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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소설 진달래 소야곡(2)
2017년 11월 09일 09시 11분  조회:1731  추천:5  작성자: 김장혁




                                  대하소설 진달래소야곡
1
청춘의 고백
차례
1. 첫사랑 그녀
2. 효자와 사랑
3. 마음의 파도
4. 체육머리 처녀
5. 쌍쌍이 나래치는 제비
6. 실련영탄곡
7. 미련
8. 꺽다리와 난쟁이
9. 청춘 로맨스
10. 달밤의 추억
11. 결투
12. 복도에서 벌어진 희극
13. 사랑의 진실
14. 폭풍
15. 목동과 파랑새
16. 약혼녀의 폭발
17. 베일에 가려진 진상
18. 리몽룡과 춘향 어디에 있나?
19. 충고
20. 규수와 목동
21. 깍쟁이령감
22. 소나무숲 속의 참사
23. 흉수의 그림자
24. 흉수와 피해자
25. 백일하에 드러난 윤간범들
26. 소식공개회
27. 흉수를 나포
28. 미궁
29. “한뉘 소 궁둥이나 칠 놈
 
 
 
 
 
 
 
 
 
 
 
 
 
 
 
 
 
 
 
 
 
 
 
 
 
 
 
 
 
                                             1. 첫사랑 그녀
       뭉게뭉게 피여오르는 구름과 안개 속에 칼날 같은 절벽을 깎아세운 천지꽃산은 푸르른 소나무와 연분홍 진달래꽃 옷을 입고 우뚝 솟아 있다. 구름인지 안개인지 담담하게 흐르며 기암괴석을 보일락말락하게 쓸어올려 드러났다 숨었다 하는 절벽이 더 진한 매력을 풍긴다.
       옛날에는 칼날처럼 예리한 절벽이 치솟았다고 하여 이 산을 칼산이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이른 봄이여서 아직도 여기저기 잔설이 남아 있다. 층암절벽에 뿌리를 박고 엄동설한의 눈보라와 찬서리에도 악착스레 살아온 진달래는 봄바람에 하느작이며 도라지춤을 추는 상 싶다. 천지꽃산에는 해마다 진달래꽃이 온 산을 뒤덮으며 활짝 피여 봄이면 봄마다 산이 하나의 큰 연분홍 진달래꽃송이를 방불케 했다. 고향 사람들은 이 산을 천지꽃산이라고 불렀다.
      천지꽃산의 진달래를 두고 사람들은 항일전쟁시기 영용한 항일투사들의 선혈을 머금고 떨기떨기 피여난 꽃이라고 했다. 또 항일투사들의 넋이 진달래꽃으로 재생한 꽃이라고 했다.
     그렇다. 천지꽃산의 진달래는 항일투사들의 불요불굴의 넋이며 엄동설한 찬서리와 풍설에도 억척스레 살아온 우리 겨레의 상징이 아니겠는가!
     비단결로 얼굴을 만지는듯 부드러운 봄바람이 불어오고 어느덧 봄아가씨가 사뿐사뿐 다가왔다. 봄아가씨의 따뜻하고 부드러운 숨결이 대지를 키스하며 스치고 지나가자 천지꽃산 층암절벽에서 겨우내 찬서리와 싸우면서 억세게 살아온 진달래도 언 몸을 풀며 애어린 꽃잎사귀가 파릇파릇 돋아나기 시작하였다. 보슬보슬 내리는 보슬비는 층암절벽에 축복의 은구슬을 뿌리고 천지꽃산의 진달래는 여느 꽃나무들을 앞찔러 이슬을 머금고 싱숭생숭한 봄꿈을 꾸면서 꽃망울을 부풀어올린다.
벌써 양지바른 언덕에 있는 진달래는 꽃망울이 버들개지처럼 오동통하게 움트기 시작하였다. 봄바람에 흥겨워 수양버들가지가 흐늘흐늘 설레이면서 춤추고 파랗고 빨간 꽃들이 소리 없이 피어 길손들을 부른다. 봄빛은 날이 감에 따라 짙어가고 해님이 방실방실 꽃웃음 짓는 따뜻한 때를 만나 예쁜 진달래꽃들이 산들산들 불어오는 봄바람에 꽃향기를 풍기면서 자기 아름다움을 한껏 자랑한다. 진달래 꽃이 만발한 고향의 산에서는 피끓는 청춘들이 싱숭생숭한 사랑의 서정시로 청춘의 노래를 연주한다.
어느 일요일, 성호는 향기로운 봄 기운을 가슴 뿌듯이 느끼면서 오랜만에 천지꽃산에 올랐다.
푸른 창공을 찌른 검 같은 천지꽃산은 뭇산 위에 우뚝 솟아 있어 참말로 장관이였다.
바람벽 같은 절벽과 파란 봄 하늘을 배경으로 산새들이 원을 그리며 재롱을 피우면서 날아예고 층암절벽에는 연분홍 진달래가 활짝 피여 반겨 맞았다.
성호는 시원한 고향 산공기를 가슴 뿌듯이 들이켜고나서 연분홍 진달래로 물든 천지꽃산을 둘러보았다. 마치 한 폭의 아름다운 산수화도 같아 아름다움의 극치를 감상하는 것만 같았다.
그는 진달래 꽃밭에 앉아 진달래꽃 향기를 한껏 맡으면서 경제학교과서를 꺼내들었다.
갑자기 그리 멀지 않은 뒤산 진달래꽃 숲  속에서 은방울을 굴리는  듯한 웬 처녀애의 구성진 노래소리가 이른 아침 봄하늘에 메아리쳤다.
“이런 야산에 웬 녀가수야?”
성호는 그 청아하게 부르는 노래소리에 그만 암송마저 그만두고 쌍까풀눈을 퉁방울눈처럼 뜨고 진달래숲 속을 두리번거렸다.
웬 일인가? 성호가 그녀를 찾는 눈치를 챘는지 노래소리가 뚝 끊기고 잠잠해졌다. 성호는 가슴이 높뛰기 시작하는 것을 느끼면서 진달래숲 속으로 성큼성큼 걸어들어갔다.
“어떤 미녀가수일가?”
그러나 한참 진달래꽃밭을 헤매면서 찾아도 그녀가 숨박꼭질이나 하는듯이 찾아내지 못하였다. 분명 그녀가 성호를 발견하고 숨박꼭질하는 것 같았다.
성호는 도리머리질하며 중얼거리더니 진달래꽃숲 속에서 나와 다시 중얼거리면서 책을 읽었다. 그런데 그가 산기슭으로 거의 내려올 때산에서 또 처녀애의 구성진 노래소리가 들려왔다.
성호는 책을 읽으면서도 드문드문 진달래꽃숲 속에 흘끔흘끔 눈길을 보냈다.
한참 후 성호는 연분홍진달래꽃숲 속에서 호리호리하게 생긴 웬 예쁜 처녀애가 진달래꽃 한줌을 가슴에 모아쥐고 나오는 것을 발견하였다.
“아니, 저게 누구야? 순희?!”
성호는 깜짝 놀랐다. 순간 성호는 대학교시절에 처녀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겠다던 자기 맹세가 산산이 박살나고 있음을 폐부로 느꼈다. 진짜 유혹의 힘은 리성을 잃게 할만큼 어머어마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어머!"
저쪽도 그를 발견하고 놀랐다.
정말 충격적인 장면이였다. 어쩜 진달래꽃이 만발한 고향산 기슭에서 첫사랑 순희와 로맨틱한 상봉을 한단 말인가!
"순희!"
성호는 순희의 아래우를 훑어보았다. 볼우물을 옴폭 파며 생글방글 웃는 그녀는 퍽 매혹적이였다.
(아, 저 살인할 볼우물, 그 옴폭 파이는 볼우물에 유혹돼 첫사랑을 달구지 않았던가.)
1메터 육십도 넘는 호리호리한 키에 보름달 같은 우유빛 얼굴, 버들나무잎 같은 눈섭, 은은한 정을 담은 까만 한쌍의 청포도 쌍까풀눈, 입술에는 연분홍 진달래꽃잎 풀물이 진하게 물들어 있었다.
예전보다 보름달 얼굴이 좀 수척해보일뿐 의연히 예뻤다.
순희는 성호와 한 고향에서 나서 자란 죽마고우였다. 아니, 성호의 가슴을 처음으로 설레이게 한 첫사랑, 잊을 수 없는 첫사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생글생글 웃는 순희의 수척하고 갸름한 보름달 얼굴이 그렇게 고울 수 없었다.
