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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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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카테고리 : 소설

대하소설 진달래 소야곡(7)
2018년 01월 09일 16시 25분  조회:1447  추천:1  작성자: 김장혁



                                 12. 복도에서 벌어진 희극
휘몰아치는 눈보라에 몸부림치는 백양나무가지에서 눈송이들이 주정을 부리면서 맥없이 떨어졌다. 희읍스름한 창 밖 하늘이 음침하게만 느껴졌다.
성호는 침대에 누워 맞은 켠 승호의 빈 침대를 보면서 착잡한 생각에 잠겼다.
(다 끝났어. 사랑은 티 없이 맑고 깨끗한 두 심장으로 연주하는 멜로디야. 사랑의 진실은 결국 순정인 거야. 은영은 이미 모든 걸 승호에게 짓밟혔어.)
성호는 저도 몰래 눈물을 줄 끊어진 구슬처럼 줄줄 흘리면서 베개잇을 적셨다. 이제껏 공부도 제대로 하지 않고 추구해온 사랑을 놓치자 절망감을 느꼈다. 천길 나락에나 떨어지는듯이 눈앞이 캄캄해났다. 사랑하는 은영이 색마에게 정조마저 무참히 짓밟힌 것으로 하여 칼로 심장을 도려내는듯이 아팠다.
(불 보듯 빤하지 않은가. 은영은 정조를 바친바 하고는 죽든 살든 승호에게 달라붙어 살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러찮으면 승호가 경옥과 홍희와도  사귄다는 걸 알면서도 승호한테 빌붙을 수 있겠는가.)
성호는 모진 진통을 겪은 후 한숨을 후~ 내쉬였다.
더는 은영을 괴롭힐 수  없어 놔줄 수밖에 없었다. 순간 성호는 이상하게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다만 목숨을 걸고 열렬히 사랑했던 은영을 잃은 진통과 더불어 은영의 암담한 미래가 근심스러웠다. 색마가 미리 파놓은 함정에 은영을 빠지게 놔두는 것이나 다름없어 마음이 고달팠다.
(나한테 시집오면 고생이지. 농민의 아들이여서 물려받을 재산은 없는데다 설상가상으로 시부모를 모셔야지. 또 아홉이나 되는 시형과 시누이들 속에서 어떻게 눈치를 보면서 시집살이를 한단 말인가. 씨원히 잘 됐어. 사랑하는 은영을 데려다 고생시키잖아 대행이야.)
그는 승호가 색마의 본성을 고치고 은영을 진정으로 사랑해줄 것을 기대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젠 성호는 승호와 사랑의 라이벌로부터 옛날처럼 친구로 되돌아가고 싶었다. 그러나 승호가 자기를 “농부의 아들”이라는지 “촌뜨기”라는지, “농포”라는지, 소궁둥이를 치던 “목동”이라는지 뭔지 하면서 깔보는 것이 마음에 앙금이 가라앉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개자식, 언젠가는 농부 아들의 짯짯한 맛을 보여 줘야지.)
성호는 자리를 툭툭 털고 일어나 바깥으로 나왔다. 울적한 기분과 홀가분한 마음이 반죽할 때 어디에 가서 술로 쓸쓸한 기분을 달래고 싶었다.
그는 눈보라가 룡트림하는 큰 길에 나섰다가 주춤 멈춰섰다. 호주머니를 뒤져보아도 달랑 동전 몇잎 밖에 없었다.
“이게 바로 농부 아들의 설음이구나.”
그는 숙사로 되돌아가다가 또 주춤 멈춰 섰다.
(선화네 음식점으로 가볼가? 술은 외상으로 얼마든지 마실 수 있는데.)
그 생각도 인차 접었다.
(아니야, 난 절대 승호처럼 허위적인 사랑을 미끼로 처녀애들의 마음과 육체를 사기칠 수 없어. 에라, 그만두자. 술을 마시지 못하면 말라지. 공을기처럼 선술집에 가서 땅콩 한접시에 외상으로 소주 한잔 쪽 마실 순 없어.)
성호는 아무리 농민의 아들이라고 해도 70년대 땅을 밟고 하늘을 떠인 사내대장부, 아니, 농민출신 대학생의 기개마저 접고 싶지 않았다.
“오빠, 어디 갔다 와요?”
등뒤에서 느닷없이 들리는 처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해연이 아니겠는가.
