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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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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59) 댓글:  조회:2081  추천:0  2016-12-23
                                                 9.조우전        상순은 로투구역에서 기차를 타고 곧추 영월구에서 내려 령길을 타고 풍찬노숙하면서 장백산 밀림 속으로 들어갔다. 수림 속 령길에서 웬 일인지 일본 놈 새끼들을 한 놈도 만나지 못하였다. 그것이 더 불안하였다.        산속으로 들어갈수록 나무숲이 우거지고 미인송들이 하늘을 찌르고 우뚝우뚝 솟아 있었다. 미인 송들은 마치 항일열사들의 혼이라도 살아서 재생한 듯이 거룩하고 늠름하였다.        상순은 옛날 장백산 밀림 속의 밀영 부근에 이르게 되자 위장하려고 괭이로 도라지와 더덕뿌리를 캐 주머니에 넣어 메고 걸었다. 그는 낫으로 고비랑 산나물을 캐면서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협곡 쪽으로 다가갔다. 그는 먼저 큰어머니가 묻힌 산소가 있는 산등성이로 찾아올라갔다.         양지 바른 언덕아래 모신 큰어머니 산소에 이르자 그는 밀짚모자를 벗어 놓고 큰절부터 올렸다.         “큰어머니, 그간 편안히 계셨습니까? 일본 놈들과 싸우다가 장렬히 희생된 큰어머니, 정말 안됐습니다. 일본 놈들을 몰아내고 광복을 맞이하게 됐습니다. 광복을 보지도 못하고 한평생 고생하다가 돌아간 큰어머니 정말 안 됐습니다.” 상순은 눈물을 왈칵 쏟았다. 이윽고 그는 산소를 여겨 보았다. 아무리 살피어 보아도 누가 손을 댄 흔적이 없이 봄에 가토를 해놓은 그대로였다. 그는 낫으로 산소를 썩썩 벌초하기 시작하였다. 그가 낫질을 하는데 나무숲 속에서 새들이 푸르릉 포르릉 날아나고 버스럭버스럭 하는 소리가 들리었다. 그는 낫질을 주춤 멈추었다가 혹시 산짐승이 아니겠는가고 짐작하면서도 사위를 두리번거리며 낫질을 하였다. 아무리 살펴 보아도 수상한 사람도 야수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큰어머니 산소 옆에 있는 검둥이 묘지의 풀도 베어주면서 중얼거리었다. “검둥이야, 넌 오래동안 그림자처럼 우릴 따라  다니었지. 전번에는 큰어머니한테 총을 겨눈 일본 놈에게 덮쳐가 물어뜯다가 총에 맞아 잘 못 됐지. 정말 우리 가족과 같았는데. 너의 최후가 너무나도 슬프구나.” 한참 후 그는 경각성을 바싹 높이어 사위를 살피면서 최구철 사돈어른의 산소가 있는 협곡으로 슬금슬금 내려갔다. 그때 노루가 큰어머니 산소 뒤로 하여 깡충깡충 뛰어 가는 것을 발견했다. (아까 버스럭거린 게 저 놈 노루겠다.) 상순은 숲 속으로 달아나는 노루를 바라보며 한숨을 후-  내쉬고 나서 협곡으로 내려갔다. 그는 최구철 사돈어른의 산소 옆에 자그마한 구덩이를 파놓은 것을 발견하고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그는 구덩이 주위를 맴돌면서 양미간을 찌푸렸다. “무덤 옆에 구덩이를 파 뭘 할까? 용천대장과 진달래사돈이 왔다 갔는가? 봄에 가토를 할 때 이렇게 구덩이를 파 흙을 쓴 적이 없었는데. 그럼 이 구덩이는? 아, 아니다. 그럼 유격대 외에 누가 여기 왔다 갔단 말인가?” 상순은 순간 머리 속에서 번개가 번쩍이고 우뢰가 하늘땅을 진동했다. 그는 낫을 쥐고 벌초를 대충 해놓고 바삐 큰절을 올린 후 황급히 협곡을 벗어났다. 그가 사위를 둘러보면서 득호와 병수 열사의 산소가 있는 옛 밀림 속 밀영자리 부근으로 내려갔다. 산골짜기를 내려다보니 일본 놈들의 시체가 다 썩어 유골들이 어지럽게 나뒹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어지러운 유골 속에 드문드문 무덤이 새로 생긴 것이 눈에 뜨이였다. (일본 놈들이 왔다 갔구나.) 상순은 신록이 짙은 밀림 속에 숨어 여기저기 한참씩 살피다가 병수와 득호 열사의 산소로 가만가만 접근하였다. 아무런 인기척도 없자 그는 두 열사의 산소로 다가가 벌초를 해 주고 절을 올렸다. 일을 마치자 그는 인차 자리를 떠 수림 속에 숨어 버리었다. 그는 나무숲 속에서 도라지뿌리와 더덕 뿌리로 대충 요기를 하고 큰어머니 산소와 최구철 사돈어른의 산소 사이에 있는 협곡 부근으로 다가가 숨어 있었다. 그는 다래넝쿨 속에 들어 누운 채 다래를 뜯어 먹으면서 아무리 궁리해 보아도 큰아버지는 한가위날에 맞춰 올 것 같지 않았다. (일본 놈들이 야마모도 같은 일본 장교 놈들의 시체만 골라 몇을 파묻은 거 같다. 일본 놈들이 만약 유격대원들의 산소를 여기에 쓴 걸 보고 조선족들이 청명과 한가위 날에 산소로 오는 풍속을 알고 여기에 매복 진을 치고 있으면 어쩌는가? 성칠 큰아버지가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 수 없겠는데. 한가위 날보다도 아무 때나 산소로 오는 게 더 안전하지. 그렇지 않으면 북만에 갔다는데 이렇게 먼 산소에 올까?) 상순은 이런 저런 궁리를 하다가 낫을 쥔 채 잠이 들어 버렸다. 얼마나 잤을까? 그는 낫을 쥐고 일어나 소변을 보려는데 캄캄칠야 원시림 속에서 버스럭버스럭 소리가 나더니 웬 놈이 군도를 빼들고 어슬렁어슬렁 다가오지 않겠는가! “아니, 저 놈이 어떻게 돼 왔지?” 여겨 보니 한철주 놈이 아니겠는가! 상순은 바삐 괴춤을 춰 입고 다래넝쿨 속에서 뛰쳐나가면서 낫을 휘둘러 그 놈과 맞붙어 싸웠다. 그때 숱한 일본 놈들이 고함치며 총창을 번뜩이며 덮쳐왔다. 철주 놈이 시퍼런 군도를 휘둘러 내리 치었다. 상순이 낫을 들어 막았지만 낫자루가 썩 뚝 잘려나갔다. 철주 놈이 재차 군도를 휘둘러 상순을 내리 찍었다. “앗!” 상순이 버럭 비명을 지르며 벌떡 일어나 보니 다래넝쿨 속에서 꿈을 꾸었던 것이다. (아무리 꿈이라도 이상한 악몽이야.) 그는 낫을 들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살피었다. 이때 또 수림에서 밤새들이 놀라 날아나는 소리가 들리었다. (무슨 동정이 있구나.) 상순은 다래넝쿨 속에서 가만히 나와 협곡 쪽으로 가만히 전이했다. 그가 누웠던 다래넝쿨 쪽에서 무슨 말소리가 나직이 들리는 것 같았다.상순은 자기 귀를 의심할 정도였다. (내가 정말 혹시 너무 의심하면서 도정신해 이런 착각했는가? 큰아버지가 왔을까? 아니면 정말 내 추측처럼 꿈에 본 한철주 놈이 일본 놈들을 데리고 와서 매복 진을 치고 유격대가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걸까?) 아직 일본 놈들을 완전히 전승하지 못한 형편에서 상순은 더욱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을 수 없었다. 상순은 어둠이 깔린 밀림 속을 더듬으면서 살금살금 산골짜기로 내려갔다. 그는 한 가지 꾀를 생각해 냈다. 그는 나뒹구는 일본 놈들의 유골 속으로 슬금슬금 가서 슬쩍 엎드려 주위 동정을 살폈다. 여기저기에서 굶주린 승냥이들의 울음소리가 밀림 속의 공포감을 더욱 자아냈다. 그는 괭이로 부식토 밑바닥에 구덩이를 슬슬 파 놓고 그 안에 들어가 머리만 내 놓고 엎드리어 있었다… 산속에 들어온 첫 날 밤은 공포 속에 흘러 지나갔다. 이튿날도 사흘 날도 생각 밖으로 무사히 지나갔다. 상순의 큰아버지 등은 수림 속에 나타나지도 않았다. 그러나 수림 속에서 일본 놈들도 발견하지 못하였다. 나흘 되는 날 대낮에 뜻밖에 수림 속 산골짜기에서 인기척이 있었다. 상순이가 일본 놈들의 무덤 옆의 수림 속에 숨어서 살피어 보니 괭이를 둘러멘 조선 사람 대여섯이 약재를 캐고 있었다. 진짜 원시림 속에서 야수가 무서운 것이 아니라 사람이 더 무서웠다. 그 사람들은 도라지랑 캐면서 협곡 쪽으로 올라가는 것이었다. (며칠 전날 밤에 다래넝쿨 쪽으로 다가온 게 저 사람들일까?) 상순은 마음이 동요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더 기다리기 힘들었던 것이다. 먹을 게 떨어진데다가 야수와 낯선 사람들로 하여 공포감이 생기는 것이었다. (큰아버지가 조선 고향에 나가게 되면 함흥촌에 찾아오겠지. 형만 사돈도 이계삼과 허영주를 믿을만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큰아버지 보낸 편지도 확실하고. 에라, 집에 가서 민병이나 잘 조직해 싸울 준비나 하자.) 그는 가을 해가 지기를 애타게 기다리었다. 이때 수림 속을 헤집는 소리가 들리더니 인기척이 또 났다. 상순은 낫을 쥐고 사위를 둘러보았다. 골짜기로부터 확실히 서너 사람이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피뜩 보니 큰아버지 같았다. 상순은 유격대에서 쓰던 암호를 보냈다. 뻐꾹 뻐꾹 뻑뻑 꾹 저쪽에서 오던 사람들이 주춤 멈춰 서는 것이 나무 사이로 보였다. 저쪽에서도 인차 화답하였다. 뻐꾹 뻐꾹 뻑뻑 꾹 상순은 머리를 좀 들고 나직이 말하였다. “군호!” “진달래!” “누구야? 혹시 상순이 아니야?” 상순은 큰아버지의 귀에 익은 목소리를 확인하였다. “큰아버지!” 상순과 성칠은 골짜기 나무숲 속에서 감격적인 상봉을 하였다. 뒤에는 용천 대장과 은녀 그리고 경위원 조 꼬마가 뒤따랐다. 그들은 모두 유격대의 옷차림새가 아니라 산골 농사꾼으로 위장하고 왔던 것이다. 이때 수림 속에서 새들이 놀라 하늘로 풍기어 올랐다. 그들은 먼저 최구철 열사를 찾아가 보려고 산골짜기를 따라 협곡으로 들어갔다. 상순은 만나자마자 궁금한 것부터 큰아버지에게 물었다. “큰아버지, 이계삼과 허영주는 믿을만한 사람입니까?” “옳다. 전번에 보낸 편지를 못 봤니?” “예. 그래도 이 동란시기에 경솔히 믿을 수 있습니까?” 성칠은 상순의 어깨를 다독여주었다. “그분들을 믿어라. 그는 당 조직에서 파견한 지하당원들이야. 그 두 분의 영도아래 항일투쟁을 하고 장차 토지개혁도 해야 한다. 지주를 청산해 재산과 땅을 가난한 농민에게 나눠 주는 투쟁을 해야 한다.” 상순은 머리를 끄덕이더니 또 물었다. “일본 놈들이 망하면 우린 조선 고향에 돌아가지 않겠습니까?” 성칠은 조 꼬마에게 보초를 잘 서라고 하고는 용천 대장을 돌아보았다. “얘가 별 거 다 묻소. 우리는 아직도 이 땅에서 중국 한족형제들과 함께 일본 놈들과 싸워야 한다. 유격대가 장차 어디로 가는가는 김일성 장군의 명령을 기다려야 한다. 이건 군사비밀이야." 용천은 희죽이 웃었다. “상순아, 그 문제로 난 네 큰아버지가 다투기까지 했어. 난 조선에 돌아가야 한다 하고 네 큰아버지는 여기 남아야 한다구 했어.” 상순은 궁금증이 풀리지 않아 자꾸 큰아버지한테로 물어 보고 싶은 걸 억지로 참았다. 큰아버지나 아버지네 형제들의 고집을 알고 남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협곡에 들어서서 최구철 열사의 산소 앞에 거의 이르렀다. 상순은 용천 대장을 돌아보면서“어째 진달래중대장은 오지 않았습니까?”하고 물었다. 용천대장은 “아들애 경주를 금방 낳아서 불편해 오지 못하였다.”라고 하였다. 상순은 “경하 드립니다.” 하고 나서        “며칠 전에 내 산소에 와 보았는데 누가 사돈 산소 옆에 구덩이를 파 놓았습디다.”라고 하였다.         용천 대장이나 성칠은 이구동성으로 “구덩이를?” 하고 말하며 상순이가 가리킨 산소 옆의 구덩이를 보며 신경을 도사렸다. “우리를 내 놓고 또 누가 왔을까?" "저 구덩이는 어쩌자고 파 놓았을까? 가토를 하는데 쓴 것도 아니고.” 용천 대장의 말이 채끝나지도 않았는데 너털웃음에 뒤이어 고함소리가 협곡을 쩌렁쩌렁 울리었다. “이 놈들아, 그 구덩이는 네놈들을 칼탕 쳐 파묻을 무덤이다! 이 한철주가 아버지와 야마모도 대장의 원수를 갚으려고 여기서 네놈들을 기다린 지 오래다! 어디 죽어 봐라!” 땅! 땅! 꽝! 총알이 빗발치듯 사처에서 날아 왔다. 수류탄도 마구 날아와 근처에서 폭발하였다. 성칠은 구덩이에 뛰어들며 소리쳤다. “용천 대장은 은녀와 상순을 데리고 갱도로 전이하오! 나와 조 꼬마가 엄호할 테니.” 용천은 구덩이로 굴러오면서 소리쳤다. “안 돼! 죽어도 함께 죽어. 빨리 갱도로 철퇴하자이!” 푱! 푱! 총알이 협곡 암벽에 날아와 박히며 무서운 소리를 냈다. 한개 소대나 될 적들은 협곡을 포위하고 기관총으로 사격해댔다. 원래 한철주는 지난 겨울 전투에서 유격대에 한개 중대나 되는 병력을 잃고 처분받아 부대대장으로 강직됐던 것이다. 우시장 경찰국 스즈끼 국장도 야마모도와 별동대가 전멸당한 죄가 발각나 할복처단 당했던 것이다. 한 달 전에 한철주는 원래 자기 수하였던 재1대대 대대장의 명령을 받고 야마모도 등 장교들의 시체를 묻어 주려고 왔다가 협곡과 산 둔덕, 밀영 부근 통나무집 앞의 유격대 무덤에 가토를 한 걸 보고 유격대 대원들이 왔다 간 자취를 알게 됐다. 그는 한 마을에 살던 성칠의 아내 하옥이가 기관총에 맞아 죽는 것을 자기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하옥의 무덤이 이 묘지 가운데 있을 것인바 성칠이 청명이거나 한가위 날이면 조강지처 무덤을 찾아 올 것이라고 추측했던 것이다. 음흉한 그는 한 달 전부터 밀림 속 무덤 주위에 매복 진을 치고 언제까지라도 유격대원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리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며칠 전에 약재를 캐는 척 하면서 산소 주위를 감시하던 조선 밀정들은 하옥의 무덤에서 벌초를 하는 상순을 발견하고 한철주에게 보고했다. 그때 상순은 노루가 달아나면서 산새들이 날아났는가 착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한철주는 풀을 건드려 구렁이를 놀래지 않는 전제하에서 상순의 움직임을 밤낮 면밀히 감시하다가 나포하며 더 큰 고기가 그물에 뛰어 들기를 기다리라고 명령하였다. 적들은 산소 주위를 샅샅이 훑다가 다래넝쿨 속에서 자는 상순을 발견하였다. 그러나 상순이가 예민한 감각으로 어디론가 사라지면서 놓치고 말았던 것이다. 그 놈들은 상순이 골짜기 일본 놈들의 유골 속에 구덩이를 파고 나무 가지를 덮고 숨어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때 성칠 등이 협곡에 들어서자 한철주는 때가 왔다고 사격명령을 내리었던 것이다. 성칠은 용천 대장을 돌아보면서 외쳤다. “철퇴! 이건 명령이오. 동만에서 당신은 내 명령에 복종해야 하네.” 용천은 별 수 없이 은녀와 상순을 데리고 협곡 속으로 들어가 밀영 갱도 안으로 철퇴했다. 성칠은 조 꼬마와 함께 사격하면서 적들을 유인하려고 협곡이 쩌렁쩌렁 울리게 고함치었다. “1중대는 북쪽으로 협곡을 포위하라! 2중대는 동쪽으로 포위하라! 3중대는 여기서 적들을 저격하라!” “한철주 이 놈아! 전번에 여기서 썩어지지 않은 게 원수냐? 달려들어 봐라!” 성칠은 끊임없이 고함 쳤다. 적들은 또 유격대 덧걸이 포위에 든 것인가 뒤돌아 살피다나니 사격이 뜸 해졌다. 용천 대장이 상순과 은녀를 데리고 안전하게 좁은 협곡으로 하여 갱도에 들어갔다. 성칠은 조 꼬마에게 먼저 철퇴하게 하고 적들에게 명중탄을 안기며 엄호하였다. 조 꼬마도 협곡으로 덮쳐 오는 적들에게 명중탄을 안겨 몇 놈 쓸어 눕히면서 협곡 안으로 철퇴하였다. “김 대장! 빨리 철퇴하… 억!” 성칠이 뒤돌아보니 조 꼬마가 가슴을 붙안고 쿵 쓰러졌다. “조 꼬마!” 한철주의 너털웃음소리가 또 들렸다. “성칠아, 이번엔 네놈 차례다.” 성칠은 조 꼬마한테로 기어가 부르며 흔들어 보았다. 조 꼬마의 가슴에서 피가 쿨쿨 솟구쳐 진달래나무가 듬성듬성 자란 바위 돌을 뻘겋게 물들이고 있었다. 성칠은 벌떡 일어나 암벽에 붙어 협곡 속으로 달려가면서 제일 먼저 달려드는 놈부터 사격했다. 그가 거의 갱도어귀에 달려갔을 때다. 갱도 어귀에서 용천 대장과 은녀가 적들에게 몰 사격을 가하면서 엄호하였다. 놀랍게도 상순이도 제법 모젤권총을 들고 엄호사격을 했다. 그 틈을 타서 성칠은 갱도 안에 뛰어 들어갔다.             10. 밀림의 최후매복습격전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한철주 놈은 갱도 어귀까지 쫓아와 수하 놈들에게 돼지 멱따는 소리를 질러댔다. “갱도 안에 수류탄을 뿌려!” 꽝! 꽝! “하하하, 이 독안에 든 쥐 같은 놈들아! 어디로 달아나겠느냐? 어서 나와 칼을 받아라!” 성칠도 맞고함을 질렀다. “한철주 놈아, 기다려라! 네놈은 우리 유격대 포위 속에 빠지었다. 명년 이때는 네 놈의 제사 날이다!” “허허허. 네 놈의 허장성세를 내 모르는 거 같으냐? 무슨 3중대까지 있냐? 다섯 놈 밖에 오지 않은 걸 내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갱도도 한 달 전부터 몽땅 수색해 출구를 다 알고 있다. 어디로 도망치겠느냐?” 뒤이어 갱도 밖에서 한철주가 일어로 지껄여대는 고함소리가 들리었다. “갱도 어귀마다 한개 분대씩 나뉘어 쥐새끼도 드나들지 못하게 지키라.” “하이!” 용천은 시꺼먼 갱도 안에서 성칠의 손을 더듬어 잡고 귀속 말을 했다. “이대로 있으면 독안에 든 쥐로 되고 말거네. 내 뭐라고 하던가? 열사들을 묻어 주었으면 됐지. 이번에 와서 벌초까지 할 게 뭔가? 적들은 꼭 산소를 쓴 거 발견하면 매복해 우리를 기다릴 수 있다니께.” 성칠은 용천의 귀에 대고 나직이 말했다. “나도 짐작했네. 우린 두개 소조로 나뉘어 날이 어둡기를 기다려 포위를 뚫고 나가기요. 내 상순을 데리고 먼저 갱도어귀를 나가면서 적들을 유인할 테니 김 대장은 은녀를 데리고 남만 쪽으로 철퇴하오. 우리 살기만 하면 북만 유격대 근거지에서 다시 만나기오.” 성칠은 용천의 귀에 대고 뭐라고 쑤군거렸다. “오, 알았네. 이번엔 우리가 엄호할 테니 성칠 대장이 무송을 거쳐 남만으로 철퇴하랑께.” 성칠은 용천 대장의 손을 잡고 나직이 말하였다. “이럴 새 없어. 우린 탄알도 거의 떨어지네. 명령에 복종하게. 어서 철퇴하라!” 갱도 안에서는 한숨소리가 길게 들렸다. 은녀는 성칠의 손을 더듬어 쥐고 “오빠, 꼭 북만에서 만나요.”라고 하였다. 성칠은 머리를 끄덕였다. “응, 그래. 우린 다 살아야 한다. 살아서 광복을 봐야 하구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 우린 그 날을 위해 싸워 오지 않았더냐?” 그들은 즉시 두개 소조로 나뉘어 밤이 오기를 기다리었다. 캄캄한 갱도안에서는 낮인지 밤인지 분간하기 힘들었다. 성칠은 권총을 쥐고 굽이진 갱도바닥에 엎드려 갱도어귀를 지키었다. 그는 상순에게 “너 권총은 어데서 난 거냐?”라고 물었다. 상순은 더는 속일 수 없어 뒷덜미를 긁적거리었다. “아주머니가 희생될 때 아주머니 권총을 주어 봇나무에 싸서 파묻어 두었댔습니다.”        욕을 먹으려니 했다.         그런데 성칠은 “잘 했다. 그랬기에 이럴 때 잘 써 먹지.”라고 하면서 뒷말을 이었다. “이후에도 전쟁터에서 적들의 손에서 무기와 탄약을 노획해 쓸 줄을 알아야 한다.” “예, 알았습니다.” “그래 마을의 민병대오 조직은 잘 됐느냐?” “예. 괜찮습니다. 전번에 민병들을 조직해 가지고 악질지주의 쌀 창고를 털어다 함흥촌 군중들에게 나눠 줬습니다. 그런데 이계삼은 그런 일을 하면 이후에는 회보하라고 합디다. 어떻게 무슨 일이나 다 회보하겠습니까?” “회보해야 한다. 그가 시키는 대로 해라. 너도 이계삼과 허영주를 잘 받들어 적후공작을 하면서 중국 공산당에 입당해야 한다.” “큰아버지도 중국 공산당원입니까?” “응, 난 원래 조선 독립군이었다. 후에 김일성 장군을 따라 조선 유격대에 들었댔지. 지금은 중국 공산당에도 가입했다. 꼭 빠른 시일 내에 입당해야 발전도 빠르다.” “예. 용천 대장도 공산당원입니까?” “아니다. 그는 조선 지주의 아들이라서 중국 공산당이나 조선 공산당이나 꺼린다. 공산당에 들어 자기 아버지를 타도하겠나 하면서 공산당에 들려고 하지 않는다. 그는 광복을 맞으면 고향 경주로 돌아 갈거 같다. 이런 말을 아무에게나 하지 말아야 한다.” 이때 갱도 어귀쪽이 어두워지더니 우레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였다. “좋아, 포위를 돌파하라고 하늘이 우리를 돕는구나. 소낙비 소리에 탈출해도 적들은 쉽게 발견하지 못할 거야.” 성칠은 상순의 손을 굳게 잡았다. 이때라고 생각한 성칠은 포위를 돌파하자고 용천대장에게 기별하라고 상순을 보내었다. 그런데 얼마 안 돼 은녀가 이쪽으로 왔다. “어떻게 된 일이냐?” “용천 대장은 나를 보내 포위를 돌파하자고 기별하라 했소.” “그럼 돌아가라. 이젠 포위를 돌파하자. 우리 이쪽에서 총소리 울리면 놈들이 이쪽으로 올 거야. 그때 너네 그 쪽에서 포위를 뚫고 남 만 쪽으로 가는 수림 속으로 달아나라.” 이때 은녀가 온 쪽 갱도 안에서 야무진 총소리가 들렸다. “아차, 용천 대장이 먼저 손을 썼구나. 