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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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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21)
2015년 10월 26일 10시 33분  조회:2290  추천:1  작성자: 김장혁
       

              김장혁 작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


                        제6장 핍박에 의해 간도로



                    6. 이별의 두만강

     먹장구름이 감돌며 무시무시한 공포를 퍼뜨린다. 야수의 승냥이 검은 그림자가 악마처럼 가가리를 쩍 벌리고 시뻘건 이빨을 들러내고 죽음의 노래를 부르며 그들의 뒤를 뒤쫓고 있다. 
     기준은 상길을 업고 걷고 또 걸어 어느 날 해질 녘에 한 이름 모를 넓은 강가에 이르렀다.
    피뜩 보아도 흙탕물이 사품 쳐 흐르르는 강폭은 몇 백 미터는 실히 될 것 같았다. 버드나무숲이 우거진 대안에는 인가라고는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혹시 두만강이 아닐까?)
     기준은 상길을 둘쳐업고 가시덩굴을 헤치며 무시무시한 수림을 버스럭버스럭 한참 걸어나갔다.
   이윽고 그는 발걸음을 멈추고 산 아래 강가를 두리번두리번 살폈다. 
   그는 사위를 두리번거리면서 한참 또 걸었다. 그제야 저쪽 산 아래에 마을이 보이고 나루터에 쪽배 몇 개도 보였다.
    기준은 상길을 보고 이불 짐을 지키라고 당부했다. 뒤이어 그는 낫으로 싸리나무 둬 단을 해 메고 스적스적 마을에 내려갔다.
     (고향을 떠나 저쪽 낯선 만주로 들어가면 다 잘 산다고 할 수야 없지.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건너자. 될 수 있으면 이쪽 제 조선 땅에서 사는 게 좋은데, 참.)
     기준은 마을에 내려 간 후 헌병이나 자위대 놈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자 대담히 마을 어귀의 한 집 앞에 들어섰다.
    “계십둥?”
    "있습꾸마."
    뒤이어 웬 나그네가 쩔룩거리면서 문 밖에 나왔다.
    그는 나무 단을 메고 서 있는 도척 같은 기준을 보고 깜짝 놀랐다.
    “무슨 일이오?”
   기준은 삽작문을 열고 들어섰다.
   “난 지나가던 길손이오. 땔나무나 받아두고 밥 한 끼 줄 수 없소?”
   나그네는 앞뒤를 두루 살피더니 생각 밖으로 “내려놓고 들어오오.” 하고 말했다.
    나그네는 기준이 벗어놓은 나무 단을 황급히 메여다가 헛간에 처넣고 문을 닫아걸었다.
   나그네가 쩔룩거리며 집에 들어가자고 했다.
   기준은 주춤 멈춰섰다.
   “저, 어린애 하나 더 있소. 나무 둬단 더 해오겠소.” 
    나그네는 손사래쳤다.
   “그러지 마오. 지금 삼림경찰들이 나무를 다친다고 산에 얼씬도 하지 못하게 하오.” 
   “알았소. 내 알아서 할게.”
   기준은 씨엉씨엉 뒷산에 올라갔다.
   이윽고 기준은 나무를 둬단 더해 이불 짐에 옷 보따리까지 메고 상길을 데리고 다시 나타났다.
   주인나그네가 나무 단을 받아 메자고 했다.
   “놔두오.”
   기준은 혼자 나무단을 훌 들어갔다.
   그때 정지 문 안에서 아낙네와 애들 서넛이 기준과 상길을 흘끔흘끔 내다보는 것이었다. 그들은 숱한 짐을 지고서도 싸리나무를 훌 들어가는 기준을 보고 입을 딱 벌렸다. 힘장사라며 혀를 끌끌 차기도 했다.
   기준이 위방에 들어가며 보니 마루 위 벽에는 고기그물도 걸려있고 마른고기도 처마 밑과 벽에 줄느런히 걸려있었다. 보아하니 나룻배나 다루는 같았다.
  정지에서 한참 분주하더니 밥상이 들어왔다.
  “자 시골이라서 변변히 갖춘 게 없소. 시장하겠는데 허물 말고 많이 드시우.”
  기준과 상길은 오랜만에 생선국에 조밥을 한때 배불리 먹었다.
   식사 후에 주인나그네는 기준에게 “어데서 오는 길이오?” 하고 물었다.
   기준은 숭늉물에 양치질까지 하고나서 가래짝 같은 손을 내밀었다.
   “난 명천의 김기준이오. 오늘 대접 고맙수다.”
  주인나그네는 기준의 손을 잡아 흔들면서 “미안하오. 난 종성의 리창록이라고 부르오.” 하고 말했다.
  그는 조금 쑥스러워하면서 뒷말을 이었다.
  “이전에는 우리 집에서 지나가는 나그네들을 푼푼히 대접했소. 그런데 이젠 간도로 들어가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공밥을 주지 못하오. 여긴 저 맞은 켠 간도에 건너가서 농사를 져 날라다 먹는 형편이니 말이오.”
   “오, 그래 저 간도로 들어가도 목을 치지 않소?”
   리창록은 도리머리를 가로 저었다.
   “목을 치다니? 이젠 괜찮소. 이전에는 만청에서 이주민들이 저 두만강을 건너가면 붙잡아 목을 치지 않으면 저쪽에서 노역을 시켰소. 그런데 지금은 건너가서 농사를 지어다가 사는 사람이 많소. 이젠 간도에 건너가 사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죽이지도 못하고 놔두고 있소.”
   기준은 한숨을 후~ 내쉬었다.
   “나도 저 간도로 건너가야 겠는데 나룻배를 좀 얻을 수 없겠소? 삯전은 내가 내리다.”
   창록은 기준을 정색해 마주 바라보더니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쉽지 않소. 나룻배를 얻을 생각이면 허창수 영감을 찾아가야 되오. 우리 가난한 집에야 어디 배 있소? 나루터의 배는 몽땅 허 영감네 배오.”
   기준은 상길을 데리고 쩔룩거리며 앞장서 나가는 창록을 따라 나섰다. 한참 창록을 뒤따라 마을 아래쪽으로 가니 높다란 토성안집이 나타났다.
   기준은 토성안집 대문 안에 들어서기 전에 창록의 손을 잡고 물었다.
   “부자 집에서 나룻배를 내놓을까?”
   창록은 기준을 돌아보며  말했다.
  “허영감은 깍쟁이요. 나룻배를 얻기 힘드오. 그래도 말해 보기오.”
  기준은 머리를 끄덕이면서 상길의 손을 잡고 창록을 뒤따라 토성 안에 성큼 들어섰다.
  황둥개들이 마루 앞에서 왕왕 짓다가 창록을 보고는 꼬리를 흔들거리면서 짖지 않았다.
   “주인님, 계십둥?”
   “웬 일인가?”
   마른 기침소리에 뒤이어 미닫이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퉁퉁하게 생긴 양반이 마루에 나섰다. 개기름이 유들유들한 퉁퉁한 얼굴이나 퉁 사발 같은 눈을 보면 무정해보였다.
  “나룻배를 빌리러 왔습꾸마.”
  부자는 생각 밖으로 첫마디부터 살갑게 굴었다.
  “아, 먼 길을 걸어 온 것 같은데 어서 올라오오.”
   기준은 짚신감발한 처지라 어지러워 질까봐 올라가지 않고 마루 앞에 서서 말했다.
   "간도에 건너가게 나룻배를 삯 내줍소.”
   허 영감은 마루에서 내려왔다.
  "원 참, 사람이 급하긴, 우물에 가서 숭늉 달라할 양반이군. 해 저물어야 두만강을 건널 수 있네.”
   “먼저 이불 짐이나 내려놓고 천천히 보기요.”
   기준은 이불 짐을 벗어 마루에 내려놓았다.
   허창수는 기준이네를 데리고 나루터 쪽으로 걸어 나갔다.
   버드나무 우거진 강변으로 나가자 맞은 켠 논밭에서 간도 농사꾼들이 논밭에서 일하는 모습이 피뜩피뜩 보였다.
   기준은 창수가 창록의 말과는 달리 사람됨이 훈훈한 것을 보고 한마디 물었다.
   “맞은 켠 간도라는 건 어떻게 돼 생긴 거요?”
   창수는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더니 “한입으로 말하자면 기오.” 하고 말꼭지를 뗐다.
