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zoglo.net/blog/jinchanghe 블로그홈 | 로그인
김장혁
<< 11월 2024 >>
     12
3456789
10111213141516
17181920212223
24252627282930

방문자

홈 > 전체

전체 [ 536 ]

136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91) 댓글:  조회:1169  추천:0  2018-01-17
                                  11. 폭풍우에 쓰러져가는 사람들       눈보라가 기승스레 휘몰아치던 동장군이 물러가고 농사꾼들 희망의 씨를 뿌리는 봄아가씨가 사뿐사뿐 다가왔다. 보릿고개가 아득히 멀건만 불비를 맞아 말라터진 소서구의 옥수수는  시들어가고 있었다. 아무리 사원들이 물을 이고 지어다 밭에 쳐도 곡식을 되살려낼 수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보릿고개를 넘기기 어려워 기아에 허덕이던 마을 사람들도 하나 둘 쓰러져갔다.       (하늘도 무심하지. 어떻게 보릿고개를 넘긴단 말인가.)       상순은 생각할수록 앞길이 막막하고 의심스러웠다.       (이대로 계속 나간다면 사원들이 다 굶어 죽지 않을까?)       이제껏 위 지시라면 순순히 다 순종해온 상순이었건만 이젠 이맛쌀을 찡그리면서 고민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어느 하루, 상우가 떡메를 만들어 들고 동생네 집으로 놀러 왔다. 그때 상순은 하나라도 백성들의 생활에 보태주려고 사원들을 동원해 생산대에서 양돈장을 짓고 집체로 돼지를 길렀다. 그는 가솔을 데리고 아예 양돈장 사양실에 들어 있으면서 명옥을 보고 생산대 돼지를 기르게 했다. 초봄이어서 쌀이 조금 있어서 그래도 명옥은 차좁쌀 죽에 장국을 끓여서 시형을 대접할 수 있었다. 상우는 동생 집인지라 속심의 말을 했다.       “그 놈 흥수가 무더위를 먹고 쓰러지는 바람에 잘됐구나. 코개가 없어 집에서 죽을 먹어도 살피는 놈이 없어 편안하구나.” 상순은 터놓고 말했다.      “허백호 서기도 철직당해 근심할게 없소. 집체식당도 당장 문을 닫게 됐소.”      상우는 죽을 맛있게 먹으면서 말했다. “집체식당보다 자기 집에서 끓여 먹는 게 훨씬 더 좋다. 사람마다 구미가 다르고 식사양이 다른데 어떻게 사기사발에 똑 같게 나눠 먹는다니?”      “당과 국가를 믿어야 하오. 우에서도 보는 눈이 있을 거오. 집체식당을 차리다가 안 되면 자기 집에서 끓여 먹으라고 하겠지.” “그래야지. 집체식당을 믿고 어디 배고파 살겠니?” 상우는 죽 두 그릇을 다 비우고 나서 명옥한테 얼굴을 돌렸다.      “제수, 정말 잘 먹었소. 야, 이 놈의 재해 언제 끝나겠소? 정말 쌀 고생을 더 못하겠소. 사람이 굶고 사는 것만큼 바쁜 게 어데 있소?”        상우는 눈물이 글썽해 엉덩이를 들고 일어나더니 집으로 돌아갔다. 상우는 따라 나가면서 명옥이 준비한 좁쌀주머니를 형님에게 건네주었다. 그러자 상우는 사양했다. “이걸 주고 너네는 어떻게 살겠니? 싫다. 제수를 가져다 줘라.” 그러나 상순은 기어이 좁쌀주머니를 형에게 밀어주었다. “형님, 가져다 자시고 몸을 춰 세우오. 공산당의 영도아래 험한 3년 재해를 이겼으니까 이제 잘 먹고 잘 살 날이 올 거요. 형님, 우리 형제는 죽이라도 나눠 먹으면서 함께 살아나기요.” “응, 그러자.” 상우는 동생네 부부가 정말 고마워 코마루가 시큼해났다. 그는 쌀 주머니를 메고 집으로 흥겨운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그 좁쌀로 죽을 쑤어서 다 먹고 나니 또 먹을 것이 없었다. 결국 상우는 처자가 불쌍해 사양하다나니 몸이 겨릅대처럼 여위어갔다. 너무 굶어서 피골이 상접하게 된 상우는 어느 날 밤에 동생네 집에 와서 조 열대여섯 근 되게 얻어 집에 가져왔다. “여보, 이걸 껍데기 채로라도 끓여서 좀 먹기요. 난 굶어서 내일이면 죽을 거 같소.” 그러나 아내는 날카로운 눈길로 영감과 조주머니를 번갈아보면서 생야단을 쳤다. “아니, 이 영감이, 정신 나갔잖소. 시동생네 좁쌀을 가져다가 집에서 끓여 먹어서야 되오? 집에서 끓여먹다가 들키면 큰일 나겠소. 당장 가져가오. 그러찮으면 생산대에 고발하겠소.” 그 욕지거리를 듣고 상우는 맥없이 구들에 벌렁 나누었다. 그러자 아내는 자기가 가져가겠다고 좁쌀주머니를 들고 떠들썩하면서 바깥에 나가려고 했다. 상우는 안간힘을 다하여 아내의 왼쪽다리와 좁쌀주머니를 붙잡고 놓지 않았다. 열아홉 살 나는 순애까지 막아 나서자 나가는 수 없었다. 그녀는 두덜거리면서 신을 벗고 구들에 들어와 핸들 나자빠졌다. 그런데 이튿날 새금은 끝내 그 좁쌀주머니를 들고 생산대회의실에 가서 숱한 사람들에게 자기 영감을 낱낱이 고발했다. 그 바람에 생산대에서는 굶어서 다 죽어가는 상우를 회의실에 끌어다가 집체식당을 파괴했다고 비판했다. 그런데 상우가 연 며칠 굶어서 서서 비판을 받다가 까무러치는 바람에 투쟁대회는 희지부지해지고 말았다. 상우는 사망하기 사흘 전에 사촌여동생 복선이네 집으로 갔다. 그러자 복선은 사촌오빠에게 가만히 죽을 쑤어 주었다. “여동생이 집에서 죽을 끓여 내게 줬다고 생산대에서 욕을 먹지 않겠니?” 상우가 근심하자 복선의 고중을 다니는 맏아들 성환은 “큰아버지, 잡숩소.”라고 했다. 상우는 죽사발을 받아들고 외탁을 한 성환의 너부죽한 얼굴을 보면서 혀를 끌끌 찼다. “넌 공부도 잘한다더구나. 전번에 동생네 홍자가 말하던데 네가 초중에 내려가 초급중학교 애들에게 로어로 본 소설을 얘기해 줬다더구나. 러시야어 공부를 어떻게 잘했으면 러시야어 소설을 보고 아래 학년 애들에게 옛말을 해줄 수 있니?” 성환은 안경을 춰 쓰면서 그저 희죽이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김한봉의 맏아들 김성환은 동생 철주나 철삼, 철우, 철갑 등과는 달리 외탁해 수염이 더부룩하고 얼굴이 너부죽했다. 그는 마음도 너그럽고 공부도 특별히 잘했다. 그리하여 당시 초중 때부터 학교에서 몇 명 없는 "A학생"으로 뽑혀 진수해중학교 조교장의 특별대우를 받고 있었다. 조교장은 청화대학이거나 북경대학 입학생을 많이 양성해내는 것을 목표로 삼고 성환과 순자, 경산 등 이른바 "A학생" 10여명을 뽑아 학교에서 우유까지 대접하면서 특별개별교육을 진행했던 것이다. 러시야의 사회주의 교육체계를 본 받아 당시 5점 시험점수제를 실시했는데 김성환과 김경산, 김순자 등은 항상 과목마다 5점을 맞았던 것이다. 하여 그들은 모두 진수해중학교의 보배로 불리었다. 당시 성환은 북경대학이나 청화대학 입학을 겨냥하고 공부했고 순자는 아버지 말씀대로 의과대학교로 가서 의사로 되려는 목표를 세우고 공부했다. 상우는 공부를 잘하는 성환과 순자를 한바탕 칭찬하면서 죽물을 맛있게 먹은 후 사촌녀동생 복선한테 말했다. “복선아, 손바닥만 한 땅이 있으면 호박을 심어라. 호박넌출이 뻗으면 그 넌출에 흙을 퍼놓아라. 그럼 호박넌출에서 뿌리가 내리고 호박이 달릴 게 아니야? 호박을 많이 심어 먹어도 쌀 보탬할 수 있다.” 그 말을 하고 사흘이 지나 상우는 굶어서 뼈 앙상하게 된 채 저세상으로 떠나가고 말았다. 농업중학교를 졸업하고 길림으로 기관사질을 하러 떠나간 동선은 아버지가 굶어 세상을 떠났다는 비보를 듣고 황급히 돌아왔다. 그는 아버지 관작을 매만지면서 흑흑 흐느끼며 대성통곡 쳤다. “아버지! 이 불효자식을 용서해주옵소서. 일본 놈 세상에서도 살아남은 아버지를 굶어 세상 뜨게 하다니요. 어, 어엉.” 순애도 대성통곡쳤다. 지새금도 3년 재해를 원망하면서 뜨거운 눈물을 훔쳤다. 형님의 유체를 염습해 칠성판에 모신 상순은 형님을 붙안고 서럽게 울고 또 울었다. 상순의 처자들도 모두 와서 절을 올리며 울었다. 상순은 일곱 살에 형 상우의 지게에 올라 앉아 고향을 떠나 살 길을 찾아 간도 함흥 촌으로 들어왔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형을 삼촌처럼 따르고 의지해 살아왔고 형수도 작은 어머니처럼 존중하며 섬겼었다. 그런데 형은 소서구에 숱한 밭을 일궈놓고 굶어 세상을 떠나지 않았는가? “형님, 세상에 이런 안타까운 일이 어디 있소? 소서구에 상우지를 남겨두고 죽물도 온전히 잡숫지 못하고 세상을 뜨다니? 형님, 일본 놈들의 세상에서도 굳세게 살아온 형님, 형님이 돌아가다니. 으흐흑, 흑흑, 형님-” 손자를 앞세운 병완은 긴 한숨을 쉬며 애탄했다. “내가 오래 살아서 차마 보지 못할 일을 수태 보는구나.” 병완은 자기가 함흥촌을 잘 이끌지 못했기에 손자마저 잃게 됐다고 속으로 자책감을 느꼈다. 상순은 둘째조카 동선과 토론하고 형의 산소를 조개덕 뒷산 기슭에 썼다. 두 해 사이에 아버지와 형을 잃은 상순은 절망에 빠지나 다름없었다. 설상가상으로 눈가루가 풀풀 흩날려 내리는 어느 하루, 하나 밖에 없는 동선이 찾아와서 밤중에 홍두깨처럼 이런 말을 불쑥 꺼내는 것이 아니겠는가.      “삼촌, 조선으로 가겠습구마.”      “뭐라니? 엄마와 순애 그리고 이 삼촌을 두고 어디로 간다고 그러니?”       상순은 조선으로 가려는 조카를 단통 나무랐다.       “으리으리한 길림 시내에서 월급과 배급을 타면서 기관사질을 하면 좀 좋아 그러니? 배부른 타령 해도 한두가지 아니구나. 조선에 가면 별날 거 같니?” 허나 동선은 고집썼다.      “원래 한족애들 속에서 일하지 못하겠습구마. 꼬리빵즈(高丽棒子)라면서 어찌나 놀려대는지 하루도 더 못 삐치겠습니다.” 상순은 머리를 끄덕이더니 권고했다.     “한족애들한테 머리를 숙이면서라도 잘 어울려 일해야지. 조선에 간다고 이밥이 하늘에서 떨어질 거 같니? 조선에 갔다가 돌아오면 자칫하면 조선특무나 민족우파로 몰릴 위험이 있다. 잘 생각해봐라.”  그러나 동선은 자기 생각을 돌리지 않았다. “삼촌, 내 재간으로 조선에 가서 얼마든지 기관사를 하면서 살 수 있습니다. 조선에 나가서 아버지네 고향 기차를 몰고 싶습니다. 아버지 고향에 돌아가서 굶어 죽어도 돌아오지 않겠습니다.” 상순은 다 큰 조카를 억지로 붙들어 둘 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한숨만 내쉬었다. 동선은 공부도 잘하고 글씨도 아주 곱게 써서 마을에 소문이 있었다. 게다가 키는 자그마해도 외까풀 눈을 굴리면서 어찌나 눈치 빠르고 역빠른지 다른 청년들은 따라 다니기 힘들었다. 금옥이네 칠군이랑 함깨 조선으로 장사를 가면 어느새 어디로 쭁드르르 빠져 나갔는지 모르게 돌아다니면서 물건을 팔고 돈을 척척 챙기곤 했다. 그는 외교에도 능해 촌구석에 박혀 살 사람이 아니라고 마을 어른들이고 친구들이고 혀를 끌끌 찰 지경이었다. 상순은 조카 동선과 공학을 자기 아들처럼 아끼고 믿고 살려고 했다. 그런데 공학이 몹쓸 병으로 해 훌쩍 떠나간 마당에 동선마저 조선으로 떠나가면 어떻게 하겠는가? 삼촌의 이런 심정을 읽은 동선은 위로의 말을 덧붙였다. “삼촌, 근심하지 마십시오. 이젠 삼촌에겐 덕돌이 있잖습둥?” 동선은 네 살 밖에 안 되는 덕돌을 품에 안더니 뽀뽀를 해주었다. 허나 상순은 세 귀 눈을 치뜨면서 나무랐다. “내 근심은 하지 말라. 허나 엄마는 어쩌니? 금방 아버지 세상 떴는데 엄마를 나어린 순애한테 맡겨놓고 조선으로 가니? 잘 생각해봐라. 조선에 가지 말고 엄마를 잘 모시면서 여기서 삼촌이랑 함께 살자.” 동선은 한숨을 후 내쉬면서 고집을 부렸다. “여기 있어 봤자 아버지처럼 굶어 죽을 수밖에 더 있습니까? 우파나 현행반혁명 모자를 쓰지 않으면 변화무쌍한 정치몽둥이에 맞아 죽을지도 어떻게 압니까?" 동선은 마음을 굳힌듯 정색했다.      "삼촌, 오랫동안 생각하고 내린 결심이니까.  더 말리지 맙소. 이제 조선에 가서 기관사를 하고 자리를 잘 잡으면 엄마와 삼촌을 모셔 내가겠습니다.” 상순은 한숨을 후 내쉬었다. “절대 날 조선에 데려간단 말을 하지도 말라. 함흥촌과 조개덕은 우리 두 번째 고향이야.  할아버지랑 너네 아버지랑 우리 조손3대가 저 소서구로부터 황무지를 개간하느라고 얼마나 고생했느냐? 난 이 두 번째고향 땅을 떠나지 않아.” 드디어 그는 동선을 더 말려야 쓸데없다는 것을 알고 마지막 부탁을 했다. “조선에 가도 항상 엄마와 순애를 잊지 말라.” “예. 불효한 조카를 용서합소.” 동선은 삼촌에게 절을 꾸벅 하고 일어났다. 상순은 떠나가려는 조카의 얼굴을 한참이나 바라보며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항상 독기 서린 세귀눈에 흐르는 뜨거운 석별의 정을 보고 동선도 돌아서며 눈물을 훔쳤다. 그는 돌아서더니 “삼촌, 덕돌이 모자를 쓰고 가깁소.” 라고 했다. 그러자 덕돌은 털모자를 벗어 몸 뒤에 숨기면서 몸부림쳤다.     “안되오. 내 털모자를 쓰고 가면 나는 어쩌오?”      동선은 덕돌을 훌 안아 들고 마주 보며 얼렸다.      “덕돌아, 이제 형님이 돈 많이 벌면 사탕과자를 하늘만큼 사줄게. 이 모자도 가져다줄게." 그제야 덕돌은 “형님, 꼭 내 모자를 가지고 오오. 양? 사탕과 과자를 꼭 사오지? 양?”라고 했다. 동선은 머리를 끄덕이면서 “그래, 꼭 사올게.”라고 했다. 그래도 시름이 놓이지 않는지 덕돌은 고사리 새끼손가락을 내밀면서 깍지걸이를 하자고 했다. “거짓말을 하면 안되오. 형님.” “그래 약속하마.” 동선은 덕돌을 안은 채 새끼손가락으로 깍지걸이를 하고 흔들었다. 동선은 잘 들어가지도 않는 덕돌의 자그마한 털모자를 억지로 꾹 박아 쓰고 길을 떠났다. 삼촌과 여동생들인 순애, 순자, 은숙 그리고 남동생 덕돌까지 떠나가는 동선을 마을 동구 밖에까지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바래였다. 지새금은 하나 밖에 남지 않은 아들마저 가는 길을 보기 싫어 바래러 나오지도 않았다. 동선이가 저 멀리 아래 마을 어귀에서 흑점으로 아물거리다가 사라질 때까지 상순과 친척들은 눈물을 머금고 손을 저으며 눈을 떼지 않았다.       동선이 조선으로 떠나간 후 상순이네 일가에 대한 지새금의 태도는 일변했다. 이전에는 순자랑 함흥촌에 올라가면 토성안 집의 큰집 큰어머니가 밥을 주지 않아 항상 셋째외할머니네 집에 가서 얻어먹곤 했다. 또 지새금은 이전에 동서인 명옥과도 물과 불처럼 생불을 켜고 욕설을 퍼붓곤 했다. 허나 동선이 간 후 처지가 뒤바뀌었다. 그녀는 이젠 시동생 네를 믿고 살아야 했다.       어느 하루, 광석 촌에서 사는 상순의 둘째매형 박범석과 둘째누나 김월금이 환갑을 쇠게 돼 순자와 홍자는 큰 집의 순애와 함께 간 적이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 순애는 입을 열자마자 또 삼촌댁의 허물을 하기 시작했다. “네 엄마 우리 할아버지를 굶겨 죽였다더라. 못된 아주머니야!” 너무 억울해 순자는 맞받아 욕했다. “네 엄마는 맏며느리라는게 어째 할아버지와 할머니도 모시지 않았니? 그래서 우리 아버지와 엄마는 둘째인데도 할아버지와 할머니, 막내고모까지 우리 집에 모셔 왔다더라. 3년 재해에 조부모를 모시느라고 우리 아빠와 엄마 얼마나 고생했는지 아니?” 허나 한 살 위인 순애도 녹녹치 않았다. “너네 아버지하구 엄마 둘째 돼가지고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우리 부모보다 더 잘 모실 것처럼 모셔갔기에 우리 부모가 온 동네에 얼마나 팔렸니? 마치 우리 부모가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잘 모시지 않아 모셔간 거처럼 되잖았니? 삼촌은 왜 그랬다니? 우리 부모와 사전에 토론도 없이 수레를 몰고 와서 모셔갈게 뭐야? 그 땜에 우리 부모 동네에서 얼마나 팔렸는지 아니? 정말 주책없이 놀았어.” 순자는 지려고 하지 않았다. “큰아버지 굶어 세상 뜨지 않았고 뭐야? 헌데 어떻게 할아버지와 할머니에 작은 고모까지 모시겠니? 그래서 우리 아버지와 엄마가 큰집 부담을 덜어주느라고 그랬다. 그것도 모르고 떠드니?” 그러자 순애는 말문이 막혀버렸다. 둘은 서로 소 닭 보듯 하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돌아가자마자 순애는 어머니에게 순자가 하던 말을 일러바쳤다. 후에 순자는 순애와 놀자고 큰집에 찾아갔다. 그는 속으로 전번에 순애와 싸운 일로 한바탕 욕먹을 거라고 생각하고 큰어머니 눈치를 살폈다. 허나 뜻밖에도 큰어머니 지새금은 아주 상냥하게 웃으면서 대하지 않겠는가.        “윗대 때문에 너희들까지 틀리면 되니? 이 다음부터는 외가집에 가서 밥을 먹지 말고 우리 집에 와서 먹어라. 내 없으면 너희들끼리 식장에서 꺼내 마음대로 먹어라!”        (아니, 맏엄마 어떻게 된 일인가?)        이전에는 맏아들 공학이 개산툰병원에서 의사질을 할 때 사카린을 혼자 먹으면서 동네에 나가 사카린을 조금만 넣어도 얼마나 단지 모른다고 자랑했다. 허나 시동생네를 한 숟가락도 주지 않았다. 허나 지금은 해가 서산에서 뜰 지경이 됐다. 새금은 밥도 먹으라고 하고 사카린도 냉수에 타서 냉국을 해 먹으라고 둬 숟가락 떠서 주기까지 했다. 순자는 돌변한 큰어머니 태도에 놀랍고도 반신반의했다. (정말 별 일이야! 깍쟁이를 쓰던 큰어머니가 불시에 부처님처럼 마음이 선량해지었단 말인가.) 순자는 생각할수록 우스웠다. 상순이 1년 사이에 아버지와 형님마저 여의고 조카 동선마저 조선에 보내고 마음이 아파할 때었다. 설상가상으로 웃새집의 큰아버지가 또 앓아누웠다. 웃새집 큰아버지 김창준은 그해에 82세였다. 항상 가슴까지 내리드린 흰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동네를 성큼성큼 돌아다니던 큰아버지가 불시에 앓아누웠다. 아마 동생과 조카 그리고 손자들이 연이어 돌아가는 바람에 심리적 타격이 심했을 수 있었다. 연 며칠 식사를 드시지 못하던 창준은 끝내 동생과 한해 동삼에 세상을 떴다. 상순과 상훈, 상길은 한해에 세 번이나 상을 치렀다. 그들은 비통한 나머지 목이 메여 울고 또 울었다. 밤이 깊어가도록 곡소리가 끝이지 않았다. 사흘만에 자손들은 비통한 마음으로 창준을 그가 생전에 피땀을 흘리며 개간하던 황무지밭이 쓸쓸히 누워있는 소서구 북쪽 산비탈에 모시었다. 명옥은 시집마을에 연이어 상치기 나는 것을 보고 마음이 아팠다. 다행히 본가집은 그간 그래도 무사히 보냈다. 오빠 근형은 효자였다. 그는 할아버지를 모시다가 둘째삼촌 경인이 할아버지를 효성을 다해 모시자 진수해를 떠나 화룡 시내에서 그리 멀지 않은 남가에 가서 혼자 살았다. 그새 근형 오빠는 맏아들 만길과 천길에 뒤이어 딸 송죽까지 보았던 것이다. 명옥의 동생 근룡은 열여섯에 항미원조 전쟁으로 나갔다가 복부에 부상을 입어 영예군인으로 됐다. 근룡은 농사일도 못했는데 체격도 좋고 인물도 좋은 처녀에게 장가를 들어 진수해에서 살면서 맏딸 정옥까지 보았다. 막내 동생 근삼은 큰형 근형의 맏아들 최만길과 명옥 누나의 둘째딸 은숙과 동갑이었다. 그들은 누가 삼촌이고 조카인지 구분하기 힘들게 허물없이 지냈다. 명옥과 상순은 병완 할아버지가 너무나도 괴로워 허연 수건을 머리에 질끈 동이고 자리에 드러누운채 일어나지 못해 근심이 태산 같았다. 병완은 자손들이 연 이어 저세상으로 떠나가자 극도로 비통에 빠져 식읍을 전폐하다 시피 했다. 자손들을 앞세운 아픔을 가슴에 묻고 더 살고 싶지도 않았다. 정말 죽지 못해 억지로 사는 괴로운 심정이었다.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창준과 기준, 상우의 원혼이 하늘에서 훨훨 날아다니는 것 같았다. 그 외로운 귀향 혼이 구름과 안개가 부서지듯이 흩어져 남으로, 남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하늘에서는 무정한 눈가루가 풀풀 흩날리고 있었다. 아니, 고향으로 날아가는 그들의 하얀 혼이 흩날리고 있었다. 아니, 고향에 대한 티없이 맑고 깨끗한 하얀 그리움이 흩날리고 있지 않겠는가! 며칠 전까지만 해도 하늘에는 물고기비늘, 룡비늘을 련상케 하는 구름이 둥둥 떠다녔다. 상순은 그 구름을 쳐다보면서 하늘을 원망하며 막연한 생각도 했었다. 저도 몰래 허구픈 웃음을 웃었다. (하늘엔 물고기도 많건만 하늘도 무심하지. 어쩜 사람 사는 인간세상에는 물고기는커녕 입에 풀칠할 쌀알도 없는가. 하느님이여, 좀 우리 백성들이 먹고 살 하늘에라도 흔한 그 물고기랑 룡이랑 내리뜨려주옵소서.)    그는 어깨가 무거워나는 것을 온 몸으로 느겼다.    (우리 중국과 조선 인민들은 그 얼마나 백성들이 배불리 먹으며 잘 살 수 있는 새 사회를 갈망했는가. 그 새 사회를 맞아오려고 그 얼마나 많은 선렬들이 일본 놈과 미제 양키들과 싸우다가 장렬히 희생되였는가.)    큰아버지 성칠, 큰어머니 김하옥, 최구철, 엄상호, 엄은희, 이병호, 득호, 림호, 최형철, 조철호... (그러나  오늘 숱한 사람들이 굶어 죽어가지 않는가!)       아버지 김기준, 둘째큰아버지 김창준, 형님 김상우... (선렬들이 보면 얼마나 마음 아파하겠는가? 백성들이 굶어 마구 쓰러지지 않는가? 당지부 서기인 내게 책임이 제일 많다. 서기가 얼마나 잘 령도했으면 숱한 사람들이 굶어 죽어가겠는가. 어떻게 하나 백성들이 배불리 먹고 사는 행복한 새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모든 지혜와 힘을 바쳐야 할 때가 왔다.) 상순은 마음 속으로 굳은 결의를 다지고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성큼성큼 토성안 대대 사무실로 걸어갔다.                                                             12. 빗발치는 정치몽둥이 마을에서 숱한 사람들이 제대로 먹지 못해 얼굴이 퉁퉁 부은 채 주린 배를 끌어안고 집체식당으로 몰려갔다. 그런 지루한 세월이 흐르자 이집 저집 식구들이 까무러치고 북망산에 가는 일이 자주 일어났다. 자연재해로 마을에 자주 곡성이 처량하게 들리고 인심이 뒤숭숭해졌다. 인심이 각박하다 못해 사람이라도 마구 잡아먹을듯이 살벌해져갔다. 설상가상으로 민족우파를 타도하는 정치폭풍이 사납게 불어쳐 조선에서 이사해온 마을 사람들은 모두 목을 움츠렸다. 무슨 정치몽둥이 날아오겠는지 모를 일이 아닌가. 반민족우파 몽둥이가 이번에는 진수해공사 당위 서기 허백호와 조개덕대대 당지부 조직위원 진달래에게 날아들었다. 허백호는 이른바 도처에서 조선족의 우량한 전통과 중국 혁명에서 조선족의 공훈을 너무 떠들어댔고 조선족을 이 땅의 진정한 주인이라고 말한 죄로 민족우파 고깔모자를 쓰고 온 공사 탈곡장을 돌아다니면서 투쟁당하는 판이었다. 신임 공사 당위 서기 박우성이 허백호 서기를 고깔모자를 씌워 조개덕의 탈곡장에 떠밀고 들어서더니 목에 지렁이 같은 핏줄을 세우고 고래고래 고함쳤다. “오늘부터 우리는 민족우파 허백호를 투쟁하겠습니다.” 박우성은 동북군정대학 시절 상순의 동창생이었다. 그는 일찍 일본까지 유학했었다. 허나 상순은 숱한 사람들 앞이라 박우성과 그저 눈인사만 했다. 허백호가 고깔모자를 쓴 것을 보고 상순은 속으로 “싼 통 했다.”고 욕했다. 박우성은 사원들 앞에 우파분자 오옥선과 박성근, 이 화영, 그리고 이른바 민족우파들인 허백호, 허영주, 진달래에게 고깔모자를 씌워 지주 장학산과 그의 아들 장충국,  악질지주 지학사의 아들 지괴호 등과 한 줄에 세워놓고 투쟁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빗발치는 총포탄 속을 헤가르며 토비와 미제 특무들과 싸워온 허백호와 항일전쟁시기 일제 놈들과 돌멩이로 싸운 진달래를 지주들과 한줄에 세워놓고 투쟁하는데는 모두들 도리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나 모두 감히 말하진 못하고 그저 눈치만 흘끔흘끔 볼뿐이었다.        그러나 진달래는 너무나도 억울해 욕설을 퍼부었다. “항일유격대 중대장인 내가 목숨을 걸고 일본 놈들과 싸웠는데 무슨 죄가 있다고 투쟁해?” 병완은 항일투사 진달래를 지주들과 함께 투쟁한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아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그리하여 박우성을 조용히 한쪽으로 데리고 가서 넌지시 말을 건넸다. “저 진달래는 무슨 죄가 있다고 지주들과 함께 투쟁하오?” 그러자 박우성 서기는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아니, 촌당지부 서기가 이렇게 정치두뇌가 명석하지 못하니 어떻게 합니까? 진달래 전 남편은 남조선 특무가 아닙니까? 그러니 특무의 새끼를 낳은 진달래는 남조선 특무입니다. 지주보다도 더 나쁜 우파입니다. 우리 공산당이 영도하는 사회주의 조국을 허물고 뒤엎으려고 미쳐 날뛴 국제 원수입니다. 잔말을 마십시오. 자칫하면 영감도 민족우파로 몰리어 투쟁 받을 수도 있습니다.” 병완은 상순과 박우성을 번갈아 보며 중얼거렸다. “항일전쟁에서 목숨을 내걸고 일본 놈들과 싸운 항일유격대 중대장을 어떻게 지주들과 함께 투쟁하오?” 그는 괴어오르는 불만을 가까스로 눅잦히면서 진달래를 돌아보다가 제자리에 가서 맥없이 주저앉았다. 흥수가 이번에도 앞장서 “우파분자들을 타도하자!” 하고 높이 외쳤다. 군중들은 주먹을 쳐들고 구호를 부르는 척 했다. 그들은 고깔모자를 쓴 허백호 서기와 진달래를 보는 순간 구호를 부르고 싶은 마음도 힘도 없었다. 그렇게 개 잡은 포수처럼 우쭐하던 허백호도 우파로 몰리어 투쟁 받는 판이었다. “이제 또 누가 투쟁을 받겠는지 아오?” 뒤에서 군중들은 쉬쉬 했다. 상순은 앞장서 구호를 부르는 흥수를 쏘아보다가 눈을 스르르 내리감고 머리를 숙인 채 덤덤히 앉아 있었다. (허영주 사장이나 진달래에게 무슨 죄가 있단 말인가? 허백호 서기는 반우파투쟁 때 흥수를 추동질해 밉게 놀았지만 억울한 일면도 있었다. 그래 허백호 서기가 조선족들이 이 땅의 주인이라는 것이 틀렸단 말인가? 이 땅을 개척하고 보호하기 위해 우리 조선족들이 쪽박을 차고 두만강을 건너와 흘린 피땀이 적은가? 그래 우리 조선족들이 이 땅의 주인이 아니란 말인가? 그래 우리 조선족에게 우량한 민족전통이 없단 말인가? 죄를 들씌우다 못해 별 거 다 들씌우는구먼.) 상순은 이해되지 않았다. 하지만 입에 빗장을 지른채 눈을 내리 감고 덤덤히 앉아 있었다. 구호소리가 멎자 박우성 서기가 연설했다. “우리는 반우파투쟁을 끝까지 벌려야 합니다. 잡귀신 같은 우파분자들은 우리 중국 공산당을 악독하게 공격하고 모독했습니다. 이런 잡귀신들은 생기는 족족 제때에 잡아 없애 버려야 합니다.” 박우성 서기는 개를 잡은 포수처럼 우쭐해 뒷말을 이었다. “진달래는 항일투쟁 때 공훈을 세운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의 본 남편 김용천은 항미원조 전쟁 때 남조선 특무가 아닙니까? 그 놈은 장백산 지구에 기어들어 우리 후방을 파괴하고 나아가서 갓 태어난 우리 사회주의 조국을 뒤엎으려고 미쳐 날뛰었습니다. 그래 남조선 악질특무의 새끼 김경주까지 낳은 진달래를 투쟁하지 않고 누굴 투쟁하겠습니까?” 그때 병완이 벌떡 일어나 고함쳤다. “박 서기, 한 가지만 물어 보기요.” 박우성은 낯이 백지장처럼 바래지더니 쌍까풀눈을 뚝 부릅뜨고 병완을 쏘아보았다. 병완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진달래는 항일투사 김성칠의 아들 경수를 낳았는데 그것도 죄오? 성칠은 항일유격대 대장이자 조선인민군 연대장이었소. 항일유격대 대장, 조선인민군 연대장의 후처로 된 진달래를 그래 우파라고 할 수 있소?” 박우성은 돌처럼 굳어졌던 백지장 같은 얼굴 표정을 느슨히 풀더니 희죽이 웃으며 병완을 마주 바라보았다. “예~ 김 서기 잘 말했습니다. 우리 미처 생각하지 못한 문제를 잘 제기했습니다. 모자를 씌워도 알맞은 모자를 씌우는 게 옳습니다.” 그러자 군중들의 눈길은 일제히 박우성 서기의 나풀거리는 입술로 집중됐다. 박우성은 군중들의 따끔한 시선을 둘러보더니 목청을 돋우어 고함쳤다. “여러분, 진달래의 본 남편 김용천은 남조선 특무고 후남편 김성칠은 조선인민군 연대장이고 렬사입니다. 진달래는 남조선 특무와도 살았고 북조선 장교와도 살았습니다. 지금 한창 북조선 특무도 잡아내라고 합니다. 내가 조사한데 의하면 진달래는 사회주의 중국에 마음을 두지 않고 수차 조선에 드나들었습니다. 표현을 보면 남조선 특무보다도 북조선 특무일 가능성이 아주 많습니다. 때문에 오늘부터 진달래의 조선 특무 혐의를 조사해야 하겠습니다.” “뭐라고?” 진달래는 박우성을 쏘아보며 언성을 높였다. “내가 장백산에서 일본 놈들과 싸울 때 당신은 일본에 가서 공부를 한 선비에 불과해요. 당신이야 말로 일본 특무 혐의가 있어!” 그러자 박우성은 억이 막혀 물려고 드는 개 주둥이처럼 짝 벌리고 불길이 이글거리는 쌍까풀눈으로 진달래를 쏘아보았다. “개도 미치면 생사람을 문다더니. 이거야 말로 참!” 박우성은 진달래를 더 조겨 보았자 자기에게 불리할 것 같아 이번에는 허백호 서기를 돌아보며 투쟁하려고 들었다. 그때 진달래는 계속 박우성을 공격했다. “내 모르는 것 같아? 넌 일본 나고야대학까지 나오지 않았나? 진짜 일본 놈들이 파견한 일본 특무 맞지?”        박우성은 울상이 돼 쌍까풀눈을 흘기며 발설했다. “내 일본 나고야대학을 나왔지만 반당 언론을 퍼뜨린 일은 없소.” “지금 어디 우파 언론을 퍼뜨려 우파로 되는가? 정규상을 봐라. 일본유학도 하지 않고 장춘에서 일본 국비생으로 공부했다고 우파로 됐는데?” 박우성은 극력 자기에게 날아오는 올가미를 벗어 버리려고 발버둥질을 쳤다. “아, 정규상과 내가 어떻게 같은가? 정규상은 듣는 말에 의하면 일본의 총애를 받아 국비생이 됐는가 하면 공산당 조직에 12가지 의견이나 종합해 제기했다는구먼. 그러니 반당 우파분자로 몰리지. 허나 난 일본 나고야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후 군정대학에서 맑스-레닌주의와 모택동 사상을 계통적으로 학습하고 왕청 같은 산골에 가서 사회주의 농촌을 건설했고 줄곧 중국 공산당에 충성했소. 우파 놈들이 깨끗한 공산주의자를 모욕하고 중상하지 말라.” 박우성은 따발총처럼 끝없이 을러멨다. “네 놈 우파들이 오히려 나를 투쟁하려고? 어림도 없어. 도적을 잡아도 우두머리를 족치라고 허백호 서기부터 타도해야 한다.” 그는 허백호의 멱살을 틀어쥐고 호통 쳤다. “여실히 탄백해라! 네 놈은 누가 소개해서 우파로 됐니?” 이때 허백호 서기가 목에 지렁이 같은 핏줄을 세우고 고함쳤다. “우파도 누가 소개해 되는가? 당신이 내 자리를 차지하고 편안할 거 같은가?” “아, 이 놈, 언감 공사 서기와 대들어?” 박우성은 질서를 유지하려고 따라 온 파출소 경찰들에게 머리를 돌렸다. “허영호 소장, 뭘 하오? 이 우파분자들의 입을 틀어막소! 이 놈들이 주둥이를 자꾸 벌려서 어디 투쟁대회를 정상적으로 하겠소?” 허나 허영호 소장은 멍해 자기 사촌형 허백호 그리고 허영주 사장 등을 둘러볼 뿐이었다. 박우성은 기다리다 못해 꽥 소리쳤다. “허 소장! 뭘 하오?!” 민경들은 모두 허 소장의 눈치를 살폈다. 허영호 소장은 두 팔을 펴보이었다. “박 서기, 입을 틀어막을 수건이 있어야 틀어막지?” 박우성은 쌍까풀눈을 허백호에게 돌렸다. “넌 서기로 있을 때 전 공사 숱한 생산대대의 빈농들이 굶어 죽게 한 죄가 있다. 총살해도 시원찮을 놈이야! 지주보다도 죄가 더 한 악질 우파분자야!” 그 말에 허영주 사장이나 허백호 서기나 모두 놀라했다. 장충국은 옆에 서 있는 진달래를 슬쩍 다치며 시원해 눈을 질끈 감아보이었다. 진달래는 장충국을 가로 보았다. 장학산은 장충국을 그러지 말라고 눈짓하더니 박우성과 민경들의 눈치를 보았다. 지주들은 허백호 서기와 허영주 사장 그리고 항일투사이며 토지개혁 때 촌 간부 진달래까지 고깔모자를 쓰고 자기들과 함께 투쟁을 받게 되자 속으로 시원해 하는 눈치였다. 간부들을 투쟁하는 사이에 지주들은 편안하게 서서 구경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박우성은 허백호 서기를 물고 늘어졌다. “허백호는 대약진이란 붉은 기치를 내걸고 왕청 같은 짓을 했습니다. 심갱밀식농사법이란 구호를 내걸고 둼을 한자 깊이로 파묻고 그 위에 옥수수를 심었으니 아까운 소서구 밭에서 쭉정이도 거두지 못하게 했습니다. 이 놈은 심갱밀식농사법을 반대한 허영주 사장을 우파로 몰아 타도했습니다.” 그 말에 병완이나 허영주 사장이나 상순이나 모두 머리를 들었다. “결과 어떻게 됐습니까? 숱한 빈농들이 3년 재해 기간에 굶어 세상을 떠나는 비극을 재연했습니다. 그들은 일제의 철 발굽 아래에서도 길가의 민들레처럼 짓밟히면서도 살아서 두만강을 건너 이 곳에까지 온 우리 인민들입니다. 어떤 인민들을 굶어 죽게 했습니까? 그래 우파 조건이 안 된단 말입니까?” 그제야 군중들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이때 흥수가 나서 구호를 불렀다. “계급투쟁을 잊지 말자!” 군중들은 흥수를 따라 구호를 높이 불렀다. “우파분자 허백호를 타도하자!” 허백호는 점점 머리를 숙였다. 그 옆에 선 허영주 사장은 머리를 점점 들었다. 박우성은 허영주 사장의 손을 잡으면서 정중히 말했다. “허 사장, 고생했습니다. 얼마나 억울했습니까? 내 상급당위에 회보해 허 사장에게 억울하게 씌워진 우파 모자를 벗겨달라고 청시할 예산입니다. 허영주 사장이야 말로 조선의용군 지하간부이고 빨찌산 항일투사입니다. 당신이야 말로 토지개혁공작대의 우수한 간부이며 우리 인민공사의 훌륭한 사장입니다. 내 꼭 우파 모자를 벗겨 주겠습니다.” 그러자 허영주는 박우성의 손을 잡고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박우성은 이번에는 병완과 상순을 일일이 찾아 손을 잡고 흔들며 말했다. “그간 저 우파분자 허백호 때문에 얼마나 고생했습니까?” 병완은 박우성의 갑작스레 태도변화에 덤덤히 서 있었다. 허나 상순은 자기 손을 잡은 박우성의 손을 꽉 잡아 흔들었다. “여보, 반장, 당신이 우리 공사 당내 문제와 우리 마을 농사문제에 대해 정확하게 보니까 시름 놓이오.” 병완은 태도 표시를 소홀히 하는 것 같아 손자 상순에게 턱을 가로 저으며 눈짓했다. 그날 투쟁대회는 허백호를 투쟁하는 바람에 군중들이 잘 동원됐다. 특히 흥수가 투쟁의 앞장에 서는 바람에 모두들 그를 두고 정치투쟁의 급선봉이라고 했다. 그 덕분에 흥수는 함흥 촌 당 지부의 동의와 공사당위의 비준을 거쳐 정식으로 입당했다. 이전에는 병완과 상순이 동의하지 않아 입당을 하지 못했다. 허나 이번에는 상순이가 조개덕에 내려간데다가 병완마저 박우성 서기의 지시를 듣고 흥수의 입당을 동의했던 것이다. 새로 입당한 흥수는 어깨가 으쓱해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정치투쟁에 더욱더 열성을 부리었다. 그는 함흥대대를 틀어쥐려고 자기 주위에 얼치기 "정치인"들을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두만강변에서 갓 이사해온 황종연과 황승연 형제를 제일 먼저 자기 밑에 끌어왔다. 황종연과 황승연 형제는 갓 제대한데다가 주먹은 셌다. 하지만 어려서부터 부모 없이 자라서 버릇이 없었다. 그는 흥수 지시가 떨어지기만 하면 쩍하면 주먹을 휘둘러 사람을 다치게 했다. 진달래네 두 아들 경주와 경수는 애들에게 “우파”, “남조선 특무, 북조선 특무 아들”이라고 놀리음을 당해 머리를 들고 학교를 다니지 못했다. 상순은 동창생인 박우성의 사무실을 찾아가 시비를 가르자고 했다. 박우성은 십중팔구는 통사정을 들이대리라고 진작 짐작하고 손사래를 쳤다. “어째 왔소? 그 조선 여자특무를 놔달라고 사정하자고? 안 되오. 이게 어느 때오? 양? 어디 동창생의 사정을 봐줄 때오?” 상순은 물러서지 않았다. “박 서기, 난 동창생 개인감정으로 사정하는 게 아니오.” 상순은 박우성의 맞은 켠 걸상에 척 앉아 자세를 바로 잡아 앉았다. 보아하니 단단히 해 낼 잡도리인 것 같았다. “사실 진달래는 진짜 항일빨찌산 여중대장이었어…” “됐소, 돼. 또 묵은 그루에 이밥 먹던 소리군. 누가 옛날 진달래가 목숨 걸고 일본 놈들과 싸운 걸 모르오? 지금 표현을 봐야지. 그는 남조선 특무 아내요. 또 조선인민군 연대장의 아내요. 사회관계가 얼마나 복잡하오? 그는 확실히 남조선 특무와 북조선 특무 혐의가 있소. 잘 조사해봐야 한단 말이오.” 상순은 책상을 탕 치면서 세 귀 눈을 무섭게 치떴다. “마구 모자를 들씌우지 마오! 제발 생사람을 잡지 마오.” “뭐라고?!” 박우성도 책상을 꽝 치면서 벌떡 일어났다. “이 동무 이게, 아무 말이나 마구 하겠소? 내 언제 생사람을 잡았단 말이오?” 상순은 좀 언성을 낮춰 도리를 따졌다. “남조선 특무의 아내라고 해 한국특무라고 할 수 있소? 조선인민군 연대장의 아내라고 해서 마구 북조선 특무라고 하면 되오? 그게 생사람을 잡는 게 아니고 뭐요? 항일투사들과 당 간부들을 지주들과 한 줄에 세워놓고 투쟁해서야 되오? 그렇게 정치두뇌가 명석하지 못하고서야 어떻게 공사 당위 서기를 하오?” 그 말에 박우성은 피씩 웃었다. “그렇게 정치두뇌가 명석한 자네가 왜 우리 공사 당위 서기를 하지 못하오? 난 그래도 허영주 사장을 상급에 말해 우파 모자를 벗겨주겠소. 내처럼 공정하게 처사하는 간부가 어디 있소?” “그 일은 참 잘 처리했소. 그래서 빈농들은 당신을 믿기 시작했소. 진달래 동지의 억울한 모자도 벗겨주란 말이오. 진달래 동지는 우리 당이 오랫동안 고험한 훌륭한 동지요. 절대 특무가 아니오. 난 당성으로 담보할 수 있소. 이전에 그의 전 남편 용천이가 우리 함흥 촌에 기어들었을 때 남조선 특무라른 것을 알고 돌멩이를 날려 전 남편의 머리를 까서 우리 민경들이 붙잡게 도왔댔소.” “그건 발뺌일 수도 있소. 내 생사람을 잡지 않는다는 것만은 믿어주오. 진달래 문제는 꼭 사실대로 밝혀질 게요. 기다려 주오. 또 내 혼자 마음대로 규정할 수도 없는 거고.” 상순은 박우성의 딱한 처지도 알았다. 프로수를 정해 놓고 우파 분자를 잡는 세월에 박우성인들 명액에 든 우파 분자를 놓자고 하겠는가! 상순은 박우성이 점심을 먹고 가라는 것도 밥맛이 없어 집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며칠 후 진달래가 경수만 데리고 감쪽같이 어디로인가 사라졌다. 병완은 곰방대에 담배를 꾹꾹 눌러 넣고 불을 달아 물었다. 속이 탄 연기가 꾸역꾸역 타래치며 방안에 꽉 들어찼다. (두만강이 얼었지. 그래, 우리가 두만강을 건너 여기로 올 때에도 두만강이 얼어붙어 쉽게 건넜지.) 그는 엉거주춤 일어나더니 눈보라 기승치는 바깥을 내다보며 중얼거리었다. (지독한 년, 어쩜 시부모와 말 한마디 없이 달아난단 말인가? 못된 년, 용천의 새끼는 자기 새끼 아닌가? 자기 살 도리만 하고 경주는 어쩌고? 우린 어떻게 살라는 거야? 네년이 달아나면 조선특무라는 때를 영영 벗지 못할 게 아니야?) 병완은 땅이 꺼지게 한숨을 후- 내쉬었다. 창 밖에 저 멀리 상순이 허둥지둥 찾아들어서는 것이 눈에 뜨이었다. (나는 앞날이 멀지 않지만 저 상순은 어떻게 더러운 때를 쓰고 한뉘 살겠는가? 경주는 어떻게 살겠느냐?) 병완은 집에 들어서는 상순을 보고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경주를 어쩌느냐?” 그는 상순에게 한마디 하고 엉거주춤 일어나더니 불쌍한 막내손자 경주를 보러 바깥으로 나갔다. 상순도 도리머리를 흔들면서 할아버지를 따라 진달래네 집으로 내려갔다.      병완이 진달래네 집 안에 들어서니 덕성 영감이  경주를 붙안고 서럽게 울고 있었다.      "경주야, 엄마 없이 혼자 어떻게 살려나? 가자 작은햘배네 집으로 가자."    병완도 어시 없는 경주를 보고 콧마루 시큼해나 머리를 쓰다듬었다.    경주는  열댓살 밖에 안됐지만 키는 덕성 영감 어깨를 넘어섰다. 그래도 덕성은 어미, 애비 없이 홀로 난 그 손자가 불쌍해 자기 집에 데려다 키울 예산하는 것이었다. 병완은 서로 붙안고 우는 덕성과 경주를 바라보며  땅이 꺼지게 한숨을 내쉬었다.   창 밖에서는 윙윙 눈보라만 사납게 휘몰아쳤다. 엄동설한 폭풍이 온 대지를 하얗게 실망으로 물들이며 사납게 파도치며 덮쳐왔다.  
135    대하소설 진달래 소야곡(7) 댓글:  조회:1450  추천:1  2018-01-09
                                 12. 복도에서 벌어진 희극 휘몰아치는 눈보라에 몸부림치는 백양나무가지에서 눈송이들이 주정을 부리면서 맥없이 떨어졌다. 희읍스름한 창 밖 하늘이 음침하게만 느껴졌다. 성호는 침대에 누워 맞은 켠 승호의 빈 침대를 보면서 착잡한 생각에 잠겼다. (다 끝났어. 사랑은 티 없이 맑고 깨끗한 두 심장으로 연주하는 멜로디야. 사랑의 진실은 결국 순정인 거야. 은영은 이미 모든 걸 승호에게 짓밟혔어.) 성호는 저도 몰래 눈물을 줄 끊어진 구슬처럼 줄줄 흘리면서 베개잇을 적셨다. 이제껏 공부도 제대로 하지 않고 추구해온 사랑을 놓치자 절망감을 느꼈다. 천길 나락에나 떨어지는듯이 눈앞이 캄캄해났다. 사랑하는 은영이 색마에게 정조마저 무참히 짓밟힌 것으로 하여 칼로 심장을 도려내는듯이 아팠다. (불 보듯 빤하지 않은가. 은영은 정조를 바친바 하고는 죽든 살든 승호에게 달라붙어 살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러찮으면 승호가 경옥과 홍희와도  사귄다는 걸 알면서도 승호한테 빌붙을 수 있겠는가.) 성호는 모진 진통을 겪은 후 한숨을 후~ 내쉬였다. 더는 은영을 괴롭힐 수  없어 놔줄 수밖에 없었다. 순간 성호는 이상하게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다만 목숨을 걸고 열렬히 사랑했던 은영을 잃은 진통과 더불어 은영의 암담한 미래가 근심스러웠다. 색마가 미리 파놓은 함정에 은영을 빠지게 놔두는 것이나 다름없어 마음이 고달팠다. (나한테 시집오면 고생이지. 농민의 아들이여서 물려받을 재산은 없는데다 설상가상으로 시부모를 모셔야지. 또 아홉이나 되는 시형과 시누이들 속에서 어떻게 눈치를 보면서 시집살이를 한단 말인가. 씨원히 잘 됐어. 사랑하는 은영을 데려다 고생시키잖아 대행이야.) 그는 승호가 색마의 본성을 고치고 은영을 진정으로 사랑해줄 것을 기대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젠 성호는 승호와 사랑의 라이벌로부터 옛날처럼 친구로 되돌아가고 싶었다. 그러나 승호가 자기를 “농부의 아들”이라는지 “촌뜨기”라는지, “농포”라는지, 소궁둥이를 치던 “목동”이라는지 뭔지 하면서 깔보는 것이 마음에 앙금이 가라앉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개자식, 언젠가는 농부 아들의 짯짯한 맛을 보여 줘야지.) 성호는 자리를 툭툭 털고 일어나 바깥으로 나왔다. 울적한 기분과 홀가분한 마음이 반죽할 때 어디에 가서 술로 쓸쓸한 기분을 달래고 싶었다. 그는 눈보라가 룡트림하는 큰 길에 나섰다가 주춤 멈춰섰다. 호주머니를 뒤져보아도 달랑 동전 몇잎 밖에 없었다. “이게 바로 농부 아들의 설음이구나.” 그는 숙사로 되돌아가다가 또 주춤 멈춰 섰다. (선화네 음식점으로 가볼가? 술은 외상으로 얼마든지 마실 수 있는데.) 그 생각도 인차 접었다. (아니야, 난 절대 승호처럼 허위적인 사랑을 미끼로 처녀애들의 마음과 육체를 사기칠 수 없어. 에라, 그만두자. 술을 마시지 못하면 말라지. 공을기처럼 선술집에 가서 땅콩 한접시에 외상으로 소주 한잔 쪽 마실 순 없어.) 성호는 아무리 농민의 아들이라고 해도 70년대 땅을 밟고 하늘을 떠인 사내대장부, 아니, 농민출신 대학생의 기개마저 접고 싶지 않았다. “오빠, 어디 갔다 와요?” 등뒤에서 느닷없이 들리는 처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해연이 아니겠는가. (오빠라니? 한살 이상 돼가지고.) 성호는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꿀꺽 삼키고 건성으로 대답했다. “산보를 나왔소.” 해연은 오가는 대학생들을 개의치 않고 다가서면서 속삭였다. “전번에 대학교 식당에 출근한다고 말한 거 같은데요.” “오, 깜빡 잊었구나.” 해연은 주위를 둘러보더니 성호에게 바싹 다가와 은근히 귀속말로 소곤거렸다. “내 식당 책임자로 발탁됐거든. 식당에 다른 학생들이 없을 때 조용히 찾아오라고. 채를 듬뿍 담아줄게.” “음.” 해연은 성호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종알거렸다. “어째, 오빠 얼굴기색이 좋잖군요. 무슨 일이 있는가요?” 성호는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해연은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더니 성호의 팔소매를 잡아끌었다. “우리 어디 가서 한잔 마실가?” 성호는 속으로는 때마침 잘됐구나 하면서도 능청을 떨었다. “식당 책임자가 출근시간에 술 마시면 되오? 어서 출근이나 하오.” “식당 일이야 아래사람들이 하지 않을라고? 길에서 이러지 말고 어서 가기요. 내 한잔 내죠.” 성호는 못 이기는 척하면서 끌려갔다. 해연은 성호를 끌고 또 선화네 선녀음식점으로 갔다. “아니, 오빠 오랜만이구만요.” 선화는 음식점에 들어서는 성호를 보고 아양을 떨다가 뒤에 따라 들어서는 해연을 보고 새침해졌다. 보름달 같은 얼굴에 질투의 그림자가 파도치며 스치고 지나가기까지 했다. “음식점이 잘 되니?” 해연의 물음에 선화는 건성으로 “그래, 너까지 도와준 덕에 밥이나 먹을 수 있지.” 하고 대답했다. “오빠, 뭘 잡숫겠어요?” “농부네 아들이야 주는대로 먹지 뭐.” 선화는 아주 정색해서 종알거렸다. “천만에 말씀, 대학생오빠 뒤에 처녀들이 줄지어 따라다니는데. 우리 음식점에 자주 오세요. 무료로 잘 대접할 테니까.” 해연도 뒤지지 않으려고 했다. “야, 우리 별로 공짜로 얻어먹으러 온 거 같구나. 후에 다신 오지 못하겠어.” 해연의 말에 선화는 저쪽으로 가서 복무원처녀를 보냈다. 해연은 돼지고기, 소고기, 개고기에 물고기 채를 시켜 한상 차리는 판. “언제 다 먹겠소? 랑비하지 마오.” “다 못 먹으면 비닐봉지에 싸서 숙사에 가지고 가서 잡수세요.” 이윽고 진수성찬이 상다리 부러지게 올라왔다. 성호는 기분이 울적한데 해연이 권하는 술을 한잔, 또 한잔 마시다나니 얼근이 됐다. “고맙소.” 성호는 해연의 술잔과 댕그랑 부딪치고 한잔 또 쭉 굽내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손님들이 시글버글한데 선화가 주방에 들어가 맴돌고 있었다. 성호는 고개를 돌리더니 해연의 손을 덥석 잡았다. 해연은 놀라 반사적으로 손을 빼려다 말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해연이, 누나, 정말 고맙소.” 해연은 손을 빼면서 나직이 중얼거렸다. “누나? 취했어? 누나는 무슨 누나? 애인이라면 안돼요?” 성호는 취기가 오른 얼굴에 희죽이 웃음을 짓다 말았다. “난 농민의 아들이란 말이요. 부모를 모실 효자. 허허허. 누가 나한테 와서 개고생을 하겠소?” 성호는 술병을 쥐어 꿀꺽꿀꺽 마셨다. “이러지 마세요. 취하겠어요. 난 그런 개고생을 하고 싶은데 어쩌지?” “바보. 아직도 포기하지 않았어?” “난 당신의 바보로 되고 싶어요. 농촌에서 돼지치기랑 하면서 살면 재밌을 것 같은데.” 성호는 도리머리를 홰홰 저었다. 해연이 술병을 빼앗을 때 선화가 오이랭채를 한접시 들고 사뿐사뿐 다가왔다. “한잔 따라도 괜찮지요?” 해연이 상을 찡그렸다. “얘, 이제 와서 뭐야? 오빠 취하겠어.” “괜찮아.” 성호는 술잔을 선화 앞에 내들었다. “로동자처녀들이 좋아. 순박하고 진심이란 말이야. 안 그래?” 성호는 해연과 선화를 번갈아보면서 떠들어댔다. “자, 한잔 주오. 선녀의 술을 천잔, 만잔 마시고프오.” 선화는 해시시 웃으면서 유리잔에 술이 찰찰 넘치게 따라 두손으로 손수 올렸다. “자, 선화 한잔, 해연도 한잔.” 성호는 술병을 들어 선화와 해연의 잔에 술을 따랐다. “난 농민의 아들이지만 처녀부자라니까. 하하하. 대학생처녀들과 사귀지 않을래. 순박하고 진심인 식당 누나들과 친하겠어.” 선화와 해연은 서로 눈길을 마주치더니 성호의 잔과 댕그랑 부딪치고 한잔씩 쭉 굽냈다. 선화는 해연과 동창생인지라 스스럼없이 개고기점을 집어 성호 입에 넣어주었다. 성호는 볼이 미여지게 우물우물 씹어넘겼다. “선화, 요즘, 내 동창친구 자주 다니오?” “오빠 심통한 그 친구 말이죠?” “그래. 그 꺽다리친구.” “거의 사흘 건너 한번 온다면 섧다 할 지경이지요. 그 량반 녀자친구 많더구만요. 번마다 다른 녀자친구를 데리고 오던데요. 뭘 하는 집 자식인지 돈도 물 쓰듯 하던데요.” 성호는 대개 짐작이 갔다. “그래, 체육머리를 한 녀자애도 데리고 왔지?” “맞아요. 보름달처럼 얼굴이 동그란 처녀애도 데리고 왔는데. 뭐 ‘홍희’라고 하는 같던데요. 점심에 데리고 온 굽슬굽슬한 체육머리를 한 녀자보다 더 어리고 예쁘던데요. 그 꺽다리 말이요. 메부리코를 어데가 다쳤는지 반창고를 더덕더덕 붙이고 왔던데요.” 꽝! “어마나!” 해연과 선화는 이구동성으로 비명을 질렀다. 해연은 손으로 입을 막았고 선화는 두 손으로 머리를 싸쥐였다. 성호가 주먹으로 술상을 내리친 바람에 술병이 땅바닥에 떨어져 박살났다. 개고기 국물도 주르르 흘러 땅바닥에 떨어졌다. “왜 이래?” 선화가 의아해 성호를 마주 바라보았다. “미안하오. 그만…” “이젠 돌아 가자요.” 해연은 결산까지 하고 성호를 부축해 음식점에서 나갔다. 등뒤에서는 선화가 “안녕히 가세요. 또 오세요.”하는 간드러진 인사말이 묻어났다. 바깥은 벌써 칠흑같이 캄캄했다. 눈보라가 기승을 부리면서 엄습해도 성호는 예쁜 해연이 동무해주는데다 술기운에 추운줄 몰랐다. “우리 공원에 들어가 놀가?” “미쳤어? 이 추운 겨울에 뭘 놀아?” “눈싸움을 해볼가?” 성호는 해연에게 팔을 맡기고 비칠거렸다. “싸움은 끝났어. 끝났단 말이야.” “뭘? 눈싸움을 하지도 않고 벌써 끝났어?” 성호는 취기가 버쩍 올라 제 좋은 소리를 쳤다. “결투는 끝났단 말이야. 그 놈새낀 소나무에 처박혀 죽다 살아났어. 허허허. 제깐 놈이 시내에서 자랐노라고 우쭐거려도 이 굴 뱀을 이길 수 있어. 뭐? 호랑이라고? 허허허. 룡호상박이라. 거죽 밖에 없는 호랑이는 이 왕의 후손인 룡을 이기지 못한단 말이야. 종이범이 룡을 이길 수 있어? 허허허.” 해연은 듣고도 무슨 소린지 몰라 어안이 벙벙해 성호를 쳐다보며 앞으로 걸어갔다. (이렇게 추운 날에 길에서 취해 쓰러지면 어쩌지?) 해연은 손목시계를 들여다보고 식당 근처에 있는 자기 집 쪽으로 성호를 부축해 갔다. “아하, 이거 방향이 틀린 거 같아. 숙사 가는 길 아닌데.” 성호는 주춤 멈춰서 겨우 몸을 가누면서도 여기저기 둘러보았다. “어디로 가? 외박은 절대 안돼.” “우리 집으로 가서 좀 쉬고 술을 깬 후에 숙사로 가오.” “안돼. 취하지 않았어. 숙사로 돌아가야 해.” 성호는 해연을 뿌리치고나서 “오늘 감사하오. 꼭 갚아줄게.”라고 하고는 돌아서서 용케도 숙사로 비칠거리면서 돌아갔다. 해연은 시름이 놓이지 않아 은밀히 뒤따라가면서 성호가 숙사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서야 돌아섰다. 뒤에서는 룡과 호랑이 싸우는듯 눈보라가 윙-윙 무서운 소리를 지르면서 기승스레 불어쳤다. 해연은 피뜩 학교 창고 쪽을 둘러보다가 가로등 불빛에 창문이 하나 열려 바람에 덜커덕거리는 것을 보았다. (에이, 어쩜 창문도 닫지 않고 퇴근했어?) 그녀는 저도 몰래 학교 창고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는 창문 가까이 다가갔다가 이상하게 눈가루 뒤덮인 창문턱에 크고 작은 발자국이 찍혀 있지 않았겠는가. (혹시 창고에 도적이 들었는가?) 가만히 동정을 살펴보니 진짜 복도에서 인기척이 나는 것이 아닌가. 해연은 경각성을 높이기 시작했다. 그녀의 머리에는 성호가 번개처럼 떠올랐다. 그녀는 고양이처럼 발뼘발뼘 뒤걸음질치다가 남성숙사 쪽으로 뛰여갔다. 단숨에 3층에 뛰여올라간 그녀는 성호네 침실 문을 두드렸다. “누구야? 밤중에 성가시게.” “해연인데요.” “뭐? 해연이?” 침실에서 부시럭거리더니 신짝을 짝짝 끄는 소리가 들렸다. 덜컥 문을 연 성호는 놀란 해연을 보고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해연은 침실에 들어가자 “큰 일 났어요. 창고에 도적이 든 거 같아요.”라고 했다. “뭐? 도적?!” 성호는 범송이랑 종수랑 불러 식당으로 줄달음쳐갔다. 그들은 쥐도 새도 모르게 식당을 포위하고 돌멩이랑 주어들고 삼엄하게 대기했다. 성호는 해연을 뒤따라 창고 뒤문을 열고 슬그머니 사무실에 들어갔다. 해연은 전지를 찾아 들고 성호는 망치를 주어들었다. 성호는 해연의 귀에 대고 뭐라고 쑤군거리더니 복도 문을 슬그머니 열고 달빛이 드문드문 깔린 복도를 쪽제비처럼 살금살금 들어갔다. 해연은 뒤에서 따라가며 수시로 전지불을 켤 준비를 했다. (저게 뭐야?) 굽인돌이를 꺾어돌자 저쪽 복도에서 웬 녀성의 신음소리가 간간히 들렸다. 성호는 가로등과 달빛을 빌어 복도를 찬찬히 살펴보고 깜짝 놀랐다. 희미한 전등불빛이 비껴드는 복도에서 웬 벌거숭이 남녀가 누워 버둥거리는 추태가 보이지 않겠는가! 해연은 코를 싸쥐고 킬킬킬 웃었다. 성호는 해연의 손에서 손전지를 빼앗아 쥐고 더러운 남녀를 비추었다. 깜짝 놀란 남자는 황급히 일어나 옷을 주어들고 창문턱에 뛰여올라갔다. “붙잡아라!” 성호가 고함치면서 쫓아갔을 때 벌거숭이 남자가 바깥으로 뛰여내렸다. “서라! 이 도적놈들!” 바깥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미처 뛰여나가지 못한 벌거숭이 녀자는 바깥의 고함소리를 듣자 옷으로 얼굴과 가슴을 가리면서 복도 저쪽 끝으로 달아났다. 해연이 쫓아가자 벌거숭이 녀자는  창문고리를 벗겼다. 성호는 차마 손전지로 더 비추지 못했다. 긴 머리카락을 흩날리면서 창문턱에 기여오르는 그녀의 뒤태가 홍희 같아 보였기 때문이다. 그녀는 옷을 안고 창문턱에 홀짝 뛰여오르더니 바깥으로 뛰여내렸다. “도적이야!” “히히히.” “어디로 도망쳐!” “아니, 이게 누구야?!” “하하하!” “허허허!” 남학생들은 분명 홍희라는 것을 발견했다. 성호는 손전지불을 내리며 창문으로 바깥에 뛰여내렸다. 범송은 도망치는 남자를 안걸이를 걸어 번져놓고 발로 대가리를 밟고 서서 한창 우쭐거렸다. “이 놈 씨름장수 손에서 벗어나려고?!” “야, 놔라. 내다, 내!” 벌거숭이는 낯을 가리웠던 옷을 치우면서 범송의 발 밑에서 애걸했다. “뭐라고?” “이게 누구야?!” 범송이 낯을 밟았던 발을 들었다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뜻밖에도 승호가 아니겠는가! 진짜 웃지도 울지도 못할 노릇이였다. 모두들 벌거숭이들이 옷을 입는 것을 놔두고 숙사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홍희는 옷으로 얼굴을 가리고 달빛 속에 눈보라 속에 사라졌다. 허나 승호는 개꼴망신을 당하고서도 옷을 주섬주섬 주어입으면서 철면피하게도 큰소리를 떵떵 치며 위협했다. “흥! 어느 새끼 감히 학교에 고발해봐라! 깡패들을 시켜 재가루를 만들어놓을 테다!” 모두들 코를 싸쥐고 킬킬거렸다. 범송은 허리를 구부정하고 웃으면서 “오늘 재수 좋게 희극을 보았어. 허허허.”하고 떠들어댔다. 저쪽에서 승호의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맨 물에 거시 같은 새끼, 작작 너덜거려라.” 범송은 홱 돌아서 소리 나는 쪽을 쏘아보았다. 승호는 계속 위협했다. “촌뜨기새끼, 까딱 개소릴 치면 없애치우겠다!” 범송은 승호를 보고 혀를 한발이나 내두르면서 빈정거렸다. “적반하장이라구야! 쳇! 숱한 처녀애들 정조를 짓밟아 놓고서도 무사할 거 같아? 퉤! 퇴학을 맞지 않나 두고 보자!” 희극은 어둠 속에 서서히 막을 내리면서 기승스레 불어치는 눈보라가 모든 종적을 감춰버렸다.                                                                                                13. 사랑의 진실       발이 없는 소문이 천리를 간다고 복도에서 벌어진 희극은 윙윙 휘몰아치는 눈보라를 타고 온 학교에 파다히 퍼졌다. 기말복습을 하느라고 조용하던 교정은 운석이 떨어진 호수처럼 부글부글 긇어면서 요란해졌다.       홍희는 머리를 들고 교정에 다니기 힘들어 종일 숙사에 붙박혀 이불을 푹 쓰고 들어누워 있었다. 이불 밑에 흐트러진 머리카락 사이에 퍽 수척해진 얼굴이 반쯤 드러났다. 그녀는 밥을 먹으러 식당에 가지 않았다. 식당 복도만 생각해도  머리카락이 곤두설 지경이였다. 한 침실에 있는 정희가 식당에서 죽을 타다가 침대머리에 놓으면서 홍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얘, 죽이나 먹어라.” 홍희는 이불로 얼굴을 푹 가리였다. 기실 정희는 홍희가 승호에게 바싹 달라붙는 것에 잘 리해되지 않았다. (승호한테 약혼녀가 있다는데도 망신당할게 뭔가.) 그녀는 정조를 녀성의 생명으로 간주했기에 홍희의 행실을 리해할 수 없었다. (이제 승호가 헌신짝 차버리 듯하는 날엔 어쩔 셈인가?) 홍희도 승호가 은영을 좋아하는 것을 눈치챘다. 그러나 승호와 은영이 마지막 장벽까지 넘었는가는 알 수 없었다. 외지 시골에서 자란 그녀는 농부의 일생이 어떻다는 것을 알고도 남음이 있었다. 집에는 남동생 둘에 녀동생 셋이나 있었다. 그녀는 부모와 동생들의 유일한 희망이였고 정신기둥이였다. 그녀는 승호와 결혼해 시내에 남아 한평생 농사를 지으면서 고생한 부모를 시내에 모셔다 효성하려는 미몽을 꾸었다. 그녀는 또 맏이로서 동생들을  경제적으로도 도와주고 싶었다. 그러나 전날 저녁에 식당에서 추태를 보인후 이제껏 모든 정성을 다해 쌓아 온 탑이 한날 한시에 와그르르 무너지는 것을 느꼈다. 이전에 그녀와 승호가 벽돌공장 숯가마 안에 들어가 련애하다가 허서기에게 들키워 무장부에 끌려가 심문받고 처분받은 적이 있었다. 승호는 그때 입당할 기회마저 박탈당할 번했다. 다행히 승호는 아버지 덕분에 쓰러지면 뒤집어눕는 재간이 있어 그저 검사서나 쓰고 말았다. 허나 대학교당위 기률검사위원회 허서기는 승호와 홍희를 조용히 불러 “다시 련애하기만 하면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은 적이 있었다. 이제 누가 이번 사고를 고발하는 날엔 무슨 낯으로 허서기를 본단 말인가? (퇴학맞으면 자살하고 말테야.) 그녀는 희망이 절망으로 뒤바뀌는 순간 천길나락으로 떨어지는 감이 들고   괴롭기만 했다. 어둠칙칙한 심연으로 끊임없이 빠져 들어가는 것 같아 한시도 견디기 어려웠다. 순간 그는 승호가 한없이 원망스러웠다. (얼마나 능력을 자랑하던 슈퍼맨인가. 뭐냐? 전날 밤의 행실은 그를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뜨리지 않았는가?) 홍희는 학교에 온 후 자기 사랑의 오아시스의 주인공으로 승호를 선택했던 것이다. 물론 그녀는 승호가 좋아하는 녀자들이 많다는 것을 모로지 않았다. 그녀는 승호가 한메터 70도 훨씬 넘는 사나이다운 체격에 무섭게 매력있는 세귀눈에 퐁당  빠져버렸다. 또 학급의 체육위원과 대학교 학생회 체육부장이였다. 그 슈퍼능력에 반해버렸다. 날이 갈수록 승호는 남다른 야망을 가진 진짜 사내라고 여겨졌다. 게다가 승호 아버지는 시내 공안국에서 과장을 하고 엄마는 병원에서 총간호장을  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때로부터 승호와 같은 완벽한 대학생총각, 백마왕자는 이 세상에 둘도 없다고 생각했다. 홍희는 사랑의 거미줄로 승호라는 권세가문의 백마왕자를 꽁꽁 묶어놓고 싶었다. 홍희는 백방으로 승호 주위를 감돌면서 그런 날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녀는 자리를 정돈하는 기회를 타서 승호의 딱 앞에 앉아 승호의 눈에 쉽게 뜨일 수 있는 지리적위치부터 확보했다. 우유빛얼굴에 크림에 분까지 하얗게 바르고 승호 앞에 앉아 분내를 풍기였다. 철학이나 정치경제학 공부는 그럭저럭 해도 되련만 공부할 때면 쩍하면 머리를 돌려 승호한테 이것 저것 묻군 했다. 그뿐이 아니였다. 아버지가 온돌을 뜯어 고쳐 준 용돈으로 승호에게 손수건도 사다 가만히 필기장에 끼워놓기도 하였다. 승호는 차츰 수태 따르는 녀자애들 속에서 홍희에게 눈길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날은 끝내 돌아오고야 말았다. 대학 3학년 때 어느 여름날 밤이였다. 홍희가 교실에서 공부를 다 하고 숙사로 내려와야 했다. 그런데 승호는 뭔가 계속 들추면서 엉덩이를 들 념도 하지 않았다. 홍희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승호에게 나직이 “오빠, 숙사에 내려가야겠는데요. 어쩐지 무서워요.” 하고 종알거렸다. 승호는 “데려다줄게.” 하고 대답하면서 책가방에 둘러메고 우쭐 일어났다. 가로등불빛이 환히 비추는 교정을 뒤로 하고 숙사에 내려오는 나무숲 속 오솔길은  꽤나 어둠침침해 녀학생들이 홀로 걷기는 무서운 곳이였다. 언젠가는 시내 건달들이 어두운 밤에 나무숲 속에 숨었다가 불씨에 뛰쳐나와 한 녀대생을 끌고 들어가 강간하려 했다. 그때 경비원들이 뛰여나오는 바람에 그 녀대생은 봉변을 면했었다. 진짜 그 나무숲 속의 여기저기서 공포가 귀신처럼 도사리고 있었다. 홍희는 저도 몰래 승호한테 다가서면서 “무서워요.” 하고 팔을 끼였다. “무서워 마오. 내 있잖아.” 승호는 스스럼없이 오른 팔로 홍희의 허리를 껴안고 걸었다. “시내 깡패도 다 때려눕힌 호랑이가 옆에 있는데 무서워 할게 뭐요? 어떤 놈이 감히 호랑이 코구멍을 들쑤신대?” 홍희는 승호의 호언장잠을 믿었다. 체육시간에 꺽다리 범송을 메치는 것을 보았고 장거리달리기를 달리는 것도 보았던 것이다. 허나 그녀는 그 나무숲 속을 지날 때면 겁났다. “호랑이 말을 더 하지 마세요. 범이 자기 흉을 하면 온다고 하지 않았어요? 괜히 자는 호랑이를 깨울라…” 그때다. “서랏!” “앗!” 갑자기 괴성과 함께 나무숲 속에서 괴한 서넛이 뛰쳐나왔다. “살겠거든 계집을 놔두고 꺼져!” 홍희는 비명을 지르면서 승호의 등뒤에 달라붙었다. “어디서 굴러온 놈들이냐? 언감 교정에서 강도질해?!” “족쳐라!” 괴한들은 우르르 쓸어들었다. “얏!” 탁! 퍽! 어둠 속에서 승호가 훌쩍 날아나가면서 발길로 차고 주먹으로 내질렀다. 단번에 두 놈이 쓰러졌다. 한 놈은 홱 몸을 돌려 곤두박질쳐 승호의 뒤에 날아내렸다. 그자는 비수를 뽑아 승호의 잔등을 푹 찔렀다. 승호는 옆으로 피하면서 구두발을 날렸다. 비수가 길 옆의 백양나무에 날아가 꽂히면서 부르르 떨었다. 그 놈이 씽 달려들자 승호가 자세를 낮춰 앞으로 굴러나가더니 재차 솟구치면서 주먹으로 그 놈의 아래배를 올리쳤다. “억!” 그 놈이 배를 끌어안고 쓰러졌다. 그 광경을 본 건달들은 날 살려라고 꽁무니를 뺐다. 그제야 승호는 비수에 찍힌 왼 어깨를 오른 손으로 감싸 안았다. “피! 아니, 저 피를!” 홍희의 손에 뜨거운 뻘건 액체가 매만지웠다. “괜찮소.” 홍희는 승호를 부축해 불빛이 환한 길에까지 간 후 책가방에서 위생지를 꺼내 승호의 어깨에 흐르는 피를 닦아주었다. 그녀는 자기 손수건으로 상처를 꼭 싸매준 후 승호를 부축해 숙사로 내려갔다. “큰일날번 했어요. 이 원쑤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승호는 홍희를 껴안으면서 고백했다. “사랑하오, 홍희. 홍희를 위해서라면 목숨이라도 선뜻이 내놓겠소.” 홍희는 뜻밖에 날아든 사랑, 아니, 오매에도 고대하던 사랑을 순식간에 품게 될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녀는 가슴이 한껏 부풀어올랐다. 그녀는 승호가 뜨거운 피 흐르는 두 팔로 꼭 껴안고 키스벼락을 안기는대로 놔두었다. 그녀는 승호의 사랑이 그렇게 갑작스럽게, 순식간에 찾아올줄은 몰랐다. 또  그렇게 열렬할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이튿날 아침에 그녀는 승호를 데리고 학교 의무실에 가서 비수에 찍힌 상처를 처치했다. 승호는 사랑의 스피드를 너무 과하게 내지 않겠는가. 사귄지 한달도 안돼 승호는 홍희를 어둠침침한 지하독서실에 데리고가서 사랑의 마지막 장벽을 허물어뜨리려고 서둘렀다. “안돼요. 이 것만은 안돼요.” 홍희는 숫처녀의 소중한 정조를 너무 일찍이 바치고 싶지 않았다. 그것은 결코 승호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였다. 어쩐지 불안하였다. 아래 학급의 은영이란 처녀애가 승호를 좋아하는 것을 눈치챘다. 게다가 승호한테 대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약혼녀가 있다는 것도 뒤늦게나마 알게 되였다. 꽉 끌어안았던 홍희를 풀어주면서 승호는 지지벌건 낯에 음흉할만치 독한 표정을 지으면서 물었다. “어째 나를 사랑하지 않소?” “아니죠.” 홍희는 침대에서 일어나 앉으면서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올려 가냘픈 어깨 뒤에 넘기면서 정색했다. “왜 학교 오기 전에 련애하던 녀자가 있단 걸 속였어요?” “아니, 근본 그 녀자를 사랑하지 않았소.” 승호는 그렇게 대답해놓고 속으로는 피씩 랭소했다. (경옥이 학교에 와서 떠들아댄 걸 알면서도 네가 계속 쫓아다니지 않았어? 새삼스레 그 일을 왜 꺼내? 다 쒀놓은 죽이 밥이 될 것 같아?) “학교 학생기률에 련애해도 안된다는데요. 이런 짓을 해서야 되겠어요?” “픽!” 승호는 코웃음치며 굳어졌던 길쭉한 낯의 근육을 느슨히 풀었다. “허허허. 우리 둘이 사랑하는 이상 뭐라오? 학생 기률도 너무나도 인성화 되지 못했단 말이요. 멀쩡하게 성인이 다 된 우릴 보고 련애도 하지 말라는 건 말이나 되오? 대학교가 어디 중놈들을 기르는 절당이라오?” 승호는 “흥!” 하고 콧방귀를 뀌더니 또 홍희를 꽉 껴안더니 침대에 쓸어눕혔다. 홍희는 두 다리를 바둥거리면서 단말마적으로 발악했다. 무슨 힘이 홍희로 하여금 발정난 호랑이처럼 달려드는 꺽다리를 몸 우에서 밀어냈는지 몰랐다. “남들의 눈이 두렵지 않아요? 들키면 퇴학이라는 걸 몰라요?” 승호는 멋쩍었든지 침대에서 툭툭 털고 일어나더니 “싫으면 마오. 강요하지 않소.” 하고 자리를 뜨려고 자물쇠를 찾아 들었다. 그날 홍희는 뜨거운 눈물을 흘리면서 간신히 처녀의 생명과도 같은 신성한 정조를 지켰다. 하지만 며칠 후에 그녀는 더는 기승스레 덮쳐드는 승호를 밀막을 힘이 없었다. 그날 점심에 승호가 아래 학급의 은영을 데리고 공원 맞은켠에 있는 선녀음식점에 가는 것을 뒤를 밟았던 것이다. 그것은 최대의 위기가 아닐 수 없었다. 은영은 나이가 어릴뿐만아니라 인물도 요귀처럼 이쁠 정도였다. 설상가상으로 은영의 아버지는 시내 정부기관에서 한자리 하는 세도가문이라고 하지 않겠는가. (사랑하는 백마왕자를 은영에게 빼앗길 순 없어. 어떤 수를 쓰든지 백마왕자를  품 속에 꽉 품고 빠져나가지 못하게 해야지.) 어느날 밤, 자습을 마치고 홍희는 큰 마음을 먹고 승호를 조용히 동무해달라고 청했다. 그녀는 승호의 팔소매를 잡고 지하독서실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지하 독서실에 들어간 홍희는 승호에게 단도직입으로 물었다. “오늘 결판을 내자요. 로실히 말해요. 오빤 도대체 날 사랑해요? 은영일 사랑해요?” 승호는 어두운 전등불빛 아래에서 길쭉한 얼굴과 입귀에 귀찮은 표정을 흘리였다. 갑자기 그는 홍희를 와락 껴안더니 열변을 토했다. “사랑하오. 목숨을 바쳐서라도 홍희를 사랑하오. 하늘이 알고 땅이 알 거요. 믿어주오. 이 지하독서실이 증명 설 거요.” 홍희는 홧홧 달아오른 승호의 몸을 밀어내면서 한마디 더 물었다. “학교 오기 전 약혼녀는 어쩔 셈인가요?” “약혼녀?” 승호는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허허허. 또 그년 말이요? 그년이 홍희와 내 사랑 발목을 잡을줄은 몰랐는데.” 승호는 진지한 표정을 지으면서 홍희의 어깨를 다독였다. “이후에 걔 말을 하지도 말아라. 묵은 상처를 건드리지 말란 말이야! 알았어?!” 허나 절대 물러설 수 없는 홍희였다. “이건 꼭 알고 넘어가야 할 대목이요. 똑똑히 말하세요.” “진작 싹 정리한 일이야. 그 녀잔 날 과부네 아들이라고 업신여겼단 말이야. 나도 자존심이 있어.” “뭘? 과부의 아들? 듣다 첫 소리군요. 아버지 공안국에서 한자리 한다고 하지 않았어요?” 홍희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친아버진지 계분지 몰라.” “계부?” 승호는 맥없이 머리를 끄덕였다. 허나 인차 몸을 홱 돌리더니 홍희의 두 어깨를 쥐어 마구 흔들었다. “난 친아버지가 누군지도 모르는 쌍놈이야. 계부 성을 탄 망종일 줄도 몰라. 그래, 왕의 후대래라. 허허허.” 그는 홍희를 침대에 활 밀어놓고 주먹으로 벽을 쿵쿵 쳤다. 홍희는 혹시 현관으로 지나가던 사람이 알가봐 말렸다. 그녀는 항상  활기 차넘치던 승호에게 쓸쓸한 사연이 있는줄은 몰랐다. 그녀는 불쌍해 일어나 승호의 얼굴을 쓰다듬다가 가냘픈 품에 꼭 껴안아주었다. 승호는 홍희의 가슴에서 머리를 떼더니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홍희를 마주 보았다. “홍희, 난 이 세상에서 홍희만큼 사랑하는 처녀는 하나도 없소. 믿어주오.” 홍희는 떨리는 두 손으로 승호의 뜨거운 눈물을 훔쳐주었다. “한마디만 묻자요? 은영과 계속 붙어다니겠어요?” “아, 그 앤 학생회 문예위원이 아니고 뭐야? 사업관계로 자주 만나는 편이긴 하지. 그런 관계는 아니라는데도 왜 그래?” 승호는 홍희의 가슴을 손으로 더듬으려고 했다. 홍희는 그 열 오른 손을 뽑아 치웠다. “재차 묻겠는데요. 은영을 사랑해요? 날 사랑해요?” “야, 이젠 귀못이 박히지 않소? 사랑하오. 심장을 빼 주고서라도 홍희를 사랑하오.” 승호는 홍희의 적삼 속에 손을 밀어넣었다. 홍희는 가슴으로 스르르 기여오르는 승호의 싸늘한 손을 꽉 움켜쥐였다. “변심하는 날엔 더러운 손이 만진 이 젖가슴을 가위로 베서 개한테 줄테야. 아니야!” 그녀는 다른 손으로 승호의 얼굴을 밀며 날카로운 말을 쏟아냈다. “변심하는 날엔 너 죽고 나 죽을줄 알아.” 승호는 머리를 끄덕이며 어렵잖게 받아넘겼다. “알았소, 알아. 믿어주오. 홍희를 영원히 사랑하오!” 홍희는 눈을 살포시 감았다. 순간 그녀는 봄날에 눈이 스르르 녹듯이 온몸이 나른해졌다. 그녀는 자꾸 젖가슴으로 기어오르려는 승호의 손을 꽉 움켜잡았다가  손을 맥없이 풀었다. 열김이 확확 풍기는 승호의 저속한 손놀림에 리지의 방선은 산산이 풍지박살나고 말았다. 이윽고 그녀는 그래도 용케 눈을 살며시 뜨고 승호의 지지벌개난 야수 같은 얼굴을 쳐다보았다. 영원히 기억해두려는듯이 빤히 쳐다며 눈사진을 찍어두었다. 그때 승호는 불티가 뚝뚝 떨어지는 허연 눈알을 무섭게 부라리면서 지껄였다. “사내는 정복자야. 전세계 녀성들이여, 뉘라서 내가 과부의 못난 아들이라더냐?” 홍희는 모든 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였다. 아무튼 강도들에게 당할 번한 자기를 구해준 구명은인이 아닌가! 그녀의 보름달 같은 얼굴에서는 줄 끊어진 구슬처럼 뜨거운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 한번이 있으면 두번이 있기 마련이였다. 그 후부터 승호는 해가 지기만 하면  그녀를 지하독서실에 데리고 가서 습관처럼 몸을 빼앗군 했다. 사랑의 마음을 달구는 것이 아니라 저렬하게 몸부터 달구면서 그녀의 몸만 빼앗았다. 이것이 그래 승호 오빠 사랑의 진실이란 말인가? 끝없는 성애가 그래 세상에서 제일 고상하고 진실한 사랑이란 말인가? 홍희는 기말인데다 해가 지는 것이 지겨울 지경이였다. 이젠 승호가 무서웠다. 아니, 이젠 짐승 같은 저렬한 "사랑유희"가 싫어졌다. 허나 이미 다 쑤어놓은 죽을 어쩔 수 없게 돼버렸다. 그녀는 모든 것을 운명과 승호의 량심에 맡기고 자포자기하고 말았다. 전날에도 혹시 헌 세집에서 그 짓을 했더라면 들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허나 역은 새 방아간을 지나가고 말았다. 그날 밤 승호는 꼬리가 길면  밟힌다면서 담대하게도 홍희를 끌고 창고 복도로 들어가서 그짓을 했다. (뭐 창고 복도에서 아짜아짜하게 도적질해 노는게 더 재미있다고? 더 쨍하게 자극적이라고? 픽!)   홍희는 생각하면 할수록 원통하고 승호가 얄미웠다. 그녀는 침실에서 이불을 푹 들쓰고 진종일 하염없이 눈물로 베개를 적시였다. (차라리 활 죽어버리면 모든 것이 끝날게 아닌가!)
134    대하소설 진달래 소야곡(6) 댓글:  조회:1536  추천:1  2017-12-27
                        10. 달밤의 추억 동녘하늘이 푸름히 밝아오면서 거무칙칙한 하늘을 파란 물감으로 칠하기 시작했다. 성호는 온 밤 잠을 이루지 못하고 창 밖에서 기승을 부리는 눈보라가 윙-윙 우는 소리를 들으면서 착잡한 생각에 잠겼다가 새벽녘에야 겨우 새우잠을 잤다. 그가 피뜩 눈을 떠보니 벌써 아침 해살이 창문에 새겨진 천태만상의 성에꽃무늬에 매달려 있었다. 그는 어제 저녁에 순희 결혼식에 만취하도록 마신데다 제대로 자지 못해 머리가 좀 뗑 해나는 감을 느꼈다. 어려서 사랑의 어섯눈이 뜨기 시작해서 그렇게 사랑했던 첫사랑 순희를 철주에게 보내고나니 아쉬웠다. 하지만 홀가분하기도 했다. 리상과 전도를 위해서는 그렇게 해야만 했다고 생각됐다. (이래서 사랑은 요술쟁이요, 요귀라고 하는구나. 난 지금 사랑을 사닥다리로 쓰려고 하지 않는가.) 그는 스스로도 어이없어 피씩 웃으면서 도리머리를 홰홰 저었다. 성호는 너무 어린 나이에 사랑에 어섯눈이 뜨기 시작하면서 녀자애들을 너무 많이 좋아한 것 같았다. 진짜 사내 감정은 산꼭대기에 부어놓은 물과도 같아 산발을 타고 여러 갈래로 쫙 흩어져 흐르는 것인가. 그는 얼굴이 좀 반반한 처녀애만 보면 이것 저것 툭툭 건드리기는 잘 건드렸지만 순희처럼 남에게 빼앗기거나 넘겨주는 일이 많았다. 은영을 하늘땅이 울게 사랑했지만 성사하지 못하고 승호한테 빼앗기지 않았는가! 성호는 JH시에 있는 둘째누나 춘자네 집으로 놀러 갔다가 또 매형 홍수의  외조카벌 되는 영화를 보자마자 첫눈에 반해 좋아했다. 그때 춘자는 소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성호가 연변에서 기차를 타고 간 날 춘자는 탄광마을에서 교원학습반에 참가하고 집에 없었다. 외조카 정춘과 정일을 보고 싶은데 둘 다 소학교에 가고 없었다. 정춘과 정일은 부모의 말을 아주 잘 들었다. 특히 아버지를 똑 떼닮은 정춘은 새물새물 웃을 때면 얼마나 귀여운지 몰랐다. 어머니가 길에서 마차나 소수레가 오면 걷지 말고 길옆에 서있으라고 했다고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500메터 밖에서 오는 마차를 보고 미리 길옆에 서 있었다. 어머니가 멀다고 일없다고 했지만 어머니 말한대로 한다면서 마차가 지나갈 때까지 길옆에 서서 기다렸다. 8살 밖에 안되는 정춘은 늦잠꾸러기였다. 그러나 체육위원을 맡은 그는 추운 겨울에  항상 제일 먼저 학교에 가서 난로불을 피웠다. 후꾼후꾼한 교실에 들어선 담임선생님과 학생들은 매우 감동됐다. 홍수가 술을 마시기 좋아하는 걸 아는 정춘과 정일은 서로 앞장서 현관에 나가 술을 병에 퍼담아가져다 드렸다. 성호는 빈집 앞에서 서성거리다가 집 열쇠를 가지러 누나를 찾아 소학교로 갔다. 그가 사무실에 들어서자 녀교원들 속에서는 모두 "우~와~ 잘 생겼어." “멋져!” 하고 환성이 터졌다. 그중 나이 어린 한 처녀교원은 새물새물 웃으면서 "김선생은 이런 미남동생을 뒀어요?" 하고 감탄했다. 춘자는 씨물 웃으면서 “영화야, 우리 동생한테 잘 해줘라.” 하고 씨물 웃었다. “그럼요. 친해도 괜찮지요?” “처녀총각들 일을 난 몰라.” 영화라는 그 처녀교원은 알고보니 정춘의 담임교원이였다. 그녀는 난로 우에 놓인 물주전자를 기울여  컵에 김이 몰몰 나는 물을 따라 성호한테 주면서 호들갑을 떨었다. 성호가 영화의 하얀 손에서 컵을 받아쥐면서 피뜩 보니 어글어글한 눈이 정신 나게 빛나고 있지 않겠는가. 무더운 여름 어느날 밤, 눈썹 같은 초생달이 동녘하늘에서 고기비늘 구름 속에서 자맥질을 하고 있었다. 성호는 누나의 집과 길을 하나 사이 둔 영화네 집 주위를 맴돌면서 영화를 만나고 싶은 충동을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 아무 일도 없이 찾아가기 어색해 머뭇거렸다. 이때 영화네 집문이 벌컥 열리면서 열대여섯살 돼보이는 영화 남동생 송철이 뛰여나왔다. 어데 가 싸우다가 맞았는지 송철의 눈덕에 붕대와 반창고가 붙어 있었다. 그래도 송철은 친척이라고 정춘과 정일이 애들한테 맞기만 하면 역성을 들어주군 했다. “너 또 공부를 하지 않겠어? 어디로 가!?” 뒤에서 영화가 비자루를 쥐고 쫓아나왔다. 그녀는 희미한 달빛 속에 서 있는 성호를 발견하고 “어머!” 하고 주춤 멈춰 서면서 비자루를 뒤에 감췄다. “언제 왔어요? 어서 들어와요.” 성호는 뒤덜미를 긁적이면서 “아니, 아니요. 집식구들이 보면 무슨 일인가 하겠소.” 라고 했다. “아니, 아무도 없어요. 어서 들어와요.” 성호는 “아니, 아니.” 하면서도 영화를 따라 처마가 낮은 초가집에 들어갔다. 촉수 낮은 전등을 켜놓아 그런지 집 안은 퍽 어두웠다. 집 안에는 진짜 서발 막대를 휘둘러도 거칠 것이 하나도 없을 지경이였다. 손바닥만한 남북쪽 높은 한족구들 우에 궤짝 하나씩 덩그러니 놓여 있을뿐 그렇다 할만한 가정기물도 보이지 않았다. 벽에는 옷이 몇견지 걸려 있었다. “부모들이 보면 뭐라 하지 않을가요?” “우메- 뭐 도둑질이라도 했나요? 왜 그리 겁나 해요?” 영화는 바닥에서 서성거리는 성호를 보고 구들을 가리키면서 “어쩌다  왔는데요. 앉아요.”라고 하면서 닦은 해바라기를 사발에 담아 가져왔다. “자요. 우리 오누이뿐이래요. 부모도 없어요.” “그럼 부모는 어디에 일하러 갔소?” 순간 영화는 얼굴색이 어두워지더니 어글어글한 눈에 침울한 기색이 피여올랐다. “부모는 우리 오누이를 두고 모두 일찍 돌아갔어요. 그런데 저 종수는 공부를 통 하기 싫어해요. 쩍하면 싸움질만 해요.” “오- 미안하오. 아픈 상처를 다쳐놓아서.” 영화는 돌아서서 손등으로 눈물을 쓱 닦더니 돌아서면서 억지로 웃음을 지어보였다. “괜찮아요.” 그녀는 성호 옆에 앉으면서 “연변 말씨는 어쩜 그렇게 듣기 재미있어요?” 하고 화제를 돌리며 어글어글한 눈으로 마주 보았다. (정말 예쁘구나.) 성호는 부지중 “영화 말씨가 생긴 것처럼 곱소.” 하고 불쑥 말했다. “호호호. 그래요? 이거 기장밥 한 대야 해드려야 하잖겠어요?” 성호와 영화가 한창 재미나게 얘기할 때 송철이 달려들어왔다. “인사해라. 정춘의 외삼촌이야.” “그래요? 안녕하세요?” 송철은 허리를 굽히면서 인사하고 주먹으로 누런 콧물을 씩 닦았다. “얘, 종이로 콧물 닦아.” 영화는 필기장을 쭉 찢어 송철의 콧물을 닦아주었다. 송철은 나이에 비해 꽤나 훤칠하고 힘꼴을 쓰게 생겼다. 그는 성호를 뒤돌아보면서 “기실 우린 사돈이죠. 정춘의 아빠는 저의 이종륙촌 오빠거든요.”라고 했다. 그 말에 송철은 “아재네 처남이면 우리캉은 친척이겠네요.” 하고 성호를 보며 씨물씨물 웃었다. “그래.” 영화는 성호를 돌아보면서 “얘는 어려서부터 부모 없이 자라서 친척이라면 좋아해요.”라고 했다. 영화는 대야에 빨래를 담아 이면서 “송철아, 숙제 해. 잉?”라고 했다. 송철은 마지못해 머리를 끄덕였다. 영화는 성호를 보고 “집 안이 무더워서 바깥에 나가자요.”라고 했다. 성호는 영화를 따라 바깥으로 나갔다. 눈썹달이 고기비늘 구름 속에서 나와 헤염치고 있었다. 성호는 빨래대야를 인 영화를 따라어디라 없이 걸어갔다. 마을 뒤로 좀 가니 달빛을 실은 희읍스름한 개울이 나졌다. 영화는 빨래대야를 내리려고 머리 우에 손이 올라갔다. 성호는 다급히 다가가 빨래대야를 받아 강가에 내려놓았다. 저도 몰래 영화의 손을 잡았다. 어쩐지 그 손은 그렇게 차고 처녀의 손답지 않게 터덜터덜한 감이 들었다. “고마워요.” 영화는 얼른 손을 빼더니 강가에 쪼그리고 앉았다. 그녀는 빨래를 강물에 훨훨 헹구어 넓적한 빨래돌 우에 올려놓고 방치로 투닥투닥 두드려대기 시작했다. 성호는 영화 옆에 있는 넓적한 돌에 앉아 영화가 빨래하는 걸 지켜보았다. 어디에선가 뻐꾸기가 뻐꾹뻐꾹 울어대 밤의 정적을 더해주었다. 강물은 달빛과 무더위를 싣고 출렁출렁 흘러가고 있었다. 밤의 정적과 함께 무거운 침묵도 흘러갔다. 한참 후 성호는 “영화, 올해 나이가 어떻게 됐소?” 하고 물었다. “처녀 나이 물어 뭘 하는데요?” 영화는 방치질을 멈추고 옆에 앉은 성호를 피뜩 보더니 빨래를 물에 활활 헹구었다. “글쎄, 괜찮지요?” “오빠부터 말해요.” “21세.” “호호호, 오빠구먼요.” “얼마기에?” “기어이 알아야겠어요?” “말하오.” 영화는 나직이 “소녀 올해 19세 밖에 안돼요.” 하고 말하고는 방치로 빨래를 탕탕 쳤다. “일찌기 학교에 갔나 보오.” “집형편이 어려워서 대학시험장에 가보지도 못하고 고중을 졸업하자마자 마을학교 민영교원으로 들어갔어요.” “오~ 그랬구먼.” 성호는 한숨을 후~ 내쉬였다. 그는 첫눈에 정이 든 영화가 점차 불쌍해 저도 몰래 동정심이 스르르 생기는 감을 어쩔 수  없었다. “민영교원이기에 농민이래요. 오빠 같은 대학생들이 부러워요.” 성호는 부지중 “아직 늦지 않았소. 대학시험을 치면 되지.” 하고 불쑥 말했다. 영화는 빨래를 훌훌 헹구어 대야에 담으면서 “대학시험이 그리 쉬워요? 제가  대학 가면 누가 학비를 대고 송철을 먹여 살린대요?” 하고 한숨을 호- 내쉬였다. 성호는 아무런 도움조차 줄 수 없어 계면쩍고 한스러웠다. 사람의 땀내를 맡은 모기들이 어둠 속에서 앵앵 엄습해왔다. 성호는 자꾸 손으로 종아리와 목을 짝짝 쳐댔다. “모기 물어서 안 되겠어요.” 영화는 씻자고 내놓았던 옷을 하나 가져다 성호의 종아리에 감싸주었다. 모기는 앵앵- 계속 엄습해왔다. 옆에서 성호가 저도 몰래 자꾸 손으로 목이고 얼굴이고 쳐댔다. “안 되겠어요. 돌아 가자요. 모기도 물지 정춘의 아빠랑 오빠를 찾겠어요.” 영화는 빨래를 대야에 담았다. “아니, 괜찮소. 다 큰 동생 범에게 물릴가봐 찾겠소?” 성호의 말에 영화는 빨래대야를 이려고 엉거주춤 일어났다. “그래도 좋을 거 같잖아요. 밤중에 처녀총각이 빨래터에 나란히 앉아 있는 걸 보면 뭐라겠어요?” 성호는 별수 없이 황급히 일어나 빨래대야를 들어 영화의 머리에 얹어 주었다… 성호가 상념에 빠졌을 때 정지에서 갓난 경남의 울음소리가 자지러지게 들렸다. 미닫이가 쭉 열리더니 엄마가 웃방에 들어왔다. “얘, 철주랑 농민인데도 결혼까지 했는데. 넌 제 짝이 없니?” 성호는 손시늉으로 미닫이를 닫으라고 했다. 영옥은 미닫이를 사르르 닫고 누워있는 성호의 옆에 와 앉았다. “얘, 자꾸 이걸가 저걸가 하지 말고 마음에 드는 새애기 있으면 하날 꽉 잡아 데리고 오려무나.” “알았소, 알아.” “그래. 우리 아들 얼마나 잘나고 총명하다고. 남의 집 열 아들을 주고도 못 바꾸지. 철주 같은 건 백개를 주고도 못 바꾸지. 쯧쯧.” 정지에서 성숙은 “내 요리 작달막해도 이렇게 꺽다리신랑을 얻어서 떡돌 같은 아들까지 낳았는데. 우리 대학생오라비를 근심할 거 있소?”라고 하더니 갓난 애기 경남의 이마에 뽀뽀를 했다. “경남아, 옳지? 저 칠한 외삼촌이 꼭 영화배우를 데려올 거야. 응~” 성호는 정지에서 노는 막내누나 부부와 조카를 내려다보면서 씨무룩이 웃더니 잠자리에서 일어나 이부자리를 거두었다. 사실 어려서 성호는 계속 막내누나 성숙을 키 작다고 늘 “난쟁이”라고 놀리면서 “난쟁이신랑”을 얻어올 거라고 비양거리군 했다. 또 너무 깍쟁이질을 한다고 늘 “깍쟁이”라고 조롱했다. 그럴 때마다 성숙은 성이 날대로 나서 “난 꼭 키꺽다리 신랑을 얻을 거야. 네나 난쟁이각시를 얻지 말라.” 하고 반격하군 했다. 오누이간에 서로 한 말이 경종으로 돼서 성숙은 자기가 키 작아 가지고서도 혼사말이 들어오면 키 큰가부터 물으면서 키 작은 남자는 아예 맞선도 보지 않았다. 하여 끝내 키 1.75도 되는 꺽다리신랑 명선을 만난  것을 항상 흐뭇하게 생각했다. 성호는 고향 마을을 떠나 학교에 돌아오면서도 번개 같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올랐다. (순희를 철주에게 준 건 별로 아깝지 않아. 허나 은영마저 승호에게 빼앗길 수는 없어. 흥!) 성호는 어려서부터 처녀애들을 너무 많이 좋아한  것 같았다. 왕춘영이, 순희, 선화, 정희, 은영이… 이제 또 처녀애 몇을 사랑할지 모른다. 그래서 그럴가. 이번에 순희를 철주한테 빼앗겼을 때 전날까지도 쓸쓸했지만 밤을 자고나니 인차 마음이 정리돼가는 감을 느꼈다. 더구나 자기 리상을 실현하는데 짐으로 밖에 될 수 없다고 생각하자 어떻게 말하면 잘 된 일이라는 감까지 들었다. (내가 순희를 사랑하기나 했는가? 순희는 내 첫사랑이 아닌가? 사랑이란 참말로 알고도 모를 불여우야.) 성호는 학교에 돌아와 침실에 누워 창문으로 비껴드는 휘영청 밝은 달빛을 내다보면서 또다시 끝없는 추억의 바다에서 돛이 없는 배를 타고 정처 없이 떠다녔다.                                                                                                                     11. 결투        휘몰아치는 눈보라 속에 아물거리는 달밤이 오면 성호는 검은 구름 속에 숨어버리는 달을 쳐다보면서 은영을 어떻게 승호 손아귀에서 찾아오겠는가고 속궁리를 굴렸다. 간혹 맞은 편 침대에 와서 자는 승호를 보면 단매에 때려 눕히고 싶은 충동이  속에서 불끈거리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승호의 비쭉한 코와 개턱처럼 쳐든 조개턱만 보아도 눈에 불티가 탁탁 튀였다. 그런줄도 모르고 은영은 이전에 성호에게 늘 어째 승호가 성호와 비슷하게 생긴 점이 많다고 쌍둥이 아닌가고 호들갑을 떨기까지 했다. (개소릴 친다. 내 어찌 바람둥이를 닮아?) 성호는 은영마저 괘씸해나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승호와 최후결판을 내는 수 밖에 없는 것 같았다. (승호와 결투를 벌려 쳐눕혔다고 해도 승호가 은영에게서 떨어지려고 하겠는가. 한뼘은 더 크고 시내에서도 한다하는 싸움군과 결투를 벌려 승산도 없어. 관건은 승호에게 있는 거 아니야. 다 은영한테 달렸어. 은영이 승호한테서  떨어져 나한테 오면 모든게 다 풀릴 거야.) 기말이 코 앞에 닥쳐왔건만 성호는 련 며칠 책도 들지 않고 침실에 들어누워  어떻게 은영을 떼내겠는가 궁리만 하고 또 했다. 갑자기 성호는 벌떡 일어나더니 무릎을 탁 쳤다. “옳지! 그래. 바로 그거야!” 성호는 오른 주먹을 으스러지게 쥐여 승호의 빈 침대 기둥을 탕 치며 구두를 신고 바깥으로 나갔다. 그가 숙사 복도 층계를 텅텅 내려갈 때였다. 뜻밖에도 층계 아래 쪽에서 은영이 머리를 다소곳이 숙이고 올라오는 것이 아니겠는가. (잘 됐어. 제 발로 찾아오는구나.) 성호는 층계를 둘러보고 나서 “은영이, 좀 보기요.”라고 하며 앞을 막아섰다. “어머, 왜? 미안해요. 급한 일 있어서.” 은영은 성호를 피해 층계를 텅텅 올라갔다. 성호는 뒤따라 올라가면서 “또 그 바람둥이를 찾아가? 갠 침실에 없어.”라고 했다. 허나 은영은 곧이듣지도 않고 곧추 침실로 향했다. 그녀는 숙사 문을 줴당겨보았다. 문이 잠가진 것을 보고서야 되돌아섰다. “잠간만.” 성호는 급히 열쇠를 꺼내 문을 열고 은영을 잡아 마구 끌고 들어갔다. 그는 문까지 걸어버린 후 은영을 똑바로 마주보았다. “왜 이래요?” 은영은 깜짝 놀라 걀쭉한 얼굴에 새침한 표정을 지었다. 성호는 단도직입적으로 돌직구를 날렸다. “너 승호 어떤 사람인지 알기나 알고 따라다녀? 걔는 바람둥이야!” “승호는 학교에 오기 전에 벌써 약혼녀가 있었어. 걔 지하독서실에서 어쨌는지 아니? 홍희와도…” “됐다, 됐어. 그만해!” 은영은 놀라기는커녕 신경질적으로 화만 냈다. “너 아니? 승호 처녀애들을 몇이나 해쳤는지?” “그만해라도. 알면 이제 어쩌라는 거야?” 성호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저도 몰래 두 손으로 은영의 어깨를 붙잡고 마구 흔들었다. “너 다 알고 있었니? 정신 좀 차려라! 이제라도 절벽 앞에서 말머리를 돌려라! 뒤에는 내가 있지 않니? 엉?!” 은영은 대답 대신 뜨거운 눈물을 줄 끊어진 구슬처럼 줄줄 흘리며 성호의  가슴을 마구 떠밀어버렸다. 승호의 침대에 털썩 물앉아 어깨를 들먹이는 은영을 보자 성호는 모든 것을 알아차렸다. 은영이 불쌍했다. 아니, 승호에게 짓밟힌 약혼녀 경옥이, 홍희가 더욱 불쌍했다. 성호는 옆에 앉아 은영의 들먹이는 어깨에 왼손을 올려놓으면서 정색해 물었다. “혹시 너도 승호에게 당하지 않았니?” 은영은 갑자기 일어나 성호의 뺨을 찰싹 갈겼다. “걸 물어 뭘 해?! 더러운 자식!” 성호는 얼얼해나는 뺨을 매만지면서 오리무중에 빠졌다. “더러운 자식? 색마 승호를 용서해? 왜 진정으로 널 사랑하는 날 받아주지 않니? 참 이상해.” 은영은 눈물범벅이 된 한쌍의 포도눈알로 성호를 바라보면서 미친듯이  고함쳤다. “오빠를 증오해요. 한평생 증오할 원쑤예요.” “그래, 증오한단 말이지. 날 사랑하고 있구나. 날 속이고 널 속이지 말어라!” 은영은 피씩 코웃음쳤다. “진짜 미움깨만 살려고 그래?” “그래, 널 위해서라면 미움깨겠니? 칼산에 오르더라도 바른 말 할테야.” 성호는 은영을 와락 끌어안으며 열변을 토했다. “바람둥이한테서 떠나라. 나한테 오라!” 은영은 성호를 밀어내며 “흥!” 하고 콧방귀를 뀌였다. “개구리 학의 고기를 먹으려고 해?! 정말 지겹게 논다. 승호 허물을 하면 오빠한테 돌아올 거 같아? 착각하지 마!” “그래, 실컷 욕해라. 세상에서 널 사랑하고 아낄 사람은 그래도 나뿐이야. 언젠가는 알게 될 거야.” 은영은 눈물을 손등으로 닦더니 발딱 일어났다. “다신 승호 오빠 흉을 보지 말라. 자꾸 끼여들지도 말고 소문도 까딱 내지 마세요.이젠  미련도 버리세요.” 은영은 오른손으로 체육머리를 뒤로 쓸어넘기더니 전에 없이 외까풀눈을 매섭게 뜨고 쏘아보았다. “똑똑히 말해 줄게. 난 아무런 능력도 없는 낙제생을 따라 농촌의 시부모를 모시고 시형과 시누이 아홉이나 되는 복잡한 시집에서 살지 못해. 승호는 체육위원 겸 학교 학생회 체육부장이지. 학습성적도 오빠보다 우수해. 난 승호 같은 영웅과 살고 싶단 말이야. 황차 가정환경도 얼머나 훌륭한가요? 그러니까, 오빤 이젠 제발 성가시게 지 말아요.” 성호는 맥없이 침대에 물앉아 묵묵히 침실에서 나가는 은영의 가냘픈 뒤모습을 바라보며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였다. 쾅! 문이 닫혔다. 찬바람이 능구렁이처럼 묻어들어왔다. “농민의 아들, 그래, 난 농민 아들이야. 너희들은 세도가문의 대단한 새끼들이야.” 성호는 아직도 문벌장벽이 엄연히 존재한다는 것을 뼈저리게 실감했다. “승호 새끼를 어쩜 좋을가? 한각 분질러 놔야 알겠어?" 성호는 주먹으로 승호의 침대를 쾅 내리쳤다. 이때 문이 덜커덩 열렸다. 범이 자기 흉을 하면 온다고 승호가 들어오지 않겠는가. 그는 의아한 눈길로 성난 사자 같은 성호를 마주보며 침대에 털썩 들어앉았다. “무슨 일 있니? 우린 친구 아니야? 어려운 일 있으면 스스럼없이 말해라. 도와줄게.” 성호는 “흥!” 하고 코방귀 뀌며 랭소했다. 그는 쌀쌀한 눈길로 승호를 쏘아보았다. “경고하마. 은영을 다치지 말라!” “은영을 좋아하니?” “그래, 은영은 내 목숨과 같은 사랑이야!” “네깐 놈이 뭔데. 이래라! 저래라 해?” “뭐라고?” 성호는 와닥닥 일어나 승호에게 덮쳐가 목덜미를 거머잡았다. “내 입이 터지면 넌 퇴학, 아니, 감옥에 가야 할 색마야!” 승호는 능구렁이처럼 씨무룩이 웃었다. “이걸 놔라! 친구간에 뭐야?” “친구? 난  바람둥이친구 없어.” 승호는 진지한 표정을 짓고 고함치는 성호를 보고 능청을 부렸다. “계집애 하나 때문에 친구 의를 상하겠느냐? 만천하 사람들이 웃겠다. 네가 은영을 좋아하는 거 같은데. 물어봐라. 널 좋아하는가? 넌 짝사랑을 한 거야. 친구니까 충고한다. 널 사랑하지도 않는 은영을 작작 쫓아다녀라.” 승호는 멱살을 꽉 움켜쥔 성호의 손을 비틀어 빼고 침대에 앉으면서 뒤말을 이었다. “글쎄 은영이 널 사랑한다면 은영을 양보하겠어. 허나 은영은 나와 죽자 살자 한단 말이야. 알만하지?” 성호는 억이 막혀 말도 나가지 않았다. 승호는 풀이 죽은 성호를 보고 중얼거렸다. “성호야, 너 혹시 무슨 소문 들었니?” 성호는 승호를 쏘아보면서 “네놈새끼 무슨 짓을 한건 네가 제일 잘 알게  아니야?!” 하고 공을 차넘겼다. 능글맞은 승호는 중을 떠보려고 했다. “혹시 은영과 내 뭘 어쩌는 걸 보았니?” 성호는 승호를 쏘아볼뿐이였다. (개자식, 지하독서실에서 짓밟은 처녀애가 은영이냐?) 그때 승호가 대수롭잖게 지껄였다. “뭐 대단한 일이냐? 서로 사랑하는 사이에 인지상정이지.” 성호는 지하독서실에서 홍희와 그러는 거 못 본거 같으냐고 고함치려다 목구멍까지 터져나오는 말을 겨우 삼켜버렸다. 승호는 성호한테 다가와 어깨를 툭툭 치면서 지껄였다. “친구니까 충고하마. 은영을 포기해라.” “왜?” “넌 농부의 아들이니까.” “이 자식!” 성호는 승호의 멱살을 틀어쥐여 콱 밀쳤다. “이 새끼야! 농민 아들이라고 업신여기지 말라!” “타고난 팔자가 농부 아들인 거 어쩌겠니? 쇠나 방목하다 대학에 오기만 해도 대단한게지. 욕심이 너무 과하면 독이 돼 다친다, 다쳐.” “뭣이?!” 성호는 승호의 멱살을 놓고 조용히, 그러나 면도칼날 같이 섬뜩한 말을 토했다. “담이 있으면 나하고 결투 하자.” “흥! 결투?!” 승호는 세귀눈으로 성호를 쏘아보며 랭소하더니 대수롭잖게 물었다. “지금 나한테 도전하는 거냐?” “그래, 깨끗하게 결투로 결판내자.” “난 걸투 안 해.” 승호의 대답은 뜻밖이였다. 입귀에 조소를 흘리기까지 하는 걸 보고 성호는 모욕감을 느꼈다. “겁나냐?”  “계집애 땜에 친구를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아.” “누가 다칠지 몰라. 쓸데없는 소릴 싹싹 걷어치우고 한판 붙어보자.” 승호는 흥흥거리면서 코웃음쳤다. “너 력도도 하고 투탄도 멀리 한다만. 흥, 싸움은 달라.” 큰 소리도 땅땅 쳤다. “난 시내 깡패두목들도 쳐눕힌 호랑이야. 흥, 소궁둥이나 치던 촌놈이 언감 도전해?”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알아!” “좋다! 결투면 결투지. 한판 깨끗하게 승부를 갈라보자. 한각 부러져도 절대 후회하지 말라.” 승호는 흉악한 상통에 조소를 날리면서 성호의 도전을 거리낌 없이 받아들였다. “뭘 걸고 결투하겠느냐?” “은영을 걸고 결투하자! 네 지면 은영을 놔라.” “허허허. 그렇게 쉽지 않을 걸!” 승호는 앙천대소했다. “네가 지면 어쩌지?” 성호는 여지를 두지 않고 제꺽 대답해버렸다. “다신 은영한테 미련을 두지 않을게.” “아니야. 내 사생활을 까딱 소문내지 말고 무덤까지 가지고 가라.” 성호와 승호는 아무 말도 없이 숙사에서 나와 눈보라 치는 학교 뒤산으로 올라갔다. 승호는 무릎까지 풍풍 빠지는 눈덮인 야산을 둘러보면서 두덜거렸다. “이런데서 어떻게 결투 해?” 성호는 오른 주먹으로 왼손 바닥을 탁탁 쳤다. “우리 촌놈들은 싸움터를 가리잖아!” “눈보라 치는 야산이라. 뿌슈낀이 결투하던 장소와 비슷하구나. 오늘 여기가 네 무덤이 될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개소릴 작작 치고 덤벼라!” 승호는 목을 놀리더니 발로 눈을 풍 차던지면서 지껄였다. “시골 농부 새끼, 어디 내 주먹맛 봐라!” 그때 승호는 씽 번개같이 날아 들어오면서 승호의 면상을 주먹으로 퉁퉁 갈겼다. 성호는 몸을 옆으로 슬쩍 피했다. 허나 왼 주먹은 간신히 피했지만 오른 주먹을 미처 피하지 못했다. 성호는 얼굴을 한대 얻어맞고 비틀거렸다. 승호는 성호 잔등에서 랭소하며 몸을 홱 돌려 성호의 뒤통수에 헤딩을 딱 했다. 그 찰나 성호의 팔굽이 굴에서 나온 구렁이처럼 승호의 이마를 찔렀다. “앗!” 승호는 이마를 싸쥐고 몸을 날려 저만치 뛰여나갔다. “흥!” 성호는 코방귀를 뀌면서 터진 입귀의 피를 쓱 닦았다. 약이 오른 승호는 호랑이처럼 으르렁거리면서 덮쳐들었다. 승호가 비발처럼 주먹을 휘두를 때다. 성호가 허리를 굽히며 승호의 아래배를 탁 올리쳤다. 승호가 아래배를 부등켜안고 허리를 굽혔다. 성호는 무릎으로 승호의 숙인 면상을 올리걷어찼다. 승호는 어디서 그런 힘이 생겼는지 풀쩍 테 밖으로 뛰여나갔다. 용케도 성호의 무릎과 발길 공격을 피했다. 승호는 악이 날대로 났다. 이번엔 주먹을 휘두르며 날아들다가 몸을 키넘어 날리면서 양다리 질로 성호의 면상을 갈겼다. 성호는 주먹과 골만 잘 쓰는가 한 승호가 발길을 날리리라고 예측하지 못했다. 결과 발길에 채워 저만치 날려 나가 꺼꾸러졌다. 승호는 맹호가 양을 덮치듯이 몸을 날려 성호에게 덮쳤다. 어찌나 날래고 무섭게 용맹스러운지 딱 마치 독수리가 토끼를 덮치는 상 싶었다. 성호는 위기에 처했다. 그 찰나 성호는 반듯이 누운채 두다리를 굽혔다가 덮쳐드는 승호의 아래배를 탁 차서 머리 우로 넘겼다. 옆으로 굴러 벌떡 일어난 성호는 무송이 호랑이를 때려잡는 기세로 주먹을 쥐고 승호가 일어나기를 대기했다. “일어나라! 범도 죽은 양은 잡아먹지 않아!” “네 따위가 다 범이냐? 퉤!” 승호는 점점 악이 나 벌떡 일어나더니 눈덮인 높은 지세를 리용해 발길로 성호에게 눈을 탁 쳐놓았다. 성호가 눈에 튄 눈을 손으로 닦는 틈을 타 승호는 몸을 날리면서 성호를 량다리로 걷어찼다. 허나 성호가 고의로 빈틈을 주었을 줄이야! 성호는 기다렸다는듯이 자세를 낮추면서 팔꿈치로 허공 뜬 승호의 아래 배를 탁 올리쳤다. “앗!” 승호는 외마디 비명소리와 함께 눈구뎅이에 나가 떨어져 때굴때굴 굴렀다. “그만해!” 뜻밖에 한 처녀애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성호가 쓰러진 승호가 일어나기를 기다려 치려고 하다가 그쪽을 돌아보았다. 은영이 눈보라  속에 허우적허우적 뛰여오면서 고함쳤다. 그때 승호는 벌떡 일어나 은영에게 눈길을 파는 성호의 뒤통수를 주먹으로 쳤다. “억!” 성호는 비명소리와 함께 눈에 처박혔다. “농부새끼! 감히 덤벼?!” 승호는 씽- 몸을 날려 날아가면서 기여일어나려는 성호의 목을 겨누고 발길을 날렸다. 성호는 날아드는 발을 덥석 잡아 홱 내동댕이쳤다. 승호는 소나무에 처박혀 머리를 꽝 쪼았다. 순간 눈언저리에서 뻘건 피가 주르르 흘러 얼굴을 뒤덮었다. 하얀 눈 우에 수치스러운 피가 벌겋게 물들었다. “촌뜨기새끼, 죽여버리겠다!” 은영이 앞에서 망신당한 승호는 벌떡 일어나 갈범처럼 덤벼들었다. 성호는 련속 날아드는 승호의 주먹을 손으로 탁, 탁 쳐냈다.  “그만해요!” 은영이 두팔을 벌려 호랑이들처럼 펄펄 날뛰는 성호와 승호 사이에 막아서며  통곡쳤다. “왜 이래요? 네? 어째 내 죽는 걸 보고 싶은가요. 엉~ 엉~” 그제야 승호와 성호는 주먹을 내렸다. 승호는 터진 머리와 눈언저리를 눈을 쥐여닦고 성호는 입귀의 피를 눈을 쥐어 닦으면서 씩씩 거렸다. “싸우지 말고 아예 날 죽여 버리세요. 그럼 다 끝날게 아닌가요?” 승호는 은영의  앞에서 우쭐거리면서 빈정거렸다. “삐치지 말라! 내 이겼어. 이젠 성호가 약속을 지킬 거야. 아무리 농부의 아들이라고 해도 군자 협의야 지켜야지.” 성호는 눈을 쥐어 입귀의 피를 닦을뿐 묵묵부답이였다. 승호는 점점 떠들썩하게 고아댔다. “하루 강아지 호랑이 무서운줄 모른다고. 촌뜨기새끼, 감히 호랑이를 건드려? 시내 가서 물어봐라. 호랑이란 별명만 들어도 깡패들이 다 달아난다. 졌다고 해라. 그럼 내 봐줄게.” 성호는 승호를 쏘아보면서 “아직도 입만 살아 있구나. 이 자식아, 아녀자 앞에서 자존심을 작작 건드려라!” 하고 반격했다. 성호는 주먹을 으스러지게 쥐였다. (저 새끼를 놔뒀다간 이제도 얼마나 많은 처녀들이 짓밟힐지 몰라!) 허나 인차 주먹을 스르르 풀었다. 승호는 물러서지 않고 계속 빈정거렸다. “아무리 악을 써도 은영은 내 거야! 다 쑤어놓은 죽을 이제 와서 어쩌겠단 말이냐?” 성호는 은영을 똑바로 쏘아보았다. 삽시에 은영은 얼굴이 새파래나면서 승호를 쏘아보았다. “그만 해요. 원, 창피해서 어떻게 살겠니?” 은영은 돌아서서 얼굴을 싸쥐고 어깨를 들먹이였다. 허나 승호는 눈언저리에서 줄줄 흐른 피가 흘러 들어가는 입귀에 시누런 금이빨을 드러내면서 씨무룩이 웃었다. 성호는 은영의 가냘픈 뒤모습과 승호의 더러운 몰골을 번갈아보면서 무엇인가 짐작이 가는 데 있었다. 그때 승호는 머리를 숙이는 성호를 보고 또 지껄여댔다. “활딱 벗고 나와야 물러나겠니? 허허허.” 성호는 머리를 숙이고 머리를 툭 떨어뜨린 채 자리를 터벅터벅 간신히 떠났다. 비틀거리며 멀어져 가는 성호의 넓은 등뒤를 훔쳐보며 은영은 서럽게 울었다. 뒤이어 그는 자기 목수건으로 승호의 눈언저리에서 멈출줄 모르고 흘러나오는 피를 닦아주었다. 윙-윙- 휘몰아치는 눈보라 속에 성호의 뒤에서는 은영의 통곡소리에 반주하여 승호의 고함소리가 허연 눈덮인 소나무 숲  속에서 울려퍼졌다. “은영은 내 거야! 내 거! 허허허!” 화답이나 하는듯이 은영의 울음소리가 눈덮인 황야에서 서럽게 울려퍼졌다.                    