적들을 자기 쪽에 유인해 가는구나.” “나는 어쩔까?” “돌아 갈 새 없다. 우리와 함께 포위를 뚫고 나가자.” 저쪽에서 일본 놈들의 고함소리가 울렸다. 뒤이어 수류탄이 폭발하는 굉음이 들리었다. 성칠은 은녀와 상순을 데리고 갱도어귀로 살금살금 뛰어 갔다. 바깥을 살며시 내다보니 적들이 보이지 않았다. 그는 상순과 은녀를 데리고 갱도 어귀로 뛰어 나갔다. 땅! 땅! 적들은 기다리기라도 한 듯이 사격하였다. “유격대 놈들이 갱도에서 나왔다.” 성칠도 사격하며 수림 속으로 뛰쳐나갔다. 푱! 푱! 야무진 총소리와 함께 은녀가 총에 종아리를 맞고 푹 꼬꾸라졌다. 적들이 무리 승냥이들처럼 그들에게 덮쳐 왔다. 성칠은 은녀를 둘쳐 업고 아름드리나무를 은폐물로 삼아 이리저리 빠지면서 철퇴하였다. 뒤에서 상순은 적들에게 명중탄을 안기며 철퇴하였다. 탄알이 다 떨어지었다. 상순은 큰아버지에게서 은녀를 받아 둘러메고 앞에서 닫고 성칠이 뒤에서 엄호하며 사격하였다. 그들이 어두운 밤을 이용하여 한참 적들과 숨바꼭질을 하며 철퇴할 때다. 땅! 땅! 땅! 난데없는 총소리가 요란하게 울리더니 갱도어귀를 지키던 놈들이 무더기로 쓰러졌다. 웬 일일까? “1소대는 김 대장을 엄호하고 2소대는 산등성이를 점령하고 3소대는 적들을 포위 섬멸하라!” 귀에 익은 인삼 중대장의 목소리였다. 적들은 번쩍이는 섬광을 보고 대뜸 수십 명의 유격대가 온 것을 알고 철퇴하기 시작하였다. 한철주는 또 절망에 빠졌다. “또 성칠 놈의 유인 술에 걸렸구나. 한달동안 까딱 하지 않던 유격대가 하늘에서 날아 내렸나? 땅속에서 솟아났나? 아이고, 하늘이 날 죽이는구나!” 그는 소낙비 속에서 군도를 하늘에 쳐들고 휘두르며 비명소리를 질렀다. “철퇴!”  그는 군도를 맥없이 내리 드리더니 뒤로 슬금슬금 뒷걸음쳤다. "한철주 놈아, 어디로 도망쳐?!” 성칠은  유격대를 지휘해 적들을 포위하면서 소멸하였다. 적들은 숱한 주검을 남기고 몇 놈이 살아남지 못하고 협곡으로 해 도망치었다. 어두운지라 성칠은 적들을 그만 쫓고 뻐꾹새 울음소리를 냈다. 여기저기에서 뻐꾹새 울음소리 들렸다. 어둠 속에서 성칠과 인삼은 감격의 상봉을 하였다. “김 대장, 다친데 없습니까? 늦어 와서 죄를 지었습니다. 처벌하십시오.” “괜찮네. 이번 포위소멸전도 위대한 승리를 거두었네.” “어째 김용천 대장이 보이지 않습니까?” “포위를 돌파하구 남만에서 만나자고 했는데. 헤이,  아마 잘 못 되지 않았는지 모르겠네. 아까 총소리에 뒤이어 수류탄 폭발 소리가 들렸네. 일본 놈들이 꽥꽥 거리더군. 찾아 보기요.” 그들은 인차 용천 대장이 포위를 돌파한 갱도어귀에 가 보았다. 그러나 갱도어귀가 다 폭파되고 용천 대장은 시체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이 아무리 손으로 파보아도 일본 놈의 시체만 나오고 용천 대장의 머리카락 한 오리마저 찾을 수 없었다. “십중팔구는 마지막 수류탄을 안고 적들과 함께 희생된 듯하오. 만약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으면 남만으로 에돌아 북만 유격대 근거지로 올 거요.” 그들은 최구철의 무덤 옆에 무덤을 하나 더 팠다. 성칠은 눈물을 줄줄 흘리며 조꼬마 시체를 거두어 손수 협곡의 맑은 물에 염습한 후 봇나무에 싸서 통나무를 가로 세로 쌓아 만든 “관”에 안아다 놓았다. 전우들은 피눈물과 함께 조 꼬마를 잘 묻어 주고 묵도를 드렸다. 추모의 총소리가 장백의 협곡과 밀림에서 오래도록 메아리치었다. 원래 성칠은 북만과 장백산 밀림이 거리가 너무 멀어 용천과 은녀만 데리고 산소에 가보려고 하였다. 그러나 용천 대장이 자꾸 적들의 매복습격에 걸릴까 봐 근심하는 바람에 인삼 중대장과 미리 토론하고 임기응변하여 적들을 이 협곡에 유인해 재차 매복습격 전을 벌리기로 했던 것이다. 인삼 중대장은 너무 늦을 것 같아 영월구를 지나자 마을에 들어서 백마들을 타고 길을 떠났다. 원래 백두산 밀영에서 기르던 백마들은 눈이 너무 많이 내려 전투에 쓸 수 없는데다가 말먹이 풀이 없어 장백산 아래 마을 사람들에게 나눠 줘 사양하였던 것이다. 유격대는 백마를 타고 재빨리 성칠 등을 쫓아 와 성칠 등을 구하고 매복전에서 빛나는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사후에 성칠은 너무나도 모험적인 유인전술을 썼다고 김장군으로부터 표창과 함께 비평도 받았다. 동녘 하늘이 희붐히 밝아 왔다. 아아한 장백산 원시림은 다시 아름다운 삼라만상을 천천히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유격대원들은 아침 해살을 맞으면서 전장을 돌아다니면서 적들의 총과 탄알을 거두어 둘러멨다. 칠백은 적들의 손에서 경기관총 한 자루를 주어 둘러멨다. 바위돌과 억복은 권총을 한 자루씩 주어 허리춤에 찼다. 상순은 일본 장교놈의 허리춤에서 권총을 끌러내고 권총 탄알띠도 풀어 허리춤에 찼다. "흐흐, 이젠 나한텐 권총 세자루나 있어." 성칠은 조카가 좋아하는 걸 보고 권총을 유격대에 바치라는 말을 하지 않고 빙그레 웃으며 머리를 끄덕였다. 그는 상순이 민병들을 조직해 지주무장과 싸우려면 권총 몇자루가 더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임호 분대장은 협곡 갱도 어귀에서 박산난 안경알을 주었다. “이건 분명 한철주 놈의 안경이겠는데.” 성칠도 머리를 끄덕이었다. 임호는 원래 가마골 구장이었는데 후에 일본 놈들의 갖은 유린에 견디기 어려워 성칠의 유격대를 찾아왔던 것이다.   그들이 수림 속을 샅샅이 뒤지었지만 한철주의 시체는 끝내 찾아 내지 못하였다. 그들은 적들의 역습을 당할까봐 장백산 밀림 속에서 인차 먼저 무송 쪽으로 철거하였다. 그들은 연 며칠 수림 속 령 길로 강행군해 무송현을 지나 돈화 벌판을 거치어 경박호에 무난히 이르렀다. 그때 푸르른 하늘에 비행기가 날아 왔다. 모두들 일본 놈들의 비행긴가 하여 수림 속에 납작 엎드리었다. 그런데 그 비행기는 하늘에서 선회할 뿐 그들에게 폭격하지 않는 것이었다. 비행기는 다시 그들의 우로 선회하면서 날아 지나갔다. 성칠이 뒤에 또 날아오는 비행기를 찬찬히 여겨 보니 일본 놈들의 고약딱지 기발표식이 아니었다. 오각별이 박혀 있지 않겠는가! 그들은 북만 유격대 근거지에 도착한 후 그 비행기는 쏘련 홍군의 비행기라는 것을 알게 됐다. 소련 홍군이 동북으로 쳐들어와 일제 침략자들을 소멸하며 추격해 왔다는 것이었다. 성칠 대장은 상부의 지시에 따라 유격대원들에게 새로운 지시를 전달하였다. “오래지 않아 조선인민과 형제적인 중국 인민은 광복을 맞이하게 됐습니다. 우리 항일유격대는 김장군의 명령에 따라 소련 홍군을 협조해 동만을 경과해 조선으로 도망치는 일제 침략자들을 추격하여 모조리 소멸하여야 합니다. 그 놈들을 중국의 광활한 대지와 사랑스러운 조선 반도에서 깡그리 몰아내고 항일전쟁의 철저한 승리를 거둬야 합니다 …” 여명의 전야는 아직도 칠칠흑야처럼 어둡기도 하였다. 반백년을 이 땅과 하늘을 뒤덮었던 먹장구름이 가시어지고 푸르른 가을 하늘에 찬란한 태양이 서서히 동녘 하늘에서 솟아올랐다. 성칠의 출발명령에 따라 항일유격대는 숨을 돌릴 새도 없이 새로운 전투에 뛰어 들었다. 그들은 찬란한 아침 햇살을 맞으며 령길을 타고 씩씩하게 동만 쪽으로 진군해 일제 놈들을 추격하였다…  
95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58) 댓글:  조회:1808  추천:0  2016-12-13
               7. 급변하는 세상 어느 날 기준과 창준은 웃새집 사랑 앞에서 전염병이 돌게 된 일을 두고 두런두런 말을 주고받았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 사랑간 앞에 땔나무무지와 짚무지를 꽉 쌓아 놓은 게 문젠 거 같다. 해볕이 잘 들지 않아 습해서 전염병이 돈 거 같아. 원래 우사간 자리지. 땅굴 같은 사랑간에 썩은 냄새 심해 사람이 붙어살긴 틀렸다.” 창준의 말에 기준은 머리를 끄덕이었다. “그런 거 같소. 올해 또 토성 안 집 동쪽으루 해서 집을 하나 지어야겠소.”  기실 전염병은 일제 731부대 놈들이 만주에 생물화학전염병균이 묻은 쥐랑 널어놓은 때문이였다. 그러나 기준 형제는 당시 사실 진상을 알 길이 없었다.   창준은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춘실의 집과 앞뒤 집에서 살기 신물이 나지 않니?” 그러나 기준은 고집을 썼다. “한집 건너 사는데 괜찮소. 춘실도 전주에서 이사해 온 흥수한테 시집간다오.” “헌 신짝도 짝이 있다고 애까지 가만히 낳은 춘실을 데려 가는 사람도 있구먼. 한 마을에서 빤히 알면서도 말이야. 허허허" 기준은 목소리를 낮췄다. “흥수는 조선 전주에서 갓 이사 와서 잘 알지 못할 수도 있소. 상순이 중매를 서주었답데. 가만히 보면 춘실은 새금보다는 훨씬 사리에 밝은 앤 거 같소. 상순의 애까지 낳을 줄 알았더라면 … 에이, 이제 이런 말 해 뭘 하겠소?” 집 안에서 그들이 주고 받는 말을 들은 상순과 명옥은 각기 다른 생각을 하였다. 상순은 뒤늦게 후회하는 아버지가 한스러웠고 명옥은 춘실을 며느리로 삼지 못한 것을 후회하는 것에 기분이 상했다. 그러나 명옥은 스스로 마음을 눅잦히었다. 몇 달 후 고양이 쥐를 생각한다고 할가. 지학사는 제일 먼저 상순이네 집에 전기 줄을 늘여주자고 전공을 데리고 왔다. 한참 후, 지학사는 개화장을 짚고 스위치를 잘깍잘깍 켰다 껐다 하면서 잔뜩 늘여놓았다. “이걸 보오. 오늘부터 환한 전등불 밑에서 살게 됐구먼. 내 말만 잘 듣소. 복이 넝쿨 채로 떨어질 게요.” 상순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낮게 늘인 전기 줄을 두루 살펴보았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자기네 집을 생각해 전기를 놓을 지학사가 아니라고 생각됐다. 하여 미심찍어 여기저기 살피어 보지 않으면 안됐다. 한때 지학사는 전기를 놔 주는 바람에 마을 사람들의 인심을 얻었다. 사람들은 코 구멍이 새까맣게 기름등잔불을 켜지 않고 환한 전등불을 볼 수 있어 좋다고들 하였다. 그 기회를 타서 지학사는 개화장을 휘두르며 돌아다니면서 선동하였다. “보오. 대일본제국은 조선에서 온 당신들을 2등 공민들로 대우해 주고 이 땅에서 보호하고 행복하게 살게 하고 있소. 난  3등공민이란 말이오. 내 촌장을 하면서 집집이 돌아다니면서 협화회에 들게 했기에 당신들은 다신 토벌 받지 않고 편안히 살게 되지 않았소?” 상순은 지학사가 일본 놈이 놓아 준 전기를 이용해 백성들을 농락하는 것이 눈꼴 사나왔다. 어느 하루, 명옥은 재물에 삼은 빨래를 한 함지나 이고 강변에 가서 씻어 이고 집으로 돌아 왔다. 그는 한 함지나 되는 빨래를 어디에 널까 두리번거리다가 울바자에 널었다. 나머지 옷을 물을 툭툭 털어 전기 줄에 훌 걸었다. “앗!” 순간 명옥은 전기 줄에 붙어 온 몸이 마구 오그라들며 목을 조이는 것 같아 짹 소리도 치지 못하였다. 때마침 상순이 집에서 나오다가 문 옆에 있던 괭이를 쥐고 달려가 전기 줄을 탁 내리쳤다. 전기 줄이 툭 끊어지면서 명옥이 전기 줄을 쥔 채 땅바닥에 퉁 떨어지었다. 땅바닥에서도 죽어가는 물고기처럼 의연히 풀떡풀떡 뛰는 것이었다. 이때 숱한 사람들이 달리어 와서 구경하면서 혀를 끌끌 찼다. 당황해 난 상순은 괭이로 전기 줄을 탁, 탁 찍어 끊어 버리고 명옥을 전기 줄에서 떼 냈다. 명옥은 그때까지도 눈을 감은 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숨을 할딱거리었다. 상순은 명옥을 업어 집안에 들어가 구들에 눕히고 손을 주물러 주었다. 한참 후에야 명옥은 눈을 스르르 뜨고 상순을 쳐다보는 것이었다. “여보, 살았구만. 우리 다신 저 놈의 전기를 쓰지 말기요.” 명옥은 머리를 끄덕이면서 다시 눈을 스르르 감는 것이었다. 기준은 며느리를 들여다보다가 상순을 보고 소리쳤다. “그 놈 전기 줄을 다 끊어 버리어라. 이제껏 전기라는 걸 모르고서도 살았어.” 상순이 나가자 기준이도 도끼를 들고 나가  전기 줄을 마구 찍어 끊어 버렸다. 그는 끊어난 전기 줄을 들고 보면서 마을 사람들에게 고함쳤다. “이 걸 보오. 이렇게 껍질도 없는 전기 줄을 늘여 놓으니 전기에 붙지 않을 수 있소?” 모두들 껍질이 없는 전기 줄을 보면서 공포에 떨었다. “우리두 전기 줄을 다 끊어 버려야겠소.” 지군선의 말에 영범도 말하였다. “그 놈 전기를 쓰다가 사람을 잡아먹겠소.” 마을 사람들은 왁작 떠들더니 돌아가 전기 줄을 마구 끊어 버렸다. 지학사는 전기로 마을 인심을 얻으려고 하다가 오히려 욕을 더 먹고 미움 깨를 사게 되었다. 지학사는 기준을 찾아 와서 명옥을 문안하는 척 하였다. “전기를 쓸 줄 모르면 사고가 난다오.” 기준은 지학사를 흘겨 보면서 욕설을 퍼부었다. “대체 무슨 심보요? 자넨 토성 안 집으로 들어가는 전기 줄은 몽땅 고무껍질이 있는 전기 줄을 늘였더구먼. 그런데 왜 우리 집과 몇 집에는 껍질이 없는 전기 줄을 늘였는가? 전기에 붙어 죽으라는 게 아니고 뭔가?” 지학사는 능청을 떨었다. “환한데서 살라고 도와 줬는데 욕 하냐? 이거 정말 억울해 못 살겠다.” 기준은 주먹으로 구들을 퉁 치며 고함치었다. “지 촌장, 가랑잎으로 제 눈을 가리우구 야옹 하지 말게! 내 용정에 가 정미소랑 두루 돌아보아 아오. 저렇게 껍질이 없는 전기 줄을 늘인 거 보지도 못했네. 자네 정말 껍질이 없으면 위험하다는 걸 몰랐는가?” "어, 어, 어," 이때 바깥에서 요염하게 치장한 일본 첩이 들어와 손마선질을 했다. 소문에는 지학사 첩이 벙어리라고 했다. 그러나 기실 지학사가 첩이 일본 녀성이라는 걸 속이려고 벙어리 시늉을 하게 했던 것이다. 때마침 첩이 와서 지학사는 떠들겠으면 떠들라고 개화장을 짚고 엉거주춤 일어나더니 횡 하니 집에서 나가 버리었다. 해질 녘에야 명옥은 겨우 정신을 차렸다. 기준은 눈을 뜨더니 겨우 일어나 앉는 며느리를 보고 한숨을 후 내쉬었다. (얼마나 효성이 지극한 막내며느린데. 하마터면 잃을 번 했구나.) 기준은 막내며느리를 막내아들에게 맡기어 놓고 바깥으로 나갔다. 전날에 그는 아버지 말씀에 따라 창준형님이랑 김범호 매부랑 전기정미소를 짓자고 토론했는데 다시 토론하러 갔다. 병완은 창준과 범호를 데리고 토성 서쪽에서 한창 석마간 터를 돌아보고 있었다. 병완은 기준까지 다 온 것을 보자 오래동안 해온 속궁리를 말했다. “정미소를 토성 서쪽 여기에 짓는 게 좋겠다." 기준은 널찍한 공터를 둘러보면서 뒷근심을 말했다. “정미소는 좀 있다가 짓는게 어떻습둥? 쥐새끼 같은 지 촌장이 또 무슨 심술을 부릴지 모르겠습구마." "어째?" 병완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기준은 금방 있은 일을 쭉 이야기 했다. "하마트면 막내며느리를 죽일번 했습구마.” 범호는 개의치 않았다. “쉬파리 무서워 장을 담그지 못하겠소? 정미소 옆에 보초를 설 방두 하나 붙여 짓기오. 우리 세 집에서 돌아가면서 보초를 서기요.” 병완은 찬동했다. “옳다. 보초를 서면 그 놈인들 어쩌겠니? 그리고 정미소 전기 줄은 좀 실하고 껍질이 있는 걸로 늘이자. 그럼 합선되거나 불이 나거나 사람이 붙는 일은 생기지 않겠지 뭐. 용정에 가서 정미소를 보지 않았느냐? 어떻게 지으면 되겠는지.” 이렇게 되여 그들 삼부자는 함흥촌 복판에 전기로 매돌을 돌리는 정미소를 짓기로 의견을 모았다. 몇 달 후 정미소를 짓자 지 촌장의 관할하에 있는 전기를 써야 되었다. 기준은 지학사에게 허리를 굽히기 싫어 석마간을 짓는 일을 좀 미루자고 했다. 그러나 병완은 잠시 낮은 문턱에 머리를 숙이고 정미소를 지으면 마을 사람들이 절구 공이를 버리고 전기석마에 쌀을 찧어 먹으면 편리할 것이며 마을 사람들의 인심을 지학사에게서 이쪽으로 끌어 올 수 있다고 극구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기준과 창준은 자기 고집을 죽이고 정미소를 짓는데 발 벗고 나섰던 것이다. 상순은 며칠째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장학산과 조덕림 같은 중국 지주들이 한통속이 되어 국민당 군을 도와 나서는데 이상하고 궁금하였다. (대체 국민당은 무슨 일을 하는 당이기에 지주들이 몽땅 그쪽 편일까? 성칠 큰아버지한테 물어보면 좋겠는데 북만으로 간 다음에는 어데 갔는지 찾아 갈 수두 없지 않은가?) 어느 하루 동산에 눈썹달이 떠서 바르르 떨고 있었다. 상순은 장학산과 조덕림이네 집에 가만히 가서 뭔가 알아내고 싶었다. (옳다, 이 놈들이 뭘 하는지 염탐해 봐야지. 보아하니 장학산은 조덕림이네 동생 조덕산 단장 수하에 노는 거 같아. 조덕림네 집에 가 며칠 엿듣노라면 뭔가 알아 낼 수 있겠지.) 그가 어둠 속을 헤집고 아름드리 버드나무와 비술나무가 꽉 들어선 나무숲을 지나 조개덕으로 갈 때다. 느닷없이 요란한 말발굽 소리가 어지럽게 들리었다. 깜짝 놀란 상순은 아름드리나무 뒤에 숨었다. 어둠 속에서 총을 멘 숱한 사람들이 말을 타고 조덕림의 토성 안 집 쪽으로 달리어 가는 것이 어슴푸레 보였다. 그가 토성 밖으로 에돌아 대문 가까이에 살금살금 다가가 보니 웬 놈들이 총을 쥐고 왔다 갔다 하면서 보초를 서고 있었다. (토성 대문 안에 들어간다는 건 말두 안 돼.) 그는 토성을 쳐다보다가 토성 우에까지 뻗친 비술나무를 보고 꾀가 생겼다. 그는 토성 안 집안이 들여다 보일만한 아름드리비술나무에 원숭이처럼 바라 올라갔다. 그는 나무 가지에 다리를 걸고 앉아 전등불이 환한 토성 안을 들여다 보았다. 토성 안에는 놀라운 정경이 펼쳐지었다. 숱한 총을 멘 무장괴한들이 문마다 삼엄하게 지키고 있고 몇몇 머슴들이 한창 말을 풀어 마구간에 들이 매고 말먹이를 주고 있었다. 대낮같이 환하게 전등불을 켠 집안을 들여다보니 활짝 열어 재낀 창문 옆에 차린 술상 상좌에 낯모를 괴한이 앉아 있고 조덕림과 장학산 외에 놀랍게도 지학사도 앉아 술을 마시면서 떠들썩하고 있었다. 상좌에 앉은 나비 코수염쟁이가 한창 연설을 하고 있었다. “일본 놈들은 오래지 않아 망하게 됐소. 일본 놈들은 태평양전쟁에서 미국에 패배를 당했는데 소련도 독일을 전승한 후 총부리를 동쪽에 돌려대고 이미 일본과 전쟁선언을 했소. 관내에서도 국민당과 공산당이 합작해 일본 놈들을 호되게 족쳐 오래지 않아 항일전쟁은 승리하게 됐소. 우리 중국 사람들을 짓밟던 일본 놈들을 몰아내고 우리 중국 사람들은 당장 나라의 주인으로 될 것이오.” 장학산은 술잔을 들고 환호하였다. “항전승리를 미리 축하해 한잔 마시기오.” 조덕림과 지학사도 술잔을 굽 냈다. (동생? 그럼 저 자는 신경 부근에 있다던 조덕산이 아닌가?) 상순은 귀를 도사리고 그들이 주고받는 말을 계속 엿들었다. 허나 조덕산만은 술잔을 들지 않고 무겁게 입을 열었다. “항일전쟁이 이제 곧 승리한다고 해서 시름놓을 게 아니요. 지금 공산당군은 토지를 우리 지주들에게서 빼앗아 가난뱅이들에게 나눠 주면서 인심을 얻고 있소. 그들은 가난뱅이들을 영도해 우리 지주들을 청산하고 총살하고 있소. 일본 놈들을 몰아낸 후 그들은 가난뱅이들로 이른바 인민무장역량을 키워 우리 국민당 군과 천하를 다투려고 하오. 천하가 빨갱이들의 손에 들어가면 우리 지주들은 몽땅 총살당하고 조상들의 산소마저 건사하지 못하게 될 거요. 밭이랑 집이랑 몽땅 가난뱅이들에게 빼앗기게 돼 죽어도 묻힐 곳이 없게 될 거요.” “그렇게 돼선 절대 안 되지.” “빨갱이들을 용서할 수 없어!” 지학사와 장학산이 팔을 걷으며 고함치었다. 조덕산은 주먹을 불끈 쥐더니 술상을 탕 치면서 떠들었다. “동만에서는 빨갱이들의 영도 밑에 있는 저 조선 가난뱅이들 유격대가 큰 후환이오. 이제 일본 놈들을 몰아내면 그 놈들은 가난뱅이들을 영도해 인민 정권과 무장 대오를 건립해 우리 한족지주들의 땅을 빼앗아 조선 가난뱅이들에게 나눠 주고 우리 한족 지주들을 청산하고 총살할 거오.” “안될 소릴!” “조선 빨갱이를 절대 놔 둘 수 없소.” 지학사는 권총까지 내들면서 떠들었다. “아예 오늘 밤으로 함흥촌 기준이랑 상순이랑 그 놈들부터 없애 치우기요. 이 마을에서 그 놈들을 꺾자고 내 얼마나 애를 썼소? 소구유에 양 재물을 치기도 하고 껍질이 없는 전기 줄을 그 놈들의 집에 늘였소. 그런데 죽으라는 상순이나 기준 놈은 전기에 붙지 않고 아낙네가 떡 붙어 죽을 번 했소. 그런데 웬 일인지 번마다 그 놈들 부자가 썩어지지 않고 화를 피한단 말이오.” 상순은 그 소리를 듣고 모든 사건 진상을 알게 되었다. (원래 모두 네놈이 한 짓이구나.) 이때 조덕산이 손사래를 치었다. “로형, 건 모르는 소리요. 아직 항일 전쟁이 승리하지 못한 형편에서 일본 놈들과 싸우지 않고 먼저 공산당 유격대부터 죽이면 안 되오. 섣불리 풀을 건드려 뱀을 놀래지 마오. 모든 건 항전이 승리한 후 손을 써야 하오. 지금은 누가 빨갱인가를 잘 정찰해 둬야 하오. 우선 우리는 몰래 우리 무장대오를 건립해 둬야 한단 말이오.” 조덕산은 주위를 둘러보며 의아해 물었다. “상순이랑 공산당원인가?” 장학산이 대답했다.  “아직 공산당에 든 거 같잖소. 내 어떻게 하나 우리 쪽에 끌어당겨오겠소.” 조덕산은 가재수염을 슬슬 어루만지면서 무슨 궁리를 하더니 입을 열었다. “옳소. 상순과 같은 청년우두머리는 죽이기보다 우리 손아귀에 넣는 게 좋소. 