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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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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7    장편소설 황혼(2) 유언 김장혁 댓글:  조회:581  추천:0  2024-07-09
                 김장혁 작 장편소설 황혼                   2. 유언      유령은 천장과 용광로 사이를 동동 떠돌아다니었다.    “저, 부패분자!”   내 혼은 유령처럼 나타나 화장터 천정에 매달려 정호를 손가락질하며 대성질호했다.   (네놈, 그래도 국장이노라고 추모사를 읽어? 추도사? 거 뭐야? 격에 맞지도 않게 시를 읊어? 네놈 누구를 큰 별과 등대에 견줘 번쩍 춰 올려? 원래 넌 권력에 아부를 일삼아온 아첨쟁이야. 뭐? 책짐 싫어나르던 쪽배 어쩌구? 저쩌구? 책짐 배 파도에 휘말려 가면 너 그렇게 좋아? 참, 어처구니 없어. 추도사를 하는 척 하면서 뭐 횡설수설해? 추도사는 청렴한 총경리 성호 총경리 읽어야 하는 건데. 왜 그 친구 안 보이지? 참, 내 총망히 염라전에 오면서 깜빡 잊었군. 성호한테 미리 부탁해두는 건데.)        장례식장이란 건 또 뭔가?    이상해. 장례식장 정면에 마땅히 걸려 있어야 할 편액이 보이지 않는다.    뭐, “고 사막의 마라토너 리종호선생(사장) 추도대회”라던가. 그런 글 보통 걸려 있는데 말이야. 대신 뭐 “특급구급실”이란 간판이 걸려 있지 않는가?    참, 살기 싫어 자살한 사람을 구급해 뭐 하는가? 훌 화장해 버리면 그만인데. 그럼 딸도 시름 놓고 직장에서도 시름놓겠는데. 왜 이다지도 사람을 두번 죽게 한단 말인가? 천천히 지루하게 말리워 죽게 만드는가?    (려향아, 어서 아빠 혼을 불러 육체와 함께 훌 태워버려라. 혼이 육체를 떠나 유령처럼 바람에 둥둥 떠돌아다니면 어쩌니? 난 더 고통스럽다. 혼마저 빨리 저세상에 보내달라.)    그러나 이상했다. 혼은 멀쩡한데유. 육체가 죽어서 그런지 입술이 천근 무게 돼 열리지 않는다. 말 한마디도 할 수 없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유서라도 남겨 놓았을 걸. 참. 후회막급이야. 세상에 후회약이라도 있다면 아마 후회로 만리장성이라도 쌓아놓았을 걸. 그래도 내 혼은 자꾸 하나 밖에 없는 무남독녀한테 뭐라고 자꾸 말하고 싶어지는게 이상하다.    (내 죽으면 비석도 필요없다. 이전에 난 내가 죽으면 골회를 내 부모 산소 옆에 파묻고 자그마한 비석이라도 세워달라고 했지. 죽어서라도 생전에 부모에게 다 하지 못한 효성을 다하고 뼈가루 돼서라도 부모 산소를 지키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니 다 부질 없는 일이다. 육체가 다 타고 나머지 뼈가루가 어찌 부모를 지키고 효성을 한단 말이냐? 오히려 내 골회를 보면 내 부모가 얼마나 마음이 아파하겠느냐? 그러지 말자. 더는 그런 악착스런 불효를 저지르지 말자.)    내 혼은 좀 궁리하고 계속 려향이한테 부탁했다. 려향이 들을 수 있겠는지도 모르고.    (려향아, 골회함도 필요없다. 공돈을 팔지 말라. 그 돈이면 렬사들의 사적을 쓴 책 몇권이라도 찍어 렬사들의 영 전에 올리겠다. 그저 나를 다 태우면 뼈가루를 보에 싸서 부모 산소와 렬사릉원에 훌훌 뿌려달라. 비록 육신은 다 탔지만 혼은 바람처럼 날아다니면서 부모와 렬사들의 혼을 지키고 싶구나. 선렬들의 피로 바꿔온 이 땅을 영원히 지키고 싶다. 다만 죽어서 렬사들의 사적을 더 쓰지 못하는게 한일 뿐이야.)    려향이 이렇게 묻는 거 같았다.    “아빠, 그럼 왜 자살했는가요? 살아서 계속 렬사들의 사적을 책으로 써내야죠.”    그러나 나는 려향이한테 모든 걸 이실직고할 수 없었다. 내 입을 잘 못 놀렸다가 려향이 전도를 그르칠가 봐.    (려향아, 나는 모든 걸 무덤에 가지고 가련다. 더는 책을 내겠다고 하지 않겠다. 널 보고 “내 책을 한어로 번역해라, 일어와 영어로도 번역해라.”고 하지 않겠다. 너도 시름놓고 박사 공부나 해라. 이젠 내 근심하지도 말라. 책을 내겠다고 아글타글 건축공지에 가서 일하지 않아도 된다. 시름 싹 놔라. 너와 못할 말이지만, 내 공지에서 일하다가 남자의 그거 한쪽 잃어버린 거 너도 알잖니? 물론 안해도 없는 내가 그게 무슨 쓸데 있겠느냐만은.)    혼은 어느덧 옛날 내가 일하던 공지로 헛깨비처럼 훨훨 날아갔다. 공지에서는 귀신이 유령처럼 나타났다고 모두 피해 숨어 버린다.    (난 사람이지 귀신이 아닌데. 왜 저러지?)   헛깨비 같은 내 육체는 돈 한푼이라도 벌어 책을 내려고 철근을 메어 날라다 고층 아프트 건축물 천정 바닥에 펴고 가는 쇠줄로 가로 세로 얽어맨다.    꽈르릉 쾅!   툭!   요란한 굉음과 함께 한창 짓던 건물 천정이 푹 물앉았다. 나의  몸뚱이는 아래 층에 허공 곤두박혔다. 아차, 철근에 불중태로부터 아랫배로 해서 잔등까지 꿰창을 맞은듯이 찔리었다. 나는 이미 혼미상태에 처해 혼이 저승문턱에 간 채 피를 줄줄 흘리고 있었다. 세상에 이런 생벼락이 어디 또 있겠는가! 지금 생각해도 온 몸에 소름이 끼친다.   그래도 한국 소방대원들은 목숨을 걸고 페허 속에 파묻힌 나를 구원했지. 먼저 탐지견이 코를 벌름거리며 냄새를 맡으면서 나를 발견하고 컹컹 짖어댔다. 소방대원들은 페허 속에서 나를 파내 구급차에 실었다.   려향아, 너도 알잖니?   (나는 한국 의료일군들에 의해 한달만에 구급되어 죽음의 고비를 넘기었지. 그러나 내가 왜 자살했는가고? 얘야, 너무 슬퍼하지 말라. 아빠는 건설공지에서 신장과 고환 하나를 잃은 딱 그게 때문이 아니야. 사람 사는게 그게 삶의 전부가 아니야.  그러나 이젠 살고 싶잖다. 더 보고 듣고 살고 싶지 않다. 세상에 오래 사노라면 너무 보지 못할 걸 많이 본다. 네가 시집가지 않고 마흔살 다 돼가는게 가슴 아프다. 로처녀로 한뉘 살 예산이냐? 우리 전주 리씨 네 대에 와서 대 끊어지게 됐다. 아차, 아니야. 다 내 차실이지. 내 아들을 봐야는데. 무남독녀 너 하나만 낳고 말았으니까. 허나 네가 이제라도 시집가면 괜찮아. 지금은 애들이 엄마 성을 타도 된다고 하지 않느냐? 넌 생육년령일 때 꼭 시집가서 손자를 안겨달라. 그땐 구천에 가서도 난 눈을 감을 거 같아. 아들을 낳아도 엄마 성을 타게 하겠다는 남자한테 시집가라. 그래야 이 애비 원을 꺼줄 수 있잖니?...)   내 넉두린지. 유언인지 끝이 없다. 장례식장에서 웬 하소연 그리도 길가?   해는 저물어 가는데 마른 풀잎이 염라전 층계에 쓰러져 제네바행진곡을 연주한다.   처용이 달밤에 나타났는가?    인생도 붉게 타오르는 황혼의 탈을 바꿔쓰고 공포의 블랙홀로 휘말려들어가며 애처로운 죽음의 노래에 맞춰 탈춤을 춘다. 저게 뭐야?   탈을 쓴 허깨비 혼이 염라전에서 요염하게 치장한 무당들과 함께 너울너울 칼춤을 춘다. 입으로는 뭐라고 허무한 인생이 애닲아 중얼중얼 굿을 한다. 대머리가 제상의 바나나를 덥썩 쥐어 발가서 우물우물 씹으며 우멍눈으로 곁눈질하지 않겠는가.     아, 저 암범을 봐라. 나를 빨리 태우라고 려향한테 손삿대질 하고 있지 않는가.     혼은 암범 한족본댁 류려평을 보자 대번에 온 몸에 소름이 끼쳤다. 류려평은 어찌나 독살이 센지 공포 자체였다. 퉁사발눈깔을 희번뜩이면서 고래고래 고함칠 때면 진짜 오뉴월에 장독에 서리 다 칠 지경이었다.    암범의 표독스런 쌍까풀 퉁사발눈이 내 유체를 째려보면서 한쪽 구석에서 두 손을 합장하고 저주하고 있지 않겠는가.    “빨리 가옵소서. 시름 싹 놓고 살게.” 
406    장편소설 황혼 제1권(1) 나의 장례식 김장혁 댓글:  조회:805  추천:0  2024-07-09
   장편소설      황혼       김장혁       1. 나의 장례식     홧홧 타오르는 열기에  잿빛벽돌들이 탁탁 튀어 오르며 죽음의 노래를 부르면서 바람에 팔락이는 실오리만한 혼의 꼬리를 집어삼킨다. 화장터 용광로는 피와 살 냄새를 맡고 뻘건 혀를 날름거리며 음흉한 실웃음을 짓는다.    인생이 허무하다. 염라전에 오면 영웅호걸도 절세미인도, 더러운 세상을 버린 육체는 뻘건 염라전 불길이 이글거리는 용광로에서  재가루로 돼 하늘로 오를 것이거니.     허나 혼은 "봉황열반"처럼 새로운 봉황으로 태어나 하늘을 훨훨 날아예며 새 세상을 노래할 것이다. 밤중에 끊임없이 우짖는 귀뚜라미처럼 끝없이 우짖으며 깨어나지 못한 사람들에게 남합할 것이리라.    바람 따라 날아가는 사랑의 그림자를 허무하게 뒤쫓아 가다가 지치어 쓰러진 언덕에 하얀 그리움이 무럭무럭 피어난다.    무시무시한 백골들이 쩍 벌린 아가리로 죽음의 공포를 뱉어내고 낮잠을 청한다.    얼룩 독사가 움푹 파인 백골 눈확에서 기어나와  혀를 날름거리며 가냘프게 시들어가는 황혼을 쳐다보며 한숨의 꼬리를 잡고 모래바람이 기승을 부리는 사막의 밤 하늘을  노크한다.    얼빠진 황혼은 비틀거리며 염라전에서 라체무를 추며 허무한 인생의 콧노래를 부르며 어두운 밤의 고독한 악기를 고른다.    장례식장 칠성 판에는 고독하게 이 세상을 누비던 내 혼의 가죽이 파르르 떨며 누어 있다.    “아버지! 왜 이리 멍청한 짓을 해요? 네?”    (그래도 딸이 있어 다행이야. 저승길에 너무 외롭진 않아.)    황혼 인생의 마지막 길에 추모곡은 울리지 않아도 그래도 처량하게 우는 무남독녀의 곡성이 들리지 않는가?   염라전의 문턱에서 지쳐 쓰러진 혼, 식어가는 혼은 화장터로 들어가면서도 희쭉 웃으며 뜨거운 열기를 받아들인다.    “아버지, 이 딸을 두고 어디로 간다고 이래요?”   칠성판에 오른 나의 혼은 딸의 목소리를 분명히 들었다.   (려향아, 슬퍼 말라. 난 그래도 우리 겨레를 위해 뭔가 해놓았다. 이젠 시름놓고 가야겠다. 지금 가면 딱 맞춤해. 존엄도 지키고. 좀 조용히 가게 해달라. 네가 울면 내 황천길이 너무 쓸쓸해진다. 이젠 좀 울음 딱 끄쳐라. 네가 운들 죽은 혼이 되살아나겠느냐? 부질없는 통곡을 제발 멈춰라.)    “아버지, 어쩜 이 세상에 외로운 딸 두고 그렇게 총망히 갈 수 있나요?”   (아니, 이게 웬 일인가? 난 분명 칼로 내 손목 동맥을 잘랐는데. 려향의 울음소리가 들리다니? 분명 자살했는데. 유독 고독한 혼은 이 더러운 세상에 살아 있단 말인가?)   종호의 혼은 세상이 보기 싫어 눈을 딱 감았다. 그런데 보기 싫어할수록 희미하게 보인다.   분명 하나 밖에 없는 려향이 칠성판에 올라와 나를 부둥켜 안고 울고 불고 야단친다.   그런데 다른 젊은 여인의 통곡소리도 애절하게 들리지 않겠는가.   “리사장님, 이게 웬 일인가요? 어쩜 나를 홀로 두고 이렇게 총망히 가는가요? 네, 사장님은 저승 문턱에 간 나를 구해 삶의 용기를 주었는데요. 왜 이렇게 짧은 생각을 다 하는가요?”   말귀를 들어봐서는 나영 같았다. 흐느껴 우는 울음소리도 어쩜 저렇게 쓸쓸할가.   “리사장님이 없이 제가 홀로 어떻게 사는가요? 흐흐흑, 흑흑,”   뒤이어 장송곡이 울리고 웬 남성이 뭘 선독한다.   (뭐? 고 리종호 부사장, 작가 추모식? 세상 웃긴다. 난 이미 이 세상과 하직했는데. 추모식을 해 뭘 해? 그저 기름을 치고 화로불에 태워 하늘에 훌 날궈 버리면 다야. 나는 자유로운 새처럼 바람을 타고 저 멀리 바다로, 광야로 훨훨 날아가련다. 저 봐라. 바람이 산의 속살에 날아들어간다. 바다를 다독여 세찬 파도를 일으킨다. 바람은 수많은 사람들 사이로 붕붕 날아다니면서 뭔가를 속삭이며 귀띔해주고 있지 않는가. 나는 바람이 되고 싶다. 내 갈 길을 막지 말라.)    종호의 혼은 별스럽게 화장터 칠성판에 올라도 공포를 하나도 느끼지 못하고 별 궁리를 다 했다. 그런데 웬 일일가?   혼이 화장터 천정에 올라가 떡 철싸닥 붙지 않겠는가. 혼은 가련하게 삶의 미련을 타고 천정에 대룽대룽 전등알처럼 매달려 내려다 보고 있다.   려향이 또 숱한 상객들 앞에서 아빠 육체를 부둥켜 안고 대성통곡친다. 빈소의 관리일군이 려향을 말려도 소용없다.   “아버지! 못 가요! 저를 두고 어데 간다고 이래요?”   “넌 시집도 가지 않고 불효를 저저리는데 내 살아 뭘 하겠느냐? 로처녀로 늙어가는 널 보면서 황혼을 재빛으로 태우면서 살라고? 어림도 없다.”   (웬 일인가?)   화장터 천정에 대롱대롱 매달린 혼은 깜짝 놀랐다. 하마트면 천정에서 퉁 떨어질번 했다.   (난 분명 속으로 되뇌였잖은가? 건데 상객들이 다 듣게 소리 나갔잖어? 별 일도 다 있다. 참.)   종호의 혼은 간사스럽게 눈을 살며시 떠보았다. 상객들 속에 놀랍게도 류려평도 와 있지 않겠는가. 저쪽 구석으로 해 나영도 서 있고  또 그 옆에는 정호도 서 있지 않겠는가!   (저 년놈들을 보기도 싫어! 저 년놈들은 대하소설 “진달래 소야곡”과 “졸혼”에도 드문드문 나오던 추악한 인물들이 아닌가? 숱한 혼을 빼간 년놈들. 바람둥이들! 저 년놈들이 보기 싫어 내 자살한게 아닌가!)   종호의 혼은 경악했다.   (날 되살아나라고? 관둬라! 한 많은 이 세상에서 두번 다신 살진 않겠어.)   혼은 천정에서 화로에 퉁 뛰어들어갔다.   뿌지직! 뿌지직!   천도의 불길이 활활 타오르며 무시무시한 죽음의 공포를 뱉어낸다. 육신은 씨뻘건 화염에 싸여 타버리며 쓸쓸한 황혼 인생의 찬송가를 부른다. 타버리는 잿빛 황혼은 용광로 속에도 뻘건 빛을 온 누리에 빛뿌린다. 황혼 빛은 어두운 밤을 밝히려고 몸부림치며 어려운 행진곡을 힘겹게 부른다.   웬 일일가?   육신은 다 타서 재가루 됐는데도 얼빠진 황혼의 혼은 계속 콧노래를 부르며 달갑게 공포의 블랙홀로 빨려 들어가고 있지 않는가! 웬 일일가?   말로는 공포의 블랙홀에 휘말려 들어갔다는데 아닌가? 건데 왜엉뚱한 사유는 계속 흐르고 있지 않겠는가?   려향의 울음소리 똑똑히 들리지 않는가? 류려평이 말리는 소리도…    (색마 정호가 내 추모사를 읽어선 안돼. 정의용사 성호가 읽어야는데. 참. 황혼에 이르니 옆에 사람도 없어. 어쩜 번대머리가 추모사 읽는 소리가 계속 들려? 저런 것도 문화국 국장 책상머리 퇴물림이라고, 시도 모르던 놈이 뭐 그것도 시라고 읊어대? 세상 어처구니 없기로서니. 하긴 사슴이 돛대에 올라 해금을 켜는 세월이니. 이상할 것도 아니지.)            황혼은 붉게 타다가 맥없이 져가는데       캄캄한 하늘에서 큰 별이 류성처럼 떨어지니       곡성이 천지를 진동하고      진달래 꽃잎에 맺힌 눈물 방울       바다를 메우며 노호하네.         지지리 어두운 밤에       등대 잃은 저 쪽배를 어찌 할꼬?       키잡이 잃어버린 저 책짐 실은 쪽배      야수처럼 덮쳐드는 세찬 파도를 어찌 할꼬?           …
405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60) 뜻밖의 상봉 김장혁 댓글:  조회:533  추천:0  2024-07-07
   김장혁 작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 제2권         제7장 포수대           11. 뜻밖의 상봉       사실 병수는 점심 때 우시장에 있는 길수의 집에 가서 은녀를 만나 기름떡을 얻어가지고 장마당으로 돌아왔던 것이다.   그때 은녀는 병수에게서 아버지가 아들딸 근심에 속을 태우다가 기막혀 사망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애고, 우리 아버지, 기침을 쿨룩쿨룩 하며 시름시름 앓더니 이렇게 불쌍하게 돌아가시다니. 아이고, 내 아버지, 불쌍한 내 아버지, 흐 흐 흑, 흑 흑.”    은녀는 대성통곡하면서 “아버지 장례에 가겠어요.” 하고 길수에게 사정했다.   한길수는 소를 잃어버렸는데 은녀마저 달아날까 봐 근심됐다.   “가긴 어디로 가? 네년이 가면 우리 집 밥은 누가 해?”   은녀는 한길수 앞에 꿇어 엎드려 두 손을 싹싹 비비면서 빌었다.   “아버지 마지막 길을 바래드리게 보내 줍소. 제발, 주인님.”   인정머리라곤 꼬물만치도 없는 길수는 건 가래를 떼면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토성대문을 나서더니 기생집으로 가버렸다.   아버지 장례에도 가지 못한 은녀는 더는 살고 싶지도 않았다.   그날 저녁, 달밤에 그는 저녁도 먹지 못하고 월선의 호령에 못 이겨 물동이를 팔에 끼고 물을 길으러 비칠비칠 걸어갔다.   (아버지 폐병치료에 일전 한 푼 돕지 못하고 장례에도 가지 못할 바엔 아예 죽는 게 낫지. 상호도 종무소식이고 은희마저 한 영감의 영월동 집에 머슴으로 끌려갔다지. 뭘 보고 이 세상에서 산단 말인가?)   철렁!   드레박이 우물에 떨어지면서 죽음의 비명소리를 질렀다.   순간 은녀는 드레박처럼 우물에 철렁 떨어지면 모든 것이 끝장 나겠는 걸 하는 생각이 피뜩 들었다.   은녀는 두 손으로 머리를 쓰다듬더니 우물 틀 우에 간신히 올라섰다.   그녀는 얼음 쪼각 같은 눈썹달을 쳐다보며 맥없이 중얼거렸다.   “하느님이시여, 아버지와 엄마를 제대로 모시지 못하고 먼저 가는 불효녀를 용서해주옵소서.”   말을 마치자 은녀는 치마폭을 뒤집어쓰고 우물에 뛰어들려고 했다.  그 때다.   순간 뒤에서 꺽쇠 같은 팔이 은녀를 꽉 끌어안아 우물 틀 우에서 내리웠다.   가슴을 할딱이던 은녀는 자기를 안아 내리운 마차몰이군 병수의 거머틱틱한 얼굴이 어슴푸레 보이었다.   병수는 소를 잃어버리자 장마당에서 도망쳐 우시장 경찰국 뒷산 수림 속에 가서 동정을 살피면서 숨어있었다. 그는 뒷산 수림 속에서 똘만이가 자전거를 타고 경찰국 울안에 달려 들어오고 헌병대원들이 오토바이를 타고 눈보라를 흩날리면서 달려 나가는 것을 다 보았다.    한참 후에 경찰국 대문 안에 뚱뚱보와 소가 들어오고 한길수가 똘만이 등 자위대원들과 함께 철규를 끌고 오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나중에 묶인 뚱뚱보를 때리며 심문하고 철규는 묶이지 않은 것을 보았던 것이다.    (정말 철규 말처럼 소를 빼앗긴 걸까?)   그러나 병수는 소를 잃어버렸기에 악마 같은 한길수에게 죽을지 살지 몰라 영월동에 돌아가지 못했다.   병수는 겨울해가 뉘엿뉘엿 지자 산속에서 슬금슬금 내려왔다. 허기증을 달래려고 우물가에서 서성거리면서 은녀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그가 혹시 은녀 뒤를 밟는 자가 있을까봐 사위를 둘러보고 머리를 우물터에 머리를 돌리는 순간 물을 길으러 온 은녀가 우물에 빠지려고 할 줄은 천만뜻밖이었다. 그가 황급히 달려가 은녀를 안아 내리우지 않았더라면 은녀는 한 많은 세상을 떠났을 것이다.    길수는 이전에는 득호나 마을사람들을 일을 시키면 품삯을 주는 척 하였지만 지금은 일본 놈들에게서 강도행세를 배워가지고 아예 일전 한푼 주지도 않고 강제로 일을 시켰다. 은녀나 은희나 일전 한푼 받지 못하고 여종으로 뼈가 물러나도록 일했다. 아버지가 병환에 계셨지만 딸로서 일전 한푼 치료비로 보태주지 못한 은녀와 은희의 아픈 마음이야 이루 더 말할 수 있겠는가? 그렇게 살 바에야 우물에 뛰어들어 죽고 싶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병수는 은녀가 우물에 뛰어들려 한 얘기를 듣고 말리였다.   “은녀, 죽어서는 안 돼. 우린 지금 아무것도 없이 힘들게 살지만 이를 악물고 살아나가야 하오.”    은녀는 우물 턱에 기댄 채 맥없이 머리를 가로저었다.   “한길수 물이나 긷자구 살라오?”    “집엔 엄마와 은희, 상호가 있지 않소?”   그제야 은녀는 한숨을 땅이 꺼지 후~ 내 쉬었다.   “오빠는 어떻게 돼 여기 왔소?”   병수는 한숨을 내쉬더니 오늘 낮에 장마당에서 있은 이야기를 했다.   “그럼 저녁도 못 잡쉈겠구먼. 내 물을 길어가지고 갔다가 올게.”   병수는 드레박으로 물을 길어 쏟아 붓네 하고 안아 한길수의 집 쪽으로 들어다주었다.   “됐소. 괜히 자위대에 들키겠소. 어서 우물에 가서 기다리오.”   은녀 말에 병수는 은녀의 머리 우에 물동이를 올려놔주고 뒤로 물러섰다. 그는 눈으로 비칠비칠 토성에 난 대문 쪽으로 물동이를 이고 걸어 들어가는 은희의 뒷모습이 불쌍했다.   한참 후 은녀가 물동이를 팔에 끼고 우물터에 나타났다.   은녀는 물동이 안에 주먹밥과 누룽지 그리고 기름떡까지 넣어 왔다. 그것으로도 며칠은 먹을 것 같았다.   “배고프겠는데 어서 잡숫소.”   훤칠하게 생긴 병수는 기름떡을 먹으면서 말했다.   “금방 은녀를 보내고 곰곰이 생각해보았소. 여기서 종살이를 한뉘 할게면 우리 간도로 달아날까?”   뜻밖의 말에 은희는 깜짝 놀랐다.   이윽고 그녀는 머리를 다소곳이 숙이며 반신반의했다.   “만주로 간다고 잘 살겠소? 엄마와 은희랑 어찌 하고? 들키는 날엔 한길수가 잡아먹자고 할게오.”   병수는 대수롭잖게 말했다.   “우리 달아났다고 어쩔 거 같소? 상호가 달아나도 어쨌소? 은희를 부려 먹으려고 어쩌지 못하오.”   은녀는 숙였던 머리를 천천히 들었다.   “손에 쥔 게 없이 산 설고 낯선 간도에 갔다가 굶어 죽으면 어쩌겠소. 가지 말기요. 이 추운 겨울에 간도로 갔다가 얼어 죽겠소.”   병수는 은녀의 손을 꼭 잡고 간곡히 말했다.   “나를 믿소. 우린 아직 젊소. 간도에 가서 우리 함께 잘 살아 보기요.”   은녀는 온몸을 바르르 떨면서 희읍스름한 달빛아래 희미하게 보이는 병수의 길쭉한 얼굴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오늘 오빠가 아니었으면 난 이미 죽은 사람일 게요. 구명은인 오빠를 따라 이 놈 지옥에서 훌 달아났으면 좋겠소.”   병수는 은녀를 꼭 끌어안고 잔등을 다독여주었다.   “어서 집에 들어가 옷이랑 먹을 걸 물동이에 넣어가지고 나오오.”   “알았소. 내 인차 갔다가 나올게.”   병수는 우물터와 좀 떨어진 으슥한 골목에 들어가 숨어 우물터에 은녀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한참 후 은녀가 사위를 둘러보면서 눈을 빠드득빠드득 눈을 밟는 소리와 함께 우물터에 나타났다.   병수와 은녀는 골목에 들어가 옷을 보에 싸안고 희읍스름한 달빛이 깔린 골목으로 바람결처럼 사라졌다.   은희는 병수를 따라 눈길로 달아나면서 말했다.   “오빠, 금방 집에 돌아가니까 한영감이 ‘잃어버린 소를 찾았는데 병수를 잃어버려 큰일 났다.’고 하더군요.”   “누가 그 개소리를 믿어. 나를 한뉘 마차몰이꾼으로 부려 먹자는 게지.”   병수는 은녀의 손을 잡고 더 빨리 달으면서 물었다.   “철규는 무사하오?”   은희는 숨이 차 할딱거리면서 대답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물매를 맞았습니다. 영팔이랑 죽여 버리자고 하니까 누가 소를 먹이겠는가 하면서 철규를 잡아두고 덕팔이 삼촌이랑 잡자고 합데.”    병수는 닫다가 주춤 멈춰 섰다.   “아차, 한 가지 잊었다. 이대로 달아나지 말구 한영감 집에 불이라도 콱 싸질러 놓을 거 그랬다.”   은희는 병수의 손을 잡아챘다.   “그만두오. 헌병들이랑 자위대원들이랑 욱실거리는데 붙잡히겠소.”   병수는 우시장 저 멀리 한길수의 집 쪽을 바라보다가 몸을 돌려 은녀의 손을 잡고 다시 달아났다.   은녀는 달아나면서도 속으로 고향마을에 있는 엄마와 은희가 근심됐다.   (엄마랑 무사한지 모르겠다. 빨리 가서 같이 간도로 달아나자고 해야지)   한편 은희는 고향마을 사람들과 함께 아버지를 뒷산 기슭에 장례지낸 후 날마다 악몽 속에서 허덕이었다.   은희는 심란한 김에 이날 밤에도 내일 밥을 지을 물을 더 길으려고 일어나 몸채 부엌간으로 들어갔다. 그는 손 더듬으로 물동이를 더듬어 팔에 끼였다.   “누구야!”  위방 밀창문이 열리면서 한길수가 반쯤 몸뚱이를 일으키고 이쪽을 내려다보는 것이 달빛에 희미하게 보였다.   “은희예요.”   “이 밤중에 뭘 떨꺽거리느냐? 잠을 깨우면서 성가시게. 에이 참.”   “물을 긷자고 그래요.”   “음, 알았다. 내일부턴 우리 잘 때 떨꺽거리자 말아라.”   탁 미닫이문이 닫기는 소리 나고 두덜거리는 소리와 도도고리는 소리가 엇바꿔 들리었다.   은희는 머리채를 뒤로 젖히고 물동이를 팔에 끼고 바깥으로 조심조심 나왔다. 그러나 연 며칠 자위대원을 시켜 은희 뒤를 밟게 해보아도 아무런 기미도 보이지 않자 월선이도 심드렁해져 오늘은 미행을 그만두게 했다.   그녀는 희읍스름한 달빛과 눈을 사뿐사뿐 밟으면서 골짜기 막치기에 있는 우물가에 다가갔다. 가을바람에 나무들이 무섭게 비명을 질러 공포를 자아냈다.   우물가에서 동이를 내려놓고 물을 푸려고 바가지를 우물에 넣던 은희는 처량한 반달이 비껴있는 우물을 들여다보다가 문뜩 이런 생각이 났다.   (이 세상에서 자유롭게 살지 못하고 도망치지도 못할 바에는 이 우물에 빠져 죽고 말았으면 좋겠다. 그럼 모든 게 끝이겠는데.)   그런데 샘물에 비낀 달 옆에 총총 박힌 뭇별들이 차디찬 샘물에 잠겨 추위에 바르르 떨고 있는 것을 보았을 때였다.   그 순간 몇 해 전 여름에 은녀가 들려준 이야기가 떠올랐다. 이 우물가에서 성칠 오빠가 은녀의 눈을 두 손으로 싸쥐고 누군가 알아 맞추라던 장면이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그때 오빠는 은녀가 떠준 샘물을 두 바가지나 마시고 시원하다고 하면서 너부죽한 얼굴에 웃음을 지었다지. 호, 오빠, 이젠 다시 볼 것 같지 않소. 성칠 오빠, 상호는 지금 어데 있소?”    어려울 때마다 자기네 일가를 도와 나서던 성칠 오빠가 이 순간 더욱 그리웠다. 기실 성칠과 은희는 열대여섯 살이나 차 있기에 기실 삼촌 벌이 됐지만 어려서부터 성칠이 그렇게 습관을 시켜 은녀나 은희나 다 오빠라고 불렀고 상호는 형님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은희는 착잡한 생각에 잠겨 흑흑 흐느껴 울면서 바가지로 우물속의 달과 별들이 담긴 물을 한 바가지 한 바가지 퍼서 물동이에 담았다. 물동이안의 달과 별들이 점점 물동이 아구리 쪽으로 올라와 차 넘쳤다.    은희가 물동이안의 달과 별들의 우에 바가지를 동동 띄워놓고 물동이를 이려고 할 때였다.    버스럭버스럭 소리가 났다.   은희가 머리를 돌려보니 골짜기에서 난데없는 검둥이가 뛰어나왔다.   “아니, 검둥아, 네가 어떻게 돼 왔니?”   검둥이는 은희의 치맛자락을 물어 당기더니 끼깅거리며 뒤를 돌아다보았다.   이때 뒤에서 휘파람소리가 들리었다.   “이게 은희 아니냐?”    나직한 부름소리가 들리었다.   (아니, 이게 성칠 오빠의 목소리가 아닌가!)   몸을 돌리는 순간 은희는 자기 앞에 두 사내가 달 빛 속에 서 있는 것을 보았다.   “아니, 상호!”   은희는 놀라 풀렁 물앉았다.   “쉿~”   상호가 식지를 입에 대면서 은희를 안아 일으키더니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 옆에는 성칠 오빠가 서있지 않는가?   은희는 대번에 상호오빠의 품에 와락 안기면서 흑흑 흐느껴 울었다.   “범이 자기 흉을 하면 온다더니 정말 왔구먼. 이게 꿈이요, 생시요?”   “그래 이건 생시요.”    상호는 은희의 파도치는 어깨를 다독이면서 어떻게 위안했으면 좋을지 몰라 했다.    “샘물터에 오면 너를 만날 거 같아 여기 왔다.”   은희는 머리를 끄덕이면서 성칠을 쳐다보았다. 뒤이어 은희는 상호의 품에 안기면서 주먹으로 가슴을 마구 쳐댔다.   “어데 갔다 이제야 왔니?”   “사냥하러 갔지.”   은희는 여기저기 살피면서 서있는 성칠을 돌아보면서 말했다.    “오빠, 오빠가 사라진 후 저 한길수가 오빠네 집을 빼앗아 림산파출소라는 걸 들여앉히고 일본 헌병들이 들어 살고 있소.”   “그랬니? 여긴 얘기하기 위험하니깐. 저쪽 숲 속으로 가자.”   성칠은 물동이를 안고 상호네 오누이를 데리고 숲 속으로 들어갔다.   “오빠, 그간 한길수란 놈은 별의별 악독한 짓을 다했소. 흐 흑 흑.”   은희에게서 그간 고향마을에 있은 일들을 죽 들은 성칠은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이 원수는 꼭 갚아야 한다.”   성칠은 은희에게서 한길수의 영월동 토성안집의 형편도 묻고 나서 말했다.   “넌 아무 일도 없은 듯이 물동이를 이고 토성 안에 들어가라. 그 다음 철규와 함께 이렇게 해라.”   성칠은 사위를 둘러보더니 은희의 귀에 대고 뭐라고 중얼거렸다.   “예~ 알았소. 그렇게 할게.”   은희는 물동이에 물을 퍼 담아 이고 허연 눈 위에 깔린 희읍스름한 달빛을 밟으면서 토성 안 집 쪽으로 내려갔다.   이윽고 성칠과 상호가 우물터 옆 소나무숲속에서 보복행동계획대로 손을 쓸 준비를 다그칠 때다.   우물터 아래쪽에서 눈을 빠드득빠드득 밟는 소리가 들리었다.   “쉿!”   소나무숲 속에서 성칠이 입에 식지를 가져다대면서 허리춤에서 모젤권총을 쓱 뺐다. 상호는 시퍼런 비수를 빼들었다.   저쪽에서는 그런 줄도 모르고 이쪽으로 빠드득빠드득 계속 걸어오면서 도란도란 말까지 했다.   “은희는 늘 저녁에 여기로 물 길으러 올게오.”   “글쎄 말이오. 한길수나 영팔이나 이렇게 추운 날에 여기로 오겠소?”   귀에 익은 여자의 목소리.   소나무 뒤에 몸을 숨긴 상호는 성칠에게 다가서면서 “어째 은녀 누나 목소리 같소.” 하고 나직이 말했다.   성칠은 머리를 끄덕이면서 샘물터에 눈길을 돌렸다.   두 검은 그림자가 샘물터에 가까워 올수록 여자의 목소리는 더 똑똑히 들리었다.   “여기서 은희를 만나면 얼마나 좋겠소?”   남자가 하는 말소리.   “은희를 만나 고향 마을 정황을 안 후 엄마를 만나는 게 옳소.”   분명 은녀의 목소리 아니겠는가.   상호는 성칠에게 “은녀 누나요." 하고 말하고 나서 비수를 허리춤에 꽂아 넣고 나가려고 했다.   그러나 성칠은 상호의 팔을 걷잡고 주위를 살펴보았다.   휴-휴-   소나무가 설레는 소리 밖에 다른 동태가 없었다.   “나가봐라. 옆의 사내를 주의해라.”   상호는 머리를 끄덕이고 나서 천천히 소나무 숲에서 나가면서 조용히 불렀다.   “누나, 은녀 누나.”   “엇, 누나라니?”   다가오던 남녀가 주춤 멈춰서더니 뒤로 비실비실 물러섰다.   “누나, 상호요.”   “뭐라고? 상호?”   은녀는 품에 안았던 보꾸러미를 툭 떨어뜨리더니 이쪽으로 달려왔다.   은녀와 상호는 달려 나가 와락 끌어안았다. 뒤에 선 사내도 다가왔다.   “누구요?”   그러자 저쪽 사내가 다가오면서 말했다.   “상호야, 난 병수다.”   성칠도 슬금슬금 소나무숲속에서 무릎까지 빠지는 눈을 밟으면서 나갔다.   “저건 누구냐?”   은녀의 물음에 상호가 나직이 대답했다.   “성칠 형님이오.”   “오빠라고? 오빠가 살아 있어?”   “그래, 난 살아있다.”   성칠은 성큼성큼 걸어 나가 은녀와 병수를 일일이 손잡아주었다.   “너희들이 얼마나 고생했니?”   은녀는 너무 기쁨과 설음에 마음이 설레어 떨어뜨린 보꾸러미를 주어 안더니 돌아서서 어깨를 들먹였다.   성칠은 은녀의 어깨를 다독이더니 말했다.   “됐다, 금방 은희도 여기 왔다가 갔다. 다시 오지 않을 거다. 여긴 오래 있을 곳이 못된다. 소나무숲속으로 들어가 이야기하자.”   뜻밖에 상봉한 그들은 소나무숲속으로 깊숙이 들어가 그간 서로들 있은 이야기를 했다.  성칠은 은녀와 병수  말을 듣고 나서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었다.   “간도로 무턱 대고 어떻게 간다고 그래?”   병수는 초신 감발한 발로 소나무 밑 둥을 탁 걷어차면서 성칠을 보고 물었다.   “간도에 가지 않으면 여기서 어떻게 사오?”   “우리 독립군에 들어가야 산다.”   “독립군에?”   병수는 놀란 나머지 소나무 숲이 쩌렁쩌렁 울리게 소리쳤다.   성칠이 식지를 입에 대고 사위를 둘러보자 병수가 물었다.   “형님과 상호랑 독립군에 들어갔소?”   “그래. 너희들도 독립군에 들어가 총을 쥐고 일본 놈들과 한길수 같은 개다리들을 이 고향에서 몰아내야 잘 살 수 있다.”   은녀는 소스러치 듯 놀라했다.   “상호야, 너도 독립군이냐?”   상호가 머리를 끄덕이자 생각 밖으로 은녀는 상호의 손으로 잔등을 톡톡 쳤다.   “참 장하다! 우리 철천지원수 한길수를 처단해 우리 원수를 갚아라!”   이윽고 병수는 이렇게 말했다.   “말몰이군도 독립군에서 받아주면 들겠소. 그런데 은녀랑 은희랑은 고향마을에 둘 수 없소. 한뉘 어떻게 한길수의 종살이를 하게 내  버려두겠소? 여자들도 독립군에서 받았으면 좋겠는데.”   성칠은 선뜻이 대답했다.   “독립군에 들어오라. 독립군에도 여자대원이 할 일이 가득하다. 밥을 짓고 빨래를 하고 총도 쏴야지.”   성칠은 은녀에게 물었다.   “독립군 소대장 진달래의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니?”    은녀는 머리를 끄덕였다.   “들었소. 그 돌멩이를 잘 뿌리는 처녀장군 말이 아니오?”   “맞다. 지난 번에도 나를 구할 때 돌멩이로 일본 놈과 자위대 놈들을 여럿을 까 눕혔다.”   “나도 진달래 언니처럼 독리군 여대원이 되겠소.”   성칠은 은녀의 손을 잡으면서 말했다.   “좋다. 우리 힘을 합쳐 우리 고향마을에서 한길수와 야마모도 소장 같은 일본 놈들을 몰아내자. 원수를 꼭 갚고야 말자.”    뒤이어 그들은 성칠의 영솔 하에 은희가 알려 준대로 엄창렬의 산소로 떠나갔다. 그들은 눈이 무릎까지 펑펑 빠지는 뒷산 비탈로 올라갔다.   한참 후 아버지 산소에 이르자 상호와 은녀는 아버지 산소에 절을 세 번 올리고 나서 풀쩍 엎드려 엉엉 통곡 쳤다.   성칠이 다가가 은녀와 상호의 어깨를 다독였다.   “여기도 오래 있을 곳이 아니다.”   그들은 다시 눈보라를 무릅쓰고 담대하게도 은녀의 집으로 내려가 삽작문을 열고 들어섰다.   바깥에서는 눈보라가 쌩쌩 휘몰아쳤다.    한길수나 응삼이 지어 야마모도소장도 이 눈보라치는 야밤삼경에 성칠과 상호 그리고 은녀와 병수가 이 마을에 숨어들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하긴 반년 넘어 영월동의 성칠과 덕팔, 동욱, 상호네 집에 넓은 그물을 치고 밤낮없이 지켰지만 그들의 그림자도 얼씬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 놈들은 겨울에 접어들자 몇 달째 경계가 허술해졌던 것이다.    한편 야밤삼경에 명순은 은녀와 이태 남짓이 사라졌던 상호를 꿈결에서처럼 만나자 부둥켜안고 엉엉 운 것은 더 말할 것도 없다.    바깥에서 보초를 서는 성칠은 그들 삼모녀의 통곡소리에 마음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404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59) 어린 장사군과 부자 김장혁 댓글:  조회:377  추천:0  2024-07-07
