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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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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116) 댓글:  조회:1338  추천:0  2018-08-14
                            2. 백프로선생  로맨스 따르릉 따르릉 교정의 종소리가 정답게 울렸다. 해가 어슬어슬 넘어가는데 학생들은 수양버드나무 가지가 휘늘어진 교정에서 뛰놀다가 교실로 와 하고 뛰어 들어갔다. 덕돌은 당직을 서게 돼 교정을 휘 한 바퀴 돌면서 자세히 살폈다. 그런데 3층 교실에 웬 남학생이 창문에 거마리처럼 매달려 안을 들여다보며 손을 휘두르는 것이 아니겠는가. “야, 창문에 매달려 뭐 하니? 그러다가 떨어지면 어쩌니? 어서 내려라!” 덕돌이 다가가면서 소리쳤다. 그런데 그 애는 창문에 매달려 교실에 뭔가 뿌리고 있었다. 교실 안에서는 여학생들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저 새끼, 모래를 뿌린다!” 교실 안에서 여학생들이 떠들어댔다. “얘, 떨어지겠다. 어서 내리지 못하겠니?” 그런데 그 애가 덕돌을 내려다보며 욕설을 퍼부었다. “에이, 씹할, 백프로 같은 게. 별 일을 다 삐친다.” “야, 내리지 못하겠니?” “제 무슨 우리 담임인가? 뭐나 다 삐치면서. 개 불알 같은 게!” 그 욕지거리에 덕돌은 울컥 치미는 분을 억지로 삼키었다. “야, 선생과 무슨 말버릇이냐? 창문에서 내려 교실에 들어가라. 떨어지면 상하겠다.” 덕돌은 그래도 그 애가 유리창문에서 내리지 않자 교수청사로 들어가 3층 교실로 올라갔다. “야, 떨어지겠다. 창문에서 천천히 내려서 들어오라.” 덕돌은 그 애가 떨어질 까봐 온화하게 말하며 손짓했다. 그때 그 애가 교실 안으로 뚝 뛰어내리며 “에이 씨, 백프로 같은 게 삐치기는?”라고 욕했다. 덕돌은 자습하던 숱한 학생들 앞인지라 “뭐라니? 너 여기 나오너라.”라고 한마디 하며 복도로 나갔다. “쾅!”  그 애가 문을 박차고 씽 뛰어나오더니 덕돌에게 헤딩을 들이댔다. 누가 학생이 교원에게 덤벼들려니 했겠는가? 덕돌은 반사적으로 피하면서 팔꿈치를 들이댔다. 그 애는 팔굽에 맞아 두 손으로 눈 통을 싸쥐고 쓰러져 땔, 땔 굴렀다. “너 감히 선생한테 손을 대겠니?” 덕돌이 을러메는 소리에 교실 문들이 벌컥 벌컥 열리며 교원들이 머리를 내밀었다. “김 선생, 어째 학생한테 손을 대오?” 덕돌이 머리를 들어보니 황승연 교장이었다. “황 교장, 얘가 내게 먼저 손을 댔습니다.” 덕돌의 변명에 황 교장은 노발대발 하면서 을러멨다. “그래도 교원은 참아야 하지. 학생과 싸우면 되오? 양?!” 황승연은 우멍한 눈으로 덕돌을 쏘아보았다. 덕돌은 억울해 참을 수 없어 대꾸했다. “선생님, 제가 때린 게 아닙니다. 얘가 헤딩을 들이대다가 내 팔꿈치에 맞았습니다.” 황 교장은 고래고래 고함쳤다. “계속 대답질 하겠니? 싸움에 이골이 튼 네가 팔꿈치를 들이대지 않으면 맞을 수 있니? 교원이면 참아야 되지. 학생들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지 말아야 한다는 걸 몰라?! 대학졸업생이라는 게 교육심리학을 밑구멍으로 배웠니?” “얘가 내 별명을 불렀는데 왜 나만 욕합니까? 학생이 교원의 별명을 불러도 됩니까? 교원은 그래 자존심도 없는 무골충이 돼야 합니까?”      “얘, 상하지 않았니? 어디 보자. 눈을 상하지 않았는지? 이게. 피 못이 됐구나.”       승연은 면상이 장마당이 된 학생애를 데리고 아래층으로 내려가면서 두덜거렸다. “개 꼬리를 3년 파묻어도 썩지 않는다더니. 아직도 주먹을 휘둘러? 어디 혼나 봐라.” 황 교장이 덕돌을 욕하자 그 애는 우쭐해  을러멨다. “교육국에 있는 큰아버지한테 다 말하겠다. 씨베.” 덕돌은 숱한 사생들 앞인지라 창피하기도 하고 분하기도 하고 억울하기도 했다. 그는 학교 대문 어귀에 있는 당직실에 돌아와 맥없이 드러누웠다. 9평도 되나마나한 손바닥만한 당직실이자 그의 숙사였다. 그는  사회에 첫발을 들여놓자마자 억울한 모자를 쓰게 됐다. (어쩜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황승연 선생이 교장을 하는 진수해중학교에 오게 됐을까? 황 선생은 고중 1학년이나 겨우 졸업한 학력에 ‘문화대혁명’ 때 진수해 시내 반란파 두목 황종연의 2인자 아닌가? 그런데도 처분 받지 않고 어떻게 진수해중학교 교장으로 됐을까?) 사실, 황승연은 시골 함흥중학교에서도 학력이 낮은데다가 “문화대혁명”시기 반란파 두목이었기에 정치 세파에 밀려 교정을 떠났다. 그런데 그는 미꾸라지처럼 진수해공사 기업소에 기어들어가 일하면서 공장 당지부 서기에게 코밑치성을 잘한 덕에 당내에 기어들기까지 했던 것이다. 그 후 뇌물 작전을 펼쳐 진수해중학교에 되 기어들어와 교무처 주임을 하다가 나중에 무슨 도깨비 변신술을 썼는지 교장으로까지 승급됐다. (진수해중학교에 사람이 없긴 없다. 정치를 한다하는 숱한 공농병 학원들도 황승연 앞에서는 비실비실 뒤로 물러서지 않는가? 진짜 ‘문무가 겸비’한 교장이니까! 위에 알락거리고 아래로는 교장 권세와 주먹을 휘두르는 판에 누가 감히 그와 엇서겠는가!) 덕돌은 한숨을 후- 내쉬었다. “황 선생한테 잘 못 걸렸어. 어떻게 하면 이번 고비를 넘을까? 그래도 사제 간인데 내가 황교장 선생을 존중하면 웃는 낯에 차마 침이야 뱉겠는가!” 덕돌이 중얼거리다가 당직실을 나섰다. 하늘에는 별들이 총총하고 보름달이 유난히도 밝아 교정 안에 은빛달빛이 대낮처럼 쫙 깔려 있었다. 덕돌은 달빛이 깔린 교정이 쓸쓸하게만 느껴졌다. 학생들은 저녁 보도를 다 받고 하학해 삼삼오오 교실에서 나와 대문 어귀로 꾸역꾸역 밀려나왔다. “백프로!” “백프로!” 애들이 덕돌의 별명을 불렀다. 덕돌은 백프로란 별명도 별나게 가지지 않았다. 덕돌은 정치시간마다 애들의 숙제를 일일이 검사했다. 어느 하루, 3개 반의 학생들이 몽땅 숙제를 했다. 너무나 기쁜 나머지 덕돌은 웃으면서 “야, 난 오늘 정말 기쁩니다.”라고 했다. 초중 1학년 학생들은 코를 풀럭거리며 “어째 기쁩니까?”라고 물었다. 덕돌은 “오늘 내가 맡은 3개 반의 학생들이 숙제를 백프로 다 했습니다.”라고 했다. 그러자 학생들 속에서 “어우, 저게 백프로야, 백프로!”라고 했다. 그 후부터 학생들은 뒤에서 가만가만 덕돌을 보면 “백프로!”하고 별명을 불렀다. 어떤 여학생들은 덕돌의 웃음 띤 얼굴을 보고 인상이 백프로라고 하기도 했다. 덕돌은 애들이 별명을 부르자 괘씸했지만 또 사달을 칠까봐 못 들은척하고 교실 쪽으로 가서 교실마다 돌아다니면서 문을 제대로 잠갔는가 검사했다. 교연실의 조장으로 사업하는 경산선생과 남철수를 비롯한 로교원들은 덕돌을 보고 애들이 놀리면 꾹 참고 못 들은 척 하면 제일이라고 했다. 애들도 교원이 애나 하는 걸 보면 더 놀린다는 것이었다. 덕돌도 청년교원의 자존심을 다 버리고 아Q처럼 꿈 참고 못 들은 척 해보았다. 밸은 났지만 효과는 아주 좋았다. 애들이 더 놀리지 않는 것이었다. 이튿날 야단났다. 덕돌에게 덤벼들어 헤딩을 하다가 스스로 덕돌의 팔꿈치를 들이받은 애의 삼촌 둘에 사촌형까지 셋이나 찾아왔다. 덕돌은 시간을 보러 가다가 운동장에서 그들과 딱 마주쳤다. “김 선생, 좀 보기요.” 덕돌은 주춤 멈춰 서며 학생들이 교실에 다 들어가고 텅텅 빈 운동장을 둘러보며 물었다. “누굽니까? 강의시간이 늦어서 오래 말할 시간이 없습니다.” “양, 오래 말할 필요 없소.” 그중 나이 서른 푼할 사내가 무릎을 꿇고 앉으면서 “여기 오오. 우리 앉아 얘기하기요”라고 했다. 덕돌은 별 생각이 없이 그 사내의 오른쪽에 앉으면서 자기를 쏘아보는 나머지 두 사람을 피뜩 쳐다보았다. 눈길이 그리 곱지 않았다. 아니, 살기등등했다. (혹시 어제 애 때문에 온 게 아닐까?) “난 수풀 림 자에 호랑이 호, 림호라고 하오. 사람들은 나를 수풀 속에서 뛰어나온 범이라고 하오.” 쪼그리고 앉은 사내가 말을 꺼냈다. “김 선생, 주먹이 그리 세오?” “무슨 말입니까?” “야, 이 새끼야!” 고함소리와 함께 그 사내는 팔 굽으로 덕돌의 면상을 들이박았다. 덕돌은 뒤로 누우며 팔굽을 피하며 발길로 그자의 면상을 걷어찼다. 그자는 뜻밖의 날랜 반격에 면상을 채워 쓰러졌다. 덕돌의 교수안도 운동장에 날려났다. “싸우러 왔어?” 덕돌은 뒤로 곤두박질쳐 벌떡 일어나며 싸울 태세를 갖췄다. “이 개새끼야! 어째 우리 조카를 쳤니?!” “죽어봐라!” 한사람은 시퍼런 칼을 빼들고 하나는 잔등에서 방치를 꺼내들고 동시에 덮쳐들었다. 덕돌이 날래게 허공잡이로 그자들의 어깨를 걷어차며 날아 넘어 갔다. 허나 칼에 종아리를 긁혔다. 셋이 호랑이들처럼 으르렁거리며 덮쳐들자 덕돌은 다리야 날 살려라 달아났다. 그자들은 덕돌을 쫓아 학교 숙사에까지 뛰어갔다. 덕돌은 숙사 식당에 뛰어 들어가 부엌에서 시퍼런 칼과 불갈고리를 들고 뛰어나왔다. “우리 조카를 때렸으니 죽어도 말하지 마라!” 그때 칼을 쥔 자가 덮쳐들며 칼을 휘둘렀다. 방망이도 날아들었다. 덕돌은 불갈고리로 날아드는 칼을 걷어내며 와닥닥 그 자들의 사이로 빠져나가 달아났다. 덕돌이 교정이어서 창피해 달아나자 셋은 겁을 먹은 것으로 오해하고 바싹 뒤쫓았다. 허나 그들 셋이 달리는 속도가 달라졌다. 칼을 쥔 자가 제일 먼저 쫓아오는 것을 보고 덕돌은 홱 돌아서서 날아드는 비수를 불갈고리로 막고 칼등으로 허벅다리를 쳤다. “앗!” 비명소리와 함께 그자가 비수를 떨어뜨리며 허벅다리를 붙잡고 푹 꼬꾸라졌다. 칼등으로 쳤기에 다행이었다. 그때 뒤따라온 자가 방망이로 덕돌의 머리를 내리쳤다. 덕돌이 급히 머리를 옆으로 피했지만 어깨를 탁 맞고 비칠거렸다. 덕돌은 쓰러지면서 그자의 재차 날아드는 방망이를 쳐냈다. 뒤이어 곤두박질쳐 일어나 어깨를 붙잡고 절뚝거리며 달아났다. 방망이를 휘두르던 자가 방망이를 버리고 쓰러진 자의 비수를 주어 들었다. 그자는 이를 악물고 덕돌을 뒤쫓았다. 림호도 헐떡거리며 뒤쫓아 갔다. 덕돌은 자기 학교 마당이어서 숱한 학생들과 교원들이 볼 까봐 학교 토성을 뛰어 넘어 달아났다. 둘은 비수와 방망이를 주어들고 뒤따라 토성에 기어올랐다. 그때 덕돌은 토성 넘어 딱 붙어 서 있다가 무쇠주먹을 휘둘러 토성을 붙잡은 손을 내리 쳤다. “아가! 이 새끼, 돌로 친다!” 무쇠주먹에 맞은 손이 어찌나 아팠으면 돌로 쳤나 했겠는가! 허나 그자들은 죽기내기로 키 넘는 토성을 기어 넘어왔다. 그들의 몸이 평형을 잡기도 전에 덕돌은 발길을 날려 아랫배를 걷어찼다. 림호가 비수를 휘두르며 덮쳐들자 덕돌은 훌쩍 날아 림호의 숫구멍 위로 날아지나가면서 비수를 걷어찼다. 쉬-툭, 부르르. 비수가 채워 백양나무에 박혀 무서운 비명을 지르며 부르르 떨렸다. 다른 자가 덮쳐드는 것을 덕돌이 씽 몸을 날려 맞받아 나가면서 아랫배를 걷어찼다. “휙” “휙” 소리와 함께 덕돌은 개구리가 물에 뛰어드는 동작으로 토성을 훌쩍 날아 넘어갔다 되 날아 넘어왔다. 그자들이 토성을 기어 넘어가자 덕돌이 로지심처럼 꿋꿋이 냉소하며 서 있었다. 그 자들은 눈이 뒤집혀질 지경으로 놀랐다. “네깐 놈들과 상대 해 교원의 명예를 더럽히기는 싫다. 어서 꺼져. 반주검이 되기 전에.” 림호는 겁을 집어 먹고 칼에 찍힌 동생을 업고 학교마당에서 비실비실 사라졌다. 그제야 덕돌은 칼에 찍힌 종아리와 방망이에 맞은 어깨가 아파 상을 찡그렸다. “잘한다, 잘해! 교원이라는 게 시간은 보지 않고 교정에서 학부모들과 싸워?” 덕돌이 돌아보니 황승연 교장이 우멍눈을 부라리며 다가왔다. “중학교 때부터 주먹질 하던 개 버릇을 개를 떼 주겠니?” 덕돌은 참다못해 한마디 했다. “교원은 그래 정당방위도 하지 못합니까?” “정당방위? 불갈고리를 휘두르고서도 정당방위를 했어? 학부모를 쳐? 완전히 형사범죄자야.” “내 먼저 칼에 찔렸는데도 정당방위를 하지 못합니까?” “교원 형상을 다 팔아먹었다. 잘 검토할 준비를 해.” “뭘 잘 못했다고 이럽니까?” 이때 경산 선생이 다가와 덕돌을 말렸다. “숱한 사생들이 보는데 싸워서야 되니? 교장을 존중해야지. 뭐야?” 황승연은 우쭐해 을러멨다. “보자, 보자 하니까. 덜 돼 먹은 놈 새끼군, 중학교 때도 나를 존중하지도 않더니. 흥, 어디 그래 봐라. 이번 일은 절대 용서할 수 없어. 학생을 때리고 학부모까지 칼과 불갈고리로 치다니. 흥!” 뒤이어 그는 머리를 돌려 경산을 흘겨보며 호통을 쳤다. “교연실 조장이 뭐 합니까? 잘 교육하오.” 경산 선생은 “알았소. 내 책임질 테니 이 일은 조용히 해결하는 게 어떻소?”라고 하며 덕돌의 피 묻은 바지를 걷고 종아리 상처를 손수건으로 닦아주고 싸매주었다. “얼른 병원에 가 처치해라.” 그는 덕돌을 얼려 병원에 보내고 대신 덕돌이 맡은 반에 들어가 대과교수를 해주었다. 덕돌이 공사병원에서 처치를 다 하고 학교로 돌아오는데 경산선생이 헐금씨금 달려 왔다. “황승연이 널 교원대회에서 비판하겠다고 하더라. 그러지 말고 술과 통졸임 같은 걸 사가지고 승연을 찾아가 비판대회를 열지 말라고 통사정을 들이대라. 명색이 너의 스승이 아니고 뭐야? 웃는 얼굴에 침을 뱉겠니?” 허나 덕돌은 듣지 않았다. “난 잘못한 게 없습니다. 황승연 교장께 코밑치성을 한다고 저를 봐줄 거 같습니까? 중학교 때부터 얼마나 수모를 당했다고 그럽니까?” 경산 선생은 덕돌의 손을 꼭 잡고 타일렀다. “낮은 문턱일수록 머리를 숙여야 한다. 그러잖으면 낮은 문턱에 머리가 터진다.” 선생이 어찌나 간곡히 타이르는지 덕돌은 마지 못해 수긍하지 않으면 안됐다. "점심에 그럼 찾아가 보겠습니다.” 허나 점심에 덕돌이 사탕과 과자, 술과 통졸임을 한 꾸럭 사들고 황승연 교장네 집으로 찾아갔다. 문을 두드리고 들어서자 황승연 교장은 손에 든 꾸럭을 보더니 훌 일어나 바깥으로 나가버렸다. “보기도 싫어.” 그러나 덕돌은 내심하게 황승연 아내한테 그 꾸럭을 내려놓고 나왔다. (웃는 낯에 침이야 뱉지 않겠지?) 덕돌은 한숨을 후 내쉬었다. 오후 2시가 되자 교연실의 스피카에서 전체 교원회의를 한다고 통지했다. 덕돌은 교원들과 함께 회의실에 갔다. 교원들이 다 회의실에 들어온 후 황승연 교장이 앞에 나가더니 다음과 같이 고래고래 고함쳤다. “오늘 교원회의에서 교원 덕돌이 학생 박송호와 학부모 박림호 등 4명을 때린 착오를 비판하겠습니다.” 깜짝 놀란 교원들의 눈길이 덕돌에게 쏠렸다. “우선 덕돌 선생으로부터 검사하겠습니다.” 덕돌도 뜻밖의 비판대회에 적이 놀랐다. 허나 그는 인차 진정하고 교원들 앞에 나가 서서 이른바 검토를 시작했다. “저는 우선 사건진상부터 말하겠습니다.” 덕돌이 전날 저녁과 오전에 있은 일을 죽 이야기고 나서 이렇게 말했다. “저는 박송호 학생이 불시에 헤딩하자 황급히 피하면서 몸부림쳤습니다. 그런데 송호가 스스로 저의 팔꿈치를 헤딩해 낯을 상했습니다. 저는 송호가 숱한 학생들 앞에서 내 별명을 부르고 결코 때린 적이 없습니다. 저는 당직으로서 책임을 다 했을 뿐입니다. 오히려 송호 학생이 3층 교실에서 떨어질 까봐 내리라고 조용히 타일렀습니다. 그래 3층 유리창문에 매달려 자습하는 여학생들에게 모래를 들이뿌리는 학생을 제지시킨 것이 잘못입니까? 전 정말 억울합니다. 저를 무슨 리유로 비판까지 합니까?” 그러자 교원들은 수군수군 했다. “박송호란 애는 원래 애군이오. 맞아 싸오.” “여자애들에게 모래를 치는 거 제지했는데 무슨 잘못이오?” “어떻게 학생이 선생을 헤딩하오?” “헤딩하다가 자기 힘에 김 선생의 팔꿈치를 들이받아 상한 게 누구 탓이오?” 그러자 황승연은 앞에 나가 교탁을 탕탕 두드렸다. “분명 덕돌이 학생을 때린 걸 내 눈으로 봤습니다. 우리 학교 교원들의 명예를 다 더럽혔습니다. 숱한 사생들이 보는데 오전에 학부모 셋이나 때렸습니다.” 그 말에 청년 교원들 속에서 이런 말도 오갔다. “‘문화대혁명’후 첫 패 대학생이 뭐 어떻고 어떻다더니 그저 그렇구먼.” “본과생이면 뭘 대단하오? 주먹이나 휘두르는 깡패지.” “그래도 우리 빈농의 재교육을 제대로 받은 공농병 학원이 사상이 제일이지.” 일부 공농병학원 출신 교원들은 평소에도 덕돌을 질투하더니 잘코사니야 하고 헐뜯어댔다. 그러자 황승연은 우쭐해 떠들어댔다. “박림호라는 학부모는 머리를 채워 뇌진탕이 올 지경이고 박영호라는 학부모는 불갈고리에 맞아 다리를 절게 됐습니다. 박송호 학생의 사촌형 박용호는 토성을 넘어 달아나다가 덕돌이 돌로 쳐놓은 게 손가락뼈가 다 끊어져 병신이 됐습니다. 그래 교원으로서 할 짓을 했습니까? 덕돌은 교원이 아니라 깡패입니다. 중학교 때부터 무서운 싸움꿈입니다. 우리 진수해에서 덕돌이네 굴 뱀이라면 누가 모릅니까? 세살짜리 애들도 굴 뱀이 온다고 하면 울음을 딱 그칠 지경입니다.” 그때 덕돌이 황승연과 따지고 들었다. “황 교장, 그래 교원은 학생과 학부모에게 들이대고 맞아대야 됩니까? ‘백프로’라고 별명을 부르면서 놀려대도 못 들은 척 하면서 아Q처럼 자기를 위안해야 합니까? 교원은 칼과 몽둥이를 휘두르는 학부모에게 찔리어 죽어도 정당방위를 하지 못합니까? 셋이 때리러 왔다가 피해 달아나면서 내 정당방위에 상한 게 누구 탓입니까?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예절교육을 하지 않고 모욕당한 교원을 비판하는 것이 맞습니까? ‘문화대혁명’이 끝난지 몇 해인데 아직도 잘못이 없는 교원을 비판, 투쟁하겠습니까?” 황승연은 이를 악물며 덕돌을 쏘아보며 호통쳤다. “이걸 보시오. 얼마나 완고한가? 자기 잘못을 검사하기는커녕 대드는 걸 보시오. 교원은 학생들에게 이신작칙의 모범을 보여야 해. 어떤 일이 있더라도 학생의 자존심을 상하게 해서는 안 되며 더욱이 손을 대서는 절대 안 돼!” 덕돌은 코웃음쳤다. “황 교장, 그런 말을 하기 부끄럽지 않습니까?” 덕돌은 교원들을 향해 허리 굽혀 경례를 했다. “제가 무례하게 중학교 스승의 잘못을 까밝히는 걸 양해해 주십시오. 황 선생은 함흥중학교에서 학생을 때린 적이 없습니까? 황 선생님은 저의 담임교원을 하면서 제가 종소리를 듣지 못하고 늦어 들어왔다고 저를 때려 코피를 흘리게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고서도 성차지 않아 저의 학습위원자격마저 취소하지 않았습니까? 선생님은 그렇게 학생의 자존심을 여지없이 짓밟고서도 오늘 저에게 이런 요구를 강요할 자격이 있습니까?” “이걸 봐라! 넌 교원자격도 없다. 없어! 오늘 이게 널 비판하는 회의지 나를 비판하는 회의가 아니야. 이 깡패 같은 새끼야, 네가 우리 학교에 발을 붙이나 두고 보자!” 황승연은 분을 참지 못해 씩씩거리며 주먹을 으스러지게 쥐고 부르르 떨며 우멍눈으로 덕돌을 쏘아보았다. 숱한 교원들 앞이 아니면 당장 칠상이다. 남철수 선생도 떠들어댔다. “이제 학교에 온지 몇 달 밖에 안 되는 신입교원을 비판하는 건 맞지 않소. 교육해야지 쩍 하면 사람을 비판하는 건 타당하지 않소. 교원은 그래 칼에 찍혀 죽어야 하오. 반항도 하지 못하고 정당방위도 하지 못한다는 게 세상에 어디 도리 있소?” 황승연은 회의를 계속 해 나가다나면 덕돌에게 망신당할 까봐 황급히 폐회를 선포했다. “오늘 회의는 끝났습니다. 덕돌에게 자기 잘못을 뉘우칠 사상준비를 시킨 후 다시 비판대회를 열도록 하겠습니다. 한번 열어 안 되면 두 번, 두 번 안 되면 열 번, 저 덕돌이 사상개조를 제대로 할 때까지 비판대회를 열겠습니다.” 그러자 덕돌은 황승연을 거들떠도 보지 않으며 회의실에서 나가면서 말했다. “백번이라도 여십시오. 난 끝까지 시비를 따질 것입니다.” 그날 회의는 그렇게 끝나버렸다. 경산 선생과 남철수 선생은 저녁에 당직실로  찾아와 덕돌을 타일렀다. “그저 검사나 하고 지나가면 그만일 걸. 왜 긁어서 부스럼을 만드오? 큰 일 쳤소. 이제 저 황승연은 저를 놔둘 거 같지 않소. 이 일을 어쩌오?” 남철수 선생의 말에 덕돌은 하루 강아지 범을 무서운 줄 모른다고 굽어들지 않았다. “제가 무슨 잘 못이 있어서 검사를 해야 한단 말입니까?” 경산선생은 그저 한숨만 후 내쉬다가 이렇게 말했다. “덕돌이 술이랑 사가도 황승연이 저러오.” “뭐라오?” 남철수는 저으기 놀라했다. “얻어먹고서도 저런단 말이오? 이제 회의만 해보오. 가만 놔두지 않겠소.” 그러나 교활한 황승연은 다시는 비판대회를 열지 않았다. 괘씸한 생각 같아서는 백번도 비판대회를 열고 싶었지만 회의를 열었다가 덕돌에게서 무슨 반격을 당할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숱한 교원들이 덕돌을 비판하는 것을 반대하는데다가 지어 교원들의 불만을 야기시킬 까봐 겁났던 것이다. 대신 혹독한 처벌을 감행했다. 그 이튿날부터 덕돌이 “착오를 지고서도 고치려고 하지 않고 태도가 나쁘다”는 이유로 교단에 오르지 못하며 반성하라고 했다. 그리고 “덕돌을 막후에서 조종한” 경산 선생은 농촌의 함흥중학교에 전근시키며 남철수선생도 교단에 오르지 못하며 총무처에 전근시킨다고 처분을 내렸다. 덕돌은 원래 문학창작에 뜻을 두었기에 교단에 오르지 못한다는 처분을 받은 것쯤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러나 그는 자기를 타이르다가 누명을 쓰고 처분 받은 경산 선생과 남철수 선생에게 미안했다. 농촌학교로 떠나가면서 경산 선생은 덕돌을 조용히 불렀다. 덕돌은 경산선생과 함께 이불 짐을 실은 소 수레를 몰고 시골 고향으로 내려갔다. 덕돌은 “선생님, 미안합니다. 저 때문에 이런 일이 생겨서.”라고 하며 머리를 숙였다. 경산 선생은 덕돌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으면서 조용히 말했다. “괜찮다. 네 탓이 아니다. 다 황승연 때문이야. 시내 학교면 별거냐? 농촌 고향마을 학교에 가도 마음이 편해 좋다. 어디 황승연의 밑에서 교원질을 하겠니? 넌 신문사에 간 성환이랑과 연줄을 놔서 신문사로 가라. 고중 때 뜻대로 글이나 써라. 진수해학교에 있으면서 정신타격을 받을 게 있니?” “알았습니다. 저는 아예 교원을 하지 말까고도 생각합니다. 제가 한 달만 대련에 가서 물고기를 사다가 장사하면 교원 일년 로임보다도 더 벌 수도 있습니다. 교원을 그만두고 장사나 하면서 살까 합니다.” 경산 선생은 주춤 멈춰서며 덕돌을 굳은 얼굴로 바라보았다. “무슨 소리냐? 우린 이런 일을 당할수록 넘어진 곳에서 일어나야 한다. 네가 교원을 그만두고 장사나 해봐라. 황승연이 얼마나 좋아하겠니? 우린 시련을 이겨내고 황승연을 이겨야 한다. 알만하니?” 덕돌은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어찌 세상에 얽매여 산단 말입니까?” “그렇다고 황승연 때문에 전도를 망치겠니? 꼭 황승연이 보라는 듯이 뜻을 펴야 한다. 알만하니?” 덕돌은 땅이 꺼지게 한숨을 후 내쉬었다. 머리를 들어 산을 바라보니 하늘이 꺼져 내린 듯이 눈앞이 온통 암흑천지로 변하고 있었다. 검퍼런 하늘에서 당장 우레 울고 번개 치면서 광풍폭우가 몰아치면서 소낙비가 억수로 쏟아질 것만 같았다.                3. 설중매화 땡볕이 쨍쨍 내리 쬐는 무더운 여름에 덕돌은 2킬로미터나 되게 길고 가파른 고개를 자전거를 타고 한 번도 내리지 않고 올라갔다. 자전거를 밀고 가던 행인들은 모두 덕돌을 쳐다보며 혀를 끌끌 찼다. “야, 그 청년이 맥이 좋긴 좋다.” “이 오르막을 어떻게 자전거를 타고 올라가오?” “글쎄 말이오.” 덕돌은 악을 딱 쓰고 오르막을 올라갔다. 령 마루에 오르자 진수해가 내려다보이며 눈앞이 캄캄해났다. 이때 남포소리가 꽈르릉 꽝꽝 울렸다. 순간 길 옆에 소소리 높이 치 솟은 쌍둥이 산 절벽에서 바위돌들이 와그르르 무너져 내려왔다. 자전거에서 내려 땀을 들이며 그 무너진 돌산을 바라보는 순간 자기 신세가 어쩜 저 돌산과 비슷한 감이 들어 즉흥시를 중얼중얼 읊었다.                외로운 산아            자욱한 안개 속에 잠겼나           잡초 속에 우뚝 솟은 외로운 산           흐리터분한 하늘아래 진창 속에 빠졌나          천길만길 소소리 높은 칼산           흐느끼며 서러움을 토하는구나         후둑 후둑 떨어지는 빗물에 눈물에          오, 모난 돌에 정이 온다더니        이 내 머리 몸 마음을        남포질로 폭파하고 정으로 깨버려       볼 품 없이 돼 버렸구나       푸른 이끼 낀 청청 바위 외로운 산         어찌 하얀 광목을 쓰고       더러운 뜨물에 뛰어들랴?            차라리 침묵 지키며        바위돌처럼  굳어지리라       저 외로운 산으로       차라리 꽈르릉 꽝꽝       화산으로 폭발하리라         개학날에 덕돌은 애들을 데리고 영화관에 가서 개학식에 참가했다. 그런데 숙사라고 당직실에 돌아와 보니 이불과 책궤가 없어지지 않았겠는가. “웬 일이야?” 구질구질 내리는 비를 무릅쓰고 여기 저기 두리번거리며 살펴보다가 덕돌은 자기 눈을 의심했다. 글쎄 학교 변소 옆의 쓰레기 무지 옆에 이불과 책궤가 비를 맞고 있지 않겠는가. “누가 이랬어?” 순간 덕돌은 코마루가 시큼해나며 서러움이 울컥 치솟아 올랐다. “뭘 보고 이 학교에 와서 이런 모욕을 다 당해? 아무리 집 없는 독신교원이라고 해도 이렇게까지 할 수 있단 말인가?” 화난 덕돌은 비를 무릅쓰고 책궤 위에 이불을 얹어 둘러메고 당직실로 돌아왔다. 그때 뒤에서 벼락 치듯 한 고함소리- “야, 누가 네 이불 짐을 당직실에 가져가라고 비준했냐?!” 돌아보니 황승연이었다. 덕돌은 성이 꼭뚜까지 치미는 것을 가까스로 참으며 거들떠보지도 않고 당직실에 이불 짐을 메고 들어갔다. 황승연은 뒤따라 들어오면서 고래고래 고함쳤다. “이게 당직실이지 숙사인가?” 덕돌은 이불 짐을 구들에 놓은 후 돌아서서 황승연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물었다. “그래 우리 독신교원들은 어디에 들랍니까? 학교 숙사를 두고 독신교원들을 들지도 못하게 하면서 당직실에도 들지 못하게 합니까?” “시내에 나가 세집에 들어라. 우리 학교는 너 같은 외톨이를 거두는 민정소가 아니야.” “그래서 내 이불을 비 오는 날에 변소 옆에 내던졌습니까? 당신도 인간입니까?” “우리 학교에서 썩 꺼져라. 보기도 싫다.” “정말 한 하늘을 쓰고 살지 못하겠습니까?” “무슨 말이냐?” 덕돌은 밸을 눅잦히며 조용히 말했다. “선생님, 제가 덕을 쌓지 못해 과거에 선생님을 제대로 존경하지 못한 건 잘 못입니다. 이제부터라도 저는 황 선생님을, 아니, 황교장 선생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참된 교원으로 되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허나 황승연은 한숨을 후- 내쉬더니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진심이냐? 너 아비와 물어봐라. 너 아비가 우리 형님을 감옥에 처넣고 나를 함흥중학교에서 쫓아냈다. 반란파라고. 그런데 지금 나를 보고 옛 제자로 받아 들여 달라고?” 황승연은 목구멍까지 올라온 이 말을 삼켜버리고 “흥!” 하고 콧방귀만 뀌더니 문을 쾅 박차고 나가버렸다. 덕돌은 어쩜 저런 원수 교장을 다 만났나 생각하니 속이 타 한숨이 연기로 돼 꾸역꾸역 뿜겨져나갔다. “황 교장은 어쩔 수 없구나. 진짜 악연이라도 저런 놈의 악연은 어디에 있어?” 개학에 담임교원을 시키자 덕돌은 황 교장이 자기를 그래도 신임해 시켰나 여겼다. 허나 남철수 선생이 다른 교원들에게서 들었는데 황 교장은 사업부담을 꽉 안겨 덕돌을 혼내자고 담임을 시켰다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듣고 누가 안착하고 이 학교에서 교단에 오르려고 하겠는가? 허나 덕돌은 마음속으로 “문화대혁명” 후 첫 패 대학졸업생의 본때를 보여주려고 담임을 맡아 나섰다. 숱한 학부모들이 자기를 믿고 귀여운 자식들을 보냈는데 학생들을 책임져야 했다. 덕돌은 학교 운동대회를 계기로 해 식전이면 애들을 데리고 달리기연습을 했다. 하학하면 애들을 데리고 진수해 다리목까지 달아갔다가 달려 왔다. 처음에는 애들이 달리기를 싫어했지만 차차 달리니 신체도 좋아지고 공부도 잘돼 좋아했다. 운동대회 전날에 불미스러운 일이 벌어졌다. 업간체조시간에 선화가 노란 등산복을 입고 나갔다고 황교장이 숱한 애들 앞에서 야단쳤다. “이게 누구네 반 애냐? 또 덕돌이네 반 애구나.” 그는 다짜고짜로 선화의 등산복을 벗겨내고 나팔바지 가랭이를 가위로 쭉쭉 째버렸다. “학교 규정을 몰라? 학생들은 남색교복 외에 다른 색깔 옷을 입지 못해!” 선화는 두 손으로 눈물을 훔치며 집으로 쫓기어 갔다. 너덜거리는 바지를 춰 입고 집으로 울며 쫓기어 가는 선화를 보고 덕돌은 마음이 아팠다. 그는 업간체조가 끝난 후 교장실에 찾아가 황승연과 따지고 들었다. “여학생이 고운 노란 옷을 입었는데 무슨 죄가 있습니까? 왜 바지까지 째서 쫓아 보냅니까?”  황승연은 삶은 소 대가리 웃다가 꾸러미 터질 소리를 쳤다. “원래 담임부터 사상이 틀려먹었구먼. 학생들이 노란 등산복을 입고 학교를 다니면 안되오. 애들이 벌써 멋을 따기 시작하면 양해난 암고양이처럼 아르릉거리며 연애하기 시작하오. 아주 위험한 신호요. 사상까지 변질한단 말이야.” “그래 학생들은 고운 노란 등산복이랑 입지 못한단 말입니까!” “노란 등산복 위에 남색 옷이거나 검정 옷을 껴입어야 해.” “학생들이라고 고운 옷을 입지 못하고 미운 옷을 입으라는 게 도리에 맞습니까? 학생들도 자기 개성에 맞는 미감에 따라 아름다운 옷을 입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너 지금 누굴 훈계하느냐?! 이제 그 여학생이 한번만 더 노란 등산복을 입고 학교에 오면 업간체조시간에 전교 사생 앞에서 비판하고 퇴학시키겠어!” "쳇! 두번째 문화대혁명을 하려는구만." "뭐라고? 어찌고 어째?" 황승연은 이를 악물고 주먹을 쳐들었다. 덕돌은 무지막지하고 야만적인 독재자와 더 할 말이 없어 교장실에서 나왔다. 뒤에서 황승연은 덕돌을 잡아먹을 상하면서 눈깔을 데굴거렸다. 한창 아름다움을 추구할 어린 여학생들의 노란 등산복을 벗겨내고 가위로 바지를 째 버리는 것은 얼마나 무지막지한 건달행위인가. 고운 옷을 입기 좋아하는 여린 여학생들을 보고 강박적으로 남색 옷을 입거나 노란 등산복 위에 까만 옷을 껴입으라는 것은 얼마나 야만적인 독재자인가? 학생들로 하여금 자기 개성에 맞는 미감에 따라 아름다운 옷을 입고 개성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할 수 있게 해야 하지 않는가? 덕돌은 생각할수록 황승연이 이해되지 않았다. “어쩜 저렇게 무지할까? 나를 보고 학생들의 자존심을 여지없이 짓밟는다고 하더니 자기는? 어린 선화의 마음에 얼마나 깊은 상처를 주었는가? 대학 문도 못 나온 무지, 정말 사생들을 해치는구나.” 이튿날 선화는 교실에 나타나지 않았다. 조바심이 난 덕돌은 선화 네 집으로 찾아가려고 학교 대문을 나섰다. “선생님!” 귀에 익은 선화의 목소리였다. 머리를 돌려 보니 학교 대문 저쪽 골목에 선화가 서 있었다. 다가가면서 보니 남색학생복을 입은 선화의 어깨에는 책가방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활발하고 예쁘게 생글방글 웃던 얼굴에는 검은 그림자가 어려 있었다. 덕돌은 그런 선화를 보고 마음이 아팠다. “어째 교실에 들어가지 않고 여기 서있니? 가자.” 덕돌이 손을 잡아끌면서 말하자 선화는 머리를 숙인 채 뜻밖에 “선생님, 전 학교를 그만 둘까 합니다.”라고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뭐라고? 그게 무슨 소리냐?” (학교에서 어떻게 애들을 들볶았으면 퇴학까지 하겠다고 하겠는가? 다 황승연의 죄악이야.) “넌 공부를 잘해 이담 여류작가로 돼야 한다.” 덕돌은 착잡한 생각에 잠긴 채 놀라움을 감추지 못해 목소리마저 떨렸다. 허나 선화는 검은 그림자가 흘러가는 얼굴을 폭 숙이더니 가녀린 어깨를 들먹이기 시작했다. “선생님, 미안합니다. 선생님의 기대대로 하지 못할 거 같습니다. 고운 옷도 입지 못하게 하는 이 학교를 다니기 정말 싫습니다. 공부도 하기 싫고 글쓰기도 싫습니다. 어머니가 하는 말이 글을 써서 성공하기 아주 힘들다고 합디다. 저는 학교를 그만두고 문화소에 다니면서 노래공부나 해 가수로 되렵니다.” “뭐라고 가수?” 순간 덕돌은 굳어졌던 얼굴이 점차 풀리었다. “그래, 가수도 좋지. 허나 가수로 되려면 문화지식도 배워야 한다.” 한식경이나 되는 덕돌의 따뜻한 사랑이 담긴 말에 감화된 선화는 학교를 그만두려는 생각을 잠시 접고 집에 돌아가 책가방을 메고 교실에 들어섰다. 그날부터 하학하면 덕돌은 선화를 문화소에 보내 성악공부를 시켰다. 일요일에 덕돌은 선화를 데리고 가무단의 송선 선생을 찾아갔다. 송선은 호리호리하고 훤칠해 물 찬 제비 같은 선화의 체격과 예쁘고 외씨같이 걀쭉한 얼굴을 보고 아주 흡족해 했다. 그녀는 덕돌을 한쪽 구석에 데리고 가서 조용히 말했다. “무용을 배워줄만한 애요. 허나 성악을 한다면서 무용을 배워 뭘 하오?” 덕돌은 비난사정을 했다. “무용과 음악이 뭐 그리 계선이 큽니까? 선화가 무용도 배워 장차 진짜 종합예술능력을 갖춘 가수로 됐으면 좋겠습니다.” 송선은 흔쾌히 대답했다. “정 그렇다면 무용을 배워주지.” 그녀는 애티를 벗고 숙성한 덕돌을 훑어보며 조용히 물었다. “영자는 소식이 있소?” “없습니다. 저는 영자를 잊었습니다. 매정한 처녀애지. 어쩜 소식 한마디조차 알리지 않는단 말입니까?” 순간 덕돌은 코마루가 시큼해났다. 허나 선화가 한쪽에 앉아 있어 더 말할수 없었고 눈물을 보일 수 없었다. 며칠 후 학교 운동대회 때 선화는 전교 사생들 앞에서 마이크를 잡고 아주 청아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노래를 간드러지게 불렀다. 덕돌은 흐뭇한 눈길로 김선화를 보면서 장차 유명한 여가수를 방불히 보는 상 싶어 흐뭇했다. 평시에 군사훈련처럼 장거리달리기를 한 덕돌의 학생들은 100미터 달리기로부터 모든 항목에서 거의 우승을 따내 경쟁자들을 뒤로 멀리 떨어뜨려 놓았다. 헌데 씨름시합에서 문제가 생겼다. 해동촌에서 왔다는 동철이란 애는 2년이나 낙제했는데 덕돌의 학급의 김수일 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컸다. 힘도 어찌나 센지 어지간한 애들은 아예 허리를 꽉 끌어안아 당겨 꺾으면서 재껴 버리곤 했다. 수일은 아예 기권하려고 했다. 그러자 덕돌은 감독처럼 수일을 교실에 데리고 가서 먼저 용기를 북돋아주었다. “씨름이나 싸움이나 덩치 따위에 있는 게 아니다. 뭐나 정신이 관건이다. 신심을 가지고 나서라.” “그 큰 애를 어떻게 이긴다고 그럽니까?” 덕돌은 그 애를 이길 씨름 몇 개 동작을 배워주었다. 그제야 수일은 다시 씨름판으로 돌아갔다. 수일은 결승전에서 끝내 해동촌의 동철과 맞붙게 됐다. 동철은 샷바를 잡을 때부터 어린 수일을 업신여기며 고의로 허리를 꽉 끌어 당겨 품안에 걷어 넣었다. 수일은 머리도 들지 못하고 눌리어 숨도 쉬기 어려웠다. 그런데 저게 뭐야? 시작 호각을 불자마자 수일이 성난 뜨개소처럼 동철을 머리로 콱 떠밀며 손으로 허벅다리를 탁 쳐 콱 당겼다. 동철은 덩치나 컸지 힘도 써보지 못하고 모래에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동철은 입을 허 벌리고 물앉아 수일을 쏘아봤다. 너무나도 억울해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3판 2승의 두번째 판이 시작됐다. 동철은 또 안손을 맞을까봐 이번에는 수일을 꽉 껴안지 못하고 두 손으로 수일의 허벅다리를 밀며 경계하며 일어났다. 이젠 됐다 싶어 동철은 또다시 수일을 마구 떠밀며 이리저리 밀었다 당겼다 하며 태를 치려고 서둘렀다. 동철이 또 떠밀며 다리마저 들어올 때었다. 수일은 두 손으로 다리를 꽉 잡아당기다가 오른손을 사타구니 밑에 넣어 동철을 허공 쳐들었다. 동철은 겁기를 띄우며 수일의 어깨 위에서 허공 돌다가 썩박나무처럼 처박혔다. “야, 수일이 이겼다!” 선화랑 지송남이랑 두 손을 쳐들고 퐁퐁 뛰며 환성을 질렀다. 덕돌은 씨름판으로 달려 들어가 수일을 껴안았다. “우리 수일이 1등이다! 일등!” 덕돌은 수일을 건뜻 들어 목마를 태우고 씨름판을 한바퀴 돌았다. 그때 웬 청년이 씨름판에 뛰어들어 덕돌과 수일을 쏘아보았다. “선생, 너덜거리지 마오! 한판 붙어 보기요.” 덕돌이 보니 그 청년은 눈에 독기가 어려 있었다. “여긴 학교 학생들의 씨름판이지 사회 청년들의 씨름판이 아니오.” 그 청년은 샷바를 쥐고 씨름판을 에돌면서 덕돌을 노려보는 것이었다. “어째? 겁나오?!” 덕돌은 냉소하며 수일을 목에서 내려놓았다. 사생들은 구경거리가 생길 거 같아 눈을 크게 뜨고 그 청년과 덕돌을 번갈아보았다. 선화랑 송남이랑 마음을 졸이며 근심했다. 허나 덕돌은 거들떠도 보지 않고 “자넨 누구요?”라고 물었다. “동철의 삼촌 철석이오.” 덕돌은 머리를 끄덕였다. 허나 대답은 왕청 같았다. “난 씨름 할 줄 모르오. 황차 내보다 어린 사람들과 놀지도 않소.” “어째 겁나오?” 약을 올리고 있었다. 그때 수일이 말렸다. “선생님, 하지 마십시오. 저 사람은 진수해에서도 이름난 씨름꾼입니다. 황소를 몇 번 탔답디다.”       덕돌은 철석과 한번 붙어보기 싶어졌다. 허나 학교 마당에서 붙기는 또 말썽을 일으킬까 봐 눈치 보였다. “후에 조용할 때 보기요.” “오늘 한판 붙어 보기요.” 허나 덕돌은 희죽이 웃으면서 나직이 말했다. “난 이날 이때까지 진수해에 철석이란 씨름꾼이 있다는 말은 들어 본적도 없소. 후에 보기요.” 동철도 삼촌을 말렸다. “삼촌, 저 선생은 진수해에서 굴뱀으로 이름났습니다.” “난 씨름판 싸움판 다 돌아다녀도 덕돌이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도 없다.” “아마 저 선생이 대학을 간 후여서 삼촌이 듣지 못했을 게요.” 동철은 덕돌과 수일을 흘겨보며 철석을 잡아끌며 씨름판을 떠났다. 체육교원들도 다른 학년의 씨름을 시작해야 하기에 철석을 말려 보냈다. 그때 황교장이 덕돌의 눈치를 흘끔흘끔 살피면서 슬그머니 미꾸라지처럼 사생들 속에서 빠져나가 동철과 철석이 가버린 쪽으로 사라졌다. 덕돌이네 반에서 운동성적은 거의 모든 항목의 우승을 따낼 지경이었다. 하지만 우승월계관은 차례지지 않았다. 이유는 황승연 교장 말에 있었다. “덕돌이네 반에서는 한 학생이 3개 항목 이상 경기에 참가하지 못한다는 경기 규정을 어겼다.” 덕돌은 황승연에게 무함당해 우승월계관은 타지 못해 억울했다. 체육위원인 지송남이랑 중대장인 수일이랑 보기 미안했고 황승연이 괘씸하기 짝이 없었다. (진짜 악연이구나. 아무리 은사님이라고 존중하고 잘 받들려고 했지만 소용없구나. 다른 방도가 있어야지.) 덕돌은 이런 생각을 굴리는데 생각지 않은 동철이 해동마을의 숱한 애들과 무리를 지어 다니면서 하학해 집으로 돌아가는 수일을 막아 자꾸 싸움을 걸고 물매를 안기곤 했다. 덕돌은 주먹을 으스러지게 틀어쥐었다. 허나 동철도 학생인지라 주먹을 휘두를 수 없어 조용히 동철이네 담임을 찾아가 정황을 말하고 애들이 더 싸우지 말게 말리게 했다. 허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애들은 담임교원 앞에서는 다시 때리지 않겠다고 했다. 하지만 하학하고 돌아갈 때면 해동다리를 막지 않으면 철교를 막고 홀로 집으로 돌아가는 수일을 때리곤 했다. 독불장군이라고 수일은 송남을 내놓고 마을 친구가 별로 없어 늘 얻어맞아 얼굴에 흉터가 생긴 채 학교를 다녔다. 덕돌은 어쩌는 수 없어 하학하면 수일을 집에 데려다 주곤 했다. 덕돌이 뉘엿뉘엿 지는 해를 바라보며 수일을 데리고 철교를 지날 때였다. “백프로 왔다!” 덕돌을 본 해동마을의 애들은 겁을 집어 먹고 버들방천으로 뛰어 들어가 자취를 감추어버렸다. 덕돌은 한 보름 동안 수일과 여학생들을 집에 데려다 주었다. 덕돌이 당직을 서던 어느 날이었다. 덕돌이 교정을 돌아보는데 키가 구척이나 되는 낯선 한족청년들 셋이 사냥총과 새총을 들고 들어와 나무에 앉은 새를 “땅!” “땅!” 쏘는 것이었다. 지어 교정의 애나무들을 마구 끊는 것이었다. (아니, 저 나무들은 우리 사생들이 어떻게 날라다 심은 거라고 꺾어? 열댓 살 나는 애들을 데리고 시내에서 15 리나 떨어진 눈 덮인 대포산에 가서 끌고 밀고 해 가져다 심은 건데.) 덕돌은 마음이 아파 사회 불량배들에게 다가가 처음에는 내심하게 부드러운 말로 말렸다. “학생들이 저녁에 공부를 하는데 학교 마당에서 총을 쏘면서 새를 잡아선 안 돼. 어서 교정에서 나가라!” “뭐라고?” “당신 누구야?” “당직교원이다. 어서 나가라. 나무를 꺾어선 안 돼.” 그 불량배들은 교정에 숱한 교원들이 있는지라 눈치를 흘금거리며 못이기는 척 하며 교정을 나갔다. 덕돌이 깊이 잠든 한 밤중에 바깥이 소란스러워졌다. “나오라!” 잘라당! 유리창문이 박살나 당직실 안에 유리 쪼각이 날려 들어왔다. 만순은 겁나 침대 밑에 숨고 덕돌은 바깥으로 눈을 비비며 문을 박차고 떠드는 불량배들한테 나갔다. 분명 낮에 왔던 불량배들이었다. 달빛에 서슬 푸른 빛이 번쩍했다. 칼이었다. 덕돌은 문 뒤에 슬쩍 물러섰다. 뒤에 섰던 다른 불량배의 두 번째로 칼이 날아들 때 덕돌은 미처 반응을 하지 못했다. 칼이 덕돌의 목을 겨누고 쉭 날아 내려왔다. 그 찰나 뒤에 있던 교원 차영천이 칼을 휘두르는 불량배의 손목을 딱 틀어쥐고 칼을 빼앗아냈다. “죽여라!” 바깥에서 불량배 셋이 몽둥이와 칼을 휘두르며 고래고래 고함쳤다. 그때 숱한 교원들이 달려왔다. 남철수 교원이 파출소에 알리자 새 불량배들은 교정에서 도망쳐버렸다. 그날 저녁에 장기를 놀러 왔던 차영천이 아니었더라면 덕돌은 교정의 나무를 지키려다가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다행히 불량배들이 휘두른 칼이 배 가죽을 가르고 지나갔던 것이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전날에 칼을 휘두르던 한 불량배가 이튿날 오후에 아무 일도 없는 듯이 또 교정에 나타나 사냥총으로 새를 잡고 있었다. 그때 덕돌이 뛰어나가 잡으려고 하자 교연실 주임 남철수가 말렸다. “안 되오. 당신이 가면 달아나오. 먼저 내 가서 사냥총을 뺏으면 그때 달려와서 붙잡소.” 말을 마치자 남철수는 슬금슬금 그 자의 곁으로 다가가 와닥닥 달려들어 사냥총을 꽉 잡았다. 그때 덕돌이 덮쳐나가 그 불량배를 붙잡았다. 교원들은 인차 부근의 파출소에 알려 불량배를 붙잡아 가게 했다. 허나 사흘도 지나지 않아 그 불량배가 또 교정에 나타나 애를 먹였다. 원래 한족민경이 그 불량배를 처리도 하지 않고 놔버렸던 것이다. 남철수와 덕돌은 진수해 공안국에 가서 김창남 국장과 진수해진 진장 이인학, 진수해 파출소 허영호 소장을 찾아가 반영했다. 이인학 진장은 그 자리로 파출소에 전화를 걸어 그 한족민경에게 호통치며 훈계했다. “오늘내로 그 불량배를 잡아 처리해. 안 그럼 경찰복을 벗을 줄 아오.”        덕돌에게 칼을 휘둘러 찌른 그 불량배들은 경찰들에게 다시 붙잡혀 법에 의해 처리됐다. 덕돌과 차영천, 남철수 교원은 용감히 불량배들과 싸운 “정의용사”로 교육계통에서 표창받았다.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겨울에는 큰 일이었다. 덕돌은 기말시험을 맞으면서 애들에게 하루 복습내용을 그어주고 암송하는 족족 집으로 보냈다. 차디찬 빛을 뿌리는 겨울 해가 서산으로 그물그물 넘어가면서 창문을 꿰뚫고 교실 안에 석조를 가늘게 비치었다. 학생들은 기말복습답안을 암송하느라고 머리를 싸쥐고 중이 경을 읽듯이 중얼중얼 했다. 애들이 다 암송하기를 기다리려 교탁 앞에서 검사하고 돌려보내노라면 흔히 토끼꼬리만한 겨울 해가 진 뒤였다. 그런데도 해동촌의 애들은 아직도 철교가 아니면 해동다리를 막고 수일을 때릴 기회를 노리었다. 눈보라 치는 날에도 덕돌은 어두운 밤에 집으로 돌아가기 겁이 나 하는 수일이랑 해금이랑 데리고 해동다리 아니면 철교를 건너 집으로 데려다 주었다. 덕돌이 나타나기만 하면 해동마을의 애들은 흩어져 집으로 달아났다. 눈보라가 윙윙 휘몰아치는 저쪽에 게딱지 같은 초가집들의 희미한 전등불이 보였다. “선생님, 이젠 돌아가십시오. 마을에 다 왔습니다.” 수일이 손을 잡고 사정했지만 덕돌은 시름이 놓이지 않았다. “안 돼. 일이 나면 어쩌니?” 이때 해금과 분옥도 말리었다. “선생님, 우리 아버지랑 집 앞에서 기다릴 겁니다. 근심하지 말고 돌아가십시오.” 그제야 덕돌은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그래, 내 여기 서서 너희들이 집에까지 가는 걸 지킬 테야. 해동마을 애들이 마을 어귀에 숨어 있으면 어쩌겠니? 어서 달려 집으로 달려가라! 집에 무사히 다 갔으면 소리쳐라!” “예, 선생님 감사합니다.” 애들 셋은 허리 굽혀 인사하고 눈보라 속으로 달려갔다. 학생들이 달려가는 발자국소리가 점점 낮아지고 그들 셋의 모습이 아물거리다가 눈보라 속에 사라져갔다. 덕돌은 눈보라 속에 흑점으로 돼 사라지는 애들을 보며 혹시 무슨 일이 있는가 계속 서서 어둑어둑한 마을 저쪽에서 눈을 떼지 않고 귀를 도사렸다.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윙윙 소리 밖에 들리지 않았다. 이때 애들의 목소리가 윙윙 휘몰아치는 눈보라 속에 들려왔다. “선생님, 돌아가십시오!” “우린 무사히 집으로 돌아 왔습니다!” "양, 내일 다시 만나기오. 복습을 잘 하오." “선생님, 감사합니다!” 그 마지막 외침소리 속에는 어른들의 목소리도 있었다. 밤하늘에는 사생들의 정어린 외침소리가 오래도록 메아리쳤다. 그제야 덕돌은 시름을 놓고 한숨을 후 내쉬며 시내 쪽으로 발목까지 풍풍 빠지는 눈길을 터벅터벅 발걸음을 옮겼다. 숙사라고 싸늘한 당직실로 돌아와 물을 먹으려고 보니 물독이 떵떵 얼어붙어 있지 않겠는가. 중천정을 얹지도 않고 대신 신문종이를 천정에 대충 붙여놓은 당직실은 겉바람이 세어서 개를 달 지경이었다. 소대가리도 얼어 터질 엄동설한에 바깥에서는 눈보라가 쌩쌩 휘몰아쳐 모래알 같은 눈가루가 성에장이 두툼하게 낀 유리창문을 때렸다. 덕돌은 허구픈 웃음을 웃고 나서 비닐바가지를 쥐고 주먹으로 살얼음을 툭툭 쳐 까고 얼음 쪼각이 둥둥 뜬 찬 물을 퍼서 꿀꺽꿀꺽 마셨다. 너무 추워서 덕돌은 언 손을 호호 불면서 풍설이 무섭게 이는 바깥에 나가 교실 뒤 눈 속에 파묻힌 싸리를 주어다가 아궁이에 쑤셔 넣고 석탄불을 일구어 죽으라고 땠다. 순간 구들 이 곳 저 곳에서 연기가 나고 가마 안에서 뜬 김이 쌕 뿜겨져 나오면서 매캐한 냄새가 목안을 찔렀고 뜬 김이 꽉 차 어디가 어딘지 분간하기 힘들었다. 부득불 문에 바오라기를 끼워 문틈을 내 군내와 뜬 김이 빠지게 문을 끌어매지 않으면 안 됐다. 그는 주린 배를 달래면서 씻은 찹쌀을 대야에 담아 물을 부은 가마 안에 넣었다. 한참 후에 물이 끓으면서 달랑달랑 소리를 내며 끓었다. 감자장도 끓일 데도 없고 그런 겨를도 없어 장에 마늘을 찍어 먹을 때가 많았다. 어떤 때에는 담임교원을 하느라고 눈 코 뜰 새 없이 돌아치다나니 미처 밥도 하지 못해 보온병의 뜨거운 물을 쏟아 놓고 숟가락으로 묵은 언 밥을 꾹꾹 찍어 녹여 대충 먹곤 했다. 그러니 위가 성하겠는가. 영양 결핍으로 해 늘 해나른하고 피곤하고 머리가 흐리터분했다. 저녁이라고 대충 간장 물에 마늘을 찍어 햄을 하면서 먹고 나서 이튿날 먹을 밥을 지을 쌀을 미리 씻어 놓았다. 그제야 한숨을 후 내쉬면서 덕돌은 이불을 들쓰고 겉바람이 세서 가죽 털모자까지 쓰고 소설책을 들었다. 아무리 고독하고 적막하고 쓸쓸해도 책만 들면 위안되고 소설 속의 이야기와 정서에 따라 마음을 움직이면서 온정을 찾곤 했다. 어떤 때에는 책을 보다가 너무 곤해 잠을 자려고 해도 연기를 먹고 죽을 것 같아 잘 수 없었다. 그리하여 덕돌은 궁리 끝에 문에 바를 끼워놓고 문틈을 낸 후 바줄로 문고리를 걸어 맸다. 잠든 후 군내를 먹지도 않고 문도 더 열리지 않아 좋을 것 같았다. 학교 탁아소에서 자는 미숙이란 처녀교원은 두 번이나 군내를 먹고 약혼한 철수에게 업히어 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은 적이 있었다. 그리하여 덕돌은 밤중까지 책을 보다가도 술을 둬 냥 쪽 마시고 다리를 옹송그린 채 새우잠을 자곤 했다. 후에 만순이 당직실에 들어와 함께 동무해 있을 때에는 항상 너무 추워 한 이불에 들어 서로 잔등을 대고 이불 두 채를 한데 겹쳐 덮고 잤다. 독신교원들이 이렇게 고생해도 교장 황승연은 근본 관심하기는커녕 교원숙사를 두고서도 독신교원들을 다 쫓아냈다. 대신 이른바 학교 명예를 지키는 축구선수 학생들을 넣어 길렀다. 만순과 덕돌이 학교에 돈을 내고 보이라 실의 석탄을 실어다 때겠다고 하자 황교장은 총무과에 시켜 독신청년교원들의 그 얇은 로임 봉투에서 석탄 6톤 값이나 잘라냈다. 온 동삼 9평방도 되나마나한 당직실에 석탄을 그렇게 땔 수 없을 것은 불 보듯 환한 일이었다. 아침에는 근본 불을 땔 새 없어 저녁에만 땐 형편이었다. 아무리 추워 불을 많이 때도 풍무 없는 아궁이에 한 달에 한톤 반씩이나 때였을까? 그것도 겨울방학에는 한 달 반이나 집에 가 있었는데. 아무리 홀로 사는 독신교원들이라고 업신여겨도 분수 있어야지.   문이 벌어진 당직실에 불을 때니 그래도 벽에 번들번들 얼었던 얼음이 뜬 김에 이슬이 맺히더니 드디어 물방울이 줄줄 흘러내리기 시작하고 창문에 얼어붙었던 성에장도 녹아 암흑천지인 바깥이 내다보였다. 그래도 집에 화기가 도니 천정의 쥐들도 좋다고 바스락거리며 뛰놀았다. 숙사보다도 교무실이거나 교실에 나가면 따뜻해 아주 좋았다. 정말 물독이 떵떵 어는 숙사에 돌아오면 추워서 으쓱 같았다. “엄동설한 냉혹한 환경에서 몇 해나 견뎌 낼까?” 덕돌은 허구픈 냉소를 지었다. “그대여, 생활이 그대를 아무리 어렵게 굴고 버리더라도 그대는 노여워하지 말고 참고 견디시라. 꼭 이겨내시리라.” 덕돌은 스스로 이렇게 마음을 다지면서 이불을 쿡 들쓰고 윙윙 휘몰아치는 바깥 눈보라의 아처런 울음소리를 들으며 아름다운 미래를 꿈꾸면서 소르르 잠이 들었다. 덕돌과 더불어 군내를 먹고 추운 고생을 하며 희노애락을 함께 한 쥐들이 당직실 천정에서 찍찍 소리 내며 비명을 질렀다. 그들이야 말로 황승연 교장보다 군내 나고 그은 천정 밑의 손바닥만한 당직실에서 외롭게 고생하는 덕돌과 만순과 동고동락하면서 동정해 우는 것이 아니겠는가! 불을 때 집안이 따뜻해지고 군내가 나지 않는 날에는 쥐들도 좋다고 천정에서 뛰놀았고 군내 나고 추우면 쥐들은 천정에서 찍찍거리며 비명을 질렀다. 이젠 덕돌은 쥐의 비명소리를 들으면 벌떡 일어나 코를 벌름거리며 “흡흡” 하고 면내 나지 않나 냄새를 맡아보고 문을 열어 군내를 빼곤 했다. 덕돌은 천정을 쳐다보면서 어처구니없어 중얼거렸다. “에이, 너네도 이 집 천정에 잘못 들었다. 나와 함께 이런 내군 고생을 할 게 뭐니? 나는 학교에 얽매인 몸이지만 너넨 군내 없는 집에 자유롭게 이사할 수 있잖느냐?” 순간 덕돌은 쥐들이 불쌍해 엉거주춤 일어나 천정종이를 칼로 손바닥만큼 도리어냈다. “뭐 하려고 그래?” 덕돌은 전기밥가마에서 밥과 돼지고기 점을 종지에 담아 천정에 올려놓으면서 중얼거렸다. “쥐들도 양력설을 쇠게 해야지.” 그제야 만순은 “허허허.” 하고 너털웃음을 치더니 “그래, 황승연을 줄 고기는 없어도 우리와 희노애락을 함께 하는 쥐를 주는 게 낫지.” 하고 덧붙였다. 덕돌은 속이 답답해 물고기 장사를 해 번 돈으로 싼 녹음기를 틀어놓았다. 바깥에서는 눈보라가 휘몰아쳤지만 오두막 같은 당직실에서는 세계 명곡이 격정 넘치게 메아리쳤다. 특히 주현미나 김용임 등 한국 여가수들의 정서적인 노래 소리는 그의 스트레스를 해소해주고 정서를 조절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최대의 정신위안을 해주었다. 음악을 듣노라면 모든 스트레스가 해소돼가고 그 시각만큼은 모든 고민과 불안을 다 잊고 아름다운 선율에 매혹돼 흥얼거리곤 했다. 천정에서 쥐들도 좋다고 찍찍 거리면서 돼지고기를 먹으면서 사교무를 추는지 바스락거리면서 야단 쳤다. 이튿날 아침 바깥에 나와 눈보라가 아우성치며 불어치는 주위를 둘러보던 그는 자기 눈을 의심하며 놀랐다. 흰 용이 꿈틀거리는 듯이 휘몰아치는 눈보라는 흰 룡이 꿈틀거리듯이 학교 운동장을 핥으면서 꿈틀거렸다. 하얀 눈 덮인 대지는 마치 흰 상복을 입은듯한데 눈보라가 무섭게 아우성치며 휘몰아치는 속에 앙상한 나무들이 눈송이들을 떠이고 몸부림치지 않겠는가. 그런데 그 눈송이들을 떠인 나무들이 마치 엄동설한에도 끄떡하지 않는 매화 같지 않겠는가!       아, 너무 혹독하고 처절한 엄동설한이여, 빼앗긴 들에도 새  봄은 오려는가? 언제면 혹한 속에서도 매화가 오동통 소담한 흰 꽃을 피우는 사랑의 새 봄이 오겠는가!
175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115) 댓글:  조회:1214  추천:0  2018-08-12
                                  10. 고민       여름의 신이 몰고 왔던 뜨거운 입김이 지나간 대지는 싸늘하게 식어가고 있었다. 가을바람에 낙엽이 우수수 지고 있었다. 누런 가랑잎들이 계절신이 누렇게 칠해가는 땅바닥에 떨어져 가을바람에 이리저리 나뒹굴고 있었다.      덕돌은 허구한 나날 여자애들을 쫓아다닌 것이 허무할 뿐이었다. 지는 낙엽과 함께 실련의 아픈 흔적이 나뒹구는 감이 아프게 느껴졌다. 사랑의 열풍을 몰고 왔던 처녀 영희도 영옥도 사라졌고 영자는 어디로 간다는 말도 없이 망아산 아래 이 시내에서 사라졌다. (사랑은 청춘 남녀가 티 없이 맑고 깨끗한 마음으로 연주하는 아름다운 사랑의 멜로디야. 정조는 사랑의 생명이 아닌가? 정조를 잃은 영자를 생각해 뭐 해?) 덕돌은 실련의 고배를 마시고 숙사 침대에 이불을 들쓰고 누워 고민하고 있었다. 소설을 읽으면서 착잡한 생각을 몰아내고 실련의 아픔을 이겨내려고 애썼지만 허사였다. 소설을 읽으려고 해도 작중 열연하는 주인공들의 이야기를 읽노라면 자연히 영자 생각이 나서 더 읽어내려 갈 수 없었다. 사라진 영자 때문에 실련의 고통으로 해 덕돌은 고민의 깊고 깊은 구렁텅이에 빠졌다. 그는 소설책을 팽개치고 일어책을 들고 보다가 불현듯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중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뭘 해봤자 하늘을 찌르겠는가? 소설을 애나게 쓴들 조선의 이기영이나 한설야를 초과하겠어? 아예 일본이나 유학 가는 게 좋겠다. 일본 같은 선진국에 가서 견식을 넓히고 돌아와 하늘을 찌르는 큰 일을 해야지. 정치 학부를 다니면서 기자로 되려는 이상도 현실에 맞지 않는 것 같았다. 에라, 모르겠다. 장사를 해 돈이라도 벌어 시내에서 사업을 해봐야지.” 덕돌은 망망한 대해에 빠져 허우적거리다가 지푸라기라도 잡은 것처럼 일루의 희망의 끈을 잡고 다시 생기를 띠기 시작했다. (그래, 일본으로 가야겠다. 큰 인물들은 청년 때 모두 유학을 가 견식을 넓히고 지식을 많이 쌓은 분들이야. 주덕이나 등소평이나 주은래, 진의 등은 모두 프랑스 유학생 출신이야. 세상의 도리를 먼저 안 사람이 수령이 되기 마련이지. 주은래는 일본으로 유학을 갔다가 프랑스에까지 유학을 갔다 온 인물이 아닌가?) 이런 생각이 자꾸 머리를 쳐들었다. 덕돌의 눈앞에는 외동아들인 자기를 믿고 살고 있는 머리가 흰 부모가 떠올랐다. (내 일본에 가면 부모는 어쩌는가?) 허나 한편 덕돌은 속으로 큰 일을 할 사람이 어찌 부모생각만 하겠는가고 생각했다. (자고로 충신은 효자가 아니잖은가!) 하지만 좀처럼 머릿속에서 부모를 지울 수 없었다. (내 일본에 가서 몇 해 일하면서 공부해 돈을 많이 벌어다 한평생 농촌에서 땅을 파면서 고생스레 살아온 부모님을 호광하게 살게 해야지. 귀국한 후 효성을 다해 모시면 되겠지.) 그는 자기를 위안하면서 부모의 동의를 받으려고 시골의 집으로 돌아갔다. 그 날, 상순은 밭으로 나가고 없고 명옥은 집에서 돼지먹이를 가마에 끓이고 있었다. 덕돌은 부엌에 앉아 한창 불을 때는 엄마의 손을 잡고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아 애꿎은 풍무만 돌렸다. 한참 후에야 큰 마음을 먹고 무거운 입을 뗐다. “엄마, 내 일본으로 유학가자고 그럽꾸마. 가도 되겠습둥?” 허나 엄마 명옥은 “일본으로 유학하러 가자고?”라고 하더니 일어나 가마뚜껑을 닦으면서 잠간 생각하는 것 같았다. 덕돌은 엄마가 꼭 반대하리라고 생각했다. 뜻밖에 어머니는 큰 마음을 먹은 것 같았다. 한참 후에 어머니는 이렇게 나직이 말했다. “유학까지 갔으면 얼마나 좋겠니? 대학을 보낸 것만 해도 기쁜데 유학까지 가면 우리 아들 얼마나 장하니? 가겠으면 가라. 부모 걱정은 말고.” 덕돌은 흰 머리를 쓸어 넘기며 비장한 결심을 하는듯한 머리에 흰서리 내린 어머니를 보는 순간 콧마루가 시큼해났다. (엄마는 내가 생사를 기약할 수 없는 모험으로 일본에 가련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다만 일본으로 유학 간다 하니 기뻐하고 있다. 그저 아들이 잘 되기만 바라는 것이 부모의 마음이 아닌가. 외동아들인 내가 가면 늙은 엄마는 누가 모시겠는가? 누나들이 다섯이나 있지만 다 멀리 시집가지 않았는가? 나를 믿고 사는 부모를 버리고 어디로 간단 말이야?) 한참 후 아버지 상순이 밭에서 돌아왔지만 덕돌은 일본 유학을 가련다는 말을 차마 꺼내지 못했다. 머리가 희슥한 부모를 보는 순간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는 드디여 자기 생각이 물을 건너는 흑보살처럼 와르르 무너지는 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숙사에 돌아와서도 덕돌은 깊은 생각을 거듭하지 않으면 안 되였다. (구경 전도를 어떻게 개척한단 말인가?) 겨울 방학이 되자 덕돌은 세상구경을 하자고 엄마와 여비를 달라고 했다. 명옥은 아들이 하자는 일이라면 열에 아홉은 안 된다는 말을 한 적이 없었다. 그는 돼지 한배를 판 돈 120원이나 꺼내 주었다. “세상 구경을 널리 하고 큰 뜻을 세워라.” 덕돌은 엄마가 주는 돈을 넙적 받으면서 이런 생각이 가슴을 후려쳤다. (이렇게 좋은 부모를 두고 내가 어디로 간단 말이냐?) 그때 상순은  덕돌이 무슨 고민에 빠진 것도 모르고 불쑥 이런 부탁을 했다. “얘, 저 윗마을 해월을 정규상한테 데리고 가서 치료해달라고 해라. 흥수는 비록 내 정치적수였지만 애들에게 무슨 죄가 있느냐? 불쌍한 애가 미쳐서 어쩌겠니?” 덕돌은 싫은 대로 대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버지, 해월은 암이 아닌 거 같습니다.” “그래도 정신병을 치료해야지.” “그럼 함께 갑시다. 정신 나간 해월을 어떻게 혼자 시내로 데리고 가겠습니까? 무슨 미친 짓을 하면 어쩝니까? 괜히 다른 소문이 나겠습꾸마.” “그것도 그렇구나.” 상순은 덕돌과 함께 윗마을에 가서 춘실과 함께 해월을 데리고 시내 정규상을 찾아 갔다. 해월은 미친 나머지 YJ병원에 들어가면서도 히히히 웃기도 하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상스러운 손짓을 마구 해대 경악케 했다. “히히히, 덕돌아, 이 사람들을 봐라.” 해월은 덕돌의 팔소매를 잡아당기면서 떠들어댔다. “함흥대대에서 한다하는 해월이 왔다고 구경하는 거 봐라. 해해해. 선녀가 내렸지. 이 집에. 흥, 집도 크다야. 헤헤.” 춘실은 창피해 해월의 허우적거리는 손을 꽉 잡고 덕돌을 따라 걸었다. 덕돌은 일단 먼저 해옥 아재를 찾아갔다. 그는 해옥의 귀에 대고 뭐라고 나직이 말했다. 그러자 해옥이 그들을 데리고 정규상의 사무실로 갔다. 정규상은 한창 병을 보다가 해월을 보더니 앉으라고 했다. 해월은 정규상을 보자 달려가 마구 끌어안으며 “충국아, 너 어째 여기 있니?”라고 미친 소리를 했다. 춘실은 황급히 해월의 팔을 마구 끌어당겨 떼 냈다. “정 선생, 양해하십시오. 얘 병을 꼭 떼 주십시오.” 정규상은 해월을 아래 위 바라보더니 우쭐 일어나 나갔다. 그러자 춘실은 속으로 남편 흥수가 함흥 대대에 하향해 내려간 정규상을 못 살게 굴었다고 나가버린 것으로 알고 실망해 했다. 허나 이윽고 정규상이 신경병 치료전문가 량수원 업무원장을 데리고 와서 함께 해월의 병을 보는 것이었다. 그제야 춘실은 젖어드는 눈 굽을 닦으면서 정규상한테 미안하고 그의 드넓은 흉금에 탄복했다.       기실 해월은 자초부터 암에 걸리지 않았었다. 정규상은 노간부들을 투쟁하면서 못 살게 구는 흥수를 혼빵내려고 해월이 암에 걸렸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흥수가 이미 처단돼 죽은 다음에는 해월이 불쌍해 정규상은 의사로서 인도주의를 발휘해 구하려고 나섰다.   그는 량원장을 데리고  한쪽으로 가서 한참 토론하더니 처방을 내렸다. 량원장은 첩약을 떼 주었고 정규상은 서약을 떼 주었다. 그리하여 해월은 정신병과에 입원해 주사도 맞고 첩약도 달여 먹었다. 정규상은 심장병과에서 권위로 돼 심장병환자들의 병을 보고 있었다. 그는 억울하게 우파 모자를 쓰고 20여 년 동안이나 농촌에서 투쟁 받으면서 고생하다가 이젠 우파 모자를 벗었을 뿐만 아니라 병원의 원장으로 됐고 인대 상무위원회 부주임, 직함평의위원회 의료전문주임위원으로 됐다. 그는 원장으로 된 후 자기에게 그렇게 억울한 우파 모자를 씌운 박영발에게 보복을 하지 않았다. 허나 병원 혁명위원회가 없어진 뒤 정부에서는 “문화대혁명” 후반기에 반란파 두목 황종연과 이흥수에게 빌붙어 간부들에게 박해를 가하고 정치투기를 해 병원에 올라온 박영발과 박윤희를 가도 병원으로 내보냈으며 출당시켰다. 덕돌이 해월의 병이 어떤 가고 찾아 갔을 때다. 정규상은 아주 반갑게 이야기했다. “근심하지 말라. 해월은 한 동안 치료받으면 나을 거야.” 그는 덕돌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넌 정말 개천에서 나온 용이다. 어쩜 그 함흥 촌 골 안에서 너 같은 대학생이 나왔니? 누가 소몰이를 하던 네가 대학에 가리라고 꿈에나 생각했겠느냐? 정말 총명한 내력이야.” 덕돌은 정규상 앞에서는 어린애처럼 주눅이 들어 머리를 숙였다. “가만, 졸업배치는 어디로 받을 예산이냐?” 덕돌은 제꺽 “일본 유학을 갈 예산입니다.”라고 말하려다가 목구멍까지 나온 말을 삼켜버렸다. “네가 내 말대로 의학원에 갔더라면 우리 병원에 배치받게 도와주겠는데.” “원래 의학원에 가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색맹이 돼서 지망을 고쳤댔습니다.” 정규상은 머리를 끄덕이면서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덕돌이 정규상과 갈라져 학교 숙사로 돌아 올 때었다. “덕돌이!” 불시에 등 뒤에서 자기를 부르는 처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머리를 돌려 보는 순간 덕돌은 깜짝 놀라며 자기 눈을 의심했다. 조영희가 아니겠는가! (아니, 집체호 영희는 어째 왔을까? 기다리는 순희는 소식도 없고 불청객은 불쑥. 흥!) 성욱이랑 순희랑 조영희랑 연속 대학시험을 네 번이나 쳤지만 연속 낙제를 맞았다. 성욱은 번마다 몇 백점도 모자랐기에 대학을 바라볼 게제도 되지 못했다. 하지만 순희와 영희는 번마다 딱딱 십여 점씩 모자라 대학에 입학하지 못해 아쉬웠다. 순희는 그후부터 가타부타 깜깜무소식이었다. (무정한 애라구야.) 혹시 순희는 덕돌을 볼 면목이 없은 것 같았다. 혹시 그녀는 점점 지위가 차나는 덕돌과의 사이를 느끼고 다시는 찾아올 엄두를 못냈을수도 있었다.       그런데 영희는 지위따위 차이는 개의치 않고 담대하게도 학교에까지 찾아왔다. 물론 처여애로서 아무리 자기 마음 속에 뒀던 총각이라고 해도 선뜻 대학교에까지 찾아오기는 조련찮았을 수도 있었다.      영희는 이젠 25세나 돼버렸다. 그간 집에 붓박혀 책과 씨름만 하면서 별로 활동도 하지 않아 그런지 호리호리하고 예쁜 영희와는 판판 다른 모습이었다. 더구나 엉덩이마저 농촌 아낙네처럼 펑퍼짐해 보기 민망스러울 지경이었다. 다만 예지로 반짝이는 까만 눈매만은 의연히 매력적이었다. 덕돌은 영자를 잃은 뒤 여자애들만 봐도 신경질이 나고 사귀고 싶은 마음이 하나도 없었다. 괜히 실련의 아픈 상처에 고춧가루를 맞을까봐 겁났다.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엄동설한에 차마 대학 한끝까지 자기를 찾아온 영희를 큰 거리에 세워 놓고 말해 보낼 수는 없었다. 그는 영희를 데리고 식당으로 갈까 하다가 괜히 열정적으로 대하면 계속 찾아 올 것 같아 그만두고 대학교 숙사 옆에 있는 자그마한 상점으로 들어갔다. 복판에 난로를 피워놓은 한족집 상점 안에는 다행히 한족 주인과 손님 몇이 있을 뿐이었다. 항상 다니던 상점이어서 주인은 사탕 한 알도 사지 않아도 덕돌과 영희에게 눈을 흘기지 않았다. 덕돌은 영희가 정을 떼게 하려고 차마 못할 말로 쌀쌀하게 했다. “어째 왔소?” 영희는 그 한마디에 새파랗게 언 얼굴에 눈물부터 왈칵 쏟더니 돌아서 어깨를 들먹이었다. 석탄이 타면서 탕탕 소리내는 화로를 마주해 서서 흑흑 흐느끼는 상 싶었다.     이윽고 영희는 가까스로 용기를 내 몸을 돌리더니 덕돌을 기대에 찬 눈길로 마주 바로보며 물었다. "이전에 제 대학에 올 때  준 담배꽃쌈진 어쨌소?" (밤중에 홍두깨라더니 웬 담배쌈지 얘기냐?) 덕돌은 이렇게 말하려다가 그만두고 딴전을 부렸다.  "학교에 가지고 오지도 않았소." "왜? 건 내 일편단심을 한코한코 새긴 꽃쌈진데." "너무 몇백년 전 담배쌈지처럼 촌스러워서..." "그래 버렸소?  "모르겠소. 어쨌던지?' "대학에 오더니 꽤나 제비 배때기처럼 희냥하며 비싸게 노는구만요." 조왕돌은 냉냉하게 물었다. "그래 그걸 찾으러 왔소?" "아니," 영희는 자기 마음을 모르는 덕돌이 한없이 원망스러웠다. "아직도 그 꽃삼지를 잊지 않았는가 해 왔소." 덕돌은 허구픈 웃음을 웃었다. 영희는 분명 직접 묻기는 그렇고 하니깐, 담배꽃삼지에 견주어 지금 자기를 잊지 않았는가, 사랑하는가를 묻고 있었다. 그녀는 미리 어떻게 말할가 많이 생각하고 찾아온 것 같았다.  "촌스러워 가지고 오지도 않았다고 말하지 않았소. 난 그걸 잊은지 오래오. 그런 담배쌈지를 줄 처녀가 수두룩하니까. 대학생처녀들도 가득한데 하필이면..." "알았소. 좋은 대학생처녀를 만나 콱 잘 사오." 그녀는 덕돌의 말을 중도무이하더니 머리를 숙인 채 상점 문을 박차고 나가 버렸다.        덕돌은 뒤늦게 따라 나가 보았다. 연애는 하기 싫어도 도의상 엄동설한에 그 먼 곳에서 찾아온 영희를 점심이라도 대접해야 하는 것이 사람의 도리가 아닌가. 영희는 오른 손으로 눈을 가린 채 달려가다가 비틀거리며 몸을 가누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큰길 옆에서 칼바람에 몸부림치는 벌거숭이 가로수를 손으로 짚고 겨우 몸을 지탱하는 것이었다. 덕돌은 가로수에 몸을 기댄 채 어깨를 들먹이는 영희를 보자 속이 뭉클해나고 콧마루가 시큼해났다. 그는 뒤따라가 영희를 위안하려고 하다가 인차 냉정하게 리성을 회복했다. (안 돼, 직업도 없는 고중생과 정을 뚝 떼버려야 한다. 또 찾아와서 졸졸 묻어 다니면 어쩌는가?) 덕돌은 마음을 모질게 먹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숙사로 발걸음을 옮겼다. 숙사에 돌아와서도 그는 너무 지나친 것 같아 창문으로 큰 길 쪽을 내다보았다. 영희는 쌩쌩 휘몰아치는 눈보라 속에서 가로수 옆에 쪼그리고 물앉아 왝왝 토하면서 우는 상 싶었다. 덕돌도 차마 정을 떼기 어려웠다. 허나 이상과 전도를 위해서는 무정하게 정을 떼버려야 했다. 한참 후 영희가 일어나 상점 부근과 숙사 쪽을 두리번거리다가 비칠거리면서 겨우 떠나가는 것이었다. (야, 영희야, 날 콱 욕해라! 난 나쁜 놈이야! 내 잘 살기 위해선 별 수 없구나.) 덕돌은 침대에 쿵 쓰러져 이불을 들쓰고 들어 누었다. 눈보라를 들쓰면서 울며불며 진수해로 돌아가는 영희를 보는 것 같아 속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야, 사랑은 정말 자사 자리한 거야. 사랑은 무서운 것이야. 사랑하지 않으면서 허위로 국밥 한 그릇이라도 사주면서 얼려 보낼 순 없어. 책임지지 못할 처녀는 아예 건드리지 말고 맺고 끊어야지. 분명 한생을 함께 할 사람이 아닌데 건드려 뭘 해? 영희, 나를 용서하오. 무정한 철석같은 사내를.) 덕돌이 “사랑전쟁터”에서 실련의 고배를 마시고 고민에 빠쪄 이불을 들쓰고 초저녁부터 책도 보지 않고 누어있을 때었다. 어느 날 밤중에 한 침실에 있는 성호가 침대에서 일어나 덕돌의 침대에 다가와 바깥에 나가 조용히 할 말이 있다고 했다. (무슨 일이 있을까? 이 책벌레가.) 료녕성에서 온 이 성호는 덕돌과 소박한 감정으로 가까이 보냈다. 숙사에서 나가자 성호는 덕돌을 조용히 불러 어깨에 오른 손을 올리고 말했다. “친구야, 그까짓 처녀애들 작작 쫓아다녀. 대학교 때 하나라도 책을 많이 봐라. 그래야 당장 사회에 나가 유용한 일을 하지.” 덕돌은 한숨만 땅이 꺼지게 내쉬었다. 성호는 “날 좀 도와줄래?”라고 평안도 말로 물었다. “뭔데?” 성호는 덕돌을 데리고 숙사 복도에 들어가더니 헌 침대를 가리켰다. “이걸 들고 가자.” 덕돌은 성호와 함께 헌 침대를 들고 교수청사로 올라갔다. 2층에 올라가 교실 저쪽으로 해 헌 위생실이 있었다. 그리로 침대를 맞들고 들어갔다. 성호는 오래 동안 쓰지 않은 위생실을 말끔히 정리해놓고 전기마저 장치해두었던 것이다. 대변실 세 칸이 있었는데 작은 책걸상을 들어다 놓고 탁상 등마저 켜놓으니 아주 조용한 독서실이 돼버렸다. “누구한테도 말하지 말라. 숙사에서 한 침실에 여덟이나 들어 떠들썩해서 어디 책을 제대로 보겠니? 난 시간이 아깝다. 언제 허튼소리나 할 새 있어? 책 한 폐지라도 더 봐야지.” 덕돌도 동감이 갔다. 숙사에서 반장 허운호가 통 말이 아니었다. 그는 기억력이 어찌나 좋은지 교실에서 집중해 책을 들고 보면 누가 지나가도 다치지 않는 한 헛눈을 팔지 않았다. 그런데 운호는 밤 12시에라도 공부를 마친 후 그 독한 술을 마시고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밤중에 숙사에 무슨 안주가 있겠는가? 운호는 쩍 하면 나이 제일 어린 덕돌을 담임 교원네 집에 가서 김치를 가져오라고 했다. 허나 덕돌은 평소에 담임교원을 보면 어려워 머리도 들지 못하는 지경이었다. 그러니 밤중에 어떻게 담임교원의 집 문을 두드리고 김치를 달라 하겠는가? 별 수 없이 침실에서 나이 지긋한 철산을 데리고 갔다. 철산이 담임교원네 집 문을 두드릴 때 덕돌은 문 뒤에 숨어 있었다.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밤중에 담임교원이 철산을 데리고 함께 김치움에 가서 김치를 대야에 담아 내오고 집에 들어간 후에야 덕돌은 김치 대야를 받아들고 숙사로 달아 나군 했다. 성호는 운호가 술을 마시는 게 딱 질색이었다. “술을 마시면 난 머리가 뗑해 암송한 것도 다 날아난다.” 성호는 덕돌과 함께 침대를 바로 잡아 놓은 후 뒤말을 이었다. “이젠 난 밤이면 여기서 홀로 자면서 책을 보겠다. 사회에 나가면 언제 일하면서 책을 보겠니? 지금 많이 봐 둬야 해. 지식은 만 가지 사업의 원동력이야. 에너지 충전을 많이 해야 돼.” 평소에 말수가 적은 성호는 이쯤하면 덕돌과 많이 말한 셈이었다. 그는 하루에 네댓 시간만 자고 동서고금의 수많은 명작과 한문도서를 읽기에 여념이 없었다. 덕돌은 성호의 독서실에서 나오면서 “신체를 돌보면서 공부해라.”라고 조용히 부탁했다. 성호는 희미한 전등 불 아래에서 철색얼굴에 미소를 지으면서 믿음에 찬 눈길로 바래었다. 집에 돌아오면서 덕돌은 성호에게 탄복했다. (진짜 세상에 둘도 없는 수재야. 저렇게 노력하니 모든 과문에 우수를 맞았지.” 뒤이어 그는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었다. (누가 책을 보면 좋은 거 몰라 그래? 실련의 구렁텅이에 빠져 이러지.) 방학이 되기 바쁘게 덕돌은 실련의 구렁텅이에서 벗어나려고 계획대로 세상구경을 나섰다. 세상구경을 널리 하노라면 실련의 고통을 잊을 수 있다고 하던 친구 성호와 승광의 말에 도리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는 화학학부에 다니는 상해지식청년에게 부탁해 학생증으로 상해까지 기차표 반표를 떼 달라고 부탁했다. 반표를 손에 쥐자 덕돌은 남방으로 달리는 열차에 올랐다. 북경에서도착하자 천안문과 고궁에 들어가 돌아보았고 만리장성에 오르고 의화원 호수에 가서 한적하게 뱃놀이도 했다. 다만 남들은 남녀들이 쌍쌍이 노를 저으면서 뱃놀이를 하는데 혼자 외롭게 노를 젓노라니 또 실련의 아픔이 가슴을 무정하게 찌른 것 같아 어쩔 수 없었다. 그는 천단공원 계단 앞에 가서 합장하고나서 하늘에 빌고 또 빌었다. “하늘에 빌어보기도 했다.대학생처녀와의 사랑과 아름다운 전도를 내려주옵소서.”  그는 천단공원 금은 장신구방에 들어갔다가 피뜩 기이한 영감이 떠올랐다. (만약 장사를 해서 숱한 돈을 벌어 금은 장신구를 사가지고 향항을 거쳐 일본으로 가면 어떨까? 향항이나 일본 돈이 없는 형편에서 세계 공동 화폐인 금을 사둬야 한다. 배를 타도 그렇고 금덩이를 내밀면 무슨 일이 안되겠는가?) 허나 덕돌은 인차 고향에 두고 온 늙으신 부모를 떠올렸다. (아니야. 내가 왜 이런 불효한 생각을 또 하지. 머리 파뿌리처럼 허연 부모를 고향에 두고 어디로 가? 넌 외동아들이야. 부모를 잘 모셔야 해.) 효도와 전도가 맞부딪치면서 모진 갈등 파도를 일어켜 속이 비길 데 없었다. (딱 일본으로 간다고 하지 말고 모든 것을 꼼꼼히 생각해보자.) 그는 천단공원의 너른 광장을 거닐면서 복잡한 생각에 잠겼다. (모든 게 가능한가고 따져 봐야지. 무슨 장사를 해서 숱한 돈을 벌어 금은 장신구를 산단 말인가? 아니, 절대 아니야. 정상적으로 출국할 수 없는데 향항을 도주해 외국상선에 올라 일본으로 건너가야 한다. 좋기는 일본 상선이지. 다른 나라의 상선이야 일본으로 가지 않고 아프리카라도 가면 큰일이 아닌가? 상선에 어떻게 올라? 가만히 헤염 쳐 동아줄을 타고 기어오르자. 올랐다가 들키면 어떻게 하지? 금은덩이를 쥐어주면 일본에 건네 줄까? 일본에 건너갔다고 해도 무슨 일을 해 학비를 대는가? 냉혹한 일본 자본주의 세상에서 일본 청년들도  취직하기 어려운데 취직 쉽겠는가? 민족기시가 심한 섬나라에서 거지행색을 하지 않으면 다행이지. 근공 검학은 어려운 거야. 누가 도주해 불법체류중인 너를 대학에 받아준다더니? 그저 떠돌아다니면서 일본 사회를 구경할 수 있을뿐이겠지. 그러고서야 어찌 발전된 일본 사회를 제대로 알 수 있어? 그럼 일본으로 도주해 간 가치가 있는가?) 덕돌은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또 부모는 어쩌지? 내가 일본에 유학을 간다고 속이고 이런 모험은 할 수 있다. 허나 내가 만약 잘못 되면 부모는 어쩌지? 한뉘 아들도 없이 딸집으로 돌아다니면서 살겠지? 물론 누나 다섯은 모두 효성이 지극하지만, 부모를 모셔야 할 아들인 내가 불효를 저질러서야 되겠는가? 혹시 일본으로 가서 돈을 많이 벌어 가지고 돌아오면 부모를 더 잘 모실 수 있지 않을까?) 허나 덕돌은 반중건중한 생각을 마무리하지 못하고 남방으로 달리는 열차에 몸을 실었다. 물론 상해지식청년대학생이 떼 준 반표를 내들고 열차에 올랐다. 침대차는 바라도 보지 못했고 좌석만 있어도 얼마나 좋으랴? 허나 그 무더운 여름에 건조실 같은 열차에 기대 설 자리조차 찾기 어려웠다. 오후에 올라 온 밤을 꼿꼿이 서서 꺼떡꺼떡 졸면서 달려 이튿날 오전에 남경에 도착했다. 덕돌은 남경에서 내려 곧추 남경대교 쪽으로 버스를 타고 달려갔다. 남경대교에 올라 도도한 장강의 물결을 보는 순간 저절로 감탄이 나왔다. (세상에 넓기도 넓은 강이 있어. 엄청 큰 강이로구나. 그래도 내 고향의 강이 더 좋아. 비록 장강에 비할바는 못 되지만 맑은 강물에 시원히 목욕하고 헤염치고. 허나 저 싯누런 장강이 몇 십 미터나 되게 깊다니 배를 타기는 좋지만 목욕하고 자맥질하기는 틀렸어.) 그는 다리 밑으로 지나가는 발 밑의 기선을 보면서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몇십미터 깊이 장강을 헤염치기도 겁나 하면서 어떻게 몇 백 미터 깊이나 되는 퍼런 바다 물에서 자맥질해 외국 상선에 다가가 올라?) 생각만 해도 모험의 대가가 아뜩하게만 생각됐다. 덕돌은 열차를 타고 한참 달리다가 소주에서 내렸다. 지도를 보니 상해를 한역 앞둔 옛 도시었다. 상해 역에 가서 괜히 반표를 내밀었다가 상해말도 온전히 하지 못하면 들키어 벌금이라도 당할 것 같았다. 소주만큼 이름난 옛 도시를 구경하고 싶었다. 소주는 옛날 2천 몇백년 전 오나라 서울이자 후에는 송나라 남쪽 임시도읍이었다. 옛날 송나라 임금도 금나라 군사들에게 쫓기어 여기 도망 와서 산적이 있었다. 하여 임금과 관리들이 미녀들을 수 없이 끌어 들여 소주와 항주에는 미녀가 많았다고 한다. 고대 오자서가 파견한 동방의 유명한 미녀 서시도 항주 부근 미녀가 아니었던가! 확실히 소주 시내에 내려 두리번거리는데 벌써 역 부근에서 왔다 갔다 하는 미녀들이 수태 눈에 띠었다. 옛날에 숱한 부패한 관리들이 소주에 낙향해 사유 원림을 건축해 고풍스러운 건축물과 원림이 유람객들의 발목을 잡고 눈길을 끌었다. 덕돌은 소주 역에서 내려 두리번거리다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옛 탑(북사탑)에 눈길을 멈추었다. (저 탑을 구경하자.) 덕돌은 그리로 발길을 돌렸다. 남방 날씨는 찜통같이 무더웠지만 다행히 그날만은 하늘이 흐려서 그리 덥지 않았다. 탑 밑에 가 보니 옛 탑은 눈 뿌리 아찔하게 높았다. 덕돌은 탑 꼭대기에 올라 가 시원한 공기를 한껏 마시면서 소주 시내를 내리 둘러보았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시내로 흐르는 강물과 울울창창한 대나무숲 속에 옛 집과 원림 그리고 인공호수가 한눈에 안겨 왔다. (그래, 저기도 들어가 보아야지.) 덕돌은 탑에서 내리자 그 원림을 찾아갔다. 원림에 들어서니 태호의 기괴한 돌로 만든 가산들이 둘러선 곳에 거울같이 맑은 연못이 누워 있고 담에는 옛 시인들의 시사를 새긴 까만 시석이 다닥다닥 박혀 있었다. 원림에는 쌍쌍이 거니는 연인들이 한 눈에 안겨왔다. 그래도 아름다운 소주 원림의 경치 때문에 덕돌은 외로움도 실련의 고민도 서서히 희석돼 사라져가고 있었다. (이 다음 연인을 데리고 와서 구경해야지. 에이, 영자 아니면 예쁜 처녀가 없을까봐? 쳇, 80년대 초 대학생이 어디서 예쁜 처녀를 얻지 못할까봐 걱정해?) 그는 영자를 잊어버리기로 하고 홀로 기념사진을 찍었다. 점심때가 되자 두터운 구름층에서 뻘겋게 활활 타오르는 해가 뜨거운 얼굴을 내밀면서 점차 무더워나기 시작했다. 얼음과자를 사서 와삭와삭 먹어도 먹을 때뿐이지 인차 목안마저 마구 마를 지경이었다. 덕돌은 상해로 가자고 아쉬운 발길을 돌려 역으로 돌아갔다. 때마침 역 부근에서 자그만 참대바구니에 물만두를 삶아 파는 처녀가 보였다. 눈에 띠는 대로 먹는데 습관 된 그였다. 물만두를 배불리 먹고 역에 들어가 상해로 가는 기차표를 사가지고 장의자에 앉자마자 저도 몰래 호로로 잠들고 말았다. “일어나!” “일어나지 못할까!” 덕돌이 눈을 뜨고 보니 웬 바싹 마른 경찰 둘이 눈을 부라리는 것이었다. “어째?” “호주머니와 가방 안의 걸 몽땅 꺼내놔!” 덕돌은 경찰이 죄인처럼 대하는 것이 괘씸했지만 별 수 없이 꺼내 놓았다. 일어교과서를 들고 보더니 “일어를 아는가?” 하고 물었다. 덕돌이 안다고 하자 “읽어보게!” 하고 을러멨다. 덕돌은 처음에는 제대로 일어로 읽다가 입을 헤 벌리고 우멍눈을 슴벅이면서 멍청히 듣는 경찰들이 일어를 알기나 하는 것 같지 않았다. 그는 경찰들의 눈치를 흘끔거리면서 조선말을 드문드문 섞어 읽었다. “네가 무슨 일어를 안다고 와다시와(나)를 못살게 굴고 있니? 개 같은 새끼!” 허나 경찰은 알아듣지 못하고 “그만! 참 잘 읽는구나!”라고 했다. 다른 경찰이 “대학생인가?”라고 하며 가슴에 단 대학마크를 건드렸다.  “그래, 난 대학생이야.” 덕돌은 당당하게 대답하면서도 속으로는 무지한 경찰을 보고 막 입 밖으로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겨우 참았다. 경찰들은 머리를 끄덕이더니 “자도 앉아 자게. 누워 자니까 괴상하게 보이지. 대학생, 양해하게.”라고 하고는 가버렸다. 덕돌은 무식한 경찰들이 우습고도 귀해 희죽이 웃었다. 그의 입귀에서는 비난의 조소가 흐르고 있었다. 상해에 도착하자마자 날씨는 찌는 듯이 무더웠다. 덕돌은 역에서 내리자마자 가방에 깊이 간직한 편지 한통을 꺼냈다. 그것은 상해지식청년 수호가 그의 아버지 상순에게 써 보낸 편지었다. 그 편지 주소 한통을 들고 그는 대도시 상해시에서 수호네 집을 찾아내 도움을 받으려고 했던 것이다. 허나 상해 사람들은 연변에 와서 빈하중농의 재교육을 받은 상해지식청년들과는 달랐다. 편지봉투에 적힌 주소를 내들고 길을 물어보아도 돈을 줘야 알려준다고 했다. 어떤 때에는 돈을 받고서도 왕청 같은 데로 틀리게 알려줘 애를 먹게 하기까지 했다. 그러다나니 인심이 야박하기로 그지 없는 상해에서 덕돌은 이틀 동안 편지봉투를 들고 길을 물으면서 찾아다녔지만 수호네 집을 찾을 길이 없었다. 편지봉투에 적힌 주소와 대조해보면 딱 길이나 집 번호나 똑 같았다. 황포구 사천북로가 소주로 612호, 딱 맞았다. 그런데 모른다 하거나 여기에는 이런 사람이 없다고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확실히 2층으로 된 그 집은 밑층에 손마선질을 하는 복장점 밖에 없었다. “딱 이 집이 맞는데.” 덕돌은 이번에는 자리를 뜰 염을 하지 않고 뻗치면서 아래 위를 두리번거렸다. 상해 사람들은 동북 사람으로서는 알아도 듣지 못할 상해 말로 저희들끼리 뭐라고 지껄이면서 땀을 뻘뻘 흐리며 서 있는 덕돌의 아래 위를 훑어보았다. 그중에 쌍까풀눈의 20대 초반의 처녀애가 편지봉투를 달라고 해 들여다보더니 뭐라고 말하면서 2층으로 올라가는 것이었다. “덕돌아!” 덕돌이 2층층계를 올려다보니 수호와 아내 황련지가 길림을 데리고 내려오면서 반갑게 인사했다. “야, 네가 어떻게 돼 여기까지 왔니?” “어서 우리 집에 올라 가자요.” 수호와 황련지는 덕돌을 데리고 2층으로 올라가다가 아까 편지봉투를 쥐고 2층으로 올라가던 처녀애를 보고 인사시켰다. “얘, 인사해라. 내 항상 외우던 우리 일가 은인 김 서기네 아들 덕돌이야.” 그러고 돌아서서 덕돌을 보고 “내 여동생 수매야.”라고 했다. 수호의 여동생 수매는 쌍까풀눈을 곱게 내리깔며 인사했다. 수호네 집은 10평방미터도 되나마나 했는데 누나까지 집이 없어 애들 둘이나 데리고 와서 얹혀살고 있었다. 그리하여 2층 침대를 놓고서도 잘 자리가 모자라 수호는 2층 지붕에 올라가 다른 층집과 자기 집 사이에 깔아놓은 3장의 널판 위에서 위험하게 자는 형편이었다. 그들은 먼 동북에서 온 은인의 아들을 열정적으로 접대했다. 먼저 땀벌창이 된 덕돌에게 찬 냉수를 마시게 하고 세수 대야에 찬물과 비누, 수건을 가져다주었다. 세수를 하고 찬 물까지 시원히 마시자 이번에는 돼지고기채에 닭알지짐까지 밥상에 올렸다. 덕돌은 오랜만에 맛있는 채에 밥을 맛있게 먹었다. 그리고 가방에서 마른 버섯이랑 노란 콩이랑 사탕과자랑 꺼내 놓았다. 수호네 길림은 이젠 열 살도 거의 돼 꽤나 컸다. 덕돌이 과자랑 사탕이란 주자 눈치를 할금거리다가 받아서 맛나게 먹는 길림을 보고 귀여워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수호네 조카애들도 과자를 맛나게 먹으면서 대뜸 덕돌과 가까워졌다. 허나 집이 비좁아 덕돌은 수매가 주선해준 부근의 지하 여인숙에 가서 들었다. 그게 오히려 부담스럽지 않고 자유스러워 더 좋았다. 수호는 낮에는 일본인이 꾸리는 신발공장에서 일하기에 대신 여동생 수매를 보고 덕돌을 데리고 여기저기 상해 구경을 시켰다. 상해 제일 번화한 남경로나 황포강변 황포공원 부근은 인파가 어찌나 붐비는지 발을 옮겨 놓을 자리도 없을 정도여서 덕돌은 도저히 수매를 따라 다닐 수 없었다. 수매는 사람들 속에서 뒤따라오는 덕돌한테 다가오더니 쌍까풀눈을 곱게 내리뜨더니 덕돌의 팔을 끼었다. 덕돌은 좀 불 자연스러워 스리슬쩍 팔을 뺐다. 그러자 수매는 맑은 눈으로 덕돌을 바라보며 웃었다. “호호호. 우리 상해에서는 동행자를 잃어버리지 않으려면 이렇게 팔을 끼거나 손을 잡고 다녀야 해. 개혁개방시기 80년대 대학생이 어쩜 아직도 개방되지 못했어? 봉건통!” 말을 마치자 수매는 이번에는 덕돌의 손을 잡았다. 덕돌은 이번에는 손을 빼지 않았다. 이렇게 돼 그들은 연인처럼 다정하게 손을 잡고 상해 서교공원과 황포공원 그리고 남경 로의 승리공원을 돌아다녔다. 일요일이 되자 수매 대신 수호가 덕돌을 데리고 상해 남경 로에 있는 제1백화상점과 국제 빈관을 구경시켰다. 국제빈관에는 상지민의 어머니가 있었다. 덕돌과 수호는 국제빈관 대청에서 소파에 앉아 차물을 마시면서 기다리었다. 기별을 받고 상지민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상지민은 덕돌을 보자 와락 끌어안으면서 “야, 우리 은인 김 서기 아들이 왔구나. 환영한다. 환영해.”라고 했다. 뒤이어 함흥대대 조개덕에 내려왔던 상해지식청년들인 홍모, 리민, 마대랑, 소승애 모두 왔다. 그들은 앞다퉈 자기들을 여러 모로 관심해준 상순의 은정을 말하면서 그의 건강형편과 마을의 형편을 물어보았다. 그날 점심. 덕돌은 아버지가 덕을 쌓은 덕분에 으리으리한 국제빈관 식당에서 상지민 어머니가 차려준 상해 고급요리에 술을 마음껏 마셨다. 허나 국제 빈관을 나서자 너무 더워서 견디기 어려웠다. 그때 상지민이 국제 빈관의 승용차를 빌어 덕돌과 수호를 집과 여인숙까지 실어다 주었다. 이튿날 수호는 덕돌을 데리고 자기가 출근하는 일본 신발공장으로 데리고 갔다. 규모는 그리 크지 않은 공장이었지만 상해바닥에서 일본 신식신발을 생산해 꽤나 인기가 있었다. 수호는 덕돌을 보고 “너 대학에서 일어를 배웠니?”하고 물었다. 덕돌이 머리를 끄덕이자 그는 “잘 됐다. 우리 일본 보스를 만나 일어로 대화해 보겠니?”하고 물었다. “그러기요. 일어를 써먹어 봐야지.” 덕돌은 수호를 따라 2층에 있는 보스 사무실로 올라갔다. 대머리 보스가 안경을 춰올리며 사무 상에서 일어나 수호와 덕돌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수호가 다가가 종이에 한어로 “대학생”, “일어”라고 썼다. 그러자 보스는 덕돌을 쳐다보면서 반겼다. 덕돌은 일어로 “안녕하세요? 처음 뵙습니다.”라고 인사했다. 일본 보스는 아주 기분 좋아졌다. “오랜만에 상해에서 우리 일어로 말하는 사람과 만나니 정말 기쁘오. 저기 걸상에 앉소.” 그는 손수 차 두 잔을 부어 수호와 덕돌의 앞 차탁에 놓았다. 여비서가 다가와 에어콘을 틀어놓아 영상 35도도 넘는 무더운 날씨와는 달리 아주 시원해 좋았다. “어느 대학교를 다니오?” 보스의 물음에 덕돌은 “YJ대학에 다닙니다.”라고 솔직히 대답했다. 일본 보스는 “그 대학은 유명한 대학이죠?” 하고 묻더니 무척 덕돌에게 관심을 보이면서 이것저것 물었다. 덕돌이 유창한 일어로 술술 대답하자 보스는 나중에 이런 말을 꺼냈다. “우리 공장에 와서 일어통역을 하지 않겠소? 높은 로임으로 초빙하지.” 그 말에 수호나 덕돌이나 너무 뜻밖이어서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덕돌은 한참이나 궁리했다. (이런 일본 공장에 있을 거면 일본에 건너가지. 아직 대학졸업장도 타지 못했는데 중도에 공장에 다닌단 말인가? 지금은 견식을 넓히고 많이 배울 때인데.) 그때 피뜩 이런 영감이 번개처럼 뇌리를 쳤다. (번화한 대도시 상해에서 일본기업소에 다니다가 저 보스를 등에 업고 일본에 건나 갈 기회를 마련하면 좋지 않을까?) 덕돌은 인차 “이제 대학을 졸업한 뒤 오면 어떨까요?”라고 헛일 삼아 말해보았다. “환영하오.” 보스는 대번에 얼굴에 화색을 띠었다. “헌데 난 지금 이 기업소를 경영하기 힘들어 죽겠소.” 알아듣지 못한 수호는 어리벙벙해 있는데 덕돌은 “무엇 때문입니까?” 하고 물었다. 일본 보스는 솔직히 말했다. “우리 기업에 일어통역이 없어 힘드네. 무슨 일을 시키려고 해도 기술자나 노동자들이나 내 말을 통 알아듣지 못하네. 그래서 나는 종이와 만년필을 들고 다니면서 한자어를 써서 그래도 의사를 얼마간 전하는 형편이네. 난 지금 당장 일어통역이 필요하네. 우리 기업에 와서 일하게나.” 일본 보스가 비난사정을 하는 것을 보고 덕돌은 응모조건을 엉뚱하게 슬쩍 높였다. “내가 여기 와서 일하면 장차 보스님께서 일본에 데리고 가서 유람도 시키고 연수도 시키겠습니까?” “그래, 될 수 있지. 여기 와서 3년만 일을 잘 하라고. 그럼 내가 일본에 돌아갈 때면 데리고 가서 일본 구경을 시키겠네.” 일본 보스는 시원하게 대답했다. 그는 뚱뚱한 몸을 일으키며 손수건으로 번들 이마의 땀을 훔치면서 안경알 너머로 덕돌을 슬쩍 곁눈질하더니 너스레를 떨었었다. “나 원, 참, 대도시 상해에서 일어를 아는 사람을 찾기 이렇게 힘들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어. 국제빈관에 가서 부탁했더니 진짜 일어를 아는 대학교 학생들이나 선생들은 우리 공장이 작다고 오지 않아. 외국어대학교 대학생들은 외교부나 영사관이 목표라고 해. 개혁개방한지 몇 해라고 일어인재가 이렇게도 없을 줄이야.” 일본 보스는 한참 신세타령을 하더니 이런 말을 꺼냈다. “덕돌이라 했던가? 여름방학에 유람을 나다니는 것 같은데 개학 전까지 우리 기업에서 임시 통역을 해 줄 수 없나?” 덕돌이 수호와 한어로 말하니 수호는 “대답해라. 차비라도 마련하면 좀 좋아서.”라고 했다. 덕돌은 흔쾌히 대답했다. 덕돌은 그날부터 지하여인숙에 뒀던 짐을 싸가지고 일본 기업인 교또신발공장에서 와서 실습 삼아 통역으로 일했다. 일반노동자인 수호와는 달리 덕돌은 보스를 그림자처럼 따라 다니면서 통역을 해주었다. 또 여비서와 함께 보스를 따라 상점에 가서 필요한 생활용품도 사오고 보모에게 음식부탁도 해야 했고 고급식당에도 따라다니면서 고급생활도 했다. 보스와 갈라져 공장 숙사에 돌아가면 곤한대로 가지고 간 일어교과서를 펼쳐들고 일어공부에 전념했다. 그런데 보스 이시가와씨는 아예 덕돌을 자기 집에 와서 함께 주숙하게 했다. 교또에서 건너온 그는 사모님도 데리고 오지 않아 전적으로 상해 당지에서 구한 보모가 끓여 주는 밥을 먹고 살아야 했다. 허나 말이 통하지 않아 음식습관이 다른데 음식주문을 하기 힘들어 골치 아팠던 것이다. 이젠 덕돌은 그의 입이 된 셈이어서 덕돌이 한시도 없이는 살기 어려웠던 것이다. 허나 개학이 오래지 않아 덕돌은 동북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이시가와 보스는 덕돌과 갈라 질 때 두툼한 봉투를 내밀면서 신신당부했다. “자네와 함께 있은 한달 동안은 아주 편리했네. 수고했어. 로임으로 인민페 200원을 넣었네. 대학을 졸업하면 우리 기업에 오게나. 꼭 더 높은 로임을 주겠네. 한 500원을 줄 예산이네.” 500원이면 대학을 갓 졸업한 대졸생의 1년 12개월 로임에 해당됐다. 수호가 받은 로임의 거의 10배는 됐던 것이다. 덕돌은 봉투를 받으면서  인사했다. “고맙습니다. 제가 대학을 졸업하면 그때 다시 봅시다.” 이시가와 보스는 덕돌의 손을 굳게 잡았다. “ 믿고 기다리겠네. 덕돌이 꼭 오겠지?” 덕돌은 허리를 굽혀 인사하며 머리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믿어줘서.” 덕돌이 떠나는 날 수호와 황련지는 어린 아들애 길림까지 데리고 상해 공평부두에까지 짐을 들어주며 바래였다. 그들은 길림성에 가서 재교육을 받으면서 낳은 애라고 아들애의 이름을 길림이라고 달았던 것이다. 수호는 줄 것이 없어 자기네 일본 교또신발공장에서 생산한 여름에 신는 산다를 스무 컬레나 가방에 넣어 보냈다. 공장에서 파는 가격은 1원도 되나 마나 했지만 연변에 가져다 팔면 3원 80전이나 4원씩 팔 수 있었던 것이다. 수호는 상해와 연변의 신 값을 손금을 보듯 했던 것이다. 그 신 스무 컬레를 팔면 로비를 하고도 남을 것이었다. 덕돌과 수호, 황련지는 눈물을 흘리면서 석별의 정을 나눴다. 덕돌은 신짝을 넣은 묵직한 가방을 메고 만 톤급 윤선에 올랐다. 흐린 날이어서 덥지 않아 좋았다. 윤선에 올라 시원한 바닷바람을 쏘이며 돌아 볼라니 저쪽 부두 입구에서 그때까지도 수호네 일가는 손을 젓고 있었다. 덕돌은 돌아가라고 연신 손을 저었다. 수호와 황련지는 눈물을 훔치며 손을 계속 흔들었다. 뿡- 만 톤급 장강호 윤선은 기나긴 경적을 울리더니 서서히 황포강 공평부두에서 미끄러져 강심으로 바다로 대련으로 미끌어져나갔다 “아름다운 상해여, 안녕히! 유정한 친구들아, 이제 가면 언제 다시 만나느냐? 꼭 다시 만나자!” 윤선은 깊고 깊은 석별의 정과 끝없는 고민을 싣고 푸르른 바다로 나아가고 있었다 …        제30장 망향(望乡)                   1. 모험과 효성        서늘한 가을바람이 선들선들 불어와 무더위가 핥고 간 대지를 시원한 세상으로 바꿔 놓았다.        상순의 집에는 경사나 난듯이 웃음꽃이 피었다. “나돌아 다닌 머저리 앉은 영웅보다 낫다는 말이 그른데 없다.” 명옥이 하는 말에 말수가 적은 상순도 희죽이 웃었다. “돼지 새끼 네개를 팔아 가지고 세상구경 떠나가더니 돼지 새끼 열 마리를 벌어가지고 왔구나.” 그때 본가집에 돌아온 막내누나 성숙이가 덕돌이 대련에서 가져온 생신한 물고기를 동네 아줌마들한테 파느라고 여념이 없었다. 성숙은 경박호 옆의 상수촌 김광선한테 시집갔다. 첫애를 잃고 그 아래로 아들 영남과 영춘을 낳았는데 이번 걸음에 애들을 데리고 놀러 왔다. 그녀는 하나 밖에 없는 남동생 덕돌이 가져온 산다와 물고기를 파는 재미에 웃음꽃을 피웠다. 덕돌은 윗방에 누워서 정지 부엌바닥에서 고기가 불이 펄 나게 팔리는 것을 보면서 흐뭇해 푸른 꿈을 익히고 있었다. 글쎄 대련에서 한 근에 20전에 산 청어를 이 시골에서 1원 30전에도 사서 먹으려고 해도 없었으니 말이다. 경제가 낙후하고 변경 시골에 자리 잡은 진수해는 시내라고 해도 하나 밖에 없는 식품상점에서 청어 한 근에 1원 50전 했지만 너무 오래서 다 썩은 것 같았고 부스러기뿐이었던 것이다. 그것에 비하면 대련에서 펄떡펄떡 뛰던 생신한 청어를 사서 가져왔기에 진수해 식품상점의 청어보다 값도 20전이나 덜 받았기에 마을 사람들은 앞 다퉈 사갔다. 하여 100근 되는 물고기를 하루 새에 불이 펄 나게 몽땅 팔았다. 이번 걸음에 덕돌은 실련의 고통에서 벗어났을 뿐만 아니라 세상을 널리 보았고 돈줄을 발견했다. “그래, 대련의 물고기에 상해 교또신발공장의 신을 가져다 팔아 목돈을 벌어야지.” 물고기와 신을 팔아 일약 200원도 넘는 돈을 벌었다. 얼굴의 밭고랑 같은 주름살마저 쪽 펴진 부모의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덕돌은 크게 장사를 벌려 부자로 돼 부모께 효도할 마음을 먹었다. 그는 머리가 희슥희슥한 부모를 바라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됐다. (상해에 다니면서 신 장사를 할지언정 일본으로 갈 궁리는 포기하자. 괜히 파악도 없는 일본유학을 모험했다가 늙으신 부모에게 불효를 저질러서야 안 되지. 외동아들인 나를 기둥처럼 믿고 있는데 내가 어찌 전도와 이상을 위해 부모를 버리고 일본으로 간단 말인가? 아무리 높은 로임을 준다고 해도 어찌 나를 믿고 바라보며 사는 늙으신 부모를 버리고 어찌 상해에 간단 말인가? 난 부모자식 간에 모모한 애끓는 이별이나 별거를 바라지 않는다. 아니, 이별이란 영영 없었으면 한다. 물론 이별이 있어야 상봉도 있다고 하지만 조석으로 부모자식들이 한자리에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그러나 이 세상 부모님들은 이별의 아픔을 속으로 피눈물을 흘리면서도 참아나간다. 부모님들은 자식이 이 세상 어디로 가든지 잘 되기만을 바라고 자식들이 잘 되면 기뻐한다. 부모님들은 자식의 뒷다리를 절대 잡아당기지 않는다. 그러나 자식으로서 부모님들의 마음을 십분의 일이라도 알아야 할 것이고 모든 것을 돈으로 계산해서는 안 된다. 모든 것을 자기 중심으로 생각하지 말고 늙어서 의지 가지 없을 부모님의 생각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자기 혼자 잘 살겠다고 늙으신 부모를 버리고 몇 만 리 밖의 일본으로 달아난다는 것은 차마 못할 짓이다! 세상에 부모자식이 한곳에서 사는 것만큼 행복하고 즐거운 천륜지락이 또 어디 있으랴? 그런 천륜지락은 황금산과도 바꿀 수 없으리라!) 이쯤 생각하자 덕돌은 바깥에 나가서 저 멀리 서쪽의 패용천산과 칼산을 하염없이 바라보면서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었다. (충신은 효자가 아니라고 하지만 난 부모님을 잘 모시고 효성을 다하는 효자이면서도 사업도 잘하는 사업가로 되련다. 그러면 얼마나 자랑스럽겠는가? 아버지도 부모에게 효성을 하고 처자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영월구 공안국 국장도 그만두고 함흥촌 시골로 돌아오지 않았던가! 그래, 그래. 나도 아버지처럼 효성이 지극했던 부모에게 지극정성을 다해 효성을 해야 한다. 아무리 가난해도 나에게 목숨과 모든 것을 주고 나를 키워준 부모 그리고 조국과 고향을 버릴 수 없다. 물론 내가 일본 유학을 하고 조국에 돌아와 조국과 고향을 위해 더 크게 일하려는 것이지만 한시도 고향과 부모를 떠날 수 없다. 모험의 길을 포기하자. 고향 연병 땅에 뿌리를 박고 부모님을 가까이에서 모시고 돼지고기 한 점이라도 대접해드리면서 효도하며 살자. 하늘을 찌르는 거창한 사업은 하지 못해도 부모와 고향 인민들에게 효도할 뿐만 아니라 향토애와 민족애에 묻혀 우리 고향 사람들을 위해 두부모만한 글이라도 쓰면서 참답게 살아보자.) 마음을 정하자 덕돌은 앞길이 환해지는 것 같았다. 효성과 부모사랑, 민족사랑, 고향사랑이 인생길에서 상상하기도 어려운 모험을 막았던 것이다. 순간 영자와의 실련의 아픔도 가뭇없이 사라졌고 패용천산과 칼산, 태평강과 부르하통하, 고향의 모든 산천이 아름답기만 했다. 둥둥 떠다닌 구름송이 같던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으면서 고향 땅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순간이었다. 그러자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때 부엌칸 쪽이 부산스러워져 내려가 보니 뒤늦게 소문을 듣고 물고기를 사러 온 병진이 아쉬워하며 떠들어대는 것이었다. “허참, 먹을 복이 없는 놈은 대련 물고기도 얻어먹지 못하는구먼.” 생산대 탈곡장 벼 낟가리에 불을 질렀다가 감옥에 갇혀있던 병진은 만기 석방돼 집에 돌아왔던 것이다. 그는 자기가 감옥에 간 것은 전적으로 자기 방화죄에 있다는 것이라고 생각할 대신 상순이가 자기를 붙잡아냈기 때문이라고 여기며 나쁜 감정을 품고 있었다. 그는 덕돌을 보자 물고기를 사지 못했다면서 빈정거리었다. “허이고, 대학생이 물고기장사를 다 하오? 이 집이야 원래 약담배장사로부터 소문 난 장사군 내력인 게 뭐. 이보, 대학생, 물고기 장사를 해 장가가면 살 집을 살 예산이오?” 덕돌은 누워 있다가 스르르 일어나더니 “철주 아버지야 사회대학을 졸업한 게 대학생 위 대학생이지.”라고 맞받아 쳤다. “저 새끼 요사한 게 말하는 거 봐라. 날 보고 사회대학을 다녔다고 비웃어?” 덕돌은 기싸움에서 물러서지 않았다. “그래 그 이상 더 좋은 대학이 어디 있소? 철조망을 두른 토성 안에 보초병들까지 보초를 서 주는 철창 속에서 법률공부를 하지 않았소? 철창 속에서 법을 잘 배웠으면 마을에 돌아와 말썽 작작 일으키고 노실하게 사오. 자칫 하면 돌을 들어 재차 자기 발을 깔게요!” 병진은 덕돌의 성격을 아는지라 무섭게 번뜩이는 눈길과 경고하는 것을 보고 두덜거리면서 고개를 숙이더니 비실비실 뒤로 물러서다가 돌아가 버렸다. 덕돌이 대학교 숙사에 돌아가니 졸업배치가 시작돼서 동창생들은 모두 각자 이상에 따라 지망을 쓰고 이른바 “공작”을 하느라고 달아 다녔다. 술과 과자를 사들고 담임교원을 찾아가고 학부 주임을 찾아가 통사정을 들이댔다. 담임교원들도 제자들의 졸업배치 때문에 머리 아팠다. 어느 제자의 이익에도 도움이 되게 해주고 싶은 것이 스승의 마음이었다. 마치 자식이 많은 아비가 자식 전도를 걱정하듯이. 허나 가지 많은 나무가 바람에 성할 때가 없는 법이었다. 제자들 속에는 별의별 해괴한 일이 다 벌어졌다. 어떤 제자는 상대방이 어디로 가려고 하는가는 정보를 장악해 가지고 자기 이해득실에 영향이 있으면 담임교원이나 학부장을 찾아가 물어뜯고 훼방을 놓았고 자기가 적임자임을 내세웠다. 덕돌은 글을 쓰는 신문사나 방송국이 아니면 출판사나 문화관 창작 실 같은데 가는 것이 소원이었다. 허나 농민의 아들이 그런 보도기관이거나 문화단위에 배치 받는다는 것이 어디 그리 쉬운 일이겠는가? 진짜 하늘의 별따기보다도 힘든 일이었다. 남들은 가문의 문벌이 높아서 기자나 편집 혹은 명작가의 아들딸이거나 사위가 아니면 며느리어서 그런 동창생들의 부모들이 이런 저런 관계를 통해 청탁을 하고 예물작전을 하는 판에 무슨 수로 경쟁이 치열한 그런 단위로 들어간단 말인가? 덕돌은 생각만 해도 골이 아팠다. 허나 세상에 얽매여 살지 않고 일본이나 상해에 가서 모험적으로 살아보려던 그여서 초현실적인 환상에 잠기면서 자기 위안하는 방법으로 암흑한 현실에서 해탈되려고 애썼다. (세상이 더러워서. 원, 그까짓 신문사나 방송국을 대단하게 생각하는 거 같아? 난 일본에 유학을 가려던 이상도 꺾고 이런 골 안에 물앉았는데. 상해 일본 기업소에서 오라는 것도 가지 않아. 여기 로임의 10배를 주겠다는 것도 그만 뒀는데. 너희들을 대단하게 보는 거 같아? 아무 일이나 하면서 부모를 잘 모시면 되지. 인생은 마라토너야. 꼭 내 능력과 노력으로 경쟁할 테야.) 덕돌이 머리 아파할 때다. 이모부 강운룡네 아들 강호가 찾아왔다. 덕돌은 울적해 있던 차라 오랜만에 찾아온 강호를 식당에 데리고 가서 채 두 접시를 마주하고 술잔을 기울였다. “무슨 일로 찾아왔니?” 강호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형님, 교통경찰을 하니 별의별 위법하는 운전수를 다 만나오. 언제 무슨 보복을 당할지 모르겠소. 그래서 형님한테서 호신술로 쓸 권투나 무술을 배워 달라고 찾아왔소.” 덕돌은 한숨을 후 내쉬었다. “강호야, 좋은 경찰을 하면서 딱 주먹을 휘둘러야 되니? 법으로 일을 처리해야지.” 강호는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형님, ‘문화대혁명’은 끝났지만 이 세상은 아직도 얼마나 어지럽다고 그러오? 모든 게 법으로 될 거 같소?” 강호는 술병을 들어 덕돌의 술잔에 부어주면서 뒷말을 이었다. “속담에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는 말이 그른데 없소. 경찰도 자기 몸을 보호하려면 호신술 닦아야 하오.” 그러자 덕돌은 한숨을 후 내쉬었다. “그 말에 도리는 있다. 그럼 어째 아버지한테서 배우지 않니? 네 아버지는 항미원조 전쟁 때부터 특종병 출신이 아니고 뭐냐?” 강호는 “주먹을 믿고 아무 짓이나 할까봐 배워주지 않소.”라고 하며 답답해했다. “지금 내 대학졸업배치로 해 골이 아프다. 배워 줄 새도 없다.” 강호는 머리를 들고 덕돌을 바라보며 말했다. “형님, 아버지와 말해서 형님을 시내에 남겨달라고 하라오? 국장인 아버지가 나서면 형님 졸업배치쯤은 문제없을 거요.” 허나 덕돌은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신문사나 문화관 같은데 갈수 있겠니?” “말해 볼게.” “고맙다.” 덕돌은 강호를 드문드문 학교 청사 뒤 소나무 숲이거나 부르하통하 버들방천에 데리고 가서 권투를 배워주었다. 실전에서 호신술로 쓸 실용적인 간단한 동작을 배워주었다. 한편 이모부는 여기저기 수소문해 덕돌의 졸업배치를 도와 나섰다. 그러나 이모부 강운룡은 공안국과 검찰원, 법원 같은 기관에는 면목이 넓었지만 문화단위나 보도기관에는 인맥이 뻗치지 못했다. 그리하여 시내 문화관에 남으려던 덕돌의 소박한 이상마저 물거품으로 돼버렸다. 핍박에 못 이겨 덕돌은 아버지에게 “이계삼 서기나 허영주 부 현장과 말해서 시내 학교에 남게 해주십시오.”라고 말했다. 그러나 상순은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사회에 첫걸음을 내딛기 시작하면서 뒷문거래에 의거해서야 장차 어떻게 제대로 일하겠느냐? 사람은 자기 능력을 믿고 살아야 한다.” 어지럽게 된 세상에서 광목천을 쓰고 진흙탕 속에 뛰어들지 않으려는 아버지가 고상하면서도 아들의 전도에 관계되는 일에도 나서지 않는 데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중에 덕돌은 진수해 당위 선전위원으로 사업하는 성환의 소개로 문화교육을 책임진 허영주 부 현장을 찾아가 도움을 받아 진수해중학교에 배치받았다. 중학교로 배치 받아 가기 전에 상해 일본 교또신발공장의 보스 이시가와 보스한테서 편지가 날아왔다. 보고 싶은 덕돌이, 안녕하오? 오랜만이오. 이젠 졸업할 때도 됐겠지? 약속대로 우리 기업에 오게나. 우린 한 달에 500원의 높은 로임으로 자네를 통역원으로 초빙하네. 만약 일반 통역이 지위가 낮다고 생각하면 장차 비서실장으로 제발시킬 수도 있네. 어때? 100명도 넘는 직원을 가진 우리 기업에 와서 일해보지 않겠나? 속히 회답하게나. 난 하루가 삼추 되게 자네가 오기를 기다리네. 잘 부탁 하네… 편지를 읽고 나서 덕돌은 희비가 겹치어 심란하기 그지없었다. 그는 편지를 꾸겨 호주머니에 넣고 고민에 빠졌다. (혹시 상해에 가서 높은 로임을 받아 부모한테 부쳐드리면 효성을 더 잘 하는 건 아닐까? 허나 옆에 외동아들이 없어도 되는 건가?) 그는 효성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곰곰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돈을 많이 드리는 것이 효성의 전부인가? 옆에 자식이 없이도 돈만 많이 가지고 근심 없이 잘 살게 하면 천륜지락을 누린 것인가? 아니다. 허나 옆에서 조석으로 모시고 있지만 부모께서 이 근심 저 걱정 다 하면서 온전히 입지도 못하고 늘그막까지 일을 해야 근근득식 한다면 자식 된 도리를 제대로 한 건가?) 칼바람이 덕돌의 얼굴을 쇠깍쟁이로 긁어내듯이 불어쳤다. 덕돌은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광야를 터벅터벅 걸어 진수해로부터 조개덕으로 돌아가면서 생각을 거듭했다. (아니야. 부자로 돼 부모를 부유하게 모시지는 못해도 하나 밖에 없는 외동아들인 내가 가까이에 있으면서 부모를 조석으로 모시는 것이 옳다. 이거야 말로 천륜지락이야. 아무리 황금산을 쌓아 놓고 산다한들 만리 떨어져 있어서야 무슨 효성인가? 무슨 천륜지락이란 말인가?) 이쯤 생각이 재차 잡히자 덕돌은 한숨을 후 내쉬었다. “돈이야 벌면 있겠지만 부모자식간의 천륜지락이야 돈을 주고서도 살 수 없다. 진수해중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으면서 여름방학과 겨울방학에 대련과 상해를 드나들면서 물고기와 신 장사를 하면 돈이야 얼마간 벌수 있지 않는가. 돈 줄이야 국내에 있으면서도 하나하나 발견할 수 있겠지. 딱 일본에 가야만 잘 살 수 있겠는가?” 집에 돌아가자 그는 진수해중학교에 배치 받은 일을 말하면서 아버지 앞에 인사국의 졸업배치 소개신을 꺼내 보였다. 상순은 소개신을 들고 보면서 머리를 끄덕였다. “됐다. 이게 너의 학습 성적과 능력으로 얻은 졸업배치이다. 옛날부터 훈장의 똥은 개도 먹지 않는다고 했다. 그만큼 훈장질을 하는 일이 힘들다는 얘기다. 혹시 네가 글을 쓰려는 이상과 모순될 수도 있다. 허나 그런 모순을 재빨리 해결하고 현실에 발을 붙이고 훈장을 잘해라. 우리 가문에 처음으로 훈장이 나온 거 아니냐? 아주 장하다.” 아버지는 항상 그러했다. 그 어떤 곤난도 완강한 의력으로 박차고 나가라고 신심을 주는 것이었다. 아직도 한 달이나 지나야 개학이었다. 덕돌은 아버지를 보고 소를 팔아달라고 했다. “뭘 하자고 그래? 졸업배치도 다 받았는데.” 덕돌은 우쭐 일어나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바깥을 내다보다가 머리를 돌렸다. “아버지, 대련에 가서 물고기를 사다 팔가 합니다.” “또 물고기장사를?” “예.” 상순은 놀라했다. “야, 이놈아, 저 혹달개소는 우리 집 목숨과 같다. 소를 팔아 본전도 못하면 황소 없이 새해 농사를 어떻게 짓니?” 명옥도 말렸다. “야, 이놈아, 대학을 졸업했으면 됐지. 뭐가 모자라서 황소를 팔아 물고기장사를 한단 말이냐?” 명옥은 저녁밥을 지으려고 쌀을 쌀 함박에 일다가 우는 상을 지었다. “야, 저 놈의 씨는 말리지 못한다. 딱 제 아비 닮았구나. 너 아비 젊어서 소금 장사를 하다가 나중에 약 담배 장사를 해 혼났다. 돈을 벌기는 고사하고 나중에 빚더미에 깔려 내 그 빚을 무는 게 혼났다. 농사를 지어서 물다 못해 술도 빚느라고 집에 불이 다 달렸지. 아비가 공산당 덕분에 장사를 하지 못하게 해 농사를 지으면서 장사를 그만두더니. 네가 왜 나서니? 이제 살만하니 또 황소를 팔아 물고기 장사를 해? 이 놈아, 대학을 졸업하고 한 달에 45원씩 타게 되면 살만하다. 몇해 전에 온 집 식구들이 한해 농사를 지어도 10원 돈도 타지 못했는데 네가 혼자 두 달이면 한해 농사 돈을 타는데 뭐가 모자라 그러니? 원, 장사란 말만 들어도 진절머리 난다. 그만둬라. 훈장질이나 잘 해라.” 덕돌이 뭘 하려고 해도 말리지 않고 다 받들어주던 어머니가 막아 나섰다. 덕돌이 아버지 눈치를 보았다. 아버지의 결단에 달렸던 것이다. 말수가 적은 상순은 한참 궁리하더니 뜻밖에 지지해 나섰다. “물고기장사를 해라. 내일 소를 팔아 줄게.” 그 말에 명옥은 기 막혀 불을 때다가 구들에 달려 올라와 죽는 상을 했다. “아니, 이 영감이 정신 있소? 하나 아들을 계속 장사를 시킬 예산이오? 이제 집을 팔아 장사를 하자고 하지 않는가 보오.” 허나 상순은 마음을 굳게 먹은 상 싶었다. “허참, 여자들이란 소견이 좁소. 전번에도 물고기를 팔아 200원을 벌지 않았소?” 그는 누가 들을까봐 목소리를 낮춰 뒷말을 이었다. “전번에 30전짜리 물고기를 가져다 1원 30전씩 팔지 않았소. 운 비를 제하고도 한 근에 70전 벌었소. 어디서 그런 목돈을 벌겠소? 할 만한 장사요.” 그리하여 덕돌은 며칠 후에 혹달개 소를 판 돈 500원을 가지고 대련 행 열차에 올랐다. 하루 밤낮을 꼿꼿이 앉아 대련에 도착해 내리니 해변가 날씨어서 장백산 아래 날씨와는 판판 달랐다. 덕돌이 추울까봐 가죽털모자를 쓰고 긴 군복외투를 입고 시내 전차에 탔더니 숱한 아가씨들이 핼금거리며 킥킥 거렸다. 음력설이 돼가는데 대련의 날씨는 춥지 않아 모두 털실내복에 홑옷바람이었다. 여름에 왔을 때는 해풍이 불어와 덥지 않더니 겨울에는 춥지 않아 살기 좋은 대도시였다. 호텔을 잡고 들자 덕돌은 대련 사람들처럼 털실내복에 홑옷바람으로 시내돌이를 나갔다. 그는 먼저 대련 역 화물처로 찾아 갔다. 거기서 한참 숱한 물건을 부치는 것을 여겨보았다. 혹시 젖은 물고기를 부치는 사람이있는가고 살펴 보았다. 허나 마른 고기를 부치는 사람은 있어도 젖은 물고기를 부치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반나절이나 살피다가 더 기다릴 수 없어 덕돌은 여직원에게 넌지시 “젖은 물고기를 부칠 수 있습니까?”고 물어보았다. “부칠 수 있어요.” 덕돌은 자기 귀를 의심할 정도였다. “젖은 물고기도 부칠 수 있습니까?” 재차 묻자 여직원은 덕돌을 흘금 쳐다보며 “금방 대답했잖아요? 부칠 수 있어요. 젖은 물고기든 언 고기든 다 부칠 수 있어요.”라고 했다. “감사합니다.” 덕돌은 너무 기뻐 허리를 굽히며 인사까지 했다. 그러자 그 여직원은 우스워 왼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어서 젖은 물고기를 실어와요. 어디로 부치려고 그래요?” “연변에 부치려고 그럽니다.” “부칠 물고기 얼마나 돼요?” “대여섯 마대 될 거 같습니다.” “음, 그럼 삼륜차군들을 보고 실어달라고 해요. 운비는 한 5~6원이면 돼요.” “감사합니다.‘ 말을 마치자 덕돌은 상해에서 돌아올 때 들리었던 대련 어물시장으로 시내전차를 타고 달려갔다. 먼저 돌아다니면서 생신한 청어와 갈치, 오징어, 낙지 등을 두루 돌면서 가격이랑 알아본 다음 시장 어귀에서 삼륜차꾼들 앞으로 찾아갔다. 삼륜차군들은 서로 일감을 빼앗을 내기 했다. 그리하여 덕돌은 운 비를 6원을 주기로 하고 손쉽게 삼륜차꾼을 구했다. 삼륜차꾼을 데리고 삼륜차를 끌고 물고기 장사꾼들 앞으로 갔다. 덕돌은 많이 산다는 조건을 앞세우고 물고기 값을 싹싹 깎아 생신한 청어는 한 근에 20전에, 갈치는 한 근에 50전에, 낙지는 몇 근씩 하는 한 근에 1원씩 흥정해 저울눈을 일일이 까근히 살펴가면서 도합 열 마대나 사놓았다. 그는 물고기장사군과 삼륜차군을 시켜 삼륜차에 싣게 하고 자기는 십장처럼 두 손을 허리에 지르고 물고기를 빼내가지 않는가 큼직한 눈을 뚝 부릅뜨고 살폈다. 물고기를 삼륜차에 다 실은 후에야 덕돌은 품속 호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물고기 값을 넘겨주었다. 뒤이어 삼륜차군이 밀다가 타는 삼륜차 옆 좌석에 걸터앉아 대련 역 화물 처로 달려갔다. 화물 처 여직원은 산더미 같은 물고기를 보고 입을 딱 벌렸다. “꽤나 한다하는 물고기장사군이군요. 이걸 연길에 가지고 가서 팔면 얼마나 벌까요?” 덕돌은 장사를 할 때엔 누구도 믿지 말라던 아버지 말을 떠올리자 거짓말을 꾸며댔다. “운비에 차비에 숙비까지 제하고 나면 한 근에 10전이나 떨어지겠는지 모르겠습니다.” 여직원은 물고기를 부쳐주면서 “그래도 이 숱한 물고기를 팔면 적어도 200원은 떨어지겠어요. 200원이면 내 여섯 달 로임이예요.”라고 하며 혀를 내둘렀다. “이걸 다 팔려면 그리 쉽겠습니까?” 이러루하게 대화를 하는 새 물고기도 다 부쳤다. 화물 처와 삼륜차군에게 운 비를 물고 나니 한숨이 후 나왔다. 화물 처를 떠나면서 여직원에게 인사를 하고 그 길로 귀로에 오를 가고 생각하다가 머나먼 대련에 왔다가 구경하지 않고 돌아가기는 너무 아쉬웠다. 그러나 겨울이어서 로호탄(老虎滩)공원이거나 성해(星海)공원으로 가서 바다구경을 해보았자 그저 그럴 것 같았다. 역 앞에서 서성거리다가 그는 발길을 돌렸다. (에라, 모르겠다. 식당에 들어가 한 때 잘 먹고 보자.) 그리하여 그는 역 광장 앞에 있는 해물식당으로 들어갔다. 그는 말쑥하게 생긴 여복무원을 불러 갈치볶음 한 사발에 술 반근, 밥 두 그릇을 주문했다. 도합 1원 10전을 내고 배터지게 먹었다. 진수해에서는 상상도 하기 어려웠다. 갈치 한 근에 거의 60전을 하는데 한 사발을, 그것도 볶은 갈치인데 한 사발에 50전 밖에 하지 않았다. “그래, 뭐나 원산지면 눅은 법이구나.” 덕돌은 술잔을 굽내고 갈치를 집어 먹으면서 피뜩 이런 생각이 들었다. “물고기는 대련에서 사면 눅어. 허나 이런 상업기밀은 누구한테도 말하지 말아야 해. 혹시 소문이 나가면 속심이 별난 사람들이 나를 장사를 하라고 물고기를 사겠니?” 덕돌은 대련의 물고기로 큰 장사를 할 푸르른 꿈을 꾸면서 열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덕돌은 이튿날 오후에 아버지와 함께 진수해 화물 처에 가보았는데 벌써 10마대나 되는 물고기가 한마대도 차나지 않고 도착했던 것이다. 한 수레에 산더미처럼 물고기를 꽉 박아 싣고 집으로 돌아오는 부자간은 단통 부자로 된 듯이 가슴이 부풀어 올라 둥둥 뜬 기분이었다. 시골 사람들은 덕돌이 또 물고기를 가져왔다고 하자 와 모여들어 설 준비로 물고기를 사갔다. 공것을 싫어하는 덕돌의 둘째누나 은숙은 계순을 업고 와서 청어에 갈치를 사갔다. 덕돌은 너무 한 것 같아 동네 사람들의 눈을 피해 슬그머니 청어 서너 마리를 가져다 주었다. 그때 성욱의 삼촌이 성욱과 함께 물고기를 사러 와서 구경했다. “형님이 왔소? 어서 올라오오.” 성욱의 삼촌 광학은 덕돌의 팔촌형벌이 됐다. “야, 우리 백성자에는 이런 물고기가 없다. 정말 희구하다야. 이 물고기를 어디서 샀니?” 덕돌은 상업기밀이 누설될까봐 “심양에서 샀소.”라고 했다. 그러자 광학은 성욱을 곁눈질하며 머리를 끄덕였다. (쳇, 너희들이 물고기장사라도 할 예산이냐?) 장사군은 제 아비도 속인다고 덕돌은 콧방귀를 뀌면서 8촌형도 감쪽같이 속였다. 그러는 덕돌을 보고 상순은 못 마땅한 눈길을 보냈다. “형님, 정말 한가지 묻기오? 백성자는 초원지구가 아니오?” 광학은 구들에 퍼더버리고 앉아 턱을 고인 채 머리를 끄덕였다. “그래, 가 본적이 있니?” “아니, 없소.” 덕돌은 피뜩 떠오르는 뭔가 있어 물었다. “그 곳에 말이나 젖소 값이 어떻소?” 그러자 광학은 “젖소 갑이 눅다. 젓소 한 마리에 한 600원 할까?”라고 했다. “젖을 짤 수 있는 젖소 한 마리에 600원?” “응, 그래.” 덕돌은 진수해 부근에서 젖소가 귀해 젖을 내는 한 마리에 2,000원씩 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귀가 번쩍 뜨인 덕돌은 젖소 장사를 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일주일 만에 대련에서 가져온 물고기를 다 팔았다. 물론 덕돌의 어머니가 나머지 물고기를 함지박에 담아 이고 눈보라가 이는 추운 날에 진수해 장마당에 가서 파느라고 고생을 했다. 하지만 한 열흘 온 집식구들이 고생해 소한마리를 팔아 1200원을 수입해 소 두 마리를 살 돈을 벌고도 물고기 얼마간 남아 집식구들이 음력설에 실컷 먹을 수 있었다. 새우는 온 여름까지 두고 먹어도 될 것 같았다. 그러자 덕돌은 용기를 얻고 대담히 큰 장사를 할 궁리를 내놓았다. “아버지, 내 광학형님네 백성에 가서 젖소를 사다가 팔아 일약 갑부로 되겠소. 물고기를 판 돈을 주시오.” 그러자 명옥이 먼저 반발했다. “야, 정신 있니? 돈을 벌었을 때 그만둬라. 난 풍설이 이는데 물고기를 이고 다니면서 파느라고 애 똑 떨어졌다. 이젠 난 물고기를 이고 다니면서 팔지 못하겠다. 장사를 싹 걷어치워라. 대학을 졸업했으면 교원이나 잘해 로임을 쪽쪽 타 살 궁리나 해라. 허욕을 작작 부려라. 내 네 아비 때문에 얼마나 고생했는지 아니?” 명옥은 남편의 눈치를 곁눈질 하면서 불평을 토로했다. “이전에 너 아비 약 담배 장사를 해서 3,000원이나 벌었다. 그 돈이면 소 50마리, 소서구를 통째로 살 수 있었다. 그런데 사람의 욕심이 끝이 없다. 그만하면 지주라도 됐겠다. 내 이젠 약 담배 장사를 그만두라고 하니 계속 하더니 그 번 돈을 다 떼우고도 빚 가리에 깔리어 죽을 고생을 다 했다. 너도 소 한 마리를 벌었을 때 그만 둬라.” 허나 덕돌은 계속 고집을 부렸다. “이번엔 소 두 마리만 사다가 팔면 4,000원을 벌면 소 한 마리를 팔아 여덟 마리를 얻는 게 되지 않소? 내 엄마를 보고 물고기를 이고 다니면서 팔라오?” 그때 옆에서 모자간을 보고만 있던 상순이 무겁게 입을 뗐다. “그만 둬라. 장사란 자기 눈으로 똑똑히 보고 해야 한다. 광학의 말을 귀 넓어서 믿었다가 젖소 값이 더 비싸면 어쩌니? 공 차비를 팔고 그 먼 백성자로 갈게 있니?” 덕돌은 멀거니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상순은 덕돌이 듣는 눈치인지라 뒷말을 이었다. “뭐나 냉정하게 고려해야 한다. 그저 젖소 두 마리를 사다가 팔면 4천원이나 번다고 산수만 하지 마라. 백성자의 젖소 값과 우유 값도 알아봐야 한다. 소젖이 잘 팔려야 젖소 값도 그렇게 비싼 거야. 또 여기 와서 정말 2천원을 받을 수 있는지? 만약 젖소가 팔리지 않으면 어쩌니? ” 상순은 덕돌의 어깨를 다독였다. “얘야, 돈에 눈이 어두워 자꾸 장사할 예산만 하지 마라. 돈 때 묻은 눈은 다른 게 잘 보이지 않는다. 탐욕은 부패와 재난을 나을 수도 있다. 난 해방 전에 집이 가난해 소학교 문에도 들어가 보지 못했다. 너 한 공부 10분의 1만 공부해도 난 현장도 했을 거야. 넌 내 몫까지 해 대학공부까지 했는데 사회 어엿한 간부로 돼야 한다. 교원으로 됐으니 우선 우리 고향 학생들을 위해 교원 사업을 착실히 해라.” 허나 덕돌은 자기 계획한 틀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방학에 장사를 한다고 교원 사업에 영향을 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상순은 자기 말을 다음과 같이 매듭지었다. “그만 해서 그만 둬라. 당장 밭갈이를 해야 하겠는데 황소 한 마리는 사놔야 되지 않겠니? 오래지 않으면 개학도 되는데 교원이나 잘 할 준비나 해라.” 모든 것이 결론이 난 셈이었다. 덕돌은 벽이라도 차고 나가는 아버지 성격을 알고도 남음이 있었다. 상순은 조만에 소홀히 먼저 입을 열지 않고 한참씩 여러 모로 궁리를 한 후 입을 열면 복판을 치는 얘기를 했다. 반박할 여지없이 정확한 결론을 내리곤 했다. 그 말을 들어서 언제나 후회할 일은 없었던 것이다. 덕돌은 유리창문으로 눈보라 윙윙 휘몰아치는 바깥을 내다보면서 뜨거워 오른 머리를 식히고 있었다. 눈보라가 백용처럼 파도치며 대지를 무섭게 휩쓸며 지나가고 있었다.
