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 경쟁
선들선들 불어오는 마가을바람에 락엽이 우수수 져서 길바닥에서 쓸쓸히 나뒹군다. 나무잎들도 푸르른 청춘을 마감하고 맥없이 떨어져 뿌리를 뒤덮어준다. 주린 까마귀들이 북으로 날아가면서 까욱까욱 울어대 을씨년스러운 기분을 한결 더해준다.
종수는 아예 광고에 신경을 쓰지도 않고 승호한테 다 떠맡겨놓고 김택수 부총편과 함께 이민사를 정리하는데 달아다녔다.
그 기회를 타서 승호는 광고부 실권을 틀어쥐고 감췄던 발톱을 서서히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가 갖은 비렬한 수단을 다 써도 김범수 부사장마저 깜쪽같이 속히웠다.
승호는 상전을 모시는데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이 투자야 말로 리윤이 제일 많이 나는 투자이지.)
그는 김범수 부사장을 모시고 여러번 술상에 앉으면서 자기 상전의 흥취와 애호를 손금 보듯이 장악하였다.
김범수는 특별히 명태와 보쌈에 맥주를 마시고 노래방에 가서 아가씨들을 끌어안고 돌아가기를 좋아하였다.
“영웅은 미녀관을 넘기 어렵다더니, 헛 참, 김사장이나 오청룡이나 매한가지군. 흥!”
어느 날, 그는 부사장 사무실로 찾아갔다.
“김사장, 점심에 시간 좀 낼 수 있습니까?”
범수는 쌍까풀눈으로 벽시계를 흘끔 쳐다보더니 희죽이 웃었다.
“무슨 일이 있소?”
승호는 뒤더수기를 긁적거렸다.
“예, 조용히 할 말이 있어서…”
범수는 깍지손을 해 사무상에 올려놓으며 정색해 물었다.
“무슨 일인지 여기서 말하오.”
“아니, 날씨도 을씨년스러운데 명태에 맥주라도 마시면서 얘기하면 좋을 것 같아서…”
“그래?”
명태와 맥주 소리에 범수는 군침을 꼴깍 삼키면서 우쭐 일어났다.
“먼저 가서 자리를 정하오. 이후엔 이런 일은 사무실에 찾아오지 말고 전화로 련계하오.”
범수는 분명 남들의 눈치를 보는 것 같았다.
“예, 알았습니다.”
승호는 뒤더수기를 긁적거리면서 사무실에서 나갔다.
그는 신문사에서 썩 멀리 떨어진 조용한 교외 별장식 음식점에 택시를 타고 달려갔다.
이윽고 범수도 공가차를 타고 달려왔다.
그는 문 앞까지 마중나온 승호를 따라 엘레베이트를 타고 3층에 올라갔다.
엘레베이트 문이 스르륵 열렸다.
“어서 오세요- 반갑습니다.”
예쁜 아가씨 두 손을 맞잡아 아래배에 댄 채 곱게 머리 숙이며 인사했다. 짧은 치마를 입은 아가씨들의 하얀 허벅다리가 눈뿌리를 빼갈 지경.
“아가씨들 써비스 죽여주는구만.”
범수는 으깨를 으쓱했다.
승호는 뒤따라 가면서 씨무룩이 웃었다. 오늘 김사장의 주흥을 붇돋으려고 옥설과 예화를 불러 왔다. 옥설은 백화상점의 무용수였는데 허벅다리의 우유빛살결이 사내들의 애간장을 다 녹일듯이 매력적이였다.
범수의 눈길이 아가씨들의 백지장처럼 새하얗고 두부처럼 야들야들한 허벅지에 화살처럼 꽂혔다.
제꺽 눈치챈 승호는 흡족한 웃음을 입귀로 흘렸다.
(김사장, 조 야들야들한 허벅다리에 뽀뽀를 빡 하고 싶지? 오늘 마음껏 놀아보라이.)
아가씨들의 안내하에 범수와 승호는 조용한 방 안에 들어가 앉았다.
승호는 메뉴를 가져다가 쭉 훑었다. 물론 김사장이 좋아하는 명태와 보쌈을 빼놓을 수 없었다.
“뭘 시켰소?”
승호가 메뉴를 쭉 내리부르자 뜻밖에 범수가 고개를 저었다.
범수는 메뉴를 가져다 한참 들여다보더니 무겁게 입을 뗐다.
"아가씨들이 뭘 좋아하는지? 좀 아가씨들을 배려해야지."
범수는 아가씨들의 눈치를 흘끔 곁눈질했다.
"이 집에는 개고기 없소?”
“있어요.”
예화는 앞질러 대답하고나서 승호를 건너다보며 혀를 홀랑 내밀었다.
“저도 개고기를 좋아해요.”
상전의 메뉴를 손금 보듯 했다고 여겼던 승호도 어색하게 웃으며 혀를 날름거렸다.
“이 집 개고기하구 보쌈 죽여줍니다. 몽땅 자연산입니다. 돼지고기는 산에서 기른 멧돼지 고기요, 배추도 농약과 화학비료 하나도 치지 않고 유기비료로 기른 겁니다.”
범수는 그제야 만족한듯 메뉴를 내려놓았다.
승호도 무거운 짐이나 벗어놓은듯이 굳어졌던 어깨를 풀어버렸다.
“아가씨를 부를까요?”
“아니, 지금 무슨 세월이라고 아가씨를 부르겠소?”
“술상에는 사촌누이라도 마주 앉아야 술맛이 나죠.”
(배 부른 흥정하지 말라.)
승호가 헤헤 웃으며 박수를 쨕쨕 쳤다. 미닫이문이 스르르 열렸다.
범수가 머리를 들어 보니 아까 엘레베이트 옆에서 마중하던 삼십대 후반의 아가씨들이 들어섰다.
그녀들은 모두 범수 량 옆에 가서 딱 들어붙어 앉았다. 범수는 아가씨들의 우유빛허벅지에서 눈길을 떼지 못했다.
“에헴, 우리 신문사 김사장이야. 잘 모셔라.”
“아, 예- 처음 뵙겠어요."
"아니, 이럴 필요없소."
범수는 승호를 불러 슬쩍 구석 쪽으로 갔다.
"아가씨들을 내보내오. 지금 무슨 세월이오? 괜히 쓸데없는 말을 듣겠소."
"예, 알았습니다."