       김장혁 작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 제2권                    제7장 포수대                               10. 어린 장사꾼과 부자       어느 날, 한길수가 병수와 철규를 데리고 말을 팔러 우시장 장터로 갔다.   한길수는 번대 머리에 중절모자를 눌러쓰고 개화장까지 척 짚고 자위대 대원까지 끌고 나섰다. 돈주머니를 찼던 옆구리에 권총을 척 찼고 외눈깔박이로 된 것이 이전 한길수의 행차보다 달랐다.   그는 걷기 싫어 자전거를 가져오라고 한 후 자위대원 둘을 떼 두면서 병수와 철규가 모는 소와 말을 잘 지키면서 우시장 장터까지 오라고 했다.   병수와 철규는 자전거를 타고 바람결처럼 달려가는 길수와 자위대원의 뒤꽁무니를 보면서 두덜거렸다.   지어 자위대원들도 볼 부은 소리를 했다.   “쳇. 재수 없어. 우린 걸어서 언제 가겠냐?”   철규가 뒤 덜미를 긁적거리다가 말했다.   “이보시오, 우리도 말과 소라도 타구 갑시다. 아무튼 남에게 팔아야 될 소가 아닙니까?”   자위대원 똘만은 철규의 머리를 어루만지면서 “허허, 요놈이. 옳다. 우리라고 다리 아픈데 걸어가겠니?” 하고 말하면서 토성 안 쪽을 돌아다보았다.   “대문이 꼭 닫겼네. 우리 둘이 말을 타고 자네들은 소를 타게.”   똘만의 말대로 자위대원들은 말을 타고 병수와 철규는 소를 타고 우시장으로 떠났다.   그들은 소와 말을 타고 닫다가도 걷고 걷다가도 달았기에 점심 전에 우시장에 이르렀다. 골목마다 이전에 비해 게다짝을 걸고 딸까  닥거리면서 다니는 일본인들이 눈에 뜨이게 많아졌다. 하얀 백의를 입은 조선인들 속에 상시 옷 같은 화복을 입은 일본인들이 섞여있는 골목은 정말로 조밭에 가라지가 섞인 것 같고 꽃밭 속에 쑥대가 섞여 넘실대는 것 같았다.   드디어 그들은 우시장 장터에 이르렀다. 이 도시의 이름을 우시장이라고 단것은 말 그대로 소장마당이 소문났기 때문이다. 소문대로   우시장 소장마당에는 숱한 살이 피둥피둥 진 소들과 말들이 말뚝에 매여져있었고 숱한 장군들이 한창 흥정을 하느라고 야단법석 했다.   어떤 소는 “음메—” 하고 영각소리 울리었다.   덩치 큰 수소는 다른 수소만 보면 앞발로 흙을 긁어 잔등에 퍼 치며 싸움질하자고 뿌리를 곤두세우고 생 지랄이었다. 어떤 수소는 암소가 지나가면 노려보며 덮쳐들다가도 말뚝에 매놓은 고삐에 끌리어 입을 짝 벌리며 대가리를 쳐들고 눈알을 흡떴다. 어떤 둥글소는 암소를 쳐다보다가 아예 매놓은 말뚝에 매달리다가 뿌리로 말뚝을 떵떵 들이받기도 했다.   늦어 가다나니 소와 말을 맬 자리가 없었다. 한참 소와 말 고삐를 잡고 있는데 요행 어떤 소장사군의 소가 팔리면서 말뚝 하나가 나졌다. 하여 눈치 빠른 철규가 제꺽 손에 쥐고 있던 말을 끌어다가 말뚝에 고삐를 매놓았다. 이렇게 한참 싱갱이 질 하며 눈치노름을 하여 겨우 말 두필에 소 한 마리를 말뚝에 매놓았다. 이제 소 두 마리만 말뚝에 고삐를 매놓으면 됐다.   (팔리겠으면 팔리구. 나 하구 무슨 상관인가? 배고픈데 점심도 먹지 못한 판에 말뚝에 매놓고 편안히 앉아 쉬자.)   소나 말을 하나도 팔지 못하였는데 점심때가 돼버렸다. 길수는 불룩해진 배를 어루만지면서 자위대원들을 데리고 점심 먹으러 가면서 병수와 철규에게 부탁했다.   “소와 말을 잘 지켜라. 이 놈의 소장마당은 생사람 눈을 빼먹는 곳이야.”   "네?"  철규는 눈이 데꾼해지었다.  병수는  “예, 예.” 하고 꿉썩거리었다.  그러나 천진한 철규는 핼끔핼끔 길수의 눈치를 보면서 소고삐로 땅바닥을 두드리면서 두덜거렸다.   “배고픈데 소만 지키라고?”   “요놈새끼, 뭐라고? 소만 잃어버려 봐라. 네 놈 목을 쑥 뽑아버리겠다.”   길수는 을러메고 나서 자위대원들을 끌고 가버렸다. 그는 점심도 점심이거니와 우시장 기생집의 옥설과 놀고 싶었던 것이다. 장터에는 병수와 철규만 남아 배를 촐촐 굶으면서 소와 말을 지켰다.   철규는너무 배고파 배를 끌어안고 수척한 얼굴마저 찡그리었다.   병수는 보다 못해 소고삐를 철규에게 주면서 부탁했다.   “내 가서 기름떡을 얻어와야겠다. 소 고삐를 단단히 쥐고 있어라. 소를 잃어버리는 날엔 우린 죽은 목숨이다.”   “예. 알았습구마.”   병수가 떠나간 후 비단솜옷을 입은 한 부자가 다가와 수소를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철규에게 물었다.   “얘, 소 주인은 어데 갔냐?”   “점심 먹으러 갔습구마.”   부자는 소를 사지 못해 아쉬운 듯이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철규는 배고파 병수가 간 쪽만 바라보면서 부자가 자꾸 묻는 것마저 시끄러워 했다.   그런데도 그 부자는 살진 수소가 욕심나 빙빙 맴돌면서 자꾸 물었다.   “얘, 네 주인이 이 소를 얼마에 판다더냐?”   “한 백 원에 판다던데.”   비싸게 말해 부자를 쫓아 보낼 속셈이었다.   “오, 너무 비싸구나. 주인이 어데 갔냐?”   부자는 주인을 찾아낼 듯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뒤이어 철규 밖에 없는 것을 보고 말뚝의 소고삐를 슬슬 풀었다.   “왜 이럽둥?”   “요 망할 놈 새끼! 입 다물지 못할까?”   부자는 자기 팔에 매달린 철규를 탁 밀쳤다.   “이게 누구 손지 알고 이럽둥?”   “누구 소냐?”   부자는 소고삐를 풀던 손을 주춤 멈추더니 철규 쪽에 살진 낯을 돌렸다.   “우시장 자위대장 한길수네 소입구마.”   “엉?!”   악명 높은 한길수의 소라고 하자 부자는 잔등에 식은땀을 쪽 흘렸다. 그러나 어린 애밖에 없다는 현실에 다시 도둑놈의 침착성을 되찾았다.   “에끼, 이 놈 새끼, 한대장은 내 잘 안다. 겁낼게 뭐냐?”   부자는 살진 머리통을 이리저리 돌리면서 주위를 슬슬 살폈다.   “야, 이 놈아, 주인이 백 원에 판다는데 좀 눅게 팔면 안 되겠니?”   “내 어찌 소를 팝둥?”  철규는 이런 생각이 피뜩 떠올랐다.  (저 놈 소를 제꺽 눅게 팔아 엄마 병을 치료해주었으면 얼마나 좋겠니?)   철규는 발딱 일어났다.   “한 50원에 사겠습둥?”   “그럼 오죽 좋겠느냐? 그런데 서울깍쟁이도 울고 갈 한영감이 그렇게 눅게 팔겠냐?”   “내게 50원 내놓고 소를 풀어 갑소.”   부자는 자기 귀를 의심했다.   (이게 웬 떡이냐?)   부자는 동전을 스무나문 잎 꺼내 대충 세는 척하다가 돈주머니에 넣어 철규에게 주고 소고삐를 풀려고 했다.   철규는 돈주머니를 제꺽 호주머니에 넣고 다급히 소 고삐를 잡았다.   “이보소. 우리 주인 오기 전엔 소를 풀어가지 못합구마.”   “이 자식, 왜 이래?”   “안 됩구마. 못 갑구마.”   숱한 장군들이 이쪽을 눈길을 보냈다.   철규가 소고삐를 놓지 않자 부자는 허리춤에서 비수를 꺼내 철규가 잡은 소고삐를 썩 뚝 잘라 버리고 소를 몰고 달아났다.   철규는 부자를 쫓아가면서 소리쳤다.   “어디로 가?! 우리 주인에게 어디 혼나 봐라!”   철규가 소리 칠수록 부자는 고삐로 소잔등을 쨩쨩 치면서 부랴부랴 장마당을 떠나갔다.   철규는 부자를 쫓아가는척하면서 장마당을 벗어났다. 그는 사위를 두리번두리번 살펴도 사람이 보이지 않자 뉘 집 동쪽의 재무지에 덮인 눈 속에 동전을 파묻어 놓았다. 그리고는 황급히 장마당으로 달아 왔다.    그제야 장마당에 병수가 돌아와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기름떡 한 장을 내밀면서 황급히 철규에게 물었다.    “수소 한 마리는 어쨌느냐?”   철규는 기름떡을 뜯어먹으면서 병수의 귀에 대고 종알거렸다.   “어떤 부자가 빼앗아가지고 달아났습니다.”   “야, 이놈 새끼, 이걸 어찌니? 우린 목이 날아났다.”  병수는 목을 매만지면서 풀썩 물앉았다.   “겁도 많기도 많습구마.”   철규는 병수의 귀에 대고 쏘근거렸다.   그러나 병수는 질겁해 물앉은 채 와들와들 떨었다.   “개소릴 치지 말라. 그러고도 살아 남을 거 같니? 난 도망갈 테다.”    병수는 진짜 장마당에서 달아나 어디론가 바람결처럼 사라졌다. 그러나 철규는 말뚝에 매지 않은 나머지 소 한 마리의 고삐와 부자의 비수에 썩 뚝 잘린 소고삐를 한손에 쥐고 한손으로는 눈을 싸쥐고 머리를 숙인 채 쪼그리고 앉아있었다.    한참 후에 기생집에서 실컷 논 한길수가 자위대원들을 데리고 장마당에 나타났다.   그는 철규의 모양을 보고 우스워하면서 소와 말을 세여 보았다.   “아니, 요 놈 새끼야, 소는 어찌 하고 눈을 싸쥐고 앉아 있느냐?”   그제야 철규는 눈을 싸쥔 채 일어나면서 종알거렸다.    “주인님, 생사람 눈을 빼먹는 세상이라기에 눈을 싸쥐고 있습구마.”   “요놈새끼, 소는 어쩌구 빈 소 고삐를 쥐고 있니?"   한길수는 불그락푸르락 해 세길네길 뛰며 고함쳤다.   "소를 어쨌니? 엉? 요놈 새끼, 가죽을 벗겨놓지 않는가 봐라.”   철규는 한길수의 독기서린 외눈깔을 올려다보면서 말했다.    “그래도 병수 삼촌의 말대로 소고삐를 단단히 쥐고 있었으니 그렇지. 안 그럼 나머지 소도 잃어버릴 줄 압소.”   “에끼, 요 놈 새끼, 주둥이만 까진 놈 새낄 어쩌겠니?”   길수는 철규를 한바탕 욕지거리를 하면서 발길로 걷어찼다.   그때 장군들이 몰려 왔다.   “어떤 뚱뚱한 부자가 와서 소를 빼앗아 갔습구마.”    철규는 발길에 채워 대굴대굴 굴면서도 익살을 피웠다.   “옳습구마. 내 그 뚱뚱보를 말리면서 소고삐를 놓지 않으니 비수로 소고삐를 베 버리구 소를 끌고 달아났습구마. 아이고, 그놈을 쫓아가면서 소를 놔라고 했는뎁슈. 더 따라오면 비수로 찍어죽이겠다고 을러메지 않겠습둥? 난 나머지 마소를 잃어버릴 가봐  장마당에 되달아 왔댔습구마.”    철규는 속으로 병수 삼촌과 함께 달아나지 않은 것을 못내 후회했다.    “요놈새끼야, 병수는 어데 갔니?!”   똘만은 눈을 가슴츠레 뜨고 주위를 살펴보다가 길수에게 의문을 들이댔다.   “혹시 그 놈이 소를 풀어가지고 도망가지 않았는지?”   “엉? 그래, 빨리 자전거를 타고 그 놈을 당장 붙잡아라. 소를 끌고 멀리는 가지 못했을 거야!”   “예!”   한길수는 자위대원들을 보내놓고서도 시름이 놓이지 않아 똘만을 불러 세웠다.   “헌병대에 돌아가 넌 오토바이를 타고 큰 길을 따라 쫓아가라.”   “예. 알았습구마.”   땅딸보 똘만은 자전거에 뛰어올라 부랴부랴 우시장 경찰국 사무청사 쪽으로 달려갔다.   철규는 집에 돌아가 혼 낼 궁리를 하면서 길수는 먼저 자위대에 헌병대까지 동원해 수소와 병수부터 찾아내자고 날뛰었다.   한참 후에 똘만과 자위대원이 장마당으로 자전거를 타고 돌아왔다.   “주인님, 소를 찾았습구마.”   길수는 우멍 눈의 주름살이 쫙 펴졌다.   “그래? 병수는?”   똘만은 땀을 훔치면서 도리멀리 질 했다.   “찾지 못했습구마. 명천에 사는 놈이 둥글 소를 끌고 큰길로 돌아가는 걸 헌병대오토바이를 타고 쫓아가 붙잡았습니다. 그런데 그놈의 말이 어린 애에게서 소를 50원에 사갔다고 합더구마.”    “뭐라고? 그럼 병수가 도둑질 한 게 아니란 말이지?”    순간 길수는 의심에 가득 찬 외눈깔박이로 쪼그리고 앉아 흐느끼는 철규를 내려다보았다.   “요놈새끼, 소를 팔았단 말인가?”   그러자 철규는 핼끔 길수를 쳐다보더니 쿨쩍이며 말했다.    “아무리 어리다고 억울하게 굴지 맙소. 소도적놈이 철부지에게 죄를 덮어씌우는 것도 모릅둥?”   그때 옆에서 구경하며 장을 보던 사나이가 끼어들었다.   “아까 보니까 확실히 비수로 고삐를 베면서 위협합디다.”   “그러잖고. 어린 애가 비수를 휘두르는 도적놈을 어찌 하겠소?”   길수는 뭔가 짐작됐는지 머리를 끄덕였다.   “좌우간 요 놈 새끼하구 소를 끌고 가던 놈을 경찰국에 가서 삼조대면시키자. 모든 게 드러날게 아니냐? 둥글소를 끌고 간 놈은 어데 있냐?”   똘만은 자전거를 장마당 눈 바닥에 세워놓으면서 말했다.   “가메다 헌병소대장이 둥글 소와 함께 경찰국으로 끌고 갔습니다.”    “음, 잘 됐다.”   길수는 쾌자를 부르다가 무릎을 탁 쳤다.   “아차, 이젠 둥글소는 잃어버렸구나.”    똘만은 중절모자를 벗어 쥐고 한숨을 땅이 꺼지게 쉬는 주인의 번들 이마를 응시했다.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놈, 경찰국 울안에는 소도적보다 더 무서운 날강도들이 득실거리는 걸 모르느냐? 아, 아냐?”   길수는 손바닥으로 입을 막더니 혀끝을 감빨면서 누가 듣지 않았나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넌 자위대원 몇을 데리고 나머지 마소들을 집에 몰아가라. 못 팔면 못 팔았지. 일본 사람들에게 몽땅 먹히겠다.”   그제야 대장의 말속의 말을 알았는지 똘만은 머리를 끄덕이면서 소고삐를 말뚝에서 풀었다.   “쥐에게 먹혀서는 아깝지만 고양이에게 쌀을 먹여선 아깝지 않다는데 난 쥐에게나 고양이에게나 다 아깝다. 아까워. 내가 어떻게 긁  어모은 재산이냐?”   “예, 안 됐습구마. 꼭 실수 없이 마소를 집에 끌고 가겠습구마.”   “장마당에 왔다가 둥글 소도 잃어먹고 병수까지 잃어버렸다. 그런데 이 놈은 어디로 갔을까?”   길수는 이를 악물고 자위대월들 서넛과 함께 철규를 끌고 경찰국 사무 청사 울 안으로 갔다.   벌건 벽돌토성을 두른 울안에 들어가자 검정 비단솜옷을 입은 뚱뚱한자가 둥글 소와 함께 늙은 느티나무 아래 묶여 있는 것이 우멍 눈에 안겨왔다.   한길수의 눈에 시뻘건 불티가 마구 튕겼다.   “이 놈 새낀가?”   그는 똘만에게 물으면서 뚱뚱한 부자한테로 다가갔다.   “아니, 왜 이럽니까? 난 그 집 소를 샀을 뿐인데.”   부자의 말에 길수는 우멍 눈으로 뒤에 머리를 숙이고 끌려오는 철규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요 놈 새끼, 이 놈 새끼 맞니?”   “예.”   철규는 부자를 보자 머리부터 숙이며 쥐구멍으로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대답했다.   부자는 철규를 보자 망망한 대해에서 지푸라기라도 만난 듯이 허우적거렸다.   “난 저 애에게 50원을 주고 샀습구마.”   철규는 입이 뽀로통해지더니 도도거렸다.   “난 돈을 받은 적도 없습구마. 자위대 한대장네 소라면서 빼앗아 가지 말라구 했는데  저 부자놈이 비수로 나를 위협하면서 소 고삐까지 잘라놓고 소를 끌고 달아났댔습구마. 어린애라고 깔보구 거짓말 작작 합소.”   부자는 눈을 뚝 부릅뜨고 고래고래 고함쳤다.   “죄꼬만 새끼, 경찰국에서 나가기만 해라. 네놈 대갈통을 잘라버릴테다.”   한길수는 부자의 귀쌈을 찰싹찰싹 갈기면서 욕했다.   “이 죽일 놈 새끼, 네가 감히 내 소를 빼앗아가? 비수로 소고삐를 자르고 어린애라고 업신여겨 비수로 위협까지 했다지? 개를 쳐도 주인을 보고 쳐라. 이놈, 어디 죽어봐라.”   부자는 철규에게서 소를 눅게 사가려다가 헌병대에 잡혀 한길수에게 반 주검이 되게 얻어맞았다.   길수는 도적놈은 붙잡았지만 둥글소를 헌병대에 빼앗기고 말았다. 끼무라 국장이 잃어버렸던 둥글 소를 잃어버린 셈 치고 헌병대에서 잡아먹게 선물하라고 하였던 것이다.    깍쟁이 한길수는 소를 잃고 병수마저 사라져 속을 끙끙 앓았다.
403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58) 머슴 김장혁 댓글:  조회:406  추천:0  2024-07-07
2015년 09월 09일 11시 44분  조회:1629  추천:0  작성자: 김장혁                      김장혁 작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 제2권                    제7장 흑야                                     9. 머슴       먹장구름이 고향의 하늘을 지지누르면서 을씨년스럽게 기운봉을 핥으며 오만하게 흘러갔다. 산과 들은 먹장구름의 야만적인 억눌림을 받아 침침해 견디기 어력게 돼가고 길 옆의 눈더미에 깔린 진달래는 언 허리를 굽힌 채 쇠 발굽에 밟혀 간간히 신음하고 있었다.     월선은 날이 감에 따라 은희를 더 못 살게 굴었다. 쩍 하면 밥이 설었다, 눅다, 되다, 돌이 씹힌다, 뭐니 뭐니 하면서 허물을 잡고 머리를 잡아 뜯어놓았다.    암범은 늑대가 가만히 은희와 치근거릴까 봐 물을 길으러 가도 자위대원을 따라 보내 감시하게 했다.    어느 날 월선은 입을 앙다물고 아침 설거지를 하는 은희를 들볶아댔다.    “다시 우리 영감과 치근거려 봐라. 가랑이를 찢어놓지 않는가.”    월선은 선처의 맏아들 철주 녀석과 함께 마차에 앉아 우시장으로 본가 집 아버지를 모시러 떠나갔다.    철주는 일본에 유학을 갔었다. 그는 금방 서울로 돌아왔다가 아버지를 보러 고향으로 내려왔던 것이다.    딸랑딸랑    구리방울소리 절주 있게 들렸다. 네 필 말은 네 굽을 안고 우시장을 향해 달려갔다.   그만하면 마차 빠른데도 암범은 재촉이 성화 같았다.    “빨리 몰아. 해지기 전에 돌아와야겠어.”   어찌나 재촉하는지 머슴 병수는 연신 닫는 말에 채찍을 쨩쨩 안겼다.    뭇 산들은 하얀 눈옷을 떨쳐입은 채 뒤로 물러갔다. 은세계를 방불케 하는 산들에서 흰 용들이 하얀 물보라를 일으키면서 엎치락뒤치락 싸우는 듯이 눈보라가 무섭게 비명을 지르면서 휘몰아쳤다.    “철주, 저 눈보라 치는 산을 보오. 우린 신선들이 날아다니는 별유천지를 마차 타고 훨훨 날아예는 거 같지 않아요?”    “그런 거 같네요.”    철주는 크림 내 확확 풍기는 월선을 피뜩 곁눈질하면서 비위를 맞추면서 씽긋 웃어 보이었다.    “작은어머니, 짚고 넘어갈 게 한 가지 있는데요. 맏아들과 무슨 ‘이랬어요’, ‘저래요’인가요? ‘야’, ‘자’ 하세요.”    “호호호.”    월선은 입을 싸쥐고 캐득캐득 웃었다.    “맏아들? 그저 맏아들과 같이 꽃마차를 타고 아버지 모시러 가니 기분이 좋아 그래요.”    “또, 또. 에이 참, 어머님도. 원.”    월선은 개의치 않고 철주의 손을 슬그머니 잡았다. 철주는 덴겁해 손을 훌 빼갔다.    월선은 취한 듯이 몸을 철주에게 기대면서 나직이 소곤거렸다.     “왜 안 되나? 어머니가 맏아들이 고와서 그래. 호호호.”     철주는 황급히 몸을 피하면서 상을 찡그렸다.     (늙으신 아버님 마음고생 많겠구나.)    순간 월선은 깨 고소해 했다.     (등신 같은 영감태기, 당신은 은희를 좋아하지? 내 당신 맏아들을 좋아한들 뭐래? 흥, 애 나지? 풍이나 맞고 콱 뒤져!)     병수는 마차를 몰면서 뒤에서 연놈들이 하는 수작이 메스꺼워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 잔등에 채찍을 안기며 박차를 가했다.     마차는 모자간의 추잡한 희극을 싣고 눈보라 속으로 질풍같이 달렸다.     한편, 한길수는 월선이가 우시장을 간 틈을 타서 은희를 고분고분 말을 듣게 길을 들이고 싶었다.     그는 몸채 마루에 나가 앉더니 호통 쳤다.     “영팔이, 은희를 끌어오게!”     “예!”    영팔은 응삼과 함께 사랑방에 가서 은희의 양팔을 잡아끌고 왔다.    한길수가 독기어린 우멍 눈을 무섭게 부릅뜨고 고래고래 고함쳤다.     “더러운 년, 자기를 생각하는 거 모르고 언감 그런 연극을 놀다니? 저 년을 기둥에 달아매라!”     영팔과 응삼은 바 줄로 은희를 기둥에 끌어맸다.     “주인어른, 왜 이랩둥? 난 아무 죄도 없어요. 제발 풀어 줍소.”     “흥, 어디 주인의 비위를 거슬러 봐. 흥, 대가를 톡톡히 치를줄 알어.”    한길수는 기둥에 매놓은 은희의 귀 쌈을 찰싹 찰싹 갈겼다.   은희의 여윈 얼굴에 뻘건 손자리가 났다. 한길수는 손찌검질도 분을 풀기는 모자랐는지 손에 침을 퉤 뱉더니 가죽채찍을 찾아 들고 번들 이마를 번쩍이면서 은희에게 어슬렁어슬렁 다가갔다. 이를 사려 문 한길수의 우멍 눈에는 늑대 독기와 변태의 음충한 눈빛이 서려 있었다.   쨩! 쨩!   한길수는 채찍으로 그 여린 은희의 종아리고 허벅다리고 가슴이고 사정없이 후려쳤다.   “앗, 아가!”   신음소리가 애처롭게 울렸다.   한길수는 채찍질하면서 을러멨다.   “주는 떡을 먹지 않더니 어떠냐? 응? 내 말을 고분고분 듣겠니? 안 듣겠니? 응?!”   은희는 채찍소리 쨩! 쨩! 날 때마다 죽어가는 비명소리를 쳤다. 은희가 머리를 가로 툭 떨어뜨린 채 대답이 없었다. 한길수가 채찍자루로 턱을 쳐들어보니 은희는 눈을 겨우 가늘게 뜨고 올려다보는 것이었다.   “경 칠 년, 다시 내 말을 듣지 않아 봐!”   은희는 대답 대신 머리를 툭 떨어뜨리더니 눈을 내리깔며 까무러쳤다. 그녀의 목과 팔, 종아리에 마디진 퍼런 굴뱀이 쭉쭉 갔다.   한길수는 은희가 죽겠으면 죽어라고 모든 것을 개의치 않았다.   그는 채찍을 놓자 마루에 앉아 곰방대를 꺼내 담배를 재워 넣었다. 눈치 빠른 아첨쟁이 응삼이가 부시를 척 꺼내 올리었다.   한길수는 응삼의 손을 밀어버리고 호주머니에서 성냥 곽을 꺼내더니 성냥가치를 득 그어 담배 불을 붙여 물었다.   “주인님, 건 뭣입둥?”   응삼과 영팔은 신기해하자 한길수는 어깨 으쓱해 입을 널어댔다.   “이 시골 놈들아, 끼무라 국장님이 나에게 준 성냥이야. 이거면 부시를 백번 치지 않아도 돼.”   한길수는 “에헴.” 하고 마른기침을 하며 안방에 들어갔다. 이윽고  나온 그느 성냥을  졸개 응삼과 영팔, 수길에게 한 통씩 나눠주었다.    “와~ 신기하다.”   응삼은 성냥 곽을 쥐고 이리저리 보면서 야단쳤다.   한길수는 영월동에서 병완을 몰아낸 후 병완의 집에 림산파출소를 세우고 들어앉아있는 야마모도 소장을 등에 업고 마구 칼을 휘둘렀다.   “저년에게 물을 치게.”   영팔은 까무러친 은희를 풀어놓고 부엌에 들어가 바가지로 물을 퍼다 얼굴에 탁 쳤다. 그래도 은희는 깨여나지 못했다. 짐승 같은 놈 들은 초겨울 널마루바닥에 은희를 눕혀놓고 정신을 차리기를 기다렸다.   한길수는 은희 생사는 관계하지 않고 차디 찬 마루에 내버려둔 채 영팔, 응삼과 자위대 대원들을 끌고 덕팔이네 집으로 우르르 몰려갔다.    “개자식, 성칠을 따라 사냥하러 갔지. 몽땅 독립군으로 처단할 테다. 네놈들의 처자들을 몽땅 내 종년을 만들테야. 으흐흐.”    한길수는 득의양양해 덕팔이네 집으로 다가갔다.   눈에 용마루가 짓눌려 푹 꺼진 집 안에서 필순의 쿨룩쿨룩 기침소리 들렸다.   길수가 졸개들을 끌고 기척도 없이 뛰어들자 필순의 아들 철규와 딸 점순이가 화닥닥 일어나면서 공포에 바들바들 떨었다.   “무슨 일입둥?”   한길수는 필순의 창백해진 여윈 얼굴을 쏘아보며 고래고래 을러멨다.    “철규, 넌 오늘부터  우리 집에 가서 말을 먹여야 돼!”     “안 됩구마.”   필순은 손으로 철규를 잔등 뒤에 빼돌렸다.   “나그네가 사냥하러 가구 없는데 이제 열 살 푼한 애마저 머슴으로 끌어가면 어떻게 합둥?”   한길수는 음흉한 우멍 눈으로 겨릅대 같은 필순을 쏘아보면서 을러멨다.   “덕팔은 독립군에 들어갔기에 죽은 목숨이야. 처자들도 다 목을 매 죽여 버려야 한다. 하지만 이 어른이 야마모도 소장과 말해서 살려 줬으니 고마운 줄 알아라. 흥!”   영팔과 응삼은 와락 달려들어 필순을 활 밀어버리고 승냥이 어린 양을 채가듯이 철규를 훌 끌고 바깥으로 나갔다.   “철규야, 철규!”   필순은 따라 나가면서 손을 들어 철규를 불렀다. 마흔이 거의 돼서 어떻게 낳은 외동아들을 빼앗기고만 것이다.   “오빠~ 응, 응~”   점순도 따라 나가면서 통곡 쳤다.   한길수는 음충한 눈길로 점순의 애티 나는 몸을 훑었다.   (너무 애호박이야.)   한길수는 우멍 눈을 점순에게서 떼더니 코를 싸쥐고 퀴퀴한 냄새 나는 집안에서 바람결처럼 나가버렸다.  집 안에서는 필순이 모녀의 처량한 울음소리가 흘러나왔다…  토끼꼬리 같은 겨울 해가 눈 덮인 서산으로 뉘엿뉘엿 넘어갈 때에야 병수가 모는 마차가 토성 안에 들어섰다.   마차 풍을 젖히고 살진 월선의 낯이 쑥 나왔다.   “여보, 아버님이 오셨어요.”   위방 문이 삐꺼덕 열리더니 한길수가 끌신을 짝짝 끌고 바삐 나갔다.   마차 우에서 백발이 성성한 염소수염이 풍막을 젖히고 나타났다.   “가시아버지, 그간 무사했습둥?”   “오, 그래.”   염소수염을 기른 월선의 아버지는 거만하게 거들먹거리면서 병수가 가져다놓은 나무 궤를 딛고 마차에서 내렸다.   헌병 가메다가 마차를 뒤따라 들어왔다. 그자는 한길수를 보고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곤방와(안녕하십니까)?"   그자는 월선의 아버지에게도 허리 굽혀 인사했다.    “하이, 오까께 사마데(예, 덕분에).”   한길수는  이젠 제법 섬나라 오랑캐처럼 일본 말로 인사말을 받았다.   이때 저쪽 토성 밑 우사에서 철규는 굽실거리는 한길수를 쓴 오이 보듯 하면서 피씩 쓴 웃음을 지었다.   “철규야, 말을 마구간에 들여다 먹이를 줘라!”   “알았습구마.”   철규는 병수와 함께 말을 풀어 마구간에 들여다 매고 구유에 먹이풀을 주었다.   “에구, 요 어린것까지 붙잡아왔구나. 쯧쯧.”   열세 살 밖에 안 되는 철규는 고된 일에 지쳐 비틀거렸다. 그는 일을 마치고 마구간에서 나오면서 높이 쳐들린 몸채 추녀를 올려다 쏘아보며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그는 자기에게 차려진 밥그릇을 들고 사랑방에 들어가 누워 신음소리를 내고 있는 은희 앞에 내밀었다.   은희는 뜨거운 눈물을 주르르 흘리면서 “네나 먹어라.” 하고 목구멍으로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겨우 말했다.   이때 병수도 밥그릇을 들고 사랑방에 들어섰다.   “은희, 이건 네 몫을 가져 온 거야. 어서 억지로라도 먹어라. 이러다간 앓아눕겠다.”   병수는 은희가 이를 옥 물고 간신히 일어나 앉아 밥술을 드는 은희를 보고서야 자기 곁방으로 나갔다.   철규는 채찍 자국이 난 은희 팔을 보고 눈물이 글썽해지더니 이를 옥 물었다. 너무 힘들어 은희의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내뱄다.   은희는 숟가락을 드네 마네 하다가 한숨소리에 신음소리를 섞어내더니 철규의 부축을 받으면서야 간신히 자리에 들어 누웠다.   철규는 은희의 귀에 대고 뭐라고 소곤거렸다.   창고 같은 사랑방에는 남녀 머슴들이 모이어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었다.