(오빠라니? 한살 이상 돼가지고.)
성호는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꿀꺽 삼키고 건성으로 대답했다.
“산보를 나왔소.”
해연은 오가는 대학생들을 개의치 않고 다가서면서 속삭였다.
“전번에 대학교 식당에 출근한다고 말한 거 같은데요.”
“오, 깜빡 잊었구나.”
해연은 주위를 둘러보더니 성호에게 바싹 다가와 은근히 귀속말로 소곤거렸다.
“내 식당 책임자로 발탁됐거든. 식당에 다른 학생들이 없을 때 조용히 찾아오라고. 채를 듬뿍 담아줄게.”
“음.”
해연은 성호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종알거렸다.
“어째, 오빠 얼굴기색이 좋잖군요. 무슨 일이 있는가요?”
성호는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해연은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더니 성호의 팔소매를 잡아끌었다.
“우리 어디 가서 한잔 마실가?”
성호는 속으로는 때마침 잘됐구나 하면서도 능청을 떨었다.
“식당 책임자가 출근시간에 술 마시면 되오? 어서 출근이나 하오.”
“식당 일이야 아래사람들이 하지 않을라고? 길에서 이러지 말고 어서 가기요. 내 한잔 내죠.”
성호는 못 이기는 척하면서 끌려갔다.
해연은 성호를 끌고 또 선화네 선녀음식점으로 갔다.
“아니, 오빠 오랜만이구만요.”
선화는 음식점에 들어서는 성호를 보고 아양을 떨다가 뒤에 따라 들어서는 해연을 보고 새침해졌다. 보름달 같은 얼굴에 질투의 그림자가 파도치며 스치고 지나가기까지 했다.
“음식점이 잘 되니?”
해연의 물음에 선화는 건성으로 “그래, 너까지 도와준 덕에 밥이나 먹을 수 있지.” 하고 대답했다.
“오빠, 뭘 잡숫겠어요?”
“농부네 아들이야 주는대로 먹지 뭐.”
선화는 아주 정색해서 종알거렸다.
“천만에 말씀, 대학생오빠 뒤에 처녀들이 줄지어 따라다니는데. 우리 음식점에 자주 오세요. 무료로 잘 대접할 테니까.”
해연도 뒤지지 않으려고 했다.
“야, 우리 별로 공짜로 얻어먹으러 온 거 같구나. 후에 다신 오지 못하겠어.”
해연의 말에 선화는 저쪽으로 가서 복무원처녀를 보냈다.
해연은 돼지고기, 소고기, 개고기에 물고기 채를 시켜 한상 차리는 판.
“언제 다 먹겠소? 랑비하지 마오.”
“다 못 먹으면 비닐봉지에 싸서 숙사에 가지고 가서 잡수세요.”
이윽고 진수성찬이 상다리 부러지게 올라왔다.
성호는 기분이 울적한데 해연이 권하는 술을 한잔, 또 한잔 마시다나니 얼근이 됐다.
“고맙소.”
성호는 해연의 술잔과 댕그랑 부딪치고 한잔 또 쭉 굽내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손님들이 시글버글한데 선화가 주방에 들어가 맴돌고 있었다.
성호는 고개를 돌리더니 해연의 손을 덥석 잡았다.
해연은 놀라 반사적으로 손을 빼려다 말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해연이, 누나, 정말 고맙소.”
해연은 손을 빼면서 나직이 중얼거렸다.
“누나? 취했어? 누나는 무슨 누나? 애인이라면 안돼요?”
성호는 취기가 오른 얼굴에 희죽이 웃음을 짓다 말았다.
“난 농민의 아들이란 말이요. 부모를 모실 효자. 허허허. 누가 나한테 와서 개고생을 하겠소?”
성호는 술병을 쥐어 꿀꺽꿀꺽 마셨다.
“이러지 마세요. 취하겠어요. 난 그런 개고생을 하고 싶은데 어쩌지?”
“바보. 아직도 포기하지 않았어?”
“난 당신의 바보로 되고 싶어요. 농촌에서 돼지치기랑 하면서 살면 재밌을 것 같은데.”
성호는 도리머리를 홰홰 저었다.
해연이 술병을 빼앗을 때 선화가 오이랭채를 한접시 들고 사뿐사뿐 다가왔다.
“한잔 따라도 괜찮지요?”
해연이 상을 찡그렸다.
“얘, 이제 와서 뭐야? 오빠 취하겠어.”
“괜찮아.”
성호는 술잔을 선화 앞에 내들었다.
“로동자처녀들이 좋아. 순박하고 진심이란 말이야. 안 그래?”
성호는 해연과 선화를 번갈아보면서 떠들어댔다.
“자, 한잔 주오. 선녀의 술을 천잔, 만잔 마시고프오.”
