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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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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19)
2015년 10월 02일 17시 31분  조회:1891  추천:2  작성자: 김장혁



                            10. 야습

    이튿날 이른 아침, 차디찬 아침 햇살이 수림 속의 은세계를 은바늘로 송곳질하며 산마루로 기어 올라가고 있었다.
    성칠은 눈구덩이에서 제일 먼저 나와 용천에게 말한 후 동욱을 데리고 영월동 뒷산에 살금살금 접근해 갔다. 그는 정찰의 편리를 위해 소나무에 바라 올라가 나무 가지에 걸터앉아 도고하게 높은 토성 안 한길수네 집과 가시철조망 속의 저목장 그리고 자기 집 자리를 면밀히 주시했다.
     한참 후 토성 안에서 적토마를 탄 끼무라 대부대가 우르르 쏟아져 나오더니 우시장 쪽으로 떠나가는 것이었다. 그런데 저목장과 림산파출소의 놈들은 개미새끼 하나 얼씬거리지 않았다.
    성칠은 저쪽 소나무가지의 동욱을 보면서 중얼거렸다.
    “뒈질 놈 새끼들, 바라가는구나. 그런데 저 놈들이 은희를 저목장 사무실에 가뒀을까? 내 집 자리에 가뒀을까?”
    동욱은 성칠을 건너다보면서 중얼거렸다.
    “글쎄 말이오. 어디다 가뒀겠는지 제대로 알아야 구하지.” 
   동욱은 성칠네 집 쪽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성칠의 집 통나무 굴뚝에서 허연 연기가 꾸역꾸역 솟구쳐 오르고 집 앞의 눈 덮인 물방아가 말없이 우뚝 멈춰서 있었다. 물방아 옆에서 자위대 보초 놈들이 서성거리며 도적눈길을 여기저기 팔고 있었다.
   한참 후 우두머리 놈이 몇몇 졸개들을 데리고 나왔다. 그 놈들은 전날 밤 누렁이들이 모여들어 주먹밥을 빼앗아 먹던 자리에 가보고 뭐라고 쑤군거리더니 집 안으로 되들어가는 것이었다.
    이때였다.
    성칠은 저목장을 가리키며 나직이 말했다.
    “저걸 봐라! 저게 은희 아니야?”
    동욱이 바라보니 헌병 두 놈이 피로 얼룩진 허연 치마저고리를 입은 은희를 끌고 나왔다. 은희가 집 뒤에 물앉자 헌병들은 뭐라고 떽떽거리며 은희를 가리면서 질탕하게 웃어댔다.
    아마 은희를 소변보게 하고 구경하며 지껄이는 것 같았다.
    “개 놈 새끼들, 은희를 저목장에 가뒀구나!”
    갑자기 두 헌병이 치마를 춰 입는 은희한테 덮쳐들었다. 승냥이들이 양에게 덮쳐드는 격이랄가. 그 놈들은 은희 양팔을 발로 짓밟고 가슴이랑 엉덩이랑 마구 만지였다. 한 놈은 치마를 걷어올리고 짐승처럼 달려 들었다. 은희가 아무리 단말마적으로 발로 차고 바둑거려도 어찌 야수 같은 두 놈을 당할 수 있겠는가.
   "저놈 새끼들!"
   성칠이 나무 가지에서 뛰어내렸다.
   "가만!"
   동욱이 나무가지에서 뛰어내렸다. 그는 덮쳐나가는 성칠을 뒤쫓아가 팔을 붙잡아 당겼다.
   "안돼! 우리 둘이 어떻게 무리 승냥이들을 당해?"
성칠은 몸부림치며 고함쳤다.
   "저 놈들을 어찌 가만 놔둘 수 있어. 놔라!"
   "안된다니까. 날이 어두운 담에 복수하자."
   그제야 성칠은 주춤 멈춰 섰다.  
    이윽고 놈들은 은희를 질질 끌고 철조망을 두른 저목장 사무실에 들어갔다. 
   성칠은 그 처참한 장면을 뻔히 보면서도 구하지 못하는 것이 못내 안타까웠다. 그는 주먹으로 소나무를 꽝꽝 쳤다. 허연 눈이 우수수 땅바닥에 흩날려 떨어졌다.
    성칠은 동욱과 함께 소나무에서 내려와 허리를 굽히고 무릎까지 푹푹 빠지는 눈을 헤집으면서 용천 등이 숨은 눈구덩이 쪽으로 돌아갔다.
   성칠은 용천의 눈구덩이에 다가가 옆에 눕더니 금방 본 정황을 죽 말했다.
    용천은 성칠의 말을 유심히 귀담아 들은 후 입을 열었다.
    “은희가 저목장 사무실에 있는 걸 보면 야마모도 놈이 거게 있는 게 분명해. 그 놈은 은희를 부하들에게 넘겨줄 놈이 아냐.”
    눈구덩이 바깥에서는 눈보라가 쓸쓸히 윙윙 휘몰아치고 눈가루가 나무 가지에서 흩날려 구덩이를 삼킬 것만 같았다.
   성칠은 용천의 철색얼굴을 보며 물었다.
    “끼무라 대부대는 이미 우시장 쪽으로 가버렸네. 은희를 어떻게 하면 구해낼까?”
   용천은 한숨을 후 내쉬었다. 입김이 서리서리 눈보라 속에 흩어지며 사라졌다.
   한참 생각하던 용천은 자못 어두운 그림자가 비낀 철색얼굴에 준엄한 표정을 지으면서 근심스레 말했다.
    “은희도 은희지만 자네 아버지 근심되네.”
   성칠은 벌떡 일어나 앉았다.