승호는 아가씨들을 손짓해 뭐라고 쑤근거렸다. 아가씨들은 볼부은 소리를 도도거리며 나가버렸다.
범수는 그러고도 시름이 놓이지 않는지 남은 두 색씨들을 눈짓했다.
"괜찮아요. 다 잘 아는 정직한 애들입니다."
그러자 범수는 마지못해 제자리에 돌아가 앉았다.
" 인사늦었어요.처음 뵙겠어요. 예화라고 불러요.”
예화가 먼저 고개를 숙여 인사하며 해쭉 웃어보였다.
“예화? 퍽 보던 아가씬데.’
범수는 눈이 화등잔이 돼 예화의 아래우를 훑었다.
“음식점에서 일하긴 아까운 아가씨군.”
예화가 뭐라고 입을 빠끔 열려는데 승호가 눈짓했다.
“예화는 한 광고회사에서 일합니다.”
“오- 그런 걸 난 또…헤헤헤.”
범수는 승호가 미리 아가씨들까지 주밀하게 배치해놓은데 놀랐다.
“이쪽은 음식점 아가씨요?”
“아니예요. 전 백화상점의 옥설이예요. 많이 부탁 드립니다.”
승호가 한마디 했다.
“걘 우리 백화상점 인기무용수입니다.”
“에이- 백화상점에 다리 아프게 세워놓긴 아까운 미녀구만.”
범수가 혀를 끌끌 찰 때였다.
옥설이 범수의 팔을 끌어안고 몸을 기대며 애교를 부렸다.
“김사장님, 절 도와주세요. 신문사에 가서 사장님 사무실 청소를 해도 좋아요. 시키는 일을 다 하겠어요.”
범수는 옥설의 탄력있는 몸을 밀어내며 승호를 흘끔 도적질해 보며 중얼거렸다.
“에이, 청소공이야 백화상점에서 신짝을 팔기보다 못하지.”
미닫이가 열리더니 음식점 아가씨들이 채를 들여왔다.
범수는 퉁사발 같은 쌍까풀눈으로 상다리 뚝 부러지게 차린 음식상을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광고과에 무슨 돈이 있다고 이렇게 랑비하오. 채를 더러 내가오. 언제 다 먹는다고 이러오?”
아가씨들은 마땅찮은 눈길을 보냈다.
“어찌 사장님을 공을기처럼 대접하겠습니까?”
“그래요. 어서 드세요.”
좌우에서 옥설과 예화가 맥주를 따른다, 보쌈을 싸 입가에 들이댄다 하면서 아양을 떨었다. 범수의 눈길이 자꾸 옥설과 예화의 짧은 치마 밑의 하얀 허벅지로 갔다. 눈치챈 예화는 짧은 치마를 살짝 들고 백설 같은 허벅지를 범수 허벅지 가까이에 들이댔다. 범수는 승호와 옥설의 눈치를 보면서 밥상 밑에서 예화의 야들야들한 허벅지를 슬슬 매만지였다.
"어허, 맥주 맛이 좋다."
옥설은 허벅지를 들이대고 해벌쭉거리며 아양을 떨었다.
"김사장님, 절 신문사 광고과에 받아주는 거죠? 김사장님 가까이에서 잘 모셔드리죠. 제가 은혜는 꼭 보답해드릴게요."
승호는 잔을 들고 희죽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헤헤헤. 김사장 비서로 받으면 좀 좋습니까? 예화, 김사장님 모시고 기분좋게 한잔 들기오.”
“허허허. 감사하오. 리과장이구야 날 알아봐준다니까.”
범수는 일일이 잔을 마주치더니 단모금에 맥주를 쭉 들이켰다. 그는 예화가 쑤셔넣은 보쌈을 받아물고 볼이 메지게 우물거렸다. 입귀에서 돼지기름이 게죄죄하게 흘러내렸다. 옆에서 옥설이 큼직한 개고기를 집어 입에 넣어주었다.
승호는 속으로 웃었다.
(영웅은 모두 미인관을 넘기 힘들지. 네놈이라고 미인계에 넘어가지 않을 수 있겠느냐?)
몇순배 돌아가자 승호가 입을 열었다.
“김사장, 종수는 광고를 하나도 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광고과 과장을 합니까?”
김범수는 승호를 흘끔 흘겨보았다.
(자식, 종수를 헐뜯자고 불렀어?)
범수는 승호를 면박주었다.
“리과장, 자기 광고나 잘 하오. 술상에서 사업얘기를 하지 말기오.”
첫마디에 코를 떼운 승호는 끙끙거리다가 화제를 돌렸다.
“김사장, 조용히 부탁드립시다.”
“뭔데?”
범수는 종이를 들어 개기름이 번지르르한 입을 쓱 닦았다.
승호는 정색했다.
“제 생각에는 우리 신문사에서 인터넷광고를 개척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범수는 승호를 힐끔 건너다보더니 좀 색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지금 신문에 낼 광고도 채우기 힘든데 인터넷광고까지 언제? 또 인터넷광고는 성호 개척한 광고 아니오? 어째 남의 뒤만 따라가자고 하오? 창신이란게 하나도 없이야 어떻게 광고수입을 창조할 수 있소?”
“성호면 성호고 우린 우립니다. 우리도 인터넷광고를 해야 광고임무를 완수할 수 있습니다. 신문은 발행량이 적어서 광고 효과가 좋지 않습니다. 이번 주에도 숱한 광고 떨어져나갔습니다.”
범수는 저가락을 내려놓고 정색했다.
“성호와 어떻게 경쟁하겠소? 성호는 리과장 대학 동기 아니오?”
“지금 어디 그런 거 따질 새 있습니까?”
범수는 한술 더 떴다.
“성호는 친삼촌 아니오?”
“걸 어떻게 알았습니까?”
승호는 깜짝 놀랐다. 세귀눈을 치뜨며 옥설과 예화의 눈치를 흘끔 살폈다.
예화는 예지로 빛나는 쌍까풀눈으로 승호를 빤히 쳐다보다가 살풋이 내리깔며 차잔을 들어 호호- 불었다.
(아니, 친삼촌이라니?)
범수는 허리를 펴고 잔등을 의자등받이에 붙였다.
“이 부사장을 어떻게 보고 하는 말이오?”
그러나 승호는 뜻밖에도 발가벗고 나섰다.