   “저 맞은 켠을 간도라는 건 사실 우리 마을 저 아래쪽으로 두만강 건너편의 한 2천무나 될 넓다란 논밭을 말하는게요. 두만강반에 있는 섬 같은 땅이라고 해서 ‘간도’라고도 했소. 어떤 사람들은 또 개간한 땅이라고 ‘간토’라고 했는데 비슷하게 ‘간도’라고 부르기도 했소. 그런데 일본 사람들은 저 간도로 이곳 농사꾼들이 마음대로 나들자 간도를 확대해서 온 두만강변 동만을 간도라 했소. 지금은 두만강변 동만으로부터 동간도, 북간도, 남간도, 서간도라고 하면서 사방 7만여 리나 되는 만주를 몽땅 간도라고 한다오. 한일합방 후에는 일본 사람들이 우리 조선 사람들을 보호하는 척 하면서 간도에 경찰과 헌병들을 들여보내 만청중국을 밀어내고 간도통치권을 점차 차지하고 있소.”
    기준은 내놓고 말할 수 없어 머리만 끄덕였다.
    그러나 허창수 영감은 막 내놓고 욕지거리를 해댔다.
    “섬나라 오랑캐들이 욕심꾸러기야. 제 섬에서 살 게지. 개 놈 새끼들이, 우리 조선을 다 삼키고서도 모자라서 조선 사람들을 보호하는 척 하면서 묻어가서 간도까지 삼키려고 개지랄이 아니고 뭐요?”
    준은 두만강변에서 이렇게 민족 심이 있는 부자를 만난 것이 다행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허창수는 기준의 어깨를 툭툭 치면서 말했다.
   “해가 지면 맞은 켠으로 건네줄게. 낮엔 안 되네. 일본 순사 놈들에게 붙잡히면 경을 칠라구.”
   리창록도 곁에서 끼어들었다.
   “우리 마을에서는 원래 두만강에서 물고기를 잡아 쌀을 사 보탰소. 그런데 일본 놈들은 두만강에서 물고기마저 마음대로 잡아먹지 못하게 하오. 쩍하면 쫓아와서 조선이 통 채로 일본 거로 됐기에 물고기도 일본 거라오. 날강도 같은 개 새끼들을, 원, 괘씸해서 어떻게 살겠소?”
    그들은 두만강 변 버드나무숲에 숨어 숱한 이야기를 했다.
   기준과 상길은 배 삯전을 주고 허 영감네 집에서 점심까지 얻어먹고 해지기를 기다렸다.
   지루한 오후가 흘러가고 무시무시한 밤장막이 서서히 드리웠다.
   기준과 상길은 허 영감을 따라 두만강 변 나루터에 나갔다.
  허 영감은 기준의 옷 보따리까지 들고 나루터까지 따라 나와 배웅했다.
  “겨울에 왔더라면 배 삯도 낼 필요 없이 얼음우로 두만강을 건너면 됐겠는데 미안하오. 잘 가게나.”
  기준은 나룻배에 올라타기 전에 허 영감의 손을 꽉 잡았다.
  “천만에 말씀을, 두만강을 건네주어 고맙소.”
  허 영감은 손을 저으면서 “이렇게 고향을 떠나가면 언제 다시 돌아오겠소?” 하고 말했다.
  기준은 머리를 들어 버드나무 우거진 두만강 변 그리고 종성의 산천을 둘러보았다. 종성의 산을 너머 저 멀리 고향 쪽의 하늘을 쳐다보았다. 순간 눈앞이 흐려지고 코마루가 시큼해났다.
강하기로 무쇠 같던 기준이도 정작 핍박에 의해 태 줄을 묻은 정다운 고향을 떠난 지 거의 한 달 만에 두만강을 건너게 되자 목이 꽉 멨다. 그는 가래 같은 손으로 눈시울을 쓱 닦더니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나룻배에 올랐다.
  그는 나루터에서 손짓하는 허 영감에게 손을 저었다. 조국산천에 대고 머리 숙여 작별인사를 했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흐느껴 울었다. 가슴을 쾅쾅 마구 쳐댔다.
   (이젠 진짜 부모형제와 고향 땅을 떠나야 한단 말인가? 처자와 생이별해 이국 땅에서 살아야 한단 말인가?)
   가슴이 미여지는 것만 같았다.
   구척 장신 사나이 기준도 처자와의 이별엔 눈물을 주르를 흘렸다. 씁쓸한 눈물이 콧마루를 적시며 입 안에 흘러들었다.
   창록이 삿대로 강바닥을 찍어 떠밀자 나룻배가 강심으로 유유히 미끄러져 들어갔다. 조선 땅과 떨어져 강심으로 밀려나가자 기준의 마음은 더없이 쓸쓸해졌다.
  (탯줄을 묻고 대대로 살아온 내 정든 고향아, 조상의 뼈가 묻힌 조선 땅아, 이렇게 가면 언제 또 찾아올까?)
   순간 기준의 눈 앞에 콧수염쟁이와 번대머리가 피뜩피뜩 떠올랐다. 그는 고향에서 못살게 쫓아다니는 일본 놈새끼 끼무라와 졸개 한길수가 한없이 가증스러웠다. 
  기준이 이를 쁙쁙 가는데 창록은 노를 저으면서 월강곡을 나직이 흥얼흥얼 불렀다.
 
    월편에 나붓기는 갈잎은
    애타는 내 가슴을 불러야 보건만
   이 몸이 건너면 월강 죄라오
 
   기러기 갈 때마다 일러야 보내며
   꿈길에 그대와는 늘 같이 다녀도
   이 몸이 건너면 월강 죄라오
 
   그때 두만강 하류 쪽에서 빨래방치 질하는 소리와 함께 월강곡에 화답이나 하듯이 웬 여인의 구슬픈 노래 소리가 들려왔다.

     새 봄이 다 가도록 기별조차 없는 임을
     또 어찌 명년 봄까지 기다려야 하나요
    두만강 눈얼음은 다 풀렸는데
     기다리는 임은 언제 돌아오랴
 
     새 봄이 아니오라 열세 봄 넘어와도
     못 참을 내랴만은 가신 님 낯 잊을까
    강남의 제비들은 제 집을 찾아왔는데
    간도로 들어간 내 님은 언제 돌아오랴
 
    두만강 변 버드나무숲속에서 뻐꾸기도 망국노의 슬픔에 겨워 처량하게 우는가? 뻐꾸기 뻐꾹뻐꾹 구슬피 우는데 봄바람에 버드나무숲이 슬픔에 겨워 와스스 몸부림친다.
   먹장구름 속에서 뻘건 독사가 쭉 뻗쳐내려오더니 강폭을 핥아갔다.
   꽈르릉, 꽝! 꽝!
   두만강을 삼킬듯한 우뢰소리가 천지를 들었다 놓는다. 
   상길은 질겁해 배전을 잡고 바들바들 떨며 흑흑 흐느껴 울었다.
  "엄마~ 엄마~"
  창록이 다급히 손사래쳤다.
  "울지마! 마적이나 만청 순사놈들을 불러오면 목이 떨어져!"
  그 소리에 상길은 울음을 뚝 그쳤다.
   댓살 같은 소낙비가 억수로 쏟아져내렸다. 
   기준은 어린 조카 불쌍해 품에 꼭 끌어안안았다. 
    광풍폭우가 휘몰아쳐 두만강 폭을 무섭게 휩쓸었다. 쪽배가 흔들리며 당장 뒤엎어질 것 같았다.  기준은 상길을 꽉 끌어안고 가래짝 손으로 가냘픈 걀죽한 얼굴의 비물과 눈물을 닦아주었다.
   쓸쓸한 이 밤에 피눈물에 젖은 두만강은 조국을 이별해가는 그들 숙질간을 업어 건늬며 쓸쓸히 바래고 있다.


              7. 간도 소서구


    쪽배가 억수로 쏟아지는 소낙비를 맞으며 사품 치는 두만강 물에 정처 없이 둥둥 떠내려갔다.  광풍폭우가 미친듯이 불어쳐 쪽배가 기우뚱거리고 불어 버드나무들이 무섭게 우수수 떨고 있었다.
    쪽배는 그래도 능숙한 키잡이에 의해 간신히 대안에 다가갔다.  창록은 노젖기를 멈추고 두만강 물에 고기그물을 꺼내 슬슬 치면서  대안의 동정을 살피였다. 쪽배는 급물살을 타고 하류 쪽으로 둥둥 떠내려갔다.
