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을 졸업하고 새파란 청춘으로 사회의 대문에 첫발자욱을 들여놓은 일이 어제 같다. 어느덧 40년 세월이 청산류수처럼 흘러 예순고개를 넘어 앞으로 나가노라니 여느 때보다 감회가 깊다.
파란만장한 인생행로에 선후하여 교원, 방송국 기자 사업을 하다가 리성권 전임사장의 방조하에 1997년에 연변인민출판사에 전근된 후부터 나의 인생이 바뀌였다. 특히 2002년부터 나는 <<로년세계>>편집부에서 17년 동안 편집사업을 하면서부터 사업과 문학창작에서 황금기를 맞이했다. 때문에 나는 22년 동안 몸을 담그고 사업해온 사랑하는 연변인민출판사에 항상 감사한 마음으로 옷깃을 여미군 한다.
연변인민출판사 지도부와 전국각지 조선족로인협회 지도일군들의 지극한 관심 그리고 력임 주필, 편집발행일군들의 다함없는 노력으로 하여1997년 1월에 창간된 《로년세계》는 중국조선족로인들의 정다운 《길동무》, 친근한 벗으로 되였으며 중국조선족로인협회친목회의 기관지로, 중국조선문잡지 가운데서 최고발행량을 자랑하는 잡지로 되였다. 나는《로년세계》주필로 10여년 동안 혼신을 다한 것으로 하여 긍지감을 느낀다.
나는《로년세계》를 로령화시대의 요구에 따라 로년군체를 리드해나갈 잡지로 꾸리기 위해 국내의 수많은 한문간행물과 전문도서를 구독한 외에 거의 해마다 자비로 한국에 나가 교보문고 등 서점에 붙박혀 우리 로인들에게 유익한 양생보건, 조선 력사 등에 관계되는 전문도서를 한 트렁크씩 구입해들여왔다. 어떤 때에는 30권을 넘어 중국 공항해관의 세금징수관을 넘느라고 여간 애를 떼지 않았다. 나는 편집들과 함께 수많은 전문도서를 읽은 후 로령화시대, 장수시대의 진입과 더불어 로인들에 제기된 양로방식문제, 복지문제, 의료위생보건문제, 주택문제, 소비문제, 재산상속권문제, 자녀문제, 재혼문제, 로인권익문제, 복장과 미용 문제, 오락관광문제, 교통문제 등 일련의 문제를 풀어나가는데 유익한 내용을 선제하여 잡지에 실었다. 또 60여명 장년과 로인 문인들로 특약저자대오를 조직하고 지방원고를 널리 편집해 잡지에 실었다. 한편 나는 직접 필을 들어 방문기, 론설문, 재담, 소품, 유모아, 수필, 수기 등 로인들이 즐겨보는 다양한 쟝르의 글을 써서 잡지내용을 실용적이고도 다채롭게 하였으며 로인독자들의 정신문화생활을 풍부히 하였다.
나는 아직도 아직도 17년 전인 2004년에 단동시에서 열린 《로년세계》발행회의를 잊을 수 없다. 유유히 흐르는 유서 깊은 압록강변에서 열린 회의에는 전국각지 조선족로인협회의 100여명 회장님들이 참가했다. 그번 《로년세계》발행회의와 문예오락은 단동지구 조선족들의 큰 잔치나 다름없이 일대 성황을 이루었다. 로인들은 자손들과 함께 한복을 떨쳐입고 발행회의에 오셨고 단동지구의 동항시, 관전현, 본계시 등지 조선족로인협회에서는 다채로운 문예공연을 하였다. 주필인 나는 편집부를 대표해 편집사업보고를 하였고 어르신들께 “황금마차” 노래를 한곡 선물하고나서 “《로년세계》는 저 유유히 흐르는 압록강처럼 영원히 어르신들의 다정한 길동무로 될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2004년《로년세계》발행량은 1만 5천 247부로 껑충 뛰여올랐다. 2006년 발행위원회 주임 윤진주, 부주임 전성자, 판공실 주임 박증범 등 동지들의 노력으로 발행량은 1만 6천 302부라는 최고기록을 창조하였다.