174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114) 댓글:  조회:1310  추천:0  2018-08-07
                                                                                                                                   8. 농촌 개혁의 봄바람        중국의 광활한 농촌 대지에서는 전면적인 개혁의 봄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4인무리”가 살판치던 세월에는 진짜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천지개벽이 일어났다. 농토를 개인들에게 떼 줘 개체농사책임제를 실시한다는 것이었다. 허동원이 제일 좋아했다. “정말 얼마나 좋소. 이전에는 많이 일하나 적게 일하나 가을이면 평균분배를 했기에 어디 일할 열정이 났소?” 허동원은 이전에 덕돌과 바위돌을 메다가 발판에서 떨어져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번했다. 겨우 되살아나 가지고서도 땅을 떼 준다니 기뻐 야단쳤다. “난 아무리 허리를 상했지만 내 땅에 많이 심으면 많이 먹는 판인데. 얼마든지 농사를 잘 지을 수 있소.” 허동원은 허리 아프면서도 자기에게 차례진 가대기를 훌 둘러 메가면서 입귀가 귀밑에 가 붙을 지경이었다. 상순도 자기에게 차례진 혹달개 고삐를 잡고 가대기를 메고 집으로 돌아왔다. 허나 상순의 얼굴에서는 그리 반기는 표정을 찾아 볼 수 없었다. (할아버지와 내가 어떻게 사원들을 이끌어 건설한 생산대대인데 다 허물어 개인에게 나눠준단 말인가?) 상순이 가대기를 사랑방에 걷어 넣고 문 밖으로 나섰을 때였다. 춘실이 상순의 코에 대고 삿대질하면서 야단쳤다. “내 나그네 죽이니 씨원해? 난 누굴 믿고 농사를 지으라니?” 상순은 춘실한테 다가가면서 분명히 말했다. “내 죽인게 아니라 흥수가 스스로 죽음의 길에 들어선 거요.” “뭐라고?” 춘실은 허연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넘기며 입술을 악물었다. 상순은 내심하게 말했다. “누가 그보고 충국을 죽이라고 했소? 장미련과는 그게 뭐요? 아무리 지주 아들이라도 그렇지. 죽이면 되오? 살인죄를 졌으니 죽어 싸지. 황차 지금 지주와 부농 모자를 다 벗겨준 판에...” “뭐라고? 계속 변명하겠느냐? 오늘 내 죽고 네 죽고 해보자!” 춘실은 더는 참을 수 없어 두 손을 가래짝처럼 펼쳐들고 머리를 끄잡아당기려고 덮쳐들었다. 숱한 사람들이 몰려왔다. 상순은 슬쩍슬쩍 피하면서 말했다. “흥수는 당원 처신을 했소? 마반산집 할머니는 기실 네랑 여동생이랑 다 같은 처지에서 억울했어. 일본 놈들한테 강제로 끌려가서 위안부로 됐지. 그런데 흥수는 그게 뭐요? 마반산집 할머니를 투쟁하고 법원에 넘겨 감옥에 보내지 않았소?” 그 말에 춘실은 무안한지 행악질을 멈추고 뒷집으로 슬금슬금 물러갔다.      일전에 상순은 감옥에 가서 마반산집  할머니 억울함을 호소했다.      몇 달 후 마반산집 할머니는 억울한 루명을 벗고 정책을 시달받아 마을로 돌아왔었다. 그러나 감옥에서 받은 고통으로 해 시들시들 앓다가 억울한 모자를 벗기는 대회를 연지 몇달 안돼 한을 품은채 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상순은 마을 사람들과 함께 후사를 치러주었다. 뜻밖에도 춘실이 찾아와 직접 옷을 갈아입히며 눈물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언니, 우리 나그네 죄를 졌소. 용서해주오. 어쩜 내 여동생은 아직도 돌아오지 않소? 흐흐흑흑.” 상순은 큰 자귀를 휘둘러 피나무를 팍팍 깎고 대패로 빡빡 밀어 손수 관작을 만들었다. 그는 두 손으로 마반산집 할머니를 렴습해 관작에 모셨다. 계수동 산골짜기에는 또 일본 놈들의 피해로 한을 품고 세상을 뜬 한 위안부 할머니의 자그마한 무덤이 생겨났다. 까마귀들이 원혼을 부르며 까욱까욱 퍼렇게 멍든 하늘을 나래치고 있었다… 허동원은 생산대 우사와 돼지 굴마저 허물어 나누려고 했다. 이젠 생산대 재산은 허울조차 없이 다 개인집으로 나뉘어 갈 판이었다. 상순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해되지 않았다. (이러다간 구사회로 되돌아가는 건 아닌가? 땅을 팔고 사고 하는 날엔 새로운 지주가 생길게 아닌가? 잘 사는 놈은 더 잘 살고 못 사는 사람은 밭도 없이 남 집의 머슴을 살아야 할 게 아닌가? 진짜 빈부차별이 심해지면 자본주의를 복벽하는 게 아닌가?) 그는 윗방에 누워 천정만 쳐다보면서 착잡한 생각에 잠겼다. (할아버지와 내가 어떻게 사원들을 이끌어 건설한 양봉장과 인삼장, 과수원, 벽돌공장마저 다 허물어 사원들에게 나눠준단 말인가?) 상순은 구들을 짚고 일어나 담배를 말아 피웠다. 온 집안에 담배연기가 새뽀얗게 피어올랐다. (안 된다. 이렇게 하는게 옳은지 현에 올라가 알아봐야 하겠다.) 그는 벌떡 일어나 마을 동구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때 허동원이 한창 사원들을 데리고 벽돌공장의 벽돌을 굽는 가마를 허물어 벽돌장을 나누려고 일손을 다그치고 있었다. 상순은 가까이 다가가 제지시켰다. “벽돌공장만은 다치지 마오! 아무리 개체농사를 짓는다고 해 집체 재산을 다 나눠 가지라는 건 아니오. 우리 대대 농민들이 잘 살자면 개체농사를 지어야 할뿐만 아니라 집체로 벽돌공장도 계속 꾸려 사원들에게 새 벽돌집을 지어 줘야 하오.” 그러나 허동원은 기를 쓰고 허물려고 들었다. “위에서 집체 재산을 사원들에게 나눠주라고 지시했는데 김 대장은 무슨 그런 소리를 하오?” 허나 상순은 허동원을 무섭게 쏘아보며 제지했다. “잠시 가만 놔두오. 벽돌공장을 어떻게 지은 게라고 허문단 말이오? 벽돌을 쓰겠으면 벽돌공장을 놔두고 구워 쓰는게 옳소. 내 위에 올라가 알아본 후에 허물어도 늦지 않소.” 그 말에 사원들도 머리를 끄덕였다. “김 서기 말이 맞소. 벽돌공장을 허물어야 고작 벽돌을 몇 장씩 나눠 가지겠소?” “며칠 기다려 허물어 가져도 늦지 않소.” “벽돌을 구워 나눠 가지기오.” 그리하여 허동원은 벽돌공장을 허물던 손을 툭툭 털더니 마을 안으로 휑하니 가버렸다. 상순은 벽돌공장에 다가가 허물리던 가마를 손으로 매만지면서 도리머리를 흔들면서 땅이 꺼지게 한숨을 후- 몰아쉬었다. 허나 몇몇 사원들은 벽돌공장을 허물어 벽돌이 생기면 돼지 굴을 지으려고 했다. 그들은 상순이 막아나서자 꽤나 아쉬운 표정을 지으면서 뒤에서 두덜거렸다. 상순은 그런 사원들에게 위엄있게 말했다. “내 현에 가서 알아보고 돌아올 때까지 누구도 벽돌 한장도 다치지 마오. 누가 만약 내가 돌아오기 전에 벽돌 가마의 벽돌을 한장이라도 허물어 간다면 함흥대대 당지부 서기이자 치보 주임인 내가 용서하지 않을 거요.” 모두들 머리를 끄덕이며 상순의 눈치를 흘금거렸다. “김상순, 아직도 큰 소린가?” 모두들 돌아보니 이때 장미련이 달려와 상순에게 삿대질을 해대며 으르렁거렸다. 상순은 억이 막혀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야, 미쳤니?” 숭길이 말렸다. 허나 미련은 옛날과는 달리 당돌하게도 양손을 허리에 지르고 상순에게 빡빡 대들었다. “계속 옛날 소릴 하겠는가? 나라에서 지주의 모자를 몽땅 벗겨줬는데 아직도 지주 딸이라고 업신여겨? 흥!” 상순은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확실히 위에서는 지주의 모자를 벗겨주고 그들을 일반 사원들과 마찬가지로 대해야 한다고 했던 것이다. 미련은 상순이 어정쩡해 서 있는 것을 보고 기고만장해 펄펄 날뛰었다. “이전에 우리 아버지랑 오라비랑 당신들이 가혹하게 투쟁해 죽였소. 마땅히 우리 아버지와 오라비 억울한 모자도 벗겨주고 돈으로 배상해야 하오. 우리 옛날 땅도 몽땅 돌려줘야 하오. 우리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대부터 지주라지만 모두 옛날 애써 번 돈으로 저 소서구를 샀어. 상순, 네 놈은 배은망덕한 나쁜 놈이야. 너희들 조손3대가 조선에서 빈 손으로 소서구에 들어왔을 때 우리 아버지 받아들여 저 소서구 황무지를 개간해 밭을 일구게 해 살게 하지 않았니? 우리 아버지 아니면 너희들이 굶어죽지 않고 지금까지 살아 있었겠구나.” 상순은 미련을 꾸짖었다. “주둥이를 다물지 못하겠느냐? 지주 모자를 벗겼다고 해도 너희들이 마음대로 옛날 땅을 되찾아 다시 지주로 되게 할 거 같으냐? 백일몽이다! 백일몽!” 허나 미련은 점점 기가 살아나 고함쳤다. “이제 봐라. 내 옛날 우리 아버지 땅을 몽땅 찾아내지 않는가? 무슨 수를 써서든지 저 소서구를 내 걸로 만들 테다.” “두고 보자! 그렇겐 되지 않을 걸!” 상순은 성이 꼭뒤까지 치밀었다. (이게 세상이 어떻게 변한 거야?! 엉?) 그는 도리머리를 흔들며 할아버지 산소를 찾아 천지꽃산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산중턱에 있는 산소에 이르자 상순은 산소 앞에 털썩 무릎을 꿇고 태산이 무너지듯 절을 꾸벅꾸벅 아홉 번이나 올렸다. “할아버지, 이게 세상이 별나게 변해갑니다. 할아버지와 제가 어떻게 건설한 우리 대대입니까? 그런데 요즘 집체 과수원이고 벽돌공장이고 몽땅 헐어 개인들에게 나눠준답니다. 지주들이 옛날 토지개혁 때 청산당한 밭을 되찾겠다고 미쳐 날뜁니다. 밭을 개인에게 몽땅 나눠준다면 또 옛날처럼 새로운 지주와 부농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허나 산소 위의 마른 풀잎이 봄바람에 한들거릴 뿐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상순은 산소 앞에 주저앉아 산 아래 무너져가는 함흥대대를 둘러보았다. 한참 후에야 일어난 그는 소서구의 밭을 돌아보았다. (야, 저 밭을 우리 집과 큰집에서 어떻게 일군 건데. 사회주의 건설을 위해 내놓았던 땅을 이제 누구한테 나눠줘? 토지개혁 때 청산한 밭을 지주의 딸 미련에게 되돌려 줘? 안 된다, 안돼, 절대 안 돼!) 상순은 하늘땅에 대고 고함치더니 그 길로 현인민정부로 찾아갔다. 허영주 부현장을 찾아가니 현지지도하러 두만강변 마을로 내려가고 없었다. 상순은 서기 사무실에 가서 이계삼 부서기를 찾았다. 이계삼 부서기는 상순을 반갑게 맞았다. 상순은 자리에 앉자 이계삼이 부어주는 따뜻한 차를 마실 새도 없이 탁상에 내려놓고 단도직입으로 의문 나는 것부터 물었다. “생산대 집체 재산을 사원들에게 몽땅 나눠주는 건 정말 이해되지 않습니다. 우리 대대 벽돌공장이랑 과수원이랑 우리 할아버지 때부터 어떻게 건설한 것인데 다 허물어 나눠준단 말입니까? 이젠 인민공사를 흔적도 없이 허물어 다 개체호에 나눠준단 말입니까? 참 리해되지 않습니다.” 이계삼 부서기는 상순의 말을 들으면서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소홀히 해답하지 않는 것이었다. “게다가 지주들의 모자를 벗겨 놓으니 지주 딸 장미련이랑 내 꼭뒤에 똥을 쌀 지경입니다. 그년은 옛날 우리가 토지개혁 때 지주들을 청산해 재산과 땅을 빈고농민들에게 나눠 준 것에 불만을 품고 우리 생산대 밭을 몽땅 되찾아 가겠답니다. 소서구는 옛날부터 자기 조상들의 땅이라면서 무슨 수를 써서든지 자기 땅으로 만들겠다고 미쳐 날뜁니다. 이렇게 되면 구사회로 되돌아가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 일은 없소.” 그제야 이계삼은 인내성 있게 새로운 개혁정책을 차근차근 설명하기 시작했다. “지금 지주들의 모자를 벗긴다고 해서 구사회로 돌아가거나 지주들이 옳았다는 것이 아니요. 옛날 봉건사회에서는 땅을 마음대로 팔고 살 수 있는 봉건토지정책을 썼기에 지주가 생겼고 머슴이 생겼소. 허나 지금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 토지정책은 봉건사회와 다르오. 토지를 마음대로 팔거나 살 수 없소. 농민들에게 토지를 나눠줘 농사를 짓지만 농민들은 사용권만 있을뿐 소유권은 없소. 말하자면 땅은 의연히 국가 소유이고 농민들은 나눠 가진 밭에서 농사를 지을 권리는 있지만 팔 권리는 없단 말이오.” 상순은 조금 눈앞이 환해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만약 노동력을 상실해 농사를 지을 수 없을 때에는 그 밭을 팔지 못하면 묵이겠습니까?” 상순의 물음에 이계삼 부서기는 내심하게 설명했다. “농사를 짓지 못하는 늙은이나 환자는 가히 다른 사람에게 토지를 양도하고 양도비를 받을 수 있소. 그러나 토지를 절대 팔고 사지는 못하오.” “오~ 그렇습니까?” 이계삼은 상냥한 눈길로 상순을 바라보며 정중하게 말했다. “우린 이젠 늙었소. 신생사물을 접수하자면 늙어서도 새로운 형세에서의 당의 새로운 개혁개방 노선과 방침, 정책에 대한 학습을 늦춰선 안 되오. 자칫하면 새로운 형세를 따라가지 못하게 되오. 우린 언제나 정치상에서 발걸음을 일치하게 해야 하오.” 그래도 상순은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지주들의 모자를 벗기는 것은 이전에 계급투쟁을 기본 고리로 하던 데로부터 우리 당의 중심공작을 경제건설에 두기 위함이오.” 이계삼은 사무 상에서 일어나 상순의 옆에 다가와 장의자에 나란히 앉아 조용히 말했다. “ 동무네 집도 보오. 아버지가 굶어 세상을 뜨지 않았소? 가난하고서야 무슨 사회주의 우월성이 있소? 백성들이 죽물도 온전히 먹지 못하고서야 인민들이 겉으로는 ‘만세!’를 높이 불러도 속으로야 좋다 하겠소? 우린 개체농사를 짓게 책임제를 실시해야 하오. 그래야 사원들의 생산적극성을 충분히 발휘시킬 수 있고 농업생산을 춰 세울 수 있소. 이전에 보오. 집체로 농사를 지을 때 아무리 모택동저작을 학습시키면서 사상동원을 해도 어디 모두 일축을 냈소? 허나 개체호로 농사를 지어 보오. 모두 자기 밭에 소출을 많이 내면 많이 먹을 수 있기에 누가 시키지 않아도 농사일을 깐지게 할 게 아니요?” 그 말은 상순의 마음에 들었다. 이계삼은 계속 얘기했다. “이전에 평균분배를 했기에 일을 하나 하지 않으나 다 같이 나눠 먹으니 생산적극성이 어디 있었소? 허나 지금은 다르오.” 그래도 상순은 터득되지 않는 점이 있었다. “허나 난 집체 벽돌공장이랑 양봉장이랑 허물어 다 개인에게 나눠주는 건 집체 경제를 파괴하는 거라고 봅니다. 벽돌공장에서 집체로 벽돌을 구워냈기에 우리 함흥대대 숱한 사원들이 새 벽돌집에 들게 되지 않았습니까?” 이계삼은 사무실 안을 뚜벅뚜벅 거닐면서 한참 궁리하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지금 과도계단이기에 가히 함흥대대에서 벽돌공장을 집체로 계속 경영해 사원들에게 벽돌집을 지어줄 수 있소. 허나 양봉장이나 인삼장, 과수원은 관리하기 힘든데 사원들에게 나눠주는게 옳소. 벽돌공장도 허물지는 말고 차차 집체에서 경영하던 데로부터 경영능력이 있는 어느 개인에게 도급 맡기는 게 옳소. 공장도 개인이 맡으면 자기 개인 벽돌공장이기에 벽돌 한장이라도 더 잘 굽고 깨지지 않게 다룰 게요.” 상순은 그제야 한숨을 후 내쉬었다. 이계삼 서기는 상순의 어깨를 툭툭 다독여주면서 말했다. “우린 평생 학습해야 하오. 옛날 사회주의 옛틀에 박힌 이론에서 벗어나 등소평동지가 개척한 중국 특색이 있는 사회주의 길을 학습하고 나가야 하오. 그래야 우린 인민들을 영도해 부강한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하고 백성들을 잘 살게 할 수 있소. 이게 우리가 개혁, 개방 하는 도리요. 등소평 동지께서는 ‘검은 고양이나 흰 고양이나 쥐를 잡으면 좋은 고양이다.’라고 하셨소. 백성들을 잘 살게 할 수 있다면 어떤 형식으로 농사를 짓든지 그것이 제일 좋은 사회주의인 거요. 실천은 진리를 검증하는 시금석이요. 개체농사를 지어 보면 집체로 할 때보다 좋은가 나쁜가는 자연히 가려질 것이오. 우리 당도 어떻게 하면 인민들을 배불리 먹고 잘 살게 하겠는가고 모색하고 또 모색하고 있소.” 그제야 상순은 눈앞이 훤히 밝아지면서 가슴이 후련해 나는 감을 느꼈다. “아무 때도 이 서기 말을 들으면 갑갑하던 가슴이 활 열리는 감이 듭니다. 돌아가 개체농사를 지어 보겠습니다.” 그때 허영주 부현장이 사무실에 들어섰다. “비서가 상순 서기가 왔다고 하더구먼. 내 농촌에 가서 밭을 나누는 걸 지도하다가 급히 돌아왔소.” 상순은 허영주 부현장과 굳게 악수를 나눴다. 이계삼 부서기와 허영주 부현장은 오랜만에 만난 상순과 함께 점심식사를 하면서 새로운 개체농사책임제에 대해 담론했다. 상순이 장미련이 우쭐거리던 얘기를 하자 허영주 부현장은 맺고 끊듯이 말했다. “지주 모자를 벗겨주고 계급투쟁을 기본 고리로 하지 않고 경제건설을 중심에 놓고 사업한다고 해서 지주들의 역청산을 수수방관해선 안 되오. 경제건설을 잘 하려면 의연히 사회 치안질서를 잘 유지해야 하오. 옛날 지주들이거나 그 자식들의 반발과 파괴 행위, 그리고 새로 나타나는 사회주의 건설을 파괴하는 범죄자들을 계속 호되게 타격해야 하오. 대대 당지부 서기이자 치보 주임인 상순 동무는 새로운 형세에서 농촌 공작을 잘 하자면 어깨가 무거울 거요. 잘해 보오.” 상순은 금후 사업방향이 명확해지자 거뜬한 마음으로 마을로 돌아왔다. 미련은 상순이 외출했다가 돌아왔다는 소문을 듣자 곧추 찾아가 행악질을 했다. “난 당신들 공산당 때문에 이젠 아버지도 없고 남편도 없고 오빠도 없고 자식도 없다. 누굴 믿고 농사를 짓겠는가? 지주 모자를 벗겼으니 우리 가정의 억울한 사건도 해명하고 모자를 벗겨 달라. 우리 오빠는 당신과 함께 항일투쟁을 하지 않았는가?” 그러자 상순은 세 귀 눈으로 미련을 무섭게 쏘아보면서 똑똑히 말해주었다. “미련아, 네 아버지와 오빠가 이전에 항일유격대를 위해 쌀을 대준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후에 국민당 반동파들의 편에 서서 악독하게 우리 공산당을 공격했다. 너희 오빠 장충국은 삼도만 토비무리에 들어 우리 마을을 여러 차례 습격해 불을 지르고 살인했고 나중에 국민당 반동파들을 따라 영구 쪽으로 도망치다가 돌아왔다. 그는 항미원조 전쟁 때에도 국민당잔여세력과 결탁해 우리 새 중국을 전복하려고 미쳐 날뛰었다. 국민당 특무였지만 항일전쟁 때 공헌을 봐서 살려두고 개조시킨 건 다행이야.” “반우파투쟁과 ‘문화대혁명’시기 노간부들의 억울한 모자를 다 벗겨주었는데 우리 아버지와 오빠의 억울한 모자도 벗겨주면 안 되오? 옛날 조선에서 왔을 때 우리 집에서 황무지를 개간하게 준 은정을 봐서 도와주면 안 되오?” 허나 상순은 미련이 울면서 통사정을 들이대는 것을 단칼로 베 버렸다. “네 아버지와 오빠가 어찌 노간부들과 같단 말이냐? 절대 안 된다. 너의 오빠는 제대로 사상개조를 하지 않고 항상 뒤에서 공산당을 비방하고 모욕했다.” “정말 완고하구먼. 아직도 그래 계급투쟁을 기본 고리로 꽉 틀어쥐고 놓지 않을 예산이오?” “아니다. 절대 흥수처럼 계급투쟁만 하지 않을 거다. 허나 역사는 어쨌든 역사이다. 네 아버지와 오빠가 우리 인민과 당에 지은 죄는 의연히 역사에서 지울 수 없다. 우린 원수와 은인을 분명히 하고 절대 잊지 않는다.” 허나 미련은 상순의 말에 콧방귀를 픽 뀌며 주름이 가기 시작하는 퉁퉁한 낯에 어두운 그림자가 비꼈다. “봐라! 우린 너를 유린하고 너의 오빠를 죽인 흥수를 법에 의해 처단했다. 사회주의 법이 얼마나 공평하니? 더 떠들지 말고 이제부터 차례진 밭을 잘 다루면서 조용히 살아라.” 미련은 왕왕 대성통곡 치면서 돌아갔다. 상순은 도리머리를 흔들면서 함흥촌 토성 안의 촌 사무실로 찾아가 돌덩이를 들어 종을 댕, 댕, 댕 두드렸다. 이윽고 숱한 사원들이 토성 안 마당에 모였다. 상순은 사원들에게 이계삼 부서기에게서 들은 당의 농촌개혁 정신을 죽 전달하고 나서 나중에 이렇게 말했다. “조개덕의 대대 벽돌공장은 절대 허물지 못합니다. 이계삼 서기는 개체농사를 지을 뿐만 아니라 옛날의 집체경제도 발전시켜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개체경제와 집체경제, 국가 경제 등 여러가지 형식의 경제를 동시에 발전시키는 것이 바로 우리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 개혁의 길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계속 대대 벽돌공장을 허물지 않을 뿐만 아니라 더 크게 확대 건설해 더 많은 벽돌을 구워 내서 아직도 새 벽돌집에 들지 못한 사원들의 새 벽돌집을 다그쳐 건설해야 합니다. 그래서 몇 해 후에는 우리 마을이 몽땅 벽돌집에서 사는 번영 부강한 사회주의 새 농촌마을로 건설해야 합니다.” 그는 사원들을 둘러보면서 물었다. “어떻습니까? 벽돌공장을 허물어 돼지 굴을 짓겠습니까? 아니면 벽돌공장을 그대로 두고 벽돌을 구워내 새 벽돌집을 짓겠습니까?!” 사원들은 한참 이해득실을 따져보았다. “벽돌을 계속 구워 내 새 벽돌집을 짓는 게 낫소.” “장원하게 타산하면 벽돌공장을 계속 꾸리는 게 옳소!” 그리하여 함흥 촌에서는 집체로 벽돌공장을 계속 꾸려 새해에도 벽돌공장을 구워내 새 벽돌집에 들지 못한 함흥 촌 농민들에게 나눠주었다. 그리고 나머지 벽돌공장의 수입은 촌의 집체 수입으로 올리고 나중에 연말에 각 촌민소조에 나눠주기로 했다. 촌민소조에서는 그 돈을 공금으로 쓰거나 사원들에게 나눠줬다. 상순은 위의 지시대로 마음이 아픈 대로 양봉장과 인삼장, 과수원은 도맡아 경영하려는 농민들에게 팔아 촌 수입으로 올렸고 다시 각 촌민소조 농민들에게 나눠주었다. 뭐나 건설하기는 어려워도 허물어 나눠 가지기는 식은 죽 먹기였다. 허동원이 사원들을 데리고 우사간 지붕 위의 이영을 벗기고 지붕틀에 바 줄을 걸어 당기자 지붕틀이 번져졌다. 쿵-! 요란한 소리와 함께 우사 지붕이 무너졌다. 새뽀얀 먼지 속에서 사원들은 지붕 위에 얹었던 가시오며 대들보며 기둥을 몽땅 뽑아내 한 대도 남기지 않고 말끔히 나눠 집으로 챙겨갔다. 생산대 우사와 돼지굴은 기초돌마저 다 뽑아가 소똥 물과 돼지똥 물이 고인 휑뎅그렁한 빈 터만 남았다. 수십년 건설한 집체 우사와 돼지굴이 한순간에 무너지고 자취를 감추어버렸다. 인삼장과 양봉장은 누가 맡아하려는 사람이 없었다. 그리하여 부득불 인삼장도 허물어 나눠주고 인삼은 뿌리를 단위로 세여 사원들에게 평균으로 나눠주었다. 그것이 상순이 마지막으로 평균분배를 한 일이었다. 양봉장과 인삼장이 허물어져 각이 날아나자 칼산과 패용천산 사이 산등성이는 벌거숭이로 돼버렸다. 상순이 할아버지와 함께 함흥대대를 건설할 웅위로운 설계도를 그리며 건설한 양봉장과 인삼장, 과수원이 며칠 사이에 빈 털털이로 돼버렸다. 상순은 그 살벌한 정경을 보고 가슴이 아프다 못해 자기 각을 뜯어가는 것 같이 느껴졌다. (과수원 다락밭을 어떻게 만든 거냐?) 상순은 자기를 “유일생산력론”의 영향이 깊어 계급투쟁을 틀어쥐지 않고 농토건설만 한다고 물어먹는 흥수와 싸우면서 사원들을 동원해 패용천산 돌을 캐내 다락 밭을 쌓았던 것이다. 그런데 사원들에게 과수원을 나눠주니 그 다락 밭의 돌을 허물어 자기 집이 아니면 돼지 굴 기초를 쌓지 않겠는가? 지어 패용천산 절벽 위에 “모주석 만세!”라는 커다란 글씨를 새겨놓고 회칠을 한 돌까지 허물어 자기 집 토성을 쌓는 판이었다. 사원들은 천지개벽과도 같은 개혁의 봄바람에 따라 숱한 나무와 농구 등을 나눠 자기 집에 끌어다 쌓아놓으니 입귀가 귀밑까지 째질 지경이었다. 집집마다 웃음이 차 넘쳤다. 상순이 벽돌공장 하나를 남겨놓고 몽땅 나눠주자 사원들의 한결 같은 대환영을 받았다. “집체 재산을 나누든 허물든 사원들한테 줘서 기뻐하면 잘한 건가?” 상순이 중얼거릴 때었다. 미련이 또 찾아와 야단쳤다. “김 서기, 소서구 밭을 나한테 나눠 주오. 저 병진이랑 허동원이랑 노동력도 없다면서 나한테 밭을 주지 않으려고 하오. 좀 옛날 은정을 생각해서라도 나를 불쌍히 여겨주오.” 미련은 전에 비해 마구 행악질 하지 않고 이번에는 분을 참으며 통사정을 들이댔다. 상순은 한참 궁리하다가 미련을 보고 “너에게 밭을 주지 않으려고 하는 건 우리 나라 토지정책에 맞지 않는다. 어디에 호적이 있으면 어디에서 밭을 줘야 한다. 근심하지 말고 가라.”라고 했다. “감사하오. 이제야 오빠 같다. 인심을 내는바 하곤 나에게 소서구 밭을 주오. 옛날 우리 집에서 대대대손 물려받은 골짜기 아니고 뭐요?” 미련은 언덕이 없어 더 비비지 못했다. 상순은 미련을 쏘아보면서 “안 돼. 소서구 밭은 절대 너에게 줄 수 없어.”라고 했다. “왜?” 미련이 앙칼진 목소리로 따지고 들자 상순은 도끼눈을 부라리며 을러멨다. “건 우리 빈농의 자존심이야!” 미련은 상순을 흘겨보다가 저쪽에서 지춘실이 오는 것을 보고 입을 삐쭉하며 자리를 떠났다. 춘실은 허연 머리를 흩날리면서 패용천산 인삼장 자리까지 달려와 야단쳤다. “난 누구를 믿고 농사를 짓소? 나그네는 총살당했고 큰딸은 시집갔고 해월은 미쳐버렸으니. 사내 없이 늙은 노친이 어떻게 농사를 짓는단 말이오?” 상순은 허연 머리카락을 흩날리는 춘실이 불쌍해났다. 그는 모든 사원들 앞에서 뭐라고 말할 수 없어 한숨을 후 내쉬면서 마을로 터벅터벅 걸어 내려가면서 고민에 빠졌다. 춘실은 뒤따라 내려오면서 계속 상순을 욕지거리했다. “너 이놈, 내 남편을 총살 했으니 이젠 속이 시원하겠구나.” 상순은 산 아래를 내려 올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춘실은 태평강 가로 거의 올 때까지 계속 줄 욕을 퍼부었다. “나쁜 놈 새끼, 아직도 다 늙어빠진 나를 탐내느냐?” “흥수를 죽이면 내가 너한테 속할 거 같아?” 상순은 버드나무와 비술나무가 우거진 태평강 가에 사원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자 돌아서서 입귀에 게거품을 물고 욕설을 퍼붓는 춘실을 쏘아보았다. “전번에도 말했지만. 흥수는 살인죄를 져서 총살당해 마땅하오. 건 흥수가 자기 스스로 지은 죄 값을 치른 거요. 흥수가 아무리 나와 수십 년 동안 정치적수였지만 죽이려는 마음은 절대 없었소. 필경 흥수는 나를 따라 삼도만 토비숙청으로부터 해방전쟁과 항미원조 전쟁을 했고 또 사회주의 새 농촌 건설에 함께 분투해온 당원이 아니었소? 흥수가 어째 당원인데 부화 타락해 여색을 탐내고 그런 살인까지 했는지 이해되지 않소.” 춘실은 콧방귀를 뀌며 침마저 상순의 발 머리에 “퉤!” 뱉었다. “더러워서, 원, 독사 입에서도 그런 말이 나와?” 상순은 눈물을 줄줄 흘리는 춘실이 불쌍해났다. “그만하오. 흥수가 미련을 탐낸 데는 아내 책임도 있소. 아내가 남편을 잘 모셨더라면 왜 외간여자와 오입하려고 미쳐 날뛰었겠소? 미련에게서 들어서 다 아오. 흥수는 미련을 협박해 겁간해 애까지 설었다는 걸. 애를 초롱에 내다 얼어 죽게 했다는 걸 다 아오. 흥수는 두 번이나 죽어 마땅한 죄를 지었소.” 춘실은 정신이 아뜩해 버들 방축에 물앉아 엉덩방아를 찧었다. 상순은 말을 꺼낸 바 하고는 계속 했다. “해월을 충국에게 붙여놓은 것도 흥수에게 책임이 있겠지만 당신도 잘못이 있소. 아무리 암에 걸려 죽어도 어찌 지주 아들에게, 그것도 애비 같은 지주 아들놈에게 딸을 맡기오?” “주둥이를 닥치지 못해? 이 버들방천에서 옛날 나와 사랑을 속삭이던 일을 잊지 않았겠지? 어떻게 우리 집에 그렇게 할 수 있니? 넌 사람이 아니다. 악마야!” 상순은 그런 춘실과 맞대구를 할 생각도 없었다. 그 자리를 떠나가면서 그는 이런 말을 한마디 했다. “밭갈이랑 낟알싣기랑 힘들 때 내 도와 줄게. ” “고양이 쥐 생각을 작작 해라구. 내 입에 거미줄을 쳐도 네 신세에 농사를 지을 거 같니? 퉤!” 상순은 진심으로 알려 줬다. “정 이 마을에서 살기 싫으면 연길의 을준을 찾아가 사오. 을준은 당신의 아들이 아니고 뭐요? 백과부가 죽었다니 생모인데 왜 백준을 찾아가지 못하오? 아차, 손자가 이젠 덕돌만큼 크다면서? 손자 신세도 좀 보면 안되오?” “퉤!” 춘실은 상순의 뒤잔등에 대고 욕설을 퍼부었다. “너도 손자 생각을 다 하니? 문빈이 이제 대학을 졸업하면 법원에 들어갈 거야. 걔가 법관이 되는 날엔 네놈부터 총살하게 할테야.” “해해해. 연애해?” 이때 가슴을 다 드러내 놓은 해월이가 애를 안고 강변에 나오다가 버들방축에서 상순과 딱 마주쳤다. 그녀는 저쪽에 물앉아 우는 엄마를 보자 히히히 웃으며 지껄이었다. “어마니, 우리 엄마하고 여기서 또 연애했어? 히히, 헤헤, 이제 금방 들을나니 둘이 이전에 여기 버들방축에서 이렇게 했다면서.” 해월은 왼손가락을 동그랗게 하고 오른손 식지를 쑤셔 넣었다 뺐다 하는 시늉을 하면서 씨물씨물 웃었다. “헤헤헤. 젊어서 재미 좋았겠구나. 히히히. 나도 해보니 좋더라. 아들도 낳고.” 상순은 어이없어 자리를 뜨려고 했다. “이 놈아! 어디로 가?!” 뒤에서 바람이 휙 일었다. 상순이 돌아서려 할 때었다. 해월은 상순의 목을 끌어안고 마구 물어댔다. 상순은 반사적으로 손으로 해월을 떠밀었다. 그런데 풀어헤친 벌거숭이 젖가슴을 떠밀었다. “오, 만져?! 내 젖가슴을? 이 늙다리 색마야? 충국이 죽었으니 이젠 네놈이 우리 모녀간의 신랑이 돼라! 너네 김씨네 너무너무 좋아해.” 상순은 미친 해월을 보고 어이없어 저쪽에 물앉아 그때까지 꺼이꺼이 울고 있는 춘실을 보고 말했다. “빨리 얘를 말리오. 괜히 동네 망신 당하겠소. 내 정규상과 말해서 해월의 병을 치료해줄게.” 말을 마치자 상순은 바람결처럼 떠나가버렸다. 뒤에서는 미친 해월이 따라 가면서 추잡한 욕설을 마구 퍼붓고 춘실은 땅을 치며 섧게 울고 있었다. 저쪽에서 인삼뿌리를 담은 바구니를 들고 벌통을 멘 사원들이 웃음꽃을 피우면서 다가오고 있었다…              9. 사랑환상곡 구리바라 같은 보름달이 동산에서 두둥실 떠오르기 바쁘게 구름 속으로 살짝 들어가 버렸다가도 예쁜 얼굴을 내밀었다. 은빛 달빛을 밟으며 봉선은 덕돌과 함께 부르하통하 강변으로 나갔다. 수양버들이 휘늘어진 버드나무가지 잎사귀들 사이로 은빛 달빛이 부서져 내린다. 저쪽 강바닥에서 출렁이는 물속에서 은빛 달빛이 은파로 부서진다. 수천만개 금잔디 은잔디가 은빛 달빛이 부서지는 물속에서 뛰논다. 부르하통하 강물은 은 쟁반 같은 달과 구름을 싣고 동으로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봉선은 두 손을 가슴에 안고 있다가 걸음을 멈추며 돌아섰다. “이후에는 나를 찾지 마오.” “왜?” 밤중에 홍두깨 내밀듯 하는 봉선의 말에 덕돌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대학시험에 낙방했소. 대학생의 대상도 안 되는데 찾아와 뭘 하오?” “뭐라오? 낙방이라니?” “사실이오. 낙제했소.” 덕돌은 돌아서서 어깨를 들먹이는 봉선을 어떻게 위안했으면 좋을지 몰라 했다. 그는 봉선의 팔을 잡아 돌려 세웠다. “괜찮소. 올해 입학하지 못하면 새해에 다시 시험을 치면 되지.” 허나 봉선은 머리를 숙이면서 한숨을 호- 내쉬었다. “이젠 신심이 없소. 시험을 세번씩이나 쳐도 낙제요. 여자 나이 스물넷이라. 생각이 복잡해 그런지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소. 난 저를 보면 속이 괴롭기만 하오.” 그 말에 덕돌은 몸둘 바를 몰라 했다. “그럼 나 때문에 낙제했단 말이오? 그렇다면 미안하오.” “아니오. 절대 아니오. 전 나를 진심으로 작문도 가르쳤고 복습제강도 빌려주면서 도왔소. 허나 어쩐지 나에게 속하지 못할 저를 보면 괜히 속이 비길 데 없단 말이오.” 말끝을 흐리면서 봉선은 돌아서며 어깨를 들먹였다. 덕돌은 어쩐지 봉선이 가엾었다. (오늘 나를 보자고 해놓고 이런 말을 하려고?) “봉선이, 어떻게 해야 저를 위로할 수 있겠소?” 그는 봉선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봉선은 몸을 빼지 않고 오히려 돌아서며 몸을 기댔다. 순간 덕돌은 가슴이 뭉클해나며 전기에라도 맞은듯 아랫배가 찡해났다. “꼭 안아주오. 난 고통스럽소.” 덕돌이 봉선의 풍만한 온몸을 꼭 포옹해주었다. 달빛아래 봉선의 고운 쌍까풀눈에 고인 눈물이 반짝였다. 그녀는 천천히 보름달 같은 얼굴을 가까이 하더니 야들야들하고 물기어린 입술을 덕돌의 입술에 가져다 댔다. 덕돌은 온몸을 부르르 떨며 목석처럼 가만히 서 있었다. 그녀의 촉촉하고 따갑고 말랑말랑한 입술과 혀가 덕돌의 입술을 감쌌다. 덕돌도 반사적으로 봉선이 내민 혀를 살짝 포개며 감빨았다. 꿀맛처럼 달콤한 첫키스였다. (안 돼, 이래선 절대 안 돼. 대학교 학생기율을 어겨선 안 돼.) 순간 덕돌은 인차 봉선을 떠밀어내면서 몸을 돌렸다. “왜? 고중생과 싫지?” “아, 아니, 두렵소.” “졸장부.” “우리 동창생들이 마구 연애했다가 별 처벌을 다 받았소. 졸업장을 타지 못할까 봐 두렵소.” “별, 이리 오오.” 봉선은 덕돌을 얽어매려고 덕돌의 손을 마구 잡아 자기 가슴에 살짝 걷어 넣었다. “이래도 모르겠소. 내 마음을?” 뭉클 하는 젖가슴에 손이 닿는 순간 덕돌은 전기에라도 붙은듯이 덴겁해 손을 뺐다. 봉선의 대담한 행동에 겁났다. “이러지 말기요. 난 중학교 때 한 여동창생한테 쪽지를 썼다가 손 한번 쥐어 보지도 못하고 숱한 애들에게 놀림을 당했단 말이오.” 그제야 봉선은 더는 대담한 행동을 하지 않았다. “오, 알았소. 중학교 때 첫사랑 있구나. 괜히 끼어들어 미안하오.” 이때 저쪽에서 자전거 방울소리 달랑달랑 울리었다. 나뭇가지 사이에 비껴드는 달빛을 빌어 웬 사내가 자전거를 타고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그게 봉선이 아니냐?” “오빠구나.” “집으로 가자! 가시나새끼 밤중에 어디로 싸다녀?!” 그 사내는 달려와 자전거에서 내리자마자 고함쳤다. 뒤이어 봉선을 다짜고짜 자전거에 마구 태워가지고 달아났다. “오빠, 날 내려놓소. 할 말이 있소.” “무슨 말? 가자! 어디 집에 가서 혼나봐라!” 덕돌은 처량한 달빛아래 우두커니 서서 버들방축 저쪽으로 자전거에 앉아 강제로 끌려가는 봉선의 그림자를 멍해 바라보았다. 그는 봉선의 오빠가 원망스러웠다. (누가 자기 여동생한테 붙여놓고 저래? 흥!) 숙사로 돌아오면서 꿈만 같이 봉선과 포옹한 채 첫키스를 하던 정경을 돌이켜 보았다. 아직도 입술에 물기어린 야들야들한 입술과 혀가 와 닿더니 감빨던 감각이 남아 있었다. 별스레 가슴이 뭉클하고 높뛰고 싱숭생숭해났다. 그 후 기말 복습이 바쁜데다가 봉선의 오빠가 두려워 오래 동안 봉선을 만나지 못했다. 처음에는 봉선을 만나고 싶었지만 시간이 흐르자 무슨 부담을 덜어버린 것처럼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그래, 대학생인 내가 한 살 위인 처녀애를 따라 다녀?) 이렇게 마음을 정하자 덕돌은 봉선을 점차 잊어 가고 있었다. 그때 덕돌의 시야에 다시 송영자가 나타났다. 덕돌이 힘써 주선해 준데서 송영자는 예술학원 무용학부에 입학했던 것이다. 방학에 송영자는 덕돌을 불러 조용히 망아산으로 갔다. 울울창창한 소나무가 산기슭을 뒤덮고 있어 장관을 이루었다. 덕돌은 소나무 숲속을 거닐며 청신하고 시원한 산 공기를 한껏 들이켜더니 영자를 돌아보았다. “축하한다. 영자, 네가 예술학원에 붙은 걸.” 영자는 쌍쌍이 거니는 연인들의 눈을 피하면서 덕돌의 옆에 따라서며 조용히 인사했다. “감사해요. 오빠, 오빠가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오늘 내가 있겠어요? 은공을 어떻게 갚으면 좋을까요?” 덕돌은 이전에 비해 퍽 성숙된 영자를 돌아보며 빙긋이 웃었다. “이젠 정말 처녀티가 나는구나.” “오빠는 이제껏 나를 여자애로 보지 않았어요?” “그래. 난 너를 보면 항상 우리 학교 뒤에서 도라지에 양산도를 연습하던 철부지애를 보는 거 같다.” 송영자는 눈을 곱게 흘기면서 “나도 이젠 수무 살인데도. 참.” 하고 앵돌아졌다. “오, 그래, 그래. 넌 정말 예쁜 대학생 처녀애야.” 그제야 송영자는 해시시 웃으면서 덕돌을 따라 소나무 숲속으로 들어갔다. “오빠, 할 말이 있어요.” 덕돌은 소나무 숲속을 둘러보더니 심각한 표정을 짓는 영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뭘?” 영자는 생글방글 웃으면서 다가와 “눈을 감아요.”라고 했다. 덕돌은 눈을 슬며시 감았다. 부연 눈앞에 영자가 얼굴을 귀밑에 가까이 하더니 “뽁.” 하고 얼굴에 키스를 살짝 안기는 것이었다. “왜 이래?” 덕돌이 눈을 뜨며 영자의 담대한 행동에 놀랐다. 영자는 혀를 홀랑 내밀더니 모로 돌아서 귀밑까지 빨간 사과 알처럼 붉혔다. 덕돌은 그 빨간 사과같이 상기된 얼굴을 한입 떼먹고 싶은 심정을 억누를 길 없어 몸을 바르르 떨었다. 덕돌은 황소와도 같이 한숨을 후 내쉬며 저쪽으로 스적스적 걸어갔다. 속으로 이런 생각도 해보았다. (저 키스는 예술학원에 입학하게 도와준 은공에 보답하는 장려인가? 아니면 나를 사랑한다는 건가?) 오리무중에 빠진 덕돌은 소홀하게 전번에 봉선처럼 맞불을 붙이고 싶지 않았다. 속으로는 봉선에 비해 송영자가 마음에 들었다. (대학생인데다가 나이도 세살 지하지. 인물체격도 예술미가 다분한 무용수답게 더 예쁘지 않는가.) 덕돌은 아직도 소나무 껍질을 손가락으로 건드리며 서 있는 영자를 참빗질했다. 호리호리한 체격에 성숙미를 자랑하듯이 부푼 가슴, 외씨같이 걀쭉한 얼굴, 버들잎 눈썹, 오똑한 코에 자그마한 앵두입… 소나무 숲속에 서 있는 영자는 정말 한포기의 빨간 장미꽃이랄까, 아니, 아니야. 숲속에 핀 나리꽃 같았다. 진짜 사랑스러운 처녀였다. 허나 덕돌은 자기 속마음을 감추며 영자에게 다가가 능청을 떨었다. “야, 대학생처녀가 뭐야? 담대하게 사내에게 키스를 해?” 그제야 영자는 고개를 돌리며 반문했다. “문제 되는가요?” “감사의 인사를 잘 받았다.” “감사의 인사를? 정말 눈치도 도끼 등이구먼요.” “그래 장려가 아니고 뭐야?” 영자는 그 말에 대답은 하지 않고 고개를 숙이고 발끝으로 애꿎은 땅바닥의 소나무 잎만 살살 긁었다. (너 혹시 날 사랑해?) 덕돌은 속으로 의문부호가 연이어 떠올랐다. 영자는 얼굴을 붉히더니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저쪽 소나무 숲속으로 한들한들 달아났다. 덕돌은 그제야 영자를 보고 모든 것을 알아차렸다. 덕돌은 소나무 숲속으로 달아가 영자를 붙잡았다. “말해? 맞니?” “뭘 말인가요?” “날 사랑해?” “오빠를 사랑하면 안 돼요? 처녀가 사내대장부를 사랑하는데 무슨 죄가 있어?” 영자는 이렇게 솔직히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차마 처녀로서 멋쩍게 먼저 사랑을 고백할 수 없어 입을 꼭 다물어버렸다. “그래?” 덕돌은 따지다 말고 영자를 꼭 끌어안았다. “영자, 널 사랑해. 예쁘고 마음씨 착하고. 너라면 함께 죽으라고 해도 죽을 거 같아.” 영자는 덕돌의 가슴을 주먹으로 통통 치며 속삭였다. “왜 그렇게 도깨비처럼 말해요? 정치와 문학을 배운다는 대학생총각이. 호호호.” “미안, 예술적이 못돼 미안~” 덕돌과 영자는 점점 몸을 밀착해갔다. 다른 연인들이 쌍쌍이 지나가면서 보든 말든 관계없이 오래 오래 포옹하고 키스벼락이 쏟아졌다… (어, 별 수 없어. 학교 학생기율을 위반하지 말아야 하는데. 예쁜 처녀의 유혹과 매력은 어찌 할 수 없어.) 번마다 영자와 열연하고 돌아와 침실에 누워 열연정경을 돌이켜보면서 덕돌은 후회 절반, 행복감 절반이었다. 덕돌은 일요일이 돼 벼모내기를 하러 집으로 돌아갔다. 하긴 막내딸 성숙마저 경박호 부근의 상수촌에 시집간 후 상순과 명옥은 일손이 딸려 쩔쩔 매면서 고양이 발도 빌어다 쓸 지경이었다. 덕돌이 논으로 나갔을 때었다. (아니, 저게 누구야? 우리 논에 왜 집체호의 조영희가 벼 모를 꽂아?) 먼발치에서 덕돌을 발견한 조영희는 머리 수건을 더 내리 쓰고 부지런히 벼 모만 꽂았다. 덕돌은 아버지 눈치를 보면서 손으로 앞에서 벼 모를 꽂아나가는 조영희 잔등을 가리키며 의문스런 표정을 보냈다. 상순은 희죽이 웃기만 했다. 한쉼 벼모를 꽂고 쉴 때에야 덕돌은 영희에게 인사했다. “집체호 새애기, 진수해에 돌아가지 않고 여기 와서 우리 집 벼 모를 꽂소?” 빈정거리는 그 인사말에 영희는 진정어린 눈길로 덕돌을 바라보며 정색했다. “내 집체호에 내려와서 저네 집에 신세를 많이 졌소. 저네 아버지는 나를 맨발의사로 제발시켰고 전 나를 방송과 신문에 내주었소. 그래 농번 계절에 그 은혜에 조금이라도 보답하려고 그러오.” “좌우간 감사하오.” 덕돌은 영희와 나란히 앉아 콧노래를 부르며 한 가슴 가득히 긍지감을 느꼈다. 한 것은 이전에 그렇게 도고하던 공주 영희가 자기 옆에 순순한 양처럼 앉아 있지 않는가? 점심에 덕돌은 자기 집에까지 따라 들어와 점심을 먹는 영희를 집안에 두고 가만히 아버지와 물어보았다. “저 영희 어째 저럽니까? 동네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아버지는 집 쪽을 살피더니 덕돌의 곁에 다가와 조용히 알려주었다. “영희는 우리 집 며느리 되겠단다.” “예? 그게 무슨 소립니까? 안 될 소리.” 덕돌은 자기 귀를 의심할 정도로 믿어지지 않았다. “어떤 시내 처녀가 이런 농촌에 시집오자 하겠습니까? 당치도 않은 말을.” 덕돌이 도리머리를 흔들자 상순은 정색했다. “며칠 전에 영희가 우리 집에 찾아와 나를 보고 이러더라. ‘내 김 대장 며느리를 하면 안 됩니까?’라고 하더라. 내가 ‘무슨 농담을 하는가? 어떻게 농촌 시부모를 모시고 살겠소?’라고 했더니 뭐랬는지 아니?” “?” 덕돌은 부쩍 신경을 도사렸다. 말수가 적은 상순이었지만 자랑 삼아 얘기했다. “이래더라. ‘저를 믿으십시오. 농촌이라도 덕돌만 저와 부부로 연을 맺고 살겠다면 전 꼭 시부모를 효성을 다해 잘 모실 겁니다. 김 대장 네는 여기 돼지 굴을 크게 짓고 굴암돼지 서너 마리 길러 새끼치기를 시키면 시내보다 못지 않게 살 수 있습니다.’ 그 효성스런 말이 얼마나 고맙던지 모르겠다. 네 생각은 어떠냐?” 덕돌은 어정쩡해 서서 놀라운 낯색을 감추지 못했다. “영희와 직접 말해보렴.” 덕돌은 허구픈 웃음을 지었다. (정말 대학에 갈만 하긴 하다. 소몰이군 출신 농포가 정말 시내 선비들의 공주들과 살만큼 차이가 없이 됐는가? 도시와 농촌, 노동자와 농민 차별이 얼마나 컸는데. 대학마크를 가슴에 척 달자마자 숱한 처녀들이 광목에 닥사리처럼 매달린단 말이야. 내가 소몰이를 할 때 저 집체 호 일등 가는 공주들이 나를 왼눈으로 보기나 했던가? 나는 농포고 저 처녀들은 시내에서 한다하는 진수해 고중 선생님들의 귀여운 공주들이 아닌가?) 허나 덕돌은 마음 속에 송영자가 있었기에 한 살 위인 영희가 들어설 자리가 좁았다. 그제야 그는 자기가 마음속으로 영자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가를 알게 됐다. 영자에 대한 사랑의 뿌리가 가슴속에 마음속에 뇌리에 뼈 속에까지 얼기설기 뿌리가 깊게 내렸다는 것을 폐부로 느끼게 됐다. (물론 영희는 예쁘고 똑똑하고 수양이 있고 참하지. 저 처녀는 꼭 부모를 효성을 다해 모실 거야. 허나 3년 동안 대학시험을 쳤는데 계속 10여 점씩 모자라 가지 못한 낙제생이야. 아무렴 대학생인 내가 저만한 처녀를 얻지 못할 까봐 소홀히 평생 대상문제를 결정한단 말인가? 절대 안 돼. 천천히 봐야지.) 사람의 마음은 비길 데 없이 고약했다. 아니야. 사랑은 원래 자사자리하기 때문이리라. (소를 몰면서 앞길이 새까말 때 같으면 저런 영희가 매달리면 얼싸 좋다고 한품에 껴안고 사랑폭풍을 안겼을 것이 아닌가?) 그날 덕돌은 이렇게 착잡한 생각에 잠겨 영희와 함께 자기 집 벼 모를 꽂았다. 영희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수걱수걱 벼모만 꽂았다. 허나 그녀의 머리 속에서도 보이지 않는 번개가 번쩍이고 들리지 않는 우레가 울었다. 복잡한 생각이 번개 치듯 흐르고 있었다. 저녁에 영희가 차마 덕돌의 집에서 자기는 불편해 저녁 숟가락이 떨어지자 집체호에 돌아가겠다고 조용히 엉덩이를 들었다. 덕돌은 집체호로 떠나가는 영희의 뒤를 따라갔다. 검푸른 바깥하늘에는 아기별이 하나 둘 반짝이기 시작하고 동녘하늘에서는 반달이 가냘프게 떠 있었다. 덕돌은 차마 자기를 따라 자기 집에 벼 모까지 꽂아주러 찾아온 영희에게 실망을 안겨주지 못해 뭐라고 말했으면 좋을지 몰라 망설였다. 그래, 일루의 희망이라도 걸고 찾아온 그녀에게 나이 “어떻소” “어떻소” 해서 돌려보낸다면 타격이 얼마나 크겠는가? 상순이 벽돌공장을 꾸려 구워낸 벽돌과 기와로 지은 집체호는 이젠 상지민까지 마지막으로 상해로 떠나 가다나니 상해지식청년들이고 진수해 조선족지식청년들이고 다 떠나가고 텅텅 비어 있었다. 영희가 어두운 집체호 문 꼬리를 잡아당기며 덕돌을 돌아보는 순간이다. 덕돌은 황급히 입을 열었다. “아버지한테서 들었소. 제가 우리 아버지 며느리가 되면 안되는가고 한 말을.” “그래요? 집에 들어가 조용히 얘기하면 어떠오? 누가 보겠소.” 영희는 기대에 찬 나머지 달빛아래 문을 열어 재끼더니 덕돌을 돌아보며 가슴을 할랑거리고 있었다. 허나 덕돌은 몸을 돌렸다. “너무 갑작스런 일이라…” 그러자 영희는 갑자기 떨리는 목소리로 나직이 말했다. “덕돌이, 내 꽃 담배쌈지를 줄 때부터 저를 사랑했소. 아니, 동무가 내 사적을 방송과 신문에 내던 그때부터 동무에 대한 사랑의 씨앗이 움트기 시작했던 거요. 그래서 동무를 따라 대학에 가려고 이를 악물고 대학시험을 쳤소. 허나 뜻대로 되지 않는구먼. 비록 낙제생이지만 난 효성을 다해 저네 부모를 모시고 덕돌을 낭군으로 잘 받들어 기자로 되려는 뜻을 이루게 하려오.” 덕돌도 감동돼 가슴이 뭉클해났다. 따르는 여자가 많아도 사내대장부도 난감할 때가 있다는 것을 처음 느꼈다. 처녀들과의 연애 장에서 감정싸움을 하기보다, 아니, 사랑싸움을 하기보다 사내들과 한바탕 싸워 때리고 얻어맞고 터지는 것이 오히려 더 통쾌하고 쉬울 것 같았다. 피를 흘리는 싸움판에서는 영웅호걸이었으나 처녀애들 앞에서는 졸장부라는 말을 들어 싸다. 중학교 시절에 은숙한테 쪽지를 썼다가 경을 친 미열 때문인가? 아니었다. “수호전”이랑 읽으면서 량산박의 호한들은 여색을 멀리했으니까. 그것이 생활의 신조로 가슴 속에 깊숙이 자리 잡았던 것이다. 뒤에서 실망에 찬 눈길로 자기를 바래며 흐느껴 우는 듯한 영희를 두고 덕돌도 가슴 속으로 피눈물을 흘렸다… 어느 날, 향화가 외사촌언니들인 미숙과 미란 지어 화룡에서 온 최송죽까지 데리고 숙사에 찾아왔다. 덕돌은 여동생들을 보자 아주 기뻐 손에서 떼지 않던 소설책을 놓고 그 애들을 데리고 문일 네 집으로 갔다. 문일은 그때 장춘의과대학에 가고 집에는 여동생 영애 밖에 없었다. 덕돌은 다른 여동생들은 시내에서 자주 만났지만 멀리에서 온 송죽은 오랜만에 만난 지라 반갑게 손잡고 인사했다. “야, 널 아홉 살 때 화룡에 가서 보고는 오랜만에 처음 보는구나. 근형 큰아버지는 편안히 계시니?” “양? 편안할 새 있소?” “어째?” 덕돌은 적이 놀라며 물었다. 송죽은 납죽한 얼굴에 생글 웃음꽃을 피웠다. “아버지는 진수해에서 화룡에 들어간 후 쌀 고생을 얼마나 했다고 그러오? 그래서 토지정책이 바뀐 뒤에 화룡에서도 남쪽으로 한 20리 올라가 있는 남산골에 들어가 감자농사를 지어 만원호로 됐소. 텔레비전방송과 신문에도 굉장하게 났소. 어째 신문에서 보지 못했소?” 덕돌은 한숨을 후 내쉬었다. “그럼 시름 놨다. 난 또 앓는가 했다. 그래 만길 형님이랑 천길 형님이랑 다 잘 있니?” “양, 만길 오빠는 림업국에 들어가 림산작업소 소장을 하고 천길 오빠는 남산 촌 당 지부 서기를 하오.” “모두 잘 있다니 기쁘다. 어쩌다가 너희들이 몽땅 왔니?” 그제야 맏이 미숙이가 입을 열었다. “순옥 아재가 너한테 좋은 색시 감을 물색해두었단다.” “대환영이다. 난 여기 숙사에서 공부하지만 너희들이 있어 외롭지 않아. 난 여동생 부자야, 부자!” 여동생들은 덕돌을 둘러싸고 앉아 “우린 오빠를 제일 좋아해.”라고 하는가 하면 “사내대장부답고.”라고 했다. 지어 “미남자지!”라고 하며 웃고 떠들고 했다. 향화는 덕돌의 손을 잡고 말했다. “오빠, 우리 엄마하고 토론하고 오빠한테 좋은 색시 감을 소개해주려오. 생각이 있소?” 덕돌은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어떤 여자이기에?” 불쑥 한마디 내던지고 덕돌은 속으로 자기를 욕했다. (엉큼한 놈, 넌 마음속에 영자가 있잖니?) 허나 어떤 여자일가 하는 아득한 호기심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을 어찌 할 수 없었다. 다른 여동생들도 호기심이 나서 물었다. “어느 대학을 다니니?” 향화는 동문서답했다. “내 친구야. 키는 1미터 65.” “와 모델체격이구나.” 애들이 혀를 끌끌 찼다. “나이는?” 송죽이 묻자 향화는 “19세.”라고 말했다. “와~ 오빠보다 네 살이나 어리구나.” 미란이 혀를 날름 내둘렀다. 덕돌은 호기심이 부쩍 당겨 향화의 손을 잡으면서 “무슨 대학을 다녀?” 하고 물었다. “오빠도~ 시내에 남아 우리랑 함께 살겠으면 학벌을 따지지 말아야지.” 덕돌은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80년대 대학생이 대학문도 나오지 않은 여자와 약혼해?” 그러자 여동생들은 “와-” 하고 서로 마주쳐다보다가 모여들어 덕돌을 주먹으로 윽박질렀다. “그럼 대학 문에 들어가지 못한 우리 모두 사람값에 가지도 못해?” “말해봐!” “아니다. 아니!” 덕돌은 애들의 구박을 피하며 구들에서 굴러 구석에 숨어버렸다. “됐다. 너희들을 말하는 게 아니야. 대상 표준을 말하는 거지.” 그쯤 되자 향화는 앵돌아지면서 눈을 곱게 흘겼다. “싫으면 만나지 마오. 괜히 남의 친구를 괴롭히지 말고.” 향화가 그렇게 나오니 오히려 덕돌은 이모네 호의를 저버릴 수 없어 만나기로 했다. 그날 저녁에 덕돌은 마음에 내키지 않았지만 향화네 집으로 갔다. 견물생심이라고 텔레비전을 보면서 희미한 텔레비전 빛을 빌어 방안에서 옆에 앉은 훤칠한 10대 청순한 미모의 처녀애를 훔쳐보는 순간 덕돌은 마음이 끌리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이튿날 덕돌은 향화의 소개로 정식으로 영옥이라고 부르는 그 처녀애를 만났다. 한참 후에 그 처녀애를 데리고 향화네 집에서 나와 공원 수림 속으로 갔다. 한 식경이나 이 얘기 저 얘기 하다나니 영옥을 찬찬히 뜯어 볼 수 있었다. 전날 저녁 희미한 텔레비전 빛을 빌어 볼 때보다 어쩐지 못해 보였다. 훤칠한 체격은 꽤나 특출해 보였다. 그러나 어쩐지 향화보다는 퍽 못해 보였다. 붓긴 듯한 눈덕이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차라리 얇은 외까풀눈이면 퍽 매력이 있을 처녀애였다. 허나 덕돌은 원래 훤칠한 여자애들을 좋아하는지라 영옥을 쉽게 놔버리고 싶지 않았다. 숱한 오빠들 속에서 귀한 막내외동딸로 자란 영옥은 꽤나 서적을 쓰면서 애교를 꽤나 잘 부리었다. 꺽다리 같은 처녀애가 어리광을 부리는 것이 꽤나 우습고도 재미났다. 지어 귀엽다 못해 웃음이 터져나왔다. “덕돌아, 어때? 영옥이 마음에 들지?” 순옥 이모가 물었다. “좀 더 지내봐야겠소.” 후에 그는 영옥을 여러 번 만나보면서도 마음에 확 드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 포기하기도 아까운 모순된 심리상태로 해 꽤나 속을 태웠다. (에라, 모르겠다. 부모들이 자꾸 빨리 한살 위인 영희와 약혼하라고 하는데 한번 집에 데리고 가서 부모와 누나들이 보고 마음에 드는가 보라고 할 판이다. 아무렴, 대학생인 내가 어디 처녀애가 없어 한살 위인 영희와 살아?) 그가 영옥을 만나 “우리 집에 놀러 가보지 않겠니?” 하고 물었다. 그러자 나어린 영옥은 천진할 만치 제꺽 대답했다. 대소한간이라 어쩜 그렇게 날씨도 추웠을까? 그들은 시내에서 버스를 타고 진수해에서 내린 후 쌩쌩 불어치는 칼바람을 맞받아 함흥 촌으로 걸었다. 19년 동안 시내에서 곱게 자란 영옥은 처음 농촌 길을, 그것도 여우도 추워 눈물을 흘릴 맵짠 추위를 무릎 쓰고 시골길을 15리나 걷는다는 것은 난생 처음 걷는 고난의 행군 길이었다. 덕돌은 자기를 따라 온 천진한 영옥이 가엾어 그녀의 손을 꼭 쥐어 자기 외투 호주머니에 넣고 둬 시간 걸어서야 집에 이르렀다. 기별도 없이 불쑥 훤칠한 시내 처녀애를 데리고 들어서자 당연히 부모와 누나 네는 기뻐 어쩔 줄 몰라 했다. 어떤가 보라고 데리고 갔더니 부모와 둘째누나는 좋다 궂다 평판은 둘째고 첫걸음이라고 돈부터 쥐어 주었다. “엄마, 누나, 그러지 마오. 난 선을 보라고 데려왔소. 아직  아니오.”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덕돌은 차마 영옥의 앞에서 그렇게 말할 수도 없었다. (이 일을 어찌나?) 엄마는 아들이 약혼이나 다 한 것처럼 동네에 나가 며느리 감 자랑을 하고 친척들도 알려 사람을 웃겼다. 덕돌은 찾아오는 친척들을 인사 시키다가 영옥이 아주 어리 궂은 것을 느꼈다. 숱한 사람들 앞에서 다리를 쭉 뻗고 앉거나 벽에 기대 앉아 어른들이 와도 인사할 줄도 잘 몰랐다. 아마 처음 추운 날에 먼 시골길을 걷고나니 다리도 아프고 피곤했겠지만 덕돌의 눈앞에는 안타까웠다. 금방 더워나던 덕돌의 마음이 갑자기 냉각되는 감이 들었다. (키나 컸지? 셈도 들지 못한 애야. 대학문도 나오지 못했지. 어떻게 저런 녀자와 살아야 해? 송영자보다 차가 많아. 영자는 대학생인데다가 얼마나 예쁘고 여물었다고.) 마음을 정하자 덕돌은 점심을 먹기 바쁘게 영옥을 데리고 귀로에 올랐다. 돌아가는 길에는 그래도 내려가는 버스가 있어 다행이었다. 빨리 보내주고 싶은 덕돌의 마음이라도 아는듯이 버스는 빨리도 달려 두 시간이나 힘겹게 걸어서 온 시골길을 반시간도 안 돼 진수해에 도착해 그들을 부리어 놓았다. 덕돌은 영옥을 버스에 태워 보내주고 한숨을 후 내쉬었다. 시름을 놓았던 것이다. 집에 돌아와 부모와 누나에게 자기 속내를 말했다. 부모와 누나는 맥이 풀려 꾸짖었다. “마음에 들지도 않은 여자애를 왜 집에까지 데리고 왔니?‘ 부모의 말에 뒤이어 둘째누나 은숙도 나무랐다. “원 저런! 괜히 아까운 돈을 줬다. 올케가 됐나 해서 줬더니. 쯧쯧쯧. 이후엔 마음을 정하기 전엔 절대 여자애들을 데리고 오지 말라.” 그러나 덕돌은 마음에 딱 들지 않는 처녀애와 오래 뒤를 달고도 싶지 않았다. 시내 처녀애를 사다리로 삼아 시내에 기여들기 위해 마음에 들지도 않는 영옥과 가짜로 약혼하고 결혼까지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 아버지를 봐라. 할아버지가 ‘집안 혼사를 망치겠는가?!’고 으름장을 놓았다고, 부명을 어길 수 없어 마음에 들지도 않는 내 어머니와 결혼해 자기와 어머니를 해쳤지 뭐야? 난 결코 그렇게 마음에 없는 약혼, 사랑이 없는 결혼비극을 재연할 수 없다.) 이튿날 집을 떠나 시내에 돌아와 이모와 향화를 찾아가 영옥이가 마음에 들지 않기에 그만 두겠다고 했다. 물론 이모와 향화에게 영옥을 집에까지 데리고 갔다고 욕까지 실컷 먹었다. 덕돌은 숙사에 돌아와 누워서도 한 달 푼히 자기가 무슨 그런 허황한 짓을 했나 생각되자 허구픈 웃음만 나왔다. 이젠 향화네 일가를 볼 면목이 없어 놀러 가지도 못했다. 그럴수록 그는 영자가 그리웠고 영자를 보기 미안해 찾아가지도 못했다. 덕돌은 대상문제로 해 연 며칠, 아니 몇 달이고 고민에 잠겼다. 자기에게 대상에 대한 기준을 정해야 했다. (그래, 아무렴, 난 대학생이니까 같은 값에 분홍치마라고 우선 어데 내놔도 눈에 환할 정도로 예뻐야 해. 숱한 사람들 앞에 나서도 그래도 내 색시가 눈에 뜨이게 예쁘고 키도 1미터 60은 넘게 훤칠해야지. 물 찬 제비 같은 처녀, 그런 처녀여야 해. 그런 처녀로는 누가 제일 적합한가? 영옥? 아니야. 그 애는 키는 크고 살색도 하얀데 별스레 눈덕이 붓긴 것처럼 미워. 그럼 누가 예뻐? 영자야. 그 앤 정말 자연미에 예술미가 다분한 애야. 물론 영희도 영자보도 못하지 않지. 예쁘고 수양이 있고 효성도 있어 내 부모가 농촌 분이라고 나무라지는 않을 거야. 그런데 나이가 한 살 위란 말이야. 봉선도 영희와 마찬가지야. 영희보다 더 나은 점이라면 시내에 살아.) 덕돌은 침실에서 이불을 들쓰고 벽 쪽으로 돌아누워 제 좋은 생각을 계속 했다. (요즘, 졸업배치를 앞두고 우리 동창생들이 시내에 남으려고 시내 처녀애들과 부랴부랴 약혼하고 결혼하지 않아? 봉선과 약혼하면 부모도 잘 모시고 시내에 남아 기자로 되려는 내 꿈을 실현하기 쉬울 건데. 허나 아무리 이상과 전도가 중하기로서니 연상 여자를 색시로 맞아? 색시는 그래도 나이도 어리고 예쁘고 야드르르한 멋이 있어야지. 나이나 들면 아내가 얼마나 왜버린 풀과 같이 미워? 지금 같아선 봉선과 영희는 나이를 먹어도 예쁠 거 같긴 한데. 그래도 안 돼. 연상 여자와 약혼 할 수 없어. 순희는 어쩐다? 내 대학에 오게 되자 집에 찾아와서 만년필을 주면서 사랑의 신호를 보내지 않았는가. 그러나 대학시험을 연속 네번이나 쳤는데 다 락방했어. 한족곳 구태현에서 한어로 시험친 게 락방한 주요 원인었지. 순희는 녀동창생일뿐, 농촌 처녀와 결혼할 일은 없어. 여자의 치마폭에 매달려 전도를 개척하려는 건 너무나도 졸장부 처세술이야. 사내대장부로서 기자로 되려는 이상은 글재간으로 실현해야지 뭐야?) 그 쯤 랭혹하게 분석하고 마음이 정해지자 덕돌은 색시 감에 대한 표준이 훨씬 높아졌다. 그만큼 스스로 자기가 어엿하고 당당해지는 것을 새삼스레 느꼈다. (대학생처녀여야지. 대학생처녀에게 장가들어야지. 너무 예쁘고 수양 있는 처녀라면 중등전문학교 처녀라도 고려할 수는 있지. 부모를 모셔야 하기에 표준을 좀 낮출 수는 있어. 그래도 어찌 대학생이 고등중학생과 함께 살아? 우리 부모 집에 들어설 하나 밖에 없는 며느리는 꼭 효성이 지극하고 수양이 있어야 해. 승냥이 같은 여자를 들여오는 날엔 고생 속에서 한뉘 살아온 우리 부모 어떻게 며느리 눈치를 보면서 살겠어?) 표준을 정하고 보니 상대적으로 영자가 제일 합당해 보였다. (영자는 대학생이기에 문화도 있고 예술세포도 있는데다가 수양도 있어. 인물체격이 물 찬 제비같이 예쁘고 대나무처럼 훤칠한데다가 나이도 세 살이나 어리지 않는가?) 순간 덕돌은 영자를 보고 싶어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허나 찾아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간 너무나도 맺고 끊지 못하고 숱한 처녀애들과 돌아다닌 것이 마음에 걸리었다. 어느 날, 뜻밖에도 영자가 불쑥 찾아와 극장표 두 장을 내놓았다. “뭐냐?” “공연 표요. 내일 극장에서 내 처음 무대에 오르게 돼요. 꼭 와서 보세요.” 영자는 얼굴에 함박꽃 같이 환한 웃음꽃을 피우며 애교 섞인 눈길을 보냈다. “그래, 가지.” 덕돌은 영자를 숙사에서 멀리 떨어진 곳까지 배웅해주었다. 갈라질 때 덕돌은 피뜩 “표 두 장이나 해 뭘 해? 누구를 데리고 가겠니?”라고 했다. “친척을 데리고 가든지 하세요.” “그런다?” 덕돌은 영자를 붙잡고 뭔가 밤새도록 말하고 싶었다. 허나 내일 공연준비를 해야 한다는 말에 그만두었다. “누구를 데리고 간다?” 이튿날 궁리 끝에 덕돌은 해옥 아재를 데리고 극장으로 갔다. 해옥은 덕돌의 고모사촌누나였다. 허나 덕돌은 해옥을 아재라고 불렀다. 엄마의 친사촌여동생이기에 아재라고 부르는 것이 더욱 편했던 것이다. 황차 해옥 아재의 맏아들 문일은 덕돌과 근근이 두 살 지하였으니 말이다. 그날따라 해옥은 병원에 가지 않고 쉬고 있어 공연이 있다고 하니 덕돌과 함께 구경하러 갔다. 예술학원의 학생들이 공연을 하는데 꽤나 볼만했다. 은은한 도라지 음악에 맞춰 학생무용수들은 여러 가지 조명색등이 명멸하는 무대에 올라 한복을 날리며 학처럼 너울너울 춤을 추었다. 문화대혁명시기 본보기극 “홍등기”를 보기보다 음악과 무용이 우리 민족의 특성에 맞아 얼마나 가슴이 뭉클하게 즐거운지 몰랐다. 아재는 걸상에 앉아 곡에 맞춰 몸을 흐느적거리었다. 그러는 아재를 보고 덕돌도 속으로 아재를 기쁘게 해드린 것 같아 즐거웠다. 더구나 연분홍 진달래꽃을 품에 안은 영자가 군복치마저고리 바람으로 무대에 올라 항일유격대 역을 하며 “장백의 진달래” 노래를 부를 때 덕돌은 그 우아한 노래 소리에 도취돼 눈을 스르르 감고 감상했다. 그러다가도 눈을 뜨고 예쁜 영자의 모습을 바라보노라니 장차 예술무대에 올라 나래치는 저명한 가수이자 무용수의 모습을 방불히 보는 상 싶었다. 영자가 백조의 차림으로 서양악곡에 맞춰 발레를 추는 예쁜 모습을 보며 흥분된 덕돌은 저도 몰래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갈채를 보냈다. 옆에서 구경하던 해옥은 덕돌을 마구 끌어당겨 앉혔고 관중들은 무슨 일인가 해 덕돌을 쳐다보며 눈을 흘겼다… 그 뒤 웬 일인지 몇 달 동안 영자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덕돌은 예술학원으로 찾아갈까도 생각해보았지만 그만 두었다. 괜히 영자에게 연애한다는 악영향을 줄까봐 서였다. 어느 날, 반장 운호가 또 편지 한 장을 건넸다. “웬 처녀한테서 온 편지 같아.” 덕돌은 편지를 받아보고 영자의 편지라는 것을 대뜸 알아보았다. 그는 황급히 세면실로 가서 혼자 편지를 뜯어보았다. “오빠, 모든 것이 끝났어요…”   “아니, 끝이라니?” 덕돌은 세면실에 동창생들이 드나드는 것을 보고 편지를 호주머니에 넣어가지고 교수 청사 뒤 산 소나무 숲속에 갔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영자의 눈물로 얼룩진 편지를 꺼내들었다.   “너무 놀라지 말고 끝까지 읽어주세요.”   공연무대에 오른 뒤 어느 날, 밤늦어 영자가 무용실에서 무용연습을 할 때다. 진작부터 눈독을 들인 무용교원이 군침을 흘리면서 그녀의 어여쁜 모습을 게걸스레 훔쳐보았다. 어깨 너머로 늘어뜨린 함치르르한 머리카락, 외씨같이 걀쭉한 얼굴, 흑진주같이 까만 포도 눈, 가늘고 하얀 목, 착 들어붙은 무용적삼 밑에서 달랑거리는 봉긋한 젖가슴, 야드르르하고 백설 같은 허벅다리… (오- 실로 보기 드문 선녀야! 사람을 막 미치게 만드는데.) 무용교원은 하마터면 미의 여신 같은 은희의 육체미에 그만 소리치며 감탄할 번해 황급히 손으로 입을 막으며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는 마른 침을 꼴깍 삼키면서 점잖게 무용연습장에 들어섰다. “영자, 영자는 참 나리꽃처럼 예쁘오. 전도가 있어.” “선생님, 많이 가르쳐주세요.” 무용선생은 무용을 가르치는 척 하면서 영자의 허리를 안고 허벅다리를 매만지기도 하고 엉덩이를 툭툭 치기도 하며 성희롱을 했다. 정욕에 불타는 무용선생의 음충스러운 눈길은 영자의 몸에서 떨어질 줄 몰랐고 거친 숨소리가 점점 높아갔다. “영자, 진정한 예술은 성해방이요. 여자애들이 스승과 책임자에게 자기 성을 해방해야 예술의 전당에 들어갈 수 있소. 알만하오? 전 번에 누구 덕에 무대에 올랐는지 아오?” 무용선생은 은희를 품에 숨 막힐 듯이 꽉 껴안고 잔등을 매만지면서 감언리설로 꾀였다.       “영자는 전도가 창창하오. 모든 건 자기에게 달렸소. 예술의 무대에 올라 아름다움을 한껏 자랑하면서 이름을 날리자면 자기를 희생할 줄도 알아야 하오. 은공을 갚을 줄 알아야 하오.” 그 놈은 영자가 뿌리치는 것도 무릅쓰고 문을 절컥 닫아걸고 전등까지 꺼버렸다. 그는 무용선생의 본능으로 아주 날래게 승냥이가 양을 덮치듯이 영자를 붙잡아 깔아뭉갰다. 영자가 아무리 그 놈을 떠밀며 소리를 치려고 했지만 입마저 죄악의 마수에 틀어 막혔다. “소리쳐봐라! 소문나면 넌 전도가 끝장나.” 어둠 속에서 그녀의 귀전을 때리는 무서운 악마의 징글스런 소리. 영자는 몸부림치고 발버둥 치며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무용연습실에는 그 놈의 거친 숨소리와 영자의 가는 울음소리가 고요한 정적을 거칠게 톱질했다…   “오빠, 저를 잊으세요. 전 처녀의 모든 것을 악마에게 빼앗겼어요. 저는 오빠의 맑은 눈길을 대할 면목이 없어요. 어쩌면, 세상이 이런가요? 저를 다시 찾지 말아요. 저는 한 많은 망아산 기슭에서 영영 사라지겠어요.”   “야- 칼 탕을 쳐도 원수를 하지 못할 놈아, 누구냐? 대체 누구야?!” 덕돌은 주먹으로 소나무를 꽝꽝 치며 갈 범처럼 날뛰며 고함쳤다. 드디어 분노에 언 얼굴에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영자, 어디로 갔소? 남방으로 갔소? 한국으로 갔소? 어, 허, 헉, 헉, 헉.” 한참 후 정신을 차린 덕돌은 눈물로 희미한 눈앞에 방불히 보는 듯 했다, 웨딩드레스를 입은 영자가 소나무숲 속의 눈보라 속에서 생글방글 웃으며 두 팔을 벌리고 자기에게로 훨훨 날아오는 것을. 어디에선가 쓸쓸한 사랑환상곡이 은은히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173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 (113) 댓글:  조회:985  추천:0  2018-08-05
                                 6. 꽃향기 풍기는 봄날 대학교 청사 뒷동산에는 알락달락한 꽃송이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그윽한 향기를 풍기고 있었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발로 부리를 싹싹 다시다가도 짹짹 노래하면서 꽃향기 풍기는 봄날의 맑은 아침을 알렸다. 청춘의 정열로 가득한 교정에서는 숱한 대학생들이 아침 달리기도 하고 태극권도 하고 철봉도 하면서 신체단련을 하고 있었다. 덕돌은 대학에 온 후 이전에 상지민에게서 배운 일어를 토대로 해 이른 아침 식전이면 일어학습에 열을 올렸다. 그는 엉뚱하게도 개혁개방의 바람을 타고 일본으로 유학을 갈 푸른 꿈을 꾸고 있었다. (큰 일을 하려면 일본쯤에 유학을 가야 해. 주은래는 일본에 유학해 공부하고서도 그 먼 프랑스에까지 유학가지 않았는가? 나도 유학을 해서 세상 견식을 넓혀 인류를 위해 엉뚱한 일을 해야지.) 그런 웅대한 포부를 품고 덕돌은 항상 일찍이 일어나 일어책을 쥐고 뒷동산으로 뛰어가 중얼중얼 일어문장을 암송했다. 대학에 온 후 덕돌은 처음에는 집에서처럼 아침 식전이면 꼭 달리기를 연습했고 밤이면 정치학부의 학생답지 않게 교실에서 두툼한 소설책을 읽었다. 대학에 오니 도서실에 조선과 중국의 명소설뿐만 아니라 세계 명작가의 명작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어 빌어내다 마음껏 볼 수 있어 얼마나 좋은지 몰랐다. 소설을 읽노라면 어찌나 재미있는지 어떤 때에는 새벽 한시가 넘었는데도 침실의 불을 끄지 않고 계속 읽었다. 이튿날 공부 때문에 어떤 때에는 아쉬운 대로 소설을 놓고 잤다. 어떤 때에는 소설책을 들고 공원 나무 숲속에 들어가 읽다가 소낙비가 쏟아져 벽돌공장 피장을 말리는 초막 아래에 들어가 소설을 읽은 적도 있었다. “아, 어쩜 이렇게 형상적으로 썼을까?” 덕돌은 리기영의 3부작 장편소설 “두만강”이나 장편소설 “고향”과 “땅”을 보면서 연신 감탄했다. 그는 전문 필기장을 갖춰 놓고 형상적으로 된 구절은 베껴두고 암송할 지경이었다. 조선의 작가 천세봉의 장편소설 “석개울의 새 봄”은 언어가 어찌나 세련되고 묘사가 형상적인지 숱한 명구를 필기장에 베껴 넣었다. 연애소설이 큰일이야. 덕돌은 짜릿한 소설을 연애소설을 보면서 간혹 별스레 설레이고 아랫배가 짜릿해 날 때도 있었다. 사춘기의 소년처럼 예쁜 처녀와 황홀한 연애도 해보고 싶어졌다. 허나 또 중학교 시절처럼 연애편지 썼다가 혼날까봐 억지로 참았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지. 황차 대학교에선 연애를 하지 못한다고 학생 기율을 정해 놓지 않았는가!” 덕돌은 이렇게 중얼거리며 도리머리를 흔들면서 책을 읽으려고 애썼다. 그는 저녁 9시 쯤이면 교실에서 소설책을 읽다가 숙사에 내려와 1미터도 넘는 검을 들고 남의 눈을 피해 뒷동산 소나무 숲속에 가서 검술과 무술을 연마했다. 그런 덕돌이건만 동창 형님과 누나들이 오해할 때도 있었다. 한번은 초여름에 학교에서 전교 장거리 릴레이경기를 할 때다. 반장 허운호는 학부 학생회 주석을 하다나니 남녀선수 10명을 뽑아야 하는데 남자선수 둘이나 모자랐다. 한 침실에 있으면서도 입학초기인지라 덕돌이 달리기를 하지 못 하는가 아예 눈길도 돌리지 않았다. 그러다 정 사람이 없으니까 마지못해 덕돌을 보고 헛일 삼아 달리기를 하지 않겠는가고 물었다. 덕돌은 다른 동창들이 얼마나 달리는지 몰라 “내 될까?”하고 반문했다. “어쩌겠니? 사람이 없는데 네라도 달려야지.” 운호는 덕돌에게 별로 희망을 걸지 않았다. 그런데 일부 여동창생들은 뒤에서 “덕돌이 때문에 이번 경기에서 우리 학부가 질건 뻔해.”라고 하는가 하면 “뚱뚱보 어떻게 달린다고?”라고 했고 지어 “허 반장은 눈이 멀었소. 아무리 사람이 없어도 덕돌을 선수로 뽑다니?”라고 하기까지 했다. 압력을 받은 허운호는 덕돌의 달리기실력을 떠보려고 들었다. 어느 날 식전에 덕돌을 불러내 함께 달렸다. 허운호는 앞에서 달리고 덕돌은 뒤에서 달렸다. 허운호는 점점 가속을 하며 드문드문 덕돌이 따라 오는가 되돌아보군 했다. 덕돌은 놀랍게도 자기가 아무리 빨리 달려도 계속 뒤따라 달려오지 않겠는가. 숨이 차 헐떡거리는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마지막에 최고속도로 달려 보았다. 덕돌은 그때 속도를 내 운호 앞으로 박질러 나가더니 100미터나 떨어뜨려 놓았다. 운호는 깜짝 놀랐다. “너 정말 잘 달리는구나. 여자애들이 뭘 안다고 널 헐뜯어?” 경기를 하는 날이 돌아왔다. 허운호가 영솔한 학부의 제일 처음 선수가 9명 선수가운데서 여섯번째로 들어왔다. 덕돌이 차례가 될 때는 꼴찌로 들어왔다. 릴레이봉을 받아 쥔 덕돌은 처음에는 바람을 맞받아 천천히 달리면서 호흡을 조절했다. 여학생들 속에서는 시끌벅적거렸다. “에이고, 저렇게 굼뜨게 달려서야 어쩌니?” “우린 꼴찌야! 꼴찌!” 허나 덕돌은 50여 미터 달려 나가더니 속도를 가하기 시작했다. 그는 점점 속도를 내면서 하나, 둘 따라 잡았다. 그는 순풍을 타고 되돌아오면서 달릴 때는 속도를 더 내 셋이나 따라 잡았다. 마지막에 종점을 앞두고 그는 숱한 여학생들에게 본때를 보이려고 최고속도를 냈다. 쏜살같이 달리며 앞에 선 선수를 따라 잡았다. 그제야 여학생들은 환성을 올렸다. “야, 저 실한게 잘도 달린다야.” “진짜 선수야, 선수!” “그러게 사람은 지내봐야 알아.” “글쎄. 일곱이나 따라잡다니.” 그 후부터 운동대회를 하면 덕돌이 첫손 꼽히었다. 수류탄던지기나 표창던지기나 장거리달리기는 모두 덕돌의 항목이었다. 한번은 전 교 육상대회에서 키가 한뼘씩이나 더 큰 꺽다리선수 무리 속에 작달막한 덕돌이 나섰다. 딱 마치 오리 무리 속의 햇병아리 같았다. 꺽다리선수들은 덕돌한테 업신여기는 눈길을 보냈다. 그들은 수류탄을 축구장 중간선 부근에까지 뿌렸다. 덕돌이 차례가 되었다. 정치학부 학생들은 덕돌이 진다고 인정하고 아예 기대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글쎄 덕돌이 뿌린 수류탄이 씽 날아가더니 축구장 중간선을 넘어가 탕 떨어졌다. 결과 57미터로 나왔다. 운동장에서 환성이 터졌다. “야, 진짜 박격포다. 박격포!” 허나 덕돌은 대학에 와서 운동선수로 될 것이 아니라 하나라도 책을 더 많이 읽어야 한다고 인정했다. 요즘 들어 유학바람이 불어 덕돌도 일본유학을 목표로 정하고 일어공부에 열중했다. 그가 한창 소나무 숲에서 일어를 암송할 때다. 느닷없이 노래를 연습하는 발성소리가 소나무 숲과 꽃송이 숲 속에서 귀를 때리며 울려 퍼졌다. 아~아~아아~ 아~아~아~아 뒤이어 금방울 은방울 굴리는 듯한 청아한 노래 소리가 들려왔다. 도라지 도라지 도라지 심심산천의 백도라지 에헤이야 데이야 에헤이야 한두 뿌리만 캐 내여 대바구니에 찬 백도라지 덕돌은 아무리 귀를 틀어막고 일어를 암송하려고 해도 꾀꼴새 소리 같은 간드러진 노래 소리에 도저히 암송할 수 없었다. 덕돌은 일어책을 쥐고 노래 소리를 피해 소나무숲 속으로 달려 멀리 떠나갔다. 그래도 노래 소리가 어찌나 맑은 고음인지 근본 일어공부를 할 수 없었다. 부득불 덕돌은 일어책을 놓고 사람들의 눈을 피해 권술을 연습했다. 발길질과 주먹질이 동작이 어찌나 빠르고 변화가 많은지 땀이 목을 적실 지경이었다. “야 멋있게 춤을 춘다.” 덕돌이 머리를 돌리고 보니 웬 열일여덟 살 돼 보이는 처녀애가 보랏빛 라이라크 꽃 무덤 속에 서 있지 않겠는가. 덕돌은 무술을 그만 연습하고 책을 쥐고 자리를 떠나려고 했다. 중학교 때 은숙에게 편지를 썼다가 혼난 적이 있은 후부터 여자애들과 가까이 하지 않았다. 자칫 여자애들의 함정에 빠지거나 감정을 억제하지 못해 대학공부에 영향을 줄까봐 서였다. 어떻게 애나게 입학한 대학인데 여자애로 인해 퇴학을 맞겠는가? “대학생, 나에게 그 멋진 춤을 배워주지 않겠소?” 덕돌은 그 당돌한 소리에 몸이 오싹해났다. “이건 춤이 아니야. 여자애들이 무술을 배워 뭘 해?” 덕돌은 일어책을 쥐고 라이라크 꽃송이 속에 서있는 여자애를 피뜩 쳐다보았다. 한 미터 육십도 넘는 훤칠한 키에 꽤나 예쁘게 생긴 처녀애였다. “그래 뭔가요?” 어쩐지 덕돌은 걸음이 늦어졌다. “무술이다!” 덕돌은 황급히 떠나가 버렸다. 이튿날 아침 식전에는 덕돌은 그 처녀애를 만났던 라이라크 숲속으로 들어가지 않고 다른 곳에서 일어공부를 했다. 그런데 또 온 뒷동산을 울리면서 그 처녀애의 노래 소리가 울려 퍼지지 않겠는가! “아니, 정말 저 계집애 성가신데. 어디 공부를 하겠니?” 덕돌은 일어책으로 머리를 툭툭 치면서 발을 땅땅 굴렀다. “쫓아버려야지.” 덕돌은 노래연습을 하는 목소리가 울리는 라이라크 숲속으로 스적스적 다가갔다. 그 여자애가 한창 한손을 가슴에 얹고 한손으로 라이라크 가지를 쥐고 서서 목을 빼들고 노래연습을 하는 것이었다. “야, 여기서 노래를 부르지 말라!” “별, 내 여기서 노래연습을 하는데 무슨 상관인가요?” 눈을 곱게 흘기며 폭폭 쏘는듯한 모습이 퍽 매력적이었다. “여기서 노래연습을 하니 일어가 머리에 들어가지 않는다.” 그러자 그 처녀애는 몸을 탈며 입이 뾰로통해 종알거렸다. “별, 레닌은 장마당에서 다 책을 읽었다는데 노래 소리에 공부를 하지 못해요?” 덕돌은 그 예쁜 모습에 욕하려던 말을 다 잊었다. 우유 빛 얼굴, 버들잎 같은 눈썹, 어글어글한 눈, 오똑한 코와 진한 립스틱의 작은 입술은 그야말로 예뻤다. 한참 후에야 덕돌은 “너 여기서 노래 부르면 숱한 대학생들이 정신이 분산돼 공부하지 못해.”라고 대충 욕이라고 했다. “오빠, 내 노래 그렇게 듣기 싫어요? 그럼 난 끝장인데.” “끝장이라니? 무슨 말이냐?” 그 처녀애는 몸을 탈더니 어깨를 들먹이었다. “난 예술학원에 가서 성악가수로 돼야겠는데 대학생오빠마저 듣기 싫다니 합격하지 못할 거 뻔하지 않은가요?”  순간 덕돌은 그 처녀애가 불쌍했다. 덕돌의 매서운 눈길이 느슨히 풀린 것을 본 처녀애는 당돌한 요구를 들이댔다. "오빠, 날 좀 도와줄 수 없어요?”  “뭘 어떻게 돕는다고 그래?”       그 처녀애는 더 가까이 다가섰다. “혹시 예술학원에랑가무 단에랑 면목 아는 사람이 없어요? 좀 뒷문거래라도 해서 예술학원에 갔으면 좋겠는데.” 덕돌은 그날 일어공부는 한 줄도 하지 못하고 그녀자애와 청년들의 이상과 전도에 대해 담론했다. 덕돌의 얘기를 듣고 영자라고 부르는 그 처녀애는 눈앞이 환해지는 것 같았고 덕돌은 이상이 있고 포부가 큰 대학생이라는 것을 느꼈다. 그 후부터 영자는 남몰래 덕돌을 묻어다니면서 이것저것 못하는 말이 없었다. 덕돌은 중학교 때 여자애들의 손 한번 쥐어보지도 못하고 혼난 적이 있어 영자와 멀리 하려고 했다. 허나 어쩐지 그러면 그럴수록 저도 몰래 뒷동산에 올라가 노래연습을 하는 영자를 만나고 싶고 싱숭생숭해났다. 어쩐지 영자에게 매료된 나머지 그녀를 도와 유명한 가수로 만들고 싶었다. 덕돌은 궁리 끝에 마을에 하향했던 송선 아줌마가 떠올랐다. “옳지. 송선 아줌마를 찾아가야지. 듣는 말에 의하면 송선 아줌마는 가무단 단장으로 됐다던데. 그 아줌마를 찾아가면 영자 하나쯤은 예술학원에 붙여주지 못하겠는가!” 사실, 송선은 정성해 서기의 처남댁이라는 인연으로 해 남편과 안해가 모두 “현행반혁명”, “보황파”, “민족반역자”라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지역 반란파 두목인 황종연과 그 졸개 이일룡에게 갖은 능욕을 다 당했다. 지어 이일룡은 송선의 탄력 있는 몸이 탐나 이른바 죄를 심문하는 척 하면서 젖꼭지랑 쇠줄로 매 문 고리에 달아매 놓고 당기거나 고추 물을 입과 코 구멍에 부어 넣으면서 고문들 들이대다 못해 나중에는 옷을 쫄딱 벗기고 윤간까지 했다. 그러고도 모자라 송선에게 숱한 옷을 넣은 옷궤를 지워 길거리를 돌아다니면서 투쟁했다. 반란파들의 피해를 받아 송선은 심심산골에 자리 잡은 함흥대대에 와서 난생처음 소수레를 몰고 낟알까지 실어드리면서 별의별 개고생을 다 했다. 또 흥수와 황종연의 갖은 기시와 능욕을 이겨내면서 죽지 못해 살았다. 그때 양말까지 목에 걸고 숱한 사람들 앞에 허리를 굽히고 투쟁 받던 일로 해 그녀는 지금도 악몽을 꾸다가도 화들짝 놀라 일어나 몸서리를 칠 지경이었다. 허나 “4인무리”가 타도돼 천지개벽이 일어난 후에야 송선과 남편은 시내에 돌아와 한 집에서 살 수 있게 됐던 것이다. 남편 최죽남은 영어 교원이었는데 정성해 서기의 처남이라는 이유로 터무니없이 “민족반역자”, “매국역적”, “보황파”, “현행반혁명분자” 별의별 억울한 모자를 다 쓰고 13년 동안이나 감옥에 갇혀 모진 고생을 다했던 것이다. 상급에서는 황종연과 이일룡 일당을 일거에 제거하고 그들에 의해 억울한 모자를 썼던 공안과 문화 계통의 숱한 억울한 간부들을 해방시켰던 것이다. 정책 락실을 받아 최죽남은 영어와 일어 교수로 교단에 오르게 됐고 송선은 문공단 단장으로 중용됐다. 어느 날 오후, 덕돌은 송영자를 데리고 송선 아줌마네 문공단 사무실로 찾아갔다. 가무단 연습실마다 피아노연주에 맞춰 노래를 연습하거나 무용실에서는 아름다운 멜로디에 맞춰 무용수들이 춤을 연습하고 있었다. 복도에서 여기저기 기웃거리다가 덕돌은 단장실을 찾아내 노크했다. “들어오세요.” 덕돌을 보자 송선은 자리에서 일어나 마주나오면서 반겨 맞았다. “와, 멋지다, 김 대장네 대학생아들이 왔구나.” 송선은 다 큰 덕돌을 어린애처럼 포옹해 주며 머리를 손으로 쓰다듬어주었다. “얘야, 내 함흥대대에 내려갔을 때 너네 아버지 관심을 얼마나 받았다고 그러니?” 그녀는 옆에 여학생이 서 있는 것을 보고 “어서 앉아라. 이 학생은 누구냐?”라고 하며 덕돌에게 물었다. 덕돌은 제꺽 “내 이모사촌 여동생이오.”라고 하며 영자를 되돌아보며 “어서 인사해라. 가무단 김단장이다.”라고 하며 인사를 시켰다. 영자는 허리를 굽혔다 펴며 생글 웃으면서 “김단장님, 안녕하십니까?”라고 했다. 송선은 영자의 아래 위를 훑어보더니 “덕돌아, 너 여동생 정말 예쁘구나. 무용수를 했으면 좋겠다.”라고 했다. 덕돌은 제꺽 임기응변했다. “김단장님, 그러잖아도 그 일로 해 찾아왔습니다. 얘를 어떻게 예술학원에 입학시킬 수 없겠습니까? 좀 도와주십시오.” 송선은 영자의 아래 위를 재차 훑어보았다. “글쎄 무용이라면 도와줄 수 있겠는데.. 이 학생은 뭘 지향하오?” 영자는 혀를 홀랑 내밀었다가 인차 입안에 숨기더니 대답했다. “가수를 지향해요.” “음, 그래? 노래를 불러보오.” 송선은 송영자가 부르는 간드러진 도라지를 들으면서 흥이 나서 몸을 흐느적거렸다. 송영자가 맑은 목청으로 부르는 노래가 끝나자 박수를 쳤다. “참 훌륭한 가수감이구먼. 예술학원에 추천해보지.” 송영자는 너무 기뻐 송선과 덕돌을 번갈아보면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 후부터 영자는 송선의 소개로 한 사영 예술학원의 유명한 가수 출신 성악교수 허송철을 모시고 노래공부를 하게 됐다. 또 송선의 제의에 따라 송선의 직접적인 가르침 밑에 무용도 학습했다. 어떤 때 송선이 가무단을 이끌고 외지로 공연을 나가면 대신 송선이 소개해준 무용 강사 마용봉에게서 무용의 기초동작부터 배웠다. 송영자는 덕돌에게 한없이 감사했다. 영자는 눈앞이 환해졌다. 전도가 창창해졌다. 당장 가수나 무용수가 되는 꿈을 꿔 보기도 했다. 덕돌은 자기의 미약한 힘이나마 한 여자애의 전도를 개척하는데 도움을 준 것만 같아 가슴이 뿌듯해났다. 어느 날, 덕돌은 해옥 아재네 아들 문일의 대학시험복습제강을 얻어다 주려고 찾아갔다. 헌데 널판장자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자물쇠가 잠겨 있었다. 별수 없어 덕돌은 “전쟁과 평화”란 소설을 보면서 기다렸다. 그때 자전거 방울소리 울리더니 웬 30대 사내가 오더니 덕돌을 보고 “누굴 찾소?”라고 물었다. 덕돌은 찾아온 사연을 말했다. "최의사 언제 오겠소. 우리 집에 들어가 기다리오." 덕돌은 그 사내를 따라 윗집에 들어갔다. 윗방에서 파란 게 내복을 입은 예쁜 쌍까풀 처녀애가 밥상에 마주 앉아 공부를 하고 있었다. 그녀는 덕돌을 쌍까풀눈으로 쳐다보다 살며시 내리깔며 책을 내려다보는 것이었다. 사내는 “최 의사네 어떻게 되는 친척이오?”하고 물었다. “5촌 아재입니다.” “고향은 어디요?” “진수해입니다.” 그러자 처녀애는 덕돌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으면서 책장을 번지는 것이었다. “그래 대학복습을 하오? 어째 복습제강을 가지고 다니오?” “아니, 난 대학생입니다. 문일한테 복습제강을 주자고 얻었습니다.” “오, 그래?” 그녀도 덕돌이 대학생이란 말에 머리를 들고 맑은 눈길을 보냈다. 그때 그녀의 보름달 같은 얼굴은 아주 예뻤다. 송영자의 걀죽한 얼굴보다 보름달 같은 동그스름한 얼굴이 짧은 쌍태 머리와 어울려 옛날 전통조선족 여인을 보는 상 싶게 예뻤다. “내 여동생이오. 후에 봉선의 대학입학복습도 배워주오.” 덕돌은 황망히 번대머리오빠게에 “예…”라고 하며 처녀애를 흘금 건너다보았다. 봉선은 함박꽃처럼 쌍겹눈으로 덕돌을 보며 생글방글 웃었다. “배워주세요. 어떻게 복습했으면 좋겠는지 통 모르겠소.” “글쎄 후에 시간이 나지면 오후쯤에 다시 찾아올게.” 덕돌은 시간도 퍼그나 흐른 것 같아 황망히 그 집에서 나왔다. (그 처녀애가 참 예쁘구나.) 그날 덕돌은 문일한테 복습제강을 건네주고 집으로 돌아오면서도 봉선이란 처녀애가 눈앞에 삼삼거렸다. 며칠 후 오후에 덕돌은 저도 몰래 작문을 한편 지어가지고 봉선을 찾아갔다. 봉선은 책을 내려다보다가 아주 반갑게 맞아주었다. “오, 문일의 형님이 왔구먼. 신용이 있구먼요.” 덕돌은 정성들여 쓴 작문을 내놓았다. “잘 쓰지 못했는데 참고하오.” 봉선은  작문을 쭉 내리 읽어보았다. “야, 정말 글을 잘 쓰는구먼요. 난 언제 이렇게 글을 쓸까?” “자꾸 써보면 되오.” 봉선은 작문지로 발갛게 상기된 얼굴을 가리며 덕돌을 보고 “부타가기오.  잘 배워주오.”라고 했다. 봉선은 식탁에서 사탕을 자그마한 대바구니에 담아 가져왔다. “문일의 형님이라는 걸 보면 오빠라고 불러야 되잖겠어요?” “아니, 난 이제 21세 밖에 안 되오.” “어마나. 이걸 어쩌나 .내보다 한 살 지하구먼요.” “그럼 내가 누나라고 불러야 하오?” “아니, 아니, 나이와 무슨 관계예요?” 봉선이 서운함을 금치 못하며 하는 말에 덕돌도 돌려댔다. “그래, 나이 지하라도 봉선의 대학입시복습을 가르칠만 한지?” “80년대 대학생, 얼마나 멋져요?” 봉선은 덕돌의 왼쪽 가슴에 단 대학 마크를 경모의 눈길로 쳐다보면서 한숨을 호 내쉬었다. “저도 복습을 잘해 대학에 붙으면 되지.” “언제 붙겠어요? 공부가 통 머리에 들어가지 않아요.” 그날 덕돌과 봉선은 대학복습에서 작문으로부터 이상과 전도 등에 대해 해 넘어갈 때까지 이야기를 나누고 나서 갈라지기 아쉬워하면서 갈라졌다. “작문을 한편 써놓소. 후에 내 와서 읽어보고 또 가르쳐 줄게.” “그래요. 써보지. 대학생 앞에서 손이 떨려 어디 쓰겠소?” “잘 쓰리라고 믿소.” “가정교사한테 한 턱 내야겠소.” 후에 덕돌은 시간을 내서 저녁에 봉선을 찾아갔다. 봉선은 아주 반겨 맞았다. “오빠는 어데 갔소?” “자리를 피했소.” 그런데 옆에는 봉선의 여자 친구 하나 앉아 있었다. 그리하여 덕돌은 점잖게 앉아 봉선이 또박또박 쓴 작문을 읽고 줄을 쪽쪽 그으면서 수개해주었다. 그러고 나서 작문을 잘 지으려면 평소에 인상 깊은 일들로 일기를 써야 한다고 했다. 봉선은 실용적인 물음을 제기했다. “대학시험에 제목을 떠나지 않자면 어떻게 하면 좋아요? 숱한 작문을 써보면서 준비했는데 그 제목이 나오지 않으면 대사인데요.” 덕돌은 제꺽 대답해주었다. “준비한 작문과 제목이 다르게 나오면 우선 그 제목과 맞는 내용의 작문을 골라 써야 하오. 다른 방법은 내용을 봐서 제목에 맞게 서두와 결말을 제목과 비슷한 말로 바꿔 둘러맞춰 써넣어야 하오.” “오, 그래. 그런 방법을 쓰면 되겠어. 얼마나 근심했는지 몰라요. 대학생선생이 있긴 있어야 되겠다.” 봉선은 어린애처럼 기뻐했다. 봉선은 친구한테 뭐라고 귀속말을 하더니 “내 오늘 감사해 대접을 해야겠소.”라고 하며 덕돌을 보고 가자고 했다. 덕돌은 술이나 한잔 얻어먹겠다고 어깨가 으쓱해 따라나섰다. 쌍태머리를 뒤로 넘기며 사뿐사뿐 걸어가는 봉선의 뒤를 따라가며 물었다. “어째 친구는 데리고 가지 않소?” “음, 옆에 사람 두고 어찌 상대접을 하겠소?” “?” 덕돌은 의문스러워 하면서 뒤따라갔다. 봉선은 달빛이 깔린 소학교 마당으로 들어갔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더니 덕돌 앞에 마주 섰다. “대학생이노라고 날 업신여길 테요?” 밤중에 홍두깨라더니 봉선은 불쑥 이런 말을 꺼냈다. “아니, 무슨 말이오? 난 아무 틀도 차린 게 없는데. 오해하지 마오.” 봉선은 덕돌의 손을 잡고 조용히 속삭였다. “내가 만약 덕돌을 좋아한다면 어쩌겠소?” 덕돌은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서며 손을 풀어냈다. “이러지 마오. 난 한창 대학공부를 하는 학생이란 말이오. 학교 규정에 대학생은 연애를 하지 못한다고 했소.” “어우, 천진한 어린애 같다. 속은 엉큼하면서도.” “무슨 소리요? 난 그저 제 오빠 부탁대로 절 도와줄 뿐이오.” “거짓말, 눈길이 날 좋아한다는 걸 말하던데요.” 봉선은 뜨거운 입김이 얼굴에 풍길 지경으로 가까이 다가서 똑바로 쳐다보았다. 달빛을 빌어서도 그 또렷한 쌍까풀눈에 은근한 정이 담뿍 담겨 반짝이는 것이 보일 지경이었다. “이러지 마오. 전 내보다 한 살 이상이오.” “나이가 그렇게 대단해요? 애정에 나이가 무슨 대사인가요?” “아, 이러지 마오.” “전 남자요? 왜 이렇게 졸장부처럼 놀아요? 저를 본 후부터 대학복습이 머리에 들어가지 않는단 말이오.” 덕돌은 다가드는 봉선을 밀어냈다. “그럼 다시 오지 않을게.” 봉선은 돌아서며 어깨를 들먹였다. “남자들이란 이렇단 말이야. 정인군자 상을 하다가도 책임지지 않고 달아날 궁리부터 한단 말이야. 흑, 흑, 흑.” 덕돌도 필경은 사내인지라 그런 봉선을 위로하지 않고 쥐구멍을 찾아 달아날 수는 없었다. “봉선이, 나를 양해하오. 저나 내나 전도를 개척할 때가 아니오. 복습을 잘해 대학에 붙소. 그때 다시 보기요. 지금은 이런 일로 해 전도를 그르칠 순 없소. 나도 대학공부를 해야 하고.” 그쯤 해서 덕돌은 그날 저녁에 몸에 열이 올라 울고불고 하는 봉선을 집에 보냈다. 침실에 돌아와서도 봉선이가 꽤나 부담스러웠다. (예쁘긴 예쁜데. 대학생도 아니고 나이도 한 살 위란 말이야.) 온 저녁 아무 책도 보지 못하고 눈앞에 삼삼거리는 봉선을 두고 궁리하다가 저도 몰래 잠이 들어버렸다. 후에 덕돌은 봉선을 찾지 않고 대신 문일을 찾아가 작문지도를 해주고 풀기 어려워하는 수학문제를 함께 풀기도 했다. 기말복습도 힘겨운 것이 있었지만 봉선을 괜히 책임지지 못하겠으면서도 들뜨게 해 대학입학시험복습에 영향을 줄까봐 두려웠던 것이다. (봉선이, 제발 정신을 집중해 복습을 잘해 대학에 입학하오.) 그것이 봉손에 대한 덕돌의 충심으로 되는 축원이었다.                           7.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     눈보라가 쌩쌩 휘몰아치는 어느 일요일 날 아침, 덕돌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스케이트를 타러 대학교 빙장으로 올라가려고 했다. 매화꽃이 핀듯이 눈꽃이 매달린 나무들이 둘러선 빙장에서 덕돌과 영화가 스케이트를 탄다고 하면 쌍제비가 쌍쌍이 나래치는 것 같다고 혀를 끌끌 찰 지경이었다. 한 살 위인 영화의 탄력적인 몸매는 뒤에서 따라가며 스케이트를 타는 덕돌의 마음을 싱숭생숭하게 만들었다. “얘, 함흥대대에서 편지가 왔다.” 덕돌이 스케이트를 둘러메고 침실 문을 열고 나가려고 할 때 반장 허운호가 편지 한통을 건네주었다. 덕돌이 받아보니 넷째누나 은자한테서 온 편지였다. “어쩌다 편지를 다 보내왔어?” 넷째누나는 덕돌이 어려서부터 따르던 누나였다. 어려서 다른 누나는 몰라도 넷째누나만은 부모에게 쫓겨난 것을 계속 “넷째누나 없어 재미없다.”라고 떼질 쓰며 불러들이던 덕돌이였다. 털모자도 없어 항상 넷째누나가 하학할 때면 복도에 나와서 머리에 수건을 꽁꽁 동여주군 했다. 덕돌이 대학교에 입학한 후 넷째누나와 매형 허학순은 학교 숙사에까지 찾아와서 생일을 축하해주었다. 그때 큰 매형도 한 달 로임 54원에서 15원을 가지고 몇 번이고 숙사에까지 찾아와 축하해주었다. 그런데 편지를 읽어보니 깜짝 놀랄 사연이 담겨 있었다. “…시삼촌과 시고모가 시아버지 생일에 왔었다. 그들은 내가 결혼한 지 5년이나 됐는데 애를 낳지 못한다고 양천 허 씨 가문의 대를 끊는다고 나를 욕하고 때렸다. 나는 지금 시삼촌에게 쫓기어 다니던 악몽을 꾸면서 자다가도 놀라 화닥닥 깨나 일어나곤 한다. 난 지금 이혼할 예산인데 네가 와서 시비를 갈라 달라. 난 시집갈 때 가져간 옷궤에 입던 옷을 수레에 싣고 본 가집에 와 있다. 내 무슨 죄를 졌다고 이런 봉변을 당했는지 모르겠다…” “누가 감히 누나를 때려?!” 덕돌은 스케이트를 숙사에 팽개치고 그 길로 시퍼런 검을 빼들고 곧추 함흥대대로 뛰어갔다. 눈보라 치는 날이어서 칼바람이 언 얼굴을 갉아 가는 것 같았다. 허나 덕돌은 분김에 추운 줄도 모르고 달음박질했다. 거의 40 리를 닫다가도 몇 발자국 걷고 걷다가도 달려갔다. (매형은 뭘 하는가? 여편네도 보호하지 못하다니. 흥! 머저리야!) 넷째누나가 아래 마을 계수동에 있는 허학순한테 시집 갈 때에도 덕돌은 상빈으로 갔었다. 허씨 집에 가서 상대접을 받았다. 허씨 일가에는 사내대장부 같은 싸움꾼과 씨름꾼들이 여럿이 있어 덕돌은 사돈이란 인맥으로 기반을 든든히 닦을 수 있었다. 한번은 학순의 조카 허민선이 진수해 영화관 앞에서 숱한 한족사내들에게 맞아 대고 있었다. 덕돌이 달려가 보니 한위신의 형 한위광이 주먹질을 하고 있었다. 옆에서 구경하던 조선족 청년들은 민선이 맞는 것을 보면서도 누구도 감히 나서 말리지 못했다. “형님, 때리지 마오!” 그때 덕돌이 나서 한위광의 팔을 잡으면서 말렸다. 덕돌을 피뜩 돌아보던 한위광은 휘두르던 주먹을 내렸다. “아는 새끼야? 꽤나 우쭐거린다. 좀 버릇을 가르쳐주자고 그래.” “형님, 친척 형님이오. 때리지 마오.” 한위광은 민선을 쏘아보며 “덕돌의 낯을 봐서 놔둔다. 다신 진수해에 와서 우쭐거리지 마라.”라고 했다. 그제야 한다하는 싸움꾼이자 씨름꾼인 민선을 비롯한 허씨 일가는 덕돌이 진수해 시내에서도 한다하는 싸움꾼과 휩쓸려 다닌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됐다. “허송근이 감히 내 누나를 때려?!” 덕돌은 생각할수록 부아통이 터졌다. “개산툰진에서 교원질을 한다는 사람이 조카며느리한테 손을 대? 네놈이 주먹이 얼마나 세기에 여자한테 손을 대?” 덕돌은 당장 개산툰으로 달려가 단매에 허송근을 때려눕히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웠다. 그가 씩씩거리며 달리다다니 어느 결에 계수동에 이르렀다. (나는 대학생이기에 절대 허씨네처럼 손을 대지 않겠다. 먼저 법률이란 무기로 넷째누나의 한을 풀어드리고 재산문제도 해결해야지.) 그는 울컥 치미는 밸을 꾹 참으면서 검을 집 울타리 바자 밑에 세워놓고 매형네 문을 꽝꽝 두드렸다. “누구요?” “내오!” 덕돌은 집문을 뚝 떼고 성큼 들어가 갖출 예의를 다 갖추고 점잖게 구들에 올라섰다. 학순과 부모들은 로지심 같은 덕돌이 들어서자 질겁해 어정쩡해 서있었다. “모두 서서 뭘 하오? 지나가던 나그네 왔는데 술상이나 내놓소.” 학순은 황급히 서둘러 식탁을 들춰 술상을 챙겨놓았다. 덕돌은 올방자를 치고 앉아 학순을 보고 “술을 붓소.”라고 했다. 학순이 술을 붓는데 술병이 덜덜 술잔을 쪼았다. “허. 이 사람, 술병이 부셔져 유리가루 술잔에 들어가겠소.” 덕돌은 아예 큰 사발에 술을 쿨럭쿨럭 부어 단모금에 60도짜리 술을 밑굽을 내고 밥상에 탕 메쳤다. “말해라! 이 새끼야. 삼촌과 함께 여편네를 때려 쫓아내고서도 발편잠을 자?!” 학순은 무릎을 꿇고 빌었다. “처남, 내 때린 게 아니다. 삼촌이 때렸다.” “그래, 당신은 제 여편네도 보호하지 못하는가? 삼촌을 말리지 못해? 그래 네 삼촌 허송근이 그렇게 주먹이 세니?! 내 어디 그 놈부터 한번 봐야겠구나!” 사돈영감이 뭐라고 끼어드는 것을 덕돌은 눈을 부라리면서 쏘아부쳤다. “개 소릴 작작 쳐! 너희들, 내 누나를 감히 때리고 쫓아내? 애를 낳지 못한 게 우리 누나 혼자 탓인가?” 덕돌은 학순을 쏘아보았다. “너 고자 때문이지.” 그래도 학순은 죄를 지었기에 아무 대꾸도 못했다. “내 마음이 독하게 변하기 전에 똑똑히 서둘러라. 울 누나 나가면서 가지지 못한 재산과 치료비로 500원을 당장 내놔! 어디 주먹맛을 보겠는가? 아니면 누나 피 값을 물 거야?!” 학순은 불길이 이글거리는 덕돌의 눈길을 감히 쳐다보지도 못하고 온몸을 사시나무 떨듯 부들부들 떨었다. 덕돌은 혹 참지 못해 주먹이라도 휘둘러 실수할까봐 훌쩍 일어나 자리를 떴다. 집으로 올라와 보니 넷째누나 은자는 마구 덕돌을 붙들고 원통해 울었다. 그에게서 들으니 시삼촌 허송근과 시고모는 음력설을 쇠러 와서 은자가 애를 낳지 못한다고 하면서 몰아주었다. 은자가 한마디 대꾸도 하지 않고 자리를 뜨자 그자들은 시동생 집에까지 쫓아와 때렸다. 은자는 바지마저 마구 벗긴 채 내복바람에 비명을 지르며 한마을에서 시집온 황인숙의 집에까지 달아났다. 허송근은 황인숙이네 집에까지 쫓아왔다. 황인숙은 은자를 고방으로 해 뒤문으로 빠져 달아나게 했다. 허송근이 고방에까지 쫓아 들어오자 은자는 뒤울안으로 해 황급히 개굴 안에 들어가 숨었다. 짐승 같은 허송근은 개굴에 들어간 은자를 찾아내 계속 때리며 “개굴에 들어가 숨어? 넌 개다.”라고 하며 온 동네 떠나가게 고함쳤다. 황인숙과 남편 그리고 동네 사람들이 모여들어 말려서야 은자는  마수에서 벗어 나게 됐다. 그녀는 그 길로 은자는 맨발 바람으로 본 가집에 달아났던 것이다. 이 얼마나 천인공노할 일인가? 덕돌은 그 말을 듣자 분이 치밀어 씩씩거렸다. 그때 상순은 덕돌을 보고 눅잦혔다. “너도 이젠 대학생이 아니냐? 철없이 주먹으로 일을 그르치지 말고 법으로 해결해야 한다. 지금 우리 쪽에서 피해자인데 자칫 주먹을 휘두르면 피고로 될 수도 있다.” “알았습니다. 내 먼저 법으로 해결하겠습니다.” 이튿날 상순은 덕돌과 은자를 데리고 법원으로 찾아갔다. 신소접대실의 법관은 덕돌이 쓴 신고서를 읽어보고 은자의 사건제보까지 듣고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허허허. 가내 말다툼이구먼. 이혼했으면 됐지. 이제 법놀음을 해서 뭘 하오?” 덕돌은 화가 나 언성을 높였다. “아니, 아녀자가 시삼촌에게 맞았는데 그래 법원에서 아무 처리도 안 합니까?” 그러자 법관은 안경알 밑으로 덕돌을 건너다보면서 사무상을 똑똑 두드리더니 말했다. “치안사건은 공안국에서 처리하지. 법원에서 처리하지 않소. 만약 형사사건이면 우리 법원에서 접수하오.” “그럼 이혼 재산분쟁 같은 민사사건도 법원에서 해결하지 않습니까?” “이혼재산분쟁 같은 건 집에 돌아가 자체로 해결하오.” “아니, 인민법원에서 백성들이 억울하게 얻어맞은 사건도 접수하지 않으면 뭘 합니까?” 그러자 법관은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보오. 오늘 찾아온 신고자만 해도 20여명이나 되는데 그런 작은 사건을 다 접수하다나면 법원에 법관이 학교의 교원만큼 많아도 다 처리하지 못하오. 정 억울하면 공안국에 가보시오.” 말을 마치자 그 법관은 아래 사람을 접대했다. 상순과 덕돌은 속에 내려가지 않았지만 별 수 없이 법원에서 나왔다. 법원 문어귀 부근의 자그마한 식당에서 정심을 대충 먹으면서 덕돌은 울분이 터져 견딜 수 없었다. 허나 꾹 참고 집으로 돌아오는 수밖에 없었다. 그는 귀로에 들어서면서 법원 대문에 걸어놓은 “인민법원”이란 커다란 간판을 쳐다보았다. (흥! 무슨 인민법원?) 덕돌은 불만이 가득해 집으로 돌아오면서 물었다. “아버지, 공안국에 제기하면 어떻습니까?” 그런데 뜻밖에도 상순은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소송놀음을 그만두자.” 그 말에 놀랐다. “한뉘 빚을 지고 살아도 시비에 지고 살지 못한다던 분이 무슨 말씀입니까? 어찌 소송을 그만 둡니까?” 그러자 상순은 한숨을 후 내쉬었다. “옛날부터 소송놀음에 집안이 망한다는 말이 있다. 소송에 이기자고 소를 팔고 땅을 팔고 나중에 집까지 다 팔아 망한 사람이 한두 사람이냐? 넌 아직 세상을 잘 모른다.” 상순은 옛날 지학사와 소송을 하던 일을 말하면서 법원 소송이 힘든 말을 했다. 그러나 천진한 덕돌은 자기 고집을 세웠다. “건 해방전 얘깁니다. 해방전 일본 놈의 세상에서도 아버진 지주한테 배상시켰는데. 황차 지금 사회주의 나라 법원은 아주 청백하지 않습니까?” “옛날이나 지금이나 법관은 최고무상의 권력이 있다. 문화대혁명을 거치면서 사법부문이 혼란해져 그 틈에 일부 법관들은 권력을 빌어 사리를 도모하려고 한다. 뭔가 검은 돈이나 술이라도 얻어먹어야 일을 본다더라.” “얼마나 주면 될까?” “그만 둬라. 법관들을 매수하는 사람도 청백하지 못한 거야. 도리 있는데 왜 먹여서 일 처리를 하겠냐? 안되면 그만두지. 물론 김창남 국장한테 말하면 허송근이나 학순 쯤은 혼낼 수도 있다. 허나 우린 절대 법대로 하지 뒷문거래는 하지 말아야 한다.” 덕돌은 아버지 성격을 알고 있어 더 말하지 않고 집에 돌아와 맥이 풀려 한잠 푹 잤다. 허나 자고 일어나 곰곰이 다시 생각해봐도 속으로 이 송사에 질수 없다고 생각했다. 양미간을 찌프리고 궁리하던 덕돌은 계수동에 가서 기사 취재를 하는 것처럼 여동창생 황인숙과 그녀의 남편 그리고 마을의 목격자들을 일일이 찾아 허송근이 은자를 때린 사실을 기록한 후 증명인 란에 서명하게 했다. 이튿날 아침 일찍 일어나 또 법원을 찾아가 들이밀었다. 마을 사람들의 두툼한 증명서들을 보더니 법관은 그제야 “ 이 사건은 영향이 아주 크구먼.”라고 하며 신고용지를 두개 주었다. 덕돌은 뜻밖에 일이 돼나가자 아주 기뻤다. 그는 그날 저녁으로 집에 돌아와 신고서를 썼다. “…허송근은 교원으로서 조카며느리를 온 동네를 쫓아다니면서 때렸다. 그 죄는 형사죄로 다스려야 하겠지만 교원이기에 스스로 반성하도록 하며 민사책임만 신고한다…” 보름 후에 허송근에게서 답변서가 왔다. 그는 답변서에 자기 잘못을 뉘우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은자가 재물에 눈이 어두워 소송했다면서 한치의 양보도 하지 않겠다고 떠벌였다. “이놈 새끼, 주먹맛을 봐야겠는가?” 덕돌은 잉잉 우는 주먹을 손바닥에 대고 탕탕 쳤다. 법원에서는 처리를 기다리라고 하는데다가 덕돌은 기말시험복습을 해야겠기에 법원의 처리를 믿고 기다리기로 하고 학교로 돌아갔다. 방학이 돼 집으로 돌아오면서도 법원에서 합당하게 처리했으리라고 믿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은자가 법원에서 소송을 철회했다고 했다. “아니, 그 소송을 어떻게 고생해 법원에서 접수하게 했는데 아무런 처리도 받지 못하고 철회한단 말이오?” 덕돌은 집구들에 엉덩이를 붙이지 않고 그 자리로 법원으로 씽 달려갔다. 담당 법관은 덕돌을 보자 따지고들었다. 법관은 철면피하게도 이렇게 말했다. “당사자 김은자가 그간 법원에 와서 소송을 철회하겠다고 해서 철회했소. 동무가 동생이겠구먼. 은자 동무는 동생이 어려서 세상물정을 모르고 소송을 자꾸 하자고 해서 억지로 했는데 철회하겠다고 했소.” 법관은 말을 마치자 회의 있다면서 자리를 피했다. “넷째누나가 이럴 수가있는가?” 덕돌은 주먹을 쥐고 집으로 향했다. 그런데 부르하통하 물이 녹아서 집채 같은 얼음장이 세찬 물결에 떠내려가고 있었다. 신을 벗고 찬 얼음물에 들어서 건너다가 허벅다리를 치는 강물은 더 건널 수 없었다. 그때 집구들장만한 얼음이 떠 내려오는 것을 보고 제꺽 뛰어 올랐다. 그는 얼음위에 선채 떠내려 오는 나뭇가지를 주어 삿대처럼 짚어 밀면서 간신히 사품 치면서 흐르는 깊은 강물을 건너갔다. 그제야 덕돌은 한숨을 후 내쉬었다. (에참, 아버지 말처럼 송사 길이 이렇게 험난할 줄은 몰랐구나.) 집에 들어서자마자 덕돌은 부모에게 법관에게서 들은 말을 하고나서 은자에게 따지고 들었다. “누나 소송을 철회했소?” 그러자 은자는 이실직고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쩌겠니? 담당법관이 이러더라. ‘소송놀음을 하면 원수로 돼 보복이 두렵지 않은가? 몇백원으로 해 원수를 맺을 게 없잖은가? 하루 부부 백일 은정이라고 하루 밤에도 만리장성을 쌓는다고 하지 않소? 필경 5년이나 산 부부지간에 원수를 맺어 무슨 좋은 일이 있겠소? 소송을 철회하오.’ 이래더라. 그래서 철회했다.” “누나가 어쩜 이렇게 할 수 있소? 야, 정말, 내 어떻게 천신만고 끝에 얻은 소송권을 내하고 토론도 하지 않고 포기한단 말이오? 어쩜 누난 시켜준 서방질도 못하오.” 덕돌은 억이 막혀 더 말이 나가지 않았다. 울분을 참으려 해도 참을 수 없었다. 상순은 분통이 터져 씩씩거리는 덕돌의 손을 잡고 말렸다. “얘야, 어떤 때에는 양보하고 지는 것이 이기는 거야. 법에서 해결해 주지 않는 것을 어떻게 하겠니?” “그래 당하고 만단 말입니까? 그 허씨들이 우리 김씨 가문을 어떻게 보고 누나를 짓밟는단 말이오?” 덕돌은 집을 나서자 그 길로 공안국에서 일하는 이모부 강운룡을 찾아갔다. 강운룡은 “4인무리”가 꺼꾸러진 후 반란파 두목 김용만이 공안국 국장자리로부터 감옥에 옮겨가고 김창남 국장이 국장으로 승진한 후 다시 김창남 국장의 부름을 받고 공안국에 와서 형사정찰과 과장으로 임명됐던 것이다. 한번은 시내 한 기계공장 사무실에 화재가 났다. 강운룡 과장은 수사 일꾼들을 이끌고 사건현지에 가서 세밀한 수사를 벌렸다. 그러나 수사 일꾼들은 아무런 단서도 잡지 못했다. 그때 강운룡은 물이 괴죄죄한 잿더미로 된 공장 사무실자리에 웬 축구공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저건 무슨 공이오?” 공장 사무실 주임과 물어보니 “화재가 나기 전날에 우리 공장 직원의 애가 공을 차다가 우리 사무실 유리창문을 깨버렸습니다. 그래서 그 애의 공을 배상 대신 빼앗아 둔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강운룡은 피뜩 가능하게 그 애가 자기 공을 빼앗았다고 악감을 먹고 불을 지르지 않았겠는가는 추측이 들었다. 과연 그 애를 데려다 심문했는데 강운룡 과장의 예측과 맞아 떨어졌다. 그리하여 한차례 방화사건을 신속하게 해명했다. 한번은 화룡시 복동진의 한 살인악마가 자동차를 빼앗아 타고 도주해 동불공사 사수대대에 잠입했다. 그때도 강운룡은 총지휘부의 제1선 정찰을 책임지고 직접 살인악마가 숨은 집 구새목에 가서 적정을 살피고 제1선 정보를 총지휘부에 보고했다. 그리고 처음에는 마을의 정치대장과 끌끌한 민병을 들여보내 떡을 치는 척, 트럼프를 노는 척 하다가 살인악마를 나포하려는 나포방안을 작성해 총지휘부에 교부했다. 그 작전방안대로 했지만 정치대장이 손이 떨려 떡메로 살인악마의 대가리를 치지 못했다. 그때 강운룡은 과단하게 제일 먼저 집안에 덮쳐들어가 살인악마를 깔고 들어앉아 목을 눌렀다. 살인악마가 호주머니에 손을 넣어 권총을 꺼내려는 순간 그는 무릎으로 살인악마의 대가리에 강타를 안기며 그 놈의 오른 손을 꽉 눌렀다. 그때 뒤따라 들어간 수사 일꾼들과 함께 살인악마를 제압하고 호주머니의 권총도 빼앗아내고 수갑을 철컥 채웠던 것이다. 하여 그는 2등공을 세우고 상금 200원을 탔던 것이다. 어려서부터 반도체부속품이랑 시계랑 사러 다니면서 덕돌은 이모부 강운룡을 하늘을 떠인 사내대장부로 존경하고 따랐다. 집안에 송사가 생기자 덕돌은 이모부를 찾아가 가르침을 받고 싶었다. 덕돌이 찾아가자 키 넘는 동생 강호가 경찰복차림으로 군례를 척 붙이며 인사했다. “형님! 경례!” 여동생 향화도 반겨 맞았다. “오빠!” 향화는 제법 처녀티가 났다. 1미터 65나 되는 호리호리한 체격에 정말 예뻤다. 이모는 조카가 오자 뜨끈뜨끈한 돼지고기장국을 끓이기에 이마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내밴 채 여념이 없었다. “아재, 강호는 경복을 입었구먼. 축하하오.” “응, 그래. 걔는 교통경찰대대에 들어갔다.” “음, 잘 됐구나.” 덕돌은 강호의 경모를 머리에 단정히 씌워주면서 어깨를 다독여주었다. “잘해라.” 그는 장의자에 앉아 한손에 하나씩 강호와 향화의 손을 꼭 잡고 그간 그립던 얘기를 한바탕 나누었다. 정심에 이모부가 왔다. 덕돌은 이모부에게 사들고 간 술병을 들어 부어드리며 단도직입적으로 은자가 당한 일을 죽 말했다. 그러자 강운룡은 술잔을 들어 마시며 한참 궁리했다. “가만 놔두지 말아야 해. 그런데 원래 소송놀음이 그리 쉽니? 담당법관이 가능하게 개산툰에 가서 답장을 받으면서 허송근이란 자와 뭔가 은밀히 단짝이 됐을 수 있다. 뻔히 은자가 억울하게 맞고 재산 한푼 가지지 못한 채 쫓기다 시피 나왔는데 조해도 시키지 않고 그게 뭐냐? 겁이 많은 아녀자에게 보복이 두렵지 않은가? 원수를 맺어 무엇이 좋겠는가? 겁을 먹여 소송을 철회한걸 봐라. 완전히 피고 허송근의 편을 들고 있잖니? 거기에 뭔가 감춰진 거래가 있었을 수 있다.” “그럼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덕돌이 술을 또 한잔 부어 올리면서 묻자 강운룡은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그쯤 해 그만둬라. 담당법관이 그렇게 편을 드는데 이제 철회한 소송을 다시 하자면 상급 법원에 기소해야 된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상급법원에서 아래 법원에서 철회한 소송을 재 접수하지 않고 아래 법원에 보낸다. 법관끼리 서로 눈치를 보면서 돕고 보호하고 짜고 든단 말이다. 툭 까놓고 말해 관장에선 관리끼리 서로 보호한단 말이야.” 그 말을 듣고 덕돌은 “야, 아직도 세상이 온통 새까맣구먼. 문화대혁명이 끝난지도 이젠 몇햅니까.” 하고 감탄했다. 강운룡은 한숨을 후 내쉬더니 “너희들 대학생들은 세상을 너무 천진란만하게 밝게 보는구나.”라고 했다. 덕돌은 “‘4인무리’를 타도하고 반란파 두목 김용만과 황종연 일당을 처리했는데도 아직도 그렇습니까?”라고 의문을 제기했다. “‘문화대혁명’ 바람에 법제풍기를 문란하게 만들어 그 여독이 한 동안 갈 거야. ‘문화대혁명’ 기간에 어디 법이 있었니? 죄도 없는 억울한 간부들을 마구 비판, 투쟁하고 투옥하고 총살까지 하지 않았니? 료녕성당위 선전부에서 간사로 일하던 장지신의 억울한 사건을 봐라. 문화대혁명기간에 장지신이 강청을 욕했다고 ‘4인무리’들은 장지신에게 갖은 혹형을 다가하다가 총살했지. 총살할 때 장지신이 구호를 부를 까봐 인후를 베 구멍을 낸 후 목수건을 둘러 가린 후 비밀사형장에 내다가 사형했지. 사형한 후 어쨌는지 아니? 사체를 기름 가마에 처넣어 부글부글 끓여 뼈를 건져내 의학원 사체해부실에 가져다 골격표본을 만들었단다. 후에 자녀들이 장지신의 뼈를 의학원에서 가져다 안장했단다.” 덕돌은 그 말에 몸서리를 쳤다. “야, 정말 가혹한 정치가 범보다 무섭다더니 세상에 그런 잔혹한 일도 다 있답니까?” 이모부는 오후에 출근하면서 말렸다. “법원에 절대 상소하지 말라. 쓸데없는 일이다. 성공가망이 없다. 학순인지 뭔지 하는 자를 직접 찾아가 도리를 따지고 이혼했으면 은자에게 재산을 얼마간 달라고 해보렴.” 덕돌은 그렇게 믿던 이모부에게서도 확답을 얻지 못하자 가슴이 갑갑해났다. 혹시 풍상고초를 다 겪은 아버지와 이모부의 말씀이 맞을 수도 있었다. 순간 법은 멀고 주먹이 가깝다는 말이 번개처럼 뇌리를 탁 쳤다. “그래, 법률로 안 되는 판에 내 손으로 해결해보자.” 덕돌은 비장한 결심을 내렸다. 그는 우선 지혜와 글로 허씨 일가를 공격하기로 했다. 그는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필을 들어 이런 최후통첩을 써 허학순에게 부쳐 보냈다. 최후통첩! 허송근, 네깐 놈이 내 어진 누나를 온 마을 쫓아다니면서 때리고 빈털터리 알몸으로 쫓아내고서도 잘 될 것 같으냐? 학순, 너는 남편으로서 자기 아내도 보호하지 못하고 맞게 놔둔 멍청이야. 보름 안으로 내 누나 치료비 300원에 이혼한 후 재산 값으로 200원을 가져오라. 그러지 않는 날엔 너 일가를 가만 놔두지 않을 것이다. 온전히 살고 싶으면 알아서 처리해라. 보름 후에도 가져오지 않으면 나를 원망하지 마라. 굴뱀 덕돌 허송근이 있는 개산툰의 한 소학교 당지부와 현 교육국에는 허송근이 조카며느리를 때린 죄악을 폭로하고 당 기율에 근거해 처분할 것을 요구하는 편지를 써 부쳐 보냈다. 일주일이 됐는데도 학순은 누나한테 돈을 가져오지 않았다. 후에 덕돌이 계수동에 가서 알아보니 최후통첩을 받고 겁을 집어먹은 학순은 부모를 데리고 마을을 떠나 진수해 시내에 세집을 맡고 숨어 버렸다. 덕돌은 진수해에 가서 한족친구 고이림과 류운봉 등을 동원해 학순이 숨은 세집을 찾으려고 온 시내를 참빗으로 서캐 훑듯 했다. 당 날 저녁에 은자가 집에 데려다 기르던 향화를 단서로 끝내 학순이 숨은 세집을 찾아냈다. 그리하여 덕돌은 한족친구들을 데리고 학순의 세집으로 쳐들어갔다. 질겁한 학순은 엉덩방아를 찧은 채 일어나지도 못했다. 영감이 뭐라고 떠드는 것을 고이림이 훌 안방에 메쳐버렸다. “학순아, 돈을 준비했는가? 고양이새끼처럼 시내에 숨으면 단가?” 학순은 벌벌 기면서 통사정 했다. "돈이 마련되면 가져가겠다. 불시에 어디 그렇게 많은 돈이 있니? 집을 팔아도 500원 밖에 하지 않는데.” “안 된다. 일주일 안에 돈을 가져오지 않으면 몰살당할 줄을 알아라. 우리 온 집안 식구들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잘못을 빌면서 누나한테 돈을 줘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죽을 줄 알아라.” “불시에 어디 돈이 있어 그렇게 많이 주겠니? 천천히 벌어 줄게.” “잔꾀를 작작 부려. 공사기업에 다니면서도 돈을 안내고 뻗칠 예산인가? 성의 있으면 꿔서라도 내야 해.” 학순은 아무리 꾀를 써도 안 되니 “돈을 줄게.”라고 했다. “오늘 먼저 100원을 당장 내놔라. 데리고 온 친구들을 술대접해야겠다.” 학순은 우는 상을 하면서 궤짝에서 겨우 80원을 내놓았다. “쳐라!” 덕돌의 호령이 떨어지자 고이림과 류운봉은 학순을 메주 밟듯 밟아줬다. 덕돌은 구들바닥에 널린 돈을 주어 가지고 가면서 을러멨다. “개새끼, 허송근 새끼 감히 우리 누나를 쳐? 가만 놔두는가 봐라! 그 놈 새끼한테 일러라. 우리 개산툰에 언제든지 가서 피 값을 받아온다고.” 겁을 집어먹은 학순은 다 터져 피 흐르는 낯을 쓱쓱 닦으면서 죽는 소리를 했다. 덕돌은 5원을 꺼내고 나머지는 은자에게 주었다. 그날 저녁 덕돌은 류운봉과 고이림, 한위신을 데리고 식당에 가서 술상을 차려 한바탕 술을 마셨다. 며칠 후 학순은 질겁해 끝내 200원을 꿔 가지고 함흥대대 조개덕에 은자를 찾아왔다. 허나 은자가 일하러 밭으로 갔다고 하자 밭에까지 찾아가서 건네주었다. 허나 덕돌은 불만이 가득해 피 값 300원 받으러 개산툰으로 홀몸으로 갔다. 원래 친구들을 데리고 갈까 하다가 그만뒀다. 주먹친구들은 자칫하면 사람을 쳐 병신이라도 만들까봐 그만두었다. (내 혼자라도 그깐 놈을 처치 못해?) 덕돌은 기차를 타고 개산툰에 가서 이 학교 저 학교 찾아다니다가 둔덕 위 소학교에서 허송근을 찾아냈다. 그는 곧추 학교당지부 사무실을 찾아가 허송근의 죄악을 공소했다. 그러자 당지부 서기선생은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전번에 편지를 보내와서 허송근 선생의 잘못을 알고 당지부 생활회의에서 비평한 적이 있소. 오늘 재차 들어보니 사실이 똑 같구먼.” “그저 비평만 해선 안 됩니다. 마땅히 우리 집안에 와서 허송근은 잘못을 사죄하고 피값으로 300원을 내놔야 합니다.” 소학교 서기는 안경 너머 혈기왕성한 덕돌을 보면서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법원에 민사소송을 해도 해결하지 못하는 것을 우리 학교에서 어떻게 받아내겠소?” “로임에서 잘라내면 안되겠습니까?” 서기는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법원의 판결이 없이는 절대 그렇게 못하오. 누나가 몹시 맞았다니 안 됐소. 내 말해서 치료비로 얼마간 주라고 해보지.” 그 말에 덕돌은 조금 가슴이 열리는 것 같았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글쎄 덕돌은 당지부 서기 사무실에서 나오다가 복도에서 덩치가 수범처럼 큰 허송근과 딱 마주쳤다. “네가 감히 내 누나를 업신여겨?!” 허송근은 보통 덩치인 덕돌을 업신보고 “애들이 뭘 안다고 여기 와서 떠드느냐?”하고 버럭 소리쳤다. “뭐라고? 이 놈, 네가 다 교원이냐? 조카며느리를 때려 쫓아내? 치료비도 내지 않고 당나귀 떼를 써?” “조용한데 가서 얘기하자.” “어째 온 학교 사생들이 네 죄악을 알까봐 겁나냐?” 덕돌이 왁짝 떠들자 교실과 교무실에서 교원들이 문을 열더니 머리를 내밀고 구경했다. “덕돌이, 여기 와서 어째 이러오?” (누군가?) 덕돌이 머리를 돌려보니 소학교 5학년 때 스승 리은규 선생이었다. 그리하여 덕돌은 허송근을 놓아주고 스승과 인사한 후 자초지종을 이야기했다. 그러자 리은규 선생은 덕돌을 말렸다. “복도에서 떠들면 영향이 나쁠뿐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오. 그래도 법으로 처리하오.” 덕돌은 곧이듣지 않았다. “법으로 처리할 수 있으면 내 무슨 이러겠습니까? 저 허송근이 소동작을 해서 법관이 소송을 철회하게 만들었습니다.” 리응규는 시간이 돼 들어가고 허송근은 어디론가 피해가고 없었다. 덕돌은 한숨만 나갔다. (네놈이 출근도 하지 않겠니?) 덕돌은 이번엔 만나기만 하면 끝장 볼 궁리를 하고 학교 대문을 막고 지켰다. 그때 사생들 속에서 허송근이 육중한 몸을 웅크리고 슬그머니 학교 대문을 빠져나가려고 했다. “어디로 가는가?” 덕돌은 다짜고짜로 허송근에게 덮쳐들어 멱살을 틀어쥐었다. “야, 저쪽으로 가서 얘기하자.” 그자는 사생들 앞인지라 창피를 당할까봐 죽는 상을 지으며 통사정을 했다. “그래, 가자.” 덕돌은 학교 담 뒤에 끌고 가서 따졌다. “오늘 내 누나 피 값을 받으러 왔다. 소송서에 쓴 대로 치료비 300원을 내놓아라.” “네가 뭔데 300원을 내라고 하니?” “뭐라고? 이 놈 새끼, 언감 개소리냐? 난 돈이 탐나 온 게 아니야. 네놈한테서 피 값을 받으러 왔다. 낼 테냐? 안 낼 테냐?” 허송근은 기세 사나운 덕돌을 보고 멱살을 틀어 잡힌 채 아무 말도 못하고 흔들리며 비명을 질렀다. “이 목을 놔라. 학순한테서 280원이나 받았으면 됐지. 나와 왜 이래?” “이 개새끼야, 사람 말이 잘 안 드는구나.” 덕돌은 불시에 틀어쥔 멱살을 콱 당기면서 머리를 뒤로 젖혔다가 헤딩을 안겼다. 떡! 모진 소리와 함께 허송근은 까무러칠 지경으로 휘청 하더니 면상이 장마당이 됐다. 떵! 떵! 떵! 네 번 헤딩을 안기자 허송근은 개목을 다는 소리를 치더니 보리자루처럼 나동그라졌다. 덕돌은 물앉은 허송근의 머리칼을 잡고 무릎으로 다 터진 면상을 짓쪼아 놓았다. 그때 리응규 선생이 달려와 말렸다. “덕돌이, 이러지 말라. 내 허송근의 처와 말해 돈을 주게 할게.” “미안합니다. 선생님한테까지 폐를 끼쳐.” 덕돌은 떠나가는 리응규 선생을 보내고 로지심처럼 식당에 가서 혼자 점심을 먹었다. 한참 후에 응규 선생이 돈 230원을 가져다주었다. “요걸로 피 값이 됩니까?” “너도 허송근을 때렸으니 엎음 갚음이 되지 않았니?” 그 말에 일리가 있었다. 응규 선생에게 감사를 드리고 차 시간이 돼 덕돌은 집으로 돌아왔다. 허나 학순을 놔둔 것이 속에 내려가지 않았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공사 운동대회를 하는 진수해중학교 중간 복도에서 학순을 딱 마주쳤다. “야, 이 새끼야, 피 값도 안내고 살 거 같니?” 학순은 대낮에 갈범처럼 으르렁거리는 덕돌을 보자 “에이크” 하고 비명을 지르며 돌아서서 도망치려고 했다. 그때 덕돌은 쫓아가면서 고함쳤다. "법은 멀고 주먹은 까깝다!”  그는 날아나가면서 발길로 달아나는 학순의 면상을 걷어찼다. 동시에 주먹이 휘감겨 날아 들어갔다. “앗!” 고함소리와 함께 학순은 시멘트 바닥에 풀썩 꺼꾸러졌다. 마구 엎딘 그의 대갈 밑에서 피가 줄줄 흘러 시멘트 바닥을 뻘겋게 적셨다. 덕돌은 눈에 불이 일어 당장 때려잡을 상을 하고 고함치며 학순의 대가리를 발길로 마구 걷어차고 밟아놓고 복도를 빠져나갔다. “서라! 사람을 치다니?!” 덕돌이 되돌아보니 안경을 건 늙은 경찰이 덕돌을 뒤쫓아 왔다. 덕돌은 도망치지 않고 순순히 그 경찰을 따라 파출소로 갔다. 파출소에서 덕돌은 자초지종을 죽 이야기했다. 그러자 경찰은 다음과 같은 "처리판결"을 내렸다. “법으로 문제를 해결해야지. 대학생이란게 사람을 때려서야 되는가? 대학생인데 이후부터 손을 대지 말고 도리를 따져라. 치안위반죄로 벌금 20원을 하라." “내 누나 맞았을 땐 왜 허학순을 벌금 시키지 않았습니까?" "그때 고발했으면 우리 파출소에서 처분했을 거야." "건데 내 한매 쳤다고 벌금시킵니까?” “그래야 네가 이후에 사람을 치지 않지? ” 경찰은 마치 덕돌을 돌보기나 하는 것처럼 말하는 것이었다. 별 수 없었다. 집에 돌아온 덕돌은 이튿날 돼지새끼 한 마리를 시장에 가지고 가서 팔아 파출소에 냈다. 아버지와 알아보니 그 안경을 건 퉁퉁한 경찰이 바로 아버지의 수하 허영호 소장이라는 것이었다. 상순도 확실히 덕돌을 교양하기 위한 것이라고 인정했다. 한차례 송사는 이렇게 법보다 가까운 주먹으로 종말을 고했다. 덕돌은 세상이 너무 허무해 너털웃음만 쳤다. “허허허. 원, 참, 법이 무른 이 놈 세상이 언제 밝아질까? 원, 더러워서 어떻게 살겠니? 하하하!” 그 너털웃음 소리에 길가 나무가지에 앉았던 참새들이 재잘거리며 날아나 버렸다.
172    대하소설 진달래 소야곡(21) 댓글:  조회:1360  추천:0  2018-08-02
                                            40. 강도들의 말로 눈보라가 윙윙 휘몰아치던 엄동설이 흘러가고 봄이 찾아왔건만 소장사를 한다고 내몽골로 떠난 성호는 소식이 전혀 없었다. 어느 하루 정희는 딸애를 데리고 태평거촌 시집에 왔다. 성호가 떠나간 후 이젠 몇십번 시집에 왔다갔는지 모른다. 시부모도 아들 소식이 없어 속을 태우고 있었다. “소식이 있소?” “없어요. 혹시 편지라도 왔는가 해서 왔는데요.” 입이 무거운 상진도 더는 참을 수 없었다. “그 놈이 꼭 살아 돌아오겠지.” 영옥은 눈물을 흘리면서 “살아있기만 했으면 얼마나 좋겠소.” 하고 정희와 손녀를 번갈아보았다. “꼭 살아 있어요. 쉽게 당할 사람이 아니죠. 전 그를 믿어요. 꼭 악착스레 살아있을 거예요.” 해지기 전에 정희는 눈물을 훔치면서 시부모와 갈라져 시내로 돌아왔다. 그녀는 실오리만한 희망을 안고 이번에는 시이모부를 찾아가 소식이 있는가 알아보았다. 뜻밖의 소식에 강운룡 과장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아니, 성호가 잃어지다니? 금시초문인데. 백성지구와 내몽골지구 공안기관에 련계를 달아보지.” “이모부, 꼭 신랑을 찾아주세요.” 강과장은 눈물을 하염없이 흘리는 처조카며느리를 측은히 바라보면서 머리를 끄덕였다. “소식을 기다리오.” 이튿날부터 정희는 사흘이 멀다하게 시집과 강과장한테로 오가면서 혹시 소식이 있는가를 기다렸다. 참말 하루가 삼추 같았다. 며칠 후 정희가 또 공안국에 이모부를 찾아갔을 때다. “성호 소식이 있소.” “어디 있대요?” 정희는 굳은 표정을 풀지 못하는 이모부의 입에서 무슨 소식이 전해질가 두렵기만 했다. 강운룡 과장은 무거운 어조로 뒤말을 이었다. “성호는 소장사를 하다가 강도들에게 소떼를 빼앗겼다오.” “살아있는가요?” “살아있구말구. 성호가 어떤 애오? 어려서부터 성호가 자라는 걸 봐서 아오. 돌 우에 올려놓아도 살아날 애지.” “아이유, 사람도!” 정희는 애나 발까지 동동 굴렀다. “어쩜 소식도 한마디 전하지 않는대요? 속을 싹 태우면서? 무정해도 정말…” 정희는 뜨거운 눈물을 줄 끊어진 구슬처럼 흘리면서 눈물범벅이 된 얼굴에 웃음을 지었다. “지금 날강도들을 나포하고 소를 찾으려고 한창 경찰들과 달아다닌다오.” “그까지 소야 있으면 어쩌고. 참, 살아 있다니 됐어요.” “감사해요. 인차 시부모께도 알려드려야 하겠어요. 시부모도 속이 타서 재가루 될 지경인데요.” “근심하지 말라고 하오. 우리도 몽골에 가서 강도 나포를 협조할 예산이요.” “예. 알았어요.” 정희가 숨가쁘게 시부모를 찾아 달려갔을 때다. 소식을 전하자 시부모는 기뻐하며 성호한테서 편지 한장이 왔다고 했다. 정희가 시어머니 손에서 받아보니 편지는 아주 간단했다.   존경하는 부모님, 그간 속을 태우게 해서 미안합니다. 정희한테도 문안을 전해 주십시오. 저는 날강고들한테 강탈당한 소를 찾아가지고 돌아갈 예산입니다. 당지 공안국에서 나섰기에 꼭 찾을 수 있을 겁니다. 근심하지 마십시오. 아들은 그 어떤 역경 속에서도 모든 곤난을 박차고 나갈 것입니다. 만나는 날까지  편안히 계십시오. 아들 리성호                                                       1988년 4월 29일.   사실 그날, 강도들은 징글스레 웃으며 말에 올라 소떼를 몰고 떠나갔다. 성호는 초원의 고목에 결박당해 사선에서 헤맸다. 해가 어둑어둑 져서 어둠의 공포가 조수처럼 밀려오고 만리 초원 마가을바람의 울부짖음소리가 악마처럼 엄습해왔다. 어둠컴컴한 하늘에 애처로운 초생달이 떠서 대지를 쓸쓸히 비추었다. 고목에 결박당한 성호의 애간장을 태웠다. 여기저기서 굶주린 이리떼들의 울음소리가 저승사자의 북소리처럼 다가오고 있었다. 성호는 고향의 부모형제들과 처자들을 떠올리자  속으로 부르짖었다. “절대 이렇게 초원에서 죽을 순 없어.” 저 멀리 강도들의 검은 그림자가 흑점으로 아물거리다가 어둠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그는 피뜩 종아리 각반에 꽂아둔 비수가 떠올랐다. (살았어.) 그는 안간힘을 다해 오른다리를 얼굴 가까이에까지 쳐들었다. 다리가 입가에 다가오자 이빨로 조심스레 비수자루를 꼭 깨물어 쓱 빼냈다. 그는 입으로 비수를 꽉 깨문 채 가슴과 팔을 얽맨 바줄을 싹싹싹 베기 시작했다. 한식경이나 역사질한 끝에 바줄이 발 앞에 주르르 흘러내렸다. 성호는 한숨을 후- 길게 내쉬었다. 고목 뒤로 꽁꽁 묶은 손목의 바줄을 끊을 방법이 없어 답답했다. 쨩! 이때 채찍소리와 함께 요란한 말발굽소리가 들렸다. “꼼짝 못하고 죽겠구나.” 성호가 중얼거리며 마지막으로 입에 문 비수를 날려 복수하려고 할 때다. “이 부근입니다.” 귀에 익은 몽골족 목소리 아닌가. “아, 저기 고목에 있구나!” 검은 그림자들이 다가왔다. “성호!” 성호가 희미한 달빛을 빌어 살펴보니 뜻밖에도 어둠 속에서 운두라바한과 쑤싼나, 테무치가 말에서 뛰여내리지 않겠는가. “개놈 새끼들!” 운두라바한은 옆구리에서 서슬푸른 반달도를 쓱 뽑아 조심스레 성호의 손목을 묶은 포승줄을 하나, 하나 베버렸다. “됐네.” 성호는 아픈 손목을 매만지면서 “구명은혜 백골난망입니다.”라고 했다. “미안하네. 재수없이 강도를 만나다니. 얼마나 놀랐겠는가? 에이, 참.” 운두라바한은 성호의 어깨를 툭툭 치면서 통쾌하게 말했다. “소와 말을 찾는게 급선무네.” 쑤싼나는 손수건을 꺼내 성호한테 내밀었다. “상처를 닦아요.” 성호가 미안해 손수건을 받지 못했다. 그러자 쑤싼나는 손수건으로 손수 성호 얼굴에 난 채찍 피자국을 닦아주었다. “그 놈들이 소떼를 몰았기에 멀리 가지 못했을거예요. 그 많은 소를 하루 밤새에 다 잡아 처리하기도 힘들게고요.” 그녀는 성호를 위로했다. “소귀마다 구멍을 뚫어놓았으니까. 어떻게 팔아먹는가 두고 보지.” 이윽고 운두라바한은 홰불을 해들고 강도들이 몰고간 소발자국을 따라 뒤쫓아갔다. 한참 눈덮인 초원을 누비며 말을 달려 갈 때였다. 앞에서 말 울음소리가 들렸다. 뒤이어 절주있게 말발굽소리가 점점 가까이 들려왔다. 그들은 말에서 뛰어내려 눈덮인 둔덕에 납짝 엎드려 어둠 속을 눈뿌리 빠지게 살폈다. 운두라바한은 옆구리에서 반월도을 빼들었다. 성호도 비수를 뽑아들었다. 쑤싼나와 테무치는 사냥총에 절컥 장탄했다. 말 한필이 이쪽으로 쏜살같이 뛰여왔다. “우리 집 말이 아냐?” 운두라한이 품에서 소라를 뽑아 들어 불었다. 그러자 백마는 앞발을 쳐들고 “오호홍~” 하고 울더니 네굽을 안고 곧추 이쪽으로 뛰여왔다. “우리 룡혈말이야!” 운두라바한은 기뻐 어쩔줄 몰라했다. “이 놈이 어떻게 돼 도망쳐왔을가?” 쑤싼나의 말은 더 귀맛을 돋구었다. “말도 배필을 찾아 돌아온 거죠.” 아닌게 아니라 룡혈말은 쑤싼나가 탄 암말한테로 다가와 좋다고 서로 핥고 야단쳤다. “멀지 않은 곳에 그놈들이 있을 거 같아.” 운두라바한은 말에 올라 룡혈말을 성호한테 넘겨주고 채찍을 휘둘렀다. “가자!” 도망쳐온 룡혈말은 성호를 태우고 네굽을 안고 쏜살같이 달렸다. 룡혈말은 강도들이 적토마를 끌고 도망친 곳으로 달리는 것 같았다. “아마 우리한테 적토마가 끌려간 곳을 알려주는거 같애. 이전에도 적토마가 잃어졌을 때 룡혈말이 적토마가 사라진 곳으로 데리고 간 적이 있네.” 그들은 룡혈말을 따라 눈덮인 초원을 한창 달렸다. 저 멀리 시내 전등불빛이 보였다. 초원에 잔설도 보이지 않고 누런 사막의 잔등이 드러났다. 이때 갑자기 룡혈말이 우뚝 멈춰서더니 앞발을 쳐들고 요란하게 울부짖었다. 그들은 말을 달려 나가보고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모래불이 흩날리는 모래바닥에 소대가리와 갈비뼈가 무더기로 어지러이 널려 있었다. “이게 웬 일이야?” 운두라바한이 말 잔등에서 굴러떨어지더니 풀썩 땅바닥에 내렸다. 쑤산나와 테무치도 아버지를 따라 뛰여내렸다. “늦었구나!” 성호가 뛰어내렸을 때 운두르바한은 무릎을 꿇고 소대가리를 매만지더니 장탄식했다. 강도들은 단서를 잡힐까봐 소를 잡아 고기만 도려내 가져갔던 것이다. “한두놈이 아닌 것 같아.” 성호는 소 귀를 일일이 살폈다. 몽땅 귀에 구멍이 뚫려 있었다. “아이고!” 성호는 주먹으로 모래바닥을 꽝꽝 쳤다. 그는 눈앞이 깜깜해났다. 어떻게 번 돈인가? 자존심을 다 버리고 고향에 돌아가 몇해 동안 소똥을 온 몸에 바르며 번 돈이 아닌가. 그런데 하루 새에 몽땅 날려 버리지 않았겠는가. 쑤싼나가 옆에서 위안해주었다. “오빠, 근심하지 말아요. 공안기관에 강탈사건을 신고하면 몽땅 나포할 수 있을 거예요.” 운두라바한이 벌떡 일어났다. “맞아, 빨리 파출소로 가자.” 그들은 말에 올라 곧추 진파출소로 달려갔다. 20분도 안돼 파출소 소장에게서 특대강탈사건을 제보받은 형사수사대대  수사대원들이 파출소에 모였다. 그들은 성호와 테무치한테서 사건경과를 상세히 료해한 후 즉시 찌프차를 타고 사건현지로 달려갔다. 모래불이 흩날리는 사막에 이르러 그들은 숱한 소 대가리와 뼈다귀들을 보고 아연실색했다. 수사대대장은 한참 현장을 수사한 후 무겁게 입을 열었다. “보십시요. 여기 자동차 바퀴자국이 나 있지 않습니까.” 모두 여겨보니 잔설이 뒤덮인 모래불 우에 확실히 자동차 바퀴자국이 시내 쪽으로 쭉 나있었다. “강도들은 여기서 소를 잡아 고기만 싣고 달아났습니다. 말고기는 팔아도 얼마 받지 못해 버렸을 수도 있습니다.” 그는 수사대원들을 둘러보았다. “우린 즉시 교통을 차단하고 일체 차량을 수색해 소고기를 밀반출하는 것을 막아야 하오. 내일부터 식당과 시장에 돌아다니면서 소고기를 파는 걸 수사해야겠소.” “옛!” 수사대원들은 분조를 나눠 시내와 교외 교통요로로 자전거를 타고 달려갔다. “성호, 우리 집으로 갑세.” 운두라바한이 뜨거운 손을 내밀었다. 성호는 따라가려고 하지 않았다. “어찌 계속 페를 끼치겠습니까? 구명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운두라바한은 사람좋게 성호의 손을 잡아끌었다. “에이, 사람이. 우린 다 같은 소수민족이요. 한 집안 사람이야. 자네 우리 집 소를 샀다가 이런 봉변을 당했는데 우리 어찌 팔짱 끼고 구경한단 말인가? 날강도들을 잡기 전까지 우리 집에 있게나.” “그래요. 오빠, 우리 집에 가자요.” 쑤싼나에 뒤이어 테무치도 성호를 가자고 했다. “형님과 난 생사를 같이 한 형제요. 가기요.” 운두라바한 일가가 부모형제처럼 열정적으로 대하는 바람에 성호는 운두라바한의 집으로 가서 눌러 있으면서 공안국의 사건수사를 협조했다. 눈보라가 휘몰아치던 동장군이 물러가고 초원에 신록이 짙어갔다. 그러나 사건수사는 아무런 진전도 없었다. 교활한 강도들은 단번에 많은 소고기를 팔면 꼬리를 밟힌다는 것을 알고 장물을 감추고 천천히 처리했거나 당지에서 처리하지 않고 외지에 가져다 팔았을 수 있었다. 몇달 동안 성호는 그저 남의 밥축을 낼 수 없었다. 그는 경찰들을 협조하는 한편  테무치를 도와 말을 타고 초원에서 양과 소를 몰아주었다. “계속 이렇게 눌러있을 순 업지.” 그는 말잔등에 앉아 소떼를 몰면서도 자기를 애타게 기다릴 부모형제와 처자들이 눈 앞에 선히 떠올랐다. 편지를 써놓고서도 우편국에 갈 새마저 없어 미처 인차 고향에 띄우지 못했다. 딸애를 업고 눈물이 그렁그렁해 자기를 바라보는 색시 정희의 새파랗게 질린 얼굴이 삼삼히 떠올랐다. 성호는 인차 도리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내가 어찌 알거지 신세로 고향으로 돌아간단 말인가. 날강도들을 잡기전엔 절대 돌아갈 수 없어.” 그는 말머리를 돌려 저쪽에서 양을 방목하는 테무치를 향해 고함쳤다. “시내 갔다 올게~!” “그래오. 조심하오, 형님~!” 성호는 말을 달려 곧추 진파출소로 달려갔다. 파출소 소장은 이젠 성호와 구면이 됐다. 그는 성호를 보고 땀에 흠뻑 젖은 얼굴을 닦으라고 수건을 주었다. “무슨 새로운 단서라도 있소?” 성호는 수건으로 얼굴을 대충 닦고 벽에 걸어놓았다. “제 보건데 기차역에 가서 더 수사했으면 좋겠습니다.” “뭘?” 소장은 성호한테 김이 몰몰 나는 물컵을 내밀며 눈을 치켜떴다. “강탈사건이 발생한 후 소고기를 외지에 부친 놈이 없는가 수사해보았으면 좋겠습니다.” 파출소 소장은 머리를 끄덕였다. “또 한가지. 려관 주인이 의심됩니다.” 성호의 말에 소장은 주춤 걸음을 멈췄다. “어느 려관 주인?” “매려관 주인.” “뭣 때문에?” 성호는 소장을 마주 바라보면서 무겁게 입을 열었다. “제가 소를 사러 온거 아는 사람은 매려관 주인 밖에 없습니다.” 소장은 한걸음 다가서며 물었다. “매려관 주인과 소를 사러 왔다는 걸 말했댔소?”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럼?” 성호는 물컵을 들어 한모금 마시고나서 뒤말을 이었다. “매려관 주인은 제가 장사하러 온 걸 알 수도 있습니다.” “참, 그럴 듯한데. 자네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가?” “장백산 기슭의 목동출신입니다.” 소장은 도리머리를 젓더니 홱 돌아섰다. “좋소. 돌아가오.” 성호가 파출소에서 나오면서 볼라니 소장은 다른 칸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뒤이어 숱한 경찰들이 소장과 함께 찌프와 자전거에 갈라타더니 어디론가 쏜살같이 달려갔다. 한참 후 경찰들은 빈손으로 돌아왔다. 교활한 날강도들은 기차역에 가서 소고기를 부치지 않았던 것이다. 사복한 경찰들이 매려관방에 가서 몰래 여기저기 살펴보고 려관방 주인의 눈치를 관찰해봐도 털끝만한 단서도 잡지 못했다. 난항을 겪게 돼 수사는 장기화될 가능성이 높게 됐다. 운두라바한은 성호를 보고 “소값을 절반 돌려주겠네. 자네나 나나 그저 재수없다고 생각하면 되오.”라고 하더니 궤짝에서 돈묶음을 꺼냈다. “이러지 마십시오.” 인심이 후한 운두라바한은 기어이 다 받지 않겠다고 고집했다. “우리 몽골족들은 의리를 중히 여기네. 이 돈을 받지 않으면 당장 우리 집을 떠나게나. 사람이 남의 마음을 받아줄도 알아야지.” 성호는 기어이 받으려고 하지 않았다. “지금 급선무는 날강도를 붙잡는 겁니다.” 운두라바한은 주춤 손을 멈추며 잠간 궁리하더니 무겁게 입을 뗐다. “날강도를 붙잡으려면 아마 시간이 걸릴 거 같네. 이걸로 수사경비로 쓰게나.” 운두라바한이 고집하자 성호는 더는 사양할 수 없게 됐다. “그럼 이렇게 합시다. 3천원만 먼저 선대주세요.” “아니, 다 받게. 우리 집에 와서 방목하느라고 수고했네.” 성호는 기어이 3천원만 받았다. “공안국에선 날 보고 매려관방에 가 주숙하면서 날강도들의 행방을 찾아보라고 했습니다. 이 돈을 주숙비와 식비로 잘 쓰겠습니다.” “그래, 진작 그래야지.” 운두라바한은 사막의 풍설에 시달린 얼굴의 주름살마저 쭉 펴지게 웃음을 지었다. 공안국에서는 사복한 경찰들이 매려관에 장기적으로 주숙해 수사할 수 없었다. 그들은 대신 성호를 보내 매려관을 감시하게 했다. “안되네.” “예?” 뜻밖에 운두라바한이 손사래를 쳤다. “생각해보게나. 만약 그 놈들이 강도라면 자네가 나타나면 경계할게 아닌가? 위험하네.” 성호는 머리를 끄덕였다. “예~ 건 생각지도 못했는데.” “이렇게 합세.” 운두라바한이 나섰다. “내 가서 살피면 어떨가?” “아무리 위험해도 제가 가야 합니다.” 성호가 고집을 쓰자 운두라바한은 한참이나 창문가에 서서 바깥의 푸르른 초원을 내다보면서 궁리했다. “됐네!” 운두라바한이 무릎을 탁 쳤다. “어째 생각이 돌지 않았을가? 매려관 뒤집에 내 매형이 있네. 매형집에 가서 주숙하면서 감시하든지 아니면 내 매형을 시켜 감시하게 하든지?” “그게 좋을 것 같습니다.” 해가 지기를 기다려 성호는 운두라바한과 함께 어두운 밤장막을 헤가르면서 운두라바한의 매형 집에 들어갔다. 운두라바한의 누이 운드라나와 매형 우란크한은 성호를 반갑게 맞았다. 애들은 모두 대학을 졸업하고 외지 대도시에서 일한다고 했다. 세칸 벽돌집은 꽤나 널직고 방이 여러개 돼서 성호가 들어 있어도 불편하지 않을 것 같았다. 성호는 그날 밤부터 어둠컴컴한 골목에 숨어서 매려관방 주인 조발귀를 감시하기 시작했다. 이른 봄인지라 새벽녘에는 꽤나 쌀쌀했다. 첫날 밤에는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이튿날 밤 9시만에 뚱뚱하게 생긴 사람 둘이 려관방에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밤중에도 려관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경계심이 든 성호는 발볌발볌 려관방 토성 가까이에 다가가 몸을 훌 날려 토성을 날아넘어갔다. 그는 고양이처럼 울 안에 살짝 날아내려 전등불이 환한 려관방 창문께로 살금살금 다가갔다. 벽에 착 붙어서서 려관방 창문으로 살며시 들여다보았다. 뚱뚱하게 생긴 두 사람은 방 안에서 량 침대에 갈라누워 뭐라고 두런두런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조선말로 대화하는 것 같았다. 성호는 벽에 몸을 찰싹 붙이고 귀를 도사려 방안의 말소리를 들었다. “참 재수없어. 요즘 소장사를 하러 다니는 놈들도 없지. 우린 뭘 뺏아먹고 산다오?” “주인집 령감은 숱한 소고기를 김치움에 숨겨두고 안줘.” “개자식, 정 더럽게 놀면 저 놈부터 털어 먹자.” “얘, 토끼도 굴어귀 풀을 먹지 않는다. 괜히 꼬리 밟히겠어.” “목장에 가서 룡혈말을 둬마리 훔쳐내오면 어떨가?” 순간 성호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날강도들이구나!” 성호는 하마트면 고함칠번했다. 그는 슬금슬금 마당에 있는 김치움에 다가갔다. 덮개에 자그마한 자물쇠가 당그라니 채워져 있지 않겠는가. 그는 사위를 두리번거리다가 품에서 쇠집게를 꺼내 자물쇠 고리를 비틀어 뜯어버린 후 덮개를 슬쩍 열고 김치움에 손쉽게 들어갔다. 손전지로 여기저기 비추었다. “아니!” 성호는 깜짝 놀랐다. 어둑컴컴한 김치움에 엄청 큰 랭장궤가 줄느런히 늘어서 있었다. 랭장궤를 열어보니 언 소고기가 차고 넘치지 않겠는가. 다른 랭장궤도 일일이 열어보아도 몽땅 언 소고기로 채워져 있었다. 성호가 김치움에서 나왔을 때까지도 방 안에서는 계속 두런두런 주고받는 말소리가 들렸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고 듣는다는데. 헛소릴 작작 쳐라!” “별 소릴! 형님, 여기 몽골초원에서 누가 우리 말을 알아듣는답데. 흥!” “전탕 도깨비 궁리만 해? 이제 꼬릴 잡히면 총살당할 판인데. 숱한 돈을 해서 뭘 해? 목숨이 더 커.” “돈이 있어야 살지. 사막에서 누가 공 먹여준대?” “야, 벽에도 귀 있어.” “사람이 한번 죽지 두번 죽소?” “계속 개소릴 치겠어?” “하, 곤하구나. 자자.” 보아하니 그 자들은 형제간 같았다. “오줌이나 누구 자자.” 한 놈이 일어나 복도로 나갔다. 그런데 어디서 본 적이 있는 것 같았다. “아니, 저게?!” 깜짝 놀란 성호는 구새목으로 돌아가 옆구리에서 대화기를 꺼내 들었다. 파출소 몽골소장이 유사시에 쓰라고 준 대화기였다. 그는 어둑컴컴한 울안 주위를 둘러보면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매려관에 쥐가 있다. 속히 출마하라.” “누구얏!” 갑자기 창문이 벌컥 열리면서 뚱뚱한 놈이 뛰쳐나왔다. 성호는 구새목에서 날아나가 그 자를 차넘겼다. 땅! 야무진 총소리가 고즈넉하던 밤정적을 깨뜨렸다. 그 자가 총을 쏘았다. 성호는 몸을 날려 토성 밖으로 날아넘어갔다. “도적이야!” 총을 쏜 자가 고함쳤다. “쳇, 도적이 ‘도적이야’를 고함쳐?” 성호는 두덜거리면서 옆구리에서 비수를 뽑아들고 매려관을 노려보았다. 이때 경찰들이 우르르 뛰여왔다. 파출소 소장은 매려관방 대문어귀에서 성호를 만나 간단히 정황을 들었다. 땅! 땅! “돌격!” 십여명 경찰들은 일제히 대문 안으로 쳐들어갔다. “경찰이야!” “투항하면 관대히 처리한다!” 경찰들은 매려관을 포위하고 고함쳤다. 총을 쏜 자들은 독 안의 쥐 신세로 됐다. 려관방 안에서 고함쳤다. “우리도 경찰이야!” “오해하지 말고 총을 거둬라!”  “경찰?! 그럼 총을 내던지고 나오라!” 파출소 소장은 의아해 머리를 버릇처럼 갸우뚱했다. “그러지. 우린 흑룡강성에서 온 경찰이야!” “뭘 하려고 여기 왔어?” “소도적을 붙잡으려고 왔습니다.” “총은 왜 쐈어?” “웬 수상한 놈이 려관방을 기웃거리다가 오줌 누러 나간 동생을, 아니, 동료를 다짜고짜로  발길로 찼어…” 파출소 소장은 그래도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그래? 그럼 경찰증을 내던져!” “그러지.” 방 안에서 창문을 열고 뭔가 내던졌다. 한 경찰이 창문 전등불빛을 빌어 어둠 속을 헤집고 손바닥만한 종이쪼박을 주어왔다. 소장이 전지불을 켜들고 그 종이쪼박을 찬찬히 보니 소개신이였다. “뭐? 파출소 소장 리봉수와 리성수?” 그는 중얼거리면서 소개신을 재차 확인하였다. 틀림없었다. 공안국에서 떼준 소개신이였다. “오해했군. 미안해.” 파출소 소장은 총을 옆구리에 찔러넣고 뒤를 돌아보았다. “안으로 들어가 봅세.” 경찰들은 총을 거두고 매려관에 들어갔다. 조발귀는 경찰들을 보자 반색했다. “야, 간이 다 떨어지겠어. 밤중에 웬 총소린가 했지.” 소장은 옆에 선 경찰을 보고 뭐라고 귀띰했다. 그러자 그 경찰은 조발귀를 데리고 저쪽으로 갔다. 소장 일행이 매려관방 안에 들어섰을 때 확실히 경찰복을 입은 뚱뚱한 두 사람이 총을 옆구리에 찌른채 서 있었다. 옆구리를 여겨보니 분명 77식자동권총이였다. “당신들은 왜 우릴 진공했는가?” 뚱뚱한 자의 항의에 소장은 “하하하.” 하고 통쾌하게 웃었다. “미안하오. 오해했구만.” “려관 주인이 우릴 파아먹었단 말이요?” “형님! 무슨 말이요? 신고했겠지.” 동생이란 자가 소장한테 물었다. “뭐라고 신고했는가? 온 파출소가 다 출동했구만.” 성호는 자기 추측을 의심하지 않았다. (금방 동료라더니 “형님”, “동생?” “소장사군이 없어 뭘 뺏아먹고 살겠는가?”) 동생인 듯한 사람이 말을 받아 얼렁뚱땅 둘러댔다. “실은 이 근방에서 소강탈사건이 발생했다더구먼. 그런데 들어보니 우리 고장에서 생긴 소강탈사건과 범죄수단이 비슷하단 말입니다. 그런 놈을 잡자면 소장사군이 있어야 미끼를 늘여서 강도들을 잡을 수 있지요.” 형이란 사람이 맞장구를 쳤다. “예~ 그렇죠. 절대 오해하지 마십시오.” “려관방 주인네 김치움에 숱한 소고기가 있다는 건 어떻게 아오?” 동생인 듯한 사람이 대답했다. “어느 하루 김치생각이 너무 나 주인 몰래 가만히 김치움에 들어가 본 적이 있습니다.” “그래?” 소장은 경찰들을 둘러보고 “됐군. 갑세.” 하고나서 그 두 사람을 놔두고 경찰들을 데리고 김치움으로 갔다. 김치움 덮개를 열고 전지불로 비춰보던 소장은 깜짝 놀랐다. 글쎄 지하창고 같은 널다란 김치움에 숱한 냉장고까지 갖춰놓았다. 경찰들이 사닥다리를 타고 들어가 랭장고마다 돌아가면서 문을 열고 보니 숱한 소고기를 무더기로 쌓아둔 것이 아니겠는가. 그들은 모두 입이 딱 벌어지고 말았다. 그들은 려관방 주인 조발귀를 파출소에 련행했다. “아니, 무슨 죄 있다고 이러는가?” “파출소에 가면 알 거요.”  옆에서 흑룡강성에서 왔다는 두 경찰은 시무룩이 웃었다. 조발귀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경찰들을 따라 가면서 자기 집에 들었던 파출소 소장이란 사람을 흘겨보았다. 흘겨보는 그 눈길은 마치 “네 놈들이 뭐라고 고발했지?” 하고 말하는 상 싶었다. 흑룡강성의 두 경찰은 씨무룩이 웃으면서 몽골족소장을 힐끔 곁눈질했다. 그때 어둠의 장막 속에 숨었던 성호가 흑룡강성에서 왔다는 경찰 둘을 찬찬히  뜯어보다가 자기 눈을 의심할 정도로 놀랐다. (아니, 저자가 혹시…) 아무리 재차 눈여겨보아도 맞는 것 같았다. 그는 당지 파출소 소장의 곁에 다가갔다. 그는 소장의 귀에 손을 대고 뭐라고 귀속말을 했다. “뭐라고?” 소장은 흑룡강성에서 온 두 경찰을 보고 뜻밖의 말을 했다. “당신들도 파출소에 가야겠소.” “예?” 의아해하는 두 경찰을 보고 소장은 분명히 말했다. “확인할게 있소.” “뭘?” 그 자는 성호를 쏘아보더니 조선말로 “당신 뭐라고 했기에 이 자들이 이러오? 조선사람끼리 물어먹겠는가?” 하고 따지고 들었다. “귀신은 속여도 날 못 속여. 순순히 쇠고랑이를 차지 못해?” 두 놈은 불찌가 튀는 눈길로 성호를 쏘아보았다. “파출소로 가자!” 소장이 손을 홱 휘두르며 몽골말로 웨치자 몽골족경찰들이 그 자들을 에워싸며 파출소로 련행했다.  조발귀는 억울하다고 꽥꽥 고함쳤다. “무슨 죄 있다고 이래?” “파출소에 가서도 억울하다고 고함치겠는가?” 구경 어떤 놈들인지? 숱한 의문부호가 어둑컴컴한 초원의 하늘에 날아내려 꽂혔다.                                                                                      41. 외나무다리에서 만난 원쑤 무시무시한 공포가 반죽된 칠흑같은 어둠이 해살을 다 갉아먹었다. 달도 어둠에 핥키워 처참하게 반쪽 얼굴 밖에 남지 않았다. 당장 뭔가 폭발할 듯한 위기일발의 순간이 긴장한 심장박동들과 함께 높뛰며 흘러가고 있다. 푸르른 초원으로 부엉이 한마리가 어둠 속에서 깃을 치며 푸드득 날아옛다. 쥐들과 뱀은 질겁해 어둠 속에 숨어버렸다. 그러나 어찌 부엉이의 예리한 눈길을 피할 수 있겠는가! 부엉이는 날카로운 발톱으로 어둠 속에서 할딱거리며 요리조리 도망치는 노랑쥐를 탁 챘다. 또 다른 부엉이가 나무에 기어올라가는 뱀의 허리를 날카로운 발로 탁 채 하늘로 올라갔다. 땅! 땅! 야무진 총소리가 고요한 어둠의 정적을 깨드렸다. 소장이라고 자처하던 자가 불시에 옆구리에서 권총을 뽑아 성호를 쏘았다. 성호는 허리를 굽히며 발길을 날려 권총을 걷어찼다. 그 놈이 재차 성호를 겨누는 순간 경찰들이 쏘았다. 땅! “아이쿠!” 그 놈이 총을 떨어뜨리며 손목을 부여잡았다. 땅! 그 놈이 허벅지를 잡으며 쓰러지더니 재차 총을 쏘았다. 땅! 동시에 다른 놈도 권총으로 몽골족소장을 겨누었다. 그 찰나 경찰들이 욱 몰려들어 그 자들을 사격했다. 그 놈들은 땅바닥에 쓰러져서도 연속 방아쇠를 당겼다. 절컥! 절컥! 그러나 격침소리만 들릴뿐. 몽골족소장은 그 놈을 깔고 들어앉아 권총을 빼앗아냈다. 성호가 잽싸게 덮쳐들어 동생이란 놈의 손목을 꽉 밟고 권총을 빼앗아냈다. 이 두 놈은 어떤 놈들일가? 파출소에 끌려간 그 놈들은 헐레벌떡거리다가도 땅이 꺼지게 한숨을 내쉬였다. “여기까지 쫓아왔어? ‘정의용사’. 허허허. 이런 내몽골 초원에서 네놈을  만날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구나.” 소장이라고 자처하던 놈이 성호를 쏘아보면서 조선말로 한탄했다. “허튼 소릴 작작 쳐. 죄행이나 낱낱이 탄백해.” 성호는 한어로 호통쳤다. 그 놈은 이를 뿌득뿌득 갈았다. “내 저승에서 염라대왕이 돼서라도 네놈을 갈기갈기 찢어놓을 거야.” 성호는 너털웃음을 웃었다. “내몽골초원이 아니라 하늘끝까지 도망쳐봐. 염라대왕도 용서하지 않아.” 몽골족 소장은 경찰들을 보고 두 놈의 몸을 샅샅이 수색하라고 지시했다. 경찰들은 두 놈의 허리춤에서 총알을 촘촘히 박아넣은 탄띠를 수색해냈다. 또 려관에서 숱한 돈묶음을 넣은 가방도 수색해냈다. 몽골족소장은 지명수배령을 꺼내 흉수 초상화와 소장이라는 자의 퉁퉁한 낯을 한참 대조해보고나서 77식권총을 뽑아 사무상에 꽝 내려놓았다. “네 놈들이 바로 YJ시 백화청사에서 살인강탈하고 도망친 날강도놈들이구나.” “뭐라고?” 소장이라는 자가 짐짓 놀라는 척했다. “백화청사 보위 과장 조흥수! 쥐새끼 같은 놈, 껍대기를 벗겨놔도 초원의 매 눈을 속이지 못해. 뭐? 흑룡강성에서 온 파출소 소장? 퉤!” 몽골족소장은 77식권총을 쳐들었다. “이건 어데서?” “…” 몽골족소장의 얼굴에 비웃음이 반죽돼 흘렀다. “조흥수, 비겁하게 놀지 말고 사실대로 탄백해라. 며칠이라도 발편잠을 자라구.” 조흥수는 코방귀를 “흥!” 뀌였다. “자, 어때? 밤도 깊었으니 툭 털어놓고 푹 자게나.” 조흥수는 마른 입술을 감빨더니 입에 꽂은 빗장을 천천히 뺐다. “찬물이나 주게.” “그래!” 조흥수는 경찰이 호로박에 퍼온 찬물을 받아 꿀떡꿀떡 들이켰다. “다리 총상을 처치해주면 말하지.” 몽골족소장은 경찰한테 몽골어로 뭐라고 부탁했다. 이윽고 법의가 들어와 흥수의 총상을 처치했다. “자, 시작하지. 저자는 누군가?” 그 자가 끝내 입을 열었다. “조길수요.” “형젠가?” 조흥수가 대답했다. “내 동생이야. 난 백화청사 살인강탈사건과 관계없네.” “아직도 떼를 쓸텐가?” 몽골족소장은 자리에서 일어나 조흥수한테 다가갔다. “죄 없는 자가 왜 총을 휘둘러? 권총은 어디서 난 건가?” 몽골족소장은 조흥수 낯빤대기에 대고 삿대질했다. “네놈은 권총으로 나하구 조선족증인을 죽이려 했어. 이미 살인미수죄를 졌어.” “흥! 어느 사람이 한번 죽지 않는가? 다만 사내대장부로서 승냥이무리과 멋지게 싸우다 죽지 못하는 것이 한일뿐.” “누가 흉수인가?” 몽골족소장이 아무리 심문해도 조흥수와 조길수는 한마디도 탄백하지 않았다. “참 지독한 놈들이구나.” 경찰들은 조흥수 형제를 류치장에 처넣고 주먹만큼한 자물쇠를 절컥 채워놓았다. 몽골족소장은 두덜거리더니 안방으로 들어가 즉시 상급 공안국에 전화로 사건해명정황을 회보했다. 뒤이어 그는 매려관 주인 조발귀를 끌어냈다. “낱낱이 탄백햇!” “무슨 죄 있다고 이러는가?” 몽골족소장은 조발귀를 쏘아보았다. “김치움의 숱한 소고기는 어디서 난 건가?” 뚱뚱한 조발귀는 벌떡 일어났다. “손님을 대접하려고 사둔 거요.” “누구한테서 샀어?”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왜 그렇게 많이 감춰뒀어?” “감춰두다니? 생 사람을 작작 잡으라고.” “로실히 탄백햇! 소고기 어데서 난 건가?” “아니, 건 확실히 산 거요.” 꽝! “식당도 아닌데 웬 숱한 소고긴가?! ” “눅게 팔기에 샀소. 정말이네.” “소고기를 판 놈들을 대라.” “모를 사람인데 어떻게 대라는가?” 조발귀는 황급히 둘러댔다. “면목 모를 사람이 당신 곱다고 숱한 소고길 눅게 팔아?” 몽골족소장은 사무상을 꽝 치면서 벌떡 일어났다. “누구와 공모해 소를 강탈했어?” “공모했다고? 진짜 생사람 잡네.” 몽골족소장은 태연한 척하는 조발귀의 삐죽한 코대에 대고 삿대질했다. “분명 네놈이 강도무리에 저 조선족청년이 소 사러 간다는 걸 알렸지?” “그날 근본 려관을 떠난 적이 없습니다.” “그래, 아직도 강탈사건이 벌어진 날을 기억할 수 있어?” “난 똑똑히 기억합니다. 믿지 못하겠으면 우리 려관에 가서 조사해보십시오. 려관 명세장에도 똑똑히 적혀 있습니다. 그날 손님이 어찌나 많은지 려관에서 한발자국도 나가지 못하고 뺑뺑 맴돌았댔습니다.” “그래, 날강도들을 불러들였으니까. 손님이 많았을테지.” “아이구, 왜 이럽니까?” 몽골족소장은 손끝으로 조발귀 턱을 쳐들면서 을러멨다. “로실히 탄백해. 아무리 떼를 써도 이 어른께 꼬리를 밟혔어. 강도들 용모파기를 다 기억하는 증인이 둘이나 살아 있어? 이제 면접하면 몽땅 드러날 걸.” 조발귀는 점점 대가리를 숙였다. “어떤가?” 몽골족소장은 하품을 하더니 “에이, 탄백하지 않겠으면 말아. 곤해 죽겠다.”라고 하더니 고함쳤다. “이 놈을 류치장에 처넣게. 관대히 처리받기 싫으면 말라지.” “저 소장님!” “왜?” 조발귀는 뭔가 말할 상 싶었다. 그러나 몽골족소장의 무서운 얼굴이 돌아서는 순간 침을 목구멍으로 꿀꺽 삼켰다. 몽골족 소장은 “총살당하고 싶으면 그만둬.” 하고 끌어내라고 손짓했다. 조발귀는 흘끔 몽골족소장을 훔쳐보더니 류치장으로 순순히 들어갔다. 그날 밤으로 수사대대에서 수사대원들이 달려왔다. 한어와 몽골어가 뒤섞여 들렸다. 몽골족소장한테서 회보받은 수사대대 지도부에서는 정황을 분석하고 성호와 테무치가 제공한 강탈범들의 용모파기에 근거해 모이초상화를 그린 후 수사대원들과 파출소 경찰들에게 나눠주고 구체적인 수사임무를 포치했다. 수사범위는 축소돼 조발귀 친척과 친구들 그리고 그와 사회관계가 있는 자들한테로 집중됐다. 다른 한편 수사대원들은 류치장에서 백화청사 특대살인강탈참사 중요 혐의자 조흥수와 조길수를 압송해 감옥에 처넣었다. 그들은 YJ시 공안국에 통지해 조흥수와 조길수를 이송하기로 했다. 이튿날 아침, 푸르른 초원에 아침해가 어둠을 불사르며 불끈 솟아올라 대지에 밝은 해살을 눈부시게 비추었다. 몽골족소장과 경찰은 우전국에 가서 참사발생 당날에 매려관의 전화와 통화한 전화번호부터 일일이 장악했다. 이웃 맹에서 걸어온 전화가 제일 많았다. 수사초점은 즉시 이웃 맹에로 집중됐다. 그들은 이웃 맹공안국 협조하에 즉시 자그마한 진에 있는 그 전화의 주인을 찾아냈다. 천라지망이 범죄혐의자들을 점점 조여갔다. 몽골족대대장은 새로운 정황에 근거해 직접 조발귀를 심문했다. “탄백햇! 우린 모든 증거를 장악했다.” “모르오. 소고기를 샀을뿐이라니까.” 조발귀는 퉁퉁한 낯빤대기마저 바위돌처럼 땅땅 굳어 있었다. 그는 낯빤대기 수수떡처럼 지지벌개서 단마디에 딱 잡아뗐다. “리귀, 칭키싸치, 마룡, 잘 알지?” “예?!” 조발귀는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기까지 했다. “앉엇!” 몽골족대대장은 날카로운 심문의 비수를 찔렀다. “리귀랑 몽땅 탄백했네. 아직도 생떼를 쓸텐가?” 조발귀는 낯에 흐르는 식은 땀을 쓱쓱 닦았다. 무릎 우에 놓은 두 손이 사시나무 떨듯 했다. “왜 탄백하지 않는가? 한평생 감옥에서 징역살이를 하겠는가? ” 조발귀는 땅바닥에 넙쩍 꿇어앉았다. “죄다 탄백하겠습니다. 관대히 처리해주십시오.” 조발귀는 개기름이 번드르한 퉁퉁한 낯빤대기에 돋은 식은땀을 팔소매로 연신 닦으면서 탄백하기 시작했다. “사실 난 소떼를 직접 강탈하진 않았습니다. 살려주십시오.” 조발귀는 리귀랑 나포됐다는 말에 탄백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나는 우리 려관에 온 조선족청년이 별로 큰 장사군인 것 같아 강탈할 궁리를 했습니다. 때마침 외사촌동생 마룡과 그의 친구들인 칭키싸치와 리귀가 찾아왔댔습니다. 그들은 술만 처마시면 시내에서 싸움질이나 하는 건달들입니다.  우리 려관에 진 주숙비와 식사비라도 받자고 그들을 보고 성호 뒤를 밟아 강탈하면 어떤가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 셋은 초원으로 가는 성호를 미행해 강탈했습니다.” 조발귀는 여기까지 말하고 두 손을 싹싹 빌었다. “장관, 제발 살려주십시오. 난 진짜 강도질하지 않았습니다. 마룡을 보고 소떼만 빼앗고 절대 성호랑 죽이진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잖으면 성호 지금까지 살아있었겠습니까?” 소뿔은 당긴 김에 빼라고 이때라고 몽골족대대장은 다잡아 심문했다. “숱한 소고기를 어디로 빼돌렸는가?” “예, 예, 다 탄백하겠습니다.” 조발귀는 입이 터진 바에 낱낱이 탄백했다. “나는 숱한 소를 통채로 팔면 꼭 꼬리를 밟힐 것 같아 그날 밤으로 몽땅 잡아서 고기만 자동차에 실어 왔습니다. 일부는 려관 김치움에 감췄고 나머진 몽땅 마룡이네 집에 실어갔습니다.” “적토마는 어쨌는가?” 몽골족소장의 심문에 조발귀는 속임없이 탄백했다. “마룡이 제 집으로 끌어갔습니다. 룡혈말은 우리 소를 잡는 새에 달아났습니다.” 조발귀는 한숨을 후~ 내쉬였다. “더 탄백할게 없는가?” 조발귀는 몽골족대대장을 흘끔 쳐다보면서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없습니다.” “탄백하지 않은 죄행이 있으면 낱낱이 탄백해라.” “예, 예.” 조발귀는 류치실에 끌려갔다. 몽골족대대장은 사무실에 돌아가 즉시 이웃 맹공안국에 전화로 강탈범죄혐의자 리귀와 마룡, 칭키싸치 등의 죄행을 통보했다. 며칠 후이웃 맹공안국의 협조하에 경찰들은 강탈범들을 몽땅 나포했다. 심문한 결과 조발귀의 탄백과 똑 같았다. 뒤이어 경찰들은 그 자들의 집에서 아직도 팔다 남은  소고기를 들춰냈으며 마룡이네 집에서 적토마도 찾아냈다. 강탈범들인 조발귀, 마룡, 리귀, 칭키싸치를 기다리는 것은 인민법률의 호된 엄벌뿐이였다. 성호는 시내 미술가게에 가서 축기를 만들어 형사수사대대와 파출소에 각각 드렸다. 그 축기에는 몽골어와 조선어로 다음과 같은 금빛 글발이 새겨져 있었다.   인민 위해 날강도들을 나포해 인민경찰의 위엄을 만천하에 떨쳤네   성호는 강운룡 과장의 귀띰을 듣고 당지 법원에 조발귀, 리귀, 마룡, 칭키싸치 등을 상대로 손해배상에 관한 민사소송을 제기했다. 당지 공안국에서는 백화청사 살인강탈사건과 소강탈사건을 해명하는 전역에서 중대한 공훈을 세운 리성호에게 “정의용사” 상패를 수여했다. 당지 법원에서는 또 다음과 같은 판결을 내렸다. “…강탈범 조발귀, 리귀, 마룡, 칭키싸치는 성호에게 손해금 도합 1만 5천원 배상해야 한다”. 법원에서는 강탈범들의 려관과 집을 강제판매해 일주일도 안돼 성호의 손에 배상금을 쥐워주었다. 법원에서는 또 강탈범들에게 각각 집단강탈형사범죄에 대한 상응한 징역형으로 엄벌에 처했다. 당시 이름이 더럽혀진 매려관을 사려는 사람이 인차 나지지 않아 운두라바한이 선뜻이 나섰다. 그는 성호를 보고 말했다. “이젠 소나 양만 키워선 살기 어려운데 려관방을 사야겠네. 쑤싼나 대학을  나오면 고향에서 려관이나 경영하게 할 예산이네.” 때마침 방학이기에 쑤싼나가 고향 초원에 돌아왔다. 그녀는 생글방글 웃음꽃을 피우면서 기뻐 어쩔줄 몰라했다. “오빠, 이담 우리 초원에 또 놀러 오세요. 그땐 저의 려관에 잘 모실게요. 따끈따끈한 쑤유차도 드릴테요.” “감사해.” 성호도 운드라바한을 돌아보더니 통큰 속셈을 내놓았다. “이러면 어떻습니까? 제가 려관에서 나온 배상금으로 소를 더 사겠습니다.” “또?” “예. 난 이번  걸음에 꼭 소를 사다가 성공하고 싶습니다. 그래야 고향에 계시는 부모형제들과 마을사람들을 볼 면목이 있을 거 같습니다.” “그래, 그럼 서로 좋지.” 성호는 수사비용으로 받았던 3천원에 감사비로 천원도 운두라바한한테 돌려주었다. “아니, 이거 되받을 수 없어.” “감사합니다. 정말 이번에 아저씨 일가가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사건을 해명하는 날을 보지 못했을 겁니다.” 성호는 운두라바한 일가에 진심으로 우러나오는 감사를 드렸다. “이담 우리 고향에 놀러 오십시오. 꼭 장백산을 구경시켜드리고 싶습니다.” “감사하네.” 이튿날 성호는 룡혈말을 타고 운두라바한 일가와 함께 소떼를 몰고 역으로 나갔다. 당지 공안국에서 나서서 화물차바곤을 미리 련계해 주어 아주 손쉽게 30여마리 소를 화물차에 부쳐보낼 수 있게 됐다. 성호는 눈물이 글썽해 운두라바한과 악수를 나누었다. “이제 갈라지면 언제 다시 보겠는가?” 운두라바한의 말에 성호는 뜨거운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꼭 만날 날이 있을 겁니다.” 그는 량손으로 쑤싼나와 테무치의 손을 꼭 잡고 흔들었다. “꼭 우리 고향에 놀러오너라.” 성호는 품 속에서 비수를 뽑아 테무치한테 주었다. “기념으로 받아라. 이 비수를 보면 날 보는 것과 같아.” “감사하오. 형님.” 테무치는 성호의 손을 잡고 놓을줄을 몰랐다. 쑤싼나는 쌍까풀눈에 글썽했던 눈물을 외씨같이 걀죽한 얼굴에 주르르 흘리면서 새하얀 하다를 성호의 목에  걸어주었다. “오빠, 우리 초원을 잊지 마세요. 아주머님이 얼마나 속이 탔겠어요. 아주머님한테 우리 몽골족일가의 문안을 전해주십시오.” “그래. 조선족청년의 절을 받으십시오.” 성호는 운두라바한 일가를 향해 태산이 무너지듯 넙쩍 엎드려 절을 꾸벅 올렸다. 초원의 풍설에 부대껴 터실터실한 주름살이 밭고랑같이 깊이 패인 운두라바한의 자애로운 얼굴을 바라보며 마음이 찡해나 뜨거운 눈물로 두 볼을 적셨다. 룡혈말에 오른 성호는 귀로에 올랐다. 그는 눈덮인 초원에 왔다가 반년 넘어 록음이 짙은 푸르른 초원을 떠나게 됐다. 푸르른 초원의 하늘을 훨훨 날아예는 매를 방불케 하는 운두라바한, 그의 깊은 은정과 의리에 저으기 감동됐다. 쑤산나와 테무치, 운두르바한은 룡혈말을 타고 먼지를 뽀얗게 흩날리면서  달려가는 성호가 흑점으로 돼 아물거릴 때까지 손을 저었다. 푸르른 초원을 배경으로 성호와 쑤싼나 일가의 석별의 정이 무더위를 부시면서  빛나고 있었다. 푸른 초원으로 매가 나래를 쫙 펴고 푸르른 하늘을 헤가르며 훨훨 날아가고 있었다.           