   “우리 대여섯이 어떻게 구하겠소? 괜히 사상자만 낼 게 아니오?”
   용천도 일어나 앉았다.
   “우린 수수방관할 수 없어. 그쪽으로 가봅세.”
   “괜히 구하지도 못하면서 다치겠소.”
   용천은 고집쓰면서 동욱과 바우돌 등을 데리고 운주동 뒷산으로 떠나갔다. 성칠은 용천의 명령대로 병수와 함께 남아서 이곳 저목장과 자기 집 자리에 남은 놈들을 감시하기로 했다.
   용천 일행 셋은 그날 운주동 뒤 산에 숨어서 병완 등이 자위대 놈들에게 잡혀 우시장 쪽으로 끌려가는 것을 뻔히 보면서도 용빼는 수가 없었다. 셋이서 몇 십 명 놈들을 자칫 잘못 건드렸다간 몇 명 안 되는 병사들을 상할까봐 소홀히 움직이지 못했던 것이다.
    해질 녘에 성칠은 용천한테서 아버지와 어머니가 우시장 쪽으로 잡혀갔다는 말을 듣게 됐다.
    성칠은 머리를 푹 숙이더니 한숨을 후 내쉬었다.
    “다 내 잘못이네.”
   용천이 맥없이 말했다.
    “어제 저녁에 덕팔을 구출한 후에 운주동에 가서 자네 아버지께 달아나라고 알려야 했네.”
   성칠은 도리머리 질 했다.
   “아니야. 아버지는 놈들을 묘한 수로 따돌리고 아무 일도 없을 거네. 끼무라는 아직 아버지를 어쩌지 못할 거네.”
   이윽고 용천은 혹시 놈들이 어제 저녁에 난 눈 우의 발자국을 따라 추격해올 까봐 성칠 등을 데리고 영월동 북쪽 산으로 살금살금 전이했다.
   용천은 수림 속으로 전이하면서도 줄곧 어떻게 은희를 구출하겠는가를 궁리했다.
  용천은 뒤 산에 올라서서 성칠의 집과 저목장의 환한 광솔불을 내려다보더니 성칠 쪽에 몸을 돌렸다.
  “먼저 내 바우돌을 데리고 자네 집에 불을 지르겠네.”
   뒤이어 그는 성칠한테 물었다.
   “자네 집에 불 질러 괜찮겠나?” 
  성칠은 머리를 끄덕였다.
  “오랑캐 놈들의 소굴로 됐는데 아까울게 없지비.”
  용천은 성칠의 귀에 대고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귀속 말을 했다.
  성칠은 머리를 끄덕였다.
   용천이 이끈 독립군 병사들은 수림 속에서 숨을 죽이고 저목장과 성칠의 집 쪽을 살피면서 밤이 깊어지기를 기다렸다.
다만 눈보라가 윙윙 휘몰아치면서 소나무 끝 초리를 스치는 소리만 휴~ 휴~ 들릴 뿐이었다.
   자정이 다가오자 용천과 바우돌이 먼저 성칠의 집 쪽으로 내려갔다.
한참 후 성칠의 집에 불길이 활활 불타 올랐다.
   “불이야!”
   보초를 서던 놈들이 뛰어다니며 야단쳤다.
   땅! 땅!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수림 속에서 야무진 총소리가 울렸다. 물레방아 옆과 마루에서 서성거리던 보초병이 보기 좋게 푹푹 꺼꾸러졌다.
   집 안에서 자위대 놈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마당에서 왝왝 소리치며 야단쳤다.
   “빨리 저목장과 토성 안에 알려라.”
   우두머리 놈이 권총을 빼들고 고래고래 고함쳤다.
   한 놈이 저목장 쪽으로 뛰어가고 한 놈이 토성안쪽으로 뛰어갔다. 우두머리 놈은 불이 달리지 않은 사랑채에 뛰어 들어가 숨어버렸다. 졸개들은 질겁해 눈먼 총을 수림 쪽에 쏴댔다. 저목장 놈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와 성칠의 집 쪽으로 몰려왔다. 토성안의 놈들도 개울을 건너 총소리 난 이쪽으로 덮쳐왔다.
   이때라고 생각한 성칠은 기회를 타 저목장 안에 스며들었다. 그들은 철조망을 뛰어넘어 통나무를 은폐물로 삼아 살금살금 저목장 사무실에 박근했다.
   “다레까(누구야)!”
   성칠은 허리춤에서 비수를 뽑아 날렸다.
   보초병이 목에 비수를 맞고 푹 꼬꾸라졌다.
   그때를 틈타 그들은 저목장사무실로 덮쳐들어갔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저목장 안에는 한 놈도 없었다. 눈앞에는 피로 물든 허연 치마저고리를 입은 은희가 대들보의 올가미에 목이 매달린 채 머리를 툭 떨어뜨리고 있었다.
   “야, 은희야!”
   성칠은 은희의 두 다리를 끌어안고 머리를 대고 대성통곡 쳤다. 성칠과 동욱이 은희를 풀어 내리려고 할 때였다.
바깥으로부터 왝- 왝- 고함소리 터지고 총소리 자지러지게 울렸다.
   성칠과 동욱은 바삐 뒤 창문을 차 깨고 바깥으로 뛰어나갔다.
   놈들이 사무실로 쳐들어갔을 때는 성칠과 동욱은 통나무 무지 사이에 뛰어 들어 갔다.
   푱 푱!
   일본 삼림경찰 놈들이 사격하면서 포위권을 좁혀왔다.
   이때 철조망 바깥에서 야무진 총소리가 자지러지게 울렸다. 몇몇 삼림경찰 놈들이 보기 좋게 쓰러졌다.