133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90) 댓글:  조회:1346  추천:5  2017-12-20
                    9. 추방        정규상 같은 유명한 교수, 의사를 보고 병을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은 사상교양에 결부한, 범보다 더 무서운 정치징벌이었다. 그것은 마치 푸르른 초원에서 풀을 먹지 못하고 달리지 못하게 천리마를 말뚝에 매 두는 것이오, 소 주둥이에 꾸러미를 채워 여물을 먹지 못하게 하는 격이 아니고 무엇인가?        의학학부 학부장 로기순 박사는 정규상이 어처구니 없이 무함과 릉욕을 당하는 것을 보고 항상 도리머리를 저으며 침묵으로 항거했다.        어느 하루 저녁 퇴근하기 전에 정규상이 복도를 청소할 때었다. “박 서기, 이러지 마세요. 누가 보면 큰 일 나겠습니다.” “떠들지 마오.” “서기가 어째 이럽니까? 이걸 놓으십시오.” 박영발 서기 사무실에서 여성의 애원소리가 간간히 들리었다. “입당하겠다면서 어째 정치민감성이 없소?” “…” “고분고분 말 들으면 입당시키구 내과 간호사장을 시킬게.” “저는 처녀예요. 이러면 어떻게 시집갑니까?” "우리 둘 밖에 모르는데. 어째 시집가지 못한다고 그러오?” “야, 이걸 놓으십시오.” “말 들어. 제꺽, 응?” “어쩜 사무실에서 이럽니까?” “잔말 말고 하자는대로 들이대라." "입당 못해두 이런 짓, 아니, 이러지 말라는데두!" "어째 정규상처럼 우파모자를 쓰구 투쟁맞겠니?” “아, 아, 집안 집 삼촌이라는 게. 이, 이게 뭐, 뭔가요?” “눈 딱 감고 조금만 참아라.” “이러지 마, 말라는데. 아이구, 아파 죽겠다. 씨!” "쉿!" 정규상은 복도를 두리번거리었다. 누구도 없었다. 다만 저쪽에 당직의사가 한창 환자서류철을 뒤적이고 있을 뿐이었다. 정규상은 살금살금 사무실에 다가가 귀를 기울였다. 밀봉된 문이 꼭 닫힌 사무실 안에서 후닥닥 후닥닥 하는 소리와 여성의 비명인지 신음소리, 침대가 삐꺼덕삐꺼덕 하는 소리 귀청을 아프게 때렸다. (더러운 놈!) 정규상은 고의로 복도를 청소하는 척 하면서 걸레대로 사무실 문을 퉁퉁 쳐놓았다. 정규상이 걸레질을 하면서 세면실로 들어가 문을 살며시 열고 살펴볼 때다. 사무실 문이 살며시 열리더니 박영발 서기가 복도를 두리번거리는 것이었다. 정규상은 제꺽 세면실 문을 닫고 걸레를 물초롱 안에 넣고 휘휘 휘저으며 씻어댔다. 그러다가 다시 세면실 문을 살며시 열고 박영발의 사무실 쪽을 살폈다. 한참 후에 한 간호사가 머리를 쓰다듬으며 나오더니 사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종종 걸음을 쳐 세면실을 지나 간호사 실로 가는 것이었다. 그녀가 세면실을 지날 때 정규상은 자기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항상 박영발을 삼촌이라고 졸졸 따라다니며 아양을 떨던 박윤희가 아니겠는가! 정규상은 박윤희가 불쌍해 보지 못할 것을 본 것 같아 세면실 안 칸에 있는 화장실에 들어가 문을 닫아걸고 나오지 않았다. 한참 후 여성 화장실문이 열니는 소리가 나더니 잘칵 문을 잠그는 소리가 나고 뒤이어 흑흑 흐느껴 우는 소리가 들리었다. 박윤희의 흐느낌 소리 같았다. 한참 후 여성 변소 쪽에서 종이를 버스럭거리는 소리와 흐느낌소리가 들리었다. 정규상은 여성 화장실에서 나가는 여성이 누군가고 살펴보았다. 분명 박윤희였다. 박윤희가 나간 후 정규상이 여성 화장실을 청소하면서 살펴보니 파지 통에 빨간 피가 가득 묻은 위생지가 수두룩이 널려 있었다. 정규상은 피 묻은 위생지가 지저분하게 널린 쓰레기통을 청소해 버리면서 박영발에게 간음당한 박윤희가 불쌍해났다. 한참 후 박영발의 사무실의 불이 켜졌다가 꺼졌다. 이윽고 박영발이 어두운 사무실에서 나와 복도에 서서 여기 저기 살펴보는 것이었다. 드디어 어깨를 으쓱하더니 층층계 쪽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세면실에서 정규상이 문을 살며시 연채 살피다가 걸레를 들고 나올 때었다. 갑자기 뒤에서 나는 고함소리에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놈 우파분자, 아직도 퇴근하지 않고 뭘 기웃거려?!” 정규상이 돌아보니 떠나간 것 같던 박영발이 도끼눈이 돼 쏘아보는 것이었다. “아, 박서기, 이제야 퇴근하오?” “안되겠다. 네 놈은 투쟁을 덜 받았구나. 진짜 음흉한 놈이구나.” 정규상은 속으로 맞받아 욕했다. (적반하장이라더니 누가 할 소리를 누가 하니?) 박영발은 정규상을 잡아먹을 듯이 쏘아보며 이발을 부득부득 갈았다. “네 놈, 말을 함부로 해 고생을 하는 걸 알지? 주둥이를 잘 건사해라. 함부로 지껄였다간 감옥에 보낼줄 알아라. 알겠어?” 정규상은 자기 입을 막으려고 하는 개수작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어쩌는 수 없었다. “예, 알았습니다. 난 아무 것도 모릅니다.” “당신은 총명한 사람이란 걸 아오. 어떻게 해야 살아남을 수 있게 된다는 거 알리라 믿네.” 박영발은 경고 메시지를 보내고는 휑하니 자리를 떴다. 정규상은 심장박동이 급해지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그는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며 박영발이 떠나간 어둠침침한 복도와 사무실을 둘러보았다. 이튿날 아침이었다. 정규상이 한창 청소할 때다. 박영발이 다가왔다. “우파분자 정규상은 광명위생원으로 가서 개조해라.” “예?” 정규상은 자기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못 들었는가? 광명위생원으로 가라!” 광명위생원은 시내 한 가도 위생원이었다. 정규상이 위생원에 개조하러 내려갔을 때었다. 광명위생원에는 5십대의 김형내라는 중의와 약제사, 간호사 셋밖에 없었다. 김형내는 염소수염을 쓰다듬으면서 기 죽은 정규상을 아주 반갑게 맞았다. “에이유, 심장내과 전문가가 이런 누추한 가도위생원에 와서 어떻게 고생하겠소?” 정규상은 목구멍으로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사상개조를 잘 해얍지.”라고 한마디만 했다. 여성약제사는 형내의 둘째 며느리 박명자라고 불렀는데 약제사를 하는 한편 시아버지한테서 중의를 배우고 있었다. 그녀는 아주 성근한 여성이어서 아주 존중하는 눈길로 정규상을 바라보면서 “후에 저에게 서의를 많이 가르쳐 주세요.”라고 하며 반갑게 인사했다. 허나 정규상은 겸손하게 “개조분자에게서 뭘 배울 게 있겠습니까?” 하고 말했다. 명자는 웃으면서 “정교수는 우리 연변에서도 이름 높은 진단전문가에 심장내과 전문가인데요. 이 기회에 꼭 스승으로 모시고 심장내과 의료기술을 배워야겠어요.”라고 했다. 정규상은 한숨을 후 내쉬며 옆에 서 있는 간호사에게 눈길을 돌리며 먼저 눈인사를 건넸다. 허나 간호사 박영자는 정규상한테 멸시하는 눈총을 주며 등을 돌리는 것이었다. 지어 자기는 팔짱을 끼고 떡 버티고 서 있으면서도 아버지 벌 되는 정규상을 보고 훈계부터 했다. “개조하러 왔으면 청소랑 말끔히 해야지, 뭔가요?”       정규상은 속으로는 불쾌했지만 별수 없었다. 꾹 참으면서 청소를 하지 않으면 안 됐다.       형내는 너무 한 것 같아 영자를 책망했다.       “예절 없이, 참, 그거 뭐요?” “에이유, 김 의사는 우파분자를 두둔하는가요?” “조선 사람들은 예로부터 어른을 존중하는 예절을 지켜왔소. 그게 뭐요?” 형내의 질책에 영자는 혀를 홀랑 내밀었다. 그후부터 그녀는 형내 앞에서 더는 정규상과 각박하게 놀지 못했다. 허나 항상 눈살이 꼿꼿해 정규상을 핼끔 쳐다보며 눈을 흘기군 했다.          어느 날 오후에 출근한 박영자는 형내를 찾아와 호들갑을 떨었다. “김 선생님, 언닌 입당하고 내과 간호사장이 됐대요. 언니가 얼마나 부러운지 모르겠어요.”        형내는 염소수염을 슬슬 쓸면서 “축하한다고 언니에게 전하오.”라고 하고는 환자를 계속 보았다.       그는 환자의 손목에서 진맥하던 손을 떼더니 그때까지 종알거리는 영자에게 눈길을 돌리며 물었다. “언니 이름이 뭐라고 했던가?” 영자는 외까풀 눈을 곱게 상글거리었다. “박윤희입니다. 어째 대상자라도 소개해주렵니까? 우리 언니 저 보다 퍽 예뻐요. 여자들이란 예쁜 것도 밑천인가 봐요. 언니는 예쁜 덕에 큰 병원에 갔잖아요.  미모 덕에 또 입당도 빨리 했지요.” (박윤희? 아니, 그럼 영발에게 짓밟힌 윤희가 하루 아침 사이에 입당하고 간호사장이 됐단 말인가?) 정규상은 자기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형내가 눈을 내리깔고 처방을 떼면서 영자에게 물었다. “어떻게 돼 그리 빨리 입당했다오. 뭐 예쁘다고 입당시켰겠소? 당조직에서 미녀만 입당시키겠소? 그럴 수는 없소. 반 우파 투쟁이 심한데 그런 말 작작 하오.” 그제야 영자는 혀를 홀랑 내밀더니 의사 사무실에서 나가며 종알거렸다. “에이고, 내 팔자도 기구하지. 한뉘 쥐구멍만한 위생원에서 낑낑거리다나면 언제 언니처럼 입당하겠니?” 정규상은 영자가 나가자 슬며시 형내에게 물었다. “저 영자 동무의 언니는 어느 병원 내과 간호사장이랍니까?” 그러자 형내는 정규상을 흘끔 건너다 보더니 대수롭잖게 대답했다. “YB병원 내과 간호사장이라오.” “예, 그렇군요.” 형내는 이상한 듯이 정규상을 쳐다보았다. “오- 정의사 그 병원에서 왔으니깐. 아는 사람이겠소.”  “알다뿐이겠습니까. 예. 한과에 있었습니다.” “오, 정말 그렇지. 항상 저 여동생을 찾아와 웃고 떠들고 했는데 요즘 보이지 않소. 전번에 피뜩 큰 길에서 보니까 아주 수척해졌더구먼. 그 곱던 얼굴이 반쪽이 되지 않았겠소.” 정규상은 속으로 짚이는 데가 있었다. 분명 박영발이 윤희의 정조를 짓밟은 대신 돌격입당시켜 간호사장까지 시킨 것이었다. 그런 방법으로 자기 죄악의 흔적을 가리려는 것이었다. (개자식, 내가 입당신청서를 쓴지 십년이 되도록 입당시키지 않더니 풋내기를 입당시키고 그런 개짓을 하는구나. 개똥을 청보자기로 싸놓을 수 있을 거 같니? 처녀 전도를 짓밟고 더러운 야욕을 채우고서도 천벌받지 않을 거 같니?) 허나 정규상은 누구하고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정규상이 빗자루를 쥐고 청소하려고 하니 형내는 말렸다. “청소는 영자나 시키고 환자를 볼 준비나 하오. 의사가 병을 보지 않고 그런 일까지 하겠소?” 허나 정규상은 빗자루를 쥐고 사무실 안을 썩썩 쓸었다. 어느 날, 웬 곱살하게 생긴 각시가 애기를 업고 정규상을 찾아왔다. “정 의사 바쁘지 않습니까?” “오, 옥선이 어떻게 돼 왔소?” 김옥선은 애기를 잔등에서 풀어내려 안으면서 “얘가 아파서 왔습니다. 좀 봐주십시오.”라고 하며 기침을 콜록콜록 하는 애를 앞으로 내밀었다. 정규상은 형내의 너부죽한 얼굴을 마주 바라보면서 “김 의사는 정말 용한 중의요. 김 의사에게 보이오.”라고 했다. 사실 광명위생원에는 중약이나 있었지 애들 감기에 맞을 베니실린마저 없었다. 서약이 없는 중의위생원에서 정규상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던 것이다. 그러자 옥선은 애기를 안고 맞은쪽에 다가갔다. “우리 마을에서 살던 각시오.” “안녕하십니까? 선생님, 얘를 살려 주십시오. 자꾸 기침을 콜록콜록 하면서 열이 자꾸 오릅니다.” 형내는 애 손을 잡아 사무 상우에 놓더니 맥을 보기 시작했다. 이윽고 형내는 옥선을 마주 보며 “폐가 좋지 못하구먼. 치료를 바짝 하지 않으면 위험하오.”라고 했다. 뒤이어 형내는 처방을 떼면서 “혹시 집에 결핵병을 앓는 사람이 없소?” 하고 물었다. 옥선은 눈물을 흘리면서 “후남편의 본댁이 결핵병을 앓아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후남편도 전염됐는지 기침을 쿨룩쿨룩 합니다.”라고 했다. 형내는 짚이는 데 있어 처방을 쓱쓱 써서 약제사 며느리에게 주었다. 한참 후 박명자가 중약을 내다 옥선에게 주었다. 옥선은 눈물을 흘리면서 “고맙습니다.” 하고 인사하고 애를 업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분 수고했습니다. 얘가 살아나면 내 떡을 쳐 가지고 오겠습니다.”라고 인사했다. 옥선이 광명위생원을 나서는데 정규상이 따라 나와 그의 손에 돈 2원을 쥐어 주면서 “얘 병을 치료하는데 보태오.”라고 했다. “아니, 이렇게 큰돈을, 이러지 마십시오.” “받소.” 옥선이 받지 않으려고 하는 것을 정규상은 마구 밀어주고 나서 “그래, 재가를 가서 후남편과 잘 보내오?”라고 물었다. “예. 정의사 소개한대로 정말 마음이 좋고 듬직한 후남편을 만나서 마음고생이 없이 잘 보냅니다. 얘가 아파서 속이 타 그렇지요.” 옥선은 또 코마루가 시큼해나 손으로 눈물을 닦았다. “크게 근심하지 마오. 일없을 게요. 저 김 의사는 우리 시내에서 소문난 한의(중의)요.” 정규상의 말을 듣고 옥선은 얼굴에 조금 긴장을 푸는 기색이 피어올랐다. 광명위생원을 나와 점심때가 오래지 않은 것을 느낀 옥선은 애를 업고 여동생 옥숙이네 집으로 갈 가고 생각했다. 여동생 옥숙은 옥선보다 열 살이나 지하였다. 체격도 좋고 예뻐서 시내 운수공사 운전수 질을 하는 신랑을 만나 아주 재미나게 살고 있었다. 그녀의 신랑 리상철은 원래 부대를 갔다가 내몽골자치구에서 해방표 자동차를 몰았는데 이 시내로 들어왔던 것이다. 옥선은 애를 업고 가서 점심이나 먹고 갈까 생각하다가 인차 생각을 달리했다. “앓는 애를 업고 여 동생네 집으로 가지 마자. 혹시 폐병이 귀여운 조카 춘화한테 전염되면 어떻게 해?” 옥선은 앓는 애를 잔등에 업고 첩약을 들고 걸어서 모아산 고개 길에 들어섰다. 20전을 주면 버스를 타고 모아산을 넘어 집으로 가련만 정규상이 준 돈을 쓰기 아까웠던 것이다. 하긴 이전에는 물독을 사도 좋은 버스를 두고 물독을 이고 모아산을 넘고 가슴을 치는 해란강을 넘어 집으로 돌아간 일도 아주 많았다. 하여 애를 하나 달랑 업고 집으로 돌아가는 일은 식은 죽 먹기였다. 힘겹게 모아산 고개를 넘으면서 옥선은 자기 인생이 고달픈 모아산 고개 길과 같은 감이 들었다. 옥선은 원래 남편 조철호를 12년이나 기다렸다. 기실 조철호는 항미원조 전쟁 때 김성칠 련대장을 따라 무명고지 전투에 참가했다. 무명고지 절벽이 적들의 포격에 무너지는 바람에 조철호는 대적공세를 벌이던 아나운서 녀전사와 함께 무정한 바위돌에 깔려 장렬히 희생됐던 것이다. 시집 큰동서네 고방에서 베갯잇을 눈물로 적시면서 신랑을 기다리다가 혹시 구새 목에서 발자국 소리가 쿵쿵 들리면 신랑이 달빛을 밟으면서 문을 뚝 떼고 집으로 돌아 올 것만 같았다. 하여 문고리를 쥐고 바깥을 내다보다가 낯모를 나그네가 문 앞을 지나가군 했다. 발걸음 소리가 멀어져 가면 옥선은 문고리를 잡은 채 모래기둥이 무너지듯이 스르르 물앉곤 했다. 어떤 때에는 독수공방하면서 신랑이 1948년 가을 장춘을 해방한 후 집에 피뜩 들리었다가 간 후 보낸 편지와 조선전쟁 때 보낸 편지를 매만지면서 신랑을 그리고 또 기다렸다. 허나 평양이 폭격을 맞은 후 다시는 편지가 오지 않았다. 게다가 신랑이 남기고 간 유복자 외동아들마저 잃어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는지 모른다. 후에 옥선은 시부모와 말해 한 마을에 세간난 후 네 살짜리 막내 시동생을 업어 키우면서 신랑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기다리었다. 하여 새파란 나이에 옥선은 12년이나 신랑을 기다리며 허무한 세월을 보냈던 것이다. 한마을에서 살던 의사 정규상이 소개해 평란 촌에 있는 후남편 이종호를 만나 살게 되었던 것이다. 이종호에게는 본댁이 낳은 14살 난 딸 신자와 11살 난 아들 경수 그리고 일곱 살 밖에 안 되는 둘째딸 순자 해서 조롱조롱 애 셋이나 달려 있었다. 종호는 애 하나도 데리고 오지 않은 후처 옥선에게 미안해 애들 셋 가운데서 젖먹이 순자를 용정에 있는 사촌형네 집에 줬다. 그 사촌형 내외간은 슬하에 자식 하나 낳아 기르지 못했다. 사촌형은 일점혈육도 없는 허전함을 달랠 겸 사촌동생네 둘째딸을 두말없이 제꺽 받아들이었다. 순자가 용정 오촌큰아버지네 집으로 떠나가는 날 눈보라가 어찌하여 그렇게 불어쳤는지 모른다. 순자는 큰아버지 손에 잡혀 용정으로 떠나면서 아버지와 경수 오빠 그리고 신자 언니를 번갈아 보면서 눈물을 줄줄 흘리었다. 평란촌 마을 동구 밖을 거의 떠나 갈 때었다. 갑자기 순자가 몸을 돌려 “언니! 오빠!” 하고 고함치며 발을 동동 구르다가 큰아버지의 손을 홱 뿌리치고 이쪽으로 되 달려 왔다. “순자야!” 경수도 네 살 지하인 여동생을 와락 끌어안고 엉엉 울었다. “아버지, 내 여동생을 남에게 주지 마시오. 예?” 경수가 아버지를 쳐다보는데 종호는 “이 놈 자식, 여동생을 시내에서 살게 보내는데 뭘 알아서 그러니?” 하고 욕했다. 종호가 흘끔 옥선의 눈치를 살폈다. 옥선은 머리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며칠 후 옥선은 어미 없는 선실의 애들이 더 없이 불쌍해 났다. 그녀는 후남편 종호를 보고 “애들이 불쌍해 어디 남의 집에 보내겠어요? 데려 오세요.”라고 말을 꺼냈다. 그러자 종호는 속으로는 놀랍고도 기뻤지만 동의할 수 없었다. “무슨 소리를 하오? 남도 아니고 사촌형한테 보냈는데. 시내에서 살면 좀 좋아서?” “후 어미도 어미입니다. 어찌 자기 자식을 남에게 맡기겠습니까? 데려 옵시다.” “뭘 먹고 살겠소? 3년 재해 세월에 입이 하나라도 불어나면 입에 거미줄을 치겠소.” 그러나 옥선은 기어이 데려오려고 고집했다. “그 애를 데려오지 않으면 후 어미가 무슨 면목으로 이 마을에서 살겠습니까? 남들은 후 어미가 애들을 쫓아냈는가 하겠습니다. 멀건 죽물을 먹으면서라도 한 집에서 키우면서 삽시다.” 종호는 옥선의 두 손을 잡고 “고맙소. 낸들 제 새끼 불쌍하지 않겠소?”라고 하더니 옥선을 와락 끌어안았다. 그날로 종호와 옥선은 용정에 가서 순자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물론 사촌형은 순자를 내놓기 아까와 했지만 별 수 없었다. 자기 딸을 데려가는 데야. 순자는 너무 좋아 아버지와 후 어머니 손을 쥐고 퐁퐁 외발 뜀을 하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경수와 신자는 여동생 순자를 와락 끌어안고 왕왕 대성통곡 쳤다. 그 정경을 보고 마음이 비단 같은 옥선은 애들이 불쌍해 뜨거운 눈물을 흘리었다. 선실의 애들을 셋이나 키우는 것도 쉽지 않은데 설상가상으로 재혼해 낳은 첫애마저 글쎄 기침을 콜로콜록 하면서 앓아 야단났다. 속이 타다 못해 재 가루로 될 지경이었다. 옥선이 어린애를 업고 모아산 고개 아리랑 고개를 터벅터벅 넘으니 재가해온 평란촌 마을이 환히 내려다 보였다. (얘가 일 없어야겠는데.) 옥선은 광명위생원에 있는 유명한 의사 정규상을 생각하자 애를 구할 신심이 생겨 한 숨을 후 내쉬더니 애를 춰 업고 모아산 고개 길을 내려갔다.                                   10. 3년 재해 비극       어느 토요일 날, 눈보라 치는 바깥을 내다보다가 정규상은 전번에 아버지가 편찮다고 약을 지어달라고 찾아왔던 상순이 눈앞에 선히 떠올랐다. 그는 퇴근하면서 형내에게 “아버지 친구가 농촌에 있는데 몹시 편찮은 거 같습디다. 내일 피뜩 가서 보고 오겠습니다.”라고 했다. 형내는 역서장을 뒤번져보더니 “쉬는 날인데 가보오.” 하고 청가를 주었다. 그는 주사실 쪽을 피뜩 살피더니 영자가 벌써 퇴근한 것을 보고 시름 놓고 물었다. “아버지 친구는 어느 마을에 있소?” 정규상은 문 밖을 나가려다가 주춤 멈춰 섰다. “여기서 한 40여리 떨어진 함흥 촌이라던가 하는 시골마을에 있습니다.” 정규상은 기억을 더듬다가 무릎을 탁 쳤다. “아차, 아닙니다. 함흥 촌에서 살다가 조개덕으로 이사해 내려왔다고 합디다.” 형내는 문께로 가다가 돌아섰다. “아버지 친구 이름이 뭐요?” “김기준입니다. 그 집 아들은 김상순입니다.” “아니, 그 분이 편찮다고 하오?” “예. 어떻게 아는 사입니까?” 형내는 도로 사무상 앞으로 가더니 “그 분은 작은 할아버지 되는 분이오.” 라고 했다. “예? 정말 세상은 넓고도 좁구먼.” "어떻게 내 작은할아버지를 아오?" "사실 세교지간이죠. 저의 아버지와 상순의 아버진 제정 때 룡정 장마당에서 면목을 익히게 됐답니다." 정규상한테서 이왕지사를 쭉 듣고 나서 형내는 머리를 끄덕였다. “어떻게 편찮다오?” 정규상은 상순이 약을 지으러 왔던 때 일을 죽 이야기하고 나서 뒷말을 이었다. “제대로 잡숫지 못해 기맥을 쓰지 못하는 거 같습디다. 전번에 상순을 보고 인삼 같은 거나 사다가 대접시키라고 했습니다.”  형내는 정규상을 보고 “정 선생, 내일 함께 가 보기요.”라고 제의했다. 정규상은 기뻐하면서도 얼굴에는 근심의 그림자가 스쳐지나갔다. “우파분자와 동행해 괜찮겠습니까?” “별 소리를 다 하오. 환자를 보러 가는데 어떻단 말이오. 후과는 내 책임질게.” 그때 형내 둘째며느리 박명자는 시아버지를 흘끔 곁눈질하면서 근심하는 표정을 드러냈다. 이튿날 아침, 형내는 돼지고기 몇 근에 기맥을 추는 약 몇 첩을 져 들고 떠났다. 정규상은 좁쌀주머니를 둘러메고 그를 따라 나섰다. 오동지섣달이라 매섭게 추웠다. 대지는 눈보라가 윙-윙- 휘몰아쳐 얼어붙은 은세계를 방불케 했다. 소서구 어구지에 있는 조개덕에 이르러 그들은 마을 사람들과 물어 제일 남쪽에 자리 잡은 상순의 집으로 들어갔다. 상순은 한창 아버지를 부축하고 숟가락으로 죽물을 입에 떠 넣어주다가 그들이 온 것을 보고 놀랍고도 반가워했다. 시아버지가 눈 대변을 닦아내던 명옥은 반갑게 인사하고는 부엌으로 내려가 가마부터 부시었다. 그녀는 큰시조카가 가져온 돼지고기를 장물에 얹고 부엌에 내려가 아궁이에 불을 땠다. 형내는 자기보다 거의 열 살이나 지하인 상순을 항상 깎듯이 삼촌 대접을 했다. 명옥은 돼지고기를 좀 베내 둘째 은숙을 보고 큰집 시조카 경학네 집에 가져가라면서 점심을 잡수러 오라고 이르라고 했다. “예.” 은숙은 돼지고기를 받아들고 한집 건너 뒤에 늙은 비술나무 아래 경학 오라버니 집으로 달려갔다. 형내와 정규상이 한창 앓는 기준을 진찰했다. 세월은 기준만 스치고 지나갔는지 이마에는 밭고랑 같은 주름살이 패이고 머리에는 시허연 서리가 내리었다. 기준은 그때까지도 푹 꺼져 들어간 눈으로 형내와 규상이 그리고 금방 들어선 경학까지 다 알아보았다. 상순은 형내와 규상을 한쪽으로 불러 물었다. “아버지 병세 어떻소?” 형내는 규상을 바라보며 “큰 병이 없소. 굶어서 기맥을 쓰지 못하는 거 같소.”라고 했다. 규상도 머리를 끄덕이었다. 상순은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야, 내 얼마나 무능하면 아버지를 굶기기까지 했겠소? 흉년세월에 어쩜 이런 일이 다 있소?” 명옥은 죽으라는 소리 내놓고 상순의 말을 고분고분 듣고 한마디 말대꾸를 하지 못했다. 뜻밖에 명옥이 한마디 툭 내쏘았다. “생산대에서 쌀을 나눠주면 저 오보호 마반산집 할머니한테 다 가져다주는게 어쩌겠소.” “뭐라고? 난 공산당원인데 어떻게 힘든 할머니를 돌보지 않겠소?! 우리 마을 애들 치고 어느 애가 마반산집 할머니 조산사로 받아내지 않았소? 덕돌도 그 할머니 받아내지 않았고 뭐요?" 상순은 아내에게 허연 눈알을 부라렸다. "됐소, 돼." 형내는  상순을 말리더니 물었다. “작은할아버지 올해 연세가 어떻게 되오?” “일흔 둘이오.” “오, 우리 집안은 모두 장수한 내력이오. 작은 할아버지는 문제없소.” 정규상은 환자가 듣는 자리에서 하는 위로의 말이라는 것을 알았다. 귀신같이 진단해 소문 높은 그는 푹 꺼진 눈 확에서 맥없이 한곳만 바라보는 기준의 눈과 바쁘게 몰아쉬는 숨소리를 듣고서도 큰아버지가 오래 앉기 힘들다는 것을 알고도 남음이 있었다. 이때 기준이 머리를 규상한테 힘겹게 돌리며 띄염띄염 물었다. “아, 아버지 조선에서 무, 무사히 보내오?” “아버지는 십년 전에 미제가 평양을 폭격할 때 세상떴습니다.” “오, 그랬구나. 참 좋은 친, 친군데.” 기준은 맥없이 눈을 스르르 감았다. 그날 저녁에 기적이 일어났다. 기준은 놀랍게도 자리에서 일어나 돼지고기 국에 이밥 한 사발이나 말아 다 잡수었다. 그리고는 맥없이 드러누웠다. 상순은 아버지를 근심했다. 허나 형내는 상순을 위로했다. "작은삼촌, 근심하지 마오. 작은할아버지는 음식에 취해 누웠소. 좀 쉬고 나면 괜찮을 거요. 약재에 인삼을 좀 넣었는데 잘 닳여서 대접하오. 그러면 일어날 게요.”  형내와 규상은 점심 숟가락을 놓기 바쁘게 기준을 깨울세라 조용히 일어나 귀로에 올랐다. 정규상은 광명위생원에 사상개조를 하러 왔기에 더욱 이튿날 출근에 주의해야 했던 것이다. 상순은 두 손으로 그들의 손을 꽉 잡고 인사했다. “약과 돼지고기 가져다줘 감사하오.” “규상 동생은 정치몽둥이에 맞으면서 고생하면서도 이렇게 먼 시골에까지 와서 고맙소.” 규상은 우파란 말만 나와도 머리 끼가 곤두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상순의 손만 잡고 흔들기만 했다. 상순은 형내와 규상의 뒷모습이 휘몰아치는 눈보라 속에 자그마한 흑점으로 돼 아물거릴 때까지 바라보았다. 순간 그들의 미거가 고마워 코마루가 시큼해났다. 형내의 말대로 이튿날 기준은 맥없이 일어나 앉았다. 상순과 명옥은 얼마나 기뻤는지 몰랐다. 연 며칠 상순과 명옥이 풍로에 형내가 지어다 준 첩약을 약탕기에 닳여 대접하고 규상이 가져온 입쌀로 정성껏 이밥을 따로 지어 드렸다. 기준은 약과 밥을 잡숫고 기적적으로 바깥으로 지팽이를 짚고 나가 대변을 보는가 하면 젖먹이 손자 덕돌을 안고 흥얼거리기까지 했다. 그러자 상순과 명옥의 얼굴에는 반가운 미소가 피기 시작했다. 손녀들도 할아버지 일어나 앉자 좋아서 어찌 할줄 몰라 깡충깡충 뛰였다. 그 애들은 다시는 애를 먹이지 않고 할아버지 심부름을 아주 잘했다. 덕돌은 할어버지 무릎에 앉아 흔들거리면서 재롱을 피웠다. 어느 날, 윙윙 휘몰아치던 눈보라가 누그러들자 기준은 상순을 불러 이런 말을 꺼냈다. “얘야, 소서구로 가보자.” “예? 이렇게 추운 겨울에 소서구로 가서 뭘 하겠습니까?” 상순은 창문으로 눈 덮인 바깥을 내다보면서 세귀눈이 휘동그래졌다. 기준은 벽을 짚고 겨우 일어나 바깥으로 나가려고 했다. 상순과 명옥이 양쪽에서 아버지를 부축해 바깥으로 나갔다. (풍설이 윙윙 이는데 왜 이러실까?) 기준은 괭이를 들고 길을 떠나려고 했다. 상순은 바삐 아버지 손에서 괭이를 받아 들면서 “뭘 하려고 이러십니까?” 하고 물었다. “가 보면 알 거야.” “수레에 앉아 갑시다.” 상순은 바삐 생산대 우사에 가서 소수레를 메워 몰고 왔다. 명옥은 황급히 집에 달려 들어가 이불을 내다 수레 밑바닥에 펴고 시아버지를 모셨다. 뒤이어 탄자를 수레에 앉은 시아버지 몸에 둘러 주었다. “고맙소. 며느리.” 명옥은 “추운데 일찍이 돌아오십시오.”라고 당부했다. 기준은 머리를 끄덕였다. 상순이 아버지를 모신 수레를 몰고 소서구로 삐꺼덕삐꺼덕 올라갔다. 눈보라가 하얀 백룡처럼 소서구 골 안을 핥아 대고 있었다. 드문드문 길이 눈 둔덕에 막혀 상순이 삽으로 마구 파헤쳐버리면서 길을 낸 후 계속 올라갔다. 기준은 살던 소서구 옛 집터를 둘러보더니 수레를 세우라고 했다. “상순아, 여긴 조선 고향에서 쪽박 차고 살 길을 찾아 간도로 들어와 살던 옛 집터지?” 상순은 그제야 아버지가 왜 소서구로 온 것을 알 것 같았다. 아버지는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더니 괭이를 쥐고 눈 가슴을 헤치며 천지꽃산 쪽으로 부축을 받으며 올라갔다. 한참 걷던 기준은 천지꽃산 기슭의 밭에 물앉는 것이었다. “아버지, 추운데 일어나십시오.” 허나 기준은 “놔라. 내 좀 여기서 편히 쉬고 싶구나.” 라고 하며 눈을 스르르 감고 앉아 까딱하지 않았다. 상순은 아버지를 부축해 일으켰다. 그런데 기준은 천천히 일어나자마자 상순의 손에서 삽을 받아 쥐어 눈을 파헤치는 것이었다. 한참 파니 검누런 흙바닥이 드러났다. 기준은 괭이를 놓고 무릎을 꿇고 물앉더니 검누런 흙바닥을 두 손으로 매만지더니 눈물을 줄줄 흘렸다. “얘, 이 땅, 이 땅은 우리 조손 3대가 피땀을 흘려 개간한 밭이 아니더냐? 이 아까운 밭을 버리고 가기 아깝구나.” “아버지!” 상순도 눈물을 흘리며 아버지를 부축해 일으켰다. 기준은 두 손에 언 흙부스러기를 담아 든 채 상순의 부축을 받아 천천히 일어났다. 뒤이어 손에 든 흙을 코에 대고 냄새를 흡흡 맡아댔다. “겨울이 돼서 흙의 향기 덜 나는구나. 허나 나는 마음 속으로 이 흙의 냄새가 맛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말을 마치자 그는 흙을 마구 입에 넣고 씹어 삼키었다. 그같이 이 땅을 사랑하고 아끼는 참 농사꾼이었다. “아, 이제야 우리 피땀이 푹 스며든 이 땅의 맛을 제대로 보았구나.” 기준은 흙을 씹으면서 몸을 돌리더니 상순을 진지하게 바라보며 간절히 부탁했다. “상순아, 정치인들이 어떻게 세상을 만들든지 간에 우린 농사꾼이야. 농사꾼의 양심은 밭을 묵여선 안 된다. 농사도 잘 모르는 건달들의 지시만 듣지 말라. 이 아까운 밭을 잘 다뤄 사원들이 굶지 말게 해라. 새 해에는 보릿고개도 넘기 힘든데 꼭 명심해라. 이 밭은 우리가 어떻게 일군 거냐? 우리 조손 3대가 뱀에게 물리고 괭이에 발등을 찍히면서 일군 밭이 아니냐? 지주 장학산의 눈칫밥을 먹으면서도 한 괭이 한 괭이 파서 일군 피밭이야!” 상순은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흐느껴 울며 정중하게 말씀을 드렸다. “예, 아버지, 제가 사원들을 잘 이끌지 못해 미안합니다. 이제부터 저는 진리를 견지하면서 허풍치기들의 말을 절대 듣지 않겠습니다. 농사를 잘 지어 사원들을 배불리 먹고 살게 하겠습니다.” 그제야 기준은 생강같이 바짝 마른 손으로 상순의 어깨를 다독여주었다. “일어나라. 내 죽으면 이 자리에 묻혔으면 좋겠다. 난 여기 누워서 우리 일군 밭에서 잘 자라는 곡식을 보고 싶구나. 허나 손바닥만 한 땅도 아깝구나. 밭에 묻지 말고 저쪽 계수동 쪽의 황무지에 묻어주면 족하다. 거기 누워서도 서쪽에 있는 이 밭을 볼 수 있으니까.” “아버지!” 아버지는 자기가 피땀으로 일군 밭에 묻히기도 아까와 하는 것이 아닌가! 상순은 속으로 피눈물을 흘리면서 수레에 아버지를 모시고 귀로에 올랐다. 소서구 골안은 그들을 환송이나 하는 듯이 눈보라들이 환호성을 울리면서 뒤따라 달려왔다. 정규상이 가져온 쌀로 죽을 쑤어 며칠 아버지를 대접하고 나니 쌀이 또 떨어졌다. 하긴 열 근이 좀 넘는 쌀을 9명 식솔이 죽을 쑤어 며칠 먹겠는가! 겨울이 돼서 푸성귀도 없고 정말 살기 각골했다. 명옥은 쌀독을 빡빡 긁다가 웃새집에 달려갔다. 항상 바쁜 일이 있으면 웃새집에 달려가면 큰집 시조부모로부터 동서들까지 항상 도와주군 했다. 그리하여 명옥은 큰집을 아주 자기 본가집처럼 믿고 살았다. 명옥이 앓는 시아버님께 죽물이라도 대접하게 쌀을 뀌어 달라고 하자 둘째동서와 후시할머니는 두 말없이 좁쌀을 한주머니 내주었다. “에이고, 효성스러운 며느리구나.” 오히려 시할머니는 손비 명옥을 기특하게 생각하며 혀를 끌끌 찼다. 명옥은 웃새집에서 얻어온 좁쌀로 지은 고들고들한 조밥사발을 시아버지 밥상에 올렸다. 기준은 아주 맛있게 조밥 한 사발을 굽 내고 자리에 드러누웠다. “야, 밥을 먹으니 살 것 같구나.” 이 한마디가 아버지가 남긴 마지막 말씀일 줄은 상순과 상우, 명옥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3년 재해를 입어 쌀 고생을 해 3년 동안이나 제대로 잡숫지 못해 앓던 기준은 끝내 동지섣달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생전에 그렇게 사랑하던 자손들을 한 구들이나 남겨두고 너무나도 총망히 세상을 떠났다. 그해 기준의 연세는 겨우 72세 밖에 안됐다. 자식을 앞세운 병완은 조개덕의 상순이네 집에 와서 하늘을 멍해 쳐다보면서 땅을 치며 탄식했다. “내가 오래 살아서 보지 못할 일을 다 보는구나. 내가 먼저 죽어야 하는데 주책없이 너무 오래 사는구나. 우리 고향을 떠나 간도에 와서 황무지를 개간해 배불리 먹고 살자고 그렇게 애를 썼구먼. 하늘도 무심하지. 황소같이 힘도 센 내 둘째아들마저 굶어 죽게 만들다니?” “아버지!” 상우는 굶어서 운신하기 힘들면서도 달려 와서 대성통곡 쳤다. “맏아들인 내가 아버지를 모시지 못한 불효를 용서해줍소. 아버지~, 아버지~” 상순은 아버지를 붙안고 더욱 서럽게 울었다. “내가 더 잘 모시자고 모셔왔건만 따뜻한 밥도 온전히 대접하지 못해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같습니다. 아버지- 아버지! 어엉, 어엉,” 두 며느리와 순자랑 순애랑 애들도 모두들 서럽게 엉엉 울었다. 덕돌은 무슨 영문인지 몰랐지만 아빠와 엄마, 누나네가 서럽게 울자 덩달아 엉엉 울어댔다. 최경인과 어금도 영월구에서 맏아들 근덕과 맏손자 일웅을 데리고 왔다. 최경인은 영월구에서 교편을 잡게 됐다. 그리하여 아버지가 돌아간 후 진수해로부터 차조구로 이사해갔던 것이다. 월금도 광석으로부터 맏아들 해진을 데리고 달려 왔다. 금옥도 남편 최학섭과 칠군이랑 인자랑 데리고 와서 서럽게 울었다. 그들은 아버지가 앓는다고 하자 몇 번이고 쌀 주머니와 돈을 들고 찾아와서 병문안을 하고 돌아갔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자 효성을 다하지 못한 것 같아 서럽게 대성통곡을 쳤다. 그 밸을 끊는 것 같은 통곡소리는 밤이 가고 새날이 밝을 때까지도 끊지 않았다. 상우와 상순은 없는 살림살이에도 누이들의 돈까지 모아 아버지 기준을 관작을 짜서 계수동으로 올라가는 산마루에 어머니와 함께 나란히 모셨다. 그들은 아버지와 어머니를 합장하지는 않았다. 상순은 아버지의 쓸쓸한 무덤 앞에서 절을 꾸벅꾸벅 올리면서 죄송한 마음을 칼로 한 오리 한 오리 어이는 듯이 아팠다. (3년 흉년 세월에 아들로 생겨서 부모를 제대로 대접하지 못한 불효를 어찌 하리오? 부모에게 효성을 하려고 영월구 공안국 국장을 다 버리고 두 번째 고향인 함흥 촌으로 돌아왔건만 부모께 제대로 효성도 하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함흥 촌과 조개덕 백성들의 쌀독은 텅텅 비었고 오래지 않아 가마에 거미줄이 칠 지경입니다. 한개 대대 사원들의 쌀독을 책임진 당 지부 서기로서 백성들이 굶어서 일 밭에서 척척 쓰러지는 비참한 정경을 더는 눈 뜨고 볼 수 없습니다. 형님도 항상 굶어 눈 확이 푹 꺼져 보기도 무섭게 됐습니다. 몇 십 년 동안 할아버지와 함께 혁명을 한 결과가 고작 이렇단 말씀입니까?) 그때로부터 상순은 과묵한 사람으로 돼 늘 고민에 잠겼다. 아버지를 갓 여읜 상주로서 항상 생산대대 회의실에서 회의를 해도 벽에 기대 앉아 대머리를 숙인 채 눈을 감고 숱한 문제를 사고하고 고민했다. 그는 무슨 회의를 하든 항상 입에 빗장을 지르고 묵묵히 앉아 있었다. 말수가 적은 그는 회의 때마다 몇 시간이고 지어 며칠이고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지어 술도 마시지 않았다. 그것은 백열화된 정치폭풍 속에서 무슨 말을 하겠는가. 혹시 술을 마시면 취해 세치 혀끝을 잘 못 놀려 우파 모자를 쓸 수도 있지 않는가. 또 어지러운 길목에 춘실과 같은 음흉한 녀자들이 함정을 파고 기다리고 있는 형편에서 남녀관계와 같은 다른 실수를 할 수도 있지 않는가.        칠칠흑야와 같은 세월에 아무리 노력해도 어두운 하늘에서 총총한 별같이 반짝이는 생활의 한 쪼깍이라도 숨겨 둘 수 없었던 것이다. 언제 어디서 밤중에 내민 홍두깨와 같은 몽둥이에, 명목 모를 몽둥이에 얻어맞아 쓰저질지 모를 어지러운 세월이 아닌가.   
132    대하소설 진달래 소야곡(5) 댓글:  조회:1209  추천:1  2017-12-11
                  8. 꺽다리와 난쟁이 성호는 마음 같아서는 승호의 더러운 몰골을 만천하에 밝혀놓고 싶었다. 하지만 승호를 해치기는 싶지 않았다. 또 홍희한테 너무 큰 충격을 줄가봐 그만두었다. 성호는 충동을 가까스로 억누르며 부랴부랴 집으로 향했다. 농민의 자식이라 호주머니를 이리저리 다 들춰보아도 동전 몇잎 밖에 없었다. 단돈 30전만 있으면 금의환향하는 신사처럼 좋은 뻐스에 앉아 20리 떨어진 천수해까지 가고 거기서 한 18리만 걸으면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단돈 30전도 없어 맨 주먹을 불끈 쥐고 달리면서 풍설이 이는 귀향길에 올랐다. (돈이 없는데 신체단련도 하고 좀 좋아.) 성호는 아Q처럼 스스로 좋게 위안하면서 행인이 없는 구간에서는 닫다가도 행인이 나타나면 걸으면서 길을 다그쳤다. 천수해에 이르러 시장기가 났다. 그는 호주머니를 들춰 빡빡 긁어모은 돈 15전을 들고 식품상점 문을 밀고 들어가 닭똥과자 반근을 샀다. 그는 길에 나서자 닭똥과자를 쥐여 입에 넣고 우두둑우두둑 씹으며 시장기를 말리면서 집으로 달려갔다. 정이 들대로 든 막내누나가 해산했는데 성호는 손에 쥔 것이 없어 아무 것도 들고 가지 못하는 자기가 너무나도 안쓰러웠다. 사실 성호는 막내누나와 성질은 서로 잘 맞지 않았지만 함께 자라다나니 정이 아주 깊었다. 막내누나 성숙은 키가 1메터 50좌우 밖에 안되는데다 성질이 좀 팩하고 뭐나 하나면 하나, 둘이면 둘, 딱딱 따져가면서 사는 "깍쟁이"였다. 허나 어찌나 총명한지 성호가 자랄 때 작은 가정선생님이나 다름없었고 인생의 도리도 많이 일깨워주었다. 성호는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날에도 여섯 누나 가운데서 막내누나의 은정 그리고 과거사에 추억의 돛배를 저어갔다. 그는 작달막한 막내누나 성숙이 키가 훤칠한 명선 같은 꺽다리에게 시집갈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둘째매형 경만의 큰매형이 성숙한테 한 마을에 있는 명선을 소개했다. 어떻게 보면 짝이 기울었다. 명선의 부모는 키 큰 며느리를 삼자고 첫날 한복이고 뭐고 장래 며느리의 옷감은 다 제일 키 큰 녀성의걸로 재여 마련해두었던  것이다. 헌데 사돈보기때 명선이 데리고 온 성숙을 보고 도리머리를 홰홰 돌릴 지경이였다. 명선도 작달막한 성숙을 데리고 마을이고 시내고 다닐 때면 손을 쥐고 나란히 걷기는커녕 항상 따로 걸었다. 키가 너무 유표하게 차나서 함께 걷기 창피해서였다. 더구나 시누이들은 올케 체격이 마음에 들지 않아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나중에는 오빠를 보고 그만두라고 권고했다. 하긴 명선은 큰녀동생이부모의 허락도 없이 한동네 식지가 끊어진 자기 친구와 좋아한다고 죽여버리겠다고 온 동네를 쫓아다녔다고 한다. 단 손가락 하나가 사고로 끊어졌다고 온 동네가 떠나갈 듯이 야단쳤던 것이다. 그런 오빠가 글쎄 자기보다 거의 한자나 더 작은 처녀를 데리고 왔으니 말이다. 시누이들은 입귀를 비쭉거리면서 작달막한 올케를 흘겨보았다. 결혼식날에 성호는 상빈으로 막내누나가 시집가는 경박호 부근 막내 매형의 마을에 가보았다. 그가 바깥에서 서성거리면서 볼라니 시누이들은 마을 사람들 속에 서서 올케를 여겨보더니 상을 찡그리면서 돌아서서 흉을 보았다. "에이고, 작달막한 올케를 삼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어." "글쎄 말이야. 그럴 줄 알았더라면 아까운 천표 없애면서 옷감을 큰 걸 사지나 않았을 걸 그랬어. 쯧쯧쯧." 남이 흉을 봐도 모르겠다. 시누이들은 형님의 흉을 보다가 상빈으로 온 성호를 보고 혀를 홀랑 내밀면서 뒤로 물러섰다. "어쩜 조렇게 작달막한 올케한테 저렇게 칠칠한 남동생 있어?" 성호는 그런 사돈처녀들이 미워 욱 치미는 밸 같으면 한대 갈겨주고 싶었다. 허나 막내누나와 매형을 봐서 용케도 참고 술을 취토록 마시고 왝왝 토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성숙을 지내보면서 어찌나 똑똑하고 참돌처럼 꽁꽁 여물고 농사나 살림살이나 예산있게 잘했는지 시누이 셋은 모두 혀를 끌끌 찰 지경이였다. 성숙은 또 효성이 지극해서 시집 큰아버지 앞으로 양아들로 들어간 남편과 함께 큰집 시부모를 효성을 다해 모시였다. 그러나 친시부모들은 자기들한테 효성을 하지 않는다고 쩍하면 트집을 잡고 심술을 부릴가 했다. 게다가 첫 애를 글쎄 현병원에 가서 낳다가 의료일군들이 산대에서 애를 떨어뜨려 그만 잃고 말았다. 그때 애를 잃었다고 성질이 괴벽한 시아버지는 쌍욕을 퍼지르면서 맏며느리를 욕했다. 심지어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며느리를 삼았기에 손자를 보기도 전에 잃었다고 투정을 부렸다. 애를 잃은 어머니 심정은 오죽했으랴. 그런데 시아버지는 성숙의 아픈 상처에 소금을 뿌렸다. 성숙은 시부모를 넷이나 모셔야 했기에 여간 힘들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한 마을에서 사는 시누이 셋이 가세해 흉을 보는 판에 정말 시집살이가 쉽지 않았다. 그런데 둘째며느리를 삼아봐야 맏며느리 무던한 것을 안다는 말이 맞았다. 둘째며느리는 키는 성숙과는 달리 체격은 멀쑥하게 생겼지만 어찌나 욕심이 과하고 자기 것만 자기 것이라고 어찌나 깍쟁이질을 하는지 시부모는 둘째며느리에게서 밥 한숟가락도 얻어먹기 힘들었다. 그제야 시부모는 “둘째며느리를 삼아봐야 맏며느리 무던한 걸 안다더니, 참.”라고  하면서 뒤늦게야 맏며느리한테 마음을 좀 돌리려고 했다. 허나 가슴에 못이 박힌 성숙은 시부모와 시누이를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녀성들이란 워낙 마음을 한번 꼭 닫으면 열기 힘들었고 앵돌아서면 돌려세우기  힘들었다. (첫 애를 잃고 두번째 애를 봤으니 누난 얼마나 기뻐할가?) 성호는 막내누나 못지 않게 기뻐 어깨춤을 덩실덩실 출 지경으로 걸음도 경쾌해졌다. 한 3시간 급행진해서야 집에 도착했다. 막내매형 명선은 부엌에서 불을 때다가 엉거주춤 일어났다. "매형, 뭘 보았소?" 성호의 말에 명선은 싱글벙글 웃으면서 "아들을 보았소."라고 대답했다. "축하하오. 누나 제 노릇을 했소." 성호는 이젠 막내누나가 아들을 보았으니 시집에서도 할 말이 있고 허리를 펴고 살 수  있게 돼 기뻤던 것이다. 그는 구들에 누워 있는 막내누나와 귀여운 갓난 조카의 발가우리한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이름을 뭐라고 지었소?" 성숙은 애기에게 젖을 먹이면서 "매형과 물어보렴."라고 했다. 명선은 시무룩이 웃으면서 "남자애를 낳은 걸 경축한다는 의미로 경남이라고 짓지 뭐." 하고 나직이 말했다. "경남이, 참 좋은 이름이요." 성호는 외조카를 안아보고 싶었지만 바깥에서 금방 들어와 몸이 차가워 그만두었다. 명선은 부엌에 들어앉아 그 큰 팔간집이 후끈후끈하게 석탄을 자꾸 퍼넣으면서 불을 땠다. 성호는 아직 장가도 들지 못한 총각이기에 모성애가 뭔지 잘 모르고 있었다. 첫애를 잃고 두번째애로 아들을 낳은 성숙의 심정이야 얼마나 기쁘겠는가. 성숙은 이젠 아들을 낳았기에 시부모 앞에 떳떳이 나설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성호는 막내누나를 보고 물었다. “어째 이모네 집에 있으면서 애를 낳을게지. 이모는 병원의 의사지. 얼마나 편리하오. 이런 시골에 왔다가 또 첫애처럼 일이라도 생겼더라면 어쩌오?” 성숙은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말도 말라. 난 그래도 엄마 집이 좋다. 엄마가 조산사가 돼서 경남을 받아냈다.” 명선은 부엌에서 아궁이에 석탄을 다 떠넣고 허리를 펴면서 말했다. “눈치 보여서 이모네 집에 어디 있겠소.” “건 무슨 말이요?” 명선은 계속 말했다. “이모가 뭐라는지 아오? 옛날에 우리 집에 본가집 손님들이 어찌나 많이 찾아왔는지 우리 시어머니 이랬소. ‘앞문으로 금방 사돈이 갔는데 뒤문으로 또 다른 사돈이 들어오오.’ 이러지 않겠소. 그 말이 무슨 뜻이요? 우리 갔다고 귀찮아서 하는 말이지. 이모부는 걸레를 쥐고 다니면서 내 구들을 밟은 자리를 싹싺 닦는단 말이요. 이모부 쌀쌀한 표정만 봐도 어디 하루라도 더 있겠습데?” “그만하라니깐.” 성숙은 신랑을 말렸다. “그래도 이모네 신세에 병원에서 산전검사를 하고 보름이나 숱한 식구들이 들어 있지 않았소?” 영옥도 한마디 했다. “녀동생이 어디 쫓는 걸 떠나왔소? 우리 스스로 떠나왔지. 저래서 옛날부터 고생을 죽게 한 사람 허물이 난다는 말이 있소.” 그제야 이모의 허물소리 끝났다. 성숙은 눈보라가 윙윙 휘몰아치는 엄둥설한에 천수해로부터 태평거촌에까지 무릎까지 풍풍 빠지는 18리 눈길을 만삭이 된 배를 부둥켜안고 걸어왔다고 한다. 한 10분에 한번씩 아파나는 산전통증으로 해 아래 모진 배를 부둥켜 안고 길가의 나무가지를 붙잡고 기대서서 이를 옥물고 아픔을 참아야 했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무릎까지 빠지는 눈길을 한 걸음, 한 걸음 걸었다. 너무 아파 입술을 깨물고 눈물을 흘리면서도 길에서 애를 낳을가봐 빨리 걸음을 옮기느라고 잔등에 식은 땀을 줄줄  흘리면서 애썼다. “23년 전에 나도 당장 낳을 성호를 배 속에 넣고 천수해에 가서 옥수수쌀을 사 이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날 저녁에 성호를 낳았지 뭐야. 어미 이를 악물고 걸어온 그 길로 어쩜 막내딸이 또 만삭이 된 애를 품고 걸어와서 그날로 애를 낳는단 말이냐? 어미 고생을 네가 또 이어할줄 누가 알았겠느냐?” 성숙은 바로 엄마가 옥수수쌀을 이고 만삭이 된 배를 부둥켜안고 힘들게 걷던 그 길로 그것도 무릎까지 펑펑 빠지는 눈길을 걸어 본가에 와서 경남을 낳았던 것이다. 성호는 힘겹게 자기를 낳은 엄마와 경남을 낳은 막내누나로 해 마음이 아팠다. 길에서 마구 양수가 터져서 하마트면 눈길에서 애를 낳을번했다고 한다. 다행히 엄마와 명선이 누나를 부축해 집으로 와서 세시간도 지나지 않아 경남을 무사히 낳았다고 한다. “에이고, 그래도 우리 경남이 길에서 나오지 않고 엄마 집에 와서 나와줘서 고맙다.” 성숙은 경남의 발가우리한 얼굴을 매만지다가 뽀뽀까지 해주었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가난한 집에서 자라서 시집가서도 평소에 뭐나 많이 아껴 먹고 아껴 썼다. 사실 성숙의 시집 식구들은 전라도에서 들어온 후대였다. 그들은 늘 함경도 사람들을 “함경도 도둑놈들”이라고 욕했으며 며느리 성숙이 좀 뭐나 아끼는 것 같아 함경도 도둑놈들의 후대여서 어쩌고저쩌고 하지 않으면 “함경도 깍쟁이”라고 했다. 성숙은 시집 식구들이 빗대고 욕할 때면 속으로 “전라도 깍쟁이”라고 맞받아치면서  “검정개 돼지 흉을 한다.”고 두덜거렸다. 원래 상진은 딸을 줄 때면 특별히 랭정히 고려한 후 대답하군 했다. 둘째딸 춘자를 숱한 대학생들이 따라다녔지만 춘자가 딱 마음에 들어 하는 홍수를 데려오자 이것저것 물어보고서야 대답했었다. 셋째딸 은숙의 약혼 때는 한 마을의 경만이 아버지 없이 자란데다가 성질이 더럽다고 딸을 고생시킬가봐 인차 승낙하지 않았다. 경만은 시원히 “딸을 주겠다.”고 대답하지 않는 가시아버지가 야속했다. 술을 마시면 쩍 하면 가시아버지와 “내야 애비 없이 자라 덜 된 놈인게 무슨.” 라고 하면서 걸고들어 주정을 부리군 했다. 넷째딸 봉금의 혼약은 대학을 졸업한 둘째 딸과 사위가 소개한 사위감인데다 송준은  중등학교를 졸업한데다 말수가 적고 마음이 착해보여서 대답했다. 다섯째딸 은자의 신랑감은 뒤집에서 소개한 혼처였는데 아래마을 허씨네 맏아들  학철이였다. 학철은 키는 작달막한데다가 어쩐지 말소리가 모기소리 만해 사내 같지 않은 것이 흠이였다. 하지만 인사성이 아주 밝았다. 영옥이 하도 인물보다 마음씨 착한게 좋다고 해서 혼사가 겨우 성사됐다. 여섯째딸 성숙의 신랑감을 처음 보자마자 상진은 인물체격이 남자답게 훤칠한 명선을 일등사위감이라면서 대답했던 것이다. 사실 명선은 훤칠한 체격값을 해 힘꼴을 쓰는데다 농사일에 미립이 텄고 손재간이 이만저만이 아니였다. 그는 목수재간이 있는데다 야장도 잘해 집을 짓고 탈곡기를 만들어 동네방네 재간둥이로 소문났다. 그런데 명선의 조상들이 전라도 출신이라는 것을 뒤늦게나마 알게 되자 상진은 지어 혼사를 그만 둘가고 하기까지 했다. 영옥은 막내딸의 일이 근심돼 사돈보기를 한후 신랑을 따라 시집마을에 갔다온 딸한테 집이 비였을 때 조용히 물어보았다. “신랑이 손을 줴주더니?” “엄만 별 걸 다 묻습둥?” “글쎄 대답이나 해라.” “줴줍데.” “그래? 안아주데?” “음~” 성숙은 부끄러워 목 안으로 기여드는 목소리로 가늘게 외마디로 대답하면서 머리를 끄덕였다. “집에서 신랑하구 잤니?” “아니, 시누이들과 함께 잤소. 엄만 별 걸 다 묻소.” 성숙은 왼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바깥으로 나가려고 했다. 영옥은 엉거주춤 일어나 딸의 손을 잡았다. “얘, 신랑이 널 고와하는지 알자고 그래.” “고와하오. 발해왕터에 가서 련애했습꾸마. 날 꼭 끌어안고 키는 작아도 똑똑해보인다면서 사랑한다고 합더구마.” 영옥은 한숨을 후~ 내쉬었다. “그럼 됐다. 아버지와 엄마를 봐라. 짝이 기우니까 틀렸더라. 너 애비 공안국장이느라고 날 못생겼다고 사랑하지 않고 동네 녀편네들 뒤꽁무니를 쫓아다니면서  나를 얼마나 못살게 굴었는지 아니? 난 네 신랑감이 키도 구척이지 짝이 기운다고 말릴가 했어. 너 애비처럼 각시를 못살게 굴가봐 근심돼.” 성숙은 물끄러미 어머니를 들여다보다가 겨우 입을 뗐다. “근심하지 맙소. 명선은 날 진짜 좋아합구마.” “그럼 얼마나 좋겠느냐?” 기실 성숙은 신랑감이 도문에서 자기와 함께 걷지 않고 자꾸 길 건너쪽에서 따로 걷는 것을 눈치챘다. 분명 자기가 키 작다고 함께 걷기를 싫어한다는 것을 짐작했다. 그후 영옥은 남편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사돈보기도 하고 성숙이 시집 마을까지 갔다 왔는데 놔두오. 전라도면 어떻고 사람에 달렸지. 굳은 땅에 물이 고인다고 깍쟁이시집에 가면 더 잘 살 수도 있소.” 상순은 마지못해 막내딸을 명선에게 준 거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듣던 말과는 달리 명선은 부지런하고 마음씨 순박하고 착하기로 한량없었다. 이때 명선은 화로에 자기가 잡아 말리어온 장어를 빠지직빠지직 구워 올려왔다. 상진과 성호는 명선과 함께 술상에 마주 앉아 술잔을 나누었다. 술상에는 명선이 고향에서 가져다 화로불에 빠지직빠지직 구운 장어와 소고기가 올라 군침이 돌게 했다. 온 집 안에는 기쁨의 금물결이 출렁거렸다. 이전에 성호가 대학을 다닐 때 여름방학에 놀러 가면 성숙은 가마니를 짜서 판  돈으로 새 옷을 사 입혔다. “우리 대학생 막내오라비가 옷도 멋지게 입고 다녀야지. 옷이라도 헐게 입으면 처녀들이 오라비한테 시집오려고 하겠니?” 성호가 집으로 돌아올 때는 꼭 돈을 손에 쥐여주면서 학교 가서 배고플 때 사 먹고 싶은 걸 사 먹으라고 했다. 어느 누나나 다 성호한테는 그랬다. 성호는 누나들의 그 은정이 눈물겹게 고마웠다. 명선은 자기 집에 온 성호를 데리고 자전거를 타고 경박호 구경을 시켰다. 처음 거울같이 맑은 경박호를 바라보는 순간 성호는 흑룡강성에 이같이 아름다운 호수가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더욱이 용암이 굳어버린 암석낭떠러지에 눈사태가 무너지는듯 쏟아지는 폭포수와 유구한 력사가 누워 있는 발해왕국터를 돌아보면서 감탄을 련발했다. 산천경개가 아름다운 경박호 부근 넓은 벌을 바라보면서 성호는 이 다음 대학을 졸업하면 이런 곳에 와서 교편을 잡을가고도 푸르른 꿈을 꾸기도 했다. 아들을 보고 기뻐하는 매형과 마찬가지로 성호는 외조카 경남을 보고 얼마나 귀여웠는지 모른다. 영옥은 명선이 바깥으로 나간 틈을 타서 성숙에게 물었다. “저런 꺽다리 신랑이 작달막한 막내딸에게 차례질줄은 몰랐지. 야, 신랑 퇴를 냈다, 퇴를 냈어.” 그러자 성숙은 경남에게 젖을 먹이면서 부은 얼굴에 희죽이 웃음을 지었다. “저 신랑 결혼 전에 그게 말을 잘 듣지 못하는 모병이 있었소. 그런 모병이 없었더라면 어찌 나한테 장가 갔겠소.” “그래?” 영옥은 입을 딱 벌렸다. 영옥은 문쪽을 힐끔 돌아보면서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그래 지금은 일없니?” “일이 있으면 애를 낳았겠소?” 영옥은 한숨을 후 내쉬였다. “그럼 됐어. 이후에 신랑 보신을 잘 시켜라. 인삼을 넣고 닭곰도 해 대접해라. 그리고 남편의 양기를 죽이는 말을 절대 한마디도 하지 말라.” 성숙은 부끄러움을 좀 타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문소리 덜컥 나면서 명선이 집 안에 들어섰다. 초가집에는 또 웃음소리 울려퍼졌다. 아니, 이런 경사가 또 어디 있겠는가. 온 집 안은 갓난 경남을 가운데 눕혀놓고 둘러 앉아 웃으며 밤이 깊어가도록 덕담을 늘여놓았다.                            9. 청춘 로맨스 이튿날 아침에 영옥이 한창 아침상을 차릴 때였다. 마을에 있는 셋째딸 은숙이 들어섰다. “우스운 일이 터졌소!” “?” 모두들 궁금해 구들로 올라오는 은숙을 쳐다보았다. 은숙은 구들에 풍덩 들어앉으면서 말했다. “순희가 글쎄 철주와 결혼한다오!” “뭐라구?” 모두 자기 귀를 의심했다. “아니, 북경에 가서 공부한다더니 철주한테 시집가?” 제일 놀란 것은 성호였다. 그때 한 마을의 미옥이 애를 안고 문을 뚝 떼고 들어왔다. “어마니, 우리 대학생신랑이 왔구나.”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영옥은 장국을 푸던 바가지를 솥안에 퉁 떨어뜨렸다. 국물이 사처로 튕겼다. 그 바람에 부엌에서 아궁이에 석탄을 떠넣던 명선이 손을 다 뎄다. 미옥은 미친듯이 웃어대면서 지껄여댔다. “아니, 신랑, 뭐 해? 네 애를 받아안지 않고.” 그녀는 갓난애를 창호한테 마구 떠밀어주었다. 성호는 미옥한테 되밀어주었다. “야, 너 무슨 미친 소릴 치니?” “호호호. 얘, 우리 둘이 만든 앤데. 모르는 척하겠니?” 성호는 억이 막혀 애를 마구 미옥에게 떠밀어주면서 야단쳤다. “얘, 미친 소릴 작작 쳐라. 내 언제 너와 련애나 했니?” 상진은 무서운 눈길로 미옥과 성호를 번갈아 쏘아보았다. “저 애는 어떻게 된 거냐?” 성호는 “저 정신환자 말을 다 믿습니까?” 하고 말하며 미옥을 쏘아보았다. “나가라! 정신병자 같은게, 어데서 만든 애를 가지고 생사람을 잡니?!” 허나 미옥은 애를 구들에 활 놓으면서 미친 소리를 계속했다. “얘, 울어도 이 집에서 울고 죽어도 이 집에서 죽어야 팔자를 고친다. 이 집이 초가집이라도 대학생네 집이야. 이 집에 와야 너도 내 첫사랑 성호처럼 대학에도 가구 잘 살지.” 미옥은 애를 안고 성호 옆에 와서 다가앉으면서 미친듯이 웃어댔다. “넌 대학생 성호네 아들이 돼야 잘 살 수 있어. 호호호.” 그제야 상진은 굳었던 주름 잡힌 얼굴을 느슨히 풀었다. 그는 진작 정신이 나간 미옥이 시내 거지한테 당했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었다. 허나 애를 안고 뛰여들어와 성호 애라고 하자 처음에는 오해하면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명선은 처음에는 어찌된 영문인지 몰라 눈이 데꾼했다가 부엌에서 국물을 털며 구들에 올라왔다. 놀란 경남과 미옥의 애가 자지러지게 울어댔다. 정신 나간 미옥은 아예 애를 안고 구들에 퍼더버리고 앉아 갈 념을 하지 않았다. “아무리 인심이 각박하기로 이 집에 온 손님한테 밥도 주지 않겠소. 흥!” 미옥은 밥상에 차려놓은 밥을 푹 떠서 먹다가 한술 푹 떠서 흘겨보는 창호의 입에 가져갔다. “얘, 이러지 말고 조용히 밥이나 먹어라!” 미옥은 희쭉 웃었다. “그럼 그렇겠지. 아무리 아들이 흔한 집이라고 해도 그렇지. 막내며느리 손자를 안고 왔는데 푸대접을 해서야 쓰오?” 그는 구들에 누워 있는 성숙을 보고 빈정거렸다. “어머, 언니 언제 왔소? 우리 산모들이 아침을 먼저 먹기요. 자, 일어나오. 내 무슨 이 집에서 밥을 주지 않으면 먹을 곳이 없을 것 같소? 오늘 순희하구 철주 결혼한다오. 그 집에 가면 잔치 떡을 배터지게 먹을 수 있지. 씨, 아침은 여기서 먹고 점심엔 거기 가야겠어.” 성호는 미옥이 또 정신병이 발작한다고 여겼다. 그러나 철주와 순희가 결혼한다는 것은 믿었다. 진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미옥은 계속 늘여놓았다. “순희, 그년 쌍통했어. 씨,” 그녀는 성호를 힐끔 쳐다보더니 중얼거렸다. “이전에 내 성호와 좋아하니까. 얼마나 질투했다고 그래. 제 되오? 끝내 똥푸개 철주한테 시집갔지. 뭐? 북경에 가서 공부를 한다더니 결국엔 이 마을에 돌아와 똥푸개 같은 철주한테 시집 가면서. 흥! 바보라도 그런 바보년이 어디 있어. 내 걔만 공부는 못해도 내 노릇은 착실히 했어. 이렇게 대학생과 좋아해서 떡돌 같은 아들을 보았지. 제 되오? 똥푸개 철주야 이런 농촌에서 똥이나 펐지. 내야 이제 대학생 신랑을 따라 시내에 가서 기와집에서 호광하면서 살게 됐어. 호호호.” 그녀는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건 말건 계속 웃겼다. “시아버지, 안 그래요? 옛날부터 시앙버지 사랑은 며느리라는데 그저 쳐다보기만 하면 어떻게 해요?” 상진과 영옥은 그저 웃어댔다. 국이 다 끓자 모두들 아침밥상에 마주 앉아 숟가락을 들었다. 미옥은 성숙의 옆에 있는 애를 들여다보더니 히쭉 웃었다. “에이고, 귀해라. 가만, 얘가 우리 애하고 어떻게 되지.” 그는 성호를 뒤돌아보더니 또 지껼여댔다. “얘들 고모사촌간이구나. 그래. 이 세상에서 잘 살자면 김서기네 손자로 태여난게 옳지. 김서기네 외손자나 사돈에 팔촌의 손자로라도 다 호광할수 있단 말이야.” 미옥은 혼자 계속 중얼거리며 미친 소리를 쳤다. “성호야, 너 대학생이느라고 너무 우쭐거리지 말라. 너 때문에 내 정신나갔지 뭐야? 씨.” “뭐라고?” 성호는 밥을 먹다가 미옥을 건너다보았다. “정말 한심하구나. 널 좋아한 적도 없다, 없어!” 상진은 미옥을 마구 쫓아냈다.  “생사람을 작작 잡아라. 가라, 가!” 미옥은 쫓겨나가면서도 계속 지껄였다. “그 잘난 밥이 아까우면 말게지. 쫓긴 왜 쫗아? 미옥이 너네 집에서 밥을 얻어먹지 못하면 먹을데 없을 것 같아? 씨, 순희네 집에 가서 잔치떡이나 먹자.” 성호는 “순희 북경에 갔다더니 어째 불시에 철주와 결혼한다오?” 하고 물었다. 그러자 영옥은 도리머리를 홰홰 가로저었다. “순희 전번에 북경에서 돌아와 철주하구 사돈보기를 했다.” 성호는 숟가락을 달랑 내려놓았다. “맨 미친 년들이구나.” 그는 밥맛이 없어 바깥으로 나왔다. 눈보라가 룡트림을 하면서 언 땅을 훑어가고 있었다. 모래알 같은 눈가루가 휘몰아치는 바람에 여기기 흩날리다가도 바람을 따라 종달음질쳐갔다. 순희가 철주와 결혼한다는 건 성호에게는 너무나도 큰 충격이였다. 속이 비길 데 없었다. (순희가 이럴 수가?) 성호는 모든 것을 믿고 싶지 않았다. 착잡한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올랐다. 철주는 어릴 때도 과수원에 가서 배를 훔쳐 셔츠안에 넣어가지고 와서 순희를 여러번 준 적이 있다. 물고기를 잡아서도 초롱채로 들어다주기도 했다. 성호는 도리머리를 흔들면서 한 집 건너 순희네 집을 내려다보았다. 첫사랑 순희를 철주한테 빼앗긴 감이 스물스물 기기들었다. (진짜 함박꽃이 둼 무지에가 꽂힌 격이야.) 그때 순희네 집 굴뚝에서 삼단 같은 연기가 무럭무럭 솟아올랐다. 그는 저도 몰래 스적스적 눈을 밟으면서 순희네 집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자기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순희네 집과 성호네 집 앞에 건조실이 있었다. 숱한 암탉들이 수탉 한마리 주위에서 북데기 속의 낟알을 쪼아먹느라고 구구거렸다. 수탉은 북데기 속의 낟알을 뚝뚝 쪼아 골라내놓고 뭐라고 구구거리며 암탉들에게 먹이고 있었다. (말 못하는 닭들의 사랑은 얼마나 간단해. 수탉이 구구구 하면 암탉이 따라다니면서 먹으며 재미있게 살거든. 허나 인간 세상의 사랑은 왜 이다지도 복잡해?) 성호는 속이 부글부글 괴여번지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똑똑한 순희가 리해되지 않았다. (바보 같은 게.) 성호는 건조실 마당에서 서성거리면서 막연한 생각에 갈마들어 몸부림쳤다. 철주는 성호보다 키도 더 큰데다가 진짜 이름처럼 실팍한 쇠기둥같이 생겨 싸우면 항상 성호를 이겼다. 진짜 사이 좋지 않은 라이벌이였다. 게다가 철주는 총명해서 공부도 아주 잘했다. 특히 그는 태평거촌 동구에 있는 한족마을 쪽에서 자라나서 한어를 아주 잘했다. 그리하여 담임교원은 철주한테 체육위원까지 시켰다. 허나 성호는 수학은 잘했지만 한어는 철주의 발뒤꿈치도 따라가지 못했다. 그래도 수학경색대회에서 몇번 우승을 한 덕에 성호는 수학교원인 담임교원의 신임을 받아 학습위원을 했다. 안도저수지를 수축하는 바람에 순희는 그 골안의 이주민들과 함께 태평거촌에 이사해왔다. 철주와 성호는 서로 순희에게 잘 보이려고 하면서 경쟁과 갈등은 더 심해졌다. 철주는 과수원에 가서 배를 훔쳐다준다, 반디를 들고 강물에 가서 모래무치랑 잡아다준다 하면서 순희를 얼리려고 했다. 허나 머리 뜨거워난 철주는 잘못을 저질렀다. 남의 집 해바라기를 훔치고 감자를 파다 순희에게 주다가 들통이 났다. 바늘도적이 소 도적이 된다고 철주는 나중에 진짜 남의 개까지 훔쳤다가 파출소에 잡혀가기도 했다. (도적놈한테 시집가? 흥!) “성호!” 성호가 머리를 들어보니 기다리는 순희는 집에서 나오지 않고 보기도 싫은 월순이 이쪽으로 빠드득빠드득 눈을 밟으며 다가왔다. 눈덮인 북데기 속에서 낟알을 쪼아먹던 닭들이 독살스런 월순을 두려운 듯이 달아났다. “때마침 잘 왔구나. 한가지 부탁하자.” “뭘?” 성호는 자리를 뜨려다가 주춤 멈춰서면서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오늘 내 작은고모 결혼하는데 저녁에 와서 좀 오락 사회를 맡아주렴.” 월순의 말에 성호는 어처구니없어 피씩 웃었다. “얘, 내가 왜? 싱겁게. 사람을 뭘로 보고 이러니?” 월순은 퉁방울 같은 눈을 번쩍 무섭게 뜨더니 성호를 쏘아보며 두툼한 입술을 열었다. “얘, 대학생이라고 봐주니까. 고까짓 주례도 서지 못하겠니?” 성호는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얘, 내 어디 주례를 설 기분이 있니?” 그때 갑자기 문이 발칵 열리면서 실내복바람의 순희가 나오더니 “월순아, 그만둬라! 집에 들어오지 못하겐?” 하고 눈을 흘겼다. 성호는 머리를 숙이면서 순희의 눈길을 피했다. 월순은 뭐라고 욕하려다가 순희가 다가와서 잡아끄는 바람에 그만두고 집 쪽으로 가면서 두덜거렸다. “순희야, 내 좀 보자.” “?” 순희는 월순을 놓고 돌아서더니 의아한 눈길을 보냈다. “얘, 시집 가는 날에 그런 애들과 말도 하지 말라. 괜히 괄시를 당하겠어.” 월순은 성호를 힐끔 되돌아보더니 문을 쾅 닫고 들어가버렸다. “무슨 일이야? 추워 죽겠어.” 성호는 순희의 헝클어진 머리카락 밑에 팅팅 붓긴 까만 포도알눈을 보면서 간신히 입을 뗐다. “너 미쳤니? 뭘 보고 철주한테 시집가니?” “어째 심술나? 남이야 철주한테 시집가든 말든 잔치날에 웬 반간이냐? 데려가라고 할 땐 데려가지 않더니, 철주한테 시집가니 어째 아깝니?” 놀랍게도 순희는 깨고소해하는 표정이였다. (바로 내게 보복하려고? 이런 묘한 기분 보여주자는 거야?) 성호는 기분이 정말 엉망이였다. “북경에서 살게지. 이런 농촌에 돌아와 뭘 하니?” “난 네가 보라고 철주와 결혼해서 이 마을에서 돼지 치고 개를 가득 치면서 백년을 살테야.” “흥! 호박을 쓰고 돼지굴로 들어간다.” “너 정말 재수 없이 논다. 남의 결혼식날에 고양이 방정을 떨겠니?” 순희는 주위를 둘러보더니 머리를 돌렸다. “한가지만 명확히 알려주마. 철주는 내 첫사랑이야. 그가 따준 배가 내 배 속에 아직도 남아 있어. 난 그때부터 철주를 사랑했다. 난 너처럼 첫사랑을 헌신짝 버리 듯하지 않아.” 성호는 더 할 말이 없었다. “저녁에 오락판 주례를 서주겠니? 마지막 부탁이야.” 순희의 눈에 핑그르르 돌아가는 눈물을 보고 성호는 마지못해 기여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마. 너와 철주 결혼을 축하한다.” 순희는 두손으로 얼굴을 가리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으로 뛰여갔다. 성호는 우두커니 서서 집 안으로 들어가버리는 순희 뒤잔등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시뿌연 김 속으로 순희가 사라져버렸다. 성호는 집에 돌아와 심란해 위방에 들어가 훌러덩 들어 누었다. 착잡한 생각이 머리를 칭칭 휘감고 끝없이 괴롭혔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가. 바깥에서 북소리와 징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그 요란한 소리는 각일각 가까이 다가왔다. (제길할, 무슨 일이야?) 성호는 호기심에 문을 열고 내다보았다. (저게 뭐야?) 글쎄 아래 마을 한족들이 북을 두드리고 징을 치면서 순희네 집 쪽으로부터 건조실을 건너 성호네 집 쪽으로 올라오고 있지 않겠는가. 그 한가운데 백마를 탄 철주가 옛날 원님처럼 거만하게 다가오고 그 뒤에 꽃가마가 다가왔다. 성호는 바깥으로 나가려고 하다가 문고리를 놓고 벽에 기대섰다. (진짜 갑돌이와 갑순이 이야기를 만드는구나.) 그는 자기 첫사랑 순희가 꽃가마를 타고 도둑놈 같은 라이벌 철주한테 시집가는  꼴을 차마 더 보기 힘들어 눈을 꼭 감고 벽에 기대 서 있었다. 그런데 웬 일일가. 북소리와 징소리가 멀어져 가지 않고 딱 성호네 집 앞에서 더 요란해지는 것 같았다. 성호가 이상해 창문으로 바깥을 내다보았다. (아니, 저게 웬 일인가?) 철주가 백마에서 내리더니 꽃가마 앞으로 다가가 꽃가마 문을 열고 순희를 안아 내려 업고 덜썩덜썩 어깨춤을 추며 야단쳤다. 눈보라 윙윙 휘몰아치는 맵짠 엄동설한에도 철주는 첫날한복을 입은 순희를 안고 한바퀴 휘 돌리더니 업고 어깨춤을 덩실덩실 추었다. 이때라고 북소리 둥둥, 징소리 쟁쟁, 새납소리 한바탕 요란하게 울렸다. “저것들이 짜고들어 우리 집 앞에서 시위하는 거야.” 성호는 중얼거리면서 창문에서 떨어져 구들에 훌렁 물앉았다. 마음이 아파 참 더 눈 뜨고 볼 수 없었다. (복수하려고? 아침에 어글어글한 눈에 고인 눈물은 뭘 설명할가? 아무리 괘씸해도 우리 집 문 앞에까지 와서 성질을 건드릴 건 뭔가?) 성호는 와닥닥 일어나 앉았다. 이때 미닫이가 쭉 열리더니 엄마 들어왔다. “에이고, 넌 언제 제 노릇을 하겠니? 대학생처녀면 어떻고 저 순희 따를 때 약혼했더라면 얼마나 좋았겠니? 철주 좋은 노릇 하지 않았니?” “엄마, 근심하지 맙소.” 성호는 귀밑머리가 희슥희슥한 어머니를 위안했다. “내 꼭 순희보다 더 예쁜 며느리를 데려올게.” 성호는 구들에 들어 누우면서 눈을 딱 감았다. 정지에서 막내누나 성숙도 한마디 했다. “엄마, 성호 순희와 연분이 없어 그런 거요. 대학생인 성호 이제 영화배우 같은 시내 대학생처녀를 데려오지 않는가 보라니깐.” “글쎄 말이야.” 그때에야 바깥에서 북소리와 징소리가 멀어져갔다. 영옥은 탄자를 아들의 몸에 덮어주고 정지로 나갔다. “더러운 놈들, 고의로 우리 집  앞에 와서 떠들긴?” 성호는 어릴 때 키가 자기보다 한 뼘은 더 큰 철주와 맞붙으면 씨름을 해도 안되고 싸워도 안 됐다. 게다가 철주는 한족마을의 애들과 친해 쩍하면 한족애들을 데리고 와서 성호를 때리고 괴롭혔다. 그런데 후에 성호가 길림으로 가서 몇해 동안 누나네 집에 있으면서 초중공부를 하며 시내 애들에게서 무술을 배운 다음부터는 상황이 달라졌다. 고중에 다닐 때 고향에 돌아오면서 성호와 철주가 한번 붙은 적이 있었다. 철주는 근본 상대가 아니였다. 처음에는 씨름을 붙었다. 철주는 키 크고 힘이 센걸 믿고 대판 성호의 허리를 꽉 끌어안고 떠밀기를 했다. 그때 성호는 철주의 힘을 리용해 옆으로 슬쩍 피하면서 꿇어앉아 왼 손으로 철주의 오른다리를 번쩍 들어 어깨우로 떠 넘기었다. 철주는 자기 힘에 앞으로 머리를 처박으면서 꼬꾸라졌다. 열이 오른 철주는 “고새끼, 미꾸라지처럼 잘 빠지는구나.” 하고 손바닥에 침을 뱉고 덤벼들었다. 두번째 판에 철주는 태산이 정수리를 누르는 기세로 덮쳐들어 오른팔로 성호의 목을 껴안고 꽉 내리눌렀다. 성호는 머리가 거의 모래바닥에 닿을 지경이였다. 그 아슬아슬한 찰나에 성호는 목을 철주의 겨드랑이 밑에 바싹 밀어넣어 쳐들며 오른 손을 철주의 사타구니에 찔러 넣고 XX을 꽉 움켜쥐여 비틀었다. “앗!” 철주가 그게 아파 성호의 목을 껴안은 팔을 놓아버렸다. 그때 성호가 오른 팔을 철주의 사타구니에 넣어들면서 허리를 쭉 폈다. 그 큰 철주를 번쩍 들어 거꾸로 처박아놓았다. “어이쿠!” 철주는 높이 떠들려 버둥거리며 강산구경을 하다가 모래바닥에 처박혔다. 성이 날대로 난 철주는 주먹을 쳐들고 씽 덤벼들어 성호의 얼굴을 쥐여박았다. 성호가 옆으로 쓱 피하면서 날아드는 주먹을 덥썩 잡아 비틀어 당기면서 아래 종아리를 탁 걷어찼다. 철주는 이번에도 자기 힘에 저쪽에 가서 나동그라졌다. 마을 사람들이 우르르 모여 그들 둘은 뜯어 말렸다. 성호는 어릴 때처럼 뛰쳐나가 뚜들겨 패놓을 수도  없었다. (난 대학생이야.) 토끼꼬리만한 겨울해가 지고 있었다. 몇가닥의 차디찬 해빛이 저녁노을 속에서 마을을 비췄다. 정지 문소리가 삐꺼덕 났다. “성호, 우리 집에 와서 잔치 술이나 마셔라!” 성호가 미닫이를 열고 내다 보고 자기 눈을 의심할 지경이였다. 범이 자기 흉을 하면 온다더니 생각 밖으로 왼쪽 가슴에 꽃을 단 철주가 찾아오지 않았겠는가. 성호는 벌떡 일어나 나가면서 철주의 손을 잡아주고 나서 “결혼을 축하한다. 잘 살아라.”라고 덕담을 해주었다. “고맙다.” 철주도 반갑게 인사를 받았다. “이전에 어려서 우린 라이벌이였지. 허나 이젠 우리 갈 길은 서로 갈라졌잖았구 뭐니? ” “그래, 필경 우린 한 고향 마을에서 자란 짜개바지친구니까.” 철주는 사람좋게 성호를 잡아끌면서 “가자, 우리 집에 가서 마을 친구들과 함께 술이나 마시자. 그리고 저녁에 잔치오락을 좀 재미나게 조직해달라.” 라고 했다. 성호는 연신 “그래, 그러자. 근심하지 말아라.” 하고 바삐 신을 찾아 꿰고 따라 나섰다. 성호는 고향 마을 친구들과 함께 술을 취토록 마셨다. 철주와 순희의 부탁대로 그는 오락판 사회를 맡았다. 미닫이가 열리더니 순희가 위방에서 나왔다. 꽃너울을 쓰고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순희, 머리를 다소곳이 숙이며 오락 판에 사뿐사뿐 나서는 순희가 그렇게 예쁠 수가 없었다. 성호는 속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생각 같아선 마구 손을 잡고 자기 집으로 끌고 달아가고 싶었다. 성호의 눈길을 받는 순간 순희의 어글어글한 눈이 유난히 이상한 빛을 발산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성호는 그날 밤 착잡한 마음을 정리하면서 무슨 정신에 오락을 사회했는지 몰랐다. 그는 자기 차례에 “갑돌이와 갑순이”이란 노래를 부르려다가 그만두었다. 그는 코로 흥얼거리면서 두 팔을 활짝 벌리고 너울너울 춤을 추었다. 순희가 행복할 것을 축원하는 간절하고 깨끗한 마음을 담아 서정적으로 춤을 추었다. 꿇어앉아 순희와 철주를 향해 두팔을 벌리고 가슴을 내밀며 두 팔을 내뻗었다가도 무술동작을 곁들어 벌떡 뛰여 일어나 백조가 맑은 호수에서 두발로 모둠다리로 옆으로 가는 시늉을 내기도 하고 학이 나래치는듯이 두 팔을 너울거리기도 하고 어깨춤을 덩실덩실 추기도 했다. 오락이 끝나자 순희는 꽃노을을 쓴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성호의 술잔에 술을 찰찰 넘치게 따랐다. 그런데 그녀가 하얀 장갑을 낀 손에 잡힌 술병끝이 술잔을 도도도 두드리는 것이 눈에 보일 지경이였다. 성호는 술잔을 받아 한잔 쭉 들이켰다. 꽃노을을 쓰고 다소곳이 숙인 순희의 하얀 보름달 얼굴을 보는 순간 성호는 가슴이 미여지는 것만 같았다. 짙게 그린 눈썹아래 순희의 어글어글한 두눈에는 눈물이 글썽해졌다. 성호는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나 비틀거리며 바깥으로 나왔다. 순희는 왼손으로 얼굴을 반쯤 가리면서 반쯤 돌아섰다. 성호는 한복을 입은 고운 순희를 철주네 집에 남겨두고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떼놓았다. 허나 떠나야만 했다. 그는 손으로 허공을 마구 그으면서 휘청휘청 어두운 눈보라 속으로 걸어갔다. 바깥에서는 눈보라가 윙윙- 휘몰아치면서 어둠 속에 짓눌린 고향마을을 핥으면서 산악 같은 슬픔을 몰아왔다. 모래알 같은 눈가루가 지붕에서 흩날려 목 안에 기여들어 성가시게 굴었다. 휘몰아치는 눈보라 속에 어디선가 쓸쓸한 노래 소리가 성호의 귀전을 아프게 때리는 상 싶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 가서 발병이 난다      
131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89) 댓글:  조회:1612  추천:2  2017-12-03
                                     7. 콩꼬투리죽 한 사발        고개, 고개 열두 고개에서 제일 넘기 어려운 고개는 십리도 못 가서 발병이 나는 아리랑 고개가 아니었다. 백성들이 제일 넘기 어려운 고개는 아직도 보릿고개였다.       중국 전국적으로 반우파 투쟁과 함께 인민공사화, 대약진 바람이 거세지면서 허백호 서기는 이른바 우파분자 오옥선과 박성근을 투쟁하는데 그치지 않았다. 그는 집체식당을 마을마다 차리게 하고 집체 화식을 강요했고 집집마다 문뜩문뜩 뛰어들어 가마뚜껑을 들었다놨다하면서 야단쳤다. 그는 혹시 쌀이나 감춰 두고 자기 집 가마에 뭘 끓여 먹는가 해 눈깔이 뻘개 삽살개처럼 싸다니면서 살폈다. 혹시 배추김치나 산나물 채를 따로 해 먹는 사원을 발견하기만 해도 몽땅 빼앗아 집체식당에 가져다 놓고 한바탕 비판대회를 열었다.        사원들은 살금살금 능쟁이랑 세투리랑 캐다가 돼지를 먹이는 척 하며 끓여 돼지죽초롱 같은데 치워두었다가 허백호 서기와 흥수의 눈을 피해 가만가만 꺼내 먹으면서 주린 배를 달랬다. 허백호 서기는 참 우스운 일도 다 했다. 자기는 흥수네 집에 들어서 가만히 돼지고기랑 사다가 끓여먹으면서 사원들은 먹지 못하게 입을 봉해버릴 잡도리였다. 그는 온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누구네 집 가마에 녹이 쓸었는가, 뭘 끓인 흔적이 있는가를 살펴보고 이른바 사상이 빨간가 누런가를 가늠했다. 물론 위에 있는 허백호 서기가 그런 사상교양정책을 내놓으면 사원들은 새 대책을 댔다. 사원들은 돼지죽을 끓이는 척하며 푸성귀를 끓여 먹고는 가마를 깨끗하게 가셔내 말리우군 했다. 하여 아무리 허백호와 흥수가 싸다니면서 가마를 열어보아도 뭘 끓여먹은 흔적이 하나도 남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은 남녀노소 모두 허백호의 코개질을 하는 흥수를 미워했다. 그가 아무리 허백호를 믿고 개 잡은 포수처럼 삐죽한 조개턱을 쳐들고 우쭐거려도 모두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오히려 허백호 그림자만 사라지면 모여들어 흥수를 놀려주었다. 어느 하루, 깡마른 콩밭에 물을 주는 일을 하는 날이었다. 나이를 먹은 아낙네들이 우쭐거리며 돌아다니는 흥수를 보자 놀려주었다. “저 흥수, 허 서기한테 잘 보여서 또 화선입당하겠다!” “코개 같은 게! 보기만 해도 눈에 불이 난다!” “저 삽살개를 오늘 두들겨 팰까?” “좋다! 모든 개 매를 맞아봐야.” 누가 선코를 뗐는지 아낙네들은 사전에 토론이나 한 것처럼 “와-” 함성을 지르며 흥수한테로 돌격해갔다. 그녀들은 우르르 모여들어 흥수를 깔고 들어앉았다. 가물에 실돌피 같은 흥수가 아무리 버둑거려도 숱한 아낙네들을 당하지 못했다.  아낙네들은 흥수 웃옷을 와락와락 벗겨 낯빤대기에 들씌워놓고 한바탕 두들겨패주었다. 그것도 모자라 아낙네들은 흥수의 바지를 훌렁 벗기었다. “아이고, 이게 무슨 고추람?” “애들 거보다도 더 작아. 히히히.” “우메-요렇게 작으니 딸 밖에 줄줄 낳지 못하지.” “호호호.” 그것도 모자라 아낙네들은 흥수의 낯빤대기에 젖을 짜서 마구 발라놓았다. 이 때 개 한마리가 왕왕 짖어대며 구경하러 뛰어와 똥오줌을 쫘르르 내쏴놓고 달아났다. 한 아낙네는 개똥을 퍼다 흥수 주둥이에 마구 쑤셔넣었다. "에, 퉤. 함경도 가시나들, 퉤!  어더렇게 죽고 파?!" 흥수는 주둥이만은 살아 있었다. "이 놈, 남도치!" "고슴도치야?!" "이 콧개!" "전라도 깎쟁이!" "오늘 톡톡히 망신 주자!" 아낙네들은 흥수의 바지와 속옷을 몽땅 벗겨 안고 "와야-"하고 저 멀리 밭머리로 달아났다. 한 아낙네는   망신시키려고  비술나무에 바라올라갔다. 아래서 흥수의 옷을 나무꼬챙이에 걸어올려보내면 그 아낙네가  말라 죽은 나무 가지에 걸어놓았다. 실 한 오리 걸치지 못한 흥수는 창피해 젖 투성이 된 거시기를 손으로 싸쥐고 콩밭에서 달아나 옥수수 밭에 숨어 있었다. 해가 서산에서 뚝 떨어져서야 사원들이 마을로 내려갔다. 그제야 발가숭이 흥수는 슬금슬금 옥수수 밭에서 나와 사위를 흘끔흘끔 훔쳐보며 옷이 걸려 있는 나무쪽으로 다가갔다. “으흐흐!” 갑자기 하늘에서 뭔가 쯘쯘한 것이 발가숭이 엉덩이와 낯에 뚝 떨어졌다. 흥수가 황급히 닦으면서 하늘을 쳐다보았다.     까욱!     흥수가 하늘을 바라보았다. 까마귀 날아지나가면서 똥을 찔찔 내리 쏘았다. 재수없는 놈은 뒤로 넘어져도 콧등을 깬다더니 날아가는 까마귀가한테 흥수는 똥벼락을 맞았던 것이다. “에크, 퉤! 재수 없어.” 흥수는 옥수수 이파리를 뜯어 쥐고 낯과 엉덩이를 쓱쓱 닦았다. 그런데 시허연 까마귀 똥은 얼룩덜룩하게 대충 닦았는데 저걸 어쩌나? 엉덩이와 낯이 옥수수 이파리에 긁혀 아려나기 시작했다. 그는 상을 찡그리면서 나무 가지에 걸려 너펄거리는 옷을 벗겨 입고 아낙네들을 윽, 윽 벼르면서 마을로 내려갔다. 그 일이 있은 후 흥수는 혼자 마을로 싸다니면서 콧개처럼 이집 저집 냄새를 맡으며 싸다니지 못했다. 대대 당지부 서기와 치보 주임을 겸한 상순은 눈가림으로 대충 이 사건을 조사하는 척 하고 두루뭉실하게 지나쳐 버렸다. "망신당해 싸다, 싸!" 상순은 속으로 잘코사니를 불렀다. 후에 흥수는 상순과 병완을 믿어서는 앙갚음을 못할 것을 알고 창피한대로 그번 이른바  "능욕사건"을 공사당위 서기 허백호에게 고발했다. 허백호의 지시를 받고 공사 파출소 허영호 소장이 조개덕대대에 내려왔다. 그러나 허영호도 용빼는 수가 없었다. "누가 때렸는지 어떻게 수사한단 말인가?" 조사해보니 흥수의 머리에 웃옷을 푹 씌워놓고 숱한 아낙네들이 달려들어 옷을 벗기고 물매를 안겼던 것이다 . "얼마나 미움개를 샀으면 아낙네들한테 물매를 맞아? 개꼴망신당해 싸다, 싸." 영호 소장도 깨고소해 조사하는 척 하다가 그저 사원대회를 열고 아낙네들을 경고나 해놓고 치보 주임 상순에게 맡기고 돌아가 버렸다. 상순은 더 조사하지도 않고 지나쳐버렸다. 흥수는 마음을 곱게 먹지 못했기에 일이 잘 풀리지 않았다. 그가 아무리 입당하려고 허백호 서기 앞에서 두 주먹을 불끈 쥐고 개처럼 뛰어다녀도 헛수고였다. 당 지부 대회에서 그의 입당문제를 토론만 하면 함흥 촌 당 지부 서기 병완의 반대를 받아 통과 되지 못했다. 게다가 마을 사원들에게서 흥수에 대한 의견을 청취하면 별의별 나쁜 의견이 다 올라왔다. 허백호는 사원들이 푸성귀를 뜯어다 돼지죽을 끓이는 척 하면서 먹는 것을 눈치 챘다. 그는 외까풀 눈을 내리 깔고 어떻게 이른바 "자본주의 길로 나아가려는 싹"을 미연에 뿌리를 뽑아치우겠는가를 고민했다. 며칠 후 그는 상순을 보고 생산대 우사 옆에 커다란 돼지 굴을 지으라고 했다. 상순은 속으로 돼지라도 많이 치면 배를 곯는 사원들에게 좀 보탬이 되겠다고 생각했다. 하여 그는 사원들을 데리고 패용천산과 칼산에 가서 정으로 돌을 캐 실어다 일주일도 되지 않아 커다란 돼지 굴을 열 칸이나 지었다. 그러자 허백호는 집집이 기르던 돼지마저 몽땅 집체돼지우리에 몰아다 넣고 함께 기르라고 지시했다. 사원들은 도리머리를 홰홰 저었다. “돼지마저 치지 못하게 하면 어떻게 살라는 거요?” “글쎄 말이오. 우린 원래 돼지보다 못한게 무슨. 돼지도 푸성귀를 마음대로 먹잖소? 근데 우리 사원들은 자본주의로 갈가봐 푸성귀도 마음대로 끓여먹지 못하게 한단 말이요.” 모두들 이구동성으로 떠들어대며 반대했다. 박성근이 제일 떠들어댔다. “소들도 보오. 수수대로 엮은 집체 우사로 들어가더니 다 얼어 죽고 굶어 죽을 지경이오. 막부득이 하면 황소들이 우사에서 뛰여나서 옛날 옥수수랑 감자랑 심어먹던 두만강변으로 도망쳤겠소?" 확실히 그런 일이 있었다. 사람들이 굶어 죽을 지경인데 언제 소를 잘 먹일게 있겠는가? 어느 하루 몇마리 황소가 고삐를 끊고 잃어지지 않았겠는가. 혹시나 해서 상순과 흥수가 옛날 합작사에서 부업으로 감자를 심었던 두만강변 범바위골로 가 보았다. 그런데 소들이 글쎄 거기서 무리로 풀을 뜯어먹고 있지 않겠는가. "이 놈 소새끼들이." 흥수가 돌멩이를 쥐고 쫓아가자 소들은 꼬리 빳빳해 도망쳤다. 다행히 흥수가 황소 한 마리 끊어진 고삐를 붙잡았다. "생산대 우사로 돌아가자." 흥수가 고래고래 고함치며 아무리 고삐를 쥐여당겨도 황소는 네발로 벋디디면서 대가리를 흔들어댔다. 코에서 피가 흘러도 황소는 돌아가려고 하지 않았다. 박성근은 계속 떠들어댔다. "아무리 우둔한 소도 생산대 우사에 돌아가면 굶어 죽는다는 거 알았단 말이요." 그때 상순과 흥수는 황소들을 하나하나 붙잡아 생산대 우사로 몰고 오느라고 얼마나 고생했는지 모른다. 어떤 소들은 뿌리로 흥수를 마구 뜨기까지 하며 반항했다. "이제 돼지마저 집체 돼지우리에 들어가면 다 굶어 죽지 않는가 보오.” 허백호는 빈정거리는 성근을 아니꼽게 쏘아보았다. "야, 이 우파분자야, 주둥이를 다물지 못해? 계속 씨부렁거리면 소처럼 주둥이에 꾸러미를 꽉 채우지 않는가 봐라. 저 주둥이 대사긴 대사야."  그의 고집스러운 지시와 협박을 누가 언감 막겠는가? “어째 성근이나 오옥선처럼 우파 모자를 쓰고 개고생 해봐야 알겠는가?” 그제야 누구도 감히 찍 소리를 못하고 울며 겨자 먹기로 돼지를 생산대 돼지우리에 몰아갔다. 돼지들은 집체 돼지우리에 들어가 서로 물고 뜯었다. 보기도 난처했다. 소련에서 중학교까지 다닌 성근은 우파 모자를 쓰고서도 뒤에서 계속 두덜거렸다. “그래도 흐루쑈브 XX주의 채가 좋지. 흐루쑈브는 감자에 소고기 볶음은 XX주의라고 했소. 얼마나 도리 있소? 빨리 감자에 소고기볶음채를 먹으면서 살았으면 얼마나 좋겠소?” 상순은 성근의 곁에 다가가서 삽으로 돼지우리 둼을 쳐내면서 나직이 말리었다. “쓸데없이 횡설수설하지 마오. 우파 모자를 쓰고서도 아직도 말장난이오?” 허나 성근은 콧방귀를 뀌었다. “흥! 이미 우파로 됐는데 이제 죽이기까지야 하겠소?” “날마다 투쟁 받는게 고달프지도 않소?” “이 놈 세월에 속심말 한마디도 하기 힘드오. 어떻게 살겠소? 배불리 먹지 못하는데 말이라도 씨원하게 했으면 얼마나 좋겠소?” 상순은 주위를 둘러보면서 성근을 돼지우리 한쪽구석으로 데리고 가서 은밀히 물었다. “소련에서는 무슨 폐단이 있었소?” 성근도 주위를 둘러보더니 다른 사람들이 돼지우리 저쪽에서 돼지 똥을 쳐 내는 것을 보고 말했다. “어째 우파 모자를 씌워놓고서도 모자라오? 어쩌자고 자꾸 험한 말까지 다 묻소?” 성근은 볼 부은 소리를 한마디 내뱉고서는 입에 빗장을 질렀다. 상순은 쉼에 성근을 데리고 마을을 벗어나 태평강 가에 가서 조용히 말했다. “나를 믿소. 절대 비밀에 붙일게. 나는 집체생산을 한 후 어쩐지 사원들의 생활이 이전에 호조조를 할 때보다도 못해가니까. 소련의 경험과 교훈을 알려고 그러오.” 그래도 성근은 주위를 흘끔거리면서 입에 빗장을 빼지 않았다. 상순은 속심의 말을 했다. "인민들이 배불리 먹고 행복하게 사는 새 사회를 건설하혀고 그 얼마나 많은 선렬들이 희생됐소. 그런데 새 사회에서 백성들을 굶겨서야 되오? 그래서 쏘련 사회주의 경험교훈을 알려는 거요. 그래야 우리 소련의 굽은 길을 다시 걷지 말고 백성들이 행복하게 사는 새 사회를 하루 빨리 제대로 건설하지." 그제야 성근은 한숨을 후 내쉬더니 꾹 다물었던 입을 겨우 열었다. “소련 꼴호즈에서 집체생산을 하니까. 사람들이 노동적극성이 없고 노라리만 쳐서 지금 우리 생산대 꼴이었소. 개체 생산을 할 때보다 형편없었소. 소련 원동 울라보지또스크 주변 그 좋은 시꺼먼 밭에서 감자 몇 알을 거둬들이지 못했소. 그래서 흐루쑈브는 쓰딸린을 마구 물어뜯으면서 기여 올라 갔소. 흐루쑈부는 레닌과 쓰딸린이 건설한 소련 사회주의 기틀을 마구 허물어 버리고 수정주의를 해나갔소. 쓰딸린 때 지금 중국처럼 정치 백열화가 됐소. 밤을 자고 나면 꼴호즈의 간부들이 없어졌단 말이오. 쓰딸린을 욕하는 사람은 모두 반혁명으로 몰리어 어디로 갔는지 다시 돌아오지 못했소. 쓰딸린이 독재였다면 지금 흐루쑈브도 보나마나 나쁜 놈이오. 보오. 쓰딸린 때 중국에 숱한 지원을 한 걸 다 빚받이를 해간단 말이오. 글쎄 2차 대전 때 빚마저 다 받아가고 중국에 파견한 기술자를 몽땅 철수하지 않았소? 그 놈 기술자들이 돌아가면서 용광로에 쇠 물이랑 그대로 식혀 굳혀버린 바람에 용광로랑 못쓰게 만들었다오. 그래서 우리 여기서 공장뿐만 아니라 학교와 상점, 농촌에서까지 자력갱생, 간고분투의 기치를 들고 전민이 동원돼 강철을 생산한다고 떠들고 있지 않소? 허나 우리 농민들이나 공인계급이나 얼마나 살기 어렵게 됐소? 팽덕회를 타도했지만 팽덕회 말에 일부 도리 있소. 어떻게 한헥타르에서 10만근을 내오? 우리 마을도 보오. 허백호 서기 말대로 해서 한헥타르에 5만근을 냈소? 소련에서도 꼴호즈를 반대한  정치인들이 몽땅 숙청당했소. 허나 흐루쑈브가 올라가 몽땅 억울한 사건을 시정했소. 나도 언젠가는 진리를 견지한 영웅으로 재평가돼 억울한 모자를 벗을 날이 있을게요.” 상순은 성근의 말을 듣고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말은 조심해야 하오. 우린 공산당을 믿고 사회주의를 믿고 이 땅에서 살아야 하오. 우리 공산당도 어떻게 하면 인민들이 잘 살게 하겠는가고 새 길을 탐색하는 과정이 아니고 뭐요? 이제부터 말을 조심해 하오. ” 박성근은 도리머리를 홰홰 둘렀다. "딱 쏘련의 옛길로 나가서야 어떻게 잘 살 수 있소? 쏘련에서 잘 못한 건 우리 무조건 따라 하지 말고 교훈을 섭취하고 새 길로 나가야지. 에이구, 말이 통하지 않소."       상순은 속으로 성근은 오옥선보다는 다른 우파라고 느꼈다. 오옥선은 확실히 공산당원을 모욕한 죄가 있었다. 그러나 성근은 두갈래 로선투쟁에서 착오를 진 우파라고 생각되였다. 그러나 무조건 당을 반대한다고 우파모자를 마구 들씌운 건 어쩐지 도리머리를 흔들며 심사숙고하게 됐다. 3년 재해 시절에 쌀 고생이 막심했다. 화영은 원래 소련에서 조선 사람들이 사는 곳으로 오느라고 해방직 후에 중앙아시아로부터 도망쳐 중국 만주로 들어왔던 것이다. 그리하여 성근보다 못지 않게 소련 꼴호즈를 잘 알았다. 그러나 그는 세상이 돌아가는 것을 살피며 입에 빗장을 지른 채 진종일 수걱수걱 일만 하면서 한마디 말도 삐치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던 그도 너무 배고파 마을 집체식당에서 참지 못하고 한마디 했다. “에구, 그놈 마우재들이 중국에서 빚을 받아가는 바람에 우리 중국 사람들이 잘 살지 못한다.” 그런데 그 말을 이번에는 학수가 허백호 서기에게 달려가 고발했다. 그러자 허백호 서기는 기뻐 무릎까지 쳐댔다. “잘 됐소. 우파분자는 한 놈, 한 놈 생기는 족족 투쟁해야 하오.” 그날부터 화영도 우파 모자를 쓰고 오옥선과 성근과 함께 투쟁을 받았다. 허백호 서기는 화영의 우파 죄장은 어머니 사회주의 모국인 소련을 모욕, 중상했다는 것이었다. 오옥선과 박성근, 화영의 죄는 지주 장학산이나 국민당 장충국, 조개덕의 대지주 장용객과 패용천 촌의 이봉각 등의 죄보다 더 크다고 했다. 하여 그들 세 우파분자들은 지주, 부농, 역사반혁명분자, 국민당분자들과 함께 고깔모자를 쓰고 한 줄로 서서 투쟁을 당했다. 농사는 제체 놓고 정치투쟁을 백열화하는 바람에 농사는 망쳐 먹었다. 게다가 연속 자연재해까지 덮씌워 농사꾼들은 입에 거미줄을 칠 지경이었다. 만물이 누렇게 번져가는 가을이 돌아오자 허백호 서기의 심갱밀식농사법대로 심은 밭에서 옥수수 몇 알을 거두지 못했다. 반대로 병완과 상순의 말대로 심은 옥수수는 그래도 모진 가물에 물을 길어 주어서 그런대로 한 헥타르에 5천근을 거두었다. 그리하여 모든 것이 자연히 결론이 나왔다. 그러나 허백호 서기는 이젠 심갱밀식농사법을 더 고집하지 못하고 정치투쟁의 몽둥이를 휘둘러 우파 모자를 씌워 자기를 따르지 않는 사원들을 하나하나 타도했다. 자연재해에 정치 투쟁의 세찬 파도 속에 떠밀리어 다니는 사원들은 주린 배를 끌어안고 보릿고개를 넘지 못해 죽어가는 소리로 아우성쳤다. 지어 굶어 하나하나 이 세상을 떠나가기도 했다. 상우는 너무도 굶어서 피골이 상접할 지경으로 되였다. 어느 날 너무 배고파 상우는 태평강 건너 양돈장 근처 동생 상순이네 집으로 찾아갔다. “형님, 왔소? 어서 올라오오.” 상순은 바람에 날려갈 듯이 여윈 형님의 손을 잡고 구들에 올라갔다. “아주버니 왔습둥?” 명옥은 아주버니를 반갑게 맞으면서 점심 차비를 했다. 그런데 쌀 고생을 어찌나 하였던지 가마에 쌀을 얹은 지 며칠 됐다. 명옥은 밑바닥이 난 쌀독을 떠올리자 어쩌다 온 시형에게 뭘 끓여 대접할 가고 근심했다. 그러다가 그녀는 바깥에 나가 생산대에서 돼지죽을 끓일 불을 때라고 돼지 굴 부근에 쌓아 놓은 콩깍지를 안아 들여왔다. 그녀는 콩깍지를 맷돌에 갈기 시작했다. 상우는 앓아누운 아버지를 보자 두 손을 잡고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아버지, 그렇게 정정하던 아버지가 앓다니? 이 놈의 3년 재해가 아버지를 쓰러지게 만들었구나. 아버진 고향 명천에서도 한다하는 힘장사였는데. 빈손이 돼서 앓는 아버지를 찾아와 문안도 못한 불효자식을 용서합소.” 범도 마구 잡아먹을 근력을 가졌던 천하의 기준도 굶어서 머리를 들지 못하고 있었다. 상우는 호주머니에서 동전 열다섯 개를 꺼내 앓는 아버지 손에 쥐어 주었다. “아버지, 이 돈으로 약이라도 씁소.” 기준은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상순은 “감사하오. 형님, 며칠씩 굶으면서 이게 어디서 난 돈이오?” 하고 의아해 했다. 상우는 손사래를 쳤다. “더 묻지 마라. 너 아주머니 몰래 모아둔 돈이다.” 상순은 도리머리를 흔들며 “좌우간 감사하오. 이 돈을 보태 아버지께 약을 지어다 대접하겠소.”라고 했다. 기준은 명옥에게 건사하라고 동전을 건네주었다. 한참 후 명옥이 콩깍지 가루를 끓인 죽을 퍼서 밥상에 올렸다. 상우는 콩깍지 죽을 받아 후후 불면서 맛있게 먹었다. “에구, 이 세월에 콩깍지 죽이라도 한사발이면 온 하루 견딜 만 하지.” 상순은 목이 꺽 막혀 입을 하 벌리고 있다가 죽사발을 밥상에 내려놓았다. “아니, 형님, 그래 죽 한 사발을 잡숫고 어떻게 온 하루 삐친단 말이요? 형수는 형님을 죽 한 사발도 안 준단 말이오?” 상우는 제수 앞인지라 아내의 허물을 하기 싫어 에둘러댔다. “네 아주머닌들 빈 쌀독을 가지고 용빼는 수가 있니? 처하구 순애가 먹고나면 죽물 한 숟가락도 남는 게 없다.” 상순은 한숨을 천정이 날아나게 내쉬었다. 그는 마음속으로 어질고도 어진 상우형님이 불쌍했다. 그리하여 한마디 해주고 싶었다. “형님, 아주머니하구 말해서 때마다 죽물이라도 얼마간씩 나눠 잡숫소. 처자만 처자라고 사양하다가 정말 형님이 세상을 뜨기라도 하겠소. 이 놈의 재해 년에 정말 형님이 근심스럽소.” 동생의 충고에 상우는 그저 묵묵히 앉아 아무런 대답 한마디도 하지 않고 엉거주춤 엉덩이를 들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상순은 형님이 맥없이 머리를 숙이고 비틀거리며 함흥 촌으로 돌아가는 뒷모습을 보고 코마루가 시큼해나는 것을 어찌는 수 없었다. 그는 자기가 항상 인민군중들이 배불리 먹고 잘 살게 하려고 뛰여다녔지만 허사였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며 도리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 놈의 세월에 범바위골로 들어가 감자라도 심어먹게 했으면 좋으련만…) 장닭이 “꼬끼오-오-” 홰를 길게 치며 우렁차게 목청을 뽑았다. 거무스레한 어둠살이 안개 발이 흩어지듯이 사라지면서 시들고 말라 죽어가는 나무와 풀들이 뒤덮인 산과 들판이 선명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패용천산 기슭을 연분홍으로 물들였던 진달래꽃들이 지고 개울가의 개나리들이 샛노랗게 피어나고 있었다. 산과 들의 꽃들이 시들어 떨어지고 나무와 풀들이 시들고 말라 죽는 살풍경은 사람들을 전에 없이 쓸쓸하게 만들어버렸다. 상순은 이튿날 생산대 대장 허동원에게 청가를 맡고 일을 제쳐놓고 아버지 약을 지으러 가려고 서둘렀다. 명옥은 까래 밑을 들춰 집에 있던 동전들을 긁어모아 전날 시형이 준 돈에 합쳐 상순에게 주었다. 상순은 돈을 쥐고 윗방에 올라가 무릎을 꿇고 앉아 “아버지, 함께 병원에 가 봅시다. 무슨 병에 걸렸는지 약을 씁시다.”라고 했다. 그러나 기준은 누운 채 우명하게 패운 눈으로 효성이 지극한 아들을 올려다보면서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난 병이 없다. 병원에 가지 않겠다. 그 돈으로 쌀, 쌀이나 얼마간 사다 밥이나 한술 다구.” “예.” 상순은 손으로 눈물을 닦으면서 일어나 돌아나갔다. 그도 진작 알았다. 원래 몸이 굉장했던 아버지는 속에 병이 없었다. 다만 자연재해와 인재로 인해 제대로 잡숫지 못해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상순은 그래도 앓는 아버지 기를 도와주려고 동전과 부스럭 돈을 주어들고 진수해 약방에 가서 인삼을 달라고 했다. 그러자 약방 점원은 동전을 안경 너머 내리 보더니 코웃음쳤다. “요걸로 어떻게 인삼 사오?” 상순은 “아버지가 앓는데 기맥을 출 약을 지어주오.”라고 했다. 그제야 점원은 머리를 끄덕이더니 약 세봉지를 달랑 지어 주고 동전을 세 받았다. 집에 돌아오자 상순과 명옥은 풍로 불을 피워놓고 약탕기에 약을 닳였다. 해가 지기 전에 상순과 명옥은 약을 광목천에 쏟아 짜서 약을 한 사발 받아냈다. 그들은 정성 들여 약 사발을 들고 아버지한테 들어갔다. 아버지를 안아 일으키고 효성의 약을 대접했다. 상순은 시름이 놓이지 않아 온 마을을 다 돌아다니면서 돈을 꿔 가지고 YB병원에 가서 정규상을 찾았다. 심혈관내과에 가보니 문이 꼭 잠겨져 있었다. 문을 똑똑똑 두드려도 안에서 아무런 인기척도 없었다. 복도로 이리저리 다니면서 찾아보아도 정규상을 찾을 수 없었다. (에참, 한창 병을 볼 시간에 문을 꼭 닫고 뭘 해? 혹시 칸을 옮기지 않았는가?) 상순은 심혈관내과란 간판을 단 칸이란 칸은 다 돌아다니면서 아무리 이 칸 저 칸 들여다 봐도 정규상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허, 별 일이다. 심장전문가가 심혈관내과에서 병을 보지 않고 어디로 갔담?) 그때 심혈관내과 사무실에서 이전에 정규상과 함께 마주 앉아 병을 보던 서기인지 뭔지 했던 의사 박영발이 걸어 나왔다. (안에 있으면서 문을 열지도 않았어?) 상순은 속으로 두덜거리면서 박영발 서기에게 다가갔다. “여보세요. 박서기 아닙니까?” “어, 허,” 박서기는 농사꾼차림을 한 상순의 아래위를 훑어보다가 면목이 좀 있었는지 “오, 그래. 무슨 일이오?” 하고 물었다. 상순은 정규상이 있던 칸을 가리키면서 “아버지가 편찮아서 정규상 주임을 찾아 왔습니다. 안에 있습니까?” 하고 말했다. 그러자 박서기는 대뜸 낯색이 퍼렇게 변했다. “정규상은 주임이 아니오. 우파분자를 찾아서 뭘 하오? 흥!” “우파라니? 그래 이 병원에 없습니까?” 박영발 서기는 검퍼래서 “저 아래 2층 소화내과에 가 보오.”라고 마지못해 알려 주고 사무실로 휭 하니 들어가 문을 쾅 닫아버렸다. 상순은 우두커니 서서 꼭 닫긴 심혈관내과 사무실을 멍해 바라보다가 2층으로 내리어 갔다. 2층 복도에서 두리번거리며 소화내과를 찾을 때 누군가 뒤에서 옆구리를 슬쩍 건드렸다. “아니, 이게 상순이 아니오?” 상순이 머리를 돌려 보니 정규상이 아니겠는가! “형님, 그간 무사했소?” 상순이 반가와 소리치자 규상은 사무실과 복도를 두리번거리더니 상순을 데리고 세면실로 들어갔다. 상순은 따라 들어가면서 이상한 감이 들었다. (무슨 눈치 보여?) 규상은 세면실에 들어가서 수도 물을 틀어놓고 문 밖의 동정을 살피면서 나직이 물었다. “무슨 일로 여기까지 왔소? 아버지는 잘 있소?” 상순은 수척해진 규상을 보자 대뜸 울먹해졌다. “아버지 편찮아 왔소.” “안됐구나. 어떤 정황이냐? 모시고 올 게지.” 규상은 아버지 정황을 죽 이야기 하고나서 뒷말을 이었다. “올해 농사를 쫄딱 망쳤소. 허백호 서기는 무슨 심갱밀식농사법인지 해서 한 헥타르에 5만근을 거두라고 강박했소. 그런데 50근도 거두지 못했소…” 이때 안경을 건 의사가 세면실에 물 초롱을 들고 들어왔다. 그러자 정규상은 변소로 들어가 소변을 보는 척 했다. 상순은 의아해 하다가 안경쟁이가 나간 후 규상에게 물었다. “어째 이상하오. 형님은 왜 남의 눈치를 그렇게 살피오?” 규상은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더니 복도에 누가 엿듣는 사람이 없는가 살피고 되들어왔다. “동생만 아오. 난 지금 우파 모자를 쓰고 병을 볼 권리마저 박탈당했소. 세면실과 변소를 청소하라오. 난 환자와 만나지도 못하게 하오.” “뭐라오? 어쨌다고 그런다오.” “쉿-” 정규상은 상순을 한쪽으로 데리고 가서 나직이 말했다. “여기서 말할 일이 아니오. 말 한마디를 했다가 좌우간 이렇게 됐소. 기준 삼촌의 약 처방을 떼는 날엔 또 투쟁당하고 검사서를 써야 되오. 언제 시간 있으면 함흥 촌에 가서 삼촌의 병을 보기요.” 세상이 돌아가는 형편이 너무나도 험악해 상순은 더 말도 나가지 않았다. “알았소. 우린 함흥 촌 아랫마을 조개덕에 이사했소. 그럼 형님, 주의하오.” 정규상은 상순을 바래며 미안해 두 손을 싹싹 비볐다. 상순은 정규상의 처지가 불쌍해 목이 꽉 막힌채 작별하고 병원을 떠났다.                                          8. 함정      붉은 태양이 대지를 비추자 온 세상이 붉게 물들어 갔다. 태양의 따뜻한 햇볕에 만물이 소생하는 것은 예사로운 일이다. 하건만 온 한 해 불비를 퍼부었기에 온 대지가 후꾼후꾼 무덥고 가물어 한해 농사를 또 망쳐 먹었다. 사원들은 쌀 고생을 하다못해 서북풍을 마실 지경이다. 그렇게 뜨겁던 태양은 초겨울이 되기 바쁘게 이번에는 대지를 꽁꽁 얼어붙게 만들었다. 눈보라가 사납게 윙윙 불어치면서 창문을 두드리며 찬 기운이 집 안에까지 마구 파고 들었다. 여우도 맵짠 추위에 눈물을 똑똑 떨어뜨릴 엄동설한이건만 시내에서는 정치투쟁이 백열화돼 부글부글 끓어번지는 도가니 속 같았다. 정규상이 억울하게 우파 모자를 쓴 것은 아주 억울한 정치사건이고 무함사건이었다. 어떻게 말하면 음흉한 자들이 계획적으로 은밀히 파놓은 함정에 빠졌다고 할 수도 있었다. 언제 우파 모자를 쓸지 몰라 모두 신경을 도사리면서 출근하던 어느 날이었다. YB대학에서는 교원대회를 열었다. 정규상도 의학학부의 부교수였으므로 회의에 참가했다. 회의에서 한 책임자는 동원연설 가운데서 당의 정풍을 협조해달라고 동원하면서 당에 대한 의견이 있으면 무엇이든 주저하지 말고 제기하라고 했다. 회의가 끝난 후 사무실에 돌아온 YB대학 의학학부 당총지 서기 박영발은 정규상을 조용히 찾았다. 그는 복도를 두리번거리더니 사무실 문까지 절컥 잠그고 아주 신비하게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정주임, 정주임이 책임지고 교원들을 동원해 의견을 청취한 후 정리해 당위에 회보하오.” 정규상은 이마 쌀을 찡그렸다. “아니, 난 당원도 아닌데 왜 하필 나한테 그런 일을 시키오?” 그러자 박영발은 눈을 가슴츠레 뜨더니 바투 들이댔다. “당신은 우리 의학학부 부학부장이 아니오? 당의 정풍을 도와 달라는데 고만한 일도 못하겠소? 황차 당신도 당원에 들자고 신청한 적극분자가 아니오?” 정규상은 그래도 선뜻이 대답하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망설이면서 창문 밖을 내다보았다. 열이 불끈 오른 박영발은 마땅찮은 눈길을 보내는 것이었다.       “당조직에서 도와달라면 할 게지. 무슨 군말이 그리 많소. 당에 대한 고만한 충성심도 없소?”  박영발의 그 눈길에는 아주 음침하고 복잡한 내면세계가 번뜩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때 정규상은 그 눈길 속에 숨어 있는 음흉한 심보를 보아내지 못했다. “그럼  의견을 수집해 당위에 보고하겠소.” “좋소. 당에서는 정주임을 믿소. 그래야 입당도 남 먼저 하지. 허허허.” 박영발의 길죽한 낯에서는 사특한 웃음기가 너불거리었다. 정규상은 이튿날 오전에 의학학부 교원들과 YB병원 내과 의사들 그리고 간호사들까지 불러 의견청취회의를 열었다. 회의를 당장 시작해야 하겠는데 박영발 서기만은 2층 회의실에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정규상이 내과 서기 사무실에 가보니 문이 꼭 닫겨 있었다. 그가 노크하고 문을 열고 들어가보니 박영발은 신문으로 얼굴을 가리고 앉아 있었다. “회의를 시작하겠는데 박 서기 없어서 시작하지 못하고 있소.” “정 주임, 당원들에 대한 의견을 청취하는 회의인데 내 가면 불편해하오. 누가 서기 앞에서 당에 대한 의견을 제기하겠소?” “오, 알았소.” 회의실에 돌아 온 정규상은 당에 대한 의견을 제기하라고 교원과 의료일군들을 동원했다. 교원들은 모두 서로 눈치를 보면서 입에 빗장을 지르고 묵묵히 앉아 있었다. 회의실은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한참 후 한 교원이 대담하게 발언했다. “당과 군중간의 관계가 긴장한데 이 문제를 시급히 해결해 주십시오.” 삽시에 회의실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 교원은 제 자리에 앉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규상은 그 교원을 돌아보며 팽팽하던 신경을 느슨하게 만드는 말을 했다. “구체적으로 실례를 들어 얘기하십시오. 의견을 드리는 것은 당에 대한 충성심으로부터 출발한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당에 허물이 있으면 제기해서 고치게 하면 우리 당이 더욱 발전하고 위대하게 될게 아닙니까? 괜찮습니다. 구애 받지 말고 얘기하십시오.” 그제야 그 교원은 우쭐 일어나 대담히 말했다. “우리 내과 박 서기를 보십시오. 진종일 문을 꼭 닫아걸고 신문만 본단 말입니다. 병원의 한개 과 당총지 서기 뭡니까? 의사라면 환자들 병을 봐야지 신문만 보다가 퇴근하면 됩니까? 또 군중들이 당총지 서기를 찾아가 담화를 하려고 해도 무슨 일을 하는지 항상 문을 꽉 닫아건단 말입니다. 사실 군중들은 서기 사무실 문고리를 쥐였다가도 두려워서 말도 하지 못하고 만 적이 많습니다.” 그 교원이 선코를 떼자 웅성거리던 회의실은 도가니 속처럼 부글부글 들끓기 시작했다. 교원들은 너도 나도 앞장서 신변의 당원들에 대한 별의별 의견을 다 드렸다. 회의가 끝난 후 정규상은 당의 정풍을 도우려는 충성심에서 교원들과 의료일꾼들을 찾아다니면서 당 조직에 대한 의견을 더 수집했다. 뒤이어 며칠 밤도와 교원과 의료일군들이 제기한 의견을 12가지로 귀납해 당 조직에 바쳤다. 그중에 이런 의견도 있었다. “당과 군중은 물과 고기와 같아야 되는데 당 총지 서기실 문이 꽁꽁 닫혀서야 되는가? 당과 군중 간에 문턱이 있어야 되는가? 응당 이런 문턱부터 없애야 합니다.” 당총지 서기 박영발은 정규상이 종합정리해 가져온 두툼한 의견서를 받아들고 펼쳐 보더니 길죽한 말상에 간교한 웃음을 지었다. “당에 대해 의견이 아주 많구만. 좋소. 수고했소.” 며칠 지난 뒤 문제가 터졌다. 정규상은 그 의견서가 화근이 돼 우파 모자를 쓰고 몇 십 년이나 고생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해 3월에 정규상은 전국소수민족참관단의 120명 가운데의 지식분자 소조 조장으로 돼 할빈, 대련, 천진, 북경, 상해, 광주, 내몽골 등 전국 각지를 참관했다. 그 사이에 북경 5.1국제노동절을 경축하는 천안문성루 관례대에 올랐다. 그런데 그 좋던 기분이 사라지기도 전에 의학학부에 돌아와 보니 2층 회의실로 올라가는 난간에 그를 공격하는 대자보가 다닥다닥 나붙은 것이 첫눈에 띄었다. 대자보의 주요 과녁은 그가 수집해 제기한 12가지 의견서였다. 기실 그것은 정규상이 한 말도 아니고 군중들이 제기한 의견을 그가 귀납해 제기한 것뿐이었다. 그것은 또 당위 지시에 따라 정풍을 돕자는 합리화건의라고 보는 것이 옳았다. 허나 정치모자공장에서는 그에게 터무니없는 “우파모자”를 끝내 들씌웠다. 하긴 YB대학 의학학부에서도 몇 프로에 해당된 우파분자를 만들어 투쟁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러나 우파대상이 하나도 나타나지 않아 박영발 서기는 쩔쩔 맸던 것이다. 그 대목에 정규상이 그처럼 엄청난 12가지 의견을 도처에 뛰어다니며 수집해 귀납해 바쳤다. 박영발은 무릎을 탁 치며 잘코사니를 불렀다. "이런, 이런! 네 놈이 우파 모자를 써 봐라.” 하느님도 무심하지. 당에 대한 충섬심이 오히려 화근으로 되다니? 청청 하늘이어, 어이하여 세상에 이런 억울한 일도 다 있는가? 억울한 우파 모자를 들쓰고 집에 돌아온 정규상은 침식을 잊은 채 구들에 털썩 들어 눕고 말았다. 그는 부모를 조선에 보내면서도 조선 고향에 나가지 않았다. 지어 그를 보고 연변에 남으라고 동원하던 림춘추까지 조선에 가벼렸다. 하지만 그는 조선 고향에 가지 않고 이 땅에서 중국 공산당과 조선족의 의학교육을 위해 룡정에서부터 국자가에 들어와서까지 불철주야 가시덤불을 헤쳐 왔다. 그가 그래 중국 공산당을 반대한 우파분자란 말인가?        1949년 여름에 정규상은 조선 평양의과대학으로 고찰하러 나갔을 때다. 그렇게 함께 살자고 하는 부모와 여동생들을 보고 중국 조선민족의학교육 사업이 자기를 요구한다면서 그들을 중국에 되돌아오라고 동원한 그가 아닌가! 하나 밖에 없는 아들로서 어린 여동생과 매부에게 부모와 어린 여동생 셋이나 맡겨 놓고 하루 밤 묵어서 부모를 떠난 그의 심정이 오죽했겠는가! 그릇마저 없어 바가지에 밥과 국을 떠 자시는 부모형제들을 조선에 남겨두고 하나도 돕지 못하고 두만강을 건너온 그, 6.25전쟁에 두만강이 막힌 미국비행기 폭격에 시체마저 남기지 못한 아버지를 보지도 못하고 사업한 그의 충성심, 당과 인민, 민족의 의학교육사업에 대한 그의 충성심을 무엇으로 다 표현하랴! 그런데도 우파란 말인가! 건국 전에 입당신청서를 쓰고 당 조직에서 시키는 일은 발을 벗고 나선 그가 아니었던가! 그는 깊은 함정에 훌렁 빠지고 말았다. 누가 그것이 정치 야심가들이 파놓은 보이지 않는 정치 함정일 줄을 꿈에나 생각했겠는가! 그 함정은 어찌나 어둡고 깊고 침침한지 몇 십년을 허우적거리고 발악해도 헤어 나오기 힘든 함정이었다. 밤이 가고 흐린 날이 희붐해지도록 그는 천정만 멍하니 쳐다보았다. 이튿날 밤 먹장구름이 덮쳐왔다. 창밖에서는 소낙비가 우르릉 꽝꽝 우레 소리와 더불어 억수로 퍼부었다. 웬 승용차가 문 밖에 와 조용히 멈춰 섰다. 이윽고 똑똑똑 노크 소리가 나직이 들렸다. (밤 일곱 시도 넘었는데 누구일가? 날 붙잡으러 온 게 아닐까?) 착잡한 생각에 모대기면서 정규상이 일어나면서 들어오라고 맥없이 말했다. 그런데 들어온 이는 생각 밖으로 정성해 서기의 부인 리영희었다. “어떻게 돼 오셨습니까? 혹시 정 서기 앓습니까?” “…” 정규상은 아무 말도 없는 리영희를 따라 밖에 나가 승용차에 앉았다. 비가 억수로 퍼붓는데 그들은 어느새 자그마한 호수 옆에 있는 정성해 서기의 주택에 이르렀다. 정규상은 화분에 물을 주던 정성해 서기가 들어오라고 하자 온돌 침실에 들어갔다. 정성해가 손을 씻고 올라왔다. 정규상은 인차 “어데 아픕니까? 봅시다.”라고 하면서 다가앉았다. 그러자 정성해는 “아니요. 동무 속이 아픈 거 같아 속이나 풀어주자고 오라 했소.”라고 했다. 뒤이어 술상이 들어왔다. “자, 한잔 들면서 얘기하기요.” 정성해 서기가 권하자 정규상은 마음을 놓고 함께 한잔을 쭉 냈다. 정성해 서기는 채를 집어 정규상의 앞에 놓인 접시에 놓으면서 말했다.       “지금 시국에 주의해야 하오. 그러나 아무 근심하지 말고 계속 자기 앞의 일을 잘하오.”      그 우렁우렁한 말소리에 정규상은 속이 훅 풀렸다. 속이 든든해지는 감이 들었다. 코마루가 시큰해났다. 그것은 곤경에 빠져 억울한 우파 모자를 쓰고 정치투쟁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려들어 허우적거릴 때 구명환을 뿌려주는 구명은인을 만난 심정이었다. 정규상은 뒷심이 든든해졌다. 그는 시름 놓고 술잔을 쭉쭉 굽 냈다. 정성해 서기는 그에게 술을 부어주면서 따금하게 충고해주었다.        “동무는 정치안광이 너무 없소. 자기 속심의 말을 아무한테나 다 해서야 되오?”        정규상은 인차 손사래를 쳤다.       “아닙니다. 아니, 건 내 개인 의견이 아닙니다. 군중들의 의견을 귀납해 제기했을 뿐입니다.”        정성해 서기는 답답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당과 군중 관계를 혼돈하지 마오. 좌우간 근심하지 마오. 당에서 시키는 일을 했으니까. 계속 당에서 시키는 일을 잘 하오. 시간이 흘러가면 공정한 판결이 있을 게요.”       정규상은 정성해 서기 말을 듣고 시름 놓고 술을 마셨다. 하여 그날 밤에 둘이서 한 근 술을 다 마셨다… 그 후 정규상은 YB대학 의학학부 부학부장 직무를 철직받고 YB병원 내과의 청소공으로 돼버렸다. 환자도 보지 못하고 진종일 변소와 병실을 청소하면서 사상개조를 해야 했다. 그때부터 그는 거의 날마다 우파 고깔모자를 쓰고 이른바 우파 분자라는 모자 외에도 “반당분자”, “심장내과 반동권위”, “반역자”, “내부간첩”, “일본특무”, “조선특무”, “매국역적” 등등 숱한 터무니없는 모자를, 억울한 모자를 쓰고 투쟁당했다. 박영발 서기는 투쟁대회에서 정규상의 머리를 쥐어 시멘트땅바닥에 마구 짓 쪼아 놓았다. 정규상은 머리가 터져 대뜸 피가 질벅하게 흘렀다. 박영발 서기는 악에 받쳐 꽥꽥 고함쳤다. “이 놈은 철두철미한 반당분자입니다. 당에 어떻게 의견이 많으면 12가지나 만들어냈겠습니까?” 정규상은 억울해 숙이었던 머리를 쳐들면서 고함쳤다. “억울하오. 건 박서기가 날 보고 시키지 않았소? 내가 당원도 아닌데 하지 못하겠다고 하자 박 서기는 사무실에서 문을 걸고 뭐라고 했소? 당조직을 돕는 셈치고 군중들의 의견을 수집해 당위에 보고하라고 하지 않았소?” “에끼, 이 놈, 생사람을 잡는다. 내 언제 그랬니? 이 놈이 사상개조 표현이 나쁘구나.” 박영발은 청년 교원과 의사, 학생들을 시켜 쇠줄에 큰 돌을 묶어 가져오게 해 정규상의 목에 걸었다. “반당 우파분자 정규상”이라는 글줄이 달린 커다란 돌이 어찌나 무거운지 쇠줄이 목덜미를 파고들면서 목에서 피가 질벅하게 흘렀다. 정규상은 목이 아프다 못해 까무러치고 말았다. 그러자 박영발 서기는 학생들을 시켜 정규상에게 찬물을 끼얹게 했다. 찬물을 맞은 정규상은 겨우 일어났다. “계속 투쟁합시다.” 박영발 서기는 정규상을 손가락질 하며 마구 무함했다. “이 놈은 항상 심장전문가라는 기술을 뻗대고 서기인 나를 업신여긴 반당분자입니다. 이 놈 정규상은 일본 특무입니다. 항일전쟁시기에 일본 놈들이 대준 장학금으로 공부한 일본 국비생 대학졸업생입니다. 이 놈은 조선특무입니다. 이 놈의 아버지와 어미, 여동생들은 조선에 있습니다. 그래도 조선특무 아니라고 하겠는가!” 그러자 정규상은 너무 억울해 고함쳤다. “일본 국비생이면 다 특무입니까? 조선에 부모형제가 있으면 다 조선 특무입니까? 여기 조선에 친척이 없는 교원이 몇입니까? 그래 박서기는 조선에 친척이 없습니까? 그럼 박서기도 조선특무입니까?” 말문이 막힌 박영발은 한참 입을 다물고 멍해 서있다가 다른 빈 구석을 찔렀다. “이 놈이 정말 자기 죄를 승인하지 않는구나. 네놈이 이전에 농촌에서 온 네 아버지 친구네 아들이 왔을 때 뭐라고 했는가? 그 상순이라던가 그 사람 굶은 조카가 죽어나갔다는 말을 들을 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아무래나 백성들이 배불리 먹구 살면 되지. 무슨 일이 중요한가?’…” “난 그렇게 말한 적도 없소. 그저 농촌에서 빈하중농들이 배불리 먹고 살면 얼마나 좋겠는가고 말한 적은 있소. 생사람을 물지 마오!” 박영발은 정규상이 완강하게 부인하자 말로는 안 되겠으니 주먹다짐을 들이댔다. 그는 구두 발로 숙인 정규상의 머리를 마구 찼다. 그러고도 성차지 않아 목에 건 돌멩이를 매단 쇠줄로 마구 톱질 하듯이 쥐어 당겼다 밀었다 했다. 정규상은 목이 베져 뻘건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그는 너무 아파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그 정경을 보던 군중들은 너무 구차해 상을 찡그리면서 머리를 숙이었다. 여기저기 여성의무일군들의 비명소리가 들리었다. 정규상은 그런 모진 투쟁을 받으면서, 비인간적인 모욕받고 피 흘리며 어둠속에서, 고통 속에서 외롭게 지지리도 깊고 긴 음흉한 함정의 어둠 속을 무릎걸음으로 기고 또 기여야만 했다.