171    대하소설 진달래 소야곡(20) 댓글:  조회:1382  추천:0  2018-07-30
                         38. 백화청사의 참사 선들선들 가을바람이 불던 가을이 흘러지나가자 대지를 꽁꽁 얼궈버리는 동장군이 기승스레 휘몰아치는 눈보라를 등에 업고 사납게 덮쳐왔다. 승호는 범송을 시켜 겨울철에 잘 팔리는 동복을 백화청사에 구입해 오게 하고 조흥수와 함께 아가씨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질탕하게 놀았다. 조흥수는 승호한테  진짜 푹 삶겨서 삶은 개다리처럼 문문하게 돼버렸다.  안수련 총경리는 한눈을 뜨고 한눈을 감아버렸다. 그녀는 흥수와 승호가 자기 앞의 일만 다하면 사무실에 엉덩이를 붙이지 않아도 괜찮다고 여겼다. 어떤 직원들은 안수련 총경리야 말로 시대를 따르는 인성화된 관리리념을 가진 훌륭한 관리일군이라면서 녀시장을 해도 될 분이라고 춰올렸다. 조흥수와 리승호는 안총경리가 눈을 감아주는 틈을 타서 고삐를 끊은 들말처럼 아가씨들과 함께 술에 곤드레만드레 취해 돌아다녔다. 직원들은 뒤에서 의론이 분분했다. “조과장과 리과장은 세상 상팔자야.” “날마다 술만 처마셔도 로임은 로임대로 타지. 얼마나 좋겠어?” “상금도 누구보다 더 많이 타잖아.” 춘란은 뒤공론을 들으면서도 못들은 척했다. 그녀는 조흥수한테 꼬리를 밟혀 보기만 해도 소름이 끼쳤다. 교활한 조흥수는 춘란의 꼬리를 밟고서도 안수련 총경리나 공안국에 사건을 진상대로 보고하지 않았고 한사코 춘란을 비호하였다. 비록 안수련 총경리의 신고로 수사대대에서 착수했지만 춘란의 저금통장에 나타난 1500원만으로는 절도혐의자라는 증거가 부족했다. 법망의 시야에서 잠시 벗어난 춘란은 대신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했다. 조흥수는 쩍하면 그녀를 은밀히 불러내 질탕하게 유린하고 릉욕했다. 어느날, 조흥수는 춘란을 보고 퇴근하면 이전에 만났던 선녀음식점에서 만나자고 했다. 조흥수는 필경 반정탐능력을 가진 파출소 소장출신이기에 매사에 신중했다. 그녀는 아가씨들을 데리고 놀아도 선희나 해연과는 순희네 불고기점에 데리고 가서 망탕 놀아댔고 춘란과는 항상 선녀음식점 단칸방에서 은밀히 만나 놀군 했다. 춘란은 이젠 출납이고 뭐고 다 팽개치고 백화청사를 훌 떠나고 싶었다. 그러나 알맞는 일자리가 없어 아직 떠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왜 이리 늦었어?” 춘란이 선녀음식점 단칸방에 들어서자 조과장은 눈알을 희번뜩거리며 화부터 냈다. “미안해요. 현금을 금고에 가져가다나니….” “그래? 여기 와 앉어.” 조과장은 춘란의 엉덩이를 끌어당겨 자기 무릎에 앉히더니 와락 끌어안았다. 춘란은 독사한테 휘감긴듯이 온몸이 오싹해나고 몸서리쳤다. 그러나 용빼는 수가 없어 눈을 지그시 감고 잠자코 있었다. “날마다 현금을 금고에 가져가야 되냐?” 조과장의 손은 너절하게 춘란의 몸을 오르내렸지만 왕청 같은 말을 꺼냈다. “그래요. 안총경리는 아직도 저를 믿어요.” “다 뉘 덕인지 아느냐?” 똑똑똑. 노크소리가 들리자 조과장은 제꺽 춘란을 옆여 내려놓았다. 복무원이 들어오자 조과장은 메뉴를 춘란한테 주면서 먹고 싶은 채를 주문하라고 했다. 조과장은 춘란이 푸짐히 차린 술상에 마주 앉아 게걸스레 개다리를 널었다. “요즘 용돈이 다 떨어졌어.” 춘란은 소고기점을 집어 조과장의 접시에 놓아드렸다. “저의 로임 다 줬는데 벌써 다 써버렸어요? 이젠 생활비도 남지 않았어요.” 조과장은 춘란한테 빚이나 지워준 것처럼 목에 지렁이 같은 피줄을 세우면서 을러멨다. “뭐라고? 어째 감옥에 가고 싶어?” “감옥에 가면 뭐래요?” “진짜?” “지금 신세, 감옥의 죄수보다 나은게 뭔가요?” “뭐, 어쩌고 어째? 이 년이 점점 목주래를 뽑힐 소릴 줴치는구나.” 춘란도 물러서지 않았다. “대가를 적게 치렀어요? 용돈이라고 5천원을 줬지. 처녀 몸까지 다 바치지 않았는가요? 그래도 모자라는가요?” “쉿-” 조과장은 문께를 힐끔 곁눈질하며 입에 식지를 댔다. “왜? 겁나요?” “이년이 이게.” 조과장은 황급히 손으로 춘란의 초들초들한 입을 마구 막았다. “어째 총살맞고 싶어?” 춘란은 차라리 총살맞고 죽고 싶다고 말하려는데 입을 틀어막아 말하지 못하고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이윽고 손을 떼자 춘란은 울며불며 야단쳤다. “의심돼요.” “뭐?” 조과장은 술맛이 없어 술잔을 탕 놓고 눈을 뚝 부릅뜨고 쏘아보았다. 춘란의 얼굴에서는 전례없이 겁기라곤 티끌만치도 찾아볼 수 없었다. “석탄무지에 파묻어둔 8500원이 잃어진게 이상해요. 혹시 조과장이  가져간 건  아닌가요?” “이년이 이게, 환장했어? 도적이 도적이야 한다고 지금  절도범 신세에 본 보위 과장을 의심해? 정말 죽고 싶어?” “차라리 죽여요. 이렇게 사는게 죽는 것보다 못해. 씨, 우리 엄마 불쌍해 죽지 못한다.” 조과장은 이젠 감옥이나 총살 따위 위협이 춘란한테 잘 들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됐다. 사선에서 헤매며 모진 마음을 먹은 춘란한테는 진짜 위협 따위가  무색해지고 있었다. 그날 조흥수 과장은 술을 석잔도 마시지 않고 난생처음으로 자기 호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밥값을 냈다. 춘란도 털끝 하나 다치지 않고 놓아주었다. 춘란은 독사 같은 조과장과 갈라지자 마음이 홀가분했다. 그러나 인차 마음이 불안해지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조과장의 반상적인 거동이 그녀를 섬찍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인차 승호를 불렀다. 승호는 영희한테 청가까지 맡았다. “춘란이 무슨 급한 일이 있소?” “호호호. 별 일 다 보겠어요.” 영희는 손으로 입을 가리면서 웃었다. 승호는 영희한테 다가가 “이제 춘란을 리용해 조과장 꼬리를 단단히 밟아야겠소.” 하고 으시댔다. 영희는 음험한 승호를 가슴츠레한 실눈으로 바라보았다. “또 누굴 잡으려고 그래요?” “이 세상은 양육강식이야. 우리 가정을 깡패들의 마수에서 보호하려면 조과장의 권총을 내가 빼앗아 차야 해.” “딱 그래야만 하나요? 어째 조과장과 의형제라도 맺고 도움을 받지 못해요. 못난 짓을 하지도 마세요.” 승호는 구두를 썩썩 닦아 쑥 꿰면서 너스레를 떨었다. “아녀자들이란 참,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른단 말이요.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는 걸 몰라? 깡패들이 갑자기 들이닥치면 언제 조과장이나 경찰을 부를 새 있소? 내 손에 권총이 있어야지.” 영희는 도리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맨날 깡패들한테 쫓기워 쩍 하면 이사짐을 사가지고 온 시내를 전전긍긍하면서 피난살이를 해야 했다. 떠돌이신세, 세집살이신세 진짜 신물이 났다. 승호는 집문을 나서며 군례까지 척 붙이면서 희극을 놀았다. 영희는 한숨을 호~ 내쉬며 물끄러미 남편을 목송했다. 승호는 종종 춘란을 만나 위로해주면서 조흥수 뒤를 파서 꼬리를 좀 밟게 됐다. 그는 조과장의 권총을 빼앗아 옆구리에 차게 될 날이 멀지 않은 것 같아 속으로  웃음주머니 흔들흔들해났다. 그는 조용한 다방에서 춘란을 만나자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어떻게 됐소?” 춘란은 승호한테 커피잔을 내밀며 수척해진 보름달얼굴에 새무룩이 웃음을 띠었다. “오빠 시켜준대로 죽음으로 위협하니까. 돈 달란 말도 더 하지 못하잖겠어요.” 승호는 한숨을 후~ 땅이 꺼지게 내쉬였다. “보오. 내 말이 맞지?” 춘란은 머리를 끄덕였다. “그 놈은 이젠 감옥이나 총살로 더 협박하지 못할거 같아요.” 승호는 춘란한테 주의를 주었다. “시름놔선 안돼. 조과장은 얼마나 음흉한 놈이라고. 이제 무슨 짓을 할지 몰라.” 춘란은 대수로워 하지도 않았다. “흥! 이젠 진짜 악이 나요. 생사결판을 내고 싶어요.” 승호는 춘란의 손을 잡고 매만지면서 충고했다. “이 좋은 세상에서 왜 죽겠소. 우릴 못살게 구는 자들을 먼저 제거하고 우리 잘 살아야지.” “어디 그리 쉽겠어요?” “날 믿소. 꼭 조과장을 제거하고 춘란을 보호해주겠소.” “몇번이고 역에 달려가서 기차 앞에 뛰여들려고 했어요. 오빠가 때때로 삶의 용기를 주지 않았더라면 진작 죽고말았을 거예요.” 승호는 이제 돈줄이 끊어진 조흥수가 무슨 짓을 할가 궁금했다. 이튿날 승호는 구입과에 들려 범송한테 일을 시켜놓고는 곧추 보위과로  건너갔다. 조흥수 과장은 금방 순라를 마치고 들어와 커피를 후후 불면서 마시고 있었다. “형님, 어제 또 술에 푹 절었겠구만.” 조과장은 푸석푸석한 얼굴을 매만지더니 손사래를 쳤다. “아니, 어젠 재수없이 한잔도 마시지 못했어. 술좌석에 동생이야 빼놓았을리 있나?” 승호는 속으로 웃었다. “용돈이 다 떨어졌소? 오늘 내 한턱 내지.” 조과장은 손수 커피를 타서 승호한테 내밀었다. “우리 형제간에 무슨 네 것 내 것 할게 있나? 속담에 담배와 술은 주인이 따로 없다고 하잖았는가?” 그들이 막 떠나가려고 할 때였다. 안수련 총경리가 보위과에 들어왔다. “오, 리과장이 여기 있구만. 내 사무실에 올라오오.” 승호가 뒤따라 사무실에 들어가자 안총경리는 손수건으로 안경을 닦아 끼더니 자못 엄숙하게 말했다. “리과장, 맨 동복만 구입하고 털모자랑 장갑이랑 구입하지 않아 되겠소?” 승호는 대수롭잖게 대답했다. “지금 시내 사람들이 누가 촌스럽게 털모자를 쓰고 다닙니까?” “농촌 사람들은 털모자를 사러 우리 백화에 올게요.” “차차 봅시다.” “뭐나 미리 준비해야지. 손님이 사러 오길 기다려서야 되오?” 그녀는 전에 없이 엄숙했다. “총경리실에 오오.” 안총경리가 문을 열고 나가려고 할 때였다. 갑자기 구입과 쪽에서 우당탕 퉁탕 메치고 깨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리과장 어디 갔어?” “개새끼, 우리 식료품상점을 망하게 했어.” “죽여버리겠다!” 승호가 황급히 안수련을 사무실 안 쪽으로 밀어보냈다. “피하십시요. 여긴 위험합니다.” “아이고, 깡패들이구나!” 안총경리는 승호 뒤에 숨으면서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금심하지 마십시오.” 승호가 주저없이 막 문을 떠밀고 나가려고 할 때다. 조과장이 승호를 막아나서더니 허리춤에서 권총을 빼들고 바깥으로 쏜살같이 뛰쳐나갔다. “이 놈들아!” 조흥수 과장이 쇠파이프를 휘두르는 괴한들한테 권총을 겨누었다. “어허, 총을 겨눠?” “죽고 파?!” “삐치지 말라!” “썩 꺼져!” 조과장의 권총 앞에서도 그 자들은 전혀 겁나하지 않았다. “어디 쏴봐라!” 괴한들은 쇠파이프로 손을 탁탁 치면서 다가들었다. 이때 범송과 구입과 일군들이 우르르 쓸어나왔다. 범송은 쇠파이프를 든 깡패들을 보자 질겁해 뒤로 비실비실 물러섰다. “승호 새끼, 나오라!” 이때 승호가 문 밖에 나서려고 했다. 범송은 문을 닫아 걸었다. “나오지 말라. 깡패들이야!” 허나 승호는 문을 박차고 나갔다. “도대체 무슨 일인가?” “저 놈이 승호 새끼다!” “쳐라!” 깡패들은 다짜고짜 쇠파이프를 휘두르면서 야수들처럼 덮쳐들었다. 그 속에는 코수염쟁이와 하이칼라들이 피뜩피뜩 띄였다. “송파네 개무리구나.” 승호는 싸울 태세를 갖추며 뒤로 한걸음 물러섰다. 땅! 조과장의 공중에 쳐든 권총구멍에서 연기가 몰몰 피여올랐다. “쳐라!” 깡패들은 쇠파이프를 휘두르면서 조과장과 승호를 포위하고 죄여들었다. 범송은 문 뒤에 숨어 얼음판에 나선 황소 눈깔로 내다보며 어쩔줄 몰라했다. 그는 근본 이런 싸움을 겪어보지 못해 겁나 벌벌 떨기만 했다. “범송아, 빨리 공안국에 알려라!” 그제야 정신을 펄쩍 차린 범송은 전화를 치러 뛰여들어갔다. 깡패들이 쇠파이프를 휘두르면서 구입과에 뛰여들어 전화기를 드는 범송에게 덮쳐들었다. 휙- 쇠파이프가 범송의 머리를 후려쳤다. 범송은 허리를 굽혀 피하면서 그 놈의 품에 머리를 틀어박고 팔을 사타구니에 넣어  건뜩 들어메쳤다. 다른 놈이 범송의 잔등을 쇠파이프로 탕 내리쳤다. “억!” 범송은 허리를 얻어맞고 쓰러졌다. 다른 구입원이 그 놈을 책상으로 내리깠다. 그 놈은 쇠파이프를 쥔 채 푹 꼬끄라졌다. 보위과에 숨은 안수련 총경리가 떨리는 손으로 공안국에 전화를 쳤다. 보위간사들이 우르르 뛰여왔다. “꼼짝 말엇!” “까딱하면 쏜다!” 조과장은 간사들과 합세하며 우쭐해 고함쳤다. 괴한들은 총구 앞에서도 승호를 쇠파이프로 후려겼다. 승호는 몸을 날려 피하며 한 놈을 차넘겼다. 그러나 얼마 지탱하지 못하고 무리 승냥이같은 깡패들이 휘두르는 쇠파이프에 맞아 비명을 지르면서 콩크리트바닥에 쓰러졌다. 백화청사는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판매원들은 질겁해 비명을 지르며 매대  밑에 납짝 엎드렸다. 땅! 조과장은 승호한테 쇠파이프를 휘두르는 괴한의 다리를 쐈다. 그 놈은  쇠파이프를 떨구고 썩박나무 넘아가듯이 쓰러졌다. 뒤이어 순라대대 경찰들과 엄충렬을 비롯한 보위간사들도 뛰여왔다. 땅! 엄충렬이 허공에 총을 쏘았다. 깡패들은 겁을 집어먹고 도망쳤다. 엄충렬이 도망치는 코수염쟁이를 안 걸이를  걸어 쓰러뜨렸다. “개새끼!” 코수염쟁이는 벌떡 일어나며 쇠파이프를 주어들어 충렬의 머리를 내리쳤다. 엄충렬이 옆으로 홱 피했다. 그러나 어깨를 쇠파이프에 빗맞고 쓰러졌다. 코수염쟁이 재차 내리치려고 하는 위기일발의 순간이였다. 승호가 씽 날아오가면서 발길을 날렸다. “어이쿠!” 코수염쟁이가 목을 붙들며 쓰러졌다. 쟁그랑! 쇠파이프가 저만치 뿌리여나가 콩크리트바닥에 떨어졌다. 엄충렬이 뛰여와 코수염쟁이 손목에 쇠고랑이를 채웠다. 승호는 반주검이 됐다. 다리뼈와 왼팔뼈가 부러졌고 두개골절도 당했다. 사 후에  여겨보니 조과장도 쇠파이프에 머리를 맞아 터졌던 것이다. 결국 조과장과 승호는 병원신세를 지지 않으면 안됐다. 며칠 후 덜 상한 조과장이 먼저 출원하게 되였다. 승호는 침대에 누운 채 조과장 손을 잡고 발라맞췄다. “형님, 형님의 은공은 평생 잊지 않겠소. 이제 출원하게 되면 한잔 마시기요.” 조과장은 승호의 손을 꽉 잡았다. “형제끼리 무슨 말? 이제 돈이 생기면 술이나 한잔 마시자. 손에 쥔게 없으니 사는 멋도 없구나.” 승호도 맞장구를 치면서 속뽑이를 해보았다. “돈이 있어야 주색을 밝히지.” 조흥수는 불평을 토로했다. “보위과에 무슨 돈이 있니? 목숨 걸고 싸워도 돈은 생기지 않아. 못된 안경리 어디 돈을 주니?” 그는 한숨을 후~ 내쉬더니 나가버렸다. 승호는 간사하게 미소를 지었다. (조과장, 당신은 꼭 무슨 일을 칠 사람이요. 돈이 없으면 선희, 해연이, 숱한 아가씨들이 계속 줄줄 묻어다니겠소? 춘란을 협박해 돈을 얻어쓰더니 이젠 어쩔 셈인가? 흥!) 승호는 완전히 양가죽을 쓴 음흉한 승냥이 몰골을 드러내며 교활한 미소를 지었다. 며칠 후 백화청사에서 온 시내 뒤흔든 살인 강탈 참사가 발생했다. 춘란이 퇴근시간에 백화청사 지하주차장에서 둔기에 맞아 쓰러졌고 현금 5만원을  강탈당했다. 보위간사 엄충렬도 출납원 춘란을 호위하던 중 둔기에 맞아 피못 속에 쓰러져 숨을 거두었다. 그날 춘란과 엄충렬은 종업원들의 로임을 내주고 나머지 돈을 은행에 가져다 저금하려다가 참살당했다. 보위과 간사들이 저녁에 순라하다가 지하주차장에서 머리가 피투성이 된 채 쓰러진 김춘란과 엄충렬을 발견하고 병원에 긴급 호송했다. 엄충렬은 이미 심장박동을 멈췄기에 사체실에 옮겨졌다. 춘란은 구급을 거쳐 산소관을 코구멍에 꽂고 간신히 숨만 붙어있는 상태였다. 안수련 총경리는 즉시 조흥수 과장을 사무실에 불렀다. “보위과에서 뭘 했소? 우리 백화청사에서 이런 참사가 다 생기다니? 원, 며칠 전엔 승호를 죽이겠다고 깡패들이 뛰여들더니 이번엔 살인강탈을 해?” 조과장은 뒤더수기를 썩썩 긁으면서 안총경리 눈치를 흘끔 살폈다. 안총경리는 사무상을 꽝 치면서 일어났다. “뭘 했는가? 우리 백화청사가 범행현장이 돼버렸단 말이요.” “예, 다 제 잘못입니다. 조사해봅시다.” 조흥수 과장은 목구멍으로 기여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하며 머리를 숙였다. “안돼! 즉시 수사대대에 신고해야겠소.” “우리 보위과에서 먼저 내부수사를 한 후에 보고해도 늦지 않습…” “싹 걷어치우오. 전번에 절도사건을 내부수사해서 어떻게 됐소?” 안총경리는 황급히 전화 다이얄을 돌렸다. “수사대댄가요? 예? 강과장, 우리 백화상점에 살인강탈사건이 생겼습니다. 예? 이미 알고 계신다고요? 수사하러 이미 왔다고요.” 똑똑똑. 노크소리가 들렸다. 안총경리가 머리를 들어보니 강운룡 과장이 수사대원들을 데리고 들어섰다. 강과장은 안총경리와 조과장에게서 사건 정황을 먼저 료해했다. (춘란이 살아나면 이 사건을 해명하기 퍽 쉬워질 거야.) 강과장은 수사대원 2명을 병원 구급실에 보내 춘란의 신변을 보호하게 했다. “함께 갑시다.” 조과장이 수사대원들과 함께 가려고 했다. “아니요.” 강운룡 과장은 조과장을 보고 “나와 함께 사건 현장에 가보기요.” 하고 지하주차장으로 떠났다. 조흥수 과장은 하는 수 없이 강과장과 수사대원 둘을 따라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갔다. 강과장과 수사대원들은 사건현장을 세심히 수색했다. 강과장은 어두커니 서 있는 조홍스 과장을 돌아보면서 물었다. “강도가 쓴 흉기는?” “춘란과 충렬은 모두 둔기에 맞은 것 같습니다.” 강과장은 머리를 끄덕이더니 또 물었다. “무슨 둔기?” “글쎄. 쇠파이프 같습니다.” “흉기를 발견했소?” “아니, 아닙니다. 추측입니다.” 사건현장은 지하주차장 입구에서 썩 구석진 곳에 들어가 있었다. 지하주차장에는  차 몇대 없었다. 백화상점 입구는 전문관리일군이 당직실에서 지키고 있었다. 강과장은 입구 당직실에 가서 관리일군에게 “그날 여기로 수상한 사람이 들어오는 걸 보지 못했습니까?” 하고 물었다. 관리일군은 “본 적이 없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분명 자리를 비운게지.” 조과장의 말에 중년관리일군은 두 손으로 손사래를 쳤다. “아닙니다, 아니. 난 자리를 딱 지켰습니다. 사건신고도 내 제일 먼저 보위과에 했습니다.” 조과장은 벌컥 화를 냈다. “그럼 강도가 지하주차장으로 날아들어왔겠는가!” 관리일군은 입을 짝 벌리고 더 할 말이 없었다. 한참 후 관리일군은 “그날 위생실로 간 적은 있습니다.” 하고 덧붙였다. “주차장 안에 위생실이 없소?” “없습니다. 백화청사 2층에 위생실이 있습니다. 위생실에서 내려와 보니까. 춘란과 충렬이 피못 속에 쓰러졌습디다.” “그날 드나든 차량번호를 등록한게 있습니까?” “예, 날마다 적어둡니다.” 강과장은 머리를 끄덕였다. 수사대원은 등록명세장을 받아 서류가방에 넣었다. 그는 춘란과 충렬이 맞아 쓰러진 피흔적이 즐벅하게 남은 자리에 가서 무릎을 꿇고 앉았다. 조과장은 뒤따라가면서 상을 찌프리면서 도리머리를 절레절레 가로 흔들었다. “관리일군을 바꿔야겠습니다. 림시공이 돼 그런지 제대로 지키지 못한단 말입니다.” “보위과에선 뭘 하고 림시공을 다 썼소?” 강과장의 책망에 조흥수 과장은 뒤더수기를 썩썩 긁었다. “다 제가 소홀한 탓입니다.” “련속 형사사건이 생길 때까지 보위과에서 뭘 했소?” “다 제가 경비를 소홀히 한 탓입니다.” 강과장은 조흥수 과장이 오늘처럼 자기 잘못을 뉘우치는 것을 처음 보았다. 이전에 공안국에서 내부보위회의를 할 때면 조흥수 과장은 파출소 소장이나 했다는 밑천을 믿고 강운룡 과장의 앞에서 책상에 걸터앉아 다리를 건들거리면서 항상 아는 척하며 앞찔러 이렇쿵저렇쿵 떠들어대군 했다. “주차장에 다른 입구는 없소?” 조흥수 과장은 인차 “있습니다.” 하고 일어서면서 한쪽 구석으로 데리고 갔다. 주차장 좁은 복도로 들어가 백화청사 안으로 통한 승강기가 있었다. 강과장은 수사대원들을 보고 사건현장을 계속 수사해 촬영하게 하고 조과장을 데리고 승강기를 타고 올라가 보았다. 강과장은 강도가 이 승강기로 들어갔을 가능성도 있다고 인정했다. 그러나 돈을 강탈한 강도가 숱한 사람들이 보는 백화청사안으로 해 도망칠 수 없지 않겠는가. 그는 조과장과 함께 지하주차장 관리원한테로 돌아갔다. “위생실에 갔을 때 사건이 발생했소?” “예, 그런 것 같습니다.” 강과장은 관리원을 쏘아보면서 한걸음 다가서며 물었다. “혹시 강도가 달아나는 걸 보지 못했소?” “아, 이제야 생각이 납니다. 제가 위생실에서 금방 당직실에 돌아왔을 때 웬 놈이 승용차를 몰고 달아났습니다.” “얼굴이 기억나오?” 관리원은 뒤더수기를 긁적거렸다. “마스크를 껴서 잘 모르겠습니다.” 조과장이 옆에서 관리원을 쏘아보면서 물었다. “얼굴 특징은 기억나오?” “좀 퉁퉁합디다…” 관리원은 조과장을 힐끔 쳐다보더니 뜻밖의 소리를 했다. “조과장처럼 낯이 퉁퉁합디다.” “이 자식, 지금 무슨 소릴 해?” 조과장은 주먹을 쳐들었다가 강과장을 힐끔 쳐다보더니 내리웠다. “어째? 난 책임을 다했습니다. 조과장은 어째 신고전화도 받지 않았습니까?” 주차장 관리원은 어떻게 하나 자긴 책임을 회피하려고 조과장을 똥구덩이에 업고 뛰여들었다. 조과장은 카리스마가 넘치는 눈길로 그를 쏘아보았다. 강운룡 과장은 즉시 사건수사정황을 천룡해 국장과 김성광 부국장에게 회보했다. 공안국에서는 전 시 공안계통에 시내에서 강탈당한 백화청사의 승용차를 찾으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외연을 확대해 타현시 공안국에 살인강탈사건을 통보해 날강도나포를 협조해줄 것을 요청했다. 한참 후 해남파출소로부터 강도가 몰고 달아난 승용차가 해남가에서 발견됐다는 제보가 들어왔다. 강과장은 급히 수사대원들의 수사정황을 회보받으러 수사대대로 돌아갔다. 조흥수 과장은 인차 병원으로 가보려고 보위과 문을 나섰다. 춘란의 신변안전이 걱정됐을가? “어디로 가?” “어!” 조과장은 흠칠 놀라 몸을 홱 돌리며 허리에 찬 권총에 손이 갔다. “자식, 고함질은?” 조과장은 승호를 보자 허리에서 손을 떼며 굳어졌던 얼굴 근육을 느슨히 풀었다. “춘란이 보러 가오.” “함께 가자.” 조과장과 승호는 동상이몽을 꾸면서 지하주차장에 가서 보위과 찌프에 앉아 병원으로 달려갔다. 승호는 생화를 사고 조과장은 과일을 사들고 구급실에 들어섰다. 수사대원 창남과 룡철이 구급실을 지키다가 조과장을 알아보고 문께에서 물러섰다. 승호와 조과장이 병실에 들어서보니 춘란은코에 산소관을 꽂은 채 두 눈을 꼭 감고 침대에 누워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야, 춘란이, 어쩌다 이렇게 됐소? 일어나오, 춘란이.” 조과장은 과일꾸럭을 침대 옆의 상자 위에 놓고 춘란한테 다가갔다. “이러지 마세요. 환자 안정에 불리해요.” 의사와 간호사가 말리자 조과장은 머리를 돌렸다. “의사, 춘란이 내 말을 알아듣습니까?” “오래지 않습니다. 생명위험은 벗어난 것 같습니다.” “뭐라구요?” 조과장은 저으기 놀랐다.  옆에서 여겨보던 승호는 미소를 지었다. “춘란이 살아나면 날강도는 그물에서 빠져나갈 수 없을 거야.” “그래, 그렇구말고. 잘 됐어.” 조흥수 과장은 춘란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천천히 일어섰다. 승호는 춘란의 머리맡에 생화묶음을 놓아주었다. “춘란이, 강도놈은 꼭 나포될 거요.” 조흥수 과장은 머리를 끄덕이면서 구급실을 나섰다. 바깥에서는 눈보라가 기승스레 윙윙 휘몰아쳤다. 보이지 않는 법망이 날강도를 향해 점점 좁혀지고 있었다.                                                                          39. 천라지망 승호와 범송은 조과장의 동태를 면밀히 감시하고 있었다. 조과장은 찌프를 몰고 머리를 수깃한 채 백화청사 지하주차장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겠는가. “승호, ‘개’ 왔다.” “알았다.” 승호는 범송의 기별을 듣고 복도에 나가 담배를 붙여 물고 조과장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승강기 어귀에 나타난 조흥수 과장은 승호와 눈인사나 하네마네 하고는 곧추 총경리 사무실로 들어갔다. 안수련 총경리는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사건수사는 진전이 있소?” 하고 물었다.  조과장은 대답 대신 허리춤에서 권총을 뽑아들었다.  “뭐요?” 안총경리는 질겁해 바들바들 떨었다. 불길한 징조를 느낀 승호는 사무실 문을 쾅 차고 들어갔다. 조과장은 승호를 흘끔 곁눈질하더니 권총을 안수련 총경리 사무상에 천천히 내려놓았다. “안총경리, 미안합니다. 제가 보위사업을 제대로 하지 못했기에 이번 사건이 생겼습니다. 보위과 과장 사직하겠습니다.” 승호는 속으로 잘코사니를 불렀다. (자식, 진작 권총을 내놔야지.) 안수련은 천천히 자리에 앉더니 마음을 가다듬으며 천천히 진정했다. “안되오. 비상사탠데. 사직이라니? 범죄자부터 붙잡은 다음 보기요.” 조흥수는 낯이 수수떡처럼 지지벌개났다. “안총경리와 직원들을 볼 면목이 없습니다. 백화청사에서 나가겠습니다.” “조과장이 없어면 보위과는 어쩌오?” 조흥수는 승호를 돌아보더니 희죽이 웃었다. “리과장이 있잖습니까. 리과장은 기동령활하고 무예가 출중하기에 더 잘 할 수 있습니다. 리과장 소원도 꺼주고 일거량득이 아니겠습니까. 허허허.” 승호는 손사래를 쳤다. “안됩니다. 전 구입과  과장이 좋습니다.” 그는 조흥수가 진작 자기 속심을 꿰뚫어보았다는 것에 소름이 끼쳤다. 안총경리는 권총을 받아 서랍에 넣으면서 침착하게 말했다. “천천히 고려해보기오.” “그간 못난 놈을 써주어서 감사합니다.” 조흥수는 허리를 꿉썩 굽혀 인사했다. 안수련은 조흥수를 쏘아보더니 무겁게 입을 열었다. “할 수 없군요.” 조흥수는 안총경리에게 재차 허리굽혀 인사하더니 승호를 돌아보았다. “동생, 안총경리를 잘 보좌하게나. 부탁이네.” “아니, 형님, 정말 안하겠단 말이요?” 승호는 속으로는 기뻐 어쩔줄 모르면서도 겉으로는 아쉬운듯이 지껄였다. 조흥수가 가버린 후 승호는 어깨가 으쓱해 재차 안총경리 사무실에 들어갔다. “안총경리, 이 비상사태에 보위과장이 없어서야 됩니까? 저한테 맡겨주십시요. 전  백화청사에서 다신 이같은 참사가 생기지 않도록 미연에 방지할 능력이 있습니다.” 안총경리는 권세욕에 열이 후끈 달아오른 승호를 날카로운 눈길로 쏘아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보위과장 인선은 따로 있소. 리과장은 구입과장을 해도 과한줄 아오.” “예?” 순간 승호는 쏘파에 털썩 주저앉으면서 어이없다는듯이 안총경리를 쳐다보았다. “아니, 제가 무슨 잘못이라도?” “가랑잎으로 눈을 가리고 야옹 하지 마오. 내 눈과 귀를 속일 것 같소?” “무슨 말씀인지요?” 승호는 속이 섬찍해났다. “집에 가서 곰곰히 생각해보오. 뭐나 본인이 더 잘 알게 아니요?” 승호는 정수리를 한대 얻어맞은 것처럼 비틀거리면서 총경리 사무실에서 나왔다. 그는 구입과로 돌아와 쏘파에 푹 물앉았다. “무슨 일이 있니?” 범송이 다가와 컵에 뜨거운 물을 부어주었다. “아니.” 승호는 머리를 부둥켜안고 울상을 지었다. 이튿날 안총경리는 중층책임자회의를 열고 과단성있게 인사조치를 단행했다. 승호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총경리 사무실로 올라갔다. 안수련 총경리는 안경을 춰올리고 건가래를 떼더니 인사결정을 공포했다. “최범송을 보위과 과장으로 임명합니다.” 뜻밖의 선포에 모두들 범송한테 눈길이 쏠렸다. 범송은 희죽거리며 승호를 힐끔 곁눈질했다. “리승호의 구입과장직을 면직합니다.” 승호는 속으로 올 것이 왔구나고 안총경리를 쳐다보았다. 안수련 총경리는 뜻밖에도 “리승호를 백화상점 공회 주석으로 임명합니다.” 하고 공포했다. 승호는 자기 귀를 의심했다. 그는 다행으로 여기면서도 속이 알알해났다. (고양이 쥐 생각해? 별로 승급시킨 것처럼 연극 놀아? 먹을 알이 없는 공회 주석을 시켜? 벼슬로 처남과 매부 지간을 리간놓는 판이군. 흥!) 승호는 극력 그런 내색을 내지 않으려고 빙그레 웃으면서 박수까지 쨕쨕 쳤다. 회의가 끝난 후에도 승호는 속이 알알해났다. (아, 진작 이럴줄 알았더라면 성호 말처럼 백화청사를 떠날 걸.) 범송은 싱글벙글 웃으면서 승호한테 손을 내밀기까지 했다. “축하해, 리주석.” “자식, 놀리니?” “아니야, 공회 주석은 백화상점의 지도자급이야. 허허허. 축하해줄만하지 않니? 공회주석도 주석인 거야. 똥꼬치도 똥이야. 리주석 안그래? 허허허.” 승호는 범송의 가슴을 툭 쳐놓으면서 “보위과장으로 된 걸 축하해. 매부!” 하고 어깨를 다독여주었다. 범송은 승호의 가슴을 주먹으로 쿵 치면서 “처남, 의심병부터 고쳐라”. 하고 입을 쭝긋해보였다. 범송은 공안국에 갔다가 허리에 권총을 지르고 나타나 으시댔다. “어때? 최범송 보위과장!” “매부가 보위과장으로 되니 마음이 든든하구나.” 승호는 “멀건 물에 거시같이 싱거운 자식, 꼴 보기도 싫어.”하고 욕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사흘만에 안수련 총경리는 또 놀라운 인사결정을 공포했다. 글쎄 범송이 구입과  과장을 겸해 한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진짜 범송과 승호에겐 희비가 엇갈린 인사가 아닐 수 없었다. 한편 백화청사 대참극에 대한 수사속도는 급물살을 탔다. 형사수사대대에서는 공개수배를 시작했다. 그들은 텔레비죤을 통해 전체 시민들에게 날강도의 모의초상을 공개했다. 당날에 한 운전수가 공안국 형사정찰대대에 편지로 다음과 같은 정황을 적발했다.   마스크를 끼고 퉁퉁하게 생긴 한 중년사내가 해남가 뻐스정류소 부근에서 찌프에서 내려 자기 택시에 앉아 북으로 달려 1중 부근에서 내렸다. 그는 피 묻은  토색가방을 꼭 끌어안고 차창 밖을 살폈다. 강운룡 과장은 수사분석회의에서 다음과 같이 날카롭게 분석했다. “범죄자는 반정탐능력이 있는 놈입니다. 백화청사 지하주차장에서 살인강탈한 후 백화상점의 찌프를 몰고 남쪽으로 도망쳤습니다. 다음 택시를 갈아타고 방향을 바꿔 북쪽으로 달려갔습니다. 이건 우리 수사방향을 전의시키려는 겁니다. 보통 범죄자는 사건을 저지른 후 자기 집 쪽으로 도망칩니다. 그러나 이 놈은 완전히 다른 행각을 벌렸습니다.” 천룡해 국장과 김성광 부국장은 이번 사건의 흉수는 일정한 반정탐능력을 가진 자라고 일치하게 인정하고 수사범위를 더 넓히기로 했다. 흉수는 확실히 백화청사 내부 지리정황과 로임을 발급하는 날자와 시간, 은행으로 저금하러 가는 경로까지 손금 보듯 하는 놈이였다. 그리하여 수사 초점은 다시 백화청사 내부로 집중됐다. 이때 승호가 백화청사에 진주한 수사지휘부에 찾아왔다. “무슨 일이요?” 강과장이 묻자 승호는 주위를 둘러보더니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저는 모의초상을 보면서 범죄혐의자는 우리 백화청사 보위과 과장 조흥수가 아닌가고 의심했습니다.” “조흥수?!” “예, 바로 조흥수라고 봅니다.” 승호는 범죄혐의자 모의초상을 들고 보다가 천천히 책상에 내려놓더니 신문으로 마스크를 가리었다. “보십시오, 이 안경 건 쌍까풀눈이나 퉁퉁한 얼굴. 얼마나 조과장과 비슷합니까?” 강과장은 도리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토끼도 굴어귀 풀을 먹지 않는다는데 간대로 조과장이 이럴수 있겠는가?” 승호는 자기 견해를 고집했다.  “요즘 조과장의 행각이 퍽 의심스럽습니다.” “뭐가?” 승호는 소파에 앉아 그간 관찰한대로 조흥수의 정황을 말했다. “우리 백화청사에 절도사건이 생겼댔습니다. 그때 조과장은 근본 공안부문에 신고하지도 않고 사건을 수사하는 척하면서 덮어두려고 했습니다. 조과장은 진짜 수상합니다. 그는 돈을 절도맞힌 출납원을 쩍하면 위협하면서 돈을 빨아냈습니다. 그번 절도사건의 장물을 조과장이 재차 절도하지 않았는가도 의심됩니다.” “무슨 증거라도 있소?” 강운룡 과장은 승호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승호는 아주 랭정하게 분석해나갔다. “저의 추측입니다. 사건이 발생한 당날에 춘란은 절도한 나머지 돈 8500원을 세집 부엌의 석탄무지에 치워뒀답니다. 그런데 몇시간도 지나지 않아 절도맞혔습니다. 이건 춘란의 집에 돈이 있다는 걸 아는 자의 절도행위라고 봅니다. 때문에 조과장과 련관되지 않는가 의심됩니다.” 강과장은 주먹코를 손으로 씃으면서 승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아주 중요한 정보요.” 승호는 허리를 펴면서 확신성있게 말했다. “그는 주색에 돈을 흔자만자 썼습니다. 항상 아가씨들을 불러다 술을 마시고 놀고 팁까지 몇장씩 줬습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2차, 3차로 노래방에 가고 안마를 하고 오입을 밥먹듯 했습니다. 그 숱한 돈이 어데서 생겼습니까?” 강과장은 머리를 끄덕였다. 그는 뜨거운 물을 후후 불어 마시더니 탁자에 컵을 놓으면서 물었다. “조과장 안해가 음식점을 차리지 않았소?” “에이, 조과장네 음식점은 불경기여서 안해가 항상 조과장이 손님을 데리고 가서 공짜로 먹는다고 말다툼했습니다. 평소에 우리랑 데리고 자기 집 음식점에 얼씬하지도 못하고 다른 음식점에 갔습니다.” 강과장은 승호를 보고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아주 세심히 관찰했구만.” 강과장의 치하에 승호는 어깨 으쓱해났다. 그때라고 슬쩍 속내를 비춰보였다. “전 원래 수사사업에 흥취가 있습니다. 경찰이 되지 못해도 백화청사 보위과에서라도 일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조과장이 돈을 물쓰듯하자 수상해 백화청사의 사건과 련계시켜 의식적으로 관찰했습니다. 이번 사건도 조과장이 한 짓이라고 봅니다. 보십시오. 사건수사가 좁혀지자 보위과장을 사직하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도적이 제 발등이 저린 거죠.” “오~ 조과장에겐 형제가 있소?” “예, 남동생과 녀동생이 있습니다. 조과장이 몽땅 시내에 끌어들였습니다.” 강과장은 승호의 얼굴 뒤에 리철갑 과장의 얼굴이 겹쳐보였다. 그런데 애비를 닮지 않은 승호는 사건해명에 아주 관건적인 단서를 척척 제공하지 않겠는가. 승호는 아주 기동령활하면서도 섬찍하게 놀았다. 그는 평소에 조흥수와 의형제까지 맺고 그림자처럼 붙어다니면서 아가씨들을 데리고 질탕하게 놀았다. 그런데 지금 형제의 가면구를 훌렁 벗어버리고 조흥수의 뒤통수를 치고 있지 않는가. 강운룡 과장은 승호의 량면성격을 모르고 능력과 재간이 아까와했다. 만약 온 시내가 들썽하게 바람을 피우면서 숱한 처녀들의 정조를 짓밟지만 않았어도 승호를 써주고 싶었다. 강과장은 승호를 보내놓고서도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올랐다. “조과장이 감히 굴어귀 풀을 먹어? 조과장은 숱한 직원들이 보는데 감히 백화청사에서 강도질해? 시간적여유가 있었는가? 이건 진짜 목숨을 내 건 모험이야.  조과장이 그렇게 무모한 자인가?” 그는 사무실에서 뒤짐을 짚고 왔다갔다 거닐다가 사무상에 놓인 강도의 흉기에 눈이 갔다. 그는 피묻은 쇠파이프를 들고 흔들어보면서 눈섭을 코마루로 쭝긋 모았다. “쇠파이프로 보위간사 충렬을 단매에 때려죽였단 말인가? 그런데 춘란은 때려죽이지 못했다? 두 피해자에게 가해진 힘이 다르지 않는가? 아녀자 두개골을 강타해 죽이지 못하는 힘이라.” 강과장은 오랜 경험으로부터 점차 이번 사건은 혼자 벌린 사건이 아니라 공범이 있다는 생각이 머리를 쳐들었다. “지하주차장 관리원은 그날 백화청사 지하주차장에 세워놓은 조흥수 과장의 찌프를 몰고 달아난 놈은 조과장과 비슷하게 생겼다고 하지 않는가? 혹시 조흥수 과장의 동생이 한 짓이 아닐가?” “창남이!” “예!” 창남이 옆방에서 들어왔다. “당장 조흥수와 그의 동생을 련행하오. 한시 급하오!” “예.” 강과장은 제일 큰 혐의자가 조과장 형제라고 점찍었다. 한참 후 창남과 수길이 빈손으로 들어왔다. “조흥수가 집에 없습디다. 조씨 처 말에 의하면 먼 곳에 려행을 간다면서 떠났다고 합디다.” “오- 진짜 수상하군.” 강과장은 즉시 혐의자들 가운데서 조흥수를 중점혐의자로 수사하기로 결정했다. “수길이, 가서 조흥수 안해를 데려오오.” “예.” 한참 후에 조흥수의 안해가 머리를 수깃하고 백화청사 현지수사 사무실에 들어섰다. 강운룡 과장은 사무상에 비스듬히 앉아 카리스마 넘치는 눈길로 매섭게 조흥수의 안해를 한참 쏘아보았다. 조흥수 안해의 기를 꺾어놓으려고 심리전을 쓰고 있었다. 한참 후 그는 콩크리트에 쇠공을 굴리는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여기 어째 온 걸 알만 하오?” “무슨 일인지요?” “이제부터 묻는 말을 사실대로 대답하오.” “예.” 강과장은 바위돌처럼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조흥수 어데 갔소?” 조흥수 안해는 태연자약한 표정을 지었다. “제가 어떻게 알아요? 그저 먼 곳에 려행을 떠난다고 말했을뿐인데요.” 강과장은 사무상에 팔굽을 대고 앞으로 몸을 숙이면서 물었다. “어디로 간다고 했소?” “말하지 않았어요.” “조흥수는 이번 백화청사 특대살인강탈사건의 중점혐의자로 돼 수사받고 있소. 그의 죄를 덮어감추거나 수사에 협조하지 않으면 형사죄를 덮어감춘 은닉죄로 사법기관의 엄벌을 면치 못하오.” 조흥수의 안해는 머리를 쳐들더니 왕청 같은 말을 했다. “우린 이미 리혼했어요. 이젠 저와 아무런 관계도 없는 사람인데요. 왜 저하고 이래요? 정말 피곤해요.” “리혼? 아주 솜씨 빠르군.” 강과장은 사무상을 꽝 쳤다. “리혼해도 조흥수 죄행을 은닉하면 은닉죄란 말이요!” 이윽고 창남이 천가방을 강과장의 사무상에 내놓았다. “조흥수네 집에서 발견한 돈보따리입니다. 1만 5천원이 들어 있습니다.” 순간 조흥수의 안해는 힐끔 그 천가방을 곁눈질하더니 머리를 폭 숙였다. “이건 어데서 난 돈이요?” “음식점에서 번 돈인데요.” “거짓말! 음식점이 밑져서 항상 조흥수와 옥신각신 말다툼하지 않았소?” 강과장은 조흥수 안해를 쏘아보면서 탄백을 유도했다. “이제라도 로실히 탄백하면 조흥수와 공범이 되지 않을 수 있소.” 조흥수 안해의 정신방어선은 와그르르 무너지기 시작했다. 한참 궁리하던 그녀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바늘이 떨어지는 소리도 다 들릴 것만 같은 심문실에서는 그녀의 거친 숨소리와 나직한 말소리만 들릴뿐이였다. “사실 그는 고향으로 간다고 했어요. 가기 전에 저한테 저 돈을 주면서 ‘그간 안해로 고생했다.’고 말했어요.” “리혼은 어떻게 된 일이요?” 그녀는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대답했다. “나그네 바깥에서 숱한 아가씨들과 뒹구는 걸 보고 제가 먼저 리혼하자고 했어요. 나그넨 질질 끌면서 안된다고 했어요. 그런데 사건이 발생한 날에 저보고 처자들이 편안하게 살게 하려고 리혼하겠다고 했어요. 흐흑흑.” 강과장은 수길과 창남을 돌아보면서 눈길을 맞추었다. “더 교대할게 없소?” “없어요. 아, 아니, 떠나갈 때 저를 보고 ‘언제 돌아올지 모르겠다’고 합디다.” “가짜리혼이구만. 떠나는 날에도 한 집에서 잤겠지?” 그녀는 위엄이 넘치는 강과장의 눈길을 감히 쳐다보지도 못하고 머리를   끄덕였다. 강과장은 조흥수가 가능하게 도마뱀이 꼬리를 떼놓고 달아나는 교활한 수법을 썼을 수 있다면서 속으로 코웃음쳤다. (흥! 진짜 가랑잎으로 자기 눈을 가리고 야옹 하는 격이군.) “시동생이 있다던데. 요즘 집에 왔소?” “오지도 않았는데요.” 강과장은 겁기 띤 그녀의 표정을 보아냈다. “이번 살인강탈범은 총살을 면치 못하오. 제대로 말하오? 요즘 자주 왔소? 우리 수사대원들은 동무네 집을 24시간 감시했소. 동무가 로실한가 볼뿐이요.” 그녀는 왕왕 대성통곡쳤다. “로실히 말할테니 제발 살려주십시오.” “로실히 얘기하오.” 그녀는 줄줄 두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손으로 훔치면서 말했다. “요즘 시동생이 자주 우리 집에 찾아왔어요. 아마 백화청사 살인사건이 생긴 날일 거예요. 시동생이 피뜩 왔다가 어디로 나가면서 ‘형님, 인차 오오.’라고 했어요. 그날 저녁에 나그네가 저한테 전화를 쳐서 ‘일이 생겼소. 과장을 다 한거 같소. 어디로 멀리 려행을 가야겠소. 옷이랑 준비하오.’라고 하더군요. 밤중에야 돌아온 그는 장밤 잠을 자지 못하고 한숨만 쉬더군요.” “시동생은 지금 집에 있소?” “시동생을 데리고 고향으로 려행 간다고 했어요. 아마 로씨야로 넘어가 려행할 예산인 거 같던데요.” 강과장은 사태가 시급함을 느끼고 그녀를 집에 돌려보냈다. “무슨 새로운 정황이 있으면 우리한테 알리오. 흥수한테서 전화나 편지가 와도 낱낱이 알려야 하오.” “예, 살려만 주세요.” 그녀가 눈물을 닦으면서 나간 후 강과장은 수길과 천일을 보고 장령자와 수분하, 흑하 여러 중로통상구로 가서 조흥수 형제가 빠져나갔는가 수사하라고 지시했다. 수사대원들은 분조를 나눠 모든 중로통상구로 떠나갔다. 강과장은 수사대대 사무실에 돌아와 버릇처럼 뒤짐을 지고 왔다갔다 거닐면서 번개같이 번쩍이는 사색을 굴렸다. 주춤 걸음을 멈춘 그는 저쪽에 진렬된 피 묻은 쇠파이프를 들고 휘둘러보면서 궁리했다. “이런 쇠파이프를 어지간히 휘둘러 쳐도 즉살할 거야. 그런데 춘란을 친 쇠파이프는 힘이 약했어.” 그는 쇠파이프를 놓고 경찰대대의 법의를 불렀다. 법의가 들어오자 강과장은 미심한 점을 물었다. “피해자의 두개골 상처 흔적이 같소?” “아닙니다.” 법의는 서류철을 가져다 일일이 펼쳐보였다. “이 사진을 보십시요. 엄충렬의 두개골 상흔인데 골절이 길게 났고 일부 두개골이 깨지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춘란의 두개골에 난 상흔은 우묵하게 들어갔습니다. 상대적으로 길지 않습니다. 쇠파이프로 때린 흔적과 다릅니다.” “혹시 권총박죽 흔적은 아닐가?” 강과장의 물음에 법의도 머리를 끄덕였다. “가능합니다. 힘도 충렬을 때린 것보다 약합니다. 상처도 덜합니다. 때문에  춘란은 죽지 않았습니다.” 강과장은 머리를 끄덕이면서 자기 생각이 맞다고 판단하고 한 걸음 더 나가 물었다. “사람이 뚱뚱해도 어떤 경우에 팔힘을 쓰지 못하오?” 법의는 한참 생각을 더듬다가 입을 천천히 열었다. “심장병환자면 힘이 없습니다. YB병원 심혈관내과 전문의사와 더 확인해봅시다.” “좋소.” 강과장과 법의는 즉시 YB병원에 가서 심혈관내과 오랜 주임의사를 찾아가 백화청사에서 발생한 사건을 간단히 말하고나서 미심한 점을 자문했다. “심장병환자는 팔힘이 약합니까?” 주임의사는 자못 신중하게 대답했다. “예, 팔힘을 쓰지 못합니다. 더욱이 범죄행위를 할 때 긴장하면 혈압이 올라가면서 심장병이 도져 팔힘이 쑥 빠집니다.” 법의와 강운룡 과장은 눈길을 마주치면서 머리를 끄덕였다. 그들은 입원실에 가서 피해자 춘란을 찾았다. 춘란이 눈을 뜨는 날에는 모든 것을 밝혀낼 수 있었다. 수사대대 건의에 따라 공안국에서는 이번 특대살인강탈 사건 수사정황을 시당위와 시정부 해당 지도자들에게 회보했다.  허철군부 서기와 최웅봉 부시장은 병원에서 모든 의료전문가들을 다 동원해 춘란을 구해낼 것을 협조하라고 지시했다. 기적이 일어났다. 구급실에서 일주일이나 중태에 빠져 누워 던 춘란이 이날 눈을 둬번 뜨지 않겠는가. 강과장과 법의가 수사대원들이 지키는 구급실에 들어섰을 때였다. 산소관을 코에 꽂은 춘란이 눈을 천천히 뜨더니 눈으로 여기 저기 둘러보는 것이 아니겠는가! 춘란은 강과장을 보자 “아버지! 사람 살려라!” 하고 고함쳤다. 그녀는 사람을 알아보지 못해 법의의 팔소매를 잡고 흔들면서 “아버지, 날 살려주십시요.”하고 떠들어댔다. 강운룡 과장과 법의는 실망에 찬 눈길을 마주치더니 병실을 나섰다. 강과장은 법의를 보고 “조흥수가 심장질환을 앓았는가 알아보기요.”하고 찌프에 몸을 실었다. 찌프는 새하얀 눈가루를 흩날리면서 질풍같이 백화청사로 달려갔다. 이윽고 그들은 백화청사 지하주차장 안으로 찌프를 몰고 들어가 세웠다. 그때 주차장 관리원이 부들부들 떨면서 다가와 경찰들인 걸 확인하고서야 한숨을 후 내쉬면서 당직실로 되돌아갔다. 강과장은 사건현장을 둘러보더니 승강기를 타고 백화청사 안으로 올라갔다. 승강기는 최고층 16층에 가 멈춰섰다. 총경리 사무실 간판이 보였다. 안수련 총경리는 강과장과 법의를 보자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강과장이 찾아온 연유를 말했다. 안수련 총경리는 안경을 벗어 안경알을 닦아 바로  걸더니 입을 천천히 열었다. “조흥수는 고혈압에 심장병이 있습니다. 항상 술을 처먹고 낯이 수수떡처럼 뻘개  다녔지요. 해마다 몇번이고 청가를 맡고 입원치료까지 받은 적이 있습니다.” 강과장은 버릇처럼 머리를 끄덕였다. “그래? 조흥수가 범죄자인가요?” 안총경리의 물음에 강과장은 수사비밀이 샐가봐 즉답을 피했다. “백화청사를 활딱 번지면서 수사해 미안합니다. 지금까지 협조해줘서 감사합니다.” 강과장과 법의가 총경리실 문을 열고 나가자 안총경리가 의자에 털썩 주저앉으면서 한탄했다. “내 눈이 멀었지. 쥐새끼한테 창고 자물쇠를 맡겼구나.” 강과장은 백화상점에서 현지수사소조를 철수했지만 여지를 두어야 했다. 춘란은 최악의 사선은 넘어섰지만 사람을 잘 알아보지 못하는 형편에 처해있지 않는가. 그녀를 믿고 어찌 흉악하고 교활한 흉수를 잡아내단 말인가. 모든 건 그래도 수사대원들의 수사력과 지혜에 의거해야 했다. 수사는 난항을 겪게 되였다. 수분하와 장령자에 갔던 수사대원들이 륙속 돌아왔지만 헛탕을 치고 말았다.  조흥수 형제가 출국한 기록이 없었다. 또 흑룡강성에 있는 그의 고향에도 가보았지만 그들 형제 종적이 없었다. “조흥수 수상하오. 안해한테 고의로 고향이나 로씨야로 간다고 속여놓았군. 우리 수사시선을 그쪽으로 돌려놓고 다른 곳으로 도망친 거 같소.” 허서기와 최시장은 공안국의 수사정황을 회보받은 후 조흥수 형제를 전국 범위내에서 지명수배를 하자는 공안국 제의에 동의했다. 당날로 성공안청을 거쳐 전국 각지 공안국에 특대살인강탈 범죄혐의자 조흥수 형제에 대한 지명수배령이 무선전으로 전파됐다. 전국에 보이지 않는 강력한 천라지망이 펼쳐졌다.       그 그물에서 먹장구름이 먼저 슬며시 빠져나갔다. 무지개도 빠져나가고 나중에는 해도 빠져나가고 이제 달만이 남아 있었다. 
170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 (112) 댓글:  조회:1693  추천:0  2018-07-29
                      4. 하늘땅이 노호한다       춘삼월이라고 하지만 옛 만주 하늘은 초봄에 눈을 퍼부으려는지 흐리터분해지며 두터운 구름이 깔리며 총총하던 별을 가리어갔다. 흥수는 신경질이 나서 머리를 쥐어뜯으면서 토성 동쪽에 있는 집으로 갔다. 어쩐지 요즘 세월이 뒤바뀐 후 흥수는 신경질이 나면서 모든 일이 잘 되지 않았다. 혁명위원회도 취소했지. 이전에 자기가 혁명해버린 이계삼과 허영주가 아무런 죄도 없이 억울한 모자를 썼다고 해명돼 모자를 벗고 현인민정부로 돌아가지 않았는가! 또 허백호도 무죄로 판결돼 감옥에서 나온다는 여론이 돌고 있다. 게다가 “문화대혁명” 때 일만 수걱수걱 하던 상순이 또 머리를 쳐들더니 자기와 시비를 걸지 않겠는가? 흥수는 생각할수록 신경질이 나고 속으로 뭔가 울컥거렸다. (마을 사람들도 상순이 양봉장이랑 인삼장이랑 벽돌공장이랑 과수원이랑 꾸린 것이 옳다고 해. 그래, “문화대혁명” 기간에 비판하던 “생산력유일론”이 맞는단 말인기여? “계급투쟁”을 하지 않아도 된단 말인고? 뭐? “3자1포”나 도급제가 맞아? 마음대로 장을 보고 밭도 개인에게 떼 주면 또 새로운 지주가 생기지 않겠노? 자본주의 싹이 온 마을에 무럭무럭 자랄 게 아닌교?) 그는 생각하면 할수록 이해되지 않아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그는 날이 갈수록 정치에 점점 관심이 없어지고 미련과 오입이라도 하면서 삼검불 같은 정신을 위안 받으려고 했다. 울안에 들어서자마자 불을 켜지 않은 집 안에서 개목을 다는 소리가 어지럽게 들렸다. “아이유, 아, 아악, 죽여준다야.” “개새끼, 오늘!” 흥수는 팔을 걷고 씩씩거리더니 문을 쾅 차고 집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전등불이 잘칵 켜지더니 정지에서 춘실이 황급히 발딱 일어났다. “어째 이제야 왔소?” “고방에서 개지랄 하는데 넌 뭘 하니?” 흥수가 고방에 뛰어들려는데 춘실이 두 팔을 벌리고 막아 나섰다. “쑤어놓은 죽을 어쩌겠소? 이젠 애까지 낳았는데. 그 에미에 그 딸이구나.” 흥수는 춘실의 팔을 탁 쳤다. “뭐라오? 당신.” “네년, 어려서 상순이하구 콩밭에서 개짓을 해 첫애를 낳았잖아.에이, 디러운 년.” “창피해 어떻게 살아? 그래 지주에게 딸을 짓밟게 놔 둬?” 춘실도 한발작도 물러서지 않았다. “검정개 돼지 흉을 보지 마오. 당신은 왜 지주 딸을 한밤중까지 간음했소? 흥!” “무슨 생이 부러질 소리야? 생사람을 작작 잡으라고.” “모르는 거 같아? 덕돌이네 집부터 뒤따라 왔는데도 시치미를 딸 예산이오? 내 입이 터지면 당신 대대당지부 서기겠소? 투쟁 받다가 감옥에 가…” 흥수는 황급히 생강같이 마른 손으로 여편네 입을 마구 틀어막았다. “그만, 그만!” 춘실은 손을 탁 쳐버리며 “어째 무서워?”라고 했다. 흥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위방에 올라가 이불을 들쓰고 드러누웠다. 이때 고방 문이 열리더니 해월이 실 한 오리도 걸치지 않고 뛰어 나와 춤을 덩실덩실 췄다. “아하, 좋다! 우리 신랑 좋고 좋다!” “아이고, 이거 동네 창피해 어떻게 살겠니? 고방에 들어가라!” 춘실은 애를 깔까봐 끌어안으며 해월을 고방에 마구 떠밀었다. 이때 충국이 괴춤을 춰올리며 고방에서 나와 때물이 괴죄죄 흐르는 낯을 쓱 닦으며 벌쭉거리었다. “가시 아버지, 언제 우리 잔치하오?” “가라! 썩 꺼지지 못해?! 꼴도 보기 싫어!” “아무리 늙은 사위라도 이럼 못쓰지. 내 당신보다 이상인데.” 충국은 너스레를 떨어댔다. “난 벽돌공장 춥다. 고방 참 따뜻해 좋다. 안 가겠다.” “썩 가지 못하겐?!” 흥수는 주먹을 쳐들었다. 허나 충국은 겁기라고는 꼬물만치도 없이 헤헤 웃으며 흥수의 쳐든 주먹을 내리었다. “권투! 당신, 안 돼! 난 상순 양형님에게서 무술 배웠어.” 흥수는 주먹으로 충국의 낯을 내질렀다. 충국은 잽싸게 주먹을 받아 쥐어 탁 밀었다. 흥수는 저쪽 벽 구석에 가서 엉덩방아를 쿵 찧었다. 충국은 기세등등해 지껄였다. “당신 내 여동생 했다. 이 치보, 당신 매부야? 가시아버지야? 허허허.” 흥수는 그 소리에 억이 막혀 멍청히 앉아 상을 찡그리며 미치광이 같은 충국을 쳐다보기만 했다. 충국은 춘실의 품에 안겨 “앙, 앙~”우는 애기 머리를 쓰다듬더니 고방으로 해 뒷문을 열고 나갔다. 그는 다 벌어진 뒤울안 바자를 꿰질러 조개덕으로 내려갔다. 한편 흥수는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충국을 놔두었다간 동네 창피해 살 것 같지 못했다. 새벽까지 이리 궁실 저리 궁실 하며 고민에 잠겼던 흥수는 결단을 내렸다. 그는 소변보러 나가는 척 하면서 바깥으로 나갔다. 그는 구새 목에 가서 벽에 걸어두었던 호미를 벗겨 들고 조개덕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마을 동구 둔덕 아래에 있는 벽돌공장이 가까워질수록 흥수는 손에 쥔 호미자루를 더욱 으스러지게 틀어쥐었다. 그가 벽돌공장 당직실에 다가가 벽에 기대 구멍이 펑 뚫린 안을 들여다보았다. 말이 당직실이지 문 쪽도 다 빠지고 창문 옆에 커다란 구멍까지 나서 우사보다도 못했다. 게다가 이불이 없어 충국은 당직실 안에 북데기를 들쓰고 자는 것이었다. 쿨쿨 자는 그 모습 딱 검정 돼지 같았다. “개 새끼, 다신 내 딸을 짓밟지 못하게 병신을 만들어주마!” 흥수는 이를 악물고 슬금슬금 당직실 문께로 다가가 문꼬리를 쥐어 당겨보았다. 문을 걸지 않아 삐꺼덕 열렸다. 술을 잔뜩 처먹은 충국은 그 추운 당직실에서 곯아떨어진 채 코를 드렁드렁 구르며 자고 있었다. 그는 흉악한 검은 그림자가 슬금슬금 다가드는 것도 아무런 기미도 차리지 못하고 잠에 완전히 곯아떨어졌다. 흥수는 호미를 쳐들고 슬금슬금 다가가 어둠 속에서 북데기를 들쓴 충국의 머리를 겨누고 힘껏 내리찍었다. “아이쿠! 발이야. 누구야?!” 충국이 벌떡 일어나 앉더니 발을 주무르며 땔, 땔 굴렀다. 흥수는 충국의 머리를 힘껏 내리찍었다. “앗!” 충국은 푹 꼬꾸라졌다. 흥수는 충국의 괴춤을 깐 후 불 중태를 더듬어 쥐고 호주머니에서 면도칼을 꺼내 째고 불알 한쪽을 베 내 입 안에 넣고 우물우물 씹었다. 순간 복수의 이발이 무섭게 맞쪼아댔다. (화근을 남기지 말아야지.) 흥수는 한쪽 불알마저 마저 썩 베 내 입 안에 넣고 우물우물 씹어 꿀떡 삼켰다. (이젠 네놈이 우리 해월을 더 밟아봐라! 흥! 네 불알을 먹고 이젠 미련을 죽여주마. 으흐흐.) 흥수는 충국의 괴춤을 춰올리고 발길로 툭 걷어찼다. 충국이 후- 한숨인지 뭔지 숨을 길게 내 쉬더니 아무런 동정도 없었다. 흥수가 충국의 코에 귀를 대보니 숨은 가늘게 쉬고 있었다. 그러나 더럭 겁이 났다. (이 놈이 정말 죽으면 어떻게 해? 제발 죽진 말라.) 흥수는 북데기를 왈왈 덮어놓고 황급히 문 밖으로 나가 어둠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그는 마을 동구 샘물터에 가서 옷과 손에 묻은 피를 샘물에 씻었다. (아차, 당직실에 호미를 두고 나왔구나. 단서로 될 수도 있어.) 그는 벽돌공장에 되돌아가 동정을 살피다가 당직실에 기어들어 어둠 속에서 호미를 더듬어 쥐고 나오려다가 주춤 멈춰 섰다. (혹시 죽지나 않았을까?) 그는 무릎을 꿇고 앉아 북데기 속에서 충국을 더듬어 흔들어보았다. “음~” 충국은 죽지 않았었다. 허나 정신을 아직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개 놈 새끼, 불알도 없는 주제에 이제 또 우리 해월을 희롱해?) 흥수는 침을 퉥 뱉고 당직실 문을 나섰다. 그는 샘물터로 슬금슬금 가서 피 묻은 호미마저 샘물에 말끔히 씻어들고 어둠을 밟으며 집으로 돌아왔다. 며칠 후 날씨가 훈훈해지자 상순의 포치에 따라 벽돌을 구워내려고 허동원은 숭길과 성욱을 데리고 벽돌공장에 왔다. 그들은 당직실에 들어가 북데기 속의 충국을 깨우려고 흔들었다. 그런데 충국이 꿋꿋이 굳어져 있지 않겠는가! “아니, 죽었어?” 성욱이 눈이 떼꾼해 소리쳤다. 허동원이 북데기를 와락와락 헤치자 상을 찡그린 충국의 낯이 드러났다. 그런데 이상하게 정수리에 피 터져 있었다. “빨리, 이 치보에게 알려라!” 허동원이 소리치자 성욱은 부랴부랴 당직실에서 뛰어나가 곧추 함흥 촌으로 달려 올라갔다. 이윽고 이흥수가 당직실에 들어섰다. 그는 충국의 피와 먼지가 덕지덕지 한데 엉켜 붙은 머리랑 두루 여겨보는 척 하더니 능청을 떨었다. “죽은 지 며칠 되는 거 같구먼. 이걸 봐.” 그는 북데기에 토한 고기랑 보고 중얼거렸다. “뭔 술 이따위로 처먹어? 아마 덕돌이 대학에 가는 날 술을 가득 처먹고 집에 와서 넘어지면서 벽에 머리를 쪼은 거 같아.” 허동원은 도리머리를 흔들며 반신반의했다. “아무리 세게 벽에 부딪친들 죽기까지야 하겠소?” 흥수는 손가락으로 조개턱을 고이고 한참 궁리하더니 또 다른 결론을 내렸다. “아마 벽에 부딪쳐 쓰러졌다가 얼어 죽은 거 같아. 구들이 찬 거 봐.” 동원은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그런 거 같지 않소. 그 추운 동삼에도 얼어 죽지 않았는데 봄에 얼어 죽었겠소? 파출소에 알리기요.” 흥수는 콧방귀를 뀌었다. “지주 아들, 국민당 특무 잘 죽었어. 파출소에 알려 뭘 해? 시체가 썩은 내 나는데 얼른 파묻어 버려.” “아무리 지주라 해도 인명사고인데 알리지 않아 되겠소?” 흥수는 엉거주춤 물앉으면서 “이 일은 내가 알아서 처리할테니 파묻고 보지.”라고 했다. 허동원은 충국의 시체를 북데기 속에서 들어 내가다가 바지에도 피가 발린 것을 발견했다. “허, 괴춤에 이 피를 보오.” 성욱은 북데기를 번지며 황급히 소리쳤다. “북데기에도 피가 발리었소.” 동원은 벽을 만지며 “이 벽에도 피가 묻어 있소.”라고 했다. 그러자 흥수는 황급히 “아무래도 머리의 피가 흘러내려 묻은 거 같아.”라고 했다. 허동원과 성욱, 숭길은 흥수의 말대로 지주라고 충국의 시체를 관을 짜서 넣지도 않고 건치에 둘둘 말아 수레에 실어 가지고 장개골 안에 올라갔다. 흥수는 고의로 시체가 빨리 썩어라고 동원과 성욱 등과 함께 장개골 안 습개에 구덩이를 파고 파묻어버렸다. 만사대필이라고 여긴 흥수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이때 뒤늦게 오빠가 죽은 소문을 듣고 미련이 팔소매를 걷고 흥수네 집으로 뛰어 들어왔다. “이 치보, 너도 사람이냐?” “왜 이래?” 흥수는 짐짓 시치미를 땄다. “오빠가 죽었는데 나한테 알리지도 않고 파묻어버려?!” 미련은 흥수에게 달려들어 머리를 마구 잡아 끄집어 당겼다. “이년이!” 흥수가 활 밀어놓자 미련은 저쪽에 나가 엉덩방아를 찧었다. “지주 아들놈을 파묻어 줘도 대단하지. 뭐 어쨌다고 지랄이냐?!” 바깥에 숱한 사람들이 구경하러 왔다. 미련은 단말마적으로 달려들며 고래고래 고함쳤다. “그래 지주네 아들이나 딸이라고 네놈이 마음대로 짓밟고 강간하고 파묻어도 되느냐?! 엉?!” “이년이, 진짜 환장했어? 주둥이를 함부로 놀리겐!” 미련은 흥수가 또 밀치려고 하자 손을 마구 물어놓았다. “아! 이년이, 이게.” 흥수는 너무 아파 물린 손을 빼내며 오만상을 찡그렸다. 마을 사람들은 웅성거렸다. “저 이 치보 미련을 강간했는 모양이오.” “글세, 강간하지 않았으면 저러겠소?” 흥수는 동네 창피해 문을 열고 마을 사람들을 향해 손 삿대질 했다. “뭘 구경해? 가지 못해? 누가 지주 딸을 비호하면 투쟁 받을 줄 알라.” 이 치보의 위협에 모두들 목을 움츠리고 집으로 돌아갔다. 흥수는 춘실과 함께 미련의 두 팔을 비틀어 줄줄 끌어 토성 앞에 가져다 훌 던졌다. 미련은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아예 길바닥에 퍼더버리고 앉아 발버둥질 치며 울며불며 고래고래 고함쳤다. “아이고, 불쌍한 내 오라비야. 아버지 엄마도 불쌍하게 투쟁만 받다가 죽었는데. 흐흐흐, 우리 오라비 장가도 가지 못하고 집도 없이 불쌍하게 죽었구나. 우리 오라비 어데 파묻었는지 날 보이지도 않고 버리느냐? 흥수, 잘 되는가 봐라. 해월이 낳은 애는 내 오라비 아들이야. 우리 오라비 해월을 백번, 천번 했다. 시원하다. 아무리 치보 주임이면 어째? 제 딸을 우리 오라비 했다고 그 승치로 나를 밤마다 찾아와 강간해? 세상에 지주 딸이라고 마음대로 강간해도 되는가? 엉~ 엉~” 온 동네에 소문나자 흥수는 그날부터 동네 창피해 마을에 얼씬하지 못했다. 그런데 집안에서도 야단났다. “내 서방을 내놔! 아버지가 해쳤어. 엉~엉~” 해월이가 발버둥질을 치면서 야단 쳤다. 바깥에서 아무리 떠들어도 괜찮았다. 허나 해월이가 미쳐 떠들어대자 흥수는 살길마저 막막해졌다. 설상가상으로 이계삼과 허영주가 함흥촌에 공작대로 내려왔다. 그들은 오자마자 토성 안 대대 사무실 앞마당에서 사원대회를 성대히 열었다. 이계삼 부서기는 대대 사무실 마루에 올라서서 다음과 같은 놀라운 상급의 정신을 전달했다. “우리 당에서는 억울한 모자를 쓰고 밥 먹듯 투쟁당하다가 억울하게 사망한 정성해 서기의 억울한 누명과 모자를 벗겨주었고 당과 사회주의를 위해 세운 풍공업적을 높이 평가해주셨습니다. 정성해동지는 일찍 우리 동만지역에서 공산당에 가입했고 지하당조직의 영도아래 조선족을 비롯한 형제 민족 반일투사들을 조직해 목숨을 걸고 간고한 항일투쟁을 해왔습니다. 그는 당 중앙의 파견을 받고 쏘련에 유학해 정치와 경제, 군사를 배웠으며 중국에 돌아온 후 당시 당 중앙이 자리잡은 연안으로 들어가 연안간부로 됐습니다. 그는 당 중앙의 지시에 따라 조선의용군 3지대를 이끌고 동북에 진출했고 우리 동만에 와서 주요 영도를 협조해 우리 지역 조선민족을 비롯한 여러 민족 인민들을 단결하고 영도해 중국 공산당을 따라 사회주의 혁명과 건설에서 풍공업적을 쌓았습니다. 그이께서 어찌 반당, 반사회주의 분자란 말입니까? 그이께서 어찌 지방민족주의를 고취하고 민족독립왕국을 꾀한 민족반역자란 말입니까?…” 상순과 학수 등은 모두 군중들 속에 서서 이날을 기다렸다는 듯이 기쁨의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그들이 어찌 기쁘지 않으랴? 그들은 그 지겨운 세월에 묵묵히 오늘이 오기를 얼마나 기다렸던가! 상순은 속에서 몇 십 년 응어리 졌던 어혈이 다 풀리는 것 같았고 가슴이 활 열리고 움켜잡혔던 목이 탁 트이는 것 같았다. 허나 흥수는 기분이 엉망이 돼버렸다. 그는 회의가 끝나자 서리를 맞은 뱀처럼 머리를 숙이고 목을 움츠린 채 집으로 돌아와 털썩 들어 누었다. (뭐? 이계삼은 현 당위 부서기로 복직됐다고? 허영주는 부현장으로? 으흐흐흐.) 그는 이불을 내리어 꼭뒤까지 푹 썼다. (하긴 잘해. 그들은 모두 나한테 투쟁 당하던 자들이 아닌가! 뭐? 뭐? 또 문화대혁명 기간에 노동개조를 하던 정규상, 김송선, 허백호의 억울한 사건을 해명하고 억울한 우파, 반혁명 모자를 벗겨 준다고 하지 않는가! 지어 항상 횡설수설하면서 처처에서 당의 기본 로선을 비웃던 우파 박성근의 우파모자도 벗겨준다고? 말도 안 돼!) 흥수는 생각할수록 세상이 완전히 바뀌어 간다는 것을 느꼈다. (이젠 상순이 우쭐하게 됐구나.) 흥수는 낯이 새까매 집에 들어 누어 입에 빗장을 지른 채 두문불출했다. 현에서 내려온 공작대에서는 연일 토성 안 대대 사무실 앞마당에서 대회를 열고 “반 우파투쟁”과 “문화대혁명”을 “청산”하기 시작했다. 회의장에는 온 대대 당원과 사원들이 시루 속의 콩나물 대가리처럼 빼곡하게 들어섰다. 회의장에는 우파로 몰리어 20여년이나 억울하게 우파 모자를 쓰고 별의별 모욕과 중상, 갖은 시달림을 받을 대로 받은 정규상과 박성근의 아들 박숭길도 서 있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감옥에 갔던 허백호 서기와 파출소 허영호 소장도 허영주 부현장의 옆에 서 있었다. 허나 이흥수는 회의장에 계속 보이지도 않았다. 사실 그는 겁을 집어먹고 대회장에 나오기는커녕 아내 지춘실을 시켜 대회장에 가서 동정을 살피게 하고 집에서 이불을 들쓰고 귀를 틀어막고 들어 누워 있었다. 그는 이불 속에서 다른 건 몰라도 충국을 죽인 일이 마음에 걸렸다. (혹시 시체 대갈통을 파내 깨진 상처 자국이라도 발견한다면 모든 게 끝장날게 아닌가? 젠장, 진작 대갈통을 잘라 없애버려야 했는데. 후-.) 그는 이불안이 뜨겁도록 한숨을 토해냈다. (아니야. 대갈통을 파서 잘라 버리면 더 의심받을 수 있어. 하느님께서 충국의 대갈 뼈에 호미에 맞은 상처를 남기지 말아주옵소서.) 흥수가 이런 생각을 하며 속을 끙끙 앓고 있을 때었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숭길을 비롯한 허춘, 성욱, 동림 등 민병들이 집에 들이닥쳤다. 그들은 다짜고짜 이불 속에서 이흥수를 끌어내 회의장으로 끌고 갔다. “왜 이래? 이걸 놔!” 흥수는 마치 도살장에 끌려 나가는 돼지처럼 몸부림치며 고래고래 고함쳤다. “허영주 부 현장의 지시다. 네놈을 투쟁대회장에 끌어낸다. 걸어!” 민병들은 이흥수를 회의장에 끌고 가 원 공사 혁명위원회 주임 황종연과 함께 숱한 군중들의 앞에 내세웠다. 허나 문화대혁명 때처럼 고깔모자를 씌우지는 않았다. “왜 이러는 거요?” 황종연은 몸부림치며 고함쳤다. “넌 문화대혁명시기 반란파 두목이다.” “억울합니다. 혁명자를 이렇게 억울하게 투쟁합니까?” 그러나 민병들은 황종연의 입에 수건을 틀어막았다. 그때 이계삼이 민병들을 말리었다. “우린 ‘문화대혁명’시기 이자들처럼 비인간적으로 가혹하게 굴지는 말아야 하오.” 민병들이 수건을 풀어주었다. 대회는 허영주 부현장이 직접 사회했다. “오늘 대회는 ‘반우파운동과 문화대혁명’을 청산하는 대회입니다. 우선 이계삼 부서기로부터 정치야심가 반란 파 두목들인 황종연과 이흥수의 죄악을 폭로, 비판하겠습니다.” 모두들 박수갈채를 보냈다. 이계삼 부서기는 함흥 대대의 이흥수와 황종연이 반 우파투쟁과 문화대혁명시기 죄악을 공개하고 다음과 같이 집중해 비판했다. “…이흥수는 항일투쟁과 해방전쟁시기 노간부들인 이계삼과 허영주, 정규상 등 동지, 지어 자기를 입당시킨 입당소개인 허백호동지마저 억울하게 우파분자로 몰아 비인간적으로 혹독하게 비판하고 투쟁하고 해쳤다. 허백호 서기 등 노 간부들은 함흥 대대 노 당지부 서기 김병완 동지와 김상순 동지와 함께 황종연과 이흥수의 착오적로선과 만행에 맞서 견결히 투쟁했다. 허백호 서기는 함흥중학교 동쪽 한족묘지 부근에서 김송선 동지를 강간하려고 덤비는 황종연을 돌멩이로 까부셔 황종연의 더러운 야욕을 제지시켰다. 한차례 강간범죄행위를 제지시키고서도 당시 허백호 서기는 황종연과 이흥수에 의해 억울하게 살인혐의를 쓰고 감옥에 가서 5년 동안이나 옥살이를 했다. 박성근 사원이 실사구시하게 말 몇 마디 했다고 이 두 놈은 우파 모자를 씌워 한뉘 고통 속에서 시달리게 했다. 박성근 동지는 20여년 비인간적인 심신타격에 견디지 못하고 폐병에 걸려 병마에 시달리다가 억울하게 사망했다. 반란파 두목 이흥수와 황종연은 청백한 노 간부와 사원들에게 반혁명분자, 우파분자 모자를 마구 들씌워 투쟁하고 박해했다. 이 두 놈은 투기적으로 입당한 정치야심가들이다. 황종연과 이흥수 두 정치야심가들은 정치투기를 일삼으면서 야합해 천방백계로 대대 노 당지부 서기이며 항일 로간부 김병완 그리고 그의 손자 김상순 서기가 ‘혁명을 틀어쥐고 생산을 촉진해야 한다’는 모주석의 지시에 따라 농업생산을 틀어쥐는 한편 타향 산골에 가서 감자농사와 옥수수 농사를 하고 대대에 인삼장과 양봉장, 벽돌공장을 꾸렸다고 류소기의 ‘생산유일력’과 ‘3자1포’를 집행한다고 억울한 모자를 들씌우고 반란 파들을 선동해 박해했으며 김상순 동지의 대대 당 지부 서기직무를 찬탈했다. 김상순 동지는 황종연과 이흥수의 연합박해를 피해 교하로 이사해 가지 않으면 안됐다. …” 이계삼 서기가 격앙된 목소리로 그들의 죄상을 읽어 내려갈수록 황종연과 이흥수는 평소에 개 턱처럼 쳐들었던 대가리를 툭 떨어뜨리고 온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군중들은 격분한 눈길로 이흥수와 황종연을 쏘아보았다. 이계삼은 계속해 흥수와 종연의 죄악을 폭로했다. “전임 공안국 국장 김용만과 황종연, 이흥수는 ‘4인무리’ 일파인 반란파 두목 모원신의 수하로서 악질반란파 두목들이다. 반란파 두목 김용만의 지시에 따라 이일룡, 황종연, 이흥수는 노간부들을 박해하고 무리싸움을 주도했으며 무고한 사람들을 마구 때리고 공공재산을 짓 부신 주범들이며 반당분자, 반혁명분자들이다. 황종연과 이흥수는 남녀작풍도 문란하다. 그들은 하향간부 박윤희를 여러차례 위생소에서 강간하거나 간음했다. 이흥수는 김송선이 자기 야욕을 거절한다고 위생소로부터 몰아내고 여자가 할 수 없는 산비탈 옥수수 실이를 시키면서 혼내려고 들었다.” 사람들은 흥수를 손가락질 하면서 마구 욕설을 퍼부었다. “이흥수는 사람도 아니다.” 이때 군중들 속에서 소란이 벌어졌다. 해월이가 젖통을 훌렁 드러낸 채 희희닥거리며 고래고래 고함쳤다. “우리 아버지는 늙어도 거시기가 대단해! 누가 당해?! 저기 저 미련을 거의 날마다 했다! 허허허. 우리 아빠 정말 대단한 수컷이야! 히히히.” 그 말에 모두 흥수를 쏘아보았다. 허영주는 인차 군중들 속에서 춘실을 불렀다. “춘실이, 빨리 해월을 데려 가오!” 춘실은 동네 창피해 해월을 마구 끌고 군중들 속을 빠져나가 집 쪽으로 달아났다. 허영주 부현장은 동림이랑 쪽에 대고 “민병들은 대회장 질서를 유지해 주십시오.”라고 했다. 뒤이어 이계삼이 계속 폭로했다. “이흥수는 미련을 장시기 강간, 간음했다. 또 후안무치하게도 지주, 국민당 토비, 특무인 장충국을 끌어들여 자기 딸 해월과 살게 해 계획외의 애까지 낳게 했다.” 그 말에 여기저기서 사원들이 흥수를 손가락질하며 코웃음을 쳤다. 허영주 부 현장이 군중들을 안정시키고 계속 대회를 집행했다. “아래에 함흥대대 간부와 군중들을 대표해 당지부 로서기 김상순동지가 발언하겠습니다.” 그러자 군중들 속에서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가 터졌다. 상순은 팔소매를 거두고 군중들 앞으로 나서 엄숙한 표정을 짓고 목청을 가다듬어 발언했다. “여러분, 억울한 모자를 쓰고 고생하던 수많은 간부들과 혁명적 군중들이 기다리던 역사적 천지개벽이 오고야 말았습니다. 림표와 ‘4인무리’의 죄악적인 노선과 김용만, 황종연과 이흥수 등 반란파 두목의 박해를 받아 수많은 간부들이 당정부문과 의료위생, 공안국과 파출소 전정기관, 농촌에서 철직 받았고 우파, 반혁명분자 억울한 모자를 쓰고 우리 대대에 와서 이른바 노동개조를 했습니다. 그래 빈농들이 일년 내내 농사를 지어도 죽물도 변변히 먹지 못하는데 들어앉아 간부를 타도하는 반혁명정치투쟁을 하는 것이 옳은 노선인가? 숱한 식구들이 겨우 이불 한 채에 다리나 촘촘히 걷어 넣고 자고 형이 입던 옷을 물려받아 입게 하는 것이 이른바 이흥수가 고집하는 계급투쟁, 혁명을 하는 사회주의 우월성인가?” 황종연과 이흥수는 점점 머리를 떨어뜨렸다. 상순의 말은 점점 날카롭게 두 놈의 썩어빠진 사상과 영혼, 죄악을 찌르기 시작했다. “황종연과 이흥수는 이름난 의학교수 정규상과 전 현을 영도하던 노간부들을 여지없이 박해해 돼지 똥을 모으지 않으면 밭에서 기음을 매게 강요했습니다. 장기적으로 간음하려는 더러운 야욕을 채우지 못하게 되자 한평생 무대에서 활약하던 유명한 무용수를 세상에 몰아도 보지 못한 소 수레를 몰고 옥수수를 실어들이게 했습니다. 위생소 위생원 자리로 여성들을 유혹하고 노동개조를 빌미로 강요하기도 하면서 더러운 야욕을 채우려고 했습니다. 당원 간부로서, 또 대대의 치안을 책임진 치보 주임으로서 이흥수는 암암리에 지주의 딸과 간통하고 강간과 간음을 일삼았습니다.” 상순이 이흥수와 황종연을 손가락질하며 “이흥수도 인간입니까? 저런 자가 당원간부입니까?”라고 소리치자 군중들은 “개새끼다!”라고 소리쳤다. “이흥수는 산아제한을 책임진 간부로서 딸 해월과 지주 아들 충국과 결혼등록도 하지 않고 간통해 애까지 낳게 했습니까? 이흥수는 정책관념이 있는가?” 흥수는 어찌나 당황했으면 말상은 찌그러지고 우묵눈은 감겨졌다. 박죽코는 거매지고 부르튼듯한 두툼한 입술은 거마리 매달린 같은데 썰어내면 한접시는 실히 될 것 같았다. 더구나 한심하게도 바지 밑으로 누런 오줌이 줄줄 흘러내렸다. “이전에 충국의 동생 장미련이 경주의 애를 가졌다고 수술 칼로 수술해보려고 미쳐 날뛴 자입니다. 이게 검정개 돼지 흉을 하는 게 아닙니까?” “옳습니다.” “사람을 물러 드는 똥개입니다.” 상순은 마른기침을 하더니 불길이 이글거리는 눈길로 이흥수와 황종연을 무섭게 쏘아보며 고래고래 고함쳤다. “이흥수와 황종연은 문화대혁명 시기 개 잡은 포수처럼 우쭐거리며 무섭게 정치반란의 칼을 휘둘러 무고한 노간부들을 타도하고 정권을 찬탈해 게바라 올랐습니다. 무고한 백성들을 짓밟고 더러운 야욕을 채우려고 미쳐 날뛰며 하늘과 땅이 용납하지 못할 죄를 지었습니다. 역사는 무정합니다. 정의는 승리하고 범죄자들은 역사의 심판을 면치 못하는 법입니다. 당과 인민의 역사적 죄인 황종연과 이흥수는 마땅히 역사의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이계삼은 상급 정법부문의 처분결정을 공포했다. “황종연과 이흥수는 당과 인민에게 하늘에 사무치는 죄악을 저질렀다. 상급 당위와 정법 부문의 결정에 따라 반당, 반혁명분자, 반란 파 두목 황종연의 공사 혁명위원회 주임 직을 철직시키고 영원히 공산당 조직에서 출당시키며 정법기관에 넘겨 형사 죄를 철저히 조사해 법에 의해 처리한다. 반당 반혁명분자, 반란 파 두목 이흥수를 영원히 출당시키며 대대 혁명위원회 주임, 치보 주임 직을 철직시키며 정법부문에 넘겨 죄상을 철저히 조사한 후 법에 의해 처리한다.” 모두들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를 보냈다. “저 놈들을 총살해야 한다!” 격분된 군중들은 흥수와 종연에게 주먹을 내휘두르며 고함쳤다. 복직된 허영호 소장은 민병들과 경찰들을 지휘해 황종연과 이흥수를 결박 지어 찌프에 싣고 대회장을 떠나 천수해 쪽으로 먼지를 새뽀얗게 일구며 달려갔다. 뒤이어 허영주 부 현장이 직접 노 간부들을 해방시키는 상급 당위의 결정을 공포했다. “억울하게 우파, 반혁명분자 모자를 쓴 이계삼, 허영주, 허백호, 김진욱, 한영수, 박영발, 박윤희, 정규상, 김송선 등 노간부들의 억울한 루명을 몽땅 벗겨 해방시키며 적당한 직위에 복직시킨다. 이미 세상을 떠난 박성근 동지와 조선에 나간 항일투사 진달래 중대장,그리고 오옥선 교원의 억울한 우파 모자와 누명을 몽땅 벗겨주며 해방시킨다. 마반산집할머니는 일제시기 일본 놈들의 핍박에 의해 조선 우시장위안소와 만주 진수해위안소에 끌려갔으며 신경과 봉천, 북평, 무한 등지까지 끌려가 갖은 릉욕을 다 당하였다. 그는 일본놈들과 전쟁의 피해자이다. 그러나 억울한 매국역적과 매민족반역자란 억울한 모자를 쓰고 투옥됐었다. 마반산집할머니의 억울한 모자를 벗겨준다. 그에게 억울한 모자를  씨운 반란파 두목 김용만과 황종연, 리흥수는 마반산집할머니에게 억울한 모자를 씌운 범죄자들로서 엄정히 처단해야 한다."    사람들 속에서 춘실도 진수해위안소에 끌려가 억울한 릉욕을 당한 일과 녀동생 은실을 생각하면서 손으로 비분에 찬 눈물을 닦았다. 허영주 부현장은 계속 상급당위의 결정을 공포했다. "과거를  ‘문화대혁명’시기 이흥수 반당노선과 맞서 견결히 투쟁한 함흥대대 당지부 노서기 김상순 동지를 중공 함흥대대 당 지부 서기로 임명한다.” 우레 소리와 같은 박수갈채가 장내를 진동했다. 이때 민경들과 민병들이 대대 사무실에서 그간 이흥수와 황종연이 조작한 노간부들의 이른바 검은 자료를 여섯 마대나 내다가 무져 놓고 석유를 치고 불을 콱 질렀다. 순간 삼단 같은 연기가 하늘로 치솟아 올랐다. 하늘 높이 타래치어 올라가는 시꺼먼 연기를 쳐다보며 노 간부들은 하늘이 날아날 지경으로 한숨을 후 내쉬었다. 정규상은 눈물이 글썽한 눈으로 시뻘겋게 타버리는 자료더미를 쏘아보며 치를 떨었다. (내가 한뉘 무슨 말을 저렇게 많이 했다고 숱한 자료를 했어? 한심한 일이었구나. 사람을 잡자니 못한 짓이 없었구나. 나쁜 놈들! 이 놈의 세상에 깊고도 어두운 동굴이 있었구나. 어쩜 20여년이나 기어서야 오늘 어두운 동굴을 헤쳐 나와 해 빛을 다시 보게 됐구나. 사람의 한뉘에 20년이 몇 번이나 있는가? ) 이때 허백호가 너털웃음을 웃으며 군중들 앞에 나서더니 주먹을 불끈 쥐고 하늘을 향해 힘껏 휘둘렀다. “위대한 중국 공산당 만세! 만만세!” 노간부들을 비롯한 군중들은 허백호를 따라 구호를 외쳤다. “아하하하, 난 오늘에야 해방됐단 말이야! 하하하하. 오늘 같은 날도 있구나! 흥수, 이놈, 널 입당시킨 내가 눈이 멀었지. 어허헉, 헉, 헉. 네놈은 천벌을 면치 못할 거야.” 허백호는 실성한 사람처럼 소리치며 비틀거리더니 상순을 붙안고 대성통곡쳤다. “상순이, 흥수 편에 서서 자네를 해친 내가 잘못했소. 나를 용서하지 마오!” 상순은 허백호 서기를 부축하며 위안시켰다. “허서기, 웬 말씀입니까? 우린 오늘 승리하지 않았습니까?” “허허허허. 승리했소. 우린 승리했소. 승리…” 갑자기 허백호는 뒤통수를 붙잡고 몸을 가누지 못했다. “허 서기! 허 서기!” 허나 허백호 서기는 게거품을 물고 까무러친 채 쓰러지고 말았다. 정규상이 황급히 뛰어와 상순의 품에 안긴 허백호의 손목을 잡고 진맥해보았다. “아차, 중풍을 맞았소.” 상순은 민병들 속에서 성욱을 돌아보며 소리쳤다. “빨리, 손잡이트랙터를 몰아오라!” 성욱은 집안 집 할아버지 상순의 소리가 떨어지기 바쁘게 조개덕으로 종주먹을 쥐고 뛰어갔다. 이윽고 성욱이가 손잡이 트랙터를 통통통 몰고 달려왔다. 상순은 눈물이 글썽해 허백호 서기를 업어 손잡이 트랙터에 실었다. 그때 허영주가 대대 위생소에 뛰어 들어가 침대에서 요와 이불을 안고 나와 손잡이 트랙터에 폈다. 규상과 상순이 그 위에 허백호를 눕혔다. 허백호 서기는 거품을 물고서도 기쁨에 겨운 미소를 지은 채 상순의 품에 안겨 손잡이 트랙터에 실려 진수해 병원으로 통 통 통 달려갔다. 맑은 하늘에 구름송이들이 바람에 동으로 흩날려 가고 있었다. 한 많은 하늘땅이 서서히 노호하고 있었다. 먹장구름이 덮쳐오더니 번개가 번쩍였다. 꽈르릉 꽝! 천지를 진동하는 봄 우레 소리가 울리더니 비방울이 후둑후둑 떨어져 허백호가 덮은 이불을 사납게 때렸다. 상순은 자기 몸으로 허백호의 위를 가리었다. 맑은 하늘에 뜬 커다란 먹장구름에서 떨어지는 비를 막을 길이 없었다. 허나 우르릉 거리던 하늘이 다시 맑아지기 시작했다. 손잡이트랙터가 달리는 길옆의 물기를 머금은 버드나무 가지들이 오동통한 버들개지들을 업고 사납게 불어치는 바람에 설레고 있었다.                            5.흉수의 그림자       먹장구름이 걷히고 찬란한 해 빛이 대지를 비추었다. 먹구름이 감돌던 하늘에는 꽃구름이 둥실 뜨고 만물이 기지개를 켜면서 새 싹이 뾰족뾰족 돋아나고 있었다. 조무래기들은 손칼이랑 나무꼬챙이를 가지고 조개덕의 양지바른 둔덕에서 오구작작 모여들어 나물을 캐 먹느라고 여념이 없었다. 마을 사람들은 상순의 포치대로 가대기랑 호리랑 창고에서 내리워 손질해 가지고 밭갈이를 나갔다. 그들의 머리 위로 봄을 알리는 제비들이 하늘하늘 날아다닌다. 제비들은 강변에서 진흙을 물어다 지붕과 처마아래에 둥지를 틀기에 여념이 없었다. 아직 초봄이어서 논밭을 깊게 갈수 없었다. 보습 날이 얼어붙은 논바닥 밑으로 더 들어갈 수 없었다. 소가 끄는 보습 날은 언 논바닥 위로 더 잘 미끄러져 나가 밭갈이를 하는 농부들의 기분이 적이 좋았다. 갓 갈아엎어놓은 번뜩번뜩하는 흙덩이들 속에서 흙냄새가 풍겨 올라 코를 찌르며 새해 풍년을 희망하는 상순의 가슴을 사뭇 부풀어 오르게 했다. 저쪽에서는 강남으로 날아가는 기러기 떼들이 패용천산과 칼산 상공을 헤가르며 끼룩끼룩 줄을 지어 훨훨 나래치고 있었다. 진짜 봄을 알리는 한 폭의 수채화와도 같았다. 상순은 밭갈이를 하면서도 마을에서 일어난 이 일 저 일을 생각하니 한숨만 자꾸 나왔다. 허백호 서기는 억울한 모자를 벗기고 명예를 회복해주자 너무 기뻐 뇌출혈까지 했다.  공사 병원에 실어갔지만 며칠 안 돼 사망하고 말았다. 게다가 충국이 무슨 감투끈인지 모르게 불시에 죽었다. 상순은 충국의 죽음에 의심이 부쩍 들었다. 젊어서 다년간 공안국 국장 사업을 해 온 그는 숭길과 허동원이 찾아와 충국의 시체에 피가 묻어있더라고 한 말을 그저 스치고 지나갈 수 없었다. 밭갈이를 떠나기 전에 집안 집 손자 성욱마저 찾아와 말했다. “벽돌공장 당직실에 피비린 냄새 물씬 납디다. 충국의 시체 외에도 덮고 쓰러진 북데기와 벽에도 피가 묻어 있습디다. 지어 바지에도 피가 묻어있습디다.” 상순은 자기가 아껴온 집안 손자 성욱이 불쌍했다. 덕돌처럼 대학에 가지 못하고 아직도 농촌에서 회계 따위나 하면서 흥수와 계급투쟁을 하자고 이를 악물고 달아 다니는 것이 가련했다. “얘, 넌 이젠 마을 일에 작작 삐치고 공부나 해서 덕돌처럼 대학에나 가라!” 그 말에 성욱은 뒷덜미를 쓱쓱 긁었다. “대학에 어디 아무나 갑니까?” 사실 성욱은 덕돌을 질투해 옥신각신 싸워왔지만 할아버지 벌 되는 상순은 아주 존경했다. 그가 아무리 덕돌을 헐뜯어도 상순은 넓은 마음으로 그를 아껴주었던 것이다. 상순은 사실 자기 아들은 소몰이를 시켰지만 성욱에게는 회계와 손잡이트랙터 운전수를 시켰던 것이다. 아무리 덕돌과 싸워도 상순의 그 점만은 성욱은 고맙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상순은 마을 사람들 앞에서는 아무런 내색을 내지 않았지만 밭갈이를 하면서도 흥수를 의심했다. (가능하게 충국을 놔뒀다간 해월을 계속 짓밟고 동네 창피하니깐 살해했을 가능성이 있다.) 허나 상순은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아무리 충국이 해월을 희롱해 눈꼴사나워도 치보 주임이란 사람이 살인까지 한단 말인가? 지주라고 해도 살인하면 총살당한다는 간단한 도리도 모를 수야 없겠는데. 황차 당 중앙에서는 계급투쟁을 기본 고리로 틀어쥐던 데로부터 경제건설을 중심사업으로 틀어쥐라고 하면서 전국의 지주와 부농의 모자를 다 벗겨주었고 동등한 대우를 해야 한다고 지시하지 않았는가? 흥수는 끝장났다. 만약 충국을 살해했다면 흥수는 …) “와-” 순간 상순은 밭갈이하는 소를 멈추었다. 그는 논두렁에 앉아 담배를 말아 붙여 물고 담배연기를 길게 빨아 들였다가 후 내 뿜었다. 비록 흥수와 정치상에서 모순은 있었지만 상순은 흥수가 그런 일을 했다고 생각하기는 싫었다. 아니, 생각하기조차 두려웠다. 허나 어쩐지 충국의 죽음이 동상이나 자살로는 생각되지 않고 피살이라는 생각이 머리를 쳐들었던 것이다. 밭갈이를 마치고 혹달개소를 풀어 몰고 집으로 돌아오면서도 계속 의혹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몰려들었다. 집으로 돌아오니 조선에서 조카 동선한테서 편지가 날아왔다. 상순은 소 채찍을 벽에 걸어두고 바삐 신을 벗고 명옥한테서 편지를 받아 바삐 훑어보았다. 존경하는 삼촌, 그간 안녕하십니까? 삼촌댁과 동생들은 모두 무사합니까? 덕돌은 이젠 어엿한 청년이 다 됐겠구나. 그간 삼촌일가에 구체 사항이 있어 편지 한 장 제때에 올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그간 삼촌 일가에서 저의 어머니로 해 수고 많았습니다. 칠순고개에 오른 어머니를 만주벌에 남겨두고 조선에 나와 버린 이 도리깨아들을 용서해 주옵소서. 일가친척도 하나 없는 저는 함경남도 함흥시에서 간부 일을 보는 노 항일투사 최진달래 큰할머님의 도움을 받아 항흥역 화물처에서 처장 사업을 줄곧 해왔습니다. 만주에 있을 때 신문사에서 교정을 보던 류정자와 결혼해 딸 애숙이, 애화에 그 아래로 아들 성국이, 성일이, 성춘이 셋이나 줄줄 낳았습니다. 애들이라도 많이 낳아 장차 그 애들끼리라도 조선에서 거래하면서 살라고 많이 낳았습니다. 그렇다고 결코 국경을 사이 둔 삼촌과 춘자를 비롯한 여동생들과 덕돌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덕돌은 이젠 어엿한 청년으로 됐겠구나. 물론 애 때부터 총기 좋던 덕돌은 이젠 대학으로 갔겠지? 얼굴도 보지 못한 이 형님은 네가 퍽 보고 싶구나. 삼촌, 여기 나온 친척들과 항일 노 투사들은 모두 나라 덕분에 잘 보내고 있습니다. 진달래큰할머니가 조선에 데리고 나온 둘째아들 상주도 조선로동당과 위대한 수령 김일성 주석의 현명한 령도아래 잘 나가고 있습니다. 상주의 원래 이름은 경수라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남조선특무 용천의 아들 경주의 이름자 "경"자를 따르지 않느라고 "상주"라고 이름을 고쳤습니다. 상주는 평양에 가서 김일성종합대학을 졸업한 후 "3대혁명붉은기소조" 소조장으로 돼 잘나가는 정치인물이 됐습니다. 가능하게 함경북도 쪽으로 나가서 어느 군 당위 위원장쯤은 할 것 같습니다. 그저 조선전쟁에서 희생된 성칠 큰할아버지가 불쌍하고 그립습니다. 큰할아버지도 살아계셨으면 함경북도 도당위원회 위원장쯤은 할 뿐이 아닙니까?     항일 로 투사 은녀 아주머니는 지금 함경북도 한 군에서 부녀사업을 하고 있고 아들도 청진시 한 대학을 졸업하고 장가도 가고 애도 낳고 근심 없이 보냅니다. 만주에서 우파로 몰리어 갖은 투쟁을 다 받아온 오옥선 선생도 여기 와서 보통 중학교에서 교장 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하여간 중국에서 우파요, 조선특무요 하고 몰려 투쟁받던 분들은 조선에 나와 모두 잘 됐습니다. 삼촌, 그간 제가 나라에 말해서 중국에 홀로 남겨둔 어머니를 모셔오자고 제기했습니다. 효성을 중시하는 나라에서는 저의 효성에 감복돼 요구를 기꺼이 동의했습니다. 그리하여 나라 외교부를 통해 중국 외사부문의 동의를 거쳐 어머니를 조선에 모셔 내오기로 됐습니다. 그간 삼촌일가와 여동생 순애가 어머니를 모시느라고 수고 많았습니다. 고맙습니다. 삼촌, 옥체 건강하게 오래오래 앉으십시오. 만나는 그날까지 안녕히 계십시오.” 상순은 오랜만에 하나 밖에 없는 조카의 편지를 받고 뜨거운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친 혈육의 정은 말리지 못해. 형수를 조선에 내 보내야 하는 순간 상순은 굵다란 눈물을 줄줄 흘렸다. 물론 상순은 큰조카 공혁이 못쓸 부스럼 병에 세상을 떠나가고 동선마저 조선에 나간 후 외롭게 사는 형수를 생각해 집 이영도 해마다 이어드리고 땔나무도 실어주고 했지만 어쩐지 아주머니에게 효성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 같아 마음이 쓰렸다. 조카들이 다 떠나가고 아주머니까지 조선에 돌아가게 되자 상순은 외롭고 허전하기 그지없었다. 상순은 아내와 토론하고 옷감 세벌을 떼서 조선에 나가는 형수에게 드리기로 했다. 형수가 떠나가는 날 상순은 유유히 흐르는 두만강 변 해관 앞에서 형수의 손목을 잡고 흐느껴 울었다. “형수님, 이제 가면 언제 만나겠소? 부디 조선에 가서 옥체 건강히 보내오.” 지새금은 말라 생강 같은 손으로 상순의 얼굴에 흐르는 뜨거운 눈물을 닦아주었다. “생원이, 그간 나 땜에 수고 많았소. 산 사람이 갈라져도 만나겠지. 난 아들의 효성을 받으러 가니까 좋은 길에 근심하지 마오.” “예. 예.” 상순은 눈물을 흘리며 형수와 이별인사를 했다. 옆에 있던 덕돌은 “이제 큰어머니 가면 언제 보겠습니까? 이 조카의 큰 절을 받으십시오.”라고 하며 산이 무너지듯 무릎을 꿇고 넙죽 절을 올렸다. 고모사촌 최해옥 누나는 옆에서 보다가 “덕돌은 언제나 보면 어른스럽단 말이오.”라고 하며 혀를 끌끌 찼다. 명옥은 지새금과 옥신각신 다투며 살아왔지만 미운 정 고운 정 그래도 동서간이라 헤어지게 되자 섭섭한 감정을 모두 잊어버리고 석별의 정을 금치 못했다. 상순은 두만강 저쪽으로 넘어가는 형수를 바래면서 흐느껴 울었다. 아, 두만강이어, 눈보라치던 엄동설한에 형님의 지게에 앉아 두만강 얼음우로 만주벌에 들어서던 일이 어제 그제 일같이 눈앞에 선하지 않는가! 그런데 오늘 또 형수를 피 눈물이 흐르는 이별의 강-두만강을 넘어가게 해야 한단 말인가! 상순의 가슴속에서는 이별의 피눈물이 사품 치며 흐르는 두만강의 푸른 물처럼 굽이쳐 흐르고 또 흘렀다… 형수를 조선에 보낸 후 상순은 아무래도 흥수의 살인혐의를 물리칠 수 없어 정식으로 파출소에 찾아가 신고했다. 복직된 허영호 소장은 상순의 신고를 듣고 뜨거운 물주전자를 들어 상순에게 뜨거운 물을 컵에 부어드리면서 머리를 끄덕였다. “김 국장의 말씀에 도리가 있습니다. 흥수는 충국이 자기 집에 드나들면서 해월을 희롱하는데 악감을 품었을 수 있습니다. 동네 창피해 살인했을 수 있습니다. 허나 이건 추측에 불과합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살인증거를 수집해야 하겠습니다.” 상순도 머리를 끄덕였다. “나도 그 생각을 했네. 살인증거가 없이 어찌 살인죄를 해명하겠소?” 뒤이어 상순은 그간 자기 고안해낸 해명수를 말했다. “우선 충국의 시체를 파내 살펴보면 모든 게 해명될 게요. 대퇴골에 상처가 없는지? 술을 많이 먹거나 추위에 얼어 죽을 수는 없다고 보오. 사건이 발생한 때는 이미 봄이였소. 그보다도 더 추운 엄동설한에도 충국은 벽돌공장 당직실에서 얼어 죽지 않았소. 그런데 봄에 얼어 죽었겠소. 분명 어데 맞아 죽은 거 같소. 북데기와 당직실 벽에 피가 여러 곳에 묻어 있었다오. 그리고 바지 괴춤에도 피가 발리어 있었다오.” 허영호 소장은 그 자리에서 현 공안국 김창남 국장에게 형사 수사 일군들을 보내 사건을 수사할 것을 요구했다. 오후에 찌프 두 대가 함흥 촌에 먼지를 새뽀얗게 일구며 달려왔다. 김창남 국장과 허영호 소장은 수사 일군들을 데리고 대대 사무실에 와서 당 지부 서기 겸 치보 주임인 상순을 만나본 후 마을의 증인들인 성욱과 허동원, 숭길과 함께 찌프에 앉아 충국의 시체가 매장된 장개골 안으로 곧추 달려갔다. 김창남 국장은 반란 파 두목 김용만이 국장에서 철직돼 감옥으로 들어간 후 국장으로 제발됐고 허영호 소장은 황종연이 철직돼 감옥에 간 후 소장으로 다시 복직됐던 것이다. 10분도 되지 않아 장개골 안 막바지 밑으로 해 찌프들이 멈춰 섰다. “충국의 시체를 묻은 곳이 어딥니까?” 창남의 물음에 숭길과 성욱은 거의 동시에 잔설이 뒤덮인 장개골 안 막바지 둔덕아래 얼음 강판 쪽을 가리켰다. “허, 이상하다. 어째 여긴 아직도 눈과 얼음이 녹지 않았지?” 김창남 국장은 모자를 벗어 쥐고 희슥희슥한 머리를 쓸어 올리면서 시체를 파묻은 곳을 둘러보며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그때 숭길과 성욱은 상순과 함께 충국의 눈을 치우고 얼음을 깐 후 시체를 파냈다. 겨우내 얼음 위에 산골의 샘물이 흘러내리면서 시체 위는 얼음이 꽁꽁 얼어붙었었다. 얼음 밑 샘물에 젖은 흙도 떵떵 얼어붙어 있었다. 놀랍게도 건치를 풀고 충국의 시체를 보니 꽁꽁 얼어 있지 않겠는가! “아니 이게 무슨 일이요? 시체가 썩지 않고 언 채로 있다니?” 상순은 충국의 일그러진 낯을 보더니 숫구멍으로부터 머리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이거 보오. 숫구멍에 무슨 둔기에 얻어맞은 상처가 있소.” 수사 일군들이 확대경으로 때와 피가 덕지덕지 묻은 머리를 찬찬히 살펴보니 두피가 무엇에 강하게 얻어맞아 터진 타박상처자국이 남아 있었다. 수사 일군들은 충국의 머리 상처자국을 카메라로 사진을 찰칵찰칵 찍었다. 바지에는 아직도 얼어붙은 피고드럼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수사 일꾼들은 도리머리를 흔들면서 연이어 샷타를 눌렀다. 그들은 불을 피워 얼어붙은 바지를 녹인 후 조심스레 벗겨냈다. “아니, 이게 뭔가!” 수사 일군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글쎄 충국의 고환이 둘 다 없어지지 않았겠는가! “정말 악한 놈이 한 짓이구나. 고환까지 빼가다니!” 김창남 국장은 치를 떨었다. 수사일군들은 녹은 시체에서 흐르는 충국의 혈액을 채취해내고 머리카락을 몇 오리 뽑아냈다. 이제 공안국 과학수사 실에 가져다 혈형과 DNA를 분석할 판이었다. 허영호 소장은 상순과 김창남을 번갈아 보면서 말했다. “꼭 이 고환을 염오하거나 거시기를 제대로 쓰지 못하는 자의 변태적소행입니다.” 상순은 김창남 국장과 허영호 소장을 한쪽으로 불러다가 자기 견해를 나직이 말했다. “내 보건대 이건 흥수가 범행했을 혐의가 크오.” 창남 국장과 허영호 소장은 동시에 상순의 세 귀 눈을 쳐다보았다. “충국은 평소에도 흥수네 고방에 기어들어 해월과 그런 관계를 했소. 그러니까 흥수가 동네 창피해 충국이 다신 해월한테 달려들지 못하게 불알을 베 버렸을 수 있소.” 둘은 서로 마주 보며 머리를 끄덕였다. 창남 국장은 연세가 들었지만 아직도 예리한 분석을 하는 옛 상전 상순을 속으로 경탄했다. “우리도 그런 생각이 듭니다. 흥수를 나포해 심문하는 한편 그가 충국을 때려죽인 흉기와 증거를 확보해야 하겠습니다.” 허영호 소장과 창남국장은 찌프를 타고 즉시 감옥에 돌아가서 흥수를 끌어내 직접 심문하기 시작했다. “이흥수, 무슨 죄를 졌는지 아는가?” 흥수는 실눈을 힐금거리며 눈치를 보더니 뻔뻔스레 떠벌였다 .“무슨 죄 있어? 난 위의 지시를 집행했을 뿐이야. 네깐 놈들이 뭘 알아 그래? 정치란 10년에 한 번씩 물곬을 바꾸는 법이야.” “닥쳐! 누가 장충국을 살해했는지 잘 알지?” “탄백하라!” 흥수는 덴겁하다가 인차 침착성을 회복했다. “아니, 지금 누구한테 똥바가지를 씌우려고 들어? 난 충국을 살해한 적이 없어!” 아무리 심문해도 흥수는 입에 빗장을 지르고 한마디도 말하지 않았다. 살인증거를 쥐지 못한 이상 더 용빼는 수가 없었다. 수사 일꾼들은 김창남 국장의 지시에 따라 상순과 함께 흥수네 집을 발칵 뒤지면서 흉기를 찾기 시작했다. 상순은 구새 목의 벽을 살피다가 처마 밑에 걸어놓은 호미에 눈길이 멎었다. 그는 호미를 벗겨 이리 저리 살펴보았다. 호미 날이나 호미 등에는 아무런 피 흔적도 없이 말끔했다. 상순은 호미를 되걸려다가 호미자루를 살피다가 피뜩 벌건 피 흔적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바로 이거다!” 흥수가 샘물에 가서 호미 날과 등은 말끔히 씻었지만 호미자루의 피는 스며들어 씻지 못했던 것이다. 수사 일군들은 즉시 호미를 찌프에 실었다. 이때 해월이 집에서 뛰쳐나와 덩실덩실 춤을 춰댔다. “경찰이 다 우리 집에 왔다. 아하, 재미있다야.” 상순과 수사 일꾼들은 도리머리를 흔들면서 집 울안에서 나왔다. 해월은 뒤에서 도라지를 추면서 횡설수설했다. "경찰아저씨, 가지 마세요. 우리 아빠 건달입니다. 우리 아빠 미련 아줌마 하고 날마다 씹을 했다. 애기까지 낳았다. 초롱에 넣어서 던졌다. 헤헤헤.”  수사 일꾼들은 해월의 아래 위를 훑어보고 상순에게 물었다. “저건 무슨 말입니까?” “저 애는 정신이 좀 나갔소. 허나 흥수가 미련을 간음한 일은 사실이오. 애를 낳았을 수도 있고.” 사실 흥수는 미련을 오랫동안 간음해 임신까지 덜컥 시켰던 것이다. 뒤늦게야 알게 돼 겁을 집어먹은 흥수는 미련의 집을 찾아가 불룩한 아랫배를 보자 전기에라도 붙은 듯이 덴겁했다. “아니, 이 년아, 어데 가서 바람을 피워 애까지 가졌어?” “더 물어서 아오? 당신 애요. 적반하장이라고 도적놈이 ‘도적이야’ 아니야? 불 지른 놈이 ‘불이야!’…” “닥쳐!” 미련이 뭐라고 계속 말하려고 하자 흥수는 손으로 미련의 입을 틀어막으며 바깥에 누가 오지 않는가 뒤를 돌아보았다. 다행히 그림자도 얼씬하지 않았다. “이년아, 넌 두렵지 않아? 경주가 남조선에 달아나다가 붙잡혀 감옥에 가지 않았느냐? 나그네도 없는데 어떻게 임신했냐? 동네 부끄럽지 않니? 유산해야 해! 미련은 흥수의 손을 쥐어 뿌리쳤다. “위선자! 네놈도 치보주임이냐? 난 네놈을 쫄딱 망신시키겠다! 네놈의 죄악을 만천하에 공개하겠다! 죽여치우지 못하는 게 한이다! 이 원수 놈아!” 흥수는 당황해 미련을 구들바닥에 깔고 들어앉아 벽 밑에 있는 이불을 들씌웠다. (이년을 이대로 뒀다간 개꼴망신당하겠다. 당장 손을 쓰지 않다간 안 돼!) 흥수가 미련에게 어떻게 손을 쓸 까고 궁리했다. 흥수의 메마른 엉덩이 밑에서 미련은 단말마적으로 엎치락뒤치락하며 발악했다. 그녀는 흥수가 자기를 딱 죽일 것만 같았다. 겨우 이불 밑에서 입을 내민 미련은 숨을 바삐 몰아쉬며 소리쳤다. “사람 좀 살려다오! 유산할 게.” “정말 내 말을 들을 테야?!” “그래. 유산할게.” 그제야 흥수는 미련을 놓아주며 엉덩이를 들었다. “네 여기 가만있어라. 내 널 유산시킬 때까지.” 흥수는 미련의 집에서 나와 토성 쪽으로 황급히 터벅터벅 걸어갔다. 정규상을 불러 유산시키자니 자칫 미련이 떠들면 발각날 것 같았다. (어쩐다?) 한참 궁리하다가 그는 토성 안에 있는 위생소에 들어가 정규상한테 가서 수술 칼을 빌려고 했다. 허나 그때 위생소 안에 정규상도 박윤희도 없었다. 그 틈을 타서 흥수는 위생소 주사실에 들어가 수술칼을 하나 훔쳐냈다. 미련의 집으로 돌아온 흥수는 공포에 질린 낯으로 자기를 보는 미련을 슬슬 얼렸다. “내 약을 가지고 왔다. 누워.” 미련은 흥수의 움츠린 손을 흘금거리며 눕는 수밖에 없었다. 흥수는 집안을 두리번거리다가 벽에 걸어놓은 각반에 가서 눈이 멎었다. 그는 각반을 벗겨내 일어나려는 미련을 깔고 들어앉아 두 손을 뒤로 꽁꽁 묶었다. “왜 이래? 죽이자고 이래?” “아니야. 네 배때에서 애를 꺼낼게. 이를 악물고 좀 참아라!” “어떻게 꺼낸다고 이래?” “걱정 마!” 흥수는 백정처럼 무섭게 미련을 깔고 들어앉아 미련의 배를 수술 칼로 째려고 들었다. “앗!” 흥수는 미련의 웃옷을 훌 걷어 올리고 수술 칼로 배를 째려고 들었다. “이러지 마! 애가 나올 거 같아.” 미련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그 소리에 흥수가 미련의 하신을 여겨보니 진득진득한 양수가 나오고 있었다. 애가 당장 나올 거 같았다. 그제야 흥수는 손을 떼고 미련의 하신을 살폈다. 이때 문이 벌컥 열리더니 해월이 들어왔다. 와들짝 놀란 두 사람은 해월을 보고서야 한숨을 몰아쉬었다. “또 했소? 히히히. 시퍼런 대낮에 또 했어?” “주둥이를 다물어!” 흥수는 해월을 붙잡아 앉혔다. 한참 후 미련의 하신에서 진짜 피 터지며 애가 나왔다. “응아~ 응아~” “해해해. 애기 나왔구나. 우리 아빠 정말 재간이 있어. 늙은 게 애기까지 낳았어. 이거 내 동생이야. 히히히. 불알이 달린 거 봐라. 얜 내 하구 충국이 낳은 아들의 삼촌이구나. ” 흥수는 바삐 해월의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주둥이를 다물어. 누가 듣겠어.” “응아~ 응아~” 흥수는 해월의 입을 막던 손을 떼 애기 입을 막았다. 그래도 안 되자 바깥을 내다보던 흥수는 애를 내려다 봤다. 고토리 달린 애가 너무나도 희구했다. (야, 평생 아들, 아들 했는데 얘를 키웠으면 얼마나 좋겠니? 저 정신병자 해월을 믿고 어떻게 살겠니?) 허나 흥수는 인차 냉정성을 회복했다. (안 돼! 절대 안 돼! 지주 딸과 낳은 애를, 바람 써 낳은 애야!) 흥수는 이를 악물고 우는 애를 안고 부엌에 내려가 부엌아궁이에 넣을까 하다가 물 초롱이 피뜩 눈에 띄었다. 그는 제꺽 애를 물 초롱에 담아 바깥에 내가려고 했다. 애가 바둥거리며 초롱 속에서 손으로 뭔가 잡으려고 하는 것 같았다. (얼어 죽게 해야지.) 흥수는 애 목을 졸라 죽인 후 부엌아궁이에서 재를 파내 초롱에 마구 담았다. 구들에서 미련은 어린 애처럼 엉엉 울었다. 해월은 “아버지 정말 지독하다!”라고 떠들어댔다. “주둥이 다물어.” 날이 어두워지기를 기다려 흥수는 죽은 애가 든 초롱과 괭이를 들고 어둠을 타 장개골 안으로 향했던 것이다… “붙잡아 가라. 우리 아빠 애기를 죽였어. 내 남동생을 죽였어. 붙잡아 가야해! 내 신랑 충국이 죽어서 나한테 오지 못해요. 헤헤헤. 난 하고 싶어 죽겠다. 우리 아비 정말 미워! 경찰이 어째 붙잡아가지 않아!” 상순과 수사 일꾼들은 정신병자 해월의 말에서도 흥수의 피의를 더욱 느끼면서 살인사건 현지 벽돌공장 당직실로 달려갔다. 당직실은 사원들이 창문과 문을 잘 손질해놓고 불까지 때 놓아서 들어가니 후끈후끈 했다. 그들이 벽을 살펴보니 정말 피 자국이 있었다. 수사일군들은 마른 피 흔적을 채집했다. 하지만 다른 물증은 얻을 수 없었다. 사원들이 북데기를 다 걷어 낸 데다가 구들바닥도 말끔히 손질하고 새 장판까지 펴놓았던 것이다. 당 날로 김창남 국장과 허영호 소장은 과학기술수사과로부터 호미자루의 혈흔과 충국의 시체 피의 흔적의 혈흔과 DNA는 일치하다는 화험 결과를 보고받았다. 혈흔의 DNA에 의해 과학수사를 하리라고는 오래 동안 치보 주임을 해온 흥수었지만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창남 국장과 허영호 소장은 흥수의 호미를 심문 실 사무 상에 꽝 놓으며 심문을 시작했다. “흥수! 그래도 살인범행을 승인하지 않겠는가!” “호미, 호미로 어떻게 내가 살인했다고 할 수 있어?” 허나 흥수의 정신방선은 철 같은 증거 앞에서 산산 쪼각이 나고 말았다. 그는 한나절도 뻗치지 못하고 자기 죄행을 시인하고 말았다. “난 어시로 생겨 충국이 귀여운 딸 해월을 짓밟는 것을 차마 더 볼 수 없어 죽였다! 그 개 불알을 까버리면 끝난다고 생각했어? 허나 죽이까지 하려고 한 적은 없어! 개나 돼지도 불을 까도 사는데 죽을 줄은 몰랐어. 충국이 개 보다 못한 놈 죽어도 싸!” 창남 국장과 허영호 소장은 경멸에 찬 눈길로 흥수를 쏘아보았다. “인민의 법률은 살인죄를 진 당신, 숱한 노 간부들을 박해한 당신을 호된 징벌을 할 것이다.” 흥수는 단말마적으로 수갑을 찬 손을 쳐들고 고래고래 고함쳤다. “난 목숨을 내걸고 해방전쟁과 토비숙청전투, 항미원조 전쟁에서 싸운 혁명전사야! 나를 총살해?! 어림도 없어!” 허나 수사 일군들은 쓴 외를 보듯이 쓴 웃음을 지으며 흥수를 철창 속에 처넣었다. 몇 달 후 반 우파투쟁과 문화대혁명 시기 못 된 짓이란 못된 짓을 다하면서 로간부들을 박해하고 충국을 살해한 흥수는 인민법률의 호된 징벌을 받아 살인죄로 총살당했다.
169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111) 댓글:  조회:1173  추천:0  2018-07-24
                       2. 탈출        5.7(함흥)대대에서 한 10킬로미터 떨어진 돌문 안에 깎아지른듯한 벼랑이 눈 뿌리 아찔하게 치솟아 있다. 덕돌이 돌문 안에 들어서자 병풍 같이 둘러선 저 멀리 두 벼랑 사이에 높은 저수지 언제가 바라보였다. 저수지 언제에서는 민공들이 개미처럼 바글거리고 있었다. 언제 아래 서쪽 산비탈에 게딱지처럼 자그마한 초막들이 서너줄 늘어섰다. 그 초막들에 진수해공사에서 뽑혀온 200여명 민공들이 들어 있었다. 말이 집이지 대충 지은 초막이어서 벽에 여기저기 구멍이 나 써늘한 가을바람이 초막에 스며들었다. 커다란 구들에 20여명 민공들이 두터운 이불을 들쓰고 드러누워 해가 밥상만한 뙤창문을 꿰뚫고 궁둥이를 비출 때까지 곤하게 자고 있었다. 전날 낮에 이어 새벽에도 흙짐을 지어 나르고 금방 들어와 곤해 떨어졌던 것이다. 저수지 공사장의 책임자 김영기는 공지를 얼기 전에 끝내려고 민공들을 낮과 초저녁 대대, 낮과 새벽대대로 나눠 윤번으로 흙을 파 올리게 하면서 마무리 공사를 다그치고 있었다.공사 무장부 부장 이인학은 전 진수해에서 모집해온 민공들 가운데 싸움꾼이 많은 형편에 따라 싸움꾼 두목들로 직속 반을 내왔다. 직속반 민공들로 민공들을 관리하는 묘수었다. 민공들은 싸우다가도 직속반 싸움꾼들이나 무장부 이인학 부장이 왔다고 하면 호랑이를 본 노루들처럼 와- 하고 몽땅 달아났다. 잡히기만 하면 또 숱한 여민공들 앞에서 창피하게 투쟁당해야 하니까.       숱한 민공들이 고된 흙짐메기에 시달려 생산대로 달아나군 했다. 그때마다 저수지공사의 힘꼴이나 쓰는 승환과 광철 등 직속반의 애들이 손잡이트랙터를 몰고 마을에 쫓아가서 도망친 민공을 붙잡아다가 200여명 민공들 앞에서 도망분자라고 비판했다. 직속반의 애들은 싸움을 잘한 덕에 고된 일을 하지 않고 초막과 돌문 안의 초소에서 보초만 서면서 거들먹거리며 세월을 보냈다. 그들은 민공들이 달아나지 못하게 감시했을 뿐만 아니라 도망친 민공들을 붙잡아 들이면서 갖은 행패를 다 부리었다. 그리하여 민공들은 힘들어도 감히 도망칠 엄두를 내지도 못했다. (쳇, 신형의 로투구 만인갱이구먼.) 덕돌은 한 마을의 친구 송철에게서 저수지 공지의 강압적인 관리방법을 듣고 납득되지 않았다. 그는 또 개 잡은 포수들처럼 거들먹거리는 직속반의 광철과 승환이 눈에 거슬렸다. 하지만 저수지 공지에서까지 싸우면 입단도 못하고 전도를 그르칠까봐 억지로 참으며 속을 끙끙 앓았다. 승환도 굴뱀 같은 덕돌을 아는지라 경거망동하지 못했다. 숱한 민공들이 밤에 낮을 이어 개미떼처럼 바글거리며 언제 아래 물 함지를 판 흙을 45도나 되게 가파른 발판을 타고 멜대로 메어 올렸다. 후에 덕돌을 따라 순임과 순희 그리고 동림과 허춘도 이렇게 힘든줄도 모르고 저수지 공지에로 올라왔다. "어째 생지옥 같은 델 왔니? 얼마나 일이 고된지 알기나 하고 왔니?" 덕돌이 근심돼 말하자 순희는 히쭉 웃으면서 개의치도 않았다. "다 사람 하는 일이겠지." .발판이 어찌나 가파른지 순희와 순임도 문푸레 광주리에 흙을 담아 멜대로 메고 발판을 밟으며 올라가기 힘들다는 것을 느꼈다. 한번은 흙짐을 메고 물 함지 위로 올라가다가 그만 발이 미끄러 철써덕물함지에  떨어졌다. 온 몸이 물함지에 빠져 물참봉이 돼버렸다. 그래도 순희와 순임은 초막에 돌아가 옷을 갈아입고 돌아와  계속 멜대로 흙을 메 올렸다. 공지 이론 보도원을 맡은 덕돌은 쉼에 한어신문을 당장에서 조선말로 번역해 민공들에게 읽어주었다. 민공들은 그의 높은 한어 수준에 입을 딱 벌릴 지경이었다. 덕돌은 신문을 다 읽자마자 조용히 일어나 소변을 보러 가는 척 하면서 산굽이를 에돌아가 민공들의 눈을 피해 버드나무 밑에 가서 드러누워 책을 보았다. 그때 순희도 소변을 보러 온 척 하면서 덕돌한테 살금살금 다가왔다. 덕돌은 책을 보다 말고 일어나 앉았다. “왜 이런 생지옥으로 왔니? 어서 구실을 대고 마을로 돌아가라.” 허나 순희는 덕돌의 옆에 와 나란히 앉더니 수건으로 어깨 먼지를 털며 생글방글 웃었다. “괜찮아. 난 네가 무슨 일을 하나 궁금하더라.” 덕돌은 콧방귀를 뀌었다. “여긴 진짜 일제 때 로투구 만인갱보다 나은 데 없다. 여기 와서 고생할 게 뭐야?” 허나 순희는 진정어린 말을 했다. “사실 네 입단을 하나라도 도와주고 싶더라.” 덕돌은 머리를 숙이고 나무꼬챙이로 발밑을 죽죽 긋는 방순희를 보고 코마루가 시큼해날 정도로 고마웠다. 허나 입으로는 투박하게 내쏘았다. “별 걱정을 다 한다. 남이 입단을 하든 말든 네가 쓸데없이 이런 골 안에 와서 고생할게 뭐야?” 순희는 머리를 들어 보름달 같은 얼굴로 덕돌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덕돌아, 넌 중학교에서 이미 입단할 자격을 갖추었다고 본다. 학교에서도 네 입단지원서를 공사에  올려보냈는데 어째 공사 단위에서 비준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원, 참. 널 입단시키지 않으면 어떤 청년을 입단시킨단 말이냐?"      순희는 덕돌의 입단사안이 왜 공사단위에서 비준되지 못한 내막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사실 장영웅은 입단소개인으로서 학교 단총지 서기 김명호선생의 지시에 따라 입단소개인 소개란에 "덕돌은 '독서벼슬론'에 물젖었기에 오래동안 고험이 필요한 동무이다. 때문에 소홀히 입단시킬수 없다."라고 써넣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덕돌의 입단은 비준되지 못했다.  그럼 김명호 단총지 서기는 왜 한사코 덕돌의 입단을 저지하려고 했는가? 그는 황승연한테서 덕돌의 뒷말을 들어 공감을 형성했었다. 그는 공부는 잘하지만 학교에서 이른바 말썽을 일으키는 덕돌이 눈에 거슬렸던 것이다. 그런데 덕돌이 학교에 돌아와 이전에 한족애들을 데리고 싸움질하던 잘못을 고치고 표현이 너무 좋은데다가 글짓기써클에서 소식이랑 써서 신문과 방송에 내 학교 위신도 올려가게 했다. 그 바람에 덕돌의 입단을 학교에서 비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덕돌의 입단을 저지하면 말을 듣기 쉬웠다. 그리하여 김명호는 학교에서는 부득불 비준하고 사생들의 눈을 피해  암암리에 장영웅을 시켜 새 입단지원서 소개인란에 덕돌을 나쁘게 써넣게 하고 공사 단위에 올려다가 덕돌의 입단을 부결해 저지했던 것이다. 힉교 단위에서 토론할 때 원 덕돌의 입단지원서에 영웅도 덕돌을 제대로 잘 평가해 써넣었었다. 순희도 그 지원서를 보았는지라 장영웅이 김명호의 지시에 따라 새 입단지원서를 바꿔 그렇게까지 나쁘게 평가해 써넣었을줄은 깜깜부지였던 것이다.       덕돌은 순희한테 모든 내막을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자기와 딱친구느라고 떠드는 장영웅을, 자기가 어떻게 입단을 도와 소개란에 좋은 말을 다 써넣었는데 입단이 비준 안돼 미안하다는 말을 횡설수설하는 "친구" 장영웅씨를 창피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덕돌은 그 내막을 전혀 모르는 척하며 한마디 말도 꺼내지 않고 장영웅이 언젠가는 량심의 가책을 느끼는 날 스스로 말할 때까지 몇년이고 몇십년이고 먼저 말하지 않고 사이좋게 보내려고 마음먹었다. 애들은 졸업할 때 영웅또 내막을 알려준 공사단위 조직위원 오영순 누나에게 루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     장영웅은 공부도 잘하고 정치도 아주 능란하게 했다. 그런데 애들은 영웅이 학교 당서기하는 아버지를 믿고  삐뚤렁정치를 하면서 으시댔다고 눈에 든 가시처럼 여겼다. 그래서이랑 때려놓을 궁리를 했다. 그리하여 영웅은 덕돌을 찾아와 보호해달라고 했다. 덕돌은 지금도 애들한테 보복당해 물매를 맞은 영웅을 제대로 보호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고 자책했다. 그래도 허울은 보기 좋은 개살구처럼 "친구"인데 왜 영웅을 빼돌리기만 하고 함께 집까지 가면서 보호하지 못했는가 검토하군 했다. 덕돌은 영웅을 너그럽게 량해했다. 영웅인들 "어찌 단서기선생의 지시를 어길 수 있었겠는가. 선생의 말대로 하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해 시키는대로 했을 것이었다. 그것이 한 청년의 전도엔 얼마나 큰 영향을 주었는가는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도 인간인만큼 덕돌한테 말하진 못해도 속으로 량심의 가책을 받을 날이 있으리라.      덕돌은 다만 영웅의 좋은 면만 생각했다. 다 함께 공부를 잘하는 친구라고 여겼다. 그의 아버지는 항상 "덕돌은 총명한 애야.  공부를 잘하지. 아무때든 덕돌은 사회에 쓰일 인재야."라고 외우군하면서 덕돌을 견결히 고중에도 입학시켜주었던 것이다. 덕돌은 영웅의 아버지 은공을 잊지 않고 후에도 종종 영웅의 아버지를 찾아가 인사했고 영웅의 아버지가 세상 떴을 때도 찾아가 관을 치면서 엉엉 어린애처럼 울었다. 그 불운의 시기에 곤경에 처한 덕돌을 제대로 평가하고 자기 앞날까지 내다봐준 영웅의 아버지를 생각하고 슬프게 울고 또 울었다. 덕돌은 영웅의 아버지 은공을 생각해서라도 넓은 흉금으로 영웅의  모든걸 양해했다. 덕돌은 시대를 잘못 만난 피해이다. 그 시대에는 공부를 너무 특출하게 해도 죄였다. 덕돌은 "독서벼슬론"이란 것이 뭔지도 몰랐다. 그런데 김명호 단서기는 그에게 "독서벼슬론"에 물전은 "사상이 나쁜 학생"이라는 억울한 모자를 씌워놓고 입단을 막아버렸다. 아니, 전도를 막아버리려고 혈안이 돼 미쳐 날뛰였다.      결코 영웅의 잘못이 아니었다. 공부를 너무 잘해도 "독서벼슬론"에 물젖은 애라고 보는 그 새대의 잘못된 판단이었다. 그리하여 덕돌은 영웅과 계속 친구로 사귀기로 마음먹었다. 다만 믿던 도끼에 발등을 찍히운다고 영웅이나 다른 애들과도 사귈 때는 너무 믿지 말고일정한 거리를 두고  주의해야 되겠다고 느꼈다.  덕돌은 마음 속으로 몇번이고 영웅에게 물었다. (영웅아, 친구라면 진심으로 도와야지. 뭐냐? 아무리 단서기선생이 압력을 가해도 그렇지. 어쩜 그렇게 입단소개란에 소개이란게, 친구라는게 그렇게 친구를 무함해 써넣는단 말이냐?)       덕돌은 순희한테 그 내막을 말하고 싶어도 친구를 헐뜯는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순희는 덕돌의 속내는 모르고 건의했다. " 이제라도 이 공지에서 입단하자고 노력해라. 내가영웅이랑 공지에 왔으면 좋겠다. 그와 내가 힘껏 도와줬으면 널 입단시키겠는데. 어쩌겠니? 내하고 동림이라도 소개인으로 나서서 널 꼭 입단시키련다.” 덕돌은 “고맙다.”라고 하고나서 산새들이 날아예는 맑고 푸르른 가을 하늘을 바라보며 이런 말을 꺼냈다. “공사 성환 형님이 그러던데. ‘4인무리’를 짓 부신 후 화국봉 주석을 위수로 한 당 중앙에서는 대학 입학 제도를 개혁해 이젠 시험을 쳐서 입학시킨다더라. 경산 선생님도 전번에 국경절에 갔을 때 나보고 공지에 가지 말고 대학시험복습이나 하라고 하더라. 전번에 순임도 아버지에게서 그런 말을 들었다고 하더라. 정규상 교수 말은 확실히 믿을 만한 정보다.” 순희도 동을 달았다. “전번에 생산대 맨발의사 조영희도 약재를 캐러 여기 산으로 왔다가 들려서 대학시험제도가 회복된다고 말하더라. 그 애 아버지는 진수해중학교 교도처 주임이 아니고 뭐냐?” “그럼 확실히 대학입학제도가 바뀐게 아니야?” 순희는 볼우물을 옴폭 파더니 머리를 끄덕였다. “나도 마을에서 도는 풍문을 들었다. 정규상 교수는 시내 병원으로 돌아간다더라. 그리고 송선 아줌마도 가무단으로 되돌아간다더라.” “진짜 천지개벽이 일어났는가?” “그럼 얼마나 좋겠니? 우리 둘은 이런 고생을 하지 않고 무조건 대학에 갈수 있지 않니?” 순희는 20세 청년이 아니라 천진난만한 10대 초반의 소녀 같았다. 그녀의 보름달 같은 얼굴에는 아름다운 미래가 사품쳐흐르고 있었다. 그녀는 부끄럼도 없이 턱을 고이고 옆에 앉은 덕돌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게 백일몽이라고나 해라. 아직도 ‘문화대혁명’ 여독이 독즙처럼 남아 있어 정치 밖에 모르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니?” 순희는 눈을 곱게 흘기면서 종알거렸다. “글쎄. 저수지 공지 책임자라는 사람을 봐라. 저수지에서 일을 잘 하면 대학에 무조건 추천해 보낸다고 사기친다.” “그게 얼리는 수작이 아니고 뭐야?” 덕돌과 순희는 한숨을 땅이 꺼지게 후 내쉬었다. 태평강 바닥의 조약돌마저 환히 들여다보이는 가을의 맑은 시내물이 조잘조잘 노래하며 흐르는 소리 밖에 들리지 않았다. "승환이랑 또 우리 연애한다고 놀리겠다." 덕돌의 말에 순희는 피씩 웃었다. "우리 무슨 어린애들이냐?" "그래도 이전에 우린 연애하지 않았다고 했잖아. 그런데 우리 지금 진짜 연애한다면 그때 억울함당한게 당연한 걸로 되잖겠니?" "그때는 철부지여서 그렇지만, 지금은 우리 선택에 달린 일이지. 누가 연애했다고 하겠으면 하라지. 호호호."  덕돌은 순희의 당돌함에 놀랐다. 순희는 또 뜻밖의 일을 알려주었다. "저 승환이 웃기지. 입단하겠다고 나한테 도움을 청하지 않겠니?" "그래?" "응, 나한테 코를 꿰웠어. 입단하지 못할가봐 우릴 놀리지 못해." "음." 덕돌은 허구픈 코웃음을 쳤다.     그들은 그래도 남들의 눈이 무서워 순희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가고 덕돌이 뒤에서 스적스적 물 함지를 파는 곳으로 다가갔다. “어험, 연애대장이 왔다.” 광철이가 빈정거리자 승환이가 맞장구를 쳤다. “원래 학교 때부터 연애야 이름이 있지? 누굴 속이려고 가만히 산굽이에 가서 연애를 해?” 덕돌은 호랑이 코를 슬슬 쑤시고 건드려도 가만 놔두었다. 그러자 승환이랑 꼭뒤에 올라 앉아 똥을 쌀 지경이었다. 숱한 애들 앞인지라 덕돌은 더는 물러 설 곳이 없었다. 허나 한숨을 길게 내쉬며 광철을 보고 나직이 말했다. “난 일하러 왔지 싸움질을 하러 오지 않았다. 이전에 덜 혼났구나. 작작 건드려라.” 덕돌이 멜대로 흙짐을 지려고 할 때었다. 갑자기 승환과 광철이 멜대로 양쪽에서 내리치고 찌르면서 덮쳐들었다. 덕돌은 발판 위에서 저쪽 발판 위로 시라소니처럼 껑충 뛰어 넘어가 냉소했다. “정말 싸우겠니? 조용한데 가서 붙어보자!” “개 소리 치지 말고 덤벼라!” 승환은 발판에 뛰어올라 멜대를 휘둘렀다. 허나 덕돌은 정수리를 겨누고 날아 내리는 멜대를 턱 받아 쥐어 콱 당겼다. 그 바람에 승환은 높은 발판에서 물 함지에 철써덕 떨어졌다. 순식간에 벌어진 사태에 광철은 감히 멜대를 휘두르지 못하고 을러메기만 했다. “오라, 둔덕에 나와 싸워보자! 네놈 새끼 이전엔 한족 애들을 믿고 우쭐거렸지. 그 새끼들이 없는 여기서 한번 붙어보자!” 덕돌은 빼앗은 멜대를 쥐고 발판에서 둔덕 위로 훌쩍 날아 올라갔다. 질겁한 광철은 멜대를 허망 휘두르며 뒤로 비실비실 물러섰다. “저녁에 다시 보자.” 말을 맞치자 덕돌은 동림과 함께 멜대로 문푸레광주리에 담은 흙을 메 날랐다. 승환은 숱한 사람들 앞에서 창피를 당하고 허리를 치는 물속에서 허우적거리며 겨우 물 함지에서 기어 둔덕에 올라갔다. “어디 두고 보자!” 승환은 비를 맞은 햇병아리처럼 돼가지고서도 입만은 살아 있었다. 덕돌은 물에 빠진 개 같은 승환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날 낮에 승환과 광철은 자기 패거리들과 함께 배를 타고 저수지의 물고기를 잡아 술이나 실컷 처먹으면서 덕돌을 까 눕힐 꿍꿍이를 쳤다. 해가 뉘엿뉘엿 지자 덕돌은 지친 몸을 끌고 공지 식당 쪽으로 걸어갔다. 동림과 덕돌이 금방 밥술을 들자 저쪽이 떠들썩하며 부산해졌다. 승환과 광철이 기세등등해 한 무리나 되는 직속반 애들을 끌고 이쪽으로 다가왔다. “야, 나와!” 덕돌은 밥사발을 놓고 일어섰다. “할 수 없구나. 사전에 똑똑히 말해둔다. 이번 싸움은 너희들이 먼저 걸었다. 누가 맞아 죽든지 서로 형사죄를 추궁하지 말자.” 서슬이 퍼런 말에 광철은 커다란 쌍까풀눈에 겁기를 띠더니 뒤로 비실비실 물러섰다. “저 새끼 지금 우리하고 죽기내기 하자구 걸고 들잖니?” “허허허.” 덕돌은 허구픈 웃음을 지으면서 독기어린 눈으로 직속반 애들을 쓸어보았다. “담이 있으면 숱한 여자들이 보는 식당에 와서 떠들지 말고 조용한 곳에 가서 사내 대 사내로 붙어보자." 승환은 덕돌을 노려보며 방망이로 왼손바닥을 탁탁 치며 빈정거렸다. “네 각시 순희랑 숱한 여자들이 있는 앞에서 사내노라고 큰 소리를 탕탕 치지 말라. 가자!” 덕돌이 싸우러 떠나려고 하자 옆에서 동림이 말렸다. “저 새끼들이 저렇게 많은데 가지 말라.” 허나 덕돌은 냉소했다. “저런 허수아비 같은 새끼들을 걱정하지 말라.” 허나 동림은 팔소매를 붙잡고 놓지 않았다. “밥이나 먹고 가라! 저 새끼들은 온 하루 고이 놀고 배때 터지게 먹고 왔다.” “괜찮다.” 덕돌은 저수지에 와서 싸우려고 하지 않았지만 더 이상 물러설 자리가 없는 것을 보고 핍박에 의해 양산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승환과 광철은 저수지 언제로 올라갔다. 덕돌이 나는 재간이 있어도 달아나지 못하게 퇴로를 막고 생사결단을 낼 꿍꿍이였다. 허나 덕돌은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동림과 허춘도 뒤따라 왔다. 직속반의 다른 민공들은 평소에 자기들과 우쭐거리는 승환과 광철의 솜씨를 구경할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고 승환의 포치대로 둑 양쪽을 막고 팔짱을 끼고 좋은 구경을 할 참이었다. 덕돌은 먼저 웃통을 벗고 나서는 승환을 보며 픽 코웃음을 쳤다. “야! 이 새끼야!” 승환은 악이 받쳐 고함치더니 몸을 좌우로 시계추처럼 흔들며 8자 형으로 쌩 덮쳐들었다. 덕돌은 까딱 하지 않고 서 있었다. 갑자기 그가 몸을 훌 날려 승환의 머리 위로 허공잡이로 뛰어 넘어서며 뒷발로 승환의 뒤 골을 탁 걷어찼다. “야따! 멋있다.” 직속반 민공들이 환성을 질렀다. 그러나 눈알을 부라리는 광철을 무서워 입을 싸쥐고 구경했다. 승환은 제 힘에 걷어 채워 앞으로 엎어질 듯이 몇 발자국 비틀거리다가 나가 떨어졌다. 허나 필경 승환도 한다하는 권투수기에 인차 몸을 홱 돌렸다. 그는 맹호처럼 덮쳐드는 덕돌의 면상을 후려쳤다. 덕돌은 슬쩍 자세를 낮추며 승환의 아랫배에 무쇠주먹으로 강타를 안겼다. “억!” 숨이 꺽 막힌 승환은 배를 부둥켜안고 허리를 꾸부리며 한쪽 무릎을 털썩 꿇었다. 덕돌은 숨돌릴 틈도 주지 않고 발길을 날려 승환의 턱주가리를 걷어 차올렸다. 쿵! 승환이 비명을 지르며 뒤로 대가리를 젖히며 엉덩방아를 찧고 너부러졌다. “개새끼!” 광철과 응철이 동시에 방망이를 휘두르며 덕돌에게 덮쳐들었다. 그러나 덕돌이 하늘 공중에 훌쩍 몸을 날리더니 두 발로 동시에 광철과 응철의 턱주가리를 차 넘겼다. “야! 멋있다!” "진짜 주먹왕은 저 놈이구나!" 직속반 애들은 구경하다가 저도 몰래 감탄이 나왔다. 그새 숨을 돌린 승환과 광철은 자기 짝패들을 돌아보며 고함쳤다. “뭐 하니?” 직속반 민공들은 사전 밀모대로 와 하고 동시에 덕돌에게 덮쳐들었다. “비겁한 새끼들!” 덕돌은 하나도 겁기 없이 몸을 훌 날려 직속반 민병들의 머리 위로 날아넘어갔다. 그는 둑을 타고 동으로 달아나다가도 말머리를 돌려 창으로 찌르는 회마창(回马枪)을 날리는 전술을 썼다. 어쨌든 애들은 많아도 닫는 속도가 다른지라 제일 먼저 추격하던 애는 주먹에 얻어맞지 않으면 발길에 채워 너부러졌다. 손을 쓸 새만 좀 있어도 덕돌은 날아드는 직속반 애들의 주먹을 잡아 비틀어 저수지 둑에 보기 좋게 둘러메쳐 태를 쳐 놓았다. 저쪽에서 동림과 허춘도 직속반 민병들을 말리는 척 하다가 덕돌의 편을 들어 싸웠다. 덕돌은 허수아비처럼 휘두르던 광철의 방망이를 빼앗아 둑 아래에 내던지며 무쇠주먹으로 정수리를 탁 내리쳤다. “앗!” 광철은 비명소리와 함께 푹 꺼꾸러졌다. “서라!” 웬 고함소리가 산골짜기를 메우며 울렸다. 덕돌이 머리를 들어보니 공사 무장부 이인학 부장이 권총을 빼 휘두르며 뛰어오는 것이 피뜩 보였다. 그제야 덕돌과 직속반 민병들이 손을 떼고 "우야-" 하고 달아났다. 어둑어둑해지는 뚝 저쪽으로 도망치는 민병들을 보고 이인학은 권총을 넣으며 옆에서 구경하는 애들과 물었다. "금방 싸움 솜씨 대단한 놈은 누구냐?" 민병들은 이구동성으로 “함흥대대 덕돌입니다.” 하고 소리치며 손가락질을 했다. 자초지종을 듣고 이인학 부장은 "아니, 그래 직속반 10여명이나 되는 민공들이 그까짓 덕돌을 당하지 못해!" 하고 믿어지지 않아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덕돌을 아는 민병들은 웅성거렸다. “리 부장은 잘 모릅니다. 저 덕돌 무리는 진수해에서 굴 뱀으로 불릴 지경으로 무서운 독사무리입니다.” “굴 뱀을 건드렸으니 직속 반 민공들이 이제 혼날 겁니다." “멍청이 같은 새끼들이, 덕돌을 하나 이기지 못해?” 이인학은 권총집을 뒤로 밀어붙이고 뚝 아래 민공들의 초막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 내려갔다. 덕돌은 파출소에 잡혀가거나 또 비판투쟁을 받을 생각을 하니 눈앞이 캄캄해 났다. (씨, 정 비판하려고 하면 교하로 도망쳐 대학시험복습이나 해야지. 이 골 안에서 입단을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 사실 덕돌이 국경절에 집으로 내려갔을 때었다. 그가 마을 앞의 샘물터에서 손을 씻는데 경산선생이 그를 보고 이렇게 말했다. “덕돌아, 대학입시제도가 회복됐다. 그 골 안에서 쓸데없는 일을 하지 말고 어서 내려와 대학시험복습을 해라.” 경산 선생까지 그렇게 말하자 덕돌은 세상에 상상도 하지 못한 천지개벽이 일어났다는 것을 뒤늦게나마 알게 됐다. 허나 저수지 공지에서는 민공들이 달아나면 직속반 애들을 시켜 손잡이트랙터를 몰고 와서 붙잡아 가고 있었다. “달아나도 되잡혀 갈 판인데 어떻게 달아난단 말인가? 간고한 대로 저수지에서 일하면서 복습도 하고 입단도 하자.” 요즘 날마다 이런 궁리를 하며 승환과 광철이 자꾸 집적거려도 참고 참다가 끝내 참지 못하고 대판 싸우고 말았던 것이다. (차라리 잘 됐다. 이젠 이 골 안에 아무런 미련을 둘게 없다.) 덕돌이 어떻게 투쟁을 받을까 이 근심 저 근심할 때었다. 저녁에 이인학 부장이 전등불이 희미한 초막으로 와 덕돌을 만났다. 그는 다른 민공들을 다 내보냈지만 동림과 허춘만은 놔두었다. 이인학 부장은 예상외의 말을 하는 것이었다. “덕돌이, 참 잘했소. 개 잡은 포수처럼 우쭐거리는 놈새끼들 기를 잘 꺾어놨소. 저는 정당방위를 했소. 아무런 잘못도 없소.” 그제야 동림과 허춘은 한숨을 후 내쉬었다. 덕돌은 손에 수갑이나 차려니 하고 바늘방석에 앉은 듯이 옴찔옴찔 했다. 그 말에 편안히 엉덩이를 차가운 구들에 떡 붙이고 앉았다. 원래 사태가 엄중하면 이인학 부장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교하로 도망치려고 했다. 여기서 붙잡혀 파출소에 가는 날에는 그렇게 고대하던 대학입학시험장에 가보지도 못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 덕돌은 이인학 부장의 옆구리에 찬 권총집을 흘금흘금 곁눈질하면서 혹시 안심시켜놓고 돌연 습격해 잡아갈까 봐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이인학 부장은 생각 외로 친절히 대하면서 덕돌의 손을 잡아 쥐고 손등을 매만지면서 소탈하게 웃었다. “허허허. 이 무쇠주먹을 보오. 썩 살이 더덕더덕한 게 어디 우리 공지 이론 총보도원의 손 같은가? 덕돌이 힘이 세단 말은 들었지만 그렇게 날랜 줄은 몰랐소.” 그는 덕돌을 진정어린 눈으로 바라보면서 뒷말을 이었다. “문무가 겸비된 아까운 인재 이 골 안에 파묻혔구먼. 덕돌처럼 땅을 밟고 하늘을 떠인 사내대장부를 좋아하오.” 덕돌은 오늘 직속반의 민병들을 데리고 오지 않은 것을 보고 적이 신경이 스르르 풀렸다. “덕돌이, 난 성환과는 친구요. 내일부터 우리 저수지공지 직속반 반장을 맡소.” “허허허. 사람을 잘 못 보았습니다.” 덕돌의 말에 이 부장은 인차 “아니, 낮다고 시시해 그러오? 그럼 민병 연 연장을 시킬까?” 하고 물었다. 그때 덕돌은 묵묵부답하고 앉아 있었다. 옆에서 동림과 허춘은 대답하라고 자꾸 눈짓했다. 허나 덕돌은 이 골안에서 민병 연장이 아니라 영장, 아니, 저수지 공정 책임자를 시켜도 할 생각이 없었다. 이 골 안을 하루 속히 벗어나 대학시험을 쳐서 질척질척한 진흙탕 속에서 짓밟히고 업신여김을 당하는 비참한 운명을 개변하고 기자로 되는 새 인생의 행로를 개척해야 했다. 그런 속내는 모르고 이인학 부장은 덕돌을 기어이 직속 반 반장을 하라고 명령했다. 덕돌은 이 부장의 지청구에 못 이겨 조건을 내걸었다. “승환이네하구 함께 직속 반에서 일하지 못하겠습니다. 싹 다 내보내십시오. 대신 동림과 허춘을 직속 반에 넣어 주십시오." 그러자 이 부장은 한참 궁리하더니 통쾌하게 대답했다. “좋소. 그렇게 하오. 지금 직속반 민병들로는 400여명이나 되는 민공들을 관리하기 어려우니까. 승환이네 직속반을 놔두고 한 개 반을 더 증가하겠소. 덕돌은 직속 2반 반장을 하오.” 이인학 부장은 분명 덕돌을 이용해 패왕노릇을 하는 직속 반 승환이랑 대치시켜 제약하고 또 승환을 이용해 신생 두목 덕돌을 제약하려는 의도였다. 동림은 다른 민공들이 일하러 나간 틈을 타서 이인학 부장에게 간곡히 부탁했다. “덕돌을 입단시켜 주십시오.” “덕돌이 아직도 입단하지 못했소? 내 저수지 단 총지 서기하고 부서기 방순희에게 말하겠소.” 그 말에 덕돌과 동림은 서로 눈을 맞추며 웃었다. 이튿날부터 덕돌은 직속반 반장으로 돼 팔자를 고쳐 흙짐을 메지 않고 동림과 허춘을 데리고 순라를 하게 됐고 입단지원서를 쓰게 됐다. 순희는 입단지원서를 가지고 와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고쳐 쓰라고 알려주고 나서 일어났다. “조금만 말썽을 부리지 말고 참아라. 입단이 비준되는 날까지만.” “허허허. 고맙다.” 덕돌은 갈퀴 같은 손으로 순희의 두 손을 덥석 잡았다. 그러자 순희는 귀밑까지 홍당무처럼 발개지더니 손을 빼냈다. “야, 또 연애했다고 놀림을 당하자고 이러니?” 덕돌은 코웃음 쳤다. “이제 누가 또 감히 나를 놀린다더니?” 순희는 초막 구들에서 일어나면서 비양거렸다. “주먹이 세니 좋구나. 직속 반 반장 되고 입단도 하고. 흙짐도 지지 않는 게.” 덕돌은 순희를 보고 속심의 말을 했다. “우리 이 저수지에서 달아나 대학시험을 치자.” 그러자 순희는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아니야. 정말 시험쳐 대학에 갈 수 있는지 누가 아니? 난 여기서 입당하고야 마을에 내려갈 테다.” 덕돌이 뭐라고 말하려는데 승환과 광철이 초막에 들어오더니 덕돌이 네를 눈에 든 가시처럼 쏘아보았다. 그러나 감히 건드리지 못하고 문을 쾅 닫고 가버렸다. 어느 날 공사에서 황종연 주임이 찌프를 타고 저수지에 와서 거들먹거리면서 공지를 둘러보았다. 공지 김 서기는 주먹 왕 덕돌을 보고 직속반 민병들을 데리고 배를 타고 저수지 물고기를 잡아오라고 했다. 덕돌은 동림과 허춘을 데리고 저수지에 가서 배를 타고 그물을 쳤다. 그때 승환과 광철이 빈들거리며 저수지에로 다가왔다. 그들도 다른 쪽배를 타고 노를 저어 그물을 늘이는 덕돌 네 배로 다가왔다. “물에서 한번 붙어보겠니?” 승환이 또 걸고 들었다. 덕돌은 그물을 치면서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 “이 개 새끼야, 헤염칠 줄 모르는 모양이구나. 덤벼들어라!” 광철은 노로 물을 탁 튕겨놓으면서 걸고 들었다. 허나 직속반의 다른 애들은 누구도 덕돌에게 덤벼들지 못했다. “작작 시끄럽게 굴어라. 어르신님이 물고기를 잡는 걸 방애했다간 네놈을 저수지 물귀신을 만들어 놓을 테다.” 덕돌의 두툼한 입에서 몇 마디 굵직굵직한 말이 나가자 질겁한 승환과 광철은 노를 저어 꼬리 빳빳해 도망쳤다. 덕돌이 네가 물에 뛰어들어 그물을 메고 헤염을 쳐 저수지 물이 낮은 막치기로 올라갈 때다. 점점 죄어드는 그물에 든 물고기들은 황급히 그물 옆으로 해 덕돌 네 허벅다리를 탁 치고 나갔다. 그물에서 빠져나간 물고기들은 이젠 살았다고 물 위에 한 키씩이나 풀렁 뛰었다가 떨어졌다. 아주 장관이었다. 그물을 다 걷고 보니 숟가락만한 허연 은빛비늘을 번쩍이는 물고기를 십여 마리나 잡았다. 그날 덕돌 네는 다섯 마리를 저수지 김 서기네 집에 가져다주고 나머지는 풀숲에 숨겨뒀다. 해질 녘에 그들은 풀숲의 물고기를 물초롱에 담아가지고 저수지 방목장에 가서 한가마나 부글부글 끓여 시뿌연 생선국을 배 세간나게 실컷 먹어줬다. 난생 처음 잘 먹고 나니 눈이 나오고 온 몸에 힘이 용용 솟구쳤다. 덕돌은 저수지에 하루도 더 물앉아 있을 수 없었다. 그는 이 생지옥 같은 저수지를 탈출할 구멍만 노리고 있었다. 어느 날, 덕돌은 공지에서 퇴근해 내려오는 순희를 만나 조용한 강변으로 데리고 갔다. "얘, 우리 오늘 밤에 공지를 탈출하자. 어렸을 때 말한대로 함께 시험쳐 대학에 입학하자." "오래잖으면 입단 비준 나오겠는데." "입단은 차차 해도 되지만 입학복습은 더 미룰 수 없어." 순희는 머리를 숙이고 한참 궁리했다. "오늘 저녁에 이 생지옥을 탈출하자." "네 가면 나도 여기 있을게 없지." "그럼 밤 10시쯤에 공지 서산 쪽에 오라." 순희는 머리를 끄덕였다. 그들은 누가 눈치채기라도 할가봐 인차 자리를 떴다. 덕돌은 해가 지기를 애타게 기다렸다. 마가을 해가 드디여 서산으로 맥없이 뉘엿뉘엿 넘어갔다. 덕돌은 저녁을 다 먹자 순라를 나가는 척하면서 덕돌은 동림과 허춘을 불러 바깥으로 나갔다. 마가을 하늘에는 뭇별이 총총하고 가냘픈 초생달이 걸려 초막과 산기슭에 은빛을 내리 뿌리고 있었다. 은빛 달빛을 밟으면서 저수지 언제에 오른 덕돌은 주위를 둘러보고 아무도 없는 것을 보고 한숨을 후 내쉬었다. “동림아, 허춘아, 난 아무래도 마을에 내려가 대학입학시험복습을 해야겠다. 너희들도 생각이 있으면 나와 함께 이 밤으로 도망치자.” 그러자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투쟁 맞자고 도망쳐?”라고 했다. 동림은 덕돌의 손까지 잡고 정중히 말했다. “내나 허춘이나 다 대학시험을 쳐도 희망이 없다. 너나 대학시험을 쳐라.” 덕돌은 진정을 토로했다. “그럼, 나를 좀 도와달라.” “무슨 일이 있으면 말해라. 우리 목숨을 걸고 너를 도울게.” 덕돌은 동림과 허춘의 손을 꽉 잡고 간곡히 부탁했다. “얘들아, 내가 도망치다가 승환이랑한테 들키면 다른 데로 유인해 뒤를 막아 달라.” “근심하지 말라.” “혹시 뒤쫓는 애들이 있어도 상하게 치지는 말라. 나를 뒤쫓아 오지 못하게 뒷다리나 붙잡으면 돼. 괜히 너네 연루돼 투쟁 받지 말라.” “걱정마라. 우리 알아서 할게.” 뒤이어 덕돌은 오랫동안 궁리한 도망칠 계획을 일일이 말하며 빈틈이 없는가 토론하고 재점검했다. 동림과 허춘은 덕돌의 면밀한 계획에 연신 머리를 끄덕였다.      한밤중이 돼 민공들은 지친 몸을 끌고 초막으로 들어와 털썩털썩 들어 눕자 코를 드렁드렁 골며 곯아빠졌다. (이 때면 직속반의 승환이랑 광철이랑 곯아 빠졌을 거야.) 옷도 벗지 않고 자는 척 하던 덕돌은 이불 밑에서 야광시계를 들여다보았다. 밤 10시정각이었다. 순희와 약속한 시간이 됐다. 덕돌은 옆에 누운 동림과 허춘의 이불 안에 손을 넣어 툭툭 쳤다. 동림과 허춘도 자는 척 하다가 슬그머니 일어났다. 덕돌은 동림과 허춘의 베개까지 자기 이불안에 넣고 이불을 덮어 놓고 슬그머니 일어나 바깥으로 나갔다. 등 뒤에서 누군가 하품을 하면서 두덜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밤중에조용히 나갈 게지. 씨, 잠을 깨우면서.” 허춘이 뒤에 남아 초막의 동정을 살폈다. 덕돌과 동림은 바깥에 나가자 오줌을 누는 척 하며 사위를 둘러보았다.      마가을 초생달빛이 어두운 하늘에 가냘프게 떠서 바르르 떨고 있었다. 적막한 사위에 인기척이라고는 없었다. 그런데 서산 기슭 절벽 밑에 이르렀는데 순희가 오지 않았다. 아무리 기다려도 보이지 않았다. (순희 다른 생각하는가?) “어서 떠나라!” 그러나 덕돌은 좀 더 기다리기로 했다.  “누구야?!” 갑자기 초막 앞에 승환과 광철이 나타났다. “동림이다!” 덕돌은 사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순희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별수 없다고 생각한 덕돌은 동림과 덕돌을 와락 끌어안고나서 황급히 초막 뒤로 해 서쪽산기슭으로 부랴부랴 사라졌다. “여기서 뭘 하니?” “보초 선다.” “어째 덕돌이 보이지 않니?” “잔다.” 승환은 좀 이상해 초막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그러자 허춘이 뚱뚱한 몸으로 막아섰다. “어디로 들어가? 민공들이 곤하게 잔다.” 광철도 이상한 감을 느꼈는지 전지로 사처를 이리 저리 비추었다. 그때 덕돌은 허리를 치는 마른 가둑나무 사이에 납작 엎드렸다. 전지불이 어지럽게 덕돌의 머리 위로 스쳐지나가며 허둥거렸다. 동림과 광철은 시간을 버느라고 고의로 승환과 광철과 걸고 들어 밀고 닥쳤다. 결국 그들은 승환이랑하구 치고 박으면서 다른 쪽으로 유인해갔다. “저수지 언제에 가서 한판 붙어 보자.” "이 새끼, 감히 덤벼?!" 승환이 동림의 멱살을 틀어쥐어 흔들었다. "승환아, 손을 떼지 못하겠니?!" 갑자기 순희가 나타나지 않았겠는가! 덕돌은 절벽을 기어올라가다가 안타까워 돌틈에서 손을 멈췄다. "어허, 방서기 어떻게 돼 왔소?" 승환은 입단이 걸려 순희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입단하겠으면 그만하고 직속반에 가서 당직이나 잘 서라." "덕돌이 보이지 않는데두." "당직실에서 기다리면 어데 갔는지 오겠지." 순희는 분명 승환을 떼서 말리고 있었다. (순희야, 여기 오라. 빨리 도망치자.) 덕돌은 절벽을 기어오르면서 몇번이고 속으로 이렇게 고함쳤다. 승환과 광철은 시어미 역정에 개 배때를 찬다고 덕돌이 보이지 않자 동림과 허춘을 업신여기면서 저수지 언제로 뒤따라 갔다. 동림과 허춘은 한밤중에 승환과 광철과 맞붙어 싸우면서 덕돌을 쫓아가지 못하게 뒷다리를 꽉 붙잡고 늘어졌다. 순희는 입단을 올가미로 승환의 추격을 가로막아섰다.       덕돌은 그 틈을 타서 사전 계획대로 경계가 제일 허술한 서산 절벽을 톱아올라 산꼭대기 보초망마저 교묘하게 벗어났다. 그는 산마루에 오르자  산아래를 바라보며 안타까움에 가슴을 탕탕 쳤다. (순희야, 왜 안와?) 덕돌은 자기를 탈출시키려고 도망치지 않고 엄호한 순희를 생각하자 코마루가 시큼해났다. 그때 전지불이 또다시 어지러이 절벽이며 산마루까지 어지러이 비췄다. (안돼. 어서 도망치자.) 그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령 길을 타고 쏜살같이 도망쳤다. 돌문 안 산꼭대기에 마주 서 있는 망루까지 벗어나자 덕돌은 어둠 속에 잠긴 저수지 쪽을 돌아보며 숨을 돌렸다. “생지옥을 승리적으로 탈출!” 허나 덕돌은 시름놓지 못했다. 주먹을 불끈 쥐고 10킬로미터나 떨어진 조개덕을 바라고 마라톤식 달리기를 계속했다. 어둠 속에서 돌부리를 걷어차 넘어져 발가락 끝에서 피 흘러 모질게 아파나도 상을 찡그리며 일어나 길 옆의 야들야들한 풀잎을 훑어 피를 쓱 닦아버리고는 절룩거리며 계속 끈질기게 달렸다. “달아나야지. 빨리 책을 가지고 고하로 달아나야지.” 닫다가 숨이 차 좀 걷다가도 중얼거리면서 또 달렸다. 한참 달릴 때었다. 묽어진 어둠 저편으로 동녘하늘이 희붐히 동트고 있었다. 새날을 갈망하던 덕돌의 한숨에 퍼렇게 멍이 들었던 하늘이 점차 어둠을 부시며 찬란한 햇빛을 빛 뿌리며 밝아오고 있었다. “날이 밝기 전에 조개덕을 벗어나야 해.” 덕돌은 연신 되뇌이며 조개덕을 바라고 달리고 또 달렸다. 그가 조개덕에 이를 때까지 령 길에서 달리면서 보니 손잡이트랙터 헤드라이트 불빛도 보이지 않았고 엔진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래도 덕돌은 조개덕 마을 어귀에 이르러 마을 동정을 살피다가 마을 서쪽 마른 수수대가 서있는 밭으로 해 슬금슬금 허춘의 집 구새 목에 이르렀다. 벽에 몸을 기대고 아무리 살펴봐도 자기 집 주위에 이상한 인기척이 없었다. 그제야 덕돌은 숨을 죽이고 허춘 네 집 앞마당을 꿰질러 나가 자기 집 뒤울안 바자 안으로 몸을 날려 뛰어 들어갔다. 뒤이어 그는 슬금슬금 뒷벽 밑에 다가가 고방 문을 살며시 열고 고방으로 들어갔다. 잠이 적은 상순은 고방에서 무슨 인기척이 나는 것을 듣고 윗방에서 문을 뚝 떼고 고방에 들어왔다. “누구야?!” 공안국 국장 출신인 상순은 순간 경각성을 높였다. “냅니다.” 나직이 대답하는 소리를 듣고 상순은 놀랐다. “아니, 덕돌이 아니냐? 어찌된 일이냐?” 덕돌은 어둠 속에서 책궤를 들춰 주머니를 찾아 쑤셔 넣었다. “길게 말할 새 없습니다. 직속 반에서 추격해 올 겁니다. 일체 모른다고 하십시오. 온 적도 없다고 하십시오.” 명옥도 정지에서 달려 들어왔다. “아니, 무슨 일을 쳤니?” “아니오. 난 대학시험 복습을 하러 교하로 달아나야겠습니다. 저수지 직속 반에 붙잡히면 난 전도를 망칩니다.” 덕돌은 정작 시험제도를 회복했는데도 시험을 한달 앞두고 쫗겨다니는 자기 신세가 서러워 어린 애처럼 아버지 품에 안겨 “엉엉.” 대성통곡쳤다. 진짜 싸움꾼 두목 같지 않게 어린 애처럼 엉엉 울었다. “이제 복습해 어떻게 대학에 붙는다고 이러니? 괜히 잡히면 투쟁 받겠다. 저수지로 돌아가렴.” “난 달아나야 합니다. 만약 저수지 직속 반 민병들이 들이닥치면 아버지와 어머니 그 놈들이 뒤 다리라도 붙잡아주십시오.” “알았다. 빨리 가라!” 명옥은 두 손으로 머리를 쓸어 뒤로 다듬어 올리더니 까래 밑을 들춰 치워 두었던 돈 5원을 꺼내 덕돌의 손에 쥐어 주었다. “차비를 해라.” 덕돌은 책 주머니를 둘러메고 고방 문을 살며시 열고 나가면서 “근심하지 말고 잘 있으십시오.”라고 하고는 문 밖으로 나갔다. 덕돌이 뒤울안 바자를 뛰어 넘어 동틀 무렵에 수수밭으로 사라졌다. 그는 혹시 직속 반 승환이랑 뒤쫓아 올까봐 진수해 기차역 쪽으로 가지 않고 진수해 서쪽 기차역을 바라고 뛰었다. 그가 패용천산 앞까지 뛰어 갔을 때다. 통통통 손잡이트랙터 다급한 엔진 소리가 조개덕 쪽에서 울리더니 마을 개들이 자지러지게 짖어댔다. 진짜 저수지 직속 반의 승환과 광철이 뒤쫓아 왔던 것이다. 사실 승환과 광철 등 직속1반의 민병들은 한밤중에 한 식경이나 싸워 동림과 허춘을 쳐 눕히고 황급히 초막에 돌아와 덕돌의 이부자리를 훌 들어보고 이불안의 베개 셋을 발견하고서야 꼬임 수에 든 것을 뒤늦게나마 알게 됐다. “이 새끼, 어디로 달아나!” 그들은 그 길로 손잡이트랙터를 몰고 조대덕으로 쫓아왔던 것이다. 허나 덕돌은 집에도 없었다. 덕돌의 부모와 물어보아도 시치미를 뚝 따는 것이었다. “어허, 이 자식이 하늘로 올라갔니? 땅 속에 기어들어갔니? 정말 신출귀몰하는구나. 우리 손잡이트랙터보다 더 빨리 뛰었단 말인가?” 그들은 닭 쫓던 개 지붕을 쳐다보는 격이 돼 맥없이 저수지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됐다. 덕돌은 책 주머니를 둘러메고 직속 반 민병들이 혹시나 쫓아올까봐 패용천산을 넘어 칼산 뒤 령길을 타고 줄행랑을 놓았다. 희뿌옇던 동녘하늘이 붉게 불타오르더니 구리바라 같은 뻘건 해가 불끈 솟아오르며 꽃구름송이들을 붉게 물들였다. 덕돌은 직속 반 민병들을 따돌리고 마수에서 벗어나자 훨훨 날듯이 홀가분함을 한 마음으로 느꼈다. 그는 시원한 이른 아침 산 공기를 한 가슴 뿌듯이 한껏 마시며 중얼거렸다. “아, 끝내 새 날이 밝아왔구나. 얼마나 기다리던 새날인가?” 그날은 덕돌의 한뉘에 잊을 수 없는 1977년 10월 25일이었다. 맑고 푸른 가을 하늘에 매 한 마리가 가없이 파도치는 황금물결 위로 자유로이 훨훨 날아예고 있었다. 산새들도 새날을 반겨 재잘거리며 노래하고 제비들도 강남으로 날아갈 준비로 나래를 굳히려고 훨훨 나래치고 있었다. 아, 새 가을날의 하늘은 형언하기 어렵게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3.개천에서 난 용     해 서쪽에서 떴는가?     생산대 빈농들의 추천을 받아 대학에 가려고 으스대던 성욱은 대학에 가기는커녕 대학입시 낙방의 고배를 마시게 됐다. 성욱은 생산대 회계에 손잡이트랙터 운전수이기에 가히 생산대 청년들 속에서 벼슬이 제일 높다고 할 수 있었다. 기실 상순은 뭘 보아도 성욱은 덕돌과 비할 바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 허나 그는 생산대 정치대장을 하면서 자기 아들을 회계나 손잡이트랙터 운전수를 시킬 수 없어 성욱을 시켰던 것이다. 남 보기도 좋고 집안 화합도 도모할 것 같았던 것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성욱은 자기 잘난 척 하면서 온 동네를 개 턱 쳐들고 돌아다니면서 청년들을 쥐락펴락 했던 것이다. 특히 집체호 조영희랑 앞에서 자기가 어떻게 대학시험을 잘 쳤노라고 한바탕 자랑했다. 반년 넘어 집에서 주산 알이나 튕기면서 공부한 그가 낙방하리라고는 누구도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데 한 달 밖에 복습하지 못한 덕돌이 시험을 쳐 대학에 입학할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 덕돌은 성욱이, 영웅이, 광철이, 순희가 첫해에 대학입시에 락방한 것을 못내 아쉬워했다. "아무리 옥신각신 다툴 땐 있었다 해도 좋은 시대에 다 함께 농촌을 벗어나 대학에 가면 얼마나 좋겠는가!" 덕돌은 모교 선생님들 말처럼 나는 놈은 나는 놈이었다. 그러나 덕돌은 아주 간고하게 복습해 대학으로 갔다는 것을 누가 알겠는가? 아, 글쎄 저수지 공지에 갇혀 흙짐을 메 나르다나니 시험 날자 11월 27일을 한 달 앞두고 교하로 도망쳐 복습하지 않았는가? 그것도 한 달 밖에 없는 복습시간에 처음에는 복습방향을 제대로 정하지 못해 리과를 복습하다가 반달 앞두고 문과로 대학입학 지망을 바꿨던 것이다. 사실 문과 복습은 반달 밖에 하지 못했던 것이다! 어느 날, 춘자는 초불을 두 대나 켜놓고 눈을 집어 뜯으면서 덕돌의 한문복습제강을 조선어로 번역했따. 그녀는 피뜩 “얘, 혹시 넌 눈이 일 없니?” 하고 물었다. 덕돌은 화확 문제를 풀다가 “괜찮소. 시력이 1.5인데. 어째 그러오?”라고 하며 개의치 않았다. 춘자는 귀여운 동생을 마주보며 근심했다. “아니야, 혹시 색맹이 아닌지 해서 묻는 거야. 이전에 나도 의학원에 가려고 했는데 색맹이 돼서 의학원으로 가지 못하고 농학원으로 갔다.”      덕돌은 화학책을 놓더니 얼굴이 굳어졌다. “전번에 군 입대 신체검사를 할 때 색맹이 돼서 입대하지 못했소.” 춘자는 번역하던 화학복습제강을 놓았다. “그럼 지망을 고쳐야 해. 색맹은 의학원에 가지 못해. 색깔을 가리지 못하면 약물이나 실험관 화험 결과를 제대로 볼 수 없어.” “양? 이젠 시험 날자가 반달 밖에 남지 않았는데?” “그래도 넌 문과를 해야 한다. 나처럼 농학원에 가겠니?” 덕돌은 반날 동안 궁리하다가 누나와 토론하고 문과시험을 치기로 하고 지망을 YB대학 정치학부로 고치기로 합의를 보았다. 지망을 고치기 위해 덕돌은 동곽 선생처럼 책 주머니를 둘러메고 다시 함흥 대대 조개덕으로 돌아왔다. 그때 함흥중학교로 가서 문과복습제강을 가지러 가니 경산 선생은 아주 맥이 풀려 했다. “어쩌겠니? 처음부터 문과를 해도 시간이 모자라겠는데 시험 날자를 반달 앞두고 문과로 치겠다고 하니.” 경산 선생은 복습제강을 내주면서 위안해 주었다. “괜찮다. 올해 입학하지 못하면 명년에 또 치지. 명년에는 천천히 잘 복습하면 꼭 입학할 수 있을 거야.” 덕돌은 현 교육국 학생모집 사무실에 찾아가 대학입학 지망을 YB대학 정치학부로 고쳤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위방 문을 탄자로 막고 두문불출하고 정치복습제강을 암송하고 나서 지리와 역사 교과서를 가져다 들여다보았다. 조선어 복습은 별로 하지도 못했다. 복습제강의 작문제목 40여개를 몇 개 유형으로 나눠 서너 개 작문을 지어보았을 뿐이다. 기실 평소에 조선어문법책과 문예창작이론 책을 놓지 않은데다가 평소에 소식이나 통신, 시, 소설도 써 보았기에 다시 별로 들여다보지 않아도 됐던 것이다.  문과 복습을 반달도 하지 못한 덕돌이 대학에 입학하다니? 온 마을 사람들과 함흥중학교의 사생들이 놀랄 일이 아니겠는가! “소몰이를 하던 덕돌이 대학에 붙을 줄은 누가 알았겠소.” 온 동네에 소문이 자자하게 났고 감탄이 끝이 없이 뒤따랐다. “덕돌은 총명한 놈이야.” “한 달도 복습을 하지 못하고 대학에 붙다니?” “글쎄 말이오. 집체호 애들은 모두 진수해중학교 교원 자식들이어서 시험제도가 회복될 거 안지도 오래오. 집체호 청년들은 반년 넘어 복습했는데도 입학하지 못했는데 소를 몰던 농사군의 아들 덕돌이 대학에 붙었단 말이오.” “기적이오. 기적!” “그래서 개천에서도 용이 난다는 거요.” 덕돌은 후에 친구 영웅과 순희가 대학입시에 락방했다는 비보를 듣고 마음이 아팠다. "공부를 잘한 학생들이 대학으로 가는 좋은 시대를 만나 영웅과 순희가 함께 대학에 갔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덕돌은 참 아쉬웠다. 후에 덕돌은 친구로서 영웅과 맹광철한테 대학입시복습자료랑 얻어 가져다 주면서 성심성의로 지원했다.      후에 안 일이지만, 순희는 그때 덕돌을 무사히 저수지 공지에서 탈출시킨 후 승환과 이인학 부장한테 일 보러 집에 간다고 청가맡고 공지를 유유히 떠나버렸다. 그녀는 그 길로 기차를 타고 둘째오빠가 있는  북경으로 도망쳐 복습했다. 그녀의 둘째오빠는 국가 모 부에서 사장을 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수도 북경 유명중학교 복습제강을 그녀에게 수두룩이 가져다 주어 복습시켰다. 그런데 한어로 시험치다나니 급제를 하지 못했던 것이다. 덕돌은 자기보다 공부도 잘하고 정치도 잘한 순희가 만약 연변에서 조선어로 쳤다면 꼭 첫해 대학입시에 입학했을 것라고 생각했다. 그러자 항상 손잡이트랙터를 몰고 공지에서 도망친 민공들을 쫓아가 공지로 붙잡아들이던 승환이랑 광철이랑 만행을 한없이 증오하게 됐다. 만약 그 애들이 공지로 붙잡아간다고 날치지만 않았어도 순희는 북경으로 도망칠 필요 없었고 뒷근심없이 연변에서 조선어로 시험치지 않았겠는가. (정말 괘씸한 놈새끼들이야. 입단도 하지 못하면서 숱한 애들을 노역화한 공지에 붙잡아들이고 전도를 해치면서 애먹이지 않았는가.)  사실 덕돌도 시험을 칠 때 아슬아슬한 고비른 넘긴 일도 있다. 시험을 친 첫날 오전에 수학을 치고 오후에 정치 시험을 치게 됐다. 덕돌은 점심에 둘째외삼촌 근룡의 집에서 점심을 대충 먹고 숟가락을 놓기 바쁘게 정치 복습제강을 쥐고 윗방에 들어가서 문을 꼭 닫고 복습했다. 그는 한 문제라도 더 복습하려고 드문드문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면서 복습제강을 한 문제 한 문제 암송해내려 갔다. “야, 어째 아직도 시험치러 가지 않았니?” 정옥이 바깥에서 들어오더니 소리쳤다. “엉?” 덕돌이 황급히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이제 12시 30분이구나. 한 10분 더 복습하고 가도 된다.” “야, 남들은 다 가더라. 어째 이제 12시 반이냐?” 그제야 덕돌은 손목시계를 다시 들여다보았다. “아차, 이게 손목시계 잤구나.” 뜻밖의 사변에 덕돌은 복습제강을 활 던지고 시험장으로 부랴부랴 손살같이 뛰어갔다. 시험장을 지키는 선생은 시계를 들여다보더니 빨리 뛰어들어가라고 했다. 1분만 더 늦어도 시험시간이 지난 지 10분 넘어 시험장에 들어가지 못할 번했다. 만약 정치시험성적이 없었더라면 대학에 입학하지 못했을 것이 아닌가? 손목시계가 우연히 잘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 외사촌 여동생 정옥이 들어와 알리지 않았어도 큰 일 날 번했던 것이다. 그러게 아버지 말이 맞지. "뭐나 여지를 둬야 한다."   그의 아버지 상순은 항상 이렇게 말하면서 회의를 가도 반시간전에 가서 앉아 기다렸다. 교통히 불편한 때 기차를 탈 때는 더했다. 한 둬 시간 전에 가서 기다린다. 그럴 필요없다면 항상 이렇게 말하군 했다.  "뭐나 여지를 둬야 해. 의외 일이 생기면 기차를 놓칠 게 아니냐?" 그 말은 완전히 맞았다. 딱 시간을 맞춰 여지를 두지 않으면 차를 놓치는 때가 수두룩하다. 외삼촌댁은 자기네 집에 들어있으면서 대학시험을 치는 덕돌이 저녁에 윗방에서 복습하면서 배고플 까봐 늘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와 깎은 무를 쪼개어 들여다 주군 했다. “목이 마르겠는데 무를 먹으면서 복습해라.” 덕돌은 코마루가 시큼할 정도로 외삼촌댁과 정옥이 고마웠고 은정을 잊을 수 없었다. 5.7(함흥)중학교 수학과, 물리과 선생들도 덕돌을 두고 의논이 분분했다. “아까운 애가 문과생으로 됐소.” “색맹이 아니었더라면 수학이랑 물리랑 공부를 잘한 덕돌은 의학원에 갔을 게요.” 덕돌은 대학입학통지서를 받아 쥐자 제일 처음으로 철봉과 성환 그리고 경산 선생을 찾아가 삶은 돼지고기와 닭 알로 간소하게나마 술상을 차려 드렸다. 그는 무릎을 꿇고 술잔을 찰찰 넘치게 세 분에게 부어 올리고 나서 감격에 넘쳐 인사말을 올렸다. “정말 고맙습니다. 선생님과 형님들의 가르침이 없었더라면 오늘 제가 소를 몰지 않고 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겠습니까? 정말 백골난망입니다.” 철봉은 의젓한 대학생으로 된 동생을 보면서 기쁜 술을 쭉 들며 연신 찬탄을 금치 못했다. “덕돌은 총명하고 은공을 잊지 않는 애야.” 성환도 고개를 끄덕이며 덕돌을 타일렀다. “충효와 의리는 이 세상에서도 위인의 기본인 거야. 꼭 명심해라.” 스승이자 형님들인 그들 셋은 마음껏 기쁜 술을 마셨다. 진수해중학교에 전근해간 경산 선생은 상순에게 소식과 통신 쓰기를 가릋쳤을뿐만 아니라 학교에서 작성한 역사, 지리, 정치 등 중점복습제강을 얻어다 덕돌에게 주었던 것이다. 철봉과 성환 두 형님은 동생에게 지식과 시, 재담 등 글쓰기만 가르친 것이 아니라 인생의 도리까지 가르쳤던 것이다. 덕돌은 그들의 은공을 한뉘 평생 잊을 수 없었다. 사제 간과 형제는 마음의 대문을 활짝 열고 소설 같은 인생살이와 세상만사를 좌담하며 소탈하게 마음껏 술을 마셨다. 한편 예순 고개에 오른 상순은 너무나도 기뻐 온 얼굴의 주름살이 쫙 펴지도록 무시로 혼자 웃었다. 명옥은 널다란 집 안 구들에서 너울너울 어깨춤까지 혼자 출 지경이었다. 상순은 외동아들이 대학에 간 것이 얼마나 기쁜지 몰랐다. 더구나 세상이 바뀌어 이계삼 서기와 허영주 부현장이 현인민정부로 돌아가게 된 것이 얼마나 기쁜지 몰랐다. 그는 자기를 위대한 중국 공산당 당원으로 양성해주었고 한뉘 수십 년 동안 희로애락을 함께 하면서 혁명해온 노간부들을 환송해야 했다. (진짜 천지개벽이 왔다. 우리 세상이 다시 온 것이 아닌가?) 상순과 덕돌은 한창 자라는 중돼지를 잡고 온 마을 남녀노소와 함흥중학교 교원들을 몽땅 청해 술잔치를 베풀고 함께 기쁨을 나눴다. 오랫동안 생산대에서 단지부 서기를 맡은 집체호 최희랑 덕수랑 덕돌의 입단소개인을 하면서 덕돌을 정치상에서 도왔다. 그들은 또 함께 소방목을 하던 소몰이군친구였다. 그들은 비록 대학에 입학하진 못했지만 친구의 입학소식에 기뻐 덕돌이네 집에 찾아왔다. 그런데 함께 기쁨을 즐겼으면 좋을 것 같은 친구 영웅과 맹광철, 심지어 순희도 오지 않은 것이 섭섭했다. (혹시 대학입시에 락방돼 오지 않았는가?)      이때 상순은 이계삼과 허영주 두 분을 위방 상좌에 모시고 술잔을 들었다. “김 대장, 있소?” 이때 뜻밖에도 흥수가 조개턱을 쳐들고 위방 문을 떼고 들어섰다. 모두들 눈을 흘길 뿐 앉을 자리를 내주지 않았다. “이 서기, 미안합니다.” 흥수는 옛날과는 달리 이계삼의 옆에 붙어 앉으면서 머리를 조아렸다. “다 ‘4인무리’의 죄악입니다. 그 놈들이 계급투쟁을 부르짖으면서 노 간부들을 못살게 굴게 했습니다. 한때 나는 착오적인 노선을 집행해 노 간부들을 푸대접했는데 용서하십시오.” 상순은 속으로 오뉴월 소불알처럼 이 다리 짝에 붙었다 저 다리 짝에 붙었다 하는 더러운 새끼라고 욕했다. 이계삼과 상순의 흘기는 눈길을 보고 흥수는 바늘방석에 앉은 것 같았다. 허나 오랜만에 생긴 술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더욱이 술상에 김이 몰몰 나는 돼지고기 점을 담은 사라를 보고 마른침을 꼴깍 삼키는 위인이었으니 되나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미운 놈을 떡 하나 더 준다고 상순은 흥수에게도 술잔을 권했다. 이계삼 서기는 흥수를 쓸어보면서 엄숙하게 말했다. “이날이 오리라는 걸 몰랐지? 과거 잘 못을 알았으면 됐소. 이후에는 권력다툼에 쌍불을 켜지 말고 권세욕을 작작 부리오. 백성들을 잘 살게 하는 게 최대의 정치요. 사람이 양심이 있어야 하지 시계추처럼 정치파도에 휘말려 이랬다저랬다 양면수법을 쓰면 못 쓰오. 정치라는 건 진리를 파악하고 올바른 길로 나가야 하지 눈앞의 세도에 아부굴종해선 안되오.” “예, 예, 예. 명심하겠습니다.” 옆에 앉은 허영주는 묵묵히 날카로운 눈길로 흥수를 쏘아볼 뿐이었다. 흥수는 오시러와 더 앉아 있지 못하고 정지에 나가 한쪽 구석으로 가서 앉았다. 허영주는 그제야 입을 열었다. “나쁜 놈 새끼, 문화대혁명 때 황종연이랑 황승연이랑 반란 파들과 짜고 들어 우리 간부들을 얼마나 못 살게 굴었소. 더러운 새끼, 이젠 우리한테 알락 거려? 허백호 서기랑 다 저 놈들의 피해를 받아 억울하게 감옥에 갔소.” 이계삼은 한숨을 후 내쉬었다. “이제 억울하게 고깔모자를 쓰고 투쟁 받고 피해 받은 노 간부들의 원한을 갚을 날이 오겠지.” 상순은 좌중을 둘러보더니 올 분들이 다 온 것을 보고 술잔을 들고 일어섰다. 그는 숱한 마을 사람들이 들어앉은 위방과 정지에 대고 목청을 돋우어 말했다. “여러분, 세상이 바뀌었습니다. 천지개벽이 일어났습니다. ‘4인무리’의 박해를 받아 우리 마을에 내려와 이른바 노동개조를 하던 이계삼 서기와 허영주 부현장께서 다시 현인민정부로 돌아가게 됐습니다. 또 겸사하여 오늘 내 아들 덕돌이 어엿한 대학생으로 됐습니다. 모두 여러분들이 도와준 덕분입니다. 여러분과 함께 이 두 가지 기쁜 일을 경축해 기쁨을 나누려고 이 자리에 청했습니다. 자, 여러분 오늘 실컷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춥시다!” 상순은 우선 이계삼과 허영주와 잔을 마주치고 마을 여러분께도 잔을 들어 인사했다. “자, 앞의 잔을 비웁시다.” 뒤이어 덕돌이 마을 여러분께 술을 부어 올리고 간단히 말했다. “여러분, 오늘 아주 기쁩니다. 여러분들의 방조에 힘을 입어 저는 파란만장한 어지러운 세상을 헤쳐오고 오늘 끝내 대학에 입학하게 됐습니다. 저는 ‘4인무리’를 짓 부시고 대학 입시 제도를 회복해 오늘의 찬란한 미래를 개척해준 화국봉 주석을 위수로 하는 당 중앙에 감사를 드립니다. 하늘땅이 지동치더니 천지개벽이 일어났습니다. 개천에서 용이 하늘로 날아오르고 가을에 칼산의 사과배꽃이 피었습니다. 해가 서쪽에서 뜨는 그날은 오고야 말았습니다. 이제껏 저를 사람으로 만드신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덕돌의 말에 모두들 “대학생이 다르긴 달라.” 하고 머리를 끄덕이며 엄지를 내 휘둘렀다. 덕돌은 여러분의 요청에 의해 “도라지”를 건드러지게 불렀다. 그 노래 소리는 마음속으로부터 우러나와 흐르는 기쁨의 노래, 축복의 노래여서 아주 건들건들 하고 흥겨웠다. 그 노래 소리에 맞춰 어머니 명옥은 어깨춤을 덩실덩실 추었다. 상순은 너무 기뻐 유일한 주제가 “호미가”를 흥겹게 불렀다. 동산천리 돋으신 해는 점심때가 되어 온다 에라 에라 에라 호미야 호미 호미를 메고 가자 알뜰하게 가꾸어라 땀에서 나오는 곡식이다 에라 에라 에라 호미야 호미 호미를 메고 가자 덕돌은 아버지가 노래를 그렇게 즐겁게 부르는 모습을 난생처음 보았다. 어머니가 흥겨워 도라지를 부르며 어깨춤을 추자 코마루가 시큼해났다. 허영주와 정규상도 일어나 어깨춤을 덩실덩실 추었다. 이계삼은 도라지를 출줄 몰랐으나 엉거주춤 일어나 팔과 다리를 들었다 놨다 하며 양걸 비슷하게 춤을 추었다. 그들이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천지개벽이 일어나 글쎄 며칠 후면 현인민정부로 돌아가게 됐다. 그보다도 역경 속에서 환난을 함께 겪으며 자기들을 보호해온 상순의 아들이 대학에 가게 된 것이 너무나도 기뻤다. 조영희와 순희 그리고 순임도 춤판에 끼어들었다. 그들은 대학 시험에 급제하지 못했지만 마음속으로부터 덕돌의 대학입학을 축하하며 너울너울 춤을 추었다. 정규상은 자기 딸 순임이가 대학에 가지 못해도 덕돌이랑 함께 놀면서 건실히 자라나서 마음이 놓였다. 동림과 허춘도 얼근히 마시고 어깨춤을 덩실덩실 추었다. 게다가 상선마저도 찾아와 목책까지 기념품으로 주고 축배를 들었다. 다만 성욱이가 왠지 덕돌이 청해도 낯도 내밀지 않았다. 송선은 오랜만에 일어나 도라지에 맞춰 우리 민족의 무용 도라지를 너울너울 추었다. 모두 눈이 휘둥그래 마흔 고개에 오른 송선이 날씬한 몸을 버들가지처럼 놀리며 추는 우아한 온돌무용을 구경하며 연신 박수갈채를 보냈다. 송선은 기쁨의 눈물을 머금고 마음속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기쁜 마음을 손과 몸에, 얼굴의 표정에 담아 최고의 기교로 도라지를 너울너울 춤추었다. 때로는 꽃나비 같이 나풀나풀, 때로는 경쾌하게 나래치는 학 같이 너울너울. “덕돌의 대학입학을 열렬히 축하해요.” 춤을 마친 송선은 덕돌과 상순을 번갈아 보면서 허리까지 굽혀 경례까지 올렸다. 상순과 덕돌도 바삐 벌떡 일어나 인사를 받으며 답례했다. 송선은덕돌과 함께 수레로 수수단을  실어오다가 소수레가  번져져 고생하던 일을 말하면서 덕돌을 치하했다.    이때 정지가 소란스러워졌다.  “나도 덕돌이 대학에 간 걸 축하한다.” 모두들 춤을 추다가  문께를 바라보았다. 덕돌은 기다리고 기다리던 순희나 영웅이 오는가고 눈뿌리 빠지게 내다보았다. 그런데  해월이 애를 업고 춤판에 끼어들었다. 그는 춤을 추다가 잔등 포대기에서 애를 꺼내 들어 덕돌에게 안겨주려고 내밀며 떠들어댔다. “야, 네 아들이다. 안아 봐라! 아들애도 당신이 대학에 간 걸 축하한다. 이걸 봐라, 헤쭉헤쭉 웃는다. 헤헤헤.” 순간 마을 사람들의 춤판은 깨졌다. 덕돌은 저으기 긴장해졌다. “야, 너 미쳤니? 건 네 장충국과 살아서 난 애야. 다 아는데 왜 생사람 잡니?” 허나 해월은 발을 동동 구르면서 떼를 썼다. “충국이 싸질렀든지 네가 만든 애든지 대학생인 네 아들이래야 잘 살게 아니야? 이 애를 책임져라!” 해월은 기어이 포대기에 싼 애를 덕돌에게 떠맡기려고 밀어주었다. 그때 장충국이 뛰어 들어와 야단쳤다. “정신 나갔어? 건 내 아들이야!” 해월은 때 괴죄죄한 충국의 낯빤대기를 찰싹 후려갈겼다. “이 더러운 지주 새끼야, 얘가 어찌 네 아들이야? 지주 손자라구, 전도 망친다, 망쳐! 얜 내 첫사랑 덕돌과 난 앤데.” 덕돌은 입을 하 벌리고 서 있었다. 순간 순희와 조영희 그리고 정순임의 눈길이 모두 해월과 덕돌에게 쏠렸다. 마을 사람들 수십 쌍의 눈길도 일시에 쏠렸다. 이때 흥수가 뛰어나와 어색한 장면을 타개했다. “여러분, 미안. 얘는 정신 나갔으니 양해하라니께.” 해월은 애기를 마구 덕돌에게 안겨주고 나가려고 했다. 허나 덕돌은 애를 흥수에게 안겨줬다. 돌도 안 된 불행아의 울음소리가 귀청을 아프게 때렸다. 마을 사람들은 흥수 뒤통수에 대고 손가락질 했다. “산아제한한다고 남의 아낙네 배를 가르겠다고 날뛰더니. 흥! 제 딸은?” “그러게 말이 아니오? 결혼도 하지 않고 지주네 애를 낳다니?” “쯧쯧쯧, 어쩜 저런 미친 딸을 두었소?” 개꼴 망신을 당한 흥수는 애를 해월에게 안겨 가지고 자리를 떴다. 춘실도 더 앉아 있을 면목이 없어 훌쩍 일어나 문을 쾅 닫고 바깥으로 나가버렸다. 충국은 때가 덕지덕지 붙은 허연 머리카락을 보란 듯이 손으로 쓱 씻어 올리더니 헤벌쭉 웃어 보이며 따라 나갔다. “너희들도 내처럼 늘그막에 새파란 처녀한테 장가들어 아들을 놔봐라!” 상순은 충국의 잔등을 흘겨보더니 술맛이 없어 머리를 홰홰 돌렸다. 한편 흥수는 뒤따라오는 충국을 보자 성이 꼭뒤까지 치밀어 올랐다. 밸 같아서는 죽여 치우고 싶었다. 이젠 충국은 집도 없이 벽돌공장 당직실에서 홀로 살다나니 때도 온전히 끓여먹지 못하고 세수도 하지 않아 때 투성이였다. 이젠 너무 투쟁을 받아 정신이 나갔는지 모든 장소에서 항상 중얼거리지 않으면 미친 소리를 마구 쳐댔다. 흥수는 충국과 같이 더러운 놈에게 딸이 짓밟힌 것을 생각하면 속에 불이 활활 타올랐다. “저 새끼를 어떻게 하면 원수를 갚을까?” 이때 충국이 또 따라와 팔소매를 잡아 당겼다. “가시아버지, 가시아버지, 우리 여동생 집에 가서 술이나 한잔, 응?” 충국은 손을 입에 가져다 대고 술을 마시는 시늉을 했다. “가라, 누가 가시아비냐? 다시 내 딸을 건드렸다간 목을 썩뚝 잘라버릴 테다!” 허나 충국이 팔소매를 잡고 놓지 않는 바람에 장미련 네 집 쪽으로 마지못해 끌려갔다. 그런데 뒤에서 해월은 충국을 보고 졸라댔다. “신랑, 빨리 우리 집에 가서 자자. 응?”  이때 애가 “앙~” 하고 자지러지게 울어댔다. 해월은 횡설수설했다. “오- 그래, 네 아빠 온다. 우리 먼저 가자. 장 서방, 인차 오라고. 괜히 술을 많이 마셔서 맥을 추지 못하겠다.” 해월은 앞서 토성 동쪽으로 허둥지둥 달려갔다. “근심하지 말라! 술 한 근 마셔도 문제없어! 뚫어놓은 구멍도 들어가지 못하겠니? 흐흐흐.” 충국의 개소리에 흥수는 눈앞에서 불티가 튕길 지경이었다. 충국에게 끌려 미련이네 시꺼먼 집 안에 들어섰다. 잘칵! 전등불이 켜졌다. “누구야?!” “내다, 내. 얼른 우리 가시아버지께 술상을 차려?” 미련은 자다가 일어나 앉아 흥수를 보자마자 겁부터 집어먹더니 이불부터 머리까지 감싸며 핸들 누워버렸다. “야, 일어나 김치에라도 술상을 차려! 옥 같은 딸을 내게 준 이 치보야.” 충국이 지껄여댈수록 흥수는 앙갚음을 하려고 이를 악물었다. 그는 집안을 둘러보다가 미련의 아들애가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기뻤다. “토함산은 어데 갔소?” 미련은 귀찮은듯이  “패용천촌 고모 집에 갔소.”라고 대답하고는 이불을 더 푹 들썼다. 흥수는 미련이 쪽을 쓸어보다가 불현듯 희미한 전등불을 빌어 이불 밑에 드러난 미련의 허연 허벅다리를 보는 순간 아래배로부터 야욕이 불타오르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오냐, 충국아. 내 딸을 짓밟은 원수를 열배, 백배로 갚아주마.) 그는 윽윽 벼르며 구들에 올라가 앉았다. 그래도 미련은 일어도 나지 않았다. 충국은 하는 수 없이 밥상을 내려놓고 술상이라고 차렸다. 김치 움에 들어가 배추김치 한통을 대야에 담아 가져다 식칼로 썩썩 썰어 대야채로 밥상에 덜렁 올려놓았다. 식탁을 아무리 들춰도 술이 보이지 않았다. “미련아, 술병을 어디에다 뒀니?” “몰라! 언제 사다 놓았소? 아낙네만 사는 집에 무슨 술이 있다고 그러오?” 미련은 몸을 들추더니 볼 멘 소리를 쳤다. 충국은 술상이고 뭐고 모르겠다고 일어나 바깥으로 나가버렸다. 그도 진작 흥수가 자기 여동생을 간음했다는 것을 알고 있는 터였다. 허나 네 좋고 나 좋고 엎음 갚음이라고 눈을 감아 주었다. 흥수도 매 한가지였다. 충국이 또 해월을 쫓아가는 것을 알면서도 때마침 잘 됐다고 여겼다. “가라!” 이때 미련이 돌아누우면서 발로 다가드는 흥수의 아랫배를 콱 걷어찼다. “으흠, 이 년아, 어디다 발길질이냐?” 절칵! 흥수는 일어나 문 걸개를 걸고 전등불마저 꺼버리었다. “어으, 차가라. 억, 억. 그만두지 못해?” 투 닥, 투 닥 소리에 뒤이어 이불을 마구 차버리는 소리가 들리었다. 먹칠한 집안에서는 고양이가 우는 것 같은 신음소리가 간간히 들려왔다. “그만 해! 시라지, 시라지 같은게 계속이야?” “좀 가만있지 못해?” 귀 쌈인지 엉덩인지 찰싹 치는 소리가 들렸다. 뒤이어 여인의 흐느낌 소리인지 신음소리인지 어둠 속에서 들리었다… 은빛 달빛이 서서히 온 동네를 비추었다. 한편 마을 사람들은 덕돌의 대학입학을 축하해 밤중까지 놀고 밤참까지 들고 하나 둘 헤어져 갔다. 덕돌과 상순은 문 밖에 나가 그들을 일일이 바래었다. 덕돌이 손님들을 다 바래고 집으로 들어가려고 할 때었다. 울바자 뒤에서 “덕돌이, 좀 보기요.”라고 하는 처녀의 나직한 목소리가 들리었다. (퍽 귀에 익은 목소리인데.) 덕돌이 돌아서는 순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집체호의 조영희가 머리를 다소곳이 숙인 채 사뿐사뿐 잔설을 밟으면서 나타났던 것이다. “어째 아직도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소?” 조영희는 대답 대신 호주머니에서 뭔가 꺼내 내밀었다. “대학입학을 축하하오. 이건 내 성의니까 받아주오.” 덕돌은 별로 다른 생각도 없이 “감사하오.”라고 하며 손수건에 싼 무엇을 받았다. “이게 뭐요?” 허나 조영희는 직답을 피하고 “풀어보면 알겠지요.”라고 하더니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은빛 달빛 속으로 뛰어 사라졌다. 덕돌은 가슴이 뭉클해나 손수건에 싼 것을 풀어 달빛을 빌어 보았다. 꽃담배쌈지가 아닌가. 정말 코바늘로 한 뜸 한 뜸 꽃을 수놓은 꽃담배쌈지였다. 덕돌은 꽃담배쌈지를 만지작거리며 조영희가 사라진 자기 집 동쪽에 있는 집체호 쪽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그는 꽃담배쌈지를 만지작거리다가 그 안에 무슨 종이가 들어있는 것 같은 감을 느겼다. 확실히 제비꼬리처럼 곱게 접은 쪽지가 들어 있었다. 펼쳐 보려고 했지만 달빛을 빌어 볼 수 없었다. “허, 대학생이 되니 좋기는 좋다. 집체호 처녀가 연애를 다 걸고.” 덕돌은 영원한 승자였다. 이전에 그가 소몰이를 할 때에는 어느 처녀가 연애를 걸었겠는가. 연애는커녕 농촌 둼무지에 박힐가봐 둼무지 피하듯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천지개벽이 일어나면서 대학입시제도를 개혁하자 대학에 입학하자 숱한 처녀들이, 집체호 시내 처녀들도 연애를 걸지 않겠는가.       덕돌이 흐뭇해 꽃담배쌈지를 만지작거리면서 윗방에 올라갔을 때다.      똑똑똑    윗방 문께서 노크소리가 조용히 들렸다.    덕돌은 착각인가고 하면서도 꽃쌈지를 치우고 문께로 다가갔다. "누구요?" (영웅인가? 맹광철인가?) "내야." 귀에 익은 목소리었다. 문을 열고 보니 이게 누구냐? 뜻밖에도 기다리고 기다리던 순희가 아니겠는가. "어서 들어오라."   "내 어찌 들어가겠니? 네 나오너라." 덕돌은 정지에 나가 신을 대충 꿰고 바깥으로 나갔다. 순희는 수깃했던 머리를 천천히 들더니 뭔가 내밀었다.  "너의 대학입학을 축하한다. 이걸 기념으로 받아라. 만년필이다." 덕돌은 미안한 마음으로 정이 폭 밴 만년필을 순희 손에서 받았다. "아니, 감사하면서도 미안하다. 네가 락방해 마음이 아프다. 우리 학창시절 꿈대로 함께 대학 갔으면 얼마나 좋겠니?" 덕돌은 어느결에 저도 몰래 순희 어깨에 손을 얹었다. "절대 포기하지 말라. 넌 공부 잘하기에 명년엔 꼭 입학할 거야." 달빛아래 순희 표정은 볼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분명 머리를 힘차게 끄덕였다. "그래, 내 근심은 말라." 그녀는 뒷말을 이었다. "한가지 기쁜 소식을 알려주마. 일성저수지공지 단총지서 네 입단 통과됐다. 이제 공사 단위 비준 받으면 돼." 그 뜻밖의 소식에 덕돌은 순희의 두 손을 덥썩 잡고 환성을 질렀다. "감사하다." "단서기인 집체호 최희랑 빅찰수랑 소개인으로 나서서 힘썼다." "오- 알았다. 네가 많이 힘쓴 거 짐작간다. 정말 감사하다. 입단은 얼마나 오랜 내 소원이었니?" "대학교에 가서 공부 잘해라." 순희는 머리를 수깃하며 몸을 돌렸다. 달빛아래 그녀의 가녀린 어깨가 들먹이는 것이 보였다. "우리 대학에서 다시 만나자." 덕돌은 이렇게 말하고나서 무슨 생각이 피뜩 떠올랐는지 순희를 만류했다.  "잠간 기다려라." 덕돌은 부랴부랴 집에 들어가더니 윗방에서 책 한꾸러미 들고 나왔다. "옛다. 내 복습하던 자료인데 복습할 때 참고해라. 넌 꼭 대학에 입학할 수 있어. 내보다 공부도 잘했고 정치도 잘하잖았니?" "감사하다. 믿어줘서. 건데..." 순희는 뭔가 말하려다가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꼴깍 삼키었다. 덕돌이 대학에 간 후에야 알게 됐는데 이튿날 순희네는 구대현으로 이사가게 됐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녀는 눈물이 앞을 가리어 차마 이사간다는 말을 덕돌한테 하지 못했던 것다.     모든 것은 불운한 운명의 조화랄까. 둘째오빠에게 얹혀살던 그녀는 부득불 둘째오빠네를 따라 한족곳인 구대현에 이사해가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래서 한어로 시험치다나니 이듬해에도, 그 이듬해에도 연속 시험쳤는데도 대학에 입학하지 못하고 말지 않았겠는가.         덕돌의 친구 장영웅과 맹광철은 다 이듬해 대학에 입학했다. 그런데 공부를 그렇게도 뛰여나게 잘하고 정치도 잘하던 순희가 락방되였다. 덕돌은  일성저수지에서 자기를 탈출하라고 엄호하던 순희, 대학에 입학하지 못한 순희를 두고  마음이 아팠다.        그는 두손 모아 빌고 또 빌었다.       "하느님이여, 비나이다. 비나이다, 순희를 꼭 대학에 가게 도와주십시오. "        