“신문사 광고사업을 위해선 친삼촌이 아니라 아버지라도 경쟁해야 할 판입니다.”
(독종! 어쩜 친삼촌 발등까지 짓밟아? 네놈은 자기 리익을 위해선 장차 내 등뒤에도 칼을 박을 놈이야!)
범수는 섬찍했다. 그러나 인차 굳어진 얼굴의 근육을 느슨히 풀며 이 구실 저 구실 대며 딴전을 부렸다.
“지금 일손이 딸리는데 어떻게 인터넷광고까지 하겠소? 불시에 어데 가서 사람을 모집해 오겠소? 괜히 해보지도 못한 인터넷광고에 덤벼들었다가 망신하겠소.”
“금심하지 마십시오.”
승호는 끈질기게 달려들었다.
“이 예화와 옥설을 우리 광고과에 전근시킵시다. 인터넷광고는 근심하지 마십시오.”
“왜?”
승호는 때가 됐다고 속심을 털어놓았다.
“예화는 성호네 인터넷광고 경영비밀을 다 알아냈습니다.”
기실 예화는 승호가 성호네 회사에 미리 박아놓은 상업간첩이였다.
(상업간첩?)
범수는 또 한번 섬찍해 승호와 예화를 번갈아 여겨보았다. 승호가 원래 좀 음험하다는 것을 모른바는 아니였다. 그러나 예쁜 예화가 그런 짓을 할 수 있으리라고는 믿어지지 않았다.
“성호네 담벽을 허물어서야 되오?”
“상업이란 원래 형제간에도 치렬한 경쟁을 하게 됐습니다.”
“그래도 그렇지. 상업간첩까지 파견하면서 경쟁할게 있소?”
승호는 더 할 말을 찾지 못해 입을 헤 벌리고 목석처럼 앉아 범수를 바라보았다.
그때 예화가 호들갑을 떨면서 어색한 기분을 풀어주었다.
“자, 좋은 인연인데요. 김사장을 이렇게 만나 무한한 영광을 느낍니다. 맥주나 시원히 마시자요.”
승호는 예화한테 화풀이를 했다.
“뭘 안다고 끼여들어?”
“어마나, 그래도 그렇죠. 왜 저를 음험하게 만들어요. 상업간첩이라니요?”
그녀는 범수한테 맥주잔을 드리며 호들갑을 떨었다.
“김사장님, 리과장 말이 맞아요. 전 성호 총경리네 인터넷광고를 손금 보듯 해요. 김사장님, 근심하지 마세요. 절 신문사에 전근시켜 인터넷광고를 맡기세요. 꼭 성호 경리네보다 더 벌 수 있어요.”
예화는 범수의 눈길이 의연히 곱지 않은 것을 보고 승호한테 눈을 흘겼다. 그녀는 애교를 부린다, 수다를 떤다 하면서 보쌈을 싸 범수의 입에 부지런히 밀어넣었다.
“아니, 그만. 오후에 회의 있소.”
범수는 술맛이 없었든지 엉거주춤 일어났다.
“아니, 금방 네병 밖에 마시지 않았는데요.”
“폭 마시고 가시죠.”
예화와 옥설이 량팔을 붙잡고 만류했지만 쓸데 없었다.
범수는 신을 꿰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쥉쥉 엘레베트 쪽으로 가버렸다.
승호는 황급히 뛰여나갔다.
“김사장, 제 부탁 잊지 마십시오. 꼭 성공할 수 있습니다.”
“천천히 잘 검토해보기오.”
범수는 한마디 남기고 엘레베이트에 들어갔다.
“감사합니다!”
“감사해요!”
범수는 승호와 예화가 머리를 조아리며 구십도 경례를 하는 것도 거들떠보지 않고 엘레베트 문을 쿵 닫아버렸다.
범수를 보내고 승호와 예화네는 술상에 되돌아와 둘러앉았다.
예화가 승호 옆에 다가와 앉으며 마른 명태를 쪽 찢어 승호의 입에 가져갔다.
“일이 될까요?”
승호는 마른 명태를 질근질근 씹으며 한마디 내뱉었다.
“먹은 쇠 똥을 눈다오.”
“호호호. 그 말 듣기 참 좋다.”
옥설도 부끄러움을 홀랑 벗어버리고 승호 옆에 딱 붙어앉아 아양을 떨었다.
“오빠, 우리끼리 맛있게 마시자요.”
“그래, 마시자!”
승호는 예화와 옥설을 량무릎에 앉히고 두부처럼 야들야들한 허벅다리를 어루만지면서 질탕하게 마셨다.
“오빠, 아- 하세요.”
승호가 입을 벌리자 옥설이 맥주잔을 들어 쩍 벌린 승호의 입에 부어넣었다.
“오빠, 아가리를 쫙 벌리세요.”
“네나 쩍 벌려대라. 찔러넣게. 허허허.”
승호가 입을 벌리자 예화가 오징어를 집어넣으며 나블거렸다.
“쫙 벌린 중둥이를 봐라. 딱 뭐 같니?”
“언니, 진짜 야하구나!”
“호호호.”
승호는 꽃밭 속에서 딩굴면서도 성호의 담벽을 허물어 허경옥과의 경쟁에서 이겨야겠다는 심보만은 허트러지지 않았다.
그는 술병을 들어 예화와 옥설의 잔에 찰찰 넘치게 붓고나서 자못 엄숙하게 말했다.
“예화, 성호 하나도 눈치채지 못하게 인터넷광고자료를 싹 빼오오.”
“예, 알았습니다. 쌀쓸이를 해버리죠.”
예화는 쌍까풀눈을 치켜뜨며 물었다.
“성호 경리 두렵지 않습니까?”
승호는 술잔을 들면서 나직이 당부했다.
“저네만 아오. 승호는 내 친삼촌이오.”
“예? 진짜?”
예화는 눈이 화등잔이 되여 승호를 쳐다보았다.
옥설은 미심했다.
“믿어지지 않어. 세상에 그렇게 젊은 삼촌이 있을 수 있나요? 그것도 친삼촌이.”
“그래, 우린 동갑이자 대학동창생 친구야. 허물 없는 사이니깐. 고만한 거 훔쳐와도 괜찮을 거야. 성호는 도량이 넓으니까. 허허허.”
예화는 승호를 다시 쳐다보며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흉금이 넓은 자기 친삼촌을 바보로 보는 것이 눈에 거슬렸다.
