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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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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리별 김장혁
2018년 10월 26일 11시 19분  조회:976  추천:2  작성자: 김장혁
    





         수필
                                                     리별
                                      
                                                                                 김장혁


       나는 아들을 저 멀리 소주로 보내면서 리별이란 그렇게 마음이 아픈 것을 처음 느꼈다.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은 검표구 앞에서 나와 안해를 끌어안고 작별인사를 하였다.
       “아버지, 어머니, 플래트홈에 나가도 종당에는 갈라지겠는데 여기서 작별합시다. 몸이랑 주의하고 젊게 살면서 잘 있으십시요.”
작별인사를 끝내자 검표구로 해서 멀어져가는 아들의 훤칠한 뒤모습을 바라보면서 나와 안해는 뜨거운 눈물을 주르르 흘리였다.
“이젠 영영 우리 품 속을 떠나가는구나.”
나는 인파 속으로 사라지는 아들의 뒤모습을 한없이 바라보다가 돌아서면서 땅이 꺼지게 한숨을 쉬며 리별에 아픈 마음을 토해냈다.
그러자 안해도 눈시울을 닦았다.
“대학교로 갈 때는 갔다가 몇달 후에 방학하면 온다고 생각하니 모르겠던데요. 이번엔 저렇게 가면 언제 오겠는가고 생각하니 정말 마음이 비길데 없어요.”
“아들을 3천원에 팔아먹었구나.”
나는 아들을 보내고 련 며칠동안 리별의 아픔을 쓸쓸히 감내하면서 이렇게 생각하였다.
설상가상으로 두달반이 지나 아들의 녀자친구마저 일본으로 류학보내게 되였다. 아들을 소주에 보낸 마음의 상처가 가시기도 전에 또 두번째로 당해야 할 리별의 아픔이다. 천하에 하지 못할 짓을 한 것 같았다. 장차 아들과 그 처녀애가 다 일본으로 류학을 간다고 한다. 다행히 아들과 아들의 녀자친구는 일본으로 류학을 가도 중국으로 돌아온다고 한 것이다. 몇번이고 속뽑이를 하여도 그 애들은 우리 부모 앞에서 중국으로 돌아온다고 하였다. 우리는 그 말을 믿어야 했다. 그러나 일본으로, 미국으로 나간 아들딸들이 돌아온 애들이 몇이나 되든가? 이제 이역만리 한족곳에 보낸 아들로 마음이 아픈데 국경 넘어 일본 섬에 아들의 녀자친구를 보내고 몇해를 지나야 다시 만날가? 국내 소주에 있는 아들도 한해에 한번 만나는데 아들은 국경 넘어 일본에 간 녀자친구를 몇해에 한번 만날가?
아들은 녀자친구를 사흘이 멀다하게 만나면서 달밝은 밤에 헤여질 때면 리별의 슬픔과 상봉의 기쁨을 처음 알게 되였다고 한다. 중국 소주와 일본 고베에 갈라져 시간과 공간의 시련을 이겨내면서 안타깝게 상봉을 기다릴 아들과 아들의 녀자친구가 처량하기도 하다. 그리고 우리와 아들 그리고 아들의 녀자친구의 리별을 생각하니 아득하기만하고 이번 리별이 아프기만 하다. 장차 그 애들이 중국에 돌아와서 또 어느 한족곳에 가겠는지? 장차 태여나게 될 손자손녀들이 한족곳에서 한족으로 동화될가봐 근심스럽다.
그런데도 아들은 졸업하자마자 3천원을 받으니 좋고 26년 사업한 아버지 보다도 더 많은 로임을 받으니 기쁘다고 소주로 떠나갔다. 그러나 나는 아들을 3천원 로임에 팔아먹은 듯하고 돈의 유혹에 아들을 사기당한듯한 기분이였다.