선화는 해시시 웃으면서 유리잔에 술이 찰찰 넘치게 따라 두손으로 손수 올렸다.
“자, 선화 한잔, 해연도 한잔.”
성호는 술병을 들어 선화와 해연의 잔에 술을 따랐다.
“난 농민의 아들이지만 처녀부자라니까. 하하하. 대학생처녀들과 사귀지 않을래. 순박하고 진심인 식당 누나들과 친하겠어.”
선화와 해연은 서로 눈길을 마주치더니 성호의 잔과 댕그랑 부딪치고 한잔씩 쭉 굽냈다.
선화는 해연과 동창생인지라 스스럼없이 개고기점을 집어 성호 입에 넣어주었다.
성호는 볼이 미여지게 우물우물 씹어넘겼다.
“선화, 요즘, 내 동창친구 자주 다니오?”
“오빠 심통한 그 친구 말이죠?”
“그래. 그 꺽다리친구.”
“거의 사흘 건너 한번 온다면 섧다 할 지경이지요. 그 량반 녀자친구 많더구만요. 번마다 다른 녀자친구를 데리고 오던데요. 뭘 하는 집 자식인지 돈도 물 쓰듯 하던데요.”
성호는 대개 짐작이 갔다.
“그래, 체육머리를 한 녀자애도 데리고 왔지?”
“맞아요. 보름달처럼 얼굴이 동그란 처녀애도 데리고 왔는데. 뭐 ‘홍희’라고 하는 같던데요. 점심에 데리고 온 굽슬굽슬한 체육머리를 한 녀자보다 더 어리고 예쁘던데요. 그 꺽다리 말이요. 메부리코를 어데가 다쳤는지 반창고를 더덕더덕 붙이고 왔던데요.”
꽝!
“어마나!”
해연과 선화는 이구동성으로 비명을 질렀다. 해연은 손으로 입을 막았고 선화는 두 손으로 머리를 싸쥐였다.
성호가 주먹으로 술상을 내리친 바람에 술병이 땅바닥에 떨어져 박살났다. 개고기 국물도 주르르 흘러 땅바닥에 떨어졌다.
“왜 이래?”
선화가 의아해 성호를 마주 바라보았다.
“미안하오. 그만…”
“이젠 돌아 가자요.”
해연은 결산까지 하고 성호를 부축해 음식점에서 나갔다.
등뒤에서는 선화가 “안녕히 가세요. 또 오세요.”하는 간드러진 인사말이 묻어났다.
바깥은 벌써 칠흑같이 캄캄했다. 눈보라가 기승을 부리면서 엄습해도 성호는 예쁜 해연이 동무해주는데다 술기운에 추운줄 몰랐다.
“우리 공원에 들어가 놀가?”
“미쳤어? 이 추운 겨울에 뭘 놀아?”
“눈싸움을 해볼가?”
성호는 해연에게 팔을 맡기고 비칠거렸다.
“싸움은 끝났어. 끝났단 말이야.”
“뭘? 눈싸움을 하지도 않고 벌써 끝났어?”
성호는 취기가 버쩍 올라 제 좋은 소리를 쳤다.
“결투는 끝났단 말이야. 그 놈새낀 소나무에 처박혀 죽다 살아났어. 허허허. 제깐 놈이 시내에서 자랐노라고 우쭐거려도 이 굴 뱀을 이길 수 있어. 뭐? 호랑이라고? 허허허. 룡호상박이라. 거죽 밖에 없는 호랑이는 이 왕의 후손인 룡을 이기지 못한단 말이야. 종이범이 룡을 이길 수 있어? 허허허.”
해연은 듣고도 무슨 소린지 몰라 어안이 벙벙해 성호를 쳐다보며 앞으로 걸어갔다.
(이렇게 추운 날에 길에서 취해 쓰러지면 어쩌지?)
해연은 손목시계를 들여다보고 식당 근처에 있는 자기 집 쪽으로 성호를 부축해 갔다.
“아하, 이거 방향이 틀린 거 같아. 숙사 가는 길 아닌데.”
성호는 주춤 멈춰서 겨우 몸을 가누면서도 여기저기 둘러보았다.
“어디로 가? 외박은 절대 안돼.”
“우리 집으로 가서 좀 쉬고 술을 깬 후에 숙사로 가오.”
“안돼. 취하지 않았어. 숙사로 돌아가야 해.”
성호는 해연을 뿌리치고나서 “오늘 감사하오. 꼭 갚아줄게.”라고 하고는 돌아서서 용케도 숙사로 비칠거리면서 돌아갔다.
해연은 시름이 놓이지 않아 은밀히 뒤따라가면서 성호가 숙사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서야 돌아섰다.
뒤에서는 룡과 호랑이 싸우는듯 눈보라가 윙-윙 무서운 소리를 지르면서 기승스레 불어쳤다.
해연은 피뜩 학교 창고 쪽을 둘러보다가 가로등 불빛에 창문이 하나 열려 바람에 덜커덕거리는 것을 보았다.
(에이, 어쩜 창문도 닫지 않고 퇴근했어?)
그녀는 저도 몰래 학교 창고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는 창문 가까이 다가갔다가 이상하게 눈가루 뒤덮인 창문턱에 크고 작은 발자국이 찍혀 있지 않았겠는가.
(혹시 창고에 도적이 들었는가?)
가만히 동정을 살펴보니 진짜 복도에서 인기척이 나는 것이 아닌가.
해연은 경각성을 높이기 시작했다. 그녀의 머리에는 성호가 번개처럼 떠올랐다.
