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 밤중에 울리는 전화벨소리
성호는 광고가 잘 되지 않아 밤중까지 침대에서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였다. 창문에 매달려 집 안을 들여보는 달빛이 쓸쓸하게 느껴졌다. 저 처량한 달빛은 조상님들과 아버지를 모신 칼산 기슭을 쓸쓸히 비추고 정희 침대머리도 어루만지리라 생각하니 코마루가 시큼해났다.
따르릉, 따르릉.
전화벨소리가 처량한 달빛 어린 집 안의 정적을 깨뜨렸다.
전화를 드니 둘째누나 춘자의 목소리가 느릿느릿 들렸다.
“성호야, 올케 집에 있니?”
“없소. 본가집에 갔소.”
“응, 집 안이 복잡한 거 안다.”
춘자는 집이 빈 틈에 엄마와 전화해서 대개 정황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얘, 엄마를 경로원에 보내라. 지금 어느 자식도 모시기 힘들다. 옛날처럼 부모를 한 집에서 모신다는게 그리 쉽느냐? 지금 가정 현실에 맞지 않는다. 자식들은 대부분 자기를 낳은 부모를 모시려고 한다. 그러나 며느리와 사위는 달라. 건 반자식도 아니야. 남이야, 남!”
성호는 여지껏 춘자의 말은 명심해 들었다. 형제 가운데서 유일한 대학졸업생이기에 뭐나 선지선각이고 생활경험 또한 누구보다 풍부하다고 할 수 있었기 때문이였다.
“우리도 어진간하면 아들 둘이나 있는 상해에서 살지 않고 살던 곳으로 돌아왔겠느냐?”
성호는 누나가 불쌍했다.
춘자는 잔밥을 데리고 숱한 빚을 지고 사는 늙은 부모가 또 빚더미에 깔릴가봐 결혼식마저도 올리지 않았다. 사람은 평생에 첫돌생일상, 결혼잔치큰상, 환갑상까지 모두 세번 큰상을 받는다고 하지 않는가. 그러나 춘자와 홍수는 부모의 부담을 덜어드리려고 결혼큰상도 받지 않았다.
춘자는 시집가서 아들 둘이나 낳아 기르면서 형제들의 모범이 되여 부모에게 효성을 다하였고 동생들을 아끼고 구석구석 보살펴주었다. 그녀는 성호에게는 항상 앞길을 비춰주는 등대, 항상 시름놓고 기댈 수 있는 부두나 다름없었다.
춘자는 애들한테 자기 겪은 비극을 재차 안겨주고 싶지 않았다. 그리하여 근사한 혼례청에서 정춘의 결혼식을 성대히 올려주었다.
정춘의 색시 류초향은 항주 미녀였다. 옛말에 중국의 미녀는 소주와 항주에서 나온다고 하지 않았는가.
강남에서 날아온 첫날색시 류초향은 성호네 부부가 사보낸 첫날한복을 입혀놓으니 조선족색시처럼 얼마나 예뻤는지 몰랐다. 걀죽한 얼굴에 예지로 빛나는 령리한 눈, 오똑한 코, 진짜 고대미녀 림대옥처럼 예쁘지 않겠는가.
하객들은 미녀색시를 데려왔다고 혀를 끌끌 찼다.
류초향은 아주 총명하고 구지욕이 강해 자습해서 법률 석사까지 나왔다.
그녀는 마음씨도 착하고 인사례절도 밝았다.
홍수는 지금도 외우고 있다.
큰며느리는 시아버지에게 새 옷을 사다 입혀주고나서 앞뒤를 돌아보면서 서툰 조선말로 귀여움을 대방출했다.
“아버지, 딱 맞아요.”
홍수는 그 귀엽던 며느리 모습이 지금도 눈 앞에 삼삼거렸다.
“둘째며느리도 남방 색시였는데 한족며느리로서는 마음이 아주 무던했다.”
“누나네 그 좋은 아들과 며느리 있는데 있을게지. 얼마나 외롭겠소?”
“아들과 며느리들이 잘하지 못한다고 돌아온 건 아니야. 이제까지 10년 동안에 스무번도 넘게 상해에 갔댔다. 그런데 여러가지로 우리한테 맞지 않더라. 남방의 기후는 어찌나 더운지 우리 동북사람들이 살긴 힘들어. 여름이면 40도도 넘는 찜통더위에 견디기 힘들어. 에어콘을 맨날 24시간 켜놓고 살아도 안돼. 남방은 공기까지 습윤해서 집안도 더운 수중기가 돌아 진짜 찜질방 같아. 너네 매형은 원래 심장도 좋지 못한데 건조실 같은 집 안에서 못견뎌. 금방 샤와를 하고 나와도 인차 땀을 뻘뻘 흘리면서 숨이 차 헐떡거린다. 5.1절부터 8월까진 우리 동북 사람들이 못 살 곳이야. 두번째는 남방음식이 입에 맞지 않더라. 우린 장국을 먹지만 거기 한족들은 기름범벅에 튀겨 먹고 짜거나 단 걸 먹기 좋아해. 난 혈당이 높은데 그런 걸 먹고 죽자고 거기 있겠니?”
성호가 춘자의 말을 들어보니 그럴 법도 했다.