130    대하소설 진달래 소야곡 (4) 댓글:  조회:1420  추천:0  2017-11-26
         6. 실련영탄곡        (오~ 내 '레날 부인'은 정말 붙잡을 수 없는 부평초야. 오 맞아, 은영아, 넌 부평초야."       성호는 숙사를 내려오면서 부평초란 즉흥시조를 짓기 시작했다.       "호수에 둥둥 떠돈 무근초 부평초야, 그래, 넌 뿌리 없는 부평초처럼 이 남자 저 남자에게 떠돌아다니는 부평초야."        "오빠, 호호호. 누가 부평촌가요?"    뜻밖에 길 옆에서 정희가 뛰여나왔다. "밤중까지 숙사에 돌아가지 않고 뭐 해?" "내 물을게 있는데요. 은영이 그렇게 좋아?" 희미한 가로등 불빛에도 파랑새의 굳은 표정이 드러났다. "네가 뛰여나온 바람에 즉흥시조 령감이 다 날아났어." "즉흥시조?" "그래, 부평초, 뿌리 없이 떠도는 부평초." "호호호." 파랑새 정희는 코를 싸쥐고 웃었다. "진짜 오빠를 두고 짓는 근사한 시조군요. 뿌리 없이 떠도는 부평초. 내 한마디 보태 줄가요?" "뭐야?" "‘묻노니, 산들 미풍에 이리 저리 떠돌겠나?’ 이건 제가 오빠에게 하는 속심의 말이예요." 성호는 저도 몰래 웃음보를 터뜨렸다. "아니야. 부평초는 은영과 파랑새를 두고 짓는 시조야!" "아니예요. 오빠야말로 부평초예요. 호호호." "너, 정말!" 성호는 도망치는 정희에게 주먹을 불끈 쳐들었다. 정희는 깔깔깔 웃으며 녀성숙사 쪽으로 달아났다. 성호는 숙사에 돌아와서도 밤중까지 침대에서 이리궁실 저리궁실 하면서 은영을 빗대고 시조 "부평초"를 다듬었다. 저쪽 침대에서 책을 보던 승호도 보다 못해 책을 놓고 이불을 들쓰고 코를 드렁드렁 골았다. 성호는 끝내 부평초란 시조를 다 써서 제비꼬리처럼 쪽지로 접어 웃 호주머니에 잘 간직했다. 이튿날 성호는 교실로 올라 갈 때 올리막길에서 은영이 오기를 기다렸다. 드디여 은영이 체육머리를 흩날리며 사뿐사뿐 다가왔다. 성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시조를 쓴 쪽지를 건네주고 교실로 가버렸다. 은영이 교실로 들어가 가만히 쪽지를 꺼내 책상 밑에서 피뜩 읽어보았다.   부평초 호수에 뿌리 없이 떠도는 부평초야 파란 이팔 빨간 꽃잎 지녔다고 뽐내지 마 묻노니, 산들 미풍에 떠다니다 말겠냐?   은영은 어이없어 피씩 웃으며 쪽지를 쓰레기에 버리려 했다. 그러다 말고 그 시조에 몇 마디 쓱쓱 쓰더니 책가방에 건사했다. (누가 누구에게 써 보낼 시조인가요?) 그녀는 공부를 하다가도 교수의 강의를 듣지도 않고 가방에서 쪽지를 꺼내 지우고 또 뭐라고 쓱쓱 쓰고 또 지우고 다시 썼다. 점심에 숙사로 내려 갈 때 은영은 옆 교실에서 불쑥 나온 성호를 따라갔다. 조용한 나무 밭 속 오솔길에 들어서자 은영은 나직이 "오빠, 밤중까지 쓴 시조를 잘 보았어요."라고 하더니 책가방에서 쪽지를 꺼내 건네주었다. "이건 제가 오빠에게 드리는 시조예요." 성호는 쪽지를 펴보지도 않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하긴, “부평초”는 우리 둘의 합작시조인 셈이지. 이건 영원한 기념이 될 수도 있는 명시조야.) 은영은 뒤에 파랑새 정희가 따라 오는 걸 보고 발뺌을 하듯 총총히 녀성숙사 쪽으로 내려갔다. 성호는 숙사에 돌아와 슬그머니 그 놈의 쪽지에 손이 갔다. 그는 평소에 지하 독서실에 가 있던 승호가 침실에 있는 것을 보고 위생실에 갔다. 위생실에서 성호는 호주머니에서 쪽지를 펴 보았다. 자기가 쓴 시조 "부평초"아래에 이런 글씨가 씌여 있었다.        누가 누구에게 써 보낼 시조인가요? 나도 오빠에게 드릴 답시조라겠는지 충고라겠는지 한수 썼어요.   참새 날마다 재잘재잘 떠드는 참새야 어느 깨알 더 큰가 저울질만 하겠는가 역은 새 방아간이나 지나가지 맙소서   "허허, 정치학부 학생답잖게 잘 썼는데." 성호는 은영이 자기를 역은 참새에 빗대 야유했는데도 욕할 대신 감탄이 앞섰다. 성호는 은영이 쓴 답시조를 읽고 또 읽어도 야유보다 마지막 "충고"의 구절이 마음에 쏙 들었다. ( 질투의 불길을 달아주었더니 속이 좀 탄 모양이야. 내 '어느 깨알이 더 큰가 저울질 하는” 것이 꽤나 답답한 모양이지. 그래, 난 지금 파랑새냐 너 체육머리냐 저울질하고 있어. 역은 새가 방앗간을 지나갈 거 같아? 건 다 속담에 지나지 않아. 난 절대 방아간을 날아지나가는 참새 격이 되지 않을 거야. 근심하지 마. 사랑스런 체육머리야.) 성호는 은영이 고마워 시조에 대고 키스까지 뽁 안겼다. 그렇다. 은영이 곱다 못해 이젠 야유를 당해도 밉지 않았다. 어느 날 체육시간에 싱거운 꺽다리 범송이 글쎄 생각 밖에 성호와 씨름을 하자고 걸고 들지 않겠는가. 그 앤 어느 진 씨름경기에서 일등을 한 적이 있어 자신 있게 성호에게 도전했다. (싱거운 자식!) 범송은 춤판에서도 독무를 추기 좋아했다. 땅바닥에 엉덩이가 거의 닿을 정도로 물앉았다가도 뻐드렁다리를 펴며 일어나면서 두 손을 천정이 닿을 정도로 올리 뻗칠 때면 숱한 녀학생들이 웃어 죽을 지경이였다. 싱거운 범송은 늘 자기가 춤을 잘 춰서  웃는가 여기고 점점 괴상한 동작으로 너펄거렸다. 성호는 범송의 도전에 응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성호는 원래 주먹치기는 잘 하지만 씨름 같은 건 별로 해본 적이 없었다. 자신감은 없었지만 응전하면서 모래판에 나섰다. (잘 됐어. 녀자애들 앞에서 어디 혼나봐라!) 범송은 성호보다 키가 한뼘이나 더 큰데다 실팍했다. 황소 같은 범송이 떡 끌어안자 성호는 숨마저 꽉 막히고 범송의 다리가 어떤 동작을 하는가 살피기도 어려웠다. 승호가 "시작!" 하기 바쁘게 범송은 성호를 끌어안고 안손을 치면서 황소처럼 떠밀었다. 성호는 힘도 써보지 못하고 썩박나무통이 넘어가듯 뒤로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처녀애들은 비명을 질렀고 승호랑 너무 일방적이기에 재미없다며 도리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범송은 사기충천해 오른 주먹을 하늘로 쳐들며 처녀애들 앞으로 가서 으시대며 테를 돌았다. 성호가 엉덩이 모래를 툭툭 털면서 볼라니 언제 왔는지 옆 학급의 은영이도 숱한 처녀애들 속에 끼여 있지 않겠는가. (헛참, 이거 은영이 앞에서 무슨 꼴이야.) 성호는 머리를 푹 숙이고 테를 돌면서 키 큰 범송을 재낄 수를 생각해보았다. (또 황소처럼 떠밀어봐라.) 두번째판이 시작됐다. 약이 오를대로 오른 성호는 범송이 안손을 치지 못하게 오른 손을 딱 쥐였다. 아니나 다를가. 범송은 큰 키와 힘을 믿고 또 황소처럼 마구 떠밀었다. 그때 성호는 옆으로 몸을 홱 탈아 빼더니 손바닥으로 범송의 뒤통수를 탁 치며 왼손으로 엉덩이를 콱 떠밀며 고함쳤다. “가라! 이새끼!” 범송은 자기 힘에 모래에 머리를 처박았다. 숱한 녀학생들은 “우~와~” 하고 감탄했다. 처녀애들은 황소 같은 범송에게 보통 체구의 성호가 또 당하리라 예상했다. 그런데 뜻밖의 장면을 보고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세번째판이 시작됐다. 범송은 얼굴의 모래를 툭툭 털고 악이 올라 성호의 허리를 끊어지라고 주먹을 쥔 손으로 꽉 누르며 틀어쥐고 내동댕이쳤다. 하도 날랜 성호였기에 멀리 뿌려나갔지만 오또기처럼 모래판에 앉았다가 되일어섰다. 약이 오를 대로 오른 범송은 말상을 흔들며 서우처럼 덮쳐들어 성호를 끌어안아 하늘 높이 쳐들어올렸다가 모래에 내리메쳤다. 허나 성호는 모래 우에 살짝 날아내렸다. 그는 번개 같이 달려들어 범송의 사타구니 밑에 오른 손을 밀어넣더니 물소 같은 꺽다리를 산천경개를 구경해보라고 건뜻 들어올렸다. “야- 힘장사로구나!” 어디선가 은영의 감탄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범송은 허망 들려 성호의 어깨 너머 두다리를 버둥거리며 발악했다. “에끼, 이놈새끼! 저리 가라!” 성호는 갈범처럼 고함치며 범송의 한종아리를 가로 치며 태를 쳤다. 범송은 엉덩방아를 찧으며 절구통처럼 맥없이 쿵 쓰러졌다. 너무 아파 오만상을 찌푸렸다. “2대 1! 성호가 이겼어!” 승호가 고함쳤다. 그런데 범송은 눈에 쌍불을 켜고 달려들더니 성호의 뺨을 찰싹 갈겼다. 성호도 벼르던 참이라 재차 날아드는 갈구리 같은 손을 피하면서 자세를 낮추며 오른 주먹으로 범송의 아래배를 올리쳤다. 련이어 성호의 무쇠주먹이 두다리 새를 강타했다. “아이쿠!” 범송은 사타구니를 움켜쥐고 비명소리와 함께 무릎을 꿇었다. 성호는 그때라고 주먹으로 말상을 올리 걷어쳤다. 범송은 뒤로 벌렁 쓰러져 땔, 땔 굴렀다. 성호는 승호랑 동창들이 말리건말건 발길을 날려 범송의 길쭉한 말상을 마구 걷어찼다. 힐끔 곁눈질해 보니 은영은 바늘로 쏘는 듯한 눈길로 표독스레 성호를 쏘아보는 것이 아니겠는가. 허나 성호는 마음 속으로 시원해하였다. 청춘의 활기로 가슴 벅찼던 대학교 시절은 동지섣달 해처럼 짧기도 짧았다. 오래지 않아 졸업하게 되였다. 실로 평생의 리상을 실현할, 전도를 개척할 관건적인 시각이 닥쳐왔다. 승호랑 연구생시험준비에 헌 세집에서, 열람실에서, 교실에서 골똘히 공부하고 있었다. 그러나 성호는 은영이라는 사랑의 돛배에 리상을 실현하는 돛을 올릴 푸른 꿈을 꾸면서 어디 려관 손님이면 그렇게 시름놓고 잘 잤겠는가. 점심을 먹고 해가 서산에 지도록 쿨쿨, 저녁을 먹고 련애소설이나 읽고 은영을 낚을 묘수만 궁리하다가 초저녁부터 이불을 들쓰고 누워 쿨쿨, 하여간 머리가 뗑 해나고 온 얼굴이 팅팅 붓게 자고 또 잤지. 진짜 자는 시간 외에는 알심 들여 사랑환상곡을 짓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밤, 쿨쿨 자던 성호는 누가 이불을 활 벗기고 코를 마구 비트는 바람에 와닥닥 놀라 깨났다. “왜 이래? 남의 단잠을 깨우면서.” 성호가 툴툴거리면서 이불을 쓰고 되누우려 할 때였다. 이번에는 성호의 귀를 마구 비틀어 쥐여 일으키지 않겠는가. 벌떡 일어나보니 승호가 아니겠는가. “이 자식!” 성호가 주먹을 쳐드는데 승호가 주먹을 내리면서 “조용히 할 말이 있어.”라고 하며 침실 밖으로 나갔다. 다른 애들은 삼각련애 일로 싸우자고 그러나 해서 성호를 보고 주의하라고 했다. 성호는 승호가 또 전번에 범송을 메쳐놓고 한바탕 족쳤다고 한판 붙어보자고 찾는가고도 생각하며 운동복에 가벼운 신까지 신고 따라나갔다. 칼바람이 낯을 핥으며 윙윙 불어쳐 나무가지들에서 무서운 비명소리를 내 분위기가 자못 신경을 곤두서게 했다. 승호는 성호를 데리고 세집으로 들어가 전등을 찰칵 켜지 않겠는가. 성호는 한숨을 후- 내쉬면서 어두운 전등불빛을 빌어 세집을 둘러보았다. 언제 헌집인가 싶게 말쑥하게 거두고 새로 천정과 창문을 간단히 장식까지 했다. 실내에는 성호와 함께 들어 올려온 침대에 책걸상  밖에 없었다. “이게 네 지하독서실이냐?” “응, 앉아라. 친구로서 충고하는 거야. 아무리 ‘급제 만세 시대’라고 하지만  졸업장이라도 탈 수 있게 명심해 공부해라.” 성호는 뒤말이 궁금해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승호는 깜장눈을 한번도 깜짝하지 않고 정중하게 말하는 것이였다. “련인이 없으면 고독하고 타격이 클 수도 있다. 하지만 은영과 정희와 그런 련애 그만둬! 삼각련애, 질투 따위는 이 세상 련애사에서 지나간 옛 방법이야. 련애는 그래도 내가 선배지. 사랑은 대방의 감정에 대한 향수이고 티 없이 맑고 깨끗한 두 순정으로 연주하는 아름다운 사랑의 멜로디야. 네가 ‘사랑의 돛배에 리상의 돛을 올리려는 건’ 얼마나 순결하지 못해? 너 은영을 사랑하니? 아니면 그 애 아버지 권력을 탐내는 거냐?” 성호는 자기를 훈계하는 승호가 눈꼴사나웠다. “검정개 돼지 흉을 작작 해라. 넌 그리 련애를 하지 않겠구나. 픽!” 승호는 놀라는 기색이 조금치도 보이지 않았다. “내 말은 련애면 련애지. 사내대장부가 뭐야? 녀자애들의 치마폭에 휩싸여 뜻을 펴려고 하다니? 너무 연약하고 가련하잖아?” 성호는 승호의 말을 듣다 못해 변명했다. “얘, 점점, 무슨 말을 하는 거냐? 모로 가도 서울에 가면 돼. 네가 삐칠 일이 아니야.” 그는 자기 말이 얼마나 가련할 정도로 무력한가를 느끼며 실망스러워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승호는 깜장눈으로 성호를 똑바로 들여다보면서 련주포를 쏘았다. “계속 이따위로 놀면 난 친구로 보지 않아. 땅을 밟고 하늘을 떠인 사내대장부가 지구라도 삼켰다가 토할 큰 뜻을 세울게 아니라 사랑을 구걸하고 권세에 아부하고 동창생을 질투하고 상사병에 걸리고. 뭐냐? 권세가문의 치마자락에 매달려 상류사회에 기어오르려고 꿈을 꿔? 가소롭다, 진짜 가소로워! 4년 동안 배운 건 고작 고거냐?” 성호도 자기 이른바 주의를 토로했다. “얘, 이 검정개야. 네 말에 도리 있어. 허나 지금 학교에서 졸업배치도 책임지지 않는데 그래 사랑이나 권세가문과의 관계학이라도 쓰지 않고 어쩌니? 관계학도 생산력이잖아. 그래 부모들의 숱한 돈을 팔고 대학공부를 하고서도 도시 일자리도 못 찾고 시골에 가서 교편을 잡아야 되니?” 승호는 철색얼굴에 비장한 기색을 띠며 뒤말을 이었다. “관계학 소영없다는게 아니야. 우리는 우선 자기 운명을 남에게 맡기지 말고 인류가 수천년 쌓아놓은 문명과 지식을 머리에 넣어야 해. 그래야 이 다음 사회에 나갈 때 관계학이나 사랑철학을 그리 쓰지 않아도 도시에 남아 훌륭한 일을 할게 아니냐? 너처럼 구걸하지 않아도 지식이 있고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는 사랑이 자기 발로 자연스레 찾아올 거 아냐? 대장부란 자기 운명을 자기 능력에 맡겨야 눈 앞의 사랑과 명예, 지위, 금전 따위를 초개같이 보며 떳떳이 자기 갈 길을 나가면서 청사에 길이길이 빛날 업적을 이룩할 수 있는 거야. 친구야, 정신 차리고 공부하게나.” “됐다, 됐어. 너 같이 공안과장의 아들이면 그렇게 해도 될 거야. 허나 농부의 아들은 그렇게 못해.” 승호는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더 말하려고 해도 말이 들 거 같지 못해 그만 두었다. 성호는 지하 독서실에서 나온 뒤에도 승호의 말이 어찌나 철리가 있는지 자기가 얼마나 무지한가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흥, 자식 헌 세집에서 철학을 연구하더니 사랑철학도 깊이 연구했구나. 자식, 약혼녀를 두고서도 제일 야드르르한 홍희라는 꽃을 꺾으려고 하는 주제에 누굴 훈계해?” 그는 승호를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모두들 성호와 그를 친구인데 생김새가 비슷하게 생겼다고 했다. 허나 승호는 그보다 한살 이상인데 뭐나 자기보다 한 수 우였으니까 머리를 숙이지 않을 수 없었다. “흥, 자식, 학교 식당에 갈 때에도 손바닥만한 카드를 쥐고 중이 념불하듯이 뭐라고 중얼거리더니 저런 명언 따위를 토해내는가? 흥, 승호야, 너 같은 놈은 위생실에서 뭘 연구하면서 살겠지만 난 달라. 넌 애비 권력을 빌어 좋은 일자리에 가서 리상을 실현하겠지만 난 농사군의 아들이야. 우리 아버지도 공안국장을 그만두지만 않았더라면 나도 이렇게 속을 태우지 않고서도 시내에서 활개치면서 살 거야. 아버진 얼마나 소박한 토지개혁 때 간부야. 난 그렇게 못해. 절대 그렇게 순박하게 살 수 없어.” 성호는 중얼거리며 손바닥으로 머리를 탁탁 쳤다. “승호, 너희들 동으로 갈 때면 난 혼자 서쪽으로 갈테야. 혹시 시장경제시대에 나 같은 실력가들이 더 쓰일 수도 있어.” 성호는 침실에 돌아와 침대에 눕자마자 눈 앞에 방불히 웨딩드레스를 입은 선녀,  사랑하는 은영과 함께 사랑환상곡에 맞춰 결혼례식장에 들어서는 장면을 보는 것만  같이 눈 앞에 삼삼히 떠올랐다. “오- 나의 레날부인이여!” 성호는 기도나 드리듯이 두 손을 모아 가슴에 대고 눈을 딱 감았다. 이튿날 오후에 파랑새 정희가 성호를 조용히 찾았다. 성호가 현관으로 나가보니 새파란 털실내복에 빨간 쵸치사 목수건까지 맨 정희가 희미한 불빛 아래 더 예뻐보였다. “은영이, 아, 아니, 정희!” 성호는 불쑥 튀여나간 실수에 그만 혀끝을 홀랑 입귀로 내밀었다. 정희는 침울한 표정을 짓더니 “조용한 곳으로 가서 얘기할게 있어요.”라고 하거이 현관 저쪽으로 또박또박 걸어갔다. 정희, 그녀는 이전에 은영에게 질투의 모닥불을 피우는데 공을 세웠다. 성호는 하는 수 없이 은영이 보지나 않나 흘금흘금 곁눈질하면서 정희를 따라 나섰다. 그는 정희가 인도하는대로 그녀를 따라 눈보라 휘몰아치는 대학 뒤동산으로 갔다. 푸른 소나무들이 윙윙 몸서리치며 비명을 질렀다. “무슨 일이야? 추운데 어서 말해.” 정희는 머리를 다소곳이 숙이더니 목수건을 만지작거리며 간신히 빨간 앵두 입을 열었다. “어떤 애가 사랑인지 뭔지 고백하면서 어찌나 치근거리는지. 어떻게 하면 좋을가.” “누가?!” “범송이.” “뭐라고? 범송이?” 정희는 머리를 끄덕였다. “그 자식 개버릇 해. 반반한 녀자는 누나고 뭐고 다 지껄여? 흥!” 성호는 그제야 자기가 은영과 정희를 동시에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사실 성호는 정희를 질투의 불씨로만 쓰기 아까울 정도로 마음 속으로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재삼 느꼈다. 허나 리상의 꿈을 실현하려면 은영의 아버지 막강한 권세를 빌어야만 했다. 은영은 사랑의 녀신일뿐만 아니라 상류사회에 바라오르는 사닥다리였다. 때문에 더 높은 절벽에 있을지라도 그는 정희보다 은영을 골라잡고 은근히 슬쩍슬쩍 다가가고 있었다. 성호는 1 대 1의 련애도 아니고 복잡한 삼각련애, 아니, 이중, 삼중, 다각 련애에 빠진 것이 아닌가? 그 사랑도 더러운 권세욕에 얼룩진 순결하지 않은 건 아닌가? 정희는 격분해하면서 착잡한 생각을 하는 성호를 보고 용기를 내 한술 더 떴다. “난 범송이 은영에게 홀딱 반해 쫓아다녔다는 걸 알아요. 주책없는게 한살 이상인데도 내한테 매달리지 않겠어요?” 정희는 성호를 흘끔 곁눈질 하더니 “난 어쩌면 좋아요?” 하고 물었다. “어쩌긴 어째? 알아 할게지.” “사랑하는 련인이 있다고 했어요.” “누구?” “아이고, 이 능구렁이야.” 정희는 두 주먹으로 성호의 어깨를 북 치 듯했다. “범송이 키도 멀쑥한게 좀 좋아서?” “말이라고 해?” “이전에 볼라니 범송에게 스케트도 가져다달라, 책가방을 메다달라, 심지어 밥까지 타다달라 하면서 꼬리를 쳐들고 한들거리더니. 숫총각의 사랑을 어째 그렇게 헌 신짝 차버리 듯하오?” “픽, 딱 한 가지 리유,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이죠. 내가 심부름을 시키니 아마 자기를 좋아하는가 했던 모양이지. 쳇, 더러운 기름개구리 백조 고기를 먹으려는 거지.” 성호는 놀라운 눈길로 정희의 걀쭉한 얼굴을 신기한듯 들여다보았다. “사실 난 성호 씨 가슴에 질투심을 불러일으키려고 그런 건데요. 범송인 오해한 거 같아요.” 정희는 점점 열을 올렸다. “정희, 말뜻을 알 거 같소. 시간을 주오. 좀 생각해봐야겠소.” 성호는 뒤를 달면서 속으로 어머니와 넷째누나가 항상 하던 말이 떠올라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절대 결혼하지 않을 처녀애들을 다치지 말라. 괜히 대학에서 제명받겠다.” (정희와 결혼하려는 거야? 아님, 왜 뒤를 달아? 량심 없는 놈!) “실망을 주지 말아요.” “에이고, 내 지식이 있소? 돈이 있소? 난 농사군의 아들이란 말이요. 열번째 자식이지만 부모를 모셔야 할 막내아들이라오. 뭘 보고 날 따르오.” 정희는 정색했다. “사랑하기 때문에!” 성호는 이글거리는 정희의 따가운 눈길을 외면하면서 자리를 떴다. 그는 정희를 숙사에까지 데려다주고 눈이 퍽퍽 빠지는 교정의 백양나무 밑에 기대서서 찬바람이 스치는 총총한 뭇별을 쳐다보며 사랑과 리상, 전도를 두고 처음 심각하고도 여러 면으로 심사숙고해보았다. 결론은 간단했다. 기실 정희는 은영보다 인물체격이나 성격이나 다 짝지지 않은 예쁜 처녀애였다. 순수한 사랑을 선택하라면 성호는 아무런 고려도 없이 숲 속에 핀 나리꽃 같은 정희를 선택했을 것이다. (허나 아무런 배경도 없이 대학교수를 믿고서야 어찌 정계에 진출해 상류사회에 바라오른단 말인가? 정희는 전도를 개척하고 리상을 실현하는데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아.) 성호는 이튿날에 다시 정희를 불러 학교 뒤산으로 올라갔다. 정희는 그래도 희망으로 가슴이 부풀어올라 환한 웃음을 지으면서 성호의 뒤를 따라 발목까지 풍풍 빠지는 하얀 눈을 빠드득 빠드득 밟으면서 뒤산 소나무숲 속까지 따라왔다. 성호는 희망에 찬 눈길로 자기를 바라보는 정희에게 차마 실망을 주기 힘들어 한 식경이나 무거운 침묵을 지켰다. 정희의 얼굴에 점점 웃움기가 사라지고 파랑새란 별명답게 파랗게 질려갔다. “왜 아무 말도 안 해요?” “정희, 미안하오.” “알았어요. 은영을 사랑하지?” 성호는 대답을 하지 못하고 그저 머리만 끄덕였다. 정희는 파랗게 질린 볼에 눈물을 주르르 흘리며 성호의 허리를 감아 안았던 팔을 맥없이 스스르 풀었다. 정희는 성호의 허리를 와락 끌어안으며 애원하듯 련주포를 놓았다. “아니죠. 어제 저녁에 내 범송의 말을 할 때 격분해하는 성호씨를 보고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걸 알았어요. 맞지? 성호는 나를 사랑하고 있죠? 왜 자기 감정을 속여요?” 성호는 정희  앞에서 허울이 쫄딱 벗겨졌다. 그는 더는 초라한 모습을 감출 수 없었다. 정희는 계속 반격을 가해왔다. “성호, 성호는 은영을 사랑하기보다 권세가문을 탐낸 거 아니고 뭔가요?” 성호는 답변할 말이 없었다. “우린 청춘을 불태워 노력만 한다면 자기 능력으로 얼마든지 전도를 개척할 수  있다고 봐요. 자기 감정을 속이지 말고 진정한 사랑을 택하세요.” 그러나 성호는 은영에게 모든 희망을 걸고 사랑과 전도를 가지고 도박을 걸었다. 그는 아주 허위적인 인간으로 탈바꿈했다. “정희, 난 정희를 사랑한 적이 없소. 절대 오해하지 말고 사랑의 키를 돌리오. 빨리 돌릴수록 좋을 거요.” “알았어요. 사랑은 구걸할 수  없어요. 꼭 후회할 거예요.” 정희는 눈물을 씻더니 한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어깨를 들먹이면서 맥없이 휘청휘청 산 아래로 내려갔다. 빨간 목수건이 바람에 날려 눈위에 떨어진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가 내 시선에서 사라지자 성호는 정희의 빨간 목수건을 주어들고 보다가 품 속에 건사했다. 뒤이어 주먹으로 소나무를 피터지게 꽝꽝 치면서 고래고래 고함쳤다. “난 사람이 아니야! 넌 권세욕에 불타는 마귀야! 마귀!” 성호는 무슨 정신에 눈덮인 학교 뒤산에서 내려왔는지 몰랐다. 이튿날 오전에 성호는 수업이 끝나자마자 현관에서 기다렸다가 교실에서 갓 나온 은영 옆에 다가가 걸으면서 점심에 보자고 했다. 누가 은영을 빼앗아라도 갈가봐 선손을 써야만 했다.        은영은 깜장눈을 크게 뜨며 놀란 표정을 지으면서 대수롭잖게 말했다. “무슨 말인지? 지금 말하면 될게 아닌가요?” “아니, 어떻게 동창들이 오가는데서.” “그럼 말하기 바쁜 문젠가요?” “그쯤 알고 점심을 자시고 교실에 오오.” 그제야 체육머리 은영은 알 것 같다는듯이 머리를 무겁게 끄덕이면서 깜장눈으로 성호를 빤히 들여다보았다. 그 표정만 보아도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몰랐다. 허나 벼른 도끼 무딘다고 그날 점심에 성호는 너무 긴장해 사랑을 고백하지 못하고 뚱딴지 같은 졸업론문을 잔뜩 늘여놓고 정이 폭 든 은영을 놔 보냈다. 성호는 재가루 될 듯한 마음을 쏟아부을 용기마저 없는 자기를 한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학교 속도스케트경기 개막식에서 성호는 뜻밖의 대박이 터졌다. 주최측에서 글쎄 그를 보고 체육머리와 함께 스케이트 쌍무를 추라는 것이였다. 졸업론문준비에 바쁘면서도 그들은 보름동안 발을 맞추고 무용동작을 창작해 매개 동작마다 익숙히 련습했다. 드디여 그날은 오고야 말았다. 3년 전처럼 은영은 탄력 있는 몸에 착 붙는 얇은 오렌지색 나일론운동복에 노란 털실 못자를 썼다. 이전보다 다르게 이번에는 하얗고 탄탄한 허벅다리가 다 드러나게 투명하고 긴 살색 양말을 신고 척 나섰다. 수천쌍의 눈길을 받으면서 성호와 은영은 리종수가 작사 작곡한 “사랑환상곡”에 맞춰 한쌍의 은제비처럼 훨훨 나래 치며 경쾌하게 빙상무용을 추었다. 성호는 흥에 겨워 멋진 조형동작을 리드해나갔다. 성호가 한쪽 다리를 뒤로 높이 추켜들면서 은영씨의 허리와 한쪽 허벅다리를 잡자 은영은 한발로 평형을 잡으면서 꽃나비처럼 두팔을 벌리고 뒤로 누우면서 한쪽 다리를 높이 추켜들었다. 뒤이어 그들 둘이 서로 허리를 안고 나란히 미끄러져나가면서 한 손씩 앞으로 뻗치고 한쪽다리씩 뒤로 높이 추켜들었다. 그들은 관성으로 십여초 동안이나 그 멋진 조형동작대로 판들판들한 빙판 우로 큰 반원을 그리면서 미끄러져나갔다. 여기저기서 섬광등이 번쩍번쩍하였다. 박수갈채가 우뢰가 터지듯싶었다. 그날은 아마 그들이 영원히 잊지 못할 날이였다. 정열에 넘치는 24살 때 그 날은 정열에 불타는 청춘의 한 페리지로 영원히 남아 있을 것이다. 퇴장해서도 은영은 흥분이 가라앉지 않아 가슴을 할딱이면서 성호의 품 속에 꼭 안기더니 허리를 꼭 껴안았다. 순간 성호는 얼마나 놀랍고도 행복했는지 몰랐다. 그는 거기서 용기를 얻고 그날 점심식사를 같이 하자고 했다. 은영은 귀밑을 살짝 붉히면서 “그래요.” 하고 쾌히 응낙하였다. 성호는 조용한 음식점으로 은영을 데리고 가서 점심을 잘 차려 맛나게 먹었다. 성호는 음식점에서 나오자 은영을 보고 정색해 말했다. “졸업시험에 바쁜데 잠간 얘기하다가 가기요.” 은영은 버릇처럼 체육머리를 뒤로 쓸어넘기면서 “퍽 신비한데요.”라고 하면서 따라나섰다. 성호는 부풀어 오르는 가슴을 안고 사랑하는 은영을 데리고 정희를 만났던 학교 뒤동산으로 올라갔다. 무릎을 빠지는 눈을 무릅쓰고 그들은 남들의 눈길이 보이지 않는 소나무 숲 속으로 들어갔다. 학교 무장부나 학생회에 들키는 날에는 야단이였다. 학교에 통보나지 않으면 검사를 해야 했고 학생기률 처분을 받아야 했다. “호호호. 참 랑만적인 설경인데요. 여기서 스키라도 타면 얼마나 좋겠어요?” 성호는 “오늘은 우리 청춘에 영원히 남을 날이니까.”라고 허두를 뗐다. “그래요. 죽어도 잊지 못할 것 같아요. 우리 아빠와 어머니마저 와서 구경했는데요.” 성호는 머리를 끄덕였다. “그래? 날 인사시키지.” 은영은 걀쭉한 얼굴에 웃음을 지었다. “뭐 그렇게까지야.” 성호는 마른 입술을 혀끝으로 축이면서 몇십 번이나 외워보던 말을 느릿느릿 꺼냈다. “은영은 어떻게 생각하겠는지 모르겠소. 한 친구가 은영을 피끓는 청춘의 티 없이 맑은 순정으로 사랑하고 있다오.” “어마나!” 은영은 의아한 눈길을 보냈다. 성호는 외마디 대답을 피하고 계속 에둘러 말했다. “그는 비바람이 불어치고 파도 세차게 쳐도 끄떡하지 않는 바다가의 초석처럼 영원히 드팀없이 은영을 사랑하겠다오.” 은영은 긴장한 기색이라고는 티끌만치도 없이 피씩 웃기만 하는 것이였다. (남은 식은땀을 흘리면서 말하는데 깔깔깔 웃다니?) 성호는 더는 룡암처럼 끓어번지는 정열을 누르지 못하고 은영을 와락 끌어안고 화산 폭발처럼 사랑을 고백했다. “은영이, 사랑하오. 은영의 사랑이 없으면 난 자유와 리상, 행복, 지어 생명과 령혼마저 끝장나오. 난 미쳐 죽을 것 같소. 나를 구해주오. 의심되면 심장이라도 꺼내보오. 내 심장은 그대를 위해 높뛰고 있단 말이요.” 은영은 성호의 가슴을 밀어냈다. “성호씨, 이러지 마. 이럼 난 괴로워.” “왜? 내가 사랑하는데.” “안 될 일이기에.” “왜? 술 마시고 말한다고?” 머리를 살래살래 젓는 그녀. “은영보다 나이 더 많다고?” “사랑에 나이가 대순가요?” “그럼 뭐요? 대학교에서 4년 생활하면서 내 마음 속엔 은영 밖에 없었소. 4년 전 스케트를 타던 그날부터 난 은영을 줄곧 사랑해왔소. 은영은 내 피끓는 청춘의 모든 것이였소.” “성호씨, 스케트를 타거나 사교춤을 춘 건 공동한 과외흥취지 사랑은 아니죠.” “사랑은 공동한 흥취에 토대하지 않는가?” “호호호, 그럴 때도 있겠지만 난 그렇찮아요. 과외애호를 일종 오락으로 논 것이지 거기에 토대해 사랑을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성호는 맥없이 은영을 놓아주며 중얼거렸다. “난 이불을 꾸며주던 날이랑, 아까 빙무를 다 추고 나를 꼭 끌어안을 때도 그렇고.” “호호호. 성호씨, 그래 오빠 같은 동창생이 저녁에 덮을 이불이 없을 때 꾸며주지 않을 수 있겠어요?” “그렇긴 하지. 난 내가 짝사랑을 했다고 믿지 않는데.” 성호는 정신이 나간  것처럼 중얼거리다가 은영의 가녀린 어깨를 잡아 마구 흔들며 부르짖었다. “아니야, 아니! 난 믿어지지 않아. 내 정희를 좋아하는가 의심해 그러지? 간에 가 붙고 쓸개에 가 붙고 한다고? 맞지? 난 정희와 관계를 끊은지 오래.” 그때 은영은 놀란 표정을 짓더니 나직이 입을 열었다. “정희와 갈라지다니. 어마나. 정희 때문도 아닌데.” 그녀는 성호 품에서 몸을 빼더니 아주 조용하면서도 똑똑히 말했다. “이걸 놓고 들어봐요. 사랑을 날개로 삼으려는 사람한텐 사랑도 찾아가지 않아요. 이 시대 처녀애들은 지식이 있고 능력이 있는 개척자에게 자기 평생을 맡기려고 하지 녀성 치마 밑에 기여들고 치마폭을 잡고 바라 오르려는 연약하고 무능한 무골충 같은 남자들을 좋아하지 않아요.” “권세 있고 돈 많은 남자를 좋아하지 않고 언제 나 같은 농부의 아들을 좋아하겠소?” 성호는 멍청하게 눈가루 흩날리는 하늘을 쳐다보면서 중얼거렸다. “나에겐 물려 받을 재산도 없는데다 부모까지 모셔야지. 그게 큰 흠이지. 나한테 웬 머저리처녀가 시집오겠소?” 은영은 정색했다. “오해하지 마세요. 오빠, 몇해전 능력 있고 지식 있는 사람이 되라고 충고하지 않았어요? 그런데도 오빤 그 상이 장상이니 전 실망했어요. 오빤 훌륭한 남자예요. 사내 기질이 있고요. 꼭 저보다 더 좋은 처녀대학생을 얻어 잘 살리라고 믿어요.” 성호는 고함쳤다. “인생은 마라토너요. 이제 금방 스타트선인데. 이제부터 시작하면 안되겠소? 난 은영만 곁에 있으면 무슨 일이라도 해낼 수 있을 것 같소.” 허나 은영은 체육머리를 쓰다듬어 넘긴후 옷매무시를 바로 잡더니 분명히 말했다. “늦었어요.” 그녀의 정색한 맑은 깜장눈길과 마주치자 성호는 가슴이 갑갑해나고 귀뿌리가 윙- 해났지만 그녀의 말을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우린 남이면 몰라도 웃학년 선배인데다 오빠 같은 분이 아닌가요? 더 애나게 굴고 싶지 않아요. 난 이미 사랑하는 남자가 있어요.” “누구? 범송이?” “차차 알게 되겠지요.” “그럼 누구?” “나는 구지욕이 강한 한 탐구자에게 내 사랑을 바치기로 했어요. 그의 연구생 시험준비에 영향을 줄가봐 기다리는 중이예요.” “그 탐구자라는 량반은 행복하겠다. 이렇게 아름다운 은영이 사랑을 받으니까. 건데 도대체 누구요?” 성호의 애탄 말에 은영은 “힌트 한나 해주지요. 지하도서실을 가 본 적이 있죠? 그 남잔…” “앗! 승호?!” 성호는 정수리에 청천벽력이나 얻어맞은 듯이 기겁했다. 그는 몸의 균형을 잡지 못하고 비틀비틀 뒤로 물러섰다. 자기 눈을 의심할 정도로 은영을 똑똑히 쳐다보았다. 은영은 분명 체육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머리를 끄덕였다. 아, 성호의 연극은 이렇게 희극적으로 짝사랑이란 비극의 막을 서서히 내렸다. 성호의 화산 폭발 같던 참사랑도, 옹근 4년 동안 모든 정력을 기울여 엮어온 사랑환상곡도 짝사랑으로 처참하게 끝났다. 그가 바꿔 온 것은 오직 살 용기마저 잃게 하는 실련의 고통이였다. 모든 것이 파멸을 선고하는 그 시각 성호에게는 외로움과 공허감, 슬픔과 칼로 에이는 듯한 마음의 아픔만이 남아 있게 됐다. 성호는 사랑과 질투로 해 고민과 가슴 아픈 실련의 고통을 안고 헤맨 정희와 실련으로 해 정신 이상에 걸린 범송에게도 미안했다. 게다가 동창생들을 볼 면목도 없게 됐다. 성호는 마음  속에 얼기설기 뿌리내린 은영에 대한 사랑이 뽑히는 순간 칼로 에이는  듯한 고통과 절망으로 죽을 것만 같았다. 마음  속에 뼈 속에 골수에 얼기설기 뿌리 내린 사랑의 낚시줄이 뽑히면서 뻘건 피를 흘리고 슬픔이 흘러나왔고 절망의 고름이 처절하게 흘렀다. 성호는 불시에 귀뿌리가 윙 해나면서 시꺼먼 천길 나락 아래로 허망 떨어져내려가는 감을 느끼면서 눈앞이 캄캄해났다. 염라왕국에 갇히면 이런 고통에 비하랴. 사랑하던 은영을 잃고는 살 것 같지 못했다. 소나무 초리에서 눈보라가 절망과 슬픔으로 부서져 흩날렸다. 씁쓸한 눈가루가 모래알처럼 날아와 성호의 뺨이며 목이며 얼얼하게 들부신다. 실련의 눈보라 속에 은영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가녀린 어깨를 들먹이고 오도카니 서 있었다. 그녀 뒤에서 성호가 그 절망의 심연에서 허우적거리며 비틀비틀 간신히 몸을 지탱하면서 멀어져갔다.       은영이 눈보라 속으로 사라진 허허벌판에 성호가 우두커니 서서 즉흥으로 시조를 읖조렸다.                                 장미꽃 맘 속에 춘풍처럼 스며든 녀신아 혜성처럼 다가왔다 별지처럼 사라졌네 외로움 눈보라처럼 하아얗게 서렸네                   7. 미련 성호는 침대에 누워 멍청히 천정 한곳만 쳐다보며 착잡한 생각에 잠겼다. 그는 비록 은영에게 실련당했지만 자기 감정을 시원히 토로하고나니 얼마나   홀가분한지 몰랐다. 그녀한테 어떻게 말할가고 며칠이고 벼르고 별렀지만 결과는 비극적으로 끝났다. 일종 해탈감이라고나 할가. 결과는 어떻든간에 속시원히 활 말해놓고나니 한시름을 놓은 것 같았다. 그러나 뒤이어 이제껏 쌓아온 리상의 달걀무지가 하루 아침에 와그르르 무너지는 감, 그리고 쓸쓸한 패배감도 스물스물 기여들었다. (이날 이때까지 범송이 은영과 좋아한다고 경계했는데. 허참, 승호가 중뿔나게 튀여나올 줄이야. 개새끼, 지하독서실에서 공부하는 척하면서 엉뚱한 짓을 했군. 밤중에 막내 홍희와 쑥떡거리며 련애하더니 아래 학번의 은영까지 넘보았어?) 성호는 벌떡 일어나 앉았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 사랑의 라이벌한테 한대 안겨주고 싶었다. (다 승호를 탓할 순 없지. 은영도 눈이 멀었어. 약혼녀가 있는 승호를 사랑하다니? 헛참, 홍희하고 이중련애를 하는 거 알기나 해?) 성호는 다시 들어누워버렸다. 허나 승호에게 순순히 지고만다는 것도 자존심에 허락되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개 주둥이에 들어간 내 ‘레날 부인’을 빼내오지?) 성호는 침대에 누워 한참 이리 궁실 저리 궁실 하면서 궁리를 굴리고 또 굴렸다. (혹시 건달놈새끼 더러운 밑바탕을 알면 떨어지지 않을가? ‘약혼녀도 있어’, ‘우리 학급 막내와도 련애하더라’. 그럼 은영은 ‘아이고, 사기꾼이야!’ 비명을 지르며 두  손으로 얼굴을 싸쥐고 도망칠 거야. 혹시 귀뺨을 찰싹 갈길지도 몰라. 그 다음엔  나한테 달려올 거야.) 성호는 금시 웨딩드레스를 입고 자기한테 달려오는 물 찬 제비같이 예쁜 은영을 방불히 보는 것만 같았다. 그는 승호의 밑바닥을 들춰내는 일을 한시도 늦출 수 없었다. 며칠이고 은영을 조용히 만나려고 기회를 노렸지만 은영은 련 며칠 눈에 뜨이지도 않았다. 어느 날 저녁에 학교 식당으로 가다가 뭔가 들고 사뿐사뿐 걸어가는 은영을 발견했다. (아이고, 내 사랑아, 오늘 끝내 만났구나.) 성호는 걸어가는 은영의 뒤모습을 보기만 해도 가슴이 설레여 황급히 뒤따라 달려갔다. “나 좀 보기요.” 은영은 와뜰 놀라 주춤 멈춰서 새침한 표정으로 뒤돌아보았다. “어마나, 간 떨어지겠네.” 그 바람에 사발에서 국물이 흘러내렸다. 성호는 뒤덜미를 긁적이면서 “미안하오. 조용한데 가서 얘기하기요.”라고 했다. 은영은 홱 돌아서면서 “무슨 할 얘기 또 있어요? 숱한 애들이 봐요. 창피하게.” 하고 발뺌을 빼기 시작했다. 성호는 리지를 잃고 은영의 팔을 홱 잡아챘다. 쟁그랑! 댕그랑! 밥사발과 국사발이 땅바닥에 떨어져 나뒹굴었다. “왜 이래요? 난 할 말이 더 없어요.” 은영은 화난 나머지 언성을 높였다. 그녀는 지나다니는 숱한 애들을 보더니 귀밑을 붉히며 엎드려 밥사발과 국사발을 주어들고 성호를 쏘아보았다. “다신 찾지도 말아요.” 한마디 남기고는 홱 돌아서서 침실 쪽으로 뛰여갔다. 성호는 닭 쫓던 개 격으로 돼 녀성숙사로 사라지는 은영의 뒤모습을 멍청히 보다가 돌아섰다. 밥맛이 없어 식당에 가지도 않고 숙사 쪽으로 돌아섰다. “성호-” 백양나무 쪽에서 웬 처녀애의 목소리가 들렸다. 성호가 맥없이 머리를 들어 그 쪽을 바라보니 뜻밖에도 해연이 오도카니 서서 자기를 웃는 얼굴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겠는가! 성호는 울적한 기분에 별로 반기는 기색도 없이 다가가면서 퉁명스레 물었다. “여긴 어째 왔소?” “뭐 대학교는 나 같은 로동자들이 오지도 못하는 곳이오?” 성호는 너무 지나친 것 같아 “언제 왔소?” 하며  속에 내키지 않은 인사말이라도 건넸다. 그제야 해연은 해시시 웃으며 성호 옆에 달라붙더니 “한참 되오.”라고 하더니 주위를 둘러보는 것이였다. “저녁식사 했소?” 성호는 볼멘소리로 “밥맛이 없소.”라고 했다. 해연은 성호를 쳐다보면서 “우리 시내에 가서 맥주나 한잔 할가요?”라고 하며 스리살짝 추파를 보냈다. 성호는 눈보라가 윙윙 휘몰아치며 백양나무 가지들이 몸부림치는 을씨년스런 날씨에 몸을 옹송그렸다. “추운 날에 맥주는 무슨?” “그럼 소주 할가?” 성호는 진퇴량난에 빠졌다. 호주머니에 단돈 1원도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버선목이라고 번져보일 수도 없었다. 또 필경 한 마을에서 머리를 맞대고 일하던 해연을 몰라라고 숙사에 들어가버릴 수도 없는 일이였다. “성호는 소비자 아니고 뭐요? 내 한턱 낼게.” 성호의 고충을 알기라도 한 듯한 해연이 선뜻이 성호를 잡아 시내로 끌었다. 성호는 못 이기는 척하면서 시내로 발길을 옮겼다. (이래선 안되는데. 고중생과 약혼하고 결혼할 수 없어. 난 꼭 은영과 같은 권세가의 규수를 꽉 잡아야 출세한단 말이야.) 체면  앞에서 리성의 방패는 산산이 박살났다. 성호는 마지못해 끌리다싶이 시내 음식점에 가서 들어앉았다. 갓 개방한 세월이여서 시내에 음식점이라고는 거의 한거리에 몇집 밖에 없었다. 40평방메터도 되나마나한 음식점에 손님도 몇이 없었다. 성호는 제일 구석진 곳에 가서 자리를 잡고 앉았다. 해연은 메뉴를 들고 보면서 성호가 좋아할 것 같은  돼지고기로, 개고기로, 소고기로 이것 저것 수태 시켰다. “해연이, 언제 다 먹는다고 그래오?” 성호는 미안했다. “근심 말라고.” 그 말에 메뉴를 적던 아가씨는 외면하면서 킥킥 웃었다. 성호는 재수 없는 날이여서 별 수모를 다 당한다고 속으로 욱하고 뭔가 괴여올라오는 것을 겨우 참아냈다. “오빠 좋아하는 모두부야 빼놓을 수 없지.” “됐소, 됐어.” 성호가 손사래를 쳤다. “알았어. 먼저 이만 하고 먹으면서 보지요.” 해연은 아주 흥이 도도해서 성호를 마주 바라보았다. “오빠, 어째 오늘 기분이 썩 좋지 않다. 무슨 일이 있어?” 성호는 입에 빗장을 지른채 묵묵부답이였다. 해연은 성호의 얼굴에 흐르는 검은 그림자를 보아낸듯 화제를 슬쩍 바꾸었다. “오빠, 내 오늘 태평거촌에 올라가 보았는데요. 오빠네 막내누나 왔더라고요.” “막내누나? 건데 어째 고향마을에 갔소?” “뭐, 못 갈델 갔소? 난 태평거촌 집체호 지식청년인데. 또 장차 농촌에 뿌리박고 혁명을 할 사람인데. 호호호.” “쳇, 해연이 어디 한뉘 시골 풀밭에 머리를 파묻고 살 녀자오?” 불쑥 그런 말을 해놓고 성호는 후회하면서 혀를 감빨았다. (해연을 책임지지 못하겠으면 웬 쓸데없는 말?) “내야 든든한 대학생 오빠 있는데 왜 시골에서 살아? 허나 시골 시부모를 위해서라면 내야 시골에서 닭과 돼지를 기르면서 살 수도 있지.” “또, 또. 오빠라고 부르지 말라고. 한살 이상 누난데. 원, 쯧쯧.” “어마나, 지금 세월에 나처럼 자진해 시부모를 모시겠다는 색시감이 어디 있소? 한나라도 있으면 내 비단보에 싸서 이고 다니겠어.” 성호는 더 할 말이 없었다. (그런 걸 어떡해?) 드디여 채가 들어왔다. 해연은 술잔에 소주를 찰찰 넘치게 부어올렸다. “오빠, 오랜만에 오빠와 마주 앉으니 진짜 기쁘오.” 뜻밖에 해연은 술잔을 내밀었다. “한잔 따라주겠어요?” “어쩌지 못하면서 웬 소주요? 맥주나 마시오.” “취하지 않을테니 근심하지 마오.” 성호는 곧이듣지 않고 점원을 보고 맥주 한병 달라고 해 부어주었다. “오빠, 자, 한잔 마시오.” 잘라당 술잔을 마주치더니 해연은 꼴깍꼴깍 굽냈다. 성호도 기분이 상한지라 에라 모르겠다고 굽냈다. 먹지 않아도 먹었다고 할 판이라 성호는 돼지고기점을 짚었다. “막내누나 무슨 일이 있습데?” “아마 애를 낳으러 온 거 같습데.” “그래? 며칠 전에 YB병원에 다니는 우리 이모네 집으로 왔었는데.” “그래도 자기 엄마 집에 와서 낳는게 마음에 놓여 그랬겠지.” 성호는 한시 바삐 막내누나와 매형을 보고 싶었다. 둘다 이젠 술이 거나하게 됐다. 해연은 자꾸 돼지고기채를 더 청해온다, 술잔에 술을 찰찰 넘치게 따라 두손으로 들어 권한다 하면서 정성을 다했다. 성호는 그녀가  눈물겹게 가긍하기만 했다. 성호는 울적한 기분에 해연의 손에서 술잔을 받아 꿀꺽꿀꺽 삼키면서 불쑥불쑥 속심의 말을 쏟아냈다. “너 오늘 밑진 장사 했어.” “뭘? 웃기지 마오. 난 장사하러 온 게 아닌데. 뭘 밑져?” “난 호주머니에 돈 1전도 없어.” “오~ 그런건 근심하지 않아도 돼. 님께선 아직 소비자가 아니오? 난 학교 식당에라도 출근하는 월급쟁이 로동자 아닌가요?” 성호는 불쌍한 자기를 여린 마음으로 보듬어 주는 해연이 불시에 사랑스러운 감을 느꼈다. “그래, 우리 대학교 식당 아줌마, 고맙소.” “아이유, 벌써 취했어? 숫처녀를 보고 아줌마라니?” (실련의 아픔을 달래줄 사람은 너뿐이지. 전도고 리상이고 뭐고 젠장, 해연이랑 같이 예쁘고 풍만한 계집애와 마구 뒹굴면서 놀고 싶은 건 어쩌지?) “너 학교 식당에 취직했니?” “그래, 래일부터 학교식당에 들어가 너한테 국물이랑 퍼줘야 해.” “그래, 잘 됐구나.” 성호는 조용한 음식점을 두리번거리다가 나직이 귀속말을 했다. “얘, 식당에서 돼지고기채랑 가만히 좀 더 퍼주렴.” “고만한 거야 OK!” 성호는 취중에도 용케 리성을 되찾아가군 했다. “얘, 이젠 밤도 깊었구나. 너, 뭘 보고 이 못난 농민의 아들에게 미련을 두고 뒤꽁무니를 쫓아다녀?” 그 기막힌 말에 해연은 손으로 취기 오른 성호의 코끝을 살짝 쥐여 비틀어놓았다. “좋아 그래.” “이전에 내 소를 방목할 땐 날 소 닭 보듯했잖아? 갑자기 이 성호가 그렇게 좋아?” 해연은 억이 막혔는지 입을 함박만하게 쫙 벌리고 다물지 못했다. “사실 네가 대학에 입학하지 않았더라면 그저 멋지고 잘난 총각으로 남을 수도 있었지.” “이런 멍청이라고. 넌 리상과 전도도 안중에 없냐?” “식당 복무원한테 무슨 리상과 전도가 있어? 대학생 성호한테 시집가면 다지.” 성호에게는 그런 말이 아주 실망스러웠다. 순수한 녀성보다도 그래도 리상과 전도를 추구하는 녀성이 지적인 것 같다는 생각이 머리를 탁 쳤다. “한잔, 따라 올리지요.” 이때 주방에서 개고기 한접시를 들고 나온 한 처녀가 다가왔다. 성호의 흐릿한 눈길에도 그녀의 모습에 놀랐다. “아니, 선화야!” 더 놀라 일어선 건 아마 해연인 것 같았다. “선화지?” 성호 이모네 옆집의 그 선화 맞았다. 선화는 성호  앞에 개고기 접시를 내려놓고 술병을 들었다. “한잔 올려도 괜찮을가요?” 성호는 이 술자리가 복잡하게 얽힐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해연은 성호에게 선화를 소개하기에 급했다. “얜, 우리 소학교 동창생이야. 어떻게 돼 여기 있니?” 선화는 보름달 같은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를 흘리며 성호의 술잔에 술을 찰찰 넘치게 따랐다. “어쩌겠냐? 대학에도 붙지 못한게 음식점이라도 차려야 밥벌이를 하지.” “그래, 이 음식점이 네 거냐?” 선화는 머리를 끄덕였다. “보스님,  한잔 받아.” 해연이 술병을 잡자 선화가 찬장에 가서 술잔을 들고 왔다. 그때 성호가 해연의 손에서 술병을 빼앗아 한잔 부어주었다. 선화는 술잔을 들고 “진작 부으려고 하다가 두 분의 주흥을 깨는 거 같아 늦었어요. 아무튼 이후에도 우리 음식점에 자주 오세요. 그럼 제가 소주 한잔 권하지요. 두분 행복할 걸 축원해요.” 하고 말하였다. 그녀는 성호와 해연의 술잔을 달라당 마주쳤다. 성호는 술잔을 높이 들어 쭉 굽냈다. “오늘 기분 좋구먼. 시내 미녀들과 한잔 하는게. 한가지 명확히 할게 있소.” 그는 해연과 선화를 번갈아보면서 “나와 해연은 절대 그런 관계 아니오. 절대 오해하지 마오.”하고 술잔을 들었다. 이때 음식점 문이 벌컥 열리더니 처녀총각 손님이 들어왔다. 그런데 뜻밖에도 승호가 글쎄 홍희를 데리고 들어서지 않았겠는가. “어서 오세요. 단골손님들께서 오셨구만요.” 선화가 마중 나가면서 아양을 떨었다. 홍희는 자기들을 놀라운 눈길로 보는 성호를 발견하고 혀를 홀랑 내밀며 외면했다. 승호는 황급히 홍희를 데리고 자리를 뜨려고 했다. “야, 어딜 가?! 같이 한잔 하자!” 성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승호는 “마셔라! 주흥을 깨뜨리지 않을게.” 하고 나가버렸다. 성호는 뒤쫓아나가려다 말고 제자리에 물앉았다. 선화는 손님을 빼앗겨 아쉬워하다 말고 성호에게 한잔 더 따랐다. “저분들을 어떻게 알아요?” “동창생이요.” 성호는 선화의 잔에 한잔 따라주면서 물었다. “쟤들 여기 자주 오오?” “그래요. 주일마다 서너번 와요. 단골손님인데요.” “그래? 참 좋은 친구지.” 성호는 머리를 끄덕이다가 뭔가 꼬리를 밟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후에 종종 와서 술을 마시세요.” 선화는 해연의 눈치도 보지 않고 성호와 술잔을 부딪치고 잔을 쭉 굽냈다. 성호는 “승호, 저 친구는 우리 학급의 체육위원인데. 정말 능력이 있는 친구지.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하고 녀자친구도 많고.” 하고 슬슬 올리췄다. “그런 거 같아요. 번마다 다른 녀자친구 데리고 오던데요.” “혹시 체육머리를 한 녀자애도 데리고 왔소?” “예. 체육머리 굽실굽실한 녀자 체격 진짜 죽여주더구만요. 좀 나이 있는 녀잔 티격태격 말다툼을 하던데요.” “그래?” 성호는 가능하게 옛날 약혼녀 아닐가 짐작됐다. 성호는 머리를 가로 흔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순간 리성의 높은 장벽이 해연, 선화와 자기 사이에 우뚝 일어서는 감을 느꼈다. (그래, 그 한마디가 고맙구나. 해연아, 넌 교수 딸이니까 . 학교식당에 들어와 일하면서라도 시내에서 만족스레 살진 몰라. 선화, 넌 음식점을 차려 돈이나 벌면서 잘 살 수 있어. 난 농민의 자식이야. 그러나 너희들과는 달라. 나한텐 상류사회로 진출할 원대한 포부와 리상이 있어. 절대 리상과 전도를 포기할 수 없어. 너희들을  선택하는 거면 같은 값에 분홍치마라고 정희를 선택하지.) 선화의 깎 듯한 인사를 뒤로 하고 성호가 바깥에 나오자 차디찬 눈보라가 실련의 쓸쓸함과 함께 윙윙 휘몰아쳐왔다. 해연의 덕분에 거나하게 마셨건만 그의 마음을 쓸쓸하게 만들었다. “고맙다.” 성호의 말에 해연은 “이담 두고 두고 인정을 갚아다오.” 라고 했다. 성호는 그저 머리를 끄덕였다. “이담 로임 타면 한턱 낼게.” “돈은 싫어. 사랑해달라.” 성호는 비틀거리며 해연의 부축을 받아 겨우 학교 대문어귀까지 왔다. “이 팔을 좀 놔라. 남들이 보면 련애한다고 소문나겠어.” “소문 나면 뭐라니?” “이러지 말래도.” “우리 집에 가 놀래?” “어디로 가? 놔라.” 성호는 용케도 팔을 빼내고 비틀거리며 숙사 쪽으로 걸어갔다. 뒤에서 해연은 오도카니 서서 성호의 뒤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미련에 찬 눈길이 보이지 않는 한오리 실처럼 어둠  속에서 성호의 잔등으로 따라갔다. 눈보라 치는 어둠  속에서 성호를 바라보는 미련에 찬 눈길이 또 한나 있었다. 진짜 눈물겨웠다. 그 주인공이 바로 정희였다. 성호가 은영에게 미련이 남아 있는 것보다 못지 않게 그녀는 아직도 성호에게 가는 미련이 남아 있었다. 헌데 해연의 부축을 받으며 비틀거리는 성호의 뒤모습을 보고 실망의 파도가 찰랑거렸다. 정희는 도리머리를 흔들더니 비틀거리며 숙사로 발길을 옮겼다. 침실에 돌아와 맞은켠 승호의 침대를 보니 이불이 개여진 채 사람은 없었다. (요놈 자식, 홍희를 데리고 어데서 노는 모양이야.) 순간 성호는 그들의 꼬리를 밟아서 은영한테 알려주고 싶은 충동이 생겼다. (옳다. 항상 열집의 사위가 돼야 한다더니 약혼녀를 두고 홍희와 은영을 건드려? 어림도 없어. 만천하에 쫄딱 밝혀놔야지.) 성호는 침실에서 나와 주춤 멈춰섰다. (요 교활한 새끼, 어데 가서 개 수작을 할가? 선화네 음식점엔 다시 안 갈 거고.) 바깥에 나와 서성거리다가 눈보라치는 백양나무숲 속을 바라보는 순간 혹시 어둠  속에 홍희를 껴안은 승호의 징그러운 모습을 방불히 보는 것만 같았다. 성호는 주먹을 으스러지게 쥐고 눈보라 속을 헤집고 교정의 백양나무숲 속을 헤집고 찾고 또 찾아 헤맸다. 허나 승호네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순간 천진한 막내동창생 홍희가 불쌍해났다. (어쩜 시내에 남으려는 미련에 승냥이 같은 색마한테 얼리워? 네 처지  불쌍해.) 그는 숙사로 돌아오다가 2층 세집 전등이 켜졌다가 깜빡 꺼지는 것을  발견했다. (혹시 저 것들이 헌 세집에서? 그래, 지하독서실이 어쩜 이 추운 겨울엔  제일 좋은 련애장소지.) 성호는 다짜고짜로 세집으로 슬금슬금 다가갔다.  평소에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은지 오랜 곳이였다. 2층 제일 안쪽에 있어 조용하기로 천혜의 련애장소였다. 밤중인지라  바늘이 떨아지는 소리마저 들을 수 있을 지경으로 아주 조용하였다. 성호는 도적고양이처럼 헌 세집에 다가가 문꼬리를 잡아 당겨보았다. 문이 꼭 잠겨 있었다. 그때였다. 집 안에서 와닥닥, 와닥닥 무슨 소리가 들리고 녀성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왜 이래? 미쳤어?” (아니, 홍희 목소리 같은데.) “미치긴? 함께 이 시내에서 살겠으면 내 말을 곰상곰상 들어.” “그래도 그렇지. 결혼도 안하고 맨날 이럼 돼?” “우린 이미 몇번이나 결혼했는데도 왜 이래?” “들키면 어째? 퇴학맞자고 이래?” “근심하지 말라? 아무도 모르니까.” 성호는 자기 귀를 의심했다. 문에 난 옹이구멍으로 들여다보았다. 그는 "지하독서실" 안에서 벌어진 광경에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승호가 글쎄 한 녀자를 깔고 들어앉아 그걸 하려고 덤벼들고 녀자는 밑에서 두다리를 버둥거리면서 저항하고 있지 않겠는가! 성호는 심장이 바깥으로 튀여나올듯이 쿵쾅, 쿵쾅 높뛰였다. “누구야? 혹시 은영이? 머리카락이 긴 걸 보니 체육머리가 아니야.) “이러지 말래도?” “홍희, 사랑해. 한번이면 어떻고 열번이면 어때? 이미 쒀놓은 죽인데.) “오빠, 약속해. 나하구 결혼하겠다고. 영원히 배신하지 않겠다고.” “이젠 몇십번 맹세했어. 영원히 사랑해, 영원히 네 신랑이 돼주마.” “은영을 좋아하지 않지?” “그래, 너만 사랑할게.” 성호는 자기 귀를 의심했다. 승호가 색마처럼 어린 막내 홍희를 깔고  씨닥거리는 것을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었다. (홍희 불쌍하구나.) 성호는 놀란 나머지 그 자리를 바삐 떴다. 그러나 고약한 생각이 머리를 쳤다. (잘됐어. 네 놈이 이러고서도 은영과 좋아해?) 침실에 돌아와 성호는 복잡한 생각을 굴렸다. 그는 은영의 마음을 돌려세우기 위해서라도, 아니, 은영을 승냥이 같은 색마의 아가리에서 빼내기 위해서라도 승호의 진상을 알려줘야 했다. 그러나 친구를 잃을 것을 생각하니 한편으로 마음 한 구석이 아팠다. 더구나 사건이 커지면 승호와 홍희는 퇴학맞을 수도 있었다. 은영 때문에 그들의 전도를 망치고 싶지 않았다. 이때 승호가 침실에 돌아왔다. 그는 자는 척하는 성호 쪽을 흘끔 곁눈질 해보더니 침실에서 되나갔다. 그날 밤에 승호는 다시 침실로 돌아오지 않았다. (개자식, 진짜 미쳤구나. 지하독서실? 픽, 지하섹스장이라고 해라. 오늘 밤에 허리 뚝 부러지게 밤을 새겠지. 큰 일은 큰 일이야.) 성호는 친구로서 승호를 속심의 말로 타일러주지 못하는 것이 자못 마음 아팠다. 성호는 구경 어떻게 해야 은영을 쟁취할 수  있을가?                                                                          
129    대하소설 진달래 소야곡(3) 댓글:  조회:1706  추천:0  2017-11-23
                     4. 체육머리 처녀        성호는 요즘 시내에 와서 대학가의 처녀 은영이나 시내 처녀애 선화를 여겨보면서 자기 마음에 미묘한 변화가 생기는 것을 느꼈다.        (왜 이래?순희와의 순박한 첫사랑을 절대 배반해선 안되는데.) 예쁜 대학생처녀나 시내물에 전 섹시한 처녀애들이 자기 사랑의 방파제를 충격할 때마다 그는 흔들리는 마음을 질책하면서 도리머리를 흔들군 했다.        (아니야, 난 벌써 사랑에 빠져서는 안돼. 공부를 해야 해. 순희고 은영이고 선화고 다~) 성호는 침실에서 침대에 누워 착잡한 생각에 빠졌다가도 도리머리질하며 삼검불 같은 번민에서 벗어나려고 모지름을 썼다. 며칠 전 일요일 점심, 성호는 시내 이모네 집에 놀러 갔다. 그런데 아무리 노크해도 아무런 인기척도 없었다. 성호가 한참 서성거리다가 몸을 돌려 층층계를 내려가려는데 파란 세다를 입은 웬 예쁜 처녀가 나타나 리상한 눈길로 성호를 훑어보다가 놀라했다. “아니, 성호 아니요?” 성호도 놀랐다. 집체호의 선화였다. 그는 짐짓 “우리 이모네 어델 갔지?” 하고 중얼거리면서 뒤머리를 긁적였다. “오, 우리 아래집 분이 이모 돼요?” 그녀는 성호의 왼쪽가슴에 단 대학 마크에 눈길을 멈추더니 활기 넘쳐났다. “잠시 기다리세요. 이제 조금 있으면 올 거예요.” 그녀는 말을 마치고 집 문을 열고 들어가면서 잠간 우리 집에 들어가 기다리오.” 라고 하는 것이였다. “아니, 난 여기서 이모를 기다리겠소.” 눈치 빠른 선화는 어색해하는 성호의 손을 잡아끌었다. “어마나, 줄나긴, 면목 모를 집이오?” 그때 이모가 나타나 어색한 장면을 타개해줄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성호야, 우리 옆집 선화야.” 선화를 보고는 성호를 가리키면서 “내 외조카야. YB대학에 다닌다. 서로 알고 지내라."라고 했다. “저 선화는 우리 생산대 집체호에 내려왔댔습니다.” 성호는 선화와 어색하게 눈길을 마주쳤다. 이모의 말에 의하면 선화는 마음이 어찌나 착한지 자기 딸처럼 가깝게 지낸다고 했다. 그런데 대학 입학시험을 3년 채 쳤는데 계속 몇 점씩 모자라 입학하지 못해 애나한다고 했다. "정말 넌 글을 잘 쓰지 않느냐? 쟤 글짓기를 좀 지도해주면 안 되겠니?" 선화는 그 말에 새침한 표정을 지으면서 콕콕 찌르는 눈길로 성호를 여겨보는  것이였다. 그 표정에는 네가 내 선생을 할 수  있겠는가는 심리상태가 환히 드러났다. 성호는 입을 헤 벌리고 웃는 것보다 새침한 표정을 짓는 선화가 오히려 그렇게 이쁜 것이 이상할 지경이였다. 순간 성호와 선화의 눈길이 반공중에서 조용히 마주쳤다. 선화는 쌍까풀눈을 살며시 내리깔더니 자기 집으로 들어가는 것이였다. (이러면 안되는데. 순희를 가수로 가르쳐달라고 이모부한테 부탁하러 왔다가 선화한테 반하면 안되는데. 선화는 인정미가 있긴 하지.) 그제야 성호는 순희가 똑똑한 녀자애라는 것을 새삼스레 느꼈다. 예쁜 처녀애들을 보기만 하면 마음이 흔들리는 자기를 어떻게 첫사랑이란 말끄댕기를 하나 잡고 믿고 시집오겠는가. 성호는 허구픈 웃음을 피씩 웃었다. 이날도 그는 금방 선화의 글짓기를 좀 지도해주고 돌아왔다. 그는 침실에 누워서도 선화의 퍽 인상 깊은 쌍까풀눈과 어깨 너머 물결치던 머리카락이 떠올랐다. 선화의 오빠도 퍽 인상 깊었다. 이모의 말에 의하면 선화의 번대머리 오빠는  30대 초반의 로총각이라고 했다. “시간이 있으면 저 선화를 도와주오. 저는 대학생이 아니고 뭐요. 저 애도 올해 시험을 쳤댔는데 내 말을 통 듣지 않더니 락제했소…” “오빠! 별 말을 다해요. 창피하게.” “야, 쓸데없는 성악공부를 그만두고 이 대학생한테서 많이 배워라. 저 애는 통 내 말을 듣지 않소. 되지도 않는 노래나 자연과학을 공부해서 잘못됐소. 사회과학이 상대적으로 쉽지 않고 뭐요?” “오빠! 그만두래도!” 선화는 앵두입술을 뾰족이 내밀면서 콕콕 찌르는 눈길로 오빠와 성호를 번갈아 쏘아보더니 책을 와락와락 걷어치웠다. 그녀는 훌 일어나더니 침실로 들어가면서 문을 쾅 닫아버렸다. 오빠는 너부죽한 얼굴에 실망에 찬 표정을 꽉 싣더니 도리머리질을 홰홰 저었다. “안되오. 쟤는 오빠가 무식하다면서 통 말을 듣지 않소? 그래도 사회과학을 배워야 사무실에 엉덩이를 척 붙이고 들어앉아서 철 밥통을 끌어안고 편안히 살 수 있겠는데. 쳇.” 선화의 오빠는 한숨을 후~ 내쉬였다. “아차, 깜빡 잊었군.  대학교에 복습재료랑 좋은 거 있으면 가져다주오.” 그는 초면강산에도 스스럼없이 성호에게 부탁했다. 시간도 퍽 간 것 같아 성호는 엉거주춤 일어났다. “점심을 자시고 가오.” 선화의 아버지마저 대학교 교수라는 틀을 차리지 않고 아주 친절하고 스스럼없이 대했다. 성호는 선화가 들어간 침실 쪽을 힐끔 곁눈질해보았다. 빠금히 열린 침실문  안에서 파란 세다가 바람결처럼 사라지는 것을 훔쳐볼 수 있었다. 성호는 지금도 보조개를 옴폭 파면서 방실방실 웃던 선화의 우유빛 얼굴이 삼삼거렸다. 성호는 돌아오기 전에 뒤를 달려고 선화의 집 서재에서 파금의 “집”이란 소설책을 쑥 뽑아들고 밥상에 마주 앉아 공부하는 영애 쪽으로 다가갔다. “선화, 이 책을 가져다 보고 가져올게.” 선화는 새침한 얼굴을 거두고 생글 웃으면서 일어나더니 떠나가는 성호에게 손까지 흔들었다. “빠이-빠이!” (아, 내 마음이 왜 저 오뉴월 하늘처럼 변덕스럽게 파도칠가? 순희를 보면 순희를 좋아하고 대학가에선 아래학급 은영이 예뻐보이고 시내에선 선화가 절세미녀 같고, 에참, 세상의 예쁜 처녀들을 다 사랑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가.) 성호 스스로도 산들산들 불어치는 미풍에도 흔들리는 갈대 같은 자기 마음으로 해 심란했다. 허나 무슨 수로 파도치는 마음을 달랜단 말인가? 성호가 선화네 집에서 돌아올 때까지만 해도 맑게 개였던 하늘이 갑자기 먹장구름이 몰려왔다. 불 뱀이 대지에 뻘건 불혀를 번쩍 뻗치더니 먹장구름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진짜 짐작하기 어려운 변덕스러운 오뉴월의 하늘이였다. 성호는 아무리 마음을 순희에 대한 첫사랑, 그 한 곬으로 몰아가려고 해도 잘 되지 않았다. 예쁜 처녀들만 보면 수시로 가을바람을 맞은 늪 가의 갈대처럼 흔들리는 것이 아니겠는가. 원래 한 학급의 누나들은 여겨보지도 않았다. 보통 대학가에는 공부를 잘하는 처녀애들이 적었다. 중학교 때부터 인물자랑이나 할만큼 예쁜 처녀애들은 대부분 일찍 련애나 하면서 공부를 잘 하지 않아 그런지 대학에 오지 못하고 일찍이 시집이나 가버린 것 같았다. 그런데 아래 학급의 어린 대학생처녀들 가운데는 꽃같이 예쁜 처녀애들도 드문드문 눈에 뜨이였다. 특별히 옆 교실을 드나드는 체육머리를 한 처녀애가 성호의 눈에 쑥 들어왔다. 걀쭉한 우유빛얼굴에 버들잎같이 꼬리가 살짝 쳐들린 짙은 눈썹, 어글어글한 깜장눈, 오똑한 코, 작고 빨간 앵두입, 진짜 "홍루몽"의 미녀 주인공 림대옥이 울고 갈 미녀가 아니겠는가. 더구나 칠칠한 체격에 탄력 있어보이는 그녀의 몸매는 성호의 가슴을 억누를 지경으로 압박을 가해왔다. 저도 몰래 한번 꽉 껴안고 키스벼락을 뻑뻑 안겨주었으면 속이 시원할 것 같은 강한 충격을 받았다. (안돼. 괜히 학교 기률을 어겨서 퇴학이나 맞으면 어쩔라고? 어떻게 힘들게 입학했다고 경거망동한단 말인가?) 천지꽃산 기슭에서 소방목을 하다가 입학한 목동 출신 대학생 성호는 이성으로 인해 강한 성적인 충동을 받을 때마다 대학교 기률로 자기 꿈틀거리는 용암 같은 사랑의 화마를 지지누르면서 억제하군 하였다. 개혁개방 초기라는 것도 있었지만 대학교당위 기률검사위원회 허철만 서기는 제대군간부출신인데 학생기률을 군부대 기률처럼 엄하게 다스렸다. 그는 대학생들은 "재학 중에 련애를 해서는 절대 안 된다."는 대학생수칙을 내놓고 련애를 하는 대학생만 잡아내면 호되게 처분했다. 한번은 이런 기괴한 사건도 있었다. 성호의 한 동창생이 벽돌공장에 가서 한 녀대생과 어깨에 손을 얹고 련애를 한창 할 때였다. 불시에 전지불이 쭉 비치더니 "꼼짝 말라!" 하고 돼지 멱따는  듯한 고함소리가 울렸다. 깜짝 놀란 처녀총각은 선불 맞은 노루처럼 화닥닥 도망쳤다. 어지러운 전지불이 뒤따르면서 계속 고함소리 들렸다. "꼼짝 말라! 계속 도망치면 총을 쏜다!" 그 고함소리에 처녀총각은 꼼짝달싹 못하고 그 자리에 못 박힌듯 멈춰서  “체포”됐다. 그들은 학교 무장부에 끌려가서야 기률검사위원회 허서기라는 것을 발견했다. 한참 심문을 받고 둘 다 신분이 밝혀진 후에야 겨우 풀려나와 숙사로 돌아왔다. 하지만 이튿날에 벌써 그들의 이른바 학생기률위반사건은 전 교에 통보되였고 입당지원서까지 당조직에 바치기까지 한 그 남학생은 엄중경고처분에 입당자격을 취소당했다. 녀대생도 경고처분을 받는 비극을 겪게 됐다. 당시 대학교 학생기률수칙은 성인으로 성숙된 20대 초반의 학생들 실제에 맞지 않는 인성화되지 못한 극좌적인 것이였다. 허나 별 수 없었다. 학생들은 처분을 두려워 지하련애를 하지 않으면 안됐다. 재수 없는 놈은 뒤로 자빠져도 코등을 깬다고 들키면 된통을 치러야 했다. 그러므로 성호는 근신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느 날 이른 아침, 성호는 며칠 후면 열리게 될 학교 륙상대회를 준비하려고 학교 운동장에 뛰여가서 아침달리기를 했다. 앞에서 달리는 한 처녀애를 보고 저도 몰래 깜짝 놀라 발걸음을 멈출 번했다. (아니, 저게 그 처녀 아니야?)  앞에서 파란 운동복을 입은 체육머리 처녀애가 탄력 있는 젖가슴을 탈랑거리면서 달리고 있지 않겠는가? 1메터 60도 넘게 쭉 빠진 훤칠한 키, 대나무처럼 칠칠한 체격을 가진 그녀는 탄력 있는 긴 다리로 아주 가볍게 성큼성큼 달려나가고 있었다. 성호는 뒤에서 슬며시 뒤따라 달리면서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을 훔쳐보았다. 그런데 한참 달리던 그녀가 눈치를 채기나 한듯 불시에 스피드를 내 달려나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다고 눈치코치 없이 무작정 그녀를 따라 스피드를 낼 수도 없어 아쉬웠다. 성호는 날이 갈 수록 그녀한테 끌려들어가는 것을 가슴깊이 느꼈다. 학교 식당에 가서도 그녀가 있나 해 눈빗질을 하다가 그녀가 나타나면 가슴이 설레이다못해 심장박동이 쿵쾅쿵쾅 드세지는 것을 온몸으로 느꼈다. 교실 현관에서 그녀를 마주쳐도, 아니, 눈길이 조금 마주쳐도 어쩐지 가슴이 뭉클해났다. 어찌 하여 심지어 그녀가 사뿐사뿐 걸어가는 모습만 보아도 그렇게 예뻐 보일가? "제길, 이거 어디 공부를 하겠어? 사춘기도 아닌데 왜 이래?" 성호는 교실이나 침실에서 책을 들어도 그녀의 모습이 떠올라 혼자 중얼거렸다. 어떤 때에는 보름달 같은 얼굴이 겹치어 떠오를 때도 있어 머리가 꽤나 복잡해났다. 심지어 이모네 옆집의 선화의 쌍까풀눈까지 아른거려 그를 심란하게 만들었다. (이렇게 머리 복잡하고서야 어찌 공부를 제대로 할 수 있단 말인가?) 만물이 춘흥을 못이기는 초여름의 어느 날, 청춘의 꿈도 많은 대학교 운동장에서 전교 륙상대회가 성황리에 열렸다. 확성기에서 경쾌한 민족음악이 흐르고 운동장을 돌아가면서 학부마다 북소리를 둥둥 울리면서 응원하느라고 떠들썩했다. 성호는 학부 수류탄선수로 뽑히였다. 수류탄뿌리기 차례가 돼 성호가 나가보니 한뼘씩이나 더 큰 한족애들이 우르르 쓸어나왔다. 키다리들  속에 들어선 성호는 딱 마치 거위무리 속의 닭 같다고나 할가. 설상가상으로 키다리 한족애들이 뿌린 수류탄이 축구장 중간선 전후에 날아가 퉁퉁 떨어졌다. 한 학급의 누나들은 벌써 승부가 갈린 것 같아 부산을 떨었다. "에이고, 우리 학부 졌어." "작달막한 성호 질 건 빤하다, 빤해!" 허나 반전이 일어날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와야!" "저게 뭐야?!" 숱한 학생들 눈길이 일제히 성호가 뿌린 수류탄이 날아가는 포물선을 따라 날아갔다. 퉁! 축구장 중간선을 날아넘어갔다. 두번째로 멀리 날아갔던 것이 아니겠는가. "57메터!" 재판이 자로 재더니 흰 기를 들면서 소리쳤다. "와~ 기적이야!" "대박이야!" 성호가 글쎄 그렇게 멀리 뿌릴줄은 누구도 몰랐다. 성호는 은근히 옆에 앉은 정치학부 녀학생들을 흘끔흘끔 곁눈질했다. 그 속에서 그 파란 운동복의 처녀애가 걸 봤겠는가 하는 것이 궁금했던 것이다. 성호는 뭔가 그 처녀애  앞에서 본때를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저게 뭐야? 그녀는 진짜 선수, 아니, 에이스, 스타였다. 백메터 달리기에서 시작을 알리는 총소리가 울리자마자 그녀는 체육머리를 흩날리며 어찌나 빨리 달리는지 다른 선수들을 한 서너메터 뒤떨궈놓고 흰 선을 풍만한 가슴에 걸었다. 체육머리가 어찌나 빨리 닫는지 운동장 확성기에서는 누군가 그녀를 두고 읊는 즉흥시 소리가 울렸다. “와~ 화살같이 내달리는 체육머리선수, 구름속을 달리는 보름달 같은 녀신이여라!” 이때 남녀 혼합릴레이달리기가 시작됐다. 뚱뚱한 성호는 장거리달리기에서 발목을 풀친 승호 대신 선수로 나섰다. 파랑새라고 불리는 정희는 얼굴이 파래 성호를 흘겨보더니 뒤에서 녀학생들  속에 가서 “에이고, 우리 학급 졌어. 저 뚱뚱보를 승호 대신 넣다니?” 하고 뒤공론을 했다. 다른 녀학생들도 머리를 끄덕였다.         “성호야, 힘이 세서 수류탄이나 표창 같은 건 잘 뿌려도 뚱뚱해서 잘 닫겠니?” 승호는 정희를 보고 “쓸데 없는 헛소리 말아. 성호는 나보다 더 잘 달릴 거야!” 오가는 소리를 들으면서 성호는 녀학생들의 쓸데 없는 근심을 산산이 부셔버리고 자기 존재를 과시하고 싶었다. 혼합릴레이가 시작됐다. 앞선 세 선수들이 잘 달리지 못해 성호네 학급은 9개 학급에서 그만 여섯번째로 됐다. 이제 성호까지 제대로 닫지 못하는 날에는 한 륜이나 떨어질 수도 있었다. 실로 무언의 압력이 성호의 어깨를 지지눌렀다. 성호 차례가 되자 정희랑 벌써 도리머리부터 흔들었다. 여기저기 성호네 학부 얼굴들에는 실망의 그림자가 파도치고 있었다. 반발심이 난 성호는 계주봉을 받아 쥐자마자 처음에는 천천히 달리면서 호흡과 심장박동, 발폭을 조절하고나서 점점 속도를 가했다. 승호는 관중석에서 일어나 앞으로 달려지나가는 성호에게 “빨리! 성호! 빨리!” 하고 고함소리를 날렸다. 성호는 눈길 하나 팔지 않고 발끝에 힘을 주며 발폭을 점점 넓게 내밟으면서 속도를 점점 더 가하였다. 5천 메터 장거리를 한 절반 달리면서 벌써 한 300메터나 앞선 선수 둘을 따라 잡았다. 그제야 정희랑 녀성들 속에서 군소리가 잦아들었다. 성호는 정치학부의 체육머리한테 한눈을 팔 여유도 있었다. 이상하게 정치학부 응원단 속에는 체육머리가 보이지 않았다. 정희랑 녀동창생들의 응원까지 받았다고 생각한 성호는 더욱 속도를 가해 50메터 앞선 정치학부의 선수도 따돌린 후 계주봉을 다음 선수에게 넘겨주었다. 이게 뭐야? 다음 계주봉을 받아쥘 선수는 그 체육머리 처녀가 아니겠는가! 그녀는 박수갈채를 보냈다. 정치학부 앞선수의 계주봉을 받게 돼 박수를 보냈는가! 성호는 제 좋은 생각을 하면서 체육머리한테 계주봉을 넘겨줬다. (내가 놀란 솜씨로 달렸다고 박수를 쳤겠지. 잘 달리지도 못한 자기네 선수에게 박수를 보낼 수 있어. 내게 져서 분해 죽는 선수에게 박수를 보내는 건 말도 안돼!) 좌석에 돌아가자 정희는 달려나와 수건까지 주면서 “어쩜 그렇게 잘 닫소?”라고 했다. 성호는 수건을 받아 땀을 닦았는데 숨이 차하는 눈치가 전혀 보이지도 않았다. 재잘거리던 참새 아가씨들은 너무나도 뜻밖이여서 입까지 함박만큼 벌렸다가 손으로 가리였다. 경기 결과 성호네 학부가 일등을 따냈다. 성호와 체육머리 등 선수들은 영웅처럼 떠받들렸다. 물론 축하파티에서 승리의 희열은 하늘을 찌를 지경이였다. 승호는 체육위원이노라고 술잔을 높이 들고 “오늘 기분 좋게 이긴 걸 축하한다.  그래도 인재를 제대로 발견하고 제때에 교체해 써준 내 눈이 밝다는 것을 다시한번 증명했어. 자, 마음껏 마시자!”라고 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파란 운동복을 입은 파랑새 정희는 입을 삐쭉하며 성호를 치켜 올렸다. “이번 운동대회에서 우리 정치학부가 총 성적 1등을 따낸데는 성호와 아래학급 은영의 공훈이 아주 컸어! 자, 성호, 술잔을 받아요. 축하해요.” 정희는 술잔을 들고 와서 성호의 잔을 쟁그랑 마주쳤다. “승리의 축배를 들어요. 진심으로 축하해요.” 성호는 기분이 좋아 술을 쭉 들었다. 사내들이란 우스워. 처녀애들 앞에서 항상 뭔가 본때를 보이고 싶어하는 거야. 처녀애들 앞에서 뭐나 잘하려고 최선을 다 하는 사내애들이 눈물겹도록 불쌍하지 않은가! 성호는 그녀와 말을 걸고 가까이 할 틈을 노리고 또 노렸다. 그날은 끝내 기적같이 다가왔다. 성호는 그번 운동대회에서 솜씨를 보였기에 대학교 륙상선수로 선발돼 성 대학생륙상경기에 참가하게 됐다. 그런데 운동장에 연습하러 갔다가 자기 눈을 의심했다. 체육머리, 그녀도 선수로 뽑혀 대기하고 있지 않겠는가. 선수들이 줄을 쭉 섰다. 감독이  출석을 장악할 때였다. "성호!" "옛!" 성호는 가슴을 쭉 내밀고 손을 들며 앞에 나섰다. 그녀의 눈길이 자기 몸에 와닿는 감각을 느꼈다. "은영!" "옛!" 체육머리 그녀가  앞에 나서면서 손을 쳐들었다. "은영? 쟤가 은영인가?" 성호는 하마트면 소리 지를 번했다. 일이 되자니 그랬을가. 은영은 성호와 함께 혼합릴레이를 하게 됐다. "잘됐어. 이건 다 하늘의 뜻이야." 성호는 은영과 릴레이를 주고 받는 연습을 하면서도 미끈하고 탄력 있는 체육머리의 몸을 아래위로 훑어보며 제 좋은 생각을 굴렸다. (인물체격이 물 찬 제비 같지. 나어린 대학생이지. 얼마나 좋아.) 순간 천지꽃산에서 순희와 맹세한 말이 떠올라 성호를 괴롭혔다. "넌 내 첫사랑이야!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첫사랑이야!" "넌 첫사랑이 몇이야? 이제 또 몇을 사랑하겠니?" 순희가 하던 말이 뇌리를 쳐서 순희에게 죄송한 감이 났다. (진짜 사랑이란 수시로 변하는 건가?) 성호는 코웃음쳤다. (뭐 은영이 사랑이나 하는 걸 제 좋은 생각을 해? 천천히 지내봐야지.) 그런데 성 대학생륙상경기에서 운이 따라가지 못했다. 그날 푸른 잔디가 깔린 륙상운동대회에서 앞선 선수들은 아주 잘 달려 다른 대학교 선수보다 앞섰다. 그런데 관건적인 시각에 글쎄 은영이 넘겨주는 릴레이 대를 성호가 받다가 그만 땅바닥에 뚝 떨어뜨렸던 것이다. 성호가 황급히 땅바닥에서 릴레이 대를 주어 들고 죽기내기로 뛰였지만 허사였다. 꼴찌를 하고 말았던 것이다. 다행히 성호가 수류탄던지기 시합에서 2등을 해 좀 미봉했다. 성호는 그번 성 대학생륙상경기는 회억하기조차 싫었다. 은영을 마주 바라보기조차 창피했다. 며칠 후에 성 대학생륙상경기에 갔던 운동원들은 쉬는 날에 뻐스를 타고 산으로 봄철 들놀이를 가게 됐다. 소나무가 푸르청청한 산기슭에 이르자 먼저 보배찾기를 하게 됐다. 성호와 은영은 푸른 소나무밭에서 보배를 찾으면서 산으로 올라가다나니 어떻게 돼 다른 동무들과 멀리 떨어진 외딴 곳으로 가게 됐다. 그런데 나무숲이 우중충하게 솟은 웬 깊은 골짜기에 들어서서 점점 오르기 힘들어졌다. 성호는 그래도 남자느라고  앞에서 가시덤불을 헤치면서 나가며 혹간 은영의 손을 쥐여 끌어당겨주었다. 그때 따뜻하고 보동보동한 은영의 손을 놓기 싫었다. 하지만 다른 선수들의 눈치가 보여 아쉬운대로 올리막을 다 올라가면 은영의 손을 놓아주어야만 했다. "성호, 어쩜 그렇게 힘도 세고 잘 닫소. 수류탄을 박격포처럼 멀리 던지고 전번에 릴레이 때도 넷이나 따라 잡는 걸 보았단 말이오." "허허허." 성호는 놀라움과 기쁨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은근 슬쩍 말을 돌렸다. "은영을 모두 빨리 닫는다고 '화살같이 달리는 보름달 녀신'이라고 했는데." "오빠, '보름달 녀신'? 어째 비유가 적절하지 않은 거 같아요. 화살과 보름달, 류사성이 있는가요?" 성호는 그저 "좌우간 즉흥시에 오른 은영이 얼마나 녀신 같은 존재오?"라고 했다. "어머! 내가 이젠 보름달로부터 녀신까지 됐네." 성호는 "그래, 그대는 숱한 남학생들 마음 속의 녀신이오." 하고 말하려다가 꿀꺽 삼켜버렸다. “은영이, 어쩜 그렇게 빨리 달릴 수 있소?” 은영은 걀쭉한 얼굴에 얇은 미소를 찰랑거리면서 되물었다. “내야 정말 묻고 싶어요. 오빤 어쩜 그렇게 빨리 달릴 수 있어요?” “내야 애들에게 덜 맞고 살자고 가만가만 지하에서 력기나 장거리달리기 같은 걸 좀 한 과외운동원일뿐이오. 은영은 진짜 수준급이더란 말이오.” 성호는 정색해서 소나무숲  속에 선 은영을 바라보며 감탄했다. (어쩜 숲  속에 피여난 빨간 장미꽃 같아. 너무 예뻐!) 은영은 눈자리 나게 바라보는 성호의 따가운 눈길에 반쯤 외면하면서 귀밑을 살짝 붉혔다. 성호도 스스로 어색해 한마디 더 물었다. “중학교때 륙상전문팀 운동원이 아니였소?” 은영은 숲  속에서 쑥대 몇가지 꺾어 냄새를 맡으면서 나직이 “원래 전교  스피드스케이트팀 선수였죠.”라고 했다. “오- 글쎄 일반선수들보다 다르더라니까. 그런데 왜 체육학부엔 입학하지 않았소?” 은영은 자꾸 묻는 성호에게 솔직히 말했다. “녀성들의 선수생애는 하루살이처럼 아주 가련하게 짧지요. 불타는 청춘을 영원히 간직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사회학과에 지망하게 됐어요. 지금 보면 정치학부보다 문학학부나 예술학부에 갔더라면 더 좋았을 걸.” “왜? 련애소설을 실컷 읽자고?” “전 련애소설을 읽기도 좋아해요. 그보다 정치를 싫어하고 정객을 좋아하지 않아요. 그런데 시험성적이 차해서 3지망인 정치학부에 입학했어요. 그만도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성호는 머리를 끄덕이며 화제를 돌렸다. "야- 덥다야. 은영이, 오늘 들놀이 재미있지?" "그래요. 나무숲 속의 공기도 좋지. 보배 찾기도 재미있지." 은영은 버릇처럼 체육머리를 뒤로 쓸어 넘기면서 손부채질 하면서 이마에 송골송골 내밴 땀을 들이였다. 그러다가 하얀 손수건을 내밀며 땀을 닦으라고 했다. 성호는 은영의 분내인지 체취인지 풍기는 손수건을 받아 땀을 닦았다. 이때 저쪽에서 승호가 이쪽에 대고 소리쳤다. "어이, 성호, 그쪽에는 보배가 없어! 여기로 오라!" 승호는 운동은 성호보다 잘하지 못했지만 이번 운동대회에서 학교 선수단 단장으로 돼서 이번에도 들놀이 령솔자로 왔던 것이다. 성호는 승호네 그쪽으로 스적스적 걸어가면서 복잡한 궁리를 했다. 그때 은영이 돌 밑에 삐죽이 내민 종이쪽지를 주어 들었다. "성호 오빠, 보배요, 보배, 난 보배를 주었단 말이요." 은영은 어린애처럼 퐁퐁 뛰었다. 그녀는 성호의 빈 손을 보더니 보배를 내밀었다. "오빠, 이걸 가지오." "아니요. 제 가지요. 혹시 무슨 기념품이라도 타겠는지." 이윽고 성호도 소나무 껍데기에 끼워놓은 누런 종이쪽지를 발견했다. 빼보니 그 것도 보배였다. 그런데 은영의 번호와 똑같은 번호였다. "잘 됐소. 번호가 똑 같군 그래. 자기 건 날 주고 내 건 자기를 주고." "호호호. 누가 자기네 자기야? 응? 호호호." "자기도 날 자기라 하고서도. 허허허." 성호는 자기 보배를 은영에게 건네주었다. "이게 바로 오고 가는 정이 아니고 뭐요?" 은영은 자기 보배를 성호에게 주면서 별 생각없이 말했다. "자기면 어떻고 저기면 어떻소? 이게 바로 주고 받는 정이지. 호호호." 그때 성호는 자기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 요 꽉 깨물어놓고 싶은 처녀야, 날 사랑해?) 성호는 가슴이 부풀어 오르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성호는 앞으로 걷다가 여린 풀숲에 곱게 핀 날씬한 참나리꽃을 꺾어 작은 꽃다발을 만들어 은영의 머리에 씌워주고 향기로운 백일향꽃을 꺾어주었다. 은영은 머리에 꽃다발을 손수 다시 바로잡아 쓰고 백일향 꽃향기를 맡더니 그윽한 깜장눈으로 성호를 바라보면서 생글방글 웃었다. 꽃다발을 쓰고 푸른 나무 숲 속을 배경으로 함박꽃처럼 웃으면서 성호를 바라보는 은영은 참말로 수림 속의 어여쁜 선녀 같고 그리스 신화속의 용맹하고 예쁜 녀신 헤라 같아 보였다. 성호는 가슴이 뭉클 해나 그녀를 꽉 끌어안고 키스벼락이라도 한바탕 안기고 싶었다. 그러나 성호는 용케도 충동을 억제하면서 리지를 잃지 않았다. 성호는 카메라를 가지고 가지 못해 그 아름다운 모습을 찍어두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보배를 다 찾았으면 이젠 여기 모엿!" 저쪽에서 승호가 고함쳤다. 보배찾기가 끝나자 오락판을 벌이게 되였다. 보배번호에 따라 한쌍의 남녀가 나가 사회자 승호의 요구에 따라 한가지 표현을 해야 했다. "37번!" 이번에는 성호와 은영의 차례 됐다. 그런데 승호란 자식이 괴상한 표현을 시키지 않겠는가. 그는 은영과 몇몇 녀선수들을 쭉 세워놓고 성호의 눈을 싸매면서 성호를 보고 보지 말고 손더듬이를 해서 숱한 녀학생들  속에서 은영을 찾아내라는 것이였다. "제길할, 번마다 날 애먹이거든." 성호는 볼이 부어 두덜거렸다. "안돼요!" 이때 은영이 소리치며 달려오더니 성호의 눈을 잘 싸맸는가 얼굴이 닿을 정도로 살폈다. 승호랑 주의하지 않는 새에 그녀는 성호의 귀에 대고 "내 손가락으로 살짝 간지를 게." 하고 귀속말을 슬쩍 해놓았다. 성호는 은영의 수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은영과 녀선수들은 두 손을 쳐들고 서 있었다. 성호가 다가가자 승호는 고의로 녀선수들의 위치를 슬쩍 뒤바꿔놓았다. "에라, 모르겠다. 아무 녀성 손이나 줴본들 뭐라냐?" 성호는 중얼거리면서 눈을 싸맨 채 녀선수들 쪽으로 걸어나갔다. 그때 승호가 익살을 피웠다. "꽃 같은 선녀들이 손을 쳐들고 쭉 서 있네. 됐어. 손을 한나한나 만져보고 은영을 찾아 손을 들게나." 성호는 소나무 숲 속에서 쥐여보았던 그 따뜻하고 보동보동한 은영의 손을 찾느라고 이 손 저 손 쥐고 만져보았다. 가늘지 않으면 길고 차지 않으면 땀이 흥건한 것이 다 아니였다. "제길할, ‘손을 간지를게.’ 해놓고 왜 아무런 동정도 없지?" 제일 마지막에 쥐우는 손이 별로 보동보동한 것이 은영의 손과 비슷했다. 그런데 성호의 손을 간지르지 않는 것이 이상했다. "은영이 맞소?" "호호호." 은영의 웃음소리가 맞았다. 그런데 킥킥거리기만 하고 간지르지 않는 것이였다. 코웃음소리도 별로 딱  앞에서 나는 것 같지 않았다. 성호는 손을 들어 키를 재려고 숫구멍을 만진다는 것이 그만 걀죽한 얼굴을 만졌다. 그 바람에 여기 저기에서 허허허, 깔깔깔, 키득키득 웃음보를 터뜨렸다. 그때 그 보동보동한 손이 성호의 손을 살짝 간지르는 것이 아니겠는가. "은영 맞다!" 성호는 그 손을 꽉 쥐고 한발 끌고 나와 쳐들더니 눈을 싸맨 수건을 풀어 내리고 보았다. 허나 그녀는 "괴짜", "멋쟁이", "파랑새"로 소문난 정희가 아니겠는가! "이게 웬 일이야?" 또 승호란 자식이 꾸민 짓이 아니겠는가. 글쎄 은영을 정희 뒤에 떡 세워놓았는데 은영마저 성호를 골려주려고 은영을 보고 성호의 손을 간지르라고 했던 것이다. "기념사진을 찍어주지." 싱거운 꺽다리 승호가 왜가리 목을 잔뜩 빼들고 떠들어대며 카메라를 가지고 다가왔다. "내 사진 한 장 찍어주지." 승호는 성호와 은영을 나란히 세워놓고 샷터를 누르려고 했다. "나도!" 파랑새 정희도 성호 옆에 달려와 섰다. 성호는 좌우간 어여쁜 미녀 둘과 함께 정답게 사진을 찍는 기분만은 좋았다. "이건 영원한 기념이야!" "그래!" 은영과 정희가 감탄하며 식지와 중지를 성호 머리 위에 대고 깔깔 웃어댔다. 오락 판은 계속 흘렀다. 그런데 뜻밖에도 저쪽 수림  속에서 왁작 떠드는 소리가 났다. 성호랑 머리를 돌려 보니 웬걸, 은영과 정희가 손풍금을 치는데 웬 건달들이 서넛이 와서 지껄이더니 마구 목이랑 끌어안는 것이 아니겠는가! 열이 후끈 오른 성호와 승호 그리고 숱한 남자선수들이 우르르 뛰여갔다. 건달들은 돌멩이를 주어들고 달려들어 승호의 머리를 내리깠다. 승호의 머리에선 선지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격분한 나머지 성호는 공중잡이로 씽 날아나가며 양발차기로 두 놈 자식을 보기 좋게 차 넘겼다. 나머지 세 놈 자식은 돌멩이를 주어 뿌리면서 성호에게 덮쳐들었다. 그때 승호도 나무 뒤로 피했다가 씽 덮쳐나가면서 무쇠주먹으로 면상을 갈겼다. 그 찰나 성호도 날아드는 돌멩이를 피하면서 덮쳐나가 헤딩으로 한 놈 자식을 받아 넘겼다. 그런데 다른 자식이 돌멩이로 성호의 머리를 겨눠 뿌렸다. 성호가 옆으로 피했으나 돌멩이는 턱에 날아와 맞았다. 뒤로 벌렁 넘어졌던 성호는 벌떡 일어나면서 발로 홱 돌려 차 그자를 차넘겼다. 다른 남자 선수들이 왁 모여들어 건달 다섯에게 도리깨로 타작하듯 물매를 안겼다. 그 놈 자식들은 은영이랑 정희랑 녀선수들을 지껄였다가 피투성이 된채 수림 속으로 꼬리 빳빳해 도망쳤다. "아이고, 이 머리를 어떻게 해?" 은영은 승호의 피투성이 된 머리를 보고 자기 수건을 꺼내 매달리다시피 하면서 얼굴의 피를 닦아주었다. "턱에 피를 봐라!" 정희는 새된 소리를 지르면서 성호의 턱에 내밴 피를 닦아주었다. 그제야 성호는 턱이 아픈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날 오락판은 건달 때문에 스산하게 깨졌다. 하지만 성호와 승호는 은영과 정희를 건달들의 폭행에서 구해준 영웅으로, 은인으로 돋보였다.                                        5.쌍쌍이 나래치는 은제비 성호는 은영과 친해진 후 청춘의 푸른 꿈과 환상으로 둥둥 떠서 하늘의 별이라도 딴 듯한 기분이였다. 그는 늘 은영의 환심을 사려고 신사처럼 차려입고 머리기름을 뚝뚝 떨어지게 바르고 두툼한 련애소설책이나 끼고 다니면서 교실에서 읽었다. 어떤 때에는 은영과 정희를 불러 노래방에 가지 않으면 사교무장에 가서 안고 빙글빙글 돌아가면서 한바탕 놀았다. 초겨울이 되자 성호는 책보기도 싫어 스케트타기에 눈이 아홉이 돼 돌아갔다. 배꽃같이 하얀 눈꽃을 떠인 나무들이 삑 둘러선 얼음판에서는 파랗고 노란 갖가지 운동복을 입은 스케트애호가들이 유리판 같이 판들판들한 빙장에서 잔잔한 호수를 스치는 은제비들처럼 나래치고 있었다. 성호는 스케트를 타다가 불같이 빨간 운동복을 입고 노란 털실 모자를 쓴 한 처녀가 마치 수림 속을 스쳐 나래치는 솔개처럼 날렵하게 뭇운동원들 속을 이리저리 스쳐지나 미끄러져나가는 것을 보았다. 몸에 착 들어붙은 빨간 운동복, 균형 잡히고 탄력 있는 몸매, 활개치며 미끄러져나가는 그녀는 섹시한 몸매를 뽐내고 있지 않는가. 일시에 숱한 남학생들의 눈길이 그 불새 같은 녀스케트선수한테 쏠렸다. 성호는 누군지 알아 볼 양으로 그녀가 다가오기를 기다리면서 스적스적 미끄러져나갔다. 쾅! 성호는 다른데 눈을 팔다가 그만 탁 밀쳐 뒤로 쿵 자빠져 대여섯메터나 쭈르륵 미끄러져나갔다. 숱한 눈길에 뒤잔등이 바늘에 쏙쏙 찔리는 듯해 급급히 일어서려고 했다. 그때 불새 같은 처녀가 한쪽 스케트날로 흰 얼음가루를 물보라처럼 날리면서 반원을 쪽 긋더니 앞에 척 멈춰섰다. "미안해요.” 그녀는 사과하려다가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어마나! 성호 오빠!" 성호가 쳐다보니 뜻밖에도 은영이 아니겠는가! "어디 상하진 않았어요? 어서 일어나세요." 은영은 성호의 손을 잡아 일으켜주었다. "괜찮소." 성호는 그렇게 말해놓고서도 상을 조금 찌푸렸다. 은영은 얼굴을 살짝 붉히면서 노란 털실 모자를 벗어쥐고 버릇처럼 파도치는 체육머리를 뒤로 쓸어넘겼다. "왜 번졌어? 속 시원히 욕이라도 하세요." 성호는 엉덩이에 묻은 얼음가루를 툭툭 털며 중얼거렸다. "그런다고 아프잖겠소?" 은영은 따라 미끄러오면서 "참말 다행이에요. 모를 남자를 번져놓았더라면 큰일 날 번했는데요."라고 했다. 성호는 짐짓 아픈 상하면서 넌지시 "내 절름발이 되면 은영이 책임져야 하오." 하고 능청을 떨었다. "호호호. 한뉘 책임지라고?" "그래, 그럼 안되오?" "호호호. 단단히 걸고 드는구먼." "이런 기회에 걸고 들지 않으면 언제 걸고 들겠소?" 은영은 혀를 홀랑 내밀더니 "진짜 언덕이 없어 비비지 못하는 량반이구먼." 하고 종알거렸다. 성호는 밀착한 빨간 운동복을 입은 은영의 몸을 흘끔흘끔 곁눈질해 훔쳐보았다. 짙은 눈썹까지 가릴락말락 타래치듯 넘긴 곱슬곱슬한 체육머리, 빛뿌리는 깜짱눈, 예리하게 솟은 코아래 웃음을 함뿍 머금은 빨간 입술, 얇게 생긴 얼굴선에 걀쭉한 얼굴, 탄력있는 호리호리한 몸매, 풍만한 가슴… 아, 은빛 스케트를 척 신고 빙장에 나선 이 빨간 체육머리 처녀 은영은 빙산에서 내려온 빨간 선녀가 아닌가. 저쪽에서 파랑새 정희가 미끄러져오더니 얼굴이 새파래서 은영을 보고 새침한 표정을 지었다. "얘, 남을 넘어뜨리고도 재미나 웃고 떠드니?" 은영도 맞받아쳤다. "별 일에 다 끼여드오." 이때 승호란 자식도 슬슬 미끄러져 와 왜가리 목을 빼들고 끼여들었다. "스케트를 타다나면 넘어질 때도 있지 뭐." 성호는 쩍 하면 끼어드는 승호를 속으로 욕했다. (자식, 언제 봐도 맨 물의 거시처럼 싱겁게 노는 놈이야! 흥!) "우리 몇바퀴 돌가요?" 은영이 체육머리를 뒤로 쓰러넘기며 하는 말에 성호랑 승호랑 정희까지 따라나섰다. 은영은 노란 털실 모자를 꼭 눌러쓰더니  앞에서 활개 치며 쌩- 쌩- 미끄러져나갔다. 진짜 은제비를 방불케 했다. 허나 승호는 로반의  앞에서 도끼를 휘두르는 격이라는 걸 눈치 챘던지 힐끔 곁눈질하더니 테 밖으로 쭉 미끄러져나가 스케트 끈을 조이는 척하다가 빙장 저쪽에 사라졌다. 성호와 정희는 그래도 억지로 은영을 따라 미끄러져나갔다. 그러나 슬쩍슬쩍 옮기는 체육머리를 따라가자니 기교는 고사하고 되는대로 짧고도 빨리 발을 옮겨놓아야 했다. 그래도 체육머리 눈에 드이지 않으니 얼굴은 덜 뜨거웠다.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숨소리도 헐레벌떡. 드바삐 체육머리를 뒤따라가던 성호는  졸지에 무릎으로 얼음을 꽝 쪼으며 푹 꼬꾸라져 쓱 미끄러져갔다. 재수 없이 끈을 밟았던  것이다. 급급히 되돌아온 은영은 "아니, 상하진 않았어요?" 하고 놀라하며 성호를 부축해 일으켜주었다. 성호는 창피한 나머지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드디여 따라 잡은 정희도 성호의 바짓가랑이에 묻은 얼음가루를 털어주었다. 성호는 항상 범송과 붙어 다니던 정희가 살갑게 구는 순간 눈에 거슬렸다. 까슬까슬한 체육머리와 파도치는 긴 노랑 머리카락이 성호의 얼굴을 간지럽히고 처녀들의 뜨거운 입김이 호호 풍겨왔다. 순간 성호는 온몸이 찡- 해나고 가슴이 울렁이며 무언의 심한 충격을 받았다. 진짜 꽃향기에 취해 몸을 가누기 힘들었다. (은영은 정말 매력적인 처녀애야! 탄력 있고 날씬한 몸매는 또 얼마나 곡선미가 있는가!) 그후 성호는 빙장에서 체육머리 은영에게 본때를 보이려고 승호와 은영, 정희, 범송이 누구도 몰래 금싸라기를 뿌린듯이 총총한 뭇별들이 반짝이는 밤이면 밤 가는 줄도 모르고 남몰래 스케트타기를 연습하였다. 넘어지면 일어나면서 바지가랑이에 얼음가루가 하얗고 반지르르하게 묻으면 툭툭 털고 일어나면서 끈질기게 련습했다. 공든 탑이 무너지랴. 그 보람으로 성호는 숱한 학생들의 놀라움과 흠모의 눈길  속에서 체육머리 처녀와 함께 한쌍의 은제비처럼 유리장처럼 반들반들한 빙장 우에서 자유롭게 훨훨 나래칠 수 있게 됐다. 오, 그때 성호는 종래로 느껴보지 못한 쾌감으로 해 막 미칠 것만 같았다. 그 즐겁고 행복한 시간이 그대로 영원히 멈춰 서 있었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진짜 은영을 사랑하고 있는가!) 순간 성호는 순희가 천지꽃산에서 하던 말이 귀전을 아프게 때리는 것이였다. "너한텐 첫사랑이 몇이나 되냐? 은숙이, 미옥이, 이제도 첫사랑이 몇이 될지 어떻게 아느냐?" 성호는 허무맹랑한 웃음을 지었다. "이래서 사랑은 변한다는 말이 있는가?" 순간 성호는 평소에 승호가 하던 말이 떠올랐다. "사내란 열집 사위가 돼야 진짜 사내란 말이야." (너무 한 거 아니야? 그럼 열집 귀공주들을 잡아먹겠다는 것이 아닌가? 사람이 어찌 그럴 수 있어? 아버지 말씀처럼 난 절대 한평생 데리고 살 처녀가 아니면 걸버무리지 않겠어.) 성호는 순희를 사랑한다고 고백해놓고 저도 몰래 은영에 대한 사랑이 자기 가슴  속에서 싹트고 얼기설기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는 것을 가슴깊이 감지했다. 그는 어쩌는 수 없어 도리머리를 절레절레 가로 흔들었다. 진짜 저도 모르게 싹 트지만 또 한뉘 잊어지지 않고 쓰디 쓴 것이 사랑이란 말인가? 엄동설한이 다가온데다 난방시설이 미비해 아무리 랭수욕을 견지하는 성호라고 해도 침실에서 이불이 얇아 추웠다. 그는 이불거죽을 뜯어가지고 집에 돌아가서 어머니한테 두툼한 이불을 꾸며달라고 했다. 그러나 불시에 무슨 돈이 있어 새 이불을 꾸미겠는가. 어머니는 고육지책으로 집에 있던 헌 이불을 뜯어 이불솜을 꺼냈다. "얘야, 미안하구나. 가난한 엄마를 만난게 죄다. 이 이불솜을 더 펴고 꾸며서 임시 덮으렴." "괜찮습니다. 어머니." 성호는 별수 없이 어머니가 씻어 방치 돌에 두드려 하얗게 바랜 이불거죽과 낡은 솜을 꿍져 메고 대학교로 돌아가려고 했다. 그때 뜻밖에도 순희의 조카 월순이 찾아왔다. “오, 때마침 성호 있구나.” 월순이 어색하게 웃으며 문고리를 잡고 들어서자 성호는 잔등에 소름이 끼쳐 본체만체 하면서 문 밖으로 나가려고 서둘렀다. “아니, 가버리면 다야?” 월순은 따라 나오면서 “성호” 하고 불러 세웠다. “난 너와 싸울 시간이 없어. 대학교에 가서 이불을 꾸며야 하니까.” 월순은 따라 오면서 “이전에 네 집에 와서 해낸 건 잘못했어. 이제라도 빌면 안 되니?” 하고 뜻밖의 소리를 했다. 그러나 성호는 월순의 말에 쉽게 넘어갈 위인이 아니였다. “그래 오늘 빌고드는 저의가 뭐냐?” 월순은 뒤에서 손을 젓는 영옥을 힐끔 곁눈질하고나서 떨어지지 않는 입을 겨우 뗐다. “우리 순희 북경에 가서 일자리를 얻은 것 같더라.” 그 뜻밖의 소리에 성호는 궁금해 “그래 대학시험은 안쳤니?” 하고 주춤 멈춰섰다. 월순은 고개를 숙이고 발끝을 보면서 쥐구멍으로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말했다. “또 락제했단다. 이젠 시험도 치지 않고 큰오빠하구 말해서 아마 북경에 호구를 올리고 일자리를 찾은 거 같아.” 성호는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였다. “참, 안 됐구나. 어쩜 4년이나 시험 쳐도 붙지 못하니?” “해마다 몇점씩 모자라니 어쩌니? 대학에 갈 운이 모자라는 걸.” 성호는 은영과 정희를 떠올리자 인차 말머리를 돌렸다. “순흰 수도에서 살게 됐으면 잘 됐구나.” 월순은 성큼성큼 걸어가는 성호를 뒤따라오면서 한술 더 떴다. “순흰 날 보고 너한테 전하라고 하더라.” “?” 성호는 혹시 누가 듣지나 않나 해서 주위를 돌아보았다. 월순도 주위를 한고패 살피더니 나직이 말했다. “순희는 너를 사랑한다더라. 너보고 북경에 와서 일하면서 함께 살지 않겠는가 물어보라더라. 넌 순희를 ‘영원히 잊지 못할 첫사랑’이라고 했다면서?” “그래, 그랬어. 건 다 지나간 얘기고.” “그럼 지금은 사랑하지 않는단 말이냐?” 순간 월순의 언성은 거칠고 높아졌다. 성호도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너네 집식구들은 정말 이상한 사람들이야. 내 순희를 사랑하든 말든 간섭할 건 뭐야? 이렇게 강권하면 내 북경에 갈 것 갔애?” 월순은 또 본색을 들어내며 행악질했다. “한마디로 뚝 찍어 말해라. 너 순희를 사랑하니? 안 하니? 살겠니? 안 살겠니?” “주먹을 들이대고 강요하겠니?” “얘, 우리 근심하지 말고 순희하고 살겠으면 살아라.” 이때 엄마까지 바자굽에서 가만히 듣다가 뛰쳐나왔다. “엄마, 제가 알아서 처리할테니깐요.” 이번에는 상진까지 와서 성호를 말렸다. “얘, 네 큰형이 웃마을에 있으니까. 근심하지 말고 북경에 가라. 수도에 가면 얼마나 좋니? 예로부터 충신은 효자가 아니라고 했다. 날 봐라. 부모를 모시려고 고향 마을에 돌아오는 바람에 공안국장도 그만두고 한뉘 풀밭에서 헤매고 말았어. 네까지 우리 땜에 시골에 돌아오게 하고 싶지 않다.” 성호는 그 말씀을 따를 수는 없었다. “부모 마음이 고맙긴 하지만 불효를 저지를 수 없습니다. 수도가 좋다고는 하지만 그리 멀리 가면 부모를 몇해에 한번 보겠습둥?” 그 말에 월순도 부모도 어쩌는 수가 없었다. 성호는 아예 뒤를 맺고 끊었다. “순희를 보고 날 잊어라고 해라. 수도에서 좋은 혼처를  얻어 잘 살라고 전해라.” 월순은 뾰로통해 발끝으로 발 밑 흙덩이를 톡톡 차버리다가 “알았다. 네 아니면 순희 북경에서 시집가지 못 할 거 같니?” 월순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렸다. 성호는 한숨을 후~ 내쉬였다. 순간 그는 홀가분한 감이 나 훨훨 날 것만 같았다. 성호는 숙사로 간신히 돌아왔지만 이불을 꾸밀 재간이 없었다. 그렇다고 불시에 어머니나 누나를 불러다 침실에 와서 꾸며달라고 할 수 도 없어 서성거렸다. 그때 피뜩 은영이 떠올라 집에서 가지고 간 찰떡 꾸러미를 들고 녀대생숙사에 발길을 돌렸다. “그래, 이런 기회에 은영 속을 떠봐야지.” 성호는 은영이네 침실문을 두드리고 들어갔다. 다른 녀학생들은 성호한테 이상한 눈길을 보냈다. “오빠 왔구먼. 앉으세요. 이건 뭐 또 들고 왔어요?” 은영과 녀학생들은 성호 앞인 것도 잊고 찰떡을 맛있게 주어먹으면서 웃고 떠들었다. “은영, 내 좀 보기요.” 성호는 얼굴을 붉히며 현관으로 나왔다. 뒤따라 나온 은영을 보고 찾아간 사연을 말했다. “그러지요. 내 잘 꾸미진 못해도 오빠 이불이야 꾸미지 못하겠어요.” 은영은 두 말없이 따라나섰다. 성호는 은영을 혼자 부르기는 그래서 나머지 떡 꾸러미를 들고 정희네 침실로 가서 정희를 불러냈다. 그런데 정희는 은영을 보자 질투의 눈길을 보냈다. “은영이 가면 되겠구먼. 왜 나까지 불렀소?” “둘이면 말동무도 되고 좋지 않소?” 정희는 마지못해 따라나섰다. 그녀들은 성호네 침실에 가서 책상 네개를 맞붙여놓고 그 우에 이불거죽과 솜을 펴놓고 한뜸 한뜸 바느질해나갔다. 성호는 바느질 하는 은영의 그 정다운 모습을 보면서 앞날의 그 무엇을 보는 상 싶어 흐뭇했다. 아마 그때부터 성호는 은영이 자기를 사랑한다고 믿고 마음 속에서 급속도로 사랑의 뿌리가 내리기 시작한 것 같았다. 성호는 늘 은영이 책을 보는 열람실에 가서 공부했다. 그녀가 오지 않으면 허전하고 공부하기도 재미없었다. 그럴 때면 무슨 구실을 대고 그녀를 찾아갔다. 때론 도서열람카드가 모자란다면서 그녀의 열람카드를 빌기도 하고 소설책을 빌려다 보고 소설독후감을 이야기하군 하였다. 그녀 또한 식성이 좋은 성호에게 남겨둔 밥표와 채표를 줬다. 그런데 한 학급에 있는 정희도 성호에게 밥표와 채표를 주어 성호는 배고픈 근심은 덜게 되었다. 그녀들의 은정이 고마워 성호는 시골에 있는 집에 가면 늙으신 어머니 보고 찰떡을 많이 쳐달라고 해 한 보따리씩 해서 트렁크에 메다가 은영과 정희네 침실에 가져다줬다. 하여 성호가 집에 갔다가 오는 날이면 승호와 성호, 은영과 정희네 침실은 토장과 찰떡, 순두부로 상다리가 부러질 지경,  다른 침실의 애들도 맛을 보러 건너오군 하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성호의 마음  속에 차지하는 은영의 자리는 점점 커갔다. 순희와 선화 그리고 해연이 들어앉을 자리는 점점 작아지는 감이 들었다. 실로 성호의 사랑은 이렇게 랑만과 환상 속에서 싹트고 얼기설기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며칠 후 성호는 한가지 놀라운 발견을 했다. 한번은 성호는 은영의 스피드를 따라 잡으려고 밤에도 스케트를 타는 련습을 했다. 그런데 달빛이 깔린 서북쪽 얼음판 우에서 도란도란 남녀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아주 귀에 익은 소리 아닌가. (누굴가?) 성호는 스케트를 타며 그들의 곁으로 스쳐지나가면서 슬쩍 훔쳐보았다. 달빛을 빌어 보니 정희가 스케트를 신고 있지 않겠는가. 그것도 글쎄 싱거운 키꺽다리 범송의 허리를 잡고 외발로 서서 스케이트를 신지 않겠는가! (혹시 정희가 범송을 좋아하는가?) 어두운 밤인데다 스케트를 스피드하게 탔기에 정희와 범송은 성호를 알아보지 못했다. 성호는 서로 붙잡고 스적스적 스케트를 타는 정희와 범송의 뒤를 한 30메터 미행하면서 동정을 살폈다. 달밤에 얼음판에서 웃고 떠들며 스케트를 타는 그 애들을 보자 슬그머니 질투 났다. (왜 이러지? 정희를 사랑하고 있는 건가?) 성호는 이상야릇한 감을 느꼈다. (허참, 사랑은 모를 일이야. 은영을 좋아하면서도 범송을 질투해?) 성호는 저도 몰래 정희와 은영을 대비해보았다. 그는 그 애들이 웃고 떠들면서 스케트를 타는 것을 보기도 싫어 스케트를 벗어 메고 숙사로 내려갔다. 그가 눈덮인 고요한 수림 속을 걸을 때다. "후과가 두렵지 않아요?" "난 모든 거 두려워하지 않는단 말이요!"… 소나무숲  속에서 또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누굴가?) 성호는 소나무 뒤에 숨어 숨을 죽이고 그 쪽을 살펴보며 귀를 기울였다. 저쪽의 남녀는 계속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진짜 렴치없구먼. 대학교에 오기 전에 약혼녀가 있었다는 걸 다 아는데요. 나와 왜 이래요?" “건 사고야." "사고? 그래 이젠 헤어지기라도 하겠단 말인가요?" "그럴 수도 있지. 홍희와의 사랑을 위해서라면." "뻔뻔스럽군요. 약혼녀와 이만저만한 거 아닌 거 같은데. 무슨 렴치로…" "이전 일을 자꾸 끄집어내 방패로 삼지 마오. 난 홍희를 사랑하오." "그 말 녀자 몇한테 곱씹었어요? 약혼녀하고도 했겠지?" "누가 듣겠소. 좀 나직이 말하오. 들키면 학교에 통보 날라?" "천하의 승호도 두려운 거 있구먼요. 호호호." (승호, 저 자식이 홍희를 건드려? 저 놈이 진짜 열집 사위노릇 할 작정인가?) 성호는 자기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승호는 이전에도 술을 마신 뒤에 성호에게 종종 약혼녀 허경옥과 처음 성생활을 해보니 어떻더라고 자랑을 늘여놓은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지금 약혼녀 경옥을 배반하고 나 어린 홍희를 얼리지 않는가! (량심없는 자식! 멍청이 같은 계집애라고야. 쯧쯧쯧.) 순간 성호는 도리머리질하면서 불쌍한 홍희의 걀쭉한 우유빛얼굴이 떠올랐다. 홍희는 외지에서 온 녀대생인데 미끈하고 섹시한 몸매로 해 대학생총각들의 인기를 끌었다. 홍희는 공부는 수술하게 했지만 학교 문예경인대회에서 무대에 올라 섹시한 몸매를 휘날리며 춤을 출라치면 총각들의 눈뿌리를 다 뺄 지경이였다. 그런데 그녀는 산재지구에 가기 싫어 한사코 조선족이 모여 사는 yj시내에 남으려고 기를 썼다.  yj시내 공안국 수사과장의 아들인 승호는 홍희의 그 욕망에 찬 약점을 틀어쥐고 구슬리고 있지 않는가! "전도를 위해선 부득불 그렇게 됐소. 오래잖으면 졸업하겠는데 조심하는 것도 좋지." 그때 승호와 홍희는 소나무숲  속에서 천천히 걸었다. 성호는 소나무에 붙어서서 눈이 풀풀 흩날리기 시작하는 하늘을 쳐다보았다. 어둠 속에서 소나무숲을 하얗게 덮으면서 풀풀 흩날려 내리는 눈이 서글프기만 했다. 그때 저쪽 빙판에서 범송과 정희가 희희닥닥거리며 다가오는 목소리가 들렸다. 순간 성호는 아주 고독한 감을 느꼈다. 허나 한편으로 은영을 생각하자 스스로 위안되는 감을 느꼈다. (그래, 난 은영이만 있으면 다른 애들이 눈에 들지 않아. 은영인 나보다 서너살 어린 대학생이야. 게다가 물 찬 제비처럼 예쁘고 활발하고 인정미가 넘치는 처녀야. 우리 둘이 살면 꼭 행복하고 늙으신 부모도 잘 모실 수 있을 거야.) 성호는 눈을 빠드득빠드득 밟으면서 숙사로 내려갔다. 신선놀음에 도끼자라가 썩는줄도 모른다고 성호는 달콤한 사랑에 빠져 푸르른 꿈을 꾸다나니 자연히 학습을 게을리했다. 어느 하루 저녁에 승호는 성호를 조용히 불렀다. (이 자식, 또 무슨 련애경험담을 하려나?) 승호를 따라가니 숙사 앞에 침대가 놓여 있었다. "이걸 함께 들자." "이걸 들어다 뭘 해?" "가면 알 수 있어." 승호는 무뚝뚝하게 말하면서 성호와 함께 침대를 맞들어  6층아빠트쪽으로 올라가는  것이였다. 묵묵히 침대를 들고 낑낑 거리면서 2층 아빠트에 겨우 올라갔다. 어둠침침한 헌 집에서 매캐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둘러보니 깨진 도자기관으로, 쥐똥으로 지저분하게 널려 있었다. "뭐 하려는 거야?" 성호는 코를 싸쥐고 궁금해 물었다. "쉿-" 승호는 입에 식지를 대더니 나직이 귓속말을 했다. "누가 듣겠어.” 성호는 너무나도 이상해 “여기다 침대를 놔 뭘 해?” 하고 물었다. 승호는 철색얼굴에 괴상한 빛을 띠우더니 “이 세집에 지하열람실을 차리고 조용히 우리 정치학부의 중심연구과제인 고전철학을 연구할 예산이야.”라고 하면서 침대를 바로잡아놓았다. “지하열람실?” 성호는 너무나도 어처구니없어 입을 쫙 벌렸다. “야, 이 자식아, 너 좋은 교실과 침실을 두고 여기서 고전철학을 연구해?” 멀쑥한 승호는 보기와는 다른 소릴 쳤다. “이 세집이야 말로 고전철학을 연구하기 맞춤한 신비로운 환경이지. 시끌벅적한 세속에서 어떻게 정치를 연구해?” 승호는 자못 정색해서 말했다. "지식은 모든 사업의 에너지야. 지식이 있어야 사업에 성공하고 높이 바라오를 수 있는 거야. 지식이 있어야 부자로 될 수 있고 자기 야망을 실현할 수  있어. 이런 도릴 알기나 해?" 성호는 코웃음이 터져나왔다. “축하한다, 지하실에서 탄생할 철학가를.” “이 자식, 비웃긴?” “아니, 교실이 복잡하면 왜 시내에 있는 너네 집에서 공부하지 못하느냐? 너 엄마와 아빠, 모두 출근하고 나면 조용할 거 아냐?” 승호는 계속 중얼거렸다. “녀동생 선금이랑 경옥이랑 정말 귀찮아.” 그는 뒤늦게야 옆에 성호가 있다는 것을 의식한 듯했다. “침대를 들어다줘 감사하다. 언제 술이나 한잔 마시자. 량산박 호한처럼 의리심이 강한 넌 입에 빗장을 단단히 지르리라 믿는다. 됐어. 이제 어둡기 전에 난 전기를 가설하고 창문에 문발도 쳐야겠어.” 성호는 승호가 항상 남을 아주 능란한 솜씨로 부려먹고 수염을 쓱 씻는데 이젠 습관이 돼버렸다. (늘 우뢰만 울고 비는 내리지 않지.) “전날 밤에 련애했지? 약혼녀는 어쩌고?” 성호는 이렇게 물을가 하다가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꿀꺽 삼켜버리고 그 신비한 낡은 세집 문 밖을 나왔다. (나는 놈이야. 련애는 련애대로 하고 철학은 철학대로 연구한단 말이지. 애비 덕에 시내에 배치받겠는데 뭐가 딸려서 냄새 나는 어둠컴컴한 세집에서 철학을 연구해?) 성호는 기말에 성적이 보잘 것 없어 머리를 들기 힘들었다. 그날 승호가 철색얼굴에 가련하다는듯 쌀쌀한 비웃음을 흘리며 성호의 시험성적을 부를 때였다.  성호는 그만 얼굴에 모닥불을 뒤집어쓴 것 같아 책상 우에 두손을 얹고 얼굴을 파묻고야 말았다. 자칫하면 퇴학맞을 판이였다. 성호는 실로 발 밑은 천길 절벽이요, 밟고 선 바위돌이 움씰움씰 움직이는 격이 되고 말았다. 고민에 싸여 있을 때 그래도 체육머리가 찾아주었다. 그녀는 성호를 숙사 밖에 불러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교수청사 뒤 울부짖는 소나무숲 속으로 걸어갔다. 두 손을 맞잡고 머리를 다소곳이 숙인 채 눈 우를 빠드득빠드득 걷는 그녀의 뒤모습마저 어찌나 사랑스러운지. 성호는 넋을 놓고 뒤에서 바라보았다. 은영은 천천히 돌아서더니 “오빠, 앞날을 위해서라도 정신 차리고 공부해요.” 하고 단도직입으로 말했다. (어떻게 알았지? 누가 알려줬는가?) 성호는 두 살이나 지하인 은영의 “훈계”를 듣고 시퍼런 면도칼날 같던 자존심이 단통 도끼에 맞은 감을 느꼈다. 그런 눈치를 몰랐을가. 은영은 습관처럼 파도치는 체육머리를 뒤로 쓸어 넘기면서 성호의 반응을 살폈다. “이젠 늦었소.” 성호는 후~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면서 김빠진 공처럼 물앉았다. “아니, 이렇게 꼴기 없는 남자일줄 진짜 몰랐어.” 은영은 어처구니없어 성호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오빠, 밤중까지 스케트를 타던 그런 완강한 의지는 어디 갔어요? 하늘을 떠인 사내대장부의 기세는 어데 갔어요? 네?” 성호는 은영을 볼 면목이 없었다. “낙제 하면 은영과 한 학급에 다니고 좀 좋아서?” “무능한 남자일줄 진작 알았어야 하는데.” 은영은 깜장눈까지 흘겼다. “남들은 지하실에서 밤중까지 공부를 하는데 오빤 뭐예요? 네? 구두바닥이 닳게 춤 추지 않으면 스케트나 타면서 논단 말이죠. 그래도 자기 앞의 공부야 해야 되지 않아요?” “그만 하오. 내 살 도리를 하지 않으리라고 훈계하려고 드오?” 성호는 불그락푸르락 하면서 두덜거렸다. “충고예요. 오빠 공부하지 않으면 이젠 함께 스케트도 타지 않을래요.” 은영은 그 차디찬 말 한마디를 남기고 체육머리를 뒤로 휙 쓸어넘기고는 자리를 떠났다. 성호는 뒤에서 주먹으로 소나무를 탕 쳤다. “에이!” 희망이 절망으로, 리상이 망상으로 돼버리는 시각에도 체면을 잃고 충고해준 체육머리 처녀 은영이가 고마웠다. 그녀의 마음 속에 자기가 있다는 것에 더욱 고마웠다. 이젠 성호는 좀 책을 봐야 했다. 기말에 아직도 경제학과목 시험이 남았건만 그는 그 놈의 서양과 조선의 애정소설유혹이 너무나 컸다. 그리하여 또 도서관에 가서 정치학부의 경제학공부는 걷어치우고 스탕달의 “붉은  것과 검은  것”, 천세봉의 “석개울의 새 봄”이란 소설을 빌어왔다. “석개울의 새 봄”은 짜릿한 련애이야기에 언어가 어찌나 형상적이고 생동한지 읽으면 읽을 수록 구수하고 감칠맛이 났다. “붉은  것과 검은  것”이란 서양애정소설은 머리를 탁 치는 것이 있었다. “그래, 바로 이거야!” 그 소설의 청년주인공 줄리앙 쏘렐은 목수의 아들이였다. 18살이나 이상인 시장의 안해 레날 부인을 애인으로 사랑한 덕에 백작이란 명문귀족으로까지 되지 않았는가! “하하하. 가시 영웅이로다. 생활을 잘 모르는 승호 같은 놈은 굴쥐처럼 헌 변소에 들어박혀 철학이나 연구해 학술가로 될 거야. 그 자식은 공안부문에서 한자리 하는 애비 덕에 상류사회에 진출하거나 대학에 남아 유명교수로 될 수도 있을 거야. 허나 난 농부 아들이기에 어떤 묘수를 쓰든지 가정배경이 그럴 듯한 규수를 붙잡아 사랑도 하고 상류사회에 바라올라가려는 푸른 꿈을 실현해야 해.” 성호는 주위에서 자기 꿈을 실현하는데 도움이 될 “레날 부인”을 눈빗질하기 시작했다. 그의 시야에 한 처녀가 나타났다. 그녀가 바로 파랑새 정희와 체육머리처녀 은영이. 여러 모로 뒤조사를 해보니 정희는 모교의 유명교수의 무남독녀, 은영은 부시장의 무남독녀, 둘다 규방의 규수라고나 할가. 성호는 마치 량 손에 떡을 쥐고 어찌 할줄 몰라 헤매는 격이 되고 말았다. “누굴 선택해야 하는가?” 혹시 정희와 은영이 둘 다 성호를 사랑할 수도 있고 또 사랑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혹시 성호가 스스로 제 좋은 생각이나 환상을 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성호는 파랑새나 은제비나 모두 자기를 사랑한다고, 아니, 최저한도로 자기를 좋아한다고 여기고 푸른 꿈에 가슴이 설레였다. (파랑새네 부모가 나를 좋아할가? 시골 농부의 아들인데. 봉건사회도 아닌데 아직도 반상의 차별이 이렇게 클가?) 성호는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몸서리쳤다. 아버지가 공안국장만 내놓지 않았어도 자기 처지가 이다지도 서글프지 않았겠는데 하는 막연한 생각도 머리를 쳤다. (정희는 성격이 좀 팩하고 괴상하지. 사랑스럽긴 한데 농민 부모를 잘 모실 수 있을가? 노여움을 잘 내는 엄마와 맞을 수 있겠어?) 성호는 사랑과 효성을 모순되게 생각하지 않았다. 짜릿하고 깊은 사랑은 끊임없는 령감을 불러왔다. 그의 눈 앞에는 파랑새 대신 얼음판에서 훨훨 나래치는 은 제비가 나타났다. 체육머리 그녀를 방불히 보는 듯해 시무룩이 웃었다. (그래, 어여쁜 녀대생이지. 가정배경도 좋고. 정부기관의 모모한 간부의 외동딸이니깐. 만약 그 집 맏사위로 되면 마음에 드는 일자리 알선해주겠지. 은영의 아버지 농부의 아들을 받아들일가?) 성호는 고민에 빠졌다가도 자기 인물체격에 기대 자신감이 생겼다. (옛날 바보 온달은 왕가의 공주에게도 다 장가들었을나니. 요 자그마한 고을 아전의 딸이 뭐 그리 대단해. 내 인물체격이면 규수와 천생배필이야. 어디 가서 나 같은 사위를 얻어? 흥!) 어디서 생긴 용기인지 몰랐다. 성호는 그런 배심을 먹고 파랑새든 은제비든 량자간에 자기 나름대로 선택하리라 독한 마음을 먹었다. (같은 값이면 분홍치마라고 부모를 모시는데 누가 낫다고 생각하면 누굴 택할 판이야. 누가 감히 시부모를 모시지 않고 내 색시로 될 수 있어?" 련 며칠 성호는 량손에 파랑새와 은제비를 쥐고 저울질을 했다. 나중에 그는 어쩐지 인정미 있고 사랑스러운 은제비 쪽으로 마음이 기우는 것을 어쩌는 수 없었다. (좀 가련하긴 해. 허나 난 은영의 치마꼬리를 붙잡고서라도 은영의 애비 신세에 내 꿈을 실현해야 해. 살기 푼푼해야 부모도 시내에 모셔올 수 있지 않겠는가. 고급간부의 외동딸인 은영을 쟁취하는 거야 말로 비단에 수놓은 꽃을 따는 격이지. 이런 걸 두고 꿩 먹고 알도 먹고 둥지 털어 불을 땐다는 거야. 그렇지 줄리앙 쏘렐식으로 명문가족의 치마자락을 단단히 잡고. 으흐흐. 나의 레날부인이여~) 마음을 정했는데 웬 일인지 파랑새를 놓기도 좀 아쉬운 감이 들었다. (사실 정희도 놓기 아쉬운 처녀애야. 성질이 좀 괴벽해서 그렇지. 후~) 성호는 땅이 꺼지게 한숨을 내쉬였다. 그러나 그것도 한순간에 지나지 않았다. 강렬한 점유욕으로 하여 먹장구름 속에서 대지로 쫙 내리치는 번개처럼 성호의 머리 속에는 은영을 손에 넣을 묘수들이 스치고 지나갔다. 노대없이 망망한 바다에 나섰다가 세찬 파도 속에 휘말려들어 넘어질번하던 사랑과 리상의 쪽배에 사랑의 돛배를 달고 전도의 항로가 항주 서호와 같이 잔잔하고 미묘한 경지에 이르렀다. 눈앞이 환해진 성호는 미친듯이 흥분해 소설책에 키스까지 뻑 안기고 고함쳤다. "살았다, 살았어!" 성호는 침실에서 나가 그 길로 은영을 불러냈다. "요새 좀 책을 보는 거 같더니 밤중에 왜 영상하게 이래?" 은영은 버릇처럼 체육머리를 뒤로 쓸어넘기면서 못 마땅한 눈길을 보냈다. "음, 소설책을 보니 배울게 많더구먼. 은영만 내 옆에 있으면 다 될 수 있어." "그래요? 공부를 잘할 수  있지? 응?" "그럼, 리상도 멋있게 실현할 수  있지. 오늘만 동무해줘. 다신 찾지 않을게." "그럼 약속하자요. 오빤 뭐나 하면 짱이죠. 공부에서도 노력하면 오빤 총명해서 꼭 될 수 있어요. 그래 오늘 밤에 어디로 갈래요?" 성호는 자못 흥분돼 하는 은영을 끌고 노래방으로 갔다. 그는 맑은 유리잔에 맥주를 찰찰 넘치게 부어드리면서 정중하게 말했다. "고맙소. 이후에도 날 믿어주오. 난 모든 걸 약속대로 할 테니까." 은영은 성호의 잔과 딩둥댕 마주치고 나서 성호의 등까지 다독여 주었다. "나도 기뻐요. 오빠가 책을 보고 뭔가 터득하기 시작하니 말이죠. 책에는 수천년 인류가 쌓아놓은 얼마나 많은 지식들이 있는가요. 잘 해보세요." "정치를 그만하고 오늘 밤 질탕하게 놀아보자. 자, 건배!" 댕그랑! 잔을 시원히 굽을 낸 다음 그들은 노래하고 춤을 추었다. 은영이 성호의 노래에 맞춰 반짝이는 오색령롱한 레이저빛 아래에서 탄력있는 몸매를 흔들어대면서 춤을 추는데 진짜 매혹적이였다. 그날 밤, 성호와 은영은 각기 좋은 생각을 하면서 밤 깊도록 맥주를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추었다. 양산도에 사랑환상곡에 맞춰 사교무에 어깨춤까지 덩실덩실, 재즈음악에 맞춰 디스코와 댄스까지 쿵작쿵 퉁작쿵 추고 또 추었다. 흥에 겨운 춤판은 식을줄  몰랐다… 오색령롱한 불빛이 별처럼 깜빡이는 사교무청사 안에서는 파격적이고 경쾌한 원무곡에 맞춰 대학마크를 단 신사숙녀들이 우아한 무용자태로 쌍쌍이 돌아가고 있었다. 그들은 마치 맑디맑은 물 속에서 분홍색, 파란색, 노란색 지느러미를 하늘거리며 헤엄쳐 돌아가는 금붕어들을 방불케 하였다. 성호도 흥에 겨워 꽃 같은 파랑새 정희의 오른 손을 잡고 날씬한 허리를 잡은 후 소용돌이치는 꽃물결 속에 들어가 빙글빙글 돌아가기 시작했다. 한바퀴 돌면서 볼라니 은영은 외롭게 걸상에 앉아 있지 않겠는가. 성호는 고의적으로 파랑새를 안고 은영이 앞에서 왔다 갔다 하면서 보라는듯이 멋진 사교춤 동작으로 리드해나갔다. 은영은 그저 성호와 파랑새를 보고 고개를 끄덕이면서 눈인사를 살짝 할뿐이였다. 두바퀴 돌아왔을 때 그 긴 걸상에서 은영이 보이지 않았다. 성호가 파랑새를 안고 스리슬쩍 춤을 추면서 사교무청 안을 참빗질할 때다. 눈 앞에는 피가 꺼꾸로 쏟아질  듯한 장면이 안겨왔다. 글쎄 은영이 싱거운 꺽다리 범송의 품에 안겨 빙글빙글 돌아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저 싱거운 새끼, 정말 기를 채워도 한두가지 아니구나. 정말 죽고 싶어   환장했어?) "아, 미치겠다, 미쳐!" 성호는 저도 몰래 파랑새를 활 놓으며 고함쳤다. 그 바람에 춤군들의 눈길이 일제히 쏠렸다. 그제야 실수한 것을  느낀 성호는 두 손을 잡고 할딱거리는 정희를 끌어안고 머리를 숙이고 춤을 추었다. 범송과 은영이 춤을 추는 꼴을 보기도 싫었다. (끝내 올게 왔구나. 저것들이 진짜 사랑하는 건가?) 성호는 도저히 확인하기 싫었고 눈 앞의 현실을 받아들이기도 싫었다. 물론 성호의 품에 안겨 돌아가는 정희도 파랑새라고 불릴만큼 물 찬 제비처럼  예뻤다. 영화배우처럼 해말쑥하고 걀쭉한 얼굴, 하현달같이 가늘고 살짝 꼬리 들린 눈섭 아래 파란 꿈을 꾸는 듯한 파란 눈, 뜨거운 키스를 기다리는 듯한, 빨간 혀끝까지 보일락말락하게 빠금히 열린 입술, 게다가 파랑새를 수놓은 파란 적삼에 탄력 있는 허벅다리가 드러난 짧은 치마는 영화배우 같은 그녀의 인기도를 퍽 높였다. 허나 파랑새 어깨 너머 소똥무지에 박힌 함박꽃처럼 범송에게 안겨 생글방글 웃으면서 돌아가는 은영을 보자 춤을 출 기분조차 없었다. 그 느릿하고도 은은히 들려오는 곡에도 성호는 사선을 칠 때 길게 내딛어야 할 것을 짧게 디뎌 파랑새의 발을 자꾸 밟아 미안했다. 한곡이 끝나자 성호는 파랑새의 나긋한 허리를 놓고 노기 띤 얼굴로 범송의 옆에 앉아 있는 은영한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은영은 기다렸다는듯이 손을 내밀어 잡히며 범송을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였다. 마치 성호와 춤을 춰도 괜찮지 하면서 말이다. 그것조차 성호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성호는 격렬한 곡이 시작되자 동작을 급하고도 크고 힘차게 춤추기 시작했다. 은영을 안아 팽이처럼 사교춤판을 한 바퀴나 돌아가다가도 불시에 멈처서며 손을 쥐여 마구 돌려놓기도 했다. 또 허리를 안아 뒤로 젖히기도 하고 홱 나꿔채며 손을 잡아 빙글빙글 돌리기도 했다. 은영은 이상한 감이 들어 핼끔핼끔 못마땅한 눈길을 보냈다. 그러나 운동세포가 발달한 처녀여서 성호가 아무렇게나 휘두르며 못 살게 굴어도 다 맞춰 마지막박자까지 췄다. 그새 꺽다리 범송이 글쎄 파랑새를 안고 돌아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성호는 그 장면을 보아도 가슴이 별스레 아파났다. (대체 무슨 판인가! 내가 은영과 정희를 둘 다 사랑하고 있어? 질투심만 불타오르니 말이야. 괜히 체육머리에게 질투의 불길을 달려다가 오히려 질투심에 속이 타들어가니 말이야.) 은영과 한곡을 다 춘 성호는 은영의 체육머리 밑에 드러난 고운 귀에 대고 귀띔했다. "끝나면 문 밖에서 기다릴게. 할 말이 있소." 은영이 머리를 가볍게 끄덕였다. 성호는 뒤이어 울리는 곡마다 체육머리와 파랑새를 바꿔가며 춤을 췄다. 그런데 싱거운 꺽다리가 끼여들어 성호가 체육머리와 추면 파랑새와 추고 성호가 파랑새와 추면 체육머리와 춤추면서 애를 먹였다. (개자식!) 성호는 주먹을 불끈 쥐였다가 한숨을 후~ 내쉬면서 참았다. 춤판이 끝나자 성호는 파랑새를 먼저 보내고 문 밖에서 은영을 기다렸다. 제일 마지막으로 체육머리가 나타나 층계를 내려오면서 사처를 두리번거렸다. 그녀는 성호를 발견하고 어두운 나무밭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는 뒤따라오는 성호를 뒤돌아보며 "밤도 깊었는데 무슨 일인지 간단히 말하세요."라고 나직이 말했다. 성호는 묵묵히 걷다가 돌아서며 은영의 두팔을 잡아 마구 흔들면서 갈범처럼 으르렁거리렸다. "그래 그 꺽다리 그렇게 좋아? 그 자식 나보다 더 좋은 거 뭔데?" "이걸 놔요. 놔!" 은영은 팔을 빼더니 체육머리를 뒤로 쓸어 넘기면서 생각 밖으로 맞대포를 쏘는 것이였다. "범송 오빠는 오빠처럼 간에 가 붙고 쓸개에 가 붙지 않아요. 뭐나 진심이죠. 공부도 잘하고 인물체격도 좋고 뭐나 다 좋아요. 어때요? 만족돼요?" "그래?" "네. 누굴 좋아하든 말든 웬 상관인데요?" "5.1절에 흰 반팔 와이셔츠 입고 다니는 주책없는 꺽다리새끼 그리 좋아? 엉?" "픽-" 은영은 코웃음 치며 쏘아부쳤다. "남의 흉은 잘 보는구만요. 범송은 오빠처럼 옹졸하지 않아요. 흉금이 넓고 시원시원하고 랑만적이죠." 그녀는 체육머리를 뒤로 쓸어넘기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성호가 아무리 애타게 불러도 거미줄로 묶은 선학 같아 멈춰 세울 수 없었다. "아- 내 그 꺽다리를 어쩌면 좋을가? 정말 기를 채워 죽인다." 성호는 주먹으로 백양나무를 피 터지도록 탕탕 치면서 통탄하였다.      