좋기는 장형이 양아들 인삼을 우리 쪽에 끌어오면 좋겠는데. 동만에서 우리 국민당 군을 널리 확충하려면 우리 한족 지주들과 위만 경찰들만 의거해서는 안 되오. 한족 가난뱅이들과 조선 지주 그리고 조선 가난뱅이들도 될수록 우리 쪽에 끌어 들이어야 하오. 만약 이 마을의 상순이랑 계속 우리 대오에 들어오지 않고 공산당 빨갱이들을 따라 가려고만 하면 그때에는 가차 없이 목을 쳐버려야 하오. 허나 손을 쓸 시간은 명확하오. 항일 전쟁의 총소리가 멎자마자 일거에 손을 쓴단 말이요.” 모두들 머리를 끄덕이었다. 조덕산은 술잔을 들었다. “자, 한잔 들고 말하기요.” 넷은 술을 쭉 들었다. 조덕산은 안주를 저가락으로 집어 입에 넣고 쩍쩍 씹다가 가재수염을 손수건으로 쓱 닦더니 계속 말하였다. “당면에는 중국 지주들로부터 중국 가난뱅이들까지 우리 주위에 뭉치게 하오. 이 부근 패랑천촌, 조개덕, 소서구 일대 손호표, 제지주, 왕지주를 몽땅 국민당 군에 들게 하오. 그자들이 빨갱이들과 조선 가난뱅이들에게 우리 재산을 빼앗기지 말도록 보호해야 하오. 생각해 보오. 조선 가난뱅이들이 조선에서 들어와 우리 조상들이 물려 준 땅을 빼앗아 가면 되오?” 모두들 이구동성으로 고함쳤다. “절대 용서할 수 없소.” 지학사는 뒷근심을 털어놓았다. “아예 난 촌장을 그만 둘가 하오. 괜히 일본 개다리라고 중국 사람들한테나 조선 가난뱅이들한테 맞아 죽지 않을까?” 그러자 조덕산은 손사래를 치었다. “아니오. 노형, 잠시 일본 놈들의 일을 하는 게 필요하오. 일본 놈들이 도망칠 때 기회를 봐서 우린 일본 놈들의 무장을 빼앗아 우리 대오를 무장시켜야 하오. 지 촌장과 장형은 해동분주소의 지학구 소장을 설복해 해동분주소와 진수해파출소 안에서도 우리 사람을 발전시켜야 하오. 진수해 일대 중국 지주들과 가난뱅이들을 우리 대오에 보내게 하오. 누가 자기 아래에 어느 만큼 사람을 확충하는가를 보고 난 그에게 군직을 줄 예산이오.” 모두들 권세욕에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지학사가 대뜸 앞질러 나섰다.  “난 가병을 몽땅 조 단장에게 내놓겠소. 손호표 지주와 제 지주를 설복해 가병을 데리고 우리 국민당 군에 들어오게 하겠소.” “좋소. 노형은 패장쯤은 될 수 있소.” 조덕림은 조덕산을 보고 바투 들이댔다. “동생, 난 여기 온 지형이나 장형을 데려 왔으니 무슨 직을 주겠나?” 조덕산은 저가락으로 밥상을  탕 쳤다. “야따, 형님!  급을 따지지 마오! 여러분, 우리 국민당 군을 확충하는데 전력하오." 그는 주위를 둘러보며 위엄있게 늘여놓았다.  "동만에서 삼도만 전흥 소교, 천교령, 묘령, 천교령, 라자구, 녕안 일대 마희산 무리들 속에서 우리 군은 대오확충과 무기 장만에 손쓰고 있소. 목단강과 할빈 일대에서도 우리 국민당군은 대오를 확충하고 공산당 빨갱이들과 싸울 준비를 다그치고 있소. 장개석 위원장님의 명령에 따라 이제 몇 백만 국민당 정규군이 동북에 들어 올 것이오. 이 광활한 동북 땅을 공산당에 두 손을 들어 내 줄 순 없지 않소. 우린 천만대군을 가진 국민당군의 영도아래 동만 각지의 무장대오와 손을 잡고 일본 놈들과 공산당군을 이 땅에서 몰아내면 우리 세상에서 부유하게 살게 될 게요. 그 날이 오면 이 땅도 나라도 몽땅 우리 거요! 그때면 모든 게 노형들 게 아니겠소?" 모두들 너털웃음을 웃으면서 술잔을 들었다. 상순은 그 자들이 술상을 파하고 집으로 돌아 갈 때까지 나무 우에서 듣다가 살금살금 내려 왔다. 그런데 나무 가지 우에 너무 오래 다리를 끼고 도정신해 놈들의 말을 듣다나니 다리가 저리어 겨우 나무 우에서 내려왔다. (이 긴급정황을 유격대에 알려야 하는데.) 그는 사위를 둘러보며 아름드리나무숲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8.친일 부자 집을 습격 상순은 큰아버지가 북만으로 갔다는 것을 알뿐 구체 지점을 몰라 속을 끙끙 앓고 있었다. 어느 하루 마을에 갓 이사해 온 이계삼이란 한족중년사나이가 그를 찾았다. 상순은 훤칠하게 생긴 이계삼을 따라 태평강가 버드나무숲 속으로 갔다. 이계삼은 희죽이 웃으면서 말했다.  “상순이, 내 이 마을에 이사해 와 보니 자넨 정말 능력도 있고 전도가 유망한 청년이오.” 상순은 뒷덜미를 긁적거리다가 경각성을 높여 이계삼의 뒷말을 기다렸다. “상순이, 믿고 하는 말이오. 자네 큰아버지한테서 자네 말을 많이 들었소. 성칠 대장은 우리가 함흥촌에 가게 되면 자네를 많이 도와주라고 하더구먼.” “예- 그럼…” 이때 함흥촌 동북쪽 골 안에 있는 동구마을의 조선 중년사나이 허영주가 스적스적 다가오기에 상순은 입을 다물어 버렸다. “괜찮네. 우린 조선의용군 3지대에서 온 전우들인데 모두 자네 큰아버지와 전우요.” 이계삼은 품속에서 편지 한통을 꺼내 상순에게 건네주었다. “김성칠 대장의 편지오.” 상순은 천자문과 조선 글을 최구장의 서당 방에세 배운 후 상길 형에게서도 짬짬이 배웠기에 한자와 조선어를 섞어 쓴 편지를 읽을 수 있었다. 편지에는 이렇게 씌어 있었다.   상순아, 일가 모두 잘 있느냐? 후어머니가 세상을 떴다는데도 가 보지 못해 미안하구나. 네가 대신 한가위 날에 벌초도 해 드려라. 이번엔 할아버지를 모시고 가지 말라. 할아버진 이젠 연세가 계시는데다가 할아버지와 같은 웃어른을 지하들의 묘소에 벌초나 가토를 다니게 하는 건 우리 조선 사람의 여절에도 맞지 않는 일이다. 난 아마 장백산 기슭에 가서 열사들의 묘지를 찾아 봐야 할 거 같다. 이계삼과 허영주 두 동지는 북만에서 만난 조선의용군 제3지대 혁명 전우들이다. 우린 북만에서 일제 놈들과 피어린 각축전을 벌리고 있다. 그때부터 잘 아는 혁명적 동지이고 중국 공산당 지하당원들이다. 그들의 영도아래 마을 사람들과 청년들을 묶어 세워 일제와 그 주구, 악질지주들과 투쟁해라. 우리는 오래지 않아 일제를 몰아내고 광복을 맞게 됐다. 이 땅의 주인으로 될 날이 멀지 않았다. 그러나 항일 전쟁이 승리해도 혁명이 끝난 것이 아니다. 악질지주들은 국민당을 등에 업고 우리 가난한 사람들이 땅의 주인이 되는 것을 막고 계속 인민들을 압박착취하려고 한다. 우리가 진정 땅의 주인이 되려면 국민당 반동파와 악질지주들까지 타도하고 인민정권을 세우고 그 놈들을 청산해 집과 땅을 가난한 백성들에게 나눠 주어야 한다. 그래야 진정 이 나라의 주인으로 되는 것이다. 이계삼 동지와 허영주 동지를 잘 받들어 일해라. 할아버지께는 따로 편지를 써 이계삼 동지를 보고 전해 드리게 하겠다.            큰아버지 김성칠                                        1945년 5월 15일 북만에서 상순은 단숨에 편지를 두 번이나 읽어보고 품속에 깊이 간직한 후 머리를 들어 이계삼과 허영주를 번갈아 보았다. 이계삼은 상순의 두 손을 덥석 잡았다. “상순동무, 우리 당 조직에서는 동무를 믿소.” “고맙습니다. 믿어 줘서. 무슨 일이든지 시키십시오. 목숨을 내 걸구 일본 놈들과 개다리놈들과 싸우겠습니다.” 허영주도 상순의 손을 잡아 흔들었다. “민병들을 묶어 세워 일본 놈들과 개다리지주들과 맞서 싸울 준비를 해야 하오.” “예. 알았습니다. 이미 20여명을 조직해 놓았습구마. 군사훈련도 시키고 있습니다. 언제든지 포치하십시오. 민병들을 데리고 적들을 족치겠습구마.” 상순이 가슴을 쭉 뻗치고 다짐했다. 그러고 나서 자기가 조덕림의 토성 밖 나무 위에서 엿들은 긴급정황을 알리었다. 이계삼은 상순의 어깨를 툭툭 치면서 부탁하였다. “좋소. 아주 중요한 정황이요. 한 가지 주의할 게 있소. 이해득실에 의해 급변하는 정치형세에 장충국과 장학산 부자와 우리 오늘 셋이 만난 거 같은 일을 절대 말하지 마오. 꼭 비밀을 엄수해야 하오. 마을에서 다른 사람들이 보는 데서 우리하구 절대 다른 말을 하지 마오. 그저 한마을에 사는 일반관계인척 하면 제일 좋소. 그러나 금방과 같은 긴급정황은 꼭 인차 알리도록 하오.” “예, 알았습구마.” 그들은 남의 이목을 끌까봐 인차 흩어지어 버드나무숲 속에서 빠져나갔다. 상순은 먼저 웃새집에 가서 할아버지한테 금방 있은 일을 말하고 나서 큰아버지 편지를 보이었다. 병완은 한참 읽어보더니 상순에게 말하였다. “내 생각에도 우린 이계삼과 허영주를 도와 마을 사람들을 묶어세우고 당지 친일주구들과 싸울 준비를 해야겠다. 산에는 네가 들어가 봐라. 난 마을에서 이계삼과 영주를 도와 일을 해야 되겠다.” “예, 알았습니다.” 상순은 인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윽고 상우형님이 놀러 왔다. 그런데 쌀 고생이 어찌나 막심했던지 상순이네도 가마에 쌀을 얹은 지 며칠 잘 됐다. 그래도 명옥이가 돼지 굴 부근에 불을 때자고 쌓아 놓았던 콩꼬투리를 매돌에 갈아서 끓였다. 한참 후 명옥이가 시형과 남편에게 그 콩꼬투리가루로 끓인 죽을 퍼서 밥상에 올리었다. 그러자 상우는 그 콩꼬투리가루로 끓인 죽을 후후 불면서 아주 맛있게 먹었다. “에이, 이 세월에 콩꼬투리가루 죽이라도 한 사발이면 온 하루 견딜 수 있지.” 그 말에 상순은 억이 막혀 입을 하 벌리고 있다가 죽사발을 밥상에 달랑 내려놓았다. “형님, 그래 죽 한 사발을 잡숫고 어떻게 온 하루 삐친단 말이오? 형수는 형님을 죽 한 사발도 안 준단 말이오?” 상우는 제수 앞인지라 아내의 허물을 하기 싫어 에둘러댔다. “이 세월에 쌀이 없는데 네 아주머닌들 무슨 재간에 죽을 끓이느냐? 아내와 동선이랑 순애랑 먹고 나면 죽물 한 숟가락도 남는 게 없다.” 그러자 상순은 한숨을 천정이 날아나게 내쉬었다. 그는 마음속으로 어질고도 어진 상우 형이 불쌍해 한마디 해 주고 싶었다. “형님, 형수와 말해서 때마다 죽물이라도 얼마간씩 나눠 잡숫소. 처자만 처자라고 하다가 형님이 굶어서 세상을 뜨기라도 할까봐 정말 근심스럽소.” 동생의 충고에 상우는 그저 묵묵히 앉아 대답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한참 후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상우는 “에이, 오늘은 제수 덕분에 콩꼬투리가루 죽을 잘 먹고 견디겠는데 내일은 또 어찌 하겠느냐?”라고 하더니 비틀거리며 집으로 가는 것이었다.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떠나가는 형님의 뒤 잔등을 멀거니 바라보면서 상순은 코마루가 시큼해났다. 그는 언제 공산당의 말대로 가난한 백성들에게 땅이 차례지어 배불리 먹고 살겠는가고 가슴을 치면서 한탄하였다. (이대로 앉아서 죽기를 기다릴 순 없다. 마을 사람들이 다 굶어 죽겠다.) 저녁에 그는 마을 청년들을 불렀다. 버들강변에 상길과 흥수, 학수, 성수와 상진, 보준, 태수, 정수, 경학, 학준 등 20여명 청년들을 불러 모았다. 상순은 7촌 조카 경학을 잘 부르지 않았는데 유서집 상진이 불러서 왔던 것이다. 경학은 늘 부실한 엄마 때문에 남보다 잘 살기 어렵다고 외웠다. 그런데 조선에서 간도로 들어 올 때 두만강을 건너 와 도문 시장에서 어머니를 잃어버린 후 찾다 못해 찾지 못하자 혼자 함흥촌에 왔던 것이다. 동생 광학은 “아무리 살기 바쁘다고 엄마마저 찾아오지 않는 형님을 믿고 어떻게 한 마을에서 살겠는가?”라고 하면서 어디론가 자취를 감추어 버리었던 것이다. 경학의 처는 남편을 보고 “시어머니를 찾아오오. 내 잘 모셔 드리겠습소.”라고 하였다. 후에 경학은 진수해에서 어머니를 본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때 어머니 박만식은 “경학아, 광학아.” 하고 울면서 돌아다니었다. 경학은 어머니를 보고서도 정신병자라고 낯이 깎인다고 못 본 척 했다. 경학은 마을로 돌아와 “정신병자 같은 어미를 겨우 피해 돌아왔다.”고 말한 적이 있다고들 했다. 가능하게 어떤 사람들이 경학을 헐뜯어 한 말인지는 몰라도 그 일로 하여 관준은 두고 두고 경학을 욕했다. 상순은 경학이 아무리 그러면 그렇게 불효를 저질렀겠는가고 믿지 않았지만 민병조직행사에는 잘 부르지 않았다. 후에 상순은 경학을 보고 엄마를 찾아오라고 타이르고는 더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시키지도 않았는데 상진 형이 알려 경학이 온바 하고는 놔두었다. 그는 십여 명 청년들을 둘러보면서 나직이 말하였다. “지금 마을 사람들이 굶어 죽게 됐다. 허나 친일 지주들의 쌀 창고에는 쌀이 썩어 날 지경이다. 우리는 가난한 농민들이 고혈로 지은 양식을 찾아다 굶어 죽어가는 마을 사람들을 구해야 되겠다.” “옳다. 지주 놈들의 쌀을 빼앗아 먹고서라도 살아야 한다.” 청년들은 상순의 말에 모두들 팔을 걷고 나섰다. 그들은 몽둥이와 칼을 들고 이번에는 일성 골 안이 아니라 동산을 넘어 성산 촌에 가서 악질지주네 집을 들이치러 떠났다. 상순은 아주 능청스레 거지행사를 하면서 토성 안 집 대문을 두드리었다. “누구요?” 상순은 밀짚모자를 꾹 눌러 쓰고 대야를 들고 “묵은 밥이라도 좀 빌어먹기요.”라고 하였다. 그러자 안에서 지주가 대문의 조그마한 문을 열더니 “또 거지가 왔구나. 밥이 없다. 가라, 가!” 하고 두덜거리며 상순을 콱 밀치었다. 상순은 지주 놈의 손목을 잡아 홱 태를 치었다. 뚱뚱한 지주는 땅바닥에 거꾸로 처박히었다. 상순이 손을 홱 젓자 숱한 청년들이 몽동이와 칼을 휘두르며 지주를 묶어 토성 안에 끌어다 마루 기둥에 결박해 놓고 창고를 부시고 쌀 주머니 채로 두 수레나 실어 내갔다. 상순은 떠나가면서 뚱뚱한 지주의 배를 툭툭 건드리며 을러메었다. “우리 가난한 백성들은 먹을 게 없어 죽어 가는데 네 놈은 창고에 쌀이 썩어날 지경이구나. 저 쌀로 가난한 마을 사람들을 구제하겠다. 파출소에 알리는 날엔 다음번엔 네놈의 목을 칠 줄을 알아라.” “호한, 제발 목숨만 살려 주오.파출소에 절대 알리지 않겠소.” “알려도 우린 겁나지 않다. 그까짓 경찰 놈들까지 몽땅 죽여 치울 날이 오래지 않다.” “예, 예. 알았습네다.” 상순은 혼자 비수를 쥐고 지주를 지키고 있다가 성수랑 먼 곳까지 수레를 몰고 갔으리라고 생각되자 한 둬 식경 후에야 지주를 묶어 둔 채 토성 대문을 빠져 나갔다. 그들은 마을에 돌아오자마자 쌀을 몽땅 마을 사람들에게 나눠 주었다. 후에 이 일을 알게 된 이계삼은 상순을 불러 말하였다. “지주에게서 쌀을 빼앗아 가난한 백성들을 구제한 것은 잘 한 일이오. 후에는 이런 중대한 일을 할 땐 내한테 말하구 하오. 자칫하면 적들에게 꼬리를 밟힐 수 있소.” “예, 알았습니다.” 상순은 뒷덜미를 긁적거리었다. 어느 날, 최구장의 집에 막내사위 정형만이 찾아 왔다. 그는 처자를 잃은 후 일본 놈들을 피해 가마골의 구장 임호와 마을 친구 석수와 용기와 함께 간도로 도망쳐 와서 항일 유격대에 들어갔었다. 그는 유격대를 따라 중소 변경에 자리 잡은 북만에 전이해 일본 놈들과 싸웠다. 그는 성칠 대장의 파견을 받고 함흥촌 부근에 왔다가 가시집에 들린 것이다. 그는 토성 안 집 서쪽에 자리 잡은 가시부모를 보자 엎드려 큰 절을 하면서 대성통곡 쳤다.그는 몇해 전에 큰물에 목숨을 잃은 계순과 어린 아들딸이 그리워 울고 또 울었다. “내 어데 가서 계순이 같은 각시를 얻겠습니까? 얼마나 현처양모인데. 으흐흑, 흑흑.” 최구장 등 식솔들은 모두 울었다. 형만이 왔다는 말을 듣고 죽순과 석은 부부도 달려 왔다. “이게 몇 해만이오?” 그들과 형만은 또 서로 붙안고 울었다. 형만은 비단옷감을 가시부모에게 드리었다. “가시부모 옷이나 지어 입으시오.” 성단은 비단옷감을 되밀어 주었다. “눈 가슴에 달아 다니면서 옷감까지 가지고 오다니? 가져다 노자로 쓰오.” 형만은 비단옷감을 되드리었다. “계순이 알면 울 겁니다. 계순이가 세상을 떠났다고 사위 아니겠습니까? 이 막내사위 주는 선물로 옷을 지어 입으십시오. 로비는 성칠 사돈어른이 주어서 입습니다.” 그는 가시집 식구들을 둘러보다가 이마 살을 찌푸리었다. “어째 셋째처남이 보이지 않습니까?” 그러자 성단은 눈물을 주르르 흘리었다. “경민은 일본 놈들에게 손을 잘리어 농사도 짓기 힘들지 어떻게 살겠소? 그래 약 담배장사를 하다가 조선에 가서 그만 일본 놈들에게 붙잡혀 감옥에서 맞아 죽었소.” 형만은 그 소리에 놀라면서 땅이 꺼지게 한숨을 지었다. “셋째형님이 정말 안 됐구먼. 그래 그 애들은 어떻게 삽니까?” "셋째며느리 애들을 데리고 경민이 생전에 약 담배장사를 해 벌어 조개덕에 사 놓은 밭을 다루면서 그럭저럭 사오.” “둘째처남 네는 어디서 삽니까?” “진수해에서 사오.” 형만은 머리를 끄덕이였다. “이제 일본 놈들이 망하면 우린 조선 고향에 돌아가 삽시다. 그때면 우리도 고향 땅의 주인이 되겠지요. 이제 잘 살 날이 멀지 않습구마.” 최구장은 한숨을 후 내쉬었다. “사위, 내 몫까지 유격대에서 일본 놈들을 호되게 족치어 두 아들의 원수를 갚아 주게나. 난 아들 둘이나 일본 놈들에게 잃었네. 중용지도를 숭배해온 나도 이젠 일본 놈들을 보면 악이 나네. 내 젊기만 해도 자네들과 함께 총을 들고 일본 놈들과 싸우겠소만.” 이때 소문을 듣고 기준과 창준이네 형제 일가족들도 형만을 찾아 왔다. 그들은 한참 성칠 형의 근간 형편을 두루 물어보다가 돌아갔다. 형만은 유격대의 일은 될수록 이런 저런 구실로 대답을 회피하거나 따로 활동하다나니 잘 모르겠다고 얼버무리었다. 그는 상순이 돌아가려고 할 때 뒤따라 나왔다. “사돈 총각, 좀 보기오.” 상순은 형만과 함께 버드나무가지들이 머리를 풀어헤치고 늘어 서 있는 태평강 가로 갔다. 상순이 먼저 “우리 큰아버지랑 잘 있습니까?”하고 물어 보았다. “그래, 성칠 대장이 전번에 보낸 편지를 읽어 보았소?” “예, 읽어 보았습니다. 정말 이계삼이라고 압니까? 성칠 큰아버지 편지에 믿을만한 중국 공산당 지하당원이라고 했던데.” “옳소. 믿을만하네. 그는 성칠 대장과 조선의용군 3지대에서 동만에 먼저 파견한 수많은 지하당원 가운데 한사람이네.” 상순은 “오~”라고 머리를 끄덕이었다. 그는 형만을 믿고 단도직입적으로 그간 고민거리를 물어 보았다. “이전에 큰아버지랑 우리 할아버지하구 아버지한테 일본 놈들을 조선에서 몰아내는 날이면 우리 모두 고향으로 돌아간다고 했습니다. 이제 일본 놈들이 망하면 우리 조선 고향에 돌아가겠는데 또 중국의 국민당과 싸울 필요 있습니까?” “글쎄 말이야. 난 조선이 광복되면 조선 고향으로 돌아가 사는 게 옳은 거 같아. 성칠 대장도 이전에는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똑똑히 말했소. 정작 오래잖아 조선이 광복을 맞게 되니 조선에 돌아가려는지 중국에 남으려는지 까딱 말하지 않는다. 후에 그를 만나면 잘 물어 봐라.” 그날, 형만은 성칠 대장이 이번 걸음에 함흥촌에 들리면 상순에게 민병을 잘 조직하라고 재삼 부탁하더라는 말을 남기고는 총망히 함흥촌을 떠나 진수해 쪽으로 갔다. 상순이 보건대 별로 진수해 일대 일본 놈들의 적정을 정찰하러 나온 것 같았다. 형만과 갈라진 후 상순은 한가위 날이 다가 올수록 큰아버지를 만날 날을 애타게 기다리었다. 그것은 큰아버지 편지에 한가위 날 쯤에 장백산 줄기줄기 산마다 누워 있는 열사들의 묘지를 찾아 보겠다고 한 말 때문이었다. (안 되겠다. 아직 항일 전쟁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큰아버지가 딱 한가위 날에 장백산에 간다고 할 수 있겠는가? 미리 장백산 밀림 속에 가서 약재도 캐고 사냥도 하면서 큰아버지를 기다려야 하지.) 상순은 원래 이계삼과 물어 보고 북만으로 가서 큰아버지를 만나려고 했지만 그만 두었다. 그것은 이번 걸음에 이계삼을 확실히 믿을만한 공산당 지하 간부인지 허실을 알아 봐야 했기 때문이었다. (이 복잡한 동란 시기에 아무나 무턱대고 믿고 따를 순 없지.) 상순은 아버지와 원시림으로 간다는 말을 한 후 괭이를 들고 일하러 가는 척 하면서 문 밖을 나섰다. 지학사 촌장도 일본 놈들이 오래잖으면 망한다고 그러는지 상순을 감히 건드리지 못했다. 그리하여 상순은 지학사 눈을 피해 쉽게 마을을 벗어날 자신이 있었다. 그때 집안에서 큰딸 숙자의 울음소리가 터지었다. 상순은 집안에 되들어가 명옥의 품속에 안긴 돐이 거의 된 숙자의 볼을 만지었다. “귀여운 내 딸아, 내 사냥해서 사슴고기랑 가져 올게. 아빠 인차 온다.” 숙자는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아빠를 보자 애고사리손을 내 밀면서 울음을 그치었다. 상순은 숙자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밀짚모자를 꾹 눌러 쓰더니 아쉬운 발걸음을 떼어 문밖을 나섰다. 숙자는 전해에 이 가난한 상순이네 집에서 태어났던 것이다. 그는 천지꽃산 비탈에 가서 할아버지 산소 옆에 파묻어둔 오지독을 파내고 그 안에서 기름종이에 싼 권총을 꺼내 품속에 깊숙이 간수하였다. 상순은 새 집에 이사할 때 웃새집 천정에 감춰뒀던 권총을 꺼내 산소 옆에 구덩이를 파고 기름종이에 꽁꽁 싸서 오지독에 넣어 파묻어두었던 것이다.  상순은 인차 생각을 바꾸었다. (아니야, 총을 가지고 가면 혹시 길에서 일본 놈들이라도 만나면 시끄럽지 않을까? 교하에서 빼앗은 권총을 괜히 충국에게 줬다. 권총 두 개 있으면 헛일 삼아 이번에 하나 가지고 가는건데.) 그는 권총을 오지독에 넣고 원래 자리에 잘 파묻어 놓은 후 마을에 되 내려가 낫을 찾아 들고 괭이를 메고 먼 길을 떠났다.  
