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레비죤을 보니 한국에서 며칠 사이에 실련하였거나 실업당한 청년 넷이 삶의 용기를 잃은 나머지 연탄가스를 먹고 집단자살했다고 하였다. 일본 후지산에 유람 갔을 때 가이드의 말에 의하면, 해마다 수십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후지산 기슭 유령삼림에 와서 자살한다고 하였다. 자살한 사람들 가운데는 삶의 재미를 잃었거나 실련하였거나 실업당했거나 사업에서 실패한 사람들도 있고 심지어 자살이란 새로운 자극을 찾으려는 사람들도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대부분 기실 삶의 용기를 잃은 사람들이 후지산 기슭 유령살림에 가서자살한다고 하였다. 이러루한 비극적인 소식을 볼 때마다 자살하려고 한 적이 있는 나는감회가 남다르다.
열여섯살 때 초중을 졸업하면서 아래학년의 한 녀학생에게 어설프게 "련애쪽지"(기실 지금 보면 그저 그 녀자애와 함께 학습도 경쟁하고 이담 대학에 함께 가서 공부를 하자는 내용뿐이였다. 그런데 당시에는 련애편지로 각인됐다.)를 썼다가 들키운 일이 있었다. 이름도 밝히지 않았댔는데 스파이와도 같은 담임교원이 사건진상을 해명할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였다. 후에 안 일이지만 그 녀자애가 글쎄 그 련애쪽지를 받고 겁나 어머니한테 보였는데 어머니가 선생님한테 바치라고 해 바쳤다고 하였다. 그 때문에 나의 천진란만한 첫사랑이 처참하게 짓밟힌 것은 놔두고 애들에게 놀리움을 당해 머리도 들고 학교를 다닐수 없게 되였다. 그 녀자애 손 한번 쥐여도 보지 못하고, 조용히 말 한마디 해보지도 못하고 에덴 동산의 과일을 훔쳐 먹은듯이 애들한테 봉변을 당해야만 하였다. 그 일로 하여 날마다 집에서는 책가방을 메고 떠나갔지만 학교로 가지 못하고 고향 서쪽에 있는 칼산에 가서 소설책이나 읽다가도 집으로 돌아오군 하였다. 비가 오면 군용갱도에 들어가 비를 피했다. 어떤 때에는 점심에 돼도 련애쪽지 사건이 탄로났을가 봐, 아버지 부릅뜬 세귀눈을 보는 것만 같아 감히 집에 밥 먹으러 가지도 못했다. 배고프면 산 아래에 내려가 자기 집 남새밭에 가서 오이나 가지를 뜯어먹고 갱도에서 소설책이나 보면서 진짜 “백모녀처럼 살았다.”
몇달이 지나 나중에 담임교원까지 찾아와서 부모님께 내가 몇달 동안 학교로 가지 않았다고 고충을 들이대는 바람에 모든 것이 탄로나고 말았다. 성이 꼭두까지 치민 아버님께서는 너무나도 실망한 나머지 나를 물매질하다가 집에서 쫓아내기까지 하셨다.
엄동설한에 맨발바람으로 집에서 쫓겨난 나는 어데로 갈데 없었다. 다행히 막내누나가 가져다준 신을 신고 큰집에 들리여 사촌누나 옷이라도 주어입고 조양천역 대합실에까지 도망쳤다. 그런데 “뽕—” 하는 렬차의 경적소리에 머리를 쳐들고 허연 연기를 뭉게뭉게 피여올리면서 달리는 기차를 보자 피뜩 기차길에 뛰여들어 자살할 생각이 머리를 탁 쳤다.
그런데 화물처 대문으로 하여 플래트홈에 들어가다가 당직원에게 붙잡혀 대문 밖에 밀리워나왔다. 그 바람에 자살하지 못하고 말았다. 역에서 나오면서 나는 내가 죽으면 또 숱한 애들이 나를 비웃을 것을 생각하니 죽을 수 없다는 것을 새삼스레 느꼈다.
(너네 보라고 내 공부를 잘해 대학에 꼭 갈거야! 장차 그 녀자애를 꼭 각시로 데려다가 잘 살고야 말겠다.)
그후 사회에 나온 후 문화단위로 전근이 리상적으로 되지 못할 때 또 자살하려고 한 적이 있었다. 나는 대학을 졸업한 후 현문화관에 들어가려던 최저한도의 희망마저 물거품이 되여 중학교에 가서 코흘리개들을 마주 했을 때 절망에 빠지고 말았다.
그때 룡정시 문련 주석으로 계신 김재권선생님은 나를 불러놓고 힘을 실어주었다.