128    대하소설 진달래 소야곡(2) 댓글:  조회:1735  추천:5  2017-11-09
                                  대하소설 진달래소야곡 제1권 청춘의 고백 차례 1. 첫사랑 그녀 2. 효자와 사랑 3. 마음의 파도 4. 체육머리 처녀 5. 쌍쌍이 나래치는 제비 6. 실련영탄곡 7. 미련 8. 꺽다리와 난쟁이 9. 청춘 로맨스 10. 달밤의 추억 11. 결투 12. 복도에서 벌어진 희극 13. 사랑의 진실 14. 폭풍 15. 목동과 파랑새 16. 약혼녀의 폭발 17. 베일에 가려진 진상 18. 리몽룡과 춘향 어디에 있나? 19. 충고 20. 규수와 목동 21. 깍쟁이령감 22. 소나무숲 속의 참사 23. 흉수의 그림자 24. 흉수와 피해자 25. 백일하에 드러난 윤간범들 26. 소식공개회 27. 흉수를 나포 28. 미궁 29. “한뉘 소 궁둥이나 칠 놈”                                                                                                        1. 첫사랑 그녀        뭉게뭉게 피여오르는 구름과 안개 속에 칼날 같은 절벽을 깎아세운 천지꽃산은 푸르른 소나무와 연분홍 진달래꽃 옷을 입고 우뚝 솟아 있다. 구름인지 안개인지 담담하게 흐르며 기암괴석을 보일락말락하게 쓸어올려 드러났다 숨었다 하는 절벽이 더 진한 매력을 풍긴다.        옛날에는 칼날처럼 예리한 절벽이 치솟았다고 하여 이 산을 칼산이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이른 봄이여서 아직도 여기저기 잔설이 남아 있다. 층암절벽에 뿌리를 박고 엄동설한의 눈보라와 찬서리에도 악착스레 살아온 진달래는 봄바람에 하느작이며 도라지춤을 추는 상 싶다. 천지꽃산에는 해마다 진달래꽃이 온 산을 뒤덮으며 활짝 피여 봄이면 봄마다 산이 하나의 큰 연분홍 진달래꽃송이를 방불케 했다. 고향 사람들은 이 산을 천지꽃산이라고 불렀다.       천지꽃산의 진달래를 두고 사람들은 항일전쟁시기 영용한 항일투사들의 선혈을 머금고 떨기떨기 피여난 꽃이라고 했다. 또 항일투사들의 넋이 진달래꽃으로 재생한 꽃이라고 했다.      그렇다. 천지꽃산의 진달래는 항일투사들의 불요불굴의 넋이며 엄동설한 찬서리와 풍설에도 억척스레 살아온 우리 겨레의 상징이 아니겠는가!      비단결로 얼굴을 만지는듯 부드러운 봄바람이 불어오고 어느덧 봄아가씨가 사뿐사뿐 다가왔다. 봄아가씨의 따뜻하고 부드러운 숨결이 대지를 키스하며 스치고 지나가자 천지꽃산 층암절벽에서 겨우내 찬서리와 싸우면서 억세게 살아온 진달래도 언 몸을 풀며 애어린 꽃잎사귀가 파릇파릇 돋아나기 시작하였다. 보슬보슬 내리는 보슬비는 층암절벽에 축복의 은구슬을 뿌리고 천지꽃산의 진달래는 여느 꽃나무들을 앞찔러 이슬을 머금고 싱숭생숭한 봄꿈을 꾸면서 꽃망울을 부풀어올린다. 벌써 양지바른 언덕에 있는 진달래는 꽃망울이 버들개지처럼 오동통하게 움트기 시작하였다. 봄바람에 흥겨워 수양버들가지가 흐늘흐늘 설레이면서 춤추고 파랗고 빨간 꽃들이 소리 없이 피어 길손들을 부른다. 봄빛은 날이 감에 따라 짙어가고 해님이 방실방실 꽃웃음 짓는 따뜻한 때를 만나 예쁜 진달래꽃들이 산들산들 불어오는 봄바람에 꽃향기를 풍기면서 자기 아름다움을 한껏 자랑한다. 진달래 꽃이 만발한 고향의 산에서는 피끓는 청춘들이 싱숭생숭한 사랑의 서정시로 청춘의 노래를 연주한다. 어느 일요일, 성호는 향기로운 봄 기운을 가슴 뿌듯이 느끼면서 오랜만에 천지꽃산에 올랐다. 푸른 창공을 찌른 검 같은 천지꽃산은 뭇산 위에 우뚝 솟아 있어 참말로 장관이였다. 바람벽 같은 절벽과 파란 봄 하늘을 배경으로 산새들이 원을 그리며 재롱을 피우면서 날아예고 층암절벽에는 연분홍 진달래가 활짝 피여 반겨 맞았다. 성호는 시원한 고향 산공기를 가슴 뿌듯이 들이켜고나서 연분홍 진달래로 물든 천지꽃산을 둘러보았다. 마치 한 폭의 아름다운 산수화도 같아 아름다움의 극치를 감상하는 것만 같았다. 그는 진달래 꽃밭에 앉아 진달래꽃 향기를 한껏 맡으면서 경제학교과서를 꺼내들었다. 갑자기 그리 멀지 않은 뒤산 진달래꽃 숲  속에서 은방울을 굴리는  듯한 웬 처녀애의 구성진 노래소리가 이른 아침 봄하늘에 메아리쳤다. “이런 야산에 웬 녀가수야?” 성호는 그 청아하게 부르는 노래소리에 그만 암송마저 그만두고 쌍까풀눈을 퉁방울눈처럼 뜨고 진달래숲 속을 두리번거렸다. 웬 일인가? 성호가 그녀를 찾는 눈치를 챘는지 노래소리가 뚝 끊기고 잠잠해졌다. 성호는 가슴이 높뛰기 시작하는 것을 느끼면서 진달래숲 속으로 성큼성큼 걸어들어갔다. “어떤 미녀가수일가?” 그러나 한참 진달래꽃밭을 헤매면서 찾아도 그녀가 숨박꼭질이나 하는듯이 찾아내지 못하였다. 분명 그녀가 성호를 발견하고 숨박꼭질하는 것 같았다. 성호는 도리머리질하며 중얼거리더니 진달래꽃숲 속에서 나와 다시 중얼거리면서 책을 읽었다. 그런데 그가 산기슭으로 거의 내려올 때산에서 또 처녀애의 구성진 노래소리가 들려왔다. 성호는 책을 읽으면서도 드문드문 진달래꽃숲 속에 흘끔흘끔 눈길을 보냈다. 한참 후 성호는 연분홍진달래꽃숲 속에서 호리호리하게 생긴 웬 예쁜 처녀애가 진달래꽃 한줌을 가슴에 모아쥐고 나오는 것을 발견하였다. “아니, 저게 누구야? 순희?!” 성호는 깜짝 놀랐다. 순간 성호는 대학교시절에 처녀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겠다던 자기 맹세가 산산이 박살나고 있음을 폐부로 느꼈다. 진짜 유혹의 힘은 리성을 잃게 할만큼 어머어마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어머!" 저쪽도 그를 발견하고 놀랐다. 정말 충격적인 장면이였다. 어쩜 진달래꽃이 만발한 고향산 기슭에서 첫사랑 순희와 로맨틱한 상봉을 한단 말인가! "순희!" 성호는 순희의 아래우를 훑어보았다. 볼우물을 옴폭 파며 생글방글 웃는 그녀는 퍽 매혹적이였다. (아, 저 살인할 볼우물, 그 옴폭 파이는 볼우물에 유혹돼 첫사랑을 달구지 않았던가.) 1메터 육십도 넘는 호리호리한 키에 보름달 같은 우유빛 얼굴, 버들나무잎 같은 눈섭, 은은한 정을 담은 까만 한쌍의 청포도 쌍까풀눈, 입술에는 연분홍 진달래꽃잎 풀물이 진하게 물들어 있었다. 예전보다 보름달 얼굴이 좀 수척해보일뿐 의연히 예뻤다. 순희는 성호와 한 고향에서 나서 자란 죽마고우였다. 아니, 성호의 가슴을 처음으로 설레이게 한 첫사랑, 잊을 수 없는 첫사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생글생글 웃는 순희의 수척하고 갸름한 보름달 얼굴이 그렇게 고울 수 없었다. 성호는 진달래꽃을 꺾어든 순희한테 다가가면서 그간 궁금하던 것부터 물었다. "소문도 없이 길림에 갔다더니?" 순희는 한숨을 길게 내쉬면서 천지꽃산 아래 고향 마을을 내려다보았다. "대학도 붙지 못한게 어쩌겠니? 호~" 성호는 어떻게 위로했으면 좋을지 몰라 서성거렸다. "아니야, 또 시험 치면 되지. 실망할 거 없어." 그러나 순희는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3년이나 시험 쳤는데도 낙제했는데 무슨 렴치로 또 시험을 쳐?" 성호는 부지중 아주 자연스레 오른 손을 순희 어깨  우에 올려놓으면서 열변을 토했다. "세상에 어디 정해준 명이 있어? 넌 총명해. 노력하면 꼭 대학에 입학할 수 있어." 순희는 성호의 손을 내리우면서 눈을 곱게 흘겼다. "다 네 탓이야!" "뭘?!" 성호는 눈이 떼꾼해졌다. "네가 철주  앞에서 '장차 순희와 결혼하겠다.'는 말만 하지 않았어도 내 인생 이렇게 되지 않았을 거야. 길림 교외에 이사 가지도 않았을 거고." 성호는 산기슭의 고향 마을을 굽어보더니 "철주, 그 새끼 정말!" 하고 중얼거리면서 동년시절의 회억에 빠졌다. 철주와 성호는 동갑이였다. 그들 둘은 짜개바지 때부터  한 고향 마을에서 어깨동무하면서 자랐다. 철주는 어려서부터 손버릇이 나쁜데다가 어찌나 까불어댔는지 모른다. 성호보다 키도 훨씬 큰 그 자식은 항상 같지 않은 일로 성호와 걸고들어 한바탕 두들겨 패놓군 했다. 또 녀자애들을 꼬시는데는 남다른 재간이 있었다. 그는 천지꽃산 넘어에 있는 과수원에 가서 사과배를 훔쳐다가 태평강 버들숲 속 모래밭에 파묻어두고 드문드문 파내 강물에 씻어 먹었고 순희와 월순한테 주기도 하면서 호감을 샀다. 성호는 슬그머니 순희를 꼬시는 철주가 미워났다. 공부를 잘 못하는 철주는 한어만은 죽여줬다. 그는 학급 학습위원을 하는 성호를 슬그머니 질투한 나머지 녀성애들 앞에서 한어로 연설하듯이 헐뜯어댔다. 지어 두 학급의 학습위원을 하는 성호와 순희가 좋아한다는지, 수학시험지랑 함께 매기면서 련애를 했다는지, 성호가 장차 순희와 결혼해 쌍둥이를 낳겠다고 했다는지 별의별 터무니없는 험담을 다 했다. 어느 날, 성호는 강바닥 모래톱에서 철주와 대판 싸움을 붙은 적도 있었다. 그때만 해도 성호는 키가 한 뼘이나 더 큰 철주를 당해내지 못하고 한매 얻어맞고 허망 쓰러졌다. 철주는 성호를 깔고 들어앉아 주먹으로 어찌나 사정없이 때려댔는지 코피까지 다 터졌다. 성호는 어린 시절을 회상하면서 피씩 웃었다. "철주는 이젠 상대도 아니지." 순희는 성호를 곱게 흘겨보았다. "어째 대학생이라는게 아직도 싸우려니?" "승부가 다 났는데 뭘 싸워? 흥!" 성호는 코방귀를 뀌었다. "철주 탓이 아니야. 다 네 탓이야." 순희의 말에 성호는 추억 속에서 깨났다. "철주 아니면 난 녀자애 같은 남자애로 됐을 거야. 그 놈 새끼 내 성격마저 고쳐놓았지 뭐야?" 성호는 극력 변명하면서 책임을 회피하려고 들었다. "너네 길림에 이사 간 건 쌀 고생해서 갔지 어디 내 탓이냐?" 순희는 까만 포도알눈을 부릅뜨고 따지고 들었다. "뻔뻔스럽긴? 철주랑 애들이 어찌나 놀렸는지 내 학교로 머리를 들고 다니지 못한 걸 아니?" 성호는 심장을 찔린 듯 어쩔 줄 몰랐다. 그의 변명 같은 방패는 펑펑 구멍이 뚫리고 말았다. 그래도 이리저리 피하면서 궤변을 부렸다. "애들이 널 고와서 놀린 거야." "뭐라고?" "사춘기 때는 그래. 고운 녀자애들이 자기와 좋아하지 않으면 놀려주지. 지어 때려주고 싶지." "뭐라니? 네나 그랬겠지. 요 궤변쟁이야!" 순희는 참다못해 주먹으로 성호의 가슴을 마구 조겨댔다. "길림에 가서 되지 않는 한어로 대학시험을 치는 바람에 못 붙었다. 알았니? 이 놈아, 다 네 탓이야!" 성호가 이리저리 피하면서 진달래꽃숲 속으로 도망치자 순희는 진달래꽃가지를 꺾어 쥐고 쫓아가면서 후려쳤다. 그 바람에 진달래 꽃이 여기저기 흩어져 날렸다. "얘, 얘, 졌다. 그만하자. 괜히 말도 못하는 불쌍한 진달래꽃만 상해." 순희는 할딱거리면서 성호를 똑바로 보면서 경고했다. "이제 다시 사람들 앞에서 '순희'란 말만 입 밖에 내는 날엔 내 황천에까지 쫓아가서 족쳐줄 거야." "그래?" "난 네 손목 한번 쥐여보지도 못하고 애들에게 얼마나 놀림을 당했는지 알어?" 성호는 순희한테 다가가 가냘프고 길죽한 손을 와락 잡았다. "왜 이래?" "얼마나 대가를 치른 손인데. 한번 쥐여보면 안돼?" "얘, 놔라, 놔!" 순희는 겨우 손을 빼 쳐들고 보면서 오만상을 찡그리었다. "아파 죽겠다." 성호는 희죽거리면서 빈정거렸다. "세상에 둘도 없는 무서운 녀자애구나." "또, 또 안될 말을 꺼내겠니?" "남은 정식으로 말하는데 넌 파쑈독재를 해?" "난 널 좋아하지 않니?" "?!" "넌 외동아들이 돼서 자기 밖에 몰라." 성호는 그 말에 한숨을 후~ 내쉬었다. "고까짓 걸로야 리유로 될 수 없지. 혹시 부모를 모셔야 할 내가 싫어진게 아니야?" 순희는 속으로 이렇게 부르짖었다. (아니야! 난 일찍 아버지를 여의여서 시부모라도 계셨으면 좋겠다. 시아버지 사랑도 받아보면 얼마나 좋겠니?) 그러나 그녀는 단마디로 대신했다. “넌 그저 싫다.” “왜?” “아주 간단해…” 그녀는 “바라오르지 못할 나무는 바라보지도 말라고 했잖아." 하고 말하려다가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삼켜버렸다. 성호는 순희한테 다가가 앉았다. 순희는 손가락으로 시꺼먼 부식토에 줄을 쪽쪽 그었다. 성호는 순희의 속심은 모르고 횡설수설했다. "거 이상 조카 월순이 또 놀릴까봐 겁나?" 순희는 머리를 점점 더 떨어뜨렸다. "그럼?" 순희는 머리를 들어 성호를 피끗 바라보더니 눈길을 칼날 같은 구름송이가 절벽을 스치면서 흘러가는 파란 하늘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천번이고 만번이고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넌 대학생, 난 농민이야.) "말해라. 도대체 무엇 때문이야?” 성호는 온 몸에 열이 올라 순희를 와락 끌어안았다. 순희는 몸부림치면서 성호의 억센 두팔을 밀어내더니 발딱 일어났다. "이러지 말라. 어서 내려가자. 누가 보겠다." 성호는 따라 일어섰다. "보면 뭐라니? 이젠 우린 중학생이 아니라 청년이란 말이다. 청년! 이전에 너네 엄마 뭐랬는지 아니?" "?" "내 엄마 너네 엄마를 찾아가서 빌었지. '우리 철 없는 성호 장차 순희와 결혼해 살겠다고 해놔서 이집 순희 애들에게 놀림을 당해 미안하오.' 그런데 너네 엄만 뭐라고 했는지 알아? ‘장차 애들 일을 어떻게 안다고 그러는가?’라고 하면서  성호를 너무 욕하지 말라고 했지. 어디 그뿐이야? 너네 월순이 날 '염치없는 올종자놈'이라고 욕한다고 다신 욕하지 말라고 엄포를 놓았지. 건 너네 엄마 날 좋아한단 말 아니고 뭐야?" 순희는 주춤 멈춰서서 성호를 곱게 흘겨보았다. "개꼬리를 3년 파묻어도 썩지 않는다더니 그 개꼬리 개꼬리구나. 참, 넌 어쩜 항상 사춘기 소년처럼 철딱서니 없니? 눈치코치 없는 멍청이라고야. 원." 허나 성호는 순희의 뒤잔등에서 계속 열변을 토했다. "넌 내 첫사랑이야. 죽어도 잊지 못할 첫사랑이야.” 순희는 오똑 멈춰 서더니 몸을 돌리고 정색해 물었다. “너 도대체 뭘 보고 자꾸 이러니?” 성호는 “너 웃을 때 볼에 옴폭 파이는 볼우물이 얼마나 사랑스럽다고.” 하고 말하려다가 너무 유치한 것 같아 그만두고 동문서답을 했다. “넌 길림에 이사가면서도 간다는 말도 한마디 안했지. 얼마나 서운했는지 아니? 영영 생리별하는가 했어. 헌데 오늘 이렇게 첫사랑 그대를 만날줄을 누가 꿈에나 생각했겠어." 순희는 실망에 찬 눈길을 흘리더니 또다시 몸을 돌려 천천히 걸었다. "픽-" 순희는 랭소했다. "네겐 첫사랑이 대체 몇이냐? 은숙이? 미옥이? 도대체 누가 네 첫사랑이냐? 넌 사춘기도 아니니데 딱 개구쟁이 같아." 순희의 보름달 얼굴에 어둠과 비웃음이 반죽된 그림자가 흘러지나갔다. "내 첫사랑은 너 밖에 없어." "호호호. 우리 학교에서 얼굴이 반반하다는 녀자애들을 건드리지 않은게 몇이나 돼?!" "됐다, 됐어. 좌우간 내 마음  속에는 너 밖에 없어." "남자애들 마음은 왜 그래? 한 곬으로 흐르지 못하고 여기저기 산지사방으로 흩어져 흘러?" 성호는 피할 곳이 없게 됐다. 무거운 침묵 속에서 그들은 산에서 터벅터벅 걸어내려갔다. 한참 후 성호는 순희 뒤에서 진달래꽃을 한가지 꺾었다. "순희야, 이 진달래꽃이 곱지?" 순희는 주춤 멈춰서 돌아서더니 성호의 손에 쥐여진 연분홍 진달래꽃을 보고 반색했다. "참 곱구나!" 금방 새침해하던 순희 같지 않게 반기는 것이 아니겠는가. "옛다! 선물이야!" 성호는 진달래꽃을 순희 앞에 내밀었다. 순희는 진달래꽃을 받아 냄새를 맡더니 상을 찡그렸다. "야! 불쌍한 진달래꽃을 왜 또 꺾어? 몇시간 지나면 말라 죽을게 아냐?” 성호는 횡설수설 늘여놓았다. "넌 사랑의 선물을 받았으니 이젠 내가 알아서 할게." "야, 무슨 헛소리야!" 성호는 들었는둥 말았는둥 희쭉거리면서 진달래꽃을 더 꺾어 작은 꽃다발을 제꺽 만들어 순희의 머리 우에 척 얹어주었다. 순간 성호는 진달래꽃다발을 쓰고 진달래꽃묶음을 든 순희를 보고 저도 몰래 환성을 질렀다. "야, 이쁘다! 넌 한송이 진달래꽃 같아! 야, 이쁜 진달래꽃 처녀야!" 순희는 너무나도 당황해 "야, 이러지 말라. 이럼 난 어쩌니?"라고 했다. 성호는 환성을 멈추고 순희에게 다가갔다. "순희야! 내 피뜩 한 가지 령감이 떠오른다!" 순희는 그윽한 정이 찰랑이는 눈길로 성호를 마주 보았다. 성호는 정색해 말했다. "넌 예쁘고 목소리도 곱지 않고 뭐야? 아까 산 우에서 노래를 부르는 걸 듣고 웬 가수가 부르나 했어. 정말 가수를 하면 되겠더라." "가수?" "응, 그래. 가수를 해라." "가수 하자면 가수 되겠니? 황차 시골 농민처녀애가?" 기실 순희는 문과대학생으로 되려다가 말고 가수로 될 새로운 꿈을 바꿔 고향에 놀러 왔다가 심란한 마음도 달래고 목청을 튀우려고 천지꽃산에 올랐던 것이다. 성호는 한 걸음 다가가 순희의 손을 잡고 열변을 토했다. "농민처녀애라도 훌륭한 스승을 모시고 배우면 될 수 있어. 넌 중학교 때도 무대에 올라 꾀꼴새처럼 노래를 아주 불러 소문이 있었잖니?" 순희는 진달래 꽃을 들어 향기를 길게 들이켜더니 머리를 들고 성호를 정색해 마주 바라보면서 입술을 감빨았다. "누가 시골 처녀애를 배워 주겠느냐?" "내 다리를 놔서 스승을 찾아 줄게." "네가?" "그래." 성호는 미심해 하는 순희의 손을 두 손으로 꽉 잡았다. "내 이모부가 예술학원 교원이야." "그래? 뭘 가르치니?" 순희의 청포도알 같은 쌍까풀눈에서는 한줄기 희망의 빛이 반짝이였다. 성호는 신심에 차 말했다. "이모부를 보고 성악교수를 소개해달라고 할게." "글쎄." 순희는 반신반의했다. 그들은 묵묵히 산기슭으로 걸어 내려왔다. 저 먼발치 혁명렬사기념비 앞에 웬 사람이 절을 꾸벅꾸벅 하는 것이 보였다. 성호가 찬찬히 살펴보니 아버지였다. "야, 숨자!" 순간 성호는 순희의 손을 잡고 진달래 숲에 숨어들어갔다. 처녀 총각의 가슴은 쿵쾅쿵쾅 높뛰었다. 뭘 도적질한 건 아니건만. 또 련애를 해선 안 될 사춘기도 아니건만. "너네 아버진 우릴 발견하지 못했을가? 왜 청명도 아닌데 렬사기념비를 찾아 왔을가?" 성호는 하얀 보름달 같은 얼굴이 연분홍진달래꽃처럼 새파랗게 질린 순희의 얼굴을 훔쳐보면서 말했다. "우리 아버진 해마다 이때면 기념비를 찾아 오군 해. 우리 큰할아버지와 큰할머니는 모두 항일유격대 군관이랬어. 그런데 바로 이 산기슭에서 큰할아버진 일본 놈들과 싸우다가 흉탄을 맞고 쓰러져 영용하게 희생됐다고 한다. 또 진달래라고 부르는 녀유격대는 임신한 몸으로 마지막유격대전사로 남아 피 한방울 남을 때까지 일본 침략자들에게 맹사격을 퍼부었대. 탄알이 다 떨어지자 돌로 일제놈들을 까부셨대. 일본놈들이 벼랑 우까지 기여올라와 그를 포위하고 생포하려고 했어. 그는 저 벼랑 우에서 뛰여내려 장렬하게 희생됐단다." "오~ 그래?" 성호는 아버지가 두 손을 맞잡고 혁명렬사기념비 앞에 머리를 숙이고 묵념을 드리는 걸 보면서 뒤말을 이었다. "이전에 아버지 얘기하던데 우리 큰할아버진 아주 힘장사였대. 이 천지꽃산 기슭에서 일본 놈들과 육박전을 할 때란다. 일본 놈 세 놈이 총창을 꼬나들고 덤벼들자 날아드는 총창을 틀어쥐고 그 놈들을 강아지 다루듯 휘둘러 쓰러뜨렸단다. 큰할아버진 탄알이 다 떨어지자 맨 무쇠주먹으로 그 세 놈의 대갈통을 까부셨단다. 그런데 뒤에서 덮쳐든 놈이 권총으로 쏘는 바람에 큰할어버지는 가슴에 흉탄을 맞고 쓰러졌단다. 후에 우리 아버지랑 마을사라들이 진달래렬사랑 우리 큰할아버지랑 렬사들의 유체를 모두 저기 혁명렬사기념비 뒤에 모셨단다." "음~ 정말 비장하구나!" "성호야, 거기서 뭘 하니? 어서 내려오라!" 성호가 가만히 진달래꽃숲을 헤치고 내려다보니 기념비  앞에서 아버지가 이쪽을 보고 손짓하지 않겠는가. "들켰어." 순희는 진달래숲에 몸을 낮추면서 성호에게 눈을 흘겼다. 성호는 순희의 손을 잡은 손을 놓으면서 "넌 죽어도 여기서 나와선 안돼."라고 했다. 그는 혼자 아무 일도 없는 척하며 휘파람을 휘휘 불면서 산 아래로 내려갔다. 그때 저쪽에서 철주가 수레를 몰고 집으로 가다가 이쪽을 흘끔거리며 채찍으로 애꿎은 소잔등을 쨩쨩 후려갈겼다.  순희는 허리를 굽히고 진달래꽃숲에서 살금살금 소나무숲 속으로 스며들어갔다.                                               2. 효자와 사랑       갑자기 먹장구름이 뭉게뭉게 피여오르더니 천지꽃산을 지지눌렀다. 연분홍 진달래꽃잎들은 삽시에 불어치는 스산한 산바람에 몸부림치면서 떨었다. 성호는 한시급히 순희와 달콤한 꿈을 무르익히고 싶었다. 상진은 진달래꽃을 꺾어쥐고 내려오는 성호를 마주 보면서 정색해 말했다. "얘, 너 그게 뭐야? 어째 불쌍한 진달래꽃을 꺾었니?" 성호는 대수롭잖게 진달래꽃을 쳐들어보였다. "집에 가져다 병에 꽂아두자고 그럽니다." "뭐라고?! 얼마나 고생스레 살아온 진달래를 그렇게 허타하게 꺾어?!" "쌔고 버린게 진달래꽃인데 몇가지 꺾었다고 큰 일 나겠습니까?" "얘, 그 진달래꽃은 무슨 꽃인지 알기나 아느냐? 일본 놈들과 싸우던 항일렬사들의 피로 물든 꽃이야." 아버지 말씀에 성호는 그제야 진달래꽃을 무심히 볼 수 없었다. 드디여 꽃을 마구 꺾은 잘못을 뒤늦게나마 느꼈다. "오늘은 큰할아버지와 큰할머니가 희생된 날이야. 어서 큰절을 올려라." 상진은 성호를 데리고 기념비 뒤에 있는 커다란 혁명렬사 묘지에 다가가 큰 절을 세번 올렸다. 성호가 머리를 들어 천지꽃산 진달래꽃숲 속을 살펴보니 순희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아차, 우리 집에 데리고 갈 걸 그랬어. 오랜만에 만났는데 밥도 한때 대접하지 못하고 보내다니?) "사내란 큰 일을 하려면 녀자를 멀리 해야 하느니라." 말수가 적은 아버지의 마디마디 말은 성호의 심장까지 쿵쿵 울려주었다. 아버지에게 꾹 잡혀 산 아래로 내려가는 성호의 발걸음은 무겁기만 했다. 한편 순희의 둘째오빠가 고향 마을에 있다는 것에 생각이 미치자 시름이 좀 놓였다. 아버지는 산기슭에 내려가 사래 긴 밭에 가 멈춰서는 것이였다. 밭머리에는 황소 한마리가 가대기를 끌다가 말고 서 있었다. 분명 아버지가 밭갈이를 하다가 쉼에 기념비에 절을 올리러 갔다가 온 것이였다. "얘야, 너와 조용히 할 말이 있다.” 상진은 가대기를 잡고 채찍으로 황소를 "이라!" 하고 몰았다. 순간 상진이 쥔 가대기가 지나간 밭에 거머스럼한 부식토가 번져지면서 그윽한 흙냄새를 풍기였다. 상진은 밭을 갈면서 산기슭 저쪽 진달래꽃숲 속을 힐끔거리는 성호를 곁눈질하더니 무겁게 입을 열었다. "얘야, 대학에 갔으면 쓸데 없이 녀자애들 뒤꽁무니를 따라다니지 말고 공부나 잘해라. 내 너만큼 공부를 할 수 있었더라면 현장도 했겠다." 그렇다. 성호의 아버지는 생활고로 소학교 대문에도 가보지 못했다. 그러나 해방전쟁과 항미원조전쟁에서 혁혁한 공훈을 세우고 제대하자 현공안국 초대국장을 맡았다. 상진은 문화대혁명때 반란파들의 피해를 받아 공안국장을 그만두고 농사를 지으면서 두번째고향 건설에 혼신을 다 바쳤다. 아버지를 두고 성호는 내심 탄복한 적이 한두번이 아니였다. 성호는 밭갈이를 하는 아버지 옆에서 고삐를 쥐고 소를 몰면서 묵묵히 따라 걸으면서 명심해 들었다. "너 혹시 저 순희를 좋아하니?" 그 말에 성호는 머리를 숙였다. 황소는 성호가 대학교를 가기 전에 반년 넘어 방목하던 놈이여서 말을 잘 들었다. "너도 이젠 컸으니 련애도 하고 대상도 찾아야 할 때긴 하지." 그 말에 성호는 안도의 한숨이 후~ 나갔다. 상진은 채찍으로 황소를 제 곯에 몰아넣듯이 성호를 자초부터 잘 타이를 예산이였다. "대상을 고를 때 꼭 자기가 사랑하는 처녀를 골라야 한다. 음식은 먹기 싫으면 식탁에 뒀다가 먹을 수 있어. 허나 마음에 들지 않는 녀자와는 한뉘 살기 힘들다. 말하자면 사랑이 없는 결혼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거야." 그렇다. 상진은 자기 교훈을 아들에게 일러주고 있었다. 기실 상진은 공안국 국장을 할 때 한 마을에 사는 성실이라는 처녀와 서로 사랑했고 결혼했던 것이다. 그런데 성실이 아들애를 낳다가 난산으로 새파란 나이에 사망할줄을 누가 알았겠는가. 상진은 하는 수 없이 갓난애를 yj 시내에 애를 낳지 못하는 집에 주었다고 한다. 상진은 꽃나이에 사망한 사랑하는 성실을 잊지 못했다. 시어머니 역정에 개 배때기를 찬다고 성실이 생각나기만 하면 쩍하면 후처 영옥을 욕하고 때리면서 가정기물을 부시고 내던지기가 일쑤였다. 영옥은 너무나도 힘들어 항상 남편에 대한 불평을 자녀들에게 털어 놓군 했다. "너넨 잘난 신랑 찾지 말라. 애비 인물이 잘나서 좋은 게 뭐냐? 인물을 뜯어먹고 살겠니? 잘나도  성질이 더러운 놈 만나면 나처럼 한뉘 고생한다." 영옥은 사위를 삼을 때나 며느리를 삼을 때면 항상 아들딸들에게 인물보다도  마음이 첫째라고 타이르군 했다. "남편을 황제처럼 받들고 모셔라. 남편이 황제가 되면 너희들은 황후로 되는 거야." 또 아들과 사위들을 볼 때마다 늘 이렇게 말했다. "남편은 집 안에서 아내를 아끼고 보살펴야 바깥에 나가서도 남에게 대접을 받소. 자기 아내도 아낄 줄 모르는 사람이 남을 아끼면 얼마나 아끼겠소? 집이 화목해야 만사가 잘 되는 법이오." 영옥은 이제 자기 집에 들어올 막내며느리만 잘 삶으면 되겠는데 정말 근심이 태산 같았다. 아들이 천지꽃산에서 소를 모는 목동일 땐 며느리감이 없을가봐  근심했는데 대학생이 되자 혼사말군과 며느리감 처녀들이 문턱이 다슬게 찾아들어 경사났다. 시아버지 사랑은 며느리라는데 이 집에서는 상진이 순희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 눈치였다. 상진은 밭머리에 가서 황소를 멈춰 세우고 성호를 정색해서 바라 보며 무겁게 말했다. "넌 대상자를 고를 때 애비와 에미 걱정은 말고 사랑하는 처녀를 골라라."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부모를 모시고 효성을 다할 처녀를 데려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상진은 아들을 대견스레 바라보았다. "그런 처녀 얻기 어디 그리 쉽겠느냐? 효성도 있고 사랑스런 처녀 이 세상에 몇이나 되겠느냐?" 상진은 황소 머리를 돌려 다시 가대기질을 하면서 뒤말을 이었다. "그래 네 생각에는 저 순희가 사랑스럽고 효성이 있다고 생각하니?" "예." 성호는 머리를 숙이며 쥐구멍으로 기어들어가는  듯한 목소리로 말하더니 발끝을 내려다보며 걸었다. "심중하게 생각해봐라. 이래라 저래라 강요하진 않겠어. 대상자문제는 신중해야 해.” "예-" "네 지금 생각에는 순희가 세상에서 제일 고운 거 같아도 이후에 순희보다 더 이쁜 애가 나타날 수도 있어." "순희는 내 첫사랑입니다. 어찌 첫사랑을 쉽게 버릴 수 있겠습니까?" 상진은 가대기를 깊숙이 박더니 황소를 멈춰 세우고 순희가 사라진 진달래꽃 숲 속을 두리번거리더니 나직이 말했다. "이후에 살자면 맨 사랑으로만은 안돼. 농민처녀애 호구를 시내에 들여가려면 힘들어. 애들도 낳으면 시내호구로 올리기 힘들게고." 성호는 머리를 들고 장담했다. "건 근심할 필요없습니다. 순희는 총명해서 꼭 예술학원에 입학할 수 있을 겁니다. 중학교 때도 학습위원이였습니다. 노래실력도 괜찮습니다. 내 이제 예술학원의 이모부한테 말해서 좋은 스승을 소개해 훌륭한 가수로 배양하게 할 예산입니다." 성호의 말을 유심히 듣던 상진은 무겁게 입을 뗐다. "순희를 대학생으로 키워서 장가들려면 퍽 힘들겠구나." "난 순희를 꼭 가수로 만들어 내 각시로 만들겠습니다." 상진은 밭갈이마저 멈추고 담배를 말아 물었다. 성호는 바삐 호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여 드렸다. 상순은 희죽이 웃으면서 성호를 바라보았다. "너 다니는 대학에는 사랑할 만한 대학생 처녀애 하나도 없니?" "없습니다. 내가 대학에 일찍 가다나니 모두 리상 누나들입니다. 다른 학부나 학년에도 눈에 드는 처녀 없습구마." 성호는 아버지 눈치를 흘끔 훔쳐보았다. 상진은 담배 연기를 후~ 내 뿜으며 한숨을 쉬였다. "너 공부 바쁘지 않으면 집에 온바 하고는 이 밭에 둼이나 내라. 이 밭을 어떻게 얻어온 밭이냐? 밥을 먹고 사는 놈이라면 이 땅을 사랑해야 해. 부모에게 효성을 다 하듯 조상들의 피땀이 슴배인 이 밭에 땀동이를 기울여야 한다." 진짜 실농군의 철리적인 말씀이였다. 밭고랑 같은 주름살이 패인 얼굴에 내비치는 엄숙한 아버지 표정을 보고 성호는 오후에 순희를 데리고 시내로 가자던 일을 잠시 접기로 했다. "아버지, 환갑이 지났는데 이젠 농사를 짓지 마십시오. 이제 대학을 졸업하면 아버지를 호광시키겠습구마." "말만 들어도 고맙네. 아직 손에 풀이 있을 때 농사라도 지어서 아들을 섬겨 줘야겠네. 대대로 붙여오던 밭인데 내놓긴 아깝구나." 순간 성호는 콧마루가 시큼해나고 눈물이 글썽해졌다. 성호는 두 말 못하고 집에 돌아가 외양간에서 암소를 풀어 수레에 메워  돼지우리 옆의 퇴비장에 몰고 가서 삽으로 둼을 푹푹 퍼 실었다. 그는 둼수레를 몰고 가면서 천지꽃산 기슭의 그 사래긴 밭을 쳐다보았다. "그래, 저 밭을 무심히 볼 수 없지." 성호는 아버지가 저 밭을 떠나지 않고 집착하는 마음을 조금이라도 알 것 같았다. 아버지는 조상들의 피땀이 배인 밭이라고 특별히 잘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연분홍진달래꽃이 둘러 선 천지꽃산 기슭의 밭에서 허리를 구부정하고 밭을 가는 상진과 둼을 밭에 내는 성호의 모습이 한폭의 농촌 사시풍경화와도 같이 안겨왔다.                                                                       3. 마음의 파도        세상 만물이 다 변하는데 사랑이라고 변하지 않겠는가!        성호는 아버지 말씀이 현실로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또 현실로 되면  너무나도 비극이라고 생각했다. 꽃구름이 두둥실 떴던 오전의 봄 하늘과는 달리 삽시에 서쪽의 천지꽃산에 먹장구름이 뒤덮여 오고 있었다. 성호는 도리머리를 흔들면서 땅이 꺼지게 한숨을 후~ 내쉬였다. 천지꽃산 기슭에서 소를 방목하던 목동이 이 시골을 벗어나 대학문으로 들어갔다는 것은 정말 고향 마을에서는 개천에서 룡이 난 새 신화나 다름없었다. 고향 마을에 천지꽃산의 전설이 생긴후 처음 기적적인 새 이야기가 파다히 퍼졌다. 성호는 소를 방목하면서도 늘 책을 호주머니에 넣고 가서 읽으면서 이 시골을 벗어나려고 청춘의 혼신을 불태웠다. 그리하여 집체호 교수들의 숱한 "왕자"들과 "귀공주"들이 대학에 가지 못했는데 농민의 아들인 성호가 대학으로 갔던 것이다. 성호는 집체호 영희나 해연이 대학에 가지 못한 건 별로 개의치 않았다. 교수들의 귀한 "귀공주"들인 그녀들은 모두 이제 시내에 들어가 아무 직업에나 취직해 시내에서 살 것이다. 하지만 농민의 딸인 순희는 시험에 급제하는 외에 농촌에서 벗어날 다른 방도가 없었다. 첫사랑인 그녀, 농민의 딸이란 딱지가 딱 들어붙어 풀밭에 그 고운 보름달 같은 얼굴을 파묻고 살 것을 정말 마음이 아팠다. 순희와 성호는 한 고향 마을에서 자란 죽마고우라는 것도 있지만 둘다 공부를 전 학교에 이름나게 잘한 최우수생이로서 1반과 2반의 학습위원이였다.담임 교원 경산 선생은 항상 그들 둘을 보고 시험지를 매기라고 했다. 성호와 순희는 서로 경쟁하면서도 서로 돕는 친구 사이였다. 남몰래 점점 리상야릇한 감정을 품게 됐고 이담 둘 다 커서 대학에 입학하자고 깎지걸이까지 한 사이였다. 성호는 리별의 쓰라림만 뿌려놓고 가버린 순희가 얄미웠다. 그 리별의 눈물이 소낙비로 억수로 쏟아져 내릴 지경이였다. (어쩜 이사갈 때도 간단 말을 안 하고 갈 수 있어? 오늘 또 간다는 말 한마디도 안 하고 훌 가버렸어? 오후에 시내에 함께 가서 이모부를 만나 스승을 찾아주려고 했건만.) 성호는 책을 들어도 머리에 들어가지 않고 순희의 어두운 그림자가 흐르던 수척한 보름달 얼굴만 떠올랐다. "얘야, 그만 둬라. 인연이라는 건 따로 있느니라." 옆에서 성호의 속내를 환히 꿰뚫어 본 어머니 말이다. 성호는 마지못해 책을 들여다보다가 소낙비가 뚝 멎자 책을 부랴부랴 책가방에 넣고 학교로 떠나려고 했다. "김 대장 있소?" 뜻밖에도 순희 둘째오빠 학선이 찾아왔다. "들어오오. 아니, 소낙비 오는데 어쩌다 우리 집에?" 개혁개방을 하면서 호도거리를 시작하자 며칠 전에 학선은 상진과 밭을 나누는 일로 대판 말다툼을 했던 것이다. 제비를 쥐여 천지꽃산 기슭의 밭을 나누자고 했다. 그런데 상진은 제비고 뭐고 그 밭은 자기가 가져야 한다고 고집했다. 리유는 간단했다. 그 밭은 자기 할아버지때부터 리지주네 황무지를 소작 맡아 개간한 밭이고 대대로 피땀을 몰부어 가꾼 밭이기때문이였다. 더구나 자기 큰아버지와 큰어머니가 천지꽃산에서 일본 놈들과 싸우다가 희생됐고 무덤도 천지꽃산 기슭 그 밭머리에 모셔져있기 때문이였다. "그 밭을 지주와 토비들의 철발굽 밑에서 빼앗아내고 지키려고 내가 민병을 데리고 토지개혁을 하고 토비를 숙청하느라고 싸울 때 너희들은 집에서 녀편네 궁둥이나 지켰지 뭐야?! 어림도 없어! 흥!" 좀 쌍트럽긴 했지만 학선은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황차 그는 고집을 쓰기 시작하면 벽이라도 차고 나가는 상진의 호랑이 같은 성질을 알고도 남음이 있었다. 재수령감을 비롯한 마을 사람들도 상진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해 모두 제비뽑기를 그만두고 상진에게 천지꽃산 기슭의 그 기름진 밭을 주기로 했던 것이다. 학선은 상진에게 져서 천지꽃산 기슭의 그 욕심나는 밭을 가지지 못하게 되자 숱한 사람들 앞에서 침을 퉤 뱉으면서 욕지거리를 해댔다. "김 대장한테 빌붙어서 콱 잘 살아라!” 그는 상진에게 흰자위를 부라리면서 "내 이후에 김 대장 네 집에 발을 들여 놓으면 내 이름을 바꾸겠다!"라고 두덜거렸다. 그는 밭을 재던 메터자를 쾅 던지고 휭 하니 찬바람을 일구며 자리를 떴다. 그래던 학선이 상진이네 집 안에 발을 들여놓았다. "이게 서산에서 해가 뜨지 않았는가?" 상진은 학선이 무슨 일로 왔겠다는 걸 대개 짐작하고 허리를 뒤로 쭉 펴면서 빈정거렸다. 학선은 분을 억지로 삼키면서 구들에 올라와 앉으면서 전번과는 달리 아주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다. "김 대장, 내 상론할 일이 있어 왔습꾸마." "천지꽃산밭 말은 꺼내지도 마오." 상진은 한마디 꽝 해놓고 창문 밖으로 칠색무지개가 핀 먼 동산을 쳐다보았다. "김 대장, 천지꽃산 밭이야 이 집에서 대대로 가꾼 밭인데 응당 김 대장네 붙여야 합지." "허, 듣다가 좋은 말이구먼." 그제야 상진은 학선을 되돌아보았다. "사실 오늘 온 건 김 대장네 성호와 내 막내 녀동생 순희 혼사말을 하러 왔습꾸마." 그 말에 상진과 영옥 내외는 서로 눈길을 마주치더니 일제히 성호에게 눈길을 돌렸다. 영옥은 입이 함박만해졌다. "거야 좋은 일이지." 영옥의 말에 상진은 "에헴," 하고 건 가래를 떼면서 세귀눈으로 아내를 흘겨보았다. 그는 어쩐지 학선이 좋지 않았다. 전번에 밭분배 때도 그렇고 자기 밑에서 생산대 회계를 할 때도 그렇고 어쩐지 언쟁을 일삼아 오면서 시비를 걸던 나그네였다. 그래서 성호를 순희한테서 떼놓으려고 했는데 사돈까지 맺자고 하니 억이 막혔다. (끝내 올게 왔구나. 어쩌지?) 상진은 마음을 정할 수 없었다. 저 집에서 발가벗고 접어드는 판에 심중히 처사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였다. 자칫 잘못 처사했다가 순희가 정말 며느리로 들어앉는 날에 한뉘 치란을 받을게 아닌가? "애들은 서로 좋아하는 거 같은데 성호 아버진 어떻습둥? 우리 순희 이 집에 며느리로 들어오면 꼭 시부모를 잘 모실겁니다. 우리 엄마를 닮아서 마흔 다섯까지도 애를 줄줄 낳아줄 겁니다. 보십시오. 내 처가 월순을 낳은 이태 후에 우리 엄마 글쎄 마흔 다섯에 저 순희를 낳지 않았습둥? 기적이 아닙둥? 우리 순희도 꼭 김 대장네 집에 떡돌 같은 손자를 낳아줄 겁니다. 쌍둥이를 서넛 낳아줄 수도 있습구마. 예. 김 대장네두 옛날에 애를 열이나 낳지 않았습둥? 우리 집과 이 집은 애를 수태 낳는 가문이니까. 성호와 순희는 꼭 궁합이 맞을겝구마. 어떻습둥?" 학선이 젖을 달라고 졸라대는 어린애처럼 졸라댈수록 상진은 입에 빗장을 지른 채 쇠덩이 같은 침묵만 지켰다. 학선은 지원이나 청하듯 조왕간쪽 영옥과 성호를 건너다보았다. 성호는 아버지 눈치를 슬슬 보면서 감히 입을 열지 못하는 눈치였다. "성호야, 네 말해 봐라. 순희를 좋아하지?" 성호는 대답대신 동문서답하듯 되물었다. "순희 길림으로 가지 않고 집에 있습니까?" 학선은 한숨을 후 내쉬더니 머리를 툭 떨어뜨리며 나직이 대답했다. "어제 네가 순희를 첫사랑이라고 하면서 약혼을 걸었다고 하더구나." "뭐? 어쩌고 어째?!" 상진은 더 참지 못하고 손바닥으로 구들 고래 꺼지게 탕 치기까지 했다. 날카로운 호랑이 눈길에 질겁한 성호는 "내 언제 약혼하자고 했다고 그럽니까?" 라고 발뺌부터 했다. 그제야 상진은 그럼 그렇겠지 하는 표정으로 바뀌였고 학선은 일이 틀려가는  것을 눈치챘다. "에이고, 어제 순희는 집에 돌아와서 울면서 이러다라. 성호가 자기를 좋아하는데 대학에 가지 못해 함께 살지 못해 죽을 거 같다면서 길림으로 가버렸다. 네가 순희를 좋아하면 좋아한다고 제대로 속심을 털어놔야지. 괜히 순희 마음을 뚜쟁이질해놓고 나 몰라라 하면 어쩌니?" 상진도 장차 애들 일이 어떻게 되겠는지 칼로 두부모를 베듯 하지 못하고 얼버무리였다. "차차 보기요." 무슨 일이나 언제나 단칼에 베듯 과단하게 처리하던 상진은 성호와 순희 혼사말만은 꼬리를 달고 질질 끌었다. 순희가 대학에 가면 그때 혼사말을 해도 늦지 않다는 배포유한 흥정을 하려는 속심이였다. "별 수 없지. 그렇게 하깁소." 학선은 맥없이 구들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오면서 골이 날대로 나서 속으로 두덜거렸다. "내 무슨 녀동생을 줄데 없어 빌붙는 거 같소. 배부른 흥정을 하긴? 쳇! 이제 수도 북경에서 한자리 하는 큰형님이 순희를 데려다 취직시켜 북경 아가씨로 만들 거야. 중앙간부를 매부로 삼지 않는가 두고 봐라! 흥!" 자존심이 강한 학선은 네모난 낯이 수수떡처럼 벌개 집으로 돌아가면서 욕지거리까지 해댔다. 한참 후에 뜻밖에도 기다리던 순희는 오지 않고 순희네 이상조카 월순이 성호네 집 앞에 나타났다. "성호야, 네 무슨 대단해서 우리 순희를 나무라니?!" "이건 또 뭐야?" 성호가 바깥을 내다보니 월순이 불그락푸르락해 펄펄 날뛰는 것이 아니겠는가. 월순은 바깥에 나가는 성호를 손가락질을 하면서 별의별 악담을 퍼부었다. "내 작은고모 뭐 시집갈 데 없다고 바람둥이 같은 너한테 빌붙을 거 같니?" "야, 동네 영상하게 왜 이래니? 할 말이 있으면 집에 들어와 해라!" 성호의 말에 월순은 더 고아댔다. "집에 들어가 뭘 해? 온 동네 사람들이 다 들으라고 떠들 테야!" 성호도 맞불질을 했다. "네가 떠든다고 순희를 데려올 게 아니야!" 월순은 집에 들어올 기미도 없고 울바자 굽에 서서 온 동네 떠나가게 떠들어댔다. “에이고, 그 잘난 시골 대학에 붙어가지고 작작 우쭐거려라.” 성호는 최후일격을 가했다. "야, 월순아, 혹시 네가 순희를 질투하는 거 아니냐?! 작은고모를 이기고 나한테 시집오겠으면 이렇게 떠들어서 될 일이 아니야!" 월순은 얼굴이 홍당무로 돼버렸다. 필경은 그녀도 숫처녀였으니까. "뭐라고?! 거 말이라고 하니? 난 네보다 두살이나 이상인데. 아무리 대학생이라도 그렇지. 내 주책없이 너한테 시집갈 거 같니? 죄꼬만 새끼!" “별 멍청이들이라고야. 여기 와서 떠들면 너네 작은고모를 대학생한테 시집 보낼 거 같니? 월순아, 근심하지 말라!” 언제 구경하러 왔는지 철주가 닭무리 속 거위처럼 긴 목을 빼들고 끼여들었다. “너네 순희는 이 사내대장부가 먹여 살릴 게!” “하하하!” “저 새끼 순희를 좋아하지 않니?” 마을 사람들은 일제히 철주에게 눈길을 돌리며 떠들썩했다. 철주는 숱한 사람들  속에서 고의로 목을 빼들고 고래고래 고함쳤다. “대학에 붙지도 못한 계집애들이라곤, 성호를 쳐다보는 게 원래 우둔하지. 순희는 농부라도 나한테 시집와야 편안히 살 수 있어. 헌 신짝도 제 짝이 있는 법 아니요?” 월순은 철주의 정신 나간 소리에 억이 막혀 그저 입을 딱 벌리고 쏘아볼 뿐이였다. 뒤이어 발길에 차인 강아지처럼 바자굽에서 깨갱거리며 도망치 듯했다. 성호는 월순의 뒤잔등에 대고 빈정거렸다. "네 작은고모보다 네가 시집오겠다면 혹시 고려해보겠는지 어떻게 아니? 집에 가서 네 둘째오빠와 토론하고 다시 혼사말 하러 오라!" 월순은 싸우러 왔다가 창피해 얼굴을 싸쥐고 도망가버렸다. 성호는 구경하러 모여든 숱한 마을 사람들을 둘러보면서 뒤에서 깨고소해 하였다. 서쪽 천지꽃산 쪽에 락조가 비낀 황혼 무렵이였다. 밥술을 들까 하는데 이번엔 집체호의 해연이 찾아왔다. "어마나, 어째 떠들썩했는가 했더니만요. 우리 마을 대학생이 왔구나." 성호는 숟가락을 놓고 알은 체했다. "올라오오. 식사했소?" 해연은 안경알을 춰올리더니 구들에 스스럼없이 올라오면서 "저녁을 주겠습니까?" 라고 했다. 영옥은 반갑게 맞이하면서 자기 곁에 자리를 내주었다. "여기 앉아 잡숫소." 해연은 옛날 도고한 시내 귀공주 같지 않았다. 이전에 소를 방목하는 성호가 말을 걸어도 소 닭 보듯 하면서 말대답조차 하지 않았던 것이다. 성호는 한뉘 이 시골에서 소방목이나 하면서 살 일을 생각하니 너무 섧고 답답했다. 그는 항상 천지꽃산 기슭의 풀밭에 소를 몰아놓고 산꼭대기에 올라가 산기슭의 사래 긴 강냉이밭을 내려다보면서 쓸쓸한 노래를 부르군 했다. 그렇게 날마다 노래를 부르다나니 목청이 터서 꽤나 듣기 좋게 노래를 불렀다. 산기슭에서 성호 아버지랑 함께 기음을 매던 선화랑 해연이랑 영희랑 성호의 노래소리를 들으면서 흥이 나 함께 코노래를 흥얼거렸다. 해연이랑 선화랑 기음을 다 매고 호미를 들고 퇴근할 때면 성호도 산꼭대기에서 노래를 그만 부르고 소를 몰고 집으로 돌아갔다. 성호는 돌아오는 길에 태평강 물에 손을 씻는 해연과 선화를 보고 말을 걸었다. “귀공주들 정말 선녀 같구먼.” 선화는 덤덤히 앉아 손을 씻었다. 해연은 아예 보기도 싫다는듯이 반쯤 돌아앉아 성호를 외면하면서 호미자루를 썩썩 씻더니 안경을 춰올려 다시 끼고는 훌 일어나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마을 쪽으로 가버렸다. 목동인 성호는 벼랑 우에 핀 그 진달래꽃송이들을 쳐다보지도 말았어야 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목동의 눈에도 예쁜 처녀들이 눈에 뜨이는 것을. 그때 상진이 터벅터벅 왔다. 선화는 자기 머리 수건을 벗어 성호에게 건네 주었다. “자, 손을 닦소.” 선화의 그 뜻밖의 행동에 성호는 어리둥절해졌다. “손이나 닦소.” “감사하오.” 성호는 부자연스럽게 수건을 받아 손을 닦네 하고 선화에게 넘겨주었다. “괜히 목동의 손때 묻어서 수건이 더럽혀지겠소.” 선화는 피씩 웃으면서 수건을 받아 손을 닦더니 강물에 훌훌 휭기어 씼으면서 중얼거렸다. “별 소릴 다 하오. 지금 목동이나 선녀나 다를 배 뭐 있소? 다 풀밭에 까투리처럼 머리를 파묻고 궁둥이를 쳐들고 땅파기를 하는 신센데.” 성호는 체면이나 챙겨가지고 소를 몰고 우사로 돌아갔다. 해연은 안경쟁이였지만 훤칠한 키에 배구를 잘 쳤다. 농촌에서 운동대회를 열면 항상 대대 배구팀 주공격수로 돼 그물 우로 솟아 올라 풍만한 가슴을 내밀며 늘씬한 허리를 뒤로 젖혔다가 앞으로 펴면서 놀라운 파괴력을 가진 강타를 안기군 했다. 배구에서는 해연과 성호는 손이 맞았다. 성호는 항상 감독으로 나가 해연과 함께 배구팀을 지휘해 하나 또 하나의 승리를 이끌어냈다. 그런데 해연은 배구시합만 끝나면 성호에게 한치의 곁도 주지 않았다. 하긴 대학교 교수의 귀한 공주이니만큼 이 시골에 와서 일시 빈농들의 재교육을 잘 받고 추천받아 시내로 들어가야 했다. 괜히 농부의 아들 - 목동과 자칫 흐물거렸다간 한뉘 시골  소똥무지에 물앉을 수도 있었으니까. 신분제도가 심했던 그 시절에 시내 공호와 농민, 아니 대학교수의 공주와  농부의 목동 사이에는 건너 뛸 수 없는 어마어마하게 높은 담벽과 깊고 깊은 협곡이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였다. 시내 대학교수의 딸들인 해연이나 선화는 아무리 성호가 인물이 잘나고 김 대장의 아들이라고 해도 곁을 주지 않은 것은 당연지사라고 할 수 있었다. 성호로서도 자기 처지를 아는지라 그런 선화와 해연을 두고 머리를 끄덕이지 않으면 안됐다. 성호는 결코 한살씩 이상인 해연이나 선화를 언감 생심  사랑까지 할 수 있었겠는가. 다만 신분 차이, 그 것이 섧고 한스러웠다. 아니, 염오하고 증오했다. “왕후장상도 씨가 따로 없거늘 이 세상에 시내 사람들과 농촌 사람들은 씨가 따로 있다더냐?! 흥!” 성호는 농부의 가문에서 태여난 더러운 팔자타령을 두덜거리면서 소채찍으로 소 궁둥이를 쨩, 쨩 치고 길가의 나무잎을 마구 치군 했었다. “우리 아버지도 제 노릇은 못했어. 공안국장을 그만두고 이런 시골에 올게 뭔가? 부모를 모시겠으면 그 좋은 국장 권력을 빌어 할아버지와 할머니 호구를 시내에 옮겨 갔더라면 자녀들도 시내에서 살게 됐을게 아닌가? 그럼 내 팔자도 이렇게 소궁둥이나 치는 목동 신세로 되지 않았겠는데. 헛 참. 더러운 팔자야!” 성호가 대학으로 가자 모든 신분 차이의 장벽이 일시에 와그르르 무너졌다. 농부의 아들이라고 성호와 금을 쪽 그어놓던 수녀나 비구니 같던 해연이 오늘 성호네 집에 찾아온게 아닌가! (해가 서산에서 뜨는 게 아니야? 대학 교수의 귀한 공주도 3년 째 대학시험을 쳐보더니 대학에는 아무나 가는 게 아니라고 생각된 건가? 혹시 시험공부 일로 해 지도받자고 찾아왔는가?) 점심상을 물리자 해연은 정색을 하면서 성호와 부모를 번갈아보았다. “성호한테 혼사말을 할가 해서 왔습니다.” 영옥은 반가워 인차 “성호 이젠 혼처를 구할 때도 됐소. 어디 좋은 며느리감 있소?” 하고 물었다. 해연은 꽤나 웃겼다. “이제 며칠 있으면 시내 들어가 살게 되는 처녀 하나 있어요. 인물 체격도 괜찮고 부모들은 모두 대학에서 교수 사업을 하는데요. 어려서부터 수양있게 자라서 시부모를 잘 모실 수 있대요. 그녀는 진짜 심청 같은 효성이 있는 효녀예요.” 영옥은 눈치 채지 못하고 “그래, 우리 성호는 맏이가 아니고 셋째아들이지만 아마 우릴 모실 팔잔 거 같소. 보오. 맏아들은 큰집 앞을 섰지, 둘째아들은 조선에 나갔지. 성호 밖에 없소. 이런 집에 들어올 시내 처녀 있다니 얼마나 기쁜 일이요?” “여보, 말귀도 알아듣지 못하면서. 쯧쯧쯧.” 상진은 눈을 흘겼다. 해연은 상진과 성호 눈치를 번갈아보면서 “한살 이상인데 괜찮겠어요?” 하고 계속 물었다. “거야 저희들 좋으면 나이가 뭐 대수요?” 영옥의 말에 상진은 한마디로 잘라버렸다. “성호 뭐 누나한테 장가들겠소?” 영옥은 상진을 흘겨보면서 고집을 썼다.  “나이 무슨 문제오? 예로부터 가정이 화목해야 모든 일이 잘 풀린다고 했습네. 한두살 이상이면 뭐라오? 누나 같은 녀자한테서 사랑을 많이 받고 좀 좋아서. 이 집엔 마음씨 착하고 효성이 지극한 며느리가 들어와야 하오.” 그때라고 생각한 해연은 한술 더 떴다. “제가 이 집 며느리 되면 안 되겠습니까? 성호가 음력으로 1월 생인데 제가 12월 생이니까요. 전 한달 때문에 한살 더 먹었는데요. 동갑이나 다름없어요.” 해연은 성호를 흘끔 훔쳐보았다. 성호는 속으로 순희를 떠올리면서 입에 빗장을 지른 채 덤덤히 앉아 있었다. 부모를 모셔야 할 처지에 놓인 성호는 여러 모로 대상자를 물색하지 않으면 안 됐던  것이다. 상진은 너무 답답해 “얘, 혼사 말은 맺고 끊고 해야 해.”라고 했다. 성호는 그제야 겨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천천히 생각해봅지.” 해연은 줄포를 놓았다. “알았어요. 혹시 순희나 선화 때문에 그러지 않나요? 성호씨가 대학에 갈 때 선화는 뭐 코바늘뜨개로 뜬 담배쌈지를 주었다면서? 흥, 그까짓 담배쌈지 인연이 그렇게 대단한가요? 난 시내에 살림집까지 갖춰 놓았어요.” 그 말에 영옥은 성호를 재촉했다. “야, 네가 집까지 있는 처녀와 살면 시름 싹 놓겠다. 시내에 집을 갖추려면 얼마나 힘드니?” “여보, 그 입 다물지 못하겠소?” 상진은 아내한테 눈알을 부라렸다. 해연은 훌 일어나면서 한마디 더 남겼다. “성호, 잘 생각해 보고 답복해주오.” 그때 성호도 일어나면서 한마디 하려고 하려다가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삼켜버렸다. (사랑은 나이를 그리 따지지 않소. 허나 사랑이 없는 결혼은 무의미하고 행복하지 않을 거요. 카멜레온 같은 처녀애, 이전에 목동질을 할 땐 쓴 외 보 듯하더니 지금 와선… 흥!) 순간 같은 시내 대학교 교수의 딸이지만 선화가 그래도 해연보다는 인정머리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최저한도로 머리수건을 벗어 목동에게 땀을 닦으라고 주던 선화는 최저한도로 자기한테 인간대접은 하지 않았던가! 해연은 집 안에 돌개바람을 세차게 일으켜놓고 횡 하니 가버렸다. 순간 성호는 소 방목을 하던 목동인 자기를 소 닭 보 듯하던 해연이 떠오르면서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바깥에서는 제비들이 빨래 줄에 앉아 몰려오는 먹장구름을 보면서 소낙비가 올 징조를 예고하듯이 짹짹 거리다가 집 안으로 날아 들어와 둥지에 올라갔다. 제비새끼들은 주둥이를 벌리고 먹이를 달라고 짹짹 울어댔다. 이튿날, 동녘 하늘이 희붐히 밝아오자 성호는 바삐 아침을 먹네 하고 시내로 돌아가는 길에 올랐다. 그는 순희 둘째오빠를 찾아가 순희 주소라도 알아볼가고 주춤 멈춰섰다가 발길을 돌렸다. 마음의 거센 파도 충격에 그는 학교로 돌아가는 길에 착잡한 생각에 빠지고 말았다.
127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88) 댓글:  조회:1786  추천:6  2017-11-06
                    5. 화선입당       땡볕이 재글재글 내리 쪼이는 삼복염천에 곡식과 나무들이 시들어갔다. 강냉이 이파리들은 달팽이처럼 감긴 채 말라버려 사원들의 마음이 재가루가 될 지경이었다. 사람들과 가축들도 홧홧 달아오르는 무더위를 먹고 쓰러져 갔다.       대지에는 “인민공사”, “대약진”, “반 우파투쟁”이란 세폭의 붉은 기가 새빨갛게 휘날렸다. 사원들은 허백호 서기의 명령에 따라 밭으로 일하러 나아갈 때도 세 폭의 붉은 기를 들고 나가 밭머리에 꽂아놓아야 했다. 그들은 굿이나 하듯이 바람에 펄럭이는 붉은 기를 바라보면서 일하고 쉼에는 붉은 기 아래에서 날마다 시시각각 허백호 서기의 가로사대를 들어야 했다. 항상 정치 유머로 횡설수설하던 성근은 이번에는 붉은 기 귀를 쥐어 내리쪼이는 뙤약볕을 가리었다. 그러자 사원들은 너도 나도 성근처럼 붉은 기 아래로 달려가 앉아 붉은 기 귀를 쥐어 햇볕을 가리었다. 밭머리마다 세 폭의 붉은 기는 펄럭였지만 사원들과 소들은 굶고 무더위를 먹어 하나하나 쓰러져갔다. 어느 하루, 흥수가 무더위를 먹고 까무러쳐 쓰러졌다. 상순은 두 말 없이 자기 웃옷을 벗어 흥수에게 씌워 업고 산 아래 마을로 내려갔다. 모두들 허백호 서기를 따라 입방아만 찧는 흥수가 쓰러지니 깨 고소해 했다. 지어 일부 사원들은 흥수를 업고 가는 상순을 나무랐다. “썩어지게 놔둘 게지.” “흥수한테 헐뜯기우면서도 구해서 뭘 한다오.” 허나 상순은 개의치 않고 흥수를 토성 안 위생원에 업고 들어가 진달래를 보고 흥수를 구급하라고 했다. 진달래는 황급히 응급조치를 대기 시작했다. 상순은 흥수가 사경에서 벗어나는 것을 보고 그날로 현 당위에 찾아갔다. 그는 곧추 이계삼 부서기를 만나 그간 허백호 서기가 함흥촌에 와서 이른바 심갱밀식농사법을 강제로 실행하면서 허영주 향장과 할아버지에게 우파 모자를 씌워 투쟁했고 사촌동생인 허영호 소장을 시켜 쇠고랑이를 채워 파출소에 연행한 정황을 반영했다. 사건경과를 죽 들은 이계삼 부서기는 책상을 꽝 치면서 벌떡 일어났다. “말이 아니구먼. 아무에게나 우파 모자를 씌워 투쟁하다니? 무슨 죄가 있다고 훌륭한 간부들에게 쇠고랑까지 채워 감금한단 말이오? 내 당장 허 서기를 찾아봐야겠소.” 상순은 믿음에 찬 눈길로 이계삼 부서기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이 서기, 기실 우파는 허백호 서기라고 봅니다. 안 되는 농사법으로 올해 농사를 다 망쳐 놓았습니다. 한자 깊이로 둼을 파묻고 그 위에 강냉이를 심어서야 뭘 거둘 수 있겠습니까? 밭에 가 보니 옥수수 몇 대 나지 않았습디다. 그걸 막았다가 허 사장과 할아버지가 우파 모자를 쓰고 말았습니다. 허 서기를 놔두면 온 진수해공사 농사를 몽땅 망쳐놓을 것 같습니다.” 이계삼은 사무실에서 한참이나 왔다 갔다 하며 거닐다가 우뚝 멈춰 섰다. “이 정황은 아주 중요하오. 우리 현당위에서 언제 그런 우둔한 짓을 하라고 지시했소? 자칫하면 허백호 서기로 인해서 진수해 숱한 간부들을 해치고 농사를 다 망치겠소.” 상순은 그때라고 한 걸음 더 다가서며 말했다. “허 서기는 함흥대대에서 먼저 심갱밀식을 실험한 후 그 경험을 전 공사에 보급하겠다고 합디다.” “우둔한 게 범을 잡겠소. 김 서기는 꾹 참고 허 서기 하는 대로 놔두오. 가을이 되면 자연히 실험전의 산량이 나오고 시비가 갈라질 게 아니오?” “예, 알았습니다.” “당에서는 언제든지 억울한 허 사장이나 할아버지 우파 모자를 벗겨 줄 것이요.” “예, 이 서기를 믿고 돌아가겠습니다.” 이계삼 부서기는 현 정부 대문 밖까지 나와 미더운 눈길로 상순을 바래였다. 한편 허백호 서기는 병완이네 집에서 나와 며칠 전에 이흥수의 집으로 옮겨갔다. 우파 모자를 씌운 병완과 결렬한다는 뜻이었다. 흥수는 허 백호를 등에 업고 입당하고 나아가서 병완을 밀어내고 대대 당지부 서기 자리를 차지하려고 허 백호를 자기 집으로 끌어들였던 것이다. 사실, 흥수는 항미원조 전쟁 때 상순의 친척 되는 남조선 유격대 총에 자기 동생이 죽은 후 상순네 일가에 원한을 품고 있었다. 게다가 춘실마저 상순과 애매한 관계가 있어 애까지 낳았다는 것을 알게 돼 속에서 복수의 불길이 이글거렸다. 그때부터 흥수는 처처에서 병완과 상순을 눈에 든 가시처럼 여기면서 암암리에 보복의 칼을 시퍼렇게 썩썩 갈았다. 그는 진수해로 달려가 돼지고기를 사온다, 술을 사온다 하면서 허백호에게 아첨하려고 괴춤이 다 벗어지는 줄도 모르고 달아 다녔다. 저녁에 춘실이 저녁 밥상을 챙겨 웃방에 올려 왔다. 흥수는 소주를 한사발이나 부어 올린 후 연신 자기 사발의 돼지고기 점을 집어 허백호의 국 사발에 놓아주었다. “허 서기, 많이 드십시오.” 김이 몰몰 나는 돼지고기를 보자 허백호는 연신 달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는 게걸스레 큼직한 돼지고기 점을 골라 저로 집어 급급히 입안에 넣었다. (이걸 어쩌나?) 돼지고기 점이 어찌나 따가운지 큰일 났다. 허백호 서기는 천정을 쳐다보며 혀로 돼지고기를 이 볼 저 볼로 굴리면서 물었다. “허허, 이 집 대들보 좋긴 좋다. 음, 어데서 베 왔소?” 흥수도 게걸스레 먹다가 입천정이 덴 허백호를 놀리려고 전라도 말로 유머를 부렸다. “된 천덩(정)꼴(덴 입천정꼴)에서 베 왔으니께.” 백호는 입을 하 벌려 김을 빼면서 계속 천정을 쳐다보며 물었다. “이 집은 어느 해 졌소?” 흥수도 능청을 부렸다. “게걸 년에 지었지라.” 허백호는 자기를 게걸스럽다고 놀리는 것이 괘씸했다. 그 사이 그는 돼지고기 점을 우물우물 돌리며 식히다가 겨우 꿀꺽 삼켰다. 순간 뜨거운 돼지고기점이 목줄로부터 명치끝까지 쪽 내려갔다. 허백호는 입을 딱 벌리고 눈을 감고 있다가 돼지고기점이 똥집에까지 내려간 후에야 입김을 후 내보냈다. “야, 거 돼지고기 맛 좋다.” 그때 흥수는 희죽이 웃으며 빈정거렸다. “맛있으면 많이 드시랑께. 돼지고기 너무 뜨겁잖은께(디까)? 찬물을 드릴까요?” “에끼, 이 사람아, 돼지고기를 먹고 찬물을 마시면 배탈이 날게 아닌가?” “예~ 그럼 술을 천천히 드시랑께.” 허백호는 술 사발을 들어 쭉 마시고 돼지고기 점을 집어 연신 입에 넣었다. “허, 거 술맛 좋고 돼지고기 맛있도다.” 그는 흥수의 귀에 대고 나직이 쑤군거렸다. “병완 영감네 집에서는 돼지고기는커녕 이밥도 온전히 얻어먹지 못했소. 뭐, 간부들이 죽물을 먹어봐야 사원들의 쌀 고생하는 거 안다던가. 진짜 푸대접을 하지 않겠소? 흥! 진작 당신네 집으로 왔겠는 걸.” "헤헤헤." 허백호는 흥수가 기다릴 말을 술술 쏟아냈다. “성의 정말 대단하오. 당에 대한 충성심도 대단하구. 이런 동무를 아직까지 입당시키지 않다니. 정말 병완 영감과 상순이 무슨 심보요? 이번 반 우파 투쟁에서 동무는 표현이 아주 좋았소. 이제 흥수 동무를 화선 입당을 시킬 작정이오.” 흥수는 어깨마저 으쓱해 가마 목 쪽의 춘실을 힐끔 건너다보았다. 눈치차린 춘실은 생글방글 웃으며 술상에 다가와 술병을 두 손으로 받쳐 들었다. “허 서기, 많이 드세요. 이 나그네를 입당시키겠다고 하니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자, 한잔 받으세요. 해해해.” 춘실이 술잔에 찰찰 넘치게 부어 올리면서 아양을 떨어댔다. 그녀도 흥수한테서 시동생이 처첨하게 남조선 유격대한테 사살됐다는 말을 들은 후 상순을 곱게 보지 않았다. 더욱이 상순한테 버림받은 앙금이 세월이 흐르고 흘러도 쉽게 풀어지지 않았다. 진짜 사랑과 원한이 마구 뒤범벅이 돼 그녀를 속이 부글부글하게 괴롭혔다. 그래서 몇 해 전에도 상순을 집에 불러들여 함정에 빠뜨리려고 했던 것이다. 허백호는 술잔을 받아 쭉 굽을 내고 나서 “아, 그 술맛 좋다.”라고 하며 술잔을 술상에 내려놓았다. 그는 흥수와 춘실을 번갈아 보며 호언장담했다. “근심하지 마오. 입당뿐이겠소? 장차 병완 영감 대신 함흥대대 당 지부 서기를 시킬 예산이오. 이 마을에서 병완과 상순의 뿌리를 찍어내야 인민군중들이 허리를 펴고 살 수 있소.” 흥수와 춘실은 너무 놀랍고도 기뻐 서로 마주 보며 연신 머리를 조아리었다. “허 서기, 정말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춘실은 손으로 머리카락을 풀어헤치며 걸작아양을 떨었다. “머리라도 잘라 신발을 지어드리겠어요.” "아니, 아니, 그럴 필요까진 없소. 술이나 잘 마시면 됐소. 허허허. 성의 참 대단하구려." 허백호는 술이 거나하게 됐지만 아첨인지 추파인지 보내는 정에 함빡 젖은 춘실의 눈길이 너무 따가와 슬쩍 피했다. “흥수 동무, 정치만은 나한테서 배워야 하오. 어, 거, 이제 우파분자 병완을 투쟁할 때 앞장서 구호도 부르고 투쟁하란 말이오. 그래야 화선입당하지.” 흥수는 멍해 허백호를 쳐다보다가 천천히 입을 뗐다. “화선입당이란 건 뭐신고?” “어, 거 전, 전쟁터에서 입, 입당한단 말이오.” “예-농사를 짓는데 무슨 전쟁이락꼬?” 허백호는 얼근이 취해 손을 내 휘저으면서 가르치려 들었다. “반 우파 투쟁은 총소리 나지 않는 전쟁이란 말이오. 반 우파투쟁을 잘하면 화, 화선입당을 할 수 있소.” 흥수는 머리를 끄덕이면서도 앞장서 병완을 투쟁하고 구호를 부를 일을 생각하니 저도 몰래 한숨이 나왔다. “어째 부담스럽소? 한, 한숨부터 자꾸 쉬, 쉬면서. 입당하려면 똥담이 커야 하오. 이번 반, 반 우파 투쟁은 병완이 사느냐 흥수가 죽느냐는 생사결판을 내는 전쟁이란 말이오? 알만 하오?” 그 말에 뭔가 알리는지 흥수는 속으로 입당해 함흥대대를 쥐락펴락 하려면 양심을 어기고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다고 굳게 마음을 다잡아먹었다. “구호를 어떻게 부르꼬?” “우파분자 김병완을 타도하자! 알만하오?” 흥수는 들었던 술병을 밥상에 내 놓더니 허백호를 쳐다보았다. “허 서기, 김 서기를 타도하다니? 그렇게 엄중한 착오입니까?” 취기가 올랐던 허백호는 정신을 차리며 눈알을 희번득거렸다. “그렇소. 하늘에 사무치는 죄를 지었소. 그 영감은 3대 혁명 붉은 기를 반대했소. 대약진을 하려면 한 헥타르에 10만근을 내야 하오. 난 올해 함흥대대에서 한 헥타르에 5만근을 내고 명년에는 8만근, 그 다음해에는 10만근을 내게 하겠소. 이제 함흥대대에서 5만근만 내면 전 공사에 그 선진경험을 보급할 예산이오. 이 중대한 임무를 흥수 동무가 병안이 대신 맡아야 하겠소. 병완 영감을 타도하지 않고 어떻게 동무가 대대 당지부 서기로 올라가오? 올라갈 자리를 내야 올라가지. 할만하지?” 흥수는 “예~ 병완 영감을 타도해야 내가 올라가지.”라고 하며 머리를 끄덕이면서도 농사는 허백호 요구를 만족시킬 자신이 없었다. (한 헥타르에 어떻게 5만근을 낼까?) 흥수가 생각해도 한심한 생산량이었다. 허백호 서기는 흥수의 그런 속심을 알고도 남음이 있었다. 하긴 그도 한 헥타르에 5만근을 낼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그도 상급의 지시를 어길 수 없었고 한번 기적을 창조하고 싶었다. 그는 그런 속내를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흥수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근심하지 마오. 우선 입당하고 당 지부 서기는 천천히 해도 되오. 먼저 상순과 병완 두 당 지부 서기를 이용해 5만근 실험을 해 보기요. 5만근을 내지 못하면 그 놈들의 책임이 아니오? 허허허.” 그제야 흥수는 조금 시름 놓을 수 있었다. “내일 우파투쟁대회에서 앞장서 ‘김병완을 타도자하!”고 구호를 높이 부르고 투쟁하오. 그럼 인차 입당부터 시키겠소.” 백호는 한미디 덧붙였다. "서기 되려면 말투부터 고치라고. 함흥대대엔 대부분 함경도 분들이라고. 계속 전라도 말 쓰면 민심을 얻는데 걸릴 거 같소." "예- 입당할락꼬, 아니, 저 말버릇 돼갖고. 무슨 조건 많은디. 고향 말씨도 못 쓰는갑디?" 흥수가 부르튼 소리하자 백호는 내심하게 타일렀다. "글세 차차 고치라니까. 이게 정치요." (정치 진짜 무지무지 더러운디.) 흥수는 한숨을 내쉬면서 술병을 들어 허백호에게 붓고 또 부어 올리고 개여 올렸다. 이튿날 오전, 사원들이 기음을 한 쉼 맨 후 쉴 참이었다. 허백호는 사원들을 향해 “몽땅 밭머리에 모이시오!” 하고 호통 쳤다. “또 무슨 일이야?” 사원들은 자기 모자에 우파 모자가 씌워질까봐 겁나 목을 움츠러뜨리며 밭머리에 양떼 몰리듯이 모여왔다. 허백호는 독기어린 눈길로 파출소에서 끌어온 병완과 허영주를 쏘아보며 아주 격앙된 목소리로 을러멨다. “우파분자 김병완과 허영주를 끌어내라!” 병완과 허영주는 쓰거운 표정을 지으면서 밭머리에 뿌리내린 듯이 까딱하지도 않았다. “우파분자들은 듣지 못했는가?!” 허백호 서기가 고함치자 흥수가 씽 달려 가더니 병완의 뺨을 찰싹 갈겼다. “영감, 나오지 못하겠는가?” 흥수가 재차 영주 사장의 뺨을 갈기려고 손바닥을 휘두를 때었다. “이 놈 새끼!” 병완이 흥수의 손목을 덥썩 잡아 비틀며 허망 밭머리에 태를 쳐놓았다. 뜻밖에 벌어진 사건에 모두들 깜짝 놀랐다. 흥수는 대가리부터 흙에 처박혔다. 그는 뻘건 피와 흙이 처 발린 상을 쳐들고 신음소리를 내면서 겨우 일어났다. “우파분자! 감히 나를 쳐?!” 뒤이어 그는 병완을 쏘아보며 주먹을 불끈 쥐고 높이 쳐들더니 목이 터지게 구호를 불렀다. “우파분자 김병완을 타도하자!!” 병완과 허백호의 독기 어린 눈길이 공중에서 부딪치는 순간 보이지 않는 번개가 번쩍이고 우레가 천지를 진동했다. 허영주 사장도 한 치의 양보 없이 대들었다. “허 서기, 내 무슨 잘못이 있다고 우파요, 뭐요 하고 떠드오?” 허백호는 어이없다는 듯이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당신, 그래 죄를 모르겠소?” 허영주는 우쭐 일어나 억울함을 호소했다. “난 이제껏 중국 공산당에 충성해온 공사 간부요. 항일전쟁시기 당신이 영월구에서 민병 련장이나 할 때 나는 조선의용군을 따라 태항산에서 일제 놈들과 싸웠소. 당신이 민주연군에서 련장을 할 때 나는 이계삼 서기와 함께 이 함흥 촌의 첫 당 지부를 세웠소. 우리 공사 어느 골안에 내 발자국이 찍혀 있지 않는 곳이 있소?…” “그만 지껄여? 자기 죄를 뉘우칠 대신 숱한 사원들 앞에서 아직도 자기 자랑을 잔뜩 늘여 놓겠는가?!” 허백호는 숱한 사원들 앞에서 수세에 몰릴 수 없었다. 그는 파출소 소장 허영호를 한쪽으로 불러 뭐라고 쑤군거렸다. 병완과 허영주를 노려보던 허영호 소장이 민경들에게 손을 홱 휘둘렀다. “우파분자들에게 고깔모자를 씌워!” 민경들은 다짜고짜 덮쳐들어 병완과 허영주에게 미리 준비해온 고깔모자를 씌우고 양팔을 붙잡아 사원들의 앞에 내 세웠다. “내 무슨 죄 있는가?” 허영주 사장이 팔을 마구 뿌리치며 반항했다. 허백호는 흥수를 돌아보며 눈짓했다. “우파분자 투쟁대회를 시작하겠습니다.” 흥수가 앞장서 투쟁했다. “허영주 사장은 우리 위대한 중국 공산당을 모욕한 죄가 있으니께." 그는 눈을 흘기는 백호의 눈치를 채고 제꺽 억지로 말투를 고쳤다. "이전에 우리 생산대에서 범바위골에 갔을 때 허영주는 ‘사원들이 배불리 먹으면 사회주의고 공산주의’라고 했습니다. 또 함흥대대의 경험을 온 진수해공사에 널리 보급했습니다. 병완 영감과 상순은 허영주 사장의 반동노선을 그대로 집행한 원흉이라니께. 아니, 원흉입니다. 우리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는 그저 배불리 먹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까? 마땅히 반 당 반 사회주의 우파분자들을 잘 투쟁해야 합니다. 저런 우파분자들이 대를 물려받으면서 우리 함흥대대를 통치해서야 됩니까? 저 병완 영감과 상순만 봐도 나는 눈에 쌍불이 난다니께. 저 놈들이 당원이노라고 얼마나 우쭐거렸는지 압니까?” 허백호는 흥수가 개인 보복하는 듯이 투쟁하는 것 같아 눈짓했다. (어쩜 시켜준 서방질도 못해?) 눈치챈 흥수는 말머리를 제꺽 돌렸다. “저 허영주 사장은 부패분자입니다. 전번에 범바위골에 왔을 때 상순이 준 멧돼지고기랑 사슴고기랑 수태 가져다 처먹었습니다. 어찌 공산당 간부로서 굶어 사는 백성들에게 쌀이나 돼지고기를 가져다 줄 대신 뭔가요? 배때 터지게 막걸리에 멧돼지 고기를 수태 처먹고 수태 챙겨 간단 말입니까? 원 격분해서!” 흥수는 또 병완을 치려고 주먹을 불끈 틀어쥐고 다가섰다. 허나 병완의 불길이 이글거리는 세 귀 눈을 보자 질겁해 꼬리를 사타구니에 차고 뒤로 한걸음 물러섰다. 황급해난 허백호는 흥수를 한쪽으로 불러 나직이 말했다. “멧돼지 고기 말은 더 하지 마오. 괜히 난장판을 만들겠소.” 격분한 흥수는 언성을 높였다. “그래 공짜로 멧돼지 고기를 처먹은 죄를 투쟁하지 않으면 뭘 투쟁하라는기오? 아, 저 투쟁하랍니까?” 백호는 허영주의 눈치를 흘끔 보며 흥수의 팔소매를 잡아 당겼다. 그제야 흥수는 침을 퉥 뱉으며 뒤로 물러섰다. 다른 사원들은 눈치만 보면서 투쟁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자 허백호는 이번에는 오옥선 교원에게 고깔 모자를 씌워 한참 투쟁했다. 그런데 오옥선이 또 야단칠 줄이야. "내 죄보다 허백호 서기 죄 더 큽니다." "뭐? 어찌고 어째?" 허백호는 눈이 휘둥그래졌다. 사원들은 모두 허백호와 오옥선을 번갈아보았다. 오옥선의 입은 칼날이었다. "삼도만토비 숙청 때 나팔수를 했던 저의 오빤 저 백호 때문에 희생됐습니다. 저 놈이 산중턱에 우리 오빠랑 세워놓지 않았어도 놈들의 총에 맞아 희생되지 않았을 겁니다. 한 개 련이나 되는 민주련군 전사들을 토비들의 탄알받이로 산중턱에 세워 놓은 죄보다 더 큰 죄가 뭡니까?" 허백호는 갑작스레 고함쳤다. "이 년, 주둥일 닥치지 못해?" 그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흥수가 씽 달려가더니 옥선의 입에 수건을 틀어막았다. 백호는 식은 땀을 쓱 닦더니 놀라운 일을 공포했다. “나는 진수해공사 당위를 대표해 반우파 투쟁에서 이흥수 동지의 적극적인 표현에 근거해 화선입당을 비준한다는 것을 선포합니다. 동시에 이흥수 동지를 병완 영감 대신 함흥대대 당 지부 서기로 임명합니다.” 허영주는 쓴 웃음을 짓더니 허백호를 손가락질 하면서 따지고 들었다. “당의 조직원칙이 있소? 없소! 당신 마음대로 입당시키오?” 흥수는 손바닥으로 낯빤대기의 피 묻은 흙먼지를 쓱 닦으면서 입이 당나발이 돼 헤벌쭉거렸다. “감사합니다. 허 서기, 난 토비숙청과 해방전쟁, 항미원조 전쟁에 가서 상순을 따라 다니며 싸우면서 왼팔에 부상당해도 저 자들이 압제하면서 입당시키지 않습다니께. 헌데 오늘 입당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정말 감사하다니께.” 흥수는 허백호 서기 앞에 무릎을 꿇고 절까지 했다. 허백호는 숱한 사원들 앞이라 너무 과분한 감이 들어 황급히 흥수를 부축해 일으켜 세웠다. 허나 흥수는 허백호의 바지가랭이를 잡고 눈물을 줄줄 흘리기까지 하는 추태를 보였다. 갑자기 허영주 사장이 고깔모자를 벗어 밟아 버리더니 버럭 고함쳤다. “허 백호, 당신은 내 범바위산에서 가져온 멧돼지고기를 먹지 않았는가?! 당신의 논리대로면 당신도 부패분자고 우파분자요!” 사원들 속에서는 소란이 벌어졌다. “에이, 검정개 돼지 흉을 한다더니. 쯧쯧쯧.” “허백호 서기도 우리 생산대 멧돼지고기를 먹은 우파분자구먼.” 어떤 사원들은 뒤에서 이러쿵저러쿵 떠들어댔다. “기실 우리 대대 농사를 망쳐 먹은 게 누구요?” “저 허 서기야.” 지어 어떤 사원들은 나직이 허 서기를 우파 모자를 씌워 투쟁해야 한다고 했다. 바빠 맞은 허백호는 황급히 고함쳤다. “오늘 투쟁대회는 이만 하겠습니다. 너무 오래 쉬고서야 언제 5만근 고지에 오르겠소?” “아니오! 오늘 회의는 계속 해야겠소!” 모두들 소리 나는 쪽을 바라보니 사원들의 뒤에서 이계삼 부서기와 상순이 앞으로 걸어 나왔다. 허백호와 허영호는 이계삼의 앞으로 다가서며 굽실거렸다. “헤헤헤, 이 서기 언제 왔습니까? 진작 온다고 알렸더라면 허영호 소장을 시켜 찌프차에 모셔 왔겠는 걸 그랬습니다. 헤헤헤.” 이계삼 부서기는 허백호를 거들떠 보지도 않고 사원들을 향해 소리 높이 말했다. “여러분, 여러분들의 말씀이 옳습니다. 병완 서기와 영주 사장은 아무런 착오도 없습니다. 나는 현 당위를 대표해 정중히 선포합니다. 허영주 사장과 김병완 서기에게 우파 모자를 씌운 것은 좌적인 착오입니다. 이 두 분은 우리 당의 실사 구시한 원칙을 견지했고 혁명에 공헌을 아주 많이 한 훌륭한 간부입니다!” 숱한 군중들이 우레가 터질듯이 박수쳤다. 이계삼 부서기는 계속해 연설을 했다. “올해 함흥대대 농사를 망쳐 먹은 허백호 서기야 말로 함흥생산대대 집체와 사원들의 죄인입니다. 저 옥수수 밭을 보시오. 곡식이 나게 만들어 놓았는가?” 사원들은 둼 구덩이 우에 몇 대 자라지 못한 옥수수, 말라 누렇게 된 옥수수를 바라보며 장탄식했다. 뒤이어 이계삼 부서기는 허백호를 돌아보며 훈계했다. “허 백호 서기는 제 정신이 있소? 둼 구덩이 위에 옥수를 심어 5만 근을 낼 수 있소? 농사를 모르면서 눈 먼 장승이 길을 가리키듯이 농사를 지휘하다니? 정말 머리가 뜨거워져도 한심하구먼.” 허백호도 지려고 하지 않았다. “이제 저쪽 밭에서 옥수수 묘를 떠다가 심으면 풍작을 거둘 수 있습니다.” “5만근을 내지 못할 땐 어찌 하겠소?” “당성으로 보장하겠습니다!” “그렇게 장담하지 마오. 당 간부로서 뭐나 실제로부터 출발해 말해야 하오. 당장 저 둼 구덩이를 흙으로 메우고 강냉이모를 떠다 심소. 이제라도 늦지 않소.” 허나 허백호는 고집을 부렸다. “이대로 심갱밀식농사법을 쓰면 5만근을 꼭 낼 수 있습니다.” 여기저기에서 “와-” 하고 웅성거렸다. 상순과 눈짓을 맞춘 이계삼은 돌아서 허백호를 보면서 “좋소. 저 한 헥타르 농사를 망칠 셈 치고 허백호 서기의 호언장담이 맞는가 보기요.”라고 했다. 뒤이어 이계삼 부서기는 돌아서더니 사원들을 향해 높이 외쳤다. “지금 반 우파투쟁이 고조에 이르렀습니다. 허나 죄 없는 병완 서기와 허영주 사장에게 우파 모자를 씌운 것은 착오입니다. 함흥대대와 진수해공사의 사원들을 동원해 배불리 먹고 잘 살게 하겠다고 황무지를 개간했는데 무슨 죄가 있단 말입니까? 우리 당원들이 혁명을 왜서 합니까? 바로 우리 사원들이 잘 사는 그 날을 위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위해 분투하는 것이 아닙니까? 때문에 나는 현 당위 반 우파투쟁 사무실을 대표해 병완 동지와 허영주 동지에게 우파모자를 씌운 것은 잘 못됐다는 것을 선포합니다. 또한 당의 조직건설원칙도 없이 아무나 입당시킬 수 없습니다. 흥수 동무의 화선입당은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선포합니다!” 흥수는 김이 빠진 공처럼 밭머리에 풀썩 물앉았다. 사원들은 우쭐거리던 흥수가 소낙비를 맞은 병아리 상이 된 흥수를 보고 입을 가리며 키득거렸다. 춘실은 어이없어 나그네와 허백호를 번갈아 보며 바른 총질했다. “허 서기 말도 쓸데 없습니깐. 하루 아침에 화전(화선)입당 했다가 한 시간도 안 돼 당원에서 떨어집니까?” 허백호는 창피해 머리를 들지 못했다. “에구, 나그네도. 내가 뭐랍데? 정치에 삐치지 말라는데도. 꼴 보기 좋게 됐구먼.” 흥수는 마른 흙덩이를 쥐어 춘실에게 뿌리면서 벌떡 일어났다. 춘실은 목을 움츠려 뜨리며 주먹을 쥐고 쫓아오는 흥수를 피해 밭고랑을 타고 달아났다. 흥수는 숱한 사람들 앞인지라 창피해 여편네를 쫓다가 말고 이계삼에게 따지고 들었다. “조직원칙이란 게 뭐 길래? 이제 금방 입당한 나를 당에서 쫓아내는기우?” 이계삼은 답답한 표정을 지었다. “한 사람의 입당은 결코 어느 책임자 개인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요. 반드시 본인이 입당 신청서를 제기한 후 기층당지부에서 당원들이 민주토론해 비준한 후 상급 당위에서 비준해야 하오.” 흥수는 우둔한 소리를 했다. “그래 허백호 서기는 상급 당위 서기 아닙니까? 허 서기 비준했으면 됐지. 무슨 잔소리 그리 많습니까?” 이계삼 부서기는 손으로 입을 싸쥐고 울컥 치미는 웃음을 겨우 막았다. “허백호는 개인이지 진수해 당위를 대신할 수 없소. 함흥촌당지부에서 당원들이 토론도 하지 않았소. 황차 동문 입당신청서를 쓴적이나 있소?” 여기저기서 웅성거렸다. “저런 걸 어떻게 입당시키오?" "간에 가 붙고 슬 개에 붙는 자식. 흥!” 상순도 끼어들었다. “소불알처럼 이 볼 쳤다 저 볼 쳤다 하는 놈 새끼!” 흥수는 상순의 독기 서린 상순의 세귀눈길을 피해 꼬리를 사리더니 휑하니 산 아래로 내려가 버렸다. 정말 낙태한 상 싶은 피투성이 꼴은 보기도 구차했다. 이계삼 부서기는 사원들을 보고 “회의가 끝났으니 이젠 일하러 가고 당원들만 남으십시오.”라고 했다. 이윽고 맨 당원들만 남자 이계삼 부서기는 허백호를 한 식경이나 비평했다. “허 서기는 조직 관념이 있소? 없소? 어떻게 우파 모자를 함부로 마구 들씌우고 투쟁까지 하오? 어떻게 개인의 명의로 흥수를 입당시킬 수 있소? 동무는 정신이 있소? 동무의 그 무슨 심갱밀식농사법대로 해서 농사를 제대로 할 수 있소? 동무의 심갱밀식농사법 대로 하지 않으면 당을 반대하고 사회주의를 반대한 거요?” 이계삼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산골 안으로 내려가는 흥수의 잔등을 가리키면서 삿대질을 했다. “어떻게 지부에서 토론한 적도 없는 흥수를 개인의 명의로 입당시킨다고 선포하오? 정말 한심하오! 허백호 서기는 당장 현 당위에 검사 서를 써서 바치오. 재차 이런 엄중한 착오를 범한다면 당의 기율로 호되게 징벌하겠소.” 뒤이어 이계삼 부서기는 병완과 허영주를 위문했다. “얼마나 억울했겠소.” “괜찮습니다. 그래야 우리 당내 두 갈래 노선 투쟁이 얼마나 치열한가를 알 수 있지.” 허영주 사장은 개의치 않았다. 병완은 고개를 숙이는 허백호를 험하게 쏘아 볼뿐이었다. 맑게 개였던 하늘에 불시에 먹장구름이 뒤덮여왔다. 저 멀리 칼산과 패용천산에 불줄기가 쭉 뻗치더니 하늘땅을 진감하는 우레 소리가 터졌다. 감 때 사나운 폭풍이 불어오며 밤알만큼 한 우박이 마구 쏟아져 옥수수 이파리를 마구 두드려댔다. 사원들은 호미를 쥐고 마을로 달려 내려가면서 올해 농사를 망쳤다고 하늘을 원망했다.                                                                                        6. 집체식당        하늘도 무심하지. 억수로 쏟아지는 우박이 심갱밀식을 하지 않은 밭의 옥수수를 덮쳐 이파리가 펑펑 구멍이 뚫리며 다 떨어졌다. 딱 마치 벌레가 갉아 먹고 남은 옥수수 대처럼 앙상해 볼 품 없이 돼버렸다.        사원들은 하늘을 원망하고 허백호를 원망하면서 한숨을 땅이 꺼지게들 쉬었다.      설상가상 좌적 바람이 세차게 불어쳐 우로부터 마을마다 생산대를 단위로 집체식당을 차리고 집체 화식을 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모두들 또 허백호 서기가 마을 사람들을 못살게 군다고 야단쳤다.      허백호 서기는 회의를 연다,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선전고동했다.      "집집마다 따로 가마를 걸고 밥을 지어 먹으면 사심이 생기오.  그 사심이 자본주의 싹을 틔우게 되오.  때문에 집체식당을 차리고 큰 대국가마를 걸고 죽을 끓여 똑같이 나눠 먹어야 하오."     함흥대대와 조개덕대대에서는 별 수 없어 허백호의 지시대로 마을에 집체식당을 차리고 큰 대국가마를 걸었다. 사원들은 집체식당에 모여들어 천정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멀건 죽을 한 사발씩 얻어먹고 주린 배를 달랬다.    성근은 이발 빠진 사발을 들고 명옥이 떠주는 죽을 한 사발 받아가지고 가면서 두덜거렸다.     “에구, 요걸 먹고 어떻게 온 하루 기음 매오?”     그러자 저쪽에서 멀건 입쌀 죽을 후룩후룩 마시던 허 서기가 힐끔 성근을 흘겨보더니 당장 반박해버렸다. “쓸데없는 소릴 작작 하오. 해방 전에는 그런 죽물도 없어 못 먹었소. 푸성귀로 주린 배를 달래던 세월에도 황무지를 개간했소. 당의 덕분에 흉년세월에도 죽물이라도 먹으면 감사한 줄 아오.” 허나 성근은 도리머리 질을 해댔다. “내 소련 원동에서 살아 봐서 아오. 쓰딸린이 영도하던 소련에서는 이렇게 집체식당을 차리기까지는 하지 않았소. 허 서기는 정말 괴상한 생각을 많이 내놓는 사람이오.” 허백호는 성근을 쏘아보며 위협했다. “말을 조심하오!” 그러나 성근은 삐죽한 턱을 흔들며 계속 두덜거렸다. “소련의 소들도 굶어 죽을 까봐 꼴호즈라는 집체 농장으로 가기 싫어하데. 황차 사람을 소들처럼 우사 같은 집체식당에 몰아넣고 멀건 물을 먹으라고 하니. 원, 어떻게 살겠소? 사람마다 배때 크기가 다르고 식미도 다른데 말이오. 맨날 멀건 죽물만 나눠먹고 어떻게 산단 말이오? 이제 내 말이 맞지 않은가 두고 보오. 집체식당을 마스고 이전처럼 집집마다 자기 가마에 끓여먹지 않는가? 쯧쯧쯧.” 사원들은 머리를 끄덕이더니 죽물을 후룩후룩 마시면서 허백호 서기의 눈치를 살폈다. 허백호는 버럭 고함 질렀다. “성근이! 어째 우파 모자를 쓰고 싶소?!” 그제야 성근은 혀를 홀랑 내밀더니 목을 움츠리며 흘끔거리며 죽 사발을 들고 한쪽 구석에 쫑그리고 앉아 후룩후룩 마셨다. 그는 홀쭉한 두 볼이 볼록하게 죽물을 물었다가 꿀꺽 삼키더니 또 입을 놀렸다.       “에구, 야야, 이런 멀건 물을 먹고 어떻게 둼을 져 산꼭대기까지 나르겠니?” 그는 사발을 들고 부뚜막 앞에 가서 명옥이 앞에 사발을 내밀며 비난사정을 했다. “한 사발 더 주오. 어디 허기 나서 살겠소?” 그러자 창욱이랑 병수랑 죽을 퍼 마시던 숟가락을 멈추고 모두 명옥을 쳐다보았다. 명옥도 어떻게 했으면 좋을지 몰라 애들에게 죽을 퍼주던 바가지를 들고 상순과 허백호를 쳐다보았다. 허백호는 성근을 쏘아보며 또 호통쳤다. “성근이, 정말 경을 칠 예산인가? 집체식당에서 주는 대로 먹을 게지. 뭐 특수해서 게걸스레 더 먹겠다고 떠드오?” 성근은 이발 빠진 사발을 구들에 달랑 내려놓으면서 두덜거렸다. “에구, 말밑천도 못 찾겠다. 배고파도 더 먹지 말고 입을 틀어막고 있으라오?” 창욱이랑 병수랑 성근을 흘금 곁눈질해 보며 맥없이 숟가락질을 했다. 허백호는 허기진 배를 글어 안고 후루룩후루룩 죽을 마시는 남녀노소를 향해 소리쳤다. “여러분, 우린 일제 놈들의 철발굽 아래서 살 때 언제 이런 입쌀죽을 다 먹어 보았겠습니까? 우린 절대 해방 전의 쓰라림을 잊지 말고 오늘 공산당의 영도아래 죽이라도 먹을 수 있는 행복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허백호 서기는 피뜩 기발한 생각이 떠올라 상순을 보고 바깥에 나가자고 했다. “내게 좋은 사상교양방법이 하나 생각나오.” 허백호는 큰 발견이나 한 듯이 상순을 돌아보며 팔을 잡아끌고 바깥으로 나갔다. “내게 사원들의 사상교양을 할 묘안이 있소.” “?” “저녁에 보드라운 게가루로 떡과 죽을 만드오.” 상순은 세 귀 눈을 치떴다. 바깥에는 숱한 사원들이 허기진 배를 끌어안고 죽물을 얻어먹으려고 모여오고 있었다. “동무는 왜 그렇게 정치 민감성이 없소?” 상순은 화났다. “그래 사원들에게 겨죽을 먹이면서 오늘이 행복하다고 교양할 예산이오?” 쓴 표정을 짓는 상순을 보고서도 허백호는 계속 했다. “용케 알아들었구먼. 동무는 총명하고 촉기 빠른데 욱 하면 성질을 내는게 흠이오. 왜 자꾸 내 말에 의문표를 달면서 그대로 착착 하지 않소? 그래 동무보다 내 뭐나 모르는 거 같소?” 상순은 머리를 숙이며 손사래를 쳤다.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그럼 뭐요? 진수해파출소 소장을 시키지 않았다고 그러오?” “아닙니다.” “그럼 뭐요?" 허백호는 눈썹을 치켜 올리며 상순을 뚫어지게 쏘아보았다. 상순은 정색했다. 그는 나이나 경력이나 비슷한 허백호한테 항상 존대를 썼다. “제가 파출소 소장을 하고 싶어 하는 거 같습니까? 그럼 왜 영월구에서 국장마저 하지 않고 마을로 돌아왔겠습니까? 저는 다만 군중들을 이끌어 혁명하면서 부모에게 효성을 하려고 했을 뿐입니다. 군중들이 쌀독을 빡빡 긁고 부모에게도 제대로 효성을 하지 못해 마음이 아픕니다. 전 허 서기를 존중합니다. 자꾸 과거 못 살던 때와 비기자고 하니 납득이 잘 되지 않습니다. 생산을 틀어쥐어 알곡생산량을 올립시다. 그래야 백성들이 잘 살고 우리 사회주의 우월성을 만천하에 알릴 수 있습니다.” “누가 틀어쥐지 않소? 나도 한 헥타르에 5만근을 올리라고 하잖소?” 허백호는 말머리를 돌리며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좌우간 저녁에 겨떡과 겨죽을 쑤라고 하오. 과거를 회상해야 오늘의 행복을 알 수 있소. 군중들이란 양떼와도 같아 사상교양을 하면서 에우는대로 가기 마련이오.” 상순은 도리머리를 흔들면서 어깨 으쓱한 허 서기를 흘겨보았다. 저녁에 명옥은 아낙네들과 함께 허백호 서기의 말대로 제일 보드라운 벼 겨로 죽을 쑤었다. 밭에 나가 역사를 하고 돌아온 사원들은 저녁에 주린 배를 안고 삼삼오오 식당에 모여들었다. 허백호는 멀건 죽사발과 게 떡을 올린 밥상에 마주 앉은 사원들을 보고 연설을 시작했다. “사원 여러분, 우리 빈농들은 해방 전에 일본 놈들의 철 발굽 밑에서 압박과 착취를 받으면서 겨떡도 변변히 먹지 못하면서 우마와도 못한 거지생활을 했습니다. 지금 많은 사원들은 해방 후 당과 정부의 영명한 영도아래 배불리 먹고 살아 왔기에 과거의 쓰라림을 잊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절대 해방 전에 일제와 지주 놈들의 가혹한 착취와 압박 밑에서 허덕이던 고통과 계급투쟁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겨떡과 겨죽을 잡숫면서 과거의 쓰라림을 회상하면서 잊지 말고 오늘의 생활이 얼마나 행복하고 공산당이 얼마나 위대한 가를 알아야 합니다.” 여기까지 연설하고 나서 허 백호 서기는 죽 사발을 들었다. “자, 여러분, 이제부터 과거의 쓰라린 맛을 봅시다.” 허백호와 상순이 먼저 겨죽사발을 들어 숟가락질을 했다. 목이 꺽꺽 막혀 겨죽이 목에 걸려 캑캑 거렸다. 허백호는 외까풀눈에 눈물이 글썽해지기까지 했다. 그것이 사상교육을 하기에는 안성맞춤 했다. 그는 손으로 눈물을 닦으면서 연설했다. “여러분들도 눈물 나는 이 겨죽을 자셔 보십시오. 이건 당에서 준 정치임무입니다. 어서들 드시오!” 그는 사원들 속으로 돌아다니면서 겨죽을 먹는 것을 감독했다. 울며 겨자 먹기로 사원들은 물을 떠다 한 모금씩 마시면서 껄껄한 겨죽을 억지로 넘겼다. 성근은 겨죽그릇을 밥상에 내려놓았다. “야, 이거 어디 먹겠소?” 그는 겨에 걸린 목을 만지더니 삐죽한 턱을 가로 흔들면서 두두 거렸다. “내 소련에 있을 때 쓰딸린은 이렇게 한 적이 없소. 진짜 소련 꼴호즈 보다도 더 하오.” “또 또, 쏘련 사회주의를 비방하겠소? 말 주의하라고. 박성근은 어째 빈농의 본색을 잊었는가?” 허백호가 성근을 흘겨보며 하는 말에 흥수가 호응했다. “성근이, 이 맛있는 겨죽을 먹으라면 먹을 게지 무슨 잔말이 그렇게 많은고?” “또, 또, 또 나선다. 에이유, 저 하루살이 당원동무 보기도 싫어서 어떻게 살겠소?” 성근은 쓴 오이 보듯 하면서 흥수를 손가락질했다. “당신은 어째 아랫마을 윗마을 정치에 그리 삐치오? 그런다고 입당시킬 거 같아? 화선입당했다가 하루도 못돼 퇴당당하고서도 부끄럽지 않어?” 흥수가 입을 짝 벌린 채 멍해 서있었다. 그때 상순이 한마디 했다. “오늘 겨 떡을 먹을 때 흥수가 ‘이 맛있는 겨죽을 먹으라면 먹을 게지’라고 말하지 않았소?” “허백호 서기 먹으라는 죽을 그래 맛있게 먹지 않고 어쩔고?” “오늘 겨죽이 맛있고서야 어찌 과거의 쓰라린 생활을 회상할 수 있소?” “허허허.” “호호호.” 상순의 말에 모두들 흥수를 우습다고 죽사발을 든 채 주린 배를 끌어안고 웃어댔다. 사원들은 억지로 물에 겨죽과 겨 떡을 삼켰다. 이때 흥수가 또 나섰다. 그는 주먹을 불끈 쥐고 구들 복판에 뛰어 나가더니 구호를 높이 외쳤다. “쓰라린 과거를 잊지 말자!” 사원들은 죽을 먹다가 죽사발을 든 채 멍해 흥수를 쳐다보았다. 허백호가 일어나면서 구호를 따라 불렀다. “쓰라린 과거를 잊지 말자!” 흥수는 흥이 나서 격앙된 목소리로 구호를 계속 불렀다. “지주를 타도하자!” 상순이도 따라 불렀다. “공산당 만세!” 사원들도 구호를 불렀다. “빈농 만세!” “빈농 만세!” “허백호 서기 만세!” “허백호…” 사원들은 구호를 부르려고 주먹을 쳐들다가 멈추었다. 모두들 허백호에게 눈길을 보냈다. “그만, 그만! 내 만세를 불러선 안 되오. 모주석 만세를 부르오!” 허백호가 황급히 손사래를 치면서 막아 나섰다. 흥수는 또 목에 지렁이 같은 핏줄을 세우면서 구호를 불렀다. “모주석 만세!” “쓰딸린 만세!” 흥수는 지지벌겋게 상기된 얼굴에 내 돋은 땀을 훔치더니 허백호 서기의 옆에 바싹 다가앉으면서 물었다. “허 서기는 우리 진수해의 모 주석과 같은 분인데 만세를 부르면 안 됩니까?” 상순은 아첨을 일삼는 흥수의 꼴이 보기도 싫어 픽 쓴웃음을 지었다. 숱한 사원들도 흥수가 조개덕에까지 내려 와서 삐치는 것이 눈에 거슬려 흘겨보았다. 그때 학수가 동생 흥수를 바깥으로 나가자고 했다. 이윽고 흥수는 두두 거리면서 식당에 들어와 벗어 놓았던 두루마기를 껴입더니 훌쩍 나가버리는 것이었다. 그날 식당에서 희극이 일어난 것은 아무 일도 아니었다. 사달은 이튿날 아침에 식당에서 일어났다. 박성근은 새하얀 입쌀 죽 그릇을 보더니 환한 웃음을 지었다. “에구, 오늘 정말 행복하구나. 내 오늘 기적을 쌓았다니까.” 학수랑 창걸이랑 모두 성근을 쳐다보며 이구동성으로 “무슨 기적을 쌓았단 말이오?”라고 물었다. 성근은 흥이 도도해 긴 목을 빼들고 횡설수설 늘여 놓았다. “글쎄 어제 저녁에 겨 떡을 먹으면서 과거의 쓰라린 우마와 같은 생활을 잊지 말고 오늘의 행복을 좋을씨고 하는 사상교육을 받았지 않았고 뭐요?” 허백호와 상순은 성근에게 눈길을 모았다. 성근은 뒷말을 이었다. “내 사상교육을 어찌나 잘 받았던지 오늘 아침에 변소에 가서 똥을 싼 게 똥마저 새빨갛지 않겠소?” “허허허.” “호호호!” 숱한 사원들이 우스워 배를 글어 안고 웃었다. 성근은 더 흥이 나서 우쭐거리며 턱을 쳐들고 또 너덜거렸다. “소련의 소마저 집체 우사간에 들어가려고 하지 않소. 우리 여기서는 사람을 소처럼 집체식당에 몰아넣다니 말이나 되오? 배고파 어떻게 살겠소? 사람마다 식성이 다르고 입맛이 다른데 똑같이 먹고 똑 같이 일하라고 하니. 그게 싫어서 소련 꼴호즈를 떠나 중국에 왔더니 여기서도 이러는구먼. 이럴 줄 알았더라면 소련에 있었을 거 그랬소. 소련 마우재(러시아 사람)들은 이다지 사람을 들볶진 않았소. 마우재들은 우리 중국 사람들보다 성질이 시원시원하고 통이 크단 말이오.” 상순은 “쯧쯧쯧.” 하고 성근에게 눈짓하며 허백호의 눈치를 살폈다. 허백호는 숟가락을 놓더니 “됐소. 잘 됐소.” 라고 하며 성근을 쏘아보았다. 상순은 제꺽 일이 상서롭지 못함을 직감했다. 허백호는 밥상에 죽사발까지 털컹 내려놓더니 구들에서 엉덩이를 뗐다. “이 마을에서 우파분자 한 놈을 붙잡아냈소.” 허 백호는 흥수를 보고 소리쳤다. “우파분자 박성근을 붙잡아 내오.” “옛!” 사원들 속에서 뛰어나와 날치는 흥수를 보고 학수는 “또, 또, 또!” 라고 하면서 눈을 흘겼다. 허나 흥수는 사원들 속을 비집고 씽 달려 나가 성근의 멱살을 틀어쥐어 끌어냈다. “이 우파분자야! 어디 인민정권의 독재 맛을 봐라!” “우파라니?” 성근은 끌려나오면서 눈이 떼꾼해 “무슨 죄를 졌다고 이러오?” 하고 물었다. 허백호는 성근의 귀 쌈을 찰싹 갈겼다. “금방 뭐라고 했는가? 뭐 ‘어제 사상교육을 어찌나 잘 받았는지 오늘 아침에 똥을 누니 똥마저 빨갛더라.’?! 이건 우리 당의 사상교육에 대한 모욕이 아니고 뭔가?!” 흥수는 손가락으로 성근의 배를 쿡쿡 찌르면서 을러멨다. “탄백해! 이 배때기에 우리 위대한 중국 공산당에 대한 불만 꼴똑하지?” 흥수는 성근의 손에서 죽사발을 빼앗아 성근의 꼭뒤에 팍 엎어놓았다. 성근의 얼굴은 죽으로 얼룩져 쥐마당이 돼 버렸다. 여기저기에서 너무 한다고 흥수를 욕하는 소리가 들렸다. 성근은 한손으로 얼굴의 죽을 닦으면서 계속 중얼거렸다. “똥을 눈 게 빨갛다 했는데 무슨 우파란 말이요? 씹할, 별 빨간 똥 우파 다 있다. 퉤!” 흥수는 개 잡은 포수처럼 우쭐해 고아댔다. “이 빨간 똥 우파야, 탄백해! 허백호 서기가 뭐 하려고 하면 네 놈은 뒤에서 항상 헐뜯으면서 빈정거렸지! 그래도 우파 아냐?!” 허백호는 오른 손으로 주먹을 불끈 틀어쥐더니 구호를 불렀다. “우파분자 박성근을 타도하자!” “박성근을 타도하자!” 처음에는 모두 허백호를 따라 흥수만 구호를 불렀다. 그러자 허백호는 상순과 학수를 쏘아보았다. 상순은 납득되지 않아 주먹만 쳐들고 구호는 나지막이 입안소리로 불렀다. 학수도 상순을 본 따 구호를 부르네 했다. “나를 따라 구호를 부르지 않는 자도 우파분자야!” 막대기를 세우자 그림자가 생기듯이 그 말은 즉시 효과를 보았다. 모두들 허백호를 따라 구호를 불렀다. 구호소리는 점점 높아졌다. 이 화영은 도리머리를 슬슬 흔들었다. “원, 쓸데없는 소리를 해서 하루아침에 타도대상이 됐구먼!” 상순은 옆에서 화영의 허벅다리를 슬쩍 쳤다. 화영이 상순과 눈길을 맞추더니 눈을 내리깔며 입에 빗장을 지르고 묵묵히 앉아 있었다. 상순은 남몰래 가만히 조개덕 제일 앞에 있는 성근이네 집 변소로 가 보았다. “이게 뭐냐?” 확실히 변소 밑바닥에는 뻘건 피똥이 무드기 쌓여 있지 않았겠는가! 그날 저녁 집체식당에서는 함흥소학교의 로우파 오옥선과 새 우파 성근을 투쟁했다. 허백호 서기와 흥수가 땀을 뻘뻘 흘리면서 투쟁하고 나니 밤중이 다 됐다. 사원들은 오옥선과 성근이 세치 혓바닥을 잘 못 놀려 우파로 몰리어 투쟁 받는 것을 본 후부터 입에 빗장을 지르고 혀를 건사하느라고 무등 신경을 썼다.  