나는《로년세계》편집사업을 하면서 제일 힘들게 보낸 2004년과 2005년을 잊을 수 없다. 그때 나는 20대 중반 처녀실습생과 로편집 도합 2명을 이끌고 《로년세계》잡지 외에도 《농가》잡지까지 두개 잡지를 꾸렸다. 일손이 딸리는 형편에서 나는 《로년세계》와 《농가》 두 잡지의 주필이자 편집, 광고업무원으로 밤낮이 따로 없이 뛰였다. 어떤 때에는 정신을 잃고 달아다니다나니 짝짝신을 신고 단위로 뛰여가서 동료들이 웃음보를 터뜨릴 때도 있었다. 그때 진짜 밤 12시전에 자본 적이 없이 편집사업과 원고심열을 하면서 눈코뜰새 없이 보냈다. 장시기 날마다 밤낮 10여시간씩 책을 읽으면서 선제하거나 원고를 심열하고 편집사업을 하면서 활동량이 적어 체중이 180근으로 올라갔으며 고혈압, 고혈지, 고혈당 증상까지 나타났다. 너무 피곤해 눈에 항상 피지고 고기가 동공에까지 씌워 두번이나 눈수술을 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항상 너무 곤하고 혈소판이 갑작스레 내려가면서 단위 식당에서 코피를 줄줄 흘린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년세가 계시는 발행일군들이 출장가기 힘들어하는 형편에서 목단강시, 교하시 등지 발행회의에 달려가서 발행선전도 협조해주었으며 심양, 영구, 길림, 할빈, 청도 등지에 취재하러 갔다가 밤차로 달려와 집에도 들리지 않고 출근해 편집사업을 하였다. 어떤 때에는 된감기에 걸려 안해 보고 단위에 와서 점적주사를 놔달라고 부탁하고 점적주사바늘을 꽂은 채 편집사업을 견지했다. 길림신문사에서 수필문학상을 타게 됐는데도 나는 잡지를 제때에 내보내기 위해 시상식에도 참가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 보고 대신 타오게 한 적도 있다. 나의 머리 속에는 오직 잡지 편집의 사명감과 의무감 밖에 없었다.
나는《로년세계》주필사업을 하면서 항상 편집이 적은 사람고생을 많이 하였고 잡지를 제때에 출간하려고 시간에 딸리고 원고가 딸리는 고생을 많이 하였다. 그러나 나는 후회하지 않으며《로년세계》편집사업을 한 것을 보람차게 생각한다.
《로년세계》잡지는 20년 동안 바로 이같은 력임편집발행일군들의 눈물겨운 지극정성에 의해 민족성과 지식성, 지방성, 실용성, 취미성이 있게 꾸려졌으며 해마다 새로운 모습으로 조선족중로년들의 길동무로 친근하게 다가갔다.
나는 십여년 동안 《로년세계》광고사업을 직접 틀어쥐여 적지 않은 광고수입도 창조해 민족문화출판사업에 기여하였다. 모두 다 알다싶이 시장경제시대에 공익성문화사업단위에서의 광고사업은 아주 중요한 사업이며 또한 아주 간고한 경제사업이다. 나는 당시 《로년세계》주필 김철환선생과 발행위원회 주임 류옥철선생에게 제의해 갓 출간된《로년세계》광고를 개척하였으며 부지런히 광고도 얻어다 제공했다. 내가 갓 주필을 맡았을 때만 해도 림시공한테 광고를 맡긴데다가 광고에 대한 관리가 따라가지 못해 광고경제효과가 좋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나는 대담히 출판사 지도부에 광고개혁을 할 것을 제기하고 림시공을 내보낸 후 직접 광고를 책임졌다. 광고사업은 여러 매체의 경쟁이 아주 심한 업종이였다. 또 락후한 특정경제환경에서 광고는 결코 마가을 길거리에 널린 가랑잎처럼 흔해 빠진 것이 아니였다. 편집사업에 눈코 뜰새 없이 보내면서도 나는 비가 오거나 눈풍설이 불어치거나 항상 잡지를 가지고 다니면서 낯선 기업소와 병원을 찾아가서 총경리실과 원장실 문을 두드리고 들어가 주필의 체면도 잃고 우리 잡지에 광고를 실으라고 동원하면서 바다에서 바늘을 건지듯이 광고를 하나, 하나 개척해나갔다. 달마다 수십명 의사들의 수십개 광고수개요구를 일일이 적어두었다가 빈틈없이 락착하였다. 또 감정투자를 아끼지 않고 광고주들의 생일, 결혼, 장례 등 대소사에 참가하면서 그들과 끈끈한 감정토대와 믿음을 쌓아왔다. 그리하여《로년세계》광고는 해마다 증가됐는바 2016년에는 60여개 광고주와 광고계약을 맺고 최고경제효과를 거두었다.
나는 《로년세계》가 진정 전국각지 조선족로인협회와 조선족로인들 속에 뿌리를 깊이 내린 한 발전전도는 영원히 찬란하리라는 것을 굳게 믿는다.
나는《로년세계》편집사업에 드바삐 보내면서도 우리 위대한 조선민족에게 자그마한 력사적 기념비라도 세워주고 조선족들 삶의 희로애락을 형상적으로 반영하기 위해 민족의 사명감으로 필승의 신념을 안고 문학창작을 견지해왔다.