168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110) 댓글:  조회:1552  추천:1  2018-07-21
                                                      10. 소몰이군과 여무용수의 설음        진붉은 태양이 서서히 서산으로 넘어가면서 금빛을 뿌리었다. 황혼의 붉은 낙조로 물든 서산의 상공은 붓으로 그린듯이 검붉었다. 그래도 져가는 태양은 펑펑 구멍 뚫린 검은 구름 조각들 사이로 구름 변두리나마 노르스름하고 발갛게 물들이고 있었다. 그것도 잠시뿐 시간이 흐름에 따라 태양은 맥없이 지평선 아래로 꼴깍 넘어가면서 몇 가닥의 금빛을 비추다가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뒤이어 어둠이 능구렁이처럼 내달려오면서 산과 들을 무섭게 뒤덮고 지지눌렀다.      1976년은 중국으로 말하면 특별한 한 해였다. 초봄에는 당산시에서 7급도 훨씬 넘는 지진이 일어나 일대 재난이 벌어졌다. 8월 말부터 9월 초에는 패용천산과 칼산 사이에 있는 과수원의 살구꽃과 사과배꽃이 하얗게 피기까지 했다. 덕돌은 소 방목을 하면서 때 아니게 핀 살구꽃과 사과배꽃을 살펴보면서 이상해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저 패용천산 꼭대기 절벽 우에서 정규상이 싸리나무광주리를 잔등에 업고 괭이로 약초를 캐고 있었다. 그는 시오를 파서 잔등의 싸리나무광주리에 담고 허리를 펴고 산 아래 무연히 펼쳐진 들판을 내려다보며 한숨을 땅이 꺼지게 길게 토해냈다. 거미줄처럼 얼기설기 늘여진 논두렁, 무연히 넘실거리며 펼쳐진 사래긴 옥수수밭과 콩밭… 허나 세상이 아무리 넓어도 말 한마디 했다가 억울하게 우파 모자를 20년이나 쓴 정규상과 같은 우파분자가 숨이 나올 곳은 없었다. 덕돌이 너무 이상해 정규상에게 배꽃이 핀 사과배나무가지를 끊어다가 보였다. “정 교수, 이걸 보십시오. 가을에 배꽃이 다 피었습니다.” 정규상도 한숨을 쉬며 나뭇가지를 받아 쥐고 한참이나 여겨보더니 그리 멀지 않은 배꽃이 하얗게 핀 과수원을 내려다보았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덕돌이 신기해하자 정규상은 의연히 한숨만 내쉬며 흐리터분한 을씨년스러운 하늘만 쳐다볼 뿐이었다. 그런데 9월 9일에 뜻밖에도 중국 인민의 대구성이며 위대한 수령이며 진붉은 태양이신 모택동 주석께서 불행하게도 사망하셨다. 전국 각 민족 인민들은 모두 슬픔의 바다에 잠겼다. 추도대회를 하는 날 함흥대대 토성 안 마당에 검은 천을 두른 거폭의 모택동 주석 초상화를 모시고 사원들이 줄을 지어 추모활동을 벌렸다. 어떤 노인들은 대성통곡하다가 기절해 넘어가 정규상이 위생소에 데려다 주사를 놓으면서 구급해야 할 지경이었다. 덕돌은 5.7중학교를 졸업하고 상순의 포치대로 생산대 소 방목을 하다나니 경애하는 모주석의 추도대회에도 참가하지 못하고 패용천산에 가서 소몰이를 해야 했다. 그는 아버지가 원망스러웠다. 그의 아버지는 집안 집 손자 성욱을 생산대 대무위원 겸 회계를 시키면서도 자기 아들은 대전 일도 시키지 않고 글쎄 소 궁둥이를 치게 했던 것이었다. “참, 아버지는 이해 못하겠어. 내가 회계를 하면 성욱보다 못하게 할까봐 나를 소방목을 하래?” 더구나 상순은 소몰이를 시킨 첫날에 그를 보고 “정치가 백열화된 세상에서 정치를 잘 하지 못하면 소궁둥이나 쳤지 별 수 있니?”라고 비꼬는 투로 말하기까지 했다. 덕돌은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힌 격이었다. 고중 졸업을 앞두고 그는 학교에서 조직한 글짓기서클에 참가해 경산과 성환 형님, 그리고 철봉 형님까지 모시고 조선어문법과 일부 문학창작 이론까지 학습했고 소식과 통신, 소설과 시 등 문체의 글짓기를 배워 공사와 현, 주 방송과 신문에도 소식을 여러 편 발표했다. 게다가 장영웅과 맹광철 그리고 방순희의 도움으로 점차 학급의 애들과도 관계를 개선해 입단지원서까지 썼다. 물론 그때 담임교원 황승연은 학교 빈농 대표 이흥수와 짜고 들어 극력 덕돌의 입단을 저애했지만 학급에서 주먹 왕이자 글짓기를 잘한데다가 대채전을 만드는 중노동도 아주 잘해 학생들 속에서 위신이 높았다. 하여 학교 내에서 덕돌을 내놓고 다른 애들을 입단시키기 힘들었다. 덕돌은 고중에서 입단하고 농촌에 나가 생산대대를 위해 소식이나 통신을 잘 써 입당도 하고 대학에 갈 푸르른 꿈이 당장 실현 될 것 같아 가슴이 한껏 부풀어 올랐다. 그가 진수해 공사 방송소에 가서 견습기자로 뛰어 다닐 때 면목 익힌 아나운서 오영순은 그보다 한 살 위 여성이었는데 공사 단위 조직위원이었다. 덕돌은 그녀를 양누나로 모시고 소식쓰기를 배웠고 방송소를 떠날 때는 이제 입단지원서가 공사단위에 올라가면 토론할 때 도와달라고 체면을 잃고 부탁해놓기도 했다. 그리하여 입단문제는 문제없으리라고 시름 놓고 미몽만 꾸었다. 허나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전해져 왔다. 학교 단총지에서 온 것이 아니라 제일 믿던 양 누나 공사 방송소 아나운서 오영순한테서 먼저 편지가 날아왔던 것이다. 동생, 미안하오. 뜻밖의 불행한 소식에 놀라거나 격분해 하지 마오. 총명한 동생은 이성을 잃은 일을 하지 않으리라고 믿고 말하오. 생각 밖으로 동생이 제일 믿던 사람이 덕돌에 대한 평가가 좋지 못했기 때문에 입단 문제가 공사 단위에서 비준되지 못했소. 학교 기층단총지에서 올려 보낸 자료가 나쁘기에 나로서는 혼자 어찌는 수가 없소. 조직원칙이 있기에 구체적으로 전해주지 못하는 것을 양해하오. 항상 주변 사람들을 과분하게 믿지 마오. 허나 이번의 좌절에서 경험과 교훈을 섭취해 이후에 사상 상에서 입단하면 꼭 멀지 않은 장래에 입단하리라고 믿소… 덕돌은 그 아래 위안의 말들을 더 읽어 내려갈 수 없었다. 그는 김이 빠진 공처럼 편지를 스르르 떨어뜨리고 위 방안에서 이불을 들쓰고 들어 누었다. 진종일 들어 누운 채 천정 한 곳만 멍청히 쳐다보았다. 며칠 후 소를 먹이다가 덕돌은 영웅이 찾아와 말하는 말에서 피뜩 의심이 들었다. “어쩌겠니? 나도 별 수 없다. 학교 혁명위원회와 단위를 쥐고 흔드는 승연선생이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대가리도 꼬리도 없이 남기고 간 영웅의 말에서 덕돌은 희미하게나마 짐작이 갔다. 입단 소개인인 장영웅이 소개인 추천 란에 평가를 좋지 않게 써놓았을 수 있었다. 덕돌은 소를 먹이고 집에 돌아오자마자 오영순의 편지를 꺼내 다시 읽고 또 읽어 보았다. …동생이 학급에서 제일 믿던 사람이 덕돌에 대한 평가가 좋지 못했기 때문에 입단 문제가 공사 단위에서 비준되지 못했소. 학교 기층단총지에서 올려 보낸 자료가 나쁘기에 나로서는 혼자 어찌는 수가 없소… “‘내가 제일 믿던 사람이’ 누구겠는가? 영웅을 내놓고 또 누가 있는가? 영웅이야, 바로 영웅이야.” 제일 믿던 입단소개인마저 평판이 좋지 않은 덕돌을 공사단위 조직위원인 오영순인들 어떻게 입단시킨단 말인가! 순간 배신감과 허위성에 허탈감이 났다. “세상에 어찌 이런 일이 있단 말인가? 영웅이 어찌 이럴 수 있느냐? 내가 널 얼마나 믿었는데...” 사실 영웅과 덕돌은 모두 공부를 잘했다. 덕돌의 큰누나는 영웅의 아버지 제자였다. 영웅의 아버지는 진수해중학교 화학교원이었는데 춘자는 화학을 아주 잘해 맏제자나 다름 없었다. 영웅은 반장이고 덕돌은 학습위원을 하면서 아주 친하게 지냈다. 그런데 덕돌이 수학과 물리, 화학을 몽땅 100점을 맞은 후부터 영웅은 덕돌을 질투하기 시작했다. 학급에서 학습성적 일위를 내줬기 순간부터 생긴 삐뚤렁 정치의 물결이 인것이었다. 그러나 졸업을 앞두고 영웅은 자기를 물매를 치겠다는 뒷말을 듣고 주먹이 센 한족친구들이 많은 걸 보고 덕돌을 보고 자기를 보호해달라고 했다. 대신 덕돌을 꼭 입단시키겠다고 이른바 거래식 군자협의를 달성했다. 덕돌은 졸업할 때 영웅을 누가 다치는 날엔 가만놔두지 않겠다고 을러멨다. 그리고 사전에 영웅을 빼돌려 물매를 피하게 했다.그런데 영웅이 배은망덕하고 뒤에서 자기를 헐뜯어 소개인 소개란에 무함해 써넣을줄은 몰랐다.  허나 승연이가 영웅을 강박해 그런 허위소개를 했다고 생각하자 더욱 격분했다. 희망으로 부풀었던 덕돌의 마음에 남긴 상처는 깊고 깊었다. 세월이 흐르고 흘러도 그 상처는 아물 것 같지 않았다. 덕돌은 소몰이를 하다가 과수원에 흐드러지게 피어난 배꽃을 보고 소 궁둥이를 치던 회초리로 마구 후려갈겼다. 새하얀 배꽃잎사귀들이 질척질척한 땅바닥에 마구 떨어졌다. “너의 아름다움은 내 마음의 비애다. 때 아니게 핀 꽃은 필요 없어!” 덕돌은 이른 아침에 소 무리를 몰고 옥수수 밭을 지날 때면 제일 서러웠다. 옥수수 밭에 달려 들어가 옥수수 잎을 마구 뜯어먹는 소를 쫓아내려고 달려 들어가면 아침 이슬에 옷이 흠뻑 젖곤 했다. 늙은 소 콩 밭쪽으로 한다고 소들의 왕격인 혹달개는 오른쪽 뿌리에 혹이 달리었는데 괘씸하게도 덕돌의 눈치를 흘금흘금 보다가도 다른 소를 쫓아내는 사이면 콩밭에 뛰어 들어가 콩 꼬투리를 마구 뜯어먹었다. “이 놈 혹달개야! 나오지 못하겠니?!” 그 놈의 혹달개는 콩밭에서 뛰어나오며 똥을 빌빌 쏘면서도 콩잎을 마구 뜯어먹었다. “이라! 이놈 혹달개야!” 혹달개를 쫓아 뛰어가다가 덕돌은 혹달개가 갓 쏴놓은 똥물을 밟고 그만 엉덩방아를 찧었다. “에이, 씨!” 일어나 내려다보니 금방 씻어 입은 바지 엉덩이에 싯누런 소똥이 발리었다. 덕돌은 너무나도 서러워 패용천산 꼭대기 너럭바위에 올라서서 산 아래에서 사래 긴 옥수수 밭을 차고 키 넘는 옥수수 사이에서 기음을 매며 나가는 사원들을 내려다보며 장탄식을 했다. “어떻게 계속 이렇게 소궁둥이를 치면서 한뉘 산단 말인가?” 그는 앞길이 막막해 흐릿흐릿한 하늘을 한참씩이나 쳐다보며 주먹을 으스러지게 쥐고 마구 후려쳤다. “야! 이놈의 세상, 어쩜 고중을 졸업한 내가 소 궁둥이를 쳐야 한단 말이냐?! 광활한 천지에는 할 일도 많다는 게 이런 거냐?” 한편 아버지가 자기에게 소몰이를 시킨 것이 원망스러웠다. 순간 소몰이를 내보내며 아버지가 하던 말씀이 귀전을 아프게 때렸다. “별 수 있니? 싸움이나 하고 책도 온전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한뉘 소 궁둥이나 쳤지.” 순간 덕돌은 콧마루가 시큼해났다. 그는 하늘을 향해 두 손을 벌려 보이면서 목청껏 웨쳤다. “아버지, 두고 보십시오! 내가 소 궁둥이나 치면서 사는가? 어쩜 세상을 주름잡아 달릴 큰 뜻을 품은 아들에게 그런 말씀을 해 자극할 수 있습니까?!” 그는 끊임없이 하늘에 대고 주먹질을 하고 웨치고 산 아래 들판에 대고 고함쳤다. “아버지, 어쩜 성욱에겐 회계를 맡기고 당신의 아들에겐 소몰이를 시킬 수 있습니까? 농촌에서 농사를 배우지 않고 소몰이나 해서야 무슨 전도가 있습니까?” 덕돌은 아버지 그때 말씀이 이해되지 않아 날마다 끊임없이 넉두리를 했다. 넉두리를 하다가도 밭으로 달려가는 소들을 되몰아왔다. 어떤 때에는 자기가 조립한 반도체 라디오를 메고 칼산에 올라가서 조선노래를 들으면서 산우에서 목청이 터지라고 노래를 불렀다. 노래를 부르고 나면 그래도 잠시나마 가슴이 후련하고 마음이 홀가분해났다. 기실 상순은 아들 덕돌에게 격장법을 써서 정신을 차리고 농촌을 벗어나라고 일부러 소몰이를 시켜 자극했던 것이다. 허나 덕돌은 아버지의 그 깊은 마음을 알리 만무했다. 약재를 캐다가 덕돌의 그 모습을 지켜 보아온 정규상은 슬슬 다가와 광주리를 벗어 너럭바위 위에 놓고 산 아래를 둘러보았다. 사원들이 보이지도 않자 그는 너럭바위 위에 덕돌과 나란히 앉아 타일렀다. “운명을 한탄만 해서야 소몰이 신세를 고칠 수 있니?” “그래 무슨 방도가 있습니까?” 정규상은 덕돌의 어깨에 손을 얹더니 나직이 말했다. “지금 세월에 잠시 지식분자들을 써주지 않지만 장차는 써줄 거야. 지식분자를 멀리하고서야 사회가 어찌 발전하겠느냐? 그러니 소만 몰지 말고 여가를 타서 책을 보아라. 지식은 언제든지 네 운명을 개변시키는 힘이 될 거야.” 덕돌은 그 말에 정신이 들었다. “예. 그런데 책을 보자고 해도 소들이 밭으로 가서 볼 새 있습니까?” 정규상은 덕돌의 어깨를 다독이면서 귀띔해 주었다. “소몰이도 방법을 대라. 소는 소금을 먹기 좋아해. 소금을 사 호주머니에 넣어가지고 다니다가 ‘염, 염.’ 하고 조금씩 먹여라. 그럼 소들이 달아날 때마다 ‘염, 염’ 하고 부르면서 손을 내밀어봐라. 소들이 밭으로 가다가도 달려오지 않는가. 소들도 방법을 대 얼리고 길들이면 얼마든지 책을 볼 새 있느니라.” “예~ 그게 정말 방법입니다.” “그래, 뭐나 방법을 생각하면서 일해야 한다.” 덕돌은 “예, 알았습니다.”라고 하며 머리를 끄덕였다. 정규상은 뒤 말을 이었다. “내 알건대 네 고조부는 궁중 어의였다더라. 너도 의사공부를 하지 않겠느냐?” 덕돌은 김빠진 공처럼 물앉아 한숨만 내쉬었다. “내 언제 의사 질을 해서 농촌을 벗어나겠습니까?” 허나 정규상은 덕돌에게 힘을 불어넣어주었다. “넌 총명하기에 농촌에서 일하면서도 의료지식을 제대로 배울 수 있다. 공부라는 건 딱 학교에서만 하는 게 아니야. 지금 잠시 농촌에 있지만 먼저 책을 보면서 자습할 수도 있다. 이제 세상이 뒤바뀌면 언젠가는 내가 너를 의사로 되게 도와주마.” “예? 정말입니까?” “그래. 의료지식 책을 주면 누구에게도 보이지 말고 가만히 소몰이를 하면서 봐라.” “예. 감사합니다.” 덕돌은 새로운 희망으로 부풀어 올랐다. 이튿날부터 덕돌은 정규상 교수의 말대로 집에서 소금을 둬 줌씩 호주머니에 넣어가지고 소몰이를 했다. 그는 먼저 우사에 가서 소들의 우두머리 혹달개의 구유 앞에 가서 “염, 염” 하면서 소금을 손에 쥐어 내밀었다. 혹달개는 귀를 뻘쭉하더니 혀로 덕돌의 손바닥을 핥아 보더니 앞으로 육중한 몸뚱이를 움직이더니 쯥쯥 소금을 핥아 먹어버렸다. “염, 염, 염.” 덕돌은 소들을 하나하나 다가가 손바닥을 내밀어 소금을 먹였다. 다른 소들도 혹달개처럼 아주 맛있게 먹는 것이었다. 그런데 덕돌은 소에게 소금을 먹이다가 오줌이 마리어 괴춤을 내리고 쏴 갈겼다. 그런데 이게 뭐야? 혹달개는 그 오줌도 쩝쩝 받아 아주 맛있게 먹는 것이 아니겠는가? “오줌, 오줌, 오줌, 염, 염, 염.” 그 후부터 덕돌은 혹달개랑 옥수수 밭으로 달아나려고 하면 쫓아갈 필요없었다. “염, 염, 염.” 덕돌이 소리치면서 손바닥을 내밀기만 하면 옥수수 밭으로 달려가던 혹달개랑 소금을 먹으려고 덕돌한테로 뛰어왔다. 소금이 없을 때는 “오줌, 오줌, 오줌.” 하고 소리치면 소들은 귀 뻘죽해 멈춰 섰다가 이쪽으로 달려 왔다. 혹달개는 오줌도 쩝쩝 맛있게 먹는 것이었다. 진짜 우둔한 소들도 조건반사가 생겼다. 원시사회 기적이 아닌가! 소금을 몇 알만 얻어먹어도 혹달개랑 덕돌의 곁을 떠날줄 몰랐다. 그게 방법이었다. 덕돌은 혹달개랑 가파로운 패용천산에 소들을 올리 몰아놓고 꼭대기 쪽에 올라가 너럭바위에 핸들 들어 누워 목마른 사람이 물을 마시듯이 정규상에게서 가진 의학책을 걸탑스럽게 읽어보았다. 비록 재미로 볼 책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 농촌 구석을 벗어나려면 중초약책이라도 열심히 읽어야만 했다. 그 밖에도 그는 닥치는 대로경산 선생이 준 소설책도 보고 동화책도 보고 철봉 형님이 준 “문학창작의 길”이란 문예창작 이론책도 읽어보았다. 제일 재미나게 읽은 책은 그래도 고파의 “림해설원”이나 라관중의 “삼국연의”나 시내암의 “수호전”이었다. 무송이나 리규, 로지심과 같은 양산박의 호한들이나 류비, 관운장, 장비 같은 영웅들의 이야기에 끌려 덕돌은 소가 옥수수 밭으로 뛰어 들어간 것도 다 잊고 넋을 잃고 읽어 내려갔다. 혹시나 옥수수 밭으로 달려 들어간 소떼를 발견하면 산 중턱으로 달려 내려가면서 “염, 염, 염.” 하고 소리쳐 부르기만 하면 됐다. 소들이 옥수수 밭에서 뛰어나오는 것만 같으면 또 드러누워 책을 읽었다. 그는 지어 잘 된 구절은 목책에 적어놓고 암송하기도 했다. 그러나 조설근의 “홍루몽”이나 양말의 “청춘의 노래”, 조선 작가 리기영의 “고향”이나 “두만강” 같은 소설은 잔잔한 물 흐름과 같이 필치가 섬세한데다가 정감이 풍부해 읽는 재미가 달랐다. 점심이 되면 옥수수떡 둬개 꺼내 대충 요기하고는 소련 작가 고리끼의 자서전 그림책을 탐독했다. 고리끼의 “어린 시절”과 “인간수업”, “인간들 속에서” 등은 할머니 손에서 너무나도 고생스레 자란 고리끼 본인의 이야기를 너무나도 진실성이 강하게 펼쳐보였다.     때문에 덕돌로 하여금 어떤 때에는 고리끼의 비참한 운명에 눈물을 흘리게 했고 점차 사람이 사는 도리를 알게 했다.       어떤 때에는 소낙비가 쏟아지면 패용천산 군용 갱도 입귀에 들어가 계속 책을 읽었다. 소들은 풀을 먹다가도 소낙비를 피해 갱도에 들어간 덕돌을 따라와 갱도 어귀에 모여 서서 주인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해가 서산에 지기 시작하면 혹달개랑 벌써 배가 뿔룩하게 풀을 뜯어먹고 산꼭대기에 모여와 누워 새김질 하면서 덕돌이 책을 놓고 일어나 집으로 돌아가기를 기다렸다. 허나 덕돌이 집으로 돌아갈 염을 하지 않고 너럭바위에 누워 작중 이야기에 매료돼 “허허허” 하고 소리치며 호탕하게 웃기도 하고 무릎 팍을 때리기도 하며 야단쳤다. 그 모양을 보고 답답했는지 소들도 집으로 돌아가자고 덕돌의 곁으로 몰려왔다. 그래도 혹달개가 담이 있어서 스적스적 다가와 집에 가자고 누워 있는 덕돌의 얼굴에 대고 입김을 푸푸 내쉬며 냄새를 맡았다. 그래도 안 되면 대가리를 하늘 공중에 쳐들고 “음메-” “음메 헉!” 하고 산정이 떠나갈듯이 영각소리를 질렀다. 그제야 덕돌은 서산에 넘어간 해를 쳐다보며 일어나 소들을 몰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 후부터 덕돌은 황혼녘으로 해 소들이 벌써 몰려오면 갈 때 됐구나 하고 책을 호주머니에 질러 넣고 집으로 돌아왔다. 빌려온 책을 다 보고 없을 때에는 자기가 조립한 반도체 라디오를 틀어놓고 북조선과 남조선의 방송을 가만히 도적질해 들었다. 어쩐지 연변인민방송이나 중국 방송은 혁명적 본보기극에서 “둥, 둥, 당, 창” 하며 부르는 경극 노래 소리 밖에 나지 않아 듣기 싫었다. 조선 방송이나 한국 방송을 가만히 들으면 아주 귀맛이 당겼다. 당시 한국 방송이나 조선 방송을 들으면 정치문제에 걸리기가 십상이었다. 허나 덕돌은 그런 방송에 끌려들어가는 것을 어찌할 수 없었다. 부드럽고 경쾌한 노래 소리는 동질 민족의 미적감수가 같아 그런지 귀맛을 당겨 라디오 속의 가수들과 함께 흥얼흥얼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고중을 졸업하고 광활한 천지에서 소 궁둥이를 치게 된 덕돌에게는 책과 라디오방송이 큰 위안으로 됐다. 책을 읽고 방송을 듣노라면 모든 고독과 적막함, 실망, 고민이 흐리터분한 하늘로 날아가고 마음이 후련하고 온 몸에 힘이 솟구쳤다. 그러나 그런 좋은 날은 오래가지 못했다. 어느날 흥수는 덕돌의 집에 찾아와 반도체 라디오를 빼앗아냈다. 그는 보름을 높이 틀어놓았다. 반도체 라디오에서는 북조선의 노래 소리가 왕왕 울렸다. 샘물터에 물을 길러 동이 이고 나갔더니 빨래하던 군인동무 슬금슬금 돌아앉네 그 솜씨 너무나도 서툴러서 부끄러워도 말 했지요 내가 빨아줄게요 내가 빨아줄게요 “이게 뭐야? 북조선 노래 아니게?” 흥수는 박죽코를 벌름거리며 눈을 뚝 부릅뜨더니 금방 밥숟가락을 놓은 상순과 덕돌을 번갈아 보면서 왜가리 목을 빼들고 호통쳤다. “잘한다, 잘해! 패용천산에 날마다 올라가 외국 방송을 듣는다더구먼.” 흥수는 반도체 라디오를 쳐들어 보이면서 을러멨다. “이건 네가 조립했다면서? 어떻게 외국 방송을 듣기 싶으면 반도체까지 다 조립해? 몰수야, 몰수!” 상순도 할 말이 없어 덕돌을 욕했다. “뭐야? 소나 온전히 먹일 게지. 말썽을 일으켜?!” 덕돌은 그저 머리를 숙이고 묵묵히 앉아 있었다. “어서 치보 주임에게 잘 못했다고 하지 못하겠니?” “잘못했습니다." 그러나 흥수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반도체를 훌 들고 나가버렸다. 덕돌은 흥수를 쫓아나갔다. "반도체 라디오는 가져가지 맙소. 내 어떻게 점심을 굶으면서 부속품을 사다  조립한 게라고 그러오?” 허나 흥수는 귀등으로도 들은 척 만 척 하면서 휑 하니 가버렸다. “안 돼! 왈라카누(뭐 할려고 하나)? 가만 놔두든가 봐라!” 상순은 덕돌이 일을 칠까봐 뒤따라 나와 황급히 뛰어가 흥수의 손을 잡고 사정했다. “이 치보, 한번만 사정하기요. 덕돌이 잘못했는데 내 교육하겠으니까. 투쟁대회나 비판대회는 그만 두오.” “관둬! 당신 노서기라는 양반이 아들을 어떻게 교육했으면 적국의 방송까지 듣소? 남조선 방송을 누가 마음대로 들으라고 했어?” 흥수가 그렇게 비난사정해도 반도체 라디오를 들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자고 할 때었다. “서라!” 옆에 있던 덕돌이 로지심처럼 고함치며 웃통을 활 벗어버리며 뒤쫓아 갔다. 흥수가 우뢰 같은 고함소리에 깜짝 놀라 뒤돌아보니 덕돌이 세귀눈을 뚝 부릅뜨고 잡아먹을 상하고 덮쳐오는 것이었다. “이놈 새끼, 치보한테 대들 테냐?!” “반도체를 놔두고 가라!” “이놈 새끼, 버릇없이 누구보고 야, 자냐?” “반도체를 내려놓지 못하겠는가?!” 덕돌은 씽 덮쳐나가 반도체를 쥐여 당겼다. 흥수는 덕돌과 반도체를 잡고 밀고 닥치고 했다. 그 바람에 반도체 얇은 곽이 각이 툭 나갔다. 마사진 반도체를 보자 덕돌은 열이 후끈 올랐다. “내 반도체를 배상하오!” 덕돌은 흥수의 멱살을 쥐고 마구 흔들었다. 그날 일을 포치 받으려고 상순이네 집 앞으로 숱한 사원들이 몰려오면서 구경했다. 흥수도 자존심을 세우면서 고함쳤다. “네놈새끼, 감히 대대 혁명위원회 주임을 뜰 테냐? 대학에 영영 추천받을 거 같아?! 흥!” “못가도 좋소. 반도체를 내놓소!” 덕돌은 흥수를 톡톡히 망신주려고 바자굽에 마구 떠밀었다. “아이고, 뜨개 소 같은 놈, 두고 보자!” 흥수에게 버릇없이 구는 덕돌을 상순이 발길을 날려 궁둥이를 차 넘겼다. “이 새끼야, 네 어찌 아버지 벌 되는 분에게 몹쓸 버릇이야? 사람 질을 못할 놈 새끼, 뜨개소가 왕이 될 거 같아? 어찌 힘으로 세상을 쥐락펴락하려고 드니? 내일부터 소를 몰지 말고 대전 일을 해라! 곡식 실이나 해라!” 말을 마치자 상순은 흥수를 부축하면서 “어떠오? 모질 상하지 않았소. 함께 위생소로 가기요.”라고 했다. 흥수는 오만상을 찌푸리다가 외까풀 눈을 가슴츠레 뜨고 덕돌을 노려보며 지분거렸다. “이놈 새끼, 두고 보자. 네 놈 새끼 이 골 안에서 구더기처럼 썩어빠지지 않는가 봐라! 내일 투쟁대회를 하고 공사파출소에 잡아가겠어!” 허나 덕돌은 대수롭지 않게 두덜거리었다. “마음대로 하오. 누가 두려워 할 거 같소?” 그날로 흥수는 민병들인 성욱이랑 응철이랑 상선이랑 끌고 덕돌을 투쟁하겠다고 데리러 왔다. 그런데 희극적인 장면이 벌어졌다. 당장 죽는다 만다 하던 해월이가 소문 듣고 덕돌이네 집으로 달려와 앞을 막아 나섰던 것이다. “아버지! 그만 두십시오. 무슨 투쟁을 한다고 이래요?” 흥수는 해월을 밀어냈다. “뭘 삐쳐?” 그때 해월은 흥수 앞에 무릎을 꿇고 두 손을 싹싹 비볐다. “아버지, 제발 덕돌을 살려 주십시오. 덕돌은 내 첫사랑입니다. 내 뱃 속에는 덕돌의 애가 있습니다.” “뭐라고?” 흥수나 상순은 두 말할 것도 없고 덕돌은 그 뜻밖의 말에 눈이 동그래졌다. “야, 이건 무슨 생 똥 같은 말이냐? 난 너를 좋아한 적도 없어!” 그 말에 해월은 일어나면서 절절한 눈길로 덕돌을 쳐다보았다. “네 지난해 동삼에 우리 집에 오지 않았니? 그날부터 난 임신했어.” “뭐라고?” 덕돌은 어이없어 혀를 홰홰 내돌렸다. “생사람을 작작 잡아라! 병문안을 갔지? 언제 그랬니?” 허나 해월은 덕돌의 팔소매를 잡고 놓지 않았다. “생떼를 쓰지 말라! 넌 내 낭군임이야.” 해월은 흥수의 팔소매를 잡고 몸까지 흔들면서 떼를 썼다. “내 신랑감을 작작 투쟁하오. 그러잖으면 토성 아래 우물에 풀렁 뛰어들어 죽어버릴 거요. 덕성영감처럼! 알았지?” 흥수는 해월과 덕돌을 번갈아보더니 성욱이랑 돌아보면서 “너네 먼저 가. 내 먼저 알아봐야 할 게 있어.”라고 했다. 해월이 떠드는 바람에 흥수는 투쟁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동네 창피해 슬금슬금 자리를 떴다. 상순은 덕돌의 귀 쌈을 찰싹 갈겼다. “이놈 새끼, 어서 우사에 가서 수레를 메워가지고 옥수수실이나 해라!” 덕돌은 아무 말도 못하고 수레를 메우러 갔다. 그때 해월은 상순의 팔소매를 잡고 집안에 들어가 통사정을 들이댔다. “덕돌이 아버지, 내 이 집 며느리 하면 안 됩둥?” 상순은 해월의 불룩한 배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그래 배 속의 애는 정말 덕돌이 거냐?” 해월은 캐득캐득 웃어댔다. “아니. 난 장충국이한테 시집갔습니다. 그 늙은 영감이 그래도 노총각이어서 힘도 생각 밖으로 잘 쓰던데요.” 상순은 어이없어 정신이 나간 해월을 집에서 내쫓았다. “가라, 가. 왜 우리 덕돌을 물어먹니? 하긴 잘한다. 너 아비는 우리 덕돌을 투쟁하겠다고 떠들어대고. 딸은 배 속에 애를 만들었다고 생사람을 잡아먹고. 흥! 퉤!” 해월은 어처구니없는 말을 늘여놓으면서 바깥으로 밀려나갔다. “내 덕돌의 애를 가졌다고 말하지 않으면 우리 아빠 덕돌을 투쟁하지 않고 가만 놔둘 거 같았습둥?” 그제야 상순은 모든 것을 알았다. 해월은 충국에게 짓밟혀 확실히 정신이 나갔다. 허나 어떤 때에는 뜻밖의 어물 넙적한 소리를 했다. 좌우간 해월이 덕돌을 구하기도 해서 그리 밉지는 않았다. 한편 덕돌은 혹달개를 말뚝에서 풀어내 수레를 메워가지고 몰고 장개골 안으로 옥수수단을 실으러 갔다. 그런데 앞에서 송선이 수레를 몰고 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아주머니, 왜 돼지죽을 먹이지 않고 여기 왔습니까?” 송선은 주위를 뒤돌아보고 아무도 없는 것을 보자 “어쩌겠소? 이 치보가 나보고 돼지죽을 먹이는 일이 편안하다고 먹이지 말라는 거.” 하고 볼멘소리를 했다. 그녀는 머리를 또 돌려 물었다. “저는 어째 소를 몰지 않고 여기 왔소?” 덕돌은 어처구니없어 혀를 글끌 찼다. “아주머니나 내나 매한가집니다. 세상에 소몰이나 돼지치기를 좋아 할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들은 이말 저말 하면서 옥수수단을 수레에 싣고 바 줄로 꽁꽁 동여맸다. 그런데 아무래도 심상치 않았다. 금방 실었을 때는 괜찮았는데 어설프게 실은 옥수수단이 조금 덜렁 거리니 수레 위에서 옥수수단이 수레채 옆으로 여기저기 괴나오기 시작했다. “탈곡장까지만 견디면 되겠는데.” 덕돌이 꾀지는 수레 위 옥수수단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리었다. 뒤에서 수레를 몰며 따라오던 송선은 “그래도 제 덕분에 처음 수레에 옥수수를 다 실어보았소.”라고 웃고 떠들었다. 가파른 내리막으로 오자 혹달개는 겁을 집어 먹고 눈을 부릅뜨고 주춤거렸다. 그보다도 송선은 내리막을 보고 감히 수레를 몰 엄두를 내지 못했다. “아주머니, 여기 소고삐를 딱 쥐고 서 있으십시오. 내 다시 와서 함께 몰고 내려갑시다.” “양, 주의하오.” “예.” 덕돌은 소고삐를 바짝 틀어쥐어 당기며 수레 멍예를 팔꿈치로 꽉 눌렀다. “이라. 혹달개야, 천천히 내려가자. 염, 염, 염.” 혹달개는 자꾸 옆의 덕돌을 보며 소금을 주겠는가고 주둥이를 하 벌리고 침을 흘리며 천천히 내리막을 내려갔다. 덕돌이 “와, 와, 와.”하며 천천히 내리막을 용케도 내려갔다. 평소에 그래도 아버지를 따라 땔나무를 실으러 다녔던 건데 덕을 보았다. 그때까지 송선은 고삐를 쥐고 암소 대가리 털을 쓰다듬어 주면서 서있었다. 덕돌은 송선의 수레마저 몰고 천천히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암소여서 내리막을 받지 못해 마구 달려 내려갔다. “와, 와,” “염, 염, 와, 와, 와!” 덕돌이 아무리 소리쳐도 암소는 네 굽을 안고 아래로 달렸다. 송선이 뒤에서 아무리 가냘픈 손으로 수레를 뒤로 잡아당기며 끌려 내려갔지만 허사였다. “활 놓소. 위험하오.” 덕돌은 수레멍지를 부여안고 로지심 같은 힘으로 뒤로 뻗쳤지만 내리 달리기 시작한 수레를 막을 수 없었다. 굽인돌이에서 한쪽 수레바퀴가 빗물 곬에 빠지더니 수레가 허망 번져졌다. 다행히 덕돌과 송선은 상하지 않고 암소도 상하지 않았다. 소수레는 해뜩 번져 수레바퀴가 빙그르 돌아갔다. 덕돌과 송선은 둘 다 길 옆에 풀렁 엉덩방아를 찧었다. “이걸 어쩌오?” 송선은 울상이 돼 땅바닥을 쳤다. 그래도 스무 살 밖에 안 되는 덕돌이 사내느라고 위안했다. “괜찮습니다. 다시 실으면 됩니다.” 덕돌은 번진 수레에 다가가더니 웃통을 벗어버리는 것이었다. “어쩌자고 그러오?” 송선은 털이 부숭부숭 난 덕돌의 쩍 벌어진 가슴을 보고 놀래며 물었다. “근심 마십시오.” 덕돌은 가슴을 쭉 뻗고 산 공기를 한껏 심호흡을 하더니 수레바퀴를 쥐고 어깨를 들이댔다. “나도 밀라오? 어찌 혼자 세우겠소? 옥수수단을 부리고 세울까?” 옥수수단을 쥐는 송선을 보고 “저쪽으로 가 구경하십시오.”라고 했다. 그는 용처럼 꿈틀거리는 두 팔로 수레를 잡고 어깨로 들이대더니 “얏!” 하고 고함치며 떠밀었다. 옥수수단을 실은 수레가 움찔움찔 하더니 드디어 서서히 한쪽으로 번져지기 시작했다. 옆에서 두 손을 잡고 긴장하게 구경하던 송선은 경악하고 말았다. “아니, 힘이 어쩜 이리도 세오?” 산더미 같은 수레가 옥수수단이 마구 괴나오면서 되 번지어져 세워졌다. 덕돌은 얼굴이 지지벌개 씩씩거리며 욕지거리를 했다. “제길, 젖은 옥수수를 베서 실어들이라고 할 게 뭐야? 마른 담 실어들이면 사람이나 소나 다 쉽겠는데. 흥!” 덕돌은 수레를 되세워놓고 숨을 돌리지도 않고 옥수수를 수레에 실었다. 괴물 같은 덕돌의 힘에 밭으로 나가던 사원들의 눈이 떼꾼해졌다. “진짜 로지심이구먼.” “허참. 우둔한 게 범을 잡는다더니.” “우리 대대에 괴물이 생겼소. 쯧쯧.” 사원들은 혀를 내둘렀다. 송선과 덕돌은 암소가 끌지 못할 까봐 옥수수단을 채 싣지 않고 혹달개가 끄는 수레에 더 싣고 탈곡장으로 몰고 떠나갔다. 덕돌과 송선은 그 다음번에는 수레에 옥수수단을 서너 단 적게 싣고 내리막을 내려왔다. 그것도 덕돌이 먼저 자기 수레를 몰고 내려온 후 혹달개를 풀어 몰고 올라가 송선의 수레에 다시 메워 몰고 내려왔다. 그러다나니 일축이 별로 나지 않았다. 말을 들을까봐 송선도 덕돌이 모는 요령을 보고 차차 앞에서 수레를 몰기 시작하고 뒤에서 덕돌이 수레꽁지를 쥐어 당기면서 가파른 내리막을 내려왔다. 기실 흥수는 송선을 징벌하기 위해, 상순은 덕돌을 혼내려고 고의적으로 옥수수 싣기를 시켰던 것이다. 그날 저녁에 흥수는 이쯤하면 송선이 혼났으리라고 속구구를 하면서 송선 네 집으로 기신기신 기어들었다. “왜 왔어요? 어서 나가세요.” 송선은 치뜬 눈으로 박죽코마저 지지벌개진 흥수를 쏘아보았다. “애들은 어데 갔소?” “시내에 책을 사러 갔다가 오지 않았어요. 이제 인차 올 거예요.” 흥수는 애들이 없는 눈치이자 신을 벗고 구들에 올라섰다. “헤헤. 어떻소. 옥수수 싣기를 하자니 힘들지? 헤헤헤.” “…” “뭐랬어? 내 말을 고분고분 듣고 위생소에 들어앉아 있었더라면 얼마나 편안했겠어? 에참, 권주는 안 마시고 벌주를 마시다니. 호박 쓰고 돼지 굴에 들어갈거노(거나)?” 흥수는 머리 숙이고 뒤로 비실비실 물러서는 송선을 밀어 붙이면서 벽 밑에까지 다가섰다. “그래도 목욕받기만 낫습니다.” 흥수는 흘겨보는 송선의 예쁜 모습을 보고 끓어오르는 정욕으로 온 몸이 전율할 지경이었다. 가시 돋힌 장미꽃 같은 미녀의 모습은 희미한 전등불 아래 이름 못할 정욕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주먹으로 지지벌개진 박죽코를 쓱 닦으며 다가섰다. “이제라도 늦지 않았어. 내 말 고분고분 들어.” 흥수가 와락 끌어안으려는 순간 송선이 찰싹 귀 쌈을 갈겼다. “짐승 같은 놈아, 네가 다 당원이고 치보 주임이냐? 짐승 보다 못한 놈 새끼! 사람을 어떻게 보고 이 지랄이야? 미친 놈아!” 흥수는 창피를 당하고 주춤 물러섰다. 이윽고 방바닥에 내려가 신을 신으면서 중얼거렸다. “어디 두고 보자. 언제까지 뻗대는가? 네년이 죽어 물귀신이 돼도 이 골 안을 벗어나는가 두고 보랑께(보라는데)? 흥!” 허나 그의 등 뒤에서는 “퉤!” 하고 침을 뱉는 소리가 들릴 뿐이었다. 흥수가 송선의 집에서 맥없이 씩씩거리며 나와 울안을 나설 때었다. 집 안에서 매서운 소리가 귀전을 귀찮게 때렸다. “개 같은 놈, 나를 어떻게 보고, 미친 놈, 윤희를 짓밟고서도 모자라 나를 지껄여? 어림도 없어!” 저쪽에서 송선의 두 딸애가 공책이랑 사들고 돌아오는 것이 보였다. 흥수는 닭을 뒤쫓다가 지붕을 쳐다보는 개 격이 돼 툴툴거리며 어떻게 송선에게 보복할 것인가를 궁리하며 함흥촌으로 돌아갔다. 어둠이 무시무시하게 깔린 한족묘지꺼리에서는 마른 쑥대들이 을씨년스럽게 가을바람에 술렁거리고 있었다. 언제면 암흑한 이 세월이 끝날까?         저자 주: 지금까지 김장혁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총7권)의 제6권까지 감상한 여러분께 경의를 드립니다.      이제부터 계속해 제7권을 련재해드리겠습니다. 저의 홍색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의 향연을 계속 만끽할 것을 기대합니다.            김장혁 작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 (제7권)           제29장 천지개벽                            1. 파란만장한 인생길       깜깜한 밤하늘에 은하수가 비끼고 삼태성이 반짝이었다. 아기별들이 초봄의 밤바람에 스치어 숯불처럼 점점 밝아지며 반짝이었다. 지지리 먹장구름으로 뒤덮인 채 흐리터분하던 밤하늘에 어쩌다가 구름이 하나하나 가시어지고 별들이 하나 둘 드러났다. 허나 별빛으로 몇 천 킬로미터 두께로 두꺼운 어둠이 깔린 밤하늘을 밝히기는 어림도 없었다. 허나 끝내 먼동이 푸름 해지기 시작했다. 어둠층이 기적적으로 점차 연해지었다. 푸름 해지는 동녘의 하늘과 구불구불한 코끼리 잔등 같은 산정의 윤곽이 그림처럼 명암이 분명해지면서 진면모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대지의 삼라만상이 암흑 속에서 기지개를 켜더니 푸름 해지는 하늘아래 삼라만상을 하나하나 드러내려고 모질음을 썼다.       “꼬끼오~오~”        어디선가 새벽을 알리는 수탉의 울음소리가 거세찬 계급투쟁의 정치파도가 휩쓸고 지나가 피곤한 나머지 잠시 고요히 잠들어버린 함흥대대 마을의 적막을 깨뜨렸다.       동녘하늘이 각일각 환해지더니 노르스름한 구름들이 점점 붉어지었다. 소나무가 우거진 계수동의 구불구불한 능선 위로 붉은 태양이 불끈 솟아오르면서 금빛 몇 가닥을 뿌렸다. 새날이 밝아오기 시작하는 시각이었다.        지지리 숨 막힐듯이 대지의 만물을 내리누르던 암흑의 장막이 기적적으로 훌렁 걷히었다. 아직도 잔설이 듬성듬성 뒤덮인 소소리 높고 가파른 절벽으로 장식된 패용천산과 칼산이 름름한 원 모습을 되 찾아가고 패용천산과 칼산 사이의 돌 언제를 쌓은 다락밭과 과수원, 양봉장과 인삼 장, 그리고 조개덕의 벽돌공장과 함흥촌의 토성 안의 고래 등 같은 대대 새 청사가 한눈에 안겨왔다. 조개덕과 함흥촌, 계수동의 게딱지처럼 거무칙칙하고 올망졸망한 초가집 무리 속에 들어앉은 붉은 벽돌집이 쌀의 티처럼 드문드문 드러났다. 그 벽돌집은 상순이가 사원들을 조직해 벽돌공장을 지은 후 새 농촌을 건설하면서 한 해 동안에 가난한 사원들에게 지어준 벽돌집들이었다.      겨우내 꽁꽁 석자두께로 얼었던 태평강의 얼음도 뜨드득 갈라지고 녹으면서 얼음덩이 사이에서 봄날의 이른 아침을 알리는 봄 강물이 조잘조잘 노래하며 꽃구름송이들을 싣고 동으로 유유히 흘러갔다.       여기저기 굴뚝에서 밥을 짓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면서 시골 마을은 활기를 찾기 시작했다.       덕돌은 아침밥술을 놓기 바쁘게 멜대를 메고 가슴을 쭉 뻗치고 태평강 가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어디 허 대장이 얼마나 힘이 세기에 나를 헐뜯는가 보자. 뭐 나를 뼈대를 아껴서 일을 건성건성 한다고? 제기랄 당신 뼈대는 어느 만한가 두고 보자.” 그는 윽윽 벼르면서 태평강 언제를 쌓는 공지로 나갔다. 사실 덕돌은 지난해 초가을까지 소몰이를 하면서 책을 보거나 라디오를 듣다나니 소가 옥수수를 먹였다는 이유로 상순에게 한바탕 욕을 먹고 대전 일을 하기 시작했다. 덕돌은 아버지와 허 동원이 시키는대로 수걱수걱 농사일을 했다. 가을에 소수레로 벼를 탈곡장에 실어들이었다. 벼실이 끝나자 탈곡장에 가서 벼단을 메 탈곡기 옆에 가져가고 탈곡기에서 튕겨 나온 짚단을 메고 짚무지를 쌓는데 날라 갔다. 그는 힘이 셌기에 단번에 32 단씩 날랐다. 벼 짚단은 괜찮은데 벼 알이 늘어지게 달린 벼 짚단을 손아귀에 더 쥘 자리 없을 정도로 틀어쥐어 둘러메고 씨엉씨엉 날랐다. 아무도 한두 번은 그렇게 할 수 있었다. 허나 온 종일, 아니, 날마다 그렇게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여 벼단을 나르는 일을 성욱과 덕돌이 둘이 하던 것을 덕돌이 혼자 날랐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이 나르던 벼 짚마저 혼자 달아 다니면서 날랐다. 그런데도 “대채평공”을 할 때에는 갓 고중을 졸업하고 나온 풋내기농민이라고 공은 적게 매겨주었다. 이른바 “대채평공”을 할 때면 매개 사원들이 일 한 것을 하나하나 사원대회에서 토론해서 공을 기입하는 형식이었다. 사원들은 그 공에 따라 년 말 총화 때 돈을 타게 됐기에 공수이자 돈이었다. 덕돌은 입술이 따발을 걸 지경이 됐다. “허 대장, 둘이 하던 일을 했는데 왜서 다른 사람들보다 공을 더 적게 줍니까?” 허 대장은 덕돌의 말을 들었는지 말았는지 거들떠도 보지 않고 “그 다음 사람을 평합시다.”라고 했다. 덕돌은 벌떡 일어나 허동원 대장을 쏘아보며 “어째 사람의 말이 들리지 않습니까? 내걸 다시 평해줍소. 내 뼈 빠지게 둘의 몫을 일했는데 어째 남보다도 공을 적게 줍니까?”라고 직격탄을 날리었다. 그러자 허동원은 쌍까풀눈을 부릅뜨고 “넌 풋내기다. 뼈대를 아껴서 건성건성 일해 가지고 공을 더 타겠다고?”라고 맞불질 했다. 자존심이 작두날처럼 시퍼런 덕돌이 가만있을 리 없었다. “뭐랍니까? 아무리 풋내기라도 그렇지. 내가 언제 뼈대를 아꼈습니까? 여기 숱한 사원들이 보지 않았습니까?” 사원들은 모두 “덕돌이 힘이야 세지.”라고 하는가 하면 “일이야 많이 했지.”라고 했다. 그 바람에 허동원은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야, 빈농들의 재교육을 잘 받으려면 공수를 따지지 말고 힘든 일, 궂은일을 다 해야 한다. 일은 많이 하고 말은 적게 해라. 넌 힘은 셌지만 일을 한 게 질이 차하다, 차해. 지난해 가을에 옥수수를 실어들일 때 송선의 수레를 몰다가 희뜩 번져 하마터면 암소를 죽일 번 하지 않았니? 너를 팔아도 그 암소 한 마리를 사지 못한다.” 그 말에 덕돌은 억이 막혀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상순은 덕돌을 쏘아보며 욕했다. “이놈 새끼, 힘만 세면 왕이 되겠니? 허 대장 말이 옳다. 넌 힘은 세지만 아직 농사일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 잔말 말고 농사일이나 잘 배워라.” 그제야 덕돌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때 둘째누나 은숙마저 덕돌을 나무랐다. “그게 무슨 태도냐? 넌 확실히 건성건성 일하는 게 보인다. 허 대장이 공수를 얼마 주면 얼마 가질 것이지. 무슨 말이 그렇게 많니?” (남이 말해도 모르겠는데 자기 누나까지 그렇게 말하다니?) 덕돌은 어이없어 더 말이 나가지 않았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코 등으로 저도 몰래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리었다. 그는 뜨거운 눈물을 손등을 씻으면서 회의실문을 박차고 바깥으로 나와 버렸다. “허 대장, 어디 두고 봅시다. 당신 아들 허춘이 이제 농촌에 돌아와도 그렇게 말하겠습니까? 뭐? 뼈대를 아껴 건성건성 일했다고? 원, 사람이 억울해서 어떻게 살아?” 덕돌은 허대장의 아들 허춘과 앞뒤 집에서 사는 딱 친구였다. 그는 두 살 지하인 허춘을 친동생처럼 아끼고 역성을 들어주었다. 한번은 덕돌이 낮잠을 자는데 계수동의 애에게 얻어맞고 허춘이 찾아왔다. “형님, 계수동의 호일과 붙었는데 맞았소. 형님, 한번 혼내주오.” “뭐라고? 누가 감히 동생을 건드려?” 덕돌은 벌떡 일어났다. “가서 그 놈 새끼를 꼬여 저기 태평강 가에 데리고 오너라. ” 덕돌은 그림자차럼 붙어 다니던 동생 허춘을 때렸다는 말에 승치 해주려고 나섰던 것이다. 덕돌은 함께 나가다가 주춤 멈춰서 머리를 숙이고 뭔가 궁리하더니 “너 먼저 가라. 내 목욕하는 척 하면서 기다렸다가 갈게. 그 새끼를 데리고 태평강 가에 가서 붙어 싸우는 척해라. 내 뒤 따라 가서 그 놈 새끼를 없애치우겠다.” 형에게서 힘을 얻은 허춘은 주먹을 으스러지게 쥐고 씩씨거리며 마을 서남쪽에 있는 태평강 언제를 가로 막아서 호일이 5.7(함흥)중학교로 오기를 기다렸다. 덕돌은 뒤에서 스적스적 태평강에 가서 목욕하는 척 하면서 언제 쪽을 노려보았다. 이윽고 오후 한시가 가까올 때 저쪽에서 허춘이 호일을 꾀여 이쪽으로 오는 것이 보였다. 그들이 강둑 위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지나갈 때에도 덕돌은 속으로 어디 혼 나봐라 하면서도 능청스레 손으로 강물을 퍼서 털이 부숭부숭 난 가슴에 끼얹으면서 못 본척했다. 그들이 떠나간 지 반분도 안 돼 덕돌은 대돌 물에서 부랴부랴 나가 옷을 주섬주섬 주어 입으면서 호일의 뒤통수를 노려보았다. 덕돌이 뒤따라 가보니 허춘은 호일과 맞붙어 싸우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뚱뚱한 허춘은 호일을 몰아세우며 드센 공격을 퍼부었다. 허나 호일의 몸놀림이 어찌나 날랜지 허춘은 점점 이리저리 몸을 피하다가도 반격을 가했다. 호일은 공격을 들이대다가도 날래게 피하고 피하다가도 주먹질에 발길질까지 해댔다. 허춘은 힘이 세고 주먹질도 잘 했지만 몸놀림이 호일을 따르지 못해 얻어맞기 시작했다. 자칫하면 허춘이 얻어맞아 쓰러질 수도 있었다. 덕돌은 황급히 나가면서 고함부터 쳤다. “야, 누구 앞에서 감히 주먹질이냐?” 호일은 사자와도 같이 노호하는 덕돌을 보더니 주춤 멈춰서며 주먹을 내리웠다. “형님…” 어느 결에 덕돌은 주먹을 날려 호일의 턱주가리를 턱 쳤다. “엇!” 덕돌은 호일의 멱살을 틀어쥐더니 헤딩을 연속 들이댔다. 한번 헤딩에 호일은 얼이 빠지고 두 번째 헤딩에 호일은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헌데 이게 뭐야? 호일은 쓰러져 눈알이 뒤로 마구 뒤집히더니 숨도 바로 쉬지 못했다. 깜짝 놀란 덕돌은 “허춘아, 모자에 물을 담아도 쳐라!” 하고 소리쳤다. 저쪽에서 구경하던 양훈과 득만도 달려와 모자에 호일의 얼굴에 물을 쳤지만 정신을 차리지 모하는 것이었다. 덕돌은 살인이라도 내지 않았는가 겁을 집어먹었다. 그는 황급히 허춘을 보고 “야, 네가 호일을 업어 너네 집에 가져다 머리에 장이랑 붙여주고 간장물이라도 타서 먹여라!” 라고 했다. 두 살 지하인 허춘도 겁을 집어먹고 덕돌이 시킨 대로 했다. 허춘이 호일을 업고 떠나가자 덕돌은 과수원으로 가는 척 하다가 아무도 따라오지 않자 부랴부랴 패용천산 쪽으로 도망쳤다. (만약 호일이 죽으면 어쩌지? 파출소에 가서 자수할까? 아니야, 자수해도 총살을 면치 못할 거야. 그럼 어떡하지?) 순간 피뜩 장씨 모녀간을 업신여긴 부랑배를 혼줄 내주려다가 때려죽인 로지심이 핍박에 의해 양산박에 오른 일이 피뜩 떠올랐다. (개새끼들, 만약 살인죄를 쓰게 되면 도망쳐버리자. 교하로 달아날까? 그래 믿을 게 교하 큰누나와 셋째누나 밖에 있니?) 허나 덕돌은 인차 생각을 바꿨다. (안 돼, 누나한테 연루되게 해선 안 된다. 그럼 어디로 달아나? 그는 겹겹이 늘어선 산 등성이들을 둘러보았다. 장백산 원시림에 숨어 원숭이처럼 살더라도 살아야 한다. 우리 집에는 내가 외동아들인데 내가 죽으면 아버지와 어머니는 어쩌겠니?) 덕돌은 이쯤 마음을 먹자 손에 쇠붙이 하나 없는데 생각이 미쳤다. (그래 강도질을 하면서 살자 해도 비수가 있어야지.) 덕돌은 패용천산 벼랑 위에 납작 엎드려 한 1리 떨어진 자기 뒤 집 허춘이네 집의 동정을 살폈다. “제발 호일이가 잘못되지 말아야겠는데.” 덕돌은 손에 땀을 그러쥐고 엎디어 중얼거리며 속을 바질바질 태웠다. 허나 두식경이나 눈 뿌리 빠지게 동정을 살폈지만 허춘이네 집에서는 나왔다 들어갔다 하는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웬 일일까? 혹시 호일이 죽었을까? 아니면 기적적으로 살아났을까?) 덕돌은 그제야 너무 세게 헤딩한 것을 후회했다. 허나 친형제나 다름없는 허춘의 역성을 들어 싸운 건 하나도 후회하지 않았다. “수호전”을 읽으면서 무송이나 로지심, 이규를 비롯한 양산박 호한들이 의리를 위해 재물을 아끼지 않고 목숨까지 바쳐 싸운 이야기를 많이 본 후 인생의 좌우명을 새롭게 정한 그였다. 덕돌은 슬금슬금 산에서 내려 옥수수 밭과 수수 밭을 꿰질러 가 허춘 네 집 구새 목에까지 접근해가 집안의 동정을 살폈다. (그런데 이게 뭐야?) 윗방에서 호일의 목소리가 들리었다. “허춘아, 너 어찌 이럴 수 있니? 나하고 싸워 안 되니 어쩜 도깨비 같은 덕돌을 불러다 나를 치니?” (살았구나. 호일이 죽지 않았구나.) 덕돌은 기뻤다. 순간 먹었던 모진 마음의 탕개가 풀리면서 구새 목에 스르르 물앉았다. 이윽고 덕돌은 구새 목에서 뒤로 슬금슬금 물러섰다. 그는 허춘 네 집 서쪽에서 술렁대는 수수 밭으로 슬금슬금 숨어들었다. “뻐꾹, 뻐꾹, 뻑뻑꾹.” 허춘과 늘 써온 호출암호를 보냈다. 이윽고 허춘이 부랴부랴 수수 밭으로 들어와 두리번거렸다. 덕돌은 “여기 있다. 여기!” 하고 소리치며 손을 저었다. 허춘은  달아 왔다. “형님, 아무 일도 없소.” 덕돌은 허춘의 두 손을 맞잡고 사위를 둘러 보고나서 나직이 물었다. “그래 언제 정신을 차렸니?” 허춘은 “우리 집에 업어온 후 우리 엄마하고 내 형님 말처럼 된장도 머리에 붙여주고 간장 물도 타서 먹였소. 그랬더니 한참 있다가 정신을 차리지 않겠소. 이젠 일없소. 근심하지 마오.”라고 했다. 덕돌은 그래도 혹시나 해 수수밭에 숨어 있으면서 동정을 살피다가 호일이 흰 천을 머리에 감은 채 허춘 네 집에서 나가는 것을 보고서야 안도의 숨을 쉬었다. 허나 사달이 났다. 저녁에 호일이네 엄마가 덕돌의 집에 찾아와 구들바닥을 치면서 자기 아들을 때려 눕혔는데 치료비를 내라고 야단쳤다. “치료비를 내지 않으면 놔두는가 보자! 집을 팔아서라도 내라.” 덕돌은 “내 잘못했소. 치료비를 내겠소.”라고 했다. 그러자 호일의 엄마는 “집을 팔아서 내라.”라고 했다. “한 백원 내면 안 됩니까?”라고 했다. “어림도 없다. 이 집을 팔면 한 5백원 받겠지. 5백원을 내라.” “무슨 치료가 그렇게 비싸답니까?” 호일이 엄마가 한바탕 야단치고 가자 상순은 덕돌의 귀 쌈을 찰싹 갈겼다. “이 뜨개쇠처럼 우둔한 놈 새끼야. 사람을 어떻게 떴으면 정신을 잃게 만들었니? 네놈 새끼 혼자 벌어서 치료비를 내라.” 덕돌은 얼얼한 뺨을 매만지면서 할 말이 없어 바깥으로 나가버렸다. 호일의 엄마가 그러는 건 이해됐다. 자기 아들이 맞아 정신까지 잃었으니까. 허나 덕돌은 허춘의 엄마의 배신행실은 용서할 수 없었다. 그녀는 호일이네가 치료비를 내라고 하자 온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이런 여론을 조성했던 것이다. “우리 허춘은 싸울줄 모르오. 호일에게 맞으면 맞았지 그렇게 정신 잃게 때릴 애가 아니오. 다 덕돌이 뜨개쇠처럼 떠서 정신 잃었다니까. 우리 집에서 무슨 치료비를 물겠소.” 빚을 진 놈은 살려줘도 정을 버린 놈은 살려 줄 수 없었다. 덕돌은 배신감을 느끼며 다시는 의리심도 양심도 없는 허춘의 어머니와 같은 집 아들의 역성을 들지 않으리라고 마음먹었다. 덕돌은 허춘을 도와주고 혼자 치료비를 껴안게 됐다. 그리하여 첫해에 농촌에 돌아와 농사일을 해 번 돈 125원을 손목시계를 사자던 돈을 주기로 했다. 하여 시내 공안국에서 일하는 5촌 이모부 강운룡이네 집에 가져다 맡긴 걸 찾아와 배상하지 않으면 안됐다. 덕돌은 손목시계를 사자던 돈을 찾으러 이모네 집으로 갔다. 작은 호수 옆으로 해 고급관원들의 집이 즐비하게 늘어섰고 그 옆으로 해 공안국 형사과에서 일하는 강운룡의 집이 있었다. 강운룡은 원래 형사과의 수사 일군으로 있다가 반란 파 두목 김용만이 공안국 국장으로 온 후 피해를 입어 교통과에 전근해 교통민경으로 일했다. 허나 시내에서 형사사건이 너무 많이 발생해 황종연과 같은 형사수사에 까막눈인 파출소 소장이나 믿고서는 사건을 해명할 수 없었던 것이다. 김용만은 별 수 없어 실무파 수사능수 강운룡을 형사과 과장으로 임명하지 않으면 안됐다. 덕돌이 집 문을 떼고 들어서자 열대여섯 살 되는 향화와 열서너 살 되는 강철이가 반갑게 맞아주었다. “오빠-” “형님이 왔구나.” 덕돌은 동생네를 한 아름에 꽉 껴안고 기뻐 싱글벙글 웃었다. 번마다 반도체라디오 부속품을 사러 시내에 올 때마다 그는 애들과 한바탕 뛰놀아 꽤나 정이 붙었던 것이다. 이모 최순옥은 덕돌이 손목시계를 사자던 돈을 불시에 찾아가려고 하자 이상해 했다. “집에 무슨 일이 생겼니?” 이모 최순옥은 점심상을 차려 덕돌을 극진히 대하면서 “불시에 이 돈을 찾아 뭘 하겠니?” 하고 물으며 쌍까풀눈에 이상한 눈빛이 반짝였다. “내가 일을 쳤습니다.” 덕돌은 머리를 숙이며 점심 숟가락을 들었다. 그에게서 사건의 자초지종을 다 들은 강운룡은 술잔을 들어 덕돌에게 권했다. “쳇, 근심하지 말라. 사내들이란 싸울 때도 있지 뭐. 그래도 나는 공안국 국장을 한 적이 있는 너네 아버지와 말이 통한다. 이전에 내가 약혼해서 너 이모를 데리고 너 네 집에 놀러 갔다. 초가집에 죽물도 겨우 마시면서도 네 엄마와 아버지는 나를 하나라도 더 대접하려고 맴돌던 모습이 지금도 눈앞에 선하다. 너도 아마 아버지를 닮은 모양이구나. 꽤나 힘도 쓰는 모양이지?”라고 했다. 그러나 순옥 이모는 “남을 때려 치료비를 물어야 되는데 싸우라고 부추기오? 쯧쯧쯧.”라고 남편한테 눈을 흘기었다. 그러자 강운룡은 “치료비는 무슨 치료비 그렇게 많이 든다니? 달라는 대로 다 줄 필요 없다. 세상에 법도 없다니?”하고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순옥 이모는 “그래도 남을 정신 잃게 때렸으니 얼마간이라도 줘야 입을 막지. 괜히 부스럼을 긁어서 혹을 만들지 말라.”고 했다. 강운룡은 “물론 치안 죄를 물으면 15일 구류될 수도 있다. 심중히 고려하는 건 옳은 거 같다. 영양이나 보충하라고 한 20원 주면 될 거 같다. 만약 무슨 일이 있으면 내게 알려라. 파출소에서도 마음대로 치료비를 안기지 못한다.” 덕돌은 이모부의 말에 힘을 입어 치료비로 20원만 찾고 100원을 주고 상해표 손목시계를 사 차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 다음번에 호일의 어머니가 와서 야단치자 치료비로 20원을 주었다. “호일을 때려놔서 잘 못했습니다. 미안합니다.” 호일의 엄마가 5원짜리 돈 넉 장을 쥐어뿌리며 야단쳤다. “우리 귀한 아들을 때려 정신을 잃게 하고서도 요거 밖에 안 주고 어디 보자. 내 너를 망치로 쳐서 정신 잃게 하고 돈 20원을 줄게.” “아무 소리나 하지 말고 줄 때 가지고 순순히 가시오. 뭐나 법이 있지 달라는 대로 다 줄 거 같습니까?” 덕돌은 돈 넉 장을 주어 호일의 어머니 호주머니에 넣어 주면서 희죽이 웃었다. “누가 웃자니? 누굴 얼리려고?” 그러면서도 호일의 엄마는 매 값을 빼서 던지지는 않았다. 덕돌은 아무 일도 없은 듯이 바깥으로 나가버렸다. 잔등에서 호일의 엄마 욕설이 들렸다. 허나 단돈 20원 받아서인지 욕하는 소리가 이전보다 낮아진 감이 들었다. (저래서 배속의 애도 돈을 보면 손을 내민다고 하는 모양이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호일은 황승연의 6촌 동생이었던 것이다. 황승연은 뒤에서 학교 혁명위원회 명의와 대대 혁명위원회 명의로 덕돌을 치안 죄로 파출소에 고소했고 생산대에서 민병들을 동원해 투쟁하라고 지시했다. 공사 혁명위원회 주임 겸 파출소 소장으로 있는 황종연은 민경들을 파견해 덕돌을 잡아다 구류소에 치안구류하려고 들었다. 눈치 챈 덕돌은 아무에게도 온다간다는 말도 없이 마을에서 사라져버렸다. 황급해난 상순은 공안국의 사촌동서 강운룡과 부국장 김창남한테 가서 자초지종을 말하고 한번만 용서해달라고 통사정을 들이댔다. 그 덕에 파출소에서 감히 덕돌을 잡자고 날뛰지 못했다. 생산 대에서도 처음에는 집체호 애들이 비판하려다가 정치대장에 노지부 서기인 상순의 얼굴을 봐서 그만두게 됐던 것이다. 이전에도 상순은 상지민과 수호 그리고 억울하게 위안부, “기생”, “반역자”로 억울하게 몰린 마반산집 뽕녀 할머니 등을 감옥에서 꺼낸 적이 있었다… (제 아들이 맞는다고 역성을 들어 줬는데 배은망덕한 허 대장은 대채평공 할 때 날 공수를 적게 줘? 뭐 뼈대를 아껴 건성건성 일한다고? 어디 네놈의 뼈다귀는 얼마나 든든한가 보자.) 덕돌은 멜대를 메고 태평강 가에 가자마자 어느 돌을 함께 메면 허동원 대장을 혼내겠는가 둘러보았다. 그때 떡돌 같은 너럭바위돌이 눈에 피뜩 띠었다. (그렇지, 저걸 메자.) 덕돌이 이를 갈며 별렀지만 허동원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대장이노라고 우쭐거려?” (지난겨울에 둼을 끌 때도 그렇지. 내가 얻어놓은 남포로 둼 무지를 폭파해 껐는데. 뭘 뼈대를 아껴서 남포질을 했다고? 내 말이 틀린 게 뭔가? 둼이 꽝꽝 언 겨울에 둼을 끄지 말고 봄에 녹으면 수레에 실어내가면 얼마나 쉬운가? 온 동삼 할 일이 없어 언 둼을 끈단 말인가? 공수나 올렸지. 그 말을 했다고 나를 보고 뭐, 개뿔도 모르면서 뭐나 아는 척 한다고?) 덕돌은 생각할수록 밸이 났다. (내가 둼을 끄다가 쉼 시간에 책을 본 게 또 무슨 잘못이 있단 말인가? 뭐 일하기 싫어한다지? 또 농촌에 뿌리박고 빈농들의 재교육을 착실히 받으려 하지 않고 농촌을 벗어날 궁리만 한다고? 그럼 어떻단 말인가? 남보다 두 배씩이나 둼을 껐는데 무슨 할 말이 있단 말인가? 쳇, 쓸데없는 일을 온 동삼 하기보다 어떤가? 대채전이고 뭐고 하면서 평평한 논밭을 온 동삼 꺼서 쓸데없는 홈채기를 만들어 다락 밭으로 만드는 멍청이들 같으니. 정말 웃긴다. 대대 혁명위원회 흥수 영감의 말이면 다 꾸벅꾸벅 듣는 멍청이 같은 게. 꺼 놓은 언 논두렁 토막도 남들이 하날 멜 때 난 네 개씩이나 멨어. 그래도 내가 뼈대를 아낀다고? ‘4인무리’를 짓 부신 지도 반년이 다 돼가건만 아직도 문화대혁명의 여독이 있단 말인가? 이 치보와 짜고 들어 송선 아줌마를 아직도 투쟁하면서 여자 몸으로 떡함지 같은 돌을 메라고? 힘이 세면 오늘 나와 함께 메 보잔 말이오.) 덕돌은 사실 보름 전에 송선 아줌마 멜대를 빼앗아 쥐고 대신 메겠다고 나섰던 것이다. 이때 저쪽에서 허동원 생산대장이랑 정치대장 상순이랑 송선 아줌마랑 하나 둘 태평강으로 나오고 있었다. 허동원 대장은 오자마자 덕돌을 보고 “오라, 돌을 계속 메자.”라고 했다. 허동원도 덕돌의 기를 꺾어놓지 않으면 생산대에서 기를 펴지 못할 것을 알았던 것이다. 헌데 연 며칠 돌을 메 날랐는데 덕돌은 밤만 자고 나면 맥이 나는지 끄떡하지도 않았다. 허나 허 대장의 얼굴은 점점 부어오르고 눈에는 피가 가득 지기 시작했다. 허동원이 쇠줄그물을 쥐고 다가오자 덕돌은 멜대와 쇠줄그물을 들고 제일 큰 떡함지 같은 바위 돌 앞으로 갔다. 허동원은 200 키로는 실히 될 바위 돌을 보자 뒤로 주춤 물러섰다. 상순은 덕돌의 속심을 빤히 꿰뚫어보고 말리었다. “야, 그 큰 돌을 어떻게 가파른 발판으로 저 높은 언제 위로 나른다고 그러니? 그 돌로 언제 기초를 쌓으면 된다. 이쪽에 숱한 돌을 두고 하필이면 그 돌이냐?” 송선도 저쪽에서 땀을 그러쥐고 긴장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저 큰 돌을 어떻게 멘다고?) 그러나 허동원도 자존심을 꺾을 수 없었다. “괜찮소. 언제를 든든하게 쌓자면 이런 큰 돌을 날라다 쌓아야 하오.” 허동원이 쇠줄그물을 그 바위 돌에 들이댔다. 그러자 덕돌은 그 큰 바위 돌 한쪽을 혼자 움쭉 들어 굴려 쇠줄그물 위에 담았다. “야, 로지심이요.” 덕돌이 멜대를 메면서 볼라니 허동원의 얼굴이 퉁퉁 붓기고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런데 바위 돌을 담은 끈을 슬쩍 덕돌이 쪽으로 밀어놓는 것이었다. 허나 그까지 것 영상해 못 본 척하고 덕돌은 어깨를 안쪽으로 들이대고 떠멨다. 허동원도 젊어서는 꽤나 힘을 쓰는 뚱보여서 힘겨운 대로 멜대를 떠멨다. 그 큰 바위돌이 움쭉 들리었다. 숱한 사원들이 모두 그들 둘이 푹푹 빠지는 모래를 밟으면서 언제로 걸어 나가는 것을 구경했다. 덕돌은 넓은 가슴을 내밀고 허리를 쭉 펴고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허나 허동원은 점점 허리를 굽히면서 비틀거리더니 숨소리마저 힘겨워져갔다. 가파른 언제에 놓은 발판을 밟고 올라서자 허동원은 허리를 펴지도 못하고 한발자국을 겨우 내딛였다. 허나 덕돌은 평지 걷듯이 한발, 두발 가볍게 떼였다. 꽈당! 요란한 소리와 함께 미처 따라 걷지 못한 허동원은 비틀거리다가 발판 아래로 뚝 떨어졌다. 덕돌도 발판 아래로 떨어졌다. 허동원이 떨어지는 바람에 무거운 바위돌이 평형을 잡지 못해서 묻어 떨어졌다. 그런데 먼저 밑에 떨어진 허동원은 커다란 바위 돌에 슬쩍 깔리고 말았다. 덕돌과 상순이 황급히 바위 돌을 치우고 보니 허동원은 인사불성이 됐는데 입귀와 콧구멍에서 뻘건 피가 줄줄 흘렀다. “도깨비야, 사람을 죽이겠다. 메지 말라는데 기어이 메더니. 이 걸 어쩌니?” 그러나 덕돌은 “허 대장도 메자고 해 멨지? 내 억지로 멨습니까? 힘이 없으면 달려들지 말거지. 누가 메자고 해서 멨습니까?”라고 두덜거렸다. (당신 뼈대도 그저 그렇구먼. 어쩌지 못하면 덤벼나 들지 말 거지. 내 뼈대를 아껴 어찌 고? 흥!) 상순은 덕돌의 귀쌈을 찰싹 갈기면서 호통 쳤다. “빨리 공사 병원에 싣고 가라! 사람을 죽이겠다.” 덕돌은 멜대를 뽑아 쥐고 자리를 떴다. “손잡이트랙터를 몰 줄 아는 성욱이나 보내시오. 난 몰줄 모릅니다.” 상순은 노기충천해 소리를 버럭 쳤다. “너도 사람새끼냐? 어서 성욱과 함께 공사병원에 모셔가라!” 누구 명이라고 어길 수 있겠는가? 그날 덕돌은 성욱과 함께 인사불성이 된 허동원을 싣고 진수해 공사 병원으로 달려갔다. 허동원은 검사를 거쳐 요추간반탈출에 발목뼈 골절이란 진단을 받았다. 그런데 몇 시간 후 허리가 아파 덕돌도 검사해보니 요추간반탈출이 왔던 것이다. 분명 허동원이 먼저 떨어지는 바람에 묻어 떨어지면서 허리를 좀 상했던 것이다. 허나 20세 청년이어서 용용 솟구치는 힘에 의해 덕돌은 허리통증을 용케도 참아냈다. 덕돌이 허리를 쓰지 못하는 허동원을 공사 병원에 실어가고 집으로 돌아오자 상순이 노발대발 하면서 욕지거리를 했다. “이 놈 새끼, 작작 원수를 갚아라. 정 그러다간 이제 병진처럼 돼버리지 않는가 봐라. 병진도 너처럼 돌아가면서 쩍하면 원수를 맺고 보복하려고 탈곡장 벼 낟가리에 불을 지르고 감옥에 들어갔다.” 덕돌은 아버지 무서운 눈길을 피해 머리를 숙이었다. 상순은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잘 들어둬라. 힘이 세면 황소가 왕이 될 거 같니? 항우나 장비 같은 힘장사도 왕이 되지 못했다. 네 따위가 누굴 힘으로 꺾으려고 드니? 힘이 나 쓸 데 없으면 일성저수지에 가서 흙짐이나 메라.” 덕돌은 차라리 좋아했다. “가라면 못 갈 거 같습니까? 원래 이 시시한 생산 대에 쓸데없는 말을 들으면서 일하지 못하겠습니다.” 덕돌은 생산 대에 있기조차 싫었던 차 잘됐다고 생각했다. 덕돌은 넷째매형 학순이 다니는 공사 목재기업에 들어 갈 까고 그간 몇 번이고 찾아 갔다. 이태 전에 결혼한 은자의 신랑 허학순은 아랫마을 계수동에 있었는데 키가 자그마했지만 원체 약삭빠르고 일처리에 능했다. 그리하여 두루 알아보고 전기기구직장에서 직공을 모집할 가능성이 많다고 했다. 하여 덕돌은 전기기구직장에서 변압기를 조립하고 수리한다는 말을 듣고 서점에 가서 전기기구 조립과 수리에 관한 서적을 사다가 골똘히 자습했다. 원래 그는 반도체라디오도 조립한 적이 있어 전기와 무선전자에 일정한 기초가 있어 인차 변압기와 발전기, 발동기 원리와 수리, 조립을 일정하게 장악했다. 허나 공사 기업으로 들어가려고 해도 재간만 있어도 안 되고 생산 대에서 추천해야 됐다. 허나 허동원 생산 대장이 한사코 반대하는데다가 청렴하고 대공 무사한 정치대장인 상순이 자기 아들을 뒷문거래를 해 공사 기업에 보내 쓸데없는 말을 들을까봐 동의하지 않은 바람에 갈수 없게 됐던 것이다. (아버지는 대공무사한 틀만 차리면서 자기 아들을 생각할 줄 몰라. 어쩜 생산대 회계도 성욱에게 맡기고 손잡이트랙터 운전수도 성욱이야?) 덕돌은 슬그머니 좋은 일은 모두 성욱한테 맡기는 아버지가 원망스러웠다. 소몰이를 시키지 않으면 둼을 꺼 밭에 내는 일을 시켰고 언제를 쌓고 기음을 매고 돼지죽을 먹이라고 하지 않으면 이번에는 일성저수지에 가서 흙짐을 메라고 했다. 그때 종복도 입대한지 8개 월 만에 입당했다. 하여 지난 해 겨울에 덕돌은 군부대에 입대해 입당이나 하고 돌아오고 싶었다. 그런데 신체검사에서 다른 것은 몽땅 합격이었지만 색맹 때문에 물거품으로 되고 말았다. 행여나 해 덕돌은 공사당위 선전위원으로 있는 성환을 찾아갔다. 허나 성환 형님은 안경알을 춰올리면서 말리었다. “부대에 가서 뭘 하니? 넌 외동아들인데 부대에 갔다가 일이 생기면 네 부모는 어쩌니?” 덕돌은 지청구를 들이댔다. “형님, 지금 부대에 가지 않고 농촌에서 어떻게 전도를 개척할 수 있소? 난 생산대 손잡이 트랙터마저 몰 자격을 주지 않는데.” 허나 성환 형님은 극구 반대했다. “넌 아직 세상이 돌아가는 걸 모르는구나. ‘4인무리’가 분쇄된 후 세상이 급격히 변화하고 있다. 화국봉을 위수로 하는 당 중앙에서는 지식인들을 중시하기 시작했다. 이제 대학입학 제도도 바뀌어 가능하게 시험을 쳐 대학에 갈 가능성이 있다. 그까짓 손잡이트랙터 운전수 따위가 뭐 그리 대단하다고 부러워하니? 생산대 도서관리원이나 신문사 통신원이나 하면서 글이나 쓰고 책이나 많이 봐둬라. 넌 장차 문화공작을 할 사람이다.” 덕돌은 성환 형님의 말이라면 열에서 아홉은 다 들어왔던 것이다. 허나 강청과 장춘교, 요문원, 왕홍문을 위수로 하는 “4인무리”를 짓 부셨다고 해 세상이 바뀔 수 있다는 것에는 믿어지지 않았다. 눈이 풀풀 흩날리는 날에 성환 형님은 덕돌을 데리고 공사 문화소에 가서 철색얼굴에 눈 섭이 짙은 마흔 고개 오른 점잖은 분을 소개해주었다. “이분은 우리 공사 문화 소 소장 김재군 선생이다.” 덕돌은 허리를 굽혀 인사하면서 김재군 선생이 내민 손을 잡았다. “이분에게서 문학창작을 배워라. 이분은 특히 옛말을 잘 정리해 소문났다. 구수한 옛말을 많이 듣고 정리하노라면 너도 문학창작을 형상적으로 할 수 있을 거야.” 성환에게서 덕돌의 글짓기형편을 들은 김재군 선생은 우렁우렁한 말소리로 소탈하게 말했다. “싹수가 있구먼. 소식도 써야지만 한 차원 높은 민담정리도 하고 소설이랑 시랑 써야지. 대담하게 쓰오. 자꾸 써야 늘지. 안 그럼 두부모만한 소식 몇 편 방송이나 신문에 낸데 자만하면 제자리에서 답보하게 되오. 작가로 되려면 청년 때부터 목표가 있고 계획이 있게 살아야 하오. 놀 거 다 놀고 잘 잠을 다 자고서야 언제 글을 쓰겠소?” 덕돌은 김재군 선생과 갈라져 문화 소 문을 나서면서 얼굴이 뜨거워났다. 정말 소식 몇 편을 내고 이 골 안에서 내노라고 자만하고 뽐낸 자기가 너무나도 부끄러웠던 것이다. 성환 형님은 이에 그치지 않았다. 그때 출판사 편집들과 일보사 기자들도 농촌에 점을 잡고 일하면서 농촌사업을 하고 있었다. 출판사 편집들은 농촌 번역소조와 도시 번역소조를 내오고 농민과 노동자 번역일군들을 양성하고 있었다. 성환은 농촌 번역소조 조장을 맡고 여러가지 정치문교도서를 번역해 출판했다. 그는 그 후부터 공사 당위 선전위원 사업에 그렇게 바쁘면서도 시간만 나면 덕돌에게 번역이론을 전수하고 한문원고를 주어 번역공부를 시켰다. 성환은 또 일보사 농촌소조 조장 박하림 선생과 기자 허길룡 선생, 현 주재기자 소 기자 최찬 선생 등에게 덕돌을 소개해 주었고 일보사와 방송국에서 연 통신원양성반에도 참가시켜 기자수업을 시켰다. 덕돌은 박하림 등 기자들의 지도를 직접 받으면서 소식과 통신 쓰기를 높은 차원에서 익혀나갔고 여러 편의 소식과 통신을 써서 신문과 연변인민방송국 방송프로에 냈다. 허나 공사 혁명위원회 주임 황종연은 백방으로 성환에게 압력을 가해 덕돌이 소식을 써서 내는 것을 저애했다. 공사 혁명위원회의 비준 없이는 소식이랑 통신이랑 마음대로 내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덕돌은 기자들 가르침을 받은 뉴스 안으로 뉴스소재를 발견해도 뉴스를 쓰지 못하고 말았다. 진짜 뉴스 집필재간이 있어도 쓰지 못하게 덕돌의 두 손을 쇠사슬로 꽁꽁 동여 매놓았던 것이다. 덕돌은 소식을 쓰지 못하고 점차 옛말을 정리하거나 시를 써서 김재군 소장이 꾸리는 “진수해 문예”란 프린트소책자에 냈다. 정치에 관계되지 않는 문예창작에 집념하니 황종연이랑 간섭하지 못해 오히려 편안하고 자유로워 좋았던 것이다. 헌데 후에 알고 보니 성환의 동생이자 덕돌의 동창생인 철군이가 입대해 부대로 가게 된다고 하지 않겠는가? 허나 “4인무리”가 분쇄된 후 점차 정치열이 식어가는 시대의 변화를 감지하지 못한 덕돌은 그래도 부대를 가서 1년 만에 갑작스레 입당해 정치토대를 닦은 후 글을 써도 늦을 것 같지 않았다. (그래, 글이야 한뉘 써야 될 게 아닌가? 정치토대를 닦는 거야 말로 급선무야. 아직도 글쎄 입단도 못했으니까. 언제 입당하고 대학에 추천받아 가는가?) 덕돌은 이렇게 생각하자 공사 무장부 간사로 일하는 성환의 둘째 동생 철주를 찾아갔다. 무장부 사무실에서는 철주 형님 외에도 리인학 부장이 있었다. 덕돌은 난로 안에서 석탄덩이가 탕탕 튀는 소리를 들으면서 리인학 부장의 눈치를 흘금흘금 보면서 입이 무거워 열지 못했다. 눈치 빠른 리인학 부장은 훌쩍 자리를 비웠다. 그제야 덕돌은 철주 형님의 날카로운 콧날을 보면서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형님, 날 군부대에 보내주오.” 철주 형님은 두툼한 신체검사서 무지를 들춰 덕돌의 신체검사서를 여겨보더니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네가 어떻게 가니? 색맹이구나.” “철군인 고혈압이라도 부대에 보내면서 나를 어째 도와주지 못하오? 색맹이란 걸 슬쩍 고치면 안 되오?” 덕돌이 지청구를 들이대자 철주는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딱 잡아뗐다. “안 된다. 내 어떻게 그걸 고치니?” “한번 좀 살려주오. 한평생 그 은공을 잊지 않을게.” “야, 안 돼. 도와주고 싶지만 입대 신체검사서는 정치심사보다 더 엄하다. 자칫하면 내 무장부 간사 직을 떼울 수도 있다.”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더 청을 들 수 없는 노릇이었다. 형의 전도를 망치고 자기 앞길을 열 수는 없었다. 이 일 저일 생각하니 덕돌은 구름이 꽉 낀 하늘이 언제 열리겠는가고 갈망했다. 앞길이 막막하기만 했다. 덕돌은 이불 짐을 둘러메고 일성저수지 공정으로 떠났다. 물론 이불 속에는 동곽 선생처럼 항상 놓을 수 없는 책을 두툼히 감춰 넣었다. (차라리 아무런 인적관계 없는 수리공정에 가서 입단하고 입당하면 좀 좋아?) 사실 생산대 안에서는 서로 먼저 입당하고 간부로 되려고 쟁탈과 질투가 심해 입단하기도 힘든 세월이었다. 아무런 정치관계가 없는 저수지공지에 가서 입단하기는 별로 쉬워보였다. 그는 생산대 도서관리원을 버리고 아버지 말씀대로 저수지 공지에 떠나가는 조금 위안됐다. 생산 대 단 지부 서기를 하는 순희가 어떻게 소문을 듣고 조개덕 마을 서쪽 태평강 가에까지 덕돌을 뒤쫓아 와 말리었다. “얘, 무슨 궁리 하니? 이번에 널 입단적극분자로 정했는데 저수지로 가면 어떻게 하니?” “네나 입당하고 대학에 추천받아 가라.” 덕돌은 심드렁해 이불 짐을 메고 발길을 떼려고 했다. 순희는 이불 짐을 잡아 홱 나꿔챘다. “야, 그게 무슨 말이냐? 난 널 진심으로 생각해 하는 말이다.” “네 진심은 나도 안다. 남들의 눈이 무섭지 않니? 괜히 나하고 좋아한다는 말을 듣겠다.” “들으면 뭐라니? 우린 이젠 애들도 아닌데.” 덕돌은 순희의 복숭아얼굴이 발갛게 상기된 것을 곁눈질 해보았다. “진정은 고맙다. 나도 살길을 찾아 가니 근심하지 말고 생산대 일이나 잘 해라.” 이때 허춘이 허둥지둥 달려왔다. “형님, 우리 엄마 일이 노여워 그러오? 난 형님의 은정을 잊지 않소. 형님은 나한테 무예와 글짓기를 가르쳐주었소. 가지 마오. 저수지 공지에 가서 어떻게 고생하겠소?” 덕돌은 날따라 몰라보게 된 허춘을 묵묵히 바라보며 머리를 끄덕였다. 사실 덕돌은 마을에서 자기를 따르는 양훈과 허춘, 득만한테 무예도 가르치고 글도 배워주어 학교에서 머리를 들고 공부하게 했던 것이다. 그리고 사내대장부로 되는 의리 같은 도리를 가르쳐주었다. 하여 애들은 맏형처럼 믿고 따랐던 것이다. 허나 허춘의 엄마 세치 혀끝으로 해 덕돌의 가슴에 상처를 입힌 것만은 사실이었다. 이때 저쪽에서 생산대 민병패 패장을 하는 동림과 생산대 부녀 대장을 하는 정규상 교수의 딸 순임도 소문을 듣고 밭으로 나가다가 뛰어왔다. 순임은 덕돌보다 두 살이나 이상인 누나 격으로서 오누이처럼 지내던 덕돌이공지로 간다고 하자 섭섭해 뛰어왔던 것이다. “얘, 왜 호박을 쓰고 돼지 굴로 들어가니?” 동림도 말렸다. “가지 말라. 네가 가면 내 무슨 멋에 조개덕에 있겠니?” 허나 덕돌의 굳은 마음을 움직일 수 없었다. 뒤이어 집체호의 조영희도 뛰어왔다. 조영희는 지난해 덕돌이 처음 통신을 배우면서 취재해 방송에 낸 뉴스인물이었다. 그녀를 모델로 농촌 생산대 맨발의사(위생원)을 소설로 각색해 “진수해 문예”에 낸 적이 있었다. 그때부터 조영희는 살그머니 덕돌이네 집으로 찾아와 성숙과 놀기도 하고 상순을 찾아와 정치에 대한 가르침을 받으면서 덕돌을 건너다 보군했던 것이다. 사실 조영희는 시내 진수해중학교 교원의 딸, 자그만치 교도처 주임의 귀한 공주이었다. 덕돌은 은근히 맑은 눈길을 자기에게 보내는 조영희의 눈치를 채고서도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군 했다. (시골 개구리 같은 내가 어찌 푸른 하늘을 날아예는 학의 고기를 먹으려고 꿈꾸겠는가?) 조영희는 옆에 순희와 순임까지 있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직방배기로 말했다. “왜 이러니? 우리 셋이 힘써 널 입단시킬 게. 저수지 공지로 가지 마오.” 허나 덕돌은 셋과 일일이 작별인사를 했다. “고맙다. 가장 어려운 때 잊지 않아 평생 잊지 않을게.” 말을 마치자 덕돌은 홱 돌아서서 일성 골 안을 바라고 이불 짐을 둘러메고 성큼성큼 걸어갔다. 파란만장한 그의 인생길에는 또 무슨 일이 생기겠는지 아직도 막막하기만 했다. 친구들은 덕돌의 발걸음이 비틀거리고 어깨가 약간 파도치는 것을 발견했다. 그들은 코마루가 시큼해나 눈물이 글썽한 눈으로 점점 멀어져가는 덕돌의 뒤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덕돌의 그림자가 자그마한 흑점으로 변해가다가 함흥촌 저 멀리 넘어 소서구 어구 굽이를 돌아 사라질 때까지 바랬다.        저쪽 하늘에서 봄을 찾아온 제비들이 둥지를 틀려고 지지배배 울면서 쌍쌍이 날아옜다.                                          
167    문예평론 "과학환상소설 창작기교에 대하여" 댓글:  조회:758  추천:1  2018-07-14
문예평론 과학환상소설 창작의 예술기교에 대하여 김장혁         나는 2000년에 첫 단편과학환상소설 “조왕돌의 모험기”를 세상에 내놓은 후 선후하여 중편과학환상소설 “지구보위전”과 “클론바우 꼬마대통령 모험기”, 2008년에는 중국조선족아동문단의 첫 장편과학환상소설이라고 불리우는 “야망의 바다”를 세상에 내놓았다. 2013년과 2015년에 장편과학환상소설 “욕망의 천지”와 “황천의 유령”을 한국에서 출판하였다. 이런 중단편과학환상소설은 3부작  장편과학환상소설 "야망의 바다", "욕망의 천지", "황천의 유렬"과 련관된 전주곡으로서 3부작 대장편과학환상소설과 함께 기실 5부작, 100만여자에 달하는 대하과학환상소설을 이뤄 조선족아동문단에 신선한 예술의 꽃을 심어주었다.        이런 과학환상소설은 선후하여 한국의 “아동문학세상”과 “서울문학” 등 문학잡지 그리고 한국의 “다음”, “네이버”와 중국의 “조글로”, “모이자” 등 인터넷 블로그에 실려 수많은 네티즌들이 들어와 열람하였다. 장편과학환상소설 “야망의 바다”와 중편과학환상소설 "지구보위전"은 연변인민방송국에서 련속방송드라마 “지구보위전”으로 각색해 련속방송하였다. 또 “동심컵중한아동문학상”과 “옹달샘컵중한아동문학상”, “웰빙아동문학상” 등 문학상도 수두룩이 탔다.       아동문학리론가, 문예평론가 김만석교수의 문예평론 “야망의 과학환상소설”과 문예평론가 김룡운선생의 문예평론 “‘야망의 바다’에는 무엇이 묻혀 있나?”는 과학환상소설 창작의 앞길을 등대마냥 환하게 비추어주었다.       과학환상소설 창작과 그 예술기교에 대한 연구는 아직 미개척지로 남아 있으며 과학환상소설 작품도 몇개 찾아볼 수 없다.      나는 이 문예평론에서 십여년 동안 과학환상소설을 창작해오면서 얻은 과학환상소설 창작의 예술기교에 대한 나의 소감을 피력하여 우리 조선족아동문학작가들이 과학환상소설을 창작하는데 일정한 도움을 주려고 한다.       첫째, 과학환상소설의 소재 선택에 대하여      조문학과 졸업생인 내가 과학환상소설을 썼다고 하면 이상해하고 웃을 수도 있다. 그러나 사실 내가 열람한 자연과학도서는 나를 명실에 부홥되는 과학환상소설 작가로 만들었다. 나는 과학환상소설을 창작하기 위해 “로년세계” 주필을 하면서 중국의 "과학환상세계" 등 여러 과학환상잡지를 탐독한 외에도 한국, 독일, 미국, 일본 등 국외의 과학환상소설을 널리 섭력했다. 그외에도 의학전문저서를 읽은 외 길림대학 지구응용물리학과를 아들의 지구와 지질학에 관한 도서를 읽었으며 일본 고베대학에서 발전학을 전공한 며느리의 발전석사과정 전문도서를 섭렵했다. 그외에도 수많은 과학 정보와 자료를 수집한 외에  “제우스신화”, “헤라신화” ,"공주 아테나" 등 고대 그리스와 로마 신화 그리고  인도 신화, 조선 “단군신화”, “주몽전설”, 중국 고대신화 “녀와가 하늘을 깁다.”, “예가 해를 쏘다.”, 일본신화 “황천” 등을 널리 읽고 과학환상소설의 소재를 선택해왔다.       우선 자연현상에서 과학환상을 과장해 과학환상소설의 신비한 소재를 얻으려고 노력했다.        례하면, 과학환상소설 “우박”의 소재는 텔레비죤에서 광동성 모시에서 탁구공만한 우박의 피해를 본 장면을 보고 선제하였다. 그때 나는 억수로 쏟아지는 우박이란 일반적인 자연재해를 과장하면 얼마든지 과학환상소설의 소재로 되지 않겠는가는  령감이 피뜩 떠올랐다. 그리하여 과학환상소설로 창작할 때 우박의 크기를 탁구공만한 우박으로부터 롱구공만큼한 우박으로 나중에는 항아리만큼한 우박으로 과장하였다.       과학환상소설에서 롱구공만한 우박이 떨어지자 유리창문이 깨지고 가로수가 끊어지고 큰길을 달리던 자동차가 박살난다. 나중에 항아리만큼한 우박이 하늘에서 쿵쾅 떨어진다고 과장하자 피해는 더 혹심해졌다. 층집지붕이 무너지고 전선대가 박살나 넘어지고 자동차가 납작하게 옥창이 되였다. 게다가 반팔을 입은 사람들은 혹한에 추워서 우들우들 떨면서 무너진 벽 밑의 가스도관에서 쌕 뿜기는 가스에 라이터로 불을 달아 불을 쪼이다가 가스 폭발로 2차 피해를 입는다. 밤중이 되자 산더미 같은 우박에서 파르스름한 빛이 반짝였다. 코치아의 사람들은 핵방사능오염이 들어 있는 것도 모르고 하늘에서 내려보낸 진주라고 파들여온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진주를 꿰서 목에 걸었다가 목이 썩어떨어지고 그 진주팔목걸이를 팔에 걸었다가 팔이 썩어떨어져나간다. 코치아 국가과학기술수사에 의하면 핵방사능오염물질이 그 우박에 들어있었다. 섬나라 오랑캐들의 짓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또 일반우박을 인공강우라는 과학지식에 근거해 섬나라 버새총리가 방사능오염물질을 걷어넣은 인공우박으로 살짝 고쳐 소설에서 코치아 조왕돌 꼬마대통령과 뱀섬나라 버새 총리간의 갈등설정에 접선해놓았다. 이처럼 자연재해인 우박을 과학환상을 통한 과장수법으로 항아리만큼한 우박이 쏟아지는 것으로 가공해 한편의 과학환상소설을 창작해냈다. 다음, 과학환상소설도 소설의 일종으로서 그 소재는 현실사회에서 찾지만 어디까지나 미래과학을 예언하는 과학환상소설로서의 미래첨과학의 신비성을 띤 소재를 얻어내야 한다. 나는 클론 생물복제기술과 줄기세포 과학기술, 신비한 우주과학의 비밀, 핵기술, 오존 등 첨단과학기술을 통해 이런 첨단과학기술을 예언하는 많은 과학환상소설의 소재를 얻어냈다. 례하면, 클론 생물복제기술에 근거해 “조왕돌의 모험기” 소재를 얻어냈으며 중편과학환상소설 “클론바우꼬마대통령 모험기” 등 신비한 이야기를 다룬 과학환상소설의 소재를 얻었다. 신비한 우주과학의 비밀에 근거해 지구를 충돌하려는 소행성을 제거하는 이야기를 다른 중편과학환상소설 “지구보위전”의 소재를 얻어냈다. 과학환상소설 “마그마발전소”의 소재는 텔레비죤에서 강렬하게 폭발하는 화산, 부글부글 끓어번지는 시뻘건 용암을 보고 환상해 얻어낸 소재이다. 텔레비죤에서 아일랜드에서 땅속에 깊이 도관을 시추해넣고 지열로 발전하는 장면을 보고 화산의 부글부글 끓어번지는 룡암으로 마그마발전소를 세우지 못하겠는가는 엉뚱한 련상과 환상을 하게 됐다. 나는 일본 고베대학에서 전문 수력과 화력 발전을 연구하는 며느리한테 마그마발전소를 세우면 어떤가는 엉뚱한 자문을 하였다. 그러자 며느리는 일본에서는 풍력발전소 뿐만 아니라 바다의 세찬 파도의 충격을 리용해 발전하는 연구도 하고 있는데 아직 마그마발전은 하지 않고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지도교수와 물어보니 지진이 많은 일본에서 만약 마그마발전소를 세우면 일대 발전혁명이 아닐 수 없다고 하였다. 이리하여 신심을 얻은 나는 일정한 과학성을 띤 소재라는 것을 확인하고 “마그마발전소”라는 과학환상소설을 쓰게 되였다. 화산구멍에 커다란 가마덮개를 덮어 놓고 강렬하게 폭발하는 화산과 부글부글 끓는 용암으로 발전하는 신비하고 엉뚱한 마그마발전소를 탄생시켰다. 직승비행기로 복제인간 조왕돌부대가 가마덮개 파편 같은 수천개 부속품을 하나하나 가져다 커다란 가마덮개를 만든다. 조왕돌부대 장병들이 살캍이 타들어가자 코끼리 살갗처럼 두터운 클론바우 복제이간들이 날아다니면서 숱한 마그마 덮개 부속품을 맞춰 덮어놓음으로써 마그마발전소는 성공된다. 물론 지금 사람들의 지혜나 기술로는 그렇게 엄청큰 가마덮개를 화산꼭대기에 덮어놓는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나는 최근에 중국에서 한 산골짜기에 직경이 몇백메터나 되는 커다란 천리혜안인 우주관측망원경을 만든 것을 보았다. 또 커다란 위성가마 같은 망원경을 보고 멀지 않은 장래에 내가 예언한 화산덮개를 덮어놓은 마그마발전소가 탄생하리라고 굳게 믿는다.     둘째, 과학환상소설의 전형인물 창조. 과학환상소설에서는 환상적인 전형환경에서 환상적인 전형인물을 창조하여야 한다. 물론 과학환상소설에는 정상인 인물형상도 섞여 있다. 아동과학환상소설일 때에는 성인과 아동 인물형상이 섞여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주요인물은 환상적인 전형환경에서 창조된 환상적인 전형인물이여야 한다. 례하면 “기원 5천여년”이라는 과학환상적인 전형환경에서 창조된 환상적인  클론바우형상은 괴상하고 독특하다고 할 수 있다. “클론바우는 생물학자 맥슨박사와 천문학자 유리박사의 아들로서 기원 2958년 5월 7일에 뉴욕시 부근 바다에서 고래어머니 배속에서 태여났다. 맥슨박사는 자기와 유리박사의 유전자를 분리해 클론인간복제기술로 선후하여 사자와 코끼리, 고래의 유전자와 결합해 여러가지 동물의 우세를 한 몸에 지닌 신화 속의 괴물 같은  환상적인 복제인간 클론바우를 복제해냈다. 클론바우는 태아때 너무 커서 고래 어머니 배에서 태여났다. 클론바우 생김새를 보라. 머리는 사자 어머니를 닮아 사자 대가리 같았는데 머리에는 또 총명한 뇌 둘이나 있었다. 총명한 두 뇌가 번갈아 쉬면서 밤낮없이 공부를 할 수 있어 12살 때 벌써 정치학과 군사학 박사학위를 획득했다. 클론바우의 코는 코끼리 코처럼 길었으며 귀는 파초 같았다. 눈은 천리혜안을 퉁사발눈인데 사자 얼굴에 눈 한쌍이 있는 외에도 뒤더수기와 식지에도 눈이 있었다. 그리하여 한번은 텔레비죤방송국 기자로 위장한 간첩이 뒤에서 비디오촬영기에 장착한 미형미사일로 자기를 쏠 때 뒤더수기와 식지에 박힌 눈으로 인차 발견하고 코끼리 코를 휘둘러 비디오촬영기 미형미사일을 쳐떨어뜨려 한차례 암살을 피할 수 있었다. 또 식지를 옹이구멍만한 구멍에도 찔러넣고 식지의 눈으로 안에서 벌어진 일을 다 들여다 볼 수 있었다. 이는 정상인이나 정상동물에게서 찾아 볼수 없는 네눈박이 환상적인 괴물로 형상화된 인물이다. 잔등에는 또 학의 어머니를 닮아 커다란 날개 두개나 달려 있어 초음속으로 훨훨 날아다닐 수 있었다. 중편과학환상소설 “괴물 클론바우 꼬마대통령의 모험기”에서 지구의 오존층에 구멍이 뚫려 아메리카 대륙에서 살지 못하게 되자 클론바우는 커다란 날개를 퍼덕여 남극주에로 훨훨 날아간다. 거기에서 펭긴까지 다 잡아 먹고 먹거리가 떨어지자 복제 클론바우3호가 집안에서 불만을 토로한다. 클론바우는 식지를 옹이구멍에 찔러넣어 식지에 박힌 눈으로 들여다보고 제때에 클론바우 3호를 제압한다.” 문예평론가 김룡운선생은 “야망의 바다에는 무엇이 묻혀 있나?”라는 문예평론에서 “클론바우의 출생비밀은 너무나도 신기하고 희한하여 환상이되 환상을 초월한 신화적인 괴물- 인물형상이다.”라고 평가했다. 클론 생물복제기술에 근거해서 나는 괴상한 환상적인 인물형상인 클론바우 몇세대인물형상과 조왕돌복제인간, 뱀과 사람의 유전자로 복제해낸 뱀인, 원숭이인 혹달개, 형상을 창조해냈다. 과학환상소설의 정형인물은 일반 동화에서의 인물과 다르다. 과학환상소설의 전형인물은 일정한 미래과학성과 환상으로 전형화된 전형인물이거나 현실생활에도 존재하는 미래의 정상인의 인물형상이다. 그러나 동화의 인물은 보통 의인화된 인물로서 사람이 아니며 마법에 의해 움직이는 환상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특징에서 과학동화나 일반동화는 과학환상소설과 구별된다.(실례는 략함) 셋째, 과학환상소설의 슈제트 구성. 과학환상소설의 슈제트는 일반 소설의 슈제트의 제요소를 구비하여 완전히 소설성을 체현해야 한다. 과학환상소설의 슈제는 이밖에도 일반소설에 비해 신화처럼 신비하고 괴상하며 파격적이며 환상적으로 전개된다는 것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례를 들면, 장편과학환상소설 “욕망의 천지”에서는 아주 일정한 과학성과 환상성을 띤 신기한 이야기들로 아주 방대한 슈제트를 구성하고 있다. 나명한 아동문학리론가이며 문예평론가이신 김만석교수는 “욕망의 과학환상소설”(김장혁의 장편과학환상소설 “욕망의 천지”를 보고”란 평론에서 “방대한 슈제트구성, 신기한 환상이야기”라는 소제목 아래 다음과 같이 론술하였다. “…이 장편과학환상소설은 코치아와 뱀섬나라지간의 모순충돌을 주선으로 엄청난 환상적인 이야기를 진격적으로 전개시키면서 소설을 창작하여 독자들을 현혹하게 만들고 있다… 1.나까아맨은 남해해전을 빚어내여 고갈돼가는 뱀섬나라 에너지문제를 해결하려다가 조왕돌과 클론바우18세 부대에 의해 실패한다. 2.나까아맨은 코치아의 금별 대통령과 금붕어 총리 오누이지간에 리간을 도발하다가 실패한다. 3.나까아맨은 딸라에 독바이러스를 발라 코치아 반도에 살포해 백성들을 몰살시키려고 들었지만 조왕돌이 연구한 해독약 “K3바이러스”에 의해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다. 4.나까아맨은 수많은 위성에 장치한 핵반사경으로 코치아 대통령부를 비춰 금별 대통령을 암살하려다가 조왕돌에게 발각돼 실패한다. 5.나까아맨은 기원 4000년에 지구종말론을 들고나오고 지구촌 령토평균분배를 시도하면서 코치아와 대국들을 리간질해 대국들을 동원하여 코치아를 치려다가 실패한다. 이렇게 코치아와 뱀섬나라지간의 모순충돌의 결과로 작품은 크라이막스에 치달아오른다. 1.금별 꼬마대통령은 지구에 날아오는 소혜성을 폭파하기 위하여 뱀섬나라 우주비행선과 영용하게 싸우며 나중에 우주비행선에 원자탄을 실은 채 소혜성을 충돌해 폭파시켜 지구를 보위하고 장렬하게 희생된다. 2.지구를 사랑하는 뱀왕의 령도아래 뱀인들이 떨쳐나서 클론바우와 조왕돌 부대와 회합해 나까아맨을 처단한다. 유라시아대륙판과 태평양대륙판의 충돌로 뱀섬나라는 침몰되고 야스구니 신사도 바다물에 떠간다. 나중에 작자는 소설의 결말을 멋지게 마무리하고 있다. 새로운 일대 조왕돌, 보름, 허선영 등은 아무리 생태환경을 복원하여도 인간의 무절제한 욕심을 절제하지 않고선 지구촌의 생태환경을 영원히 보호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새로운 길 탐색에 나선다.” 김만석교수는 장편과학환상소설 “욕망의 천지”를 두고 “이같이 변화무쌍한 이야기는 과학적원리에 의하여 안받침되였기에 일반 이야기와 전혀 다른 과학적이며 환상적인 이야기로 승화되였다.”고 평가하였다. 한국 아동문학학회 회장 나명한 시인이며 평론가인 김완기선생은 “옹달샘중한아동문학상” 심사평에서 “장편과학환상소설 ‘야망의 바다’에 등장한 각종 가상인물의 변화무쌍한 할동모습은 한편의 환상영화를 보는 느낌이 든다. ‘야망의 바다’는 작가의 풍부한 작품구상과 상상력을 보인 과학환상소설이다”고 평가했다. 일반소설은 생활론리에 근거해 사건이 발전된다면 과학환상소설은 과학론리에 토대한 과학환상에 근거해 환상적이고도 파격적으로 사건이 발전된다. 괴물 클론바우 꼬마대통령은 중편과학환상소설 “괴물 클론바우 꼬마대통령 모험기”에서는 “기원 2958년에 태여났다. 그는 어머니 유리박사의 제의를 받아들여 오존층을 핵미사일로 구멍을 뚫었다가 지구 생물이 훼멸되자 살 곳이 없어 우주비행선을 타고 태공에 올라가 랭동관안에 들어간다.”고 서술하였다. 장편과학환상소설 “야망의 바다”에서는 태공을 날아예는 우주비행선 랭동관 안에서 천년 잠을 자던 클론바우와 500년 굳잠을 자던 무빈총사령관이 후세 금별 대통령과 조왕돌 등에 의해 김이 문문 나는 랭동관 안에서 녹아나 깨여나서 걸어나왔다.”고 하였다. 하여 이 과학환상소설의 신비하고 환상적인 감을 더 해준다. 지금 일부 악성불치질환에 걸린 일부 부자환자들은 의료기술로 치료하기 어렵게 되자 자진하여 랭동관 안에 들어가 꽁꽁 언 채 누워 있다. 그들은 후세에 자기 난치병을 치료할 수 있는 의료기술이 발명되였을 때 자기 언 몸을 랭동관에서 꺼내 치료해달라고 유언을 남기였다. 이런 과학정보에 근거해 나는 괴물 클론바우와 금별 대통령이 태공에서 날아다니는 우주비행선 랭동관 안에 들어간 환상적인 장면을 구상해냈던것이다. 례하면, 단편과학환상소설 “조왕돌의 모험기”에서 크론박사가 주사기로 조왕돌의 팔에서 뭔가 빼가지고 지하과학실험실에 들어갔다. 이윽고 크론기술로 복제한 숱한 조왕돌과 똑 같게 생긴 애들이 수태 지하과학실험실에서 나온다.일반소설의 생활론리에 의하면 지하실험실에 들어가 얼마 되지 않아 그렇게 짧은 시간에 숱한 애들이 나올 수 없다. 이는 완전히 과학환상소설에서만이 될 수 있는 과학론리에 의한 파격적이고 환상적인 사건전개라고 할 수 있다. 또 이런 과학환상소설의 인물충돌에는 항상 첨단과학기술이 동반한다. 례하면 클론 인간복제과학, 줄기세포과학, 핵과학기술 등이 동반한다. 그리하여 자연히 핵전쟁으로 인한 핵오염이 지구와 인간을 포함한 생물의 생존에 얼마나 큰 위해를 주는가는 주제도 보여줄 수 있었다. 클론바우 꼬마대통령 모험기에서 오존층에 관한 과학기술에 의해 사건은 상상 밖의 크라이막스와 급격히 해결에 이른다. 작중 전쟁에서 밀리게 된 클론바우 꼬마대통령은 어머니 유리박사의 제안대로 코치아 상공의 오존층을 원자탄으로 폭파해 커다른 구멍을 뚫어놓는다. 오존층이 뚫린 하늘에서 내리쪼이는 자외선을 지구상의 인간들은 멸종의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여기서 독자들은 자연히 오존층이 파괴되면 지구상의 모든 생물이 훼멸될 수 있다는 위험성을 알게 된다.       다음, 과학환상소설의 환경묘사, 사건은 될수록 발전단계마다 환상적이고 신비해야 한다. 장편과학환상소설 “황천의 유령”에서의 핵전쟁으로 인해 백골더미로 되고 유령이 떠도는 하나꼬의 고향마을과 뱀인들의 해변가 화산굴 그리고 해변가 언덕의 환경묘사는 아주 환상적이고 신비하다.        금별대통령이 배를 타고 코치아로부터 섬나라 뱀인들의 화산굴로 돌아오는 장면은 더욱 신화나 전설 속의 장면을 방불케 한다. 금별 대통령이 배를 타고 련체쌍둥이 아들을 데리고 파도가 사나운 바다를 헤치며 건너오다가 해변가에서 풍랑에 휘말려 몽땅 바다에 떨어진다. 때는 엄동설한이라 바다물이 혹독하게 차다. 그때 이상하게도 갑자기 파도가 얼어 얼음산이 돼 앞뒤로 풍랑을 막아주고 뜻밖에도 온천의 뜨거운 물이 솟구쳐 금별 대통령의 부자간을 얼어죽지 않게 보호한다. 금별 대통령 부자가 해변가 절벽에 오르지 못하자 뱀인들이 몸으로 새끼처럼 꼰 뱀인 사닥다리를 절벽에 놓는다. 그리하여 그들은 뱀인들의 터덜터덜한 몸사닥다리를 타고 절벽에 오른다. (원 작품을 읽어보면 환상적이며 신비한 감이 더 날 것이다.) 다음, 과학동화나 과학이야기는 과학환상소설처럼 완정한 슈제트 구성이 필요없을 수도 있으며 사건도 마법에 의한 환상수법으로 꾸며나갈 수 있다. 그러나 과학환상소설은 소설처럼 미래과학성과 환상을 띤 완정한 슈제트구성이 필요하다.         동화는 이야기 한토막이거나  마법에 의한 환상에 의해 해결되는 동화를 구성할 수 있다. 또 동화는 소설처럼 슈제트구성, 전형환경에서의 전형인물창조, 세부묘사 등 제 요소 구비에 대한 요구가 높지 않다.        그러나 과학환상소설은 과학성에 의한 소설의 슈제트 요소가 완전히 귀비돼야 한다. 말하자면 사건의 발생, 발전, 크라이막스, 해결은 완전히 과학성에 의해 구성돼야 한다. 때문에 과학성에 의한 슈제트구성이 완비하지 못하면 과학환상소설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자칫하면 의인화된 과학동화거나 과학이야기로 되고 말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나의 소견에는 과학환상소설은 동화나 과학동화에 비해 창작하기 어렵다고 외람되게 생각한다.   넷째, 과학환상소설의 과학성 우선, 과학환상소설은 우선 소설로서의 제 요소를 구비해야 할뿐만아니라 과학성이 있어야 한다. 과학환상소설의 과학성은 현재과학으로는 해석할 수 없는 미래과학을 환상의 예술수법으로 예언하는 미래과학성이 구비돼야 한다. (실례는 략함) 다섯째, 과학환상소설의 환상에 대하여. 과학환상소설은 과학환상과 그를 예술적으로 보여주는 랑만이 구비돼야 한다. 이것이 과학환상소설이 과학동화나 과학이야기나 일반소설과 다른 특징이다. 사실 과학환상환상소설은 독특한 창작 예술기교가 필요하기에 창작하기 아주 힘든 감이 든다. 환상에는 신화적 환상, 종교적 환상, 유토피아환상, 과학환상 등이 있다. 과학환상소설에서의 환상은 어디까지나 일정한 과학성을 동반해야 한다. 이것은 동화의 마법에 의한 환상과 구별되는 점이다. 례를 들면, 안데르쎈의 동화 “성냥 파는 소녀”에서 소녀는 너무 추워 성냥가치를 그어대 불을 피운다. 그 불은 인차 두 손을 따뜻하게 만든다. 소녀는 난로 앞에 앉아 있는듯한 기분이 든다. 두번째로 성냥개비를 그어대자 커다란 방이 보이고 식탁의 접시에 게사니고기가 수두룩이 놓여 있다. 또 성냥개비를 그어대니 성탄나무가 나타나고 성탄나무의 초불들은 하늘로 날아올라가 별이 되였다. 또 성냥개비를 그어대자 자애로운 할머니가 나타나 소녀를 꼭 끌어안고 하늘로 날아올라갔다고 한다. 이는 동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완전히 소녀의 마법과도 같은 환각에 의한 환상이다. 추위와 기아에 허덕이다가 점점 사망해가는 소녀의 환각일 수도 있다. 그러나 과학환상소설에서의 환상은 동화에서의 환상과는 달리 일정한 과학성이 있는 환상이며 미래과학을 예언하는 랑만적인 환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동화의 환상과 과학환상소설의 다른 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과학환상소설에서는 어디까지나 과학론리와 과학예언에 의한 환상이라는 점이 과학동화에서의 환상과 다르다. 과학환상소설을 창작할 때 과학환상 외에 신화와 전설적 환상과 종교적 환상, 유토피아적 환상을 일부 섞어놓음으로써 과학환상소설이라는 예술작품으로 하여금  딱딱하고 단조로움을 피하고 더 다채롭고 신비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과학환상소설은 어디까지나 과학환상을 위주로 해야지 이런 마법적이거나 신화, 종교, 유토피아적인 환상의 비중이 절대 과학론리에 의한 환상 비례를 초과하지 말아야 한다. 총적으로 과학환상소설 창작에서 소재, 수제트, 전형인물창조, 그리고 과학환상소설의 과학성과 환상 등 예술기교는 아직도 개척되지 못한 처녀지부분이 많다고 생각한다. 가련하게 짧고도 짧은 반디불 인생에 과학환상소설 창작기교에 대한 탐구와 과학환상소설 창작은 나 가없는 우주처럼 끝이 보이지 않아 안타깝기만 하다. 씁쓸하고 고독한 골고다의 언덕을 넘어 고독한 과학환상소설 창작의 외길을 걷노라니 어느 덧 예순고개, 환갑의 나이를 먹고보니 인생은 허무하고 일장춘몽이라고 느껴진다. 이젠 나 혼자만 과학환상소설 창작의 외길을 걷지 말고 우리 아동문학작가들이 손에 손잡고 지혜를 모아 끊임없이 과학환상소설의 창작예술기교를 탐구한다면 꼭 우리 조선족아동문단, 나아가서 세계아동문단에도 내놓을만한 더 훌륭하고 신비하고 엉뚱한 과학환상소설을 창작해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멀지 않은 장래에 우리 조선족과학환상소설의 화단에는 아주 다양한 과학환상소설의 꽃이 활짝 꽃피리라는 것을 확신한다. 2018년 5월 25일
166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109) 댓글:  조회:2068  추천:5  2018-07-10
                        8. 심산에서 뛰쳐나온 맹호       흐리멍텅한 하늘아래 함흥중학교 마당에는 범이 새끼를 칠 지경으로 풀이 듬성듬성 자라나 있고 여기저기에 장바로 매놓은 소들이 풀을 뜯어먹으면서 똥물을 찔찔 쏘아댔다. 학생들이 뛰놀며 공을 차야 할 운동장이 소를 먹이는 방목지로 돼버렸다. 참 한심한 판이 아닌가. 저 멀리 텅텅 빈 교실은 돌멩이에 얻어맞아 펑펑 구멍 뚫린 창문으로 허수아비처럼 멍하니 어지러운 세상을 바라볼 뿐이었다. 얼럭덜럭한 대자보가 펄럭거리는 학교 몸뚱이는 진짜 산신당에 놓인 화환을 들쓴 것 같기도 하고 무덤에 놓인 지전을 들쓰고 신음하고 있는 것 같았다. 교정에는 학생들의 명랑한 글소리 대신 “음-메-” 하는 소 영각소리가 여기 저기에서 들렸다. 학생들은 필 대신 호미와 괭이를 주어들고 풀밭에 머리를 파묻고 거꾸로 엎뎌 기음을 매고 땅 파기를 하면서 빈농들의 재교육을 받아야 했다. “어떻게 돼 우리 학교가 저 지경으로 됐을까?” 먼발치에서 모교의 참경을 바라보는 덕돌은 서글프기만 했다. 어쩌다가 학교에서는 내일 오후에 진수해에 가서 영화구경을 한다고 하지 않는가! 학교에 가지도 않은 덕돌은 근본 영화를 구경할 수 없었다. 순간 그는 자기를 놀리던 애새끼들을 보복하고 싶은 생각이 불끈 치밀어 올랐다. “옳다!” 그는 학교 마당 주변의 백양나무 밑에서 서성거리며 거닐다가 무릎을 탁 쳤다. “개 새끼들이 영화 구경하러 간 틈에 한족친구들을 시켜서 패주자.” 덕돌은 황급히 집으로 달려갔다. 그는 아버지가 일 밭을 나간 틈에 고방을 활딱 뒤번져 쌀 주머니를 찾아 들고 쌀독 뚜껑을 열어 재꼈다. 그는 바가지로 쌀을 푹푹 퍼서 주머니에 쏟아 넣었다. 이때 문이 벌컥 열리더니 어머니가 들어와 놀라 했다. “쌀을 퍼내 뭘 하니?” 덕돌은 아버지가 들어오는가 덴겁했다가 계속 쌀을 퍼 담았다. “급히 쓸 일이 있습니다.” 어머니는 아들이 하는 일을 막은 적이 없었다. 하지만 쌀 고생을 하는 때인지라 사정이 달랐다. “대체 뭘 하려고 그러니?” “진수해 친구들에게 쌀을 줘야겠습니다. 빨리 가야합니다. 막지 마쇼.” 어머니는 농오래기를 주어다 쌀 주머니를 꿍꿍 매주면서 혀를 끌끌 찼다. “무슨 일인지 몰라도 친구는 많이 친해야 해. 허나 절대 나쁜 친구를 친하지 마라. 도적놈을 친하면 도적놈이 되고 강도를 친하면 강도로 되느니라.” “양, 근심하지 마십시오.” 덕돌은 쌀 주머니를 메고 마을을 벗어나자 수수밭을 꿰질러 아무도 보지 못하는 뒤 장대에 올라 진수해로 뛰어갔다. 덕돌은 해동다리를 헐레벌떡 달려 건너면서 사품 치며 세차게 흐르는 강물을 보자 궁리가 피뜩 떠올랐다. “그래, 해동다리를 막아 승환이랑 설복이랑 패줘야지.” 그는 류운봉의 집으로 찾아가 쌀 주머니를 내려놓으면서 말했다. “사형, 오늘 원수 진 애들이 영화 보러 와. 개 새끼들을 패주자.” “그래. 쌀을 잘 먹겠다.” 운봉은 쌀 주머니를 들어 키가 자그마한 어머니께 보이고 나서 구들에 내려놓았다. 그는 팔소매를 거두더니 주먹을 불끈 틀어쥐고 바깥으로 씽 달려 나갔다. “근심하지 말라. 내 오늘 본때를 보여줄게.” 그때 운봉의 어머니는 쌀 주머니를 어루만지면서 반가와 하면서도 근심돼 뒤따라 나오면서 말렸다. “괜히 죽게 치진 마라!” 운봉은 들었는지 마는지 덕돌을 데리고 또 한 친구를 찾아갔다. 만난 청년은 운봉보다도 키가 훨씬 크고 눈이 우멍해 보기에도 흉측했다. “내 사형 한위신이야. 술 공장의 한위신이라면 우리 진수해에서는 길바닥에서 짓던 개도 짖지 못해.” 한위신은 다가와 덕돌의 아래위를 훑어보더니 손잡고 “누가 감히 내 사제들을 건드려! 가자!” 하고 손을 홱 저었다. 덕돌은 뒤따라가면서도 류운봉과 한위신 둘이서 어떻게 한다하는 주먹치기꾼들인 승환이나 일광, 설복, 광호랑 한무리 깡패들을 쳐 눕히겠는가고 적이 근심했다. 그는 뒤에서 운봉의 팔소매를 살짝 잡아당기더니 나직이 말했다. “우리 셋이서 그 숱한 놈 새끼들을 당할 만 하니? 친구들을 더 불러오면 어떠냐?” 그러자 운봉은 눈을 슴벅이면서 희죽이 웃었다. “근심하지 마라. 우리 셋이 아니라 내 혼자라도 통쾌하게 패줄 수 있어. 어떤 새끼들인지 어디 보자. 아직 함흥 촌에 싸움꾼들이 있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어.” 먼저 덕돌은 한위신과 운봉의 말대로 혼자 영화관에 가서 승환이랑 영화 보러 왔는가 살펴보았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영화관 문 앞에서 영화를 다 보고 나오는 승환 등과 눈길이 딱 마주쳤다. 덕돌은 속으로는 시퍼런 칼을 썩썩 갈면서도 걔들을 놀래지 않으려고 고의로 머리를 숙이며 슬슬 피해 골목길로 들어갔다. “서라! 어디로 달아나니?” 승환과 일광, 광호, 설복 넷이나 덕돌을 뒤쫓았다. 덕돌은 짐짓 겁을 집어먹은 것처럼 주먹을 쥐고 해동다리 쪽으로 달아났다. 뒤에서 쫓는 애들은 꼬임 수에 든 줄도 모르고 기를 쓰고 뒤쫓아 갔다. 허나 날마다 몇 천 미터씩 닫는 덕돌을 따라 잡기란 조련치 않은 일이었다. 허나 헐레벌떡 혼자 내뛰는 덕돌을 잡을 듯 말듯 쫓아가다가 놓칠 수 없어 계속 쫓아갔다. 승환이랑 숨이 차 좀 쉬며 걸으면 덕돌도 걷고 승환이랑 달아 오면 덕돌은 달아났다. 그들은 괘씸해 덕돌을 뒤쫓아 해동다리 중간까지 달려갔다. 그들이 덕돌을 거의 따라 잡을 때었다. 진작 류운봉이 해동다리에서 난간을 쥐고 강물을 구경하는 척하면서 덕돌을 쫓아 달려오는 애들이 다가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승환이랑 덕돌을 뒤쫓아 거의 따라잡을까 말까 할 때다. “서라!” 류운봉이 꽥 소리치며 덕돌의 뒤를 막아 썩 나섰다. 불시에 나타난 중등키에 호리호리한 류윤봉을 보고 승환이랑 하나둘 주춤 주춤 멈춰 섰다. 허나 수수한 한족 애 혼자인 것을 보고 꺽다리 승환이 손을 홱 저었다. “쳐라!” 애들이 왁 달려들었다. 허나 한위신은 그저 우멍눈을 슴벅이며 뒤에서 구경했다. “이 새끼들아!” 류운봉이 성난 사자처럼 고함치며 씽 승환과 광호의 키 넘어 날아지나가며 양쪽으로 발길질을 날렸다. “앗!” 비명소리와 함께 운봉의 발길에 걷어 채워 키꺽다리 승환과 광호가 거의 동시에 나가 너부러졌다. 뒤에서 덤벼들려던 일광과 설복은 그 뜻밖의 광경에 주춤 멈춰 섰다가 인차 앞뒤로 운봉을 공격했다. 그때 덕돌이 일광을 정면으로 파고들며 발길을 날렸다. 허나 일광은 주먹을 쥐고 개처럼 껑충 뛰어 옆으로 피하면서 주먹을 날렸다. 덕돌은 뜻밖의 주먹에 배를 맞고 뒤로 물앉았다. 그때 운봉이 어느 결에 설복의 아래 종아리를 탁 걷어차 넘겼다. 일광이 주먹을 휘두르며 운봉에게 덮쳐들었다. 운봉은 다시 날아오르며 일광의 대가리를 걷어찼다. 허나 일광도 필경은 권투를 배운 애답게 살짝 자세를 낮추며 두 손으로 날아오른 운봉의 다리를 틀어쥐었다. 운봉은 땅에 떨어지는 순간 허망 노출된 일광의 면상을 팔 굽으로 탁 내리쳤다. “앗!” 일광은 운봉의 다리를 틀어쥔 채 쓰러졌다. 그때 쓰러졌던 설복과 광호, 승환까지 와르르 일어나 덮쳐왔다. 그때 덕돌은 운봉에게 덮쳐드는 광호를 막아 싸웠다. 운봉은 일광에게 다리를 꽉 잡히고서도 무쇠주먹으로 일광의 뒤통수를 꽝꽝 내리쳤다. 무쇠주먹에 얻어맞은 일광은 “앗!” 소리와 함께 반 주검이 돼 푹 꺼꾸러져 버렸다. 설복과 승환이 동시에 운봉에게 덮쳐들었다. 허나 운봉은 자세를 낮추며 설복의 아랫배를 팔 굽으로 탁 쳤다. “억!” 아랫배를 부둥켜안고 꺼꾸러지는 설복이, 거의 동시에 승환은 운봉의 번개 같은 발길질에 무릎을 탁 걷어 채워 절룩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그때까지 한위신은 그저 희죽이 웃으며 구경하고 있었다. 힘을 입은 덕돌은 광호의 사타구니에 오른 팔을 쑥 넣더니 건뜻 들어 올려 한 바퀴 휘 휘 돌렸다. 허망 들려 두 다리를 버등거리던 광호는 비명소리와 함께 다리 아래로 거꾸로 처박혔다. “잘한다! 잘해!” 그때까지 저쪽 뒤에서 구경하던 한위신은 박수를 탁탁 치며 쾌자를 불렀다. 질겁한 승환과 설복은 다리야 날 살리라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허나 운봉이 씽드르 달려 나가 절룩거리며 달리던 승환의 뒷다리를 딴죽을 걸어 쓰러 눕혔다. “어디로 도망쳐?!” 한위신이 몸을 날려 설복의 꼭뒤로 날아 넘어가며 한발로 뒤발 질 해 쓰러 눕혔다. 저쪽에서 싸움을 도우려고 주먹을 쥐고 뛰어오던 승환의 패거리들은 겁을 집어먹고 도망쳤다. 그 속에는 성욱과 상선, 응철도 있었다. “야, 성욱아, 어디로 닫니? 넌 내 조카기에 때리지 않을테니 여기 오라! 그럼 살려준다.” 덕돌의 고함소리에 성욱이랑 주춤 멈춰 섰다. 그들은 서로 뭐라고 의논하더니 이쪽으로 다가왔다. 한위신은 주먹을 탁탁 치며 덕돌에게 물었다. “얘들은 왜 놔두니?” “내 조카야. 놔두자.” 한위신은 지나가려는 성욱을 붙잡고 우멍눈을 무섭게 슴벅이면서 위협했다. “봐라! 누구든 덕돌을 건드렸다간 죽는다! 죽어! 알았어?!” 한위신이 장측으로 내리치자 해동다리 나무난간이 뭉청 끊어져나갔다. 또 발길을 날리자 난간 가름대가 부서져 강물에 날아가 떨어졌다. 성욱은 겁을 집어 먹고 다리야 날 살리라고 도망쳤다. 덕돌은 깨고소해했다. 운봉은 한쪽에 대가리를 붙안고 물앉아 바들바들 떠는 승환과 설복, 일광의 대가리를 뚱뚱 치면서 위협했다. “네깐 놈들이 감히 이 어른께 덤벼들어! 또 덤벼들어라!” “아니, 다신 아니오!” “덕돌을 업신여기겠는가?!” “아니, 다신 아니오!” 한위신은 승환의 머리칼을 틀어쥐고 무릎에 대가리를 딱딱 짓쪼아놓았다. 승환은 단통 코피를 줄줄 흘리며 죽어가는 비명 소리를 쳤다. 설복과 일광은 겁을 집어먹고 무릎을 꿇고 마구 절을 하면서 두 손을 싹싹 비볐다. “살려주오! 제발 살려주오!” 허나 한위신은 “덕돌아, 뭐 해? 패라!”라고 했다. 덕돌은 무방비상태인 일광과 설복을 돌아가며 발길질을 하면서 고함쳤다. “이 새끼들이, 다시 날 연애한다고 놀리겐?!” “다신 아니다.” “또 놀려라!” “아니, 죽어도 아니다.” 운봉은 일광의 대가리를 땅바닥에 마구 쪼아 놓으면서 을러멨다. “이 개새끼야, 할아버지라고 불러!” 일광과 설복은 마주 보다가 한위신에게 한 대씩 더 얻어맞고 이구동성으로 “할아버지!” “할아버지!” 하고 부르며 살려 달라고 애걸복걸했다. 덕돌은 머리를 끄덕이고 나서 설복의 배때기를 탁 걷어차면서 을러멨다.  “이제 다시 덤벼 봐라. 죽는다. 죽어. 다시 놀리겐?” “아이다.” “가라!” 덕돌은 일광의 낯을 탁 걷어찼다. 일광은 상판을 붙잡고 일어나 가면서도 속으로는 이를 쁙쁙 갈았다. 설복의 올빼미 눈깔도 곱지 않게 선뜩했다. 광호는 어느 결에 강물에서 기어 나왔는지 다리 끝, 저쪽 강둑에서 이쪽을 기웃거렸다. 승환이랑 피범벅이 된 상통으로 다리를 절룩거리며 집 쪽으로 갈 때다. 뜻밖에 승연이가 자기 형 황종연 소장을 데리고 달려왔다. 분명 먼저 다리목에서 쫓겨 시내로 달려간 애들이 고발한 것이었다. “서라!” 덕돌은 황종연 소장보다 황승연 담임교원이 더 무서워 주먹을 쥐고 달아났다. 허나 닫다가 뒤를 돌아보니 한위신과 류운봉은 태연자약하게 황 소장과 뭐라고 웃고 떠들고 있지 않겠는가? 덕돌이 후에 안 일이었다. 황종연과 황승연은 한위신의 형 한위광이 무예가 출중한데다 그 무리가 “굴뱀”처럼 지독하고 많기에 감히 건드리지도 못했다. 그들은 진수해 큰길바닥에서 우쭐거리며 싸우다가도 한위광을 보기만 하면 꼬리 빳빳해 줄행랑을 놓곤 했던 것이다. 한번은 한위광이 한창 조양식당에서 친구들과 술을 마실 때다. 황종연은 술상에서 말다툼을 하다가 그 나그네 멱살을 틀어쥐고 헤딩을 떵 했다. 순간 그 나그네는 면상이 쥐마당이 돼 쓰러졌다. “언감 누구 앞에서 주먹질인가!” 한위광이 건너 상에서 씽 날아가더니 원앙새다리로 종연과 승연 형제를 한발에 하나씩 걷어차 넘겼다. 황종연과 황시연은 한위광을 두려워 선불 맞은 노루처럼 다리야 날 살려라고 도망쳤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황승연 형제는 여기서 또 한위광의 동생 한위신을 만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더욱이 덕돌이 진수해의 “주먹 왕” 한위신 형제와 친분이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한위신은 황종연과 황승연마저 위협했다. “이후에 누구든 내 사제 덕돌을 업신여기면서 못 살게 굴기만 하면 좌시하지 않을 거야.” 권총을 찬 황종연 소장도 굴 뱀과 같은 한위신 무리를 어찌는 수가 없어 물러갔다. 덕돌은 집에 돌아온 후 그날 해동다리실전에서 주먹과 발이 쾌속반응하지 못한 교훈을 더듬어냈다. 승환이나 일광은 그날 덕돌이 덤벼들자 두 손을 낯에 대고 자세를 낮추며 옆구리 밑으로 빠지면서 주먹으로 배를 강타했다. (이제까지 배운 무술은 보기 좋을뿐 실전에서 많이 써먹지 못할 물건이야. 자기를 알고 남을 알아야 백전백승한다. 나도 권투를 배워 무술과 권투의 장점과 약점을 다 장악해야지. 그래야 무술과 권투의 약점을 미봉하고 장점을 발양해 그 새끼들을 쳐 눕힐 수 있지.) 그는 동불사 6촌 형 김봉룡을 찾아갔다가 그의 친구 룡남이가 권투를 잘 한다는 말을 듣고 술과 담배를 사가져다 주고 권투를 배우기 시작했다. 룡남은 덕돌보다 두 살 이상이지만 호리호리한 몸매로 권투를 어찌나 날래게 하는지 눈이 시릴 정도였다. 이전에 무술로는 1미터 반 이내에 들어온 적수를 상대해 주먹질과 발길질, 무릎과 머리로 공격했다. 허나 권투는 적수를 4~5미터 거리에 두고서도 재빠른 몸놀림과 발놀림으로 덮쳐나가면서 연타를 안길 수 있는 실용적인 권법이었다. 용남에게서 몇 달 동안 상대방에게 공격해 들어가는 보법 그리고 상대방이 공격해 들어올 때 피하는 보법과 동작을 몇 개 배운 후 덕돌은 권투에 점차 눈을 뜨기 시작했다. 몸놀림도 매우 날렵해지고 진공속도도 빨라져 눈 깜짝할 새에 덮쳐들어가 상대를 쳐 눕힐 수 있게 됐다. 허나 덕돌은 권투가 맨 주먹을 쓰고 발길을 적게 쓰는 약점이 있다는 것을 느꼈다. (바로 이거야. 맨 주먹으로 발이 하는 노릇까지 할 수 있는가? 발을 잘 쓰지 못하는 권투쟁이들을 발길질로 차 눕혀야 해.) 덕돌이 한창 권투를 익히고 권투의 허점을 돌파할 실전무술을 연마할 때었다. 덕돌의 양형님 수봉이 찾아왔다. “덕돌아, 누가 너를 때리면 나한테 말해라.” “감사하오. 허나 애들의 싸움에 형님을 시켜 때리면 이긴 게 아니오. 그래 내 힘으로 개 새끼들을 하나하나 쳐 눕히겠소.” “글쎄, 당당한 주먹 왕이 되자면 그리 쉽니? 나와 경만 매형께 알려라. 어느 새끼 감히 너를 건드리면 혼 내줄게.” 수봉 양형이 고마웠다. 허나 덕돌은 수봉 형님이 돌아간 후에도 계속 무술과 권투를 익혀나갔다. 그는 패용천산 꼭대기 절벽 위에 올라가 썩 살이 배긴 무쇠주먹을 반공중에 대고 힘차게 휘두르면서 산악이 쩌렁쩌렁 울리게 고함쳤다. “개새끼들아! 이 주먹으로 날 놀린 놈들을 몽땅 쳐 눕히겠다! 이 놈의 더러운 세상을 평정할 거야!” 어느 날 저녁, 덕돌이 저녁술을 놓으려는데 경산 선생이 찾아와 조용히 타일렀다. “얘야, 주먹으로 세상을 개조하려고 하지 마라. 이젠 싸움꾼들과 놀지 말고 학교로 오너라.” (어쩜 우리 아버지 말과 똑 같을까?) “주먹세계에 들어서면 끝이 없다. 아까운 시간을 허비하지 말고 내 주는 책이나 봐라. 지금 ‘독서무용론’이 살판치지만 이후에는 지식이 꼭 필요하다.” 까부는 덕돌이었지만 자기를 친형님처럼 아끼고 이끌어주는 김경산 선생의 말만은 귀담아 들었다. (그래, 문무가 겸비된 남자, 땅을 밟고 하늘을 떠인 떳떳한 사내대장부로 돼야지.) 허나 덕돌은 근심되는 일이 한 두 가지 아니었다. “학교에 가면 애들이 또 놀리지 않겠는지 모르겠습니다. 학교라는 게 어디 공부를 시킵니까? 일이나 시켜 먹었지.” 경산 선생은 덕돌의 손까지 잡고 차근차근 타일렀다. “세월이 더럽긴 하지만 너 그래도 고중졸업장이야 타야지. 이렇게 고삐를 끊은 들소처럼 싸움질이나 하면서 떠돌아 다녀서야 되니? 고중도 졸업하지 않고 이후에 어떻게 대학에 가니?” 덕돌은 머리를 숙이며 “김 선생님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내일 당장 학교로 가겠습니다.”라고 했다. 경산 선생은 너무 기뻐 연신 “그래야지. 이제야 내가 희망하는 덕돌 답구나.”라고 했다. 그는 누런 책을 몇권 가방에서 꺼내 놓았다. “궤에 감춰놨던 책이야. 잘 읽어라. 넌 글도 잘 쓰지 않고 뭐야? 이제부터 나한테서 소식이나 통신 같은 짧은 문장부터 배워가지고 후에 기자나 작가로 됐으면 얼마나 좋겠니?” 그 말에 덕돌은 눈이 동그래졌다. “기자?” 김 선생은 확신에 찬 머리를 끄덕였다. “응, 그래.” “내가 어떻게 기자나 작가까지 되겠습니까?” 덕돌은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넌 될 수 있어. 이제부터 노력해라.” 덕돌은 가슴이 부풀어 올라 심장박동마저 세차게 높뛰었다. 정지에서 다 들은 아버지도 경산이 떠나간 후 타일렀다. “선생님의 말이 옳다. 네가 학교에 가지 않으면 누가 좋아하니? 학교서 일하더라도 가라. 집에서 가만히 책을 읽지 말고 학교에 가서 선생님들의 가르침도 받는 게 옳아.” 이튿날 아침, 흐리터분한 날씨에 덕돌은 공부도 하지 않는 학교에 슬슬 다가갔다. 그가 학교 마당에 일년만에 나타나자 애들은 신기한 괴물을 보듯 눈치를 흘금거리며 슬슬 피했다. 승환과 일광은 덕돌이 교실에 나타나자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순희랑 은숙이랑 신기한 눈길로 덕돌을 바라보다가 머리를 폭 숙였다. 덕돌은 뒤로 두 번째 줄, 옛날에 앉았던 자리에 앉았다. 왁작 떠들던 교실이 덕돌이 나타나는 바람에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짱! 덕돌은 불시에 귀뿌리가 윙 해났다. 덕돌이 우쭐 일어나 얼굴을 돌려 보았다. 뒤 줄에 일광이 하얀 낯이 퍼렇게 일그러졌다. “감히 나를 치니?” 옆에 앉았던 장영웅도 일어나 일광을 말렸다. “너 영상하게 교실에서 이러지 마라.” 덕돌은 “나오라.”라고 하며 일광에게 도전했다. 일광은 따라 나오면서 고함쳤다. “한족 애들을 믿고 작작 우쭐거려라!” 애들은 싸움을 구경하려고 우르르 쓸어 나왔다. 덕돌은 일광부터 처 넘겨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또 업신여김과 놀림을 당하게 될 것은 불을 보듯 빤한 노릇이었다. 선생님들과 애들이 보지 못하는 학교 뒷마당에 에돌아가자 일광은 해동다리에서 반 주검이 되게 얻어맞은 승치를 하려고 이를 뿌득뿌득 갈았다. “오늘 죽어봐라.” 덕돌이 웃옷을 벗어 땅바닥에 놓는 순간 일광이 쌩 덮쳐들어오면서 발길로 덕돌의 턱을 탁 걷어찼다. 덕돌은 날아드는 발을 번개같이 잡아 홱 뿌리쳤다. 그 바람에 일광은 달려들던 속도와 힘에 저쪽 광호 발밑에 뿌려 나가 거꾸로 처박혔다. 일광이 피와 흙 범벅이 된 낯을 쓱 닦으며 일어나려는 순간이었다. 덕돌이 씽 달려 들어가면서 땅을 짚은 팔을 툭 걷어찼다. “아이고!” 비명소리와 함께 일광은 접질린 팔을 붙안고 쓰러졌다. 덕돌은 호랑이를 때리는 무송처럼 덮쳐들어 일광의 덜미를 누르고 무쇠주먹을 휘둘러 뒤통수를 즉살 나게 꽝꽝 내리쳤다. 벽돌 두 장도 까부시는 덕돌의 주먹에 얻어맞아 일광은 죽는 소리도 못치고 너부러졌다. 일광이 맥도 쓰지 못하고 얻어맞아 쓰러진 것을 보고 광호와 승환이, 설복까지 동시에 덮쳐들었다. 허나 덕돌은 무서워하는 기색이 전혀 없이 접전했다. 그러자 동림과 성택, 영웅이 나서서 승환이랑 말렸다. “1대 1로 싸워라. 셋이나 달려들면 되니?!” “놔둬라! 다 때려눕히겠다.” 덕돌은 고함치며 몸을 날려 원앙새발길질로 덮쳐드는 광호와 설복을 동시에 대가리를 걷어찼다. “어우야!” “무술을 배운다더니 한각 쓰는구나!” 여자애 같던 덕돌이 일 년 동안 보이지 않더니 맹호가 산에서 덮쳐 내려온 듯한 강한 모습을 보고 애들은 모두 경악했다. 승환이 그새 권투자세를 취하면서 정면으로 덮쳐들었다. 덕돌은 자세를 낮추며 토끼뜀으로 몸을 옆으로 슬쩍 피했다. 승환의 몸이 오른 쪽으로 스쳐 지나갈 때 덕돌의 주먹이 아랫배를 강타했다. 승환이 비칠거리며 덕돌의 뒤에 겨우 멈춰 섰다. 덕돌이 뒤돌아서며 발길로 숙인 승환의 턱주가리를 걷어찼다. 승환은 옆으로 피하려고 했지만 번개같이 연신 날아드는 발길과 무르팍 강타에 비명소리와 함께 이발을 떡떡 맞 쪼아 피를 줄줄 흘렸다. 침을 퉤 뱉자 부러진 이빨이 피와 함께 튕겨났다. 설복과 일광, 광호가 동시에 덕돌에게 덮쳐들었다. 둬 매 얻어맞은 덕돌은 도망치는 척 하다가도 홱 돌아서며 발길을 날려 제일 먼저 따라 오는 광호부터 차 눕혔다. 그러고는 또 달아났다. 그는 온 학교 운동장을 달아 다니면서 승환이랑 일광이랑 치고 박았다. 허나 덕돌은 전혀 겁기가 보이지 않고 싸우면 싸울수록 용감해지고 날렵했다. 휴식시간이 돼 장옥이랑 장화랑 조신지랑 숱한 한족 애들이 교실에서 나와 이 장면을 보고 뛰어왔다. 그 애들이 승환이랑한테 물매를 안길 때 황승연과 흥수도 뛰어왔다. “덕돌아, 이게 뭐야?” 흥수가 을러멨다. 황승연은 이전에 해동다리에서 한위신에게 위협받은 일이 있어 감히 입도 벌리지 못했다. 그제야 싸움은 끝났다. 덕돌이나 광호네나 모두 여기 저기 얻어 터져 정도부동하게 피를 흘렸다. 허나 결국 덕돌은 이긴 것이다. 셋이 덕돌에게 얻어맞았으니까. 흥수가 그들 넷을 불러 교실에 들어간 후 학생들 앞에 세워놓고 비판했지만 덕돌은 속으로 은근히 너털웃음을 웃었다. (난 끝내 이겼어. 이젠 네 놈들이 무섭지 않아. 이 교실 안의 주먹 왕은 내다, 내.) 이튿날부터 덕돌은 기세등등해 학교로 다녔다. 다만 뒤에 앉은 일광이가 불시에 돌멩이 같은 것으로 돌연히 습격하는 것이 근심될 뿐이었다. 1분만 버텨내면 옆 교실에 있는 장옥이랑 달려 나오기에 무섭지도 않았다. 그런데 뜻밖의 사건이 벌어졌다. 광호랑 승환이랑 덕돌과 자옥이랑 두려워 학교에 오지 않았던 것이다. 오히려 그 놈 새끼들이 보이지 않자 덕돌은 불안하고 가슴이 답답하고 불쾌했다. 사실 덕돌의 짐작이 맞았다. 전번에 덕돌의 실력을 너무 깔보고 덮쳐들었다가 망신당한 광호랑 진수해의 부랑배들을 긁어모아 덕돌에게 보복할 획책을 꾸미고 있었다. 덕돌은 광호랑 궁금해 운봉과 함께 진수해에 내려와 돌다가 영화관 앞에서 또 딱 부딪치게 됐다. 면목도 없는 꺽다리 하나가 덕돌을 잡아끌었다. “여기 오라! 네가 함흥촌의 덕돌이냐?” “그렇다. 누구냐?” “너 광호를 알지?” “안다. 광호네 짝패냐?” “그래, 나 림영철이야. 성은 수풀 림, 이름은 쇠다. 한번 맞붙어 보겠니?” “수풀 속에서 뛰어나온 쇠라. 네 이름 그럴듯하구나. 어디 해보자.” 덕돌이 림영철을 뒤따라가는데 운봉이 저쪽 먼발치에서 눈치 채고 스적스적 따라가 철로소학교 마당으로 들어갔다. 림영철이 덕돌을 업신여기고 허리를 굽히더니 주먹을 둘러메고 씽 덮쳐들었다. 덕돌은 뒤로 풀쩍 뛰어 물러섰다가 앞으로 나가며 자세를 낮춰 옆으로 걷어차 올렸다. 씽 달려 들어오며 헤딩을 하려던 영철이 면바로 불알중태를 채워 두 손으로 사타구니를 싸쥐고 뺑뺑 돌았다. 덕돌이 영철의 더벅머리를 틀어쥐어 무릎에 대고 떵떵 짓 쪼아버렸다. 림영철은 단통 면상이 쥐마당이 돼버렸다. 구경하는 척 하던 다른 애가 그 틈에 덤벼들어 덕돌의 뒤통수를 강타했다. 덕돌이 뒤에서 휙 하는 바람소리를 듣고 훌쩍 물앉는 바람에 그 애의 몸이 앞으로 휘청거렸다. 덕돌은 뒤로 손을 뻗쳐 자기 머리 위에서 허우적거리는 몸뚱이를 휘감아 쥐여 태를 탁 쳤다. 짱 소리와 함께 언 땅 위에 그 애가 보기 좋게 뻐드러졌다. “개새끼들아! 어느 놈이 감히 내 형제를 건드려!” 운봉이 도끼눈을 부라리며 덮쳐들었다. “굴 뱀이 왔다!” 광호네 패거리들은 독수리를 본 참새들처럼 몽땅 도망쳤다. 덕돌은 달아나는 시내 애들에게 주먹을 휘두르며 철로소학교 마당이 쩌렁쩌렁 울리게 고래고래 고함쳤다. “야, 개새끼들아, 다 달려 들어봐라! 다 때려죽이겠다!” 그날부터 류운봉과 한위신, 고이림, 류지 등 친구들은 덕돌이 시키는 대로 진수해 온 시내를 돌아다니면서 광호네 친구라고 보이는 애들의 집을 하나하나 쳐들어가 패주었다. 그후부터 시내 애들도 광호를 두둔해 나서려고 하지 않았다. 자기를 놀려대며 개 같이 짖어대던 싸움군들을 다 때려눕히자 덕돌은 개를 치던 몽둥이를 팽개치고 안심하고 다시 학교로 다녔다. 허나 광호랑 일광이랑 덕돌과 한족 애들이 무서워 드문드문 학교로 왔다가 눈치를 흘금흘금 보다가도 돌아갔다. 덕돌은 장영웅과 함께 당당하게 제일 뒤 줄에 앉았다. 벽을 등지고 앉은 후부터 뒤에서 일광이 돌연히 습격해 주먹을 날릴 까봐 근심할 필요 없어 마음이 훌 놓였다. 한번은 광호가 학교 마당에서 불시에 덕돌의 뒤에서 주먹을 휘두르며 덮쳐들었다. 덕돌은 훌쩍 자세를 낮추며 팔꿈치로 아랫배를 탁 친 후 숙인 광호의 대가리를 탁 걷어찼다. “어이쿠!” 광호는 허망 저쪽으로 나가 꼬꾸라졌다. “비열한 새끼, 돌연습격해?” 덕돌은 광호에게 물매를 안기며 고함쳤다. 인젠 광호도 덕돌에게 마음속으로부터 굴복하지 않으면 안됐다. 정면으로 달려들어도 돌연습격해도 근본 적수가 아니었던 것이다. 이제부터 덕돌은 기죽은 적수들에게서 시선을 떼게 됐다. 더는 그 애들로 해 근심하지 않고 경산 선생을 모시고 글짓기에 전념해도 됐다. 경산은 덕돌을 자기 집에 가만히 불러 석유등잔불을 밝혀놓고 소식쓰기부터 배워주었다. “소식쓰기를 배워 함흥 대대나 우리 학교 사적을 신문이나 방소에 내면 얼마나 멋지니?” “예? 내 쓴 글이 언제 나겠습니까?” 경산은 아주 진지한 표정을 지으면서 “될 수 있다. 네가 무예를 익힐 때처럼 이걸 배우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다는 정신으로 열심히 배워라.”라고 하며 희망과 이상의 푸른 씨앗을 덕돌의 가슴에 심어주었다. 어쩐지 덕돌은 경산 선생의 말씀이 마음에 와 쏙쏙 들어박혔다. 그는 날마다 경산 선생 집에 찾아가 소식의 이론과 취재, 집필에 관한 공부를 체계적으로 해나갔다. 나중에 함흥 대대에서 혁명을 틀어쥐고 새 농촌건설을 잘 한 경험을 취재해 첫 소식을 썼다. 상순은 덕돌이 밤중까지 밥상을 놓고 원고지에 원고를 쓰다가도 몇 글자를 쓰지 못하고 쭉쭉 찢어 밥상 옆에 던지는 것을 보고 빈정거렸다. “에이고, 네가 쓴 글이 방송에 나는 날에는 해가 서산에서 뜨겠다.” 덕돌은 밸이 나 속으로 기어이 소식을 써서 방송에 내 아버지께 본때를 보이려고 쓰고 또 썼다. 나중에 그는 원고라고 써가지고 경산 선생한테 가서 검사를 맞혔다. “처음 썼는데 잘 썼구나. 되겠다.” 경산은 그 원고를 본 후 직접 만년필을 들어 새까맣게 수개해주었다. “이걸 정성들여 재필기를 해라.” 덕돌은 경산 선생님이 수개한 원고를 깐깐히 보면서 자기 원고의 결점을 봐내고 재학습했다. 두 번이나 경산 선생한테 검사 맞힌 후 수개하고 정리한 후 선생의 부탁대로 현 방송국에 보냈다. 하루가 지나고 일주일이 지나도 집에 걸린 스피카에서 기별도 없었다. 경산 선생은 덕돌을 찾아 집에 데려다 조용히 타일렀다. “조급해 하지 마라. 뭐나 단술에 어찌 배부르겠느냐? 천천히 학습하노라면 꼭 방송과 신문에 날 그 날이 있을 거야.” 덕돌은 자기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확성기에서 아나운서의 방송소리가 울려왔다. “아래에 덕돌 동무가 써 보낸 소식을 보내드리겠습니다.” “아니, 네 쓴 소식이 나온다.” 경산도 환성을 울리다가 덕돌과 함께 귀를 도사리고 들었다. “진수해공사 함흥대대 조개덕 생산대에서 혁명을 틀어쥐고 새 농촌건설을 촉진하고 있습니다. 조개덕 생산 대에서는 계급투쟁을 억세게 틀어쥔 한편 황무지에 인삼장과 양봉장을 꾸렸을 뿐만 아니라 마을 동구에 벽돌공장을 앉히고 칼산의 구들돌을 캐 부업수입을 올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 생산대 벽돌공장에서 생산한 벽돌과 기와로 선후해 대대 사무 청사와 조개덕 생산 대 우사와 회의실, 돼지우리를 지었으며 2년 동안 사원들에게 도합 20여 채 새 벽돌기와집을 지어 주었습니다. 새 마을 건설에서 고무된 사원들의 생산적극성이 전에 비해 높아져 생산도 혁명도 일대 앙양을 일으켜 올해 년 수입도 지난해에 비해 곱절로 올라갔습니다.” 경산 선생은 너무 반가워 밥상 너머 덕돌의 어깨를 다독여주었다. 덕돌도 너무 기뻐 연신 “선생님, 고맙습니다.”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인사했다. “그래, 이젠 네 새로운 인생이 시작된 거야. 절대 자만하지 말고 두 번째, 세 번째 원고를 계속 써내야 한다. 이젠 나이도 18세라 어리지 않아. 전도를 위해 꾸준히 글재간을 익혀나가야 한다.” “예, 알았습니다. 꼼 명심하겠습니다.” 집에 돌아오자 아버지 상순이 싱글벙글 맞으면서 “우리 기자 돌아왔소? 네 쓴 문장이 방송에 나더구나. 축하한다, 아들아.”라고 했다. “아버지, 해가 서산에서 뜰 날이 왔구먼요.” 덕돌이 우스개를 하자 상순은 덕돌을 껴안아주면서 “건 다 격장법을 써서 널 글을 마음먹고 써내게 한 거야. 허허허. 딱 곧이들었니? ”라고 하지 않겠는가! 억이 막혀 더 웃지 못 할 노릇이었다. 아버지의 속생각은 여래불의 마음 같이 넓고 깊을 줄은 몰랐다. 덕돌은 학교에서 공부는 하지 않고 일하러 다니는 것이 싫어 학교에 가기 싫어 가네마네 했다. 어느 날, 경산은 집에 찾아와 가방에서 “조선어문법” 책을 주면서 물었다. “내가 공사방송소에 가서 임시 기자로 일하게 됐다. 너도 가서 견습하는 게 어때?” “좋습니다. 허나 제 같은 학생이 방송소에 갈수 있겠습니까?” “내 학교 혁명위원회 대리 주임 성환과 말해 볼게.” 경산은 조개덕 앞 한육모판에 가서 성환을 찾았다. 한참 후 성환과 경산이 뭐라고 하며 벼 모상 판으로부터 마을 쪽으로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성환은 마을 앞 둔덕길에서 덕돌을 보자 손짓해 불렀다. 덕돌이 뛰어가자 성환은 그에게 신신당부했다. “덕돌아, 경산 선생을 따라 방송소에 가라. 견습 기자로 돼 견식도 넓히고 기자 수업을 잘해라. 장차 당과 인민을 위해 글을 쓰는 유명한 기자로 돼라.” “고맙습니다. 두 분 선생님.” 이튿날에 덕돌은 진수해 방송소에 가서 이광평 소장의 지도아래 소식이나 통신 등 보도기사를 쓰는 것을 배웠고 경산 선생과 함께 전 공사를 돌아다니면서 취재하고 보도기사를 썼다. 방송소에서 어떻게 아나운서의 말을 녹음해 방송하는가, 어떤 전자기계로 전 공사에 유선방송을 내보내는가도 알게 됐다. 덕돌은 약 두 달간의 실습을 거쳐 견습 기자의 실력을 갖춰나갔다. 한편 “조선어문법” 책도 열심히 읽어 집필수준도 눈에 뜨이게 제고시켰다. 한편 그는 맨 소식이나 인물통신만 써서는 장차 기자로 되기 힘들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빈농의 재교육을 잘 받아 입당해 대대 간부나 돼야 대학에 추천 받아 가는 세월에 농업상식도 배워야 해. 아니야, 누구도 몰래 무선전기술을 배워 시내에 가서 반도체라디오 수리공이 되면 어떨까? 그래, 그거야. 소식이나 통신은 아무 직업을 택하던 다 쓸 수 있지 않는가? 난 기자 하나만 바라고 살 수 없어. 여러 가지 재간을 익혀 가지고 이쪽 길로 가서 안 되면 저쪽 길로 나가야 해.) 그날부터 덕돌은 동림이 네 집에 있는 반도체 라디오 조립지식 책을 가져다 반도체 무선 전자 기술을 배우기 시작했다. 이극관과 삼극관, 저항기와 가변저항기, 소형변압기, 확성기, 등 부속품의 원리를 학습했다. 그는 용돈을 까래 밑에 치워두었다가 시내 오금상점에 가서 부속품을 사다 조립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부속품 하나에 몇 원씩 하는 세월에 농민의 아들이 반도체 부속품을 살 돈이 어데서 생기겠는가? 명옥은 항상 하나밖에 없는 아들의 꿈을 현실로 되게 뒷받침해주었다. 그녀는 돼지새끼를 판 돈을 남편 몰래 가만히 덕돌의 손에 쥐워 주었다. 덕돌은 기뻐 날듯 했다. 그는 돈을 남아 하나라도 부속품을 더 사려고 버스도 타지 않고 동림과 함께 이른 새벽에 시골마을에서 떠나 40 리나 걸어 네 시간 만에 연길에 도착했다. 오금상점에 들리어 소형변압기와 나발을 사서 품에 간직하고 나오니 점심때가 거의 돼갔다. 하늘을 바라보니 유난히 맑아 햇볕이 쨍쨍 내리쪼였다. 반도체 부속품을 사고 나니 그들의 호주머니 돈을 다 털어 모아보니 단돈 5전 밖에 없었다. 5전으로는 국수 한사발도 사 먹지 못할 판이었다. “운동 삼아 달려서 집으로 돌아가자.” 덕돌이 말하자 동림도 머리를 끄덕였다. “그러자. 운동을 따로 할 게 있니?” 그들은 단 돈 오전으로 도마도 두 근을 사서 점심 대신 먹으면서 귀로에 올랐다. 그들은 시내를 벗어나자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아스팔트길로 슬슬 달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찌나 무더운지 숨이 헉헉 막혀 달리기 힘들었다. 그때 불시에 먹장구름이 뒤덮여오더니 앞뒤를 분간하기 힘들게 소낙비가 새뽀얗게 와르르 쏟아졌다. “어, 시원하다!” 덕돌은 한편 소형 확성기의 종이가 비에 젖을까봐 옷을 벗어 둘둘 감아 꼭 껴안고 가로수 밑에 숨었다. 그러다가 열사의 영패를 모신 큰 길옆의 기와집에 들어가 비를 끊었다. 비가 멎자 그들은 또 닫다가도 숨이 차면 걷고 걷다가도 달으면서 끝내 40 리나 떨어진 집으로 돌아왔다. 덕돌은 연 며칠 동안 반도체조립수책을 보면서 비닐판에 송곳으로 구멍 뚫고 부속품과 전자회로를 하나하나 아연으로 땜질 해 고정시켰다. 조립을 끝마치자 덕돌은 맑게 갠 날을 골라 자체로 조립한 반도체 라디오를 자전거에 싣고 동림과 함께 패용천산 기슭에까지 갔다. 그들은 자전거를 세워놓고 패용천산 꼭대기에 단숨에 톺아 올랐다. 그들은 연 쇠줄로 소나무와 소나무 사이에 안테나를 늘여 반도체라디오에 연결시켜 놓았다. 덕돌은 두근두근 거리는 가슴을 억지로 진정시키며 자작 반도체 라디오에 전지약을 꽂고 보름을 똑 켜 돌리며 높였다. 순간 기적이 일어났다. “쌕-” 무선전 전파소리가 났다. 덕돌이 가변저항기를 돌리자 확성기에서 여아나운서와 남아나운서의 목소리가 엇갈아 똑똑히 울리지 않겠는가! “연변인민방송입니다.” “연변인민방송입니다.” 뒤이어 혁명적 본보기극 “흥등기”를 보내드리는 것이었다. 덕돌은 너무 기뻐 패용천산 꼭대기에서 하늘을 향해 두 손을 쫙 펴들고 목청을 가다듬어 고함쳤다. “성공했다! 내가 반도체 라디오를 조립해냈다!” 덕돌은 너무 기뻐 패용천산 꼭대기 벼랑 위에서 곤두박질을 몇 번이고 했다. 세상에 못해낼 일이 있는 것 같지 않은 꿈도 많은 랑만의 시절이었다. 패용천산 꼭대기에서는 덕돌이 조립한 반도체 라디오의 맑은 방송소리가 정답게 울렸다. 저녁에는 라디오 하나도 없는 마을의 이집 저집에서 그의 반도체 라디오 소리가 울렸다. 온 마을에서 돌아가면서 그 반도체 라디오를 들었고 나중에는 조대덕 생산대 회의실에서 전체 사원들이 듣기까지 했다. 여기저기서 덕돌에게 엄지를 내두르며 혀를 끌끌 찼다. “정말 괴상한 애오!” “어쩜 반도체를 다 조립하오?” “이담 농촌에서 살 애가 아니오.” 회의실에서는 반도체 라디오에서 밤중까지 방송소리가 맑게 울렸다. 다만 우리 조선족들에게 맞지 않는 “둥, 등, 등, 창!” 하며 울리는 본보기극 “홍등기”의 노래 소리가 귀맛을 잃어 아쉬웠을 뿐이었다.           9. 혼돈시대 비극 흐리터분한 하늘은 개일 듯 말듯 하면서 지지리도 개일 줄을 모르고 대지를 침침하게 짓눌렀다. 하늘의 여기저기 구멍이 펑펑 뚫리더니 먹장구름 속에서 가느다란 해 빛이 전지 불처럼 애처롭게 대지를 비추었다. 겨울을 앞둔 패용천산 벼랑 위에는 단풍이 빨갛게 물들었다. 패용천산 기슭 과수원에는 다락 밭을 만드는 일터에는 붉은 기가 펄펄 휘날리었다. 상순은 사원들을 데리고 패용천산 벼랑의 돌을 캐다가 무너진 과수원 다락 밭에 돌 둑을 쌓았다. 허나 종연 대신 대대 혁명위원회 주임으로 된 흥수는 득의양양해 대대 사무실에서 뒤지개를 짓고 왔다갔다 거닐면서 두덜거리었다. “상순은 대체 무슨 궁리를 하는지 모르겠어. 대채 전을 하는데 앞장서? 이전엔 다락 밭의 돌을 허물어 ‘모 주석 만세!’를 새긴다고 야단치더니. 별일이야.” 그는 주춤 멈춰 서더니 손을 휘둘렀다. “그래, 바로 그거야. 자기가 쌓은 과수원 다락 밭 언제를 제대로 만들어 놓기 위한 거야.” 며칠 후 공사 혁명위원회 주임으로 헬기를 타고 직상승한 종연이 잣대를 든 검사소조 일꾼들을 데리고 찌프를 타고 대대 사무실에 나타났다. 그는 흥수를 보자마자 입당소개인이라는 것도 잊은 듯이 훈계부터 시작했다. “함흥 대대에서 대채 전을 몇 헥타르 했소? 사원들은 ‘농업에서 대채를 따라 배우라.’는 모 주석의 지시에 호응해 대채전을 하느라고 눈코 뜰 새 없는데. 흥! 대대 혁명위원회 주임이 사무실에서 빈들거리다니? 쳇!” 그러자 흥수는 종연의 퉁퉁한 낯을 쳐다보다가 “미안하오. 내 밭으로 나가봐야 하겠소.”라고 하며 문 밖으로 나서려다가 돌아섰다. “공사 검사소조에서 왔을 때 반영할 일이 있네. 저 조개덕 생산 대 김 대장이 말이 아닌기여. 정치 수요에 의해 패용천산 과수원 다락 밭에 돌둑을 쌓네 하더니 계수동과 상우지 밭에 대채대대처럼 다락 밭을 만드는 걸 한사코 반대해서 우리 대대 대채전 면적을 완수할 거 같지 않아.” 종연은 검사소조 일꾼들을 둘러보면서 지시했다. “빨리 조개덕에 가서 김 대장을 혼쭐 내주게. 그 영감은 통 말이 들어가지 않아. 고집불통이야. 계급투쟁을 기본 고리로 혁명을 틀어쥐라면 뭐 벽돌공장이요, 양봉장이요 꾸리더니 이번엔 대채 전을 만드는 걸 방해한단 말이오. 정 안되면 파출소 경찰들을 불러다 위협하오. 이게 목전 농촌 정치란 말이오.” 그 말에 흥수는 어깨가 으쓱해 검사소조를 데리고 조개덕으로 달려갔다. 대대 사무실이 조용해지자 종연은 토성 안을 한 바퀴 삑 돌아보았다. 토성 안에는 위생소의 맨발의사 송선 밖에 없었다. 종연은 한숨을 후 내쉬더니 구렁이처럼 위생소에 슬쩍 기어들어갔다. 순간 주사기를 소독하던 송선은 깜짝 놀라 옴찔했다. “누구라고? 놀라 간 다 떨어지겠어요.” 송선이 눈을 곱게 흘기는 모습을 보고 종연은 온 몸에 욕정이 용암처럼 부글부글 끓어번졌다. 그 이글거리는 욕정의 용암은 어데라도 닿으면 당장 타 버릴 것만 같았다. 허나 종연은 20대 중반의 나이와는 달리 아주 노련한 늑대처럼 위생소 안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송선에게 지분거렸다. “저명한 무용수, 의사질하느라고 수고 많소.” “다 이 치보, 아니, 황주임 덕분이지요.” “걸 아오?” “…” “이전에도 말했지만 내 한마디면 송선 동무를 훅 날려 보낼 수도 있고 또 위생소 소장으로 만들 수도 있단 말이오." 송선은 못 들은 척 하고 입에 빗장을 지른 채 주사기 소독만 하고 있었다. 소귀에 경 읽기처럼 멋 적은 느낌을 받은 종연은 뒤로 슬금슬금 다가갔다. 송선은 온 몸에 소름이 끼치면서도 주사기를 소독하는 척 했다. 그때 종연이 뒤에서 불시에 송선의 허리를 와락 끌어안았다. “왜 이래요? 열 살이나 이상 되는 사람과 버릇없이 이게 뭐요?" 뜻밖에도 송선은 몸부림치며 돌아서더니 표독스럽게 쏘아보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대로 놓아줄 종연이 아니었다. 그는 다짜고짜 송선을 마구 안고 침대 쪽으로 떠밀고 가서 쓰러 눕혔다. “이걸 놔라! 소리치겠다! 아유, 이 짐승 같은 놈아! 승냥이야!” 송선은 마구 발버둥질 치며 고함쳤다. 종연은 징글스럽게 웃으며 송선의 얼굴을 마구 뻑뻑 빨고 개처럼 핥아댔다. “미녀무용수, 그대에게 난 미쳤어. 세상 둘도 없는 미인을 놔둘 거 같아?” 송선은 가슴에 손을 마구 넣어 매만지는 종연의 손을 마구 막으며 단말마적으로 반항했다. “사람 살리오! 사람…” 당황해난 종연은 황급히 오른손으로 송선의 입을 틀어막았다. 이때 문소리가 덜컥 났다. 그제야 종연은 스르르 놓아주며 벌떡 일어났다. 그는 능청스럽게 헛소리를 쳐댔다. "김 맨발의사, 짧은 시간 내에 위생소 일을 배워서 참 잘 했소. 계속 잘하오." 송선도 남들의 눈이 두려워 아무 말도 더 하지 않았다. 