성호는 진달래꽃을 꺾어든 순희한테 다가가면서 그간 궁금하던 것부터 물었다.
"소문도 없이 길림에 갔다더니?"
순희는 한숨을 길게 내쉬면서 천지꽃산 아래 고향 마을을 내려다보았다.
"대학도 붙지 못한게 어쩌겠니? 호~"
성호는 어떻게 위로했으면 좋을지 몰라 서성거렸다.
"아니야, 또 시험 치면 되지. 실망할 거 없어."
그러나 순희는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3년이나 시험 쳤는데도 낙제했는데 무슨 렴치로 또 시험을 쳐?"
성호는 부지중 아주 자연스레 오른 손을 순희 어깨  우에 올려놓으면서 열변을 토했다.
"세상에 어디 정해준 명이 있어? 넌 총명해. 노력하면 꼭 대학에 입학할 수 있어."
순희는 성호의 손을 내리우면서 눈을 곱게 흘겼다.
"다 네 탓이야!"
"뭘?!"
성호는 눈이 떼꾼해졌다.
"네가 철주  앞에서 '장차 순희와 결혼하겠다.'는 말만 하지 않았어도 내 인생 이렇게 되지 않았을 거야. 길림 교외에 이사 가지도 않았을 거고."
성호는 산기슭의 고향 마을을 굽어보더니 "철주, 그 새끼 정말!" 하고 중얼거리면서 동년시절의 회억에 빠졌다.
철주와 성호는 동갑이였다. 그들 둘은 짜개바지 때부터  한 고향 마을에서 어깨동무하면서 자랐다. 철주는 어려서부터 손버릇이 나쁜데다가 어찌나 까불어댔는지 모른다. 성호보다 키도 훨씬 큰 그 자식은 항상 같지 않은 일로 성호와 걸고들어 한바탕 두들겨 패놓군 했다. 또 녀자애들을 꼬시는데는 남다른 재간이 있었다. 그는 천지꽃산 넘어에 있는 과수원에 가서 사과배를 훔쳐다가 태평강 버들숲 속 모래밭에 파묻어두고 드문드문 파내 강물에 씻어 먹었고 순희와 월순한테 주기도 하면서 호감을 샀다. 성호는 슬그머니 순희를 꼬시는 철주가 미워났다.
공부를 잘 못하는 철주는 한어만은 죽여줬다. 그는 학급 학습위원을 하는 성호를 슬그머니 질투한 나머지 녀성애들 앞에서 한어로 연설하듯이 헐뜯어댔다. 지어 두 학급의 학습위원을 하는 성호와 순희가 좋아한다는지, 수학시험지랑 함께 매기면서 련애를 했다는지, 성호가 장차 순희와 결혼해 쌍둥이를 낳겠다고 했다는지 별의별 터무니없는 험담을 다 했다.
어느 날, 성호는 강바닥 모래톱에서 철주와 대판 싸움을 붙은 적도 있었다. 그때만 해도 성호는 키가 한 뼘이나 더 큰 철주를 당해내지 못하고 한매 얻어맞고 허망 쓰러졌다. 철주는 성호를 깔고 들어앉아 주먹으로 어찌나 사정없이 때려댔는지 코피까지 다 터졌다.
성호는 어린 시절을 회상하면서 피씩 웃었다.
"철주는 이젠 상대도 아니지."
순희는 성호를 곱게 흘겨보았다.
"어째 대학생이라는게 아직도 싸우려니?"
"승부가 다 났는데 뭘 싸워? 흥!"
성호는 코방귀를 뀌었다.
"철주 탓이 아니야. 다 네 탓이야."
순희의 말에 성호는 추억 속에서 깨났다.
"철주 아니면 난 녀자애 같은 남자애로 됐을 거야. 그 놈 새끼 내 성격마저 고쳐놓았지 뭐야?"
성호는 극력 변명하면서 책임을 회피하려고 들었다.
"너네 길림에 이사 간 건 쌀 고생해서 갔지 어디 내 탓이냐?"
순희는 까만 포도알눈을 부릅뜨고 따지고 들었다.
"뻔뻔스럽긴? 철주랑 애들이 어찌나 놀렸는지 내 학교로 머리를 들고 다니지 못한 걸 아니?"
성호는 심장을 찔린 듯 어쩔 줄 몰랐다. 그의 변명 같은 방패는 펑펑 구멍이 뚫리고 말았다. 그래도 이리저리 피하면서 궤변을 부렸다.
"애들이 널 고와서 놀린 거야."
"뭐라고?"
"사춘기 때는 그래. 고운 녀자애들이 자기와 좋아하지 않으면 놀려주지. 지어 때려주고 싶지."
"뭐라니? 네나 그랬겠지. 요 궤변쟁이야!"
순희는 참다못해 주먹으로 성호의 가슴을 마구 조겨댔다.
"길림에 가서 되지 않는 한어로 대학시험을 치는 바람에 못 붙었다. 알았니? 이 놈아, 다 네 탓이야!"
성호가 이리저리 피하면서 진달래꽃숲 속으로 도망치자 순희는 진달래꽃가지를 꺾어 쥐고 쫓아가면서 후려쳤다. 그 바람에 진달래 꽃이 여기저기 흩어져 날렸다.
"얘, 얘, 졌다. 그만하자. 괜히 말도 못하는 불쌍한 진달래꽃만 상해."
순희는 할딱거리면서 성호를 똑바로 보면서 경고했다.
"이제 다시 사람들 앞에서 '순희'란 말만 입 밖에 내는 날엔 내 황천에까지 쫓아가서 족쳐줄 거야."
"그래?"
"난 네 손목 한번 쥐여보지도 못하고 애들에게 얼마나 놀림을 당했는지 알어?"
성호는 순희한테 다가가 가냘프고 길죽한 손을 와락 잡았다.
"왜 이래?"
"얼마나 대가를 치른 손인데. 한번 쥐여보면 안돼?"
"얘, 놔라, 놔!"
순희는 겨우 손을 빼 쳐들고 보면서 오만상을 찡그리었다.
"아파 죽겠다."
성호는 희죽거리면서 빈정거렸다.
"세상에 둘도 없는 무서운 녀자애구나."
"또, 또 안될 말을 꺼내겠니?"
"남은 정식으로 말하는데 넌 파쑈독재를 해?"
"난 널 좋아하지 않니?"
"?!"
"넌 외동아들이 돼서 자기 밖에 몰라."
성호는 그 말에 한숨을 후~ 내쉬었다.
"고까짓 걸로야 리유로 될 수 없지. 혹시 부모를 모셔야 할 내가 싫어진게 아니야?"
순희는 속으로 이렇게 부르짖었다.
(아니야! 난 일찍 아버지를 여의여서 시부모라도 계셨으면 좋겠다. 시아버지 사랑도 받아보면 얼마나 좋겠니?)
그러나 그녀는 단마디로 대신했다.
“넌 그저 싫다.”
“왜?”
“아주 간단해…”
그녀는 “바라오르지 못할 나무는 바라보지도 말라고 했잖아." 하고 말하려다가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삼켜버렸다.
성호는 순희한테 다가가 앉았다.
순희는 손가락으로 시꺼먼 부식토에 줄을 쪽쪽 그었다.
성호는 순희의 속심은 모르고 횡설수설했다.
"거 이상 조카 월순이 또 놀릴까봐 겁나?"
순희는 머리를 점점 더 떨어뜨렸다.
"그럼?"
순희는 머리를 들어 성호를 피끗 바라보더니 눈길을 칼날 같은 구름송이가 절벽을 스치면서 흘러가는 파란 하늘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천번이고 만번이고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넌 대학생, 난 농민이야.)
"말해라. 도대체 무엇 때문이야?”
성호는 온 몸에 열이 올라 순희를 와락 끌어안았다.
순희는 몸부림치면서 성호의 억센 두팔을 밀어내더니 발딱 일어났다.
"이러지 말라. 어서 내려가자. 누가 보겠다."
성호는 따라 일어섰다.
"보면 뭐라니? 이젠 우린 중학생이 아니라 청년이란 말이다. 청년! 이전에 너네 엄마 뭐랬는지 아니?"
"?"
"내 엄마 너네 엄마를 찾아가서 빌었지. '우리 철 없는 성호 장차 순희와 결혼해 살겠다고 해놔서 이집 순희 애들에게 놀림을 당해 미안하오.' 그런데 너네 엄만 뭐라고 했는지 알아? ‘장차 애들 일을 어떻게 안다고 그러는가?’라고 하면서  성호를 너무 욕하지 말라고 했지. 어디 그뿐이야? 너네 월순이 날 '염치없는 올종자놈'이라고 욕한다고 다신 욕하지 말라고 엄포를 놓았지. 건 너네 엄마 날 좋아한단 말 아니고 뭐야?"
