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편소설
멍청이 누나
김만석
1
삼꽃거리 정선식당 주인 정선이가 심장병이 도져 또다시 드러누웠다. 벌써 1주일 째다.
식당 복무원 아가씨가 문을 살며시 열고 정선이가 누워있는 복무원 휴식실을 들여다 본다. 정선이는 녀성 치고 키도 크고 몸집도 풍만한 축이였다. 얼굴도 두리 넙죽하고 눈도 커서 얼핏보다도 어리무던한 40대 녀성으로 안겨왔다.
《아줌마》
《엉?》
《정말 별란 사람 다 보겠어요. 》
《어떤 사람? 》
《글쎄 아줌마를 찾아왔다던 사람이 아줌마 앓는다고 하니 도루 가지 않겠습니까. 》
《남자? 여자? 》
《녀잔데 어떤 젊은 총각을 데리구…》
《나이는 얼마나 돼 보이구? 》
《쉰살 될가? 》
《누굴가? 》
정선이는 복무원 아가씨를 내보내고 아예 도리머리를 하면서 더는 다시 생각하지 않기로 작심했다. 외톨이로 살아오는 정선이에게는 그 누가 애잡짤하게 생각하며 찾아줄 사람은 따로 없었던 것이다.
정선이는 커다란 눈을 멍하니 뜨고 천정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애꿎은 눈물만 흘리고 있다. 매번 심장병이 도질 때면 이젠 습관이나 된 듯 저승으로 가신 아버지도 그리웁고 정선이네 오누이를 버리고 떠나간 어머니도 그리웁고 배 다르지만 시집간 혁화언니도 그리웁기만 했다.
아버지는 1952년도에 고향마을의 부농의 딸과 결혼하여 영옥이라는 딸까지 보았다. 그러던 아버니가 연길에 전근하여 입당하게 되면서 당조직의 제의와 동의를 거쳐 부농의 딸인 그 녀성과 합법적인 리혼을 하였던 것이다. 그후 아버지는 가무단 무용 배우와 결혼했는데 그래서 태어난 것이 정선이와 정철이였다.
정선이가 2살 나던 해에 농촌에서 살던 8살에 나는 영옥이가 아버지를 찾아오게 되었다. 정선이 한테는 난데없던 언니가 생기게 된셈이였다. 날마다 공연을 다니는 어머니다 보니 집에 붙어 있는 날이 한달 치고 거퍼 2~3일도 되지 않았다. 이런 형편에서 언니가 나타났으니 경선이는 얼마나 좋았는지 모른다. 언니 뒤를 졸졸 따라 다니던 일들이 눈앞에 삼삼히 떠올랐다. 얼마나 즐거운 동년이였던가…
그런데 그런 재미나는 일들을 쓸어내치고 이번에는 무시무시한 문화대혁명 때 일들이 꿈틀거리며 눈앞에 느닷없이 펼쳐지였다. 대비판 투쟁대회, 11살에 난 정선이는 동생 정철이와 함께 아버지네 직장으로 갔다. 정선이는 자기의 두눈을 의심할 정도였다. 앞가슴에 주자파 라는 패쪽을 건 저 사람이, 저 사람이 누구냐 그것은 아버지, 아버지였다.
살벌한 기운이 차고 넘치는 장소, 아츠러운 투쟁구호소리가 소름이 끼치는 장소! 그런데 난데없던 키 자그마한 농촌 녀성이 씽 달려 나가더니 코신짝을 벗어들고 아버지의 뺨을 후려치는것이였다.
《이놈이, 이놈이 이란구 대류망이꾸마! 새끼까지 있어가지구 나를 차버린 놈이꾸마. 이 개같은 자식! 퉤, 더럽다, 더러워! 이런 날이 올 줄을 몰랐지? 》
그녀는 미쳐 날뛰였다. 정선이는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 못하고 그저 오돌오돌 떨기만 하였다. 아버지는 바위처럼 끄떡 잖고 우뚝 서서 그 부리부리한 눈에 불길을 펄펄 날리며 그 녀성을 뚫어져라 쏴보기만 하였다. 세상 모르는 정철이는 이를 부드득 갈며 씩씩거렸다. 정선이는 정철이를 꽈악 그러안고 발만 동동 굴렀다.
그때 어디선가 새된구호 선창소리가 들렸다.
《주자파 정경호를 타도하자! 》
《대류망 정경호를 타도하자! 》
군중들의 제창소리는 하늘 땅을 진감했다. 그런데 저 구호를 부르는 사람은 또 누군가? 정선이는 된 방망이에 한매 호되게 얻어 맞은 듯 정신이 아찔했다. 도무지 알고도 모를 일이였다. 그것은 17살에 나는 영옥언니였다. 아니 영옥이가 저럴 수가 있을가? 아무리 두눈을 비비고 다시 보아도 영옥언니가 틀림없었다. 영옥이…영옥이…
오늘 따라 어쩐일인지 그런 언니라도 보고싶은 정선이였다. 너무나 외롭고 너무나 고독하고 너무나 쓸쓸한 정선이였으니깐… 정선이가 40살에 나니 언니두 인제 46살 되였을 것이다. 지금은 그냥 훈춘에서 어떻게 살고있는지?
2
《따르릉… 》
전화벨 소리가 울리였다. 한번 두 번 세 번… 정선이는 까딱 움직이지 않고 그냥 누운 그대로이다. 정선이는 전화벨 소리를 들었는지 말았는지… 하도 지꿎게 울리는 전화여서 정선이는 마지 못해 송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여보세요. 》
《말씀하세요. 》
《저…아재… 》
《아재라니? 》
《저… 조카입니다.》
《조카라니? 》
《훈춘 혁화의 아들, 아니 영옥의 아들…》
《어머나! 》
정선이는 한쪽으로 기우듬히 쓰러졌다. 이게 도대체 웬 일인가? 보지도 못한 조카가 어찌하여 나한테 전화까지 한단 말인가? 뭐 혁화의 아들? 조카? 장장 24년간 꼬물도 소식이 없던 언니가 오늘 무슨 바람이 불어서 아들까지 내세워 이렇게 전화를 거는걸가? 더는 듣고 싶지가 않은 전화였다. 정선이는 송수화기를 전화기 우에 덜컥 올려 놓았다.