그들은 범수가 가기를 기다리기나 했다는듯이 떠들어대며 해질 때까지 질탕하게 마셔댔다.
기실 승호는 예화를 건너다본지 오랬다.
그는 취해 허트러진 예화의 모습을 보고 다른 궁리를 했다.
(저 년을 가질 절호의 기회야.)
그는 백화상점 때 수하 옥설을 재끼는 것은 좀 굴어귀 풀을 다치는 것 같았다. 그리하여 아쉬운대로 먼저 택시에 태워 보냈다.
예화도 택시를 타고 떠나려고 했다.
“예화, 조용히 할 말이 있소.”
“그래요?”
예화는 택시에 올라타는 승호를 치켜보았다. 어쩐지 정신을 좀 가다듬어야 했다. 그러나 자꾸 눈이 내려왔다.
승호는 예화를 택시에 태워가지고 시내에서도 근사한 다방으로 달려갔다.
저쪽 골목 구석에서 옥설이 질투의 눈길로 택시 타고 달려가는 그들을 쏘아보았다. 그녀는 떠나간 척하다가 택시에서 내려 승호와 예화가 어데로 가는가고 살폈던 것이다.
희미한 전등불빛 아래 은은한 음악이 흐르는 다방이 기분을 돋구었다.
승호는 구석진 방에 들어가 맥주와 마른 명태, 포도, 닦은 호박씨로 한상 차렸다.
“아니, 커피를 마시잖고 또 맥준가요?”
“그래?”
승호는 다방 아가씨한테 원두커피를 갈아오라고 주문했다.
예화는 더운지 웃옷을 훌훌 벗어 옷걸이에 걸어놓았다. 그녀의 출렁이는 풍만한 젖가슴으로 정욕에 불타오른 승호의 눈길이 애타게 오르내렸다.
승호는 마주 앉은 예화의 얼굴을 찬찬히 훑었다.
맥주를 마셔서 좀 발가우리한 걀죽한 외씨얼굴, 흐리마리해진 풀린 쌍까풀눈, 오똑한 코, 키스를 빡빡 안겨주고 싶은 초들초들한 앵두입…
(팁 주고 놀기보다. 요런 미녀를 점유하는 게 낫구나. 아, 오늘 넌 죽었어. 베개로 머리를 쳐놓고서라도 데리고 놀아야지.)
“예화, 여기 오오.”
“왜 그래요?”
예화는 승호의 따가운 눈길이 어색했는가?
그녀는 아까 술상과는 달리 정작 둘이 남은 다방에서 꽤나 엄숙해졌다. 그녀는 오쫄 일어나 소변 보러 가겠다고 구실을 대고 나가버리였다.
승호는 룡암처럼 부글부글 끓어번지는 정욕을 억누를 수 없었다. 그러나 예화가 고분고분 말을 듣지 않아 괘씸해났다.
(이년이 권하는 술은 안 마시고 벌주를 마시겠느냐?)
이윽해 예화가 소변을 보고 다방문을 살며시 열었다.
그 때였다.
승호가 자기 커피잔을 제자리에 되놓았다.
그녀가 이상해 자리에 돌아가 앉아 커피잔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이상하게 커피색이 새하얗지 않겠는가.
(프림을 쏟아넣었는가?)
그런데 프림은 그대로 접시에 놓여 있지 않겠는가.
(뭘 탔을가?)
예화는 도리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승호는 예화의 예리한 눈길을 피하며 씨무룩이 웃었다.
기실 그는 예화를 맑은 정신에 재끼기는 아직 채익지 않은 참외를 따 먹는 격이라 그만뒀다. 그리하여 예화의 커피잔에 수면제가루를 털어넣었던 것이다. 그는 항상 팁도 주지 않고 아가씨를 재끼려고 수면제가루와 콘돔을 돈가방에 감춰가지고 다녔다. 그런데 이번에는 수면제를 너무 많이 타놓아서 그만 예화한테 들키고 말았다.
예화는 불길한 예감이 덜컥 들었다.
순간 그녀는 불시에 손으로 이마를 톡톡 치며 고개를 숙였다.
“아이고, 머리 왜 아프지?”
그녀는 승호의 속내를 떠보려고 들었다. 그녀는 커피잔을 들어 호호 불다가 둬 모금 입에 물었다. 그리고 손으로 목을 붙잡고 위생실에 가서 토해버렸다. 뒤이어 자리에 돌아와 눈이 자꾸 내려오는 상 하다가 쏘파에 스르르 쓸어졌다. 예화가 눈을 살며시 뜨고 살폈다. 그런 줄도 모르고 승호는 무슨 빛이 번쩍이는 눈길로 예화의 짧은 치마 밑에 드러난 하얀 허벅지를 참빛질하면 달걀침을 꼴깍 넘기는 것이였다. 뒤이어 스르를 일어나더니 예화를 흔들었다.
"예화, 예화."
그러나 예화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것 같자 승호는 야수의 본성을 들어냈다. 손으로 예화의 허벅지를 슬슬 만지더니 손이 뱀처럼 배로부터 점점 우로 슬슬 기여올라왔다.
그때 예화가 화닥닥 일어나더니 웃옷을 주섬주섬 주어 입었다.
“안되겠어요. 오늘 술을 너무 많이 마셨는가 봐요. 머리 아파서 집에 일찌기 돌아가야겠어요.”
“아니, 정신 차렸어? 어험, 험, 이걸 하나도 먹잖고 돌아가면…”
“미안해요. 먼저 실례하겠어요.”
예화는 입을 쩝쩝 다시며 실망해하는 승호를 다방에 홀로 남겨두고 기어이 떠나가버렸다.
(음흉하구나. 날 해치려고? 흥! 어림도 없어.)
몇해 전에 승호는 범송과 밀모해 미인계를 써서 예화를 성호네 광고회사에 박아넣었던 것이다.
예화는 미녀사처럼 성호의 착한 마음 속을 비집고 들어가 태연자약하게 똬리를 틀고 들어앉아 인터넷광고 정보를 몽땅 손에 넣었던 것이다.
이튿날 승호는 웃음주머니 흔들흔들해 사무실에 들어섰다.
그가 자꾸 벽시계를 쳐다보았다. 벽시계는10시를 가리켰다. 그런데 기다리고 기다리는 예화가 나타나지 않았다.
