 덮인 마을을 단숨에 집어 삼킬 것만 같았다. 눈보라 속에 삼형제 꿍꿍이는 삼라만상을 감추고 말았다.            
362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18) 경성 힘장사 김장혁 댓글:  조회:730  추천:0  2024-02-18
    김장혁 작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          제3장 운주동                          1. 경성 힘장사              어느 날 하늘에서는 거위털 같은 함박눈이 푸실푸실 내렸다. 사냥하기 젤 나쁜 날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성칠은 생계를 유지하려고 말을 타고 눈길을 헤치면서 사냥 길에 나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의 앞길에 무슨 공포 뭉텅이가 퉁 떨어질지 가늠하기 어려운 사냥길이었다.     글쎄 운이 좋으면 꽃사슴이나 잡을 수도 있으련만. 성칠의 눈 앞에서는 희망이 아물거리며 유혹했다.       "쨔!"       성칠은 채찍으로 말 잔등을 탁 치고 달려나갔다.       저 뒤 마을 동구 밖에서 하옥과 은녀가 오도카니 서서 푸실푸실 쏟아지는 눈발 속을 헤집고 멀어져가는 성칠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가련하게 서 있었다.       검둥이는 여느 때처럼 앞에서 코로 킹킹 냄새를 맡으면서 달려 나갔다.      성칠은 재수 없어 명천군 산골에서 박달령까지 넘으면서 고생했건만 토끼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 성칠은 한길수가 은녀를 빼앗아 갈 예산을 하는 눈치가 보이는지라 빈손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그는 그럭저럭 꿩 사냥이나 하면서 들어 가다나니 명천의 원시림도 벗어나고 경성군 주을면의 어떤 눈 덮인 산기슭에 이르렀다. 명천의 산보다는 달리 잔나무가 우거졌을 뿐이었다.      그때 웬 중년사나이가 애들 둘을 데리고 무릎이 펑펑 빠지는 산기슭으로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사냥군인가?)      산에서 젤 두려운게  야수보다도 사람을, 특히 사냥군을 만나는 것이다.      순간 성칠은 총가목을 으스러지게 쥐고 경계의 눈초리 꼿꼿해졌다. 그런데 중년사나이와 애들은 손에는 총도 없이 빈 손이 아닌가?      (그럼 나무군인가?)     그런데 손에 낫도 도끼도 들지 않고 맨 바 줄만 어깨에 메고 터벅터벅 올라오고 있지 않는가.     그 사내는 산 속의 나무들을 둘러보더니 어깨의 바줄을 벗어 애들에게 건네주었다. 뒤이어 그 사내는 팔뚝만하고 대여섯 길만큼 한 나무를 손으로 잡고 “윽!” 하고 어깨로 떠밀어서 툭 끊는 것이었다.      애들이 나무를 척척 모아 놓고 바 줄로 꿍꿍 묶어놓는 것이었다.       (정말 괴력을 가진 힘장사구나.)      칠성은 말에서 내려 말고삐를 잡고 스적스적 다가가면서 인사를 건네었다.      “여보시오. 과연 힘장사구먼. 도끼도 쓰지 않고 이 실한 나무를 어깨로 툭툭 끊다니. 쯧쯧쯧.”      성칠은 혀를 끌끌 찼다.      그 사내는 손을 마주 툭툭 쳐서 눈을 털면서 성칠과 적토마를 엇갈아보면서 말했다.        “어데서 온 양반인지는 모르겠소만. 우린 대대로 이 지방에서 살면서 도끼를 쓸 줄 모르고 땔나무를 했다오.”       성칠은 그 사내를 우러러보며 다가가 악수를 청했다.        “알고 지내기오. 난 명천군 상우남면 운주동의 사냥꾼 김성칠이오.”       그 사내는 통쾌하게 대답했다.       “경성군 주을면 용천동 리원삼이오. 이 애들은 내 맏이 장활과 둘째 장은이오. 얘들아, 어서 인사해라.”       애들은 낯선 성칠을 힐끔 쳐다보더니 어색하게 그저 머리를 숙여 인사했다.       리원삼은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시골에서 자란 애들이라서 수줍음을 많이 타 인사할 줄을 잘 모르오.”      성칠은 저 산 아래 바라보이는 마을을 내려다보면서 물었다.     “여기 멧돼지나 호랑이 같은 큰 야수들이 출몰하지 않소?”      리원삼은 도리머리를 홰홰 저으면서 넉두리처럼 중얼거렸다.      “여긴 멧돼지랑 호랑이랑 많소. 여름과 가을 한철에는 그 놈의 멧돼지하구 곰 성화로 감자농사와 옥수수농사를 망쳐먹는 때가 많소. 그런데 온 마을에 사냥총 한 자루 없으니 그 놈들을 어디 당해내겠소?”      성칠은 머리를 끄덕였다.      이때 원삼은 성칠의 아래위를 살펴보더니 뒤말을 이었다.      “이보시요. 먼 곳에서 왔는데. 자, 누추한 대로 우리 집으로 가서 토장국이나 먹고 사냥을 하오.”      성칠은 그러지 않아도 언 주먹밥을 먹고 눈보라를 무릅쓰고 헤매느라고 시장기가 들었다. 그리하여 리원삼의 집에 가서 잠간 쉬고 싶었다. 황차 황소처럼 우람지게 생긴 리원삼이가 사내대장부 같아 마음에 들었다.      “그러기요.”       리원삼은 어깨로 사발 밑굽 같은 나무 몇 대를 더 떠밀어 툭툭 끊어 큰애의 손에서 바 줄을 받아쥐어 대여섯 대씩 묶어 두 단을 만들었다.      이때 둘째 장은이가 손에 눈덩이를 쥐여 형 장활에게 뿌렸다. 면바로 장활의 낯에 맞아 눈만 팬들거렸다.     “이 새끼, 어디 덤벼봐라.”       맏이는 동생에게 연속 눈을 쥐여 뿌렸다.       “그만두지 못하겠니?”       원삼이 눈을 뚝 부릅뜨자 애들은 그제야 머리를 수굿하면서 손에 쥐였던 눈을 버리고 손을 톡톡 털었다. 그리고 땔나무 하나씩 골라잡고 산 아래로 끌고 내려갈 잡도리를 하는 것이었다.       성칠은 원삼에게 권고했다.       “나무 단을 말 잔등에 싣고 가기요.”      그러나 원삼은 사양했다.       “아니, 그만두오. 산에서 말보다 내 어깨가 낫소.”      성칠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때 원삼은 긴 머리 태를 목에 몇 번 감고 손바닥에 침을 퉤퉤 뱉어 비볐다. 뒤이어  그 큰 나무 단을 두개나 “엇차!” 소리와 함께 단번에 오른쪽 어깨에 척 둘러메고 산 아래로 발길을 돌렸다.     “가기오.”     성칠은 입이 함박만큼 딱 벌어졌다.     “아니, 그러지 말고 내 말 배때에 한단씩 달아매면 되오. 저 죄꼬만 애들이 어떻게 나무를 끌고 간다고 그러오.”     원삼은 머리도 돌리지 않고 말했다.    "일없소. 그 애들도 어려서부터 나무를 끌고 내려가 놔서 괜찮소.”     원삼은 나무단을 두 단이나 메고 눈 덮인 산비탈에서 성큼성큼 걸어 내려갔다.      성칠도 힘을 꽤나 썼지만 원삼의 로지심 같은 괴력에 저으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나무단을 메고 눈 덮인 산비탈을 평지를 걷듯 내려가는 원삼의 억대우 같은 뒤 모습을 내려다보면서 연신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는 애들이 끌고 내려가는 나무 두대를 바로 묶어 말안장에 매여 끌고 원삼을 따라 산 아래로 내려갔다. 검둥이는 버릇처럼 성칠의 앞에서 귀 벌쭉해서 달려 나갔다.      원삼은 중도에서 한 번도 숨도 돌리지 않고 산기슭까지 내려가 한 헐고 낮은 초가집 울안에 들어가 나무단을 쾅 메쳤다.       그는 뒤에서 말에 나무 두 대를 매 끌고 오는 성칠과 두 아들을 돌아보았다.         “에이, 사람도 끝내 말로 끌고 오네.”        성칠이 울안에 들어섰을 때 집안에서 키가 작달막한 중년여인이 나왔다.       “인사하오. 명천군 영월동에서 온 사냥꾼 김성칠이오.”       “반갑습구마.”       원삼의 아내는 허리를 굽혀 함경도 말로 인사하고는 집안에 들어가더니 부엌에 내려가 불을 일구고 솥을 부시였다.       성칠은 적토마 배때에 걸어놓았던 그물주머니에서 꿩 두 마리를 꺼내 들여갔다.      “자, 사냥을 많이 하지 못하였소. 이걸 끓여 먹기오.”      “야, 양양 맛있다. 꿩고기 맛있다.”      “양양 맛있다. 오래오래 맛있다.”      애들은 알락달락한 꿩을 보자 퐁퐁 뛰면서 노래를 불렀다.      “아니, 이 눈 덮인 산속에서 헤매면서 잡은걸 주다니. 참, 자넨 빈손으로 집에 가겠소?”       “근심하지 마오. 집에 돌아가는 길에 사냥하면 될게 아니겠소.”       원삼은 마지못해 꿩 두 마리를 받아 아내한테 주었다.       그러자 묵직한 꿩 두 마리를 받은 원삼의 아내는 “아니, 두 마리나!” 하고 여간 감탄해마지 않았다.        성칠은 사냥총을 들고 집안에 들어가 벽에 기대 세워놓고 원삼과 마주 좌석을 정해 앉았다.       원삼이가 털모자를 벗자 고슬고슬한 양머리가 드러났다. 원삼의 양머리라든가 툭 튀어나온 이마아래 쑥 꺼져 들어간 눈이 사내내장부의 매력을 과시했다. 그러나 나이에 비해 때 이르게 이마에 패인 밭고랑 같은 주름살이 지지 않았겠는가. 그 주름살은 풍상고초를 겪으면서 살아온 원삼의 흘러간 인생길을 보여주는 상 싶었다.        원삼의 아내가 꿩 깃털을 한대씩 뽑아주자 애들은 좋다고 깃털을 기발처럼 쳐들고 밖으로 뛰어나가 깡충깡충 뛰놀았다.       성칠이 집안을 둘러보니 서발막대기를 휘둘러도 걸칠 것이 없었다. 덕 우에 놓인 함지와 조왕 쪽에 반지르르한 쌀독 몇 개, 벽 쪽에 놓인 농짝 두개밖에 눈에 뜨이는 것이 없었다. 까래는 따닥따닥 기워 볼품없었다.      “이 마을에 모두 몇 호 살고 있소?”        성칠의 물음에 원삼은 곰방대에 담배를 쑤셔 넣고 불을 붙이면서 대답했다.       “한 십여 호 사오. 내 춘삼 맏형님과 인삼 둘째형님, 무삼 동생도 이 마을에서 사오. 우리 집안은 몇 대를 이어 이 골 안에서 살아왔소. 그런데 죽물이나 겨우 먹는 신세요.”        성칠은 집안 살림에 대해 이것저것 물었다.       “아까 들으니 강냉이농사나 감자 농사를 믿고 사는 거 같은데 곰과 멧돼지 성화에 어떻게 살겠소?”      원삼은 가래짝 같은 손으로 무릎 우에 떨어진 담배 재를 털면서 한숨부터 내 쉬었다.      “살기 어렵소. 황무지를 일궈 강냉이하구 감자를 심어먹고 몇 십리 동쪽으로 나가서 동해바다에서 물고기나 잡아 먹고 살지. 그런데 여름과 가을에는 정말 그 놈 곰 멧돼지 성황에 강냉이 밭과 감자밭이 절단 난단 말이오. 하도 산에 나무가 많아서 땔나무걱정은 하지 않지만 이 골안에서 살기 힘드오..”       성칠은 머리를 끄덕이었다.      술이 서너 순배 돌자 원삼은 우묵한 눈을 슴벅이면서 성칠을 보고 걸걸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거 초면강산이지만 부탁 하나 해도 되겠소?”      “무슨 부탁이 있으면 말하오.”       원삼은 이런 말을 꺼냈다.       “명년 여름이나 가을에 우리 여기 와서 멧돼지하구 곰 사냥을 해주오. 그 놈의 멧돼지하구 곰 성화에 어디 감자하구 강냉이 농사를 해먹고 살겠소?”       성칠은 두 말 않고 서슴없이 대답했다.       "알았소. 꼭 오지."       원삼은 희쭉 웃으면서 술잔을 쳐들었다.       "감사하오. 자, 한잔 쭉 들기오."      성칠은 한장 굽내고 술잔을 밥상에 놓았다.      원삼은 껌정눈을 슴벅이면서 성칠한테 물었다.      “손님네 명천은 그래도 우리 여기보다는 살기 괜찮지 않소?”      성칠은 한숨을 후- 내쉬었다.      “우리 거기도 한가지오. 밭이 몇 무 안되는데 그것도 한길수라는 지주네 땅을 붙이는 게요. 소작료를 내고나면 멀건 죽물도 마시기 힘드오. 그래서 나는 일년 사지장철 사냥을 하느라고 산에서 헤매오. 사냥을 하는 게 농사를 짓는 것만 퍽 나으니까.”        그들은 살림살이 말을 하다나니 마주 앉아 한숨만 푸푸 땅이 꺼지게 내쉬었다.       성칠은 부엌의 솥에서 쌕 김이 쌕 뿜겨 나오는 것을 보자 배를 굶어온 적토마와 검둥이가 생각났다.      “아차, 깜짝 잊었구먼. 집에 말먹이풀이 좀 없소? 벼 짚이라도 좋소.”      그러자 원삼은 구척 같은 몸을 움쭐 일으켰다.      “있소. 사냥꾼이 말을 굶겨서야 안 되지.”       성칠은 원삼을 따라 나가 벼짚을 한 아름 안아다가 작두에 썩썩 썰어서 외양간의 암소와 함께 말을 먹였다.       뒤이어 그들이 되들어왔을 때에는 구들복판에 꿩고기국과 막걸리동이 한동이 더 올랐다…      그날 성칠은 원삼과 함께 꿩고기를 안주하여 권커니 작커니 하면서 막걸리를 두 동이나 마시였다. 원삼 일가도 성칠의 덕에 꿩국을 실컷 먹었다.      점심상을 물리자 성칠은 원삼이부부가 말리는 것도 마다하고 말을 타고 사냥 길에 다시 올랐다.       하늘이 무너졌는지, 함박눈이 앞을 가리지 못할 지경으로 수림에 무너져내렸다. 검둥이는 킹킹 거리면서 앞에서 달렸다.
361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17) 결혼 김장혁 댓글:  조회:878  추천:0  2024-01-29
        김장혁 작 대하소설 제1권                                        8. 결혼            가없이 맑고 푸른 가을의 하늘은 푸르기만 했다. 강물도 어찌나 맑은지 지느러미를 하느작거리며 조약돌에 키스하면서 유유히 노니는 붕어도 다 들여다보일 지경이였다.       고향의 강가에서 빨래하는옥실의 눈앞에는 뱀을 잡아주고도 아무 말 없이 산으로 나무하러 성큼성큼 떠나가던 경숙의 모습이 떠올랐다.      옥실은 빨래를 훨훨 휑구어 함지에 담아 이고 집에 돌아갔다.    그녀는 이번에는 물동이를 이고 샘물터에로 사뿐사뿐 다가갔다. 그녀가 바가지로 샘물을 푸려고 샘물을 들여다보는 순간 경숙의 길쭉한 얼굴이 희미하게 떠오르는 것이 아니겠는가.       (웬 일이지?)      옥실은 한숨을 호 내쉬면서 바가지로 잔잔한 샘물을 저어 경숙의 모습을 지워버렸다. 그녀가 쪼그리고 앉아 두 손을 무릎에 얹고 샘물을 들여다보니 고요해진 물에 또 경숙의 상반신이 떠올랐다.      옥실은 누가 볼까 봐 황급히 바가지로 샘물을 물동이에 퍼 담아 이고 샘물터를 떠나갔다.     열다섯 살의 이팔청춘 옥실은 그때로부터 저도 모르게 경숙에 대한 사랑의 싹이 트는 것을 가슴 속으로 느끼기 시작했다.      어느 하루. 옥실은 빨래터에 가서 빨래를 했다. 넙죽한 돌에 빨래를 놓고 방치로 탁탁 쳐서는 조약돌이 환히 다 들여다보이는 운주하 개울물에 빨래를 불렀다가 왈왈 헹궈 꾹 꾹 짰다. 그리고는 빨래를 버드나무가지에 훌훌 널어 말렸다.     그런데 흐르는 개울물에도 경숙의 모습이 떠오를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     우람진 체격에 길쭉한 얼굴, 짙은 눈썹에 두부모같이 두꺼운 입술, 항상 말수 적은 그 입은 철문처럼 꾹 닫겨져 있었다.     “아니, 이게 웬 일일까?”     옥실이 중얼거리는데 개울물에 떠오른 그 그림자는 자기 쪽으로 움직여 오는 것이었다. 이상한 것은 거울같이 맑은 개울물 안에 서있는 경숙은 자기 앞에 쪼그리고 앉는 것이었다.     옥실은 조약돌을 주어 물에다 힘껏 뿌렸다.     출렁!     순간 물방울이 옥실의 얼굴과 저고리에 뿌리우면서 경숙과 자기 그림자도 지워졌다.     화뜰 놀란 옥실이가 너무나도 이상해 옷을 털면서 일어나 돌아다보니 경숙이가 실로 말없이 앉아 자기를 보고 있었다.     “아니, 경숙오빠!”     “허허허.”     “남은 물을 맞고 깜짝 놀라 죽겠는데 너털웃음을 웃소? 흥!”    옥실은 경숙을 고운 눈길로 흘겨보면서 동전을 감아쥐며 돌아섰다. 순간 옥실의 하얀 볼이 귀밑까지 홍당무로 돼버렸다.    “누가 보겠소.”     옥실은 빨래와 방치를 와락와락 대야에 담아 이고 버들강변을 떠나버렸다.     뒤에서 경숙은 멀어져가는 옥실의 잔등을 보면서 너털웃음을 치며 중얼거렸다.     “허허허. 누가 보면 뭐라오?”     이윽고 최구장 어른이 호미를 들고 버들강변으로 다가왔다.     “경숙아, 옛말에 남녀칠세부동석이라고 했다.”     그러자 경숙이는 이렇게 말했다.     “그럼 장가들 나이가 되여도 처녀애들과 말도 못합둥?”     그 말에 최구장은 경숙의 아래위를 훑어보면서 중얼거렸다.      “오- 그래, 내가 잊었구나. 너도 장가 이젠 들 나이가 되였지.”      최구장은 쪼그리고 앉아 호미를 개울물에 씻으면서 골똘한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가 한참 후 허리를 펴면서 일어섰다.      “그래 저 옥실이 네 마음에 드니?”     경숙은 그저 히죽이 웃으면서도 아무 말도 못했다.     “좋단 말이지. 알았다. 내 혼사말군을 허도이사한테 보내 혼사 말을 해야겠다.”     최구장은 신흥동의 만춘집 김 구장에게 부탁해 맏아들 경숙의 혼사 말을 신흥동의 옥실의 아버지 허득필에게 했던 것이다.    허득필은 술이라면 오금을 못 쓰고 농사일이라면 뒷전이어서 살림이 형편없었다. 딸 옥실과 명실의 중간에 아들 명철이 있었다.    “주인집 영감 있소?”    김 구장이 집 울안에 들어서자 그때까지 막걸리를 마시던 허득필은 바삐 막걸리사발을 내려놓고 마루에 나가 맞이했다.     “아니, 어떻게 돼 이 구차한 우리 집에 찾아왔소? 허허. 어서 올라와 한잔 같이 하기요.”     김 구장은 고무신을 벗고 머리 태를 어깨 너머 뒤로 척 돌려가더니 집안에 들어가 사양하지 않고 술상에 마주 앉았다. 원래 김 구장도 술을 반가와 하여 허 씨 와는 알맞춤한 술친구였다.      이때 허씨 처자들이 모두 나와 곱도록 인사를 올렸다. 김 구장은 피뜩 옥실에게 눈길을 멈추었다가 허득필에게 돌렸다.      허득필은 막걸리를 부어 주면서 지껄였다.      “아니, 신흥동에서 한다하는 만춘집 구장 어른이 어떻게 돼 서발막대기를 휘둘러도 걸칠게 없는 우리 집에 찾아왔소? 자, 좌우간 반갑소. 어서 드오.”      김구장은 막걸리를 한 사발 죽 마신 후 건가래를 뗐다. “에헴, 이 집에 내 혼사 말을 하러 왔소.”      그 말에 조왕 쪽에 있던 옥실은 두 무릎 사이에 머리를 파묻었다. 그는 마음 속에 경숙이 있는데 김 구장이 자기 집 아들에게 혼사말을 하면 어찌 하겠는가고 저으기 근심했다.     그때 허득필은 싹아 떨어진 이발이 다 들여다보이게 입을 하 벌리고 김 구장을 쳐다보다가 막걸리동이에 바가지를 넣어 막걸리를 퍼 김 구장 앞의 사발에 부으면서 정색해 물었다.      “그래, 김 구장 어느 아들과 혼사 말을 하러 왔소?”     그러자 김 구장은 손을 들어 살래살래 흔들었다.      “아니오. 아니. 참. 에헴."     허득필은 막걸리를 붓던 사발을 밥상에 달랑 놓으며 다가앉았다.     "그럼 뉘네 집하구?"     "저 강 건너 운주동 최구장네 맏아들과 혼사 말을 하러 왔네.”      허득필은 옥실을 힐끔 내려다보더니 다시 김 구장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그때 옥실은 부끄러워서 뒷문을 열고 뒷마당에 나가 추녀 밑에 서서 집안에서 어른들이 주고받는 말을 엿들었다.     허득필은 김 구장과 맞 잔을 하면서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래, 최구장어른이 김구장을 보냈소?”      “그러잖구. 최구장 집은 사방 십리 안에 이름 있는 유식한 가문이 아니고 뭐요? 이 집 맏딸을 그 집에 맏며느리로 보낸다면 얼마나 좋겠소?”       허득필은 귀가 솔깃해졌다.      “김 구장이 중매를 서니깐. 길게 말해 뭘 하겠소. 내 맏딸을 최구장 집에 주기로 하겠소.”      옥실은 뒤 벽에 기대 문틈으로 그 말을 엿듣고 부끄럽기도 하고 기쁘기도 했다. 옥실은 기도나 드리듯이 두 손을 맞잡아 가슴에 대고 북녘하늘을 바라보더니 잠간 눈을 딱 감았다. 이윽고 뒤울안에서 구새 목 쪽으로 살금살금 달아났다.      김구장은 막걸레를 죽 들이마시고 자리를 털고 일어나면서 매듭을 지었다.     “그럼, 혼사 말이 성사 된 걸로 최구장에게 전하겠소."     “가만!”     아주 시원하게 대답하던 득필이 김 구장을 따라 일어나면서 꼬리를 달았다.     “그런데 내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옥실을 시집보내고 이 집 농사는 누가 짓겠소. 한 3년 있다가 시집보내야 될 것 같소이다.”     김 구장은 어이없다는 듯이 조개턱을 흔들면서 허득필의 낯에 대고 삿대질을 했다.     “에끼, 이 사람아, 그래 다 큰 딸을 시집보내지 않고 영영 붙들어두고 자네 대신 농사 질을 시키겠는가!”      “아니, 그런 말은 아니요.”     “그래, 딸을 준 대신 막걸리 값이라도 달라는 건가?”      허득필은 씨무룩이 웃었다.      “알만하오. 곤난한 살림살이에 기둥같이 믿던 맏딸을 그럴 수도 있지. 내 알아서 최구장에게 말해주지.”      최구장은 김 구장에게서 혼사말을 갔다 온 과정이야기를 죽 듣고 나서 그 이튿날로 둘째아들 경인을 시켜 송아지 한 마리를 사돈 허득필에게 보내주었다.     두 사돈집에서는 그해 섣달 초하루에 경숙과 옥실의 결혼을 올리기로 했다.     최구장 일가는 경사가 났다.     최구장의 아내 성단은 임신한 몸이 돼가지고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돋을 지경으로 바삐 돌았다. 그녀는 감자떡이나 빚어놓고 녹두 길금이나 깨 기름에 볶고 두부와 닭 알 지짐을 지쳐 상우에 올리고 닭이나 잡아 큰상에 올려놓았다. 막걸리를 많이 겨를 수 없어 성단은 경인과 경민을 전날 우시장 고을에 가서 막걸리나 몇 동이 사서 수레에 사서 실어오게 했다.      원래 옛날 남부와 중부 조선에서는 결혼잔치를 사흘이나 했다. 결혼잔치 첫날에는 신랑이 백마를 타고 신부네 집에 가서 큰상을 받고 신부네 집에서 하루 밤 자고 이튿날에야 신부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와 신부에게 큰상을 받게 한다. 그리고 사흘에는 신랑이 다시 신부를 데리고 신부네 집에 가서 가시부모에게 인사를 올려야 했다.      그런데 함경북도에 들어온 후 살림살이도 힘들기에 많은 사람들은 결혼잔치를 간단히 하루에 다 치르는 것이 새로운 습관으로 돼버렸다.     최구장과 허득필은 토론하고 여기 함경북도 새로운 습관대로 결혼식을 간단히 치르기로 했다.     신랑 경숙은 백마를 타고 삼촌 최구철과 동생 경인을 비롯한 상빈들의 옹위를 받으면서 운주하 개울물을 지나 앞마을 신흥동의 허득필의 집에 이르렀다.     마을 아낙네들은 울바자 박에 모여서서 손가락을 입귀에 물고  신랑이 허 씨 네 집에 들어가는 모습을 보고 소곤거렸다. 신랑이 키도 훤칠한데다가 매부리코라던가 사내답다고 혀를 끌끌 찼다. 그리고 말고삐를 잡은 총각 경인이도 아주 잘났다고 혀를 둘렀다.     양태머리를 무릎아래까지 내리 드리운 경인은 키도 경숙보다 더 크고 몸도 탄탄하고 날렵해보였다. 게다가 경인은 고을에 가서 태권도와 무술을 배워서 명절이거나 굿을 하는 날에는 칼춤을 아주 날래게 추어 운주동과 신흥동에는 물론 영월동에까지 인기 있는 총각이었다.     경숙은 버선발로 가시집 마루를 딛고 안방에 들어가 큰상을 점잖게 받았다. 백두산 원시림에서 내려온 최구철은 경인 등 상빈들을 데리고 아주 틀스레 곁방에 들어가 상빈 상을 받았다. 경인은 수시로 앞뒤로 달아 다니면서 오촌 숙 최구철과 형님 경숙이 사이에 말을 전했다.     점심때가 거의 될 무렵에야 신랑 경숙은 큰상을 물리고 곱게 한복을 차려입은 옥실과 함께 가시부모인 허득필 부부를 비롯한 가시집안 어른들에게 절을 올렸다.     옥실이 고운 한복을 입고 눈물을 흘리면서 가마에 오를 때 허득필은 서운해 멍해 서 있다가 바가지로 막걸리를 퍼서 죽 들이켰다.  그의 처는 눈물을 하염없이 흘리면서 얼굴을 돌리었다.     경숙은 백마에 올라타고 고삐를 잡은 경인과 함께 앞서고 그 뒤로 사인교를 탄 신부 허옥실이 뒤따랐다. 상빈들인 최구철은 적토마를 타고 그 뒤에서 옹위하면서 따랐다. 백마를 탄 신랑 경숙은 다른 때보다도 더 늠름해 보였다.     앞마을에서 신랑신부의 행렬이 운주동에 나타나자 최구장을 비롯한 시집 식구들은 마을 어귀까지 달려 나와 덩실덩실 춤을 추며 반겨 맞았다. 은녀는 육촌 오빠 경숙이가 결혼한다고 하자 아버지와 함께 며칠 전에 백두산 기슭에서 말을 타고 최구장 큰아버지 집으로 달려왔던 것이다. 그는 육촌오빠 경숙이 장수처럼 백마를 타고 가마에 탄 신부를 데리고 늠름하게 오는 것을 보고 기뻐 어쩔 줄을 몰랐다.      성칠은 최구철과 진달래가 왔다는 기별을 받고 마을 타고 백두산에서 잔치 집에까지 찾아 달려왔다. 최구철은 말에서 내리자마자 진달래와 함께  어깨춤을 덩실덩실 추었다.     가마에서 신부가 나오자 모든 사람들의 눈길이 신부에게 쏠렸다.     “와- 정말 곱다.”     “신흥동에 저렇게 고운 색시가 있었니?”     “글쎄 말이야."     "경숙이 색시 고와서 온 밤 자지 못하겠다.”     바자굽과 구새 목에서 아낙네들이 수군거리는데 마을 처녀들은 부러운 눈길로 새 색시 옥실을 바라보았다.     새 색시가 큰상을 받자 최구장은 한시름을 푹 놓았다…     이듬해 음력 2월 2일에 옥실은 옥동자 봉인을 낳았다. 옥동자는 외까풀 눈에 얼굴은 자그마 해도 귀엽기만 했다.     옥실은 포대기에 싼 봉인을 남편 경숙에게 안겨주었다.     봉인을 안고 경숙은 너무 좋아서 매부리코를 실룩거렸다.        “어허, 그 놈이 보채기도 보챈다.”      그는 애를 안고 서성거리다가 아버지에게 안겨주었다.      최구장은 맏손자를 안고 반가워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는 애 볼에 뽀뽀를 해주면서 중얼거렸다.      “봉인아, 이 놈아, 네 놈은 우리 개성 최씨 가문의 기둥 같은 14대장손이다. 어이구, 우리 14대 장손어른이 대단히 역빠르겠는데. 허허허.”       맏손자를 본 최구장은 이마의 밭고랑 같은 주름살이 단번에 쪽 펴지면서 내 천 자가 이전에 비해 얕아진듯했다.      봉인이라는 이름은 최구장이 임시 지어 부른 애명이었다. 후에 최구장은 뿌리 근자 돌림으로 손자들의 이름을 짓기로 하고 봉인의 이름을 근형이라고 지었다.      마당의 앙상한 나무에 까치 한 마리가 앉아 꼬리를 달싹거리며 근형이 태어난 것을 세상에 알리기라도 하듯이 깍, 깍, 깍 노래하고 있었다. 뻐꾸기가 화답이나 하듯 눈덮은 수림에서 뻐꾹뻐꾹 울었다.       까치와 뻐꾸기는 화음으로 봉인의 길고 긴 인생의 꿈을 미리 연주하고 있는가?      그 울음소리 특별히 애처롭고 비장하지 않겠는가?