   원래 용천 등은 작전계획대로 성칠의 집 뒤쪽으로 접근해가 불을 질러놓고 보초병 두 놈을 쏴 눕힌 후 저목장 북쪽 눈 속에 달려가 매복해 있다가 성칠 등을 엄호하여 놈들을 쏴 눕혔던 것이다.
   놈들이 깜짝 놀라 멈칫 하는 틈을 타 성칠과 동욱은 통나무무지에서 몸을 날려 철조망을 뛰어넘어 수림 속으로 도망쳤다.
뒤에서는 일본 경찰 놈들이 고래고래 고함치는 소리와 총소리가 어지럽게 울렸다. 용천 등은 성칠과 동욱을 접응하여 어둠을 타 수림 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11. 밀모

    밤중에 영월동 삼림경찰주재파출소와 저목장이 습격당했다고 하자 깜짝 놀란 끼무라 국장과 경찰들은 질겁해 벌벌 떨었다. 야마모도 소장은 저목장에서 토성 안 한길수의 폐허 같은 집에 옮겨 숨어있었기에 다행이 죽지 않았던 것이다.
    끼무라는 병완이 눈치 채지 못하게 태연자약한 척 했다.
   그는 병완을 경찰국 사무실에 불렀다. 한길수는 끼무라가 번마다 병완을 불러 일을 의논하고 큰 일을 맡기는 것이 눈에 거슬렸다.
허연 구레나룻이 더부룩한 병완을 보면서 끼무라는 속으로 무척 속이 타는 모양이구나고 생각했다.
    “너무 속 태우지 말게나. 우리 큰길닦이는 몇 십 년 해야 될 큰일이네. 이 일은 우리 대일본제국 조선에서의 근본 이익과 조선백성들의 생활과 밀접한 관계가 있네. 그러니 큰 길만 잘 닦으면 자네 온 가족 신상을 내가 지켜주겠네.”
    병완은 끼무라를 힐끔 쳐다보았다.
   “무슨 일이 있는지 뚝 찍어 말하오.”
   끼무라는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우리 길닦이에도 자네 같은 목수가 필요하네. 말하자면 골짜기나 개울을 지나가는 길에는 다리를 놓아야 하네. 자네 목수들을 데리고 가서 다리를 잘 놓아달란 말이오.”
   병완은 흰 수염을 슬슬 쓸었다.
   “거야 어려울 게 없지요. 제일 좋은 통나무로 멋진 다리를 척척 놔드립지비.”
  이때 경찰국 사무 청사 기둥인지 대들보에서 또 이상한 소리가 났다.
끼무라도 의상한지 천정과 기둥 쪽을 두리번거리더니 병완에게 눈길을 돌렸다.
“병완이, 이 집에서 이상하게 저런 까드득 까드득 소리가 자주 나네. 쥐가 노는 것도 아닌 것 같은데 뭘까?”
병완은 천정을 쳐다보며 능청을 떨었다.
    “글쎄 무슨 소릴까?”
   끼무라는 교활한 눈길로 병완의 표정변화를 살피고 있었다.
  병완은 아무 일도 없는 듯이 천정에 귀를 기울이는 척 했다.
  “무슨 소릴까? 혹시 천정에 쥐가 노는가? 경찰들을 보고 올라가 보라고 하오.”
  끼무라는 머리를 끄덕였다.
  끼무라는 제자리에 가서 앉더니 뒷말을 이었다.
  “병완 총도감, 한 가지 부탁이 있네.”
  류강철의 통역을 들은 병완은 끼무라를 똑바로 마주보았다.
   끼무라는 독기 번쩍이는 눈길로 병완을 보며 독사의 혀와 같은 혀를 날름거리였다.
   “성칠은 우리 헌병들을 살해했네. 아직 늦지 않았네. 자네가 성칠을 설복해서 우리 대일본제국에 귀순한다면 이전의 죄를 묻지 않겠네. 총도감의 낯을 봐서 말이네.”
   끼무라는 교활한 눈빛이 얼른거리는 눈길로 병완의 얼굴을 살피었다.
   무뚝뚝하게 덤덤히 앉아있는 병완의 얼굴에서는 아무런 변화도 읽을 수 없었다.
   “이전에도 말했지만 난 자네 부자를 아주 흠상하오. 그 천하장사다운 근력에 숱한 마을 사람들의 믿음을 받는 높은 위망에 솔직한 성격에 바위 돌처럼 움직이지 않는 심성 말이오. 자네가 사양하니 그런데 난 자네에게 자위대 부대장을 맡길 수도 있네. 저 한길수 대신 자위대 대장도 맡길 수 있네.”
   한길수는 언짢은 눈길로 끼무라를 힐끔 쳐다보다가 머리를 푹 수그렸다.
   (강철의 말이 맞구나. 저 두상이 눈을 상했다고 나를 폐물짝이라고 한다더니. 흥!  정말 헌신짝 버리듯 하려는구나. 내 대신 병완 녀석을 대장까지 시키련다. 쳇, 정신 나갔지. 병완 부자가 자기를 잡자고 시퍼런 칼을 썩썩 가는 것도 모르고.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놈, 흥! 낮은 돌을 밟다가 이제 큰 코 다치지 않는가 봐라!)
   이때 끼무라가 무거운 침묵을 깨뜨리면서 병완에게 물었다.