94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57) 댓글:  조회:1925  추천:0  2016-11-30
                  5. 밀림의 열사들을 기리어 여우도 눈물을 흘리게 하던 맵짠 겨울을 몰아내고 봄은 끈질기게도 산과 들에 찾아 왔다. 일제 놈들한테 빼앗긴 천지꽃산에는 진달래꽃이 만발하였고 들에는 푸르른 잔디가 누런 황야에 깔리기 시작하였다.        친일촌장 지학사는 일본 놈들의 앞잡이 돼 돌아다니더니 일본 년의 첩까지 들여앉혔다. 외씨처럼 걀죽한 백지장 얼굴에 꼭 다문 앵두입은 이 골안에서 꽤 인기를 끌었다. 듣는 말에 의하면 지학사 촌장이 삼도만 삼림분주소 일본 소장놈을 통해 소장놈의 처제를 첩으로 얻었다고 하였다. 일본 놈들도 오래지 않아 저들의 식민통치가 망할 것을 알고 악명 높은 당지 부자놈들한테 처제 아니라 심지어 딸까지 미리 줘 피신시키는 일이 기수부지였다.      어느날, 친일주구 지학사는 일본 놈 둘을 데리고 칼산 꼭대기로 갔다.       떵! 떵!      놈들이 메질하는 소리가 쇠붙이에 부딪히며 쩌렁쩌렁 울렸다.      병완이 밭갈이를 하다가 가대기를 멈추고 찬찬히 여겨보았다. 일본 놈들을 인도해 칼산에 큰 쇠말뚝을 박는 것이었다. 칼산 기슭에서 밭갈이를 하던 병완은 놈들의 하는 짓에 마음에 내켜하지 않았다. 그는 밭갈이를 멈추고 칼산으로 향하였다.         분명 일본 놈들은 못되게도 칼산의 기를 누르려고, 아니, 이 지역 중조 인민들의 기를 꺽으려고 쇠말뚝을 박는 것이었다. 아니, 자기 숫구멍에, 이 지역 중조 인민들의 숫구멍에 대못을 박는 것과 같이 느껴졌다.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병완은 칼산 허리에 내려가는 일본 놈들을 손가락질하면서 을러멨다.        "이게 무슨 짓인가? 우릴 벼락 맞아 죽으라고 저주하는 건가?"       그러나 지촌장한테서 대개 뭐라는가를 통역받고 일본 놈들은 욕지거리를 했다.      "조선 노예놈새끼, 조선 놈들 기를 꺽어놔야 우리 대일본제국이 기를 펴고 살아날 수 있어."      일본 놈들은 망치와 커다란 쇠말뚝을 둘러메고 칼산 중턱으로 갔다. 그 놈들은 칼산 허리에 또 쇠말뚝을 쾅쾅 박았다.분명 일본 놈들은 산맥을 끊어 중조 인민들의 맥을 끊어농으려는 개수작을 피우고 있었다.     당시 일본 놈들은 조선과 중국 인민들의 기를 꺾으려고 못되게도 조선반도 태백산맥과 중국의 장백산 줄기를 따라 돌아다니면서 숱한 산꼭대기와 산허리에쇠말뚝을 박아놓았던 것이다.       병완은 자기 허리에 쇠못을 박는 것만 같았다. 놈들은 일본 놈들 두 놈에 지촌장까지 셋 밖에 없었다. 병완의 완력에 그 놈들 셋 쯤은 아직도 개 패듯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개도 섣불리 건드리기 힘든 때였다.        병완은 놈들을 그 쯤 해 놔두고 칼산에서 스적스적 내려왔다.       그날 밤 그는 기준과 상순을 데리고 밤도와 칼산에 가서 괭이와 메로 그 놈의 쇠말둑을 빼 부르하통하에 처박아넣었다. 그제야 그들 삼형제는 한숨을 후- 내쉬었다.        상순은 웃새집과 집 식구들을 따라 할머니 산소에 가서 가토를 하고 제사를 지냈다. 그는 할머니 산에서 내려오면서 장백산 밀림 속에 나무 가지와 눈으로 대충 덮어 놓은 큰어머니 생각이 났다. 그때 할아버지가 찾아왔다. “얘, 눈이 녹아 밀림 속에서 산짐승들이 큰며느리를 다치면 어쩌겠니? 큰어머니를 잘 모셔 드려라.” 할아버지 말씀에 상순이 나섰다. “거 잘 생각했어. 나도 갔으면 좋겠지만 함께 가면 자칫 일본 놈들과 저 지촌장의 눈에 날 수도 있다.” 기준의 말에 병완은 머리를 끄덕였다. “넌 집에서 농사를 돌봐라. 내 가서야 지 촌장놈이 의심하지 않을 거야.” 상순은 두덜거렸다. “지 촌장 눈치를 볼게 있습둥? 아예 어느 날 밤에 토성 안 집에 뛰어 들어가 지 촌장 놈을 죽여 버리깁소.” 그러나 병완은 말리었다. “그래선 안 된다. 지학사 한 놈을 죽여치우긴 쉽다. 그러나 만약 지촌장이 살해돼 봐라. 이전처럼 숱한 일본 놈들이 함흥촌을 토벌하러 올게야. 이 마을은 잿더미로 될게 아니야? 숱한 유격대 가속을 안전하게 보존하려면 굴 어귀 풀을 다치지 말아야 한다. 언젠가는 유격대가 온 중국 땅에서 일본 놈들을 몰아 내는 날을 기다려서 지학사 놈을 처단하자.” 상순은 할아버지 말씀에 머리를 끄덕이었다. 상순도 이젠 울뚝 밸을 용케 참아낼 줄 알았다. “할아버지, 어떻게 가겠습둥? 우리 형제들이 가겠습구마. 집에서 쉽소.” 상순이 소서구에 가서 상우 형과 말해 보았다. 새금은 정지에서 엿듣고 야단쳤다. “농사철에 어디로 간단 말이오? 가겠으면 혼자 가오.” “우린 저 생원이 대사라는데. 쩍 하면 괴상한 일만 하자고 든다니까.” 상순은 함흥촌에 내려와 웃새집 상길 형과 말해 보았다. 그러자 상길은 인차 따라 나섰다. 병완은 손사래를 저었다. “상길은 아버지를 도와 농사를 지어라. 아무래도 내 마지막으로 맏며느리를 잘 묻어 주구 와야 하겠다.” 그리하여 상순은 할아버지와 함께 장백산으로 들어가기로 하였다. 이때 충국이 쌀 주머니를 메고 들어 왔다. “형님, 우리 집 앞을 지나면서도 어째 들리지도 않소?” 그는 쌀 주머니를 상순의 사랑방에 내려놓으면서 “형님, 쌀 고생하는데 이걸로 보리 고개나 넘기오.”라고 하였다. “야, 임마, 너네 빚을 갚지도 못했는데 또 쌀을 가져 오니? 너 아버지한테 혼 나겠다.” 충국은 사람 좋게 웃었다. “형님, 우린 양형제 간이 아니오? 내 아버지한테 말했소. 근심하지 마오. 이건 거저 주는 게지. 형한테 빚을 지우는 게 아니오.” 그는 배낭과 목수도구상자에 삽과 괭이를 둘러 멘 상순과 병완을 보고 “어데 가오?”하고 물었다. 상순은 충국의 귀에 대고 나직이 말했다. “산에 가서 큰어머니랑 유격대원들의 유체를 잘 묻어 주자고 그래.” “나도 갈 게. 숱한 유격대를 묻자면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지 않겠는가?” 충국의 말에 상순은 머리를 끄덕이었다. 그들은 충국네 집에 들려 먹을 걸 더 푼푼히 마련해 가지고 진수해 쪽으로 떠났다. 장학산은 떠나가는 그들을 두고 한쪽 눈은 뜨고 한쪽 눈은 감아버렸다. 병완과 상순은 먼저 진수해의 큰 손녀 어금의 집에 들렀다. 경인은 부모를 모시고 있었다. 최구장은 병완 등을 보자 반가와 마주 나오며 인사하였다. “사돈어른, 정말 오랜 만이오. 반갑소.” 병완은 최구장과 악수를 나무며 집 안으로 들어갔다. 상순은 큰 매형과 장백산으로 가게 된 연유를 알려 주었다. 하여 어금이 갖춰 준 종이에 싼 밥을 가득 배낭에 챙기어 넣었다. 이때 해옥이 학교에서 돌아와 뾰로통해 어머니와 떼질 썼다. “엄마, 난 해옥이란 이름이 싫습니다.” 어금은 이상해 해옥의 손을 잡고 물었다. “그 이름이 얼마나 좋다고 그러냐?” 그러나 해옥은 입이 뾰로통해서 몸까지 흔들면서 종알거리었다. “다른 애들 이름은 일본 말로 요시꼬, 하나꼬라고 부르는데요. 가이교꾸라는 게 얼마나 듣기 싫습둥? 일본 성까지 다니 무슨 요시시로(吉城) 가이교꾸(海玉)라구 하지 않겠습둥?” “호호호, 애두 참. 네 이름은 해옥이니깐. 얼마나 좋다고 그러니? 해옥이란 이름은 바다에서 건진 옥이라는 뜻이다. 이제 일본 사람들이 돌아가면 최씨성을 제대로 달면 최해옥, 얼마나 좋냐?”        해옥은 덥썩 어머니 품에 안기면서 방실방실 웃었다.         해옥은 또 종알거리었다.         “우리 윗 학년의 차대균이란 오빠 이름은 더 우습게 됐습니다. 창씨개명이란 걸 하니까. 오오야마(大山) 다이낀(大均)이랍니다. 다이낀이라는 게 얼마 듣기 싫습니까?" 경인은 격분해하였다. “일본 놈들이 얼마나 나쁜 놈들이야. 차대균이나 최해옥이나 얼마나 좋은 조선 이름이 있다고. 천벌 맞을 놈들이 우리 조상들이 물려 준 성마저 일본 성으로 창씨 개명해 바꾼단 말이냐?” 어금은 “누가 듣겠습구마.”하고 바깥을 내다보았다. 상순은 해옥이 귀여워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바깥에 나왔다. “외삼촌, 놀러 오시오. 예?” “응. 그래.” “외노할아버지, 놀러 오시오. 예?” 병완은 가래 같은 손으로 해옥의 복숭아얼굴을 쓰다듬어 주고 최구장 등과 작별인사를 나눈 후 길을 떠났다. 그들은 기차를 타고 무난히 영월구에 이르렀다. 그들은 일본 놈들에게 발목을 잡힐까봐 토벌맞은 마을을 에돌아 곧추 장백산 기슭으로 들어갔다. 그들이 어찌나 신출귀몰하면서 령길을 슬슬 에돌아 걸었던지 물 샐 틈 없이 봉쇄한다고 떠들어댄 일본 놈들도 그들을 발견하지 못하였다. 상순은 할아버지를 부축하어 유격대가 일본 놈들을 눈 함정에 빠뜨려 소멸한 깊고 질척질척한 산골짜기를 겨우 건넜다. 일본 놈들은 유격대의 매복습격을 받아 뒈진 숱한 시체를 거둬 갈 새도 없어 눈 덮인 골짜기에 마구 끌어다 던지고 가버렸던 것이다. 그리하여 야마모도 놈을 비롯한 숱한 일본 놈들의 더러운 시체가 골짜기에서 썩어 나 악취를 풍기고 있었다. 상순은 기억을 더듬어 진달래가 만발한 가산 앞에서 잿더미로 된 큰아버지네 통나무집 자리를 찾아냈다. 거기에도 형체를 알아 볼 수 없는 일본 놈들의 시체가 여기저기에서 썩고 있었다. 병완과 상순은 여기 저기 살피다가 머리가 잘린 시체를 발견하였다. 시체는 썩었지만 산짐승들이 물어 뜯어 가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었다. “박병수 열사의 시체입구마.” 그들은 또 박병수의 시체 옆에서 완정하게 남아있는 득호의 시체를 찾아냈다. 열사들의 피 묻은 하얀 옷이랑 그대로 후줄근히 젖어 있었는데 주위에는 진달래가 열사들의 피를 머금고 무럭무럭 자라 활짝 꽃피고 있었다. 그들은 통나무집 널로 짠 관에 두 열사를 모신 후 연분홍진달래가 활짝 핀 양지바른 언덕에 잘 안장해 주었다. 두 열사의 묘지 주위에 진달래꽃을 옮기여 심어 놓고 큰절까지 올리었다. “열사들이여, 고이고이 잠드십시오.” 상순은 고별인사를 하고 무거운 발걸음으로 자리를 떠났다. 그들은 협곡 쪽으로 들어가면서 최구장의 시체를 찾았다. 그때 협곡 안에서 흐느껴 우는 소리가 들리었다. “쉿-” 상순은 식지를 입술에 대며 협곡 절벽에 붙어 서더니 앞을 면밀히 주시하였다. 아니, 저게 뭔가? 성칠 큰아버지와 용천 대장, 만삭이 다 된 진달래 그리고 은녀, 경위원 조 꼬마가 협곡 밑바닥에 놓은 관에 대고 큰절을 올리고 있었다. “큰아버지!” 상순은 괭이를 든 손을 쳐들고 달리어 나갔다. “상순아!” 성칠도 인기척을 느끼고 권총을 빼 들다가 환성을 질렀다. “아버지도 오셨구먼요.” 성칠을 따라 은녀, 진달래, 용천 대장은 병완에게 큰절을 올렸다. 병완은 성칠의 손을 덥썩 잡았다. “여기서 만날 줄은 몰랐구나.” “충국아, 감사해!” 용천과 진달래도 일일이 악수하였다. 병완은 상순을 보고 “우리도 사돈어른께 절을 올리자.”라고 하였다. 그들 조손은 충국과 함께 최구철의 유체에 큰절을 올리었다. “괭이와 삽을 가져 와서 가시아버지를 잘 모시겠습니다.” 용천 대장은 상순 등과 일일이 인사하였다. 만삭이 된 진달래는 뚱뚱한 몸을 웅크리고 앉은 채 눈물을 하염없이 흘리며 아버지를 모시는 것을 바라보았다. 병완과 성칠 등은 눈물과 함께 최구철 열사를 협곡 안에 모시었다. “아버지!” “가시아버지!” “사돈어른 고이 계십소.” 그들은 눈물을 머금고 최구철 열사와 고별인사를 하였다. 진달래는 무거운 배를 안고 차마 걸음이 떨어지지 않아 흑흑 흐느끼며 자꾸 아버지 산소를 되돌아보았다. “아버지, 이제 외손주를 낳으면 데리고 꼭 오겠어요.” 용천은 진달래 팔을 부축해 협곡을 올라갔다. 산에서 20여년 살아온 덕에 진달래는 무거운 몸을 이기며 용케도 협곡 우로 올라갔다. 성칠은 여럿을 돌아보며 “먼저 박병수 열사를 찾아가 보기요.”라고 하였다. 은녀가 바삐 “오빠, 먼저 언니를 찾아가 보기요.”라고 하는데 상순이 말리었다. “박병수 열사와 득호 열사는 우리 제일 먼저 묻어주고 오는 길입구마.” 그들은 이제야 하옥을 찾아가 보게 됐다. 은녀는 밀영자리를 돌아다보며 어깨를 들먹이었다. 그들은 연분홍 진달래꽃이 만발한 펑퍼짐한 산등성이에서 나무에 가려진 하옥의 시체를 발견하였다. 그런데 나무 가지가 어지럽게 널리어 있었다. “여보! 우리 왔소!” 성칠은 나무 가지를 와락와락 헤치며 아우성치었다. “큰어머니!” “언니!” “아주머니!” 그들이 애타게 부르며 다가갔건만 다 썩어 가는 하옥은 대답이 없었다. 병완은 총알에 꿰뚫어진 하옥의 두개골을 붙안고 흑흑 흐느껴 울었다. “맏며느리, 내 며느리를 죽였소. 그저 함흥촌에 붙들어 두었더라면 이런 일이 없었겠는 걸.” 성칠은 하옥의 뼈를 하나하나 건지면서 말렸다. “아버지, 며느리는 항일투쟁을 위해 장렬하게 희생됐습니다. 그는 절대 자기 희생을 후회하지 않을겁니다.” 하옥의 유골을 처참하기로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었다. 하옥의 유골 옆에는 그녀의 피를 머금고 자란 듯이 연분홍 진달래가 듬성듬성 활짝 피어 하느작거리고 있었다. 상순과 충국은 눈물을 머금고 미인 송을 톱으로 베 관을 짰다. 병완과 용천은 무덤을 재빨리 팠다. 성칠과 진달래는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하얀 봇 나무껍질을 벗겨다 하옥의 시체를 감싼 후 관안에 조심스레 넣었다. “여보, 외로운 대로 고이 잠드오. 내 일본 놈들을 몽땅 소멸하고 광복의 날을 맞을 때 다시 찾아 올 게.” 드디어 커다란 봉분이 생기었다. 성칠은 상순을 한쪽으로 불러 가 조용히 말하였다. “만약 어느 날 내가 일본 놈들캉(놈들하고) 싸우다가 죽으면 여게 묻어 달라.” 상순이 눈물을 흘리며 머리를 끄덕이었다. 그러나 병완은 세 귀 눈을 뚝 부릅떴다. “맏며느리랑 사돈어른이랑 희생됐는데도 모자라 그런 불효를 저지를 소릴 하니?!” 그러자 충국도 “김 대장은 꼭 살아 일본 놈들에게 복수의 불벼락을 안겨야 하오.”라고 말하였다. 그들은 마지막으로 하옥에게 큰절을 올리었다. 상순은 하얀 구레나룻이 더부룩한 큰아버지가 눈물을 줄줄 흘리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상순과 진달래는 여기 저기서 진달래를 파다가 하옥의 묘지 주위에 돌아가면서 심어놓았다. 그들은 협곡 막바지를 지나 다시 통나무집 자리에 갔다. 열사들의 붉은 피를 먹고 연분홍 진달래가 곱게 피어 봄바람에 하느작거렸다. 박병수와 득호 두 열사의 무덤에 큰 절을 올리었다. 은녀는 병수의 무덤 앞에 쓰러지어 대성통곡 쳤다. “여보세요. 우린 한뉘 머슴살이를 하다가 유격대에 들어 살만하니 이렇게 가다니오? 내 배속의 애는 어떻게 하라오? 아버지 없는 애 불쌍해 내 어떻게 혼자 살라오?” 성칠 등은 모두 은녀를 여겨 보고 몸이 그런 것을 발견하였다. 은녀는 만삭이 다 된 진달래 보다 서너 달 늦었던 것이다. 진달래나 성칠이나 지어 용천이까지 은녀에게 등한한 것이 미안하였다. 성칠은 은녀를 부축해 일으키었다. “미안하다. 은녀야. 네가 몸이 이런 걸 모르고 계속 찬 물에 밥을 짓게 했구나.” 은녀는 일어나 병수의 무덤을 바라보며 흑흑 흐느끼며 어깨를 들먹이었다. 병완을 비롯한 성칠과 용천, 진달래, 상순, 충국은 모두 장백산 기슭의 밀림 속에서 열사들의 희생에 눈물을 흘리었다. 그들은 열사들의 피로 물든 장백의 밀림을 바라보았다. 미인송이 꽉 들어선 밀림 속의 산과 산골짜기마다 이름 없는 유격대 열사들의 시체가 묻혀 있었다. 어느 바위돌 밑에, 고목밑에 이름 없는 항일 열사가 묻혀 있는지 누가 알랴. 아, 장백의 밀림아, 너는 잊지 말라. 산에 산마다 연분홍진달래가 활짝 핀 동만의 산줄기마다, 산마루마다, 내와 들에 소리 없이 누워 있는 항일열사들의 이름을. 산과 산골짜기마다 열사들의 선혈을 머금고 활짝 핀 장백산 기슭의 진달래꽃은 열사들을 기리어 머리 숙이고 하느작거리며 흐느끼고 있었다. 그렇다, 장백산의 줄기줄기 뻗어간 산마다 뒤덮으며 봄이면 피어나는 진달래는 살아 숨 쉬는 항일유격대 선열들의 상징이 아닌가!                            6. 갈림길 열사들의 유골을 묻어 준 후 성칠과 용천은 은녀와 진달래를 데리고 북만으로 떠나게 됐다. 성칠은 아버지 앞에 큰절을 올리면서 말하였다. “아버지, 오래지 않으면 항일전쟁은 우리 승리로 끝날 거 같습니구마. 이제 우리 유격대가 북만에서 조선의용군 3지대를 따라 동만으로 나갈 때도 멀지 않습구마. 한철주 놈을 아직도 척살하지 못했습니다. 그 놈이 도망친 곳을 정찰해내 척살해야겠습니다. 그때까지 마을 사람들과 항일유격대 가속들을 잘 묶어 세우고 그들을 잘 보호하면서 편안히 계십소.” 병완은 성칠의 손을 잡았다. “얘야, 이젠 상순이랑 다 컸으니 마을을 근심하지 말라.” “이제 마을에 우리 유격대 사람을 보내 아버지와 상순을 돕게 하겠습구마.” 상순은 큰아버지와 갈라질 때 조용히 강청을 드렸다. “나도 유격대에 들어가면 어떻습니까?" "호미자루를 쥐고 농사를 지어 유격대에 쌀을 지원하는 것도 항일투쟁을 하는 거야." "청년 기분에 맞지 않습니다. 유격대에 들어가 총을 쥐고 통쾌하게 일본 놈들을 족치고 싶습니다.” 그러나 성칠은 상순을 보고 정색해 말하였다. “항일전쟁은 오래잖아 승리할 거야. 이제 지방에는 너 같은 골간이 필요하다. 함흥촌 일대 집단부락촌 촌장 지학사 악질지주와 싸우고 가난한 백성들을 구제하면서 쌀을 유격대에 지원해라. 이것도 항일구국투쟁을 지원하는 것이라는 걸 잊지 말라.” 상순은 큰아버지 고집불통 성질을 알기에 더 말하지 못하고 작별인사를 하고는 충국과 함께 함흥촌으로 돌아왔다. 어느날, 충국의 아버지 장학산이 충국을 보내 상순을 불렀다. 상순은 또 빚 재촉을 할까봐 바늘방석에 앉은 듯이 안절부절 못하면서도 눈치를 흘금거리며 토성안 덩실한 집으로 들어갔다. 장학산은 아주 상냥한 표정을 지으면서 상순을 맞았다. 그는 상순이가 높다란 중국 구들 턱에 걸터앉자마자 빚재촉은 번지지도 않고 이런 말을 꺼냈다.      “난 자네를 충국이랑 리국이랑 형제처럼 생각하네. 물론 소작료랑 각박하게 받아 냈지만 건 다 양아들 인삼이 영도하는 항일유격대에 쌀을 한 알이라도 더 보내기 위한 거였네. 널리 양해하게나.” 상순도 류창한 한어로 한마디 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합구마. 우리 조선에서 살 길이 없어 소서구로 찾아 왔을 때 충국의 아버지가 황무지를 개간해 밭을 일구게 주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살았겠습둥?” 장학산은 머리를 끄덕이면서 뒷말을 이었다. “이젠 일본 놈들은 오래지 않아 망하게 됐네. 우리 중국 사람들과 조선 사람들은 허리를 펴고 진정 이 땅의 주인이 되게 됐어.” 상순은 장학산을 놀랍게 다른 눈길로 보게 됐다. 그는 장학산을 그저 탐욕스러운 지주로만 보았는데 정치에 꽤나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발견했다. 장학산은 계속 정색해 말하였다. “저 지학사랑 일본 놈의 촌장이 돼서 잠시 너덜거리지만 오래 가지 못해. 이 마을에서 네 할아버지와 아버지 말이 서지. 넌 또 청년들의 우두머리야. 이 마을 대부분 사람들은 모두 너희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따라 조선 함흥에서 온 친척이거나 고향친구들 아니고 뭐야?” 하긴 온 마을 사람들을 쭉 둘러보아도 그랬다. 아래사랑집 형제와 김관준, 유서집 김상진, 아간집 김상근, 김태철이네 사형제, 사돈 집들인 김영진과 김영범, 김응범네 삼형제, 춘실의 큰집과 작은 집, 최구장네 자손 다섯집,한 고향 사람들인 덕성과 장산, 송국, 백룡이네 일가 그리고 유격대에 들어간 운주동의 김칠백, 허철석, 가마골의 임호, 용기, 석수, 정형만 등 부모들도 모두 성칠의 부탁대로 창준과 기준 형제를 따라 함흥촌에 왔던 것이다. 그들의 중심에는 김병완과 창준, 기준이 있었고 그 뒤에는 유격대 대장을 하는 성칠이 있었다. 장학산은 그런 점을 모두 감안하고 있었다. “넌 아주 사내답구 전도 있는 청년이야. 아버지를 닮아 힘도 센데다가 주먹도 세고. 허나 이 동란의 시대에 길을 잘 들어서야 전도를 개척할 수 있는 거야. 무턱대고 아무나 따라 가면 전도를 망칠 수도 있어. 지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넌 충국과 의형제이기에 내 가만히 충고해 주는 게야.” 장학산은 유들유들한 낯에 다른 때에는 볼 수 없었던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 상순은 장학산이 그저 소작료나 떼먹는 일반 지주가 아니라는 것을 점차 느끼었다. “일본 놈들이 망하면 이 세상은 국민당과 공산당의 세상이야. 지금 추세를 보아서 어느 당 세상이 되겠는 지는 아직 딱히 몰라. 이럴 때 잘 못 길을 들어서면 멸문지화를 당할 수도 있단 말이야.” 이런 말은 유격대에서도 들어 본 적이 없는 말이었다. 상순은 호기심이 들어 한마디 물어 보았다. “그럼 충국 아버지는 어느 길에 들어섰습둥? 당연히 우리 큰아버지가 이끄는 유격대를 따라 가기로 했겠습지?” 장학산은 나란히 앉은 충국과 상순을 번갈아 보면서 목소리를 낮췄다. “이런 말은 너네만 듣고 바깥에 나가 아무와도 말하지 말라. 국민당 군은 800만 대군이야. 거게다 지방 보안대와 자위대, 경찰들까지 합하면 천만명두 더 된대. 공산당군이야 고작 백만도 되나마나 하지. 비록 여기 동만에는 조선 항일유격대가 많아 보이고 국민당군은 하나두 보이지 않는거 같지만 말이야. 전 중국을 내다 봐야 하느니라. 난 상순은 우리 충국과 의형제를 맺었고 내 양아들의 조카니까 생각해 말하는 거야. 아무리 봐도 너와 충국은 국민당을 따라 가는 게 좋을 거 같아. 국민당의 삼민주의를 봐라. 국민당군은 전적으로 백성들이 잘 살게 하는 당이라는 걸 보여주지.” “예?” 상순은 국민당 말을 처음 듣는지라 깊이 더 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 우리 큰아버지도 국민당입둥?” 그러자 장학산은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었다. “아니야. 그 일 때문에 정말 속이 탄다. 성칠이네 유격대는 중국 공산당이 령도하는 조선족항일유격대지.” “그럼 큰아버지는 공산당입둥?” 장학산은 머리를 끄덕이었다. “이전에두 난 공산당이 국민당 보다 약하다고 양아들을 보고 유격대를 데리고 국민당에 들어가라고 하니 통 말을 들어야 어쩌지. 그 애 전도가 참 막막하구나. 어쩜 세상이 돌아가는 형편도 모르고 한사코 공산당을 따라 간단 말이야? 사람이 사느라면 길에 잘 못 들어설 때도 있지. 허나 그걸 알았을 땐 인차 바른 길로 바꿔 걸을 줄도 알아야 해. 헌데 그 놈의 고집이 정말 사달이야.” 장학산은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더니 뒷말을 이었다. “상순아, 네라도 내 말 듣고 자초부터 바른 길에 들어서라. 넌 마을의 청년들을 묶어세워서 국민당 군을 따라 가야 한다.” “예? 그럼 큰아버지네와 다른 길을 가란 말입둥?” 장학산은 머리를 끄덕이었다. “장차 인삼과 성칠도 내 말 들을거야. 바른 길로 돌아오게 해야 돼.” 