   “건너가도 되겠소. 맞은 쪽에 만주국 놈들이 없는 거 같소.”
  기준은 상길을 안고 대살 같은 빗발 새로 창록을 돌아보며 물었다.
  “만주국 놈들이 붙잡으면 정말 목을 쳐 머리를 두만강에 처넣소?”
  창록은 배를 버드나무숲이 우거진 뭍에 댔다.
  “이전엔 그랬소. 지금은 그러잖소. 붙잡히면 극상 해야 노역을 시킬 뿐이오. 빨리 내려 달아나오."
  기준은 창록의 손을 굳게 잡았다.
  “고맙소. 이제 갈라지면 언제 만나겠는지.” 
  창록은 비물에 젖은 이불 짐과 옷 짐을 대안에 마구 던졌다.
  기준은 창록한테 동전 두잎을 건네주고 상길을 안고 뭍에 성큼 내려섰다.
  창록은 삿대로 뭍을 떠밀면서 조용히 말했다.
  “간도에서 살기 힘들면 조선에 돌아오오. 언제든지 두만강을 건네줄게.”
  “양. 고맙소.”
  순간 쇠기둥처럼 강한 기준이도 코마루가 시큼해났다. 낯선 간도 땅을 딛고 멀어져가는 창록과 배를 보다가 머리를 들어 조선의 산천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마음이 비길 데 없이 괴롭고 쓸쓸했다.
  기준은 이불 짐과 옷 짐을 다시 한데 잘 묶어 둘러메고 상길마저 목매를 태우고 일어났다.
  “가자! 빨리 가자!”
  상길은 기준의 말대로 오줌으로 발바닥의 상처를 처치해 좀 낳았지만 아직도 걷기 힘들어 삼촌의 잔등 신세를 입어야만 했다.
  기준은 두만강 변에서 멀리 달아나면 안전할 것만 같았다. 별 일이었다. 일제 놈들의 압박과 추격에서 해탈된 감도 뒤따랐다.
  비록 낯선 간도 땅이지만 고향과 조선에서 멀면 멀수록 쫓아오는 놈이 없을 것만 같았다.
    기준은 늙은 버드나무 밑에서 소낙비가 멎기를 기다렸다. 소낙비가 멎자 그들은 간도라고 불리는 논밭굽이를 굽이굽이 감돌아 흐르는 두만강 변의 버드나무숲을 헤치면서 한참 하류 쪽으로 걸어갔다. 드디어 원시림을 온 몸에 들쓴 한 산기슭에 이르렀다.
    그때 난데 없는 말을 탄 놈들이 달려왔다.
    (마적들이?)
    맞았다. 당시 마적들은 말을 타고 두만강변을 돌아다니면서 전문 불법도강한 조선 백성들을 미친듯이 수탈했다.
    기준은 황급히 목마를 태웠던 상길을 제꺽 내리워 안고 길 옆 숲속에 엎드렸다.
    말발굽소리가 딸까닥 딸까닥 가까워왔다.
   상길은 겁나 또 울라울라 했다.
   "울지 마라!"
   기준은 상길을 꼭 껴안았다.
   "他妈的,躲到哪儿去了?“
   대여섯이나 되는 마적들은 기준과 상길의 앞에 와서 멈춰서서 꽥꽥거렸다.
   그 놈들은 숲에 마구 채찍을 휘둘로 쨩쨩 후려갈겼다.
   "아가! 엄마!"
   채찍에 얻어맞은 상길이 그만 너무 아파 울음보를 터뜨렸다. 
   "하하하, 이놈들, 어서 나왓!"
  마적들은  다가와 마구 채찍을 휘둘러댔다.
  기준은 벌떡 일어나 휙휙 날아드는 채찍을 거머쥐고 홱 나꿔챘다.
  마적이 보기좋게 말에서 떨어져 곤두박혔다.
  기준은 그 놈의 허리에서 긴 칼을 쑥 뽑아 내리찍었다.
   "아이마얏!"
   그 놈은 외마디 비명소리와 함께 뒈졌다.
   뜻밖의 반격에 마적들은 깜짝 놀랐다.
   그러나 그 놈들은 수적 우세를 믿고 칼을 뽑아들고  덮쳐왔다.
   기준은 번개같이 날아나가며 칼을 휘둘러 찌르고 찍어댔다. 칼과 칼이 부딪히며 무수한 불찌가 튕겼다.
   또 한 놈이 칼을 맞고 보기 좋게 말 위에서 내리곤두박혔다.
   "아야, 마야!"
   "포우(달아나)!
  마적들은 상대를 잘 못 골랐다는 걸 뒤늦게나마 눈치챘다.
  나머지 서너 놈은 비명소리 치더니 우르르 꽁무니를 뺐다. 
 그제야 기준은 한숨을 후 내쉬었다.
 그는 칼을 들고 뒈진 두 놈의 몸을 이리저리 들췄다. 다행히 은전 일여덮잎을 들춰냈다.
  기준은 상길을 목마 태우고 이불짐을 들춰메고 두만강 맞은 켠을 바라보았다.
   이젠 두만강 너머 조국의 산이 희미하게 보일 뿐이었다. 그는 도리머리 질 하더니 머리를 숙였다. 순간 코마루가 시큼해났다.
   그간 오줌찜질을 했기에 상길은 개암나무를 휘어잡으면서 산으로 조금씩 오를 수 있어 다행이었다.
   갑자기 먹장구름이 뒤덮여오더니 하늘에서 또 번개가 번쩍이며 우르릉거렸다.
    우르릉 꽈르릉 꽝꽝!
   우뢰가 하늘땅을 진동하면서 무섭게 울리더니 때 아닌 봄에 소낙비가 물을 퍼붓듯이 쏟아져 내렸다.
   기준은 솜저고리를 벗어 상길에게 씌워주었다. 인가라고는 하나도 없는 산길에서 비를 피할 곳도 없었다.
   한참 개암나무 뒤덮인 산발을 타고 걷는데 다행히 뜻밖에 나졌다.
   "이건 하늘이 내린 구명동굴이야."
   기준은 상길을 데리고 동굴에 엉금엉금 기어들어가 비를 피했다.
    바깥에서 억수로 쏟아져 내린 빗물이 그들이 쪼그리고 앉은 동굴바닥에도 흘러들었다. 그러나 몸에 비를 맞지 않아 다행이었다.
    오뉴월의 비는 소잔등을 다툰다고 금방 기세 사납던 소낙비는 한참 후에 뚝 그쳐버렸다.
    기준은 동굴바깥에 나가 검칙칙한 밤하늘을 둘러보았다. 아직도 비가 곤두박질쳐 날아내리고 있었다.
    “오늘 밤은 여기서 자든지 하자.”
   기준은 손 더듬 하면서 동굴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한 십 미터 들어갔는데도 끝에 닿지 못했다.
   (됐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하느님이 우리를 자라고 여기에 이런 동굴을 만들어 놓은 것 같구나.)
  그는 이불 짐을 들고 상길을 데리고 동굴 안쪽으로 들어갔다. 축축한 동굴바닥에 속이 젖지 않은 이부자리를 두 겹으로 펴고 잠자리에 숙질간이 나란히 드러누웠다.
   이윽고 상길은 곤해 코를 콜콜 골았다. 동굴 안에는 기준의 한숨소리가 길게 울려 퍼졌다.
   이튿날 이른 아침. 기준은 먼저 일어나 동굴을 두루 살펴보았다. 누르스름한 토색 동굴 벽을 매만지면서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동굴 안에 모닥불을 피웠던 흔적이 있었다.
   한참 들어가니 시원한 바람이 불어 들어오고 이윽고 검고 칙칙한 둥근 하늘이 보였다. 이 동굴에 들어오면 천연적으로 다른 곳으로 달아나기 좋은 동굴이이였다. 아마 숱한 피난민들이 두만강을 건너와 여기 숨어있다가도 동간도, 서간도, 북간도로 들어간 동굴인 것 같았다. 후에 기준이가 안 일이지만 그 동굴에는 조선독립군 투사들이 숨어 항전을 벌려온 전적지였다고 했다.
   이때 동굴 저쪽에서 상길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상길아, 울지 말라. 삼촌 여기 있다.”