   “어떤가? 성칠을 산에 가서 데려오게나. 그가 포수대를 데리고 돌아오면 성칠에게도 중대장쯤 맡기겠네. 사격술도 대단하지 않은가! 포수대는 우리 자위대에 몽땅 받아들이고. 그까짓 독립군을 쫓아다녀봤자 날마다 산과 들판에서 우리 대일본제국의 경찰들과 헌병들에게 쫓기는 개 신세지. 우리 대일본제국 자위대에서 벼슬을 한다면 근심할게 뭔가? 복이란 복을 다 누릴게 아닌가?”
   병완은 끼무라를 정색해 마주 보았다.
   “전번에도 말했지만 난 총칼을 휘두를 사람이 아니오. 난 목수이기에 집을 짓거나 다리를 놓을 수 있을 뿐이오.”
   끼무라는 땅이 꺼지게 한숨을 길게 토해냈다.
   “참 답답하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 줄도 모르고 부처님 상을 하니까.”
   끼무라는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와 병완의 손까지 잡았다.
   “강요하진 않겠네. 세상이 돌아가는 걸 아는 사람이라면 우리 일본제국을 등에 업는 게 얼마나 명지한 선택이란 걸 알거네. 이면에선 한길수 대장이 선생이야. 허허허.”
   끼무라는 한길수를 힐끔 엿보았다. 한길수는 그제야 조금 미소를 짓는 듯이 보였다.
  “가서 길을 잘 닦아주게나. 단 한 가지. 다리에서는 까드득 까드득 하는 소리 나지 않게 잘 놓게나.”
   병완은 엉덩이를 툭 털고 일어났다.
   “한 가지 요구 있소.”
  끼무라는 대뜸 반색하면서 콧수염을 쓰다듬으며 다가섰다.
  “뭘 말인가?”
  병완은 끼무라의 가재수염을 마주보았다.
  “농사철에 나도 집에 돌아가 농사도 돌보게 해줍소.”
  끼무라는 선선히 대답했다.
   “오. 거야 되고 말고. 당신에겐 특수대우를 해주지. 내 부탁만 잊지 말구 곰곰이 생각해보게나.”
   병완이 경찰국을 나서자 끼무라는 볼이 부어 머리를 숙이고 서있는 한길수에게 다가갔다.
   “골났는가?”
  그는 한길수의 어깨를 툭툭 다독여주었다.
  “자존심 좀 상했을 거야. 허나 난 자네 자존심을 좀 팔아서 병완의 마음을 움직여놓자고 했을 뿐이네. 내 마음속에는 한길수 대장 밖에 없네. 성칠이 놈을 산에서 내려오게 유인해 체포하기 위해서라면 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거네. 알만한가? 하나 알고 둘은 모르는 놈들. 허허허.”
   한길수는 얼리고 닥치는 끼무라에게 놀아나는 자기가 너무나도 가련해보였다.
   (병완 놈을 내 손으로 없애버려야 해.)
   한편 집으로 돌아간 병완은 길닦이를 하러 떠나갔다.
  그는 목수들을 모집하려고 이 마을 저 마을 돌다가 운주동 맏아들네 집에 들렸다.
   창준과 기준이네는 한 백 미터 사이 두고 아래 윗집에 살고 있었다. 기준은 아버지가 서쪽에 있는 웃새집에 왔다는 말을 듣자 형네 웃새집으로 달려가다 시피 바지에 바람소리 나게 주먹을 쥐고 뛰어갔다.
   “아버지, 무사합둥?”
  기준이가 헐떡거리면서 위방에 들어섰다.
  “오, 그래. 너 그래도 전번에 그 울뚝밸을 어떻게 참았니?”
  병완의 말에 기준은 뒷덜미를 긁적거리면서 아래 자리에 앉았다.
  “밸 같았으면 도끼로 한길수 졸개들 대갈통을 팍팍 패놓고 싶습디다. 참는 게 속에서 밸이 목구멍까지 욱, 욱 치밉더구마.”
  병완은 정색해 말했다.
   “잘 참았다.”
   “그깟 놈들 도끼로 대갈통을 콱콱 찍어놓고 만주로 가면 다입니다.”
   “쯧쯧쯧, 또, 또 그 말이다.”
  병완은 기준에게 눈을 흘기었다.
  “여기 명천은 우리 집안이 려생 할아버지 대부터 대대손손 14대나 살아온 고향이야. 얘들아, 400여년이나 살아온 고향에서 될 수 있으면 꾹 참고 살아야 한다. 고향을 어떻게 그렇게 쉽게 버리고 가느냐?”
   창준은 생각 밖으로 이렇게 말했다.
   “일본 놈들의 등살에 밭도 없는데 어떻게 삽니까? 전날 밤에는 영월동의 우리 집마저 다 불타 버렸습니다.”
   "무슨 소리냐?”
  “우리 우시장 경찰국에 붙잡혀간 날 밤이랍니다.”
  병완은 곰방대에 담배를 쑤셔 넣으면서 머리를 끄덕였다.
  “일본 경찰 놈들에게 빼앗긴 바엔 불난들 뭐라느냐?”
  기준은 답답해 가슴을 꽝꽝 쳤다.
  “그러나 저러나 새해에는 어떻게 삽니까? 밭에다 나무만 심으라지. 또 농사는 제쳐 놓고 길닦이를 나가라고 못살게 굴겠지.”
  병완은 성냥을 득 그어 곰방대에 대더니 뻑뻑 빨았다.
  “바로 거 때문에 왔다.”
   창준과 기준이가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병완은 담배를 길게 빨아 연기를 내뿜었다.
   “내 생각엔 문중 전을 꿔서 너럭바위 널린 황무지 한 마흔 짐이나 붙여보면 좋을 거 같다.”
    그러나 창준은 답답해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버지, 지난해 묵밭을 붙여보지 못했습니까? 올해에는 어떻게 보릿고개를 넘겠습니까?”