그녀는 고양이처럼 발뼘발뼘 뒤걸음질치다가 남성숙사 쪽으로 뛰여갔다. 단숨에 3층에 뛰여올라간 그녀는 성호네 침실 문을 두드렸다.
“누구야? 밤중에 성가시게.”
“해연인데요.”
“뭐? 해연이?”
침실에서 부시럭거리더니 신짝을 짝짝 끄는 소리가 들렸다. 덜컥 문을 연 성호는 놀란 해연을 보고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해연은 침실에 들어가자 “큰 일 났어요. 창고에 도적이 든 거 같아요.”라고 했다.
“뭐? 도적?!”
성호는 범송이랑 종수랑 불러 식당으로 줄달음쳐갔다.
그들은 쥐도 새도 모르게 식당을 포위하고 돌멩이랑 주어들고 삼엄하게 대기했다. 성호는 해연을 뒤따라 창고 뒤문을 열고 슬그머니 사무실에 들어갔다. 해연은 전지를 찾아 들고 성호는 망치를 주어들었다.
성호는 해연의 귀에 대고 뭐라고 쑤군거리더니 복도 문을 슬그머니 열고 달빛이 드문드문 깔린 복도를 쪽제비처럼 살금살금 들어갔다. 해연은 뒤에서 따라가며 수시로 전지불을 켤 준비를 했다.
(저게 뭐야?)
굽인돌이를 꺾어돌자 저쪽 복도에서 웬 녀성의 신음소리가 간간히 들렸다.
성호는 가로등과 달빛을 빌어 복도를 찬찬히 살펴보고 깜짝 놀랐다.
희미한 전등불빛이 비껴드는 복도에서 웬 벌거숭이 남녀가 누워 버둥거리는 추태가 보이지 않겠는가!
해연은 코를 싸쥐고 킬킬킬 웃었다. 성호는 해연의 손에서 손전지를 빼앗아 쥐고 더러운 남녀를 비추었다. 깜짝 놀란 남자는 황급히 일어나 옷을 주어들고 창문턱에 뛰여올라갔다.
“붙잡아라!”
성호가 고함치면서 쫓아갔을 때 벌거숭이 남자가 바깥으로 뛰여내렸다.
“서라! 이 도적놈들!”
바깥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미처 뛰여나가지 못한 벌거숭이 녀자는 바깥의 고함소리를 듣자 옷으로 얼굴과 가슴을 가리면서 복도 저쪽 끝으로 달아났다. 해연이 쫓아가자 벌거숭이 녀자는  창문고리를 벗겼다.
성호는 차마 손전지로 더 비추지 못했다. 긴 머리카락을 흩날리면서 창문턱에 기여오르는 그녀의 뒤태가 홍희 같아 보였기 때문이다. 그녀는 옷을 안고 창문턱에 홀짝 뛰여오르더니 바깥으로 뛰여내렸다.
“도적이야!”
“히히히.”
“어디로 도망쳐!”
“아니, 이게 누구야?!”
“하하하!”
“허허허!”
남학생들은 분명 홍희라는 것을 발견했다.
성호는 손전지불을 내리며 창문으로 바깥에 뛰여내렸다.
범송은 도망치는 남자를 안걸이를 걸어 번져놓고 발로 대가리를 밟고 서서 한창 우쭐거렸다.
“이 놈 씨름장수 손에서 벗어나려고?!”
“야, 놔라. 내다, 내!”
벌거숭이는 낯을 가리웠던 옷을 치우면서 범송의 발 밑에서 애걸했다.
“뭐라고?”
“이게 누구야?!”
범송이 낯을 밟았던 발을 들었다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뜻밖에도 승호가 아니겠는가!
진짜 웃지도 울지도 못할 노릇이였다. 모두들 벌거숭이들이 옷을 입는 것을 놔두고 숙사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홍희는 옷으로 얼굴을 가리고 달빛 속에 눈보라 속에 사라졌다. 허나 승호는 개꼴망신을 당하고서도 옷을 주섬주섬 주어입으면서 철면피하게도 큰소리를 떵떵 치며 위협했다.
“흥! 어느 새끼 감히 학교에 고발해봐라! 깡패들을 시켜 재가루를 만들어놓을 테다!”
모두들 코를 싸쥐고 킬킬거렸다.
범송은 허리를 구부정하고 웃으면서 “오늘 재수 좋게 희극을 보았어. 허허허.”하고 떠들어댔다.
저쪽에서 승호의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맨 물에 거시 같은 새끼, 작작 너덜거려라.”
범송은 홱 돌아서 소리 나는 쪽을 쏘아보았다.
승호는 계속 위협했다.
“촌뜨기새끼, 까딱 개소릴 치면 없애치우겠다!”
범송은 승호를 보고 혀를 한발이나 내두르면서 빈정거렸다.
“적반하장이라구야! 쳇! 숱한 처녀애들 정조를 짓밟아 놓고서도 무사할 거 같아? 퉤! 퇴학을 맞지 않나 두고 보자!”
희극은 어둠 속에 서서히 막을 내리면서 기승스레 불어치는 눈보라가 모든 종적을 감춰버렸다.
 