360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16) 수림에서 맺은 인연 김장혁 댓글:  조회:819  추천:0  2024-01-29
                       김장혁 작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 제1권              7. 수림에서 맺은 연분                     녹음이 짙은 여름의 어느 날이었다. 기운봉 기슭의 수림은 비온 뒤 구름이 걷히고 해가 나타나자 더욱 청초하고 수려하였다.  개암나무들이 듬성듬성 난 풀숲 속에 빨간 나리꽃송이 활짝 피어 한폭의 아름다운 수채화를 방불케 했다. 수림 속에 스며드는 부채살 같은 해살 속에 하느적거리는 나리꽃, 도라지꽃은 방실방실 웃음꽃을 피우면서 옥실을 반겨 맞았다.       양천 허씨 네 큰 딸 옥실은 이름과 같이 살결이 백설처럼 희였고 얼굴이 보름달처럼 환한데다가 호리호리하게 생긴 처녀애였다.     옥실은 어린 남동생 명철과 함께 버드나무바구니를 끼고 머루를 따러 기운봉 기슭으로 올라갔다.     “야- 저 나리꽃!”    옥실은 환성을 지르면서 두 손을 활짝 벌리고 치마자락을 휘날리며 달려나갔다.     그때 나무꼬챙이를 쥐고 뒤따르던 명철이가 고함쳤다     “누나! 조심해, 여긴 뱀이 많은 곳이야!”     옥실은 그런 말에 신경을 쓸 새 없이 달려가 나리꽃을 몇 송이 꺾어 뾰족코에 대고 흠흠 꽃향기를 맡았다. 까만 반점이 박힌 빨간 나리꽃은 곱기도 하고 향기로웠다. 그런데 빨간 나리꽃의 노란 화분이 하얀 얼굴에 묻어 노란 분칠을 한 것 같아 자연미를 한껏 돋구어주었다.      옥실은 노란 장미꽃, 빨간 장미꽃을 꺾는다, 하얗고 파란 나팔꽃을 줄기채로 훑어낸다 하더니 꽃다발을 틀어 머리 우에 얹었다. 참말로 꽃 같은 얼굴에 꽃다발을 얹고 수림 속에서 달아 다니는 옥실의 그 모습이 비할 데 없이 예쁘기도 했다.      명철은 몽둥이를 쳐들고 누나 뒤를 따라 다니면서 어데 뱀이 기어 나오면 당장 때려죽일 듯이 의심스러운 풀숲을 돌아가며 헤치면서 살폈다. 그런데 명철은 누나의 머리에서 나리꽃잎을 하나 뚝 뜯어 내 입에 넣고 씹었다.     옥실은 눈을 곱게 흘기면서 종알거렸다.    “야, 애도 남의 고운 꽃다발의 꽃 이파리를 뜯어먹다니?”    명철은 또 꽃 이파리를 하나 뜯어먹으면서 빈정거렸다.    “산속에서 뛰어 다녔더니 이 어른이 좀 시장하단 말이야.”    옥실은 명철이 또 꽃 이파리를 뜯어 낼까봐 꽃다발을 벗어 손에 쥐고 봇나무 수림 속으로 달려 들어갔다.     “야, 이 머루를 봐라.”     명철은 봇 나무 숲속에 멈춰선 누나를 보고 뒤따라 뛰어갔다.     그들의 눈앞에는 황홀경이 나타났다. 허리만큼 실한 봇 나무에 바를 걸친 듯이 얼기설기 내리 드린 머루넝쿨에 까만 머루송치가 데룽데룽 매달려있었다.     파랗고 넙죽한 머루 이파리 속에 매달린 까만 눈동자처럼 초롱초롱 윤기 나는 머루 알은 탐스럽기만 했다.     옥실은 가늘고 하얀 식지와 중지로 머루 한 알을 뜯어 입안에 넣고 오도독오도독 씹어 먹었다.     “아이고, 시큼해라.”     옥실은 대번에 외까풀 눈을 한일자로 감아버리면서 오만상을 찌프리었다. 명철은 다다가 머루 한 송치를 뜯어 입에 포도 알을 넣고 질근질근 씹었다. 뒤이어 그는  누나와 함께 포도송치를 부지런히 따서 옥실이 든 버드나무바구니에 넣었다. 어느새 바구니에는 까만 머루송치가 무룩하게 쌓였다.     이때 저쪽에서도 영월동의 상우와 그의 큰 누나 어금이 산나물을 캐면서 이쪽으로 다가 오고 있었다.     얼굴이 너부죽하고 곱게 생긴 어금은  벌써 처녀티가 완연했다. 자지 색 나리꽃을 입에 문 어금은 숲속에 내린 나리꽃같이 예뻤다. 그녀의 남동생 상우는 중등 키에 실하게 생긴 편이었다.      옥실은 그들이 다가오는 것을 눈인사를 하였다. 그녀는 청석바위 우에 뻗어 올라간 머루줄기 밑에 까만 머루송치가 다닥다닥 달려 있는 것을 보고 그리로 와삭와삭 풀숲을 헤치면서 다가갔다.      그녀가 탐스러운 머루송치를 뜯어 바구니에 담자고 하얀 손을 뻗칠 때다. 하얀 바탕에 새까만 점이 얼룩덜룩 박힌 터덜터덜한 독사가 머루넝쿨에서 혀를 날름거리면서 노려보는 것이 아니겠는가.      “앗! 뱀이야!”     그 비명소리에 명철은 반사적으로 왼쪽어깨에 둘러멨던 몽둥이를 오른손에 바꿔 쥐였다.     “에이크!”     명철은 몽둥이를 휘둘러 독사를 내리쳤다. 그런데 독사가 그만 몽둥이에 맞아 옥실이 든 바구니에 툭 떨어졌다.      “에구머니!”      옥실은 바삐 바구니를 달랑 떨어뜨렸다.     설상가상으로 독사 한 무리가 바위 밑 풀숲에서 기어 나와 대가리를 쳐들고 그들을 공격해왔다. 분명 굴 독사들은 이 불청객의 침입을 그저 볼 수만 없었던 모양이다.     이 나무 저 나무 가지들에서 독사들이 데룽데룽 매달려있다가도 땅바닥에 툭툭 떨어졌다. 그 놈들은 대가리를 쳐들고 그들에게로 맹공격해왔다.      “피해!”      위기일발의 시각에 경숙과 경인이 고함치며 낫을 들고 뛰어왔다.      그들은 낫을 휘둘러 고사리 숲처럼 대가리를 쳐들고 옥실한테 달려드는 독사무리 목을 쳐댔다. 상우도 달려와 명철과 함께 몽둥이로 나무 가지에 데룽데룽 매달린 독사들을 때려잡았다.      옥실과 어금은 봇 나무 뒤에 숨어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채 오른 식지를 입에 물고 공포에 질려 바들바들 떨면서 총각 애들이 독사를 잡는 것을 보고 있었다.     총각애들이 휘두르는 몽둥이와 낫에 맞아 뱀의 대가리와 피가 사처로 날렸다.      “이 놈들아! 다 덤벼들어라!”     사기난 명철도 고함치면서 몽둥이를 휘둘러 독사들을 때려 죽였다.     대가리가 낫에 맞아 날아난 뱀들은 의연히 꼬리가 꿈틀거렸다.     옥실과 어금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점점 뒤로 비실비실 물러서며 온몸을 사시나무 떨듯 했다.     호리호리한 총각 경인은 뒤돌아보면서 다급히 소리쳤다.      “삼십육계에 줄행랑이 제일이오. 어서 빨리 달아나오. 우리 독사무리를 막을 테니.”     그제야 정신차린 옥실과 어금은 걸음아 날 살리라고 바구니고 뭐고 다 던져버리고 머루 덩굴 숲속에서 달아났다.      한참 후에 명철과 경인이 뻘건 피 묻은 낫과 몽둥이를 들고 숲속에서 뛰어나왔다. 경숙은 머루를 담은 바구니를 들고 와서 옥실에게 내밀었다.     “자, 이 좋은 머루를 가지고 가오.”     옥실은 머루바구니를 받으면서 귀밑까지 발갛게 붉혔다.     “고맙소. 여러분이 아니었더라면 큰 경을 쳤을 번했소.”     그녀는 고마운 눈매로 키 큰 경숙을 쳐다보았다.     명철은 옆에 서 있다가 자기 누나에게 경숙과 경인을 인사시켰다.    “누나, 이제 금방 알았는데 이 형님은 운주동 최훈장네 형님들이라오.”     옥실이 나서면서 경숙과 경인에게 인사를 드렸다. 그러나 원래 말수가 적은 경숙은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둘째 경인은 앞에 나서면서 인사를 받았다.      “일이 생기지 않았으니 됐소. 이후에는 이 근방에 와서 머루를 따지 마오. 독사에게 물리면 큰일이 아니오?”     이때 상우가 나서 알은체 했다.     “알고 보니 큰아버지 전번에 외우던 최 훈장 어른 네 형님들이구만. 우린 영월동의 김병완 할아버지의 작은 집 손자 맏손자 상우와 맏손녀 어금이오."      경숙과 경인이도 전번에 수림 속 감자밭에서 만났던 성칠을 떠올리면서 아주 반갑게 대했다.      어금은 최사련 할머니와 성칠 큰아버지에게서 최구장과 최구철 두 어른의 이야기를 많이 들어 초면이었지만 이젠 구면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키는 크지만 말수가 적은 경숙보다 중등 키에 해박해 보이는 경인에게 눈길이 더 갔다.       그는 버들바구니를 왼팔에 낀 채 가리마를 쪽 낸 머리를 다소곳이 숙이면서 인사를 드렸다.       “정말 고맙소. 두 분이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무슨 사고가 생겼겠는지 모르겠소.”       경숙보다도 키가 더 큰 경인은 시무룩이 웃으면서 어금을 바라보며 화답했다.      “천만의 말씀을. 우린 령을 사이 두고 영월동과 운주동에 사는 형제와 같은 사람들이오. 이후에 무슨 일이 있으면 서로 도우면서 살기요.”      명철이 넓은 가슴을 치며 말했다.      “옳소. 우리는 한마을에서 사는 형제들이오. 이후에는 한집안의 형제들처럼 재미나게 보내기요.”      허옥실은 수집어서 머리를 다소곳이 숙이면서 경숙을 훔쳐보았다.     경숙은 가타부타 말없이 낫을 들고 나무하러 기운봉 기슭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 뒤에서 옥실은 멀어져가는 경숙을 지켜보면서 서 있었다.      경인과 상우, 명철, 어금 등은 수림 속에서 웃고 떠들면서 놀다가 점심때가 다 돼서야 각기 자기 고향마을로 내려갔다.      울울창창한 수림에서 부채살 같은 해빛이 처녀총각들의 뒤를 따라 걸어왔다. 드문드문 그들이 주고 받는 말 틈새에도 해빛은 옥구슬을 끼워주기도 했다.
359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15) 운주동서당방 김장혁 댓글:  조회:766  추천:0  2024-01-29
           김장혁 작 대하소설 제1권                                6. 운주동 서당방            먹장구름 틈새로 한줄기 빛이 희미하게 내리비추다가 맥없이 한숨을 쉬면서 어디론가 서서히 사라진다. 어둠이 신나서 콧노래를 흥얼거리면서 이리떼처럼 기를 쓰고 대지에 기여들어 초가집을 우악스레 감싸안아버린다.       최구장은 마루에 앉아 담배대통을 뻑뻑 빨며 급변하는 하늘의 풍운조화를 바라보다가 도리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는 머리를 돌려 조왕간에서 바삐 돌아치는 큰며느리 허옥실을 보고 성칠이 준 멧돼지 고기를 푹 끓이라고 했다.      최구장 일가가 사는 명천군 상우남면 운주동은 함경북도에서도 알려지지 않은 심심산골이었다. 정말 그가 살던 고향 개성이란 옛 고려의 수도에 비할 바가 못 되는 곳이었다.      지금도 최구장은 눈을 스르르 감으면 자기 고향 개성이 눈앞에 주마등처럼 흘러 지나가군 했다. 자기가 어려서부터 공부하던 서당이며, 고려 충신 정몽주가 철퇴에 맞아죽은 선죽교며, 고려의 옛 궁전터전이며, 어려서부터 드레 박으로 샘물을 길어다 마시던 큰 길옆의 우물터며 눈앞에 선히 떠올랐다.      함경북도라고 하면 원래 이씨 왕조 때 죄를 지은 자들을 정배를 보내던 곳이었다. 그렇게 사람이 못살 산골이어서 범죄자들이나 정배를 보내 고생을 시킬 곳이었다.  일본 사람들이 개성에 들어온 후 서당 글을 가르치던 최구장 영감도 계속 마음 놓고 글을 가르칠 수 없었다. 일본 사람들은 자기들의 일본글을 가르쳐야 하지 한자나 조선 글을 가르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이제껏 대대로 하늘 천, 따 지, 감을 현, 누른 황이나 익혀온 최구장 네를 보고 알지도 못하는 일본 말을 가르치라고 하는 일본 사람들의 심사는 이를 데 없이 괘씸했다. 그것이야 말로 최구장의 명줄과 같은 서당 훈장 밥통을 내놓으라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게다가 작은 집의 사촌동생 최구철마저 일본 놈 몇을 총을 놓아 죽였기에 최구장 일가는 일본 놈들의 요시찰 인물로 점 찍혀 살기 어렵게 됐다. 그리하여 최구장은 정든 고향을 떠나 그때까지만 해도 일본 사람들이 들어오지 않은 명천 우시장에서도 멀리 떨어진 심심산골에 들어와 수림 속에 밭이나 일구어 감자농사를 지어 먹으면서 살게 됐던 것이다. 비록 심심산골이고 고향 개성처럼 환한 고을은 아니지만 일본 사람들이 없어 기를 펴고 살 수 있고 시골 애들에게 마음 놓고 서당에서 글을 다시 가르칠 수 있어 좋았다.       운주동 서쪽에 누르스름한 뭇 산우에 기운봉이 우뚝 솟아있었다. 기운봉의 들쑥날쑥한 갈색바위는 사시절 구름 속에 안개 속에 잠겨있었다. 그 구름 모양은 천태만상이었다. 피어올랐다 풀렸다 하는 구름송이, 안개처럼 물기어린 구름송이, 햇솜같이 새하얀 구름송이, 고기비늘처럼 무늬를 정연하게 돋친 구름송이로 정말 아름답기만 했다. 구름송이들도 기운봉의 허리에 감겨 한참씩 쉬고서는 어디론가 가뭇없이 사라지군 했다. 하여 멀리서 보면 기운봉은 마치 구름바다의 섬을 방불케 했다.        기운봉의 청석옥석 사이로 샘물이 쿨쿨 쏟아져서는 갈색바위를 부시며 철철 흘러내려 운주동과 신흥동 마을로 달려갔다. 운주동은 서쪽의 기운봉 기슭으로부터 동쪽으로 흘러내리는 운주하 개울물을 따라 한 5, 6리나 되게 죽 뻗은 산골짜기에 한두 집씩 게딱지처럼 여기저기 스산하게 널려 있었다. 개울물 남쪽에는 운주동 마을에 집들이 죽 늘어서 있었고 개울물 북쪽에는 신흥동 마을이 산을 등지고 죽 늘어서있었다. 기운봉 동쪽 기슭에 있는 운주동 뒷산꼭대기는 좀 평평했다. 마을 사람들은 그 곳이 명당자리라고 하는 최구장의 제의에 따라 산소를 쓰고 그 주위에 돌로 토성을 높다랗게 쌓아 놓았다. 그리하여 성과도 같은 그 토성안의 산소로 하여 운주동의 일부 집들을 성남집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운주동의 이런 시골 집들은 통나무집들이었다. 대부분 아름드리나무들을 톱으로 썩썩 켜 통나무채로 쌓은 후 나무못으로 고정시켜놓고 그 우에 지붕틀을 올리고 널판자를 기와처럼 얹은 통나무집이다. 집집마다 잡나무를 베다가 울바자를 집 둘레에 높다랗게 세웠다. 진짜 산골 마을의 풍경이었다.       최구장은 어려서 고향 개성에서 서당공부를 하여 천자문, 논어, 대학, 중용을 다 배웠다. 또 풍수지리마저 익혀서 집을 어떤 데 지어야 좋고 어디다 산소를 써야 명당자리라는 것을 환히 꿰뚫었다. 기운봉 기슭의 성은 바로 그의 제의에 따라 개척한 명당산소자리였다.      게다가 무슨 일이 생기면 최구장은 몽땅 해리하고 푸는 방법을 정확하게 깨우쳐 주군 했다. 그리하여 개성으로부터 운주동에 이사해 온 후에도 마을 사람들은 그를 유식한 서당훈장으로 모시였고 애들을 그의 서당에 보내 공부시켰다.      또 사람들은 그를 해리장으로 높이 모시고 무슨 일이 생기면 그를 찾아 해결방도를 물었고 결혼하거나 장례를 치르면 은전을 가지고 와서 그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다.      최구장이 아침 밥술을 놓기 바쁘게 마을의 병욱이가 아들 시준의 손목을 잡고 최구장의 팔간 집 울안에 들어섰다.       “최 훈장님, 아침을 잡수셨습둥?”       그러자 최구장은 버릇처럼 왼손으로 하얀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움찔 일어나 마중했다.      “김 영감, 오늘 일찍 하오다. 어서 오너라. 시준이 요즘 공부를 잘하더라.”      시준은 인차 구십도 경례를 올렸다.      “안녕하십니까? 최 선생님!”      최구장은 인차 시준의 손목을 잡아 마루에 끌어올렸다.     “에이, 시준도 이젠 열 둬 살 먹더니 철들었네. 이리 올라와. 오늘도 제일 먼저 서당에 왔구나.”     시준은 다른 애들보다는 달랐다. 말수가 적은데다가 눈만 뜨면 책만 들여다보고 중얼거렸다. 그 애는 서당에 들어서자마자 책보를 풀어놓고 마루에 손가락으로 글을 오리면서 중얼거렸다.      “내 뭐랬소? 책을 익혀 살 놈은 어릴 때부터 다르다니까.”     그는 윗방에 들어가 그때까지 일어도 나지 않은 장손 봉인의 엉덩이를 커다란 손바닥으로 짝짝 쳤다.      “이 자식, 일어나라. 해 궁둥이를 다 비춘지도 오래다.”      둬 살 밖에 안 되는 봉인은 일어나 앉으면서 두 손으로 눈을 비벼댔다.       이윽고 정신을 차린 봉인은 할아버지 품에 와락 안기였다.       “할아버지!”       “오, 그래. 요 놈이 우리 집안의 기둥과도 같은 14대 장손이지! 요 놈도 공부를 잘해야겠는데.”       이때 최구장의 딸 죽순이 앙기작앙기작 걸어와 봉인을 밀어냈다.       “가. 내 아버지야!”       여자애는 볼에 볼우물을 옴폭 파며 흘겨보았다.       “그래, 아빠는 장손도 고와하지만 하나 밖에 없는 우리 딸을 정말 고와하지.”       최구장이 딸과 손자를 안고 노는 재미나는 모습을 보고 병욱은 부러운 눈길을 보냈다. 최구장의 맏아들 경숙이도 옆에서 히죽이 웃었다. 허옥실도 부엌에서 아침상을 거두면서 하얀 이를 드러내며 방실 웃었다.       이때 마을 애들이 다 와서 최구장은 제일 윗방에 들어가 애들에게 천자문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시준이랑 병권의 맏손자 형내랑 천자문을 따라 외우는 낭낭한 글소리가 이 시골에 울려 퍼졌다.      “하늘 천, 따 지, 감을 현, 누를 황!”     최구장의 막내아들 경석은 공부하기 싫어 천자문을 외우는 척 하면서도 바깥을 흘금흘금 곁눈질 했다.     (에이, 씨, 바깥에 나가 놀았으면 얼마나 좋겠니? 운주하에 나가서 목욕도 하고 모래에 물도랑을 파면서 놀겠는데. 날마다 하늘 천, 따 지야?)     막내아들의 그런 속내를 꿰뚫어본 듯이 최구장은 대통으로 경석의 머리를 한 대 딱 쳐놓았다.      “아가!”      비명소리에 애들이 모두 손으로 머리를 만지는 경석에게 머리를 돌려 보고 캐득거렸다.      “공부에 집중해! 왜 자꾸 바깥을 흘금거리면서 정신을 팔아? 그러고서야 입으로 아무리 외운들 글자가 머리 속에 들어가나? 못된 놈 새끼! 다시 공부에 집중하지 않아 봐! 회초리로 종아리를 칠 테야! 어험.”      경석은 눈물을 흘리면서도 아버지가 무서워 눈치를 흘금 거리며 하늘 천, 따 지를 외웠다.      최구장은 철 없는 경석을 보고 골치 아파 했다.      맏아들 경숙은 자기 대신 이젠 가문의 농사일을 담당했기에 공부를 할 새 없어 시키지 못하고 둘째 경인은 천자문을 떼고 무예를 익히느라고 검을 들고 달아 다녔다. 셋째 경민은 허약한데다가 넷째 경욱과 함께 공부에는 뜻이 없고 약 담배 장사에 흥취가 박혔다.     (헤이, 생각만 해도 가운이 답답하다.)     최구장은 생각다 못해 총명한 막내 경석에게 희망을 두고 어려서부터 공부를 시키는 판이었다. 장차 형내네 할아버지 관준한테 보내서 한의공부를 시킬 예산이었다. 서당 훈장질을 이어받아서야 살기조차 어렵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에 막내아들은 삶의 그루를 바꿔 심어 의사로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 속셈으로 관준의 손자 형내에게서 서당 공부 학비를 받지 않았다.       그런데 경석은 놀음에 탐해 정신을 집중해 공부를 잘 하지 않아 실망스러웠다.       한참 후에야 경석과 애들은 금방 일을 잊은 듯 했다.       서당에서는 애들의 글 읽는 소리가 랑랑하게 울려 퍼졌다.       “하늘 천, 따 지, 감을 현, 누를 황‧‧‧”       바깥이 불시에 어두워지더니 먹장구름이 뒤덮여 왔다. 먹장구름 속에서 시뻘건 불구렁이 기운봉을 번쩍 덮쳤다. 그 놈은 숱한 불혀로 기운봉을 감싸핥아버리고는 먹장구름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우르릉 꽝꽝       우레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고 번개가 번쩍였다.       뒤이어 추녀 끝에서 숱한 실 폭포가 쏟아져 내렸다.      그제야 경석은 바깥에 나가 놀 궁리를 접고 정신을 집중해 공부를 하는 것이었다. 하늘이 도운 셈이었다.      최구장은 그제야 한숨을 후 내쉬며 저쪽 마루로 나갔다.      그는 대통에 담배를 쑤셔 넣고 부시를 쳐 불을 달아 물고 뻑뻑 빨았다. 그는 몰려 오는 비구름을 바라보며 세상의 풍운조화를 예측하기라도 하는듯이 손을 꼽았다 폈다 하면서 무슨 궁리를 하고 있었다.
358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14) 치마봉 전설 김장혁 댓글:  조회:912  추천:0  2024-01-11
                     김장혁 작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 제2장                 5. 치마봉 전설              높은 가을하늘에서 보름달이 구름을 뚫고 얼굴을 내밀고 나와 조약돌을 치고 박으며 흐르는 버치 꼴 개울물에 은파를 뿌렸다. 저기 치마봉 양지쪽에도 은빛이 희끄무레 깔려있었다. 호랑이의 울부짖음 소리가 먼 수림 속에서 들려왔다.     성칠은 은녀를 데리고 개울 물가를 걸었다.      “은녀, 우리 여기서 좀 쉬어 갈까?”      은녀는 별빛이 반짝이는 초롱초롱한 눈으로 성칠을 쳐다보았다.     “오빠, 사냥을 갔다가 와서 곤하지는 않소?”     성칠은 한숨을 후- 내쉬면서 버들잎을 주르르 훑어 버렸다. 그는 적토마를 버드나무가지에 매놓고 은녀에게 물었다.     “일없다. 치마봉 전설을 들어 보겠니?”     은녀는 어린애처럼 환성을 올렸다.      “난 오빠 얘기를 듣기 좋아하오. 어서 얘기해주오.”      그리하여 그들은 돌돌돌 흐르는 개울물을 마주하여 버드나무아래 제방 둑에 나란히 앉았다.     성칠은 마른기침을 몇 번 하더니 제법 옛말을 할 잡도리였다. 은녀는 두 무릎 우에 턱을 고이고 손가락으로 모래에 줄을 족족 그으면서 하회를 기다렸다.     “저 치마봉을 봐라. 얼마나 치마폭 같이 생겼냐?”       그들은 한참이나 말없이 저 멀리 치마봉을 바라보았다. 치마봉은 정말 치마폭처럼 아래는 퍼지고 우는 짤룩하고 치마 주름처럼 내리 발로 바위돌이 들쑥날쑥 박혔다. 뭇별이 총총한 하늘에서 별찌가 치마봉 상공에 쭉 긴 꼬리를 늘이며 떨어져내려왔다. 숫처녀의 가슴에도 뜨거운 별찌가 찌르르 불티를 튕기었다.       은녀는 초롱초롱한 포도눈으로 치마봉을 하염없이 바라보면서 머리를 가볍게 끄덕였다.      “치마봉은 정말 치마폭처럼 아름답소.”      성칠은 담배쌈지를 꺼내 담배를 말기 시작했다. 은녀가 담배쌈지를 빼앗다 시피 채갔다.      “내 말아 줄게.”      은녀가 담배 대를 자기 입에 대고 침을 쪽 발라 종이를 말아 꼭 싼 후 성칠의 입에 쏙 밀어 넣어주었다. 성칠은 은녀의 침이 붙은 따뜻한 담배를 붙여 길게 빨아들였다. 특별히 담배 맛 있었다.      "고맙다."     “고맙긴? 난 오빠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될지 모르겠소.”     “에이, 그게 무슨 소리냐? 그래 오빠라는 게 여동생이 승냥이 입에 들어가는 걸 뻔히 보고만 있어서야 되니?”      은녀는 성칠의 팔을 두 손으로 꼭 껴안았다. 그때 버들방축에서 버스럭버스럭 소리가 들렸다.     “음. 저기 짐승이 온 모양이구나. 사냥총을 한방 놓을까?"     은녀는 황급히 말렸다.     “아니, 그러다가 누가 상하면 어쩔 라고 그러오?"     더욱 요란하게 버스럭버스럭 소리가 나더니 검둥이가 뛰어가자 그 인기척이 멀리 사라지고 조용해졌다. 이상한건 그쪽으로 뛰어간 검둥이가 한 번도 짓지 않고 꼬리를 흔들흔들 흔들면서 이쪽으로 뛰어온 것이다.      성칠은 십중팔구 누구라는 것을 짐작하고 바로 앉았다.      그는 담배를 한 모금 길게 빨았다가 후 내 뿜으면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은녀는 세운 한쪽무릎을 두 손으로 잡고 앉아 성칠의 옛말을 귀담아 들었다.       뒷산 수림 속에서는 뻐꾸기 "뻐꾹 뻐꾹" 애처롭게 우는 소리 귀청을 처량하게 간질렀다.       “멀고먼 옛날에 이 버치꼴에는 소를 모는 목동이 살았단다.”      목동은 어찌나 피리를 잘 부는지 그 구성진 피리소리를 듣고 새들마저 날아와서 너울너울 춤을 추었다. 그런데 목동은 나이가 들도록 이 심심산골에 시집오려는 처녀가 없어서 장가를 들지 못한 노총각으로 되었다.     어느 하루 목동은 소를 몰다가 너무 더워 이 개울물에 와서 목욕이나 하려고 버드나무를 헤치면서 다가왔다. 그런데 글쎄 그때 하늘에서 칠색 단 저고리와 연분홍치마를 입은 아름다운 선녀가 둘이나 너울너울 춤추면서 내려왔다. 너무 황홀해 그 선녀들을 쳐다보는데 선녀들은 너무 더워서 주위를 대충 살펴보고서는 칠색 단 저고리와 연분홍치마를 훌훌 벗어버리더니 개울물에 뛰어들어 목욕하기 시작했다.       처음 눈같이 하얀 선녀들의 몸을 훔쳐본 목동은 목구멍에서 쿵쿵 소리가 날 지경으로 심장이 높뛰었다. 선녀들은 옥같이 흰 살을 드러내놓고 두 손으로 물을 서로 끼얹으면서 물장난을 치고 있었다.      이때 목동이 모는 소 무리에서 늙은 암소 한마리가 나서더니 이렇게 귀띔했다.      “주인님, 저 선녀들 속에서 더 고운 선녀의 칠색 단 저고리와 연분홍치마를 숨겨두면 주인님의 천생배필은 문제될게 없소이다.”      그 말에 어진 목동이었지만 장가들 생각으로 슬그머니 다가가서 칠색 단 저고리와 연분홍치마를 훔쳐 산 둔덕의 숲속에 숨겨두었다.     하늘에서 벼락이 치는 듯 옥황상제의 심부름꾼이 선녀들을 궁전에 돌아오라는 령을 내렸다.     다른 선녀들은 저고리와 치마를 입자 하늘로 날아올랐건만 한 선녀는 칠색 단 저고리와 연분홍치마가 없어져 하늘로 날아오를 수 없었다. 목동은 선녀를 보고 자기와 천년배필을 무을 것을 약속하면 치마를 내주겠다고 했다. 선녀는 눈물범벅이 된 얼굴을 들어 목동의 까만 얼굴을 바라보더니 마지못해 머리를 끄덕였다.      그때로부터 선녀는 저 버치 꼴에 삼을 심어 삼베로 베천을 짜고 버들을 베 광주리와 버치를 틀면서 목동과 함께 잘 살았다고 한다.      그들이 한창 깨알이 쏟아지게 살 때 선녀가 인간 세상에 숨어서 사는 것을 알고 옥황상제는 심부름꾼들에게 잡아오라고 명령을 내렸다. 심부름꾼은 하늘에서 내려오자마자 선녀의 머리채를 잡아 쥐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목동이 아무리 소리치고 선녀가 아무리 발버둥 질 쳐도 소용없었다.      이때 늙은 암소가 목동을 보고 자기 등을 타고 풀썩 솟아오르라고 했다. 목동이 정말 그렇게 하였더니 몸이 하늘로 씽씽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그가 거의 따라 잡으려고 할 때였다. 심부름꾼은 다시는 선녀를 날지 못하게 선녀의 연분홍치마를 벗겨 내리 던졌다. 그런데 뒤따라 날던 목동의 몸이 그 연분홍치마에 감기여 더 날지 못하고 땅바닥에 떨어졌다.       “그때 땅에 떨어진 선녀의 연분홍치마가 굳어져 저 치마 봉으로 됐단다.”       성칠의 말에 은녀는 다가앉으면서 물었다.      “그럼 그 목동은 저 치마봉에 깔리어있단 말이오?”      “그래, 그러나 목동은 행복하게 눈을 감았지. 죽어서도 사랑하는 선녀의 치마폭에 싸여 묻혔으니 말이다.”     “호- 어쩜 저 치마봉에는 그런 눈물어린 전설도 있어요.”     개울물이 돌돌 흐르는 버치 꼴 개울물가에는 나그네와 처녀의 한숨소리가 간간히 들렸다.     한참 납덩이같은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성칠은 은녀의 따뜻한 손을 더듬어 잡고 나서 조용히 말했다.      “은녀, 난 너를 고와한다.”      “어마나!”      은녀는 외마디소리를 가늘게 질렀다.       그녀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면서 돌아앉았다.      “어째? 넌 나를 좋아하지 않지?”       성칠의 물음에 은녀는 손을 성칠에게 맡긴 채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그녀는 홧홧 달아오르는 얼굴을 두 무릎 사이에 숨기면서 나직이 말했다.       "누가 좋아하지 않는다 했소? ”      성칠은 은녀의 허리를 끌어당겨 꼭 안고 은녀의 얼굴을 두 손으로 받쳐 들고 달빛을 빌어 은녀의 얼굴을 똑바로 들여다보았다. 버드나무 그림자에 희미하게 가려진 은녀의 얼굴이 그렇게도 예쁠 줄은 몰랐다.      “넌 처녀이구 난 아내가 있는 나그네야. 그런데 나는 아들도 딸도 없을 놈이야. 우린 저 치마봉 전설의 목동과 선녀처럼 함께 살수 없는 게지?”      성칠의 애탄 목소리에 은녀에게서 이런 말이 불쑥 튀어나왔다.       "나그네면 어떻고. 처녀면 어떻대? 아들딸만 많이 낳고 잘 살면 좀 좋아서.”      성칠은 화들짝 놀랐다.       “은녀야!”      성칠은 은녀를 꼭 껴안았다. 은녀의 온몸이 바르르 떨렸다. 그러나 성칠은 맥없이 팔을 풀었다.      은녀는 성칠의 품에 파묻었던 얼굴을 들어 성칠의 구레나룻수염이 짙은 성칠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오빠, 우리 둘이 좋아하는데 또 뭣이 두렵소?”      성칠은 몸을 돌려 바로 앉았다.     “안 된다, 안돼. 우리는 함께 살 수 없어. 내 큰아버지는 우리 영월 김 씨 집안과 너네 영월 엄 씨네는 통혼을 하지 못한다고 했다.”     은녀는  돌아앉아 어깨를 들먹이었다.     "왜? 우리 두 집안이 전생에 무슨 원쑤라도 맺았다오?"    애탄 건 성칠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주먹으로 가슴을 쾅쾅 치며 한탄했다.      "아니야. 우리 두 집안은 친형제하구 같단다. 그러나 통혼은 안된단다."     "왜?"     은녀는 종주먹으로 성칠의 가슴을 쾅쾅 치며 물었다.     "500년 전에 우리 집안 김려생할아버지하구 너네 조상 엄흥도 할아버지가 목숨걸고 리조 단종왕을 보호했지. 그 두분 충신할아버지들이 우리 두 집안은 친형제 같다면서 그때부터 서로 통혼하지 않기로 했단다."     "그때면 그때지. 500년 후에도 그 언약 따를 건 뭔가요?"     "우린 대대로 조상들의 언약을 무조건 지켰단다. 지금도 절대 못 고쳐."     성칠은 한숨을 땅이 꺼지게 쉬면서 말없이 은빛달빛이 깔린 한 많은 치마봉을 바라보았다.     오- 사랑하면서도 사랑할 수 없는 고통, 그 고통이야 이루다 말할 수 있으랴? 가슴이 미여지는 것 같고 밸이 끊어지는 것만 같을 것이였으리라.     달도 차마 눈 뜨고 보기 구슬펐던지 구름 속으로 외면했고 개울물이 구슬프게 돌돌돌 흐느끼면서 흐르고 있었다. 적토마는 배가 고팠던지 성칠과 은녀의 잔등에 대고 투루루 뜨거운 입김을 뿜었다. 검둥이도 뛰어와 끼깅거리면서 길을 재촉했다.     성칠은 흐느끼는 은녀를 데리고 버치꼴 막바지로 무거운 발걸음으로 터벅터벅 올라갔다. 그 발자욱마다 애잡짤한 뜨거운 눈물이 고였다. 그 피눈물로 그들의 어울리지 않은 사랑의 애탄 가슴을 잠시나마 식여줄 수 있을가?