126    대하소설 진달래 소야곡(1) 댓글:  조회:2076  추천:1  2017-10-31
                                                                                       머리말        40년 동안 나는 문학창작을 해 선후해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 3부작 장편과학환상소설 “야망의 바다”와 “욕망의 천지”, “황천의 유령” 그리고 장편실화소설 “3.8선에서 싸우던 나날에”, 장편실화소설 "부르하통하강반 살인악마의 유령", 장편실화 “인민의 훌륭한 법관 록도유”, 수필집 “리별” 등 도합 18권을 세상에 내놓았다.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에서는 지난 세기 초로부터 우리 조선족이 걸어온 100년 력사시기 눈물겨운 이민사를 썼다.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과 3부작  장편과학환상소설 “야망의 바다”, “욕망의 천지”, “황천의 유령” 등 소설은 출판된 후 다음,  네이버, 조글로와 모이자 등 블로그에 널리 련재돼 수많은 네티즌들이 열람하였다. 장편과학환상소설 “야망의 바다”, 중편과학환상소설 “지구보위전”은 연변인민방송국 청소년부 부장 채선녀사가 련속방송드라마 “지구보위전”으로 각색해 방송하였다.  장편과학환상소설 "야망의 바다"는 한국 "아동문학세상"에도 소개되였으며  "옹달샘컵한중아동문학상"을 받았다. 장편과학환상소설 “욕망의 천지”는  한국 "서울문학"에도 소개되였으며 “웰빙아동문학상”을 받았다. 중편과학환상소설 “지구보위전”은 한국 "서울문학"에 소개되였으며 “동심컵 중한아동문학상”을 받았고 그 수상소식은 한국 련합뉴스에 보도되였다. 장편실화소설 “38선에서 싸우던 나날에”는 연변인민방송국에서 2년 동안 련속랑독을 하였고 료녕조선문보에서도 전문을 련재하였다.        이젠 문우들의 권고대로, 예순고개에 오른 나는 필을 내려놓고 귀여운 손자 세빈이나 안고 천륜지락을 누리면서 안일한 만년을 보낼 수도 있다. 그러나 계속 문학창작이란 올리막길을 걷고 싶고 중화민족 부흥의 위대한 꿈을 실현하기 위해 세상에 새로운 도전을 하고 싶다.       그 불요불굴의 기개와 강렬한 심정을 시조 “락락장송”으로 표현해볼가.                청춘은 락화류수              인생은 일장춘몽                백발이 성성타만              뜻이야 굽힐손가                여봐라 락엽이 져야              락락장송 알리라          문학창작은 참말로 사막의 올리막길로 힘들게 달리는 끝도 보이지 않는  마라토너와도 같다. 나는 지금까지 너무나도 생존을 위한 삶을 살아왔고 사회에 해놓은 일도 별로 없다. 만약 돈을 벌고 안일하고 편안히 살려면 누가 붓을 들겠는가! 누가 피곤해 코피를 줄줄 흘리면서 글을 쓰겠는가! 누가 눈을 두번이나 수술하면서도 맨날 엉뎅이 배기게 서재에 들어앉아 글을 쓰겠는가! 그러나 나는 40여년이나 달구고  갈고 간 필을 소홀히 놓을 수 없다. ㄱ, ㄴ, ㄷ, ㄹ가 사회와 가정의 심장에서 썩어가는 곰팽이를 도려내는 수술칼로 되고 사막에 연분홍 진달래꽃이 방실방실 웃음짓는 오아시스를 가꾸는 감로수로 되게 하고 싶다.        나는 아파트를 한채 더 갖춰놓기보다도 나라와 민족, 우리 후대들에게 정신적 문화재부를 하나라도 창조해 물려주는 것이 더 보람차다고 생각한다. 혁명선배들은 민족의 독립과 나라의 번영을 위해 목숨까지 서슴없이 바치지 않았던가! 내가 글을 쓰면서 혈압이 올라가 코피를 몇번 흘리고 피와 고기 씌운 눈을 두번 수술한 것 쯤은 목숨바쳐 싸운 혁명선렬들의 희생정신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나라와 인민들이 양성한 작가로서 나라와 민족을 위해 력사적인 사명감과 의무감을 안고 계속 붓을 들어 중화민족 부흥의 위대한 꿈을 더욱 황홀하게 장식하기 위해 문학작품을 창작해내는 것은 천만지당하다.        불굴의 우리 조선민족은 찬서리와 눈보라 속에서도 층암절벽에 뿌리를 박고 완강하게 살아온 진달래마냥 이 땅에서 불요불굴의 완강한 의지로 굳세게 살아왔다. 민족대이동의 격변기에 진달래는 중국의 광활한 대지, 지구촌의 방방곡곡에 날아가서 뿌리를 내리고 악착스레 살아나가면서 온누리에 연분홍 진달래꽃을 활짝 꽃피우고있다. 이 땅에서 지혜롭게 살아온 우리 조선족의 삶과 희로애락을 책으로 써내는 것이 작가, 편심인 나의 숙명이고 사명이라고 생각한다.       허용규, 김강희 등 장군님들은 나에게 민족을 위해 묵직한 글을 쓸 것을 기대했다. 조룡호, 김영만, 정규창 등 로지도자들과 김재권, 김설봉, 김철환, 김진산 등 은사님들 그리고 전평선, 윤진주, 리창수, 리석복, 신길웅, 리운학, 윤응순 등 전국각지 수많은 회장님들은 내 손을 꼭 잡고 민족을 위해 력사적인 기념비를 남길만한 문학작품을 써낼 것을 간곡히 부탁했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그렇다할 만한 글을 쓴  것이 없다는 것을 재삼 느꼈다.      뇌장을 불태우고 뼈를 깎으면서라도 우리 조국과 민족에 기념비와 정신기둥을 세워놓아야 한다. 이 성스러운 사업을 나라와 민족의 역사적인 사명감과 의무감으로 삼고 앞사람이 쓰러지면 뒤사람이 이어나가면서 필사적으로 해나가야 하지 않겠는가.       정조를 짓밟히고 절망에 빠져 머리로 콩크리트바닥을 떵떵 쫏아대던 처녀, 나중에 삶의 욕망을 잃고 소나무에 목을 매단 처녀, 한국에서 10여년 동안 번 피나는 돈과 고향집마저 판 돈으로 몽땅 두 아들며느리한테 집과 차까지 갖춰주고서도 불효한 아들며느리들한테 박대를 받다못해 쫓겨나 눈물을 흘리면서 고향으로 돌아간 늙은 량주, 림종을 앞둔 시어머니를 어서 죽으라고 주사마저 놔주지 않는 “쥐며느리”, 사선에서 헤매는 어머니한테 마지막으로 주사라도 한대 더 놓아주려고 사처로 헤맨 불쌍한 아들… 이 모든 것을 보고 들은 나는 다시 필을 들 강한 충동을 받아 마침내 대하소설 “진달래 소야곡”을 쓰게 되였다.       대하소설 “진달래 소야곡”은 개혁개방시기부터 민족대이동의 현시대를 배경으로 사회 최소 세포인 가정을 해부하여 사랑과 혼인, 가정에 비낀 희비극적인 희로애락을 보여주었으며 삶의 뼈아픈 교훈을 따끔하게 짚어내고 가정문제를 헤쳐나갈 앞길을 긴 여운으로 남기려고 모지름을 썼다.       나는 요란스러운 폭포수로 되려고도 하지 않는다. 수풀에 가려진 계곡에서 촐랑촐랑 노래하면서 흐르는 금강산의 한줄기 벽계수로 되고 싶다. 항상 낮은 곳으로 잔잔히 흘러가는 티없이 맑은 벽계수의 한방울 물방울로 되고 싶다. 때로는 세인들이 보지도 못하는 지하수로 소리없이 흐르다가도 사람들이 가뭄에 허덕이는 사막에 한줄기 생명수로 퐁퐁 솟아올라 삶의 오아시스를 가꾸고 진달래꽃을 활짝 꽃피우고 싶다.        나는 기자, 편심, 작가로 키워준 당과 인민의 충성스러운 작가로 되고 싶다. 민성이란 필명 그대로 백성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글을 쓰면서 외나무다리를 타고 기어이 가람을 건너 온 누리에 진달래가 활짝 핀 황홀한 경지에 이르고 싶다.  괴로우나 즐거우나 내 령혼의 영원한 안식처는 문학창작이다. 내가 한부의 문학작품을 낼 때마다 하늘에 외롭게 둥둥 떠돌아다니던 내 령혼을 웅위로운 백두산 기슭의 진달래꽃과 수려한 금강산의 모란꽃, 하늘 높이 치솟은 한라산의 무궁화가 반겨 맞으리라.        여지껏 다년간 나의 사업을 정성껏 지지해주고 대하소설 “진달래소야곡”의 창작과 출판에 신심을 준 리성권 전임사장과 량문화 사장, 리원철 부사장, 리철주 부총편을 비롯한 연변인민출판사 지도일군들과 동료들께 감사를 드린다. 그리고 이 대하소설을 정성껏 편집출판한 료녕민족출판사 권춘철 사장과  편집들께 숭고한 경례를 드린다. 또 이 대하소설 창작과 출판에 지성어린 지도와 관심을 한 심양시 고려경제문화유한회사 리사장 전정환 회장님, 주신문출판국 손룡호 부국장, 연변대학 최문식 교수님, 허휘훈 교수님께 삼가 경의를 드린다.                                                                      저자 김장혁                                           2017년 5월 7일
125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87) 댓글:  조회:1110  추천:0  2017-10-27
                3. “헥타르 당 5만근 내라!”       겨우내 꽁꽁 얼었던 밭에 아직도 여기 저기 잔설이 널려 있었다. 아직도 찬바람이 기승을 부리며 대지를 싹쓸이하고 있었다. “인민공사, 대약진 동풍을 빌어 헥타르 당 5만근씩 양곡을 내십시오.” 토성 안 생산대대 사무실에서 열린 사원대회에서 향 당위 허백호 서기가 밤중에 홍두깨 내밀듯 내리는  지시에 무두들 입을 딱 벌렸다. 병완은 머리를 홰홰 둘렀다. “농사 지을줄 알고 말하오? 제 정신 있는 사람들 같지도 않소. 우리 대대 밭에서 한 헥타르에 5천근씩만 내도 대단하오. 5만근씩 내라는 건 정신 있는 소리 같잖소.” 상순도 동을 달았다. “신문에 어디선가 한 헥타르에 10만근을 거둬들였다고 하지 않았고 뭣입둥?” “뭐라니?”] "아하, 상급에서 5만근 내라면 낼게지. 무슨 잔소립둥?" 병완은 주름살이 산골짜기처럼 패였다. “어떻게 농사를 지으면 한 헥타르에 10만근을 낸다오?” 상순은 코웃음 쳤다. “신문에서 사진 봤습니다. 사람이 벼 우에 올라앉았습디다. 곡식이 어찌나 잘 됐으면 사람이 벼 우에 올라앉아도 꺼지지 않겠습니까. 흥!” 회의가 끝난 뒤에도 병완은 허백호의 지시가 잘 납득되지 않아 도리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정말 귀신이 곡할 노릇이야. 허 서기는 자꾸 둼을 많이 내면 한 헥타르에 5만근을 거둘 수 있다고 하지만 둼 무지 꼭대기에 강냉이를 심어 보라지. 천근이나 내는가? 모두 정신이 있는 거 같지 않다.” 상순도 할아버지와 맞장구를 치면서 볼 부은 소리를 했다. “글쎄 말입니다. 자본주의 싹이 자란다면서 황무지를 마음대로 일구지 못하게 하면서도 무당 수확고 지표는 정신이 나가게 올리니까. 아래서 어떻게 일하겠습니까?” 병완은 이마살을 찌푸리었다. “상순아, 세상이 돌아가는 게 심상치 않다. 그저 당에서 하라는 대로 하면서 아무 말이나 하지 말라. 봐라, 팽덕회로부터 시작해 지금 전국적으로 숱한 우파분자들을 붙잡아 내 투쟁하지 않니? 잘 못 걸리면 정치몽둥이에 맞아 죽겠다.” 허나 상순은 대수로워 하지도 않았다. “5만근을 내지 못할 게 빤한데 못할 건 못하겠다고 해야지.” 병완은 근심스러워 한숨만 땅이 꺼지게 내쉬었다. “허백호 서기는 기어이 5만근을 내야 한다고 하더라. 좌우간 우에서 하라면 노력은 해보자.” 상순은 인차 “예, 해봅시다.”라고 대답하더니 엉덩이를 구들에서 떼었다. 상순이 조개덕으로 내려 간 뒤 병완은 함흥 촌의 여러 생산대 사원들을 동원해 이른 봄부터 언 둼을 꺼서 밭에 내갔다. 병완이 한창 사원들을 데리고 소 수레에 실어온 둼을 밭에 고루고루 펴놓을 때다. 저 멀리 허백호 서기와 허영주 사장이 자전거를 타고 소서구 어귀로 달려올라 오더니 자전거에서 내려 밀고 올라오는 것이었다. 병완이 황급히 마중해 내려갔다. 그때 허백호 서기는 헐레벌떡거리면서 가파른 밭에 올라가 사원들이 밭에 둼을 고루고루 펴놓는 것을 둘러보았다. 그는 병완을 못 마땅한 눈길로 되돌아보며 목에 지렁이 같은 피 줄을 세우고 을러멨다. “아니, 김 영감! 밭에 둼을 저렇게 적게 펴서야 5만근은커녕 만근도 내지 못하겠소!” 병완은 너무 한심해 도리머리를 흔들더니 옆에 서 있는 허영주 사장을 돌아보았다. 허영주 사장은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숱한 사원들 앞에서 허백호 서기는 손사래를 치면서 고함쳤다. “함흥대대는 한 헥타르에 5만근을 낸 우리 공사 모범대대로 돼야 합니다!” 병완은 참다못해 한마디 했다. “허 서기, 아무리 대약진 시대라고 해도 될 만한 지시를 해야 하오. 어떻게 이 싯누런 황무지 밭에서 5만근을 내오? 이 밭에서 한 헥타르에 5만근을 낼 수 있는 농사꾼이 있으면 내 앞에 데려 오오.” 허백호 서기는 성이 꼭뒤까지 치밀어 올랐다. “김영감! 당신도 당원이오? 공사당위 서기가 5만근을 내라면 낼 거지 무슨 잔소리 그리 많소?” 허영주는 이상어른과 버릇없이 노는 허 서기가 눈꼴 사나와 한마디 했다. “이보, 허 서기, 너무 지나치지 않소?” 허백호 서기는 홱 돌아서며 허영주 사장을 쏘아 보았다. “또, 또, 또! 공사 사무실에서 그만 논쟁했으면 됐지. 숱한 사원들 앞에서 계속이오?” 허영주 사장은 굽어 들지 않았다. “뭐든지 실제적이어야지. 이 묵밭에서 5만근을 못 낸다는 건 빤한데 왜 억지로 하라고 하오?” “동무! 조직 관념이 있소?  숱한 사원들 앞에서 뭐요? 나를 까서 망신시킬 예산이오? 어째 우파 모자를 쓰고 한뉘 개고생을 해 보겠소?” 허영주와 병완은 서로 마주 보며 머리를 가로 흔들었다. 한참 납덩이같은 무거운 침묵이 흐른 후 병완은 천천히 무겁게 입을 열었다. “허 서기, 이 밭에서 5만근을 낼 수 있는 구체방도를 가르쳐 주오.” 숱한 사원들은 모두 삽을 짚고 서서 허백호 서기의 입을 쳐다보았다. 허백호 서기는 물러 설 수 없어 사원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둼을 한자 두께로 낸 후 둼 우에 흙을 펴고 곡식을 심소.” 사원들은 모두 눈이 휘동그래졌다. 허백호 서기는 삽으로 밭을 팍팍 팠다. 한참 후 허백호 서기는 사원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정성이 지극하면 돌 우에도 꽃이 피는 법이오. 우리 공산당원들은 특수재료로 만든 강철 전사들입니다. 가열처절한 전쟁년대에 목숨 걸고 싸워 승리했습니다. 그런데 왜 한 헥타르에서 5만근을 내지 못하겠습니까?” 이때 학생들을 데리고 일하던 함흥소학교의 여 교원 오옥선이 비쭉거렸다. “공산당원도 그거 해서 남자의 정자와 여자의 난자가 합해 만들어진 사람이겠지? 강철로 만들었겠소?” “하하하!” “호호호!” 사원들은 코를 싸쥐고 웃었다. 허백호 서기는 자기 말을 비꼬는 오옥선을 쏘아보며 꽥 소리쳤다. “오 선생이 금방 뭐라 했소?” 그러자 모두들 혀를 홀랑 내밀더니 머리를 숙이었다. 허나 허백호 서기는 닭을 잡아 원숭이를 훈계하듯이 오옥선을 투쟁해 반 우파투쟁의 불길을 지펴 한 헥타르에 5만근을 내지 못한다는 사원들의 입을 틀어막으려고 했다. 쉼에 허백호 서기는 사원들을 불러 놓고 고함쳤다. “오옥선 선생은 사원들 앞에 나와 머리를 숙이고 서오!” 오옥선 선생은 무슨 영문인지 모르고 사원들의 뒤로 슬금슬금 물러서면서 이상한 빛이 번뜩이는 허백호 서기의 외까풀 눈을 훔쳐보았다. 허백호 서기는 금방 오옥선이 공산당을 모욕한 사실을 대충 말하고 오옥선에게 우파분자 모자를 씌워 투쟁한다는 결정을 선포했다. “반당 우파분자 오옥선은 공산당을 엄중하게 모욕 중상했습니다. 우린 이런 우파분자를 뛰여나오는 족족 잡아내서 견결히 투쟁해야 합니다.” 허백호 서기 명령에 따라 민병들은 오옥선 선생을 사원들 속에서 잡아 앞에 끌어냈다. 허백호 서기는 오옥선을 손가락질하면서 구호부터 불렀다. “반 당 우파분자 오옥선을 타도하자!” 그러나 사원들은 서로 눈치를 보면서 구호를 부르지 않았다. 허백호 서기는 붉으락푸르락 해서 이른바 오옥선의 우파분자 죄행을 공포했다. “금방 오옥선은 우리 위대한 중국 공산당을 상욕으로 욕했습니다.” 그때 오옥선은 머리에 쓴 빨간 수건을 풀어 허벅다리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면서 물었다. “그래 사실이 아닙니까? 공산당원도 그걸 해서 남자의 정자와 여자의 난자가 합해져 만들어지지 않았습니까? 아무리 특수재료로 만들어졌다 해도 납이나 강철로 만들어 졌겠습니까?” 또 폭소가 쏟아졌다. 허백호 서기는 오옥선의 콧대를 삿대질하면서 고래고래 고함쳤다. “보십시오. 이 악질 반당 우파분자가 얼마나 더러운 상욕으로 공산당을 모욕했는가!” 허백호 서기는 목청을 돋우어 구호를 불렀다. “반당 우파분자 오옥선을 타도하자!” 그러자 숱한 사원들 속에서 따라 부르는 구호소리가 소서구 골짜기에 울려 퍼졌다. “반당 우파분자 오옥선을 타도하자!” 오옥선은 그날 오후부터 날마다 쉼이면 우파분자란 고깔모자를 쓰고 투쟁받고 노동개조를 했다. 그 후부터 누가 감히 공사 당위 서기 허백호의 말에 왈가불가 하겠는가! 오옥선 우파분자 사건이 발생한 뒤 허백호 서기가 함흥대대에 점을 잡고 병완이네 집에 들었다. 그가 직접 소서구 황무지 밭에서 한 헥타르에 5만근을 수확하는 농사혁명을 지휘했다. 그러나 조개덕의 상순만은 아직도 한 헥타르에 5만근을 낸다는 것을 납득돼 하지 않았다. 그는 먼저 토성 밖에서 조용히 할아버지를 만났다. “어떻게 마른 짚과 둼을 한자 두께로 편 후 곡식을 심습니까? 생짚과 생풀이 썩으면서 피여오르는 증기에 곡식이 살아나 남겠습니까? 아까운 땅만 버리겠습니다.” 허나 병완은 주위를 둘러보면서 “쉭-” 하고 입에 식지까지 댔다. “허 서기 앞에서 아무 말이나 하지 말라! 자칫하면 너도 오옥선처럼 우파 모자를 쓰겠다.” 할아버지가 말리는 것도 상순은 머리를 숙이지 않았다. “사람이 빚을 지고 살아도 어찌 시비에 지고 살겠습니까?” “얘야, 내 말대로 말 좀 주의해라! 지금 한마디만 잘못 했다간 ‘반당 우파모자’를 쓰고 한뉘 고생하겠다.” 상순은 대대 사무실에 있는 허백호 서기를 찾아갔다. “오, 김 서기 왔구먼. 앉소.” 상순이 자리에 앉자 허 서기는 온 몸에 힘이 넘쳐나는 젊은 김 서기를 보면서 물었다. “그래, 조개덕대대에서는 헥타르 당 5만근을 낼만 하오?” 상순이 입을 열려고 하는데 옆에 앉은 병완이 허벅다리를 툭 쳤다. 허나 상순은 마른기침을 하더니 기어이 입을 열었다. “허 서기, 한 헥타르에 5만근을 내기 어려울 거 같습니다.” “건 왜?” 허백호 서기는 호랑이 눈썹을 치켜 올렸다. 상순은 구김 없이 말했다. “밭을 한자 깊이로 파고 마른 볏짚과 풀을 깔고 둼을 펴면 볏짚과 풀이 썩으면서 피어오르는 증기에 곡식이 살지 못합니다. 또 맨 둼을 한자 두께나 펴면 곡식이 자라지도 못합니다. 우리 한번 맨 쇠똥무지에 강냉이를 심어 봅시다. 잘 자라는가?” 그러자 허백호 서기는 단통 구들을 탕 치면서 버럭 고함쳤다. “동무! 동무는 우리 공사 팽덕회요? 뭐요? 팽덕회가 전문 모주석이 뭘 하려고 하면 반대만 해서 타도된 걸 모르오? 당 조직에서 어떻게 하라면 할 게지. 무슨 잔소리 그리 많소?” 상순이 뭐라고 말하려는데 병완이 말을 빼앗아 했다. “허 서기 말이 옳습니다. 우린 상급 당위에서 지시하는 대로 일단 해보는 게 옳습니다.” 그제야 허백호 서기는 어깨가 으쓱해 엉덩이를 움찔하더니 바로 앉았다. “해 보지도 않고 된다, 안 된다는 건 진짜 나쁘오. 상순 동무는 할아버지한테서 많이 배워야 하오. 이전에도 말했지만 동무는 소처럼 올리 뜨는 괴벽한 성질이 흠이요. 세상에서 살자면 강하기만 해선 안 되오. 어떤 때에는 낮은 문턱에 머리를 숙일 줄도 알아야 하오.” 병완도 머리를 끄덕이면서 상순에게 충고했다. “얘야, 허 서기 충고를 잘 들어라.” 허백호 서기는 도리어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반 우파 투쟁 때 상급에서 하라는 대로 해선 낭패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상순은 참지 못하고 또 한마디 했다. “이제 5만근을 내자다가 농사를 망쳐 먹으면 그때 허 서기 책임지겠습니까? 되지도 않을 일을 왜 고집합니까?” 허백호 서기는 김빠진 공처럼 뒤로 물앉더니 나직이 말했다. “나도 별 수 없소. 한 헥타르에 5만근이든 10만근이든 위에서 내라면 내야 하오. 좌우간 먼저 해보기요.” 그제야 병완과 상순은 허백호 서기도 난처한 처지라는 것을 알고 묵묵히 앉아 애꿎은 담배만 풀썩풀썩 태웠다. 풍작을 거두려면 초봄에 밭의 누기가 좋아야 했다. 허나 무정한 하늘에서는 풍작을 약속하는 보슬비 한 방울도 내리지 않았다. (야, 한시간만이라도 비를 내려보냈으면, 하늘도 무심하지.) 사원들은 하늘을 쳐다보면서 통탄했다.                                                                              4. 우파분자        가뭄이 든 황무지 밭에서는 마른 흙가루가 봄바람에 마구 흩날리었다. 말라 갈라터진 밭고랑에서는 화기가 홧홧 달아올랐다.        허 서기는 가물다고 사원들을 동원해 소서구 밭에 물을 길어다 치게 했다. 한 보름 역사질 했을 때다. 둼을 한자 두께로 깐 밭에서 김이 문문 났다. 병완은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올해 농사는 끝장났구먼. 구덩이에 파묻은 마른 볏짚과 풀이 썩으면서 김이 올라오고 있는 거요.” 허나 농사는 지을 줄도 모르는 허 서기는 자기 좋은 소리를 했다. “이제야 제대로 둼이 되느라고 김이 나는구먼. 허허허.” 병완은 더부룩한 흰 구레나룻을 흩날리며 가까이에 가서 보더니 무릎을 탁 치더니 밭머리에 풀썩 물앉았다. 허 서기는 순 지도자의 자존심으로 나왔다. “난 신흥무군관학교 우수졸업생이오. 총알과 대포 탄알이 어데서 날아오는 것도 다 아는데 그까짓 농사를 모를 거 같소. 아무 근심도 하지 마오. 가을에 이 밭에서 5만근을 거둘 낫이나 잘 갈아놓소.” 병완은 상급이고 뭐고 더는 참을 수 없어 허 서기가 보는데서 흙을 손으로 허비어 뜬 김에 썩어 버린 강냉이 알을 파내 쳐들었다. “이걸 보오. 강냉이 씨가 다 썩어버렸는데도 근심하지 말라고! 허서기, 농사를 개뿔도 모르면서 눈 먼 지휘를 작작 하오!” “이 영감이, 이게, 늙긴 늙었구먼. 로망이구만, 어째 당 지부 서기를 하지 못하자고 올리뜨오?” 병완은 대수로워 하지도 않았다. “못하면 못했지. 당신 정신 나간 지휘대로 올해 농사를 망쳐 먹을 순 없소. 올해 함흥대대 천여명 사원들이 뭘 먹고 살겠소?” 그때 상순이 왔다가 허백호 서기 앞에 한발 나섰다. “할아버지 말씀이 맞습구마. 농사는 농사꾼이 더 잘 알지. 허 서기 더 잘 알겠소? 허 서기는 전쟁을 하라면 우리 할아버지보다 더 잘 할지는 몰라도 농사는 우리 할아버지 말씀을 듣소.” 허영주 사장은 상순에게 더 말하지 말라고 눈짓했다. 그러나 상순은 머리를 숙이지 않고 맞섰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우리 함흥 촌에서 범바위산에 가서 강냉이와 감자를 심어 빈농들이 쌀 고생을 하지 않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황무지도 마음대로 개간하지 못하게 하던게. 또 이런 망년된 농사법을 지시하니 올해 우리 빈농들이 뭘 먹고 산단 말입니까?” 참다못해 허영주도 옆에서 한마디 끼어들었다. “허 서기, 이분들 충고를 듣소. 온 함흥대대에서 뭘 먹고 살겠소? 지금 집집마다 쌀독을 빡빡 긁는 소리를 듣지 못했소? 숱한 사람들이 먹을 거 없어 밤이면 산에 가서 비술나무껍질을 가만히 발라다가 구워 먹는다오. 당신 모르오? 이러고서야 어찌 사회주의 우월성을 과시할 수 있겠소?” 갑자기 허 백호 서기가 고함을 버럭 질렀다. “좋소! 우리 공사에 우파를 잡아 내지 못해 그러는데 잘 됐소. 금방 허 사장이 말한 말은 우파로 되고도 남음이 있소. 허영주는 우파요. 내일부터 우파 모자를 쓰고 투쟁을 받아 보오.” 허나 허영주의 얼굴에서 겁기를 털끝만치도 찾아 볼 수 없었다. “난 총탄이 빗발치던 항일전쟁터에서 싸워온 조선의용군 군관이오. 내 우파 모자를 쓸지언정 온 진수해공사 한해 농사를 망칠 순 없소. 한자 깊이로 땅을 파고 짚과 둼을 파묻어선 낟알을 제대로 거두지 못하오.” 허백호 서기는 붉으락푸르락 해서 목에 지렁이 같은 핏줄을 세우며 온 산골짜기가 다 떠나가게 고래고래 고함쳤다. “당신 정말 계속 인민공사와 대약진을 반대하면 우파 모자를 씌워 총살해 버릴 수도 있어!” 그래도 허영주 사장은 기가 꺾이지 않았다. “내 목이 날아나도 전 공사 인민들의 목숨과 같은 한해 농사를 망칠 수 없소. 보오. 숱한 사원들이 지금 죽물마저 먹지 못하고 보릿고개도 넘기기 힘든 형편이오. 그런데 어찌 이런 무지막지한 농사법으로 한해 농사를 망치자고 든단 말이오?!” 그 말에 모여 왔던 사원들은 웅성거리며 머리를 끄덕였다. 지어 어떤 사원들은 허영주 사장의 말이 옳다고 떠들어댔다. 허백호 서기는 뒤로 물러 설 수 없었다. 그는 허영주에게 마구 악담을 퍼부었다. “당신은 지금 무슨 죄를 짓고 있는지 알기나 하는가? 당이 영도하는 사회주의 우월성을 무시했지? 사회주의 사회에서 보릿고개를 넘기 어렵다고? 죽물도 변변히 먹지 못한다고? 풀과 나무껍질로 연명한다고? 이는 사회주의에 대한 모욕이야!” 뒤이어 그는 사원들을 돌아보면서 을러멨다. “여러분, 모두 들었지? 금방 이 놈이 뭐라고 반당 반사회주의 언론을 퍼뜨렸는지. 이 놈은 반당, 반사회주의 우파분자입니다.” 허나 허영주는 머리를 숙이지 않고 맞서 싸웠다. “허백호 서기! 개도 먹지 않는 자존심을 버리오! 이 밭 심갱밀식을 해서야 되오? 아무리 둼을 한 미터 깔고 빽빽이 밀식한들 될 거 같소? 한 헥타르에 어떻게 5만근을 낼 수 있는가?! 천근이 어떻겠소?” 허백호는 높은 둔덕에 올라서서 고함쳤다. “누구든지 심갱밀식을 반대하면 그는 반당, 반사회주의 우파분자 모자를 쓰고 투쟁 받을 것입니다.” 뒤이어 그는 병완을 보고 명령했다. “김 서기, 반당 반사회주의 우파분자 허영주를 끌어내시오!” 허나 병완은 팔쩡을 끼고 들은 척도 하지 않고 하늘을 쳐다보면서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이윽고 병완은 허영주 사장의 앞에 다가가 그의 왼손을 쥐어 높이 쳐들었다. “허영주 사장의 말이 옳습니다. 이렇게 심갱밀식해선 낟알 한 알도 거두지 못합니다. 원래대로 둼이나 많이 내고 흙에 곡식을 심읍시다. 농사는 그래도 우리 농사꾼들이 더 잘 압니다. 삐뚠 정치 밖에 모르는 사람들의 정신 나간 말을 듣지 맙시다!” 뜻밖의 말에 허영주나 허백호나 모두 경악했다. 여기저기서 웅성거렸다.  “김 서기 말이 옳소.” “쯧쯧, 저 영감이 오망을 하지 않소?” "투쟁맞지 못해 저러오?" 허백호는 병완을 손가락질하면서 위협공갈했다. “어째 영감도 우파 모자를 쓰고 투쟁 받고 싶소?” 허나 병완은 대수로워 하지 않았다. “난 당과 사회주의를 반대한 적도 없소. 올해 농사를 망쳐 우리 대대 사원들을 굶게 하는 허 서기야 말로 진짜 우파요!” 병완은 허백호 서기 턱밑에 삿대질 하면서 우렁찬 목소리로 고함쳤다. “당신이 어찌 위대하고 정확하고 영광스러운 중국 공산당을 대표할 수 있소? 당신 말이 어찌 우리 당을 대표하는 지시라고 할 수 있소?!” 사원들이 마구 구호를 불러댔다. “우파분자 허백호를 타도하자!” 지어 삼합에서 갓 이사해온 종연이랑 어떤 청년들은 허백호를 마구 붙잡아 때리려고 들었다. “아까운 밭농사를 이렇게 망쳐놔 우린 어떻게 살아!” “가물에 둼무지 우에 강냉이를 심어 뭘 거둬들이겠는가!” 허백호는 꼬리 빳빳해 산골짜기 아래로 도망쳐 내려갔다. “이 놈들, 어디 두고 보자, 가만 놔두는가!?” 병완은 허영주와 토론하고 둬짐 되는 밭을 딱 절반씩 나눠 실험하기로 했다. 절반에는 허백호 서기 지시대로 한자 두께로 둼을 편 위에 강냉이 씨를 반 뼘씩 간격을 두고 빽빽이 밀식하기로 했다. 나머지 절반에는 둼을 얼마간 섞어 펴놓은 흙에 강냉이 씨를 한 뼘 간격을 두고 심기로 했다. 병완은 빙 둘러선 사원들을 둘러보면서 가슴을 쭉 펴고 목청을 돋우어 말했다. “이 밭에서 두 짐을 딱 절반씩 나눠 두 가지 농사법으로 강냉이를 심어 실험해 봅시다! 실천은 진리를 검증할 것입니다.” 허영주도 앞에 나서 말했다. “지금 소련 수정주의자들이 우리 나라에서 3년 재해를 입은 기회에 우리 나라에 보냈던 소련 기술자들을 철수해가고 이전에 지원한 걸 빚으로 받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린 아주 어려운 형편에 처하게 됐소. 그런데 한해 농사를 망쳐서야 됩니까?” “안 됩니다!” 사원들은 허백호 서기를 욕하며 벌건 저녁노을을 밟으면서 마을로 내려갔다. 벌건 낙조는 김이 문문 나는 밭과 사원들을 다 데워 죽일 듯 무시무시하게 빨갛게 타올랐다. 하늘도 무심하지 가물에 단비를 내려 보내지 않고 불비만 퍼부었다. 가물을 이기려고 사원들은 소 수레로 물독을 실어 강냉이 밭에 퍼 쳤다. 그런데 무더위에 물독을 싣고 다니던 비녀뿔이랑 숱한 소들이 더위를 먹고 척척 쓰러졌다. 소들은 들누워 일어나지 못하고 퉁방울 눈알들이 뒤집혔다. “이걸 어쩌는가?” 사원들이 한창 쓰러진 소잔등 위에 나뭇가지를 꺾어 덮어줄 때었다. “저 놈들을 체포해라!” 허백호 서기가 허영호 소장과 함께 숱한 민경들을 데리고 덮쳐들었다. 민경들은 허 서기의 지시대로 허영주와 병완을 체포했다. 병완은 민경들의 손에서 팔을 빼며 야단쳤다. “무슨 죄 있다고 이래?” “아직도 몰라?” 허백호 서기가 어깨가 으쓱해 우쭐거리면서 외까풀 눈을 부릅뜨고 고래고래 고함쳤다. “우리 공사 당위에서는 네놈 둘을 우파분자로 결정 내리고 날마다 투쟁하기로 했다!” “우파라니? 정말 한심한 세상이구먼!” “뭐라고?” 허영호가 병완을 흘겨보며 욕했다. “손을 떼라!” 언제 왔던지 상순이 밭머리에 나타났다. “길러준 개 발뒤축을 문다더니.” 상순의 앞에서 허영호 소장은 머리를 숙이면서 뒤로 물러섰다. “김 국장, 공사 당위 지시인지라 그만, 양해하십시오.” 허백호 서기는 영호에게 외까풀 눈을 흘기더니 상순의 멱살을 틀어쥐고 을러멨다. “이 놈아, 네 놈도 어째 우파 모자를 쓰고 싶은 거야?! 썩 꺼지지 못해?!” 허나 상순은 가슴으로 허백호를 떠밀며 물러서지 않았다. 성이 꼭뒤까지 치민 허백호는 허영호 소장을 돌아보며 고래고래 호통을 쳤다. “뭘 하니?! 이 놈들을 몽땅 체포해라! 내 진수해에 오자마자 함흥 촌의 김씨 3대부터 눈에 거슬리더라! 너네 김씨 3대가 없으면 함흥대대를 영도할 사람이 없을 거 같은가?” 어떨 꿍 하는 욕심이 사람을 죽인다고 흥수가 삽을 짚고 서 있다가 썩 나섰다. “허 서기, 저 병완 영감이랑 상순이랑 대대로 우리 함흥대대를 쥐락펴락 해습니다. 우리 사원들도 저 김씨 조손3대를 모두 눈꼴 사나와 합니다.” “좋소. 이런 동무들이 전도 있단 말이오. 동무는 이름이 뭐요?” “이흥수라고 부릅니다. 전 항미원조 때 소대장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병수가 코웃음쳤다. "흥! 겨우 반장이나 한 주지에 자기절로 한급 올려 붙여 소대장이라고 말하는구만."         그러자 흥수는 우먹눈을 부릅뜨고 병수를 쏘아보며 목에 지렁이 같은 핏줄을 세우고 고래고래 고함쳤다. "병수야, 넌 반장이랄도 해봤어? 난 항미원조전쟁에서 팔을 부상당한 영예군인이란 말인기여." 태수가 저쪽에서 삽을 짚고 서서 빈정거렸다. "참, 대단하오. 압록강을 건너면서 비행기구경 하다가 적기 소사 받지 않았고." 병수도 맞장구를 쳤다. "육박전을 할 때 상순을 찌른 적이 없지. 뭐." "허허허." 허백호는 병수와 태수한테 손사래를 치더니 흥수한테 몸을 돌렸다. "그래? 흥수동문 전도 있소." 허백호는 바다에서 지푸라기라도 잡은듯이 흥수 손을 잡았다. “동무는 당원이오?” “아닌기오.” “이런 동무들을 진작 입당시키지 않고. 당지부 서기 뭘 했는가? 쯧쯧쯧. 근심하지 마오.” 허백호의 말에 흥수는 합박만한 입이 귀밑까지 째졌다. “저 사람들, 내캉 남대치라고 입당시키지 않았시우. 허서기, 무슨 일 있으면 내게 시키라우.” 흥수는 미소를 짓는 허백호 서기 얼굴을 보자 가슴을 내밀고 마구 물어먹었다. “저 병완 영감과 상순은 저네 자리를 빼앗길까봐 나를 입당시키지 않았시우. 저 김씨네 조손 3대가 세습하면서 우리 마을을 영영 쥐락펴락하자는 게 아니고 뭡니까? 저런 지껌은.” 허백호 서기는 머리를 끄덕였다. “확실히 함흥대대에 문제 있소.” “나를 빨리 입당시켜 지부 서기로 제발시키라우. 내 꼭 허 서기 말대로 한 헥타르에 5만근을 내겠는지라우.” 그러자 사원들은 모두 흥수를 아니꼬운 눈길로 쏘아보았다. 저 쪽에서 지주 장학산은 공산당 간부들끼리 싸우는 것을 보고 깨고소해 했다. (옳다, 잘 싸운다! 네 놈들 끼리 서로 싸우다나면 우린 투쟁을 덜 받겠구나.) 충국도 속으로 너털웃음을 웃었다. (허허허. 병완과 상순을 투쟁하는 걸 구경하면 좀 좋아서.) “허소장, 뭘 하오? 저 놈들을 체포하지 않고.” 허영호 소장은 허백호를 한쪽으로 데리고 가서 조용히 말렸다. “형님, 좀 냉정하오. 그저 농사문제구만. 어찌 우파 모자를 씌워 체포할 수 있소?” “에이, 정치 불문이라고. 어서 내 말대로 체포해.” 허영호 소장이 발에 뿌리 내린 듯이 서 있자 허 백호는 펄펄 뛰면서 민경들에게 하늘땅이 맞붙을 듯이 고래고래 고함쳤다. “저 병완 영감과 허영주에게 수갑을 채우고 고깔모자를 씌워!” 민경들은 우르르 달려들어 병완과 허영주에게 수갑을 채우고 미리 준비해 가지고 온 고깔모자를 머리에 씌웠다. 어찌나 높은 고깔모자를 썼는지 병완과 허영주를 동화속의 인형 같아 보기도 우스웠다. “이게 무슨 짓인가?!” 상순은 다짜고짜 병완과 영주의 머리에서 고깔모자를 벗겨 땅바닥에 내동댕이쳐 발로 마구 짓밟아 놓았다. “이 놈, 너도 어째 우파 모자를 쓰고 싶니?” 허나 상순은 뒤로 한걸음도 물러서지 않고 허백호 서기에게 대들었다. “억울한 모자를 작작 씌우오. 뭘 잘 못했다고 이럽니까?” 병완은 막내손자를 말렸다. “얘, 삐치지 말라. 괜히 연루되겠다.” 병완은 민경들에게 잡혀 파출소로 가면서도 가슴을 뻗치고 마을 사람들을 향해 목청을 돋우어 소리쳤다. “나는 우리 마을 빈농들에게 미안한 일을 한 게 없소. 여러 분, 근심하지 마오.” 상순과 사원들은 죄수처럼 수갑을 차고 떠나가는 병완과 허영주를 묵묵히 목송했다. 하늘의 진붉은 태양은 지상의 만물을 불태울듯이 불비를 마구 내리퍼부었다. 갓 머리를 내민 야들야들한 옥수수 이파리들이 무정한 불볕에 데여 맥없이 축 늘어졌다. 온 대지를 진붉게 물들이는 낙조마저 굶주린 사람들이 발라 먹어 껍질이 벗겨진 비술나무마저 불태울듯 했다. 사원들은 무더위를 피해 쉼 시간이면 말라 죽어버린 앙상한 비술나무 밑으로 들어가 들어누워 팔로 얼굴을 가리고 쉬었다. 목 안에서 겨뿔 내가 확확 풍길 지경이었다. 일할 때 사원들은 모두 현훈증이 나 수건으로 머리를 질끈 싸매고 일하는 척 했다. 저쪽에서 모진 소리가 나서 모두들 그리로 눈길을 돌렸다. 학수가 물을 실어 나르던 곤두뿔의 잔등을 고삐로 치며 “이랴!” “이랴!” 하고 고함쳐도 곤두뿔은 대가리를 땅바닥에 댄 채 일어나지 못했다. 모두들 우르르 그리로 달려갔다. “이 놈의 쇠새끼, 일어나지 못하겠니?” 그러나 곤두뿔은 눈알을 흡뜨며 바쁜 숨을 몰아쉬는 것이었다. 저쪽에서 소수레에 물통을 실어 나르던 소들이 이쪽으로 대가리를 돌리고 곤두뿔을 근심어린 눈길로 바라보았다. 상순이 달려 가보니 곤두뿔은 마지막 숨을 몰아쉬는 것 같았다. “안 되겠소. 아마 무더위를 먹은 거 같소.” 말을 마치자 상순은 곤두뿔의 목에서 수레 멍예를 벗겨주었다. 곤두뿔은 자기 임자 상순을 알아보았는지 “음메-” 하고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뻐둑거렸다. 상순이 황급히 달려가 곤두뿔을 춰 세우려고 무등 애썼다. 허나 아무리 애써도 곤두뿔은 끝내 일어나지 못하고 대가리를 털썩 모로 떨어뜨리더니 네다리를 쭉 뻗었다. “나와 함께 숱한 황무지를 일궈 놓고 이렇게 털썩 쓰러지니? 곤두뿔아, 쓰러지면 안 된다! 안 돼!” 상순은 곤두뿔의 목을 끌어안고 엎뎌 대성통곡쳤다. “범바위골에서 네가 아니었더라면 우린 범과 곰에게 죽었을 게다. 네가 이렇게 물을 긷다가 죽으면 어쩌니? 죽는 날까지 일하다가 불쌍하게 죽었구나. 곤두뿔아!” 허백호 서기는 뒤에서 “원, 사람이 무슨 제 아비나 죽었다고 저러오?” 하고 코웃음 쳤다. 상순은 곤두뿔의 목을 글어 안고 흐느끼면서 울고 또 울었다. 어찌 슬프지 않으랴! 소서구와 범바위골의 어느 밭고랑에 곤두뿔의 발자국이 찍혀있지 않았겠는가! 허백호가 어찌 농사군과 밭갈이소의 깊은 정을 다 알 수 있었겠는가! 오후에 흥수랑 허백호랑 달려들어 곤두뿔을 잡았다. 집체식당에서 곤두뿔의 뼈를 우린 소탕에 곤두뿔의 살코기를 담아왔다. 허백호와 흥수는 밥상에 마주 앉아 야수들처럼 곤두뿔의 고기를 게걸스레 먹어댔다. 허나 상순은 숟가락을 들어 고기를 저어보다가 달랑 내려놓고 바깥으로 나가버렸다. 그가 어찌 자기와 함께 뼈 빠지게 황무지를 개간하고 농사를 지어온 곤두뿔의 고기를 먹을 수 있겠는가!
124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86) 댓글:  조회:1448  추천:0  2017-10-20
                                            제24장 폭풍우                                                                   천지를 뒤엎을듯이 으르렁대는 무서운 폭풍이 산과 들을 안아 바다에 처넣을듯이 천하를 샅샅히 휩쓸었다. 중국의 대지에는 전례 없는 폭풍이 먹장구름을 몰아왔다. 먹장구름이 뒤덮인 하늘의 변덕스런 풍운조화는 누구도 가늠하기 힘들었다. 꺼머칙칙한 하늘에는 흑룡이 아가리를 쫙 벌리고 인간세상을 통채로 삼킬듯이 덮쳐들었다. 숱한 얼룩독사들이 숲속에서 혀를 날름거리며 호랑이를 노려보는가 하면 원숭이들이 나무에 기어올라가 해금을 켜기도 했다. 어떤 먹장구름은 똑 마치 백골더미에서 기어나오는 백골정이 사악한 바람을 불러 일으키는 모양새를 해 간사해보이기로 그지없었다.        악마처럼 사악한 폭풍은 산과 들판을 휩쓸다가 야수무리처럼 먼지를 새뽀얗게 일구며 조용하던 마을에 덮쳐들었다. 엉터리없는 폭풍은 심술을 부리면서 고즈넉하던 초가집 이영을 홀락 벗겨갔으며 굴뚝 모서리에서 휘파람을 불면서 창문을 두드리고 동네 집 처녀가 옷을 갈아입는 것마저 게걸스레 훔쳐보며 바람벽을 핥아갔다.        심술쟁이 폭풍은 사람들을 못살게 굴더니 비구름을 몰아왔다.       뻘건 불 뱀이 먹장구름이 뒤덮인 하늘을 짜개며 날아들어갔다가 포화의 파편 속 같은 매지구름 속에서 뛰쳐나와 대지를 사정없이 채찍질 했다.       우르릉 꽝 꽝! 천지를 뒤흔드는 우레 소리와 함께 룡을 방불케 하는 룡구름 속에서 불뱀이 불쑥 나타나 패용산 마루에 도사리고 있는 호랑이 상을 한 호랑이구름을 휘감아 내동댕이쳤다.      따웅- 땅!광      하늘 땅을 들었다 놓는듯한 천둥소리와 함께 시뿌연 호랑이구름이 아가리를 쩍 벌려 산정에서 불뱀을 한입에 집어 삼켰다.     꽈르릉 -따웅- 천지를 진감하는 우뢰소리에 발맞춰 누러스름한 호랑이구름이 하늘 룡구름을 향해 뻘건 혀를 날름거렸다. 룡구름은 황급히 하늘로 치솟아 오르며 흩어지는 상 싶었다. 그러나 뭉게뭉게 타래쳐오르든 룡구름은 먹장구릅 속에서 아래로 날아내리더니 호랑이구름과 패용천산 허리를 휘감아 천길나락에 내리뜨리려고 용을 썼다.     꽈르릉!       따웅!      룡호구름이 아가리를 쩍 벌리고 맞부딛치는 순간 거대한 화광이 번쩍이고 불룡수염과 불호랑이수염이 하늘에 뻗치며 하늘땅을 진동하는 우뢰소리가 천지가 맞붙을 지경으로 지동쳤다.           똑 마치 하늘에서 룡과 호랑이가 피를 말리는 쟁투를 벌이는 것 같았다. 그 룡호쟁투에 휩쓸려 태양은 빛을 일었고 대지는 저승사자의 곡을 하며 신음하고 있었다. 질겁한 패용천산의 호랑이와 승냥이 사슴떼들이 산기슭으로, 산골짜기로 흩어져 숨어 하늘의 룡호쟁투를 쳐다보다가 살길을 찾아 도망치기에 바쁘다. 룡호쟁투의 칼바람 속에 백성들은 갈팡질팡하며 몸부림치며 하나하나 쓰러진다.      광풍이 휘몰아쳐 곡식들이 땅에 맞절을 할 듯이 허리를 굽혔다 폈다 하면서 모지름을 썼다. 후두둑 후두둑 곡식 이파리를 두드리면서 밤알만큼 한 우박이 와르르 쏟아졌다.      우박은 온 봄부터 여름까지 사원들이 땀 동이를 기울여 가꾼 강냉이 이파리들을 사정없이 쓸어 눕히고 짓밟았다. 사원들은 미친 듯이 불어치는 광풍 속에서 산과 들의 밭에 새뽀얗게 쏟아지는 소낙비를 바라보면서 주먹으로 가슴을 쿵쿵 치고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었다.                                                                      1.  조개덕      병완은 토성 안 생산대대 사무실 마루에 서서 무심한 하늘에서 사납게 일어나는 풍운변화 쳐다보면서 상을 찡그렸다. “하늘이 불쌍한 우릴 돕지 않는구나. 어떻게 하나 인민공사 첫해에 풍작을 걷어야 사회주의가 좋고 우리 공산당이 영명하다는 걸 보여주겠는데. 이 일을 어쩌오?”      상순은 할어버지를 위로했다.      “할아버지, 근심하지 맙소. 함흥대대 밭에서 곡식을 제대로 걷어들이지 못하면 또 범바위골에 들어가 묵밭에 감자를 심깁소.”       병완은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또 파출소에 잡혀가자구? 당원대회에서두 부업에만 정신을 팔면서 자본주의 소농경제를 발전시킨다고 비판받자고? 안 된다. 더는 널 욕보이게 할 순 없어.” 그러나 상순은 개의치 않았다. “함흥대대는 이전보다 너무나 큽구마. 원래 함흥촌에 소서구와 동구, 마개동 그리고 조개덕까지 들어와서 이젠  200호도 넘습구마. 난 조개덕 생산대 사원들만 데리고 가만히 산에 들어가겠습구마.” “야! 왼 고집이냐?! 지금 전국 정치형세가 심상찮다. 대약진과 인민공사를 반대하는 세력을 타도하는 반우파투쟁 바람이 세차게 불어치고 있잖니?  자본주의를 복벽한다고 투쟁맞자고 그러니? 정신 있니?”       할아버지 말리는 말에 상순은 대꾸하지 못하고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더니 엉덩이를 들고 우쭐 일어났다. 그는 착잡한 생각에 잠겨 이리저리 궁리하며  조개덕 초가집으로 돌아왔다.       지난해에 범바위산에서 동언의 실수로 산불이 달려 숱한 산림을 불태웠다. 그 일로 해 상순은 당내에서 비판받았고 동언은 파출소에 잡혀가 석달 동안 노동개조를 했던 것이다. 다행히 새로 온 파출소 소장은 허영호였다. 그는 상순이 영월구 공안국을 세울 때 받아들여 과장으로 제발시킨 간부였다. 후에 허백호 서기는 영월구로부터 진수해공사 당위 서기로 온 후 천용구 공안국장과 말해 사촌동생 허영호를 진수해 파출소 소장으로 데려왔던 것이다. 그리하여 허영호 소장은 옛날의 상전이라고 봐주어 그만해서 동언의 "방화사건"을 마무리지어버렸던 것이다. 허나 당내 비판대회에서 상순은 혼줄 났다. 허백호 서기는 상순을 비평할 때 코웃음쳤다. “흥! 상순 동무는 아직도 안하무인이구먼. 그 나쁜 버릇부터 고치라구. 삼도만 토비숙청 때도 항상 세상 일을 다 아는 척 하더니 아직도 그 꼴이구먼. 아직도 소농경제사상에 물젖어 인민공사에 청시도 하지 않고 가만히 심산에 들어가 황무지를 개간하다니? 참, 동무는 조직 관념이 있소? 없소? 세상에 둘도 없는 무정부주의자란 말이요.” 허 백호 서기는 갈범처럼 들었던 자료를 사무상에 탁 던지며 호통쳤다. “동문 정말 성질이 괴벽한 사람이오. 어째 고집이 그리 세오? 그 괴벽한 성질을 좀 고치오. 동무 눈에는 상급 공사당위 서기 있소? 없소?” 그때 병완은 일어나 흰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발언했다. “우리 마을 사원들을 데리고 범바위골로 들어가라고 지시한 사람은 내오. 내 모든 책임을 다 지겠소. 상순하고 아무런 관계없소.” “분명 제가 마을 사람들을 데리고 산에 들어갔는데 나설 게 뭡니까?” 상순의 그 말에 허백호 서기는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그 할아버지에 그 손자구먼. 손자가 조직의 비준도 없이 산에 들어가 부업하려고 할 때 어른이라면 마땅히 제지해야지. 왜 한 바지를 입고 춤 추오? 흥! 함흥촌은 당신들 때문에 문제요, 문제!” 그때 상순이 벌떡 일어나 허 서기를 손가락질 하며 질책했다. “저의 할아버지를 모독하지 마십시오. 산불이 난 건 저에게 영도 책임이 있습니다. 허나 사원들을 배불리 먹게 하려고 산에 들어간 것이 무슨 잘못이란 말입니까?!” "쯔쯔쯔, 저걸 보라니깐." 허 서기는 상순에게 삿대질하며 비평했다. “동무, 다른 공사 산에 들어가 황무지를 개간게 잘 했는가?  쌀을 국가에 바치지 않고 사원들에게 다 나눠 주면 되오? 그렇게 하면 자본주의 싹을 키우게 된단 말이오. 단순히 쌀 문제 아니오. 이건 사회주의 길로 나가는가, 자본주의 길로 나가는가 하는 엄숙한 문제란 말이오.” 이때 진수해인민공사 허영주 사장이 나섰다. “상순 동무가 범바위산에 들어가서 황무지를 개간한 일은 허 서기도 알겠는데. 이전에 내 범바위골에 갔다가 상순 동무가 보내온 멧돼지 고기랑 가져다 준 걸 기억나지 않소?  허 서기도 잘 먹고 인사까지 하지 않았소? 그때  허서기 비준받고 전 향에서 황무지개간현지회의을 열고 상순이 경험까지 소개하지 않았소? 그때 허 서기는 전 향에서 황무지를 개간하는 운동을 벌리자고 하지 않았소?” 허백호 서기는 미꾸라지처럼 구멍을 내고 빠져나갔다. “황무지를 개간한 일은 잘못이 없다고 보오. 허나 황무지를 개간해서 얻은 낟알을 국가에 한 알도 바치지 않고 몽땅 함흥 촌에서 나눠 먹은 건 착오가 아니고 뭐요? 순전히 자본주의 싹을 키우는 무정부주의 행위요.” 그때 상순이 가슴을 펴며 일어나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 “허 서기 말대로 생산대에서 황무지를 개간해 잘 먹고 잘 사는 게 자본주의 싹을 키운 게라면 배를 쫄쫄 굶으면서 사는 게 사회주의고 공산주의란 말입니까?” 허백호 서기도 물러서지 않고 사무상을 꽝 치며 일어났다. “이게 정말 우리 공사에도 자본주의냐 사회주의냐 하는 두 갈래 노선 투쟁이 존재하는구먼. 그저 넘어갈 일이 아니구먼.” 현당위 조직부 부장 이계삼은 상순에게 눈길을 돌리며 엄숙하게 비평했다. “범바위골 산불이 난데는 상순 동무가 영도책임이 있소. 이후에는 무슨 일을 하나 조직 관념에 주의하고 상급을 존중해야 하오.” 이계삼 부장의 공정한 발언에 허 백호 서기는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으며 상순과 허영주를 두리번거렸다. 이계삼 부장은 뜨거운 물을 마시고나서 뒷말을 이었다. “황무지를 개간하는 것이 ‘사회주의냐? 자본주의냐?’ 하고 너무 끌어올리지 말 걸 바라오. 오늘 날 모든 일은 이제 역사의 준엄한 시련과 고험을 받고 검증을 받아야 하오. 단 한가지만은 여러분들이 모두 심사숙고해 볼 문제입니다. 우리 공산당원들이 그래 마을 사람들이 굶어 죽는 걸 뻔히 보고만 있어야 합니까? 황무지를 개간해 백성들이 배고프지 않게 하는 것도 그래 잘 못이란 말입니까? 우리 공산당원들은 인민들의 이익을 위해 분투하는 게 취지가 아닙니까? 인민들을 배불리 먹고 살게 하는 것이 뭐가 잘못 됐단 말입니까?” 그 말에 모두들 머리를 끄덕였다. 이계삼 부장의 발언은 참가자들로 하여금 이구동성으로 상순과 병완이 한 일은 인민을 배 불리 먹고 잘 살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다만 사전에 공사당위 비준도 받지 않고 산에 들어갔고 화재가 생긴 일만은 상순이 서면검사를 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그날 상순은 서면으로 검사 서를 써서 공사당위에 바쳤다. 허백호 서기는 아주 엄숙하게 날이 선 말을 했다. “지금 한창 인민공사, 대약진과 반우파투쟁의 붉은 기를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고지에 꽂는 시기에 말을 주의하오. 자칫하면 반당분자로 몰리어 투쟁받을 수도 있소. 동무는 노실한 건 좋소. 허나 욱 하면 벽이라도 마구 차고 나가는 그 울뚝밸이 마음에 안 드오. 좀 울뚝밸을 참지 못하겠소?” 이계삼도 머리를 끄덕였다. “허 서기 말이 옳소. 당과 인민을 위해 일을 잘 하려면 꼭 그 결점을 고치고 인내성을 키워야 하오.” 허영주는 상순의 손까지 잡고 간곡히 부탁했다. “쓴 약은 몸에 좋다고 허 서기 말을 명심하오. 우린 무슨 일을 하나 냉정하게 심사숙고하고 빈틈없이 처리해나가야 하오.” 상순은 그들의 충고를 모두 받아들이고 결점을 시정하고 당과 인민을 위해 착실히 일할 것을 다짐했다. 그 후 공사에서는 함흥생산대대가 너무 커 관리하기 힘든데다가 병완과 상순이 한 생산대대에서 사업하기 불편한 점을 감안해 조개덕과 패용천마을 계수동을 함흥생산대대에서 떼내 조개덕생산대대를 내오고 상순을 조개덕생산대대 당 지부 서기로 임명했다. 함흥촌에서 1리 떨어지나 마나한 조개덕은 지주 조덕림이 제일 먼저 살던 마을인데 후에 조선에서 숱한 이민들이 하나, 둘 모여들면서 조선족과 한족들이 형제처럼 섞여 사는 혼합마을로 됐다. 조개덕과 패용천촌 한족들 가운데는 지주가 아주 많았고 빈농이 몇 집이 없었다. 이계삼 부장과 공사에서는 한어에 능통한 상순을 서기로 보내야 조개덕생산대대를 잘 다스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상급에서는 상순의 사업을 협조하라고 조개덕생산대대 당지부에 진달래와 새로 입당한 이학수도 보냈다. 상순이 조개덕으로 간다고 하자 창걸, 병수, 경학 등 숱한 사원들이 그를 따라 조개덕으로 이사해갔다. 상순은 조개덕에 내려가면서 천지꽃산 뒤의 소서구 밭을 둘러보았다. (저 밭은 우리 조손 3대가 조선 고향에서 쪽박을 차고 간도에 들어와 어떻게 일군 황무진가!) “아이고, 김서기, 이젠 조개덕으로 간다고 하니 내사 발편잠을 자겠구먼요.” 상순은 등 뒤에서 나는 한 여인의 웃음소리에 몸을 천천히 돌렸다. 지춘실이 갓 돌이 지난 딸애 미선을 안고 비웃음이 가득 실린 입귀를 비쭉거리었다. "또 무슨 소리야? 내사 뒤근심 없는줄 알아라," 춘실이 눈귀를 치켰다. "어쨌다고?" 상순은 주위에 다른 사람이 없는 것을 보고 말했다. “전번에 어째 나를 함정에 빠뜨리자고 하잖았는가?” “뭘 어쨌다고 이래?” 상순은 한걸음 다가가며 따지고 들었다. “몰라서 묻소? 애 앓는다 해놓고 그게 뭐요? 하마트면 도적으로 만들어놓고서도. 이젠 너하구 한 마을에서 살지 않게 됐으니 발편잠을 잘 거 같다.” “호호호. 삶은 소대가리 웃다가 꾸러미 터질 소릴! 원! 사내대장부가 고만한 담도 없소? 고런 토기 담에 어떻게 양키놈들하구 싸웠소?” 춘실은 애를 안고 허리 부러지게 폭소했다. “남의 나그네 없는 틈에 집에 들어왔으면 도적이 아니고 뭐요? 그것도 밤중에 아녀자가 홀로 있는 집에?” “왜 날 해치려고 드느냐?” 춘실은 외까풀눈을 치켜떴다. “함께 못 살 바엔 짓밟아 버리고 싶다. 어째? 명옥이한테 장가들더니 아들 하나 없이 꼴 보기 좋다. 콱 잘 살아라!” “함께 살지 못해도 우린 원쑤가 아니잖니? 우린 이젠 모든 게 끝이야!” “아갸!" 상순의 세귀눈을 보고 질겁한 춘실은 애를 안고 황급히 달아나면서 소리쳤다. "김 서기 사람 죽인다고 또 고함칠 테다.” 상순은 달아나는 춘실의 뒤에 대고 건 가래를 퉥 뱉었다. “더러운 년! 미인계를 써서 나를 함정에 빠뜨리려고?!” 상순은 저쯤 굽이를 돌아 달아나는 춘실의 펑퍼짐한 엉덩이를 보고 이상야릇한 감을 느꼈다. (사람의 정욕은 이상하지?) 허나 상순은 인차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안 돼, 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건설하기 위해 종신토록 분투해야 할 당원이야!) 상순은 마른 침을 꿀꺽 삼키더니 한숨을 길게 내쉬며 돌아서서 성큼성큼 걸어갔다. 모든 것이 냉정하게 이지의 세계로 서서히 돌아오는 순간이었다. 상순이네 조개덕으로 이사하게 된 날, 병완과 창준, 상훈과 상길 그리고 상우까지 찾아와 짐을 꾸려 주었다. 그런데 기준이 보이지 않았다. 짐을 다 싼 후 상순과 상우는 아버지를 찾아 온 마을을 헤맸지만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상순은 혹시나 해 어머니 산소가 있는 동산에 있는가 올라가 보았다. 계수동까지 다 찾아도 아버지는 보이지도 않았다. “혹시 소서구에 있는 할머니 산소에 가지 않았을까?” 상순은 중얼거리면서 상우 형님과 함께 소서구 중턱에 있는 할머니 산소로 올라가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할머니 산소에서 아버지 처량한 울음소리 들렸다. “어머니, 우리 정든 고향을 떠나 쪽박을 차고 건너와서 어떻게 일군 땅이라고 다 내놓고 조개덕으로 이사간단 말입둥? 예? 이 소서구 밭은 우리 조손3대가 피땀으로 일군 밭이지 않습둥? 그런데 조 막내아들놈이 조개덕으로 간다오. 이 일을 어쩌면 좋습둥? 어허헉, 헉헉.” "아버지!" 상순과 상우는 목메여 이구동성으로 아버지를 부르면서 달려갔다. 어둠 속에서 기준은 어머니 산소 옆의 밭에서 머리를 숙이고 벌벌 무릎걸음을 하고 있었다. “아버지!” 상순은 아버지를 부축해 일으키려고 했다. 아버지는 울면서 입으로 밭의 흙을 쩝쩝 핥는 것이 아니겠는가. “아버지, 이러지 맙소. 내려 가깁소. 이제 조개덕에 가서 황무지를 많이 일구면 꼭 함흥촌에서보다 못잖게 배불리 먹고 살 수 있을 겁니다.” “이 놈 자식, 놔라!” 기준은 상순의 팔을 활 뿌리치면서 고함쳤다. “이 놈아, 곡식도 뿌리를 뽑아 옮겨 놓으면 잘 자라지 못해. 우리 고향 떠나 여기 와서 얼마나 고생했느냐? 여기서 겨우 밭을 일궈 놓고 살만 하니까. 또 밭도 별로 없는 한족마을로 가서 고생할 예산이야?” 상순은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아버지 심정은 이해됩구마. 이 막내아들은 공산당원입구마. 나는 배고픈 고생을 하는 조개덕 군중들을 이끌고 배불리 먹고 살게 하는 길로 나가겠습구마. 아버지, 이해해 줍소.” 기준은 더욱 서럽게 울면서 무릎을 꿇고 밭의 흙을 두 손으로 담아 코에 대고 흙냄새를 맡다가 봄바람에 후루루 날려 보냈다. 아쉬운 눈물이 이별의 아픔으로 부서져 흩날려갔다. 상순은 아버지 아픈 마음을 위안해주며 겨우 집으로 모시고 내려왔다. 조개덕으로 떠날 때, 기준은 두 번째 고향 함흥 촌을 떠나기 싫어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애들도 할아버지를 따라 덩달아 울었다.        병완은 조개덕으로 떠나는 상순을 대견하게 바라보았다.        상순은 조개덕에 내려가면서도 근심부터 앞섰다.        (조개덕에는 손바닥만한 논밭도 없는데 어떻게 사원들을 배불리 먹고 살게 한단 말인가?)                                                                           2. 덕대 위 덕돌       상순은 조개덕 사원들의 초가삼간마다 돌아다니면서 정황을 요해하고 나서 앞이 막막해 한숨만 땅이 꺼지게 내쉬었다.       그가 집 안에 들어서니 아버지가 한창 둘째 손녀 은숙과 함께 가마니를 짜느라고 땀을 흘리고 있었다. 순자는 벽 밑에서 밥상에 마주 앉아 한창 공부를 하고 있었다.        “아이고. 이 년이 또 가마니 술로 내 손을 쳤다!” 기준은 바디를 놓고 가래짝 같은 손을 쳐들었다. “어마나!” 은숙은 가마니 술을 든 채 황급히 바깥으로 달려 나갔다. “어데로 달아나? 달아나면 어떻게 가마니를 짜니?” 은숙은 바깥에서 집 안에 대고 부서지는 소리를 쳤다. “때리는 거 뭐? 이젠 어머니하고 가마니를 짜지 할아버지하고 짜지 않겠습구마..” 그러자 순자가 밥상을 밀어 놓더니 가마니 술을 쥐고 다가와 앉았다. “할아버지, 내 술질을 할래요.” “응, 그래. 공부하지 않구 되겠니?” “숙제를 거의 했어요.” “음, 저녁으로 밀지 말라. 괜히 석유를 없애지 말고.” “예.” 상순은 구들에 올라와 앉으면서 아버지를 만류했다. "쉬면서 가마니를 짭소.” “얘, 며느리 오래잖으면 애기를 낳겠는데 가마니를 짜야 미역국이라도 끓이지.” 상순은 조롱조롱 들어앉은 딸들을 둘러보더니 한숨을 땅이 꺼지게 쉬었다. 그때 고방에서 명옥이 앓음소리 들렸다. 상순은 고방으로 들어갔다. “어떠오?” 상순은 벼짚을 깔고 누워 있는 명옥의 남산만한 배를 내려다보면서 물었다. “내일이나 모레면 애를 낳을 거 같소.” “이번에는 아들일가?” 상순은 혼자 소리를 하면서 명옥의 배를 만져보았다. “남들이 말하는게 배 한판이 뿔룩하면 아들이고 움푹하면 딸이라던데 어디 보자.”        상순은 명옥의 배를 슬슬 만져보면서 중얼거렸다. “아니, 이번에도 딸이면 어쩌니? 대가 끊어지겠는데. 이게 또 딸인 모양이구나. 배 한판이 움푹한 게.”       뒤이어 그는  명옥의 남산만한 배를 손으로 툭 쳐 밀어놓으면서 바깥으로 나가버렸다.       명옥은 배 안에서 꿈틀거리는 애기를 매만지면서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마흔 살에 어떻게 임신한 애라고 저럴까?”       순간 그 애를 가지려고 모진 애를 쓰던 이왕지사가 눈물겹기만 했다.        조롱조롱 딸애 다섯이나 낳았다고 남편 상순은 집에만 들어오면 대가 끊어지게 됐다고 야단쳤다. 상순이 어찌나 신경질을 쓰는지 명옥은 너무 힘들고 지겨웠다. 그런데 아들을 낳자고 해도 서른여덟 살에 벌써 달거리가 가버렸다. 명옥이 아무리 기다려도 달거리는 나지지도 않았다. 아마 제대로 먹지 못해 영양부족으로 인해 너무 일찌기 그렇게 된 것 같았다. 조개덕과 함흥 촌에서 목수 최국선이네와 상순이네가 아들이 없었다. 그런데 한해 전에 최국선은 아들을 보고 기뻐서 동네 사람들을 청해 큰 생남잔치까지 베풀었다. 이젠 아들이 없는 집은 상순이네 밖에 없었다. 명옥은 떡돌 같은 아들을 낳았으면 좋겠는데 용빼는 수가 없었다. 약을 써 보려고 해도 쌀독을 빡빡 긁어 죽물도 겨우 먹는 신세에 어데서 돈이 있어 약을 쓰겠는가? 그런데 조개덕 생산대대 당지부 조직위원을 맡은 이학수가 상순이네 딱한 사정을 보고 지원의 손길을 보냈다. 어느 하루, 그는 상순이네 집으로 찾아와 돈 5원을 내놓았다. “김 서기, 이 돈을 보태 아주머니한테 녹태를 사다 대접하오. 꼭 아들을 낳을 수 있을 게요.” “고맙소.” 아들이란 말에 상순은 학수가 얼마나 고마운지 몰랐다. 학수가 상순에게 돈을 가져다준 것은 상순이네 부부가 이전에 덕을 쌓은 덕분이었다. 상순과 병완은 학수를 입당시킨 소개인이었고 상순의 아내 최명옥은 학수의 외동아들 주홍을 젖을 먹여 키워준 주홍의 구명은인 양어머니가 아닌가! 며칠 후 이른 아침에 목수 최국선이 상순이네 집으로 찾아와 호주머니에서 돈 12원을 꺼내 내놓으면서 진심에 어린 말을 했다. “벙어리가 벙어리 고통을 안다고 이 집에 아들이 없어 속을 태우는 걸 아오. 이 돈으로 녹태를 사서 제수를 대접하오. 내 아내도 녹태를 사 먹고 떡돌 같은 아들을 낳았소.” “고맙소, 최 목수.” 상순은 일하러 나가기 전에 돈 17원을 순자에게 주면서 “네가 연길에 가서 녹태를 사오너라.”라고 신신당부했다. 명옥은 근심스러워서 순자를 붙잡고 “돈을 꼭 잘 건사해라.”라고 하면서 일원을 꺼내 쉽게 꺼낼 웃옷호주머니에 넣어주고 나머지 돈은 바지 호주머니에 넣어주었다. “요걸로 차비를 하고 점심이나 사먹어라. 연길에 가면 넷째외할머니네 집으로 찾아가서 사달라고 해라. 네가 어데 가서 녹태를 사겠니? 가짜라도 사면 큰 일 난다.” 명옥은 나머지 돈을 넣은 호주머니를 바늘로 꿰매주고 나서 외할머니네 집을 어떻게 찾아 가라고 상세히 알려줬다. 순자는 그때 겨우 열세 살 밖에 안됐다. 연길을 가본 적도 없었고 녹태란 말 들어 본적도 없었다. 그래도 남동생을 보려는 일념으로 단돈 17원을 간직하고 연길로 떠났다. 버스를 타고 연길에 가서 내린 후 어머니가 가르쳐 준대로 하남다리를 건너 우물을 지나 동쪽으로 굽어 들었다. 처음 연길에 왔는지라 가보지도 못한 넷째 외할머니네 집을 어떻게 찾는단 말인가? 천방지축 헤매다가 어머니가 가르쳐준 근방에 가서 이 골목 저 골목 헤매면서 이 집 저 집 들어가 물었다. 외할머니 명함도 모르고 허망 외삼촌 댁이 식품상점에 다닌 다고 말하면서 찾고 또 찾았다. 정성이 지극하면 돌 우에도 꽃이 핀다고 점심 때 거의 돼서야 끝내 넷째 외할머니네 집을 찾아냈다. 넷째 외할머니는 기뻐 어쩔 줄 몰라 했다. “에이고, 네가 어떻게 하면 우리 집까지 다 찾아 왔느냐?” 갓 결혼한 외삼촌 최근호와 새 삼촌댁은 있으면 아주 반가와 했겠는데 출근하고 없었다. 순자의 넷째 외할머니 정어금은 남편이 밥이라도 배 불리 먹으려고 마약 장사를 하다가 일본 놈들에게 살해된 후 딸 셋과 아들 근호를 데리고 시아버지 최구장을 따라 함흥촌에 왔었다. 광복을 맞은 후 중국 공산당 덕분에 사돈 병완 촌장에게서 조개덕의 땅을 분배받았다. 허나 남편도 없이 도저히 농사를 지을 수가 없었다. 비록 맏시형 경숙과 셋째 시동생네 집 식구들이 옆에서 거들어 주고 사돈 병완과 조카사위 상순까지 돌봐주었지만 눈치가 보였다. 설상가상으로 시아버지와 맏시형 경숙이네가 사돈집과 멀리 한다고 진수해 시내로 내려가자 믿을 구석이 없게 됐다. 그리하여 정어금은 애들을 데리고 연길에 내려가 닥치는 대로 보짐 장사를 하면서 살았다. 살림살이가 아주 궁핍했지만 그녀는 원래 인품이 후하고 마음이 뜨거운 분이어서 구차하게 사는 시댁조카 명옥을 아주 동정하면서 입던 옷이라도 쥐어 주면서 도와주군 했다. 순자가 오자 넷째 외할머니 정어금은 와락 끌어안으면서 불쌍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에이구, 시골애가 꽤나 역바르구나. 어떻게 연길에서 우리 집을 다 찾아왔니?” 순자가 찾아오게 된 사연을 말하자 넷째 외할머니는 혀를 끌끌 찼다. “그래, 녹태를 먹으면 옥동자를 낳을 거야.” 그런데 넷째 외할머니는 일하러 나가는 길에 순자를 데리고 연길의 어느 한 의약상점에 가보았다. 그런데 그 상점에 녹태가 없었다. “이걸 어쩌니?” 넷째 외할머니는 울상을 지었다. “난 일하러 가야겠는데 녹태를 사지 못해 어쩌니?" 넷째 외할머니는 아래쪽을 가리키며 알려주었다. "가만 있자, 저기 오금상점 아래쪽에 있는 백화상점이거나 다른 약방에 가면 있겠는지. 가봐라.” 넷째 외할머니까지 일이 바빠 가버리자 순자는 눈앞이 캄캄해났다. (녹태를 꼭 사가지고 가야겠는데. 엄마가 남동생을 업어오게 해야지.) 순자는 점심도 먹지 못하고 이 골목 저 골목 돌면서 묻고 또 물으면서 여러 약방을 찾아 다녔다. 한 약상점에서  녹태가 있다고 하자 얼마나 기뻤는지 몰랐다. 순자가 옆구리에 기워 맨 호주머니를 뜯고 16원을 꺼내 점원에게 주자 상점 점원은 눈이 휘둥그래 물었다. “네가 녹태를 사다 뭐 하니?” “우리 엄마 녹태를 잡숫고 남동생을 업어오게 하자고 그럽니다.” “그래?” 약방 녀점원들은 서로 눈길을 맞추며 어린 시골소녀의 그 가긍한 마음에 혀를 끌끌 찼다. “돌아갈 때 녹태를 잘 건사해라.” "예." 순자는 상점 점원이 꽁꽁 싸주는 성냥갑만한 녹태를 받아 호주머니에 잘 건사하고 상점 문을 나섰다. 그는 녹태를 잃어버릴까봐 녹태를 넣은 호주머니를 손으로 꼭 잡고 길을 떠났다. 그녀는 배를 촐촐 굶으면서도 남동생을 보겠다는 일념으로 이를 꼭 옥 물고 연길에서 버스에 올라타고 진수해로 떠났다. 그녀가 진수해에서 15리나 떨어진 함흥촌으로 돌아왔을 때에는 입에서 겨뿔내가 확확 났고 눈앞이 아물거리면서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어느 날, 상우는 패랑산 앞의 물도랑에서 익모초 한 짐을 베서 지게에 지고 동생 상순네 집으로 왔다. 명옥이 바삐 마당에 나가며 상우 잔등의 풀를 보며 물었다. “아주버니, 이건 뭐예요?” 상우는 지게를 벗어 받침막대기로 받쳐놓으면서 말했다. “제수, 이건 익모초요. 이걸 닳여서 먹으면 랭이 빠져서 아들을 낳을 수 있을게요. 우리 처도 애를 낳지 못하다가 익모초를 달여 먹고 애를 줄줄 낳았소.” 명옥은 시형을 거들어 지게에서 익모초를 부리면서 보니 연분홍 보라빛 입술모양의 꽃이 핀 풀이였다. 상순이 집에 돌아오자 명옥은 금방 시형이 가져온 익모초 이야기를 했다. 상순과 명옥은 아들을 볼 간절한 마음에서 익모초를 작두에 썩썩 썰어 가마 안에 넣고 부글부글 끓였다. 명옥이 뚜껑을 열고 김이 물물 나는 가마 안을 들여다보니 씨꺼먼 약물이 보이었다. 명옥이 바가지로 조금 떠서 맛을 보니 쓰겁기로 말이 아니었다. 그러나 명옥은 아들을 보려는 일념으로 이를 악물고 익모초를 닳인 물을 마셨다. 기적이 일어났다. 마흔도 다 된 명옥은 순자가 사온 녹태와 시형이 베 온 익모초를 닳여 먹고 가버렸던 달거리가 다시 나졌다. 몇 달후에는 서른아홉에 기적적으로 임신까지 했던 것이다. 그렇게 애나게 임신했건만 남편 상순은 딸을 낳을까봐 두덜거리기만 했다. 어느 날 초저녁, 상순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오늘 일찍이 자자.”라고 했다. 석유등잔불 밑에서 숙제를 하던 순자는 뾰로통한 소리를 했다. “아직 숙제도 채하지 못했는데 벌써 쉬겠습니까?” 상순은 맏딸의 애원소리를 들었는지 말았는지 등잔불을 훅 불어 끄고 아내 옆에 드러누웠다. 그는 전날처럼 또 아내의 배를 만져보면서 중얼거렸다. “애가 왼쪽에 있고 복판이 볼록해야 아들이라오. 그런데 이게 애가 오른쪽에 있고 복판이 둥그렇게 움푹 빈 걸 보니 또 딸이구나!” 그는 배까지 툭 쳐놓고 나가버렸다. 또 딸일까 봐 명옥은 적이 근심됐다. “어떻게 임신한 앤데. 제발 이번엔 아들을 낳았으면 얼마나 좋을까?” 배 속의 어린애는 나기 전에 전설 같은 이야기가 많았다. 조개덕의 늙은 비술나무 밑으로 지나가던 늙은 스님이 상순이네가 넷째 딸 신자의 생일을 쇠 주지 않자 함흥 촌에까지 찾아 온 적이 있었다. 그 스님은 상순을 보고 신자를 가리키며 이렇게 예언했다. “이 애를 천대하지 말고 생일을 잘 쇠 주오. 그러면 5년 후에 소가 밟아도 우그러들지 않는 애를 낳을 거요. 장차 이 집에 하늘신과 땅신, 인간신 세 신을 업은 천하에 둘도 없는 애를 낳을 거요.” 태몽 또한 이상했다. 명옥은 어느 하루, 땔나무 하러 가파른 패용천산으로 갔다. 그녀가 숨이 가쁘게 나뭇가지들을 잡아 쥐면서 가파른 산으로 톱아 오를 때였다. 불현듯 아름드리나무들이 하늘을 찌르는 수림 속에서 금빛이 누렇게 하늘을 찌르며 눈부시게 빛나고 있지 않겠는가. 하도 이상해 그녀가 잔 나뭇가지를 휘어잡고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가 보고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글쎄 아름드리 소나무 가지에 금빛이 반짝반짝 빛나는 커다란 금낫이 걸려 있지 않겠는가! “아니, 금 낫이 어쩌면 내게 차려졌담!” 명옥은 황급히 금빛이 반짝이는 금 낫을 벗겨 쥐였다. 분명 낫날이고 낫자루고 모두 금빛이 반짝이는 금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겠는가! 참말 놀랍고도 기쁜 일이었다. 명옥은 땔나무고 뭐고 다 그만두고 그 금빛 낫만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금빛 낫에 깃든 태몽을 꾸고 잉태한 것이 바로 명옥의 배 속 아기였다. 명옥이 함흥 촌에 올라가자 웃새집 큰시어머니는 또 “작은집 작은며느리 이번엔 또 무슨 태몽을 꾸었소?” 하고 물었다. 금낫에 깃든 태몽 이야기를 들려주자 큰시어머니는 머리를 끄덕이더니 “이번에 열 번째 만에 분명 금돌 같은 아들애를 보겠구먼.”라고 했다. 명옥은 잉태한 열달 동안 줄곧 하느님께 “제발 금덩이 같은 아들을 점지해 주옵소서.” 하고 서쪽의 패용천산과 칼산을 향해 마음속으로 빌고 또 빌어 왔다. 이튿날 이른 아침, 명옥은 중얼거리다가 빡빡 긁던 쌀독이 떠올라 애를 낳으면 먹을 것을 마련하려고 만삭이 된 몸으로 농궤에서 단돈 50전을 꺼내 들고 진수해로 떠났다. 그녀는 만삭이 된 모진 몸으로 장마당에 가서 강냉이 쌀을 한 주머니 사 이고 점심도 사 먹지 못한 채 허기진 만삭이 된 배를 끌어안고 귀로에 들어섰다. 그녀는 천신만고 끝에 해가 서쪽으로 기운 후에야 겨우 집으로 돌아왔다. 다행히 땡볕이 쨍쨍 내리 쪼일 뿐 비가 내리지 않아 무사히 집으로 돌아 올 수 있었다. 황혼이 깃들어 열린 고방 문으로 내다보자 서쪽의 패용천 산과 칼산이 타는 듯이 낙조가 벌겋게 비껴 있었다. 무슨 아쉬움이 저렇게 빨갛게 탈까? 하늘도 힘겹게 사는 이들을 보고 속이 다 뻘겋게 타는 모양이다. 명옥은 진수해 장마당에서 돌아오자마자 애를 당장 낳겠는지 하신에서 끈적끈적한 양수가 흘르는 것을 발견했다. 하건만 그녀는 이를 악물고 신음소리를 내면서 강냉이 쌀을 씻어 가마에 얹혀 놓고 불을 일궈 놓았다. 그녀는 때끔때끔 아파나 더는 참을 수 없어 벽 밑에서 공부하는 순자를 불렀다. “맏이야, 애를 낳을 거 같다. 네가 불을 때라." 그녀는 바깥에서 제기차기를 노는 은숙도 불렀다. "얘, 넌 빨리 우사에 가서 아버지를 오라고 일러라.” “예-” 은숙은 바깥으로 나가자마자 종주먹을 쥐고 우사로 뛰어갔다. 그때 기준은 윗방에서 나와 사랑방으로 들어갔다. “아니, 이게 뭐냐? 멱 줄거리 밖에 없구나. 며느리가 애를 낳으면 멱국을 먹이자고 가마니를 팔아 멱을 사다가 여기 숨겨뒀는데.” 정지에서 홍자랑 신자랑 “히히히.” 하고 코웃음을 치다가 할아버지가 나오자 손으로 입을 가리면서 머리를 숙였다. “분명 네 년들이 한 노릇이지?!” 기준이 멱 줄거리를 쳐들고 정지에 들어서자 애들은 “와!” 하고 바깥으로 도망쳤다. 다만 순자만은 부엌에 앉아 불을 때면서 시무룩이 웃었다. 기준은 “넌 모르니?” 하고 따졌다. 순자는 “배고파서 아마 애들이 뜯어 먹은 거 같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기준도 팔소매를 훌훌 걷더니 돼지죽을 끓이던 가마를 싹 부셔내고 멱 줄거리를 씻어 넣고 멱 줄거리로 국을 끓이기 시작했다. 고방에서 명옥은 앓음 소리를 내면서 배속의 애를 만져 보았다. 애기는 세상에 나오기 조급한지 배 속에서 요란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에이고, 애비를 닮아서 성급하기도 하구나. 제일 먹을 게 없는 재해를 입은 세월에 세상에 나와서 어떻게 먹을 고생을 하겠느냐?) 한편 은숙이 우사에 뛰어가 아버지를 불렀다. “아버지, 엄마 애기를 낳겠는 모양입니다. 빨리 집으로 가깁소.” “헤이, 또 딸이겠지.” 상순은 쇠똥을 치던 삽을 벽에 세워놓고 집으로 갔다. 상순이 벼 짚을 깐 어두운 고방에 들어서니 명옥이가 아파나는 아랫배를 부둥켜안고 굴고 있었다. 상순은 다가가 “좀 참고 견디오.”라고 하며 수건으로 명옥이 얼굴의 땀을 닦아주면서 위로했다. 저녁 여섯시쯤 되었을 때었다. 명옥은 앓음 소리를 내면서 안간 힘을 다해 애를 낳았다. “응아-” “응아-” 갓난 애기의 울음소리가 온 집안을 요란하게 울렸다. 상순은 애기를 받아 낸 후 입으로 탯줄을 물어 끊기 바쁘게 바삐 애기 두 다리 사이를 만져 보았다. “아니, 이게 뭐야?” 명옥은 황급히 “어째 그러오?” 하고 맥없이 물었다. “뭐 달린 놈이구나!” “양? 잘 보오.” 명옥은 놀랍고도 급해났다. “정말이오. 고추 달린 놈이오! 당신은 끝내 아들을 낳았소.” 명옥은 머리를 들어 애기를 보려다가 어두워 보지 못하고 머리를 툭 떨어뜨렸다. “음. 그럼 시름 놓았소.” 그녀는 아들을 낳고 시름을 활 놓았던지 스르르 까무러쳤다. 아들을 낳아 기쁘기도 했겠지만 굶어서 맥이 진한 것이었다. 기준은 손자를 보자 윗방에서 정지에 내려와 상순이 품에서 손자를 받아 안고 들여다보면서 기뻐 어쩔 줄 몰랐다. 이윽고 기준은 상순을 보고 애기를 까무러친 어미젖을 먹인 후 시퍼런 칼과 함께 함지에 담아 조왕 덕대에 올려놓게 했다. “아버지, 어째 이럽둥?” 기준은 보로 손자 놈을 잘 덮어주면서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함지에 칼을 담아 두면 병마가 애에게 감히 덮쳐들지 못한다. 함지에 담아 덕대에 높이 올려놓으면 장차 이 애가 만 사람이 우러러 보는 높은 사람이 될 거야. 사람은 집에서부터 높이 모셔야 바깥에서도 높이 모시는 거야.” “예~ 듣다 첫 얘깁구마.” 한참 궁리하던 기준은 마른기침을 쿨룩거리더니 “얘, 이름을 덕돌이라고 짓자.”라고 했다. 상순은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아니, 이담 크면 혹시 애들이 떡돌이라고 별명을 지어 부르면 어쩝둥?” 허나 기준은 고집을 썼다. “모르는 소리! 이 이름이 좋다. 덕대에 높이 모신 손자니까 덕대라는 덕을 넣어서 덕돌이라고 지은게야. 덕은 또 도덕, 덕분에 덕이 들어가서 좋아. 돌은 쇠 밟아도 부서지지 않을 지경으로 딴딴하고 앓지 않을 거야. 이전에 그 중 말이 기억나지 않니? '5년 후에 이 집에서 소 밟아도 우그러들지 않는 떡돌 같은 아들을 보게 된다.' 하지 않았어?” 아버지 말씀에 상순은 머리를 끄덕였다. “덕돌. 알고 보니 이름이 좋습니다.” 기준은 도리머리를 저으면서 장탄식했다. “헤이구, 재해년에 나서 뭘 먹고 살겠니?” 순자랑 애들도 남동생이 귀여워 모여와 구경했다. 순자는 성냥마저 없어 윗집 경산의 집에 가서 나무꼬챙이에 불을 붙여다 부엌 아궁이에 불을 땠다. 상순은 가마 안에 미역 몇 오리를 더 걷어 넣고 미역국을 끓이기 시작했다. 이때 조왕 덕대에 올려놓은 함지에서 덕돌이 자지러지게 울어댔다. “저 놈이 무서워 우는 게 아닐까?” 상순은 함지를 내리우고 덕돌을 안아 아내한테 가져다 젖을 물리었다. 그때까지도 명옥은 까무러친 채 깨나지 못하고 있었다. 석유등잔불 아래 덕돌이 엄마 젖을 오물오물 빨며 젖을 먹는 귀여운 모습이 보였다. “여보, 이젠 깨나오. 깨나서 멱국이나 먹소.” 상순은 멱국을 퍼다 숟가락으로 명옥의 입에 퍼 넣었다. 그래도 명옥은 깨나지 못했다. 명옥은 아들을 낳고 시름을 활 놓은데다 며칠 동안 쌀알이라고는 입에 대지도 못해 맥이 모자라 온 밤 깨나지 못했다. 밤중에 남편이 부축해 일으켜서야 그녀는 겨우 일어나 순자가 떠온 미역국을 후후 불며 마셨다. 그제야 정신이 좀 났다. 이튿날 아침, 아버지가 쑤어놓은 강냉이 죽을 보자 며칠 배를 촐촐 굶은 애들은 정지에서 좋다고 국자로 떠서 후후 불면서 먹어대고 있었다. 겨우 정신을 차린 명옥은 모기 소리 같은 목소리로 “죽을 좀 퍼 달라.”하고 말했다. 그 소리에 은숙은 “엄마 살아났구나.” 하고 말하며 강냉이 죽을 한 사발 퍼다 어머니 입에 한 술 한 술 떠 넣어주었다. 점심에 상순은 집에 돌아왔다가 아내가 일어나 애기에게 젖을 먹이는 것을 보고 너무도 기뻐 집에 있던 돈을 다 들춰가지고 마을에 나갔다. 그는 7촌 조카 경학이네 집에 가서 돈을 꿔가지고 아래 마을 계수동합작사에 가서 보온병을 사다가 덕대에 덜렁 올려놓았다. 그런데 하나 밖에 없는 아들 덕돌은 난 날부터 어찌나 자지러지게 우는지 낳은 엄마도 어쩌는 수 없었다. 그때 죽을 먹던 신자가 덕돌이 우는 소리가 듣기 싫다고 숟가락으로 밥상의 숟가락을 두드렸다. 달라당, 달라당! 숟가락을 두드리는 소리에 덕돌은 울던 울음을 뚝 끊었다. 그 후부터 애들은 덕돌이 울기만 하면 밥상에 숟가락을 놓고 두드리곤 했다. 그때마다 덕돌은 재미났는지 울지 않았다. 마반산 집 할머니는 산파였다. 그의 말이라면 사람들은 의사 말만큼 믿고 그대로 했다. 덕돌이 너무 자주 똥물싸개를 하자 마반산집 할머니를 찾아갔다. 마반산 집 할머니는 명옥을 보고 “애에게 젖을 자꾸 먹이지 마오. 젖을 너무 많이 먹이면 똥물싸개를 하오.”라고 했다. 그때부터 명옥은 그 말대로 덕돌에게 젖을 잘 먹이지 않았다. 그 후부터 덕돌은 여위어 자꾸 앓으면서 갈비대가 아롱아롱하고 눈확이 폭 꺼졌다. 하루는 경학의 처가 덕돌보다 열엿새 늦게 낳은 성욱을 안고 놀러 왔다가 덕돌을 보고 놀랐다. “아니, 얘가 어째 이렇게 되였소?” “마반산집 할미가 젖을 먹이면 똥물싸개를 한다고 해서 젖을 먹이지 않았소.” 성욱의 엄마는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그 할미 말을 듣지 마오. 젖을 먹이오. 우리 성욱을 보오. 젖을 많이 먹어도 똥물싸개는커녕 감기도 하지 않소. 빨리 젖을 먹이오.” 그때부터 명옥은 덕돌에게 젖을 먹였다. 그리하여 덕돌은 차차 몸에 혈색이 띄고 포동포동해지면서 튼튼하게 자랐다. 그사이 똥물싸개를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일, 여덟 달이 지나 덕돌이 구들에서 앙금앙금 기기 시작했다. 기준은 너무 희구해 웃방 문턱 너머 손을 내밀면서 “이리 와, 이리 와. 헤이구 그 놈이 조걸 보오, 기는구나. 그 놈이 희구하다.”하고 대견스레 웃었다. 기준은 조개덕에 내려온 후 제대로 먹지 못해 3년 동안이나 앓음 소리를 내면서 앓았댔다. 허나 손자를 보자 기뻐서 어데서 힘이 생겼는지 일어나 호미를 쥐고 나가더니 사래긴 콩밭 기음을 몇 고랑씩 맸다. 지어 상순이 이영을 이을 때면 지붕에 올라가 이영을 잇는 일을 도와 주군 했다. 상순과 명옥은 늘그막에 낳은 하나 밖에 없는 아들에게, 금이야 옥이야 하고 쥐면 부서질가봐 놓으면 날아날 가봐 하면서 키우는 덕돌에게 생일상을 차려 주었다. 덕돌의 생일상에 상순은 연필과 공책, 돈과 쌀 사발을 놓았다. 명옥은 잘 살라고 입쌀과 좁쌀, 기장쌀, 옥수수쌀, 수수쌀, 열콩, 콩을 그릇 그릇 담아 올려놓았고 찰떡, 감자떡, 닭 알 지짐을 올려놓았다. 덕돌은 명옥의 품에 안겨 생일상에 마주 앉자 벌떡 일어나 연필을 덥썩 쥐더니 필기장에 죽죽 오리면서 놀았다. 친척들과 마을 사람들은 “이 담 덕돌은 공부를 잘 하겠다.”라고 했다. 어떤 사람들은 덕돌이 5원짜리 돈을 가지고 놀다가 연필로 쌀을 담은 사발을 돌아가면서 휘저으면서 놀자 혀를 끌끌 찼다. “에, 큰 노릇을 할 놈이 다르긴 다르다.” “장차 쌀 고생을 하지 않고 잘 살겠다.” 덕돌은 어머니가 손수 빚어놓은 생일 떡을 두 개나 먹었다. 누나들은 남동생이 귀여워 항상 아버지와 어머니가 일 밭에 간 후에 덕돌을 탄자에 올려놓고 네 귀를 들고 그네처럼 흔들면서 온 동네를 돌아 다녔다. 그 놀음이 좋아서 덕돌은 항상 입귀가 귀밑까지 찢어질 정도로 벌리고 깔깔깔 웃어댔다. 그것이 습관이 돼 덕돌은 돌이 지나고 서너 살을 먹은 다음에도 늘 “누나, 그네 타자.” 하고 떼를 썼다. 누나들은 제기도 차고 차개차기도 놀아야 하겠는데 시끄러울 때다가 많았다. 그럼 애들은 덕돌이를 탄자에 올려놓고 애기 때처럼 “헤이 싸! 헤이 싸!” 하면서 그네를 태우는 척 하다가 길바닥에 쾅 내려놓았다. 덕돌은 엉덩방아를 찧어 아파 “와-” 하고 울음보를 터뜨렸다. 그 후부터 덕돌은 다시는 탄자그네를 타자는 말을 하지도 못했다. 엄마와 아버지가 일 밭에서 돌아오면 손시늉을 하면서 고발했다. “엄마, 엄마, 누나네 탄자를 쾅 이랬다.”  “엉? 누가 그랬니?” “저 누나들이 다!” 덕돌은 누나네를 손가락질 했다.       명옥은 빗자루를 들고 애들을 때리면서 고래고래 고함쳤다.       “이 년들아, 내가 어떻게 낳은 아들이라고 땅에다 탕 놓니? 요 년들아, 너네 다섯을 주고 덕돌이 하나 바꿀 거 같니? 응?!” 명옥은 애들을 쫓아가며 때리면서 욕설을 퍼부었다. “금이야 옥이야 하고 쥐면 부서질까 봐 근심하면서 키우는 애라고? 우리 덕돌을 까딱 다치기만 해봐라. 몽땅 가만놔두지 않겠다!” 애들은 빗자루에 맞으면서 바깥으로 달아났다. 둘째 은숙은 문을 열고 신도 못 신은 채 달아나면서 혀를 내두르면서 엄마에게 반항했다. “아들, 아들! 덕돌이, 덕돌이 밖에 모르면서!” 누나 네가 다 쫓기어 나간 후 덕돌은 울먹울먹해 서적을 쓰면서 말했다. “엄마, 누나네 없어 심심하다!” 그제야 명옥은 비방울이 떨어지는 바깥을 향해 소리쳤다. “얘들아, 들어오너라. 덕돌이 심심하다고 운다!” 누나들은 대사령이나 내린 듯이 와르르 집으로 쓸어 들어왔다. 애들은 덕돌이 운다고 식장에서 숟가락을 꺼내 밥상 우에 올려놓고 쟁그랑 댕그랑 두드려댔다. 덕돌은 그 소리가 듣기 좋다고 울음을 그쳤다. 명옥이 일하러 가고 없으면 덕돌은 누나들에게 혼줄 났다. “다시 엄마한테 고발하겐?” “아이(아니) 그러겠다.” “다시 고발해봐라. 없다, 없어.” “아이 그러겠다.” 누나들이 야들야들한 허벅다리를 꼬집어대면서 다짐해도 덕돌은 그저 당하면서도 역성을 들 엄마나 아버지가 없는지라 꼼짝하지 못했다. 엄마나 아버지나 큰누나 순자가 집에 들어오면 덕돌은 “와-” 울음보를 터뜨리면서 누나들을 손가락질 하면서 고발했다. “저 누나 때렸다.”  누나들이 집에서 쫓기어 나갈 것은 불 보듯이 빤한 일이었다. 그 후에도 이런 일이 수두룩했다. 비 오는 날이고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날이고 누나 네는 덕돌이를 때렸다가 집에서 쫓기어 나군 했다. 그러나 덕돌이 자기를 제일 아끼는 넷째누나 신자만은 들어오게 하라고 엄마와 말해서 신자만은 재수 좋았다. “야, 얘가 신자만은 들여놓으란다. 어서 들어오너라. 덕돌이 운다.” “예-” 넷째누나 신자만은 운이 좋게 들어왔다. 그 덕분에 신자는 덕돌이 울지 않을 때까지 밥상에 숟가락을 놓고 두드리면서 밥도 제때에 얻어먹을 수 있었다. 그때로부터 넷째누나 신자는 덕돌을 고와 각별히 아끼고 보살폈다. 금이야 옥이야 하는 덕돌은 진짜  온집 식구들의 각별한 사랑 속에서 무럭무럭 자라났다.  