또다시 전화벨소리가 울렸다. 정선의 눈앞에는 수만개의 의문부호들이 둥둥 떠올랐다. 지꿎게 들려오는 전화벨소리, 정선이는 짜증나서 이마를 찡그리고 송수화기를 다시 들었다.
《아잽니까? 저 영철입니다. 아마 아재는 이 조카를 보지도 못했으니 잘 모르실겁니다…》
《….》
《전화 듣고 계십니까? 아재 제발 빕니다. 》
《그래 전화번호는 어떻게 알았지?》
《아재 옳구만! 아재, 엄마와 난 1주일 전에두 연길에 왔댔슴다. 그 때 아재네 식당을 겨우 찾았댔슴다.》
《우리 식당은 어떻게 알구? 》
《예, 그건 지난번 연변일보에 아재 사적이 났습니다. 자치주 치부모범이라구! 그날 나는 엄마를 모시구 아재네 식당 앞까지 찾아 갔댔슴다. 그런데 아제가 앓는다니… 엄만 빈손으루 어떻게 들어 가냐면서… 그래서 들어 가지 못했슴다. 그 때 아제네 식당 간판에 있는 전화번호를 베껴 가지구 왔슴다. 아재, 지금 듣고 있슴까?》
《…》
《아재, 울엄마 급성당뇨병에 걸려 이젠 막 위급함다. 지금 연변병원 관찰실에 있는데 아재, 정말 미안함다. 엄마가 아재한테 알려선 안된다는 것두… 아재, 난 렴치를 불구하구 이렇게 엄마 몰래 가만히 전화 겁니다. 지번에 올 땐 소를 팔구 이번엔 집까지 팔아가지구 왔는데 그런데두 돈은 판판 부족이니… 흐윽… 아재 제발 울 엄마를 살려줍소…》
정선이는 송수화기를 땅에 탕! 떨어뜨린 채 맥을 버리고 습관대로 두눈을 지긋이 감았다. 어쩌면 이다지도 모진 인간일가? 어떤 때는 형제관계를 칼로 썩뚝 베이버리고 아닌 보살하던 사람이 오늘은 제 아들까지 내세워 아재요 뭐요 하는 영옥이야말로 세상에 더없는 밉살스러운 인간으로 안겨왔다. 정말이였다. 영옥이처럼 매정하고 악착하고 몰염치한 인간은 이 세상에 더는 없을 것이다.
1970년 이른 봄 ‘검은굴’에 갇혀 너무 고생하던 끝에 아버지는 간염으로 중하여 집에 나와 치료하게 되였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계급계선을 나눈다면서 언녕 달아난지도 오래였다. 그래서 15살에 나는 정선이가 아버지의 병시중을 도맡아 하는수 밖에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영옥언니가 웬 낯모를 청년을 데리고 와서 병마에 시달려 몸져누운 아버지 앞에서 행패를 부리는것이였다.
《그래두 이게 아버지인가요? 주자파, 반혁명, 대류망! 이름도 듣기 싫어요. 난 아버지를 반란해요. 난 이 가정을 반란해요.난 내 이름 석자도 반란해요. 난 이제부터 혁화(革花),혁명의 꽃 혁화임다.》
그리고선 아버지한테 더 바싹 다가들며 악청 높이 웨쳐댔다.
《우린 결혼 할텝니다. 이 잘난 반혁명 집에선 전 못 살겠어요. 첫날 옷과 이부자리를 당장 해내요! 》
《이 쌍년아, 네 눈에는 이 죽어가는 애비가 안 보여?》
누워있던 아버지가 벌떡 일어나 앉으며 벽력같이 소리쳤다.
《흥, 그러면 겁나 할줄 알아요? 우리는 혁명반란파 맹장이에요. 그래, 말해봐요. 해주겠는가, 못해주겠는가? 》
그때 밖에 나갔다가 들어온 정철이는 13살이지만 오가는 말에서 그 기미를 인차 알아채고 대뜸 성난 사자가 되였다.
《나갓! 당장 못 나가겠어?》
정철이는 씽 달려가 식칼을 집어들었다. 정선이는 몸부림치는 동생을 끌어안고 모지름을 썼다.
《반혁명 새끼 따긴 따구나. 야, 그래 누날 죽일테니? 죽이겠음 어디 죽여 봐. 어디서 새끼 반혁명 같은게…》
그러면서도 겁을 집어먹은 영옥이네는 슬슬 뒤걸음을 치다가 문을 차고 꽁무니를 내뺐다. 정철이는 자기를 끌어안은 정선이를 뿌리치고 영옥이네를 따라 나섰다. 그는 돌멩이를 뿌리며 쫓아갔다.
《쌍간나새끼, 죽인다 죽여! 》
아, 너무도 끔찍한 사실, 너무나도 진실한 이야기다!
그러던 혁화가 자기는 차마 말을 못하고 자기의 아들을 내세워 전화에 대고 지금도 뭐라고 씨부렁대고 있다.
‘뭐 나한테 빈다구? 급성당뇨병? 마지막으로 살려달라고?’정선이의 귀에는 영철이가 말하던 중점단어들이 옹골차게 들려왔다. 어쩌면 그런 말들이 아무런 거침없이 목구멍으로 술술 튀여 나올가? 지나간 일들을 잊지 않았다면, 아니 최저 한도로 인간이라면 그 에미에 그 아들이라도 도저히 그럴 수는 없겠는데…
그래도 아재란다. 아니 언니란다. 언니? 그래 언니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같은 피줄을 함께 타고난 자매들끼리 하는 말이 아닌가? 그렇다면 혁화는 아버지의 딸이 옳은가? 아버지와 결혼한 그 농촌 녀성이 낳았으니까 아버지의 딸이 옳기는 옳겠지. 그러면 영옥의 몸에도 아버지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말이 된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더니… 기딱찬 현실이다. 그러니 영옥이는 어쨌든 나의 언니, 정철의 누나다… 정선이는 악몽에서 깨여난 듯 화뜰 놀라기까지 했다. 모질고 모진 인연이 정선이를 끄당긴다.