357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 (13) 빚문서 김장혁 댓글:  조회:821  추천:0  2024-01-11
       김장혁 작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 제2장                            4. 빚문서           어둠침침한 어둠이 해를 몰아내고 도고한 토성에 타리대를 치고 앉아 다리쉼을 하고 있었다. 저 멀리 공포가 깨난 수림 속에서 승냥이가 주린 배를 신음하면서 시끄럽게 울고 있었다.       성칠은 적토마 잔등에 멧돼지를 싣고 한길수의 토성 안 집 대문 안에 들어섰다.       그때 한길수는 마루바닥에서 응삼과 마주 앉아 한창 뭐라고 쑤군거리면서 담배를 뻑뻑 빨고 있었다.       “아니, 어디서 난 적토마야?”       응삼의 말에 한길수는 기둥에 기대앉은 채 건 가래를 뗐다.       “에헴, 해 다 졌는데 웬 일인가?”      성칠은 곧추 마루 밑에까지 말을 몰고 다가섰다.      “빚을 갚자고 왔소.”      응삼은 씽 드르르 달려 내려와 말 잔등에 건 멧돼지고기를 말대가리를 기우뚱거리면서 여겨보았다.     그때 부엌에서 은녀가 문선을 잡고 성칠을 내다보고 반겨 맞았다.      “오빠!”      성칠의 곁으로 다가온 은녀는 화들짝 놀랐다.      “아니, 이 가슴의 피는? 어데 상하지는 않았소?”      성칠은 개의치 않았다.      그는 한길수 쪽으로 몸을 돌리고 쇠덩이 굴리는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멧돼지를 가지고 은녀를 내놓읍소."      "쳇!"     한길수는 담배대통을 마루에 탁 쳐 털어버리면서 벌떡 일어나 고함쳤다.     “무슨 소릴? 요까짓 멧돼지 고기 120원이나 가?”      성칠은 반문했다.     “한 250근은 되는데 안 된다니?”     응삼은 길쭉한 박대가리를 홰홰 내저었다.     “안 될 소릴 작작 하라구. 돼지고기 한 근에 50전씩이나 치겠다고? 흥!”     한길수는 발로 마루를 구르면서 꽥꽥 고함쳤다.     “걸 장마당에 가져다 팔아 은전을 가져 오게나! 120원에서 한 푼이라도 골아봐라! 은녀를 문밖으로 한 발자국이나 데려 내가겠구나! 흥!”     응삼은 옆에서 붓는 불에 키질을 했다.     “주인어른님, 소 한 마리에 30원 밖에 하지 않는데 멧돼지 한마리에 20원에서 더 하겠습둥? 우릴 바보 취급한다니까!”     “그래, 그래. 요까짓 걸로 어림도 없어. 우릴 뭘로 보는 거냐?”     한길수는 돌아서서 잔등을 보이더니 또 대통에 담배를 담아 꿍꿍 다졌다.     성칠은 품속에서 뭔가 꺼내보였다.     “자, 이건 백두산에서 자란 곰의 열이오. 이 열을 잡수면 허리 병이고 내장 병이고 다 떨어지구마.”    한길수는 귀가 솔깃해 몸을 홱 돌렸다. 그는 점점 성칠이 쥔 웅담쪽으로 낯을 가까이 하면서 눈이 사발만해졌다.    “이걸 잡수면 또 그 아래게 힘을 쓰오.”    “그래?”    한길수는 제꺽 성칠의 손에서 웅담을 뺏다시피 채갔다.     “그럼 이걸 두고 은녀를 데려가게.”    성칠은 한 발자국 다가섰다.    "문서를 내다 줍소."     그때 응삼이 나서면서 새된 소리를 쳤다.     “가만! 그까지 웅담이 백 원이나 된단 말인가? 고까짓 걸로 누굴 속이려고? 저 함박꽃 같은 은녀를 데려가? 안 될 소릴! 흥.”     월선도 위방 문선을 잡고 내다보다가 혼자말로 욕지거리를 했다.      "잘 하긴 잘 해. 저 쌍놈 영감태기 웅담을 먹고 동네 간나새끼들 엉덩이를 들쑤시려고? 은녀를 내보내면 누굴 부려먹어? 흥!"     나그네 귀 석자라고 한길수는 응삼과 월선의 푸념질에 웅담을 쳐들고 은녀와 번갈아보았다. 그러나 이윽고 우멍한 눈에 이상한 눈빛이 번쩍였다.     “저깟 계집년이야 없으면 말라지. 건강장수야 말로 돈을 주고도 못 바꾸는 게야. 이걸 먹고 오래 살면 다야.”     응삼은 오만상을 찡그리면서 야단쳤다.    “주인어른, 어쩌면 만 가지 일을 다 냉정하게 처리하다가도 이 일은 저 놈의 말을 딱 곧이듣고 이럽니까? 진짜 웅담인지 속아 넘어가지 맙소.”     그러자 한길수는 웅담을 쭉 감빨아보았다. 당장 상을 찡그렸다.      “아, 쓰다. 진짜 웅담이야.”     응삼은 어이없다는 듯이 뱁새눈을 한일자로 감아버리면서 길쭉한 상판을 가로저었다.     “이이고, 주인영감도. 정신 나갔나. 감쪽같이 속아 넘어가네.”     찰싹!    어느 결에 한길수가 그의 귀 쌈을 얼얼하게 갈겼다.    “어디서 개 주둥아리 질이냐?”      응삼이 한대 맞고 뱁새눈을 떴을 때에는 노기등등한 한길수가 눈깔을 부라리면서 그를 쏘아보고 있었다.      이윽고 한길수는 웅담을 들고 집안으로 들어가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손을 뒤로 홱 저으면서 고함쳤다.      “개자식, 누가 정신 나갔냐?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얼빠진 놈이라고. 어서 빚 문서를 내다주고 멧돼지고기나 부엌에 들여가!”     월선은 별수 없다는 듯이 머리를 홰홰 저면서 살진 엉덩이를 흔들거리며 영감을 따라 집안에 들어갔다. 응삼은 얼얼해나는 볼을 매만지면서 옆채에 들어갔다.     성칠은 멧돼지고기를 부엌에 메 들여 다주고 은녀의 손목을 잡고 나왔다. 은녀는 성칠의 옆구리에 바싹 다가가 붙었다. 평소에 그렇게 으르렁거리면서 우쭐하던 응삼은 한풀 꺾인 채 빚 문서를 꺼내다 성칠에게 건네주었다. 성칠은 빚 문서를 갈기갈기 찢어 활 팽개치고 은녀를 데리고 적토마를 끌고 대문 밖을 나섰다.     등 뒤에서는 응삼의  개 짖는듯 갈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짜 웅담을 먹고 우리 주인 영감 그게 맥을 쓰지 못하는 날엔 가만 놔두는가 봐라. 흥! 제길 할, 재수 없을러니 별 일을 다 본다. 쳇!”     그 욕지거리에 대꾸하는 듯이 검둥이가 돌아서서 “왕, 왕, 왕!” 무섭게 짖어댔다.
356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12) 호랑이와의 박투 김장혁 댓글:  조회:903  추천:0  2024-01-11
        김장혁 작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 제2장                 3. 호랑이와의 박투             이튿날 창렬은 성칠이 준 곰의 열을 내놓으면서 명순에게 분부했다.       “여보, 이제 늙은 게 더 살아 뭘 하겠소. 이걸 팔아서 빚을 갚고 은녀를 데려 내오오.”       때마침 성칠이가 문안하려고 집안에 들어서다가 창렬이 하는 말을 들었다.       “은녀 아버지, 곰의 열은 얻기 힘든 귀중한 약잽구마. 곰의 열을 잡숫고 페병을 치료합소. 내 오늘부터 사냥해서 그 빚을 꼭 갚아드리겠습니다. 그 곰의 열은 꼭 잡수시오.”      창렬은 기침을 쿨룩쿨룩 하며 꼬장꼬장 마른 곰의 열을 들고 쳐다보였다.      “이걸 먹기보다 이걸로 은녀를 데려 내오면 얼마나 좋겠소. 쿨룩, 자네가 황소 네 마리 값에 맞먹는 쿨룩, 쿨룩 빚을 어떻게 갚는다고 그러오?”       그러나 성칠은 억대우 같은 몸을 일으키면서 고집썼다.       “은녀 아버지, 곰의 열을 달여 잡숫고 몸조리를 잘 하시오.”     성칠은 밖에 나가 적토마에 훌쩍 뛰어올랐다.     은희는 바깥에 나와 바랬다.    “오빠, 잘 다녀오세요.”       “응, 잘 있어라.”     성칠은 은희와 상호를 돌아보며 명순에게 다시 인사하고 말을 달려 산으로 올라갔다.     명순은 은희와 함께 낫과 새끼를 들고 버치 골 쪽으로 내려갔다. 동네 집 성칠이가 사냥해서 자기 집 빚을 무는 것을 눈을 펀히 뜨고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버들을 베다가 버치라도 틀어 팔아서 보태려고 마음먹었던 것이다.     마가을이었건만 참나무가지는 봄기운을 잃지 않은 듯이 물빛이 어려 있었다. 줄기에만 버드나무 잎이 몇 개씩 매달려있는 앙상한      버드나무가지들이 한길수에게 은녀까지 빼앗기면서 당하고 있는 명순 일가의 처지와 같아 가엽게만 생각됐다.    그들은 물기가 파란 버드나무가지들을 한 줌 한 줌 베여 땅바닥에 모아놓았다.    한참 낫질을 하다가 명순은 허리를 펴고 팔소매로 이마의 땀을 닦으면서 이런 생각을 다했다.     “호- 성칠에게도 아들이나 하나 생겼으면 얼마나 좋겠니? 하옥은 어쩜 애도 하나 못 낳아?”      그녀는 너무 싱거운 걱정을 하는 것 같아 도리머리를 흔들더니 다시 허리를 굽히고 낫질을 하여댔다.     한편 사냥을 나선 성칠은 노루와 꽃사슴을 보고도 범이나 곰을 놀랠 까봐 총을 놓지 않았다.     그는 곧추 령을 몇 개 넘어 한 달전에 암 콤을 잡은 그 낭떠러지 위로 말을 타고 올라갔다.     한참 달리다가 그는 나무에 말고삐를 슬쩍 매놓은 후 바위 위에 앉아 한식경이나 주위를 살폈다. 그러나 곰이 얼씬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검둥이가 귀를 곤두세우더니 벌떡 일어나 사위를 쳐다보면서 끼깅거렸다. 뒤이어 노린내가 코를 찔렀다. 성칠은 서늘한 가을바람에 실려 오는 노린내를 맡자 호랑이가 부근에 왔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는 인차 총에 장탄한 후 바위 옆의 큰 나무 우에 올라가 주위를 신경을 도사려 살폈다.     “따 웅!”     얼룩호랑이 낭떠러지 아래로 성큼 뛰어 내렸다. 분명 주린 호랑이가 사람 냄새를 맡고 달려왔다.     검둥이가 낭떠러지 아래에서 왕왕 짖으면서 호랑이의 시선을 자기 쪽으로 유인해갔다.     호랑이도 그리 쉽게 얼리지 않았다. 호랑이는 검둥이를 덮쳐드는 척 쫓아버리고는 곧추 성칠이 바라 올라간 나무 밑에 어슬렁어슬렁 기어오더니 사발 눈으로 나무 위를 올려다보았다.     호랑이는 나무 우에 걸터앉아 총을 겨냥하고 자기를 노려보는 성칠을 발견하자 “따 웅— ” 하고 울부짖었다.     땅!     성칠은 선제공격했다. 철알에 빗맞은 호랑이는 성난 사자마냥 픽 돌아섰다. 사발 눈에서 불이 이글거렸다. 호랑이는 저쪽으로 달아갔다가 다시 이쪽으로 덮쳐왔다. 그 놈은 아가리를 쩍 벌리고 나무에 올라탄 성칠의 발밑에까지 뛰어올랐다. 그러나 성칠의 발밑을 스치면서 바위 저쪽에 풍덩 뛰어넘어갔다. 이렇게 이쪽에서 저쪽으로 날뛰어 풍덩 떨어지고 저쪽에서 이쪽으로 날뛰어 풍덩 떨어지군 했다. 세 번 덮쳐 아가리로 물지 못하자 날아지나가면서 쇠꼬리 같은 꼬리를 휘둘러 성칠을 땅 쳤다. 다행이 꼬리가 먼저 나무줄기에 맞은 후 성칠의 얼굴을 때렸다. 성칠은 치명상은 아니었지만 대번에 눈앞에서 번개치는 듯 하더니 코앞에서 따뜻한 무엇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호랑이는 저쪽 낭떠러지아래까지 달아나서 사발 눈을 슴벅이면서 이쪽을 돌아보았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성칠은 사냥총을 겨냥했다.       땅!     호랑이는 또 빗맞고 꼬리 빳빳해 달아났다. 호랑이가 날린 꼬리에 맞아 성칠은 눈에 별찌가 일어나 제대로 조준하지 못했던 것이다.     성칠은 팔소매로 뻘건 코피를 닦으면서 두덜거렸다.     “참 재수 없군. 끝내 놓쳐버렸군.”     그는 나무에서 주르르 미끄러지어 내리었다. 검둥이가 달려와서 꼬리를 휘청거리면서 문안이라도 하는 듯이 피 묻은 코앞을 핥았다.     “검둥아, 일없다. 어서 이곳을 떠나가자.”     성칠은 말고삐를 풀고 말 잔등에 올라 검둥이와 함께 아름드리나무속을 살피면서 수림 속을 빠져나왔다. 가을하늘도 높아진 듯이 명랑해졌다. 저 건너 쪽에 나무가 없는 곳에 감자밭이 보였다.     “옳지, 놀란 호랑이가 다시 나타나지 않을 바에는 해 지기 전에 멧돼지라도 잡아가야지. 전번에 덫을 놓은 게 걸렸는가도 가보자.”     그는 말에서 내려 검둥이 뒤통수를 다독이고 나서 감자밭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먼발치에서 볼라니 덫에 거먼 무엇이 걸린 것 같았다.     “그럼 그렇겠지. 아무튼 빈손으로야 돌아갈 수 없지.”     성칠이가 다가가 보니 검둥이만한 중멧돼지 한마리가 덫에 걸려있었다. 성칠이가 그 놈을 덫에서 풀어내려고 하는데 어디선가 사각사각 감자를 갉아먹는 소리가 들려왔다.     “에크!”     성칠은 저쪽에서 삐죽한 주둥이로 땅을 뒤지면서 감자를 파먹는 송아지만큼 한 암 멧돼지를 보고 황급히 감자밭에서 허리를 구부정하고 적송나무밭 쪽으로 뛰어갔다.     멧돼지도 이쪽 인기척을 느끼자 감자를 파먹다 말고 뾰족한 송곳니를 드러내며 이쪽을 무섭게 노려보았다. 이상하게도 멧돼지의 잔등에 애솔나무가 자라나있었다. 분명 멧돼지는 사냥꾼들의 총알이 싫어서 소나무밭에 가서 송진에 대고 몸뚱이를 비비다가 모래밭에 가서 딜딜 굴렀던 것이다. 그렇게 몇 번 반복하면 멧돼지의 온몸은 송진과 모래알이 들어붙어 철갑을 두른듯하게 됐다. 그 놈 멧돼지는 솔 씨가 송진과 함께 잔등에 들어가 박혀 애솔나무가 자랐던 것이다.     성칠은 멧돼지가 자기를 완전히 발견하지 못하고 다시 감자를 파먹는 틈을 타서 뒤로 살금살금 달려갔다.      땅!     야무진 총소리와 함께 멧돼지 배때기에서 파란 불티가 일었다. 그러나 모래 철갑 때문에 치명상을 입히지 못했다. 총소리에 놀란 멧돼지는 몸뚱이를 홱 돌렸다. 화약 냄새를 맡은 그 놈은 뾰족한 송곳니를 드러내고 성칠에게 덮쳐왔다. 성칠은 미처 장탄을 할 새 없어 총을 버리고 장딴지에 찬 비수를 쑥 뽑아들었다. 멧돼지가 곧게 덮쳐들자 성칠은 옆으로 살짝 피했다가 비수로 멧돼지 배때기를 푹 찍었다. 철갑 같은 모래철갑을 꿰뚫고 멧돼지 배때기에 비수가 박혔다. 그러나 비수를 되빼기 전에 멧돼지는 홱 돌아서 재차 공격하여왔다. 이때 검둥이가 멧돼지 뒤 다리를 물어뜯고 적토마가 뒤 발질로 멧돼지를 차댔다. 그 틈을 타 성칠은 재차 습격해오는 멧돼지를 피했다. 그는 인차 사냥총을 집어 들고 나무 밭으로 달아났다. 그는 적송나무를 안고 빙빙 돌면서 장탄했다. 멧돼지가 아가리를 쩍 벌리고 송곳니를 드러내고 덮쳐드는 찰나였다.     땅!     성칠은 멧돼지의 아가리 안에 사냥총을 넣을 지경으로 대고 방아쇠를 당겼다.     멧돼지가 송곳니로 깨무는 바람에 총대는 부러지고 멧돼지는 맥없이 성칠의 앞에 털썩 쓰러졌다. 성칠도 멧돼지 앞에 맥없이 쓰러졌다. 검둥이는 멧돼지가 숨을 쉬는 것을 보고 목을 깨물어 완전히 숨통을 끊어놓았다.      한참 후 성칠은 멧돼지 배에 꼽힌 비수를 뽑아 배를 가르고 염통과 간, 폐를 꺼내 검둥이에게 줘 먹이고 몸뚱이를 반쪽씩 갈라 말 잔등 양쪽에 척 걸었다.      그가 말고삐를 잡고 감자밭을 떠나려고 할 때다.      “그 놈 멧돼지들이 감자밭을 도륙냈구나.”     백발이 성성한 한 영감이 호미를 쥐고 거의 절단 난 감자밭을 돌아보며 하는 말이다.     성칠이 머리를 돌려보니 백발영감 뒤에 젊은이 대여섯이 호미와 괭이를 쥐고 걸어오고 있었다.     “감자밭을 밟아 못쓰게 만들어 미안합구마.”     작달막한 영감은 말에 처맨 멧돼지를 쳐다보며 말했다.      “아니오. 멧돼지들을 잡아서 감사하오."     성칠은 중멧돼지를 말 잔등에서 내리워 놓았다.     “이 멧돼지들은 이 감자밭을 파먹고 자란 멧돼지입니다. 가져갑소.”     그러나 영감은 받지 않았다.     “피를 흘리면서 잡은 멧돼지를 가지고 가오.”     성칠은 “원래 다 드려야 하겠지만요. 남에게 진 빚이 있어 이 작은 멧돼지만 드립니다. 꼭 받아주시오.”라고 했다.     “보아하니 무슨 사연이 있는 것 같은데?     성칠은 한길수네 빚 대신 부엌 여로 들어간 은녀를 빼내오려고 사냥하게 된 경과를 죽 이야기했다.     백발영감이 한숨을 후- 내쉬면서 멧돼지를 받으려고 하지 않는 것을 성칠이 억지로 밀어주었다.      백발영감은 마지못해 멧돼지고기 반쪽을 받으면서 물었다.     “젊은이, 고향이 어딘가?”     “이 산 너머 영월동입니다.”     “오, 그렇구먼.”    백발영감은 머리를 끄덕이더니 인사했다.    “난 운주동 최구장이오. 얘들은 다 내 아들들이요.”    성칠은 말고삐를 놓고 넙적 엎드려 절을 올렸다.    “아니, 젊은이, 이게 웬 일이가?”     최구장이 바삐 성칠을 붙잡아 일으켰다.    성칠은 일어나며 “혹시 최구철이라고 압니까?”    최구장과 아들들이 놀라운 기색을 띠었다.     “그래. 내 동생이지. 어데서 본적이 있소?”     성칠은 최구장의 두 손을 잡았다.    “이전에 구철 삼촌의 신세를 많이 졌습구마.”    그는 백두산에 갔을 때 있은 일을 죽 이야기했다.    최구장은 한숨을 후- 내쉬었다.     “정말 넓고도 좁은 게 세상인가 보오. 일본 놈들에게 쫓긴 동생이 백두산까지 들어가 숨은 줄은 정말 꿈에도 생각지 못했소. 내게 연루될 까봐 찾아오지 않은 모양이요.”     최구장은 하얀 수염을 쓰다듬으며 북녘하늘을 바라보면서 눈시울에 맑은 눈물이 글썽해졌다.     성칠은 최구장과 갈라지면서 인사했다.     “삼촌으로 모시겠습니다. 후에 또 찾아뵙겠습니다.”     최구장은 성칠의 두 손을 잡고 반가와 했다.     "후에 다시 구철을 보면 놀러 오라고 전해주오."     "예."     성칠은 최구장 일행과 갈라져 말고삐를 잡고 수림 속으로 들어갔다.     뒤에서 최구장의 맏아들 경숙은 메 부리 코를 쓱 문지르면서 “그 형님이 인심도 후하오. 멧돼지고기 반쪽이나 주다니.”라고 했다.     둘째아들 경인이 맞장구를 쳤다.     “함경북도 사람들이 원래 인심은 후한 거야.”     한편 성칠은 검둥이와 적토마를 이끌고 하늘이 올려다 보이지 않는 수림 속을 걷고 걸어 어느덧 샘물터에까지 왔다.     그제 날에는 이 샘물터에서 은녀가 떠주는 시원한 샘물을 마시면서 갈증을 풀었는데 오늘 샘물에는 낙엽이 둥둥 떠 있을뿐이었다.      은녀가 없는 텅 빈 우물을 내려다보노라니 성칠은 마음이 허전하고 쓸쓸했다.     검둥이는 은녀의 체취를 맡아 보려는 듯이 킹킹거리면서 은녀가 앉아 샘물을 퍼주던 샘물터의 납작한 바위돌이며 흐르는 샘물가에 코를 대고 냄새를 맡아 보는 것이었다.     성칠은 말고삐를 쥐고 샘물가에 와서 적토마에게 먼저 시원한 샘물을 실컷 들이켜게 한 후 자기도 두 손으로 샘물을 퍼서 둬 모금 들이켰다.     그는 손으로 입술을 쓱 닦으면서 저 아래쪽의 한길수의 고래 등 같은 기와집을 내려다보노라니 이가 갈렸다.     그는 적토마와 검둥이를 끌고 곧추 엄창렬의 집으로 향했다.     그때 마루에서 명순이 치마폭으로 무릎을 덮고 창렬과 마주 앉아 버치를 틀고 있었다.     서산 버치골 쪽을 바라보니 가을비가 구질구질 내리기 시작했다.     “여보, 성칠이 우리 은녀를 좋아하는 거 같소.”     “그럼 어떻소?”     “우리 은녀를 내오면 성칠의 작은댁으로 들여보내면 어떻소?”     창렬의 말에 명순은 덴겁해서 도리머리질 했다.     “우리 아무리 못 살아도 본댁이 새파래 살아있는데 첩으로야 못 주지요. 법이 없이도 살 병완 영감도 차마 우리 은녀를 아들의 첩으로 삼자고는 하지 않을 거예요.”    창렬은 고집했다.    “쳇, 모르는 소리. 지금 맏며느리 하옥이가 십여년이 넘도록 애를 낳지 못해 속이 타 죽는데 작은며느리를 두지 않고 되겠소. 은녀를 지킬 사람은 성칠 밖에 없소.”    명순은 영감을 외까풀 눈을 곱게 흘기면서 입귀를 비쭉했다.    “당신네 영월 엄씨와 영월 김 씨는 옛날부터 통혼하지 않는 한 집안 같은 사람들이라면서?”    그 말에 창렬은 한숨을 길게 내쉬더니 머리를 끄덕였다.     그가 버치 골짜기 쪽으로 해 치마 봉을 올려다보니 벌써 치마봉 위의 구름송이에 불이 달린 듯이 저녁노을이 곱게 피고 있었다.     “성칠은 언제 오겠냐? 후- 쿨루쿨룩.”     그때였다. 범이 자기 흉을 하면 온다고 성칠이 적토마 고삐를 잡고 마당에 들어섰다.     창렬의 내외간은 동시에 환성을 질렀다.    명순이 먼저 버들가지를 놓고 치마폭을 한손으로 걷어쥐고 마루에서 황급히 내려왔다. 창렬은 그제야 버들가지를 쥔 채 기침을 쿨룩쿨룩 하며 마당에 내려섰다.     “잘 있었습둥?”     창렬은 가냘픈 가슴에 성칠을 안고 떡판 같은 잔등을 어루만지였다.     “그래, 그래. 고생이 많았겠구먼. 이 가슴에 묻은 피는 웬 일인가?”     “호랑이를 잡지도 못하고 꼬리에 빗맞아 코피를 흘린 것이니 일없습니다.”     “에이, 안전에 주의하게나.”     “예.”     성칠이 말 잔등에서 멧돼지고기를 부리는데 옆에서 구경만 하면서 힘을 보태주지 못하는 창렬은 안타깝기만 했다.     갑자기 그는 무슨 생각이 떠올랐던 모양이였다.      “가만, 성칠이. 여기다 멧돼지고기를 부리지 말고 아예 실은 채로 한 영감네 집으로 가져가고 은녀를 데려 내오게나.”     성칠은 도리가 있는 듯 해 부리던 멧돼지고기에서 손을 뗐다. 한참 궁리하다가 그는 중 멧돼지고기 반쪽을 부리어 부엌에 들여갔다.     “이건 잡수시오. 한영감이 멧돼지 한마리만 받고 은녀를 내놓겠습니까?”     그러나 창렬은 숨이 차 헐헐거리면서 고집을 거두지 않았다.     “아니어. 쿨룩쿨룩, 저 전번에 나를 준 곰의 열까지 다 가지고 가서 통사정해보게나. 난 곰의 열을 먹기보다 은녀를 데려 내왔으면 심병이 뚝 떨어질 것 같네. 금이야, 옥이야 하던 딸을 빼앗기니 가슴이 답답해 죽겠네.”      성칠은 생각을 고쳤다.     “곰의 열만은 그만 둡소. 한영감이 내놓지 않으면 내 이제 사냥을 더 해서 한 달 안에는 은녀를 꼭 데려 내오겠습니다.    명순도 부엌에 들어가 함지에 물을 퍼들고 나왔다.    “성칠이, 은녀 아버지 말을 듣소. 은녀만 데려 내오면 저영감의 병이 나을게요. 곰의 열을 가지고 가게나.”    성칠은 함지 물에 손의 피를 썩썩 씻으면서 한숨을 후 내쉬었다.    성칠이 한 영감의 집으로 떠난 후 명순은 멧돼지고기를 베여 함지에 담아 이고 개울 건너 병완이네 집으로 떠나갔다.