123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85) 댓글:  조회:1553  추천:0  2017-10-17
                             12. 고무신 한 짝       여름 해는 길었지만 대지를 더 데우지 못하는 것이 아쉬운 듯 서서히 넘어 갔다. 서산마루는 저녁노을에 누르스름하게 익다가 벌겋게 타 번졌다. 패용천산과 칼산은 톱날 같은 이빨로 뻘겋게 익은 해를 통채로 천천히 씹더니 꿀꺽 삼켜버렸다.       상순은 사원들에게 감자랑 멧돼지고기랑 인구별로 고루고루 나눠준 후 집에 들어왔다. 애들은 뛰놀다가 아버지 세 귀 눈을 보자 겁이 나서 벽 밑에 두 손을 가져가며 물앉았다. 한 구들 들어앉은 딸애들을 보자 상순은 신경질부터 잔뜩 났다. “이 쌍 가시나 새끼들이, 저리로 피하지 못해? 앉을 자리도 없이 한 무리나 들어앉아 있니?"      그는 명옥을 가로보았다. "낳으라는 아들은 낳지 못하고 맨 계집애들만 줄줄 낳았어. 신경질이 나 어디 살겠니!” 명옥은 남편의 독기어린 세귀눈을 보고 애들에게 나가 놀라고 가만히 손짓했다. 그녀는 남산만한 배를 뚱기적거리면서 고방에 들어갔다. 상순은 고방에 따라 들어가 드러누운 명옥을 보고 물었다. “어째 해산할 거 같소?” “양, 아마 그런 거 같소.” 상순은 아들을 보려는 일루의 희망을 품고 뒤울안에서 불쏘시개로 둔 누런 벼 짚 단을 들여다 풀어 고방 구들에 폈다. 그리고 아내를 부축해 두툼히 깐 벼 짚 우에 눕혔다. 상순이 고방에서 나와 손을 맞잡고 아들을 낳았으면 마음 속으로 빌었다. 한참 후에 고방에서 “응아, 응아.” 하고 울음소리가 났다. “뭣이오?” 상순은 고방에 달아 들어가며 다급히 물었다. 한참 후 고방에서 맥없이 나오는 상순의 입에서는 푸념질인지 감탄인지 맥없이 흘러나왔다. “점점 똑똑한 거 낳는구나.” 애 울음소리를 듣고 남동생을 낳았는가고 뛰어 들어온 순자는 아버지에게 “남동생입니까?” 하고 물었다. 상순은 “너 어미 그런 재간 있다더냐?” 하고 김빠진 공처럼 맥없는 말을 하며 집에서 훌쩍 나가버렸다. 저녁에 상순이 집에 들어왔을 때 명옥은 갓 낳은 다섯째 딸 정숙에게 젖을 먹이면서 안아보라는 말도 감히 하지 못했다. 2년 전에 금자를 낳았을 때 딸이라고 상순은 생일도 제대로 쇠지 않았다. 그런데 아들을 낳지 못하고 또 딸 정숙을 낳았으니 갓 난 딸은 태어나자마자 푸대접을 받기 마련이었다. 저녁을 대충 먹은 상순은 한숨을 땅이 꺼지게 후 내쉬면서 또 바깥으로 나갔다. (웃새집 사랑 칸에 든 스님부터 처리해야겠어! 어디서 감히 미신사상을 퍼뜨려?!) 상순은 스님한테 속힌 것 같아 생각할수록 분통이 터졌다. (이젠 마흔이 다 됐는데 아들이 어데서 생겨? 쳇, 괜히 헛소리를 해서 내 애간장만 태웠지.) 상순은 그 길로 웃새집으로 스적스적 걸어갔다. 그는 큰집 큰아버지와 새 큰어머니께 문안인사를 드리고 사랑에 든 스님을 찾아갔다. 스님은 우쭐 일어나기까지 하면서 “김 서기!” 하고 인사하였건만 상순은 어두운 그늘이 비낀 집안에서 그 놈의 빡빡 깎은 중대가리를 보기만 해도 역겨웠다. “작작 너덜거려! 이게 언제라고 미신사상을 퍼뜨려? 구 사회 낡은 물건 짝들을 가지고 꺼져!” “건 왜?” 중은 어안이 벙벙해 사랑방에서 나가려고 하지 않았다. “우리 집 여편네가 마흔이 다 됐는데 아들을 어떻게 낳는다고 미신을 퍼뜨려?” “아, 그 일 말인가요?” 중은 상순을 향해 합장하고 눈을 스르르 감더니 뭐라고 주문을 외우는 것이었다. “뭐 하는 짓인가?” 중은 천천히 눈을 뜨더니 입을 무겁게 열었다. “시주님, 관세음보살, 나무아미타불. 시주님은 꼭 몇 해 후에 금덩이 같은 아들을 얻게 되나이다.” “흥! 또 그 소린가! 내 여편네는 이젠 서른 일곱인데!” “녹태나 사슴 피 같은 보약을 쓰면 낳을 수 있느니라.” 상순은 곧이듣지 않았다. “쳇, 우리 여편네 아들을 낳으면 해 서산에서 뜨겠다.” “아니오. 몇 해 전에도 말씀 드렸지만 그 집엔 이제 천지신명을 타고 나서 황소가 밟아도 우그러들지 않을 옥동자가 태어날 게요!” 상순은 중을 삿대질하며 욕설을 퍼부었다. “네 이 더러운 중놈아, 내게 그런 요망한 소리를 쳐서 이 마을에 남으려는 건가? 작작 거짓말을 하고 이 마을에서 꺼져! 내가 민병들을 데려다 끌어내다 처단하기 전에!” 중은 보짐을 싸들고 떠나면서도 합장하더니 상순을 보고 진심에 어린 말을 했다. “꼭 명심하오. 그 집 사람에게 녹태를 사다가 대접하오. 그럼 꼭 아들을 얻을 수 있소.” 상순은 반신반의하면서도 호주머니에서 엽전 몇 잎을 꺼내 주었다. “로비로 쓰오." 그는 목소리를 낮췄다. "내 줬다고 누구하고도 말하지 마오.” “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시주는 꼭 복을 받아 아들을 받아안을 거요. 화음청주,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중은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더니 바깥을 나가더니 팔을 휘휘 활개 치며 마을을 떠나갔다. 상순은 웃새집에서 나와 토성 쪽으로 오면서도 중의 말을 생각하며 중얼거렸다. “마흔에 아들을 낳는다고? 흥! 서산에서 해 뜨겠다.” “아들을 낳으면 낳았지. 나를 보오.” 상순은 머리를 돌려 여자 목소리 나는 토성 옆의 우물을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 물동이를 인 춘실이 눈에 띄었다. 상순이 지나치려 할 때다. 춘실은 물동이에서 흘러내리는 물방울을 손으로 훔치면서 그를 불러 세웠다. “여보, 어째 우리 집 나그넨 데리고 오지 않았소?” “여보라니?!” “우리 해월이 앓는데 좀 봐주지 않겠소?” "아니, 모질 앓소?” "양, 병원에 실어가야 되잖겠는지 모르겠소." "그래 어쩌오?" “당원이란게 인민군중 곤난도 관심하잖겠소?” 상순은 가자하다가 주춤 멈춰 섰다. “난 의사도 아닌데 어쩌오? 래일 낮에 병원에 데리고 가 보이오.” “밤중에 급병이 도서면 어쩌오? 밤에 무서워 어떻게 진수해까지 혼자 앨 데리고 가오?” 상순은 마지못해 춘실을 따라 갔다. 어둠이 두툼하게 깔린 마당에 들어서니 집안은 등불도 켜지 않아 어둠 컴컴했다. 춘실이네 황둥개가 꼬리를 치며 달려오자 상순이네 검둥이가 달려와 안고 깨물고 하며 함께 끼깅거리며 뛰놀았다. 상순은 좀 주춤거리었다. 춘실은 집안 물독에 물을 부어놓고 마당에 나와 상순의 팔소매를 끌어 집안으로 들어갔다. “앓는 애는?” 상순이 윗방에 들어가면서 물을 때었다. "여기 애 있소.” 상순이 수들에 올라가려고 할 때다. 어둠 속에서 춘실은  상순을 와락 끌어안으며 뒤로 물앉는 것이었다. “왜 이래?” “내가 앓는 단 말이오. 그래 옛 정분을 다 잊었소?” 상순은 덴겁한 나머지 춘실의 손을 뿌리치며 화닥닥 일어났다. “가정이 있는 사람들이 웬 옛 정분이오?” “나가면 소릴 칠 테야!” 상순은 마구 끌어당기는 춘실을 뿌리치며 문께로 나갔다. “도적이야!” “도적을 붙잡아라!” 뒤에서 춘실의 고함소리가 울렸다. “아차! 잘 못 걸리겠다!” 상순은 함정에 빠질까봐 한 짝 신을 신지도 못한 채 후닥닥 냅다 뛰었다. “사람 살리오! 도적이야!” 춘실의 고함소리에 숱한 사람들이 꾸역꾸역 모여들었다. 사람들은 춘실이네 집에 등불을 밝히고 여기 저기 살피면서 춘실과 사건 경과를 물었다. “나도 모르오! 어떤 도적이 우리 집에 기어들지 않았겠소? 내 소리 치니 달아났소!” 마을 사람들은 웅성거렸다. “누굴까?” “글쎄. 무슨 도적이 왔을까?” “아마 멧돼지고기 욕심나 나그네 없는 집에 뛰어들었겠지.” “이게 누구 신이오? 분명 남자 신인데.” 그때 성수가 마루바닥에서 허연 고무신 한 짝을 주어들고 소리쳤다. “그게 도적놈의 신이겠소.” “옳소. 도적놈이 미처 신지 못하고 도망친게 분명하오.” “무슨 도적놈이 신을 벗고 이 집 안에 들어갔겠소?” 마을 사람들이 이러쿵저러쿵 의논이 분분했다. “아마 도적이 급히 도망치다나니 문턱에 걸려 벗겨졌겠지.” 모두들 보니 춘실이네 집 문턱이 확실히 높았다. 성수는 신짝을 들고 등불을 빌어 두루 살피면서 “이 신짝의 주인이 누군가 밝혀내면 도적을 붙잡을 수 있을 게요. 이제 김 서기한테 이 신짝을 가지고 가서 사건을 보고해야지.”라고 하며 상순이네 집 쪽으로 걸어갔다. 한편 상순은 선불 맞은 사슴처럼 춘실이네 집에서 빠져나와 저 멀리 태평강 가로 달아났다. 때마침 금옥이 맏아들 칠군과 함께 오빠네 집으로 놀라오다가 밤중에 누군가 춘실이네 집에서 와닥닥 뛰어나와 닫는 것을 보았던 것이다. 금옥은 뒤에서 “도적이야!” 하는 소리를 듣고 십중팔구 짐작이 가는지라 칠군을 오빠네 집에 보내고 자기는 춘실이네 집에 갔다가 마을 사람들의 신짝 말을 하는 것을 보았다. (저걸 어쩌나? 분명 오빠 신인데.) 그녀는 급히 오빠네 집에 가서 다른 고무신을 주어들고 오빠가 달아난 태평강 가로 남 몰래 달려갔다. 그는 아름드리 버드나무숲 속을 돌아다니면서 나직이 “오빠, 오빠-” 하고 불렀다. 그때 태평강가 버들방천에서 서성거리던 상순은 뜻밖에 조개덕의 금옥의 목소리가 나는 것을 듣고 놀랐다. 그는 달빛을 빌어 확실히 금옥인 것을 보고서야 다가왔다. “넌 어째 여기 왔니?” 금옥은 달빛 속에 고무신을 내밀었다. “이걸 신고 그 짝짝 신을 태평강에 버리오.” “음, 알았다.” 상순은 한 짝 밖에 없는 신짝을 태평강 물에 던졌다. 출렁! 고무신은 억울함과 달빛과 함께 출렁이는 강물에 실려 떠내려갔다. 상순은 고무신을 갈아 신고 금옥과 함께 마을로 들어갔다. 그때 토성 밑에서 자기를 찾아다니던 성수를 만났다. “어, 김 서기, 어디를 갔다 오오?” 상순은 짐짓 모르는 척하면서 “양, 내 조개덕 여동생네 집으로 갔다 오는 길이오. 무슨 일이 있소?”라고 되물었다. 성수는 상순의 발부터 내려다보더니 한 짝 고무신을 내밀었다. “이 신을 보오. 웬 도적놈이 집에 뛰어들었다가 신짝이 벗겨진 채 도망쳤소?” 상순은 신짝을 받아 두루 살펴보는 척 하더니 “허, 도적이라니? 뉘네 집에 도적이 들었댔소?” 하고 반문했다. “내 형네 집에 도적이 들었잖아.” “음, 그랬구먼. 내 조사해볼게. 이 신 임자만 찾으면 도둑이 밝혀질 게요. 근심하지 말고 모두 돌아가오. 동네 부산하게 떠들지 말고.” “양, 파출소에 알리던지.” “내 알아서 처리할게.” 성수는 상순의 발에 고무신이 신겨져 있는 것을 본 후 시름 놓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는 나머지 고무신짝을 부엌에 걷어 넣고 불을 달았다. (춘실이 왜 저러지? 진짜 날 함정에 빠뜨리려고 그랬을까? 부부 인연은 없어도 원수는 아닌데. 알고도 모를 일이야.) 이튿날 상순은 범바위골로 떠나게 됐다. 그는 고무신짝을 개 물어 갔는지 없다 하고 그 사건을 얼버무려 버렸다. 성수나 학수나 모두 그 말을 반신반의하면서도 어쩌는 수 없었다.       상순은 물을 길으러 우물로 갔다가 춘실과 딱 마주쳤다.       "어마나!" 춘실은 지은 죄 있는지라 주춤 멈춰섰다가 동이를 내리워 안고 집 쪽으로 발뺌하려고 했다. "서오." 춘실은 몸을 홱 돌렸다. "아이구머니, 간 떨어지겠다." 그녀는 버들잎 같은 눈섭을 치켜올리며 대들었다. "왜? 날 때려죽이겠니?" 상순은 주위를 둘럴보고 인기척이 없자 춘실한테 한발 다가서며 나직이 말했다. "어쩜 그럴 수 있소? 어째 날 바람 피웠다고 물어먹을 예산이오? 어쩜 함정을 파놓고 빠뜨리자고까지 하오? 진짜 그렇게 음험할줄은 몰랐소. 제 량심 있소? 그런다고 내 당신과 살 거 같소. 우린 둘 다 이젠 가정이 있고 자식들도 많잖고 뭐요? 이젠 내하구 살 궁리는 단념하오. 제발 날 좀 놔주오." 춘실도 할 말이 있었다. "야, 누가 너처럼 제 친아들도 모르구 가정 살림살이도 모르는 놈과 산더더니, 퉤, 더럽다, 더러워!" 상순은 "친아들"이란 말에 드레박을 잣다가 주춤 멈춰 섰다. "백준이 이젠 연길에서 중학교를 다니는데. 흥! 이때까지 해준게 뭐냐? 언제 한번 찾아가 본적이라도 있니?" 그 말에 상순은 그만 드레박 자새를 활 놓았다. 자새가 핑그르르 돌아갔다. 드레박이 우물 안에 철렁 떨어졌다. 상순도 마음이 아팠다. 백준은 그와 지춘실의 첫사랑 쓴 열매가 아닌가. 아버지 반대로 파혼하다나니  연길 백과부네 집에 주었던 것이다. 그 일을 생각할 때마다 상순은 가슴이 미여지는 것만 같았다. 상순은 우물 안을 들여다보면서 드레박을 간신히 줄에 걸어 자아 올리며 말했다. "미안하오. 백준이 이름이나 고치오." 지춘실은 새된 소릴 질렀다. "뭐라고?  안돼." "우리 아버지 벌은 다 '준'자 돌림이야. 기준, 창준, 관준..." 지춘실은 허리에 손을 찌르고 앙천대소했다. "야, 야, 내 애를 낳으면 딱딱 너네 애비벌 된다. 너네 애비 생각만 해도 악이 난다. 그 영감 아니면 백준을 남을 줬겠니?" 상순은 세귀눈을 흘겼다. "명옥이 나보다 뭐 더 좋다고 너 애비 날 막았다니?" "또, 또, 그 말 꺼내겠니?" "흥! 꺼내면 어째?" 춘실은 어글어글한 눈을 치켜뜨며 두덜거렸다. "하긴 명옥이 인물이 나보다 예쁘고 딸을 명태드럼처럼 줄줄 나아서 오죽 좋겠느냐? 호호호." 상순은 춘실을 쏘아보며 정색했다. "명옥은 못 생겼지만 너처럼 간사하고 음험하진 않아. 량심과 효성이 있고 너처럼 변덕스럽진 않아."  춘실은 억울한듯이 입을 쫙 벌리고 상순을 손가락질하며 한참동안 말하지도 못했다. 이윽고 그녀는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더니 숨을 돌려 간신히 입을 열었다. "얘, 상순아, 내 아들 낳지 않았으면 너네 영월 김씨네 무슨 개판 됐는지 아니? 대 끊어질번 했다는 걸 잊지 말라. 백준인 너네 집 기둥이라는 걸 잊지 말라. 홀대하기만 해봐라. 가만놔두지 않겠다. 명옥이 그런 떡돌 같은 아들 낳는 재간이나 있니? 이젠 마흔이 다 됐으니 모든게 끊났다. 백준이 아니면 넌 아들이나 있겠구나. 흥!" 상순도 물러서지 않았다. "싹 걷어치워. 명옥이 아들 낳는 재간없다구? 순자 우에 아들 셋이나 낳은 거 잊었느냐? 지금 생각해도 그때 일본 놈들 세상에 너무 가난해 약도 온전히 못 쓰고 굶겨 죽인게 불쌍하다. 다신 그 말 꺼내지 말라." 춘실은 깨고소해하는 표정을 지으며 입귀로 계속 횡설수설 악담을 흘렸다. "너 애비 도깨비 의사돼서 그랬다. 왜 약담배 먹여 죽였다는 말은 안해?"   "악담 그만하지 못하겠니?" 상순이 세귀눈을 부릅떴다. "에그머니!" 춘실은 저쪽에 물동이 안고 도망치려고 했다. 상순은 나지막이 부탁했다. "내 말 좀 듣소. 그 애 이름 백호라고 고쳐라." "백호?" 춘실은 동이 안고 되돌아섰다. "그래, 우리 맏아들 얼마나 좋은 이름이냐?" 지춘실이 뜻밖에 수긍했다. "'우리 맏아들'?  뭐? 백호? 호호호. 그래, 백호로 키워서 네놈새끼를 잡아먹게 하지 않는가 봐라. 호호호." 상순은 자못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 "마을에 돌아다니면서 쓸데 없는 소릴 작작 해라." "어째? 겁나니? 내 입이 터지면 넌 끝장날줄 알아라. 너 고무신짝 한짝 어쨌니? 허, 어느새 새 신 사다 싣었어?  신짝 바꿔 신고 다니면 단가 해? 마을 사람들 숱한 눈 못 속여." "쉿-" 상순도 저쪽에서 다가오는 명옥을 보자 식지를 입술에 가져다 댔다. "어째 겁나니? 흥! 당지부 서기는 고사하고 이 마을에서 쫓겨날 줄 알아라." 상순은 드레박을 우물에 드리우며 대수롭잖아했다. "내 무슨 나쁜 짓 한 것도 없는데." 춘실은 동이를 안고 우물 가에 다가와 나직이 말하며 깔깔깔 웃었다. "어쩜 어디 가나 그렇게 여자들한테 인기 높니?" 상순은 드레박을 자아올리며 물었다. "건 또 무슨 소리야?" 춘실은 입귀를 실룩거리더니 빈정거렸다. "조선에 나가 양키놈들하구 싸우진 않구. 뒤고방에서 허영희란 여자하구 잘 살았지? 배수관에 들어가 뭐 했니? 또 김치움에 들어가선 뭐 했니?" 명옥은 그들의 말을 듣다가 집 쪽으로 되돌아갔다. 아마 듣기도 싫었던 것 같다. 상순은 명옥이 사라지자 드레박을 받아쥐며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쓸데 없는 소릴 작작 하오. 아무 일도 없었다." "픽!" 춘실은 믿지 않았다. "바람 피웠지? 온 동네 소문이 짜짱한데두. 흥!" "진짜 아무 일도 없었소." 상순은 춘실의 물동이를 쥐어당겨다놓고 드레박 물을 쏴 쏟아주었다. "그런 쓸데 없는 소문 믿지 말고 작작 떠드오." 뒤이어 상순은 주위를 둘러본 후 자못 엄숙하게 춘실을 마주 보았다. "춘실이, 우리 셈 없을 때 서로 사랑했지만 부모 반대로 부부 연은 지 못했소. 그러나 서로 원수 치부는 하지 말기오." "..."       춘실은 포도알눈을 살며시 내리깔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물동이를 이었다. 그녀는 물동이를 이어주는 상순을 가로 보더니 맑은 눈물을 주루룩 흘렸다. 두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은 그처럼 맑고 쓸쓸할 수 없었다. 춘실은 볼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을 손으로 훔치며 동이를 이고 비칠거리며 떠나갔다.      물동이에서 물이 찰랑거리며 튕겨나왔다. 파도치는 그녀의 가녀린 어깨를 바라보는 상순의 가슴은  미여지는듯 때끔때끔 아파났다.      이튿날 상순은 마을 사람들과 갈라져 청년들과 함께 수레를 몰고 범바위골로 떠나게 되었다. 저쪽에서 명옥과 춘실이 애를 업고 못 박힌 듯이 서서 떠나가는 그들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춘실은 상순을 보고 해시시 웃으면서 혀를 홀랑 내밀었다가 침을 퉥 뱉었다. 상순은 춘실을 흘겨보며  수레를 몰고 무거운 발걸음으로 떠나갔다.          "변덕스런 년이라구야, 원, 어쩜 저럴 수 있어? 흥!)          삼복염천 땡볕이 아침부터 쨍쨍 내리쪼여 곡식과 버드나무잎사귀들이 축 늘어졌다. 상순은 수레를 몰고  범바위골로 길을 다그쳤다.                                                         13. 범바위골 생사박투        석양이 비낀 범바위골의 기름지고 푸르른 풀밭에서 학수의 아들 주봉과 상순의 둘째딸 금숙은 곤두뿔과 비녀뿔을 타고 버들피리를 구성지게 불었다. 푸르른 하늘아래 흰 구름이 감도는 울창한 수림 속에 우뚝 솟은 범바위산도 즐거워 반기고 산새들도 피리소리에 맞춰 푸르른 가을 하늘을 훨훨 날며 춤을 췄다.        주봉은 명옥이 젖을 먹여 키운 양아들이었다. 아들을 낳지 못한 명옥은 특별히 주봉을 친 아들처럼 사랑하고 아끼었다. 그와 금숙은 그녀의 양 젖을 한 짝씩 먹고 자라서 친 오누이처럼 다정했다. 저쪽에서 감자를 파던 상순이 호미를 쥔 채 허리를 펴고 이쪽을 두루 살피더니 입가에 손을 모아대고 소리쳤다. “얘들아, 너무 멀리 가지 마라! 범이 오면 어쩌니-” 옆에서 학수가 중얼거렸다. “범 말을 하지 마오. 자기 흉을 하면 범이 온다지 않소.” “음, 애들이 먼데 가면 어쩌오?” 주봉은 양아버지 말을 듣고 고삐를 쥐여 당겼다. 그러나 아무리 고삐를 당겨도 곤두뿔은 대가리를 흔들면서 돌아서지 않고 자꾸 멀리 달아났다. 성이 꼭뒤까지 치민 주봉은 곤두뿔의 잔등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이 놈 곤두뿔, 말을 듣지 않겠니?” 주봉은 을러메면서 고삐로 곤두뿔의 대가리며 잔등이며 쨩쨩 때렸다. 곤두뿔은 눈깔을 부릅뜨고 주봉을 당장 뜰 상을 했다. “때리지 마라!” 어느 결에 상순이 뛰어왔다. 상순은 주봉의 손에서 고삐를 빼앗아내면서 타일렀다. “얘들아, 소는 말을 하지 못하지만 이 놈도 자기를 아끼면 말을 잘 듣는다. 자기를 못살게 굴면 심술을 쓴다. 이후엔 소를 아껴라.” 상순이 바지 호주머니에서 소금 몇 알을 꺼내 손바닥을 펴 보이자 곤두뿔은 쯥쯥 핥아 먹더니 꼬리를 휘휘 휘젓는 것이었다. “오, 알았습니다.” 후에 주봉과 금숙은 아버지들과 말하고 소금이나 콩알을 조금 호주머니에 넣어가지고 가서 곤두뿔과 비녀뿔에게 먹이었다. 그때마다 곤두뿔과 비녀뿔은 친절한 눈길로 애들을 보면서 껄껄한 혀로 소금알을 핥아 먹으면서 꼬리를 휘휘 휘저었다. 황혼 무렵이었다. 갑작스레 먹장구름이 범바위산 쪽으로 몰려오더니 구불구불한 불 뱀이 범바위산 허리를 번쩍 내리쳤다. 우르릉 꽝꽝! 하늘땅을 뒤흔드는 우레 소리에 뒤이어 호두알만한 비방울이 후둑후둑 떨어졌다. 뒤이어 밤알만큼 한 우박이 수림과 감자밭을 내리 조기기 시작했다. 각일각 소낙비는 폭우로 번져 대야로 퍼붓는 듯이 억수로 쏟아졌다. 한 시간이 지나자 언제 폭우가 기승을 부렸는가 싶게 동녘하늘에 고운 칠색무지개가 척 걸렸다. 그 날 밤에 마을 사람들이 잠들려고 할 때다. 따웅~ 호랑이 울부짖는 천둥 같은 소리와 함께 바깥에서 송아지들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상순과 병수 등이 황급히 벽에 걸어 놓았던 사냥총을 벗겨 들고 뛰어나갔다. 금숙은 집구석에서 사시나무 떨듯 하면서 옹크리고 앉아 있었다. 허나 주봉은 그래도 사내자식이어서 거적을 살짝 들고 가만히 내다보았다. 검둥이와 황둥개가 먹칠한 듯한 수림 속에서 언뜰 언뜰 하는 쌍불들을 내다보며 왕왕 짖어댔다. 곤두뿔과 비녀뿔 아빠 소 어미 소들이 초가집을 중심으로 서너 마리 송아지들을 복판에 둘러싸고 호랑이들과 맞섰다. 곤두뿔이랑 대가리를 수그리고 앞발로 땅바닥을 허벼 잔등에 퍼 치면서 호랑이들과 싸울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상순과 성수는 사냥총을 들어 수림 속의 노란 쌍불들을 겨눠 쏘았다. 땅! 땅! 따-웅! 수림 속을 울리는 호랑이 울음소리와 함께 쌍불들이 사처로 흩어져 달아났다. 상순은 시름 놓지 못하고 초가집 마당에 삭정이를 모아 놓고 우등불을 피웠다. 활활 타오르는 우등불 빛을 빌어 소들을 살펴보니 송아지 한 마리가 목을 물리어 피가 흘렀다. 곤두뿔이랑 어미 소들은 송아지와 초가집을 똬리처럼 둘러싸고 대가리를 바깥쪽으로 향하고 웅크리고 앉아 온밤 우등불 빛이 비추는 수림 속을 노려보았다. 호랑이들과 승냥이들은 다시는 감히 덮쳐들지 못했다. 상순과 성수 등은 곤두뿔이랑 비녀뿔이랑 얼마나 대견스러운지 몰랐다. 서늘한 가을바람이 불어오자 만물이 누렇게 번져가고 오곡백과가 무르녹기 시작했다. 풀밭이 아무리 푸른 신록을 지키려고 부질없이 발버둥질 쳐도 날이 갈수록 누런 색깔에 물들어버렸다. 상순은 마을 사원들을 이끌고 곤두뿔과 비녀뿔이랑 소 수레에 메워 가지고 감자와 강냉이 이삭들을 초가집 마당에 실어 들였다. 부식토로 뒤덮인 땅이 어찌나 비옥한지 토실토실한 감자와 방치 같은 누런 강냉이 이삭들이 잘 열려 탐스럽게 대풍작이 들었다. 사원들은 풍작의 기쁨에 겨워 힘 드는 줄도 모르고 이른 아침부터 해질 무렵까지 감자를 파고 강냉이 이삭을 뜯어 수레에 실어 들였다. 그 숱한 낟알을 실어들이느라고 곤두뿔과 비녀뿔은 목에 피 고드름이 지기까지 했다. 상순은 곤두뿔의 피 고드름이 진 목을 매만지면서 불쌍한 나머지 가만히 강냉이 이삭을 주둥이에 넣어주었다. 곤두뿔은 맛나게 먹으면서 커다란 눈알로 상순을 정답게 쳐다보았다. 어느 날, 그들이 한창 강냉이 이삭을 뜯을 때다. “앗! 곰이다!” 금숙과 성수네 맏딸 정옥이 비명소리를 질렀다. 상순이 뛰어나가 보니 엄청 큰 곰 두 마리가 강냉이를 가로 타고 나가며 이삭을 뜯어 겨드랑이 밑에 끼며 야단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 놈 곰새끼!” 상순과 성수는 황급히 소리치며 밭머리에 세워 놓은 사냥총을 들고 뛰어왔다. 그런데 곰은 상순과 성수에게 하나씩 덮쳐들어 사냥총을 빼앗아 무릎에 대고 뚝 분질러 던졌다. 급해 맞은 상순은 밭머리로 뛰어나가 곤두뿔과 비녀뿔의 고삐를 수레 채에서 풀어놓았다. 성수와 학수랑 다른 소들의 고삐를 풀어놓았다. 곤두뿔은 모진 고함을 지르면서 앞발로 흙을 긁어 잔등에 퍼치더니 곤두뿔을 낮추며 곰에게 덮쳐들었다. 둔한 것 같던 곰은 소 무리들이 덮쳐오자 강냉이 둬 이삭을 쥐고 꼬리 빳빳해 수림 속으로 달아났다. 그러나 곤두뿔이랑 비녀뿔이랑 곰을 놓칠세라 수림 속으로 뒤쫓아 들어갔다. “염, 염, 염!” 상순이 아무리 손에 소금을 들고 불러도 소들은 계속 고함치며 곰들을 쫓아갔다. 상순과 성수는 소들이 상할까봐 다른 사람에게서 사냥총을 빼앗아 들고 수림 속으로 쫓아갔다. 그들이 단풍나무숲이 우거지고 집채 같은 바위가 우뚝 솟은 범바위골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다. 갑자기 노린내가 코를 찔렀다. 살펴보니 나뭇가지에 누런 소털과 범의 털이 묻어 선들바람에 살살 나붓기고 있었다. 후에 안 일이지만 범바위 뒤에는 범의 굴이 있었다. 허나 누구도 모르고 범바위 근처에까지 황무지를 일궜기에 범들은 죽기내기로 굴과 영지를 지키려고 “불청객”들에게 덮쳐들었던 것이다. 이때 앞에서 코로 냄새를 씩씩 맡던 검둥이와 황둥개가 대가리를 쳐들고 왕왕 짖으면서 꼬리를 흔들었다. 상순이네가 나무숲 속을 살펴보니 곤두뿔이 이쪽으로 걸어오며 꼬리를 휘휘 젓다가 우뚝 멈춰서는 것이 아니겠는가? 곤두뿔은 귀를 뻘쭉 세우고 이쪽을 의아한 눈길로 바라보더니 “음-메- 헝-” 하고 수림이 떠나갈듯이 영각하며 꼬리를 휘휘 휘저었다. 상순은 앞으로 나가며 호주머니에서 소금 알을 쥐어 손바닥을 펴 보이면서 “염, 염, 곤두뿔아, 돌아가자!”라고 했다. 허나 곤두뿔은 귀를 뻘쭉 하더니 오던 쪽으로 냅다 뛰어가는 것이었다. 이때 검둥이도 왕, 왕, 왕 짖어댔다. 상순은 수림에서 불길한 예감이 들어 두리번거렸다. 아차, 저게 뭔가? 가을바람이 불어치며 낙엽이 우수수 지는 속에 누런 이마빼기에 꺼먼 왕자를 박은 얼룩 범이 범바위 뒤에서 뛰쳐나오지 않겠는가. 그 놈은 상순이네가 사냥총을 겨누기도 전에 “따~ 웅!” 하고 울더니 사납게 덮쳐들었다. 호랑이는 앞발로 상순의 어깨를 탁 치고 날아지나갔다. 뒤이어 몽둥이 같은 꼬리로 휘파람소리를 내며 휙 휘둘러 갈겼다. 다행히 상순이 넘어지면서 맞지 않고 대신 팔뚝 같은 나뭇가지가 맞아 낙엽이 우수수 떨어졌다. 땅! 땅! 상순과 성수는 재차 덮쳐드는 호랑이의 쫙 벌린 아가리를 조준해 총을 쏘았다. 옆구리에 총알을 빗맞은 호랑이는 화약 냄새를 맡자 돛 바늘과도 같은 흰 수염을 곤두세우며 “따웅-” 하고 으르렁거렸다. 이때 어디로 간 것 같던 곤두뿔이 덮쳐와 합세하면서 전세는 역전됐다. 곤두뿔과 비녀뿔은 뿌리를 곤두세우고 호랑이한테 사납게 덮쳐들며 배때기를 들이박았다. “따-웅!” 호랑이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면서 김빠진 공처럼 쓰러졌다. 검둥이는 호랑이의 꼬리를 물어 마구 뜯었다. 따~웅! 이때 범의 굴에서 숱한 범들이 뛰어나와 덮쳐왔다. 비녀뿔과 곤두뿔은 호랑이 무리와 일대 혼전을 벌렸다. 비녀뿔은 제일 앞에서 덮쳐드는 범의 배때기를 턱 떠받아 하늘공중에 날려버렸다. 호랑이들도 자기 굴 어귀까지 몰려온 사람들과 황소들 앞에서 더 물러설 자리가 없게 됐다. 그 놈들은 단말마적으로 덮쳐들어 황소들의 잔등 위로 마구 날뛰면서 물어 재꼈다. 곤두뿔은 덮쳐드는 호랑이 옆구리를 연속 떠서 나무숲 속에 처박았다. 나머지 호랑이들은 동료들이 피를 토하며 맥없이 쓰러지는 것을 보고 수림 속으로 달아나버렸다. 그 틈에도 곰들은 강냉이 이삭을 뜯기에 여념이 없었다. 비녀뿔은 무섭게 고함치더니 비녀뿔을 곤두세우고 강냉이 밭으로 덮쳐갔다. 곰들은 배때를 들이박는 비녀뿔의 뿌리를 떡 잡아 내리누르며 목을 비틀려고 버둑버둑 애썼다. 다른 곰은 비녀뿔의 불 중태를 물어뜯으려고 뒤로 덮쳐들었다. 이때 곤부뿔이 영각하며 사납게 덮쳐들어 비녀뿔의 꼬리를 잡은 다른 곰의 엉덩이를 탁탁 박았다. 다른 곰은 질겁해 비녀뿔의 뿌리를 활 놓고 강냉이 밭을 와락와락 헤치며 도망쳤다. 뒤이어 상순이네가 곤두뿔이랑 검둥이랑 데리고 밭으로 돌아왔다. “빨리 강냉이 이삭을 담아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기요!” 사원들은 황급히 강냉이 이삭을 주어 수레에 싣고 초가집으로 내려왔다. 호랑이에게 물린 곤두뿔의 깊숙한 상처에서 뻘건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 상순은 수레를 벗긴 후 집 뒤에 끌고 가서 오줌을 싸 상처에 발라주었다. 오줌은 상순이네 조상이 물려준 묘약이었다. 소 상처에도 소염이 될지는 모를 일이지만 상순으로서는 그 외에 별다른 방도는 없었던 것이다. 어느 하루, 모두들 점심을 먹을 때었다. 허영주 향장이 사무실 주임 박청산과 함께 범바위골로 불시에 찾아왔다. 상순은 오래 동안 갈라졌던 형님을 만난 듯이 반갑게 맞았다. “허 향장, 어떻게 돼 이런 산골로 왔습니까?” 허영주는 상순의 손을 꽉 잡으면서 소탈하게 웃었다. “어제 함흥 촌에 찾아갔다가 범바위산에 부업하러 갔다는 말을 듣고 찾아왔네.” 상순은 허영주와 박청산 주임을 윗방에 모시고 올라가 앉으면서 금숙과 정옥을 보고 밥상을 새로 차려오라고 했다. 숟가락을 들고 밥상을 둘러보던 허영주는 반색했다. “허허허, 대단하구먼, 여긴 무릉도원 같군 그래.” “오시느라고 시장하겠는데 자, 막걸리나 드십시오.” 허영주와 박청산은 사양하지 않고 막걸리를 들고 안주를 짚었다. “이건 뭔가? 멧돼지 고기 아닌가?” 허영주의 말에 박청산은 우물우물 고기점을 씹으면서 “썩썩하고 쫄깃쫄깃한 게 진짜 별맛이구먼.”라고 했다. “우리 향 식당에도 없는 멧돼지 고기 아닌가?” 그 말에 상순과 청산은 머리를 숙였다. 허영주는 멧돼지고기 사발에 저로 연신 창질을 해대며 말했다. “사원들이 배불리 먹고 잘 살면 좋지. 김 서기 참 잘 했소. 합작사에서 부업이라도 해서 사원들을 배불리 먹고 살게 해야 하오. 이제 함흥 촌 합작사의 경험을 전 향에 널리 선전해서 황무지를 개간하게 해야겠소.” 허 향장은 숟가락을 놓으면서 상순을 마주 바라보았다. “향내 여러 촌 서기와 합작사 주임들을 범바위산에 청해다 황무지개간현지회의를 하면 어떻소? 김 서기가 범바위산의 황무지와 묵밭을 개간해 풍작을 거둔 경험도 소개하오.” 그런데 상상 밖으로 상순은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그러지 마십시오. 옛날부터 소문난 잔치 먹을알이 없다고.” 그 말에 허 향장은 자못 불쾌해 했다. “함흥 촌 합작사들에서만 황무지를 개간해 배불리 먹고 살겠소? 다른 마을에서도 잘 살게 도와 줘야하지.” “허 향장의 생각은 옳습니다. 그런데 소문이 나면 범바위산은 우리 향의 산이 아니기에 쫓겨날 겁니다.” 상순의 말에 허 향장은 머리를 끄덕이었다. 한참 궁리하던 허 향장은 “이렇게 합세.”라고 말머리를 떼더니 뒤 말을 이었다. “진수해에서 전 향 황무지개간사업회의를 열면 김 서기가 범바위산을 밝히지 말고 황무지를 개간해 대풍작을 거둔 경험을 소개하오.” 상순은 양미간을 찌푸리면서 한참 궁리하더니 “건 좋습니다. 전 향 인민들이 배불리 먹게 사는데 유리하다면 경험을 소개하겠습니다.”라고 했다. 그날 오후에 허영주 향장과 박청산 주임은 상순과 함께 새로 개간한 범바위산의 밭을 일일이 돌아보고 상순이네가 주는 멧돼지 고기에 감자와 강냉이 등을 가지고 범바위산을 떠나갔다… 병완과 상순은 함흥 촌 마을 사원들을 이끌어 연속 4년 동안 범바위산에 들어가 감자와 강냉이 농사를 지어 마을 사람들의 쌀독을 꼴딱꼴딱 채워 사원들로 하여금 배불리 먹으면서 살게 했다. 하여 사원들의 생산 적극성을 대폭 높였을 뿐만 아니라 사원들로 하여금 사회주의 우월성을 마음속으로 느끼게 하였다. 마을 사람들은 범바위산에서 네 번째 수확의 가을을 맞이하게 됐다. 어느 날, 쉼에 상순이 한창 숫돌에 낫을 갈 때었다. 갑자기 저쪽에서 “불이야!” 하는 고함 소리가 들렸다. 모두들 벌떡 일어나며 머리를 돌려 그쪽을 바라보았다. “아니, 저게 뭐야!” 삼단 같은 불길이 마른 풀숲을 핥으며 구렁이처럼 산비탈로 기어나가고 있었다. 동언이랑 동식이랑 허둥지둥 헤매면서 불을 끄기에 여념이 없었다. 상순이랑 모두들 낫을 버리고 그리로 뛰어갔다. 그들은 나무 회초리를 꺾어 들고 날름거리는 불을 쳐댔지만 산비탈을 핥으며 퍼져나가는 불길을 끌 수 없었다. 순식간에 한헥타르도 넘는 산비탈의 황무지가 잿더미로 돼버렸다. 산불은 야수처럼 다른 산비탈로 날아 넘어가 달렸다. “이 일을 어쩌느냐?” 상순은 풀썩 물앉으면서 가슴을 탕탕 쳤다. 주봉이 뛰어와 헐떡거리며 말했다. “저 동언이 쉼에 담배를 가만히 피우다가 그만 옷에 불을 떨어뜨렸습니다.” 학수는 주봉을 흘겨보면서 “네가 뭘 안다고 주둥이질이냐?” 하고 꾸지람했다. 그래도 주봉은 계속 말했다. “내 맞은쪽에 앉아 보니 동언이 담배를 피우다가 담뱃재가 솜옷에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동언은 솜옷에 달린 불을 끄자고 벗어서 마구 풀밭에 털었습니다. 그래서 풀밭에 솜옷의 불이 옮겨 붙었습니다.” 동언의 아버지 득호는 떽 했다. “그래 우리 동언이 산불을 달아놓았단 말이냐?!” 상순은 주봉과 고개를 숙인 동언을 번갈아 보다가 다급히 소리쳤다. “누구 때문에 산불이 났든지간에 빨리 산불을 꺼야 하오! 큰 경을 치겠소.” 상순은 초가집에 달려가 삽을 찾아들고 한 키씩이나 타오르는 산불 쪽으로 뛰어갔다. 사원들도 모두들 삽과 괭이, 빗자루, 호미를 찾아들고 산불과 생사박투를 벌렸다. 허나 설상가상으로 가을바람까지 세차게 불어쳐 산불은 벌써 산비탈을 벌거숭이 잿더미로 만들어버렸다. 산불을 또 다른 산비탈들로 사정없이 덮쳐갔다. 이때 난데없이 숱한 낯선 사람들이 깍쟁이와 삽, 괭이와 빗자루를 들고 달려와 불끄기 생사박투에 뛰어들었다. 상순이 여겨보니 그 뒤에는 초봄에 갓 범바위산에 왔을 때 만났던 헌 초가집 주인 늙은이도 있었다. 상순이 급히 뛰어가 머리를 숙여 인사하자 그 늙은이는 욕부터 해재끼었다. “내 뭐라던가? 산불을 주의하라는데.” 상순은 그저 목덜미를 긁적이면서 “어떻게 산불을 끌 방도가 없습니까?” 그러자 늙은이는 콧방귀를 뀌었다. “흥, 이제 천사람 만사람을 동원해 와보오. 이 큰 산불을 끄는가?” 늙은이는 타오르는 불길을 보더니 무릎을 탁 치더니 눈길을 상순에게로 돌렸다. “방도 있네.” 상순은 한걸음 다가섰다. “예?” “맞불을 놓아야 하네!” “예?! 맞불을?” “그렇소. 예로부터 산불에는 맞불을 놓아야만 끌 수 있다고 했소.” “그럼 맞불을 놓아 보깁소.” 상순은 늙은이와 함께 돌아다니면서 불 뱀처럼 덮쳐가는 맞은켠 산비탈 마른 풀밭에 돌아가면서 맞불을 놓았다. 한식경 맞불을 놓았더니 산불은 기적적으로 꺼지기 시작했다. 해질 녘이 되어서는 산불이 몽땅 꺼지고 여기저기서 가는 몇 가닥의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를 뿐이었다. “살았습니다. 할아버지!” 상순은 늙은의 주름살이 얼기설기 진 커다란 손을 잡아 흔들었다. 늙은이도 허연 수염을 쓰다듬으며 검댕이 칠을 한 꺼먼 얼굴에 만족한 웃음을 지었다. 셈평이 없는 동언은 주책머리 없이 재 더미로 된 산을 둘러보면서 “허허, 온 산이 말끔히 타버려 새해에 황무지를 개간하기 참 좋게 됐구먼.”라고 횡설수설 했다. 상순은 동언의 뒤통수를 손바닥으로 슬쩍 치면서 “에끼, 이 놈 자식!”하고 책망했다. 그제야 동언은 머리를 숙이며 삽으로 흙을 파 남은 불씨를 덮어 놓았다. 상순은 사원들을 이끌고 산골짜기의 샘물터에서 샘물을 길어다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연기를 찾아다니면서 샘물을 끼얹었다. 어느 결에 가을 하늘에 뻘건 황혼 낙조가 뒤덮여 잿더미로 돼버린 산비탈을 벌겋게 물들여갔다.
122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84) 댓글:  조회:1181  추천:1  2017-10-09
                                                                 10. 범바위골로 진군       기승스레 불어치는 눈보라를 무릎 쓰고 병완은 쌀 주머니를 메고 맏며느리 진달래네 집으로 갔다. 남편을 잃고 마음 속에 깊은 상처를 입고서도 이를 꼭 옥물고 가녀린 어깨에 혼자 가정부담을 떠메고 애들 둘을 데리고 사는 맏며느리가 불쌍했다.       진달래는 애들 둘을 데리고 살면서 용천한테 총상을 입은 아픈 다리를 끌고 일하러 다니다나니 아주 힘겨웠다. 그녀가 아무리 한해 동안 혼자 뼈 빠지게 일해도 양곡이 얼마 차례지지 않았다. 병완이 쌀 주머니라도 메다 주지 않으면 보릿고개를 넘기도 힘들 지경에 이르렀다.       병완은 진달래네 집에 들어가 쌀 주머니를 맏며느리에게 넘겨주고 나서 조왕 쪽에 있는 쌀독부터 열어보았다. 쌀을 나눠준지 한 달도 되지 않았는데 쌀독이 절반이나 비지 않았겠는가. “헤이, 이걸로 세 식구 보릿고개를 어떻게 넘기겠소?" 병완은 맏며느리와 답답한 속을 털어놓으려다 말고 도리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무슨 감투 끈인지 모르겠다. 개체로 농사를 지을 땐 쌀독이 꼴딱꼴딱 차지 않았고 뭐요? 그런데 지금 무리를 지어 다니면서 뼈 빠지게 일해도 쌀독이 텅텅 빈단 말이요.) 진달래는 쌀을 쌀독에 쏟아 넣으면서 한마디 께끼었다. “제 보건대요. 저처럼 혁명에 남편마저 바친 열사 유가족이거나 상순 조카 같은 제대군인 가정의 쌀독이 텅텅 비었어요. 노동공수에 따라 쌀을 주는데 집에 노동력이 없어 그런 거 같아요.” 병완은 머리를 끄덕였다. 그는 벽 밑에 앉아 무릎에 손자 경수와 경주를 앉히고 흔들거리면서도 얼굴에는 수심의 그림자가 흘러지나가고 있었다. “밭은 적고 인구는 많이 늘어난 것도 문제야. 이제 마을 사람들을 동원해 황무지를 더 일궈야겠소.” 진달래는 가마 목에 무릎을 꺾고 앉았다. “그래요. 밭이 적은 것도 문제지만 열사 유가족에게 그저 열사증이나 주고 아무런 보상도 해주지 않는 것도 문제예요.” 병완은 머리를 끄덕였다. “건국 초기 어려움을 벗어나면 장차 꼭 열사 유가족이거나 군속에게 우대 무휼 금 같은 걸 얼마라도 주겠지.” 진달래는 무릎을 안고 한숨을 땅이 꺼지게 호 내쉬었다. “정말 살기 막막해요.” 며느리 말을 들으며 병완도 한숨을 가슴이 터지게 내쉬었다. 진달래는 벽 밑의 경주를 안아다가 가마 목에 눕히고 이불을 덮어주며 불평을 털어놓았다. “소서구 밭을 누가 일궜는데 합작사에 다 들여놓고 배를 촐촐 굶으면서 살아야 돼요?” “쯧쯧, 그만 하오. 우린 당원이 아니오? 당원은 대공무사 해야 하오. 고만한 이익 때문에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에 대한 신앙이 흔들려서야 되오?” 시아버지 말을 듣고서도 진달래는 뽀로통해 했다. “전 조선에 나가 인삼 시동생을 찾아 봐야겠어요. 애 아버지가 조선인민군 연대장을 하다가 희생됐으니까 조선에서는 우대해주겠지요.” 병완은 한숨만 내쉬었다. “아가야, 그만 말해라. 용천 대장은 남조선 괴뢰군이 아니었나? 자칫, 어험, 험. 심중히 생각하고 가게나.” 병완은 손자들을 내려놓고 엉거주춤 일어나 집 밖으로 나갔다. 진달래는 그래도 년세 계시는 시아버지가 시삼촌 덕성보다 자기를 더 보살핀다는 것을 느꼈다. 병완은 자손들을 데리고 초가삼간을 지어 진달래네 들어 살게 했다. 그리고 때때로 땔나무를 해 실어다 주기도 하였고 쌀이 떨어지면 종종 자손들을 보고 가져다주게 했던 것이다. 그 친어버이 같은 사랑에 진달래는 못내 고마워 뜨거운 눈물을 흘리곤 했다.       진달래는 생활고를 겪으면 겪을수록 남편 - 성칠을 잃은 것이 마음이 더 아파났고 한없이 성칠 오빠가 그리웠다. 그녀는 낮에는 합작사에 나가 아픈 다리를 끌고 나가 일하느라고 다른 생각을 할 새 없엇지만 조용한 밤이면 애들을 재우고 머리를 매만지면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밤을 지새군 했다.      그녀는 항일유격대 중대장으로 돼 돌팔매질로 일본 놈들을 까눕힐 때부터 그 얼마나 일본 놈들이 없는 새 나라를 갈망했던가. 그 얼마나 자식들한테 풍요롭고 행복한 새 사회를 넘겨주고 싶었던가. 그러나 미제를 몰아내는 전쟁에 남편을 바치고나니 애들한테 따뜻한 밥 한그릇도 푼푼히 떠줄 여력도 없게 되였다.      (안돼, 계속 이렇겐 살 순 없어. 언제까지 시집 신세에 살겠는가. 조선 인민들은 위대한 수령 김일성 장군의 령도아래 전쟁의 상처를 재빨리 치유하고 중국과 쏘련의 국제주의 지원을 받아 새 나라를 재빨리 건설하고 있다고 하지 않는가. 경수 아빠는 조선인민군 련대장, 렬사야. 조선에서는 꼭 항일유격대 때부터 김일성 장군을 따라 싸운 렬사 유가족을 잘 보살펴줄 거야.)     외로운 진달래는 이 시각, 조선인민의 위대한 수령 김일성 장군이 령도하는 새 조선이 한없이 그리웠다... 병완은 진달래네 집을 나서자 그 길로 막내손자네 집을 찾아갔다. 그런데 가는 길에 증손녀들이 말싸움을 하는 것을 보았다. 상우네 막내딸 순애는 순자를 윽박질렀다. “네 엄마 못난데다가 키도 작달막한 게 어디 우리 삼촌 대상 되니?” 순자도 지려고 하지 않았다. “우리 엄마만큼 마음이 좋으라고 해라. 네 엄마는 그리 잘 나서? 얼마나 댕댕거렸으면 마을에서 ‘땡땡이’이라고 별명을 지었겠니?” “뭐라니?” 옆에서 듣던 동선도 기분이 상해 순자를 가로 보았다. “네 엄마는 맏며느리라는 게 어째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우리 집에 보냈니? 우리 엄마를 말할 게 있니?” 그 말에 동선과 순애는 말문이 막혔다. “얘들아, 싸우지 말라!” 병완은 애들을 말리고 나서 마른기침을 하며 상순이네 집 윗방 문을 떼고 들어갔다. 상순은 할아버지에게 윗자리를 권해 모셨다. 병완은 곰방대를 꺼내 담배를 재워 넣으면서 말했다. “너도 전선에 나가 피를 흘리며 싸웠는데 쌀독이 어떤지 모르겠다.” 상순은 아버지를 흘금 쳐다보며 “우리 집 쌀독 근심은 하지도 마십시오.”라고 했다. “보나마나 쌀독이 훌쭉하겠지.” 병완은 수리치에 부시를 쳐서 곰방대에 불을 붙여 뻑뻑 빨다가 담배연기를 후 길게 내뿜었다. “아무래도 사회주의 우월성을 백성들이 마음 속으로 느끼게 하려면 황무지를 더 일궈야 될 거 같아.” 상순은 오래 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입을 천천히 열었다. “사회주의 제도가 우월한 건 사회주의 이론에 명확히 쓰여 있습니다. 이제 온 동삼 정치사상교양을 하면 자연히 눈이 번쩍 뜨이게 될 겁니다.” 그러나 병완은 도리머리를 가로 저었다. “아니야, 맨 이론학습만 해선 절대 안 돼. 백성들 쌀독도 꼴딱꼴딱 채워 줘야 한다. 백성들이란 배가 불러야 저절로 노래도 나오고 춤도 나오는 법이야. 배고프고서는 아무리 이론이나 정신자극으로 좋다고 해도 좋다고 할 리 만무해. 봐라, 지금 자기 집 자류지는 풀 한 대 없이 알뜰히 가꿔도 합작사 밭은 대충대충 기음을 매지 않니? 어떤 밭엔 풀이 범이 새끼를 칠 지경이다.” 상순은 그 말씀에 도리 있다고 생각했다. “할아버지, 이제 봄이 되면 사원들을 동원해 황무지를 대대적으로 개간합시다.” 그쯤 동을 달고 상순은 한숨을 후 내쉬었다. “헌데 마을 부근에는 개간하기 좋은 황무지가 없습니다.” 조손삼대는 마주 앉아 담배를 풀썩풀썩 피우면서 한참 궁리했다. 방 안에는 납덩이와 같은 침묵이 흘렀다. 한참 후 상순이 먼저 입을 열었다. “할아버지, 아버지, 사원들을 데리고 범바위골에 들어가서 황무지를 개간하면 어떻겠습니까?” “거 두만강변에 있는 범바위골 말이냐?” “예. 내 약 담배 장사를 하러 조선에 드나들 때 범바위골을 지날 때가 많았습니다. 범바위산은 어찌나 높은지 산 중턱에 구름이 둥둥 떠다닙니다. 산에는 멧돼지들과 호랑이, 승냥이 같은 야수들까지 욱실거려 농사를 짓기 힘들어 무인지경이 됐습니다. 그래서 황무지와 묵밭이 아주 많습디다.” “그래?” 병완과 기준은 거의 동시에 이구동성으로 반문하며 상순의 기이한 생각에 못내 탄복했다. “예, 범바위골로 들어가서 황무지를 일굽시다.” 그러나 병완과 기준은 인차 대답하지 않고 궁리만 하고 앉아 있었다. 한참 후 병완이 물었다. “네 말은 사원들을 데리고 범바위골로 이사 가자는 게야?” “그래도 괜찮습니다. 헌데 노동력을 범바위골에 다 뽑아 가면 함흥 촌 농사는 어찌 하겠습니까?” 병완은 곰방대를 빨더니 무겁게 입을 뗐다. “네 생각은 좋긴 좋다. 황무지를 많이 일궈 사원들의 쌀독을 꼴딱꼴딱 채워 주면 모두들 사회주의가 좋다고 할 게야. 허나 진수해향 지역을 벗어나서 상급에서 알면 동의하겠는지 모르겠다.” 상순은 대수롭잖게 여겼다. “괜찮습니다. 어떤 때엔 먼저 일을 하고 후에 회보해도 됩니다. 우리가 숱한 쌀농사를 지어 사원들의 쌀독을 꼴딱꼴딱 채워주면 우에서도 잘했다고 할 겁니다.” “먼저 일을 해재끼고 후에 회보한다?” 병완이 망설일 때 기준이 나섰다. “쌀독을 빡빡 긁으면서 배를 촐촐 굶을 게 있습니까? 범바위골 황무지를 개간하고 보깁소.” 병완은 “이제 봄이 되면 범바위골로 들어가자. 이 다음 우에서 뭐라고 하면 내가 책임질게.” 하고 말하며 우쭐 일어났다. 상순은 할아버지에게 힘차게 말했다. “아니, 할아버지, 근심하지 마십시오. 제가 다 책임지겠습니다.” 병완은 한숨을 쉬면서 바깥으로 나갔다. 어느덧 여우도 눈물을 흘리는 매서운 추위로 만물이 꽁꽁 얼어붙었던 겨울은 지나가고 만물이 약동하는 새 봄이 왔다. 상순은 흥수와 성수 등 젊은 농사군들을 데리고 며칠 동안 비술나무랑 베다가 불에 달궈 후린 후 쇠보습을 박아 넣어 가대기를 만들었다. 흥수는 상순이랑 돌아온 한 달 후에야 함흥촌으로 돌아왔다. 상순은 궁금해 그간 어데 갔댔는가고 물었다. 그러나 흥수는 부대를 떨어져 헤매다가 길을 잃어 헤매다나니 늦었다고 얼버무렸다.        상순은 흥수가 가능하게 남조선 땅에서 남조선 유격대원 영수의 총에 맞아죽은 동생 창수를 묻어주러 갔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좀 섬찍한 생각도 들긴 했다.       (흥수가 동생 원쑤를 갚으려고 총으로 영수를 쏜 적도 있다. 그럼 영수를 보복살해하자고 찾아갔을 수도 있지 않은가...)       그러나 상순은 흥수가 남조선 땅에서 무슨 짓을 하고 돌아왔는지 조사할 방법이 없었다. 상순은 어디까지나 수하 전우 흥수를 좋은 쪽으로 많이 생각하려고 무등 애를 썼다. 나중에 그는 흥수가 살아서 돌아온 것만 해도 기쁘게 여기며 더 캐여묻지 않기로 했다.       (만약 흥수가 영수한테 보복하러 찾아갔댔다면 꼭 남로당(남조선 로동당) 유격대에서 조선인민군을 통해 적발이 들어올게 아닌가. 전우를 더 의심하지 말자.)       한 보름 후 상순은 흥수를 포함해 끌끌한 젊은 농사꾼들을 데리고 소 수레에 농기구랑 강냉이와 감자 종자랑 싣고 호호탕탕하게 150여리나 떨어진 두만강변 범바위골로 "진군"했다. 병완은 마을 사람들 속에서 상순의 손을 잡고 신신당부했다. “산에 가면 불하구 야수들을 조심해라. 안전이 제일이다.” “예, 명심하겠습니다." 상순은 할아버지를 안심시켰다. "빗발치는 포탄과 총알 속에서도 죽지 않았는데 그까짓 야수들을 이기지 못하겠습니까? 평안히 보내십시오.” 지춘실은 흥수 쪽으로 다가와 귀속말로 주의를 줬다. “저 나그네를 너무 믿지 마오.' 뒤이어 그녀는 상순을 흘겨보며 볼 멘 소리를 했다.  "상순이, 당신 정말 큰 일 치겠다. 내내 남의 나그네를 전쟁터 아니면 무인지경 산골로 끌고 다녀? 여인네도 나그네 없인 살기 힘들다고. 흥!” 상순은 못 들은 척 하면서 배가 남산만한 명옥을 따라 나온 딸 넷을 한 아름에 안고 뽀뽀를 해 주었다. 병완과 기준, 창준을 비롯한 마을 사람들은 상순이랑 흥수랑 몬 소수레가 조개덕을 넘어 굽인 돌이에까지 사라질 때까지 손을 저으며 바래였다. 상순이 이끈 수레 대오는 이튿날 저녁 무렵에야 범바위산 기슭에 이르렀다. 그들은 한 마을에 들려서 대충 대국 가마를 걸어놓고 밥을 지어 먹고 하루 밤 묵었다. 이튿날 아침, 범바위산을 올려다보니 굽이굽이 올리막 길은 구름 속으로 빨려 들어가 끝이 보이지 않을 지경으로 까마아득했다. 오뉴월의 소낙비는 소잔등을 다툰다고 금방까지도 맑던 하늘이 갑자기 먹장구름이 덮쳐와 시뻘건 번개가 번쩍이더니 달걀만큼 한 우박이 억수로 쏟아져 내렸다. 모두들 수레 밑에 우르르 쓸어 들어가 우박과 비를 피했다. 상순이네 검둥이와 흥수네 누렁이도 주인들과 함께 수레 밑에 들어와 꼬리를 사타구니에 차고 들어앉았다. 금숙은 검둥이 대가리를 쓰다듬어 주며 쌍까풀 청포도 눈으로 수레 틈으로 흘러내리는 빗물을 말똥말똥 쳐다보았다. 뒤이어 소낙비가 산기슭을 뒤덮으며 억수로 퍼부었다. 그 바람에 숱한 이불이 소낙비를 폭 맞아 몽땅 젖어버렸다. 한참 기승을 부리며 쏟아지던 소낙비가 멎고 먹구름이 점차 범바위산을 벗기더니 서쪽으로 밀려갔다. 뒤이어 안개가 덮쳐와 범바위산을 꼭 감쌌다. 안개는 산기슭의 굽이굽이 굽은 길을 껴안고 몸부림치며 마구 흩어지기 시작했다. 상순은 코 기러기처럼 제일 앞의 수레를 몰고 굽인돌이 길에 접어들면서 목청을 돋우어 소리쳤다. “소낙비가 멎었을 때 어서 산꼭대기로 올라가기요. 이 굽인 돌이 길을 따라 올라가면 산꼭대기에 평평한 황무지가 있소. 모두 힘을 내 올라 가기요!” “예!” 그들은 구름 속으로 빨려 들어간 굽이굽이 아흔아홉 굽인 돌이를 에돌면서 범바위산 꼭대기에 올라갔다. 모두들 구름 위에 우뚝 솟은 평평한 범바위산 산정은 정말 가관이었다. 유서 깊은 두만강을 건너 조선의 산마루가 구름 위에 바라보이고 범바위산 중턱에 하얀 양떼처럼 구름송이들이 흐르고 있었다. 상순은 개암나무와 쑥대가 키를 넘는 황무지를 바라보면서 시원한 산 공기를 한껏 들이켰다. 아, 정말 범바위산은 농사꾼들의 희망으로 차 넘치는 땅, 그들이 땀 동이를 몰 부어 힘껏 개척할 할 처녀지였다. (어쨌든 여기서 풍작을 거둬 마을 사람들이 사회주의 우월성을 피부로 느끼게 해야 한다.) 상순은 굳은 결의를 다지면서 마을 사람들과 함께 범바위산 꼭대기 평평한 황야에 큼직한 돌멩이를 들어다 놓고 가마를 걸었다. 드디어 구름 속에서 밝은 해가 나오더니 따뜻한 햇볕을 빗물에 젖은 범바위산 황무지를 골고루 비추었다. 금숙이랑 몇몇 처녀애들이 수레에서 젖은 이불을 나무에 걸어 말리었다. 처녀애들은 웃고 떠들면서 산골짜기에 내려가 샘물을 찾아내 쌀을 일어 얹고 삭정이를 주어다가 밥을 짓기 시작했다. 상순은 한창 밥을 짓는 금숙이랑 옥자랑 마을의 처녀애들한테 가서 신신당부했다. “산불을 주의해라. 산불이 나면 큰 일이 난다. 알았지?” “양, 근심하지 맙소.” 겨우 열대여섯 살 먹은 금숙은 몇 살 이상 언니들을 따라 범바위산으로 왔던 것이다. 상순은 금숙이 불쌍했다. 집에 먹을 것이 없어 공부하러 가지 못하고 소학교 4학년을 다니다가 그만두고 밥벌이를 하려고 범바위산에까지 따라 왔던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야외에서 가마를 걸고 삭정이를 주어다가 불을 지펴 점심을 대충 끓여 먹었다. 오후부터 나무를 베다가 기둥을 대충 세우고 웃갓부터 씌워 집인지 막인지 세웠다. 상순은 주위 환경을 익숙히 하려고 사냥총을 메고 검둥이를 데리고 평평한 범바위산 꼭대기를 두루 돌아보았다. 범바위산의 꼭대기는 유별나게 울울창창한 수림 속에 평평한 평지이다가도 불시에 깊은 협곡이 패여 있어 꽤나 무시무시했다. (저게 뭔가?) 상순은 한참 돌아다니다가 협곡과 협곡 사이 평지에 디귿 “ㄷ”자 형으로 앉은 허름한 초가집 세 채를 발견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집 이영이 다 날아나고 마당에는 범이 새끼를 칠 지경으로 마른 쑥대가 한 키나 자라 있었다. 집의 문짝이 다 떨어진 것을 보아 빈지 오랜 집인 것 같았다. “됐다! 이 헌 집을 손질해 들면 되겠다.” 상순이 초가집에서 나왔을 때 웬 늙은이가 지게에 광주리를 지고 마당에 들어섰다. 둘은 주춤 멈춰서 상대방을 바라보다가 얼굴 근육을 느슨히 풀었다. 늙은이는 사냥총을 든 상순의 아래 위를 훑어보며 물었다. “어데서 왔소?” 상순은 “함흥 촌에서 왔습니다.”라고 대답하며 다가갔다. “함흥 촌?” “예. 여기서 한 150리 떨어진 진수해 함흥 촌에서 왔습니다.” 늙은이는 머리를 끄덕이더니 “그 먼 곳에서 여긴 어째 왔소?” 하고 물었다. “예, 저, 쌀 고생이나 하지 말자고 감자농사나 좀 해갈가고 왔습니다.” 곧이곧대로 대답하는 상순의 대답에 늙은이는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에이고, 어떻게 고생하겠소? 우리도 여기서 살다가 달아났소.” “예? 건 왜서요?” 늙은이는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었다. “우린 일제 때 나라를 잃고 두만강을 건너서 여기 인적 없는 범바위골에 들어와 화전 농사를 지었지. 그런데 이 산골엔 범과 승냥이 욱실거리는데다가 가을이면 멧돼지들 성화에 감자농사를 하지 못하오. 허나 일제 놈들의 가혹한 철발굽 밑에서 노예로 살기보다 나아서 여기서 그럭저럭 연명하면서 광복을 맞았소. 공산당 덕분에 우린 야수들과 멧돼지들을 피해 이 무서운 산골을 떠났소. 그런데 자네들 여기서 어떻게 고생하겠소?” 상순은 머리를 끄덕였다. 늙은이는 상순을 데리고 다니면서 골짜기에 있는 샘물터와 자기들이 일궜던 묵밭을 일일이 알려 주었다. 상순은 늙은이와 갈라지면서 “할아버지, 고맙습니다.”라고 인사했다. 늙은이는 상순을 보고 “꼭 산불과 야수를 주의하오.”라고 신신당부하고는 약재를 캐면서 산비탈 쪽으로 내려갔다. 상순은 마을 사람들을 데리고 와서 그 헌 초가집 세 채를 손질해 들었다. 마을 사람들은 집이라고 드니까 마음이 놓였다.                                          11. 올감자대풍작        울울창창한 밀림에도 여름 땡볕이 쟁글쟁글 내리쪼였다. 상순이 마을 사람들을 이끌어 범바위산의 나무를 찍고 뿌리를 뽑아내고 황무지를 개간해 일군 감자밭에 연보라 빛 감자꽃이 소담하게 피어 웃음 짓고 있었다. 호미로 파 보면 포기마다 주먹만큼 한 올 감자알이 서너 개씩 달려 있어 마을 사람들의 마음은 흐뭇하기만 했다. “멧돼지야!” “저 놈 멧돼지들이 감자를 다 파먹는다!” 한 무리 멧돼지들이 저쪽 감자밭머리에 덮쳐들어 올감자를 먹고 있었다. “저 놈 멧돼지들이! 어제 저녁에도 달려 든 걸 사냥총을 쏴서 쫓아버렸는데 또 왔다!” 상순은 흥수와 병수와 함께 밭머리에 뛰어가 세워두었던 사냥총을 들었다. 상순은 전쟁터에서처럼 흥수와 병수를 보고 말했다. “멧돼지를 잡기요!” “좋소!” 그들 셋은 멧돼지들을 포위해갔다. 상순은 허리를 굽히고 감자밭에서 슬금슬금 멧돼지들 쪽으로 뛰어갔다. 멧돼지들은 감자를 파먹다가 상순을 발견하고 대가리를 돌려 도망치기 시작했다. 땅! 땅! 그러나 늦었다. 좌우에서 포위해 들어가던 흥수와 병수가 총을 쏘며 멧돼지들을 한 곬으로 몰아쳤다. 그때 제일 큰 어미멧돼지가 판가리 싸움을 할 상으로 상순에게 정면으로 덮쳐들었다. 땅! 총소리와 함께 멧돼지 대가리에서 먼지가 풀썩 했다. 그러나 멧돼지는 쇠바늘 같은 뾰족한 어금니를 빼물고 상순에게 덮쳐들었다. 상순은 미처 두 번째 탄환을 재울 새도 없이 총자루로 멧돼지 대가리를 내리 팼다. 멧돼지는 상순을 깔고 넘어가 주둥이로 상순의 목을 물려고 들었다. 허나 상순은 총 박죽을 멧돼지 아가리에 밀어 넣었다. 멧돼지가 총자루를 까득까득 깨물었다. 그 새 상순은 오른 손으로 장단지 각반에서 비수를 뽑아 멧돼지 턱주가리 밑의 요해처를 푹푹 박아 넣고 도려냈다. 어미멧돼지는 꽥 비명을 지르며 피를 울컥 토하더니 버둑거리다 맥없이 옆으로 쓰러졌다. 상순은 150킬로그램은 실히 될 어미멧돼지를 겨우 밀어내고 기어 일어났다. 그의 얼굴에는 멧돼지 발톱에 허빈 피 묻은 커다란 상처자국이 나 있었다. 그새 흥수와 병수는 사냥총으로 다른 멧돼지들을 쏘았다. 100킬로그램은 실히 될 멧돼지 두 마리가 그들의 총에 맞아 쓰러졌다. 질겁한 멧돼지들은 무리를 지어 수림 속으로 우르르 달아났다. 마을 사람들도 호미와 괭이를 들고 이쪽으로 달려 왔다. 상순은 피 묻은 비수를 멧돼지 목에서 뽑아 팔소매에 쓱쓱 닦아 장 단지 각반에 되 꽂아 넣었다. “아버지, 얼굴에 피!” 금숙은 자기 치맛자락을 쭉 찢어 들고 아버지한테 다가가 얼굴의 상처를 닦아주었다. “괜찮아.” 상순은 금숙의 손에서 천 쪼박을 받아 얼굴을 대충 닦고 나서 육중한 어미멧돼지 배때기를 발로 툭툭 찼다. 성근이랑 태연이랑 멧돼지들을 둘러보며 혀를 끌끌 찼다. “허허허. 덕분에 멧돼지 고기를 잘 먹게 됐구먼!” “이런 걸 두고 나쁜 일이 좋은 일로 된다는 게요.” “허허허. 감자를 도둑질 맞힌 대신 멧돼지 고기를 먹어도 좋지.” “허허허” “호호호” 마을 사람들은 웃고 떠들며 상순이네가 잡은 멧돼지를 초가집에 끌어다 물을 끓여 튀를 했다. 일군들은 점심밥상에 둘러 앉아 푹 끓인 멧돼지고기를 한 사발씩 놓고 맛나게 먹었다. 흥수는 큼직한 멧돼지고기 점을 젓가락으로 집어 먹으면서 떠들어댔다. “야, 거 멧돼지고기는 썩썩한 게 술 안주로 들어났는데. 그런데 이 산골에는 술이 없단 말이야.” 상순은 여러 사람들을 둘러보더니 묵직하게 말했다. “올감자하구 멧돼지고기를 마을에 실어다 나눠 주기요. 돌아오는 길엔 술도 사오구.” 모두들 멧돼지고기에 삶은 감자로 점심을 배불리 먹고 수레 다섯 대에 중돼지 두 마리에 밭에서 파온 올 감자를 실었다. 상순은 병수와 흥수를 보고 “자네들은 산에 남아서 초막과 감자밭을 지키오. 멧돼지 오는 족족 잡소.”라고 했다. 병수는 사냥총을 들어 보이면서 “김 서기, 근심하지 마오. 멧돼지고 호랑이고 오겠으면 오라지. 다 쏴 잡겠소.”라고 장담했다. 흥수는 상을 찡그리면서 “나도 집을 떠난 지 오래서 가서 딸 해월이랑 보고 싶소.”라고 했다. “어째 여편네 궁둥이가 생각나는가?” 병수가 놀려대는 바람에 흥수는 “에끼, 이 사람이, 자네와 함께 산에 남을 게.”라고 하며 초가집 안으로 훌 들어가 버렸다. 상순은 학수와 성근, 태연을 데리고 올감자를 꽉 박아 실은 소 수레를 몰고 함흥 촌을 바라고 떠났다. 그들은 중도에서 아무 마을에나 들어가 쉬지도 않고 곤하면 수레 채에 걸터앉아 꺼떡꺼떡 골면서 온밤 길을 다그쳐 이튿날 점심에야 함흥 촌에 도착했다. 상순은 촌공소 마당에 소 수레들을 세워 놓고 할아버지를 찾아 촌공소에 들어갔다. 때마침 할아버지는 점심식사를 마치고 촌공소에 계셨다. “할아버지, 그간 무사히 계셨습니까?” “오, 그래. 산에서 모두들 무사했냐?” “예.” 병완은 상순이네가 실어온 올감자와 멧돼지고기를 보고 기뻐 어쩔 줄 몰라 했다. “야, 보릿고개를 겨우 넘고 이젠 어떻게 기나긴 여름을 지내겠는가고 근심했는데 이젠 마을 사람들이 살았다. 살았어.” 마을 사람들은 주머니와 함지를 들고 와서 올감자에 멧돼지고기까지 가져가면서 기뻐 야단쳤다. 병완과 상순은 웃음꽃이 활짝 핀 마을 사람들의 얼굴들을 돌아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명옥은 배가 남산만 해가지고 두 살 밖에 안 되는 금자를 업고 와서 함지에 감자알과 돼지고기를 이고 가면서 만면춘풍이었다. 진달래는 경주와 경수를 데리고 와서 함지에 감자와 멧돼지고기를 담았다. 경주와 경수는 제법 어머니를 도와 자기 집에 차례진 감자를 함지에 주어 담았다. 상순은 진달래가 안간힘을 쓰며 이려는 함지를 훌 빼앗아 안고 진달래네 집으로 성큼성큼 갔다. 그때 옆에서 춘실이 입이 함박만 해 집으로 가는 명옥을 보고 입귀를 비죽거리며 “좋겠소. 저 잘난 나그네 와서.”라고 하더니 상순의 잔등을 흘겨보았다. “당원이란 게 자긴 여편네 보러 오면서 남의 나그네는 오지 못하게 하다니. 쯧쯧쯧, 남을 보살피지 않는게 당원이오?” 상순은 슬그머니 밸이 꼬였지만 못 들은 척 했다. 상순이 데리고 온 검둥이를 보자 춘실의 황둥개는 꼬리를 치며 좋다고 달려와 “으응”하며 매달려댔다. “지개! 더러운 개새끼! 치사하게 우리 집 암캐만 보면 매달려!” 춘실은 욕하며 검둥이를 발로 걷어 차 놓았다. 검둥이는 풀쩍 뛰어 피하며 춘실을 쏘아보며 으르렁거렸다. “검둥아! 그러지 마!” 상순은 어느 결에 진달래네 집에 감자를 가져다주고 돌아와 검둥이를 말렸다. 춘실은 상순을 핼끔 쳐다보더니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그녀는 함지를 인 채 콧방귀를 “흥!” 하고 뀌더니 몸을 홱 돌려 떠나갔다. 마을 사원들은 풍작을 거뒀다고 기뻐 야단이었다. 아낙네들이 시루에 쩌 온 하얀 김이 몰몰 나는 조 찹쌀을 탈곡장 마당에 있는 커다란 둥그런 매돌 위에 쏟아놓았다. 그러자 나그네들이 손바닥에 침을 뱉고 떡메를 쥐여 샛노란 찰떡을 쿵쿵 쳤다. 남정네들의 힘찬 떡메 질에 신바람이 난 아낙네들이 대야에 찬물을 떠 가지고 와서 떡돌 위에서 익어가는 찰떡을 이리저리 번지면서 찬물을 끼얹었다. 점심에 탈곡장 마당에서 온 마을 사람들이 모여 잔치를 베풀었다. 병완이 막걸리 잔을 들고 축배를 올렸다. “자, 올해 공산당의 영명한 정책의 혜택을 입어 올해 올감자 대풍작을 거뒀습니다. 범바위골에 간 부업대에서 이렇게 많은 올감자에 멧돼지 고기까지 실어왔습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 함께 올감자 대풍작을 경축해 마음껏 마시고 춤을 춥시다!” “예- 감사합구마!” “자, 기쁘게 한잔 마시깁소!” “옛!” 모두들 문문하게 삶은 썩썩한 멧돼지 고기를 안주로 막걸리를 쭉쭉 마셨다. 서너 잔 들어가자 학수가 막걸리 사발을 들고 상순의 앞에 다가와 내밀었다. “김 서기, 덕분에 잘 먹고 잘 살게 됐는데 막걸리 한 사발 쭉 내고 한곡 부르오.” 상순은 막걸리를 받아 쭉 굽을 내고 항상 부르던 “호미가”를 구성지게 불렀다. 동산천리 돋으신 해는 점섬 때가 되어온다 에라 에라 에라 호미야 호미 호미를 메고 가자 알뜰하게 가꾸어라 땀에서 나오는 곡식이다 에라 에라 에라 호미야 호미 호미를 메고 가자   마을 사람들은 일어나 원을 치고 돌아가면서 상순의 노랫소리에 맞춰 어깨춤을 덩실덩실 추었다. 춘실이랑 새금이랑 명옥이랑 웃새집 신옥이랑 련옥이랑 아낙네들이 치맛자락을 날리면서 도라지 춤을 너울너울 췄다. 해가 뉘엿뉘엿 서산으로 넘어가자 모두들 얼근해서 희희낙락거리면서 집으로 돌아갔다. 집집마다 아낙네들이 채칼에 감자를 싹싹 갈아 감자떡을 빚어 시루에 얹어 끓였다. 이윽고 집집마다에서 감자떡 냄새와 멧돼지고기 국의 구수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해지는 동네 골목마다 애들의 노랫소리가 울려 퍼졌다. 냄냄 맛있다 오래오래 맛있다 냄냄 맛있다 돼지고기 맛있다   다른 애들은 또 다른 노래를 불러대며 뛰놀았다. 아가리 딱딱 벌려라 영채 김치 쑤셔넣게 다른 애들은 화답이나 하듯이 맞받아쳤다. 주둥이 짝짝 벌려라 감자떡을 쑤셔넣게           마을 골목에서 애들이 떡을 먹으면서 깡충깡충 뛰놀며 부르는 노랫소리는 자장가처럼 하늘로 날아올라가 메아리쳤다. 둥근 해님은 애들이 부르는 그 자장가를 들으며 서산으로 넘어가 밤하늘의 꿈나라로 서서히 달려갔다.
121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83) 댓글:  조회:1328  추천:0  2017-09-30
                          8. 합작사 소서구 남쪽 천지꽃산에 먹장구름이 덮쳐왔다.  먹장구름을 헤가르며 불 뱀 몇마리가 혀를 날름거리면서 대지를 내리 채찍질 했다. 우르릉 꽝! 천지를 진동하는 우레 소리와 함께 대살 같은 소낙비가 창창 억수로 쏟아졌다. 한참 쏟아지던 소낙비가 갑자기 뚝 멎고 서쪽 하늘이 건뜻 들리더니 구름이 말끔히 씻겨가고 파란 하늘이 열렸다. 동녘하늘에 칠색무지개가 곱게 비끼었다. 병완은 이마에 호미를 쥔 손을 얹고 맑게 개이는 하늘을 둘러보더니 촌공소에서 나가 호미로 늙은 비술나무에 건 종을 댕, 댕, 댕 두드렸다. “일하러 나오오!” “장마가 지기 전에 기음을 매야겠소.” 상순이 제일 먼저 토성 안 촌공소에 들어갔다. 촌공소 옆집 상우 형님이 아주머니와 함께 호미를 쥐고 나왔다. 병완이 한참이나 종을 두드려서야 대여섯 사람이 마지못해 호미를 쥐고 토성 안에 들어섰다. 병완은 너무 기차서 중얼거렸다. “합작사에서 양식을 나눌 때는 너도 나도 앞장서 주머니를 들고 달려오더니 일하러 나오라고 하면 모두 자라목이 되니 어쩌겠니?” 상순은 할아버지 팔을 받치고 서서 나직이 말했다. “할아버지, 아마 사원들이 집체 일을 자기 집 일처럼 여기지 않는 거 같습니다.” 병완은 벌칵 성을 냈다. “에끼, 이 놈아, 그게 동길 녀석 말과 다를 배 뭐냐?” “건 사실입니다. 사원들이 집체 일을 자기 집 일처럼 생각하고 일하게 하려면 맑스- 레주의, 모택동 사상과 사회주의 이론으로 사상교양부터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말에는 도리가 있다고 생각했는지 병완은 상순을 쳐다보았다. (정말 막내손자 말처럼 종이나 쳐서 나오라고 해 억지로 붙들어 일을 시키는 수야 없지.) 그날 병완과 상순은 사원들을 데리고 소서구 옛날 상우네 상우지와 상길이네 밭 강냉이 기음을 맸다. 이튿날부터 마을에서 사람들이 뒤에서 쑤군거리는 소리가 귀전을 아프게 때렸다. "아침에 소낙비가 왔는데 어떻게 기음을 맨다고 이러오?" 한 사원이 호미에 찰떡처럼 들어붙은 흙을 손으로 뜯어내면서 두덜거렸다. “김 촌장은 농사군 같지 않소." "자기 자손들의 밭 자리 기음부터 맨다.” “합작사를 해도 노동력이 많은 김 촌장 자손들이나 잘 살겠는지 노동력이 적은 집은 어디 입에 풀칠이나 하겠소?” 마을에 별의별 소리가 다 떠돌아다니는 것이 아니겠는가! 병완은 마을 사람들이 참말 답답했다. (자기가 자손들을 데리고 피땀으로 일군 밭을 몽땅 합작사에 내놓지 않았는가? 마을 사람들을 이끌어 집집마다 쌀독을 꼴딱꼴딱 채워놓고 잘 살게 하려고 밤낮 헤매는데 뒤에서 통통한 말을 하다니!) 병완은 원통했다. 이튿날 아침 상순이 촌공소로 찾아왔다. “할아버지, 밤새 무사했습니까?” 상순이 호미를 놓고 구들에 올라왔다. 병완은 한숨을 후- 내쉬었다. “마을 사람들이 통 말이 아니다. 호조조 때까진 괜찮았다. 우리 집안에서 애나게 일군 소서구 밭을 수태 내놓으니 입이 함박만 했다. 그런데 합작사를 한 후부터 쩍 하면 비쭉거리거든.” 상순은 할아버지와 마주 앉아 위로해 주었다. “할아버지, 마을 사람들이 합작사에 대해 미처 이해하지 못한 탓입니다. 세세대대로 개체로 농사를 지어온 그들을 보고 하루 아침에 양 무리를 몰듯이 집체로 일하라니까 그러는 겁니다. 또 노동력이 적은 집에서는 아무리 애를 써도 가을에 차례질게 적으니까 일 할 열성이 없는 것입니다.” 병완은 상순을 힐끔 가로보면서 볼 부은 소리를 했다. “노동에 따라 분배하는 것은 사회주의 분배원칙이 아니냐? 사회주의 분배원칙도 모르는 마을 사람들이 정말 코 막고 답답하다. 너도 알겠지만 우리 이전에 저 소서구 밭을 대여섯이 달려들면 일주일 안에 다 매지 않았고 뭐니? 그런데 합작사 사원 3, 40명이 사흘 김을 매도 다 매지 못한다. 모두 날일 공만 벌자고 일축은 내지 않고 호미를 쥐고 언제 해지겠는가고 멀뚱멀뚱 하늘만 쳐다본단 말이야.” 상순은 내심하게 할아버지에게 말씀 드렸다. “그들에게 사상교양을 해서 사회주의 분배원칙과 우월성을 알게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병완은 곰방대에 담배를 재우다가 정중하게 말했다. “얘야, 넌 군정대학에 다녀서 사회주의 이론을 잘 알지 않고 뭐야? 네가 촌 당 지부 서기를 맡고 저 깨지 못한 마을 사람들에게 사회주의 사상교양을 해라.” 상순은 더는 사양하지 못했다. 며칠 후 상순은 당 지부회의에서 당원들의 민주선거를 거치고 진수해향 당위의 비준을 거쳐 정식으로 함흥 촌 당 지부 서기를 맡게 됐다. 병완은 당 지부 서기를 내놓고 촌장만 했다. 상순은 서기를 맡자마자 사원들에게 사회주의 합작화의 우월성에 대한 사상교양을 차근차근 진행했다. 상순은 사전에 맑스와 엥겔스, 레닌, 쓰딸린, 모택동주석의 초상을 촌공소 벽에 정중하게 모셔놓고 그날 저녁에 사원대회를 열었다. 사원들은 촌공소에 모여들어와 벽에 걸어놓은 도사들과 모택동 주석의 초상화에 눈이 끌렸다. 학수는 상순을 보고 “허, 김 서기 오더니 촌공소에 수염이 좋은 영감들을 많이 모셨구먼.”라고 했다. 사원들도 웅성거렸다. “정말 그래, 저 서양영감 하얀 구레나룻이 정말 멋있소.” 지군선이 제일 첫 초상화를 가리키며 물었다. “저 영감은 누구요?” “우리 혁명의 도사 맑스오.” 상순의 대답에 군선은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오, 맑스! 이름도 별나구나. 그래 성이 '맑'이고 이름이 '스'란 말이요?" "세상에 ‘맑’씨도 있소?” 상순은 속에서 치미는 웃음을 억지로 참으면서 설명했다. “혁명의 도사 맑스의 성은 맑스고 이름은 칼이오. 보통 ‘칼. 맑스’라고 부르오.” 성수가 또 물었다. “어째 이름이 앞에 있고 성이 뒤에 있소? 성이 칼이고 이름이 맑스인 걸 그러지 않소?” “서양 사람들은 우리 동양과는 달리 이름을 앞에 쓰고 뒤에 성을 쓰오.” “오~ 서양은 별나구나.” 상순은 맑스에 뒤이어 엥겔스와 레닌, 쓰딸린, 모택동 주석의 초상화를 가리키면서 일일이 소개해드렸다. 그런데 성근이 또 빈정거렸다. "에이, 난 저 네번째 령감은 보기도 무섭소." "누구기에?" "우리 쏘련 쓰딸린이요." "어째?" 사원들은 또 궁금했다. "아무래나 말할 일이 아니오." 성근은 용케도 목구멍까지 올라와 간질거리는 말을 꾹 참아냈다.        상순은 사원들한테 맑스의 “자본론” 핵심인 잉여가치학설로부터 시작해 자본주의 페단과 사회주의 제도의 우월성에 이르기까지 쭉 이야기 했다. 사원들은 흥미진진하게 듣기 시작했다.       상순이 레닌과 쓰딸린이 세운 소련 사회주의 정황을 간단히 소개하자 모두들 귀를 도사리고 들었다. 학수는 제일 앞에 앉아서 공책에 뭐라고 적으면서 상순의 연설을 도정신해 골똘히 들었다. 드르릉 드르릉 상순이 살펴보니 제일 뒤에서 박성근이 무릎 우에 세운 팔꿈치에 길죽한 번들머리를 고인 채 코를 드르렁드르렁 골고 있었다. “성근이!” 드르릉 드르릉 상순이 고함쳐 불러도 성근은 계속 구들 고래가 다 꺼질 지경으로 코를 고르고 있었다. 숱한 사람들의 눈길이 되로 쏠렸다. 그때 학수가 뒤에 대고 “성근이! 이 사람! 깨나지 못하겠는가?!” 하고 버럭 고함쳤다. “엉?! 어쨌다고?” 그제야 성근은 깨여났다. “사람이, 원, 코를 어찌나 세게 구르는지 구들 고래 다 꺼질 지경이오!” 상순이 고함쳐서야 성근은 입귀에 흐른 침을 손바닥으로 쓱 닦으면서 두덜거렸다. “난 또 무슨 큰 일이 났다고.” 상순은 무섭게 성근을 쏘아보았다. “당신 머나먼 소련에서 일가친척도 없이 함흥촌에 왔다고 불쌍해 좀 봐주니까 통 말이 아니구먼.” 성근은 마주 바라보지도 않고 게두덜거렸다. “에이고, 소련에서 날마다 막 씃고 내리 씃고 해도 쓸데없습데. 배불리 먹고 잘 살면 다요.” 상순은 공책을 내리우면서 박성근을 노려보았다. “뭐라오? 세계 혁명의 위대한 도사를 아무래나 말하겠소?” 그래도 성근은 머리를 숙이지 않았다. “내 그 놈의 정치 학습이 싫어서 소련에서 여기 달아났소. 꼴호즈 하니 영 틀렸어. 꼴호쯔라면 그 우둔한 쏘련의 소들도 가기 싫어했소. 소들도 꼴호쯔에 가면 굶어서 빼빼 여윈다는 거 아니까 말이요. 그런데 여기 중국에서 꼴호즈를 잘 모르면서 그 길로 또 가려고 하니 참 답답하오.” 상순은 눈귀를 느슨히 풀었다. 사원들이 물었다. “꼴호즈라는 게 뭐기에 그리 나쁘다고 그러오?” 박성근은 우쭐해서 올방자를 틀고 앉았다. 모두들 상순에게서 눈을 떼 성근의 쪽을 뒤돌아보았다. “꼴호즈라는 건 세상 못쓸게요. 여기서 말하는 합작사와 같은 ‘집체농장’이오. 꼴호즈를 해놓고 집체로 농사를 지으니까 모두 일을 하지 않습데. 소련 마우재들이 특별히 게으르오. 일하기는 싫고 맨날 술병을 안고 돌아다니면서 주정만 부린단 말이요. 적극성이 없어 어디 일이 축나오?. 밭에 범이 새끼 칠 지경인데도 술만 처먹구 집에서 녀편네를 껴안고 그거만 하면서 씩식거린단 말이요. 같은 밭에 같은 사람이 농사를 짓는데 개체로 할 때보다 산량도 더 나지 않고 먹을 알이 없었소. 모두 어디 자기 집 일처럼 하오?"      숱한 사원들은 상순의 강의는 제체놓고 돌아앉아서 성근의 하소연을 들었다. 상순은 강의를 그만두고 소피 보러 가는 척하고 바깥으로 나가버렸다. 그는 성근이 마음대로 말하라고 내버려두고 바깥에서 엿들었다.       성근은 어깨 어쓱해 부쩍 열을 올려 연설을 계속 해재꼈다.       "쏘련엔 묵밭이 많아 좋았소. 밭이 또 비옥해서 부지런히 가꾸면 먹을 근심이 없어서 살만했소. 마우재들은 게으르다 못해 내물에 물고기 늙어죽어도 잡아 먹지 않소."      그때 학수 령감이 끼어들었다.      "에끼, 이 사람아, 혼자 다 아는 상하지 말게. 내 들은 건 마우재들이 냇물 고기를 먹지 않는다더라이,"     "게을러 그래."      "뭘 안다고 끼어들어?"     학수도 지려고 하지 않고 목에 지렁이 같은 핏대를 세웠다.     "마우재들은 바다 고기만 먹지 냇물 고기 먹지 않는다이."  그 말에 모두들 머리를 끄덕였다.      "건 그렇다 치고 내말 들으라이. 쏘련에서 우리 조선 사람들이 일본 놈들과 비슷하게 생겼다고 일 본 놈들과 내통하는가 해서 밤중에 강제로 기차에 마구 실어서 울라부지또크에서 머나먼 내지로 실어갔소. 조선 사람들은 가지 않겠다고 울고 불고 비난사정해도 되오? 난 처자를 데리고 도망쳐 수림에 가서 납작 엎드려 있다가 겨우 소련을 떠나 중국에 달아났다니까. 야, 우리 조선 사람들이 저 훈춘 맞은켠 쏘련 해변가에 쭉 가면서 어떻게 일군 황무진데 두고 오자니 기 딱 찹데. 헌데 여기서두 꼴호즈를 할 줄은 몰랐소.” 사원들은 모두 귀 솔깃해 듣더니 머리를 끄덕였다. 상순은 성근을 그대로 내버려둘 수 없었다. “닥치지 못하겠는가! 또 횡설수설 망발하면 가만나두지 않겠소.” 성근은 콧방귀를 뀌면서 눈을 감고 억지로 입을 꾹 다문 채 묵묵히 앉아 있었다. 그 날 회의는 성근이가 빈정대는 바람에 흐지부지해졌다. “모두들 곤하겠는데 오늘 학습은 이만 하겠습꾸마.” 상순은 집에 돌아간 후 밤중이 되도록 성근의 말을 반박할 준비를 하느라고 등잔불 밑에서 동북군정대학 때 필기장을 뒤적이었다. 이튿날 기음을 매고 첫 쉼을 쉴 때다. “여러분, 여기 모이십시오.” “낮에 일하고 저녁에 곤하기에 오늘부터 쉼에 밭머리에서 회의를 하겠습꾸마.” 사원들은 상순의 눈치를 흘끔흘끔 쳐다보면서 모여들었다.  여기저기서 이런 소리가 들렸다. "깡깡 마른 이론을 말해 누가 알아듣겠소?" "글쎄 말이오. 여기 합작사지. 당학교오?"       심지어 박성근은 상순을 중심으로 빙 둘러앉은 사원들 속에서 벌떡 일어나 목에 지렁이 같은 핏줄을 세우고 말했다.       "상순이, 난 쏘련 홍군이 독일 침략군을 까부신 전쟁은 봤소. 그런데 중조 군대가 미군 놈들을 짓부신 전쟁은 보지 못했소. 조선에 나가 양키놈들을 족치던 전투얘기나 좀 해주오." 상순은 머리를 끄덕였다. "알았소. " 상순은 공책도 쥐지 않고 호미 자루를 짚고 서서 말을 시작했다. “광복 전에 우리는 나라가 망해 일제 놈들과 조선 지주들의 가혹한 착취를 받아 손바닥만 한 땅도 없어 살길을 찾아 쪽박을 차고 이 간도에 들어왔습니다. 허나 천하의 까마귀는 다 검다고 중국 지주들은 조선 지주들보다 못지않게 우리를 노예처럼 부려먹었습니다. 황무지를 일구게 한 후 소작료를 8할씩 걷어 갔습니다. 우리는 항상 뼈 빠지게 일해도 해마다 보리 고개를 넘기 힘들었습니다.” 모두들 여기저기에서 머리를 끄덕이었다. “지주들이 무엇에 의해 배 터지게 먹고 살았겠습니까? 그들은 소작료를 혹독하게 걷어가면서 우리를 착취해 잘 살았습니다. 지주들은 고이 놀고서도 배 터지게 먹고 살고 우리는 날마다 소나 말처럼 일해도 죽물마저 먹고 살기 힘들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한쪽 구석에 머리를 두 다리 새에 처박고 앉아 있는 장학산과 장충국을 쏘아보았다. 상순은 과거를 회고시킨 자기 말이 사원들의 마음에 서서히 젖어들고 있는 것을 느꼈다. “우리 위대한 중국 공산당이 인민을 영도해 일제를 몰아내고 지주를 청산해 우리 빈농들에게 밭을 나눠주었습니다. 당과 정부에서는 민족 차별이 없이 조선에서 건너온 우리에게도 한족 형제들과 마찬가지로 밭을 주었습니다.” 이때 학수가 우쭐 일어나 “위대한 중국 공산당 만세!” 하고 구호를 불렀다. “공산당 만세!” “공산당 만만세!” 사원들도 따라 구호를 불렀다. 상순은 열의가 오른 군중들에게 사기 나 연설했다. “우린 더는 지주들의 착취를 받지 않고 마음껏 농사를 짓고 살게 됐습니다. 중국 공산당은 이제 우리를 영도해 더 잘 살게 하려고 옛날에 없는 호조조, 합작사를 차리게 하였고 이제 사회주의 인민공사를 꾸려 나갈 것입니다. 우리는 중국 공산당을 믿고 합작사, 인민공사의 길로 나가야 합니다. 우린 소련 사회주의련방공화국에서 꼴호즈를 차린 경험과 교훈을 잘 섭취해 이 땅에서 남부럽지 않게 사는 지상낙원을 건설합시다. 공산당을 믿고 사회주의 길로 나가면 행복한 앞날이 있습니다. 여러분, 신심이 있습니까?” 사원들은 호미를 높이 쳐들면서 고함쳤다. “있습니다!” “좋습니다. 우린 절대 소련의 꼴호즈나 우리 나라 사회주의 합작사가 나쁘다는 말을 믿지 말고 당을 따라 사회주의 길로 나갑시다.” 모두들 박수갈채까지 보냈다. 땅땅 마른 이론보다 과거를 들어가면서 한 그의 연설은 성공하였던 것이다. 사원들 속에서 병완은 상순을 대견한 눈길로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기분이 좋아진 상순은 오후 첫 쉼에는 항미원조전쟁 때 얘기도 한 대목 하겠다고 했다. 그러자 사원들은 앞다퉈 우르르 밭머리에 모여들었다.        상순은 사원들 속에 앉아서 천천히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였다.        "우리가  따발렬을 넘어 남조선 땅에 잘못 들어갔을 때오. 갑자기 한개 대대는 될 미군 양키놈들이 괴뢰군을 앞세우고 우리 운송차대를 포위했소. 그 놈들은 비행기 폭격에 뒤이어 땅크(탱크)까지 앞세우고 우릴 공격했소." 사원들은 상순의 이야기를 귀 솔깃해 들었다. "그런데 우린 글쎄 탄알이 거덜났단 말이요." "저런!" 성근마저 신경을 곤두세웠다. "저걸 어쩌오?" 사원들은 모두 손에 식은 땀을 쥐고 하회를 기다렸다. 그러나 장충국은 젤 뒤에서 반쯤 비스듬히 누워 빈정거렸다. "또, 또, 제 자랑을 잔뜩 늘여놓는구만. 쯧쯧." 그러나 상순의 이야기는 충국의 예측과는 퍽 달랐다. "우린 육박전을 벌리며 생사결판으로 적들과 싸웠소. 그번 무명고지 육박전에서 저 병수는 연신 양키놈들을 세놈이나 찔러눕혔소. 저 병수 아니면 내 양옆에 불시에 나타난 양키놈들한테 양옆구릴 허망 찔려 죽을번 했소. 그때 저 병수가 '싸' 하고 고함치면서 그 두 양키놈들을 연속 찔러눕혔지." "병수, 참 대단하오!" 상순은 젤 뒤에 앉은 성수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저 성수 패장은 마흔대나 되는 긴 운수차대를 이끌고 적들의 포위를 뚫고 승리적으로 후방에 있는 김인섭 연대장부대와 지원군 부대를 찾아갔소. 참 큰 공훈을 세웠소."  모두들 성수랑 병수랑 태수랑  돌아보며 혀를 끌끌 차면서 여간 찬탄해마지 않았다.   그때 태수가 옆에서 끼어들어 한마디 했다. "저기, 흥수는 뭐겠소. 눈에 달이 올라서 옆에서 돌격해나가는 김영장을 마구 찌르지 않았겠소." "하하하." 여기저기서 이런 말도 들렸다. "행방이 없구만." "흥수는 말씨럭은 잘 해도 싸울줄 개뿔도 모르오." 그러자 사원들 속에서 춘실이 눈물을 흘리면서 도도거렸다. "남은 나그네 잃어버려 속태우는데. 뒤에서 흉허물 하겠소. 별, 저네만 잘 싸웠겠구만." 성수도 낯이 불그락푸르락해나 씩씩거렸다. "너거(너네) 그리 잘 싸웠어? 반장하나 주어 하지 못하고서도! 흥!"  그러자 상순이 황급히 밀어나 태수를 흘겨보며 손사래를 쳤다. "아니오. 흥수 반장도 아주 용감히 싸웠소. 그번 전투에서 병수하구 태수 탱크 기관총과 기관포로 양키놈들을 무리로 쓸어눕혔댔소. 야, 얼마나 통쾌하던지. " 그러자 태수가 손사래를 치면서 일어났다. "아니오. 상순 영장은 더 용감히 싸웠소." 뒤이어 병수와 태수가 네 한마디 내 한미디 이야기했다.     상순은 괴뢰군은  놔두고 양키놈들을 추격해 산 아래로 짓쳐 내려갔다. 갑자기 바위 뒤에서 쇠기둥 같은 놈이 상순을 나꿔채  쓰러눕혔다. 상순은 벌떡 일어나며 발길로 시꺼먼 놈의 사타구니를 걷어찼다. 그 놈이 허리를 굽히며 가달 두새를 붙잡으며 돼지 멱따는 소리를 치는 순간, 상순은 공병삽을 잡은 채 날래게  오른 팔로 그 놈의 목을 끌어안으며 원숭이처럼 잔등에 날래게 날아올라갔다. 상순은 공병 삽을 쳐들고 호통쳤다. "죽고파?! 손들엇!" "NO! NO!" "너? 너?! 뭐야?! 핸드 들엇!" 상순은 쳐들었던 공병삽을 반공중에 쳐들며 호통쳤다. "I Surrender!(난 투항하겠어.)" "뭐? 아이?!  손 아이 들겠어?! 이놈 핸드(손) 들엇! " "OK! OK! Hand! hand! My hand!" 상순은 무슨 말인지 잘 몰랐다. 그러나 그 놈이 손을 쳐드는 걸  보고 투항하겠다는 걸로 짐작했다. "세계 최강군이란 미군은 맨 이런 놈들이야?!  마이(많이) 마이 핸드 들더라. 흥!  누런 대가리나 쌔까만 놈이나 다 겁쟁이들이구나! 날창도 아니고 공병삽을 들이대도 손을 번쩍번쩍 드니까. 물알 같은 놈들, 진짜 싸울 멋도 없어!" 그는 허무맹랑해 흑인놈을 조롱하면서 공병삽으로 반공중을 가리키더니 호통쳤다. " 핸드 들엇!" 흑인놈은 목마를 탄 상순을 되돌려보며 자기 손을 쳐들어보이면서 물었다. "My hand?(내 손?)" 상순은 호통쳤다. "네 놈은 까짜로 투항하는 건 아니겠지?  핸드 들엇!" "Yes, I hands up. Den't kill me!(예, 내 손들게. 날 죽이지 마시오.)" 씨꺼먼 흑인놈은 사위를 둘러보며 두 손을 쳐들었다. "또 아이냐? 엉?! 아이 투항하겠다고?!" 상순은 공병삽을 버리고 그 놈의  잔등에서 미끌어져내려왔다. 곰 같은 흑인놈은 주위를 흘끔흘끔 곁눈질했다. 순간 주위에 지원군이 없는데다가 자기보다 엄청 덩치 작은 상순을 보고 왼눈에도 차하지도 않았다.  갑자기 흑인 놈은 상순의 목을 틀어쥐고 곰처럼 깔고 들어앉았다. 왼팔을 부상당한 상순은 곰 같은 놈에게 깔려 숨이 꺽 막혔다. 그는 오른 손으로 흑인놈의 사타구니 두새 커다란 X알을 꽉 틀어쥐었다. "A! No! No!" 흑인놈은 너무 아파 상순을 훌 놓으며 아우성쳤다. 땅! 총소리와 함께 곰 같은 흑인놈은 옆으로 스르르 너부러졌다. "흥! 양키놈들도 그저 그렇군!" 상순이 모젤권총으로 쐈던 것이다. 그는 코웃음쳤다. 세계에서 최고강군이란 자들이 이 모양이라는 것에 너무 허무맹랑해 냉소했다. 전사들은 김영장이 앞장서 용감히 싸우는 것을 보고 용기백배 돼 양키놈들을 추격해 내려갔다. 한 개 대대나 되는 괴뢰군은 한개 소대 밖에 안 되는 중국인민지원군을 남북으로 협공했다. 설상가상으로 미제 탱크와 육군마저 덮쳐 와 지원군 전사들은 용감히 싸우다가 하나하나 영용히 희생됐다. 상순은 쓰러진 전사의 옆구리에서 수류탄을 뽑아들고 태수와 병수를 돌아보며 한어로 고함쳤다. “탱크를 빼앗자! 엄호해라!” “옛!” 명사수 태수가 반자동보총으로 탱크 뒤의 양키들을 본때 나게 쓸어 눕혔다. 병수는 뛰여내려가며 연이어 양키놈들을 찔러눕혔다. 양키놈들은 무기 자랑이나 했지 육박전에는 기겁해 뒤로 비실비실 물러섰다. 그 틈에 상순은 탱크 앞으로 뛰어갔다. 탱크가 그의 옆으로 우르릉 거리며 지나갈 때다. 그는 탱크 위에 훌쩍 뛰어 올라가 탱크 뚜껑을 열고 수류탄을 뿌려 넣고 훌쩍 뛰어내렸다. 꽝! 요란한 폭파소리와 함께 탱크가 제 자리에 멈춰 섰다. 나머지 탱크는 계속 돌진해왔다. 상순은 수류탄마저 없어 주위를 애타게 둘러보았다. 그는 길에서 활활 타번지는 자동차에 눈길이 멎었다. "죽어봐라!" 상순은 불길이 이는 자동차에 뛰여갔다. 그는 바곤에 뛰여올라가 불이 반쯤 달린 군복을 안고 덮쳐드는 탱크 위에 뛰여내렸다. 그는 불타는 군복으로 부르릉거리며 연기를 내뿜는 탱크 꽁무니를 꽉 막아버렸다. 순간 탱크 안에 자욱한 연기가 들어가 양키놈들이 탱크 안에서 견디기 힘들었다. 탱크  멈춰서더니 웃덮개 훌 열렸다. 양키놈들이 비명을 지르며 기여나와 뛰여내렸다. 뚜르륵 뚜르륵 그때 태수가 돌격총을 휘둘러 쓰러눕혔다. "잘 했어!" 상순은 손을 홱 젓더니 탱크 웃뚜껑을 열고 탱크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병수와 태수도 뛰어들어갔다. 상순이 탱크를 부릉부릉 몰고 아군의 자동차대오가 도망친 쪽으로 달려나갔다. "어디로 가는가?" 병수가 의아해 물었다. "굽인돌이에 가서 뒤따르는 탱크를 없애버리자! 장탄하라!" "알았소." 그들은 삼도만에서도 손을 맞춰 탱크를 몰고 토비들을 족친 전투경험이 있었다. 병수가 장탄하고 태수가 기관포 방아쇠를 잡았다. 상순은 탱크 헤드라이트까지 켜고 달리면서 멀리 산기슭 큰 길 쪽을 쳐다보았다. 아군의 트럭대오의 헤드라이트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뒤의 탱크를 제거하지 않으면 몇참 못가 추격당하고 말 것이었다. 그는 굽인돌이를 돌자 탱크를 돌려세우더니 굽인돌이에서 몇마장 떨어진 두번째 굽인돌이에 달려가 은페해 멈춰섰다. 뒤따르던 탱크 두대는 상순이 몬 탱크를 동료 탱크인가고 무작정 뒤따라왔다. 그 놈 탱크 두대가 굽인돌이를 돌아설 때다.  "사격!" 쾅! 요란한 굉음과 함께 앞장섰던 미제 탱크는 명중탄을 맞고 웃뚜껑과 포신이 허망 날아났다. 앞의 탱크에서 화염이 충천하자 뒤따르던 탱크는 급정거하더니 도망치려고 대가리를 돌리고 있었다. "사격!"  쾅! 두번째 포탄이 날아갔다. 오른쪽 무한궤를 얻어맞은 탱크는  페철이 돼 풀썩 물앉고 말았다. 양키놈들은 탱크 웃덮개를 열고 비명을 지르며 뛰여내리었다. 태수는 탱크 기관총으로 양키놈들을 소사했다. 놈들은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뒤따르던 양키놈들과 괴뢰군은 굽인돌이에서 무 슨 일이 벌어졌는지도 모르고 도망쳤다.  상순은 한숨을 후 내쉬었다. 그는 탱크 웃덮개를 열고 산기슭에서 싸우는 전사들에게 한어로 명령했다. “우리 트럭대오가 안전하게 전이했다. 동쪽 마을로 철퇴!” "옛!"  성수와 흥수 등 십여 명 전사들이 어둠 속으로 철퇴했다.  상순과 병수 태수는 탱크를 몰고 도망치는 괴뢰군 트럭을  추격해가면서 기관포와 기관총을 갈기며 소분대의 철퇴를 엄호했다. 괴뢰군 트럭은 보기 좋게 불이 활활 일었다. 괴뢰군들의 비명소리, 아우성 소리로 일대 아수라장을 이뤘다. 이때 남쪽 하늘에서 전투기들이 아츠러운 소리를 지르며 날아왔다. 쿵! 쾅! 꽈르릉! 전투기들은 길에 늘어선 트럭을 지원군의 트럭으로 알고 폭격하고 소사해댔다. 그러나 상순이네 모는 탱크만은 자기들 탱크라고 여겼는지, 아니면 발견하지 못했는지 폭격하지 않았다. 숱한 괴뢰군 트럭들이 폭파돼 불길이 하늘로 치솟아 올랐다. “제길, 우리에게 폭탄을 던져!” 괴뢰군 병사들은 하늘에 대고 욕설을 퍼부었다. 어떤 병사들은 쌕쌔기를 사격까지 해댔다. 그 틈에 상순이네는 탱크를 몰고 좌충우돌하면서 불에 타는 적들의 자동차와 트럭을 마구 절벽 아래에 떠밀어버리고 짓뭉개버렸다.  "포탄과 기관총탄이 다 떨어졌네." 태수의 말에 상순은 한숨을 후 내쉬었다. "저놈 자동창까지 없애버리고 철퇴!" 상순은 탱크를 몰고 도망치는 괴뢰군 트럭을 쫓아가 꽝 냅따떴다. 자동차는 아우성치는 괴뢰군들을 실은 채 허망 절벽 아래로 꺼꾸로 처박혔다. 그는 병수와 태수를 돌아보며 말했다. "탱크를 양키놈들한테 넘겨줄순 없어!" "옳소! 없애버리기오!" 상순은 탱크를 돌려 오던 길로 한참 달리다가 불붙는 괴뢰군 자동차에 딱 붙여세우고 탱크(땅크)에서 내렸다. 순식간에  자동차의 불이 탱크에 옮겨 붙기 시작했다. 저쪽 뒤에서 괴뢰군과 양키놈들이 이쪽으로 덮쳐오고 있었다. 탱크가 탈 시간이 될 거 같지 않았다. 태수는 철갑모를 주어들고 자동차 휘발유통응로 다가갔다. 그는  비수를 뽑아  휘발유통을 쿡쿡 찔렀다. 휘발유가 쌕 쏘리 내며 내 뿜겼다. 태수는 철갑모에 휘발유를 꼴똑 받아 탱크 뒤꽁무니에 툭 쳤다. 조급해난 상순은 돌격총을 들어 자동차 휘발유통을 뚜르륵 갈겼다. 휘발유통이 탕 폭발하며 탱크에 불길이 더 거세게 옮겨 붙으면서 활활 타올랐다.  사원들은 너무나 통쾌해 고함치며 박수갈채를 보냈다. "야, 통쾌하다!" "미군 양키놈들 콧대를 여지없이 꺾어놨다이!" 상순은 도리머리질 했다. "세계 최강군이라고 우쭐렁거리던 미군은 종이범이오. 원자탄이나 비행기, 땅크를 믿고 우쭐거렸지. 육박전만 하게 되면 뒤로 슬금슬금 물러나 꼬리빳빳해 도망친단 말이오. 미처 도망치지 못한 놈들은 쩍하면 손을 번쩍번쩍 든단 말이오." "허허허." 박성근은 허구픈 웃음을 웃었다. "그 놈들 겁난 파란 눈 보는 거 같소. 그런데 '요 핸드, 마이 핸드' 그게 뭐라는 거요?" 상순은 웃으면서 말했다. "내 사단 비서과 과장질 할 때 우리 비서과 영어통역관과 물어보고 배를 끌어안고 웃었댔소. 난 '요 손 들어라'고 '요 핸드' 했는데 '요 핸드'란 영어로 '네 손'이란 말이라오. 그러니 '네 손 들어라'란 말이어서 그 놈 양키놈과 말이 통했단 말이오. 그러니 그 놈은 '마이 핸드' 하고 손을 번쩍 들잖겠소. 영어통역관의 말에 의하면 영어로 '마이 핸드'는 '내 손'이란 말이라오. 그런데 난 '많이 손 들더라.'라고 했지." 성근은 웃어 죽을 지경이었다. "하하하, 김영장, 참 대단하오- 보리영어에 조선말까지 섞어서 양키놈을 손 들게 했으니까." "핫하하."       사원들도 배를 끌어안고 웃었다.        조용해지자 상순이 또 이런 말을 꺼냈다.        "미군 양키놈들 이름도 참 괴상한 이름이 다 있소."        상순의 말에 박성근은 누런 말이발을 다 들여다보이게 허 벌리고 하회를 기다렸다.         "우리 비서과 영어통역이 한 양키놈들 포로들을 신문할 때오. 그 놈의 이름을 물어보니깐  '萝卜头(Lo bother :로버터)'라고 하지 않겠소. 또 한 흑인놈은 '톱(톰:Tom)"이라고 하지 않겠소."        "허허허. 성이 로고 이름이 버터라, 에이, 양키놈들은 원래 '무우대가리' 오. 개놈들은 원래 최강군은커녕 '톱'으로 '무우대가리'나 켜먹고 살 놈들이라니깐."        "허허허."        "호호호."        사원들은 배를 끌어안고 폭소를 터뜨렸다. 상순은 쉼시간마다 항일유격대 항전, 삼도만토비숙청전투,  남조선 특무와 국민당 특무 잡은 전투, 항미원조 전투 이야기를 섞어 이야기하면서 사원들에게 사상교양을 진행했다. 그러자 그 효과를 본 것 같았다. 사원들은 상순의 말을 아주 흥미진진하게 들었고 상순의 두리에 뭉쳐 하자는대로 따라 아주 잘 해나갔다. 이튿날 이른 아침에 병완이가 촌공소 마당에 걸어놓은 합작사의 종을 치지도 않았는데도 벌써 사원들은 스스로 호미를 쥐고 촌공소에 모여들었다. 밭에 나가서도 병완이나 상순이 시키지 않아도 사원들은 밭머리를 가로타고 기음을 매나가는 것이었다. 박성근도 별 군소리 없이 호미를 휘둘러 기음을 수걱수걱 매는 것이었다. 저녁노을이 붉게 타오르며 낙조가 산과 들을 붉게 태우며 밭고랑마저 벌겋게 물들였다. 허나 사원들은 흥겨운 노랫소리도 높이 계속 기음을 맸다. 병완과 상순은 코 기러기들처럼 사원들의 제일 앞에서 기음을 매나가면서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어느 하루 명옥이 집안에서 걷다가 발밑에 뭔가 물렁 밟히는 것이었다. 그녀가 구들을 보니 발에 밟힌 낡은 까래 톱에 누런 똥이 묻어있지 않겠는가? 명옥은 벽 밑에 누워 있는 시어머니를 보고 편찮은 시어머니를 몰라온 것이 마음이 안쓰러웠다. 그녀는 두 말 없이 바깥에 나가 쑥을 쥐고 들어와 똥 꼬치를 닦아 밖에 던졌다. 저녁에 남편이 돌아오자 명옥은 낮에 있었던 일을 말했다. 상순은 벽 밑에 누운 어머니 곁에 가서 이마도 짚어보고 손맥도 짚어 보았다. “어머니, 어디 편찮습니까?” “아니, 아프잖소.” 상순은 어머니 손을 잡고 눈물을 흘렸다. “내 혁명을 하느라고 사처로 헤매다나니 어머니를 잘 모시지 못해 죄송합니다. 이제라도 병원에 가깁소.” 상순은 잔등을 돌려대고 아내를 보고 “어머니를 부축해 업히오.”라고 했다. 그러나 사련은 며느리 손을 마구 밀어버렸다. “그만 두오. 없는 살림살이에 무슨 병원이오. 늙어서 그런 건데. 나를 편안히, 편안히 누워 있게 놔, 놔두오.” 사련은 말을 마치자 눈을 스르르 감고 바쁜 숨을 몰아쉬었다. 기준이가 윗방에서 내려와 보고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안되겠다. 윗방에 눕혀라.” 상순과 명옥은 황급히 윗방을 싹 걷고 누더기 이불이라도 편 후 어머니를 안아다가 모셨다. 연 며칠 상순이네 부부가 아무리 효성을 다해 모시었지만 어머니는 끝내 세상을 뜨고 말았다. 최사련은 정든 고향 개성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함경북도 명천군 상우남면의 기준에게 시집와서 아들 둘에 딸 셋을 낳았다. 그녀는 남편 기준을 따라 1925년에 간도 함흥 촌에 들어와 살자고 애쓰다가 갓 예순이 넘어 자손을 도합 스물대여섯이나 남겨두고 총망히도 세상을 떠나갔다. 상순은 죽물도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고 돌아 간 어머니가 불쌍해 “어머니-”, “어머니-”하고 부르며 목 놓아 울었다. 상우 부부와 명옥도 꺼이꺼이 곡을 하면서 눈물을 훔치었다. 동선과 순자, 금숙, 금자도 흐느껴 울었다. 사흘 후 함흥 촌 동산 마루에는 새 묘지가 하나 더 생기었다. 상순과 상우 형제는 피 눈물과 함께 어머니를 누런 흙 속에 모시고 서럽게 울고 또 울었다. 병완은 집 마당에서 서성거리면서 연신 주먹으로 가슴을 꽝꽝 치면서 한숨을 땅이 꺼지게 쉬었다. “내 죽어야 되는데. 오래 살아 별 꼴을 다 보는구나. 아들과 며느리 둘에 손자까지 앞세우고 오래 살아 뭘 하겠는가? 에이고, 불효한 자식들이 나를 외롭게 두고 먼저 가는구나.” 하얀 두루마기와 베옷이 뒤덮인 동산 마루에서는 아직도 구슬픈 곡성이 울리고 있었다.                    9. 산등성이의 쓸쓸한 무덤 매서운 동지섣달 바람이 총총한 뭇별들을 밝게 씻어놓았다. 칼바람에 밝아지는 달은 똑 마치 바람에 점점 밝아지는 숯불 쪼각 같았다. 삼태성도 온 밤 자지 않고 별빛을 뿌리느라고 곤했던지 하품을 하며 서산으로 넘어가고 동녘하늘에는 샛별이 반짝이고 있었다. 명옥은 자리에서 일어나 부랴부랴 문을 열고 바깥에 나와 서쪽 하늘을 쳐다보았다. 시계가 없어 명옥은 항상 학교로 다니는 애들이 지각할까봐 새벽에 일어나 져가는 삼태성과 샛별을 보고 시간을 맞춰 새벽조반을 짓 군 했다. (아직 일찍 하구나.) 명옥은 집식구들을 깨울 세라 살금살금 집 안에 들어와 구들에 올라가 바느실을 찾아들고 새벽 별빛을 빌어 손으로 만지며 옷을 기우면서 동녘하늘이 좀 더 밝아오기를 기다렸다. 그녀는 남편의 옷을 한 뜸 한 뜸 기우면서 미소를 지었다. 성미 급한 남편이 마을에 돌아와서 시할아버지를 도와 마을 사람들을 묶어세워 합작사 농사를 잘 지어 마을 사람들이 호평을 받자 마음이 흐뭇했다. 눈보라가 휘몰아쳐 모래알 같은 눈이 날아와 환히 밝아오는 창호지를 무섭게 두드렸다. 명옥은 이로 실끝을 물어뜯어 끊은 후 부랴부랴 부엌으로 내려가 죽을 쑤기 시작했다. 아침을 지어 놓고 명옥은 곤하게 자는 순자랑 금숙이랑 두드려 깨웠다. “일어나라. 해가 엉덩이를 다 비추겠다. 어서 아침을 먹고 학교로 가라.” 순자와 금숙은 부랴부랴 일어나 죽물을 대충 먹네 했다. 그때면 상순은 딸애들의 책보를 열고 필기장에 자대를 대고 줄을 쪽쪽 쳐 주군 했다. 순자와 금숙은 아버지 사랑에 눈시울을 붉히며 책보를 싸안고 학교로 떠났다. 명옥은 심한 쌀 고생으로 왕복 30리 통학하는 애들에게 점심 도시락도 싸주지 못하고 보내는 것이 내내 마음이 아팠다. 순자는 늘 이른 아침에 책보를 싸쥐고 학교로 반달음질 쳐 갔는데 지각을 한번 한 적이 없었다. 점심때가 되면 숙사 학생들은 모두 점심을 먹으러 숙사 식당에 갔다. 잘 사는 집 애들은 진수해 애들을 내놓고 모두 도시락을 싸가지고 와서 맛나게 밥을 먹었다. 그럴 때면 함흥 촌과 조개덕의 순자랑 경산이랑 모두 군침을 흘리면서 남들이 밥을 먹는 것을 부러워 했다. 그들은 쌀쌀해 나는 배를 끌어안고 바깥에 나가 물앉아 있다가 오후 시간이 되면 교실에 들어왔다. 점심도 먹지 못하고 오후에 시간을 보고 집으로 돌아올 때면 배고파 걷다가도 길옆에 물앉자 쉬다가 또 걷곤 했다. 가을이면 해동 굽인 돌이 길 옆 밭에 퍼런 무랑 누워 있었고 과수원에는 노란 배가 주렁주렁 달려 싱그러운 냄새를 풍겼다. 그러나 순자는 귀전에 아버지 우렁찬 목소리가 귀전을 때리는 것 같았다. “참외밭과 무밭에 가면 신 끈을 다시 매지 말고 사과 배 밭에 가 모자를 벗어 다시 쓰지 말고 수건을 다시 매지 말라. 그러지 않으면 남에게 무와 배를 훔쳐 먹었다는 의심을 사거나 말을 들을 수 있으니 말이다.” 순자는 아버지에게 무서운 매질을 당할 가봐 손을 내밀어 무를 뽑지 못했고 손을 들어 배를 뜯어 먹지 못했다. 순자는 한 마을에서 함께 학교로 다니는 잘 사는 동갑들인 성환이랑 고모사촌동생 칠군에게서 누룽지라도 얻어먹을 때도 있었다. 그때면 순자는 그 애들이 얼마나 고마운지 몰랐다. 배고파 집으로 돌아오고 나면 순자는 기진맥진해 쓰러지군 했다. 허나 저녁이라고 죽물을 마시고 쓰러졌다가도 다시 일어나 전등불 아래에서 끄떡끄떡 졸면서도 공부를 했다. 어느 날 순자는 책보를 안고 가마 목에 서서 아버지 밥상에 밥을 퍼 놓는 것을 보고 몸을 탈며 떼를 썼다. “엄마, 도시락을 싸 줍소. 다른 애들은 다 점심을 먹는데 난 항상 굶어 배고파 죽겠습니다.” “얘, 우리 집 유일한 노동력이 아빠가 아니냐? 아빠하구 할아버지 밥 잡숫지 않고 어떻게 일하러 가니? 일하지 못하면 가을에 쌀을 타지 못해.” “응, 안 돼, 나도 도시락을 싸 달라. 응~ 응, 응~” 이때 밥상에 마주 앉았던 상순이 성질을 썼다. “어서 학교로 가! 얻어맞기 전에.” 순자는 바깥으로 뛰어나가 학교로 반 달음치어 달려갔다. 그날부터 순자는 선생님이 한자를 세벌 쓰라고 하면 필기장이 없어 나무꼬챙이로 땅바닥에 다섯 번씩 쓰고 열 번씩, 지어 스무 번씩 썼다. 순자와 경산 그리고 성환은 공부를 잘해 항상 그들의 100점 맞은 모범시험지가 학교 흑판보에 나붙었다. 어떤 때 100점짜리 시험지를 집으로 가지고 오면 상순은 맏딸이 너무 귀여워 와락 끌어안고 빙빙 돌려주었다. 순자도 눈물이 글썽해졌다. 상순이네 집은 어찌나 가난했는지 먹을 쌀이 모자라 금숙이랑 봉자랑 학교를 가지 못하고 열 살도 되기 전에 벌써 벼 모 내기와 기음을 매야 했다. 소학교 문에도 가보지 못한 상순과 명옥은 자식들까지 까막눈을 만드는 것 같아 얼마나 가슴이 아팠는지 몰랐다. 허나 합작사를 한 후에 웬 영문인지 쌀독을 빡빡 긁어 먹어야 했다. 어느 날, 명옥은 밥상에 마주 앉아 공부를 하고 있는 순자를 보자 부지중 글을 배우고 싶은 충동이 생겼다. “순자야, 날 좀 글을 배워 달라.” 순자는 포도 눈이 대꾼해 물었다. “엄마, 이제 공부를 해 뭘 하겠습니까?” 명옥은 공책까지 갖춰 가지고 순자가 공부하는 밥상머리에 다가앉으면서 말했다. “순자야, 내 할아버지는 이전에 서당 방 훈장이었다. 그런데 옛날에는 여자애들한텐 글을 배워주지 않았단다. 그래서 우리 오빠랑 서당에서 공부를 할 때면 난 늘 옹이구멍으로 오빠한테 배워주는 할아버님 말씀을 듣고 천자문을 익혔다. 헌데 지금 넌 얼마나 좋니? 새 사회를 만나서 여자인데도 공부를 하고. 엄만 옛날에 공부를 하지 못 한 게 한평생 한이 됐다. 좀 배워 달라.” 순자는 포도눈알을 말똥거리더니 종알거렸다. “엄마, 그럼 내 엄마한테 글을 배워 주면 김 선생이라고 부릅소. 돈도 좀 주고.” 그러자 명옥은 순자를 쏘아보더니 공책을 식탁 안에 넣어 버렸다. “요 죄꼬만 계집년아, 내 공부를 못하면 못했지. 너를 선생이라고 부를 것 같아? 흥!” “그럼 안 배우겠으면 마오.” 순자도 틀을 차리면서 앵돌아졌다. 모녀간이 수가 틀리는 바람에 명옥은 다시는 글을 배우자는 말을 하지 않았다. 철없는 순자도 엄마한테 글을 배워 주지 않고 한뉘 후회 할 일을 저지르고야 말았던 것이다. 명옥은 순자가 배워주지 않는데 순자 옆에서 공부하는 금숙에게서라도 글씨를 배워달라고 할가고도 궁리해보았다. (에이, 그만두자. 맏이 배워 주지 않는데 둘째가 배워주겠니? 헤이, 이제 공부를 해 밥이 나온다니. 싹 걷어치우자.) 어느 날, 명옥은 사과 한 알을 얻어다가 본가 집 아버지가 짜준 궤안에 넣었다. 이튿날 일요일이여서 먼 학교로 갔던 순자까지 애들이 다 모이자 명옥은 사과를 쪼개 나눠주려고 농궤를 들췄다. 그런데 아무리 옷가지 속을 들추고 또 들춰도 없지 않겠는가? “누가 사과를 먹었니?” “응? 우린 모르오.” 명옥이 아무리 몽당비자루를 쳐들고 돌아가면서 물었다. “사과를 모르니?” 순자와 금숙은 다 “모르오.” 하고 도리머리 질 했다. 명옥이 셋째 딸 봉자에게 몽당비자루를 겨누며 “니 먹었니?”하고 바투 들이댔다. “아이, 모르오.” 봉자는 하얀 얼굴이 귀밑까지 홍시처럼 빨갛게 상기되면서 “난 먹지 않았소. 난 먹지도 않았는데 어째 나와 이럽니까?” 하고 당황해했다. 순자는 얼마간 짐작이 가서 봉자를 보고 “너 사과를 먹을 때 누가 봤니?” 하고 물었다. 봉자는 어망 간에 “내 사과를 먹는 걸 누구도 못 봤는데 뭐.”라고 얼버무렸다. 명옥과 순자는 눈길을 맞추면서 배를 끌어안고 웃고 말았다. 봉자는 자체 무안에 빠져 구들에 나뒹굴면서 “와-”하고 울음보를 터뜨리고 말았다. 명옥은 벼 짚을 주어 새끼를 꼬면서 밥상 옆에 조롱조롱 앉아 공부하는 순자와 금숙이 그리고 옆에서 구경하는 봉자를 보면서 한숨을 호 내쉬었다. 생기라는 아들은 생기지 않고 넷째 금자까지 낳다나니 이젠 딸을 넷이나 낳았으니 기막힐 일이 아닌가. 신경질이 난 상순은 넷째 금자의 생일을 쇠지도 않으려고 했다. 그때 웃새집 사랑방에 들어있던 중이 지나가다가 상순이네 집에 문뜩 들어왔다. “에헴, 이 집 넷째 오늘 생일날인 거 같은데 지나가던 중에게 시주를 좀 하지 않겠소?” 불청객 같은 중이 들어서서 하는 말에 상순은 불쾌하기도 하고 놀랍기도 했다. (이 중이 어떻게 오늘 금자 생일인 거 알가? 정말 귀신이 곡할 노릇이야.)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상순은 짐짓 왕청 같은 말을 내 뱉었다. “생일은 무슨 놈의 생일, 알지도 못하면서 남의 일에 웬 참견이오?” “생일날이 아니라고 시치미를 떼겠소? 환히 아는데 누굴 속이려오?” “어서 물러가오. 지금 공산당의 세상에 무슨 뚱딴지같은 미신사상을 퍼붓소?” 허나 중도 끈질기게 들어붙어 떠나가지 않았다. “내 그래도 한다하는 풍수쟁이라오. 이전에 말한 적이 있는 거 같은데. 으흠, 이 집 넷째 딸이 금자라던가? 저 애를 거저 애라고 보지 마오. 저 애를 잘 대접하면 이제 4년 후에 이 집에 소가 밟아도 우그러들지 않는 떡돌 같은 아들을 태여 날 거오.” “4년 후에? 쳇, 다 늙어 죽겠소. 언제 마흔이 넘어 아들을 본다고 그러오?” 상순은 곧이듣지도 않는척했지만 은근히 호기심이 생긴 것이 분명했다. “그럼 한 가지만 묻기오. 저기 내 아내가 또 임신했소. 저 배 속의 애는 아들일 거 같소?” 중 영감은 우쭐 일어나더니 “쯧쯧쯧, 내 말을 명심해 두오. 4년 후에 소가 밟아도 우그러들지 않고 세 개 신을 업은 떡돌 같은 아들애가 태어 날 거요.”라고 곱씹어 말하며 밖으로 나갔다. “4년, 4년, 또 그 말이구나. 4년 후면 내 마흔 살인데 애기를 낳을 수 있는가? 전탕 황당한 미신의 소리만 치면서.” 상순은 중의 뒤 잔등에 대고 삿대질하면서 신경질을 쓰다가 돌아서더니 명옥의 배를 쏘아보더니 횡 하니 바깥으로 나가버렸다. 명옥은 배 속에서 노는 애를 느끼며 배를 쓰다듬었다. “요 불쌍한 것아, 네가 또 아들이 아니면 난 네 애비 아들 비위 성화에 어떻게 배기겠느냐? 네가 어미 고충을 헤아려 제발 아들로 태어나렴.” 이미 생긴 애야 어떻게 딸이든 뭐든 아들로 뜯어고치랴? 괜히 중이 지나가면서 뜨거운 밥을 먹고 이빨이 부러질 식은 걱정을 해 놓아서 명옥이만 속을 태우면서 애를 낳기를 기다리게 되고 말았다. 개체농사를 지을 때엔 밭이 얼마 있으면 농사를 얼마 지으면 국가에 바치고 나머지는 다 자기 식량으로 남겨 쌀독이 꼴딱꼴딱 찼다. 허나 합작사를 한 다음 상순이네나 상우네나 숱한 밭을 집체합작사에 들여놓고 뼈 빠지게 일했는데도 쌀독이 홀쪽했다. (보리고개를 어떻게 넘긴단 말인가?) 명옥은 늘쌍 공부를 하는 애들이 학교로 늦어가 지각을 할까봐 새벽에 일어나 아침밥을 하다나니 늘 곤기에 몰려 초저녁이면 끄떡끄떡 졸군 했다. 애들은 갓 돌이 지난 금자를 업은 채 새끼를 꼬다가 끄떡끄떡 조는 엄마를 보고 입을 싸쥐고 캐득캐득 웃었다. 순자는 어머니를 깨울까봐 입에 식지를 대고 동생들에게 “쉿-” 하고 말렸다. 그러나 그 웃음소리에 명옥은 끄덕끄덕 조아리던 머리를 멈추고 곤기가 몰린 눈길로 겨우 애들을 희미하게 보고는 또 도정신해 새끼를 꼬고 또 꼬았다. 상순은 집에서 나가자 그 길로 토성안집에 가서 상우 형님을 만났다. 집에는 때마침 상우 형님과 아주머니가 있었다. “형님, 맏조카 앓는다더니 어떻소?” 상우는 울상이 돼 머리를 숙이며 한숨을 지었다. 새금이 두덜거렸다. “저 영감은 한숨만 쉬면서 아들을 죽이겠다는데. 병원에 가보지 않고.” 그때 뜻밖에도 상우가 머리를 들고 새금을 쏘아보면서 고래고래 고함쳤다. “내 가보면 어찌겠소? 병원의 의사니까 제절로 제 병원에서 의사를 보이고 치료하겠지. 날마다 가서 붙들고 앉아 있으면 죽을 게 살아나오? 이젠 세월이 바뀌어서 합작사를 한 후에는 집체 일 하러 나가지 않으면 공수를 벌지 못해 쌀도 타지 못하는 거 알면서도 그러오?” 허나 새금은 혀를 끌끌 차면서 나그네를 흘겨보면서 나무랐다. “어쩜 저렇게 몰인정할 까? 제 새끼 죽어 가는데 병원에 딱 다섯 번 밖에 가지 않고 일 밖에 모른다니까.” 아주머니가 나무라는 말에 상순은 속이 찔리는 데가 있었다. 삼촌으로서 제일 큰 조카가 앓는데 조선 전쟁터로 뛰어다니다나니 한 번도 문안을 가지 못했던 것이 못내 속에 걸렸다. “아주머니, 그래 그 새기는 어쨌소?” “누구? 벽선 말이오?” “양.” “헤이, 사돈보기까지 다 하고 올 음력설 후에 결혼식을 올리려고 했는데 이게 뭐요? 결혼이고 뭐고 살려 놔야 어쩌지. 참 답답하오.” 상순은 무릎을 탁탁 치면서 하소연하는 아주머니를 보고 너무나도 미안해 “아주머니, 함께 공학이를 보러 가기요.”라고 했다. “오늘?” “양? 조카가 앓는데 한 번도 가보지 못해 미안하오.” 새금은 그제야 바위처럼 퍼렇게 굳었던 얼굴을 좀 펴면서 단통 해시시해 했다. “그래도 항상 생원이 사리에 밝다니까.” 상순은 공부를 하는 순애를 보고 “너도 방학을 했지. 앓는 오빠를 보러 가자.”라고 했다. 순애는 공부를 하다가 좋아 퐁퐁 뛰며 다가와 삼촌의 손을 잡았다. 상순이가 아주머니와 조카 순애를 데리고 기차를 타고 개산툰병원에 가 병실의 문을 떼고 들어가 보았을 때다. 공학은 침대에서 겨우 일어나 맞이했다. 옆에서 벽선이가 그들에게 인사를 올리고서는 돌아서서 어깨를 들먹이며 흑흑 흐느껴 울었다. “어디 보자. 부스럼이 이렇게 중하단 말이냐?” “삼촌, 괜찮습니다. 이전에 영자 앓던 부스럼은 아닙니다. 치료하면 나을 겁니다.” “아니, 이 동무는 병세가 중한데도 그저 일 없소, 일 없소 합니다. 이 병원에서는 안됩니다. YB병원이거나 장춘 성병원에 가야 합니다.” 상순이 보니까 목덜미에 부스럼이 난 곳이 팅팅 붓고 고름이 질질 흐르고 있었다. 상순은 조카를 와락 끌어안고 눈물을 왈칵 쏟으면서 “얘아, 이게 무슨 일이냐? 그저 부스럼이 아니구나. 이 시골 병원에서 널 죽이겠다. 안 된다. 당장 YB병원으로 가자.”라고 했다. 공학은 “삼촌, 서러워하지 마십시오. 그래도 자기 병원에서 치료해야 보살핌도 더 받을 수 있습니다. YB병원에 가면 아는 사람도 없지 치료비나 많이 팝니다.”라고 했다. 상순은 급한 성미였다. “얘, 당장 짐을 꾸려 가지고 연길에 들어가자. 할아버지 친구의 아들 정규상이 의사질 한다. 큰집 혁내 조카도 연길에서 중의로 소문이 높은 용한 의사다. 우리 두 집에서 집을 팔고 소를 팔아서라도 너를 구해야 한다.” 벽선은 조카에 대한 삼촌의 친 혈육의 정을 가슴 깊이 느낀 나머지 뜨거운 눈물을 이불에 똑똑 떨어뜨리면서 보짐을 꾸린 후 퇴원수속까지 마쳤다. 상순은 조카를 부축해 병원 밖으로 나갔다. 공학은 조선인민군 부상병들을 구급하면서 일해 온 병원을 둘러보았다. 그때 병원의 원장과 의료일군들이 너도 나도 얼마간씩 공학에게 쥐워 주면서 치료비에 보태라고 하며 바래었다. 공학은 눈물을 흘리면서 “내 꼭 병을 치료하고 다시 돌아와 여러분과 함께 이 병원에서 일하겠습니다.”라고 답례했다. YB병원에 입원한 후 상순은 맏조카를 자기 친자식처럼 아주머니와 함께 간호했다. 그는 또 YB병원에서 수소문해 심 혈관 내과에 정규상이 있다는 것을 알아낸 후 찾아갔다. 기실 정규상은 YB의학원에서 교수를 하면서 YB병원 심혈관내과에 나와 환자들의 병도 보고 있었다. 상순이 공학을 데리고 찾아 갔을 때 정규상은 한창 곱살하게 생긴 30대 초반의 여인과 무슨 답답한 말을 하는 것 같았다. 상순이가 찾아 들어가자 정규상은 상순을 알아보고 반갑게 인사하면서 그 여인과 주고 받던 말을 뚝 끊었다. 상순은 그들의 주고받던 말을 중둥무이 할 수도 없어 옆에 조용히 앉아 기다리는 수 밖에 없었다. 그때 정규상이 그 여인을 보고 “신랑이 이름이 조철호였던가?”라고 묻는 것이었다. “예, 그때 그 집 아버지께서 우리 혼사 말을 해줘서 내 로투구로 시집가지 않았고 뭣입니까?” “그 일은 알만 하오. 신랑이 일이 정말 답답하오. 그래 부대에 연계해 보았소?” “예. 부대에서 신랑이 마지막으로 보낸 편지를 가지고 조선에 나가 아무리 찾아보아도 찾지 못했습니다. 신랑이 갔던 그 부대 한 개 사단이 몽땅 전멸하고 없어져 찾을 길이 없답니다.” 그 여인은 눈물을 줄줄 흘리며 어깨를 들먹였다. 기실 조철호는 성칠 연대장이 영솔한 사단의 정찰병이었다. 무명고지 쟁탈전 때 그는 성칠 연대장의 명령에 따라 무명고지에 가서 한국군 대대장 이병수를 혀로 붙잡아온 후 무명고지를 탈환하고 사수하다가 미군 쌕쌔기의 폭격과 탱크의 포격에 맞아 바위돌과 흙무지에 파묻혀 장열하게 희생됐던 것이다. 그 후 성칠 연대장 부대는 전멸하다 시피 돼 조철호를 비롯한 숱한 열사들이 장열하게 희생된 일을 누구도 알 수도 증명설 수도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옥선은 찾고 또 찾고 기다리고 또 기다리었던 것이다. “그래 열사증이라도 줍데?” “아니, 언제? 난 열사 증을 주려는 걸 받지 않았습니다. 난 열사증이 필요 없습니다. 신랑을 찾아내야지. 내 신랑은 꼭 살아 있습니다. 꼭 찾아올 겁니다.” 정규상은 머리를 끄덕이며 한숨을 후 내쉬었다. “참 답답하오. 이젠 전쟁이 끝 난지 반년도 넘고 해가 지났는데도 신랑이 돌아오지 않으니까.” 그 여인은 눈물을 훔치면서 하소연했다. “난 신랑이 죽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디엔가 살아만 있으면 세상 끝이라도 찾아 가겠습니다. 저녁이면 달빛이 비껴드는 빈 방에서 신랑 생각에 눈물로 베갯잇을 적시면서 밤을 새다가도 구새 목에서 쿵쿵 발자국 소리가 나면 혹시 신랑이 웃으면서 문을 뚝 떼고 들어서기나 할 것 같지 않겠습니까? 그래 후닥닥 일어나 달아가 문고리를 쥐고 바깥을 내다보면 우리 집 앞을 지나가는 동네 나그네 발걸음 소리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난 맥이 풀려 문고리를 쥔 채 물앉아 흐느껴 울군 했습니다. 흐흐흑, 흑흑흑.” 상순이가 들어도 기막힌 사연이었다. 그리하여 그들이 말을 다 주고 받기를 기다리느라고 바깥에 나가 복도에서 왔다 갔다 했다. 한참 후 그 여인이 정규상의 바램을 받으면서 복도로 나왔다. 머리 태를 땋아 늘인 어깨를 들먹이면서 옆으로 지나갔다. 상순이 그 여인을 보니 아주 젊고 예뻤는데 너무나도 불쌍했다. 정규상은 상순을 들어오라고 하면서 의사사무실로 들어가며 “에이, 무슨 쓸데없는 전쟁을 해서 숱한 여인들이 남편을 잃게 만들 게 뭐요? 그 것도 동족끼리 죽일 내기 하면서 숱한 열사와 과부를 만들었단 말이오.” 정규상이 너무 험한 말을 하는 것 같아 상순은 맞은쪽에 있는 의사의 눈치를 보니 그 의사는 보던 신문을 들어 험상궂은 얼굴을 막는 것이었다. 그런 눈치는 모르고 정규상은 “우리 아래 마을에 있는 김옥선이라고 부르는 저 예쁜 각시를 로투구에 있는 조철호란 총각에게 내 소개해서 시집갔소. 신랑이 돌아오지 못해 어찌 하오? 에이 참, 더러운 세월이란 말이오.” 하고 계속 중얼거리었다. 한참 후 정규상은 상순에게 눈길을 주었다. “참 오랜만이오. 무슨 일로 찾아 왔소?” 상순은 맏조타의 병 정황을 말하고나서 “내 큰조카를 살려 주오. 어떻게 연줄을 놓아 피부병에 용한 의사를 찾아 병을 봐게 해주오.”라고 간청했다. “오, 그런 일이오?” 정규상은 상순을 데리고 2층에 있는 피부과에 있는 한 여성의사에게 뭐라고 하더니 데리고 나와 곧추 공학이가 입원한 병실로 총망히 찾아갔다. 그 여성의사는 공학의 혹처럼 팅팅 부어오른 고름 투성이로 돼버린 덜미를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상을 찡그리는 것이었다. “어째 이제야 왔어요? 치료기일을 좀 늦추면 위험해요.” 상순은 의사의 손을 꼭 잡고 “의사선생님, 우리 큰 조카를 꼭 살려 주십시오. 예? 내 머리털로 신을 지어서라도 그 구명은혜를 잊지 않고 갚겠습니다.”라고 비난 사정을 했다. “노력해봅시다. 먼저 우리 피부과 입원 처에 입원시킵시다.” 그 여성의사의 분부대로 상순은 벽선과 함께 뛰어다니면서 입원수속을 한다, 조카를 입원실에 업어간다 하면서 채바퀴 돌듯이 맴돌았다. 정성이 지극하면 돌 위에도 꽃이 핀다던데 이건 웬 일일까? 7촌 조카 혁내도 불러 중약도 달여 먹였건만 공학의 뒷덜미 부스럼의 고름은 멎지 않고 병세가 점점 심해져 이젠 목으로부터 얼굴까지 팅팅 부어올랐고 목으로 죽물도 넘기기 어려워했다. 새금은 공학을 붙안고 엉엉 서럽게 울었다. 상순은 죽어가는 맏조카를 뻔히 보고만 있을 수 없어 여성의사를 찾아가 최대한 의료대책을 대달라고 신신당부했다. 벽선은 어머니와 삼촌이 병실을 비운 틈이면 공학의 손을 꼭 잡고 어깨를 들먹이면서 흑흑 흐느껴 울었다. 공학은 팅팅 붓긴 얼굴 속에 겨우 보이는 눈으로 벽선을 바라보면서 손을 꼭 잡았다. “벽선이, 슬퍼하지 마오. 나는 내 피를 빼서 죽어, 죽어 가는 조선인민군 전사를 구한 걸 절대 후회하지 않소.” 벽선은 공학의 손을 잡고 애타게 흔들었다. “동무, 동무 피를 뽑아 수혈하지 않았어도 동문 이런 병에 걸리지 않을 수도 있어요.” 그러나 공학은 벽선의 손을 꼭 잡고 신신당부했다. “한 가지 부탁하기요. 의학적으로 고혈압환자가 피를 뽑아 남에게 수혈하면 이런 부스럼에 걸려 사람이 목숨을 잃을 수 있는가 꼭 연구해 보오. 정말 고혈압환자가 피를 뽑으면 죽는가? 이후에는 나처럼 고혈압환자가 남에게 수혈하려고 피를 뽑았다가 사망하는 일이 생기지 말게 말이오. 나는 아마 사랑스러운 벽선을 이 세상에 홀로 남겨놓고 저 세상으로 떠나가야 할 것 같소.” “그런 말 말아요.” 벽선은 공학의 품에 와락 안기며 흑흑 흐느껴 울었다. “동무는 내 마음 속으로 제일 사랑하는 선생이요. 꼭 병을 치료한 후 저와 결혼하자요. 약한 말 말아요. 힘내세요. 우린 의사들이예요. 꼭 치료해낼 수 있어요. 으흐흑, 흑흑.” 이때 새금이 들어와 벽선을 공학의 품에서 왈 일으켜 앉혔다. “정신 있소? 아픈 사람한테 이렇게 엎뎌 있으면 어찌 하오? 숨이 막히겠소.” 그러자 벽선은 눈물범벅이 된 얼굴의 눈물을 훔치면서 한쪽 구석으로 가 돌아서서 어깨를 들먹였다. 공학은 겨우 손을 들어 벽선을 가리켰다. “엄마는 어째 내 벽선과 말하자 하면 들어와 이러오?” “응? 네 병 치료에 방해될까 봐 그런다.” 이때 상순이가 들어와 새금을 불러 복도로 나가 뭐라고 말했다. 그러자 공학은 나지막하게 “벽선이, 여기 오오.”라고 했다. 벽선이 다가가자 공학은 벽선의 손을 꼭 잡고 떠듬떠듬 말했다. “벽선이, 사랑하오. 미안하오. 난 글렀으니까 새로운 출발을 하오. 좋은 신랑을 만나 행복하게 사오.” 벽선은 손을 들어 공학의 입을 막았다. “안 돼요. 전 동무를 영원히 사랑해요. 사랑해. 어, 허헉헉.” 병실에는 벽선의 울음소리에 반죽해 공학의 하늘이 무너질 듯한 한숨소리가 가슴을 허비며 들려왔다. 복도에서는 그러는 공학과 벽선을 들여다보며 새금과 상순이 눈물을 훔쳤다. 공학은 알지도 못할 부스럼을 치료하지 못하고 끝내 이 세상을 떠나갔다. 자식을 앞세운 상우와 새금이 그리고 형님과 오빠를 잃은 동선과 순애의 마음들이야 오죽하랴.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벽선은 병실에서 기절하고 말았다. 상순은 조카의 대소변을 받아내며 정성을 다했지만 끝내 조카를 보내고 집에 돌아와 털썩 물앉았다. “야, 조카를 잃고 나니 엄마 세상 떠났을 때보다도 더 슬프다. 중이 자기 머리를 깎지 못한다고 의사 하는 공학이 제 부스럼을 떼지 못하고 삼촌보다 먼저 떠나가다니. 원, 세상에 이런 일도 있단 말인가?” 이틀 후 상우와 상순은 공학이를 함흥 촌 동산에 피눈물과 함께 묻어주었다. 공학이 생전에 애지중지하던 의서 한 궤짝도 무덤 옆에 묻어주었다. 고혈압환자가 피를 빼 수혈하면 죽을 수 있는가하는 미지의 의학과제와 함께 영영 묻어두었다. 상순은 조카의 무덤을 안고 어루 쓸며 슬프게 울었다. 함흥 촌과 계수동 사이에 솟아오른 무덤 위로 한 겨울의 매서운 눈보라가 쓸쓸히 휘몰아쳤다. 저쪽 백양나무 앙상한 가지에서 까마귀가 부리를 다시더니 까욱까욱 을씨년스럽게 울고 있었다.  