아버지는 이제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달아나고 이제 남은것이란 아버지의 피줄을 이어받은 정철이와 나, 그리고 영옥언니가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니 정선의 꽁꽁 얼었던 가슴은 금시 물에 젖은 솜이 되여 버렸다. 어릴 때 자기의 손을 잡고 다니던 언니의 그 부드러운 손이 따뜻이 느끼여 왔다. 정선이는 저도 모르는 사이 윤기간의 정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정선이는 누운대로 팔을 뻗쳐 송수화기를 들었다. 그리고 정철의 호출기 번호를 하나씩 꼭 꼭 눌렀다.
3
정선이는 정철이가 어서 빨리 돌아오기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 호출한지 2시간은 좋이 지났건만 정철이는 눈앞에 나타나지를 않았다. 벌써 날은 저물어 창밖은 어둑스레 하다. 정선이는 어딘가 불안하고 허전하고 아니, 외롭기 그지없는 종잡을수 없는 기분에 휩쌓여 가슴이 답답하기만 했다. 시간은 너무나 지루하였다.
이때 층계를 오르는 쿵당쿵당 하는 무거운 구두발소리가 울렸다. 보나마나 그것은 동생의 발자국 소리였다.
《누나!》
설흔살 넘어 이미 애 아버지가 다 된 정철이는 방에 들어서기 바쁘게 철부지 아이처럼 누나부터 찾았다.
《누나 또 아프오?》
《괜찮어. 》
《그런데 호출은? 》
정선이는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의 사랑도 모르고 자라난 동생을 대견스럽게 바라보았다. 아버지를 닮아 키가 구척 같고 얼굴이 너부죽하고 어글어글한 눈길… 실로 아버지의 모습 그대로인 동생이였다.
《헤헤헤… 그런걸 난 또 누나 더 앓는가구 했지뭐. 누나 앓음 안되오… 옛소, 이 달두 괜찮게 벌었소.》
정철이는 호주머니에서 백원짜리 한묶음 꺼내 정선의 앞에 밀어 놓았다.
《누나, 이 돈으로 병을 치료하오.》
《아니다. 이 누나 어디 돈 없는 사람이니? 》
사실 정철이는 세월을 잘 만나고 또 누나를 잘 만나 누나가 사준 택시를 몰고 다니는 새시대의 젊은이였다. 이런 정철이는 이 세상 하나 밖에 없는 정선이를 엄마처럼 고이 믿고 살았다.
《정철아》
《양?》
《정철이는 누나 말을 잘 듣지?》
《그래, 누나 말을 안 듣구 누구 말 듣겠소. 헤헤헤… 》
정철이는 어릴 때처럼 정선의 손을 꼬옥 잡고 제딴에 좋아 어쩔줄 몰라 했다.
《정철아…》
《야— 누나두 할 말 있음 얼른 할게지…》
《그래 저… 저 훈춘에 큰누나가…》
《뭐?!》
《큰누나… 혁화언니…》
정철이는 금시 전기줄에 닿은 듯 화뜰 놀라면서 누나의 손을 팽개쳤다.
《누나, 또 그 소리요?》
정철이는 대번에 가파른 언덕을 톺아오르는 황소처럼 씨근 벌떡거렸다. 주먹으로 자기의 손바닥을 땅! 쳤다. 안절부절 못하는 정철이였다.
《정철아, 너 누나 말을 듣는다구서두?》
《다른 말은 다 들어두 그 쌍년 말은 안 듣겠소!》
《얘, 정철아!》
《안 듣는다는데! 》
칼날같은 정철이였다. 정철이는 자리를 차고 발딱 일어났다.
《정철아, 게 앉어! 》
정선이는 간신히 일어나 앉으며 정철이한테 명령했다. 그 소리에 발목이 잡힌 정철이는 그만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정철아, 혁화언니 급성당뇨병이란다…》
《당뇨병이 아니라 암이면 뭐라오?》
《지금 연변병원 관찰실에 와 있다는구나.》
《그런걸 누난 상관할게 없소!》
《정철아, 혁화언니두 사람인게 인제는 자기의 죄를 느끼구 있겠지…》
《죄!? 으하하하…》
정철이는 미친 사람처럼 앙천대소하였다. 정선이로서도 정철의 마음을 돌려 세울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있었다. 그러나 앓는 몸으로 오직 바랄수 있는 사람이란 정철이 하나밖에 없었다. 그런데 정철이가 이렇게까지 강경하게 나오니 무슨 뽀족한 수가 있겠는가?
정선이는 두눈을 꼬옥 감고 맥없이 자리에 드러 누웠다. 그렇게 모진 정철이도 눈앞에 쓰러지는 누나를 보고 주춤 제 자리에 물앉았다.
《누나, 누나 병부터 먼저 고쳐야 하는거야!》
《야—세상에… 어디 이런 변이 있느냐? 우리 3형제는 어찌되여 이렇게 원쑤처럼 지내야만 하니?》
《그게 어디 누나나 내 탓이오? 우린 3형제가 아니오! 우린 누나하고 나, 이렇게 오누이 둘밖에 없소. 그래 그따위 쌍년도 인간이란 말이오? 누나, 그래 잊었소? 》
《정철아, 그만해!》
《난 못 잊소! 난 죽어두 못 잊겠단 말이오. 누나 정말 머리가 돌지 않았어?》
《아니다. 누나는 머리가 돌지 않았어! 그 때 언니두 오죽했으면 그랬겠니?》
《이것 보지. 그러기에 누나 멍청이야! 누난 세상 둘도 없는 멍청이야, 멍청이야! 》
정철이는 제 가슴을 잡아 뜯으며 좁은 방이 쩌렁쩌렁 울리게 고래고래 소리 찔렀다. 웬일인지 두 사람의 대화는 여기서 동강나고 말았다. 무서울 정도로 괴괴한 침묵이 흘렀다. 둘은 눈물범먹이 된 눈으로 물끄럼 말끄럼 서로 쳐다 보고 있다.