355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 (11) 부억녀 댓글:  조회:890  추천:0  2024-01-11
       김장혁 작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 제2장                                                       2. 부엌녀                  가을바람이 구름 한 점 없는 가을 하늘의 하현달을 스쳤다. 처량한 달빛이 영월동을 희끄무레 비추었다. 창렬의 집 지붕이 달빛에 앙상하게 드러났다.       집 문이 열리면서 은녀가 나왔다.       집 안에서 쿨룩쿨룩 기침소리와 함께 “은녀야, 이 달밤에 어디로 가냐? 그 집에는 못 간다.”라고 하는 창렬의 목소리가 가늘게 들려왔다.      뒤이어 창렬의 처 명순이 뒤따라 나오면서 은녀의 손목을 잡았다.      “어디로 가는 거냐? 한씨 댁에 못 들어간다. 어서 집에 들어가자.”      어머니가 손목을 잡아 마구 끌었다.      은녀는 어머니의 손을 마구 뿌리쳤다.      “엄마, 내가 들어가지 않으면 우리 집 기둥을 빼주겠습니까?”      명순도 더는 말릴 힘이 없어 못이 박힌 듯 우두커니 서서 은녀가 개울가로 내려가는 것을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명순은 두 볼로 흐르는 눈물을 삼키면서 개울가에까지 따라 나왔다.      “얘야, 아무튼 몸을 주의해라. 그 색마 같은 한길수를 주의해라.”      “나도 다 컸으니 근심하지 맙소.”      은녀는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저고리 동전을 들어 닦으면서 개울물을 따라 허둥지둥 걸어 내려갔다.      달빛을 싣고 졸졸 흐르는 개울물, 은녀는 그 개울물에 놓인 징검다리를 보자 둔덕 저쪽에 있는 칠성 오빠네 집 쪽에 눈길을 보냈다.          성칠 오빠 집의 등잔불빛이 눈물이 고인 은녀의 눈에 희미하게 알른거리면서 뜨였다.      은녀는 한숨을 호- 내쉬면서 맥없이 개울가에 쪼그리고 앉았다.     은녀의 귀전에는 성칠 오빠가 말고삐를 잡으면서 자기에게 “무슨 일이 있어도 알려라.”라고 하던 말소리가 쟁쟁하게 들려왔다.     (어쩐담? 믿을만한 사람은 성칠 오빠 밖에 없다. 알릴까?)     은녀는 엉거주춤 일어서다가 되 물앉았다.     “안돼. 내가 들어가서 고생할지언정 성칠 오빠까지 부담시킬 수는 없지.”     왕 왕 왕!     성칠네 집 쪽에서 검둥이가 짖어댔다.      은녀는 저도 모르게 머리를 들어 피뜩 성칠네 집 쪽을 바라보았다. 등불 빛에 키가 후리후리한 검은 그림자가 얼른거렸다. 그 그림자는 마당에서 장작개비를 안고 집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오빠, 난 어쩌면 좋아? 흑흑흑,”      은녀는 이렇게 중얼거리면서 흐느껴 울다 말고 양태머리를 가로저었다.      “아니야! 그럴 수는 없어. 이 몸이 더 고달프면 고달팠지.”      은녀는 독한 마음을 먹고 개울 아래쪽으로 걸어갔다.      이때 갑자기 버스럭 소리가 개울가에서 들려왔다. 은녀는 두 손으로 입을 가리면서 몸을 옹송그리고 소리나는 쪽을 살폈다.      킹!      버드나무숲 속에서 버스럭 버스럭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더니 검둥이가 뛰어나왔다.      “검둥이야, 네가 웬 일이냐?”       검둥이는 뛰어와서 은녀의 치마 밑으로 발등과 장딴지를 핥을 상을 했다. 따뜻한 코김이 발등을 간지럽혔다.      은녀는 쪼그리고 앉아 검둥이의 뒤통수를 매만지다가 다독여주었다. 검둥이는 은녀의 품에 안기면서 끼깅거렸다. 검둥이는 성칠을 따라다니면서 자기 주인과 은녀의 각별히 친한 사이를 알고도 남음이 있었다. 검둥이도 마치 은녀의 가련한 처지를 불쌍해하는 것 같았다.      이때 징검다리 쪽에서 인기척소리가 났다.     은녀가 검둥이 잔등을 쓸어주다가 머리를 들어 그쪽을 바라보니 달빛아래 후리후리한 사나이가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담배불빛이 희끄무레 밝아지더니 성칠의 덩실한 코 마루와 입이 보였다.      “오빠, 으흐흑.”      은녀가 뛰어가서 성칠의 품 안에 안기면서 어깨를 들먹였다. 쓸쓸한 하현달빛을 빌어 은녀의 눈에서 줄줄 흐르는 눈물을 볼수 있었다.     “은녀, 웬 일이냐?”     성칠은 은녀의 어깨를 다독이면서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그는 검둥이가 개울 쪽에 대고 왕 왕 왕 짖어대자 사냥꾼의 민감한 감각으로 개울가에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알고 이상해 검둥이를 따라 집에서 내려왔던 것이다.     “은녀야, 어서 말해라. 너 무슨 일이 있구나.”      은녀는 어깨를 들먹이면서 성칠의 품에서 스르르 나왔다. 처량한 하현달빛에 그녀의 눈에 고인 눈물이 쓸쓸하게 반짝였다.      이윽고 은녀는 목안으로 들어가는 소리로 말하였다.      “한영감이 나를 부엌여로 들여갈 예산이오.”      성칠은 은녀의 두 팔에서 손을 떼면서 한길수가네 집 쪽에 침을 퉤 뱉었다.      “그 놈 새끼! 언감 네한테 손을 댄단 말이냐? 들어가지 말라. 그 놈이 감히 어쩌는가 두고 보자.”      성칠은 열이 올라 씩씩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안 되오. 내가 가지 않으면 길수 놈이 빚 대신 우리 집 기둥을 뽑아가겠다고 했소.”     “쳇, 그러기만 해보지. 가만 놔두지 않겠다. 가자, 집으로 돌아가자.”      성칠은 은녀의 손목을 잡고 마구 집 쪽으로 끌다시피 했다.      은녀는 끌려가면서 통사정했다.      “이러지 마오. 내 이 밤에 가지 않으면 그 번들 이마가 내일 개다리들을 끌고 와서 집을 허물어갈게요.”     그러건 말건 성칠은 은녀를 다짜고짜 끌고 은녀네 집 쪽으로 향했다.     “일없다. 내 방법을 댈게. 너를 그 쌍놈 영감태기네 집에 들여보낼 순 없다.”     “빚을 졌으니 무슨 용빼는 수 있소?”     그 말에 성칠이도 은희를 마구 끌고 가다가 손을 스르르 놓았다. 그는 호주머니에서 담배쌈지를 꺼내 담배를 말아 부시를 쳐서 불을 붙여 물면서 개울가 모래바닥에 물앉았다.      개울물이 무거운 침묵을 깨뜨리면서 파란 가을 하늘과 달빛을 싣고 졸졸 흐르고 있었다.      은녀도 성칠의 옆에 맥없이 주저앉았다.      은녀는 조약돌을 쥐여 애꿎은 모래바닥에 줄을 쪽쪽 그었다.     이윽고 성칠의 입에서 콘크리트바닥에 쇠공을 굴리는 듯 목소리가 울렸다.     “은녀야, 한영감의 빚을 물어주면 그만이야. 너는 저 개울가의 버들을 베서 버치를 틀고 나는 사냥을 해서 그 놈의 빚을 말끔히 물어  주고 네 아버지 폐병도 치료해주자.”    “오빠, 오빠의 마음은 고맙소만 형님과 오빠네 일가에 미안하오.”     “그런 소리를 하면 못써.”     하현달이 치마봉을 희미하게 비추었다. 남쪽산등성이는 희끄무레 하고 산 음달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누워있었다. 서늘한 가을바람이 불어 그들의 뺨을 시원히 적셔주었다. 어디에서인가 짝을 잃은 외기러기가 구슬프게 끼룩끼룩 울고 있었다.     이튿날, 동녘이 푸름푸름 밝아오자 성칠은 동생 창준과 기준을 데리고 창렬의 집으로 갔다.     성칠은 집안에 들어서자 벽에 기대여 겨우 앉아있는 창렬이를 보고 말하였다.     “은녀 아버지 근심하지 맙소.”      창렬은 그저 기침을 쿨룩쿨룩 했다.     성칠이 바닥에 서서 구들에 올라가지도 않고 뒤 말을 이었다.     “내가 사냥을 해서라도 한 씨 댁의 빚을 물어줄 테니 아예 근심하지 마시오.”     “고맙네. 쿨룩쿨룩. 자네 신세를 쿨룩, 너무 져서. 쿨쿨, 쿨룩쿨룩. 아,”     창렬은 일어서려고 하였다.     “천만의 말씀, 이웃사촌이라고 서로 도우면서 살아얍지.”     성칠은 성큼 구들에 올라가서 일어서려는 창렬을 만류하며 도로 앉혔다. 조왕간 쪽으로 하여 앉은 은녀 어머니와 은녀 그리고 은희까지 맑은 웃음을 지었다.     창준과 기준은 형을 따라 밖에 나와 지붕에 올라갔다. 흩날리고 남은 이영을 고루고루 펴놓고 그 우에 새 단을 올려 이영을 잇기 시작하였다. 이때 은녀와 창준의 맏아들 상훈과 둘째아들 상길마저 달려와 새 단을 걸이 대에 걸어 지붕에 올렸다. 상호는 마당에 널린 새를 비로 쓸어 모았다. 기준의 맏아들 상우도 와서 마당에서 새로 새끼를 꼬았다. 여럿이 반나절을 역사 질 한 끝에 새 이영으로 탈바꿈했다.       명순과 은희, 은녀는 집안 부엌에서 점심차비에 바삐 돌아쳤다. 은녀는 성칠 오빠가 준 장 꿩 깃털을 한대 뽑아 사랑방 천정에 꽂아놓았다. 명순은 그 장 꿩을 뜨거운 물에 튀를 해 곰의 고기와 함께 칼 모태에 놓고 돔박돔박 칼로 썰어 큰 가마에 얹었다.       은녀가 부엌 아궁이에 장작을 넣고 불을 지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가마에서 쌕김이 쌕 소리와 함께 뿜겨 나왔다.      창렬은 지팡이를 짚고 마당에 서서 기침을 쿨룩쿨룩 하면서 지붕우의 성칠 네를 쳐다보았다.      “수고들 했네. 사닥다리를 주의해 내려들 오게나.”     성칠 네가 금방 사닥다리에서 마당에 내려서기 바쁘게 한길수가 응삼과 수길 등 하인들을 데리고 마당에 쓸어들었다.     “에헴, 하긴 잘하는구먼. 은녀는 들여보내지 않고.”     번들이마에 중절모자를 삐뚤게 쓰고 거들먹거리는 길수를 보고 기준의 얼굴에서는 언짢은 기색이 유표하게 흘렀다.     은녀는 벌써 겁을 집어먹고 명순의 뒤에 숨어 두 손을 가슴 위에 맞잡고 서 있었다.     성칠은 아주 너그럽게 한 씨 댁의 앞에 다가갔다.     “한영감, 여기는 뭘 하러 행차했소?”    한길수는 말이발을 앙다물고 투덜거렸다.    “자네 삐칠 일이 아니네. 병 치료에 남의 돈을 잘 썼으면 갚을 줄도 알아야지. 양심이 있는가? 이젠 석삼년이 되도록 본전도 한 잎 갚지 않았단 말이오.”     그때 실 돌피 같은 응삼이 우쭐해서 은녀 쪽으로 다가갔다.      “은녀야, 어서 우릴 따라 가자. 괜히 집 기둥이 뽑히겠다.”     그때 옆에 서있던 기준이가 어깨로 응삼을 콱 밀쳤다.     “누가 감히 이 집 기둥을 뽑아간다던가?”     “내다!”     한길수는 호랑이처럼 고함치며 발길로 짚 기둥을 탁 찼다. 그 바람에 천정에서 흙 부스러기가 우수수 흩날려 떨어졌다. 주먹으로 벽을 꽝 치자 주먹만큼 벽이 우멍하게 패여 들어갔다.     “어느 놈이 빚을 갚지 않고 내 앞에서 큰소릴 친단 말인가! 엉?!”    기준이 한발 앞으로 나서는 것을 성칠이 막으면서 웃는 얼굴로 나서며 비아냥거렸다.     “한 씨 주먹이라면 이 명천 바닥에서 누가 모르겠소? 손가락을 빼  빚을 갚겠소?”    한길수는 목을 옆으로 삐뚤면서 귀를 기울였다.     “무슨 말인가?”     성칠은 한영감에게 다가서 나직이 말했다.      “한 달만 말미를 줍소. 내 사냥해서 대신 갚아주지.”      “또 기다려? 안 돼! 오늘 은녀를 데려가야겠네!”     한길수가 으르렁거리는데 응삼이 옆에서 길쭉한 박대가리를 가로저으면서 풍을 쳐댔다.    “그렇지요. 오늘 안으로 저 은녀를 데려가야 하겠네. 데려가구 말구. 흥!”    응삼은 창렬 쪽으로 박대가리를 돌리더니 뱁새눈을 부라리었다.     “나으리 벼락 같은 성미를 모르는가? 날래 은녀를 보내라구.”    그때 기준이 썩 나서면서 들이 댔다.    “한영감, 대체 빚을 얼마나 졌다고 은녀가 들어가야 합둥?”    한령감은 개화장으로 땅바닥을 콕 찌르면서 고함쳤다.    “빚을 진지 석삼년이 되니 이자에 이자까지 120원이네. 30원이면 소 한마리야. 아니, 자네들은 뭔가? 더운밥을 먹고 괜히 식은 걱정하다가 다치지 말게.”    길수는 머리를 돌리더니 고함쳤다.    “얘들아, 뭣들 해? 어서 저 은녀를 데리구 가자.”     하인들이 우르르 쓸어가서 은녀의 양팔을 잡고 끌어당겼다. 그러자 기준이 힘줄이 꿈틀거리는 팔을 휘둘러 하인의 귀쌈을 짝 갈기면서 땅방울같이 고함쳤다.     “썩 피키지 못할까? 백주에 감히 남의 양가집 고운 딸을 빼앗아간단 말인가! 엉?”     한영감은 주춤 뒤로 물러섰다. 그는 자기나 뺨을 맞은 모욕감이 들었다.     “아니, 저 놈이 개배때기를 차도 주인을 보고 차라고. 네가 감이 내 하인을 쳐? 이 놈아!”     어지간한 사람이면 한 영감이 을러메기만 해도 질겁해 진작 달아났으련만 기준은 떡 뻗치고 서서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았다. 한길수가 덮쳐 와서 개화장으로 탁 내리쳤다. 기준은 개화장을 떡 받아 쥐고 비틀었다. 한영감은 준비 없이 개화장을 휘둘렀다가 뜻밖의 반격을 받아 개화장을 빼앗겼다. 한길수는 중절모자가 땅바닥에 떨어져 굴면서 박 같은 번대 머리가 드러나고 말았다.      “에끼, 이 놈, 언감 대들어?!”     길수는 숱한 마을 사람들 앞에서 망신당하고 말았다. 그는 체면을 세우려고 이번에 왼손으로 치는 척하다가 오른 주먹으로 기준의 얼굴을 내질렀다. 이번에도 기준이가 날아드는 주먹을 몸을 낮추면서 왼손으로 탁 쳐올려 막으면서 피했다. 뒤이어 날아드는 왼손을 턱 받아 쥐고 비틀었다.     “애개개, 이 놈이, 울뚝이놈. 애비 같은 사람과 정 버르장머리 없이 노는구나.”     이때 응삼이 뒤에서  영팔, 수길 등 하인들에게 고함쳤다.     “자네들은 뭘 하는가? 주인어른이 당하는데.”      영팔과 수길은 동네방네에 소문난 한다하는 싸움군이였다. 그들은 대판 팔을 걷고 싸움판에 뛰어들었다.      “기준아, 그만해라!”     성칠이 말렸다.     이때 은녀가 고함치면서 앞에 썩 나섰다.     “이러지들 맙소. 내 부엌데기로 들어가면 모든 게 끝이 아니겠소.”     기준도 한길수도 모두 손을 놓았다. 한길수는 오른손목이 아파 왼손으로 부여잡고 오만상을 찌푸리었다.      “그래, 진작 그래야지. 에이, 팔목껍질이 다 벗겨졌군.”       한영감은 시어미 역정에 개 배때기를 찬다고 기준이랑은 감히 업신여기지 못하고 창렬의 목덜미를 잡아 활 밀쳤다.      “이게 다 네 놈 탓이야! 죽여치울 놈, 빚을 갚지 않고 저 놈들을 믿고 우쭐대?”     창렬은 엉덩방아를 찧고 땅바닥에 쓰러진 채  가슴을 부여잡고 기침을 쿨룩쿨룩 했다.     그새 응삼이가 땅바닥에 떨어진  중절모를 주어 한길수의 번대머리에 삐뚤게 씌워주었다.      뒤이어 하인들은 은녀를 붙잡다 싶이 하여 앞세우고 개울 아래쪽으로 향해 발걸음을 뗐다. 창렬과 명순은 저쪽으로 가면서 이쪽을 되돌아보는 은녀를 보고 땅을 치면서 울었다.     성칠은 보다가 안 되여 한길수에게 통사정을 하였다.     “은녀를 제발 데려가지 맙소. 내 사냥을 해서 꼭 빚을 물겠습구마.”     “은녀를 먼저 데려갈 테니까. 자네가 사냥을 해서 빚을 물면 그때 다시 내오게나.”    성칠은 별수 없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말았다. 그러나 기준만은 울뚝 밸을 못 이겨 눈에서 불길이 이글거렸다.     “사람을 업신여겨도 유분수지. 아무리 빚을 졌다고 남의 딸을 빼앗아가다니. 이 집에서는 어떻게 농사를 짓고 산단 말이요?”     한길수는 개화장을 휘둘러 기준이를 가리키면서 빈정거렸다.     “아하, 아직도 은희와 상호가 있지 않는가? 저 울뚝밸이 정말 귀찮게 논다니까? 이 담에도 오늘처럼 그렇게 버릇없이 놀다가는 내 버릇을 단단히 가르쳐줄테다.”    한길수는 개를 잡은 포수처럼 우쭐해 어깨를 으쓱하면서 응삼과 수길 등 하인들을 데리고 개울 쪽으로 내려갔다.     저 불쌍한 은녀를 보라. 하인들에게 납치되다 시피 해 개울 아래쪽으로 내려간다. 그 처참한 광경을 보고 창렬은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가슴을 치면서 울음보를 터뜨렸다.     “다 내 잘못이지. 내 빨리 죽었더라면 빚을 지지 않고 살았겠는데. 은녀를 언제 찾아내오겠느냐? 어이구. 내 딸아. 쿨룩, 쿨룩.”     명순은 남편을 부축하여 딸이 랍치돼 가 텅 빈부엌으로, 괴로움만 남은 쓸쓸한 부엌으로 들어갔다. 적막감의 꼬리를 붙잡고 부자집으로부터 오는 공포가 하품 하며 스물스물 기어 들어온다.     둘째딸 은희는 저고리 동전으로 눈물이 글썽한 눈 굽을 찍었다.     상호가 엄마를 달래면서 눈물을 줄줄 흘렸다.      “엄마, 울지 마! 응? 울지 마. 흑, 흑, 흑.”     그 광경을 보고 모두들 땅이 꺼지게 한숨을 내쉬었다. 성칠과 기준은 격분해 씩씩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354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 샘물터에서 만난 처녀(10) 김장혁 댓글:  조회:885  추천:0  2024-01-11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 김장혁              제2장 고향 마을의 사람들                        1.샘물터에서 만난 처녀                   서리발 나는 해볕이 개마고원 원시림의 숫구멍을 내리쪼이기 시작하였다. 개마고원에는 마가을이 스치고 지나가면서 울긋불긋 단풍이 들어 별유천지였다.     성칠은 적토마 배를 툭 차 박차를 가하면서 령길을 벗어나 적송이 우거진 산비탈을 내리달렸다.     한참 달리다가 저 멀리 고향 마을이 내려다보이자 목이 말라 마른 침을 꼴깍 넘겼다. 말배에 처맨 조롱박을 풀어 쳐드니 물방울이 몇 방울이 마른 입술에 떨어졌다. 성칠은 입술의 물방울을 혀로 감빨다 말고 저 멀리 보이는 샘물터에 눈길을 박았다.     “샘물을 실컷 마셔야 하지.”     좁다란 골짜기 막바지 샘물터에서 웬 처녀가 바가지로 샘물을 한 바가지 한 바가지 물동이에 퍼담고 있는 것이었다. 하얀 무명저고리로 감싼 가녀린 어깨 위로 외태머리를 치렁치렁 드리운 처녀, 깜장치마를 입은 처녀의 동실한 뒷모습이 그렇게도 아름다울 수야 있겠는가.      (은년가? 은흰가?)       검둥이가 앞서 달려가려는 것을 성칠이 “휙!” 휘파람을 불어 불렀다.        그는 말을 달리다가 살짝 뛰어내려 살금살금 샘물터로 다가갔다.        (뒷모습은 은녀와 똑 같은데.)        성칠이 샘물터의 처녀 뒤까지 살금살금 다가갔는데도 처녀는 아직도 자취를 모르고 있었다. 성칠은 뒤로 다가가 두 손으로 처녀의 두 눈을 꽉 막았다.        “왁!”     “어마나!”     후닥닥 놀란 그 처녀는 두 손으로 성칠의 두 손을 잡고 손가락을 하나 꼭 잡아 푸느라고 안간힘을 다 썼다.     "누구야? 놔, 놔라니깐!"     성칠은 손가락에 힘을 더 주면서 걸걸한 목소리로 물었다.     “내 누구겠꽁?”     “이걸 놔봐!”     “맞추고야 놓을 테야.”      “성칠 오빠겠꽁.”       “아니다. 은녀야.”       “그럼? 아냐. 성칠 오빠 맞다. 응응. 이걸 놔.”      성칠이 아무리 목소리를 숨기려고 하였지만 은녀의 귀를 속일 수는 없었다.      성칠이 두 손을 활 놓자 은녀는 그의 두 손을 잡은 채 돌아앉으면서 쌍까풀눈을 똥그라니 떴다.      “오빠 맞구나! 나쁜 놈!”      은녀는 성칠의 넓은 가슴에 주먹을 안기다가 성칠의 가슴을 활 밀어놓았다. 성칠은 준비 없어 벌러덩 엉덩방아를 찧었다.      “얘야, 목이 말라 째지는 것 같다. 물 한바가지를 주렴.”      “그래요.”      은녀는 강원도 영월군에서 이사해 와서 남대치 말을 곧잘 했다.      그녀는 물바가지로 샘물을 한 바가지 푹 퍼서 손바닥으로 바가지 밑에 흐르는 물을 쓱 닦았다.      "자요."      그녀는 두 손으로 물바가지를 쑥 내밀었다.      성칠이 급히 받아 마시려고 하자 은녀가 물바가지를 도로 가져갔다.      “야, 목이 말라 죽겠는데 무슨 장난이야.”      “아니. 급히 마시지 말아요.”     은녀는 물바가지에 풀잎을 하나 뜯어 띄워 놓은 후 다시 내밀었다.     “자, 드세요.”     성칠은 물을 마시려다가 풀잎을 보고 상을 찡그렸다.     “물바가지 안에 웬 풀잎이냐?”     은녀는 생글방글 웃으면서 종알거렸다.     “오빠가 바쁜 걸음을 달려온 후 물을 급히 마시다가 얹힐 가봐 그래요.”     “오, 그래?”     은녀는 옥 같은 이를 드러내며 쌔물쌔물 웃으면서 성칠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성칠은 물바가지 물에 뜬 풀잎을 후후 불면서 샘물을 꿀꺽꿀꺽 마시었다.       “어, 시원하다. 이제야 살 것 같다. 자, 한바가지 더 주렴.”      성칠이 물바가지를 내밀자 은녀는 샘물을 또 한바가지 폭 퍼 주면서 종알거렸다.       “자, 드세요. 땅 밑에 샘물만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실컷 드세요.”      “그래, 은녀 샘물이 특별이 시원하구나.”     성칠은 시원한 샘물을 연속 두 바가지나 마셨다.     “호호호, 괜히 물배만 채우겠소.”     은녀는 또 한바가지 퍼서 두 손으로 내밀었다.     성칠은 그 한 바가지마저 다 마시고서야 뒤에 따라온 검둥이 대가리를 쓰다듬었다. 검둥이도 성칠과 은녀를 번갈아보면서 꼬리를 흔들거렸다.     성칠은 말배에 건 주머니에서 큼직한 곰의 고기덩이를 꺼내서 은녀에게 내밀었다.     “이건 뭐예요?”     "사냥한 거야. 집에 가져다 앓는 아버지한테 대접해라. 이 장꿩 꼬리털 하나만은 기념으로 잘 건사해.”    성칠이 정색해 말하자 은녀는 귀밑까지 발갛게 상기됐다.    “오빠, 은희 언니가 알면 괜히 오해하겠어요.”    “뭘, 오해한다는 거야. 오빠 너한테 주는 건데.  언제 셈평이 들겠니? 또 널 고와하면 뭐라니?”      “아이고, 부끄러워라. 호호호.”     은녀는 물바가지를 떨어뜨리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면서 외면했다.     가리마를 낸 귀밑에 칠색무지개가 더 곱게 피였다. 이팔청춘의 은녀는 실로 산속 숲속에 피어난 한 송이 함박꽃 같았다. 함치르르한 머리카락아래 짙은 눈썹아래 긴 속눈썹에 어울리게 새별처럼 반짝이며 새물대는 눈, 옥 같은 이, 구김살 하나 없는 빨간 입술, 빨갛게 달아오른 두 볼에 귀밑머리 몇 오리가 흘러내려 가을 산바람에 하느작거렸다.      “보기는?”       “보는데 고운 얼굴이 축나니?”      성칠은 은녀을 품에 와락 끌어안았다. 그 넓은 품에 안겼던 은녀는 덴 겁을 한 듯이 바삐 뒤로 물러섰다.     “놔요. 저기 누가 온다는데도.”      짐짓 골짜기아래 저쪽으로 눈치하자 성칠은 그 곳을 내려다보면서 손을 놓았다.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에이, 요게 어디서.”     “호호호, 아저씨가 이러면 되는가요?”     “그런가? 내 너무 한 겐가? 에크, 저게 네 엄마가 오는구나. 그럼 내 먼저 내려가겠다.이후에 무슨 일이 있으면 알려라."      성칠은 적토마 잔등에 훌쩍 뛰어올라 검둥이를 앞세우고 먼지를 뽀얗게 일구면서 굽이진 골짜기 아래로 사라졌다.       은녀는 촉촉한 눈길로 멀어져가는 성칠 오빠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골짜기 저 아래에서 한손으로 치마 자락을 걷어안고 올라오는 어머니를 보자 제정신이 펄쩍 들어 물동이를 이고 장 꿩과 곰 고기를 들고 아래로 치마자락이 휘날리게 내리 걸었다.        은녀가 인 물동이에서 바가지 물동이에 부딪치는 소리가 동 동 동 절주 있게 들려왔다.        은녀는 금방 있은 분간하기 어려운 일에 생글 웃다가 무거운 그림자가 얼굴을 스쳐지나갔다.       햇님도 처녀 총각의 이런 연극을 많이 보았으련만 숫처녀의 웃음에 화답이나 하듯이 씨물 웃었다. 시원하고 맑은 가을 샘물은 여전히  뭘 조잘조잘 속삭이면서 흐르고 흘러 성칠이 네 집 앞을 굽이굽이 흘러내려갔다.       은녀는 물동이에서 얼굴에 흘러내리는 물방울을 손으로 닦으면서 어머니를 따라 집 안에 들어섰다. 그런데 응삼의 자그마한 주먹 낯을 보자 불길한 예감이 들어 주춤 멈춰 섰다.      “오, 은녀가 돌아왔구먼. 마침 잘됐다.”     응삼의 이지러진 애호박 같은 낯에 간사한 웃음이 흘러지나갔다. 은녀가 왼손에 쥔 장 꿩에 눈길이 닿자 주름살이 죽죽 간 그의 길쭉한 낯에 음흉한 그림자가 얼른거렸다.      은녀가 집안에 천천히 들어가 장 꿩을 부엌에 내리어 놓고 물동이를 내리어 물독에 쏴- 부었다. 그녀가 동이를 안고 다시 샘물터로 가려고 문 밖에 나섰다.      그때 집 안에서 쿨룩쿨룩 기침소리와 함께 엄창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얘, 은녀야, 가지 말고 들어오라.”     은녀가 집 안에 들어가니 아버지가 쑥 꺼져 들어간 가슴을 손으로 두드리면서 쿨룩 거렸다.     은녀는 바삐 물동이를 구들에 내려놓고 구들에 올라가 아버지 잔등을 두드려주었다.       창렬은 응삼을 내려다보면서 말하였다.      “작은 나리,  딱한 사정을 들어주오. 은녀를 데려가지 못하오. 내 병이 나으면 꼭 그 집에 들어가서 일해 빚을 갚아주겠소. 쿨룩쿨룩.”      은녀는 깜짝 놀라 발딱 일어나더니 이글이글 불타는 눈총을 응삼에게 쏘았다.      응삼은 개의치 않고 엄창렬에게 호통쳤다.      “애햄, 그래 자네가 언제 병이 나아서 3년 전에 진 빚을 갚는단 말이요? 약을 쓰겠다고 해서 뀌워줬더니. 참 량심없게 놀아? 은녀가 이젠 저렇게 컸으니 딸 신세라도 져야지 않겠소?”       부엌 쪽에 쪼그리고 앉아 있던 창렬의 처 명순이 두 손을 마주잡고 통사정하였다.      “조금만 말미를 줍소. 애 아버지가 저렇게 앓는데 은녀까지 들어가고 나면 이 집 농사는 누가 짛겠소? 딱한 사정을 좀 봐줍소.”      “그것도 말이라고 해?”     응삼이 발딱 일어나면서 뾰족한 참새 입을  짹짹거렸다.      “염치 있소? 신세를 졌으면 갚을 줄도 알아야지. 딸년들이 저렇게 컸는데 일도 시키지 않는가? 그래 요리 간에 보낼 예산인가? 은녀 안 되면  은희를 가져가야겠소.”      납덩이 같은 침묵이 집안에 흘렀다.      한참 후 응삼이 일어나면서 구렁이 같은 말 한마디 내뱉었다.      “정 딸년들을 못 들여보내겠으면 처라도 들여보내오.”      응삼이 엉덩이를 툭 털면서 바닥에 내려가 신을 신었다. 응삼은 문을 박차고 나가면서도 우멍 눈은 은희의 하얗고 말쑥한 얼굴과 풍만한 젖가슴을 흘끔 곁눈질했다.      그때까지 아버지 잔등을 두드리던 은녀가 쌍까풀눈을 들어 응삼을 바라보았다.      “나리,  내 들어갈테니 엄마는 놔 두세요.”       응삼은 실 돌피 같은 몸을 돌려 창렬과 은녀, 은희를 번갈아보면서 흐뭇한 웃음을 지었다.       “오, 그래 참 심청 같은 효녀로구나. 내일 인차 우리 집에 들어오라.”      창렬이 은녀를 밀치면서 일어나 손을 내저었다.     “저, 나리, 은녀는 죽어도 못 들여보내겠소. 내 눈에 곰팡이가 끼기 전에는 안 되오.”     응삼은 머리 뒤로 담배연기를 흩날리면서 뒤도 돌아보지도 않고 독살스레 을러멨다.     “내일 보내게나. 오지 않으면 이 놈의 집을 허물어 갈 줄 알아라. 퉤! 배은망덕한 놈들.”     응삼이 삽짝문을 열고 나가자 창렬은 은녀와 은희를 붙안고 잔등을 어루만지면서 눈물을 흘리면서 중얼거렸다.      “은녀야, 안 된다, 안 돼. 내가 죽으면 죽었지 너희들을 남의  부엌데기로 들여보내지 못한다. 안 된다, 안 돼.”      은녀는 아버지 잔등을 두드려주면서 하얀 얼굴에 눈물을 주르르 흘리었다.       뒤이어 그녀는 어머니와 함께 아버지를 헌 까래 위에 눕혀놓았다. 앓는 아버지 초췌한 얼굴을 내려다보는 은녀의 가슴은 한 오리 한 오리 저며 내는 것만 같았다. 눈물과 땀방울이 흘러내려 은희의 양 볼에 눈물범벅이 된 귀밑머리 몇 오리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이때 바깥이 어두워지더니 돌개바람이 사납게 불어쳤다. 순식간에 돌개바람에 창렬의 집 이영이 흩날려 하늘높이 날아났다. 앙상한 연목가지가 퍼런 하늘아래 덩그렇게 드러났다.  먹장구름이 덮쳐오더니 가을비 구질구질 쏟아져 내렸다. 을씨년스러운 하늘아래       집 안에서는 쿨룩쿨룩 기침소리에, 천정에서 새 떨어지는 물을 받느라고 분주한 소리, 명순과 은녀, 은희의 흐느낌소리가 반죽돼 상가집처럼 처량하게 귀를 아프게 했다.     은녀의 남동생 상호는 사내노라고 주먹을 으스러지게 쥐고 눈을 부릅뜨고 씩씩 거렸다.     땅거미가 질 무렵에 먹장구름이 흘러가고 가을비 멎자 기러기 몇 마리 끼룩끼룩 슬프게 울면서 날아 지나가고 있었다.