순희는 주춤 멈춰서서 성호를 곱게 흘겨보았다.
"개꼬리를 3년 파묻어도 썩지 않는다더니 그 개꼬리 개꼬리구나. 참, 넌 어쩜 항상 사춘기 소년처럼 철딱서니 없니? 눈치코치 없는 멍청이라고야. 원."
허나 성호는 순희의 뒤잔등에서 계속 열변을 토했다.
"넌 내 첫사랑이야. 죽어도 잊지 못할 첫사랑이야.”
순희는 오똑 멈춰 서더니 몸을 돌리고 정색해 물었다.
“너 도대체 뭘 보고 자꾸 이러니?”
성호는 “너 웃을 때 볼에 옴폭 파이는 볼우물이 얼마나 사랑스럽다고.” 하고 말하려다가 너무 유치한 것 같아 그만두고 동문서답을 했다.
“넌 길림에 이사가면서도 간다는 말도 한마디 안했지. 얼마나 서운했는지 아니? 영영 생리별하는가 했어. 헌데 오늘 이렇게 첫사랑 그대를 만날줄을 누가 꿈에나 생각했겠어."
순희는 실망에 찬 눈길을 흘리더니 또다시 몸을 돌려 천천히 걸었다.
"픽-"
순희는 랭소했다.
"네겐 첫사랑이 대체 몇이냐? 은숙이? 미옥이? 도대체 누가 네 첫사랑이냐? 넌 사춘기도 아니니데 딱 개구쟁이 같아."
순희의 보름달 얼굴에 어둠과 비웃음이 반죽된 그림자가 흘러지나갔다.
"내 첫사랑은 너 밖에 없어."
"호호호. 우리 학교에서 얼굴이 반반하다는 녀자애들을 건드리지 않은게 몇이나 돼?!"
"됐다, 됐어. 좌우간 내 마음  속에는 너 밖에 없어."
"남자애들 마음은 왜 그래? 한 곬으로 흐르지 못하고 여기저기 산지사방으로 흩어져 흘러?"
성호는 피할 곳이 없게 됐다.
무거운 침묵 속에서 그들은 산에서 터벅터벅 걸어내려갔다.
한참 후 성호는 순희 뒤에서 진달래꽃을 한가지 꺾었다.
"순희야, 이 진달래꽃이 곱지?"
순희는 주춤 멈춰서 돌아서더니 성호의 손에 쥐여진 연분홍 진달래꽃을 보고 반색했다.
"참 곱구나!"
금방 새침해하던 순희 같지 않게 반기는 것이 아니겠는가.
"옛다! 선물이야!"
성호는 진달래꽃을 순희 앞에 내밀었다.
순희는 진달래꽃을 받아 냄새를 맡더니 상을 찡그렸다.
"야! 불쌍한 진달래꽃을 왜 또 꺾어? 몇시간 지나면 말라 죽을게 아냐?”
성호는 횡설수설 늘여놓았다.
"넌 사랑의 선물을 받았으니 이젠 내가 알아서 할게."
"야, 무슨 헛소리야!"
성호는 들었는둥 말았는둥 희쭉거리면서 진달래꽃을 더 꺾어 작은 꽃다발을 제꺽 만들어 순희의 머리 우에 척 얹어주었다. 순간 성호는 진달래꽃다발을 쓰고 진달래꽃묶음을 든 순희를 보고 저도 몰래 환성을 질렀다.
"야, 이쁘다! 넌 한송이 진달래꽃 같아! 야, 이쁜 진달래꽃 처녀야!"
순희는 너무나도 당황해 "야, 이러지 말라. 이럼 난 어쩌니?"라고 했다.
성호는 환성을 멈추고 순희에게 다가갔다.
"순희야! 내 피뜩 한 가지 령감이 떠오른다!"
순희는 그윽한 정이 찰랑이는 눈길로 성호를 마주 보았다.
성호는 정색해 말했다.
"넌 예쁘고 목소리도 곱지 않고 뭐야? 아까 산 우에서 노래를 부르는 걸 듣고 웬 가수가 부르나 했어. 정말 가수를 하면 되겠더라."
"가수?"
"응, 그래. 가수를 해라."
"가수 하자면 가수 되겠니? 황차 시골 농민처녀애가?"
기실 순희는 문과대학생으로 되려다가 말고 가수로 될 새로운 꿈을 바꿔 고향에 놀러 왔다가 심란한 마음도 달래고 목청을 튀우려고 천지꽃산에 올랐던 것이다.
성호는 한 걸음 다가가 순희의 손을 잡고 열변을 토했다.
"농민처녀애라도 훌륭한 스승을 모시고 배우면 될 수 있어. 넌 중학교 때도 무대에 올라 꾀꼴새처럼 노래를 아주 불러 소문이 있었잖니?"
순희는 진달래 꽃을 들어 향기를 길게 들이켜더니 머리를 들고 성호를 정색해 마주 바라보면서 입술을 감빨았다.
"누가 시골 처녀애를 배워 주겠느냐?"
"내 다리를 놔서 스승을 찾아 줄게."
"네가?"
"그래."
성호는 미심해 하는 순희의 손을 두 손으로 꽉 잡았다.
"내 이모부가 예술학원 교원이야."
"그래? 뭘 가르치니?"
순희의 청포도알 같은 쌍까풀눈에서는 한줄기 희망의 빛이 반짝이였다.
성호는 신심에 차 말했다.
"이모부를 보고 성악교수를 소개해달라고 할게."
"글쎄."
순희는 반신반의했다.
그들은 묵묵히 산기슭으로 걸어 내려왔다. 저 먼발치 혁명렬사기념비 앞에 웬 사람이 절을 꾸벅꾸벅 하는 것이 보였다.
성호가 찬찬히 살펴보니 아버지였다.
"야, 숨자!"
순간 성호는 순희의 손을 잡고 진달래 숲에 숨어들어갔다.
처녀 총각의 가슴은 쿵쾅쿵쾅 높뛰었다. 뭘 도적질한 건 아니건만. 또 련애를 해선 안 될 사춘기도 아니건만.
"너네 아버진 우릴 발견하지 못했을가? 왜 청명도 아닌데 렬사기념비를 찾아 왔을가?"
성호는 하얀 보름달 같은 얼굴이 연분홍진달래꽃처럼 새파랗게 질린 순희의 얼굴을 훔쳐보면서 말했다.
"우리 아버진 해마다 이때면 기념비를 찾아 오군 해. 우리 큰할아버지와 큰할머니는 모두 항일유격대 군관이랬어. 그런데 바로 이 산기슭에서 큰할아버진 일본 놈들과 싸우다가 흉탄을 맞고 쓰러져 영용하게 희생됐다고 한다. 또 진달래라고 부르는 녀유격대는 임신한 몸으로 마지막유격대전사로 남아 피 한방울 남을 때까지 일본 침략자들에게 맹사격을 퍼부었대. 탄알이 다 떨어지자 돌로 일제놈들을 까부셨대. 일본놈들이 벼랑 우까지 기여올라와 그를 포위하고 생포하려고 했어. 그는 저 벼랑 우에서 뛰여내려 장렬하게 희생됐단다."
"오~ 그래?"
성호는 아버지가 두 손을 맞잡고 혁명렬사기념비 앞에 머리를 숙이고 묵념을 드리는 걸 보면서 뒤말을 이었다.
"이전에 아버지 얘기하던데 우리 큰할아버진 아주 힘장사였대. 이 천지꽃산 기슭에서 일본 놈들과 육박전을 할 때란다. 일본 놈 세 놈이 총창을 꼬나들고 덤벼들자 날아드는 총창을 틀어쥐고 그 놈들을 강아지 다루듯 휘둘러 쓰러뜨렸단다. 큰할아버진 탄알이 다 떨어지자 맨 무쇠주먹으로 그 세 놈의 대갈통을 까부셨단다. 그런데 뒤에서 덮쳐든 놈이 권총으로 쏘는 바람에 큰할어버지는 가슴에 흉탄을 맞고 쓰러졌단다. 후에 우리 아버지랑 마을사라들이 진달래렬사랑 우리 큰할아버지랑 렬사들의 유체를 모두 저기 혁명렬사기념비 뒤에 모셨단다."
"음~ 정말 비장하구나!"
"성호야, 거기서 뭘 하니? 어서 내려오라!"
성호가 가만히 진달래꽃숲을 헤치고 내려다보니 기념비  앞에서 아버지가 이쪽을 보고 손짓하지 않겠는가.
"들켰어."
순희는 진달래숲에 몸을 낮추면서 성호에게 눈을 흘겼다.
성호는 순희의 손을 잡은 손을 놓으면서 "넌 죽어도 여기서 나와선 안돼."라고 했다.
그는 혼자 아무 일도 없는 척하며 휘파람을 휘휘 불면서 산 아래로 내려갔다. 그때 저쪽에서 철주가 수레를 몰고 집으로 가다가 이쪽을 흘끔거리며 채찍으로 애꿎은 소잔등을 쨩쨩 후려갈겼다. 
순희는 허리를 굽히고 진달래꽃숲에서 살금살금 소나무숲 속으로 스며들어갔다.
 