종연이 스리슬쩍 주사실에서 나와 보니 정규상이 의사실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아니, 당신은 왜 위생소에 드나들면서 시끄럽게 구오?" 정규상은 알은체 하며 “이흥수 주임이 빈농들의 병을 봐달라고 해서 다시 들어왔소.”라고 했다. "뭐라고? 이 서기는 제 마음대로 하는구먼. 내 함흥촌을 떠나간지 며칠이 됐다고 우파를 위생소에 끌어들여? 돼지 똥이나 모으라." 허나 정규상은 못 들은 척 하면서 의사사무실에 들어가 의서를 보는 것이었다. “정 의사를 놔두세요. 그가 없이 어떻게 환자를 봐요?” 송선이 뒤따라 나오면서 우는 상을 짓자 종연은 콧방귀를 뀌었다. “맨발의사라는 게 환자도 보지 못하오?” “감기 같은 거야 주사를 놓거나 정통편 몇 알을 주면 되겠지만요. 이제 겨울철에 들어서면 기관지염이나 폐 염 같은 중병이 돌면 정 의사 없어서야 됩니까?” 허나 종연은 대수로워 하지 않았다. “중병환자가 생기면 공사병원에 올려 보내면 되지.” 종연은 두덜거리며 나가려다가 정의사와 송선을 번갈아 보면서 속으로 혹시 저것들이 서로 좋아하지 않는가는 의심이 부쩍 들었다. 허나 송선의 말대로 위생소에서 윤희와 박영발이 떠나간 후 정규상이 없으면 될 것 같지도 않았다. 다만 흥수가 자기 비준도 없이 정 의사를 위생소에 들여앉힌 것만은 속에 내려가지 않았다. 황종연은 괘씸했으나 별 수 없었다. 토성 안 위생소 앞마당에서 찌프가 부르릉 엔진소리를 요란히 냈다. 찌프는 먼지를 새뽀얗게 일구며 토성 안을 벗어나 곧추 패용천산으로 달려갔다. 황종연이 패용천산 기슭에 이르러 찌프에서 내려 산비탈 밭을 바라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대채 전 같은 다락 밭은 근근이 가파른 과수원에 얼기설기 뻗어 있을 뿐 다른 산비탈에는 찾아 볼 수 없었다. “함흥 대대는 말이 아니구먼!” 종연은 틀스레 뒤짐을 짚고 숱한 사원들이 일하는 비탈 밭으로 올라갔다. 숱한 사원들이 모두 일하지 않고 상순과 흥수가 뭐라고 다투는 것을 구경하는 것이었다. “이게 뭐요?! 모두 일하지 않고!” 종연이 나타나자 흥수는 우쭐해 상순을 손가락질을 하며 야단쳤다. “김 대장은 말이 아니야! 우리 대대 대채 전 면적이 적은 건 다 이 김 대장 탓이야!” 상순은 종연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그래 평평한 밭을 다락밭으로 만들어 못쓰게 만들 게 뭐요?" "모 주석께서 '농업에서 대채를 따라 배우라.'고 한 최고지시를 반대하오?" “누가 반대하오? 과수원 같이 가파른 밭에는 다락 밭을 만들면 수토유실도 막고 좋단 말이오. 허나 평평한 밭을 파서 우정 다락 밭을 만들어 뭘 하오? 손바닥만한 밭이라도 더 일구지 못해 그러는데 뭐요? 숱한 뚝을 만들어 밭 면적을 하나라도 줄일 게 뭐요? 황차 검은 점토를 파서 둑을 쌓고 누런 생흙이 드러나 어떻게 생흙에 곡식을 심어 먹소? 정말 농사를 지은 사람 같지 않소. 우의 지시를 영활하게 집행해야 하지. 그저 밭도 살펴보지 않고 대채 전 면적만 늘여서 되오?!” 그 말에 사원들은 모두 머리를 끄덕이며 수군거리었다. 그러자 종연과 흥수는 서로 눈치를 마주 보면서도 할 말이 없었다. 한참 후에야 종연이 퉁퉁한 낯에 살기등등해 입을 열었다. “상급에서 하라면 할 게지. 무슨 잔소리가 이리 많습니까? 가만 보니 함흥대대 대채 전 문제는 지도부의 사상인식문제구먼. 허허. 이거 참. 대채 전 면적을 검사소조에서 검사해보면 어느 대대 인식이 어떤가 알 수 있단 말이오." 그는 아주 역게 상순과 흥수 어느 쪽에도 서지 않았다. "먼저 사상인식을 바로 잡고 통일해야겠구먼. 상급에서 하라면 하시오. 이게 당전 농촌의 최대정치란 말입니다. 이 숱한 사람들이 하루에 한 헥타르도 대채전을 못하고서야 어찌 얼기 전에 대채 전을 다 만들겠소?" 그는 본보기극 "홍등기" 중의 주인공 리옥화처럼 높은 둔덕에 올라서더니 지도자 틀을 차리며 손까지 흔들어대면서 고래고래 고함쳤다. “날마다 한 헥타르씩 대채 전을 꼭 꼭 만드십시오. 상급에서 명령하면 무조건 해야 합니다.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면 정치책임을 추궁하겠습니다.”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다가 종연이 손을 홱 젓자 물을 뿌린 듯이 조용해졌다. 황종연은 개 잡은 포수처럼 우쭐해 고래고래 고함쳤다. “함흥 대대 이름부터 조선의 이름을 달아서야 되겠습니까? 이제부터 함흥대대는 5.7대대로 이름을 고쳐야 하겠습니다. 우리 대대에서 모주석의 5.7지시를 잘 호응해 대채전을 잘 만든다는 것을 보여줘야 하겠습니다. 대대 이름부터 5.7대대로 고치겠습니다. 함흥중학교 이름도 5.7중학교로 고치겠습니다.” 이계삼이 뒤에서 허영주를 마주 보면서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우에서 5.7간부학교를 꾸리더니 이젠 우리 대대마저 5.7대대로 바꿀 예산이구먼. 흥!” 허영주도 나직이 맞장구를 쳤다. “쳇, 죄꼬만 반란파 애가 올라가더니 온통 빨갛게 물들이는 판이구먼. 어쩜 삐뚠 정치를 해도 저렇게 하오?” 상순은 어이없어 종연을 쏘아보았다. “우리 대대 이름을 고치지 못하오. 이 함흥촌은 우리 조상들이 정든 고향을 떠나 쪽박을 차고 이 고장에 온 후 개척한 마을이오. 모두 고향을 그리는 마음을 담아 함흥촌이라고 이름을 달았소. 헌데 젊은이들이 과거 전통을 모르고 이러는 건 틀리오.” 종연은 목에 지렁이 같은 핏줄을 세우고 을러멨다. “영감이, 뭘 알아 처처에서 혁명을 반대한단 말인가? 공사당위 서기이신 내가 고친다고 하셨으면 고치는 거지. 오늘부터 5.7대대, 5.7중학교로 부르라. 누가 반대하면 누굴 투쟁하겠소." 허나 여기저기서 계속 웅성거렸다. 이계삼과 허영주의 격분한 눈길까지 부딪치자 종연은 감히 상순을 건드리지 못하고 화제를 돌렸다. “오래지 않으면 눈이 내리겠는데 모두들 다그쳐 대채전을 만드십시오. 하루에 한 헥타르씩은 해야 임무를 완수합니다. 지금 함흥대대, 아니, 5.7대대는 대채전 만들기 전역에서 제일 꼴찌입니다.” 허나 상순은 종연이가 비판한다고 해도 결코 시비에 지고 말 사람이 아니었다. 할 말은 해야 했다. “채 걷어 들이지 못한 곡식이 가득한데 언제 평지에까지 다락 밭을 만드오? 이제 곡식을 눈 밑에 파묻으면 나라에 어찌 애국 곡식을 바치겠소? 사원들은 또 허리띠를 졸라매고 살라오? 좀 엄동설한에 한지에 방아를 걸 소릴 작작 치오!” 종연은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김 대장은 언제부터 정치는 불문하고 생산 밖에 모르는 사람으로 됐습니까? 공안국 국장까지 해본 사람 같지도 않게. 쯧쯧쯧.” 그러자 상순은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았다. “종연아, 개구리로 됐노라고 올챙이 때를 잊어선 안 된다. 지금 누구 앞에서 버릇없이 빈정거리느냐?” “뭣이랍니까?!” 종연은 숱한 사람들 앞에서 자존심이 꺾였지만 더 망신당할 것 같아 네모난 낯이 수수떡처럼 지지벌개 자리를 떴다. “어디 두고 봅시다! 흥!” (어 참, 오늘은 재수 없어. 송선과 상순에게 연속 당하고!) 종연은 더 할 말이 없다는 듯이 뒤지개를 짚고 둔덕에서 내려 공사 검사소조를 데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휑하니 산 아래로 내려갔다. 이계삼과 허영주는 속이 시원해 희죽이 웃었다. 종연도 상순을 어쩌지 못하자 흥수는 상순과 이계삼의 눈치를 흘금거리다가 종연의 꽁무니를 따라 달려 내려갔다. “황 주임, 황 주임!” “어째?” “회보할 일이 있네.” 종연은 홱 돌아섰다. “뭘?” 흥수는 머리를 되돌려 상순이네와 멀리 떨어진 것을 확인한 후에야 조개턱을 들더니 입을 열었다. “저 김 대장네 말이 아니네. 아비는 대채 전에 소극적이고 아들은 나서서 자기 아비 한 일을 방송에까지 내면서 야단이란 말이제이.” “무스 거(뭘)?” 황종연은 금방 잠에서 깨난 사람처럼 어리둥절해 했다. “어째 아직도 몰라? 덕돌은 조개덕 생산 대에서 벽돌공장을 꾸려 새 농촌건설을 잘 했다고 부쩍 춰올리는 글을 써서 공사 방송에까지 냈제이. 사원들이 다 듣고 덕돌을 그 아비에 그 아들이라고 하늘 공중에 뜨게 춰 올렸다니까.” “허, 세상에, 덕돌이 말성꾼이더구먼, 벌써 그렇게 컸는가?” “허, 정말, 황서기도 희구해 하는 거 같네 그려.” “이 서기, 나처럼 발랑거리던 애들이 이담 큰 일을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반란 파들이 득세하는 세월이니까. 반란에 도리가 있지.” 종연은 대대 혁명위원회 주임을 할 때 상순이가 벽돌공장을 꾸려 대대 사무실을 짓고 새 벽돌집을 지어 사원들을 들게 한 성과를 자기 성과로 만들어 공사 파출소 소장으로 올라갔고 이젠 공사당위 서기 겸 혁명위원회 주임으로 됐다. 그 사실을 흥수도 알고도 남음이 있었다. 황종연은 흥수의 외까풀 눈을 되돌아보며 물었다. “정규상, 그 우파는 어째 위생소에 들여보냈습니까?” “누가 병을 보겠어? 송선은 춤이나 잘 추겠지만 병이야 볼 수 있나?” 순간 종연은 금방 위생소에서 당한 일이 떠올라 가만 놔둘 수 없어 한입 꽉 깨물었다. “송선을 어찌 위생소에 계속 둔단 말입니까? 대채전을 하는 공지에나 보내시오. 위생소에는 정의사만 있어도 됩니다.” “불시에 왜?” “병도 볼 줄 모르는 여자를 위생소에 둬서 뭘 하오?” 흥수는 코웃음이 킬 나왔다. 하마터면 종연의 앞에서 콧물까지 튕길 번했다. (이 자식이 송선에게 코를 떼인 모양이구나. 안 글면 자기가 금방 위생소에 걷어 넣고 또 내치려 하겠나?) 흥수는 늙은 여우어서 인차 종연의 심사를 꿰뚫어보았던 것이다. (자식, 아직 이 어른도 송선이, 그 미녀를 먹어보지 못했어. 네가 제 어미 벌 되는 송선에게 다 눈독 들여? 더러운 놈 새끼.) 흥수는 종연이 찌프를 타고 먼지를 새뽀얗게 일구면서 떠나 가버리자 인차 토성 안에 들어가 위생소 문을 떼고 들어섰다. “이 주임, 어떻게 돼 오셨어요?” 송선은 흥수를 보자 인사했다. 그 목소리 어찌나 부드러운지 한쪽 간이 다 녹아떨어질 지경이었다. 흥수는 돌아서서 환자에게 주사를 놓는 송선의 뒷모습을 보면서 마른 침을 꼴깍 삼키었다. 하얀 위생복을 입은 탄력 있는 엉덩이를 보는 순간 흥수는 온 몸에 정욕이 끓어 사품 치는 것을 어찌 할 수 없어 온 몸을 바르르 떨었다.습관처럼 박죽코가 벌써 지지벌개졌다. “음, 어험.” 흥수는 환자가 일어나 가기를 기다려 주사실 문을 걸고 송선에게 다가섰다. “에헴, 송선이, 이제 금방 황주임이 동무 땜에 나하고 노발대발 하고 갔어.” “예?” (아무려면 이 영감과 말했을까?) 흥수는 적이 놀라는 눈치인 송선을 흘금 곁눈질하더니 창밖을 내다보았다. “황주임은 저를 대채전을 만드는 공지에 내보내라고 하더구먼.” 송선은 주사기를 씻어 소독 가마에 넣으면서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흥수는 이때라고 생각하고 창문 카텐을 주르륵 닫아버리고 송선에게 돌아섰다. 새파랗게 질린 송선의 얼굴을 보는 순간 박윤희처럼 마구 끌어안고 우유 빛처럼 하얀 얼굴이고 말랑말랑한 가슴이고 마구 빨고 핥아주고 싶었다. 허나 마른 나무 꺾듯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잘 아는 흥수였다. 마른 침을 꿀꺽 삼키면서 억지로 가까스로 눅잦히며 다가섰다. “송선이, 내 말만 고분고분 들어. 글면 황주임이 아무리 어쩔락꼬 해도 내 말이면 다야. 박윤희랑 어떻게 올라갔는지 알아? 이 복잡한 세월에 무슨 재간에 코신부대 부녀대장이 3년 만에 현행반혁명 모자를 벗고 시내 병원으로 돌아갔겠어?” 슬슬 구슬리며 흥수는 송선의 뒤로 가서 허리를 끌어안고 가슴에 손이 쑥 들어갔다. 탄력 있는 따뜻한 가슴을 움켜쥐는 순간 온몸이 전율했다. 허나 뜻밖에도 송선이 홱 돌아서며 몸부림쳤다. 찰싹! “개 같은 놈새끼! 나를 어떻게 보고 감히 이 지랄이냐?!” 뜻밖에 귀 쌈까지 한 대 얻어맞은 흥수는 개꼴 망신을 당했다. “좋다, 좋아!” 흥수는 분통이 터져 주사실 문고리를 쥐고 을러멨다. “좋다, 좋아! 권하는 술을 마시지 않고 어디 벌주를 마셔봐! 내일부터 당장 조개덕 생산대에 내려가 곡식 실어들여! 네 년, 노동개조하면서 혼 나봐야 순종할 거냐! 이 함흥 대대, 아니, 5.7 대대에서 나를 모르고 네까짓 거 개똥이나 생길 거 같아?! 흥!” 흥수가 주사실 문을 쾅 닫고 나간 후 송선은 어깨를 들먹이며 흐느껴 울었다. 건너 칸에 있는 정규상은 벽 너머 이쪽 칸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대개 짐작하고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었다. 그는 의사 사무실에서 흐리터분한 하늘에서 무너져 내리는 듯이 푸실푸실 내리는 눈송이들을 내다보며 중얼거리었다. “언제 이놈의 암흑한 세월이 끝날까?” 이튿날 아침 송선은 위생소에서 쫓기어 나와 조개덕 생산 대로 내려왔다. 상순은 일 포치를 받으러 회의실에 들어서는 송선을 보고 놀라했다. “어째 위생소에 가지 않고 여기 왔소?” “이흥수 주임이 노동개조해랐어요. 차라리 잘 됐어요. 위생소에서 굴욕을 당하기보다 대전에 나가 일을 왕왕 했으면 속이 덜 탈 거 같아요. 아무 일이나 시키세요.” 상순은 송선의 여린 몸을 보며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었다. “어떻게 일하겠소?” 상순은 한참이나 눈을 지그시 내리감고 앉아 궁리했다. 이윽고 그는 머리를 들더니 상의조로 물었다. “대전 일이야 어떻게 그 약한 몸으로 하겠소? 우사에서 돼지죽이나 끓여 먹이면 어떻소?”   송선이 반색을 하면서 “고맙습니다. 해보지요.”라고 했다. “안돼!” 이때 별안간 회의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흥수가 조개턱을 쳐들고 뛰어 들어오며 고함쳤다. 그는 낯이 퍼래 뎅뎅해 왁작 고아댔다. “노동개조를 시킬 년을 슬슬 어루만져서야 되는가? 오늘부터 눈 속에 가서 소 수레로 곡식을 실어들이란 말이야! 이건 공사 황주임과 대대 혁명위원회 주임인 내 결정이야! 누가 감히 뜯어고쳐?!” 상순은 어처구니없어 푸 하고 코웃음을 참지 못해 콧물과 침방울까지 튕겼다. “바로 대왕페하의 명이겠구먼. 별 것들이 다.” 그는 흥수를 멸시하는 눈길로 쏘아보며 일을 포치했다. “여긴 조개덕 생산대지. 당신들 5.7대대가 아니오. 김송선 동문 오늘부터 우리 생산대 돼지 사양원이오. 누구도 다치지 못하오.” “조개덕 생산 대는 그래 우리 5.7대대 생산 대 아니고 하늘에서 뚝 떨어진 생산대오?‘ 흥수도 숱한 사원들 앞에서 지려고 하지 않았다. “현행반혁명분자 송선은 오늘부터 소 수레로 곡식을 실어 들여! 내 말을 듣겠는가? 듣지 않겐?!” 상순은 코웃음 쳤다. “이 주임은 농사를 지어 본 사람 같지 않구먼.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는데 싣걱질을 어떻게 하오?” “저런 노동개조범에겐 눈 내리는 날에 싣걱질을 시켜 혼내야 돼! 김 대장은 왜 처처에서 나와 맞서? 어제는 대채전을 하지 못하게 하더니 오늘은 또 현행반혁명분자를 노동개조를 시키지 못하게 보황 파로 나서는 거야?!” 상순이 뭐라고 반박하려는데 송선이 썩 나섰다. “해 보겠습니다. 다 사람이 하는 일이겠지요.” 상순은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사람이나 소나 다 죽이겠소? 안 되오." 그는 흥수를 소아보았다. "어째 이전에 윤희 간호사를 혼내던 것처럼 혼내자고 그러오? 사람이. 원, 이 주임은 황주임처럼 철부지애도 아닌데 왜 그리 철이 없이 노오?” 항일전쟁시기로부터 해방전쟁, 항미원조 전쟁 기간과 해방 후에 오래 동안 부대와 공안국에서 지도사업을 해온 상순의 눈을 속일 수 있겠는가? 상순은 이미 황종연과 흥수의 더러운 소박치를 속속들이 꿰뚫어보고 있었다. 허나 근거를 잡지 못해 잠시 가만 놔두고 있었다. 이때 흥수의 동생 학수도 말리었다. “흥수, 그만 둬. 이 눈 가슴에 어데 가서 곡식을 실어 들인다고 그래? 사람이 도리 있게 놀아. 괜히 인심을 잃지 말고!” 성수도 못 마땅한 눈길로 흥수를 바라보며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숱한 사원들 앞에서 흥수는 더 창피당할 수 없었다. 그는 사원들을 둘러보더니 불시에 목에 핏대를 세우고 고함쳤다. “지금부터 현행반혁명분자 순선의 투쟁대회를 하겠수.” 송선은 흥수를 흘겨보았다. 눈귀에서 “별 더러운 새끼!” 하는 표정이 흘렀다. “뭐라오?” 상순은 너무 어처구니없어 회의실 문을 쾅 걷어차고 나가버리었다. 흥수는 상순이 가겠으면 가고 놔버리고 송선에게 도끼눈을 날렸다. “반혁명분자 송선은 앞에 나섯!” 누구의 명이라고 나서지 않고 배기겠는가. 대대 혁명위원회 주임이자 치보 주임인 흥수가 아닌가. 사원들은 흥수의 눈치를 흘금흘금 보며 웅성거리며 송선의 앞에 모여섰다. 흥수는 개 잡은 포수처럼 우쭐거리며 고래고래 고함쳤다. “현행반혁명분자 송선은 우리 함흥대대, 아니, 5.7대대에 온 후 개조 표현이 나쁘다. 위생소에 떡 들어앉아 해놓은 일이 뭔가? 의료지식이 없어 병도 제대로 보지 못했다. 대대 혁명위원회 주임의 말도 제대로, 엉, 험.” 흥수는 말 뒤끝을 얼버무리며 마른기침을 깇었다. 자기 말을 잘 듣지 않은 게 주요 투쟁내용을 만들면 꼬리가 드러날 것 같았던 것이다. 그는 인차 투쟁내용을 바꿨다. “저 년 발을 보슈. 이게 어느 때락꼬(때라고) 코신을 신고 다니오? 조선족들 코신을 보고 문화대혁명 시기에 코신 코가 오똑 일어선 건 조선족들이 독립하려고 만든 게라고 하지 않았소? 독립왕국을 진짜 꾸리려는 건가? 그런데 아직도 코신 신고 다녀. 이제부터 우리 대대 조선족들은 코가 오똑한 코신을 신지 못해. 괜히 독립왕국을 꾸리련다는 혐의를 쓰지 말라고.” 그때 박성근의 아들 숭길이 물었다. “그래 이제부터 조선족들은 무슨 신을 신어야 하오?” “우파 애비에 그 아들이구나. 코가 없는 검정고무신을 신으라고!” 사원들 속에서 웅성거렸다. "어떻게 검정고무신을 신고 다니오?” "보기 싫게스리." 흥수는 숭길을 외까풀 눈으로 쏘아보았다. “이 놈들아! 말조심해! 괜히 숭길이 아비 성근처럼 우파 모자를 쓸란다(쓰갰다).” 숭길은 혀를 홀랑 내밀더니 사원들 속으로 뒤로 물러섰다. 흥수는 건가래를 떼더니 계속 송선을 투쟁했다. “상모춤은 항상 머리를 가로 돌리지 않아? 문공단 상모춤 추는 걸 보고 우리 반란파 두목, 아니, 반란파 책임자 모원신, 아니, 이씨께선 저게 당과 사회주의가 나쁘다고 머리를 가로 젓는 게 아닌가고 비평한 적이 있어. 그런데도 현행반혁명분자 송선은 우리 대대에 온 첫날부터 상모춤을 추었고 우리 대대 문예선전대를 데리고 계속 머리를 가로 젓는 상모춤을 췄네. 왜 혁명적 본보기극을 내놓고 항상 우리 조선족들의 케케 묵어빠진 상모춤만 춰? 이게 모주석의 문예노선을 반대하는 게 아니고 뭔가? 이전에도 송선은 문공단에서 수정주의 물건짝들을 극력 주장하고 자본주의 썩어빠진 생활방식을 선전했지. 예, 글케(그렇게) 돼 현행반혁명 모자를 쓰고 우리 대대에 노동개조를 하러 내려왔는기여. 개조 표현이 아주 나쁘단 말이오.” 그때 이계삼은 옆에서 허영주가 한어로 통역해주는 말을 듣고 손사래를 쳤다. “아니오. 반대의견이 있소. 우리 한족간부들이라고 다 상모춤을 반대한 건 아니오. 상모 춤은 문화대혁명 전에도 조선족들이 즐겨 춘 춤이오. 지어 항일전쟁 때에도 풍년 든 농촌에서 상모 춤을 추었소. 내 알건대 상모춤은 예로부터 조선족들이 즐겨 춘 전통춤이오. 상모 춤이 본래 긴 댕기를 돌리느라고 머리를 돌린 거지. 당과 사회주의를 부정해 머리를 가로 흔든 게 아니오. 송선 동무를 너무 혹독하게 굴지 마라…” “뭘 알아 삐쳐?! 늙어 빠진 영감이, 어째 투쟁받기 싶어?” 흥수가 악을 딱딱 썼지만 허영주까지 나섰다. “상모춤을 췄다고 비판, 투쟁하는 건 잘못이오. 쩍 하면 우파요, 현행반혁명이라고 억울한 모자를 씌우는 건 착오란 말이요.”   그 바람에 회의실은 송선의 투쟁대회인 것이 아니라 흥수를 공소하는 공소마당처럼 돼버렸다. 흥수는 사원들마저 웅성거리자 회의를 부랴부랴 끝마쳤다. “모두 일이 바쁘겠는뎁쇼(데요). 오늘 회의 이만. 모두 일하러들 가라고.” 말을 마치자 흥수는 회의실 문을 쾅 걷어차고 나가 버렸다. 그가 맥없이 조개덕을 떠나 펑펑 쏟아지는 눈을 맞으며 한족묘지꺼리를 지나 함흥대대 마을로 올라갔을 때다. 지춘실이 눈 속을 헤치며 헐레벌떡 달려와 죽는 상을 했다. “여보, 어데 갔소? 해월이 다 죽어 가는데.” “뭐라고? 해월인 왜 갑자기?” “걔가 자꾸 골이 아프다고 했잖소? 그런데 골암이라오.” 춘실이 울상을 했다. “뭐라고? 누가 암이랬어?” 흥수는 믿어지지 않아 머리를 절레절레 가로 흔들었다. 춘실은 죽어가는 소리를 질렀다. “아이고, 정의사 진단했소. 골에 암 덩어리 생겼다고.” “정 우파 노동개조 하고 싶어 지랄이야. 누굴 위협해? 어림도 없어. 펀펀한 애가 어떻게 골암 걸려?” 춘실은 흥수의 가슴츠레 뜬 외까풀 눈에 삿대질을 해댔다. “어이구, 어이구, 정의사가 누구요? 시내에서도 이름난 의학교수야, 교수. 정 교수가 틀림없이 암이라는데.” 그제야 흥수는 울상을 지으면서 토성 동쪽을 굽이돌아 황급히 집으로 달려갔다. 그가 집안에 들어가 보니  해월이 머리를 붙안고 뺑뺑 맴돌고 있었다. “얘, 해월아, 아이고, 내 귀여운 막내딸아, 어디 아프니? 어디 보자.” 흥수는 구들에 올라가자마자 해월을 끌어안고 머리를 매만지면서 눈물을 흘렸다. “이게 무슨 날벼락인고? 아이고, 내 딸아.” “작작 남과 악한 짓 하오! 죄를 만나지 말게.” “뭐, 이 년아? 내가 악해 해월이 암에 걸렸어?” 울던 해월은 아버지를 활 밀어놓으며 야단쳤다. “뭐라고? 내가 암에 걸렸어?  아직 시집도 가보지 못했는데 암에 걸려 죽어? 아이고, 엄마, 난 사랑하는 사람을 가슴에 품고 이날 이때까지 살았는데 어쩌오? 암에 걸려 그한테 시집가지도 못하고 죽게 생기지 않았소?” 춘실은 흥수에게 주먹을 내둘렀다. “쓸데없는 소리를 해서 애를 겁 먹이오?” 그녀는 눈물을 훔치면서 해월을 끌어안고 다독였다. “해월아, 넌 죽지 않는다. 마음에 드는 총각한테 꼭 시집 보내줄게.” “옳소.” 엄마의 그 말에 해월을 울음을 딱 그치더니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을 떴다. “엄마, 나도 아오. 오래 살지 못한다는 거, 골이 뜨끔뜨끔 빠개지는 거 같소. 난 덕돌을 사랑하오. 덕돌은 첫사랑이오. 덕돌한테 시집보내주오. 양? 내 죽기 전에 소원을 꺼주오.” “뭐라니?” “뭐? 누굴 사랑한다고?” 흥수와 춘실은 서로 마주 보며 덴겁해났다. 허나 해월의 철색얼굴에 헤 벌린 입에서 울리는 분명한 소리. “덕돌을 우리 집에 데려오오. 빨리, 난 그 애를 죽도록 사랑한단 말이오.” 춘실은 기막혀 입을 딱 벌렸다. “왜 하필이면 딱 덕돌이냐? 세상에 둘도 없는 발개돌이를.” 흥수는 어이없어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음~ 음, 세상 몹쓸 놈을 좋아해? 안된다, 안돼.” 해월은 또 머리를 붙안고 구들에 들누워 땔땔 굴며 떼를 썼다. “아버진 나빠, 무슨 원수 졌다고 항상 덕돌 아버지와 싸워? 난 덕돌 아버지 대공무사하고 사원들 잘 살게 하는 훌륭한 시아버지 감으로 보는데. 다시 덕돌 아버지를 노엽혀 봐라. 내 저 토성아래 우물에 빠져 저 앞집 덕성 할아버지처럼 죽어버리겠어. 당장 내 신랑 덕돌을 데려오오. 엉, 엉, 엉.” 춘실은 구들에 훌 물러앉아 엉덩방아를 찧으면서 난감해 했다. “이 일을 어쩌오? 하필이면 덕돌이야?” 토성 아랫집에서는 해월의 통곡소리와 어시들의 울음 섞인 난감한 목소리가 그칠 줄 몰랐다. 흥수는 토성 안에 달려가 정규상을 보자마자 두 손을 잡고 “제발 우리 해월을 살려주오.”라고 빌고 또 빌었다. 정규상은 항상 자기를 흘겨보던 흥수의 외까풀 눈을 눈귀로 쓸어보았다. “남과 작작 악한 짓 하오. 이계삼 서기랑 허영주 부현장이랑 내랑 작작 투쟁하고 비판하란 말이오.” 그러자 흥수는 머리를 숙이고 속으로 “바로 그거구나.” 하고 이를 갈았지만 겉으로는 인차 헤헤 웃었다. “아, 알았네. 해월이만 살려주게. 정 우파, 아, 아니, 정 교수님.”      규상은 못이기는 척 하면서 흥수네 집에 가서 진맥도 해보고 해월의 머리에 침도 놓아주었다. 이윽고 해월은 골을 붙잡고 울지 않고 누워 잠에 곯아떨어지는 것이었다. 후에도 정의사가 침을 놓고 약을 달여 먹이었더니 해월은 그때만은 골이 아프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한편 상순은 펀펀하던 해월이 불시에 암에 걸렸다는 말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는 토성 안 위생소에 들어가 정 의사에게 물었다. “해월이 암에 걸렸다는 말이 정말이오?” 그러자 정의사는 희죽이 웃으면서 입귀로 이런 말을 얼버무려 나직이 흘렸다. “차차 알게 될게요.” 상순은 한숨을 후 내쉬었다. “어쩜 귀여운 애가 암에 걸린단 말이오?” 그러자 정규상은 “암이란 것도 집안에 악한 사람이 있으면 걸리는 법이오.”라고 했다. 상순은 아무리 흥수가 악한 짓을 해도 해월이 암에 걸린 건 불쌍하고 동정심이 갔다. 상순은 성질이 팩하고 과격했지만 원래 동정심도 많고 심성이 착했다. 위생소에서 나온 그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수호와 상지민을 공안국 류치소에 가둬 두고 노동개조를 시키는 것이 일이 아니라고 생각됐다. 황련지는 굴내를 먹은 후 상순이네 집에 있으면서 정규상의 치료를 받고 많이 나았다. 하지만 쌀이 귀한 세월이라 옥수수쌀에 푸성귀나 겨우 먹으면서 영양보충을 제대로 하지 못해 몸을 인차 춰 세우지 못했다. 게다가 남편마저 감옥에 가 있기에 충격을 받아 심란해 건강이 의연히 좋지 못했다. 궁리 끝에 상순은 흥수와 토론하지도 않고 현 공안국 류치소에 찾아갔다. 그는 책임자를 만나 사정얘기를 죽 하고나서 “제가 잘 교육하지 못해 이렇게 됐습니다. 이제 우리 생산 대에서 책임지고 잘 교육하겠습니다. 황차 상지민과 수호는 모두 재교육대상이 아니고 뭡니까? 병을 치료해 사람을 구해야지 않겠습니까?”라고 했다. 그러자 한참 궁리하던 류치소의 책임자는 무거운 입을 뗐다. “현행반혁명을 어떻게 놔 보낸다고 그럽니까? 또 이 일은 저 혼자 결정할 수 없습니다. 황종연 상급 혁명위원회 주임과 물어봐야 합니다.” 상순은 어이없어 했다. “아니, 공안국과 법원에서 하는 일을 왜 혁명위원회에 물어봐야 하오.” “지금은 혁명위원회가 일체를 영도하지 않습니까? 법원과 공안국도 혁명위원회 주임의 지도를 받아야 합니다.” 이때 뜻밖에 사무실에 웬 중년 경찰간부가 들어왔다. 류치소 책임자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인사했다. “김 국장 왔습니까?” 그런데 그 김국장이란 경찰간부가 상순을 찬찬히 보더니 놀라했다. “아니, 김국장이 아닙니까?” 그 경찰간부는 상순을 보고 아주 반가와 했다. “아니, 누구던가? 면목은 좀 있는데.” 상순이 걸상에서 일어나며 어리벙벙해 하자 그 경찰간부는 상순의 두 손을 잡았다. “김 국장, 저는 영월구 공안국에 있을 때 치안과장을 하던 김창남입니다.” “어, 창남인가? 그래. 참 오랜만이구먼. 여기서 무슨 사업을 하오?” 그러자 류치소의 책임자가 “새로 전근해온 우리 공안국 부국장입니다.”라고 했다. 그러자 김창남 국장은 “그때 영월구 공안국에서 김국장이 과장으로 제발시키지 않았더라면 오늘 제가 이 자리에 있겠습니까?”라고 하며 이왕지사를 이야기하며 감구지회에 잠겼다. 한참 후 상순은 창남 국장을 보고 부탁했다. “마침 잘 됐소. 우리 대 상지민과 수호 문제로 찾아왔는데 우리 생산 대에서 교육하게 놔주오.” 김창남 국장은 궁리하더니 결단성 있게 대답했다. “좋습니다. 아직 상지민과 수호네는 나이 어려서 일시 잘못했기에 적아모순까지는 아닙니다. 아무튼 병을 치료해 사람을 구하는 것이 우리 무산계급 전정의 목적이 아니겠습니까? 빈농이 없으면 혁명도 없습니다. 우린 김 국장을 믿고 그 애들을 내보내겠습니다. 1년 동안만 지방 관제를 합시다. 그래도 개조하지 못하면 다시 류치소에 데려오든지 그때에 가서 봅시다.” “감사하오. 꼭 책임지고 잘 교육하겠소.” 그러나 류치소 책임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김창남 국장을 바라보면서 근심했다. “김 국장, 황주임한테 회보하지 않고 되겠습니까?” “류치소 노동개조 대상은 뭐 법원에서 판결한 범죄자도 아니고 정치사상개조 대상이기에 우리 공안국에서 결정할 수 있소. 어떻게 사사건건 다 황주임에게 회보하겠소? 이 김 대장은 영월구 공안국 국장을 한 분이오. 근심 말고 내보내오. 사상 개조가 목적이지 류치소에 가두는 것이 목적이 아니오. 내보내는 게 그들의 개조에 유리하오. 류치소에 가둬두면 그들은 개조는커녕 사회에 악감을 가질 수도 있소.” “예, 알았습니다.” 그 책임자도 더 말하지 않았다. 그날로 상순은 류치소에서 상지민과 수호를 데리고 나왔다. 그들은 숱한 행인들이 오가는 큰 길에서 오래간만에 만난 부모 자식처럼 서로 끌어안고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상순은 아주 거뿐한 마음으로 그들 둘을 소수레에 싣고 마을로 돌아왔다. 수호는 상순이네 집에 와서 아내 황련지를 보는 순간 와락 끌어안고 엉엉 울었다. 뒤이어 황련지에게서 자초지종을 듣고 그간 자기 아내를 친딸처럼 보살펴준 상순에 일가에게 절을 하며 감사를 드렸다. “정말 감사합니다. 제가 꼭 노동을 잘해 김대장이 시름 놓는 훌륭한 지식청년으로 되겠습니다.” 상지민도 상순의 인정미에 눈물을 흘렸다. “김 대장은 우리 상해지식청년들의 친부모와 같은 분입니다. 우린 김 대장의 얼굴을 봐서라도 다신 말썽을 일으키지 않겠습니다.” 상순은 상지민과 수호네 부부를 친자식처럼 자기 집에서 계속 묵게 하면서 이제 봄이 돌아오면 집체 호와 수호네 집을 벽돌집으로 지어주겠다고 사원대회에서 결정했다. 그리하여 수호와 상지민, 황련지는 마을에 마음을 붙일 수 있게 됐다. 다른 상해지식청년들도 감동돼 상순의 말이라면 아주 잘 들었다. 상지민은 덕돌을 보고 “만약 누가 너를 업신여기기만 하면 말해라. 내 싹쓸이를 해 줄테다.”라고 했다. 덕돌은 상지민의 외국인 같은 쌍까풀 눈을 쳐다보았다. “감사하오, 상해 형님.”  덕돌은 상지민 형님이 싸움꾼 친구가 몇 십 명이 나 되는 우두머리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어 피뜩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상지민 형님, 한 가지 도와주겠소?” “뭘? 말해라. 도와줄게.” 덕돌은 자기 집 주위를 둘러보며 나직이 말했다. “이건 우리 아버지 알면 안 되오.” “그렇게 심각해?” “양.” “대체 뭔데?” 덕돌은 상지민을 한쪽으로 팔소매를 끌고 가서 말했다. “형님에게서 상해 권투나 무술을 배우고 싶소. 형님네 상해로 간 다음에 내 맞아대면 누구한테 말하겠소?” “음, 그것도 맞아. 내 오늘부터 상해 권투와 검술을 배워 줄게.” 말을 마치자 상지민은 덕돌을 데리고 상해집체호로 갔다. 그는 침실에 들어가 침대 밑에서 시퍼런 대도를 꺼내 찌르고 찍고 쒹쒹 휘둘러보였다. “어때? 배울래?” “양, 그리고 형님, 형님은 외국어랑 잘 한다던데. 내께 일어를 좀 배워주겠소?” “응? 걸 배워 뭘 해? 괜히 소문나면 나처럼 비판 받자고? 뭐, 서양의 달이 더 밝다 했다고.” “겁나지 않소. 누구도 모르는 일어를 배워두면 이담 남들이 못할 일을 할 게 아니오?‘ 그러자 상지민은 덕돌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면서 기특해 중얼거렸다. “어쩜 이 시골에 이런 애가 다 있냐? 넌 다른 시골 애들과 다른 뭔가 있고나. 그래, 내 너헌테 일어도 배워주지.” 덕돌은 그날부터 이른 아침이면 동녘이 희붐히 밝으면 상지민을 따라 장개골 안에 들어가 권투와 검술을 배웠다. 그리고 눈이 와서 일을 하지 않는 날에는 상해 집체호에 가서 가만히 일어를 배웠다. 상지민과 수호 네는 음력설에 집으로 갔다가 돌아올 때면 상해 라면이나 갈치, 물고기를 가득 사다가 상순과 마을 사람들에게 나눠주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 비준도 없이 상지민과 수호를 감옥에서 내왔다고 떠들어댄 흥수네 집에는 국수 오리 한 오리도 가져다주지 않았다. 해월이가 앓아도 상순을 내놓고 암이 옮는다고 누구도 병문안을 가지도 않았다. 어느 날, 상순은 덕돌을 보고 타일렀다. “얘야, 해월이 암에 걸려 죽는다 만다하는데 찾아가 문안해라.” “에이고, 해월이 아버지 도처에서 아버지 허물을 하는데 뭐 떼문에 문안해야 합니까?” “그래도 사람이 어찌 인정을 저버리겠니? 혹시 네가 찾아가보면 해월이 병이 낫겠는지 가봐라.” 덕돌은 아버지가 어찌나 해월을 찾아가서 병문안을 하라고 하는지 가기 싫은 대로 억지로 찾아갔다. “해월아, 덕돌이 왔어.” 춘실이 말하자마자 해월은 위방에서 울던 울음을 뚝 그쳤다. “어디, 어디 왔어? 내 사랑 덕돌이.” 덕돌은 흉측하게 눈이 쑥 꺼져 들어가고 마른 해월의 몰골을 보는 순간 온 몸이 오싹해났다. “해월아, 어떻니?” “응, 괜찮아. 너를 보니 병이 다 나은 거 같애. 이젠 부끄러운 게 없다. 난 너한테 시집가려고 했는데 이게 무슨 꼴이냐?” 해월은 덕돌을 보자 발딱 일어나 팔소매를 꼭 잡아 이불 쪽으로 끌어당겼다. “여기 앉아라. 내 고중에 가지 못했지만 너도 봐라. 고중에 가 배운 게 뭐야? 너도 마을에 돌아와 소 궁둥이를 치게 되지 않는가 봐라.” 춘실은 미닫이를 닫고 나가고 덕돌은 멀찍이 앉았다. 그러자 해월은 빨갛게 질린 얼굴에 서운함이 물결쳐 지나갔다. “왜 암이 전염될까봐 그러니? 일없다. 정의사 그러는데 암은 전염되지 않는대.” “그래 어떻게 하나 병을 치료해라. 넌 꼭 건강을 찾을 수 있다.” “그래, 너만 내 옆에 있어주면 난 살아날 거 같다.” 해월은 불시에 덕돌을 와락 끌어안더니 나누웠다. “왜 이래?” 덕돌은 깜짝 놀라 해월을 슬쩍 밀어놓았다. 허나 해월은 단말마적으로 덕돌을 놓으려고 하지 않고 얼굴을 비비며 애원했다. “덕돌아, 나도 알아. 제발 날 한번만이라도 여자로 만들어주면 안되니? 내 첫사랑은 너야. 이제껏 부끄러워 말하지 못했어. 딱 한번만, 응? 한번만.” 덕돌은 해월을 밀어놓으면서 일어났다. “해월아, 병이나 잘 치료해라.” 말을 마치자 덕돌은 정지에 나와 신을 찾아 신고 부랴부랴 바깥으로 달아나갔다. “얘, 덕돌아! 어데 가?!” 덕돌이 되돌아보니 해월은 맨발 바람으로 눈 덮인 바깥으로 뒤쫓아 오다가 풀렁 물앉아 발버둥질을 쳤다. 뒤에서 흥수와 춘실이 쫓아나와 해월을 겨우 끌고 돌아갔다. 덕돌은 속으로 해월이 불쌍하면서도 동네방네에 소문이 잘 못 날까봐 발걸음만 재우쳤다. 덕돌이 떠나간 후 해월은 울고 또 울었다. 해가 지고 달이 뜨고 밤이 깊어가도 울음소리가 끊을 줄 몰랐다. 해월은 아버지 흥수의 목을 끌어안고 생 떼를 쓰며 대성통곡 쳤다. “내 팔자가 기구하지. 어쩜 시집도 가지 못하고 죽어? 엉, 어 헝, 헝, 남자 그게 어떻게 생긴 줄도 모르고 죽어? 엉, 엉, 엉.” 흥수도 막내딸이 불쌍했다. 나이 열여덟 살이 되도록 남자 맛도 보지 못하고 죽게 놔두고 뻔히 쳐다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해월아, 아버진들 어찌 할 도리가 없는지라. 불쌍한 내 딸아, 우쩔락꼬 이래?” 흥수는 위방에서 해월을 끌어안아 자기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자 해월은 잠시 울음을 그쳤다가 또 가늘게 어깨를 들먹이면서 흐느껴 울었다. 흥수는 딸을 끌어안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갑자기 해월은 울음을 그치더니 머리를 되돌려 아버지를 뒤돌아보았다. “아버지, 아버지 무슨 내 신랑이냐? 어서 마을에 나가서 아무 총각이라도 남자면 돼. 빨리 데려오라. 나도 여자 한번 해보고 죽겠다.” “내 누굴 데려오겠니? 누가 오자 하니?” “덕돌이 오지 않을까?” “그 새낀 역어서 오겠니?” “그럼 장충국은 온다.” “뭐라고? 장충국?” 흥수는 어이없어 하면서도 자기 귀를 의심했다. “응, 그래. 지주 아들이면 어때? 한족이면 어때? 쉰이 넘으면 뭐라니? 남자면 돼. 아무리 봐도 노총각 장충국이 아니면 올 사람이 없소.” 해월은 아버지 무릎에 올라앉은 채 돌아앉아 아버지 목을 끌어안고 콧물, 눈물범벅이 된 얼굴을 아버지 낯에 비볐다. “아빠, 빨리 가 노총각 장충국을 데려와.” 흥수는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었다. 쉰도 넘은 장충국한테 열여덟살 밖에 안되는 딸애를 내줄 생각을 떠올리자 일종 모욕감이 무섭게 파도치며 덮쳐왔다. 그때 춘실이 들어와 흥수를 정지에 데려 내갔다. “노총각 장충국을 데려오는 거지?” 뒤에서 해월의 절절한 목소리가 늙은 부부의 마음을 재가루로 불태워 날려 보냈다. 춘실은 손등으로 눈물을 닦으면서 부탁했다. “빨리 충국을 데려오오. 딸의 마지막 소원을 꺼주오.” “당신도 정신 나갔어? 난 차마 못해. 어떻게 금이야 옥이야 하고 키운 말짱 숫처녀 딸인데 그 더러운 한족 지주 아들에게 깔리게 해?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짐승보다 못한 짓을 못해.” 흥수는 문을 쾅 차고 바깥으로 나가버렸다. 그는 흐리터분한 하늘을 쳐다보며 푸실푸실 낯에 내리는 눈을 마구 손으로 털어버렸다. 집안에서는 해월의 울음소리가 가슴을 칼로 어이는 듯이 울려 왔다. “에이, 세상에 어쩜 우리 집에 이런 일이 생겨?” (학수네 집에 가서 술이나 마셔야 속이 풀리겠다.) 흥수는 눈을 빠드득 빠드득 밟으면서 학수 네 집으로 가버렸다. 밤 늦도록 술을 마시고 집으로 비틀거리며 돌아왔다. 헌데 이상하게 해월의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아니, 얘가 혹시 죽지는 않았어?) 흥수는 부랴부랴 위방 문을 벌칵 열고 들어갔다. 허나 어두운 방안에는 해월의 자취가 없었다. “해월아, 해월아!” 흥수는 가슴에서 돌이 툭 떨어지는 상 싶었다. “떠들지 마오. 좀.” 정지에서 아내 춘실이 들어와 손을 끌어당겨 물 앉혀 놓았다. “해월은 어디 있소?” “고방에서 잠이 들었소.” “어쩌다 울지 않아? 고방은 춥겠는데.” “근심 마오. 오늘 불을 뜨끈뜨끈하게 땠으니까.” 흥수는 시름을 놓고 이불 위에 힌들 드러누워 한숨을 후 내쉬었다. “내 어디 자니?” “아니, 저게 해월이 깨나지 않았나?” 흥수는 아직도 전라도 남대 치 말을 조금 썼다. “그래요. 아빠,” 해월은 암으로 앓는 애 같지 않게 고방에서 뛰어나와 아버지 목을 끌어안았다. “아빠, 난 오늘 시집갔거든.” “엉?! 무슨 말이냐?” 흥수는 벌떡 일어나 전등불 스위치를 찰칵 쥐어 당겼다. 전등불 아래 해월은 암환자 같지 않게 기쁜 나머지 어깨춤을 덩실덩실 췄다. “노총각 장충국한테 시집 갔거든. 헤헤헤.  첨으로 남자 그걸 맛 봤어!” “엉?! 아이고,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춘실은 손으로 해월의 입을 틀어막았다. “아무 말도 하지 마라.” 흥수는 아내를 손가락질 하며 욕했다. “이년, 네년이 내 없을 때 개짓을 했구나. 아이고, 이 일을 어떠렇게 해(어떻게 해)?” 춘실은 흥수의 입을 틀어막으며 소리를 낮춰 중얼거렸다. “작작 떠드오. 이보, 이왕 일이 이렇게 된 거 어쩌오?” 흥수는 외까풀눈을 부릅뜨더니 챨싹 아내의 귀 쌈을 갈겼다. “어우, 어우, 이 미친 년들아.” 춘실은 볼을 매만지더니 황급히 해월을 끌고 정지로 뛰어나갔다. “어쩜 우리 집안 이 지경 됐어? 암이 그래 우리 이씨보다 더 세단 말인가? 거 더러운 장충국이 언감 대대 혁명위원회 주임을 어떻게 보고 내 딸을 언감 깔아뭉개? 치보주임 딸을 감히?! 어우, 어우, 망했다, 망해! 우리 집안 망했어!” 흥수는 너무 분통이 터져 주먹으로 자기 가슴을 쾅쾅 쳤다. 사실 춘실은 흥수가 나간 후 가만히 조개덕에 가서 집도 없어 헐망한 벽돌공장 당직실에서 자는 충국을 얼리고 닥치고 해서 데려다 해월과 합방하게 했던 것이다. 장충국은 여자 맛을 보지 못한 노총각인지라 흥수네 고방에 기어들어 이게 웬 떡이냐고 해월한테 덮쳐들어  반주검이 되게 깔아뭉갰던 것이다. “흥, 이치보, 넨들 어쩌겠니? 귀한 10대 처녀 딸도 내게 깔리었어. 네 번이나. 허허허.” 그 후부터 장충국은 춘실에게서 흥수가 집을 나갔다는 기별을 받기만 하면 밤낮을 가리지 않고 흥수네 집 뒤울안 바자를 슬쩍 벌리고 들어가 고방 문을 열고 기어들었다.       50대 중반이지만 충국은 처음 여자 맛을 보는지라 욕정이 뚝을 터진 홍수처럼 사납게 쏟아졌다. 번마다 해월을 넋을 잃게 해재끼었다. 해월이 흥분되다 못해 턱을 쳐들고 숨이 넘어가는듯이 신음소리를 내면서 오열하는지. 짐승 같은 늙다리 노총각 충국은  야수처럼 해월을 릉간했다. 가녀린 호박꽃에 우박이 치는듯 하기도 하고 진창에 발목까지 푹푹 빠졌다가 너무 빳빳해 겨우 겨우 뿍뿍  빼는듯하기도 했다... 충국은 한편 자기 일가를 투쟁하고 비판하던 흥수의 부릅뜬 외까풀 눈을 떠올리며 욕지거리를 해대면서 더욱 기승스레 몸부림쳤다. 어떤 때에는 춘실이 고방에 달려 들어와 제 딸을 좀 살살 다루라고 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춘실만 나가면 짐승남의 본능을 자제하기는커녕 정욕이 이씨 일가에 대한 보복심과 반죽돼 용암처럼 이글거리며 불타올랐다.  더욱 저돌적인 짓이 더 강렬하고 맹렬했다. 처음에는 흥수는 깜짝 놀라 세길네길 펄쩍 뛰었다. 그러나 나중엔 이상해했다.       (웬 일인가?)      충국이 나든 후부터 당장 죽을 것 같던 해월이가 점점 생기를 찾더니 앓음 소리도 내지 않았다. 대신 고방에서 해월의  노래까지 간혹 흥얼흥얼 새어나오는 것이 아니겠는가. 흥수는 충국이 드나드는 것을 알고 냉가슴을 앓았다. 처음에 황둥개는 낯선 충국이 나타나기만 하면 왕왕 사납게 짖어댔다. 흥수는 황둥개가 짓기만 하면 충국이 오는 걸 알고 냉가슴을 앓았다. (어 참, 멧돼지 잡으러 갔다가 집돼지 잃은 격이 돼버렸네. 이게 송선을 욕심낸 보응이라도 아닌가? 아니면 정 우파 말처럼 너무 악한 짓을 많이 해서 보응 받는 건가?) 허나 흥수는 인차 자포자기했다. (에라, 쑤어놓은 죽을 어찌랴?) 그 후부터 흥수마저 한 눈을 뜨고 한 눈을 감아버렸다.       그때로부터 충국은 흥수만 없으면 뒤울안 바자를 헤치고 비집고 들어가 고방에 기어 들군 했다. 온 한해 겨울 충국은 눈이 오나 눈보라 치나 날마다 시도 때도 없이 그렇게 흥수네 집에 드나들었다.         이젠 흥수네 집지킴이 황둥개도 장충국이  와도 짖지 않고 꼬리를 쳐들고 휘휘 저으며 반긴다. 오히려 충국을 보면 펄쩍 뛰어 품에 안기기도 하고 주둥이를 때 덕지덕지한 바지가랭이에 대고 끼깅거리기도 하며 애교를 부린다.          그 바람에 흥수네 집 뒤울안 수수대바자가 완전히 쩍 벌어졌고 고방문과  뒤울안으로부터 소서구 충국이네 집까지 허연 눈 위에 더러운 발작국이 더덕더덕 찍히었다. 나중에는 한가닥의 오솔길이 나고 말았다.      흥수네 집에서는 해월의 울음소리 대신 매일이다시피 봄 밤에 발정 나서 짝을 찾아 헤매며 우는 암고양이 울음소리 같은 신음소리가 간간히 들릴 뿐이었다...
165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108) 댓글:  조회:1464  추천:1  2018-07-08
                      5. 방화범의 말로        바싹 마른 황금 벼 낟가리가 우사 지붕을 넘어 우뚝 우뚝 솟아 있었다. 우사 마당에 있는 탈곡장에서는 사원들이 연합탈곡기로 탈곡을 하느라고 웃고 떠들며 개미 채 바퀴 돌듯 맴돌아 치고 있었다.      상순은 벽돌로 토성 안에 높다란 대대 사무실 청사를 덩실하게 지어놓고 빨간 기와까지 얹어 놓았다. 마을 어디서나 토성 안의 고래 등 같은 대대 사무실청사 지붕이 다 바라보이었다. 상순은 조개덕 1대 사원들을 데리고 벽돌공장을 차린 첫해에 대대 사무실대청 외에도 생활이 가난한 장팔래, 왕정해 등 몇몇 사원들의 벽돌기와집도 지어주었다. 사원들은 탈곡장에서 일하면서 모두 상순에게 엄지손가락을 대둘렀다. “김 대장 덕분에 우리 새 벽돌집에서 살게 됐네.” 장팔래가 벼단을 낟가리 무지에 올리며 하는 말에 왕정해도 벼 단을 무지고 나서 그 높은 낟가리 위에서 허리를 펴더니 엄지를 내둘렀다. “김 대머리(大脑袋)는 머리가 아주 좋아. 그 대머리에서 별의별 기발한 생각이 다 나온다니까.” “그러게 말이야.” 장팔래는 혀를 끌끌 찼다. “우리 대에서 김 대머리를 내놓고 누가 벽돌공장을 세울 생각이나 했겠소?” “글쎄 말이오.” 왕정해도 벼 단을 척척 무지면서 동을 달았다." "그런 엉뚱한 생각을 한 사람은 하나도 없소.”  그들은 벼 낟가리를 가리면서 자연히 종연이나 흥수를 의논하다가 비난하기에 이르렀다. “종연이랑 부대에 갔다가 와서 세상일을 다 아는 상 하잖고 뭐요?" "그 새끼들이 우리 대대에 해놓은 게 뭐야?” “어째 계급투쟁을 틀어쥐고 혁명을 잘하지 않았는가?” “입방아나 찧었지. 뭘 해놓은 게 있어? 흥!” “그래도 이번에 입당했다잖는가?” “그게 바로 우리 대대 정치야!” “삐뚤렁정치라고나 해라!” “김 대머린들 어쩌겠는가? 이계삼이나 허영주 두 사람만 믿어서야 되겠소? 영발과 윤희가 앞다퉈 시내로 돌아가려고 종연을 입당시키려고 기암을 쓰는 데야.” “글쎄 말이야. 종연은 그래도 김 대머리에게 아첨하느라고 덕돌이 고중에 붙을 때 손을 들어줬다더라.” “제 따위 감히 김 대머리를 모르고서야 이 함흥대대에 발이나 붙이겠어? 남들은 부대에 가서 8달이면 입당한다던데 한뉘 입당은커녕, 흥!” 왕정해가 주위를 둘러보더니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저 종연은 원래 간에가 붙고 슬개에 가 붙는 새끼야. 이런 일도 있다네. 종연이랑 승연이랑 숭길이랑 룡정에서 깡패들한테 마을까지 쫓기어 왔잖고 뭔가. 숭길과 승연은 황급히 종연이네 김치움에 숨었지. 황종연은 깡패들이 당장 집마당에 쳐들어게 되자 미처 김치움에 뛰어들지 못하고 집에 달아들어가 문을 닫아걸었지. 한무리 깡패들은 집문을 부시고 종연을 개패듯했지. 깡패들은 숭길과 승연이 어데 있는가 족따졌지. 그러자 종연은 자기 맞지 않으려고 제꺽 김치움에 있다고 물어먹었다오.” “제 동생도 김치움에 있는데.” “제 살려고 동생쯤 물어먹는 건 아무 것도 아니야. 그래서 숭길과 승연은 김치움에서 끌려나와 깡패들한테 물매를 맞았지.” “에이, 항일전쟁 때 같으면 한간이나 조간이나 해먹을 놈이구만. 쯧쯧쯧. 퉤!” “황승연도 똑 같은 물건짝이야. 깡패들한테 두들겨맞아대자 뭐라고 했는지 아는가?” 왕정해는 낟가리를 가리다가 벼단을 쥔채 물었다. “어쨌기에?” “다 종연과 숭길이 시켜서 한 일이지. 자기와 상관없다고 했다네.” “허허허. 형제간이 다 사람 물어먹는 미친개구만.” 이때 병진이가 벼 단을 꽉 박아 실은 소 수레를 몰고 탈곡장에 들어섰다. “이 새끼는 항상 뿌리 든든한 황소만 골라 쓴다니까.” 그 말에 병진은 소 수레를 멈춰 세우고 바 줄로 소수레 위의 벼 단들을 걸어 쥐어 당겼다. 그러자 벼 단들이 낟가리 쪽으로 후루루 무너졌다. “내사 소 싸움에 이름 있지 않는가?” 병진의 말에 장팔래가 배를 끌어안고 비웃어댔다. “허허허. 그래, 너야 말로 황소싸움에 집을 팔아 황소 값을 물고 허망 우리 한족 대에 나앉지 않았니?” 그러자 왕정해도 맞장구를 쳤다. “그래도 아니, 저기 김 대머리가 네게도 벽돌집을 지어줄지.” 병진은 소 수레 위의 벼 단을 훌훌 쥐어 내리뿌리며 두덜거렸다. “누가 생산대 소를 싸움시켜 뿔을 빼놓은 놈한테 벽돌집을 사준다더니?” 병진은 계속 두덜거렸다. “철주마저 고중에 붙지 못했지. 더러운 팔자야. 우리 철주 저 김 대머리네 덕돌을 얼마나 쫓아다녔소? 그를 도와 싸움질은 또 얼마나 했소? 덕돌을 따라다닌 애들은 다 붙고 우리 철주만 병신 같은 새끼 혼자 붙지 못했단 말이오. 재수 없는 놈은 뒤로 넘어져도 코 등을 깬다고. 쳇!” 이때 상순이 이쪽 벼 짚무지 쪽으로 벼 짚을 산더미처럼 둘러메고 스적스적 다가왔다. “병진이, 헛소리 작작 치고 빨리 벼 단이나 실어 들여! 저거, 저거! 소들이 또 싸워 뿌리 빠지겠어!” 병진은 허리를 굽혀 바를 주섬주섬 주어 수레에 훌 뿌리고 나서 상순의 독기어린 세 귀 눈을 흘끔 곁눈질했다. “이라!” 그는 고삐로 소 궁둥이를 탁 치며 수레를 몰고 꼬리빳빳해 탈곡장을 빠져나갔다. 저쪽에 가서 병진은 소 수레에 올라앉더니 상순 쪽을 돌아보며 누르스름한 개털 모자를 꾹 눌러 썼다. “이라! 저 놈을 보기 싫어서. 원!” 병진은 두덜거리며 소 수레에서 목이 긴 술병을 들어 꿀떡꿀떡 몇 모금 마시더니 애꿎은 소 궁둥이를 고삐로 사정없이 후려 갈겼다. 놀란 황소는 대가리를 마구 흔들며 네 굽을 안고 소 수레를 끌고 덜커덩덜커덩 뛰어갔다. 상순은 가을이 다가오자 벽돌 굽기를 그만 두고 사원들을 데리고 탈곡에 나섰던 것이다. 사원들은 벼 풍작을 거둔 것은 상순이 냉상모판을 잘 관리한데다가 논물까지 잘 보았고 사원들을 잘 이끌어 벼농사를 알뜰히 지은데 있다고 혀끝을 끌끌 찼다. 그 덕분에 올해부터는 이밥을 배불리 먹게 됐다고 했다. 하긴 이전에는 생산대장이 사원들을 잘 틀어쥐지 못한데다가 전체 사원의 절반도 넘는 지주와 부농들까지 심술을 부린데다 논물을 볼 줄 몰라 해마다 아까운 논에서 벼를 제대로 거둬들이지 못했다. 여름에 논을 내다보면 벼보다도 검은 돌피 이삭이 더 많아 도대체 벼 밭 인지 돌피 밭인지 분간하기도 힘들었다. 허나 상순이 이 생산대로 온 다음부터 지주와 부농들이 찍 소리 한마디 치지 못하고 상순이 말하는 대로 둥글소들처럼 논에 나가 기음을 매고 또 맺던 것이다. 하여 논밭에서 돌피를 찾아보기 힘들게 됐던 것이다. 사원들도 올해부터 새 벽돌집에 들어 배불리 먹으면서 잘 살게 됐다고 사기나 일손들을 다그쳤다. 그런데 화는 눈썹 끝에서 떨어진다고 야밤삼경에 탈곡장 벼 낟가리에 삼단 같은 불길이 치솟아 올랐다. “불이야!” “불이야!” 사원들은 탈곡을 하다가 벼 낟가리로 달려갔다. “빨리 물을 퍼 치오!” 상순은 가래 짝을 놓고 우사로 달려 들어가며 고함쳤다. 그는 물 초롱에 물을 꼴딱 담아 들고 불길이 치솟는 벼 낟가리 쪽으로 선참으로 뛰어 갔다.  “불이야! 불이야!”  병진이 개털 모자를 벗어쥔 채이 불 붙는 벼낟가리 쪽에서 고함치고 있었다. “빨리 물을 쳐라!” 병진은 상순을 보자 허리를 굽혀 굽석거리며 거수경례까지 척 했다. “김 대머리! 아니, 존경하는 김 대장!” 상순의 날카로운 세귀눈길이 이상하게 번쩍이자 그는 비실비실 뒤로 물러섰다. 사원들은 집에 달려가 물을 담은 대야며 초롱이며 들고 달려와 불이 붙는 낟가리에 물을 퍼 쳤다. 허나 바싹 마른 벼 낟가리 하나는 세차게 불어치는 겨울바람에 삽시간에 잿더미로 돼버렸다. 불이 났다는 소리를 듣고 흥수와 이계삼, 종연, 허영주, 박영발, 윤희까지 대대 간부들이 몽땅 뛰어와 불을 껐다. 허영주는 사원들에게 “불이 붙지 않은 낟가리에도 물을 쳐 보호하라!” 하고 연신 고함쳤다. 한족사원들은 몸에 물을 퍼치고 성한 벼 낟가리에 불이 옮겨 붙지 못하게 몸으로 막을 각오까지 하면서 물을 치고 또 쳤다. 둬 식경이나 사원들이 물을 퍼 쳐서야 불길은 점점 죽어갔다. 허나 한족 사원들이 한 해 동안 애나게 일해 수확한 벼낟가리 하나는 몽땅 타버렸다. 사원들과 후에 다행히 다른 낟가리에는 불이 옮겨 붙지 못했다. “어느 놈이 낟가리에 불을 질렀는가?” “붙잡기만 하면 껍질을 싹 벗겨놓겠다.” 탈곡장에는 아직도 재무지로 된 낟가리에서 삼단 같은 김이 물물 피어오르고 땅바닥에는 물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재물 같은 물은 겨울의 맵짠 바람에 인차 살얼음이 지더니 인차 얼어붙었다. 탈곡장 사처에 사원들의 마사진 대야며 초롱이며 장갑이며 지어 모자까지 널려있었다. 불이 붙은 잿더미 옆에서 병진은 물을 맞아 폭 젖은 개털 모자를 주어들고 희죽이 웃으며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여기저기서 절망에 빠진 소리가 들렸다. 장팔래는 왕정해와 마주 서서 “온 낮 가린 낟가리가 단번에 재무지로 됐구먼.”하고 실망했다. 왕정해는 “헤이, 올해는 배불리 먹겠다 했더니 쫄딱 망했어.”라고 맥이 빠진 소리를 하며 무릎을 꺾고 울상을 지었다. “올해 또 어떻게 쌀 고생을 하겠소?” 사원들이 맥없이 물앉거나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서서 두덜거렸다. 상순은 흥수를 조용히 불러 나직이 말했다. “빨리 전화로 파출소 허소장에게 사건 신고를 하오. 빨리!” “금방 여기 오기 전에 전화를 치려고 하니 통하지 않소. 어느 놈이 대대 전화선을 끊어 놓지 않았겠소.” “이건 계급투쟁의 새로운 동향이란 말이오! 안 되겠소.” 상순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왕정해! 장팔래!” 하고 불렀다. “어째?” 왕정해가 사람들 속에서 이쪽으로 걸어왔다. 상순은 “너희 둘이 빨리 마구간에서 말을 타고 파출소에 가서 사건 신고를 해라!” 하고 분부했다. 왕정해는 뒤를 돌아보며 “장팔래는 집에 갔소. 내 혼자 어떻게 가오?” 하고 늦장을 부렸다. “야! 고양이한테 불알이 떨어질까 봐 혼자 못 가니? 어서 빨리 가라!” 왕정해는 내키지 않았지만 성이 꼭뒤까지 치밀어 오른 상순의 명령을 거역하지 못해 마구간으로 뛰어갔다. 이윽고 말의 호용소리에 뒤이어 말 발굽소리가 다급히 떨꺼덕떨꺼덕 멀어져갔다. 상순은 종연과 흥수와 함께 사건현지를 돌면서 수상한 단서를 찾으려고 살폈다. 이튿날 이른 아침에 동녘이 희붐히 밝아올 무렵에 찌프가 조개덕에 달려와 아츠런 제동 소리와 함께 멈춰 섰다. 민병들을 데리고 탈곡장 주위를 돌며 보초 서던 상순이 찌프 소리와 인기척소리에 찌프 쪽으로 다가갔다. 허영호 소장은 상순을 만나자 화재정황을 물으면서 탈곡장 화재발생지 주위부터 돌아보았다. 상순은 “고의 방화혐의가 크오. 꼭 흉수를 붙잡아 징벌해야 하오.”라고 했다. 허영호 소장과 상순은 회의실에 들어가 조용히 수사방안을 의논했다. 허영호 소장은 “먼저 의심스러운 지주와 부농부터 어제 저녁에 뭘 했는가 하나하나 조사해야겠습니다.”라고 했다. 상순은 대머리를 숙이고 한참 궁리하더니 머리를 들었다. “옳소. 화재발생시간은 어제 그러니까 11월 23일 밤 12시 좀 넘어서요. 애들로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나이 별로 소조회의를 열고 사람마다 어제 뭘 했는가를 말하고 증명인을 대라고 하면 좋을 것 같소.” 허영호 소장도 한참 궁리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게 좋은 거 같습니다. 먼저 그물을 널리 쳐 고기 한 마리도 빠져 나가지 못하게 하는 게 옳습니다. 중점혐의대상이 생기면 어제 뭘 했는가를 서면으로 쓰게 하고 증명 인을 써넣으라고 합시다.” 이때 흥수가 소문을 듣고 아침도 먹지 못하고 달려왔다. 그는 회의실에 들어서자마자 상순에게 외까풀 눈을 흘겼다. “김 대장이 어떻게 경각성을 늦췄으면 탈곡장에 불이 다 달렸겠소? 그래도 계급투쟁을 하지 않고 되겠소? 벽돌만 구워내더니 보오. 무슨 쓸데 있소? 한해 농사를 다 태워버리지 않았소?” 상순은 세 귀 눈으로 흥수를 바라보며 어이없어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허영호 소장은 “지금 흉수를 나포해야지 여기서 서로 옥신각신할 때가 아닙니다.”라고 했다. 이때 바깥에서 찌프가 급정거하는 아츠런 소리가 들리더니 떠들썩하는 소리가 들렸다. 찌프에서는 뜻밖에도 김용만 국장이 공안국 수사일꾼들을 데리고 내렸다. 그는 틀스레 거들먹거리면서 재무지로 된 낟가리자리를 여기저기 휘둘러보았다. 그는 회의실에서 마중 나온 허영호 소장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재무지와 얼음 강판이 돼버린 탈곡장 쪽으로 터벅터벅 다가갔다. 벼 짚 재무지에서는 아직도 김이 무럭무럭 피어올랐다. 용만 국장은 거들먹거리며 땅바닥에 널린 양철초롱을 툭 걷어차면서 훈계하기 시작했다. “허 소장, 이게 뭐요? 어째 허 소장 관할 구역에서 연속 악성사건이 생기오?” 허영호 소장은 입을 다문 채 머리를 숙이고 꾹 참고 듣기만 했다. 이때 황종연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형님, 참 오래간만이오.” “오? 그래?” 용만은 종연을 와락 끌어안고 잔등을 툭툭 치며 문안했다. “머리가 요즘 어때?” 종연은 이젠 붕대도 다 풀었던 것이다. “붓긴 얼굴도 내리고 머리도 괜찮소. 그러나 저러나 우리 마을에 또 화재 나 큰일이오.” 종연과 용만은 부대 전우였다. 그들은 특별병종에서 특수훈련을 받아 힘깨나 쓰고 날랜 싸움꾼들이었다. 제대한 후에 용만은 대학에 추천받아 갔고 “문화대혁명”이 터지자 반란 파 조직을 무었고 사회에서 주먹깨나 쓴다하는 종연이랑 어중이떠중이들을 긁어모아 노 간부들을 타도하는데 앞장섰다. 그러다가 할빈에서 온 반란파 두목 이씨 가명을 단 모원신의 통역이자 신변호위 무사를 맡고 개다리행사를 하면서 개 잡은 포수처럼 우쭐거렸다. 그는 모주석의 조카인 모원신을 바싹 따라야만 벼슬길이 열린다고 여겼다. “호랑이 꼬리는 꽉 잡고 놓지 말아야 살아.” 그는 공부는 별로 하지 못했지만 반란파 두목 이 씨의 거천으로 “문화대혁명” 후기에 일약 공안국 국장자리까지 빼앗아 했다. 종연은 제대한 후 진수해 근방에서 소문난 주먹깨나 휘두르는 이름난 난봉꾼이었다. 허나 “문화대혁명”의 거세찬 “동풍”을 타고 용만을 등에 업고 진수해지역의 반란파 두목으로 됐다. 야심이 큰 종연은 용만을 “형님, 형님” 하면서도 속으로는 농촌에서 대대 혁명위원회 주임이나 하며 고생하는 자기를 봐주지 않는다고 은근히 투덜거렸다. 용만은 앞에서 설설 기는 종연과 무뚝뚝한 표정을 짓고 서 있는 허영호 소장을 번갈아보면서 계속 훈계했다. “함흥대대 말이 아니오! 전번에는 대대 혁명위원회 주임을 돌멩이로 머리를 까는 반혁명사건이 생기더니 이번에 탈곡장에 불을 싸지르다니! 대대 간부들이 뭘 했소? 계급투쟁을 얼마나 잘 했으면 이렇소?! 쯧쯧쯧!” 종연은 뒤에 서있는 상순과 허영호 소장을 흘금 돌아보더니 용만에게 머리를 조아리면서 제 좋은 소리를 했다. “워낙 이 조개덕 1대는 지주와 부농이 많은데다가 조개덕 2대에는 이른바 우파와 현행반혁명, 노 간부들이 많아서 정황이 꽤나 복잡합니다. 전번에도 허백호, 그 늙다리 우파 놈이 원한을 품고 돌멩이로 내 머리를 깠소!” “생산대 대장은 누구야?” 종연은 돌아서 상순을 가리켰다. “이분입니다. 김 대장, 공안국 김용만 국장입니다.” 상순이 앞으로 나가면서 인사했다. 김용만은 상순의 날이 서게 우뚝 솟은 코와 예지가 번쩍이는 부리부리한 세 귀 눈을 보면서 대충 인사했다. “아, 김 대장 말은 족히 들어 왔습니다. 공안국 국장 출신이라면서? 뭐 하고 밥을 먹었습니까? 항미원조땐 사단 비서과장까지 했다는 양반이 어째 미연에 이런 사건을 방지하지 못했습니까? 방화범을 붙잡을 좋은 방도는 생각해봤습니까?” 버르장머리 없는 용만의 말에 상순은 뒤로 떨어져 걸으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용만은 아예 종연과 물었다. “무슨 단서라도 쥔 게 있소?” 종연은 여러 사람들을 둘러보면서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오늘 오전부터 사람마다 그날 일정을 얘기하고 의심스러운 사람을 적발하기로 했소.” 용만은 머리를 끄덕이더니 “건 누가 내놓은 방안이오?” 하고 물었다. 종연은 상순의 눈치를 흘끔 보면서 “우리 대대 간부들이 내놓은 방법이오.”라고 하며 두터운 혀로 입귀를 슬쩍 핥았다. “좋소. 털끝만한 의심스러운 단서가 있으면 회보해라.” “양, 양.” 이때 허영호 소장은 재무지 북쪽에서 목이 긴 술병을 하나 주어들고 이리저리 보고 있었다. “여기에 무슨 라이터가!” 잘깍 켜보니 라이터에 불이 달렸다. 수사 일군들은 인차 하얀 장갑을 낀 손으로 특별히 크고 목이 긴 술병과 라이터를 쥐어 찌프에 있는 상자에 담았다. 허 소장은 “저게 중요한 단서로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고 김용만에게 말했다. 그러자 용만은 자기보다 스무 살이나 이상인 허 소장을 거들떠도 보지 않고 버릇없이 말하며 도리머리를 말대가리처럼 흔들었다. 이젠 허 소장도 늙었소. 그깟 병과 이 화재가 무슨 관계있단 말이오? 신경이 너무 예민하오. 예민해. 허 소장은 지금 계급투쟁의 안광으로 문제를 보는 게 아니라 술병을 들고 흉수를 잡으려 한단 말이오. 주책 있소? 말도 늙으면 달리지 못하는 법이오.”  “간부는 진수해파출소 소장도 젊은 간부로 시켜야 하겠소. 간부 연소화는 도리가 있단 말이오. 제 책임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은 철직시켜야 하오.” 그때 상순이 한발 나서면서 말했다. “허 소장은 한창 경험을 쌓고 일을 잘 할 때오. 어린 애들이 뭘 안다고 그러오?” 그러자 김용만은 무섭게 눈을 부라렸다. “영감이, 묵은 그루에 이밥 먹던 소리를 작작 하란 말이오.” 상순은 굽어들지 않았다. “사람을 성가시게 굴지 말고 방화범이나 잡소.” 용만이 억이 막혀 입을 짝 벌리고 쩝쩝 다시는데 저쪽에서 병진이랑 왕정해랑 장팔래랑 숱한 사원들이 구경하러 이쪽으로 다가와 그만뒀다. 허 소장은 병진이 여기 저기 기웃거리자 그의 일거일동을 쓸어보았다. 왼 손을 검정 천으로 싸매고 있었다. 왕정해는 그 옆에서 울상을 짓고 있었다. 그날 저녁에 왕정해가 상순이네 집으로 찾아왔다. 그는 구들머리에 걸터앉더니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아무래도 어제 병진의 거동이 의심스럽소.” “뭐요?” 상순은 담배를 말다가 다가앉았다. 왕정해는 목소리를 낮췄다. “어제 탈곡장에 불이난 후 병진은 우사에 와서 내가 잣던 펌프를 마구 빼앗아 잣지 않겠소. 마구 잣다가 펌프 자루가 훌 빠지니 자기 왼손가락을 마구 쐐기자리에 넣고 잣지 않겠소. 그러다가 ‘아이구! 손가락이 덴 걸 모르고 아파 죽겠다.”고 하더구먼. 손가락을 빼낸 걸 보니 껍질이 짓 이개졌더구먼. 낮에 소 수레 벼 단을 부릴 때에는 근본 손을 데지 않았고 손을 싸매지도 않았소.” 상순은 성냥을 득 그어 담배를 붙이더니“그런데 뭐가 의심스럽소?” 하고 묻고 나서 계속 왕정해의 말을 귀담아들었다. “술을 먹은 거 같더구먼. 거동이 정상이 아니었소.” “낮에 술을 마신 거 같지 않던데.” 왕정해는 무릎을 탁 쳤다. “병진은 소 수레에 술병을 가지고 다니지 않고 뭐요? 어제 오전에도 김 대장에게 욕을 먹고 탈곡장을 나갈 때 수레에서 술병을 꺼내 꿀떡꿀떡 마셨소.” 순간 상순은 공안국 수사 일꾼들이 재무지 옆에서 허 소장이 주은 목이 긴 술병을 주어간 일을 떠올리게 됐다. “술병이 어떻게 생긴 겐지 알만 하오?” 왕정해는 눈알을 굴리면서 생각하다가 “특별히 목이 긴 거 같았소. 일반 병보다는 뿔룩한 게 컸소.”라고 했다. 상순은 병진에게 점점 의심이 갔다. 탈곡장에서 오래 동안 철주가 학교에 붙지 못했고 소싸움을 시켜 빚을 가득 걸머지고 허망 나앉았다고 불만을 토로하지 않았던가! 상순은 엉거주춤 일어나면서 왕정해를 보고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고 요새 병진을 잘 감시하오. 병진의 소 수레에 아직도 목이 긴 술병과 라이터가 있는가 슬그머니 살펴보오.”라고 부탁했다. “알았소.” 상순은 우사 회의실에 허영호 소장을 찾아갔다. 회의실에는 수사 일꾼들 밖에 없었다. 알고 보니 용만은 종연이가 집에서 닭을 잡고 청해 술을 마시러 가고 없었던 것이다. “병진이가 소싸움을 시켜 배상하다나니 집도 없이 조개덕 1대에 허망 나앉은 일에 불만을 품고 불을 지르지 않았겠소?” 상순은 병진의 의심스러운 점을 일일이 제기했다. “아침에 허 소장이 타버린 낟가리 뒤에서 주은 술병은 병진이 항상 수레에 싣고 다니면서 마시던 술병과 비슷하오.” “예?” 허영호 소장은 숱한 종이 장들을 하나하나 뒤번지더니 병진의 자술을 찾아내 상순과 함께 읽어 보았다. 나는 불이 난 12월 14일에 아침부터 우후까지 수레로 벼를 탈곡장에 실어들이었다. 저녁에는 앞마을 계수동에 가서 동원이네 집에서 술을 마시고 밤늦게 집으로 돌아와 잤다. 난 이번 탈곡장 낟가리에 불을 단 일이 근본 없다. 이병진. 1974년 12월 15일 상순은 병진의 자술서를 서너 번 읽어보더니 손가락으로 한곳을 똑똑 쳤다. “병진은 확실히 의심스럽소. 누가 의심하지도 않고 묻지도 않았는데 여기에 ‘난 이번 탈곡장 낟가리에 불을 단 일이 근본 없다.’고 쓴 거 보오."      허영호 소장은 "정말, 도적이 제 발등이 저리다고." 하고 말하면서 자술서를 뚫어지게 들여다보았다. “이게 바로 여기에 황금 300냥이 없다는 거나 뭐가 다르단 말이오?” “허허허.” 상순은 허 소장을 보고 "혹시 다른 의심스러운 사람은 없소?" 하고 물었다. 허영호 소장은 한숨을 후 내쉬었다. “혹시 이번엔 하향한 노간부들이나 지주와 부농들 쪽에 문제는 없겠습니까?” 상순은 뒤로 물러앉으면서 심중하게 한참이나 착잡한 생각에 잠겼다. 한참 후에야 그는 무거운 입을 열었다. “노간부들이 무슨 그런 불장난을 했겠소? 이계삼 서기나 허영주 현장처럼 총칼을 들고 일제와 국민당과 싸워온 노간부들인데. 지주와 부농들 속에서는 충국을 좀 조사해봐야겠소.” 수사 일꾼들은 계급성분이 복잡한 이 마을에 와서 노서기 김상순 대장의 말을 듣는 수밖에 없었다. 상순이 나가 충국을 조사해보니 전날 저녁에 충국은 조개덕에 있는 단간 집이 내굴어서 우사 회의실에 와서 우사에서 일하는 상순의 둘째사위 경만과 양아들 수봉과 함께 잤던 것이다. 사위와 양아들을 찾아가 조사하고 대조해보아도 충국의 말과 똑 같았고 소변보러 밤중에 한번 피뜩 나갔다 들어온 외에 나간 적이 없다고 했다. 다른 지주와 부농들도 수사 일꾼들이 일일이 조사해보아도 별로 수상한 단서가 잡히지 않았다. 상순은 이튿날 아침에 자기 집 윗방에 올라가 임시로 들어있는 허영호 소장과 수사 일꾼들과 함께 아침상을 마주하고 말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병진이가 수상하오.” “나도 병진이란 자가 제일 수상하다고 생각합니다.” 허영호는 상순의 말에 동의하고 나서 “병진은 표현이 어떻습니까?” 하고 물었다. 상순은 장국을 한술 떠서 후후 불어 꿀떡 넘기더니 말했다. “병진은 일제의 개다리, 반역자 이화영의 맏아들이오. 허 소장이 영월구에 있을 때 일이오. 이전에 병진의 애비 이화영이 역사반혁명분자로 고깔모자를 쓰고 투쟁 받을 때오. 병진은 팔소매 안에 비수를 치워가지고 나가 제 애비를 찔러 죽인 무지막지한 호로 자식이오.” “예?” 수사 일꾼들은 그 말에 모두 숟가락을 든 채 놀라 입을 딱 벌렸다. “그 자가 실로 어지간히 독한 자가 아니구먼.” “어쩜 자기 아버지를 비수로 찔러 죽인단 말이오.” 상순은 뒤 말을 이었다. “당장에서 죽은 건 아니지만 비수에 찔려 피를 너무 많이 흘려 사흘 만에 죽었소. 당시 어째 죽였는가 하니까. 자기 아버지가 투쟁을 받으면서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보고 반역자인데 어서 죽으라고 찔렀다고 하지 않겠소?" “개보다도 못한 놈 새끼!” 허영호 소장은 아주 격분해 했다. “그자가 방화범일 가능성이 아주 많습니다. 김용만 국장과 말하고 즉시 불러다 심문해야 하겠습니다." ”상순도 “좋소. 그렇게 하기요.”라고 했다. 아침 숟가락을 놓기 바쁘게 허영호 소장과 상순은 종연이네 집으로 김용만을 찾아 갔다. 그런데 그들도 진작 밥을 다 먹고 새로 지은 덩그런 대대 사무실로 들어가고 있었다. 허영호가 다가가 수사방향을 말하자 김용만 국장은 이럴 때는 군인답게 과단하게 말했다. “즉시 병진을 불러다 심문하오. 난 황주임과 급히 의논할 일이 있어 함께 진수해로 내려가야겠소.” 저쪽에서 거만하게 뒤지개를 짚고 대대 위생소에 들어가고 있는 종연은 술을 마셨는지 퉁퉁한 낯이 귀밑까지 벌겋다 못해 홍당무 같았다. 그는 윤희와 송선을 보고 지껄여 댔다. “아무리 소장으로 가도 그렇지. 어떻게 요 미녀들이 아까워 가겠니? 야, 이 좋은 침대는 어쩌고? 으흐흐, 허허허.” 그 말에 송선은 “아니, 황 주임이 어디 소장으로 갑니까?” 하고 물었다. 윤희도 적이 놀랐다. “제가 시내로 돌아가는 일을 잊지 마십시오.” “그러지. 이 함흥대대에서, 아니, 진수해 공사에서 내 말이면 다오. 허허허. 이제 내 파출소 소장으로 가면 내 말만 잘 듣소. 시내로 돌아가는 일은 근심도 하지 마오.” 윤희와 송선은 마주 보며 웃었다. 이윽고 종연도 대대 사무실로 나오고 이흥수도 도착했다. 바깥에서 떠들썩하더니 병진이가 민병들과 함께 대대 사무실로 들어왔다. “어쨌다고 나를 이러오? 난 불을 단 적이 없단 말이오?” 병진이 행악질하는 것을 보고 허영호 소장과 상순은 서로 눈길을 맞췄다. 종연과 용만은 병진을 심문하는 일보다 무슨 일이 그렇게 중요한지 바깥으로 나가더니 찌프에 앉아 먼지를 새뽀얗게 일구며 떠나가 버렸다. 허영호 소장은 한참이나 병진을 무섭게 쏘아보더니 아래위를 훑어보았다. 아직도 왼손에 천을 감고 있었다. “어째 손은 감고 있는가?” 병진은 손을 움츠려 뜨리면서 “그날 저녁에 불을 끄다가 뎄소.” 하고 대답했다. “불을 끄는데 먼데서 물을 쳤겠는데 어떻게 손을 델 수 있는가?” 허영호 소장은 병진의 가까이에 다가가더니 손을 싸맨 천을 풀어내 들고 봤다. 물퉁이 친 손등이 벌겋게 부은 채 진물이 줄줄 흐르고 식지는 살갗이 벗겨져 있었다. “이 손가락은 어떻게 돼 이렇소?” 병진은 아무 고려도 없이 대답했다. “그날 펌프를 잣다가 핀이 나가 손가락을 넣고 자았소." 뒤이어 그는 "내 펌프를 자았으니 불을 껐지 물이 없어 불을 끄기나 했겠소?” 하고 자기 공을 내세웠다. 허 소장은 사무상을 꽝 치면서 호통 쳤다. “병진이! 어째 여기 불러왔는지 아는가!” 심지가 굳은 병진은 미리 사상준비를 한 듯이 태연자약하게 앉아 허 소장을 치켜보았다. “그래 내가 불을 질렀단 말입니까?” “시치미를 뗄 작정인가? 그날 저녁에 뭘 했는가?” 병진은 줄줄 주어 댔다. “그날 온 하루 뼈 빠지게 벼 싣기를 하고 저녁에 계수동에 가서 친구 동원이네 집에서 술을 마시고 집으로 돌아와 잤습니다. 난 불을 단 적이 근본 없습니다.” 상순이 옆에서 한마디 물었다. “동원이네 집에서 나올 때 몇 시였소?” “아즈바이, 지금 날 의심하오?” “묻는 말이나 대답하오.” 병진은 좀 생각하는 거 같더니 인차 “그때 한 11시 반일 거요.”라고 대답했다. “이제부터 묻는 말에 한마디도 거짓말이 없이 대답해야 하오. 우리 계수동의 동원과 조사하면 몇 시에 돌아온 게 빤하니까.” “난 거짓말 하지 않았소.” “좋소. 11시 반부터 12시까지 뭘 했소?” “술을 먹고 집에 와서 잤지 뭐 했겠소” “집에서 뭘 했소?” “잤다는데. 왜 이러오? 난 불을 지르지 않았소.” “자기 한 짓을 모르오?” “난 불을 지르지 않았소.” “지금 묻지도 않은 불을 지르지 않았다는 말만 반복하는 건 뭐요?” “불을 지르지 않았다는 거 말하는 거요. 야, 내 정말 정신병에 걸리겠다. 그만 하면 안 되오?” 상순은 그간 조사한 정황에 근거해 따지고 들었다. “네 옆집 왕정해는 네가 12시 넘어 집에 오지도 않았다는 거 알고 있다. 그래도 거짓말을 할 작정이냐? 생각해 봐라. 너는 근본 집에 가지도 않고 불이 붙은 화재현장에서 헛소리를 치면서 개털 모자를 주어가지고 우사 펌프를 자았다. 네가 집에서 잤다는 게 거짓말 아닌가? 넌 근본 술을 먹고 집에 들어가지 않았고 화재현장에 있었다. 그래도 떼질 쓸 테냐?” 그 말 한마디 한마디는 예리한 비수로 돼 허위와 거짓말로 감싼 병진의 추악한 몸뚱이를 하나하나 발가벗겨버리었다. 허영호 소장은 사무상을 꽝 치며 고함쳤다. “노실하게 탄백하라!” “내 불을 질렀다고 이럽니까?” “이게 누구 건가?!” 허영호 소장은 목이 긴 술병을 사무 상 위에 꽝 올려놓았다. 술병을 본 병진의 낯은 대번에 새까맣게 질렸다. 그는 버릇처럼 시꺼먼 눈썹아래 우멍 눈을 껌벅이며 번개같이 속궁리를 하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못 했다. “이 술병을 모르오?” 한참 후에야 제 정신이 들었던지 병진은 “그 술병과 무슨 관계있소?”하고 말끝을 얼버무렸다.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해. 누구 술병인가?” “내 거요.” “네 술병이 왜 불에 탄 낟가리 북쪽에 있는가?” “건, 건.” 병진은 꺽꺽거리다가 “어제 벼를 부리고 떨어뜨린 거 같습니다.” 하고 둘러댔다. 허 소장은 “우리 사원들은 네가 벼를 부린 후 술을 마시고 가는 걸 다 본 사람이 있다. 그래도 계속 거짓말을 해?” 하고 말하며 병진을 뚫어지게 쏘아보았다. 상순은 병진의 멱살을 틀어쥐고 흔들며 고함쳤다. “우린 증거를 다 장악했다. 노실하게 말해라! 네 라이터는 어쨌니?” 병진은 호주머니를 들추는 체 하다가 “아야, 내 라이터를 어쨌니?” 하고 상순을 쳐다보았다. 상순은 병진의 멱살을 틀어쥐어 흔들다가 콱 밀어놓았다. “네가 불을 질렀지?” 병진은 뒤로 엉덩방아를 찧으면서 “아니, 이거 생사람을 잡겠소.” 하고 억울한 척 했다. “이건 뭐냐?” 이때 허 소장은 라이터를 사무 상에 내놓았다. 병진은 “그 라이터 어디서?” 하고 빼앗으려고 허 소장한테 달려들었다. “이 놈, 노실하게 탄백해라.” “난 불을 단 적이 없소. 생사람을 잡지 마오.” 병진은 죽을상을 지으면서 최후발악하며 탄백을 거부했다. 그야말로 낚시에 걸린 물고기가 물에서 나오지 않으려고 자충 우돌 하면서 허우적거리는 상이었다. 이때 허영호 소장은 사무 상을 꽝 치면서 “어째 네 죄행을 다 말해야 승인하겠는가?” 라고 고함쳤다. 병진은 그저 “난 불을 지른 적이 없소. 생사람을 잡지 마오.” 이 말만 반복할 뿐이었다. “네가 손이 덴 것은 어떻게 된 영문인가?” 상순의 묻는 말에 병진은 흘끔 쳐다보며 “불을 끄다가 뎄소.”라고 대답했다. “거짓말!” 상순은 병진의 귀 쌈을 후려갈겼다. “너 이놈 새끼! 넌 불이 달린 낟가리에 가서 고함질이나 쳤지 근본 불 가까이에 가서 불을 끈 적이 없다. 어떻게 손을 데우니?” 허 소장도 책상을 꽝 쳤다. “너 이놈! 노실하게 탄백하지 못 하겠는가? 네 손은 어데서 덴 후 상한 거다. 말해! 손은 어데서 뎄는가? 네 라이터는 어째 벼 낟가리 옆에 떨궜어?” “또 한 가지 있다. 네 모자는 어째 불붙은 낟가리 옆에 있어?” “불을 끄다가 떨어뜨렸지. 뭐. 어쨌다고 자꾸 이러오? 난 불을 단적이 없소. 없어!” 병진은 비수에 심장을 찔려 피를 줄줄 흘리는 야수처럼 되고서도 한사코 불을 단적이 없다고 부인했다. 병진은 평소에 사내노라고 큰소리를 꽝꽝 쳤지만 이쯤 되자 걸상에 물앉아 도적고양이처럼 허 소장과 상순을 흘금거리면서 다리마저 부들부들 떨었다. 나중에 허영호 소장은 “자기 죄행을 낱낱이 교대하고 발편잠을 자라!” 하고 엄히 꾸짖었다. 뒤이어 허영호 소장은 병진을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하고 상순이네 윗방에 가둬 넣고 계속 심문하기로 했다. 허영호 소장과 상순은 혹시나 해 기타 지주들과 부농들의 정황도 조사했다. 그런데 충국이랑 근본 의심할 데가 없었다. 온 여름 집에 비가 새 대부분 시간 우사 회의실에 와서 잔 충국은 그날도 초저녁 팀으로 탈곡하고는 회의실에서 불이 달리기전에 자는 것을 사원들이 드문드문 쉬러 들어왔다가 보았다고 했다. 허영호 소장은 상순과 함께 상순이네 집 바깥에 나가 새 정황을 말했다. “김 국장, 전번에 허백호 형님이 말하던데 그날 종연은 묘지꺼리까지 송선을 쫓아가 겁탈하려고 했답니다. 그래서 백호 형님이 종연을 돌멩이로 깠답디다.” “그럼 송선을 겁탈하려는 형사범죄자를 돌로 깠는데 무슨 죄가 있단 말이오? 황차 종연은 죽지도 않고 그날로 정신을 차렸고 사흘 만에 공사병원에서 퇴원했는데.” 상순의 말에 허 소장은 한숨을 후 내쉬었다. “허백호 서기가 내 형이라고 김용만이 생사람을 잡는 겁니다. 공안국에서도 형사수사에 이름 있는 강운룡 과장을 교통대대에 쫓아버렸답니다. 기실 이번 방화사건도 강운룡 과장이면 진작 해명했을 겁니다.” 상순은 사촌동서가 그렇게 된데 마음이 아팠다. “방화사건이 해명된 거나 같소. 병진이 지른 게 분명하오.” “나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한편 병진은 허영호 소장의 수사방안대로 상순이네 집 위방에 있으면서 수사일꾼들과 함께 성숙과 명옥이 끓여주는 밥을 먹으면서 하루 10여 시간 씩 심문을 받았다. 날마다 수사 일꾼들이 윤번으로 똑 같은 심문을 했다. 그것이 짜증나 병진은 이젠 밥도 별로 먹지 않고 천정을 멍하니 쳐다보면서 무슨 궁리를 하고 있었다. 어느 날 점심, 병진은 숟가락을 놓자마자 뒤가 마려웠던지 구들 끝에 나가 앉아 신을 신었다. 그러다가 피끗 부엌 쪽으로 해 놓인 땔나무 패는 도끼가 눈에 뜨였다. 그는 도끼를 보는 순간 생사결판을 내고 도망치고 싶었다. 뒤를 돌아보니 수사 일꾼들은 바깥에 나가고 없었다. 부엌에서 명옥과 성숙이가 설거지를 하고 벽 밑에서 상순이가 솜옷을 껴입고 있었다. (이때 손을 쓰지 못하면 감옥에 가거나 총살 받을 거다.) 병진은 불시에 도끼를 쥐어들고 돌아섰다. “이놈 새끼!” 순간 어느 결에 덮쳐든 상순의 무쇠주먹이 병진의 면상을 떵 쳤다. 병진이 도끼를 휘두르기도 전에 상순에게 도끼를 쥔 팔이 뒤로 탈려 버렸다. “사람 살려라!” 명옥이 소리치자 문이 벌컥 열리며 허영호 소장이랑 뛰어 들어왔다. “꼼짝 말어!” 허영호 소장이 권총을 병진에게 들이댔다. 병진은 몸부림을 치다가 그만두었다. 수사 일꾼들은 병진에게 쇠고랑을 채웠다. “이 새끼 도끼를 들고 찍으려고 하지 않겠소.” 병진은 이를 악물며 고함쳤다. “네 놈들을 다 찍어죽이지 못한 게 한이다! 내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아버지 원수를 갚겠다. 상순이, 네 놈은 내 소싸움을 시켜 소뿔을 뺐다고 한족 대에 쫓아내 빚 구렁에 처넣었다. 난 허망에 나앉았기에 아까울 게 없다. 네놈들에게 원수를 갚지 못한 게 원통할 뿐이다!” “네 놈이 불을 달았지?” 상순은 병진의 귀 쌈을 후려갈겼다. 병진은 하늘땅도 두려워 하지 않았다. “네 놈들의 집까지 다 불 지르지 못한 게 한이다.” “탄백해라. 어떻게 불을 질렀는가?” 병진은 상순과 허영호 소장을 쏘아보며 버럭버럭 고함쳤다. “난 두려울 게 없다. 내가 불을 질렀다. 난 그날 계수동에서 술을 마시고 11시 반에 집 울안으로 돌아왔다. 술기운에 탈곡장에 밝힌 전등불을 보는 순간 소싸움을 시킨 바람에 소 값을 무느라고 집을 팔고도 모자라 빚을 가득지고 한족 생산 대에 쫓겨 온 게 괘씸하더라. 그래서 낟가리에 불을 콱 지르고 싶더라. 사원들이 먹을 쌀이 없게 만들어서 상순의 위신을 납작하게 만들자고 그랬다. 그래서 항상 쥐고 다니던 술병을 가지고 탈곡장에 가서 제일 서북풍이 센 서북쪽 낟가리에 불을 질렀다. 다 말했다. 죽이고프면 죽여라!” 허영호 소장은 수사 일꾼들을 잘 기록하게 하고 병진을 계속 심문했다. “불을 지른 경과를 상세히 말해라. 낟가리에 술을 치고 불을 달았지?” 병진은 구들에 펄렁 물앉더니 자랑삼아 대답했다. “낟가리에 불이 잘 붙으라고 벼 짚 단을 몇 단 빼낸 후 술을 치고 불을 질렀다. 불이 통쾌하게 확 달리더라.” “손에도 술이 묻은 채 불이 달려 뎄지?” “잘 아는구나. 술병에도 불이 확 달려 손이 뎄다. 그래 불이 붙은 술병을 낟가리 밑에 떨군 채 달아났다.” 상순은 성난 사자처럼 병진을 쏘아보며 따졌다. "라이터도 그래서 낟가리 밑에 떨어뜨렸지?”   “그렇다. 공안국 국장을 했다더니 공밥은 먹지 않았구나. 라이터에도 술이 묻었는지 불이 확 달려 그만 떨어뜨리고 달아났다.” 병진은 어린 애처럼 마구 발버둥질을 치며 대성통곡 쳤다. “네놈들의 집을 몽땅 불 지르고 죽여치우지 못하고 잡힌 게 한이다. 이 개새끼들아!” 그는 쇠고랑을 채운 두 손을 쳐들고 고래고래 고함쳤다. 진짜 방화범의 몰골이 백일하에 드러나고 만 것이다. 화재사건이 발생해 일주일 만에 사건이 다 해명된 뒤에야 김용만과 황종연이 돌아왔다. 김용만은 황종연이 사건을 해명했다고 상급에 거짓 보고를 하고 허영호 소장을 철직시킨다고 했다. 이유라면 허영호 소장의 관할구역에서 연속 살인, 상해, 방화 사건이 발생했지만 제때에 해명하지 못했고 이젠 늙어서 제대로 소장 구실을 못한다는 것이었다. 몇 달 후 방화범 이병진은 공개심판에서 유기징역 10년에 언도돼 감옥으로 압송됐다. 김용만 국장은 방화범을 나포한 허영호 소장을 철직하고 대신 황종연을 진수해파출소 소장으로 임명했다. 상순이나 허영호나 수사 일군들과 사원들까지 모두 그 인사변동에 삶은 소대가리 웃다 꾸러미 터질 노릇이라고 뒷공론을 했다.              6. 주먹세계       개일듯 말듯 하던 하늘이 조금 개이는 것 같더니 또다시 먹장구름이 뒤덮쳐 왔다. 거무칙칙한 하늘이 둥근 천정처럼 가없이 넓은 들을 칭칭 둘러 감아 숨 막히고 코막 힐 지경이었다. 하늘에는 덕돌의 근심어린 마음이 내려앉은 듯이 형체를 분간하기 어렵게 퍼렇게 덩덩한 구름들이 겹겹이 내려 앉았다. 먹장구름덩이들은 해가 대지를 비출 수 없게 심술을 부리는듯이 만물상을 지었다. 어떤 먹장구름은 아가리를 쩍 벌리고 으르렁거리는 호랑이 대가리 같고 어떤 구름은 때론 불상에 뛰어올라 천정을 쳐다보며 이를 잡아먹는 잰나비 같았다. 어떤 구름은 뭉쳤다가도 변화무쌍하게 흐트러지며 요술이나 피우는 상 싶었다. 먹장구름의 심술과 요술,롱간에 숨 막힐 듯한 대지의 만물은 파란 하늘과 따뜻한 햇볕을 볼 수 없었다. 패용천산과 칼산 사이 골짜기의 과수원 상공에서 난데없는 매지구름이 연기처럼 피어오르더니 감때사나운 바람에 먹장 같은 떼구름이 사납게 몰려왔다. 우르릉 꽝 요란한 천둥소리와 함께 소낙비가 새까만 구름이 고패를 치듯 하며 덮쳐왔다. 바람이 휙- 소용돌이치자마자 밤송이 같은 빗방울이 후둑후둑 떨어졌다. 그만 비바람과 함께 하늘이 무너져 내려 앉나 시피 먹장구름이 쏟아져 내리는 듯이 진창에 소낙비가 창창 들어박혔다. 덕돌은 패용천산 동굴 속에 숨어 장대비가 쏟아지는 검푸른 하늘을 쳐다보며 언제 구름 한 점 없이 하늘이 개이고 맑은 하늘아래 따뜻한 날이 오겠는가고 바랐다. 허나 당장 하늘이 개일 것 같지도 않았다. 패용천산 남쪽 산비탈의 이 동굴은 십여 년 전에 군부대에서 전쟁준비로 파놓은 군용 갱도였다. 이전에 덕돌은 애들을 데리고 군사훈련을 하면서 이 갱도 안에 들어가 횃불을 들고 끝까지 나가 본적이 있었다. 갱도가 남쪽 양지바른 벼랑으로부터 서쪽 과수원 쪽까지 통했던 것이다. 며칠 전에 덕돌은 집에서 아버지에게 쫓겨나 바깥에서 헤매다가 소낙비를 피해 이 갱도로 와서 숨었던 것이다. 사실 덕돌은 고중입학을 위해 여학생들이 자기에게 투표하게 동원하라고 순희와 은숙에게 쪽지를 써서 부친 일이 탄로 났던 것이다. 그것도 덕돌이 믿고 친하던 철주와 동림에게 그 쪽지를 썼기에 여자애들이 다 투표해 고중에 입학했다고 자랑삼아 얘기했던 것이다. 그런데 고중에 붙지 못한 철주가 그 일을 성욱과 상선에게 말하는 바람에 성욱이 새로 온 담임교원 황승연에게 고발했던 것이다. 공사 기업에 갔다가 형 황종연의 덕분에 학교에 되돌아온 황승연이 또다시 덕돌이네 학급에 와서 담임교원을 맡았던 것이다. 황승연은 공사 기업에서 일해봤자 승급도 하지 못하자 학교에서 놀면서 애들의 왕이나 되는 게 나을 거 같아 되돌아왔던 것이다. 황승연은 덕돌에게 선입견이 있었는바 덕돌은 노 간부 상순의 아들이기에 미워 했지만 류소기의 “독서벼슬론”에 폭 물들어 공부만 잘하지만 사상이 나쁜 애라고 더욱 미워했던 것이다. “나쁜 놈 새끼, 내 계속 이 학교에 있었더라면 고중에 가기나 했겠어? 흥! 하도 덕돌의 큰누나 춘자와 동창생인 경산이랑 성환이랑 도왔으니 그렇지. 거기다 6촌형 철봉까지 발을 벗고 나서는 판에 빈농 대표 흥순들 혼자 막을 수 있었겠는가! 손오공이 아무리 날래도 여래불의 손을 벗어나지 못해. 이제 내 손에 들었으니 혼나 봐라!” 승연이 속을 끙끙 앓으면서 벼르는데 때마침 덕돌이 순희와 은숙에게 쪽지를 썼다고 하지 않겠는가! “흥! 잘 걸려들었다. 못된 송아지 궁둥이에 뿔부터 난다더니. 너 이전에 나를 풍자하는 7언 율시까지 쓰더니 이번에 어디 두고 보자. 우리 학교에서 공부나 하는가?” 그는 학교 장동원 서기한테 말하면 괜히 또 덕돌의 편을 설 것 같아 먼저 은숙을 불러 사건을 확인했다. 은숙은 선생님의 앞인지라 얼굴이 대뜸 홍당무가 됐다. 승연은 은숙을 슬슬 구슬렸다. “괜찮아. 은숙아, 네 잘못은 없다. 덕돌이 그 못된 새끼 잘 못이지. 어찌 학생으로서 여학생에게 연애편지를 쓰니?” “연애편지 아닙니다. 그저 서로 학습을 도우면서 이담 대학에 가자는 편지를 썼을 뿐입니다.” “네 그 편지 있니?” “그거 해 뭐 합니까?” 은숙은 외까풀 눈을 살며시 치켜뜨며 득의양양해 하는 황승연의 날카로운 낯을 올려다 보았다. “너한테 관계없다. 덕돌이 쓴 그 편지를 내 보자. 뭐라고 썼는가?” 허나 은숙도 이젠 열일곱 살이나 되는 애여서 하라는 대로 할 소녀애가 아니었다. “그 편지를 애들이 보면 나까지 놀려댈 게 아닙니까?” “내 말릴게. 누가 감히 너를 놀리겠니?” “덕돌이 놀림을 당해도 그렇지.” 은숙은 눈물이 글썽해 황승연을 쳐다보면서 통사정을 들이댔다. “황 선생님, 제발 이 일을 없는 일로 덮어 감춰 주십시오. 예?” 그러자 황승연은 음충한 눈길로 귀밑까지 발갛게 물든 은숙의 얼굴을 보다가 손을 들어 슬슬 어루만지면서 빈정거렸다. “내가 담임교원인 이상 넌 근심하지 마라. 덕돌을 교육해 사람으로 만들자고 그런다. 이담 다신 여자애들과 집적거리지 못하게 말이다. 이게 바로 병을 치료해 사람을 구한다는 모주석의 교시를 학습 활용하는 거야.” 은숙은 자기 얼굴에서 벌레가 기는 것 같아 몸을 옹송그리면서도 황승연의 손을 감히 쳐버리지 못했다. 황승연도 너무 한 거 같았던지 은숙의 얼굴에서 손을 떼면서 “그 편지만 가져오라. 그 편지 있니?” 하고 물었다. 은숙은 덕돌의 “병을 치료해 사람을 구한다.”는 황승연의 말에 얼리어 깊은 고려도 없이 “있습니다. 우리 엄마 건사했을 겁니다.”라고 대답해버렸다. “네 엄마 그거 건사해둬 뭐한다니?” 은숙은 머리를 들지도 못하고 목구멍으로 기어들어가는 모기소리만한 목소리로 “우리 엄마는 편지를 두었다가 이제 다시 덕돌이 나를 지껄이면 그 편지를 꺼내 혼 내주겠다고 건사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내일 얼른 그 편지를 찾아 가져 오너라. 내 덕돌을 혼 내주마.” “덕돌을 놔두십시오. 서로 학습을 잘하자고 했는데 무슨 잘못이 있다고 그럽니까?” “넌 모른다. 학생들이 연애를 해선 안 돼.” “…” 그리하여 이튿날 은숙은 어머니와 말하고 그 편지를 가져다 황승연에게 바쳤다. 황승연은 덕돌의 큰 꼬리나 밟은 듯이 성욱이랑 상선이랑 응철이랑한테 이른바 연애편지를 돌려가면서 구경시켰다. 그리하여 삽시간에 온 학급 애들에게 덕돌이 연애편지를 은숙에게 썼다고 소문이 쫙 펴졌다. 화는 눈썹 끝에서 떨어진다더니 이런 맑은 하늘의 생벼락이 또 어디 있겠는가? 덕돌이 교실에 들어갔을 때었다. 은숙이랑 순희랑 두 손으로 얼굴을 싸쥐고 바깥으로 우르르 달려 나갔다. 남자애들은 “연애대장이 왔다!” 하고 고함쳤다. 덕돌은 무슨 감투 끈인 지도 모르고 책가방을 메고 교실에 들어가 제 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책상에 죽은 물고기 몇 마리가 놓여 있고 그 옆에 분필로 “덕돌아, 너와 은숙의 결혼잔치 부조다.”라고 써놓았다. 머리를 들고 앞을 보니 흑판에도 여자애 손을 잡은 남자애를 그려놓고 “난 은숙을 사랑한다. 우린 이 담 대학에 간 후 잔치해 잘 살자!”라고 써놓지 않았겠는가! “누가 그랬니?” 덕돌이 묻자 여기저기서 “연애대장!” 하고 고함쳤다. 성욱이랑 응철이랑 깨고소해 구경하고 있었다. “누가 그랬니? 나서라!” 덕돌이 눈을 부릅뜨고 고함치자 응철이 책상에 앉아 깨 그루에 앉은 참새처럼 재잘거렸다. “내 그랬다. 연애대장!” 덕돌은 분이 치밀어 으스러지게 틀어쥔 주먹으로 응철을 한 대 갈겼다. 응철은 허리를 슬쩍 틀어 피하면서 덕돌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덕돌과 응철은 땅바닥에서 엎치락뒤치락 하며 굴렀다. 그때 구경하는 숱한 애들 속에서 성욱이 발로 덕돌의 배를 걷어찼다. 그러자 상선이랑 설복이랑 일광이랑 달려들어 덕돌에게 물매를 안겼다. 그때 장영웅이랑 동림이랑 광철이랑 나서서 말려서야 덕돌은 다 터진 얼굴을 들고 겨우 일어났다. 덕돌은 눈물을 주르르 흘리면서 책상에 가서 가방을 메고 쩔룩거리면서 교실을 나갔다. “어디 두고 보자! 이 개새끼들아!” 상학종이 울렸다. 황승연은 교실에서 나가는 덕돌을 문어귀에서 딱 마주쳤다. “어디로 가?!” "..." 덕돌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휭 하니 가버렸다. 그런데 고중에 붙지 못한 철주랑 숱한 애들이 책가방을 메고 교실에 들어와 벽에 죽 붙어 서서 야단쳤다. “저런 연애대장을 다 고중에 붙이면서 왜 우릴 붙이지 않습니까?” “옳습니다. 덕돌을 퇴학시키고 우리를 고중에 입학시키십시오.” 철주랑 소리쳤다. 황승연은 코피를 흘리며 운동장으로 가버리는 덕돌을 보고 고소해 했다. 한참 후 황승연은 덕돌을 따라와 불러 세웠다. “네가 학생이 할 짓을 했니? 연애편지를 쓰다니? 넌 퇴학시켜야 해.” 덕돌은 허리 아파 나무에 기대서서 억울함을 하소연했다. “난 연애편지를 쓴 게 아닙니다. 그래 학습을 서로 돕자고 한 게 무슨 잘 못입니까?” 황승연은 날이 선 콧마루 위 우멍눈을 무섭게 부릅뜨고 고함쳤다. “너 아직도 승인하지 않겐?! 이 놈아, 꼴찌 같은 새끼, 죄꼬만 게 누구한테 연애편지를 써? 그 바람에 은숙이 공부를 하지 못하고 울고 있다.” 황승연은 덕돌의 귀쌈을 쨕 갈겼다. 덕돌은 눈앞이 캄캄해나며 숱한 별찌가 맴돌았다. “어째 칩니까? 선생이면 학생을 마음대로 때려도 됩니까?” 덕돌은 얼얼해나는 볼을 매만지면서 대들었다. “야, 이 놈 새끼, 아무리 사생이 ‘한 전호속의 전우’라지만 네 감히 선생한테 대들 테냐?” 덕돌의 눈에는 황승연이 선생이라기보다 편싸움을 하는 싸움 군 같아 보였다. “더 들을 말도 없습니다.” 덕돌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절뚝거리면서 집으로 가버렸던 것이다. 그런데 점심에 집에 와서 그 사실을 알게 된 상순은 자초지종을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무작정 덮어놓고 덕돌을 마구 때리며 쫓아다녔다. 성질이 괴벽한 상순은 낫을 마구 쥐어뿌리며 쫓아다녔다. 덕돌은 집에서 쫓겨난 후 여기저기 숨어 다니다가 배고프면 밤에 자기 집 가지 밭에 가만 가만 가서 가지를 뜯어먹고 추우면 가만히 집 뒤울안으로 해 고방에 들어가 가만히 잤다. 아버지가 겁나 어떤 때에는 교실의 창문 유리를 뜯어내고 살금살금 기어들어가 책상 위에서 자군 했다. 그런데 그만 아버지에게 들키어 집에 다시는 들어가지 못했다. 그리하여 머나먼 패용천산 갱도에 와서 숨어 있었던 것이다. 배고프면 마을 앞의 자기 집 가지 밭에 내려가서 가지나 오이를 뜯어 먹으면서 주린 배를 달래었다. 그는 아무리 배고파도 과수원에 주렁주렁 달린 배 하나 마을의 남의 가지를 하나도 훔쳐 먹지 않았다. (에이유. 이 더러운 세상에서 어떻게 살겠니? 아예 자살해 버리자.) 덕돌은 달리는 기차 앞에 뛰어들어 자살하려고 진수해 역으로 갔다. 허연 연기와 김을 물물 내뿜으며 칙칙 폭폭 달리는 열차 대가리를 보는 순간 더 살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덕돌은 열린 대합실 창문으로 뛰어나가 달리는 열차를 향해 뛰어갔다. “서라!” 그때 역 직원이 고함치며 쫓아가 덕돌의 팔소매를 잡았다. “놓으십시오! 난 살고 싶지 않습니다. 이 더러운 세상에서 살고 싶지 않단 말입니다!” 덕돌은 몸부림치며 고함쳤다. 여러 직원들이 덕돌의 허리를 끌어안고 팔을 뒤로 비틀어 역 파출소로 끌어갔다. 경찰까지 와서 덕돌을 보고 물었다. “너 이름이 뭐니? 왜 자살하려고 하니?” “난 살고 싶지 않습니다. 연애편지를 쓰지 않았는데도 연애편지를 썼다고 놀려주는 거 어쩝니까?” 경찰은 인차 진수해파출소에 전화로 알렸다. 이윽고 찌프가 달려와 역 파출소 마당에 와서 멈춰 섰다. 찌프에서 허영호와 황종연이 내렸다. 그들은 역파출소에 들어오자 대뜸 덕돌을 알아보고 “네가 어째 여기 왔니?” 하고 놀라했다. 역 파출소 경찰은 “얘를 아오? 얘가 자살하려고 달리는 열차에 뛰어들려는 거 겨우 붙잡았소.”라고 했다. 황종연은 허영호를 흘끔 곁눈질 해보더니 경찰에게 “얘는 우리 진수해 공사 함흥 대대 노 서기의 아들이오. 꽤나 말썽을 일으키는구먼.” 하고 말하면서 덕돌을 돌아보았다. “어째 자살하려고 했니?” 덕돌은 왕 울음보를 터뜨렸다. 이윽고 경찰들은 흑흑 흐느끼는 덕돌에게서 억울한 하소연을 듣고 머리를 끄덕였다. “김 서기가 어떻게 기른 외동아들인데 자살해서야 되니? 구체정황은 대개 알만한데 사내란 어떤 일이 있어도 허리를 꿋꿋이 펴고 떳떳이 살아야 한다. 알만하니? 자살할 용기가 있으면 어째 이를 악물고 살 결심이 없느냐?” 허영호 소장의 말에 덕돌은 머리를 점차 들었다. (그래, 옳다. 내가 자살하면 누가 좋아하니? 성욱이랑 응철이랑 내가 연애편지를 썼다고 두고두고 놀릴 게 아닌가? 난 억울한 누명을 쓴 채 귀신이 될 게 아닌가?) 순간 덕돌은 벌떡 일어나 “저를 집에 보내주십시오. 다신 머절싸하게 자살하지 않겠습니다.”라고 했다. 허영호는 “그래, 그래야지. 어서 집으로 가라.”라고 했다. 그때 황종연이 덕돌의 앞을 막아 나섰다. “안 되오. 우리 파출소 소장은 내지. 당신이오? 걔를 마음대로 돌려보낼 순 없소. 우리 파출소에 데리고 가서 잘 알아봐야겠소.” “뭘 말이오?” 종연은 소장 틀을 차리면서 제까진 멋있는 추리를 해댔다. “얘 말만 듣고 내보내 되오? 자살하려고 할 때엔 꼭 무슨 죄를 지었을 수 있소. 그간 집에서 쫓겨나 바깥에서 뭘 먹고 살았단 말이오? 꼭 뭘 훔쳐 먹었을 수도 있잖소?” 덕돌은 너무 억이 막혀 종연을 쏘아보면서 울분을 토했다. “어째 생사람을 잡으렵니까? 내 언제 훔쳐 먹었습니까? 난 배고프면 우리 집 가지 밭에 가서 가지를 뜯어 먹으면서 이제껏 살았습니다.” “걸 어떻게 믿니? 네 집 가지 밭이 얼마 크면 네가 가지를 뜯어먹으면서 열흘이나 넘게 살았단 말이냐? 남의 가지랑 훔쳐 먹었지?” “어떤 때엔 우리 엄마 가만히 옥수수떡을 가져다주어서 먹고 살았소.” “보오. 아무 문제도 없소. 얘는 김 서기를 닮아서 거짓말을 할 얘가 아니오.” 그제야 황종연도 죄 없는 덕돌을 어찌는 수 없어 내보냈다. 허영호는 비칠거리는 덕돌이 또 자살이라도 할까봐 근심돼 쫓아나가 데리고 진수해 시내에 하나 밖에 없는 대중식당에 대리고가서 한때 사 먹였다. 그는 이밥을 넋을 잃고 먹는 덕돌을 보고 코마루가 시큼해났다. (얼마나 굶었으면 이밥 두 사발이나 먹고서도 두부 국 한 사발을 게 눈 감추듯 할까?) “덕돌아, 날 알만하지?” 덕돌은 국물을 들어 쭉 마시고 나서 입귀를 쓱 닦으면서 “잘 모르겠습니다. 잘 먹었습니다.” 하고 허리 굽혀 인사했다. 그는 40대 중반인 허영호가 자기를 특별히 잘 대해주는 것이 고마워 연신 인사했다. 허영호는 덕돌의 손을 잡고 말했다. “난 진수해파출소 허영호라고 한다. 네 아버지는 이전에 영월구 공안국 국장이었다. 그때 나를 경찰로 뽑아줬다.” “예? 우리 아버지가 공안국 국장이었습니까?” 덕돌은 눈이 동그래졌다. “그래. 그때 내가 늙으신 어머니를 모시고 고생할 때 김 국장은 항상 우리 집에까지 찾아와 자기 호주머니를 들춰 어려운 생활에 보태라고 주었지. 네 아버지가 나를 공안국에 데려오지 않았더라면 내가 파출소 소장을 하기는커녕 영월구에서 소 궁둥이나 쳤을 거야.” “예~” 덕돌은 이제야 자기를 잘 대해주는 원인을 알고 머리를 끄덕이면서 미더운 눈길로 허영호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이후에 무슨 일이 있으면 내게 말해라. 넌 아직 어려서 모르는 게 많다. 황승연이나 저 파출소 소장 황종연은 네 아버지와 썩 좋지 않은 사이니까. 주의해라.” 덕돌은 허영호에게 허리 굽혀 인사했다. “예. 알았습니다. 명심하겠습니다.” 허영호는 그러고도 시름이 놓이지 않아 진수해를 벗어나 해동다리까지 덕돌을 바래다 주면서 여러 가지로 타일러 주었다. 허영호와 갈라진 덕돌은 집으로 들어가려다가 자기한테 낫을 마구 쥐어뿌리던 아버지 부릅뜬 세 귀 눈이 떠올라 주춤 멈춰 섰다. (아버지가 나를 용서할까?) 중도에서 덕돌은 오도 가도 못하고 길 한판에서 서성거렸다. (그럼 어디로 간단 말인가? 패랑산 갱도로 갈까? 아니야. 이젠 조꼬만 가지나 오이도 다 뜯어먹어 사흘 안엔 먹을 게 없다. 그렇다고 남의 거 뜯어 먹을 수도 없고.) 생각다 못해 덕돌은 가보지 못한 둘째외삼촌 집을 떠올렸다. (거기서 며칠 묵으면서 보자.) 덕돌은 진수해 영화관 근처에 있는 둘째외삼촌 집으로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겨우 옮겼다. 남루한 옷을 입고 집에 들어선 덕돌을 보고 둘째외삼촌 근룡이나 삼촌댁도 놀라했다. “네가 어떻게 돼 왔니?” “놀러 왔소.” 근룡은 키 넘게 큰 덕돌의 손을 잡고 반갑게 맞이했다. 그는 옛날 자기 애기때 어머니가 젖이 없어 먹지 못해 고생할 때 덕돌의 어머니가 자기를 업고 다니면서 동냥젖을 먹여 살렸고 염소를 길러 염소젖을 먹여 키웠다는 말을 했다. 삼촌댁은 덕돌을 먹이려고 없는 쌀독을 빡빡 긁어 찰밥을 해먹이었다. 덕돌은 고중입학준비를 한창 하는 한 살 지하 외사촌여동생 최정옥과 초중입학을 준비하는 외사촌남동생 최연길의 공부랑 배워주면서 사흘은 잘 놀았다. 허나 외삼촌 집에 계속 눌러 앉아 있는 것도 쌀이 귀한 세월에 말이 눈치 보여 엉덩이를 들고 일어났다. 근룡은 “얘, 어쩌다 놀러 왔다가 더 놀아라.”라고 했다. 허나 덕돌은 “학교에 가서 공부하겠소.”라고 하며 기어이 일어나 떠나갔다. 뒤에서 정옥은 “지금 어디 학교에서 공부를 한다고 그래? 농촌 학교에서야 농사일을 더 시키겠지 뭐? 더 놀면서 내 공부나 배워 줄 게지.”라고 했다. 허나 덕돌은 그들의 호의를 가슴에 담은 채 그들과 석별의 정을 나누며 좁은 골목길을 벗어났다. “이젠 어디로 가야지.” 몇 발자국만 더 내디디면 외할머니네 집이었다. 작은 외삼촌 근삼은 덕돌보다 열한 살 이상이었는데 둘째누나 은숙과 동갑이었다. 그는 금방 결혼해 여섯 살 난 딸애 순애를 키우면서 재미나게 살고 있었다. 허나 외할머니네 집 앞으로 가면서도 발걸음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쌀 고생을 모질게 하는 세월이여서 피뜩 보니 외할머니네 바람벽에 쌀 절약공약서가 나붙어 있었다. 둘째외삼촌댁에게서 들어서 알았는데 외할머니는 바람벽에 붙인 그 절약공약서에 “손님은 하루에 양표 한 근 두 냥에 5전을 내고 가라.”고 조목조목 써넣었다고 했다. 또 화룡의 맏아들 근형의 맏아들 만길이 어쩌다 놀러 가도 양표와 돈을 내지 않는다고 몇 번이고 외할머니가 꾸중했다는 말도 들은 적이 있었다. 여기까지 생각하자 덕돌은 발길을 돌렸다. 이때 뒤에서 문을 열며 누가 뭐라고 말하는 여인의 말소리가 들렸다. 덕돌은 혹시 외할머니께 들킬세라 황급히 발걸음을 재우쳐 그 골목길을 벗어났다. (그럼 어디로 간다? 영월구에 간 큰고모네도 계속 진수해에 있었더라면 며칠 묵을 수 있겠는데.) 진수해 골목길에서 오도 가도 못하고 방황하던 덕돌은 광석의 둘째고모네 집으로 갈까 궁리해보았다. (아니야. 거기 가도 며칠 있겠니? 아예 이 걸음으로 교하 누나네 집으로 달아나자. 누나야 날 몇 달이고 있어라 할 게 아닌가?) 무릎을 탁 치고 난 덕돌은 다시 진수해역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속으로 태산 같은 근심이 발걸음을 무겁게만 했다. (동전 한 푼도 없이 어떻게 교하까지 간단 말인가? 4원 50전이나 하는 차표를 사야 가지. 정 안되면 도적차를 타고 가지. 화물차에 숨어 갈까.) 마음을 다잡자 덕돌은 골목에서 큰길로 나와 역으로 빨리 걸어갔다. “어디로 가니? 덕돌아!” 이때 뒤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덕돌이 몸을 홱 돌려 보는 순간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막내 누나 성숙이가 아니겠는가? 덕돌은 황급히 달아나려고 했다. “야, 서라! 누나 어쩌니? 집으로 가자.” 덕돌은 겁을 집어먹고 우뚝 멈춰 서서 주위를 둘러보며 네 살 위인 성숙과 물었다. “아버지한테 잡히면 죽겠는데.” “아버지 너를 데려 오라고 했다. 때리지 않겠다고 하더라.” “정말?” 노기 띤 아버지 무서운 세 귀 눈이 떠올라 덕돌은 믿어지지 않았다. “정말이다! 아버지도 네가 억울하다는 거 알고 데려오라고 했다.” 그제야 덕돌은 성숙의 팔을 붙잡고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이윽고 덕돌은 성숙을 따라 집으로 돌아갔다. 아버지가 겁이 나서 가만히 들어가 보니 아버지가 보이지 않았다. 상순은 덕돌이 무서워 밥을 제대로 먹지 못할 까봐 자리를 우정 피해주었던 것이다. 밤이 깊어서야 아버지가 돌아왔지만 윗방에 누워 자는 척 하는 덕돌을 깨우지 않는 것이었다. 이튿날 아침 덕돌이 아버지를 감히 쳐다보지 못하고 머리를 숙이고 옥수수떡을 먹을 때 상순은 자기 그릇의 옥수수떡을 하나 집어 주면서 조용히 타일렀다. “사내란 큰일을 하자면 여자애들을 멀리 해야 한다. 알만하니?” “아니, 난 고중에 갈 때 여자애들을 투표하라고 편지를 썼지 연애편지를 쓴 게 아닌데 무슨? 원, 억울해 죽겠습니다.” 덕돌이 일어나자고 하자 붙들며 아버지는 계속 타일렀다. “네가 연애했다는 게 아니다. 이후에 어쨌든 여자애들과 주의해라는 말이다. 봐라. 말로 그저 투표해달라고 하면 될 걸 편지를 쓸게 뭐야? 네가 연애편지를 쓴 것도 아닌데 얼마나 곤혹을 겪니? 방법이 틀렸단 말이다. 이후엔 뭘 하나 주관동기와 방법을 잘 고려해야 한다. 알만하지?” 그 말에 덕돌은 뭔가 눈앞이 환해지는 것 같아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바로 그거다. 그거. 왜 하필 좋은 입을 두고 편지를 썼을까? 남에게 이상하게 연애편지를 썼다고 억울하게 놀림을 당하게.) “이젠 성욱과 싸우지 말라. 걘 네 9촌 조카 아니냐? 옛날부터 팔촌이 한 구들이라고 성욱의 아버지 증조부와 네 증조부는 친형제간이야.” “글쎄 난 친척이라고 그 애 공부도 배워주고 수학콩쿠르에서랑 시험지를 보여주면서 도와주었건만 내 학습위원을 한다고 질투해 처처에서 물어먹는단 말입니다. 그 새끼 내 나무를 꺾지 않은 것도 꺾었다고 선생한테 고발했습니다. 이번엔 내 연애편지를 쓴 게 아닌데도 선생한테 고발하고 애들한테 소문을 편 바람에 내 학교에 머리를 들고 가지 못합니다. 애들이 나를 어떻게 놀려주는지 알고 아버지는 그럽니까?” 순간 덕돌은 너무 억울해 옥수수떡을 먹지도 못하고 “엉엉.” 통곡 쳤다. 그제야 상순은 먼 손자 벌 되는 성욱이가 너무 했다는 것을 알고 더 말하지 않고 그저 한숨만 길게 내쉴 뿐이었다. 덕돌은 손으로 눈물을 닦으며 집을 나섰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학교 교실에 들어갈 일이 머리기 곤두설 지경이었다. “에라, 모르겠다. 교실에 들어가도 어디 공부 하니? 학교라는 게 전탕 농사일만 시키면서. 놀림을 당하자고 학교로 다녀? 안 가!” 덕돌은 주먹을 으스러지게 틀어쥐었다. “권투를 배워 나를 놀리던 새끼들을 몽땅 때려눕히고 다시 학교에 가자!” 덕돌은 아버지 눈길이 무서워 학교로 가는 척 하다가 아버지 엄마 그리고 누나 은자와 성숙이가 모두 밭으로 나간 후에 슬쩍 집으로 돌아와 들어 누워 교과서를 보면서 그간 뒤쳐진 공부를 했다. 지어 집식구들에게 들킬 까봐 철봉형님과 경산 선생이 준 “림해설원”이나 “수호전”이나 “삼국연의” 같은 두툼한 소설책을 가지고 패용천산 양지바른 절벽 위에 올라가 나무 그늘 밑에서 읽었다. 그는 소설책을 읽을수록 감칠맛이 나고 재미났다. 그는 소설을 읽으면서 소설속의 리규나 로지심 같이 무예가 출중한 무사가 돼 자기를 놀리는 애들을 때려눕힐 생각이 불쑥불쑥 치밀어 올랐다. (내 힘으로는 안 되겠고. 누굴 시켜 때린다?) 궁리 끝에 그는 조개덕의 소학교 때 한족친구들을 내세워 설복이랑 성욱이랑 때리기로 마음먹었다. 덕돌은 장옥이랑 조신지, 장선이랑 친하자고 그물로 잡은 물고기랑 집에 좀 남기고는 다 퍼다 주었다. 지어 한번은 대여섯 근이나 되는 잉어를 잡자마자 장옥이네 집에 가져다주었다. 장옥은 장팔래의 둘째아들이었다. 원래 장팔래와 상순은 아주 친하게 지냈기에 장옥도 덕돌과 인차 친해졌다. 그러자 장옥은 “덕돌아, 네 아버지는 우리 집에 새 벽돌집을 지어줬다. 너와 난 세세대대로 제일 가까운 친구야. 만약 어떤 새끼든 너를 건드리기만 하면 말해라. 이 형님이 죽여치우겠다.”라고 하며 주먹을 내휘둘렀다. 그때라고 생각한 덕돌은 장옥에게 한 마을의 친척인 성욱을 치면 또 아버지께 말을 들을 거 같아 가만 놔주고 계수동의 설복이랑 괘씸하게 굴던 일을 말했다. “당장 때려죽이겠다!” 장옥은 덕돌보다 두 살이나 이상이었다. 진수해중학교에 다니는 그는 그날 학교에 가지도 않고 인차 조신지랑 장선이랑 장화랑 한족 애들을 일여덟 불러가지고 함흥중학교로 뛰어갔다. 휴식시간에 교실에 뛰어든 장옥은 주먹을 휘두르며 고래고래 고함쳤다. “누가 감히 덕돌을 놀리는 거냐?! 어디 죽어봐라!” 몇 개 대대에서 손꼽히는 싸움꾼 장옥을 보는 순간 애들은 모두 목을 움츠리더니 서로 눈치 보며 뒤 구석으로 비실비실 피했다. 그때 덕돌이 쓱 나서며 설복을 손가락질 하며 고함쳤다. “저 새끼 쳐라!” “이 새끼야!” 장옥은 씽 덮쳐가 키가 훤칠한 설복을 발길로 차고 주먹으로 쳤다. 숱한 한족 애들이 우르르 덮쳐가 설복을 땅바닥에 쳐 눕히고 물매를 안겼다. 덕돌은 설복의 멱살을 쥐어 일으켜 보기 좋게 골받이를 딱딱 해댔다. 설복은 코피가 터져 낯이 쥐마당이 됐다. 덕돌은 숱한 애들에게 주먹을 휘두르며 우줄거리며 고함쳤다. “이후에 누가 나를 놀리기만 해봐라! 대갈통을 까버릴 테다!” 은숙은 여자애 같던 덕돌이 사납게 변한 데 놀라 바깥으로 달아났다. 순희도 나무라는 눈길로 덕돌을 흘겨보며 뒤따라 나가버렸다. 설복은 그래도 기가 시들지 않아 죽는 소리를 쳤다. “일광아, 성욱아, 뭐 하니?” 덕돌은 일광을 걷어찼다. “이 새끼도 때려라!” 덕돌의 소리치자 한족 애들은 일광마저 반주검이 되게 때렸다. 애들은 무서워 손을 쓰기는커녕 맞을 까봐 겁을 집어먹고 교실에서 와 소리치며 달아났다. 그때 황승연이 뛰어왔다. “이게 뭐야? 한족 애들을 시켜 우리 학급 애들을 치다니?” “치면 어째? 몽땅 때려죽이겠다!” 장옥이랑은 황승연마저 때리자고 덤벼들었다. 그때 덕돌이 두 팔을 벌려 앞을 막아섰다. “선생은 놔둬라. 오늘은 그만하고 돌아가자!” 교실은 장마당이 돼버렸고 온 학교가 공포에 떨었다. 덕돌은 속이 시원해 온 하루 장옥과 함께 진수해 대중식당에 가서 술까지 마시고 밤중에야 집으로 돌아왔다. 절칵 전등불이 켜지더니 아버지가 일어나 앉으며 노한 눈길로 덕돌을 쏘아보며 세 귀 눈을 흘겼다. “너 학교에 간 첫날부터 싸움질이냐? 숱한 애들이 네가 보낸 한족 애들에게 맞아댄 보복을 하자고 우리 집에 찾아와 사랑방까지 온 집안을 다 뒤번지고 갔다.” “뭐라고? 누가 감히 왔단 말이오?” 덕돌은 밸을 쓰면서 윗방에 들어갔다. 허나 상순은 이전과는 달리 덕돌을 마구 욕하지 않고 문을 열고 윗방에 들어와 앉더니 차근차근 타일렀다. “얘야, 복수심을 버려라. 저 병진을 봐라. 이전에 소싸움을 시켜 생산대 소뿔을 뺐다가 그때 돈으로 900원을 배상했다. 병진이 집까지 다 팔아 소 값을 물고 한족 대에 쫓겨나고 말았다. 그 승치를 하려고 생산 대 낟가리에 불을 질렀다가 감옥에 갔다. 사람이 복수심이 강하면 남을 해치고 자기마저 해치게 된다. 남과 단결할 줄도 알아야 한다. 자기를 헐뜯고 해치던 애들과도 단결해야 한다.” 허나 덕돌은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래 나를 죽이자고 드는 애들을 놔두란 말입니까? 난 그렇게 하지 못하겠습니다. 그 놈새끼들이 다신 나를 놀리지 못하게 몽땅 혼 줄을 내주겠습니다.” “에이유, 언제 철이 들겠니? 사람이 어찌 힘으로 세상을 개조하려고 하니? 힘이 센 게 왕이 된다면 황소가 왕이 되지? 네가 하나 쳐 눕히면 셋을 쳐 눕히는 싸움꾼이 너를 찾는다. 어쨌든 숱한 애들이 널 때리려고 찾아다니니까 주의해라.” 덕돌은 일어나려는 아버지 손을 두 손으로 잡고 졸라댔다. “아버지, 허영호라는 경찰이 말하던데 아버진 영월구 공안국 국장을 했답디다. 나한테 싸움재간을 배워주지 않겠습니까?” 상순은 손을 뿌리쳤다. “그만둬라! 금방 싸우지 말라고 했는데 진짜 싸움꾼이 될 작정이냐? 언제 사람이 되겠니? 힘이 나 쌔나면 내일부터 밭에 나가 기음이나 왕왕 매라. 네 학교에도 가지 않고 어쩔 예산이냐? 철봉이랑 성환이랑 경산이랑 다 네가 학교에 가지 않는다고 하면서 전도를 근심하더라.” 허나 이번에도 덕돌은 툴툴거렸다. “공부도 하지 않는 학교에 가서 놀림을 당하자고 가겠습니까? 내 놀리는 애들을 몽땅 버릇을 떼놓고야 학교에 가겠습니다. 어느 새끼 더 놀리는가 보겠습니다. 주둥이를 망치로 다 까 없애치우겠습니다.” 상순은 아들애가 세상에서 부딪치고 얻어맞더라도 스스로 세상 사는 도리를 깨닫게 하려고 더 말하지 않고 정지로 내려가 잠자리에 들었다. 이튿날 때마침 일요일이 돼 덕돌은 장옥이네 집으로 찾아가 어제 저녁에 애들이 자기를 때리려고 찾아온 일을 얘기했다. 그러자 장옥은 주먹으로 벽을 꽝 쳤다. 순간 땅땅한 벽에 움푹 주먹자리가 났다. “어느 새끼 감히 네 집까지 찾아간다니?! 때려죽이겠다!” 장옥은 주먹을 휘두르며 윽윽 별렀다. 그날 덕돌은 장옥과 조신지와 함께 반디를 들고 물고기를 잡으러 패용천산 앞으로 가면서 어떻게 집에 찾아온 애들에게 복수의 불벼락을 안기겠는가를 의논했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때마침 저쪽에서 일광과 설복이 반디를 들고 골통 쪽에서 금방 둑 위로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저길 봐라!” 덕돌이 가리키는 쪽을 보던 장옥은 반디를 쾅 내던지고 곧추 그리로 씽 덮쳐갔다. 뒤에서 조신지와 덕돌도 쫓아갔다. 덮쳐드는 장옥을 본 설복과 일광은 고양이를 본 쥐새끼처럼 두 손으로 낯을 가리고 발뺌을 하려고 허둥지둥 길옆의 옥수수 밭으로 달아 들어갔다. 좁은 옥수수 밭 옆은 논밭이어서 일광을 숨기기는 어림도 없었다. 숨을 곳이 없게 된 일광과 설복은 얼마 더 달아나지 못했다. 장옥의 안걸이에 걸려 일광이 논밭에 쿵 넘어졌다. 장옥은 한다하는 싸움꾼이어서 발길을 날려 넘어진 일광의 턱주가리를 탁 걷어차고 논밭에서 절벅절벅 달아나는 설복을 쫓아갔다. 뒤따르던 조신지와 덕돌이 뒤따라가 치고 박고 해 논밭에 거꾸로 처박아놓았다. 드디어 설복도 장옥의 무쇠주먹에 얻어맞아 코에서 쌍줄 코피가 줄줄 흘렀다. 장옥과 덕돌이 네는 설복과 일광을 논밭에서 이리 저리 쫓아다니며 반 주검이 되게 밟아주었다. “다시 덕돌을 놀리겠느냐?!” “다신 안 놀리겠다.” 설복과 일광은 두 손이 발이 되게 싹싹 비비며 빌었다. “네까짓 새끼들이 감히 덕돌의 집에까지 때리겠다고 찾아가? 다시 그래 겐?!” 장옥이 을러메자 일광과 설복은 쥐마당이 된 낯을 쳐들지도 못하고 논밭에 조아렸다. “안 찾아갈게.” 장옥은 발길로 일광과 설복의 턱을 걷아 차며 호령했다. “할아버지라고 불러!” 일광과 설복은 서로 눈치를 보았다. “빌지 못할까?!” 조신지가 주먹을 날렸다. “부르겠다. 할아버지!” “한어와 조선어로 불러!” 일광과 설복은 연신 피 흐르는 머리를 조아리면서 “할아버지! 할아버지!” 하고 불렀다. 그들은 여자애 같은 덕돌을 입으로는 “할아버지”라고 부르면서도 속으로는 언제든지 오늘의 치욕을 씻고 덕돌에게 보복하려고 궁리했다. 한매 얻어맞을 때마다 속으로 시퍼런 칼을 갈고 또 갈았다. 성질도 여자애 같고 이제껏 싸움이라고는 해 보지 못한 덕돌은 슬그머니 겁났다. “정말 엄마의 말씀처럼 맞은 놈은 다리를 펴고 자도 때린 놈은 다리를 꼬부리고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한다는 게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인가?” 덕돌은 장옥이랑 없을 때 혹시 설복이나 일광을 만나면 큰일이었던 것이다. 그는 낮에는 학교에 가지 않고 패용천산 절벽 위에 가만히 올라가 나무그늘 밑에 누워 책을 보다가도 애들이 뛰노는 함흥중학교 마당을 내려다보는 순간 학교로 가지 못하는 서러움이 괴여 올랐다. “날마다 이렇게 그 놈 새끼들을 피해 벼랑 위에 누워 있을 순 없어. 하루빨리 주먹치기를 배워 저 놈 새끼들을 다 때려눕히고 학교에 가야 한다! 내 무슨 죄인이라고 숨어 다녀?” 덕돌은 벼랑위에 앉아 학교를 내려다보면서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그는 핍박에 의해 양산박으로 올라가듯이 책을 잠시 놓고 싸움재간부터 배우지 않으면 안됐다. 황차 무슨 등소평의 “우경 번안 풍”을 배격하고 림표와 공자를 비판하는 운동을 하면서 학교에서는 근본 공부를 하지 않고 일만 하는 데야. 학교에 가서 농사만 지으니 갈 재미도 없었다. 그는 먼저 남몰래 장옥에게서 발로 걷어차기로부터 하나하나 익혀나갔고 집 사랑방 천정에 끈으로 모래를 꼴딱 넣은 농구공을 달아매놓고 주먹으로 치고 머리로 들이받기도 했다. 주먹으로 농구공을 처음 칠 때에는 손등이 아파 죽을 것 같았다. 허나 장옥이랑 없을 때 자기를 보호하고 적수를 쳐 눕히기 위해 이를 악물고 치고 박고 또 쳤다. 허나 그것만으로는 싸울 수 없었다. 설복과 일광은 다 축구선수인데다가 진수해에서 한다하는 싸움꾼들을 친해 권투를 어지간히 배운 애들이 아니었다. “그 새끼들을 싹 때려눕히자면 로지심처럼 힘 장수로 돼야 해.” 덕돌은 함흥 촌에 가서 쇠바퀴를 얻어다 뒤울 안에 숨겨두고 어두워진 밤이면 가만히 거중을 연습했다. 처음에는 25 킬로그램짜리 쇠바퀴 한 개씩 쇠막대기에 꽂아놓고 드는 연습을 했다. 팔에 힘이 오르자 나중에는 양쪽에 50킬로그램짜리 쇠바퀴 하나씩 달고 거중을 연습했다. 날마다 밤이면 100킬로그램짜리 쇠바퀴로 거중을 연습했기에 온 몸에 힘도 자라 단숨에 20차씩 인상할 수 있게 됐다. 그리하여 어지간한 애들은 외팔로 허리를 감아쥐어 내동댕이치거나 깔아 뭉개버릴 수 있게 됐다. 그러나 그는 누구 앞에서도 힘자랑을 하지 않았다. 겨울에는 태평강의 얼음을 까고 차디찬 강물에 발가벗고 팬티만 입고 냉수욕을 했고 날마다 식전에 패용천산 앞에까지 내복바람에 달아갔다 달려왔다. 낮에는 학교에 가지도 않고 패용천산에 달려 올라가 누구도 볼수 없는 양지바른 절벽 위거나 시꺼먼 갱도 안에 들어가 혼자 주먹치기와 발길질을 연습했다. 장옥은 덕돌이 그간 연습한 주먹치기와 발길질 그리고 거중하는 것까지 점검한 후 이렇게 말했다. “이만 하면 내게선 배울 거 다 배웠다. 맨 힘만 세고 주먹질과 발길질만 익혀선 안 돼. 이제 스승을 모시고 진짜 무술과 권투를 배워야 해. 단매치기 같은 결투재간을 두루 배워야 해.” 장옥은 이튿날 덕돌에게 무술스승을 찾아주겠다면서 데리고 진수해에 갔다. 진수해 동쪽으로 해 남새대대 부근으로 가서 키도 자그마한 한족 애를 만났다. “인사해라. 류운봉이라고 한다.” 덕돌은 류운봉과 악수하며 인사했다. 장옥은 운봉에게 “이 앤 내 한마을 친구야. 무술을 잘 가르쳐달라. 부탁한다.”라고 했다. 덕돌은 속으로 요 죄꼬만 애를 스승으로 모시고 무슨 무술을 배우겠는가고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그 눈치를 채고 류운봉은 집 뒤울안에 덕돌과 장옥을 데리고 갔다. 거중연습을 할 때 쓰는 육중한 쇠바퀴며 벽에 처매놓은 모래 마대가 보였다. 저쪽 땅바닥에는 아링과 숱한 쇠바퀴와 쇠모르쇠가 널려 있었고 벽에는 번뜩이는 검과 대도가 걸려 자루의 빨간 술이 바람에 하느작거리고 있었다. 운봉은 허리는 가늘었지만 어깨는 넓었다. 그는 덕돌을 보고 쇠바퀴를 들어보라고 했다. 덕돌은 거중연습을 해온터라 허리띠를 졸라매고 자신 있게 다가가 쇠바퀴를 “어차!” 소리와 함께 들려고 했다. 그러자 류운봉은 “그게 몇 킬로그램인지 아니? 150킬로그램이야.”라고 하더니 작은 쇠바퀴를 바꿔 맞추더니 “자, 이걸 들어봐라!”라고 했다. 덕돌은 자기가 연습하던 쇠바퀴보다 50킬로그램이나 무거운 것을 보고 놀라 입을 짝 벌렸다. “이건 몇 킬로그램이냐?” “120킬로그램이야. 이전에 내 연습하던 거야.” 덕돌은 자신이 없어 도리머리 질 하면서 다가가 가름대를 꽉 틀어잡고 건뜩 들어 올렸다가 가볍게 내려놓았다. 겨우 체면을 지켰던 것이다. “힘이 세구나! 괜찮아!” 류운봉은 150킬로그램 짜리 쇠바퀴를 다시 맞추고 나서 허리띠를 꽉 조여 매는 것이었다. 그는 가슴을 쭉 내밀고 하늘을 쳐다보면서 숨을 길게 들이쉬었다. 배는 홀쪽해지고 가슴이 무섭게 솟아올랐다. 그가 허리를 굽혀 가름대를 두 손으로 꽉 틀어쥐는 순간 근육과 힘줄이 울뚝불뚝한 팔뚝이 용처럼 꿈틀거리었다. “어-싸!” 고함소리와 함께 류운봉은 그 무거운 쇠바퀴를 건뜻 머리위로 추켜올렸다. 그는 숨도 돌리지 않고 들었던 쇠바퀴를 두 손으로 시계바늘이 돌아가는 방향으로 한 바퀴 돌리고 또 추겨 올렸다. 뒤이어 사람을 내동댕이치듯 저쪽에 활 내동댕이쳤다. 허나 숨이 차하거나 힘들어하는 기색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그제야 덕돌은 속으로 저 왜소한 키에 어데서 저런 괴력이 나올 까고 못내 감탄하면서 스승으로 모실만 하다고 머리를 끄덕였다. “야, 눈이 있어도 태산을 알아보지 못했구먼!” 덕돌은 감탄소리를 치며 박수까지 쳐댔다. 운봉은 표정도 별로 변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벽돌을 넓적한 돌 위에 넉 장이나 쌓아 놓더니 기를 장 측에 모으더니 힘껏 내리쳤다. “꽝!” 요란한 소리와 함께 벽돌 넉 장이 무쇠주먹에 맞아 몽땅 깨졌다. 류운봉은 무술에서 권술을 날렵하고도 힘차게 표연했다. 덕돌은 처음 보는 지라 깜짝 놀랐다. 뱀이 혀를 날름거리며 굴에서 기어 나오는 듯 하고 독소리가 나래를 퍼덕이며 먹이를 찍는 것 같기도 한 동작을 했다. 땅바닥에 살짝 몸을 기댔다가 토끼가 네발로 매를 차는 동작도 하고 원숭이가 나무위에 달려 올라가 팔을 들고 멀리 보는 듯하다가 살짝 뛰어내려 자세를 낮춰 몸을 씽 돌리며 발로 땅바닥을 쌩 쓸어버리고 일어나며 무쇠주먹을 내지르고 몸을 날렸다. 원앙새다리에 양다리로 뛰면서 발길을 연신 날렸다. 정말 무른 속에 강함이 돋보이고 강한 속에 유연한 동작이 깔려 있어 힘 있고도 날래고 보기도 멋졌다. 그날부터 덕돌은 날마다 진수해에 가서 류운봉을 스승으로 모시고 실전무술과 무술단매치기를 하나하나 배웠다. 그것은 나 어린 덕돌이 현실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고 압제받는 운명에 대한 반항이었다. 그는 까딱 소문 없이 패용천산 벼랑위 나무 숲속에서 무예를 익혀 이제 언젠가는 숲속에 숨었던 맹호가 산에서 덮쳐나가듯이 함흥중학교로 쳐들어갈 그날이 다가올 것이다…               7. 암담한 세월                구중천 하늘 높이 걸린 금빛태양은 뭇산들이 자기 발 밑을 찌르며 높이 솟으려고 하자 삽시에 얼굴이 퍼러뎅뎅해졌다. 검퍼런 태양은 먹장구릅 속에서 불채찍을 마구 휘둘러 쵸몰랑마봉이고 백두봉이고 칼산이고 마구 후려갈겼다.         꽈르릉 꽝꽝!         세상의 풍운조화는 변화무쌍해 마른 하늘에서 생벼락이 마구떨어졌다.         함흥대대에서는 하루 밤 자고 나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짐작하기도 어려웠다.         종연은 대대 혁명위원회 주임을 내놓고 진수해파출소 소장으로 갔지만 함흥 대대를 더 미친 듯이 쥐락펴락했다. 그는 박영발과 박윤희를 사상개조에 힘썼고 정치 표현이 아주 좋았다고 극구 찬양하면서 시내로 추천해 보냈다. 박영발은 시내로 떠나가면서 종연의 손을 꽉 잡고 눈물까지 흘렸다. “황주임, 아니, 황 소장. 이 은공을 영원히 잊지 않을 거요. 이 다음 어데 아프거나 하면 찾아오오. 내 힘껏 도와줄게.” 박영발은 림표처럼 양면파 수법을 아주 능란하게 썼다. 그는 기실 속으로 반란파 두목 출신인 황종연을 곱게 보지 않았다. 허나 이 진창에서 빠져나가 시내 병원으로 돌아가려면 별 수 없었다. 속에 내키지 않는 대로 윤희를 황종연에게 양보해야 했고 황종연의 입당소개인도 서주어야 했다. 전번에 화재사건이 생겨 김용만 국장이 찾아왔을 때에야 비로소 황종연은 철천지원수 김용만과 한 짝패라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그러나 안팎이 다르게 양면 파 수법을 썼기에 시내로 돌아가게 됐던 것이다. 윤희는 암흑으로 뒤덮인 이 산골에서 벗어나기 위해 너무나도 눈물겨운 모욕도 윤간도 참아야만 했던 것이다. 그녀는 시내 병원으로 돌아가게 됐지만 기쁜 줄도 몰랐다. 황종연과 흥수에게 짓밟히고 짐승처럼 모욕을 당할 대로 당한 그녀에게는 다만 깊고 깊은 인간생지옥에서 간신히 벗어났다는 감각 밖에 없었다. 그녀의 눈귀에는 어느덧 잔주름이 얼기설기 가기 시작했고 얼굴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먹장구름처럼 몰려 있었다. 그녀는 자기 대신 위생소에 남게 된 맨발의사 송선을 측은한 눈길로 바라보더니 주사실에 놓은 새 침대를 유심히 보다가 작별인사를 했다. “어떻게 고생하겠습니까?” 송선은 주사기를 소독하다가 말고 “어쩌겠소? 나도 햇볕을 볼 날이 오겠지.”하고 말하며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윤희는 속으로 송선이가 어떻게 자기 대신 저 침대에서 색마 황종연과 흥수에게 깔릴까 적이 근심됐다. 그녀는 황종연이 위생소에 들어와 헤헤 웃으며 내민 손을 잡지도 않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위생소 문을 쾅 닫고 함흥대대 마을을 총총히 떠났다. 영발은 그래도 떠나가기 전에 아래 마을 조개덕으로 가서 양심적으로 상순을 찾아보았다. 상순은 한창 울바자를 뽑아 안으로 해 세우고 있었다. 영발은 바자를 쥐어주면서 속심의 말을 했다. “김 서기, 정말 미안합니다. 나도 살자니까. 본의 아니게 황종연을 도와주고 김 서기에게 미안한 일을 많이 한 거 같습니다. 양해해 주십시오.” 상순은 흉금이 넓게도 영발을 포옹까지 해주었다. “우리 마을에 와서 고생했소. 살자면 마음에 없는 일을 할 때도 있소. 내 이 바자를 안으로 세우고 싶어 세우오? 흥수가 떠드는 바람에 이러지.” 영발은 이상해 물었다. “바자를 어째 안으로 세워야 한답니까?” 상순은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흥수는 우리 집 마당이 너무 넓어 자본주의 싹이 자랄 수 있다오.” “건 무슨 말입니까?” “남보다 더 심어 먹으면 배불러 자본주의 생각을 하게 돼 자본주의 싹을 아예 매버리느라고 이런다오. 대대 신임 혁명위원회 주임의 말을 듣지 않고 되오?” 영발은 상순이 삽으로 바자를 세우고 흙을 파묻자 발로 꽁꽁 밟아 주면서 중얼거렸다. “정말 이해되지 않는 게 많습니다." 여기까지만 말하고 그는 입에 빗장을 질렀다. 항상 량면파수법을 써온 박영발을 경계해야 했다.  그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한 고랑이라도 만들어 옥수수 몇 포기라도 더 심어먹으면 좀 좋아서? 돼지도 두 마리를 치면 안 된다지. 닭을 열 마리 이상 쳐도 자본주의를 복벽한다고 하지. 이 산골에서 어떻게 잘 살 수 있겠는가? 덕돌이 네 함흥중학교에서는 공부를 하지 않고 학생들이 농민들과 함께 밭에 나가 헤매니 이 사회가 어떻게 발전하겠는가? 손발에 똥을 발리여야 사상이 좋으니 뭘 해? 배를 촐촐 굶으면서도 무슨 밭고랑을 가로 타고 공산주의를 바라본다고 하니. 쯧쯧쯧.” 상순은 바자 굽을 꽁꽁 밟아놓으면서 누가 듣지 않나 살폈다. 길옆으로 지나가는 사람이 있어도 다행히 한족 마을이어서 누구도 알아듣지 못했다. 영발은 떠나가면서 말도 많이 했다. “김 서기, 내 간 다음에 내 들었던 집에 드십시오. 그 집이 길옆 제일 앞집이어서 멀리 저 앞이 바라보이고 환합니다. 그 집이 장래성이 있는 집입니다.” “이젠 조개덕의 한족 생산 대와 조선족 생산 대를 한데 합쳤기에 서쪽의 조선족들이 모여 사는 쪽으로 올라가야 할 거 같소.” 이 마을을 떠나게 된 영발은 무서운 것이 없었다. “조개덕 생산대를 두 개 대로 나누더니 또 합친답니까? 흥수가 또 무슨 수작을 부린답니까?” 상순은 영발이가 그래도 기본 양심은 잃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목까지 올라온 말을 꿀꺽 삼켰다. “자초에는 나를 지주와 부농들이 득실거리는 한족 대에 보내 고생시키자고 갈라놓고 나를 보냈지. 허나 벽돌공장을 세워 한족 생산 대에서 새 벽돌집을 짓기 시작하니까 합해버리는 거지. 그래야 자기 잘 영도한 걸로 되고 여기 조개덕 한족 사원들처럼 새 벽돌집에 들어 살지.” 영발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하늘을 쳐다보며 웃었다. 그 웃음소리는 혁명적 본보기극에서나 들을 수 있는 독수리의 웃음소리와도 흡사했다. 상순은 괭이를 쥐어 울바자 바깥의 밭고랑 자리를 골고루 고러 길바닥을 넓혀 놓았다. 그는 밭으로 갈 때 돼 영발의 손을 잡고 한 가지 부탁했다. "병원에 정규상을 데려가 주오. 이젠 정규상과 싸우지 말고 늘그막에 화목하게 보내오.” 영발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허나 인차 안경을 춰올리더니 카멜레온처럼 머리를 끄덕였다. “예. 그러지 않고. 내가 돕지 않으면 누가 정교수를 돕겠습니까? 우린 이전에는 옥신각신했지요. 허나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유치했습니까? 결국 우린 모두 이 산골에 와서 노동개조를 하면서 고생했는데. 정규상은 해마다 스무 수레나 되는 돼지 똥과 인분을 모아 커다란 제형 둼 무지를 만들었습니다. 아까운 원로교수가 병을 보지 않고 저게 뭡니까?” 영발이 가리키는 데를 바라보니 정규상이 싯누런 인분을 담은 밀차를 밀고 건조실 부근에 있는 둼 무지로 힘겹게 끌고 가고 있었다. “아무튼 시내 병원에 가면 정의사 일을 힘써 주오.” 영발은 이젠 더 할 말이 없는지 상순과 악수를 나누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늙은 비술나무 밑으로 가버렸다. 며칠 후 상순은 흥수와 말하고 영발이가 들었던 널찍한 집을 사고 이사했다. 그는 조개덕 1대와 2대 연합생산 대 대장으로 된 후 칼산의 양지바른 산 중턱 평평한 곳에 양봉장과 인삼 장을 차리기로 했다. 사원들은 이젠 상순의 말이라면 무조건 따랐다. 연합생산 대를 만드는 바람에 조선족사원들도 벽돌공장의 벽돌로 새 벽돌집도 짓고 들것이고 이제 인삼도 심고 꿀벌도 길러 잘 살 날이 다가올 것이기 때문이었다. 사원들은 코 기러기 같은 상순을 따라 괭이를 메고 패용천산과 칼산 사이에 난 골짜기를 따라 올라갔다. 그들은 싱그러운 냄새를 풍기는 과수원을 돌아보더니 뒤 덜미에 땀을 뻘뻘 흘리며 앞에서 걷는 상순의 등 뒤에 대고 엄지들을 내둘렀다. “김 대장! 이거요.” “이 과수원도 다 김 대머리 덕분이오.” “하도 김대장이 칼산과 패용천산의 돌을 캐서 다락 밭을 손질해 놓았으니 말이지 과수원을 골물이 몽땅 밀어버렸을 거요.” “흥수랑 제정신이 있소? 과수원 수토유실을 방지하자고 사원들이 쌓은 다락 밭인데 어쩜 걸 허물어서 ‘모 주석 만세!’를 새기오?” “그래야 모 주석에 대한 진붉은 충성심을 표현하지.” “저 김 대장이 아니면 우리 대대가 무슨 왜지 밭으로 갈지 모르오. 동지섣달에 한지에 방아를 걸 지경이오.” “어디 그뿐이오. 저기 멍지뫼산 앞의 산종논밭도 김 서기 덕분이지.” “이제 양봉장과 인삼 장을 차리면 꿀을 슬슬 마시면서 인삼을 팔아 수입을 톡톡히 거둘 거요.” “김 대장의 대머리를 누가 따르오.” 사원들은 상순을 따라 과수원 위로 해 서쪽으로 굽어들어 칼산으로 올라가면서 상순에 대한 찬사가 끝이 없었다. 그들은 상순을 따라 칼산의 남쪽 중턱에 올라가 괭이며 삽이며 짚고 멈춰 섰다. 상순은 손으로 산중턱을 가리키면서 사원들에게 원대한 설계도를 내놓았다. “여긴 산세가 가파르지 않은데다가 양지바른 비탈이어서 인삼 장을 차리기에 안성맞춤한 곳이오. 이제 저 칼산 뒤쪽의 돌을 캐서 구들돌로 팔면 그 수입도 톡톡할 거요.” “와- 김 대장이 돌아왔기에 살 때를 만났소.” “옳소.” 사원들은 온 몸에 힘이 나서 상순이 포치한대로 괭이를 휘둘러 잔 나무들을 뿌리 채로 뽑아 버리고 인삼 장을 만들기 시작했다. “김 대장! 큰 일 났소.” 이때 흥수가 헐레벌떡거리며 달려왔다. 상순은 괭이질을 멈추고 허리를 펴면서 황급히 물었다. “이보, 경주가 대련에 가서 배를 타고 한국으로 달아나다가 잡혀 왔소.” “그 새끼들이!” “이제 며칠 후에 반역자, 매국 적들을 공개심판하게 될 거요.” “사람 질을 못할 새끼들이 정신이 있소? 후-” 숱한 사원들도 일손을 멈추고 흥수와 상순 쪽으로 몰려왔다. 흥수는 터를 닦기 시작한 인삼 장을 둘러보며 물었다. “여기 뭘 하오?” “인삼장과 양봉장을 꾸리오.” “뭐요?! 이게 어느 때오?” 흥수는 어이없다는 듯이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김 서기, 아니, 김 대장, 당신 제정신이 있어? 당신 생산 대에서 숱한 일이 생겼는데 계급투쟁을 틀어쥐지는 않고 인삼장과 양봉장을 꾸리다니? 아무리 꾸린들 무슨 소용 있소? 붉은 기발이 꺼꾸러지고 위성이 하늘로 올라간들 무슨 소용이 있어? 우린 항상 계급투쟁이란 이 기본 고리를 잊지 말아야 한단 말이야.” 그 말에 상순은 개의치 않았다. “또 그 말이오? 사원들이 배를 곯고서야 붉은 기가 며칠 휘날릴 수 있다고 보오? 모 주석께서도 혁명만 틀어쥐라고 하지 않았소. 생산도 촉진하라고 했소.” “당신과 난 정말 완전히 다른 두 갈래 노선으로 달리고 있단 말이오. 말이 정말 통하지 않소. 당신네 생산대 상해지식청년 상지민과 수호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아오?” “생산대를 갓 합한 게 내 어떻게 아오?” 상순도 놀라하며 흥수의 외까풀 눈을 쳐다보았다. “상지민이랑 상해지식청년들을 몇 백 명이나 조직해 두만강 변에서 모 주석의 초상화까지 불태워 버렸소. 현행반혁명이오, 반혁명!” “뭐라오? 그 새끼들이. 쯧쯧쯧.” 흥수는 책임을 상순에게 덮어씌웠다. “당신이 생산만 생산이라더니 상해지식청년들을 제대로 교육하지 못한 때문이오. 수호는 전기 줄을 훔쳐 오늘 오전에 파출소에 잡혀 갔소. 마반산 집 아매는 일제 때 해동다리 건너 진수해 어구지에 있던 기생집의 소문난 ‘뽕녀’라는 미녀 기생이었어. 당장 위생소 조산사자리에서 몰아내야겠소. 맨발의사 송선이 혼자면 되오.” “글쎄 정 안되면 정 의사를 되 위생소에 쓰면 어떻소?” “보오. 그래 계급투쟁을 하지 않으면 되오? 당신은 이런 걸 도무지 모르고 있었단 말이오. 또 알려고도 하지 않았고. 모두 당신 탓이오.” “모두 내 잘못이겠구먼. 내 한족생산 대에 있다가 금방 온 게 알 턱이 뭐요? 치보 주임인 당신 뭐 했소? 이제 와서 네 탈 내 탈 할게 뭐요?” 상순은 무릎을 꺾고 쪼그리고 앉았다. 그는 담배쌈지를 꺼내 담배를 말아 붙이더니 담배 연기를 길게 후 내뿜으면서 뒤처리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궁리했다. 며칠 후 진짜 공안국 김용만 국장과 진수해파출소 황종연 소장 그리고 허영호 등 숱한 경찰들이 법관들과 함께 상지민과 수호, 김경주, 그리고 마반산집 아매까지 자동차에 싣고 와서 함흥중학교 운동장에서 공개심판대회를 열었다. 대회장에는 사람들이 시루 속의 콩나물대가리처럼 빼곡하게 들어 서 목을 왜가리 목처럼 빼들고 구경했다. 법관은 공판대회 주석 대 마이크 앞에 다가서더니 목청을 가다듬어 선포했다. “지금부터 일제 때 기생 마반산집 아매를 판결하겠습니다.” "어째 이름을 부르지 않고 마반산집 아매라니?" "옛날엔 남존녀비가 심해 이름 없는 여자들이 많았다오." "아무리 심문해도 마반산집 아매는 죽어도 이름을 대지 않는다오." "쯔쯔쯧."  경찰들이 마반산 집 할머니에게 “일제 매국, 매 민족 기생”이란 개패를 메워 자동차 위에 끌어 내세웠다. 허나 마반산집 할머니는 허연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머리를 숙이지도 않고 마을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모두들 수군거리었다. “저 할머니 별나게 남편도 없고 애도 없다고 했더니. 원래는 기생이었구먼.” “글쎄 말이오. 기생은 애를 낳지 못하오?” “그래. 피임약을 너무 써서 애도 가지지 못한다오.” "저 아매 우리 마을 숱한 애들을 받아냈는데." "글쎄 말이오. 덕돌이랑 성욱이랑 다 저 아매 받아내지 않았소?" "그렇지. 조산파아매 수고 은공이 많지." 법관은 판결문을 공포했다. “마반산집 아매, 녀, 조선족, 65세. 조선 함경북도 명천군 사람, 죄범은 일제 때부터 명천 우시장 일본 놈들의 기생집에서 기생 질을 했으며 우리 진수해 북쪽 어귀에 있던 유명한 일본 기생집에서 기생을 했다. 후에 일본군을 따라 교하, 길림, 장춘, 심양으로 따라다니면서 일본군을 위해 기생을 했으며 호북성 무한, 장사에 가서 기생을 했다. 일본 놈들이 투항한 후 죄범은 우리 군에 의해 체포됐으며 후에 신강개발 집체농장에 가서 노동개조를 했다. 죄범은 신강 집체농장에서 도망쳐 함흥대대 조개덕에 잠입한 뒤 마반산에서 온 사람처럼 신분을 속이고 조산사 노릇을 했다. 일제 군을 위해 기생노릇을 한 김뽕녀가 지은 죄는 하늘에 사무친다. 그러나 죄범은 해방 후 대대 위생소가 없는 형편에서 조산사를 하면서 빈농들을 위해 병을 치료해주었고 숱한 해산부의 애를 받아내 주었다. 그리하여 감형하여 일제 매국, 매 민족 기생 마반산집 아매에게 유기징역 5년에 언도한다.” “억울합니다! 억울해. 난 일본놈들의 피해잡인다. 난 정말 억울하단 말입니다!” 뜻밖에 마반산 집 할머니는 개패를 마구 벗어 자동차 위에서 내던지면서 고함쳤다. “아니, 감형 판결했는데도 뭐가 억울하다고 저래?” 여기저기서 웅성거렸다. 옆에서 여성경찰이 두 팔을 붙잡고 제지시키느라고 애를 썼지만 헛수고였다. 마반산 집 할머니는 팔을 뿌리치며 반발이 심했다. “난 자원해 기생이 된 게 아닙니다. 일제 때 일본 놈들이 명천 우시장 부근에서 빨래를 하는 나를 붙잡아 강제로 기생집에 걷어 넣었습니다. 내가 왜 정든 고향을 떠나 이 만주에 들어와야 했겠습니까? 일제 놈들이 군대를 위안하는 성노리개로 우리 조선 여성들을 짐승처럼 짓밟았습니다. 생각만 해도 원통합니다.” 여성경찰이 수건으로 마구 마반산 집 할머니 입을 틀어막으려고 했다. 마반산 집 할머니는 입을 막는 손을 마구 집어 팽개치며 안간힘을 다해 고함쳤다. “나는 일제 놈들의 피해자입니다. 절대 일본 놈들을 방조한 매국역적이 아닙니다. 난 억울합니다.” “주둥일 다물지 못해?!” 흥수가 마반산집 아매 얼굴을 쨩 갈겼다. 순간 마반산집 아매는 피흐르는 주름진 입귀를 사려물더니 가냘픈 어깨가 무섭게 파도쳤다. 할머니는 천천히 머리를 들더니 독기서린 눈길로 흥수를 쏘아보며 고함쳤다. “흥수, 너네 처 춘실도 네 처제 영실과 함께 위안소에 끌려갔다가 임신해서 풀로나왔다. 기억하느냐?” “뭐, 뭘? 영실인지, 은실인지 몰라. 춘실을 모욕하지 말라.” “난 네 처와 처제와 함께 일본군 위안소에 끌려간 피해자야!” “아니, 생사람을 물어먹어?” 흥수는 식은 땀이 흐르는 말상을 팔소매로 닦으면서 뒤로 비실비실 물러섰다. 군중들도 웅성거렸다. 춘실은 머리를 숙여 흥수의 우멍눈을 피해 슬슬 사람들 속을 빠져나갔다.  상순은 버릇처럼 대머리를 숙이더니 눈을 지그시 감고 뭔가 궁리하고 있었다. 이때 법관이 상해지식청년 상지민에 대한 판결서를 읽었다. 그제야 상순은 머리를 들었다. “현행반혁명, 상지민, 25세, 상해시 출생, 체포 전 진수해공사 함흥 대대 조개덕 생산 대 상해 지식청년. 죄범 상지민은 ‘지식청년들이 광활한 농촌에 하향해 빈농의 재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모주석의 지시에 불만을 품고 집체호 호장으로서 생산대 노동에 잘 참가하지 않고 항상 영어와 노어, 일어 책을 들고 보면서 외국의 달은 둥글고 밝은데 중국의 달은 왜 항쌍 쪼각달인가고 하면서 노골적으로 외국을 숭배하고 중국이 낙후하다고 씹어쳤다. 특히 상지민은 상해지식청년들 가운데서 사상이 온전하지 못한 수호 등과 결탁해 반동무리를 뭇고 모주석의 지시 때문에 고향 상해를 떠나 산골에 와서 고생한다면서 공개적으로 반동사상으로 반당, 반사회주의 여론을 조성했다. 심지어 수십 명의 사상이 불온한 상해지식청년들을 긁어 모아 두만강 변에 가서 당지 정부를 포위공격하려고 망녕되게 시도했다. 죄범 상지민과 수호는 반당, 반사회주의, 현행 반혁명 죄를 범했다. 허나 현행반혁명 상지민과 수호는 일시 실족해 기로에 들어선 상해지식청년들이기 때문에 회개할 기회를 주기 위해 감형 처분해 유기징역 3년, 노동개조 3년에 처한다.” 황련지랑 이행복이랑 뒤에서 뭐라고 쑤군거렸다. 상순이나 마을 군중들은 멀거니 상지민과 수호 그리고 뽕녀 할머니를 쳐다보았다. 뒤이어 경찰들이 결박 지은 장리국과 김경주를 자동차 위에 서있던 끌어내 자동차 바곤 앞머리에 설치한 두 쇠살창 사이에 머리를 넣고 채워놓았다. 그들의 목에 건 개패에는 “매국역적, 반역자”라고 쓴 글씨가 박혀 있었다. 특히 뻘건 승하기 표를 쳐놓은 것이 사람들의 눈을 놀랍게 자극했다. “아니, 총살한다는 표시 아니오?” “글쎄 말이오. 그 아비에 그 아들이오.” “주는 밥을 먹고 살 거지. 이제 남조선을 간다고 누가 공밥을 먹여준다오?” 법관이 김경주의 매국반역도주 죄행을 공술했다. “남조선 특무의 아들 김경주는 몇 해 전에 함흥대대에 암암리에 기여든 국민당 잔여특무 장리국을 따라 장백산으로 도망쳐 숨어 있다가 나중에 중국 대륙에서 남조선과 대만으로 도망칠 궁리를 했다. 리국은 향항을 거쳐 대만으로 달아나자고 하고 경주는 대련으로 해 남조선으로 달아나자고 했다. 대련으로 간 후 그들은 항구에 가서 외국상선을 본 후 비수로 경찰이나 군인을 살해하고 총을 빼앗은 후 외국상선에 잠입해 올라간 후 공해로 가서 외국상선을 납치해 경주는 남조선으로 가고 배 머리를 돌려 리국은 대만으로 달아날 매국도주계획을 꼼꼼히 세웠다. 하여 그들은 우선 오금상점에 가서 시퍼런 식칼 두 자루와 숫돌을 사 시퍼렇게 갈아 몸에 품고 파출소 부근에서 홀로 나오는 경찰을 노리며 기웃거리며 살폈다. 허나 시내에서 행인이 아주 많아 좀처럼 손을 쓸 수 없었다. 그들은 연 한달 동안이나 대련 시내와 군부대 숙영지 부근에 가서 총을 탈취하려고 시도했지만 죄악적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그러자 두 놈은 행동계획을 변경해 군부대에 기어 들어가 무기고 열쇠를 마스고 총을 도둑질하려다가 김경주는 붙잡히고 장리국은 도망쳐 행방불명이다. 김경주는 남조선으로 도망치려고 꿈꾸며 매국역적의 사상이 뼈 속까지 배긴 얼토 당토하지 않는 반동 시까지 썼다. 파도가 출렁이는 대련의 항구에 구리바라 보름달이 두둥실 떠있구나 고향의 저 달이 나를 반겨 웃나 나를 마중해 고향의 바닷물이 예까지 밀려왔나 산이 높아 가지 못하나 바다 깊어 날아가지 못 했나 이제 민주와 자유 고향 경주에 간다면 만주 타향에서 죽은 아버지 혼도 모시어 가리라 ...” “얼마나 경주의 매국반동사상을 보여준 시인가?” 군중들은 경주의 시를 법관이 읽자 웅성거렸다. 이때 법관이 목청을 가다듬어 판결서를 선포했다. “매국역적, 현행반혁명 김경주를 무기징역에 언도하고 정치권리를 종신토록 박탈한다.” 뒤이어 경적소리가 요란하게 울리고 장리국과 김경주를 실은 자동차가 먼지를 새뽀얗게 울리며 달려갔다. 장미련은 어린 아들애 토함산을 끌어안고 함흥중학교 마당에 벌렁 물앉아 왕왕 울었다.  장충국은 동생 장리국의 안위를 걱정되는데다가 남편을 잃은 미련이 불쌍해 때가 괴죄죄한 낯에 눈물을 줄줄 흘렸다. 숱한 산새들이 놀라 하늘로 새까맣게 날아오르고 까마귀 떼들이 까욱까욱 을씨년스럽게 울면서 먹장구름이 뒤덮인 계수동 골짜기 상공을 날아예고 있었다. 마반산집 할머니와 상지민, 수호를 실은 자동차는 다시 새뽀얀 먼지를 일구면서 진수해 쪽으로 떠나갔다. 상순은 찌그려져가는 초가집에서 아들 애 수길림을 데리고 홀로 사는 수호의 각시가 불쌍했다. 상해 대도시에서 살다가 고향을 떠나 이런 시골에서 배고프고 추운 고생에 이제 신랑까지 감옥에 갔으니 얼마나 고생하랴. 상순은 수호네 집에 찾아갔다. 수호 색시 황련지는 놀란 기색을 띄우며 문을 열고 구들 끝에 물러 “무슨 일이 있습니까?” 하고 물었다. 상순은 싸늘한 집안에 들어서면서 “집에 어째 면내 같은 냄새 난다.”라고 하며 코로 “흡, 흡” 하고 냄새를 맡았다. “아니, 며칠 불을 때지 않았소?” 황련지는 울상이 된 채 “땔나무가 없어서 이틀째 불을 때지 못했습니다.” 하고 말하며 반반히 빈 부엌을 내려다보았다. “추운데 겨울에 우리 집에 가 있는 게 어떻소?” 상순의 물음에 황련지는 도리머리를 가로 흔들었다. “호의는 감사하지만 애를 데리고 어떻게 가 있겠습니까? 김 대장, 어떻게 땔나무를 해결해 줄 수 없어요?” “되오.” 상순은 그 길로 생산대 탈곡장에 가서 수레에 벼 짚을 꽉 박아 실어 수호네 집 문 앞에 부리었다. 그리고 황련지와 함께 손수 부엌과 마당에 벼짚 무지를 가려 주었다. 황련지는 너무 감사해 상해에서 부쳐온 갈치를 네 개나 상순에게 줘 보냈다. 상순은 받지 않겠다고 사양했다.  “사의를 받아주십시오.”  황련지가 맨 발 바람으로 갈치를 들고 따라 나왔다.        상순은 동네 영상해 갈치를 받아가지고 집으로 갔다.        이윽고 수호네 집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그때부터 수호네 부부는 상순을 양아버지라고 부르고 존경했다. 그들은 상해에 설을 쇠러 갔다가 올 때면 항상 일주일 전에 편지로 오는 날을 기별했다. 그러면 상순이 아니면 덕돌이 수레를 메워 가지고 진수해 역에까지 마중 가서 짐을 실어왔다. 집에 돌아오면 수호네 부부간은 갈치나 돼지고기 그리고 상해국수를 꺼내 덕돌에게 줘 보내군 했다. 상순은 자기 생산 대에서 억울하게 노동개조를 하는 이계삼 서기와 허영주 부현장 그리고 정규상교수와 송선에게 특별한 관심을 돌렸다. 그는 항일투사출신 서기와 현장이 이런 농촌에 와서 억울하게 노동개조를 하는 것이 마음이 아팠던 것이다. 그는 봄과 여름 가을에는 이계삼 서기와 허영주 부현장을 보고 바쁜 대전의 일을 시키지 않고 과수원과 인삼 장과 양봉장을 지키게 했다. 하여 이계삼 서기와 허영주 부 현장은 복잡한 생산 대를 피해 경치도 좋고 공기도 좋은 과수원 보초막에서 시원한 샘물에 밥을 지어 들면서 신선처럼 지낼 수 있었다. 눈보라가 흩날리는 겨울이 돌아오면 상순은 그들을 보고 우사에 들어와 소 사양을 시켰던 것이다. 그리하여 추운 겨울에 사원들과 함께 농토개량을 하느라고 언 흙덩이를 끄거나 멜 필요 없이 따뜻한 사양 실에서 보낼 수 있었다. 또 흥수의 딸 해월을 치료해주는 기회를 타 흥수와 말해서 정규상을 위생소에 되넣었던 것이다. 또 위생소에서 밀려 나온 송선을 돼지사양을 시켜 대전의 힘든 노동에서 해탈시켰던 것이다. 그런데 또 이튿날 아침부터 일이 생겼다. 항상 기침을 쿨룩쿨룩 하며 우파 박성근이 글쎄 폐 염으로 피를 토하더니 한 많은 세상을 떠났던 것이다. 누구나 폐 염에 걸려 죽었다고 전염될까봐 성근의 조상도 하러 가지 않고 멀찍이 서서 구경했다. (말 한마디를 잘 못했다가 몇 십 년 동안이나 우파 모자를 쓰고 얼마나 고생하다가 저세상으로 갔는가?) 이렇게 생각하면서 상순은 우파를 돕는다는 말을 들을 각오를 하면서도 성근이네 집에 갔다. 집안에 들어서 보니 성근의 입귀에 아직도 피가 묻어 있었다. 아들 숭길은 옷도 갈아입히지 못하고 불쌍하게 돌아간 아버지를 끌어안고 어린애처럼 엉엉 울고 있었던 것이다. 상순은 눈도 감지 못하고 세상을 뜬 성근의 눈을 스스르 감겨 주고 헝겊 쪼박을 주어다 대야에 물을 떠다 놓고 입귀의 피부터 시작해 얼굴을 말끔히 닦아주고 나중에 손과 발까지 닦아 주고 나서 옷을 새것으로 갈아입혔다. 상순은 한숨을 후 쉬고 나서 숭길과 함께 널판을 한 쪼각 주어다 칠성판이라고 그 위에 성근을 눕혀놓았다. 숭길은 아버지 시체를 끌어안고 엉엉 울며 넉두리를 했다. “아버지, 보았습니까? 아버지가 세상 떠나도 누구도 들여다보지 않았지만 덕돌의 아버지가 찾아와 옷을 갈아입혀주었습니다. 어이구, 우리 아버지, 불쌍한 아버지.” 상순은 손등으로 볼에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으며 “얘야, 기다려라. 내 가서 관작 짜 올게.”라고 한마디 하고는 바깥에 나왔다. 마을 사람들은 상순마저 슬슬 피해 갔다. “폐병에 걸리면 어쩌자고?” “저 김 대장은 무섭지 않은 모양이지?” 이때 흥수는 콧방귀를 뀌었다. “흥! 어째 수호가 없으니 황련지에게 눈독을 들여? 쳇, 진짜 기름개구리가 학 고기를 먹으려는 격이지.” 상순은 남이 뭐 라든 개의치 않고 자귀와 대패, 톱, 망치를 가져다 성근이네 집 앞에서 널판을 주어다 관을 짰다. 대패를 빡빡 미는 상순과 멀찍이 떨어진 아래 이화영이네 집 근처에 서서 마을 사람들과 뒤 공론을 했다. “김 대장을 보오. 어디 계급투쟁의 안광이 있소? 우파분자에게 관까지 짜주오.” 참다못해 상순은 자귀를 쥐다가 말고 허리를 폈다. “우파 분자도 사람이오. 아무리 우파라고 해도 우리 마을에서 사람이 죽어나가는데 그래 들여다보지도 않고서도 사람이라고 할 수 있소? 짐승보다 못한 놈 새끼!” “아니, 당신 지금 누굴 욕하오?” 흥수는 상순에게 손가락으로 삿대질하며 조개턱을 흔들어댔다. “너도 사람새끼냐? 흥! 더러운 새끼들이.” 상순은 손바닥에 침을 퉥 뱉어 큰 자귀 자루를 쥐더니 팍팍 널판을 찍어댔다. 한참 후 관을 다 짜자 상순은 숭길과 함께 관작을 집 윗방에 맞들고 들어갔다. 그리고 손수 성근의 유체를 관안에 모셨다. 숭길은 상순의 손을 잡고 “정말 고맙습니다. 김 대장이 아니면 어쩝니까? 난 어떻게 할지 전혀 머리 뻥 한 게 생각나지도 않습디다.” 하고 말했다. 상근의 처도 손으로 눈물을 닦으면서 돌아서더니 어깨를 들먹였다. 이때 밖이 소란스러워 나더니 문을 삐꺽 열고 덕돌이 들어와 다급한 소리를 쳤다. “아버지, 아버지!” “무슨 일이냐?” “아버지, 수호네 각시 죽은 거 같습디다.” “뭐라고? 어제 금방 벼 짚을 실어다 불을 때게 했는데. 가보자!” 상순은 급히 덕돌을 데리고 수호네 집으로 뛰어갔다. “어떻게 알았니?” “내 상해에서 온 편지를 가지고 가서 ‘길림이 엄마!’ 하고 아무리 불러도 대답하지 않습디다.” 금방 덕돌이 갔을 때 아무리 불러도 대답을 하지 않으니 문을 당겨 보았다. 그런데 문안으로 노끈으로 느슨히 매놓지 않았겠는가! 하여 ‘길림이 엄마!’ 하고 연신 부르니 집안에서 가느다란 무슨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리하여 문을 콱 당겨 끈을 풀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황련지가 글쎄 팬티 바람에 문어귀 쪽으로 기어 나오다가 까무러친 것 같았다. 그런데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상순은 황급히 수호네 집으로 달려가 문을 뚝 떼고 들어갔다. “흡, 이게 뭐야? 면내구나.” 집안에는 면내가 지독했다. “면내 먹고 죽었지 않았니?” 상순은 바삐 마구 엎디어 있는 황련지를 마구 흔들며 불렀다. “황련지! 황련지!” 아무 대답도 없었다. 당황해난 상순은 황련지를 끌어안고 흔들며 애타게 불렀다. “황련지! 깨나라고!” 그래도 까딱하지 못했다. 허나 황련지의 몸은 따뜻했다. “안 되겠다.” 상순은 황련지에게 옷을 입힐 새도 없어 이불에 싸 업고 자기 집으로 달려갔다. 뒤에서 덕돌이 따라가면서 이불귀를 쥐어 밖에 드러난 어깨를 덮어주었다. 흥수는 마을 사람들 속에서 상순을 보고 코를 조개턱을 쳐들고 헐뜯어댔다. “흥! 잘해. 절다간 이제 황련지에게도 폐병이 옮겠어.” 상순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황련지를 업고 집에 들어갔다. “빨리 김치 물을!” “이게 무슨 일이오?” “면내를 먹은 거 같소.” 명옥은 황급히 조왕덕대에서 김치대야를 내리어 김치 물을 바가지에 부어들고 왔다. 상순은 바삐 황련지 입에 김치 물을 부어넣었다. 꼭 다문 입에 잘 들어가지 않자 명옥이가 손가락으로 입술을 벌리고 상순이 부어넣었다. 뒤이어 상순은 두 채나 내다가 따뜻한 구들 위에 이불을 펴고 그 위에 황련지를 눕히고 두터운 이불을 덮어주었다. 명옥은 부엌에 내려가 아궁이에 벼 짚을 넣고 불을 땠다. 드디어 가마에서 따가운 김이 쌕 나오며 구들이 뜨끈뜨끈해졌다. 이윽고 황련지 입귀가 실룩거리며 한숨을 길게 내쉬더니 신음소리가 났다. “살아났다. 살아나.” 황련지는 상순의 말을 들으며 쌍까풀눈을 스르르 뜨더니 “이게, 이, 이게 어딘가요?” 하고 물었다. “면내를 먹고 까무러친 거 업어왔어. 아들애를 상해에 보내기를 잘 했어. 하마터면 애까지 봉변을 당할 번했어.” 황련지는 그제야 자기가 팬티와 브래지어 바람인 거 알고 부끄러움을 타며 일어나려고 했다. 허나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일 없소. 나을 때까지 우리 집에 있소.” 상순은 황련지를 말리고 나서 성숙을 보고 “가서 옷을 가져오너라.” 하고 부탁했다. 이윽고 성숙과 은자가 수호네 집에 달려가 황련지의 옷을 가지고 달려왔다. 그녀들은 구들에 올라오기 바쁘게 황련지에게 옷을 입히고 이불을 덮어주었다. “근심 말고 우리 집에 있으라고. 부모를 떠나 이런 시골에 와서 얼마나 고생이냐?” 상순의 부모와도 같은 관심과 말에 황련지는 뜨거운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상순은 이불깃을 꼭꼭 여며주고 바깥으로 나갔다. 상순이가 아래로 한 집 건너 성근이네 문 앞으로 내려갈 때었다. 칠촌조카 위경이 그의 팔소매를 잡아 한쪽으로 끌고 갔다. “흥수랑 뒤에서 삼촌을 수호 색시한테서 갈치를 얻어먹더니 업고 달아 다닌다고 하오.” 그 말에 상순은 저쪽에서 삿대질하며 재재거리는 흥수를 쏘아보았다. “주둥이를 까부셔버려라. 저것도 사람새낀가? 당원은커녕 사람 새끼도 아니다. 죽어가는 사람을 그래 업어다 김치 물이라도 먹여 살려야지. 뭐요?” 상순은 성근네 문고리를 잡았다가 놓으면서 위경한테 다가와 말했다. “조카도 다른 일이 없으면 함께 성근의 장례를 지내기오. 성근은 글쎄 말을 한마디 잘 못했지만 우파도 사람이 아니오? 살겠다고 소련에서 여기까지 와서 얼마나 고생했소. 영영 떠나가는 마지막 길이 곁에 사람 하나 없이 얼마나 쓸쓸하오? 구천에 가서도 눈을 감지 못할 거 같소.” 위경은 뒤로 물러서면서 “폐 염이 전염되지 않을까? 마을 사람들이 우파라고 도리머리를 흔드는데 하필…”라고 할 때었다. “이 사람아, 아무리 우파라고 해도 가는 길에라도 사람대접을 하면 안 되냐? 폐 염에 걸리면 형내를 찾아 가 보면 되오.” 위경은 주춤거리다가 상순의 무서운 세 귀 눈길을 피해 머리를 숙이고 뒤따라 들어갔다. 이때 규상과 이계삼이 조상하러 찾아왔다. 뒤에 허영주도 오고 장축국마저 찾아왔다. 조개덕의 숱한 지주들도 먼발치에서 구경하면서 들어오려고 하는 것을 상순이가 바깥에 나가서 충국과 함께 돌아가라고 말렸다. 자칫하면 진짜 우파와 지주, 부농들은 원래 한통속이라고 뒤통수에 손가락질을 당할까 봐 그랬던 것이다. 해지기전에 상순은 노 간부들과 함께 괭이와 벼 짚을 메고 뒤 산에 올랐다. 그들은 벼 짚으로 불을 피워 언 땅을 녹이고 온 종일 역사 질 해 성근의 무덤을 팠다. 이튿날 아침에 쓸쓸하게 눈이 풀풀 흩날리었다. 성근의 시체를 실은 수레를 앞에서 상순이가 몰고 뒤에서 성근의 아내와 숭길이 수레 뒤에서 성근의 관을 짚고 꺼이꺼이 서럽게 울며 걸어 나갔다. 그 뒤에 노 간부들이 머리를 숙이고 뒤따라 걸어 나갔다. 대부분 마을 사람들은 저 먼 발치에서 쑤군거리면서 구경하며 성근이가 불쌍하게 죽었다고 속으로 외울 뿐 한마디 말도 하지 못했다. 상순은 성근의 장례 수레를 몰고 눈길을 걸으면서 속으로 정치투쟁의 참혹성을 뼈저리게 느꼈다. (정말, 참혹한 정치는 뼈를 부시는구나.) 뒤에서 성근의 아내와 아들 숭길의 대성통곡소리가 눈 덮인 북망산을 애절하게 울리며 천천히 산비탈로 올라가고 있었다. 저쪽 흐리멍텅한 하늘에서 허연 눈이 푸실푸실 흩날리며 쏟아지고 까마귀가 아직도 암담한 세월임을 알리기라도 하는 듯이 까욱까욱 울며 스산하게 배회하고 있었다.  