정선이는 떨리는 손을 내밀어 정철의 손을 끄잡아 당겼다. 살뜰한 정이 흘러가고 뜨거운 정이 흘러오고 있었다. 혁화 때문에 성들을 냈지만 오누이의 정은 변함없이 고스란히 흐르고 있었다.
4
정선이는 쿵당쿵당 충계를 내려가는 정철의 발걸음 소리를 들으며 엉거주춤 일어섰다. 방금 정철이는 《누나, 다시 혁화이야기를 꺼내면 누난 내 누나 아니요!》하고 최후통첩을 내리고 떠나갔다. 정선이는 더는 누워있고 싶지가 않아서 밖으로 나왔다. 밖은 벌써 어두운 밤이였다. 가로등이 환히 켜졌고 전조등을 켠 택시들이 밤거리를 뻔질나게 달리고들 있었다.
정선이는 무거운 다리를 질질 끌며 거리길에 섰다. 웬 택시가 정선이의 옆에 와서 스르르 멈춰섰다. 정선이는 마치 택시를 기다린것처럼 택시에 올라 앉았다.
《어디 가시려는지요?》
《예?》
《저 어디까지? 》
《가는데 까지 가자요.》
택시운전수는 정선이를 뒤돌아보고 알겠다는 듯이 부르릉 발동을 걸면서 밤거리를 내달렸다. 가로등도 뒤로 물러서고 택시들도 다가 와선 뒤로 뒤로 뻔질나게 사라지고
《어디가실까요?》
《그냥 가세요.》
정선이는 등받이에 기대여 두눈을 지긋이 감고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으려했다 그러나 정철이가 고래고래 소리치던 그 웅글은목소리가 지금도 귀청을 아프게 때리였다. 그리고 혁화의 그 무서운 얼굴이 눈앞에 서서히 나타났다.
1976년 아버지의 병은 오랜 간염
L에 간암으로 번졌다 그래서 21살에 나는 정선이는 큰 마음을 먹고 훈춘에 시집간 영옥언니를 찾아갔다. 돈은 걱정 말고 정선이와 함께 아버지를 모시고 북경병원에 가자고 말이다. 그런데 언니는 완전히 딴 사람으로 변했다.
《그래 아버지가 아버지 노릇을 어디 했니? 이 계급투쟁 년대에 현행반혁명으로 자식들에게 루를 끼쳤으면 됐지 그것두 모자라서 또…여태 모르는척 하다가 제가 죽게 되니 이 딸을 찾는다니?》
《건 아버지 요구가 아니예요! 건…제 생각에서…》
《그래두 난 못 가!》
혁화는 바로 이런 인간이 아니였던가!
그때 더는 방법이 없어서 정선이가 아버지를 모시고 북경병원에 갔다. 아버지는 병원침대에 누워서 다시는 일어나지를 못하였다.
《이 불쌍한것아. 이 아버지에겐 자식이 너 하나밖에 없구나》
《아니, 아니예요. 정철이두…》
《그래 정철이두 있지…》
《아버지 그리구 혁화언니두…》
《그 그만둬! 그 쌍년 이름은 듣기두 싫어, 싫단 말이여!》
아버지도 혁화언니를 자기의 딸로 취급하지 않았다. 그러니 혁화는 나의 언니도 정철의 누나도 아니지 않는가?
그후 아버지는 끝내 북경병원에서 잘못되였다.
《아버지-》
정선이는 아버지를 목놓아 부르며 울고 울고 또 울었다. 심장이 툭 멎는것만 같았다. 정선이는 끝내 정신을 잃고 사망된 아버지 옆에 쓰러졌다. 이렇게 아버지의 병시중을 왔다가 정선이는 심장병으로 몸져눕는 신세가 되었다. 그때 북경에서 언니한테 전보를 쳤는데 언니는 감감무소식이였다. 아버지의 골회함을 안고 연길에 왔을 때도 언니는 반쪽 얼굴도 내밀지 않았다.
이래도 그래 혁화는 나의 언니란 말인가? 아니다! 과연 정철의 말은 추호도 틀린데가 없다. 혁화는 그때 벌써 우리를 배반한 인간이다! 그래도 혁화는 제 아들을 시켜 나를 이렇게 찾고있다. 마지막으로 살려 달란다. 나 한테 애걸복걸한다 왜서? 혁화가 사람이라면 어디 말해 봐, 말해 보란말이야! 정선이는 속으로 이렇게 목놓아 부르짖었다.
그래 혁화는 무엇 때문에 장장 24년간 소식이 없다가 이렇게 나타났을가? 뭐 《연변일보》에서 내 소식을 알고? 그렇다면 그것은 내가 돈을 벌었기 때문이다. 아니, 내가 부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돈, 그래 그 돈을 어떻게 벌었던가?
아버지가 돌아간 후 정선이는 제대군인과 약혼하고 벼락결혼까지 하였다. 정선이는 아버지께서 남겨준 집을 팔고 그 돈으로 식당을 꾸리였다. 그리고 세방살이를 하면서 아글타글 돈을 벌어 지금 이 정도로 되었다. 지금은 큰 식당을 앉히고 몇십만원 저금하고 살게 된것이다.