   그래도 상길은 흑흑 흐느껴 울었다.
    기준은 황급히 되돌아가 상길을 안고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삼촌이 무슨 귀여운 조카를 두고 어디로 가겠니? 울지 마.”
  상길은 울음은 끊었다. 하지만 고사리 손으로 눈물을 닦으면서 흑흑 흐느끼며 어깨를 들먹였다. 기준은 보짐에서 구운 개구리를 꺼내 상길과 함께 바작바작 씹어 먹었다.
   그들은 련 며칠 풍찬노숙하면서 산을 넘고 강을 건너 서쪽 산에 올라 령 길을 따라 걸었다.
   해질녘이 되여 어떤 골짜기에 이르니 골 안 막받이 움막들에서 저녁밥을 짓는 연기가 자오록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기준은 저 양반들도 자기처럼 모두 핍박에 의해 고향을 떠나 이 곳에 왔으리라고 생각되자 마음이 쓸쓸해보였다.
   제일 가까운 움막에 다가가니 한 나그네가 기준의 아래위를 훑어보며 “누굴 찾소?” 하고 물었다.
   “아니오. 여긴 어디요?”
   나그네는 기준을 흘끔 가늠해보았다.
   “계수동이오.”
    대답해버리고 나그네는 귀찮다는 듯이 거들떠보지도 않으며 움막 안으로 훌 들어가 버렸다.
   움막 안에서 벌거숭이 애들이 때투성이 낯들을 내밀고 상길을 보고 주먹을 코 마루에 댔다가 쳐들어 보이었다.
  상길이 주먹을 쳐들어 덤비라는 시늉을 했다.
  그 모양을 보고 기준은 허구픈 웃음을 피씩 지었다.
  (조선에서 듣던 소리와는 다르구나. 뭐 ‘만주에서는 지나가던 나그네에게도 기장밥에 장국을 먹인다고?’ 뭐 ‘땅이 많아서 살기 좋다고?’)
   기준은 쌀독에서 인심이 난다고 살기 힘드니까 야박하게 구는 것이라고 생각되자 도리머리를 흔들며 그 자리를 부랴부랴 뜨고 말았다.
    해는 그물그물 져 가는데 고향을 떠난 기준과 상길은 어데서 이 밤을 자야 하는가?
   기준은 계수동 산정에 올라 산 아래를 내려다 둘러보았다. 남쪽에는 버드나무가 우거진 들판이 펼쳐져있고 서쪽에는 아름드리 버드나무가 우거진 자그마한 골짜기가 남북으로 길게 누워 있었다. 서남쪽에는 깎아지른 산이 두개가 나란히 서있었고 그 뒤로 누르스름한 산들이 주마등처럼 울룩불룩 줄느런히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골짜기에는 인가라고는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옳다, 이쯤이면 끼무라나 한길수가 찾아오기 힘들 거 같아. 저 서쪽 골 안에 가서 황무지를 일구면서 살면 안 될까?)
   동산을 내려 골짜기에 들어서니 해가 뉘엿뉘엿 져갔다. 설상가상으로 아름드리버드나무숲속 하늘에 까마귀가 날아와 무시무시한 감을 더해줬다.
   상길은 겁을 집어먹고 기준의 옆구리에 딱 붙어서 숨이 한줌만 해 걸었다.
   기준은 버드나무에 앉아 울어대는 까마귀들에게 돌을 뿌렸다. 까마귀들이 후닥닥 하늘에 풍겨 올라가면서 까욱, 까욱 요란하게 울어댔다.
   그제야 상길도 돌을 주어 까마귀들에게 뿌리며 장난쳤다.
   그들이 개울물에 들어서니 종아리를 뭔가 톡톡 치는 것이었다. 무심결에 물속을 내려다보니 손바닥만한 허연 물고기들이 놀라 마구 뛰놀고 있었다.
   “이게 웬 떡이냐? 물고기야!”
   기준은 이불 짐과 옷 보따리를 강 건너 모래불우에 내던지고 팔을 걷어 올리더니 강물에 뛰어들었다. 그는 강가의 풀숲을 손 더듬질 해 손바닥만한 붕어를 잡아 모래바닥에 훌훌 내뿌렸다. 상길은 들었던 낫을 버리고 버들가지를 꺾어들고 모래바닥에서 팔딱거리는 손바닥만한 물고기들을 붙잡아 꿰기에 여념이 없었다.
   원래 이 자그마한 시내 물은 부르하통하에 흘러들어가는 강이었다. 강에는 물고기도 많았지만 잡을 줄 아는 사람이 없어 이제껏 물고기들이 늙어죽을 지경이었다. 그러다나니 물고기들은 사람을 무서워 피해 달아날 줄도 몰랐다.
    기준이 한참 손더듬질 해 잡으니 손바닥만 한 물고기가 몇 꼬챙이나 됐다.
기준은 물고기가 잘 잡히지 않자 시내 물에 손을 씻고 모래톱으로 올라왔다. 상길은 먹음직한 손바닥만 한 물고기들을 들고 보면서 혀를 감빨면서 걀쭉한 얼굴에 입이 함박만 해졌다.
    “이거면 몇 때는 실컷 먹겠어.”
    기준은 상길을 데리고 마른 삭정이를 주어다 쌓아놓고 부시를 쳐서 모닥불을 피웠다.
   상길은 너무 흐뭇해 입귀가 귀밑까지 째질 지경이었다.
   “야, 여기 간도에 이렇게 고기가 많은 좋은 강도 있습니다. 예?”
   상길도 모닥불에 삭정이를 주어다가 자꾸 올려놓았다.
   기준은 맑은 강물을 돌아다보면서 “그래, 우리 이 고기도 많은 강을 태평강이라고 이름을 짓자.” 하고 말했다.
   “어째 태평강입니까? 우리 고향의 운주하라구 하면 더 좋지 않습니까?”
   “아니야. 운주하라고 하면 우리가 운주동에서 온 걸로 의심 받을 수 있어. 간도에 와서는 태평무사하게 살아야지. 그래 태평강이라고 짓자는 거야.”
   “예~ 태평무사하라. 태평강. 이 강 이름이 아주 멋있습꾸마.”
   이때 갑자기 먹장구름 속에서 뻘건 불 뱀이 서산에 뻗치고 우레 소리가 천지를 뒤흔들며 울렸다. 불시에 소낙비가 와르르 쏟아져 모닥불이 꺼져버렸다.
   “안 되겠어. 비를 피하자.”
   기준은 두리번거리다가 서쪽 골 안 쪽에 검 칙칙한 집안에서 등불이 가물거리는 것을 발견했다.
   “저 집으로 가보자.”
   “예.”
   그들이 소낙비를 무릅쓰고 서쪽 골 안 어귀에 가보니 만주국 한족집이 하나 나타났다.
   처음 보는 한족집이여서 신기해보였다. 집 울안에서 개가 왕왕 짓는데 만복을 걸친 뚱뚱한 나그네가 문을 열고 내다보았다.
   “에이, 꿔라이바(오게나)!”
   뚱뚱보는 기준이네를 보자 뜻밖에도 오라는 손시늉을 했다. 상길은 겁나 기준의 옆구리에 머리를 파묻을 지경이었다.
   기준은 뚱뚱보주인의 말을 알아듣지는 못하였다. 허나 손시늉을 보고 아무튼 소낙비나 피해 하루 밤 자려고 마음먹었다. 그는 상길의 손목을 잡고 성큼성큼 울바자 안으로 집에 들어갔다.
    뚱뚱보는 알아듣지 못할 중국말을 하면서 손시늉을 했다. 기준은 이불 짐과 옷 보따리를 구들에 내려놓고 상길의 손에서 물고기 뀀 하나를 뚱뚱보 주인에게 넘겨주었다. 그러자 뚱뚱보는 처음 물고기를 보고 희귀해 어쩔 줄 몰라 하며 아내한테 줘 보내며 뭐라고 분부했다.
    기준이 남쪽구들에 올라가 앉아 집안을 둘러보니 넉넉한 집 같아 보였다. 남북으로 갈라진 높은 중국 구들, 벽 쪽에는 뻘건 칠을 한 농궤가 서너 개나 놓여있었고 농궤 위에 비단이불이 겹겹이 쌓여있었다.
   이윽고 뚱뚱보주인의 아내가 김이 몰, 몰 나는 옥수수떡 대여섯 개에 파와 된장을 들여왔다.