 
 
 
 
 
 
 
 
 
 
                        2. 효자와 사랑
      갑자기 먹장구름이 뭉게뭉게 피여오르더니 천지꽃산을 지지눌렀다. 연분홍 진달래꽃잎들은 삽시에 불어치는 스산한 산바람에 몸부림치면서 떨었다.
성호는 한시급히 순희와 달콤한 꿈을 무르익히고 싶었다.
상진은 진달래꽃을 꺾어쥐고 내려오는 성호를 마주 보면서 정색해 말했다.
"얘, 너 그게 뭐야? 어째 불쌍한 진달래꽃을 꺾었니?"
성호는 대수롭잖게 진달래꽃을 쳐들어보였다.
"집에 가져다 병에 꽂아두자고 그럽니다."
"뭐라고?! 얼마나 고생스레 살아온 진달래를 그렇게 허타하게 꺾어?!"
"쌔고 버린게 진달래꽃인데 몇가지 꺾었다고 큰 일 나겠습니까?"
"얘, 그 진달래꽃은 무슨 꽃인지 알기나 아느냐? 일본 놈들과 싸우던 항일렬사들의 피로 물든 꽃이야."
아버지 말씀에 성호는 그제야 진달래꽃을 무심히 볼 수 없었다. 드디여 꽃을 마구 꺾은 잘못을 뒤늦게나마 느꼈다.
"오늘은 큰할아버지와 큰할머니가 희생된 날이야. 어서 큰절을 올려라."
상진은 성호를 데리고 기념비 뒤에 있는 커다란 혁명렬사 묘지에 다가가 큰 절을 세번 올렸다.
성호가 머리를 들어 천지꽃산 진달래꽃숲 속을 살펴보니 순희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아차, 우리 집에 데리고 갈 걸 그랬어. 오랜만에 만났는데 밥도 한때 대접하지 못하고 보내다니?)
"사내란 큰 일을 하려면 녀자를 멀리 해야 하느니라."
말수가 적은 아버지의 마디마디 말은 성호의 심장까지 쿵쿵 울려주었다.
아버지에게 꾹 잡혀 산 아래로 내려가는 성호의 발걸음은 무겁기만 했다. 한편 순희의 둘째오빠가 고향 마을에 있다는 것에 생각이 미치자 시름이 좀 놓였다.
아버지는 산기슭에 내려가 사래 긴 밭에 가 멈춰서는 것이였다. 밭머리에는 황소 한마리가 가대기를 끌다가 말고 서 있었다. 분명 아버지가 밭갈이를 하다가 쉼에 기념비에 절을 올리러 갔다가 온 것이였다.
"얘야, 너와 조용히 할 말이 있다.”
상진은 가대기를 잡고 채찍으로 황소를 "이라!" 하고 몰았다.
순간 상진이 쥔 가대기가 지나간 밭에 거머스럼한 부식토가 번져지면서 그윽한 흙냄새를 풍기였다.
상진은 밭을 갈면서 산기슭 저쪽 진달래꽃숲 속을 힐끔거리는 성호를 곁눈질하더니 무겁게 입을 열었다.
"얘야, 대학에 갔으면 쓸데 없이 녀자애들 뒤꽁무니를 따라다니지 말고 공부나 잘해라. 내 너만큼 공부를 할 수 있었더라면 현장도 했겠다."
그렇다. 성호의 아버지는 생활고로 소학교 대문에도 가보지 못했다. 그러나 해방전쟁과 항미원조전쟁에서 혁혁한 공훈을 세우고 제대하자 현공안국 초대국장을 맡았다. 상진은 문화대혁명때 반란파들의 피해를 받아 공안국장을 그만두고 농사를 지으면서 두번째고향 건설에 혼신을 다 바쳤다. 아버지를 두고 성호는 내심 탄복한 적이 한두번이 아니였다.
성호는 밭갈이를 하는 아버지 옆에서 고삐를 쥐고 소를 몰면서 묵묵히 따라 걸으면서 명심해 들었다.
"너 혹시 저 순희를 좋아하니?"
그 말에 성호는 머리를 숙였다. 황소는 성호가 대학교를 가기 전에 반년 넘어 방목하던 놈이여서 말을 잘 들었다.
"너도 이젠 컸으니 련애도 하고 대상도 찾아야 할 때긴 하지."
그 말에 성호는 안도의 한숨이 후~ 나갔다.
상진은 채찍으로 황소를 제 곯에 몰아넣듯이 성호를 자초부터 잘 타이를 예산이였다.
"대상을 고를 때 꼭 자기가 사랑하는 처녀를 골라야 한다. 음식은 먹기 싫으면 식탁에 뒀다가 먹을 수 있어. 허나 마음에 들지 않는 녀자와는 한뉘 살기 힘들다. 말하자면 사랑이 없는 결혼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거야."
그렇다. 상진은 자기 교훈을 아들에게 일러주고 있었다. 기실 상진은 공안국 국장을 할 때 한 마을에 사는 성실이라는 처녀와 서로 사랑했고 결혼했던 것이다. 그런데 성실이 아들애를 낳다가 난산으로 새파란 나이에 사망할줄을 누가 알았겠는가. 상진은 하는 수 없이 갓난애를 yj 시내에 애를 낳지 못하는 집에 주었다고 한다.
상진은 꽃나이에 사망한 사랑하는 성실을 잊지 못했다. 시어머니 역정에 개 배때기를 찬다고 성실이 생각나기만 하면 쩍하면 후처 영옥을 욕하고 때리면서 가정기물을 부시고 내던지기가 일쑤였다.
영옥은 너무나도 힘들어 항상 남편에 대한 불평을 자녀들에게 털어 놓군 했다.
"너넨 잘난 신랑 찾지 말라. 애비 인물이 잘나서 좋은 게 뭐냐? 인물을 뜯어먹고 살겠니? 잘나도  성질이 더러운 놈 만나면 나처럼 한뉘 고생한다."
영옥은 사위를 삼을 때나 며느리를 삼을 때면 항상 아들딸들에게 인물보다도  마음이 첫째라고 타이르군 했다.
"남편을 황제처럼 받들고 모셔라. 남편이 황제가 되면 너희들은 황후로 되는 거야."