353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9) 진달래와 사냥군 김장혁 댓글:  조회:1140  추천:0  2023-12-13
      김장혁 작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 제1권        9 .사냥꾼과 진달래             햇빛도 비껴들지 못하는 원시림은 다시 무서운 정적을 되찾았다.     구철과 성칠은 발구에 곰과 이리 몇 마리를 싣고 귀로에 올랐다. 말을 탄 진달래는 앞에서 혹시 야수들이 덮쳐들까봐 앞길을 살피면서 달려 나갔다.     집에 돌아와 곰을 부리어 창고에 끌어 들여가고 나니 어느 덧 점심 때도 훨씬 지나갔었다.     성칠은 구철을 보고 “집식구들이 기다릴 것 같아 집으로 돌아가야 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구철은 손바닥을 탁탁 털면서 극구 말렸다.     “이 사람아. 숱한 짐승을 잡아 놓고 고기 한점도 먹지 않고 가겠나? 며칠 묵게나.”    성칠은 “아닙구마. 집을 떠나온 지 오래기에 가야 합니다.”라고 하며 기어이 떠나려고 했다.     “그럼 저 곰 고기와 멧돼지 고기를 얼마간 가지고 가게나.”    구철은 딸을 돌아보았다.    “멧돼지야, 오빠를 배랠 차비를 해라.”     “예, 알았어요. 아버지.한가지 여쭐 말씀이 있어요.”      멧돼지는 구철을 보면서 지청구를 들이댔다.      “왜 그래?”     구철은 나무장작을 안아 부엌에 들여가다가 몸을 뒤로 반쯤 탈면서 물었다.     멧돼지는 몸을 흔들어댔다.     “아버지, 이젠 멧돼지라고 부르지 마세요."      구철은 씨무룩이 웃었다.       "왜?"       진달래는 입이 뽀로통해 종알거렸다.      "성칠 오빠 나한테 고운 이름을 지어 주었어요? 뭐겠공?"       구철은 성칠과 진달래를 번갈아보며 물었다.      "뭔데?"      "진달래, 어때요?”     “그래?  참 좋구나. 백두산의 진달래는 눈 속에서도 얼어 죽지 않지. 진달래야, 해가 지련다. 어서 오빠를 모시고 갈 준비를 해라.”     “예.”     진달래는 생글방글 웃음 지으면서 나무장작을 한 아름 안고 아버지를 따라 부엌에 들어갔다. 이윽고 그녀는 집안에서 호랑이가죽옷을 한 견지 들고 나왔다.     “오빠. 이걸 바꿔 입어요. 가죽옷이 다 째졌어요.”    진달래는 성칠의 째진 웃옷을 봇기고 새 가족옷을 갈아입히면서 마음이 아파했다.    "에이고, 잔등이 멧돼지 이빨에 깊숙이 긁히었어요. 쯧쯧 , 피고드름이 다 맺혔어요.”     성칠은 호랑이가죽옷을 갈아입은 후 검둥이를 불러 뒷간 쪽으로 데리고 가서 검둥이의 째진 귀에 대고 오줌을 쌌다.      그러자 검둥이는 대가리를 흔들어 오줌을 털어버렸다.      “검둥이야, 오줌은 우리 조상 때부터 물려온 명약이다. 아까운 약을 털어버릴게 뭐냐?”       진달래는 피씩 웃었다.      (오줌이 무슨 명약이람? 진짜 명약은 우리 백두산 약초인데.)       구철은 벌써 곰의 각을 뜯어내느라고 여념이 없었다. 성칠은 구철을 도와 각을 뜯고 진달래는 나무토막을 안고 집에 들어가 물을 끓인다, 쌀밥을 짓는다 하면서 복숭아이마에 땀방울을 줄줄 흘렸다.      한참 후 성칠은 쌀밥에 멧돼지고기장국을 두 사발이나 먹었다.       구철은 더 만류할 수 없음을 알았다.       “성칠이, 저 곰 두 마리와 이리 두 마리를 가지고 가게나.”       그러나 성칠은 아주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그렇게 많이 어떻게 가지고 가겠습둥? 이 심산 밀림에서 굶어 죽을 번 했는데 덕분에 살아 남은 것만 해도 고맙습니다.”       구철은 아주 통이 큰 사내대장부였다.       “에끼, 이 사람아. 야수들에게 죽을 번 하면서 숱한 야수를 잡았는데 어떻게 빈손으로 보내겠나. 저기 적토마 옆구리에 싣고 가면 돼. 곰의 열도 둬 개 빼놓았는데 가지고 가게나. 내장 병에 참 좋은 약이지.”      성칠은 한 마을에 사는 엄창렬이 폐병이 심한 것이 머리에 또 올라 곰의 열 두 개는 받아두었으나 적토마마는 재삼 사양하였다.     “적토마를 보내고 뭘 타고 사냥하겠습니까?”     구철은 손까지 내저었다.      “적토마 두 마리나 되는데 걱정인가. 저 적토마는 새끼를 밴 암말이네. 명년 봄이면 망아지를 낳을게야. 근심두 팔자야. 곰 네 마리나 잡아두고 가는데 말 한필을 주는게 무슨 그리 대순가?”      구철은 통쾌하게  “허허허” 웃었다.     성칠은 적토마에 곰의 고기를 백여 근 달고 떠나게 됐다.     진달래가 고개를 갸웃하고 궁리하다가 성칠을 따라 나섰다.     “오빠를 바랠 게요. 가다가 또 야수무리를 만나면 어쩌겠어요.”     성칠은 말 잔등에 오르면서 히쭉 웃었다.      “근심하지 마오. 사냥꾼이 야수를 두려워 처녀의 호송을 받겠소? 소 웃다가 꾸러미 터지겠소.”      “멧돼지야! 아니, 진달래야. 조심해 갔다 오라!”      “예.”     성칠은 구철에게 큰 절을 올리고 진달래와 함께 적토마를 타고 말머리를 나란히 하고 천천히 떠나갔다.     검둥이와 얼룩이는 신이 나서 앞에서 쌍쌍이 꼬리를 휘저으면서 달려 나갔다.      그들은 붉게 타오르는 석양을 바라고 말을 타고 원시림 속을 달렸다. 적토마를 탄 성칠과 백마를 탄 진달래는 참말로 한 쌍의 백마왕자와 백마공주 같았다.      성칠이 피뜩 보니 말을 타고 개털 모자를 쓴 진달래의 얼굴은 눈 속에서 피어나는 한 떨기 매화꽃송이 같았다. 진달래는 성칠의 눈길을 느끼자 부끄러운지 두 다리로 말배를 툭 차더니 앞으로 쏜살같이 달려 나갔다.      그들은 눈보라 속을 헤가르면서 원시림에서 한참 앞으로 달려 나갔다. 한식경이나 달리니 눈 덮인 수림이 사라지고 단풍이 든 원시림이 나타났다.      성칠은 말고삐를 낚아채더니 진달래를 바라보며 당부했다.     "진달래, 이젠 해가 져가는데 어서 집으로 돌아가오.”     진달래는 말머리를 나란히 하면서 개털 모자를 벗어 다시 꾹 눌러썼다.      “괜찮아요. 여기부터 야수들이 많이 출몰하는 곳인데요. 좀 더 바래드릴게요.”      성칠은 진달래를 쫓아가면서 “아니야. 이젠 돌아가라고.”라고 하였다.      그러나 진달래는 계속 달려가면서 말머리를 돌리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또 한참 내리달렸다. 이젠 원시림이 끝이 나고 가둑 나무와 싸리 밭이 나타났다.      성칠은 또 말렸다.      "진달래, 이젠 돌아가오.”      그제야 진달래는 닫는 말을 천천히 멈춰 세웠다.      그녀는 개털 모자를 벗어 쥐고 성칠을 빤히 쳐다보면서 입을 열었다.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요.”       성칠은 곰의 고기를 넣은 가죽주머니를 바로잡아놓으면서 물었다.       “뭘?”       진달래는 먼 수림 속을 바라보다가 성칠에게 철색얼굴을 돌렸다.        “집에 어린애 몇인가요?”       성칠은 말채찍을 매만지면서 반문했다.       “아, 그걸 왜 묻소?”       진달래는 고개를 다소곳이 숙이면서 쌍태 머리를 매만졌다.       “물으면 안돼요?”      성칠은 한숨을 후- 길게 내쉬더니 솔직하게 말하였다.      “어, 괜찮지? 난 아직 자식이 없소.”       그 말에 진달래는 숙였던 고개를 들면서 의아한 눈길을 보냈다.       “왜요? 오빠는 아직 장가를 들지 않았는가요?”      그러자 성칠은 솔직히 대답하였다.       “아니요. 장가를 간지 15년이 되는데 자식을 하나도 보지 못했소.”       “그래요?”       진달래도 한숨을 호- 내쉬였다.       “형님은 아주 예쁘지요?”      성칠은 헤벌쭉 웃었다.      “어? 저, 그저 그래. 옛날부터 아내 자랑을 하는 건 상 머저리지.”      그러자 진달래는 손으로 입을 싸쥐고 사내애처럼 깔깔깔 웃었다.      “알았어요. 묻는 내가 우둔하지요.”      성칠은 원시림 쪽으로 되돌아보더니 물었다.      “진달래, 이젠 야자 해도 되지?”      진달래는 호호 웃으며 머리를 끄덕였다.      “되고말고요. 열두 살이나 이상 오빤데요. 얼마나 어색하구 장벽이 있는 것 같았는지 몰라요.”      성칠은 또 재촉했다.      “이젠 어서 돌아가라. 이 다음 사냥하러 이 근방에 오면 내 꼭 여동생 집에 올 거야.”     진달래는 떠나려 하지 않고 흉금을 털어내놓았다.     “오빠, 난 이 인적 없는 원시림이 싫어요. 생각 같아서는 나서 자란 고향으로 가고 파요. 어려서 돌 뿌리기를 연습하던 고향의 강가로 돌아가고 싶어요. 눈 감으면 고향의 강이 막 떠올라요. 그러나 아버지가 일본 놈을 쏴 죽인 죄로 돌아갈 수도 없어요. 오빠네 명천 산골에라도 가서 살고 파요. 그 곳에 큰아버지도 계시거든요. 아버지는 일본 놈들에게 잡힐까봐 이 산속을 떠나지 않거든요. 이렇게 짐승처럼 원시림에서 한 발작도 못나가고 5년 동안이나 갇혀 살았어요.”       성칠은 땅이 꺼지게 한숨을 후- 내쉬었다.       “아직 우리 명천에는 그 쪽발이들이 많이 들어오지 않았다. 그런데 일본 사람들도 잘 대해주면 그렇게까지 악독할까?”       진달래의 눈에서는 불길이 이글거렸다.       “오빠는 그 놈들을 몰라요. 얼마나 악독한 놈들이라고.”       “알았다. 내라고 그 쪽발이들을 고와 그러겠니? 그저 지껄이지 말고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살자는 거지.”       이어 그는 진달래의 손에서 말고삐를 잡아 채 말머리를 돌려놓으면서  작별인사를 하였다.       “이젠 돌아가라. 시간이 나지면 우리 명천에 아버지와 함께 놀러 오렴. 구장 큰아버지도 만나고. 빨리 돌아가라.”       진달래는 갈라지기 아쉬워하면서 이슬 맺힌 깜장 눈을 끔쩍이면서 작별인사를 하였다.      “오빠네 일가와 구장 큰아버지를 보면 인사를 전해줘요. 잘 돌아가세요. 오빠!”       “다시 만나자!”      적토마와 백마도 갈라지기 아쉬워 “오 호 홍!”, “투루루!”하고 투레질하면서 말머리를 돌려 서로 응시하였다.      적토마와 백마는 주인들이 박차를 가하자 남북으로 갈라져 천천히 달려 나갔다. 백마와 적토마는 점점 멀어져가고 말 잔등의 남녀는 자꾸 서로 뒤를 돌아보았다. 서로 흑점이 돼 아물거리다가 진달래는 눈 덮인 원시림 속으로 사라지고 성칠은 누런 개마고원 산기슭으로 사라졌다.       사냥군과 진달래는 공간적으로는 점점 멀어져갔다. 그러나 앞을 갈릴 수 없는 눈보라 속에 진달래와 사냥군의 알고도 모를 정은  백두산과 개마고원에 씨를 뿌리고 점점 깊어만 갔다...
352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8) 원시림의 총소리 김장혁 댓글:  조회:762  추천:0  2023-12-13
               김장혁 작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 제1권            2015년 04월 17일 09시 33분  조회:1567  추천:2  작성자: 김장혁                     8.원시림의 총소리            사나운 산바람에 눈사태가 공포스럽게 원시림에서 무너져내렸다. 눈너울을 들쓴 미인송들이 소소리 하늘을 꿰지르고 흐리멍텅한 하늘을 떠받치고 서 있는데 무시무시한 원시림에서 어둠이 죽음의 노래를 부르며 휩쓸어와 여기저기 기웃거렸다.       성칠과 검둥이가 백두산 기슭으로 한 둬 시간 내리 걸으니 눈 덮인 수림 속 저 멀리에 희미한 등불 빛이 가물거리는 것이 보였다. 인가가 있다고 생각하자 성칠은 피곤기가 오면서 배에서 꼬르륵 소리 나면서 시장기도 났다.      그는 안간힘을 다해 간신히 그 등불이 켜진 토굴집 앞에 이르렀다.      “왕 왕 왕!”      갑자기 송아지 같은 얼룩개 한마리가 덮쳐 나왔다. 허나 그 놈 얼룩개는 검둥이를 보자 꼬리를 흔들면서 서로 붙어 끼깅거렸다.     집 안에서 늙은이의 기침소리가 나면서 두런두런 말소리가 났다.     뒤이어 문 여는 소리가 나면서 웬 개털모자가 쑥 나와 두리번거렸다.     “주인님, 사냥을 왔다가 길을 잃었는데 하루 밤 묵으면 안 되겠습둥?”     “들어오오.”     집 안의 늙은이 목소리다.     “고맙습구마.”    성칠은 개털 모자를 따라 집 안에 들어갔다.    집 밖에서는 검둥이와 얼룩이가 서로 좋다고 뛰놀았다.     어두운 집안을 둘러보니 벽에는 호랑이와 멧돼지 등 산짐승가죽들이 줄줄 걸려 있었다. 곰의 가죽을 시꺼멓게 깐 구들에는 한 백발로인이 이불로 반신을 가리고 누었다가 상반신을 겨우 일으켜 반쯤 앉는 것이었다.   “할아버지, 절을 받읍소.”   성칠은 구척장신을 굽히더니 털썩 무릎을 꿇고 절을 올렸다.    “절까지 무슨?”    늙은이는 황망히 몸을 앞으로 굽히며 절을 받았다.     개털모자는 그때까지도 경계에 찬 눈길로 성칠의 아래위를 훑어보고 있었다. 하긴 아닌 밤중에 이 무인산골에 뛰어든 낯선 사냥꾼을 누가 소홀히 믿겠는가?     “얘, 뭘 하느냐? 저녁상이나 놓을 게지. ”      호랑이가죽옷을 입은 개털모자는 모자도 벗지 않은 채 “예, 알았어요.”라고 대답했다.      그 목소리는 은방울을 굴리는 듯 아녀자의 목소리었다.     성칠은 사냥총을 벗어 벽에 걸어놓고 그물망태기를 벗어 개털모자에게 주었다.      “사냥이 잘 되지 않아서 꿩 둬 마리밖에 잡지 못했습니다. 이걸 끓입소.”      늙은이는 사람 좋게 히죽이 웃었다.     “에이, 늙은 사냥꾼 집으로 왔는데 아무리 살기 막막하기로서니 그래 자네가 먹을 게 없을라고? 그만두게나. 사냥을 하노라면 사냥이 잘 안 되는 날이 있지.”     개털모자는 솥에서 김이 문문 나는 삶은 감자와 고기를 놋그릇에 담아 구들의 밥상 우에 올려다 놓고 은저 한 쌍과 숟가락을 갖춰 놓았다. 그리고 바깥으로 개 먹이를 들고 나갔다. 이윽고 개들이 먹이를 맛있게 먹으면서 끙끙거리는 소리가 들리었다.      “어른신도 함께 저녁을 잡숩시다.”     늙은이는 상반신을 일으켜 앉으면서 “우린 진작 먹었네.”라고 했다.     성칠은 눈속을 헤매면서 배고팠기에 삶은 감자 한 사발과 멧돼지고기 한 사발을 게 눈 감추듯 다 먹어치웠다.      그러자 음식에 취해 눈까풀이 천근 무게나 되는듯하였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그가 다리 아파 깨나 보니까. 등잔불 밑에서 아까 그 개털모자가 구들에 범의 가죽을 씌운 이불 밑에 누운 자기 다리를 자그마한 손에 눈을 쥐여 비비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개털 모자를 벗은 것을 보니 그제야 쌍태 머리 아녀자인 것이 완연히 드러났다. 산 속에서 자란 처녀애지만 꽤나 예뻤다.      성칠이 일어나려고 하자 늙은이가 옆에서 말리였다.      “누워있게. 겨울 신을 신지 않아서 발이 얼었구만. 멧돼지야, 눈으로 계속 비벼 냉기를 빼라. 그러잖으면 고생할 거야.”     늙은이는 기침을 쿨룩쿨룩 하며 뒷말을 이었다.     “여기 장백산은 가을에 눈이 펑펑 쏟아지네. 이후부터 장백산에 들어와 사냥하겠으면 겨울복색을 든든히 갖춰 가지고 오게. 나도 며칠 전에 산에 들어갔다가 불시에 눈이 터져서 혼났네. 고뿔에 걸린지도 며칠 됐네. 얘 멧돼지가 없으면 이 산골에서 내 홀로 얼어 죽었을 게요.”     성칠은 처녀애를 멧돼지라고 부르자 자기 귀를 의심했다.     (참, 마음씨 착하고 고운 처녀애를 멧돼지라니?)     한참 후 멧돼지라는 처녀애는 대야에 담았던 눈을 밖에 내다 던지고 들어왔다. 토막나무를 안고 들어와 부엌아궁이에 서리었다. 부엌아궁이에서 불길이 세차게 타 번지면서 부엌 쪽을 환히 비췄다. 그 불빛에 멧돼지라는 이름과는 달리 쌍태 머리를 가슴 앞에 늘어뜨린 처녀애의 예쁜 모습이 환히 보였다.     호랑이가죽옷을 입은 그녀는 숲 속에 핀 진달래 같다고 할까?      짙은 눈썹아래 이글이글 타 번지는 예리한 눈길과 우뚝 솟은 코, 두툼한 입술. 참말로 눈 속에 피어난 한 떨기 건실한 매화꽃송이와도 같이 예뻤다.     “그래, 젊은이는 어데서 왔게?”    늙은이 물음에 성칠은 멧돼지에게서 눈길을 뗐다.    “예. 명천군 상우남면 쪽에서 왔습구마. 김성칠이라 부릅구마.”    늙은이는 한숨을 후 내쉬었다.    “글쎄. 함경북도 사투리 보니 그렇게 짐작했네. 난 최구철이라고 부르는 늙은인데 황해도 개성에서 이 산골에 온 지 한 오륙년 되네.”     최구철은 담배를 말아 붙이었다.     “상우남면에 우리 개성 최 씨 네 집안 형님이 있네. 그 형님이 산골에서 서당 훈장질을 한다던데.”     “예- 바로 우리 산골 앞에 그런 분이 계십구마. 혹시 최구장, 그 분을 그러지 않습니까?”     최구철은 “맞아. 바로 그분이야.”라고 말하고 뒤 말을 이었다.     “큰아버지 구장형님을 데리고 우리 개성에서 떠나서 명천에 들어갔지. 구장 형님네 큰아버지는 모두 잘 있는지 모르겠소. 또 조카들은 다 잘 있는지 모르겠구먼.”     성칠은 손가락을 꼽아가면서 일일이 소개해드렸다.    “에이, 그 황막한 산골에서 뭐 심으면 잘 살겠습둥? 최구장의 부친은 세상을 뜬지 몇해 되고 자녀들도 모두 잘 있습니다.”    최구철은 한숨을 후- 내쉬였다.     “이걸 보오. 세상은 넓으면서도 좁지. 두루두루 알아보면 면목이 있거든. 구장 형님은 자식농사를 잘했네 그려. 허허허.”     아버지 말에 부엌아궁이 앞에 있는 멧돼지도 의심의 눈길을 완전히 풀었다.    솥에서 쌕 김이 쌕- 하고 나기 시작하였다. 멧돼지는 솥뚜껑을 열고 나무꼬챙이를 넣어 훌훌 저었다. 그리고 물을 좀 더 붓고 솥뚜껑을 닫은 후 또 나무토막을 부엌아궁이에 더 서리어 넣었다.     한참 후 멧돼지는 꿩고기를 걸이어 모태에 놓고 툭툭 찍어 돔박돔박 썰더니 세 사발에 담아왔다. 셋은 한집 식구들처럼 둘러 앉아 꿩 국을 후후 불면서 맛있게 먹었다.    최구철은 성격이 아주 시원시원했다.    “자, 이젠 밤도 깊었구먼, 곤하겠는데 한잠 푹 자기요.”    멧돼지는 웃방에 따로 성칠의 이불을 펴드렸다.    이튿날, 성칠이 눈을 떠보니 창살 밖이 벌써 환하였다.    정주간에서 흘러드는 구수한 장국냄새가 코를 찔렀다.    두런두런 부녀간이 낮게 주고받는 말소리가 들리었다.    “어제 따뜻한 꿩국을 먹어 그런지 몸이 거뿐하구나. 열두 쑥 빠진 거 같다. 손님한테두 멧돼지장국을 푹 끓어대접해라.”    “예. 알았어요. 그런데 멧돼지 고기 거덜 났어요.”    “일없다. 내 오늘 사냥하러 가겠다.”     그 말소리를 엿들은 성칠은 하루라도 더 있기 미안하였다. 그런데 일어나 앉으니 다리가 얼었는지 띠끔 띠끔 아파났다.     이때 최구철이 미닫이문을 열고 문턱너머 들여다 보는 것이었다.     “어, 일어났어? 간밤에 드문드문 신음소리를 내더구먼. 자네 다리 언 거 같소. 여기서 며칠 푹 쉬게나.”     성칠은 일어나 정주간에 절룩거리면서 나갔다. 그는 억지로 다리를 절지 않으려고 했지만 절룩거리는 다리가 발각나고 말았다.     “에이, 그 다리가 얼어도 웬간히 언 게 아니구먼.”      성칠은 대수롭잖게 여겼다.      “좀 지나면 나을 겁니다.”      성칠은 방바닥에 내려가면서 대야를 쥐고 밖에 나갔다. 그는 조상의 비방을 쓰기로 작심하고 집 동쪽에 간 그는 오줌을 대야에 받았다. 그때 검둥이와 얼룩이가 껑충껑충 뛰어와 끼깅거리면서 주둥이로 성칠의 바지를 들췄다. 성칠은 꿇어 앉아 손으로 검둥이의 뒤덜미를 쓰다듬어 준 후 언 다리에 오줌을 바르고 주물렀다.     최구철은 밖에 나와 소변을 보려다가 성칠을 보고 이상해 하였다.     “뭘 하나?”    “오줌으로 언 다리를 찜질합구마.”    “오- 오줌 약?”     최구철은 양미간을 찌푸리더니 대야의 누런 오줌을 들여다보면서 신기해하였다.     “오줌으로 어떻게 언 다리를 치료하겠는가? 이 사람아, 추운데 집안에 들어가게나.”      성칠은 최구철을 쳐다보면서 설명했다.      “때간에 오줌냄새를 피울빠봐 그럽니다. 이 오줌 찜질은 궁정 어의를 지낸 우리 증조부 때부터 물려받은 비방입니다.”    최구철은 오줌대야를 내려다보며 신기해했다.     “그래? 그래도 추운 겨울에 바깥에서 이게 뭔가? 들어 갑세.”  들어갔다.      성칠은 하는 수 없이 오줌대야를 들고 구철을 따라 집안으로 들어갔다.      부엌에 가서 숯불에 오줌 대야를 놓아 좀 따끈따끈하게 덮인 후 꺼내 한참 오줌 찜질을 하니 다리가 시원한 감을 느꼈다.      아침에 시원한 멧돼지고기장국까지 먹은 후 성칠은 사냥총을 메고 바깥에 나가는 최구철을 따라 총을 메고 나섰다.     구철은 말렸다.      “아니, 자넨 집에서 쉬게나. 언 다리를 가지고 어디로 간다고 그래?”      “괜찮습구마.”     성칠은 대수롭지 않은 표정을 지으면서 라고 하면서 기어이 따라 나섰다.      이윽고 구철과 성칠은 적토마를 타고 산 아래 수림 속으로 뛰어갔다. 그들의 앞에서 검둥이와 얼룩이가 길잡이로 나서 눈이 뒤덮인 수림 속으로 냄새를 맡으면서 뛰어다녔다.     그들이 말을 타고 한 20리 달렸을 때다. 백두산에 언제 눈이 있었느냐는 듯이 하얀 은세계는 사라지고 누런 옷을 입기 시작한 아름드리나무들이 하늘 높이 소소리 솟아있는 원시림이 나타났다.      백두산 꼭대기는 눈 덮인 엄동설한이었지만 여기 원시림은 아직 가을 풍경이었다. 아름드리나무들 속에서 말을 타고 들어가 하늘을 쳐다보면 나무 가지와 나무 잎들이 뒤덮여 새파랗게 보일뿐 푸른 하늘을 찾아 볼 길이 없었다. 다만 소소리 치솟은 아름드리나무로 이루어진 밀림 속으로 부채 살처럼 비쳐드는 실실이 은실금실 해 빛을 보아야만 맑은 날과 흐린 날을 가릴 수 있을 뿐이다. 밀림 속에는 천년 묵은 나무 잎들이 썩은 검은 부식토가 깔려 있어서 푹신푹신한 푸른 주단 같았다. 어떤 곳에는 썩박나무가 넘어가 다른 나무에 기대 서 있었다. 거기에는 버섯과 이끼, 가느다랗고 파란 잔풀이 듬성듬성 돋아있었다. 이따금 산새들이 수림 속에서 지저귀면서 노래했다.        검둥이와 얼룩이가 앞에서 달리다가 멈춰서면서 꼬리를 흔들거렸다. 한참 말을 타고 천천히 걷는데 산새들이 하늘로 풍겨오르면서  지저귐 소리 자지러지다가 멎어버렸다. 앞쪽 원시림 속에서 육중한 꺼먼 무리들이 오른쪽으로부터 왼쪽으로 지나가고 있었다. 달리던 적토마들도 겁이 나서 멈춰 섰다. 구철과 성칠은 서로 눈길을 마주치면서 히쭉 웃었다. 그들은 곰 대여섯 마리가 무리를 지어 거의 지나가기를 기다려 뒤에 떨어진 곰을 목표물로 정하고 앞으로 말고삐를 놓아 달려 나갔다.      구철은 방아쇠를 당겼다.      땅!     야무진 총소리가 고요하던 장백의 림해를 깨웠다.     총소리와 함께 곰 한마리가 쓰러져 나뒹굴었다. 한 마리는 배때를 맞고 주춤 하다가 장탄하는 그들을 발견하고 수림 속으로 죽기내기로 도망쳤다. 검둥이와 얼룩이가 뛰쳐나가 쓰러졌다가 되 일어나 도망치려는 곰을 물어재꼈다.      그들이 말을 놓아 덮쳐나갔을 때였다. 수림 속에서 웬 나무숲을 가르는 와삭와삭 소리가 요란스레 났다. 금방 앞에서 지나갔던 곰의 무리가 되 덮쳐 왔다. 적토마들도 놀라 앞발을 쳐들면서 “오 호 홍!”하고 말머리를 돌려 내뛰기 시작하였다.      “에크!”       뒤에서는 동료를 잃어 성난 곰들이 무리를 지어 검둥이에게 덮쳐들었다.      “검둥아! 이쪽으로 오너라!”     검둥이와 얼룩이는 귀를 뻘쭉 하더니 이쪽으로 도망쳤다.     구철과 성칠은 토론이나 한 듯이 두개 방향으로 나눠 달리다가 말머리를 홱 돌리었다.     구철은 제일 먼저 덮쳐오는 곰에게 명중탄을 안겼다.      땅!      저쪽에서 성칠도 명중탄을 퍼부었다.      땅!      곰 두 마리가 쓰러지자 뒤따르던 곰들이 끼깅거리면서 멈춰 섰다.     이때 성칠의 잔등 쪽에서 쉭- 하고 소리 났다. 머리를 홱 돌리는 순간 멧돼지 한마리가 거리대날 같은 이발을 빼물고 덮쳐들었다. 성칠은 몸을 홱 탈아 피하면서 총 탁으로 멧돼지 주둥이를 탁 갈겼다. 멧돼지는 이발이 깨져 비명소리를 지르며 땅바닥에 나 떨어졌다.      그러나 성칠도 그 놈의 앞발에 잔등을 긁히어 가죽옷이 죽 미여졌다. 수림 속 사처에서 곰무리들과 멧돼지들이 덮쳐 나와 위기일발에 처하게 되였다.    “성칠이! 도망칩세.”     “예!”     성칠이가 말머리를 돌려 도망치려 할 때다. 뒤에서 곰 한 놈이 뛰어나와 적토마 다리를 꽉 깨물었다. 놀란 말이 앞발을 쳐들었다가 내뛰는 바람에 성칠은 말 잔등에서 뒤로 퉁 떨어지고 말았다.     곰이 성칠을 물려는 위기일발의 순간이다.     쒹-     난데없는 돌멩이가 날아와 그 놈 곰의 주둥이를 까부셨다. 곰이 피를 토하면서 무서운 비명소리를 질렀다. 그 놈 곰은 대가리를 돌려 껑충껑충 수림 속으로 도망쳤다.     쒹- 쒹-    연이어 돌멩이가 날아와 뒤따라 성칠을 덮치던 곰의 대갈통을 연신 까부셨다. 곰은 황급히 수림 속으로 도망쳤다.     성칠이 마른 풀숲에서 일어나면서 여겨보니 뜻밖에도 호랑이가죽옷을 입은 쌍태 머리 멧돼지가 원숭이처럼 백마를 타고 달려오면서 돌멩이를 홱홱 뿌리고 있었다.     “메돼지 왔냐?”     “예!”     멧돼지가 연신 멧돼지와 곰들을 돌로 까부시자 힘을 얻은 성칠과 구철은 사냥총을 쏘아 곰 무리를 쫓아버렸다.     “오빠! 괜찮아요?”     멧돼지는 성칠의 째진 잔등을 보고 머리에 맸던 이봉을 풀어 잔등의 상처를 닦아주었다.     성칠은 대수럽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괜찮소.”     그는 적토마를 끌고 수림 속에 들어가 웃통을 벗더니 오줌을 누면서 손으로 오줌을 받아 자기 상처 입은 잔등에도 쓱쓱 발랐다.      