그런데 오늘 혁화가 손을 내민다. 그 돈으로 입원시켜 달란다. 그래 돈이 없으니 나를 찾은 것이 아니란 말인가? 그렇다. 바로 이것이 답안이다! 그렇게 많은 의문부호들이 금시 사라지고 드디어 종지부호가 크다맣게 찍어졌다. 그러니 정선의 무겁던 가슴은 가든해지고 정선의 몽롱하던 눈앞은 안개가 걷히듯이 점차 맑아졌다.
《기사님, 여기 어디죠?》
《예, 여긴 조양천입니다.》
《조양천?》
《그래요.》
《택시를 돌려주세요.곧장 연변병원으로 몰아요!》
5
연변병원 관찰실 문앞에 이른 정선이는 무춤 서버렸다. 여기까지 찾아오고서도 그래 들어가야 하는가? 아니면 아예 돌아가야 하는가? 정선이는 망설이게 되었다. 그러나 어찌된 영문인지 발걸음은 저도 모르는 사이에 관찰실 문앞으로 다가갔다.
유리창 너머로 서너명 되는 환자들이 보였다. 정선이는 대뜸 혁화를 알아보았다. 그렇게 고웁던 얼굴이 24년 지난 오늘은 살이 빠지고 쪼골쪼골 주름이 잡혀서 볼모양이 아니였다. 그렇게 생기돌던 두눈도 푹 꺼져 들어가 감겨져 있었다. 앙상한 장작깨비 같은 손등에 꽂은 주사바늘을 통하여 점적주사약이 한방울 두방울 가녀린 몸으로 흘러들어가고 있었다.
어쩐지 측은한 생각이 든 정선이는 관찰실 문을 살며시 열고 환자들에게 눈인사를 하면서 혁화 한테로 다가갔다.
《아재 아니오?》
《누군데?》
스무나문살 되어보이는 청년이 손부터 내밀며 물었다. 그러나 정선이는 그 손을 잡지 않았다. 이렇게 말하는것을 보면 혁화의 영철이라는 그 아들이 분명하였다. 그러나 저으기 노(怒)자가 든 정선이는 영철이를 알은체도 하지 않았다. 정선이는 침대곁에 다가가 혁화의 손을 잡았다. 소학교 다닐 때의 그 보드라운 손이 아니였다. 그때 혁화가 움퍽눈을 가슴츠레 뜨고 정선이를 알아보았다.
《네가 왔구나!》
혁화는 이렇게 말하고는 두눈을 다시 감는것이였다. 정선이는 대답 대신 그저 손을 지긋이 잡았다.
《네가 왔구나. 네가! 고맙구나…》
《아…ㄴ…니…》
《이 죄많은 나를 …그래두…언니라구…그예…찾아 왔구나…》
혁화는 가냘픈 목소리로 그러나 울음 섞인 목소리로 띄엄띄엄 말하는것이였다.
《용서해다구 정선아…》
《….》
정선이는 대답하고 싶지가 않았다. 그래서 고개 한번 끄덕잖고 혁화의 입만 뚫어지게 지켜볼뿐이였다. 혁화는 눈물 코물 흘리며 뭐라고 주어대기 시작했다. 그러나 정선의 귀에는 그것이 통 들리지를 않았다. 혁화가 어찌나 흐느끼며 오래동안 지껄이는지 나중에 정선이는 마지 못해 귀를 기울이였다.
《…내라구 왜 아버지 딸이 아니겠니? 그때 현행반혁명으로 몰리운 아버지 때문에 …나는 남 다 드는 홍위병에두 못들어댔어…군중조직에서는 아버지와 계급계선을 나누어야 …홍위병에 들수 있댔어 홍위병에 들어야 …북경 천안문광장에 가서..모주석의 검열을 받을수 있었던거야…그래서 나는 …아버지를 투쟁했던거야. 아버지를 타도하는 구호를 부르고…그 결과 나는 홍위병에 들고…북경에 가서 모주석의 접견도 받구…반란파표병(본보기)까지 되었지만 …아버지는 타도되고 아버지는 앓아눕구…아버지는 돌아가시구…》
그래도 정선이는 가타부타 말이 없이 귀만 열어놓고 혁화가 무슨 말을 어떻게 하는가고 밭아 듣고만 있었다.
《정선아, 그때 나는 반란파 대장과 련애를 했댔어…그런데 아버지와 계급계선을 나누지 鳧만 결혼을 안 한다는거야…그땐 검은 5류분자 자녀는 시집두 못 가는 세상이였어…그래서 나는 결혼하기 위하여 아버지를 반란하고 우리집두 반란하구 이름두 반란하구…형제두 반란하구…아이구 기가 찬 세월이였어…》
그래도 정선이는 아무런 응대도 없었다.
《정선아, 아버지가 앓아 북경간다구 할 때두…아버지가 암으로 세상 떴다 할 때두…난 그때 화선입당을 하느라구 납뜰 때였어. 당에 들자면 립장이 견정해야 한다는거야…그래서 난 얼굴 한번 내밀지 않았던거야…이런 나를 그래 아버지의 딸이라구 할수 있겠니? 내가 죄를 졌지 죄를 졌지 무어야..》
여기까지 듣던 정선이가 갑자기 소리 찔렀다.
《듣기 싫어요!》
《정선아》
《그만 해요!》
계급투쟁 년대에 제 한목숨 살자고 살판치던 한 인간의 때늦은 후회를 더는 듣고싶지가 않았다. 정선이는 입술을 짓깨물었다. 어쩐지 오열이 화끈 나면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입당? 아버지를 잡아먹은 인간이 그래 만백성을 위해 전심전의로 일할수 있어? 당에서 그래 혁화같은 인간망종을 받아들여? 최저한도의 인간성마저 깡그리 게세 당한 인간! 그래 가지고 혁명은 무슨 뚱딴지 같은 혁명이야!
정선이는 입을 하 벌리고 자기를 멍하니 쳐다보는 혁화를 갈기 갈기 찢어놓고만 싶었다. 이같이 악착한 혁화라는 인간과 인연이 맺어진 것이 한없이 저주로 왔고 또 그런 인간을 언니라고 부르게 된것이 한없이 원통하여 견딜 수가 없었다.