164    대하소설 진달래 소야곡(19) 댓글:  조회:1553  추천:0  2018-07-07
                       36. 국장의 사위 대지를 휩쓸던 무더위가 서서히 물러가고 선들선들 가을바람이 불어왔다. 지구촌  명화가는 벌써 산기슭으로부터 올라가면서 누렇게 산수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천지꽃산 중턱 바위틈에서 진달래가 새해 봄에 연분홍꽃을 피울 것을 기약하며 도라지춤을 추고 있었으며 울긋불긋 단풍이 물들기 시작했다. 참말로 한폭의 멋진 가을의 산수화를 방불케 했다. 종수는 황금물결이 출렁이는 전야를 둘러보자 아직도 농민 아들답게 가슴이 부풀어올랐다. 그는시원한 가을 공기를 한 가슴 가득히 한껏 들이켰다. “아, 올해도 만풍년이 들었구나.” 그는 일요일이 돌아오자 농촌에 내려가 낫을 들고 가을걷이를 하고 싶었다. 이전에 그는 가을만 되면 고향에 돌아가 부모를 도와 가을걷이를 하는데 습관되였다. 그러나 국장의 사위로 된 덕분에 운명을 탈바꿈해 낫을 들잖게 됐고 신문사 기자로 됐다. 중학교 때부터 글짓기를 잘한 그의 리상은 신문사 기자로 되는 것이였다. 그는 기자 꿈을 실현하려고 졸업 전야에 친척의 소개로 한족처녀 류려평과 눈을 질끈 감고  번개식 결혼을 했다. 국장 자리를 지키는 가시아버지 덕분에 그는 자그마한 신문사 기자로 됐을 뿐만 아니라 부모와 동생들까지 줄줄이 시내에 호적을 붙였다. 그리하여 세세대대 농촌에서 땅을 파던 부모형제의 팔자를 고쳐주었다. 한참 궁리하던 그의 머리에는 성호가 피뜩 떠올랐다. (성호네 집이야 말로 개혁개방 시기 신형농촌 만원호야. 신문에 내자.) 그는 성호를 불쌍한 놈이라고 여겼다. (어쩜 대학을 졸업하고 소궁둥이를 친단 말인가? 아무리 경제시대에 돈이 중하다고 해도 그렇지. 정치경제학을  밑구멍으로 배웠어? 못난 놈! 이게 언제라고 아직도 소농경제사상에 물젖어? 에이, 말도 안돼!) 종수는 성호를 시내에 데려오고 싶었다. 의리심도 강하고 소박한 성호를 가까이 두고 서로 도우면서 살고 싶었다. 그가 낫을 쥐고 자전거에 오르려 할 때다. “어디로 가오?” 언제 왔는지 뒤에서 가시어머니가 표독스런 눈길로 쏘아보며 두덜거렸다.  “쉬는 날에나 좀 집일을 했으면 얼마나 좋겠소? 빨래를 하고 집을 좀 거두오.” 종수는 자전거를 멈춰 세우면서 얼굴에 언짢은 기색을 띄였다. “빨래야 세탁기에 처넣으면 되는데 뭘 자꾸 그럽니까?” “어쩜 색시를 생각할줄 모르오? 가마목 소금도 줴놓아야 짜다고 빨래가 제절로 세탁기에 달아들어가오?.” 그때 안해 류려평이 딸애를 안고 나오면서 우방을 눈치질하면서 말렸다. “엄마, 그만해요.” 그녀는 남편을 보고 “어서 가봐요.”라고 했다. “뉘 덕에 기자로 됐는가? 부모형제들까지 다 시내에 들여오고서도. 쳇, 기자라는게  아직도 낫을 들고 돌아다녀?” “대학교 동창네 벼가을도 도와주고 취재도 하려고 그럽니다.” 가시어머니가 또 뭐라고 잔소리를 하려고 하자 종수는 자전거에 올라 뒤도 돌아보지 않고 씽 달아났다. “에이, 스트레스야.” 종수는 자전거를 타고 곧추 성호네 고향으로 달려갔다. 그는 가시집 신세를 좀 졌다고 해서 가시어머니가 항상 잔소리하는 것이 딱 질색이였다. 자전거를 타고 천수해를 지나다가 장마당에 가서 돼지고기 서너근 사 자전거 뒤에 달았다. 그가 사람들과 물어 처음 천지꽃산 기슭에 자리잡은 태평거촌에 이르러 보니 형편없는 시골마을이였다. 늙은 비술나무 아래 모여앉아 한담을 하는 로인들과 물어 겨우 성호네 집으로 찾아갔다. 성호네 초가집은 마을 제일 앞줄에 있었다. 돌로 쌓아올린 토성 밖에 실실이 늘어진 비술나무 가지들이 선들선들 불어오는 가을바람에 흐느적이며 춤을 추고며 반갑게 마중했다. 초가집 지붕에는 얼기설기 뻗친 박넝쿨에 드문드문 둥그런 박이 달려 있었고 빨간 고추도 널려 있었다. 마당에는 숱한 소들이 한창 여물을 먹고 새김질하고 있었고 닭들이 오구구 모여들어 먹이를 쪼아먹고 있었다. 진짜 한폭의 시골 산수화를 방불케 했다. 때마침 집 안에서 영옥이 구정물함지를 들고 나왔다. “성호 어머니 아닙둥? 안녕하십니까?” “양, 누구요?” “성호 대학교때 동창생 박종수입니다. 성호 어데 갔습둥?” 영옥은 함지를 내려놓고 “오, 반갑소. 성호는 저기 우사에 있소.” 하고 천지꽃산 골짜기 어귀를 가리켰다. 종수는 자전거 짐받이에서 돼지고기를 풀어 성호 어머니에게 드렸다. “가을에 반찬이나 합소.” “아니, 이럴 변이라구. 쯧쯧쯧.” 종수는 기뻐하는 영옥의 주름진 얼굴을 뒤로 하고 자전거에 몸을 싣고 천지꽃산을 바라고 페달을 힘차게 굴렀다. 그가 높다란 돌토성을 두른 널다란 우사칸 대문어귀에 이르자 사냥개들이 왕왕왕 짖으면서 뛰쳐나왔다. “지개! 이 놈 개새끼들이!” 때마침 성호가 소똥을 치다가 쫓아나와서 위기를 모면했다. 사냥개들은 성호한테 달려가 앞발로 매달리면서 꼬리를 흔들었다. “아니, 기자가 어떻게 돼 소똥냄새 나는 시골로 다 왔어?!” 성호는 대문 어귀를 내다보다가 저으기 놀라했다. “몇해만이냐?! 정말 반갑다!” 종수는 소똥이 발려서 움츠려뜨리는 성호의 손을 마구 잡아 흔들었다. 그는 우사칸에 차고 넘치는 30여마리 소를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야, 넌 이젠 한뉘 살 돈을 다 마련했구나. 난 한달에 74원 밖에 받지 못하는데.” 성호는 뒤더수기를 긁적거렸다. “건 수학적계산에 불과해. 손에 돈을 쥐여야 돈이야.” 그는 종수 자전거 짐받이에 달아맨 낫을 보면서 물었다. “무슨 바람이 불어 소똥냄새 나는 시골에 왔니?” 종수는 한숨을 후~ 내쉬더니 툭 털어놓고 말했다. “쉬는 날에 너네 집 가을을 도와줄 겸 취재도 할가 해 왔다.” 성호는 떽 했다. “그만 둬! 소문난 잔치 먹을 알이 없다고. 절대 신문에 내지 말라. 어쩌다 만났는데 가을은 무슨 놈의 가을이야. 산에 가서 놀자. 우리 집 가을걷이는 몽땅 삯을 줬다.” 그는 천지꽃산 앞의 누런 논밭을 가리켰다. “저 걸 봐라. 숱한 한족농민들이 우리 논밭에서 가을을 하고 있잖니?” “진짜 개혁개방 초기 신형 만원호야.” “에이, 자식!” 그들은 웃고 떠들면서 우사로 들어갔다. 숱한 개들이 성호네를 따라 우르르  뛰여들어갔다. “다빈치야, 게르만아! 나가 승냥이 오지 않는가 살펴라!” 다빈치라고 불리는 송아지만큼 큰 시꺼먼 사냥개와 게르만이란 호랑이 같은 누런 사냥개가 숱한 개들을 데리고 바깥에 나갔다. “아니, 여기 승냥이 있니?” 종수는 꽤나 섬찍해났다. “있구말구. 전번엔 호랑이까지 글쎄 토성을 날아넘어와 송아지를 물어가려고 하지 않았겠느냐?” “엉?” “게르만과 다빈치 련합진공을 받고 도망쳤어.” “저 사냥개를 게르만이라니? 혹시 독일 사냥개냐?” “그래, 독일 특종사냥견이야. 다빈치는 프랑스 특종사냥견인데 대단히 사나워.” 종수는 머리를 끄덕였다. “자식, 든든한 경호원들을 뒀구나.” 성호는 희죽이 웃으며 종수를 돌아봤다. “호랑이 자기 흉을 하면 온다고 호랑이 말을 작작 해라.” 종수가 우사 당직실을 둘러보니 벽에 사냥총이 걸려 있었다. “널 붙들고 앉아 있으면 어쩌냐? 내 온바에 뭔가 해야지.” 종수가 고집하는 바람에 성호는 당직실 벽에서 채찍을 벗겨 들었다. “형은 국장 사위로 되더니 팔자를 고쳤구만. 가시집에서 사준 벽돌집에 들어 살지,  기자로 됐지.” “야, 야, 말도 말라. 너처럼 자기 능력으로 사는게 제일 편안해.” “왜?” 종수는 성호의 어깨를 툭툭 쳤다. “우린 다 농부의 아들이 아니고 뭐냐?” “그런 소릴 작작 해라.” 성호는 우사칸으로 나가면서 성을 발칵 냈다. “사실 아니냐?” “농부의 아들이 어떻단 말이야? 난 ‘농부의 아들’이란 신분에 맞서 싸우는 투사로 되겠어.” “농부의 아들이 섧지.” 종수도 설음을 쏟아냈다. “팔자를 고치자고 한족 국장 집 사위로 됐지. 그런데 가시집 신세를 너무 져도 좋찮아.” 성호는 소채찍을 들고 소무리 쪽으로 가면서 머리를 끄덕였다. 종수는 계속 하소연했다. “가시엄마 하루 건너 찾아와서 잔소리를 한다. 이젠 잔소리 딱 진절머리난다.” 성호는 종수의 고충을 짐작할 수 있었다. “난 고향 우사에서 소나 개와 함께 뒹굴면 뒹굴었지 가시집엔 가지 않아.” 종수는 넉두리를 해댔다. “집이 따로 있어도 쓸데 없어. 가시집과 불과 5분거리니까. 엄마랑 동생들이랑 모두 30평방메터 박에 안되는 우리 집에서 함께 사는데 말이야. 가시엄만 쩍 하면 찾아와서 우리 살림살이를 현지지도한단 말이야. 우리 엄마랑 바늘방석에 앉은 것처럼 쩔쩔 맨다. 가시엄마는 딸한테 사준 비좁은 집에 숱한 사돈들까지 덮씌워 사는 걸 눈꼴 사나워 해. 이젠 가시엄마 온다하면 머리카락이 곤두설 지경이야. 안사돈이 온다하면 녀동생들은 슬슬 피해 바깥으로 나가버려. 남동생 만수는 어떤 땐 괘씸해 주먹으로 벽을 꽝꽝 친다. 후- 스트레스야, 스트레스.” 성호는 충고를 아끼지 않았다. “꾹 참고 살아야지.” “참고 견디다는게 하루가 삼추 같아.” 성호가 대문을 열자 소들과 개들은 좋다고 바깥으로 뛰여나갔다. 성호는 채찍을 재치있게 반공중에 한고패 휘둘러 갈겼다. 쨩! 쨩! 채찍소리에 소들은 겁을 집어먹고 앞으로 네굽을 안고 뛰여나갔다. 다빈치와 게르만을 우두머리로 한 사냥개들은 옥수수밭으로 뛰여가는 소들을 쫓아가 물 상하며 왕왕왕 짖어댔다. 성호와 종수는 옥수수밭에 뛰여들어 옥수수이파리를 먹는 소들을 몰아냈다. (소궁둥이를 치기 쉽잖구나.) 천지꽃산 기슭으로 가자 소들은 누렇게 번져가는 가을풀을 뜯어먹으면서 애를 덜 먹였다. 숨을 돌리자 종수는 성호한테 다가갔다. “얘, 대학을 졸업하고 이게 뭐냐? 소치기도 계속 할 일이 아니야.” “무슨 소리야?” 성호는 무연한 벌판을 내려다보면서 가을의 시원한 산공기를 한 가슴 가득 한껏 들이켰다. “이제 젖소를 사서 우유를 시내에 가져다 팔 예산이다.” “야, 야, 싹 그만둬!” 종수는 손사래를 쳤다. “이만하면 됐다. 싹 팔아가지고 시내에 벽돌집을 한채 사라. 우리 시내에서 함께 살자.” “제 손가락을 빨아먹고 살겠니?” “가시아버지한테 널 취직시켜달라고 말할게.” “싹 그만둬. 내 가시아버지 연줄을 달아보겠다는 것도 말렸다.” 성호는 산기슭으로부터 동서로 가로 왔다갔다하면서 풀을 뜯어먹으며 산중턱에까지 올라온 소떼를 내려다보며 코노래를 불렀다. 종수는 현실에 만족하는 성호를 두고 도리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성호는 종수의 속을 꿰뚤어나 본듯이 제 생각을 털어놓았다. “이모부와 말하면 파출소 민경쯤은 할 수 있을거 같애.” “좀 좋아서?” 성호는 도리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어쩐지 농민의 아들이 돼 그런지 시내 매끄러운 소시민들과 섞여서 살기 싫어.” 성호는 종수를 돌아보면서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난 남들이 다 동쪽으로 갈 때 홀로 서쪽으로 갈테야.” “쳇, 최서해가 이 시골에 재생했는가?” 종수는 그 말뜻을 오래도록 음미해보더니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시내 사람들이라고 다 매끄러운 건 아니야. 시내 사람들이 싫다고 교수네 규수마저 이런 소똥 구린내 나는 우사칸에 데려다 살 생각이냐?” “정희 오자고 하겠느냐? 지금 딸애를 데리고 가시집에 얹혀 산다.” 종수는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새파란 나이에 오래 갈라져 사는 건 도리 아니야.” “애까지 낳은 정희가 어쩔라구?” (건 몰라.) 종수는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꿀꺽 삼키고 말았다. 그는 속으로 죄책감을 느꼈다. 몇해 전에 자기가 승호와 은영의 일을 삐라로 찍어 온 시내에 널어놓은 일이 항상 마음에 걸렸다. 그 삐라사건만 없어도 성호는 수사대대에 무난히 들어갔을 것이 아닌가. 성호는 종수가 보도기률을 어길 수 없어 신문에는 내지 못하고 삐라를 찍어 널어났으리라는 것을 짐작했다. 은영과 승호의 은사를 공개한 건 타당하지 않지만 깡패들의 죄악을 폭로한 것이 씨원해 짐짓 모르는 척했다. 종수는 농민의 아들이기에 소박한 일면이 있었지만 입이 가볍고 속에 섬찍한 뭔가도 있었다. 그는 절벽 위로 스적스적 올라가는 성호를 따라가면서 화제를 돌렸다. “야, 은영이 어데 갔는지 궁금하지?” 성호는 버럭 화를 냈다. “은영이 말을 다시 하지도 말라!” “아니, 왜 이래?” 성호는 채찍을 휘둘러 쨩 내리후려치고나서 중얼거렸다. “난 은영을 사랑하지도 않았어. 황차 이젠 가정도 있는데 걔를 다 언제 생각할새 있니?” 기실 성호는 첫사랑 순희보다 은영을 더 사랑했다. 그런데 한마디 말도 하지 않고 이 세상에서 사라진 것이 안타까왔다. 그는 은영이 결코 정신병에  걸리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속으로는 은영의 행방을 알고 싶었지만 종수 앞에서 그런 내색을 내지 않았다. 갑자기 서북쪽 하늘로부터 먹장구름이 뭉쳤다 흐트러졌다 하면서 이쪽으로 덮쳐왔다. 쨩! 쨩! 성호는 종수한테 비닐박막을 뿌려주고는 황급히 채찍을 휙휙 휘둘러 소들을 산 아래로 몰고 내려갔다. 먹장구름 속에서 불뱀이 몇가닥 혀를 번쩍 날름거렸다. 불뱀은 천지꽃산 꼭대기를 휘감아 내동댕이쳤다. 우르릉 꽝! 꽝! 천지를 뒤흔드는 우뢰소리가 울리더니 열콩알만큼한 비방울들이 바위와 절벽에 후둑후둑 떨어졌다. 다빈치와 게르만은 소떼를 산 아래 몰아내려갔다. 소떼를 따라 산 아래로 내리닫던 성호는 그만 소똥을 밟고 썩박나무 넘어가듯 엉덩방아를 찧었다. 오만상을 찡그리면서 일어난 성호의 엉덩이에는 누런 소똥이 한벌 척 들어가붙었다. 그래도 성호는 개의치 않았다. 종수는 따라내려가면서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그도 농촌태생이지만 성호가 이런 시골에서 소궁둥이를 치는 것이 리해되지 않았다. 성호는 창창 쏟아지는 소낙비에 물병아리 돼가지고 간신히 소떼를 우사에 몰아넣고 대문을 채워버렸다. 그는 사양실에 들어와 옷을 벗어 꽉꽉 비틀어 짜면서 오히려 종수를 근심했다. “얘, 집에 다 갔구나. 래일 제때에 출근하지 못해 어쩌겠니?” “괜찮아.” 그들 둘은 젖은 옷을 맞쥐고 비틀어 짜서 널어놓고 우사의 커다란 솥에 끓여놓은 시라지국에 옥수수밥을 대충 먹었다. 그들이 한창 이야기할 때였다. 바깥이 훤하게 개이는 것이 아니겠는가. “야, 날이 개였을 때 시내에 돌아가라.” 종수는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자꾸 축객령을 내리지 말라. 오늘 온 밤 인생담이나 나누자.” 성호는 후~ 한숨을 몰아쉬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우사에 나가더니 소깔을 날라다준다, 개와 돼지한테 먹이를 준다 하면서 바삐 돌아쳤다. 종수도 뒤따라 나가 팬티 바람에 성호를 거들어주었다. “기자선생 오늘 로동개조를 톡톡이 하는구나.” “그런 소릴 하지 마. 내 뿌리도 농촌에 있잖니.” “허허허.” 성호는 어쩐지 종수나 범송은 흙냄새 나서 시내에서 자라 매끄러운 승호보다 마음이 통하는데가 있었다. 종수는 성호를 도와 온종일 그 넓은 우사  밑바닥에 널린 소똥을 다 쳐내고서야 저녁 밥상에 마주 앉았다. 불시에 바깥이 어두워지더니 또 대줄기 같은 비줄기가 좔좔 쏟아졌다. 초가을비가 장마철 비처럼 대지에 억수로 쏟아부었다. 이윽고 대지가 어둠의 장막 속에 서서히 휩싸여버렸다. 번개가 번쩍 하면서 시꺼먼 우사칸으로 날아들어왔다가 그들이 두려운듯 되달아나갔다. 꽈르릉! 무서운 천둥소리가 하늘땅을 진감했다. 금방 밥술을 놓았을 때다. 바깥에서 개 짖는 소리가 왕왕왕 다급하게 들렸다. 따웅- “이크, 또 호랑이가 왔구나!” 성호는 벽에  걸어둔 사냥총을 벗겨 들고 당직실 구들에서 뛰여나갔다. 참말 무시무시한 광경이였다. 종수는 당직실 구석에 놔뒀던 낫을 주어들고 따라나섰다. “나오지 말라.” “아니, 혼자 어떻게 호랑이와 싸워?” “위험해! 나오지 말래두.” 성호는 궁둥이로 문을 들이밀어 닫아버렸다. 종수는 문꼬리를 쥐고 바깥을 내다보았다. 우사 토성 안에 시퍼런 불찌가 왔다갔다 했다. 호랑이가 뛰어들어 송아지를 물고 토성 밖으로 나가려고 날뛰었다. 다빈치와 게르만이 왕왕 짖어대며 악착스레 덤벼들었다. 호랑이가 토성을 훌쩍 뛰여넘으려는 순간 다빈치가 호랑이 뒤다리를 물었다. 게르만도 꼬리를 덥석 물어당겼다. “따웅!” 호랑이는 송아지를 떨구면서 홱 돌아서며 다빈치에게 덮쳐들었다. 다빈치와 게르만은 잽싸게 몸을 피했다. “저 놈 호랑이새끼! 내 어떻게 키운 송아지라고!” 성호는 당직실 문을 살며시 열고 나가더니 공중에 대고 엄포를 놓았다. 땅! 호랑이는 물었던 송아지를 떨구더니 몸을 날려 토성을 훌쩍 뛰여 넘어갔다. 성호는 도망치는 호랑이 쪽에 대고 또 총을 쏘았다. 땅! 장개골안 중턱에서 시퍼런 불찌가 오락가락 하다가 뚝 멈춰섰다. 뒤따라오는  사냥군이 없자 호랑이는 아마 토성 안에 버리고 달아난 송아지가 아까워 서성거리고 있는 것 같았다. 성호는 사냥총을 들고 억수로 쏟아지는 가을비를 흠씬 맞으며 땅바닥에 쓰러진 송아지한테 달려갔다. “아이고, 죽었구나!” 성호는 진창에 풀썩 물앉아 송아지를 붙안고 야단쳤다. 호랑이는 송아지 목주래를  물어 끊었던 것이다. 끊어진 목에서 뻘 건 피가 흘러 진창에 고인 비물에 쭉 퍼져나갔다. 다빈치와 게르만은 왕왕왕 하고 애처롭게 짖어댔다. 자기들이 잘 보호하지 못해 죄송스러운듯이 짖고 또 짖어댔다. “사냥개 몇마리로는 호랑이를 말리지 못해.” 종수는 량미간을 찌프리더니 좋은 꾀를 내놓았다. “성호야, 암소만 우사에 가두고 수소를 토성 안에 풀어놔라. 호랑이도 황소를  두려워 해.” 성호는 사냥총을 짚고 간신히 일어났다. “그 말이 옳아. 새 해엔 토성도 높여야겠어.” 종수는 대문을 잘 채웠는가 돌아보는 성호 뒤를 따라 다니면서 또 한마디 충고했다. “성호야, 소사양을 아버지한테 넘겨주고 시내에 집을 잡고 살면 어때?” “말도 안돼. 아버진 근본 내 소사양하는 걸 도와주지 않아.” 성호는 당직실에 들어가 사냥총을 벽에 걸어두었다. 종수는 도리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왜 도와주지 않는다니?” 성호는 당직실에서 나가 가을비를 맞으면서 죽은 송아지를 안아다 사양실에 들여왔다. 그는 부엌에 걸어놓은 커다란 솥의 물에 피물이 묻은 손을 씻으면서 고충을 털어놓았다. “아버진 자손들을 무척 사랑하지. 그런데 소사양만은 돕지 않아.” 성호는 한숨을 후~ 내쉬더니 뒤말을 이었다. “아버진 내가 대학에 가니까 얼마나 기뻐했는지 몰라. 그런데 금의환향은커녕 귀행하자 너무나도 실망했지. 그래서 소사양하는 걸 도우면 시내에 돌아가지 않을가봐  돕지 않아.” 종수는 머리를 끄덕였다. 이윽고 그는 무릎을 탁 쳤다.  “얘, 부근의 농민들을 고용해 소사양을 하면 어떻니?” 성호는 대야에 물을 퍼놓고 죽은 송아지를 씻다가 종수한테 머리를 돌렸다. “좋은 생각이구나.” 그날 종수는 당직실에서 성호와 함께 밤이 깊어가도록 자지 못했다. 혹시 호랑이 다시 뛰어들가봐서다. 이튿날 종수는 성호가 준 송아지고기를 차마 받지 못했다. “얘, 이 소고긴 목에 걸려.” “별 소릴 다 한다. 가지고 가라.” 종수는 사양하다 못해 받아 가지고 자전거를 타고 가려고 했다. 그런데 질척질척한 진창길을 한발작도 움직이기 힘들었다. “걸어가야겠어.” “자전거는 어쩌니? 내 소수레에 실어다줄가.” “그만둬. 우사를 비우면 호랑이라도 오면 어쩌니? 후에 자전거 가지러 올게.” 종수는 바지가랭이를 걷더니 신을 벗어쥐고 맨발바람으로 길을 떠나려고 했다. “얘, 비닐박막을 가지고 가라.” 성호는 우사칸에 들어가더니 비닐박막을 들고 나왔다. “이 소고기도 가지고 가라. 네 가시엄마를 가져다주렴.” 성호가 기어이 손에 쥐어주는 바람에 종수는 마지못해 소고기를 들고 몸을 돌려 시골 진창길을 저벅저벅 걸어갔다. “얘, 절대 날 신문에 내지 말라.” “알았어.” 성호는 멀어져가는 종수의 뒤잔등을 바라보면서 한숨을 후~ 내쉬였다. 종수는 진창길을 밟으면서 마을 앞에 이르자 초가 팔간집을 들여다보았다. 때마침 성호 아버지가 낫을 들고 나왔다. “성호 아버지, 이걸 받읍소.” 상진은 비닐주머니를 받아들고 물었다. “이건 웬 소고기요?” “갈 길이 바빠서 들고 가지 못하겠습구마. 잡숩소.” 상진은 소고기를 들고 보더니 실망한 눈길로 종수를 바라보았다. “소 죽었소?” “예. 어제 호랑이 뛰어들었습구마.” 상진은 장개골안 쪽을 바라보면서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였다. “목에 걸려서 먹을 거 같지 못하우.” 상진은 소고기를 종수에게 되밀어주었다. “안녕히 계십시오.” 종수는 별 수 없이 소고기를 들고 질척한 진창길로 저벅저벅 걸어나갔다. 상진은 장개골안 우사 쪽을 돌아보면서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37. 소장사군 천지꽃산에는 울긋불긋 단풍숲이 푸르청청한 소나무숲과 어울려 조화를 이루고  들에는 황금나락이 가을바람에 설레며 춤을 추고 있었다. 해맑은 가을 하늘에 꽃구름들이 양떼처럼 서서히 흐르고 천지꽃산 칼날 같은 벼랑 사이로 산새들이  풍작을 노래하며 재잘재잘 지저귀고 있었다. 일요일에 정희가 한나를 데리고 시골 우사에 찾아왔다. 철주는 우사를 지나가면서 빈정거렸다. “함박꽃이 둼무지에 꽂혔구만.” 정희는 못들은척하면서 우사에 들어섰다. 그녀를 조롱이나 하는듯이 구린내가 물씬 풍겼다. 그녀는 황급히 코를 싸쥐고 오만상을 찡그렸다. “에이, 구린내야!” “아빠!” 한나는 두 팔을 쫙 벌리고 성호한테 달려갔다. 성호는 한나를 와락 끌어안고 뽁뽁 뽀뽀를 해주었다. “아빠 보고 싶더냐?” 한나는 성호의 품에 안겨 종달새처럼 종알거렸다. “예, 아빠, 이젠 시내 가서 어머니랑 함께 살자요.” 성호는 한나를 와락 끌어안고 정희를 흘끔 건너다보았다. “귀여운 우리 공주님, 거짓말을 하지 않지?” 한나는 머리를 까땍거렸다. “어머니 시켰지?” “예, 어머닌 아빠를 보면 ‘시내에 가서 어머니랑 함께 살자’고 말하라 했습니다. 밤이면 무섭습니다. 아빠 있으면 무섭지 않아 얼마나 좋겠어요?” “그래?” “6.1절에 다른 애들은 다 엄마, 아빠 량손을 쥐고 공원에 가서 노는데요. 난 아빠 없어 부럽습니다.” “그 말도 엄마 시켰지?” “예, 엄마도 아빠가 보고 싶다고 했습니다.” “아빠 돈 많이 벌어가지고 한나랑 엄마랑 함께 살자.” 성호가 정희를 뒤돌아보니 돌아서서 어깨를 가늘게 들먹이고 있었다. “정희, 그간 애를 데리고 고생했소. 내라고 시내에서 살면 좋은줄 몰라 이러겠소?  나도 칠정육욕이 있는 사내요. 왜 처자가 보고 싶지 않겠소? 그러나 저 서른마리도 넘는 소들을 누가 돌보겠소?” 정희는 돌아서서 손수 건으로 뜨거운 눈물을 훔쳤다. “시아버님이 좀 도와주면 얼마나 좋겠어요?” 성호는 손사래를 쳤다. “그런 말 절대 하지 마오.” “?” 정희는 어글어글한 외까풀눈이 데꾼해졌다. 걀죽한 얼굴에 의아한 표정이 사품쳐 흘렀다. “아버진 내가 소궁둥이를 치는 걸 반대하니까.” 성호는 제꺽 화제를 돌렸다. “한나를 키우느라고 고생했소.” 성호는 정희와 한나를 한품에 와락 끌어안았다. “이젠 다 때려치우고 시내로 가서 함께 삽시다. 예?” 성호는 정희와 한나를 끌어안았던 팔을 스르르 풀었다. “어찌 중도 랑패를 보겠소? 이제 소장사를 해서 돈을 많이 벌면 시내에 덩실한 벽돌집을 사놓고 잘 살아보기요.” “저 소30마리도 넘는데요. 저만하면 안돼요?” 정희는 우사칸 당직실을 거두면서 물었다. “난 원대한 꿈이 있소.” “무슨 꿈? 사람 욕심이 어디 끝이 있어요?” 성호는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꿀꺽 삼켜버렸다. 우사 사양실에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성호는 채찍을 들더니 우사 대문을 활짝 열어제끼고 소떼를 몰고  방목하러 떠났다. 성호는 시원한 산공기를 마시면서 다빈치와 게르만을 앞세우고 소떼를 몰고 천지꽃산 기슭에 오르면서 새로운 꿈을 무르익히고 있었다. (그래, 종수의 말이 맞아. 마을에서 끌끌한 장년을 고용해 소사양을 하게 하고 난    시내에 진출해야지.) 당면계획도 세웠다. (이제 황소를 처리해 내몽골에 가서 젖소를 사다가 우유를 팔아 돈을 벌어야지. 여기선 젖소 한마리에 2천원, 황소 두세배값이야. 진짜 집 한채 값이잖는가.) 정희는 여느 때처럼 시부모의 빨래도 해주고 집도 거둬주었다. 어떤 때는 시어머니를 도와 자류지 감자를 파왔고 가지를 뜯어다가 썰어 마당에 비닐박막을 펴놓고 널어 말리웠다. 정희가 고방에 들어가보니 일하고 벗어놓은 헌 옷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그녀는 구석구석 살피면서 어지러운 옷견지를 들춰 대야에 담아 이고 한나를 데리고 태평강에 나갔다. 높고 푸른 하늘아래 태평강물은 어찌나 맑은지 푸른 하늘과 하얀 목화송이 같은 구름이 둥둥 떠 흘렀다. 맑은 강물이 핥으며 흐르는 조약돌 사이에서 지느러미를 하느적거리는 모래무치랑 붕어랑 환히 들여다보였다. 빨래터에는 순희가 빨래를 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저 눈인사나 하며 계속 방치질했다. 정희는 대야의 빨래를 맑은 강물에 훌 쏟아불궈놓았다. 드디여 비누를 먹여 빨래돌 우에 놓고 방치로 팔이 시리게 투닥투닥 두드리기 시작했다. 일밭으로 나가던 마을 사람들은 빨래를 하는 정희를 보고 혀를 끌끌 찼다. “정말 시내 색시 같잖소.” “얼마나 부지런한 색시요.” 동불사댁의 말에 세린하댁도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글쎄 말이요. 일요일에 시집에 오기만 하면 저렇게 부지런히 일한단 말이요.” 순희는 정희와 나란히 앉아 빨래를 하면서 정희 처지가 가엾어 한숨을 후- 내쉬였다. (성호도 한심하지. 어쩜 시내 색시를 데려다가 저렇게 고생시켜?) 순희는 정희 처지가 남의 처지 같지 않았다. 그녀는 착잡한 생각을 빨래와 함께 강물에 훌훌 휑구어버리며 허구픈 웃음을 지었다. 정희는 상을 찡그리면서 때물이 줄줄 흐르는 빨래를 쭉쭉 짜서 대야에 담았다. 시내에서는 활활 주어버릴 헌 옷들이였다. 그러나 시부모는 일할 때 입겠다고 버리지 않았다. 온 오전 빨래를 한 그녀는 팔을 쉬울 새도 없이 시어머니를 따라 밭에 가서 고추도 따고 옥수수도 땄다. 고추대만큼도 안되는 한나는 빨간 고추 다닥다닥 달린 고추대 사이로 다니면서 빨간 고추를 따서 어머니 바구니에 담았다. “한나, 넌 그저 놀아.” “나도 고추 딸래.” “아니야, 고추 매워서 손으로 눈이랑 만지면 아려.” 정희는 한나의 손을 쥐고 개울가에 가서 말끔히 씻어주었다. 한나는 계속 고추를 따겠다고 발을 동동 구르며 떼를 썼다. “넌 여기서 놀아.” “아니야, 고추 딸래.” 정희는 한나를 달랬다. “말 잘 들으면 저녁에 할머니네 떡을 쳐준다.” 영옥이 맞장구를 쳤다. “그래, 우리 손녀 말 잘 듣지? 찰떡 쳐줄게.” “야, 좋아라. 떡이 냠냠 맛있다. 오래오래 맛있다.” 고추를 다 따자 정희는 시어머니를 따라 마늘밭에 가서 마늘도 쑥쑥 뽑았다. 이윽고 그녀는 자전거에 마늘을 실어 들였다. 그녀는 손이 쉴 새없이 시어머니한테서 배우면서 마늘양태를 따 처마 밑에 걸어놓았다. (시내 색시 어쩜 농촌 아낙네들처럼 일을 저렇게 잘할가?) 영옥은 원래 시내 처녀를 막내며느리로 삼고 싶지 않았다. 로동이 사랑이라고 차차 지내면서 보니 정희는 여느 시내 색시들처럼 매끄럽지 않고 부지런하고 마음씨도 곱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영옥은 쌀독에서 바가지로 찹쌀을 퍼서 쌀함박에 씼어  시루가마에 얹었고 돼지고기를 씻어 가마에 넣었다. 농촌에는 석탄도 없어 땔나무로 불을 때야 했다. 정희는 먼지  풀풀 이는 땔나무를 무릎에 대고 뚝뚝 끊어 부엌 아궁이에 쑤셔 넣고 불을 지폈다. 한참 후 가마에서 쌕김이 쌕- 뿜겨나왔다. 시어머니가 벽에 기대놓았던 떡돌을 번져놓자 정희는 떡똘을 싹싹 씻어냈다. 영옥이 김이 문문 나는 떡쌀을 퍼다 떡돌에 쏟아놓았다. 정희는 떡메를 싹싹 씻어 들고 손수 찰떡을 쿵쿵 쳤다. “야 –호- 맛있겠다.” 한나는 떡을 치는 어머니를 응원이나 하듯이 박수까지 쳐대며 환성을 질렀다. 해질 녘에야 시아버지가 일밭에서 돌아왔다. 정희는 찰떡을 베 사발에 담다가 일어나면서 인사했다. “아버님, 돌아오셨습니까? 로년에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괜찮소.” 정희는 시어머니를 도와 저녁상을 차렸다. 밥상에는 무룩이 담은 떡사발과 돼지고기장국이 올랐다. 저녁에 성호도 태평강을 건너 집에 들어섰다. “냠냠 맛있다. 오래오래 맛잇다.” 한나는 노래나 부르는듯이 흥얼거리며 떡과 돼지고기를 맛나게 먹었다. 한나는 할머니네 집에 오기를 좋아했다. 할머니네 집에 오면 집에서도 먹지 못하던 떡도 먹고 돼지고기도 먹을 수 있었기 때문이였다. 하긴 정희는 본가집에서는 돈이 아까와 돼지고기를 별로 사먹지도 않았지만 시집에 올 때면 꼭꼭 사왔다.  영옥도 일이 바빠서 평소에는 떡을 쳐먹을 새도 없었지만 며느리와 손녀가 오기만 하면 떡쌀을 퍼내군 했다. 저녁상을 물리자 상진은 성호를 마주보면서 무겁게 입을 열었다. “얘, 언제까지 농촌에서 소궁둥이 치겠느냐?” 정희는 말수 적은 시아버지가 엄숙하게 묻는 말씀에 동감이 갔다. “글쎄 말입니다. 제 생각엔 소를 팔아버리고 시내에 집을 잡고 부모를 모시고 사는게 옳다고 봅니다. 부모님들께서도 이젠 년세가 들어 어떻게 계속 힘겹게 농사를 지으면서 사시겠습니까?” 성호는 머리를 숙이고 한참 궁리하더니 천천히 머리를 들었다. “내라고 농촌에서 살고 싶어 이러오?” “그럼 왜?” 상진은 들을수록 화났다. 그는 꾹 참으면서 천천히 성호의 뒤말을  기다렸다. “돈 벌어 시내 가서 좀 더 환하게 살자고 그럽구마.” “어서 소를 팔아가지고 시내로 가라. 대학을 졸업하고 어찌 돈에 눈이 어두워 소궁둥이를 친단 말이냐?” 성호는 마을 사람들의 조롱도 비난도 다 개의치 않았다. 그러나 페부를 찌르는 아버지 충고는 심사숙고해야 했다. 상진은 답답해 땅이 꺼지게 한숨을 후~ 내쉬였다. 그때 웃마을 큰형님 백호가 찾아왔다. 그는 맏이였지만 아들이 없는 큰집에 앞을 서서 큰집 부모를 모셨다. “성호야, 아버지 말씀이 옳다. 이젠 시내로 가라. 공안국이거나 광고회사 같은데 들어가면 얼마나 좋겠니?” 성호는 정희의 눈치를 흘끔 살폈다. 외씨 같은 얼굴이 새파래지려니 했는데 다행히 무표정했다. 백호는 성호를 타일렀다. “넌 막내니까. 부모 근심은 하지 말라. 내 옆에서 부모를 모시면 돼.” 성호는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아니요. 현시대에 딱 맏아들이 부모를 모셔야 한다는 도린 없소. 막내도 부모  자식이 아니요? 어느 자식이 모시기 편리하면 어느 자식이 모시는게 옳소. 형님과 아주머니는 큰아버지와 큰어머니를 모시느라고 얼마나 고생했소. 내한테도 부모께 효성을 드릴 기회를 좀 주오.” 성호는 정희의 눈치를 흘끔흘끔 살피면서 뒤말을 이었다. “큰형님도 이젠 예순이 다 된 로인이요. 이젠 아들며느리 신세에 사는 신세에 어떻게 부모를 모신다고 그러오? 둘째형님은 조선에 가고 없지. 누나넨 출가집  외인이라고 어쩌겠소? 누나네도 다 시집부모를 모시고 있잖소? 이제 소장사를 해서  돈을 많이 벌면 부모를 얼마든지 잘 모실 수 있소.” “그만둬라. 우린 시내에 가서 살지 않겠다. 농촌이 편안해 좋다.” 상진이 허리를 펴면서 손사래를 쳤다. “우리 근심은 하지도 말라. 네가 대학을 졸업하고 소궁둥이를 치지 않는 걸 봤으면 얼마나 좋겠느냐?” 이때 은숙이 옥희를 업고 혜옥과 주옥까지 데리고 들어섰다. “아버지 말씀이 옳다.” 그녀는 잔등에서 옥희를 내리워 한나와 놀게 하고 뒤말을 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이게 뭐냐? 어서 시내에 가서 환한 일자리를 찾아라. 괜히 올케까지 고생시키지 말구.” “알았소. 알아서 한다니까.” 성호는 형님과 누나 말을 고맙게 받아들였다. 그러나 얼굴이 파랗게 질려가는 정희의 걀죽한 얼굴을 곁눈질해보고 누나 말을 중동무이했다. 은숙은 그래도 계속 충고했다. “큰오빠하구 우리 부모 곁에 있으니깐. 부모 근심하지 말고 시내로 가라. 황차 넌 막내니까. 부모를 모시지 않는다고 말할 사람도 없어.” 백호도 맞장구를 쳤다. “그래. 한집에 있으면서 모신다고 해서 효성을 다 하는게 아니야. 네가 대학을 졸업하고 소를 치면서 사는 건 부모에겐 최대의 불효야. 부모들은 자식들이 잘 되는 걸 보면 행복해.” “그래. 형님과 누나 말을 들어라. 우린 아직 자기절로 밥벌이는 할 수 있다. 내 손에 풀이 있을 때 너네 먹을 쌀까지 대줄 수 있다.” 엄마도 한마디 했다. “우린 네가 잘 되는 걸 보면 세상 좋겠다.” 성호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알았습니다.” 백호는 성호가 시내에 갈 의향이 있다는 것을 보아내고 내심으로 기뻐했다. 어둠이 깃들자 성호는 한나를 업고 정희와 함께 은빛달빛을 밟으면서 태평강 징검다리를  건너 우사로 돌아왔다. 창문으로 서글픈 달빛이 비껴드는 우사 사양실에 누운 정희는 쓸쓸하기만 했다. 골안에서 어둠의 적막을 깨우면서 드문드문 승냥이의 울부짖음소리가 들려왔다. 울 안에서 사냥개들이 무섭게 울부짖었다. 성호는 자리를 차고 벌떡 일어나더니 벽에서 사냥총을 벗겨들고 나갔다. “조심하세요.” “걱정 마오.” 정희는 조마조마해 창문으로 바깥을 내다보았다. 산기슭 어둠 속에서 시뻘건  불찌가 왔다갔다 달아다니는 것이 보였다. 이따금 승냥이의 울부짖음소리가 몸서리치게 들려왔다. 그녀는 달빛에 비낀 남편, 사냥총을 들고 나가는 남편의 뒤모습을 보고 한나를 꼭 끌어안고 뜨거운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며칠 후 성호는 마을에서 소사양을 할 농민일군을 물색했다. 그런데 시내 보통로동자들의 로임보다도 더 주겠다고 해도 조선족농민들은 왼눈으로 보지도 았았다. 늙은 비술나무 아래에서 마을 령감들은 의론이 분분하였다. 동불사 령감은 “누가 성호네 머슴살이를 하겠는가?”고 뒤에서 쑤근거렸다. 세린하 령감도 맞장구를 쳤다. “누군 바보요?” 나중에 이 고장에서 유명한 제지주네 아들 제경국이 나섰다. 돈이 있으면 귀신마저 매돌을 돌리게 부린다고 지주 아들마저 자존심을 버리고 소사양원으로 들어오려고 찾아왔다. 성호는 제경국을 쓰기 좀 주저했다. 혹시 아버지가 촌당지부 서기를 할 때 항상 자기 애비를 투쟁했다고 경국이 암암리에 보복할가봐 섬찍하였다. “경국을 써도 괜찮아. 내 옆에서 도와줄게.” 뜻밖에 아버지 나설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성호는 아버지와 경국한테 소사양을 맡긴 후 소를 팔아 손잡이뜨르로 벽돌을 울 안에 실어들였다. “얘, 당장 마당에서 탈곡해야겠는데 벽돌을 실어들여 뭘 하겠느냐?” 상진은 성호가 무슨 궁리를 하는지 답답했다. 성호는 벽돌장을 훌훌 부리워 놓으면서 빙그레 웃었다. “새 해 봄이면 알 수 있을 겁니다.” 성호는 통통통 손잡이뜨락또르를 몰고 벽돌공장으로 달려갔다. 그때 내몽골에서 집안집 팔촌형 광호가 놀러 왔다. 광호는 원래 태평거촌에서 살다가 쌀고생에 견디기 어려워 10여년 전에 내몽골에 이사갔던 것이다. 그는 성호네 산골짜기 어귀에 있는 널직한 우사를 두루 돌아보더니 머리를 끄덕였다. “우사를 잘 지었구나. 여기다 우리 내몽골 소를 사다가 길렀으면 돈을 벌거 같다.” 성호는 오랜만에 만난 광호를 보고 헛일 삼아 물었다. “내몽골에서 황소 한마리에 얼마나 하오?” “지금 한 4, 5백원 해.” “오~” “진짜 내몽골에 가서 소장사라도 할 예산이냐?” 순간 아버지 말씀이 떠올랐다. “장사군은 애비도 속인다. 장사를 하려면 누구도 믿어선 안된다.” 성호는 광호를 어색하게 바라보면서 말끝을 얼버무렸다.  “아니, 그저 물어보는 거요.” 그러나 광호는 짐작이 가는데가 있어 중얼거렸다. “내몽골이 멀어서 여기까지 소를 가져오는게 문제야. 몇달 동안 몰고 올 수도 없지.” 성호는 속궁리가 따로 있었다. 그는 광호를 집에 청해 술을 마시면서 내몽골 형편을 자세히 알아보았다. 광호는 내몽골 초원에 진달래꽃을 심어 꽃피우고 싶다고 하면서 성호와 함께 고향의 천지꽃산에 올라가 진달래 몇그루 뿌리채로 파가지고 내몽골로 돌아갔다. 며칠 후 성호는 소를 더 팔아가지고 소장사를 하려고 내몽골로 떠났다. 그는 혹시나 해서 각반을 친 장단지 안쪽에 비수까지 감췄다. 부모와 정희가 아무리 말려도 벽이라도 차고 나갈 성호의 앞길을 막을 수 없었다. 성호는 광호를 따라가지 않고 혼자 소장사길을 개척하고 싶었다. 성호는 렬차를 타고 밤낮을 달려 내몽골 어느 자그마한 진에 이르렀다. (혹시 여기에도 젖소가 있잖을가?) 그는 령감에 따라 무작정 생소한 역에서 내렸다. 해는 져서 어둑어둑한데 성호는 시내를 두루 살피다가 역에서 그리 멀지 않은 자그마한 려관에 잠자리를 잡았다. 그는 려관 한족주인 조발귀와 물었다. “여기 초원이 멉니까?” “멀잖소. 시내를 벗어나면 사처에 초원이요. 어디서 왔는지 초원구경을 왔소?” “예. 우리 장춘에선 초원을 볼래야 볼 수 없습니다.” “에이, 하필이면 늦가을에 왔소? 초원을 구경하려면 봄이나 여름에 와야지.” 성호는 그쯤 묻고나서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그는 침대에 누워 깍지손을 걸어 베고 천정을 쳐다보면서 한참 속궁리를 굴렸다.  그는 한참 후에야 려관방 문을 제대로 걸었는가 확인하고나서야 새우잠을 청했다. 이튿날 이른 아침에 성호는 려관방을 나섰다. 뚱뚱한 중년사나이 조발귀는 되창문으로 성호를 흘끔 내다보면서 물었다. “초원구경 가오?” “아니, 아침 먹고 돌아오겠습니다.” “오, 그래?” 조발귀는 인심을 쓰려고 했다. “우리 집에서 아침식사를 하오.” “감사합니다. 시내구경도 할 겸 나가 먹겠습니다.” 성호는 뚱뚱한 주인의 얼굴에 어째 살기가 서린감을 느껴 인차 자리를 뜨고 싶었다. 그는 려관방을 나서자 마차를 세 내가지고 교외로 쏜살같이 달려나갔다. “어디로 가려오?” “어디라 없이 초원 목장이면 됩니다. 목장 구경하러 왔습니다.” “쨔!” 마차 주인은 연신 말채찍을 쨩쨩 날렸다. “이런 말은 여기서 얼마나 합니까?” 성호는 마차 주인에게 넌지시 말값을 물어보았다. “오~ 한 1천 5백원쯤 하오.” “오-” 성호는 저도 몰래 감탄이 나갔다. 고향에서는 이런 말이면 3천원이나 4천원은 했다. 심지어 좋은 말 한필이면 만원씩 하는 어지간한 자동차와도 바꾼다는 말이 돌 정도였다. 마차를 타고 얼마나 달렸을가. 이윽고 누렇게 번져간 무연한 초원이 펼쳐졌다. 초원에는 양떼가 꽃구름송이들처럼 흐르고 말타고 양떼를 모는 운두라바한의 름름한 모습도 보였다. 성호는 양떼에 관심이 전혀 없었다. “소나 말을 사양을 하는 목장은 없습니까?” “뭐, 소 사려고 그러오?” “아니, 난 양띠여서 양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왜?’ 마차 주인은 마차를 몰면서 이상하다는 눈길을 보냈다. “양을 잡는 걸 련상하면 불쌍해서 보기조차 안쓰럽습니다.” “진짜 양처럼 착한 사람이구만.” 마차 주인은 채찍을 날래게 후려쳤다. 쨩! 쨩! 또 한식경이나 달리자 무연한 누런 초원에 하얀 목화송이 같은 양떼에 이어 젖소떼와 말떼가 나타났다. 사납게 달리는 말떼는 똑마치 노호하며 덮쳐오는 황하의 물결처럼 감때사나왔다. “됐습니다. 수고했습니다.” 성호는 용돈을 넣은 호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마차세를 주었다. “혹시 돌아갈 때 마차가 필요하지 않겠는지? 련계하게나.” 마차 주인은 전화번호까지 적어주었다. “예. 알았습니다.” 마차가 떠나가자 성호는 말을 타고 말떼와 젖소떼를 모는 운두라바한한테 다가갔다. 항아리 같은 젖통을 디룽디룽 단 채 풀을 뜯어먹는 젖소떼 속에는 황소도 수태 섞여 유유히 흘러가고 있었다. 말을 탄 운두라바한은 낯선 성호의 아래우를 유심히 훑어보았다. “여보시오. 젖소를 팔지 않겠습니까?” 그제야 운두라바한은 바위돌처럼 굳어졌던 얼굴 근육을 느슨히 풀면서 말에서 훌쩍 뛰여내렸다. “몇마리나 사겠소?” “값을 보고 흥정합시다.” 운두라바한은 초원의 바람에 꺼슬꺼슬한 낯에 활기를 띄였다. “한마리에 한 천원이야 받아야지.” “아니, 왜 그리 비싸오? 한 7백원이면 사겠는데.” 운두라바한은 성호를 힐끔 곁눈질하였다. (세상 물정은 좀 아는군.) 그는 먼 초원의 하늘을 쳐다보면서 입을 뗐다. “몇마리 사겠소?” “한 세마리.” 그들은 한어로 통화했다. “8백원에 사가오.” 한마리에 2천원에 판다면 운비와 로비를 떼고도 한 천원은 떨어질 것 같았다. 그래도 속내와는 달리 값을 깎아내렸다. “7백원에 파오.” “고까짓 세마리를 사면서 남의 소값을 자꾸 깎겠소? 어떻게 키운 소라고 그러오?” 성호는 기어이 고집했다. “7백원에 팔면 소와 말도 더 사겠소.” 운두라바한은 반색하면서도 성호을 믿지 않았다. “어디서 왔는지 모르겠소만 소와 말을 어떻게 가져가려고 그러오?” “장춘 교외에 있소. 기차에 부치면 얼마든지 가져갈 수 있소.” “그래?’ 운두라바한은 성호를 믿기 시작했다. “말과 황소는 몇마리 사겠소?” 성호는 한술 더 떴다. “소와 말을 기차역까지 실어다줄 수 있소?” “내겐 자동차 없소. 하필 차에 실을 필요있소? 소와 말을 기차역까지 몰고 가면 되겠는데.” 성호는 머리를 끄덕였다. 그는 운두라바한과 흥정해 황소 20마리, 젖소 3마리 말 2필을 사기로 했다. “이제 역에 가서 운비를  알아보고 오겠소.” “실언하지 마오.” 성호가 머리를 돌려 떠나려고 할 때였다. “가만!” 운두라바한이 불러세웠다. “역까진 한 150리나 되오. 내 아들과 함께 말을 타고 가오.” “난 말을 탈줄 모르오.” “내 아들이 탄 말에 앉아 가오.” 운두라바한은 옆구리에서 소뿔로 만든 나팔을 꺼내들더니 “뚜-” 하고 길게 불었다. 저쪽 누런 초원에서 웬 청년이 말을 타고 뽀얀 먼지를 일구면서 쏜살같이 달려왔다. 이윽고 성호는 운두라바한의 아들과 함께 말을 타고 쏜살같이 역으로 달려갔다. 그가 운두라바한의 아들과 함께 말을 타고 초원으로 돌아왔을 때는 점심때 거의 되였다. 그는 돌아올 때에는 말을 손수 타고 운두라바한을 뒤에 태우웠다. 말타기를 미리 익혀두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점심이나 먹고 소를 몰고 가오.” 운두라바한은 사람좋게 웃으면서 성호를 몽골포로 인도했다. 성호가 둘러보니 진짜 고향에서는 볼 수 없는 풍경이였다. 젖내가 진한 몽골포 안에 항아리에 하얀 우유가 불렁불렁 끓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성호가 돌아보니 문께로 이쁜 몽골처녀가 생글방글 웃음꽃을 피우며 들어섰다. 운두라바한이 소개했다. “우란호트대학을 다니는 딸 쑤싼나요. 쑤싼나라는 몽골말은 중국어로는 목란꽃이라는 뜻이오.” 그는 쑤싼나한테 돌아섰다. “얘, 장백산 기슭에서 온 조선족청년이야.” “리성호라고 부르오.” “예- 전 조선족청년을 아주 좋아해요. 언제 장백산을 구경했으면 좋겠는데요.” 성호가 손을 내밀었다. “기회가 있으면 우리 고장에 오면 장백산구경을 시켜주지.” 그녀는 성호의 손을 잡고 생글 웃었다.  “예~ 많이 도와주세요.”  그녀는 따뜻한 쑤유차를 손수 호로박에 부어 성호한테 드렸다. “우리 쑤유차는 몸에 좋아요. 자, 어서 마셔요.” 그녀는 노래를 부르듯이 종알거렸다. “우리 고장에 여름에 오면요. 푸르른 초원에 매가 날아예고 양떼와 소떼, 말떼가 구름송이처럼 흘러 진짜 장관이죠.” “난 소를 사려고 왔소.” 성호의 말에 쑤싼나는 혀를 한발이나 내둘렀다. “아니, 소를 사려고 여기까지 왔단 말인가요?” 성호는 대답 대신 머리를 끄덕였다. 운두라바한의 아내는 그새 나무대로 우유를 절러덩절러덩 젓더니 작은 대야에 하얀 우유를 퍼왔다. 밥상에는 삶은 양고기와 소고기가 무두룩이 쌓여 있었다. “자, 드오. 초원이라 장춘 시내와는 비길 수 없이 밥상이 스산하오.” 운두라바한은 호로박으로 자기 술잔에 술을 권했다. “먼 길을 가야기에 술은 그만두기요.” “한잔이야 들어야 하지.” 성호는 호의를 거절할 수 없어 한잔 들고 양고기와 밥을 게 걸스레 입에 퍼넣었다. 점심숟가락을 놓기 바쁘게 성호는 허리춤에 띠였던 돈따발을 꺼내 1만 3천원을 세여 운두라바한의 손에 건네주었다. 운두라바한은 식지에 침을 퉤퉤 뱉어서 두툼한 돈을 세면서 헤벌쭉거렸다. “하하하. 오늘 하늘에서 귀인이 나타나서 앉은 자리에서 만원 돈을 벌었군.” 성호는 바깥에 나가 자기가 산 소와 말의 귀에 집게로 구멍을 내 표적을 냈다. 그의 깐깐한 솜씨에 운두라바한은 못내 놀랐다. “테무치야, 저 소와 말을 역까지 몰아다줘라.” “예.” 성호는 아주 순조롭게 소와 말을 사가지고 귀로에 올랐다. 운두라바한 운두라바한은 말을 타고 한 십여리까지 따라오면서 바래였다. “이 후에 소와 말을 사러 또 오오.” “이번에 잘 되면 자주 오겠습니다.” 그들은 오랜 친구처럼 서로 포옹하고나서 헤여졌다. 성호가 운두라바한의 아들과 함께 가을 모래바람이 휘몰아 불어치는 누런 초원을 벗어나 어둑어둑한 황혼무렵에야 교외에서 그리 멀지 않은 산기슭 굽인돌이길에 들어섰다. 그때였다. 난데없는 괴한들이 말을 타고 쏜살같이 덮쳐왔다. “서라! 소와 말을 두고 가면 살려준다.” 성호는 품 속에서 비수를 뽑아들 새도 없었다. 쨩! 채찍소리와 함께 비수를 뽑으려던 성호의 손이 길다란 채찍에 휘감겼다. 성호는 채찍에 휘감긴 손을 홱 나꿔챘다. 채찍질한 놈이나 성호나 다 말잔등에서 퉁 떨어졌다. 쨩! 다른 놈이 채찍을 휘둘렀다. 순간 성호는 몸을 움츠리면서 날아드는 채찍을 피했다. 그는 팔을 뻗쳐 날아드는 채찍꼬리를 잡아챘다. 평소에 7절채찍과 3절곤봉을 휘두른 덕을 톡톡히 보았다. 테무치도 강도들한테 채찍을 날렸다. 쨩! 두번째 놈은 성호와 주인집 아들의 련합진공에 저만치 도망쳤다. 쨩! 쨩! 쨩! 채찍이 련속 날아와 성호의 면상과 손목을 후려갈겼다. 어찌나 날랜 채찍질인지 성호는 미처 피할새도 없었다. 테무치는 상서롭지 못한 것을 보고 말머리를 돌려 도망치는 것이 아니겠는가! 쨩! 채찍이 날아가 테무치의 머리를 후려갈겼다. “앗!” 모자가 땅바닥에 떨어졌다. 테무치는 그제야 정신이 펄쩍 들었다. 그는 몸을 날려 오른쪽 말배에 딱 들어붙더니 먼지를 새뽀얗게 일구면서 허겁지겁 도망쳐버렸다. 말을 탄 놈들과 싸워본 적이 없어 불리했다. 성호는 더 싸우지도 못하고 대뜸 말잔등에 뛰여올라 도망쳤다. 휙- 갑자기 뒤에서 올가미가 날아와 성호의 목을 걸었다. 진짜 이런 올가미에 당해본 적이 없었다. 성호는 올가미에 걸려 말잔등에서 퉁 떨어졌다. 강도들은 말 뒤에 성호를 달아매 줄줄 끌고 달려갔다. 성호는 왼손으로 목에 걸린 올가미를 틀어쥐고 오른손으로 각반에 감춘 비수를 뽑으려고 했지만 헛수고였다. “개자식! 죽어봐!” 저쪽에 쓰러졌던 두 놈도 일어나 말을 타고 따라오더니 성호에게 겨끔내기로 채찍을 안겼다. 강도들은 성호를 산기슭의 말라죽은 고목에 묶어놓았다. 성호는 조여드는 목을 추슬리며 한어로 겨우 한마디 흘렸다. “아이고, 여기서 죽으면 집에 있는 로모는 어찐단 말인가?” 강도들은 몽골말로 뭐라고 저희들끼리 지껄였다. 그중 한 놈이 성호의 목에 건 올가미는 풀어주고 두 팔을 뒤로 해 꽁꽁 묶어놓았다. 성호가 채찍을 나꿔채는 바람에 말에서 떨어졌던 놈이 다가왔다. 그 놈은  돌부리에 찔려 상처자국이 난 낯을 매만지면서 꽥꽥 소리 질렀다. “저 놈을 살려주면 우리 잡혀. 아예 화근을 없애버리자.” 다른 두 놈은 소와 말을 몰고 가면서 한어로 빈정거렸다. “우리 손을 더럽힐 필요없어. 승냥이 물어가지 않으리.” “허허허. 말과 소를 몰아가면 됐지. 살인죄까지 질 필요없지.” “하하하.” 그 놈들이 떠나가는 뒤에는 공포의 어둠이 점점 두텁게 깔리고 있었다. 어디라 없이 빈 공간이 없이 살기가 차넘쳤다. 어디선가 굶주린 이리떼들의 무서운 울부짖음소리가 울려왔다. 그 공포의 울부짖음소리가 성호의 황홀한 꿈을 산산히 까부시고 있었다. 어둠과 공포가 몰려오는 살벌한 초원의 고목에 묶인 성호한테 절망의 올가미가  몰려와 꽉 옥죄고 있었다. 성호가 절망의 심연에서 헤여나올 수 있을가? 죽음의 공포가 살벌하는 허허벌판은 아무 대답도 없다. 멍든 하늘은 저승사자마냥 랭소하고 있다.
163    대하소설 진달래 소야곡(18) 댓글:  조회:1401  추천:1  2018-06-26
                         34. 마수에 걸린 아가씨들 승호는 신변에 범송을 데려왔지만 여전히 공포의 심연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다.  낯선 사나이 몇이 다가와도 저승사자나 덮쳐오는 것처럼 공포에 온몸이 오싹해났다. 어느 하루, 그는 복도에서 서성거리다가 보위과 패쪽을 쳐다보고 엉뚱한 궁리를 했다. (보위과장을 했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권총을 척 차고 다니면 어느 놈이 감히  건드리겠는가.) 그는 인차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보위과 조과장을 잘 친해 보호받는게 상책이야.) 승호는 백화상점의 상품구입은 몽땅 범송에게 맡겨놓고 조과장한테 은밀히 접근하기 시작했다. 조과장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 것조차 눈치채지 못하고 승호가 청하자 술을 마시러 따라나섰다. 조흥수 과장은 특종부대 패장출신으로서 제대한 후 외지에서 파출소 소장까지 하다가 백화상점 보위과 과장으로 전근해왔다. 그는 무예도 뛰여나고 사건해명에도 신통력이 있어 시공안국과 백화상점 안수련 총경리의 신임을 받았다. 그는 교제능력도 강해 부모와 동생들까지 호적을 몽땅 시내에 올렸다. 그는  술친구가 어찌나 많은지 로임만으로는 엄청 모자랐다. 그리하여 직업도 없는 안해를 보고 음식점을 차리게 했다. 그런데 조과장이 항상 술친구들을 자기 집 음식점에 데리고 와서 공짜술을 마셨기에 음식점은 결손딱지가 처 들어붙게 되였다. 조과장이 손님만 데리고 오면 안해는 “또 공짜 손님을 데리고 왔는가?” 하고  바가지를 긁었다. 손님들도 조과장 안해의 바가지를 긁는 소리가 듣기 싫어 발길을 돌렸다. 이날에는 승호가 청했다. 그러나 조흥수는 이상 처신을 하느라고 순희네  풍성불고기점으로 갔다. 불고기점으로 들어서면서 조과장은 전화로 아가씨들을 불렀다. “선희야, 해연을 데리고 당장 풍성불고기점으로 오라. 여기 돈 많은 신사 한 분이   기다려.” 승호는 조흥수와 처음 앉은 술자리인지라 조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과장, 아가씨들은 그만두기요.” “괜찮아. 술좌석엔 사촌누나라도 마주 앉아야 술맛 나지. 헤헤헤.” 조흥수는 눈을 거슴츠레 뜨고 징글스런 표정을 지었다. 승호는 별 수 없었다. 이윽해 상다리 부러지게 주안상이 들어오고 아가씨 둘도 들어서서 흥이  도도해졌다. 순희는 공짜로 양고기를 두접시나 들여왔다. “여러분, 우리 불고기점을 찾아와주셔서 고맙습니다. 맛있게 드십시오.” “고맙소. 우린 단골 손님이 아니고 뭐요?” 조과장이 우쭐 일어나 순희의 보름달 같은 얼굴에 뽀뽀까지 뻑뻑 했다. “아, 징글스러워요. 쯧쯧쯧.” 순희는 상을 찡그리며 볼에 볼우물을 옴폭 파기까지 하며 아닌 보살을 떨었다. 저쪽에서 숯불을 들고 오던 철주는 흘끔 도적질해보고서도 못 본 척했다. 조흥수는 승호에게 아가씨들을 일일이 소개했다. “서로 인사하지. 백화청사 구입과 과장 리승호요.” “어머나, 구입과장이면 돈 많겠다. 전 장선희라고 불러요. 후에도 종종 불러주세요.” 걀죽하게 생긴 녀자가 넉가래 같은 승호의 손에 가늘고 긴 손을 살짝 얹었다가 내려 놓으면서 종알거렸다. “해연이예요.” 승호는 해연을 별로 대학교 식당에서 본 것 같았다. 그러나 조과장 옆에 앉은 그녀를 모르는 척했다. “선희, 오늘 리과장을 잘 모셔라.” “어마나, 이런 행운 어디 있어요?” 선희는 아양을 떨며 승호 곁에 바싹 다가앉았다. “오빠, 잘 모셔드릴게요.” 해연은 안경알을 춰올리면서 조과장의 곁에 다가앉았다. 조흥수는 아가씨들 앞에서 어깨가 으쓱해졌다. “술상에서 예쁜 아가씨들과 마주 앉으니 기분이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소.” 그는 승호를 흘끔 건너다보면서 “리과장, 오늘 내 한턱 내는 걸로 하고 질탕하게 놀아보기요.” 하고 술잔에 술을 찰찰 넘치게 부었다. “자, 우리 만남을 위해 한잔 들기요.” “오늘 술맛 좋아요.” “호호호.” 아가씨들은 교태를 부리면서 술잔을 홀짝 기울였다. 승호도 술잔에 돌아가면서 술을 붓더니 “자, 오늘 아가씨들과의 아름다운 추억을 위해 한잔 들기요.” 하고 한잔 권했다. “와~ 미남자, 말도 멋지군요.” 선희는 승호를 하늘높이 건뜩 춰올렸다. 선희가 오쫄 일어나 승호 잔으로부터 시작해 돌아가면서 술을 따랐다. “오늘 멋진 리과장을 만났는데요. 별스레 가슴이 설레이는데요. 기분 좋게 한잔 드세요.” “야~ 리과장, 선희 격정에 찬 말만 들어도 술맛나겠다.” 조과장은 애교 많은 선희를 승호 옆에 앉힌 것이 입 안의 비게덩이를 놓친 것처럼 아까웠다. “선희, 하나 제의하지.” “뭔데요?” 선희는 승호의 잔과 마주치고나서 앵두입가에 술잔을 가져가려다가 멈추며 승호를 쳐다보았다. “리과장과 교배주를 마시면 어때? “호호호.” 선희는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으며 승호를 핼끔 쳐다보았다. 뒤이어 그녀는 “좋아요.” 하고 술잔을 들더니 승호한테 다가앉았다. 승호는 짐짓 체면을 차리면서 씨무룩이 웃기만 했다. “보기와는 달리 꽤나 수줍네요. 자, 한번 해보죠.” 선희가 술잔을 든 손으로 승호의 잔등을 휘감아안을 때였다. 조과장이 능청을 떨었다. “건 좀 이른 것 같은데.”  “남이야 뭐 하든 관계하지 마세요.” 선희는 눈까지 질끔 해보였다. 눈치 빠른 승호는 제꺽 선희를 끌어안고 교배주를 마셨다. 별로 조과장이 미리 아가씨들과 짜고든 감이 들었다. 그들은 권커니 작커니 하면서 거나하게 마셨다. 조과장이 새 제의를 했다. “자, 이젠 나눠 앉아 마실가?” 선희가 빨갛게 달아오른 외씨얼굴까지 흔들어대면서 아양을 떨었다. “진작 그래야죠. 오늘 질탕하게 망가져보자요.” 승호는 안팎이 다르게 말렸다. “초면강산에 이러지 맙시다. 우리 넷이 한 자리에서 재미나게 마십시다.” 조흥수는 “사람이, 원, 시키는 서방질도 못하겠어?” 하고 두덜거리더니 해연을 데리고 다른 칸에 옮겨갔다. 그리하여 승호와 선희가 어지러운 원래 술상에 마주 앉게 됐다. 선희는 밀창을 드르륵 닫아버리고나서 담대하게도 승호 무릎에 달랑 올라앉았다. 그녀는 몸을 살며시 기대더니 승호의 얼굴에 얼굴을 살며시 가져다댔다. 순간 승호는 감전이나 된듯이 아래배로부터 찡 줄이 뻗치면서 온몸이 전률을 느꼈다. “아니, 이러지 마오. 초면강산에.” “오빠, 어째 제가 밉상이어서 싫어요?” “아니, 선희는 정말 예쁘오.” 승호는 선희를 무릎에서 슬쩍 내려놓으면서 술을 한잔 부어주었다. “자, 한잔 마시기요.” “리과장도 남잔가요?” 승호는 대답 대신 술잔을 들어 쭉 굽냈다. (야, 네깐 년이겠니? 난 숱한 처녀들을 잡아먹고 죄를 만난 병신이야.) 그는 선희 앞에서 루추한 자기 모습을 로출되는 것이 싫었다. 선희는 보아하니 놀아난 녀자였다. 그런 녀자는 승호가 병신이란 걸 첫눈에 알아볼 것이 아니겠는가. 승호는 개꼴망신당하기 싫어 애꿎은 술잔만 기울이면서 부글부글 사품치며 끓어번지는 정욕을 억지로 참고 또 참았다. 선희는 한숨을 호- 내쉬였다… 그날 승호와 선희는 끓어번지는 정욕을 술로 지져버리고 자리를 떴다. 아쉬움과 미련을 남기고 떠나는 술자리였지만 앞날이 궁금해 황홀하기만 했다. 그후 승호는 답례로 조과장을 청했다. 조과장이 앉은 술자리에는 꼭 아가씨들이 들어와 앉았다. 그것도 번마다 다른 아가씨들이였다. 조과장은 번마다 통이 크게 아가씨들한테 팁으로 몇장씩 줘보냈다. 아가씨들은 그 놈 팁 때문에 서로 경쟁할 지경으로 조과장을 졸졸 따라 다니면서 놀아댔다. 조과장은 숱한 돈을 팔았지만 승호 같은 아우를 얻어 속으로 흐뭇했다. 승호도  조과장의 보호를 받을 수 있을 것 같아 더 좋았다. 진짜 매형 좋고 처남 좋고 다 좋은 판이다. (조과장이 어데서 저리 많은 돈이 생겨서 저렇게 물 쓰듯 할가?) 승호는 꽤나 궁금했다. 사실 조흥수는 맨 보위과장을 해서야 어디서 그리 많은 돈이 생기겠는가. 그는 누구도 모르게 엉큼하게 돈을 얻어내는 잔재간을 피우고 있었다. 백화상점 출납 춘란은 예쁘게 생긴 처녀였다. 그런데 조과장은 우연하게 춘란의  치명적인 약점을 발견했다. 어느 하루, 조흥수는 안총경리가 불러서 사무실에 갔다. 안총경리는 춘란을 내보내고 단도직입으로 말했다. “춘란이 글쎄 돈가방을 도적맞혔다오.” 조과장은 눈이 휘둥그래졌다.  “예?! 어떻게 돼?” 안수련 총경리는 억이 막혀 횡설수설했다.  “아, 글쎄 돈 만원이나 넣은 돈가방을 출납원실에 뒀댔는데 도적맞혔다오.  백화청사에 어쩜 이런 일이 생길 수 있단 말이요? 춘란인 뭐요? 출납이라는게 돈가방을 어떻게 그렇게 건사한단 말이요?” 조흥수 과장은 속으로 웃음주머니 흔들거렸다. (춘란아, 이 년, 끝내 내 마수에 걸렸구나. 으흠.) 그는 속내를 드러내지 않으려고 짐짓 쏘파에 물앉아 안경알을 벗어 닦으면서 빈대눈깔을 데굴데굴 굴렸다. 80년대초에 돈 만원이면 작은 돈이 아니였다. 일반 직원의 월로임은 극상해야 40여원 밖에 안됐고 년말 상금도 극상해야 200원이나 300원 밖에 안됐다. (그 년, 엄청난 돈가방을 출납원실에 두고 화장실에 갔단 말인가? 아무리 영업대청 출납원실라고 해도 그렇지. 숱한 사람이 오가는 영업대청에서 잃어버릴 수 있단 말인가?) 한참 후 조흥수는 안경을 걸고나서 안수련 총경리 굳어버린 얼굴을 쳐다보았다. “안총경리, 이 사건에 의문점이 많습니다.” 안수련은 조과장의 얼굴에서 답안을 찾으려는듯이 기대가 넘치는 눈길을 보냈다. “돈가방을 왜 보험궤에 넣지 않았답니까? 도대체 무슨 급한 일이 있어 돈가방을 영업대청 출납실에 두고 어델 갔답니까?” 안수련은 머리를 끄덕이면서 뭐라고 필로 노트에 적어넣었다. “춘란은 재무과에 인차 가져가려고 그랬다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쩜…” 조과장은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꿀꺽 삼켰다. 총경리 앞에서 언제나 여지를 두군 했다. 안수련 총경리는 안경알 밑으로 조흥수를 날카롭게 쏘아보면서 지시했다. “형사수사대대 지원을 청할가요?” 안총경리 제의에 조흥수는 황급히 손사래를 저었다. “먼저 소문 내지 말고 내부수사부터 합시다.” “알았소.” 안총경리는 백화상점 위신이 추락될가봐 근심하고 있었다. 조흥수는 먼저 과원들에게 수사임무를 주어 몽땅 내보내고 춘란을 보위과에 불렀다. 춘란은 보위과에 들어오면서 안경알 너머 쏘아보는 조과장의 카리스마 넘치는 눈길에 머리를 푹 숙이고 말았다. 조과장은 한참 춘란을 쏘아보기만 했다. 춘란은 몸둘바를 몰라하면서 빨간 등산복깃을 만지작거렸다. 조과장은 쇠덩이 구으는 듯한 목소리로 질책했다. “어쩜 돈가방을 재무과에 가져가지도 않고 화장실로 간단 말이요? 엉? 어쩜 그렇게 무책임하오?!” 춘란은 눈물을 줄줄 흘렸다. “글쎄 말이예요. 정말 후회막급인데요.” “평소에도 그랬소?” “아닌데요. 보통 영업이 끝나면 퇴근전에 재회과에 가져갔어요. 그런데 그날 오전에 벌써 영업액이 만원이 넘어서…” “어떤 가방에 넣었소?” “전 항상 토색가방에 넣어서 재무과에 가져갔지요.” “보위과에 알려야지. 현금운송 원칙도 다 까먹었어?! 응?!” 출란은 엉엉 대성통곡쳤다. 조과장은 사무상을 꽝 쳤다. “이실직고하지 못해?!” “왜 이래요? 제가 도적놈인가요? 보위과에서 잘했으면 백화청사 안에서 절도사건이 다 생겼겠어요?” 적반하장이라고 춘란이 되물고 늘어질줄은 몰랐다. (아니, 이년이 이게.) 조과장은 춘란의 돌변한 태도에는 개의치도 않고 계속 닦아세웠다. “아직도 자기 죄를 뉘우치지 못하는구먼. 돈 만원이면 몇십년 로임이라는 건 알겠지? 출납원 자리를 내놓겠소? 감옥에 가 로동교양이라도 하고 싶소?” 춘란은 눈물을 닦으면서 조과장을 쳐다보았다. “조과장, 좀 봐주세요. 고의로 그런 것도 아닌데요. 어떻게 도적을 잡아주세요. 제가 때벗이를 하는 길은 그거 밖에 없어요.” 조과장의 어조는 좀 부드러워졌다. “춘란이, 절 잡아 뭘 하겠소?” 조흥수는 얼리고 닥치고 해서 춘란을 내보내고 뭔가 잡히는 것이 있었다. “뭐? 좀 봐달라고? 이년, 뭔가 있구나.” 조흥수는 수사경험이 있는, 꽤나 로련한 보위과장이였다. 그는 사무실에서 뚜벅뚜벅 왔다갔다 거닐면서 궁리했다. 그의 뇌리에서는 번개가 치고 무성의 우뢰가 울부짖으면서 무서운 령감이 피뜩피뜩 떠올랐다. 조과장은 퇴근 때 집에서 빈들거리는 남동생을 시켜 춘란을 스리슬쩍 미행하라고 했다. 이튿날 사건해명에 기적이 일어났다. 조과장은 퇴근 전에 안총경리를 속이고 암암리에 공안국에 가서 인맥을 통해 은행구좌 춰적소개신을 떼가지고 춘란의 은행구좌를 수사했다. 그런데 은행 해당 책임자는 춘란의 은행구좌에 1500원이 새로 들어온 것을 밝혀냈다. 저금시간도 사건이 발생한지 반시간도 되나마나 한, 딱 오전 11시 15분이였다. “네년이 어디로 도망쳐?” 조흥수는 춘란의 꼬리를 꽉 밟았다. (불여우 같은 년, 꼬리를 숨길 수 있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나머지 돈은 어쨌지?) 그는 혹시 춘란이 집에 감춰두지 않았을가 의심했다. 그는 재무과장을 시켜 춘란을 재무과에 불러들이게 했다. 조흥수는 남동생을 불러 춘란의 집을 알아낸 후 골목에서 보초를 서게 하고 혼자 춘란의 세집에 접근했다. 그는 사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자물쇠를 부시고 세집에 들어갔다. 궤짝이고 식탁이고 지어 이불 속까지 활딱 번졌는데 일전한푼도  없었다. 그는 량미간을 찌프리며 궁리하다가 부엌의 장판에 눈길이 갔다. (혹시 부엌에 숨겨두지 않았을가?) 조흥수는 부엌의 장판널을 들고 뛰여내려갔다. 그는 부뚜막을 두루 살피다가 석탄무지에 눈길이 갔다. 어둑시그레한 석탄무지에 별로 무슨 끈이 보일락말락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라이터를 켜들고 보니 토색가방 끈이 보였다. 훌 쥐여당기니 확실히 토색가방이 묻어나왔다. 조흥수는 미칠듯이 기뻤다. 그는 석탄먼지를 털새도 없이 토색가방 쟈크를 쭉 열어제꼈다. 가방 안에 두툼한 지페묶음이 나왔다. 몽땅 5원짜리였다. 세여보니 딱 8,500원이였다. “하하하. 엉큼한 도적년! 네년이 아무리 손오공처럼 육갑을 해도 내 마수에서 벗어나지 못해!” 조과장은 돈이 무둑이 든 토색가방을 그대로 들고 엉거주춤 일어났다. 그는 세집 문을 살며시 열고 안경알을 춰슬리고 바깥동정을 살폈다. 작은 골목에는 쥐새끼도 드나들지 않았다. 그는 도적고양이처럼 가방을 들고 세집문을 나서서 사위를 흘끔거리면서 스리슬쩍 도망쳤다. 그는 토색가방이 날아나기라도 할가봐 옆구리에 끼고 속궁리를 베아링처럼 굴렸다. “춘란은 분명 먼저 은행에 저금한 후 이 돈가방을 세집에 치워놓고 안총경리한테 허위사건보고를 한 거야.” 묵직한 돈가방을 안은 그는 공과 사 갈림길에서 격렬한 갈등을 겪고 있었다. “이 돈을 조직에 바치면 극상해야 사건을 해명했다고 상금 몇백원 주겠지. 흥, 아예 이 돈을 통채로 챙겨넣고 춘란의 꼬리를 계속 단단히 밟고 기름을 짜내야지.” 조과장은 제딴에는 일석이조의 묘수를 둔 것처럼 득의양양해했다. 그러나 기실 역은 새 방아간을 지나가듯이 끝내 감옥으로 향한 기로에 한발 들여놓고야 말았다. 그는 돈가방을 끼고 곧추 자기 집에 가서 사랑칸 문 자물쇠를 열고 들어갔다. 여름이여서 김치움에는 드나드는 사람도 없었다. 그는 어둑시그레한 김치움에 스리슬쩍 들어가 김치독 옆의 흙을 파고 파묻어놓았다. 뒤이어 그는 김치움에서 나와 덮개를 덮고 자물쇠까지 잠가놓고서도 시름이 놓이지 않아 그 우에 떡돌까지 들어다 짓눌러놓았다. 모든 것이 빈틈 없다고 느낀 그는 득의양양해 어깨를 으쓱하더니 사랑 문 밖으로 나갔다. 엉큼한 조흥수는 돈을 집에 가져다 궤짝에 숨겨 놓은 후 백화상점에 돌아갔다. 그는 보위과가 빈 틈을 타 춘란을 불러들였다. 춘란은 조과장의 교활한 눈길을 피하면서 머리를 수깃하고 쏘파에 옹송그리고 앉았다. 조흥수는 포로된 사냥물의 걀죽한 얼굴을 쏘아보면서 엉큼한 궁리를 구을렸다. 납덩이 같은 침묵이 지루하게 흘렀다. 한참 후에야 육중한 조과장은 엉거주춤 일어나더니 어슬렁어슬렁 춘란의 옆으로 다가와 앉았다. 그는 비수같은 말로 나긋나긋한 춘란의 빈틈을 푹 찔렀다. “어쩜 그렇게 엉큼하오?” 춘란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조과장을 쳐다보았다. “무슨 소린가요?” “허허허. 아직도 시치미를 따겠어? 저금통장에 무슨 돈이 그렇게 많아? 어데서 난 돈인가?” 춘란은 뻔뻔스럽게 나왔다. “상금을 저금했는데요.” 조과장은 춘란의 어깨에 손을 얹으면서 한술 더 떴다. “춘란이, 상금이 1천 5백원이나 돼?” 춘란은 조과장이 어깨에 올린 팔을 탁 쳐버릴 맥조차 없었다. “어디서 난 돈인가?” 춘란은 머리를 숙였다가 안간힘을 다해 천천히 쳐들었다. “딸이 세집살이를 한다고 우리 부모가 집 사라고 준 건데요. 백화상점 총경리들과 재무일군들의 상금이 얼마나 많은지 알아요?” “꽤나 태연자약하군. 아무렴 총경리들이 재무과와 짜고들어 무짐작으로 상금을 나눠 먹었어?” 춘란은 속으로 조과장을 욕했다. (개뿔도 모르는 놈새끼,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기나 아니?) 조흥수는 “세집 석탄무지에 파묻은 돈가방은 뭐냐?!” 하고 고함치고 싶었다. 그러나 용케도 목구멍까지 치미는 말을 꿀꺽 삼켰다. “우린 네 죄행을 몽땅 장악했어. 감옥에 보내줄가?” 춘란은 아무 말도 못하고 머리를 툭 떨어뜨리였다. 드디여 그녀는 머리를 천천히 들더니 눈물이 글썽한 눈으로 조과장을 쳐다보았다. “조과장, 제발 살려주세요.” 그녀의 목소리는 가련하게 떨리면서도 높았다. 그때 문을 똑똑똑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쉿-“ 조과장은 입가에 식지를 대더니 우쭐 일어나 문께로 다가갔다. “누구요?” “승호요.” “오, 그래?” 조과장은 바깥으로 나가 뭐라고 쑤근거리더니 되들어와 문까지 절컥 잠궜다. 그는 춘란의 곁에 돌아와 앉더니 언포를 놓았다. “난 지독한 저승사자야. 널 지옥에 보낼 수도 있고 천당에 보낼 수도 있어. 어쩌면 좋겠느냐?” 춘란은 징글스런 조과장의 눈총을 맞으면서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흐흐흐흐.” 순간 조과장은 사냥총에 맞아 푹 꼬꾸라지면서 피를 흘리는 사슴이나 본듯이 쾌감을 느꼈다. “조과장, 제발 살려주세요.” “널 놔주고 보위 과장 내놓으란 말이냐? 뭘 보고 너 대신 내 지옥에 들어가?” 춘란은 손으로 걀죽한 볼에 흐르는 눈물을 닦더니 머리를 들었다. “조과장이 시키는대로 다 할게요.” 조과장은 선수를 쳤다. “그래? 나머지 돈 8,500원은 어디다 숨겼어?” “세집 석탄무지에 파묻어놓았어요.” “오~ 그래?” 능구렁이 같은 조과장은 능청을 떨었다. “그 돈 어쩌면 좋아?” “조과장이 가지세요.” 엉큼한 조과장은 안팎이 다르게 나왔다. “이년, 이 조과장을 어떻게 보고 그래?” “?!” 조흥수는 사무상에 돌아가 앉더니 서랍 속의 미형록음기를 쳐들어보였다. 춘란은 혀를 홀랑 내밀다가 속으로 욕설을 퍼부었다. (음흉한 놈! 네놈은 제 명에 죽지 못할 거야.) 춘란의 속내를 꿰뚫어보았는지 조과장은 좀 더 무섭게 나왔다. “네 절도증거를 이 서랍에 보관해두마. 고까짓 돈으로 내 입을 틀어막으려고? 쳇, 어림도 없어!” “그럼 어쩜 좋아요?” 능청스런 조과장은 어슬렁어슬렁 춘란한테 다가와 귀속말을 했다. “절도해간 돈은 네 손으로 가져다 상점에 바쳐라. 넌 정말 아름다운 처녀야. 어느 사내도 홀딱 반해 미칠 미녀야.” 그 말귀를 알아듣지 못할 리 없는 춘란은 온몸을 바들바들 떨려 흐느껴 울었다. 조과장은 춘란의 걀죽한 볼을 살살 매만지면서 색마의 진면모를 드러냈다. “강요하지 않아. 싫으면 그만 둬. 지옥을 자청하면 별 수 없지.” 이윽고 춘란은 눈물을 닦고 머리를 쳐들었다. “조과장, 전 숫처녀예요. 좀 봐주세요. 술 마실 용돈을 푼푼히 드릴테니까요. 돈만 있으면 어데 가서 아가씨를 데리고 놀지 못하겠어요.” “닥쳐!” 조과장은 사무상을 탕 쳤다. “감히 나와 흥정해?” 그는 춘란의 곁에 다가와 나직이 한마디 뱉었다. “내 입만 터지면 넌 당장 지옥에 들어가야 해. 만원이면 총살받을 수도 있어.  목이 떨어진 숫처녀를 지키고 싶은가? 아니면 이 조과장의 아가씨로 되겠는가? 둘 중 마음대로 해.” 조과장은 손을 내흔들었다. “나가!” 춘란은 간신히 일어나 나가려다가 주춤 멈춰서 독살이 비친 눈길로 조과장을 쏘아보았다. “조과장, 약속을 어기는 날엔 황천에 가서라도 당신 그걸 물어뜯어놓을테요.” “모든 건 너한테 달렸어.” “고려할 시간을 주세요.” 조과장은 대답 대신 나가라고 손을 내저었다. 출란은 바깥에 나오면서 속으로 욕했다. (색마 같은 놈, 네 놈은 제 명에 죽지 못할 거야.) 그녀는 억지로 마음을 진정시키고나서 황급히 택시를 잡아타고 세집으로 쏜살같이 달려갔다. 세집 앞에 달려가 부서진 자물쇠꼬리를 보고 기절초풍하게 놀랐다. “아니, 이게 뭐야?!” 그녀가 집 안에 들어가보니 궤짝문은 열려 있고 옷이고 이불이고 온 구들에 지저분하게 널려 있었다. 그녀는 황급히 장판널을 들고 뛰여내려가 석탄무지를 손으로 뒤져보았다. 그러나 토색가방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이걸 어쩌나?) 그녀는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원래 그 돈을 조과장한테 주고 몸을 빼려고 했던 것이다. 그녀의 눈 앞에는 징글스런 조흥수 과장 낯빤대기가 떠올랐다. 안경알 너머 징글스레 그녀의 몸을 노려보던 색마의 거슴츠레한 눈길이 삼삼거렸다. (그 놈 작간 아닐까?) 춘란은 석탄무지에 물앉아 석탄덩이를 마구 뿌리며 대성통곡쳤다. 그녀는 깜깜하고 아득한 수렁에 훌렁 끊임없이 빠져들어가는 감을 느꼈다.           35. “시인”과 녀제자의 로맨스 찌는 듯한 무더위가 휩쓸고 지나간 대지에 어느덧 시원한 가을바람이 선들선들 불어왔다. 가을 하늘은 구름 한점 없이 말끔히 밀어내고 높고 푸르른 가슴을 드러냈다. 이른 아침, 공원 수림에는 락엽이 돌랑돌랑 한여름의 아쉬움을 휘날리고 있었다. 승호는 공원에 산보하러 나갔다가 범송이 공원에서 웬 처녀와 장의자에 나란히 앉아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가 다가가는 것도 모르고 계속 도란도란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저 자식이, 다른 처녀애와? 선금과 련애할 새 없이 결혼하더니 딴 짓을 해?) 승호는 그대로 지나쳐버릴 수 없어 슬금슬금 다가갔다. 범송은 엉거주춤 일어나더니 어색하게 웃었다. “내 녀학생이야.” 범송은 황급히 일어나는 처녀애를 돌아보면서 인사시켰다. “예화, 내 처남이야.” “안녕하세요?” 예화는 해맑은 눈길로 승호를 보고 허리 굽혀 인사했다. “오. 그래? 이야기하오. 저기 산보하러 가겠네” 승호는 그쯤 하고 자리를 떴다. 예화는 범송이 천수해중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을 때 늘 작문을 써가지고 정치교원인 범송을 찾아다녔다. 예화를 비롯한 녀학생들은 범송이 훌쩍 솟구치며 배구를 내리깎는 날렵한 모습에 홀딱 반해버렸다. “예화, 그래 신랑은 어데 있소?” 범송은 예화와 나누던 이야기를 계속 나누었다. “신랑?” 예화의 얼굴에 수심의 어두운 그림자가 흐르는 것을 보고 범송은 꼭 무슨 곡절이 있음을 엿보아냈다. 그때 예화가 오쫄 일어나 떠나려고 했다. “미안하오. 상처 건드리지 않았는지 모르겠소.” “다신 신랑 말 하지도 마세요. 일이 있어 가야겠어요.” 예화는 떠나가려다가 주춤 멈춰서더니 몸을 돌렸다. “최선생님, 후에 편할 때 련락드리겠는데요. 전화번호 줄래요?” “그래, 제 전화번호도 알려주오.” 범송은 둔덕 아래로 내려가는 비틀거리는 예화의 뒤모습을 보면서 도리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며칠 후, 범송이 사무실에 있는데 예화한테서 전화가 걸려왔다. 범송은 승호를 힐끔 곁눈질해보고 거짓말로 스리슬쩍 전화를 받았다. “양, 누나, 참 오랜만이구만요. 매형이랑 모두 잘 있소?” 그제야 시름놓였는지 승호는  과장실로 들어갔다. “최선생님, 저 예화예요.” “오, 알았소.” “선생님, 전화 받기 편해요?” 범송은 옆의 다른 과원들의 눈치를 슬쩍 곁눈질해보고 “양, 좀, 만나서 말하면 어떻소?” 하고 대답했다. “그래요. 그럼 어데서 만날가요?” “전번 그 자리에서.” “알았어요.” 범송은 전화를 놓기 바쁘게 바깥에 내려가 택시를 잡아타고 공원으로 달려갔다. 그는 예화를 만나자 줄느런히 펼쳐놓은 양산 밑에 마주 앉아 콜라를 한잔씩 놓고 시원한 가을바람을 쐬면서 청년들이 배구를 치는 것을 구경했다. 그때 웬 소녀애가 빨간 장미꽃 한송이를 그들의 앞에 내밀었다. 범송은 마주 바라보는 예화 눈치를 채고 제꺽 10원을 주고 빨간 장미꽃 두송이를 샀다. “뭘 그렇게 비싸게 주고 사요?” “랑만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꽃값을 묻지 않는 법이요.” 예화는 범송이 내미는 장미꽃을 받아 향긋한 꽃향기를 맡으면서 걀죽한 얼굴에 전에 없이 생기를 띄우는 것이였다. “선생님은 아직도 랑만적이군요.” 범송은 예화가 기분이 좀 돌아서는 것 같아 저으기 위안됐다. 그런데 저쪽 양산에서 승호가 혼자 앉아 콜라를 마시면서 그들을 살피고 있을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자식, 의심병이 도졌나? 항상 제 색시를 의심하더니 이젠 날 의심해? 자기  밑구멍이 쯘쯘하니 남을 자꾸 의심해? 신경병!) 범송은 더 앉아있을 재미가 없어 콜라를 홀짝 마셔버리고 예화를 데리고 자리를 떴다. 그들은 공원 맞은켠 조용한 골목에 자리잡은 다방으로 들어갔다.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음악이 잔잔히 흐르는 다방에서 범송은 희미한 불빛 아래 예화를 마주하고 앉아 커피를 마시면서 무거운 침묵을 깨뜨렸다. “예화, 지금 뭘 하오?” “자그마한 음식점을 차렸어요. 후에 청하죠.” “꼭 가지. 그간 무슨 일이 있었소?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 “예~ 최선생님, 관상 볼줄도 알아요?” “아니.” “예- 한 입으로 다 말하기 힘들어요. 사람의 팔자는 타고 난 건지 전 남자 복이 없는가 봐요.” 범송은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였다. 예화의 살아온 이야기를 들을 수록 마음이 무겁기만 했다… 대학에 가지 못한 예화는 서른살 파란 나이에 홀로 난 어머니가 불쌍하여 인물체격이 좋고 돈이 있는 총각에게 시집가서 어머니와 남동생을 경제상에서 돕고 싶었다. 그녀는 재학하여 대학에 가라는 어머니의 권유도 듣지 않고 스무살에 록화청을 차린 한 총각과 번개식결혼을 했다. 신랑은 첫인상에 성격이 씨원씨원한 것 같아 그녀의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시집을 가고보니 신랑에게는 큰소리를 친 것과는 달리 돈이 별로 없었다. 록화청에 날아드는 가랑잎 같은 돈을 번다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였다. 관중이 서넛 밖에 안되는 날밤에도 온 밤 비디오테프를 바꿔 돌려야 했다. 치고 박고 칼로 찌르는 무술영화에 울며 겨자먹기로 조금 색갈이 짙은 걸 섞어 돌려야 관중을 끌수 있었다. 그러나 경찰들이 두려워 그런 테이프는 감히 돌리지 못했다. 그래도 그들 부부는 법을 어기지 않고 량심을 속이지 않으며 정정당당하게 돈을 벌려고 모지름을 썼다. 무슨 돈을 번단 말인가? 신랑이 혼자 밤낮 록화청을 지킬 수 없어 낮에는 예화가 임신한 몸으로 무더위를 무릅쓰고 지켰다. “말이 길어졌군요.” 예화는 범송의 눈치를 살짝 보았다. “괜찮아.” 범송은 커피잔을 들어 후루룩 마셨다. 예화는 머리를 다소곳이 숙이고 뭔가 골똘히 생각하다가 범송을 마주 바라보면서 무겁게 뒤말을 이었다. “신랑은 어찌 그렇게 철면피할 수 있어요? 돈을 벌지 못해도 참고 살 수 있어요. 그런데 바람 피우는 건 정말 용서할 수 없죠. 한번은 신랑의 옷을 씻으려고 호주머니를 들추다가 처녀애들의 사진 서너장이 나오지 않겠어요. 그때부터 의심스러워 살피기 시작했어요.” 그제야 예화는 커피를 한모금 홀짝 마시더니 뒤말을 이었다. “한번은 낮에 록화청을 지키다가 새 테이프를 가지러 집에 갔지요. 대낮에 안으로 문을 걸지 않았겠어요. 문을 두드리자 집 안에서 뭐라고 하더니 버스럭거리지 않겠어요. ‘어서 문을 열지 못하겠어?’ 하고 소리치자 한참만에야 문을 열었어요. 당황해하는 신랑의 표정이 참말 이상했어요. 제가 이상해 집안을 두루 살펴보다가 침대 우에서 길다란 까지색머리카락이 널려 있는 걸 발견했어요. 전 근본 머리에 염색한 적이 없었거든요. 제가 머리카락을 쳐들어보이면서 ‘이건 뭔가?’고 따지자 신랑은 꺽꺾거리면서 대답하지 못했어요. 저는 집 안에 이상한 기운이 도는 걸 녀성의 예민한 육감으로 느꼈어요. 옷궤랑, 베란다랑 여기저기 들춰보았어요. 그런데 글쎄 부엌에서 버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겠어요. 부엌에 가서 장판널을 활 들가하다가 가마옆의 뜨물초롱을 들어 장판에 활 부어놓았어요. 장판널을 왈 뜯어보니 글쎄 사진에서 본 듯한 그년이 뜨물과 국수오래기를 들쓴채 쪼그리고 앉아 있지 않겠어요. 분명 빈집에 그년을 끌어들여 그 짓을 한게 아니고 뭔가요. 흑흑,” 예화는 대성통곡쳤다. “그 년의 머리채를 잡아채고 마구 잡아 뜯어놓고 생야단쳤지요. 그런데 괘씸한 신랑은 오히려 저를 뜯어말리면서 뺨까지 찰싹 갈기지 않겠어요. 그 틈에 까지색머리년은 부엌에서 기신기신 기여나와 도망쳤죠. 그런 놈과 어떻게 살겠어요? 한다는 소린 얼마나 메스꺼운지 알아요?” “?” “숫처녀맛 보자고 그랬다. 어째?” “얼머나 뻔뻔스러운가요? 흑흑흑.” 예화는 서럽게 울며 어깨를 가냘프게 달싹이였다. 범송은 한숨을 땅이 꺼지게 후- 내쉬면서 중얼거렸다. “어쩜 이렇게 예쁜 색시를 두고 바람을 피워?” 예화는 범송의 말에 고개를 들고 마주 바라보았다. 어두운 다방의 불빛을 빌어서  눈빛이 이상하게 반짝이었다. “글쎄 저와 살면 어쩐지 격정이 없대요.” 범송은 차잔을 들어 후룩 마시고나서 말했다. “바람을 피우는 사내들이 다른 녀자들이 자기 색시보다 더 예뻐서 그러오?” “사내들은 왜 그래요? 남의 녀자와 살면 별난가요?” “글쎄 말이요. 아마 한 녀자와 오래 같은 방식으로 사노라면 지루하고 짜릿한 격정이 없겠지. 남의 녀자와도 오래 살면 또 자기 색시처럼 격정이 다슬어없어지는 건 매한가지지.” 예화는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그럼 한뉘 얼마나 많은 녀성들과 바람을 피워야 되는가요?” “중이 고기 맛을 들이면 빈대도 다 잡아먹는다오. 바람둥이는 말리지 못해. 일찌기 갈라지길 잘했소.” “선생님은 어쩜 시만 잘 쓰는가했더니만요. 남녀관계에 대해서도 어쩜?” 범송은 황급히 손사래를 쳤다. “아니, 아니요. 오래 살다보면 점차 알게 되오.” 예화는 머리를 수깃하고 답답한 속사정을 말했다. “신랑은 말로는 ‘임신한 거 어떻게 자꾸 다치겠는가?’고 했어요. 아마 젊다보니 나와 그러진 못하니까요. 성욕을 참지 못해 다른 녀자와 해소했을 수도 있지요.” “애는 어쨌소?” “긁어버렸어요.” 범송은 예화의 속뽑이를 해보았다. “신랑을 한번쯤 용서하면 안되겠소?” “아니, 복수하고 싶어요.” “못써. 신랑을 살뜰히 대해줘야지. 물론 임신한 몸이여서 힘들었겠지만 말이요. 그래야 신랑의 마음을 붙잡을 수 있소.” 예화는 이번만은 선생님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선생님, 제가 임신해 입덧이 나 왝왝 토하면서도 낮에는 록화청을 지켰는데요.  밤마다 달려드는 신랑을 어떻게 받아당하겠어요. 한번 대충 그러는 것도 아니고 하루 밤에도 끝없이 달려들어요. 배속의 애가 상할가봐 근심도 하지 않고 미친듯이 달려들었어요. 흐흑흑.” 범송은 더 할 말이 없게 됐다. 예화는 억울함을 하소연했다. “그 개새끼보다 더 나은 남자가 없어서 빌고 들겠어요?” 범송은 풍전등화 같은 예화의 운명을 생각해서라도 무거운 입을 또 뗐다. “가정은 티없이 맑고 깨끗한 사랑을 토대로 하여 융합된 부부로 이루어져야 오래 갈 수 있소. 어떤 땐 사랑보다 가정이 더 크오. 많은 사람들은 가정을 유지하면서도 바깥에서 정부를 찾거나 애인을 찾아 감정과 애정의 부족한 걸 보충하려고들지. 건 다 도덕에 어긋나오.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리혼하지 않는 것도 도덕에 어긋나오. 그런 점에서 보면 예화가 갈라진 건 도덕적으로도 잘한 일이요. 저는 아직 젊소. 참다운 사랑을 찾아 도덕적으로도 어긋나지 않고 부부사랑으로 차넘치는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게 옳소.” 그 말에 예화는 귀가 솔깃해지는 눈치였다. “예화는 자기절로 깊은 고민의 구렁텅이에 빠지지 마오.” 예화는 한숨을 호~ 내쉬였다. “선생님의 말씀을 들으니 이젠 마음이 후련해요. 후에도 종종 저의 고민을 풀어주세요.” 범송은 다방에서 나와 예화를 음식점 부근에까지 데려다주었다. 그는 어스름한 골목길로 멀어져가는 예화의 뒤모습을 보노라니 저도 몰래 처량하고 마음이 쓰라리기만 했다. “어쩜 가야금을 둥기당당 신나게 타면서 방실방실 웃던 예화가 저런 마음고생을 하게 됐을가? 예화를 여러 모로 도와줘야지.” 그후 범송은 예화네 음식점으로 자주 찾아갔다. 별로 크지 않은 음식점은 예화의 예술적인 손길에 아주 단아하고 깔끔하게 차려졌다. 범송은 맥주를 잘 들지 않았다. 그러나 예화가 부어주는 맥주가 시원하여 맥주잔이 술술 내려갔다. 이래서 술상에서는 사촌누나라도 마주 앉으면 술맛이 난다는 말인가. 얼굴에 홍조가 피여오른 예화는 맥주병을 들어 범송의 잔에 자꾸 맥주를 부어올렸다. 이때 양복차림을 깔끔하게 한 깡마른 청년이 음식점에 들어섰다. 예화는 오쫄 일어났다. “미안해요, 선생님. 우리 음식점에 자주 드나드는 손님이 와서 잠간  건너가 봐야겠어요.” 예화가 그쪽에 가서 단골손님을 데리고 단간방으로 들어갔다. 순간 범송은 슬그머니 속이 비길데 없었다. (이상해, 내가 예화를 좋아하는가?) 범송은 도리머리를 하면서 애꿎은 맥주잔을 연신 기울였다. 한참 후에야 예화가 돌아와 마주 앉았다. “예화, 이젠 손님들이 올 때 돼서 돌아가야겠소.” 범송은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50원짜리 지페 내놓았다. “아니, 선생님, 5원만 주세요.” 예화가 받으려고 하지 않자 범송은 되밀어주었다. “제가 영업을 하는데 스승이 좀 부조하면 안되오?” “예화, 우리 왔소.” 범송이 문어귀를 피뜩 돌아보니 뜻밖에도 승호가 빨간 적삼을 입은 춘란을 데리고 들어서지 않겠는가. 승호도 범송도 서로 놀랍고 이상했다. “안녕하세요? 리과장, 최선생님은 저의 중학교시절 담임선생님인데요.” 예화가 나서서 어색한 분위를 깨면서 인사했다. “서로 아는 사인가요?” “오, 전번 공원에서 본 그 색시구먼.” 승호는 어색하게 범송과 예화를 번갈아 바라보면서 허구픈 웃음을 지었다. 한켠으로 피해섰던 춘란은 더욱 어색했다. 아주 은밀히 리승호 과장과 붙어다니는 판인데 범송에게 들킬줄을 누가 알았겠는가. “안녕하세요? 최선생님, 단위에 손님이 와서 나왔어요.” “오, 그래?” 범송은 승호를 돌아보면서 “그럼 일을 봐라. 난 얼근히 취해서 가봐야겠어.” 하고 자리를 떴다. 그 후에도 범송은 술친구들만 생기면 예화네 음식점에 데리고 가서 맥주를 마셨다. 지어 술상이 끝나고 영업도 끝나면 예화와 식당 복무원들까지 데리고 노래방에 가서 흥청망청 밤이 가는줄도 모르고 놀았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후 승호와 춘란의 그림자는 얼씬하지도 않는 것이였다. (자식, 더 으슥한델 데리고 가서 놀겠지. 해산달이 된 색시와 그 짓을 못하니까. 굴어귀 풀도 놓지지 않아?) 조과장한테 붙어놀던 춘란이 승호한테 찰싹 붙어 암암리에 놀아날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개 똥 먹는 버릇 못 고친다더니?) 그는 승호와 춘란을 개의치 않았다. 다만 식당영업이 잘 돼나가서인지 수심의 그림자가 가뭇없이 사라진 예화의 해맑은 얼굴, 유쾌하게 노래를 부르는 예화의 생기발랄한 모습을 보고 내심 기뻤다. 며칠 후 범송은 선금과 함께 산부인과에 가서 아들을 본 승호를 축하해주었다. 선금과 갈라지기 바쁘게 범송은 예화네 음식점에 전화를 쳤다. 그런데 중지신호 밖에 없었다. “웬 일일가?” 범송은 황급히 택시를 잡아타고 예화네 음식점으로 달려갔다. 음식점 문 앞에 가보니 “세집”이라는 큼직한 글자가 붙어있지 않겠는가. “참, 사람도 무정하지. 어디로 간단 말도 하지 않고 감쪽같이 사라져?” 눈보라가 윙-윙- 휘몰아치던 지루한 겨울이 지나가고 화창한 새 봄이 왔다. 봄아가씨가 사뿐사뿐 다가오자 차디차고 쌀쌀한 눈깔만 부라리던 동장군은 겁을 집어먹고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다. 비단결로 얼굴을 매만지는 듯한 부드러운 봄바람이 산들산들 불어왔다. 범송은 예전처럼 공원에 가서 로인들과 함께 태극권을 련습했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아니, 예화!’ 범송은 태극권을 그만두고 땀을 훔치면서 생글방글 웃으면서 자리를 바라보는 예화한테 다가갔다. 예화는 허리를 굽혀 구십도경례를 올렸다. 범송은 미색외투를 입은 예화의 손을 놓치기라도 할가봐 꽉 잡고 핀잔부터 했다. “어데 갔댔소? 괘씸한 것, 아무 말도 없이. 그게 뭐요? 핸드폰번호까지 바꾸고. 그래 그간 어데 갔댔소?” “청도에.” “뭘 하러?” 예화는 새물새물 웃을뿐 대답하지 않았다. “저녁에 다시 보자요.” 그녀는 핸드폰번호를 알려주었다. 범송은 퇴근하자마자 승호의 눈을 피해 예화한테 핸드폰을 쳤다. 이윽고 그들은 화도해물관에서 조용히 만났다. 오색령롱한 전등불빛이 반짝이는 널다란 대청에는 손님들이 몇이 없었다. 범송은 시원한 감이 드는 해물관의 큼직하고 알른알른한 유리창문 옆에 예쁜 예화와 마주 앉으니 기분이 한결 좋았다. 예화는 맥주를 들어 범송의 잔에 찰찰 넘치게 부었다. “오늘 사죄하는 의미에서 제가 한턱 내지요.” “아니, 영업도 그만뒀는데 무슨 돈이 있다고 그러오.” “번마다 선생님의 도움이 많았어요. 감사해요. 자, 드세요.” 예화는 범송의 맥주잔과 댕그랑 마주치고나서 굽을 냈다. 범송도 굽을 내지 않을 수 없었다. “청도에서 무슨 일을 했소?” 범송은 또 꼬치꼬치 캐묻기 시작했다. “비밀이예요.” 예화는 이쑤시개로 익은 조개살을 쏙쏙 빼내 범송 앞의 접시에 놓아드렸다. “어째 음식점은 그만뒀소? 그간 내 얼마나 애타게 찾았는지 아오?” “참 미안해요. 한입으로 다 말하기 힘들어요.” 예화는 앵두입으로 소라살을 홀짝 흡입하면서 뒤말을 이었다. “이전에 우리 집 단골손님을 기억나세요?” “오- 그 깡마른 양복쟁이.” “맞아요.” “꽤나 날 질투나게 하기도 굴었지.” “왜요?” “쩍하면 예화를 불러가서 날 속이 볶이게 했던 거야.” “호호호. 선생님~ 질투나던가요?” “왜? 나도 칠정육욕이 있어.” 예화는 새물새물 웃었다. 한참 후에야 그녀는 입을 열었다. “그 단골은 박철이라고 불러요. 박철이 보기싫어 청도로 갔지요.” 범송은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걔가 보기싫다고 음식점을 때려치워? 말도 안돼.” 예화는 게다리를 쏙 뽑아 속살을 빼 범송이 앞의 접시에 놓고 자기도 오물오물 맛나게 씹어 꼴깍 삼키더니 앵두입을 열었다. “어진간하면 잘되던 음식점을 다 때려치웠겠어요? 박철은 시내에서 한다하는 간판광고상인데요. 돈이 많으니 녀자들도 많지요. 몇해전에 네살짜리 딸애를 데리고 리혼했지요. 음식점의 단골이 되면서 이래저래 정이 들어 우린 동거하는데까지 갔지요. ” 예하는 범송과 맞잔을 하고 뒤말을 이었다. “박철은 내가 마치 자기 소유물이기나 한듯이 깜짝 못하게 했어요. 손님들과 맞잔을 해도 안됐어요. 미안한 말씀을 드리지만요. 심지어 선생님과 맞잔을 하는 걸 봐도 며칠이고 저하고 행악질을 하군 했어요.” 그 말에 범송은 “예화한테 피곤하게 굴어 미안하오.” 하고 죄송스러워했다. “아니예요. 절대 아니예요. 박철이 좀스러워 그렇지요. 또 남녀의 감정문제는 사심이 있기 마련이니까요. 보세요. 최선생님도 박철을 질투하지 않았는가요?” “이제 보니 그래.” 범송은 머리를 수깃하고 애꿎은 소라 속살만 이쑤시개로 뽁뽁 뽑아내 우물우물 씹어먹기만 했다. “박철은 나한텐 손님과 웃어도 안되고 술을 마셔도 안된다고 했지만요. 자기는 숱한 처녀애들과 밤중까지 술을 마시고 질탕하게 놀 때가 한두날이 아니였어요.” 예화는 범송의 앞에서 진짜 부모 앞에서 하소연하듯이 허물없이 그간 있은 털어놓았다. “련인절날엔 어쩌겠어요. 아침에 훌 나가더니 이튿날 새벽에야 들어오지 않았겠어요. 그날 혹시 저녁에나 들어와 뜻밖의 랑만을 주겠는가고 기다렸죠. 그런데 밤이 깊어가도 오지 않았어요. 전화 한마디 없었어요.  후에 뭐라고 하는지 알아요. 단위에 업무가 바빠서 그랬다고 해요. 그날 정말 최선생님을 찾을가고도 했지요.” “찾을게지. 고독하면 날 찾소.” “고마와요.” 예화는 범송의 술잔에 술을 찰랑찰랑 넘치게 부어올렸다. “자, 드세요.” 예화는 범송의 잔과 댕 마주치더니 반쯤 마셨다. “말이 길어진 거 같아요. 선생님과 만나면 허물없이 말하는데요. 널리 량해하세요.” “괜찮아. 우린 사제간이 아니고 뭐요?” “예. 그날 선생님을 찾아가려고 했는데요. 호주머니에 단돈 6원 밖에 없었어요. 박철은 제 호주머니에 돈이 있으면 선생님이랑 술을 사 대접한다고 몽땅 들춰내 치워놓군 했지요. 어디 믿음과 마음이 가야 살지요. 제가 뭐 로임도 받지 않는 보모인가요? 그렇게 박정하게 놀았는데요. 제가 박철이 술내 풍기는 옷을 빨아주고 하루 세때 밥을 해줘야 한다는 도리가 어디 있어요?” 범송은 머리를 끄덕이고나서 술잔을 들었다. “자, 한잔 드오.” “예. 선생님과 만나니 기분 참 좋아요.” 댕그랑 댕댕. 그들은 술잔을 들어 한잔 굽을 냈다. “전 이젠 홀로 살겠어요. 저의 자유를 얽매는 정신쇠사슬이 없지. 홀가분한게 얼마나 좋아요? 남자를 해 뭘 해요? 이젠 신물이 나요.” (예화는 예쁘게 생겼지만 남자 복이 없는가 봐!) 범송은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생각과 다른 말을 했다. “예화는 아직 젊소.  후에 꼭 예화 마음에 드는 신랑이 생길 거요.” “전 남자복이 없어요.” “아니요. 이후엔 먼저 상대방을 잘 알아본후 사귀란 말이요. 너무 성급하게 서두르면 자꾸 사고를 치게 되는거요.” “제가 너무 경솔했을 수도 있죠.” 범송은 화제를 돌렸다. “그래 지금 뭘 하오?” “이번엔 다방을 차렸어요.” “재간이 있구만.” 예화의 얼굴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스쳐지나갔다. “전번에 음식점을 차렸다가 3만원이나  밑졌어요.” “무슨 소리요?” 범송은 눈이 데꾼해 예화를 쳐다보았다. “장식비에 임대료에 두루 그렇게 됐어요. 3년 임대계약을 맺았댔는데요. 계약기한 전에 그만뒀기에 임대료를 절반이나 받지 못했어요. 장식비를 허망 처넣고나니 그렇게 됐어요.” “에이구, 차물을 팔어서 어찌 그 돈 벌겠소?” “괜찮아요. 청도에 가서 그만큼 벌었으니까요.” 예화는 혀를 홀랑 내밀면서 범송의 눈치를 살피더니 이쑤시개로 조개살을 뽁 뽑아 앵두입 안에 넣었다. 돈도 벌고 새 삶의 길을 걷고 있는 에화를 보고 범송은 한시름을 푹 놓았다. “이젠 자주 만나지 않아도 되겠지.” 그는 예화와 자주 만났다가 괜히 승호와 선금의 오해를 살가봐 근심됐다.