또 아들과 사위들을 볼 때마다 늘 이렇게 말했다.
"남편은 집 안에서 아내를 아끼고 보살펴야 바깥에 나가서도 남에게 대접을 받소. 자기 아내도 아낄 줄 모르는 사람이 남을 아끼면 얼마나 아끼겠소? 집이 화목해야 만사가 잘 되는 법이오."
영옥은 이제 자기 집에 들어올 막내며느리만 잘 삶으면 되겠는데 정말 근심이 태산 같았다. 아들이 천지꽃산에서 소를 모는 목동일 땐 며느리감이 없을가봐  근심했는데 대학생이 되자 혼사말군과 며느리감 처녀들이 문턱이 다슬게 찾아들어 경사났다.
시아버지 사랑은 며느리라는데 이 집에서는 상진이 순희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 눈치였다.
상진은 밭머리에 가서 황소를 멈춰 세우고 성호를 정색해서 바라 보며 무겁게 말했다.
"넌 대상자를 고를 때 애비와 에미 걱정은 말고 사랑하는 처녀를 골라라."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부모를 모시고 효성을 다할 처녀를 데려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상진은 아들을 대견스레 바라보았다.
"그런 처녀 얻기 어디 그리 쉽겠느냐? 효성도 있고 사랑스런 처녀 이 세상에 몇이나 되겠느냐?"
상진은 황소 머리를 돌려 다시 가대기질을 하면서 뒤말을 이었다.
"그래 네 생각에는 저 순희가 사랑스럽고 효성이 있다고 생각하니?"
"예."
성호는 머리를 숙이며 쥐구멍으로 기어들어가는  듯한 목소리로 말하더니 발끝을 내려다보며 걸었다.
"심중하게 생각해봐라. 이래라 저래라 강요하진 않겠어. 대상자문제는 신중해야 해.”
"예-"
"네 지금 생각에는 순희가 세상에서 제일 고운 거 같아도 이후에 순희보다 더 이쁜 애가 나타날 수도 있어."
"순희는 내 첫사랑입니다. 어찌 첫사랑을 쉽게 버릴 수 있겠습니까?"
상진은 가대기를 깊숙이 박더니 황소를 멈춰 세우고 순희가 사라진 진달래꽃 숲 속을 두리번거리더니 나직이 말했다.
"이후에 살자면 맨 사랑으로만은 안돼. 농민처녀애 호구를 시내에 들여가려면 힘들어. 애들도 낳으면 시내호구로 올리기 힘들게고."
성호는 머리를 들고 장담했다.
"건 근심할 필요없습니다. 순희는 총명해서 꼭 예술학원에 입학할 수 있을 겁니다. 중학교 때도 학습위원이였습니다. 노래실력도 괜찮습니다. 내 이제 예술학원의 이모부한테 말해서 좋은 스승을 소개해 훌륭한 가수로 배양하게 할 예산입니다."
성호의 말을 유심히 듣던 상진은 무겁게 입을 뗐다.
"순희를 대학생으로 키워서 장가들려면 퍽 힘들겠구나."
"난 순희를 꼭 가수로 만들어 내 각시로 만들겠습니다."
상진은 밭갈이마저 멈추고 담배를 말아 물었다. 성호는 바삐 호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여 드렸다.
상순은 희죽이 웃으면서 성호를 바라보았다.
"너 다니는 대학에는 사랑할 만한 대학생 처녀애 하나도 없니?"
"없습니다. 내가 대학에 일찍 가다나니 모두 리상 누나들입니다. 다른 학부나 학년에도 눈에 드는 처녀 없습구마."
성호는 아버지 눈치를 흘끔 훔쳐보았다.
상진은 담배 연기를 후~ 내 뿜으며 한숨을 쉬였다.
"너 공부 바쁘지 않으면 집에 온바 하고는 이 밭에 둼이나 내라. 이 밭을 어떻게 얻어온 밭이냐? 밥을 먹고 사는 놈이라면 이 땅을 사랑해야 해. 부모에게 효성을 다 하듯 조상들의 피땀이 슴배인 이 밭에 땀동이를 기울여야 한다."
진짜 실농군의 철리적인 말씀이였다. 밭고랑 같은 주름살이 패인 얼굴에 내비치는 엄숙한 아버지 표정을 보고 성호는 오후에 순희를 데리고 시내로 가자던 일을 잠시 접기로 했다.
"아버지, 환갑이 지났는데 이젠 농사를 짓지 마십시오. 이제 대학을 졸업하면 아버지를 호광시키겠습구마."
"말만 들어도 고맙네. 아직 손에 풀이 있을 때 농사라도 지어서 아들을 섬겨 줘야겠네. 대대로 붙여오던 밭인데 내놓긴 아깝구나."
순간 성호는 콧마루가 시큼해나고 눈물이 글썽해졌다.
성호는 두 말 못하고 집에 돌아가 외양간에서 암소를 풀어 수레에 메워  돼지우리 옆의 퇴비장에 몰고 가서 삽으로 둼을 푹푹 퍼 실었다.
그는 둼수레를 몰고 가면서 천지꽃산 기슭의 그 사래긴 밭을 쳐다보았다.
"그래, 저 밭을 무심히 볼 수 없지."
성호는 아버지가 저 밭을 떠나지 않고 집착하는 마음을 조금이라도 알 것 같았다. 아버지는 조상들의 피땀이 배인 밭이라고 특별히 잘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연분홍진달래꽃이 둘러 선 천지꽃산 기슭의 밭에서 허리를 구부정하고 밭을 가는 상진과 둼을 밭에 내는 성호의 모습이 한폭의 농촌 사시풍경화와도 같이 안겨왔다.
 
 
 
 
 
 
 
 
 
 
 
 
 
 
 
 
 
 
 
 
 
 
 