장학산은 상순을 흘끔 쳐다보더니 시탐조로 물었다. “너 혹시 성칠의 공산당에라도 들지 않았니?” “아니, 큰아버지가 공산당 말을 외운 적은 있지만 아직 공산당에 들지 않았습구마.” “음.” 장학산은 머리를 끄덕이었다. “그럼 잘 생각해 보고 결정해라. 절대 강요하지 않는다. 만약 마을 청년들을 데리고 국민당 군에 들어가려면 내 연줄을 달아 줄 게. 넌 마을 청년들을 데리고 국민당 군에 들어가자마자 아마 패장쯤은 시킬 거야.” 장학산은 달콤한 말로 상순과 충국을 유혹하였다. 그러나 상순은 국민당 군이 어떤 군대인지 모르고 대답할 수 없었다. 게다가 성칠 큰아버지가 영솔하는 유격대와 다른 군대라고 하니 소대장을 시킨다구 해도 대뜸 들어가겠다고 대답할 수 없었다. 장충국은 담배물주리를 뻑뻑 빨며 연기 사이로 가슴츠레 한 눈으로 상순의 입이 열리기를 바라보며 기다렸다. 그 눈길은 어쩜 그렇게도  절절한 빛이 넘쳐나겠는가. 상순은 무슨 궁리를 하면서 곁눈질하는 장학산이 흉측해 구들 턱에서 엉덩이를 뗐다. “내 좀 잘 생각해 보겠습구마. 숱한 마을 청년들과 관계되는 일인데 경솔하게 대답할 수 없지 않습둥?” 옆에 있던 충국이 상순을 따라 토성 대문 밖에까지 나오면서 나직이 말하였다. “상순아, 우리 의형제가 함께 국민당 군에 들어가 한자리씩 하자. 천만대군과 백만 대군이 싸우면 어느 군이 이기겠니? 국민당 군이 이길 게 빤하지 않니? 장차 국민당 세상이 될 텐데 중공군에 들어가 뭘 하겠니? 자칫 감옥살이 아니면 총살당하겠는데.” 상순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벼슬 욕에 흥분돼 지지벌개진 충국의 낯을 보며 속으로 놀라운 감을 느꼈다. “잘 생각해 보고 우리 아버지한테 말해라. 우리 아버진 진심으로 너와 날 생각해 말한거야.” 상순은 “호의는 감사하다.”라고 말하고는 인차 자리를 떴다. 그가 함흥촌에 들어서니 지학사가 한창 마을에 전기 줄을 가설하는 일본 놈들과 뭐라고 개화장을 휘두르며 야단치고 있었다. 지학사는 상순을 보자 웃음 속에 칼을 품고 입을 널어놓았다. “에이고, 우리 마을 청년들 우두머리가 왔구나. 봐라. 대일본제국에서는 우리 집단부락에 모범집단부락 편액을 달아 주고 전기까지 놔준다. 우리 모범집단부락 사람들이 이젠 암흑에서 벗어나 환한 전등불 밑에서 살게 됐지 않았어?” 상순도 이젠 곧은 울뚝밸만 쓰는 것이 아니라 능청스럽게 놀기 시작하였다. “오, 촌장어른 수고 많구먼. 촌장 덕분에 우리 마을이 변신합구마. 수고 많소.” 지학사도 상순의 그런 말에 속으로 놀라움을 느끼었다. (그 놈이 점점 여물어 가는구나.) 사실 지학사는 이 마을에서 기준이네 일가가 제일 눈에 든 가시 같았다. 또 기준과 상순이 제일 두려웠던 것이다. 그리하여 상순을 일제 강제징역에 보내 버리려고 획책했지만 치질이 와서 성사하지 못했고 전번에는 졸개를 시켜 상순이네 집 소 구유에 양 재물을 타 놓게 하여 둥글 소를 죽였던 것이다. 그는 손호표 지주가 기준이네 집에 와서 떠들어대자 토성 망루 우에서 구경하면서 잘코사니를 불렀던 것이다. 그러나 기준과 상순 부자는 디뎌 놓을수록 더 강인하게 살아나는 것이 아니겠는가. 상순은 속으로 지학사를 피씩 웃었다. (모범집단부락? 알기나 해? 네 모범집단부락 안에서 숱한 유격대 가족들이 안전하게 보호를 받으면서 살고 있다는 걸. 흥! 아무리 전기를 놓아도 일본 놈들을 좋아할 거 같으냐? 일본 개다리촌장 놈아, 네 놈부터 죽여치우자고 칼을 썩썩 갈고 있어.) 그는 큰집으로 들어가 금방 일 밭에서 돌아온 할아버지에게 위방에서 조용히 산으로 갔던 일과 장학산이 하던 말을 이야기하였다. 그러자 병완은 나직이 말하였다. “절대 장학산 말 듣지 말라. 우린 모든 걸 성칠과 물어 본 후 한 걸음, 한 걸음 온당하게 나가야 해. 어느 쪽이 힘이 세다고 그 쪽에 붙을 게 아니야. 우리는 이제껏 일본 놈들이 아무리 백만 관동군을 가지고 있어도 허리를 굽히지 않고 그 놈들과 맞서 싸우면서 꿋꿋하고 떳떳하게 살아 왔다. 우린 양심적으로 우리 백성들을 위해 싸우는 군대를 도와야 한다. 잠시 공산당군이 힘이 약하고 수가 적더라도 성칠이 영솔하는 유격대가 가는 길을 따라 가는 게 옳다.” 상순은 머리를 끄덕이었다. “글쎄 말입니다. 나도 그래서 장학산한테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습구마. 큰아버지가 영솔하는 유격대야 말로 우리 가난한 백성들을 잘 살게 하려고 싸우는 우리 빈고농민들의 군대인 거 같습구마.” 병완은 담배를 풀썩풀썩 피우다가 무겁게 말하였다. “이후에는 충국이 형제한테 유격대 말을 하지도 말라. 갈 길이 다르니까.” 그들 조손 3대가 한창 이야기하는데 아래 마을 조개덕의 조덕림 지주가 찾아 왔다. “김영감, 있소?” 그는 병완에게서 눈을 떼여 상순을 보더니 “에이, 때마침 상순이 있구나.”하고 반색하며 집안에 들어왔다. 기준은 조 지주를 인사하고 자리를 권하였다. 조덕림은 인품이 꽤나 좋아 최구장네 경숙이, 경인이, 죽순이, 경민, 경석이네까지 모두 밭을 주어 붙이게 하였다. 하여 병완이나 상순은 꽤나 호감이 있었다. “무슨 일루 해두 다 지는데 왔소?” 기준의 물음에 조덕림은 “짧은 해에 길게 말할 게 없소." 라고 하더니 뒷말을 이었다.  "내 이 집 전도를 생각해서 말하는데 누구하구두 말하지 마오.” “이젠 일본 놈들은 오래지 않아 망해서 섬나라로 쫓기어 갈 게요. 내 동생은 신경에서 국민당군 퇀장을 하오. 이 집 상순인 중국 말도 잘하고 이 마을 청년들의 우두머리 아니고 뭐요?  마을 청년들을 데리고 국민당 군에 들어가면 내 동생 조덕산과 말해서 한자리 시키겠소.어떻소?” 상순은 호기심이 난 척 하면서 속을 빼보려고 물었다. “그 먼 신경 부근으로 어떻게 가겠소? 여기 부모처자를 두구 간다는 것도 말이 아니오.” 조덕림은 바깥을 두리번거리더니 말하였다. “신경 부근까지 갈 필요 없소. 요즘 우리 동생이 동만으로 나옵네. 여기에서 군대를 모집해 일본 놈들과 싸울 예산이요.” 기준과 상순은 머리를 끄덕이었다. 한참후 조덕림이 뭐라구 또 말하자고 할 때 상순이 입을 열었다. “난 농사나 지으면서 부모에게 효성을 다할 생각이지 총을 쥐고 싸울 생각이 없소.” “그래도 장학산은 자기가 말해서 자네 국민당 군에 들 생각이 있는 것 같다고 하던데.” 기준과 상순은 대뜸 조덕림과 장학산이 한통속이라는 것을 눈치챘다. 순간 조덕림과 장학산을 경계하게 됐다. “잘 생각해 보기요.장학산과 생각해 보겠다고 했지 국민당 군에 들겠다고 한 적은 없소.” 상순은 이렇게 말했지만 기준은 아예 거절해 버리었다. “그만 둬라. 농사를 짓지 않고 괜히 싸움에 삐치다가 목숨을 잃겠느냐?” 조덕림은 다가앉으면서 지껄이었다. “상순이 마을 청년들을 데리고 국민당군에 들어가면 내나 장학산은 소작료를 절반만 받겠소. 아니, 2할만 받겠소. 그럼 어떻소?” 그래도 기준은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싫소. 우리 농사군들은 제게 차례진만큼 먹으면 되오. 우린 공 걸 먹기 싫소.” 조덕림은 더 말했자 쓸데없는 줄 알고 엉거주춤 일어나면서 한마디 내뱉었다. “우리 중국에는 이런 말이 있어. 권하는 술은 마시지 않고 벌주를 마시겠는가. 잘 생각해 보게나.” 그 선뜩선뜩한 날이 선 말에 기준과 상순은 선뜩해 남을 느꼈다. 그러나 량심은 버릴 수 없고 기개는 접을 수 없었다.  
93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56) 댓글:  조회:2088  추천:1  2016-11-23
                         2. 약 담배론 번신할 수 없어        상순은 빈손으로 집으로 돌아 갈 면목이 없었다.        (큰 매형과 둘째 매형에게서 숱한 돈을 꿨기에 빚 구렁텅이에 빠지고 말았으니 이 일을 어찌 한단 말인가?)        충국은 자기 말을 듣지 않아 망했다고 하면서 다시는 상순을 따라 약 담배장사를 하지 않겠다고 집으로 돌아가 버리었다. 상순은 진수해 큰매형네 집에서 며칠 묵으면서도 돈을 더 꿔달라는 말을 꺼내지도 못하였다.        상순은 가슴이 갑갑해났다. 약담배장사가 잘 되지 않은 것도 있겠지만 전번에 교하 려관 주인한테 약담배짐을 맡겨놓고 은실을 구하려고 길림에 갔다가 은실을 만나지도 못한 것이 속에 내려가지 않았다.      위안소가 있던 부근 가게 사람들과 물어보니, 어떤 사람들은 일본놈들이 그녀들을 끌고 신경에 갔다고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일본군을 따라 관내에 들어갔을 것이라고도 했다.      (다 지학사 놈 탓이야. 그 놈은 내 춘실을 사랑하는 걸 알고 보복하려고 밤중에 일본 놈들을 끌고 가서 춘실과 은실을 위안소에 팔아넘긴 거야. 지학사 놈을 어떻게 하면 원쑤를 다 갚을가.)         상순은 주먹을 으스러지게 쥐고 이를 뿌득뿌득 갈았다. 상순은 진수해를 돌면서 궁리하고 궁리하던 끝에 일본인들이 꾸리는 흥농합작사에 들어가 이자 돈 150원이나 꿨다. 그는 그 이자 돈을 밑천으로 몇 달 동안 조선으로 몇 번 왔다 갔다 하면서 끈질기게 약 담배장사를 하였다. 웬 영문인지 하느님이 상순을 빚 구렁텅이에서 빠져나와 살아라고 도왔던지 약 담배장사가 잘 돼 3,300원이나 벌었다. 어느 날 상순이가 옷장 선대에 끌로 구멍을 파고 약 담배를 밀어 넣은 후 나무쐐기를 살짝 박아 막아놓을 때었다. 기준은 상순을 보고 말려싿.  “이젠 그만하면 됐다! 그 돈이면 저 소서구라도 사겠다. 꼬리 길면 밟힌다.” 병완도 상순을 말렸다. “얘, 약 담배장사를 해서야 집안을 구하고 우리 조선 사람들을 다 구할 수 있느냐? 유격대를 도와 일본 놈들을 몰아내야 해.” 상순은 개의치 않았다. “알만 합구마. 할아버지, 장사라는 건 될 때 바짝 해야 됩구마. 이제 좀 더 벌어서 진수해에 기와집을 사 놓고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모시고 잘 살면서 공부를 좀 해야 되겠습구마. 약 담배장사를 한다고 유격대를 돕지 않겠다는 것도 아닙구마.” 기준과 병완은 상순의 고집을 아는지라 더 말리지 않았다. 상순이 옷장을 수레에 실을 때었다. 동남쪽에서 황둥개가 뛰어 오면서 꼬리를 저었다. “워리- 워리-” 상순은 춘실의 황둥개 뒤대가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중얼거리었다. “네 여주인은 날 욕해도 넌 아직도 날 반기는구나.” 명옥은 사랑에서 저녁 죽을 끓이다가 뾰로통해했다. “아들딸이 서넛 됐는데도 춘실이야?” 상순은 황둥개 뒤대가리를 만지다가 이전에 개귀에 쪽지를 써넣던 생각을 하면서 어망 간에 개 귀에 손이 갔다. 웬걸, 뭔가 쥐이는 것이 있었다. “이게 뭐야?” 상순이 손더듬질해 꺼내 보니 쪽지가 아니겠는가. 쪽지에는 이렇게 또박또박 씌여 있었다.   개 같은 상순아, 네 아들 을준이를 백 과부네 양아들로 보냈다.   (뭐라고? 을준이? 이름을 더럽게도 지었군. 남의 아버지 준 자 돌림으로 짓다니? 좋은 아들을 제 손으로 키울게지. 백과부네 집에 양아들로 보내? 미쳤어, 미쳐.) 상순은 황둥개를 보고 “너 여기서 기다려라.” 하고는 마당에서 까만 숯 쪼박을 주어 가지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식칼로 숯 조박을 뾰족하게 깎아 가지고 쪽지 뒤에 이렇게 썼다.   춘실아, 왜 내 말을 듣잖니? 이제 돈을 벌어 진수해나 국자가에 벽돌집을 사놓고 너 모자간을 데려다 갈게. 애를 남에게 주지 말라. 상순   쪽지를 다 써서 말아가지고 바깥에 나오니 황둥개가 어데 갔는지 없었다. “이 놈 개새끼, 개똥도 약에 쓰자면 없다더니 원, 참.” 도리머리를 흔들며 집안을 기웃거리다가 부엌에서 갓 세살 밖에 안 되는 영자를 업고 맴도는 명옥이 띄었다. “여보, 나오오.” “저녁이 늦은데?” 명옥은 행주에 손을 닦고 바깥으로 나왔다. 그는 상순의 말이라면 죽으라는 말 외에는 일언반구 듣지 않을 때가 거의 없었다. 상순은 명옥을 바자굽 한쪽으로 데리고 가서 쪽지를 꺼내 주면서 말하였다. “이 쪽지를 춘실한테 갖다 주오.” “무슨 쪽지요?” “글쎄 가져다주라는데.” “계속 춘실과 좋아할 작정이오?” “애를 남에게 주지 말라는 쪽지요.” “남이야 애를 주든 말든 무슨 상관이오.” “떠들지 말고 가져다줘. 이제 돈을 많이 벌면 당신 치마 감을 사다 줄게.” “피- 누가 얼리울 거 같아?” 코 웃음 치면서도 명옥은 속히는 셈치고 쪽지를 가지고 춘실을 찾아가 가만히 주었다. 춘실은 명옥을 보내 놓고 다시 쪽지를 펼치어 보더니 코웃음 쳤다. “픽, 애 아까우면 당초에 그만 둘 거지.” 한편 상순은 옷장을 수레에 싣고 진수해역으로 올라갔다. 역무일군의 옆구리에 스리슬쩍 돈을 찔러 주고 길림에 붙이는 꼬리표를 옷장에 붙여 놓고 집으로 돌아 왔다. 이튿날 아침에 상순이 치분 통에 넣은 물약담배를 배낭에 지고 떠나려고 할 때다. 선준이 글쎄 약 담배를 팔러 용정에 갔다가 붙잡혀 결박당한 채 일본 놈들에게 끌려 마을에 들어서는 것이 아니겠는가? (아차, 이게 무슨 일이야?) 겁을 집어 먹은 상순은 동불사역에 실어간 옷장을 찾으러 부랴부랴 달리어 갔다. 그런데 직접 가자다가 역에서 덜미를 잡힐 것 같았다. 동불사역 부근에서 서성거리다가 그는 진수해소학교 교장의 집을 찾아 갔다. 집안에는 교장부부에 구들에서 앙기장, 앙기장 걸음마를 타는 애 밖에 없었다. 그는 돈 50원을 꺼내 교장에게 주면서 지청구를 들이댔다.  “교장 선생님, 난 함흥촌의 상순이라고 부르오. 수고스러운 대로 내 길림에 부친 옷장이 있는가 봐 주겠소?” 교장은 돈을 보고 마른 침을 꼴깍 삼키더니 물었다. “옷장에 뭐 있소? 자기절로 알아봐도 되겠는데도 뭘 이러오?” 교장은 돈을 되밀어 주었다. 상순은 돈을 교장의 손에 쥐여주었다. “여보게, 일본 사람과 다툰 적이 있어 가기 불편해 그러오.” 그래도 교장은 이상하해 하였다. 하긴 옷장을 팔아도 50원을 하지 않겠는데 옷장을 찾아오라는 것도 아니고 있는가만 봐 달라면서 많은 돈을 내 놓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돈이 흑사심이요, 견물생심이라고 돈 앞에서 교장도 용빼는 수가 없었다. 그는 아내의 눈치를 흘끔 보더니 돈을 받아 넣었다. “내 알아 보지. 집에서 기다리오.” 교장 선생은 그 자리로 역에 나가 알아보고 돌아 왔다. 그는 아주 긴장한 낯빛으로 상순을 보면서 말했다. “옷장이 아직 있습데. 이제 역 전등불이 꺼지면 옷장을 훔쳐내 가지고 달아나오." 상순은 그날 저녁까지 교장의 집에서 먹고 나가 역 부근에 숨어 있으면서 전등불이 꺼지기를 기다렸다. 일각이 삼추같이 지루하게 느껴지었다. 한밤중이 돼서야 전등불이 끝내 꺼지었다. 상순은 교장이 준 집게로 철조망을 끊고 기어들어가 옷장을 찾아 미리 준비한 각반으로 묶어서 지고 살금살금 역 화물 처에서 빠져 나왔다. 무슨 힘이 그로 하여금 옷장을 지고 단숨에 걸음아 나를 살리라고 함흥촌에까지 돌아오게 했는지 모른다. 그는 집에 오자마자 웃새집에 가서 집게와 못 빼기를 가져다가 빠드등 빠드등 옷장 네 각을 뽑아냈다. 그는 옷장 선대에 박은 쐐기를 집게로 빼내고 구멍에 넣은 약 담배를 털어 대야에 담았다. 그때 갑자기 일본 순사 놈들이 마을을 덮쳤다. “주인 있소?” 누군가 울안으로 들어왔다. 피뜩 바라보니 진수해소학교 교장 같아 보였다. (아니, 교장이 순사 놈들을 데리고 온 게 아니야?) 깜짝 놀란 상순은 못 빼기를 쥔 채 와닥닥 외양간 쪽으로 뛰어 나갔다. 그런데 울안의 소구유 말뚝에 이마를 딱 쫗았다. “앗!” 비명소리와 함께 풀썩 꼬꾸라지었다. (물앉아 있으면 잡혀!) 상순은 간신히 일어나 외양간으로 달려 들어가 뒤 문으로 빠져 나갔다. 그런데 발이 소똥물구덩이에 푹 빠지었다. 그러나 상순은 발을 탁 털고는 못 빼기를 쥔 채 영범이네 집에 달려갔다. 눈치를 차린 영범이네는 마당에 가마니를 펴 놓고 절을 하면서 제를 지내는 척하였다. 그 틈에 상순은 술을 한사발이나 쭉 들이 켜고 고방에 들어가 들어 누워 자는 척 하였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교장 새끼 순사 놈들에게 고발한 거 같아.) 상순은 세상에 정말 믿을 사람이 없다는 것을 새삼스레 느꼈다. 상순이 달아난 후 창준과 상길은 일본 순사를 외양간 쪽으로 들어 가지 못하게 막아서서 인사하는 척 하였다. 아래사랑집 석철과 석은은 창준이네 집으로 놀러 왔다가 일본 순사를 자기 집에 데리고 가서 술상을 차리어 대접하였다. 그 틈에 기준과 상우는 옷장을 마사 선대를 김치 움에 처넣었다. 그들은 창준과 상길이 바깥에서 지키게 하고 김치 움에 들어 가 옷장 선대 구멍에 밀어 넣은 약 담배를 하나하나 꺼내 대야에 담았다. 일본 순사 놈은 술에 취해 겨우 운신해 진수해로 돌아갔다.        "안돼!"       상순은 술을 마시고 자는척 하다가 벌떡 일어났다. 그는 곧추 웃새집에 달아가 사랑방 중천정에 숨겨둔 권총을 꺼내 옆구리에 차고 순사놈의 동향을 살폈다. 만약 순사 놈이 자기를 나포하려고 한다면 권총으로 순사 놈과 개다리 교장을 쏴 죽이고 유격대를 찾아가려고 했다.       그러나 순사와 교장이 가버린 것을 확인한 후 상순은 웃새집 사랑방 중천정에 권총을 되 감춰놓고 집에 돌아 와 시름 놓고 기준과 함께 김치 움의 약 담배를 꺼내보았다. "아니, 이게 뭐야?" 옷장 선대 구멍에서 얼었다 녹았다 해 약 담배가 변질해 팔 수 없게 돼버리지 않았겠는가! 병완은 상순을 교양할 때가 왔다고 생각하였다. “내 뭐라더냐? 그만하면 됐다는데도. 30원이면 소를 살 수 있는데 3, 300원이면 땅 몇십헥타르도 살 수 있지 않느냐? " "이젠 손을 싹 씻고 그만둬라. 이젠 쓸데없는 짓을 하지 말구 유격대를 도와 일본 놈들을 이 땅에서 몰아내구 나라를 찾아 잘 살 궁리나 해라. 오직 유격대를 따라 혁명해야만 나라를 잃은 우리 조선 사람들은 살 길이 있느니라.” 상순은 기가 꺾이지 않았지만 할아버지의 말씀에 도리가 있다는 것을 깊이 느꼈다. 그는 웃새집 중 천정에 다시 감춰둔 권총을 생각하자 마음이 든든해졌다. (그래, 먹을 게 없으면 유격대를 따라 일본 놈들을 쳐 몰아내구 지주, 한간 놈들을 청산해 살아야지.) 상순은 속으로 윽벼르면서 주먹을 으스러지게 쥐었다.                                       3.효자 상우는 소서구에 되돌아가 토벌 때 불을 맞은 집을 손질하고 부모를 모시고 살았다. 상순은 집도 없이 계속 웃새집 손바닥만 한 사랑방에 들어서 갑갑하게 살았다. 명옥은 빚에 깔리어 막막한데 먹을 쌀마저 떨어져 큰집, 작은집을 돌아 다니면서 쌀을 찧어 주거나 떡을 쳐주거나 두부콩을 갈아주고 콩물이나 죽물이나 얻어먹으면서 간신히 목숨을 이어갔다. 명옥이 영수를 업고 속에 애를 밴 몸으로 큰 매돌 돌리노라고 얼마나 고달팠겠는가! 원래 당나귀나 끌고 돌아가면서 굴릴 큰 매돌 밀어 굴리노라고 굶은 그녀가 얼마나 고생했겠는가! 명옥은 매돌 자루를 놓으면 넘어질까 봐 꼭 붙잡고 간신히 돌고 또 돌았다. 배고프다 못해 배가 쓰려나고 아프고 나중에는 메스껍고 눈앞이 아물거리더니 아찔해났다. 그래도 그녀는 입을 꼭 옥 물고 끝까지 콩을 다 갈았다. 지새금은 명옥을 보고 “젊은 각시 콩을 이오.”라고 하였다. 명옥은 할 수 없이 허리띠를 꽉 졸라매고 간 콩을 담은 함지를 새금이 이워주자 이고 한 걸음 한 걸음 간신히 걸어 나갔다. 설상가상으로 웃새집으로부터 시준네 작은집으로 가자면 얼음 강판을 건너야 하였다. (남의 콩물함지를 떨어뜨려 마스면 어쩌겠는가?) 애를 업고 속에 애를 밴 명옥은 콩물 함지를 이고 이를 옥 물고 얼음 강판을 내려다보면서 한 발 한 발 종발걸음을 치며 조심조심 걸어 나갔다… 명옥은 너무 도정신해 콩 함지를 이고 시준네 작은집에 다 가서 콩물함지를 내려놓았다. 그러나 그녀는 눈앞이 아찔해나 물앉고 말았다. 그래도 그 집에서 끓인 콩물이나마 둬 그릇 얻어먹고 나니 집으로 돌아 올 수 있었다. 어느 하루, 지새금은 금재를 보내 명옥을 불러 오게 했다. 국자가에 내려 간 큰집 상철아주버니와 조카 형내 그리고 손자 영기까지 놀러 왔는데 명옥더러 소서구에 와서 밥을 지어라는 것이었다. 명옥은 큰집 일이자 자기 일로 생각하고 애를 업고 눈보라를 무릅쓰고 소서구에 있는 큰집으로 갔다. 명옥은 형님 지새금과 손을 맞춰 기장밥에 두부까지 앗아 큰집 상철이네 조손 3대를 잘 대접하였다. 그런데 지새금은 밥이 모자란다면서 명옥에게 밥을 먹고 가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기준은 위방에서 듣다못해 “맏며느리, 작은며느리를 밥을 주오.” 라고 하였다. “저녁밥이 모자라는데도 그럽둥? 시아버지는 좀 조왕간 일을 작작 삐칩소. 그저 약방 감초처럼 뭐나 다 삐칩둥?” 기준은 상우를 쏘아 보며 혀를 끌끌 찼다. 그런데 어진 상우는 그저 자기 밥이나 먹으면서 안해한테 일언반구도 하지 못했다. 기준은 “음~” 하더니 “내 밥사발을 내려다 주오.”라고 하였다. 명옥은 시아버지와 형님이 싸울 것 같아 밥도 먹지 않고 애를 업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아버님, 감사합구마. 집에 가 밥을 먹겠습구마.” 기준은 “집에 가 먹을 밥이 어디 있다고 그러오?” 라고 하며 반 남은 밥그릇을 기어이 들고 나왔다. 지새금은 시아버지한테 눈을 샐쭉 흘기면서 두덜거리었다. “에이고, 그저 작은며느리, 작은며느리 하면서. 데리고 들어 온 며느린가?” 상철은 제수가 너무하는 것 같아 눈살을 찌푸리며 밥맛을 다 잃었다. 기준은 듣지 못한 척 하면서 명옥을 가지 말라고 자꾸 말렸다. 그러나 명옥은 애를 업고 밥술도 들지 않고 기어이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들어섰다. 풍설이 하도 윙- 윙- 기승스레 일어 굶은 명옥은 주린 배를 끌어안고 장개골 묘지가 가득한 곳까지 터벅터벅 걸어 와서 눈앞이 가물거려 쓰러지고 말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러 갔을까? 맵짠 추위에 얼어들어 견디기 힘들어 우는 어린 애의 자지러진 울음소리에 명옥은 깨났다. 그녀는 휘몰아치는 눈보라 속에 쓰러져 있으면 애까지 다 얼어 죽을 것 같아 이를 악물고 일어났다. 그녀는 비틀거리면서 무릎까지 푹푹 빠지는 눈길을 간신히 걸어 집으로 한발자국한발자국 나아갔다. 걸음마다 배고프고 가난한 고달픈 인생의 힘든 걸음발이었다. 앙상한 버드나무와 비술나무를 구분하기 힘들고 빙글빙글 돌고 하늘과 땅이 맞붙는 상 싶었다. 그래도 명옥은 애를 살리기 위해 살아야 하겠다는 일념으로 이를 악물고 의악스레 걷고 걸어 끝내 웃새집 사랑 간으로 집이라고 돌아 왔다. “작은 며느리, 저녁을 먹었소?” “예-” 명옥은 맥없이 대답하고는 애를 내리워 놓기 바쁘게 폭 꼬꾸라지었다… 쌀독에서 인심이 난다고 할까? 일본 놈들의 철 발굽 밑에서 중국 지주들의 가혹한 착취를 받을 대로 받아 쌀 고생을 할 때여서 그럴까? 아무튼 새금은 동서를 부려 먹고 밥도 주지 않고 죽을 끓여 놓고 혼자 조왕 간에 돌아 앉아 후룩후룩 잘 먹어댔다. 일하러 나갔다가 돌아 온 남편과 시아버지는 반사발 하나면 족하였다. 어느 날 밤, 상순이 함흥촌 남쪽의 묘지를 지나는데 누군가 쿨쩍쿨쩍 우는 소리가 쓸쓸히 들리었다. “이 밤중에 누가 이런 묘지에서 울까?” 