남방과 동북은 모든 습관이 너무나도 달랐다. 설상가상으로 한족과 조선족은 더욱 달랐다. 게다가 자식들과는 세대차이까지 있었다.
“살던 고장에 돌아오니 얼마나 좋은지 몰라. 한평생 함께 일하던 동료들과도 자주 만나고 친구들과 함께 유람도 다닐 수 있어 좋아. 답답한 일이 있으면 속시원히 말할 사람들도 있어 얼마나 좋은지 몰라. 다만 아들과 손녀들이 보고 싶을뿐이야. 큰 손녀 청우는 우리 손으로 10년이나 키운 애 아니고 뭐냐? 둘째손녀 정분도 얼마나 귀엽다고. 걔들이 보고 싶어 내내 눈물 흘린다.”
누나 말소리는 점점 떨리는 것 같았다. 아마 아들과 며느리, 손녀들이 보고 싶어 눈물을 흘리며 흐느끼는 것 같았다.
“맏아들과 맏며느리 고급아빠트를 사놓고 한 시내에서 살자는 걸 우린 돌아왔다. 자손들이 보고 싶으면 한해에 한, 두번 가보면 되지. 우리 늙은 량주 무슨 근심이 있니?”
성호는 누나의 말을 듣고 보니 많은 생각을 하게 됐다.
사실 모든 늙은 량주들이 둘의 로임을 가지고 실컷 쓰면서 살 수 있다. 먹고 싶은 걸 사다 실컷 먹을 수 있다. 밤중에 시장하면 식장을 열고 먹어도 된다. 텔레비죤도 보고 싶은 걸 마음껏 볼 수 있다. 밤낮 팬티 바람에 마음대로 화장실에 가도 되지. 아무 때나 자고 일어나도 되니 얼마나 자유롭니? 제일간 부모자식간에 눈치를 보지 않아 좋다. 아들을 시집살이를 시키지 않아 더욱 좋다. 서로 갈라져 있으니 좋은 일이 한두가지 아니다. 부모자식간에도 자유로운 공간이 있어야 한다. 입안의 혀도 씹을 때 있다고 한 집이란 좁은 공간에서 아무리 부모자식 간이라도 사느라면 자칫 갈등이 생길 수도 있다. 서로 떨어져 있으면 다툴 일도 없고 시간이 가노라면 서로 그리워질 것이 아닌가.
“우리 친구들과 동료들이 모두 자식들과 갈라서 사는게 더 좋다고 말한다. 너도 참고해라.”
성호는 이제껏 춘자의 말이라면 토 하나도 달지 않고 그대로 다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젠 드문드문 자기 관점을 내놓기도 했다.
“누나, 자식들하구 한 집에서 살지 않는 건 옳다고 생각하오. 그러나 늘그막엔 그래도 자식 곁에 있어야 하오. 너무 멀리 떨어져 있으면 얼마나 고독하고 안전하지 못하오. 자식들도 멀리 떨어져 있는 부모가 얼마나 근심스럽겠소? 자식들과 한 시내에서 따로 집을 잡고 살면 상책인 것 같은데…”
한참 후 춘자는 계속 뒤말을 이었다.
“지금 세월에 자손 3대가 한 구들에서 산다는 건 힘든 일이야. 우리 부모들이 자식들한테서 뭘 바라겠느냐? 그저 자식들이 말썽 없이 행복하게 살면 돼. 자식들이 잘되면 부모들은 행복하고 기쁜 거야.”
춘자는 진심으로 막내남동생을 충고해주고 싶었다.
“너도 옛날 우리 부모들의 전통방식으로 엄마를 모시려고 하지 말라. 좋기는 엄마를 경로원에 보내라. 이전에 어떤 누나들은 엄마를 돌아가면서 모시면 어떤가 했지만 안돼. 우리 형제 열이지만 어느 집도 들어온 식구들은 부모를 모실 사람들이 아니야. 엄마를 경로원에 보내면 늘그막에 밥을 지을 필요도 없고 마음고생도 하지 않지. 너도 중간에서 시집살이 하지 않고 올케도 속을 태우지 않아 좀 좋아?”
성호는 춘자의 말을 반박하고 싶지 않았다.
“고민해보겠소. 아무쪼록 몸건강에 주의하오.”
“그래, 고맙다. 딱 한 집에서 모시는게 효성하는게 아니야. 부모자식들이 모두 편안하게 사는게 상책이야.”
“알았소. 참고하지.”
전화를 덜컥 놓은 성호는 땅이 꺼지게 한숨을 후~ 내쉬였다.
그는 경로원과 독집을 놓고 어디에 엄마를 모시면 좋을가고 밤늦도록 고민했다.
이튿날 밤중에 또 전화 벨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한국에 있는 다섯째누나 은자한테서 온 전화였다.
“성호야, 엄마 잘 있니?”
성호는 전화기를 고쳐쥐며 인사를 주고 받았다.
“양, 누나 덕분에 새 집도 사고 택시도 하면서 엄마를 잘 모시고 있소. 근심하지 마오. 다섯째누나랑 잘 있소?”
언제 들어도 부드럽고 자애로운 누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응, 그래. 성숙도 쌍둥이를 보면서 보모질해 한달에 180만원이나 번다. 나도 2층짜리 세집을 주고 병원에 나가 병간호를 해서 한달에 250만원은 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엄마를 경로원에 보내는 게 좋을 것 같아. 나도 며느리를 삼아봤는데. 함께 있으니 서로 얼마나 불편한지 몰라. 한족며느리 돼서 조선족며느리보다 다사하지 않고 로실한데도 서로 불편하더라.”