11시가 넘었다. 그래도 예화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승호는 기다리다못해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예화, 어떻게 된 판이오?”
“미안해요. 제가 오늘 머리 아파서 갈 것 같지 못해요.”
“뭐라고?”
승호는 불길한 예감이 부쩍 들었다. 그는 벌떡 일어나 언성을 높였다.
“아무리 아파도 그렇지. 멀어서 오지 못하오? 정 오지 못하겠으면 큐큐로 정보파일을 보내란 말이오.”
“…”
점심이 다 돼도 기다리는 예화는 오지 않았다. 큐큐를 자주 열어봐도 아무 파일도 보이지 않았다.
사무실 문이 벌컥 열렸다.
뜻밖에도 성호가 들이닥쳤다.
(진짜 불청객!)
“어떻게 돼 왔니? 앉아라.”
승호는 당황망조해 자리에서 움쭐 일어나 쩔쩔 맸다.
성호는 사무실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아무리 경쟁해도 그렇지. 어쩜 이럴 수 있니?”
“뭘?”
승호는 길죽한 박씨얼굴에 억지로 웃음을 게바르면서 시치미를 땄다.
“예화를 시켜서 무슨 짓을 했니?”
승호는 자리에 풀썩 물앉았다…
원래 예화한테서 이변이 생겼다.
미운 놈을 떡 하나 더 준다고 예화는 생존과 부귀영화를 위해서 승호의 포치대로 행동했다.
그녀는 성호가 어디로 나간 틈에 경리실에 들어가 승호의 떨리는 손으로 성호의 컴퓨터를 열고 모든 자료를 복제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녀는 보이지 않는 눈길이 자기 일거일동을 따라다닌다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였다. 옆 사무실의 연화와 동료들의 눈길도 두려웠다. 그러나 그녀는 용케도 용기를 내서 자료를 손에 넣었다.
그녀는 도적고양이처럼 발볌발볌 경리실에서 나와 한숨을 호- 내쉬였다.
뒤이어 유판을 핸드빽에 넣어가지고 연화와 동료들의 눈치를 흘끔 보면서 사무실에서 빠져나가려고 했다.
그러나 그녀는 어쩐지 가슴에 뭔가 걸리는 강한 충격을 받았다.
(내 잘 살자고 이렇게 하는게 옳은가?)
그녀는 맥없이 자리에 물앉아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였다.
(리성호 경리는 나를 얼마나 믿고 아꼈는가? 결손을 보는 처지에서도 우리를 회사에 받아주지 않았던가. 이 유판을 승호한테 가져가면 리경리는 망하지 않을가? 리과장은 어쩜 자기 삼촌의 뒤통수를 칠 수 있단 말인가? 다방에서 날 짓밟으려고까지 하잖았는가. 량심이 없는 자야.)
그녀는 점차 욕심 대신 량심이 마음 속으로 돌아오는 것을 어쩌는 수 없었다.
핸드폰 진동소리 요란히 울렸다. 그러나 그녀는 받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한참 후 성호가 사무실에 되돌아왔다.
예화는 우쭐 일어나 경리실에 들어가려고 하다가 주춤 멈춰 섰다.
(승호의 진상을 몽땅 까밝혀놓으면 혹시 숙질간에 이 벌어지지 않을가? 그럼 난 리간질 한 못된 년으로 되는데.)
예화는 한참 망설이다가 용케도 량심적으로 마음을 정했다.
(량심을 어기지 말아야지. 진실은 꼭 밝혀야 해.)
그녀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경리 사무실 문을 살며시 밀고 들어갔다.
“이걸 받아요.”
성호는 예화가 내미는 유판을 보면서 놀랄 대신 태연자약한 표정을 지었다.
예화는 성호의 태연자약한 거동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어제 승호가 밀모한 사실을 터놓았다.
“진작 다 알고 있었소.”
성호는 어제 벌써 김사장한테서 승호의 꿍꿍이를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는 밤도와 자기 인터넷광고자료를 복제해 감춰놓은 후 경리실에 몰카를 가설해 놓았던 것이다. 그리고 고의로 경리실을 비운 후 수시로 핸드폰을 통해 경리실의 동태를 낱낱이 지켜보았다.
“리경리, 아무리 생각해 봐도 승호 과장이 이렇게 하는 건 옳지 않죠…”
성호는 자기를 믿고 따라주는 예화를 넓은 흉금으로 너그럽게 포옹했다.
“고맙소. 이 일로 더 고민하지 마오.”
순간 예화는 코마루가 시큼해났다.
그녀는 눈물이 글썽해났다.
“리경리, 정말 죄송해요. 량심없는 절 용서하지 마세요…”
성호는 더욱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별말을, 경쟁이 백열화던 이 세상에서 예화처럼 성실한 직원은 찾기 힘드오.”
성호는 자리에서 일어나 예화의 어깨를 다독여주고 사무실 안에서 왔다갔다 거닐다가 나갔다.
예화는 감격과 자책감에 반죽된 뜨거운 눈물을 훔치며 뒤따라 나갔다…
한편 신문사 광고과 사무실에서 승호는 땅바닥에 무릎을 털썩 꿇고 앉아 두 손을 싹싹 빌었다.
“작은삼촌, 용서해주오.”
“작은삼촌?”
성호는 넉가래 같은 손을 휘둘러 승호의 뺨을 챨싹 갈겼다.
“날 작은삼촌으로나 보기나 하느냐? 왜 그랬어?”
승호는 얼얼한 뺨을 매만지다가 머리를 들이밀었다.
“그래, 쳐라, 쳐! 차라리 얻어맞으면 속이 씨원하겠다.”
그러나 성호는 비웃음이 넘치는 눈길로 승호를 훑어보았다.
“비렬한 자식! 량심은 개를 떼줬어?! 엉?!”
승호는 성호의 두 손을 꽉 잡았다.
“작은삼촌, 이번만 용서해달라. 경옥과 경쟁하려다가 그만 미쳤어. 지금 굉팔까지 감옥에서 나와 굉팔광고회사를 차려 경쟁이 얼마나 치렬하냐?'
"건 무슨 소리야. 탐오죄로 감옥에 갔는데 굉팔이 나오다니?"
"아직도 초저녁이구나. 굉팔이 감옥에서 나왔어. 시내 중심가에 광고회사를 차렸어."
"엉?"
성호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아니, 그런 부패분자도 감옥에서 나와? 그런 법도 있다니?"