 
 
 
 
 
 
 
 
 
 
 
 
 
 
 
 
 
 
 
 
 
 
 
 
                                             13. 사랑의 진실
      발이 없는 소문이 천리를 간다고 복도에서 벌어진 희극은 윙윙 휘몰아치는 눈보라를 타고 온 학교에 파다히 퍼졌다. 기말복습을 하느라고 조용하던 교정은 운석이 떨어진 호수처럼 부글부글 긇어면서 요란해졌다.
      홍희는 머리를 들고 교정에 다니기 힘들어 종일 숙사에 붙박혀 이불을 푹 쓰고 들어누워 있었다. 이불 밑에 흐트러진 머리카락 사이에 퍽 수척해진 얼굴이 반쯤 드러났다. 그녀는 밥을 먹으러 식당에 가지 않았다. 식당 복도만 생각해도  머리카락이 곤두설 지경이였다.
한 침실에 있는 정희가 식당에서 죽을 타다가 침대머리에 놓으면서 홍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얘, 죽이나 먹어라.”
홍희는 이불로 얼굴을 푹 가리였다.
기실 정희는 홍희가 승호에게 바싹 달라붙는 것에 잘 리해되지 않았다.
(승호한테 약혼녀가 있다는데도 망신당할게 뭔가.)
그녀는 정조를 녀성의 생명으로 간주했기에 홍희의 행실을 리해할 수 없었다.
(이제 승호가 헌신짝 차버리 듯하는 날엔 어쩔 셈인가?)
홍희도 승호가 은영을 좋아하는 것을 눈치챘다. 그러나 승호와 은영이 마지막 장벽까지 넘었는가는 알 수 없었다.
외지 시골에서 자란 그녀는 농부의 일생이 어떻다는 것을 알고도 남음이 있었다. 집에는 남동생 둘에 녀동생 셋이나 있었다. 그녀는 부모와 동생들의 유일한 희망이였고 정신기둥이였다. 그녀는 승호와 결혼해 시내에 남아 한평생 농사를 지으면서 고생한 부모를 시내에 모셔다 효성하려는 미몽을 꾸었다. 그녀는 또 맏이로서 동생들을  경제적으로도 도와주고 싶었다. 그러나 전날 저녁에 식당에서 추태를 보인후 이제껏 모든 정성을 다해 쌓아 온 탑이 한날 한시에 와그르르 무너지는 것을 느꼈다.
이전에 그녀와 승호가 벽돌공장 숯가마 안에 들어가 련애하다가 허서기에게 들키워 무장부에 끌려가 심문받고 처분받은 적이 있었다. 승호는 그때 입당할 기회마저 박탈당할 번했다. 다행히 승호는 아버지 덕분에 쓰러지면 뒤집어눕는 재간이 있어 그저 검사서나 쓰고 말았다. 허나 대학교당위 기률검사위원회 허서기는 승호와 홍희를 조용히 불러 “다시 련애하기만 하면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은 적이 있었다. 이제 누가 이번 사고를 고발하는 날엔 무슨 낯으로 허서기를 본단 말인가?
(퇴학맞으면 자살하고 말테야.)
그녀는 희망이 절망으로 뒤바뀌는 순간 천길나락으로 떨어지는 감이 들고   괴롭기만 했다. 어둠칙칙한 심연으로 끊임없이 빠져 들어가는 것 같아 한시도 견디기 어려웠다.
순간 그는 승호가 한없이 원망스러웠다.
(얼마나 능력을 자랑하던 슈퍼맨인가. 뭐냐? 전날 밤의 행실은 그를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뜨리지 않았는가?)
홍희는 학교에 온 후 자기 사랑의 오아시스의 주인공으로 승호를 선택했던 것이다. 물론 그녀는 승호가 좋아하는 녀자들이 많다는 것을 모로지 않았다. 그녀는 승호가 한메터 70도 훨씬 넘는 사나이다운 체격에 무섭게 매력있는 세귀눈에 퐁당  빠져버렸다. 또 학급의 체육위원과 대학교 학생회 체육부장이였다. 그 슈퍼능력에 반해버렸다. 날이 갈수록 승호는 남다른 야망을 가진 진짜 사내라고 여겨졌다. 게다가 승호 아버지는 시내 공안국에서 과장을 하고 엄마는 병원에서 총간호장을  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때로부터 승호와 같은 완벽한 대학생총각, 백마왕자는 이 세상에 둘도 없다고 생각했다.
홍희는 사랑의 거미줄로 승호라는 권세가문의 백마왕자를 꽁꽁 묶어놓고 싶었다. 홍희는 백방으로 승호 주위를 감돌면서 그런 날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녀는 자리를 정돈하는 기회를 타서 승호의 딱 앞에 앉아 승호의 눈에 쉽게 뜨일 수 있는 지리적위치부터 확보했다. 우유빛얼굴에 크림에 분까지 하얗게 바르고 승호 앞에 앉아 분내를 풍기였다. 철학이나 정치경제학 공부는 그럭저럭 해도 되련만 공부할 때면 쩍하면 머리를 돌려 승호한테 이것 저것 묻군 했다. 그뿐이 아니였다. 아버지가 온돌을 뜯어 고쳐 준 용돈으로 승호에게 손수건도 사다 가만히 필기장에 끼워놓기도 하였다.