402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57) 암범과 늑대 김장혁 댓글:  조회:450  추천:0  2024-06-28
                       김장혁 작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 제2권            제7장 흑야                8. 암범과 늑대          싸늘한 달밤에 처량한 달빛이 사랑채 안을 처량하게 비추었다. 무시무시한 공포가 희극처럼 사랑채에 스물스물 기어들어 기웃거린다.      은희는 다 타버린 폐허 같은 길수네 토성 안 사랑채에 들어가 누더기이불을 쓰고 자리에 들었다. 온 여름 불도 때지 않아 습기 찬 구들에 누더기이불마저 축축해 누어있을 수 없었다. 한길수가 마을 사람들을 강제로 끌어다가 연 십여 일 동안 대충 손질한 몸채에 한길수와 월선이 들어있고 줄느런히 들어선 곁채에 영팔과 응삼, 수길이 들어있었다.      은희는  야밤에 짐승보다도 못한 그자들이 더 무서워 종시 잠들 수 없었다.     (아버지 엄마만 아니면 이 놈의 승냥이 굴에서 도망치고 말건데. 그렇게 할 수도 없고.)    은희는 스르르 일어나 밖을 내다보았다.   희읍스름한 달빛이 쓸쓸히 집 안을 비추고 을씨년스런 가을바람이 이영 초리를 와스스 건드리며 스치고 지나가는 소리 집 안에 공포를 더 몰아온다.    삐꺼덕   대문에 달린 작은 문짝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길수가 응삼을 데리고 대문 안에 들어섰다. 그는 개 잡은 포수처럼 우쭐거리면서 어깨 으쓱해 우멍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성큼성큼 몸채로 들어갔다.   희읍스름한 달빛이 깔린 마당에 허연 무명저고리에 까만 몽당치마를 입은 은희가 물동이를 팔에 끼고 사뿐사뿐 걸어 나왔다.   은희를 보는 순간 한길수는 길쭉한 말상에 말 이발을 드러내며 웃었다.   “응삼이, 오늘 일은 끝났네. 자넨 집으로 들어가게나. 에헴.”   “예.”   응삼은 좋아라고 사랑채 곁방에 들어가 버렸다. 춘실이 맛있는 명태 국을 끓여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한길수는 머리를 다소곳이 숙이고 다가오는 은희의 왼팔을 붙잡았다.   “얘, 주인을 보고 인사할 줄도 몰라?”   “주인님, 무사합둥?”   “오, 그래, 밤중에 동이를 이고 물 길으러 가냐?”   은희는 쥐구멍으로 들어가는 가는 소리로 “예.” 하고 대답했다.   그녀는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길수의 팔을 살짝 뿌리쳤다.   한길수는 고양이 쥐나 생각하듯 말리었다.   “밤중에 무슨 물을 긷는다고 이러니? 내일 길어라.”    “예, 알았습꾸마.”   은희는 길수가 팔을 놓기를 기다려 부엌에 동이를 들여다 내려놓고 나와 사랑채에 들어갔다.   이튿날 아침, 한길수가 음충한 눈길로 물을 길으러 가는 은희의 엉덩이를 우멍 눈으로 힐끔힐끔 곁눈질해보더니 다른 궁리를 했다.    그는 몸채에 월선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자 은희의 뒤를 슬금슬금 밟았다.   은희는 어제 저녁에 자기에게 특별한 “은혜”를 베푼 주인이 징글스러웠다. 그런데 이른 아침에 물을 길으러 가는 자기 뒤를 따라 오는 것이 여간 상서롭지 못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도 아침 밥을 지으려고 물을 당장 길어오라고 월선이 소리쳤는지라 물을 길으러 가지 않을수 없었다.   (아무리 하면 시퍼런 대낮에야 어찌 하겠느냐?)   은희가 우물가에 가서 동이를 내려놓고 바가지로 물을 퍼 담는데 길수가 사위를 둘러보더니 마른기침을 하며 다가왔다. 은희는 온몸에 소름이 끼쳐 동이에 물을 빨리 퍼 담았다.   “은희, 헤헤. 너도 눈이 있고 귀 가졌으니 알겠지? 널 얼마나 귀여워하고 아끼는가를.”   은희는 다리에 거머리 매달린 것 같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방망이질하듯이 높뛰는 가슴을 눅잦히면서 물동이를 이쪽으로 돌려놓고 물만 퍼담았다.   한길수는 제꺽 물동이를 빼앗아 내려놓으면서 지껄여댔다.   “은희야, 한뉘 종년이나 하고 살겠니? 이팔청춘이 너무 아깝다, 아까와.”   은희는 고양이 쥐 생각을 하는 것이 메스꺼웠다.   (며칠 전 밤중에 집에 뛰어 들어와 뭐라 했는가? 상호와 성칠 오빠가 독립군에 들어가 의병이 됐다고 호통 치면서 우리 일가를 몽땅 죽일 수도 있다고 위협하지 않았던가?)   음충스레 힐끔거리는 눈길, 살기어린 우멍 눈, 헤헤 웃으면서 드러낸 말 이발…   은희는 온 몸에 소름이 끼쳐 한길수를 외면하면서 살금살금 우물 쪽으로 돌아앉아 물을 한바가지, 한바가지 퍼 담았다.   은희 속내는 모르고 한길수는 계속 지껄여댔다.   “나만 믿어라. 그럼 상호 죄도 눈감아주고 네 일가를 몽땅 잘 살게 해주겠어. 알았지?”  은희가 머리를 다소곳이 숙이고 물을 퍼 담다가 무슨 생각에 잠긴 듯이 잠간 멈추자 한길수가 이제 수가 드나 해 속심을 드러냈다.   한길수가 은희의 어깨를 껴안으면서 열변을 토해냈다.   “널 첩으로 들여앉힐게. 그러면 저 토성안 집도 주고 너희들 온 집 식구들도 우리 토성안집에 들어와 평생 먹고 입을 근심 없이 복 방에 앉혀놓을게.”   은희가 몸부림치며 “이걸 놓으세요. 놓아!” 하고 고함칠 때였다.   뒤에서 앙칼진 목소리가 골짜기를 꽉 메우며 울려왔다.   “년 놈들! 잘 놀긴 놀아!”   뒤를 돌아보니 암범 같은 월선이가 옆구리에 두 손을 지르고 표독스런 눈길로 쏘아보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년, 물은 긷지 않고 웬 서방질이냐?”   월선은 시어미 역정에 개 배때기를 차듯이 영감과는 어쩌지 못하고 덮쳐들어 은희의 머리채를 틀어쥐고 마구 끌고 당겼다.   은희는 억울하게 머리를 당기우면서도 반항 한번 하지 못하고 너무 아파 신음소리를 냈다. 한길수는 그저 머리를 홰홰 내저으면서 어슬렁어슬렁 그 자리를 피해 달아났다.   아침 숟가락을 놓자 한길수가 앵돌아진 월선을 슬슬 구슬리였다.   “여보, 아무렴. 내가 당신을 저버릴까? 당신이야 말로 조강지처나 다름없소.”   “또, 또, 누굴 얼려요?  뭐 세살 짜리 앤가 해요?”   월선은 입귀를 비쭉거리면서 훌 일어나 바깥으로 나가려고 했다.   한길수가 일어나 따라 나가면서 월선의 손을 잡아 집안으로 끌어 당겨 물앉혀 놓았다.   “여보, 은희가 이 집에서 부엌데기를 못하겠다고 도망칠 까봐 슬쩍 얼려 발목을 잡은 것뿐이오.”   월선은 피씩 쓴 웃었다.   “당신이 콩으로 메주를 쓴다고 해도 곧이들을 거 같아요? 우물가에서 분명 ‘소실로 들여앉히겠다’는 걸 똑똑히 들었어요. 뭐, 이 토성   안 집을 주겠으니 들어와 살라고?”   “건 그저 얼리느라구 한 거짓말이요.”   “이전에도 나를 그렇게 얼렸지. 본댁을 서울에 두고 얼려 내캉 여기서 살았죠. 이젠 내 나이 드니까 새파랗고 야들야들한 계집애들에게 눈독 들여?”    한길수는 딱 잡아뗐다.    두터운 어둠의 장막이 높은 토성 안에 서서히 두텁게 드리웠다. 허연 달이 뜨면서 달빛이 추녀 끝을 핥으면서 희롱하며 창문턱에까지 내리비치자 길수는 아래배로부터 가슴까지 찡 해나면서 끓어오르는 정욕을 참을 길이 없어 이발을 지그시 깨물었다. 낯이 화끈화끈 달아오르고 입에서는 단김이 푸푸 터져나갔다.    그때 사랑방에서 문을 닫는 덜커덕 소리가 났다.    (그래, 은녀가 설거지를 마치고 들어가는 모양이야. 마침 월선이가 가시아버지를 모시러 우시장에 가고 없지. 이때야. 히히히.)   한길수는 잠옷 바람에 하이칼라 번들 이마를 떡 쳐들고 바깥으로 나갔다.   그는 몸채를 한 바퀴 빙 돌아가면서 살펴도 인기척이 없자 닭을 훔쳐 먹으러 가는 쪽 제비처럼 슬금슬금 사랑 방 쪽으로 다가갔다. 빠드득빠드득 눈을 밟는 소리보다도 한길수의 거친 숨소리가 더 높았다.   은희가 이튿날 아침밥을 지을 물을 길어놓고 금방 사랑방에 들어갔을 때다.   번들이마가 슬금슬금 다가가 문고리를 당겨보니 집안에서 노끈으로 매놓은 것이었다.   그는 마른 침을 꼴깍 삼키며 몸채 쪽을 흘끔흘끔 살피더니 문고리를 잡아 당겼다 밀었다 했다. 이윽고 노끈이 풀리면서 사랑방문이 훌러덩 열리였다.    한길수는 도적놈처럼 집안에 들어간 후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까만 방안 벽을 더듬질하면서 구들 쪽으로 올라갔다.     “야밤에 누군가요? 소리치겠습꾸마.”   은희 화닥닥 일어나면서 불을 켜자고 바스락거렸다.   “쉿- 주인이야.”   한길수가 바삐 나직이 말했다.   “불을 켜야지.”   은녀 말에 한길수는 너스레를 떨었다.   “헤헤헤. 두려워 말라. 난 너를 위해서라면 간이라도 빼주겠다. 요 귀여운 것아.”   별스레 키득키득 웃는 소리와 누더기를 뒤척이는 소리가 들리었다.   “기쁠 테지. 온 우시장이 내 말이라면 다야. 난 너 같은 종년도 천당 같은데서 살게 할 수도 있고 18층 지옥에 처넣어 뼈다귀도 추리지 못하게 할 수도 있어.”   한길수가 을러메면서 기신기신 구들에 올라왔다.   “찍소리 치지 말고 고분고분 내 말 들어. 이렇게 누추한 방에서 한뉘 물이나 긷고 변소 똥이나 치면서 살게 있니? 내일부터 응삼과 수길을 보고 우리 작은댁 방에 불을 때라고 할 테야.”   한길수가 입에 엿이나 발라 문 것처럼 달달한 말로 구슬리면서 슬슬 기어 올라왔다. 뒤이어 이불안에 손을 쓱 들이밀어 더듬었다.   “요 귀여운 것아, 널 소실로 맞아들이면 몸채를 다 손질하는 날로 들여앉히마.”   “키득키득”   이불 안에서 들리는 웃음소리에 한길수는 황망히 손 더듬질 했다.   “요것아, 좋지? 그래,  널 평생 복을 누리게 할 수 있어. 본댁은 이젠 쉰이 다 돼서 날 싫어해. 이젠 여자로 써먹기는 다 틀렸어. 통 정이 떨어져서 못살겠단 말이다. 진작 소실을 들일 때가 된지 오래다. 에구, 넌 참 탄탄하고 몽글몽글 하구나. 너와 백년을 살았으면 오죽 좋겠느냐.”    한길수가 웃통을 와락와락 벗으면서도 스리슬쩍 계속 늘여놓았다.   “네가 소실로 들어오면 네 애비 폐병도 뚝 떼게 돈을 대줄게. 너도 애비에게 효도를 해야 하지 않겠느냐? 애비를 생각해서라도 내 말 고분고분 들어라.”   한길수는 옷을 다 벗자 이불 안에 스리슬쩍 들어가 이불안 여자의 탄력 있고 매끌매끌한 몸을 가로탔다.   그가 막 달려들 때였다. 밑에 깔린 여자가 불시에 두 발로 한길수를 마구 탁탁 차버렸다. 한길수가 채워 여체 위에서 누더기 우에 나뒹굴었다.   “이년이, 감히 누굴 차? 이러고도 살기를 바라느냐?”   한길수가 벌거숭이 몸뚱이를 일으키면서 마귀의 손을 뻗쳐 은희를 붙잡으려고 손 더듬질 했다.   “하하하, 이 놈 두상이, 하긴 잘한다, 잘해!”   이게 웬 일인가?   집 안에 광솔불이 환하게 켜졌다.   실 한오리도 걸치지 않은 알몸뚱이 월선이가 누더기이불 위에서 허리에 한쪽 손을 지른 채 장승처럼 떡 뻗치고 서서 암범처럼 길길이 날뛰었다.   “뭐? 이젠 나와 통 정이 떨어져서 못 살겠다고? 소실을 들일 때라? 아이유, 분해라.”   월선은 구석에 머리를 숙이고 서있는 은희를 활 밀치었다.   “이 년과 백년을 살았으면 좋겠다던 게 콱 살아봐라!”    월선은 한길수를 표독스레 쏘아보았다. 어두운 집 안에서도 눈에서 불찌가 툭툭 떨어지는 것이 보일 지경이었다.   “더러운 영감, 아이유, 분해라. 누구 덕에 이 골 안에 발붙이고 이 토성안집을 지었기에? 응? 이 토성안집을 저년에게 줘?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엔 안 돼!”   “에이유, 에이유. 저년을 얼리느라구 한 농담을 가지고 왜 그래?”   “로망이지 로망, 미쳤어? 저년의 엉덩이가 그렇게 꿀맛일 것 같아? 며칠 전에 내 우물가에서 치근덕거리는걸 보고 싹 다 눈치 챘어. 주책머리 없는 영감태기. 에이유, 아버지~ 저런 못난 놈을 사위라고 서울에서 올라올 때마다 황금덩이를 줬어요? 아버지, 불쌍한 아버지~  내 처지 얼마나  불쌍하오. 에이유, 에이유~ 아버지, 어머니~”   “이보, 왜 이래? 동네에 소문나겠소. 이런 패가망신이라구야, 원, 토성 안에 보초를 서는 숱한 자위대원들이 있소. 그만하지 못할까! 쯧쯧.”   월선은 누더기를 와락 안아 벌거숭이 한길수에게 마구 들씌워 놓았다.   한길수가 주섬주섬 잠옷을 주어 입으면서 은희를 힐끔힐끔 곁눈질하며 중얼거렸다.   “에이, 막돼먹은 쌍년처럼 계속 떼를 써?! 에헴, 참. 재수 없어.”   한길수는 길쭉한 말상을 절레절레 흔들면서 월선을 죽도록 미워했다. 밸 같았으면 허리춤의 권총을 뽑아 한방에 쏴죽이고 젊고 예쁜 은희를 데리고 살았으면 좋을 것만 같았다.   암범 같은 여편네 앞에서 방귀도 하나 못 뀌고 실컷 개꼴망신당한 늑대 같은 한길수는 괜히 시어미 역정에 개 배때를 차듯 했다.   그는 괜히 은희를 보고 “후에 두고 보자.” 하고 한마디 내뱉고 나서 능구렁이처럼 슬금슬금 바깥으로 빠져나가버렸다.   한길수가 꼬리를 빼자 월선은 시에미 역정에 개 배깨끼 차듯했다. 그년은 바들바들 떠는 은희의 머리채를 잡아 마구 벽에 쿵쿵 짓 쪼아놓으면서 암범처럼 펄펄 날뛰었다.    아이고, 불쌍해라. 저 맞아대는 은희를 보라. 두 손으로 머리를 틀어쥔 월선의 우악스러운 손을 붙잡고  애원하였다.    “제발 살려주세요.”    허나 월선은 사정없이 매질을 멈추지 않았다.   은희는 머리채를 끗기면서 매만 맞는데 눈물, 코피 흐르고 애원소리 갑갑한 사랑방에 울려 퍼졌다.   월선은 나중에 맥이 모자라 더 때리지 못하고 구들바닥에 물앉아 헐떡거리다가 돼지 멱 따는 소리를 질렀다.   “다시 우리 영감을 넘보았다간 가다리를 찢어 죽여치우겠다. 알겠니?”   그는 표독스러운 눈길로 은희를 쏘아보더니 광솔 불을 훌 불어 끄고 훌쩍 일어나 횡 하니 바깥으로 나갔다.   사실 월선은 우물가에서 한길수가 은희와 치근덕거리는 것을 본 후 며칠 전 한길수가 한 거짓말을 한마디도 믿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월선은 본가 집 아버지를 모시러 우시장으로 가는 척 하면서 이날 가만히 은희의 방에 숨어들었던 것이다. 그는 은희를 보고 한쪽구석에 서 있다가 한길수가 들어오면 시키는 대로 이리이리 하라고 했다. 뒤이어 월선은 은희 대신 누더기이불속에 누워 한길수가 하는 짓거리를 다 듣고 키득키득 웃었던 것이다.    은희는 월선의 행악질에 헝클어진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먹칠한 듯이 캄캄한 방안에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면서 쓸쓸히 어깨를 들먹였다.    (성칠 오빠랑 없으니까 한길수 승냥이처럼 살판 치잖아.  저승  같은 여기에서 어떻게 산단 말인가?)   은희는 생각할수록 살아갈 앞길이 막막했다. 사랑방에서는 그녀가 흑흑 흐느껴 우는 소리가 쓸쓸하게 납덩이같은 밤 정적을 괴롭게 톱질한다.
401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56) 사내 자존심 김장혁 댓글:  조회:490  추천:0  2024-06-28
   김장혁 작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 제2권             제7장 흑야         7. 사내 자존심        거무칙칙한 밤하늘에서 고기비늘구름떼가 총망히 흘러가고 간혹 하현달이 구름 사이를 비집고 얼굴을 내밀어 대지의 쓸쓸한 산과 들에 여기저기 널린 오두막들을 비추며 뭐라고 중얼거리다가도 뭣이 그렇게 두려운지 구름 속으로 사라지군 했다.    일본 놈들은 기운봉 기슭 뭇 산들에 꽉 들어선 수림을 눈독들였다.  목재를 실어내가기 위해 우시장으로부터 영월동과 운주동을 거쳐 명천과 경성에까지 통하는 길을 닦기 시작한지도 이젠 몇 해 잘됐다.    일본 놈들은 자기 야욕을 채우려고 농사꾼들을 강제로 인부로 끌어다가 운주동 북산과 영월동 서산 부근의 아름드리 원목을 난벌해 길옆에 실어내려 저목장에 쌓아두었다. 그 놈들은 저목장의 아름드리 원목을 마차와 자동차에 실어 우시장 역에 실어갔다. 거기서 기차에 원목을 꽉 박아 싣고 남으로, 남으로 달려 서울에 가고 부산에 갔다. 또 일부 원목은 부산에서 기선에 실어 일본 본토에까지 실어다가 목조건축물을 짓는데 썼다.    일본 놈들의 야만적인 난벌로 해 영월동 서산과 운주동 북산은 오래지 않아 벌거숭이로 돼갔다. 총을 멘 일본 헌병들은 야마모도 소장의 지시대로 밤낮 저목장에 우등 불을 피워놓고 지켰다. 거무칙칙한 산등성이에까지도 우등불빛이 어려 붉게 물들어있었다. 영월동 병완의 집 굴뚝에도 게딱지 같은 고약딱지기발이 꽂혀 펄럭이고 있었다.    며칠 전에 야마모도와 한길수가 헌병들과 영팔 등 졸개들을 끌고 영월동 병완의 집에 뛰어들었다.    야마모도는 거만스럽게 군도자루를 잡고 병완의 집구들에 올라서서 대들보를 기웃기웃 올려다 살피더니 마른기침을 했다.   “에헴, 오늘 내로 이 집을 내란 말이야. 여기에 우리 림산파출소를 앉히겠어.”   류강철의 통역을 들은 병완은 기막혀 야마모도를 부릅뜬 눈으로 쏘아보았다.   “아니, 정신 나갔는가? 제 집에서 내쫓으면 어데서 살란 말인가?”   한길수는 옆에서 깨 고소해 말 이발을 드러내고 헤벌쭉거렸다.   야마모도는 군도로 구들바닥을 쿡 찔러 짚고 서서 호령했다.   “어데서 살든 관계없어. 조선이 통 채로 우리 대일본 제국 거로 됐네. 우리 황군이 어데 군사시설을 앉히려면 자네 집이 아니라 군청이나 서울이라도 내놔야 해. 알만 해?!”   병완은 아무리 말해도 쓸데없다는 것을 알았다. 헌병들은 농짝이랑 파출소에 쓸데없는 가정기물을 마구 내던졌다.   병완은 한마디 말도 해보지 못하고 일본 헌병 놈들의 총창에 떠밀리어 울며 겨자 먹기로 자기 집에서 쫓기어났다. 끼무라 국장과 야  마모도 소장은 병완이 길닦이공지 총 도감도 그만둔 데다 종무소식인 성칠을 잡는 미끼로도 써먹을 수 없다고 인정하고 집을 빼앗은 것이었다.   병완은 자존심을 꺾고 솔가해 영월동을 떠나 운주동에 가서 맏아들 창준의 집에 한데 들 수밖에 없었다.   기준은 주먹을 부르르 떨면서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개놈 새끼들, 남의 집을 마구 빼앗다니? 내 아무 때든 그 놈들을 도끼로 대갈통을 찍어놓고 말지 않는가 봐라.”   창준은 도리머리 질 하면서 울뚝밸이 센 동생을 말렸다.   “그러지 말라. 무리승냥이 같은 일본 놈 새끼들을 다쳤다가 어떻게 산다고 그러니? 온 집안이 몰살을 당하자고 그러니? 아버지 말씀대로 만주에 가면 다야. 똥이 무서워 피하니? 더러워서 피하지.”   병완은 두 아들의 말을 묵묵히 들으면서 앉아 있다가 한숨을 구들바닥이 꺼지게 내쉬었다. 뒤이어 그는 기준을 따라 바깥으로 나갔다.   병완은 기준을 불러 세웠다.   “얘야, 울뚝밸을 쓰지 말고 꾹 참아라. 항상 네 울뚝밸이 근심된다. 내라고 밸이 없어 그 놈들에게 집을 빼앗기고 쫓기어 난 거 같니? 임시 자존심을 꺾고 원수를 갚을 기회를 기다리자.”   기준은 성이 꼭뒤까지 치밀어 황소숨을 푸푸 몰아쉬었다.   병완은 기준의 어깨를 다독였다.   기준은 머리를 숙이고 툴툴거리면서 집으로 돌아갔다.   이튿날 병완은 두 아들 집 자손들을 데리고 올해 새로 개간한 바위돌밭으로 메밀을 거두러 운주동 뒷산으로 갔다.   “아버지, 영월동 서산에는 가보지 않겠습니까?”   기준의 물음에 병완은 바위돌 틈 새로 해 산으로 올라가면서 “며칠 후에 가보자. 한영감이 불에 탄 집을 손질한다더라. 그놈새끼 보기 싫다.” 하고 말했다.   “쉬파리 무서워서 장을 담그지 못하겠습니까?”   그들이 이런 말을 주고받으면서 소잔등 같은 너럭바위가 소 무리처럼 누워있는 바위돌밭에 갔다. 바위 돌 틈새에 재를 펴놓고 심은 메밀은 끝 초리가 꼿꼿이 쳐들고 있었다.   “좋은 밭을 두고 이게 뭐냐? 우린 뭘 먹고 살아야 하느냐?”   병완이 답답해하자 기준은 “이젠 여기서 일본 놈들의 수하에서 못 삽니다. 만주로 들어갑시다.” 하고 말했다.   병완은 말라버린 메밀을 베면서 말했다.   “정작 고향을 떠나자니까 고향 모든 게 아깝구나. 김려생 할아버지께서 명천에 입북한 후 4백여 년이나 대대로 살아온 우리 고향이 아니냐? 어쩌면 우리 고향이 이렇게 됐느냐? 참 안타깝다.”    기준과 창준은 코마루가 시큼해났다. 그들은 4헥타르나 되는 바위 틈새의 메밀을 베였지만 몇 십 단이 되지 않았다.   며칠간 온 집 식구들이 메밀을 거둬들여 마당에서 도리깨로 두드려 낟알을 마대에 담고 보니 대여섯 마대 밖에 안 됐다.   아낙네들이 메밀을 껍데기채로 절구통에 넣고 찧어 죽물이라고 끓였다.   모두들 밥상에 둘러앉아 천정이 환히 들여다보이는 메밀죽물도 아주 맛있게 후룩후룩 마시였다. 그런데 목에 꺼슬꺼슬한 까만 메밀 겨가 걸려 자꾸 물을 마셔야만 했다. 그래도 쌀알이 들어간 죽물이라도 마실 수 있어 모두들 다행으로 생각했다.   한편 영월동에서 병완을 몰아낸 한길수는 삼년 앓던 이빨을 뺀 것 같았다.   그는 개 잡은 포수처럼 어깨 으쓱해 쏘다니면서 곁을 쳐서 복판을 울리는 수를 써서 병완을 따르던 사람들을 하나하나 못살게 굴었다.   (독불장군이라고 제 아무리 천하장사 병완과 성칠이라고 해도 용빼는 수가 있겠는가?)   그는 권총까지 차고 거들먹거리면서 희미한 등잔불이 창문으로 내비치는 엄창렬의 집으로 다가갔다.   늑대를 만난 개울가의 버드나무 초리들이 초겨울 바람을 얻어맞아 아츠러운 비명소리를 질렀다.   징검다리를 건너가다가 한길수는 졸지에 매끄러운 돌을 빗디뎌 핸들 넘어가 엉덩방아를 쿵 찧었다.   “아이쿠!”   개울물에 물앉은 한길수는 어찌나 아팠던지 어슴푸레 뜬 달빛아래 오만상을 다 찡그리며 말 이발이 다 드러났다.   “아니, 주인님, 어떻게 하면 이리 좁은 개울물에 다 빠졌습니까?”   한길수는 너무 아파 왜가리 목을 배배 틀며 오만상을 찡그리면서 엉덩이를 만졌다.   “이놈아, 남은 아파 죽을 지경인데 무슨 개소리냐?! 얼른 부착하지 않고!”   수길은 길수를 부축해 일으켰다.   “주인님, 내 등에 업히시오.”   “에끼 이 놈아, 토끼가 어찌 호랑이를 업느냐?”   길수는 이젠 덜 아픈지 입씨름 질을 하면서도 수길의 등에 업혀 타다 남은 토성안집으로 되돌아갔다.   이윽고 옷을 갈아입은 한길수는 다시 수길의 부축을 받으면서 창렬의 집으로 발걸음을 쩔룩쩔룩 옮겼다.   저쪽 오두막 같은 집 쪽에서는 반딧불만한 등잔불빛이 가물거리고 있었다.   수길은 옆에서 한길수를 부축하며 불쑥 이런 말을 꺼냈다.   “주인님, 우시장에 기와집을 여러 채나 두고 어째 이런 두메산골 다 탄 집을 수리하자고 합니까?”   “이 놈아, 이 두메산골을 보잘 것 없는 것이라고만 보지 말라. 여긴 병완과 내가 사내대장부의 자존심을 내걸고 싸운 산골짜기야. 그  놈을 고향에서 몰아내고 그 놈들이 보란 듯이 번듯하게 살아야 해.”   “오, 참 고명합구마.”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놈이라구야. 토끼도 굴이 여러 개느니라. 시내와 산골에 집을 두고 사는 재미가 얼마나 좋은지 알아?”   “참 좋지요.”   “종년들을 가득 두고 사는 재미 또 얼마나 꿀맛인지 아는가?. 하하하, 네편네도 보지 못하는 골 안에서 말이야. 하하하. 알만해?”   “오, 건 몰랐구먼요.”   그제야 수길은 주인이 이 두메산골에 특별히 신경을 쓰는 까닭을 조금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놈.”   이젠 귀못이 박힐 지경인 그 말에는 수길도 속으로  웃음이 피씩 났다.   (건 끼무라 국장이 당신에게 늘 하는 말이 아닌가요? 배운 게 고작인가요? 우리에게 그 말을 고대로 써먹으면서. 쳇.)   창렬의 집 삽작문을 열고 들어선 길수는 건 가래를 떼면서 틀스레 고래고래 소리쳤다.   “창렬이 있어?!”   안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한길수는 수길에게 들어가자고 머리 짓을 하더니 안에서 들어오라는 말도 하기 전에 건 가래를 떼면서 다짜고짜로 문을 뚝 떼고 들어섰다.   그는 말 이발을 드러내놓고 헤헤 웃으면서 등불을 빌어 은희를 힐끔힐끔 곁눈질했다.   은희는 등 곬에 소름이 쪽 끼쳐 누더기로 얼굴을 반쯤 가리면서 돌아앉았다. 창렬은 누더기를 덮고 누어 있다가 몸을 겨우 반쯤 일으켰다. 그는 길수가 또 무슨 수작을 피울지 몰라 뒤숭숭하고 겁이 났다.   “밤중에 웬 일이오?”   창렬이 기침을 쿨룩쿨룩 하며 일어났다.   “에헴, 놀랄게 없네.”   한길수는 거만하게 신을 신은 채 구들에 올라섰다. 그런데 무슨 역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한길수는 호주머니에서 하얀 손수건을 꺼내 코를 싸쥐었다.   “음, 웬 썩은 냄새야, 딱 개굴 같군.”   한길수는 단도직입했다.   “이 집에서 내게 진 빚을 물자면 이제도 삼대가 대대로 물어도 다 갚지 못하네.”   창렬과 명순은 몸 둘 바를 몰랐다.   “밭에다 곡식도 심지 못하게 해서 죽물도 먹지 못하는데 뭘 어찌 하라는 말이요?”   길수는 옆구리에 찬 권총집을 앞으로 당겨다 끌어안고 앉으면서 은희를 힐끔 건너다보며 호통쳤다.   “내일부터 우리 집에 가서 탄 집을 손질하는 일이나 하게나.”   명순이 말렸다.   “어이구, 우리 나그네 폐병에 오늘일가 내일일가 하는데 어떻게 일한다고 그럽둥?”   수길이 끼어들었다.   “허허, 병완이 밖에 모르는 놈들, 참 잘 됐소. 보오. 우리 마을에서 쫓겨난 병완을 믿고 살 수 있소? 우리 주인은 이젠 일본 자위대 대장이 됐단 말이오. 우리 주인 말을 잘 들으란 말이오.”   한길수는 득의양양해 이번엔 수길을 번쩍 춰 올렸다.   “수길은 이젠 영월동 구장으로 됐어. 이후부터 병완의 말을 듣지 말고 이구장 말을 꼽싹꼽싹 들으라구.”   창렬이 기침을 쿨룩쿨룩 하며 사정했다.   “구장인지 돼지 구신지, 제발 사람 좀 들볶지 마오."   "뭐라고? 감히 구장님을 놀려? 엉?"   "은녀가 이젠 일곱 해나 부엌더기로 살았는데 다 죽게 된 나까지 이럴게 있소?”   한길수는 이때라고 은희를 힐끔 건너다보면서 본심을 드러냈다.   “그럼 저 은희를 우리 집에 부엌데기로 들여보내오.”   “양?”   창렬 내외는 기절초풍할 지경이었다. 은희는 질겁해 누더기를 쓰고 온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안 되오.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엔 은희를 데려가지 못하오.”   “허허허, 정신이 있는가?”   한길수가 너털웃음을 하더니 위협하기 시작했다.   “똑똑히 들어. 상호가 성칠의 포수대를 따라 독립군에 들어갔어. 이 집식구들을 몽땅 죽여도 속이 시원치 않아. 알만 해!?”   옆에서 수길도 맞장구를 치며 으르렁거렸다.   “이게 어디 장마당인가 해? 누구와 흥정을 하는 건가?”   창렬은 입을 딱 벌린 채 멍하니 집 한쪽 구석을 쏘아 볼뿐이었다.   “장마당처럼 흥정할 셈인가? 하도 내가 고향 사람들이라고 끼무라 경찰국장에게 숱한 돈을 팔면서 잘 말했기에 오늘까지 살아 있는 줄 알게나. 독립군 가족은 몽땅 죽일 수도 있어. 노비로 되려가는 건 생각해준 거야.”   수길이 주인을 도와 짜개진 나무에 쐐기를 깊숙이 박았다.   “이젠 우리 한대장의 말을 잘 듣게나. 너희 일가를 살려 준 우리 주인님이 은희를 첩으로 삼은들 무방하지 않는가. 안 그래? 흥!”   온 집안이 쥐 죽은 듯이 고요해졌다.   한길수는 때가 됐다고 생각하고 권총집을 뒤로 홱 젖히면서 을러멨다.   “밤이 깊었어. 은희를 데리고 가자.”   머리를 다소곳이 숙이고 있던 은희는 그 청천벽력 같은 소리에 “와~” 하고 울음보를 터뜨리면서 어머니 잔등 뒤에 숨으려고 했다.   “가자, 이년. 어시를 살리겠니? 어찔래?”   수길은 달려들어 은희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아이고, 엄마, 아버지~”   그러나 수길이 잡아끌고 뒤에서 한길수가 잔등을 떠미는데 나약한 은희가 어찌는 수가 있겠는가?   뒤에서는 울음소리를 반주하여 쿨룩쿨룩 기침소리가 들릴 뿐이었다.   저걸 보소, 은희와 그녀 부모의 가긍한 처지를. 자기 자녀마저 한밤중에 도살장 같은 한길수네 집에 부엌데기로 끌려가도 구할 수 없는 어시의 마음인들 오죽 아프겠는가?   집 밖에서는 을씨년스러운 초겨울 바람이 휴, 휴 무서운 비명을 지르면서 스쳐 지나갔다.
400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55) 뿌리 김장혁 댓글:  조회:470  추천:0  2024-06-28
         김장혁 작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 제2권           제7장 흑야              6. 뿌리          최구장이 운주동에 차린 서당방은 요즘 또 일본 헌병 놈들 때문에 살벌한 위기를 겪게 됐다. 응삼과 영팔, 수길은 스승 최구장을 도울 대신 배은망덕하고 최구장이 서당방에서 가르치는 내용을 염탐해 나까노라 소대장에게 다 고발했다. 나까노라 소대장은 문제가 된다고 생각하면 인차 끼무라 국장에게 보고했다.    교활한 헌병대와 개다리 응삼의 감시 밑에 최구장은 운주동 서당을 진지로 민족주의 전통교양을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어느 날 오전, 최구장은 아침 숟가락을 놓은 후 바깥 날씨가 유난히 따뜻해 마루에 앉아 대통을 길게 뻑뻑 빨아 들이켰다가 담배 연기를 후 내뿜었다.    그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일본 놈들은 우리를 점점 살기 어렵게 만든다. 목을 조이다 못 해 이젠 조선말을 하지 못하고 조선 글을 가르치지 못한다고 하지 않는가. 이름도 일본 놈들의 이름처럼 창씨개명을 하라고? 개놈들, 우리가 어찌 네 놈들의 섬나라 오랑캐 같은 대화민족으로 된단 말이냐? 흥!)     최구장은 생각할수록 가슴이 갑갑해났다. 운주동 서당이 위기를 겪고 조선 사람들의 대화민족으로 동화될 것을 강요하는 일본 놈들의 성화에 견디기 어려웠다. 설상가사상으로 요즘 며느리를 잃은 아픈 마음의 상처에마저 소금을 맞은 듯 했다.     그는 담배대통으로 마루턱을 툭툭 치더니 담배연기를 푸~ 푸~ 내뿜었다.      “응삼과 영팔은 사람새끼 아니야. 자기들이 배운 서당 방을 지켜줄 대신 뭐야? 배은망덕하게도 섬나라 오랑캐들 밀정질을 하면서 고발까지 하다니? 에잇, 길러준 개 주인의 발뒤축을 문다고, 에잇, 참, 개만도 못한 놈 새끼들! 개라면 주인을 보면 꼬리나 치지. 퉤! 개새끼면 잡아먹지. 흥!”    그는 성이 꼭뒤까지 치밀어 올라 벌떡 일어났다. 그는 대통을 옆구리에 찌르고 은빛구레나룻을 흩날리며 글방으로 들어갔다.    이윽고 선후하여 봉인과 봉순, 봉문이 어시들과 함께 들어왔다.   최구장은 오늘 따라 손자들을 일일이 둘러보면서 어시들이 다 온지라 자못 엄숙하게 말했다.   “모두 바쁘더라도 거기 앉소. 긴히 할 말이 있소.”   경숙과 어금이 그리고 셋째며느리가 앉았다. 좌석을 다 정하고 앉자 최구장은 앞자리에 좌정하더니 아주 엄숙하고도 무겁게 입을 열었다.    “오늘 우리 손자들에게 이름을 지어줘야 하겠소. 명심들 하오.”   경숙이가 최구장에게 물었다.   “이름이라니요? 우리 앤 봉인이 아닙둥?”   어금도 의아해 했다.   “혹시 시아버님도 일본 사람들의 말대로 창씨개명을 하려는 게 아닙둥?”   셋째며느리는 묵묵히 시아버지의 눈치만 살펴보고 있었다.   최구장은 건 가래를 떼더니 한마디, 한마디 똑똑히 말했다.   “무슨 놈의 생벼락을 맞을 창씨개명이야. 일본 놈들이 창씨개명을 하라는 바람에 급급히 우리 조선 이름을 똑바로 지어주겠다는 말이요.”   그제야 아들며느리들은 머리를 끄덕였다.   최구장은 정중하게 말했다.   “이제껏 저 애들이 부른 이름은 모두 어린애 때 부르는 애명이었소. 그러니 정식이름을 지어주겠소. 봉인은 근형, 봉순은 근덕, 봉문은 근활이라고 지었소. ‘근’ 자는 뿌리라는 ’근’ 자요. 저 애들이 이담 커서 우리 개성 최 씨네 뿌리, 나아가서 우리 조선민족의 뿌리를 잊지 말라는 뜻에서 뿌리 ‘근’ 자 돌림으로 지은 게요. 이담 손자를 몇을 낳든지 모두 뿌리를, 근본을 잊지 말도록 ‘근’ 자 돌림으로 짓도록 하라.”   “예-”   모두들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어시들은 이젠 집으로 가도 된다. 근형과 근덕, 근활아,”   “예!”   “이제 마을 애들이 오면 함께 조선 글을 공부하자.”   “야~ 좋다.”   손자들은 어려운 천자문을 배우다가 천자문보다 조금 쉬운 조선 글을 배운다니 좋아서 환성을 질렀다.   최구장은 애들이 오기 전에 흑판에 석회덩이로 백두산과 천지를 그려놓고 백두산이라고 큼직하게 써놓았다.   드디어 애들이 삼삼오오 어른들의 손을 잡고 서당에 들어와 자리에 앉았다.   “그럼 오늘 공부를 시작하겠다. 여기 흑판에 써놓은 글자를 어떻게 읽느냐?”   그때 아래 방에서 웬 애가 “백두산!” 하는 소리가 울렸다.   애들이 머리를 돌려 아래 방 쪽을 보니 문에 난 옹이구멍으로 들여다보던 명옥이 문까지 빠금히 열고 소리쳤던 것이다.   “거 계집애가 웬 소리냐? 얼른 문 닫지 못할까? 삼실이나 뽑을 게지.”   최구장이 고함치면서 옆구리에서 대통을 빼들자 질겁한 명옥은 입을 빼쭉 하더니 문을 닫고 아래 방으로 내려갔다.   상순은 허연 코 물을 풀쩍거리면서 히히 웃었다.   “가시나가 무슨 공부야. 삼실이나 뽑을 게지. 흥!”   우쭐하는 상순을 보고 최구장은 눈을 무섭게 흘기었다.   “상순아, 그럼 못 써. 계집애라고 깔보면 안 돼. 에헴.”   상순은 머리를 폭 숙이었다.   “계속 배우자. 따라 읽어라. 백두산!”   “백두산!”   애들이 따라 읽는 낭랑한 소리가 서당에 차고 넘쳤다.   뒤이어 최구장은 “‘백두산’이란 글자를 읽으면서 모래판에 열 번씩 써라.”   “예~”   “뭐? 백두산?! 이놈들이 정신 나갔어?”   이때 서당 밖에서 새된 소리가 울렸다.   모두들 머리를 돌려 밖을 내다보았다.   나까노라 소대장이 군도를 잡고 응삼과 영팔, 류강철을 앞세우고 뛰어 들어오고 있었다.   응삼은 들어서자마자 삿대질하며 가물에 실 돌피 같은 목에 지렁이 같은 피 줄을 세우면서 고래고래 고함쳤다.   “백두산은 무슨 백두산이야? 장백산이야. 아니, 후지산이라고 해야 해. 알았어?"   최구장은 씨무룩이 웃으며 대구했다.   "이보쇼. 지리를 몰라도 한참 모르는구만요. 백두산을 어떻게 장백산이라고 하는가? 더구나 백두산을 일본의 후지산이라는 건 너무 하잖은가?!"    류강철이 통역해주자 나까노라는 퉁사발눈깔을 희번뜩이며 버럭 고함치었다.   "뭐라고? 이 놈 영감! 후지산이라면 후지산이랄거지. 웬 잔소린가?!" 그러나 최구장은 한발작도 물러서지 않고 따지고 들었다.   "장백산은 산맥 이름이고 장백산 최고봉은 백두산이 아니고 뭔가? 백두산을 어찌 후지산이라고 해?"   나까노라는 최구장의 일리 있는 말에는 더 어쩌지 못하고 딴전을 부리었다.   최구장, 왜 또 조선 글을 가르쳐?”   최구장은 앉은 자리에서 응삼을 손가락질하면서 질책했다.   “너 정말 점점 말이 아니구나. 버르장머리 없는 놈이라고. 누구 보고 삿대질하며 반말이냐?”   나까노라 소대장은 군도 자루를 잡으면서 거들먹거렸다.   “최군 목에 개패를 걸어!”   류강철이 따라 들어와 통역하자 응삼과 영팔이 줄이 달린 패쪽을 들고 들어와 주춤주춤 하다가 최구장의 목에 걸어놓았다.   “무슨 짓이냐?”   나까노라는 말해주라고 영팔에게 손짓했다.   영팔은 개다리질을 곧잘 했다. 차렷 자세까지 취하고 목에 핏줄을 세우면서 고아댔다.   “이젠 조선 말을 하지 못해. 대일본 제국 법을 어긴 죄인놈에겐 이런 패쪽을 걸어준다.”   최구장은 천천히 일어나더니 나까노라와 영팔을 쏘아보면서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다가갔다.   “왜 이래?”   영팔은 기가 눌리어 뒤로 물러서려고 했다.   찰나 최구장은 목의 패쪽을 벗겨 제꺽 영팔의 목에 걸어놓았다.   영팔은 개패를 벗어 쥐고 최구장에게 달려들었다.   “이건 영감에게 건 거야.”   최구장은 무섭게 영팔과 응삼을 손가락질하며 욕했다.   “이 섬나라 오랑캐 발바리놈들아, 너넨 조선 사람이 아니냐? 너희들이야 말로  민족의 역적들이야.  일본 놈의 개놈들게게 개패를 걸어야 해! 개놈새끼들!”   영팔은 개패를 들고 최구장과 나까노라 소대장을 번갈아보면서 머리를 숙였다.   나까노라 소장이 간사한 웃음을 지으며 코밑 가재수염을 쓰다듬더니 “허허허.” 하고 허무한 웃음을 웃었다.   “이 영감이 미쳤나? 허허, 단단히 경을 치러야 하겠구먼.”   그래도 최구장은 한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았다.   “무슨 개 뼈다귀 같은 개 소리야! 우리 조선 사람들이 조선말을 하지 않고 그래 섬나라 오랑캐들의 개소리를 치라는 거야? 너희들 죄꼬만 섬나라 오랑캐들 개소리를 우린 모른다.”   최구장이 고함치자 류강철은 옛스승인지라 그대로 통역할 수 없어 우물거리었다.    그러나 나까노라는 최구장의 퍼러덩덩한 얼굴 표정을 보고 격한 어조를 듣고 눈치챘다. 그는 군도 자루를 거머쥐어 군도를 뽑으려다가 도로 뒤로 밀어재끼었다.    “최구장, 당신은 이 부근에서 제일 유식한 양반이 아니고 뭐요? 당신은 앞장서 대일본 제국의 말을 배우고 일어를 애들에게 가르치란 말이요. 우린 당신이 우리 대일본 제국에 공로를 세우면 서당을 계속 꾸리게 하겠네. 잘하면 서당 방이 아니라 이 마을에 커다란 벽돌학교를 지어주겠소이다. 알겠소까?”   나까노라는 이쯤 말하고 나서 옆에 선 류강철을 보고 통역해주라고 눈치 했다.   통역을 듣고 난 최구장은 피씩 쓴 웃음을 지었다.   “안 된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그런 일은 없다. 안 된다, 안 돼, 절대 안 되지.”   류강철이 그 말을 통역해주자 나까노라는 군도를 쑥 뽑아들더니 고래고래 고함쳤다.   “이 영감두상을 붙잡아가!”   “하이!”   영팔과 응삼은 최구장의 양팔을 붙잡고 류강철은 뒤에서 마구 밖으로 떠밀었다. 뒤에서 나까노라는 빼들었던 군도로 통나무흑판을 탁 내리찍었다. 그러고도 성차지 않아 발길로 흑판과 석회 덩이 통을 탁 차 넘기고 밖으로 나왔다.   뒤늦게 소문을 듣고 달려온 경숙과 경민 등이 영팔의 손을 붙잡고 사정했다. 그러나 사정을 봐주기는커녕 나까노라 소대장의 안전에서 최구장의 두 팔을 바 줄로 꽁꽁 묶어 문 밖으로 마구 떠밀었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근형과 근덕, 근활 그리고 명옥까지 달려와 끌려가는 할아버지 다리를 붙잡고 꿇어앉아 엉엉 울었다. 나까노라는 사정없이 애들을 마구 뜯어 내쳤다.   최구장은 애들을 내려다보면서 힘주어 말했다.   “할아버지가 없어도 너희들은 우리 조선 사람의 뿌리를 잊지 말아야 한다. 꼭 조선어를 배우고 조선말을 해야 한다. 알겠느냐?” 애들은 머리를 끄덕이더니 주먹으로 눈물을 닦으면서 주먹 밑으로 할아버지를 붙잡아가는 일본 놈과 영팔 등을 쏘아보았다.   최구장은 마을 사람들을 둘러보더니 머리를 들어 먹장구름이 뒤덮인 하늘을 쳐다보며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었다. 그는 가슴을 쭉 뻗치고 은발을 흩날리면서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저 멀리 먹장구름 밑에서 불뱀이 뻘건 혀를 날름거리어 기운봉 산허리를 내리치더니 먹장구름 속으로 사라졌다. 뒤이어 대지에는 창대 같은 소낙비가 새뽀얗게 억수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골물이 요란스레 협곡에 뭐라고 고함치며 덮쳐내려가더니 실폭포가 쏴쏴 쏟아졌다.