  뚱뚱보주인은 먹으라는 손시늉을 했다. 기준과 상길은 만주국의 후한 인심을 처음 느끼면서 옥수수떡을 맛있게 먹었다.
  그런데 뚱뚱보는 높은 한족구들에 앉아 옥수수떡을 떼먹다가도 누런 건 가래를 구들아래 땅바닥에 퉤퉤 내뱉었다.
  기준과 상길은 더러워서 겨우 옥수수떡을 목구멍으로 넘겼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배고픈 놈이 가릴 것 없이 옥수수떡을 굶은 승냥이가 사냥물을 뜯어먹듯이 마구 우겨먹었다.
  한참 후 뚱뚱보주인은 기준이네를 서쪽 방으로 데리고 들어가더니 손으로 구들을 툭툭 치며 거기에서 자라는 손시늉을 했다.
  기준은 상길을 데리고 고향을 떠난 후 만주국의 한족 집에서 처음으로 배불리 먹고 한잠 잘 잤다.
  이튿날 아침 기준은 공밥을 얻어먹기 싫어 상길을 보고 이불 짐과 옷보다리를 지키라고 하고는 마당에 나가 도끼를 들고 통나무를 팍팍 패주었다.
   뚱뚱보주인은 마당에 따라 나와 엄지손가락을 내둘렀다. 한참 통나무를 팬 후 기준은 부엌간에 들어가더니 물 초롱을 들어 쳐들어 보이면서 물이 어데 있나 손시늉을 하며 물었다. 뚱뚱보주인은 물 초롱을 들고 기준을 데리고 우물터에 갔다. 두 번 째로 갈 때는 뚱뚱 보 주인이 멜대를 메고 가더니 물 초롱 두개에 물을 꼴딱꼴딱 퍼 담아 멜대로 어깨에 척 메고 식은 죽 먹기로 아주 절주 있게 집으로 돌아왔다.
   기준도 배워 멜대로 물을 길어보았다. 그러나 뚱뚱보주인처럼 멜대를 메고 걸을 때 멜대가 아래위로 흔드는 절주감과 발이 맞지 않아 물을 많이 흘렸다.
   아침에 뜨끈뜨끈한 장국에 조밥까지 배불리 먹은후 기준은 뚱뚱보주인이 준 괭이를 쥐고 소서구(小西沟)라는 골 안으로 들어갔다. 좁은 골 안은 길이가 한 3 리는 실이 됐다. 골 안을 따라 중간쯤 가자 움막이 나타났다.
   뚱뚱보주인이 다가가자 움막 안에서 새하얀 한복을 입은 조선나그네가 나타나더니 허리를 꿉썩 하면서 인사했다.
  뚱뚱보주인이 중국말로 뭐라고 말하자 조선나그네가 기준을 돌아보면서 말했다.
   “이 양반은 이 골 안의 주인인데 장학산이란 지주요. 난 조선 회령에서 온 주현경이요. 우린 장지주네 밭에서 소작 농사를 지은 지 이태나 되오. 우리 집 주인 장학산 지주는 마음이 후하오. 장 지주는 당신과 함께 여기서 소작 농사를 지으면서 살라고 하오.”
   그 말에 기준은 장 지주에게 허리를 굽혀 고마운 인사를 올렸다.
   “고맙소. 난 올해 몇 년 몇 월 며칠인 지도 모르오.”
  주현경이 장학산 지주와 뭐라고 묻더니 기준에게 “오늘은 1925년 4월 19일이라고 하오.” 하고 알려주었다.
   기준은 머리를 끄덕이면서 “거의 한 달 반이나 걸어왔구먼.” 하고 중얼거렸다.
   기준은 그날부터 장학산 지주네 톱과 괭이, 삽을 빌어다가 소시거우 막치기 샘물터 부근 양지바른 경사면에 움막을 짓고 장지주네 가마를 빌어다 건 후 좁쌀을 한주머니 꿔다 죽물을 쑤어먹으면서 소작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기준이가 괭이로 황무지를 번지는 사이에 상길은 묵밭에 듬성듬성 자란 능쟁이랑 캐느라고 여념이 없었다. 그런 푸성귀를 데쳐서 죽물에 버무려 먹으니 꽤나 보탬이 됐다.
   쉴 때 기준은 소서구 산정에 올라가 간도의 인적이 드문 황야를 둘러보았다. 아름드리버드나무가 우거진 누르므레한 들판, 원시림을 방불케 나무와 소나무가 꽉 들어선 야산, 인적이 드문 황야는 정이 붙을 데가 하나도 없었다.
   그래도 소서구 남쪽에 우뚝 솟은 천지꽃산에는 고향의 산처럼 봄을 맞아 진달래가 듬성듬성 피어 있어 조금 위안됐다. 천지꽃산 줄기를 타고 앉아 남쪽으로 내다보면 깎아지른 절벽으로 이뤄진 패랑천산이 있고 그 서쪽에는 세모칼날이 비스듬히 세로 박혀있는 듯이 칼산이 패랑천산보다도 두 배나 높게 솟아있고 칼산 서쪽에는 산무루가 방추 돌처럼 평평한 멍지뫼 산이 있었다. 누르무레한 황야에 우뚝 솟은 패랑천산과 칼산 그리고 멍지뫼 산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기준은 허구픈 웃음을 지었다.
   (섬나라 오랑캐들이 살판을 치는 세상에서 정말 저 칼산처럼 자존심을 세우면서 살 수 없을까?)
  그는 머리를 돌려 머나먼 고향이 있는 동남쪽 하늘을 멀리멀리 하염없이 바라보면서 착잡한 생각에 잠기였다.
   (고향의 부모형제들은 무사한지? 만주국에 들어온 성칠 형님과 진달래 사돈 새기는 어데 있을까?)
남산 하늘에서 훨훨 날아예는 새들을 보는 순간 기준은 새처럼 날개라도 돋혔으면 고향에 훨훨 날아가 부모형제들을 만나고 싶은 생각이 불붙듯 했다.
  (성칠 형님을 만나면 조선독립군에 들어가는 게 옳지 않을까?)



     8. 땅의 유혹


    병완은 길닦이를 하면서도 막내아들과 셋째손자 생각에 늘 얼굴에 어두운 그늘이 져 있었다. 또 북으로 독립군을 따라 떠나간 맏아들 생각을 하면 가슴이 더욱 아팠다.
    (그 놈이 무사한지? 배짱 있는 장한 놈이긴 하지.)
   창준도 동생과 둘째아들 생각에 밤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집식구들은 기준과 상길이 가능하게 만주국으로 들어갔겠다고 짐작했다.
   병완은 소낙비 오는 날이면 이놈들은 어데서 자고 있을까, 밥상을 마주 앉으면 이 놈들은 죽물이라도 얻어먹는지를 근심하군 했다.
  길닦이공지에서 쉴 때 병완은 창준을 불러 소변보러 가는 척 하면서 수림 속에 들어갔다.
   병완은 나무가지를 쳐들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귀속 말을 했다.
   “창준아, 아무리 생각해 봐도 가을걷이나 해가지고 만주국으로 달아나야 될 것 같다. 한길수 성화에 어디 고향에서 살겠니?”
   창준은 한마디 보탰다.
   “그 놈은 한 하늘을 쓰고 살지 못할 철천지원숩구마.”
   병완은 주위를 다시 살펴본 후 괴춤을 춰 입더니 뒷말을 이었다.
   “그 놈은 일본 놈들을 등에 업고 우리 일가를 몽땅 죽이잔다. 이제 다리 몇 개에 기둥마다 나무벌레를 집어넣으면 다 된다. 개놈새끼들, 경찰국이구 다리구 몽땅 무너지는 꼴 보기 좋겠어. ” 
   창준은 한숨을 후- 내쉬었다.
   “전번에 뒷산에 가보니 바위 돌 틈에 심은 메밀 이삭이 꼿꼿이 쳐든 게 몇 마대 날거 같지 않습더구마.”
   병완은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었다.
   “큰 일 났다. 문중 전을 꿔 쓴 걸 어떻게 물겠니? 가을이면 이제 빚꾼들이 와야 몰려들 텐데. 어찌겠느냐?”