162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107) 댓글:  조회:1492  추천:0  2018-06-16
                     2. "작은 선생"        하늘에서는 거무칙칙한 구름이 감때사납게 흩날리고 먹장구름을 꿰뚫고 불뱀이 패용천산 중턱을 날카롭게 핥아갔다.        꽈르릉! 꽝! 꽝!         먹장구름은 칼산이 높이 솟구치려는 야심이 있다고 갖은 술책을 다 부린다. 먹장구름은 때로는 넓은 흉금으로 포옹한다는 것을 세상에 보여주려고 잠시나마 옥맺힌 옹졸한 가슴을 하얗게 풀어헤치면서 산봉오리를 끌어어안기도 하고 숙구멍을 어루만져준다.        그래도 말을 듣지 않고 함구무언일 때는  불채찍을 휘둘렀다.         번쩍!         우르릉 꽝꽝!         간사한 요귀는 먹장구름 사이에 숨어서 음산한 바람을 일이키더니 불혀를 날름거린다.         천둥소리가 천지를 진동하며 지꿎게도 소낙비가 억수로 쏟아졌다. 빗줄기가 점점 굵어지더니 나중에는 밤알만큼 한 우박이 와르르 쏟아져 진창에서 물똥이 튕겼다. 풀이 듬성듬성 난 함흥중학교 운동장에는 난데없는 탁구공만큼 한 하얀 우박이 쏟아져 나뒹굴었다. 운동장에서는 체육시간을 본지 오래었고 뛰노는 학생들을 본지 오래 풀이 무성하게 자라 범이 새끼를 칠 지경이었다. 감때사납게 불어치는 비바람에 학교 지붕 양철이 들려 넌덜거리며 산신당 귀신 소리를 울리며 사생들의 마음을 아프게 긁었다. 펑펑 구멍 뚫린 교실 유리창문은 을씨년스러운 날씨를 내다보며 장탄식하고 있었다. 학교 벽에는 대자보가 다닥다닥 들어붙어 있었다. 이른바 류소기의 “독서벼슬론”을 비판하고 “반역자이며 내부간첩이며 매국역적인 류소기 수정주의 교육노선”을 비판하는 대자보들이었다. 그런 대자보를 많이 써야 정치표현이 좋다고 하는 세월이었다. 때문에 남의 대자보를 베껴서라도 비판대자보를 주일마다 한 장 붙여야 했다. 겹겹이 나붙은 대자보는 세상에 보기 드문 “명필”들이었고 필체도 각양각색이었다. 쌀이 귀한 세월이라 쌀 물로 풀을 쑤어 붙이지 못하고 그 추운 겨울에 바깥에 나가 진흙을 파다가 물에 풀어 진흙탕으로 벽에 대자보를 붙였다. 그러다나니 허연 종이에 쓴 대자보는 그야말로 흑대자보로 돼버리었다. 덕돌은 공부를 뛰어나게 해 애들이 “수학 골”, “작은 선생”으로 별명을 지어 부를 지경이었다. 하지만 “문화대혁명시기” 학교 정치 환경에서는 용빼는 수가 없었다. 당시 사회에서는 지식분자들을 “더러운 아홉째”라느니 “소자산계급”이라고 몰아붙이면서 “그들의 사상은 발에 소똥이 묻은 빈농들의 사상보다 못하다.”고 했다. 또 지식보다도 사상이 붉어야 한다며 지식분자들은 빈농의 재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우에서 최고지시가 내렸다. 함흥중학교에서는 정치형세에 맞춰 빈농 대표 이흥수가 와서 관리하기 시작했고 학교 당 지부 서기 장동원은 유명무실한 지도자로 되였고 학교 혁명위원회 주임 이승복과 서기 장동원은 대대 혁명위원회 주임 황종연과 학교 빈농 대표 이흥수와 토론한 후 함흥대대 당 지부 선전위원이던 김철봉, 김성환 등 몇몇 지식이 있는 농민들을 겸직교원으로 초빙했다. 이흥수는 학교 빈농 대표라는 특수신분을 이용해 종연의 동생 황승연도 학교에 끌어들이었다. 자기 졸개로 쓰려는 이도에서였다. 학교에서는 문화지식공부는 뒷전이고 농업과를 설치하고 학생들에게 농사짓기를 가르쳤고 학생들을 생산대에 내몰아 봄에 담배그루뽑기, 벼모꽂기부터 가을하기에 탈곡까지 하게 했다. 진짜 학생이 아니라 공을 받지 않는 준농사군들이나 다름없었다. 덕돌은 당시 공부를 잘했지만 표창을 받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류소기 “독서벼슬론” 반동사상에 물젖었다고 락인돼 한쪽으로 밀리었다. 더구나 담임교원 황승연은 형 황종연과 이흥수와 짜고 들어 상순의 아들이라고 덕돌을 학습위원에서 내치고서도 모자라 처처에서 기를 펴지 못하게 들볶았다. 어느 날 아침, 숱한 학생들이 교탁 옆에 황승연을 둘러싸고 서 있었다. 덕돌이 다가간 줄도 모르고 황승연은 계속 지껄였다. “덕돌은 안 되오. 새애기처럼 코를 풀럭거리며 공부나 잘했지. 일하기 싫어하고 체육이랑 영 못한단 말이오. 뽈이랑 어디 찰줄 아오?” 애들은 덕돌을 돌아보면서 키득키득 웃었다. 그제야 덕돌이 애들 뒤에 서있는 것을 본 승연은 교편으로 교탁을 탁탁 치더니 교실에서 훌 나가버렸다. 분명 덕돌을 때리지 못해 하는 짓거리였다. 비가 구질구질 내리는 지꿎은 날에 사래긴 밭을 김맬 때 덕돌은 제일 앞에서 기음을 매며 나갔다. 황승연은 호미를 메고 전문 덕돌의 꽁무니를 뒤 따라다니며 곡식포기 속의 풀을 뽑아 숱한 애들 앞에 높이 쳐들어 보이면서 비평했다. “이게 뭔가? 이렇게 거짓으로 매서 되니? 빈농의 재교육을 밑구멍으로 받아?” “허허허. 어째 그렇게 빨리 나갔나 했더니 풀을 매지도 않았구먼.” “일을 할줄 알아야 어쩌지?” “작은 선생”으로 불린 덕돌을 질투하던 어떤 애들은 속이 시원해 헐뜯었다. 게다가 성욱이랑 상선이랑 덕돌이 철주와 함께 동네 해바라기를 훔쳐 먹었다는지 뭔지 하면서 이른바 덕돌의 “죄상”을 만들어 헐뜯었다. 그럴수록 덕돌은 김매기도 더 잘하고 쉼 시간이면 애들과 멀찍이 떨어져 숨어 성환 형님이 빌려준 소설책을 가만히 읽었다. 덕돌은 황승연이 어찌나 미웠으면 모주석의 칠언율시를 배운 후 딱딱 한 행에 일곱 자로 된 이른바 “7언 시”를 써서 황승연을 “황둥개”라고 욕하면서 자기를 압제하는 이른바 죄상을 폭로했다. 그런데 성욱이 황승연에게 덕돌이 쓴 시를 훔쳐다 보이는 바람에 덕돌은 또 봉변을 당했다. 황승연은 쑥 꺼져 들어간 우멍 눈에 쌍불을 켜고 덕돌의 귀 쌈을 후려갈겼다. “이 새끼야, 길러준 개 발 뒤축을 문다고 네놈새끼 언감 날 헐뜯어?” 저쪽에서 성욱이랑 깨 고소해 입을 싸쥐고 웃었다. 허나 방순희랑은 덕돌을 동정해 마음이 아파 상을 찡그리며 불쾌한 표정으로 황승연을 바라보았다. 덕돌은 황승연에게 한매 또 한매 얻어맞을 때마다 속으로 이 다음 커서 힘이 세면 황둥개부터 까부실테다.” 하고 윽벼르면서 이를 악물었다. 허나 흐린 하늘이 조금 개이면서 간혹 쨍 하고 해 뜨는 날도 있었다. 덕돌을 그렇게 못 살게 굴던 황승연이 글쎄 하루 새에 함흥중학교를 떠나게 됐다. 대대 혁명위원회 주임 황종연이 김용만 국장에게 술 상자를 들어다주고 뒷문거래를 해서 승연을 공사 기업소에 넣어주었던 것이다. 황승연이 학교에서 사라지자 덕돌은 얼마나 홀가분한지 긴 한숨을 후 내쉬었다. 뜻밖에도 담임교원으로 김경산 선생이 왔다. 성환이나 경산, 황승연은 모두 덕돌의 큰누나 춘자와 소학교 때부터 고중까지 동창생이었다. 특히 경산은 춘자와 한 마을에서 자랐고 소학교부터 농학원 다닐 때까지 동창생이었다. 덕돌은 인차 경산 선생님이 담임교원으로 온 기쁜 소식을 편지로 써서 교하 큰누나한테 부쳤다. 춘자가 쓴 편지 두통이 인차 날아왔다. 한통은 고향 친구 경산한테 날아왔다. 그는 편지에서 덕돌이 그간 황승연에게 수모를 당한 일을 이야기하고 덕돌을 잘 가르쳐달라고 부탁했다. 다른 한통의 편지는 덕돌에게 날아온 것이었다. 덕돌은 편지를 받아 쥐고 학교 운동장 동남쪽에 있는 백양나무 아래로 갔다. 운동장에는 쑥이 한 키씩이나 자라 범이 새끼를 칠 지경이었다. 설상가상 한족묘지 바깥으로 드러난 뻘건 관 널이 아가리를 쩍 벌리고 있어 시꺼먼 관속이 들여다보여 무시무시하기만 했다. 허나 덕돌은 한족묘지꺼리에 누구도 오지 않아 좋았다. 편지를 뜯어보니 춘자는 덕돌을 보고 교오자만하지 말고 경산선생님의 가르침대로 공부만 잘할 것이 아니라 다른 동창생들과 단결도 잘하고 공부를 잘 못하는 친구들을 도와주며 훌륭한 사상품성을 닦으라고 재삼 부탁했던 것이다. 덕돌은 글귀마다 형제의 정이 찰찰 넘치는 편지를 읽으면서 흐느껴 울었다. 뜨거운 눈물은 편지지에 점점이 떨어져 젖어갔다. “누나, 꼭 누나 가르침을 명기하겠소.” 덕돌은 교하 쪽을 향해 머리를 숙이었다. 그때 경산 선생님이 찾아왔다. “온데를 찾아도 없더구나. 여기서 뭘 하니?” 덕돌은 허리를 굽혀 인사하고 나서 “선생님, 전 잘 못도 많은데 많이 도와주십시오.”라고 했다. 그러자 경산은 “독서무용론이 살판 치는 세월에 너 같은 훌륭한 학생들이 고생하게 됐다.”라고 하며 덕돌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너네 누나에게서 편지가 왔더구나. 내 있는 힘껏 도와 줄 테니 근심하지 말고 공부를 잘 해라.” 그 말에 덕돌은 놀랐다. “공부를 잘해도 일없습니까?” “일 없다. 요즘 등소평 동지가 올라가 교육을 틀어쥐면서 학교에서 지식교육을 중시하기 시작했다. 마음 놓고 공부를 잘 해라. 우리 학급의 학습 성적을 춰 세워야 하겠는데 네가 학습위원을 맡아야겠다.” “예?!” 경산 선생님의 말에 덕돌은 놀랐다. “난 널 믿는다. 학습위원이 된 후 자기 공부만 잘 할뿐만 아니라 이전처럼 ‘작은 선생’이 돼 학습 성적이 차한 애들을 배워줘라.” 뒤이어 경산 선생님은 미더운 눈길로 덕돌을 바라보면서 “할 만하지?”라고 물었다. 덕돌은 뜨거운 눈물을 흘리면서 감개무량해 경산 선생님을 바라보며 “꼭 잘겠습니다.”라고 했다. “좋다. 내일 학급에서 통과하겠다. 그리고 몇 가지 말해야겠다.” 덕돌은 손등으로 눈물을 닦고 나서 똑바로 서서 선생님의 말씀을 귀담아 들었다. “참된 사람이 되려면 공부도 잘해야 하겠지만 고상한 품성부터 닦아야 한다. 황승연 선생이 너를 압제하고 때리고 학습위원을 철직한 것은 잘 못이다. 나는 그를 몇 번이고 찾아 너의 학습위원을 회복시키라고 했다. 허나 필경 그는 너의 담임교원이 아니냐? 너도 이젠 나이 어리잖고 책도 다른 애들보다 많이 보았으니까. 이젠 셈이 들어야지. 아직도 밉던 곱던 자기 선생을 황둥개라고 시까지 지어 숱한 학생들 앞에서 욕한 건 잘 못이야. 지금 아무리 학생과 선생은 ‘한 전호 속의 전우’라고 하지만 필경 너의 스승인데 그럼 못 쓴다. 알만하지? 큰 그릇이 되려면 마음을 널리 써야 한다.” 덕돌은 인차 마음이 돌아설 수 없어 머리만 숙이고 발끝으로 땅바닥의 풀만 긁어댔다. “공부를 못하는 애들을 잘 배워주면서 자기 주위에 애들을 뭉치게 할 줄도 알아야 한다. 각종 방법을 대서 애들을 하나하나 단결해 친구로 보내라. 그럼 외목에 나는 일은 없을 거야. 지어 성욱과도 단결해야 한다. 황차 성욱은 네 9촌 조카가 아니냐?” 어린 덕돌은 그 말까지 접수하기 힘들었다. “성욱이랑 나를 도처에서 헐뜯는데 그 애하고 어떻게 단결합니까?” “그래도 단결해야 한다. 너를 질투하고 미워하는 걸 나도 안다. 그럴수록 단결해 너를 미워하지 않고 헐뜯지 말게 해야 한다. 그래야 네 위신이 올라 갈 수 있다. 알만하지?” “네~” 덕돌은 실오리만큼 알듯 말듯해 그저 머리만 끄덕이었다. 이튿날 이른 아침 날씨는 유난히 밝았다. 밤새 지루하게 내리던 소낙비도 멎고 새들도 깃을 털며 날 준비를 하느라고 여념이 없었다. 덕돌이 오랜만에 호미 대신 책보를 메고 학교에 갔다. 그날 경산 선생은 숱한 학생들 앞에서 엄숙히 선포했다. “오늘 우리 학급 새 간부들을 선포하겠습니다. 반장에 장영웅, 홍위병 조장에 최설복, 체육위원에 김일광을 임명합니다.” 학생들은 모두 박수를 우레와 같이 보냈다. 그때 장영웅이 옆에 앉은 최설복을 보고 의아해 “어째 학습위원이 없니?”하고 중얼거렸다. 그러자 설복은 “학습위원이야 성욱이지 않고 뭐야?”라고 하며 앞줄에 덕돌과 나란히 앉은 성욱을 바라보았다. 덕돌이 보니 성욱은 득의양양해 경산 선생을 바라보았다. 경산 선생은 성욱이네와 벽을 하나 사이 둔 아래 웃집 사이이었다. 성욱은 그 지리적 우세를 믿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때 경산 선생은 정말 성욱과 덕돌을 번갈아보더니 목청을 돋우어 선포했다. “다음 학습위원을 개선하겠습니다. 학습위원은 반드시 학습 성적이 우리 학급에서 최고인 학생이여야 됩니다.” “학습 성적 1등이야 덕돌이지. 성욱이 되니?” 장영웅이 설복과 말했다. 허나 설복은 의견이 달랐다. “그래도 학습 성적만 봐서 되니? 품성도 봐야지. 담임교원을 황둥개라고 욕하는 애가 어떻게 학습위원을 하니?” 그때 경산 선생이 설명했다. “물론 학습위원은 다른 간부들과 마찬가지로 품성도 좋아야 합니다. 내 보건대 우리 학급의 학습위원은 공부를 제일 잘 하는 덕돌 동무가 하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성욱 동무도 잘 하지만 학습 성적이 덕돌과 비할만합니까? 누가 학습위원을 하는 게 옳은지 토론해봅시다.” 그러자 교실 안은 장마당처럼 의논이 분분했다. 영웅은 벌떡 일어나 말했다. “덕돌 동무는 매개 과목 평균성적이 100점입니다. 우리 학급에서 최고 1등입니다. 성욱 동무는 겨우 급제나 맞았는데 어떻게 학습위원을 할 수 있습니까? 덕돌 동무는 기실 품성도 좋습니다. 황승연 선생님이 자꾸 욕하니까. 괘씸해 황둥개라고 그런 시를 썼을 뿐입니다.” 경산 선생은 명확히 말했다. “건 덕돌의 잘못입니다. 밉던 곱던 선생을 그렇게 욕해선 안 됩니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선생님과 어른들을 존경하는 훌륭하고 참된 사람이 돼야 합니다. 덕돌 동무는 이전의 잘못을 고치고 고상한 품성을 키우겠다고 나한테 결심을 표시했습니다. 덕돌 동무는 총명하고 학습도 잘할 뿐만 아니라 품성도 좋습니다. 덕돌은 초중 1학년 때 겨울이면 날마다 학교에 일찍이 나와서 자기 학급 교실의 난로를 피웠을 뿐만 아니라 교무실의 난로도 피워 사생들의 호평을 받았습니다. 덕돌은 활동소에서도 단장을 하면서 학생들을 이끌고 3년 동안 돼지 똥을 해마다 열 수레씩이나 주어 생산대 온상에 내게 했고 날마다 학생들을 데리고 패용천산을 톺아 오르면서 군사훈련을 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학교에서 제1패로 로두구 만인갱 앞에서 선서하고 홍위병에 가입한 훌륭한 동무입니다. 덕돌은 이후에 꼭 큰 일을 할 훌륭한 학생이 되리라는 것을 나는 굳게 믿습니다.” 그는 학생들을 향해 엄숙히 말했다. “이제부터 학습위원을 민주로 선거하겠습니다. 동무들은 필기장을 찢어내 자기가 동의되는 학습위원의 이름을 써서 내십시오.” 애들은 “와!” 하고 소리치며 이구동성으로 “덕돌이 좋다.” “학습이야 누가 덕돌을 따르니?” 하고 말하며 손으로 종이를 가리고 이름을 써 바쳤다. 해월이랑 은숙이랑 경산 선생을 도와 애들이 투표 결과를 흑판에 바를 정(正)자로 한 획 한 획 썼다. 결과는 불 보듯이 뻔했다. 성욱의 이름 아래에는 바를 정자 하나 밖에 없었지만 덕돌의 이름 아래에는 무려 열 개나 줄줄이 달려 있었다. 성욱은 콩알 눈으로 옆에 앉은 덕돌을 힐끔 가로보더니 머리를 책상에 파묻고 어깨를 들먹였다. 덕돌은 성욱을 측은한 눈길로 내려다보았다. 뒤이어 그는 벌떡 일어났다. “내 생각에는 성욱이 계속 학습위원을 하고 내가 옆에서 도와주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난 학습위원을 못하겠습니다.” 그러자 애들은 “우-” 하고 소리치는가 하면 어떤 애들은 “안 됩니다. 덕돌이 해야 합니다.”라고 소리치며 책상을 마구 손바닥으로 두드렸다. 경산 선생은 웃으며 덕돌을 내려다보았다. “덕돌을 정식으로 학습위원으로 임명합니다. 학습위원 덕돌은 우리 학급 학생들을 이끌어 학습성적을 제고하기 위해 노력하십시오.” 덕돌은 일어나서 전체 사생들 앞에서 우렁차게 대답했다. “저는 선생님과 동무들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잘 해보겠습니다.‘ 그 “취임연설”에 애들은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를 보냈다. 이튿날 덕돌은 전반 학급 학습 성적을 제고시키기 위한 처음 조치로 자리정돈을 할 자기 생각을 반장 장영웅과 홍위병 조장 최설복과 말하고 구체적으로 토론해 자리정돈계획을 세웠다. 그 계획에는 한 횡대 줄에 앉은 대여섯 동무들 중간에 공부를 괜찮게 하는 학생을 하나씩 앉히는 혁신적조치가 들어 있었다. 덕돌은 그 자리정돈계획을 손수 작성해 교무실에 가서 경산 선생에게 바쳤다. 경산 선생은 자리정돈계획을 받아 보고 덕돌이 기특해 대견하게 바라보았다. “이런 계획을 다 세웠단 말이냐?” (열대여섯 살 밖에 안 되는 초중 2학년 학생이 이런 엉뚱한 계획을 세워? 정말 큰일을 할 애들은 애 때부터 다른 거야.) 이튿날에 경산 선생은 덕돌의 방안대로 자리정돈을 했다. 그리하여 시간에 선생님이 가르쳤지만 공부를 따라가지 못하던 애들을 중간에 앉은 덕돌을 비롯한 “작은 선생”들이 자습할 때 보충으로 배워 주었기에 제때에 알고 넘어 갈수 있었다. 키가 훤칠한 성택은 힘도 세고 축구도 잘 찼지만 수학시간에 선생님이 잘 가르쳤는데도 따라 이해하지 못했다. 허나 “작은 선생” 덕돌이 옆에 앉아 제 시간에 보충해 배워 준 데다가 하학한 후에 교실에 남거나 일요일에 교실에 나와 배워줬기에 꽤나 공부를 잘했다. 그 후부터 성택은 젖은 누룽지랑 감자밥이랑 밥 곽에 싸다 덕돌에게 주면서 친해졌다. 성택은 정말 속으로 덕돌을 따랐다. 그는 항상 “덕돌아, 누가 너를 건드리면 내 가만 놔두지 않겠다. 나를 믿어라.”라고 했다. 허나 성욱은 덕돌의 위신이 올라가자 그의 옆에 앉기도 싫어했다. 지어 그는 경산 선생을 찾아가 다른 자리에 앉혀달라고 졸라 앞으로 세 번째 줄에 상선이랑 같이 앉았다. 그들 셋은 누가 가르쳐주는 “작은 선생”이 없다나니 다 똑같이 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이 토대 위에서 덕돌은 집에 돌아간 후 학습 열성을 불러일으키려고 마을 별로 학습소조를 내오고 조장들이 학습이 차한 애들의 공부를 책임지고 보습시키게 했다. 이런 조치는 정말 전반 학급 학생들의 학습 성적을 제고시키는데 유조했다. 허나 마을에서 덕돌과 한 소조에 든 성욱은 상선이랑 종호랑 애들을 동원해 학습소조 공부에 참가하지 말게 맛있는 감자누룽지랑 삶은 옥수수 이삭이랑 쥐어 주면서 꼬드겼다. 그 바람에 덕돌은 슬그머니 애를 먹었다. 마을의 활동소에서도 성욱은 소장인 덕돌을 외목에 내려고 종호랑 상선이랑 짜고 들어 걸으라면 서고 서라면 걸으면서 처처에서 청개구리들처럼 애를 먹였다. 어느 날 경산 선생은 덕돌을 교무실로 불러갔다. 난로 옆에 방순희가 경산 선생과 나란히 앉아 뭐라고 말하고 있었다. “덕돌아, 여기 와 앉아라.” 경산 선생은 수학시험지를 덕돌과 순희에게 주면서 “수학선생님은 일이 있어 외출하면서 학습위원들인 너희들한테 중요한 임무를 주더라. 이 시험지를 너희들 둘이 매겨라.”라고 말했다. 사실 경산 선생은 덕돌이 여학생들을 배워주지 못하는 형편에 따라 순희에게 부학습위원을 맡겨 학습이 차한 여학생들의 공부를 가르치게 했던 것이다. 뒤이어 그는 시험지를 놓고 매개 문제 모범답안을 알려주고 매기는 표준을 일일이 알려 주었다. 그날 저녁에 덕돌은 경산 선생이 말한 표준대로 시험지 점수를 매기었다. 일광의 시험지를 매기다가 응용문제 아래에 답을 쓰지 않은 것을 몇 점을 떼 내야 하겠는지 몰라 고개를 갸웃거리었다. 한참 모지름을 쓰다가 그는 경산 선생의 집에 가서 물어보려고 신을 신고 떠났다. 그런데 그가 경산 선생 네 집으로 갔을 때 전등불이 이미 꺼져 있었다. “이걸 어쩐다? 내일 시험지를 바치라고 했는데.” 생각하다 못해 덕돌은 “순희한테 물어볼까?” 하고 생각하고 순희네 집 쪽으로 발걸음을 떼었다. 그날따라 전기가 오지 않아 온 마을에 등불만 깜빡이었다. 허나 먼발치에서 등불이 깜빡이는 순희 네 집을 바라보며 걷다가 주춤 멈춰 섰다. (내 순희 네 집으로 갔다고 혹시 성욱이랑 놀려주지 않을까?) 그는 늙은 비술나무 아래 성욱이 네 집 쪽을 돌아보았다. 성욱이랑 종호랑 사랑채에서 한창 노느라고 여념이 없는 것 같았다. (에라, 시험지 때문에 가지. 뭐라니?) 덕돌은 시험지를 다 매기려는 일념으로 순희 네 집 문 앞으로 다가갔다. 안도에서 이사해온 순희 네는 3대가 한 집에서 사는 집이었다. 순희는 윗방에서 살고 오빠네 일가가 정지와 고방에서 살았다. 덕돌은 등불이 깜빡이는 윗방에 순희가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그쪽에 가서 “순희.” 하고 조용히 불렀다. “누구야?” “덕돌이야.” “밤에 어째?” “시험지를 매기다가 모를 게 있어 그래.” 집안에서 바스락거리더니 순희가 문을 열고 “들어오라.” 하고 말했다. 그런데 정지에서 순희보다 두살 이상인 여조카 월순이 두덜거렸다. “밤에 찾아와 뭘 해?” 순희는 방에 들어오는 덕돌에게 자기 옆자리를 내주면서 정지에 대고 핀잔을 주었다. “삐칠 게 뭐야? 남이 시험지 매기는 거 땜에 찾아왔는데.” “낮에 올게지. 밤에 오니 말하지.” 그때 옆에 앉아 있던 순희 엄마가 월순을 나무랐다. “월순이 그만하지 못하겠니? 남이 공부 땜에 그런다는데.” 덕돌은 영상한대로 모를 걸 물어보고 일어서려고 했다. 그러자 순희는 “덕돌아, 온바하고는 몇 가지 물어보자.”라고 했다. “뭘?” 덕돌은 멈칫 멈춰 선 채 등불아래 쳐다보는 순희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반문했다. “일광이랑 성적이 어떻데?” “수학성적이 괜찮다.” “그 애네 외삼촌이 우리 수학선생 이기춘 선생이란다.” “오, 수학을 잘하는 내력이겠다.” “장영웅의 성적은 어떠냐?” “98점이다.” “어째? 어디 틀렸더니?” “소수점을 하나 찍지 않아 한 문제 틀렸더라.” “설복은 몇 점이냐?” “78점 밖에 맞지 못했다.” “홍위병 조장이란 게 뭐야?” “성욱은?” “74점.” “이전 학습위원이라는 게 뭐야? 이전에 수학콩쿠르에서도 네 껄 보고 베껴서 100점을 맞았다더구나.” “…” “베껴 쓴 애나 보인 애나 다 한가지야.” “허허허.” 덕돌도 여자애들의 성적을 물었다. “은숙이랑 성적이 어떻데?” “잘했다. 95점이더라.” “월금이는?” “92점이다.” “잘 했구나.” 이때 정지에서 부스럭거리며 듣던 월선이가 소리 질렀다. “너네 계속이냐? 염치 있니? 남이 자야겠는데 밤중까지 뭐야?” 그러자 아재노라고 순희가 또 정지에 대고 욕했다. “계속 삐치겠니?” 순희가 손을 들어 정지를 손가락질 하다가 그만 등잔불을 툭 쳐서 꺼버렸다. 순희의 아버지가 성냥을 그어대자 순희 엄마와 순희가 등잔불을 다시 밝혔다. 허나 덕돌은 더 있을 재미없어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와 버렸다. 그런데 그 일이 말썽거리로 될 줄은 천만뜻밖이었다. 월순은 활동 참 부 참장이었는데 활동 때마다 덕돌과 의견이 맞지 않아 티격태격 했다. 어떻게 말하면 두살 지하인 덕돌이 지휘를 받는다는 것도 속에 내려가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주책없는 월순은 동네에 나가 덕돌이 순희를 좋아한다고 하면서 그 날 일을 가지고 소문을 펴놓았다. 그 바람에 성욱이랑 종호랑 상선이랑 월순의 말을 보태 덕돌이 순희에게 연애를 걸려고 밤에 집에까지 찾아갔고 덕돌이 “이담 커서 순희를 각시로 데려다 살겠다.”고 했다고까지 학교에서 소문을 퍼뜨렸다. 그러자 덕돌보다 한두 살씩 이상인 설복이랑 일광이랑 원래 공부를 잘하는 덕돌을 질투하던 터라 놀려대기 시작했다. “못된 송아지 뿔부터 난다더니? 우리 학급 학습위원이 연애한다면서?” 그러자 덕돌과 순희가 억울하게 당하기만 하고 머리를 들고 다닐 수 없었다. 월순은 지어 덕돌이네 집에까지 찾아와 한창 부모형제와 함께 밥을 먹는 덕돌을 찾아와 한바탕 행악질을 했다. “덕돌아, 조꼬만게. 이 담에 우리 순희를 각시로 데려다 살겠다고 했니?” “난 그런 적이 없다. 너도 그날 밤에 정지에서 들었겠지만 나와 순희는 시험지와 공부에 관계되는 말만 했지 않고 뭐니?” 덕돌의 말에 월순은 성을 발칵 냈다. “네 아직도 승인하지 않겠니? 네 친구 철주도 그렇게 말한 적이 있다는데도.” 덕돌은 벌떡 일어났다. “뭐라고? 네가 그날 밤 일을 소문냈기에 말이 보태져서 그렇게 됐다.” “조꼬만 새끼, 니 정말 못된 놈 새끼구나.” 그 말에 상순은 밥술을 놓고 월순을 손가락질 하며 훈계했다. “들어보니 네가 불을 저질러놓고 오히려 누구한테 와서 행악질이냐? 보기도 싫다. 썩 나가지 못하겠니?”  “어디 두고 보자!” 월순은 덕돌에게 주먹을 쳐들어 보이더니 문을 쾅 닫고 나가버렸다. 한편 순희는 집에서 월선을 욕했다. “남의 일에 삐치겠니? 네 소문 놓는 바람에 내하고 덕돌이 머리를 들고 학교에 다니지 못하게 됐다. 네 책임져라.”        그러나 엎질러진 물을 퍼 담을 수는 없게 돼버렸다.       나중에 말이 눈덩이처럼 굴면서 점점 더 커져 덕돌과 순희가 밤중에 집에서 연애하다가 월순에게 들키었다고 소문이 퍼졌다. 그 말이 끝내는 경산 선생의 귀에 들어갔다. 경산선생은 순희와 덕돌을 또 교무실에 조용히 불러 전후시말을 죽 들은 후 이후에 주의하라고 주의를 주었다.       경산선생이 학급에 덕돌과 순희는 근본 연애한 적이 없었다고 명확히 지적하고 나서 엄포까지 놓았다. “이후에 누구든 다시 덕돌과 순희를 놀려주면 책임을 추궁할줄 아십시오."  그제야 부글부글 끓어오르던 콩물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덕돌의 어머니 명옥은 황급히 순희 엄마를 찾아가 빌었다. “어쩌겠소? 이집 순희 애들에게 몰리는데 미안하오. 우리 덕돌이 잘못했소.” 그런데 순희의 어머니는 뜻밖의 말을 해서 명옥도 놀랐다. “덕돌의 잘 못이 없소. 장차 애들의 일을 어떻게 아오? 황차 덕돌이 그날 밤에 순희를 찾아와 잘 못한 게 없소. 나와 순희 아버지도 이 칸에서 덕돌이 하고 순희 말하는 거 다 보았소. 걔들 연애한 일이 없소. 괜히 공부를 못하는 애들이 질투 나서 떠드는 거 가지고 근심하지 말고 가오.” 그 바람에 덕돌과 순희의 관계도 어색하게 됐다. 그들은 교실에서 딱 마주쳐도 머리를 숙인 채 서로 못 본체 하면서 지나쳐버렸다. 더욱이 애들 앞에서는 서로 마주 보고 말하기는커녕 마주 걷기조차 하지 못했다. 덕돌은 그 번 일을 생각만 해도 등 곬에 식은땀이 돋고 소름이 끼칠 지경이었다. 그는 한숨을 후 내쉬며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3. 묘지부근 혈안       토성 안팎의 실실이 늘어진 버드나무 가지들이 무더운 햇볕에 축 늘어져 이파리마저 달팽이처럼 오그라들 지경이었다. 토성 안의 늙은 비술나무는 벽돌 집 짓기에 들끓고 있는 사원들을 굽어보며 방불히 희죽이 웃음 짓는 것 같았다. 비술나무는 백여 년 살면서 이 마당에 빨간 벽돌집이 들어앉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상순은 조개덕 1대 사원들을 데리고 널찍한 토성 안 마당에 와서 벽돌로 대대 사무실과 위생소, 공장건물을 짓기 시작했다. 장차 대대 민영기업을 대대적으로 발전시켜야 한다고 내다보았다. 흥수와 종연은 새 벽돌사무실에 들 생각을 하자 어깨가 으쓱해 토성 안에 와 맴 돌아쳤다. 그들은 이번만은 상순이 “계급투쟁을 틀어쥐지” 않는다고 헐뜯어대지 않았다. 박영발은 윤희와 함께 위생소에서 침대를 들어 내오면서 빈정거렸다. “침대 다 마사져 이젠 못 쓰겠소. 새 걸로 바꿀까?” 윤희는 영발에게 눈을 곱게 흘기면서 해쭉거렸다. “누가 듣겠어요.” “들으면 뭐라오? 체면을 차려? 침대 밑에 사내를 두고 다른 사내한테 다리를 벌려대는 주제에.” 윤희는 침대를 활 놓고 가버렸다. 그 바람에 침대가 각이 나버렸다. 상순은 삽으로 건물 기초를 파다가 그들 둘을 흘금 훔쳐보며 콧방귀를 뀌었다. “원, 참, 꼴 보기도 더러워서. 흥!” 충국은 괭이로 기초를 꽝꽝 파면서 두덜거렸다. “이 토성안집은 우리 집에서 인섭 형님에게 져준 집인데 왜 허물어? 아무 때건 주인이 오면 어디 보자.” 상순은 저쪽에 서서 담배를 꼬나물고 뭐라고 떠들어대는 종연과 흥수를 돌아보며 중얼거렸다. “말조심하라고. 이 집의 주인은 바로 인민공사 생산대대야. 아무 소리나 했다간 고깔모자를 씌워서 투쟁하지 않는가 봐라.” 충국은 그래도 픽픽거렸다. “한뉘 혁명하더니 꼴좋다. 대대 서기도 하지 못하고 우리 같은 지주나 거느린 대장이나 하면서. 그래, 하긴 조선에서는 대대장보다 대장이 더 높고 세지. 허허허.” 충국이 비웃는 소리에 상순은 그저 빙긋이 웃기만 했다. “내 혁명을 한게 너 국민당처럼 벼슬이나 하자는게 아니야. 난 이 다음 북망산에 가도 조상들한테 할 말이 있어. " 그렇다. 상순은 저 천지꽃산 비탈밭이랑 소서구 상우지랑 장개골안과 계수동 숱한 밭이랑 일궜고 강물을 막아 멍지뫼산 앞에 산종논밭을 풀었다. 패랑산과 칼산에 과수원을 만들었고 조개덕에 벽돌공장을 세웠다. 이제 대대 사무실을 짓고 사원들의 집을 하나하나 지을 예산이다. "우리 공산당원들은 너 국민당원과 달라." 그렇다. 상순과 같은 공산당원은 자기 이해득실을 따지지 않고 고생은 앞장서 하고 향수 앞에서는 뒤로 물러선다. “그만하오. 내게 뭐 당과 학습을 시키는 판이오?” 장충국은 괭이질을 멈추고 허리를 펴더니 상순을 손가락질하면서 신경질을 썼다. “아무리 교육해도 나는 죽어도 지주 아들귀신이고 국민당 잔여세력 혼이니까. 헤이.” “잔말 말고 기초나 잘 파라. 난 논물을 보러 가야 해.” 상순은 삽을 기초구덩이에 세워놓고 훌쩍 뛰어나갔다. “내 무슨 지주 대장이오? 모르오. 저 종연이랑과 말하오.” 충국은 두덜거리면서 괭이질을 콱콱 했다. 종연과 흥수는 온 대대 이른바 "문제거리" 로간부들과 지주들을 몽땅 조개덕에 처박아 상순한테 떠맡겼다. 그리하여 충국도 소서구 토성 안에서 조개덕으로 이사해 왔다.  다리 부러진 노루 한 곬에 모인다고 진짜 이 시대 "문제거리분자들"이 몽땅 조개덕 1대에 모인 셈이었다. 흥수는 시름이 놓이지 않아 날마다 공지에 와서 그들을 감독했다. 상순이 논으로 나가려고 하자 종연이 막아섰다. “김 서기, 토론할 일이 있습니다.” “김 서기? 난 서기 아니오. 생산대 대장이지.” 종연은 상순의 볼 부은 소리에 희죽이 웃으며 다가섰다. “김 서기, 난 김 서기를 진짜 일을 하는 농촌 노서기라고 마음속으로 존중합니다. 흥수처럼 입방아만 찧는 간부는 딱 질색입니다.” 상순은 담배쌈지를 꺼내 담배를 말아 물더니 달라진 종연의 태도를 유심히 바라보면서 물었다. “무슨 일인지 빨리 말하오. 난 논물을 보러 가야겠소.” “김 대장이 딱 논물을 봐야 합니까?” 상순은 담배연기를 후 내뿜으며 나직이 “한족사원들은 아직 벼농사는 둘째고 논물도 잘 보지 못하네. 어서 말하오. 무슨 일이오?”하고 물었다. 종연은 다가오는 흥수를 건너다보며 입을 무겁게 뗐다. “저 박영발 서기는 정치입장이 견정하고 개조 표현이 좋다고 봅니다. 장차 제일 먼저 시내로 돌려보내는 것이 어떻습니까?” “영발을?” 상순은 저쪽에서 윤희와 희희닥거리는 영발을 건너다보다가 상을 찡그렸다. 그는 한창 무거운 기초 돌을 쇠줄그물에 담아 멜대로 메 나르는 이계삼과 허영주, 허백호를 가라키면서 언성을 높였다. “어째 저 노 간부들을 시내 당정 부문에 보내지 않고 박영발을 보내자고 그러오? 말도 안 되는 소릴 작작 하오.” “아이쿠!” 이때 저쪽에서 허백호가 물앉아 손을 쥐고 죽는 상을 했다. “어디 상하지 않았습니까?” 상순은 뛰어가며 물었다. 이계삼과 허영주도 멜대로 돌을 메 나르다가 내려놓고 허백호한테 다가갔다. 상순이가 보니 허백호가 상을 찡그리며 잡은 왼손에서 뻘건 선지피가 흐르고 있었다. 함지만큼 큰 돌을 움직이다가 그만 손이 찌워 터졌던 것이다. 상순은 무릎을 꺾고 앉더니 허백호의 피 흐르는 손가락에 묻은 돌먼지를 후후 불고 손으로 닦아준 후 자기 흰 바지가랭이를 찢어 싸매주려다가 말았다. “허 서기, 나에게 돈도 먹지 않는 조상들이 물려준 밀 방약이 있습니다. 써보겠습니까? 꼭 낫습니다.” “뭐기에?” “저쪽으로 가서 이 터진 손가락에 소변을 보십시오. 즉석에서 지혈이 되고 어혈이 풀립니다. 또 소염도 되고 진통도 됩니다.” “알았소. 또 오줌약이구먼.” 이렇게 돼 허백호는 상을 찡그리며 일어나 토성 밑으로 가서 왼 손의 상처에 대고 오줌을 누었다. 그는 손을 들어보더니 “허, 정말 그 밀 방약이 좋긴 좋구먼. 피가 뚝 멎었구먼.”라고 하더니 피와 오줌이 게발린 손을 바지에 쓱쓱 닦았다. 상순은 종연에게 다가갔다. “박영발이 위생소에서 해놓은 일이 뭣이오? 난 동의하지 않소. 저렇게 궂은 일, 무거운 일을 다 하는 허백호 서기랑 이계삼 서기랑 허영주 현장이랑 시내에 보낼 걸 제기하오.”라고 했다. “김 서기, 이건 대대혁명위원회 결정입니다. 박영발 서기를 시내로 보내겠습니다.” 종연이 고집을 쓰자 상순은 삽을 둘러메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논밭으로 떠나가 버렸다. 저쪽에서 상순에게 하는 종연의 말을 듣고 박영발은 득의양양해 윤희의 어깨까지 툭툭 치며 히히거렸다. 종연은 자기 안속이 따로 있었다. (박영발을 시내로 돌려보내고 윤희를 흥수에게 넘겨주면 두 사람에게 다 위신을 얻을 수 있어. 이거야 말로 꿩 먹고 알 먹고 둥지 틀어 불을 때는 격이 아니겠는가? 두 입당소개인에게 충성을 보여야 입당도 더 빨리 될 것이 아니겠는가? 또 상순과 토론하는 척 해야 상순의 미움을 덜 보지 않겠는가. 영발을 쫓아보내고 송선을 위생소에 넣고 윤희 대신 데리고 놀아야지.) 종연은 전날 밤에 위생소 주사실에 뛰어들었다가 흥수와 딱 마주친 후 윤희에게서 떨어지기로 마음먹었다. 황차 하늘에서 선녀가 내려온 듯이 윤희보다 얼마나 더 예쁜 무용수 송선이가 마을에 나타났으니 말이다. 송선은 요즘 종연의 관심을 받아 대대 맨발의사로 돼 날마다 대대 위생소에서 박영발과 윤희에게서 주사를 놓는 재간으로부터 청전기로 진맥하고 혈압을 재는 것까지 배우고 있었다. 대지를 무덥게 달구던 여름해가 서쪽 하늘의 구름들을 뻘겋게 지지며 불태우다가 서산으로 뉘엿뉘엿 넘어갔다. 송선이 토성 안 위생소에서 나와 조개덕으로 돌아갈 때다. 종연은 대대 사무실 공지에서 송선이 나오기를 혈안이 돼 기다리다가 사위를 둘러보면서 스적스적 먼발치에서 송선의 뒤꽁무니를 따라갔다. 송선은 뒤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리자 불길한 느낌을 받고 함흥 촌을 벗어나 함흥중학교 마당에 들어서자 선불 맞은 노루처럼 황급히 조개덕으로 반달음박질을 쳐갔다. 허나 부대에서 십여 킬로미터도 단숨에 뛰어가는 군사훈련을 거친 특종병출신의 종연을 어찌 떼버릴 수 있었겠는가? 그들의 거리는 각일각 더 가까워졌다. 조개덕과 몇 백미터 떨어진 한족묘지꺼리에 이르렀을 때다. 종연은 송선을 뒤따라 잡자  나직이 소리쳤다. "겁나 마오. 나요, 나.”  송선은 황급히 돌아서면서 물었다. “아니, 황주임이구먼. 무슨 일이 있습니까?” 종연은 달빛을 빌어 송선의 부풀어올랐다 내렸다하는 풍만한 가슴을 음충한 눈길로 게걸스레 쓸어보았다. “몰라서 묻소? 내 아니면 대대 맨발의사와 선전대 대장을 할 수 있었소?” “고마워요.” “사람이 신세를 졌으면 갚을 줄 알아야지.” 종연은 손을 내밀어 송선의 어깨를 감싸안으려고 했다. 송선은 무용수의 특유한 날렵함으로 허리를 살짝 굽혀 탈면서 종연의 겨드랑이 밑으로 머리를 빠져나갔다. “아니, 어째 내 말을 고분고분 듣지 않겠소?” “황주임을 이렇게 보지 않았는데 왜 이래요?” 달빛에 색마의 불길이 비치는 종연의 우멍눈이 무섭게 드러났다. “난 선녀 같은 송선 동무에게 홀딱 반했단 말이오. 내 책임지고 농사일을 시키지 않고 위생소에 들여앉힐 테니까. 내 말을 고분고분 듣소.” 종연은 다시 송선을 끌어안으려고 두 팔을 벌리며 덮쳐들었다. 송선은 뒤로 비칠비칠 물러서며 두 손을 들어 종연의 팔을 막았다. 딱! 어둠속 어디에선가 돌멩이가 날아왔다. “앗!” 비명소리와 함께 종연이 머리를 싸쥐고 핑그르르 돌아서다가 쿵 쓰러졌다. “어마나!”  송선은 풀이 한 키씩이나 들어선 한족묘지를 둘러보았다. “어쩌나!” 송선은 두 손으로 대가리를 싸아나고 땔땔 구으는 종연을 내리보다가 다리야 나를 살리라고 주먹을 쥐고 묘지꺼리 풀밭에서 뛰쳐나갔다. 그녀는 종주먹을 쥐고  선불 맞은 사슴처럼 조개덕 쪽으로 달아났다. 뒤에서 종연의 돼지 멱따는 비명소리가 처절히 들리었다. 한참 후 풀숲 속에서 한 검은 그림자가 허리를 구부정하고 쓰러져 신음소리를 내는 종연한테로 슬금슬금 다가왔다. 그 그림자는 발길로 종연의 면상이며 배며 가슴이며 마구 꽝꽝 걷어찼다.        “앗! 악, 아이고!”       종연은  비명을 칠 뿐 아무런 반항도 하지 못했다.       검은 그림자는 발로 종연의 가슴이며 아랫배며 마구 차고 짓밟아놓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구름도 드라마 한 장면 같은 참경을 보기 무시무시해 먹장구름 속으로 얼굴을 숨겼다. 이튿날, 흥수가 우사 회의실 마당에서 사원대회를 연후 조개턱을 쳐들고 야단법석하며 고아 쳤다. “여러분, 우리 마을에 큰 형사사건이 생겼습니다. 어떤 놈이 황주임을 때려 정신을 잃게 만들었습니다. 이는 우리 대대 계급투쟁의 새로운 동향입니다. 계급의 적들은 혁명위원회 주임과 우리 공산당원들을 눈에 든 가시처럼 여기면서 처처에서 복수의 칼을 시퍼렇게 갈고 있었습니다.” 여기저기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대체 어디서 얻어맞았소?” 병진이 나서서 물었다. “남의 말 다 듣고 떠드오.” 흥수는 건 가래를 떼더니 병진을 힐끔 곁눈질해보고 뒷말을 이었다. “어제 오후까지 펀펀하던 황주임이 해진 뒤라고 생각되는데. 저기 함흥중학교 동남쪽 조개네 한족묘지꺼리에서 맞아 쓰러졌단 말이오.” “와-” “어째 하필 그런 으쓱한 데 가서 얻어맞았다오?” 병진이 제일 떠들어댔다. 이때 흥수가 뒤짐을 짚고 치보 주임 틀을 차리면서 사원들을 둘러보며 목청을 돋우어 말했다. “이제부터 대 별로 매개 사원들은 어제 저녁에 뭘 했는가를 교대하며 수상한 자가 있으면 적발하오.” 그 말에 제일 가슴 찔리는 데가 있는 사람은 송선이었다. 허나 그녀는 어제 저녁에 있었던 일을 입 밖에 낼 수 없었다. 그녀가 머리를 숙일 때었다. 흥수가 또 말했다. “누구나 모두 어제 오후에 입었던 옷을 입고 다시 이 마당에 모이오.” 모두 집으로 돌아갔다. 상순은 이계삼과 허영주 그리고 허백호를 찾아가 의논했다. “혹시 충국이 어제 볼 부은 소리를 하더니 그 놈 새끼 한 짓이 아니겠습니까?” “무슨 소리요?” 이계삼은 눈을 치켜뜨며 물었다. “어제 충국은 토성 안 집은 자기 아버지가 양형님인 김인섭에게 지어준 집이라면서 주인이 조선에 간 후 빈틈을 타서 허물면 되는가? 언제든지 주인을 되돌려줘야 한다는 식으로 두덜거리더구먼요.” “음-” 이계삼이 머리를 끄덕였다. 옆에 서있던 허영주는 한숨을 후- 내쉬었다. 허나 허백호는 “그 놈 새끼 얻어맞아도 싸오.”라고 하면서 시원해 했다. 사원들은 하나 둘 어제 입었던 옷을 입고 우사 마당에 돌아왔다. 과연 흥수의 그 수사방법이 괜찮았다. 그는 어제 저녁에 묘지꺼리에서 종연을 때려 피터지게 한 자의 팔소매나 바지에 꼭 종연의 피가 묻어있으리라고 믿었다. 한편 진수해 파출소 허영호 소장을 비롯한 민경들도 마을에 들이닥쳤다. 그들은 흥수와 함께 사원들의 옷을 일일이 세심히 검사했다. 특히 지주 아들 장충국과 지괴호 등의 옷을 꼼꼼히 검사했다. 허나 피 묻은 옷을 입은 지주가 하나도 없었다. 특히 충국의 바지와 팔소매를 서너 번이나 번지면서 검사했지만 혈흔이 하나도 없었다. “어제 확실히 이 옷을 입었어?” 그러자 장충국은 상순을 흘깃 곁눈질하며 날카로운 흥수의 우멍한 눈을 피했다. "어째 나를 의심하오? 어제 이 옷을 입었소. 저 상순대장과 물어보오.”  상순이 충국의 아래위를 훑어보더니 흥수에게 머리를 끄덕였다. 흥수는 도리머리를 흔들더니 민경들과 함께 이젠 우파분자 정규상, 허백호, 일제통역 리달송, 하향간부 이계삼과 허영주 차례로 검사하기 시작했다. 흥수가 순식간에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민경 옆에 서 있던 상순의 바지를 가만히 보더니 외까풀 눈을 데굴거리며 고함쳤다. “저 피!” 민경들과 숱한 사람들의 눈이 동시에 상순의 바지에 집중됐다. 상순은 “허허허.” 하고 웃더니      “어째 나를 의심하오?”라고 하며 찢어지고 피가 발린 바지와 흥수를 번갈아보았다. 저쪽에 갔던 허영호와 허백호도 이쪽으로 다가왔다. “아니, 저 피!” 이번에 흥수는 허백호의 팔소매와 바지에 묻은 피를 가리켰다. 허영호와 민경들의 눈이 허백호와 상순에게 집중됐다. 상순은 허영호를 보고 어제 허백호 서기 상처를 처치해준 일을 얘기했다.  “허 소장, 사실 이건 어제 허 서기가 돌에 손이 찌워 흐른 피오!” 허영호 소장은 머리를 끄덕이고나서 오류분자들한테로 다가갔다. 흥수는 상순과 허백호 서기를 의심하는 것이 분명했다. 허나 허영호 소장은 사촌형 허백호를 놔두고 충국 같은 악질지주들을 의심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주들이 어제 여기 대대 사무실을 짓는 공지에 와서 일하던 옷을 아무리 검사해도 피 흔적이 하나도 없었다. 그러자 의심에 찬 시선은 다시 상순과 허백호 서기한테 집중됐다. 흥수는 외까풀 눈으로 쏘아보며 상순을 쏘아보며 다가섰다. “피는 증겁네.  당신들 종연 주임을 상해한 혐의를 벗지 못 하오. 로실하게 말하라니께. 반란 파 두목 종연이가 대대 혁명위원회 주임으로 올라간 데 앙심을 먹었지?” 상순은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허, 이 사람이 생사람을 잡는다. 난 확실히 종연이 노간부들을 못 살게 구는 게 눈꼴사납소. 허나 해칠 생각은 전혀 없었소. 모 주석도 ‘말로 싸워야지. 주먹다짐을 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소?” “뻔뻔스럽긴! 아직도 떼를 쓰긴!” 흥수는 우먹한 외까풀 눈을 무섭게 부라리며 상순한테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다가섰다. “그만 두오!” 그때 허백호 서기가 앞에 썩 나섰다. “김 대장은 아무런 죄도 없소. 내 종연을 때려눕혔다. 통쾌하게 돌로 대가릴 까고 발로 밟아놓았다. 봐라! 이 팔소매와 바지의 피를!” 모두들 시선이 허백호에게 집중됐다. “아니, 허 서기가 저럴 수가?” “글쎄 말이오. 사람은 겉을 봐서 모른다니까.” 허영호 소장은 실망어린 눈길로 사촌형을 바라보았다. 상순은 허백호 서기한테 다가가며 두 손을 펼쳐보였다. “아니오. 허 서기는 절대 그럴 수 없소.” 허나 허백호는 자기 소행을 시인했다. “김 대장, 확실히 내가 돌로 까부셨소. 난 이미 묘지꺼리 백양나무에 목을 맸던 사람이오. 어찌 똥이나 퍼서 밭에 내며 노동개조를 하면서 살겠소. 죽기만 못하오. 난 죽기 전에 종연과 흥수를 죽여 버리고 싶었소. 종연이가 묘지꺼리로 가자 뒤따라가 돌멩이를 뿌려 대가리를 깠소…” 뒤이어 사건 경과를 죽 얘기했다. “와-” 좌중에 숱한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평소에 말수가 적은 공사당위 서기 허백호, 그것도 파출소 소장의 사촌형이 대대 혁명위원회 주임을 해쳤다니?) 흥수는 외까풀눈을 가슴츠레 뜨고 허영호 소장의 눈치를 흘깃 곁눈질하며 허백호 앞에 다가갔다. 그는 어색한 함경도 말투로 물었다. “난 허 서기가 한 짓이라고 보지 않소. 그래, 종연이 어쨌다고 그렇게 돌로 쳤단 말이오?” 허백호는 가슴을 쭉 펴고 자랑삼아 속에 들어앉은 앙금을 쏟아냈다. “종연은 노 간부들을 반란해 대대혁명위원회 주임을 한 새끼요. 우리 노 간부들을 똥이나 쳐서 밭에 내게 하면서 노동개조를 악착스레 시킨 놈이오. 언제부터 내 그 놈 새끼를 때려죽이자고 별렀소.” 흥수는 반대파가 하나 줄어들 거 같아 속 시원했지만 파출소 소장의 형인지라 다른 때보다는 살살 다루려고 억지로 애썼다. “한가지 더 묻기요. 어떻게 종연이 조개덕 뒤에 있는 한족묘지꺼리로 갈 거 알고 따라가 해쳤소?” 허백호는 아무런 고려도 없이 말했다. “어제 대대 사무실을 짓는 공지에서 보니까. 종연 놈 새끼 뒤지개를 짚고 여기 왔다 갔다 하더구먼. 해질녘에 먼 발치에서 종연의 뒤를 밟아 묘지까지 쫓아갔댔어.” 송선은 허백호의 눈길이 자기에게 오자 종연이 자기 뒤를 쫓아와 덮친 사실을 말할까봐 머리를 폭 숙였다. 허나 다행히 허백호는 송선을 보고 희죽이 웃을 뿐 송선의 말은 입 밖에 내지도 않았다. “뭣들 해! 죄인을 파출소로 압송하지 않고!” 허영호 소장의 명령이 떨어지자 민경들은 허 소장의 눈치를 보면서도 허백호 서기의 손목에 쇠고랑을 철컥 채워 찌프에 등을 떠밀었다. 상순이가 보니 찌프에 압송돼가면서도 허백호는 죄책감이라고는 하나도 없이 머리를 쳐들고 격분해하고 있었다. 그는 머리를 들고  고함쳤다. "종연 새끼 숨통을 끊어주지 못한 게 한이다!”  허영호가 찌프에 오르려고 하자 상순이 팔소매를 잡아 끌어당겼다. “좀 보기요.” 허영호 소장은 상순의 엄숙한 세 귀 눈을 보며 차문 고리를 스르르 놓더니 운전수에게  먼저 가라고 당부했다. 부르릉 부르릉. 찌프가 먼지를 새뽀얗게 일구며 마을을 벗어났다. 허영호 소장은 상순을 따라 토성안 늙은 비술나무 쪽으로 스적스적 걸어갔다. 상순은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고  물었다. “허소장, 그래 종연인 어떤 정황이오?” 허영호 소장은 옛 상전을 미더운 눈매로 보면서 대답했다. “이마가 돌에 맞아 터졌고 갈비뼈도 밟혀 부려져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허나 며칠 치료하면 괜찮다고 합디다.” 상순은 “다행이군.”라고 하며 한숨을 후 내쉬더니 조용히 말을 꺼냈다. “아무리 봐도 허백호 서기가 그런 무모한 일을 했다고 믿어지지 않소. 충국이랑 지주들을 다시 잘 조사하는게 어떻소?” 허영호 소장의 어두운 얼굴에 고통스러운 그림자가 스쳐지나갔다. 그는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었다. “무슨 단서라도 쥔 게 있습니까? 김국장님?”  “또, 또. 국장은 무슨 국장이야? 김 대장이라고 편히 부르게나.” 상순은 허영호 소장의 입버릇을 핀잔주고 나서 뒤 말을 이었다. “아무리 봐도 충국이랑 지주들이 수상하단 말이오. 어제 충국은 한참이나 우리 공산당과 대대 간부들을 헐뜯었소. 불만이 이만 저만이 아니더구먼. 우린 계급의 적들이 날마다 우리 당과 정부를 보복하려고 칼을 시퍼렇게 간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되오.” “해가 서산에서 뜨지 않겠소?” 이때 언제 다가왔는지 흥수가 뒤에서 오며 끼어들었다. “김 대장이 어쩌다가 계급투쟁을 다 말하오? 항상 생산만 틀어쥐더니. 흥. 우리 대대에는 아직도 계급투쟁이 존재한단 말인기오.” 상순은 세 귀 눈으로 흥수의 외까풀 눈을 엄히 쏘아보았다. “내 언제 계급투쟁을 잊은 적이 있소? 모 주석께서는 ‘혁명을 틀어쥐고 생산을 촉진하라.’고 지시하셨지 언제 혁명만 틀어쥐고 생산을 틀어쥐지 말라고 했소? 혁명을 제대로 인식하란 말이오. 입방아만 찧으면서 계급투쟁만 하는게 혁명이 아니오. 생산도 새 마을 건설도 모두 혁명이란 말이오.” 리론 수준이 차한 흥수는 기암이나 썼지 상순의 전면적인 이론에 답변할 여지가 없었다. 그는 그저 외까풀 눈을 부라리며 끙끙거릴 뿐이었다. “잘 왔소. 이 치보, 우리 허 소장이랑 함께  지주들의 집을 한번 돌아가면서 들추는 게 어떻소?” 상순이 어색한 장면을 깨면서 건의했다. “좋다니께.” 리흥수는 상순과 허영호 소장과 함께 지주와 부농들의 집을 몽땅 수색할 행동방안을 짰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면서 패용천산과 태평 벌에 두툼한 어둠의 장막이 서서히 내리 드리웠다. 마을은 자정이 가까워오자 얼굴에 주먹이 날아들어도 보이지 않을 지경으로 어둠 속에 짓눌렸다. 허영호 소장과 이흥수 치보 주임, 상순은 꼴꼴한 세 개 소조 민병들을 거느리고 조개덕에 집중된 전 대대 지주와 부농들의 집을 동시에 수색했다. 상순은 민병들을 데리고 둔덕 아래 장충국이네 집을 들이닥쳐 수색했다. 장학산과 아내는 이미 죽고 충국은  홀로 대충 살고 있었다. “문 열엇!” “누구요?” “민병이다!” 안에서 버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충국이 두덜거리며 전등불이 켜졌다. 드디어 문이 삐꺽 열렸다. 불시에 뛰어든 민병들은 충국을 한쪽에 밀어버리고 집 구석구석을 뒤졌다. 민병들은 궤짝이며 쌀독이며 지어 장독까지 뒤져도 아무것도 뒤져 내지 못했다. 희미한 전등불아래 충국은 민병들을 쓸어보다가 상순을 흘겨보며 두덜거렸다. “우리 집에 뭐가 있다고 그래? 밤중에 자지 못하게.” 그때 상순은 집안을 두리번거리다가 북쪽구들에 뛰어올라가 이불을 쥐어 훌 들었다. 요대기 밑으로 시퍼런 칼끝이 삐죽이 드러났다. “이게 뭐냐?!” 상순은 요대기를 훌 들었다. 그 밑에 시퍼런 검과 비수가 드러났다. 상순은 전등불빛에 번쩍이는 시퍼런 검과 비수를 쥐어 충국의 코앞에 대고 흔들어 보였다. “이놈, 이게 뭐냐? 삼도만 토비질을 할 땐 이불 밑에 권총을 숨기더니 이번엔 시퍼런 칼을 숨겼구나. 우리 공산당과 정부를 보복하려고 시퍼런 칼을 갈고 있었구나.” 상순은 비수를 충국의 목에 바투 들이댔다. “탄백해. 시퍼런 검과 비수를 갖춰두고 보복하려고 했지? 네놈이 황 주임을 돌로 깠지? 로실히 탄백해라!” “형님! 아니, 김 대장!” 충국은 머리를 번쩍 쳐들고 고래고래 고함쳤다. “왜 나를 억울하게 구오? 난 어제 저녁에 근본 그리로 간적이 없었소.” “이 놈아, 황주임 머리를 깐 돌멩이엔 지문이 남아 있다! 로실히 탄백하지 못할까?! 위국은 어디로 갔어?!” “야, 억울하다! 누가 한 짓을 내게 들씌우는가?!” 상순은 “뭘 하는가? 이 놈을 끌어가라!” 하고 명령했다. 민병들은 장충국을 바 줄로 꿍꿍 뒤 결박 지어 함흥 대대 우사에 있는 회의실로 끌어갔다. 회의실에는 다른 소조의 민병들이 속속 돌아왔다. 허영호 소장이 거느린 민병소조에서는 한국 특무 용천의 아들 김경주의 집을 수색했다. “김경주와 그 놈의 새끼 아들애 토함산이 보이지 않소.” 그 말에 충국은 피씩 웃었다. “어디로 갔어? 말해!” 허영호 소장이 따지자 충국은 “그래, 미련이도 없습디까? 토함산이 정말 없습디까?” 하고 물었다. “미련은 있더라.” 충국은 한숨을 후 내쉬었다. “애를 데리고 어디로 갔단 말인가?” “이 놈, 시치미를 딸 작정이냐?” 상순은 계급투쟁의 안광으로 위국과 경주가 잃어진 일을 한데 연계시켜 경각성을 높이고 있었다. “난 모르오. 알면 허 소장에게 미련이 있던가고 물어보았겠소?” 흥수가 이끈 민병소조도 회의실에 돌아왔다. “그 조덕림이랑 무슨 눈치를 차렸는지 아무것도 들춰내지 못했소.” 허영호 소장은 상순과 흥수와 금후 계급투쟁에 대해 의논한 후 찌프를 타고 파출소로 돌아갔다. 민병들은 회의실에 장충국을 가둬놓고 윤번으로 보초를 섰다. 이튿날 저녁부터 장충국과 조덕림, 지괴호 등에게 고깔모자를 씌워 성세 호대한 투쟁대회를 열었다. “계급투쟁을 절대 잊지 말자!” 상순이 일어나서 주먹을 쥐고 휘두르며 구호를 목청껏 불렀다. 사원들은 상순을 따라 구호를 목이 터지게 불렀다. “계급투쟁을 절대 잊지 말자!” “잊지 말자!” “반혁명분자, 지주와 부농, 일제 주구들을 타도하자!” “타도하자!” 커다란 쇠 물통에 충국을 비롯한 지주들을 높이 올려 세워 놓고 두 손을 추켜들게 하고 몇 시간 동안 연속 투쟁했다. 허나 지주들은 손을 쳐든 채 한사코 “종연을 돌멩이로 깐 일이 없다.”고 딱 잡아뗐다. 충국은 꾀 망둥이어서 두 손을 쳐들고 오래 서 있기 힘드니 한 미터 높이도 더 되는 쇠 물통 위에서 거꾸로 떨어지군 했다. 민병들이 다시 쇠물통을 세워놓고 그를 들어 올려놓는 사이라도 팔을 쉬우려는 수작이었다. 홍위병완장을 낀 민병들에게 얻어맞아도 한 10분 서 있고는 또 쇠물통 위에서 굴러 떨어지군 했다. 밤이 깊어도 투쟁대회는 백열화돼갔다. 뭇별도 깜박이며 우사 회의실을 내려다보고 휘여든 반달도 겁을 집어 먹은듯이 바르르 떨다가 황급히 구름 속으로 숨어버렸다.                                     4.경쟁     온 하루 구름이 뒤덮여 흐리터분하던 하늘이 조금 맑아지는 것 같더니 해가 어슬어슬 져가고 있었다. 허나 덕돌은 함흥중학교 마당에 홀로 가서 남몰래 철봉대에 매달려 턱 걸기도 해보고 닫다가도 멀리 뛰기도 연습했다. 그는 당장 고중에 올라가야 했다. 학습 성적은 근심도 하지 않았다. 허나 료녕성 철령사범학교에서 대학입시에서 백지 시험지를 낸 장철생이란 “백지영웅”이 나온 후부터 학교에서는 학습을 틀어쥐지 않고 빈농의 재교육을 받는답시고 농촌에 나가 농사 일만 했다. 학생들이 고중에 입학하려고 해도 시험성적을 우선 보는 것이 아니라 이른바 사상품성을 우선 고려해 학생들이 먼저 추천하고 대대 혁명위원회에서 동의해야 하며 학교 빈농 대표 흥수와 학교 당지부와 혁명위원회에서 최후로 결정했다. 허나 성욱이랑 질투해서 어찌나 덕돌이 방순희와 연애를 걸었다고 헐뜯었던지 덕돌의 위신은 납작하게 돼버렸던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덕돌이 공부를 잘한 것도 “독서벼슬론”에 물이 든, 이른바 사상품성이 좋지 못한 죄로 돼 덕돌의 뒷다리를 물고 늘어졌다. 셈이 들지 못한 덕돌은 시대를 잘못 만난 것을 모르고 생각하면 할수록 성욱이 괘씸해났다. (개새끼, 아무리 아버지가 친척이기에 용서하라고 했으나 정말 용서할 수 없어.) 이때 송철과 철주가 다가왔다. “야, 덕돌아, 아무리 연습해도 쓸데 있니? 성욱이 새끼 너를 헐뜯어서 어떻게 고중으로 가니?” “글쎄 말이다. 내 고중에 가지 못하는 날엔 성욱을 가만 놔두지 않겠다.” 철주가 뒤에서 쐐기를 박았다. “야, 우리 성욱을 언제 또 때려놓을까?” 허나 덕돌이 머리를 가로 흔들었다. “안 돼. 그랬다가 전번에도 아버지한테 혼났다. 괜히 친척집 9촌 조카를 때렸다가 말썽을 일으켜 고중에도 가지 못하겠다.” 철주는 철봉대에 디룽디룽 매달려 흔들거리면서 빈정거렸다. “그 새끼, 연애하지 않은 거 연애했다고 했겠니?”   “후-” 덕돌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안 돼. 내 한주먹이면 성욱이랑 콩가루로 만들 수 있다. 허나 고중에 간 다음에 보자.” 송철도 “옳다.” 라고 하며 쌍봉 대에서 풀쩍 뛰어내리더니 “고중에 올라간 담에 손을 써도 늦진 않아.”하고 동을 달았다. 덕돌은 마을로 돌아오다가 피뜩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철주야, 너 어째 내 커서 순희와 잔치해 살겠다고 했다고 물어먹었니?” 바빠 맞은 철주는 “난 근본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 누가 그러더니?” 하고 변명했다. “성욱 새끼, 경산 선생과 그렇게 말하는 바람에 얼마나 욕을 먹었는지 아니? 우리 아버지는 못된 송아지 엉덩이에 뿔부터 난다면서 집에서 쫓아내기까지 했다.” 덕돌의 말에 송철은 손사래치면서 말렸다. “됐다, 됐어. 우리끼리 싸우면 괜히 성욱이랑 좋아하겠다.” 덕돌도 비상시기에 친구끼리 싸우지 말아야 하겠다고 생각하고 그만두었다. 상순은 덕돌이 공부는 잘했는데 순희와의 일로 고중에 올라가지 못할까봐 함흥중학교 장동원 서기 집을 찾아갔다. 장동원 서기는 원래 진수해중학교 화학교원이었다. 그는 당시 쏘련과의 전쟁과 재해에 대처할 준비를 잘하라는 최고지시에 따라 화학품으로 수류탄을 만들다가 그만 화학품폭파사고로 오른손 엄지손가락을 잃고 말았다. 당의 호소에 적극적으로 호응한데서 그는 화선입당했고 함흥중학교 당지부 서기로 내려오게 됐다. 상순이 찾아가자 장동원은 반갑게 맞이해 위방에 모셨다. “춘자 아버지 어떻게 돼 왔습니까?” 상순은 자리를 정하고 앉자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우리 덕돌을 고중에 붙여주십시오. 부탁드립시다.” “예. 알았습니다. 덕돌은 총명한 아이어서 장차 꼭 큰일을 할 학생입니다. 지금 시대를 잘 못 만나 고생합니다. 공부를 잘하는 덕돌 같은 애들을 무슨 류소기 ‘독서벼슬론’ 나쁜 사상에 물젖었다고 하는데 그건 잘 못입니다.” “감사합니다. 우리 덕돌이 소롱소롱 해 성욱이랑 싸우고 여자애들과도 말썽을 일으킨 거 같은데 많이 교육해주십시오.” 상순이 머리를 숙이며 하는 말에 장동원은 미안해 솔직히 말했다. “시대가 발전하자면 장차 덕돌이 같이 공부를 잘 하는 학생들에게 의거해야 합니다. 농사일을 잘하고 힘이나 세고 일이나 잘하고 남을 헐뜯는 애들에게 의거하면 맨 날 계급투쟁만 해야 합니다. 지식에 의거하지 않고 정치투쟁만 해서야 어찌 사회가 발전하겠습니까.” 장동원은 너무 장황히 말한 것 같아 화제를 되돌려왔다. “덕돌은 온 학교에서도 손꼽히게 공부를 잘하는 학생입니다. 체육까지 몽땅 우수를 맞은 학생은 그 학급에서 덕돌 밖에 없습니다. 그런 장래성이 있는 학생을 고중에 붙이지 않고서야 우리 함흥중학교가 장차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근심하지 말고 돌아가 덕돌을 보고 다신 말썽을 일으키지 말게 잘 타일러 주십시오.” 상순은 “예, 고맙습니다. 그럼 장 서기를 믿고 시름 놓고 집으로 가겠습니다.”라고 하며 일어나 떠나갔다. 정지에서 장동원의 아들 장영웅이 아버지와 덕돌의 아버지가 주고받는 말을 다 들었던 것이다. 장동원은 영웅을 불러 타일렀다. “넌 다른 애들이 덕돌을 놀려주면 말려라. 덕돌은 창창한 전도 있다. 네가 친구로 보낼만한 애다. 넌 덕돌에게 추천 투표를 하게 애들을 하나하나 동원해라.” 아버지 부탁을 들은 동원은 항상 광철을 데리고 덕돌의 집에 찾아와 함께 놀면서 애들을 하나하나 낚을 토론을 했다. 상순은 오촌 조카 철봉과 성환 그리고 담임 경산 선생까지 찾아다니면서 덕돌의 고중입학을 주문했다. 철봉은 덕돌을 참된 사람을 만들려고 자기 집에 데리고 가서 조용히 타일렀다. “얘, 넌 어려서부터 공부를 잘하고 옛말도 잘하고 아동단 단장으로부터 활동소 소장까지 하면서 정치공작도 잘했지 않았고 뭐야? 우리 가문에서는 너에게 희망을 건다. 이제부터 쓸데없이 애들과 싸우며 말썽을 일으키지 말고 나한테 다니면서 글짓기를 배워 장차 기자나 작가나 되면 어떠냐?” 덕돌은 6촌 형님의 진심어린 말이 마음에 와 닿아 “양, 형님의 말대로 하겠소.”라고 진심으로 대답했다. 철봉은 궤짝에서 자기가 애지중지하던 누렇게 색 바래진 책들을 꺼내 주면서 타일렀다. “쓸데없이 말썽을 일으키지 말고 이런 책이나 읽어라. 지금 시대에 지식이 쓸데없다고 하지만 장차 지식이 있는 애들이 사회에 쓰일 거야. 난 ‘문화대혁명’이 터지는 바람에 때를 놓쳐 대학공부를 하지 못했다. 네나 이 책을 읽고 장차 큰 문인이 돼라.” “양.” 덕돌은 형님의 말씀에 가슴이 뭉클해 나고 희망으로 한 가슴이 벅차올랐다. 철봉은 시나 극, 소품도 꽤나 잘 썼다. 덕돌이 머리를 숙여 철봉 형님이 준 책을 보니 “문학창작의 길”, “임해설원”, “홍루몽”과 같은 두툼한 책이었다. “홍루몽, 조설근? 허허허. 그러지 않아도 읽을 책이 없어 헤맸는데 실컷 보겠소.” 그는 보풀이 진 누런 두툼한 책을 받아 쥐자 읽고 싶은 충동부터 생겼다. 그때 철봉의 아들애 일국과 성국 그리고 성빈은 아버지가  책을 삼촌을 준다고 아까워했다. 덕돌은 자기보다 일여덟 살 밖에 지하가 아닌 일국이랑 성국이랑 조카들의 머리를 매만지면서 “얘들아, 삼촌이 본 후 가져다 줄 게.”라고 했다. 철봉은 길쭉한 얼굴에 희죽이 웃음 지었다. “쾐찮다. 가져다 봐라. 열 살도 안 된 얘들이 언제 그 책을 알고 본다고 그러니?” 아주머니도 상냥하게 웃으면서 “괜찮소. 생원이 가져다 보고 큰 사람이 되오.”라고 하며 가지고 가라고 손짓했다. 덕돌은 “그래도 이담 얘들이 보게 다 본 후 가져오겠소.”라고 다짐했다. 그제야 조카들은 해시시 웃었다. 떠나갈 때 철봉은 덕돌의 손까지 잡고 재삼 타일렀다. “그 책을 너만 보고 남에게 보이지 말라. 자칫하면 황색소설을 본다고 또 말을 듣겠다.” “양, 알았소.” “고중에 가는 관건적인 대목에 절대 말썽을 일으키지 말라. 영웅이랑 광철이랑 하나하나 무슨 수를 쓰더라도 친해라. 그래야 너를 고중에 추천하는 애들이 많아 질 게 아니냐? “네만 잘하면 경산 선생이랑 성환이랑 우리도 학교에서 네 고중에 가도록 힘을 써줄게.” 덕돌은 책을 안고 떠나가면서 “형님, 형님 말대로 잘 해보겠소.”라고 했다. 덕돌은 “임해설원”을 읽으면 읽을수록 재미나서 밤중까지 탐독하였다. 그는 책을 보다가 곤해 바깥에 나와 두 팔을 벌리고 뒤지개를 지으면서 휘영청 밝은 달을 쳐다보았다. 여름밤의 무더운 밤공기를 한껏 들이마시다가 피뜩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순희랑 은숙이랑 내게 투표하게 편지나 써볼까?) 허나 인차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괜히 또 연애를 한다고 말을 들으면 어쩐다?” 그는 소설책이나 더 보려고 집으로 들어오다가 또 생각을 달리했다. “혹시 필적을 속이면 내 쓴 거 아무도 모르지 않을까?” 덕돌은 무릎을 탁 쳤다. “그래, 익명신을 쓰자.” 그는 제 딴에는 아주 묘하게 필체를 바꿔 익명신을 쓰기 시작했다. 고의로 글씨도 필획을 평소처럼 죽죽 곧게 긋지 않고 비뚤비뚤하게 써내려갔다. 내리 금은 고의적으로 뱀처럼 구불구불하면서도 윗 끝을 실하게 오려놓았다. 은숙아, 내 누구라는 거 묻지 마라. 내 고중입학 도와 투표해 달라. 옛날 내가 배고플 때 감자누룽지를 준 것처럼 말이야. 찬란한 미래를 향해 어깨 겯고 한걸음 한걸음 나가자. 넌 영원히 내 누룽지야. 덕돌은 또 다른 필기장 한 장을 쭉 찢어낸 후 또 다르게 써 내려갔다. 순희야, 우리 둘 다 공부를 잘하는데 함께 고중에 가고 대학에 가자. 나 고중 입학을 도와 달라. 네가 날 돕지 않으면 누가 돕겠니? 여자애들을 동원해 나에게 투표하게 해 달라. 하늘이 굽어 지켜볼 거야. 편지라 할까? 쪽지라 할까? 덕돌은 다 쓰자 접어서 책가방에 넣었다. “옳지. 내일 학교에서 진수해에 영화 보러 간다지? 그때 우전국에 가서 부치자.” 이튿날 덕돌은 진짜 영화 보러 가는 김에 우전 국에 들리어 자기를 아는 애들이 들어 올까봐 흘금흘금 살피다가 편지봉투와 우표를 샀다. 그가 편지에 은숙과 순희 집 주소를 거의 쓸 때다. 갑자기 우전국 문 안으로 상선과 종호가 쑥 들어왔다. (젠장!) 덕돌은 편지 주소를 제꺽 써서 책가방에 넣었다. 상선이 다가오다가 덕돌을 이상한 눈길로 여겨보더니 나갔다. “어쩔까?” 덕돌은 우전국 안에서 왔다 갔다 하면서 상선이랑 떠나 갔는가고 바깥을 흘금흘금 내다보았다. 상선이랑 보이지 않자 그는 황급히 편지봉투를 번져 놓고 풀을 가져다 우표를 붙여 우체통에 슬쩍 걷어넣았다. 그때 우체국 안에 모를 시내 애들이 몇이 있을 뿐 알만한 애들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상선이랑 있은들 뭐라니? 내 교하 누나네 집에 편지를 부쳤다고 하면 다지. 황차 누가 쓴 건지 모르는데 겁날 게 없다. 연애편지도 아니고 투표해달라는 거뿐인데 뭐라니?” 덕돌은 제딴에는 귀신도 모르게 편지를 부쳤다고 위안하면서 우체국에서 나왔다. 그런데 저쪽에 상선이랑 성욱이랑 종호랑 모여 서서 뭐라고 이쪽을 손가락질을 하며 바라보는 것이었다. 그때 우체국에 있던 애들이, 시내 애들이 성욱이랑 쪽으로 달려가는 것이었다. “저 새끼들이, 오늘 시내 애들을 시켜 나를 칠 작정인가?” 덕돌은 편지를 가만히 부치려고 오늘만은 철주랑 동림이랑 송철이랑 함께 오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허나 그런 근심은 인차 사라졌다. 성욱이랑 뭐라고 말하며 그를 먼발치에서 바라볼뿐 털 하나 건드리지 않는 것이었다. 그제야 덕돌은 시름놓고 영화관으로 콧노래를 부르면서 갔다. 며칠 후 가을에 떨어지는 낙엽처럼 난데없는 편지가 순희 집에 날아와 떨어졌다. 다행히 편지는 주책머리 없는 월순이 먼저 받지 않고 순희가 먼저 받아 보았다. 순희는 콩콩 높뛰는 가슴을 억누르면서 겉봉을 뜯어보았다. 보지 않던 필체였다. 허나 그는 대뜸 덕돌이라는 것을 짐작했다. 공부는 특등 가게 잘하지만 고중을 가지 못할까봐 근심하면서 자기에게 투표해달라고 할 남자애는 덕돌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언제 일 밭에서 돌아왔는지 엄마가 불쑥 집안에 들어왔다. 정신을 잃고 편지를 거듭 읽고 또 읽는 순희를 보고 “누구한테서 온 거야?” 하고 물었다. “어마나!” “무슨 편지기에 그러니?” “편지는 무슨 편지. 삐치지 마세요.” 순희는 황급히 편지를 가지고 부엌에 내려가 성냥을 득 그어 불을 달아 아궁이에 걷어 넣고 벼 짚을 넣고 또 넣었다. 그녀는 다시는 또 덕돌에게서 연애편지를 받았다는지 연애했다는지 쓸데없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았고 애들에게 놀림을 받고 싶지 않았다. 더욱이 자기와 덕돌이 당장 있게 될 고중입학에 영향을 주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순희는 부지깽이로 아궁이에서 불타오르는 벼짚과 편지를 들여다보면서 쌔무룩이 웃으면서 나직이 혼자 말을 했다. “별 애를 다 보았다. 좋은 입을 뒀다 뭘 하고 이런 짓을 하니? 남 또 웃기자고. 나쁜 놈 새끼. 놔두는가 봐라.” 순희의 놀란 거동을 보고 엄마는 대개 짐작이 갔다. “너 남자애들과 작작 휩쓸려라. 자칫 전번처럼 덕돌과 연애한다고 동네방네 학교에까지 소문이 나면 큰일이다. 괜히 고중에 입학하지 못하겠다.” “됐습니다. 누가 듣고 무슨 일이 있는가 하겠습니다.” 그때 월순이 학교에서 돌아오는 바람에 그들 모녀간은 제꺽 입을 다물어버렸다. 순희는 이튿날 학교에 가서 덕돌을 보고서도 편지를 받은 일이 없는 것처럼 꾸며댔다. 그러자 덕돌은 혹시 자기 쓴 편지를 받지 못했는가고 추측이 들어갔다. 순희는 덕돌의 이상한 눈길이 자꾸 자기를 훔쳐보는 것을 보고 덕돌이 한 소행임을 육감적으로 느껴졌다. 순간 웬 일인지 소녀의 가슴이 더욱 세차게 할랑거리고 높뛰는 것을 어찌는 수가 없었다. 휴식 시간에 복도에서 덕돌을 딱 마주치자 순희는 저도 모르게 곱게 흘겨보더니 머리를 숙이며 얼굴을 귀밑까지 빨갛게 붉히었다. 그제야 덕돌은 순희가 편지를 받은 것을 알게 됐다. 한편 같은 날 은숙도 편지를 받았던 것이다. 허나 은숙이 먼저 그녀의 어머니가 받아 가만히 뜯어보았다. “이게 뭐야? 옛날 배고플 때 감자 누릉지를 어쩌고 뭐고 한 거 보지. 요게 저 아랫마을 덕돌이란 놈 새끼 한 짓이 아니야? 조꼬만 새끼 벌써부터 연애편지질이냐? 못된 놈의 송아지 새끼 엉덩이에 뿔이 난다더니. 이러고서도 고중으로 가?” 은숙의 어머니는 편지를 뜯어 부엌 아궁이에 넣을까 하다가 그만 두었다. “덕돌이 편지를 썼는지 붙잡아내 혼내 줘야지. 고놈새끼 쏠락거리면서 웃기지 않아? 흥!” 이때 은숙이 집으로 돌아왔다. “너 혹시 누구와 연애를 하는게 아니야?” “어째 그럽니까?” “이걸 봐라! 누가 쓴 겐가.” 은숙은 편지를 뜯어보고 또 뜯어보며 숙인 머리가 홍당무로 돼버렸다. “주의해라. 덕돌이 어떤 애냐? 전번에는 순희하고 잔치해 살겠다고 해 온 마을과 학교를 떠들썩하게 하더니. 이젠 또 옛날 누룽지 친구 어쩌고저쩌고 집적거리니?” 은숙은 머리를 천천히 들더니 두 손을 싹싹 비비며 빌었다. “엄마, 절대 학교나 마을에 나가 아무 말도 하지 마오.” 어린 딸의 말도 그럴 법해 어머니는 은숙의 손에서 편지를 빼앗아 갔다. “좋다. 이 편지는 내가 건사할게. 덕돌이 새끼 이제 또 편지 쓰는 날엔 이 편지까지 가지고 학교에 찾아가 한바탕 해낼 테다.” 은숙은 무릎을 꿇고 빌었다. “어머니, 제발 떠들지 마오. 소문 펴지면 난 어떻게 머리를 들고 학교를 다닌다고 그러오? 고중에도 가지 못하오.” 그제야 어머니는 두덜거리면서 편지를 건사했다. “덕돌이, 고 못된 올 종자 놈 새끼, 좋은 입을 가지고 투표해달라고 말할 게지. 간이 떨어지게 편지질은 왜 한다니?” 은숙은 벽 쪽에 마주 서서 손으로 맑은 눈물이 줄줄 흐르는 두 눈을 비비며 어깨를 들먹였다… 담임교원 김 경산 선생은 학생들 속에서 덕돌의 위신을 높이려고 처처에서 여론을 조성했다. 그는 덕돌이 쓴 글을 학급마다 돌아다니면서 읽어주는가 하면 지어 한어로 쓴 작문이나 “칠언률시”마저 붓으로 대자보로 써서 벽보 란에 붙여주었다. 고중입학을 추천하는 관건적인 시각이 닥쳐왔다. 두 개 학급에서 고중은 한개 학급만 모집하기에 기실 절반 밖에 가지 못하게 됐다. 진산선생이 천방백계로 덕돌의 위신을 세워주었기에 성욱이랑 아무리 추천하지 않고 헐뜯어댔지만 물거품으로 되고 말았다. 장영웅이랑 맹광철이랑 전성택이랑 모두 덕돌을 추천했다. 게다가 순희와 은숙이가 여학생들 속에서 장차 대학으로 갈 애는 덕돌 밖에 없다고 여론 조성을 한 바람에 여학생들도 대부분이 덕돌을 추천했다. 순희 차례가 되자 그녀는 발딱 일어나 제일 처음으로 덕돌을 추천했다. “덕돌은 우리 학교 뿐만 아니라 우리 전 진수해 공사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공부 천재입니다. 수리화 평균성적이 100점을 맞는 학생이 어디 있습니까? 수학콩쿠르에서도 번마다 100점, 그것도 참고문제까지 몽땅 풀고 1등을 했습니다. 이런 동무를 고중에 추천하지 않으면 누구를 추천하겠습니까? 우리 학교에서 덕돌을 고중에 입학시키지 않으면 후회할 겁니다. 큰 손실입니다.” 그러자 성욱이랑 “아우, 어우. 자는 덕돌의 각신 게 뭐.”하고 빈정거렸다. 순희는 돌아서서 성욱을 쏴줄까 하다가 영상해 그만두었다. (똥이 더러워 피하지. 무서워 피하니?) 은숙의 차례가 됐다. “나도 덕돌을 추천합니다. 공부도 잘하고 조직능력도 있다고 봅니다. 우리 학급에서 덕돌이 고중에 가지 못하면 안 됩니다. 덕돌을 추천하면서 한마디 충고하겠습니다. 이후에 남녀관계를 주의하기 바랍니다. 전도가 유망한 동무인데 이 결점을 고치지 않으면 장차 전도에 영향을 줄 겁니다.” “이제야 중점발언을 했다.” “옳다. 저 덕돌이 새끼 순희와 잔치해 살겠다고 했지 않고 뭐야?” 성욱이 떠들자 덕돌은 벌떡 일어나 고함쳤다. “난 근본 그런 말 한 적이 없다. 네 어찌 9촌 조카라는 게 이다지도 날 헐뜯니?” 교실 안에서 덕돌과 성욱의 무섭게 번쩍이는 눈길 사이에 갑자기 보이지 않는 번개가 치고 우레가 천지를 진동하며 울렸다. “누가 널 9촌숙이라니? 옛말이면 듣기나 좋지. 흥!” 경산 선생이 둘 다 말리지 않았더라면 당장 맞붙을 것만 같았다. 추천은 계속 이어졌다. 결과 덕돌의 이름 아래에는 바를 정자가 6개 하고도 2획이 꼬리 붙었다. 덕돌은 학급 학생들의 투표수가 32표나 돼 친구들인 장영웅, 맹광철, 동림, 순희, 은숙과 함께 고중입학선에 추천됐다. 물론 일을 잘해 이른바 사상품성이 좋은 성욱이도 겨우 26표, 딱 반수를 얻어 제일 마지막이름으로 추천됐다. 성욱과 친하던 리응과 종호, 상선도 추천됐다. 허나 손버릇이 나쁜 철주가 그만 고중에 추천받지 못했다. 철주는 누구 탈만해 입이 따발 3개나 걸 지경으로 나와 온 마을로 돌아다니며 누구와 행패를 부리지 못해 씩씩 거렸다. 경산 선생과 성환, 철봉은 덕돌의 고중입학 그 다음 보조로 학교 빈농 대표 이흥수와 학교 지도부 공작을 했다. 경산 선생은 성환과 철봉과 무슨 수를 대겠는가고 토론하고 흥수의 딸 해월이 추천받지 못한 일을 가지고 거래하기로 했다. 허나 흥수는 호의로 찾아간 경산선생을 외까풀 눈으로 흘겨보았다. “무슨 일이오?” “해월의 고중입학문제 때문에 왔습니다.” 흥수는 “흥!” 하고 코 방귀를 뀌더니 “김 선생이 담임교원을 어찌나 잘 했으면 우리 해월이 학생들에게 추천도 받지 못했겠어?”라고 하며 누런 이발사이로 침까지 튕겼다. “그래서 찾아왔습니다.” 경산 선생은 흥수 앞으로 허리를 굽히며 다가앉아 조용히 말했다. “거래를 합시다. 해월을 우리 책임지고 고중에 입학시키고 대신 덕돌의 고중입학을 학교에서 토론할 때 비준해 주십시오.” “안 돼!” 흥수는 딱 잡아뗐다. “어디 와서 뒷문거래를 하려는기여? 빈농 대표를 보기로 뭐로 보는가? 되지도 않을 소릴! 흥!” 허나 경산 선생은 맥을 버리지 않고 재삼 권고했다. “서로 좋게 하면 어떻습니까? 덕돌이도 구하고 해월도 구하면 좀 좋아 그럽니까? 잘 고려해보십시오. 황차 학교 지도부 결정은 빈농 대표 혼자 결정하는 것도 아닙니다. 학교 당 지부 장동영 서기는 덕돌의 고중입학을 지지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심중하게 결정하십시오.” 그래도 흥수는 경산을 보지도 않고 고집을 부렸다. “덕돌은 애비를 닮아 사상품성이 나쁜 애여. 류소기 ‘독서벼슬론’에 푹 물젖어서 공부밖에 모르는 애오. 장차 어떻게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위업을 그런 애들에게 믿고 맡기는가. 우리 해월이 고중에 가지 못하면 농촌에 나와 일을 잘해 추천 받아 대학으로 가면 돼. 장철생이랑 처럼 고중에 가지 못해도 빈농의 재교육만 잘 받으면 얼마든지 대학에 갈 수 있단 말이여.” “그래도 잘 고려해보십시오. 나도 해월과 덕돌의 일로 두 번 다시 찾아오진 않을 겁니다.” 진산 선생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흥수네 집 문밖으로 나가버렸다. 그때 해월이 정지에서 어린 애처럼 발버둥질을 치며 엉엉 울면서 떼를 썼다. “아버지, 날 고중에 붙여 주오. 엉~ 엉. 헝, 어 헝, 헝, 엉~ 엉” 춘실도 위방에 올라와 두 손을 싹싹 비볐다. “영감, 남의 새끼 눈을 멀게 하자고 제 딸의 눈도 멀게 하겠소? 황차 당신이 반대해도 덕돌의 앞길을 막지 못하오. 학생들이 추천했지 장동원 서기나 리종봉 주임이 동의하는 판에 당신 혼자 어쩌오?” “흥!” 흥수는 그래도 납작한 콧대를 세웠다. “종연까지 반대하면 상순의 금이야 옥이야 하는 외동아들이 어떻게 고중에 입학해?” “종연을 그렇게 믿소? 지난여름에 한족묘지꺼리에서 대갈통이 깨진 후 어리어리해졌더구먼. 너무 믿지 마오.” “종연까지 믿지 못하면 누굴 믿고 일하오? 황차 입당소개인 말도 안 듣고 어떻게 그 자식이 입당하오?” 춘실은 호들갑을 떨어댔다. “혹시 입당하려고 상순한테 타협할 수도 있잖소?” 흥수는 큰 소리를 탕탕 쳤다. “그 새끼, 림표처럼 양면파 수법을 쓰기만 하면 해봐라. 가만 놔두는가 . 그 놈 새끼 속까지 들어갔다 나와서 다 알아.” 흥수는 정지에서 떼질 쓰면서 우는 해월에게 마구 욕설을 퍼부었다. “그치지 못하겐? 어떻게 서둘렀으면 애들에게 추천받지 못해?” 허나 해월의 울음소리는 점점 더 자지러지기만 했다. 대대 우사 회의실에서는 학생들에게서 추천받은 학생들의 명단을 놓고 하나하나 혁명위원회와 당지부에서 토론하게 됐다. 회의에는 황종연, 이흥수, 김상순, 이학수, 이성수, 이계삼, 허영주, 박윤희 등이 참가했다. 먼저 경산 선생이 담임교원 신분으로 학생들을 쭉 소개했다. 그는 덕돌을 소개할 때 특별히 자세히 소개했다. “덕돌은 우리 학급 학습위원이고 전 교에서도 공부를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게 잘하는 학생입니다.” 그때 흥수가 콧방귀를 뀌었다. “공부를 잘 해 무슨 소용 있소? 사상품성이 좋아야지.” 그때 종연이가 제지시켰다. “다 듣고 말하오.” 흥수의 우멍한 외까풀 눈에 의아한 눈빛이 어리었다. (저 자식이 어데가 찰싹 붙어?) 경산 선생은 계속 소개했다. “덕돌 학생은 사상품성도 아주 좋습니다. 그는 자기 공부만 한 것이 아니라 ‘작은 선생’으로 돼 학습이 차한 학생들을 잘 배워주어 학생들에게서 위신이 아주 높습니다. 그는 학생들의 자리를 정돈하고 공부를 잘 하는 학생들이 차한 학생들을 이끌면서 호상 학습하는 열조를 일으켜 우리 반의 학습 성적을 눈 뜨이게 제고시켰습니다.” “원래 담임교원부터 ‘독서벼슬론’에 푹 전 사람이구먼. 그저 공부, 공부 밖에 모르지 않아.” 흥수가 또 부르튼 소리로 두덜거렸다. 종연은 싸맨 머리를 들더니 또 손시늉으로 제지시켰다. “덕돌 학생은 노동도 아주 잘하고 정치사상도 아주 좋습니다. 중학교에 올라온 후 하루도 아니고 몇 해 동안 우리 학급의 난로 불을 도맡다 시피 피웠을 뿐만 아니라 교연실의 난로불도 피웠습니다. 또 아동 단 단장으로부터 활동 참 참장까지 하면서 겨울 방학이면 자기보다 두세 살씩 이상 되는 애들까지 데리고 패용천산에 오르면서 군사훈련을 했고 겨울방학마다 돼지 똥을 열 수레씩이나 주어 생산 대에 바쳐 빈농들이 모상 판 둼으로 잘 쓰게 하지 않았습니까? 덕돌은 해마다 생산 대에 가서 빈농의 재교육을 받을 때에도 누구보다 앞장서 일을 잘 했습니다. 근 첫 패로 홍위병에 가입한 훌륭한 학생입니다. 때문에 덕돌의 고중입학을 대대에서 비준할 것을 건의합니다.” 경산선생이 덕돌을 하나 소개하는데 한 식경이나 걸렸다. 퉁퉁 부은 머리에 붕대를 감은 황종연이 무거운 입을 벌리더니 첫 포를 쏘았다. “경산 선생의 소개를 듣고 난 덕돌의 고중입학을 지지합니다.” “뭐라오?!” 흥수는 종연의 뜻밖의 말에 깜짝 놀랐다. 아니, 상순이나 경산 선생 그리고 회의장소에 있는 모든 이들이 자기 귀를 의심했다. 허나 종연의 발언은 명확했다. “덕돌은 김상순 서기를 닮아 애들을 이끌어 좋은 일을 많이 했고 사상품성도 좋습니다. 공부도 잘해 장차 큰일을 할 훌륭한 인재인데 그런 학생을 고중에 보내지 않으면 누굴 보내겠습니까? 여러분 안 그렇습니까?” 종연은 말을 마치면서 상순과 이계삼의 눈치를 흘금 곁눈질해 보는 것이었다. “더러운 새끼, 깨 그루에 앉은 새 새끼처럼 까불지 말라. 김 대장한테 알락거리면 널 입당시켜 줄 거 같니?” 종연도 숱한 당원들 앞에서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입당할 사람이니까. 더욱 원칙을 지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 덕돌 같이 훌륭한 학생을 고중에 입학하지 못하게 하면 역사에 죄를 짓는 것이 두렵지 않습니까? 개인감정으로 너무 그럴 필요 없다고 봅니다.” “옳소.” “덕돌의 입학을 동의합니다.” 여기저기에서 이구동성으로 덕돌의 고중입학을 동의한다고 표시했다. 지어 흥수의 형들인 성수나 학수마저 동의해 나섰다. (이렇게 될 줄을 알았더라면 경산 선생과 해월의 고중입학을 거래할 거 괜히 고집했지 뭐야?) 흥수는 후회막급이었다. 그는 발버둥질을 치며 엉엉 울던 해월이 떠올라 두 손으로 머리를 싸쥐고 회의실에서 훌 나가버렸다. (이젠 모든 게 끝장이야. 학교에서 토론해보았자 불 보듯 빤하지 않는가? 장 서기나 이 주임이나 모두 덕돌의 큰누나 춘자의 은사들인데. 상순이네 조손 3대가 반세기 동안 쌓은 기반에 와서 사는데, 흥! 진짜. 남의 눈을 빼려다가 제 딸의 눈을 멀게 하지 않았는가? 쳇!) 흥수는 아예 학교에서 토론할 때 참가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런데 장동원 서기가 어찌나 빈농 대표가 참가하지 않으면 무효라고 해서 마지못해 참가했다. 그는 눈을 뻔히 뜨고서도 회의에서 장동원 서기가 덕돌의 우점을 잔뜩 늘여놓아 덕돌의 고중입학이 통과되는 것을 구경했다.       진짜 닭 쫓던 개 지붕을 쳐다보는 격.       덕돌은 고중에 입학하게 됐다. 그는 하늘을 날듯이 기뻤다. 마음 속으로 자기를 도와준 김경산, 철봉과 성환 등 은사님들과 부모, 형님들과 친구들이 고마웠다. 그는 희망의 나래를 활짝 펼치고 이상의 세계로 훨훨 날아가기 시작했다.
161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106) 댓글:  조회:1337  추천:0  2018-06-13
                          10. 먹장구름이 뒤덮인 광활한 천지        금빛태양의 따뜻한 햇볕을 받아 만물이 우썩우썩 자라고 맑은 이슬에 수풀이 우거질 계절이었다. 허나 하늘이 어찌나 변덕스런지 맑은 하늘을 찾아 볼 수 없어 곡식이 잘 자라지 않았다. 옥수수도 극상해야 애들 키만큼이나 자랄까 말까 할 난쟁이었다. 설상가상으로 화가마 같은 뻘건 태양이 어찌나 불비를 퍼붓는지 밭고랑이 다 터질 지경으로 가물어서 옥수수 이파리마저 달팽이처럼 댈댈 감겨들고 말라버리었다.        먹장구름이 뒤덮인 광활한 천지에서 별의별 해괴한 일이 다 벌어지고 있었다. 상순은 이사해온 후 재차 함흥 대대 당 지부 서기로 선거됐지만 그만두었다. 이계삼과 허영주는 상순을 조용히 태평강 변에 데리고 가서 엄숙히 비평했다. “왜 당 지부 서기를 하지 않소?” 이계삼의 격한 말에 상순은 개의치 않고 자기 주견을 내놓았다. “대대 혁명위원회 나온 후 당지부는 유명무실하게 돼버렸습니다. 비당원인 종연이 혁명위원회 주임으로 돼 당지부를 쥐고 흔들면서 개 잡은 포수처럼 우쭐거리는 꼴조차 보기 싫습니다. 난 대대 당지부서기를 하면서 권력다툼에 혈안이 돼 미쳐 날뛰는 흥수하구 종연 사이에서 눈치를 보면서 옥신각신하기도 싫습니다.” 허영주는 상순의 날카롭게 비평했다. “정치는 감정으로 대하는 게 아니오. 동무는 원칙을 지키고 시비에 지려고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불의에 굴종하지 않았소. 헌데 어째 이번엔 이렇게 연약하게 나오오? 정치는 물러서면 물러설수록 밀리는 법이오. 동무는 한뉘 평생 수많은 기회를 놓쳤소. 삼도만 토비숙청 때 영장을 할 기회를 놓쳤고 영월구 공안국 국장마저 내놨소. 사람이 한뉘 평생에 그런 기회 몇 번 있겠소? 이제 대대 당지부 서기마저 하지 않으면 또 후회하게 될 거요. 전반 국면을 생각해 서기를 해야 하오.” 허나 상순은 자기 고집을 부렸다. “지금 정치를 할수록 당과 인민의 이익을 해치는 착오를 더 지게 됩니다. 오히려 한개 생산대를 맡아 백성들을 위해 일하는 것이 낫습니다. 진짜 종연과 흥수하구 날마다 대대에서 싸우기도 신물이 날 지경입니다.”       이계삼은 상순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돼지꼬리 되기보다 닭 머리 되는 게 낫을 수도 있지.”   “한개 생산대라도 잘 건설해 사원들이 배불리 먹고 살게 하는 게 낫습니다.”      두 노간부들도 더 말리지 않았다.      상순은 자진해 함흥대대 조개덕생산대 정치대장으로 됐다. 원래 조개덕은 한 개 마을이자 한개 생산대었는데 혁명위원회 주임 황종연의 제의에 따라 한족들로 제1생산대를, 조선족들로 제2생산대를 나누기로 했다. 종연은 고의적으로 상순을 애먹이느라고 지주와 부농들이 욱실거리는 한족생산대인 제1생산대 정치대장으로 보냈다. 상순은 민족단결도 강화할 좋은 기회가 왔다고 계급성분이 복잡하고 낙후한 1대로 가게 된 것을 좋아 했다. 명옥은 남편을 말렸다. “한족 곳에서 겨우 조선족마을로 되돌아왔는데 어찌 호박을 쓰고 돼지 굴로 들어가겠소?” 허나 상순은 고집을 쓰고 한족대로 갔다. “한족들은 부지런하고 남을 헐뜯지 않아 조선족들보다 더 좋소. 한족들은 벼농사를 잘 모르오. 내 가서 벼농사를 가르쳐주고 직접 논물도 봐주면서 한족사원들한테 벼농사도 배워주고 이밥을 먹고 살게 만들어야겠소.” 아내와 자녀들이 한사코 반대하면서 한족마을로 가지 않겠다고 하자 상순은 혼자 한족 대에 가서 일하고 집식구들은 조개덕 2대에 남겨두었다. 어느 날 공사 혁명위원회에서 자동차에 한 20명 되는 상해 지식청년들을 실어 마을에 부리어 놓았다. 찌프에서 뚱뚱한 간부가 내려 눈덕에 살이 져 퉁퉁 부은 거 같은 눈으로 거만하게 상순을 째려보면서 손을 내밀었다. “난 현 공안국 국장 김용만이오. 김 대장의 말은 많이 들었습니다. 오늘 상해 지식청년들을 실어왔습니다.” “오, 김국장이구먼. 수고 많습니다.” 상순은 영발에게서 김용만 국장의 말을 피뜩 들었지만 모르는 척 했다. 저쪽에서 영발은 용만을 보자마자 기가 꺾이어 토성 안 위생소로 들어가 버렸다. 종연과 흥수는 진작 기별을 받고 헐금씨금 뛰어와 용만 국장에게 허리를 굽신거리면서 머리를 조아렸다. 그들은 용만 국장 옆에 서 있는 상순을 흘겨보았다. 상순은 용만에게 물었다. “이 숱한 상해 청년들을 마을에 실어다 뭘 하오?” 용만은 찌프에서 뒤따라 내린 허영호 소장을 보면서 말했다. “광활한 천지에는 할 일이 많소. 상해 지식청년들이 조개덕에 와서 빈농들에게서 재교육을 받아야 하오.” 그는 짐을 부리는 상해 청년들을 가리키면서 상순에게 말했다. “저 청년들은 대도시에서 자라다나니 이런 시골 농촌마을엔 처음 왔소. 오기 싫어하는 것을 실어온 청년들도 있으니까. 사상정황이 복잡할 거요. 만약 불온분자나 파괴분자가 생기면 인차 허 소장에게 알리오.” 용만은 틀을 차리면서도 아주 능란하게 수작을 피웠다. “김 대장은 산전수전 다 겪은 노간부기에 상해지식청년들을 잘 교육하리라고 믿습니다.” 그는 상순을 한쪽으로 데리고 가서 조용히 뒷말을 이었다. “김 대장, 종연한테서 들을라니 김 대장은 이사 올 때 호구를 올리기 힘들었더구먼. 내 듣고서 허 소장을 보고 호구를 올려주라고 했소.” 기실 용만과 종연은 모두 반란파에 들어가 한바지를 입고 득세한 일맥상통한 자들이었다. 종연이 찾아가 고발하자 용만은 권력을 빌어 백방으로 상순의 호구를 올려줘서는 안된다고 허영호 소장을 압력을 가했다. 허나 허영호 소장은 은인이며 노상전인 상순을 배신할 수 없었다. 영월구 때부터 자기를 경찰로 배양했고 어머니한테도 무진 관심을 돌린 상순이 아닌가. 허영호 소장은 용만과 종연의 협박에도 물러서지 않고 상순의 호구를 올려 주었던 것이다. 용만은 상순이 그 정황을 모르는가 해 상순의 앞에서 아닌 보살을 떨었다. “한가지 부탁할 일이 있소. 상순 대장이 직접 입당소개인으로 나서서 혁명위원회 주임 종연을 입당시키오. 우리 서로 도우면서 살기요. 종연은 부대에 갔다 왔지. 정치 민감성이 있는 아주 전도유망한 청년이오. 입당하면 공사에 올려다 써줄 예산이오. 부탁하기요.” “알았소. 나도 이젠 나이가 들었으니 진작 청년들을 후비간부로 양성해야지. 다 내 잘못이오.” 상순의 진심에 찬 말을 듣고 용만은 한시름을 놓으면서 머리를 끄덕였다. “그럼 부탁하고 돌아가겠소. 김 대장, 무슨 일이 있으면 나한테 전화하오. 현 공안국에 연계하면 인차 찾을 수 있소.” 상순은 그저 머리만 끄덕였다. 흥수와 종연은 상순의 말에 적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항상 원칙을 내세우면서 불의에 맞서고 직설적이던 상순이 같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김용만의 찌프가 먼지를 일구면서 꼬리 빳빳해 달아났다. 흥수와 종연은 할 말이 가득한데 채 하지 못했는지 아주 아쉬워하면서 찌프가 마을 동구 밖 굽인 돌이를 돌아 사라질 때까지 손을 저었다. 상순은 상해지식청년들의 집체호를 새해에 짓기로 하고 먼저 그들을 마을에서 좀 괜찮다는 서너 집에 나눠 들게 일일이 배치했다. 짙은 눈썹아래 부리부리한 봉이 눈을 슴벅이는 상지민이라고 부르는 상해지식청년은 키도 크고 딱 서양 사람처럼 생겨 마을 청년들에게 꽤나 인기가 있었다. 상순은 집체호 호장인 상지민과 수호, 이행복 그리고 마대랑, 송 꼬마 등을 자기 집에 들게 했다. 상지민은 정치대장인 상순에게 부쩍 호기심을 가지고 이것저것 물었다. “우리 마을에 빈농이 몇 분입니까?” 상순은 “내까지 포함해 대여섯 집 밖에 안 되네.”라고 대답해주었다. “그래요? 그 나머지는 모두 중농 이상입니까?” 보통키에 귀가 뻘쭉하고 너부죽하게 생긴 수호는 호기심에 차 물었다. “그래. 대부분 지주와 부농이지.” 상지민은 버릇처럼 눈을 슴벅이면서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우린 빈농의 재교육을 받으러 왔지. 지주와 부농의 재교육을 받으러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상순은 상지민을 나무랐다. “벌써부터 그렇게 생각하면 못써. 여기 와서 지주나 부농의 교육을 받으라는 건 아니오. 나를 포함한 빈농의 말을 잘 듣고 농사를 배우면 돼. 알만하지?” “예!” 꺽다리 상지민은 발뒤꿈치를 척 붙이더니 군례까지 올리었다. 그는 꽤나 유모아적이었다. “너희들도 김 대장께 경례를 올려!” 그러자 수호와 마대랑, 이행복, 송 꼬마 등은 일렬횡대를 짓더니 차렷하고 군례를 척 붙였다. “우린 김 대장 말을 잘 듣겠습니다.” 상지민은 상순의 두 손을 잡고 맹세했다. 상순이 알고 보니 상지민의 아버지는 상해교통대학의 교수이었고 어머니는 상해 국제호텔 한개 부문 책임자라고 했다. 교양 있는 지식분자 가정에서 태어 난 상지민은 영어와 노어, 일어까지 안다고 했다. 그런데 지식분자는 더러운 아홉째이어서 지식분자 자녀일수록 더 빈농의 재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해 고중을 졸업한 상지민은 대학에 입학하지 못하고 이런 동북 변강 산골에 내려와 하향지식청년으로 돼 집체호 호장으로 됐다. 상순이 상지민 등을 금방 자기 집에 배치하고 나오는데 또 공사에서 찌프가 달려왔다. 찌프에서 허영호 소장이 내리고 그 뒤에 웬 곱살한 중년여인이 여자애 둘을 데리고 내려왔다. 허 소장은 상순과 손을 굳게 잡으며 인사한 후 뒤에서 내린 여인네를 돌아보며 소개했다. “이 분은 정성해 서기네 처남댁 김송선입니다. 문공단의 이름난 무용수입니다.” 허소장은 송선한테 상순을 소개했다. “이분은 이 마을의 원로 김상순 서기요.” 상순이 송구해하며 인차 고쳐 말했다. “아니, 지금은 조개덕 1대 정치대장이오.” “잘 부탁드립니다. 김 대장.” 송선은 허리를 구십도로 굽히며 인사했다. 상순은 어두운 그림자가 흐르는 외씨처럼 걀쭉하고 예쁜 송선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인사했다. “이런 산골에 와서 어떻게 고생하겠소?” 송선은 조심스레 김상순 대장을 바라보며 억지로 미소를 지어보였다. “괜찮습니다. 김대장 많이 관심해주십시오.” 상순은 뒤에 따라 내려온 열대여섯 살 돼 보이는 여자애와 열둬살 돼 보이는 여자애를 돌아보면서 이상해 물었다. “남편은 무슨 사업을 하기에 여기로 오지 않소?” 그러자 송선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상순과 허 소장을 번갈아 보며 오물거렸다. “저, 남편은 대학교 영어교수입니다. 지금 5.7간부 학교에 가서 재교육을 받고 있습니다. 여기로 올 거 같지 못합니다.” 상순은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아무리 정서기 처남이라고 해도 그렇지. 한집 식구들을 이렇게 억지로 갈라놓을 게 뭐요? 사람들이. 원, 참.” 송선은 코마루가 시큼해나 얼굴을 돌려 딸애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상순은 허 소장을 보고 어처구니없는 웃음을 웃었다. “에이유, 우리 마을에 숱한 노간부와 지식청년이 왔소. 이젠 무용수까지 왔으니 정말 별의별 인재가 다 왔구먼. 허허허.” 허영호 소장은 상순을 한쪽으로 데리고 가서 나직이 말했다. “정성해 서기 처남댁은 문공단에서 한다하는 무용수입니다. 그런데 반란파 두목 김용만과 한 짝패인 일룡의 수청을 거부했답니다. 설상가상 송선 동무는 김용만의 처 허해복과는 예술학교의 동창생친구인데 후에는 무용권위를 두고 적수로 됐답니다. 용만의 처 해복은 무용권위자리를 차지하려고 베개머리 송사해서 송선 동무를 이 산골로 쫓아 보냈답니다.” 허 소장이 떠나간 후 상순은 측은한 눈길로 송선의 가냘픈 두 어깨를 바라보면서 한숨을 후 내쉬었다. “가기요. 한족생산대어서 좀 습관 되지 않을 거요.” 상순은 먼저 송선 일가 세 식구를 자기 집에 데리고 갔다. “먼저 우리 집에 있다가 이제 생산대 창고 제일 동쪽 간에 구들을 놓고 들게 할 게.” “고맙습니다.” 뒤따라가면서 송선은 가냘픈 어깨를 들먹이었다. 그들이 늙은 비술나무 밑에 갔을 때었다. 종연과 흥수가 헐레벌떡거리면서 뛰어왔다. “김 서기, 아니, 김 대장, 이게 뭐요?” 흥수가 떠들어댔다. “당신의 눈에는 우리 대대 간부들이 보이지 않는기어? 노동개조범들이 왔으면 대대에 먼저 데리고 와 인사시켜야지.” “사람이 아무리 늙고 눈치 무뎌도 조직관념이야 있어야지. 참.” 종연도 한마디 하다가 속세를 벗어난 선녀같이 예쁜 송선을 보자마자 얼빠진 놈처럼 주춤 멈춰 섰다. 그는 멍해 호리호리한 송선의 몸에서 눈을 뗄 줄을 몰랐다. 순간 네모난 낯빤대기가 별스레 수수떡처럼 벌겋게 번지었다. (저 년을 꼭 재껴치울테야. 아이유, 저 호리호리한 몸매에 풍만한 젖가슴, 치마 속에서 출렁이는 하들하들 한 엉덩이, 두부살 같이 야들야들한 허벅다리. 오, 정말 사내 애간장을 불태우는 미녀구나.) 이상했다. 우멍눈으로 송선을 뚫어져라고 쏘아보던 흥수의 코등이 뻘겋게 달아올랐다. 그에게는 한가지 모병이 있었다. 젊고 예쁜 여자만 보면 말상이 찡그러지고 코등이 뻘겋게 달아올랐다. 그리하여 마을 사람들은 뻘겋게 달아오른 흥수의 콧등을 손가락질하면서 코빨개라고 별명을 부르면서 놀려댔다. 해가 뜨자 달이 진다고 송선이 조개덕에 내려오자 종연의 눈에서 점차 윤희가 사라져 갔다. 상순은 색마 종연의 수수떡처럼 벌개나는 낯빤대기에서 데굴데굴 굴리는 음충한 눈길을 눈치채고 임기응변해 송선 일가를 자기 집에 데리고 가지 않았다. 그는 송선을 돌아보더니 종연이네를 가리키며 일일이 소개했다. 그러자 송선은 또 허리를 굽히며 억지로 웃음지으며 인사했다. 종연은 단통 아랫배가 찡해 나며 온 몸에 욕정이 끓어 번져 참을 길이 없었다. 옆에 서있는 흥수는 비록 나이를 먹었지만 한뉘 평생 이런 미녀를 처음 보는지라 적이 군침이 목구멍으로 꼴깍 넘어갔다. 삽시에 그의 콧등이 뻘겋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종연은 흥수한테 눈을 흘기며 주먹으로 옆구리를 툭 쳤다. 뒤이어 그는 자기 음흉한 속내를 덮어 감추며 아주 점잖게 송선한테 관심부터 보였다. “송선 동무라고 했지. 어떻게 이런 산골에 와서 고생하겠소? 문공단 무용수라는데 농사일을 시키긴 아깝소.” 그는 흥수를 돌아보면서 손을 홱 저었다. “이렇게 하기요. 송선 동무는  한족대에 두기보다 대대 마을에 집을 잡게 하고 우리 대대 문예선전대 대장을 시키기요.” 그러자 송선은 허리굽혀 인사했다. “관심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동무는 우리 대대 문예선전대를 이끌어 무산계급현대혁명경극 ‘흥등기’ 같은 걸 조선말로 만들어서 사원들에게 공연하오.” 송선은 눈귀로 실웃음을 살살 지었다.      “꼭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잘 해보겠습니다.”       상순은 오히려 한시름을 덜게 됐다. 그러나 종연의 색마 본성을 꿰뚫어보고 적이 근심됐다. 함흥대대에서 저녁에 토성 안 대대 사무실 앞에 무대를 꾸리고 상해지식청년환영대회를 열었다. 상해지식청년들이 처음 내려왔기에 환영대회무대는 특별했다. 대대 혁명위원회 주임 황종연이 무대에 선코로 올라가 공식적으로 환영사라고 장황하게 늘여놓았다. 뒤이어 대대 혁명위원회 부주임 겸 치보 주임 이흥수가 주먹을 내휘두르며 사원들에게 상해지식청년들의 신변안전을 보호하며 생활상에서 자기 자녀들처럼 관심할 것을 요구했다. 상해지식청년 대표 상지민은 무대에 올라가 먼저 상해 지방말로 뭐라고 떠들어대더니 표준말로 빈농의 재교육을 잘 받겠다고 표시했다. 그는 입 반주를 하더니 현대경극 “흥등기”의 한 토막을 손짓 몸짓 해가면서 흥얼거렸다. “…구산 선생의 술 한 사발을 마셨더니 온 몸에 담이 커지고 더운 피가 끓어 번지네…” 이 산골에서 한해에 영화마저 몇 번 보지 못하다가 “혁명본보기극”이라는 현대경극 노래를 처음 듣고 사원들은 호기심으로 들끓었다. 상지민이 우멍한 눈을 슴벅이며 하는 뛰어난 연기에 모두들 박수갈채를 아끼지 않았다. 게다가 상해 여자애 황지민까지 무대에 올라가 노래에 맞춰 춤을 춰대고 마대랑이랑 군도를 빼들고 일본 놈의 무술연기를 해 흥을 돋우었다. 나중에 송선이 무대에 올라 우리 민족의 민요 “도라지”를 부르며 춤을 너울너울 추며 상해지식청년들을 환영하는 조선족사원들의 뜨거운 마음을 표시했다. 상지민은 무대에 뛰어올라가 송선에게 엄지를 내두르며 사원들을 향해 “재청을 요구합니까?” 하고 소리쳤다. 그러자 사원들은 “재청!”, “재청!” 하고 소리치며 우레 같은 박수를 쳤다. 송선은 무대에 나와 사원들에게 허리를 굽혀 경례를 드리고 잔등에 감췄던 탈과 상모를 쓰고 머리를 흔들며 상모를 돌리다가도 도라지 춤을 너울너울 추었다. 그녀는 잠간 춤을 멈추더니 감명 깊게 말했다. “이전에 우리 조선족들이 상모 춤을 추느라고 머리를 흔드는 것을 보고 일부 극좌적인 사람들은 ‘왜 머리 위의 꼬리를 자꾸 가로 흔드는가? 당과 사회주의에 불만을 품고 부정하느라고 도리머리 질 하는 게 아닌가?’라고 무함했습니다. 그 바람에 마음 놓고 우리 민족의 도라지나 상모 춤을 추지 못했습니다. 오늘 마음껏 추겠어요.” 모두들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냈다. 음악이 없는 형편에서 송선은 “도라지”에 “양산도”와 “농악무” 노래를 번갈아가면서 흥얼거리며 춤을 추었다. 환영무대는 하늘에서 내린 선녀와도 같이 날씬한 그녀의 춤판으로 해 고조에 올랐다. 특히 경극 밖에 보지 못하던 조선족사원들은 자기 민족의 무용을 마음껏 보고 흥이 나서 어깨를 들썩들썩 하며 어깨춤을 추기까지 했다. 상순은 송선의 무용표현을 보면서 아까운 인재가 이런 산골에 와서 썩는다고 마음이 아파하면서 한숨을 후 내쉬었다. 허나 무대아래에서 종연은 날씬한 송선의 출렁이는 풍만한 젖가슴을 노려보면서 온 몸을 부르르 전율했다. 그는 낯이 수수떡처럼 뻘겋게 달아올라 온 몸에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욕정을 억누르기 힘들었다. (어떻게 하면 저 미녀를 손아귀에 넣을까?) 흥수도 자기 생각이 따로 있었다. 그는 오래 동안 윤희에게 눈독을 들이면서도 종연이 무서워 다가서지 못했다. 종연이 송선에게 부쩍 관심을 보이자 이젠 때가 왔다고 여기었다. 환영대회 공연이 거의 끝나갈 무렵에 흥수는 슬그머니 토성 안에 콩나물처럼 꽉 박아선 사람들 속을 참빗질하면서 윤희를 찾았다. 윤희는 자지색 수건을 치고 턱을 고인 채 박영발의 옆에 서서 무대 위에서 송선이가 추는 춤을 구경하고 있었다. 흥수는 슬금슬금 뒤로 물러서서 윤희만 지켜보았다. 공연이 끝나자 윤희는 곧추 사람들 속에서 헤어나갔다. 그때 영발이 주위를 두루 살피더니 윤희에게 뭐라고 말하더니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사람들이 모두 헤어진 뒤에야 윤희는 주위를 둘러보더니 위생소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윤희는 독신이기에 살림집을 잡지 않고 홀로 위생소 침실에서 밥이나 대충 끓여 먹으면서 있었다. (벌써 자는가. 으흐흐.) 흥수가 토성 대문 어귀에 서서 위생소 쪽을 바라볼 때었다. 문소리가 덜컥 나더니 윤희가 위생소에서 나와 토성 밑에 있는 변소로 가는 것이었다. 흥수는 토성 밑에 두툼히 깔린 어둠 속으로 해 슬금슬금 변소 쪽으로 다가갔다. 변소에서 윤희가 오줌을 누는 소리가 쌕 나는 것이었다. (저 오줌 소리를 봐라. 노처녀 오줌소리 소 오줌소리 같구나. 흐흐흐. 빨 힘도 셀 거야.) 흥수가 입맛을 다시고 있을 때 윤희가 변소에서 나와 위생소 쪽으로 들어갔다. (어찔까? 여기서 덮칠까? 안 돼, 혹시 소리나 치면 들키기는 십상이야. 들어가서 해치우는 거야.) 이때 갑자기 토성 대문 쪽에서 발자국 소리가 났다. 흥수가 토성 밑에서 여겨 보니 꺽다리었다. (영발이? 저 년 놈들이 아직도 언감 간통을 해?) 마당의 검은 그림자를 본 윤희는 위생소 안으로 달아 들어가더니 문 걸개를 채우는 소리가 잘칵거렸다. 허나 검은 그림자가 다가가 문을 똑똑똑 두드리는 것이었다. “문을 여오. 나 영발이오.” (영발이 새끼 옳구나. 저 놈, 뭐 할락꼬 이 밤중에. 어디 보자.) 흥수가 욕하며 볼라니 위생소 안에서 윤희의 말소리가 들렸다. “밤중에 뭐예요? 남들이 보면 뭐라 하겠어요? 일이 있으면 내일 낮에 얘기 합시다.” “요즘 감기환자 많아서 어디 조용히 얘기 할 새 있소? 황차 황주임이 윤희를 항상 지키는데 어떻게? 빨리 문을 여오.” “안 돼요. 밤 말은 쥐가 듣고 낮말은 새가 듣는다는데 할 말이 있으면 내일 하세요.” “내 긴히 할 말이 있소. 들어가 말하기요.” “무슨 말인지요. 내일 봅시다.” “밤 말은 쥐가 듣는다는데 어떻게 바깥에서 말하겠소?” 그제야 두덜거리며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영발은 문고리를 쥐고 주위를 둘러보더니 슬쩍 들어가 문을 채우는 것이었다. 흥수는 숨을 죽이고 어둠이 깔린 토성 안 주위를 살핀 후 아무런 동정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도적고양이처럼 슬쩍슬쩍 마루에 올라가 허리를 굽히더니 위생소 침실 쪽으로 다가갔다. 흥수가 위생소 유리창문 밑에 웅크리고 앉아 귀를 도사리고 동정을 살폈다. 집안에서 영발의 말소리가 두런두런 들렸다. “네년이 황주임과 흐물 넙적거려? 네놈 새낄 시내 병원에 보내줄 거 같아? 보기도 메스껍다. 퉤!” “당신 아직도 나를 관리할 예산입니까?” “내 입이 터지는 날엔 네 년은 끝장이야.” 흥수는 숨을 죽이고 듣다가 “뭐 숨긴 거 있구나. 뭘까?” 하고 중얼거리며 위생소 안에 귀를 도사렸다. “내 전도까지 망쳐 놓고서도 여기까지 따라와서 내내 시끄럽게 굴어요?” (뭐라고? 저 연놈들이 원래 그런 관계였구나. 끝내 년놈들 꼬리 밟혔어.) 흥수는 당장 윤희를 자기 손에 다 넣은 듯이 웃음주머니가 흔들거리었다. “저리 피해요! 왜 이래요?” “내 말을 고분고분 듣겠니? 안 듣겠니? 내 입이 터지면 넌 이 마을에서 머리를 들고 있을 거 같니?” “당신도 머리를 들고 살겠구먼. 흥!” “난 황 주임의 입당 소개인이야. 황 주임이 날 봐준단 말이야!” (황 주임이 나는 봐주지 않겠구먼.) 윤희는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꼴깍 삼켰다. “시간이 없다. 누가 오겠다. 고분고분 말을 들어라.” “가만, 이전 일을 무덤까지 가지고 가겠다고 맹세할만 해요?” “응. 그래. 너와 내 이 똥구덩이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비밀을 고수하마. 흐흐흐.” “에이유, 이 영감을 어쩌겠니? 집안집 삼촌이라는게. 이게 뭔가요? 사람들을 웃기지 않겠어요?” 뒤이어 책상이 삐꺽거리는 소리가 나고 고양이가 우는 소리 같은 신음소리가 간간히 들리었다. 바깥에서 귀 솔깃해 듣는 흥수의 아랫배가 찡 해났다. (아이유, 저것들이.) 흥수는 점점 달아오르는 욕정을 억누를 길이 없었다. 그는 달아오르는 콧등을 슬슬만지다가 뒤로 슬슬 마루에서 물러섰다. 그는 마루 밑에서 닭 알만한 돌을 주어 유리창문에 뿌렸다. 찰라당! 순간 위생소 침실이 쥐 죽은 듯이 조용해지었다. 흥수는 어둠을 밟으며 쥐새끼처럼 토성을 따라 쪼르르 달려가 구석에 숨어버렸다. 토성 안에 물을 뿌린 듯이 무거운 침묵이 애타게 흘렀다. 한참 후 위생소 문이 살며시 열리더니 윤희가 헝클어진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살피는 것이었다. (놀랐지? 더러운 년놈들. 흥!) 흥수는 코 방귀를 뀌며 냉소했다. 이윽고 위생소에서 박영발이 슬그머니 나오더니 토성 안을 두리번거리며 꼬리 빳빳해 어둠속에 사라졌다. 달도 뜨지 않아 어둠침침하게 먹칠한 밤하늘에 먹장구름만 덮쳐와 광활한 천지를 갑갑하게 지지 누르고 있었다.                          제28장 동틀 무렵          1. 어두운 장막아래 희극       동녘 하늘이 희붐히 밝아왔다. 종달새가 지종지종 울면서 농부들의 파종을 재촉했다. 강남에 갔던 제비들도 광풍폭우를 무릎 쓰고 북으로 날아와 둥지를 트느라고 분주했다.       종연과 흥수가 짜고들어 고의적으로 상순을 조개덕에, 그것도 한족대에 보낸 것은 그와 조선족사원들 그리고 이계삼과 허영주, 허백호 등 노 간부들과 갈라놓기 위해서였다. 허나 상순은 대수로워 하지도 않았다.      (네놈들이 아무리 그런들 어쩔 테냐? 조개덕을 새 마을로 건설할 테야.)     상순은 새로운 건설계획을 세우고 조개덕 동구 늙은 비술나무 부근 둔덕에 벽돌공장을 세우기로 했다.      그는 사원대회에서 한족사원들에게 격조높이 동원했다. “여러분, 우리 함흥대대에 과수원이 있지 않습니까? 이제 우리 조개덕에 벽돌공장을 세우면 초가집을 허물고 벽돌집을 한채 한채 짓고 벼농사를 지어 이밥을 배불리 먹고 삽시다.” “좋소!” 한족사원들은 모두 두 손을 들어 환영했다. 상순은 동원령이 끝나자마자 사원들을 이끌고 괭이와 삽으로 쑥대와 잔나무가 키를 넘은 둔덕을 파헤치고 평평하게 고르고 피장을 치기 시작했다. 조개덕의 절반도 넘게 차지하는 지주나 부농들은 반란파들과는 달리 찍 소리 못하고 상순의 말을 고분고분 들었다. 상순은 함흥대대 당지부 서기를 벗어 멘 것이 얼마나 홀가분한지 몰랐다. (함흥대대에 벽돌공장을 세우려면 또 반대파 종연과 흥수가 나서서 말썽을 일으킬 거 아닌가? 허나 조개덕에는 반대할 사람이 없지.) 상순은 아무런 저애도 없이 벽돌공장을 짓고 벽돌을 구워내기 시작했다. 그 바람에 지주나 부농을 투쟁하는 투쟁대회를 연지 오래됐다. 오히려 함흥대대 당지부 서기를 그만두고 조개덕 한족대로 오니 여러 모로 마음이 편해 좋았다. 이젠 황종연과 이흥수 수하에 이계삼과 허영주 그리고 허백호, 정규상 등 로간부들을 투쟁하지 않아도 돼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어느 날, 혁명위원회 주임 황종연이 벽돌공장에 어슬렁어슬렁 기어들어왔다. 그는 한창 시뻘건 벽돌 가마의 불을 들여다보며 석탄을 퍼 넣는 상순을 보고 코 방귀를 뀌었다. “흥!” 그때 석탄을 떠 넣고 돌아선 상순은 석탄가루 검댕이 묻은 얼굴을 들어 종연을 흘겨보았다. 종연의 꼬리를 따라온 흥수는 저쪽에서 뻘겋게 구워낸 벽돌장을 쥐어 이리저리 보며 이쪽을 힐끔거렸다. 종연은 목에 지렁이 같은 핏줄을 세우면서 호통쳤다. “김 대장은 뭐요? 혁명을 틀어쥐지 않고 생산만 틀어쥐다니? 모 주석께서는 ‘계급투쟁을 기본 고리로 틀어쥐라”고 하지 않으셨소? 그래 모 주석의 최고지시마저 다 잊었단 말인가? 김 대장은 이게 뭐요? 대대 비준도 없이 함부로 벽돌공장을 세우다니? 지주들과 부농을 투쟁하지 않고 벽돌만 구워내니 누구 좋은 노릇을 하오? 정말 이렇게 하다가는 대장도 하지 못할 줄 아오.” 그러자 상순은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았다. “야, 종연아, 혁명은 빈 말로 하는 게 아니야. 생산을 틀어쥐는 실제 행동으로 혁명해야 한다. 넌 진짜 혁명을 모르면서 어떻게 입당하겠니?”       종연은 성이 꼭뒤까지 올라 꽥꽥 고함쳤다.      “김 대장이 막는다고 내 입당하지 못할 거 같소? 어디 두고 보기오.” 종연은 대뜸 네모난 낯판대기 뻘개나면서 두 손으로 벽돌무지를 떠밀어 무너뜨리면서 고래고래 고함쳤다. “당장 벽돌공장을 허무오! 그러잖으면 대대 민병들을 동원해 강제로 허물어 버리겠소!” 그러자 한족사원 왕청해가 종연의 멱살을 틀어쥐고 눈을 부라렸다. “이놈새끼, 우리 한족사원들이 김 대장 덕분에 새 벽돌집을 짓고 살려는데 벽돌공장이 무슨 원수를 졌다고 허물어?” 분노한 한족사원들은 괭이며 삽을 틀어쥐며 노한 눈길로 종연을 쏘아 보았다. 그 사태를 수습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지 모를 일이었다. 종연은 겁을 집어먹고 뒤로 비실비실 물러서면서 을러멨다. “지주, 부농 놈의 새끼들, 감히 혁명위원회 주임께 손을 대?!” 허나 한족사원들은 종연을 노려보며 팔을 걷고 조여들었다. 그때 상순은 분개한 사원들을 말렸다. “여러분, 절대 손찌검 하지 마오! 그럼 우리에게 도리 없어지게 되오. 황주임도 대갈통이 달린 놈이니까. 벽돌공장을 세운 걸 차차 동의할게요. 누가 감히 벽돌공장에 손을 대면 하늘이 용서하지 않을 겁니다!”   상순의 말에 한족사원들은 모두 이구동성으로 소리쳤다. “옳소!" "누가 감히 우리 대 벽돌공장을 허문단 말이오!" "우린 그 놈들과 결사적으로 싸울 거요!” “이 놈들이 반란이다! 반란!” 종연은 고래고래 고함치며 뒤로 물러섰다. 흥수가 앞으로 나서면서 위엄을 보였다. “네 놈들이 감히 대대 혁명위원회 주임과 맞서?! 몽땅 파출소에 잡아 갈테다!” 그 틈을 타서 종연은 흥수의 뒤에 비실비실 물러섰다가 꼬리 빳빳해 도망쳤다. 흥수도 외까풀 눈으로 격분해 모여오는 한족사원들과 상순을 번갈아 보다가 뒤로 비실비실 물러서다가 몸을 돌려 달아났다. 기세등등해 을러메던 황종연과 흥수는 며칠이 지나도록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그날 대대 사무실에 돌아간 흥수는 종연을 말렸다. “벽돌공장을 지은 일은 잘 된 일이오. 사원들을 새 벽돌집에 들어 살게 하면 오죽 좋겠소? 사회주의 제도 우월성도 보여주고. 사기 난 사원들이 혁명을 더 틀어쥐고 생산을 촉진할 게 아니오?” 그러나 종연은 세길 네길 펄쩍 뛰었다. “이 치보도 사상이 온전하지 못하구먼. 대대 간부들이 혁명에 대한 인식이 통일되지 않으니 조개덕에서 반란이 일어나지!” 허나 흥수는 입당 소개인인지라 종연을 어린애 타이르듯 했다. “내 말을 듣소. 오래지 않으면 입당할 발전대상인데 말썽을 작작 일으키란 말이오. 상순이 서기도 그만두고 조개덕에 물러갔는데 자꾸 신경을 건드려 무슨 좋은 일이 있소? 개도 막다른 골목에 이르면 문다는 말을 듣지 못했소? 그가 조개덕에 갔지만 이 마을은 그들의 조손 3대가 와서 개척한데다가 거의 60여 년 동안이나 기반을 닦아왔소.” 그 말에 종연이 사무상에 다가가 털썩 들어앉으며 좀 수긍하는 눈치가 보이었다. 흥수는 나직이 뒷말을 이었다. “입당하려면 상순의 지지를 받아야 하는기여. 그러잖으면 저 이계삼과 허영주, 허백호까지 몽땅 들고 일어나면 될 거 같소? 아직은 상순과 타협해야 해.” 그 말에 눈이 좀 뜨이었던지 종연은 흥수를 쳐다보면서 한숨을 후 내쉬었다. “그럼 먼저 입당하고 보지. 뭐!” 그러면서도 적이 내키지 않아 도리머리를 흔들며 두덜거렸다. “아직도 우리 상순의 눈치를 보면서 살아야 하오? 벽돌공장을 세워 벽돌을 구워내면 조개덕 사원들이나 좋은 노릇을 했지. 우리한테 무슨 소용 있소?” 그러자 흥수는 절충하기로 했다. “상순은 그런 사람이 아니오. 대공무사해 놔서 먼저 대대에 벽돌을 실어오고 후에 조개덕 사원들의 집을 지을 거요.” 종연은 계속 두덜거렸다. “이 치보는 아직도 상순을 그렇게 믿소? 내 원, 참, 미련을 가지지 마오.” 그 날 저녁에 흥수는 가만히 상순을 찾아가 좋은 말로 구슬렸다. 상순은 황소가 개를 쳐다보듯 하면서 “오뉴월의 쇠불알처럼 이 볼 저 볼 작작 치오.”하고 두덜거리며 벽돌공장 아궁이에 석탄을 퍼 넣었다. 흥수는 밸 같으면 콱 쏴주고 싶었지만 황종연의 입당문제를 생각하자 상순의 턱 밑에 기여들지 않을 수 없었다. “내 황 주임과 말해서 벽돌공장을 허물지 못하게 했네.” 허나 상순은 “해가 서산에서 뜨지 않겠소? 흥!” 하고 코웃음 쳤다. “정말이라니께. 김 대장은 대공무사한 분이어서 꼭 벽돌을 구워 먼저 대대에 실어오고 나중에야 조개덕 사원들의 집을 지을 거라고 말했어. 그래서 황주임이 가만있는기여.” 말귀를 제꺽 알아차린 상순은 삽질을 멈추고 몸을 돌려 흥수를 돌아보며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황 주임이 어쩌다가 셈이 들었소? 난 벽돌로 대대 사무실부터 지으려오.” 흥수는 제꺽 동을 달았다. “종연이 입당할 중점발전대상인데 그만한 정치 각오야 없겠수?" 흥수는 이젠 함경도 말을 꽤나 잘 했다. "김 대장이 그 애 입당을 많이 도와주오. 쉰이 넘은 우리 늙은이들이 이제 볼 게 있나? 젊은이들의 앞길을 잘 닦아주는 게 덕을 쌓는 일이지.” 상순은 한숨을 후 내쉬며 담배쌈지를 꺼내 담배를 말아 물었다. “그거야 그렇지. 황주임이 왼 고집을 부리지 말고 우리 말 잘 들으면 노당원들이 왜 그를 도와주지 않겠소? 허나 입당하려고 듣는 척 해선 절대 안 되오.” 상순도 이젠 책략을 고쳐 속내와는 달리 얼렁뚱땅 얼려넘겼다. 흥수는 내키지는 않았지만 겉으로는 수긍하는 척 하고 좋은 말을 한바탕 해대고 자리를 떴다. 어둠 속에서 달아다니던 쥐새끼들이 모두 자기 굴로 달아 들어가 노란 콩과 벼 알을 까먹고 있었다. 패용천산 양지바른 벼랑 위 가파론 산마루에 돌로 한 글자가 50미터씩 되게 새긴 “모 주석 만세!”란 허연 글발은 어찌나 큰지 부르하통하 남쪽에 있는 다른 마을들에서도 다 환히 볼 수 있었다. 그 글을 새긴 덕에 당과 당의 위대한 수령 모 주석에 대한 충성심이 높다고 종연은 비당적극분자로부터 중점발전대상으로 됐다. 물론 거기에는 황종연에게 아첨해 농촌을 벗어나려는 박영발, 황종연과 타협하면서 대대 권력을 양분하려는 흥수가 입당소개인을 해 힘쓴 덕분이었다. 게다가 윤희마저 황종연에게 아양을 떨며 아첨하는 판국이서 쉽게 통과되었다. 흥수는 종연과 박영발이 빈 틈을 타서 위생소 주사실에 가서 윤희를 기웃기웃 살폈다. 윤희는 한창 어린 애에게 주사를 놓다가 알은체 했다. “어머, 이 치보 왔어요?” “응, 그래. 환자 많소?” 윤희는 마스크를 벗고 얼굴의 땀을 훔치면서 말했다. “오늘은 괜찮습니다. 며칠 전엔 감기에 걸린 환자들이 많아 눈 코 뜰 새 없이 보냈습니다.” 아낙네가 어린 애 바지를 춰 입혀 업고 주사실에서 나가자 흥수는 음충한 눈길로 윤희를 쏘아보며 따졌다. “너 이년, 당과 인민에게 죄를 진 일이 없니?” (밤중에 홍두깨라더니 이건 또 무슨 감투 끈인가?) 윤희는 청청백일에 생벼락을 맞은 듯이 오도카니 서있었다. 그녀는 각일각 다가서는 흥수의 이상한 눈길을 피하며 뒤로 비실비실 물러섰다. “이년, 말해! 위생소에서 무슨 짓을 했니?” “아니, 건 무슨 말인가요?” “어째 계속 시치미를 따? 네 년이 위생소에서 박영발과 거의 날마다 간통한 거 모르는가 해?” “어마나!” 윤희는 두 다리에 맥을 잃고 바르르 떨다 환자 침대에 폴싹 물앉았다. 흥수는 자기 말이 비수로 돼 면바로 윤희의 심장을 찔러 빨간 피가 주르르 흘러내린 것을 보고 계속 칼질을 해댔다. “귀신을 속여도 내 눈은 속이지 못해! 어째 사원대회를 열고 날마다 투쟁하고 공사 파출소에 붙잡아 가야 알겠어? 정규상처럼 돼지 똥과 인분을 퍼 나르겠어?” 윤희는 콧등이 뻘개 으르렁거리며 다가서는 콧빨개를 쳐다보며 두 손을 마주 싹싹 비볐다. “이 치보, 제발 살려 주십시오. 제발, 난 어떻게 이 세상에서 머리를 들고 살아요?” “그럼 내 말을 듣겠나?” 윤희는 백지장처럼 창백하게 질린 얼굴을 들어 흥수를 바라보았다. “뭘 말인가요?” 흥수는 주사실 바깥 동정을 살피더니 윤희를 와락 끌어안고 풍만한 가슴에 손을 쑥 넣었다. “이러지 마세요.” 흥수는 자기 손을 잡아 빼는 윤희를 쏘아보며 을러멨다. “어째 거절할 거야?” “누가 보겠어요.” 이때 위생소 소장실 쪽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덴겁한 흥수는 윤희 가슴에서 손을 빼면서 나직이 쑤근거렸다. “저녁에 보자!”  윤희는 마른기침을 “에헴, 에헴” 깇으면서 복도에서 멀어져가는 흥수의 발자국소리를 들으며 침대에 풀썩 물앉았다. (내 운명은 왜 이다지도 기구할까? 저 콧빨개를 어쩔가?) 그녀는 가냘프게 어깨를 들먹이었다. 그때 복도에서 마른기침 소리가 나더니 뜻밖에도 황종연이 주사실에 들어섰다. 윤희는 제꺽 눈물을 훔치며 침대에서 일어섰다. “혈관주사를 놔주오. 어째 감기에 걸린 거 같소.” 윤희는 제 정신이 없었다. 다른 때 같으면 어린애 정맥주사바늘이라도 단번에 찔렀으련만 종연의 팅팅 살아난 피 줄에도 주사바늘을 제대로 박지 못했다. 서너 번 주사바늘을 찌르자 종연이가 재채기를 하더니 두덜거렸다. “아파 죽겠소. 젠장!” “미안해요. 황 주임.” 종연은 피가 흐르는 주사바늘자리를 개의치도 않고 낯빤대기 수수떡처럼 뻘개 음충한 눈길로 윤희를 뚫어지게질 바라보았다. “박 간호사도 마흔 고개에 오르니까 주사바늘도 온전히 꼽지 못하는구먼. 빨리 맨발의사를 배양해야겠소. 박호사를 믿다간 동지섣달에 한지에 방아를 걸겠소.” 윤희는 주사를 놓으면서 속으로 욕했다. (늑대 같은 놈.) “근심하지 마오. 우리 함흥대대에서 내 말만 잘 들으면 위생소에서 쫓겨날 근심 할 필요 없소. 허나 내 말을 거역하면 당장 18층 지옥에 갈수도 있소. 알만하오?” 윤희가 머리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자 종연은 거친 숨소리를 내면서 지지벌건 네모낯을 윤희의 귀밑머리를 간지를 지경으로 머리를 바싹 들이대고 나직이 중얼거리었다. “언제든 문을 두드리면 열란 말이오.” 윤희는 홧홧 열기를 풍기는 종연의 뻘건 네모낯을 피하면서 속으로 계속 욕했다. (네 놈도 달려들 궁리지. 어쩜 이 산골에는 맨 색마들이야?) 해가 서산으로 넘어가자 윤희는 위생소 문고리를 단단히 걸고 두 손을 맞잡고 침대머리에서 왔다갔다 서성거리였다. 그녀는 열십자로 반창고를 붙인 유리창문을 내다보며 무서운 생각부터 들었다. (전번에 저 유리는 흥수가 깬 걸 거야. 그러지 않으면 어떻게 우리 일을 알 수 있겠는가?) 밤이 깊어가면서 바깥이고 위생소 안이고 어둠이 두툼히 깔렸다. 무시무시한 공포가 슬밋슬밋 구석구석에서 몰려오고 있었다. 윤희가 속이 두근닥근해 침대에 누웠다 일어났다 하면서 불안해 할 때다. “똑똑똑.” 출입문 쪽에서 노크소리가 들렸다. 윤희는 발딱 일어나 두 손을 맞잡고 바장이었다. 이런 일은 여러 번 당했지만 오늘 저녁에는 심장이 가슴 바깥으로 튀어나가는 것 같고 머리기가 곤두섰다. (난 어떻게 해? 어떡해?) 이때 문을 더 자지러지게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윤희는 바들바들 떨었다. “누굴까?” 윤희는 중얼거리며 문 쪽으로 살금살금 걸어가 문고리를 잡고 바깥 동정을 살폈다. 바깥 밤 사람이 벽에 딱 붙어 서서 누군지 알 수 없었다. “누구예요?” “나요, 나! 문을 여오.” (이 치보? 어쩌면 좋을까?) “빨리 문을 열지 못하겠어? 어째 똥 짐 메고 싶어?” 윤희는 문고리를 쥐고 망설이었다. (한 놈이면 어떻고 두 놈이면 어떠냐? 눈을 찔끔 감고 고비를 넘기자. 똥 짐을 지며 수모를 당하기보다야 낫겠지.) 이래서 하는 말이다. 여자란 한번만 정조가 열리면 터지는 홍수와도 같아 걷잡을 수 없었다. “빨리 문을 열지 못해?” 그때 문이 절컥 열렸다. 흥수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슬쩍 들어오자마자 윤희를 와락 끌어안고 키스벼락을 안겼다. “조급해 하지 마세요. 문이나 걸어야죠.” “오, 그래, 어서 잘 걸어.” 흥수는 누가 볼까봐 두려운 듯이 먼저 위생소 주사실 안으로 씽 들어가 버렸다. “어서 와. 뭘 꾸물거리는 거야?” 윤희가 문가에서 문고리를 절컥거리면서 오지 않자 흥수는 속에서 욕정이 끓어 번지다 못해 괴여 번지었다. 더는 참을 수 없어 그는 주사실에서 나와 윤희를 번쩍 들어 안고 들어갔다. “문을 잠그는 게 뭐 그리 오래?” 흥수는 씩씩거리면서 윤희를 침대에 내려놓고 깔고 들어앉았다. 침대가 삐꺼덕거렸다. “이년 이 침대에서 사내들을 얼마나 많이 끌어들여 한바탕 굴러댔으면 침대가 다 찌그러지게 삐꺼덕거려?” “헛소릴 작작 쳐요.” 그는 윤희의 웃옷부터 빡빡 벗기면서 빈정거리었다. “모르는가 해? 전날 네년이 영발과 이 침대에서 개짓을 한 거. 헤헤헤. 울긴 왜 울어? 내 말 고분고분 들으면 누구한테도 말하지 않을게. 지금 아니? 황 주임은 널 대전일 시키고 대신 송선을 위생소에 들여앉히려고 맨발의사로 배양할 예산이야. 내 너를 보호해 주지 않으면 되겠어? 내일부터 당장 똥 짐을 메면서 고생하지 못해서.” 흥수는 오래 동안 탐내오던 윤희의 발가숭이 몸이 홀랑 들어나자 어루만지고 핥으면서 계속 너덜거렸다. “아이고, 이 몸이 반지르르 한 게 딱 태평강 바닥 조약돌 같구나. 허허허. 오, 홍, 어이구.” 윤희는 자기 몸을 메주 밟듯 하는 흥수의 오르내리는 손이 징글스럽고 어우르면서 하는 짓이 메스꺼워 온 몸이 오싹해났다. 허나 그녀는 노동개조를 하기 싫어 이를 꼭 악물고 억지로 참아야만 했다… 드디어 흥수는 목석같이 누워 있는 윤희의 차디찬 몸 옆에 스르르 맥없이 굴러 떨어졌다. 그는 긴 한숨을 후- 톱아 내더니 윤희를 욕했다. “이년, 죽은 돼지처럼 누워 있기만 하니 무슨 흥이 나겐?” 똑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 “가만있어!” 탕탕탕! 문을 잡아 두드리는 소리가 자지러졌다. 드디어 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흥수는 벌거숭이 된 채로 황급히 침대 밑으로 기어들어갔다. “어째 인차 문 열지 않았소?” 목소리가 귀에 익었다. 윤희는 치마를 입을 새도 없이 침대에서 발딱 일어나면서 침대 위에 널린 흥수의 옷을 훌 걷어 침대 밑에 처넣었다. 흥수는 침대 밑에서 감히 옷을 입을 엄두도 내지 못했다. “불을 켜지 말라.” (종연이구나. 이걸 어쩌나?) 흥수는 침대 밑에서 옷으로 몸을 가리며 옹송그렸다. 이때 벌써 종연이 침실에 들어섰다. “내 뭐랬는가? 내 말을 고분고분 듣지 않으면 18층 지옥에 걷어 넣겠다는데.” “금방 나가 문을 열려고 했어요.” “문을 걸지 않았던데. 문고리가 마사지지 않았어?” 사실 윤희는 오늘 저녁에 뛰어든 놈들을 망신시키자고 고의로 문고리를 채우는 척 하면서 되 열어놓았던 것이다. 흥수나 종연이나 그런 줄도 모르고 있었다. “왜 인차 대답하지 않았어.” “이러지 마세요.” “뭐라고? 네가 정말 이따위로 나오면 위생소에서 쫓아내고 송선을 이 자리에 앉힐 줄 알아라. 정규상을 앉히든지. 고분고분 말을 들으란 말이야.” (더러운 놈, 송선을 눈독들이면서도 윤희를 놓지 않아?) 침대 밑에서 흥수는 욕하면서 숨을 죽이고 하회를 기다렸다. “황주임, 난 황주임보다도 열 몇 살이나 이상이오. 황 주임은 이 다음 장가가지 않겠소? 입당하지 않겠소? 중점발전대상이 이렇게 하면 어떻게 입당해요?” “네깐 화냥년이 누굴 교육하려고 드니? 잔 말 말아. 네 년이 내 입당을 도와주지 않으면 가만 놔둘 거 같아?” 종연은 흥수와는 달리 다짜고짜 윤희를 침대 위에 깔고 넘어갔다. “이 년이 진작 쫄딱 벗었어? 날 기다렸지? 왜 온 몸이 축축해?” 흥수 머리 위 침대에서 호랑이들이 서로 물어뜯으며 싸우는 것 같았다. 흥수는 침대 밑에서 속으로 연놈들을 욕하면서도 윤희의 열기 띤 신음소리에 온 몸을 바르르 떨었다. 이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누구야?!” 윤희는 종연을 밀어내면서 급기야 소리쳤다. “도적이야!” 종연도 흥이 깨져 어둠 속에서 옷을 주섬주섬 주어 입으면서 욕지거리를 퍼부었다. “박영발, 그 개새끼, 내 흥을 깨뜨렸어.” 전등불이 짤깍 켜졌다. 윤희는 치마를 대충 주어 입다가 종연이 옷매무새를 보고 킬킬거렸다. 종연은 어찌 황급했으면 바지 위에 팬티를 껴입은 것이 아니겠는가! “이게 뭐야?” 황종연도 웃으면서 침대에 걸터앉아 팬티와 바지를 벗어 다시 입었다. “간 거 같소. 또 할까?” “안 되오. 밤이 깊었으니 어서 가오.” “글쎄 오늘 다 끝내겠소? 이후엔 내가 온 눈치면 문을 두드리지 않아도 문을 여오.” 종연은 바지를 훌 춰 입었다. 그는 윤희를 끌어안아 빙빙 돌리다가 침대 위에 쾅 내려놓았다. 꽈당! 요란한 소리와 함께 그만 침대 널판이 펄러덩 꺼지었다. 그 바람에 윤희는 침대 밑 땅바닥에 퉁 떨어졌다. “아이쿠!” 침대 밑의 흥수는 깔리어 그만 허리가 접질릴 정도였다. “이게 무슨 소리야!” 황종연은 침대 널을 들다가 자기 눈을 믿지 못할 참경에 깜짝 놀랐다. 그는 얼빠진 사람처럼 입을 딱 벌리고 멍청히 서서 침대 밑을 쏘아보았다. 침대 밑에서 글쎄 벌거숭이 흥수가 피 흐르는 머리를 싸안고 슬금슬금 기어 나와 후닥닥 바깥으로 도망치지 않겠는가! 종연은 윤희의 귀 쌈을 찰싹 갈겼다. 뒤이어 그는 침을 퉤 뱉고 바깥으로 비파소리 나게 나가버렸다. 토성 밖 어디에선가 동네 개들이 왕왕 짓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었다. 윤희는 허물어지듯이 주사실 침대에 쓰러져 서럽게 울었다. 그녀는 자기 기구한 운명이 서럽고 자기를 무참히 짓밟은 세 사내들을 증오하는 불길을 억누를 수 없어 울고 또 울었다. 먹장구름도 토성 안 어둠의 장막아래 벌어진 희극을 보기 싫은듯이 두툼한 어둠으로 삼라만상을 덮어버렸다.  
160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105) 댓글:  조회:1152  추천:0  2018-06-07
                     7. “내 몫까지 공부해 달라”        연변의 4월 중순은 화창한 봄날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여기 교하는 아직도 싸늘했고 여기저기 아직도 잔설이 남아 있었다. 어떤 큰 물도랑에는 겨우내 두텁게 얼어붙었던 얼음이 채 녹지 않은 채 싸늘한 봄바람에 찬 기운을 풍기며 햇볕에 번쩍이고 있었다. 이 맘 때면 연변에서는 밭갈이가 거의 끝나갔지만 여기서는 이제야 밭갈이 준비로 가대기를 내다 보습 날을 닦았다. 상순은 황하채소생산대대의 논물기술원으로 왔기에 벼 냉상모판을 만든다, 벼씨를 소금물에 불궈 소독한다 하면서 바삐 보냈다. 중국 어디로 가나 생산대대마다 계급투쟁을 하지 않는 곳이란 없는 것 같았다. 비록 교하는 ‘문화대혁명’ 바람에 정치 백열화가 된 연변보다는 덜 했지만 여기서도 지주와 우파 그리고 이른바 현행반혁명을 투쟁하고 있었다. 그러나 연변과는 달리 황화채소대대에는 상순처럼 항일전쟁 때 유격대원 출신에 해방 후에 대대 당지부 서기라도 한 조선족간부가 없었고 오랜 “노집권파”, 이른바 노간부가 없었다. 그래서 상순은 이사해 오자마자 당지부 부서기로 돼 존중을 받았다.      채소대대에는 제3대가 조선족마을이고 나머지 두개 생산대는 한족생산대었다. 상순이네는 한족들이 사는 제2생산대에 이사 왔기에 편안했다. 한족들은 “문화대혁명” 바람이 아무리 불어도 서로 덜헐뜯었다. 자기 발등에 불이 떨어지지 않으면 남의 일에 삐치려고 하지 않았고 남을 조만에 건드리지 않는 것이 그들의 우점이었다. 진짜 한족들은 자기 안해를 건드리지만 않으면 남이야 살인했든 뭐 했든 제 눈으로 보고서도 눈을 질끈 감고 모르는 척했다. 허나 일단 자기를 건드리거나 원수를 맺기만 하면 10년이고 20년이고 대대로 원수치부를 했다. 또 좋다하면 자기 밸도 다 빼줄 상한다.  의리심이 강한 것이 그들의 특성이라고 할 수도 있었다. 황화대대 이 서기는 오히려 상순을 항일 노투사라고 하면서 아주 존중했고 무슨 일이 있으면 그와 토론한 후 결정했다. 상순은 이런 한족들의 성질을 오래 전부터 알고 있는 터이라 쓸데없는 일에 삐치지 않고 그들과 화목하게 지냈다. 하여간 상순은 쇠 물도 녹일 도가니 속 같은 함흥대대를 벗어나 고요한 황화채소대대에 온 것이 얼마나 홀가분하고 좋은지 몰랐다. 보리 고개를 바라보는 함흥대대에서는 이 때면 벌써 쌀이 떨어져서 일성 골 안의 한족들한테 가서 강냉이 쌀이나 수수쌀을 꿔 먹고 가을에 가서 꿔온 수수쌀 한근에 입쌀 한근 두냥씩 갚아주어야 했다. 그러다나니 꿔 먹은 쌀을 가을에 입쌀로 갚고 나면 이듬해 또 보리고개를 넘기 힘들었다. 허나 여기 황화채소대대에 오니 쌀은 로동자들처럼 배급받을 수 있어 쌀 고생은 덜 했다. 연변에서 가지고 온 쌀을 다 먹자 생산대에서는 상순에게 옥수수쌀을 두 가마니나 배급해주었다. 게다가 맏딸 춘자가 배급을 탄 밀가루랑 드문드문 가져다주어 칼면도 해먹고 강냉이떡을 해 먹을 수 있어 쌀 고생은 별로 하지 않았다. 상순이 키운 벼 모가 심한 저온 냉해 년에도 잘 자라 남새대에서 처음으로 제때에 벼모를 냈다. 상순이 이른 아침에 나가 달을 지고 돌아오면서 온 정성을 다해 논물을 보았기에 논밭에서 벼모가 잘 자라 논밭 옆의 길을 지나가던 행인들은 상순에게 엄지를 내두르면서 혀끝을 끌끌 찼다. 상순은 일약 합격된 논물관리원으로 자리매김을 했다. 그런데 셋째사위 동준이네 이모 집에 빌려 들어서 살았는데 장구지책은 아니었다. 그리하여 상순은 연 며칠째 피장을 쳤다. 명옥은 학교에 가서 외손자 성춘과 성일을 봐주었다. 첫달에 춘자는 자기 애 둘을 본다고 어머니한테 30원을 가져왔다. 명옥은 맏딸이 내미는 돈을 받으려고 하지 않았다. “얘, 좋은 제 외손자를 봐주고 돈을 받아서야 되니?” “엄마, 남한테 애를 보이면 15원을 내야 하는데 좋은 자기 엄마를 주는데 뭐 아깝겠소?” 명옥은 첫달에 마지못해 15원만 받고 두 번째 달부터 춘자가 뭐라고 해도 일전도 받지 않았다. “얘, 남을 웃기겠다. 가져가라.” 춘자는 별 수 없어었다.      “그럼 이 돈은 엄마 나를 준 셈 치고 가져다 잘 쓰겠소.”       후에 사돈집에서 둘째아들을 세간내겠다고 하면서 집을 내라는 바람에 상순은 있을 곳이 없어 맏딸 춘자네 외통 집에 들어가 얹혀 살았다. 맏딸 춘자네 집이라야 구들이 열대여섯 평방미터 밖에 되지 않는 손바닥만 한집이었다. 게다가 한족 집구들이어서 비좁은 집에서 아홉 식구가 정말 돌아누울 자리도 없었다. 춘자네 부부는 자기네가 이사 오는 것을 동의한 터라 불편한대로 부모와 함께 한 구들에서 살아야 했다. “빨리 집을 짓고 나가야지. 사위 보기 미안해 어쩌니?” 상순은 이렇게 중얼거리면서 생산대와 말해서 집터를 잡고 짬짬이 피장을 쳐서 집을 짓기 시작했다. 설상가상으로 한족마을에 이사해오니 한족들이 은자와 성숙을 욕심내서 혼사 말을 어찌나 거는지 당혹스럽기만 했다. 지어 한족 총각들이 은자와 성숙과 어찌나 지분거리는지 딸애들이 집에 돌아오면 고충을 털어놓으면서 한족마을에서 살지 못하겠다고 빌빌거리었다. 게다가 연변에서는 공부를 잘하던 덕돌이 한족학교를 다니면서 공부를 따라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설상가상으로 그는 한족 건달무리들과 어울려 탄광 시내로 돌아다니면서 싸움을 하고 지어 학교로 가는 척 하고 마을을 떠나 중도에서 술이나 마시고 계집애들과도 지분거렸다. 덕돌은 한반 뒤좌석에 앉은 왕춘영(王春荣)이라는 애가 이뻐보여 자꾸 지껄였다. 쌍태 머리를 땋아 올린 그 여자애는 우유빛 얼굴에 운우지정을 그리는 듯한 외까풀눈이 생글생글 웃음 지을 때면 퍽 유혹적이였다. 덕돌은 그 여자애를 날마다 보면 오금을 쓰지 못할 정도이었다. 그런데 춘영도 덕돌을 보고 웃음을 살짝살짝 보내면서 유혹했다. 그녀는 자기 필기장을 내밀면서 생글방글 웃음을 보냈다. “조선어로 내 이름을 써 달라.” "엉? 왜?" "기념으로!" 덕돌은 싱글벙글 하면서 “좋아. 내 써 줄게.”라고 하더니 필기장을 가져다 왕춘영의 이름을 멋있게 써주느라고 애썼다. “와, 멋있다. 이게 정말 내 이름 맞지?” 왕춘영은 입을 함박만큼 활짝 벌리고 웃으면서 필기장을 광순한테 내밀어 보였다. 광순은 덕돌의 셋째매형의 사촌여동생이었다. 그 애는 덕돌보다 두 살이나 이상인데 소학교 1학년을 조선학교를 다녀서 한글을 알아보았다. “맞아. 이거 네 조선 이름이야.” “와, 좋다. 난 조선이름을 가졌어.” 춘영이 좋아서 필기장을 안고 교실에서 어린애처럼 퐁퐁 뛰자 리려평이랑 진해화랑 다른 한족 여자애들도 조선이름을 써달라고 덕돌에게 졸랐다. 덕돌은 그 애들에게 일일이 조선이름을 정성껏 써주었다. 그리하여 덕돌은 한족학교 공부는 따라가지 못했지만 한족 여자애들의 호감을 사게 됐다. 여자애들은 점심이 되면 맛있는 돼지고기채랑 덕돌에게 집어 주군 했다. 특히 춘영은 맛있는 소고기랑 닭고기랑 많이 사다가 덕돌에게 가만히 주었다. 그 덕분에 덕돌은 춘영의 고기를 잘 얻어먹고 좋아 입이 함박만해졌다. 심지어  춘영과 가만히 만나 영화 보러 가기도 했다. 춘영은 덕돌이 학교에 오지 않으면 용대랑 보고 “어째 덕돌은 오지 않아?” 하고 묻곤 했다. 그러자 용대랑 덕돌을 놀려주었다. “춘영의 신랑, 제일 고운 각시 얻어 좋겠어.” 기실 용대도 슬그머니 춘영을 좋아했는데 춘영이 덕돌을 좋아하는 눈치자 은근히 질투했던 것이다. 어떤 때 춘영이가 말을 듣지 않는다고 덕돌은 그만 삐져서 춘영의 책상에 모래를 한줌 쥐어 올려놓았다. 그리하여 여담임 왕숙혜 선생한테 들켜 된욕을 치르기도 했다. 지어 왕 선생은 덕돌의 집에까지 찾아와서 친구 춘자한테 덕돌의 소행을 고발했다. 그러자 덕돌은 점점 학교에 가기 싫어 집에서 싸준 도시락과 책들을 가방에 넣어 메고 학교로 가는 척 하면서 집을 떠나서는 용대랑 용구랑 함께 학교로 가는 도중 탄광에 가서 놀았다. 그들은 석탄을 실은 소철에 뛰어올라 몇 리씩 호사를 보다가도 뛰어내리면서 놀았다. 어떤 때에는 학교에 가지 않고 영화관에 가서 영화를 보았다. 학교로 가다가 자기들을 놀리는 한족애들을 때려놓기도 했다. 한족 애들은 덕돌이랑 어찌나 미웠는지 그들이 나타나기만 하면 손벽을 치면서 놀려댔다. “고려새끼 큰 바지가달, 애를 한무리 낳는다!” 그러면 그 놀리는 소리에 용대랑 용구랑 반격하군 했다. "낳은 애들은 몽땅 너네 할아버지다!” 하여 쩍 하면 한족 애들과 무리 싸움을 하였다. 그래서 덕돌이랑 맞을 까봐 가까운 길로 학교로 다닐 수 없어 멀리 에돌아 다니지 않으면 안됐다.     “안 되겠다. 여기에 애들을 뒀다간 한족 집에 시집가지 않으면 건달이 되겠다.” 명옥은 춘자를 불러다 토론했다. “야, 저 덕돌을 연변에 보내 공부를 시켜야겠다. 여기 뒀다간 건달이 되겠다.” 춘자는 무서운 눈길로 동생을 흘겨보았다. “야, 어째 학교는 가지 않고 애를 먹이니? 내 낯이 다 깎인다. 왕 선생은 공사에서 회의할 때마다 네 말을 한단 말이다. 수학은 잘 하는데 다른 공부는 몽땅 낙제라고.” 덕돌은 겁기 띤 눈으로 큰누나를 흘금 훔쳐보며 입이 뽀로통해 중얼거렸다. “난 한족학교를 다니지 못하겠소. 이전에 소학교에서 한족 반을 다닐 때도 공부를 따라하지 못해 그만두지 않았소? 그때도 괜히 재수 없이 ‘류소기를 타도하자’를 한어로 잘 쓰는 바람에 한족 반에 갔단 말이오.” 그러자 춘자는 나무랐다. “얘야, 여기서도 부지런히 공부 하면 따라갈 수 있다. 어째 학교에 가지 않고 건달들과 휩쓸려 다니니?” 그러자 덕돌은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한족 선생들이 시간에 뭐라는지 근본 알아듣지도 못하겠는데 어쩌오?” 이때 동수가 다가와 덕돌에게 불러 쓰기를 시켜보았다. 그런데 매형이 부르는 단어를 거의 다 썼다. “열심히 하면 되겠다. 금방 이사 왔는데 어떻게 또 이사해? 이담에 모를 게 있으면 나한테 물어라.” 그리하여 후에 덕돌은 모를 것이 있으면 큰매형 동수 아니면 셋째매형 동준을 찾아가 배웠다. 하여 한어와 수학은 비슷하게 배워나갔지만 한어로 강의하는 정치나 역사, 물리, 화학은 근본 따라갈 수 없었다. 덕돌은 시험을 치면 수학과 한어문은 우수를 맞았지만 기타 과목은 몽땅 낙제를 맞았다. 한족학교에 온 바람에 처음으로 낙제생이 돼버린 덕돌은 공부에 재미를 붙이지 못하고 방황하게 됐다. 그때 명옥은 가문 회의에서 이런 기발한 생각을 내놓았다. “내 생각에는 덕돌을 연변에 내보내 잠시 은숙이네 집에서 공부를 시키는게 옳은 거 같다. 먼저 은숙에게 편지를 써 보내자.” “뭐라고요?” 춘자는 놀라 눈이 동그래지더니 남편을 쳐다보았다. 동수는 한참 궁리하더니 “좋겠소." 하고 동의해나섰다. "여기 시내에서 친구를 잘못 사귀는 날엔 얘가 건달이 아니면 도적, 아니 강도로 될 수도 있소.” 명옥은 춘자의 손을 쥐고 당부했다. “빨리 은숙한테 편지를 써 보내라.”       춘자는 하나 밖에 없는 남동생의 전도를 위해 체면을 버리고 은숙에게 편지를 썼다. 편지에 이사온 후 부모와 덕돌의 근간 형편을 말하고 쌀고생을 하면서 고생스런 대로 남동생을 데려다 공부시켜달라고 부탁했다. 동녘이 푸름 해 오자 상순은 덕돌을 두들겨 깨웠다. “야, 일어나라.” “어째 그럽니까?” “학교 다니기 싫으면 농사라도 지어야지.” 덕돌은 언감 아버지 말씀을 어기겠는가. 곤한 대로 눈을 집어 뜯으면서 아버지를 따라 바깥으로 나갔다. 그런데 이상했다. 이전엔 이쯤 되면 아버지한테 얻어맞기 일쑤였다. 그런데 아버진 이상하게 때리지 않았고 심지어 욕하지도 않았다.         “이걸 메라!”          상순은 삽과 괭이를 들더니 멜대를 내밀었다.        덕돌은 멜대를 받아 물초롱을 메고 아버지를 따라 변소 쪽으로 갔다. 상순은 괭이로 변소 뒤의 넓적한 돌을 들었다. 순간 누런 똥이 드러나면서 구린내가 물씬 풍겨 코를 찔렀다. “똥을 퍼서 초롱에 담아!” “아, 구린내야.” 덕돌은 코를 싸쥐고 울상을 지었다. 상순은 덕돌을 흘겨보았다. “공부하기 싫으면 별 수 있니? 한뉘 소 궁둥이나 쳤지.” 덕돌은 아버지를 무서워 구린내를 맡으면서 억지로 퍼 담았다. “그걸 메고 나를 따라오라.” 덕돌은 무거운 대로 똥초롱을 멜대로 메고 아버지를 따라 남산으로 올라갔다. 덕돌이 똥초롱을 메고 올라가다가도 맥이 없어 쉬자 상순이 메고 산비탈을 한참 올라갔다. 상순은 푸름 해 오는 옥수수 밭골땅에 괭이로 홈을 죽죽 파더니 을러멨다. “거 코 막고 말뚝처럼 서있지 말고 똥이나 이 홈채기에 쏟아라.” 덕돌은 하는 수 없이 구린내를 참으면서 똥초롱을 들어 홈채기에 나가면서 누런 똥을 줄줄 쏟았다. “이 놈아, 한 곳에 그렇게 많이 쏟아서 어떻게 이 많은 밭에 다 쏟니? 작작 쏟아!” 덕돌은 빨리 쏟아버려 일을 끝내려고 했던 것이다. 아버지 호령에 덕돌은 꼼짝 못하고 조금씩 쏟으면서 나갔다. 자칫하면 아버지가 온 밭에 똥을 지어 나르라고 하면 큰 일이었다. 개구쟁이 아들의 그런 속내를 빤히 들여다본 상순은 똥을 두 초롱 다 내자 괭이를 짚고 서더니 아주 의미심장한 말을 하기 시작했다.        “야, 이 놈아, 난 어려서 공부를 하고 싶어도 집이 가난해 공부를 하지 못했다. 아침을 먹으면 저녁쌀을 근심해야 해서 난 여덟살부터 그렇게 가고 싶은 학교도 가지 못하고 아주머니 기음을 맬 때면 앞에서 밭고랑의 풀을 뽑았다. 열세 살부터는 가대기질도 했다. 어려서 공부를 하지 못했기에 이렇게 한뉘 농사를 지으면서 별의별 고생을 다 하면서 산다. 넌, 얼마나 좋니? 무슨 근심이 있니? 너를 일하라 하니? 공부만 잘 하면 되는데 어째 배불리 먹고 배때 쑤셔나서 학교에도 가지 않니?” 덕돌은 아버지의 엄한 눈길을 피하면서 머리를 숙이며 목구멍으로 기여 들어가는 소리로 “잘못했습니다.”라고 겨우  대답했다. 상순은 아주 엄숙하게 말했다. “공부를 잘 하지 않으면 별수 있니? 한뉘 소 궁둥이나 쳤지. 학교로 가지 않겠으면 오늘부터 이 밭에 똥을 메 내라." 덕돌은 울상을 지으며 눈물을 줄줄 흘렸다. "어쩌겠니? 학교로 가서 공부하겠니? 날마다 똥을 메 나르겠니?” “학교로 가겠습니다.” 덕돌이 눈물을 흘리며 어깨까지 들먹이는 것을 보자 상순은 덕돌의 어깨를 다독이며 무거운 입을 열었다. “내 공부만 했으면 현장이라도 했겠다. 넌 내 하지 못한 몫까지 공부하면 안 되겠니? 넌 전도가 창창한 애다. 내 몫까지 공부를 잘 해라. 부탁이다. 네가 공부를 잘해 한뉘 소 궁둥이를 치지 말았으면 얼마나 좋겠느냐?” 덕돌은 아버지 말에 흐느껴 울었다. “아버지, 잘 못했습니다. 이젠 학교로 가서 공부를 명심해 하겠습니다.” 상순은 덕돌을 품에 꽉 끌어안고 머리를 쓰다듬어주면서 신신당부했다.        "그래야지, 이제야 내 아들답구나. 나처럼 한뉘 후회하지 말게 공부를 잘해라.”       “예.” 그들 부자간이 남산의 비탈 밭을 내릴 때는 이른 아침 해가 동산에서 두둥실 떠올라 대지를 환히 비추었다. 덕돌은 마을에 들어서면서도 마음 속으로 부모를 애먹이지 않고 공부를 잘하겠다고 다지고 또 다지었다. (이제 연변에 나가면 본때나게 공부해야지.) 열흘도 되지 않아 은숙한테서 친혈육의 정이 담뿍 담긴 편지가 날아왔다. “…부모형제들 쌀 고생, 마음고생 하지 않는다니 이 둘째딸은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습니다. 한편 덕돌이 안쪽에 가서 공부하기 힘들다고 하니 마음이 아픕니다. 우리 집에 하나 밖에 없는 남동생을 공부를 잘 시켜야 합니다. 덕돌을 보내시오. 내 책임지고 우리 집에서 공부를 시키겠습니다…” 그 편지를 읽으면서 덕돌은 감사한 마음에 눈물을 주르르 흘리면서 친형제의 뜨거운 정을 느꼈다. 물보다 피가 더 짙고 피보다 짙은 것은 정이 아닌가! 아버지와 어머니도 한시름을 놓은듯이 한숨을 후 내쉬었다. 춘자는 밥상을 가져다 놓고 함흥중학교에 있는 동창생들인 경산과 성환 그리고 황승연에게 편지를 써 보냈다. 편지마다에 동창생들의 우정을 먼저 간단히 말하고 남동생 덕돌이 함흥중학교에 되나가니 잘 가르쳐달라고 부탁했다. 어머니는 덕돌의 손을 붙잡고 신신당부했다. “외지에 가서 공부하노라면 여러 모로 어려운 점이 많을 거야. 누나를 애 먹이지 말고 공부를 잘해라.” 어머니가 눈물을 흘리면서 하는 말을 덕돌은 가슴 깊이 아로 새겼다. “나도 어지간하면 너를 보내지 않겠다. 네 앞날을 망칠까봐 모진 마음을 먹고 누나네 집에 보낸다.” “꼭 최우등을 할 테니 근심하지 마십시오.” 덕돌은 어머니가 주는 단돈 5원에 쌀 한 주머니를 가지고 떨어지지 않은 걸음으로 연변으로 떠나가게 됐다. 그는 부모와 누나들과 갈라지기 아쉬운 대로 연변 고향으로 나가야만 했다. 용대랑 용구랑 현준이랑 광순이랑 아쉬워하면서 덕돌을 바랬다. 성숙과 은자는 쌀주머니를 번갈아 이면서 교하역에까지 가서 바래었다. 뜻밖에도 왕춘영이 교하역에까지 따라 와 눈물을 흘리면서 덕돌의 손을 잡고 애원하지 않겠는가. “연변에 가지 말라.” 누나네는 덕돌을 흘겨보았다. “못된 쇄지 뿔부터 난다더니. 쯧쯧쯧." "쓸데없이 가시나들부터 친하지 말라." "연변에 나가면 공부나 잘해라. 알았지?” 허나 덕돌은 누나네 말에는 개의치 않고 개찰구로 나가면서 왕춘영에게 머리를 돌렸다. “내 이제 대학에 붙으면 너를 찾아올게.” 그는 무거운 한마디 남기고 무정한 열차에 올랐다. 천천히 미끄러져 가는 차창 밖으로 성숙과 은자가 보였다. 아니, 저게 뭐야? 춘영이 플래트홈에까지 나와 뛰어오며 처량하게 손을 흔드는 것이 아니겠는가? 덕돌은 코마루가 시큼해나 일어나 차창 밖으로 머리를 내밀고 내다보았다. 춘영은 손을 흔들면서 뛰어오다가 허망 넘어진 채 손으로 눈물을 닦으며 무정히 달리는 열차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덕돌이 아무리 차창 밖으로 머리를 내밀고 눈 뿌리 빠지도록 보아도 시야에서 춘영의 모습은 훌 무정하게 사라지고 말았다…                        8. 교정의 종소리      소낙비가 언제 쏟아 졌나 시피 먹장구름이 드리웠던 하늘이 맑게 개이면서 동쪽 벌판에 칠색무지개가 곱게 걸려 패용천산 앞 큰 도랑물에 거꾸로 비끼었다. 이슬은 해빛을 한오리 한오리 꿰여 황홀한 칠색비단을 드리우고 황홀한 꿈의 세계로 무지개-아치교를 놓아주었다. “빨리 나가 고기를 잡자. 물이 흐리면 꼭 미꾸라지가 많을 거야.” 덕돌은 성욱과 함께 바삐 다리 밑에서 나갔다. 덕돌이 반디를 대고 성욱이 발을 쿵쿵 굴러 물고기를 반디 쪽으로 쫓았다. 덕돌이 반디를 드니 미꾸라지가 한 종지씩이나 나왔다. 비온 뒤 물고기가 많이 나와 덕돌은 반디 질을 하는 재미가 좋았다. “아차, 큰 고기 든 거 같다.” 덕돌이 반디를 들면서 하는 말에 성욱은 “거 어떻게 아니?” 하고 호기심에 찬 눈길로 반디를 들여다보았다. “아이야, 뱀이다! 뱀!” 덕돌은 소리치더니 “이걸 어쩌니?” 하며 제꺽 반디를 감아쥐었다. 성욱은 미꾸라지를 반 초롱이나 담은 초롱을 들고 따라 도랑둑으로 나갔다. 덕돌은 양미간을 찌푸리더니 “옳다. 이대로 집에 가지고 가서 가마에 삶아서 돼지를 먹이자.”라고 했다. 성욱은 섬직해 “그 가마에 어떻게 밥을 해먹니?” 하고 짧은 목을 움츠리었다. “그럼 우리 누나네 집 가마에 삶아 우리 돼지를 먹일게.” “그래라.” 그들은 덕돌의 누나네 집으로 뱀을 감아쥔 반디를 들고 갔다. 모두 일하러 가고 집에는 누나도 매형도 없었다. 덕돌은 성욱을 보고 “가마 덮개를 열어라.”라고 했다. 성욱이 가마를 여니 돼지죽이 절반이나 차 있었다. 덕돌은 가마에 다가가 반디를 스르르 풀었다. “뱀이 가마에 떨어지자마자 제꺽 가마뚜껑을 닫아라!” “응.” 덕돌이 반디를 가마 안에 넣고 슬슬 풀었다. 뱀이 가마 안에 뚝 떨어지자마자 성욱은 뚜껑을 찰강 닫아버렸다. “이젠 됐어.” 덕돌은 부엌에 내려가 아궁이에 벼 짚을 쑤셔 넣고 불을 지폈다. 한참 있으니 김이 쌕 나면서 가마뚜껑이 무엇엔가 툭툭 맞히는 소리가 났다. “뱀이 데 죽는 모양이야.” “하하하.” 한참 후 가마를 살그머니 열어보니 부글부글 끓는 돼지죽 위에 꼬불꼬불한 뱀이 푹 삶겨져 있었다. 바가지로 툭툭 건드려 보니 확실히 죽었다. 덕돌은 삶은 뱀을 바가지에 퍼서 돼지 굴에 가지고 가서 돼지구유에 쏟아 놓았다. 그러자 돼지는 꿀꿀 거리며 다가가더니 아주 맛있게 한 입에 다 먹어 버렸다. 덕돌은 배짱도 있고 시원시원한데 비하여 콩알 눈인 성욱은 꼭 다문 입처럼 속이 꽁해 쩍하면 잘 앵돌아졌다. 그러나 그들 둘은 성미는 달라도 친척이어서 그런지 늘 잘 어울려 다니곤 했다. 한번은 낙제생인 원순이가 성욱의 새 모자를 빼앗아 가지고 달아났다. 그때 성욱이 따라 달려가면서 모자를 돌려달라고 했다가 원순에게 얻어맞았다. 그러자 덕돌과 성욱이 달려들어 한쪽다리씩 들어 건뜻 들어 메쳐놓고 모자를 되찾았다. 성욱과 덕돌은 늘 같이 다니면서 단짝이 됐기에 아이들의 업신여김을 덜 받았다. 둘째매형 경만은 덕돌에게 특별한 관심을 보였다. 교하에서 조개덕에 올 때도 수레를 몰고 와서 마중해 덕돌과 쌀을 실어왔고 책도 매주었다. 쌀 고생을 어찌나 많이 했던지 경만은 아내와 함께 마당에 자란 청수수를 베여 낟알을 털어내 말리었다. 허나 그 수수가 마르기도 전에 쌀이 다 떨어졌다. 은숙은 부득불 돌도 되지 않은 둘째딸 주옥을 업고 방아에 청수수를 쪘다. 수수가 채 마르지도 않아 방아에 묻어나면서 잘 찧어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은숙은 오전부터 진종일 방아를 찧어서야 여나무근 되는 수수쌀을 얻어냈다. 은숙은 그 청 수수쌀로 죽이라고 쑤어놓았다. 그런데 죽이 목에 걸려 덕돌은 속으로 눈물과 함께 삼켰다. 그런 어려운 형편에서도 덕돌은 공부는 잘해 학습위원으로 됐다. 그것도 매 학과목 평균 성적이 98점 이상이었다. 그중 수학과 물리, 화학 평균성적은 100점이나 됐다. 하지만 덕돌은 항상 낙제생 큰애들에게 얻어맞았다. 매형 경만이나 양형님 수봉에게 말하면 원순이랑 철주랑 광일이랑 시간에 덕돌의 잔등에 잉크를 쳐놓는가 하면 여자애들이 보는데서 더 놀려주었다. 그리하여 덕돌은 학교에서 머리를 들고 공부하기 어려웠다. 그때마다 수봉과 경만은 덕돌의 역성을 들곤 했다. 한번은 학교에서 전 교 수학콩쿠르를 벌렸다. 성욱은 덕돌의 옆에 딱 붙어 앉아서 덕돌의 시험지를 처음부터 몽땅 베껴 썼다. 결과 성욱은 덕돌과 함께 1등상을 탔다. 그것도 어느 문제 답안이나 똑같았고 성적도 똑같이 100점으로 1등을 했던 것이다. 그런데 성욱은 덕돌의 덕분에 1등상을 타고서도 차츰 덕돌을 질투하기 시작했다. 이런 형편에서 덕돌은 두번째 수학 콩쿠르 때에는 성욱과 갈라 앉았다. 물이 가라앉자 물에 가리었던 돌이 수면에 드러났다. 결과는 불 보듯 빤했다. 덕돌은 그번 수학 콩쿠르에서 2등을 했지만 성욱은 등수에 들지 못했을뿐만 아니라 한 문제 밖에 풀지 못했다. 그때부터 성욱은 덕돌과 나란히 앉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덕돌이 자기와 나란히 앉아 시험지를 보였더라면 그래도 2등은 했겠는데 말이다. 한번은 성욱이 교실에서 발딱 일어나면서 소리쳤다. “선생님, 덕돌은 학습위원 자격이 없습니다.” 애들의 눈길이 일시에 성욱에게 쏠렸다. “어째?” 황승연의 물음에 성욱은 터무니 없는 소리를 했다. “전번 수학콩쿠르 때 내 시험지를 다 보고 써서 2등을 했습니다. 덕돌은 학교 나무도 수태 꺾었습니다.” 덕돌은 너무 억이 막혀 일어나 되물었다. “내 언제 네 시험지를 보고 썼니? 네가 내 시험지를 보고 썼지. 또 언제 나무를 꺾었니?” 성욱은 질투의 불길로 타오르는 눈길로 덕돌을 쏘아보다가 주먹을 한 대 날렸다. 그때 덕돌이 팔을 들어 막으면서 한주먹을 안겼다. “손을 떼라!” 황승연 담임이 고함치면서 다가왔다. “시간에 이게 뭐야? 덕돌은 참아야지. 학습위원이라는게 뭐야?!” 덕돌은 머리를 숙이면서 “잘못했습니다. 선생님.”라고 했다. 짙은 눈썹아래 쑥 패어들어 간 우멍눈, 날이 선 코. 황승연 선생님을 보기만 해도 덕돌은 겁부터 났다. 그 일이 있은 뒤 덕돌과 성욱은 서로 소 닭 보듯 했다. 덕돌은 그래도 어깨동무이자 9촌 조카라고 성욱과 더 싸우지 말려고 했다. 하지만 성욱은 상선이랑 자기 집에 데려다 놀면서 덕돌의 흉을 한바탕 보면서 따돌리자고 했다. 신록이 짙어가고 무더위가 쏟아지는 여름이 지나가고 선들선들한 가을바람이 불어왔다. 덕돌은 태평강 가에 이르자 채발로 고기잡이를 하던 성욱이랑 상선이랑 애들의 옷을 걷어안고 저쪽으로 달아났다. 덕돌은 그제날 활동참 단장을 하던 애 답지 않게 친구들을 잃고 말았다. 그때 철주가 채발과 비닐초롱을 들고 저쪽에서 흥얼거리면서 다가왔다. “너 따돌림을 당했지?” “아, 아니야.” 덕돌은 그제날 성욱과 함께 철주와 원순의 두 다리를 들어 메 치고 때린 일이 생각나 얼버무렸다. 한편 그는 공부도 잘 못하고 남의 해바라기랑 딱총이랑 훔친 철주와 놀기 싫었다. “야, 외목에 날게 뭐야? 나와 친하겠니?” 철주의 말에 덕돌은 저 멀리에서 히히거리는 성욱이랑을 보며 머리를 끄덕였다. 덕돌은 철주를 따라 태평강에 들어가서 고기잡이를 하기 시작했다. 잔잔히 흐르는 태평강 물에는 병풍처럼 둘러선, 깎아지른 벼랑이 치솟은 패용천산이 거꾸로 비꼈다. 철주가 발을 대자 덕돌이 강물에서 발을 굴러 고기를 쫓았다. 철주가 발을 들자 하얀 모래무치와 버들치가 팔딱팔딱 뛰었다. 한참 물고기 잡이를 하면서 그들은 어느덧 칼산기슭의 과수원 옆에까지 이르렀다. 주렁주렁 달린 노란 배들이 싱그런 향기를 풍기었다. 덕돌은 닭 알 군침을 꼴깍 삼켰다. “덕돌아, 더운데 저 배를 뜯어먹자.” 덕돌은 덴겁해 “얘, 들키면 큰일 날 게 아냐? 그만두자.” 하고 뒤로 물러섰다. “일없다. 난 도적질에 이골이 텄으니까. 들킬까 봐 근심하지 마.” 그래도 자리를 뜰 염을 하지 않는 덕돌을 보고 철주는 바투 들이댔다. “너 정 재미없이 놀면 나까지 널 외목에 낸다.” 그 말에 덕돌은 마지못해 따라나섰다. 그는 철주를 따라 살금살금 강냉이 밭을 꿰질러나가 배 밭에 숨어들어갔다. 그들 둘은 쥐처럼 배나무에 기어 올라가 주먹만큼 한 배를 뜯어 적삼 앞가슴에 불룩하게 넣었다. 덕돌은 두 다리와 손이 바들바들 떨리었다. 심장이 콩콩 뛰어 밖으로 튀어 나올 것만 같았다. 덕돌과 철주가 배를 가득 뜯어 넣고 태평강 쪽으로 다가올 때다. 저 멀리에서 빨래를 하는 순희랑 보였다. “저 애들에게 배를 나눠 줄까?” 덕돌도 맞장구를 쳤다. “옳다. 순희랑 우리 편이 되게 하자.” 그들은 그대로 마을에 들어갈 수 없어 태평강 가의 버드나무 밭 모래를 파고 배를 파묻었다. 그리고 서너 개씩만 쥐고 가서 순희랑 인옥이랑 또래 여자애들에게 나눠주었다. “이 배는 어디서 훔쳤지?” “아니야, 6촌 형님한테서 가진 거야.” “응, 옳다. 함흥촌의 과수원은 덕돌네 6촌형이 지킨다더라.” 철주도 맞장구를 쳤다. 덕돌이 앞가슴에서 노란 배를 서너 개 꺼내 순희에게 주자 순희랑 생글 웃으며 받았다. 애들은 태평강에 가서 배를 씻어 사각사각 맛나게 먹었다. 그런데 그날 저녁에 큰 경을 치렀다. 농약을 친 줄도 모르고 애들이 배를 먹고 저마다 배를 끌어안고 마구 뒹굴었다. 어른들은 사연을 알고 황급히 손잡이 트랙터에 덕돌이랑 순희랑 싣고 진수해 병원으로 달려갔다. 정규상과 박영발은 “빨리 진수해병원에 가야 애들을 살리오.”라고 했다. 생산대 손잡이 트랙터 운전수 허성훈은 전 속력을 다해 애들을 싣고 밤길을 달려 진수해 병원으로 향했다. 배도적사건이 드러난 후 덕돌은 자연히 학습위원직을 철직 맞을 위기에 처했다. 설상가상으로 사건은 연속 생겼다. 어느 날, 애들은 보슬비가 쏟아지는 싸늘한 날씨를 피해 학교 동쪽에 가서 뛰놀았다. 그런데 종이 울린 줄도 모르고 계속 놀았다. 담임 황승연은 함흥대대 혁명위원회 주임을 찬탈한 황종연의 동생이었다. 그는 덕돌이 상순의 아들이라고 눈에 든 가시처럼 여기는 터였다. 그런데 오늘 때마침 잘 걸려들었던 것이다. 황승연은 학교 동쪽에 와서 숱한 애들과 함께 뛰노는 덕돌을 보고 꽥 소리쳤다. “종이 울렸는데도 계속 놀 테냐?!” “아야, 종이 울렸구나.” 덕돌은 당황해 이렇게 외치며 황승연의 날이 선 코 위 독기서린 눈길을 보면서 질겁해 하며 교실로 뛰어 들어갔다. 애들은 모두 교실로 찍 소리치지 못하고 쓸어 들어갔다. 승연은 교실에 들어오자마자 교편으로 교탁을 탕탕 치며 꽥꽥 고함쳤다. “덕돌아, 일어서!” 덕돌은 잘 못 걸렸구나 생각하며 머리를 숙이면서 일어섰다. “너 종이 울린 거 들었니? 못 들었니?” “못 들었습니다. 지각해서 잘못했습니다.” “그러면 단가? 노실하지 못한 새끼, 어디 혼나봐라!” 승연은 “위응과 철복도 서라! 너네는 종이 울린 걸 듣지 못했니?” 하고 물었다. 위응은 덕돌이 사실 대로 말했다가 혼나는 것을 보고 인차 “들었습니다.”하고 거짓말로 대답했다. “음, 로실하구나. 넌 앉아라!” 약삭빠른 철복도 당연히 들었다고 대답하고 자리에 앉게 됐다. 그런데 승연이 덕돌에게 다시 물어도 역시 지각한 것은 잘 못했지만 종소리 나는 건 정말 듣지 못했다고 했다. 그러자 승연은 독기 서린 우멍눈으로 쏘아보며 덮쳐오더니 덕돌을 마구 책상에 짓 쪼아 놓고 주먹으로 때렸다. 덕돌은 코피가 터져 책상에 피가 질벅했다. 순희랑 미선이랑 차마 그 참경을 볼 수 없어 책상에 머리를 파묻었다. 덕돌이 맞을 때마다 여기저기서 여학생들이 비명을 질렀다. 승연은 때리고서도 성차지 않아 당장에서 처분결정을 내렸다. “덕돌의 학습위원직을 철직한다. 대신 성욱을 학습위원으로 임명한다.” 그는 덕돌을 질투하는 성욱을 버쩍 추켜올리고 덕돌의 얼굴에 먹칠을 해놓기 시작했다. “성욱은 덕돌보다 공부를 더 잘한다. 이전에 덕돌이 수학 콩쿠르에서 1등한 것도 모두 성욱의 시험지를 베껴서 쓴 거야. 어쩜 시험 답안이 성욱의 답안과 똑같단 말이냐?” 덕돌은 너무나 억울했다. “선생님, 난 학습위원을 하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허나 성욱의 답안을 베낀 적이 없습니다.” 덕돌은 성욱이 그래도 9촌 조카라고 성욱이 자기 답안을 베낀 것은 숱한 애들 앞인지라 말하지 않았다. 이때 성욱이 일어나 덕돌을 손가락질하면서 교실이 떠나가게 소리쳤다. “덕돌이 내 답안을 베꼈습니다. 이건 사실입니다.”       덕돌은 피 묻은 손가락으로 성욱을 손가락질 하며 어처구니없어 했다. “얘, 네가 이런 말을 할 처지냐?” “친척이고 뭐고 모르겠다.” “옳다. 친척이고 뭐고 사실대로 말한 성욱이 잘 했다.” 승연은 성욱과 덕돌 사이에 붙는 불에 키질했다. 순희랑 미선이랑 덕돌이 억울하다고 떠들었다. 덕돌은 아무리 말해도 버선목이라고 번져 보일 수 없었다. 진짜 만두 먹은 벙어리 처지로 되고 말았다. 그저 속으로 꼭 이담 성욱보다 공부를 더 잘해 대학에 가는 것으로 누가 진정 자기 성적인가, 누가 누구의 시험지를 베꼈는가를 증명해 보이려고 마음먹었다. 집으로 돌아가는데 덕돌은 해쭉거리는 성욱 그리고 오류분자 리달송의 아들 이응을 보았다. 그때 철주가 다가와 덕돌에게 나직이 쑹얼거렸다. “야, 네가 나떨어지니 성욱이 새끼 박수까지 치더라. 그냥 놔두지 말자.” 철주의 말에 덕돌은 주먹을 으스러지게 쥐었다. 철주는 덕돌을 끌고 고추밭에 들어가 빨간 고추를 뜯어 그 즙액을 손에 바르게 했다. 덕돌과 철주는 준비가 끝나자 성욱이네를 쏜살같이 쫓아갔다. “서라, 개새끼들아, 오늘 맞아봐라!” 덕돌이 꽥 소리치며 덮쳐들어 성욱의 눈통을 잽싸게 쳤다. 성욱은 눈이 아려 눈을 싸쥐고 맴돌았다. 그때 상선이가 덕돌에게 덤벼들었다. 옆에 있던 철주가 상선을 막아 귀 쌈을 짱 갈겼다. 그러자 상선이가 철주의 턱주가리를 헤딩했다. 덕돌이 손바닥으로 성욱의 눈 통을 짱 갈겼다. 고추 발린 손에 눈 통을 맞은 성욱은 눈을 뜨지 못해 물매를 맞았다. 담배 밭에서 일하던 경학이 갑자기 뛰쳐나왔다. 그 바람에 덕돌과 철주는 혼비백산해 달아났다. 그날 저녁에 성욱은 부모에게 야단맞았다. “뭐야? 친척끼리 싸우다니?” 성욱이 자기 좋은 소리를 하자 경학은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고놈 새끼, 굴러 온 돌이 배긴 돌을 뺀다고 공부를 잘 한다고 너를 업신여겨?” 덕돌은 연변으로 나올 때 아버지와 어머니가 하던 부탁을 생각한데다가 둘째 누나와 매형이 자기 때문에 고생하는 것을 생각하고 공부를 열심히 했다. 한편 날마다 누나를 도와 아침과 저녁으로 불을 때고 외 조카 혜옥과 주옥도 업어주면서 도와주었다. 그런데 겨울인데도 덕돌은 솜옷을 가지고 온 것이 없어 추워 기침을 쿨룩쿨룩 깇었다. 나중에 가래를 뱉으면 피가 묻어 나왔다. 덕돌이 돌을 던지며 운동하던 곳을 돌아보던 경만은 놀라 은숙에게 알렸다. 은숙은 깜짝 놀라 바깥에 뛰어나와 덕돌의 손을 잡고 물었다. “얘, 언제부터 피 나왔니?” “한 보름 되오?” “뭐라니? 그럼 왜 진작 말하지 않았니?” 은숙은 주옥을 업고 덕돌을 데리고 정규상을 보이러 토성안집의 위생소로 찾아갔다. 대대 혁명위원회 간판을 버젓이 건 위생소에서 무슨 옥신각신 소리가 들렸다. “당신, YB병원에서 우파 모자를 쓰지 않았소? 여기 와서 그간 위생소 소장을 했으면 과분하지. 이젠 박영발 서기한테 소장을 시키겠소. 정규상 우파는 이제부터 돼지 똥이나 모으란 말이오. 빈농에게서 재교육을 잘 받으란 말이오.” 정규상은 소침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위생소에서 나왔다. “저기, 정 선생, 얘 병을 봐주십시오.” 그러자 정규상은 뒤에 따라 나오는 종연과 박영발의 눈치를 흘끔 보았다. “어째, 아프오? 아프면 이젠 박 소장한테 보이오. 난 병을 보지 못한다오.” 은숙은 아버지와 할아버지에게서 정규상 의사가 용하다는 말을 듣고 기어이 정 선생에게 보이려고 졸라댔다. 그때 종연이 마루에 나와 허리에 두 손을 지르더니 혁명위원회 주임 틀을 차리면서 정규상을 쏘아 보며 을러멨다. “정 우파는 거기서 뭘 하는가? 얼른 가서 오류분자 리달송과 함께 돼지 똥이나 줏지 못하겠소?” “예?” “아직도 꾸물거리겠는가?” 정규상은 어정쩡해 서 있다가 물었다. “리달송은 일제 때 용정통감부 간도파출소 일본통역인데 나를 어찌 그런 일본주구 놈 취급을 한단 말이오?” 종연은 정규상의 눈길이 곱지 못한 것을 보고 발을 탕 구르며 을러멨다. “뭐라고?! 정 우파는 반당분자이기에 옛날 지주나 통역보다도 더 악독한 현행반혁명분자야! 무산계급전정의 타도 대상이란 말이야! 썩 물러가 돼지 똥이나 백 수레를 주으란 말이야.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면 네놈의 대가리를 둼 무지에 거꾸로 심어놓을 테다!” 박영발은 위생소 유리창문으로 내다보며 깨고소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김상순 서기를 믿고 이 마을에 왔었다. 하지만 정작 와보니 상순은 기운 달과 같았고 흥수가 살판 치는 것을 보고 상순을 따르지 않고 점차 흥수한테 붙었다. 허나 흥수도 맥을 추지 못하는데다가 상순마저 교하로 이사해가자 반란파 종연한테 철썩 달라붙어 입당소개인이 돼주었다. 종연이 혁명위원회 주임으로 올라갈 때는 슬그머니 막후에서 “정치고문”을 서 주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종연은 박영발을 치하해주었다. “박 서기는 세상물정을 아는구먼. 당신, 정치표현이 아주 좋소. 지금 반란파들의 세상인데 그까짓 시들어가는 노간부들을 보호해 보았자 밥이 나오오? 사형장에 끌리어 가지 않으면 감옥에 가고 노동개조를 하지 않으면 돼지 똥이나 주어야 하지.” 박영발은 속으로 자기보다도 스무 살이나 어린 20대 반란파 두목 종연을 건달 같은 놈이라고 욕하였다. 허나 혁명위원회 주임 종연에게 달라붙어야 노동개조도 덜 하고 위생소에 들어박혀 병이나 보고 어려운 세월을 넘길 것 같았다. 종연은 박영발의 그런 속내까지는 모른 채 홱 달라진 정치표현을 보고 계속 횡설수설했다. “박 서기, 대대혁명위원회에 대한 충성심을 봐서 박영발 서기를 우리 대대 위생소 소장으로 임명하겠소.”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박영발은 허리를 굽신거리면서도 뒷말을 다는 것을 잊지 않았다. “헌데 정규상 의사는 어쩌겠습니까?” “근심하지 마오. 그 놈은 돼지 똥이나 주어라면 되지. 근심할게 있소? 정치표현이 아주 나빴단 말이오. 이전부터 병완 영감과 상순 서기한테 찰싹 붙어서 내가 혁명위원회 주임으로 올라가는 걸 얼마나 반대했다고?” 이렇게 돼 오늘 정규상은 위생소에서 쫓기어 나가 돼지 똥을 줏게 되었던 것이다. 윤희는 창문가에 서서 측은한 눈길로 정규상을 내다보았다. 은숙은 정규상을 욕보이지 않으려고 덕돌을 데리고 위생소에 들어갔다. 정규상은 먹장구름이 뒤덮여 흐리터분한 하늘을 쳐다보며 땅이 꺼지게 한숨을 후 내쉬더니 머리를 수깃하고 토성안 대대사무실 마당에서 나가버렸다. 박영발은 덕돌의 가슴에 대고 청진기를 대보더니 놀라했다. “아니, 폐염에 걸렸구먼. 허나 약을 좀 쓰면 되오.” 그때 주사실에서 박윤희 간호사가 건너와 아양을 떨었다. “아니, 이게 김 서기네 아들딸이 아닌가요? 어쩜 김 서기는 이렇게 예쁘고 칠칠한 아들딸을 두었어요?” 그녀는 부끄럼을 타는 덕돌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계속 했다. “이 부리부리한 눈이랑 보오. 딱 김 서기를 답지 않았소?” 그러자 옆에 서 있던 종연이 두덜거리었다. “노처녀 돼 그러오? 걔가 뭘 잘 났다고 그러오? 새애기처럼 곱게 생겨 뭘 하오? 무골충처럼 애들에게 놀림만 당한다던데.” 박영발은 처방을 떼더니 먼저 덕돌에게 마이시린 주사를 맞으라고 했다. 덕돌이 주사를 맞으러 갔을 때었다. 종연은 덕돌이 들어온 줄도 모르고 주사실에서 윤희의 엉덩이를 툭툭 치면서 쌍소리를 하며 지분거렸다. “주사 맞으러 왔니?” 윤희는 덕돌을 보자 종연의 손을 밀치며 주사를 놓으려고 서둘렀다. 그제야 종연은 윤희한테서 물러서면서 자기 흥을 깼다고 그러는지 덕돌을 곱지 않은 퉁방울눈으로 흘겨보았다. 덕돌은 기침을 쿨룩쿨룩 하면서 점심마다 토성 안 위생소에 와서 주사를 맞았다. 허나 기침이 좀 나을 뿐 계속 가래에 피가 묻어나왔다. 그때 은숙은 덕돌을 데리고 가만히 조개덕 생산대 식당자리에 있는 정 의사를 찾아가 덕돌의 병을 봐달라고 했다. 정규상은 돼지 똥을 줏던 작은 삽을 놓고 사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여기 오는 걸 누가 본 사람이 없소?” 하고 물었다. “없습니다. 덕돌을 살려주십시오.” “집에 들어가기요.” 정규상은 황급히 돼지 똥 초롱과 삽을 든 채 집 문을 떼고 들어갔다. “내 병을 봤다는 걸 알면 야단나오.” 은숙은 “본 사람이 없습니다. 전번에 박 서기한테 보이니 페염이라고 합디다. 주사를 며칠 맞혔는데도 계속 가래에 피가 묻어나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정규상은 덕돌의 손목을 짚고 맥을 보더니 “페염은 옳소. 중약을 써야 하겠소. 내 처방을 떼 줄 테니 진수해 병원에 가서 중약을 지어다가 달여 먹이오.”라고 했다. “감사합니다.” 은숙은 정규상의 처방을 받아 쥐자마자 애를 업은 채로 진수해 병원에 헐금씨금 달려가서 약을 지어다가 풍로에 달였다. 그런데 돼지 똥을 줏느라고 돌아다니던 이달송이 은숙이네 마당을 지나다가 은숙과 덕돌이 풍로에 중약을 달이는 것을 보았던 것이다. 은숙은 개의치 않고 중약을 달였다. 정규상의 약 세 첩을 달여 먹였는데 기적적으로 덕돌의 가래에 피가 묻어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이달송이란 자가 은숙이네 중약을 달인 일을 박영발한테 밀고할 줄이야. 그 바람에 등줄이 달아오른 박영발은 공사병원에 달려가 은숙이 중약을 지어간 처방을 들춰내 정규상의 필적을 확인하고 돌아왔다. 그는 위생소 소장 몰래 우파 정규상이 병을 마음대로 보고 약 처방을 뗀 일을 고발했다. 그 일로 해 정규상은 조개덕생산대 우사에 소들과 함께 갇혀 날마다 소 똥과 돼지 똥을 쳐내고 밤에는 투쟁맞고 소들과 함께 북데기를 쓰고 자야 했다. 그는 낮에는 돼지 똥을 주어 모으면서 노동개조를 하지 않으면 안 됐다. 대신 이달송은 고발한 공로로 돼지 똥 임무를 백 수레로부터 50수레로 줄일 수 있게 됐다. 덕돌은 페염이 치료돼 건강한 몸으로 공부를 잘해 기말에 최 우수생으로 됐다. 수학콩쿠르에서 덕돌은 백점으로 1등, 그것도 아주 풀기 어려운 참고문제까지 몽땅 풀어 만점으로 1등을 했던 것이다. 어문 성적은 그의 모든 학과목 성적에서 제일 낮았지만 역시 다른 과문과 마찬가지로 최우등을 했다. 특히 작문을 어찌나 멋있게 썼던지 김경산 선생은 한 학년의 다른 학급에 다니면서 덕돌의 작문을 참고하라고 읽어주기까지 했다. 한어는 더 말할 데 없었다. 교하에서 한족학교를 다니다가 온 덕돌은 한어로 대화도 술술 하고 과문은 통째로 줄줄 한어로 이야기 할 정도로 통달했던 것이다. 비록 학습성적은 올라갔지만 덕돌은 한번 지각했다가 승연에게 혼난 후 몇해 동안이나 승연에 대한 공포증으로 시달렸다. 그는 교정에서 뛰놀다가도 종소리만 들으면 신경을 도사리고 교실로 뛰어 들어가곤 했다. 덕돌의 대신 학습위원으로 된 성욱의 학습 성적은 덕돌과 비하기도 어렵게 훨씬 낮았는데 전 학급에서 중상류에 속했던 것이다. 은숙과 경만은 입이 하나 불어 쌀고생에 힘들었지만 덕돌의 진보에 기뻐 힘든줄 몰랐다. 그러나 정규상 의사가 덕돌의 페염을 치료해주었다고 대대 혁명위원회의 처벌을 받아 돼지 똥을 모으면서 수모를 당하는 것을 보고 미안해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었다.         9. 우국우민의 충정 내자산탄광의 하늘을 찌르며 아찔하게 솟아오른 버럭 산에서는 불길이 활활 타오르고 버럭을 실은 차가 연신 소철을 타고 버럭산 꼭대기로 올라가 버럭 돌을 버렸다. 그때마다 숱한 버럭 덩어리가 가파른 버럭 산꼭대기에서 굴러 내려오면서 깨져 돌 속에 숨은 석탄을 굴려내려 보냈다. 상순을 비롯한 마을 사람들은 위협을 무릅쓰고 버럭 산 아래로 가서 버럭 차가 올라와 버럭 돌을 부리어놓고 내려오는 틈을 타서 버럭 속의 석탄덩이를 주어 수레에 담았다. 그렇게 온 하루 모으면 몇 버치는 돼 땔 근심을 하지 않아도 됐다. 상순이네 황하전자에 온지도 어언간 한해가 다 지나가고 새해 봄이 다가왔다. 아직도 날씨는 아주 쌀쌀했지만 버럭 산에서 활활 타오르는 불길의 화기로 해 추운 줄을 몰랐다. 며칠 전에 선후하여 이계삼 서기와 허영주 부 현장한테서 눈물겨운 편지가 왔던 것이다. 편지에서 두 노간부는 함흥대대 반란파들이 당지부를 말살하고 유명무실하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혁명위원회 주임이며 반란파 두목인 황종연이 새까만 정치를 하고 있는 살벌한 정황을 죽 쓰고 나서 상순을 보고 현실을 도피하지 말고 함흥대대에 돌아오라고 했다. 상순은 망치로 버럭덩이를 땅 쳐 깨 석탄을 주어 버치에 담으면서 긴 한숨을 후 내쉬었다. (황화전자 남새생산대에 있으면 쌀 고생과 마음고생 하지 않고 땔나무근심을 하지 않아 좋긴 좋은데.) 상순은 허리를 펴고 버럭 산 저쪽 산기슭 아래 무연하게 펼쳐진 검은 논을 내려다보면서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하지만 나를 양성해준 이 서기와 허 현장을 사지에 놔두고 좌시할 수는 없지 않은가?” 상순은 이런 생각을 굴렸다. (황차 덕돌은 여기 한족학교에서 공부를 할 수도 없고 딸애들을 한족 집에 줄 수도 없지 않는가?) 여기까지 생각하자 상순은 석탄을 그만 줏고 수레를 몰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가 자기 생각을 아내와 말하자 아내는 기뻐 야단쳤다. “잘 생각했소. 애들 전도를 봐서라도 연변에 나가기요.” 허나 춘자와 홍자는 말리었다. “여기 오라고 한 나를 망신시키지 마십시오.” 춘자는 성이 나 펄펄 뛰었다. 상순은 춘자를 보고 말했다. “이 일은 체면이 아니라 숱한 사람들의 운명과 관계되는 대사야. 내 먼저 연변에 나가 마을 형편을 두루 살펴보고 결정하겠다.” 춘자는 일단 생각을 잡은 후에는 벽이라도 마구 차고 나가는 아버지 성격을 아는지라 더 말리지 못했다. 명옥은 연변으로 떠나가는 남편에게 희망을 기대하면서 바래었다. “꼭 이사해 나가기요. 종연이랑 좀 입당시키겠다고 얼려 일이 되게 만들어보오.” 허나 상순은 콧방귀를 뀌었다. “흥! 이사를 가지 못하면 못했지. 종연한테 알락거리라고? 원칙도 없이 오뉴월의 소불알달걀처럼 이 볼 쳤다 저 볼 쳤다 하라고? 어림도 없어. 나는 이사를 가도 당당하게 갈 테오.” 허나 명옥은 남편의 손을 꼭 잡고 부탁했다. “어떤 때에는 일이 되게 하자면 종연이랑 스리슬쩍 얼려 넘겨야 하오.” “스리슬쩍 얼려 넘겨? 오호. 그래 그 말은 하던 중에 멋있소. 얼려 넘기기만 하겠소. 나를 받지 않고선 그 놈이 살아남을 수 없지.” 상순의 그 말 뜻을 다 알아듣지 못했지만 명옥은 남편도 꼭 이사해 나가려고 한다는 것만은 알고 한시름 놓았다. 상순은 함흥대대에 돌아오자마자 토성 안 아주머니부터 찾아가 보았다. 아주머니는 딸 순애마저 진수해 음악교원 최수룡에게 시집보내고 홀로 외롭게 살고 있었다. “아주머니, 그간 편안히 계셨소?” 뜻밖에도 지새금은 네 살 밖에 안 되는 외손자 최귀춘을 데리고 놀다가 반가와 어쩔 줄 몰라 했다. “난 생원이 우리를 버리고 영 갔나 했소. 올 봄에는 생원이 없어서 이영을 잇지 못해 어쩌겠는가 근심했소. 그런데 범이 자기 흉을 하면 온다고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겠소.” 상순은 아주머니를 한참 위문하고 나서 옆에 있는 대대 사무실로 들어갔다.         “어머나!”         위생소에서 쓰레받기를 들고 나오던 윤희는 놀랐다. 그녀는 주춤 멈춰 섰다가 생글방글 웃었다. “김 서기, 어떻게 돼 왔습니까?” 상순은 머리를 끄덕이며 인사를 받아 주었다. “누가 왔다고?” 건방진 목소리가 들리더니 조개턱 종연이 길쭉한 머리를 내밀었다. “어, 당신 어떻게 돼 왔소?” “사원들이 다 어데 갔소?” 종연은 심드렁한 표정을 지으면서 냉소했다. "저 패용천산에 갔소. 저기 보오.  돌로 ‘모 주석 만세’를 새기고 있잖소?”  그의 상통에는 상순이 다시 나타난 것을 좋아하지 않는 속내가 환히 드러났다. 박영발은 위생소 창문으로 상순을 보면서도 나와 인사도 하지 않고 신문으로 낯을 가리는 것이었다. (간에 가 붙고 슬개에 가 붙는 자식, 딱 오뉴월에 소불알처럼 이 볼 쳤다 저 볼을 쳤다 하는 놈 새끼야.) 상순도 종연과 영발이 보기 싫어 토성 안에서 성큼성큼 나와 패용천산으로 향했다. 대문어귀에서 되돌아보니 종연이가 윤희의 팔소매를 억지로 끌고 대대 사무실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종연은 윤희를 사무실로 끌고 들어가 을러멨다. “박 간호사, 내 말 듣겠소? 안 듣겠소?” 윤희는 두 손을 싹싹 마주 비비면서 종연이가 무슨 수작을 부리겠는가고 눈치를 살폈다. “어찌 언감 황주임 말을 듣지 않겠습니까?” “그래, 우리 함흥대대에 온 이상 내 말을 잘 듣지 않고 되겠소? 누구 덕에 무더운 여름이나 칼바람이 부는 겨울에 산과 들에 나가 헤매지 않는지 아오?” 종연은 사무 상을 손가락으로 똑똑똑 치면서 윤희 눈치를 살피면서 수작을 피웠다. “아차, 앉소. 여기 앉소.” 윤희는 별 수 없이 종연이 내주는 걸상에 앉았다. 종연은 옆으로 윤희를 째려보았다. “이제 보니 우린 동갑인 거 같소. 둘 다 용띠지?” “어머, 그래요?” 윤희도 위생소에서 쫓기워 날까봐 발라맞추었다. “나는 노총각, 박동무는 노처녀. 우린 천생배필인 거 같소.” 윤희는 눈을 곱게 흘기면서 앵돌아졌다. “처자 있으면서 노총각은 무슨 노총각? 사람을 웃기지 마세요.” 종연은 손으로 윤희의 허리를 슬쩍 끌어안으면서 지껄였다. “애는 있어도 마음만은 총각 마음이오.” 윤희는 겁기 띤 표정으로 종연을 흘끔 곁눈질했다. “왜 이래요? 누가 보겠어요.” “모두 일하러 가고 없소.” 윤희는 걸상에서 엉덩이를 옴찔하면서 옆의 위생소 눈치를 살피더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오, 그래. 옆에 박 소장이 있지. 이제 보니 그 놈을 일밭에 쫓아 보내고 윤희 혼자 소장 겸 의사 겸 간호사를 하면 좋겠다.” 종연은 서뿔리 건드리지 않고 아주 점잔을 빼면서 서서히 윤희에게 다가들고 있었다. 윤희는 종연이 징그럽고 두려웠다. “아니, 전 병을 볼 줄 몰라요. 그저 주사나 놓았지.” “그 놈을 쫓아 내지 않으면 어지간히 불편하지 않겠소?”       종연은  다시 윤희를 와락 끌어안고 걀쭉한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윤희는 종연을 살짝 밀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황주임은 박 소장 지지마저 받지 못하면 어떻게 입당하겠습니까?” 그러자 종연은 걸상 등받이에 잔등을 대면서 머리를 끄덕였다. “아, 옳소. 박영발 소장과 윤희 간호사는 문화대혁명 전부터 어진간한 관계가 아니었다면서?” 한참 무슨 궁리하던 종연은 등받이에서 잔등을 떼면서 헤헤 웃으면서 윤희를 쳐다보았다. “동갑이, 내 입당을 도와주오. 그럼 내 동갑을 영영 위생소에서 일하게 할게.” 윤희는 억지로 웃음을 지었다. “황 주임이 진보하고 입당하려는데 어찌 돕지 않겠습니까?” 윤희는 종연이가 문화대혁명 초부터 국장을 하는 반란파 두목 김용만과 다 한통속이라는 것을 잘 아는 터라 발라 맞추지 않을 수 없었다. 종연은 윤희를 노려보면서 한바탕 열변을 토했다. “고맙소. 허나 절대 림표처럼 양면파 수법을 쓰지 마오. 저 박영발은 양면파 수법을 쓰는 사람이오. 듣자니, 대대 당지부 서기를 선거할 때 모든 당원들 앞에서는 이흥수 서기를 선거하고 나중에 투표할 때는 상순한테 투표했다오. 오히려 정적이나 다름없이 수십 년 싸운 상순이한테 투표했다오. 사람이 어찌 이렇게 의리와 양심을 어기고 논단 말이오.” 갑자기 위생소 쪽에서 박영발의 부름소리가 들렸다. "윤희! 환자 왔소. 얼른 주사를 놓소!”   종연은 목소리를 낮추더니 옆의 위생소 쪽을 흘끔 눈짓하며 헐뜯어댔다. “저 영감은 믿지 못할 사람이오. 윤희는 뭘 보고 저런 영감과 바람을 피웠소? 흐흐흐. 이젠 나와 친하기요.” 윤희는 낯이 새파랗게 질리더니 앵돌아져 나가버렸다. 한편 상순이 패용천산으로 올라가면서 볼라니 온 함흥대대 사원들을 다 동원했는지 돌을 나르는 사원들이 과수원 다락 밭과 패용천산 양지바른 벼랑 위 사이로 개미떼처럼 분주히 오가는 것이었다. 그런데 사원들은 글쎄 과수원에 다락 밭에 둔덕을 쌓은 돌을 허물어 날라다 벼랑 위에 “모주석 만세!”를 새기고 있었다. “아니, 이게 무슨 일이야? 저 다락밭의 둔덕을 어떻게 쌓은 거라고 저래? 저걸 허물면 수토유실이 생겨 과수원은 끝장 날 게 아닌가!” 상순은 다락밭으로 달려가 다짜고짜 흥수의 손에서 돌을 빼앗아냈다. “이게 무슨 짓이오? 과수원을 망치려고 드오?” 흥수는 깜짝 놀랐다. 처음에는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어리둥절해하다가 그는 성난 상순의 아래위를 훑어보면서 비웃음을 지었다. “이보, 당신, 아직도 우리 함흥대대 일에 삐치오?” 상순은 흥수에게서 빼앗은 돌을 도로 쌓아놓으면서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다락밭 돌을 허물어선 안되오.” 흥수는 옆구리에 두 손을 지르고 침을 튕기며 을러멨다. “이 싱거운 나그네를 봐! 지금 모주석께 충성을 표시하려고 패용천산에 세상에서 제일 큰 ‘모주석 만세’를 새기는데 파괴할 예산인기여? 어째 ‘현행반혁명’ 모자를 씌워서 교하에 보내 달라노? 더운 밥을 먹고 식은 걱정 말라!” 흥수는 상순을 밀어놓으면서 돌을 기어이 가져가려고 했다. 상순은 돌을 가져가지 못하게 하려고 흥수와 밀고 닥치고 했다. 이때 이계삼과 허영주 그리고 허백호까지 다가와 상순을 말렸다. 그러자 상순은 그들과 인사한 후 저쪽에 데리고 가서 말했다. “아니, 칼산과 패룡산 돌을 새로 캘게지. 하필이면 다락밭 돌을 왜 허물어간단 말입니까?” 이계삼은 상순의 어깨를 다독이었다. “놔두오. 지금 무슨 세월이라고 그러오?” 허영주도 말렸다. “놔두오? 지금 과수원이겠소? 새해 농사를 다 망쳐 먹으면서도 그 노릇을 하는데. 무슨 수가 있소? 시대 조류가 아니오? 누가 감히 거슬러 올라 간다오? ‘나를 따르는 자는 흥하고 나를 거역하는 자는 망한다.’는데.” 허백호는 사위를 둘러보더니 목소리를 낮췄다. “상순이 잘 왔소. 저녁에 우리 다시 토론해보기오.” 이때 산비탈에서 종연이 헐금씨금 올라오고 있었다. 이계삼은 머리로 종연이 올라오는 쪽을 가리키자 허영주와 허백호가 스적스적 돌을 나르러 떠나들 갔다. 종연은 과수원에 올라오자마자 상순을 손가락질하며 빈정댔다. “김상순, 당신 정말 싱거운 사람이오. 교하에 갔으면 그 곳 혁명이나 할 거지. 어째 불청객이 나타나서 남의 충성심을 어지럽히오? 당장 산 아래로 내려가오. 안 그러면 민병들을 부르겠소.” 흥수가 맞장구를 쳤다. “황 주임 말이 맞아. 조금만 더 지랄 쓰면 민병들을 불러야제이. 치보주임이 부르지 못할 거 같아? 파출소 허소장이라도 불러오지 않는가 보라구.” 상순은 흥수와 종연을 손가락질하며 질책했다. “교하로 이사해 가면서 자네들한테 우리 대대를 맡겼더니 이게 뭔가?” 상순은 침을 퉥 뱉더니 산비탈 아래로 성큼성큼 내려갔다. 먼발치에서 슬금슬금 바라보던 이계삼이랑 허영주랑 그제야 상순을 시름 놓고 돌을 날랐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찾아 왔지만 아직도 날씨는 싸늘했다. 강남에 갔던 제비들도 날아와 지붕 밑에 둥지를 틀고 새끼를 낳을 준비를 하느라고 분주히 날아가고 날아오고 있었다. 토끼꼬리만한 해가 서산으로 넘어가고 먹장구름이 뒤덮인 동녘 하늘에 그래도 초생 달이라도 떠서 먹장구름 사이를 헤집고 지지리 어두운 밤하늘을 밝히려고 무등 애를 썼다. 두꺼운 먹장구름 떼들이 퍼져 별들이 총총한 밤하늘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상순은 조개덕에 있는 둘째딸 은숙이 네 집에서 저녁을 들었다. 은숙은 보글보글 끓는 장국을 사발에 떠서 아버지 밥상 위에 올려놓으면서 말했다. “많이 듭소. 이전에 이사갈 때 제가 뭐랍디까? 이사가지 말라는데도 기어이 가더니. 이제라도 이 딸의 말을 듣고 돌아옵소.” 상순은 한숨을 후 내쉬었다. “오자 해도 집이 없구나.” “먼저 우리 건너 사랑방에 구들을 놓고 있으십시오. 차차 집이 나지면 사고 듭지요.” 은숙은 아버지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받아들인 거로 여기고 뒤 말을 이었다. “하나 밖에 없는 덕돌이 부모가 없으면 친구를 잘 못 친해 나쁜 애로 변질하면 어쩝니까?” 상순은 돼지고기 점을 떠서 덕돌의 국그릇에 담아주면서 타일렀다. “최우수노라고 자만하지 말고 꾸준히 공부해라. 그리고 누나와 매형을 애 먹이지 말고 말을 잘 들어라. 철주랑 손버릇이 나쁘니까. 놀지 말라. 그런 애들과 놀면 나쁜 물이 묻을 수 있다.” 은숙도 타일렀다. “넌 별나게 성욱이랑 놀지 않고 하필 철주와 노니?” “성욱이가 내 공부를 잘하고 학습위원이 됐다고 질투하오. 내 나무를 꺾지 않았는데 선생한테 나무를 꺾었다고 물어먹었소.” “뭐라고?” 은숙은 적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덕돌은 성욱에게 물리어 학습위원에서 떨어진 일도 말할까 말까 하다가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아 그만 두었다. (아버지와 누나 그리고 매부가 들으면 얼마나 실망할까? 교하에 있는 엄마와 누나들은 펄쩍 뛸 게 아니겠는가?) 경만은 덕돌을 보고 말했다. “이후에 누가 너를 때리거나 놀리면 내나 수봉한테 말해라. 내 놔두지 않겠다. 쓸데없이 시시한 철주랑 친해가지고 그러지 말아라.” 허나 덕돌은 외목에 날까봐 철주와 놀지 않을 수 없었다. 숟가락을 놓기 바쁘게 우사 회의실로 이계삼을 찾아갔다. 도중에 늙은 비술나무 밑으로 가는데 누가 부삽으로 뭘 줏는 듯한 어두운 그림자가 어렴풋이 보였다. “누구요?” 가까이 가서 보니 정규상이 초롱을 들고 돼지 똥을 부삽으로 주어 담고 있지 않겠는가? “아니, 이게 무슨 일이요? 동생은 대대 위생소에서 병을 보지 않고?” “그렇게 됐소.” 정규상은 주위를 슬금슬금 둘러보더니 상순을 데리고 늙은 비술나무 밑으로 가 나직이 영발에게 밀리어 위생소에서 쫓겨나 돼지 똥을 줏게 된 경과를 간단히 이야기했다. 그러자 상순은 주먹을 으스러지게 틀어쥐었다. “정말 말이 아니구먼. 영발 서기는 뭐요? 반란파들에게 붙어 동생을 해치다니? 참.”  정규상은 상순을 보고 귀속 말을 했다. “놔두오. 괜히 그자들을 건드렸다가 형까지 고생하겠소. 형은 교하로 시원히 잘 떠나갔소. 보지 않으면 약이지.” “내 어찌 동생이나 이계삼 서기랑 여기서 고생하게 놔두고 혼자 피해 있겠소?” “그래 어쩔 예산이오?” 상순이 뭐라고 입을 떼려고 할 때었다. 저쪽에서 기침 소리가 나더니 어두운 그림자가 둘이 나타났다. 상순과 규상이 비술나무 뒤에 숨으면서 살펴보니 별로 허영주 서기 같아 보였다. 가까이 다가온 걸 보니 과연 허영주가 아니겠는가. “허 현장!” 허영주를 와락 끌어안으면서 상순이 외치자 허영주는 “쉿-” 하고 식지를 입에 대더니 나직이 말했다. “여기는 오래 말할 데가 아니오. 저기 가기요. 이 서기랑 기다리고 있소.” “알았습니다.” 상순과 정규상은 허영주를 따라 마을 뒤로 해 조개덕 서북쪽으로 한 1리 떨어져 있는 한족묘지꺼리로 슬금슬금 다가갔다. 백양나무가 봄바람에 쏴- 쏴- 무섭게 을씨년스레 소리치며 몸부림치고 있었다. 마른 풀이 한 키씩이나 자란 한족묘지꺼리는 꽤나 무시무시했다. 허영주가 다가가면서 손 벽을 짝짝 치자 저쪽에서도 손 벽을 짝짝 치는 소리가 들렸다. 놀란 까마귀가 푸 닥닥 날아나는 소리가 들리면서 무시무시한 감이 더했다. 상순이네가 다가가자 묘지 쪽에서 세 사람이 나타났다. “상순이 왔소?” 이계삼이 먼저 다가와 상순의 손을 잡았다. “이서기, 허서기, 반갑습니다. 아니, 이게 누구야? 허 소장이 아니오?” 상순은 제일 뒤에 나타난 허영호 소장을 보고 놀랐다. “김 국장, 제가 노간부들을 제대로 보호해 드리지 못해 미안합니다.” “아니, 언제 국장이오?” 상순은 허영호를 와락 끌어안으면서 속심의 말을 했다. “이젠 우리 모두 허 소장의 신세를 져야 하겠소.” 인사를 마치자 허 백호 서기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아무리 ‘문화대혁명’이라도 그렇지. 우린 이대로 노동개조나 하면서 세월을 보낼 순 없소. 저 반란파 두목 종연과 반란 파 개다리들과 생사결단을 내기요.” 그러자 이계삼이 말렸다. “그래도 당을 믿소. 위대한 당은 꼭 영명한 결단을 내릴 것이오.” 허나 허백호 서기는 땅이 꺼지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날이 대체 언제 오겠소? 내나 정규상 교수나 보오. 십여 년 전에 우파 모자를 썼는데 오늘도 그 상이 장상이오. 우린 일본 놈들과 국민당 놈들과도 목숨을 내걸고 싸웠소. 저 종연과 흥수만 없애치우면 누구도 우리를 어쩌지 못할 게요.” 허영주도 격분해 했다. “우린 대갈로부터 발끝까지 무장한 일본 놈들과도 태항산으로부터 싸우면서 동북에 진군했고 정성해 서기를 따라 연변에까지 나왔소. 그까짓 주먹깨나 쓰는 반란파 놈들이 뭐가 대단하오?” 허백호는 살기 띤 말을 이었다. “난 이 묘지거리 저 백양나무에 목을 매 이미 죽은 사람이오. 상순이 구해준 목숨인데 이제 그까짓 반란 파들을 죽이고 죽으면 뭐라오?” 이계삼은 나직하지만 엄숙하게 말했다. “안 되오. 아무리 정치투쟁이 백열화해도 무리한 행동은 하지 마오. 일단 살인사건을 저지르기만 하면 공안국에 잡히고 말 거요. 정적은 정치투쟁으로 해결해야지. 왜 산전수전 다 겪은 노 간부들이 요만한 시련을 이기지 못하오? 내심하게 싸워야 하오.” 허백호는 한숨을 후 내쉬었다. “종연과 흥수를 병신이라도 만들어놓으면 다요.” 이계삼이 백호와 영주를 보고 나직이 말했다. “안되오. 종연과 흥수를 병신을 만들어놓으면 지금 같은 ‘문화대혁명’ 바람에 또 두 번째 종연과 흥수, 박영발이 나타날 게요. 몇을 병신을 만들어야 이 놈의 세월이 끝나겠소?” 뒤이어 그는 상순을 돌아보더니 뒤 말을 이었다. “상순이, 이사 갈 때도 우린 반대했소. 현실도피를 하지 말고 돌아오오. 숱한 노간부들을 버린 건 둘째고 우리 대대를 흥수와 종연에게 맡기는 바람에 이게 무슨 꼴이오?” 허영주도 말했다. “옳소. 돌아오오. 우리 일치단결해 흥수와 종연을 꺾어버리잔 말이오.” 여러분의 말을 다 듣고 상순은 무거운 입을 열었다. “그간 노간부들을 두고 교하로 가서 죄송합니다. 저는 돌아와야겠습니다. 반란파들이 로간부들을 반란해 정권을 찬탈하는 것을 좌시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들과 주먹이나 칼로써가 아니라 마레주의 모택동 사상이란 정치투쟁 무기를 들고 최대의 인내성으로 끝까지 싸워야 합니다.” 여럿은 박수쳤다. “좋소. 환영하오.” 이계삼은 상순을 끌어안았다. 허영주도 상순을 끌어안았다. 허나 이제껏 입을 다물고 있던 정규상이 근심했다. “형님이 돌아오는 건 옳소. 그런데 혁명위원회와 치보 주임 자리를 차지한 종연과 흥수 형님을 받자 하겠소?” 그러자 상순은 주먹을 틀어쥐고 을러멨다. “누가 내 앞길을 막는다오?” “형님이 이사해 오려고 해도 그 놈 새끼들이 동의하지 않으면 어떻게 오겠소?” 그러자 허백호가 자기 사촌동생 영호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얘야, 네가 방법을 대봐라. 상순이 와야 우리가 발편잠을 잘 수 있다.” 한참 납덩이같이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허 영호 소장이 자기 소견을 내놓았다. “방법이 있습니다. 우선 조개덕 생산대 사원대회를 열고 김 서기를 받겠는가를 투표해서 결정하게 합시다. 조개덕에는 종연 밖에 없습니다. 흥수는 함흥촌에 있지 않습니까? 조개덕생산대에서 결정하면 직접 파출소에 락호증을 가져오면 내 호구를 올려놓으면 모든 게 끝납니다.” 그러나 허백호는 시름놓지 못했다. “만약 생산대에서 통과되지 못하면 어쩌니?” 허영호는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관대루야?” 허영주가 동을 달았다. “옳소. 조개덕 생산대 광범한 사원들은 모두 상순동무를 환영할 거요. 지난해 종연과 흥수가 대대를 맡으면서 무슨 꼴이 됐소?” 허백호는 영호쪽으로 돌아서면서 간절히 부탁했다. “얘야, 혹시 생산대에서 통과되지 않더라도 네가 손을 써라. 파출소에서 상순이네 호구를 조개덕에 붙여주면 다야.” “정 안되면 마지막수라도 써야지.” 이튿날, 조개덕 우사에 있는 생산대 회의실에서 사원대회가 열렸다. 회의에는 당연히 종연과 흥수도 대대를 대표해 참가했다. 허영호 소장과 허영주, 이계삼, 허백호, 정규상 등이 모두 참가했다. 생산대 허송산 대장은 사원들이 다 모인 것을 보고 선포했다. “이제부터 사원대회를 시작하겠습니다. 우리 대대 당지부 오랜  서기 김상순 동지 일가 이사문제를 토론하겠습니다.”  종연은 벌떡 일어나 버럭 고함쳤다. “안되오! 절대 안되오! 이사 갔으면 갔지. 왜 되돌아와? 어림도 없는 짓이오!” 흥수도 맞장구를 쳤다. “안 되고말고. 아예 이사회의를 열지도 말아야 해. 생산대에 밭이 적어 죽물도 먹기 힘든데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이사해간 사람을 받어? 식량이나 줄어들었지. 사원 여러분, 안 그렇습니까? 잘 따져 보십시오.” 그러자 여기저기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때 허동원이 입을 열었다. “내 생각에는 김상순 서기를 받는 게 옳소. 김 서기와 병완 서기가 우리 대대 과수원을 꾸리고 저 멍지메산 앞에 논밭을 여섯 헥타르나 더 풀었소. 저 장개골안과 천지꽃산 그 어느 밭인들 김 서기네 일가가 일군게 아니겠소? 사람이 양심이 있어야지. 로실히 말해 우리 함흥촌은 김 서기네 일가가 개척한 마을이라고도 해도 과언이 아니오. 우리가 쪽박을 차고 고향을 떠나 이 곳에 발을 붙이고 사는 게 다 누구네 덕이오? 김 서기네 은공을 잊어서는 안 되오. 사람이 양심을 저버리고 배은망덕해서야 되오? 우리 마을은 김 서기 같이 대공무사하고 재간과 능력이 있는 실농군 간부가 와서 영도해야 살 길이 있소.” “뭐라고?” 종연은 허동원을 쏘아보면서 자기 귀를 의심했다. “종연아, 네 말버릇을 조심해라. 이상들과 뭐야? 넌 혁명위원회 주임을 하면서 해놓은 일이 뭐냐? 과수원 다락밭에 쌓은 돌을 허물어 뭘 했니? 그 바람에 과수원에 수토유실이 심해 사과나무 뿌리가 다 드러났고 지난해 여름 폭풍우에 숱한 나무가 넘어지고 아무 것도 거둬들인 게 없다. 지난해 농사도 다 망태기로 돼버려 올해 사원들은 보리 고개를 넘기 어렵게 됐다. 상순 서기와 병완 서기가 우리를 이끌어 얼마나 많은 고생을 해 차려놓은 과수원이냐?” “뭐라오? 감히 ‘모주석 만세’를 새긴 위대한 공적을 죄로 몰겠는가? 어째 반혁명 모자를 쓰고 싶소?” 흥수는 눈을 뚝 부릅뜨고 을러멨다. 그때 허영호 소장이 나섰다. “이치보, 괜히 죄 없는 사람에게 마구 모자를 씌우지 마오. 상급에서는 타격면을 좁히라고 했소. 쩍 하면 우파가 아니면 현행반혁명 모자를 씌워 타도하다나면 함흥대대에 혁명적인 빈농이 몇이 남겠소? 정 그따위로 놀면 파출소에서 당신 치보주임 자격을 취소해버리겠소.” 파출소 소장이 말하자 흥수는 찍 소리 하나 더 치지 못했다. 그러자 최국선이 나서서 흥수를 종연과 흥수를 손가락질하면서 공소하듯 말했다. “너희들이 한 게 뭐냐? 내 온 일년 내내 뼈빠지게 일한 게 년말에 5전짜리 동전 세 개 밖에 타지 못했다. 내 그래 온 일년 가마니 한 장 짜서 판 것보다도 일을 못했단 말이냐?” 최국전은 지난해 연말에 탄 동전 세 개를 종연의 낯에 쥐어 뿌렸다. 그러자 국전의 동생 국천은 더 한심한 말을 했다. “형님은 그만하면 그래도 괜찮소. 난 빚을 120원이나 진 건 어찌 하오?” 그때 정규상이 나섰다. “김서기 영도할 땐 그래도 이 마을에서 찰떡을 쳐 먹고 돼지고기도 놔눠 먹지 않았소?” 그러자 사원들은 이구동성으로 “옳소. 김 서기 돌아와야 하오.”라고 했다. 이쯤 되자 일이 뒤틀린 것을 알고 종연은 아예 자리를 훌 떠나 버렸다. 허나 흥수는 일루의 희망을 품고 남아 있었다. “사원대회에서 무기명투표를 하제이(하지).” 그는 일어나 말했다. “모두들 담배 종이에 동의, 부동의를 써서 바치오. 한 사람이 한 장만 써내야 하오. 내가 직접 검표하겠소.” 모두들 담배쌈지에서 담배종이를 한 장씩 꺼내 써서 바치고 회의실을 나가 흥수와 허영호소장의 검표한 결과를 기다려야 했다. 한참 후 흥수가 두덜거리며 투표종이를 허공중에 활 뿌리치며 두덜거렸다. “어쩜 이럴수 있단 말인가? 지주나 부농들이 반대하고는 누구도 막아 나서지 않다니?” 허소장은 머리를 끄덕였다. “이게 바로 조개덕생산대와 함흥대대 민심의 반영이오.” 흥수의 형 학수도 끼어들었다. “민심은 천심이라고 상순을 받는 수밖에 있어? 괜히 원수를 맺지 말고 낙호증이나 떼줘라.” 성수도 형 흥수를 나무랐다. “상순은 항미원조 전쟁때도 형님을 몇 번이나 구했소? 형님은 잊었소? 압록강을 건널 때 미군 전투기가 소사할 때도 상순이 밀치며 엎드리게 하지 않았으면 살아 남을 수 있소? 남조선 충청도 한산면에 산등성이에서 육박전을 할 때도 상순이 공병삽으로 미군 흑인을 찍지 않았더라면 왼팔을 상한 형님이 살아남았겠소? 상순은 왼팔까지 날창에 찔리면서 널 구해줬는데 구명은인한테 배은망덕해서야 쓰나?” 그러나 흥수는 “흥!" 하고 회의실을 떠나갔다. 이계삼과 허영주 그리고 허백호와 정규상 등은 모두 상순한테 다가와 악수를 나누면서 기뻐했다. 사원들도 이구동성으로 환영했다. “잘 됐소. 김 서기 온다니 살 길이 나졌소.” “어서 옵소. 김 서기.” 밤이 가는 줄도 모르고 사원들은 상순과 웃음꽃을 피웠다. 허동원은 상순의 두 손을 잡고 흔들며 진심으로 축하했다. “김 서기 돌아오면 우리 생산대 정치대장을 합소. 내 계속 생산대장을 하면서 손잡고 사원들이 잘 살게 합시다.” “감사하오. 나를 받아주어서 고맙소.” 그날 사원대회는 기실 상순이 돌아오는 것을 환영하는 희의나 다름없었다. 사원들은 진짜 우국우민의 충정을 지닌 상순과 같은 대공 무사한 농촌간부가 필요했던 것이다. 상순이 노간부들과 사원들에게 휩싸여 회의실을 나섰을 때는 밝은 보름달이 구중천에 두둥실 떠 있었다.