“딱 문화관에 들어가야만 문학창작을 할 수 있느냐? 교원사업을 하면서도 얼마든지 문학창작을 할 수 있다.”
그의 말씀에 삶의 용기를 얻고 절망에서 간신히 헤쳐나온 나는 그때부터 룡정시 문화관 원로작가들인 김재권, 리태수, 황병락 등 선생님들을 모시고 “보름회”라는 문학단체에 다니면서 문학창작수업을 하였다.그런데 소속 중학교 일부 책임자들은 “교수연구를 하지 않으면서 자기 글만 쓴다.”고 비평하면서 글을 쓰지 못한다고 제한했다. 이는 작가를 꿈꾸는 나의 문학생명을 짓밟는 조폭한 간섭과 더러운 수작이 아니고 뭔가? 비록 생물로서의 목숨은 붙어 있어도 작가로서의 령혼과 생명은 죽고 말것이 아닌가. 문학의 자유, 표현의 자유가 없는 세상은 곧 죽음이 아닌가!
나는 그제야 알것 같았다, 창작자유가 얼마나 소중한가를, 아니, 민주와 자유가 없으면 얼마나 암담한가를!
나는 물 한모금도 없고 불볕이 홧홧 달아오는 문단사막에서 마라톤 달리기를 잠간 멈추고 애어린 문학생명을 살려내려고 무등 모지름을 쓰지 않으면 안됐다. 교편을 잡고 합법적으로 문학창작을 해나기 위해 나는 담임교원 사업에 눈코뜰새 없으면서도 초중과외작문써클 지도교원을 주동적으로 맡고 수많은 학생작문을 지도해 신문과 잡지에 발표하였다. 학생들은 주와 성, 전국급 여러가지 작문콩쿠르에서 우수중학생작문상을 수두룩이 안아왔다. 그때 학생들 속에서 수많은 대학생들이 배출됐으며 그들 속에는 오늘날의 대학교 학원 원장, 교수, 박사도 있고 국내외에서 활약하는 유명가수, 성악교수도 있으며 중국 조선족문단과 한국 문단에서 활약하는 어마어마한 작가, 시인도 있다. 나는 그들의 지명도가 너무 높아서 줄곧 내 입으로 누구, 누구는 나의 학생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마치 그들의 지명도를 빌어 후광을 보려고 하는 것 같아서였다. 그러나 오히려 그들은 언제 어디서나 나를 계몽스승이라고 널리 외우고 있다. 인간수양을 제대로 닦은 그들이 장하기만 하다. 당시 나도 수차 교육잡지사와 전주 교육론문발표회에서 우수작문지도교원상과 우수작문지도론문상을 탔으며 학교에서 우수담임교원상도 탔다. 학교 책임자들과 교원들은 전교 교원성과전시회 때 전시된 나의 수두룩한 작품과 전주 우수교연론문상 그리고 학생들의 작문과 상장들을 둘러보고 나의 작문지도교수사업을 충분히 긍정했다. 나는 그때라고 나는 “교원이 글을 잘 써야 학생작문을 잘 지도할 수 있다.”, “글감고르기에서 사로개척의 예술적인 비결” 등 교수론문을 써서 여론조성을 했다. 기실 “교원이 글을 잘 써야 학생작문을 더 잘 지도할 수 있다.”는 것은 어문교원으로서의 간단한 상식이지 그 무슨 철리가 아니다. 더욱이는 대서특필할 론문거리도 아니였다. 그러나 나는 아주 힘들게 따낸 작문지도 성과로 그 간단한 상식적인 도리를 증명하고 내가 과외로 문학창작을 하는 것을 합법화해야만 하였다. 나중에 학교에서는 나를 보고 중국조선족교육잡지에 발표된(주와 현 조선어문교수론문회의에서 우수상을 수상하기도 한) 작문지도교수론문을 전교 년말총화회의에서 교류하게 하였다.