상순은 누군가 다가가 보고 깜짝 놀랐다. 글쎄 아버지가 묘지 옆에 쭈그리고 앉아 울고 있지 않겠는가! “아버지! 웬 일입둥? 또 아주머니한테 괄시당했습둥?” 기준은 막내아들을 보더니 울음을 그치고 일어났다. “얘야, 옛날부터 황제도 집안과 여편네를 잘 다스리지 못했단다.” “대체 무슨 일입둥?” “얘, 이제껏 말하지 않았는데. 난 맏며느리 손에서 배고파 못 살겠다. 그래 여기 와서 죽어 버리자고 했다.” “예?” 영웅호걸이던 아버지가 아주머니에게 당하고 살 용기마저 잃어버리다니? (세상에 이런 일도 있단 말인가?) 상순은 그 자리에서 결단을 내렸다. “아버지, 우리 집에 가 삽시다. 우리 부모를 모시겠습구마.” 기준은 도리머리를 가로 흔들었다. “나를 죽게 놔둬라. 너넨 둘짼데다가 숱한 빚을 졌는데 맏이보다도 더 가난한 너넬 어떻게 고생시키겠니?” 상순은 황급히 “아버지, 내 아무리 가난해도 부모를 못 모시겠습둥? 갑시다.”라고 하며 아버지 팔을 부축하며 집 쪽으로 끌었다. “집도 없어 큰집 사랑 간에 들어 사는데 어떻게 들어가겠니?” 기준은 뒤로 뻗치며 가지 않으려고 하였다. 그러자 상순은 아예 잔등을 들이대더니 아버지를 업고 집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얘, 날 내려 놔라. 작은며느리와 토론도 하지 않구 어떻게 가니?” 상순은 아버지를 내려놓으면서 “근심하지 맙소. 명옥은 마음이 비단이어서 절대 반대하지 않을겝구마.”라고 하였다. 기준은 한숨을 후 내쉬었다. “그럼 가자. 그런데 맏아들하구 며느리 너희 집에 간다는 말을 하지 않고 가서 되겠니? 말썽이라도 생기면 어쩌니?” “토론은 무슨 토론입둥? 잘 모시지도 못하는데 우리 모시면 오히려 부담을 덜어준다고 좋아할 겁구마.” 기준은 한숨을 연신 토해냈다. “난 이젠 맏며느리를 보기만 해도 진저리난다.” 상순은 아버지를 모시고 웃새 집 사랑 간으로 들어갔다. “명옥이, 우리 부모를 모시자고 아버지를 모셔왔소.” 명옥은 죽을 끓이다가 부엌에서 일어나 반갑게 맞았다. “시아버님, 왔습둥? 어서 구들에 올라 갑소.” 이윽고 명옥은 다 끓은 죽을 사발에 듬뿍 담아 상에 올리었다. “시장하겠는데 듭소.” “둘째며느리를 어떻게 고생시키겠소?” 기준은 숟가락을 들면서 근심하였다. 명옥은 반겨 맞으면서 “둘째아들며느리는 자식이 아닙둥? 근심하지 맙소. 우리 잘 모시겠습구마.”라고 말하였다. 상순은 명옥의 처사에 고마웠다. “여보, 아무래도 엄마도 모셔와야겠소.” 남편의 말에 명옥은 “시누이도 모셔오오.”라고 하였다. “금옥이까지?” 기준은 죽을 맛있게 먹으면서 막내아들에게 부탁하였다. “얘, 금옥인 놔둬라. 네 아주머니 좋아하지 않겠다.” 그러나 상순은 그 자리로 나가 큰집 소 수레에 소를 메우더니 소서구로 떠났다. 그는 소서구에 가서 큰집에 들어서자마자 형님 부부에게 이실직고하였다. “그간 형님과 아주머니 쌀 고생을 하면서 부모를 모시느라고 수고했소. 둘째아들은 자식이 아니오. 이젠 우리가 부모를 모시겠소. 달리 생각하지 마오.” 그 말에 지새금은 세 귀 눈을 흘기면서 야단쳤다. “시동생, 그것도 말이라고 하오? 맏이가 부모를 모시는 게 도리지. 우리보다 어느만큼 더 잘 모시자고 그러오? 동네를 웃기지 않겠소?” “좌우간 다른 말 할 게 없소. 부모하구 금옥은 우리 집에 데려 가겠소. 엄마, 가기요. 금옥아, 너도 가자.” 최사련은 구들에서 일어나면서 “아버지하구 작은며느리하구 토론했니?”라고 물었다. “양, 아버진 벌써 우리 집에 가 있소.” “야, 좋아라.” 금옥은 좋아라고 둘째오빠와 함께 가려고 서둘렀다. 그 말에 새금은 욕설을 퍼부었다. “더러운 영감쟁이, 저렇게 새끼들을 리간 놓고 살면 얼마나 잘 살겠는가?” 뒤이어 어머니와 여동생을 모시고 바깥에 나가는 상순의 뒤 잔등에 대고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퍼부었다. “거지 같은게 부모를 더 잘 모실 상 하긴? 저 것들이 한 날 한 시에 싹 썩어 지었으면.” 상순은 성이 꼭뒤까지 치밀었지만 이상 아주머니라고 억지로 꾹 참았다. 그는 어머니를 부축해 수레에 모시고 여동생 금옥도 싣고 소서구를 떠났다. 상우는 멀리 떠나가는 어머니와 금옥을 멍하니 바라보면서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죽물도 마시기 어려운 세월에 형제간에 서로 부모를 모시자고 앞다투다니? 얼마나 효성스럽고 고상한 효자 형제들인고?                                          4. 가난과 무지가 낳은 악과 상순이네 식구는 불었는데 빚은 이자에 이자까지 자꾸 늘어만 갔다. 장학산 지주네 빚은 이자에 이자까지 하면 농사를 지어서는 한평생 다 갚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누나네 돈을 꾼 건 그래도 이자가 없어 다행이었다. 최사련은 궁리 끝에 술을 거르기로 하였다. 그는 막내며느리를 데리고 여 싹을 키우고 누룩을 만들어 가지고 술을 거루었다. 기준은 눈 가슴에 산에 가서 땔나무를 해왔다. 상순은 살림살이에는 관심이 없고 할아버지와 성칠 큰아버지의 포치대로 마을의 흥수, 학수, 성수 삼형제와 충국이네 형제, 고모사촌인 동길, 명길 등 10여명 청년들에게 권투를 배워준다, 날창찌르기를 배워준다 하면서 데리고 다녔다.       그 중에서도 전라도 남대 쪽에서 류리걸식하면서 여기까지 들어온 흥수는 상순의 꼬리를 물고 졸졸 따라다녔다. 상순이 가시할아버지 최구장 일행을 모시고 두만강을 건널 때 피뜩 흥수와 우연히 만난 적이 있어 서로 풋면목이나마 있었다. 흥수가 알아듣기 힘든 남대말을 하는데다가 생김새도 우습게 남북골에 우먹한 빈대눈이여서 마음에는 안 들었다. 하지만 어데 안착하지도 못하고 떠돌이하는 그가 불쌍해 상순은 아버지와 할아버지한테 비난사정을 해 마을에 받아주게 하였고 자기들이 붙이는 장학산의 밭도 몇마지기 떼서 흥수한테 농사지으며 살아라고 주었다. 그리하여 흥수 일가 삼형제는 상순 일가를 구명은인처럼 여기고 따랐다.       어느 하루, 상순의 어머니와 아내가 술을 거르다가 불을 너무 많이 때 웃새집 사랑채 나무구새에 불이 달리었다. “불이야!” “불이야!” 웃새집 식구들과 기준은 대야와 함지에 물을 담아 들고 나가 퍼 치었다. 다행히 불은 구새만 태우고 꺼지었다. 사련과 명옥 고부는 첫 가마에 35원을 번 후 웃새집 사랑채를 태울까봐 다시는 술도 거르지 못하였다. 설상가상으로 섬나라 오랑캐 촌장 지학사는 상순을 없애 버릴 음흉한 계책을 꾸미며 이를 쁙쁙 갈아댔다. 악질지주 지학사는 마을에서 상순의 영향력이 커질수록 눈에 든 가시처럼 미워하고 해치려고 들었다. 관동군은 간도 조선족청년 가운데서 강제로 특설부대 강박군인을 뽑았다. 지학사는 이번 기회에 상순을 제거하려고 악독한 마음을 먹었다. 그는 함흥촌 청년들 가운데서 상순을 보고 강제로 특설부대로 가라고 을러멨다. 상순은 일본 놈들의 특설부대에 가기 싫어 구실을 만들려고 궁리를 하였다. 무릎을 탁 치고 난 상순은 맵짠 겨울 추위에 집 문창에 구멍을 내고 엉덩이를 들이대 얼군 후 면도 칼날로 항문 왼쪽 편의 가려운 데를 자꾸 긁어 치질을 앓는 것처럼 부어나게 만들었다. 상순은 지학사를 찾아갔다. “지 촌장, 난 치질로 아파서 특설부대에 가지 못하겠소.” 지학사는 엉거주춤 서 있는 상순을 믿지 않는 눈길로 흘끔 쳐다보면서 “어데 보자. 정말 치질을 하는가?” 라고 하며 다가왔다. 상순은 “봅소.”라고 하면서 바지를 훌 내리우고 팅팅 부어 오른 엉덩이를 내밀었다. 팅팅 붓긴 항문을 보더니 지학사는 “에이, 안 되겠구나. 엉덩이가 팅팅 부은 걸 보냈다가 내 목이 날아 나라고.”라고 하였다. 상순은 살았다고 좋아하며 바지를 춰 입고 달아났다. 마을 청년들은 서로 가기 싫어 제비를 만들어 뽑았다. 하여 마을에서 상순을 따라 다니지 않던 김금산이란 청년이 뽑혀 특설부대에 나갔다. 며칠 후 상순은 믿을만한 흥수와 동길 등 몇몇 청년들을 데리고 밤중에 머나먼 성산 골 안에 가서 지주 집을 털어 양식을 탈취해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 주고 나머지를 자기 집에도 얼마간 가져 왔다. 어느 날, 영자가 볼을 긁으면서 울었다. “엄마, 볼이 가렵소.” “응? 어디 보자.” 명옥은 갓난애를 업고 죽물을 끓이다가 그만 두고 영자를 안고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아니, 이게 뭐냐?” 영자가 애고사리손으로 가렵다고 긁어대는 볼에 벌건 부스럼이 생기지 않았겠는가. 부스럼 끝을 누르니 고름이 질질 흘러 나왔다. “이걸 어쩌니? 애들이 셋이나 되니 등한했구나.” 사련도 다가와 보고 야단쳤다. “이게 홍진이라는 게 아니야? 잘 치료하지 않으면 큰 일 난다.” 기준은 사랑채 위방에서 “막내며느리, 무슨 일이냐?” 라고 물었다. “영자 볼에 벌건 큰 부스럼이 생기었습구마.” 며느리 말에 기준은 엉거주춤 내려와 영자의 얼굴을 두 손으로 받들고 보더니 “응, 일없다. 단침을 발라줘 봐라. 따뜻한 오줌을 발라줘 봐라.”라고 하였다. 명옥은 인차 손가락을 입에 넣어 단침을 묻혀 영자의 볼에 발라 놓았다. 바깥에서 상순이 들어오자 명옥은 영자를 안고 가서 볼을 보이었다. “얘를 진수해병원에 데리고 가야 하지 않겠소?” 그러나 상순은 “고까짓 부스럼 때문에 무슨 놈의 병원! 병원의 의사란 일본 놈들은 몽땅 돈을 떼먹는 나쁜 놈들이오. 좋은 조상이 물려 준 오줌 약이 있잖소. 오줌이나 발라 주오." 하고 대수로워 하지도 않았다. 명옥은 영돌과 갓난애 선돌을 제쳐 놓고 대야를 들고 변소에 가서 따뜻한 오줌을 받아다 영자의 볼에 발라 주었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영자의 볼에 난 부스럼은 낫지 않았다. 볼에 난 부스럼은 벌겋던데로부터 검붉어지면서 고름이 점점 더 많이 질질 흘러 내렸다. “안되겠다. 병원에 가 봐야지.” 명옥은 상순이 어디로 나간 틈을 타서 영자를 업고 진수해 쪽으로 허둥지둥 달리어 갔다. “서라!” 뒤에서 상순이 헐금씨금 쫓아 왔다. “어디로 가니?” 이제껏 한마디도 대들지도 않던 명옥은 물러서지 않았다. “애 볼에 고름이 나다 못해 썩어 떨어질 지경인데도 병원에 가지 말라오?” 상순도 고집을 부리었다. “집에 먹을 쌀이 없는데 일본 놈 의사들이 좋은 노릇을 하자고 병원에 가니?” 그래도 명옥이 집으로 발길을 돌리지 않았다. “그래 죽는 애를 보고 있겠는가?” “이년이 집으로 못 가겠니?!” 상순은 세 귀 눈을 부라리면서 길옆의 나무 가지를 꺾어 들고 영자를 업은 명옥을 마구 후려쳤다. 영자는 잔등에서 울면서 “아버지, 왜 엄마를 때리오?” 하고 소리치었다. 상순은 들었는지 마는지 마구 후려치면서 명옥 모녀를 양을 몰듯이 집으로 몰았다. 명옥은 남편을 이기지 못해 눈물을 흘리면서 집으로 발길을 돌리었다. 그제야 상순은 나무 가지를 놓고 어디론가 일을 보러 떠나갔다. “다시 병원 소리만 해 봐라. 종아리를 분질러 놓겠다.” 상순이 떠나간 후 영자는 까만 포도알눈으로 명옥을 쳐다보면서 “엄마, 아버지 어째 엄마를 때리오?”라고 물었다. 명옥은 영자의 고름이 질질 흐르는 볼을 들여다보다가 수건을 가져다 닦아 주면서 “병원으로 간다고 그랜다.” 하고 대답하며 눈물을 줄줄 흘리었다. 어린 영자는 “그럼 병원으로 가지 말기요.”라고 말하였다. 명옥은 속으로 요렇게 귀한 애를 병원에 데리고 가지 못하게 하는 남편이 원망스러웠다. 그러나 그녀는 용빼는 수가 없었다. 상순인들 자기 맏딸이 귀엽지 않았겠는가? 아니다. 그는 맏딸을 매우 귀해 했다. 다만 그의 머리에 의학지식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의학지식이 없기에 미신을 믿으면서 무당에 의지해 영자를 구해보자고 마음먹었던 것이다. 무지가 낳은 죄악이었다. 그는 함흥촌 동쪽에 있는 절당에 가서 무당을 데려 왔다. 무당의 말대로 마을에 나가 닭을 사다가 잡아 삶은 후 삶은 닭고기를 무당의 앞에 가져다 놓았다. 무당은 명옥을 보고 영자를 업고 벽을 마주 해 구들바닥에 꿇어앉으라고 해 놓고 북채로 소고를 두드려대면서 굿을 하기 시작하였다. 무당은 영자를 업은 명옥의 잔등을 회초리로 쨕쨕 치면서 굿을 하였다. “여자귀신이면 다발을 틀어 이고 가고 남자귀신이면 짐바를 갖춰가지고 지고 가라.” 뒤이어 삶은 닭고기를 뜯어 사처에 뿌리면서 또 같은 굿을 해댔다. 그러나 굿은 아무런 효과도 보지 못하였다. 영자의 볼에 난 부스럼은 곪아서 고름이 나다 못해 구멍이 나서 볼이 썩어 들어가면서 넌들넌들하게 되었다. 영자는 밤잠도 자지 못하고 볼이 아프다고 울었다. 부모로 생겨서 애 볼이 썩어나가는 것을 어떻게 차마 눈뜨고 본단 말인가? 명옥은 몇 번이고 병원으로 가보고 싶었건만 독고래 같은 상순이 무서워 가지 못하였다. (굿을 할 게면 그 돈으로 병원에 갔더라면 애를 이 지경으로 만들었겠니?) 그녀는 원망하면서 가위를 얻어다가 영자 볼의 썩어 넌덜거리는 살가죽을 싹싹 베 버리었다. 순간 베 버린 구멍으로 빨간 혀와 이가 다 들여다보였다. 명옥이 죽물을 떠 넣으니 입으로 아니라 볼 구멍에서 죽물이 괴어 나왔다. 차마 눈 뜨고 애의 볼을 더 볼 수 없어 명옥은 어깨를 들먹이면서 눈물을 탐방탐방 쏟아냈다. 그녀의 가슴이 마구 뭉개지고 썩어 떨어지는 것 같이 아팠다. 영자는 병원 문 앞에도 가보지 못 하고 아파 발버둥질 치다가 숨지었다. 아, 가난이 죄악이고 무지가 죄악이었다. 병원에 갈 돈만 푼푼히 있었더라도, 조금만 의학지식이 있었더라도 병원에 갔더라면 다섯 살 밖에 안 되는 귀여운 영자를 이렇게 볼이 다 썩어 나가다 못해 온 몸이 다 썩어 처참하게 이 세상을 떠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 야속하다. 야속해. 명옥과 상순은 영자를 붙안고 얼마나 대성통곡 쳤는지 모른다. 그들은 피눈물을 흘리면서 영자를 동산마루에 가져다 파묻었다. 자그마한 봉분 앞에 쭈그리고 앉은 상순과 명옥은 오래도록 떠나가지 못하고 땅을 치면서 꺼이꺼이 울었다. 비극은 끝나지 않았다. 영자의 부스럼이 영돌한테 전염되었는지 영돌도 볼에 부스럼이 나면서 앓기 시작하였다. 그때도 명옥은 상순을 보고 “얘는 병원에 데리고 가서 치료하기요. 양? 이래 뒀다간 또 죽이어 내 가겠소."라고 애원하였다. 그러나 상순은 세 귀 눈을 부릅뜨고 떽 소리쳤다. “너 또 그 말이냐? 병원엔 무슨 병원? 돈 떼먹는 일본 놈 의사 좋은 노릇 하자고?” 설상가상으로 기준까지 말렸다. “병원에 가지 마오. 약 담배를 풀어서 먹이면 부스럼에 일 없다오.” “약 담배를?” 명옥은 눈이 떼꾼해졌다. “어린 애한테 어떻게 약 담배를 먹입둥? 형내라도 옆에 있었으면 물어보겠는데.” 명옥은 영돌을 둘쳐 업으면서 “내 영돌이를 데리고 국자가 형내한테 찾아가 보이겠소. 형내는 숱한 병으로 앓는 환자들도 치료했는데 제 팔촌동생을 치료하지 못하겠둥? 형내야 우리 돈을 떼먹을 사람이 아니지.” 하고 말하였다. 그 말에 상순은 마음이 좀 돌아 섰던지 주춤 멈춰 서서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서 아버지를 돌아보았다. 기준은 상순을 보고 “얘, 먼저 약 담배를 써보고 낫지 않으면 형내한테 가 봐라.”라고 말하였다. “예.” 상순은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약 담배 가루를 가져다가 따가운 물 사발에 풀어 놓았다. 기준은 “애기네 애를 가져 오오.”라고 하였다. 명옥은 반신반의하면서도 시아버지 령을 따르지 않을 수 없어 띠를 풀고 잔등에서 영돌을 내리워 상순에게 넘기어 주었다. 영돌은 애고사리 손을 뻗쳐 어머니 쪽에 대고 흔들면서 “엄마, 난 약 담배를 먹지 않겠다. 아버지. 싫소.”라고 버둥댔다. 기준이 영돌의 가슴에 다리를 놓고 누르면서 안 먹겠다고 도리머리 질 하는 머리를 붙잡았다. 상순은 약 담배 물을 도리머리 질 하는 영돌의 입에 부어 넣었다. 명옥은 긴장한 얼굴로 애를 지켜보았다. “아, 그, 그, 큭…” 영돌은 두 다리를 가둥대더니 거시기가 꼿꼿이 일어났다. 영돌의 두 다리가 바둑거리다가 맥없이 쪽 펴지면서 바둑대기를 그만 두었다. 거시기도 옆으로 스르르 쓰러지는 것이었다. 기준은 손을 놓고 다리를 치우면서 “이젠 약 담배를 먹였으니 낫겠지.”라고 하면서 엉거주춤 일어나 위방으로 올라갔다. 명옥과 상순이 애를 끌어 당겨다 보니 숨이 없었다. 영돌은 상을 일그러 뜨린 채 조용히 그리고 영원히 잠들어 버렸던 것이다. 명옥은 영돌을 안고 “영돌아, 영돌아, 애고, 귀여운 영돌을 이게 무슨 일입둥? 병원에 보내자는데 이게 뭡둥?” 하고 대성통곡 쳤다. 그제야 상순은 머리를 푹 숙이었다. 그의 눈에서 뜨거운 후회의 눈물이 주르르 흘러 내려 두 볼을 적시었다… 그 후 반달도 되지 않아 갓난애 선돌도 나오지 않는 명옥의 젖을 빨고 빨다가 굶어 죽고 말았다. 사실 명옥은 애를 연속 둘이나 죽여 내가다나니 속을 태울 대로 태워 젖가슴이 메말라 젖 한모금도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남은 연속 애들을 셋이나 죽여 야단인데 소서구에 있는 새금은 문안은커녕 빗자루로 구들을 쳐대면서 쾌자를 불렀다. “봐라! 봐! 네 년 놈들이 시부모를 더 잘 모실 상 하더니 하늘이 생벼락을 쳐서 한 구들에서 셋이나 썪어졌지. 이제 네 년 놈들도 주둥이에 곰팡이 낄 게야. 어디 두고 보자…” 그러자 상우는 여편네를 가로 보며 욕하였다. “그만 두지 못하겠소? 형제간에 돕지 못할망정 그게 무슨 욕지거리요?” 새금은 남편을 흘기어 보면서 앵돌아져 줄 욕을 퍼부었다. “항상 동생, 동생 해도. 그 잘난 시동생은 우릴 형으로 보오? 우릴 쫄딱 망신시키지 않았습둥? 어떻게 우리하구 토론도 하지 않고 시부모를 마구 빼앗아가오? 남들은 우릴 시부모를 제대로 모시지 않았다고 볼 게 아니오?” 상우는 “그만 두지 못 하겠소? 동네 영상하게.”라고 하며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었다. 그래도 새금은 계속 도도도거렸다. “아침을 먹으면 저녁쌀이 없는데 내라고 시부모를 굶기고 싶어 그랬겠소. 쌀독이 텅텅 빈 살림살이를 어떻게 하라오? 내 원, 원통해 원, 못 살겠다.” 새금을 탓해 뭘 하랴? 당시 일본 놈들은 할빈 교외에 자리잡은 731공정에서 만든 전염병균을 비행기로 여러차례 동북각지에 살포해 실험했다. 그리하여 동만지구에도  몇해동안 전염병이 확산돼 수많은 무고한 백성들이 무리로 죽어나갔다. 이것이 바로 극악무도한 일본 놈들의 죄악이 아니고 무엇인가! 한편 지학사는 상순이네 연속 애 셋이나 죽어 나가자 속으로 상순의 기를 꺾어 놓은 것 같아 속이 시원해 하였다. 전번에 특설부대에 보내자 하다가 못 보냈는데 망하는 꼴을 보고 깨 고소해 하면서도 그에 그치지 않았다. 그는 졸개들을 데리고 가서 수건으로 입을 틀어막으면서 개화장을 휘둘러대며 고래고래 고함치었다. “이 놈 집은 전염병 굴이야! 어서 새끼를 두르고 누구도 나오지 못하게 막아라!” “옛!” 졸개들이 달려들어 상순이네 사랑채를 돌아가면서 나무말뚝을 박더니 새끼줄을 몇 겹으로 줄줄 띄워 놓았다. 상순이 바깥에서 집으로 돌아와 세 길 네 길 날뛰었다. “어느 놈이 감히 우리 집 앞길을 가로 막아?!” 상순이 지학사에게 단말마적으로 달려들자 지학사의 졸개들이 앞을 막아 나섰다. 지학사는 뒤로 물러나며 개화장으로 상순을 푹푹 찌를 상을 하며 휘둘러댔다. “이 무지막지한 놈아, 네 여편네까지 전염병에 걸렸는데. 온 마을에 전염되면 어쩌니? 온 마을 사람들을 다 죽일 예산이냐?” 상순은 물러서지 않고 시비를 걸었다. “그래 우리 집 식구들이 드나들지도 못하게 하면 굶어 죽어란 말인가?” 지학사는 “그럼 전염병에 걸린 네 여편네만 집에서 나오지 못하고 넌 나 다녀도 된다.”라고 타협하였다. 지학사는 그 쯤 해 놓고 집으로 돌아갔다. 상순도 온 동네에 전염병을 전염시킬까봐 아내를 나가지 말게 하고 달아 다니면서 먹을 걸 얻어다 먹이었다. 어느 날, 기준은 진수해에 내려가 목수 일을 해 번 돈 10원을 명옥의 손에 쥐어 주었다. “며느리, 이 돈으로 약을 져다 먹고 몸을 춰 세우오. 애들을 셋이나 죽이었는데 애기 네까지 약 한 첩 써 주지 못하고 죽일 순 없네.” “고맙습구마. 시아버님.” 명옥은 돈을 받아 쥐고 감격해 뜨거운 눈물을 흘리었다. 그는 정지에 내려오자 남편한테 돈을 주면서 부탁하였다. “시어머니 앓아 누웠는데 약을 써 드리오. 시아버님이 팔소매 다 떨어진 웃옷을 입고 추워서 두 팔을 맞붙잡고 우둘우둘 떨면서 다니는데 차마 두고 보지 못하겠소. 옷감을 떼 오오. 내 웃옷을 지어 아버님께 드리고 싶소.” 그런데 새금이 시아버지 진수해에 가서 목돈을 벌었다는 소문을 어데서 들었는지 소서구로부터 달리어 내려 왔다. 그는 집 문을 떼고 들어서자마자 야단치었다. “시아버지, 돈을 벌어서 작은 며느리만 주구 어째 맏며느리는 주지 않습둥? 그래 맏며느리는 며느리 아닙둥?” 기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맏며느리를 내리쏘아볼 뿐이었다. 명옥은 남편을 보며 주라고 눈짓을 하였다. 순간 상순은 조선에서 자기를 업고 간도에 들어 와서 부모처럼 자기를 아끼던 형님과 아주머니가 떠올랐다. 그는 품에 넣었던 돈에서 절반 꺼내 아주머니한테 주었다. “엄마한테 약을 사다 주자고 했는데 가져가오. 아주머니를 미처 생각하지 못해 미안하오.” 펄펄 날뛰는 호랑이 같은 상순도 부모와 형님네 앞에서는 양처럼 순하였다. 위방에서 기준은 못 마땅한지 건 가래를 떼었다. 새금은 돈을 받아 쥐고 위방에 대고 입귀를 비쭉하더니 떠나 가 버렸다. 상순은 명옥과 토론하고 나머지 돈을 가지고 진수해에 가서 아버지 옷감을 사고 너머지 돈으로 어머니 약을 지어 가지고 왔다. 명옥은 손수 바늘로 한 뜸 한 뜸 기워 웃옷을 지어 시아버지한테 입혀 드리었다. 기준이 동네로 나가 막내며느리 자랑을 어찌나 하였던지 동네방네 노인들이 엄지손가락을 내두르면서 칭찬이 자자하였다. “그 집 막내며느리는 엄지 며느리오.” 명이 길어서일까 효녀여서 그럴까. 명옥은 약 한 첩도 사 먹지 못 하고서도 구사일생으로 전염병을 이기고 살아났다. 그러나 사련은 약을 달여 대접했지만 가석하게도 시시콜콜 계속 앓아 일어나지도 못하였다. 명옥은 병석에서 일어나자마자 누룩을 잡아서 술을 걸었다. 상순이 산에 가서 땔나무를 해오면 기준은 부엌에서 그 땔나무를 무릎에 대고 뚝뚝 끊어 아궁이에 넣고 불을 때었다. 명옥은 동네방네 노인들을 청해다 술을 대접하였다. 노인들은 술맛도 좋지만 인품 좋고 효성이 지극한 명옥의 마음이 고마워 모두들 술을 사가서 장사가 잘 되었다. 명옥은 술을 팔아 번 푼돈을 모아 가지고 시어머니에게 보약을 손수 지어다 달여 대접하였다. 사련은 누운 자리에서 명옥의 손을 꼭 잡고 뜨거운 눈물을 주르르 흘리었다. “막내며느리, 자네 효성에 난 죽어도 원이 더 없네.”        정성이 지극하면 고목에도 꽃이 핀다고 사련은 막내며느리 효성에 받들리어 다시 일어나 앉았다. 그녀는 허약한 몸으로 일어나자마자 머리를 쓰다듬더니 팔을 걷고 막내며느리가 말리는 것도 마다하고 술을 거르는 것을 거들었다.        상순이네는 집도 없이 큰집인 웃새집 사랑방에 들어 부모를 모시면서 살았지만 구차한 살림에 부모자식 간에 서로 끔찍이 사랑하고 고부 사이에 화목해 동네에 효자들이라고 소문이 높았다.  