은자는 불평을 토로하기 시작하였다. 성호는 누나의 넉두리를 그저 들어주었다.
“철수가 몸이 실해 좀 살을 내리려고 고기랑 물에 삶아 간장에 찍어 먹게 하려면 안돼. 며느리는 남방 한족이 돼서 그저 본가집 엄마 기름을 푹 넣고 돼지고기를 볶아줘야 먹기 좋아한다. 우리 조선족들은 고추를 내놓고 어디 양념을 그렇게 푹푹 떠넣니? 장물에 끓인 돼지고기거나 삶은 돼지고기를 간장에 찍어 담백한 걸 먹기 좋아하지 않고 뭐니? 그런데 우리 며느리는 아니야. 숱한 양념을 푹푹 걷어넣고 기름에 볶고 지져 먹는다. 남방한족들은 짜고 시쿨고 단 걸 먹기 좋아하니깐. 우리 철수 이젠 돼지처럼 120킬로그람이나 된다. 걔 오래잖아 죽을 지경이야. 철수도 문제야. 피우지 말라는 담배를 바로 밥 먹듯 피운다. 한국 기업에서 주정뱅이 상전을 만나서 맨날 술에 취해 흙이 돼 집으로 돌아오지. 지금 바깥에서 식당음식을 자꾸 먹는 게 좋은 거 같애? 식당에서 돈을 남으려고 몇백번씩 튀개를 튀워낸 그은 페유를 걷어넣고 채를 볶아 올린다. 그런 채에는 발암물질이 가득해. 너도 식당 좀 작작 다녀라. ‘술을 작작 마셔라, 담배를 좀 피우지 말라.’ 철수한테 천만번 부탁해도 어디 듣니? 며느리 보고 좀 철수를 통제하라고 하면 뭐라는지 아니? ‘시어머니, 우리 제마음대로 살게 잔소릴 좀 작작 하세요.’ 이런다. 아이구, 원, 답답해 죽겠다.”
은자는 섭섭한지 한참 말을 잇지 못하다가 한참 후에야 말했다.
“지금 녀자애들이 누가 시부모하구 함께 살자겠니? 엄마하구 올케를 마음고생을 시키지 말고 엄마를 경로원에 보내라. 우리 형제 사망한 넷째를 빼고 아홉이면 엄마 경로원 비용을 대지 못하겠니?”
그 말에 성호는 수긍할 수 없었다.
“글쎄 자식들은 편할 것 같은데. 엄마는 마음 한쪽 구석에 쓰려 할 것 같소. 옛날 어른들은 아들 며느리하구 함께 사는 전통양로방식이 머리에 꽉 박혔단 말이요. 이전에 자녀가 하나도 없는 ‘오보호’ 늙은이를 양로원에 보내지 않았고 뭐요? 자칫하면 엄마는 숱한 자녀들을 두고 경로원에 가게 돼서 섭섭하고 마음이 아파할 게요. 원래 노여움이 많은 엄마가 맨 도리깨아들과 쥐며느리를 뒀다고 욕하면서 섭섭해하지 않겠소?”
“야, 좀 말 들어라. 한 집에서 모신다고 해서 효자 아니야. 엄마를 마음이 편하게 모시는 게 효자야.”
“알았소. 잘 생각해보겠소.”
“얘, 오래 생각할 건 없어. 요즘 단위 일이 바쁘더라도 돌아다니면서 경로원을 알아봐라. 비싸더라도 환경이 좋은 경로원에 엄마를 모시자. 우리 아홉 형제가 돈을 모아서 비용을 대면 되겠지.”
“알았소.”
“그저 대답만 하지 말고 꼭 알아봐라. 부탁이야.”
“양, 부탁대로 알아보지.”
누나네는 그간 엄마와 전화로 정황을 속속들이 알아내고 토론이 있은 것 같았다. 진짜 가정정치협상회의를 연 것 같았다.
어쨌든 여러 모로 엄마를 잘 모실 방법을 모색해야 했다.
(진짜 엄마를 경로원으로 보내는게 옳은가?)
그날부터 성호는 시내 주변에 있는 경로원을 돌아다니면서 두루 알아보기 시작했다.
일요일에 그는 시내에서 한 5~6리 떨어진 한 경로원으로 가보았다.
그 경로원은 원래 생산대 우사에 간벽을 촘촘히 막고 대충 구들을 놓은 것이였다. 침대를 놓고 나면 돌아설 자리도 없는 비좁은 방을 한달에 집세만 해도 300원씩 내야 했고 식사비용과 관리비를 합쳐 별도로 500원을 내야 한다고 했다. 그때 성호는 신문사 광고회사에서 한달에 겨우 1200원을 받았다. 비용이 비싼 건 둘째고 양로시설이 말이 아니였다. 그런 초라한 경로원에 어머니를 모신다는 것은 말도 아니였다.
또 시내에서 서북 쪽으로 한 7~8리 되는 산기슭에 자리잡은 한 경로원에 가보았다.