그후부터 학교와 조선어문교연실에서 더는 나의 과외창작을 막지 않았다. 오히려 후에 부임돼온 주천을 교장과 유재환 교장은 나에게 고중교수와 전교 작문써글 지도교원을 맡기고 나의 문학창작을 지지해주었으며 어문교연실 교원들에게 문학창작활동을 폭넓게 벌릴 것을 호소하였다. 문학창작 연성환경을 마련한 후 나는 다시 용기를 얻고 퇴근한 후 세집에서 밥상을 놓고 곤한 눈을 집어뜯으면서 한편, 또 한편의 글을 써냈다. 그러나 작품은 써놓아도 발표하기는 아주 힘들었다. 중편련정소설 “사랑환상곡"은 지금 다시 읽어봐도 괜찮은 예술작품인 것 같다. 나는 소설원고를 가지고 숱한 잡시사를 찾아다녔고 편집들이 제기한 수개요구대로 16번이나 수개했다. 진짜 그 두툼하고 부동한 내용으로 된 수개원고로 전람회라도 열만 하였다. 하지만 그 중편소설은 국내에서 끝내 발표되지 못했다. 20년이 지난 후 나의 그 소설은 중단편소설수필집 "사랑환상곡"에 수록돼 한국에서 출판돼 한국에서도 제일 큰 서점인 교보문고에서 버젓이 팔렸다. 지금도 컴퓨터 인터넷에서 검색하면 나의 그 소설집 판매광고를 찾아볼 수 있다. 몇십년이 지난 후 결과가 보여주다싶이 작품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소설이 당시 편집들의 눈에 들지 못한 것 밖에 없다.
그 소설을 국내 편집부에서 퇴고를 맞은 그날 나는 뻐스를 타고 모아산 고개를 넘어 룡정에 돌아오면서 절망에 빠졌다. 필을 꺾으려고까지 했다. 나는 속으로 피눈물을 흘리면서 발표되지 못한 그 소설 원고를 한장 한장 찢어 차창 밖으로 날려 보냈다
날마다 교편을 잡고 코흘리개애들과 씨름하면서 너무나도 힘든데다가 리상대로 마음놓고 문학창작을 할 수도 없었고 혹시 아글타글 쓴 작품도 발표발표하기 아주 어려웠다. 설상가상으로 뜻대로 문화단위로 전근해가지 못해 사는 것이사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고 극단적인 선택까지 하려고도 했다. 그러나 머리 허연 부모에게 마지막하직인사를 하러 갔다가 외동아들인 내가 죽으면 누가 늙으신 부모를 모시겠는가는 생각이 피뜩 들었다. 그리하여 두번째에도 끝내 죽지 못하였다.
뒤따라 참을 “인”자 석자면 살인도 피한다고 모든 곤난과 시련이 닥칠 때마다 한발작 물러서 랭정하게 사고하고 대응하니 바다와도 같이 넓은 세상이 보였다. 룡정에서 교편을 잡다가 스승들과 지인들의 방조하에 끝내 모아산 열두 아리랑고개를 넘어 연변인민방송국에 전근해왔고 나중에 연변인민출판사에 전근해들어왔다. 훌륭한 창작환경을 만난 나는 마음껏 글을 쓸 수 있게 되여 리상의 창작세계로 한발자욱한발자욱 걸어나갈 수 있었다.
지금 회상하면 자살하려고 한 일이 얼마나 유치하였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그렇게 짧고도 졻은 바보 같은 생각을 하였을가?
나는 실련하고 자살하려는 녀학생을 내 경험교훈으로 구해준 적도 있다. 교수실습하러 갔을 때 녀학생이였는데 고중동창생과 2년 동안 열련하였는데 대학에 가면서 배신했다는 것이였다. 녀학생은 삶의 용기를 잃은 나머지 살 생각이 없다면서 자살까지 하겠다고 하였다. 그때 나는 녀학생에게 내가 두번이나 자살하려던 과거를 얘기해주고나서 여러 모로 삶의 용기를 북돋아주었다.
“과거 내가 두번이나 자살하려 한 것은 얼마나 유치하고 짧은 생각이였는가. 그때 자살하지 않았기에 나는 초중때 그 녀자애보다 더 어리고 예쁜 안해를 얻어 행복하게 살게 되지 않았는가.”
“또 배신자를 잃은 것으로 해 자살하려는 건 너무 무지한 선택이다. 배신한 자를 사랑할 가치가 없다. 하루 빨리 배신자 동창생을 잊으라. 이제 배신자보다 더 멋진 총각이 너를 기다릴 거야.”
그리하여 그 녀학생은 삶의 용기를 얻고 실련의 고통에서 벗어나 이듬해에 대학에 진학하였고 대학졸업한 후 류학생총각과 결혼해 연길에서 교편을 잡고 행복하게 살고 있다.
용기는 생과 사를 다 가로 타고 있다. 용기를 잘못 가지면 순식간에 자살하게 된다. 자살까지 하려는 용기가 있는 청년이라면 고만한 곤난도 이겨낼 용기가 없겠는가? 죽기를 각오하였던 청년은 삶의 용기와 의력이 더 강해지고 생명력도 더 강해지는 법이다. 자살할 용기까지 있다면 무엇 때문에 난관을 물리치면서 살 용기가 없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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