성호는 뒤더수기를 긁적거리였다.
"그래, 오청룡도 나왔다니?"
"아니, 그 놈은 감옥에 있다더라. 듣는 말에 의하면 굉팔은 먹은 돈을 다 괴우구 간암에 걸려 치료를 구실로 보석돼 나왔다더라."
"세상이 한심하구나. 그 놈 그래서 항상 세상에서 정의만 가지고 못 산다고 지껄이며 다녔구나. 진짜 나는 놈이구나."
성호가 굉팔한테네 정신이 간 틈에 승호는 중얼거렸다.
"광고자료를 가져다가 사업실적을 쌓고 싶었다. 그래서라도 경옥을 이기고 세상에 성공한 나를 보여주고 싶었다.”
성호는 승호의 손을 꽉 잡아 일으키면서 억지로 부드럽게 말하려고 애썼다.
“자식, 남의 담벽을 허물아다가 자기 토성을 쌓아 뭘 하느냐? 광고를 해도 법과 량심을 지켜야지. 그게 뭐냐? 미인계를 쓰고 간첩까지 파견하고… 부패분자 오청룡이나 리굉팔과 다른게 뭐냐? 음험하기로 짝이 없구나. 이후엔 특무정치를 작작 해라.”
“잘못했어. 제발 용서해달라.”
성호는 타이르기 시작했다.
“이런 자리에서 처음 삼촌이라고 부르는게 참 가슴 아프다.”
승호는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우리 둘 사이에 뭔들 말하지 못하겠느냐? 어쩜 방조해달라고 말하지 않고 이런 못된 궁리를 했니?”
승호는 도리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밸을 빼서 날 도와주겠어?”
“야, 우리 둘한테 돈이 더 중요해? 쳇, 자식, 왜 그렇게 사람을 믿지 못해?”
성호는 말을 마치자 자그마한 유판을 꺼내 내밀었다.
“옛다. 인터넷광고 자료야. 부동산광고랑 의료광고랑 다 있다.”
승호는 미심한 눈길로 성호를 쳐다보았다.
“진짜 주는 거야.”
광고주와 인터넷광고 정보이자 거금이 아닌가.
성호는 분명히 말했다.
“그래, 난 네가 어떻게 하나 광고업계에서 일어나는 걸 보고 싶다. 광고를 많이 해서 집도 사라. 세집살이를 하는 걸 차마 눈뜨고 보지 못하겠다.”
성호의 진심에 승호는 또 머리 숙여졌다.
“작은삼촌! 날 죽여주오-”
성호는 승호 사무상에 유판을 놓았다.
그는 승호를 와락 끌어안고 잔등을 다독였다.
“쓸데없는 소리! 우린 숙질간이 아니냐!”
그는 뜨거운 눈물을 줄줄 흘리는 승호를 품에서 떼내 똑바로 마주 바라보면서 무겁게 입을 뗐다.
“시장경쟁시대는 눈물이 필요없어. 그러나 경쟁도 정당한 수단으로 해야 해. 힘내라!”
승호는 코마루가 시큼해나 머리를 끄덕였다…
이튿날 승호는 성호를 자기 집에 초청했다.
성호가 집에 들어서자 영희는 이전과는 달리 성호를 웃는 얼굴로 맞이했다.
“어서 올라오세요.”
마실을 왔던 선금도 눈인사를 했다.
승호는 안방에서 한창 공부하는 광훈을 보고 “얘, 인사해라. 작은할아버지다.”라고 했다.
그러자 광훈은 미닫이를 열고 눈이 휘둥그래 성호를 내다보았다.
영희가 또 혀바닥을 날름거렸다.
“그럼 당신의 아버지란 말입니까? 삶은 소대가리 웃다가 꾸레미 터질 일이구만요.”
“무슨 말버릇이오?”
승호는 황급히 인사시켰다.
“작은삼촌이야.”
영희는 입귀를 비쭉하면서도 머리를 숙였다.
“미안해요. 시삼촌.”
승호는 광훈을 돌아보았다.
“작은할아버지한테 인사를 드려라.”
광훈은 진짜 어처구니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예? 난 할아버지 본적도 없는데. 불시에 무슨 작은할아버진가요?”
“이 자식!”
성호는 광훈을 때리려는 승호의 손목을 잡고 말렸다.
“걔를 탓해 뭘 하느냐? 무정한 세월이 이런 비극을 만들었지. 너네 집에 아무 것도 해준 것도 없구나. 작은할아버지 말 듣긴 구차하구나.”
선금도 어색하게 웃으면서 승호와 영희를 번갈아보았다.
“승호 오빠한테 삼촌이면 난 어떻게 불러야 하는가요?”
승호는 정색했다.
“삼촌이지.”
성호는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삼촌은 무슨 삼촌, 서로 편하게 보내면 되오.”
뒤이어 그는 호주머니에서 두툼한 봉투를 꺼내 광훈한테 주었다.
“얘야, 너한테 해준게 아무 것도 없구나. 이제부터라도 우린 조손처럼 다정하게 살자구나.”
광훈은 뒤더수기를 긁적거리면서 아버지와 어머니 눈치를 흘끔흘끔 보면서 받으려고 하지 않았다.
“받아라.”
성호는 광훈의 오른손을 잡고 돈봉투를 쥐워주었다.
“이건 네가 기말시험준비를 잘하라고 주는 거야.”
광훈은 아버지 눈치를 흘끔 보았다.
승호는 “작은할아버지 주는 거 받아라.”라고 했다.
그제야 광훈은 돈봉투를 두 손으로 꼭 잡고 “감사합니다.”라고 하며 꿉썩 인사했다. 그러나 입이 떨어지지 않는지 “할아버지.”라고 부르지는 않았다.
영희도 해시시 웃으며 인사했다.
“에이구, 애들이 인사할줄 몰라서 어떻게 해요? 아무튼 광훈 애비를 많이 교육해주세요.”
그 말에 승호가 세귀눈을 치켜떴다.
영희가 뭐라고 말하려고 하자 승호가 마구 밀막아버렸다.
“됐소, 됐소. 어쩌다가 온 작은삼촌한테 무슨 말버릇이오?”
그러나 영희는 누그러들지 않았다.
“뭐라고요? 당신, 잘못이 없어요?”
승호는 아무 말도 못하고 성호의 팔소매를 끌고 바깥으로 나갔다.