승호는 차츰 수태 따르는 녀자애들 속에서 홍희에게 눈길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날은 끝내 돌아오고야 말았다. 대학 3학년 때 어느 여름날 밤이였다.
홍희가 교실에서 공부를 다 하고 숙사로 내려와야 했다. 그런데 승호는 뭔가 계속 들추면서 엉덩이를 들 념도 하지 않았다.
홍희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승호에게 나직이 “오빠, 숙사에 내려가야겠는데요. 어쩐지 무서워요.” 하고 종알거렸다.
승호는 “데려다줄게.” 하고 대답하면서 책가방에 둘러메고 우쭐 일어났다.
가로등불빛이 환히 비추는 교정을 뒤로 하고 숙사에 내려오는 나무숲 속 오솔길은  꽤나 어둠침침해 녀학생들이 홀로 걷기는 무서운 곳이였다. 언젠가는 시내 건달들이 어두운 밤에 나무숲 속에 숨었다가 불씨에 뛰쳐나와 한 녀대생을 끌고 들어가 강간하려 했다. 그때 경비원들이 뛰여나오는 바람에 그 녀대생은 봉변을 면했었다. 진짜 그 나무숲 속의 여기저기서 공포가 귀신처럼 도사리고 있었다.
홍희는 저도 몰래 승호한테 다가서면서 “무서워요.” 하고 팔을 끼였다.
“무서워 마오. 내 있잖아.”
승호는 스스럼없이 오른 팔로 홍희의 허리를 껴안고 걸었다.
“시내 깡패도 다 때려눕힌 호랑이가 옆에 있는데 무서워 할게 뭐요? 어떤 놈이 감히 호랑이 코구멍을 들쑤신대?”
홍희는 승호의 호언장잠을 믿었다. 체육시간에 꺽다리 범송을 메치는 것을 보았고 장거리달리기를 달리는 것도 보았던 것이다.
허나 그녀는 그 나무숲 속을 지날 때면 겁났다.
“호랑이 말을 더 하지 마세요. 범이 자기 흉을 하면 온다고 하지 않았어요? 괜히 자는 호랑이를 깨울라…”
그때다.
“서랏!”
“앗!”
갑자기 괴성과 함께 나무숲 속에서 괴한 서넛이 뛰쳐나왔다.
“살겠거든 계집을 놔두고 꺼져!”
홍희는 비명을 지르면서 승호의 등뒤에 달라붙었다.
“어디서 굴러온 놈들이냐? 언감 교정에서 강도질해?!”
“족쳐라!”
괴한들은 우르르 쓸어들었다.
“얏!”
탁!
퍽!
어둠 속에서 승호가 훌쩍 날아나가면서 발길로 차고 주먹으로 내질렀다. 단번에 두 놈이 쓰러졌다. 한 놈은 홱 몸을 돌려 곤두박질쳐 승호의 뒤에 날아내렸다. 그자는 비수를 뽑아 승호의 잔등을 푹 찔렀다. 승호는 옆으로 피하면서 구두발을 날렸다. 비수가 길 옆의 백양나무에 날아가 꽂히면서 부르르 떨었다. 그 놈이 씽 달려들자 승호가 자세를 낮춰 앞으로 굴러나가더니 재차 솟구치면서 주먹으로 그 놈의 아래배를 올리쳤다.
“억!”
그 놈이 배를 끌어안고 쓰러졌다.
그 광경을 본 건달들은 날 살려라고 꽁무니를 뺐다.
그제야 승호는 비수에 찍힌 왼 어깨를 오른 손으로 감싸 안았다.
“피! 아니, 저 피를!”
홍희의 손에 뜨거운 뻘건 액체가 매만지웠다.
“괜찮소.”
홍희는 승호를 부축해 불빛이 환한 길에까지 간 후 책가방에서 위생지를 꺼내 승호의 어깨에 흐르는 피를 닦아주었다. 그녀는 자기 손수건으로 상처를 꼭 싸매준 후 승호를 부축해 숙사로 내려갔다.
“큰일날번 했어요. 이 원쑤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승호는 홍희를 껴안으면서 고백했다.
“사랑하오, 홍희. 홍희를 위해서라면 목숨이라도 선뜻이 내놓겠소.”
홍희는 뜻밖에 날아든 사랑, 아니, 오매에도 고대하던 사랑을 순식간에 품게 될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녀는 가슴이 한껏 부풀어올랐다.
그녀는 승호가 뜨거운 피 흐르는 두 팔로 꼭 껴안고 키스벼락을 안기는대로 놔두었다. 그녀는 승호의 사랑이 그렇게 갑작스럽게, 순식간에 찾아올줄은 몰랐다. 또  그렇게 열렬할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이튿날 아침에 그녀는 승호를 데리고 학교 의무실에 가서 비수에 찍힌 상처를 처치했다.
승호는 사랑의 스피드를 너무 과하게 내지 않겠는가.
사귄지 한달도 안돼 승호는 홍희를 어둠침침한 지하독서실에 데리고가서 사랑의 마지막 장벽을 허물어뜨리려고 서둘렀다.
“안돼요. 이 것만은 안돼요.”