159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104) 댓글:  조회:1749  추천:0  2018-06-02
                 5. 삼십육계 줄행랑이 제일       가을의 쪽빛하늘은 맑고 푸르고 높았다. 산과 들의 곡식밭은 누렇게 번져가고 있었다. 하늘에는 강남으로 날아가려는 새끼제비들이 날개를 굳히느라고 나는 연습을 하고 있었다. 덕돌은 성욱과 함께 삽을 둘러메고 쥐 굴을 파러 태평강을 넘어 제방둑 옆의 콩밭으로 갔다. “야, 쥐 굴!” 덕돌이 소리치자 성욱은 삽으로 그 쥐 굴을 파기 시작했다. 한자 깊이도 파지 않았는데 다 퍼진 노란 콩알이 나왔다. “야, 쥐 콩!” 덕돌은 희구해 쥐 콩을 손으로 마구 파냈다. 그때 놀란 쥐 한 마리가 쥐 굴에서 나와 구덩이 밖으로 뛰어나갔다. “요놈 쥐새끼! 죽어 봐!” 성욱은 마른 콩 숲속으로 뛰어 들어가는 쥐를 따라가면서 삽날로 탁탁 때려 끝내 잡아치웠다. “덕돌아! 큰누나 왔다. 어서 집으로 돌아가자!” 그때 저쪽에서 덕돌의 막내누나 성숙의 부름소리가 들려왔다. “응? 큰누나 왔다고?” “응- 빨리 가자.” “큰 매형이 또 사탕이랑 과자랑 가져왔데-?” “응!” 덕돌은 쥐 굴에서 난 젖은 콩을 성욱에게 다 주고 성숙을 따라 부랴부랴 집으로 달려갔다. 그는 무슨 생각이 났던지 돌아섰다. “성욱아, 우리 집에 놀러 오너라. 내 사탕이랑 과자랑 줄게.” “응, 고맙다!” 그들은 서로 손을 저으면서 헤어졌다. 경학의 아들 성욱은 덕돌의 9촌 조카인데 둘은 각별히 친한 짜개바지친구였다. 덕돌은 이전에 털모자도 없이 귀를 얼굴 때 성욱이 자기 쓰던 털모자를 씌워주던 일을 잊지 않았다. 그리하여 덕돌은 동갑조카라고 성욱과 사탕 한 알이라도 나눠 먹곤 했다. 덕돌이 주먹을 쥐고 집으로 뛰어오니 마당에서 큰누나 춘자가 어린애를 안고 반겨 맞았다. “우리 하나 밖에 없는 남동생이 왔구나.” “큰누나!” 덕돌은 한달음에 애를 안은 큰누나의 품에 안겼다. 춘자는 덕돌과 애를 한품에 안고 기뻐 어쩔 줄 몰랐다. “덕돌아, 네 조카 성춘이야.” 그제야 덕돌은 큰누나의 품에서 머리를 들고 어린애를 빤히 들여다보았다. 성춘은 어머니 품에 안겨 손가락을 입에 넣고 빨면서 하얀 두 다리를 바둑 거리었다. “성춘아, 얘 생일이 언제요?” 덕돌은 외조카 성춘의 젖살이 포동포동 오른 볼을 손가락으로 매만지면서 물었다. 그러자 춘자는 덕돌에게 애를 안겨주었다. “옳지. 외삼촌이 안아봐야지. 얘는 70년도 11월 11일이 생일이다.” 덕돌이 입이 함박만 해 성춘을 안고 싱글벙글하며 횡설수설했다. “그 놈이 생일이 특별한 게 큰 노릇을 하겠다. 어쩜 몽땅 1자냐? 네 가지가 몽땅 1등을 할 팔자로구나.” 명옥이 집에서 나오면서 황급히 소리쳤다. “애를 떨어뜨리겠다. 꼭 안아라.” “예.” "이젠 그만 안아보고 큰누나한테 줘라." "예." 마을에서는 모두들 나이는 어려도 속에 영감이 들어앉았는지 옛말을 잘 하는 덕돌을 보고 “속에 영감이 들어찬 쪽똘영감”이라고들 했다. 덕돌은 성춘을 품에 꼭 안고 흔들면서 귀여워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는 아쉬운대로 성춘을 큰누나한테 넘겨주었다. 전 해 겨울에 엄마가 기차를 타고 교하에 가서 성춘을 낳는 것을 받아내고 뒤 바라지를 했다. 둬달 후에 엄마가 집으로 돌아와 큰매형 등에 업혀 강을 건너 큰딸 집으로 간 얘기로, 갓난 애기 얘기를 하는 것을 들었기에 덕돌은 큰누나네 아들을 낳았다는 것을 진작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처음 보니 매형과 누나를 고루고루 닮아 새하얀 살색에 곱게 생긴 조카 성춘이 얼마나 귀엽고 고운지 몰라 어쩔 줄 몰라 했다. “우리 하나 밖에 없는 처남이 왔구나.” 이때 동수가 나와 덕돌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입에 사탕 알을 넣어 주었다. “야, 이 놈아, 돌이 둘인 거 뭐야? 허허허.” “호돌매돌.” 춘자가 한마디 끼어들며 웃었다. 동수는 덕돌의 손을 끌고 들어가더니 “봐라, 셋째매형도 왔다.”라고 하면서 윗방에 앉아 있는 한 청년을 가리켰다. “셋째매형?” “응. 그래. 셋째매형이야.” 덕돌이 보니 작달막한 셋째매형은 철색얼굴에 웃음을 지으면서 사과 한 알을 들고 일어나 다가왔다. “자요. 사과 드세요.” (셋째매형도 남대치구나.) 춘자는 “에이고, 열네 살 밖에 안 되는 애하고 무슨 존대를 쓰오? 편안히 이래라 저래라 하오.”라고 했다. “하나 밖에 없는 처남인데요.” 이때 상순이 집에 들어섰다. 동준은 동서 동수를 보고 “절을 해도 돼요?” 하고 물었다. “글케 하게.” 허나 상순은 손사래를 흔들었다. “아니, 절은 뒀다 천천히 하오.” 그 말에 동준은 손으로 뒷덜미를 긁적거렸다. 상순은 상좌에 앉더니 덕돌을 보고 “너 과수원에 가서 셋째누나를 데려오렴.”라고 했다. “예.” 덕돌은 큰누나가 주는 사탕과 과자를 호주머니에 넣고 칼산과 패용천산 사이에 있는 대대 과수원으로 달려갔다. 상순은 셋째 사위감을 마주 앉아 엄숙하게 물었다. “이름을 뭐라고 부르오?” “고동준이라고 불러요.” “고씨라? 무슨 고씨요?” 상순과 동준은 딱딱하게 일문일답을 했다. “제주 고씨입니다.” “그럼 남조선 제주도가 고향이오?” “아닌데요. 우리 고씨는 본이 제주지만 후에 탐라에서 대륙에 들어와 경상도에서 살았어요.” 상순은 한숨을 후 내쉬었다. “경상도에서 여기까지 입북하느라고 고생이 얼마나 많았겠소? 다 일본 놈들 때문이었지.” 상순은 담배쌈지를 꺼내 담배를 말아 한 대 붙이더니 물었다. “길림에서 중등전문학교를 나와 소학교 교원을 한다지?” “예.” “내 하나 궁금한 게 있소. 지금 모 주석께서는 ‘이계급투쟁위강(以阶级斗争为纲),강거목장(纲举目张)이라고 했는데 무슨 뜻인지 설명해주겠소?” 그것은 사위 감의 지식을 시험 치는 대목이나 다름없었다. 동수는 별로 생각도 하지 않고 술술 대답했다. “그 뜻은 이런 거 같아요. ‘계급투쟁을 기본 고리로 하여야 합니다. 기본 고리를 틀어쥐면 모든 것이 다 풀립니다.'” “무엇 때문에 ‘강거목장’이라고 했소?” “예. 말씀 드리면요. 고기그물이 있잖아요. 예서도 투망이라고 하지요?” “그래 투망이지.” “투망에서 끈은 고리와 같은 거죠. 투망이 아무리 커도 끈을 잡아당기면 그물이 끌려 모아지면서 고기를 잡을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러니깐. 계급투쟁을 기본 고리로 틀어쥐면 모든 일이 술술 다 풀린다는 뜻이지요.” “오, 그래서 계급투쟁을 기본 고리로 틀어쥐라는 말이구먼.” 상순은 동준의 그럴 듯한 대답에 머리를 끄덕이었다. 뒤이어 그는 동준의 집안 형편을 두루 물어보았다. 교하에서 소학교 교원을 하는 동준은 고씨네 일곱 형제 가운데서 둘째였다. 로임을 타는 교원이기에 귀여운 딸 홍자를 고생시킬 것 같지 않았다. 이때 홍자가 누런 사과를 듬뿍 담은 하얀 버들광주리를 이고 집안에 들어섰다. 동준은 나가 홍자의 머리 위에서 사과광주리를 받아 내리워 주었다. 그 모습을 보고 명옥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사실 상순과 명옥은 이전에도 서뿔리 홍자의 결혼을 결정하지 않았다. 이전에도 동네에서 숱한 중매군들이 문턱이 다슬게 찾아왔지만 다 거절했다. 그들은 애지중지하며 키운 딸을, 죽다가 살아난 셋째딸을 아무데나 줬다가 고생시킬까봐 마음고생을 시키지 않을 사위 감을 고르고 또 골랐던 것이다. 병진이 동불사의 고모사촌동생을 소개했을 때에도 술주정뱅이 병진을 닮아 주정뱅이라는 것을 알고 거절했다. 윗집 아낙네가 로투구의 자기 5촌 조카를 소개했을 때에도 키가 작은데다가 농사를 짓는 고생할 자리라고 대답하지 않았던 것이다. 상순은 고방에 들어가 머리 수건으로 얼굴의 땀을 훔치는 홍자를 따라 들어가 의향을 물었다. “저 동수가 마음에 드느냐?” “예. 교원질을 하니까. 농사지을 고생은 하지 않을 거 같습니다. 말수가 적고 마음이 좋아 보입니다. 나를 마음고생을 시키지 않을 거 같습디다.” “그래. 네가 그간 춘자네 집으로 가서 여러 번 만나보고 지내봤다니 믿겠다.” 상순은 고방에 들어온 아내와 큰딸 춘자를 보고 의향을 물었다. “헌데 말이 적고 눈에 독이 좀 있는 거 같아. 어떠냐?” 춘자는 자기 견해를 제대로 말해주었다. “말수가 적어서 속을 알기 힘듭니다. 허나 이제껏 2년 동안 지내보니 마음이 어진 편입디다.” 그러자 명옥은 상순이 너무 꼬치꼬치 캐묻는다고 여겼다. “에이고, 춘자가 한 학교에서 지내보고 소개했는데 틀림 있겠소. 절을 받기요.” 그리하여 상순과 명옥은 정중하게 고동준을 셋째사위로 맞아들이기로 하고 절을 받았다. 동준은 “감사해요. 홍자를 데려다 마음고생을 시키지 않고 행복하게 살겠습니다.”라고 하면서 꾸벅 절을 올리었다. 상순과 명옥은 친척들을 불러다 약혼술상을 차렸다. 둘째사위 영만과 큰사위 동수는 술친구였다. 그날도 그들은 새 동서를 맞은 기쁨에 겨워 술을 취토록 마셨다. 허나 말수 적은 동준은 첫걸음인지라 눈을 내리깔고 술을 덜 마셨다. 덕돌은 사탕과자를 내다가 성욱과 동린과 함께 나눠 맛있게 먹었다… 음력 정월 초아흐레에 홍자는 동준한테 시집가게 됐다. 동준은 잔치 전 일주일 전에 가시집에 와서 홍자와 함께 있었다. 잔치 날 새벽 3시 반이 되자 성급한 상순은 기차시간이 늦을 까봐 신랑의 큰상을 차려놓으라고 재촉이 성화같았다. 명옥은 “기차가 8시 반에야 떠나는데 무슨 재촉을 그렇게 합니까?”라고 했다. 허나 상순의 성깔을 아는 명옥은 은숙이랑 춘자랑 데리고 윗방에 큰상을 차렸다. 그리하여 동준은 새벽 4시도 되지 않아 큰상을 받았다. 전기도 오지 않아 초불을 밝히고 진짜 전쟁을 치르는 격이었다. 상빈으로 동준의 삼촌이 왔는데 술을 한 잔도 입에 대지 않았다. 상순이 술을 마시지 않는 위인이라는 것을 알았는지 사돈영감도 술을 별로 마시지 않았다. 이쪽에서 상빈으로 상순이 직접 덕돌을 데리고 갔다. 상순은 제일 귀엽게 기른 셋째딸 홍자가 어떤 곳에 시집가는가를 직접 자기 눈으로 그 미지의 땅을 밟아보고 와야 시름을 놓을 것 같았던 것이다. 그들은 새까만 밤에 첫날 마차에 첫날이불이랑 실어가지고 진수해를 바라고 떠났다. 그런데 반란파 두목 종연이 뜻밖에도 마차를 몰고 짐을 실으러 오지 않았겠는가. (진짜 이게 해 서산에서 뜨지 않았는가.) 상순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종연도 당지부 서기인 상순에게 잘 보이지 못하고는 입당은 고사하고 이 마을에서 발을 붙이기 어렵다는 혁명의 도리에 눈이 트기 시작했던 것이다. 상순은 셋째 딸과 함께 기차를 타고 일곱 시간 남짓이 지루하게 달려서야 교하에 이르렀다. 저 멀리 탄광의 버럭산에서 불이 활활 타오르면서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내자산 탄광이 마을에서 한 3리 밖에 되지 않아 땔나무근심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사돈집이 있는 마을에 가보니 집집마다 벽 밑에 기름이 번지르르한 피장 같은 석탄을 쌓아놓고 때고 있었다. 덕돌은 또 상빈으로 가서 상다리 부러질 지경으로 차려놓은 상빈 상을 받고 배가 세간나게 먹어댔다. 둘째누나 은숙의 결혼에 상빈으로 갔을 때와는 달리 열네 살이나 됐기에 배를 슬슬 만지면서 “야, 잘 먹었다.”고 하지는 않고 좀 체면을 차리었다. 상순은 춘자네 집에 며칠 있으면서 건두부 채에 돼지고기를 실컷 먹을 수 있었다. 두루 마을 형편을 알아보니 밭도 많고 남새를 가꾸므로 살기도 함흥대대보다 나을 것 같았다. 함흥대대에서 아무리 한평생 대대로 고생해도 죽물이나 겨우 먹었다.  땔나무도 없어 항상 담배뿌리와 강냉이뿌리를 파다가 때면서 기아에 허덕이지 않았던가! 어느 해인가 한번은 집에서 어쩌다 음역설을 만나 돼지고기 두 근을 사다 장국을 끓여놓았다. 애들은 숟가락으로 국 사발을 살살 저으면서 돼지고기를 찾느라고 여념이 없었다. 그런데 성숙이가 불시에 “와-” 하고 울음보를 터뜨렸다. “어째 그러니?” 성숙은 눈물을 닦으면서 “내 돼지고기 은자 국사발에 들어갔소?”라고 했다. “어쩌다가 그렇게 됐니?” 명옥이 물으니 성숙은 울면서 말했다. “내 국 사발하고 은자 국 사발을 나란히 놓아놔서 내 숟가락으로 장국을 젖다가 아까워 먹지도 않던 돼지고기점이 은자 사발에 들어갔소.”       명옥은 은자의 국 사발에서 성숙이 가리키는 돼지고기 점을 숟가락으로 퍼서 주었다. 그런데 성숙이 씹어보니 장덩이었다. 참 울다가 웃을 일이었다.     상순은 황화전자 큰딸네 집에 와 있으면서 두루 살펴보니 땔나무근심도 없지 쌀도 배급을 주지 논도 잘 다루면 잘 먹고 살 것 같았다. 이곳 한족들은 원래 논농사를 지을 줄 몰라 씨를 뿌려 거두는 것만큼 거둬다 먹고 위주로 채소를 가꾸고 있었다. “여기 와서 논물기술원으로 살면 어떨까? 그까짓 함흥대대에서 문화대혁명의 시련을 받을 게 뭔가? 에라, 삼식육계에 줄행랑이 제일이야. 교하로 훌쩍 이사해 버리자.” 상순은 며칠 심사숙고한 끝에 춘자와 말해 보았다. 그러자 춘자는 남편과 토론하고 본가집을 황하전자대대 2대 논물기술원으로 받게 주선했다. 그때 내자산공사 농업보급소에 배치된 동수의 말을 대대에서 인차 들어주었다. 황차 상순은 벼농사 기술원이라는데야. 대대 당지부 서기에 치보 주임도 해본 경력까지 있어 공사에서마저 훌륭한 농촌 간부를 얻었다고 환영하는 눈치였다. 홍자도 부모를 떠나 먼 타향에 시집왔는데 자기를 금지옥엽처럼 아끼던 친정 부모가 옆에 오면 좋다고 기뻐 어쩔줄 몰랐다. 상순은 “문화대혁명” 정치가 백열화된 함흥대대를 떠나 조용한 한족 곳에 와서 쌀 근심, 땔나무 근심을 하지 않으면서 살고 싶었다. 게다가 상순이 대대에 돌아오니 반란파들이 그의 둘째딸 은숙이 조선 회룡에 가서 있은 일로, 진달래 큰어머니 문제 등을 꼬챙이에 꿰들고 조선특무라는지, 고모 6촌 동생 이병수와 용천의 남조선 특무사건을 꼬챙이에 꿰들고 남조선 특무라고 떠들어대는 것이었다. (에라, 모르겠다. 이 더러운 대대를 떠나고 말자.) 집에 돌아온 후 상순은 이계삼을 찾아가 볼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찾아가 보아야 현실을 도피하려고 한다면서 반대할 것은 빤한 일이었다. 그리하여 먼저 허영주를 찾아가 교하에 이사해 갈 의향을 말했다. 그러자 허영주는 눈이 똥그래 상순을 뚫어지게 보다가 펄쩍 뛰었다. “아니, 무슨 말이오? 우린 김 서기를 믿고 이 마을로 내려왔소. 숱한 노간부들을 버리고 어디로 간단 말이오? 함흥대대를 뭐로 만들 예산이오?” “문화대혁명 바람에 어디 살겠습니까? 우리 조손 3대가 쪽박을 차고 이 마을에 와서 황무지를 개간하고 한평생 고생했지만 오히려 투쟁 받아야 했습니다. 종연이랑 이마에 피도 마르지 않은 반란파들이 우리 당지부 머리 위에 올라 앉아 똥을 쌀 지경입니다. 보기만 해도 눈에 불이 나서 어디 살겠습니까? 안쪽에는 땅이 많아 농사를 짓기 좋고 마을 옆에 탄광이 있어서 땔나무근심도 없어 살기 좋을 거 같습디다.” “꼼꼼히 잘 생각해보오. 당을 믿어야 하오. 우리 당은 꼭 정확한 길로 나갈 것이오. 우리는 초인간적인 인내력으로 이번 ‘문화대혁명’의 시련을 이겨나가야 하오.” 영주는 절절한 눈길로 상순을 바라보며 두 손을 꼭 잡아 흔들었다. 상순은 머리를 숙이고 우사 회의실을 나섰다. 그는 먹장구름이 뒤덮인 채 개일 줄 모르는 하늘을, 애꿎은 함박눈만 펑펑 내리쏟아붓는 하늘을 쳐다보더니 한숨을 후 내쉬었다. 이계삼과 허영주 그리고 허백호까지 나서서 현실을 도피하는 것은 당과 인민을 책임지지 않는 행위라고 비평하면서 말렸다. 하지만 벽이라도 차고 나가는 상순의 성질을 막을 수는 없었다. 노 간부들은 자기가 살자고 쌀 걱정을 하지 않으려고 이사 가는 상순을 더 막을 수도 없어 그만 물러서고 말았다. 상순의 둘째딸 은숙도 갓난 계옥을 업고 와서 울면서 말리었다. “아버지, 우리를 버리고 가지 마십시오. 안쪽에 간다고 쌀이 하늘에서 떨어지겠습니까? 온 집 식구들이 한족 곳에 가서 무슨 고생을 하자고 그럽니까?” “썩 꺼져라! 남이 이사 가는데 고양이 방정을 떨겠니?” 은숙은 울면서 집으로 돌아갔다. 아버지 성격을 아는 그녀도 어쩌는 수 없었다. 그녀는 맏딸 계옥을 업고 겨울 하늘을 우러러 보며 섭섭해 눈물을 지었다. 청청 하늘이어, 어이하여 아버지는 이 딸의 일편단심 효성을 몰라주는 걸까?                                    6. 정든 고향을 떠나      천지꽃산에는 잔설이 듬성듬성 널려있었다. 만주 땅에서는 아직도 꽃샘추위가 꽤나 맵짰다. 얼굴을 스치는 바람은 아직도 사람들을 괴롭혔다. 상순은 삽을 메고 명옥은 제물을 담은 함지를 이고 천지꽃산 중턱의 쓸쓸한 할아버지 병완의 무덤으로 다가갔다. 그 뒤에 어린 덕돌이 따라 올라갔다. 상순은 산소 앞에 이르자 명옥과 덕돌과 나란히 서서 두발을 모으고 똑바로 섰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이 불효한 손자를 용서하옵소서. 혹시 이 손자를 현실을 도피하는 연약무능한 놈이라고 욕할 수도 있으리다. 허나 할아버지와 아버지께서 고향을 떠나 쪽박을 차고 두만강을 건너와서 개척한 우리 함흥대대는 반 우파투쟁에 뒤이어 ‘문화대혁명’ 바람까지 불어와 이젠 사람이 살 곳이 못됩니다. 반란파들이 이른바 혁명을 한답시고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마귀굴로 돼 버렸습니다. 차라리 일본 놈들이나 국민당 놈들이라면 모조리 죽여 버리면 그만이 아닙니까? 허나 반란파들은 위로부터 혁명적인 홍위병이라고 지지를 받기에 그렇게 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대갈통부터 발끝까지 무장한 일본 놈들을 몰아내고 국민당들을 때려 부셨고 세계 최강이라고 자부하는 미군까지 조선에서 몰아내지 않았습니까? 허나 새로 생긴 반란파들은 어찌는 수가 없습니다. 속담에 똥이 무서워 피합니까? 더러워서 피한다고 했습니다. 제가 이사는 가지만 조부모님과 부모의 산소를 꼭꼭 찾아 뵙고 모실 것입니다.” 말을 마치자 상순은 가지고 간 삽으로 산소에 흙을 푹푹 퍼 올렸다. 이쪽에서 명옥은 제사상을 차려놓았다. 뒤이어 상순과 명옥은 덕돌과 함께 절을 꾸벅꾸벅 아홉 번이나 올렸다. 뒤이어 상순과 명옥은 제주를 부어 올리고 절을 하였다. “조부모님들, 이 불효한 손자를 널리 양해하시고 편안히 계십시오. 이 마을을 떠나는 게 영영 떠나는 게 아닙니다. 제 마음은 항상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계시는 우리 마을에 두고 갑니다. 편안히 계십시오.” 상순은 작별의 절을 또 아홉 번이나 하고나서 눈물을 훔치면서 산 아래로 내려갔다. 태평강을 건너 계수동 산정으로 올라가 부모의 산소도 찾아보았다. 그는 어머니와 아버지 산소에 다가가자 넓적 엎드려 산소를 부둥켜안고 대성통곡했다. “아버지, 어머니! 이 불효자를 욕하십시오. 부모 생전에 맛있는 음식을 제대로 대접하지 못하고 3년 재해 때 따뜻한 밥 한 끼 제대로 잡숫지 못하고 돌아간 아버지께 정말 미안합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반란파들을 보기 싫어 떠나는 거지. 아버지, 어머니를 영 버리고 떠나가는 게 아닙니다. 용서하십시오, 이 불효자를.” 덕돌은 부모가 눈물을 훔치자 뜨거운 눈물을 주먹으로 닦았다. 상순은 심란한 나머지 계속 중얼거렸다. “삼십육계에 줄행랑이 제일이라고 여기서 반란파들에게 투쟁받고 살게 있습니까? 부러지면 부러졌지 후려들 순 없습니다. 사람이 빚을 지고 살아도 어찌 시비 지고 삽니까?” 상순과 명옥은 손수 제주를 부어 올리고 덕돌과 함께 절을 아홉 번이나 했다. 뒤이어 상순은 덕돌을 보고 제주를 부어 산소에 올리고 절을 올리게 했다. 작별제사를 마치자 상순은 한참 비틀거리면서 산기슭으로 내려가다가 부모의 산소를 되돌아보았다. 잔설이 뒤덮인 민둥산의 흔들리는 마른 풀대 숲속에 누워 있는 부모의 산소가 쓸쓸하기 그지없었다. 이튿날 동녘이 희붐히 밝아오자 상순과 명옥은 은자를 데리고 먼저 마을을 떠났다. 그런데 어떻게 소문을 들었는지 마을 동구 밖에까지 상순을 바래러 나온 마을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그 속에는 이계삼과 허영주 그리고 허백호와 박영발도 있었다. 박윤희는 저쪽 늙은 비술나무 아래에서 눈 굽을 찍었다. 전날 그녀는 상순을 찾아와 눈물이 글썽해 하소연하며 사정했다. “김서기를 믿고 이 산골에 왔는데요. 이렇게 우리를 버리고 가면 어떻게 해요? 이제라도 말머리를 돌리세요.” 그때 상순은 그저 한숨만 후 내쉬었다. “절대 그대들을 버리고 가는 것이 아니요. 이 마을이 이젠 살기 더러워서 시원히 바람을 쏘이러 가는 것이오.” “그게 무슨 말씀인가요?” 윤희는 명옥의 눈치를 핼금 보면서 물었다. 그 한마디 말에 실오리만한 미련을 거머잡을 수 있었다. “다시 돌아오지요? 예?” 그 말에 상순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박윤희는 야속한 마음으로 자리를 떠났다. 이날 상순의 동생 금옥이네도 이사를 떠났다. 금옥은 오빠가 없는 이 마을에 있을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숱한 한족들까지 나와 그들 오누이네를 바랬다. 흥수는 헤벌쭉거리면서 달려 나와 머리에 서리가 내리기 시작한 상순의 두 손을 잡았다. “상순이, 이제껏 너무 한 거 같아 미안하이.” 상순은 아주 넓은 마음으로 흥수를 포옹했다. “우리 대대를 맡기고 가오. 우리 마을을 잘 건설하오.” 상순은 흥수가 야속할 때 많았다. 항미원조 전쟁 때 두번이나 흥수를 구해주지  않았는가. 압록강반에서 미제 공중날강도가 날아올 때 뻔히 서서 적기를 구경하는 걸 상순이 달려가 안아 엎디게 하고 자기 몸으로 덮지 않았더라면 팔만 상했겠는가. 남조선 지역에 군복을 운송할 때 야산에서 육박전을 할 때도 흑인 놈한테 찔릴 번하는 흥수를 상순이 공병삽을 휘둘러 흑인놈을 찍어죽이고 구하지 않았던가. 그때 상순은  흑인놈한테 왼팔을 날창에 찔리지 않았던가. 상순이 아니었더라면 흥수 오늘까지 살아 있겠는가! 그런데도 배은망덕하고 권세욕에 눈이 어두워 항상 상순을 헐뜯지 않았는가. 그러나 상순은 드넓은 품으로 전우를 양해해왔다. 종연은 입이 함박만 해 반란파들 속에 서서 상순을 손가락질 하면서 뭐라고 중얼거리었다. 상순이 가게 돼 서기 자리가 비지 않겠는가. 탈권할 좋은 기회였다. 비록 탯줄을 묻은 고향은 아니지만 상순은 거의 반평생 건설하느라고 애써 온 두 번째 고향 함흥촌을 정작 떠나자고 하니 코마루가 시큼해났다. 그는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모지름을 썼다. 허나 그는 이계삼과 허영주와 작별의 악수를 나누면서 끝내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이서기, 허현장, 편안히 있으십시오.” 허영주는 상순의 손을 잡고 놓지 않으면서 늙은 비술나무 밑의 한쪽으로 가서 신신당부했다. “교하에 가서는 한쪽 눈만 뜨고 한쪽 눈을 감고 세상 시비를 작작 하게나.” 허나 상순은 머리를 들어 하늘의 먹장구름을 쳐다보더니 또 그 말이었다. “허현장, 사람이 빚을 지고 살아도 어찌 시비 지고 살겠습니까? 난 인생좌우명을 버리고는 살지 못합니다.” 허영주가 한숨을 쉬는데 그때 이계삼도 다가왔다. 그는 고목 주위를 둘러보더니 숱한 사원들이 먼발치에 서서 이쪽을 보는 것을 보고 간단히 작별인사를 했다. “김 서기, 교하라고 반란 파들이 없겠소? 한족 곳에 갔다가 맞갖지 않으면 우리 마을에 돌아오오.” 그 말에 상순은 정중하게 말했다. “반란파들이 살판 치는 이 마을이 이젠 보기도 싫습니다. 편안히 계십시오.” 지춘실은 비술나무 밑으로 다가오면서 흥수의 눈치를 할금할금 훔쳐보더니 상순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지새금과 순애는 눈물이 글썽해 상순에게 다가왔다. 순애는 상순의 두 손을 잡고 “삼촌, 삼촌이 가면 우린 누구를 믿고 삽니까? 삼촌이 옆에 있으면서 이영도 이어주고 집도 손질해주더니 이렇게 훌쩍 떠나가면 어쩝니까?”라고 애원했다. “올해는 이미 이영을 이어놓았으니 괜찮다. 명년에 부모 산소를 보러 올 때 이영을 손질할 테니 근심하지 말라.” 성욱과 동림은 달려와서 아버지와 어머니 옆에 서 있는 덕돌을 불렀다. “이사 가니?” 성욱이 묻자 덕돌은 울먹울먹해 겨우 말했다. “나는 아이 간다. 여기서 놀다가 이제 밭갈이랑 할 때 오라더라.” 그러자 동림은 손벽까지 치면서 좋아했다. 덕돌은 성욱과 동림의 손을 잡아 흔들었다. 동림은 덕돌의 손을 잡아 끌었다. “가자, 오늘 패랑산에 올라가지 않겠니?” “며칠 후에 올라가자. 내 우리 아버지와 엄마 이사 가는데 바래야지.” "아싸, 우리도 안쪽으로 이사간다고 하더라.” 동림은 이사가기 싫은지 입에 따 발을 걸 지경으로 뽀족해졌다. “뭐라고?” 놀란 것은 성욱이었다. “동림이네까지 이사가면 나는 누구와 놀겠니?” “나와 함께 놀면 되지.” 그때 병진이네 맏아들 철주가 달려왔다. “누가 너하고 논다더니?” 성욱은 앵돌아졌다. 덕돌이랑 성욱이랑 손버릇이 나쁜 철주와 놀기 싫어했다. 어려서는 쩍하면 다른 애들의 놀이감 권총이랑 훔치더니 크면서 남의 해바라기랑 훔쳐 까 먹군 했던 것이다. 저쪽 종연이네 집 부근에서 방순희랑 정인옥이랑 월선이랑 이쪽의 덕돌이랑 보고 있었다. 상순은 마을의 숱한 사람들의 환송을 받으면서 마을 동구 밖으로 떠나갔다. 그는 머리를 들어 자기가 한뉘 평생 분투해온 마을과 패용천산과 칼산, 그리고 조상의 산소가 모셔진 천지꽃산과 계수동 산정을 바라보며 눈물을 훔쳤다. 그는 조상들의 산소 그리고 함흥촌과 조개덕 마을 사람들을 향해 돌아가며 꾸벅꾸벅 절을 올렸다. 그는 눈물을 훔치더니 비틀거리며 진수해를 바라고 떠나갔다. 저쪽 어데선가 한 여인의 쓸슬한 노래소리가 간간히 들리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오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 가서 발병 난다 ... 상순은 그 귀에 익은 목소리 주인이 누구인가를 알고도 남음이 있었다. 저쪽 늙은 비술나무 아래에서 지춘실이 하얀 머리수건을 벗어 두 손으로 맞잡고 석별의 정을 담아 쓸쓸히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속이 강철 같은 상순도 그 장면을 보자 코마루가 시큼해났다… 봄 제비들이 지저귀면서 어둠이 엷게 색바래져가는 하늘에서 날아다녔다. 그날은 유난히도 맵짠 칼바람이 세차게 불어쳤다. 덕돌은 부모와 넷째누나가 마을에서 저 멀리 흑점으로 아물거리다가 굽인 돌이를 돌 때까지 배웅했다. “덕돌아, 오늘 안쪽으로 가기 전에 군사훈련을 하지 않겠니?” 동림이 물어보자 덕돌은 주먹으로 눈물을 쓱 닦으면서 머리를 끄덕였다. “온 마을의 홍소병하구 홍위병들을 몽땅 집합시켜라!” 성욱은 “동림아, 너네는 어디로 이사가니?” 하고 물었다. “흑룡강성 상지라는 곳으로 간다.” 동림은 씩씩거렸다. “이씨, 쌀고생 하지 말자고 안쪽으로 간다더라.” 덕돌은 동림을 보고 말했다. “우리 아버지는 투쟁대회 싫어서 이사한다더라. 이씨, 나는 가기 싫어 죽겠다.” 그러자 성욱은 불쑥 뜻밖의 소리를 쳤다. “작은 아즈바이, 커라배(할아버지)는 서기를 내놓기 싫어하더니 덕돌인 활동참 단장을 내놓기 싫어하는구나. 정말 웃긴다, 웃겨. 흥!” 덕돌은 희죽이 웃으며 성욱을 바라보았다. “이 놈아, 내 이사 가면 단장을 하려무나. 잔말 말고 오늘까지 이 단장 아즈바이 말을 들어라! 빨리 애들을 불러오라.” “알았다. 아즈바이께 잘 보여야 단장이나 하겠는지.” 이윽고 애들이 몽땅 조개덕 마을 복판에 자리 잡은 창고마당에 모였다. 희붐히 밝아오는 마당에 모인 애들 속에는 덕돌보다 두, 세 살 이상 되는 초중 졸업반의 애들도 있었다. 애들은 낙제를 자꾸 하여 초중 1학년을 다니는 덕돌과 한 학년을 다니는 애들도 있었고 어떤 애들은 덕돌보다 두 학년이나 세 학년 이상 되다나니 덕돌보다 키가 머리 하나는 더 커도 단장이라고 죄꼬만 조왕들이 영도를 받아야 했다. 덕돌은 제법 나무권총을 허리에 차고 애들앞에 서서 목청을 가다듬어 구령을 불렀다. “3열 횡대로 줄을 섯!” 그러자 애들은 즉시 3열 횡대로 줄을 섰다. 허나 어떤 애들은 이전처럼 말을 잘 듣지 않았다. 키 큰 동철은 저쪽으로 서서 굿을 보고 서 있었다. 그는 철주와 수군거리기까지 했다. “저 덕돌은 이사 간더던데 아직도 우리 단장 한다니?” 동철의 말에 철주가 맞장구를 치면서 줄도 바로 서지 않았다. “글쎄 말이야. 자네 아버지는 금방 갔다. 그런데 자는 어째 가지 않니?” 그때 덕돌이 소리쳤다. “난 가지 않는다! 줄이나 바로 서라!” 그러자 애들은 쑤군거렸다. “옳다! 가지 마라! 네가 가면 우리 활동참이 재미없다.” “옳다! 누가 우리에게 재미나는 옛말을 해주겠니?” “누가 우리를 데리고 패용천산에 가서 전투놀음을 놀겠니?” “가지 말라!” 애들이 소리치자 덕돌은 코마루가 시큼해났다. “그래, 난 이사 가지 않는다! 근심하지 말라! 오늘 군사훈련을 하는 게 어때?” “와!” 애들은 좋아 야단쳤다. 허나 철주랑 성욱이랑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성욱은 덕돌이 가야 단장을 하겠는데 가지 않겠다고 하니 앵돌아졌다. 덕돌은 떠들어대는 애들을 향해 소리쳤다. “이제부터 내 구령대로 해라!” “차렷!” 애들은 제법 구령대로 두 발뒤꿈치를 척 모아붙이면서 똑바로 섰다. “쉬엇!” “차렷!” “좌로 돌앗!” 애들은 제법 구령대로 좌로 척 돌아섰다. “뛰엇!” 애들은 덕돌의 구령에 따라 발을 척척 맞춰 마을 밖으로 달려 나갔다. 애들은 패랑산을 바라고 닫다가도 덕돌이 나무권총을 휘두르며 “엎드려!” 하고 외치면 길 양옆에 두 줄로 쭉 엎드렸다. 머리는 길을 향해 줄느런히 엎드렸다. 하긴 겨우내 눈이 오는 날을 내놓고 거의 날마다 애들은 이른 아침에 일어나 덕돌의 지휘에 따라 군사 연습을 했기에 구령만 내리면 아주 멋지고 일치하게 엎드리고 기고 달리었다. 그뿐이 아니다. 애들은 어느 새 패랑산에서도 제일 가파로운 남쪽 기슭에 이르렀다. 마을로부터 약 한 키로미터나 달려온 애들이 쉴 새도 없이 덕돌은 허리에 찼던 권총을 빼내 휘둘렀다. “돌격!” “싸(杀)!” 애들은 소리치면서 경사도가 60도도 넘는 가파론 절벽을 톺아 오르기 시작했다. 덕돌은 한참 톺아 오르다가 내려다보았다. 눈뿌리가 아찔 해났다. 그의 앞에서 9촌 조카 후남이가 제일 가파론 절벽 돌틈을 잡으면서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창선은 항상 그랬듯이 제일 마지막에서 기어오르고 있었다. 막내외동아들인 창선은 항상 겁을 먹고 절벽으로 기어오르기 싫어했다. 허나 그 애도 덕돌의 명령도 명령이었지만 활동참 기율을 어길 수 없어 마지못해 기어오르고 있었다. 덕돌이네 아랫집 정규상네 둘째딸 순임도 후남의 뒤를 따라 절벽을 톺아오르고 있었다. 죄꼬만 덕돌은 몇몇 꺽다리들의 뒤를 따라 빠른 축에 들어 절벽 위로 톺아 올랐다. 반시간도 안돼 애들은 몇십미터나 되는 가파로운 패랑산 절벽을 톺아 올라 정상에 올랐다. 애들은 패용천산 꼭대기에서 땀을 들이며 시원한 산 공기를 한 가슴 가득히 들이켜면서 웃고 떠들었다. 그때 저 동녘에서 붉은 해가 불덩이처럼 구름을 가르고 불끈 떠올랐다. 고기비늘 같은 먹장구름이 점차 발갛게 타오르다가 금빛으로 물들어져갔다. 덕돌은 금빛으로 물들어가는 산꼭대기에 돌로 조각한 글처럼 새긴 “모주석 만세!”란 글을 보면서 흥얼거렸다. “금빛태양이 대지를 비추니 모주석 만세 금빛구호 더욱 빛나는구나!” 순임이랑 후남이랑 산꼭대기가 떠나가게 박수를 쳤다. “쟤는 작문을 잘하지 않고 뭐야!” “옳다. 그래서 말도 아주 멋지게 하지 않고 뭐니.” 이때 동철이 코를 풀적 거리면서 다가왔다. “덕돌아, 이사 가기 전에 옛말을 좀 더 해 달라.” 그 말에 애들이 떠들까봐 덕돌은 손사래를 쳤다. “누가 내 이사 간다더니? 안 간다, 안가!” 그러자 순임은 박수를 치면서 쌍까풀눈을 곱게 흘겼다. “그러지 않고. 네가 가면 누구한테서 옛말을 듣겠니? 빨리 하나 해라.” 애들은 예전처럼 산이 떠나갈 듯이 박수를 치면서 덕돌을 바라보았다. “그럼 하지.” 애들은 덕돌을 둘러싸고 모여 앉았다. 덕돌은 금방 절벽을 오르느라고 땀을 흘린 애들이 감기에 걸릴까봐 “에헴, 에헴.” 하고 마른기침을 하더니 짧은 옛말을 시작했다. “호랑이가 담배를 피우던 옛날이었다.” “야, 야. 호랑이가 어떻게 담배를 피우니? 순 거짓말이다, 거짓말.” 철주가 떠들어대자 꺽다리 애들은 손으로 철주의 머리를 눌러놓으며 말렸다. “작작 떠들어라. 옛말이 다 그렇지. 뭐. 덕돌아, 계속 해라.” 애들은 코를 풀적거리며 숨을 죽이고 귀를 강구고 덕돌의 옛말을 들었다. “수말이 새끼를 낳았다는 멀고 먼 옛날에 어떤 마을에 개코라는 애가 있었지.” “히히히.” 애들은 코를 싸쥐고 웃었다. “개코다, 개코.” 덕돌은 웃는 순임이랑 순희랑 보면서 뒤를 이었다. “개코네 아버지는 사방 십리에 이름을 날린 사냥꾼이지. 그런데 하루는 산에 가서 범을 잡다가 나무 위에 올라갔지. 그런데 그만 날랜 범이 나무가지 위에까지 씽 날아올라왔지." "저걸 어쩌니?" "그래서 아버진 범한테 물려 죽었단 말이야.” “저런! 그래 어쨌니?” 덕돌은 턱을 고이고 다가드는 성욱이랑 돌아보며 계속 이야기했다. “그래서 개코는 원수를 갚으려고 어머니한테서 활쏘기를 배웠지. 활을 잘 쏘면 멀리서도 범을 잡을 수 있어 물리어 죽을 위험이 적지. 그런데 어머니는 물동이 물에 바가지를 얹어 이고 개 코를 보고 바가지 쪽지를 활로 쏘라고 했지. 개 코는 어머니를 쏠까봐 겁이 나서 손이 떨렸지만 잘 조준해 물 동이 우에서 바가지 쪽지를 면바로 쏘아 떨구었단다.” “야, 명사수구나.” “그래. 개코 어머니는 개 코에게 활과 칠성비수를 주면서 아버지 원수를 갚으러 가도 된다고 했지. 그래서 개코는 범과 승냥이들이 득실거리는 머나먼 산으로 갔지. 처음 원시림 속에 간 개 코는 날이 어두워지자 으르렁거리는 범과 이리들을 보고 겁이 나 나무 밑에 눈을 감고 있었지. 그때 마을로 갔던 범들이 돼지랑 오리랑 물고 산으로 돌아오고 있었지. 제일 큰 아버지 범은 냄새를 ‘흡, 흡.’ 맡더니 나무 밑에 두 팔로 눈을 가리고 있는 개 코를 발견하고 새끼와 조카 범들을 보고 ‘저 개 코를 물어오라! 내 양치질이나 해야 하겠다.’라고 명령했단다. 그러자 새끼 범들은 달려와 개코를 물려고 했지. 그때 개코는 활을 꺼내 달려드는 범을 쏘았지. 백발백중인 개코의 화살에 숱한 범이 쓰러졌지. 그런데 한 놈이 쓰러지면 또 다른 범이 달려들었지. 개코는 용감히 싸우다가 나중에 화살이 다 떨어졌지. "저런!" "그래서 개코는 끝내 어미 범 앞에 물려 갔지. 어미 범은 개 코를 제꺽 입에 넣더니 통째로 꿀꺽 넘겼지. 개코는 어미 범의 새까만 배때 안에서 칠성 검으로 밸을 싹싹 베고 간에도 칼을 대 도려내기 시작했단다.“ “하하하. 거 재미있구나.” 숨이 한줌만 해서 귀담다 듣던 애들은 웃고 떠들기 시작했다. “조용해!” 제일 머리 큰 순춘이 소리쳐 제지시켰다. 덕돌은 계속했다. “어미 범은 배 아파 땔, 땔 굴다가 ‘이 놈 새끼들이, 나에게 독이 묻은 개 코를 물어다 줬다.’라고 하더니 돌아가면서 새끼들을 물어 죽였지. 그때 개 코는 어미 범의 배를 쓱 가르고 세상 밖으로 살짝 나왔지.” “허허허. 정말 개코 같다야.” “깔깔깔.” 애들은 재미있다고 배를 끌어안고 웃어댔다. 덕돌은 애들을 돌아보면서 물었다. “내가 말하지 않아도 개코가 어떻게 된 건 알만하지?” 동림이 제꺽 대답했다. “그거야 이전 옛말 끝처럼 ‘숱한 범을 잡아 아버지 원수를 갚고 범을 팔아 어머니를 모시고 잘 살았다.’ 이렇겠지 뭐?” 성욱이 동림의 얼굴을 가리키면서 끼어들었다. “그래도 조선지도 머리 좋단 말이야!” 덕돌은 엉덩이를 털며 일어났다. “이젠 땀도 들였으니 내려가자!” “와, 좋다!” 기실 덕돌은 힘이 약하기에 옛말이나 공부를 잘하는 우세를 빌어 애들을 자기 주위에 모으려고 애썼다. 그는 애들에게 할 옛말을 준비하려고 엄마 아니면 아버지 지어 6촌형님 철봉과 동생 송희에게서 옛말을 해달라고 졸라대 숱한 옛말을 들어두었던 것이다. 어떤 날에는 애들이 너무 옛말을 더 해달라고 졸라대 며칠 들어둔 옛말이 바닥이 날 지경이었다. 그리하여 즉흥으로 숱해 전하거나 꾸며내서 되는대로 옛말을 해주었다. “사냥꾼이 범 한 마리를 잡은 게 배를 짜개니 배안에 새끼 범이 있지 않겠니? 그래서 그 새끼 배를 짜개니 또 배 안에 또 새끼 있더란다. 그래서 그 새끼 배를 짜개니 또 범이 있더란다. 그래 범 한 마리를 잡아서 숱한 범을 얻어가지고 수레에 실어다 집으로 와서 잘 살았단다.” 그 허황한 말도 애들은 딱 곧이듣고 “참 신기한 범도 다 있다.”라고 하면서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어떤 때에는 그럴듯한 옛말도 해주었다. “옛날이 지주 한 놈이 어찌나 지독하게 머슴들을 부리는지 머슴들은 복수하려고 들었지. 그래서 남자 머슴과 여자 머슴은 각기 아주 고운 앵무새로 변했지. 그들은 지주네 소 뿌리에 앉아 지주를 욕해댔지. ‘욕심쟁이 지주놈 얼마나 사는가 보자.’ 그 말을 들은 지주는 독이 나서 방치를 들고 슬금슬금 다가와 소 뿔 위에 앉은 앵무새를 딱 쳤지. 앵무새들은 날아나고 대신 지주네 소가 대가리를 맞고 즉살했단다. “하하하.” “이번에는 앵무새가 지주 놈의 번대머리 위에 올라 앉아 놀려댔지. 그러자 지주는 방치로 자기 대가리를 딱딱 쳤단다. 딱 소리와 함께 지주는 대가리 터져 죽었단다.” “호호호.” 애들은 재미있다고 배를 끌어안고 웃어댔다. 순임이랑 패용천산 뒤쪽으로 내려가면서 “아침에 이렇게 신체단련을 하니 영 좋다. 그런데 집에 가서 아침을 많이 먹어 대사다.”라고 했다. 후남은 “너네는 그래도 공호 돼서 괜찮다. 우린 죽물도 배불리 먹기 힘들다.”라고 두덜거렸다. 순희는 덕돌을 뒤따라 산을 내려가면서 “덕돌아, 가지 마라. 네가 가면 우리 활동참은 망태기 된다.”라고 말리었다. 허나 덕돌은 보름달 같이 고운 순희의 얼굴을 돌아보면서 “우리 아버진 쌀 고생을 너무 해서 교하로 이사 간다더라.”라고 했다. 그러자 순희는 주위에 애들이 없는 것을 보고 한마디 했다. “한족 곳에 가서 뭘 하니? 아무리 쌀 고생을 해도 그렇지. 교하가 그리 좋데?” “나도 모르겠다. 아버지 가자고 집까지 다 팔아먹었는데 어쩌겠니? 차차 가야지.” 허나 순희는 계속 말렸다. “넌 우리 학년에서 제일 먼저 홍위병에 들어가지고 가면 어쩌니? 교하에는 홍위병 조직이 있다니?” 허나 덕돌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온 세상이 홍위병 세상인데 교하 한족학교라고 홍위병이 없겠니? 난 배고파 여기서 못 살겠다.” 순희가 또 뭐라고 말하려는데 저쪽에서 철주와 동철이 뛰어 내려오는 것이 보여 그만두었다. 애들이 패용천산에서 내려와 줄을 서서 마을에 들어설 때었다. 성수랑 학수랑 한창 겨우내 덕돌이 애들을 이끌어 주어 모아놓았던 돼지 똥을 수레에 실어다 모상 판에 내고 있었다. 그들은 덕돌이랑 보고 엄지를 내둘렀다. “저 덕돌을 보오. 김서기를 닮아서 애들을 데리고 군사훈련을 하고 돌아오는 거 보오.” 이남이 하는 말에 활동참 보도원인 수봉은 “이 돼지 똥도 덕돌이 애들을 데리고 온 겨울 주어 모아놓은 게오.”라고 칭찬했다. 이남을 비롯한 사원들은 모두 혀를 끌끌 찼다. “저 애들이 해마다 돼지 똥 열 수레씩이나 주어서 모상 판에 잘 쓰오.”라고 했다. 그 칭찬하는 소리를 듣고 겨우내 손을 얼면서 고생해 돼지 똥을 주었지만 속으로 긍지감을 느꼈다. 사실 애들은 덕돌이 활동참 단장이 된 후 보도원 수봉과 토론하고 학습소조를 내와 방학숙제를 한다, 돼지 똥을 한 대야씩 주어오라, 패용천산 절벽을 오르라 하니 처음에는 추운데 헛고생을 한다고 두덜거렸다. 허나 이 때에야 덕돌의 말을 듣고 군사훈련을 하고 공부를 하면서 날마다 조개덕 생산대를 위해 좋은 일을 한 것이 옳았다는 것을 깊이 느끼게 됐다. 덕돌은 끝내 떠나가는 날이 돌아왔다. 그는 막내누나 성숙과 함께 십여일 둘째누나네 딸 계옥이랑 업고 놀다가 집에서 애지중지 키우던 토끼 두 마리를 바구니에 담아들고 마을을 떠나게 됐다. 부모들은 교하에 가서 사돈집을 빌어든 후 들어오라고 편지가 왔던 것이다. 그 소문을 듣고 송아지친구 성욱이랑 동림이랑 뛰어왔다. “너 정말 가니?” 덕돌은 토끼를 담은 바구니를 막내누나에게 주고 성욱과 동림의 두 손을 잡고 흔들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늙은 비술나무 밑 저쪽에서 미선과 순희가 눈물이 그렁그렁해 덕돌을 볼뿐 다가오지 못했다. 덕돌은 순희 쪽에 대고 손을 저었다. 허나 순희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우고 저쪽으로 달아났다. 덕돌은 고향 마을을 떠나면서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되지 않는 발걸음을 겨우 무겁게 한 발자국 한발자국 떼었다. 눈물을 휘 뿌리며 정든 고향을 떠나는 그의 심정 오죽하랴. 아, 고향이란 무엇이기에?                             
158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103) 댓글:  조회:978  추천:0  2018-05-27
                     3. 청춘의 욕정 무더기로 쌓인 억울한 백골더미 위에서 요정이 사악한 입김을 내뿜자 수많은 억울한 사람들이 허깨비처럼 백골로 변해갔다. “깔깔깔, 까르륵, 깔깔.” 요정은 쓰러져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배를 끌어안고 간사하게 웃어댔다. 도대체 왜 세상이 이렇게 변했을까? “문화대혁명”의 음산한 바람이 불어온 후 도시와 농촌 그 어디나 모두 살풍경이었다. 노간부들을 보호하던 한영수 등 수많은 조선족간부들은 감방에서 풀려 나오지 못했다. 현위 이계삼 등 적지 않은 한족 노간부들도 조선족 노간부들과 함께 이른바 “5.7간부학교”에 가서 노동개조를 해야 했다. 산골에 있는 “5.7간부학교”는 모주석의 “5.7지시”에 따라 차린 간부학교라고 했다. 하지만 사실 “착오”를 진 간부들을 가둬 놓고 마레-주의, 모택동 사상으로 두뇌를 씻어내고 노동개조개조를 하는 전문학교라고 할 수 있었다. 사회에서는 지식분자들을 더러운 아홉째들로 몰아부치면서 지식분자들은 손과 발에 똥이 묻은 빈농들보다 사상이 못하다고 여론조성을 했다. 또 지식분자들은 광활한 농촌에 내려가 빈농들에게서 생산노동을 배우면서 재교육을 받아야 사상이 붉은 간부로 될 수 있다고 했다. 하늘에서는 최고지시가 눈송이 날아 내리듯이 끝이 없이 쏟아져 내렸다. “광활한 천지에는 지식분자들이 할 일이 많다.” “빈농이 없으면 혁명도 없다. 빈농을 반대하는 것은 혁명을 반대하는 것이다.” “빈농이 일체를 영도한다.” “노동계급이 일체를 영도한다.” 최고지시가 쏟아져내려오는 족족 남녀노소를 물론하고 참답게 학습하고 암기해야 했다. 모주석의 말씀은 마디마다 진리이고 황금을 주고도 바꾸지 못하는 진리였고 철리였다. 그 금지옥엽 같은 말씀, 진리, 최고지시를 누가 감히 어기겠는가! 전 당, 전국 인민들이 최신, 최고 지시를 목책에 적어두고 사람들이 눈에 제일 잘 띠우는 곳에 세운 흑판보거나 선전란에 큼직큼직한 뻘건 글씨로 써서 모셔놓았다. 지어 조각을 잘 하는 예술가들은 최고 지시를 목판조각하거나 지어 세멘트 흑판에 새겨 놓았다. 집집마다 밥을 먹기 전에 최고 지시를 실은 손바닥만 한 붉은 모주석 어록책을 가슴에 댔다가 모주석의 초상화에 올리휘두르면서 “경애하는 모주석의 만수무강을 축원합니다!” 라고 충성의 인사를 올리었다. 학교에서도 시간을 보기 전이면 사생들이 몽땅 기립해 모주석의 초상화에 대고 “경애하는 모주석의 만수무강을 축원합니다!”를 삼창하는 것이 관례로 됐다. 조금 문제가 있다는 로간부들은 모두 “5.7”지시에 따라 “5.7”간부학교에 가서 뼈가 빠지도록 각종 농사일을 하면서 사상을 개조했다. 기실 감옥이 아닌 감옥이라고 할 수 있는 학교에서 징역살이를 하고 있었다. 한영수는 아내 이연분까지 “5.7간부학교”에 끌리어 갔다. 이연분은 신문사 기자였는데 코신부대를 지지하는 문장을 썼다고 해 “보황파”로 몰리어  “5.7”학교에 끌리어왔다. 허나 학교에서는 그들 부부를 한 침실에 들어 함께 자지도 못하게 했다. 한영수는 산을 넘어 분교  양돈장에 가서 돼지죽을 끓여 먹이게 됐고 아내는 이 학교에 와서 노동개조를 하는 수십 명 간부들의 밥을 지어야 했다. 학교 혁명위원회 관리일군들은 그들이 서로 잡담을 하지 못하게 감독했으며 채찍질을 하지 않았을뿐 감옥의 죄수들을 다루듯 했다. 표현이 좀 좋지 않으면 저녁에 여는 사상개조회의에서 한바탕 비판받아야 했다. 어느 날 저녁, 사상개조회의에서 한 간부는 앞장서 한영수를 적발하고 비판했다. 남을 투쟁하는데 앞장서야 하루라도 빨리 이 지긋지긋한 5.7간부학교를 벗어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저 영수는 돼지를 잘 먹일 대신 배고프다면서 돼지죽을 훔쳐 먹었습니다." 그 말에 모두 웅성거렸다. (어떻게 배고팠으면 돼지죽을 다 훔쳐 먹었겠는가.) "쯧쯧쯧." "또 있습니다. 한영수는 여기 본교 식당에 와서 아내를 도와 나무를 팼습니다. 아직도 자산계급의 썩어빠진 생활과 사상 습관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분교 양돈장의 돼지죽이나 잘 끓일게지 여기 와서 뭘 하려는 겁니까? 남들이 일하러 간 틈을 타서 아내를 돕는 척하다가 밥이라도 훔쳐 먹을 작정 아닙니까? 사심이 얼마나 많습니까?” 영수는 머리를 숙이고 반성해야 고비를 넘길 수 있었다. 한 반란파는 영수의 아내 이연분의 머리카락을 잡아 마구 내리누르면서 고래고래 고함쳤다. “속담에 암캐 꼬리를 치지 않으면 수캐 달려들지 않는다고 네년이 꼬리쳤지?” 그 억이 막힌 말에 한영수나 이연분은 두 말할 것이 없었다. 노간부들은 모두 어이없어 고개를 툭 떨어뜨린 채 도리머리를 흔들거나 한숨을 푸푸 내쉬었다. 너무 혹독하게 바투 들이대자 연분은 머리를 들고 반란파를 직시하면서 반문했다. “나와 영수동무는 합법적인 부부 아니오?” “그거야 옳지.” 어망 간에 이렇게 대답하고 반란파는 말을 바꿨다. “허나 너희들은 노동개조하는 반동간부야. 마음대로 사통해선 안 돼!” “뭐가 사통이란 말이오? 부부간에 살아도 사통이오? 정말 사람을 웃겨도 분수가 있지.” 비인간적인 모욕에 연분은 굴하지 않았다. “너희들 정말 그걸 했는 모양이구나.” 영수는 옆에 선 연분의 손을 툭툭 쳐 말리며 한발 나섰다. “근본 그럴 새 없었소. 난 나무를 팼고 이 동문 밥을 짓고 돼지죽을 주었을 뿐입니다.” “음, 하기만 해보지. 네놈들 바지를 벗겨놓고 거기에 개똥을 발라놓겠다.” 그 소리에 간부들은 속으로 어처구니없어 하면서도 누가 감히 나서 말 대구 한마디 하지 못했다. 반란파들은 저녁이면 노간부들을 투쟁하면서 변태적인 재미를 보고 있었다. 이런 어지럽고 변태적인 세상이기에 영수와 연분 부부는 한 방에 들어 잘 수도 없었다. 더구나 노간부 십여 명이 시루속의 콩나물처럼 한 구들에 누워 돌아누울 자리도 없이 잤기에 서로 감독하다나니 용빼는 수가 없었다. 바깥에 있는 변소로 나가도 보초를 서는 당직이 변소까지 따라 다니기에 그럴 기회가 없었다. 한번은 분교의 취사원이 애가 앓아 청가를 맡는 바람에 밥을 지어 분교에 가져가게 됐다. 이른 새벽에 연분은 밥을 지어 함지에 퍼 이고 남편이 있는 분교에 가면서 별스레 가슴이 높뛰었다. 뒤에는 물론 당직이 뒤따랐다. 그녀가 밥함지를 이고 헐금씨금 영을 넘어 어느덧 분교 숙사에 이르렀다. 그녀가 숙사에 들어가 구들을 둘러보니 아직 숱한 노간부들이 이불을 들쓰고 구들에 빼곡하게 누워 곤하게 자고 있었다. 그녀는 육감적으로 제일 문 옆에 누운 사람이 자기 남편임을 알아보았다. 하여 살금살금 다가가다가 뒤돌아보았다. 당직은 바깥에서 서성거리다가 변소로 어정어정 가고 있었다. 연분은 오랜만에 가까이에서 남편을 보자 가슴이 울렁이었다. 그러나 숱한 노 간부들이 자는 커다란 구들에서 어찌는 수가 없었다. 궁리 끝에 그는 다른 노간부들이 깰까봐 가만가만 남편의 발치에 다가가 맨발을 매만졌다. 그 바람에 깨어난 영수는 자기 발을 매만지며 바라보는 연분을 보고 깜짝 놀랐다. 연분의 심정을 헤아리고 그저 도리머리를 흔들면서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었다. 영수가 와닥닥 일어나려고 하는데 연분이 옆을 눈치하면서 눌러 눕혔다. 그녀는 남편의 발만 가만히 매만지다가 들키기 전에 인차 나가와버렸다.  “에헴, 에헴” 그때 당직이 마른기침을 하면서 변소에서 나와 괴춤을 춰 입었다. 그는 밥함지를 두고 나오면 될 연분이 늦어서야 나오는 것을 보고 대개 눈치 챘다. 돌아오는 길에 당직 노간부는 연분에게 말했다. “이 놈 세월 무슨 세월이오? 부부라도 만나 말 한마디 해도 안 되니. 참.” 그 말에 연분은 코마루가 시큼해나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돌아서 어깨를 들먹였다. “후에 내 당직을 설 때 기회를 마련해 줄게.” 그 노간부는 그들을 위로해 주었다. 허나 그 험악한 세월에 누가 누구를 믿겠는가. 어느 날 아침, 영수가 돼지먹이를 푸려고 본 교 식당으로 오게 됐다. 그때는 금방 노간부들이 일밭으로 나가고 반란파가 당번을 서고 있었다. 영수는 식당에 들어가 바가지로 뜨물독에서 시크무레한 냄새 나는 뜨물이랑 묵은 음식찌꺼기를 한 바가지 한 바가지 퍼서 물 초롱에 꼴딱 담았다. 그가 멜대로 물 초롱을 메고 떠나려 할 때다. 연분이 앞치마에 손을 닦으면서 식당 침실에서 나오다가 딱 마주쳤다. “여보, 좀…” 오랜만에 만난 영수는 식당 안에 누가 없는 것을 보고 아내를 와락 끌어안았다. 아내는 자기 볼에 키스벼락을 안기는 남편의 볼을 매만졌다.        젊은 부부는 끓어오르는 욕정을 어찌 할 수 없어 신음소리를 내면서 찰떡처럼 딱 들어붙어 포옹한 채 말을 잃었다. “여보, 누가 보겠소. 또 투쟁 받겠소.”  “보겠으면 보라지. 우리 어디 남남이오?” 영수는계속 여기저기 매만졌다. 연분은 피뜩 “여보, 돼지 굴에 가면 어떤가요?”라고 물었다. 영수는 머리를 저었다. “안 되오. 돼지 꿀꿀거리면 인차 들키오.” 뒤이어 영수는  기발한 생각을 내놓았다. “변소로 가면 어떠오?” 연분은 머리를 들고 영수를 마주 바라보며 궁리하다가 머리를 끄덕였다. “당신 먼저 들어가오.” 영수는 사위를 흘금거리면서 식당에서 그리 멀지 않은 토성 구석에 있는 변소로 들어갔다. 문고리를 쥐고 식당과 바깥을 살피던 연분도 돼지죽을 퍼들고 돼지 굴로 가는 척 하면서 땔나무 주위를 한 바퀴 돌아보았다. 전날에 보초를 서던 노 간부가 당직을 서느라고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있었다. 반란 파는 저쪽 숙사 쪽으로 어깨가 으쓱해 가고 있었다. 연분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누르면서 바가지를 든 채 변소로 다가가 문 꼬리를 쥐어 당기었다. 영수는 물앉아 벌써 바지를 내리었다. 연분은 변소 문고리를 단단히 쥐고 바지를 재빨리 내리었다. 그들 부부는 그 비좁고 구린 내 나는 변소에서 오랜만에 끓어오르는 청춘의 욕정을 불태웠다. 누가 들을까봐 거친 숨소리도 크게 쉬지 못하면서도 그들의 사랑은 기름을 친 마른 장작더미에 붙은 불처럼 열렬하고 강렬하게 활활 타번지었다. 계급투쟁을 기본 고리로 하는 세월에 가혹한 정치몽둥이에 얻어맞으면서도, 날마다 고된 노동개조를 하면서도 인간의 기본 욕정만은 머리를 숙일 줄을 몰랐다. 부드러운 비단이불속이 아니어도 푹신푹신한 침대 위가 아니어도 좋았다. 그들 부부는 구린내 나는 변소에서도 그다지도 달콤하게 사랑을 나누는 것이 아닌가! “에헴. 에헴.” 마른기침 소리와 함께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애햄, 애햄, 칵 퉤!” 연분은 문고리를 두 손으로 딱 틀어쥐면서 황급히 인기척을 냈다. 영수는 두 번 다시 사랑을 나누고 싶었다. 하지만 어찌는 수가 없어 아쉬운 대로 아내 허리를 놓아주면서 허리를 굽힌 채 조용히 바지를 춰 입었다. 연분은 옹이구멍으로 바깥을 내다 살피었다. 당번 노간부가 도리머리를 흔들면서 식당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저 치가 눈치채지 않았을까? 이 일을 어쩐담?) 연분은 근심하면서도 머리를 손으로 싹싹 빗어 넘기고 옷매무새를 단정히 한 후 변소 문을 살랑 열고 나가 변소 문을 꽉 닫아놓았다. 그녀는 변소 옆에 놓았던 바가지를 쥐고 사위를 두루 살피면서 황급히 자리를 떠나버렸다. 당직 노간부는 짐짓 보지 못한 척 하면서 아예 식당 울안에서 나가 저쪽 숙사 쪽으로 스적스적 가버리는 것이었다. 영수와 연분은 그 노간부가 눈치 챘다는 것을 직감했다. 만약 그가 눈치 채지 못했더라면 연분이 나왔으면 뒤가 바빠서라도 변소로 인차 들어갈 것이 아니겠는가! 영수는 속이 한줌만 해 도적고양이처럼 변소에서 나와 식당에 들어가 돼지먹이를 퍼 담은 물 초롱을 멜대로 둘러메고 식당 문을 나섰다. 그가 울안을 벗어나는데 반란파와 딱 마주쳤다. 반란파가 이상한 눈길로 영수의 아래위를 훑어 볼 때다. 저쪽에서 당직 노간부가 돌아오더니 “어, 한 동무 왔소?” 하고 짐짓 모르는 척 했다. “양.” 영수는 황급히 돼지 뜨물을 메고 총총 걸음을 재우쳤다. 노간부는 슬쩍 웃음을 지어보이면서 길가의 돌을 발로 툭 차버리었다. 반란파는 휘파람을 불면서 숙사로 들어가 버리었다. 되돌아보니 식당의 굴뚝에서 점심밥을 짓는 삼단 같은 연기가 꾸역꾸역 솟아오르는 것이었다. 그제야 영수는 한숨을 땅이 꺼지게 후 내쉬면서 고개를 넘어섰다. (이 놈의 암흑한 세월이 언제면 끝날까?)                     4. 민주투표 박영발과 박윤희는 이른바 “보황파”로 몰리어 갖은 고문과 능욕을 받을 대로 다 받았다. 어느 날, 그들은 가족까지 데리고 시골 함흥대대에 쫓기어 내려가 노동개조를 하지 않으면 안 됐다. 진수해공사에 떨어진 박윤희와 박영발은 허영호 소장의 덕분에 상순이 있는 함흥대대로 내려가게 됐다. 말로는 하향간부라고 듣기 좋게 불렀지만 기실 농촌으로 추방해 노동개조를 시킨 셈이다. 박영발은 함흥대대에 내려오자마자 상순의 집을 찾아갔다. 상순은 맨발 바람으로 뛰어나오다 시피 했다. 영발은 상순의 두 손을 잡고 통사정을 들이댔다. “김 서기, 이전에 이집 애들을 치료해준 걸 봐서라도 나를 도와주오. 당신을 믿고 함흥대대로 왔는데 조개덕 생산대에 오는 게 좋을 거 같소.” 상순은 박영발 서기의 두 손을 꽉 잡고 흔들었다. “근심 마오. 내 치보 주임과 말해서 우리 대에 내려오게 하지. 농촌에 내려와서 어떻게 고생하겠소?” “양, 괜찮소. 그래도 감옥에 갇혀 고문당하고 투쟁 맡기보다야 낫겠지.” 상순은 누추한 초가집에 영발을 데리고 들어갔다. 그는 영발에게서 그간 시내 “문화대혁명” 정황을 죽 들었다. “우리와 함께 고생하던 시 당위 판공실의 김진욱은 지금 사평감옥에 가서 감옥살이를 하오.” …진욱은 완고한 악질반동분자로 몰리어 사평감옥에 가서 진종일 30도도 넘는 고온용광로 앞에서 쇠 물을 녹이는 강제노동개조를 해야 했다. 옥수수떡 한 쪼각이거나 천정이 다 들여다보이는 멀건 강냉이죽물을 대충 먹고 낮에 쇠 물을 녹이는 고된 일을 해야 했다. 어떤 때에는 멀건 배추장물을 먹다가 쥐새끼마저 장물 그릇에 있어 먹다 말 때도 있었다. 허나 배고파 그런 장물도 쥐새끼를 퍼 버리고 먹지 않으면 안 됐다. 배고파 고된 일을 삐치기 힘들었던 것이다.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해 강철생산임무를 완수하지 못하는 날이면 또 노라리를 쳤다고 투쟁 받거나 고문당하거나 지어 작은 단방에 갇혀 반성해야 했다. 생산임무를 완수했어도 날마다 밤이면 감방에서 끌리어 나가 감옥 회의실에 가서 숱한 “죄수” 앞에서 손을 들고 투쟁받으면서 모택동 주석의 저작을 암기하고 사상을 검토해야 했다. 밤중이면 너무 배고파 주린 배를 그러안고 시달림을 받아야 했다. 어떤 때에는 진짜 기어지나가는 쥐며느리마저 다 잡아 입에 넣고 씹어 먹기까지 했다. 허나 그래도 하루 노동개조와 사상개조가 끝나 감방 잠자리에 들면 제일 좋았다 쇠살창 너머 흘러드는 쓸쓸한 달빛을 볼 때면 고향에 있는 처자들의 생각이 나 고통스러웠던 것이다… 상순과 영발은 이말 저말 하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함흥촌에 올라가 치보 주임 이흥수를 찾았다. 흥수는 상순의 말을 듣자 영발과 윤희를 번갈아 보다가 영발을 보고 “조개덕으로 가서 잘 개조하오.”라고 했다. 영발은 그날로 처자를 데리고 이불 짐을 수레에 실어가지고 상순을 따라 조개덕에 내려와 상순이네 집에 임시로 들게 됐다. 박윤희는 함흥촌에 독신으로 내려와 대대 위생소 옆 칸에 임시 들어 있게 됐다. 사실, 윤희는 영발과 마찬가지로 치보 주임 흥수에게 상순이 있는 조개덕에 보내달라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흥수는 백지장 같이 살결이 하얀 윤희의 예쁜 모습을 아래위 뚫어지게 훑어보더니 한마디로 잘라버렸다. “안돼. 조개덕에 개조범들이 많으면 뭉쳐서 나쁜 짓 할 수 있우니께. 못가. 함흥촌에 남으라면 남을 게지. 무슨 잔말인가? 상순의 엉덩이에 엿이나 달렸어?”      윤희는 혀를 홀랑 내밀며 눈을 곱게 흘기었다. 치보 주임이 어찌나 으르렁거리는지 그녀는 다시는 조개덕으로 가겠다는 말을 꺼내지 못했다. 다리 부러진 노루가 한데 모인다고 함흥대대에 개조하러 내려 보낸 하향간부들이 날에 날마다 늘어갔다. (어쩜 이계삼 부서기와 허영주 부현장을 오류분자와 함께 몬단 말인가? 그래 노간부들이 지주, 부농, 우파분자, 역사반혁명분자, 현행반혁명분자들과 똑같이 노동개조하고 투쟁받아야 한단 말인가?) 상순은 사원들을 데리고 천지꽃산 상우지에 가서 기음을 매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납득이 되지 않았다. 그는 산중턱에 있는 쓸쓸한 할아버지 산소를 보자 그 앞으로 다가갔다. 풀숲 속에 쓸쓸하게 누워 있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산소를 바라보는 순간 가슴이 뭉클하고 코마루가 시큼해났다. 사원들이 산비탈 아래로 다 내려가기를 기다려 그는 조부모의 산소 앞에 무릎을 꿇고 꾸벅꾸벅 절을 올리면서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할아버지, 할머니, 왜 저를 홀로 이 사악한 세상에 남겨두고 그렇게 총망히 가시였습니까? 항일 노 간부들인 이계삼 부서기와 허영주 부현장마저 우리 마을에 돌아와 노동개조를 하게 됐습니다. 할아버지, 이젠 이 험악한 세상에서 누구와 우리 마을 건설을 의논하랍니까? 어허허, 흑흑흑.” 상순은 산소를 끌어안고 목 메여 할아버지를 부르고 또 불렀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 천지꽃산 산비탈에는 쓸쓸한 흐느끼는 울음소리가 수풀과 옥수수, 조밭을 휩쓸며 울렸다. 그때 선들선들 불어오는 가을 바람소리에 섞여 할아버지 걸걸한 말소리가 들려오는 상 싶었다. “얘야, 울지 말라. 이계삼 서기와 허 현장이 있지 않느냐? 위대한 중국 공산당을 믿어라.” “할아버지! 할아버지!” 상순은 머리를 들고 할아버지를 부르면서 두리번거렸지만 하얀 구레나룻이 더부룩한 할아버지의 자애로운 모습은 보이지도 않았다. 참말 이상한 노릇이었다. (환각인가?) 상순은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아니야. 할아버지 혼이 하늘에 현령하여 비틀거리는 나를 가르친 거야.) 상순은 머리를 끄덕이고 나서 또 할아버지 산소를 끌어안고 서럽게 울었다. 한참 통곡치고 나니 속이 후련했다. 비통한 울음소리가 메아리치고 쓸쓸한 파도가 사납게 치는 산비탈 하늘로 외기러기 한 마리가 외롭게 “끼룩끼룩” 울며 가로 날아 지나갔다. 상순은 또 한참이나 산소를 붙안고 흐느껴 울다가 산소에 절을 올리고 나서 이를 악물고 일어나 산비탈 아래로 터벅터벅 걸어 내려갔다. “그래, 위대한 중국 공산당을 믿고 살아야 하지. 아무 때건 우리 당은 억울한 사건을 시정하고 올바른 길로 인민들을 이끌어나갈 거야.” 상순은 이렇게 중얼거리면서 마을에 들어갔다. 점심 숟가락을 놓기 바쁘게 그는 이계삼 서기가 든 우사에 있는 회의실로 찾아갔다. 상순은 집도 없어 이 서기 일가를 회의실에 모시고 허영주 부 현장을 창고 옆에 구들을 놓은 초가 단칸방에 모신 일이 미안했다. 허나 우사에 든 날에 이계삼과 허영주는 이구동성으로 괜찮다고 했다. "항일투사들은 추운 겨울에도 언제 이런 집에서 쉬어 보았겠소?" "나뭇잎을 깔고 덮고 잘 때에 비하면 꽃이오.” 우사 회의실에 들어가 보니 이계삼은 회의실에 보이지 않았다. 바깥에 나가 두루 살펴보니 이계삼과 허영주는 글쎄 앞집 변소에 가서 누런 인분을 초롱에 퍼담는 것이었다. “이서기, 이른 아침부터 인분을 퍼서 뭘 합니까?” 상순의 물음에 이계삼은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신새벽에 흥수가 와서 우리를 보고 오늘부터 인분을 퍼서 천지꽃산 비탈밭에 내라고 했소. 별수 있는가?” 상순은 주위를 둘러보더니 이 서기 손에서 쇠바가지 긴 자루를 빼앗아 두 초롱에 구린내 나는 누런 인분을 꼴딱 담았다. 뒤이어 이 서기 대신 멜대까지 메려고 서둘렀다. “놔두게나. 흥수 보면 또 자네까지 말을 듣겠소.” 상순은 마지 못해 멜대를 놓고 괭이를 들고 따라나섰다. 이계삼과 허영주가 멜대로 인분 초롱을 메고 마을을 벗어나자 받아 메고 천지꽃산 비탈 밭으로 씨엉씨엉 올라갔다. 밭머리에 이르러 상순은 멜대를 내려놓고 인분 초롱을 들어 밭골땅에 줄줄 쏟았다. 이계삼과 허영주가 뒤를 따라가면서 괭이로 인분을 파묻었다. 상순이 불평을 털어놓았다. “에이, 이전에 흥수를 어째 입당시켰던지 모르겠습니다.” 그러자 이계삼은 주의를 주었다. “이제부터 당원을 발전시킬 때 장시기 엄격한 고험을 거친 후 입당시켜야 하오. 정치열성을 지나치게 부리는 자들은 흔히 정치야심이 있을 수 있소.” “예. 종연이랑 승연이랑 주의해야 하겠습니다.” 이계삼은 머리를 끄덕였다. 상순은 조용한 산비탈밭에서 사원들이 오기 전에 요긴한 말부터 꺼냈다. “이서기, 난 당지부 서기를 내놓겠습니다. 반란파들과 흥수가 어찌나 탐내는지 어디 배기겠습니까?” “뭐라고?!” 이 서기는 놀라면서 인분을 끄다가 괭이질을 멈추었다. “그게 무슨 나약한 소린가? 언제부터 천하 면도칼날 같이 자존심이 강하던 자네가 그렇게 무른 밀가루반죽이 됐는가?” 상순은 머리를 숙이었다. 허영주도 상순을 비평했다. “어찌 그런 나약한 소리를 하오? 종연이랑 반란파들이 지금 우리 공산당 노간부들을 몰아내고 대대 권력을 찬탈하려고 하네. 정치란 물러서면 물러설수록 입지가 좁아지는 법이네. 당지부 서기를 내놓을 궁리는 하지도 마오.” “조개덕 생산대 정치대장이나 할 예산입니다. 원 저 함흥촌 흥수나 종연이 보기 싫어 어디 일하겠습니까? 정치대장을 해도 조개덕의 인민을 위해 일할 수 있지 않습니까?” 허나 이계삼은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자네가 서기를 내놓고 정치대장을 하면 그런 수모를 당하지 않을 것 같은가? 자네 이젠 쉰이 다 된 노간부야.” 이계삼은 상순의 어깨를 툭툭 치면서 정중하게 타일렀다. “상순이, 자네 일생을 돌이켜 보면 청렴하고 원칙을 지킨 일생이오. 지위도 명예도 따지지 않고 오직 당과 인민을 위해 혁명을 해왔소. 영월구 공안국 국장자리도 수하에게 내주었소. 지원군 영장을 하다가 퇴대한 후 시내에서 살 권리도 내놓고 이 골안에 되돌아와 이제껏 마을을 건설하느라고 김병완 서기와 함께 대를 이어 고생했소. 그런데 지금 난세 판에 뒤로 물러서려고 하오? 흥수나 종연이 좋아할 일을 하려오?  지금 반란파들은 우리 로공산당원들을 몰아내고 대 혁명위원회를 장악하려고 하오. 혁명위원회라는 데는 당원이 아니어도 들어갈 수 있어 반란파들이 탈권하기 좋은 근거지로 됐소. 때문에 당지부 서기를 내놓아서는 절대 안 되오. 비당원 반란파들인 종연이랑 당권마저 우롱하게 해서는 절대 안 되오. 이런 관건적인 시각에 김 서기는 자기절로 자기를 타도하자고 개패를 메고 나설게 뭐요? 공산당원으로서 스스로 억울한 누명을 쓰고 반란파들에게 권력을 찬탈할 기회를 내주어서야 되오? 정말 어처구니없는 짓을 하지도 마오. 현실도피를 하려고 하지 말고 역경을 맞받아 싸워나가야 하오. 이럴 땔수록 모든 일을 신중하게 처리하오.” 상순은 노서기의 비평에 머리를 숙이었다. “그럼 저의 정치견해를 보류하기로 하겠습니다. 허나 당지부 서기를 민주로 선거합시다. 대체 우리 대대 당원들의 민의를 알아야 될 것 같습니다.” 허영주가 한마디 보탰다. “좋은 의견이오. 명심하오. 우리는 허백호와 박영발, 박윤희까지 모두 단결해 종연을 우두머리로 한 반란파들의 기염을 꺾어 놔야 하오. 우린 노동개조를 하러 나왔지만 아직도 중국 공산당 당당한 당원이오. 우리가 뒤에서 떠밀어 줄 테니까. 근심하지 말고 대담이 공작하오. 종연이랑 절대 우리 당내에 기어들지 못하게 막아야 하오.” 상순은 머리를 끄덕였다. 이때 저쪽에서 종연이랑 흥수랑 붉은기를 메고 사원들을 몰아 밭으로 나오고 있었다. 흥수는 눈초리 꼿꼿해 을러멨다. “똥을 퍼 나르라고 했더니, 참. 한 초롱 밖에 나르지 못했어? 오늘 언제 열 초롱 나르겠어?‘      상순이 막아 나섰다. “아니, 좋은 수레를 두고 왜 노간부들에게 똥 짐을 나르게 하오? 무슨 심보요?” 그러자 흥수는 삐죽한 조개턱을 개 턱처럼 쳐들고 대들었다. “어째? 노동개조범에게 똥 짐을 메나르게 했는데 가슴 아파?” 흥수는 사원들 속에서 가물에 실돌피 같은 한 나그네 뒤 덜미를 잡아 끌어냈다. 헝겊막대기처럼 훤칠한 키에 다닥다닥 기운 누더기를 입은 예순도 넘어 보이는 나그네였다. “알만하오? 이 놈은 일제 때 용정통감부 간도파출소에서 일본 놈들의 통역을 하던 이달송이란 개다리란 말이오. 이제부터 이계삼과 허영주는 이놈과 함께 똥이나 퍼 나르게나.” “뭐라고?!” 상순이 눈을 뚝 부릅뜨자 흥수는 주름이 쪽쪽 간 길죽한 호박대가리에 비웃음기가 서리어 쪽 퍼졌다. “어째 달통되지 않는가?” “어쩜 노간부들을 일본 통역과 똑 같이 취급한단 말이오?” 상순의 질책에 흥수는 코방귀를 “흥!” 하고 뀌었다. “퉤! 당내에 자본주의 길로 나가는 집권 파는 지주나 부농, 일본주구보다도 더 나쁜 놈들이란 말이오. 당과 인민을 위해 일하는 척 하며 양면파 수법을 써가면서 나쁜 짓을 한단 말이오.” 상순이 한걸음 나서면서 흥수와 따지고 들려고 하자 이계삼이 인분초롱을 메고 허리를 펴면서 말렸다. “그만하게. 치보 주임이 하라는 대로 하지. 뭐.” 흥수가 우쭐거리는데 종연이가 흥수를 밀치면서 나섰다. “이젠 당지부 서기나 치보 주임이 이래라 저래라 할 때는 지나갔네. 모든 건 우리 혁명위원회에서 하라는 대로 해야 돼.” 상순은 “이마에 피도 마르지 않은 놈 새끼.” 하고 욕하려다가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억지로 삼켰다. 이계삼이 인분초롱을 메고 산비탈 아래로 내려가려고 할 때다. “서오!” 종연이 고함쳤다. 이계삼이 돌아서 옆구리에 두 손을 지른 종연을 쳐다보았다. “이 놈아! 밭머리에서 모주석께 충성무를 춰드리고 가야지. 잊었는가?!” 그제야 이계삼과 허영주, 상순도 별 수 없어 머리를 숙이고 다가섰다. 흥수는 남조선 특무로 몰리자 인차 카멜레온처럼 살짝 입장을 바꿔 종연을 괴수로 하는 반란파들에게 달라 붙었다. 그것도 정치매매를 앞세우고. “종연이, 너도 정치를 하려고 나선바하고는 입당해야 하지 않겠느냐?” “건데?” “입당하려면 내 방조가 필요할 거야.” 종연과 흥수는 모주석의 초상을 휘날리는 붉은 기대에 걸어놓으려고 했다. 허나 걸개가 없어 아무리 역사질을 해도 걸 수 없었다. 종연은 상순을 보고 모 주석 초상을 안고 서 있으라고 했다. 허나 상순은 나서지 않았다. 그때 흥수가 제꺽 나섰다. “내 들게.” 그때 상순이 나무랐다. “에끼, 이 사람아, 모주석 초상을 자네가 들고 있으면 모두들 자네에게 충성무를 춰 올리겠는가?” 그러자 흥수는 주춤 멈춰서더니 쭈물거렸다. 종연은 모 주석 초상을 들고 이리저리 돌아보면서 중얼거렸다. “모 주석을 높이 모셔야겠는데 오늘은 별 수 없구나. 후에는 모 주석 초상을 모실 걸개를 멋지게 만들어 가지고 와야겠다.” 종연은 꽂아놓은 기발 두 대 사이에 모 주석 초상을 기대 세워놓았다. 뒤이어 종연은 사원들을 보고 모 주석 초상을 향해 빨간 모 주석 어록 책을 들고 자기를 따라 외치게 했다. “위대한 수령 모주석의 만수무강을 축원합니다!” “만수무강!” “만수무강!” “만수무강!” 뒤이어 사원들은 모 주석 초성을 향해 쩔룩거리면서 충성 무를 추어댔다. 밭머리 충성무가 끝나서야 모두들 김을 매기 시작했다. 쉼에는 또 모 주석의 최신지시와 어록을 학습하고 암기하기 시작했다. “우리 사업을 영도하는 핵심적 역량은 중국 공산당이다. 우리 사업을 지도하는 지도사상은 맑스- 레닌주의이다.” 강냉이밭에 범이 새끼를 칠 지경으로 풀이 자라나도 사상혁명만 하다나니 기음을 제대로 맬 겨를이 있겠는가! 장마철이 다가오면서 소낙비가 억수로 퍼부었다. 풀들은 밤낮으로 소리를 치면서 자라고 있었다. 그래도 반란파 종연은 군복을 입고 우쭐거리면서 “농사는 잘 못 돼도 사상만 새빨가면 된다.”고 했다. 사원들은 모두 멀건 죽물을 마시면서 배고픈 판에 일하는 척 하면서 축을 내지 않았다. 만약 누가 농사를 틀어쥐면 류소기의 “생산유일역론”에 물 젖은 반동분자로 몰리우기 십상이었기에 누구도 감히 “시대의 조류”를 막을 수 없었던 것이다. 저녁에 당원들은 토성 안 대대 사무실에 모였다. 회의에는 비당원들인 종연과 송희 등 반란 파들도 참석했다. 상순은 이계삼과 허영주, 허백호에게 눈길을 보낸 후 입을 열었다. “오늘 우리는 당지부 확대회의를 열고 새로 당 지부 서기를 선출하기로 했습니다. 오늘 회의에는 ‘문화대혁명’ 가운데서 나온 정치열성분자들인 종연과 송희도 열석으로 참석했습니다. 당 지부 회의기 때문에 비당원들은 방청할 수는 있지만 선거권과 표결권은 없습니다. 이에 특별히 회의 전에 안면고시를 하는 바입니다.” 그러자 종연은 책상을 꽝 치며 벌떡 일어나더니 고래고래 고함쳤다. “우리를 벙어리로 만들 거면 참석시켜 뭘 한단 말이오? 대대 혁명위원회 주임을 뭘로 보오?” 상순은 양보하지 않았다. “엄숙한 당원대회에 참가했으면 조용히 듣기나 하오. 이제 더 떠들면 회의장에서 쫓아 내겠소.” 종연이 뭐라고 또 말하려고 하는데 흥수가 뒤에서 바지 뒤꽁무니를 잡아 물 앉혀 놓았다. 종연은 성이 꼭뒤까지 치밀었지만 씩씩거리면서 자리에 앉아 팔꿈치로 책상을 꽝 쳤다. 상순은 눈꼴이 사나웠지만 회의를 계속 사회했다. “지금부터 우리 대대 당지부 서기를 선출합시다. 자유로 발언하시오.” 이때 또 종연이 나섰다. “내가 하면 안 됩니까?” “종연은 당원도 아닌데 어떻게 지부 서기를 한다고 그러오?” 그러자 흥수는 조개턱을 쳐들고 일어나 떠들어댔다. “난 이번 회의에서 아예 우리 대대 반란파 우두머리, 아니, 반란파 수령 종연 동무를 입당시킬 것을 건의합니다.” 허백호가 단마디로 막아 나섰다. “입당조건도 구비되지 않은 햇내기를 어떻게 입당시킨단 말이오?” “왜 안돼? 종연은 군인출신이자 ‘문화대혁명’ 가운데서 우리 공사 반란파 우두머리인데도 화선입당을 할 수 없어?” 흥수의 어처구니없는 말에 허백호 서기가 눈을 흘겼다. “자네를 잘 고험하지 않고 화선입당 시켰기에 혁명에 얼마나 큰 지장을 줬는가? 종연의 화선입당을 반대하오.” 그러자 종연은 벌떡 일어나 고함쳤다. “더러운 영감들이 짜고 들어서 내 입당을 가로막다니? 내일부터 죽게 투쟁 받을줄 알아라!” 이계삼 서기도 한마디 했다. “자, 자, 그만두오. 입당조건도 안된 종연을 어떻게 입당시키오. 오늘 회의는 새 당지부 서기를 선거하는 회의요.” 그리하여 다시 당 지부 서기를 선거하기 시작했다. 순간 납덩이같은 침묵이 흘렀다. 한참 후 이계삼이 제일 먼저 침묵을 깨뜨렸다. “내 보건대 김상순 동무가 계속 서기를 하는 게 옳소.” 허영주도 맞장구를 쳤다. “옳소. 상순 동무가 하지 않으면 누가 할 수 있소?” “내가 할 수 있어!” 흥수가 눈알을 부라리면서 소리쳤다. 그 바람에 모두들 코웃음쳤다. 그때 영발 서기가 일어서더니 입을 열었다. “내 보건대 상순 동무는 계속 지부 서기를 할 자격이 없다고 봅니다.” 그 말에 모두들 놀라운 눈길을 영발에게 돌렸다. 영발은 개의치 않고 계속 발언했다. “상순 동무는 생산, 생산, 하면서 농사 밖에 틀어쥘 줄 모릅니다. 지금 모주석의 지시대로 ‘계급투쟁을 기본 고리로 틀어쥐는 시대’에 류소기의 ‘생산유일역론’의 썩어빠진 수정주의 사상에 물든 사람을 서기로 선거해서야 됩니까? 상순 동무가 계속 서기를 하면 우리 대대에서 자본주의 싹이 저 장마철의 풀처럼 범이 새끼 칠 지경으로 자라날 겁니다. 난 흥수 동무가 서기를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모두들 놀랐다. 상순도 적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믿던 도끼에 발등을 찍힌다고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었다. (노동개조를 하러 시골로 왔다고 불쌍해 자기 집 위방에 들이고 생각해주었건만 관건적인 시각에 흥수 편을 들다니? 하긴 반란파들인 종연이나 흥수에게 달라붙어야 투쟁도 덜 받을게 아닌가? 사람을 잘 못 보았구나. 오뉴월 소불알처럼 이볼 쳤다 저볼 쳤다 하는 놈.) 허영주는 도리머리를 흔들더니 강경하게 말했다. “박 동무는 이 마을의 역사와 상순 동무의 공적을 알기나 하도 말하오? 난 박 동무 의견을 반대하오. 우리 마을 서기는 상순 동무 해야 하오.” 이렇게 옥신각신 다투듯이 자기 견해를 주장하다나니 밤중이 됐다. 나중에 표결을 하게 됐다. 흥수가 성이 나서 바깥으로 횡 하니 나가버렸다. 그러자 박영발은 소피보러 가는 척 하면서 뒤꽁무니를 따라 나갔다. 그런데 저게 뭔가? 박영발은 뒤간으로 가는 흥수를 따라가더니 “아버지!” 하고 불렀다. 흥수는 자기 귀를 의심하며 돌아서 영발을 바라보았다. “아버지, 근심하지 마오.” “아버지라니?” 흥수는 영발이 미치지 않았나 외가풀눈을 치켜뜨며 쏘아보았다. 영발은 밤이어서 똑똑히 볼 순 없었다. 하지만 분명 아첨이 번지르르하게 흐르는 낯으로 흥수를 쳐다보며 손까지 잡고 말했다. “아버지, 근심하지 마시오. 내 투표 할테니까 당지부 서기는 꼭 아버지가 당선될 겁니다.” 흥수는 너무 어처구니없어 코방귀를 뀌었다. 허나 인차 관건적인 시각인지라 영발을 보고 지시하듯 말했다. “꼭 투표하오. 그럼 자넬 제일 먼저 시내 병원에 보내 줄게.” 이때 뒤에서 윤희가 쫓아나와 “빨리 들어오오. 투표를 해야겠어요.”라고 소리쳤다. 흥수와 영발을 오줌을 누는 척 하고 인차 회의실로 돌아갔다. 모두 무기명으로 담배종이에 대대 당 지부 서기 후보들인 상순과 흥수 가운데서 한사람만 써넣기로 됐다. 모두들 엄숙하게 담배종이에 자기 마음에 드는 후보의 이름을 써넣었다. 흥수는 제꺽 자기 이름을 써넣고 영발이 자기 이름을 쓰리라고 여기고 건너다보면서 희죽이 웃기까지 했다. 윤희가 투표결과를 공포했다. “리흥수 2표, 김상순 6표. 차기 대대 당 지부 서기는 김상순 동지로 통과됐습니다!” 박윤희가 공포하자 모두들 박수 쳤다. 허나 반란파들은 우르르 일어나 문을 꽝 박차고 나가버렸다. 허나 흥수는 벌떡 일어나더니 박윤희의 손에서 투표쪽지를 와락 빼앗아 보았다. “아니, 이렇게 될 수 없소. 절대 없소.” 그는 두덜거리면서 쪽지를 보고 또 살펴보았다. “내 한 표에 박영발 서기 한 표, 학수 형님의 한 표 해도 셋이 될게 아닌가?” 그때 학수가 흥수를 질책했다. “그만둬라! 난 너에게 투표하지도 않았다.” “형님, 어찌 이럴 수가 있소?” 흥수가 입을 짝 벌리고 싯누런 덧이를 드러냈다. 당장 학수를 물것만 같았다. “네가 저 종연이랑 저 반란파들을 끌어들여 이 마을을 무엇으로 만들 작정이냐?! 퉤! 서기를 해? 어림도 없다.” 흥수는 형에게 욕보고 영발을 돌아보면서 손을 잡았다. “그래도 믿을 건 형도 아니고 박서기 밖에 없구먼.” 그러나 사실 박영발은 앞에서는 흥수를 선거했지만 양면파 수법을 써서 무기명 투표를 할 때에는 상순의 이름을 써넣었던 것이다. 흥수가 서기를 하면 계속 투쟁만 받을까봐. 흥수는 상순이가 자기를 선거했을 줄은 몰랐다. 그는 영발이 자기를 선거했다고 오해했던 것이다. 그러나 투표종이를 다 펴보고서야 박영발이 자기를 투표하지 않은 것을 눈치챘다. 흥수는 평소에 영발의 검토 서를 늘 보다나니 필적을 알고 있었다. “개 자식, 변소 간에 가서 나를 아버지라고까지 불러놓고?!” 박영발은 시원한 웃음을 얼굴에 지으면서도 흥수에게 그 말을 하지 말라는 듯이 눈을 질끔 해보였다. “알락 고양이 같은 놈! 어디 두고 보자!” 흥수가 노발대발 할 때다. 허백호가 흥수의 손에서 투표쪽지를 빼앗아갔다. “이게 무슨 작법이오? 투표쪽지를 펴봐서야 되는가?!” “펴보면 어째?” “어째 보복이라도 하려는 거요?!” 허백호는 외까풀눈으로 무섭게 흥수를 쏘아보았다. “내 눈이 멀었지, 멀었어. 자넬 입당시킨 내가 당과 인민 앞에 부끄럽소. 부끄러워!” “뭐라고?” 흥수는 결이 날대로 났다. “어디 두고 보자. 언제까지 이 시골에서 똥이나 치면서 사는가?” “마음대로 해봐라. 개똥을 무서워 피하는가 하니? 더러워서 피하지. 퉤!” 그날 회의는 이렇게  당원들의 승리로, 상순이가 재차 대대 당지부 서기로 재선된 것으로 끝났다.      흥수는 회의실에서 나와 토성 밖에 나가자마자 씩씩거리면서 종연이랑 반란파들이 모인 황연건조실 쪽으로 씨엉씨엉 걸어갔다. 그의 납짝코에서 시거먼 연기가 풍겨나오고 있었다.
157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102) 댓글:  조회:1631  추천:3  2018-05-18
                  14. 고향으로 날아간 혼 억수로 쏟아지던 비도 가을에 접어들면서 드물어지고 홧홧 달아오르던 열기도 서서히 물러갔다. 화가 난 세월의 화가가 산과 들판을 누렇게 물들여가더니 황금물결이 가을바람에 출렁이었다. 다만 세월의 바람에 화약내 나는 정치열기만은 우매한 정치몽둥이에 펄럭이고 있었다. 사원들은 허리띠를 졸라매고 이 가을을 기다리었던 차라 낫을 숫돌에 갈면서 가을 준비를 다그쳤다. 해마다 언제면 풍작을 거둬 배불리 먹고 살겠는가고 희망에 한껏 가슴이 부풀어 올랐지만 가을을 하고 타작을 하고나면 또 배고픈 고생을 해야 하는 것이 농가의 살풍경이었다. 계급투쟁을 하다나니 곡식밭에 범이 새끼를 칠 지경으로 풀이 한 키씩 자라 곡식이 잘 자랐겠는가? 논밭에 가 보면 벼 밭인지 돌피 밭인지 분간하기조차 힘들 지경으로 검은 돌피가 대가리를 쳐들고 넘실거렸다. 조 밭으로 가 보면 누런 가라지들이 잘 난 듯이 대가리를 쳐들고 조이 이삭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느 날, 상순이 낫을 갈아들고 누런 밭으로 나갈 때다. “김 서기―!” 상순이가 머리를 돌려 보니 글쎄 뜻밖에도 이계삼 서기와 허영주 부 현장이 저쪽 우사 쪽에서 손을 저으면서 부르고 있었다. “이 서기!” 상순은 낫을 쥔 채 그리로 뛰어갔다. 그는 이계삼 서기와 허 현장을 보자마자 양손으로 두 분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 “아니, 어떻게 돼 두 분이 여기 왔습니까?” 이계삼 서기가 머리를 숙이면서 대답했다. “그렇게 됐네.” 허영주 부현장은 “광활한 천지에는 우리가 할 일이 많지.”라고 씁쓸하게 말했다. 그제야 상순은 허영호 소장이 말하던 일이 피뜩 떠올라 한숨을 후 내쉬었다. “어떻게 고생하겠습니까?” 그러나 노간부들은 오히려 상순을 위로해 주었다. “우리 때문에 어떻게 속을 태우겠소?” 상순은 두 분의 손을 꽉 잡아 흔들면서 위로했다. “근심하지 마십시오. 우리 마을에서 누가 감히 두 분을 어쩐단 말입니까?” 이계삼과 허영주는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면서 마을을 돌아보았다. 저쪽에서 흥수와 종연이랑 이쪽을 쓴 외 보듯 힐끔거리었다. 반란파들은 가을걷이는 뒷전이고 투쟁대회를 여는데 혈안이 돼 미쳐 날뛰었다. 그 바람에 이계삼과 허영주 뿐만 아니라 흥수마저 반역자, 남조선특무로 몰리어 투쟁 받았다. 종연이랑 송희랑 먼저 흥수와 상순을 끌어내 투쟁하려고 들었다. 그런데 사원들이 투쟁대회장에 잘 나오지 않아 투쟁대회는 흐지부지 해졌다. 종연과 승연, 송희가 직접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투쟁대회장에 나오라고 동원했지만 모두 나가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만은 예외로 됐다. 상순이 자원해서 대대 사무실 앞의 쇠종을 두드리며 소리쳤다. “오늘 중요한 회의를 합니다. 모두 대대 사무실 마당에 모이십시오.” 그러자 사원들은 하나, 둘 토성 안에 모여들었다. 게다가 상순이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동원하자 한 사람도 빠지지 않고 토성 안에 모여와서 시루 속의 콩나물 대가리처럼 꽉 박아섰다. 이날 상순은 자기 절로 집에서 만든 개패를 목에 걸고 숱한 사람들 앞에 나섰다. 개패에는 다음과 같은 꺼먼 글씨가 쓰여 있었다.   사원들을 배불리 먹이지 못한 대대 서기 김상순을 타도하자! 그것도 상순이란 이름은 거꾸로 쓰여 있었다. 모두들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사원 여러분들이 나를 투쟁하십시오. 난 착오가 많습니다. 난 할아버지 대신 당지부 서기를 한지도 십년이 다 돼가지만 우리 대대 면모를 개변시키지 못했고 우리 대대 사원들을 배불리 먹고 살게 하지 못했습니다. 나는 당지부 서기를 할 자격이 없습니다. 내가 젊은 당원을 발전시키지 못했기에 사회주의 새 농촌을 건설할 후계자가 없습니다. 종연이랑 송희랑 믿고선 우리 마을을 사회주의 새 농촌으로 절대 건설할 수 없습니다. 난 투쟁을 맞아야 합니다.” 이계삼 서기와 허영주 부 현장 그리고 허백호 서기까지 모두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상순이, 지금 뭐 하는 거요?” 그러나 상순은 개패를 목에 건 채 허리를 구십도로 굽히었다. 그러자 사원들은 분분히 고함쳤다. “김 서기 절대 자리를 내줘선 안 되오.” “우리 대대는 김 서기가 영도해야 됩니다.” “흥수가 영도해선 절대 안 된다니까!” 어떤 사원들은 뒤에서 나지막이 뒷소리를 했다. “셈이 들지 못한 종연이 형제나 송희 안 되오.” “몽둥이질이나 했지 농사를 알기나 하오? 뭘 아오?” “몽둥이질도 어디 김 서기 발뒤축에나 가오?”       회의실은 수라장이 됐다.       이때 송희가 앞에 나섰다.       “가만, 가만!”        종연은 상순의 개패를 쥐어 당기면서 악담을 퍼부었다.       “김상순, 당신 지금 투쟁 받으러 왔소? 아니면 자기 자랑 하러 나왔소? 당신은 지금 후퇴하는 척하면서 전진하는 게 아닌가? 서기를 하지 않겠다고 하지만 기실 내놓기 싫어 여론 조성하는 게 아니고 뭔가? 한보 후퇴하는 걸로 열 발자국 전진하려고? 누가 모르는가? 당신은 혁명은 모르고 생산만 하는 놈이오. 류소기나 등소평의 ‘3자 일포’거나 ‘유일생산역론’이거나 ‘물질자극’ 따위 더러운 사상에 물젖은 썩어빠진 서기요. 진작 물러나야 했소. 당신은 역사문제가 많은 사람이오. 우리 마을에까지 기어든 남조선 특무 이병수의 외 6촌 형이 아니오? 또 남조선에 가서 남조선 괴뢰군과 내통한 혐의도 있어. 오늘 잘 나섰어. 진작 투쟁 받고 서기를 우리에게 넘겨줘야지.” 상순은 머리를 들고 종연을 마주 보더니 눈을 흘겼다. “넌 날 투쟁할 자격이 없다." 그러나 상순은 사원들을 향해  말했다. "사원 여러분들이 나를 투쟁하십시오. 난 착오가 많습니다. 그러나 나는 남조선 특무가 아니오. 난 항일전쟁 때부터 유격대를 도와 쌀도 날라 갔고 장백산 밀림에서 성칠 대장을 도와 일제와 총을 맞대고 싸웠소. 난 삼도만 토비를 숙청하는 전투에도 참가해 토비를 몰아내고 우리 마을 주변의 숱한 마을 사람들을 보호 했소. 이 상순이 무슨 죄가 있느냐? 난 손바닥만한 땅도 없이 조선 고향을 떠난 너희 부모들을 이 마을에 받아 주었고 우리 할아버지와 함께 당의 영도아래 저 장학산과 지학사 같은 지주를 청산해 너희들 부모한테 밭을 나눠주고 배불리 먹고 살게 했다. 우리 조손 3대는 제일 일찍 이 마을에 들어와 황무지를 개간한 밭을 몽땅 내놓고 너희 부모들을 이끌어 생산대를 꾸리고 황무지를 개간해 논을 풀고 과수원을 차려 너희들을 배불리 먹고 과일도 먹게 했다. 이것도 죄냐? 너희들이 대대 권력 찬탈에 눈이 뻘개 미쳐 날뛰는 흥수 꼬드김에 들어 이렇게 반란하면 누가 좋아하느냐? 종연아, 너희들이 그래 저 장충국이나 지괴호 같은 지주 새끼들이 좋아하는 노릇을 하겠느냐?” 일부 사원들은 모두 머리를 끄덕였다. “김 서기를 투쟁해선 안 되오. 안 돼!” 종연은 상순의 빈틈없는 말에 더 할 말이 없어 몽둥이만 쳐들었다. “이 나그네 한 대 맞아봐야 알겠는가? 전탕 자기 좋은 소리만 한다니까.” 종연이 몽둥이를 들어 상순을 내리쳤다. 그때 옆에 서있던 성환이 손으로 막았다. “종연이, 말로 해야지. 몽둥이를 휘둘러서야 되오?” 종연은 상순을 투쟁하려다가 오히려 민심만 잃고 말았다. 그날 회의는 상순을 투쟁한다기보다 상순이가 인심을 얻고 종연이랑 반란 파들의 기염을 꺾는 회의로 돼버렸다. 그날 회의에 참가한 후 병완은 앓아눕고 말았다. 병완은 고향을 떠나 쪽박을 차고 두만강을 건너 함흥 촌에 들어와 함흥 촌의 군중들을 배불리 먹고 살게 하려고 한뉘 정성을 다했다 하건만 계급투쟁의 예봉이 자기와 손자에게 돌려지자 정치투쟁의 참혹함을 뼈저리게 느꼈다. 하여 그는 깊고 깊은 심연 속에 빠져 허덕이고 있었던 것이다. 상순이 달려왔다.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꼭 일어나셔야 합니다. 꼭 밝은 세상을 보셔야 합니다.”  허나 병완은 더는 깨어나지 못했다. 정규상이 달려와 맥을 짚어보고 중풍에 걸린 것 같다고 했다. 상순과 상길은 할아버지를 수레에 싣고 진수해 병원으로 가려고 서둘렀다. 그때 아랫사랑집 보준이 말렸다. “큰아버진 집에서 편이 운명하시게 놔두오. 진수해병원에 간들 우리 마을 정교수만 용하겠소? 정 의사, 치료방법이 없소?” 정규상은 수레에 병완을 모시려는 상순과 상길 그리고 상훈을 말렸다. “뇌출혈에 걸린 환자를 들어 수레에 싣고 가느라고 덜렁거리면 뇌가 울리면서 더 중해질 수 있습니다. 집에 모시고 중약을 써봅시다.”       정규상은 먼저 혈관주사를 가져다 놓으면서 직접 약을 져 가져왔다. 그러자 상길과 상순은 손수 풍로를 피웠고 명옥과 상길의 처 리련옥은 약탕기를 씼은 후 중약을 쏟아 넣고 풍로에 올려놓고 달였다. 한참 후 명옥과 련옥은 중약을 사발에 짜서 좀 식인 후 양쪽에서 한술한술 떠 입에 넣어드렸다. 병완은 손자들과 손비들의 살뜰한 보살핌을 받아 보름 후에야 천천히 눈을 떴다. 그는 천천히 손을 들어 상순과 상길의 얼굴을 매만지면서 겨우 몇 마디 했다. “나, 난, 안, 안 되겠다. 꼭 머, 머리를 들, 들고 꿋꿋이, 꿋꿋이 살아나가야 한다.” 상순은 세 귀 눈에 뜨거운 눈물을 주르르 흘리면서 머리를 끄덕였다. “할아버지, 세상이 아무리 험악해도 인민군중들을 위해 살려는 저를 어쩌지 못 할 겁니다. 난 당과 인민에게 미안한 일을 한 것이 없습니다. 저는 공산당을 믿습니다. 반란 파들이 아무리 일시 미쳐 날뛰어도 당과 인민들은 꼭 정확한 결론을 내릴 것입니다.” 병완은 상순의 손을 굳게 잡으면서 머리를 끄덕였다. 그는 자기 주위에 둘러 앉아 눈물을 흘리는 상훈과 상길 등 손자들과 손녀들 그리고 증손자, 증손녀들을 둘러보면서 상길에게 물었다. “성, 성칠이, 큰며느리 진, 진달래, 인섭이 보고 싶구나. 그들은 참, 참, 장하다.” 상길은 할아버지 손을 잡고 귀가에 대고 조용히 말했다. “진달래 큰어머닌 편지에 조선에 나갈 때 몇몇 악질분자들을 돌멩이로 까 눕힐 수 있었대요. 하지만 정치소용돌이 속에서 미혹된 군중들이라고 생각돼 놔뒀답니다. 조선에 나간 큰어머니와 인섭 삼촌 그리고 은녀 아주머니 모두 잘 있답니다. 옥선도 조선에 나가 중학교 교장으로 사업한답니다. 너무 근심하지 마십시오.” 병완은 맥없이 머리를 끄덕이더니 눈을 스르르 감았다. 그이 눈귀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주르르 흘러 밭고랑 같은 주름살을 흥건히 적시었다. “고, 고향, 고향으로 돌아가는 날이 언, 언제 오겠니? 누구든 이후에 고, 고향에 돌아가면 조상님들의 산, 산소에 찾아가 꼭 인, 인사를 드리어라. 부, 부모님과 조상들이 계시는 고향 땅에 묻히고 싶구나.” 상길은 주먹으로 눈물을 닦았다. “할아버지, 왜 이런 말씀을 합니까? 흐흑, 할아버지, 일어나십시오. 정신을 차리십시오.” 그러나 병완은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였다. 상순과 상길은 정규상과 규혁이 지어준 첩약을 달여 계속 할아버지께 대접하였다. 그 덕에 병완은 사흘만에 또다시 겨우 눈을 떴다. 그는 사위를 두리번거리었다. “할아버지,” 병완은 상순과 상길의 손에 손을 얹고 간신히 물었다. “성, 성칠은 어디 있니?” “예? 큰아버지는 조선에서 희생됐습니다.” 상길의 말에 병완은 눈물을 주르르 흘리면서 마지막 숨을 몰아쉬었다. 드디어 병완은 숨을 길게 톺아 올리더니 후 내쉬면서 천천히 숨을 거두었다. “할아버지!” “할아버님!” 상길과 상순이 할아버지 두 손을 잡고 대성통곡 쳤다. “노할아버님!” 온 집 식구들은 눈물의 바다에 빠지고 말았다. 그렇게도 조상의 뼈가 묻힌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었건만 끝내 돌아가지 못하고 타향에서 병완은 한을 품은 채 영영 두 눈을 감았다. 바깥에서 초겨울 바람에 앙상하게 마른 버드나무 가지들이 몸부림치고 까마귀 두 마리가 원통해 떨고 있는 비술나무 가지에 앉아 꽁지를 들썩이며 “까욱”, “까욱” 하고 처량하게 울어댔다. 상길은 할아버지 흰 적삼을 들고 지붕에 올라가 “복!” “복!” “복!” 하고 처량하게 할아버지 혼을 불렀다. 그러나 초겨울 바람을 타고 날아난 할아버지 혼은 영영 돌아오지 못하였다. 육신은 타향에 있어도 혼이나마 고향 명천으로 훨훨 날아가고 있었으리라. 온 집 식구들은 상모를 쓰고 베옷을 입고 조상객들을 맞이하였다. 석철과 석은 형제를 비롯한 친척들과 마을 사람들이 윗방 앞에서 큰절을 세 번씩 올리었다. “형님, 이게 웬일이요? 우린 함께 농사를 잘 지어가지구 고향으로 돌아가자고 하지 않았소? 아이고, 형님~” 석철의 말에 상순과 기준은 구슬픈 곡소리를 하였다. 뒤이어 마을사람들이 하나, 둘 조상하러 찾아왔다. 평소에 웃새집 병완 영감네 신세를 진 사람들이 투쟁 받을 위험을 무릅쓰고 찾아왔다. 상순은 덕팔의 손을 굳게 잡고 “장례에 와 주셔서 고맙습니다.” 하고 인사하였다. 사흘 후 마을 사람들은 병완을 모신 상여를 메고 천지꽃 산중턱으로 올라 갔다. 그들은 반란 파들의 위협도 무릅쓰고 장례대오를 뒤따랐다. 장충국과 조덕산도 장례에 왔다. 곡성과 함께 자손들은 할아버지를 할머니의 묘지에 피눈물과 함께 합장하였다. 병완의 후노친은 진작 리성희의 묘지와 산골짜기 하나를 사이 두고 뒷산에 썼던 것이다. 본댁과 후처를 한데 산소를 쓰면 구천에서도 서로 싸운다는 풍속에 의해 그리 된 것이었다. 함흥촌 서쪽 천지꽃산 중턱 산비탈에, 마른 개암나무가지가 몸부림치는 황야에 커다란 묘지 하나가 쓸쓸히 누워 있었다. 그 묘지 속에는 고향을 지키려고 목숨을 내걸고 싸우던 병완이, 숨을 거두기 전까지도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해 차마 눈을 감지 못하던 리성희 량주가 쓸쓸히 누워 계시었다. 모두들 제주를 붓고 장례가 끝났다. 그러나 상순과 상길은 조부모의 묘지를 끌어안고 대성통곡 쳤다. 상길이 대성통곡을 쳤다. “할아버님! 할머님! 이게 웬 일입둥?” 상순도 할아버지의 묘를 끌어안고 엎디어 어루만지면서 대성통곡을 쳤다. “할아버님, 할머님! 조부모님들에게 효성을 다하지 못한 이 불효자식을 용서해 주옵소서. 이 추운 겨울에 입을 거 제대로 입히지 못 하고 잡수실 거 제대로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이 불효자손들을 용서하십시오. 어째 우리를 두고 홀로 가십니까?”       자손들은 모두 묘지 앞에 꿇어앉아 대성통곡을 치었다. 애절한 울음소리는 눈이 풀풀 흩날리는 황야에 처량하게 울려 퍼지었다. 산소 남쪽의 백양나무 가지에서 까마귀가 까욱까욱 스산하게 울고 있었다. 고향을 그렇게도 사랑하던 병완이,  조상들의 산소가 계시는 고향을 그렇게도 사무치게 그리던 조선의 한 효자가, 고향을 지키려고 목숨을 걸고 싸우던 한 용사가 노친과 함께 타향의 황야에 영영 묻히었다. 아, 태줄을 묻은 고향이여, 희망과 사랑을 묻어 두고 조상들의 산소를 모셔둔 고향이여, 사망하면서도 고향이 그리워 눈을 감지 못한 이 고독한 영령들을 위로해 주시라. 육신은 죽었어도 혼이라도 고향 명천으로 훨훨 날아가고 있으리라.                     제27장 암야                           1.비밀사형 먹장구름이 대지를 짓누르면서 감도는 깜깜한 밤이었다. 달도 별도 찾아 볼 수 없는 암야였다. 지하감방 구석구석까지 공포의 어둠이 서리서리 도사리고 있었다. 억울한 모자를 쓰고 갇힌 노간부들은 지하감방에서 끌려나가 가혹한 고문을 당하다가도 어디엔가 끌려가면 종적을 감추고 말 때도 있었다. 갑자기 철창 밖에 반디 불 같은 남포등 불빛이 다가왔다. 천정에 개구멍만큼 난 철문이 드르릉 열리더니 두 자가 뚜벅뚜벅 사다리를 타고 내려왔다. 희미한 남포등 불빛에 그자들의 군복 팔에 뻘건 완장을 두른 것이 눈에 뜨이었다. “박영발! 나왓!” “예.” 박영발은 목구멍으로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또 무슨 고문을 들이 댈지 몰라 머리끼 곤두섰다. 고문실에 나가자마자 몽둥이찜질부터 들이대며 고문했다. “이 놈! 로실히 말해! 반혁명 폭란 때 누가 구락부에 불을 질렀어?” “난 모르오.” “아니, 이 자식, 누구 앞이라고. 이 분은 모원신, 아, 아니, 이씨 지도자 김 통역이야, 이분이 한마디만 하면 네 놈은 목이 썩둑 날아날 줄 알아라.” 옆에 선 놈이 퉁퉁한 자를 춰 올렸다. 이씨의 통역이라고 하는 퉁퉁한 김용만은 남포등을 들어다 영발의 코앞에 들이대고 이발을 사려 물더니 물었다. “구락부에 불을 지른 사건을 이실직고하지 못해?” “모르오!” 찰싹! 영발은 귀 쌈이 얼얼하게 한대 맞았다. “말해! 누가 불을 질렀어?!” “말해도 너희들이 믿지 않을 걸.” “말해! 누가 불을 질렀어?!” 악에 받친 그는 맞고함을 쳤다. “반란파들이 불을 질렀다. 왜 우리한테 들씌우는 거야?” 그러자 김 씨는 돼지처럼 살이 진 상판대기에 흉악한 몰골을 지었다. “정말 죽고 싶으냐? 너희들 두목들도 다 탄백했다. 한영수랑 김진욱이랑 다 불었어. 그 사람들은 로실히 탄백하고 발편잠을 잔다. 집에 가서 편안히 식구들도 만나고 편안히 살고 싶지 않니? 아니면 계속 지하 감방에서 고문을 당하겠는가?” 김용만은 돼지 대가리를 홱 젖히더니 뒤에 선 졸개들에게 손시늉 했다. 졸개들이 우르르 달려들어 형틀에 영발의 두 팔을 달아맸다. 졸개들은 마치 모래주머니나 치듯이 영발의 몸에 대고 사정없이 주먹질을 해댔다. “억, 억.” 영발은 졸개들의 주먹에 배를 얻어맞으면서 비명소리를 질렀다. 그래도 졸개들의 주먹질은 멈추지 않았다. 졸개들은 그러고도 성차지 않아 몽둥이로 영발의 머리를 탁 내리쳤다. “앗!” 영발은 끝내 비명소리와 함께 까무러치고 말았다. 졸개들이 영발의 낯에 찬 물을 한 대야 퍼 쳤다. 그러자 영발은 천천히 피 흐르는 머리를 들었다. “말해! 누가 불을 질렀어?!” 허나 영발은 입에 빗장을 지른 채 물이 줄줄 흐르는 눈으로 맥없이 김씨를 쏘아볼 뿐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김용만은 이발을 앙물고 영발의 길쭉한 턱을 쳐들더니 눈깔을 부라리면서 을러멨다. “이 놈이 정말 목이 날아나야 불겠니?!” 뜻밖에 김용만은 어조를 부드럽게 바꾸면서 물었다. “누가 불을 지른 것만 불면 넌 자유다. 병원에 돌아가 계속 서기를 하면서 고운 간호사들이랑 얼려서 데리고 살아도 된다.” 김용만은 고문 방법을 바꾸었다. “듣자니 네 놈은 서기를 하면서 내과 간호사장 박윤희를 간음했다더구나. 옳지?” 영발은 머리를 숙이었다. “빨리 탄백하고 윤희한테 가게나.” 김용만은 꿈지럭거리는 영발을 보고 만족한 웃음을 웃었다. “그 고운 노처녀를 두고 저 세상으로 가긴 싫지?” 영발은 대뜸 울음보를 터뜨렸다. “그래, 고운 간호사들을 수태 두고 이 세상을 떠나긴 싫은 거지. 명지한 선택을 하라고.” 김용만은 퉁퉁한 낯을 영발의 얼굴에 닿을 정도로 들이대며 물었다. “말해, 누가 불을 질렀어? 한영수? 김진욱? 아니면 너냐?!” “난 ‘항대’의 먹을 쌀과 기름을 책임졌을 뿐이야!” “이 놈이, 이게! 네 놈이 채를 하라고 들여보낸 기름을 치고 불을 달았지!?” “어느 얼빠진 놈이 자기들이 숨은 구락부에 불을 지르겠는가?” “반란파 조직에 죄를 들씌우고 네 놈들이 반혁명 폭란을 일으킬 도화선에 불을 지르려는 게 아닌가? 진상을 모르는 조선족 군중들에게 홍색이 악독하게 네놈들을 불태워 죽이자고 불을 질렀다는 여론을 조성하려는게 아니야?! 홍색이 민심을 잃게 만들고 네놈들이 반혁명폭란을 일으키려는게…” “퉤!” 영발은 김씨에게 침을 퉥 뱉었다. “이 놈 새끼! 매우 쳐라!” 김용만의 불호령이 떨어지자 졸개들은 몽둥이와 쇠파이프로 영발을 육장 버러지 되게 때렸다. 그런데 영발은 몽둥이찜질을 당할 때 이상하게 덜 아픈 감이 들었다. 후에 알고 보니 몽둥이를 날린 사람은 강운룡이었다. 강운룡은 교통정보과에서 근무하다가 형사정찰과에 전근해 왔던 것이다. 강운룡은 마음속에 민족심이 있었기에 조선족 노간부 정성해 서기를 보호하려고 똘똘 뭉쳐 싸우다가 체포된 한영수나 김진욱, 박영발을 동정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몽둥이로 칠 때면 솜방망이로 치듯이 슬쩍슬쩍 치는 척했을 뿐이었다. 허나 한 졸개의 몽둥이질에만도 영발은 정신을 잃고 쓰러지고 말았다. 김용만은 졸개들에게 명령했다. “끌어내가! 저 놈을 오후에 모아산에 끌어내다가 총살해버려!”  영발은 졸개들에게 질질 끌리어 지하 감방에 들어갔다. 한참 후에 영발은 신음소리를 내더니 점차 정신을 차렸다. 눈을 슬며시 떠보니 깜깜한 감방 안은 어디가 어딘지 알아 볼 수 없었고 축축한 시멘트 땅바닥이 온 몸을 차갑게 지졌다. 영발은 홍색의 무리들이 구락부를 불태우고 점령한 뒤 조직을 따라 의학원 사무 청사에 철거했다. 그 곳도 포위되고 점령당하게 되자 그는 자살하자고 의학원 사무 청사 2층 지붕에서 뛰어내렸었다. 허나 질긴 것이 사람의 생명이었다. 그 높은 2층 지붕에서 뛰어내렸는데 두 발이 진흙탕에 푹 빠져 들어가면서도 죽지 못하고 까무러쳤던 것이다. 그리하여 여기까지 끌리어 와 지독한 심문을 받게 됐던 것이다. (한영수나 김진욱은 절대 승인하지 않았을게다. 그들이 승인했으면 나를 이다지도 심문하겠는가?) 저쪽에서 매질 소리로 고함소리로 비명소리로 지하감방이 처참하고 살풍경이었다. 한참 후 저쪽에서 남포등 불빛이 밝아오더니 지하감방 철문이 드르릉 열리었다. 졸개들이 누군가를 끌어다 들이뿌리치고 가버렸다. 감방은 또다시 공포에 찬 어둠으로 꽉 메웠다. 깜깜한 감방에는 간간히 신음소리가 들릴 뿐이었다. 졸개들이 멀리 간 것을 확인한 영발은 어둠을 헤집고 겨우 기어가 쓰러진 사람을 흔들었다. “진욱이요? 영수요?” 신음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몸과 얼굴을 만져보고 키가 작은 것을 보고 한영수인 것 같았다. 허나 인차 부인했다. 진욱도 한영수보다 크지만 그도 그리 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한참 후에야 쓰러진 사람이 입을 쩝쩝 다시면서  숨 넘어가는 소리를 하는 것이었다. “물을…”  그 목소리는 가늘었지만 영발은 대뜸 한영수의 목소리라는 것을 알게 됐다. 한영수는 YJ시 당위 판공실 주임이었고 정성해 서기를 보호하는 군중단체에서 책임자였다. “영수, 영수!” “누구요? 진욱이오? 영발이오?” “영발.” “오, 살아 있구먼.” “죽자고 층집에서 뛰어내렸는데 죽지 못하고 살았소.” “죽기보다 못하오. 오후에 우리를 총살하겠다 했소. 사상 준비를 했소?” “양?” 영발은 깜짝 놀랐다. 그러나 인차 진정했다. “차라리 죽으면 더 좋을 거 같소.” “정성해 서기를 구하지 못한 바에야 죽는 게 낫지. 여기서 고문당할게 있소? 나도 반란 파들에게 손을 들고 투항해 나오는 게 싫어서 자네를 따라 2층 사무 청사에서 뛰어내렸네. 그런데 엎어져서 갈비뼈만 끊어지고 죽지 못했네. 진욱인 내 앞에서 손을 들고 나가는 척 하다가 문을 나가자마자 도망쳤소. 헌데 반란파들한테 붙잡혀 몽둥이에 맞아 여기까지 질질 끌려 왔다오. 쯧쯧쯧.” 감방 안에서 죽음을 앞둔 두 사람이 두려움 없이 비장한 대화를 나누었다. “세상이 어떻게 돼 이렇게 됐소? 반란파들은 한족간부 전인영 부서기랑 요흔이랑 배극이랑 정성해 동지를 끝까지 보호했다고 타도한다오. 그분들도 이 지하감방에 갇혀 고문당하다오.” 영발의 말에 한영수도 한숨을 후 내쉬었다. “전인영 부서기는 참 좋은 한족간부지. 그는 정성해 등 숱한 조선족간부들을 보호했을 뿐만 아니라 민족단결을 위해 애썼소. 그의 아내는 조선족인데다가 며느리 감도 조선족을 골라두었다오.” “그러니 반란파들이 민족반역자라면서 타도하자고 혈안이 돼 미쳐 날뛰지.” “그러나 저러나 군 분구 조모 동지가 정성해 동지를 보호해 안전하게 북경으로 전이시켰기에 다행이오.” “가족들은 어찌 한다오?” “그게 문제요. 허나 김영순 동지랑 애들도 밤에 빼서 자동차에 실어 의란으로 해서 안도 역에까지 실어갔다오. 거기서 기차에 앉혀 북경으로 빼 보냈다오.” “그럼 됐소. 가족들까지 무사하면 됐소.” “헌데 정성해 서기 안전문제가 큰 걱정이오.” 영발은 한영수의 귀가에 대고 귀속 말을 했다. “소리를 낮춰 말하오. 저 놈들이 꼭 우리 말을 염탐할 거오.” “알았소. 허나 오후면 죽게 됐는데 무서울게 뭐요?” “그래도 다른 사람들을 다치게 하면 어쩌오?”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가 갈까 봐 그들은 소리를 낮추어 한참이나 이 이야기 저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참 후 지하 감방 복도가 조금 훤해지더니 철문이 드르릉 열리는 소리가 들리었다. 한영수는 신음소리를 내면서 벽을 붙잡고 엉거주춤 일어났다. “저승사자가 오는구먼.” 그러자 영발은 따라 일어서더니 어둠컴컴한 지하 감방에서 자못 비장한 표정을 지었다. “한뉘 혁명을 해온 우리가 여기서 반란파들에게 죽을 줄은 몰랐소.” “북소리 둥둥 저승사자 갈 길을 재촉하는구나.” 영발은 발을 탕 구르면서 화를 발끈 냈다. “아니, 형님! 형님은 아직 시나 읊을 기분이 있소?” “허허허, 혁명자들은 죽는 것을 예사로운 일로 여기네.” 허나 영발은 계속 두덜거렸다. 이때 감방 문이 드르릉 열리더니 군복을 입고 뻘건 완장을 낀 자들이 대여섯이 남포등을 들고 뛰어 들어왔다. 그 놈들은 다짜고짜로 한영수와 영발의 두 팔을 잡아끌고 나갔다. 영발은 끌려 나가면서도 소리를 질렀다. “이 놈들아, 우릴 어디로 끌고 가는가?!” “비밀사형이다!” “잔말 말고 걸엇!” 햇볕을 오래 동안 보지 못한 그들은 지하 감방에서 땅 위로 올라갔다. 순간 눈이 시려 어디가 어딘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한참 후에야 실눈을 짓고 여기저기 두루 알아 볼 수 있었다. 지상의 저쪽 감방에서도 또 누군가 끌려 나왔다. 영발이가 보니 박윤희었다. “윤희!” “박 서기!” 그들은 서로 마주 보며 발에 뿌리 내린 듯이 우뚝 멈춰 섰다. “걸어! 이 년 놈들아!” 반란파 졸개들은 총 박죽으로 그들의 잔등을 떠밀고 두 팔을 잡아 끌어내갔다. 박영발은 끌려 나가면서도 고함을 멈추지 않았다. “윤희, 미안하오!” “네 놈들이 저 불쌍한 처녀애를 죽일게 뭐냐?! 죽이겠으면 나 하나만 죽일 거지. 우리가 무슨 죄 있느냐? 억울한 모자를 쓰고 타도되는 우리 민족의 지도자들을 보호했을 뿐이다. 네놈들이야 말로 아무 죄도 없는 무고한 간부를 잡는 죄인들이다. 살인악마들이다. 이제 제 명에 죽지 못할 거다!” “이 놈 새끼, 썩어질 때까지 아가릴 벌릴 테야?!” 반란파들은 박영발과 한영수의 입과 눈을 검은 천으로 동여매고도 모자라 반창고를 몇 겹으로 마구 감아 놓았다. 한영수와 박영발은 입이 있어도 소리도 치지 못하고 끙끙 벙어리 소리를 내면서 자동차 운전실에 떠밀리어 올라갔다. 자동차 운전실 차창에는 검은 보를 쳐놓아 바깥을 볼 수 없었다. 자동차는 시내를 벗어나 한참 달리더니 산으로 올라가는지 엔진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드디어 덜커덕덜커덕 자동차가 몹시 들추더니 엔진이 뚝 꺼지면서 멈춰서는 것이었다. “내려!” 자동차에서 그들을 끌어내리자 눈과 입을 싸매 동였던 수건을 풀었다. 그들이 둘러보니 소나무 숲이 우거진 모아산으로 올라가는 산비탈 중턱이었다. 여기는 이전부터 비밀리에 사형을 집행해온 비밀사형장이나 다름없었다. 반란파 우두머리 김용만이란 자가 찌프에서 내려와 피둥피둥 살진 몸뚱이를 앞으로 움직여왔다. 그 자는 허리에 찬 권총을 매만지면서 말했다. “이제래도 말해라! 너희들 두목 누구인가? 너희들이 구락부에 불을 질렀고 반혁명폭동을 일으켰다는 것을 승인만 하면 살려주겠다.” 한영수는 앞으로 나서면서 떳떳이 말했다. “내만 죽여라! 난 정성해 서기를 보호한 군중단체의 책임자다! 이 박영발이나 윤희는 상관없다!” “허, 그 놈이 죽음 앞에서까지도 꽤나 책임자답구나. 악질반동분자!” “우리 공산당원들은 죽음을 겁내지 않는다! 죽일 테면 어서 죽여라!” 김용만은 한 발자국 다가서면서 가슴을 쭉 내밀고 떳떳이 서서 자기를 쏘아보는 한영수를 주먹으로 떠밀었다. “마지막으로 묻겠다. 네 놈들이 불을 지르고 반혁명 폭란을 일으켰지?” “아니다. 네놈들이야 말로 반혁명 폭동을 일으킨 놈들이다. 네 놈들은 할빈에서 온 이 씨 놈의 충동질을 받고 군중들에게 총질하면서 억울한 간부들을 붙잡아 고문하고 억울한 모자를 씌워 타도하려고 했다. 네 놈들이야 말로 연변조선족자치주를 뒤엎으려고 반혁명폭동을 일으키고 미쳐 날뛴 폭군이다. 반혁명 반란파 놈들이다. 총살 맞은 놈들은 바로 네 놈들이다!” “이 놈을 끌어내라!” 성이 꼭뒤까지 치민 김용만은 낯이 지지벌개 나더니 돼지 멱따는 소리로 고함쳤다. 졸개 이일룡 등이 한영수를 미리 파놓은 구덩이 앞으로 끌고 갔다. 옆에 보니 아직도 구덩이가 여럿이 있었고 저쪽에는 주검을 갓 파묻었는지 자그마한 애기 묘지 같은 것이 여러개 있었다. 반란 파들이 한영수를 무릎을 꿀리려고 하자 한영수는 꿋꿋이 서서 뻗치었다. “난 아무 죄도 없는 공산당원이다. 왜서 네놈들에게 무릎을 꿇어야 한단 말이냐?” “잠간만!” 김용만은 박영발과 박윤희를 돌아보고 음흉하게 웃었다. 그 살진 낯에 발린 웃음 속에는 살인마의 살기가 가득했다. “네놈들은 아주 바람난 연놈들이라면서? 헤헤헤. 비록 태어난 날은 하루가 아니지만 바람둥이 짝과 함께 죽어서 기분 좋겠구나. 허허허.” 김용만은 다가와 박윤희의 피로 얼룩진 턱을 쳐들고 물었다. “네 년은 코신부대에 들어가서 자갈을 날라다 항대에 섬겨줘 우리 혁명반란파들을 치게 했다지?” 박윤희는 가슴을 쭉 내밀고 떳떳이 대답했다. “그랬다. 네 놈들을 더 족치지 못하고 죽게 된 것이 한일뿐이다.” 김용만은 윤희의 귀 쌈을 찰싹 갈겼다. “이년, 죽게 됐는데도 개소리냐?” 그자는 이를 악물었다. “마지막으로 묻겠다. 코신부대 두목 누구야?!” “말해!” 일룡이랑 졸개들이 잡아먹으려고 덮쳐드는 승냥이무리처럼 고아댔다. “내다! 어서 죽여라!” 윤희가 굴하지 않자 용만은 슬쩍 전술을 바꿨다. “넌 새파란 나이에 이 쉬 빠진 자들과 함께 죽을 작정이냐? 나이 아깝다. 아까워.” 그 자는 윤희의 잔등을 매만지면서 지껄였다. “넌 영발보다 더 좋은 총각한테 시집가서 애기도 낳고 행복하게 살고 싶지 않느냐?” “이 더러운 세상을 보기도 싫다. 어서 죽여라!” 작달막한 일룡은 실눈으로 윤희의 높은 젖가슴을 노려보면서 지껄였다. “너무 아깝지. 저렇게 새파란 노처녀를, 헤헤헤.” “악질반동분자들은 살려둘 수 없다!” 용만은 이를 악물면서 “윤희를 끌어가라!”라고 고함쳤다. 졸개들이 우르르 덮쳐들어 윤희를 결박지운 채로 밀고 닥치면서 구덩이 앞에 끌고 갔다. 일룡이란 자는 윤희를 밀고 가는 척 하면서 손으로 젖가슴을 스리슬쩍 만져보았다. “퉤!” 윤희는 일룡에게 침을 뱉었다. “더러운 놈새끼!” 일룡은 낯의 침을 쓱 닦으면서 윤희의 얼굴을 골로 떠받아 코피를 터지어 놓았다. 윤희는 코피 흐르는 얼굴을 들어 일룡을 쏘아보았다. 이쪽에서 용만은 영발에게 족따졌다. “마지막으로 묻겠다. 네 놈들이 구락부에 불을 지르고 반혁명폭란을 일으켰지? 두목은 누구냐?” “죽어도 그 말이다. 불은 반혁명반란 파 네 놈들이 질렀다. 혁명정권을 보위하는 군중조직의 총책임자는 내다. 어서 죽여라!” 김용만은 악이 치밀어 이를 악물더니 손을 홱 휘저으면서 고함쳤다. “이 놈들을 몽땅 총살해라!” 박영발도 구덩이 앞에 끌리어갔다. 한영수는 구덩이 앞에 선 영발과 윤희를 보고 말했다. “우린 사전에 준비한대로 하기요.” 그러자 박영발도 비장한 표정을 지으면서 중얼거렸다. “다만 혁명지도자들을 보호하지 못한 게 한이오.” 윤희도 쉰 목소리로 외쳤다. “반란 파들이 총살당하는 날을 보지 못하고 이렇게 일찍이 죽는 것이 한일뿐이다!” 그러자 김용만은 유들유들한 살진 네모낯짝에 살기찬 웃음을 게바르며 찌껄이었다. "어째 계속 박영발과 통간하지 못하는 게 한이라고 하지 않니? 퉤! 더러운 연놈들.”  뒤이어 그자는 이발로 입술을 사 물더니 오른 손을 쳐들고 돼지 멱따는 고함을 질렀다. “이 놈들을 당장 총살해." 뒤이어 그는 명령을 내렸다. "사격준비!” “잠간!” 뜻밖에 박영발이 고함쳤다. “뭐야?” 김용만이 벌벌 떠는 박영발한테 다가갔다. 박영발은 한영수를 흘끔 훔쳐보더니 용만의 귀에 입을 가져가더니 나직이 쑹얼거렸다. “우리 두목은 저 한영수입니다. 난 졸개일뿐입니다...” “오- 그래? 좋아. 진작 고발할게지.” 김용만은 퉁퉁한 낯바닥에 음흉한 몰골을 드러냈다. “박영발은 살려준다. 나머지 놈들은 몽땅 총살이다.” 한영수는 무슨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눈치챘다. 이때 이구동성으로 구호소리가 울렸다. “공산당 만세!” “모주석 만세!” 한영수와 윤희는 구호를 불렀다. 땅! 땅! 총소리와 함께 한영수와 윤희는 구덩이에 채워 굴러 떨어졌다. 허나 한참 후 한영수는 자기가 죽지 않고 의식이 있는 것을 느꼈다. 머리를 매만져보아도 성한대로 있었다. 영문을 모르고 죽은 척 하고 있을 때다. “이 놈들아, 죽은 척 하지 말고 기어 나와!” 일룡이란 자가 고함치면서 구덩이 안에 자갈을 쥐어 뿌렸다. 한영수는 구덩이에서 기어 나오면서 반란파 두목 김용만에게 물었다. “왜 죽이지 않고 또 시달리게 하는 거야?” 그러자 용만은 음흉한 웃음을 지었다. “네 놈들을 그리 쉽게 죽게 할 거 같으냐?” 일룡이란 자는 “허허허.” 웃더니 주둥이를 너펄거렸다. “‘공산당 만세!’ ‘모주석 만세!’를 부르는 자들을 어떻게 총살하니? 그럼 우린 국민당이 되래?” 그들은 다시 한영수와 영발 그리고 윤희의 입과 눈을 수건으로 꽁꽁 싸맨 후 자동차에 싣고 돌아와 다시 지하 어둠 컴컴한 감방에 처넣었다.                   2. 신음하는 꽃송이들 어둠컴컴한 감방 철문이 드르릉 열리더니 남포등이 쑥 들어오면서 이일룡이란 자가 윤희의 감방에 들어섰다. 그런데 이상하게 일룡이 혼자 들어왔다. 순간 윤희는 두 팔로 몸을 감싸 안고 옹송그리면서 감방 구석에서 바들바들 떨었다. “히히히, 아까운 미인이 누추한 감방에 갇혀 있다니?” 일룡은 남포등을 들고 음충스러운 눈길로 윤희의 풍만한 젖가슴을 노려보았다. “윤희, 나와.” 윤희가 바들바들 떨면서 감방 구석에 앉아 있자 일룡은 덮쳐가 마구 끌고 바깥으로 나갔다. “윤희! 윤희! 무슨 일이 있소?” 박영발이 소리쳤다. “사람 살려요!” “사람 살려요!” 허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작달막한 일룡은 가물에 실돌피 같았지만 그래도 사내인지라 굶고 지친 윤희는 당해낼 수 없었다. 그녀가 아무리 문설주와 벽모서리를 잡고 바둑거려도 용빼는 수가 없이 감방 당직실로 끌려갔다. 당직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원래 반란 파들은 술을 마시러 가고 당직으로 일룡을 남겨 두었던 것이다. 일룡의 징글스런 눈길을 보는 순간 윤희는 겁에 질려 와들와들 떨리면서 두 다리의 맥이 쪽 빠지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겁내지 말라.” 일룡은 일단 먼저 덜덜 떠는 윤희를 구슬리면서 다가섰다. “윤희는 청년당원이라면서. 투쟁정신만은 좋아. 조선족 여성들로 코신부대를 무어 조선족 노간부들을 보호하기 위해 보황파들에게 자갈을 주어 날라다 주었다? 허허, 그 돌멩이에 우리 홍색의 수많은 반란 파들이 머리 터졌단 말이야. 참 아까운 나이에 어쩜 한영수나 영발이 같은 보황파들의 더러운 물을 먹었어?” 허나 윤희는 쓴 외 보듯 하면서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이 년아, 죽고 싶으냐?” 갑자기 일룡은 당장 잡아먹을 상을 지으면서 고함쳤다. “네년의 목숨은 내 손에 달려 있어! 알만해? 고분고분 묻는 말을 대답해. 누가 보황파 우두머리냐?” “모른다!” 윤희는 이를 악물로 고함쳤다. 그러자 일룡은 음흉한 몰골을 드러냈다. “이 년이 이게, 특수고문을 당해 봐야 알겠니?” 그 자는 바 줄로 윤희 두 손을 뒤로 꽁꽁 묶어 까딱 할 수 없이 책상 다리에 끌어매놓았다. 뒤이어 윤희의 높은 젖가슴에 손을 쓱 넣어 슬슬 매만졌다. 윤희는 구렁이가 가슴에서 기는 것 같아 신음소리를 냈다. 그녀는 더는 참을 수 없어 침을 일룡의 낯에 퉤 뱉었다. “이년이, 이게. 말해! 누가 우두머리냐? 영발이 고발했다. 두목은 한영수지?” “더러운 자식, 네가 다 대학생이야? 대학공부를 밑구멍으로 했니?” “뭐라고? 이년이 어디 죽을 맛을 봐라!” 일룡은 윤희의 웃옷을 홀딱 벗겼다. 순간 우유 빛 젖가슴이 훌렁 드러났다. 그녀가 몸부림칠수록 야들야들한 젖무덤이 두부모처럼 하들거렸다. 짐승 같은 야욕이 발정한 일룡은 거친 숨을 몰아쉬더니 윤희에게 와닥닥 덮쳐들었다. 그 자는 윤희의 풍만한 젖무덤을 두 손으로 움켜쥐고 마구 만지다가 침이 질질 흐르는 뻘건 혀 바닥으로 마구 감빨아댔다. “이 짐승 같은 놈아, 아, 아, 아!” 윤희가 욕설을 퍼부으면서 신음소리를 냈다. 신음소리를 낼수록 짐승 같은 일룡의 더러운 손이 더 거칠게 젖가슴을 쓰다듬고 만지고 틀어쥐어 흔들고 빨고 핥아댔다. 한참 더러운 짓을 하던 일룡은 징글스럽게 윤희를 쏘아보며 물었다. “말하겠니? 말하지 않겠니?” “퉤!” 일룡은 낯에 묻은 건 가래를 닦으면서 지껄이었다. “이 년이, 환장했구나. 어디 언제까지 뻗치는가 보자!” 그자는 사무 상 앞에 다가가더니 서랍에서 가는 노끈을 꺼내더니 이쪽으로 다가왔다. 뒤이어 노끈으로 윤희의 앵두알 같이 빨간 젖꼭지를 동여맸다. “말해! 누가 우두머리야?” “…” 윤희는 응대도 하지 않았다. 일룡은 이발을 악물고 노끈을 쥐어 당기었다. “아가!” 윤희는 젖꼭지가 아파 비명을 질렀다. “말해!” 허나 윤희의 입에서는 욕설만 터져 나왔다. “짐승보다 못한 놈, 언젠가는 네놈을 심판할 날이 올 거다.” 일룡은 악에 받쳐 노끈을 꽉 당겼다. 그만 젖꼭지가 끊어지면서 빨간 피가 젖무덤으로 줄줄 흥건히 적셨다. 윤희는 너무 아파 신음소리를 냈다. “말하겠니? 안 하겠니? 이 년이 정말 지독한 악질이구나!” 윤희는 머리를 천천히 들면서 흐트러진 머리카락사이로 일룡을 무섭게 쏘아보았다. 일룡은 그 무서운 눈길을 피하더니 권연을 붙여 물고 풀썩풀썩 피웠다. 연기가 감방 당직실에 서리서리 올라가면서 매캐한 냄새를 피웠다.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일룡은 윤희에게 다가오더니 담배를 길게 빨아댔다. 빠지직 소리와 함께 담뱃불이 새빨갛게 피어올랐다. 갑자기 그자는 담뱃불을 피가 줄줄 흐르는 윤희의 끊어진 젖꼭지에 빠지직 빠지직 지져댔다. “아이고머니!” 윤희는 너무 따가워 비명을 지르면서 마구 몸을 배배 꼬았다. “하하하.” 일룡은 짐승처럼 너털웃음을 웃어댔다. “말해! 우두머리가 누구야?” “내다. 내가 코신부대 책임자이다. 내가 조선족 여성들을 보고 네놈들을 족치라고 자갈을 날라다 주라고 시켰다! 네놈의 대갈통을 까부시지 못하고 잡힌 게 원수다! 원수!” “이 년이 또 혼나봐야 주둥이를 열겠니?!” 한 쉼 쉬고 난 일룡은 또다시 야욕이 발작했다. 그자는 씩씩거리면서 윤희를 마구 끌어다가 허리를 굽혀 책상다리에 마구 매놓고 치마를 훌렁 벗겨 놓았다. “뭘 하려는 거야?!” 일룡은 말 대신 괴춤을 까고 달려들었다. 윤희는 뒤로 달려드는 일룡의 사타구니를 뒤발길질을 했다. “이 짐승 같은 놈아, 네 놈이 날벼락을 맞아 썩어지지 않는가 봐라!아, 악, 아이유…” 사무상 다리마저 삐꺼덕거렸다. 윤희의 날카로운 욕설과 죽어가는 비명소리가 당직실을 메웠다… 세상의 풍운조화는 예측하기 어려웠다. 위에서 정성해 등 조선족 노간부들을 보호하는 이른바 “보황파”라고 일컫는 군중단체들과 이른바 노간부들을 타도하려고 미쳐 날뛰던 “반란파”들은 이젠 싸우지 말고 대연합을 하라고 했다. 위의 지시에 따라 옳고 그름을 떠나서 이젠 변론이고 돌팔매질이고 때리고 마스는 투쟁은 끝났다. 허나 실상 반란파들은 감옥에 들어간 자들이 하나도 없었고 각급 기관의 요직을 차지했다. 할빈에서 온 반란파 두목 이씨의 통역을 하던 자는 노국장을 몰아내고 모모한 국장으로 승급해 권총을 차고 찌프에 앉아 개 잡은 포수처럼 싸다니면서 계속 노간부들을 못 살게 굴었다. 그리하여 노간부들은 그를 보기만 하면 모골이 송연해질 지경이었고 눈에 든 가시처럼 미워했다. 이일룡이란 자마저 미녀들이 꽃송이들처럼 방실거리는 시내 문화단위로 들어가 원래 과장을 반란해 몰아내고 과장자리를 차지했다. 일룡은 이쁜 무용수나 가수를 보기만 하면 새파란 새애기든 각시든 상관없이 젖가슴을 스리슬쩍 만져 봐야 시름 놓는 건달 습관이 있었다. 일룡은 콧노래를 부르면서 복도를 지나가다가 무용수인 용만의 처 해복과 정성해 서기 처남댁인 송선을 만났다. “과장님, 안녕하십니까?” “오, 그래, 그래.” 일룡의 눈길은 대번에 생글방글 웃는 송선의 얼굴로부터 풍만한 젖가슴에 가 꽂혔다. 송선은 그 찔러버리는 눈길이 너무 아파 가슴에 뭐가 묻었는가고 내려다보았다. 저고리에 뭐가 묻은 것도 없었다. 일룡의 나쁜 습관을 아는 송선과 해복은 눈인사를 하고는 바쁜 걸음으로 자리를 떴다. 해복은 자기 남편이 국장인데 감히 나하고야 어쩌지 않으려니 했다. “왁!” 갑자기 일룡이 뒤에서 덮쳐와 해복과 송선을 와락 끌어안으면서 젖가슴을 만져놓았다. “어마나!” 해복은 국장 남편을 믿고 일룡을 쏘아보았다. 허나 송선은 감히 일룡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팔을 치워버리고 저리로 가버렸다. “건달 같은게. 과장이라는 게 뭡니까?” 해복이 불평을 토로하면서 눈을 흘기자 일룡은 씨물씨물 웃으면서 변명했다. “어허, 국장 부인님, 미안하오. 불시에 그만, 헤헤헤.” 그때 복도에 다른 무용수들이 나오자 해복도 더 어쩌지 못하고 눈만 흘기며 헤어져 갔다. 이러루한 일은 수두룩했다. 허나 여성무용수들은 예술과 과장을 감히 건드리지 못했다. 하긴 과장을 건드리면 무대에 오를 수 없었던 것이다. 일룡은 과장 실에 가서 걸상에 앉아서도 금방 해복과 송선의 풍만한 젖가슴을 움켜쥐었을 때 가슴이 뭉클하고 높뛰던 흥분이 가라앉지 않았다. 아직도 손에는 야들야들한 해복과 송선의 젖가슴을 만지던 감각이 남아 있었다. (아, 그 야들야들하고 뭉글뭉글한 젖통! 어쩜 바가지를 엎어놓은 것처럼 그렇게 크고 야들야들할까!) 눈앞에서는 송선의 외씨처럼 걀쭉하고 우유처럼 하얗고 해맑은 송선의 얼굴과 풍만하고 야들야들한 젖가슴이 삼삼거렸다. “오호호.” 순간 아래배로부터 거기가 찡해나면서 사타구니 두 새가 부풀어 올랐다. “에이, 이걸 어쩌지? 해복은 국장 부인이니까. 안돼. 송선아, 네년은 타도대상인 정 서기 처남댁이니까. 내 손아귀를 벗어나지 못해. 헤헤헤. 타도 맞은 정 서기는 처자들도 구하지 못하고 종적을 감췄는데 언제 처남댁을 구해?” 일룡은 더는 참을 수 없어 어떻게 하면 송선을 손아귀에 넣고 데리고 놀 것인가 궁리했다. 이윽고 일룡은 외까풀 눈을 치뜨더니 발딱 일어났다. 그는 무용실에 가서 한창 내복바람에 춤 연습을 하는 송선을 불렀다. 송선은 자기 다리로부터 젖가슴을 얼이 빠진 듯이 뚫어지게 노려보는 이 과장의 게슴츠레한 외까풀 눈을 피해 옷을 입으면서 물었다. “무슨 일이 있습니까?” “과장 실로 오오. 조직담화를 할 일이 있소.” 숱한 무용수들의 앞인지라 일룡은 제법 점잖게 과장 틀을 차리면서 한 마디 던지고 무용실의 무용수들을 위엄이 있는 외까풀 눈으로 빙 둘러보더니 훌 나가버렸다. 과장 실에 돌아간 일룡은 거만스레 의자 등받이에 잔등을 대고 권연을 꺼내 풀썩풀썩 피웠다. 똑, 똑, 똑. 노크소리가 가볍게 들렸다. “들어오오.” 문소리가 가볍게 나더니 송선이 머리를 숙인 채 조용히 들어섰다. “여기 앉소.” 일룡은 송선의 붕긋한 젖가슴을 보는 순간 버릇처럼 당장 만지고 싶은 충동이 생겼다. 허나 짐짓 그런 안속을 드러내지 않고 마른 침만 꼴깍 넘기면서 맞은편에 앉는 송선의 몸을 노려보았다. “송선이, 동무는 ‘문화대혁명’의 동풍에 날려가고 싶소? 살고 싶소?” “예?” 안속과는 달리 일룡은 단도직입적으로 위협부터 들이댔다. “제가 뭘 잘 못한 것이라도 있습니까?” “몰라서 묻소?” “뭘 말인가요?” “내 말해 줘야 알겠소?” “…” 송선은 공포에 새파랗게 질린 눈길로 일룡의 얇은 입을 쳐다보았다. “넌 반역자, 내부간첩이야!” “?” “네 년은 한간이며 민족우파이며 독립왕국을 세우려던 정성해 서기 처남댁이야!” 그제야 송선은 십중팔구는 눈치를 차렸다. “정 서기 처남댁인데 무슨 죄가 있는가요?” 일룡은 의자에서 일어나 송선의 곁으로 어슬렁어슬렁 다가갔다. “이년! 어째 날마다 투쟁받고 싶으냐?” 그는 불시에 송선의 젖가슴을 만지려다가 송선이 살짝 피하는 바람에 헛탕을 치고 말았다. “왜 이래요?” 송선은 일룡의 손을 뿌리치면서 문 쪽을 쳐다보며 나갔다. “할 말이 없으면 무용연습하러 나가겠습니다.” “흥! 더러운 년.” 일룡은 낯이 지지벌개지더니 이발을 부득부득 갈았다. “네년이 그 문을 나서는 날이면 투쟁받아야 한다.” 그 말에 송선은 감히 문을 박차고 나갈 엄두를 내지 못하고 문고리를 쥐고 섬섬 거리었다. “이제야 세상이 돌아가는 걸 알만 해?” 일룡은 송선에게 뒤로 다가가 와닥닥 끌어안으면서 젖가슴을 노리고 손을 뻗쳤다. “이걸 놓으세요.” 송선은 몸부림치면서 일룡의 손을 뿌리쳤다. 허나 일룡의 손이 인차 구렁이처럼 송선의 젖가슴 속으로 기어들어가 꿈틀거리었다. “이 년아, 내 말을 순순히 듣고 무대에 오르겠느냐? 아니면 날마다 거리를 돌면서 개패를 메고 숱한 사람들 앞에서 비행기를 타면서 투쟁 받겠니? 응?” “이걸 놔라!” 찰싹! 송선은 일룡의 귀 쌈을 한대 갈겼다. 일룡은 이발을 악물었다. “이년, 미쳤구나. 어디 투쟁 받아봐라!” 뜻밖에도 송선은 일룡을 콱 밀치면서 버럭 고함쳤다. “개 같은 자식! 누구를 능욕하려는 거냐!” 일룡은 괜히 끓어오르는 욕정을 가까스로 눅잦히면서 문을 박차고 나가는 송선을 닭 쫓던 개처럼 쳐다보기만 했다. 그날 오후부터 투쟁대회가 시작됐다. 일룡은 김용만과 짜고 들어 송선을 군중들 앞에서 투쟁했다. 용만의 처 해복과 송선은 예술학교 동기 동창생이었다. 가난한 빈농 가정에서 태어난 해복은 예술학교를 졸업했지만 시내 문화단위에 남기 힘들었다. 그때 정성해 서기 처남댁 송선이 나서서 정서기에게 줄을 달아주었기에 해복은 송선과 함께 시내 문화단위에 남게 됐던 것이다. 허나 김용만은 일룡을 불러 말했다. “이번 기회에 아예 송선이란 년의 예술생명을 잘라 버려야겠네.” “예. 알았습니다. 국장 어른의 지시대로 하겠습니다.” 일룡은 상전의 앞에서 머리를 조아렸다. “그년을 아주 그냥 정치상에서 대가리를 쳐들지 못하게 타도하고 무용도 하지 못하게 만들어 놔야죠. 그래야 국장님 사모님이 우리 단위에서 쥐락펴락 하지. 흐흐흐.” 김용만은 일룡의 정치민감성에 만족한 웃음을 짓더니 권총집을 매만지며 과장실을 나섰다. 일룡은 무용실에 숱한 책걸상을 쌓아놓았다. 책걸상 키가 천정에 닿을 지경이었다. 무용수들과 성악지도교사들 그리고 숱한 반란 파들이 모였다. “반혁명 무용권위 김송선을 끌어내라!” 몇몇 반란 파들이 개패를 목에 건 송선의 두 팔을 뒤로 비틀어 끌고 나왔다. 일룡은 앞에 나가 송선의 머리카락을 움켜쥐어 흔들며 빈정거렸다. “이년아, 어떠냐? 이런 날이 오리라고 몰랐지?” 허나 송선은 날카로운 눈길로 일룡을 쏘아보았다. “누굴 감히 쏘아봐?” 일룡은 뒤로 주춤 물러서더니 손을 홱 휘두르며 천정이 날아나게 고함쳤다. “이 년, 비행기를 타 보겠니?!” 그러자 숱한 반란파들이 송선을 숱한 책걸상을 쌓아 놓은 위로 올라가라고 핍박했다. 송선은 방법 없이 개패를 건채 책걸상 무지로 기여 올라갔다. 그가 천정에 머리 닿을 지경으로 올라가자 일룡은 목에 지렁이 같은 피 줄을 세우며 고래고래 고함쳤다. “이 반혁명예술권위야! 잘못이 뭔지 알만 한가?!” 그때 뜻밖에도 해복이 군중들 앞에 뛰어 나서더니 “반혁명예술권위 김송선을 타도하자!” 하고 외쳤다. 그러나 무용수들은 서로 눈치를 보면서 구호를 따라 부르지 않고 주먹을 들었다가 슬슬 내리웠다. “모주석께서는 계급투쟁을 잊지 말자고 지시하셨습니다. 동무들, 이 치열한 계급투쟁 마당에 정치입장과 계급입장을 정확하게 수립해야 합니다!” 그제야 모두들 마지못해 주먹을 쳐들고 해복의 구호를 따라 부르네 마네 했다.  “이년, 비행기 타봐라!”  갑자기 일룡이 고함치더니 책상다리를 탁 걷어찼다. 꽈당! 요란한 소리와 함께 책걸상 무지가 넘어졌다. 그 위에 섰던 송선은 무용실 바닥에 무릎을 짓쪼며 꽈당 떨어졌다. 순간 송선의 머리와 팔굽, 무릎에서 빨간 피가 질벅하게 흘렀다. 다행히 송선이 무용수이기에 유연하게 떨어졌기에 덜 상한 셈이었다. “히히히. 일어나!” 일룡은 겨우 기어 일어난 송선의 머리를 끌어 당겨 일으키면서 빈정거렸다. “비행기 맛이 어때? 중국 속담에 권하는 술은 마시지 않고 벌주를 마신다더니. 헤헤헤.” 일룡과 해복이 사전에 사촉한대로 일부 무용수들은 정치표현이 나쁘다는 말을 들을까봐 앞다퉈 송선을 투쟁했다. 그때 송선은 이전에 투쟁을 받은 정성해 서기가 집에 돌아와 들려준 이야기가 떠올랐다. 중국 남방으로 가면 국연에 잔나비 대갈통을 까먹는 것이 최고 요리라고 했다. 그것도 산 잔나비를 쇠살창안에 가두고 면도칼로 빡빡 깎은 잔나비 대가리를 쇠살창 위에 고정시켜놓고 손님들이 망치로 대가리를 딱 까서 숟가락으로 뇌 즙을 파먹는다고 했다. 그리하여 벌써 취사원들이 잡을 잔나비를 고르러 잔나비 우리로 가기만 하면 잔나비들이 서로 죽을 까봐 눈을 판들거리면서 누가 죽을 차례인가고 둘러본다고 한다. 취사원이 한 잔나비를 손가락질만 하면 잔나비들이 욱 모여들어 그 잔나비를 붙잡아 마구 살창 밖으로 떠밀어 내보냈다. 취사원은 힘도 들이지 않고 그 잔나비를 붙잡아내 요리상에 올릴 수 있었다. 지금 자기를 투쟁하는 장면이 딱 그 숱한 잔나비들을 방불케 했다. 이튿날부터 용만 국장의 지시대로 일룡은 정치열성을 보이는 반란 파들을 지휘해 개패를 목에 건 해복에게 평소 무용복을 비롯한 숱한 값진 옷을 꽉 걷어 넣은 옷궤를 지워 거리로 끌고 다니면서 투쟁했다. 송선은 거리로 나가 반란파들에게 끌리어 절룩거리며 다니면서 꽹과리를 댕댕 치며 “반혁명예술권위 김송선을 타도하자!” 하고 구호를 부르면서 거리투쟁을 받아야만 했다. “어우, 저 멋쟁이 무용권위 송선이 어쩜 저렇게 투쟁을 다 받소?” “이전에 얼마나 잘난 척 했소.” “그게 다 정 서기 처남댁이노라고 우쭐거린 게지.” 사람의 질투란 무서운 것이었다. 평소에 질투심으로 속이 꽤나 불편하던 일부 사람들은 송선이 투쟁을 받으니 깨고소해 했다. 지어 진상을 모르는 일부 군중들은 송선의 머리에 돌을 쥐어 뿌렸다. 송선의 머리에서는 뻘건 피가 줄줄 흘러 볼까지 적시었다. 피에 질벅하게 젖은 머리카락이 어깨에 드리워 예쁘던 무용수가 볼품없이 됐다. 그것도 모자라 용만은 일룡에게 지시해 정성해 서기 아내 김영희(김영순)도 끌어내 송선과 함께 개패를 걸고 옷궤를 메워 투쟁하게 했다. 이튿날부터 영희와 송선은 무거운 옷궤를 지고 개패를 건 채 꽹과리를 댕댕 치며 거리로 끌려 다니면서 처참하게 투쟁 받았다. 아름다운 무용수 송선의 예쁨은 오히려 변태적인 반란 파들에 의해 화를 불러왔다. 반란 파들의 사촉을 받은 자들은 질투하던 나머지 그 아름다운 꽃송이를 무참히 음해했다. 연변의 암흑에 찬 대시에서 아름다운 꽃송이들은 야수들에게 무참히 짓밟혀 신음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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