92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55) 댓글:  조회:1915  추천:0  2016-11-10
                         12. 아, 장백산 기슭의 진달래        성칠은 최구철을 업고 유격대원들을 거느리고 협곡에까지 전략적으로 전이하였다. 상순은 큰어머니를 업고 협곡에 가서 한쪽구석 밑바닥에 내려놓고 자기 웃옷을 벗어 펴 놓고 그 위에 눕혔다.        진달래는 성칠의 잔등에서 아버지를 내리워 안고 피가 낭자한 얼굴에 볼을 비비며 흑흑 흐느껴 울었다. 성칠과 전우들은 모두 영용하게 희생된 최구철을 둘러싸고 머리를 숙이었다. 진달래는 자기 하얀 웃옷을 벗어 아버지 얼굴을 가리더니 꼭 끌어안고 흑흑 흐느껴 울었다. 진달래는 발딱 일어나 성칠과 함께 나무 가지를 끊어다 아버지 시체를 가리어 주었다. 유격대원들은 하얀 겉옷을 벗어 눈을 담아다 최구철의 시체를 하얗게 덮어놓았다. 유격대원들은 저마다 복수심으로 주먹을 으스러지게 틀어쥐었다. 성칠과 진달래가 협곡 밑바닥에서 위쪽을 쳐다보니 좁은 물도랑만 한 틈으로 눈보라치는 하늘이 바라 보일뿐이었다. “놈들은 꼭 이곳을 지나 갈 거야. 이제 칠백 중대장과 동욱 중대장이 적들의 배후를 매복습격 할 때 우린 이 협곡에서 놈들을 저격하자!” 성칠의 말에 진달래는 머리를 끄덕였다. 진달래는 희생된 아버지 때문에 너무 울어 팅팅 부운 눈에 피까지 지었다. 전투를 앞두고 피진 그녀의 깜장 눈에 복수의 불길이 이글거리었다. “적들이 협곡 위에서 수류탄 같은 걸 내리 뿌리면 우리에게 불리하겠는데요.” 진달래의 근심에 성칠은 머리를 끄덕이면서도 과단성있게 말했다. “적들에게 들킨 눈 갱도를 계속 쓸 순 없어. 꼭 전술을 바꿔야 해. 한철주 놈은 여기 지리에 깜깜부지야. 그 놈이 어찌 우리가 이런 협곡에 있으리라고 생각할 수 있겠느냐?” 한편 한철주는 텅 빈 밀림속의 밀영을 폭파하고 불살라 버린 후 갱도를 발견하자 속으로 못내 놀랐다. (이런 동굴로 쥐새끼처럼 신출귀몰하면서 이동작전했구나.) 그는 눈 함정에 빠진 놈들이 눈 동굴에서 뛰쳐나온 유격대에게 소멸당한 내막은 아직도 깜깜부지였다. (이상한 일이야. 놈들이 정말 응세나 가메다가 말한 것보다 엄청 많았단 말인가?) 오리무중에 빠진 철주는 일본 놈들을 끌고 다시 산골짜기 쪽으로 다가왔다. 그런데 적들이 한창 자그마한 골짜기를 넘어 가다가 굳은 눈이 쿵 꺼지었다. 적들은 또 눈 함정에 빠졌는가 하여 비명을 지르며 아우성쳤다. 그런데 저게 뭔가? 꺼진 곳에 모여 가 보니 눈 동굴이 드러났다. 한철주는 군도자루를 잡았던 오른손으로 무릎을 탁 쳤다. “이때까지 속았구나!” 그제야 산등성이와 산골짜기에서 자기들에게 사격하던 유격대가 감쪽같이 사라진 비밀을 짐작할 수 있었다. “우리 눈 함정에 빠지었을 때 이 산등성이와 산골짜기 눈 동굴에서 사격하고는 눈 동굴로 신출귀몰하였구나.” 졸개들은 눈 동굴을 따라 유격대를 추격하자고 떠들었다. 그러나 철주는 도리머리를 가로 흔들었다. “실력을 보존하고 안전하게 밀림을 벗어나야 해.” 그는 장백산 기슭 밀림 속의 밀영을 폭파하고 불사른 사진과 애기 엄마의 수급이 있었기 때문에 더는 유격대와 싸우기 싫었던 것이다. 장백산 기슭의 산골짜기마다 호랑이 아구리 같았고 저승 같았고 무덤 같아 질겁했다. “눈 동굴을 폭파해버리고 산골짜기 막바지 쪽으로 에돌아 철퇴하라! 우린 해 지기 전에 큰 함정 같은 밀림을 빠져 나가야 해.” 그는 하얀 장갑을 휘두르며 명령하였다. 꽝! 꽝! 꽝! 적들은 작은 산골짜기 눈 동굴을 폭파해 버리었다. 땅! 땅! 땅! 이때 뜻밖에도 밀림 서남쪽과 동남쪽에서 유격대가 나타나 적들의 배후를 습격 해왔다.       "사격!"       한철주는 절망에 찬 고함을 질렀다.       그는 눈 위에 납작 엎드려 중얼거리었다.        “이건 또 뭐야? 금방 동굴로 달아난 놈들을 족쳐 버리었는데 남쪽에서 또 웬 놈들이야?”        칠백과 동욱이 영솔한 유격대 두개 중대는 밀림에서 아름드리나무들을 은페물로 삼으면서 맹렬히 사격하며 맹호마냥 적들에게 덮쳐 들었다.        “전우들 원수를 갚자!”        땅! 땅!        “일본 제국주의를 타도하자!”        땅! 땅! 땅!        “일본 주구 한철주 놈을 생포하자!”       구호소리, 총소리,  비명소리, 아우성소리 뒤범벅이 돼 밀림에 울려퍼졌다.       (저 귀신 같은 놈들이 어떻게 내 이름까지 알아?)       한철주는 새하얀 옷을 입은 유격대원들이 백호처럼 덮치어 오는 것을 보고 장백산 밀림에서 유격대의 손에 죽고 싶지 않았다. “3중대, 엄호해! 1중대와 2중대는 날 따라 산골짜기로 철퇴!” 한철주가 일어나 철퇴하려 하였다. “보고!” 철주가 돌아보니 1대대장이었다. “웬 일인가?” 1대대장은 난처해하였다. “보고, 1중대는 거의 다 죽고 둬 개 분대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저 많은 유격대 놈들을 어떻게?” 철주는 이를 악물고 대대장의 귀쌈을 찰싹 갈겼다. “빨리 유격대를 막지 못할까?! 네 놈이 그러고서도 일본 섬나라 오랑캐냐?” 대대장은 담대하게도 철주의 귀쌈을 찰싹 갈기면서 눈깔을 부라리었다. “네놈 조선 노예 놈 따위가 감히 우리 황군을 모독해?!” 철주는 군도를 빼들며 을러멨다.  “감히 상관 명을 거역해?! 총살할 테야!” “총살해! 조선 노예 새끼야!” 대대장이 대들었지만 철주는 용하게 참아냈다. “이제 산에서 내려가면 네놈부터 군법에 의해 처단할 테다!” 철주는 군도를 칼집에 되 넣으며 1중대장을 불러 고래고래 고함쳤다. “빨리 엄호해!” “하이!” 적들은 1중대 엄호하에 간신히 산골짜기 막바지까지 도망치었다. 그 놈들이 하얀 물이 파먹은 물곬 우로 뛰어 넘을 때었다. 꽈르릉! 꽝! 꽝! 폭발 굉음과 함께 물곬 양편 협곡이 우르르 무너졌다. 숱한 적들이 협곡 아래로 거꾸로 처박혔다. “아,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하는구나!” 한철주는 절망에 빠지었다. 그 놈은 군도를 빼들고 하늘에 휘두르며 고래고래 고함치었다. “철퇴!” 적들은 협곡을 건너지 못하고 또 밀림 속으로 달아났다. 그런데 몽땅 하얀 옷을 떨치어 입은 유격대원들은 칠백 중대장과 동욱 중대장, 인삼 중대장의 영솔 하에 서남쪽과 동남쪽, 서쪽에서 포위권을 좁히며 백호처럼 덮쳐들었다. 사기가 땅바닥에 떨어진 적들은 밀림 속 산지사방에 흩어지면서 달아났다. 이때 협곡을 폭파해 버리고 빠지어 나간 성칠 대장은 진달래 중대장과 함께 북쪽과 동쪽으로부터 적들을 습격하였다. 혼비백산은 철주 놈은 군도를 빼 들고 패잔병들을 데리고 혈로를 뚫고 북을 바라고 도망쳤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철주 놈이랑 사경에서 벗어났는가 하였더니 북쪽 밀림에서 한 50미터 거리를 두고 유격대를 거느린 성칠 대장과 딱 마주쳤다. 성칠은 권총을 겨누면서 고함쳤다. “한철주 놈아, 날 알아보겠느냐? 투항하면 살려준다!” “퉤! 내 손에 죽어 봐!” 한철주 놈은 옆에 선 놈의 손에서 수류탄을 빼앗아 뿌리었다. “꽝!” 요란한 굉음과 함께 아름드리나무 가지들에서 눈가루가 쏴르르 쏟아지었다. 뚜루룩, 뚜루룩! 일본 놈의 기관총수가 눈 둔덕에 엎드려 성칠 대장 쪽에 몰 사격을 가하였다. 성칠은 눈 둔덕에 엎드려 상순의 손에서 사냥총을 받아쥐어 기관총수 놈의 대가리를 겨눠 방아쇠를 당겼다. 땅! 명사수의 야무진 총소리와 함께 기관총수 대가리가 박살났다. 뇌 장과 뻘건 피가 튕기며 허연 눈을 더럽혔다. “야, 성칠 놈아! 담이 있으면 1대 1로 결투를 벌려보자! 엎뎌 있지 말구 어서 나오지 못해?!” 철주 놈은 미친 듯이 고함치며 기관총을 쏴대며 성칠한테로 덮쳐 왔다. 상순은 큰어머니를 업고 뒤로 철퇴하였다. 그때 옆에 섰던 3중대장 놈이 기관총을 빼앗아 쏘며 “한 련대장! 빨리 도망치쇼!” 하고 고함쳤다. 3중대장 놈의 맹렬한 기관총소사에 하옥을 업은 상순의 발부리에서 눈꽃이 튕겨 오르면서 푱! 푱! 푱! 비명 소리를 냈다. 상순은 업고 달리던 하옥을 내리워 눕히고 그 우에 덮으며 엎드리었다. 푱! 하옥은 머리에 흉탄을 빗맞았다. 하옥의 손에 쥐었던 권총이 눈 위에 뚝 떨어지었다. 상순이가 웬 일인가고 머리를 돌리어 큰어머니를 쳐다보았다. 하옥의 머리에서 피가 쿨쿨 솟구쳤다. 상순은 권총을 주어 품에 간직하며 대성통곡 쳤다. “큰어머니! 큰어머니!” 그러나 하옥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였다. 검둥이는 자기 주인에게 기관총을 쏜 3중대장 놈에게 맹호처럼 덮쳐갔다. 검둥이는 적 3중대장 놈의 뒤로 덮쳐 잔등을 타고 올라가 목을 꽉 깨물었다. 3중대장 놈은 목이 분질러 져 뒈졌다. 허나 검둥이는 3중대장 놈의 목을 꽉 깨문 채 놓지 않았다. 이때 뒤에서 덮쳐나온 7소대장 놈이 검둥이에게 죄악의 총을 쏘았다. 땅! 검둥이는 “깨갱” 비명을 지르며 푹 쓰러지었다. 그러나 검둥이는 죽어 가면서도 3중대장 놈의 목을 꽉 문채 놓지 않았다. 성칠도 달려와 하옥을 붙안고 눈물 흘리며 애타게 불렀다. “여보! 여보! 정신 차리오.” 그러나 피가 낭자한 하옥의 얼굴은 굳어지었고 영영 한마디 말도 하지 못하였다. “야, 이게 웬 일이오?” 성칠은 하옥을 내리어 놓고 권총을 들고 “검둥아! 내 검둥아!” 하고 고함치더니 노기충천한 눈길로 적들을 쏘아보았다. “사격!” 유격대원들은 적들에게 복수의 불길을 안기었다. 상순은 나무 가지로 큰어머니 시체를 가리워놓고 눈물에 젖은 눈으로 마구 덮어 놓았다. 적들의 2중대 중대장과 몇몇 소대장 놈들이 사격하며 엄호했다. 그 틈을 타 몇몇 놈들이 한철주 놈을 보호하며 밀림 쪽으로 도망쳐 버렸다. 진달래는 나무 가지를 구르며 나무와 나무사이를 날듯이 뛰어 나가 기관총을 쏘는 적 7소대 소대장 놈에게 돌팔매를 안겼다. 딱! 7소대 소대장 놈은 대갈통이 빠개져 푹 꼬꾸라졌다. 그때 상순이 사냥총을 버리고 총알이 빗발치는 밀림 속으로 뛰어 나가 기관총을 노획해 적들에게 돌려 대고 방아쇠를 당겼다. 뚜루룩, 뚜루룩! 총알은 도망치는 적들 무리로 쓸어 눕히었다. 그러나 기관총을 쏴본 적 없는 상순이기에 방아쇠를 계속 당기는 바람에 후충격파에 견디지 못해 기관총구는 점점 하늘로 쳐들어지었다. “상순아, 기관총대 낮춰!” 한철주는 도망치면서도 기관총소사를 하는 상순을 피뜩 돌아보며 이를 뿌득뿌득 갈았다. “뭐, 상순, 김호라더니. 네놈 아무 때든 내 손에 죽어!” 성칠은 권총을 휘두르며 고함쳤다. “한철주 놈을 생포해라!” “돌격!” 성칠 대장은 유격대원들을 이끌고 한철주 등 일제 침략군 놈들을 추격하였다. 한철주 놈은 해질 녘에야 패잔병 한개 중대의 병력을 데리고 겨우 포위권에서 벗어나 영월구와 몇 십리 떨어진 들판에 이르렀다. 그는 상가집 개처럼 헐레벌떡거리더니 허리춤에서 권총을 뽑아 머리에 댔다. 옆에서 2중대장이 권총을 빼앗았다. “왜 이래?” 한철주 놈은 머리를 툭 떨어뜨렸다. “두개 중대 병력에 별동대 야마모도 소장까지 잃었는데 무슨 면목으로 사령부에 돌아간단 말인가?” 그러자 수길이 말리었다. “장병들이 많이 살상당했지만 우린 유격대 밀영과 갱도를 폭파해 버렸고 진달래 년의 대가리도 떼 오지 않았습니까? 이게 혁혁한 전공 아니고 뭡니까? 스쯔끼 국장 말대로 우린 백 사람을 잘못 죽이더라도 유격대를 한 놈도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제야 한철주 놈은 머리를 맥없이 끄덕이었다. 그는 무슨 생각이 피뜩 떠올랐던지 무릎을 탁 쳤다. “아차, 잊었네. 밀림에서 총알에 대가리를 맞아 죽은 게 분명 성칠 놈의 여편네었네. 그년의 머리를 떼 와야 했는데, 쯧쯧쯧.” 수길도 머리를 끄덕이었다. “나두 봤습꾸마. 그때 우리 대가리도 지키기 바쁜데 언제 그년 대가리를 떼올 새 있었습둥? 저기 계집유격대 대장 대가리 둘이나 있으면 됐습꾸마. 대신 가져다 바치면, 헤헤.” 그 말에 긴장이 풀렸는지 철주 놈은 눈 위에 털썩 들어앉았다. 적들이 금방 좀 쉬려고 할 때다. 어둠이 깃드는 산기슭 쪽에서 또 소란스러워졌다. “또 뭐야??” 한철주 놈이 소스라쳐 일어났다. 그때 수길이 몇 몇 졸개들과 함께 웬 놈을 끌고 왔다. “누구냐?” “영월구분주소 소장입니다.” 한철주는 깜짝 놀랐다. “자넨 어떻게 여기까지 찾아 왔어?” 소장은 풀썩 무릎을 꿇었다.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어제 밤에 유격대 놈들에게 분주소가 날아 났습니다. 그래 유격대를 피해 한 련대장네 관동군을 찾아 왔습니다. 나를 관동군에 받아 줍소. 분주소 소장 질을 못하겠습니다. 언제 또 신출귀몰하는 유격대 습격을 받을지 누가 압니까?” 한철주 놈은 소장 놈의 귀쌈을 찰싹찰싹 갈겼다. “제길 할, 밥통 같은 놈! 유격대 놈들한테 얼이 다 빠졌군.” 누가 누구에게 할 소리인지. 사실 성칠 대장이 밀림에서 일본 놈들의 별동대와 관동군을 매복 습격하는 기회를 타 용천 대장은 북만 소대를 거느리고 영월구분주소를 기습하여 분주소를 폭파해 버리고 경찰 일여덟 놈을 살상했던 것이다. 하하하. 꼴 보기 좋다, 밀림과 영월구에서 매복습격과 기습당한 일본 놈들의 꼬락서니를 봐라. 한편, 성칠은 뉘엿뉘엿 지는 해를 올리다 보고 그만 두었다. 그는 전우들과 하옥의 시체를 하얀 눈으로 덮고 그 위에 나뭇가지를 얹어 시체 자리를 표시해 놓았다. 이 땅의 초부들이여, 이 땅을 무심히 밟지 말라. 이름 모를 항일선렬의 넋이 소리없이 그 곳에 누워 있을지 누가 알랴. 어느 산골짜기 바위돌을 무심히 차지 말고 아무 나무나 마구 찍지 말라. 그 돌 밑에나 나무 밑에 우리 항일렬사가 묻혀 있는지 누가 알겠는가.         하얀 눈에 뒤덮인 무덤에서 빨간 피가 괴여 흘러나왔다. 진짜 눈에 매화가 핀듯하고 밀림에 연분홍 진달래가 피어오르는 상 싶었다.         아, 장백산의 진달래, 그대는 정녕 우리 민족 항일열사들의 선혈로 물들어 피어난 생명의 꽃이어라. 진달래는 항일 투사들의 혼을 상징하는 불멸의 꽃이며 눈보라 치는 밀림에 남긴 항일투사들의 발자국마다에 피어난 항일투쟁 역사의 발자취이다.         이제 매서운 겨울이 가고 따뜻한 새 봄날이 오면 밀림에는 수많은 진달래가 피어 온 원시림을 연분홍빛으로 곱게 물들이리라.                                         제18장 여명의 전야                                                         1. 교하 여관        함흥촌 상공에는 먹장구름이 침침하게 내리 드리워 있었다.        항일유격대의 매복습격전과 기습을 받은 일본 관동군 놈들과 경찰 놈들은 이를 갈며 미친 듯이 항일유격대 근거지를 토벌하고 살인과 약탈, 방화를 거리낌 없이 하였다.       함흥촌도 예외 없이 일제의 쇠 발굽 밑에서 신음하고 있었다.       지난 겨울에 상순은 할아버지의 포치에 따라 형내와 충국을 데리고 원시림에 들어가 항일유격대를 도와 싸우고 부상병들을 치료해 준 후 마을로 가만히 돌아왔다. 그는 전장에서 하옥의 권총을 건사했는데 유격대에 바치지 않고 가만히 품속에 넣어 가지고 돌아 왔던 것이다. 그는 집 식구들과 형내, 충국에게도 말하지 않고 궁리하던 끝에 어둠의 장막을 빌어 권총을 기름종이에 싸서 자그마한 오지그릇에 넣어 가만히 웃새집 사랑채 천정구멍 덮개를 열고 중 천정 우에 감춰 두었다. 병완과 기준은 조용히 상순을 불러 그간 산에 갔던 얘기를 들었다. “참, 잘했어. 일본 놈들 콧대를 여지없이 꺾어 놔야 해!” 상순에게서 하옥의 비보를 듣고 병완은 슬퍼 눈물까지 찔끔 흘리었다. 기준은 팔소매로 눈물을 닦았다. “아주머닌 우릴 얼마나 보살폈다고. 참, 비통하구나.” 그들의 말을 엿듣던 온 집 식구들은 모두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지새금은 뒤에서 근심했다. “저 생원 때문에 이 집안 큰 일 나겠다. 큰시아버지 유격대에 갔으면 됐지 생원까지 삐칠 게 뭐요? ” 명옥은 그 말에 속이 걸리는 데 있었지만 큰집과 화목하게 살려고 그만 두었다. 영자는 오랜만에 만난 아버지 목을 끌어안고 칭얼거리었다. “아버지, 어데 갔댔어?” “응? 장사하러 갔지.” 상순은 영자를 안고 뽀뽀해 주었다. 이튿날 상순은 또 약 담배 장사하러 떠났다. 하긴 그가 약 담배장사를 하지 않으면 집식구들은 입에 거미줄을 칠 지경이었다. 유격대에 쌀과 약, 소금을 사가느라고 약 담배장사를 해 번 돈을 다 쓰고 장학산의 빚을 물지도 못하였다. 게다가 패용천산 앞의 논밭이 물에 쫄딱 밀리어 벼를 얼마 거두지도 못했는데 손호표 지주는 소를 죽인 앙갚음으로 소작료로 6할이나 가져가 버렸던 것이다. 먹을 것이 없어 명옥은 본가 집에 가서 좁쌀 세말을 가져다 온 집식구들이 죽을 쒀먹으면서 연명하고 있었던 것이다. 상순은 충국을 데리고 먼저 공석촌으로 갔다. 월금 누나네 집으로 가면서 둘째매형을 보고 돈을 꿔 달라고 통사정을 들이대었다. 둘째매형 박범석은 결혼 때 인사도 받지 않은 가시아버지는 미워했지만 사내대장부 같은 막내처남만은 좋아 하였다. 그는 농궤 자물쇠를 열고 돈을 꺼내 주면서 “옛소. 200원이오. 가져다 돈을 많이 버오.”라고 하였다. 월금은 장사하러 떠나는 막내오라비를 보고 얼마나 대견하였는지 몰랐다. (조선에서 넘어와 오랑캐 령을 넘을 때만 해두 바지에 오줌을 싸더니. 쯧쯧, 저게 언제 저렇게 커서 장사하러 다 다니니?) 그녀는 동구 밖에까지 따라 나와 허리춤에서 돈을 몇 입 꺼내 막내오라비에게 슬쩍 건네주었다. “이걸 가지고 가서 길에서 배고플 때 뭘 좀 사먹어라.” “고맙소. 누나.” 상순은 둘째누나가 준 돈까지 염낭에 깊숙이 간직하고 나서 진수해 큰매형네 집으로 갔다. 상순의 큰 매형 최경인은 조선에서 들어와 부모를 모시고 진수해에서 서당을 차리고 애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있었다. 상순은 큰 매형의 집에 들어 가 먼저 최구장 사돈어른 양주에게 인사를 드리고 큰 매형에게 찾아 간 사연을 말하였다. 경인은 아내와 상의하고 600원이나 척 내 놓았다. "막내처남 어쩌다 돈 꾸러 왔는데 도와 줘야지. 이건 우리 일가의 명줄과 같은 돈이네. 아무튼 가지고 가서 주의하면서 돈을 많이 버오." 어금은 자기 막내오라비를 진심으로 도와주는 남편이 고마웠다. “감사하오.” 상순은 큰 매형이 눈물이 찔끔 날 정도로 고마웠다. 그는 최구장 사돈어른으로부터 돌아가면서 인사하고 떠나가려고 하였다. 그때다. “외삼촌!” 학교에서 돌아온 근덕은 상순을 보고 반겼다. 근원과 해옥 등 조카들이 우르르 모여와 반겼다. 그들은 모두 멀쑥하게 생긴 작은 외삼촌을 좋아했다. 상순은 외조카들을 일일이 안아 주면서 “내 이제 돈을 많이 벌면 엿 사탕을 사다 줄 게.”라고 말하고는 집을 나섰다. 경인은 시름이 놓이지 않는지 따라 나와 충국을 곁눈질하면서 “처남, 장사할 때 누구나 너무 믿지 마오.”라고 신신당부하였다. “양, 근심하지 마오. 얘는 내 친구요.” 상순은 인사를 마치자 진수해역으로 나갔다. 상순은 충국을 데리고 진수해역에 나갔다. 그들은 기차를 타고 아주 순조롭게 명천과 우시장에 달려 나갔다. 그들은 약 담배 장사꾼들에게서 약 담배를 사자마자 숨도 돌릴 새 없이 기차를 타고 곧추 귀로에 올랐다. 그들은 기차를 타고 교하에 가서 내렸다. 상순은 충국을 데리고 교하 시내를 돌다가 역 부근의 한 여관에 들어갔다. 여관의 뚱뚱한 주인은 그들과 짐을 흘끔거리었다. “무슨 장사를 하오?” 상순은 “약장사를 하오.”라고 하였다. 충국은 손으로 상순을 툭툭 치면서 사실대로 말하지 말라고 눈짓하였다. 여관 주인은 불신에 찬 충국의 거동을 보더니 저쪽으로 가 버리었다. 충국은 상순을 보고 나직이 꾸지람 하였다. “왜 약장사 말을 하오? 저 사람이 일본 놈들이라도 데리고 오면 어째?” 그러나 상순은 “감히? 가만 놔두지 않을 테야.”라고 큰소리를 탕탕 쳐댔다. 충국이 근심하는데도 상순은 “교하의 약 담배장사꾼을 하나도 모르는데 여관 주인 보고 도와달라면 어떨까?” 하고 물었다. 충국은 “형, 어쩌자고 그래?”하고 놀라했다. 상순은 “여관 주인이 여관까지 메고 달아나겠니? 