399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54) 어미 없는 설음 김장혁 댓글:  조회:424  추천:0  2024-06-28
    2015년 08월 31일 16시 23분  조회:1465  추천:0  작성자: 김장혁                김장혁 작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  제2권                                      제7장 흑야                                                          5. 어미 없는 설음        네댓 살에 어머니를 여읜 봉인과 명옥은 날개 부러진 제비 새끼 같았다. 그들 오누이는 어려서부터 눈치밥을 먹으면서 자랐다. 그들 오누이는 밥값이라도 하느라고 베실을 뽑고 나물을 캐오고 다른 일도 시키는 대로 부지런히 했다. 어느 날 애들이 마당에서 놀고 있었다. 숱한 애들이 손을 잡고 둥그렇게 서서 돌아가면서 소리를 먹인다.         여우야, 여우야!       나와 놀자         둥그런 원 안에서 두 손으로 눈을 막고 쪼그리고 앉은 오니(귀신)로 된 애가 화답한다.         밥 먹는 중이다        애들이 손을 잡고 오니애를 안에 넣고 둥그렇게 돌아가며  또 묻는다.             반찬은 무엇이냐?        원 안의 오니애가 화답한다.         산 뱀이다!         원 안에 앉아있던 오니(귀신)애가 손을 눈에서 떼면서 애들을 쫓아간다. 애들은 “으악!” 소리치면서 종 주먹을 쥐고 산지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났다. 그러다가 오니(귀신)로 된 애가 그중의 어느 애를 잡으면 그 애가 대신 오니(귀신)로 되여 애들이 손잡고 돌아가는 원 안으로 들어가 두 손으로 눈을 막고 쪼그리고 앉는다. 봉인은 애들과 놀고 싶어 가만히 명옥을 데리고 애들 속에 가서 손을 잡았다. 그때 할아버지 최구장이 헐금씨금 와서 곰방대로 봉인과 명옥의 이마를 똑똑 때렸다.      “이 놈 새끼들아, 일 하지 않고 누가 밥을 주니? 어서 석마간으로 가서 좁쌀알을 주워 모으지 못해?!” 봉인과 명옥은 아파서 눈물을 찔끔찔끔 쏟으면서 석마간으로 갔다.    네댓 살 되는 오누이는 다른 집 애들처럼 놀지도 못하고 할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운주동 석마 칸에 가서 겨 속의 쌀알을 주워 모으기 시작했다.     아침부터 눈이 시리게 먼지가 새뽀얗게 이는 석마간 겨 무지에서 좁쌀알을 한 알 한 알 주었지만 한바가지를 채운다는 것은 실로 쉽지 않은 일이었다.    온종일 주어 한바가지를 채울라 할 때다.     주인이 나와서  힐끔 바가지를 들여다보더니 바가지를 쥐여 마구 흔들어놓는 것이 아니겠는가. 진짜 얄밉게 놀기도 했다. 바가지 안에서 쌀알들이 훌렁 꺼져 내려가서 다시 채우자니 아름찼다.    애나게 주어 겨우 한바가지를 채워 바치자 주인은 먼저 성냥가치만한 나무꼬챙이를 한 개를 내주었다. 그렇게 다섯 바가지를 주어 나무꼬챙이 다섯 개를 채우면 구리돈 1전을 주었다.    온종일 둘이서 애나게 겨 무지 속에서 좁쌀알 다섯 바가지를 주어야 1전을 벌수 있었다. 3전이면 커다란 고마이 한 마리를 살 수 있었다.    봉인과 명옥이가 서너 날 겨 무지에서 좁쌀알을 한 알 한 알 주어 구리돈 2전이나 3전을 가져오면 할머니 성단은 오누이의 머리를 두 손으로 정겹게 쓰다듬어 주군 했다.     “에이유, 요 귀한 내 새끼들아, 얼마나 장하냐? 쯧쯧.”    경숙도 어미 잃은 자식들이 귀하고 불쌍해 얼굴을 매만지면서 뽀뽀까지 해주군 했다.   오누이는 어머니를 잃고도 뜻밖에 어른들의 말을 잘 듣고 일도 잘하면서 강하고도 건실하게 자랐다.    군일이 있을 때면 봉인과 명옥은 어머니를 잃은 섧음을 가슴 아프게 느끼곤 했다.    다른 애들은 다 어머니들이 불러내다가 떡이랑 고기국이랑 먹이는가 하면 엿사탕이랑 먹였다.    봉인과 명옥은 언제면 자기들을 부르겠는가고 목이 빠지게 기다렸다. 위방에 누워서 머리를 들고 정지를 내려다보군 했다. 그러나 해가 지고 달이 떠도 어머니가 없다보니 부르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봉문아, 여기 나오너라.”    봉문은 넷째 삼촌댁 성단이 벌써 두 번째 불러내다가 돼지고기 점을 입에 넣어줬다.    봉문이 입에 돼지고기 살점을 물고 와서 고의로 봉인과 명옥이가 부럽게 하느라고 손으로 살코기 실을 쪽쪽 찢어서 입에 넣고 잘근잘근 씹으면서 짹짹거렸다.    “양, 양, 맛있다. 오래오래 맛있다.”    봉인과 명옥은 어린 사촌동생이 먹는 살 고기가 너무나도 먹고 싶어 목구멍에서 군침을 꼴깍 삼켰다. 어찌나 배고팠는지 배에서 꼬르륵 소리까지 자꾸 났다.    이때 아래 방에서 위방으로 누군가 다가오는 소리가 나자 명옥은 머리를 들고 아래방 쪽을 내려다보았다.    “봉순아, 여기 오너라.”    이번에는 둘째삼촌댁 김어금이 위방 미닫이를 쭈르륵 열고 들어섰다. 손에는 돼지갈비뼈가 쥐여져있었다. 그는 자기 아들 봉순에게 주려다가 주춤 멈췄다.    “아니, 너네 오누이도 여기 있구나. 아직 아무 것도 먹지 못하잖았냐?”    “예, 삼촌댁.”    봉인은 코마루가 시큼해 울먹울먹하면서 대답했다.    어금은 갈비뼈를 손으로 뚝 비탈아 끊더니 명옥과 봉인을 나눠 주었다.     그러자 봉순이 칭얼거렸다.   “아냐, 엄마, 날  달라. 응~응~”    봉인은 서너 살 지하인 동생이 불쌍하다고 자기에게 차려진 갈비를 주었다. 그래서 명옥은 자기에게 차려진 갈비를 오빠와 엇바꿔가면서 나눠 먹었다.     어금이 나가 할머니 성단에게 뭐라고 중얼거렸다.    한참 후 할머니 성단이가 떡과 국물을 들고 와서 봉인과 명옥도 저녁을 먹었다.     할머니는 어미 없는 그들 오누이가 불쌍해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뜨거운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뒤이어 할머니는 며느리들을 시켜 애들에게 몽땅 저녁을 먹이게 했다.    그후부터 할머니 성단은 연년생들인 자기 막내딸 계순과 똑같이 봉인, 명옥 오누이를  보살폈다.    물은 에우기에 가고 애들은 거둬 주는 데를 따라 간다고 어머니를 일찍이 여읜 봉인과 명옥은 자기들을 어머니처럼 아끼고 고와하고 보살펴주는 할머니를 어머니처럼 따르면서 할머니 말씀이라면 아주 잘 들었다.     가을이 오자 할머니는 애들을 데리고 산속에 가서 다 파간 감자밭을 돌아다니면서 파가지 못한 감자를 팠다.     삽자루만큼도 안 되는 봉인은 사내애노라고 삽을 둘러메고 달아 다니면서 감자가 있을 만한 데는 폭폭 팠다.    “할머니, 감자!”    “오, 그래, 에이고, 우리 봉인이 용하다. 제 얼굴만 한 감자를 다 파내고.”    성단은 봉인이가 파낸 큼직한 감자를 쥐여 흙을 싹싹 닦아 광주리에 담고 나서 봉인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봉인은 할머니의 칭찬을 받고 좋아서 외까풀 눈이 실눈으로 되고 입이 귀밑까지 쭉 째질 지경이었다.    그 모양을 보고 봉인보다 한살 이상인 계순이 시샘이 나 도도거렸다.     “어머니는 그저 봉인 밖에 모르면서. 나와 명옥은 칭찬 한마디 하지 않으면서. 원, 분해 죽겠다.”     성단은 허리를 펴고 일어나 수건으로 땀을 닦고 나서 초롱초롱한 쌍까풀눈을 흘기는 계순의 얼굴을 만져주었다.    “에이구. 내 딸아, 우리 막내딸을 누가 미워하겠냐? 응? 난 우리 딸이 영 곱다.”     성단이가 쪼그리고 앉으면서 이마에 이마를 대고 “도글도글” 하면서 얼렸다. 그제야 계순은 배시시 웃었다.    계순과 명옥은 할머니를 따라다니다가 “여기 감자가 있는 것 같다.” 하고 말하면서 할머니가 호미로 파려고 하면 “할머니, 놔 둡소.       우리 파 보게.” 하고 바삐 소리치고는 손으로 파보군 했다.    닭 알만한 감자알이 흙속에서 드러나자 애들은 환성을 올렸다.    “할머니, 감자 나왔습니다.”    성단은 계순과 명옥이 고사리 손으로 파는 흙속에 드러난 감자알을 보고 대견해했다.    “오, 그래? 계집애들도 장하다.”    계순과 명옥이 손으로 파는데 저쪽에 갔던 봉인이가 뛰어왔다.    “물러나라. 삽으로 파자.”    “안 돼, 이건 우리 파낸 거야.”    그러나 봉인은 계순을 활 밀어내고 삽으로 푹 팠다. 그런데 바삐 삽질하다나니 감자가 한쪽이 쓱 잘리어나갔다.     “봐라, 감자알이 찍혔어. 어머니, 얘를 보시요.”     성단은 눈을 흘기는 계순을 말리였다.     “응, 알았다. 이미 그렇게 된 걸 어찌 하겠니? 싸우지 말라.”     그래도 계순은 도도도 거렸다.      “항상 자기 더 잘 하는 척 하긴.”     봉인도 지지 않으려고 했다.      “그래, 어떻게 너네 계집애들과 비하겠니? 할아버지 말씀하던데. 난 이 집안의 14대 장손이란다. 넌 뭐냐?”      성단은 우쭐해서 삽자루를 왼손에 쥐고 허리에 오른손을 찌르고 선 봉인을 보면서 우스워 코를 싸쥐고 웃었다.     계순은 눈이 동그래 어머니에게 물었다.     “어머니, 14대 장손이란 건 뭣입둥?”     “그래, 우리 봉인은 우리 개성 최씨네 집안 열네 번째로 대를 이은 기둥손자란 말이다. 집으로 말하면 기둥과 같지. 기둥이 없으면 집이 무너지고 말지.”     명옥은 두 손의 흙을 털면서 봉인을 쳐다보면서 “와~ 오빠 정말 대단하구나. 우리 집의 기둥이라고 하지 않니?” 하고 감탄했다.    계순은 앵두입술을 옥물더니 뾰로통해 했다.     “쟤가 우리 집 기둥이라고? 쟤가 없는 날엔 우리 집안이 무너지겠구나. 흥! 누가 그 말을 곧이듣는다더니? 픽!”     그래도 봉인은 옆구리에 손을 찌르고 턱을 바짝 쳐들고 외까풀 눈으로 계순과 명옥을 한참이나 내려다보았다.     반나절을 헤매 성단은 애들을 데리고 감자를 반 광주리나 파서 이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덕대 위에서 감자갈이를 내려다가 감자를 갈기 시작했다.    계순이 “어머니, 내 갈아 보깁소.” 하고 응석을 부렸다.     “그래라.”     성단은 함지 안에 놓은 감자갈이를 훌 넘겨주면서 주의를 주었다.     “이 양철 판 뾰족뾰족한데 손이 맞히면 베져. 주의해.”     “양.”     성단은 밖에 나가 땔나무를 안아 들여다 놓고 저녁준비를 했다.    계순은 어머니가 그렇게 주의를 주었건만 끝내 감자갈이 판에 애고사리 손을 스치고 말았다.     “아, 아파라.”     “어디 보자.”    성단이 부엌에서 솥을 부시다가 솔을 놓고 와서 손을 쥐고 보니 무명지등에 빨간 피가 돋아 나오고 있었다. 성단은 입으로 피를 뽁 빨고는 헝겊을 주어다가 싸매주었다. 대신 명옥이가 나머지 감자 몇 알을 싹싹 갈았다.    해가 질 무렵이 되자 솥에서 구수한 감자떡 냄새가 났다. 둘째, 셋째, 넷째까지 세간나고 다섯째마저 갑산으로 감자농사 하러 가다나니 집에는 최구장 내외에 경숙과 계순, 봉인이네 오누이만 남았다.    반나절 역사 질 해 발간 장물 콩을 딱딱 박아놓고 시루 가마에 얹어 쪄낸 감자떡은 여섯 식구가 먹고도 남을 것 같았다. 그래서 성단은 감자떡을 그릇에 담아 운주동 한마을에 있는 셋째아들과 넷째아들네 집으로 가져갔다.    서걱서걱 해도 감자떡은 별 맛이었다.    계순과 봉인은 감자떡을 먹으면서 너무 맛이 있어 노래 부르듯 종알거리었다.    "양, 양, 맛있다. 오래 오래 맛있다.” 하고  했다.    봉인은 쩍 하면 한살 이상인 작은 고모와 말다툼을 하다가도 손찌검 질을 하면서 싸우기도 했다.   오늘 저녁에는 떡을 먹으면서 봉인이가 먼저 말썽을 일으켰다.    “내 계순보다 감자를 더 많이 팠어!”   계순은 봉인을 손가락질하면서 피씩 웃었다.    “우스워라. 삽으로 푹 판 게 감자가 잘리어나가지 않았니?”    “너희들이 파지 못한 걸 내 삽으로 팠지?”    “아까운 감자를 네가 찍어 버렸기에 절반이나 잃어버렸다.”    “아니야!”    “옳아!”    “아니야!”    “옳다!”    봉인과 계순이 마주서서 입씨름을 하자 최구장은 저로 밥상을 탕 치면서 고함쳤다.    “그만하지 못해?!”    그래도 봉인은 입이 뾰족해 중얼거렸다.   “이 놈새끼들이! 어디 맞겠냐?”   최구장이 곰방대를 뽑아 치려고 하자 봉인은 달아났다. 그러나 명옥과 계순은 달아나지 않고 앉아 있다나니 최구장이 치는 곰방대에 머리를 딱딱 맞았다.   계순은 성단의 품에 안기면서 울고 명옥은 머리를 싸쥐고 울었다.    “엄마~ 엄마~”   성단은 명옥이 불쌍해 계순과 함께 품에 껴안고 영감을 흘겨보았다.   “어미 없는 애를 왜 쳐요?”   성단이 애들을 껴안고 눈물을 흘렸다.   최구장은 안 되였던지 쳐들었던 곰방대를 내리워 담배를 채워 부시를 쳐 물고 빨며 “에헴, 에헴.” 하고 마른기침을 하며 훌 일어나 바깥으로 나가버렸다.    그도 어미 없는 오누이의 설음을 느꼈으리라.    쓸쓸한 팔간집 마당에는 벌거스름한 낙조가 삐겨들어 오누이의 설음을 더 짙게 만들었다. 오누이의 쓰라린 설음이 지가난 자리에 피눈물이 휘뿌려지어 한이 맺혀 뾰족뾰족 고개를 쳐든다.
398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53) 무당의 굿 김장혁 댓글:  조회:1124  추천:1  2024-06-05
    김장혁 작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 제2권         제7장 흑야              4. 무당의 굿       맏아들 경숙이가 하늘과 땅에 비는 불쌍한 정경을 보면서 안타까워하던 최구장은 무당을 청해 천지신명에게 빌기로 했다.   (며느리야, 내가 너를 위해 할수 있는 일이란 이것 밖에 없구나. 자고로 인생 팔자나 목숨이나 모든 것이 하늘이 정해준 것이오니 하늘의 명에 기탁할 수 밖에 없다.)    “여보, 당신 무당을 청해오오. 우리 무당을 청해 며느리를 위해 최후노력을 해보기오.”   노친 리성단은 이제껏 영감의 말이라면 오직 순종만 해왔지만 이번만은 자기 생각을 말하고 싶었다.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할까 말까 하다가 끝내 목구멍을 열고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여보, 무당을 청하기보다 신설동의 관준 사돈어른을 청해 저 팅팅 부어오른 머리의 어혈을 뽑아볼까요? 관준 어른은 이 부근에 이름난 의원이 아니고 뭐예요?”   충청남도 서현에서 놀러 왔던 성단의 남동생 리병호도 충고했다.   “옳아요. 매형, 그깟 무당을 청해 뭘 해요? 의원을 청해 병을 보이는 게 낫을 거 같아요.”   최구장의 처조카 리철근도 말리였다.   “아까운 돈을 무당을 줄게면 병 치료나 하세요.”   “관둬!”   최구장은 기어코 그들의 충고를 듣지 않았다.   “너희들이 뭘 알아서 끼어드나? 사람의 목숨은 하늘이 정해준 거야. 무당을 청해 하늘에 비는 수밖에 없다.”   성단이나 남동생은 모두 입을 다물고 말았다.   최구장은 노친 성단을 보고 재삼 부탁했다.   “어서 사찰에 가서 무당을 청해 오오.”   누구의 명이라고 거절하겠는가.   리성단은 은전을 몇 개 주머니에 넣어가지고 맏아들 경숙과 함께 무당을 청하러 떠났다.   최구장은 경인과 경민이 등을 시켜 집안의 돈을 다 모아가지고 소 한 마리를 사다 잡게 했다. 그 다음 바깥에 대국가마를 걸고 소고기를 저며 앉히고 불을 때 끓이게 했다.    한편 허리 꼬부장한 성단과 눈물범벅이 된 경숙이 사찰로 가는 도중에 별 희한한 변을 당할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그들은 운주동을 벗어나 마을동쪽의 산기슭 길 굽인 돌이를 지나려는 때였다. 헌병소대장 나까노라가 지휘도를 거들거리며 검정가죽장화를 번쩍거리며 거들먹거리면서 통역 류강철과 함께 오다가 딱 마주쳤다.    “쏘까, 나니에 이꾸(어데로 가)?”   최구장 댁과 경숙이 주춤 멈춰 섰다.   “에이, 노친, 어디로 가?”   나까노라의 말을 통역해 주자 경숙은 머리를 숙였지만 리성단은 성을 냈다.   “네 이놈, 넌 어미도 없이 자랐니? 제 어미 같은 사람보고 노친이라니? 내가 그래 네 여편네라도 돼?”   “뭣이? 어째? 감히 황군한테 대들 텐가?”   리성단은 손으로 삿대질하면서 류강철을 욕했다.   “너 이 버릇없는 놈 봐라. 네놈이 우리 영감한테서 천자문을 배우던 때가 어제 같은데 스승 댁과 반말을 쓰다니? 배은망덕한 놈 같은 게 잘 되는가 봐라.”   “나니(뭣이)? 나니(뭣이)?”   “예. 이 노친은 내가 자기를 욕했다고 성을 냅니다.”   류강철의 일본어로 하는 말에 나까노라는 머리를 끄덕였지만 성단과 경숙은 뭐라고 지껄이는지 알아듣지 못하고 갈 길을 가려고 앞을 막아선 그자들을 에돌아 가려고 했다.    "빠까(바보), 아이사쯔오 시나싸이(인사말을 하게나)."   드디어 최구장 댁 모자가 허리를 굽혀 인사하자 나까노라는 또 자기들이 만들어낸 면례 말을 암송하라고 강요했다.   면례 말이란 일본 놈들을 만나면 해야 되는 인사말 비슷한 것이었다.    “인사했으면 됐지. 면롄지 뭔지 우린 모른다. 맏며느리가 아파 사찰에 급히 갔다 와야겠는데 앞길을 막지 말구 피해라.”    그러나 류강철은 피할 염을 하지 않고 오히려 앞길을 막으면서 을러멨다.    “면례 말을 암송하지 못하면 소대장이 가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럼 자네 배워주게나. 빨리 가게 말이야.”   류강철은 최구장 댁 앞에서 허리를 굽히며 “예, 예.” 하고나서 정식으로 배워주려고 들었다.   “고꼬노 진민노 이찌 와레라와 닛뽄노 덴노노 진민니 나리(이곳 백성의 하나인 우리는 일본 천황의 백성으로 된다).”   그 면례 말은 진짜 우리 조선 사람들을 일본의 망국노로 만드는 식민지교육의 한 단락이었다.   최구장댁은 굽은 허리를 꿋꿋이 펴고 물었다.   “죽으라는지 살라는지 모를 소릴. 어떻게 암송해? 엉? 집에 앓는 사람을 눕혀놔서 갈 길이 바빠. 듣고도 모를 소릴 할 새 있냐?”   “바 새끼, 못 간다, 못 가!”    나까노라는 벌컥 성 내면서 기어이 암송시키라고 류강철을 보고 을러멨다.   그러자 류강철은 일본 상전 앞에 허리를 굽히더니 최구장 댁한테로 홱 돌아섰다.    “지금 어느 때라고 아직도 면례 말도 모르고 어디로 간다고 그럽니까? 내 말을 들으시오. 한일합방 후 조선은 이미 일본에 속했단 말입니다. 그러니 일본 어른들이 하라는 대로 면례 말을 암송하라면 암송하세요. 그러지 않으면 이담 길도 못 다닙니다.”    최구장 댁은 억이 막혀 하얀 머리를 홰홰 돌리다가 “그래 면례 말이 무슨 뜻이냐?” 하고 물었다.   류강철은 배를 쓱 내밀었다.   “이런 말이요. ‘여기 백성의 하나인 우리는 일본의 이곳 백성으로 된다.’는 말입니다. 알만 합둥?”   최구장 댁은 류강철을 마구 밀면서 사정했다.   “어이구, 죽어가는 며느리를 두고 하루 새에 일본 백성이 되라니, 될 수 있냐? 원, 이담 암송할 테니 이번엔 보내다오.”    경숙도 나서 빌었다.   “자네 이전에 아버지 제자인 옛정을 봐서라도 일본 사람과 말해주게나. 어떻게 알아듣지 못하는 면례 말을 이 자리에서 암송하겠나?”   그러나 류강철은 도리머리 질 했다.   “안 되오. 꼭 암송하구야 갈수 있소. 벌금 10원을 내거나 귀 쌈을 피나도록 맞지 않고선 못 가오.”   “어이구, 이 일을 어쩌느냐?”   최구장 댁은 무릎을 꿇고 물앉더니 한참 후에 일어나 외워보겠다고 일어섰다.   “음, 좋소. 암송하오.”   최구장 댁은 마른 침을 꼴깍 넘기더니 나까노라와 류강철을 엇갈아 훔쳐보더니 입을 열었다.   “꼬꼬댁 꼬꼬. 개 똥 같은 지지미가 와르르 쏟아져 나온다. 미운 사람이나 콱 채워라. 자, 다 외웠으니 자네 통역을 잘해주게나. 우리 가게 말이야.”    류강철은 어처구니없어 입을 딱 벌리면서 웃었다.   그는 나까노라의 눈치를 흘끔 쳐다보고는 손으로 입을 꽉 싸쥐었다.   옆에서 듣던 나까노라는 류강철의 배때를 툭툭 치면서 "나니까(뭐야)?" 하고 물었다.   류강철은 너무 우스워서 눈물이 글썽해졌고 코 물까지 흘러내려 손수건을 꺼내 닦고 나서 말했다.   “참, 묘한 조선말로 암송하였지요.”   “소우까(그래?). 요로씨이(좋아).”   그들이 웃고 나서 돌아보았을 때에는 최구장 댁은 벌써 베치마를 팔락이면서 저 멀리 굽인 돌을 돌고 있었다. 그 뒤로 경숙도 종아리에 바람이 일게 가 버리고 있었다.   이튿날 사찰에서 온 요염하게 생긴 무당이 최구장 댁 모자의 안내 하에 운주동 최구장의 집에 나타났다.   신선인 듯이 하얀 비단으로 아래위를 감고 누런 비단으로 머리카락을 질끈 동인 무당, 요염하게 화장한당이 나타났다.   뚱뚱한 얼굴, 분을 너무 처 발라 하얗고 살진 얼굴, 복숭아얼굴에 짙은 버들 잎 눈썹, 큼직한 쌍까풀눈, 축 늘어진 두 볼의 살은 꽤나 요염하면서도 위엄스러워 보였다.   최구장이 마중 나가 허리 굽혀 인사했다.   “무당 마나님, 먼 곳에서 오시느라고 수고 많았습니다.”   무당은 왼손을 가슴에 대고 허리 굽혀 인사를 받더니 오른 손에 허리춤의 칼 자루를 잡고 하얀 치마 자락을 날리면서 여기저기 다니면서 살펴보더니 물었다.   “환자는 어데 있어요?”    최구장 댁과 둘째며느리 어금이 무당을 안내해 정주간에 들어갔다.   무당은 합장하고 환자 옥실의 관상을 여기저기 살펴보더니 염불하듯 중얼거렸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이여. 그대의 귀여운 딸이 몹쓸 병에 걸렸나니 부디 구해주옵소서.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뒤이어 무당은 머리카락을 풀어헤치고 한참 꽹과리를 챵챵 두드려대면서 퐁퐁 뛰며 춤을 마구 춰댔다. 뒤이어 무당은 허리춤에서 서리발 치는 칼 두자루를 쑥 빼들어 휙휙 휘두르며 칼춤을 추었다. 무당이 휘두르는 칼날에서 서리발친다. 두 칼날이 마주 치며 불꽃이 튕긴다.   " 귀신들아, 칼을  받아라! 남자귀신, 여자귀신 다 칼에 잘려 날아나라! 남자귀신이면 지고 가고 여자 귀신이면 이고 가라! "   무당은 정점 목소리를 높여 굿을 했다.    “창생이여, 화음청주, 일어나. 화음청주, 이런 몹쓸 병에 걸리다니. 화음청주, 귀여운 이 딸은 너무 젊습니다. 화음청주, 아직 천당으로 갈 때는 아닌뎁쇼. 화음청주, 화음청주,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화음청주, 화음청주.”   무당의 굿은 무속인의 굿에다가 중놈의 염불을 섞어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그 진가를 알아듣지 못하고 있었다.     드디어 무당은 옥실을 마주하여 합장하고 허리 굽혀 인사한 후 사뿐사뿐 걸어 나와 미리 무어놓은 나무 대에 올라가 남쪽을 향해 똑바로 섰다. 최구장 내외를 비롯한 온 집 식구들은 모두들 남쪽을 향해 꿇어 엎드렸다.   요염하게 치장한 무당은 머리를 풀어헤치고 북채를 거머쥐더니 둥둥 당 둥둥 당 북을 절주 있게 쳐댔다. 그러자 부근의 숱한 구경꾼들이 몰려와 무당이 굿을 하는 것을 구경했다.   이날 따라 하늘이 유난히 맑고 구름 한 점 없었다. 저 멀리에 까마귀 떼가 날아와 백양나무 위에 앉아 까욱, 까욱 처량하게 울어댔다.   무당은 북치기를 멈추더니 머리를 풀어헤치고 남쪽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벌리고 휘젓더니 합장배례하더니 두 눈을 내리깔고 소리높이 굿을 하기 시작했다.   “태극천상 워니 하니 사방이여, 어쩜 나비들도 내려앉을 꽃 같은 나인데 저렇게 몹쓸 병을 여린 창생에게 주었나이까. 화음청주,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굽어 살피옵소서. 불쌍한 저 창생을 해치지 말고 살려주옵소서. 관세음보살이여, 남자 귀신이면 지고 가고 여자 귀신이면 이고 가옵소서.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여린 창생을 보좌해주옵소서. 화음청주, 화음청주…”   무당은 한참 굿을 하다가 북을 둥둥 당 둥둥 당당 당 당 당 치었다. 무당은 북치기를 멈추더니 삶은 소고기점을 여기 저기 쥐어뿌리면서 뭐라고 중얼거렸다.   마을의 애들은 소고기를 주어가느라고 야단쳤다.   무당은 회초리로 애들을 찌를 상하며 가리키면서 고래고래 고함쳤다.   “저 불충스런 못된 놈 새끼들에게 천벌을 내리옵소서. 제물을 더럽히는 이단자들에게 날벼락을 내리옵소서.”   웬 일인가?   좀 전까지만 해도 맑던 하늘에 먹장구름이 뒤덮여오더니 번개가 번쩍이고 날벼락이 마구 쳤다.   어른들은 자기 집 애들에게 내리는 천벌이라고 여겼던지 소고기를 줏지 못하게 말려가지고 집으로 바삐 달아났다.   최구장은 무당이 아주 영험하다고 믿었다. 그는 맏며느리가 살 것 같아 무당에게인지 남쪽하늘에인지 꾸벅꾸벅 연신 절을 올렸다. 그러자 온 집 식구들이 장대처럼 쏟아지는 소낙비를 무릅쓰고 모두 최구장을 따라 절을 꾸벅꾸벅 올렸다.    무당은 염불이 영험한 것 같아 소낙비를 무릅쓰고 나무 대에 풍덩 꿇어앉아 눈을 딱 감고 합장배례 한 채 점점 소리 높여 염불하면서 치성을 드렸다.    뒤이어 무당은 머리카락을 풀어헤치고 비바람을 무릅쓰고 한참 꽹과리를 챵챵 두드려대며 퐁퐁 뛰며 춤을 마구 춰댔다. 뒤이어 무당은 허리춤에서 서리발 치는 칼 두자루를 쑥 빼들어 휙휙 휘두르며 칼춤을 추었다. 무당이 휘두르는 칼날에서 서리발친다. 두 칼날이 간혹 맏부딪치며 댓살 같은 소낙비 빗방울사이에서 불꽃을 튕긴다.   " 귀신들아, 칼을  받아라! 남자귀신, 여자귀신 다 칼에 잘려 날아나라! 남자귀신이면 지고 가고 여자 귀신이면 이고 가라! "    최구장과 경숙이가 바삐 기름종이를 바른 우산을 들고 올라가 무당을 비바람 속에서 가리어주었다.   한참 후 무당은 천천히 일어나 소고기점 칼로 저며 내 여기저기에 쥐어뿌렸다. 그리고 소고기점을 저며 간장에 찍어 먹으면서 집식구들도 굿을 한 제물을 먹으라고 주었다. 최구장과 경숙은 먹을 생각이 없었지만 굿이 영험하지 못할까봐 억지로 조그만 소고기점을 눈물과 함께 삼키였다.    무당이 비바람도 무릅쓰고 정성을 다해 굿을 했다고 최구장은 무당에게 병완이가 부조로 가져온 금덩이에서 큰 것을 골라 주었다.    최구장네 일가는 무당도 청해 정성을 다해 하늘에 굿을 하면서 빌었고 경숙은 관준의 귀띔대로 행여나 하고 오줌을 받아 끓여 옥실의 머리를 씻어주고 닦아주었다. 하건만 그들의 정성과는 달리 옥실의 머리는 조금 내린 것 같았지만 온 몸이 팅팅 붓기기 시작하고 살에서 찐득찐득한 땀인지 물인지 내배였다.    한 열흘이 지나도 옥실은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로 저고리도 입히지 못할 정도로 온 몸이 팅팅 부어올랐다. 경숙은 하루 삼시로 대    소변을 받아 냈다. 피가 섞였는지 벌건 소변을 받아내는 경숙은 요강에 눈물 방울을 뚝뚝 떨어뜨렸다.   경숙은 날마다 못해가는 옥실을 보고 구들에 물앉아 한숨을 구들 고래 꺼지게 후~ 내쉬었다. 옥실은 어떤 때에는 정신이 드는지 간혹 눈물을 흘리었다. 친인들을 두고 떠나가기 싫어 흘리는 생이별의 피눈물이었다.   그럴 때면 경숙은 다가가 앉아 옥실의 손을 쥐여 흔들면서 “여보, 일어나오. 정신 차리오.” 하고 넉두리를 하듯 말했다.   어린 오누이 봉인과 명옥은 엄마의 한 팔씩 쥐어당기면서 “이차, 이차. 엄마, 일어나시오. 엄마~” 하고 울었다.   불쌍한 애들이 하는 모양을 보고 최구장 내외는 주글주글 주름살이 진 눈 확에 눈물이 글썽해 안질이 희미해졌다.   “엄마, 일어나, 응? 일어나!”   봉인은 엄마 손을 잡고 당기면서 울었다. 그러나 셈이 들지 못한 명옥은 엄마가 살아났다고 좋아 퐁퐁 뛰면서 놀았다.   옥실은 가쁜 숨을 몰아쉬기 시작했다.   관준을 청해 맥을 보이니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최구장을 조용히 한쪽구석에 불러다가 나직이 말했다.   “해지기 전까지 넘길 것 같지 못합니다. 빨리 후사를 준비하시오.”   그러자 최구장은 돌아서서 어깨를 들먹였고 경숙은 손으로 구들을 치면서 울었다. 그러나 숨이 지지 않은 옥실이 놀랄까봐 소리치지 못하고 흑흑흑 흐느껴 울었다.   모두 후사준비에 바삐 돌아쳤다.   바깥에 어둠의 장막이 내리 드리고 번개가 번쩍이더니 우뢰가 꽈르릉 꽝꽝 울렸다. 뒤이어 바깥에서 소낙비가 우르르 쏟아지는 소리, 추녀에서 장대 같은 비 물이 쏟아져 내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옥실은 모진 한숨을 길게 내쉬더니 숨을 조용히 거두었다. 볼품없이 팅팅 부은 얼굴과 손, 네댓 살 밖에 안 되는 오누이를 다 키우지도 못하고 저세상으로 떠나가는 옥실은 정말 천하에 둘도 없이 불쌍했다. 온집 식구들은 곡성을 높여 옥실의 사망에 애도를 드렸다. 다섯 살 밖에 안 되는 봉인은 엄마가 세상 떴다고 “엄마, 엄마!” 하고 구들에서 발버둥질 치면서 울었다.     그러나 연년생인 네 살짜리 명옥은 셈이 들지 못해 엄마가 세상뜬것도 몰랐다. 철부지 명옥은 이제 엄마가 저세상으로 가면 다시 되돌아오지 못 한다는 것도 모르고 장례 집에 몰려든 사람들이 많이 왔다고 좋다고 방구석에 세워놓은 조주머니에 올라갔다가는 뚝 뛰어내리면서 놀았다. 그것이 그의 한생에 얼마나 후회되는 일인지도 모르고 철부지처럼 외발로 뚝뚝 뛰면서 뛰놀았다.     그들 오누이는 네댓 살 난 어린 나이에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어머니, 세상에서 제일 사랑스러운 어머니를 여의였다. 어린 나이에 어머니가 없는 세상에서 갖은 시련과 굴욕, 천대, 시기를 다 겪어야만 했다. 그들 오누의 앞날은 어두운 장막이 뒤덮인 이 세상에서 더 참담하고 암흑하고 막막했다.     사흘 후 옥실의 장례를 치르게 됐다.   최구장의 제의대로 조상의 성산이 모셔져있는 성남의 양지바른 곳에 묘지를 썼다. 비록 먼저 떠나간 맏며느리였지만 14대 장손을    낳은 맏며느리기에 최구장의 아버님을 모신 성남 성안에 모셨던 것이다.    장례식 날에 경숙은 사랑하는 아내를 차마 비 물이 고이는 차가운 땅에, 무덤에 묻지 못해 떨리는 손으로 첫 삽을 떠 흙을 관 네 귀에 스르르 쏟아놓았다. 그의 줄 끊어진 구슬처럼 흐르는 눈물도 누런 흙과 함께 관위에 쏟아져 들어갔다. 옥실의 부모와 남동생 허성룡도 무두 흑흑 흐느껴 울었다. 처량한 통곡소리 남산둔덕을 메아리쳤다…   장례를 다 치르고 경숙이가 비틀비틀 집으로 돌아와 보니 봉인이 명옥의 손을 잡고 그때까지도 “엄마~ 엄마!” 하고 대성통곡 치고 있었다.    경숙은 어린 오누이가 불쌍해 한품에 끌어안고 꺼이꺼이 울었다.    “어미 없는 애들을 어찌 하오. 어, 허, 헉, 흐~으~흑, 흑. 어째 내게 이런 일이 생기오. 당신이 없이 어떻게 살라오? 이 오누이는 어찌 하라오? 으흐흑, 흑, 흑, 하늘도 무심하지. 아~ 하~”   최구장이 위방에서 나와 경숙의 어깨를 다독이면서  위로해주었다.   “어찌겠니? 갈 사람이 돼서 간 걸. 애들을 굳건히 잘 키워라.”   경숙은 주먹으로 가슴을 탕탕 치며 먹장구름이 뒤덮인 하늘을 쳐다보면서 쓰라린 눈물을 하염없이 흘렸다.