홍희는 숫처녀의 소중한 정조를 너무 일찍이 바치고 싶지 않았다. 그것은 결코 승호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였다. 어쩐지 불안하였다. 아래 학급의 은영이란 처녀애가 승호를 좋아하는 것을 눈치챘다. 게다가 승호한테 대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약혼녀가 있다는 것도 뒤늦게나마 알게 되였다.
꽉 끌어안았던 홍희를 풀어주면서 승호는 지지벌건 낯에 음흉할만치 독한 표정을 지으면서 물었다.
“어째 나를 사랑하지 않소?”
“아니죠.”
홍희는 침대에서 일어나 앉으면서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올려 가냘픈 어깨 뒤에 넘기면서 정색했다.
“왜 학교 오기 전에 련애하던 녀자가 있단 걸 속였어요?”
“아니, 근본 그 녀자를 사랑하지 않았소.”
승호는 그렇게 대답해놓고 속으로는 피씩 랭소했다.
(경옥이 학교에 와서 떠들아댄 걸 알면서도 네가 계속 쫓아다니지 않았어? 새삼스레 그 일을 왜 꺼내? 다 쒀놓은 죽이 밥이 될 것 같아?)
“학교 학생기률에 련애해도 안된다는데요. 이런 짓을 해서야 되겠어요?”
“픽!”
승호는 코웃음치며 굳어졌던 길쭉한 낯의 근육을 느슨히 풀었다.
“허허허. 우리 둘이 사랑하는 이상 뭐라오? 학생 기률도 너무나도 인성화 되지 못했단 말이요. 멀쩡하게 성인이 다 된 우릴 보고 련애도 하지 말라는 건 말이나 되오? 대학교가 어디 중놈들을 기르는 절당이라오?”
승호는 “흥!” 하고 콧방귀를 뀌더니 또 홍희를 꽉 껴안더니 침대에 쓸어눕혔다.
홍희는 두 다리를 바둥거리면서 단말마적으로 발악했다. 무슨 힘이 홍희로 하여금 발정난 호랑이처럼 달려드는 꺽다리를 몸 우에서 밀어냈는지 몰랐다.
“남들의 눈이 두렵지 않아요? 들키면 퇴학이라는 걸 몰라요?”
승호는 멋쩍었든지 침대에서 툭툭 털고 일어나더니 “싫으면 마오. 강요하지 않소.” 하고 자리를 뜨려고 자물쇠를 찾아 들었다.
그날 홍희는 뜨거운 눈물을 흘리면서 간신히 처녀의 생명과도 같은 신성한 정조를 지켰다.
하지만 며칠 후에 그녀는 더는 기승스레 덮쳐드는 승호를 밀막을 힘이 없었다. 그날 점심에 승호가 아래 학급의 은영을 데리고 공원 맞은켠에 있는 선녀음식점에 가는 것을 뒤를 밟았던 것이다.
그것은 최대의 위기가 아닐 수 없었다. 은영은 나이가 어릴뿐만아니라 인물도 요귀처럼 이쁠 정도였다. 설상가상으로 은영의 아버지는 시내 정부기관에서 한자리 하는 세도가문이라고 하지 않겠는가.
(사랑하는 백마왕자를 은영에게 빼앗길 순 없어. 어떤 수를 쓰든지 백마왕자를  품 속에 꽉 품고 빠져나가지 못하게 해야지.)
어느날 밤, 자습을 마치고 홍희는 큰 마음을 먹고 승호를 조용히 동무해달라고 청했다. 그녀는 승호의 팔소매를 잡고 지하독서실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지하 독서실에 들어간 홍희는 승호에게 단도직입으로 물었다.
“오늘 결판을 내자요. 로실히 말해요. 오빤 도대체 날 사랑해요? 은영일 사랑해요?”
승호는 어두운 전등불빛 아래에서 길쭉한 얼굴과 입귀에 귀찮은 표정을 흘리였다.
갑자기 그는 홍희를 와락 껴안더니 열변을 토했다.
“사랑하오. 목숨을 바쳐서라도 홍희를 사랑하오. 하늘이 알고 땅이 알 거요. 믿어주오. 이 지하독서실이 증명 설 거요.”
홍희는 홧홧 달아오른 승호의 몸을 밀어내면서 한마디 더 물었다.
“학교 오기 전 약혼녀는 어쩔 셈인가요?”
“약혼녀?”
승호는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허허허. 또 그년 말이요? 그년이 홍희와 내 사랑 발목을 잡을줄은 몰랐는데.”
승호는 진지한 표정을 지으면서 홍희의 어깨를 다독였다.
“이후에 걔 말을 하지도 말아라. 묵은 상처를 건드리지 말란 말이야! 알았어?!”
허나 절대 물러설 수 없는 홍희였다.
“이건 꼭 알고 넘어가야 할 대목이요. 똑똑히 말하세요.”
“진작 싹 정리한 일이야. 그 녀잔 날 과부네 아들이라고 업신여겼단 말이야. 나도 자존심이 있어.”
“뭘? 과부의 아들? 듣다 첫 소리군요. 아버지 공안국에서 한자리 한다고 하지 않았어요?”
홍희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친아버진지 계분지 몰라.”