나는 어디로 출장 가든지 핸드 컴퓨터거나 필기장과 필을 가지고 다니면서 창작을 멈추지 않았다. 한번은 인천공항에서 글 쓰기에 도 정신 하다나니 그만 항공편을 놓칠 번 한 적도 있었다. 제일 한심한 것은 그렇게 밤낮 애타게 창작한 파일이 컴퓨터 50만자나 없어졌을 때 나는 너무나도 애나고 실망한채 맥이 풀려 한주일이나 다시 컴퓨터에 마주 앉지 못했다. 나도 칠정육욕이 있는 사람이다. 남들처럼 술도 마음껏 마시고 장기도 놀고 싶고 아내와 함께 명승고적을 유람하기도 싶었다. 허나 항상 “놀 걸 다 놀고 언제 글을 쓰겠는가고 자기한테 채찍질하면서 부글부글 끓어번지는 놀고 싶은 야마를 정복하고 기나긴 “글 감방”에 갇혀 글을 쓰고 또 썼다. 나는 40여 년 기나긴 세월 “글감옥”에 갇혀 우리 조선민족을 위해 뭔가 자그마한 기념비라도 끝내 만들어 냈다는 긍지감으로 해 인생행로에서 아주 보람차게 살았다고 가슴깊이 느낀다.
나는 40년 동안 문학창작을 해 선후해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 대하소설 “진달래소야곡”, 3부작 대장편과학환상소설 “야망의 바다”와 “욕망의 천지”, “황천의 유령” 그리고 장편실화소설 “3.8선에서 싸우던 나날에”, 장편실화 “인민의 훌륭한 법관 록도유”, 수필집 “리별” 등 도합 20여권, 약 800여만자에 달하는 문학작품을 써냈다.
2018년 퇴직한 후 예순고개를 넘어도 나는 필을 멈추지 않고 두번째 대하소설 "진달래 소야곡"을 창작했고 심양시 고려경제문화교류유한회사 전정환 총경리와 료녕민족출판사 권춘철 사장님의 지성어린 방조하에 세상에 내놓았다. 그리고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과 대하소설 "진달래 소야곡"을 잘 수정하고 보충해 위챗에 올렸다. 심지어 어떤 장절은 재창착한 것이나 다름없다. 나의 조글로와 위챗에 올렸는데 하여 국내외 수많은 독자들이 감상하고 댓글도 아주 많이 달아주면서 나를 고무해주었다. 이는 나의 창작에 대한 편달과 격려가 아닐 수 없다 . 근년에 나는 수많은 동화, 아동소설을 창작해 <<소년아동>> 잡지와 "아동문학" 총서 <<서울문학>>, 한국 <<아동문학세상>> 등 국내외 간행물에 발표했다. 김장혁 동화아동소설선집<<멋쟁이 매옹이와 찍찍의 겨룸>>, <<괴물 클론바우 꼬마대통령 모험기"를 탈고했으며 장편소설 "졸혼" 등 문학작품을 수두룩이 창작해 조글로와 위쳇에 올렸다. 소설 "졸혼"은 처음에는 중편으로 썼는데 위챗에 올린 후 독자들을 확 끌었다. 어떤 독자들은 나를 보고 "소설 <<졸혼>>이 중편으로 끝난 것이 아주 아쉽다", "소설이 끝나지 않은 것 같다"고 하면서 주인공들의 사랑이 후에 어떻게 되겠는지 궁금하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나는 오랫동안 심사숙고와 구상 끝에 장편으로 써서 지금 위챗에 올리고 있다. 하여 많은 독자들의 비교적 좋은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어떤 독자들은 다음 장절은 어떻게 되였는지 보고 싶다면서 빨리 위챗에 올려달라고 졸라대고 있다. 하여 나는 책임감있게 장절마다 여러번 심열하고 수개해 올리고 있다. 하여 국내외 독자들이 많은 댓글을 올리면서 비교적 열렬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나는 퇴직한 후 아들 집에 가서 손자 둘을 학교와 유치원에 차에 실어가고 데려 온다. 와중에 소주 한족곳에서 한족학교를 다니는 손자들이 조선어를 배우지 못해 내가 애타게 창작해 발표한 소설을 보지 못할가봐 근심이 태산같다. 이제 50년이 지나면 조선어로 창작한 내 소설을 볼 수 있는 우리 후대들이 구경 몇이나 남겠는가 하는 것도 근심된다. 위기감에 잠긴 나는 내 일부 중점 문학작품을 여생에 한어로 번역해 손자들한테 기념으로 주기로 했다. 