내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그래 3천원이면 사갈 수 있단 말인가? 나도 아들에게 3천원씩 대줄 힘이 없어 이러는가? 그럴 힘이 있어도 우리 애들은 이 산골에 눌리워 있지 않을 것이다. 종당에는 애들과의 리별의 아픔을 당해야 하는것이 현실이다.
아들은 기차를 타고 소주로 가고 아들의 녀자친구는 비행기를 타고 일본으로 가고 말았다. 그렇다,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금이야 옥이야 하면서 키워 길림대학까지 졸업시킨 아들을 이역만리 밖으로 보내는 부모의 심정이야 오죽하랴. 더우기 공주처럼 기른 딸을 길림대학까지 졸업시켜 일본에 보낸 아들의 녀자친구 부모의 마음이야 얼마나 눈물겹겠는가?
아들과 갈라지기 싫어서 우리는 아들을 보고 연길에 남아 함께 살자고 얼마나 설교하였는지 모른다. 아들의 녀자친구를 일본에 보내기 싫어서 우리는 아들을 시켜 소주에 붙잡아두려고 얼마나 많은 수를 써 봤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 처녀애는 기어이 일본으로 가게 되였다. 천여원씩 받으면서 연길 산골에 남아서 부모 곁을 지키려는 애들이 지금 몇이나 될가?
부모와 자식이 함께 한 도시에서 사는 것도 만복중의 하나이다. 모든 것은 돈으로 다 따지는게 아니건만 애들은 그런 것은 심중에도 없고 몇천원을 받는 관내 연해 대도시로 가려고 하였다. 이것도 지금 애들의 시대적 조류이니까. 우리 부모들이 그 조류를 거슬러 애들을 막으면 날아오르려는 새들의 가위를 짓누르는 격이 되고 만다. 우리 곁에 애들을 남기려고 해도 우리 연변의 경제가 락후하기에 남겨둘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애들이 잘되는 것을 보기 위해 부모는 리별의 아픔을 참으면서도 하나 밖에 없는 아들딸을 한족들이 득실거리는 이역만리 땅에 보내야 하였다.
이제야 나는 생사를 기약할수 없는 전쟁터에 아들딸을 서슴없이 내보낸 옛날 우리 부모들의 마음이 오죽하였겠는가를 알 것 같다. 그들이야말로 아들딸과의 생사를 모를 리별의 아픔을 여린 마음으로 고통스레 감당해온 대단한 애국주의 부모들이 아니겠는가!
이제야 나는 한 교수의 증조할아버지대부터 대대로 자식들을 무식쟁이 아닐 정도로 소학교 공부만 시켰다는 도리를 터득하게 되였다. 그들은 자식들을 너무 공부시키고 세상을 너무 널리 알면 고향과 부모를 떠나는 것이 싫었다고 한다.
     그런데 부모들의 그런 심정을 하나도 모르고 나는 대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에 류학가려고 마음먹었댔다. 그것도 당시에는 지금처럼 돈을 내고 류학갈 수 없으므로 모험의 길을 걸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파뿌리처럼 하얀 머리를 흩날리는 어머니와 작별인사를 하러 가서 나는 뜻을 꺾지 않으면 안되였다.
내가 어머님을 보고 일본에 류학가려는데 어떤가고 묻자 어머님께서는 내 예상과는 달리 말리기는커녕 한참 생각하더니 “대학을 졸업하고 일본까지 류학가면 얼마나 좋겠느냐?” 하고 아주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겠는가.
어머님은 이 못난 아들이 생사를 기약할 수 없는 모험의 길을 걸으려고 날뛰는 것도 모르고 아들이 잘되기만을 바라고 계셨다.
주름살이 조글조글하고 머리 새하얀 어머니를 바라보자 나는 외동아들인 내가 없으면 늙으신 부모님은 누가 모시겠는가고 생각하고 그렇게 가고 싶던 일본류학의 꿈을 접고 뜻도 꺾고 말았다.