397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52) 오누이 김장혁 댓글:  조회:637  추천:1  2024-06-05
       김장혁 작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            제7장 흑야         3. 오누이        흐릿한 하늘이 운주동을 지지 누르고 있었다. 비도 내리지 않고 갑갑하게 대지를 덮고 있는 먹장구름이 밉살스러울 지경이었다.    어느날 명옥은 봉인 오빠랑 공부하는 서당 방 문 뒤에 달려갔다. 그런데 할아버지가 붓으로 쭉 그어놓은 듯 짙은 버들잎 눈썹아래 엄한 눈길로 나가라고 눈짓했다.   최구장은 은빛수염을 슬슬 쓸며 못 마땅한 눈길로 명옥을 쏘아보았다.   할아버지가 겁나 명옥은 아래 방으로 해서 정주간으로 달아났다.   그는 엄마의 품에 안기면서 칭얼거렸다.   “엄마, 나두 오빠랑 함께 공부할래. 응~응.”   옥실은 철없는 어린 딸이 불쌍해 명옥의 눈물범벅이 된 얼굴에 얼굴을 대고 상냥한 어조로 달래였다.   “얘야, 옛날부터 여자애들은 공부를 하지 못한단다. 여자애들은 베실을 뽑고 밥을 지어야 해.”   명옥은 머리를 도리도리 하면서 떼를 썼다.    “난 베실 뽑기 싫습니다. 나도 오빠처럼 공부하겠소. 엉~엉, 흐흑.”   옥실은 눈물줄기가 쏟아지는 명옥의 얼굴을 쓰다듬으면서 달래였다.    “응, 할아버지한테서 배우지 못하면 오빠 먼저 배운 다음에 오빠한테서 배우자. 그만 그쳐라. 할아버지가 듣고 위방에서 나와 또 곰방대로 이마를 치겠다. 딱 그쳐라.”     명옥은 흑흑 흐느끼면서 울음을 그치더니 옥실의 품에 안겼다.    한참 칭얼거리던 명옥은 옥실의 품에 안긴 채 조용히 잠들어버렸다.   옥실은 쌔근쌔근 잠자는 딸을 꼭 껴안고 다독이면서 한숨을 호~ 내쉬었다.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명옥은 쌔근쌔근 자면서도 흑흑 흐느끼곤 했다. 옥실은 명옥이를 구들에 내려놓고 베개를 베워주고 누더기이불을 덮어주었다.   뒤이어 그녀는 헛간에 나가 사다리를 가져다가 천정 대들보에 기대여 놓고 올라가 메주덩이를 뜯어 북데기를 펴놓은 바닥에 내리 떨어뜨렸다.    마지막에 손이 닿을락 말락 하는 메주덩이가 천정에 매달린 채 남아있었다. 아무리 손을 뻗쳐도 손가라 끝도 닿지 않아 이마에 콩알 같은 땅방울이 송골송골 내돋았다.   드디어 그녀는 눈앞이 아찔해나며 무수한 별빛이 반짝거리며 두 다리가 덜덜 떨렸다.   그녀가 마지막 메주덩이를 달아맨 새끼에 손을 뻗쳐 뜯으려는 순간 졸지에 바깥에서 나까노라 소대장의 고함소리가 들렸다.    “뭘 해?!”   옥실이 바깥으로 머리를 돌리면서 내다보다가 몸이 기우뚱하며 사다리에서 허공 퉁 떨어졌다.   “앗!”    그 모진 소리에 미닫이문이 쫘르륵 열리면서 서당에서 어른들이 무슨 일인가고 부엌간 쪽으로 달려 내려왔다.   옥실은 메주덩이가 널린 북데기 위에 떨어지면서 그만 땅바닥에 머리를 탕 부딪치고 말았던 것이다.   “엄마!”   명옥도 깨나서 방바닥에 떨어져 쓰러져 있는 엄마를 보고 달려가 흔들며 울었다.   경숙과 경민은 부랴부랴 옥실을 안아다가 가마 목에 눕혔다.   “여보, 이게 웬 일이요? 어이구, 이 일을 어쩌오?”   뒤늦게 정주간에 내려온 최구장은 정주칸 바닥에 널린 메주덩이를 둘러보고 경숙을 나무랐다.   “너 메주를 뜯어 줄 게지 이게 뭐냐? 아녀자가 저렇게 높은 대들보의 메주를 뜯다가 잘못되다니. 엉? 이런 일이 또 어데 있냐?”   경숙은 수건으로 옥실의 얼굴의 먼지를 닦아주면서 중얼거렸다.   “메주를 뜯겠으면 말할 게지. 이게 뭐요? 저 높은 대들보에 올라가다니? 흑, 흑.”   옥실은 정신을 잃은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눈을 꼭 감고 조용히 누워있었다. 다행이 북데기 위에 떨어져 어데 피가 터진 곳은 없었다.   한식경이 지나자 옥실의 얼굴이 점점 팅팅 부어올랐다. 눈언저리는 까맣게 번지어 갔다. 거품을 문 입술은 창백하다 못해 백지장 같았다.   “어이구, 여보, 깨나오. 일어나오. 저 오누이를 두고 누워있으면 어쩌오? 어이구.”  경숙은 울상이 되여 구들을 치면서 땅이 꺼지게 한숨을 푸푸 몰아쉬었다.  봉인과 명옥은 옥실의 양손을 쥐고 흔들면서 “엄마~”, “엄마~” 하고 대성통곡 쳤다.   “엄마, 일어나.”   “엄마~ 깨나~”   이때 형내가 사람들 틈을 비집고 들어와 쪼그리고 앉아 옥실을 들여다보다가 일어나면서 최구장에게 말했다.    “스승님, 저 높은 데서 떨어졌는데 머리 터진데 없급꾸마.  피 안터졌지만  내상은 더 위험합니다. 오히려 나쁜 피가 밖으로 터져 나왔다면 덜 위험한데요. 어혈이 머리 안에 있기에 더 나쁩니다. 부중이 와서 머리가 붓긴 걸 보시오. 목숨이 위험합니다. 빨리 우리 할   아버지한테 보입소.”   그러나 최구장은 피씩 입귀로 쓴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뭘 알아 그래? 분명 가난이 덮씌운 이 집안에 병 귀신이 덮친 게다. 이건 의학이나 약으로 치료해 살릴 수 있는 병이 아니야.”   최구장은 의학보다 신을 믿었던 것이다. 그도 옥실의 상처는 약으로 치료해 될 게 아니다. 하느님과 신께 맡겨야 될 것 같았던 모양이다. 그는 맏며느리를 구하기 위해 마지막노력을 하고 싶었다.    옥실을 둘러본 마을사람들과 학부모들은 모두 혀를 끌끌 차더니 집으로 돌아가 쌀독에서 좁쌀 한바가지, 감자 한 대야라도 들고 와    옥실을 구하는데 보태 쓰라고 했다. 뒤늦게 병완은 불붙이에서 사는 맏손녀 어금에게서 최구장 맏며느리의 불행한 소문을 듣고 부랴부랴 달려와 금덩이 몇 덩이를 내놓았다.   “맏며느리 이렇게 상해 안 됐소. 이걸로 사돈며느리 치료를 해줍소.”   “이건 어데서 난 금덩어리들이오?”   “이건 이전에 성칠이 웅진의 날강도 백승만의 걸 빼앗은 거요. 근심하지 말고 쓰오.”   최구장은 병완에게 “감사합니다.” 하고 인사하고는 사돈어른의 금덩이를 받아 경숙에게 넘겨주었다.   이때 창준과 기준 두 집 식구들도 소문을 듣고 각기 동전을 가지고 와서 보태 쓰라면서 문안을 여쭈었다.   최구장은 문안하러 온 동네어른들에게 일일이 인사하면서 며느리가 불쌍하여 중얼거렸다.   “요즘 쌀독을 빡빡 긁더니 분명 죽물도 모자란다고 애 어미 제대로 잡숫지 못했을 거야. 그러니 굶은 며느리가 저 높은 대들보에서    메주를 뜯다가 어지름 증에 떨어진 거다.”   최구장은 눈물을 주르르 흘리더니 마루에 나가 까마귀가 우는 하늘을 바라보면서 장탄식을 하며 주먹으로 가슴을 탕탕 치였다.   “천지신명이시여, 우린 대대로 양심 어긴 적 없소이다. 하늘과 땅에 미안한 일을 한 적이 없고 남을 해친 일은 더욱 없소이다. 그런데 우리 집에 이 웬 날벼락인고. 아이고~”    최구장이 마루에 물앉아 대성통곡치자 자녀들이 달려가 아버지를 부축해 위방에 모셨다.   봉인과 명옥이 할머니 품에 안기면서 서럽게 울었다.   최구장 댁 성단은 동전으로 눈물을 훔치더니 봉인과 명옥을 며느리에게 먹이려고 부엌 칸에 내려가 좁쌀을 씻어 솥에 얹었다. 그러자 둘째며느리 어금이 부엌에 내려가 불을 때였다.   이때 관준이 침통이랑 가지고 들어섰다.   “사돈어른, 큰며느리 상해 얼마나 비통하겠습니까? 봅시다. 어디를 상했는가?”   최구장은 멀찍이 서서 관준 영감이 옥실의 맥을 보고 팅팅 부어오르는 얼굴의 상처를 보는 것을 별로 희망을 두지 않고 볼 뿐이었다.   “어떻소?”   경숙의 물음에 관준 영감의 얼굴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비끼었다.   “약을 많이 써야 될 것 같소.”   뒤이어 관준은 경숙의 귀에 대고 뭐라고 여쭈었다.   경숙은 머리를 끄덕이더니 아내 손을 만지면서 눈물만 하염없이 흘렸다.   처량한 울음소리에 정신을 차렸는지 옥실이 입술을 옴직거리더니 눈귀로 눈물이 주르르 흘러 귀밑으로 줄줄 떨어졌다.   “여보, 정신을 차리오. 양? 새파란 나이에 애들을 두고 이게 무슨 일이요? 여보,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 ~”   경숙의 울부짖음 소리에 온 집 식구들은 흑흑 흐느껴 울었다. 그러나 나까노라는 서당을 감시하러 왔다가 옥실을 문안하기는커녕 개 닭 보듯 하더니 그 자리에서 꼬리를 빼는 것이었다.    경숙은 아내를 살려달라고 하늘에 빌고 땅에 빌고 신에게 빌었다.    “오, 청청 하늘이여, 부디 어질고 불쌍한 옥실을 굽어 살펴 살려주옵소서. 부지런하고 곱살하게 생긴 옥실이 무슨 죄가 있다고 이다지도 일찍이 서른 살도 안 된 꽃나이에 데려가려고 하는가? 아직 철도 들지 못한 다섯 살짜리 아들애 봉인과 네 살 밖에 안 되는 딸애 명옥을 두고 어떻게 갈수 있단 말인가? 그 귀한 오누이를 당신이 기르지 않고 떠나가면 어떻게 하는가?”    그는 하늘과 땅에 빌다 못해 이번에는 옥황상제와 염라대왕에게 빌고 또 빌었다.    “염라대왕이여, 불쌍한 오누이를 생각해서라도 옥실을 살려주옵소서. 당신도 눈이 있고 귀가 있잖은가? 염라대왕님이여, 이 딱하고 어려운 옥실의 사정을 봐서라도 살려 주옵소서. 제발 살려 주옵소서.”    허나 어린 오누이는 뜻밖의 사고로 끝내 어머니를 여의는 불운한 운명을 벗어나지 못했다.   옥실은 숨이 붙어 있었지만 의식을 잃은 채 각일각 경각을 다투고 있었다. 그녀는 불쌍한 어린 오누이를 두고 이미 세상을 뜨나 다름이 없었다.  세상에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잃게 될 오누이 불쌍하기만 했다.
396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51) 운주동서당방 김장혁 댓글:  조회:486  추천:0  2024-06-05
       김장혁 작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 제2권                             제7장 흑야         2. 운주동 서당방         가지 많은 나무 바람에 잘 새 없다고 최구장은 점점 많이 늘어난 자손들의 막막한 앞날 근심이 태산 같았다.    최구장은 곰방대를 뻑뻑 빨면서 네 살 밖에 안 되는 명옥이 베실을 삼다가 까딱까딱 자부는 것을 보고 곰방대로 이마를 딱 쳤다.     “아가!”    “요년 가시나, 초저녁부터 자고 언제 밥값을 하겠냐?”    자불다가 명옥은 너무 아파 눈물을 똑똑 떨어뜨리었다. 그 애는 눈을 비비더니 베실을 삼아 모대기에 감았다. 허나 14대 장손 봉인은 정주간에서 단잠에 빠져 코를 다랑다랑 골고 있었다.   명옥은 잠기 가득한 눈을 똥그랗게 뜨고 저녁 늦게까지 베실을 뽑아내 감고 또 감았다.   최구장은 자불면서 베실을 뽑는 조그만 손녀가 불쌍해났다.   “명옥아, 너도 자고 내일 일찍이 일어나 베실을 뽑아라. 가시나, 밥값을 해야 죽이라도 먹지.”   “예, 내일 베실을 많이 뽑겠습꾸마.”   명옥은 좋아라고 일어나 베실을 감아치우고 봉인의 곁에 가서 두 다리를 꼬부리고 굳 잠에 빠져버렸다.   최구장은 집 안에서 갑갑하여 바깥으로 나가 검은 구름 속에 어슴푸레 보이는 달을 쳐다보았다.   이윽고 검은 하늘에서 보슬비가 보슬보슬 떨어졌다. 최구장은 가슴이 옥죄여 드는 것 같아 마루에 내려 보슬비를 온몸으로 맞았다. 차라리 비를 흠뻑 맞아 온몸의 근심을 씻어버리기라도 했으면 좋을 것 같았다. 그는 이일 저일 생각하니 당장 숨이 넘어 갈 것만 같았다.    “이젠 묵밭도 마음대로 일구지 못한다지. 밭에다 나무를 심어야 한다지. 사냥도 하지 못하고 버드나무를 베지도 못한다지. 뭘 먹고 살아야 한단 말인가? 그래 이 땅이 일본 놈의 땅으로 됐단 말인가? 아, 나라가 망하더니 망국노 신세로구나. 이게 바로 망국노 설음이구나.)    최구장은 바쁠 때일수록 병완과 답답한 마음을 털어놓고 싶었다.   (그러나 난 이 고향 땅을 쉽게 버리고 만주로 들어갈 수 없어. 지식으로 이 땅에서 일본 놈들과 싸워보자. 일본 놈들은 메이찌 유신 후에 세계 선진 지식과 기술을 끌어들여서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었다. 그 놈들은 우리보다 먼저 세상 아는 것이 많고 힘이 있기에 우리 나라를 먹어치우고 우리 땅에 발을 붙인 게 아닌가? 무지몽매는 오랑캐 놈들에게 짓밟히는 제일 큰 원인인 거야. 우리 후손들을 더는 무식해 오랑캐 놈들에게 억눌리면서 살게 할 수는 없다.)   그는 주먹을 으스러지게 틀어쥐고 부르르 떨었다. 지루한 어둠속에 흩날리는 보기 좋던 은빛구레나룻도 원형을 잃고 말았다.   (이 지루한 밤이 언제면 개일까?)   최구장은 한숨을 길게 쉬면서 마루에 올라가 갓을 벗어 비 물을 툭툭 털어 마루기둥에 걸어 놓았고 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갔다. 이른 아침 먹장구름이 뒤덮인 동녘하늘이 희붐히 밝아왔다. 얼음조각 같은 해라도 조금 떠서 비췄으면 좋으련만 좀처럼 얼굴을 내밀지 않았다.   아침술이 떨어지기 바쁘게 최구장은 맏아들 경숙을 보고 흑판을 만들라고 했다. 아버지 뜻을 안 경숙은 아버지와 함께 구새 목에 몇 해 놔두었던 통나무 몇 개를 맞들어 마당에 가져왔다. 그는 큰 자귀로 통나무를 풍풍 찍어낸 후 대패로 빤빤하게 밀어 다듬었다. 이윽고 나무판자를 대고 숯 검댕이 칠을 하니 제법 자그마한 흑판이 됐다.   한동안 일본헌병들이 서당에서 조선 글을 가르치지 못하게 하여 최구장은 흑판마저 없애 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백절불굴하고 제일 위방에 흑판을 다시 만들어 세웠다.   그날부터 그는 서너살 밖에 안 되는 손자들인 봉인과 봉순, 봉문을 흑판 앞에 앉혀놓고 글을 가르쳤다.   며칠 지나자 소문을 듣고 마을의 사돈 기준이 아들 상우와 상순을 데리고 왔고 신설동의 열서너 살 되는 형내도 다시 서당에 왔다.   “얘들아, 글을 배워야 한다. 글을 모르면 남들에게 짓밟히게 되느니라. 성현들의 글에는 우리가 모르는 지혜와 새 세상이 있느니라.” 학부모들인 기준과 상철이 등도 모두 개학하는 날에 모여와 애들과 함께 공부했다.   “오늘부터 천자문을 가르치겠다. 처음 글자는 ‘천’이라고 읽는다. ‘천’ 자는 하늘이라는 뜻을 나타낸다. 따라 읽어보자. 하늘 ‘천’.”   “하늘 ‘천’!”   서당에는 최구장을 따라 애들이 글 읽는 소리가 낭랑하게 들려왔다. 그 낭랑한 글 읽는 소리는 절에서 중이 염불하는 소리처럼 느릿느릿하면서도 노래 소리처럼 절주 있게 들려왔다.    “하늘 천, 따 지, 누를 ‘황’, 가물 ‘현’.”    “참 잘 읽었다. 그럼 한 글자 한 글자 읽으면서 써 봐라.”    애들은 종이나 붓이 없는지라 미리 준비해가지고 온 모래판에 나무꼬챙이나 손가락으로 한 글자 한 글자 읽으면서 써내려갔다. 애들이 제대로 쓰지 못하면 최구장이 돌아가면서 손을 잡고 한 획 한 획 쓰는 연습을 했다.    형내는 몇 해 전에 배운 적이 있어 작은 선생이 되여 옆에 앉은 애들의 손을 잡고 쓰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좀 큰 애들은 괜찮았는데     봉문이랑은 세 살 밖에 안 되는지라 제대로 따라 쓰지 못했다.    이때 아래방에서 “잉잉” 여자애가 우는 소리가 들렸다.    “웬 일이냐?”   모두들 아래 방을 내려다보았다. 네 살 밖에 안 되는 명옥이 두 손으로 눈을 비비면서 서당 문어귀에 서있었다. 최구장이 성난 눈길로 명옥을 보면서 물었다.    “저 년 가시나, 어째 떠드느냐?”   명옥은 어머니의 손에서 빠져나와 서당에 뛰어 들어오면서 소리쳤다.   “할아버지, 나도 공부하겠습구마.”   그러자 최구장은 명옥을 쫓아내면서 꾸짖었다.   “이 년 가시나, 계집애가 공부를 해 뭘 해? 넌 가서 베실이나 뽑아라.”   그러나 명옥은 몸을 뱅뱅 탈면서 떼를 썼다.   “싫습니다. 나도 봉인 오빠처럼 공부를 하겠다 ~ ”   “이 가시나, 나가지 못 할까?!”   순간, 상순이가 코를 풀쩍거리면서 “명옥아, 여기 내 옆에 앉아 공부해라.”라고 하면서 엉덩이를 옆으로 움직여 앉을 자리를 내놓았다.    기준은 상순의 말에 어이없어 희죽이 웃기만 했다.   경숙이 보다 못해 달려와 칭얼거리는 명옥을 안아 정지로 내려갔다.   그는 명옥을 옥실에게 안겨주면서 책망했다.   “애를 보지 못 하고 뭘 하오?”   옥실은 손으로 눈을 비비면서 우는 명옥을 받아 안으면서 남편에게 눈을 흘기었다.   “계집애는 공부를 하면 못씁둥?”   “가시나가 공부를 해 뭘 해? 베실이나 뽑고 빨래나 하고 밥이나 지으면 되는 거지. 쯧쯧. 아버지가 화를 내면 어쩌자고. 다신 그런 소릴 하지 마오.”    옥실은 명옥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면서 도도 거렸다.   “공부는 뭘 사내들만 하라고 날 때부터 써 놓았다오?”   “그만 하오. 숱한 사람이 듣는데.”   경숙은 위방을 올려다보면서 눈까지 끔쩍해보이었다.   그러자 옥실은 입을 다물고 명옥을 안고 달래였다.   “일 없어. 오빠가 먼저 글을 배우면 오빠한테서 배우면 된다. 울지 말라. 이젠 끝여라.”   그래도 명옥은 흑흑 흐느껴 울었다.   위방에서는 문을 꼭 닫았는데 최구장이 글을 설명하는 소리만이 들리었다.   “‘천지황현’이란 뜻은 이러하느니라. 옛날에 하늘땅이 가물고 몽땅 누르러 갔다는 뜻이니라. 생각해봐라. 이런 하늘아래 누런 땅에서 가물어 곡식이 여물 수 있겠느냐?”   “없습구마.”   형내는 배운 적이 있어 제꺽 대답했다. 옆에서 듣던 상철과 기준은 머리를 끄덕였다.   최구장은 마른기침을 하며 애들에게 말했다.   “아래에 하늘 ‘천’자에 깃든 ‘녀아의 전설’을 이야기해주겠다.”   “와우, 좋다.”   애들이고 어른이고 귀를 가시고 들었다.   “먼 옛날 태고 적에 하늘에 구멍이 펑 뚫렸지. 그래서 하늘에는 불이 활활 타오르고 땅에는 가뭄이 형편없이 들어 곡식이 다 쓰러졌단다. 그래서 녀아는 중국 곤륜이란 산에 가서 바위 돌을 깨서 불에 녹여서 파 난 하늘을 기웠단다.”   “와~ 대단한 여자야.”   애들이 감탄했다.   “그런데 마지막에 한사람이 드나들 만큼 기울 녹인 용암이 모자랐단다. 그래서 녀아는 사람들을 살게 하려고 자기 몸으로 나머지 하늘 구멍을 막았단다. 그때부터 하늘 구멍이 막혀 사람들이 곡식을 심어도 잘 자라서 잘 살게 되였단다.”    “와~ 정말 대단한 녀아로구나.”    “그래, 참말 대단해.”   최구장은 눈을 지그시 감고 애들의 감탄소리를 들으면서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오늘 공부는 이만하자.”   애들은 집으로 돌아가면서 옛말을 들으니 재미있다고들 했다.   며칠 후 최구장은 애들이 배운 것을 다 익히자 그다음 글자를 배워주었다.   “오늘 배울 첫 글자는 영글 측자이다. 먼저 따라 읽기를 하자. 영글 ‘측’!”   “영글 ‘측’!”   몇 번 따라 읽기를 한후 애들은 한 획 한 획 따라 “측” 자를 써나갔다.   최구장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면서 애들 속을 왔다 갔다 하면서 애들이 모래판에 글씨를 쓰는 것을 돌아보았다.   (영팔과 응삼이랑 다 얘들처럼 배워주었건만 우리 조선 사람을 도울 대신 일본 놈들의 개다리로 돼버렸단 말이야. 무식도 죄지만 유  식해도 지식을 누굴 위해 쓰는가는 것이 더 중요한 거야.)   최구장은 응삼이랑 떠올리자 마음이 아프고 자기 노력이 결과가 빗나와 서글펐다.   한참 후 최구장은 책상을 똑똑 쳤다.   “그만, 그만 쓰고 오늘 배운 영글 ‘측’자의 뜻을 알도록 하자.”   애들은 모두 똑바로 앉아 초롱초롱한 눈을 한 번도 깜짝하지 않고 최구장 선생님을 바라보면서 하회를 기다렸다.   최구장은 미리 마련해놓은 둥근 채 바퀴를 두 손으로 쥐여 안으로 힘껏 우겼다. 그러자 채 바퀴는 타원형으로 이그러져 버렸다.   “봐라. 이렇게 된 걸 이그러졌다고 한다. 영글 측자는 바로 이그러진다는 뜻이느니라.”   그러자 애들은 “오~” 하고 알았다는 듯이 감탄소리를 내면서 머리를 끄덕였다.   그때 형내가 손을 들었다.   “뭐냐? 말해라.”   형내는 이런 요구를 제기했다.   “선생님, 땅에 깃든 얘기도 들려줍소.”   그러자 애들은 좋다고 박수까지 쳤다.   “그래, 그렇게 하자. 에헴, 따 ‘지’라. 땅이란 원래 울퉁불퉁하게 생겼지. 높이 우뚝 솟은 건 산이요, 깊이 패인 건 골짜기지. 우리 사는 명천 여기서부터 몇 백리 떨어진 북쪽에는 백두산이란 높은 산이 우뚝 솟아있다.”    최구장은 흑판에 석회 돌로 백두산을 그려놓고 백두산을 일일이 설명하고 뒤이어 백두산에 깃든 전설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에헴, 최구장, 안녕하오?”   이때 나까노라이찌로 헌병 소대장이 서당에 불쑥 들어섰다.   불청객이 들어오자 최구장은 백두산 그림 아래에 썼던 백두산이란 글을 지우고 후지산이라고 써놓았다.   “오, 후지산, 우리 대일본 제국의 아주 아름다운 산이야.”   나까노라이찌로 소대장은 손으로 턱을 고인 채 흑판을 들여다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자는 코 수염을 쓱 닦더니 거들먹거렸다.   “좋소까. 계속 얘기했소까.”   최구장은 계속 백두산 전설을 얘기했다. 그러나 나까노라이찌로 소대장은 뭐라고 말하는지 알아듣지 못하겠는지라 서당에서 나가버렸다.    그는 떠나가면서 조선말을 알아듣는 영팔과 수길과 같은 조선 앞잡이들을 데리고 와야 제대로 감시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최구장은 애들이 흥미진진하게 듣자 다른 얘기도 들려주었다. 애들을 데리러 일찍 왔던 학부모들도 최구장의 얘기가 재미있어 흥미진진하게 들었다.   명옥은 오빠 봉인이랑 공부하는 것이 너무 부러워 꼭 닫긴 문에 난 옹이구멍으로 들여다보면서 귀를 강구고 듣고는 애고사리 같은 손가락으로 손바닥에 글자를 써보면서 하늘 천, 따지를 귀동냥해 익혀나갔다.    그런데 어떤 때에는 봉인오빠한테 들킬 때가 있었다. 못된 봉인이가 손가락으로 옹이구멍으로 쏙 내지르면 눈이 찔렸다. 설상가상으로 할아버지 최구장은 명옥이 옹이구멍으로 들여다보는데다가 애들이 옹이구멍에 대고 손가락질하면서 작난 친다고 나무꼬챙이를 깎아 옹이구멍에 박아넣어 꽁꽁 막아버렸다.    옹이구멍까지 딱 막히자 명옥의 글공부는 꽉 막혀버렸다.   서당에는 날이 갈수록 신흥동과 영월동, 가마골, 신설동의 숱한 애들이 모여와 흥성흥성해져 가고 있었다.   최구장은 아예 팔간 집 제일 서쪽 간에 “운주동 서당방”이란 편액까지 내 건 후 서당방 학생들을 널리 모집했다. 그러자 운주동 주위의 신흥동, 가마골, 신설동, 불붙이 부모들이 애들을 데리고 운주동서당방에 하나, 둘 모이어 왔다.   운주동서당방에서는 날따라 하늘 천, 따 지 읽는 낭랑한 소리 드높아만 갔다.   최구장은 장차 ㄱ, ㄴ, ㄷ, ㄹ 가 칼이 되어 섬나라 오랑캐들의 숨통을 찌르리라 생각하니 늙은 가슴에도 힘이 솟구치는 것을 느끼었다.
395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50) 수림 속 바위돌밭 김장혁 댓글:  조회:540  추천:0  2024-06-05
   2015년 08월 28일 16시 43분  조회:2159  추천:1  작성자: 김장혁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제2권)                                                    김장혁 저                                                                     제7장 흑야           1. 수림 속 바위돌밭       먹물을 뿌려 놓은듯 한 칠칠흑야, 서쪽 밤하늘에 걸려 있는 가냘픈 눈섭달이 봄바람에 스쳐 바르르 떨고 있었다. 한줄기 달빛은 먹장구름을 아득바득 밀어내려고 애를 쓰건만 온 누리의 어둠을 밀어내기는 힘겨웠다.    잔설이 뒤덮인 아득히 먼 기운봉 아래 뭇산들은 검은 장막 속에 파묻혀 거뭇거뭇한 몸뚱이를 웅크린 채 취한 듯이 굳잠에 빠져 있었다. 늦잠을 자던 기운봉 기슭의 산발들이 무섭게 내리누르는 어둠을 털어버리고 창공을 떠받고 일어서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어둠의 장막은 걷힐줄 모르고 점점 더 어둡게 고향의 산발들을 감쌌다. 어찌나 어두컴컴한 밤인지 주먹으로 불시에 얼굴을 들이쳐도 눈치 채지 못할 캄캄하고 갑갑한 흑야였다.     어둠에 짓눌린 방안에서 병완은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가담, 가담 한숨만 길게 내쉬었다. 겨우내 길닦이를 하지 않은 동안이나마 집에서 조용히 잠자리에 들 수 있었지만 근심스러운 일은 태산 같았다.      끼무라는 그가 총 도감이라고 영월동이나 운주동에 마음대로 드나들게 하였고 그의 아내 성희나 며느리 하옥을 옥에서 풀어주었다. 그 “덕분”에 지지리 지루한 이태 사이에 그는 집에서 잠시나마  한집 식구들과 함께 살 수 있었다. 그는  이태나 인부들을 데리고 경성으로 통하는 큰길 닦기에 나섰다. 하지만 끼무라가 인부들의 삯전을 차일피일 미루면서 제대로 주지 않아 골치 아팠다.     (삯전을 주지 않으면 인부들이 뭘 먹고 산단 말인가? 원삼이네 삼형제가 길닦이 공지에서 빠져 집으로 잘 달아났지. 일본 놈들을 믿다간 한지에 방아를 걸 지경이야. 언제 삯전을 줄지 알 턱이 있느냐? 쳇, 일본 놈들은 이젠 사냥도 하지 못한다지 않는가. 성칠과 숱한 사냥꾼들을 체포하려고 미쳐 날뛰지! 성칠은 어데 가서 헤매는지? 그 놈이 무사해야 되겠는데. 자식, 이태 동안이나 종무소식이니 속이 타서 이거 원 어디 살겠는가? 자식이 상호와 동욱이랑 숱한 마을 청년들을 데리고 갔잖은가. 기별이라도 할 게지. 원, 서른도 넘은 놈이 이젠 부모들 심정도좀 알아야겠는데. 참, 애를 낳아 길러 보지 못한 놈이 돼서 저럴까. 쯧쯧.)     병완은 너무 답답해 자리에서 일어나 성희를 깨울세라 조심조심 담배통을 당겨다놓고 담배를 한 대 말아 물었다. 부시까지 손더듬질해 찾아 쥔 그는 부시를 척척 켜서 겨우 담배를 붙였다.     속이 탄 그는 담배를 길게 빨았다 후- 내뿜었다.    (일본 놈들의 경찰국 사무 청사는 무너지지도 않고 아직도 보기 싫게 서있지 않는가. 나무벌레들이 몇 해 지붕틀과 대들보, 기둥이랑 구멍을 뚫어 무너지게 만들까? 확실히 나무벌레가 기둥뿌리를 파먹는 소리가 까닥까닥 났는데. 언제 쾅 무너지겠냐?)    후~ 병완은 땅이 꺼지게 한숨을 후- 내쉬었다.    (일본 놈들이 이 고향에 있는 한 배불리 먹고 살 날은 없어. 그런데 무슨 힘으로 일본 놈들을 몰아낸단 말인가!)    병완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요즘엔 황무지에 일군 밭에마저 나무를 심어라고 지랄이지 않는가? 어떻게 일군 밭이라고 그래. 이건 굶어 죽으라는 게 아니고 뭔가?)    병완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분통이 터지고 살 길이 막막했다. 온밤 잠을 설치다가 새벽녘에야 겨우 자리에 누워 눈을 조금 붙였다. 동녘이 푸름해지자 그는 잠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는 바깥에 나가 지게에 재를 퍼 담아 메고 산기슭으로 올라갔다.     그는 지게의 재를 쏟아 바위와 바위 사이에 가면서 삽으로 펴놓았다.     싸늘한 해가 뜨자 성희가 문을 열고 나와 재를 버리려다가 삽으로 재를 지게에 퍼 담는 병완을 발견했다.    “여보, 신 새벽부터 어쩌자고 이래요?”    병완은 삽으로 재를 지게에 퍼 담으면서 볼 부은 소리를 했다.   “밭에 나무를 심으라는데 어디 입에 풀칠이나 하겠소? 바위 돌 틈에라도 재를 펴놓고 메밀이라도 심어야겠소.”    성희는 함지의 재를 버리려다가 말고 땅바닥에 내려놓으면서 말했다.    “바위돌 틈새에 메밀을 심어서야 몇 알 거둔다고 그래요?”    “그래도 어쩌겠소. 한 마대라도 거두면 얼마나 좋겠소?”    그때 하옥이도 밥을 지어놓고 나와 시부모를 따라 함지에 재를 담아 이여다가 바위돌 틈새에 폈다.     병완은 십여 일 동안 낮에는 마을 앞에 가서 길을 닦는 일을 감독하고 이른 아침이면 재를 지게에 져다가 바위돌 틈새에 펴놓았다.      그 덕에 한헥타르나 되는 새 “바위돌 밭”을 일구었다.    한달 푼히 지나니 기운봉 기슭의 뭇 산에 드문드문 뒤덮였던 잔설이 녹고 봄바람이 훈훈히 불어왔다.    서산의 수림 속 어디선가 뻐꾸기가 “뻐꾹" "뻐꾹” 봄소식을 알리고 하늘에서는 종달새가 지종지종 제창 좋은 파종 계절이 왔다고 기별을 전했다.    봄은 농사꾼들에게는 희망의 계절이었다. 봄에 씨앗을 많이 뿌리면 올해는 풍작을 거둬들여 배불리 먹고 살리라는 희망이 가슴을  부풀게 했다. 그러나 일제 놈들에게 짓밟힌 가을에는 농사군들의 봄에 싹튼 희망과는 달리 실망을 안겨 주군 하였다.    (올해는 어떨지?)    병완 일가는 몽땅 동원돼 바위 돌 틈새에 재를 펴고 나무꼬챙이로 재를 찔러 구멍을 낸 후 메밀 씨를 뿌려 넣고 잘 파묻어놓았다.   병완은 쉼에 나무꼬챙이를 너럭바위에 놓고 셋째 며느리 잔등에서 넷째 손자 상순을 뽑아 높이 쳐들었다가 품에 꼭 끌어안고 볼을 자기 얼굴에 대고 비볐다.    “낯이 길쭉한 게 제 애비를 똑 떼 닮았구나. 이 쌍까풀눈을 봐라.”    기준은 옆에서 허리 쉼을 하면서 아버지에게 말했다.   “거 세 귀 눈을 보시오. 딱 아버지 안질 같지 않은가.”   그 말에 병완은 밭고랑 같은 주름살을 쫙 펴고 환하게 웃음 지었다.   “그래? 어디 보자. 이 놈이 정말 세 귀 눈이구나. 허허허. 한대 건너 날 닮았구나. 이 놈이. 정말 고와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겠다.”   “할아버지, 앵~코, 앵~코 하자.”   “그래, 그래. 앵~코 하자.”   병완은 상순을 안고 너럭바위에 누워 발우에 상순을 올려놓고 “앵~코-” “앵코-” 하면서 다리를 올렸다 내리웠다 했다.   상순은 좋다고 야단쳤다.   그 모습을 보고 기준과 사련은 마주 바라보며 얼굴에 웃음꽃을 피웠다.   한참 후 병완은 상순을 안고 일어났다.   사련이 상순을 안아갔다.   병완은 기준과 창준을 불렀다.   “얘들아, 너희들도 운주동 산기슭 바위돌 틈에 재를 펴고 메밀을 심어라.”   기준은 볼 부은 소리로 말했다.   “이런 바위틈에 메밀을 심어 몇 알 거두겠습둥?”   병완은 눈을 흘겼다.   “한 마대라도 거둬 보리고개를 넘는데 보태야지. 새해부터 일본 놈 새끼들이 밭에 나무를 심으라는데 뭘 먹구 살겠냐?”   기준은 땅이 꺼지게 한숨을 후- 내쉬었다.   “이거 일본 놈들 성화에 어디 견디겠습니까? 일본 놈들을 몰아내지 못할 바에야 아버지 말씀대로 만주에 가면 어떻습둥?”   병완은 한숨을 후 내쉬었다.   “글쎄 말이다. 헌데 한평생 살아온 고향을 버리고 어떻게 만주로 간단 말이냐? 려생 할아버지 대부터 조상들의 산소가 모두 여기 명천에 모셔졌는데 어떻게 버리고 가? 불효자식이라고야.”   그때 성희가 끼어들었다.   “난 안가. 남쪽 충청도 한산면에 둔 고향을 떠나 입북한 것만 해도 그런데 또 두 번째 고향 같은 명천을 버리고 만주로 가? 안가, 난 안가!”    그 말에 병완은 눈을 흘기었다.    “또, 또 그 말이야. 그러지 않으면 애들이 당신 한산 리씬 걸 몰라 줄까 봐 그러오? 쳇, 지금 충청도나 서울엔 여기보다 일본 놈들이 더 욱실거린다오. 거기 가 살겠으면 살아보우.”    성희는 독기어린 영감의 눈길을 피하더니 굽은 허리를 쭉 펴면서 기준과 창준에게 손으로 삿대질 했다.   “너거(너네), 내 눈에 흙 들어가기 전엔 다신 만주로 간단 말 하지 마! 만주에 가 아내를 되놈들에게 빼앗기려고 기래? 애들도 몽땅 되놈 색시 얻으려고 기래? 안 된다. 안 돼!”    무두들 한숨을 땅이 꺼지게 쉬였다.   한참 납덩이처럼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이거 총 도감이 아닌가? 길닦이는 하잖고 여기서 뭘 하는가?”   바위돌 틈새에서 기어 나왔나. 능구렁이 같은 한길수가 야마모도 소장과 함께 일본 헌병들과 자위대 놈들을 끌고 이 깊은 야산에까지 나타날 줄이야.   “여기서 뭘 해?”   병완은 너럭바위에서 일어나 손바닥의 먼지를 툭툭 쳤다.   “입에 풀칠이나 하자고 메밀을 심네.”   야마모도 소장이 안경을 벗어 안경알을 수건으로 닦아 다시 눈에 걸었다.   “으흠, 조선 사람 말이 아냐. 산에 나무를 심지 않고 자꾸 곡식 심어?”   뒤이어 야마모도는 손사래를 쳐댔다.   “안 돼, 안 돼. 몽땅 나무를 심어야 돼!”   그러자 괭이자루를 꽉 틀어쥔 병완의 소발쪽 같은 손이 부르르 떨렸다. 생각 같아서는 괭이로 야마모도 놈을 콱 찍어 죽이고 싶었다.  그러나 애들의 장래를 봐서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는 용케도 참아 냈다.   “당신 말대로 밭에 나무를 다 심구 그래 우리 굶어 죽으래? 되지도 않을 소릴 하지도 말라.”   기준은 옆에서 황소숨을 몰아쉬더니 참지 못하고 마구 욕설을 퍼부었다.   “여긴 내 고향이야. 네깐 일본 놈들이 뭔데 내 고향 땅에 메밀마저 심지 못하게 하느냐?!”   류강철이 그 말을 통역해주자 야마모도는 군도를 뽑아들고 기준한테 달려들었다.   “바새끼! 죽어, 죽었소까!”   기준은 병완의 손에서 괭이를 빼앗아 쥐고 날아드는 군도를 막아냈다.   “그만 둿!”   이때 등 뒤에서 고함소리가 들렸다. 모두 머리를 돌려보니 끼무라가 경찰들을 데리고 나타났다. 기준과 야마모도는 괭이와 군도를 거두었다.   끼무라는 군도자루를 잡고 헐금씨금 병완의 앞에 다가왔다.   “총도감, 근심하지 말게나. 여기에 메밀을 심어 먹었소. 길만 잘 닦으면 돼.”   그러나 병완은 오히려 오만상을 찡그렸다.   (내 굶어 죽어도 네 놈들 쌀을 먹을 것 같으냐?)   교활한 끼무라는 야마모도 소장을 책망하는 척 했다.   “자넨, 림장이나 잘 지키라고. 하필 총도감이 묵밭을 일구는 걸 가지고 시비할건 뭔가? 빨랑빨랑 림장에 가.”   이번엔 몸뚱이를 한길수에게 돌렸다.   “한 대장, 자꾸 총도감과 이러지 말게나. 둘이 힘을 합쳐 대일본 제국의 일을 많이많이 도우란 말이야.”   “하이!”   한길수가 일본 말로 대답하면서 군례까지 척 붙이었다.   병완은 구역질이 나 침을 “퉤!” 뱉었다.   “원, 더러워서 못살겠어.”   병완은 떠나가 버리는 일본 놈들과 발발이 같은 한길수 뒤에 대고 줄 욕을 퍼부었다.   “흥! 나를 우습게 보는구나. 총 도감? 길만 다 닦으면 헌 신짝 버리듯 할 게 뻔하다. 쳇, 저 놈들이 보기 싫어서 만주국에 가버려야겠다.”   성희는 병완을 말리였다.   “만주에 간다고 잘 살 것 같아요? 전번에 본가 집에 가보니 서울이나 충청도 한산은 몽땅 일본 놈들의 세상으로 됐더구먼요. 오랍동생이 말하던데요. 우리 고향 마을에서 만주로 간 사람들이 그러더라나요. 만주에선 만족과 되놈 강도들이 여편네를 마구 빼앗아 간다던데요. 괜히 만주로 가서…”    병원은 단마디로 노친의 말을 잘라버리었다.   “됐소, 됐어. 물론 여기서 저 놈들의 비위를 맞춰 주면 그럭저럭 살 수는 있소. 그러나 만주의 개나 돼지처럼 살지언정 일본 놈들의 총 도감이나 하면서 살진 못하겠소.”   병완은 얼굴을 기준에게 돌리었다.   “기준아, 내 먼저 만주로 들어가 어떤가 두루 돌아보고 오마.”   기준은 말려 나섰다.   “아버지, 내 들어가 보겠습꾸마. 아무래도 여기 고향에서 살 것 같지 못합꾸마. 아버지가 한길수를 외눈깔을 만들어놨지. 이태 전에 내 또 영팔과 승만을 때려눕히지 않았습둥? 저 놈들은 우릴 눈에 든 가시처럼 여기면서 자꾸 걸고들어 못살게 굴게 뻔합꾸마.”   병완은 한참 먼 남산을 쳐다보면서 묵묵히 고민하더니 머리를 힘없이 끄덕였다.   갑자기 성희는 바위 돌 사이에 폴싹 물앉더니 엉엉 대성통곡 쳤다.   “만주에라고 일본 놈들이 없겠느냐? 전번에 고향에 갔다가 들었는데 간도 용드레촌에도 일본 놈들이 득실거린다더라.”   그래도 병완은 고집을 부렸다.     “일본 놈들이 만주 산골에까지 갔겠소? 일본 놈들이 없는 산골에 가서 땅굴을 파고 살면 그 놈들인들 어쩐대?”    말이 쉽지 고향 땅을 버리고 이국의 낯선 타향에 가서 어떻게 살겠는지 기약이 없었다.   모두들 맥이 풀려 더 일하지 못하고 성희를 부축해 괭이를 메고 메밀 씨 함지랑 이고 안고 집으로 내려갔다.     소 잔등 같은 바위돌들만이 엉거주춤들 물러 앉아 한숨을 풀풀 쉬면서, 멀어져가는 불쌍한 주인들을 바래고 있었다. 바위돌들은 하늘을   하염없이 쳐다보며 뭐라고 두덜거리었다. 농사군들의 배불리 먹으려는 그 소박한 소망마저 짓밟는 오랑캐들을 증오해 하늘을 쳐다보며 공소하고 있는 건가?