“원래 집에 청해 술이나 한잔 나눌가 했는데. 녀편네 때문에 창피해서. 원, 가자 선녀음식점에 가자.”
그때 영희가 따라나섰다.
“괜히 날 욕보이지 마세요. 제가 음식점에 가서 한턱 내죠.”
“됐소, 됐어.”
승호는 시끄러워 영희를 마구 떠밀어 집 안에 들어가게 했다.
선녀음식점에 가자 선화가 반겨맞으면서 수다를 떨었다.
“아이구, 두분 함께 오긴 처음인 것 같은데요. 얘들아, 안방에 모셔라.”
“예-”
아가씨들이 안방으로 안내했다.
자리를 잡고 앉자 성호가 물었다.
“혹시 집에 무슨 일이 있니?”
승호는 머리를 들지 않고 메뉴에 눈길을 돌리며 중얼거렸다.
“에이구, 어느 집에 말썽이 없겠니? 항상 도도거리는 건 아낙네 본병이지.”
“뭐라고?!”
영희가 불길이 이글거리는 눈길로 쏘아보면서 들어올줄이야!
“그래 도도거리게 되지 않았는가?! 오늘 결판내자.”
승호는 성호 눈치를 흘끔 보면서 영희를 쏘아보았다.
“아니, 이 미친 년, 어디까지 쫓아와 생야단이냐?”
영희는 성호 앞에서 승호 멱살을 틀어쥐고 야단쳤다.
“이 미친 놈아, 누가 미쳤어? 아가씨들과 개지랄하지 않았으면 어데서 더러운 성병까지 묻혀들이겠느냐? 뭐? 뻔뻔스레 날 미쳤다구 해?”
성호는 승호를 쏘아보았다.
“이 자식, 또 본병이 발작했구나.”
“아니, 무함이야.”
“무함? 어째 숱한 사람들 앞에서 쫄딱 발가놔달래?”
승호는 머리도 들지 못한채 그저 욕지거리만 했다.
“별, 미친 년 다 보겠다. 집으로 돌아가지 못해?”
영희는 성호를 보고 넉두리를 했다.
“삼촌이라면서? 이런 놈부터 잘 교육하세요.”
성호는 도리머리를 흔들더니 영희를 보고 “먼저 집으로 돌아가오.”라고 했다.
영희는 승호를 쏘아보면서 “저런 놈을 믿고 내 어떻게 살아요? 내 팔자 기구하기도 하지.” 하고 마지못해 나가버렸다.
성호는 승호를 쏘아보면서 물었다.
“이실직고해라. 예화랑 데리고 놀아서 성병에 걸렸지?”
승호는 우물우물 얼버무렸다.
“오해했어. 예화는 그런 애 아니야. 걔는 못된 애 돼서 한번도 그런 일 없다. 아마 목욕탕에 가서 때밀이를 해서 그랬는지 매독에 걸린 거 같애. 혹시 안마방 안마복에서 감염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내 아가씨를 데리고 놀아서 성병을 묻혀왔다고 저렇게 생지랄이야. 막 갈라지잔다. 애 둘이나 두고 어떻게 갈라진다고 저러니? 갈라지지 않으면 일본으로 건너간단다. 에이, 씨원히 일본으로 가버렸으면 씨원할 거 같애. 복화도 일본에 혼자 두고 근심스러운데. 날마다 도도거리니 어떻게 살겠니?”
성호는 땅이 꺼지게 한숨을 후- 내쉬였다.
“참말 답답하구나. 보나마나 네가 또 본병이 뛰쳐나왔지?”
승호는 평행선을 달리려고 애썼다.
“아니야, 정말 억울하다. 이건 버선목이라고 뒤집어보이겠느냐? 쩍 하면 의심한다. 전번에 머리물감을 찾지 못하니 어쨌는지 아니? 웬 녀자를 가져다줬다고 야단친다. 또 저녁에 조금만 늦어 들어가도 웬 녀자와 술을 마셨는가 의심한다. 자기 곁으로 일주일만 가지 않아도 바깥에 나가 해결했는가고 묻는다. 부부간에 이렇게 의심하고서야 어떻게 사니?”
성호는 속으로 의심 많은 승호를 나무라면서도 한발 물러섰다.
“글쎄 확실한 증거가 없으니까. 이렇다 저렇다 할 순 없지. 허나 우리 집 안 전통을 깨는 일을 하자 말라. 그러는 날엔 절대 용서하지 않을테다.”
승호는 무겁게 머리를 끄덕였다.
“알았다. 나는 새 사람이 되려고 애썼다. 하지만 묵은 때를 벗을 방법이 없는게 정말 안타갑다.”
그는 그래도 피는 속이지 못한다는 것을 새삼스레 느꼈다. 가정이 위기에 처했을 때 그래도 기댈 수 있는 든든한 기둥이 있어 다행이였다.
한참 후 승호는 참고 참았던 울분을 토했다.
“넌 훈계할 자격이 있니? 숱한 고무들과 삼촌들이 조카란 걸 뻔히 알면서도 어쩜 그렇게 할 수 있니? 언제 한번 날 찾아와 따뜻한 말 한마디라도 해준 적이 있니? 그러니 녀편네도 날 개처럼 취급하지.”
성호는 진심으로 사과했다.
“죄송하구나. 혹시 너와 양아버지 사이가 벌어질가봐 찾아보지 못했다. 인사성이 밝지 못한 건 정말 우리 형제들 차실이야. 널리 량해해라. 이제부터 우린 숙질 간으로 새롭게 시작해보자.”
승호와 성호는 술맛이 다 떨어져 묵묵히 애꿎은 담배만 풀썩풀썩 피우다가 엉뚱한 말 한마디 했다.
“에이유, 차라리 영희와 훌 갈라졌으면 좋겠다. 녀자 없으면 못 산다더냐? 차라리 로봇녀자와 살았으면 더 좋겠다. 내 하자는대로 하고 잔소리 없어 살 것 같겠는데 말이야.”
승호는 참말 답답했다. 허경옥과 경쟁해야 하는 마당에 집 안에 불이 달렸다. 영희가 련며칠 승호와 아웅다웅 싸우더니 어디론가 훌 사라져버렸다.