   병완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한참 후 기준이가 물었다.
   “글쎄 그럼 먼저 집안의 문중전을 꿔서 농사를 지어 보기요. 뭐.”
  창준도 머리를 끄덕였다.
  “옳다. 될 수 있는 한 고향에서 사는 게 옳다. 일본 놈들이라고 우리 고향에서, 우리 나라에서 영영 살겠느냐? 정 안되면 그때 만주로 가든지.”
   삼부자는 집안에서 조상들의 산소를 가꾸고 족보를 찍는데 쓰는 문중전(门中钱)을 꿔서 너럭바위가 널린 황무지를 일본 놈들에게서 사서 농사를 짓기로 했다.
   “성칠은 소식이 없느냐?”
   병완이 물었다.
  “소식이 없습구마.”
  기준은 며칠 전에 생긴 저목장습격과 영월동 큰집에 불이 달린 일을 들은 소문대로 죽 이야기했다.
   “아무리 생각해 봐두 별로 형님하구 독립군이 한 거 같습니다.”
  병완은 머리를 끄덕이더니 그간 끼무라가 자기를 얼리려고 하던 짓을 죽 이야기해주었다.
  “기준아, 넌 할 일이 있다.”
  병완은 허리를 굽히고 목소리를 낮추더니 두 아들에게 귀속 말을 했다.
   “일본 놈들의 큰길 다리에도 나무벌레를 잡아넣고 다 무너지게 만들어야겠다.”
   기준이 머리를 가로 저었다.
  “나무벌레를 믿어서야 언제 무너지겠습둥? 경찰국을 보십시요. 멀쩡하게 지금도 서있지 않습니까? 아예 다리를 놔주지 않는 게 낫지.”
   병완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모르는 소릴. 경찰국 사무 청사 기둥과 대들보에서 까드득 까드득 소리 나더라. 조만간에 무너질 거야.”
   그는 바깥을 내다보더니 뒤 말을 조용히 했다.
    “지금 다리를 놔주는 척 하지 않고서야 고향에서 살게 하겠니? 겉으론 놔 주는 척 하고 무너지게 하는 게 상책이다. 좌우간 올해 한해 농사를 지으면서 보자.”
    삼부자는 오래 동안 의논하고 나서 저녁상을 받았다.
    어둠의 장막이 공포를 실은 채 내리 드린 바깥에서는 눈보라가 무섭게 아우성치며 기승스레 휘몰아쳤다. 눈가루가 모래알처럼 창호지를 공포에 떨게 무섭게 두드렸다.
 
 
 
 
 
 
 
    제9 핍박에 의해 간도로

               
      1.
농사꾼의 희망




     고향의 들에 기약 없이 찾아온 봄에 농사꾼들은 배불리 먹고 살려는 일루의 희망을 품고 농사 차비에 분주했다.
     병완은 목수들과 인부들을 데리고 우시장 부근의 큰길닦이에 나섰다. 길닦이 일터에는 일본 헌병과 자위대 놈들이 욱실거렸고 시공을 감시하는 십장들이 득실거렸다.
     그때 한길수가 말을 타고 자위대를 한 무리나 끌고 와서 병완이 다리를 놓는 곳에 와서 살피더니 어디론가 휑하니 가벼렸다.
     한편 기준은 문중전(门中钱: 가문에서 조상들의 산소관리와 족보 편찬등 모아둔 돈)을 변돈으로 맡아 내오려고 했다.
     “문중전을 꿨다가 제때에 갚지 못하면 이자 위 이자에 깔리어 어떻게 삽둥?"
    상우가 하는 말에 기준도 답답했지만 별수 없었다.
   “그래 앉아 굶어 죽길 기다리겠느냐? 황무지라도 일궈 살아야지.”
   기준은 원래 벽이라고 차고 나가는 성격인지라 자손들이 뭐라고 해도 통 곧이듣지 않았다. 그는 집안 어른인 큰집 병권 큰아버지와  작은 집 병은 삼촌이 관리하는 문중전을 300원이나 맡아 내왔다.
   병권은 조카에게 문중전을 뀌어주면서 기막혀 새하얀 염소수염을 쓰다듬으면서 물었다.
  “무슨 돈을 이렇게 많이 꾸느냐? 80원이면 소 한 마리를 사는데 300원이 적은 돈이냐?” 
   기준은 대수로워 하지도 않았다.
    “밭은 없지 어쩝둥? 숱한 식구들이 굶어죽겠습둥? 이걸로 황무지를 세 맡아 개간해 감자하구 강냉이를 심어야겠습구마.”
   기준은 혹시나 하여 300원을 다 쓰지 않으려고 마음먹었다. 그는 야마모도 소장에게 250원을 주고 너럭바위가 널린 황무지 쉰 짐이나 세를 맡아 내왔다.
    창준과 기준은 상훈과 상우를 데리고 괭이랑 삽이랑 둘러메고 아낙네들은 낫을 들고 너럭바위가 널린 운주동 뒷산에 올라갔다.
   그들은 산에 오르자 쉴 새도 없이 황무지를 일구느라고 바삐 맴돌기 시작했다.
   “이 넓은 황무지에 부지런히 농사를 잘 지으면 설마 산 사람 입에 거미줄이야 치겠느냐?”
    푸르른 하늘에서는 종달새가 지종지종 봄소식을 알리면서 노래하며 날고 있었다.
    마른 쑥대가 한 키도 넘게 뻣뻣이 고개를 쳐들고 소잔등 같은 너럭바위가 쭉쭉 누워 있는 황무지를 마주보자 모두들 한숨부터 나갔다. 그들은 그래도 일루의 희망을 품고 부지런히 쑥대를 낫으로 베 날라 내가고 갓 녹은 너럭바위 사이 땅을 괭이로 파고 삽으로 골고루 펴놓기도 했다.