394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49) 힘장사 삼형제 댓글:  조회:527  추천:0  2024-05-27
  김장혁 작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     제1권  제6장 포수대                     8. 힘장사 삼형제           일제의 쇠발굽 아래에서 신음하는 땅에도 봄은 찾아왔다.      겨우내 모진 추위를 이겨낸 풀싹들이 파릇파릇 움텄다. 강인한 진달래는 가혹한 눈풍설에도 뼈 아픈 인내력으로 엄동설한을 벋텨냈다.  연분홍 진달래는 잔설이 뒤덮인 바위 틈새로  어여쁜 연분홍 얼굴을 반쯤 내밀고 혹시 섬나라 오랑캐들이 오지나 않았나 해 여기저기 눈치를 살핀다. 진달래 꽃잎새로 무지막지한 바람에 슬픔이 스치고 지나가며 애처로운 아리랑을 부른다.     경찰국 사무청사 공지에서 인부들은 기둥을 세울 원목을 목도로 메여 날라 왔다. 그때 한 아름이나 되는 원목은 누구도 목도를 하려고 나설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때 키가 훤칠하고 어깨가 떡 벌어진 한 중년사나이가 나섰다.     “원삼아, 우리 삼형제 메자.”     “양, 형님.”     모두 어깨가 떡 벌어진 사내들이였다.     “기준아, 우리도 함께 메자.”    그때 병완도 기준을 불렀다.     원삼이라는 사내대장부가 웃통을 벗어버리고 용이 꿈틀거리는 것 같이 울뚝불뚝한 팔로 한 아름이나 되는 원목 한쪽머리를 건뜻 쳐들었다.     “와- 천하에 둘도 없는 힘장사로구나.”     모두들 저도 몰래 감탄했다.     병완과 기준, 창준이 장대기로 들린 원목 대가리를 떠받쳤다. 그러자 나머지 사내들이 목도를 틈 사이에 제꺽 들이밀어 넣었다. 뒤이어 그들 여섯이 세 곳에서 그 한 아름이나 되는 원목을 목도를 해 기초돌 쪽으로 “허기영차” “허기영차” 절주 맞게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메여갔다.     그들은 한번도 허리 쉼을 하지 않고 “허기영차” “허기영차” 단숨에 메여갔다.     장사들의 모습에 끼무라마저 입을 딱 벌렸다.    원삼이라는 사나이가 목도채를 내려놓으면서  병완에게 물었다.    “우리 알고 지내깁소. 들을나니 총도감은 영월동에서 왔다던데 혹시 성칠 힘장사의 아버지가 아닙둥?”    병완은 그들과 일일이 악수하면서 물었다.    “맞소. 당신들은 어데서 왔소?”    원삼은 병완의 손을 굳게 잡아 흔들면서 일일이 소개했다.    “우린 경성군 주을 면에서 온 삼형젭니다.”    그는 나이 제일 많은 사나이를 가리키면서 “이분은 내 큰형님 리춘삼입니다.” 하고 이쪽 키 좀 작은 사나이를 가리켰다.    “이분은 둘째형 리인삼입니다. 난 셋째 리원삼이고 막내 무삼은 집에 있습니다.”    병완은 그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눈 후 창준과 기준을 불러 일일이 인사시켰다.    병완은 원삼의 삼형제를 둘러보면서 인사말을 했다.    “이전에 성칠이 사냥하러 갔다가 신세 진 얘기를 합데. 성칠의 은인들을 이렇게 만날 줄은 정말 몰랐소. 우리 생사고락을 함께 하기요.”     원삼은 사람 좋게 웃었다.     “호한은 천하를 자기 집으로 생각한다는데 고만한 거야 뭐.”     병완은 “사람이 어려울 때 밥 한술이라도 도와 준 게 잊어지지 않지.” 하고 말했다.    원삼은 병완과 함께 원목 위에 나란히 앉아 궁금한 것을 물었다.    “성칠 형님은 어째 공지에 나오지 않았습니까?”    그러자 병완은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더니 성칠에게 그간 있은 일을 죽 이야기했다.    이때 끼무라 국장이 군도자루를 잡고 이쪽으로 다가왔다.    “아니, 원목 한 개를 메 오고 한식경이나 앉아 쉬는가? 언제 사무 청사를 다 짓겠는가?”    “에이유, 저 놈들이 보기 싫어서 어디 살겠소?”    원삼은 엉덩이를 툭툭 털고 일어나면서 어깨를 들썩거리며 저목장 쪽으로 떠나갔다.    끼무라 국장은 한길수를 데리고 와서 인부들을 쉴 새도 없이 공지에 마구 내몰았다.     끼무라는 인부들의 밭이 묵어가고 농사가 망가지는 것은 뒷전이고 경찰국 사무청사 건축에만 신경을 쓰면서 날마다 밤낮 숱한 헌병들을 파견해 공지를 지키게 해놓고서도 시름이 놓이지 않아 공지에 나와 직접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차질이 없는가를 살폈다.    “총 도감, 가을 전에 사무 청사를 다 지을 수 있소?”    병완은 한발 나서면서  대답했다.    “가을이면 새 청사에 들도록 하겠습니다. 이젠 지붕틀까지 다 짜 놓아서 너무 근심할 필요 없습구마.”      끼무라 국장은 머리를 끄덕이고 나서 코 수염을 슬슬 어루만지었다.    끼무라 눈치를 슬슬 살펴보던 병완은 슬쩍 이런 말을 꺼냈다.    “이젠 목수들의 일만 남았소다. 농번기에 인부들을 더러 집으로 돌려보내 밭갈이도 하게 돌려보내도 됩니다.”    끼무라 국장은 병완에게 낯을 돌리면서 “그래도 되겠는가?” 하고 물었다.    “예.”   그때 한길수가 외눈깔을 부라리면서 꽥 소리쳤다.    “관둬. 어떻게 데려온 인부들인데 돌려보내?!”   병완은 자기 얼굴에 대고 삿대질하는 한길수의 손을 탁 쳐버리면서 맞고함을 쳤다.    “인부들을 내 데려왔지. 네가 데려왔냐?!”    “가마골 인부들은 나와 영팔이 억지로 끌어온 거야.”    병완은 한길수의 외눈깔통에 대고 손가락질하면서 고함쳤다.    “그럼 가마골의 인부들만 여기에 남기고. 나머지 인부들은 집에 보내면 돼.”    한길수는 외눈깔을 무섭게 부릅떴다.    “그래, 네 아들놈부터 집에 보내 농사짓게 해라. 안 그래도 네놈들 삼부자가 눈에 거슬린다.”    병완은 한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았다.   “공지 총도감은 내야. 니 가라면 가구 가지 말라면 가지 않을 거 같은가?”    옆에서 류강철의 통역을 들은 끼무라 국장이 하얀 장갑을 낀 손을 흔들며 말리였다.    “에이, 됐네, 됐어. 분공대로 공지 일은 병완 총도감이 하라는 대로 하게. 한 대장은 공지보호만 잘하면 돼. 병완 총도감, 조용히 할 말이 있네.”    한길수는 병완을 흘겨보고는 영팔이랑 데리고 저쪽으로 휭- 하니 가버렸다.    끼무라 국장은 기둥을 세울 기초 돌을 둘러보면서 병완에게 물었다.    “총도감, 이젠 기둥을 세우고 지붕틀을 올려야 되겠구먼.”    병완은 솔직하게 말했다.   “예, 그래야 합지. 지붕틀을 올리려면 기준이나 원삼이네 사형제 같은 힘장사들만 남기고 나머지 웅진에서 온 약골 백승만이랑 쓸데 없습니다. 품삯이 아깝지 않습둥?”    끼무라 국장은 머리를 끄덕였다.    “그것도 그렇군. 그러나 백승만이만은 여기에 남겨둬야 하겠네. 저 사람은 웅진 부근의 한다하는 우두머리네.”    (우리 짐작이 맞았구나. 승만 놈은 확실히 끼무라 놈이 박아놓은 밀정이야. 개놈새끼.)    병완은 끼무라를 뒤따라 뚜벅뚜벅 걸으면서 말했다.    “그런데 난 일본식으로 지은 적이 없어 근심됩구마. 아마 조선식으로 지어야 할 것 같습구마.”    “어험, 거 말인가?”    끼무라는 병완을 힐끔 곁눈질해 보더니 너스레를 떨었다.    “건 이 땅에 우리 대일본 제국의 자존심을 세우려는 거네. 꼭 일본식으로 지어야네.”   (개놈들, 내 고향에 뭐 네 놈들의 자존심을 세워? 흥, 내 그 놈의 자존심을 개 좆대가리 부러지듯 꺽어놓아야지.)    병완은 일본식 경찰국 사무 청사를 짓는데 파악이 없어 기초 돌에 앉아 왼손으로 머리를 붙안고 고민했다.    기준은 옆에 와 털썩 주저앉으면서 귀속 말을 두런두런 했다.    “아버지, 잘 됐습구마. 오래 견디는 조선식 방틀 집을 지을게 있습둥? 일본식으로 아무래나 져 놓고 가버립시다. 쾅 무너졌으면 속이 시원하겠습구마. 흥!”     병완은 주위를 두루 살펴본 후 기준에게 머리를 돌렸다.    “아냐. 우리 만주로 떠나가기 전까지는 이놈 청사가 서 있어야 돼.”     기준은 긴 한숨을 후- 내쉬었다.    한참 후 기준은 흙을 한줌 쥐여 줴뿌리면서 말했다.    “일본식이든 조선식이든 간에 무슨 관계있습둥? 저놈들이 지으라는 대로 아무래나 꽝 무너지게 지어놓고 가깁소.”    병완은 기준의 훤한 이마를 마주 보더니 머리를 끄덕였다.    이때 끼무라가 군도자루를 잡고 웬 얄팍하게 생긴 자를 데리고 이쪽으로 다가왔다.    그 바람에 병완은 기준에게 일어나 가라고 고개 짓을 했다.    “에헴, 총도감 수고하네. 이젠 근심하지 않아도 되겠소.”    그는 몸을 돌려 뒤따라온 말라꽹이를 돌아보더니 뒤 말을 이었다.    “자, 소개해주지. 일본식 건축 설계사오.”   병완이 인사하자 그 자는 손을 내밀었다. 병완은 억지로 손을 내밀었다가 말라꽹이의 차가운 손이 싫어 인차 놓아버렸다.    끼무라 국장은 그자를 보고 가방 안에서 커다란 종이 한 장 꺼내놓게 했다.     “이보게, 이건 경찰국 사무청사 설계도요. 이대로 지으면 되오.”     보아하니 2층으로 된 집이였다.     “끼 국장님, 난 이제껏 단층집을 지었지 2층짜리 집을 지은 적이 없습니다.”    류강철이 통역하자 끼무라는 도리머리 질 했다.    “당신은 그저 이대로 지으면 되오. 설계사는 총 도감에게 설계도를 설명해주게나.”    일본 설계사는 반나절이나 구조에 대해 설명하고 짓는 방법까지 일일이 알려주었다.     이튿날부터 병완은 기준이네 형제와 원삼이네 사형제를 불렀다.     “우리 여기서 만난 것두 운명인 것 같소. 우리 의형제로 지내는 게 어떻소?”      병완의 말에 원삼은 천근 무게도 들듯이 힘줄이 불뚝불뚝한 팔을 휘휘 저으면서 병완을 따라 성큼성큼 걸었다.     “좋습구마. 성칠 장사의 아버지는 우리 윗벌이니까 양아버지처럼 모시고 우리 사형제와 성칠 형님, 그리고 기준형님과 의형제로 보내깁소.”     병완은 믿음에 차 원삼의 어깨를 툭툭 쳤다.     원삼은 병완을 바라보며 말했다.     “총도감을 처음 봤을 때 힘깨나 쓰니까. 혹시 성칠 양반의 아버지가 아닌가 했습구마.”    병완은 원삼의 시원시원한 성격이 마음에 들어 어깨를 툭툭 쳤다.    "자네들은 무슨 리씬가? 혹시 리씨왕조 전주 리씨 아닌가?"    “아니, 우린 공주 리씹구마."    "그래? 공주 리씨들은 무두 힘깨나 쓴다더니 정말이구먼. 어떻게 돼 이 먼데까지 인부로 왔소?”    그 물음에 원삼은 황소숨을 몰아쉬었다.    “별수 있습둥? 산골에서 사냥이나 하구 살았는데 일본 사람들은 이젠 사냥도 하지 못한다꾸마. 게다가 지주는 소작료를 8할씩이나 받아먹지. 그런 소작농사두 밭이 있어야 해먹지. 일본사람들이 밭에다 적송을 심으랍꾸마. 이젠 뭘 먹고 삽둥? 그런데 저 승만이란 놈이 우리 고향까지 와서 삯전을 푼푼히 준다면서 인부를 모집하지 않겠습둥.”     “음, 어디나 다 한가지구먼.”    병완은 속으로 승만이 정말 일본 놈을 단단히 등에 업은 밀정 놈이라는 것을 새삼스레 느꼈다.    어느날, 경찰국 사무 청사 기틀이 선 것을 보자 끼무라 국장은 기뻐서 입이 함박만큼 벌어졌다. 그는 원삼이네 3형제한테 엄지를 내둘렀다.     한길수는 끼무라 국장을 보고 두덜거렸다.     “쳇, 끼 국장님께선 그래 정말 병완 놈을 나보다도 더 믿구 중용하겠니까? 그것도 모자라서 원삼까지 넘보는 겁니까? 그 놈들은 속에 비수를 품은 자들입니다요.”     끼무라는 코 수염을 어루만지면서 간사한 웃음 띤 눈길로 한길수를 쏘아보았다.      “한 대장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몰라. 그래 병완을 믿는다고 봐? 흥, 이 놈아, 저 놈들이 경찰국 사무 청사만 다 지으면 후환을 없애야겠다. 저 놈은 이 지방을 쥐락펴락할 놈이야. 성칠을 붙잡는 날이면 일거에 저 악당들을 몽땅 처단해버려야지. 내버려둬선 절대 안 돼. 우리 대일본제국이 이 지방에 뿌리를 박는데 큰 후환거리로 될 거야.”      그제야 한길수는 실눈을 지은 외눈깔에 배시시 웃음기가 새어났다.     온 몸에 힘을 얻은 한길수는 피 눈이 돼 병완의 꼬리를 밟으려고 미쳐 날뛰었다.     어느 날 이른 아침, 한길수는 영팔을 데리고 갓 세워놓은 기둥들과 가름대로 갓 얹어놓은 대들보를 일일이 검사했다.       그때로부터 또 두 달이 지났다. 경찰국 사무청사가 일떠섰다. 1층은 조선식 방틀집이고 2층은 일본식 판자집으로 돼 진짜 짜구배 집 같았다.         무더운 여름이 가고 서늘한 가을에 갓 들어섰다. 우시장과 명천을 둘러선 치마봉과 기운봉에 울긋불긋 단풍이 들었다.   경찰국 사무 청사는 보기에는 그럴듯했다. 건뜻 쳐들린 추녀, 아름드리 기둥과 대들보, 초대형지붕틀…     끼무라 국장은 2층으로 된 새 경찰국 사무 청사를 보면서 입이 함박만 해졌다. 그는 군도자루를 잡고 나까노라 헌병소대장과 림산파출소 소장에 갓 복직시킨 야마모도소장, 야마다 면장, 헌병 분대장 가메다, 그리고 조선 졸개들인 자위대장 한길수, 자위대 중대장 영팔과 수길, 경찰 허꺽쇠, 똘만 등을 거느리고 새 경찰국 사무 청사에 들어갔다. 서른 간도 넘는 경찰국 사무 청사를 일일이 돌아본 끼무라 국장 일행은 2층에 올라 우시장시내를 내려다보다 멀리 보이는 울긋불긋 단풍이 들기 시작한 남산을 쳐다보더니 만족한 웃음을 지었다.     한길수는 이 경사로운 새집들이잔치에 끼무라 국장이 병완과 삼부자와 원삼 삼형제를 부르지 않은 것을 보고 깨고소했다.     (그럼 그렇겠지. 아무렴 우리 끼무라 국장님이 저 놈들을 더 믿어? 어림도 없지. 흐흐흐.)    끼무라는 2층 난간에 뚱뚱한 배를 대고 옆에 선 한길수를 돌아보면서 말했다.    “병완이를 우시장으로부터 회령까지 통하는 길닦이공지 우시장 구역 총 도감으로 내몰게나.”    그 말에 한길수는 외눈깔이 뒤로 번져 질 지경이었다.    “또 총도감입둥?”    끼무라 국장은 눈귀로 한길수를 내리 흘겨보면서 중얼거렸다.    “그래, 아직 성칠을 잡지 못하였네. 알만한가?”    “예~ 허허허. 그물을 넓게 쳐서 큰 고기를 잡아야죠. 거 참 묘한 수입니다. 또 하마터면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를 번했습니다.”    한길수는 우멍한 외눈깔을 데굴거리면서 손으로 뒷덜미를 긁적거렸다.    병완은 진작 끼무라 국장 놈의 속심을 빤히 들여다 본데다가 일본 놈들의 믿음 따위나 칭찬 따위를 바라지 않았으므로 별로 개의치 않았다. 다만 한 달 채 주지 않은 인부들의 삯전이 근심스러웠고 개 코처럼 우뚝 솟은 경찰국 사무 청사가 계획대로 나무벌레들에게 무너지지 않을까봐 손바닥에 땀을 그러쥐고 근심할 뿐이었다.     이때 한길수가 2층에서 내려오더니 외눈깔에 득의양양한 빛을 띤 채 다가왔다.    “병완이, 내일부터 인부들을 데리고 길닦이에 나가게나. 끼 국장께서 자넬 길닦이 총 도감으로 중용한다네. 참, 좋겠다. 에헴.”     그러자 병완은 침을 탁 뱉었다.     “가서 전하게나. 한 달 삯전을 빨리 내달라고. 삯전을 주기 전엔 길닦이에 나가지 않겠네.”    “닥쳐!”    끼무라 국장이 군도자루를 잡고 2층에서 내려와 인부들 앞에 오더니 군도를 쓱 뽑아들고 돼지 멱따는 소리로 고함쳤다.     “대일본 제국의 길을 닦으라는데 무슨 삯전소릴?! 누가 감이 안 나가?! 몽땅 죽여치우겠다!”    병완 삼부자와 원삼 삼형제는 끼무라 국장이 빼든 서슬 푸른 군도를 쏘아보면서 주먹을 으스러지게 틀어쥐고 부르르 떨었다.    여기저기에서 땅이 꺼질 듯 한숨소리가 났다.    퍼렇게 딩딩한 가을하늘이 둥근 천정처럼 이 땅덩어리를 칭칭 둘러 감았다. 산기슭에 자리 잡은 공지의 가을하늘은 넓었지만 끼무라의 서슬 푸른 군도아래 찜통 속처럼 숨이 막힐 듯이 좁고 갑갑했다.     을씨년스럽게 불어오는 가을바람에 낙엽이 우수수 떨어졌다. 멀리 바라보이는 산 봉오리들은 변덕스러운 조화를 부리는 비구름 속에 숨박꼭질을 하듯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사라졌다가는 다시 나타나군 했다. 길닦이에 끌려 나갈 원삼 삼형제를 비롯한 인부들은 머리를 숙이고 투덜거리면서 긴 한숨만 내쉴 뿐이었다.     (고향 산골에 심어 놓은 감자가 멧돼지들이 다 파먹겠는데 어쩌는가? 길닦이에 발목을 잡혀서. 원 일본 놈들의 성화에 어떻게 살아가겠는가?)    원삼은 어둑어둑해지는 저 멀리 동북쪽의 고향 쪽의 검푸른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에서 날아지나가는 기러기 떼들의 애처로운 울음소리가 쓸쓸하게 들리어왔다. 기러기들도 인부들의 가긍한 신세를 동정이나 하는듯이 구슬프게 울면서 줄지어 날아 지나갔다.           저자의 말:              이제까지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 제1권을 마지막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제2권을 실어드리도록 약속하겠습니다. 기대하세요. 
393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48) 성동격서 댓글:  조회:550  추천:0  2024-05-27
     김장혁 작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          제6장 포수대          7. 성동격서          병완은 쌩쌩 휘몰아치는 눈보라를 무릅쓰고 온 오전 걸어서야 운주동에 이르렀다.    병완이 집에 들어서자 기준의 부부는 기뻐 어쩔 줄 몰라 했다.     “아이고, 아버님, 돌아왔습둥?”     “ 시아버님, 그새 감방에서 얼마나 고생했겠습둥?”    기준 부부는 병완을 위방에 모시고 넙적 절을 올렸다.    그때 고방에서 성희와 하옥이 나왔다.    “이게 웬 일이요? 어떻게 돼 여기 있소?”    성희가 허리를 펴면서  대답했다.    “그간 무사했어요? 일본 놈들의 등살에 견디지 못해 하는 거 보고 둘째아들이 데려왔어요.”     “음, 그러나 저러나 넷째손자를 안아보자."    최사련은 갓 난지 반년도 되지 않는 상순을 고방에서 안아 내오고 저녁 준비하러 부엌으로 내려갔다.    “어이유, 이 놈, 딱 제 애비를 닮았구나. 얼굴이 길쭉한 게 참 잘 생겼구나. 아~그, 딱.”    병완은 손자가 고와서 안아보고 싶었지만 금방 바깥에서 들어온 찬 몸에 닿아 감기에 걸릴 까봐 그저 들여다보기만 했다.    한참 후 몸이 녹은 후 병완은 넷째손자 상순을 안고 볼에 뽀뽀를 했다.    상우는 웃새 집으로 기별하러 달려갔다.    그새 병완은 성희에게서 성칠과 집식구들이 그새 일본 놈들에게 당한 봉변을 대충 들었다.    “성칠은 검둥이 귀에다 쪽지를 보내 왔더군요. 뭐 고향 마을 사람들과 함께 사냥을 하면서 무사하다고 하지 않았겠어요.”    “사냥해도 범죄라고 잡아가니까요. 이젠 어떻게 살아요? 호-”    병완도 천정을 쳐다보면서 천정이 날아나게 한숨을 후- 내쉬었다.    이때 기별을 받은 창준 부부가 자손들을 데리고 들어와 일일이 인사를 나누었다.    병완은 벽에 기대 앉으면서 기준이 말아주는 담배를 입에 물었다.    “일본 놈들은 정말 교활한 놈들이야. 나를 이용해 경찰국 사무 청사를 짓자는 게지. 눈깔이 뽑힌 길수가 쓸모없게 됐다고 여긴 것도 있고.”    직통배기 기준이가 툭 내쏘았다.    “누가 그 놈들의 둥지를 지어준다오?”    병완은 창준이가 부시를 쳐서 부쳐주는 담배를 한껏 빨아 연기를 후~ 길게 내뿜더니 말했다.    “그 놈들이 삯전을 준다 해도 짓지 않겠니?”   기준은 울뚝 밸을 썼다.   “그 놈들 얼림 수에 들 거 같소? 쳇, 목을 매 끌어가도 공지에 가지 않겠소.”    병완은 그저 마른기침을 하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저녁을 대충 들고 밤이 깊어 창준이랑 떠나간 후 병완은 기준만 불러 조용히 위방에서 귀속말을 했다.    “면회하러 왔을 때 이전에 내가 말한 말이 기억나니?”    기준은 한참 궁리하더니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나무옹이와 벌레 말씀입둥?”    “응.”    “예, 벌레 있는 통나무로 경찰국 사무 청사를 지으면 몇 해 가지 못해 무너지고 말겁니다. 중심대들보에 쐐기를 하나 박아주든지.”    병완은 머리를 끄덕였다.    “그래, 일본 놈들이 곱다고 사무 청사를 지어주겠느냐? 그 놈들은 사무 청사를 다 짓기 전까지 마을 사람들을 들볶을 게 아니냐? 성칠은 분명 진달래사돈이랑 영솔하는 독립군과 연계있는 거야. 성칠처럼 총을 들고 맞서 싸우는 것도 좋아. 또 일본 놈을 도와 사무 청사를 지어주는 척 하면서 무너지게 만드는 것도 상책이 아니겠느냐? 으흠.”    밤이 깊도록 위방에서는 두런두런 주고받는 말소리가 가담가담 들리었다. 그러나 누구도 그들 부자가 무슨 말을 주고받는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위방에서 등잔불까지 끄고 병완은 셋째아들 기준에게 귀속 말을 계속 했다.    “가을 쯤에 경찰국을 다 짓는 날엔 네가 먼저 만주에 가 봐라. 감방에서 수감자들에게서 들었는데 만주에는 묵밭도 많고 기장밥에 장국을 먹으면서 잘 살수 있다더라. 지나가는 나그네에게도 찰밥에 장국을 대접시킨다고 하더라.”    “나도 우시장이나 명천 장마당에서 그런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활 팽개치고 몽땅 만주에 가서 살깁소.”    안주인들은 그 소리에 숨이 한 줌만 해졌다.    “나도 감방에서 그렇게 생각했다. 한길수의 눈알을 뽑아놓아서 일본 놈들은 나를 눈에 든 가시처럼 여겨. 총 도감을 시킨 건 날 이용해 사무 청사를 지으려는데 지나지 않아. 경찰국 사무 청사를 다 지으면 그 놈들은 나를 죽일지도 모른다. 게다가 성칠이 독립군과 연계 있다고 잡아 죽이자고 미쳐 날뛰고 있지 않느냐. 이 고향에서 살긴 다 틀렸어. 후— 이 일을 어쩜 좋겠느냐?”     “알았습구마. 내 이미 나무벌레를 자귀질하면서 가득 붙들어서 치워 놓았습구마.”    “잘 했다. 밤도 깊었으니 가서 자라. 내일부터 다시 마을 사람들을 동원해 공지로 가자. 벌레를 대들보에 넣는 건 우리 부자간이 비밀리에 하자.”    “예. 알았습니다. 편안히 쉽소.”    미닫이문이 쓰르륵 쓰르륵 닫는 소리가 들리면서 기준이가 고방으로 들어갔다.    빼앗긴 들에도 봄이 왔다. 여기저기 잔설들이 남아있었지만 자연스레 계절이 바뀌면서 찾아온 따뜻한 봄기운을 어찌 할 수 없었다. 여기저기 산에서 종달새가 “지종”, “지종” 애처롭게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우시장 경찰국 사무 청사 공지는 사면에서 일본 헌병들과 자위대 놈들이 총칼을 빼들고 삼엄하게 지키는 바람에 자못 삼엄한 분위기 속에 잠겨있었다. 공지 뒤쪽 산꼭대기 망루에서 철갑모와 털모자를 쓴 일본 헌병들과 자위대 대원들이 서슬 푸른 총칼을 들고 왔다 갔다 하며 보초를 서고 있었고 산중턱 벽돌로 쌓은 보루에 기관총까지 걸어놓고 독립군의 습격을 막으려고 시도했다. 삼엄한 경계를 밟으며 숱한 인부들이 개미떼처럼 바글거리면서 일하고 있었다.    병완이 삯전을 가져다 마을 사람들에게 나눠 준데다 사냥하면 일본 놈들이 잡아 가두는 바람에 숱한 마을 사람들이 공지로 다시 몰려왔던 것이다.    일을 다시 시작한 후 끼무라 국장은 직접 공지를 자주 드나들면서 살폈다.    이른 아침인데 저 둔덕 아래서 오토바이 몇대가 먼지를 보얗게 일구면서 부릉부릉 달려왔다.    끼무라 국장이 통역 류강철과 한길수 대장 그리고 몇몇 졸개들을 데리고 오토바이 몇 대에 갈라 앉아 달려왔다.     오토바이에서 내리자 끼무라 국장은 군도자루를 왼손으로 잡고 독기어린 눈으로 주위를 쓱 둘러보더니 곧추 병완 등이 한창 지붕틀을 짜는 목수 간 앞으로 다가왔다.    병완은 쐐기를 박을 구멍을 파다가 멈추고 끼무라 국장에게 눈인사를 했다.    끼무라 국장은 다가와 흰 장갑까지 벗고 병완에게 손을 내밀었다.   “김 총도감, 수고 많네. 보라니깐. 내가 사람 보는 눈만은 있지. 당신이 총 도감을 맡으니까 인부들이 모여들고 일이 척척 돼가지 않는가! 허허허.”    끼무라 국장은 넉가래 같은 병완의 손을 잡아 흔들면서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옆에서 류강철이 통역하자 뒤따라온 길수는 입에 다발을 세 개나 걸 지경으로 불만스러워 했다.   (쳇, 병완을 믿다가 이제 한지에 방아를 걸지 않나 두고 봐라.)   그런데 끼무라 국장은 계속 병완과 지껄여댔다. “김총도감이 경찰국 사무 청사를 짓느라고 수고 많은데 우시장에 기와집 한 채를 마련해 줄까? 여기 우시장에 와서 살 생각은 없는가?”     병완은 짐짓 미소까지 지으면서 대답했다.    “끼무라 국장, 호의는 감사합구마. 난 시골 눔이 돼 영월동 시골이 좋단 말입구마.”   “허허허.”   끼무라 국장은 너털웃음을 웃더니 머리를 길수 쪽으로 되돌렸다.   “김총도감은 한대장과는 판판 달랐쏘까. 한대장은 시내에 오니 기생집이 가까워 입이 함박만 해졌는데.  자넨 진짜 땅을 밟고 하늘을 떠인 사내대장부야. 호한은 여색을 멀리 하는 법이야. 허허허.”    한길수는 눈을 흘기면서 두덜거렸다.    “흥, 녀자라면 오금을 못쓰다가두. 검정개 돼지 흉을 한다고 해라?  ”   끼무라는 그 두덜거리는 소리가 무슨 뜻인지 알아들을 리 만무했다.   뒤이어 그는 코 수염을 손으로 쓱 문질렀다.    “올해 가을에 새 경찰국 사무 청사에 들게 해주게나. 늦어도 명년 봄 안에는 새집들이를 하게 말이네.”    류강철이 통역하자 그때라고 생각한 병완은 끼무라 국장을 마주 보면서 시원히 대답했다.   “끼무라 국장, 경찰국 사무 청사는 올 가을 전에 다 끝낼 테니까. 근심하지 마오. 그런데 한 가지 청 들 일이 있소.”    류강철이 통역해주자 끼무라 국장은 “요로씨이(좋아). 무슨 요구?” 하고 한걸음 다가섰다.    병완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기준과 창준을 비롯한 여러 목수들이 대패질과 자귀질을 하는 것을 둘러보고 나서 끼무라의 오른팔을 잡고 한쪽으로 가서 조용히 말했다.    “내 맏아들 성칠을 풀어 줍소. 그 애가 사냥을 한 것뿐인데 독립군으로 몰아 죽일 셈입니까?”    “뭐? 성칠이?!”    끼무라 국장의 눈이 갑자기 떼꾼해졌다.    “안 돼! 그 놈을 잡으러 갔다가 우리 헌병대원들이 수태 죽었쏘다. 성칠이, 독립군과 이거네.”   끼무라는 엄지와 식지를 붙였다 뗐다 해 보였다.    “그 앤 아무 죄도 없습구마. 독립군인지 뭔지 아직도 모르고 이날 이때까지 살아왔단 말이요. 그날 독립군이 왔는지 어쨌는지 모르지만 그 애와 아무런 상관이 없소이다.”    “안 돼! 성칠만은 안 된단 말이야!”    한길수는 깨 고소해하는 눈길로 병완을 쏘아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밸 같아선 병완을 개화장으로 단매에 쳐눕히고 싶었다. 그러나 끼무라 앞인지라 용 빼는 수 없어 속을 끙끙 앓았다.   병완은 그 눈치를 모를 리 없었다. 그러나 그는 끼무라한테 다가서면서 기를 쓰고 성칠을 구하려고 청을 들었다.    “끼 국장님, 내가 어쩌다가 청을 드는데 요만한 것도 안 되오? 내 맏아들을 용서해줍소. 예?”   그러나 끼무라는 딱 잡아뗐다.   “안 돼! 그 놈을 생각하면 자네도 용서할 수 없어. 조선에는 한 놈이 역적의 죄를 지으면 구족을 멸한다는 말이 있잖은가! 성칠이 그 놈이 지은 죄는 절대 용서할 수 없어. 자넨 우리 경찰국 사무 청사를 짓는데 없어서는 안 될 목수이고 총 도감이기에 용서해 준거니까 그만하게. 괜히 내 생각이 바뀌게 하지 말게나.”    병완은 안 되겠다 싶어 한숨을 땅이 꺼지게 후— 내쉬었다.   한길수는 멀찍이 서서 우멍 눈을 가슴츠레 뜨고 끼무라 국장과 병완이가 쑤군거리는 것을 아니꼽게 곁눈질해보았다.   뒤이어 한길수는 영팔의 팔을 잡고 한쪽으로 가서 쑤군거렸다.    “영팔이, 저 병완에게 딱 붙어 다니면서 지붕틀을 제대로 짜나 감시하게나. 좋기는 한사람을 목수무리 속에 잠입시켜 암암리에 감시하게 해라.”    그러자 영팔은 머리를 끄덕였다.    한길수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병완의 꼬리를 잡아 내동댕이치고 싶었다. 그래야만이 일본군 속에서 자기 권위를 수호할 것만 같았다. 병완이 끼무라 국장의 신임을 얻는다면 자기 자리를 빼앗길 것만 같은 위기감이 들었던 것이다.     목수 간에서는 병완과 기준, 창준을 비롯해 목수 일여덟이 부지런히 지붕틀을 짜고 있었다. 그때 영팔은 그들 사이로 왔다 갔다 하면서 힐끔힐끔 감시하고 있었다.     요즘 낯선 목수 하나 목수간에 들어왔는데 꽤나 까다로웠다. 병완이가 시키는 일은 하지 않고 힐끔힐끔 병완만 살피는 눈치 같았다.     병완은 그자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기준과 창준에게 눈짓했다.    한참 일하고 나서 병완은 뒷간으로 가는 척 하면서 기준에게 뒤쪽을 머리짓 했다.     병완은 뒷간에 가서 대변을 보는 척 하면서  조용히 귀속 말을 했다.     “아무래도 새로 온 목수란 자가 한길수 끄나불인 거 같아. 운주동 사람도 아니고, 신흥동이나 가마골 사람도 아니잖니? 어떻게 하나 그 놈들의 눈을 피해 나무벌레를 지붕틀 중심에 넣어야겠는데. 그 놈이 걸리는구나.”    기준은 머리를 끄덕였다.    한참 후 기준이 수를 내놓았다.    “아버지, 내 그 놈 끄나불과 걸고들어 싸우면서 그 놈들의 눈길을 돌리는 틈에 손을 쓰면 어떻습둥?”    “오, 그게 참 묘수구나.”     그들 부자는 영팔의 의심을 살까 봐 인차 뒷간에서 나왔다. 그런데 뜻밖에도 영팔이 벽 밑에서 이쪽을 흘끔거리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저 놈이 저게!”    기준은 주먹을 으스러지게 틀어쥐었다.    병완은 기준의 팔소매를 슬쩍 쥐어 당기며 말리였다.     그들이 목수 간으로 들어가는데 영팔이 뒤에서 불평스레 투덜거렸다.     “변소간에 한시에 둘씩이나 가다니. 흥! 그러구서야 언제 경찰국을 다 짓겠는가?”    새로 온 목수가 또 힐끔거리면서 그들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때라고 기준은 그 자한테로 다가갔다.    “당신은 어디서 왔소?”   그 목수는 힐끔 병완을 쳐다본 후 눈을 내리깔면서 대충 대답했다.   “웅진에서 왔소."   "오- 그래? 어째 웅진에서 본적이 없는데."    그 자는 허구픈 웃음을 지었다.    "웅진에서 이 백승만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소.”    “어데서 듣던 이름인데.”    병완이 피뜩 보니 웬 곱사등이였다.    순간 병완은 기준과 눈길을 마주쳤다.    쉼에 병완은 기준과 창준을 불러 바깥에 나갔다.    “승만이란 자는  웅진 길 어귀 도둑놈이야. 이전에 성칠에게 혼난 적이 있어."    기준은 양미간을 찌푸리면서 “저 놈이 어떻게 돼 여기까지 왔을까?” 하고 의문스러워 했다.    창준은 수재답게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추측했다.    “분명 한길수가 끌어들인 밀정입니다. 우리를 힐끔힐끔 감시하고 있잖습둥?”     “한길수는 도둑놈들이나 강도패거리들을 다 끌어들여 일본 놈의 개를 만들고 있어.”    병완은 기준과 창준에게 뭐라고 귀띔해주었다.    다음 쉼에 기준이가 한창 지붕틀에 구멍을 뺄 때였다.    승만이가 대충 자귀질하는 척 하면서 기준을 힐끔힐끔 곁눈질했다.    그러자 기준이가 끌을 쥔 채 고함쳤다.     “네 놈은 어데서 굴러온 놈인데 일은 하지 않고 눈깔만 힐끔거려?”    “뭐라고?”    “네가 감히 대들 테냐?”    기준은 두 마디 안짝에 그 자의 멱살을 거머쥐고 주먹으로 눈통을 쳤다. 곱사등이 승만은 눈 통을 싸쥐고 오만상을 찡그리다가 마구 주먹질을 해댔다.    그가 어찌 기준의 상대가 되겠는가!    기준이 승만에게 한발 안기자 저쪽 기초구덩이에 뿌리어나가 보기 좋게 나부라졌다.    둘이 맞붙어 싸우자 숱한 목수들이 그리로 욱 쓸어갔다. 영팔과 수길은 승만과 합세하려고 그쪽으로 뛰어갔다. 그들 둘은 말리척하면서 기준의 양팔을 붙잡았지만 기준의 발길질은 멈추지 않았다. 결과 승만은 낯이 쥐마당이 되게 얻어맞았다.     순간 병완과 창준은 톱밥 속에 감춰 둔 나무벌레를 파냈다. 기준이가 영팔까지 쳐 눕힐 때 그들 둘은 지붕틀의 중간 구멍마다에 나무벌레를 걷어 넣고 애교를 바른 쐐기까지 슬쩍 박아 넣었다.    이때 한길수는 자위대원과 헌병 대여섯을 데리고 달려왔다. 병완과 창준은 그 놈들이 밀고 닥치면서 싸움을 말리는 것을 곁눈질해보면서 또 대여섯 개 지붕틀 중간에 벌레를 집어넣고 쐐기를 박아 넣었다. 실로 눈 깜짝 할 새에 일을 끝냈다.    병완과 기준, 창준은 며칠 전에 미리 벌레가 있는 원목을 슬 슬 톱질해 노란 나무벌레를 나오는 족족 영팔이 패거리들의 눈을 피해 슬슬 집어 톱밥 속에 감춰 두었던 것이다.     애교를 바른 쐐기는 한식경 지나자 딱 들어붙어서 다시 뽑자고 하여도 뽑을 수 없게 굳어져 버렸다. 그때쯤 되어 기준이 쪽의 싸움질도 여럿이 뜯어 말리는 바람에 끝나갔다.    기준은 병완이 네가 지붕틀에서 손을 떼는 눈치를 채고 주먹의 먼지를 탁탁 털며 을러멨다.    “이 놈새끼, 일하지 않았다간 죽여 버리겠다.”     백승만은 눈통이 닭 알만큼 부어올라 참말 꼴불견이었다.    목수들이나 인부들은 속이 시원해 했다.    “개자식, 눈깔을 힐끔거리면서 우릴 살피더니 쌍 통 했다. 히히.”    “눈깔이 터졌으니 이젠 밑구멍으로 우릴 살핀다니? 흥.”    “허허허.”    “하하하.”    “저 놈이 우시장 천하장수 병완도 몰라본 모양이지?”    “글쎄 말이야. 하룻 강아지 범 무서운 줄도 모른다더니 명천 울뚝이도 모르구 덤벼? 쳇!”    “그러게 말이야.”    병완은 인부들이 주고받는 말을 들으면서 창준과 기준을 바라보더니 만족한 듯이 머리를 끄덕이며 씨무룩이 웃었다.    한길수도 끼무라 국장의 부탁이 있는지라 기준을 어쩌지 못하고 외눈깔로 쏘아볼 뿐이었다.    끼무라는 도리어 기준의 어깨를 툭툭 치면서 책망인지 치하인지 분간하지 못할 말을 했다.    “자식, 꽤나 주먹질을 잘하던데. 쳇, 자네 부자간은 사람을 치면 눈 통부터 잘 치는구먼. 그 애비에 그 아들놈이야.”     “하하하”    끼무라가 뭐라고 지껄이는 걸 알아듣지 못한 기준은 주먹을 으스러지게 쥐고 부르르 떨며 부릅뜬 눈으로 영팔과 곱사등이 승만을 쏘아보았다.     (개놈새끼들, 몽땅 외눈깔을 만들어놓고 말리라. 퉤!)    기준은 더러워서 영팔이 쪽에 가래를 탁 뱉고 나서 씩씩 거렸다. 영팔은 옆구리에 찬 권총집에 손을 댔다 뗐다 하면서 단방에 기준을 쏴 죽이지 못하는 것을 한스러워 했다. 그러나 끼무라의 눈치를 슬슬 보면서 끝내 손을 쓰지 못했다 .      병완이 눈짓하자 기준은 지붕틀을 돌아보더니 목수 간 쪽으로 휭 하니 가버렸다.    저쪽에서 뻐꾹새가 처량하게 울고 있었다.    뻐꾹-    뻐꾹-