한편 손자들이 조선어로 된 나의 수많은 문학작품을 읽을 수 있게 하려고 모지름을 쓰며 나로서의 노력을 했다. 옛날 우리 조상들은 일본놈들의 노화교육, 동화교육의 철발굽 아래에서도 서당방을 차리고 애들한테 조선어를 가만가만 가르쳐 우리 조선어가 대를 잇게 했다. 나는 조상들의 그 지혜로운 전통경험을 이어받아 종종 집에다 서당방을 차리고 손자들한테 조선어도 가르치고 있다. 또 조선어교과서를 구하기 힘들기 전에 한시급히 동북교육출판사 서점에서 조선어교과서를 사다가 손자들한테 영원한 기념선물로 드렸다. 나는 손자들에게 놀음감이랑 사주고 애들이 기뻐할 때를 놓치지 않고 "너희들은 조선족어린이기에 할아버지 부탁대로 조선어를 잘 배우라."고 신신당부하군 하였다. 나는 멀지 않은 장래에 손자들도 이 할아버지의 간곡한 당부의 심원한 의의를 알 것이라고 믿는다.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총 7권)과 대하소설 "진달래 소야곡"(총 4권), 3부작 장편과학환상소설 “야망의 바다”, “욕망의 천지”, “황천의 유령” 등 소설은 출판된 후 다음, 네이버, 조글로와 모이자 등 블로그에 널리 련재됐고 위챗계정과 위챗그룹에 올라 수많은 네티즌들이 열람하였다. 장편과학환상소설 “야망의 바다”는 한국 “서울문학”과 “아동문학세상” 등 잡지에 소개되였고 연변인민방송국에서 련속방송드라마 “지구보위전”으로 각색해 방송하였으며 “옹달샘컵 중한아동문학상”을 받았고 수상소식은 한국 연합뉴스에서도 보도되였다. 장편과학환상소설 “욕망의 천지”는 한국 “아동문학세상”에 소개되였으며 “웰빙아동문학상”을 받았다. 중편과학환상소설 “지구보위전”은 “동심컵 중한아동문학상”을 받았고 한국 “서울문학”에도 소개되였다. 장편실화소설 “38선에서 싸우던 나날에”는 연변인민방송국에서 2년 동안 련속랑독을 하였으며 료녕조선문보에서 전문을 련재하였다. 나는 한중아동문학상, 아리랑문학상을 비롯한 30여개 문학상도 탔다. “로년세계”발행회의 때면 나는 나의 문학작품집 “사랑은 요술쟁이야”, 실화집 “빨간 장미꽃 함정”, 장편과학환상소설 “야망의 바다”, 수필집 “리별” 등 몇만원어치 되는 저서를 전국각지 로인협회 회장들께 증송하였다.
문학창작은 참말로 누가 물 한방울 주지 않는 사막의 올리막길로 힘들게 달리는 끝도 보이지 않는 마라토너와도 같다. 만약 돈을 벌고 안일하고 편안히 살려면 누가 붓을 들겠는가! 누가 눈을 두번이나 수술하면서도 맨날 엉뎅이 배기게 글감옥에 들어앉아 글을 쓰겠는가! 누가 아파트 한채를 처넣으면서 애나게 문학작품을 창작해 출판하겠는가. 그러나 나는 아빠트를 한채 더 갖춰놓기보다도 우리 글로 창작된 문학작품을 하나라도 세상에 남기는 것이 더 보람차다고 생각한다. 나는 ㄱ, ㄴ, ㄷ, ㄹ가 사회와 가정의 심장에서 썩어가는 곰팽이를 도려내는 수술칼로 되게 하고 사막에 연분홍 진달래꽃이 방실방실 웃음짓는 오아시스를 가꾸는 감로수로 되게 하고 싶다.
나는 요란스러운 폭포수로 되려고도 하지 않는다. 다만 수풀에 가려진 계곡에서 촐랑촐랑 노래하면서 흐르는 금강산 벽계수의 한방울 물로 되고 싶다. 때로는 세인들이 보지도 못하는 지하수로 소리없이 흐르다가도 사람들이 가뭄에 허덕이는 사막에 한줄기 생명수로 퐁퐁 솟아올라 삶의 오아시스를 가꾸고 진달래꽃을 활짝 꽃피우고 싶다.
나는 진작 제2인생-륙십청춘 황홀한 인생길을 설계대로 나가고 있다. 괴로우나 즐거우나 내 령혼의 영원한 안식처는 문학창작에 있다. 한부의 문학작품을 창작해낼 때마다 하늘에 외롭게 둥둥 떠돌아다니던 나의 령혼은 웅위로운 백두산의 진달래꽃과 수려한 금강산의 모란꽃, 하늘 높이 치솟은 한라산의 무궁화가 반겨 맞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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