사위가 사철 푸른 소나무에 둘러싸여 있는 2층짜리 경로원은 꽤나 아담했고 공기도 좋았다. 방도 좀 널직하고 실내에 위생실도 있었으며 텔레비죤과 옷장도 놓여 있었다. 2층에 있는 널직한 활동실에서는 로인들이 한창 “장훈이야!”, “멍훈이야!” 하면서 장기를 두고 있었다. 어떤 안로인들은 화토를 놀고 있었고 어떤 로인들은 운동기구에서 간단한 운동을 하고 있었다.
식사시간이 돼서 양로원 식당에서 로인들이 식사하는 것을 여겨보니 시래기국에 김치 한접시에 밥 한사발 밖에 없었다. 한달에 식사비용 300원을 받는다고 했다. 돈을 좀 더 받더라도 밥반찬이나 더 올렸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후에도 성호는 짬만 있으면 여러 경로원을 돌아보았지만 모두 맞갖지 않았다.
설상가상 어머니 세대는 경로원에는 자녀가 없는 로인들이 가는 곳으로 여기는 전통관념이 꽉 박혀 있었다. 어머니를 형편없는 경로원에 보낸다는 것은 어쩐지 마음에 걸렸다.
(편안하자고 엄마를 경로원에 못 보내지.)
그때 은숙이 찾아오지 않았겠는가.
“얘, 성호야, 엄마를 내 모셔갈게.”
성호는 난처해했다.
“아니, 무슨 소리요. 누나네 돕자는 건 고마운데. 자꾸 엄마를 여기 저기 옮기게 하면 마음이 안정되지 않아 좋지 않소. 또 엄마를 누나네 집에 모셔가면 마을 사람들이 뭐라겠소? 지금 경로원을 알아보는 중이요. 누나네 너무 경로원 소리를 하니 말이요. 이게 이 소릴 하고 저게 저 소릴 하니까. 나도 어쨌으면 좋을지 모르겠소.”
성호는 속으로 성질이 팩한 은숙한테 엄마를 보내기 싫었다. 게다가 매형은 이전에 부모네 밭을 부치고서도 쌀마저 주지 않은 적이 있지 않는가.
부모를 보낸다고 해도 림시구급이지 장구지책이 아니였다.
은숙은 말을 바꿨다.
“엄마가 우리 집에 가서 놀면 안되니?”
성호는 정색하는 은숙을 보고 “사돈할머니도 누나네 집에 있잖소? 누나한테 너무 부담시키지 않고 뭐요?” 하고 도리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괜찮아. 우리도 자식들한테 모범을 보여야지. 지금 생각해보면 우리 어째 부모한테 각박하게 굴었던가 싶다. 덕분에 덩실한 벽돌집에서 살면서 엄마 생전에 효성을 해야 이담 후회되지 않을 거 같아.
성호는 머리 숙어졌다.
그때 영옥도 방에서 객실에 나와 말했다.
“나도 시내에 와서 아무리 좋은 층집이라도 떡 갇혀 있으니 몸이 말째구나. 좀 살던 고장에 가서 바람도 쏘이면 좋을 거 같다.”
성호는 자기 집 택시를 불러 은숙과 함께 엄마를 고향 마을로 모셔갔다.
은숙네 집에 가보니 누나와 매형은 어머니를 모시려고 그 추운 엄동설한에 글쎄 건너방에 구들까지 놓지 않았겠는가.
성호는 고향 마을의 누나와 매형이 속으로 고마웠다.
그렇다. 누나와 매형이 없으면 누굴 믿고 어머니를 고향 마을에 보낸단 말인가.
그는 누나와 매형을 더 고생시키지 않으려고 눈풍설이 이는 날에 시내에 내려와 석탄을 사서 차를 세내 실어가지 않으면 안됐다. 그래도 셋째매형 경만과 누나 은숙이 고마웠다.
(옛날부터 충신은 효자가 아니라고 했지만 난 사업도 잘하고 어머니한테 효성을 다할테야.)
그런데 진짜 어머니를 잘 모시자고 하니 일이 자꾸 꼬였다.
한나한테서 시어머니 고향의 셋째딸 집으로 갔다는 말을 들었던지 정희가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겠는가.
“이거 해 서산에서 돋지 않는가?”
성호는 오랜만에 안해를 보고 기쁘다는게 불쑥 이런 말이 튀여나갔다.
정희는 단통 새침해 외까풀눈으로 남편을 쏘아보았다.
“어째 오지 못할 데를 왔소? 난 성호란 효자의 당당한 안해란 말이요.”
성호는 정희를 끌어안으면서 맞장구를 쳤다.
“그래, 정희는 영원히 내 색시야. 절대 엄마 때문에 우리 이 벌어지지 말아야지. 안 그래?”
정희는 성호의 품에서 빠져나오면서 이 구석 저 구석 살폈다.
“요즘 단위 일이 바쁜가요?”
“괜찮소. 요즘 시내 주변에 있는 여러 경로원을 돌아보았는데 다 맞갖지 않습데.”
“어째 경로원인가요?”
“누나네 어찌나 경로원에 보내라고 하는지.”
정희는 피씩 코웃음쳤다.
“동문 정말 귀 널러 대사죠. 팔순이 넘은 어머니를 자기 집에서 모시지 않고 경로원에 보낸다고? 어머니나 동네 사람들이 동무네 형제들을 뭐라겠어요?”