392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47) 끼무라 국장 댓글:  조회:439  추천:0  2024-05-27
6. 끼무라 국장              우시장 공포가 넘치는 경찰국 사무실.        끼무라 국장은눈깔을 부릅뜨고 책상을 탕탕 치면서 노발대발했다.        “ 빠가요로!!”      끼무라는 이발을 사려물고 야마모도의 낯빤대기를 찰싹찰싹 갈기며 욕설을 퍼부었다.     "하잇!"     “하잇!”      야마모도 소장은 이마와 팔을 허연 붕대로 감은 채 발뒤꿈치를 딱 붙이고 얻어맞으면서도 머리를 푹푹 숙였다.    한길수는 외눈깔로 영팔과 수길을 둘러보다가 머리를 숙였다.    끼무라 국장은 의자에서 일어나 왼손으로 군도자루를 잡고 거들먹거리면서 다가왔다.    “저목장이 다 불타버렸어. 통나무를 어디 가서 얻어다 경찰국 사무청사를 짓는단 말인가?! 한무리 밥통!”    끼무라 국장은 독기어린 눈길로 야마모도소장을 쏘아보면서 욕설을 퍼부었다.    “야마모도 소장은 왜 저목장 경비를 허술히 했어? 당장 림산파출소 소장을 철직한다. 대신 오늘부터 가메다 경관이 잠시 삼림경비를 책임지라!”    “하이!”    (이게 웬 떡이냐? 복이 넝쿨 채로 떨어졌잖아. 으흐흐, 흐흐) 털 한 모숨은  입이 함박만 해 끼무라 국장에게 군례를 척 붙였다.    끼무라 국장은 한길수를 내려다보면서 빈정거렸다.    “천하의 한길수도 이젠 늙었구먼. 병완에게 당해 외눈깔 신세로 되다니? 흥! 페물짝!”   한길수는 이를 뻑뻑 갈았다.    “우리 집에 불이 난건 분명 독립군과 사냥대 놈들이 한 짓입니다. 끼 국장님, 아니, 끼무라 국장님, 원수를 갚게 해주십시오.”    끼무라 국장은 오른손으로 한길수의 어깨를 다독여주었다.    “한 대장, 참 안 됐네. 자네에게 원수를 갚을 기회를 주겠네. 난 오늘 자네를 자위대 부대장으로부터 대장으로 승급시키겠네. 우리 헌병대를 도와 성칠이랑 사냥대 놈들을 몽땅 잡아오게나.”    끼무라 국장은 허리춤에서 권총을 쑥 뽑아 친히 한길수에게 내밀었다.    “총을 쏘는 방법은 류 통역이 배워 주게나.”    한길수는 어깨가 으쓱해서 연신 허리를 굽혔다.   “옛! 목숨을 바쳐 대일본제국을 위해 싸우겠습니다.”    끼무라 국장은 선심을 쓰는 척 했다.    “한대장, 자넨 이젠 영월동에서 발을 붙이기 힘들어. 아예 우시장에 이사해 사오. 조용한 골목에 기와집 서너 채를 마련해놓았네. 집 부근에 응삼과 영팔, 수길의 집도 마련해놓았어. 근심하지 말게.”    “감사합니다. 끼 국장, 아, 끼무라 국장님!”    한길수는 아예 마루에 넙적 꿇어 엎드리더니 끼무라의 발끝을 핥을 상을 하면서 연신 절까지 했다. 응삼과 영팔, 수길까지 한길수를 따라 마루에 꿇어 엎드려 절을 올렸다.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목숨 바쳐 천왕페하께 충성을 바치겠습구마."    “에헴.”   끼무라는 건 가래를 떼더니 두 손으로 한길수를 일으켜 세우면서 음충한 눈길로 외눈깔을 들여다보았다.    “당신 집에 쓰빠라씨이 무스메(예쁜 처녀애)를 데리구 왔지?”   한길수는 외눈깔로 힐끔 끼무라의 눈치를 훔쳐보았다.    "은녀란 계집애 말입니까? 데려 오구 말구요. 당장 가져다 바칩죠. 헤헤헤.”     “아주 예쁜 계집이야. 자네 집에 두고 살게나.”   한길수는 그제야 한숨을 후 내쉬었다.   (은녀를 빼가려는가 했더니, 괜히 놀랐구나.)   순간 한길수는 끼무라 국장이 아주 우러러보였다.   (정말 진심으로 모실 분이야.)   끼무라는 바로 이 순간을 위해 모든 것을 내려 놓은 것이다.   한길수는 끼무라 국장에게 계책을 올렸다.   “성칠의 동생 기준과 창준이란 놈들이 상우남면 운주동에 왔습니다. 성칠이란 놈은 꼭 운주동에 찾아 올겁니다. 그때 납작 나포하면 됩니다.”    제 딴에는 좋은 계책을 드렸는가 하였는데 끼무라 국장은 도리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이에(아니오). 이이에(아니오). 건 모르는 소리야.”   모두 의아한 눈길을 끼무라 국장에게 보냈다.   그때 끼무라 국장이 사무 상에 돌아가 의자에 앉더니 천천히 두툼한 입술을 뗐다.   “곰곰이 생각해 봤소까. 한대장이 눈을 잃었어. 저목장과 한길수 대장 집이 불타버렸네. 이 모든 게 뭘 말해주는가. 알고 보면 아주 간단해. 우직한 놈들을 핍박할수록 그 놈들은 반항한단 말이야?”   류강철은 옆에서 그 말을 마구 보태 통역하였다.   “조선 속담에 ‘막다른 골목에 이른 개가 담장을 뛰어넘는다.’고 하지 않았는가.”   일본 헌병대 놈들은 모두 머리를 끄덕였다. 여기저기서 수군거리면서 의논하다가 끼무라 국장의 칼날 같은 시선을 맞자 조용해졌다.    한참 자기 말을 터득하도록 침묵을 지키면서 부하들을 바라보던 끼무라 국장이 흡족한 표정을 지으면서 사무 상을 똑똑똑 두드렸다.    “보라고. 한 대장이 품삯을 주지 않는다고 병완은 한 대장의 눈알을 뽑아 놓았어. 병완을 가뒀다고 성칠 일당이 저목장을 불태웠고 한길수 집에 불을 질렀네. 분명 그 놈들이 반항한 거야.”    모두들 머리를 끄덕이면서 수군거렸다. 그러나 한길수만은 속이 앙알했다.    (종놈을 부려도 유분수지. 일본 경찰국 사무 청사를 지으면서 날 보고 삯전을 대라니. 그간 적잖게 사재를 털어 품삯을 줬건만 또 욕지거리군.)    정말 자위대 대장자리를 주었으니 그렇지. 한길수는 억울해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이때 끼무라 국장이 또 입을 열었다.    “난 병완을 풀어주고 공지 총 도감을 맡기겠네.”    “우와~”    모두들 뜻밖의 결정에 놀라 소스라쳤다.    한길수는 입이 함박만큼 딱 벌리고 우멍눈을 가슴츠레 뜬 채 끼무라를 의아한 눈길로 쳐다보았다.    수길과 영팔은 한길수의 불쾌해하는 우멍눈을 보고 입을 딱 다물었다.    한길수는 한참만에야 겨우 입을 열었다.     “아니, 그 놈을 풀어줘도 그런데. 총도감까지 맡기다니? 제 정신 있습둥? 우리를 뜨는 놈 말입니다. 놔주선 안됩구마. 안되구 말구. 그 말씀만은 거둡소.”    그러나 끼무라 국장은 이미 결단을 내렸다.    “이건 명령이야. 감히 거역해!”    그는 사무상을 꽝 쳤다.    끼무라는 군도자루를 힘있게 잡고 한길수를 쏘아보았다. 코밑 수염마저 푸들거렸다.    “하나 밖에 모르고 둘은 모르는 놈들. 이 명천과 우시장 바닥에서 병완을 모르고 사는가? 그 놈에게 필마옹 벼슬이라도 줘서 슬슬 얼려야 해. 그래야 경찰국 사무 청사가 여름이면 덩실하게 일떠설게 아닌가? 또 한 가지 있어. 병완을 내놓으면 성칠이랑 경계심이 허술해지면서 영월동이나 운주동에 찾아올게 아닌가? 이게 바로 그물을 널리 쳐서 큰 고기를 잡는 거야. 알만한가?”      그제야 한길수는 머리를 끄덕이었다.     그는 외눈깔이 뒤집힐 정도로 떼꾼해 끼무라를 쳐다보았다. 뒤이어 사무 상에 돌아가 앉는 끼무라를 뒤따라가면서 볼 부은 소리를 했다.    “그럼 난 뭘 하랍니까?” 하고     “자넨, 경찰국 사무 청사 공지일은 그만두고 이제 봄부터 닦을 큰 길 공지 총 도감을 맡게. 자넨 이젠 어깨가 무겁게 됐네. 총도감 보다도 자위대 대장을 잘하게나. 어느 놈이 대일본제국을 반대하면 그런 놈들을 몽땅 잡아드리게나. 우선 성칠 놈부터 한 달 내에 잡아오란 말이야.”    끼무라의 독기어린 음험한 눈길을 피하면서 한길수는 허리를 굽혔다.    “옛!”    한길수는 속으로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겉으로는 명령을 거역할 수 없었다.   끼무라는 가메다와 한길수를 쏘아보았다.    “감방에 가서 병완 영감을 데려오게!”    감방에서 갖은 고생을 다한 병완은 구레나룻이 더부룩했다. 한길수를 보자 그의 눈에 불티가 이글거렸다.    “죽이겠으면 단매에 쳐 죽일 거지. 작작 능욕해라.”    그러자 한길수는 외눈깔로 흘겨보면서 욕지거리를 해댔다.    “네 놈을 그리 쉽게 죽게 할 거 같니? 실컷 부려먹고 죽여도 늦지 않아!”    병완은 감방 문설주를 짚고 서서 물었다.    “도대체 어쩌자는 거냐?”     한길수는 휙 돌아서면서 볼 부은 소리를 했다.    “끼무라 국장에게 가보면 알 거다. 흥!”    병완은 한길수의 코 방귀 소리를 들으면서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이 놈들이 무슨 짓인들 못하겠느냐. 죽는 거 외에 다른 일이 더 있겠냐.)    병완이 가메다와 한길수를 따라 경찰국장 사무실로 갔다.    뜻밖에 끼무라 국장이 복도에까지 나와 기다리다가 반색을 하면서 마중할 줄이야.    “병완이, 감옥에서 얼마나 고생했겠는가. 어서 안으로 들게나.”    류강철의 통역을 듣고 병완은 자기 귀를 의심할 정도이었다.    병완은 코웃음쳤다.    끼무라는 의자를 손으로 가리키었다.    “병완이, 여기 앉게나.”    그는 병완의 옆에 나란히 앉았다.    병완이 둘러보니 이전과는 달리 심문할 헌병도 보이지 않고 가메다와 한길수 밖에 없었다.    “에헴, 병완이, 당신은 우시장의 천하장수네. 자네야 말로 우리 우시장의 이거야!”    끼무라는 두 손으로 주먹과 엄지를 병완의 앞에 쳐들어보였다.    그 말에 병완은 피씩 코웃음을 쳤다. 순간 한길수는 코 방귀를 뀌었다.    “길수, 이건 자네들의 격투에서 이미 결론이 났네.”   길수는 더는 참을 수 없었다.   “국장님, 전번에 내가 그만 골 박이를 한다는 게 나무옹이를 들이박아 상한게지. 결코 저 놈이 천하제일주먹이 돼서 그런 건 아닙니다.”    끼무라는 두 팔을 장의자에 걸치어 놓으면서 웃었다.    “에이, 사람이 옹졸하기로서니. 참,  자네가 날린 골박이를 살짝 피한다는 건 권투고수고서야 할 수 있는 재간이야.”    끼무라는 한길수를 내리깎고 병완을 잔뜩 춰 올렸다.    뒤이어 그는 병완이 쪽으로 몸을 반쯤 돌리면서 무겁게 입을 뗐다.    “병완이, 한 가지 상의할 일이 있네. 자네에게 품삯은 배로 줄 테니까. 우리 경찰국 사무 청사 짓는 공지의 총 도감을 맡게나. 부총 도감으로부터 총 도감으로 승급시킨 거네.”     끼무라 국장이 뒷말을 이었다.    “한길수 영감은 자위대 대장으로 승급시켰네. 김총도감은 올해 안으로 2층 경찰국 사무 청사를 지어주게나. 이전에 3층을 짓자고 했는데 무린 것 같아. 안전도 고려해야 해야겠고 저목장이 타버려서 목재도 당분간 그렇게 많이 마련할 것 같지 못하네. 올 겨울 전에 새 경찰국 사무청사에 드는 날엔 자네에게 자위대 부대장쯤 시킬 예산이네. 어떤가?”     갑자기 들이닥친 뜻밖의 제안에 병완은 어리둥절해졌다.    한참 후 병완은 볼 부은 소리로 말했다.    “총도감을 할 수 없소. 전번에 숱한 마을 사람들을 불러 왔다가 괜히 삯전도 주지 못해서 죄송해 죽겠소. 이젠 마을 사람들이 내 말을 듣지도 않을 게요.”    끼무라 국장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이전에 한총도감을 보고 삯전을 주라고 했는데 주지 못해 미안하네. 이번엔 꼭 줄 테야. 근심하지 말고 총 도감을 맡게나.”    한참이나 궁리하던 병완이 무거운 입을 뗐다.    “군자 협의를 하깁소. 경찰국에서 책임지고 날마다 삯전을 딱딱 결산해 준다는 계약서를 쓰오. 삯전을 주지 않으면 인부들은 집에 돌아가서 농사를 지을 수 있다고.”      끼무라 국장은 의자에서 일어나 사무 상으로 돌아가 의자에 앉아 병완을 곁눈질하면서 한참이나 궁리하다가 쇠 덩이 같은 침묵을 깨뜨렸다.    “계약서를 쓰지. 허나 날마다 삯전을 준다는 건 시끄러운 일이네. 달마다 삯전을 한 번씩 결산해 주기로 하게나. 난 한길수 영감과 자네를 우시장에서 내 두 팔로 생각하네. 잘 하면 일본 대제국은 당신들에게 최고무상의 권력과 부유를 줄 것이요. 어서 인부들을 빨리 되불러 오오. 눈이 녹기 전에 목재를 베 오고 봄이 돌아오면 토목공사를 시작하잔 말이요.”     끼무라는 병완이가 제기한 품삯 계약서를 쓱쓱 써서 병완에게 주었다. 분명 끼무라의 친필 계약서에는 우시장 경찰국장 끼무라의 이름이 씌어 있었고 경찰국 도장과 끼무라의 손지장도 찍혀 있었다.     병완은 계약서를 둬번이나 찬찬히 들여다본 후에야 머리를 끄덕이었다.     “계약을 꼭 지키오. 그러잖으면 이후에 콩으로 메주를 쓴다고 해도 인부들은 말을 듣지 않으니까.”    병완은 뜻밖에도 선선히 대답하는 것이었다. 끼무라와 길수는 그 이상할 만치 선선한 대답에 자기들의 귀를 의심할 정도였다.    (권세욕과 탐욕 앞에선 누구나 용빼는 수가 없지.)    끼무라는 득의양양해 미리 준비한 동전을 몇 십 개를 책상 우에 달랑 꺼내놓았다.    “병완 총도감, 이전에 일한 삯전이네. 당신이 먹고 나머지를 나눠주면서 공지에 불러오게나.”   병완은 자기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양이 쥐 생각하는군.)   병완은 동전을 거들떠도 보지 않으면서 투정질을 했다.   “고까짓 걸로 턱도 안 되우.”   끼무라 국장은 옹졸한 마음을 드러냈다.    “그만해도 대단하지. 저목장이 다 타버려 목재 하나도 건지지 못하였는데 삯전은 무슨 삯전. 흥! 삯전을 주지 않아도 인부들을 붙잡아 일을 시킬 수 있어!”    “총 도감을 못 하겠소. 이담에도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삯전을 주지 않으면 우린 어데 가서 말한단 말이요?”    끼무라는 안 되겠는지 서랍에서 또 동전을 한줌 쥐여 내놓았다.    “먼저 가져가져다 나눠 주게나. 이후엔 꼭 줄 테니 근심하지 말게. 지금 경찰국에도 독립군을 방비할 무기를 들여오고 자위대를 묶어세우느라고 돈이 판 부족이란 말이요. 대일본 제국을 위해 잠시 경제난을 함께 극복합세.”     한길수는 끼무라 국장이 자기보다 병완을 더 대단히 여기는데 여간 불쾌하지 않았다.     (내 눈을 상했다고 감히 페물짝 취급해? 이젠 병완을 진짜 중용할 속심인가? 일본 놈들은 개새끼야. 믿지 못할 개새끼들이야.)    길수는 질투심이 나서 두덜거렸다.    “삯전만 저렇게 척척 내놓으면 나도 총 도감을 잘 할 수 있습구마. 흥! 젠장, 인부들이 반항을 해 볼만 하구나.”    그 소리에 병완은 쓴 웃음을 지었다. 류강철은 그 두덜거리는 소리만은 통역해주지 않았다.    그러나 교활한 끼무라는 한길수의 속을 꿰뚫어 볼대로 보았기에 그 두덜거리는 소리가 대개 무슨 뜻이란 걸 알아듣고도 남음이 있었다.    이렇든 저렇든 병완은 삯전 주머니를 들고 경찰국 문을 나섰다.    그는 삯전주머니를 든 손을 부르르 떨었다. 밸 같으면 쥐어 던지고 가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품삯 한 푼도 받지 못하고 쌀 고생을 할 마을 사람들을 생각하자 밸을 눅잦히고 마을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이젠 봄이 다가오려나. 눈보라가 휘몰아치는데도 날씨는 그리 춥지 않았다. 아마 병완은 마을 사람들에게 적으나마 삯전을 줄 수 있어 그랬던지 추운 줄도 모르고 씨엉씨엉 걸었다.     병완은 가슴 속에서 일루의 희망이 신기루처럼 솟아오로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그것이 안개 속에서 꿈틀거리는 유혹이건만, 일시나마 마을 사람들에게 밀린 삯전을 조금이라도 나눠 줄 수 있어 생기는 기쁨이리라.    그의 가슴 속에서는 총도감을 하는 편리를 리용해 경찰국 사무청사를 무너뜨리려는 교묘한 계획이 무르익고 있었다.
391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46) 저목장을 습격 댓글:  조회:490  추천:0  2024-05-19
         김장혁 작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            제6장 포수대          5. 저목장을 습격        성칠은 눈보라가 윙윙 사납게 휘몰아치는 영월동 서쪽 수림까지 도착하자  무시무시한 공포가 도사리고 있는 고향 마을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하염없는 근심걱정이 부모형제들한테로 휘몰려가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한참 후 그는 진달래를 찾았다.    “아무래도 엄마와 처가 근심되는구나. 헌데 내 집에 가본다는 건 풀 섶을 지고 불구덩이에 뛰어드는 격이지. 온종일 궁리했는데 검둥이를 또 보내야겠다.”     진달래는 머리를 끄덕이면서 영월동쪽을 내려다보았다.    성칠은 쪽지를 개 귀구멍에 끼워 넣었고 개 잔등에 이리고기덩이 두개를 매달았다.    성칠은 개 대가리를 쓰다듬으면서 사람에게 말하듯이 일러주었다.    “검둥아, 집에 가서 꼬리를 흔들면서 어머님께 기별해라.”    “끼깅~”    검둥이는 꼬리를 휘청거리다가 수림 속을 떠나 영월동 쪽으로 씽 달려갔다.    룡천은 마을에서 온 사냥꾼들에게 조용히 말했다.    “칠백과 동욱은 사냥한 이리 고기를 마을 사람들에게 나눠줘라. 식량난으로 헤매는 마을사람들에게 사냥하는 길만이 살 길이라는 걸 알려줘야 해.”    모두들 머리를 끄덕였다.    진달래가 덧붙였다.    “금방 검둥이를 보냈지만 시름이 놓이지 않는군요.”   칠백은 성칠을 돌아보면서 말했다.    “내 아내를 시켜 형님네 집에 가서 큰엄마하구 아주머님을 보고 기준형님네 집에 가라고 전하겠소.”    성칠은 칠백의 어깨를 힘 있게 움켜쥐며 머리를 끄덕였다.    며칠 후에 칠백은 철규, 룡철, 룡구 동욱까지 데리고 산속으로 들어왔다. 일본 놈들의 총알을 먹고 죽을까봐 무서워서 사냥을 하지 못하겠다던 그들이 아닌가. 그들도 사냥을 해야만 살 길이 있다는 것을 피부로 느꼈기 때문이다.    최동욱이 포수대에 들어온 데는 피눈물 나는 사연이 있었다.    그의 처 박경돈은 앓는 몸이었지만 아주 자색이 예뻤다. 진작 눈독을 들이고 있던 야마모도 소장 놈이 음충한 눈길로 그녀를 노리고 있으리라고는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다.     어느날 오전, 야마모도는 마을의 서쪽산림을 돌다가 갈증이 나서 마을로 내려왔다. 그는 마을의 서쪽으로 첫 집인 동욱의 집을 보는 순간 아래배로부터 찡 하고 뻗는 정욕을 내리누를 길이 없었다.    그는 먼발치에서 한참이나 동욱이 있는가 집 안을 기웃기웃 살피다가 스적스적 다가갔다.     (어째 집안이 조용하지? 동욱의 처마저 없으면 어쩐다?)    그가 마른 침을 꼴깍 넘기면서 다가가 동욱의 집 안을 들여다보니 동욱은 보이지 않고 동욱의 처만 구들을 쓸고 있지 않겠는가? 검정치마 아래 드러난 새하얀 종아리와 수척해진 하얀 복숭아얼굴을 보는 순간 야마모도소장은 온 몸의 혈관에서 끓어 넘치는 정욕을 참지 못하면서 집안에 성큼 들어섰다.    “아니, 깜짝이야!”    최동욱의 아내가 구들을 쓸던 빗자루를 쥔 채 놀란 눈길로 야마모도를 쏘아보았다.    “에헴, 목이 말라. 냉수나 한바가지 주게나.”    야마모도는 마른기침을 하면서 목 단추부터 벗겼다.    동욱의 처는 빗자루를 놓고 물독에 가서 냉수 한바가지를 펐다. 그녀는 한손으로 바가지 밑굽에 흘러 떨어지는 물방울을 닦으면서 정주간 바닥에 선 야마모도 소장에게 주었다.     야마모도는 물바가지를 받아 냉수를 꿀떡꿀떡 마셔버렸다. 그는 왼손으로 입술에 묻은 물을 쓱 닦더니 집안을 흘끔흘끔 살피면서 지껄여댔다.     “으흠, 동욱이, 어데 갔소까?”    동욱의 처는 두 손을 마주 비비면서 바깥을 내다보았다.    “땔나무 하러 산으로 갔어요. 이제 곧 올거요.”    “땔나무? 그랬소까?"    그 놈은 야수의 눈빛을 번뜩였다.    "산의 나무를 마구 찍었쏘까? 안 되지. 허나 이 야마모도 소장이 이렇게 눈을 감아 보이면 일 없쏘다.”    야마모도 소장은 눈을 질끈 감아 보이면서 지껄였다.   그는 물바가지를 동욱의 처 앞에 내밀었다. 그는 물바가지를 받으려는 동욱의 처의 손을 잡아 확 나꿔챘다.    “왜 이래요? 소리칠래요.”    “그래, 소리쳐 봐. 산에 간 동욱이 와? 알면 너 목을 칠게다.”    “이 손 놓으세요.”    동욱의 처는 손을 빼려고 해도 안 되자 야마모도의 손을 꽉 깨물었다.    “아이고, 요년 정 죽고 싶어?”   야마모도는 물린 손이 아파 오만상을 찡그리면서 동욱의 처 손을 놓아버렸다. 동욱의 처가 경계심을 늦추고 바가지를 쥐고 돌아서는 순간이었다. 야마모도는 동욱의 처 허리를 꽉 껴안고 구들바닥에 쓰러 눕히었다. 갑자기 일어난 일이라 동욱의 처가 아무리 기를 쓰고 일어나려고 해도 우악스러운 야마모도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녀가 아무리 바둑거리고 깨물어도 용빼는 수가 없었다. 야마모도는 동욱의 처를 깔고 들어앉아 치마 자락을 올리기 시작했다. 집안에서는 악을 딱딱 쓰는 그녀의 모지름 소리에 울음소리가 반죽돼 울려 퍼졌다…    동욱이 산에서 땔나무를 해 지고 집 울안에 들어섰을 때에는 야마모도에게 처가 당한 후였다. 야마모도는 군도를 거들거리면서 집 울안에서 나와 산 쪽으로 올라가고 있었고 집안에서는 처의 울음소리가 간간히 들리었다.    나무 짐을 활 벗어던지고 집안으로 뛰어 들어간 동욱은 구들바닥에 꿇어 앉아 흐터러진 머리카락을 훔치며 엉엉 우는 처를 보고 모든 것을 짐작했다.     “그놈새끼 대가리를 콱 찍어놔야지.”    성이 날대로 난 동욱이 씩씩 바쁜 숨을 몰아쉬면서 화닥닥 바깥에 뛰쳐나가 땔나무 짐에서 도끼를 뽑아들고 뒤쫓아나갔다. 그때 칠백 형이 마을동구 밖에까지 뒤 쫓아가 동욱의 손에서 도끼를 빼앗아냈다.    “웬 일이야?”    동욱은 칠백 형의 손을 마구 뿌리치면서 “이걸 놓소.” 하고 고함치면서 몸부림쳤다.    “에이, 씨, 저 놈을 죽이고 나도 죽자.”    동욱은 형에게 도끼를 빼앗긴 후 팔소매로 눈물을 쓱쓱 닦았다.   칠백은 집 안에서 울고 있던 제수를 보고 인차 눈치 챘다. 호리호리하게 생긴 동욱의 눈에서도 복수의 불길이 이글거렸다.    “원수는 꼭 갚아야 해. 허나 우리 둘의 힘으로는 안 돼! 성칠 형님을 따라 포수대에 들어가자. 한데 뭉쳐 야마모도와 개다리들까지 몽땅 죽여 버리자.”    후에 동욱이 집으로 와보니 글쎄 아내가 대들보에 목을 매고 둥둥 달려있지 않겠는가?    동욱은 경돈을 대들보에서 풀어 내리어 구들바닥에 내리워놓았다. 그런데 경돈은 이미 숨이 떨어졌었다.   동욱은 형과 함께 아내를 뒷산에 묻고 핍박에 의해 포수대에 들어왔던 것이다.    성칠은 동욱의 어깨를 다독이며 문안했다.    “아내를 잃어 얼마나 비통하겠느냐? 우린 꼭 원수를 갚아야 한다.”     동욱은 머리를 끄덕였다. 그는 이젠 눈물이 더는 나오지 않았다. 머리에는 복수심 밖에 없었다.    성칠은 그제야 한숨을 후~ 내쉬었다.    그는 영월동쪽의 밤장막이 드리운 칠흑 같은 밤하늘을 멍하니 바라보면서 한길수의 집에서 시종 질을 하는 은녀랑 득호랑 근심됐다.    후-    성칠은 눈 덮인 땅바닥이 꺼지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룡천이 불러서 진달래와 성칠은 조용한 수림 속에 갔다.    룡천은 눈보라가 아우성치는 밀림의 어둠 속에서 진달래와 성칠을 둘러보면서 말했다.    “우린 성칠 성님 말대로 사냥부터 해서 마을사람들의 인심을 얻었고 포수대를 묶어세웠소. 돌아오는 봄에 일본 놈들이 경찰국 사무 청사를 짓지 못하게 해야 하오. 이젠 기회를 보아 저목장을 불태워 버리기요.”    성칠이 찬동해 나섰다.    “저목장을 불태워 버리기요. 개 같은 놈들이 우리 고향에서 독사처럼 똬리를 틀고 들어앉아있게 할 순 없소.”    그러고 나서 뒤 말을 덧붙였다.    “마을사람들이 먹을 쌀을 해결하게 계속 사냥하면서 기회를 봐 저목장에 불을 지르기요. 저 한길수놈도 가만 놔둘 수 없소. 그 놈은     일본 놈들의 개다리란 말이요. ”    룡천은 좀 궁리하다가 “그렇게 하자이.”라고 결단을 내렸다.    그들 셋은 사냥꾼들과 유격대 대원들을 이끌고 백마를 타고 치마봉 쪽으로 전이했다.     원시림에서는 맵짠 산바람에 눈보라가 흩날리며 무서운 소리를 냈다. 여기저기에서 주린 산짐승들의 울음소리가 무섭게 들려왔다.    룡천과 진달래, 성칠은 한쪽에 가서 작전을 꾸몄다. 룡천이 독립군 대원 몇을 데리고 저목장의 일본 보초병 놈들을 해치우고 성칠이 칠백과 동욱을 데리고 저목장에 불을 지르며 진달래는 나머지 대원들과 사냥군들을 데리고 돌발사태에 대비해 엄호하고 접응하도록 했다.    진달래는 대원들과 사냥꾼들을 몇 개 소조로 나눠 삼면으로 저목장 주위 수림 속에 매복해 저목장과 영월동의 동정을 면밀히 주시하게 한 후 룡천한테로 갔다.    “왜 왔어?”    진달래는 주머니에서 조약돌을 꺼내 쳐들어 보였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저 놈에게 접근하기 힘들 거 같아서 왔어요.”     룡천은 머리를 끄덕였다.    칠백과 칠석, 상호 등은 먼저 가만히 마을에 내려가 이리 고기를 집에 가져다 두고 돌아왔다.    그들이 무사히 돌아 온 것을 보자 룡천과 진달래는 바우돌과 억복 등 몇몇 건장한 대원들을 데리고 하얀 보를 어깨에 매고 비수를 뽑아들고 수림 속에서 살금살금 저목장 대문 어귀에서 보초를 서는 일본 놈들에게 다가갔다.    수림에서는 눈보라가 기승스레 윙윙 휘몰아치는 소리가 들릴 뿐이었다. 하얀 보를 들쓴 대원들을 보초병 놈은 발견하지 못하고 총창을 비껴들고 철조망 바깥에서 왔다 갔다 했다.    일본 보초놈은 휘몰아치는 눈보라 소리에 수림까지 다가간 룡천 등을 발견하지 못했다.    룡천이 나무 뒤에 붙어 서서 손을 홱 저었다.    바우돌과 억복이 쏜살같이 보초병 놈에게 덮쳐들어갔다.    “누구야?!”    그제야 나무 뒤에서 덮쳐 나오는 그들을 발견한 보초병 놈이 총을 벗겨들며 소리쳤다.    “쉭-”    딱!    “억!”    보초병놈은 진달래가 먼발치에서 뿌린 돌에 이마빼기를 맞고 총을 떨어뜨렸다. 억복과 바우돌이 번개같이 달려들어 비수를 몇 번 번쩍이었다. 보초병 놈은 네각을 쭉 뻗어버린 채 바우돌에게 줄줄 끌리어 허연 수림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억복이 어느 새 일본 보초병 놈의 옷을 입고 철갑모를 쓰고 총칼을 들고 저목장 대문 어귀를 지켰다.    성칠은 칠백과 동욱을 데리고 미리 준비한 기름통들을 들고 어둑컴컴한 저목장 통나무 무지에 다가갔다. 그때까지 등잔불이 켜진 임산주재소 저목장 사무실에서는 아무런 동정도 없었다.    성칠과 칠백, 동욱은 저목장 통나무 세 개 무지들에 나뉘어 가서 통나무들에 기름을 치고 거의 동시에 불을 싸질렀다.    그들이 대문 어귀를 벗어날 때에야 불을 발견했는지 저목장 사무실에서 일본 놈들이 총창을 빼들고 뛰어나왔다.    룡천과 진달래는 독립군 병사들과 사냥군을 지휘해 사격을 가했다.    땅! 땅! 땅땅!    요란한 총소리와 함께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뛰어나온 일본 놈들이 보기 좋게 쓰러졌다.    일본 놈들도 저목장 사무실 벽에 기대서서 맞총질을 했다. 그새 저목장 통나무 무지에는 집채 같은 불길이 활활 타올랐다.    놈들은 뭐라고 꽥꽥 소리치면서도 번져가는 불을 끌 새 없었다.    진달래는 활활 타오르는 불길을 빌어 저목장 사무실 구새 목에 기대서서 꽥꽥 고함치는 지휘관 놈에게 돌멩이를 날렸다.    쒹-    딱!   “아이고, 이다이(아파)!”   야마모도 소장 놈은 이마빼기를 붙들고 구새에 기대섰다.   땅!   그때 성칠이 나무에 기대서서 사냥총으로 한방 갈겼다.   “어이쿠!”   야마모도 소장 놈은 이마를 놓고 다시 쳐들었던 군도마저 뚝 떨어뜨렸다.    동욱은 성칠의 손에서 사냥총을 빼앗아 야마모도 소장 놈에게 겨누었다.    땅!   총소리와 함께 거의 동시에 야마모도 소장 놈이 구새 목에 쓰러졌는지 엎드렸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 놈이 통나무 쪽으로 엉금엉금 기어가면서 고함치는 것이 보였다.    “저 놈 새끼를!”    최동욱은 사냥총에 장탄해 그쪽으로 겨누었다.   그때 룡천이 명령했다.    “철퇴!”    최동욱은 시야에서 벗어나는 야마모도 놈에게 사격했다.    땅!    허나 야마모도는 통나무 뒤에 몸을 숨긴 뒤였다.   성칠은 사냥총을 틀어쥐고 악을 쓰며 고함치는 동욱을 마구 끌고 수림 속으로 들어갔다.    “원수는 후에 갚아도 돼! 가자!”    “이번에 저 원수 놈을 죽여야 해!”    “가자!”    성칠과 칠백은 양쪽에서 동욱을 마구 끌고 수림속으로 깊숙이 들어가버렸다.   뒤에서는 삼단 같은 세찬 불길이 수림과 영월동을 환히 밝히면서 보기 좋게 활활 타 번지고 있었다. 공포에 찬 저목장 안에서는 죽어가는 섬나라 오랑캐들의 비명소리가 간간히 들려왔다. 왝왝 고함치는 소리도 섞여 밤하늘을 괴롭혔다.