    병완과 창준은 한숨을 푸푸 내쉬며 두런두런 얘기하다가 수림 속에서 나왔다. 그들은 목수 일을 하면서도 한길수의 눈치가 보여 한 곳에 가서 일하지 않았다.
    이때 한 무리 기병이 먼지를 새뽀얗게 날리면서 달려왔다. 모두들 또 한길수가 자위대를 끌고 오는가고 생각했다. 그런데 가까이에 온 것을 보니 자위대가 아니라 몽땅 일본군의 군복을 입은 조선 사람들로 된 군인들이었다.
   일부 일군들은 희한해 일손을 멈추고 괭이자루를 짚고 멍해 서서 구경했다.
  그때 일본군 군관 복을 입은 자가 나서 목을 빼들고 꽥꽥 고함쳤다.
   “여보게들. 나를 알만합둥?”
  병완과 창준이 쳐다보니 한길수 맏아들 한철주가 아니겠는가.
  “퉤!"
   "에이고, 그 애비에 그 아들놈이구나.”
   인부들은 힐끔힐끔 곁눈질하면서 나직이 욕지거리를 했다.
   그런 눈치도 모르고 한철주는 말 잔등 위에서 하얀 장갑을 낀 손으로 삿대질하면서 연설을 해댔다.
    “여러분, 새 살길을 알려드리겠습꾸마. 여긴 일본 사람들까지 들어와 욱실거리기에 땅이 비좁아 살기 힘들어졌습구마. 그렇채임둥?”
   길닦이를 하던 인부들은 삽질을 그만 두고 삽자루를 짚고 서서 귀 뻘쭉해 한철주의 입을 쳐다보았다.
   사기 난 철주는 개 턱 쳐들고 고래고래 고함쳤다.
   “일본 사람들을 뜰 필요 없습꾸마. 그들은 메이찌유신 후에 유럽의 선진적인 과학기술과 문화를 인입해 아주 강대한 군사강국으로 되였습니다. 강국을 떠서 먹을알이 있습니까? 그들은 우리 조선을 통 채로 먹어버렸습니다. 그러니 우린 여기 조선에서 살기 어려운 형편에서 만주국으로 가서 황무지를 일궈 밭을 만들고 사는 게 명지한 선택입니다.”
그 말에 병완은 속으로 그 놈 친일파 개다리 놈 새끼, 일본에 유학해 배운 게 저따위 개 소리 뿐인가 욕했다.
한철주의 고함소리는 그치지 않았다.
“만주는 땅이 넓고 사람이 적어서 지나가던 나그네에게도 기장밥에 된장국을 대접합구마. 내 간도에 가봤는데 확실히 땅이 넓더구먼요. 우린 일본제국을 등에 업고 간도에 가서 농사를 짓고 둥지를 틀고 새끼를 치면서 사는 게 새 살길입니다. 일찍 본 세기 초에 우리 조선에서 종삼품 리범윤을 간도관찰사로 임명해 일진회를 영솔해 간도에 쳐들어가게 했습니다. 우리는 리범윤과 같은 선배님들의 뒤를 이어 일본제국이 간도로 진출한 기회에 간도라는 이 보배 땅으로 진출해 조선인 농장도 차리고 황무지를 개간하면서 살아야 합구마. 일본 집단농장에 가기 싫으면 개별적으로 간도에 가도 괜찮습구마. 일본 집체농장에서는 벼농사도 배워주고 일본 은행에서는 원세개 대가리가 박힌 만주국 돈도 꿔 줍니다. 일본군은 우리 조선 사람들을 2등공민으로 높이 생각하면서 잘 보호해 줄 것입니다. 우리 조선 청년들은 일본군에 들어가 일본제국의 대동아공동경영권을 수호하고 간도에 우리 두 번째 고향을 건설해야 합니다. 여러분, 어떻습둥?”
그러자 어떤 사람들은 옳다고 하였고 어떤 사람들은 그럴듯하나 불여우 같은 한길수를 봐도 어찌 그 아들놈의 말을 믿고 간도로 가겠는가고 했다.
그때 가마골의 정형만이란 인부가 나서서 물었다.
“당신은 일본에 유학 갔다 왔다는 걸 아오. 그런데 지금 일본군에서 무슨 일을 하오?"
"걸 물어 뭘 합둥?"
한철주는 입을 헤 벌리고 쳐다보는 정형만을 말위에서 내리보았다.
"그걸 알아야 당신 말을 믿고 간도로 가지.”
그러자 철주는 말 잔등에서 내려 정형만의 어깨를 다독여주면서 지껄여댔다.
“난 지금 간도로 진출하는 일본군 대대장이요. 날 따라 간도로 들어갈 생각이 있소?”
그 말에 형만은 머리를 절레절레 가로저으면서 뒤로 물러섰다.
“아, 아니오.”
일부 살 길이 없는 인부들은 철주에게 다가가 일본농장에 가면 어떤가를 알아보고 가겠다고 나섰다. 그 바람에 수십 명 되는 인부들이 그 자리에서 농장에 가겠다고 나섰는데 철주는 그들이 집식구들을 만날 새도 주지 않고 강박으로 군복을 입혀 끌고 가버렸다.
아들놈의 꼬리가 보이지 않자 이번에는 한길수가 백마를 타고 자위대를 끌고 들이닥쳤다.
그는 병완과 창준을 곧추 찾아와서 외눈깔을 부라리면서 을러멨다.
“병완이, 내 아들 말처럼 자네도 간도로 들어가게. 자네 일가가 내 고향을 떠나 간도에 가버리면 다신 당신을 다치지 않겠네.”
(개자식, 이젠 내놓고 쫓는 판이구나. 흥!)
     한길수는  톱질 하는 병완에게 다가와 흉악한 외눈깔로 쏘아보면서 채찍으로 통나무를 툭툭 치면서 선뜩선뜩한 말로 지껄였다.
     “당신의 아들 성칠과 기준은 용서할 수 없네. 내 집에 불을 지르고 내 잔등을 괭이로 찍지 않았는가. 뼈다귀를 콩가루를 내도 원수를 다 못하겠어.”
      병완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길수는 혼자 지껄이기 멋 적었던지 말 잔등에 오르더니 고래고래 고함쳤다.
“그 놈들을 잡기만 해봐라. 대가리를 떼서 두만강에 처넣지 않는가!”
  병완은 먼지를 새뽀얗게 일구면서 멀어져가는 한길수의 뒤에 대고 침을 퉤 뱉었다.
“개 새끼들의 성화에 어디 살겠냐?”
그는 창준의 귀에 대고 말했다.
“저놈들이 우리를 간도에 보낸 후 뒤를 밟아 성칠과 기준을 잡아 죽이려는구나. 유인수작이지.”
그 말에 창준은 머리를 끄덕이면서 “예. 지금 내색을 내지 말구 꾹 참깁소.”라고 말했다.
병완은 그저 긴 한숨을 후 길게 내쉬었다.
그는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고 창준의 귀에 대고 “다리나 무너지게 다 세워놓고 가을걷이를 해가지고 간도로 달아나자.” 하고 말했다.
그들 부자간은 이를 악물고 수모를 당하면서도 참으면서 고의적으로 나무벌레가 먹은 통나무로 다리기둥을 하나하나 세워놓았다. 혹시 나무벌레가 없는 나무에는 꼭꼭 끌로 구멍을 파고 나무벌레를 집어 걷어 넣고 나무구멍을 막아놓았다.
병완과는 달리 논어나 읽어온 최구장은 “중용지도”를 처세 좌우명으로 삼았다. 그는 자식들을 불러놓고 엄숙하게 말했다.
“내 말을 명심해라. 너희들은 절대 남과 싸울 궁리를 하지 말라. 특별히 한길수나 일본 사람들과 주먹질 하지 말라. 주먹을 들이대면 주먹이 날아 들어오는 법이다. 폭력은 또 새로운 폭력을 낳는다는 걸 알아라. 우린 살기 힘들어도 꾹 참아야 이 고향에 살아남을 수 있느니라. 너무 강하면 꺾어지는 법이다. 병완 사돈어른이나 기준사돈이랑 봐라. 뜨개 소처럼 이 고향 우두머리 한길수나 일본 놈들을 뜨더니 고향에서 편안히 사는가. 버드나무가지는 휘어들어도 끊어지지 않는다. 허나 대살처럼 너무 내놓고 곧게만 뻗고 휘어들 줄을 모르면 부러지기 마련이다.”