“무슨 뾰족한 수 있소?”
“누나들은 정말 큰 일 났어요. 자기네 모시지도 못하면서 쩍 하면 동무를 줴 흔들자고 든단 말이오.”
“그래도 형제들이 엄마 생활비도 보내왔단 말이요.”
“그 돈이 뭐 큰가요?”
정희는 또 푸념질을 하기 시작했다.
“동무네 누나넨 시부모를 모셔보지 못해서 며느리 실정을 잘 몰라요?”
“며느리를 삼아봐서 부모의 심정은 잘 알던데.”
정희는 침대에 앉으면서 계속 푸념질을 했다.
“하나하나 보세요. 어느 누나 시부모를 모셨는가?”
“지금 셋째누나 시엄머와 친정엄마를 한구들에 모시고 있잖소.”
“시엄마를 모셔보니까. 본가집 엄마 생각이 나서 모셔갔겠지. 그게 며칠이겠어요?”
정희는 침대에서 일어나 종주먹으로 성호의 가슴을 툭 쳐놓았다.
“당신은 그래 사위 돼가지고 예순이 넘은 가시부모를 모실 생각은 한번이라도 해봤어요? 자기 엄마만 엄마라면서.”
말을 듣고보니 성호는 정희한테 미안했다.
“죄송하오. 정희, 가시부모는 젊다고 미처 생각하지 못했소. 우리 이제부터 량쪽 부모를 다 잘 모시기오.”
정희는 해쭉 웃었다.
“그럼 그렇죠.”
그녀는 전번에 울며 불며 떼를 쓰던 일이 언제 있었느냐는듯이 말도 잘하고 기분도 좋아보였다.
“이렇게 하면 어떨가요?”
“?”
성호는 자기 손까지 잡는 정희의 파란 눈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내 한나를 데리고 본가집에 가 있든지. 아니면 세집을 잡고 나가 있든지? 어떤가요?”
정희의 말에 성호는 도리머리를 홰홰 내저었다.
“되지도 않을 소릴! 그래 부부간에 생리별이라도 할 작정이오?”
정희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채 정색했다.
“아니, 그런 건 아니죠. 그래도 제 방안이 실제적인 거 같애요. 저와 딸이 보고 싶으면 일주일에 둬번 우리 사는 집에 오세요. 한나도 당장 대학시험을 쳐야죠. 시어머니 때문에 옥신각신하면 애가 어떻게 공부해요? 진짜 시엄마를 모시지 못하겠어요. 당신이 자꾸 핍박하면 리혼하는 길 밖에 없어요.”
정희는 작정하고 온 것 같았다.
성호는 성이 꼭두까지 치밀었다.
“쩍하면 리혼소리요? 난 생명과 모든 걸 준 엄마와 갈라질 순 없소. 누가 리혼하자면 두려워 할 거 같소? 너무 핍박하지 마오.”
그는 자존심에 허락되지 않았다. 그러나 가정을 유지하려고 최대인내력으로 꾹 참아버렸다.
정희는 옷을 주어입더니 “잘 고려해보고 전화 주세요.” 하고 훌 나가버렸다.
창 밖에서 쓸쓸한 달빛이 적막한 집안을 훔쳐보면서 들어올가말가 망설이고 있었다.
문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한나가 학교에서 돌아왔다.
성호는 한나의 손을 잡고 빌다 싶이 애원했다.
“얘, 외가집에 가서 엄마를 데려오라. 엄마는 아빠를 버리고 달아나려고 해. 이 가정이 깨지면 넌 날개 부러진 외로운 새로 돼.”
“아빠!”
뜻밖에 한나는 찬바람이 홱 불어치는 눈길로 흘겨보았다.
“어쩜 엄마도 잘 보살피지 않아 리혼까지 해요?”
“어쩌겠니? 다 아빠 잘못이구나. 부탁이다. 응? 네가 엄마를 이 집에 데려오라.”
한나는 량볼에 눈물을 주르르 흘리더니 마지못해 머리를 끄덕이며 외가집으로 떠나갔다.
이튿날 저녁에 문소리가 덜컥 나더니 한나가 정희를 데리고 오지 않았겠는가.
“여보!’
성호는 정희를 와락 끌어안았다.
“이걸 놓으세요. 온 몸에 푹 밴 어머니 냄새 코를 찔러.”
(항상 ‘냄새’, ‘냄새’ 하면서 정말 더럽게 노니?)
정희는 성호를 활 밀어놓고 신도 벗지 않은 채 현관에 서서 물었다.
“어머닌 어데 갔어요?”
“양, 셋째누나네 집에 놀러 갔소.”
“어머니를 어떻게 모실 예산인가요?”
“올라오오. 천천히 토론하기요.”
정희는 마지못해 구들에 올라왔다.
“누나넨 형제들이 돈을 모아서 엄마를 경로원에 보내자고 합데.”
정희는 픽 코웃음쳤다.
“여섯이나 되는 누나넨 누가 모시겠다고 하는가요? 무리를 지어 막후조종만 한다니까. 여보, 당신은 왜 자기 주대도 없이 누나네 말을 그렇게 귀 넓적해 듣기만 해요? 시간 없어요. 툭 찍어 말하세요.”
성호도 말할 때 됐다고 여겼다.