구철은 성칠이가 끌고 오는 적토마의 다리를 굽어보며 혀를 끌끌 찼다.      “쯧쯧, 그 아픈 다릴 해가지고."      "비방 오줌 약을 썼으니 괜찮습구마."     "빨리 멧돼지와 함께 가서 발구를 몰고 오게나.”    성칠은 “제가 여기서 지키겠습니다. 가서 발구를 몰고 옵소.”    구철은 머리를 끄덕이더니 말을 타고 집 쪽으로 달려갔다.    “아버지하구 함께 같이 가오.”    성칠의 말에 멧돼지는 깜장 눈으로 빤히 쳐다보면서 “짐승들이 덮쳐오면 어떻게 해요?라고 했다.     멧돼지는 성칠의 이글거리는 눈길을 피해 몸을 외로 틀며 쌍태 머리를 만지작거렸다.     “올해 열 몇 살이오?”     멧돼지는 고개를 숙이면서 “열일여덟은 돼 보이는구먼.”라고 하는데 눈덮인 숲속에 피여난 매화처럼 이뻤다.    멧돼지는 나리꽃 한 송이를 뜯어 꽃향기를 맡으면서 “참말로 향기로운데. 난 올해 열아홉이예요.”라고 대답하고 나서 고개를 숙이고 쌔물쌔물 웃었다.    성칠은 후- 한숨을 쉬었다.     “한창 꽃피는 나이구먼. 그런데 아주 고운 처녀애에게 멧돼지라는 이름이 어울리지 않는구먼.”     그는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진달래라고 부르면 어떻소?”     멧돼지는 그 말에 반색했다.     “진달래? 최진달래? 호호호. 그 이름이 참말로 내 성미에 맞아요. 아버지는 멧돼지처럼 닥치는 대로 마구 뒤져 먹고 강하게 자라라고 멧돼지란 이름을 지었다고 해요.”      성칠은 감탄을 금치 못하였다. "방 난 내 눈을 의심하였소.어쩌면 처녀애가 말 타고 달리면서 돌을 백발 백중할 수 있단 말이오?”     멧돼지는 나무숲을 살피면서 종알거렸다.     “우리 집은 개성에서 한다하는 사냥꾼이었지요. 난 어려서부터 나무에 바라 오르기 좋아했죠. 또 그네를 뛰기 좋아했는데 이 나뭇가지 위에서 저 나뭇가지 위를 뛰어 다니기를 연습하였지요.”      성칠은 “돌멩이는 언제부터 뿌렸기에 그렇게 백발백중을 할수 있단 말이요?”라고 하였다.      그러자 멧돼지는 말고삐로 백마의 잔등을 살짝살짝 건드리면서 이렇게 대답했다.       “어려서 나도 아버지나 오빠처럼 사냥꾼이 되려고 사격을 배우려고 하였지요. 그런데 아버지와 어머니는 계집애가 무슨 사냥을 한다고 그러는가 총을 주지 않았어요. 그래서 산골 강바닥에 나가 돌을 뿌리는 연습을 했지요.”      그녀는 옆구리의 돌 주머니에서 돌을 꺼내 보라는 듯이 날아가는 새를 겨누고 씽 날렸다. 날아가던 새가 돌에 맞아 푹신푹신한 주단 같은 땅바닥에 뚝 떨어졌다. 그러자 얼룩이가 달려가 입에 물고 꼬리를 휘휘 저었다.      “얼룩아, 검둥이와 함께 나눠 먹어라.”      “오빠는 올해 춘추가 어떻게 돼요?”     성칠은 나이를 속이지 않았다.     “올해 이젠 서른하고도 두 살이나 되오.”      “어머! 그럼 우리 큰 오빠와 동갑이네요.”     “오빠 있소? 오빠를 두고 처녀애가 무슨 사냥이오?”    순간 멧돼지의 철색 얼굴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흘러갔다.     그녀는 수림 속을 쓸어보며 머리를 숙였다.     “오빠는 일본 놈들에게 어디로 잡혀갔는지 알 길이 없어요.”      멧돼지는 팔소매로 눈물을 닦으면서 돌아섰다.     “몇 해 전에 일본파출소의 마쯔무라 소장 놈이 개성에서 몇십리 떨어진 우리 산골에까지 들어 사냥을 하지 못한다고 윽박지르지 않겠어요. 우리 여섯 식구는 손바닥만 한 땅도 없어 농사를 짓지 못하고 사냥을 해서 사는데 이건 입을 닫아 매고 죽으라는 게 아니고 뭐예요? 우리 집에서 계속 사냥을 하자 하루는 마쯔무라 소장놈이 개다리들을 앞세워가지고 와서 사냥총을 빼앗아가겠다고 야단치지 않겠어요. 성이 꼭뒤까지 치민 경호 큰오빠는 사냥총 탁으로 일본 놈을 한대 갈겼죠. 그러자 마쯔무라 소장놈은 ‘이 놈을 강제징용에 끌어가야겠다.’고 을러메더니 사냥총을 빼앗고 경호 오빠를 마구 끌고 가지 않겠어요. 경호오빠는 강박군대에 끌려가 간도에 들어갔다고 해요. 경호오빠가 끌려간 후 며칠이 지나서 마쯔야마 놈이 또 경환 둘째오빠마저 끌고 가려고 했어요. 그러자 아버지는 분이 치밀어 김치 움에 치워놓았던 사냥총으로 그 놈을 쏴 눕혔지요. 일본 놈들은 뜻밖의 습격을 받자 다리를 맞고 쓰러진 마쯔무라 놈을 업고 꼬리 빳빳해 달아났지요. 그런데 누가 알았겠어요. 우리가 도망치려고 보 짐을 싸가지고 집에서 나올 때 도망쳤나 했던 일본 놈들이 우르르 들이닥쳐 앞길을 가로 막았어요. 일본 놈들의 총질에 경환 오빠와 어머니가 가슴을 맞아 피를 흘리면서 당장에서 쓰러져 숨을 거두었어요. 악에 받친 아버지는 사냥총으로 맞불질해 일본 놈 두 놈을 쓰러뜨리었어요. 혼 줄이 난 놈들은 혼비백산해 사처로 달아났어요. 그러자 나와 아버지는 마구 간에서 말고삐를 풀어 말을 타고 도망쳐 인적이 없는 여기 장백산 원시림 속까지 들어 왔던 거예요.”      성칠은 멧돼지의 하소연을 듣고 땅이 꺼지게 한숨을 쉬었다.      “오-  참 안 됐구만. 명천 우시장에도 쪽발이들이 들어왔다오. 허나 아직 우리 마을에까지는 들어오지 않았소. 큰 경을 칠 놈들이오.”      그제야 성칠은 자기가 집에 들어갔을 때 멧돼지가 경계의 눈길을 보낸 까닭을 알 것 같았다.      이때 검둥이와 얼룩이가 “왕 왕!”, “왕 왕!”하고 요란하게 짖어댔다.     동시에 사처에서 나무숲을 와삭와삭 헤치는 소리가 났다.      성칠이와 메돼지가 여겨보니 숲속에서 굶주린 호랑이무리와 이리무리가 곰의 고기 냄새를 맡았는지 아니면 사람과 말을 보고 잡아 먹자고 왔는지 몰려오고있었다.      성칠과 멧돼지는 토론이나 한 듯이 말 잔등에 뛰어올랐다. 성칠이가 먼저 호랑이무리에 대고 총을 쏘았다. 숱한 철 알이 우박 치듯 호랑이무리에 날아갔다.      호랑이들이 겁을 집어먹고 달아났다. 그러나 교활한 이리무리들은 적토마와 백마를 전후좌우로 슬슬 돌면서 포위하더니 불시에 우르르 덮쳐들었다. 백마가 다리를 깨물려 “오 호 홍!”하고 비명을 지르면서 앞발을 쳐들었다가 이리를 내리 짓밟고 뒤발로 차기도 하였다. 이때 멧돼지가 백마잔등에서 나무 가지에 뛰어 올라가 허리에 찬 가죽주머니에서 닭 알만 한 돌을 꺼내 연신 승냥이의 대가리를 겨누고 날렸다.    앞장서 덮쳐들던 승냥이 몇 마리가 비명을 지르면서 쓰러졌다. 검둥이와 얼룩이도 승냥이들에게 덮쳐들어 깨물었다.    땅!    이때 또 원시림에서 야무진 총소리가 났다.     피뜩 보니 수림 속에서 구철이 발구를 몰고 달려와 합세해 총탄을 퍼 부었다.     그들 셋이 총질과 돌팔매질을 하자 이리무리도 몇 마리 주검을 남기고 수림 속으로 꼬리 빳빳해 도망쳤다.
351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7) 김장혁 댓글:  조회:989  추천:0  2023-12-11
         김장혁 작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                                  제1권                      7. 민족의 성산 백두산              치마봉 아래 산기슭은 벌써 울긋불긋 단풍이 들었고 마른 풀잎들이 선들바람에 흐느적거렸다. 영월동 앞의 적송과 백송, 미인송이 빼곡히 들어선 원시림과는 달리 치마봉 기슭에는 잡목이 빼곡히 들어섰다.     푸르른 하늘에서 매가 돌개바람에 휘감겨 날리는 연처럼 빙빙 선회하다가 줄 끊어진 연처럼 내리 꽂힌다. 이때라고 생각한 성칠은 누렇게 번진 풀 속으로 검둥이를 추겼다. 검둥이가 코를 풀 속에 파묻고 냄새를 맡으면서 내달리다가 매가 돌던 하늘아래에 가서 멈춰서더니 꼬리를 휘청휘청 저어댔다.     “킁킁!”     개 코 방귀 소리를 들으면서 성칠은 그리로 살금살금 다가갔다.      웬걸!      알락달락 무늬 간 장 꿩 한 마리가 긴 꼬리털을 흐느적거리면서 까투리와 함께 뭔가 주둥이로 쪼고 있었다.      “휙~”      성칠이 휘파람을 불자 검둥이가 슬슬 그 자리를 피한다.      땅! 땅!      까투리는 폴싹 쓰러졌다.      푸드득!      총알을 빗맞은 장꿩이 하늘로 날아오른다.      땅! 땅!     장꿩은 맥없이 내리 꽂히더니 풀숲에 퉁 떨어졌다.     검둥이가 씽- 풀숲 속에 달려나가  꿩과 까투리를 한입에 물고 되돌아와 꼬리를 저어댔다.     성칠은 장 꿩과 까투리를 받아 쥔 후 요도로 배를 가르고 내장을 꺼내 검둥이에게 주고 그물가방에 그 두 마리 꿩도 걷어 넣었다.     이젠 해도 숫구멍을 내리쪼이기 시작하였다. 그물가방을 툭툭 치던 성칠은 흐뭇한 표정을 지으면서 멧돼지나 곰이나 호랑이라도 잡으려고 산속으로 더 깊이 들어갔다.      원시림을 걷고 걸어 어디까지 들어갔는지 짐작하기 어려웠을 때였다.      웬 일가?       불시에 수림속이 어두워지더니 때 아닌 안개가 뒤덮였다. 희끄무레하고 담담한 해 빛이 짙은 구름층을 겨우 뚫고 나왔는데 몽롱한 안개바다 속에 빨려 들어가 대지는 어둠속에 잠겨있다. 숨 막힐 듯이 구름 밑에 안개 밑에 지지눌린 산봉우리가 삼라만상을 두꺼운 안개 속에 감춰버렸다.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안개는 천길 절벽의 천년 이끼 낀 청석 낭떠러지를 보일락 말락 하게 씻어 올리고 있었다. 참말로 미묘한 절승경개에 성칠은 가슴 뿌듯해 혀를 끌끌 찼다. 그 바위 틈 사이로 노란 잔등에 토색 줄이 쪽 간 다람쥐가 깡충깡충 뛰놀다가 쪼르르 나무우로 기어오른다.      자오록하던 안개가 기암괴석에 빨려들어갔는지 수림 속에 스며들었는지 차츰 하늘이 개이었다. 그런데 9월말 날씨에 갑자기 눈이 펑펑 쏟아지기 시작하였다.     (웬 일일까? 혹시 꿈을 꾸는 게 아닌가? )     성칠은 검둥개를 앞세우고 한참 눈 덮인 수림을 빠져나가니 수림이 끝나고 애나무가 자란 앞에 눈 덮인 깎아지른 절벽이 앞을 막았다. 그는 절벽을 톺아 올라 넘으면 사냥할 산짐승들이 있을 것 같았다. 절벽너머 세상을 보고 싶은 호기심과 충동에 의해 그는 돌 뿌리를 잡고 바위틈에 손톱과 손가락을 박으면서 눈 뿌리 아찔한 천길 절벽을 톺아 오르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절벽에 부석부석한 돌 뿌리는 훌렁 빠져 나왔다. 결국 그는 한길 너머 올라갔다가도 눈 덮인 땅바닥에 퉁 떨어져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래도 포기할 성칠이 아니었다. 그는 완강한 의력으로 손가락이 긁히어 피가 흘렀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의악스레 절벽을 톺아 올랐다. 검둥개는 절벽에 올라가지 못하고 절벽 우에 올라간 주인을 쳐다보면서 “왕왕!” 짖어댔다.     해님이 방실 웃음 지을 때 칠성은 피 나는 손으로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면서 절벽 앞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의 눈앞에는 백설을 뒤집어 쓴 산봉우리들 복판에 웬 바다같이 넓고 푸르른 천지물이 나타났다.     (하늘에 닿은 높은 산봉우리 복판에 바다와 같이 넓은 푸르른 천지가 있다니? 참 괴이한 일이 아닌가!)     성칠은 자기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참말로 인간세상에서 보기 드문 절승경개었다. 눈 뿌리 아찔하게 솟은 산봉우리들이 눈꽃노을을 쓰고 그에게 손짓하고 있었고 발밑에 있는 맑고 푸른 거울 같은 천지물이 파란 빛으로 그를 맞이해 주었다.     “이게 아버지 늘 말씀하시던 천하절승 백두산이 아닌가?”     성칠은 두 손을 입가에 벌려대고 목청껏 고함쳤다.      "야- 백두산아! 내가 왔다~”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백두산에 성칠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메아리쳤다. 검둥개도 벼랑아래에서 “왕 왕 왕!” 하고 요란하게 짖어댔다.     성칠은 백두산 꼭대기의 청신한 공기를 가슴 뿌듯이 한껏 들이마시고 자기가 선 봉우리를 둘러보았다.     아! 얼마나 아름다운 백두산인가! 백설이 뒤덮여있는 산봉우리아래 얼음굴이 숭숭 뚫린 곳에서 선인이 금단을 구웠다는 관면봉, 안개와 구름이 감도는 저 가마 덮개와 같은 화개봉, 독수리의 두 날개와 같은 예리한 두 암석이 치솟은 천곡봉, 천층만층 절벽으로 이루어진 신비석 같은 용문봉, 용이 드나드는 문이었다고 하는 용문봉 남쪽으로 하여 빨간 노을이 비낀 자하봉, 눈 밑에 절벽이 드문드문 검푸르게 치솟은 철벽봉, 옥기둥처럼 서있는 석벽 우에서 은실 같은 하얀 실 폭포가 쏟아져 천지에 흘러드는 옥주봉, 잔등에 사닥다리폭포를 업고 있는 제운봉, 눈을 뒤집어쓴 호랑이가 웅크리고 엎드려 있는 것 같은 와호봉, 하늘에 장검을 찌른 것 같은 백운봉…      성칠은 넋이 나간 사람처럼 백두산의 절경을 둘러보았다.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어떤 봉우리는 독수리가 날개를 펴고 바위에 날아내려 앉은듯하고 어떤 봉우리는 용녀가 거울을 마주하여 머리를 빗는 듯했다. 어떤 것은 흉측한 사자 같기도 하고 어떤 것은 원숭이가 장기 쪽을 들고 앉아 있는 것 같았으며 어떤 것은 큰 눈을 부릅뜬 백발 로인과도 같았다.      천변만화하는 백두산의 하늘에는 안개가 또다시 뭉게뭉게 피어올라 뭇산 봉우리들에 베일을 씌어 주더니 스르르 사라졌다. 갑자기 까만 구름이 서북쪽으로부터 둥둥 떠오더니 천지 못 속으로 스며들었다. 뒤이어 동남쪽으로부터 흰 구름송이가 떠올라 천지를 한 바퀴 빙 돌더니 천지 못 속으로 들어갔다. 한참 후에 흰 구름과 검은 구름이 천지 못 속에서 불끈 솟아오르더니 한데 뒤섞여 타래 쳐 오르더니 우르릉 꽝꽝 하고 우레 소리가 울리고 번개가 번쩍였다. 그것은 똑 마치 서북쪽의 흑룡과 동해바다의 백룡이 천지의 용과 천지에서 만나 잔치를 벌리었다가 영토분쟁이 생겨 싸움판이 벌어 것 같이 보였다. 뒤이어 하늘에서 눈 덮인 백두산과 퍼런 천지에 밤송이 같은 박재를 마구 쏟아부어댔다.        “아니! 이거 눈 덮인 천지간에 우박이 쏟아지다니!”      칠성은 놀란 소리를 지르면서 그물망태기를 들어 우박을 막았다.      아, 천하절승 백두산! 백두산 열여섯 봉우리는 하늘아래 어깨 겯고 우뚝우뚝 솟아 금수강산을 지켜선 대장부들 마냥 어깨 겯고 천지의 물을 굽어보고 있었다.      성칠은 청신한 산 공기를 마음껏 가슴 뿌듯이 들이켜고 나서 백두산의 천하절경을 넋을 잃고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다.      전설에 의하면, 먼 옛날에 한 도인이 하루는 눈이 뒤덮인 절벽을 내려 천지에 이르렀다고 한다. 헌데 못 속에서는 몇 마리의 잉어가 새빨간 꼬리를 하느작거리면서 헤염쳐 다니고 있었다. 도인이 잔파도에 들어서 잡으려 하니 그 고기는 하느작거릴 뿐 달아나지 않아 단번에 붙잡혔다. 이어 또 다른 한 마리를 잡으려고 하다가 꿈꾸던 도인은 발이 미끄러져 물에 쑥 빠져 들어가 다시 나올 수 없었다. 그가 바위를 붙잡고 백 길을 더 내려가니 돌층계가 사다리처럼 놓여있었다. 사처로 두리번거리며 여겨보니 전각과 용을 새긴 옥기둥이 금빛이 반짝거리는데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그가 한가운데 화려한 궁전으로 들어가니 백발이 성성한 한 로인이 수정 침대 우에 누워 우레 소리같이 요란하게 코를 고르고 있었다. 도인은 더 앞으로 못 다가가고 옥전에서 뒷걸음을 치다가 돌아서서 못 속에서 헤어 나오기 시작하였다.       한 백발자국 와서 머리 돌려 궁전을 바라보니 오색영롱한 것이 눈을 부시면서 은파 속에서 번쩍이는 것이었다. 도인은 사지 나른해지면서 맥이 없었다. 그는 돌층계에 기대서서 숨을 돌렸다. 그러나 온 몸이 한 토막의 나무와 같은 감이 들더니 파도에 따라 둥둥 뜨면서 불씨에 잠이 오는 것이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도인이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그의 곁에 사냥꾼 둘이 서 있었다. 눈을 번쩍 크게 뜨고 바라보니 자기는 이미 승자하에 누워 있었던 것이다. 두 사냥꾼은 못에서 한 사람이 둥둥 떠오자 원래는 서쪽비탈에서 동쪽비탈에로 헤엄쳐 가는 사람인가 했는데 건지고 보니 못에 빠진 도인이었다고 하였다. 사냥꾼에 의해 구원된 도인의 이야기를 듣고 그때부터 천지에 용궁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졌다고 한다. 성칠과 검둥이는 넓은 보천석 위에 올라가 앉아 한참 쉬다가 승자하를 따라 내려갔다. 전설에 의하면 옛날 천지 용궁에는 용왕의 다섯 마리 태자교룡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온 몸에서 린광이 번쩍이었는데 바람을 불러오고 비를 몰아 올수 있었다고 한다.       어느 해 봄, 배꽃이 키 다툼하며 피어날 때 이 다섯 형제는 가만가만 못 우에 떠올랐다. 아, 보지 못했으면 몰라도 이 그림과도 같은 아름다운 풍경은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들은 구름과 안개를 잡아타고 백운봉에 올라 천지의 물에 굴절돼버렸던 열여섯 봉 절승경개를 보고 완전히 도취돼버렸다.       그들이 지난 자리에는 다섯 갈래 깊고 깊은 골짜기를 남겼다. 그러나 봄빛은 좋으나 오래있지 못하게 됐다. 맏이는 사형제를 데리고 용궁에 되돌아가려 하였다. 그중에서 삼태자만은 인간춘색에 미련을 두고 도주에 슬그머니 사형제를 떨어져 달아났다.      꽈르릉!       갑자기  요란한 소리와 함께 두 산봉우리가 갈라지면서 한 가닥 빛이 서북쪽으로 날아가고 깊고 깊은 협곡이 하나 생겼다. 하여 천지의 물은 그 협곡을 따라 흐르게 되였으며 은파가 번쩍거리게 되였다. 이것이 바로 성칠이가 본 오늘의 승자하인 것이다.     그 후 셋째태자 용남은 용궁에 오래간만에 돌아왔다. 용왕이 그를 용궁의 규례를 어겼다고 쫓아버리자 배 한척을 무어가지고 그 우에 앉아 승자하를 따라 동해 바다 속의 용왕을 찾아가려고 하였다.      원래 천지 용왕과 형제간인 동해 용왕이 이 소식을 듣고 맏아들을 보내왔다. 천지동쪽으로 커다란 흰 구름송이가 날아오더니 셋째태자 용남이가 탄 배가 머무른 승자하 상공에 둥둥 떠 내려왔다. 구름 속에서 숱한 채색구름이 내려왔다. 그것들이 차츰 오색찬란한 비단옷을 입은 선녀로 변해 내려와 용남의 둘레에 달려와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면서 그를 옹위하였다. 뒤이어 흰 구름이 둥둥 떠내려와 용남과 선녀들을 감싸더니 하늘로 솟아올라 동해바다로 날아가 버렸다. 그리하여 용남이가 탔던 그 배는 주인이 없어 방향을 잃고 물길에 떠밀려 승자하 동쪽 기슭에 걸쳐 있었던 것이다.       성칠은 썩은 배를 총탁으로 두드리면서 개탄하였다.       “어허, 네 처지 가련하구나. 주인 잃고 물에 밀려 바위 우에 걸쳤으니까. 제 어이 동해바다에 떠가서 만리 창해를 헤가르며 달리랴. 오늘은 썩은 나무로 돼 어이 하여 후세사람들의 의논거리로 돼 답답한 한탄만 자아내는가!"      성칠은 바위를 부시면서 소리치며 급물살을 타는 승자하를 따라 한 3 리를 내려갔다. 갑자기 발밑에 우당탕퉁탕 천둥소리와 같은 요란한 소리가 울렸다. 천천히 바위 돌을 잡으면서 절벽 굽을 따라 내려가면서 보니 백길 절벽에서 거센 물이 쏟아져 내리는 것이 아닌가.       “아하! 이게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늘 외우던 민족의 성산 백두산의 폭포구나!”      백설 같은 폭포수는 눈사태가 무너져 내리는 듯이 청석옥석을 부시며 쏟아지고 있었다. 그 절경은 마치 흰 용 두 마리가 백설을 쏟아 붓는 것 같기도 하고 흰 한복을 입은 백화암의 궁녀들이 절개 굳게 뛰어내리는 것을 연상시키기도 했다. 그 맑은 물은 부서져도 흰 물 바래로 쏟아지고 물갈퀴와 안개를 사처로 펼치면서 아치교처럼 칠색무지개를 꽃피웠다. 아마 견우와 직녀도 여기 아름다운 아치교 같은 칠색무지개를 보면 은하수에서 만나 부둥켜 안고 울기 전에 먼저 여기 백두 폭포에 와서 아름다운 절승경개에 취해 웃고 떠들면서 놀리라!       폭포 옆 절벽 길을 내린 후 성칠은 한숨을 후- 쉬면서 폭포를 돌아다보았다.      “아, 참말로 백두폭포는 천하절승이구나.”       성칠은 폭포와 그 주위의 절벽을 둘러보면서 눈 덮인 바위 우에 앉아 숨을 돌렸다. 그런데 사냥꾼 성칠은 별스럽게 노린내가 어디선가 풍겨와 코를 간질이는 것을 발견하였다.      “왕 왕 왕!”     성칠은 대뜸 주위에 뭐가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는 사냥총을 들고 날카로운 눈길로 검둥개가 짖는 쪽을 바라보았다.      “에크!”     그리 멀지 않은 너럭바위 우에 얼룩호랑이가 우뚝 서서 불지가 뚝뚝 떨어지는 눈깔로 그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성칠이 사격거리를 줄이면서 허리를 구부정하고 앞으로 나갈 때었다.      “따 웅!”      백두산이 떠나갈듯이 호랑이가 울었다. 호랑이는 성칠이 다가가자 팔뚝 같은 꼬리를 휘젓다가 꼬리 빳빳해서 도망치는 것이었다. 성칠이 보니 호랑이가 어찌나 빨리 달리는지 어느새 산비탈에 오르더니 흐릿한 하늘과 눈 덮인 산 사이로 사라져버렸다.      성칠은 맥이 진해 호랑이를 뒤쫓지 않고 검둥이와 함께 산 아래로 부랴부랴 내리기 시작하였다.      백두폭포에서 쏟아진 맑은 물은 집채 같은 청석바위를 부시면서 흰 물갈퀴를 일구면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쏜살같이 흐른다. 마치 성난 백마가 수없이 청석바위우로 달리는 듯 쏴-쏴 소리치며 산기슭으로 굽이굽이 흘러 내려가고 있었다.      “오- 이 강이 바로 천지 동북쪽에서 흐르는 백하겠구나. 저 내륙에 가서는 송화강이고.”     성칠은 눈을 빠드득빠드득 밟으면서 그 백하에 다가가 맑은 물을 두 손으로 퍼 시원히 마셨다. 그러니 가슴에 백두 열여섯 봉이 솟는 듯 새 힘이 솟구쳤다.     (아버지 말씀에 의하면, 백하는 천고의 원시림을 적시면서 흘러지나 동북평원을 적시면서 송화강으로 탈바꿈하여 나중에 흑룡강과 우쑤리강과 합쳐 동해바다로 흘러들어간다고 했다. 백두산 동남쪽기슭에서 발원한 700리 두만강은 동해바다로 흐르고 백두산 서쪽기슭에서 발원한 푸르른 압록강은 서쪽으로 흘러 발해와 황해 어구에 흘러들어간다고 했다.)      그렇다, 송화강과 두만강, 압록강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원동의 이 땅을 적시면서 흐른다. 더 많은 수난사를, 더 높은 소리로 두런두런 아야기를 나누려고, 민족의 빛나는 력사를 더 높이 노래 부르려고 골짜기 어구에서 또 새로운 친구들을 만나 더 크고 세찬 강을 이루면서 바다로  몇천년, 아니, 몇만년 줄곧 흘러갔다.지만 끝내는 넓은 바다에 가서 만나서 서로 부둥켜 안고 바다에 오는 길에 수많은 수난을 겪은 이야기하면서 대성통곡치지 않는가.      백두산은 줄기줄기 뻗어 개마고원의 수많은 산과 태백산과도 이어졌고 북으로 줄기줄기 뻗어져 대흥안령과 소흥안령과 이어졌으며 서북쪽으로 료동 반도와 발해에까지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었고 동으로는 장고봉을 넘고 우쑤리강을 넘어 저 동해에까지 천고의 비밀을 안고 깊이 뿌리를 박고 있다.      이때 검둥이가 또 앞으로 뛰여나가면서 “왕!왕!” 짓기 시작했다.     성칠은 어께에서 총을 내리어 개가 짖는 쪽으로 겨냥하면서 살펴보았다. 금방 달아났던 호랑인가고 경계하였는데 웬 사슴이 절룩거리면서 김이 물물 나는 강물 쪽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이게 웬 떡이냐!)    “검둥아! 축!”     성칠이 지령을 받고 검둥이가 사슴을 쏜살같이 쫓아갔다. 사슴은 애처로운 비명을 지르면서 절룩거리며 눈밭에서 도망쳤다. 그러나 상한 다리를 가지고 뛰면 어디로 뛴단 말인가! 검둥이가 사슴을 거의 따라 잡을까 말까 할 때 사슴은 김이 물물 나는 강물에 풍덩 뛰어들어 건너갔다.     웬 일일까?     그 김이 물물 나는 강물을 건너더니 사슴은 다리를 절룩거리지 않고 쏜살같이 달아나는 것이었다. 검둥이가 아무리 쫓아가도 거리는 좁혀지기는커녕 점점 멀어졌다.      “제길! 그럴 줄 알았더면 총을 갈겼겠는걸.”      성칠은 닭 쫓던 개 지붕을 쳐다보듯 하였다.      “검둥이야! 돌아오너라. 호랑이라도 만나겠다.”      검둥이는 꼬리를 흔들거리면서 뛰어왔다. 사슴을 놓쳐 미안하다는 듯이 검둥이는 대가리를 눈밭에 파묻을 상하면서 엎드린 채 끼깅거렸다.     “괜찮아! 어서 내려가자! 날이 어두워지는구나!”     백두산에 어둠이 깃들기 시작하고 풍설이 일면서 무서운 귀신의 곡소리와 같은 비명소리를 내고 있었다.     성칠은 무릎까지 푹푹 빠지는 눈 속에서 허우적거리면서 골짜기를 따라 내려갔다. 미끄러져 넘어지면 일어나고 허기지면 그물 속에서 꿩 다리를 빼서 검둥이와 함께 끊어 먹고 갈증이 나면 눈을 한 움큼 움켜쥐어 먹으면서 한 발자국 한 발자국 힘겹게 산 아래로 걷고 또 걸었다.     마가을 해는 빨리도 지고 있었다. 벌써 해는 빛을 거둬가지고 물러서고 어둠이 원시림에 도사리고 있었다. 무시무시한 공포가 휘파람을 불려 여기저기 수림에서 으르릉거리는 이리떼들의 소리와 무시무시한 죽음의 노래를 연주고하고 있었다.