그때 호사가 들어와서 정선의 어깨를 툭툭 쳤다.
《밖에서 손님이 찾아요.》
《손님?》
정선이는 엉거주춤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복도에는 키가 구척같은 청년이 기다리고 있었다.
《누나, 이게 무슨 짓이야! 정말 그냥 이럴 테야?》
그 사람은 정철이였다. 정철이는 다짜고짜 정선의 손을 덥썩 잡고 밖으로 내끌었다. 허둥지둥 끌려 나온 정선이는 정철이 한테 떠밀려 차에 올랐다. 차는 부르릉 앞으로 내달리였다.
6
그날밤 정선이는 한잠도 자지를 못하였다. 혁화는 얼마나 모질고 영악한 인간인가! 문화대혁명 기간에 죄 지은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 대부분이 제 잘못을 느끼고 새사람이 된지도 오랜데 어찌하여 이제 와서야 눈물코물 흘리며 잘못을 느낀다고 할가?
정선이는 두 눈을 껌뻑껌뻑 하면서 혁화 모습을 눈앞에 떠올렸다. 살이 싹 빠져 피골이 상접해 볼모양이 없이 된 혁화, 그래도 없는 눈물을 짜가면서 말하던 혁화…말하는것을 보면 어느 정도 제 잘못을 느끼는것 같기는 하였다.
그렇다면 죄를 느끼는 혁화를 내가 리해하지 못하는 것이란 말인가? 정선이는 머리를 마구 가로 저었다. 도무지 저로서도 가늠이 가지 않았다. 혁화와 나, 나와 혁화, 그 누가 그 누구를 리해하여야 한단 말인가?
아버지가 간암에 걸려 북경으로 함께 가자고 했을 때 혁화는 뭐라고 떠버렸던가?《제가 죽게 되었으니 이 딸을 찾는다》고 악다구니질을 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이번에 제가 죽게 되었으니 동생이라고 오늘 나를 찾아온것이 아닌가? 가증맞은 인간! 죄를 입어 급살맞을 인간! 죽어 천만번 마땅할 쌍년! 이렇게 욕하여도 혁화는 할 말이 없을것이다. 그래, 없고 말고! 정선이는 미친 사람처럼 악- 소리쳤다 이를 뿌드득 갈았다.
그런데 지난날 혁화가 그렇게 미웠는데 오늘 혁화를 미워하는 나는 그래 어떤가? 나는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 오늘 내가 죽어가는 혁화를 옆에 두고 손벽치며 잘코사니를 부르면 어떻게 될가? 오십보 백보라구…그래 혁화와 내가 무슨 구별이 있단 말인가?
시대가 변하여 오늘은 경제시대에 진입했다. 혁화는 지난 혁명시대의 력사적인 죄인이다. 그렇다면 오늘 경제시대에 나는 현실적인 죄인이 되어야 한단 말인가? 아니다. 절대 나는 혁화와 같은 그런 시대적인 죄인으로는 될 수가 없다.
정선이는 머리를 털고 정신을 가다듬었다. 까칠한 손으로 제 가슴을 치면서 울던 혁화,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혁화는 그래도 뒤늦게나마 자기의 과오를 느끼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혁화가 자기가 저지른 죄를 인정하고 또 그 죄를 내가 용서한다면 남은 것은 하나밖에 없는 언니 혁화뿐이다. 함께 아버지의 피줄을 이어받은 언니다. 언니,어릴 때 나의 손을 잡고 다니던 언니,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하지 않는가! 우리 서로 나눈 피! 그 언니를 용서해주자. 하나밖에 없는 우리 언니를 용서, 용서, 용서해주자!
여기까지 힘겨웁게 생각을 굴려오는데 《누나 멍청이야!》하는 정철의 목소리가 대포소리처럼 들려왔다. 두눈을 크게 뜨고 보아도 정철이는 없었다. 환각이였다. 정선이는 흠칫 놀라기까지 하였다. 하지만 정선이는 그런 멍청이가 되고싶은 것을 어쩔수가 없었다.
7
이튿날 정선이는 남편과 상론하고 《남편이 돈은 내더라도 언니를 만나서는 절대 안된다》는 전제조건을 내건 다음 선불금 4000원을 내고 언니를 연변병원에 입원시켰다.
정선이는 그날부터 매일 정심밥을 차려가지고 언니한테 다녔다. 그 옛날 아버지가 《검은굴》에 갇혔을 때 정철이의 손을 잡고 아버지 한테 밥을 날랐건만 지금은 정선이 홀로 언니한테 밥을 나른다. 어쩐지 정철이와 함께 밥을 나르고 싶은 마음이 앞서는 정선이였다.
오늘도 정선이는 정심밥을 들고 식당문을 나섰다. 하늘에 먹구름이 낮게 드리웠다. 숨막히는 날씨다 금시 소나기가 퍼부을 잡도리였다. 언니가 시원한걸 먹고싶다고 하기에 오늘은 랭면을 말아서 보자기에 싸가지고 나섰다. 이제 막 택시를 불러 타자고 하는데 지나가던 택시가 휘우듬이 꺾어들더니 정선의 앞길을 막으며 칙 하고 멈춰섰다. 정선이는 하마트면 넘어질번 하였다.
《눈이 없나요?》
부아김에 정선이는 입에서 뱀이 나가는지 구렝이 나가는지 모르고 욕을 퍼부었다. 그때 차창문이 열리더니 어떤 사내의 머리가 불쑥 나왔다. 검으락푸르락 하는 정철의 얼굴이였다.