 
                      3. 마음의 파도
       세상 만물이 다 변하는데 사랑이라고 변하지 않겠는가!
       성호는 아버지 말씀이 현실로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또 현실로 되면  너무나도 비극이라고 생각했다.
꽃구름이 두둥실 떴던 오전의 봄 하늘과는 달리 삽시에 서쪽의 천지꽃산에 먹장구름이 뒤덮여 오고 있었다.
성호는 도리머리를 흔들면서 땅이 꺼지게 한숨을 후~ 내쉬였다.
천지꽃산 기슭에서 소를 방목하던 목동이 이 시골을 벗어나 대학문으로 들어갔다는 것은 정말 고향 마을에서는 개천에서 룡이 난 새 신화나 다름없었다. 고향 마을에 천지꽃산의 전설이 생긴후 처음 기적적인 새 이야기가 파다히 퍼졌다. 성호는 소를 방목하면서도 늘 책을 호주머니에 넣고 가서 읽으면서 이 시골을 벗어나려고 청춘의 혼신을 불태웠다. 그리하여 집체호 교수들의 숱한 "왕자"들과 "귀공주"들이 대학에 가지 못했는데 농민의 아들인 성호가 대학으로 갔던 것이다.
성호는 집체호 영희나 해연이 대학에 가지 못한 건 별로 개의치 않았다. 교수들의 귀한 "귀공주"들인 그녀들은 모두 이제 시내에 들어가 아무 직업에나 취직해 시내에서 살 것이다. 하지만 농민의 딸인 순희는 시험에 급제하는 외에 농촌에서 벗어날 다른 방도가 없었다. 첫사랑인 그녀, 농민의 딸이란 딱지가 딱 들어붙어 풀밭에 그 고운 보름달 같은 얼굴을 파묻고 살 것을 정말 마음이 아팠다.
순희와 성호는 한 고향 마을에서 자란 죽마고우라는 것도 있지만 둘다 공부를 전 학교에 이름나게 잘한 최우수생이로서 1반과 2반의 학습위원이였다.담임 교원 경산 선생은 항상 그들 둘을 보고 시험지를 매기라고 했다. 성호와 순희는 서로 경쟁하면서도 서로 돕는 친구 사이였다. 남몰래 점점 리상야릇한 감정을 품게 됐고 이담 둘 다 커서 대학에 입학하자고 깎지걸이까지 한 사이였다.
성호는 리별의 쓰라림만 뿌려놓고 가버린 순희가 얄미웠다. 그 리별의 눈물이 소낙비로 억수로 쏟아져 내릴 지경이였다.
(어쩜 이사갈 때도 간단 말을 안 하고 갈 수 있어? 오늘 또 간다는 말 한마디도 안 하고 훌 가버렸어? 오후에 시내에 함께 가서 이모부를 만나 스승을 찾아주려고 했건만.)
성호는 책을 들어도 머리에 들어가지 않고 순희의 어두운 그림자가 흐르던 수척한 보름달 얼굴만 떠올랐다.
"얘야, 그만 둬라. 인연이라는 건 따로 있느니라."
옆에서 성호의 속내를 환히 꿰뚫어 본 어머니 말이다.
성호는 마지못해 책을 들여다보다가 소낙비가 뚝 멎자 책을 부랴부랴 책가방에 넣고 학교로 떠나려고 했다.
"김 대장 있소?"
뜻밖에도 순희 둘째오빠 학선이 찾아왔다.
"들어오오. 아니, 소낙비 오는데 어쩌다 우리 집에?"
개혁개방을 하면서 호도거리를 시작하자 며칠 전에 학선은 상진과 밭을 나누는 일로 대판 말다툼을 했던 것이다. 제비를 쥐여 천지꽃산 기슭의 밭을 나누자고 했다. 그런데 상진은 제비고 뭐고 그 밭은 자기가 가져야 한다고 고집했다. 리유는 간단했다. 그 밭은 자기 할아버지때부터 리지주네 황무지를 소작 맡아 개간한 밭이고 대대로 피땀을 몰부어 가꾼 밭이기때문이였다. 더구나 자기 큰아버지와 큰어머니가 천지꽃산에서 일본 놈들과 싸우다가 희생됐고 무덤도 천지꽃산 기슭 그 밭머리에 모셔져있기 때문이였다.
"그 밭을 지주와 토비들의 철발굽 밑에서 빼앗아내고 지키려고 내가 민병을 데리고 토지개혁을 하고 토비를 숙청하느라고 싸울 때 너희들은 집에서 녀편네 궁둥이나 지켰지 뭐야?! 어림도 없어! 흥!"
좀 쌍트럽긴 했지만 학선은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황차 그는 고집을 쓰기 시작하면 벽이라도 차고 나가는 상진의 호랑이 같은 성질을 알고도 남음이 있었다. 재수령감을 비롯한 마을 사람들도 상진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해 모두 제비뽑기를 그만두고 상진에게 천지꽃산 기슭의 그 기름진 밭을 주기로 했던 것이다.
학선은 상진에게 져서 천지꽃산 기슭의 그 욕심나는 밭을 가지지 못하게 되자 숱한 사람들 앞에서 침을 퉤 뱉으면서 욕지거리를 해댔다.
"김 대장한테 빌붙어서 콱 잘 살아라!”
그는 상진에게 흰자위를 부라리면서 "내 이후에 김 대장 네 집에 발을 들여 놓으면 내 이름을 바꾸겠다!"라고 두덜거렸다.
그는 밭을 재던 메터자를 쾅 던지고 휭 하니 찬바람을 일구며 자리를 떴다.
그래던 학선이 상진이네 집 안에 발을 들여놓았다.
"이게 서산에서 해가 뜨지 않았는가?"
상진은 학선이 무슨 일로 왔겠다는 걸 대개 짐작하고 허리를 뒤로 쭉 펴면서 빈정거렸다.
학선은 분을 억지로 삼키면서 구들에 올라와 앉으면서 전번과는 달리 아주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다.
"김 대장, 내 상론할 일이 있어 왔습꾸마."
"천지꽃산밭 말은 꺼내지도 마오."
상진은 한마디 꽝 해놓고 창문 밖으로 칠색무지개가 핀 먼 동산을 쳐다보았다.
"김 대장, 천지꽃산 밭이야 이 집에서 대대로 가꾼 밭인데 응당 김 대장네 붙여야 합지."
"허, 듣다가 좋은 말이구먼."
그제야 상진은 학선을 되돌아보았다.
"사실 오늘 온 건 김 대장네 성호와 내 막내 녀동생 순희 혼사말을 하러 왔습꾸마."
그 말에 상진과 영옥 내외는 서로 눈길을 마주치더니 일제히 성호에게 눈길을 돌렸다.
영옥은 입이 함박만해졌다.
"거야 좋은 일이지."
영옥의 말에 상진은 "에헴," 하고 건 가래를 떼면서 세귀눈으로 아내를 흘겨보았다.
그는 어쩐지 학선이 좋지 않았다. 전번에 밭분배 때도 그렇고 자기 밑에서 생산대 회계를 할 때도 그렇고 어쩐지 언쟁을 일삼아 오면서 시비를 걸던 나그네였다. 그래서 성호를 순희한테서 떼놓으려고 했는데 사돈까지 맺자고 하니 억이 막혔다.
(끝내 올게 왔구나. 어쩌지?)
상진은 마음을 정할 수 없었다. 저 집에서 발가벗고 접어드는 판에 심중히 처사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였다. 자칫 잘못 처사했다가 순희가 정말 며느리로 들어앉는 날에 한뉘 치란을 받을게 아닌가?
"애들은 서로 좋아하는 거 같은데 성호 아버진 어떻습둥? 우리 순희 이 집에 며느리로 들어오면 꼭 시부모를 잘 모실겁니다. 우리 엄마를 닮아서 마흔 다섯까지도 애를 줄줄 낳아줄 겁니다. 보십시오. 내 처가 월순을 낳은 이태 후에 우리 엄마 글쎄 마흔 다섯에 저 순희를 낳지 않았습둥? 기적이 아닙둥? 우리 순희도 꼭 김 대장네 집에 떡돌 같은 손자를 낳아줄 겁니다. 쌍둥이를 서넛 낳아줄 수도 있습구마. 예. 김 대장네두 옛날에 애를 열이나 낳지 않았습둥? 우리 집과 이 집은 애를 수태 낳는 가문이니까. 성호와 순희는 꼭 궁합이 맞을겝구마. 어떻습둥?"
학선이 젖을 달라고 졸라대는 어린애처럼 졸라댈수록 상진은 입에 빗장을 지른 채 쇠덩이 같은 침묵만 지켰다.