350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 (6) 김장혁 댓글:  조회:955  추천:0  2023-12-10
     김장혁 작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                                             제1권                                6.묵은 빚                 먹장구름이 기운봉을 칭칭 감싸더니 가을비를 구질구질 내리쏟아부었다. 먹장구름은 떼를 지어 몰려다니면서 꿍꿍이를 쑥덕거리다가도 제 밸에 맞갖지 않으면 다 익어가는 호박에 말뚝이라도 박지 못하는 것이 한인지 돌멩이질하듯 호박과 가을배추에 우박까지 투당투당 쏟아부었다.      "하늘도 무심하지."      "가을에 웬 우박이람?"     농사군들은 흐리멍텅한 가을하늘을 쳐다보며 두두거렸다.      한길수는 병완을 손아귀에 넣으려고 자기 집에 들어 살게 했을뿐만 아니라 쌀도 십여 말이나 주었다. 그런데 병완이 이 산골 막바지에 집을 짓고 든 후부터 마을 인심이 병완에게 쏠리고 자기 말이 잘 서지 않았다. 그러자 길수는 날이 갈수록 병완이가 아주 불편하게 생각 됐다. 지어 그를 이 산골에서 쫓아내야겠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길수는 뒷짐을 지고 마루에서 왔다 갔다 하다가 곰방대를 홱 휘두르면서 중얼거렸다.       “그래, 그 놈에게 빚더미를 들씌워서 쫓아내야지.”       그는 중문 밖에 대고 소리쳤다.      “거 응삼이, 영팔이!”      “예꾸마!”      대답소리와 함께 응삼과 영팔이 마루아래에 뛰어왔다. 마루 위에 서서 불호령하는 번대머리의 우멍눈에서는 무서운 번개불빛이 번쩍였다.       “거 머슴꾼들까지 다 데리고 병완의 집에 가서 빚재촉을 하게나.”       “예? 우리가?”      응삼과 영팔은 겁기 어린 눈길로 서로 마주 쳐다보다가 머리를 뚝 떨어뜨리는 것이었다.      “뭣들 하는가! 얼른 떠나지 않고.”     땅방울 같은 호령소리에 누가 언감 거역하겠는가.     그들은 목안으로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대답해 놓고 마지못해 무거운 발걸음을 뗐다.     그들의 뒤 잔등에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하하하, 항우 같은 병완이라도 견디기 어려울걸.”     길수는 곰방대를 휘두르면서 염소수염을 쓰다듬었다. 그의 눈길이 어디로 가면 어디에서 이글이글하는 불길이 타 번질 것만 같았다.      그는 마루 위에서 호랑이처럼 왔다 갔다 하다가 주춤 멈춰 섰다.       “아니야! 그 물소 같은 병완을 응삼이 후릴 수 있겠는가! 내 직접 가봐야지.”      길수는 집에 들어가 벽에 걸어놓은 중절모자를 번대머리 우에 올려놓고 특제개화장을 들고 문 밖을 나섰다.     이때 정주간에서 한창 분칠하던 월선이 문을 벌컥 열고 쫓아 나왔다.      “여보, 괜히 자는 호랑이 콧구멍을 들쑤셨다가 무슨 경 치려고 그래요? 병완이 누군데?”      그래도 길수는 개화장을 홱 휘두르면서 큰소리를 땅땅 쳤다.       “그깐 놈이 언감 어쩔라고.”      그러나 월선은 두툼한 입술을 계속 너펄거렸다.      “코나 떼우지 말구 오세요.”      “그 주둥아리를 다물지 못할까!”      그 호령소리에 월선은 입울 삐쭉거리면서 정주문을 쾅 닫고 들어가 버렸다.      길수는 개화장을 휙휙 휘두르면서 득의양양해서 중문을 지나 대문 밖을 나갔다.       실개울을 건너 골짜기 막바지로 올라가는데 저 멀리 덩그런 팔간 초가집 앞에서 나무를 패는 병완의 소잔등 같은 잔등이 보였다.       벌써 응삼이 장부책을 옆구리에 끼고 영팔 등 10여명 머슴을 데리고 올라가더니 장부책을 펼치고 뭐라고 꽥꽥 소리치면서 손으로 병완의 낯에 대고 삿대 질 하는 것이 보였다.      “10년 묵은 빚을 올해 안으로 다 갚도록 하게나.”       그 말에 집안에서 창준과 기준이 등이 다 뛰쳐나와 입을 짝 벌렸다.       그런데 괘씸한 병완은 근본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도끼를 휘둘러 나무만 팡팡 패는 것이었다. 그러자 한길수는 헐금씨금 숨이 바쁘게 달아올라가 꽥 소리쳤다.     “병완이. 빚 문서를 들었겠지?”     “흥!”     병완은 아니꼬운 눈길로 피뜩 길수를 보고는 계속 시퍼런 도끼로 나무를 팼다.     길수는 개화장을 짚고 서서 실돌피 같은 응삼 쪽으로 낯을 돌렸다.      “응삼이, 저 자식한테 장부를 불러줬는가?”      “예. 불러 주고 말구요.”      “아마 이 양반이 잘 듣지 못한 거 같네. 이 집 식구들이 다 듣게 그 10년 묵은 빚 장부를 다시 잘 불러주게. 아마 대대로 물어도 다 물것 같지 못할 거니까.”      “예. 알았습꾸마.”      응삼은 병완의 잔등에 대고 곡이나 하듯 빚 장부를 내리 읽었다.      “1903년, 아니. 1902년 노일전쟁 당시 12월 6일에 김병완은 일가식솔 열을 데리고 우리 주인님 한길수 씨의 집에 들어와 얹히어 살았다. 이듬해 1903년 9월 16일에 집을 짓고 나갔다. 열 식구 숙비를 계산하면 하루에 3원 50전으로 눅게 치더라도 280일이면 980원이라. 물 값은 하루에 10전으로 계산해도 28원이라. 변소사용세에 문턱세. 공 먹은 공기 세에 밟은 땅값까지 합치면 도합 67원 80전이라. 합계를 하면 총 빚은 1,075원 80전이라. 거기에 해마다 3푼 이자로 계산하면 10년이면 도합…”       “닥치지 못할까!”      그때까지 도끼로 나무를 팡팡 패던 병완이 시퍼런 도끼를 들고 돌아서면서 우레 같은 소리로 고함쳤다.       그 바람에 응삼은 깜짝 놀라 그 자리에 풀썩 물앉았다.       이때 한길수가 개화장으로 땅바닥을 쿡 찍으면서 한 발자국 나섰다.      “아하, 병완이, 사람이 빚을 졌으면 갚을 줄도 알아야지. 웬 고함질인가?”      “어쩌자고 이러오? 누가 이 골 안에 오겠다는 걸 오라 해놓구 지금에 와선 이게 무슨 짓이요?”      “아따. 아무리 결의형제라도 공 게면 공 게고 빚이면 빚이지. 그래 생떼를 쓰면 단가? 아름차하지 말고 천천히 갚도록 하오. 빚을 갚지 못하겠으면 이 집을 내놓고 내 개척해 놓은 이 마을에서 썩 물러가란 말이오. 그럼 그 산더미 같은 빚을 갚지 않아도 돼. 어험, 에헴. 헙. 쯧쯧쯧.”       “쳇! 그리 쉽지 않을걸!”        “어디, 두고 보자. 이 마을에서 배기는가?”      “나도 한마디 해두지만. 당신이 의리를 지키지 않는다면 나도 사정을 두지 않을게요.”      “그저 이 자식을!”      약이 오를 대로 오른 한길수는 개화장을 휘둘러  내리치려고 하였다.     옆에 섰던 영팔이가 긴 마른 장작을 쥐여 병완의 어깨를 탁 내리쳤다. 장작깨비 툭 끊어나 푸르르 날아 저 멀리 땅바닥에 가서 떨어졌다.           병완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떡 버티고 서서 영팔을 쏘아보았다. 다른 사람 같으면 장작개비에 맞았으면 진작 어깨뼈가 부러졌거나 푹 꺼꾸러졌을 것이다. 그러나 병완은 시퍼런 도끼를 떨어뜨렸을 뿐 까딱하지 않았다.     그는 뚝 부릅뜬 퉁방울눈으로 한길수를 쏘아보았다.     게다가 창준과 기준마저 괭이와 도끼를 들고 다가왔다.      창준은 키가 자그마하고 성질도 순한 편이었지만 기준은 아버지를 닮아 키도 크고 억대우 같이 생긴데다가 성깔이 아주 사나왔다.한길수는 숱한 사람들 앞인지라 순순히 물러설 위인이 아니었다. 그는 개화장을 들어 병완을 힘껏 내리쳤다. 병완은 어느 결에 개화장을 받아 쥐어 비틀면서 길수의 허리를 감아 안아 둘러메쳤다. 길수는 오만상을 찡그리며 겨우 벌벌 기어 일어나 질겁한 나머지 개화장을 쳐들었다가 스르르 내리웠다.      그는 뜻밖에 성난 사자처럼 덤벼드는 병완을 보고 억지로 웃음을 지으면서 말투마저 고쳤다.       “허허, 어험, 병완이, 이러지 말게나. 우린 의형제기 아닌가! 영팔이, 자네도 그만하게. 병완이, 내 무정한 게 아니요. 자네가 열 식구를 데리고 근 열 달이나 살았으면 빚을 갚는 게 옳지!”     병완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침을 퉤 뱉었다.     “그럼 내 당신네 헌 집에 있으면서 저 고래 등 같은 새 집을 지어준 목수공전은 얼마나 되는가? 내 당신네 집 농사를 10년이나 일전한푼 받지 않고 지어주건 어쩌겠는가? 그걸 3푼 이자로 계산하면 10년이면 얼마나 되는가? 우리 열 식구가 들어 산 것과 어느 게 더 많은가?”      그 말에 길수는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입이 쩍 벌어졌다가 딱 막혔다.      그는 남이 자기 신세를 진 것만 따졌지 자기가 남의 신세를 진것은 꼬물만치도 생각 해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한참만에야 길수는머리 돌았는지  제 쪽에서 오히려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그거야 자네가 우리 집에서 살면서 진 인정 빚에 못 이겨 한 일이 아닌가? 그래 의형제라는 게 그런 수고비까지 받겠는가? 배은망덕한 놈.”     병완은 마지막 일격을 가했다.      “어째 당신은 짝 시비만 하오?”     도리를 따지나 힘으로 싸워 보나 이기지 못하게 되자 길수는 시에미 역정에 개 배때를 차듯 개화장으로 응삼의 엉덩이를 툭 치면서 고함쳤다.     “바보 같은 놈, 돌아가자. 이런 시비곡직 없이 무지막지한 놈과 더 말해봤자 본 전도 못 찾겠다.”     “허허허.”      “하하하.” 병완 일가 식솔들은 길수가 기 꺾여 돌아가는 낭패상을 보고 모두 배를 끌어안고 웃었다.      마당을 감돌아 흐르는 물도 시원한지 쿨쿨 소리치면서 웃음 싣고 구름 싣고 흘러내려갔다. 그러나 웃는 애들 속에 서 있는 병완과 성희의 얼굴에는 수심에 찬 검은 구름이 스쳐지나갔다.     “아이고, 나 죽는다. 아이고, 허리, 다리, 팔이 다 아프구나. 좀 꽉꽉 문지르오.”     길수는 집에 돌아가자마자 구들에 마구 쓰러져 죽는 상을 했다.      월선은 길수의 허리를 문지르면서 비꼬아댔다.      “그래 숱한 사람들을 끌고 가서 빚을 받았는가요?”     “말도 말아. 병완 놈이 어찌나 우악스러운지 촉도 못 걸겠더군. 빚이야 갚지 않고 어디 견디는가 보라지.”     길수는 이를 뿌득뿌득 갈았다.     “에이, 그 놈 새끼를 내 놔두는가 보지. 이 산골에서 살기나 하겠소. 아이고, 병완이 생각만 하면 골통이 뻐개지는 것 같다니까.”     그러나 월선은 영감의 허리를 문질러주면서 한숨을 땅이 꺼지게 쉬었다.     “내 이전에 뭐라 했어요? 소같이 우둔한 병완을 끌어들이지 말라는데도. 혹을 떼버리지도 못하고. 이젠 길러준 개한테 발을 물리게 됐구먼.”     길수는 번들이마를 뒤로 쳐들어 돌리면서 잔소리를 했다.      “에이유, 쓸데없는 잔말 말구 좀 꽉꽉 문질러.”     “그만하면 됐지. 어쨌다고 잔소린기여?”     그러자 번들이마는 아예 반듯이 돌아누웠다.     “안 되겠소. 거 부엌 여를 와서 문지르라 하오. 젊은 게 손에 힘이 더 있겠지.”     월선은 영감한테 쌍까풀눈을 흘기면서도 시끄러워 머리를 곁채로 돌렸다.    “얘, 부엌 여야. 여기 오너라!”    “예.”     곁채에서 부엌여의 목소리가 들리더니 신을 작작 끄는 소리가 다가왔다.     월선은 집안에 들어서는 부엌 여를 쏘아보면서 욕부터 퍼부었다.     “에이, 저 망할 년. 주인이 아파 야단인데 인사말 한마디도 할 줄 몰라? 주리를 틀어놓을 년, 어서 나를 도와 주인님의 아픈 허리와 다리를 주물러 드려라.”      “예. 어데 모질 아픈가요?”      부엌 여는 구들에 꿇어앉아 길수의 허리를 꽉꽉 문질러주었다.     그제야 길수는 번들 이마를 베개에 붙이면서 두 눈을 사르르 감았다.      "그래, 그래도 젊은 게 손이 달라. 손에 힘이 있단 말이요.”     한참 후 번들이마가 눈을 번쩍 떴다.    “여보, 이젠 내 아픈데 없소. 조용히 자게 해주오. 은녀야, 거 냉수 한 그릇  떠오렴.”     “예.”     그제야 월선은 한숨을 호 내쉬더니 버릇처럼 또 두덜거리기 시작하였다.     “영팔이랑 큰소리나 쳤지. 병완 앞에서는 호랑이를 본 개 새끼처럼 주먹을 한번 휘두르지 못하고 꼬리 빳빳해서 달아나다니? 참, 기막힌 일이 아닌가요? 무용지물들을 한 무리나 기르는 거면 개를 기르겠어. 쯧쯧쯧.”     “시끄럽소. 정주간에 나가오.”     한길수는 월선을 활 밀어버렸다.     월선은 뒤로 밀려나면서 빈정거렸다.     “에이유, 시어미 역정에 개 배때를 찬다더니 이건 어데 가 꺾이고 누구하구 신경질을 써요? 흥!”      “썩 나가지 못할까!”     월선이 두덜거리면서 나가는데 부엌여가 냉수 한 그릇을 퍼들고 들어섰다. 길수는 비단요 우에 일어나 앉아 냉수를 받아 꿀꺽꿀꺽 마시고 사발을 주면서 부엌 여를 힐끔 쳐다 보았다.      어깨 넘어 치렁치렁한 쌍태 머리, 쪽 갈라 금을 낸 가리마아래 훤한 이마, 짙은 눈썹아래 물기 일고 정기 도는 한 쌍의 머루알눈, 주름 없는 말쑥한 얼굴, 꼭 닫힌 입술…     “후~”     길수는 한숨을 후- 내쉬었다.     부엌 여는 길수의 눈길을 피해 머리를 다소곳이 숙이면서 물 사발을 들고 정주간으로 나갔다.     “후~”      그녀의 등 뒤에서 길수가가 땅이 꺼지게 한숨을 쉬는 소리가 뜨겁게 들리었다.      이때 마당 쪽에서 신을 끗는 소리가 작작 나더니 응삼의 목소리가 울렸다.      “어르신, 어르신!”     번들이마는 미닫이를 활 열면서 “왜 그래?”하고 물었다.     실 돌피 같은 응삼이 어느새 집안에 들어와 길수의 귀에 대고 쑥덕거렸다.    “주인님, 지금 고을에는 일본 사람들이 득실거립구마. 일본 사람들에게 병완을 밀고해버리면 어떨까요?”    “쉿!”     길수는 입가에 손가락을 대더니 부엌 여를 힐끗 눈길질 했다.     “부엌 여야, 그만 문지르고 부엌에 나가 봐.”     부엌 여가 일어나 나가자 길수는 상을 찡그리면서 일어나 앉았다.    “일본 오랑캐 말인가? 흥!”    길수는 말 이빨 새로 흘러내리는 게 침을 쓱 문대고 이었다.    “건 신중해야 하네. 일본사람들이 그러지 않아도 전번에 저 뒤 산 수림을 보더니 목재가 욕심나 하더라. 자칫하면 호랑이를 쫓아내고 승냥이를 끌어들이는 격이 될 수도 있어.”     그제야 응삼은 길죽한 머리를 조아렸다.    “예, 그러고 보니 난 하나만 알았지 둘은 몰랐습구마. 그래도 주인님의 도량이 바다처럼 넓습니다. 해해해.”    이때 서울에서 공부하는 길수의 맏아들 철주가 트렁크를 들고 들어왔다. 학생모에 학생제복을 입은 철주가 늠름해 보였다.    “아버님, 안녕하세요?”     길수는 아들의 인사를 받으면서 입이 단통 쩍 벌어졌다.     “응, 그래. 서울에 가 공부를 하더니 시골 때를 말끔히 벗었구나. 말투도 서울말씨고.”     길수는 일어나려다가 엉거주춤 물앉았다. 허나 철주 뒤에 따라 들어서는 박단춘과 손자 녀석 명호를 보더니 꾹 참고 상을 찡그리면서도 일어났다.     “안녕하세요? 아버님.”     철주와 박단춘은 명호를 데리고 절까지 올렸다.     “오, 그래. 일어나라.”    철주와 단춘은 일어나 정주간에서 들어오는 월선에게도 절을 올렸다.    “에이고, 요 내 새끼야.”    월선은 손자 녀석을 그러안고 핥을 상을 하였다.    단춘이 정주간에 나간 후 철주는 길수를 보면서 물었다.    “허리를 상했는가요?”     “응, 길러준 개한테 물렸다.”    “예?”    철주가 일어나 상처를 보려 하자 길수는 그만두라고 하고 나서 병완과 있은 일을 죽 이야기하면서 수를 대달라고 하였다.    길수와 응삼이, 아들 철주가 한자리에 앉아 쑤군덕거리기 시작했다.    앞마당 살구나무 위에서 참새 몇 마리가 짹짹거렸다. 마당개도 왕- 왕- 짖어댔다. 집 안에서는 세 사람이 뭐라고 떠들썩거리다가 웃고 떠들었다.
349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 (5) 김장혁 댓글:  조회:940  추천:0  2023-12-09
               김장혁 작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                                                             제1권                                         5.양반집 건달           추석 이튿날, 하늘은 가없이 높고 맑고 파랗다. 꽃구름송이들이 듬성듬성 떠 춤추며 흘러가고 있어 더욱 낭만적이고 기분이 좋았다. 다람쥐들도 콧노래를 흥얼흥얼 부르며 볼이 뽈록하게 도토리를 입에 물어 굴에 들여가느라고 분주하다. 토끼도 겨울나이 준비에 승냥이 방어할 굴을 여러개 파느라고 뺑뺑 맴돈다.      병완과 성칠 부자는 곰의 가죽과 고기를 수레에 싣고 명천 우시장 쪽으로 떠났다. 겨울에 먹을 쌀을 얼마간이라도 장만해야 했다.      그들이 마을에서 벗어나 산골짜기 어구에 거의 들어설 때였다. 뒤에서 급촉한 말발굽소리가 들려왔다.      병완이 흘끔 뒤돌아다보았다.      한길수가 자주 빛 말을 타고 나는 듯이 달려오고 있었다.      한길수는 말을 타고 수레와 나란히 가며 지껄여댔다.      “병완이, 당신 배은망덕해도 한두 가지 아니구먼.”    그의 길쭉한 낯은 바위 돌처럼 굳어져 있었다. 우멍눈은 보기에도 무섭게 음험한 독살이 차넘쳤다.     “건 무슨 말이요? 어제 애들을 보내 데리러 가니 당신이 오지 않아가지구두. 그래 곰의 고기를 기준한테 보내지 않았소?”     “쳇, 옛말이면 듣기나 좋지.그 걸로 어느 코에 발라?”     한길수는 말을 탄 채 말상을 흔들면서 침까지 퉤 내뱉었다.     병완은 원래 인품이 후했다. 그는 수레에서 엉거주춤 일어나더니 허리춤에서 시퍼런 칼을 빼내 곰의 고기를 열 근은 실히 되게 썩썩 베 한길수에게 넘겨주었다.      그제야 한길수는 고기덩이를 받아쥐고 이리저리보더니 낯의 근육이 느슨히 풀렸다. 그는 말 잔등에 채찍을 날리면서 달려 가 버렸다.       하늘과 금을 그어놓은 듯 한 산등성이 령길에서 병완부자가 탄 수레와 한길수가 타고 되돌아가는 말은 점점 멀어져갔다. 가을바람이 우수수 불어친다. 벌거숭이 누른 땅 위에 맥없이 서있는 옥수수 마른 이파리들이 너풀거린다. 붉게 타는 듯 한 단풍잎이 어느새 철이 지난 듯이 지기 시작하였다. 저 멀리 높은 하늘에서 기러기 떼들이 줄지어 끼룩끼룩 남으로 날아갔다. 독수리가 검은 날개를 쭉 펴고 나래 치면서 먹이를 찾는 상 싶었다. 기러기 떼들이 산산이 피해 날아 나 버린다.     병완 네가 몇 해 전 봄에 짐짝을 메고 처음 영월동에 왔을 때 이 산골에는 한 씨 네 밖에 없었다. 그때 한씨 네는 억대우 같은 병완을 보고 밭이나 소작을 주어보려고 자기 집에 머물게 한 적이 있었다.     목수재간이 있는 병완은 손바닥 같은 몇 뙈기 묵밭보다도 산골짜기에 들어선 아름드리나무들이 제일간 마음에 쑥 들어왔다.     (저 아름드리나무들을 찍어서 함지를 파 팔면 쌀 근심은 할 게 없겠다.)     동상이몽이라고 한길수는 소작농으로 병완을 쓰려고 궁리하였고 병완은 목수 질하여 살 궁리를 하였다.     이튿날부터 병완은 산에 올라가 나무를 찍어 집을 지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한길수는 기어이 자기 집부터 먼저 지으라고 야단쳤다. 그리하여 병완은 넓은 골짜기 어구 새 집터에 한길수네 집을 지어주고 산골짜기 막치기 쪽의 더 좁은 집터에 자기네 집을 지었던 것이다.      그 후 선후하여 이 산골짜기에 덕성과 덕팔, 엄창렬, 성팔 네가 알몸신세로 처자를 데리고 이사해왔다.     한길수는 제손으로 농사를 하기 싫은데다가 병완이네 부자는 목수재간과 사냥재간으로 살아가기에 그들의 손을 믿고 농사를 지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소작농을 얻자고 그들을 오는 족족 받아주었다. 병완은 이 적적한 산골짜기에 친구가 생겼다고 그들을 먼저 자기 집에 들게 하였다.  봄이 오자 그들에게 새집을 지어주었고 함께 묵밭을 떠서 옥수수라도 심어 먹으면서 살아 왔던 것이다. 원래 이 마을은 한길수 네가 달이 솟아 오르는 산골이라는 뜻으로  승월동이라고 이름을 지었댔다. 그런데 병완과 엄창렬 네가 다 본이 영월이여서 아예 영월동이라고 불렀다. 그 바람에 덕성과 덕팔, 성팔이 네도 영월동이라고 따라 불러 영월동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한길수는 자기 딴에는 영월동에서 땅 몇 십 헥타르를 가진 부자노라고 어깨 으쓱하였다. 형님 한길주와 짜고 들어서 명천군 아전 질을 하던 자기 조부와 면장노릇을 하였던 아버지 산소가 이 산골에 묻혔다는 구실로 명천군 군수에게 금과 은냥을 먹이고 이 산골을 독차지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저 병완이 온 후 덕성과 덕팔, 성팔, 엄창렬이 네 마을의 인심을 다 가져가서 점차 자기가 뭐라고 해도 말이 통 서지를 않았다. 그는 내내 어떻게 무슨 구실로 병완이 네 일가를 이 산골마을에서 쫓아내고 다시 이 마을을 쥐락펴락 하고 싶었다.      한길수는 고래 등 같은 기와를 얹은 팔간태청의 넓은 마루에 앉아 곰방대로 번대머리를 썩썩 긁으면서 높다란 토성 너머 먼 산을 바라보며 음흉한 속궁리를 하고 있었다.      (병완아,어디 두고 보자. )      그는 무슨 생각이 떠올랐던지 곰방대를 쥐고 엉거주춤 일어나더니 마름을 불렀다.      “여보게, 응삼이!”      “예-”     곁방 문이 열리면서 실돌피처럼 생긴 응삼이가 괴춤을 쥔 채 맨발 바람으로 뛰어 나왔다. 그는 머리가 삼검불 같았지만 주인에게 해시시 웃어 보이면서 허리를 연신 꼽싹거리는 것만은 잊지 않고 있었다.     “주인어르신님, 무슨 분부가 계십둥?”     “에이, 저 함경도 말투만 들어도 정이 뚝 떨어져. 쯧쯧.”     길수는 버릇처럼 곰방대로 번들 이마를 쓱쓱 긁더니 뒷말을 이었다.     “거 병완이 10년전에 우리 집에 와서 살았잖아. 그 장부를 가져오게나.”      “예, 그런데 그걸 불시에 찾아 뭘 하겠습니다”      응삼은 입버릇처럼 또 함경말투를 쓰고 혀를 홀랑 내밀며 말투를 바꿨다.     “장부를 가져다 뭘 하려구?”     “앗따, 가져오라면 가져올 게지. 무슨 잔말이 그리도 많아?”     “예, 알았습구마.”     응삼은 뒤짐을 짚고 몸채에 홱 들어가는 번들 이마를 보고 투덜거렸다.     “난 또 무슨 큰일이나 났다고. 괜히 식전 아침부터 설치면서 남의 재미를 깨버릴 건 뭔가? 흥.”      누구의 명이라고 어기겠는가. 응삼은 바지 괴춤을 춰 입으면서 신을 작작 끌고 곁채로 들어갔다.     곁채 구들에는 아직도 이불이 어지러이 나뒹굴었다. 그 이불 한 쪽이 들렸는데 음삼의 여편네의 허연 허벅다리와 흘러내린 박속 같은 젖무덤이 드러나 있었다. 문소리가 덜컥 하자 응삼의 여편네 춘실은 이불귀를 들어 젖가슴을 가리었다.     “무슨 일이기이기에 식전부터 지랄인가요?”     “에이, 주인어른이 아마 또 병완과 맞붙을 예산인 모양이요. 장부를 가져오라고 하는걸 보니. 그 둥글 소 같은 녀석을 어쩌자고 지껄이는지 모르겠소. 어디 또 한번 혼나고 싶은 모양이지.”     응삼은 궤짝에서 장부를 꺼내더니 들고 나가려다가 앵돌아져 눕는 여편네에게 눈길이 돌아갔다. 그는 이불을 들어 덮어주더니 춘실의 볼을 살짝 매만지면서 구슬렸다.      “요, 귀염둥이야. 얼른 갔다 올게. 이젠 해도 한발 떴으니 일어나 밥이나 해라.” “알았어요.”     춘실은 이불을 잡아당겨 턱에까지 더 꼭 쓰면서 눈을 곱게 흘겼다. 아마 춘실은 작달막하고 실 돌피 같은 나그네라도 살뜰한 멋에 붙어사는 것 같았다.     응삼은 장부책을 쑥 뽑아 들고 몸채에 들어갔다.     한길수는 염소수염을 쓸쓸 어루만지면서 밥상에 마주 앉아있었다.     “자, 여기 앉게. 거 장부책에 있겠지? 병완이 언제부터 언제까지 우리 집에 와 있었다는 게 말이야.”     “예. 여기 있습구마.”     주인의 눈치를 살피던 응삼이는 주인의 가까이에 설설 기듯이 다가가 앉더니 근시안경을 걸고 장부책을 내리 훑었다. 담배 대여섯 모금을 빠는 새 응삼은 안경알 안의 빈대떡 같은 눈알을 데굴거리더니 장부책을 내밀었다.    “여기 있습니다. 1903년입니다. 그해 노일전쟁이 있은 해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1903년 음력 2월 9일부터 그해 가을 9월 16일까지 있었습니다. 한 반년 푼하구먼요.”    “고작인가? 거 2월을 12월로 고치게나.”    응삼은 안경알을 춰올리면서 번대머리를 건너다보며 난감해했다.    “아니, 그럼 년도가 틀립니다.”     한길수는 곰방대로 밥상을 탕 쳤다.     “에끼, 이 멍청아, 년도를 1902년으로 하면 될게 아닌가?”     “그런데 더 써넣을 자리도 없는데 어떻게 글씨를 고치겠습둥?”     “가져 오게.”     한길수는 장부책을 당겨가더니 퉁방울눈을 뚝 부릅뜨고 들여다보았다.     “이걸 보게나. 여기 건너금 두개 밑에 한 개를 더 그으면 한자로 3자가 되고잖는가? 여기 2자 앞에 열십자를 하나 더 써넣으면 될게 아닌가.”      응삼은 안경테를 붙잡고 빈대떡 눈을 크게 뜨고 들여다보다가 머리를 끄덕였다.      “아주 절묘합구마. 되겠습니다. 주인 어른신은 원래 이런걸 아주 묘하게 고치는데 이골이 텄습니다.”      “에끼. 이 자식. 한대 딱 맞고 싶은가? 쓸데없는 소리 말고 얼른 고쳐놓게.”     한길수가가 곰방대를 쳐들면서 으름장을 놓았다.      "아이고!”     응삼은 머리를 싸쥐고 비명을 지르면서 장부책을 안고 무릎걸음으로 비실비실 뒤로 물러서다가 사랑채로 나갔다.     한길수는 염소수염을 쓰다듬으면서 바삐 끌신을 끌고 물러가는 응삼의 가는 뒤 잔등을 바라보며 뒤 근심도 없지 않아 있었다.     “저 병완이를 건드렸다가 무슨 일이 생기지나 않을까? 어쩌다가 내 할아버지가 여기 함경도에 정배를 와서 이런 구렁텅이에 빠졌나? 저런 물귀신 같은 병완과 자웅을 또 결해야 하다니. 참 억이 막힌 일이다.”          한길수는 쩍 하면 할아버지를 원망하군 하였다. 그의 할아버지는 원래 황해도에서 아전노릇을 하였다. 그런데 무너져가는 조정과 매관매직의 그릇된 행위를 보고 바른 말을 하였다가 그만 도절도사에게 잡혀 곤장을 맞고 웅진에 정배를 왔던 것이다. 