《누나, 또 어디 가는거야?》
《…》
《또 병원 가지?》
《…》
《걸 보기오, 뭔가?》
정철이는 팔을 쑥 내밀어 정선기가 든 보자기를 나꾸어 챘다. 그 바람에 그릇이 기우뚱거려 간장물이 주르르 흘렀다. 정철이는 그 보자기를 잡아채더니 저쪽 아스팔트길에 팽개쳤다. 금시 꽝! 하는 폭발소리가 터졌다. 육수물을 넣은 보온병이 깨지는 굉장한 폭음이였다. 정철이는 누나의 팔을 끄잡아 당겨 무작정 차에 올려앉혔다.
《누나, 그 잘난 언닌지 뭔지 죽겠으면 죽게 내버려 둘게지. 누나 무슨 배가 아파 이 지랄이야!》
《정철아, 너 너무 그럼 못쓴다. 정철아 너두 지난날의 영옥누나를 얼마나 미워하구 있니? 그런데 지금 너두 지난날의 영옥누나처럼 사람같잖은 그런 행동을 해서 되겠니?》
《뭐라구?》
《혁화는 정치로 아버지를 못살게 굴었는데 너는 지금 죽어가는 혁화를 돈으로 못살게 굴면 되겠니?》
《말이면 다 하는줄 알어? 내가 언제…》
《정철아,난 네가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걸 잘 알고 있어. 너두 빈곤호를 돕느라고 2000원 의연금을 냈다구 어제 신문에 났더구나.》
《그렇소. 혁화가 인간이라면 2000원이 아니라 20000원이라두 내겠소. 지금 난 누나땜에 막 미치겠단 말이오!》
《그래두 아버지의 피줄을 이어받은 누님이 아니니?》
《피줄이구 나발이구 이젠 그런 말 집어쳐!》
정철이는 신경질적으로 꽥 소리 찔렀다. 그리고선 부르릉 차를 냅다 몰았다. 번개가 번쩍, 우뢰가 꽈르릉! 대번에 대줄같은 소낙비가 억수로 쏟아졌다. 콩알같은 비방울이 사정없이 차창문을 들입다 뚜다린다. 혁화언니가 얼마나 큰 대못을 정철의 가슴에 박아놓았으면 정철이가 이 정도로 미쳐 날뛸가? 정선으로서는 리해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정선이는 곧은 직장인 정철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정철이는 《이거 물럿!》하면서 정선의 손을 탁 뿌리쳤다.
택시는 억수로 퍼붓는 비속을 뚫고 빵빵 고속도로 달렸다.
8
언니의 병은 놀랍게도 빨리 호전되였다. 그러나 정선의 병은 되려 악화되여 갔다. 정선이는 연변병원에 입원하라는 의사의 권고도 마다하고 한사코 연길시병원에 입원하였다. 언니의 앞에서 나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가 않은 정선이였다.
병이 거의 나아진 영옥언니가 과일구럭을 사들고 오늘 연길시병원을 찾아와서 의지가지 없이 고생스레 혼자 아글타글 살아온 정선이를 문안하고 있다.
《정선아, 언닌 래일 퇴원하는구나. 너의 병이 낫기 전에 내가 먼저 나가게 되어 이 언니 가슴이 정말 아프구나. 고맙다, 정선아… 너 남편두 어제 너 몰래 나를 찾아왔더구나…》
《뭐라구요?》
남편이 전제조건을 어기고 정선이 몰래 혁화언니 방문을 하였단다. 정선이는 남편의 처사가 눈물겹도록 고맙기만 하였다.
《그리구 나 정철이를 보구 싶다만 죄 지은 년이 보자구 할수두 없구…》
《언니…정철이를 리해…》
《알았어 알았다구… 어떻게 하나 너네 오누이 재미있게 잘 지내다구…사람구실을 못한 언니 정말 부끄럽구나…》
언니는 이런 말을 남기고 점적주사를 맞고있는 정선이를 두고 떠나갔다. 정선이는 언니가 나간 출입문을 멍하니 바라보면서 뜨거운 눈물을 흘리였다. 그렇게 밉던 언니를 이렇게 용서해주자고 얼마나 안간힘을 썼던가! 정치시대에 혁화가 진 빚을 오늘 경제시대에 와서 청산하자니 그렇게 힘들고 그렇게 어려웠던것이다. 지나간 모든 일들이 몽롱한 안개속으로 서서히 사라져 갔다. 어지럽던 지난날의 세상사들을 깡그리 잊어버리고 싶은 마음이였다
《탕탕탕…》
누군가가 출입문을 다급히 두드렸다. 문이 벌칵 열리더니만 땀투성이가 된 정철이가 나타났다. 며칠전에 목단강으로 장거리를 뛰고 어제 저녁에 돌아온 정철이는 오늘에야 누나가 연길시병원에 입원한것을 알고 이렇게 드달려온것이였다.
《누나, 왜 이러는거야?》
《내 어쨌니?》
《에씨 또 그 쌍년 때문이야?》
《정철아…》
《그 쌍년이 옛날엔 아버지를 죽이더니 오늘은 누나를 죽이자는게 아니구 뭐야!》
《그렇게 말하는게 아니야》
《듣기 싫소. 급살맞아 뒈지지 않나 두고 보란 말이야!》
《정철아 영옥언닌 그래두 너를 보고싶어하더라.》
《걷어치우오. 옛말이면 듣기나 좋지. 더럽소, 더러워!》
《정철아 영옥언닌 래일 퇴원할거야…》
《퇴원?》
《병이 다 나았다누나》
《뭐? 누날 죽게 하구 자긴 나가구?》
정철이는 침대 옆에 놓인 탁상을 꽝 들입다 쳤다. 탁상 우에 놓였던 혁화가 사온 과일들이 떽데구르르 굴러 떨어졌다.
《퇴원 못해! 죽여 치울거야!》
정신 나간듯 정철이는 고래 고래 소리치며 문을 박차고 밖으로 뛰쳐 나갔다. 와당탕 분노한 발걸음소리가 병원복도를 쩌렁쩌렁 울리였다.