영희는 뒤늦게나마 병원에 갔다가 자기도 승호한테서 무서운 성병-매독에 걸렸다는 것을 알게 되였다. 교수의사는 엄중하다면서 장기적으로 검진하면서 관찰해 보아야 한다고 했다.
그녀는 이제껏 애들을 보고 가정을 버리지 못했다. 그러나 이젠 더는 승호한테 아무런 미련을 가지지 않았다. 승호가 잘 때 그저 도끼로 단매에 찍어죽이고 싶었다.
그녀는 세상에 머리를 들고 살 용기마저 나지 않았다. 고민 끝에 그녀는 온다간다는 말도 없이 아들을 데리고 어데론가 사라졌다.
(어디로 갔을가? 일본으로 건너가 복화와 함께 살가? 한국으로 건너가 숨어서 살가?)
그제야 승호는 가정이 화목해야 만사가 흥성한다는 말이 가슴아프게 맞혀왔다.
승호는 성호의 지원을 받아 인터넷광고까지 했지만 아가씨들과 놀아대다나니 광고사업실적을 올리지 못했다. 결과 경옥과의 경쟁에서 지고 말았다. 안수련 리사장과 허철군 부서기 지지를 기반으로 한 경옥은 시내 모든 백화상점, 공장, 제3산업 분야의 광고를 싹쓸이를 하다싶이 하였다.
년말에 김범수 부사장은 광고임무를 완수하지 못한 승호의 부과장 직무를 해임해버렸다. 대신 범송을 부과장으로 임명했다.
설상가상으로 승호는 성병이 날따라 악화돼갔다. 생식기가 뻘겋게 부어오르고 군데군데 가렵더니 요즘에는 집게로 물어뜯는 것처럼 띠끔띠끔 아파났다.
황급히 화장실에 가서 들여다보고 깜짝 놀랐다.
귀두에서 고름이 질질 흐르고 썩어 떨어지는 것 같지 않겠는가.
그는 황급히 병원 피부과에 달려갔다. 성병과가 따로 있었지만 녀의사가 검진하는데다가 어쩐지 성병과에 들어서기는 창피했다.
피부과의 남성교수의사는 승호의 생식기를 보고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어서 가서 화험해보오.”
오후에 화험결과가 나왔다.
교수는 깜짝 놀랐다. 큰 전염병환자나 만난 것처럼 마스크를 끼고 장갑까지 끼더니 기록부에 승호의 성명과 주소, 전화번호를 일일이 적어넣었다. 물론 승호는 창피해서 거짓말을 주어댔다.
“입원해 치료해야 하오. 생명이 위험하오.”
“예? 무슨 병인가요?”
의사는 상을 찡그리며 승호를 가까이 하기도 싫어했다.
“잘 치료하면 몇해 살겠는지.”
“예?”
승호는 더욱 놀랐다.
의사는 그를 한쪽으로 데리고 가서 나직이 말했다.
“당신은 에이즈에 걸렸소. 처자들도 검진하러 오라고 하오. 처자들한테도 전염됐을 가능성이 있소.”
순간 승호는 정신기둥이 와그르르 무너졌다. 허망 땅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으며 물앉고 말았다. 눈앞이 캄캄하고 머리가 뗑해났다.
의사가 황급히 전화로 120구급차를 불렀다.
이윽고 승호는 구급차에 실려 지역의 큰 병원에 들어갔다.
한참 후 승호는 천천히 정신을 차렸다.
그가 눈을 떠 둘러보니 쇠살창을 댄 새하얀 병실이 아니겠는가.
순식간에 화장터 문어귀에 실려온 듯한 기분이였다. 진짜 절망의 구렁텅이에 훌렁 빠져들어가는 강한 충격에 견디기 힘들었다.
그는 모든 것을 잃고 말았다. 아득바득 기여오르자던 과장자리도 잃어버렸고 따뜻한 가정도 사랑도 풍비박산나고 말았다. 목숨마저 마가을 앙상한 나무초리에 매달려 간들거리는 누런 이파리로 되고 말았다.
그는 절망에 빠져 침대에 맥없이 쓰러져 신음했다. 썩어떨어나가는 육체의 고통과 악몽이 끝없이 기신기신 기여와 절망의 고통 속에서 허덕이는 혼을 집게로 짚어놓으며 괴롭혔다.
벽화와 성호가 황급히 병실에 달려왔다. 병원 의사들은 감염될가봐 그들이 승호의 병실에 들어가지 못하고 문 밖의 먼 발치에서 문안하게 했다.
벽화는 쇠살창 너머 “사형선고”를 받은 승호를 보는 순간 까무러쳤다.
성호가 황급히 부축했다.
“아주머니, 정신 차리오.”
승호는 쇠살창을 부여잡고 부르짖었다.
“어머니, 죄송합니다. 불효를 저질러서…흑흑흑.”
이윽고 승호는 성호의 날카로운 눈길을 피하면서 침대머리에 돌아가 서랍에서 종이쪼박과 원주필을 꺼내더니 뭐라고 써서 의사한테 주었다.
성호가 받아보니 이런 글이 쓰러진 쑥대처럼 누워 있었다.
내 병에 걸린 걸 양아버지와 범송한테 알리지 말라. 괜히 어머니와 선금이 치란받겠다. 난 죽어도 조상들 산소 옆에 갈 면목이 없게 됐다. 죽으면 화장해서 하늘에 날려보내라. 작은삼촌 말처럼 열 집 사위로 살기보다 한 녀자의 참된 남편으로 사는게 옳은 걸 그랬어. 인생은 일장춘몽이라. 아득바득 해도 모든 게 허사로구나.
그 피눈물나는 글발을 본 순간 성호는 눈물을 금할 수 없었다. 그는 안타까움에 젖은 눈길로 피골이 상접한 승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는 인간측면으로 승호를 염오하고 심지어 증오했다. 그러나 한피줄로서 생명의 마지막 순간에 처한 친조카가 한없이 가엾었다.
“야, 이 못난 놈아, 어쩜 그런 짓을 해 몹쓸 병에 걸렸냐? 엉? 흑흑흑.”
승호는 쇠살창을 부여잡고 까무러친 어머니와 옆에서 부축하는 작은삼촌을 내다보면서 참회의 눈물을 찔끔찔끔 쏟아냈다. 후회가 세찬 파도처럼 충격하였다. 죄책감에 찬 눈물이 누르무레한 코물과 함께 초췌한 두 볼을 타고 줄줄 흘러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