그런데 사람이 대바른데다가 지식이 있어서 몇 해 되지 않아 함경도 명천군청에 들어가 아전노릇을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길수의 부자간은 할아버지와 판판 달랐다. 길수의 아버지는 서당공부는 뒷전이고 전문 도박놀이터에 가지 않으면 기생놀음을 하였던 것이다. 가산을 탕진하게 되자 그의 아버지는 두 아들을 남기고 독주를 마시고 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자 길수의 어머니도 그날로 남편이 마시다가 만 독주를 마저 들이켜고 세상을 떴던 것이다.       하루 사이에 부모를 잃은 한길수는 아주 절망에 빠졌다. 원래 한길수는 아버지만은 달리 할아버지의 가르침 밑에 서당공부도 잘하고 참하였다. 그러나 부모가 돌아가자 굴레 벗은 말처럼 마구 구을러 다니며 못된짓이란 짓은 다 했다.       그는 점차 서당에는 다니지 않고 못된 짓을 하기 시작하였다. 나무장사군들의 나무단에 불을 지르지 않으면 나무꼬챙이로 어린애들의 언 귀를 짱짱 쳤다. 뒷간 옹이구멍으로 여인들의 허연 엉덩이를 훔쳐보지 않으면 똥구덩이에 돌멩이를 들이뜨려 똥 벼락을 맞게 하기도 하였다. 막내로 자란 그는 점차 돼지 심술을 꽉 묶어놓고 만든 고약한 심술쟁이로 변해갔다. 똥 누는 애를 물 앉혀 놓기도 하고 방아 호박에 똥오줌을 싸 넣기도 하였으며 되는 호박에 말뚝을 박지 않으면 칼로 호박껍질을 동그랗게 도려내고 호박 속을 파낸 후 똥을 싸 넣고 호박껍질 덮개를 살짝 덮어놓기도 하였다. 어디 그뿐인가.       한길수는 술집을 드나들면서 술이나 처마시고 쩍 하면 걸고 들어 싸우기가 일쑤였다. 우시장거리에서 한길수 무리가 왔다하면 모두 썩 피해갔다. 심지어 애들마저 한길수 말만 하면 울음을 딱 끄칠 지경이였다.      어디 그뿐인가?      어려서부터 녀자들 변소간을 옹지구멍으로 엿보더니 커가면서 개버릇이 커갔다. 길거리를 다니다가도 반반한 여자만 보면 오금을 못쓰고 뒤꽁무니를 따라다니며 지껄여댔다. 이쁜 녀자를 그날 안으로 재껴치우지 않고선 시름놓지 못했다.  반반한 딸을 가진 집에선 한길수 온다면 숨이 한줌만 해서 딸을 숨겨 놓느라고 야단쳤다.      한길수는 또 명천 우시장 거리 기생집에 오입하러 문턱이 다슬게 다니었다. 요즘엔 일본 기생년들 궁둥이 맛을 들여 집에 붙어있지 않았다. 아무리 기생출신이라도 월선은 영감이 기생행골에 이를 쁙쁙 갈았다.       한길수는 굴레를 벗은 말이요, 우리에서 뛰쳐나간 호랑이새끼 같았다. 그는 말이 양반집 아들이지 실지는 비단에 감싼 심술쟁이요, 싸움꾼이요, 오입쟁이었다.       한번은 길수가 씨름판에 구경을 갔다. 웬 키가 훤칠한 사내가 숱한 상대를 하나하나 이기고 황소를 타고 씨름판을 한 바퀴 도는 것을 보고 심술이 났다.      그는 팔소매를 썩썩 걷으면서 구경꾼들 속을 비집고 나가면서 자기 앞을 지나가는 황소를 탄 사내대장부를 보고 걸고들었다.      “어이, 당신은 일등이라지만 이 한길수와 씨름을 해보지도 않고 어찌 일등이라고 할 수 있겠소. 그 황소 잔등에서 내려오게나. 한판 겨뤄보겠나.”      그 거동은 거만하기로 짝이 없었다. 일등을 한 사내대장부는 흥이 다 깨지고 기분이 잡쳐서 소잔등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그는 소고삐를 자기 친구에게 넘겨주고 나섰다.       “장사는 누구신지 통성명이나 하기요.”       한길수는 어깨를 으쓱하면서 빈정거렸다.       “아니, 그래 당신은 이 명천에서 이름이 짜한 싸움꾼 한길수도 모르고 황소를 탔소?”     그 사내대장부는 넉가래 같은 손을 척 내밀었다.     “오, 그렇구먼. 나 상우남면 운주동의 김병완이오.”     “그래? 당신 키는 구척이요. 힘 깨나 쓰는 모양인데. 나와 한판 붙어 보겠는가?”      한길수가 걸고 들었지만 병완은 점잖게 받아 넘겼다.      “이보시오. 씨름판은 끝났으니 명년에 다시 씨름판에 나와 겨뤄 보는 게 어떻소?”       그러자 한길수는 우쭐해났다.      “아니, 일등을한 양반이 무슨 겁이 그렇게 많아? 어째 황소를 이 어른께 빼앗길 까봐 그래? 잔말 말고 한판 붙어보자.”      병완은 황소 잔등에서 훌쩍 뛰여내렸다.      그는 팔소매를 걷더니 씨름판 복판으로 들어갔다.      한길수는 병완의 뒤를 따라 들어가면서 모래바닥에서 돌멩이를 슬쩍 오른 손에 감춰 쥐었다.     심판이 그들 둘의 잔등을 치면서 “시작!” 하고 소리치기 바쁘게 길수는 오른손에 쥐였던 돌멩이로 병완의 무릎을 딱 치면서 뒤로 꺼꾸러뜨렸다.     구척장신이요, 힘장사인 병완은 무릎이 너무 아파서 힘도 못써보고 상을 찡그리면서 맥없이 뒤로 넘어졌다.      한길수는 손에 쥐였던 돌을 모래바닥에 떨군 후 발로 모래를 차서 푹 덮어 버리었다. 뒤이어 그는 어깨가 으쓱해서 씨름판을 한 바퀴 돌면서 빈정거렸다.     “보라고, 황소를 탄 일등이 내아래 무릎을 꿇었어. 흥! 일등도 그저 그래! 퉤퉤!”     이때 병완이 아픈 무릎에 묻은 모래를 툭툭 털더니 일어났다.     심판이 다가와 한길수에게 말했다.    “삼판양승이니 아직 두 판을 더 해야 결판나오.”     한길수는 손에 쥔 돌이 없어 당황해났지만 성난 사자처럼 황소숨을 거칠게 몰아 쉬면서 으르릉 거렸다.     “이 자식, 어디 죽고 싶으면 덤벼 봐라!”     그러나 병완은 쓰거운 듯이 피씩 웃으면서 길수에게 다가섰다. 그러자 한길수는 자신이 없으면서도 어찔 수 없어 마주 붙었다.     “시작!”      심판이  두 손으로 씨름군들의 잔등을 탁 치며 고함쳤다.     한길수는 왝왝 고함치면서 억대우 같은 병완을 이리저리 떠밀기도 하고 옆으로 밀어 붙이었다.     한길수도 한다하는 싸움꾼이였기에 병완도 소홀히 할 수 없었다. 그는 처음에는 한길수가 떠밀고 밀어 붙혀도 당하는 척 하였다. 그러나 한길수가가 숨을 돌리느라고 동작을 멈춘 순간 다리를 끌어당기다가 왼손으로 오른팔을 어깨 위에 둘러메고 오른손으로 왼다리를 당기다가 사타구니 밑에 오른팔을 쑥 넣고 건뜻 쳐들었다. 한길수는 숱한 구경꾼들의 머리 위로 두 다리를 뻐둑거리면서 두 손을 허우적거렸다.     “물러가라!”      병완은 길수를 머리 위로 강아지 휘두르듯 빙글빙글 휘두르다가 구경꾼들의 머리 위로 테 밖에 내동댕이쳤다. 어지간한 사람이면 면상이 모래에 박혀 잘못됐을 것이다. 그러나  날랜 길수는 허공 날아 떨어지는 순간,  원숭이처럼 살짝 모래불에 곤두박질하면서 다시 벌떡 일어났다.       "개자식, 어디 죽어봐라! 퉤!"       길수는 종아리 각반에서 시퍼런 비수를 뽑아들고 음흉한 우멍눈으로 병완을 쏘아보았다.       그래도 병완은 겁기가 하나도 없었다.       구경꾼들은 비명소리를 지르면서 와야 하고 흩어졌다. 길수가 비수를 휘두르면서 달려들어 배를 겨누고 푹 찌르자 병완은 옆으로 몸을 탈면서 오른발을 날려 비수를 차 떨어뜨렸다. 길수가 비수를 쥐는 순간 병완은 왼발을 날려 아래 배를 콱 걷어찼다.       “억!”       길수는  아래 배를 끌어안고 쓰러졌다.      구경꾼들이 박수갈채를 보냈다.      길수는 다시 덮쳐들고 싶었으나 숨이 꺽 막혀 맥을 쓸 수 없었다. 한길수는 아래배를 붙안고 창피한대로 삼십육계 줄행랑을 놓았다.       그 후 앙갚음을 하려고 길수는 싸움꾼 친구들을 불러가지고 병완이네 집까지 쫓아가 걸고 들었다.     "야, 이놈아, 오늘 씨름 결판내자."       병완은 길수가 덤벼드는 족족 멨다가 처박어주었다.      그는 길수를 꽉 안아 바자 밖으로 훌 내던졌다. 길수는 기신기신 기여 일어나 엉덩이의 먼지를 툭툭 털며 또 덤벼들었다. 이번에는 병완은 배잡이로 멋지게 길수를 짱 넘어뜨리었다.        "3판 양승이니 내 이겼소. 결판 났으니 어서 돌아가오."      길수는 손으로 턱에 묻은 진흙을 쓱 문대며 랭소했다.      "흥! 모레 또 해보자!"       따라왔던 싸움군 친구들도 길수가 병완의 적수가 아니라는 것을 보아냈다.       "형님, 그만하오. 상대가 아닌 것 같소."     "개소릴 작작 쳐! 내 그놈 허리를 뚝 분질러놓지 않는가 봐라! 퉤!"       길수는 날마다 지면서도 사흘이 멀다하게 찾아와 계속 병완과 걸고 들었다.      하루도 아니고 연 보름동안 길수는 병완과 씨름을 걸었지만 날마다 엉덩방아를 찧었다. 나중에 그는 시퍼런 작두를 들고 와서 죽기내기로 싸움을 걸었다.      미운 놈을 떡을 더 준다고 병완은 길수와 같은 자는 꺾어 놓는 것이 상수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 다음번에 한길수가 찾아왔을 때었다.       병완은 미리 준비해 놓은 집안의 술상에 길수의 손을 잡고 들어갔다.       “그럼 그렇겠지. 이 길수가가 누구라고 언감 이긴단 말인가! 허허, 으흠.”       길수는 병완이 주는“항복술”을 받아 마시고 개 잡은 포수처럼 어깨 으쓱해서 싸움군 친구들을 데리고 돌아갔다.       그 후에는 우시장에서 싸움을 걸고들 때마다 먼저 상대방에게 이렇게 묻군 하였다.      “너 운주동 일등씨름군 병완을 아느냐?”       상대방이 눈이 휘 동그래졌다.     “병완 힘장사 어떻게 아오?”       길수는 어깨를 으쓱하며 우쭐렁거리며 흰소리를 쳐댔다.       “병완도 다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 놈이 술상 차려놓구 무플을 꿇고 두손이 발이 되게 싹싹 비니 가만놔뒀지.”       병완의 결의형제라는 말만 들어도 대부분 싸움꾼들은 무릎을 푹푹 꿇었다.      "형님, 눈이 있어도 태산을 알아보지 못했소. 용서하오.”     "그럼 술 한잔 내야지. 으흐흐."      한길수는 이렇게 낯선 싸움군들한테서 항복술 한잔 얻어마시고 개 잡은 포수처럼 어깨를 살구고 우쭐렁거리며 길거리를 싸다녔다. ㅎㅎㅎ      
348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 4 김장혁 댓글:  조회:864  추천:0  2023-12-07
     김장혁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 첫 등고일: 2015년 04월 01일 11시 45분  조회:1712  추천:1  작성자: 김장혁                      4.충신 김려생             이튿날 이른 아침에 벌써 병완은 베 모자를 쓰고 베적삼과 베 바지를 입고 일가 로소를 데리고 할아버지 김수종의 산소로 떠나갔다.      함경도 명천군 상우남면 쪽으로 산등성이를 넘어 운주동 뒷산 기슭으로 가니 벌써 큰집 형님 병권과 하나밖에 없는 조카 관준과 큰손자 상철, 둘째손자 상렬까지 모두 베옷을 입고 산소에 와있었다.      어제 큰집에 갔던 창준도 산소 옆에 있다가 아버지와 어머니가 오는 것을 보고 마중 나와 인사했다.      “아버지, 어머니 오셨습둥?”      “오, 그래. 에이, 그 놈 함경도 사투리, 참.”      남편이 눈을 뚝 부릅뜨자 성희는 작은 앵두 입을 닫고 말았다.      병완과 병관 두 집 식구들은 산소 앞에서 서로 인사를 나누었다.      병완은 억대우처럼 생겼으나 형님 병권은 선비처럼 허약하게 생겼었다. 병권과 병완, 둘 밖에 없는 형제는 할아버지 김수종과 아버지 김승중이 과거를 본 후 궁정에 들어가 어의로 되였다가 봉변을 당한 것을 보고 과거장에 가지도 않았다. 하나 밖에 없는 녀동생 곰순은 남존녀비 세월에 공부도 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병권은 후토에 술을 부어놓고 큰절을 세 번 하였다.     “할아버지, 할머니, 그간 잘 계셨습니까? 자손들이 제를 지내러 왔습니다. 인사 받으십시오.”     아낙네들은 산소 앞에 제사상을 차리고 남정네들은 벌초를 하기에 바빴다.     병권과 병완은 벌초를 마치자 자손들을 죽 차례로 세우고 제주를 올리기 시작하였다.     “할아버지, 그간 조상들께서 저희들을 잘 보우해주셔서 우리 일가가 대대로 아무런 액운이 없이 앞날이 활짝 열렸습니다. 할아버지들의 바다같이 깊고 하늘같이 큰 은공을 우리는 대대로 잊지 않을 것입니다. 조상들께서 계속 우리 후손들을 행복하게 보우해주옵소서. 할아버지, 후손들의 절을 받으십시오.”      병권이 목이 메 말하자 모두들 넙적 엎드려 큰절을 세 번씩 올렸다. 병완은 산소 앞에 차린 제사상에서 차조이밥사발을 받쳐 들고 숟가락으로 큼직하게 한 숟가락 떠서 산소 옆으로 해 파묻었다.      “아침 대접이 늦어서 미안합니다. 할아버지.”      그들은 할아버지에게 제사를 올린 뒤 아버지와 어머니를 합장한 산소에 옮겨갔다.      “아버지, 아침식사가 늦었습니다.”      병권은 후 토에 술을 붓고 절을 한 뒤 병완과 함께 벌초를 하면서 눈물을 파란 풀잎에 뚝뚝 떨어뜨렸다. 자손들도 옷자락으로 얼굴을 닦았다.      제주를 붓자 누군가 먼저 흑흑 흐느껴 울자 모두들 와- 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병권은 하얀 수염을 흩날리면서 산소 앞에 꿇어앉아 흰 종이에 붓으로 쓴 글을 곡을 붙여 읽기 시작하였다.      “서울에서 궁중 어의로 계시던 할아버지와 아버지, 이 어인 일입니까? 이런 산골짜기에 묻힌 지도 어언 3년이나 됩니다. 이 도리깨자식들이 불효하여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잘 모시지 못해 죄송합니다. 이 불효자식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이제부터라도 우리는 대대손손 산소를 잘 모셔드리겠습니다. 구천에서 자손들을 도와주시면서 굽어 살피소서.”      제사행사가 끝나자 병권은 염소수염을 쓰다듬으면서 형제와 자손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얘들아, 너희들은 들어라. 우리 할아버지는 원래 이씨 조선 순조왕대에 궁중 어의였느니라. 할아버지는 조상들에게서 대대로 물려받은 오줌 비방 약을 잘 썼는데 그만 손조왕 왕실에 썼다가 그만 들키어 쫓겨났다. 내 아버지 명함은 김승중이셨는데 역시 순종조의 궁중 어의였다. 왕은 할아버지를 내쫓았다가 자존심을 꺾으면서 다시 할아버지를 황궁에 모셔 들여가지 못하고 아버지를 모셔갔다. 그런데 아버지도 할아버지처럼 오줌약을 썼다가 쫓겨 날 줄을 누가 알았겠느냐?”      병권은 목이 꺽 메여 술잔을 들어 꿀꺽 마시고 뒤 말을 이었다. 모두들 병권을 바라보면서 귀를 도사리었다.      산소 옆의 소나무에서 까치가 우짖는 소리 밖에 들리지 않았다.      “아버지 고향은 서울이었다. 그러나 그이는 할아버지를 따라 할아버지의 고향인 상우남면 바로 이곳으로 낙향하였다. 너희들이 생각해보아라. 아버지는 얼마나 자기 고향 서울을 떠나기 싫었겠느냐? 그러나 효자인 아버지는 떠나기 아쉬운 자기 고향을 버리고 할아버지가 항상 외우던 할아버지 고향으로 내려 왔단다. 그리고 여기에서 우리 형제를 낳았단다. 눈을 감으면 떠오르는 고향 서울이 얼마나 그리웠겠느냐? 하긴 고향 서울은 그리웠겠지만 그 멍청이 같은 순조왕이 있는 서울을 떠난 것도 잘 된 일이였지. 아버지는 생전에 그렇게 효자였다. 할아버지를 위해서는 자기 모든 것을 버리셨다.”      병권은 말을 마치자 모두들 일어나 산소에 술을 부어 올리고 세번씩 큰 절을 올렸다.     병권과 병완이 곡을 부르자 모두들 울면서 곡을 했다.     한참 후 제사상에 둘러앉자 병권은 이런 이야기를 하였다.     “아버지는 낙향한 후 병을 잘 보았을 뿐만 아니라 지식이 있어 이 상우남면에서 받들린 분이었다. 그래서 명천군읍에서 문서 벼슬을 하라고 면장이 추천하였다. 그러나 아버지는 벼슬에 흥취가 없고 그저 할아버지 이 고향에서 가난한 사람들의 병만 보았단다. 우리 영월 김 씨는 원래 경주 김씨에서 내려온 김씨 돼 그런지 심지가 굵고 어지간한 일에 머리를 숙이는 법이 없었다. 이전에 천년 신라를 통치해온 우리 경주 김 씨의 후손들은 다 그렇게 대틀이었지. 그까지 순조왕이 다 뉘라더냐?”      병완이 병권의 무릎을 툭 다쳤다.       “형님, 누가 듣겠소.”      병권은 병완의 무릎을 치면서 대수럽게 생각하지도 않았다.      “뭐라니? 아버지는 고향이 너무 보고 싶으면 돈을 벌어가지고 서울에 드문드문 가서 어린 실절 친구들도 만나보군 하였단다.”      이때 기준이가 움쭐 일어나면서 이렇게 물었다.      “큰아버지, 그럼 왜 우리는 경주 김씨라 하지 않고 영월 김씨라 합둥? 이 영월동과 무슨 관계있습둥?”      “그래, 아버지 말해 주지 않은 모양이구나. 허, 이러기에 족보를 만들어야 한다. 전번에 집안 문장 어른이 후손들의 이름을 적으러 왔던데 저기 상우랑 상훈이랑 다 적어갔다. 이 다음 족보를 찍을 때 다른 애들도 낳는 족족 일일이 찍어 넣어야지.”      병권은 기준에게 얼굴을 돌렸다.      “잘 물었다. 우리 영월 김 씨가 어째 경주 김 씨에서 나왔다고 하는가? 그럼 모두 들어두어라."      모두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병권의 옛말을 들었다.       “이조 제6대왕 단종 때 있은 일이다. 그러니까 1453년 좌우 되였을 때다. 그때 단종은 겨우 13살 밖에 안 되는 어린 임금이었다. 내 14세 조부 김려생(金丽生)은 그때 단종왕 때 궁정의 통정대부 정1품 벼슬을 했다.”      병완은  놋그릇에 물을 부어 형님에게 주었다.       병권은 물을 한 모금 꿀꺽 마시고는 뒤 말을 이었다.       “그런데 단종왕의 삼촌이 되는 수양대군은 일당을 모아가지고 단종왕을 왕위에서 끌어 내리고 자기가 왕이 되였단 말이다. 그자가 바로 이조 제7대왕 세조왕이었지. 김려생 할아버지는 그때 사육신들인 김종서 등 보다 못지않게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지조를 버리지 않았지. 그는 벼슬을 버리고 가만히 단종왕을 따라 강원도 영월군으로 내려갔다.”       병권은 너무 비통해 한숨을 후 내쉬고 나서 뒤이야기를 이었다.       “우리가 영월 김 씨로 된 데는 비장한 옛말이 있다. 그때 세조왕은 단종왕을 따라 다니는 충신들을 모조리 잡아 죽이려고 미쳐 날뛰었다.그래서 려생 할아버지는 감히 단종왕이 영월로 가는 마차를 따라 큰길로 가지 못하고 령길을 타고 묵묵히 따라 갔단다.그때 세조왕은 단종왕에게 시종 한사람과 시녀 두 사람을 딸려 보냈고 지금 영월읍 서북쪽으로 난 골안에 6간 집 한 채를 지어주고 살게 하였다. 그리고 늘 군사를 보내 어디로 도망치지나 않는가 감시했다. 그런 형편에서 려생 할아버지는 늘 먹을 것도 장만하여 가져갔다. 한번은 단종왕을 보고 도망치라고 권유하였지. 그런데 어린 단종왕은 삼촌인 세조왕이 두려워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부들부들 떨기만 하였다. 단종왕을 그냥 그자리에 모셔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한 려생 할아버지는 단종왕을 억지로 모시고 영월 북쪽에 있는 절로 가서 구경하는 척 하면서 도망칠 궁리를 하였다. 그런데 밀고가 들어가서 세조왕의 군사들이 단종왕을 잡으러 절까지 올라오고 있었다. 려생 할아버지는 바삐 단조왕을 절의 큰 구리종 속에 숨겨두면서 ‘누가 와서 불러도 까딱 대답하지 말고 신이 올 때까지 기다리십시오.’라고 했다. 그런데 단종왕은 뜨거운 구리종 속에 들어가 앉자마자 더워서 땀을 뻘뻘 흘리면서 물을 마시게 가져오라고 했다. 려생 할아버지는 절에 들어가 물을 찾았으나 중들이 물을 다 치워놓고 우물에 자물쇠를 잠가 놓아 물을 퍼올 수 없었다. 그래서 별수 없이 헌 바가지를 들고 물을 뜨러 산골짜기에로 내려가 냇물을 한바가지 퍼들고 올라왔지. 그가 거의 절에 돌아올 때 군사들이 들이닥쳐서 단종왕을 찾느라고 온 절을 발칵 뒤졌지. 려생 할아버지는 조마조마해 애 태웠단다. 그런데 일이 되지 않으려니까 그랬던지. 한 병졸이 단종왕을 찾다 못해 신경질이 나서 창으로 단종왕이 숨은 구리종을 떵 치면서 ‘이 놈 단종왕 나오지 못하겠는가?’하고 고함치자 단종왕은 자기가 거기 숨은 걸 아는가 해 벌벌 떨면서 구리종에서 나왔단다. 그리하여 단종왕은 다시 영월읍 서쪽 집에 갇히고 말았단다. 그 후 세조왕은 단종왕을 따르는 충신들이 영월에 모여서 다시 역모를 꾸밀까봐 고민했지. 세조왕은 단종왕을 죽이라는 간신들의 말을 듣고 독주를 내려 단종왕을 죽이고 말았다.”      “헤이, 삼촌이란 왕이 자기 조카를 죽이다니? 쯧쯧.”      관준이 혀를 끌끌 찼다.     "세조왕은 지독하였지. 세조왕이 두려워서 누구도 감히 단종왕의 시체를 거둬 장례를 치르지 못하였단다. 그때 려생 할아버지는 영월리 호장 엄흥도를 가만히 불러 상의한 후 엄흥도의 아들들과 함께 밤중에 단종왕의 시체를 관작에 넣어 영월읍 서쪽으로 하여 산중턱에 아늑한 양지바른 작은 둔덕 위에 모셨단다. 그리고 엄흥도와 함께 낮이면 나무 위에 올라가 단종왕의 산소를 누가 다치지 않나 지키고 밤이면 산소 옆을 돌면서 지켰단다. 하루도 아니고 3년 동안 그렇게 지키노라니 얼마나 고생이 막심하였겠니? 려생 할아버지는 단종왕의 3년 제사까지 지냈지. 세조왕의 추포영이 내리자 려생 할아버지는 영월에서 도망쳐 가솔들을 거느리고 여기 함경도 명천군에 와서 변성명을 하고 감자농사를 짓고 바다에 나가 물고기를 잡아 자시면서 살았단다.”      모두들 “오~” 하고 한탄하였다.      기준은 조용히 듣다가 궁금해났다.     “큰아버지, 그래 엄흥도 양반은 후에 어떻게 되였습둥?”      “엄흥도 양반은 도망치기는커녕 자손들에게 ‘내가 선왕의 시신을 거둔 것이 무엇이 잘못이란 말인가? 그게 신하된 도리가 아닌가? 그게 죄라고 구족을 멸한다 해도 나는 두렵지 않다.’라고 하면서 계속 그 자리에서 살았단다. 우리 려생 할아버지는 내내 단종왕을 잊지 못해 낙루하면서 한식이거나 단오 때거나 추석이면 늘 단종왕이 묻힌 강원도 영월군 쪽에 제사상을 차리고 절을 올리곤 하였단다. 후에 려생 할아버지는 임종시에 부인 순천 박씨와 아들들인 복중과 복덕, 손자들인 산룡과 대룡, 언룡을 불러놓고 이렇게 신신당부하였단다.‘나는 생전에 나를 그렇게 사랑하고 아껴 준 단종왕이 묻힌 곳을, 강원도 영월군을 잊을 수 없구나. 너희들부터 경주 김씨로부터 영월 김씨로 고쳐라. 그러면 우리 자손들도 대대로 목숨을 보전하는데 안전할 것이다. 너희들은 자손들을 꼭 공부를 시켜라. 그러나 과거 보러 가지는 말라. 벼슬을 하면 구족을 조사할 터이니 너희들이 내 자손인 것을 알면 잡아 죽일 것이다.”      “오- 그래 우리가 영월 김씨로 되였구먼요.”      “그런데 어째 증조부와 할아버지는 궁정의사를 해도 붙잡히지 않았는가요?”      “그건 160여년이 지난 후 이씨 조선 왕은 려생 할아버지를 이씨 왕조에 충성한 충신이라고 반포하고 단종 왕을 왕으로 추대하였지. 그리고 영월군 영월읍 서쪽으로 한 3킬로메터 떨어진 장릉에 단종왕의 기념비와 왕릉를 그럴듯하게 건설했지. 그 후에야 우리 일가도 마음대로 과거를 보고 벼슬도 하게 되였다. 그래서 할아버지도 과거에 합격된 후 뛰어난 의술로 하여 궁정의 의사로 될 수 있었구 붙잡지 않았단다.”      “예-”     기준이랑 모두 그제야 머리를 끄덕였다.      창준이 또 한마디 물었다.       “우리가 어째 영월 엄씨네와 통혼하지 않는다고 합니까?”       “오, 그래. 충신 김려생 할아버지와 엄흥도 호장은 목숨을 내걸고 단종 왕을 보호하고 시신을 거두어 장례를 지내였고 또 그 산소를 3년이나 지키면서 생사고락을 같이 하였지. 그때부터 려생 할아버지와 엄흥도 할아버지는 피를 나눈 친형제처럼 지냈단다. 그래서 려생 할아버지와 엄흥도 호장은 후에 ‘우리는 친형제와 같기 때문에 자손들은 서로 통혼을 하지 말자.’고 약속하였단다. 그때부터 영월 엄 씨와 영월 김 씨는 통혼하지 않았단다.”      “예-”      여기저기에서 이제야 알았다는 듯이 긴 감탄이 흘러나왔다.       성칠은 큰아버지를 바라보면서 한마디 더 물어보았다.      "그럼 우리 집 안에선 우리 마을 엄창렬네하구 통혼하지 말아야 합둥?" 그 말에 하옥은 남편을 흘끔 곁눈질하면서 언짢아하는 눈치를 보였다.     병관은 그저 지나가는 물음으로 여기고 제꺽 대답했다.      "그래. 엄씨는 다 영월 엄씨야. 형제 집안과 어떻게 통혼하니?"     병완은 맏아들을 이상해  돌아보았다.     (혹시 저 자식이 개울 건너편 집 창렬이네 은녀를 좋아하는가? 하옥이를 두고? 아니야. 절대 그러지야 않겠지? 본댁을 두고 무슨 짓을?)     기준은 병권 곁에 바싹 다가앉았다.     “큰아버지, 그래 려생 할아버지 산소랑 어데 있습니까?”      그러자 병권은 긴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었다.      “잘 물었다. 려생 할아버지의 산소는 아직도 명천군 상우면 동남쪽 67리 되는 포하동 풍무덕에 있단다. 이전에 내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따라 려생 할아버지의 산소에 가 보았는데 그 산소자리가 명당자리더라. 남쪽에는 출렁이는 동해 바다물이 출렁거리고 사면에는 낮은 산 둔덕이 둘러있고 북쪽에는 양지바른 둔덕이 양팔을 들어 벌리고 있는 자애로운 품 같은 것이 서있어 아주 아늑하더라. 오늘도 우리가 려생 할아버지 산소가 너무 멀어서 가지 못하는 것이 한이구나. 보통 자손들이란 자기 부모부터 가까운 조상들의 산소를 찾아가는 것이 상례로구나. 원래는 가까운 곳에 있으면 할아버지와 조상들의 산소를 다 찾아보아야 하였는데 그렇게 되지 못했구나. 참 안타까운 일이야.”      가을바람에 병권의 새하얀 염소수염도 흩날리었다.      “이젠 이야기를 그만하고 다시 제주를 붓고 절을 올린 후 할아버지와 할머니, 부모들과 함께 아침식사를 하고 집으로 내려가자.”      “예, 알았습구마.”      성희와 며느리들은 아침 제사상을 차렸다. 조부모와 부모의 산소에 절을 올리고 곡을 하는 병권과 병완의 눈에는 뜨거운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그들이 식사를 마치고 떠나가자 산소는 다시 처량하게 적막강산으로 되였다. 소나무들도 조용한 산소를 내려다보면서 서늘한 가을바람에 서글프게 휴- 휴- 설레었다. 까마귀가 나무가지에 앉아 꽁지를 들썩이며 까욱- 까욱 처량하게 울었다. 화답이나 하듯 건너편 수림 속에서 뻐꾸기가 "뻐꾹", "뻐꾹" 애처롭게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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