   이때 갑자기 너럭바위 사이에서 버스럭버스럭 마른 풀을 헤치는 소리가 났다. 기준은 혹시 산속의 야수가 덮쳐올 까봐 괭이를 든 채 허리를 굽히면서 버스럭거리는 풀숲 속을 살폈다.
   “아니, 웬 놈이야!”
   기준의 소리에 모두들 산기슭 쑥대숲속에 머리를 돌렸다.
   글쎄 한길수가 권총을 빼들고 숱한 쑥대를 헤치면서 자위대 놈들을 끌고  어슬렁어슬렁 다가오고 있지 않겠는가.
   “몽땅 체포해라!”
"예꾸마!"
   한 무리 자위대 놈들이 이리떼처럼 고함치며 덮쳐왔다.
   그 놈들은 창준과 기준, 상훈과 상우를 붙잡아 팔을 뒤로 비틀어 결박하려고 미쳐 날뛰었다.
   기준은 성난 사자처럼 펄쩍 뛰었다.
   “아니, 놔라!"
   그의 눈에서는 시뻘건 불길이 무섭게 이글거렸다.
   "왜 이래? 우린 돈을 꿔서 야마모도 소장에게서 이 황무지를 세 맡았단 말이오.”
  한길수는 우멍눈으로 기준을 쏘아보더니 말 이발을 드러내면서 냉소했다.
   “이건 대일본제국 자위대장인 내 땅이란 말이야. 도둑놈 같은 것들. 언감 내 발등을 딛여?”
   기준과 창준은 억이 막혀 이를 사려 물고 온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기준은 씩씩 거리면서 괭이를 쳐들어 치려 하였다. 하지만 창준이가 눈짓 하는 바람에 그만두었다.
   그러나 자위대 놈들이 결박하려고 들자 생각을 고쳐먹었다.
   “왜 이래? 야마모도 소장과 묻기나 하고 이래?!”
   기준이 한길수를 쏘아보며 물었다.
   한길수는 권총을 뽑아 기준의 가슴에 겨누면서 너털웃음을 웃었다.
   “저승에 가서 물어 봐! 성칠이란 놈은 내 토성안집에 두 번이나 불을 질렀고 이젠 독립군을 무어 날 죽이려고 미쳐 날뛰고 있어. 죽고 살고 하는 판에 무슨 놈의 시비 할 게 있냐? 네 놈들 온 집안을 몽땅 도륙내도 시원찮겠어!”
   그제야 기준은 한길수의 독에 찬 속심을 대개 알았다.
   사실 한길수는 병완을 먼저 죽이려고 하였지만 길닦이 공지에 일본 헌병들의 눈이 무서워 손을 쓰지 못하고 기준한테 먼저 분풀이를 하려고 들었던 것이다.
   눈을 내리뜨고 궁리하던 기준은 자기를 결박하는 자위대를 보고 사정했다.
   “죽기 전에 오줌은 누구 죽게 해주오.”
    악독하기 그지없는 한길수도 자비를 베푸는 척 했다.
   “그래, 오줌을 눈 후에 묶어도 늦지 않다. 풀어 줘라.”
   오라가 풀리기 바쁘게 기준은 괭이를 들어 한길수의 번대머리를 내리 콱 찍었다. 그러나 한길수는 그럴 줄 알았다는듯이 날아드는 괭이를 슬쩍 피했다. 그 바람에 한길수는 다행히 괭이에 대갈통은 안 찍히고 잔등을 빗찍혔다.
    “아이쿠!”
   한길수가 비명을 지르는 사이에 기준은 허리를 굽히며 냅다 뛰어나가 너럭바위 뒤로 몸을 피했다.
   푱! 푱!
   탄알이 너럭바위에 맞혀 불똥을 튕기며 죽음의 노래를 불렀다.
   한길수는 왼손으로 빗 찍힌 잔등을 만지며 고래고래 고함쳤다.
   “붙잡아라!”
   땅! 땅!
  자위대 놈들도 너럭바위와 쑥대밭에 총을 쏘며 추격했다.
   기준은 괭이를 버리고 너럭바위 사이로 이리저리 피하며 다리야 날 살리라고 도망쳤다.
  그때 누렁이가 기준을 뒤쫓아 쏜살같이 달려들었다. 그 놈 누렁이는 기준이 피할 새 없이 종아리를 물고 늘어졌다. 다행히 바지가 넓어서 종아리를 빗물고 바지를 꽉 물고 놓지 않았다.
   “이 놈 개새끼!”
  기준은 아픔을 참으면서 가래짝 같은 왼손으로 사냥개 누렁이의 목을 틀어쥐고 소 발쪽 같은 오른 주먹을 휘둘러 누렁이 대가리를 호되게 내리쳤다.
   사냥개 누렁이는 깨갱거리더니 물었던 바지를 놓고 냅다 뛰었다. 그런데 그놈 누렁이는 계속 기준의 뒤를 쫓아오면서 왕왕 짖어댔다.
   기준은 주먹만 한 돌멩이를 쥐어 사냥개 누렁이에게 힘 있게 뿌렸다.
  누렁이는 주인이 보이지 않자 겁을 집어먹고 꼬리를 사리고 풀숲 속으로 달아나버렸다.
  기준은 그제야 개에게 빗 물린 종아리에서 피가 흘러 하얀 바지를 뻘겋게 적시는 것을 발견했다. 그런 걸 돌볼 새 없이 쩔룩거리며 풀숲 속에 숨어버렸다.