9
그 이튿날 영옥이가 퇴원하는 날이였다. 퇴원수속을 다 마치고 아들과 함께 병원문을 나서는데 색안경을 건 어떤 사람이 다가왔다.
《요부요 쭤처?(차를 타지 않겠어?)》
《장거리를 뛸수 있습니까?》
《썬마?(뭐라구?)》
아들은 색안경을 건 키 큰 청년을 올리 내리 훑어보았다.
《어머니 한족 사람입니다.》
《한족사람이면 뭐라니, 마침 잘됐다 짐두 많은데…》
이쯤되자 아들은 택시 운전수와 흥정을 걸었다.
《넝부넝취 훈춘?(훈춘으로 갈 수 있나요?)》
《싱(그러지)》
《둬소챈?(값은 얼마인가요?)》
《관타마디 쟈챈 취바(값같은 소리하네 가자구)》
택시운전수는 영옥이네를 택시에 앉히고 도문쪽으로 향하여 차를 냅다 몰았다. 택시가 어찌나 쏜살같이 달리는지 거리 집들이며 차들이며 언뜰언뜰 뒤로 뒤로 물러갔다. 차가 쉴새없이 들추는 바람에 머리가 연신 천정에 맞부딛쳤다.
《쓰지, 쏘우 만이댈마(기사님 좀 천천히 몰아요)》
《메이 쓰잰(시간이 없어)》
택시 기사는 웬일인지 택시를 한결 더 빨리 몰았다. 후미진 내리막길을 뻔질나게 미끌어 내려갔다가 이번엔 빵빵 하늘로 치달아 날아 올랐다. 껑충 언덕에 뛰여 오른 택시는 귀부리 쌩쌩 소리날 정도로 미친듯이 달렸다. 길 량쪽 백양나무들도 쓰러질듯 달려왔다가는 뒤로 뒤로 잦빠지며 물러갔다.
《어머니 기사가 술 마셨잖습니까?》
《모르는 소리. 술 마시구 차를 어떻게 몬다구 그러니..》
그때 차는 급작스레 삐익! 하면서 급정거하였다. 관성 때문에 영옥이네는 앞의자 등받이에 냅다 골받이를 했다.
《쓰지(기사님)》
《뚜이부치(미안해)》
택시기사는 담배 한가치 꺼내 물더니 팍 하고 라이타를 켜댔다. 담배연기를 길게 빨아서는 푸 하고 내뿜었는데 그 연기는 마치 모진 굴뚝에서 나가는 타래치는 연기 같았다.
이윽고 택시기사는 부르릉 하고 차를 다시 몰았다
《애야, 너 정선의 은덕을 잊지 말거라》
《예, 어머니》
그때 택시기사는 급작스레 또 제동기를 꽉 밟았다. 그 바람에 차는 앞으로 꼰졌다. 기사는 웬 일인지 입에 물었던 담배를 퉤!하고 내뱉었다. 영옥이네는 하도 의아쩍어서 서로 쳐다 보았다. 알고도 모를 일이였다. 차는 또다시 달렸다. 침묵이 흘렀다. 한참 후에 영옥이가 침묵을 깨뜨리였다.
《우리 같은 농촌사람들이 어디 돈이 있어 이런 택시를 탈수 있겠니? 어제두 정선아재가 돈 200원을 따로 주면서 집으로 갈 때 꼭 택시를 타라구…택시를 타지 않으면 언니가 아니라구…흐윽..그래서..》
《어머니 또 우시네…》
《그래 인제 안 울게…좋은 아재두 찾았는데 울어선 안되지 …아! 그런데 이 에미 어찌 지독하였으면 정철이 그 애가 글쎄 마흔닷새 되는 동안 한번두 찾아 안 왔겠느냐? 다 내탓이지…》
《그 외삼촌 말입니까?》
《그래, 세상이 뒤죽박죽이 된 그 세월에 사람두 사람나름이였지. 그 험악한 세상에 많은 사람들은 모두다 사람답게 살았는데 이 에민 그러지를 못했구나. 말로는 혁명을 한답시구 했지만 그게 어디 혁명이였니? 제 살 궁리만 하다나니 결국은 아버지두 잡아먹구 동생들두 잃어버리구…너는 절대 이 에미처럼 살아서는 아니된다 안되지!>.
《어머니 알만함다. 인제 그만 말씀하세요>.
그때 차는 또다시 부르릉하고 속도를 내였다. 먼지를 뽀얗게 날리며 앞으로 앞으로 내달리는 택시, 도문을 지나 두만강기슭을 따라 털렁털렁 들추며 달리고 달리고 또 달리였다.
《쓰지 또우라(기사님 다 왔어요)》
《쓰마(그래)》
《둬소챈?(얼마죠?)》
《둬소챈?(얼마죠?)》
기사는 웬일인지 힝 코방구를 뀌며 영옥의 아들의 말을 복창하였다. 그리고서는 빨리 택시에서 내리라고 호통하다싶이 영옥이네를 재촉하였다. 영옥이네가 택시에서 내리자 기사는 택시문을 쾅! 걷어 닫았다. 뒤미처 기사는 가던 방향을 향해 부르릉 차를 몰고 내뺐다
《쓰지- 저 챈…(기사님 이 돈을…》
《군타마디(꺼지라구)》
기사는 웅글은 목소리를 뽀얀 먼지 속에 휘말아 버리면서 머얼리 내달렸다. 그러던 기사는 갑자기 운전대를 주먹으로 빵 치며 소리쳤다.
《혁화, 혁화는 죽었어!》
갑자기 기사는 제동기를 밟으며 차를 급정거 시켰다. 그리고 차창밖으로 머리를 내밀고 뒤를 돌아다 본다.
《그렇다면 영옥이는…?》
그러나 영옥이는 이 모든 소리를 듣지 못하였다. 영옥이는 저 택시 기사가 정철이라는것을 끝까지 알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택시가 보이지 않을 때가지 고마운 저 택시 기사한테 영옥이는 오래 오래 손을 젓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