“이 집에 엄마를 모시고 우리 세집을 잡고 나가는 게 상책인 거 같소. 형제들한테서 쓸데없는 뒤소리를 듣지 않고 서로 편리할 게 아니오?”
“이제야 머리 좀 도는 것 같군요.”
정희는 반색했다.
“동무나 앞뒤로 다니면서 다 돌보면서 살아요.”
정희는 해시시 웃으며 성호의 두 팔을 잡고 마주 바라보았다.
(에이, 요 미꾸라지를. 내한테 싹 밀어놓고 스리슬쩍 빠져나가는 거 봐라.)
한나는 멋도 모르고 부모가 싸우지 않자 마음이 놓이는지 안방으로 들어갔다.
성호는 근사한 세집을 얻어놓은 후 이사회사 사람들을 불러다 이사짐을 실어갔다. 그리고 어머니도 고향에서 시내 집으로 모셔왔다.
어머니도 좋아했다. 며느리 눈치밥을 먹지 않기에 마음이 편안할 것 같았기 때문이였다.
영옥은 성호가 점심에 쉬러 들어오면 안방에 들어와 서성거리면서 혼자말로 중얼거리군 했다.
“옛날부터 내리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는 법이지.”
성호의 마음은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 같았다.
어느 하루 성호가 아빠트단지 슈퍼마켓에서 어머니가 잡숫기 좋아하는 돼지고기와 상추를 듬뿍 사들고 집에 와보니 어머니가 보이지 않았다.
황급히 층집에서 승강기를 타고 내려가 아빠트 동쪽의 층계에서 해볕쪼임을 하는 이웃할머니들과 물어봐도 누구도 못 봤다고 했다.
(어디로 갔을가?)
성호는 황급히 핸드폰을 꺼내 막내처남 준식한테 택시를 몰면서 시내 어디에서 어머니가 보이는가 봐라고 부탁했다. 고향마을에 돌아갔는가고 셋째누나네 집에 전화를 해봐도 온 적이 없다고 했다.
성호는 잔등에 소름이 끼쳤다. 어머니는 아직 치매가 오지 않았다.
(그럼 어디로 갔단 말인가?)
그는 혹시나 해서 파출소에도 달려가 신고를 해놓았다.
성호가 정신을 잃고 밤중에 핸드폰이 울렸다.
“성호 선생인가요?”
“예. 누구십니까?”
“파출소입니다. 어머니를 모셔가십시오.”
“예? 예. 곧 가지요.”
성호는 준식한테 핸드폰을 쳐서 택시를 몰고 오라고 해 택시를 잡아타고 파출소로 달려갔다.
파출소 당직실에 어머니가 청년경찰 옆에 초조히 앉아 있지 않겠는가!
“엄마!”
“아들이!”
그들 모자는 서로 끌어안고 눈물을 뜨거운 상봉의 눈물을 줄줄 흘렸다.
알고보니 어머니는 혼자 남새를 사려고 아빠트에서 1킬로메터도 넘게 떨어진 시장에 갔다가 길을 잃어 온 하루 행인들과 물으면서 헤맸다. 해가 져서 큰길 가로등 밑에서 서성거리는 어머니를 마음씨 착한 경찰이 파출소에 모셔가지 않았겠는가.
“감사합니다. 경장님!”
성호는 연신 감사를 드리고나서 어머니를 택시에 모시고 집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면서 그는 어머니 손을 잡고 이후에는 혼자 시내에 나가지 말고 잡숫고 싶은 것이 있으면 자기와 말하거나 아빠트단지 상점에 가서 사 자시라고 신신당부했다.
어머니는 아들을 고생시키는 것 같아 머리를 끄덕였다.
영옥은 자기를 찾아와 큰절을 올리는 한나를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얘, 불시에 절은 무슨 절이냐?”
한나는 할머니 주름살이 주글주글한 두 손을 꼭 잡고 눈물을 머금고 말씀드렸다.
“할머니, 이제 보면 할머니를 언제 볼지 몰라요.”
“어째 어데 가니?”
“예, 할머니, 미국에 류학가게 돼요.”
“혼자?”
“아니, 엄마 함께 가요.”
“엄마는 한국에 유람가고. 제가 남아서 공부한다고 해요.”
“오~ 우리 막내손녀 한국에 류학 가? 참 좋구나. 네가 잘되면 할머니도 좋아. 방학이면 자주 놀러 와.”
“예~”
점심에 아들이 돌아오자 영옥은 또 혼자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릇과 녀자는 내돌리면 못써. 꼭 축나지 않으면 망가져!”
어머니는 분명 며느리와 한나가 나도는 것이 납득되지 않아했다.
성호는 땅이 꺼지게 한숨을 쉬였다.
성호의 생일날이였다.
밤중에 승호는 생일을 축하해주겠다고 하면서 안마방으로 청했다.
성호는 저으기 고마웠다.
(자식, 이젠 삼촌취급 하는 건가?)
그는 피뜩 무슨 궁리를 하다가 승호를 데리고 순희네 안마방으로 갔다.
금방 안마방에 들어섰는데 전화 벨소리가 요란히 울렸다.
정희의 전화였다.
“여보, 생일 축하해.”
성호는 순희의 방에 들어가 전화를 받았다.
“어, 감사하다. 지금 어디지?”
“미국.”
“뭐라고? 언제 미국까지 갔어?”