최구장은 숨을 돌린 후 뒷말을 이었다.
“사람이 사느라면 울퉁불퉁한 버드나무속에 대나무 같은 곧은 마음을 숨길 줄도 알아야 한다. 한길수나 일본 놈들이 고와서 머리를 숙이라는 게 아니야. 뜰 줄 아는 소는 말 한마디 없이 뜨고 무는 개는 짓지 않고 무느니라.”
경숙과 경욱은 아버지의 심원한 처세철학을 다 알아듣지는 못하고 그저 도리머리만 가로저었다.
을씨년스러운 늦가을이 다가왔다.
기운봉 기슭에 낙엽이 우스스 지고 다람쥐들도 겨울나이준비에 나무를 오르내리며 분주히 가댁질하며 돌아쳤다.
병완은 너럭바위가 누운 바위 돌밭에 심은 메밀을 거둬야 하겠는데 끼무라가 길닦이에 어찌나 내모는지 몸을 뺄 수 없었다.
(총 도감? 개자식! 필마 옹을 시키면서 나를 얼려 네 놈의 강도욕심을 차려? 천만에! 대대로 살아온 고향에서 살지 못하게 한 놈이 누군데? 태 줄을 묻은 고향에서 간도 황야에 쫓아내는 놈이 누군데?)
속에서 용암이 부글거리듯이 분노가 부글부글 끌어 번졌다. 그러나 그는 이전과는 달리 우시장 경찰국 국장 사무실에 들어설 때는 아무 일도 없는 듯이 억지로 얼굴에 미소를 지어보였다.
대문 옆의 보초병들도 병완에게 군례를 척 붙이더니 안으로 들어가게 했다. 병완이 피뜩 경찰국 사무 청사 용마루를 바라보니 조금 휘어 든 감이 들었다. 그것은 목수 특유의 눈으로만 보아낼 수 있는 것이다.
병완이 들어서자 끼무라는 자리에서 일어나 마주 걸어 나왔다.
“오, 범이 자기 흉을 하면 온다더니 총도감이 왔구먼.”
끼무라는 하얀 장갑을 낀 손을 내밀었다.
병완은 승냥이 족때기를 잡은 감을 느껴 끼무라의 손을 인차 놓았다.
“끼무라 국장, 눈이 내리기전에 너럭바위돌밭에서 메밀을 거둬들여야겠소. 며칠만 말미를 주오.”
“그래?”
끼무라 국장은 안경너머 병완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병완은 아주 태연자약하게 말했다.
“가을걷이를 해야 하겠는데 한길수가 무섭소.”
끼무라는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천하장사 병완이가 한길수를 무섭다 하면 누가 곧이듣겠는가? 허허.”
병완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우리 막내아들 기준이가 봄에 산속에 들어가 황무지를 개간할 때 한길수가 총으로 쏘아 죽이려 한 일을 모르오? 그 애에게 무슨 죄 있다고 이러오? 그 애를 고향에서 살지도 못하고 바깥에서 헤매게 했단 말이오?”
끼무라는 병완의 말을 류강철의 통역을 듣고나서 뚜벅뚜벅 사무실안을 거닐면서 속궁리를 굴렸다. 그의 머리에서는 번개가 번쩍이고 우레가 쳤다.
사실 끼무라는 병완이네 일가를 잡아가두거나 몰살시키려면 손을 뒤집듯이 쉬웠다. 그러나 병완이네 일가를 미끼로 성칠, 나아가서 독립군의 꼬리를 밟아 독립군을 일망타진하려는 것이었다. 올 봄에 한길수가 개인보복을 하려고 끼무라 몰래 기준이네를 죽이려고 날뛰는 바람에 기준이가 조카를 데리고 달아났고 병완이네 일가를 놀래놓았다. 결과 성칠과 독립군은 두 해 되도록 조선반도 명천군내에 얼씬하지도 않았다. 이젠 저 우직한 병완을 미끼로 성칠의 포수대나 독립군을 명천에 유인해 끌어들여 잡아 죽일 수 없게 됐다. 밸이 난 것 같아서는 한 마리 개에 지나지 않는 한길수를 단칼에 죽여치우고 싶었다.
(길수는 수단이 모자라. 저 병완도 이젠 메밀이나 거둬가지고 간도로 달아날 것 같아. 길수 손에 언제 죽을 지도 모르는데 눌러 있을 리 만무해. 저 놈은 그렇게 우둔하지 않으니까.)
끼무라는 거닐던 발걸음을 우뚝 멈추더니 병완에게 낯을 돌리면서 말했다.
“그 일로 내 전번에 한길수의 귀 쌈을 얼마나 세게 쳤는지 몰라. 이번 가을걷이는 시름 놓고 하게나. 한길수가 다시 시키지도 않은 일을 하면 가만 놔두지 않겠소.”
이러루하게 눅잦혀놓고 뒤 말을 달았다.
“지금도 늦지 않소. 난 자네를 자위대 한길수 버금자리에 앉히고 싶네. 내 손을 잡으면 대대로 고향에서 복을 누리면서 살 수 있지. 그러지 않으면 초상집 개처럼 이리저리 쫓기면서 개나 돼지처럼 살걸.”
그러나 병완은 “관심해줘 고맙네. 난 총을 차구 거들먹거릴 재목이 아니오. 땅에 곡식이나 심어먹고 살 사람이니 다신 그 말을 꺼내지도 마오.” 하고 무뚝뚝하게 거절해버렸다.
그 무자비한 말을 듣자 끼무라는 군도자루를 매만지며 독한 마음을 먹었다.
(제 발로 찾아왔을 때 오늘 저 놈을 가둘까? 죽여 버릴까?)
그는 몸을 홱 돌렸다. 그러나 얼굴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떡 서있는 병완을 보는 순간 피뜩 뇌리를 치는 생각이 있었다.
(간도로 가게 놔주자. 저 놈의 뒤를 밟아 간도에서 성칠과 독립군을 찾아내 일망타진해야 한다.)
마음을 정하자 끼무라는 군도자루를 스르르 놓으면서 팽팽하게 굳어진 얼굴근육을 느슨히 풀더니 나오지 않는 웃음을 지어보였다.
“요로씨이(좋아)! 가을걷이 하게나. 총도감이야 인부들을 동원해 일을 시키고 감독하면 되는 거야.”
그 소리에 병완은 몸을 돌려 바깥으로 나가려고 했다.
“잠간!”
끼무라는 병완을 불러 세웠다.
“난 자네가 우리 경찰국 사무 청사를 짓고 길에 숱한 다리를 놓은걸 잊지 않겠네. 그런데 경찰국 사무 청사에 무슨 소리가 자꾸 나서 귀찮네.”
병완은 경찰국 천정을 쳐다보았다. 여기저기 비가 샌 검은 흔적이 있었다.
“어데서 소리가 난다고 그러오?”
병완은 시치미를 뗐다.
그때 때마침 까드득 까드득 소리 났다.
“저 소리네.”
끼무라가 천정과 병완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그러나 병완은 아주 태연자약한 표정을 지었다.
“아마 쥐가 노는 것 같구먼.”
“해결방법이 없을까?”
끼무라는 병완의 얼굴을 읽으면서 속심을 빼보려고 했다.
병완은 의연히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고양이를 기르오. 쥐를 쫓게.”
끼무라는 “쥐? 허허허.” 하고 냉소하더니 손사래를 쳤다.
“잘 가게나.”
병완은 그 말에 속이 섬찍해났다. 마치 자기 속마음을 다 안듯이 작별인사를 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개자식! 네 놈을 무서워하는 것 같아? 경찰국이 쾅 무너져라! 깔려 썩어져라! 그 날이 멀지 않다!)
병완이 경찰국 사무청사를 나서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던 가메다는 끼무라 옆에 다가갔다.
“저 놈 후환을 없애버립시다.”
류강철은 그 말에 섬찍해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끼무라 국장은 머리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놈, 그물을 널리 쳐서 큰 고기를 낚아야 해. 큰 고기는 바로 성칠과 항일독립군이야. 알만해?”
“하이!”
가메다는 속으로는 내키지 않았지만 일단 차렷 자세로 군례만은 보기 좋게 척 붙였다.