   사냥개 누렁이가 왕왕 짖어대는 풀숲 속으로 추격하던 한길수는 기준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자 사냥개 누렁이를 불러가지고 되돌아왔다.
   그런데 이쪽 수림에서는 창준이고 상훈이고 상우고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두 자위대원이 상우의 처 지새금과 상훈의 처 리신옥을 붙잡고 있을 뿐이었다.
   “제길할, 끌고 갓!”
  한길수는 잔등의 상처를 대충 천으로 싸맨 후 아녀자들인 지씨와 리씨를 붙잡고 우쭐해 산기슭으로 내려갔다.
  그때 야마모도 소장이 한 무리 경찰들이 나타나더니 한길수의 앞을 막았다.
   “뭐 하는 짓인가?”
  한길수는 허리 굽혀 야마모도에게 허리를 굽신하고 나서 말 이발을 드러내며 널어놓았다.
  “이 놈들이 내 황무지를 마음대로 개간한단 말입니다.”
  야마모도는 금이빨을 드러내며 냉소했다.
   “자네 황무지? 저 산비탈의 황무지, 아니, 이 우둔한 사람아,  조선 땅이 몽땅 일본 땅이 돼 버린 지도 십년 넘었어. 무슨 놈의 당신 땅?!”
  한길수는 머리를 툭 떨어뜨리었다.
   “당장 풀어놓게. 누구 안전이라고 감히! 내게서 황무지를 세 맡은 사람들을 다쳐? 끼무라 국장에게 보고하기 전에 당장 저 황무지에서 손을 떼. 우리와 병완 총도감이 어떤 관계인지 알고 지랄인가?”
   한길수는 울며 겨자 먹기로 수하들을 보고 지새금과 리신옥을 풀어놓게 했다. 그제야 잔등이 아파 왼손을 허리에 대고 만지면서 오만상을 다 찡그렸다.
   풀숲 속에 숨어 이 광경을 지켜보던 창준과 상훈, 상우도 결박당한 채 나왔다. 야마모도는 졸개들을 시켜 일일이 풀어줘 집에 보냈다.
   한길수는 일본 놈들의 개다리질을 하면서도 섭섭함을 금치 못해 번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씩씩거렸다. 금방 단방에 기준을 쏴죽이지 않은 것이 후회막급이었다.
   해가 서산으로 뉘엿뉘엿 기울어져갔다.
   그러나 기준만은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창준을 비롯한 사람들은 사처로 찾아 헤맸다. 상우와 상훈은 근심돼 메밀밥과 산나물 채를 보자기에 싸들고 기준을 찾으려고 밭을 일구던 황무지에도 가보고 기운봉 기슭에까지 찾아가보았다. 그러나 기준의 그림자는 보이지도 않았다.
   집 사람들이 찾을 때 기준은 수림 속에 피해 있었다. 그는 어둠의 장막이 내리기를 기다려 슬렁슬렁 뒷산을 성큼성큼 내려갔다.
  (길수 놈은 나를 죽이고 말 작정이구나. 그 놈은 꼭 우리 집을 감시하고 있을 거야.)
   그는 숨을 죽이고 운주하를 건너갔다. 종아리를 치는 봄물은 뼈 속까지 시리여 이발을 덜덜 마주 쪼을 지경이었다. 설상가상으로 개에게 물린 상처에 물이 들어가 아리였다.
   운주하를 건너자 그는 괴춤을 까고 종아리 상처에 오줌을 내리 쌌다. 즉시에 아릿하다가 피가 멎었다. 오줌 약은 어의를 한 김수종 증조부와 김승중 할아버지 대부터 대대로 물려받은 전통 묘약이었다. 그 덕분에 개에게 물린 후 인차 오줌을 손바닥에 눠 개에게 물린 자리에 발랐기에 개 독을 타지 않고 지혈도 됐던 것이다.
    그는 자기 집에는 가지 않고 서쪽에 이웃해 있는 웃새 집에 다가가 기회를 빌려 밥이나 가져오라고 해 얻어먹을 예산이었다.
    그는 운주하 강반에 무연하게 펼쳐진 버드나무숲속의 마른 새를 헤치면서 웃새집 구새 목 쪽으로 다가갔다. 울바자바깥을 두루 살펴보아도 수상한 그림자가 얼씬하지도 않았다.
    이때 때마침 웃새 집 둘째조카 상길이가 소변 보러 구새목 쪽으로 쫑드르 달려 나왔다.
조카 상길은 아홉 살 밖에 안 됐지만 최구장에게서 어려서부터 천자문이요, 소학이요, 론어요, 중용이요, 대학까지 배워서 영월 김씨 네 가문에서 큰집 형내 버금으로 어린 수재로 불리었다. 그는 특별히 호랑이 같이 무서운 남성 성격을 가진 기준을 좋아하고 따랐다.
    기준은 상길이 놀랄 까봐 오줌을 다 누고 괴춤을 춰 입기를 기다려 조용히 불렀다.
   “상길아~”
   원래 목소리가 실한 기준은 겨우 가는 목소리를 내 불렀다.
   “양? 삼촌입둥?”
   깜짝 놀란 상길은 가는 허리를 굽히고 두리번거렸다.
    “그래, 내야.”
   기준은 새 숲 속에서 슬쩍 나왔다.
   “삼촌!”
   그제야 상길은 어둠 속에서도 새 숲 속에 서있는 어두운 삼촌의 그림자를 알아보고 기뻐 다가왔다.
   “삼촌!”
   상길은 삼촌 기준의 품에 와락 안겼다.
   “쉿!”
  기준은 상길을 껴안고 새 숲속으로 살금살금 물러갔다.