“계부?”
승호는 맥없이 머리를 끄덕였다. 허나 인차 몸을 홱 돌리더니 홍희의 두 어깨를 쥐어 마구 흔들었다.
“난 친아버지가 누군지도 모르는 쌍놈이야. 계부 성을 탄 망종일 줄도 몰라. 그래, 왕의 후대래라. 허허허.”
그는 홍희를 침대에 활 밀어놓고 주먹으로 벽을 쿵쿵 쳤다.
홍희는 혹시 현관으로 지나가던 사람이 알가봐 말렸다. 그녀는 항상  활기 차넘치던 승호에게 쓸쓸한 사연이 있는줄은 몰랐다. 그녀는 불쌍해 일어나 승호의 얼굴을 쓰다듬다가 가냘픈 품에 꼭 껴안아주었다.
승호는 홍희의 가슴에서 머리를 떼더니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홍희를 마주 보았다.
“홍희, 난 이 세상에서 홍희만큼 사랑하는 처녀는 하나도 없소. 믿어주오.”
홍희는 떨리는 두 손으로 승호의 뜨거운 눈물을 훔쳐주었다.
“한마디만 묻자요? 은영과 계속 붙어다니겠어요?”
“아, 그 앤 학생회 문예위원이 아니고 뭐야? 사업관계로 자주 만나는 편이긴 하지. 그런 관계는 아니라는데도 왜 그래?”
승호는 홍희의 가슴을 손으로 더듬으려고 했다.
홍희는 그 열 오른 손을 뽑아 치웠다.
“재차 묻겠는데요. 은영을 사랑해요? 날 사랑해요?”
“야, 이젠 귀못이 박히지 않소? 사랑하오. 심장을 빼 주고서라도 홍희를 사랑하오.”
승호는 홍희의 적삼 속에 손을 밀어넣었다. 홍희는 가슴으로 스르르 기여오르는 승호의 싸늘한 손을 꽉 움켜쥐였다.
“변심하는 날엔 더러운 손이 만진 이 젖가슴을 가위로 베서 개한테 줄테야. 아니야!”
그녀는 다른 손으로 승호의 얼굴을 밀며 날카로운 말을 쏟아냈다.
“변심하는 날엔 너 죽고 나 죽을줄 알아.”
승호는 머리를 끄덕이며 어렵잖게 받아넘겼다.
“알았소, 알아. 믿어주오. 홍희를 영원히 사랑하오!”
홍희는 눈을 살포시 감았다. 순간 그녀는 봄날에 눈이 스르르 녹듯이 온몸이 나른해졌다. 그녀는 자꾸 젖가슴으로 기어오르려는 승호의 손을 꽉 움켜잡았다가  손을 맥없이 풀었다. 열김이 확확 풍기는 승호의 저속한 손놀림에 리지의 방선은 산산이 풍지박살나고 말았다.
이윽고 그녀는 그래도 용케 눈을 살며시 뜨고 승호의 지지벌개난 야수 같은 얼굴을 쳐다보았다. 영원히 기억해두려는듯이 빤히 쳐다며 눈사진을 찍어두었다.
그때 승호는 불티가 뚝뚝 떨어지는 허연 눈알을 무섭게 부라리면서 지껄였다.
“사내는 정복자야. 전세계 녀성들이여, 뉘라서 내가 과부의 못난 아들이라더냐?”
홍희는 모든 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였다. 아무튼 강도들에게 당할 번한 자기를 구해준 구명은인이 아닌가!
그녀의 보름달 같은 얼굴에서는 줄 끊어진 구슬처럼 뜨거운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
한번이 있으면 두번이 있기 마련이였다. 그 후부터 승호는 해가 지기만 하면  그녀를 지하독서실에 데리고 가서 습관처럼 몸을 빼앗군 했다. 사랑의 마음을 달구는 것이 아니라 저렬하게 몸부터 달구면서 그녀의 몸만 빼앗았다.
이것이 그래 승호 오빠 사랑의 진실이란 말인가? 끝없는 성애가 그래 세상에서 제일 고상하고 진실한 사랑이란 말인가?
홍희는 기말인데다 해가 지는 것이 지겨울 지경이였다. 이젠 승호가 무서웠다. 아니, 이젠 짐승 같은 저렬한 "사랑유희"가 싫어졌다. 허나 이미 다 쑤어놓은 죽을 어쩔 수 없게 돼버렸다. 그녀는 모든 것을 운명과 승호의 량심에 맡기고 자포자기하고 말았다.
전날에도 혹시 헌 세집에서 그 짓을 했더라면 들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허나 역은 새 방아간을 지나가고 말았다. 그날 밤 승호는 꼬리가 길면  밟힌다면서 담대하게도 홍희를 끌고 창고 복도로 들어가서 그짓을 했다.
(뭐 창고 복도에서 아짜아짜하게 도적질해 노는게 더 재미있다고? 더 쨍하게 자극적이라고? 픽!)  
홍희는 생각하면 할수록 원통하고 승호가 얄미웠다. 그녀는 침실에서 이불을 푹 들쓰고 진종일 하염없이 눈물로 베개를 적시였다.
(차라리 활 죽어버리면 모든 것이 끝날게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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