학선은 지원이나 청하듯 조왕간쪽 영옥과 성호를 건너다보았다.
성호는 아버지 눈치를 슬슬 보면서 감히 입을 열지 못하는 눈치였다.
"성호야, 네 말해 봐라. 순희를 좋아하지?"
성호는 대답대신 동문서답하듯 되물었다.
"순희 길림으로 가지 않고 집에 있습니까?"
학선은 한숨을 후 내쉬더니 머리를 툭 떨어뜨리며 나직이 대답했다.
"어제 네가 순희를 첫사랑이라고 하면서 약혼을 걸었다고 하더구나."
"뭐? 어쩌고 어째?!"
상진은 더 참지 못하고 손바닥으로 구들 고래 꺼지게 탕 치기까지 했다.
날카로운 호랑이 눈길에 질겁한 성호는 "내 언제 약혼하자고 했다고 그럽니까?" 라고 발뺌부터 했다.
그제야 상진은 그럼 그렇겠지 하는 표정으로 바뀌였고 학선은 일이 틀려가는  것을 눈치챘다.
"에이고, 어제 순희는 집에 돌아와서 울면서 이러다라. 성호가 자기를 좋아하는데 대학에 가지 못해 함께 살지 못해 죽을 거 같다면서 길림으로 가버렸다. 네가 순희를 좋아하면 좋아한다고 제대로 속심을 털어놔야지. 괜히 순희 마음을 뚜쟁이질해놓고 나 몰라라 하면 어쩌니?"
상진도 장차 애들 일이 어떻게 되겠는지 칼로 두부모를 베듯 하지 못하고 얼버무리였다.
"차차 보기요."
무슨 일이나 언제나 단칼에 베듯 과단하게 처리하던 상진은 성호와 순희 혼사말만은 꼬리를 달고 질질 끌었다. 순희가 대학에 가면 그때 혼사말을 해도 늦지 않다는 배포유한 흥정을 하려는 속심이였다.
"별 수 없지. 그렇게 하깁소."
학선은 맥없이 구들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오면서 골이 날대로 나서 속으로 두덜거렸다.
"내 무슨 녀동생을 줄데 없어 빌붙는 거 같소. 배부른 흥정을 하긴? 쳇! 이제 수도 북경에서 한자리 하는 큰형님이 순희를 데려다 취직시켜 북경 아가씨로 만들 거야. 중앙간부를 매부로 삼지 않는가 두고 봐라! 흥!"
자존심이 강한 학선은 네모난 낯이 수수떡처럼 벌개 집으로 돌아가면서 욕지거리까지 해댔다.
한참 후에 뜻밖에도 기다리던 순희는 오지 않고 순희네 이상조카 월순이 성호네 집 앞에 나타났다.
"성호야, 네 무슨 대단해서 우리 순희를 나무라니?!"
"이건 또 뭐야?"
성호가 바깥을 내다보니 월순이 불그락푸르락해 펄펄 날뛰는 것이 아니겠는가.
월순은 바깥에 나가는 성호를 손가락질을 하면서 별의별 악담을 퍼부었다.
"내 작은고모 뭐 시집갈 데 없다고 바람둥이 같은 너한테 빌붙을 거 같니?"
"야, 동네 영상하게 왜 이래니? 할 말이 있으면 집에 들어와 해라!"
성호의 말에 월순은 더 고아댔다.
"집에 들어가 뭘 해? 온 동네 사람들이 다 들으라고 떠들 테야!"
성호도 맞불질을 했다.
"네가 떠든다고 순희를 데려올 게 아니야!"
월순은 집에 들어올 기미도 없고 울바자 굽에 서서 온 동네 떠나가게 떠들어댔다.
“에이고, 그 잘난 시골 대학에 붙어가지고 작작 우쭐거려라.”
성호는 최후일격을 가했다.
"야, 월순아, 혹시 네가 순희를 질투하는 거 아니냐?! 작은고모를 이기고 나한테 시집오겠으면 이렇게 떠들어서 될 일이 아니야!"
월순은 얼굴이 홍당무로 돼버렸다. 필경은 그녀도 숫처녀였으니까.
"뭐라고?! 거 말이라고 하니? 난 네보다 두살이나 이상인데. 아무리 대학생이라도 그렇지. 내 주책없이 너한테 시집갈 거 같니? 죄꼬만 새끼!"
“별 멍청이들이라고야. 여기 와서 떠들면 너네 작은고모를 대학생한테 시집 보낼 거 같니? 월순아, 근심하지 말라!”
언제 구경하러 왔는지 철주가 닭무리 속 거위처럼 긴 목을 빼들고 끼여들었다.
“너네 순희는 이 사내대장부가 먹여 살릴 게!”
“하하하!”
“저 새끼 순희를 좋아하지 않니?”
마을 사람들은 일제히 철주에게 눈길을 돌리며 떠들썩했다.
철주는 숱한 사람들  속에서 고의로 목을 빼들고 고래고래 고함쳤다.
“대학에 붙지도 못한 계집애들이라곤, 성호를 쳐다보는 게 원래 우둔하지. 순희는 농부라도 나한테 시집와야 편안히 살 수 있어. 헌 신짝도 제 짝이 있는 법 아니요?”
월순은 철주의 정신 나간 소리에 억이 막혀 그저 입을 딱 벌리고 쏘아볼 뿐이였다. 뒤이어 발길에 차인 강아지처럼 바자굽에서 깨갱거리며 도망치 듯했다.
성호는 월순의 뒤잔등에 대고 빈정거렸다.
"네 작은고모보다 네가 시집오겠다면 혹시 고려해보겠는지 어떻게 아니? 집에 가서 네 둘째오빠와 토론하고 다시 혼사말 하러 오라!"
월순은 싸우러 왔다가 창피해 얼굴을 싸쥐고 도망가버렸다.
성호는 구경하러 모여든 숱한 마을 사람들을 둘러보면서 뒤에서 깨고소해 하였다.
서쪽 천지꽃산 쪽에 락조가 비낀 황혼 무렵이였다.
밥술을 들까 하는데 이번엔 집체호의 해연이 찾아왔다.
"어마나, 어째 떠들썩했는가 했더니만요. 우리 마을 대학생이 왔구나."
성호는 숟가락을 놓고 알은 체했다.
"올라오오. 식사했소?"
해연은 안경알을 춰올리더니 구들에 스스럼없이 올라오면서 "저녁을 주겠습니까?" 라고 했다.
영옥은 반갑게 맞이하면서 자기 곁에 자리를 내주었다.
"여기 앉아 잡숫소."
해연은 옛날 도고한 시내 귀공주 같지 않았다. 이전에 소를 방목하는 성호가 말을 걸어도 소 닭 보듯 하면서 말대답조차 하지 않았던 것이다.
성호는 한뉘 이 시골에서 소방목이나 하면서 살 일을 생각하니 너무 섧고 답답했다. 그는 항상 천지꽃산 기슭의 풀밭에 소를 몰아놓고 산꼭대기에 올라가 산기슭의 사래 긴 강냉이밭을 내려다보면서 쓸쓸한 노래를 부르군 했다. 그렇게 날마다 노래를 부르다나니 목청이 터서 꽤나 듣기 좋게 노래를 불렀다. 산기슭에서 성호 아버지랑 함께 기음을 매던 선화랑 해연이랑 영희랑 성호의 노래소리를 들으면서 흥이 나 함께 코노래를 흥얼거렸다.
해연이랑 선화랑 기음을 다 매고 호미를 들고 퇴근할 때면 성호도 산꼭대기에서 노래를 그만 부르고 소를 몰고 집으로 돌아갔다.
성호는 돌아오는 길에 태평강 물에 손을 씻는 해연과 선화를 보고 말을 걸었다.
“귀공주들 정말 선녀 같구먼.”
선화는 덤덤히 앉아 손을 씻었다. 해연은 아예 보기도 싫다는듯이 반쯤 돌아앉아 성호를 외면하면서 호미자루를 썩썩 씻더니 안경을 춰올려 다시 끼고는 훌 일어나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마을 쪽으로 가버렸다. 목동인 성호는 벼랑 우에 핀 그 진달래꽃송이들을 쳐다보지도 말았어야 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목동의 눈에도 예쁜 처녀들이 눈에 뜨이는 것을.
그때 상진이 터벅터벅 왔다. 선화는 자기 머리 수건을 벗어 성호에게 건네 주었다.
“자, 손을 닦소.”
선화의 그 뜻밖의 행동에 성호는 어리둥절해졌다.
“손이나 닦소.”
“감사하오.”
성호는 부자연스럽게 수건을 받아 손을 닦네 하고 선화에게 넘겨주었다.
“괜히 목동의 손때 묻어서 수건이 더럽혀지겠소.”
선화는 피씩 웃으면서 수건을 받아 손을 닦더니 강물에 훌훌 휭기어 씼으면서 중얼거렸다.
“별 소릴 다 하오. 지금 목동이나 선녀나 다를 배 뭐 있소? 다 풀밭에 까투리처럼 머리를 파묻고 궁둥이를 쳐들고 땅파기를 하는 신센데.”