120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82) 댓글:  조회:1494  추천:1  2017-09-26
                                          6. 무명고지 격전        엷은 어둠이 벌겋게 타다 남은 저녁노을 밀어내며 산기슭에 몰려왔다. 이남 땅에서 어둠조차 공포의 사자와도 같았다. 상순은 트럭대오를 정돈한 후 즉시 출발하려고 했다. 전사들은 상순이네가 가져온 밥함지에 둘러 앉아 남쪽의 이밥을 떠먹고 기분 좋게 트럭에 올라탔다. 부르릉 부르릉 그들이 금방 떠나려고 할 때다. 뚜루룩 뚜루룩 푱! 푱! 푱! 기관총이 산마루에서 불을 토하고 남에서 트럭들이 불시에 들이닥쳤다. “빨갱이들을 생포해라!” “어서 투항해!” 땅! 쿵! 땅! 쿵! 박격포 탄알이 우박처럼 날아와 폭발했다. 상순이 피뜩 보니 괴뢰군들이 철갑모를 번뜩이며 새까맣게 덮쳐왔다. 사태가 아주 위급했다. 벌써 몇 대 트럭에 불길이 삼단같이 일고 여기저기에서 전사들의 비명소리가 처량하게 들렸다. “성수 패장, 트럭을 몰고 따발령 쪽으로 철퇴하라!" "옛!" "2패와 3패는 저 동쪽고지를 점령하라!” 상순의 명령에 따라 전사들은 전투에 유리한 동쪽고지로 돌격해 올라갔다. “트럭을 몰고 오던 길로 빠져나가라!”  성수는 운전수들에게 고함치며 트럭 운전실에 올라탔다. 군복을 만재한 트럭들은 일제히 꽁무니를 빼기 시작했다. 고지를 점령한 상순은 눈 위에 엎드린 채 오던 길로 달아나는 트럭을 바라보며 욕설을 퍼부었다. “양키놈들, 하늘에서 떨어졌는가? 잘 왔어. 뒈질 놈들!" 그는 이제야 양키놈들에게 본때를 보여줄 시각이 닥쳐왔다고 이를 악물고 윽윽 벼르며 속으로 시퍼런 칼을 갈았다. 흥수는 다가와 엎디더니 “저 숱한 군복을 버리겠소?” 하고 물었다. “아니야? 적들이 트럭을 쫓아가면서 불질하면 어쩌는가?” 상순의 말에 흥수는 머리를 끄덕였다.  “빨리 전호를 파고 저격준비 하라!” “옛!” 전사들은 공병삽을 휘둘러 재빨리 전호를 파기 시작했다. 허나 댕그랑댕그랑 삽날이 돌에 부딪치는 소리만 날뿐 언 땅이 잘 파지지 않았다. 전사들은 돌을 주어다 대충 쌓아놓고 엎드렸다. 그때 괴뢰군 트럭들이 미제 탱크 앞에서 쫓아왔다. 양키놈들은 항상 독전태세로 뒤에 물러서고 괴뢰군들을 탄알받이로 앞장세웠다. 상순은 경기관총을 둔덕에 걸어놓고 성수네 트럭을 쫓아가는 괴뢰군 트럭을 조준해 사격했다. 뚜르륵 뚜르륵 성수네가 몰고 달아나는 트럭대오는 상순이네가 점령한 고지를 안고 서쪽으로 굽이돌아 북상하고 있었다. 그들을 추격하는 남조선 괴뢰군 트럭들이 상순이네 점령한 고지 북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상순은 허리춤에서 신호총을 꺼내 밤하늘에 대고 쏘았다. 씽- 탕! 포화에 그은 어두운 밤하늘에 빨간 신호등이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올라갔다가 제일 뒤에서 달리는 성수 트럭 앞으로 해 떨어졌다. 성수는 불길이 활활 타 번지는 트럭을 세우고 고지를 올려다보았다. 상순은 남조선 괴뢰군이 알아듣지 못하게 한어로 고함쳤다. “성수! 불 달린 트럭으로 길을 막앗! 고지로 철퇴!” 성수는 트럭 운전실 문을 열고 고지를 올려다보며 버럭 성을 냈다. “트럭을 버리다니!” “트럭으로 길을 가로 막앗! 괴뢰군 트럭이 쫓지 못하게!” “알았소!” 성수는 전사를 시켜 불이 활활 붙는 군복을 마구 뒤에 내리뿌리게 했다. 괴뢰군 트럭은 휘발유통에 불이 당길가봐 이리저리 피하면서 쫓아왔다. 성수는 산 중턱 제일 좁은 굽이돌이에 이르자 불이 활활 타오르는 트럭을 가로 멈춰 세워놓았다. 그는 운전실에서 내려 뒤로 달려가더니 휘발유통 덮개를 열고 불이 활활 타오르는 군복을 내리워 훌 덮어놓았다. 불길 속에서 성수가 산 아래로 굴러내려가는 것이 얼핏 보였다. 쿵! 삽시에 자동차 휘발유통이 폭발하며 불길이 하늘을 찔렀다. 불이 달린 군복이 자동차 파편과 함께 하늘로 날아올랐다가 여기저기 어지러이 떨어졌다. 뒤따라온 괴뢰군의 트럭들은 불타는 트럭에 막혀 북으로 도망치는 지원군의 트럭들을 바라보면서도 용빼는 수가 없어 꽥꽥 고함만 쳤다. 상순은 기관총으로 괴뢰군 트럭의 휘발유통을 조준해 사격했다. 뚜르륵 뚜르륵 쾅! 쾅! 트럭 휘발유통들이 폭발하면서 화염이 하늘 높이 치솟아 올랐다. 금방 고지에 달려 올라온 성수는 상순을 손가락질하며 놀란 소리를 쳤다. “왜 트럭을 쏘오?! 놈들 트럭이라도 빼앗아 몰고 도망쳐야지.” “트럭을 거저 세워 놔 되니? 완전히 추격을 따돌려야 해!” 그제야 성수는 뒷덜미를 긁적거렸다. “빈 통이 소리 더 높다더니 개뿔도 모르면서 큰소리만 꽝꽝 쳐!” 상순은 욕설을 퍼부었다. 괴뢰군과 미제 양키놈들은 남북으로 고지를 에워싸고 진공했다. 이때 흥수는 상순을 힐끔 곁눈질하면서 두덜거렸다. “이상해! 분명 아까 그 집에서 물어먹은 거야!” 번쩍이는 화광을 빌어 흥수의 눈과 입가에 증오가 번뜩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헛소릴 치지 말라!” 상순은 전사들에게 명령했다. “탄알을 아껴! 적들이 십여 미터까지 오면 사격하라!” 상순이 한어로 명령하는 바람에 괴뢰군은 알아듣지 못했다. “아까 김영장은 삼촌이고 뭐고 하더구먼. 여기 남조선에 무슨 친척이 있소?” 상순은 귀찮게 구는 흥수를 흘끔 가로 보았다. “잔말 말고 전투준비해!” 이때 모진 엔진소리를 내면서 4대 탱크까지 덮쳐왔다. 미군 탱크는 불붙는 괴뢰군 트럭과 중국인민지원군 트럭을 길옆에 밀어 버렸다. 길이 열리자 탱크들과 트럭은 북으로 도망친 트럭대오를 추격해갔다. 나머지 미군과 괴뢰군들은 고지로 엉금엉금 기어 올라왔다. 상순은 한어로 전투명령을 내렸다. “사격!” 전사들은 일제히 불을 토했다. 간사한 미군은 뒤에서 뭐라고 독전했다. 괴뢰군은 진두에서 앞 병사가 쓰러지면 뒤 병사가 시체를 넘어 맹사격을 가하면서 돌격해 올라왔다.   괴뢰군들은 미군 탱크 지원을 받으며 고지에로 파죽지세로 덮쳐 왔다. 괴뢰군들은 미군의 대포밥이 돼 기를 쓰고 덮쳐들었다.  벌써 몇몇 지원군 전사들이 흉탄을 맞고 쓰러졌다. 상순은 경기관총 탄알이 다 떨어져 사격을 멈췄다. “탄알이 다 떨어졌다!” “나도 탄알이 없다!” 상순은 여기저기서 절망에 가까운 소리가 들렸다. "중공군이 탄알이 다 떨어졌다. 돌격!" 괴뢰군들은 그 소리를 듣고 허리를 펴고 꿋꿋이 선채 무명고지에로 달려들었다. 상순은 모젤권총과 공병삽을 들고 병수와 태수 등 전사들을 돌아보면서 비장하게 고함쳤다. “트럭대오를 엄호해야 해. 이 무명고지에서 결사전을 벌리자!” 상순은 공병삽을 틀어쥐더니 벌떡 일어났다. “총창을 꽂앗!” 전사들은 상순의 명령에 따라 모두 총창을 꽂으며 따라 일어섰다. “싸(杀)!” 상순은 공병삽을 휘두르며 제일 앞에서 뛰어 내려갔다. 머리 누런 양키놈이 상순의 옆에서 짓쳐 내려가는 흥수한테 총을 겨누었다. 눈치 빠른 상순은 흥수를 옆으로 밀어재끼며 공병삽을 휘둘러 양키 놈 목을 탁 찍었다. 땅! 양키 놈은 쓰러지면서 총을 쏘았다. 상순은 몸을 기우뚱하더니 공병삽을 쥔 손으로 왼팔을 붙잡으며 몸을 비틀며 간신히 가누었다. “김영장!” 병수가 뛰어나가면서 총을 쏜 양키를 총창으로 찔러 눕혔다.      상순은 아픔을 참으면서 일어나자마자 또다시 공병삽을 무섭게 휘두르며 머리 누런 양키놈들을 덮쳐내려갔다. 세계최강군이노라고 우쭐렁거리던 미군 양키놈들은 야수처럼 덮쳐들며 날치는 상순이랑 병수랑 보며 뒤로 비실비실 물러섰다. 양키놈들은 무기나 믿고 우쭐렁거렸지 육박전엔 얼음판에 들어선 소눈깔을 해가지고 무서워 부들부들 떨며 뒤저참했다. 그 놈들은 큰 덩치를 믿고 줄곧 지원군 전사들을 깔보아왔지만 생사결단으로 덮쳐드는 지원군 전사들 앞에서 손을 들지 않으면 뒤로 도망쳤다. 상순은 삼검불 같은 누런 머리털을 흩날리며 도망치는 한 양키놈을 뒤쫓아가 공병삽으로 목을 탁 내리쳤다. 그 놈은 목을 옆으로 비틀어 피하면서 애걸했다. "NO! Den't Shoot!(아니, 쏘지 말라!)" "너?! 뭐라고 개소리야!" 상순은 타오르는 전장의 화염을 빌어  양키놈의 파란 눈에서 애원의 빛이 가련하게 판들거리는 것을 보았다. "손 들엇!" 상순은 공병삽으로 손을 가리켰다. “요 핸드 들엇!" 상순은 요 손을 들어라고 말했다. 그런데 양키놈은 손을 쳐들어보이면서 이렇게 중얼거렸다. "Your hand(요 핸드: 너의 손)?" "응, 요 손 들엇!" 양키놈은 자기 손을 쳐들어보이며 비명 같은 소리를 쳤다. " My hand?!(마이 손: 내 손?!OK, OK!)" 상순은 공병삽을 쳐들고 귀동냥해 들은 보리영어로 호령했다. "응! 요 핸드(요 손) 들엇!"  "Yes, yes!" 양키놈은 용맹한 상순 앞에 무릎을 털썩 꿇더니 총을 든 채 두 손을 머리 위에 번쩍 쳐들었다. 파란 눈은 공포에 판들거렸다. "흥! 네놈들도 세계 최강군이냐? 너네 양키놈들은 마이(많이) 핸드 들더라(많이 손 들더라.). 날창만 들이대면 손을 번쩍번쩍 들어?!. 흥! 맨 물알 같은 놈들, 뭐? 세계 최강군! 퉤!" 상순은  코웃음치며 그 놈의 총을 빼앗아냈다. 양키놈은 개목숨을 구했느라고 연신 "OK, OK!" 하고 상순한테 살려달라고 두 손을 싹싹 비볐다.  갑자기 두 양키놈이 양옆에서 총칼을 번뜩이며 동료를 구하려고 상순한테 덮쳐들었다. 상순은 로획한 돌격총으로  연신 두 양키 놈을 쏴 넘겼다. 그 틈에 무릎을 꿇었던 누런 머리가 벌떡 일어나 상순의 돌격총을 잡아 꽉 눌렀다.  상순은 무쇠주먹을 휘둘러 양키놈의 대갈통을 서리맞은 박처럼 까부셨다. 그 놈이 주춤 하는 틈에 상순은 머리로 연신 양키 놈의 대가리를 들이받았다. 양키 놈은 건뜩 쳐들린 코마루가 분질러지고 코피 툭 터졌다. 그양키 놈은 비명을 지르며 네각을 쭉 뻗고 뒈진 돼지처럼 쓰러졌다. 상순은 코피범벅이 된 양키놈 누런 머리털을 틀어쥐여 내리누르며 무릎으로 대가리를 연신 걷어찼다. 양키놈은 목마저 분질러져 까딱하지 못했다. 떵! 떵! 그러고도 성차지 않아 상순은 무쇠주먹을 휘둘러 양키 놈의 콧대를 여지없이 까부셨다. 뒤이어 벌떡 일어나 발로 양키놈의 피범벅이 된 부러진 콧대를 짓밟아 뭉개며 너털웃음쳤다. "허허허! 끝내 양키놈들 콧대를 분질러 놨구나!" 병수가 뒤쫓아와 맞장구를 쳤다. "하하하! 통쾌해!" 퉤! 상순은 쓰러진 양키 놈의 납작해진 피범벅콧대에 침을 뱉었다. 뒤이어 그는 양키놈의 손에서 돌격총을 빼앗아내 몰사격하며 무리로 쓰러지는 양키 무리 속을 돌진했다. "돌격!" "싸!" 죽음을 각오하고 총창을 휘두르며 단말마적으로 덮쳐 내려가는 중국인민지원군 장병들을 보자 괴뢰군은 산 아래로 내리 뛰며 눈 먼 총을 쏘아댔다. 태수는 쫓아내려가면서 연신 괴뢰군 병사를 찔러눕혔다. 그는 "싸!" 소리치며 또 한 놈의 뒤 잔등을 찔러 눕혔다. 괴뢰군들도 장탄해 총을 쏠 새 없어 태권도를 날렸다. 어떤 괴뢰군 병사는 몸을 날려 지원군의 머리를 발길로 차 눕히고 무쇠주먹으로 머리를 까부셨다. 어떤 괴뢰군 병사는 지원군의 멱살을 틀어쥐고 헤딩을 해댔다. 상순은 왼팔을 쓰지 못하자 오른 손으로 공병삽을 휘두르는 척 하다가 발길을 날려 병수에게 덮쳐드는 양키를 차 눕혔다. 그는 공병삽으로 쓰러진 미군 흑인병사를 마구 찍어 죽였다. 이때 흥수는 눈에 달이 올라 적이고 아군이고 눈앞에 뛰어만 들면 총창으로 마구 찍어댔다. 그는 옆에서 자기를 보호하며 짓쳐나가는 상순을 보자 적이라고 총창으로 들이 찍었다. 뜻밖의 총창 질에 상순은 공병삽으로 날아드는 총창을 쟁그랑 막으며 황급히 소리쳤다. “흥수!” “누구야?!” “상순이다!” “김영장! 어두워서 통 보이지 않네!” 흥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산아래로 괴뢰군을 추격해내려갔다. "죽어봐!" 갑자기 바위 뒤에서 한 괴뢰군이 몸을 날려 흥수를 독수리가 병아리 채가듯 했다. 그 놈은 흥수를 깔고 들어앉아 비수로 내리 찌르려고 했다. "난도 남조선 사람이야!" "뭐락꼬?" "내 고향 전주야!" "뭐래?" 그 놈은 비수를 들고 산마루에서 타번지는 불길을 빌어 흥수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깜짝 놀라 물러앉았다. "아니, 이꺼 흥수 히야(형) 아닌가베!" "너거(네가) 막내 창수 아니가?" "그래." 상순은 덮쳐나가면서 흥수 위에서 몸을 일으키는 괴뢰군 놈을 총탁으로 내리치려다가 반공중에서 멈췄다. 그들이 주고받는 말소리를 들었던 것이다.  흥수는 육박전에서 만난 창수를 붙안고 옆에 아가리를 쩍 벌린 무덤의 관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해골을 한쪽으로 밀어내고 동생을 흔들며 다잡아 물었다. "아빠캉 젬마(엄마)캉 어떠래(어떻냐)?" "다 미공군 폭격에 즉살했어!" "아빠! 젬마!" 흥수는 어린애처럼 동생 창수를 붙안고 울었다. "누가 울어? 소대장 목소리 같은디." 이때 관 안으로 누군가 철갑모를 쑥 들이밀었다. 분명 괴뢰군이었다. "에끼, 이 놈!" 흥수는 총칼을 쓱 뽑아 철갑모를 푹 찔렀다. "아걋!" "관둬!" 창수가 흥수의 총칼을 빼앗아냈다. "뭔 짓거리야?!" "내 수하라니께." 창수가 철갑모 쓴자를 끌어당겨 관 안에 들어왔다. 부자집 무덤인지 관이 꽤나 컸다. "중대장, 누군데?" "히야(형)야!" "오- 그래?" "어서 나가 중공군 오나 살펴!" "넷!" 철갑모는 다시 무덤에서 나갔다. 흥수는 창수 얼굴을 매만지면서 말했다. "히야 따라가자! 성수 형이랑 다 나왔어." "히야는 그간 어데 갔댔어?" "만주에 갔던 거야. 널 얼마나 찾았는디." "중공군에서 뭐 하는디?" "반장 해." "반장? 뭔 급인디?" "분대장이야. 성수는 패장이야." "패장이면 더 높은디?" "그래, 소대장이지." "관둬, 히야, 내캉 따라 가! 난 중대장이야. 고향에 돌아가!" "글쎄. 건데 성수는 어쩌나? 우린 중공군인디 남조선 괴뢰군이 살려주겐?" "내 잘 말하지. 우린 포로를 죽이잖으니께." "안돼! 날 따라가자!" "중공군이 괴뢰군 중대장을 살려줄까?!" "우린 포로를 우대해!" 이때 밖에서 철갑모가 불렀다. "중대장! 빨리 부대따라 가자니께!" "오- 그래!" 형제간의 만남도 잠간, 그들은 서로 상대방을 설복시키지 못하고 관에서 나왔다. 그들은 아무 말도 없이 다시 자기 부대로 돌아가 적수로 돼 총부리를 맞대고 싸워야 했다. "몸조심해!" "히야도 그래! 총소리 나면 도망치락꼬!" "그래!" 창수는 철갑모와 함께 무덤을 빠져나가 어둠이 두텁게 깔린 수림에 사라졌다. 흥수는 머리를 툭 떨어뜨리고 어정어정 걸으며 사위를 살폈다. 상순을 찾아야 했다. 그는 어쩐지 옆에 상순이 었어야 마음이 든든한 것을 어쩔 수 없었다... 상순은 괴뢰군은  놔두고 양키놈들을 추격해 산 아래로 짓쳐 내려갔다. 갑자기 바위 뒤에서 쇠기둥 같은 놈이 상순을 나꿔채  쓰러눕혔다. 상순은 벌떡 일어나며 발길로 시꺼먼 놈의 사타구니를 걷어찼다. 그 놈이 허리를 굽히며 가달 두새를 붙잡으며 돼지 멱따는 소리를 치는 순간, 상순은 공병삽을 잡은 채 날래게  오른 팔로 그 놈의 목을 끌어안으며 원숭이처럼 잔등에 날래게 날아올라갔다. 상순은 공병 삽을 쳐들고 호통쳤다. "죽고파?! 손들엇!" "NO! NO!" "너? 너?! 뭐야?! 핸드 들엇!" 상순은 쳐들었던 공병삽을 반공중에 쳐들며 호통쳤다. "I Surrender!(난 투항하겠어.)" "뭐? 아이?!  손 아이 들겠어?! 이놈 핸드(손) 들엇! " "OK! OK! Hand! hand! My hand!" 상순은 무슨 말인지 잘 몰랐다. 그러나 그 놈이 손을 쳐드는 걸  보고 투항하겠다는 걸로 짐작했다. "세계 최강군이란 미군은 맨 이런 놈들이야?!  마이(많이) 마이 핸드 들더라. 흥!  누런 대가리나 쌔까만 놈이나 다 겁쟁이들이구나! 날창도 아니고 공병삽을 들이대도 손을 번쩍번쩍 드니까. 물알 같은 놈들, 진짜 싸울 멋도 없어!" 그는 허무맹랑해 흑인놈을 조롱하면서 공병삽으로 반공중을 가리키더니 호통쳤다. " 핸드 들엇!" 흑인놈은 목마를 탄 상순을 되돌려보며 자기 손을 쳐들어보이면서 물었다. "My hand?(내 손?)" 상순은 호통쳤다. "네 놈은 까짜로 투항하는 건 아니겠지?  핸드 들엇!" "Yes, I hands up. Den't kill me!(예, 내 손들게. 날 죽이지 마시오.)" 씨꺼먼 흑인놈은 사위를 둘러보며 두 손을 쳐들었다. "또 아이냐? 엉?! 아이 투항하겠다고?!" 상순은 공병삽을 버리고 그 놈의  잔등에서 미끌어져내려왔다. 곰 같은 흑인놈은 주위를 흘끔흘끔 곁눈질했다. 순간 주위에 지원군이 없는데다가 자기보다 엄청 덩치 작은 상순을 보고 왼눈에도 차하지도 않았다.  갑자기 흑인 놈은 상순의 목을 틀어쥐고 곰처럼 깔고 들어앉았다. 왼팔을 부상당한 상순은 곰 같은 놈에게 깔려 숨이 꺽 막혔다. 그는 오른 손으로 흑인놈의 사타구니 두새 커다란 X알을 꽉 틀어쥐었다. "A! No! No!" 흑인놈은 너무 아파 상순을 훌 놓으며 아우성쳤다. 땅! 총소리와 함께 곰 같은 흑인놈은 옆으로 스르르 너부러졌다. "흥! 양키놈들도 그저 그렇군!" 상순이 모젤권총으로 쐈던 것이다. 그는 코웃음쳤다. 세계에서 최고강군이란 자들이 이 모양이라는 것에 너무 허무맹랑해 냉소했다. 전사들은 김영장이 앞장서 용감히 싸우는 것을 보고 용기백배 돼 양키놈들을 추격해 내려갔다. 한 개 대대나 되는 괴뢰군은 한개 소대 밖에 안 되는 중국인민지원군을 남북으로 협공했다. 설상가상으로 미제 탱크와 육군마저 덮쳐 와 지원군 전사들은 용감히 싸우다가 하나하나 영용히 희생됐다. 상순은 쓰러진 전사의 옆구리에서 수류탄을 뽑아들고 태수와 병수를 돌아보며 한어로 고함쳤다. “탱크를 빼앗자! 엄호해라!” “옛!” 명사수 태수가 반자동보총으로 탱크 뒤의 양키들을 본때 나게 쓸어 눕혔다. 병수는 뛰여내려가며 연이어 양키놈들을 찔러눕혔다. 양키놈들은 무기 자랑이나 했지 육박전에는 기겁해 뒤로 비실비실 물러섰다. 그 틈에 상순은 탱크 앞으로 뛰어갔다. 탱크가 그의 옆으로 우르릉 거리며 지나갈 때다. 그는 탱크 위에 훌쩍 뛰어 올라가 탱크 뚜껑을 열고 수류탄을 뿌려 넣고 훌쩍 뛰어내렸다. 꽝! 요란한 폭파소리와 함께 탱크가 제 자리에 멈춰 섰다. 나머지 탱크는 계속 돌진해왔다. 상순은 수류탄마저 없어 주위를 애타게 둘러보았다. 그는 길에서 활활 타번지는 자동차에 눈길이 멎었다. "죽어봐라!" 상순은 불길이 이는 자동차에 뛰여갔다. 그는 바곤에 뛰여올라가 불이 반쯤 달린 군복을 안고 덮쳐드는 탱크 위에 뛰여내렸다. 그는 불타는 군복으로 부르릉거리며 연기를 내뿜는 탱크 꽁무니를 꽉 막아버렸다. 순간 탱크 안에 자욱한 연기가 들어가 양키놈들이 탱크 안에서 견디기 힘들었다. 탱크  멈춰서더니 웃덮개 훌 열렸다. 양키놈들이 비명을 지르며 기여나와 뛰여내렸다. 뚜르륵 뚜르륵 그때 태수가 돌격총을 휘둘러 쓰러눕혔다. "잘 했어!" 상순은 손을 홱 젓더니 탱크 웃뚜껑을 열고 탱크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병수와 태수도 뛰어들어갔다. 상순이 탱크를 부릉부릉 몰고 아군의 자동차대오가 도망친 쪽으로 달려나갔다. "어디로 가는가?" 병수가 의아해 물었다. "굽인돌이에 가서 뒤따르는 탱크를 없애버리자! 장탄하라!" "알았소." 그들은 삼도만에서도 손을 맞춰 탱크를 몰고 토비들을 족친 전투경험이 있었다. 병수가 장탄하고 태수가 기관포 방아쇠를 잡았다. 상순은 탱크 헤드라이트까지 켜고 달리면서 멀리 산기슭 큰 길 쪽을 쳐다보았다. 아군의 트럭대오의 헤드라이트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뒤의 탱크를 제거하지 않으면 몇참 못가 추격당하고 말 것이었다. 그는 굽인돌이를 돌자 탱크를 돌려세우더니 굽인돌이에서 몇마장 떨어진 두번째 굽인돌이에 달려가 은페해 멈춰섰다. 뒤따르던 탱크 두대는 상순이 몬 탱크를 동료 탱크인가고 무작정 뒤따라왔다. 그 놈 탱크 두대가 굽인돌이를 돌아설 때다.  "사격!" 쾅! 요란한 굉음과 함께 앞장섰던 미제 탱크는 명중탄을 맞고 웃뚜껑과 포신이 허망 날아났다. 앞의 탱크에서 화염이 충천하자 뒤따르던 탱크는 급정거하더니 도망치려고 대가리를 돌리고 있었다. "사격!"  쾅! 두번째 포탄이 날아갔다. 오른쪽 무한궤를 얻어맞은 탱크는  페철이 돼 풀썩 물앉고 말았다. 양키놈들은 탱크 웃덮개를 열고 비명을 지르며 뛰여내리었다. 태수는 탱크 기관총으로 양키놈들을 소사했다. 놈들은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뒤따르던 양키놈들과 괴뢰군은 굽인돌이에서 무 슨 일이 벌어졌는지도 모르고 도망쳤다.  상순은 한숨을 후 내쉬었다. 그는 탱크 웃덮개를 열고 산기슭에서 싸우는 전사들에게 한어로 명령했다. “우리 트럭대오가 안전하게 전이했다. 동쪽 마을로 철퇴!” "옛!"  성수와 흥수 등 십여 명 전사들이 어둠 속으로 철퇴했다.  상순과 병수 태수는 탱크를 몰고 도망치는 괴뢰군 트럭을  추격해가면서 기관포와 기관총을 갈기며 소분대의 철퇴를 엄호했다. 괴뢰군 트럭은 보기 좋게 불이 활활 일었다. 괴뢰군들의 비명소리, 아우성 소리로 일대 아수라장을 이뤘다. 이때 남쪽 하늘에서 전투기들이 아츠러운 소리를 지르며 날아왔다. 쿵! 쾅! 꽈르릉! 전투기들은 길에 늘어선 트럭을 지원군의 트럭으로 알고 폭격하고 소사해댔다. 그러나 상순이네 모는 탱크만은 자기들 탱크라고 여겼는지, 아니면 발견하지 못했는지 폭격하지 않았다. 숱한 괴뢰군 트럭들이 폭파돼 불길이 하늘로 치솟아 올랐다. “제길, 우리에게 폭탄을 던져!” 괴뢰군 병사들은 하늘에 대고 욕설을 퍼부었다. 어떤 병사들은 쌕쌔기를 사격까지 해댔다. 그 틈에 상순이네는 탱크를 몰고 좌충우돌하면서 불에 타는 적들의 자동차와 트럭을 마구 절벽 아래에 떠밀어버리고 짓뭉개버렸다.  "포탄과 기관총탄이 다 떨어졌네." 태수의 말에 상순은 한숨을 후 내쉬었다. "저놈 자동창까지 없애버리고 철퇴!" 상순은 탱크를 몰고 도망치는 괴뢰군 트럭을 쫓아가 꽝 냅따떴다. 자동차는 아우성치는 괴뢰군들을 실은 채 허망 절벽 아래로 꺼꾸로 처박혔다. 그는 병수와 태수를 돌아보며 말했다. "탱크를 양키놈들한테 넘겨줄순 없어!" "옳소! 없애버리기오!" 상순은 탱크를 돌려 오던 길로 한참 달리다가 불붙는 괴뢰군 자동차에 딱 붙여세우고 탱크(땅크)에서 내렸다. 순식간에  자동차의 불이 탱크에 옮겨 붙기 시작했다. 저쪽 뒤에서 괴뢰군과 양키놈들이 이쪽으로 덮쳐오고 있었다. 탱크가 탈 시간이 될 거 같지 않았다. 태수는 철갑모를 주어들고 자동차 휘발유통응로 다가갔다. 그는  비수를 뽑아  휘발유통을 쿡쿡 찔렀다. 휘발유가 쌕 쏘리 내며 내 뿜겼다. 태수는 철갑모에 휘발유를 꼴똑 받아 탱크 뒤꽁무니에 툭 쳤다. 조급해난 상순은 돌격총을 들어 자동차 휘발유통을 뚜르륵 갈겼다. 휘발유통이 탕 폭발하며 탱크에 불길이 더 거세게 옮겨 붙으면서 활활 타올랐다.        상순이랑은 자동차 옆에 쓰러진 괴뢰군과 양키놈들의 시체에서 돌격총을 서너개씩 주어 어깨에 메고 흥수랑 전이한 무명고지 동쪽 마을에 도망쳐 갔다. 뒤에서 탱크가 활활 타오르는 불길 속에 쿵 폭발하는 굉음이 들렸다.       한편 상순과 전사들은 마을 사처에 흩어져 숨었다. 성수와 병수는 돼지우리에 들어가 북데기를 들쓰고 숨었다. 태수는 소 우리에 뛰어 들어가 소구유에 들어가 소먹이를 들쓰고 숨었다. 상순은 무작정하고 건치를 두른 명호 삼촌네 집으로 뛰어 들어갔다. “누구야?!” “상순이오. 삼촌, 날 살려주오.” “상순이라고? 내 불을 켜마.” 정지와 위방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불을 켜지 마시오. 우린 지금 괴뢰군에게 추격 받고 있소.” “여기 들어와도 안 되겠고. 옳지. 가자.” 명호는 위방에서 내려와 상순을 데리고 바깥에 나가더니 김치 움 덮개를 열고 손짓했다. “여기 들어가 함지를 쓰고 있어!” “양.” 상순은 권총을 들고 김치 움에 뛰어들었다. 김치 움 덮개가 꼭 덮였다. 이때 발자욱소리 쿵쿵쿵 들렸다. "난도 지원군이여, 상순 영장 수하제." "그래? 얼른 김치 움에 들락꼬." 김치움 덮개가 훌 열리더니 검은 그림자가 쿵 뛰어내렸다. "김련장! 흥수락꼬." 상순은 손 더듬으로 흥수를 끌어안아 앉혔다. "함지를 머리에 이라고." "알았다니께." “양키 놈이 날 쏘는 걸 김 련장이 옆으로 밀쳤으니께 말이제이. 난 남조선 고향 땅에 뼈를 묻을 번했제라.” “쉿-” 상순과 흥수는 말소리를 딱 죽이고 쿵쿵 높뛰는 가슴을 눅잦히면서 바깥동정에 귀를 기울였다. 이윽고 바깥에서 꽥꽥 거리는 소리에 뒤이어 김치 움 위로 발자국 소리가 쿵쿵쿵 울렸다. 한 괴뢰군 군관이 꽥꽥 고함쳤다. “그 놈들이 분명 이 마을로 숨어들었어!” 병사들이 명호네 집 안에 뛰어들었다. “중공군을 못 봤어?” 명호가 위방에서 나오면서 시치미를 땄다. “몰라요. 중공군이라니?” “이 놈들, 중공군을 숨겨두는 날엔 대갈통이 날아날 줄 알아라!” “밤중에 홍두깨라더니 웬 소리여?” 명호는 능청을 떨면서 입귀로 말을 흘렸다. 괴뢰군들은 온 마을을 발칵 뒤집었다. 한 놈은 김치 움 덮개를 열고 전지불을 비췄다. 상순과 흥수는 숨을 딱 죽이고 김칫독 사이에 숨어 함지를 이고 있었다. “김칫독 밖에 뭐가 있다고 이러는 기여?” “냄새 더러운 경상도치들 김치독이야.” 병사가 김치 움 덮개를 훌 던지자 김치 움 안이 다시 어두워졌다. 명호가 덮개를 꼭 덮어놓으면서 “괜히 남의 김치 독이 얼겠어. 흥!”라고 두덜거렸다. 한 병사가 돼지우리를 지나가다가 굴암돼지가 우는 소리를 듣고 전지 불을 비췄다. 굴암돼지가 자기 자리를 성수와 병수에게 빼앗기고 주둥이로 북데기를 마구 뚜지면서 꿀꿀 울어댔다. 그 바람에 그만 성수와 병수의 다리가 북데기 바깥으로 삐죽이 드러나고 말았다. “제끼제끼(빨리빨리) 와! 돼지우리에 빨갱이들이 있어!” 제주도치는 돼지우리에 대고 총을 쏘았다. 돼지우리에서도 맞불질하며 뛰어나왔다. 성수와 병수는 제주도 치를 쏴 눕히고 어둠 속으로 도망쳤다. 뒤미처 달려온 한국 병사들은 총을 쏘며 성수와 병수를 추격했다. 마을에서 들통 난 지원군 전사들은 마구 총질하며 어둠 속으로 도망쳤다. 상순은 김치 움 안에서 명호 삼촌과 영수 때문에 살아남은 일을 생각하자 고모오촌 삼촌에게 걸리는 것이 있었다. 병수 형이 함흥 촌에서 나포된 일이었다. 명호 삼촌이 맏아들이 죽은 줄도 모르고 애타게 죽을 때까지 기다릴 걸 생각하니 가슴이 아팠던 것이다. 그는 호주머니에서 공책과 꽁다리연필을 꺼내 어둠속에서 손 더듬질 하면서 “삼촌, 병수는 간도 함흥 촌에서 체포됐소. 미안하오.”라고 썼다. “뭘 하오?” 흥수의 물음에 상순은 “아무 것도 아니야.”라고 한 후 버스럭거리며 종이쪽지를 접어 함지 안에 넣고 돌로 짓눌러 놓았다. 바깥동정을 살펴보니 쥐 죽은 듯이 잠잠해졌다. 멀리에서 간혹 총소리가 들릴 뿐이었다. “우린 여기서 날이 밝기 전에 빠져나가야 하오.” “가기요.” 상순과 흥수는 김치 움 덮개를 열고 바깥으로 고양이처럼 살금살금 기어 나왔다. 이때 집안에서 명호와 영수가 나왔다. 상순은 그들을 와락 그러안고 통곡을 쳤다. “삼촌, 동생, 이렇게 갈라지면 언제 다시 만날까?” “살아 있으면 만나겠지.” 명호의 말에 영수도 동을 달았다. “나라가 통일되면 또 만나겠지. 난시에 몸조심하라니까.” “양, 잘 있소.” “에이, 죽일 놈의 함경도 말투를 봐라. 정 떨어진다.” 명호는 그 판에도 농담을 하며 상순의 잔등을 툭툭 쳤다. 영수는 보꾸러미를 들고 나와 상순에게 내밀었다. “형, 쌀이 막대라고 밥 가지고 가.” “고맙다. 동생, 언제 다시 만날까?” “혹시 병수 형 소식이 있으면 알려 달라.” 상순은 할 말이 없어 머리만 숙이었다. "섯거라! 이 놈들!" 갑자기 괴뢰군 서너놈이 울안에 뛰여들었다. "너거 창수 아니가. 나야, 나, 히야!" 흥수가 말하면서 앞에 나섰다. 저쪽에서 따발총을 내리며 한발 나섰다. "히야, 아직도 몬 달아났시우?" "그래, 이쯤 해서 헤어지자." 땅! 땅! 명호와 영수가 집 안에서 나오며 괴뢰군을 사격했다. 창수와 한 병사가 쓰러졌다. "창수야!" 흥수가 창수한테 달려갈 때다. 괴뢰군이 총질했다. 란전이 벌어졌다. 상순은 몸을 날려 괴뢰군병사를 차넘기며 오른 손으로 총을 빼앗아 갈겼다. 푱! 푱! 나머지 두 괴뢰군은 도망치다가 어둠 속에 구새목에서 쓰러졌다. "흥수, 어서 피하자!" 그러나 흥수는 창수를 끌어안고 가려고 하지 않았다. "안돼, 난 고향 전주에 얘를 묻어주고 갈래. 엉~ 엉~" 상순은 오른 손에 총을 잡고 총상을 입은 왼팔로 흥수를 끌고 갈 수 없었다. "영수, 이 자식을 좀 끌고 가자!" "예, 히야(형)." 영수는 흥수를 마구 뜯어 끌고 상순을 따라갔다. "놔! 이놈, 네놈이 내 막내동생 쏴죽였어." 갑자기 흥수는 날창으로 영수의 옆구리를 푹 찔렀다. 영수는 잽싸게 피했다. 그러나 날창에 빗찔렸다. "어더럭해? 닌도 죽고 싶어?" 영수는 따발총을 흥수한테 겨눴다. "닥쳣!" 상순은 영수의 따발총을 하늘에 쳐들었다. "우린 혁명동지야! 자기 동지를 죽여선 안 돼!" 영수는 이를 악물었다가 말았다.  땅! 그 틈에 흥수가 보총으로 영수를 쏘았다. 영수는 총을 맞고 쓰러졌다. 상순은 흥수의 손에서 보총을 빼앗아냈다. "이놈, 양키놈과는 어쩌지 못하고 제편을 쏘는덴 꽤나 솜씨 있군! 흥!" 영수를 살펴보니 허벅다리에 총알을 빗맞았던 것이다. 그래도 영수는 흥수를 욕할 뿐 더 반격하지는 않았다.   명호가 집안에서 뛰어나오며 흥수를 노려보았다. "아버지, 오해라니께." "오해? 네놈이 내 동생 죽였는디. 개놈새끼!" 그래도 명호가 어른스러웠다. 그는 오히려 동생을 잃은 흥수를 위로했다. "됐네. 전쟁판엔 적아나 혈육이나 따로 있나? 동생 잃어 섭섭하겠지만. 널리 양해하게나. 어서 가게나." 명호가 말렸다. "저 무명고지를 넘으면 인삼 련대장이 영솔한 조선인민군을 만날 수 있어." "네? 잘 됐소." 상순은 명호를 보고 "흥수 동생을 잘 묻어주오."하고 부탁했다. 명호는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흥수는 이를 뿌득뿌득 갈았다. "내 언제든 동생 원수를 갚고야 말겠어!"       상순은 명호에게 영수를 맡기고 흥수를 간신히 뜯어말리며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명호는 흥수를 쏘아보며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더니 영수를 업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벌써 새벽닭이 “꼬끼오-” 울더니 동녘하늘이 푸름푸름 밝아오기 시작했다.                           7. 한 많은 압록강      우뚝우뚝 치솟은 산마루와 하늘이 화가가 그린 듯이 선명하게 갈라지더니 동녘하늘에 전쟁의 포화에 그은 뻘건 해가 불끈 솟아올라 차디찬 햇빛을 몇 가닥 비추었다. 밤새 억수로 쏟아진 소낙비를 맞아 함초롬한 버드나무 잎사귀는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잎사귀 사이에 햇빛이 비껴들어 유난히 윤택이 났다.       상순은 조춘성 사단장의 통역으로 돼 찌프에 앉아 최전선에서 달아 다녔다.      몇 달전에 무명고지 최전선에서 상순은 인삼 삼촌을 만났다. 그 무명고지는 큰아버지 성칠이 장렬한 최후를 마친 피에 물든 고지였다. 큰아버지 유체는 인삼 삼촌이 잘 거둬 마천령고개 양지바른 곳에 잘 묻어주었다고 하였다. 상순은 무명고지를 무심히 바라볼 수 없었다. 그는 미군의 폭격에서도 억세게 살아남은 무명고지 절벽의 진달래꽃들을 바라보며 머리를 숙였다. 그는 영수 등 남조선 유격대와 인삼 련대장이 영솔한 조선인민군의 엄호를 받으며 마천령 부근에서 이동작전하는 조춘성 사단장의 부대를 만나 동복을 넘겨주었던 것이다.      인삼 련대장은 상순을 와락 끌어안고 대견스레 마주 바라보았다.     "야, 어제 짜개바지 입고 달아다닌 거 같은데 벌써 영장까지 됐구나."     "삼촌!"      상순은 전선에서 만난 삼촌을 보자 큰아버지 생각이 나서 목이 꺽 멨다.       조춘성 사단장이 다가오더니 상순을 보고 엄지를 내둘렀다. "김영장은 싸움만 잘하는가 했더니 한어도 변설이군. 우리 사단 비서과 과장을 하면서 내 통역을 서오."     처음에 상순은 잘 납득되지 않았다. 그는 미군 양키 놈들을 통쾌하게 족치기 위해 조선 전선에 나왔던 것이다. 허나 미군 양키 놈을 통쾌하게 족쳐 보지도 못했다. "통역이라니? 난 아직 양키놈들 콧대를 제대로 꺾어놓지 못했습니다." 조춘성 사장은 상순의 어깨를 다독였다. "허허허, 김영장은 탱크를 빼앗아몰고 양키놈들 탱크와 군용트럭을 통쾌하게 족치지 않았소? 그만하면 됐지." 상순은 특별히 조선 하늘을 횡행하며 아군과 민간인들을 마구 폭격하며 미쳐날뛰던 미군 공중날강도가 제일 눈에 거슬렸다. "조사장, 아직도 세계 최강공군이느라고 우쭐거리는 양키비행기를 통쾌하게 쏴떨구지 못한게 한입니다. 날 고사포부대에 보내주십시오. 통쾌하게 미제 공중날강도들을 족치고 싶습니다." "하하하. 미제 비행기는 우리 영용한 공군 비행사들에게 맡기면 되오. 그들은 이미 숱한 날강도들을 격추했소. 이젠 미제 날강도들은 감히 청천강 이북 하늘엔 다신 얼씬하지도 못하지 않소?" 상순은 그랠도 전선에서 싸우고 싶지 조사장 옆에서 입방아나 찧기 싫었다. 사실, 조선전선에 나온 지원군들은 통역이 없이는 한 발자국도 내딛기 힘들었다. 조 사단장은 왼팔에 총상을 입은 상순이 한어를 잘 하기에 전선에서 싸우기보다 자기 통역을 하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상순은 조사단장과 함께 찌프에 앉아 달리면서도 몇달 전에 있은 일들이 영화처럼 눈앞에서 돌아갔다. 그는 성수, 병수와 태수 등 30여명 전사들을 데리고 영수가 이끄는 유격대의 엄호를 받아 괴뢰군의 포위토벌을 피하면서 북으로 퇴각해 천신만고 끝에 접응부대와 트럭대오를 찾았다. 상순이 거느린 두개 소대는 인삼 련대장의 부대를 만나 몇 명의 대가를 내고 트럭 28대에 실은 동복을 최전선부대에 넘겨주었던 것이다. 그런데 흥수가 주의하지 않은 틈에 대오에서 어디론가 사라진지 사흘이 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상순은 잃어진 흥수를 두고 별의별 궁리를 다 했다. 북으로 들어가는 도중에 그들은 미군 트럭을 습격해 양키 두 놈을 본때 나게 처단한 일도 있었다. 어느 날 밤중에 그들은 길에서 남으로 도망치는 미군 트럭을 발견했다. 상순은 반자동보총으로 운전실을 조준해 사격했다. 비명소리가 들리더니 운전수가 죽었는지 트럭이 덜컥 멈춰 섰다. 한 흑인 놈이 운전실에서 뛰어내려 어둠속으로 허둥지둥 도망쳤다. “서라!” 상순은 권총을 뽑아들고 추격하면서 공중에 총을 쏘았다. 땅! 흑인 놈은 두 손을 들고 주춤 멈춰서며 되돌아보았다. 흑인군관이었다. 상순은 다가가 절구통 같은 흑인군관의 허리춤에서 권총을 뽑아냈다. 순간 흑인군관은 주먹을 날려 상순의 턱을 탁 쳤다. “아이야!” 불의의 습격에 상순은 기우뚱하더니 푹 꼬끄라졌다. 손에 쥐였던 권총이 몇 미터 밖으로 날려갔다. 흑인군관은 권투자세를 취하더니 쓰러진 상순에게 덤벼들었다. 상순은 곤두박질쳐 벌떡 뛰어 일어나 오른 팔 굽으로 덮쳐드는 흑인 군관의 배를 들이박았다. “억!” 흑인군관은 비명소리와 함께 배를 끌어안으며 허리를 굽혔다. 상순은 발길을 날려 그 놈의 사타구니 두새를 걷어찼다. "앗!" 그 놈은 요해처를 채워 뺑뺑 돌며 비명을 질렀다. 상순은 무쇠주먹으로 흑인군관의 관자노리를 걷어쳐 올렸다. 흑인군관은 김이 빠진 공처럼 풀썩 물앉았다. 뒤따라 덮쳐온 태수는 총창으로 흑인군관의 잔등을 푹푹 찔렀다. 그새 상순은 권총을 주어 들어 흑인군관을 쏘았다… 상순은 조선전쟁터에 나와서 양키 놈들을 더 죽이지 못하고 조선전쟁이 끝나게 된 것이 아쉬웠다. 그는 찌프에 앉아 조춘성 사단장을 따라 최전선으로 나갔다가 개성을 거쳐 평양으로 돌아갔다. 평양 시내는 조선 전쟁기간에  미군 폭격기의 수십번의 폭격에 잿더미로 됐다. 그러고도 모자라 미제 공중날강도들은 정전협정을 체결하기 전 2시간 전까지도 마지막으로 수십대 폭격기와 전투기로 평양시내를 폭격하고 무고한 백성들을 소사해 살해하였다. 온 평양시내는 산더미 같은 불길이 치솟았고 순식간에 잿더미로 새까맣게 타버렸다. 박살 난 벽돌장들이 무더기로 널려 있을 뿐 성한 집이라고는 하나도 찾아 볼 수 없었고 시꺼먼 재가루가 흩날렸다. 적지 않은 평양 시민들은 전쟁의 포화에 그은 벽돌장들을 쌓아놓고 나무와 양철기와 쪼각을 얹어 막을 지어놓고 살고 있었다. 그래도 뭘 끓여 먹는지 그런 오두막들의 양철연통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목숨이 긴 게 사람이야. 고향이 뭐 길래 저런 잿더미도 떠나지 않고 살까?) 상순은 전쟁의 포화에 그은 평양 시내를 보면서 마음이 아팠다. 다행히 미군과 괴뢰군이 함경도 남쪽 지역에 쳐들어갔을 뿐 상순의 고향 명천까지는 쳐들어가지 못 했다. 상순은 고향 명천으로 가 보고 싶었지만 부대에서는 한시각도 마음대로 몸을 뺄 수 없었다. 찌프는 평안도까지 들어가 어느 산마루에 올라가 멈춰 섰다. 상순은 찌프에서 내려 조춘성 사단장과 함께 폭탄구덩이가 벌집처럼 펑펑 뚫린 산마루와 산비탈들을 둘러보며 정중히 말했다. “조 사장, 이젠 미제와도 전쟁이 끝났는데 난 함흥 촌에 돌아가겠습니다. 두번째고향 연변조선족자치주는 저를 수요합니다. 전 참군하기 전에 지방당조직에 약속했습니다. 전쟁이 끝나면 꼭 귀향하겠다고 말입니다. 전 마을 사람들을 배 불리 먹고 잘 살게 사회주의 새 농촌을 건설하고 싶습니다.” 조춘성 사단장은 머리를 돌리더니 세귀눈을 번쩍이는 상순을 보고 엄숙하게 말했다. "아직 미제는 남조선에서 물러가지 않았소. 그 놈들이 남조선에 있는 한 정전한 조선반도에서 언제든지 다시 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소. 우린 아직 대만을 해방하지 못했소. 부대에는 김과장 같은 군사인재가 대량 수요되오." "전 고향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제2고향건설에도 제가 할 일이 많고도 많습니다. 만약 전쟁이 재발하면 그땐 꼭 부대로 돌아오겠습니다." 조사장은 머리를 끄덕였다. “정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면 별 수 없군.” 그는 한숨을 길게 내쉬는 것이었다. “난 원래 상순 동무를 참모장이라도 시키고 싶었소. 이 몇달 동안 김 과장은 통역뿐만 아니라 전략전술 참모역할도 아주 잘 했소. 동무에게는 남달리 일정한 군사지략이 있다는 걸 보아냈소. 부대에 계속 남아 있으면 장차 훌륭한 지휘관으로 성장할 수 있다고 보는데. 참.” 그는 상순을 똑바로 마주 바라보았다. “그래도 촌으로 돌아가겠소?” “예. 이젠 미제를 38선 이남에 몰아냈으니깐 전쟁도 다 끝나게 됩니다. 전쟁이 없는 평화연대에 부대에 남아서 뭘 할 게 있습니까? 저는 평화년대에는 부대보다 백성들을 배불리 먹게 하는 일이 더욱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조 사단장은 머리를 끄덕이더니 상순의 두 손을 꼭 잡고 흔들다가 와락 끌어안았다. 그의 눈가에는 뜨거운 이슬이 맺혀 반짝였다. 상순은 조사장의 품속에서 나오자 물었다. "조사장님, 옛날 복자공장 소식은 있습니까?" 조사장은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었다. "옛날 복장공장은 대만특무놈들한테 발각됐다는 정보를 받았댔소. 그래서 미제를 38선 이남까지 밀어낸 후 상부의 지시에 따라 복장공장을 강변에서 남쪽으로 한 백킬로메터 떨어진 협곡에 전이했소." "3련장이랑 허영희 부공장장이랑 모두 무사합니까?" 조사상은 머리를 숙였다. "복장공장은 이전하기 전에 미제 공중날강도 폭격을 맞았댔소.' "예?!" 상순은 깜짝 놀랐다. 그는 자기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미제 공중날강도들이 기습폭격 할 당시 허영희는 김치움으로 피신하려고 뛰여갔다오. 3련장은 자기 몸으로 허영희 부공장장의 몸을 뒤덮으면서 구하려다가 장렬희 희생됐소. 그 덕에 허영희  부공장장은 목숨은 구했지만 한쪽 다리를 잃고 말았다오." "뭐라구요?!" 상순은 당장 허영희를 찾아가보고 싶었다. "허영희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후방병원에 호송됐다던데 지금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소." "하, 이거 참." 상순은 애타 발로 땅바닥을 구르더니 두 손을 마주 치면서 서성거렸다.         며칠 후, 상순은 조춘성 사단장과 전우들과 고별하고 귀국하는 지원군부대와 함께 귀국렬차에 올랐다.        귀국렬차가 압록강과 점저 가까워졌다. 순간 상순은 옛날 복장공장에 찾아가보지 못하고 한 많은 압록강을 건너는 것이 한이였다.          그는 쌀을 얻으러 강을 건너가다가 미제 공중날강도 폭격을 맞아 허영희와 함께 도관 속에 갇혔던 정경이 아직도 눈앞에 선희 떠올랐다.       그들이 깎아지른 절벽 밑의 산굽이를 에돌아 금방 강바닥에 들어섰을 때다. 갑자기 하늘에서 얭- 요란한 소리와 함께 미 전투기가 네 대나 날아왔다. “적기다! 빨리 트럭에서 내려 피신하라!” 상순은 고함치며 옆에 앉은 허영희의 손을 쥐고 트럭에서 뛰어 내렸다. 한참 달리다가 언제의 커다란 콘크리트도관 안에 들어가 납작 엎드렸다. 폭탄이 강바닥에 떨어져 작렬하며 폭음이 귀청을 째지게 때렸다. 파편이 쌩쌩 날아와 도관 벽을 쳤다. 상순은 허영희를 품속에 꽉 끌어안고 위에 엎드렸다. 꽈르릉! 꽝! 꽝! 요란한 굉음과 함께 언 흙덩이들이 도관 앞뒤 구멍을 꽉 막아 버렸다. 순간 도관 속은 칠흑처럼 온통 새까맣게 돼버렸다. 상순은 몸을 벌떡 일으키며 손 더듬을 해보았다. 그런데 뜻밖에 그만 영희의 뭉글뭉글한 젖가슴이 손에 닿았다. 상순이 덴겁한 듯 황급히 손을 빼려는 순간 영희가 상순의 손을 꼭 잡았다. 상순은 전기에라도 붙은 듯이 황급히 손을 빼갔다. 그런데 이번에는 영희가 상순을 꼭 껴안고 놓지 않았다. “허 주임, 허 주임!” “예.” “상한데 없소?” “예. 김 공장장이 몸으로 뒤덮어준 덕분에. 김 공장장은 저의 구명은인이죠.” “우린 여기서 빨리 나가야 하오. 오래 있으면 공기가 희박해 위험하오.” “예.” 상순은 어둠 속에서 몸을 돌려 영희를 뒤로 물리고 들어오던 쪽을 손으로 흙덩이들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한참 단말마적으로 파고 또 파니 시원한 냉기가 도관 속으로 불어 들어왔다. “이젠 살았소. 이제 한참 파노라면 바깥이 나지겠지.” 그런데 영희는 뒤에서 상순을 꼭 껴안으면서 “좀 쉬십시오.”라고 했다. “뭐 하는 거요?” “누가 보는가요?” “보지 못해도 그렇지. 난 처자가 있는 나그네란 말이오.” “누군 처녀구먼요.” 상순은 영희의 팔을 뿌리쳤다. “그럼 더욱 근신해야지. 우린 당원이 아니오?” “당원은 사랑도 모르는가요? 전 첫눈에 사내다운 당신한테 반했는데요.” 상순은 흙을 파헤치면서 두덜거렸다. “나를 어떻게 보고 이러는 거요?” “우린 여기서 죽을 수도 있어요? 난세에 언제 죽을지 어떻게 알아요? 후회 없이 살지요. 전 당신과 함께라면 여기서 죽어도 괜찮을 거 같아요.” “허 주임, 정말 천만뜻밖이오. 남편 보기 미안하지 않소?” “저의 남편은 전선에서 희생됐어요. 자기 수하의 생활을 좀 관심해주면 안 돼요?” “…” “영웅도 미인관을 넘지 못한대요. 음충한 눈길로 노리다가도 정인군자인 척 하긴. 호호호.” "입 다물지 못해?” "픽!" "이 흙덩이나 받아 뒤에 쌓으라고." 상순은 어처구니 없어 피씩 웃었다. 어디 그뿐인가. 허영희는 김치움에서도 상순을 꼭 끌어안고 사랑을 호소했다. " 군중들 생활 좀 관심해주면 안돼요? 언제 죽을지 어떻게 알아요?" 상순이 그녀를 뿌리치고 김치움에서 훌 나가버리자  허영희는 울면서 야단쳤다. "당신은 꼭 후회할 거예요. 차례진 김치도 먹지 않고. 흑흑흑."       허영희는 상순이 동복을 싣고 최전선에 떠나갈 때도 김치꾸러미를 주면서 그윽한 눈길로 상순을 바라보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김치를 가지고 가서 생각나면  잡수세요. 김치 생각나면 찾아오세요.”   허영희의 간절한 목소리는  아직도 귀전을 간질이는듯 했다. 순간 상순의 눈앞에는 보름달 같이 복성스러운 영희의 얼굴이 선히 떠올랐다. 상순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는 허영희 짝사랑한테 미안했고  다리를 잃은 그녀에게 문안 한마디 못하고 떠나오는 것이 죄송해 속으로 외웠다.  (영희, 미안하오. 영희한테 해준 건 하나도 없이 김치와 돼지고기점만 넙적넙적 받아먹지 않았소? 참 미안하오. 그대의 짝사랑을 받아주지 못해서 정말 미안하오. 날 용소하오. 조직의 몸이어서 그렇게 할 순 없었소.)          그렇다. 당원도 사람이였다. 당원도 칠정육욕이 있었다. 그러나 특수강철로 만들어진 공산당원은 절대 그런 불륜에 빠져선 안되였다.         (영희, 용서하오. 강철기률을 가진 당원은 영원히 그렇게 할 수 없소. 래세가 있다면 ...) 그러나 그는 인차 허구픈 웃음을 웃었다.         "허허허, 영희, 래세라는게 있소?"        상순은 속으로 천번만번 되뇌이며 한 많은 압록강을 서서히 건너고 있었다. 그는 덜커덕거리며 달리는 렬차 등받이에  잔등을 비스듬히 대고 눈을 스르르 감고  착잡한 생각에 잠겼다.       순간 남편을 전선에서 잃은데다가 한쪽 다리마저 잃은 허영희가 한없이 불쌍했다. 만약 허영희가 살았다고 해도 한쪽다리를 잃고  살아갈 일을 생각하니 한없이  막막하게만 생각되였다.        상순은 달리는 렬차 차창으로 휙휙 뒤로 밀려가는 새 압록강철교 옆 미제 공중날강도들의 야만적인 폭격에 끊어진 옛 압록강철교 단교를 바라보며 치를 떨었다.  미제 공중날강도들의 하늘에 사무치는 죄악을 공소하며 압록강물에 서 있는 단교 교각과  너덜거리는 단교 란간을 바라보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일제 철발굽 아래에서 수많은 평안도 황해도 조선 백성들이 살길을 찾아 건넌 한 많은 압록강이였다. 그 압록강을 건너면서 상순은 3련장의 묘지에도 찾아가보지 못하고 귀국하는 것이 마음아팠다.  군복을 운송할 때 무명고지에서 희생된 10여명 전우들을 묻어주지도 못하고 남조선 땅에 두고 오는 것이 죄송스러웠다.      상순은  압록강 중간에 끊어진 옛철교(단교)를 바라보며 긴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었다.       미제 공중날강도들은 중조 변경에까지 날아와 민가를 폭격해 재가루로 만들었고 수많은 무고한 백성들을 살해하였다. 미제는 그것도 모자라 쥐와 파리까지 동원해 생물화학무기를 조선반도에 뿌렸다. 미제는 제2차 세계대전 시기 일제가 중국 동북 할빈 교외 731부대 생물화학무기자료와 기술자들을 몽땅 걷어다가 전세계에 200여개 생물화학세균무기연구소를 세우고 계속 생물화학무기를 연구해왔다. 미제 침략자들은 심지어 중조 변경과 평양에 원자탄까지 쓸 것까지 모의한적이 있다고 하지 않는가. 그러나 세계 여론이 두려워 원자탄을 쓰는 것을 보류했고 나중에 남조선에 원자탄을 배치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미제의 핵공갈과 야만적인 생물화학세균무기도 중조인민들 불굴의 정의의 투쟁정신을 굴복시키지 못했으며 백기를 들고 나와 정전협정에 싸인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미제 공중날강도들은 중조친선의 뉴대, 항미원조 동맥인 압록강 철교를 폭격해 끊어버렸다. 그러나 압록강 그 단교(끊어진 철교) 옆에 중조인민들은 단시일내에 새 철교를 놓고 숱한 고사포진을 포치해 방공화력을 강화해 지키고 있었다. 그후부터  미제는 다시는 철교 상공에 얼씬도 하지 못하였다. 미제 침략자들은 16개 나라 유엔군과 이승만 괴뢰군까지 추종해가지고 "인천에서 아침 먹고 평양에서 점심을 먹고 압록강가에서 저녁밥을 먹겠다."고 떠벌여댔지마 3년 전쟁 결과 어떻게 됐는가? 미제는 영용한 중조인민군의 반격 앞에서 흙보살이 황하를 건넌 격이 되지 않았고 뭔가?     상순은 조선 백성들을 수없이 폭격, 살해한 미제 공중날강도를 하나도 쏴 떨구지 못한 것이 한이었다. 미제 침략자 승냥이 놈들을 남조선 땅에서 완전히 몰아내지 못한 것이 한이었다.  쪼개진 조선반도를 보고 마음이 아팠고 통일된 조선을 후대들에게 넘겨주지 못하는 것이 마음에 내려가지 않았다. 미제가 남조선 땅에 남아 있는 한 언제든지 전쟁이 재발할 수 있다. 그 력사적 한이 약소민족의 가슴에 맺힌 피엉어리로 돼 가슴을 아프게 했다.       "미제 놈들이 뭐가 돼서 태평양 천만리 건너와 조선반도에 들어와 주인행세, 국제경찰행세를 하는가? 네놈들이 뭐가 돼서 남조선을 식민통치하면서 우리 조선민족을 쥐락피락 하는 거냐? 약소민족이 약하면 제국주의 렬강들에게 얻어맞게 된다. 약소민족일수록 더 강해야 된다. 꼭 사회주의 새 중국을 잘 건설하고 국방을 강화해 제국주의 침략을 막고 나라를 튼튼히 보호해야 한다."      상순은 어깨가 무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달리는 차창으로 압록강 철교를 되돌아보며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8. 벼슬을 초개같이 여기고      상순이 집에 돌아와 보니 초가삼간 지붕이 용마루가 푹 꺼지고 밭고랑처럼 홈이 패여 있었고 여기저기 비가 새 간장 물 같은 것이 벽에서 흐르고 있었다. 집안에 들어가 보니 윗방에 아버지가 옆구리 아파 누워 있었고 정지에는 열살난 맏딸 순자가 동생들을 데리고 공부하고 있었다. “아버지!” 순자가 제일 먼저 아버지를 알아보고 두 팔을 벌리며 뛰어왔다. 상순은 순자를 그러안고 금숙과 봉자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나서 위방에 올라가 아버지께 큰절을 올리며 문안인사를 드렸다. “아버지, 그간 무사히 계셨습니까?” “응, 그래. 무사히 돌아왔으니 다행이다. 너 아내는 이런 젖먹이들을 데리고 네게 무슨 일이 생길까봐 얼마나 속을 태웠는지 모른다. 밭으로 나간 게 좀 있으면 올 거야.” 한참 후 상순은 할아버지를 비롯한 일가친척들을 찾아뵈려고 집에서 나갔다. 그런데 토성 밑에서 한손으로 물동이를 붙잡아 이고 물 길으러 나오는 춘실과 딱 마주칠 줄이야. 춘실은 입귀를 비쭉거렸다. “전쟁터에 가겠으면 혼자 갈 게지. 남의 나그네를 데리고 갈게 뭐요? 왜 데리고 오지 않고 혼자 왔소? 남의 나그넬 죽일 잡도린가?” “무슨 소리요?” " 보오, 성수, 창걸, 태수, 병수, 희수, 창욱, 다 돌아오지 않았소? 왜 딱 흥수만은 데리고 오지 않았소? 흥수 죽으면 씨원하지. 나까지 데리고 살게스리." 상순은 세귀눈을 부릅뜨고 춘실을 쏘아보았다. "무슨 생벼락 맞을 소리오? 흥수 대오를 떨어져서 어데 갔는지 모르오. 꼭 돌아오겠지." 춘실은 상순의 세귀눈이 무서워 물동이를 팔에 끼고 달아나며 핼끔 뒤돌아보더니 계속 빈정거렸다. “중놈이 제 머리를 깎지 못한다고 국제 혁명을 하고 돌아온 나그네 저 지붕 보오. 비물이 왈왈 새는 걸. 저런 나그네를 만난 여편네도 고생문이 열리겠다. 흥!” "춘실이, 좀 보기요." 춘실은 우물에 가서 드레박을 잣아올리며 도도거렸다. "뭘? 남편 없다고 업신여기지 마오." 상순은 개의치 않고 다가가 드레박을 잣아 올려 물동이에 물을 부어주면서 말했다. "미안하오. 흥수를 데리고 와야 하는데." "그래, 죽었소?" "아니오. 막내동생이 피살된 후 정신이 나간 상하던게 밤중에 부대에서 떨어져 어디로 사라졌단 말이오. 혹시 막내동생 시체를 걷어주자고 그러잖았는지 모르오. 아버지와 엄마 사망했다니까. 고향엔 아무도 없잖소? 여기 처자하구 동생 성수가 있으니까 돌아올 수도 있소. 내심하게 기다리오." "말이 쉽지. 내 누굴 믿고 살라오?" 춘실은 눈을 흘기더니 물동이를 이고 자리를 떴다. 비틀거리며 겨우 걷는 그녀의 머리 위에서 물이 철렁철렁 쏱아져 질질 흘렀다. 상순은 흥수가 일어져 마음이 아팠다. 란시판에 그를 데리고 오지 못한 것이 한스러웠고 춘실한테는 한뉘 사람 빚을 지고 살아야 할 것 같았다. 상순은 이 마을에 불쌍한 녀인이 한둘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특히 남편을 조선전선에서 잃고 홀로난 큰어머니가  더없이 불쌍했다.  그는 한숨을 후- 내쉬더니 큰아버지와 형님네 집을 찾아가 죽 인사를 드리고 나서 웃새집 사랑방에 있는 큰어머니를 찾아갔다. 울안에서는 경주와 경수가 말다툼을 하고 있었다. "우리 아버진 렬사야! 너네 아버진 나쁜 놈이야!" 경수가 턱을 쳐들고 덤벼들자 머리 하나는 더 큰 경주는 경수를 활 밀어놓았다. "흥! 우리 아빤 유격대 대장이야!" 경주가 으시대자 경수는 발딱 일어나 손가락으로 경주의 콧대를 삿대질하며 욕했다. "너네 아버진 남조선 특무야!" "뭐라니?! 이 새끼!" 경주는 경수를 깔고 들어앉아 마구 때렸다. "경주! 그만 두지 못해!" 집 안에서 진달래가 달려나왔다. 그녀는 경주를 뜯어말렸다. "엄만 항상 경수 편을 들면서. 씨, 흑흑, 난 엄마 아들이 아니야? 씨," 진달래는 상순을 보자 애들을 한팔에 하나씩 품에 안고 먼 남쪽 하늘을 쳐다보며 눈물을 펑펑 쏟았다. "큰어머니, 그간 애들 데리고 고생 많았습구마." 진달래는 저고리 동전으로 눈물을 닦았다. "괜찮소. 시아버지랑 시동생들이 돌봐줘서요." 상순은 경수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면서 말했다. "귀국하기 전에 인삼 삼촌을 만났는데. 큰아버지 유체를 팔달령 양지바른 곳에 잘 안치했더구만요. 엄마를 모신 소서구에 모셔와야 되는건데." 진달래는 도리머리를 저었다. "아니오. 경수 아빠는 조국보위전에서 장렬히 희생됐는데요. 조국 강산에 묻힌 것을 영광으로 생각할 거요." 그 말에 상순도 머리를 끄덕였다. "큰어머니, 무슨 힘든 일 있으면 나한테 알려줍소." "그래요. 남정네 없으니깐. 살기 힘들어요. 종종 부를게요." 진달래는 삽작문을 나서는 상순의 떡돌 같은 뒤잔등을 미더운 눈길로 바라보며 마음이 든든해 한숨을 호 내쉬었다. 뒤이어 상순은 토성 안의 촌공소에 가서 할아버지에게 문안인사를 드리고 나서 그간 전쟁터에서 있은 일을 죽 이야기했다. 그는 충청남도 서천군 한산 면에서 명호 삼촌을 만난 이야기를 하고나서 한숨을 후 내쉬었다. “김치 움에서 병수가 함흥 촌에서 죽었다는 쪽지를 써서 함지 안에 남겨 놓고 왔습니다. 그걸 보면 명호삼촌이 얼마나 마음이 아파하겠습니까?” 허나 병완은 마른 기침을 깇을 뿐이었다. “ 우리가 괴뢰군에 포위됐을 때 명호 삼촌은 우리가 지원군이란 걸 뻔히 알면서도 김치 움에 숨겨 주었습니다. 삼촌과 영수는 괴뢰군을 쏘아눕히고 우릴 엄호해 빼돌려 주기까지 했습니다. 영수는 유격대를 이끌고 우리한테 인삼 삼촌부대를 찾아주었습니다. 병수 형이 잘못 된 걸 알면 삼촌이 얼마나 가슴아파하겠습니까?” 병완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니야, 우린 계급립장을 분명히 해야 한다. 공산당을 반대하는 자들과는 친척이라고 해도 한 하늘 아래 살 수 없다." 뒤이어 그는 상순의 세귀눈을 바라보며 물었다. “이제 공안국으로 돌아갈 예산이냐?” “아닙니다. 내 조선에 나갔을 때 진작 조직에선 천용구를 나 대신 국장으로 임명했을 겁니다. 마을에 돌아와서 할아버지와 아버지께 효성을 하고 처자를 돌보면서 혁명사업을 할 예산입니다. 딱 공안사업을 해야만 혁명하는 겁니까?” “그래. 난 이젠 늙었어. 네가 함흥 촌의 당 지부 서기에 촌장을 했으면 좋겠다.” 상순은 손사래까지 치며 확실하게 말했다. “할아버지께서 계속 촌장사업을 하시오. 난 할아버지를 도와 일하면 됩니다.” 병완은 정색해서 말했다. “그래도 명색이 지원군 영장과 복장공장 공장장에 사단 비서과 과장까지 한 네가 지방에 돌아와서 촌장이나 서기마저 하지 않아서야 되니?” 그러자 상순은 허리를 펴면서 가슴을 쭉 내밀며 말했다. “당원이 언제 벼슬을 바라고 혁명합니까? 밭고랑을 가로 타고 사회주의화 공산주의를 위해 일하면 됩니다.” “그래도 잘 생각해 봐라.” 상순은 오래 동안 마음을 굳혀온 듯했다. “나라와 마을 백성들의 쌀독을 책임지고 농사를 잘 지어 쌀독들을 꼴딱꼴딱 채우는 일만큼 더 중요한 사업이 어디에 있습니까?” 병완은 곰방대에 담배를 재워 넣으면서 벼슬을 초개와도 같이 여기는 막내손자를 대견하게 바라보았다. “하긴 백성들이 배불리 먹고 잘 사는 게 중요하지!” 성수는 집에 들어서며 손벽까지 치면서 “옳습니다. 잘 먹고 잘 살아야 한다는 말이 옳습니다!”라고 했다. 병완은 상순에게 그간 고충을 말했다. “지금 호조조를 하다가 합작사를 차리자니 저애가 많다. 제일 머리 아픈 게 저 아래골 집 동길이다. 정미소를 합작사에 바치자고 하니 내놓지 않겠다고 생 떼를 다 쓴다. 네가 좀 가서 설복해보렴.” “에이, 그 동생은 호조조를 할 때도 제 집끼리 농사를 지으면 좋다고 말썽이더니. 이번에도 그럽니까?” 병완은 성수랑 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동길은 쩍 하면 이런다. 같은 면적의 밭에 집체로 심으면 어떻고 개인으로 심으면 어떤가? 집체로 농사를 지으면 자기 집 일처럼 하지 않는다면서 집체생산을 반대하지 않겠니?” 상순은 벌떡 일어났다. “할아버지, 근심하지 마십시오. 내 가서 설복하겠습니다.” 그가 토성안집에서 나와 정미소 쪽으로 가는데 왁작 떠드는 소리가 났다. 가까이 가보니 동길이 한창 손으로 삿대질해대고 있었다. “이 정미소는 웃새집 할아버지와 성남집 큰아버지, 우리 아버지 함께 지은 거요. 우리 집안 개인 정미소나 한가진데 왜 합작사에 들여놓으라는 게요? 우리 무슨 지주요? 부농이요? 지주와 부농을 청산하듯이 정미소를 빼앗아 가면 되오?!” 그때 숱한 사람들 속에서 지춘실이 상순이 다가오는 것을 발견하고 고의로 팔을 걷고 떠들어댔다. “그 집은 원래 부농성분을 줘야 하오. 헌데 상순과 병완영감이 친척이라고 상중농으로 매겨놓아 그렇소. 이 정미소를 보오. 옛날 지주도 이렇게 큰 정미소가 없었소.” 그러자 마을 사람들은 여기저기서 이구동성으로 “옳소. 정미소를 합작사에 들여놔야 되오.”라고 떠들어댔다. 동길은 외사촌형 상순이 온 것을 보고 바다에서 지푸라기라도 붙잡을 양이었다. “형님, 말해 보오. 우리 정미소인데 왜 합작사에 들여놔야 하오? 이 사람들이 도리 있소?” 그러나 동길의 기대에 찬 눈길과는 상순의 말은 달리 엇나갔다. “이 정미소는 우리 아버지네 삼형제가 꾸린 건 사실이오. 허나 사회주의는 다 함께 잘 살아야 하오. 우리 몇 집이 이 큰 정미소를 차지해서는 안 되오. 그렇게 되면 사회주의 사회에서도 새 지주와 부농이 나오면서 빈농들과 빈부차이가 엄청나게 생기게 되오. 때문에 우리는 정미소를 헐값으로 쳐서 합작사에 들여놓고 집체로 이 정미소를 운영해야 하오. 자본주의 싹은 아예 자라지 못하게 뿌리 채로 싹싹 뽑아 버려야 하오.” 마을 사람들은 상순의 말에 우레와 같은 박수를 쳤다. “에이 씹에! 형님도 한가지구먼.” 동길은 성이 날대로 나서 목에 지렁이 같은 피 줄을 살구면서 고래고래 고함쳤다. “아무리 한 피 줄을 타고 나지 않은 형제라고 이렇게까지 못 살게 굴게 뭐요? 이젠 외할아버지고 외사촌형님이고 모르겠소.” 사실 김동길은 김범호의 후처의 맏아들이었다. 김범호의 첫째 처 곰순은(상순의 고모) 딸 하나만 달랑 낳고 애를 더 낳지 못하자 범호는 후처를 맞아들여 동길과 명길 등 아들 다섯이나 줄줄 낳았던 것이다. 범호의 후처가 낳은 숱한 아들은 기실 상순이네와 피를 나눈 형제는 아니었지만 형제취급을 했던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별의별 소리를 다 쳤다. “당신이 운들 어찌 하겠소? 사회주의는 혼자 잘 살라는 법이 없소.” “정미소는 사회주의 합작사 거요.” “정미소를 합작사에 들여놔야지.” “생떼를 쓰지 말라!” 상순도 동을 달았다. “동생, 별 수 없소. 우리 집과 큰집에서는 정미소를 들여놓기로 했소. 마을 사람들의 여론이 무섭지 않소?” 그러자 성이 꼭두까지 치민 동길은 주먹코를 벌름거리면서 퉁방울눈을 부라리며 고래고래 고함쳤다. “그럼 형님네도 우리 마을에서 제일 좋은 황소 곤두뿔을 합작사에 들여놓소.” 그 말에 상순은 두 말 없이 대답했다. “당장 들여놓겠다.” 그때 어느 새 왔던지 병완이 나서면서 한마디 보탰다. “우리 공산당원들은 대공무사하다. 나도 우리 집 황소 비녀뿔을 들여놓겠다.” 그러자 동길은 더 떼쓸 수 없었다. 씩씩거리던 그는 숱한 사람들 앞에서 괴춤을 까더니 그걸 빼들고 마을 사람들을 향해 오줌을 쏴 갈겼다. “이거나 먹고 다 썩어져라!” 지춘실을 비롯한 아낙네들은 아우성을 지르면서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돌아섰다. 동길은 그 길로 마을을 떠나 의란구로 가버렸다. 그 후 동길의 부모와 처자 그리고 형제들은 웃새집과 성남집 형제들이 아무리 말리여도 동길을 따라 의란구로 떠나갔다. 병완의 딸 곰순은 별 수 없이 의란구로 따라갔다. 그들 온 집안 식구들은 다시는 함흥 촌에 발길을 돌리지 않았고 웃새집과 성남집과 발길을 끊고 살았다. 다만 곰순만은 자기 낳은 딸 계월을 데리고 드문드문 놀러 오군 했다. 실로 피란 물보다 진한 것이어서 참말로 무서운 것이었다. 말썽이 많던 그 날, 상순은 외양간에서 곤두뿔의 고삐를 풀어 쥐고 마당에 나섰다. 기준은 낮에 있은 일을 풍문에 들었기에 상순이가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알아채고 마당에 나왔다. “얘, 기어이 합작사에 끌어가겠니?” 상순은 애지중지하던 곤두뿔의 턱을 쓰다듬어주면서 말했다. “아깝지만 합작사에 들여놔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 당원인 내가 어찌 마을 사람들을 이끌고 합작사로 나가고 인민공사를 꾸리고 사회주의 길을 따라 나가겠습니까?” 기준은 도리머리를 흔들며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며 곤두뿔의 넓적한 잔등을 어루 쓸었다. “참 아깝구나. 개체농사를 지을 때부터 이제껏 우리 부자간과 함께 소서구로 장개골안으로 숱한 밭을 갈던 곤두뿔이 아니냐? 우리 목숨과 같은 소야.” 상순은 아버지가 곤두뿔을 목숨처럼 아끼고 아까워하는 것을 알고도 남음이 없었다. “저 뒤에 진달래 큰아주머니랑 소도 없이 어떻게 농사를 짓겠습니까? 합작사에 소를 바치면 소가 없는 집들에서도 농사지을 근심이 없을 거 아닙니까?” 기준은 애 둘이나 데리고 과부로 사는 진달래네와 같이 어려운 사람부터 생각하는 아들이 대견스러웠다. 상순은 빗자루로 소잔등과 배, 엉덩이를 썩썩 씨원하게 쓸어주면서 정중하게 말했다. “저 모아선 너머 전국노동모범 김시룡동지는 전국에서도 앞자리를 차지하는 호조조를 꾸리고 고급합작사를 꾸렸습니다. 그는 사원들을 이끌어 집체농사의 모범을 보이면서 부유의 길로 힘차게 나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부터 공산당을 믿고 우리 집의 모든 것을 다 바쳐서라도 마을 백성들을 이끌어 모두 다 쌀독을 꼴딱꼴딱 채워놓고 배불리 먹고 사는 사회주의 새 마을을 건설해야 합니다.” 아들의 설득력 있는 말을 들은 후에야 기준은 몸을 돌리더니 가져가라고 손을 뒤로 휘저었다. 명옥은 문 앞으로 끌려 지나가는 곤두뿔을 보고 치맛자락을 들어 눈 굽을 찍었다. 이때 웃새집 병완도 비녀뿔을 끌고 합작사 외양간으로 오고 있었다. 숱한 마을 사람들이 병완과 상순의 대공무사한 거동에 혀를 끌끌 찼다. “당원들이 다르긴 다르오.” 며칠 후 진수해향에서 당위 서기 허백호와 향장 허영주가 함흥 촌 촌공소에 찾아왔다. 때마침 촌공소에서 병완과 상순이가 한창 뭔가 의논하다가 놀라운 눈길로 맞아주었다. “찾아가 인사하지 못해 미안합니다.” 상순은 뒤덜미를 극적거렸다. 그러자 허백호 서기는 빈정거렸다. “제 언제 상급을 존중한 적이 있소? 세상은 넓고도 좁소. 이거 보오. 제 또 내 아래서 일하게 되지 않았소?”  상순은 속으로 대들었다. (내 언제 당신 밑에서 벼슬하려고 기를 썼소? 흥!) 그런 속내를 모르고 허백호 서기가 자리에 앉자마자 희죽이 웃으면서 병완과 상순을 보고 말했다. “이렇든 저렇든 상순 동무는 내 오랜 수하요. 게다가 항미원조 전쟁에서 복장공장 공장장과 영장, 사단 비서과장까지 한 동지요. 상순 동지는 실전경험도 풍부하고 무예가 뛰어나오. 나는 허영주 향장과 토론하고 김상순 동무를 진수해 파출소 소장으로 임명하였소. 당장 이불짐을 싸가지고 진수해로 가기요.” 병완은 반가와 자리에서 일어나기까지 했다. “감사하오. 허 서기.” 허나 상순은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저를 잘 봐줘서 고맙습니다. 허나 파출소 소장을 사양하겠습니다. 제가 파출소 소장을 할 게면 영월구 공안국 국장을 내놓았겠습니까?” 병완은 상순을 욕했다. “이 놈아, 너를 관심하는 서기 앞에서 무슨 망발이냐? 한뉘에 이런 좋은 기회 몇 번 있을 거 같냐?” 허영주 향장도 상순의 손을 붙잡고 사정하듯이 말했다. “상순이, 파출소 소장을 하오. 자넨 이후에 우리 현 공안국 국장으로 제발될 수도 있네.” 허나 상순은 바로 앉더니 똑똑히 말해 두었다. “감사합니다. 저는 벼슬을 초개와 같이 여깁니다. 시골 마을에서 부모를 모시고 효성을 하면서 이 마을 백성들을 이끌어 사회주의 새 농촌을 건설하겠습니다. 농민들이 쌀독에 쌀을 꼴딱꼴딱 채워 놓고 배불리 먹으면서 살게 하겠습니다.” 허백호 서기는 도리머리질 했다. “제 하지 않아도 소장을 할 사람이 쌔고 버렸소. 몸값을 작작 올리오. 영월구 공안국에 있는 허영호나 성우 동무도 있소.” 상순은 좋아라고 찬성했다. “그러십시오. 그 동무들에게 소장을 시키십시오. 전 함흥 촌에서 혁명을 하겠습니다.” 허영주 향장은 너무나도 안타까와 야단쳤다. “이보게, 상순이, 당 조직에서 다년간 자넬 배양한 게 아깝네. 나라 기둥감을 이런 시골에서 호미를 휘두르게 할 순 없네. 그럼 시내에 가서 향 공급판매합작사 주임을 하오.” “합작사 주임이라니 무슨 말씀입니까?” 상순은 세귀눈을 치켜뜨며 물었다. 허영주 향장은 상순을 믿음에 찬 눈길로 마주보았다. “함흥 촌 촌장과 당 지부 서기에는 자네 할아버지가 있잖소? 상순 동무는 진수해로 내려가 우리 유력한 조수로 돼주오. 현에서도 상순동무를 상응한 직위에 사업배치를 할 거요.” 허백호 서기는 눈귀에 안타까운 빛을 흘리며 말했다. “상순이, 촌 합작사와는 달라. 향 합작사를 진수해 시내에 차리게 됐네. 향 합작사에서 주임 겸 당 지부 서기를 하오.” 그러자 병완은 제꺽 상순을 권고했다. “상순아, 합작사 주임을 해라. 시내에 가서 공호가 되면 얼마나 좋니?” 상순은 세귀눈을 내리깔고 한참 생각하다가 한숨을 후 내쉬었다. “제 마음은 이미 정해졌습니다. 두 분이 저를 양성해주고 봐 주는 성의는 백골난망입니다. 초야에서 나라와 백성의 쌀독을 책임지는 일만큼 위대한 일은 없습니다. 시내에 가서 합작사 물건을 팔면서 안일하게 살 궁리는 꼬물만치도 없습니다.” “상품과 돈을 다루는 일엔 자네와 같이 청렴하고 철저한 관리일군이 필요하네.” 허영주 향장의 목소리에는 간절한 애정이 배여 있었다. 허나 상순은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더니 나지막하나 아주 똑똑히 말했다. “정치를 하는 사람이 합작사에 들어앉아 과자나 팔아 뭘 하겠습니까? 저를 놔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허백호 서기는 한숨을 후 내쉬더니 도리머리 질 하며 일어났다. "그럼 내 대신 향당위 서기를 시키면 하겠다는 말이오?" "아니, 이건 무슨 말씀이오? 절대 그런 뜻이 아니오." 기실 허백호와 상순은 나이도 별로 차이 없었고 경력도 비슷했다. 허백호가 민주련군 련장할 때 상순은 련 지도원을 했고 나중에 영장에 임명됐지만 하지 않았다. 허백호가 영월구위 서기를 할 땐 상순은 영월구공안국 국장에 뒤이어 현 공안국 국장을 하지 않았는가. 상순은 항미원조전쟁에 참전해 영장에 사단 비서과장까지 했기에 기실 허백호보다 더 높은 경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상순은 허백호를 항상 존대하였다.     그러나 허영주 향장은 자기 련장할 때 상순이 기관총반장을 한 적이 있다고 항상 상순의 상급으로 자처하면서 우쭐거렸다.    그는 장탄식했다. “사람이, 파출소 소장이라도 시킬 때 하지 않고. 참, 꼭 후회할 거오.” 향 령도들이 떠나간 후 병완은 연 며칠 상순에게 파출소 소장을 하라고 재삼 권했다. 하지만 상순의 마음은 패용천산처럼 끄떡 움직일줄 몰랐다.      패용천산 절벽은 퍼런 이끼를 들쓴 채 세월의 세찬 풍파에도 끄덕하지 않았다. 패용천산 꼭대기에서 산새들이 훨훨 자유로이 날아예고 있었다.  
119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81) 댓글:  조회:1675  추천:1  2017-09-19
                      4. 군복을 운송 군복공장의 식당에는 경사가 났다.식당 문으로 김이 물물 나오고 돼지고기 끓는 구수한 냄새가 식당 밖에까지 풍겨 나왔다. 허영희 주임은 전에 없이 열정이 나서 웃고 떠들며 식당에서 돌아쳤다. 그때 상순이 마른기침을 하며 들어섰다. 그녀는 웃음을 뚝 끊고 불자연스레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 오히려 상순은 아주 자연스럽게 영희 앞으로 가서 멈춰 섰다. “첫 땐데 재봉공들을 돼지고기국을 배불리 먹이오.” 영희는 생글방글 웃으면서 머리를 끄덕였다.       전사들이나 재봉공들은 식당에서 처음으로 돼지고기국에 새하얀 이밥을 배불리 먹으면서 웃고 떠들었다. 그들은 돼지고기랑 입쌀은 상순 공장장과 허영희 주임 등이 미군 전투기 폭격을 무릅쓰고 얻어온 것이라고 혀를 끌끌 찼다.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상순과 허영희 주임을 여간 칭찬하지 않았다.      "군중들 생활을 잘 관심하는 분들이야."     " 좋은 책임자들이야.” 어떤 재봉공들은 “우리 군복을 더 많이 만들어 그들에게 보답하자.”라고까지 했다. 허영희는 재봉공들에게 시원한 김치를 대접하려고 대야를 들고 김치 움으로 사뿐사뿐 다가갔다. 그때 상순이 식당을 돌아보다가 바깥에 나오는 것이 눈에 띄었다. 그녀는 김치 움에 들어가면서 상순에게 맑은 눈길을 보냈다. “김치를 받아주겠어요?” 상순은 머리를 끄덕이며 영희를 따라 김치 움으로 갔다. 이윽고 영희가 김치움에 들어가더니 대야에 김치를 담아 올려 보냈다.  상순은 김치대야를 받아 움 옆에 놓고 서성거렸다. “빨리 손을 좀 당겨주세요.” 김치움에서 영희의 목소리가 들렸다. “에이고, 고까짓 김치 움에서 혼자 나오지 못해? 쯧쯧.” 상순은 꺼먼 김치 움 아구리에 손을 들이밀었다. 그런데 허영희는 손을 잡고 올라오는 것이 아니라 상순을 김치 움 안에 잡아 당겼다. 쿵덩! 아무런 준비도 없은 상순은 김치움에 쿵 떨어지면서 영희 몸 위에 넘어졌다. 이윽고 누군가 김치움 덮개를 닫아버렸다. “숱한 재봉공들이 김치를 먹자고 기다리는데 이게 뭐요?” “정인군자인 척 하지 말아요. 이후엔 김치 잡숫겠어요? 하면 이 김치 움으로 따라 들어오세요.” “저 김치는 어쩌오? 눈보라에 흙먼지 들어가겠소.” 그러자 영희는 김치 움 덮개를 열고 머리를 바깥으로 내밀고 두리번거리더니 김치 대야를 되들여왔다. 영희는 김치 움 덮개를 살짝 덮는 것이었다. “됐어요.” 영희는 말을 마치자 상순한테 다가와 품에 와락 안겼다. 상순은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깜짝 놀랐다. 풍만한 영희의 가슴이 밀착해오며 압박하면 할수록 숨조차 상순은 거칠어지고 아랫배가 찡해나는 것을 금치 못했다.  "안되오. 난 중공 당원이오." 상순은 영희를 떠밀어 버리었다. 영희는 상순을 더 꼭 끌어안으며 종알거렸다. "또, 또,  당원은 사람이 아닌가요?" "중공 당원은 특수강철로 만든 사람이오." 상순은 말을 마치자 영희를 밀어내고 김치 움 덮개를 열고 훌쩍 바깥으로 뛰어 나갔다. 김치 움 안에서는 영희의 울분소리가 들렸다. “당신은 꼭 후회할 거예요. 언젠가는 제 발로 김치 움으로 올 거예요.” 상순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김치대야를 안고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전사들과 재봉공들은 김상순과 허영희가 입쌀밥에 돼지고기국까지 대접한데 고마워 낮에 밤을 이어 더욱 정성들여 군복을 지었다. 그리하여 군복공장에서는 군복 짓기 임무를 앞당겨 완수했다. 상순은 식당에서 밥을 먹으면서 한숨을 후 내쉬었다. (이젠 동복을 다 생산했으니 한 시름 놓게 됐어.) 이때 허영희가 식당아줌마와 뭐라고 말하더니 돼지고기 장국과 밥그릇을 들고 와서 상순과 마주해 앉았다. 이윽고 영희의 분부를 들은 아줌마가 돼지고기 장국 그릇을 들고 상순의 앞으로 다가와 앉았다. 그녀는 주위를 흘금흘금 곁눈질하더니 상순의 국그릇에 돼지고기를 골라 덧놓아주었다. “감사하오.” 아줌마가 가자 상순은 영희를 빤히 들여다보며 국물을 맛나게 후룩후룩 들이켰다. 영희는 상순에게 맑은 눈길을 보내며 밥숟가락으로 자기 장국 사발에서 돼지고기 점을 떠서 상순의 그릇에 담아주었다. 상순은 남들이 보는 거 같아 그대로 받아먹으면서 영희를 곁눈질해 보았다. 보름달 같은 얼굴에 복숭아 이마, 버들잎 같이 짙은 눈썹, 이글이글 반짝이는 봉이 눈, 오똑한 코, 애교 섞인 평안도 말을 쏟아내는 조그마한 입. 인물체격이나 어디를 보아도 함흥 촌에 있는 명옥 보다, 지어 춘실 보다도 훨씬 뛰어난 여인이었다. 순간 상순은 아랫배로부터 찡 치밀어 오르는 정욕을 금할 수 없어 마른 침을 꼴깍 삼키며 숟가락을 놓았다. 그 모든 것을 다 꿰뚫어 본 듯이 영희는 상순에게 눈짓하더니 머리를 다소곳이 숙이면서 나직이 속삭였다. “김치 생각이 나는가요?” 허나 상순은 땅이 꺼지게 한숨을 짓더니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아니, 돼지고기를 잘 먹어 배부르오.” 영희는 앵돌아지면서 입귀를 삐쭉했다. “김 공장장은 입 안에 다 들어온 시원한 김치도 잡숫지 않을래요?” 상순도 능글스레 재담을 엮어댔다. “돼지고기를 배불리 먹었는데 찬 김치를 먹고 배탈이 나면 어쩌오?” “따로 따로 먹으면 배탈이 날 리 있어요?” “따로 먹어도 배 안에 들어가면 한데 합쳐지지 않소?” “그 놈의 배는 김치도 먹지 못하는 멍청이 배구먼.” 상순은 밥그릇을 들고 일어나면서 굳은 마음을 보여 주었다. “당원은 특수재료로 만들어졌으니까.” 영희는 상순의 밥그릇과 숟가락, 저를 와락와락 걷어가지고 가면서 두덜거렸다. “김 공장장, 당원은 먹고 싶은 김치도 못 먹는 사람인가요?” 영희는 주방으로 들어가면서 상순에게 눈을 흘기었다. 숱한 재봉공여인들이 상순과 영희를 흘금흘금 곁눈질했다. 어느 날 오후, 퇀 참모장이 성수가 모는 자동차에 앉아 군복공장 울안에 들어섰다. 상순은 급히 마중 나가 손을 내밀었다. “참모장, 안녕하십니까?” 참모장은 상순의 손을 굳게 잡으면서 “김 공장장, 수고 많았소.”라고 하며 공장장 사무실 문 앞으로 갔다. “어서 들어갑시다.” “김 공장장이 먼저 들어가십시오.” 상순과 참모장은 서로 사양하다가 나중에 그 좁은 문으로 둘이 거의 동시에 비비닥거리며 들어갔다. 그런데 참모장의 배가 어찌나 다이아처럼 뚱뚱한지 숨을 헐떡거리며 겨우 비비며 들어갔다. 아줌마들이 그 모양을 보고 식당 안이 떠나가게 깔깔깔 웃어댔다. 참모장은 사무실에 들어가자마자 상순을 보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김 공장장은 전선으로 군복을 실어가는 임무를 맡아야 하겠소.” “예?!” 상순은 적이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나 인차 굳어졌던 얼굴근육이 느슨히 풀리며 싱글벙글 웃기까지 했다. “잘 됐습니다. 이제야 전선에 나가 양키 놈들과 통쾌하게 싸울 수 있게 됐군. 이 놈 골 안에서 아낙네들과 신경질을 쓰면서 지긋지긋해 어디 살겠습니까?” 상순은 기뻐 어쩔줄 몰라했다. "전선에 나가 미제 양키놈들 콧대를 분질러놔야지. 흥!" 참모장은 혈기 넘치는 상순을 보고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개성에서 정전담판을 하고 있소.” “그럼 난 양키 놈들을 잡아치울 기회도 없겠구먼.” 그러나 참모장은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아니오. 이 전쟁은 싸우다가 담판하고 담판하다가도 싸우는 판이오. 언제까지 걸릴지 누구도 예측하기 어렵소. 우리 부대는 지금까지 후방을 지켰지만 이젠 후방의 군수물자를 싣고 직접 최전선에 나가 양키 놈들과 싸워야 하오.” “거 잘 됐구나.” “음, 우리 운송대는 지금까지 후근총사령부 교통운송과 조남기 과장의 3단계 운송전략전술 지시에 따라 군수물자를 운송했소. 이전 같으면 우린 군복을 자동차로 철도연선에까지 운송하면 되었소. 이전엔 기차로 조선반도 중부까지 실어가면 거기서 다시 트럭으로 전선에 운송하고 그 다음 다시 인력과 축력으로 최전선으로 운송했지. 그런데 며칠 전 미제 날강도들의 폭격에 철길이 여러 구간이 끊어져 철로운송을 잠시 할 수 없게 됐소. 겨울이 닥쳐와서 전선에선 동복이 급히 수요되오. 전선의 장병들이 어떻게 겨울에 홑옷을 입고 싸우겠소. 철로운송을 잠시 할 수 없는 정황에 근거해 김 영장은 2련장과 함께 40대 운송자동차대대를 최전선으로 직접 호송해야겠소. 요즘 미군 전투기 봉쇄가 너무 심해 도로운송도 힘든 판이오.” 상순은 권총집을 뒤로 돌려 메면서 자리에서 우쭐 일어났다. “오늘 떠나랍니까?” “아니, 이 사람아, 급하긴 우물에 가서 숭늉을 달라 할 지경이구먼. 저녁이나 든든히 먹고 날이 어두워져 적기 공습이 적을 때 감쪽같이 공장 울안을 벗어나가게.” “옛! 알았습니다.” 상순은 공장을 돌아보며 근심했다. "복장공장은 어쩝니까?" "근심하지 마오. 3련장한테 공장을 맡길 예산이오." "예." 상순은 머리를 끄덕이고나서 말했다.  "조선 여성들을 잘 지도할 여성책임자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음. 누굴 시키면 좋겠소?" 상순은 참모장을 쳐다보며 엄숙하게 거천했다.  "허영희를 부공장장으로 시키면 어떻습니까?" "허영희?" "녜. 허영희는 지금  식당 주임을 하는데 령도재능은 있는 것 같습니다." 참모장은 통쾌하게 대답했다. "알았소."      그들은 한참 동안 이 말 저 말 하다가 해질 무렵에 공장장 사무실을 떠나 식당으로 들어갔다. 참모장은 허영희 주임을 불러 뭐라고 한참 말하더니 상순이 쪽으로 다가왔다. 허영희 주임이 울먹한 표정으로 다가오자 밥을 먹으며 웃고 떠들던 재봉공여인들은 웃음소리를 딱 죽이며 밥을 먹었다. 영희 주임은 주먹밥 한 꾸러미에 새파란 싹이 돋아난 무우 네 개를 넣어 들고 상순의 앞으로 다가왔다. “전선에 나가면 목이 마르고 배고플 거예요.” 영희는 머리를 다소곳이 숙이며 울먹울먹해 말하는 것이었다. 상순은 주먹밥꾸러미를 받으며 허영희 주임을 바라보았다. “이제껏 허주임 수고 많았소. 감사하오. 내 돌아올 때까지 복장공장을 잘 령도하오." "네-" 허영희는 머리를 끄덕였다. 그는 허영희 주임에게 분부했다. "주먹밥꾸러미 40개 더 만드오. 트럭마다 한 꾸러미씩 올려놔야겠소.” “알았어요. 김영장.” 허영희는 두 손을 맞잡고 머리를 수깃하고 식당으로 걸어갔다. 상순은 주먹밥꾸러미를 성수가 모는 제일 앞의 트럭 운전실에 가져다 넣고 음식점으로 되돌아왔다. 허영희는 식당 아줌마들과 함께 주먹밥을 꾸러미에 한창 넣느라고 여념이 없었다. 상순은 영희를 불러 쌀독 쪽으로 다가갔다. 영희는 다소곳이 숙였던 머리를 들더니 상순을 마주 바라보며 아주 진지하면서도 나직이 물었다. “김치 생각이 나는가요?” “아니, 군복을 싣고 전선으로 나가야 하는데 언제 김치 생각을 다 하겠소?” “전선에 나가면 김치가 없을 게 아닌가요?” “…” 허나 상순은 쌀독을 손수 일일이 열어보더니 영희한테 머리를 돌렸다. “명심하오. 숱한 재봉공들의 운명을 책임진 허 주임은 김치 생각을 하기보다도 쌀독과 물독을 꼴딱꼴딱 채워놓고 살림살이를 잘 해야 되오.” “예. 갈라지면서도 사업 말 밖에 할줄 모르는구만요.” 영희는 나직이 대답하며 돌아서더니 어깨를 들먹였다. 이윽고 그녀는 보꾸러미를 하나 상순에게 내밀었다. “뭐요?” “김치예요. 자동차에 싣고 가다가 생각 날 때면 잡수세요.” “?” 상순은 보꾸러미를 되돌려주면서 핀잔했다. "정말, 입만 열면 김치, 김치오?”  그때 옆에서 무슨 감투끈인지도 모르는 참모장이 영희를 보고 끼여들었다. “가져오오. 내나 가져다 먹기오.” "네." 영희는  머리를 끄덕이더니 상순을 힐끔 곁눈질하더니 김치보꾸러미를 들고 참모장한테로 다가갔다. 상순은 머리를 다소곳이 숙인 그녀의 어깨가 세차게 파도치는 것을 보았다. “참, 그간 허 주임이 김영장한테 정이 폭 들었구먼.” 참모장은 영희가 옆에서 뜯어주는 김치 한 잎을 저로 집어 먹으며 중얼거렸다. “김치가 너무나 맛있구먼. 김영장은 왜 호송 가는 길에 안 먹어?” 상순은 개의치 않고 어떻게 미군 전투기의 폭격을 피해 봉쇄선을 꿰뚫고 군복운송 임무를 완수할 것인가를 골똘히 궁리하고 있었다. 저쪽에서 흥수가 외까풀눈으로 상순한테 질투의 눈길을 보내며 남북골을 절레절레 저었다. (쳇, 저깟 놈 뭐가 대단해? 허주임이 왜 꼬리를 쳐?) 그는 이해되지 않았다, 춘실도 그렇고 허주임도 그렇고 왜 상순을 그렇게 따르는지. (저 놈 거기에 뭐 엿이라도 붙었나? 아님... 흥!) 얼음 쪼각 같은 겨울 해가 압록강 저쪽 산 너머로 꼴깍 넘어갔다. 부르릉 부르릉 트럭 엔징 소리가 공장 울안에서 요란하게 들리며 헤드라이트가 어지러이 여기저기 비추더니 멈춰 섰다. 상순이 참모장을 따라 울안에 나갔다. 운전수들은 트럭에서 뛰어내리자마자 세개 패로 나뉘어 자동차 앞에 줄지어섰다. 참모장은 운전수들 앞으로 나갔다. “동무들은 김영장의 지휘아래 이번 동복운송전투임무를 훌륭히 완수하리라고 믿습니다. 아래에 김영장으로부터 몇 마디 지시하겠습니다.” 운전수과 전사들은 열렬한 박수갈채를 보냈다. 상순은 전체 운전수들과 전사들에게 우렁차게 고함쳤다. “운전수들은 몽땅 식당에 들어가 저녁식사를 든든히 한 후 내 말을 들으라.” “옛!” 운전수들은 먼 길을 달려와 자기들을 염려하는 김영장이 고마웠다. 그들은 질서정연하게 줄을 지어 식당에 들어가 밥상에 마주 앉았다. 허 주임은 식당의 십여 명 아줌마들을 이끌어 치마에서 비파소리 나게 맴돌며 밥상을 차려 올렸다. 그때까지 상순은 운전수들의 밥상을 둘러보며 살피다가도 허주임에게 말해 모자라는 채나 돼지고기 국을 더 올리게 했다. 옆에서 상순의 거동을 보던 참모장은 패기 있으면서도 세밀한 상순의 사업 작풍에 여간 감탄해마지 않았다. 한참 후 상순은 2련장을 한쪽 구석으로 불러 나직이 말했다. “우린 통일지휘에 따라 군사행동을 해야겠소. 내가 총지휘를 맡고 2련장은 호위를 맡소. 운송패 운전수들은 희수 패장과 성수 패장이 맡아야겠소.” 2련장은 차렷 하고 거수경례를 올렸다. “옛!" "견결히 완수하겠습니다!” 희수와 성수는 한 마을에서 왔지만 전선에서는 상급이기에 특별히 존대를 써서 대답했다. 상순은 그들 둘의 손을 굳게 잡아주면서 물었다. “좋소. 무슨 어려운 건 없소?” 그때 성수가 나직이 말했다. “김영장, 운송 임무를 완수하는데 제일 위험한 건 그 놈 적기들 폭격과 기관총소사오. 이 많은 트럭이 한꺼번에 장사진을 치고 봉쇄선을 넘어간다는 건 정말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제일 먼저 미군 전투기와 폭격기가 날아오면 어떻게 대처하겠는가 하는 것부터 준비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상순은 유심히 들은 후 또 물었다. “미제의 지상군이 운송트럭대오를 습격하는 경우는 없는가?” “지금까지 그런 일이 없었습니다.” 상순은 머리를 끄덕이더니 머리를 숙인 채 한참이나 무슨 생각을 굴리었다. “흥수 반장은 할 말 없소?” 흥수는 능글거리면서 중얼거렸다. “우린 김영장 명령을 트럭 위에서 듣지 못할 가봐 걱정이지.” 상순은 머리를 끄덕였다. “음. 또 무슨 문제는 없소?” “이제 생각나면 다시 말하겠소.” 흥수는 입버릇처럼 상순에게 존대를 쓰지 않았다. 옆에서 그들을 지켜보던 참모장은 그들 셋을 둘러보면서 말했다. “이젠 출발하오.” 운전수들과 호위병들이 벌써 마당에 나와 줄지어 섰다. 그새 여재봉공들은 군복을 자동차에 다 실어 놓고 마당에 몽땅 줄을 지어 서 있었다. 미군 전투기의 폭격이 두려워 전등불과 등잔불마저 몽땅 꺼놓아서 공장 울 안은 까만 나라였다. 다만 땅바닥에 깔린 허연 눈만이 발밑에서 보일 뿐이었다. 상순은 운전수들과 호위병들 그리고 여재봉공들을 둘러보며 소리 높이 말했다. “그간 군복공장 여재봉공들은 동복생산전투임무를 훌륭히 완수했습니다. 동무들은 조선전쟁의 승리를 위해 위대한 업적을 창조했습니다. 최전선의 전사들은 동무들이 지은 동복을 든든히 입고 미제 승냥이들을 호되게 족칠 것입니다. 동무들, 수고했습니다!” 허 주임이 목멘 소리로 고함쳤다. “김영장과 호위병 아저씨들 수고했어요.” 여재봉공들이 따라 고함쳤다. “수고하겠어요.”   상순은 손을 들어 군례를 척 올렸다. “감사합니다. 그간 수고 많았습니다.” 상순이 운전수들과 호위병들한테 연설하는데 재봉공들 속 여기저기에서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군복운송 임무를 맡고 최전선으로 나가게 됐습니다. 미군 전투기와 폭격기의 폭격을 맞받아 봉쇄선을 꿰뚫고 군복을 제때에 최전선 장병들에게 운송해야 합니다. 우린 통일된 지휘아래 통일 지시와 신호에 따라 군사행동을 해야겠습니다. 나와 운전수들을 책임진 성수 패장은 제일 앞 트럭에 앉아 나가겠습니다. 적기가 날아오면 신호탄이거나 권총 두 방을 쏘아 적기경보신호를 보내겠습니다. 운전수들은 적기경보신호가 울리면 헤드라이트를 몽땅 끄고 달려야겠습니다. 적기가 기수를 숙여 내려오며 폭격하기 시작하면 절대 트럭에서 뛰어내려 숨지 말고 원래 달리던 속도보다 더 늦게 혹은 빨리 달리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그래야만 적기 폭격에 명중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운전수들은 김영장의 말을 듣고 속으로 여간 감탄해마지 않았다. “2련장과 흥수 반장은 제일 뒤 트럭에 앉으십시오. 군복을 실은 트럭 바곤마다 호위전사들이 3명씩 앉아 경기관총으로 적기를 조준 사격합시다. 헤드라이트를 끄고 달리는 트럭을 가파로운 굽인 돌이에서 인도하시오. 우린 목숨으로 우리 여재봉공들이 눈에 피발이 서게 지은 동복을 우리 장병들에게 전달해야 하겠습니다.” 상순은 군복공장 울안의 어두운 그림자들을 둘러보며 목청껏 외쳤다. “전체 동지들, 우린 나라를 보위하기 위해 조선전선에 나왔습니다. 이번 운송임무는 우리 숱한 장병들의 생사와  관계되는 관건적인 임무입니다. 나는 동지들이 훌륭히 해내리라고 굳게 믿습니다. 동지들, 동복운송 임무를 훌륭히 완수할 신심이 있습니까?” “있습니다!” 장내에서는 우레와 같은 함성소리가 울렸다. “출발!” 상순은 참모장과 3련장 그리고 허영희 부공장장 등과 일일이 악수하며 석별의 정을 나누었다. 상순이 영희 앞에 다가가 손을 내밀자 영희는 손을 꼭 쥐며 눈물이 글썽해 반쯤 외면하였다. "그간 수고 많았소. 허 주임. 아니, 이젠 부공장장이지." "저에 대한 관심 감사해요. 무사히 갔다가 돌아오세요." 그녀는 손으로 눈을 가리더니 돌아서서  어깨를 들먹였다.  순간 상순도 코마루가 시큼해남을 어쩔 수 없었다.  그는 작별인사를 마치자 부랴부랴 제일 앞 트럭에 가서 운전실에 들어가 성수 옆에 앉았다. 숱한 헤드라이트가 공장 울안을 벗어나자 두텁게 뒤덮인 칠흑 같은 어둠속을 누비며 남쪽으로 쏜살같이 달렸다.                                            5. 한 많은 따발령 차디찬 겨울해가 내리비추는 대낮에는 미군 전투기가 자주 덮쳐 오지 않았다. 하여 상순은 40여대 트럭대오를 거느리고 쏜살같이 남으로 달릴 수 있었다. 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했다. “이제 얼마 달리지 않으면 굽인 돌이 많은 따발령에 도착하게 되오. 미군 쌕쌔기는 항상 따발령 부근에서 우리 운송차량을 폭격하군 했소.” 성수의 말을 듣고 상순은 즉시 트럭 바곤에 나가 앉았다.  "뒤따르는 자동차마다 전할 것! 방공사격준비!" 뒤따르는 자동차가 뒤의 자동차에 대고 상순의 명령을 전달하며 고함쳤다. "뒤따르는 자도아마다 전할것! 방공사격준비!" 마지막 자동차에까지 전투명령이 전달됐다. 자동차마다 고사기관총을 운전실 위쪽에 걸어놓고 하늘만 살폈다. 땅! 이때 남쪽하늘에 파란 신호탄이 하늘로 날아올라갔다. 따발령 길을 닦으며 지키던 2련에서 적기 공습을 알리는 신호탄을 쏘아올렸다. 아니나 다를가.  구름 속에서 얭얭 요란한 소리와 함께 한 떼의 쌕쌔기가 날아왔다. 상순은 인차 허리춤에서 신호총을 빼 뒤쪽 공중에 쏘았다. 땅! 빨간 신호탄이 하늘에 날아올랐다가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졌다. 뒤따라오던 트럭의 전사들은 모두 고사기관총과 반자동보총으로 하늘을 겨누었다. 미군 쌕쌔기가 전투편대를 지어 뒤로 날아 지나갔다. 이윽고 기수를 돌린 미군 쌕쌔기들은 흩어지더니 뒤로 덮쳐들어 운송트럭을 향해 미친 듯이 소사하며 덮쳐들었다. 성수 등 운전수들은 사전에 상순이 포치한대로 쌕쌔기가 트럭을 조준해 소사하려는 순간 차들을 후퇴시켰다. 쌕쌔기는 트럭 앞에 헛사격을 해댔다. 상순은 경기관총으로 쌕쌔기들에게 한 배짐 맹사격을 가했다. 다른 트럭의 전사들도 공중에 대고 일제히 불을 토했다. 화력망을 헤가르며 쌕쌔기들이 겨끔내기로 덮쳐들어 후퇴하는 트럭을 조준해 기수를 숙이며 사격했다. 순간 트럭들은 상순의 지휘대로 이번에는 앞으로 쏜살같이 달렸다. 쌕쌔기는 또 트럭의 뒤꽁무니를 갈기고 말았다. 악이 날대로 난 쌕쌔기들은 트럭을 따라가며 소사했다. 그러나 해가 꼴깍 넘어갔다. 게다가 트럭들이 헤드라이트마저 꺼버리고 굽인 돌이 많은 따발령으로 달리는 바람에 조준해 소사하기 힘들었다. 이때 쌕쌔기들은 따발령 상공으로 날아지나가며 조명탄을 줄줄이 늘여놓았다. 순간 따발령이 대낮같이 환해졌다. 트럭이 아니라 개미가 기어가는 것마저 환히 볼 수 있었다. 미군 쌕쌔기는 제일 앞에서 굽인 돌이를 돌며 영마루로 달려 올라가는 성수의 트럭을 조준해 소이탄을 투하했다. 꽝! 꽈르릉! 요란한 굉음과 함께 소이탄이 폭발하면서 트럭이 달리는 굽인 돌이 길에 삼단 같은 불길이 치솟았다. 길바닥에도 폭탄구덩이가 벌집처럼 뚫려 트럭들이 앞으로 한발자국도 달려 나가기 힘들었다. 뒤에서도 폭발굉음이 울렸다. 뒤따라오던 트럭 주위에서도 불길이 활활 치솟아 올랐다. 상순과 전사들은 트럭에서 뛰어내려 쌕쌔기들을 향해 맹렬한 사격을 가했다. 그때 따발령을 지키던 2련 전사들도 고사기관총으로 미제 공중날강도들을 향해 밀집사격을 가했다. 질겁한 쌕쌔기들은 남쪽으로 도망쳤다. 상순이 살펴보니 제일 앞에서 달리던 성수의 트럭이 멈춰선 채 불이 달렸고 산기슭에 들어선 트럭 몇 대에서도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상순은 굽인 돌이를 꿰질러 나가 성수의 트럭에 뛰어갔다. 성수가 뛰어와 우는 소리를 했다. “아이고, 이걸 어쩌오?” “어째?!” “다이아 터졌단 말이오!” 상순이 뛰어가 다이아를 보니 폭탄파편에 맞아 터져 주저앉아 있었다. 뒤의 트럭들은 벌집 같은 폭탄구덩이들과 불붙은 성수의 트럭에 막혀 따발령을 넘을 수 없었다. 2련 련장이 황급히 달려왔다. "2련장 보고!" 상순도 거수군례를 올리며 명령했다. "2련장,  빨리 폭탄구덩이를 메꾸라!" "옛!" 2련장은 2련 전사들을 령솔해 폭탄구덩이를 메꾼다, 자동차에 달린 불을 끈다 하면서 맴돌아쳤다. 상순이 영마루에 올라가 두루 살펴보니 폭탄구덩이들이 파인 길을 내놓고 옆에 자그마한 호박길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 갈림길을 따라 올라가면 영마루를 넘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살았다, 살았어!" 그는 무릎을 탁 치더니 돌아와 소리쳤다. “성수, 군복을 뒤 트럭에 싣소.” “트럭은 어쩌겠소?” “길 옆으로 모오. 적기가 덮쳐오기 전에 우린 저 작은 길로 따발령을 넘어가기요.” “트럭을 버리겠소?” “옆에 몰아놓고 빨리 다이아를 바꾸오!” “알았소.” 성수는 운전실에 들어가 트럭을 겨우 길 옆으로 몰아갔다. 공기가 다 빠진 다이어 때문에 트럭은 요란한 엔진 소리를 내며 힘겹게 길옆으로 나갔다. 상순은 령마루 둔덕에 올라서서 손을 연신 휘둘러댔다. “쌕쌔기들이 덮쳐오기 전에 빨리 따발령을 넘어야 하오!” 몇몇 전사들이 성수의 트럭 바곤에 뛰어 올라가 불이 붙은 군복을 길옆에 던지고 너머지 군복을 제일 뒤에서 달려온 트럭에 옮겨 실었다. 상순은 전사들을 지휘해 폭탄구덩이에 자동차에 싣고 온 통나무를 부리워 임시다리를 놓았다. 뒤이어 그와 2련장은 굽인 돌이에 전사들을 배치해 트럭이 안전하게 갈림길 목을 벗어나 따발령을 넘게 손짓으로 지휘하게 했다. 다른 트럭의 운전수들은 환한 조명탄의 불빛을 빌어 트럭을 몰고 폭탄구덩이들과 성수의 차 옆으로 빠져나가 갈림길로 부르릉부르릉 달려 겨우 따발령을 넘어 달아났다. 성수는 숙련된 솜씨로 다이아를 바꾸고 운전실에 들어가 앉았다. “군복을 그만 옮겨 싣소. 이젠 우리 트럭도 달릴 수 있소.” 군복을 흥수네 트럭에 옮겨 싣던 전사들은 트럭에 앉으면서 반자동보총을 잡고 하늘을 살폈다. 상순은 2련장과 전사들과 작별하고 제일 마지막에 선 성수의 트럭에 올라갔다. 그는 고사기관총을 운전실 위에 걸어놓고 밤하늘을 살폈다. “빨리 이 자리를 피하기오!” 부르릉 소리와 함께 성수는 발동을 걸었다. 성수와 흥수는 트럭을 고속으로 몰아 따발령을 넘어 산 아래로 내려갔다. 이때 남쪽 하늘에서 또 쌕쌔기들이 덮쳐왔다. 그런데 하늘도 상순이네를 돕는지 조명탄이 하나 둘 꺼져버려 따발령은 새까만 나라로 돼버렸다. 그 틈을 타서 성수는 헤드라이트를 끈 채 트럭을 몰고 산 아래로 굽이굽이 쏜살같이 달렸다. 성수의 날랜 운전솜씨에 상순은 못내 혀를 끌끌 찼다. 쌕쌔기들은 또 하늘에 조명탄을 줄줄이 늘여놓았다. 하지만 그때는 상순이네 제일 마지막 트럭마저 따발령을 넘어 몇 킬로미터나 달아난 뒤였다. 쌕쌔기들은 따발령을 몇 바퀴 선회하더니 상순이네 트럭대오를 찾지 못하고서도 불 붙는 군복무지에 폭탄을 내리 던졌다. 2련 장병들은 고사기관총 맹사격으로 쌕쌔기 폭격에 화답했다. 꽈르릉! 꽈르릉! 따발령 쪽에서 우레와 같은 굉음이 울렸다. “하하하! 그 놈들이 헛수고를 잘 하는구나!” “폭탄을 아무데나 다 던져야 가볍게 돌아가지!” “상전한테 욕도 먹지 않고!” “허허허!” “하하하!” 상순이네는 한바탕 통쾌하게 웃으며 어둠을 헤가르면서 달렸다. 상순은 트럭대오를 영솔해 온갖 간난신고를 거치면서 달려 어느 산기슭에 도착했다. 북에서 떠날 때와는 달리 날씨가 꽤나 풀려 기승스레 불어치던 눈보라도 멎고 산과 들에 뒤덮인 눈도 찾아 볼 수 없고 드문드문 잔설이 보일뿐이었다. 이제 맵짠 추위가 서서히 물러가면 훈훈한 봄날을 맞으려고 만물이 살금살금 태동하고 있었다. 상순은 트럭대오를 산기슭 길옆에 멈춰 세우고 2련장을 보고 전체 대원들을 집합시키라고 했다. 이윽고 상순은 전우들을 돌아보면서 엄숙하게 말했다. “동무들, 우린 이미 최전선 남조선 땅에 도착했습니다. 이제부턴 하늘만 살펴서는 안 됩니다. 하늘과 길 주위를 몽땅 살펴야 합니다. 마을 백성이라고 해서 경각성을 늦춰선 안 됩니다. 우린 돌연습격을 방지하기 위해 여기서 잠시 쉬고 해 지면 다시 떠납시다.” 모두들 웅성거렸다. 상순은 트럭을 길에서 피해 산기슭 쪽에 세우게 한 후 전사들을 시켜 나무를 끊어다 트럭을 위장하고 군복 위에는 눈을 날라다 덮어놓았다. “모두들 자기 트럭에 올라가 눈을 좀 붙이오. 여기 어딘지 알아보고 운송노선을 결정하겠소.” 전사들은 모두 트럭에 올라가자마자 코를 드렁드렁 구르기 시작했다. 뒤이어 상순은 보초까지 세운 후 성수와 흥수를 데리고 산마루에 올라가 주위환경을 둘러보았다. 산 넘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밥을 짓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마을 하나가 보였다. 전쟁이 포화에 맞고 그을은 마을에는 온전한 초가집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었다. 대충 문짝을 달고 가마니를 처맨 타다 남은 집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어 한산해보이기 그지없었다. 상순은 성수를 돌아보며 “차대에 가서 쉬면서 만일을 대비하오. 난 흥수와 함께 저 마을에 가서 먹을 걸 좀 얻어 오겠소.”라고 했다. “그럼 언제쯤 돌아오겠소?” 성수의 물음에 상순은 “순조로우면 어둡기 전에 돌아올게.”라고 대답하고는 산 너머로 성큼성큼 걸어 내려갔다. 성수는 상순을 따라 가는 흥수를 보고 “형님, 남조선이오. 매사에 주의하오.”라고 했다. 흥수는 돌아보며 “트럭을 잘 지켜라.”라고 당부하고는 산 너머로 넘어갔다. 상순과 흥수는 산기슭의 마을 어귀에 이르러 한참이나 두리번거렸다. 마을에는 괴뢰군의 그림자도 얼씬하지 않았다. 상순은 흥수를 보고 손을 앞으로 휙 휘저었다. 둘은 아무 거리낌 없이 마을 제일 서쪽 집에 다가갔다. 굴뚝에서는 연기가 사랑스럽게 무럭무럭 피어오르고 있었다. 흥수는 군침까지 꼴깍 삼키면서 문 꼬리를 쥐어 당겼다. “주인님, 계시오? 에헴, 헴.” 집안에서 대답하기도 전에 흥수와 상순은 집안에 들어섰다. 젊은이가 부엌아궁이에 불을 때다가 와닥닥 일어서며 그들을 쏘아보았다. 가마 목에서 애를 업은 젊은 색시가 쌀 함박으로 쌀을 일어 가마에 얹다가 깜작 놀라 물앉았다. 윗방에서 웬 허리구부정한 늙은이가 기침을 쿨룩쿨룩하며 남자애를 안고 정지를 내다보다가 후들후들 떠는 것이었다. “겁나 마십시오. 우린 중국인민지원군입니다. 절대 백성들을 해치지 않는 인민의 군대입니다.” 상순은 젊은이 쪽으로 다가가면서 흥수에게 바깥으로 머리 짓을 했다. 흥수는 머리를 끄덕이며 신을 신은 채 윗방으로 올라가 늙은이 외에 다른 수상한 자가 없는가를 살펴보고 바깥으로 나가 울바자 안에서 망을 보았다. 상순은 젊은이의 눈길이 곱지 않은 것을 보고 다가가 말을 걸었다. “젊은이, 이 마을 어느 군에 속하오?” 젊은이는 머리를 숙이고 다시 물앉아 아궁이에 땔나무를 쑤셔 넣으면서 입 안의 소리로 대꾸했다. “충청남도 서천군이랑께.” “오- 우리가 밤중에 길을 잃어 이렇게 깊숙이 남조선으로 진군했군. 서천군 어느 면인가?” “한산 면이랑께.” “한산 면?” “예.” 상순은 무릎을 꺾더니 젊은이 옆에 쪼그리고 앉으면서 나직이 말했다. “아니. 한산 면은 경상남도 통영 한산 섬에 있어. 누굴 속이려고 드는가?” “누굴 속이긴 속여?” 상순은 대수로워 하지 않는 젊은이에게 물었다. “자넨 성이 뭐요?” "이씨." "본은?" “한산 이씨.” “한산 이씨?” “예.” 젊은이가 옆에 쪼그리고 앉은 상순을 이상한 눈길로 힐끔 곁눈질했다. 상순은 윗방에서 정지에 나온 머리 허연 늙은이와 젊은이를 번갈아 보았다. 어쩐지 그들이 남이 돼 보이지 않았다. “내 할머니 성씨와 같군.” “그래요?” 늙은이가 엉거주춤 일어나며 놀라했다. 젊은이는 믿어지지 않는지 콧방귀를 뀌며 아궁이에 땔나무를 뚝뚝 끊어 쑤셔 넣었다. 상순은 늙은이를 쳐다보며 물었다. “여기 한산 면에 한산이씨 많습니까?” “그럼. 우리 마을은 한산 이씨 마을이라지.” 늙은이의 말에 상순은 한숨을 후 내쉬었다. “우리 할머니 고향은 경상남도 통영 한산 면이라던가. 이 마을에 한산 이씨가 많을 줄은 몰랐습니다.” 늙은이는 두 눈을 크게 뜨고 상순의 아래위를 훑어보며 물었다. “혹시 자넨 간도에서 나온 거 아냐?” “그렇습니다.” “간도 어데서 왔어? 혹시 함흥 촌이라고 알아?” 상순은 뿌리를 드러낼 수 없어 반문했다. “그걸 물어 뭐 해요?” “아니, 거 별 일 아니야. 우리 고모가 광복 전에 명천에서 간도 함흥 촌으로 갔댔어. 헌데 찾을 길이 없어 그래.” “예? 그래 당신 고모가 명천 어느 마을에 있었습니까?” 상순은 적이 놀라며 늙은이를 뜯어보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본 것 같은데 기억이 나지 않았다. “명천 상우남면 운주동이였어.” “예? 우리 집도 명천 운주동에서 간도 함흥 촌에 이사 갔는데. 고모 명함 뭐요?” “혹시 이성희라는 할머니 알아?” “예?” 상순은 적이 놀랐다. “저의 할머니가 바로 이성희입니다.” “뭐라고?” 늙은이는 상순에게 다가섰다. “아니, 그럼 자넨 혹시 기준형님의 아들 아닌 기여?” “옳습니다. 난 막내입니다.” “너 그럼 상순이던가?” “예. 맞습니다.” 상순도 일어섰다. 늙은이는 “할머니 조카 명호인 기여.”라고 하며 일어났다. “아니, 여기서 만나다니?” 그는 상순을 와락 끌어안고 엉엉 대성통곡을 쳤다. “널 보면서 별로 기준 히야(형)처럼 생겼다 했지. 어쩜 부리부리한 세귀눈이 형을 신통히도 빼 닮았을까.” “아, 삼촌! 할머니는 생전에 오빠 일가를 얼마나 그렸다고. 흑흑흑.” 상순은 명호를 그러안고 섧게 울었다. 그는 명호 일가에게 간단히 할머니가 고향과 친척을 몹시 그리다가 돌아간 일을 얘기했다. “그랬구나. 끝내 고모는 고향에 돌아와 보지도 못하고 돌아가셨구나.” 명호는 눈물을 하염없이 흘리면서 머리를 끄덕이었다. 드디어 그는 우두커니 서 있는 젊은이 부부를 인사시켰다. “얘, 영수야, 형이야. 내 항상 외우던 고모님 막내손자야!”  “상순아, 이 놈은 내 둘째아들 영수야. 며느리도 시형을 인사해.” 영수는 땔나무를 놓고 일어나 어두커니 서 있었다. “이 놈아, 어서 인사해.” “형.” 영수는 겨우 목구멍으로 기어드는 소리로 난생처음 보는 상순을 “형”이라고 불렀다. 상순은 영수의 둥실한 어깨를 툭툭 쳤다. 뒤이어 머리 숙이며 인사하는 영수의 아내와도 인사했다. 명호는 상순의 손을 잡고 구들로 끌어당겼다. “어서 올라오게나. 바깥에서 얼었겠는데.” 상순은 구들에 올라가 앉으면서 명호의 무릎에 앉은 애 머리를 쓰다듬어주면서 물었다. “이 애는?” “오, 얘는 간도로 들어간 맏아들 병수네 아들애야. 장손 말뚝이지.” 명호는 장손 말뚝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중얼거렸다. “우리 아버지 계시면 이 놈 증손들을 보고 얼마나 반가와 했겠어? 오래 계셨더라면 저 작은며느리 잔등에 업힌 둘째 증손 쇠뚝이까지 봤겠는데 말이야.” 상순은 한숨을 후 내쉬며 물었다. “그래 병수형님네 아주머니는 잘 계십니까?” “에이고, 저거 남정 찾는다고 용천 연대장을 찾아갔어. 헌데 용천 연대장을 어데 가 찾아? 부대에서 용천 연대장이고 병수고 통 말 안 해 줘. 혹시 나 해 허 사단장을 찾아간다고 서해안전선에 떠난 지도 이젠 달포도 됐는데 종무소식이야. 이 난세에 여자 몸으로 총알이 빗발치는 싸움터에 찾아가 헤매는 기여. 우리도 위험하지만 혹시 여기 오면 병수를 찾을까 해서 헤매는 기여.” 명호는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었다. 상순은 의아해 한마디 물었다. “아니, 고향이 살기 좋은 통영 한산 섬에 있다던데 여긴 병수 형을 찾으러 왔다는 말입니까?” 그러자 나이와는 달리 허리마저 구부정하게 휜 명호는 간신히 허리를 펴면서 말했다. “그래. 아들 찾으러 싸움터 근처에 온 거야. 이전에 내 아버지와 함께 명천에 갔었다. 그런데 고모가 간도로 갔더라. 후에 아버님이 항상 고모를 외우다가 오누이의 생리별의 한을 품고 돌아가셨지. 맏이는 또 국군에 나갔지. 이전에 우리 일가도 간도로 가려고 했던 기여. 헌데 이 난시가 터져서 여기서 물앉은 기여. 이 마을에 와보니 우리 한산이씨 종친들이 많은 기여. 인심도 무지무지 좋고. 글케 이 마을에 물앉아 사는 기야. 아마 다시 고향 한산 섬에 돌아가야겠어. 여긴 조선인민군이 들어왔다 국군이 들어왔다 하면서 어찌나 톱질 하는 지 살기 어려워? 봐라. 너 중공군도 들어오지 않았나? 에이, 원 참.” 명호는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상순은 가마에서 쌕 김이 뿜기는 것을 보고 군침을 꼴깍 삼켰다. 명호는 땅이 꺼지게 한숨을 후 내쉬었다. “병수 그 놈은 무명고지에서 싸운 후 서울에 올라갔다는 말을 듣고는 이태 째 종무소식이야. 이 난세에 자손들을 건사하기도 힘들어. 그 놈이 어디에 살아 있으면 편지 한통이라도 보낼 거지. 자식을 기다리는 부모 맘 하나도 몰라. 불효자식 같은 놈.” 상순은 마음 한 구석에 병수 형을  붙잡아 총살당하게 한 일이 결리었다. 그러나 공산당원은 특수자료로 만든 강철전사라는데서 대의멸친한 처사를 후회하지 않게 됐다. 그는 숙였던 머리를 들고 바깥에서 흥수의 마른 기침소리가 나는 것을 보고 우쭐 일어났다. “삼촌, 내 인차 떠나야 하겠습니다. 밥이나 한보자기 싸줍소.” “그래. 이래 갈라지면 언제 또 볼가? 봐라. 넌 중공군이 되고 우리 병수는 한국군이 되지 않았나? 총부리를 마주 대고 싸울지도 누가 알아. 한심한 세월이지. 형제간에도 피를 봐야 하는 이 놈 전쟁? 에이구, 형제간에 맞불질하다  누가 죽겠는지 어떻게 알아?” “밥이 적어 어쩔까요? 더 지어드리지요.” 영수 아내가 행주치마에 손을 닦더니 쌀 함박을 들고 고방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아니, 제수, 그럴 새 없소. 밥을 얼마 지으면 100여명 배를 불리겠소?” 그 말에 영수는 “많이 왔군 그려.”라고 하며 아버지를 힐금 곁눈질하는 것이었다. 명호는 며느리에게 눈짓했다. “쌀독에서 인심이 난다고. 이 난세에 쌀독이 푼푼해야 밥도 많이 지어주지. 있는 밥을 먼저 줘 보내라.”       영수 아내는 함지에 밥을 퍼서 상순에게 주었다. 그러자 상순은 사양하지 않고 밥을 불룩하게 담은 함지를 안고 바깥으로 나왔다. 영수는 바깥까지 따라나와 말했다. "내 형은 국군이지만요. 난 유격대에 들어 싸우고 있어. 근심하지 말고 가요." "그래, 병수한테서 들었어." 상순은 이렇게 말하려다가 병수 일이 속에 걸려 목까지 올라온 말을 삼켜버렸다. 그런줄도 모르고 영수는 뒤따라오면서 계속 말했다. "이 부근에는 미군과 괴뢰군들이 득실거려요. 혹시 그 놈들캉 맞붙을 수도 있는기여. 유격대를 불러다 엄호해줄가보다." 상순은 손사래를 쳤다. "아니야. 우리 근심하지 말라. 괜히 신분을 폭로할게 있니?" "괜찮아요. 형을 위해서라면 까짓 신분이겠어요?" "그만둬라. 우린 곧 북상해 지원군 부대를..." 상순은 혀끝을 얼버무렸다. (내가 어찌 영수를 믿고 이런 말까지.) 그는 후회하면서 명호 삼촌 일가와 석별의 정을 나누고 어둑어둑해진 바깥으로 나갔다. 흥수는 못 마땅한 눈길로 상순을 가로보더니 뒤따라 나온 명호네 일가를 경계심에 찬 눈길로 매섭게 쏘아보았다. 순간 명호도 반자동보총을 든 흥수를 노려보았다. 상순은 집안에서 있은 일이 드러날가 봐 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밥함지를 안고 바삐 자리를 떴다. “젠장 밤중에 따발령 갈림길에 잘 못 들어서서 왕청 같은 데로 달려 왔군. 빨리 되돌아가야겠어.” 산을 넘는 그들의 뒤에는 석별의 정과 어둠이 반죽해 따르고 있었다.  