390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45) 사냥군 댓글:  조회:455  추천:0  2024-05-19
   김장혁 작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        제6장 포수대                                   4. 사냥군           엄동설한은 새끼를 쳐서 대지에 한기를 내리뜨렸다. 그러나 독립군 대원들의 항일에 달아오른 가슴을 얼구지는 못했다.     진달래는 그날 밤에 바우돌을 데리고 불붙이에 있는 경인오빠한테 찾아갔다.    진달래가 밤중에 문을 두드리고 들어서자 경인은 놀랍기만 했다.    “아니, 얘, 어찌 이 추운 겨울에 왔느냐?”     진달래는 경인오빠와 형님 어금에게 인사를 드린 후 정주간에 앉았다.     어금은 부엌에 내려가 칼 모태에 감자를 돔박돔박 썰어 솥에 넣고 장국을 끓였다. 이윽고 솥에서 김이 쌕 빠져나오면서 구수한 감자장국 냄새가 좁은 방에 구수하게 풍기었다.    한참 경인에게서 그간 이야기를 들은 후 진달래는 비로소 경인도 버치를 결을 버들을 베다가 일본 놈들에게 당한 것을 알게 됐다.    진달래는 어금과 함께 제꺽 아침상을 갖춰 놓은 후 바깥의 바우돌도 불러들였다.    진달래는 아침을 들면서 단도직입적으로 경인에게 말했다.    “오빠, 일본 놈들의 성화에 어디 살겠어요? 우리 함께 일본 놈들을 사냥하면 어때요?”    경인은 진달래를 흘끔 내려다보면서 나지막이 말했다.    “무슨 힘으로 그 많은 일본 놈들을 사냥한다니?”    섬찍해 난 어금은 숟가락을 들다가 말고 신랑을 건너다보았다.    경인은 색시 어금의 눈치를 슬슬 보면서 도리머리 질 했다.    “삯전을 주지 않지 버치마저 결어 팔지 못하게 하니 어떻게 살겠냐?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살 구멍이 나지겠지.”    “일본 놈들을 몰아내지 않고서야 어찌 마음 편히 잘 살 수 있겠는가요?”    “말이 쉽지. 칼이나 사냥총 몇 자루로 어떻게 일본 놈들을 몰아내겠니? 서뿔리 일본 놈들에게 칼을 휘둘렀다가 부모형제들이 다 잘못되면 어쩌겠니? 아버지 말씀처럼 중용을 지키는 게 이 난리에는 제일이야.”    진달래는 한숨을 호 내쉬었다. 그녀는 격양된 목소리로 말했다.    “오빠는 검술이 출중하잖아요? 그 검술이면 얼마든지 일본 놈들의 목을 칠 수 있지 않아요. 사람마다 일떠나 몇 놈씩 잡으면 일본 놈들을 몽땅 쳐 죽일 수 있어요.”    경인은 손을 들어 손사래를 저었다.    “얘, 언성 좀 낮춰라. 요즘 영팔이랑 우리 집을 기웃거린다.”    그제야 진달래는 더 말해도 경인의 머리에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을 직감하였다. 그녀는 감자장국이나 몇 숟가락 뜨네 하며 바우돌이 배불리 먹기를 기다렸다. 진달래는 맛 나는 장국도 맛이 없어 숟가락을 밥상에 달랑 내려놓았다.    진달래는 바우돌을 데리고 경인이네 집 문 밖을 맥없이 나왔다. 그녀는 불붙이를 떠나면서 퍽 실망스러웠다.    성칠은 진달래에게서 조카사위 경인의 말을 듣고 한숨을 후- 쉬더니 진달래를 위안했다.    “사냥꾼들을 묶어세우는 일이 그렇게 식은 죽 먹기겠느냐? 천천히 방법을 대야겠다.”    진달래는 성칠을 믿음에 찬 눈길로 바라보았다.    이튿날 그들은 기운봉 기슭에서 룡천 중대장과 만났다. 룡천 중대장은 성칠과 진달래에게 우시장부근에서 사냥꾼으로 독립군 포수대를 조직할 임무를 맡기고 독립군 대원들과 함께 백마를 타고 장백산을 바라고 개마고원 쪽으로 출발했다.    성칠은 행동과 은신하는데 편리하게 하려고 진달래를 운주동 최구장의 집으로 가서 묵게 하고 혼자 사냥총을 쥐고 수림 속으로 들어갔다.    수림 속에서 성칠은 사냥하면서 어떤 방법으로 사냥꾼들을 묶어세우겠는가고 궁리했다.     토끼 꼬리만한 겨울해가 눈 덮인 서산의 수림 속으로 숨어버리고 영월동 서산에는 어둠의 장막이 내리 드리우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에서 굶은 이리들의 울음소리가 무섭게 들리었다.    성칠은 먼저 엄창렬의 집에 가서 상호를 만나려고 해싿. 상호는 명천 공지에서 도망쳐 집에 돌아왔던 것이다.  평소에 엄창렬 일가를 많이 도와왔기에 말하기 쉬울 것 같았다.    성칠은 사냥총을 들고 눈 덮인 사위를 둘러보았다. 숨이 막힐 듯이 고요했다. 쥐 죽은 듯이 고요한 어둠을 밟으면서 성칠은 슬금슬금 바자에 난 삽작문을 살짝 열었다.    문을 노크하려고 할 때 집 동쪽에서 인기척이 났다.    성칠이 삽작문 뒤에 붙어섰다. 그런데 찬찬히 여겨보니 바로 상호였다.   “상호야.”   “아니, 형님.”    “쉬—”   성칠은 입술에 손가락을 세로대면서 주위를 살폈다.   상호는 성칠의 팔소매를 잡아 집 쪽으로 끌었다.    “다른 식구들을 놀라게 할 게 없다.”    성칠은 상호와 함께 삽작문을 나섰다.   상호는 성칠을 따라 걸으면서 말했다.    “낮에 총소리를 듣고 형님이 근심돼서 아까 가보았소. 때마침 검둥이가 달려와서 꼬리를 휘청휘청 저으면서 끼깅 거리잖겠소. 그래서 큰어머니랑 아주머니랑 모두들 형님이 무사하다고 짐작하고 조금 근심을 덜었소. 그러나 형님 근심이 태산 같소. 형님이 무사하다고 전해야지.”    “먼저 내 말 듣고 가라.”    성칠은 상호의 팔소매를 잡아끌고 집 뒤 산기슭 수림 속으로 들어갔다.    “상호야, 왜 공지에서 돌아왔니?”   그러자 상호는 “흥!” 하고 코 방귀부터 뀌었다.   “그따위 공지에서 일해 봤자 삯전도 받지 못하는데. 차라리 집일을 하는 게 낫지.”   성칠은 머리를 끄덕이었다.   “잘 돌아왔다. 그러나 공지에서 도망치면 일본 놈들이 영팔이랑 시켜 붙잡아갈 게야.”    “하긴 큰아버지가 안 됐소. 우리 삯전을 주지 않는다고 한길수와 대판 싸우다가 감옥에 갇혔으니 말이오.”   성칠은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었다.   “상호야, 일본 놈들을 믿고 일한다는 건 괜한 짓이다. 내 이런 생각을 해봤다.”   그는 사냥총을 들어 보이면서 뒤 말을 이었다.    “우리 사냥이라도 해야 올해 보릿고개를 넘지 않겠니?”    상호는 어둠 속에서 성칠을 쳐다보면서 근심스레 말했다.    “형님, 사냥한다고 형님을 붙잡아가려고 미쳐 날뛰던데 사냥해 되겠소?”    “일본 놈들도 너무 하잖니? 사냥도 하지 못하면 우린 뭘 먹고 살겠니?”    그러자 상호는 이를 뻑뻑  갈았다.      “그 놈들이 어디 우리 생사를 돌보오?”    성칠은 사냥총을 힘 있게 높이 추켜들고 흔들면서 힘 있게 말했다.     “우리는 사냥총을 들고 짐승을 사냥해 연명해야 해. 사냥총으로 우리 고향에서 일본 놈들을 몰아내야 한다. 그래야 편안히 살 수 있다.”    상호는 한숨을 후 내쉬었다.    “그런데 우리 몇이 그 놈들을 다 몰아낼 수 있겠소? 황차 우리 고향에서 몰아낸다고 해도 인차 우시장이나 다른 곳 일본 놈들이 무리승냥이처럼 다시 쳐들어올게 아니오?”    성칠은 상호의 어깨를 꽉 움켜쥐어 흔들면서 신심 있게 말했다.   “우리 영월동과 운주동, 가마골, 신흥동에서 몽땅 들고 일어나면 우리 고향에서 일본 놈들을 몰아낼 수 있다. 생각해봐라. 우리 가만있으면 몽땅 우리 아버지처럼 붙잡혀 감옥에서 죽고 만다. 우리 조선 백성들이 몽땅 들고 일어나면 그 놈들을 몰아내지 못하겠니?”    성칠의 뜨거운 입김이 엄동설한을 날려 보내면서 상호의 얼굴에까지 풍겨갔다. 한참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뒤이어 상호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형님 말이 옳소. 공지에서 도망쳤다고 감옥에 갇히기 전에 사냥총을 들고 일본 놈들을 사냥하다 죽는 게 낫소.”    성칠은 룡천과 진달래 말을 하면서 장백산 항일독립군 말도 해주었다.   상호는 그 말에 힘을 얻었다.   “형님, 사냥총을 들고 형님을 따라 사냥하겠소.”   상호는 머리를 들어 집쪽을 보았다.   “형님, 잠간 집에 들어가서 부모에게 사냥하러 떠난다고 말하고 나올게.”    성칠은 상호의 팔소매를 붙잡았다.   “급히 서둘 필요 없다. 부모들과 하루 밤 더 자면서 잘 말한 후 내일쯤 치마봉 아래로 오너라.”   그러나 상호는 결단성 있게 말했다.    “아니오. 지금 형님은 혼자 위험하오.”     성칠은 더 말리지 않았다. 그는 어둠을 헤치면서 성큼성큼 집 쪽으로 걸어가는 상호의 어두운 뒷모습을 대견하게 지켜보았다.    상호는 집에 들어갔다가 인차 나왔다. 그는 김치 움에 들어가 감춰둔 사냥총을 들고 나왔다. 그는 사위를 둘러보더니 집 뒤 산기슭으로 달려왔다. 성칠과 상호가 김칠백의 집으로 향할 때다.    상호네 집 문이 열리면서 두 그림자가 삽작문을 열고 나왔다.    “상호야, 상호야.”    엄창렬이 허리를 구부정하고 손을 들어 흔들면서 삽작문 안에서 나왔다. 명순이 치마폭을 걷어안고 황급히 뒤따라 달려 나왔다.     상호는 사냥총을 들고 급히 마주 달려갔다.    “아버지, 어머니, 근심하지 마시오. 산짐승을 많이 사냥해야 아버지 기침병도 치료하지.”    명순은 손으로 상호의 얼굴을 만졌다.    “아무튼 몸조심하고 성칠 형님의 말을 잘 들어라.”   성칠은 성큼성큼 뒤따라와 엄창렬 부부에게 인사하고 나서 “근심하지 마오.” 하고 말했다.   엄창렬은 허리를 구부정하고 기침을 쿨룩쿨룩 하며 가쁜 숨을 몰아쉬며 겨우 말했다.   “아무튼 둘 다 몸조심하게. 사냥이야 성칠이 좋은 스승이니까. 시름 놓고 보내겠네.”   상호는 넙적 엎드려 부모께 절을 올리고 성칠을 따라 나섰다.    성칠은 상호와 함께 먼저 강 건너 자기 집으로 발길을 옮겼다.   성칠은 주춤 멈춰서더니 상호한테 귀속 말을 했다.   "우리 집으로 가서 내 무사하다고 기별해라. 만약 뜻밖의 정황이 생기면 서쪽 수림 속으로 달려가라.”    상호는 머리를 끄덕였다.    그는 사냥총을 성칠에게 맡기고 평소처럼 골짜기바닥의 허연 얼음을 스적스적 건너 성칠의 집으로 다가갔다.    성칠은 강둑 버드나무숲 속에서 눈을 깔고 엎드려 총 가목을 으스러지게 틀어잡고 집 쪽의 동정을 살폈다.   “왕, 왕, 왕!”   갑자기 검둥이가 덮쳐왔다.   “휙~ 휙—”   성칠이 휘파람을 불자 검둥이는 어둠속에서도 주인이 있는 곳으로 달려왔다.    “끼깅- ”   검둥이는 몸뚱이를 일으키더니 두발을 거인처럼 우뚝 선 성칠의 가슴에 얹고 끼깅거렸다. 성칠은 한손으로 검둥이 머리를 다독여주었다.    땅! 땅! 땅!   이때 집 쪽에서 총소리가 울렸다. 성칠은 강뚝에 엎드리면서 총소리 난 쪽으로 사냥총을 겨눴다. 어둠속에서 상호가 집안에서 뛰쳐나오고 집안 전등불이 꺼졌다. 상호 뒤로 검은 그림자 셋이 뛰쳐나왔다. 허나 성칠은 총을 쏠 수 없었다. 일본 놈들인지 집식구들인지 알수 없었다.    땅 땅 땅!   뒤따라 나온 검은 그림자들에게서 불빛이 번쩍였다.   땅!    성칠이 쏜 총에 뒤따라 나오면서 총을 쏜 놈 가운데서 한 놈이 푹 꺼꾸러졌다.    상호는 집 서쪽수림 속으로 도망쳤다. 나머지 두 놈이 상호 쪽으로 쫓아갔다.     후에 안 일이지만 일본 놈들은 성칠이네 집안에 미리 들어가 숨어 있다가 검둥이가 온 것을 보고 성칠이 부근에 있다는 것을 짐작하였던 것이다. 하여 성칠의 어머니와 아내를 바 줄로 묶고 수건으로 입을 틀어막은 후 고방에 가둬놓았다. 놈들은 벽에 붙어 서서 숨을 딱 죽이고 성칠이 집안에 들어서기를 기다렸다. 그때 상호가 들어섰다. 놈들은 성칠인가 오해한 채 붙잡으려고 욱 덮쳤다. 상호는 덮쳐드는 일본 놈들을 보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일본 놈들 셋이 뒤쫓아 나왔던 것이다.     땅 땅 땅!    이때 강둑에서 숱한 놈들이 총을 쏴대면서 다가왔다. 성칠의 옆에 있던 검둥이는 검은 그림자들에게 덮쳐나갔다.    “아이유! 이 놈 개새끼!”     영팔의 비명소리 같았다.     성칠은 사냥총으로 상호 뒤로 쫓아가는 두 그림자를 겨눠 또 사격했다.     땅!     한 놈이 푹 꺼꾸러졌다.     땅!    또 한 놈이 명중탄을 맞고 푹 꺼꾸러졌다.    성칠은 사냥꾼의 본능으로 총을 쏜 자리에서 일어나 한길수네 집 쪽으로 달아났다. 뒤에 검은 그림자가 보이지 않자 강을 슬쩍 건너 칠백이네 집 울바자 옆으로 달아났다. 그런 줄도 모르고 왜놈들은 왝왝 소리치면서 강둑에서 눈먼 총질을 해댔다.     그때였다.    총소리를 들은 칠백과 진달래, 칠석이 집안에서 뛰쳐나와 합세했다.    그때 덕성이 뒤따라 나오면서 발을 굴렀다.    “얘들아, 다 가면 난 누굴 믿고 살라니?”    옥녀도 뛰어나와 엉엉 울었다.    “오빠~”    칠백은 성칠의 손에서 사냥총을 받아 쥐고 쳐들어 보이면서 말했다.    “아버지, 근심하지 맙소. 만주에서 가서 만나깁소.”    성칠과 진달래는 서쪽 수림 속에서 상호와 회합했다. 모두들 진달래의 주밀하게 계획한 전술대로 수림 속으로 철퇴했다. 수림 속에     서 진작 바우돌을 비롯한 독립군 대원들이 백마들을 잡고 대기하고 있었다. 모두들 진달래의지휘대로 백마를 타고 수림 속으로 전이했다. 성칠은 달리는 백마를 탄 사람들이 많이 불어난 것을 보았다.     칠백과 칠석 형제는 벌목공지에 가서 헛고생을 하고나서야 형 룡천의 말처럼 성칠을 따라 사냥해야 살 길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그들은 일본 놈들이 무서운 물건짝들이지만 결코 그 놈들이 무서워 집에서 굶어 죽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칠백이네 형제가 최동욱과 그런 의향을 말했다.     그러나 동욱은 그들을 따라나서지 않았다. 아내가 앓는 것도 있고 무모하게 일본 놈들이 말리는 사냥을 하다가 일본 놈들에게 붙잡혀 혼날 까봐 그만뒀던 것이다.     칠백이 찾아가서 아무리 동원해도 동욱은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쌀은 다른 방도로 구할 수 있겠지만 총칼을 흔드는 일본 놈들의 등살에 하루도 살수 없을 거다.”      별수 없었다.     성칠은 도리머릴 질 했다.     (사냥은 강요할 수 없지.)    성칠 등은 백마를 잡아타고 눈 깜짝할 새에 치마봉 기슭에까지 달려갔다.    그 곳에서 룡천 중대장을 비롯한 2분대 독립군 병사들이 벌써 치마봉 기슭 수림 속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그들은 룡천 중대장의 지휘아래 즉시 박달령을 넘어 100여리 밖으로 쏜살같이 전이했다.     눈 덮인 수림 속 여기저기에서 굶주린 이리떼들이 울부짖고 있었다. 룡천과 진달래, 성칠은 조용한 곳에 가서 금후 대책을 의논했다.    룡천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여기서 잠시 휴식정돈한 후 내일 밤에 일본 놈들의 림산 작업소를 습격해 저목장을 기습하기오. 목재를 몽땅 불태워 버리기오.”    “글쎄요. 어쨌든 이번 임무를 빨리 완수하고 인차 장백산지구로 철퇴하는 거 상책인 거 같아요. 하루라도 더 끌면 일본 놈들이 덮쳐들 거요.”     진달래가 맞장구를 쳤다.    한참 생각에 잠겼던 성칠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니요. 우리는 더 많은 젊은이들을 우리 포수대에 묶어세워야 하오. 먼저 금방 포수대에 들어온 사람들의 마음을 잡아야 하오. 우선 말한 대로 사냥부터 해서 저 젊은이들의 집식구들을 기아에서 구해야 하오. 사냥한 단맛을 봐야 더 많은 젊은이들이 우리 포수대에 들어오게 되오.”    룡천은 성칠의 말에 머리를 끄덕였다.    “맞아. 난 미처 생각하지 못하였네. 내일 먼저 사냥부터 합세. 모레쯤 사냥물을 마을에 가져갑세. 저놈 저목장을 불태워 버립세.”    성칠은 칠백이랑 있는 데로 돌아왔다.    “우리 삭정이를 가져다가 우등 불을 피우자. 새우잠이라도 자야 내일 사냥하지.”    “형님 말이 옳다. 어디 추워서 견디겠니?”    바우돌이 보초서고  모두들 어둠을 무릅쓰고 삭정이를 주어왔다. 성칠이 부시를 쳐서 불꽃을 일구자 이윽고 수림 속에 우등불이 활활 피여 올랐다. 모두들 추워 우들우들 떨면서 이 밤을 어떻게 보낼까 근심하다가 욱 우등 불에 모여들어 불을 쪼였다.    이때 이리떼들이 슬금슬금 다가왔다.    땅!    성칠이 몸을 돌려 쏜 사냥 총알에 우등 불쪽으로 슬금슬금 기어오던 이리 한 놈이 폴싹 꺼꾸러졌다. 모두들 사냥총을 거머쥐고 불똥이 왔다 갔다 하는 수림 속을 노려보았다. 굶주린 이리떼는 자기 동료가 쓰러졌건 말건 물러서지 않았다. 그 놈들은 토론이나 한 듯이 울부짖더니 미친 듯이 덮쳐왔다.     땅 땅 땅!    독립군 대원들과 포수대 사냥꾼들이 일제히 총을 쏘았다.   사냥 경험이 없는 독립군 병사들과 칠백이랑 눈 위에 엎드리거나 무릎을 꿇고 총을 쏘아댔다.    성칠과 진달래만은 나무에 기댄 채 꿋꿋이 서서 총을 쏘아댔다.    “서서 사격해! 승냥이들과 싸울 땐 서서 사격해야 된다. 그래야 승냥이들이 달려들어도 머리나 목 같은 요해처를 물리지 않아!”    성칠의 말에 모두들 일어나 나무 뒤에 기대서서 악을 쓰면서 덮쳐오는 이리떼를 향해 사격했다. 십여 마리 이리가 쓰러지자 이리떼들은 물러갔다.     이튿날 동녘하늘이 희붐히 밝아올 돌아보니 아직도 숨이 채 지지 않은 이리들이 바둑거리면서 사람들을 노려보는 것이었다.    성칠은 비수로 바둑거리는 이리의 숨통을 찔러 죽이고 나서 웃으며 걸걸한 목소리로 말했다.    “첫 사냥물이 꽤나 많군. 허허허.”    칠백은 환한 웃음을 지으면서 동을 달았다.    “이거면 우리 집식구들이 한 보름은 실컷 잡숫겠다. 시장에 가서 팔아도 한 달 먹을 쌀은 사겠다.”    칠석이랑 좋아서 싱글벙글 웃었다.    “사냥해야 산다니까.”    “성칠 형님을 따라 사냥에 나선 게 옳아. 사냥해야 살 수 있어.”    “하하하.”    눈 덮인 밀림 속에서는 첫 사냥을 한 기쁨에 겨운 웃음소리가 호탕하게 울려 퍼졌다. 그들은 우등 불에 이리 고기를 구워 실컷 먹고 눈 속에 숨어 굳 잠에 곯아떨어졌다.    해가 다시 지면서 어둠의 장막이 서서히 드리우자 그들은 백마에 언 이리를 처매고 다시 명천의 고향을 바라고 말을 달렸다.
389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44) 통나무의 비밀 댓글:  조회:451  추천:0  2024-05-19
    김장혁 작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                제6장 포수대           3. 통나무 벌레의 비밀             토끼 꼬리만한 늦겨울의 해는 어느새 수림 속의 엄동설한에 밀리어 맥없이 하얀 산둔덕을 넘어가고 하얀 눈이 뒤덮인 수림에 어둠의 장막이 무섭게 어둑어둑 내리 드리었다.       일본 놈들은 성칠의 사냥총을 빼앗으러 갔다가 독립군의 습격을 받아 동료 몇을 잃었다. 그 놈들은 림산파출소 경찰까지 다 동원해 수림을 서캐 훑듯 했지만 독립군의 그림자도 찾지 못하고 닭 쫓던 개 신세로 됐다. 다만 동서로 갈라진 어지러운 말발자국 밖에 보지 못했다.      일본 놈들은 보병으로 기병을 쫓아 붙잡는다는 것은 어림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놈들은 공포에 찬 어둠이 깃들자 매복습격이라도 받을까봐 황급히 꼬리 빳빳해 림산파출소로 내려왔다.      한편 진달래와 성칠은 독립군 대원들과 함께 백마를 타고 일본 놈들을 수림 속으로 이리저리 끌고 다니다가 역습을 가하려고 했다. 그런데 교활한 일본 놈들이 수림 속에서 철거하는 바람에 성사하지 못했다.     성칠은 진달래를 보고 말했다.     “최 부소대장, 부모형제들이 어떻게 됐는지 영월동에 가 봐야겠네.”     진달래는 어둠 속에서 거친 숨을 몰아쉬는 성칠을 쳐다보면서 나직이 말했다.     “원수는 꼭 갚아야 해요. 그러나 오늘 영월동에 내려가선 안돼요.  위험해오. 놈들은 꼭 오빠네 집에 그물을 치고 뛰어들기를 기다릴 거요.”     진달래 말을 듣고 한참 생각하던 성칠은 옆에 앉아있는 검둥이를 내려다보더니 말했다.     “그럼 다른 수를 쓰지. 검둥이를 집에 보내겠소. 검둥이가 무사한걸 보면 내가 무사한 걸 짐작할 거요.”     성칠은 무릎을 꺾으면서 쪼그리고 앉더니 검둥이의 대가리를 손으로 어루만지면서 중얼거렸다.    “검둥아, 네가 집에 가라.”     검둥이는 알아들었다 듯이 낑낑거리면서 꼬리를 휘휘 내저었다. 검둥이는 눈이 시허옇게 뒤덮인 수림 속으로 사라졌다.     “최 부소대장, 영월동에는 며칠 후에 가기로 하구 운주동에 가 봐야겠소.”    진달래는 성칠의 손을 굳게 잡으면서 말했다.     “오빠, ‘최 소대장’, ‘최 소대장’ 하지 말고 ‘진달래야’ 하세요. 종전처럼 야, 자 하세요. 운주동엔 뭘 하려고요?”     성칠은 진달래를 한쪽으로 데리고 가서 목소리를 낮췄다.     “ 넌 부소대장이야. 숱한 사람들 앞에서 야, 자, 해서야 되겠니?”    “괜찮아요. 운주동에 있는 동생들과 조카들을 만나려고 그래요?”    성칠은 머리를 끄덕였다.     “아버지를 면회하러 갔을 때 아버지는 기준한테 전하라더라. ‘통나무 옹이나 벌레를 조심하라구.’ 목수인 기준은 그 말귀를 알아들었을 거야.”     진달래는 머리를 끄덕이었다.    “오빠, 나도 운주동에 갈래요. 큰아버지도 만나 보고.”     “최구장을 만나러?”    “예, 그집 둘째오빠는 검술에도 능하니까. 우리 독립군에 합세하자고 말해야겠어요.”     “네가 어떻게 가겠니? 그곳은 위험해.”     성칠의 말에 진달래는 머리를 가로저었다.     “누구도 아녀자가 이런 일을 하는 걸 모를 거요. 우리 오누이 부부처럼 가장하고 밤에 운주동에 들어가면 의심하지 않을 거예요.”     성칠은 그제야 한숨을 후 내쉬었다.     진달래는 독립군 대원들과 함께 말을 타고 어둠을 타 운주동으로 가만히 달려갔다.     독립군 대원들은 말에서 내려 마을 근처 버들방천에 숨어 대기하게 하고 성칠과 진달래가 운주동으로 스적스적 들어갔다.     제일 동쪽어구에 있는 최구장네 집에는 진달래가 대원 한명만 데리고 들어갔다. 거의 동시에 성칠은 서쪽에 자리 잡은 기준네 집 앞에 이르렀다. 성칠은 사위를 둘러보고 나서 독립군 대원을 구새목에서 보초를 서게 하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초저녁이지만 성칠이가 사냥총을 들고 웃방에 들어서자 기준은 적이 놀라면서 우쭐 일어나 문안했다.     “형님, 집에 무슨 일이 생겼소?”      제수 최사련이 난지 몇 달 안 되는 상순을 안고 위방에 올라와 인사했다.     성칠은 제수가 올린 술상에 마주 앉자마자 막걸리사발을 들어 마시면서 그간 우시장과 영월동에서 있은 일을 쭉 말했다.    기준은 원래 아버지보다도 성질이 우락부락했다. 그는 맏형의 말을 듣고 펄펄 뛰었다.    “작두날로 찍어 죽일 놈들, 언감 아버지를 가두고서도 형님께도 손을 댄단 말이요? 개놈새끼들이 사냥도 하지 못하게 하면 입에 거미줄을 치라오?”    성칠은 땅이 꺼지게 한숨을 지었다.    뒤이어 성칠은 기준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엊그저께 면회하러 갔을 때 아버지는 ‘통나무의 옹이나 벌레를 주의해라.’고 하더라잖았니? 감옥이여서 말씀하기 불편해 암시한 말씀 같구나. 넌 목수니까 전번에 내 아버지 말씀 전했는데 뭘 암시했는지 알았지?”     “통나무 옹이나 벌레를 주의하라? 알긴 알았소.”     기준은 담배를 말아 뻑뻑 빨면서 아버지 말씀을 되새기면서 곰곰이 생각했다.     한참 후 기준은 머리를 들어 성칠을 바라보면서 무겁게 입을 떼였다.     “그 말을 그대로 풀어보면 통나무의 옹이나 벌레를 주의해 경찰국 사무 청사가 무너지지 말게 하라는 말씀인 거 같소. 자칫 탄로나면 아버지처럼 해를 입을 수도 있지.”     “음.”     기준은 마른기침을 하며 뒷말을 이었다.     “감옥에 갇힌 아버지가 일본 놈들 사무 청사인지 개나발인지 잘 되기를 바라겠소?”     기준은 형의 귀가에 입을 가까이 대고 귀속 말을 했다.     “이전에 목수 간에서 일할 때두 아버지는 통나무 벌레를 파서 물초롱에 던지면서 늘 이랬소.  ‘이런 벌레 먹은 통나무로 집을 지어서 몇해 가겠는가?’ 이렇게 말씀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소. 그 말씀을 연계해 곰곰이 생각해보면 아버지는 분명‘통나무 벌레를 기둥에 박아 넣어 일본 놈들 사무 청사가 무너지게 하라.’고 귀띔한 것 같소.”     성칠은 머리를 끄덕이면서 물었다.    “그럼 옹이는 뭐냐?”    기준은 목수로서 짐작되는바가 있었다.    “옹이 많은 나무를 쓰면 눈에 날게고. 주의는 해야지. 그러나 우리에게 기둥이나 대들보에 옹이 대신 쐐기를 묘하게 박아 넣어 무너지게 하라는 게 같소. 쐐기 하나만 대들보에 박으면 천정무게가 한쪽으로 기울어 몇 해 되지 않으면 아무리 번듯한 청사도 무너질게 아니요?”     성칠은 연신 끄덕이었다.     "오, 거 참 묘수로구나.”      뒤이어 그는 기준의 귀에 대고 뭐라고 쑤군거렸다.     기준은 연신 개탄했다.     “옳소, 옳소, 알았소.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근심하지 마오.”     "아버지 말씀 알아들었으면 이젠 늦추지 말구 경찰국청사를 와르르 무너지게 만들어라."     "알았소."     일이 이쯤 되자 성칠은 이 추운 겨울에 바깥에 말을 쥐고 서있을 독립군 대원들이 근심돼 바깥에 나갔다.    그는 보초를 서는 대원더러 가서 최 소대장에게 운주하 버들방천에 숨어있는 독립군 대원들을 집에 데려다 자게 하는 게 어떻겠는가고 물어보라고 부탁했다.     성칠이 집에 재차 들어간 후 대원은 곧추 마을 동쪽의 최구장의 집으로 달려갔다.     바깥에는 독립군 대원 바우돌이 망을 보고 있었다.    집 안에서는 진달래가 한창 큰아버지 최구장과 맏오빠 경숙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바우돌이 바깥에서 들어와 연통하자 진달래는 바깥에 나갔다.   그는 성칠이 쪽에서 온 독립군 대원의 말을 듣고 좀 생각하다가 말했다.    “성칠 오빠는 쫓기는 몸이어서 동생네 집에 들어가 자긴 틀렸어요. 오히려 여기 우리 큰아버지네 집이 더 편리해요. 내 이제 들어가 큰아버지한테 사냥꾼 친구들이라고 말해보고 여기 와서 하루 밤 묵어 가자요.”     진달래가 집 안에 들어갔다가 인차 나왔다.    “대원들에게 말을 끌고 오라고 하세요.”     “말까지 끌어오면 혹시 일본 헌병 놈들이나 오면 의심을 받지 않겠소?”    “괜찮아요. 큰아버지는 아직 그 놈들 눈에 나지 않았으니까요.”    진달래는 성칠까지 불러다가 독립군 대원들과 함께 최구장의 집에서 하루 밤 묵으면서 푹 쉬었다.    이튿날 장국까지 맛있게 마시고 진달래는 떠나게 됐다.    이른 아침에 최구장은 뒷간에 가다가 총을 잡고 망을 서며 숱한 백마를 지키는 바우돌을 보고 심상치 않은 감을 느꼈다.    최구장은 떠나가려는 진달래를 한쪽으로 조용히 불러 귀속 말로 물었다.    “너희들은 혹시 일본 놈들을 사냥하는 거 아니냐?”    진달래는 한기에 언 철색얼굴에 미소를 지으면서 머리를 끄덕였다.    최구장은 조카에게 마음먹고 귀띔해주었다.    “옛 성인들이 가로사되 ‘자기를 억제하고 례에 맞게 행동하라.’고 하였느니라. 뭐나 중용을 지키는 게 좋아. 일본 사람들이 무력으로    우리를 짓밟으니 좋으냐? 뭐나 무력으로 해결하자고 말아라. 남의 피를 보면 자기도 피를 흘려야 하느니라. 스물도 넘은 계집애 시집은 가지 않고 엉뚱한 일에 삐칠게 뭐냐?”    진달래는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    “귀띔에 고마워요. 너무 근심하지 마세요.”    최구장은 백마를 타고 멀어져가는 진달래를 보고 도리머리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달려가는 백마들의 말발굽소리 요란하고 그 뒤로 하얀 눈꽃이 새뽀얗게 흩날렸다. 눈 덮인 기운봉 저쪽으로 백마들이 자그마한 하얀 점들로 아물거렸다.
388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43) 전우를 구출 김장혁 댓글:  조회:594  추천:0  2024-05-10
                                         김장혁 작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                              제6장 포수대                             2. 전우를 구출                  성칠은 룡천의 말을 듣고 착잡한 생각에 빠졌다.     한참 후 그는 무슨 마음을 먹은듯이 위방에 올라가 벽에 걸어둔 사냥총을 벗겨 마른 수건으로 쓱쓱 닦고 탄약과 시퍼런 비수를 꺼냈다.    그는 비수를 팔소매에 대고 쓱쓱 닦아 엄지로 날을 쓱쓱 훑어보며 윽별렀다.    (아버지를 감옥에 가둬? 일본 놈새끼들, 가만 놔두는가 봐라.)    하옥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성칠은 한숨을 후 내쉬었다.    (나는 싸우다가 죽어도 괜찮은데. 참, 부모형제를 연루시키면 어쩐단 말인가?)    아내 하옥은 남편이 우시장에 갔다 온 후 행동거지가 이상한 감을 육감적으로 느꼈다. 그녀의 얼굴에는 수심의 그림자가 물결쳤다. 호랑이 같은 남편에게 후대를 낳아주지 못한 죄책감이 늘 앞서군 하였다. 하여 남편과 바깥일을 묻기도 저어했다. 그러나 요즘 시아버지가 한길수의 눈알까지 뽑아버려 감옥에 갇힌 후 면회하러 갔다 와서 남편의 거동이 심상치 않아 묻지 않고서는 견디기 어려웠다.     그녀는 위방에 올라가 성칠한테 다가가 큰 마음 먹고 남편에게 물었다.     “시아버님은 무사하던가요?”    성칠은 머리도 들지 않고 대답했다.    “승냥이 굴에 들어간 분이 무사할리 있겠소?"   하옥은 남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한숨을 호 내쉬었다.    “혹시 돈을 좀 팔면 아버지를 모셔 내올 수 없을까요?”    “아버지를 면회하는데도 큰아버지 산삼하구 면회 비까지 냈소. 아버진 무기징역을 받을지도 모르오. 일본 놈들의 앞잡이 눈알을 뽑아 놨으니까.”     성칠은 사냥총을 벽에 걸어놓고 비수를 장단지 각반 속에 쓱 꽂아 넣었다.    “이 일을  어쩌는가요?”    성칠은 아내를 보고 무거운 어조로 말했다.    “여보, 당신은 나한테 시집와서 고생 많았소. 난 아마 집을 떠나 큰 사냥을 하러 가야 할 것 같소. 집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수고하오.”    이전에 성칠은 사냥하러 가도 전혀 작별인사를 한 적이 없었다.    하옥은 이상해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사냥을 한 둬달 하면 돌아오겠지요?”   성칠은 도리머리 질을 절레절레 했다.    “한두 달로 될 것 같지 않소. 무리승냥이들을 모조리 잡자면 몇 십 년이 걸릴 수도 있소.”    이때 미닫이문이 스르르 열리면서 어머니가 들어왔다.    “얘, 아까 내캉 말할 때 무심히 들었던 관데. 먼 곳에 사냥하러 가는가 베?”    성칠은 엉거주춤 일어나 엄마께 허리를 굽혀 인사하면서 대답했다.    “예, 엄마, 무사히 있읍소. 일이 있으면 동생들이나 조카들에게 말합소. 엄마, 동생들이 사는 운주동에 이사 가면 좋을 것 같습구마.”    성희는 구부정한 허리를 펴고 맏아들을 바라보다가 앉으라고 손시늉 했다.    “이사 말은 하지도 말어. 이 팔간 집을 어떻게 지은 집이라고 그래? 저 물방아는 어쩌고? 난 이집에서 죽더라도 너 아버지 올 때까지 기다릴 거야.”    성칠은 어머니와 아내를  번갈아보면서 한숨을 땅이 꺼지게 후- 내쉬었다.    이때 바깥에서 검둥이가 짓는 소리가 컹 컹 컹 들리고 문을 탕 탕 탕 두드리는 소리가 요란히 들렸다.    “문 열엇!” 성칠이 위방 문을 열자 허연 한기와 함께 영팔과 응삼, 수길 등이 집안으로 우르르 쓸어 들어왔다. 뒤에 털 한 모숨과 가메다 등 일본 헌병들도 따라 들어왔다.    영팔이 우쭐해서 성칠을 보고 지껄였다.    “사냥총을 내놓게.”     성칠은 벽 밑에 걸어놓은 사냥총을 벗겨 으스러지게 틀어쥐었다.     “사냥총을 내놓고 뭘 먹고 살라는 거요?”     “이 놈이, 사냥총을 내놓지 못할까?”     “안 된다. 벌목 삯전도 주지 않으면서 사냥총까지 내놓으라고? 사냥총은 우리 사냥군들의 목숨이야.”     “이젠 산짐승도 몽땅 일본 거야. 사냥은 무슨 놈의 사냥? 흥!”   가메다가 으르렁거리자 앞잡이들이 팔을 걷으며 다가섰다.   “얘들아, 사냥총을 빼앗아라!”   영팔의 호령소리에 수길과 응삼이 등 졸개들이 와르르 달려들었다. 그들은 성칠의 손에서 사냥총을 빼앗으려고 몸싸움을 벌렸다.   이때 가메다는 군도를 빼들고 꽥 고함쳤다.    “빠까요로(멍청아), 이 놈을 묶어!”    일본 헌병 놈들이 아예 성칠과 사냥총을 한데 바 줄로 꿍꿍 묶어 문밖으로 떠밀었다.    “여보, 여보!”   하옥이가 따라 나오면서 소리쳤다.    “성칠아! 이 놈들아, 내 맏아들 무슨 죄 있다고 마구 잡아가는 거냐?”    본가집에 놀러왔던 곰순도 정주간에서 뛰어나오면서 소리쳤다.    “오빠!”    성칠은 묶인 채 내리막길로 내려가면서 머리를 돌려 어머니와 여동생 곰순을 돌아보면서 소리쳤다.    “내가 돌아올 때까지 엄마를 잘 모셔라.”    검둥이도 어데 갔다가 주인이 묶여 가는 것을 보고 일본 놈들에게 달려들면서 왕왕 짖어댔다.    땅! 땅! 땅!    일본 놈들이 검둥이에게 사격했다. 검둥이는 날쌔게 피하면서 도망쳤다.    땅! 땅! 땅!    갑자기 물레방아 쪽에서 야무진 총소리가 울렸다.     일본 헌병 두 놈이 눈 바닥에 푹푹 꺼꾸러졌다. 방앗간 뒤에서 몇 사람의 그림자가 얼른거렸다.    땅! 땅! 땅!    가메다도 권총을 꺼내 맞불질을 했다. 총알이 물레방아 바퀴에 픽픽 박혀 눈꽃을 튕겼다.    영팔과 수길은 성칠을 활 놓고 다리야 날 살리라고 내리막으로 선불 맞은 노루처럼 도망쳤다.    “성칠이, 빨리 산속으로 뛰게나!”   물레방아 바퀴 뒤에서 분명 룡천의 웅글진 목소리가 울렸다.    그제야 제 정신이 펄쩍 든 성칠은 묶인 채 눈 덮인 산기슭 수림 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검둥이도 끼깅거리면서 성칠을 따라 뛰어갔다.    땅! 땅! 땅!    자지러진 총소리와 함께 성칠의 앞과 뒤에서 눈꽃이 튕기었다. 귀 뻘쭉해 달리는 검둥이 옆의 적송에 총알이 픽픽 박혀 나무껍질이 튕겼다.    성칠은 이리 저리 적송 사이로 몸을 빼면서 팔자 형으로 달려갔다.    헌병놈들은 가메다가 군도를 휘두르자 룡천과 성칠을 추격했다.   갑자기 일본 헌병 한 놈이 “억!” 비명소리와 함께 어데서 날아온 돌멩이에 맞아 이마를 감싸 쥐고 눈 위에 푹 꺼꾸러졌다.   쒹-    쒹-    연속 날아오는 돌멩이에 일본 헌병 몇 놈이 무릎을 안거나 대가리를 붙안고 꺼꾸러졌다.    그 사이 성칠은 수림 속으로 멀리 달아나면서 뒤를 돌아보았다. 웬 사람이 원숭이처럼 나무 가지를 쥐고 구르면서 이쪽저쪽 나무로 건너뛰면서 날아왔다.    “오빠!”    성칠은 자기 앞에 귀신처럼 나타난 사람이 진달래일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진달래야!”    진달래는 재빨리 허리춤에서 단도를 뽑아 성칠을 묶은 바 줄을 끊었다.    성칠은 손목을 만지면서 진달래를 보고 적이 놀랐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느냐?”    “오빠를 마중하러 왔댔어요. 일본 놈들이 쫓아오기 전에 이 고개를 넘어야 해요. 자, 어서 뛰자요.”    성칠은 바줄과 함께 눈 우에 떨어진 사냥총을 쥐고 진달래를 따라 산중턱을 따라 수림 속으로 뛰었다.    “그래 물레방아 간에서 일본 놈들에게 총을 쏜 룡천이랑 아는 사이냐?”     “그래요. 우린 장백산항일독립군 전우지요.”     “장백산 항일독립군?”    “예, 그래요.”    성칠은 듣기만 해도 신기하기만 했다.    그들이 한 골짜기에 들어섰을 때였다.    골짜기에는 진작 몇몇 독립군 대원들이 백마들의 고삐를 잡고 경계하고 있었다. 이윽고 룡천 등도 일본 헌병들을 따돌리고 달려왔다.     성칠은 룡천 등을 보자 굳게 악수를 나누었다.     “고맙네! 자네들이 구원하지 않았더라면 난 아버지처럼 한평생 우시장감옥에 갇힐 번 했소.”    “그 놈들은 진작 당신 부자간을 마음 놓지 못했어. 우린 당신을 만나러 가다가 때마침 당신을 결박해가는 일본 놈들과 마주 띄우게 됐네.”     성칠은 룡천과 진달래를 둘러보면서 무거운 어조로 말했다.    “나도 장백산 항일독립군에 들겠소. 꼭 아버지와 우리 고향 사람들의 원수를 갚겠네. 나를 받아주오.”    룡천은 성칠의 쩍 벌어진 어깨를 믿음에 찬 손으로 툭툭 쳤다.   “좋네. 당신은 진작 우리와 마음을 같이 했다이. 우리 조선 땅에서 우리 부모형제들이 일본 놈들의 철발굽 아래에서 해탈돼 행복하게 살게 하려면 총칼을 들고 일본 놈들을 우리 고향 땅에서, 아니, 우리 조선 땅에서 몽땅 몰아내야 하네.”    성칠은 룡천의 두 손을 굳게 잡았다.    “고맙소. 나를 구해줘서. 나는 독립군에서 솜씨를 보이겠소.”    룡천은 신임에 찬 눈길로 성칠을 바라보다가 독립군 대원들에게 몸을 돌렸다.    “우린 우시장 일대 사냥꾼들을 묶어세워야네.  일본 놈들이 우리 목재를 실어다가 경찰국 사무 청사를 짓는 걸 막아야지.”    성칠은 가슴을 쑥 내밀고 대답했다.    “근심하지 마오. 내 나서서 꼭 젊은이들을 묶어세우겠네.”    진달래는 성칠에게 다가와 백마 고삐를 넘겨주었다.    룡천은 백마에 올라타면서 손을 홱 저었다.    “빨리 이곳을 빠져 나갑세. 적들이 꼭 추격해올 거야.”   독립군 대원들은 모두 백마에 올라탔다.   성칠도 백마에 올라탔다. 검둥이도 주인을 따라 달려갔다.   한창 독립군 대원들을 따라 달리다가 성칠이 말고삐를 잡아당겼다.    “룡천이, 이 곳에서 할 일이 있네.”    룡천도 멈춰 섰다.   성칠은 입에서 김을 훅훅 풍기면서 말했다.   “한길수를 가만 놔두고 떠날 수 없어.”     “잠시 철퇴하는 거야! 일단 일본 놈들의 추격을 피해야 하이. 전술적인 철퇴를 했다가 다시 기회를 엿봐야 돼.”    룡천이가 전술적인 철퇴라고 했는데도 성칠은 고집을 썼다.    “아니야, 이대로 달아나면 눈에 난 발자국을 따라 인차 추격해올 거야.”   그 말에도 도리 있었다.   “인마를 갈라서 철퇴하자. 기회가 되면 매복습격도 하자.”    룡천은 머리를 끄덕였다.    그러자 진달래가 룡천에게 말했다.    “김 소대장, 내가 바우돌과 억복을 데리고 성칠 오빠와 함께 남으면 어때요?”    “좋아. 1분대는 진달래 소대장을 따르고 2분대는 날 따르라. 우린 놈들을 각자 따돌리고 사흘 후 치마봉 밑에서 만난다.”    “옛!”    독립군은 두 패로 나뉘어 백마를 타고 수림 속으로 달려 들어갔다.   윙윙 휘몰아치는 눈보라가 수림 속으로 사라지는 독립군 용사들의 종적을 지워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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