성호는 체면이나 챙겨가지고 소를 몰고 우사로 돌아갔다.
해연은 안경쟁이였지만 훤칠한 키에 배구를 잘 쳤다.
농촌에서 운동대회를 열면 항상 대대 배구팀 주공격수로 돼 그물 우로 솟아 올라 풍만한 가슴을 내밀며 늘씬한 허리를 뒤로 젖혔다가 앞으로 펴면서 놀라운 파괴력을 가진 강타를 안기군 했다. 배구에서는 해연과 성호는 손이 맞았다. 성호는 항상 감독으로 나가 해연과 함께 배구팀을 지휘해 하나 또 하나의 승리를 이끌어냈다. 그런데 해연은 배구시합만 끝나면 성호에게 한치의 곁도 주지 않았다. 하긴 대학교 교수의 귀한 공주이니만큼 이 시골에 와서 일시 빈농들의 재교육을 잘 받고 추천받아 시내로 들어가야 했다. 괜히 농부의 아들 - 목동과 자칫 흐물거렸다간 한뉘 시골  소똥무지에 물앉을 수도 있었으니까.
신분제도가 심했던 그 시절에 시내 공호와 농민, 아니 대학교수의 공주와  농부의 목동 사이에는 건너 뛸 수 없는 어마어마하게 높은 담벽과 깊고 깊은 협곡이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였다. 시내 대학교수의 딸들인 해연이나 선화는 아무리 성호가 인물이 잘나고 김 대장의 아들이라고 해도 곁을 주지 않은 것은 당연지사라고 할 수 있었다. 성호로서도 자기 처지를 아는지라 그런 선화와 해연을 두고 머리를 끄덕이지 않으면 안됐다. 성호는 결코 한살씩 이상인 해연이나 선화를 언감 생심  사랑까지 할 수 있었겠는가. 다만 신분 차이, 그 것이 섧고 한스러웠다. 아니, 염오하고 증오했다.
“왕후장상도 씨가 따로 없거늘 이 세상에 시내 사람들과 농촌 사람들은 씨가 따로 있다더냐?! 흥!”
성호는 농부의 가문에서 태여난 더러운 팔자타령을 두덜거리면서 소채찍으로 소 궁둥이를 쨩, 쨩 치고 길가의 나무잎을 마구 치군 했었다.
“우리 아버지도 제 노릇은 못했어. 공안국장을 그만두고 이런 시골에 올게 뭔가? 부모를 모시겠으면 그 좋은 국장 권력을 빌어 할아버지와 할머니 호구를 시내에 옮겨 갔더라면 자녀들도 시내에서 살게 됐을게 아닌가? 그럼 내 팔자도 이렇게 소궁둥이나 치는 목동 신세로 되지 않았겠는데. 헛 참. 더러운 팔자야!”
성호가 대학으로 가자 모든 신분 차이의 장벽이 일시에 와그르르 무너졌다. 농부의 아들이라고 성호와 금을 쪽 그어놓던 수녀나 비구니 같던 해연이 오늘 성호네 집에 찾아온게 아닌가!
(해가 서산에서 뜨는 게 아니야? 대학 교수의 귀한 공주도 3년 째 대학시험을 쳐보더니 대학에는 아무나 가는 게 아니라고 생각된 건가? 혹시 시험공부 일로 해 지도받자고 찾아왔는가?)
점심상을 물리자 해연은 정색을 하면서 성호와 부모를 번갈아보았다.
“성호한테 혼사말을 할가 해서 왔습니다.”
영옥은 반가워 인차 “성호 이젠 혼처를 구할 때도 됐소. 어디 좋은 며느리감 있소?” 하고 물었다.
해연은 꽤나 웃겼다.
“이제 며칠 있으면 시내 들어가 살게 되는 처녀 하나 있어요. 인물 체격도 괜찮고 부모들은 모두 대학에서 교수 사업을 하는데요. 어려서부터 수양있게 자라서 시부모를 잘 모실 수 있대요. 그녀는 진짜 심청 같은 효성이 있는 효녀예요.”
영옥은 눈치 채지 못하고 “그래, 우리 성호는 맏이가 아니고 셋째아들이지만 아마 우릴 모실 팔잔 거 같소. 보오. 맏아들은 큰집 앞을 섰지, 둘째아들은 조선에 나갔지. 성호 밖에 없소. 이런 집에 들어올 시내 처녀 있다니 얼마나 기쁜 일이요?”
“여보, 말귀도 알아듣지 못하면서. 쯧쯧쯧.”
상진은 눈을 흘겼다.
해연은 상진과 성호 눈치를 번갈아보면서 “한살 이상인데 괜찮겠어요?” 하고 계속 물었다.
“거야 저희들 좋으면 나이가 뭐 대수요?”
영옥의 말에 상진은 한마디로 잘라버렸다.
“성호 뭐 누나한테 장가들겠소?”
영옥은 상진을 흘겨보면서 고집을 썼다.
 “나이 무슨 문제오? 예로부터 가정이 화목해야 모든 일이 잘 풀린다고 했습네. 한두살 이상이면 뭐라오? 누나 같은 녀자한테서 사랑을 많이 받고 좀 좋아서. 이 집엔 마음씨 착하고 효성이 지극한 며느리가 들어와야 하오.”
그때라고 생각한 해연은 한술 더 떴다.
“제가 이 집 며느리 되면 안 되겠습니까? 성호가 음력으로 1월 생인데 제가 12월 생이니까요. 전 한달 때문에 한살 더 먹었는데요. 동갑이나 다름없어요.”
해연은 성호를 흘끔 훔쳐보았다.
성호는 속으로 순희를 떠올리면서 입에 빗장을 지른 채 덤덤히 앉아 있었다. 부모를 모셔야 할 처지에 놓인 성호는 여러 모로 대상자를 물색하지 않으면 안 됐던  것이다.
상진은 너무 답답해 “얘, 혼사 말은 맺고 끊고 해야 해.”라고 했다.
성호는 그제야 겨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천천히 생각해봅지.”
해연은 줄포를 놓았다.
“알았어요. 혹시 순희나 선화 때문에 그러지 않나요? 성호씨가 대학에 갈 때 선화는 뭐 코바늘뜨개로 뜬 담배쌈지를 주었다면서? 흥, 그까짓 담배쌈지 인연이 그렇게 대단한가요? 난 시내에 살림집까지 갖춰 놓았어요.”
그 말에 영옥은 성호를 재촉했다.
“야, 네가 집까지 있는 처녀와 살면 시름 싹 놓겠다. 시내에 집을 갖추려면 얼마나 힘드니?”
“여보, 그 입 다물지 못하겠소?”
상진은 아내한테 눈알을 부라렸다.
해연은 훌 일어나면서 한마디 더 남겼다.
“성호, 잘 생각해 보고 답복해주오.”
그때 성호도 일어나면서 한마디 하려고 하려다가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삼켜버렸다.
(사랑은 나이를 그리 따지지 않소. 허나 사랑이 없는 결혼은 무의미하고 행복하지 않을 거요. 카멜레온 같은 처녀애, 이전에 목동질을 할 땐 쓴 외 보 듯하더니 지금 와선… 흥!)
순간 같은 시내 대학교 교수의 딸이지만 선화가 그래도 해연보다는 인정머리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최저한도로 머리수건을 벗어 목동에게 땀을 닦으라고 주던 선화는 최저한도로 자기한테 인간대접은 하지 않았던가!
해연은 집 안에 돌개바람을 세차게 일으켜놓고 횡 하니 가버렸다.
순간 성호는 소 방목을 하던 목동인 자기를 소 닭 보 듯하던 해연이 떠오르면서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바깥에서는 제비들이 빨래 줄에 앉아 몰려오는 먹장구름을 보면서 소낙비가 올 징조를 예고하듯이 짹짹 거리다가 집 안으로 날아 들어와 둥지에 올라갔다. 제비새끼들은 주둥이를 벌리고 먹이를 달라고 짹짹 울어댔다.
이튿날, 동녘 하늘이 희붐히 밝아오자 성호는 바삐 아침을 먹네 하고 시내로 돌아가는 길에 올랐다. 그는 순희 둘째오빠를 찾아가 순희 주소라도 알아볼가고 주춤 멈춰섰다가 발길을 돌렸다.
마음의 거센 파도 충격에 그는 학교로 돌아가는 길에 착잡한 생각에 빠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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