118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80) 댓글:  조회:1760  추천:1  2017-09-11
                               2. 압록강을 건너 어느 결에 동녘하늘이 희붐히 밝아왔다. 검푸르던 하늘이 어둠을 밀어내며 누름한 색을 띠기 시작하한다. 불그스럼한 고기비늘구름이 제법 은빛을 띠더니 먼 동산에 커다란 홍시 하나가 불쑥 떠올라 하늘가 산마루에 걸렸다. 그 빨갛게 타오르는 홍시 하나를 뜯어먹으려는 듯 빨갛게 타오르는 숱한 산마루들이 키 돋음을 하며 하늘로 치솟아 오르는 상 싶었다. 상순은 와닥닥 이부자리를 차고 일어났다. “아야, 어느 새 날이 밝았군.” 명옥도 옆에서 금자를 안고 누워 있다가 일어나 금자를 업으면서 눈물이 글썽한 눈으로 남편을 마주 바라보았다. “울지 마오. 여보, 아버지를 잘 모시고 애들 잘 키우오. 난 미제를 조선에서 다 몰아내면 마을에 돌아올 거요.” “양, 천번만번 무사히 갔다가 돌아오오.” 명옥은 한 고향 동갑친구여서 남편과 항상 대등의 말투를 썼다. 상순은 그것이 허물이 없어 좋았다. 상순은 명옥이 업은 너부죽한 금자의 볼에 뽀뽀 해주었다. “에이고, 이게 아들이면 얼마나 좋겠니?” “다음엔 내 꼭 떡돌 같은 아들을 낳아 줄게.” 상순은 머리를 끄덕이었다. 사람의 팔자는 타고 난 것인가? 금자를 낳을 때 명옥은 이상한 태몽을 꾸었다. 한번은 명옥이 마을 회의에 갔다가 모범이 되어 고운 꽃 한 송이를 탔다. 그녀는 그 고운 꽃송이를 가슴에 안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집에 와서 보니 이상하게도 꽃이 네모 번듯한 숫돌이 아니겠는가. 그 이상한 태몽을 꾼 후 금자가 품속에 날아들어 임신됐다. 그해 1952년 5월에 낳으라는 아들은 낳지 못하고 딸을 낳았던 것이다. 다음에는 꼭 아들을 낳으라고 상순은 넷째딸의 이름은 금자라고 지었다. 상순은 금자를 아들 대신 난 딸이라고 그리 고와하지 않았다. 그때 한 중이 지나가다가 상순이네 집에 와서 냉수 한 그릇을 얻어 마시고 상순과 명옥의 관상과 손금을 보고 이제 5년 후이면 이 집에 소가 밟아도 우글지 않고 하늘, 땅, 천재 신을 세 개나 업은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예언했다. 기준은 그 말을 듣고 억이 막혔다. “5년 후이면 며느리 마흔이 다 되는데 어떻게 애를 낳아? 손자를 보긴 다 틀렸구먼.” 명옥은 아들을 낳지 못한 죄책감에 가마 목에서 머리를 숙였다. 아들이 참군하는 날이 돌아오자 기준은 윗방에서 기침을 쿨룩거리면서 일어나 나왔다. 그는 생사를 기약할 수 없는 먼 길을 떠나가는 아들 앞에서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애썼다. “장하다. 사내란 골기 있어야 해.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버릴 수 있어야지. 이 놈의 전쟁이 언제면 끝나겠는고. 후-” 상순은 아침을 대충 먹 네하고 숟가락을 놓기 바쁘게 일어나더니 아버지에게 큰 절을 올렸다. “예로부터 충신은 효자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허나 저는 충신은 효자로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효성도 할 줄 모르는 사람이 어찌 나라를 위해 충성하는 충신이 될 수 있겠습니까? 이 아들은 전쟁에서 승리한 후 마을에 돌아와 효성을 다해 아버지를 모시겠습니다. 편안히 계십시오.” 기준은 가슴이 아파 그저 머리만 끄덕이며 목이 꾹 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상순은 머리를 홱 돌리더니 바깥으로 나갔다. 촌공소 앞에는 벌써 마을에서 참군하는 청년들을 실을 트럭이 서 있었다. 상순은 성수, 흥수, 조개덕의 병수, 희수, 명사수 태수, 창걸, 창욱 등 청년들과 함께 트럭에 탔다. 지춘실은 트럭 위의 흥수를 쳐다보다가 마을 사람들에게 손을 흔드는 상순에게 눈길을 돌리면서 욕설을 퍼부었다. “정말 호박 쓰고 돼지 굴로 들어간다. 야, 그 좋은 공안국장도 하지 않고 참군해 뭐 하니? 또 가겠으면 저 혼자 갈 게지. 남의 남편까지 끌고 생사를 모를 전쟁터에 갈 건 뭔가?” "흥! 여편네라고. 원, 뭘 알아 떠들어대?" 흥수가 도리머리를 젓자 춘실은 버들잎 눈섭을 치켜올리며 눈까지 흘겼다. "바보라구, 상순 밑에 졸개나 하나 더 보태줬지." 그러나 흥수는 춘실을 내려다보며 솟삿대질하며 고함쳤다. "작작 두덜거려! 내 무슨 한뉘 상순이 졸개 될락꼬?" 춘실은 눈을 흘겼다.  "별 상순보다 더 큰 벼슬 차례질 거 같소?" 흥수는 춘실이 아무리 두덜거려도 개의치 않고 딴 생각을 했다. (쳇, 내 이제 전선에 나가 전공 세우고 상순보다 높이 승급해서 본때를 보여줄테야!) 그는 또 다른 엉뚱한 생각도 했다. 참군해 남으로 쳐나가다가 고향에 들러 헤어진 지 오랜 부모를 찾아보려고 들었던 것이다. 병완과 창준, 기준, 그리고 상길이, 상우, 상훈이, 설봉이, 동선이 몽땅 마을 사람들 속에 끼여 상순에게 손을 흔들며 환송했다. 트럭이 상순이네를 싣고 부르릉 하더니 앞으로 서서히 움직여 나갔다. 명옥은 금자를 업고 봉자와 금숙의 손을 잡고 먼지를 일구며 달려나가는 자동차 뒤를 따라 달렸다. 그녀는 금숙의 손을 놓고 눈물을 닦으며 멈춰 서 어깨를 들먹였다. 춘실도 해월의 손을 잡고 뒤따라 달려가며 흥수에게 손을 마구 흔들었다. 상순이네는 진수해에서 며칠 동안 신병교육을 받게 됐다. 그때 이계삼 부서기와 허영주 부현장이 진수해 신병훈련소에 와서 상순을 찾았다. 상순은 한창 신병들을 훈련시키다가 그만 두고 반갑게 맞이했다. 혀영주 부현장은 상순의 손을 잡고 아쉬워했다. "상순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소. 공안국장을 그만두고 참군하다니. 참,  원." "남조선과 대만 특무들까지 싹 다 잡았기에 여기서 제가 할 일은 없습니다. 이제 우리 사회주의 조국을 지키고 조선인민들의 항미전쟁을 지원하러 나가야죠. 전선에 나가 미제 콧대를 꺾어놓고 싶습니다. 뭐? 세계에서 젤 강한 미군? 흥! 우리 조선 사람들의 매운 본때를 보여주겠습니다.." 이계삼 부서기는 상순이 이미 마음을 먹은 이상 어쩔 수 없었다. 그는 호주머니에서 종이쪽지를 하나 꺼내 상순에게 주었다. "이걸 가지고 가오. 부대에 가면 상부에 바치고 조직배치를 받소." 상순이 받아 펼쳐보니 소개신이었다. 항상 자기를 돕는 입당소개인들이었다. "감사합니다. 꼭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싸워 공훈을 세우겠습니다." 이계삼과 허영주는 대견하게 상순을 마주보며 두 손을 굳게 잡아주었다. 상순은 전선으로 떠나기 전에 아내와 순자를 데리고 순자를 데리고 큰누님 어금이네 집으로 찾아갔다. 매형 경인과 누님 일가는 그들 세 식구를 반갑게 맞았다.  경인은 맏손자 일웅을 보고 순자를 인사시켜야 하겠는데 어떻게 인사시켰으면 좋을지 몰라 망설였다. 순자와 일웅은 다 1944년생 동갑이었다. 그러나 일웅의 할머니는 순자의 큰고모여서 할머니 쪽으로는 순자가 일웅의 고모(아재)벌이었다. 그러나 할아버지 쪽으로는 순자의 어머니는 근덕(봉순)의 사촌누나이기에 순자와 일웅은 고모육촌오누이벌이 됐다. 나중에 어금이 나서서 애들이 부르기 편리하게 오누이로 치고 인사를 나누게 했다. 그런데 순자는 해옥을 아재라고 인사해야 했는데 어금은 어처구니 없어했다. “순자야, 우리 해옥이 아홉 살이나 이상이니까 아재라고 해도 되고 언니라고 해도 돼. 이래라. 아버지 쪽 친척들 앞에서는 언니로 인사하고 외가 친척들 앞에선 아재라고 불러라. 얘들 촌수도 원, 쯧쯧쯧.” 상순은 처녀티가 완연한 해옥을 보면서 큰누나에게 물었다. “해옥이 올해 몇 살이오?” “열아홉 살이다.” “오래잖아 시집가야겠구먼.” 어금은 생글방글 웃음 짓는 해옥을 가리키며 웃었다. “저애 어렸을 때 어쨌는지 아니?” 해옥은 어머니 팔을 잡아 흔들며 어린애처럼 응석을 부렸다. “엄마, 또 그 말을 하겠습니까?” 그러나 어금은 오래비 앞에서 계속 말했다. “한번은 저 애를 보고 감자를 파오라고 했더니 어쨌는지 아오? 글쎄 호미를 가지고 가서 감자를 뿌리 채로 뽑아 들고 감자를 뜯어낸 후 되 심어놓지 않았겠소? 호호호.” “엄마, 그만 말하오.” 해옥은 손으로 어머니 입을 마구 막았다. 어금은 머리를 뒤로 물리면서 계속 말했다. “난 감자 밭에 가보고 깜짝 놀랐소. 집에 돌아와 난 ‘어떤 놈이 우리 감자를 뿌리 채 다 파갔다고 욕했지.” 어금은 하나 밖에 없는 딸의 볼을 살짝 꼬집는 시늉을 하면서 “요 놈 계집애 소행인 것도 모르고. 호호호.”라고 하며 웃었다. 그때 경인도 한마디 했다. “에고, 한번은 저 애가 함박으로 쌀을 이는 게 너무 많이 흘린다고 쌀을 다 돼지 굴에 쏟아 던지라고 욕했지. 그런데 정말 쌀 함박을 들고 나가서 쌀을 돼지 구유에 쏟아 던지지 않았겠소. 허허허.” “하하하.” 상순이네 내외간도 우스워 웃고 말았다. 그러나 해옥은 홍당무로 된 얼굴을 두 손으로 싸쥐고 고방에 들어 가 숨어버렸다. 그들 오누이는 온밤 이왕지사를 얘기하면서 밤이 가는 줄도 몰랐다. 이튿날 오전에 상순은 진수해역에 나가 부대를 따라 떠나게 됐다. 큰누님 어금과 큰매형 경인은 눈물이 글썽해 상순을 전선에 내보냈다. 어금은 막내오라버니 손을 꼭 잡고 “아무튼 조심해 무사히 돌아오너라.”라고 하며 뜨거운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상순은 역에 나가 순자를 꼭 안고 뽀뽀 해주면서 “엄마 말을 잘 듣고 공부를 잘 해라.”라고 당부했다. 순자는 두 볼에 눈물을 흘리면서 머리를 끄덕였다. 상순과 신병들은 벼 짚을 깐 낡은 화물차에 하나둘 올라갔다. 명옥과 순자는 눈물을 흘리며 화물차를 눈이 뚫어지게 여겨보며 손을 자꾸 흔들었다. 그러자 상순은 종이를 둘둘 말아서 훌 내뿌리더니 손을 저었다. 명옥과 순자가 그 종이를 주어 보는 사이에 화물차 문을 사정없이 쓰르륵 쿵 닫히더니 상순과 처자들의 시선을 가로막아버리었다. “아버지!” 순자가 목 놓아 울며 손을 저었다. 화물차는 숱한 중국인민지원군 전사들을 싣고 처자들과 사정없이 갈라놓고 쿵쿵쿵 지심을 울리며 칙칙폭폭 전선으로 떠나갔다… 상순이 떠나간 후 마을에서 집 추녀 밑에 “영광스러운 군속”이란 패쪽을 걸어주었다. 허나 나그네 없는 상순이네 집은 말이 아니었다. 초겨울에 발라놓은 벽이 말이 아니었다. 기실 소똥과 흙이 벽에 얼어붙었다가 갈라 터져 하얀 서리 끼고 동기가 들어왔다. 집이 어찌나 추운지 명옥은 애들을 자기 배 위에 올려놓고 잘 지경이었다. 낮이면 기준과 명옥은 물을 끓여 흙을 이겨 집안에서 갈라터진 벽 틈을 바르고 또 발랐다. 그런데 금자가 오줌똥을 싸서 속내복도 입지 못하고 광목치마 바람인 명옥의 잔등은 오줌 똥물에 다 젖다 못해 얼음고졸이 질 지경이었다. 기준은 그 추운 겨울에 눈 덮인 소서구 골안에 올라가 쑥이랑 땔나무를 해 지고 돌아와 부엌에 내려가 불을 땠다. 그런데 구들 이곳저곳에서 연기가 어찌나 나오는지 온 집 식구들이 쿨룩쿨룩 콜록콜록 했다. 정말 추운 고생, 내군 고생까지 하면서 온 집 식구들은 언제면 추운 겨울이 지나가고 따뜻한 봄이 올까하고 고대했다. 어느 날, 너무 추워 불을 너무 많이 땠기에 그만 나무구새에 불이 달렸다. 다행히 기준이 제때에 발견하고 며느리와 함께 물독의 물을 퍼다 쳤기에 집에 불이 달리지 않았다. 한편 상순이네는 진수해에 가서 기차를 타고 심양에 가서 부대 편성을 받았다. 신병부대 수장은 상순이 바친 현당위 소개신을 받고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며 상순의 아래위를 훑어보았다. "상순동지는 참 대단하구만, 항일전쟁 때 벌써 기관총을 잡고 일제와 싸웠고 해방전쟁 때 탱크를 몰고 토비들을 쓸어눕혔구만. 련지도원, 영장, 현공안국 국장까지 했구만. 우리 부대 영광이오." "과분한 치하입니다. 이제 전선에 나가 꼭 새로운 공훈을 세우겠습다." "좋소." 부대에서는 상순의 뛰여난 전투경험과 령도능력에 근거해 그에게 지원군 모부 영장으로 임명했다. 그런데 흥수는 까짓 반장을 임명했다고 입에 따발을 걸 지경이 돼 뒤에서 투덜거렸다. "상순이 뭐 그리 내보담 대단해 영장을 시켜? 흥!" 이튿날, 상순은 신병영 장병들을 거느리고 기차를 타고 압록강 안에까지 달려갔다. 미군 비행기가 앵앵 날아와 압록강 바닥에 폭탄을 우박처럼 쏟아댔다. 꽈르릉 꽝꽝! 압록강 바닥의 얼음이 폭탄에 맞아 커다란 구멍이 벌집처럼 펑펑 뚫렸다. 흥수는 떡 서서 처음 흐릿한 하늘에서 날아다니는 미군의 쌕쌔기를 희구해 쳐다보며 구경했다. "야, 저 무거운 쇠뭉치가 어떻게 하늘을 날아다녀?" 얭- 그때 미군 전투기 한 대가 아츠러운 소리를 내며 날아와 기관총 소사를 했다. “엎뎌!” 상순은 달려나가며 흥수를 콱 밀치며 고함쳤다. 픽, 픽, 픽! 상순은 흥수의 몸을 덮으며 엎디었다. 그 바람에 흥수는 오른 팔에 부상당했다. “흥수, 괜찮소?! " "아니, 밀치긴 왜 밀쳐?! 그 바람에 몸뚱이에 구멍 날 번했잖아!” 상순은 흥수의 팔을 붙잡고 물었다. “어디 상하지 않았소? 비행기 날아오는데 언제 비행기를 구경할 새 있소? 죽이자고 미쳐 날뛰는 적기 아니오? 에이, 참! " 그는 전투경험이 없는 흥수에게 내심하게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이 답답한 친구야, 비행기나 포탄이 날아오면 엎뎌야 덜 상하오.” "흥! 엎딘다고 안 상해? 죽을 놈은 죽어! 쳇!" "아니오. 이후엔 비행기나  폭탄이 날아오면 꼭 엎디오. 폭탄은 땅에서 터지면 하늘로 올라가면서 더 넓게 퍼지오. 때문에 서 있으면 파편에 맞을 면적이 더 커지오." 상순은 흥수가 조선 땅을 밟기도 전에 오른 팔을 상한 것을 보고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위생원! 위생원!” 이윽고 위생원이 뛰어왔다. “빨리 상처를 처치하오.” “옛!” 이때 또 전투기 한 대가 미친 듯이 기관총 소사를 하면서 덮쳐들었다. “개 같은 양키 놈 새끼 어디 덤벼라!” 상순은 옆에 엎드린 사수의 손에서 경기관총을 빼앗아 들더니 벌떡 일어나 덮쳐드는 전투기를 사격했다. 픽, 픽, 픽! 상순의 옆에서 얼음 쪼각이 툭툭 튕겼다. 상순은 아랑곳 하지 않고 전투기에 경기관총을 퍼부었다. 그 바람에 전투기는 날개가 벌집이 돼 꼬리 빳빳해 도망쳤다. 상순이 전사들과 함께 일어나 몇 걸음 걷지 못했을 때 또 전투기 몇 대가 편대를 지어날아 왔다. 저쪽에서 고사포와 기관총이 불을 토했다. 이때 상순은 우렁찬 목소리로 명령했다. “적기를 향해 사격!” 중국인민지원군 전사들은 얼음판에 반드시 누워 기관총과 보총까지 하늘에 대고 불을 토했다. 적기 한 대가 꽁지에서 시꺼먼 연기를 뿜으며 남쪽하늘로 도망쳤다. 쿵 요란한 소리와 함께 적기는 먼 산에 처박혔다. 다른 전투기들은 동료가 추락하는 것을 보고 남쪽으로 도망쳤다. “어, 내 원수를 갚았다!” 흥수는 오른 팔을 쳐들고 고함치다가 상처가 아파 오만상을 찡그리며 오른팔을 내리워 붙잡았다. “빨리 도강하라!” 상순은 대안을 향해 팔을 휘둘렀다. 전사들은 은폐할데라고는 하나도 없는 강바닥을 재빨리 건너 조선 땅을 밟았다. 강 언제에 올라서자 상순은 한숨을 후 내쉬었다. 겨울의 토끼꼬리만한 해는 서산에 매달린 채 전운이 감도는 하늘에서 마지막 차디찬 빛을 뿌리더니 꼴깍 넘어갔다. 이튿날 이른 아침에 부대 장병들이 금방 아침 식사를 마치고 출발 준지를 할 때다. 찌프 한대가 먼지를 쌔뽀얗게 흩날리며 달려오더니 주둔지 마을에서 멈춰섰다. 찌프에서 뚱뚱한 수장과 경호원들이 내렸다. 알고보니 조춘성 사장이 상순을 찾아왔던 것이다. 그는 상순을 찾아낸 후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김영장, 새로운 임무를 주겠소.” “무슨 임무입니까?” 헌데 조 사장은 단도직입으로 말하지 않고 자꾸 에둘러 말했다. “김영장은 지방에서 공안국장을 했고 항일전쟁 때부터 지하당원이었으니깐, 각오가 높다고 보오.” 상순은 심상찮은 감을 느끼면서 조 사장의 입에서 무슨 임무가 떨어질지 몰라 조급하기만 했다. “무슨 임무인지 명령만 하십시오. 꼭 완수하겠습니다.” 조 사장은 상순의 어깨를 툭툭 치면서 말했다. “난 김영장을 믿소. 사실 겨울이 닥쳐왔는데 전선에서는 겨울군복이 많이 수요되오. 상급에서는 김영장에게 후방 군복공장 공장장을 맡기기로 했소.” “예?!” 상순은 자기 귀를 의심할 정도였다. “나는 미군 양키 놈들과 통쾌하게 싸우자고 몇 천리 떨어진 이곳까지 달려왔습니다. 그런데 왜 군복공장에 있으라고 합니까?” 상순은 단통 머리가 텅 빈 듯이 뗑 해났다. 허나 그는 군인으로서 명령에 복종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상순은 조사장을 보고 두덜거렸다. “그래 군복공장에서 아낙네들이나 영도하란 말입니까? 건 아낙네들이나 할 일이지.” 조 사장의 표정은 청석처럼 굳어 있었다. “김영장은 한개 련 전사들을 영솔해 군복공장을 보위하고 재봉침을 수리하고 군복을 지어야 하오. 그리고 두개 련으론 군복을 전선에 호송해야겠소. 군복공장의 여성들이 재봉침으로 군복을 짓는데 워낙 동복은 두터워서 마선이 자주 고장 난다오. 동복을 전선에 제때에 보내는 사업도 최전선에서 싸우는 것보다 못지 않은 전투 임무요. 전선에서 우리 지원군 전사들이 동상을 입고 얼어 죽는 것을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소. 지금 미제와 남조선 괴뢰군들은 이른바 '교살전'을 벌리면서 날마다 밤낮 숱한 비행기를 파견해 우리 후방공급선을 폭격하고 있소. 그 놈들은 우리 후방에서 전선에 량식과 군복과 무기, 탄약을 제때에 공급하지 못하게 해 우리 지원군과 조선인민군을 굶어죽고 얼어죽고 무기와 탄약도 없어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몰살당하게 하려고 망녕되게 시도하고 있소. 그리하여 후근사령부 교통운송과 과장 조남기동지의 지시에 따라 우리 사에서는 특별히 동무네 영에 이 간고한 전투임무를 맡겼소. 김영장은 전투지휘경험도 있기에 군복호송임무를 훌륭히 완수하리라고 믿소.”      상순은 새로운 임무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조 사장, 난 정말 총을 들고 싸우는 게 소원입니다. 허나 명령에 복종하고 새 임무를 꼭 완수하겠습니다.” 상순의 말에 조 사장은 머리를 끄덕였다. "좋소. 김영장은 전선에 나가도 훌륭한 지휘관이 될 수 있지만 후방에서도 뛰어난 공장장으로 될 수 있다고 믿소.” 상순은 한숨을 후 내쉬었다. 한참 후 그는 조 사장에게 물었다. “그래 우리 사는 몽땅 후방에 남습니까?” 조춘성 사장은 아주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 “양. 우리 사는 먼저 후방에서 군복도 짓고 군수물자를 전선에 수송하고 운송선을 지켜야 되오. 강을 건너면서 보지 못했소? 미군 비행기는 군수물자수송선을 차단하려고 여기까지 날아와서 무차별폭격을 감행한단 말이오. 지금 중국인민해방군 공군 비행대가  미제 적기를 혼빵내고 있소. 우리 공군 조선족비행사 리영태(리영태동지는 후에 중국인민해방군 공군 부총사령원, 중장으로 됐음.) 동지는  미군 비행기를 세대나 격추했다오." "참 대단합니다!" 상순은 엄지를 내밀었다. 조사장은 손을 내흔들면서 뒷말을 이었다. "미제는 2차 세계대전 때 독일과 일본 비행기를 수태 격추한 이른바 '왕패비행사'들을 우리 조선 상공에 파견해 폭격했소. 그 놈들은 천여시간씩 전투비행한 풍부한 비행기술을 가진 왕패비행사놈들이기에 개 잡은 포수처럼 우쭐거리면서 저공비행해 우리 군 수송선을 폭격하고 심지어 초가집도 놔두지 않고 폭탄을 내리전져 재더미로 만들었지. 그런데 우리 공군이 조선전쟁에 참가한 후부터 정황은 달라졌소.  리영태 등 나젊은 비행사들은 몇십 시간 밖에 비행한 경험하지 못한 비행사들이오. 그런데 안하무인이던 미공군 왕패비행사들이 글쎄 '햇내기" 비행사 리영태동지랑한테 련이어 격추당했소. 그후부터  미 USA  적기는 청천강 이북엔 드물어졌소. 아직도 드문드문 미제 공중날강도들이 여기까지 날아와 폭격을 감행하긴 하오. 그러나 그 놈들은 이전처럼 저공비행하지 못하다나니깐 폭탄명중률이 훨씬 낮아졌소.  여긴 아직도 전선이나 다름없소.” 상순은 머리를 끄덕이더니 점차 정서가 안정돼갔다. 조 사장이 돌아간 후 상순은 흥수가 든 집으로 찾아가 팔의 상처를 오줌으로 찜질을 해주었다. 그날로 조개덕의 창걸과 병수는 1련을 따라 전선으로  길닦이를 나갔고 한 마을에서 간 희수, 태수, 성수 등은 자동차를 몰줄 알았기에 2련과 함께 전선에 군복과 쌀을 운송하러 떠나갔다.  흥수는 팔을 상했기에 3련과 함께 상순을 따라 군용복장공장에 남게 됐다.        흥수는 원래 참군해 전선에 나가 높이 승급해 상순과 춘실한테 본때를 보이고 싶었다. 그런데 상순이  참근하자마자 영으로 돼 300여명이나 지휘하는 걸 보고 맥이 탁 풀렀다. 그는 그제야 자기아 상순은 천양지차라는 것을  느끼기 시작한 것 같았다. 질투가 나도 별 수 없었다.     (난 근본 상순의 적수가 아닌가베. 흥!)     흥수는 원래 기회를 봐 고향에 나가 부모형제를 찾아보려고 작심했었다. 그런데 조선 땅을 밟기 전에 팔을 상하는 바람에 생각을 바꿨다. 그는 전선에 나가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생각했다. 지어 군복공장이고 뭐고 인차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에라, 고향이고 뭐고 다 몰라. 후방에 남아 살아남는게 요긴해. 글케야 함흥촌에 돌아가 처자캉(와) 만나지.)        이튿날 상순은 한개 련 전사들을 데리고 산골에 자리 잡은 군용복장공장으로 갔다. 절벽 밑에 자리 잡은 학교 자리 군복공장 둘레에는 가시철조망이 촘촘히 늘어섰고 전사들이 대문 어귀에 삼엄한 경계를 서고 있었다. 군견 두 마리가 보초병들을 따라 공장 주위를 돌아다니면서 코로 흡흡 냄새를 맡고 있었다. 상순 일행이 군복공장 안에 들어가 보니 수십 명 조선 여성들이 동복을 짓느라고 숱한 마선 앞에서 눈을 뗄 새 없이 돌아갔다. 상순은 전사들과 군복공장의 여성들을 몽땅 공장 마당에 집합시켰다. 조선 여성들은 군인들처럼 줄을 맞춰 섰다.  상순은 높직한 둔덕 위에 올라서서 간단히 연설했다. “난 군복공장의 공장장으로 새로 부임돼 온 중국인민지원군 영장 김 상순입니다. 조선 여성동무들은 이제까지 전선보다 못지않은 동복 짓기를 했습니다. 이제부터 동무들은 나의 통일적인 지휘아래 재빨리 동복을 지어 전선에 보내야 하겠습니다. 동복을 전선에 제때에 보내는 사업도 최전선에서 싸우는 것보다 못지않은 전투임무입니다. 동복을 전선에 제때에 보내지 못하면 우리 전사들이 동상을 입게 됩니다. 총을 들고 전선에서 적들과 싸우는 것도 전투지만 동복을 짓는 것도 역시 아주 중요한 전쟁입니다. 여러분, 제때에 완수할 수 있겠습니까?” “있습니다!” 뒤이어 조선 여성들은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를 보냈다. 어떤 여성들은 미목이 청수한 상순을 보고 쑤군거렸다. "새 공장장은 미남이야.” 상순은 못 들은 척 하고 목청을 돋우어 고함쳤다. “이후에 마선이 고장나거나 무슨 어려운 일이 있으면 나에게 보고하십시오. 우린 제때에 어려운 문제를 해결해 줄 것입니다.” 그 말에 여성들은 박수를 보냈다. 동원연설이 끝난 후 상순은 먼저 전사 둘을 시켜 마선 몇 대를 공장장 사무실에 가져오게 했다. 그날부터 공장의 기술자를 불러 전사들에게 마선 수리기술과 군복짓기기술을 배워주게 했다. 상순은 후에 마선수리를 잘 지도할 목적으로 전사들과 함께 학도공이 돼 마선수리기술을 참답게 배웠다.       대부분 전사들은 인차 마선으로 동복을 짓는 일과 마선수리에 달라붙게 되였다. 그리하여 세개 조로 나눠 한개 조에서 8시간씩, 밤낮 24시간 교대해 재봉침(로어로 마선)을 세우지 않고 동복을 지었다. 그리하여 창고에는 그들이 지은 동복이 눈에 뜨이게 산더미처럼 쌓여갔다. 상순은 전사들을 데리고 수시로 공장주위를 돌면서 검사했고 전시이기에 밤이면 항상 등불관제를 강조했다. 등불이 환하게 켜지면 미군 전투기의 폭격을 당할 수도 있었다. 허나 전선에서 동복이 급히 필요 됐기에 미군 폭격기가 오지 않으면  전사들과 여성들이 낮에 이어 온 밤 석유등잔불을 밝히고  동복을 지었다.  상순은 전사들을 데리고 고장 난 재봉침을 손질했다. 밤장막은 절벽아래 공장을 두텁게 뒤덮어주었고 공장안에서는 바깥과는 달리 희미한 석유등잔불 밑에서 밤중까지 마선이 돌아가는 소리가 고르롭게 들리었다.                                           3. 군복공장     동녘하늘이 희붐히 밝아오자 상순은 일찍이 일어나 전사들과 함께 식전 군사훈련을 했다. 식당 아줌마들은 밥 지으러 식당으로 가면서 쑤군거리었다. “저 김 공장장은 세귀눈에 독살이 있어.” “너무 미남자야.” “반했어?” “호호호.” 그녀들은 깔깔거리며 웃다가 그만 쏘아보는 상순의 세귀눈을 보자 혀를 홀랑 내밀고 선불 맞은 노루들처럼 황급히 식당에 달아 들어갔다. 상순은 식당에 들어가 쌀독과 물독을 일일이 열어보고 누르스름한 입쌀을 한줌 쥐었다 스르르 쌀독에 쏟아 넣으면서 중얼거렸다. “이런 묵은 쌀을 먹고 어떻게 열 몇 시간씩 일해? 흥!” 상순은 식당 주임 허영희를 불러 물었다. “어디서 이런 쌀을 가져 왔소?” 허영희는 앞치마에 손을 싹싹 닦으면서 “그저 군부대에서 실어오는 대로 받아 두었어요.”라고 대답했다. 상순은 세 귀 눈을 부라리면서 호통쳤다. “식당 주임이면 쌀을 잘 검사해보고 받아놔야지. 재봉공들이 위탈이 나면 어쩌오? 철 모르내기는 살아도 때 모르내기는 못 사오.” 허영희는 눈뿌리 빠지게 비평받고 몸 둘 바를 몰라 쩔쩔 맸다. 이때 밖에서 부르릉부르릉 엔진 소리가 났다. 상순이 바깥으로 나와 보니 때마침 성수가 쌀을 트럭에 싣고 왔다. 상순은 성수의 옆 좌석에 앉은 책임자에게 눈길을 돌렸다. “쌀을 검사하고 부리겠소.” 식당에서 허 주임도 나와 동을 달았다. “전번에 어쩜 그런 쌀을 가져 왔어요? 재봉공들이 그런 쌀을 먹고 배탈이 나면 어떻게 해요?” “어쨌다고 오자마자 이 야단들이오?” “우리 공장에 새로 온 김 공장장이오.” 책임자는 깐깐한 상순에게 불쾌한 눈길을 보냈다. 상순은 어느 새 트럭 바곤에 올라가서 쌀 주머니를 풀고 쌀을 쥐여 보았다. 또 어떤 마대에는 또 누런 쌀이 들어 있었다. 상순은 전사들을 시켜 쌀 마대를 일일이 풀어보면서 좋은 쌀만 부리어 식당에 들여갔다. 후근 책임자는 눈이 동그래졌다. “아니, 절반 넘어 되돌려 보내면 우리 몇 번 더 실어 와야겠소?” 그 말에 상순은 “누가 이런 쌀을 실어 오라던가?”라고 하며 가라고 손을 바깥쪽으로 내흔들었다. 책임자는 난처해 뒷덜미를 긁적거리었다. “전선에서는 그런 쌀은커녕 물도 제대로 마시지 못하는데 후방에서 배부른 타령을 하다니?” “뭐라오?” 상순은 트럭에서 뛰어내려 책임자의 멱살을 틀어쥐고 흔들었다. “너 이놈, 군부대나 집안이나 흥하려면 쌀독과 물독을 꽁꽁 좋은 걸로 채워야 해. 공장에 썩은 쌀을 보내 항미원조 전쟁을 파괴할 예산인가?” 그제야 책임자는 머리를 숙이며 연신 “알았습니다. 다음부턴 좋은 쌀을 여기에 보내겠습니다.”라고 했다. 상순은 그래도 눈알을 데굴데굴 굴렸다. “아직도 내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어? 전선에나 여기나 나쁜 쌀을 공급해선 안 돼!” 상순은 성수에게도 사정 두지 않고 독기어린 세귀눈을 흘겼다. “자식, 다음번에 뜬 쌀을 가져와봐라. 아줌마들을 시켜 바지를 벗길 테야.” 허영희와 식당 아줌마들이 손으로 입을 가리며 키득거렸다. 운송 책임자는 트럭에 올라 성수를 보고 빨리 차를 몰아라고 했다. 성수는 가면서 차창 밖으로 손을 흔들었다. “상순아, 너 좋겠다. 꽃밭에 들어앉아서.” 성수는 트럭을 몰고 새뽀얀 먼지를 일구며 달아났다. 그 후부터 성수와 운송책임자는 다시는 식당에 나쁜 쌀을 실어오지 못했다. 식사 때마다 상순은 병사들과 재봉공 여성들이 먼저 식사하게 하고 제일 마지막으로 해 식당에 들어서곤 했다. 진짜 고생은 앞장서 하고 향수는 제일 마지막에 하는 당원다웠다. 허나 김 공장장이 온다 하면 허영희 주임은 눈치를 흘금흘금 보다가도 그의 사발과 접시에 밥과 채를 넘치게 푹푹 퍼주었다. 상순이 세귀눈으로 피끗 곁눈질해 보면 허영희는 새하얀 이발이 다 드러나게 웃으며 맑은 눈길을 보내군 했다. 상순은 밥을 먹으면서 어쩐지 자꾸 허영희 해말쑥한 얼굴과 풍만한 가슴에 자꾸 눈길이 가게 되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제길, 남들은 전선에서 목숨 내걸고 싸우는데 후방에 들어앉아 쓸데없는 궁리를 하다니.) 그는 자기도 모르게 쓴 웃음을 지으며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여성들은 모두 하얀 이밥을 먹게 된 후부터 상순을 존경하게 됐다. “이전에 뜬 쌀밥이 얼마나 맛이 없었니?” “야. 지금 밥은 정말 풀이 있는 게 맛있어.” “다 저 미남자 덕분이야.” 여성들은 상순을 칭찬하다 못해 나중에 인물 평가까지 해댔다. “우리 김 공장장 진짜 미남이야.” “얼마나 사내답게 생겼냐.” “저런 신랑 만난 색시도 꼭 예쁠 거야.” “두 말 하면 잔소리죠.” 그때 흥수가 “에헴!” 마른기침을 하며 뒷짐을 지고 다가갔다. 여성들은 힐끔힐끔 곁눈질 해보더니 말을 뚝 끊었다. “사담 작작 하고 부지런히 동복을 지어.” 흥수가 지나간 후 여성들은 턱을 쳐들고 혀를 한발씩이나 내둘러댔다. 그녀들은 작달막한 흥수는 상순과는 달리 별로였다. 힐끔거리는 외까풀 눈만 봐도 싫어했다. 물을 뿌린 듯이 조용하던 직장이 또 여기저기서 보글보글 끓기 시작했다. “저 이 반장 색시 꼭 미울 거야.” 이때다. “일하지 않고 뭘 하오?” 어데서 날아 내려온 듯이 상순이 나타났다. “범이 자기 흉을 하면 온다고.” 처녀애들은 혀를 홀랑 내밀더니 머리를 폭폭 숙이었다. 공장안이 다시 조용해지고 대신 마선을 돌리는 소리가 절주 있게 들렸다. 공장장 사무실에 돌아온 상순은 턱을 고이고 양미간을 찌푸리더니 번개같이 속궁리를 돌렸다. (감독만 해선 안 되겠어. 재봉공들의 사상교양을 해야지.) 쉼 시간에 상순은 200여명 재봉공여성들을 10개 반으로 나누고 10명의 반장을 선출했다. 상순은 반장들과 하나하나 개별담화를 한 후 반장회의를 열고 엄숙하게 말했다. “반장 동지들, 동지들은 모두 우리 복장공장의 골간들이오. 우리 군복공장의 여중호걸들입니다. 동지들, 자기 반의 학습과 노동, 기율을 책임지고 잘 관리할 것을 명령합니다. 잘 관리할 수 있겠습니까?” “옛!” “좋습니다. 난 여기 있는 10명 반장 동지들을 믿습니다. 이제 우린 달마다 생산총화를 짓고 우수한 자는 표창하고 후진들에게는 사상공작을 해야 하겠습니다. 어떻습니까? 신심이 있습니까?” “있습니다.” “좋습니다. 전체 회의를 합시다. 몽땅 마당에 집합하십시오.” “옛!” 여성노동자들은 10개 반으로 나뉘어 군인들처럼 줄을 지어 섰다. 공장장 상순은 그녀들 앞에 나서더니 다음과 같이 사상동원을 했다. “군복공장 전체 동무들, 정말 수고 많습니다. 전선에서 우리 장병들은 목숨 걸고 미제 양키 놈들과 싸우고 있습니다. 전선에서 우리 전우들은 소대가리도 얼어서 탁탁 틸 추운 겨울에 동복을 급히 입어야 됩니다. 우리가 하루 빨리 동복을 보내면 우리 전우들이 하루 덜 얼고 미제를 더 호되게 족칠 수 있습니다. 우린 총포성이 들리지 않는 전선에서 싸우고 있습니다. 언제 뉘네 남자가 어떻고 색시가 어떻고 잡담을 할 새 있습니까?” 이때 여성들 속에서 키득키득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때 반장들이 매서운 눈길로 그녀들을 쏘아보자 손으로 입을 가리고 머리를 숙였다. 상순은 계속 연설했다. “동무들은 나라와 인민군대가 부여한 사명감을 안고 분초를 다퉈 동복 한 벌이라도 더 빨리, 많이 지어야 합니다. 상급 후근부문에서는 동무들의 수고를 알고 새하얀 햇입쌀과 맛 나는 채소도 보내왔습니다. 우린 대소한이 돌아오기 전에 동복생산전투임무를 완수해야겠습니다. 완수할 수 있습니까?!” “있습니다!” 그녀들의 대답소리는 우레와 같이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나는 동무들이 꼭 완수하리라고 굳게 믿습니다.” 우렁찬 박수소리가 울려 퍼졌다. 대회가 있은 후 복장공장은 눈뜨이게 기율이 짜이고 생산열정이 하늘을 찌를 듯이 올라갔다. 상순은 재봉공들의 생활을 개선해 줘야겠다고 생각하고 허영희와 흥수를 불렀다. 영희는 상순의 세 귀 눈과 마주 칠까봐 머리를 다소곳이 숙이고 공장장 사무실에 들어섰다. “모두 거기 앉소.” 흥수와 허영희가 맞은편에 자리를 정하고 앉자 상순은 세귀눈으로 그들을 마주보며 말을 꺼냈다. “재봉공들이 하루에도 열대여섯 시간씩이나 일하는데 좀 영양보충을 시켜야겠소. 재봉공들이 쓰러지면 이제 일주일 안에 군복생산임무를 어떻게 완수하겠소?” “예? 거 참 아량 있는 생각인데요.” 상순은 마른기침을 “에헴.” 했다. 그러자 영희는 상전 앞에서 실례한 것 같아 혀를 홀랑 내밀었다. “강 건너에 가서 식량과 고기붙이라도 얻어 와야겠소.” “예?” 상순은 대답 대신 머리를 끄덕이었다. 상순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이 일은 우리만 알아야 하오.”라고 했다. “예. 알았습니다.” 이윽고 흥수와 허영희가 전사 넷을 데리고 들어왔다. 그날 오전 아홉시쯤 되자 성수가 트럭을 몰고 와서 입쌀과 생 배추를 부리었다. 상순은 흥수와 전사들을 데리고 계획대로 성수가 모는 트럭에 앉아 강 건너로 달려갔다. 상순은 비위장판이었다. 강 건너 마을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쌀을 동냥 하듯이 얻어냈다. 다른 마을에 가서는 금방 건립한 초급합작사 돼지우리에 돼지가 우글거리는 것을 보고 200근은 실히 될 돼지까지 얻어 트럭에 실었다. 점심때 그들은 웃음주머니가 흔들흔들해 성수가 모는 트럭에 앉아 귀로에 올랐다. 그들이 깎아지른 절벽 밑의 산굽이를 에돌아 금방 강바닥에 들어섰을 때다. 갑자기 하늘에서 얭- 요란한 소리와 함께 미 전투기가 네 대나 날아왔다. “적기다! 빨리 트럭에서 내려 피신하라!” 상순은 고함치며 옆에 앉은 허영희의 손을 쥐고 트럭에서 뛰어 내렸다. 한참 달리다가 언제의 커다란 콘크리트도관 안에 들어가 납작 엎드렸다. 폭탄이 강바닥에 떨어져 작렬하며 폭음이 귀청을 째지게 때렸다. 파편이 쌩쌩 날아와 도관 벽을 쳤다. 상순은 허영희를 품속에 꽉 끌어안고 위에 엎드렸다. 꽈르릉! 꽝! 꽝! 요란한 굉음과 함께 언 흙덩이들이 도관 앞뒤 구멍을 꽉 막아 버렸다. 순간 도관 속은 칠흑처럼 온통 새까맣게 돼버렸다. 상순은 몸을 벌떡 일으키며 손 더듬을 해보았다. 그런데 뜻밖에 그만 영희의 뭉글뭉글한 젖가슴이 손에 닿았다. 상순이 덴겁한 듯 황급히 손을 빼려는 순간 영희가 상순의 손을 꼭 잡았다. 상순은 전기에라도 붙은 듯이 황급히 손을 빼갔다. 그런데 이번에는 영희가 상순을 꼭 껴안고 놓지 않았다. “허 주임, 허 주임!” “예.” “상한데 없소?” “예. 김 공장장이 몸으로 뒤덮어준 덕분에. 김 공장장은 저의 구명은인이죠.” “우린 여기서 빨리 나가야 하오. 오래 있으면 공기가 희박해 위험하오.” “예.” 상순은 어둠 속에서 몸을 돌려 영희를 뒤로 물리고 들어오던 쪽을 손으로 흙덩이들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한참 단말마적으로 파고 또 파니 시원한 냉기가 도관 속으로 불어 들어왔다. “이젠 살았소. 이제 한참 파노라면 바깥이 나지겠지.” 그런데 영희는 뒤에서 상순을 꼭 껴안으면서 “좀 쉬십시오.”라고 했다. “뭐 하는 거요?” “누가 보는가요?” “보지 못해도 그렇지. 난 처자가 있는 나그네란 말이오.” “누군 처녀구먼요.” 상순은 영희의 팔을 뿌리쳤다. “그럼 더욱 근신해야지. 우린 당원이 아니오?” “당원은 사랑도 모르는가요? 전 첫눈에 사내다운 당신한테 반했는데요.” 상순은 흙을 파헤치면서 두덜거렸다. “나를 어떻게 보고 이러는 거요?” “우린 여기서 죽을 수도 있어요? 난세에 언제 죽을지 어떻게 알아요? 후회 없이 살지요. 전 당신과 함께라면 여기서 죽어도 괜찮을 거 같아요.” “허 주임, 정말 천만뜻밖이오. 남편 보기 미안하지 않소?” “저의 남편은 전선에서 희생됐어요. 자기 수하의 생활을 좀 관심해주면 안 돼요?” “…” “영웅도 미인관을 넘지 못한대요. 음충한 눈길로 노리다가도 정인군자인 척 하긴. 호호호.” "입 다물지 못해?” "픽!" "이 흙덩이나 받아 뒤에 쌓으라고."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상순은 갈구리 같은 손으로 흙덩이와 돌덩이를 억척스레 파서 뒤로 넘겼다. 뒤에서 영희는 그 흙덩이들을 또 자기 뒤에 쌓아올렸다. 또 한참 지났다. 도관 밖에서 부르짖는 소리가 들렸다. “김영장! " "허 주임!” “살았소. 허 주임, 우린 살았단 말이오.” 상순은 중얼거리다가 높이 고함쳤다. “우리 여기 갇혔소!” “아, 여기 있구만. 김영장, 허주임도 그 안에 있소?” “양, 흥수, 빨리 우릴 파내오.” “양, 빨리 파 낼게!” 바깥에서 왁작거리며 흙덩이를 치우는 소리가 들렸다. 한참 후 바가지만한 구멍이 펑 뚫렸다. 눈보라 치는 압록강 바닥이 내다보였다. "살았구나!" 상순과 허영희는 끝내 도관 속에서 기여 나왔다. “야, 우린 당신들이 잘 못 됐는가 했소.” 흥수와 성수는 상순을 끌어안고 어린애들처럼 풍풍 뛰었다. 상순은 사위를 두리번거리더니 트럭이 없는 것을 보고 황급히 물었다. “트럭은? 쌀과 돼지는 어쨌소? 상한 동무들은 없소?” 성수는 강 건너를 손가락질 했다. “누구도 상하지 않았소. 트럭은 내 저 강 건너 안전한 곳에까지 몰아다 피신시켰소.” 상순은 손을 홱 저었다. “빨리 강을 건너기오. 또 적기가 날아오겠소.” 그들은 재빨리 뛰어 눈 덮인 강바닥을 건너가 쌀과 돼지를 실은 트럭을 몰고 쏜살같이 군복공장으로 질주했다. 돼지가 트럭 위에서 겁기 띤 껌정눈깔로 전사들을 쳐다보며 꿀꿀 울어댔다.  
117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79) 댓글:  조회:1683  추천:1  2017-09-02
                                        12. 일망타진       얼음 쪼각 같은 겨울 해가 벌겋게 타오르는 저녁노을 속으로 숨으면서 마지막 찬 빛을 뿌리더니 서산으로 뉘엿뉘엿 넘어갔다. 어둠의 장막이 내리덮인 함흥 촌에 자동차 한 대가 헤드라이트로 마을을 누비더니 촌공소에 들어섰다. 천룡구 부국장이 로야령에 내린 특무들을 몽땅 생포하고 그 길로 민경들을 데리고 함흥 촌으로 달려왔다. 그는 자동차에서 내리자마자 상순에게 경례했다. “보고! 김 국장, 우리 현 공안국 민경들이 특무 잡으러 왔습니다.” “천 국장, 들어가기요." 상순은 자기가 양성한 천룡구 부국장을 대견하게 바라보았다. 그는 천룡구를 데리고 촌공소 안으로 들어갔다. 상순은 기둥에 매놓은 용천과 병수를 가리키면서 천용구 부국장에게 생포과정을 이야기하고 잔당을 나포할 작전방안을 얘기했다. “참 좋습니다. 허나 충국의 집은 위험합니다. 제가 거기에 가고 김 국장은 여기서 전투를 지휘하면 어떻습니까?” 분명 천용구는 위험한 특무잡이에 여기에서 수장인 상순 국장을 보낼 수 없었던 것이다. 천용구가 하는 말에 상순은 도리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안 되네. 내가 그래도 자네보다 충국이네 토성안집 형편을 더 잘 아네. 내 보건대 적들은 대낮의 총소리를 듣고 삼도만이나 다른 곳에 도망쳤을 수도 있소. 전소광은 삼도만과 이 지역을 손금 보듯 하네. 절대 소홀히 대적해선 안 되오. 내 소서구에 가고 자넨 여기서 쥐휘하게나.” “알았습니다.” 천용구는 상순 국장의 포치에 따라 민경들을 분조를 나눠 포치했다. 동산 쪽의 계수동쪽과 소서구 쪽으로도 수색하라고 명령했다. 또 한 개 분조는 함흥 촌 촌공소를 위주로 지키면서 용천과 병수를 구하러 올 수 있는 적들을 나포하기로 했다. 모든 작전을 다 포치하자 상순은 허영호 과장과 민경 둘을 데리고 소서구 어귀 충국이네 집 북쪽으로 가서 토성 밑에 난 구멍으로 들어갔다. 상순이 민경들을 데리고 집안에 불쑥 들어가자 장학산 부부는 깜짝 놀랐다. 충국은 손을 베개 밑으로 넣다가 멈췄다. 리국은 그만 두라고 충국의 옆구리를 툭툭 쳤다. 상순은 눈치를 채고서도 구들에 뛰어 올라가며 물었다. “권총은 어쨌는가?” 충국은 베개 밑에서 권총을 꺼내 자루 쪽을 공손히 내밀었다. 허영호 과장과 민경은 충국을 쏘아보며 권총집에 손이 갔다. 상순은 권총을 받아 탄창을 빼보았다. 놀랍게 촘촘히 박힌 싯누런 탄알을 보고 상순은 세 귀 눈으로 충국을 쓸어보았다. “탄알은 어데서 났니?” “전번에 전소광이 준 게다.” “왜 전번에 바치지 않았니?” “탄알이 없는 총으로 어떻게 전소광을 대적하니?” 상순은 머리를 끄덕이더니 권총을 되돌려줬다. “너를 믿는다. 전소광이 오면 가차 없이 쏴.” 충국은 머리를 끄덕였다. 상순은 집안을 둘러보면서 물었다. “왔다 간 놈이 없는가?” “오늘 저녁에 먹을 걸 가지러 올 날이네.” “음. 등잔불을 켜라.” 상순의 호령에 충국은 이상해 했다. “특무 놈들이 혹시 집안을 들여다보고 김 국장을 발견하고 달아나면 어쩌자고?” 상순은 코웃음 쳤다. “개뿔도 모르는 놈. 평소처럼 등잔불을 켜지 않으면 무슨 일이 생겼다고 특무들이 놀라 달아날 게 아닌가?” “오~” “장탄했니?” 그제야 충국은 머리를 끄덕이며 등잔불을 켠 후 권총에 장탄했다. 상순은 허영호를 보고 한 민경을 데리고 주방에 나가 숨어 있게 하고 한 민경은 북쪽 구들에 이불을 덮고 누워있게 했다. 자기는 남쪽 구들에 펴놓은 미련의 이불 속으로 들어가 누워 머리만 내놓고 동정을 살폈다. 미련은 부끄러워 키득거리었다. “오빠, 내 이불 속에 들어가면 난 어디에서 자오?” “옆에다 이불을 펴고 누워라. 딴전을 부렸다간 죽을 줄 알아.” “오빠한테 몇 번 죽었는지 모르겠소. 쩍 하면 죽인다고 해?” “시끄럽다. 어서 누워!” 미련은 별 수 없이 상순의 옆에 누웠다. 상순은 충국을 보고 “혹시 특무들이 들어와 옆에 누운 게 누군가 하면 미련의 신랑감이라고 해라.”라고 했다. 미련은 키득거렸다. “웃지 마라.” 충국은 이불을 덮고 누워 베개 밑에 권총을 넣고 매만지면서 착잡한 생각에 잠겼다. (전번에 전소광은 나를 보고 지주들로 유격대를 조직해 장백산에서 유격전을 벌리자고 했다. 국민당 천하를 되찾으면 우리 땅을 다 찾아 주겠다고 했다. 이 권총으로 상순을 쏴 죽일 순 있다. 하지만 건너 방의 민경 둘이 인차 덮쳐 올 거야. 안돼. 대만에 쫓겨 간 국민당 군이 언제 대륙으로 되돌아온다고 그래? 몇몇 특무들이 와서 유격전을 해서야 언제 공산당군의 천하를 뒤엎을 수 있겠는가? 800만 대군을 가지고서도 200만도 안 되는 공산군을 이기지 못해 대만에 도망친 주제에 유격전을 해? 봐라, 전소광이 온지 며칠이 안 돼 벌써 상순까지 와서 천라지망을 치지 않는가? 괜히 잘 못 서둘러서 보석된 내가 목이 댕강 날아나라고? 상순의 말대로 로실히 국민당 특무 잡이에 협조해 주고 관대처리나 받으면서 연명하는 수밖에 없다.) 한참 후 마당에서 바스락바스락 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미련이가 자꾸 이불 밑으로 발을 내밀어 상순의 허벅다리를 툭툭 치며 지껄이었다. 상순은 미련의 발을 이불 밑에서 밀어내고 바깥 동정에 귀를 도사렸다. 창 밖에서는 눈보라가 윙윙 휘몰아치며 모래알을 쥐여 뿌리는 듯이 창호지를 마구 두드리는 소리가 들릴 뿐이었다. 한참 후 바깥에서 눈을 밟는 빠드득빠드득 소리가 급촉하게 나다가 집 앞에서 잠간 멈추는 것 같았다. 이윽고 방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상순은 이불 밑에서 권총 안전띠를 풀고 문에 겨눴다. “왕형이 왔구만.” 충국은 상순을 들으라고 소리쳤다. 상순은 눈을 슬며시 뜨고 이불귀 밑으로 문어귀에 선 놈을 쏘아보았다. “초저녁부터 자는가?” “혼자 왔소?” “응, 전 퇀장이 나보고 먹을 거 가지고 오라고 했네.” 상순이 충국을 보니 베개 밑을 더듬는 것이었다. “남쪽 구들에 왜 두 사람이야?” “오, 내 매부감이 왔네.” “오, 그래?” 충국은 불시에 베개 밑에서 권총을 꺼내 특무에게 총을 겨눴다. “꼼짝 말라!” “자네 무슨 장난이야?” 그때 상순이가 이불을 젖히며 뒤에서 총을 겨누었다. “꼼짝 말라!” 왕발은 사태가 틀린 것을 알고 되돌아 도망치려고 했다. 그때 주방 문 뒤에서 허영호 과장이 총을 들고 막아섰다. 허나 왕발은 최후발악을 하려고 권총을 뽑아 들었다. 땅! “억!” 상순이 쏜 총소리와 함께 왕발이 허벅다리를 틀어쥐고 털썩 쓰러졌다. 그 놈은 땅바닥에 누워 총으로 맹호와 같이 덮쳐나가는 상순을 겨눠 방아쇠를 당겼다. 땅! 총소리가 울리며 천정이 펑 구멍 뚫렸다. 상순은 덮쳐들어 발로 왕발의 손을 꽉 밟고 총을 빼앗아냈다. 왕발은 권총을 들고 멍청히 서있는 충국을 보고 고함쳤다. “이놈아, 빨리 빨갱이들을 쏴! 안 그러면 넌 한평생 후회할 거야! 아이고, 저 멍청이야.” 허영호와 상순은 충국의 눈치를 살폈다. 충국은 부르르 떨리는 손으로 총을 구들바닥에 내려놓았다. 허영호 과장은 충국의 총을 몰수했다. “김 국장, 어떻게 돼 저 놈의 손에 권총이 있습니까?” “고험했어. 탄창에는 탄알이 없어.” 허영호가 탄창을 뽑아보니 빈 탄창이었다. 충국은 상순의 놀라운 솜씨에 놀라 축 늘어뜨린 머리를 쳐들지도 못하고 구들에 풍덩 물앉아 한숨을 후 내쉬는 것이었다. 상순은 미리 빈 탄창을 가지고 가서 충국의 장탄한 탄창을 검사할 때 제꺽 바꿔 넣었던 것이다. 다른 민경도 뛰어 들어와 바로 왕발을 꽁꽁 묶었다. 상순은 민경을 보고 나가 바깥에서 보초 서라고 한 후 왕발을 심문했다. “우린 네놈들의 계획을 다 알고 있어. 로실하게 탄백하면 관대하게 처리하고 항거하면 호되게 징벌할 테다.” “장관, 죽여 달라! 고달프게 굴지 말고 빨리 죽여라!” "남조선 특무 용천과 병수도 다 잡혔다. 전소광과 장광우는 지금 어데 있는가?” 왕발은 충국을 쏘아보았다. “네 놈이 우릴 팔아먹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구나.” “너도 전소광을 불어야 살아남을 수 있다. 목숨을 내놓겠는가? 탄백하겠는가?” 상순은 권총으로 왕발의 대갈통을 툭툭 찔러댔다. 죽음 앞에서 굴복하지 않을 놈은 없었다. “김 국장, 총살해 버립시다.” 허영호 과장(소장)이 재촉했다. 상순이 바깥으로 나갔다가 들어오더니 한족말로 “저 동쪽 계수동에서 적정을 알리는 신호탄이 하늘로 날아올라갔소. 이젠 이 놈이 필요 없게 됐소.” 라고 하더니 권총을 왕발의 대갈통을 겨눴다. 왕발은 황급히 새된 고함질을 쳤다. “제발 살려주오. 장관, 탄백하겠소. 탄백해!” 그제야 상순은 권총을 거두었다. “말해라. 쓸데 있는 말인가 보자!” 왕발은 머리를 툭 떨어뜨리더니 탄백했다. 원래 아침에 함흥 촌에서 총소리가 울리자 대만특무 전소광은 대뜸 용천이네가 잘 못 됐겠다고 짐작하였다. 그는 왕발을 보고 장충국이네 집에 가서 밥과 이불을 가지고 계수동 막바지 도가집 부근에서 만나자고 했던 것이다. “거짓말을 한마디라도 하면 넌 죽어!” 상순이 을러메자 왕발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비굴하게 빌었다. “장관, 내 어찌 목숨을 가지고 장난하겠습니까?” 상순은 계수동 쪽에서 적정을 알리는 신호탄이 올라간 적도 없었지만 기민하게 꾸며대 왕발의 속을 뽑아 보았던 것이다. 그는 민경을 보고 촌공소에 대만 특무 왕발을 끌어가게 하고 허영호 과장과 함께 쏜살같이 동쪽 계수동쪽으로 달려갔다. “김 국장, 나도 가겠네.” “집에 돌아가지 못할까?” 장충국은 권총을 쥐고 달려 와서 숨이 차 헐떡거렸다. “아니. 왕발이 가지 못하면 전소광이 의심할게요. 내라도 가면 그 놈이 마음 놓아서 체포하기 편리할 거 같소.” “음, 그게 그럴 법 하구나. 가자.” 상순은 계수동 막바지에 있는 도가 집으로 향해 올라갔다. 그들은 도중에서 계수동 골 안을 수색하던 천용구 부국장을 만나 작전방안을 꾸몄다. 그들은 인차 왕발 대신 충국을 앞세우고 포위 습격해 전소광과 장광우 두 대만특무를 체포하기로 했다. 민경들이 상순과 천용구의 지휘아래 충국을 앞세워 도가 집 부근을 거의 포위해 올라갔을 때었다. 도가집 부근 어둠 속에서 웅글진 목소리가 들렸다. “왕발인가?” “예.” “왜 사람이 그렇게 많은가?” “당지 지주들을 데리고 오오.” “먹을 건 푼푼히 가져 왔는가?” “예. 한 가마 밥을 다 가져 왔소.” 이때 도가 집 부근에서 한 놈이 앉아 송수하기를 걸고 무전기를 삑, 삑, 삑 치는 것이 보였다. 이윽고 동남쪽 하늘에서 비행기가 신호등을 번쩍이면서 날아왔다. 새로운 정황이었다. 상순은 인차 천용구와 귓속말을 주고 받았다. “즉시 전소광을 체포해야 하오.” “예.” 상순이 손을 홱 앞으로 휘둘렀다. 숱한 민경들이 쏜살같이 도가 집으로 짓쳐 올라갔다. “뭐 하는 짓이야?” 전소광은 놀라하며 허리춤에서 권총을 빼들었다. 허나 그때는 늦었다. 숱한 민경들이 덮쳐들었다. “충국이, 뭐 하는 거야?” “네 놈을 생포하러 왔다!” “아야, 마야(어머니!)” 전소광은 황급히 권총으로 충국을 쏘았다. 충국은 어깨를 붙잡고 쓰러졌다. “사격!” 민경들은 전소광을 향해 사격했다. 전소광은 숱한 총알을 맞고 즉살했다. 무전기를 치던 특무 장광우는 천용구와 상순의 씨꺼먼 총구 앞에서 두 손을 쳐들었다. 그런데 밤하늘에서 날아오던 적기는 장광우의 무전을 받고 황급히 기수를 건뜻 쳐들더니 황망히 고도를 높여 동남쪽으로 날아가는 것이었다. “에끼, 이 놈새끼, 그새 도망치라고 무전을 쳐? 어서 무전기로 저 비행기를 돌아오라고 하지 못할까?” 허나 장광우는 무전기로 자기들은 이미 몽땅 나포되었으니 다시는 연변에 특무를 파견할 궁리를 하지 말라고 무전을 쳤던 것이다. 상순은 즉시 명령을 내렸다. “사격!” 천용구 부국장이 거느리고 온 민경들은 고사기관총으로 꽁무니를 빼는 비행기를 조준해 불을 토했다. 상순은 성차지 않아 손수 고사기관총으로 멀어져가는 비행기를 사격했다. 따당 땅땅 땅땅땅! 불줄기가 적기를 향해 날아갔다. 허나 비행기는 어느 결에 어둠 속으로 멀리 사라져버렸다. 비행기가 사정거리를 벗어났던 것이다. 천용구와 김상순은 장광우 놈의 손에서 무전기를 빼앗아 냈다. “네 놈은 사형을 면치 못해.” 상순과 천용구는 자동차를 불러 전소광의 시체를 싣고 장광우를 압송해 가지고 함흥 촌으로 개선가도 높이 돌아갔다. 한차례 인심을 격동시키는 특무잡기전투는 승리로 끝났다. 모두들 총을 높이 쳐들며 승리의 희열로 차 넘쳤다. 어둠 속에 잠긴 함흥 촌 상공에는 구호소리가 밤늦게까지 높이 울려 퍼졌다. 이튿날 천용구와 상순은 민경들과 함께 자동차에 용천과 왕발 등 특무들을 꽉 박아싣고 승리도 개선가도 높이 영월구로 귀로에 오르게 됐다. 함흥촌을 떠나기 전에 상순은 허영주 서기와 할아버지께 허리를 굽혀 경례를 드린 뒤 자동차에 뛰어 올라가 공안국을 대표해 간단히 연설했다. “여러분, 우리는 공산당의 영도아래 미제의 훈련을 받은 남조선과 대만 특무들을 몽땅 나포했습니다. 보십시오. 특무 놈들이 비행기를 타고 하늘에서 날아 내리든지, 땅 속에서 기어 나오든지 모두 우리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상순은 격앙된 목소리로 고함쳤다. "일체 반동파와 지주악당, 반혁명분자들에게 엄중히 경고한다. 네 놈들이 감히 사회주의 조국과 우리 두 번째 고향 연변조선족자치구에 침략해 온다면 우린 인민무력의 강철의 힘으로 네 놈들을 견결히, 철저히, 모조리, 깡그리 소멸할 것이다!" 그는 뒤이어 군중들을 향해 우렁찬 목소리로 연설했다. "우린 중국 공산당의 영도아래 재빨리 사회주의 개조를 진행하고 모두 다 함께 잘 살 수 있는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사회를 건설해야 합니다.” 군중들은 “와-” 고함치며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를 보냈다. 용천은 무릎을 꿇고 앉아 상순을 쳐다보며 통사정했다. “나는 항일 유격대 대장 출신이여. 내 아들 경주를 데리고 대한민국 고향에 돌아가게 놔 달라.” 용천은 사람들 속에서 진달래와 경주를 찾았으나 보이지 않았다. “쳇, 이 놈이. 주둥이만은 살아서 목숨을 구걸하는가?” 상순이 욕지거리하며 용천의 죄악을 폭로했다. “네 놈은 조선인민군 연대장, 내 큰아버지 김성칠 동지를 살해한 철천지 원쑤놈이야. 우리 사회주의 조국을 뒤엎으려고 침투해 들어온 악질특무 놈이다. 백번 죽여도 마땅하다!” 군중들도 죽어 마땅하다고 했다. 이때 병수가 병완을 보고 고함쳤다. “할아버지! 살려 주세요! 우린 한국 서울에서 용천 연대장과 함께 친일주구 한철주와 한선주 형제를 처단했어요. 입공속죄했으니 관용을 베풀어 주세요.” 병완은 병수를 되돌아보지도 않았다. (자식, 누가 널 남조선 특무질하라고 했느냐?) 허나 그의 몸이 조금 비틀거리는 것이었다! 병수는 자동차 위에서 두리번거리더니 눈보라 휘몰아치는 천지꽃산 중턱의 이성희 할머니 산소를 찾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할머니! 할아버지! 아버지!” 병수는 미친 듯이 고함치더니 머리를 돌려 상순을 쳐다보고 말했다. “상순아, 내가 고향에 돌아가 부모를 모시지 못할 바엔 네가 후에 내 고향에라도 가면 아버지와 동생 영수한테 내가 여기서 죽었다는 거나 알려라.” 그 말에 상순은 기 딱 차서 한숨만 길게 내쉬었다. 병수의 말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내가 죽으면 저 천지꽃산 왕고모 산소 옆에 묻어 달라. 할머니한테 구천에 가서라도 육친도 모르는 네놈들을 공소할테야!” 상순은 병수를 욕했다. “내 할머니를 업고 똥구덩이에 뛰어들지 말라!” 옆에서 용천이 병수를 나무랐다. "이제야 알겠어? 병완이랑 상순이랑 다 그래. 빨갱이들은 육친도 몰라. 혁명하다 필요하면 제 처남 손자도 마구 잡아먹어.허허허."  병수는 머리를 툭 떨어뜨렸다. 뭔가 이제야 알렸는가? 용천은 계속 지껄여댔다. "날 봐라. 항일유격대 대장이였잖아. 저놈들과는 전우였어. 그러나 항일유격대 대장도 죽인다니까." 그때 병완이 용천의 앞에 다가가 고함쳤다. “용천아, 넌 이전에 항일투사였고 성칠의 전우였다. 허나 오늘은 우리 철천지원수로 됐다! 네놈은 성칠과 사촌동생마저 살해하지 않았느냐? 네놈은 용서할 수 없는 죄를 졌어. 또 우리 나라에 침투한 남조선 특무 죄를 졌다. 우리 인민정권이 절대 용서할 수 없다!” 용천은 결박당한 채 자동차에 끌려가면서도 머리를 쳐들고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남쪽 하늘을 하염없이 쳐다보았다. 그때 용천이 노래를 불러댔다.        " 동해물과 백두산이..."      정신을 차린 병수는 이제야 자기가 남조선 특무라는 것을 알았는지 중얼거리기 시작하였다.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노랠 부르지 말엇!"       흥수가 꽥 고함치면서 씽드르 자동차 위에 뛰여올라가 장총으로 용천과 병수의 주둥이를 마구 쑤시었다.        "그만둬!"       상순이 급히 흥수가 휘두르는 총을 밀막으면서 말렸다.       "우린 인의 지사야! 절대 이러질 말아야 해!"       상순이 말리자 흥수는 마지못해 총을 거두고 자동차에서 내려갔다.      "남조선 특무놈들을 죽여라!"       "죽여라!"      군중들은 주먹을 쳐들며 격노해 고함쳤다.     용천은 이제 당장 총살받을지도 몰라 사람들 속에서 재차 진달래를 찾았다. 그러나 아무리 눈뿌리 빠지게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절망에 빠져 흐리멍텅한 하늘을 쳐다보며 허무맹랑하게 웃어버렸다.        (세상은 얼마나 허무한가. 저렇게 무정한 진달래를 안해라고 얼마나 발바닥이 다슬게 조선 팔도를 다 찾아헤맸던가! )        순간 그의 눈 앞에는 돌팔매질로 자기 머리를 까던 진달래, 이를 악문 질달래가 떠올랐다. 그는 도리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래, 넌 근본 날 사랑하지 않았어. 뭐? 너거 첫사랑은 성칠이라고? 그럼 내캉 결혼은 왜 했어? 왜?!)     용천은 전쟁으로 인해 사랑이 원한으로 뒤바뀐 것에, 사랑과 원한이 뒤엉킨 세상을 애절하게 한탄했다.  죽음을 재촉하는 저승사자의 북소리가 둥둥 요란하게 울린다. 그의 눈에는 염라전이 어슴푸레 보이는 상 싶었다. 전쟁 악마의 보이지 않는 갈퀴 같은 검은 손이 하늘에서 길다란 올가미를 내려보내 서서히 용천의 목을 휘감았다. 전쟁 악마가 없었더라면  용천은 진달래와 함께 경주를 키우면서, 아니, 아들딸을 한구들 낳아 기르면서 행복하게 살 수도 있었을 것다. 그러나 용천의 그 아름다운 꿈은 전쟁이란 악마에 의해 풍비박산나고 말았다.       어디 그뿐인가! 전쟁 악마는 용천으로 하여금 사촌동생 칠백이, 전우 성칠과 총칼을 비껴들고 생사결판으로 싸우게 내몰지 않았던가! 그들을 죄악의 손으로 총칼을 들고 살해하지 않았던가.         용천은 사람들 속에서 피뜩 덕성을 발견하고 목청껏 고함쳤다. "작은아버지! 경주를 보우해 주시예!" 그는 진달래를 보지도 못했지만 어데라 없이 하늘에 대고 고함쳤다.  "진달래야! 장차 경주를 남조선에 보내달라!” 상순은 용천을 쏘아보며 호통쳤다. "주둥일 다물지 못해?!" 뒤이어 상순은 정책을 말해주었다.  "너희들 친일주구 한철주 형제를 사살하고 똘만을 나포하는데 공이 있어. 때문에 우리 정부에서는 가능하게 관대하게 처리할 수도 있다. 특히 용천은 항일에도 공이 있어 고려할 거야. 그러나 이건 내 생각이지 국가 공안부문의 결정이 아니야." 용천은 머리를 툭 떨어뜨리며 뭐라고 중얼거렸다. 눈보라 소리에 사람들은 그가 자동차 위에서 뭐라는지 똑똑히 들을 수 없었다. 용천은 자동차에 실려가면서도 머리를 돌려 원망에 찬 눈길로 누구를 찾는 듯이 사람들 속을 누비었다. 그러나 진달래는 끝내 보이지도 않았다. 덕성은 자동차에 실려 끌려가는 조카를 차마 보기 힘들어 머리를 숙였다. (아, 처자를 만나자고 얼마나 찾아 헤맸는가? 진달래 사랑을 찾기는 고사하고 원수치부할 줄은 몰랐제이, 헤이, 내 끝장 이렇단 말인고? 얼마나 그리던 진달랜데. 얼마나 사랑한 진달랜데?  마지막길일 수도 있는데, 머리도 내밀지 않어? 경주라도 보이지 못하고. 헛참, 진짜 몰인정한 빨갱이야.)       그는 진달래가 원망스러웠다. 진달래와 자기를, 아들과 자기를 갈라놓은 전쟁이 원망스러웠다. 자기를 만주 사지에 특무로 보낸상관 허군호 사단장과 미군을 원망했다. 진달래와 같은 무정한 여자를 아내라고 이런 불구덩이에 뛰여든 것을 후회했다. 아니, 이제 누굴 원망한들 무슨 소용 있으랴. 백번 후회한들 무슨 소용 있겠는가!         병수는 천용구 부국장과 공안전사들이 압송하는 자동차에 실려가면서도 눈이 푸실푸실 내리는 흐리멍텅한 남쪽하늘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머리를 홰홰 저었다. 그러는 병수를 보고 상순은 천지꽃산 중턱에 모신 할머니 산소를 올려다 보며 머리를 숙였다.       구경 무엇이 전우였던 그들로 하여금 총창을 비껴들고 서로 생사결판으로 싸우게 했던가? 구경 무엇이 사촌형제끼리, 친혈육끼리 총창을 비껴들도 맞붙어 서로 찔러 죽이게 했는가. 구경 무엇 때문에 항일유격대 전우끼리 서로 총부리를 겨누고 결투하게 하였던가! 구경 무엇이 그렇게 그리워 찾아헤맨 부부를 서로 원수로 만들었는가!       바로 미제의 참혹한 침략전쟁이 그렇게 만들었다. 미제가 인천에 등륙하지 않았더라면  조선 인민들이 자기 조국의 문제를 자체로 해결했을 것이며 통일된 조선을 후대들에게 넘겨주었을 것이다. 미제가 남조선을 식민통치하지 않았더라면 전쟁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 아닌가. 미제 침략전쟁은 인류 역사에서 제일 큰 범죄자였다. 바로 참혹한 침략전쟁이 부부도, 사촌형제도, 전우도 서로 원수로 되여 싸우게 만들지 않았던가!  아, 이 땅에 다시는 침략전쟁, 동족상잔전쟁이 일어나지 말고 평화가 깃들기를 두 손 모아 기도한다. 평화란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       휘몰아치는 눈보라 속에 몸부림치는 버드나무 가지 위에서 까마귀떼들이 꽁지를 달싹이며 까욱까욱 무섭게 울어대며 발톱으로 부리를 닦으며 먹이를 쪼을 준비를 했다.      용천이 자동차에 실려 갈 때 기실 진달래는 다리 총상을 오줌찜질을 해 지혈시키고 있었다. 이윽고 그녀는 양손에 경주와 경수의 손을 잡고 아픈 다리를 끌면서 마을 동구에까지 나가 눈보라 속에 멀어져가는 자동차를 바래였다. 자동차가 어두워 가는 하늘 아래 눈보라 속에 시야에서 사라지자 그녀는 경주를 꼭 끌어안고 한없이 서럽게 통곡쳤다.       하루 밤 부부도 만리장성을 쌓는다고 비록 항일전재시기 밀림에서 한해도 함께 살지는 못했지만 필경 그들은 부부였다. 그럼 그녀가 용천을 동정해서 통곡칠까?      아니다. 그보다도 애비 없이 살 경주가 불쌍해 우는것이리라.       그날 밤이였다. "여보, 내 왔어. 경주 얼마나 보고 싶은지." 밤중에 용천이 장백산 밀림의 통나무집, 그들이 결혼해 첫날 밤을 보내던 그 통나무집에 찾아오지 않았겠는가! "당신 어떻게 돼 왔는가요? 당신은 남조선 특무 아닌가요? 어떻게 살아 돌아왔는가요? 어서 나가요!" "그래, 또 날 붙잡아 중공군에 보낼 예산인기여?" 용천은 두덜거리며 구들에 나란히 누워 쌔근쌔근 자는 경주의 얼굴을 매만지였다. 뒤이어 경수의 얼굴에 갈퀴 같은 검은 손을 뻗쳤다. "손 떼라!" 성칠의 고함소리가 들렸다. 용천과 진달래가 돌아보니 장소는 어떻게 돼 장백산 통나무집 아니고 함흥촌 촌공소인데 어떻게 돼 성칠이 유령처럼 나타나지 않았겠는가! "이 양심 없는 놈아! 어째 내 아내 빼앗아 살았어! 조 쥐새끼까지 낳기까지 했잖어?!" 용천은 욕설을 퍼부으며 성칠의 멱살을 틀어쥐고 흔들더니 머리로 떵 들이받았다. 성칠도 주먹으로 반격했다. 애들이 깨나 어른들 싸우는 걸 보고 엄마 품에 와락와락 안겨 엉엉 울었다. 진달래가 새된 소릴 지르며 뜯어 말렸다. "그만하지 못해요? 진짜 죽어서 귀신 됐어도 싸워요?" "염라전에 가도 저 놈 용서할 순 없어! 흥!" 용천이 입귀의 피를 손으로 쓱 닦으며 주먹 쥐고 덮쳐들며 계속 야단쳤다.     성칠은 용천의 주먹을 손으로 막으며 진달래를 가리켰다. "진달래한테 물어봐라. 널 사랑하기나 했겠구나." '뭐라고?" 용천은 주먹을 내리고 진달래를 돌아보았다. "그래요. 전 근본 용천 대장을 사랑하지 않았어요." "그럼 왜 내캉 결혼했어?" 진달래는 차마  "저의 첫사랑은 성칠 오빤데요." 하고 입을 떼기 힘들었다. 그는 자기 첫사랑을 받아주지 않고 자기를 용천한테 떠밀어보낸 성칠 오빠가 한없이 원망스러웠다.       기실 통나무집에서 번개식 결혼한 첫날 밤에  진달래는 사랑하지도 않는 용천한테 강간당하는 기분에 잠겼다. 그녀는 성칠 오빠 얼굴을 련상하면서 육체와 마음의 아픔을 간신히 참아냈던 것이다. 진달래는 용천과 우연히 갈라져 조선에 나가 성칠 오빠와 재혼해 산 5년 동안이 얼마나 행복한지 몰랐다. 그러나 죄악의 전쟁은 성칠 오빠를 빼앗아갔다. 아니, 남북 분단의 비극적인 마수가 그들의 단란한 가정을 산산 박산나게 만들었다. 아니, 저게 뭔가요? 글쎄 성칠은 경수를 안고  용천은 경주를 안고 서로 진달래를  바줄당기기를 하듯 밀고 당겼다. "여보, 날 따라 조선에 가기오!" "여보, 당신은 내 본처야, 날따라 남조선에 가자!" 진달래는 그들 둘의 사이에서 각이 다 빠질 지경이었다. "이걸 놔요! 놔!" 진달래가 아무리 고함치며 발악해도 그들 둘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녀는 마구 대성통곡치며 몸부림쳤다. "엄마!" "엄마!" 애들의 울음소리에 진달래는 벌떡 일어났다. 깨고 보니 괴이한 꿈이 아니겠는가!  진달래는 꿈을 깼는데 딱 꿈 같지 않았다. 아직도 용천과 성칠한테 꽉 붙잡혔던 두 손이 얼얼하게 아파났고 가슴마저 미여지는듯이 아파났다. 그녀는 자기 팔자가 안타깝고 용천과 성칠 오빠가 너무나도 원망스러워 울었다. 아마 용천과 성칠은 구천에 가서도 그녀 때문에 서로 싸우며 빼앗을내기 하면서 그녀를 놓아줄 것 같지 않았다. 그것에 마음이 아파났다. 그녀는 고사리손으로 눈을 부비며 엉엉 우는 애들이 불쌍해 한손에 하나씩 품에 꼭 껴안고 눈물을 하염없이 흘렸다.        아, 미제의 침략전쟁과 동족상잔전쟁으로 인해 그 얼마나 많은 부부가 헤여지고 심지어 원수로 돼 싸웠던가. 그 얼마나 많은 가정이 풍비박산났는가! 그 얼마나 많은 초가삼간이 미제 공중날강도들의 폭격을 맞아 재더미로 되였던가!        진달래는 밤이면 밤마다 악몽을 끊임없이 꾸었다.           어느날 밤 진달래는 또 무서운 악몽을 꾸었다.      글쎄 남조선에 도망쳐 괴뢰군이 된 경주와 조선인민군 경수가 서로  퉁사발눈을 부릅뜨고 서슬푸른 총칼을 맞대고 죽기내기로 육박전하며 싸우지 않겠는가! 금강산인가, 설악산인가. 깎아지른 누런 절벽 위에서 경수가 서슬푸른 총창으로 경주를 찌르며 고함쳤다. "이 놈, 네 애비 내 아빠를 살해했어!" 경주는 날창을 비껴치우며 총창으로 찔렀다. "원수놈 새끼야, 네 애비 엄마를 빼앗아갔어. 어디 죽어봐!" "닥쳐라!" 진달래는 황급히 고함쳤다. 그녀는 절벽 위로 쫓아올라가며 연신 돌멩이를 날렸다. 쟁강! 돌멩이가 날아가 서로 얽힌 총창에 맞아 불꽃을 튕겼다. 경수와 경주는 어머니가 뛰여올라온 것을 보고 주춤 날창질을 멈추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간이였다. 또다시 이를 악물고 죽기내기로 육박전을 벌렸다. "그만두지 못해?!" 진달래가 고함치며 두 아들 중간에 뛰여들어 두 손으로 두 총창을 틀어쥐여 허공에 쳐들었다. "얘들아, 너희들은 친형제야." 그러나 동시에 이런 고함소리가 절벽을 아프게 때릴줄이야. "친형제는 무슨 친형제?!." "원수야!" 두 아들이 또다시 퉁방울눈을 부릅뜨고 날창질을 하였다. 진달래는 마음이 너무 미여지는듯해 두 아들을 뜯어 멀리면서 눈물을 팡팡 쏟았다.         "너희들  둘 다 엄마 한배로 배아프게 난 아들들이야.  친형제간에 계속 싸울래? 엄마 죽는 걸 보겠어?! 친형제간에 서로 애비 죽인 원수치부를 해서야 되느냐?" 그 말에 두 아들은 총창질을 멈췄다가 또다시 날창질을 했다.  진달래 힘으로는 둥글소처럼 싸우는 억대우 같은 아들들을 뜯어말릴래야 말릴 수 없었다.       다섯살이나 이상인 억대우 같은 경주가 글쎄 경수의 날창을 비껴치우고 날창으로 푹 찔렀다. 경수가 가슴에 피를 내뿜으며 비칠거릴 때였다. 경주가 발길로 경수 아랫배를 걷어찼다. 경수는 뒤로 자빠지며 절벽 아래로 떨어져 죽지 않았겠는가 "경수야!" 진달래는 만신창이 돼 죽은 경수를 보고 경주의 멱살을 틀어쥐고 흔들며 고함쳤다. "이 지독한 놈 새끼야, 친동생을 죽여?!" 그러나 경주는 눈깔을 뚝 부릅뜨고 시퍼런 총창으로 엄마를 겨눴다. " 엄마도 배신자야! 아빠하구 결혼해가지고 왜 경수 애비캉 바람 피웠어?!" "뭐라고? 어떻게 돼 내 경수 아빠한테 재가했는지 알기나 하고 이래?" 경주는 이를 악물며 고함쳤다. "다 알아! 엄만 배신자야! 죽어도 싸!" "맞아!  배신자야!" 뜻밖에 용천이 구름 속에서 절벽 위에 날아내려오지 않겠는가! 그는 진달래한테 총을 겨누며 지껄여댔다. "너거 엄만 돌멩이로 내 머리를 까 빨갱이들한테 붙잡아 바쳤어!" "닥쳐!" 아니, 성칠이 절벽에 기여올라오며 고함치지 않겠는가. "진달랜 날 사랑했지. 널 사랑하지도 않았어!" 용천은 총으로 진달래를 먼저 쏘았다. 뒤이어 절벽에 기어오른 성칠을 쏘았다. "여보!' 진달래가 손을 뻗쳐 절벽에서 떨어지려는 성칠의 손을 잡아끌어당겼다. 그때 용천은 한발에 성칠과 진달래를 절벽 아래로 차 떨어뜨렸다. "앗!" 진달래는 성칠과 함께 떨어지면서 경주의 종아리를 붙잡았다. 그런데 글쎄 경주는 발길로 진달래를 걷어차며 너털웃음을 쳤다. "배신자는 죽어야 해! 허허허." 성칠은 절벽에서 떨어졌지만 아무 일도 없었다. 그는 권총을 뽑아들더니 용천과 경주를 쏘았다. 용천과 경주는 절벽에서 허망 떨어져내려왔다. 진달래는 경주를 받아안으려고 두 팔을 벌리고 절벽 밑에 뛰여갔다. "경주야!" 그러나 경주는 절벽에서 떨어져내려오면서 고함쳤다.  "배신자야!" 그 고함소리에 꿈에서 깨난 진달래는 와닥닥 일어났다. 그녀는 쌔근쌔근 자는 애들의 얼굴을 매만지면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것이 꿈만 같지 않았다.         죄악의 38선악마에 의해 남북으로 분단된 나라에서 휴전해 숨고르기를 하는 한 소국의 약소민족은 항상 형제간, 부부간, 전우간에도 원수로 돼 생사결판으로 싸우는 전쟁악몽은 끝없을 것이 아닌가!        지구촌에서 국제경찰행세를 하는 패권주의자 - 미제  호전광들이 남조선 땅에 있는 한 항상 전쟁의 불씨는 남아 있을 것이 아닌가! 나라가 남과 북으로 쪼각나 있는 한,  작은 나라,  약소민족의 비극은 끝없을 것이 아닌가!                                              제23장 충신과 효자                                                                                                                                                                                       1. 귀향 눈보라가 기승스레 불어치더니 맵짠 겨울의 추위가 뼈 속까지 스며들었다. 박달나무가 얼어 탁탁 터질 듯하고 여우가 추워서 눈물을 흘릴 맹추위가 성큼 다가왔다. 병완은 촌공소 바깥에 나가 마루 위에 서서 눈보라치는 산과 들을 바라보며 이 추운 겨울에 성칠은 어느 무명고지 눈 속에 파묻혔는지? 승냥이가 물어 갔는지? 근심이 태산 같은 돼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었다. 조선에서 배불리 먹으면서 살자고 간도에 와서 중국 공산당의 덕분에 일본 놈을 몰아낸 후 광복을 맞았다. 친일주구와 지주들을 청산하고 땅을 분배 받아 쌀독에 쌀을 꼴딱꼴딱 채워놓고 잘 살까 하니 애를 먹이는 놈들도 많았다. 장개석 국민당 반동파들이 못살게 굴었고 토비들이 성화를 부렸다. 국민당 잔여세력과 토비들을 숙청하고 전국을 해방하고 강대한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워 이젠 근심 없이 살겠다고 발편잠을 자게 됐다. 그런데 이번에는 미군이 파견한 특무 놈들이 성화를 부렸다. 맏아들마저 미제를 몰아내려고 조선 전쟁에서 희생됐다. (저 어린 손자 경수를 어쩌겠는가? 경수와 경주는 이부동복 형제간이지만 장차 서로 원수의 아들이라 서로 복수하려고 하지 않을까?) 병완은 이일 저일 근심이 태산 같았다. (주책없이 오래 사니 맏아들을 다 앞세웠구나. 어지러운 난시야. 전우와 형제가 원수로 돼 서로 죽여야 되는 전쟁! 이 놈의 전쟁이 언제 끝날까?) 병완은 저도 몰래 밭고랑처럼 파인 이마 쌀을 찌푸리더니 주름살이 조글조글한 두 볼에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이때 상순이 찾아왔다. “할아버지, 원수를 다 갚았는데 너무 상심하지 마십시오.” “백발머리 늙은이가 검은머리 아들을 앞세운 비길 데 없는 마음을 누가 다 알겠느냐?” 병완은 막내손자에게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손바닥으로 눈귀에 글썽한 눈물을 쓱 닦으며 몸을 돌려 촌공소로 들어갔다. “할아버지, 내 공안사업을 그만두고 조선 전선에 나가 큰아버지 원수를 갚겠습니다.” “뭐라니?” 병완은 자리에 앉았다가 벌떡 일어났다. “너 공안국장을 하지 않고 전선으로 가다니?” “여기 미군 특무도 다 잡아냈지. 할 노릇이 있습둥? 미군이 여기까지 쳐들어오기 전에 총을 메고 미군 양키놈들과 통쾌하게 싸워 봤으면 좋겠습니다.” 병완은 한참 궁리하다가 말했다. “그래도 전도를 잘 생각해봐라. ” 상순은 대수롭잖게 말했다. “할아버지, 미제를 몰아내고 제가 퇴대하면 이 마을에 돌아와서 할아버지와 함께 백성들이 쌀독과 물독을 꼴딱꼴딱 채워놓고 잘 사는 사회주의 새 마을로 건설하면 안 됩니까? 이젠 할아버지와 아버지도 연세가 계시는데 제가 옆에서 조석으로 보살펴드려야겠습니다.” “아니야, 아니야. 예로부터 충신은 효자 아니야.” 상순은 정중하게 말했다. “할아버지, 저는 혁명사업을 잘하는 나라의 충신이 될 뿐만 아니라 할아버지와 부모를 효성을 다해 모시는 효자로 되겠습니다.” 병완은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아니야, 아니. 충신과 효자 다 될 수 없느니라. 어느 한 가지는 버려야 한다. 우리 근심하지 말고 공안국장을 그만두겠다는 생각을 버려라.” 그러나 상순은 이미 마음을 먹은 것 같았다. “내 하루 이틀 생각한 게 아닙꾸마. 혁명사업과 효성을 위해서라면 난 벼슬도 초개같이 여깁니다. 마을에 돌아와 혁명사업과 효성을 모두 잘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습둥? 딱 공안사업만 사업입둥? 마을에 와서 사회주의 건설을 잘 해 마을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 잘 살게 해도 역시 혁명을 하는겝꾸마.” 병완은 촌공소에서 나가는 너부죽한 상순의 잔등을 보며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어쩌자고 낮은 돌을 밟아? 효자로 되려는 걸 보니 큰 일 하긴 틀렸구나.” 상순은 집에 돌아가자마자 명옥을 보고 물을 끓이라고 하였다. 그는 괭이와 삽을 들고 바깥으로 나가 마당 눈 밑에서 흙을 꺼 버치에 담아 정지에 들여왔다. 기준은 옆구리가 아파 상을 찡그리면서 윗방에서 일어나 앉았다. “뭐하려고 그래?” 상순은 바가지로 가마 안에서 김이 물물 나는 뜨거운 물을 퍼서 흙에 부었다. “벽을 발라야겠습구마.” “야, 어떻게 겨울에 언 벽을 바르니?” 상순은 삽으로 흙을 이겼다. “지금 바르지 않고 어떻게 추워서 이 겨울을 나겠습둥?” 기준은 눈을 치켜떴다. “참군할 예산이야?” “예. 미국 놈들이 우리 연변에까지 특무를 보내는 거 봅소. 어디 여기서 마음 놓고 살게 합둥? 조선 전선에 나가 통쾌하게 미군 놈들을 쓸어 눕히겠습꾸마. 그간 아버지 아픈 몸으로 수고하겠습구마. 조선전쟁이 끝나면 마을에 돌아와서 아버지를 조석으로 모시겠습꾸마.” “뭐라고? 공안국장은?” “근심하지 맙소. 마을 혁명도 혁명입꾸마. 아버지와 처자들을 굶게 할 순 없습꾸마.” 기준은 흙에 뜨거운 물을 쳐 주면서 조용히 말했다. “얘, 네가 국장인데 우리 이 기회에 영월구로 이사 가면 안 되니? 대대손손 농사를 짓고 살았는데 아들 덕에 시내 사람으로 살면 좀 좋니?” 상순은 흙을 이기던 삽을 짚고 서서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 “아버지, 내라고 어째 아버지와 처자들을 시내호구로 올리고 시내에서 편안히 잘 살게 하고 싶지 않겠습둥? 허나 공산당원은 권력을 빌어 사심을 챙겨선 안 됩니다. 더구나 조직에 손을 내밀어 부담을 끼쳐선 안 됩니다. 내 마을에 돌아오면 모든 게 다 풀릴 겁니다.” 기준은 완전 다른 사람이 돼버린 상순을 보고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었다. "큰형님을 조선 전쟁에 잃었는데 또 너를 생사를도 모를 전쟁터에 내보내? 정말 근심스럽구나.” “근심하지 맙소. 난 항일유격대원 때부터 일본 놈과 국민당 군, 토비, 미군특무들과도 싸웠습꾸마. 내 전투경험과 무예면 얼마든지 미군 양키 놈들을 까부실 수 있습꾸마.” 상순은 외양간에 들어가 소똥을 퍼내 진흙에 이겨 구새 목으로부터 돌아가면서 벽을 발랐다. 허나 인차 흙이 얼어 바르자마자 인차 떨어졌다. 그리하여 상순과 기준은 더운 물을 끓여가지고 흙을 이겨 얼기 전에 벽을 발랐다. 원래 기둥을 세우고 수수대로 에를 대충 엮어놓고 흙을 대충 바른 얇은 벽이어서 겨울에 집안이 이가 덜덜 떨릴 지경으로 추웠다. 쑥대 같은 마른 풀대로 불을 때서 밤중은커녕 초저녁도 되기 전에 구들이 얼어들기 일쑤였다. 그런데 눈보라 치는 초 겨울에 언 벽에 소똥을 바른들 제대로 붙겠는가? 바람을 어찌 막으랴? 허나 상순은 그렇게라도 벽을 발라놓아야 조금이라도 시름 놓고 집을 떠나 부대에 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이때 앞마당이 대성통곡치는 소리 들렸다. 시끌벅쩍 시끄러워졌다. “누가 저래?” 아버지 말에 상순이 앞마당에 나갔다. 윗집 덕성이 주먹으로 벽을 쿵쿵 쳐대며 대성통곡을 치는 것이었다.  그는 상순을 보자 씽 덮쳐들어 멱살을 틀어쥐었다. “야, 이 놈 새끼야, 죽고 살고 해 보자. 네 놈이 내 조카를 죽였어! 난 이젠 아들딸도 조카도 없어. 아내도 손자도 없어! 무서울 거 없어!” 상순은 덕성 영감을 콱 밀쳤다. 덕성 영감은 울바자 굽에까지 뿌리어나가 엉덩방아를 쿵 찧었다. 다행히 뒤에 울바자에 걸려 뒤 골은 깨지 않았다. “영감! 적반하장이라고 누가 할 소리를 합둥? 용천은 우리 성칠 큰아버지를 쏴 죽였어!” “병수가 말하지 않던? 그들 둘은 진달래 때문에 깨끗한 결투를 했다고! 성칠은 용천의 경호원이 쐈더랬어.” “결투? 이 놈 영감 정말 정신 있어? 어째 남조선 특무 둘이나 영감네 집에 들었댔어? 영감도 남조선 특무를 도운 혐의가 있어!” 상순은 세 귀 눈을 부릅뜨고 고래고래 고함쳤다. 마을 사람들이 울바자 밖에 와 웅성거렸다. 지군선은 때를 맞났다고 지껄여댔다. “공안국장질을 하더니 개 잡은 포수처럼 우쭐거리긴. 흥! 이 마을이야 병완 영감과 상순이 쥐락펴락 하는 세상이 아니고 뭐요?” 상순의 세귀눈에 독기가 서리었다. 덕성은 머리를 상순의 가슴팍에 들이대고 떠밀었다. “이 자식아, 그 권총으로 날 죽여! 내 남조선 특무여. 죽여라! 죽여! 이 놈아!” 상순은 뒤로 몇 발자국 물러서며 참다못해 손바닥으로 덕성 영감의 머리를 콱 떠밀었다. 덕성 영감은 밑둥 잘린 썩박나무처럼 나가 쓰러졌다. “영감, 한 고향 영감이라고 놔두는 줄 아오.” 상순의 말에 덕성은 비실비실 뒤로 물러서더니 울바자 밖으로 나가며 하늘을 향해 두 손을 펼치며 소리쳤다. “아들 딸이 다 죽고 없어. 누굴 믿고 살아야 하나? 어허허!” 상순은 마을 사람들이 쑤군거리자 안 되겠다 싶어 고함쳤다. “칠백은 용천이 죽였소! 사촌형제가 총창으로 육박전 하다가 찔러 죽였소!” 처음 듣는 상순의 그 말에 덕성 영감은 천천히 돌아섰다. “너거 어찌 알아?” “병수 형님에게서 다 들었어!” “그래? 맞다! 알고 보니 너도 특무의 동생이라. 병수 특무를 너 형이라면서? 허허허. 이 특무 동생 놈아, 너도 특무야!” 기준은 듣다못해 한발 나섰다. “형제끼리 총부리를 맞대고 서로 죽이는 이 놈의 난세에 용천은 남조선을 지키느라고 우리에게 총을 겨눴고 우린 우리 중국을 보위하기 위해 용천을 나포했소.” 사람들 속에서 흥수 옆에 선 춘실이 빨간 입술을 앵두 알처럼 쫑긋했다가 입귀를 씰룩거렸다. “픽! 권총을 찼다고 우쭐거리긴!” 상순은 가까이에 있었으면 춘실의 귀쌈이라도 한 대 찰싹 갈겨주고 싶었다. 그는 마을 사람들이 흩어져 간 후 아버지와 함께 벽을 대충 한 벌 발라 놓았다. 오후에 공학과 벽선이 상순이네 집으로 찾아왔다. “큰조카, 얼른 올라오라.” 상순은 그들을 반갑게 맞았다. 상순은 딸을 넷이나 줄줄 낳으면서 아들을 보지 못했다. 그래서 다섯째 애는 아들을 보려고 넷째 딸의 이름을 금자라고 지었다. 그는 조카들인 공학과 동선을 자기 아들처럼 귀해 하면서 각별히 아꼈다. “무슨 일이냐?” “삼촌, 벽선과 결혼해야겠습니다.” 벽선은 조왕칸 쪽으로 앉아 머리를 다소곳이 숙인 채 손가락으로 까래 톱을 매만졌다. “그래, 내 입대하기 전에 너희들 사돈보기도 해주고 결혼식을 올려주면 시름 놓겠다. 아버지하구 엄마는 어쩌더냐?” 공학은 너부죽한 얼굴에 만면춘풍이었다. “부모들은 우리 둘의 약혼을 동의했습니다. 삼촌과 함께 사돈인사를 가면 어떻겠는가고 합디다.” “좋아. 내 사돈인사를 하러 가지 뭐.” 공학은 그저 좋아서 싱글벙글 웃었다. 벽선은 얼굴에 수심의 그림자가 스쳐지나갔다. “김 동무, 그 뒷덜미 부스럼이나 잘 치료하오.” “어째? 무슨 부스럼이기에 결혼을 미뤄?” 공학은 머리를 숙이면서 손가락으로 자기 뒷덜미를 가리켰다. “전번에 조선인민군 한 부상병에게 내 피를 뽑아 수혈했는데 부스럼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상하게 부스럼이 점점 더 커지면서 띠끔띠끔 아픕디다.” 상순은 공학에게 다가가 부스럼을 들여다보며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병원에 있는 게 자기 병도 소홀히 하지 말고 제때에 치료해라.” 그러나 공학은 대수로워 하지 않았다. “언제 부스럼을 치료할 새 다 있겠습니까? 생사를 다투는 부상병들이 수태 들어오는 때.” 상순은 공학이가 병원에 있으니까 후에 잘 치료하리라고 믿고 화제를 돌렸다. “새애기 고향이 어데요?” “국자가에 있습니다.” “음, 시내 처녀구만.” 뒤이어 상순은 벽선의 가정정황을 죽 물어 보고 아버지를 보고 사돈보기와 결혼 택일을 해 형님한테 보냈다. 조카들이 돌아가자 상순은 명옥과 함께 마당에 나가 도리깨를 휘둘러 콩 타작을 했다. 이튿날 상순이 정미소에서 벼를 찧어 수레에 실을 때다. 영월구에서 천룡구 부국장과 허영호 과장이 찾아왔다. “김 국장, 어서 공안국으로 돌아갑시다.” 상순은 겨 먼지가 묻은 손을 탁탁 쳐 털고 손을 내밀었다. “천 국장한테 정식으로 말하자 했는데 잘 왔소.” 뒤이어 상순은 권총집을 벗어 천룡구 국장에게 내밀었다. “왜 이럽니까? 김 국장.” 천룡구는 놀랐다. 허영호도 깜짝 놀랐다. 허나 상순은 아주 태연자약한 표정을 지었다. “국장을 하지 않고 항미원조 전선에 나가겠소.” 천용구 국장은 입을 헤 벌렸다. 이해되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아니, 여기도 전선입니다. 여기서도 미제와 싸우고 있지 않습니까?” 상순은 정미소 안에서 큰아버지랑 사촌형님이랑 내다보자 천룡구와 허영호를 한쪽으로 데리고 가서 나직이 말했다. “난 혁명을 위해서라면 벼슬 같은 건 초개같이 여기네. 전선에 나가 미제 대부대와 통쾌하게 싸워보고 싶소.” “공안국 사업은 어쩝니까?” “난 동무들이 꼭 공안사업을 잘하리라고 굳게 믿소. 내 상급 공안부문에 이미 제기했소. 내 대신 천 국장을 국장으로 제발하고 허영호 과장을 부국장으로 제발시켜달라고.” “안됩니다! 김 국장!” “못갑니다. 김 국장!” 천룡구와 허영호는 이구동성으로 상순을 말리었다. 상순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난 이미 마음을 먹었으니 돌아가 허백호 서기와 전 현 공안일군들에게 전해주오. 바쁜데 다신 나를 찾아오지 마오. 난 인차 마을의 청년들과 함께 참군해 전선에 달려 나가야겠소.” 그래도 천룡구는 상순의 팔을 잡고 눈물이 글썽해 말리었다. “왜 이럽니까? 그래도 난 김국장이 집 근심을 할까봐 김국장네 집식구들을 영월구에 모셔가자고 했는데. 왜 이럽니까?” 그러나 상순은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아니오. 절대 안 되오. 난 조직에 부담 끼치지 않겠소.” 천룡구 부국장은 손사래를 쳤다. “우리 공안국엔 김국장의 지도가 필요합니다. 김 국장이 아니었더라면 우리 오늘이 있었겠습니까?” “김 국장, 우리와 함께 영월구로 돌아갑시다.” 허영호가 쌀 마대를 수레에 싣는 사이에 천룡구는 상순을 한쪽으로 끌고 가서 나지막이 뒷말을 이었다. “허백호 서기도 이젠 진수해향당위 서기로 전근해 간답니다. 근심 말고 돌아갑시다.” “허 서기 때문이 아니요. 갓 일떠선 우리 중국을 지키기 위해 조선 전선에 나가려는 거요.” 천룡구는 한숨을 후 내쉬었다. 허영호도 쌀 마대를 수레에 실어다 상순이네 집에 부리어 주고 나서 돌아가자고 극구 권고했다. 허나 상순의 마음은 바위처럼 움직일 줄 몰랐다. 상순은 조왕간 쪽에 죽 세워놓은 쌀독을 열어 보이면서 말했다. “보오. 내 서른이 넘도록 우리 집 쌀독에 이렇게 새하얀 입쌀이 꼴딱꼴딱 찬적은 없었소. 난 우리 온 마을 나아가서 우리 중국 조선족들이 배불리 먹는 사회를 목숨으로 지키고 싶소.” 상순은 천룡구의 어깨를 다독이며 부탁했다. "소서구 장리국이 사라졌소. 혹시 대만특무들과 련관되지 않았는지 면밀히 주시하오." "예, 꼭 잘 감시하겠습니다."         후에 안 일이지만 장리국은 대만특무들과 함께 휩쓸려 특무활동을 하다가 대만특무들을 데리러 온 비행기에 앉아 대만으로 도망쳤던 것이다.         한편, 천룡구 부국장과 허영호는 민병이던 자기들을 공안전사로, 공안간부로 양성, 제발시킨 은사님인 상순과 차마 리별하기 어려웠다. 그들은 팔소매로 눈물을 닦으며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간신히 떼놓으며 영월구로 돌아갔다.         산과 들에는 스승과 제자들이나 다름없는 그들 리별의 눈물로 하얗게 바래진 눈보라가 윙윙 기승스레 불어쳤다.        저자 주: 천룡구 부국장은 김상순(당시 실재한 공안국장 김진임.)의 제발을 받아 김상순의 후임으로  안도현공안국 국장으로 제발됐으며 선후하여 왕청현공안국 국장, 왕청현인민검찰원 검찰장으로 오래동안 사업하다가 정년리직휴양한 력사적으로 실재한 리직로간부임.  
‹처음  이전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