성호는 정희의 전화를 한참 듣고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정희는 깔깔깔 웃었다.
“다단계판매할 때 한국 백영 사장 기억나죠? 백사장 연줄로 옆집 엄희선 아줌마랑 미국에 왔거든요.”
“아니, 한국에 갔는가 했너니 미국에 갔어?”
“한국에 나왔다가 미국에 건너왔지.”
“그래? 한나도 미국에 있니?”
“놀라지 말라고.”
좀 끊었다가 정희 목소리가 챙챙하게 들려왔다.
“어떻게 돼 거기까지 갔어?”
“알 필요없어. 의심 많은 당신, 머리 복잡해질 거야. 잠간, 놀라운 소식 하나 알려줄게. 내 한국에 있을 때 일인데요. 2호선 지하철에서 당신네 그 송준이 선희라는 년하구 다니는 걸 봤어.”
“뭐라고? 혹시 사람 잘못 보지나 않았어? 송준은 일본에 갔다는데.”
“아니요. 확실히 송준이였어요. 혹시 잘못 봤나 해서 뒤쫓아가서 똑똑히 보았는데요. 선희와 손잡고 희희닥거리면서 가던데요. 제가 선희를 몰라요? 시내에 소문난 명모델인데요. 잘못 볼 수 없어요.”
“그 놈 일본에 간다고 우릴 얼려놓고 갈보년 찾아 한국에 갔어? 더러운 놈, 제 명에 죽는가 봐라.”
“여보세요. 지금 어데 있지?”
“오, 순희네 집이야.”
“밤중에 거긴 왜 갔나? 혹시 안마방 아니야?”
“승호 생일을 축하해준다고 왔어.”
“오늘 어머니도 생일연회에 모셨어요?”
“아니, 숱한 손님들을 청해놓고 모시고 다니기 불편해서 그만뒀소. 어머니 반가와하는 음식 주문해 미리 가져다 드렸어.”
“당신도 효자인가요? 생일은 기실 어머니 고생한 날이 아니고 뭐야? 어머니 얼마나 고독했겠어?”
성호는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안마방에 더 있고 싶지 않았다. 그는 한시급히 어머니 보러 가고 싶었다. 그러나 승호의 성의를 무시할 수도 없었다.
(한시간 푼히 안마를 받고 가도 늦지 않겠지.)
“술 작작 마시고 저녁에 일찍이 어머니한테 가라. 부탁이야.”
“알았어. 아무쪼록 안전에 주의하면서 잘 있어라.”
“오, 그래. 너무너무 사랑해. 빠이빠이.”
성호는 핸드폰을 끄면서 흘겨보는 순희 표정을 읽었다.
그는 자기를 부르는 승호의 목소리를 듣자 순희의 귀에 대고 뭐라고 쑤근거렸다.
“뭘해?”
“쓸데 있어서.”
“알았어.”
성호는 단간방으로 들어가면서 눈을 찔끔해 보였다.
순희는 승호한테 들어간 아가씨를 불러내 뭐라고 쑤근거리더니 들여보냈다.
아가씨는 머리를 끄덕이더니 승호의 방에 들어갔다.
“아가!”
승호는 벌떡 일어나 앉았다. 아가씨가 머리를 마사지하다가 머리카락을 어찌나 아프게 줴당겼는지 때끔해날 지경이였다.
“미안해요.”
아가씨는 머리카락 몇대를 종이에 싸 옆구리에 스리슬쩍 감췄다.
이윽고 그녀는 화장실에 가겠다고 나갔다가 순희네 방으로 들어가는 것이였다.
성호는 누워 있는 척하다가 가만히 뒤따라가 문틈으로 승호의 방을 살펴보았다.
아가씨는 순희네 칸으로 들어가지 않겠는가.
(OK!)
성호는 엄지와 식지를 딱 소리나게 튕겼다.
그는 위생실로 가는 척하면서 순희네 방으로 들어갔다. 순희는 원주필로 종이에 뭔가 쓰다가 그만두며 보름달 같은 얼굴에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걸 해 뭘 하오?”
“쉿- ”
성호는 식지를 입술에 대고 승호 방을 되돌아보았다.
순희는 승호의 머리카락을 싼 비닐봉지를 성호한테 내밀었다.
성호는 비닐봉지를 안마복 주머니에 넣은 후 안마방으로 들어갔다.
(돈 밖에 모르는 간나새끼들!)
그는 속으로 욕지거리하면서 침대에 들어누웠다. 아가씨가 시원하게 마사지를 해주자 잠이 스르르 몰려왔다.
(자식, 이제 몽땅 밝혀질 거야.)
성호는 침대에 누워 눈을 지그시 감았다. 아가씨의 마사지를 받으면서 허탈감에 빠졌다.
한참 후 안마가 끝나자 성호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집에 홀로 계시는 어머니가 기다리는 것 같았다. 승호의 머리카락을 싼 비닐봉지를 잘 건사하고 혼자 집으로 쥉쥉 돌아와버렸다.
승호는 바깥에서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고 그때까지도 안마를 받느라고 눈을 지그시 감고 있었다.
영옥은 밤중까지 쉬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다. 아들이 돌아오자 조용히 안방에서 객실에 나왔다.
“어머니, 참, 미안합구마. 저녁은 제대로 잡쉈습니까?”