이튿날부터 병완은 창준 등을 데리고 운주동 뒷산에 올라 너럭바위돌밭에 가서 메밀을 거둬들였다. 5헥타르나 되는 너럭바위돌밭에 재와 오줌을 섞어 돌 틈에 걷어 넣고 메밀을 심고 온 한해 정성 다해 가꿨지만 가을걷이를 하고나니 셋이 먹을 메밀도 거두지 못했다. 그리하여 병완은 메밀을 껍데기채로 가루를 내 먹기로 했다.
“요걸로 열대엿 식구가 명년 보릿고개도 넘기지 못하겠구나.”
병완은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었다.
설상가상으로 빚 군들이 문이 떨어지게 찾아들었다.
“이 집에서는 언제 빚을 갚소?”
“사람이 염치 있소? 조상들의 산소를 가꿀 돈을 꾸고서도 갚을 염을 하지 않다니?”
빚군들은 빈손으로 돌아가면서 별 소리를 다 했다.
병완은 착잡한 생각에 잠겼다.
“간도로 가야 할 것 같구나. 이렇게 숱한 식구가 그저 앉아 굶어 죽기를 기다릴 수야 없지 않겠는가?”
병완이 잠자리에 누우면서 중얼거리었다.
그러자 성희는 앵돌아지었다.
“난 안 가. 고향 떠나 당신한테 시집와서 명천 산골까지 왔잖아. 그런데 조선을 떠나 만주국으로 가? 안 가. 갈려면 당신 혼자 가. 난 성군 오빠랑 명호조카랑 있는 고향 한산에 돌아갈 거야.”
병완은 돌아누워 성희를 마주 보며 말했다.
“누가 고향을 떠나기 좋아 떠나려오? 일본 놈들의 성화에 먹을 게 없어 잠시 간도에 피해 가서 살자는 게지. 일본 놈들이 한평생 조선에 있겠소? 저 놈들이 물러가면 다시 고향에 돌아오자는 거요.”
그래도 성희는 잠자리에서 일어나 창문 밖을 멍하니 내다보면서 도리머리 질을 했다.
“그래도 안 가! 조선을 떠나면 언제 돌아온다고 그래요? 영감도. 죽어도 여기 조선에서 살제이.”
병완은 더 할 말이 없었다.
이튿날 병완이가 바깥으로 나가니 거위 털 같은 흰 눈이 풀풀 흩날려 내렸다.
그런데 성남집 기준이네 집 쪽으로부터 석철 영감이 이쪽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저 영감이 간도로 갔다던 게 언제 왔는가? 또 빚 재촉을 하러 오는가?)
석철 영감은 병완의 작은집 육촌동생이었다. 병완의 할아버지 김수중은 석철 영감의 할아버지 김득중의 큰 형님이었다. 팔촌이 한 구들이라고 아주 가까운 집안이었다.
“형님, 오랜만이오.”
석철이 허리를 굽히며 인사하자 병완도 반갑게 맞았다.
“오, 그래. 어서 집으로 들어가자.”
창준이도 소리를 듣고 나와 반갑게 인사했다.
“칠촌 숙 그새 무사했소?”
“양.”
위방에 올라가 자리를 정하고 앉자 석철은 정주간을 내려다보더니 미닫이문을 닫고 병완에게 다가앉으면서 귀속 말을 했다.
“형님, 간도에 간 기준에게서 기별이 왔소.”
“양? 그래 그 놈들이 어데 있다오.”
병완은 저도 몰래 목소리를 높였다.
석철은 입에 식지를 대며 “쉬-” 하더니 뒷말을 이었다.
“빨리 형님네를 보고 간도로 들어오라고 합데. 진수해라는 곳과 한 20리 떨어진 소서구란 곳이오.”
병완은 석철에게 다가앉으면서 물었다.
“그래 확실히 땅이 넓어 배불리 먹고 살만 하다오?”
석철은 허리를 뒤로 쭉 폈다.
“양. 기준이 날 농사를 했는데 중국 주인에게 소작료를 주고도 상길과 둘이 먹고 서너 마대 좁쌀이 남을게라오.”
“그래?”
창준은 “기준과 상길이가 무사하니 시름 놨소.” 하고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정지에서 성희도 그 말을 듣다가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왔다.
“생원이 그게 정말인 거요? 그 애들이 잘 있데이?”
“양. 움막을 짓고 아주 잘 있소. 우리 동생도 아래 동네서 잘 있습데. 우리도 올 겨울에 간도로 들어갈 예산이오.”
병완은 머리를 끄덕였다. 그러나 성희는 간도로 간다는 말에만은 상을 찡그리었다.
“배고픈 고생은 할 수 있어도 고향을 떠나 낯선 만주에 가서 어떻게 살아?”
병완은 푸념 질을 하는 성희를 돌아보았다.
“누가 고향을 떠나고 싶어 떠나겠소? 일본 놈들과 한길수 성화에 고향에서 배기지 못해 가는 거지.”
석철 영감도 맞장구를 쳤다.
“누가 고향을 떠나고 싶겠소? 우리 간도에 가서 농사를 잘 지어 가지고 언젠가 조국에서 일본 놈들이 그림자도 보이지 않을 때 고향으로 다시 돌아오기요.”
창준은 머리를 숙이고 듣다가 “그게 어디 쉽겠소?” 하고 말했다.
“그래 고향에서 굶어 죽겠느냐?”
병완의 말에 석철 영감이 뭔가 떠올랐는지 숟가락질을 멈췄다.
“아차 잊을번 했소. 기준이 회령 맞은 켠까지 마중 나오겠답데. 두만강 변 버드나무숲속에 모닥불을 피워놓은 걸 보면 건너오라고 합데. 혹시 만주국 경찰에게 잡힐까봐 모닥불에서 강물을 따라 아래쪽으로 한 1리 떨어진 곳으로 두만강을 건너오라고 했소.”
“알았소. 막내 놈이 아주 세밀하게 타산했구나.”
병완은 석철에게 아침을 대접시켜 보낸 후 집식구들을 불렀다.
상훈이 아래 성남집에 가서 삼촌댁 최사련과 큰 동생 상우를 불러왔다.
사련은 남편과 시조카가 무사하다니 근심 어렸던 얼굴이 조금 풀렸다.
상우는 아버지가 간도에서 무사히 농사를 짓고 있다는 말을 듣고 “할아버지, 우리도 간도로 가깁소. 뭘 보고 여기 있겠습둥?” 하고 말했다.
창준도 머리를 끄덕였다.
“동생과 둘째아들을 간도에 두고 여기 편안히 눌러 앉아있을 수 없습구마. 석철이 말하지 않았습둥? 우리 들어가면 기준이 두만강 변 회령까지 마중 나오겠다지 않았습니까?”
병완은 집시구들을 둘러보면서 말했다.
“이렇게 하자. 나와 창준이 먼저 간도에 들어가 볼 테니 다른 식구들은 기다리고 있다가 따라 들어오라.”
그러자 성희는 왕왕 대성통곡 쳤다.
“아이고, 그예 정말 가? 아이고, 본가집 오라버님과 조카들과 생이별하라고. 조상들의 산소랑 우짤락꼬?”
그 넉두리에 병완도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었다.
“조상들과 아버지 산소가 대사긴 대사요. 다 모시고 간도로 들어가는 수도 없고. 그러나 우린 잠시 일본 놈들을 피해 간도로 가는 게지. 이제 농사를 지어 돈이랑 많이 벌면 조상들의 산소가 계시는 고향에 돌아와야 하오. 우리 탯줄을 묻은 고향을 꼭 돌아와야 한단 말이오.”
성희는 계속 울면서 말렸다.
“사람의 일을 어떻게 알아요? 이제 간도로 들어가면 명천에 돌아올 수 있겠는지 말겠는지? 간도 귀신이 되겠는지 누가 알아요? 가지 말자요. 예?”
“작작 떠드오. 길을 떠나는 사람을 놓구 무슨 방정맞은 소리요?”
병완이가 목에 지렁이 같은 피 줄을 세우면서 고래고래 고함쳤다.
“누구한테도 우리가 간도로 들어간 말은 하지 마오.”
병완과 창준이가 먼저 간도로 떠나가고 기별을 보내면 나머지 온 집 식구들이 간도로 들어오기로 했다.
바깥에서는 눈보라가 휘몰아쳐 창호지를 뒤흔들면서 무서운 비명 소리를 냈다. 간도로 들어갈 막연한 앞길에 도사리고 있는 무시무시한 공포가 사처로 몰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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