   “한길수놈이 여길 또 찾아왔더냐?”
  상길은 기준의 품속에서 얼굴을 떼였다.
  “아니, 지금 아버지랑 사처로 삼촌을 찾아갔습니다. 아버지는 나와 엄마랑 집을 지키라고 했소.”
  “음~”
  기준은 머리를 끄덕이더니 나직이 말했다.
  “아버지랑 형님이랑 근심하지 말라고 일러라.”
  “가만, 삼촌, 아직도 저녁밥을 잡숫지 못하지 않았습둥? 아버지랑 형님이랑 삼촌의 밥을 보자기에 싸가지고 찾아갔습구마.”
   “그래, 난 점심과 저녁을 먹지 못했다.”
   상길은 발딱 일어났다.
   “내 가서 밥을 가져오겠습구마.” 
   기준은 떠나가려는 상길의 손목을 잡고 말했다.
   “바깥동정을 잘 살피면서 가져오너라. 너만 오구 엄마랑 어른들은 오지 말라고 해라. 한길수 패거리들에게 들키면 큰일 난다.”
   상길은 머리를 끄덕이더니 봄바람에 설레는 버드나무숲과 새밭을 둘러보면서 집으로 들어갔다.
   기준은 몇 발자국 물러가서 숨을 죽이고 사위를 두리번두리번 둘러보았다.
   아무런 인기척은 없었다. 애꿎은 봄바람만 와스락,  와스락 버드나무숲을 스치면서 불어왔다. 쓸쓸한 바람이 버드나무 잎새에서 흐느껴 울며 공포가 도사리고 앉아 있는 숲속으로 다가왔다.
   조용하던 웃새집 안에서 조금 떠드는 소리가 났다가 다시 잠잠해졌다.
  이윽고 고방 문이 살며시 열리면서 구새 목으로 죄꼬만 그림자가 허리를 꼬부장하고 이쪽으로 살금살금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삼촌~”
  상길이 새 풀속을 헤치면서 다가와 나직이 불렀다.
  기준은 새풀 속에서 다가갔다.
  “상길아, 여기 오라.” 
   “히히히, 삼촌, 삼촌을 보니 영 좋습구마.”
   “그래, 나도 널 보니 영 좋다. 내 밥을 먹을게. 망 좀 봐 달라.”
   “예.”
   상길은 일어나 괴춤을 춰 입더니 살금살금 새와 갈대를 헤치고 앞으로 가서 주위를 초롱초롱한 눈을 똑바로 뜨고 도리반도리반 살폈다.
   기준은 촐촐했던지라 메밀밥 한 그릇을 게눈 감추듯이 했다. 그러고 나서 목이 말라 마른 침을 꿀꺽 넘기고 혀로 입술을 감빨았다.
   그는 새밭과 갈대숲을 살피는 상길을 나직이 불렀다.
   “상길아, 오너라.”
  상길이 다가오자 기준은 상길의 귀에 대고 귀속 말을 했다.
   “가서 솜옷을 가져오너라.”
   “이불도 가져오겠습구마. 추워서 어떻게 바깥에서 쉬겠습둥?”
   “아니야. 솜옷을 가져오면 돼.”
   상길은 머리를 끄덕이고 떠나가려다가 되돌아섰다.
   “삼촌, 내일 밥도 가져오랍둥?”
   “오, 그래.”
   한참 후 상길의 어머니가 고방 문으로 솜옷을 이고 밥보자기를 들고 왔다. 상길은 물까지 떠들고 왔다.
   “아니, 아주머님, 들키면 어쩌자고?”
  “별 소릴. 그놈들이 우리 생원이 무슨 죄가 있다고 제 집에도 못 들게 하오?”
   김수월은 대수로워 하지도 않았다.
  기준은 한숨을 후 내쉬었다.
  “아주머니, 이젠 우린 한길수 놈 때문에 고향에서 살 것 같지 못하오.”
  “글쎄 말이오. 대낮에 하는 상을 보면 생원을 잡아먹을 상이데. 어데 안전한데 피신해 있소.”
  기준은 머리를 끄덕였다.
   “어떻게 날마다 피난살이를 하겠소? 간도로 피해 가는 게 상책인 거 같소. 아버지하구 형님에게 말하오.”
   김수월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기준은 자기 생각을 터놓았다.
   “오늘 온종일 산림에서 곰곰이 생각해보니까요. 일본 놈들도 임시 아버지를 이용해 길닦이를 하려고 볼모로 우시장에 잡아두고 있소. 성칠 형님이랑 체포하자는 거 같소. 성칠 형님만 잡히면 조만간에 우리 일가를 몽땅 살해할 거 같소.”
   기준은 어둠 속에서 봄바람에 설레는 새밭을 둘러보면서 나직이 말했다.
   “내일 밤에도 이때 쯤 뻐꾸기 소리를 낼게. 상길을 시켜 밥을 가져오오. 어른들이 드나들면 자취를 눈치 챌 수도 있으니까.” 
   수월은 상길과 함께 떠나면서 “알았소. 꼭 조심하오.” 하고 당부했다.
   기준은 젖은 홑옷을 새밭에 벗어버리고 솜옷을 갈아입었다.
   그는 젖은 홑옷을 쳐들고 웃새집 쪽을 바라보았다. 그는 새밭을 헤치면서 운주하 강반 버드나무숲 쪽으로 갔다. 뒤이어 뼈 속을 파고드는 아픔도 참으며 차디찬 운주하를 건너 운주동 뒷산 수림 속에 잠적해버렸다.
    공포가 뒤지개를 지더니 하품을 길게 하면서 늦잠을 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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