“그래, 며느리 가져온 생일 음식 잘 먹었다. 무슨 술을 그렇게 온밤 마셨니? 몸 조심하구 술 좀 작작 마셔라.”
“예, 엄마, 미안합니다. 편안히 쉽소.”
어머니가 마지못해 자기 방에 어정어정 돌아가자 성호는 침대에 푹 쓰러졌다.
그는 어머니한테 죄송스러웠다. 어머니는 40여년 전에 자기를 낳느라고 얼마나 고생했던가.
그때는 대약진시기여서 쌀 고생이 아주 심했다. 그를 낳기 전날에 먹을 쌀이 없어 어머니는 만삭이 된 배를 부둥켜안고 고향마을에서 15리나 떨어진 천수해 시장에 가서 강냉이쌀 30근 사서 이고 돈이 없어 점심도 잡숫지 못하고 집으로 한발자욱한발자욱 힘겹게 돌아왔다고 한다. 뜨끔뜨끔 아파나는 배를 안고, 세상에 나오려고 발버둥질하는 발개돌을 배 속에 넣고 매만지면서 이를 악물고 집으로 돌아와 쓰러졌다고 한다.
(어머니는 힘들고 배 아프게 날 낳았다. 그러나 어머니가 고생한 날 네놈은 어머니를 빈 집에 홀로 두고 친구들과 함께 술을 처먹고 안마방에 갔다가 밤중에야 돌아왔다. 아이고, 어머니, 이 불효한 도리깨아들을 귀쌈이라도 칩소. 어머니~)
그는 눈물을 훔치며 일어나 앉았다. 이제라도 어머니한테 반성하고 용서를 구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만두었다. 괜히 엄마 쓸쓸한 마음을 다시 건드려 비감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다신 생일을 쇠지 않을테야. 생일에 아버지 산소에 찾아가 큰절을 올리고 엄마를 모시고 맛있는 음식을 대접할테야. 어머니한테서 살아온 얘기나 들어야지. 엄마 무릎을 베고 다정하게 손을 잡고 나를 낳아 키우던 얘기도 듣자. 그럼 엄만 반가와서 끝없이 얘기를 들려줄 거야.)
스물스물 몰려드는 불효감, 더불어 고독감과 함께 흘러간 반평생이 너무나도 허무하게만 느껴졌다.
(정희 말처럼 진짜 해놓은 게 뭔가? 마흔고개를 넘었는데도 부모께 효성을 잘 해드리지도 못했고 대를 이을 아들 하나 낳지 못했지. 처자한텐 해준 게 뭔가? 이젠 빚더미에 지지 눌려 숨막힐 지경이야. 사회에 나가선 아직도 광고회사 일반직원이야. 로상전 김범수 총경리가 봐주어서 신문사에도 겨우 들어간 게 아닌가.)
그는 너무나도 한심해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였다. 문들어질 것 같은 그의 가슴은 가물에 말라터진 논바닥 같았다. 실망에 찬 마음은 눈풍설이 휘몰아치는 산야에 홀로 서 있는 소나무 신세 같았다.
그때 어디에서인가 한 녀인의 목소리가 귀전을 때리는 상 싶었다. 귀에 퍽 익은 목소리였다.
(정희 목소리인가? 아니야. 누구야?)
오빠, 맥을 버리지 마세요. 이럴 땔수록 만족할줄 알아야 해요. 오빤 누구보다 마음씨 착해 잘 된 일이 많았어요. 어려운 생활형편에서도 부모께 효성을 다했기에 누님들이 돈을 뀌워주고 힘을 합쳐 어머니한테 효도를 하기로 했지요. 정의감과 의리심이 강한 정의용사이기에 머나먼 내몽골 쑤싼나 일가가 소장사를 도와주지 않았는가요?
오빠, 힘내세요. 절대 곡절 앞에서 머리를 숙이지 말고 용감하게 생활난을 이겨나가세요.
(환청인가? 딱 전화에서 들리던 녀성의 살뜰한 말소리 같은데. 정희인지, 연화인지? 쑤싼나? 순희인가?)
놀랍게도 또 녀성의 목소리가 귀전을 아프게 때렸다.
민심이 천심이죠. 오빤 잃은 게 많지만요. 대신 수많은 인심을 얻었어요. 오빠와 사랑은 이루지 못했지만요. 오빠의 진정과 사랑 그리고 착한 마음에 보답하고 있잖아요? 오빠를 헐뜯고 못 살게 군 오청룡과 리굉팔의 추악상과 죄상을 검거했지요.
오빠는 돈과 지위는 얻지 못했지만요. 사람부자, 마음부자, 사랑부자예요. 오빠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을 믿고 용감히 운명에 도전하세요. 오빠가 이제껏 도와준 모든 분들이 오빠를 도와줄 거예요.
성호는 벌떡 일어났다.
(아, 은영인가?!)
방안을 둘러봐도 아무도 없었다. 진짜 괴상한 일이였다.
(무슨 유령이라도 하늘에서 내려와 귀띔하는 목소린가?)
성호는 빈 집 안에서 신비한 달빛을 밟으며 왔다갔다 거닐면서 속으로 되뇌였다.
(이제껏 곡절도 많이 겪고 실패의 쓴 맛도 많이 봤지. 패배의 교훈을 섭취해 열심히 살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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