그렇다. 예로부터 충신은 효자가 아니라고 하지만 나는 효성도 잘하고 사업도 잘하려는 소박한 길을 선택하였다. 내가 잘 살겠다고 늙으신 부모를 고향에 남겨두고 일본으로 가는 불효를 저지를 수 없었다. 중국에서 수수하게 살더라도 부모를 모시고 효성을 다하면서 짤막한 글이라도 쓰면서 내 한생을 살자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지금 생각해봐도 부모를 위해서나 나를 위해서나 잘한 선택이라고 생각된다.
아버님께서 세상을 뜨시기 한주일전 아버님과의 리별은 정말 한평생을 두고두고 마음이 아픈 리별이였다. 아버님께서 평소에 맛있어하는 소고기 등을 사들고 병문안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날 때였다.
사업터로 돌아가야만 하는 나의 손을 잡고 아버님께서는 이렇게 신신당부하셨다.
“꼭 사업에 성공하오. 사람은 빚을 지고 살아도 시비를 지고 못사오. 정의를 지키고 시비를 가려 글을 써야 진정한 기자이구 작가요. 내 말을 명심하오.”
그러고나서 아버님께서는 가래짝 같은 손을 들어 군례를 올리듯이 손을 들어 어서 가라고 손시늉을 하셨다.
나는 눈물을 훔치면서 문 밖을 나섰다. 그러나 별로 아버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너무 무겁고 마지막 리별을 앞둔 부탁 같아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자전거에 몸을 실으려다가 집으로 되들어갔다.
그러자 아버님께서는 몸을 일으키시면서 손을 척 들어 저으면서 신신당부하셨다.
“왜 돌아왔소? 사내자식이 그리 눈물이 헤프구서야 어떻게 큰 일을 하겠소? 어서 돌아가오. 아들이 사업을 잘해 성공하면 난 구천에서도 웃겠소.”
아버님께서는 어서 떠나가라고 손시늉을 연신 하셨다. 나는 지금도 그 마지막 리별에 마음이 아프다. 일주일전만 해도 정신이 말쑥하셨던 아버님께서 이 불효자식을 두고 총망히 떠나가시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도 못하였다. 또 그것이 아버님께서 나에게 남기신 마지막 리별의 유언일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였다. 이제야 나는 부모와 자식의 리별의 아픔과 아들이 잘되기를 바라는 부모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알 것 같다.  
나는 부모자식간에 불필요하고 무모한 애끓는 리별이나 별거를  바라지 않는다. 아니, 리별이란 영영 없었으면 한다. 물론 쓸쓸한 리별이 있어야 상봉의 기쁨을 알 수 있다고 하지만 조석으로 부모자식들이 한자리에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그러나 이 세상 부모들은 리별의 아픔을 속으로 피눈물을 흘리면서도 참아나간다. 자식이 이 세상 어데로 가든지 잘 되기만을 바라고 자식들이 잘 되면 기뻐한다. 부모는 자식의 뒤다리를 절대 잡아당기지 않는다. 조건이 되면 시대의 조류에 따라 자식을 따라갈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러나 자식으로서는 부모의 마음을 열분의 하나라도 알아야 하고 모든 것을 돈으로 계산해서는 안된다. 자기 혼자 잘 살겠다고 부모를 버리고 몇만리 밖의 외국으로 달아나는 것은 차마 못할 짓이 아니겠는가? 세상에 부모자식이 한 곳에서 사는만큼 행복하고 즐거운 천륜지락이 또 어데 있으랴? 그런 천륜지락은 황금산과도 바꿀수 없으리라!
충신은 효자가 아니라지만 부모를 잘 모시고 효성을 다하는 효자로 되면서 사업도 잘하는 사업가로 된다면 얼마나 자랑스럽겠는가?
 
                   * 수필은 2009 연변작가협회, 연변인민방송국 주최, 한국 중부문학협회 후원
                                        제1 두만강수필문학상 수상작
                      "연변녀성" 2019년 제2호에 실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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