일이 뒤틀려지면 여관이라도 팔아서 내라고 할 판이지.”라고 하였다. 그 말에 충국도 “글쎄 말이오.” 라고 하며 상순의 말을 따랐다. 상순은 충국을 데리고 짐을 들고 여관 주인이 든 방으로 찾아 갔다. “무슨 일이오?” 여관 주인은 흘끔거리며 상순이 손에 든 짐을 쳐다보았다. 상순은 여관 주인의 방에 들어가 걸상에 앉았다. 그는 집안에 주인만 있는 것을 보고 조용히 “주인, 큰 장사를 해보지 않겠소?” 하고 속뽑이를 해보았다. “무슨 장사를?” “글쎄 우리와 손을 잡고 장사할 생각이 없소? 여관방만 차려서야 어떻게 갑부로 되겠소?” 상순이 바투 들이대자 주인은 “무슨 장사인지 돈만 벌면 해보지.” 라고 하였다. 상순은 짐을 내밀면서 “약 담배를 팔아 주오. 그럼 한몫 톡톡히 주지.” 하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였다. 주인은 기절초풍할 지경이었다. “약 담배?! 일본 순사 놈들한테 들키면 목이 날아나!” 상순은 황급히 손으로 주인의 입을 막고 바깥을 살피었다. 이윽고 머리를 돌리고 물었다. “하겠소? 안 하겠소?” 주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머리를 숙이고 궁리하였다. 한참 후 천천히 머리를 들었다. “헛일 삼아 해보기오.” “당신은 여기 면목을 잘 아는 사람들에게 약 담배를 파오.” “알았소. 내 팔아보지.” 주인이 대답하자 상순은 약 담배 짐을 내보이고 맡기었다. 그는 안전을 고려해 다른 여관에 자리를 옮기었다. 며칠 후 상순과 충국은 그 여관에 되돌아가 주인을 찾았다. “주인, 약 담배 값을 주오.” 주인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잖아도 자네들을 찾자고 했네. 전날에 약 담배를 팔러 다니다가 순사 놈한테 들키어 약 담배 짐을 던지고 달아났네.” “뭐라고? 약 담배 값을 내 놔. 이 놈!” “말을 듣고서도 떠들어? 떠들면 순사들이 다 잡아 가! 미친 놈들, 잡혀 가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인줄 알아라. 흥!” 상순은 열통이 터지었지만 용빼는 수가 없었다. 충국은 성이 꼭뒤까지 치밀어 어쩔 줄 몰라 했다. “내 뭐라던. 이런 놈을 믿고 어떻게 장사하니?” 상순은 주먹을 연신 날려 주인의 면상을 장마당이 되게 만들어 놓았다. “네깐 놈이 감히 우리 돈을 떼먹어? 어째 여관에 불을 콱 지르래?” 그 말에 주인은 혼비백산하였다. “불을 질러? 순사 불러야겠어.” 그 놈은 피 터진 코를 손으로 문대며 옆방에 대고 고래고래 고함치었다. “얘들아! 빨리 순사 불러! 이 놈들 여관에 불을 지르겠대!” 옆방에서 여편네가 소리쳤다. “살인이야! 사람 살려요!” 상순이 피뜩 바깥을 내다보니 중절모를 쓴 웬 사내가 들이 닥쳤다. “봐라! 순사 왔어. 이 놈들, 어디로 달아나?” 여관 주인이 우쭐거리었다. 바빠 맞은 상순은 충국을 돌아보면서 “뛰어라!” 라고 고함치며 문 밖을 뛰어 나갔다. 그는 몸을 날려 울안에서 덮쳐드는 순사 놈을 발길을 날려 걷어찼다. 순사 놈도 만만찮은 놈이어서 옆으로 슬쩍 피하면서 권총을 빼들었다. 상순은 옆으로 몸을 살짝 낮추면서 재차 발길을 날려 그 놈의 권총을 차 떨어뜨리었다. 충국이 뒤따라 나오며 권총을 주어 들었다. 그런데 땅 밑에서 솟아나온 듯이 순사 놈들이 대여섯이 호각을 불며 뒤쫓아 왔다. 상순은 충국의 손에서 권총을 빼앗아 제일 앞에서 쫓아오는 순사 놈을 겨눠 한방 갈겼다. 땅! 총소리와 함께 그 순사 놈이 가슴을 붙잡고 꺼꾸러졌다. 다른 순사 놈들은 대갈통을 싸쥐고 부랴부랴 도망쳤다. 상순과 충국은 한참 이 골목 저 골목 빠져 달아나다가 뒤따르는 놈이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헐떡거리며 멈춰 섰다. 상순이 권총을 품속에 걷어 넣는데 충국이 두덜거렸다. “에이 참, 약 담배 값도 찾지 못하고 이게 뭐야?” 상순은 대수롭지 않아 하며 너털웃음까지 웃었다. “허허허, 야, 이 놈아, 목숨까지 잃을 수야 없지 않느냐? 이후에 여관 주인 놈을 찾아가 약값을 받아내자.” “초상집 개 신세 됐구먼두, 너털웃음이 나와? 흥!” “목숨만 있으면 돈이야 아무 때건 벌겠지. 속담에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하지 않았는가? 약 담배 값 대신 권총 한 자루 벌었으면 본전은 됐어.” 충국이 손을 내밀었다. “권총은 내 주은 거야.” 허나 상순은 희죽이 웃으며 충국의 손을 탁 쳐버렸다. “내 순사 놈을 발길로 차지 않았더라면 권총은커녕 둘 다 황천객이 된지 오랠 거 아냐?!” 그들은 마주 보더니 너털웃음을 웃으며 그 길로 교하 아래 산 기슭까지 달아났다. 거기서 밤중에 목재를 실은 짐차를 타고 한 많은 교하를 떠났다.  
91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54) 댓글:  조회:1963  추천:0  2016-10-27
        10. 밀림속의 눈함정       일본 관동군 놈들은  사흘 후 밤중에야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원시림 속에 철 발굽을 들여 놓게 됐다. 다행히 두꺼운 눈이 떵떵 굳은 덕에 순조롭게 밀림 속의 밀영 부근에 접근하게 된 것이었다.       어둠 속에 눈을 하얗게 들쓴 소나무들이 하늘을 찌르는 밀림, 가없이 펼쳐진 눈 덮인 밀림에서는 눈보라가 윙윙 사납게 울부짖고 있었다.      웬 일인지 유격대는 사흘 전에 두번 기습하고는 줄곧 그림자도 얼씬하지 않았다.     철주는 그것에 더 불안했다. 그는 눈에 반쯤 메워진 깊은 산골짜기를 바라보았다. 산골짜기 막치기는 눈보라 치는 수림 속에 가리어 보이지도 않았다. 그가 골짜기 굳은 눈 우에 올라가 발로 탕탕 굴러 보아도 눈이 어름처럼 떵떵 굳어 빠지지 않았다. 피뜩 보니 무슨 눈 우에 발자국이 어지럽게 찍히어 있었다. (유격대가 활동하던 곳인가? 사냥꾼들이 다닌 발자국일까?) 착잡한 생각을 하던 그는 대오를 멈춰 세우고 앞에서 길안내를 하는 응세를 불렀다. 응세는 뒤로 달려와 허리를 굽실거렸다. 철주는 군도자루를 잡고 물었다. “아직도 유격대 밀영이 먼가?” “이 골짜기를 곧추 건너가면 한 3리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저쪽 골짜기 막바지로 에돌아가려면 얼마나 먼가?” 응세는 “한 10여 리는 에돌아야 할 겁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철주는 머리를 끄덕이고 나서 꼬치꼬치 캐물었다. “그래 이 산골짜기를 이전에도 건넜는가?”        응세는 두루 살펴보더니 눈 우를 손가락질 하였다. “예. 이전에도 우린 사냥꾼으로 위장해 가지고 여길 건너가서 밀림속의 밀영을 정찰하다가 발각됐지요. 난 이 골짜기에 굴러 떨어졌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습니다. 그 때도 밤중에 여기 굳은 눈을 밟고 산골짜기를 건넜습니다. 그런데 재수 없이…” 응세는 하마터면 자기가 유격대에 나포된 말을 해버릴 번 했다.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용케 삼켜 버렸다. 그는 한철주의 눈치를 흘끔 훔치어 보면서 중얼거렸다. “백 소조장도 여기 눈을 건너 정찰하다가 죽었습니다.” “그런 불길한 소리 하지 말라. 건너 봐.” “예.” 응세는 말을 마치자 골짜기에 덮인 눈 우에 올라가 발로 눈을 탕탕 굴러 보았다. “보세요. 말을 타고 건너가도 꺼지지 않을 겁니다. 건너 오십시오.” 한철주는 무슨 일이 떠올랐던지 응세를 손짓해 불렀다. “이리 오게.” 응세가 헐금씨금 올라오자 나직이 물었다. “김호랑 이상한 거동이 없던가?” “없습구마.” “음.” 한철주는 머리를 절레절레 가로 저었다. “경각성을 늦춰선 안 돼. 돌다리도 두드려 보면서 건너라고 했네. 김호랑 불러다 앞세우게나.” “예.”        한철주는 산등성이를 따라 걷던 놈들에게 명령했다.  "김호(김상순)랑 응세랑 앞세우고 눈 위로 산골짜기를 건너라!" 상순은 사위를 둘러보았다. 큰아버지와 용천 대장의 결정에 따라 유격대는 여기 협곡 밀림에서 매복습격 전을 하기로 했다. 그런데 놈들은 순순히 밀림 속의 밀영에까지 발을 들여 놓을 것 같지 않았다.  그는 산골짜기를 두루 여겨 보고나서 응세가 주의하지 않는 틈을 타 형내와 충국의 허벅다리를 툭툭 쳐놓고 주먹을 쥐어 보였다. 싸울 준비를 하라는 신호였다.       상순은 젤 앞에서 고의로 발을 쾅쾅 구르며 걸어나갔다. "봅소. 눈이 떵떵 굳어서 여기로 건너도 됩니다. 언제 10리나 에돌아가개." 형내와 응세가 깊은 산골짜기를 내려가 굳은 눈을 밟으며 한 열 미터 들어가도 아무 일도 없었다. 일제 관동군은 산골짜기를 곧추 건너지 않으면 멀리 에돌아야 하였다. 한철주는 한숨을 후 내쉬더니 군도를 빼들어 앞으로 홱 휘두르며 나직이 나직이 명령하였다. “천천히 전진.” 숱한 적들은 산골짜기를 우르르 쓸어 내려가 총칼을 빼들고 굳은 눈을 밟고 달려 나갔다. 쿵! 쿵! 갑자기 요란한 소리와 함께 굳은 눈이 푹푹 꺼져 버렸다. 상순이랑 응세랑과 함께 눈 함정에 빠져 몇 길 되는 눈 속에 사라지고 말았다. 뒤따르던 놈들이 “함정!” 하고 되돌아서려 했다. 그 때는 이미 늦었다. 쿵! 하늘땅이 뒤번지어 지는 소리가 나더니 어지간한 집 울안만큼 눈이 단꺼번에 풀썩 꺼졌다. 또 십여 명의 놈들이 눈 함정에 빠져 없어졌다. “멈췃!” “빨리 산골짜기를 벗어나라!” 한철주가 고함칠 때었다. “사격!” 고함소리와 함께 산골짜기 맞은편 눈속 여기저기에서 자지러진 총소리와 함께 섬광이 번쩍이었다. 적들은 헛총질을 하면서 맞불질 하였다. 그러나 눈 동굴에 은폐해 쏘아대는 유격대원들의 몰 사격에 적들은 삼대 쓰러지듯 하였다. 원래 성칠과 진달래는 유격대원들을 데리고 협곡막치기로부터 산골짜기를 따라 눈 동굴을 파고 내려와 여기에 눈 바닥 밑으로부터 올리 큰 함정을 군데, 군데 파놓았던 것이다. 눈 위에 어지러운 발자국이랑 그대로 굳어 있어 근본 눈 함정을 알아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스무 길이나 되는 새까만 눈 함정에 빠진 상순이랑 미처 정신을 차리지도 못했을 때었다. 새까만 눈 함정 밑바닥에 가로 난 눈 동굴에서 유격대원들이 총을 쏘면서 뛰어 나왔다. “총을 쏘지 마십시오. 우리 셋은 조선 백성들이오.” “조선 백성?!” “어느 게 백성이고 적인지 어떻게 알아?!” “조선백성은 소리 쳐라!” 유격대는 총을 쏠 대신 총창으로 마구 찔렀다. “내 조선 백성이오” “나도!” 상순은 충국에게 한어로 소리치라고 고함치었다. 그리하여 충국까지 다른 동굴에 끌리어 들어갔다. 나머지 응세랑 가메다는 유격대원들이 휘두르는 란도와 날창에 개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다른 큰 눈 함정에 빠진 일본 놈들도 함정 밑바닥에 쓰러지었다가 일어나자마자 총창에 찔리어 개죽음을 당하였다. 함정 밑바닥 여기저기 난 동굴에서 일본 놈들을 총으로 쏘고 총창으로 찌르는 고함소리와 적들의 애처로운 비명소리가 천지를 진동하였다. 순식간에 수십 명을 잃은 한철주는 눈 함정 밑에 숱한 유격대가 있는 줄도 모르고 맞은쪽 산등성이 눈 속에서 사격하는 유격대를 쏘아 보며 악이 받쳐 발을 탕탕 굴렀다. “철퇴!” 나머지 적들은 산골짜기에서 기어 올라와 다리야 날 살리라고 철퇴하였다. 맞은편의 유격대원들은 맞은쪽 적들에게 명중탄을 안기다가 눈 동굴에 들어갔다. 그들은 눈 함정 밑의 일본 놈들의 시체에서 군복과 군화를 벗기어 내고 무기를 걷어 가지고 눈 동굴 어귀를 막아버린 후 눈 동굴을 따라 산골짜기 막치기에 있는 협곡에 들어가 숨어 버렸다. 협곡은 밀림에서 보면 자그마한 틈 밖에 없었지만 협곡 밑에는 수십 길 깊은데다가 널다란 동굴이 생겨 있어 천연적인 은신처였다. 성칠과 용천은 작전계획을 세울 때 적들이 산골짜기 눈 함정에 빠져 혼난 후 꼭 산골짜기를 에돌아 협곡 위쪽으로 건너가리라는 것을 예견하고 북만 유격부대와 함께 미리 여기 매복해 기다리기로 했던 것이다. 성칠은 병수와 득호를 돌아보고 “위생원과 함께 상순이랑 데리고 밀림 속의 밀영으로 돌아가오.”라고 하였다. 상순은 총 한 자루를 들고 형내와 충국을 데리고 병수와 득호를 따라 밀림 속의 밀영으로 밤도와 달리어 갔다. 그들이 밀림 속의 밀영부근에 이르렀을 때었다. “군호!” 둘러보니 보초병이 나무 위 어디에선가 군호를 묻는 것이었다. “진달래!” 병수가 대답하자 보초병이 눈 덮인 미인 송 나무 가지 위에서 들어가라고 손짓했다. 장백산 밀림속의 밀영에 들어선 후 상순은 자주 다녔기에 곧추 성칠네 통나무집에 찾아 갔다. 바깥에서는 경위원이 보초를 서고 있었다. “군호!” “진달래!” 경위원은 병수와 상순을 알아보고 집안으로 안내하였다. 형내는 성칠의 통나무집 구들에 신음소리 내며 누워 있는 작은할머니를 알아보고 문안인사를 하였다. 진달래는 은녀와 함께 하옥의 옆에서 간호하다가 병수에게 물었다. “전선정황은 어떤가요?” 병수는 진달래와 은녀를 돌아보면서 대첩을 보고하였다. “대승을 거뒀소. 숱한 놈들이 눈 함정에 빠져 무리죽음을 당했소.” 등이 굽은 득호도 기뻐 어쩔 줄 몰라 하였다. “그 놈들이 이제 협곡에서 또 몰살당할 게요. 허허허.” 진달래는 하옥의 상처를 처치해 주는 형내를 보다가 구들에서 일어났다. “내 바깥에 나가 보초병들을 돌아보고 오겠어요. 수고들 하세요.” 말을 마치자 진달래는 득호와 병수를 데리고 나갔다. 하옥의 상처는 많이 호전됐다. 그녀는 천천히 눈을 뜨더니 상순의 팔을 붙잡고 떠듬떠듬 말했다. “조카, 날 두고 빨리 도망쳐. 아무리, 아무리 생각해도 어째 상서롭지 못해. 여긴 적들이 빤히 아는 곳, 곳이오. 여기를 가만 놔두겠나?”           상순은 “큰어머니, 함께 도망치깁소.” 하고 총을 쥐고 바깥에 나갔다. 그는 집 뒤 눈 덮인 가산에 가서 밤 장막에 묻히어 버린 채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밀림의 동정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살폈다. 한편 한철주는 그런 줄도 모르고 졸개들을 끌고 멀리 밀림 속으로 철퇴하였다. 적들은 눈보라가 윙윙 휘몰아치고 굶은 이리떼들이 여기저기서 우는 무시무시한 눈 덮인 밀림 속에서 군데군데 우등 불을 피워 놓고 모여 서서 밀림의 동녘 하늘이 밝아 오기를 기다리었다. 땅땅! 갑자기 총소리가 자지러지게 울렀다. 우둥불에 둘러 앉아 불을 쪼던 몇놈이 푹푹 꼬꾸라졌다. "반격!" 한철주가 군도를 빼들고 고함쳤다. 질겁한 놈들은 눈바닥에 엎디거나 아름두리 나무에 기대 밀림에 대고 헛총질을 한바탕했다. 그러나 맞은 켠 밀림은 총소리마저 없었다. 유격대원들은  몇놈을 쓰러눕히고는 밀림 속에 자취를 감췄다. 놈들이 총을 거두고 불을 쬐려고 할 때였다. 땅! 땅! 땅! 또 다른 쪽에서 총소리가 울렸다. 몇놈이 또 풀썩풀썩 눈 위에 더러운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유격대원들은 놈들이 시름 놓고 좀 자려고 하면 야밤을 타 기습하군 하였다. 유격대의 교란 작전에 놈들은 온 밤 공포 속에서 한잠도 자지 못했다.   지루한 밀림의 밤이 흘러가고 드디어 동녘 하늘이 희붐히 밝아 왔다. 한철주는 응세와 가메다가 정찰하지 못한 새 정황에 부딪치어 골탕을 먹은 것이 안타까워 속이 바질바질 탔다. “내 기어이 장백산 밀영을 토벌해 네 놈들의 소굴을 깡그리 불태워 버릴 거야! 네놈들을 칼 탕 쳐 놓을 테다!” 그는 먼저 특무들을 시켜 앞에 나가 밀림에 매복 군이라도 있나 령탐하게 하였다. 특무들은 날이 훤히 밝아서야 돌아 왔는데 사방 몇 리 안에 유격대라고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러자 한철주는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밀림을 쏘아보더니 이를 악물며 군도를 빼 들었다. “전군은 협곡을 넘어 장백산 밀영에 진군하라!” 적들이 협곡을 넘어 밀림에 들어섰을 때었다. 땅! 땅! 난데없는 총소리가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밀림의 고요를 깨뜨리었다. 몇몇 일본 놈들이 보기 좋게 꺼꾸러졌다. “유격대!” “아이고, 유격대!” 일본 관동군이 거의 절반이 협곡 뒤로 돌아 갔을 때 유격대가 또 나타나 맹렬한 사격을 가하였다. 적들은 비명소리 아우성소리 쳐 댔다. 삽시에 적들의 진영은 수라장이 돼 버리었다. 정말 장백산 기슭 밀림의 항일유격대는 말 그대로 신출귀몰하는 천병이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몇 리 안에 없다던 유격대가 하늘에서 떨어진 건가? 땅 밑에서 솟아났단 말인가?” 한철주도 신출귀몰하는 유격대를 두고 어찌는 수 없어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모든 전투는 유격대의 작전계획대로 벌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한철주는 제 놈들 무기와 수적 우세를 믿고 군도를 빼 들고 밀림이 떠나가게 고래고래 고함치었다. “도쯔께끼(돌격)!” 하고 . 일본 놈들은 더는 살 길이 없는 것을 알았든지 죽을 둥 살 둥 모르고 총을 쏴대며 눈무지 뒤에서 사격하는 유격대원들에게 덮쳐들었다. 성칠은 최후발악하며 개미떼처럼 덮쳐드는 적 무리를 보고 대낮인데다가 전세가 불리한 것을 보고 철퇴명령을 내리었다. 그러자 유격대원들은 협곡으로 통한 눈 동굴로 들어갔다. 그들은 눈으로 동굴어귀를 막아버리고 다시 협곡을 따라 깊숙이 숨어 버리었다. 한철주가 유격대가 사격하던 눈 무지들을 점령했을 때에는 유격대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유격대원들이 엎드려 총을 쏘던 자리와 어지러운 발자국 자리 밖에 보이지 않았다. “유격대가 하늘로 날아 났는가? 땅속으로 스미어 들었단 말인가?” 그는 군도를 쥔 오른손을 허공에 대고 고함쳤다. 뒤이어 한철주의 안경알 밑의 우멍한 눈에 음흉한 빛이 번쩍이었다. “네놈들 유격전술에 넘어 가 눈 함정에 빠질 거 같은가? 성칠아, 네 놈이 아무리 잔꾀를 부려도 유격대 밀영을 메고 달아나겠는가?” 그는 이빨을 악물더니 군도로 밀영 쪽을 가리키었다. “곧추 밀영으로 진군!” 적들은 추운 밀림의 해 빛에 총창을 번뜩이며 억지로 사기를 높이어 가지고 밀영 쪽으로 진군하였다. 땅땅! 땅땅! 잠잠하던 밀림 속에 또 자지러진 총소리가 울리었다. 사라졌던 유격대가 또 눈 동굴에서 나타나 적들의 후미에 대고 맹사격을 가하였다. 적들의 더러운 시체가 허연 눈 우에 나뒹굴었다. 한철주는 오도 가도 못하다가 더는 유격대의 유격 술에 코를 꾀여 끌리어 다니지 않으려고 마음먹었다. 그는 쓴 웃음을 지었다. “1중대는 산골짜기 유격대 놈들을 견제하라. 나머지 2중대와 3중대는 밀영을 진공!” 1중대의 한개 소대 밖에 안 되는 적들이 협곡 쪽으로 총부리를 돌려대자 유격대는 성칠의 명령에 따라 눈 동굴 속으로 되들어 가 버리었다. 그들은 동굴어귀 천정의 눈을 무너뜨려 자취를 감춘 후 협곡의 눈 동굴을 통해 전날 밤중에 싸우던 산골짜기 눈 함정 쪽으로 전이하였다. 성칠은 적들이 장백산 밀영을 공격하려는 것을 알고 장백산 밀영 쪽으로 포위권을 좁혀왔던 것이다.                                                               11. 결사전        한철주가 끌고 온 관동군 일본 놈들은 원래 야밤에 밀림의 밀영을 기습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젠 발각된 바 하고는 대낮에 내놓고 밀영을 진공하였다. 밀영 쪽에서 총소리가 자지러지게 들리었다.        원래 야마모도는 진작 가메다를 앞세워 별동대를 끌고 가파른 산골짜기를 넘기 싫어 남쪽으로 멀리 에돌아 전날에 벌써 장백산 밀영에 박근했던 것이다. 그러나 교활한 야마모도는 실력을 남기려고 눈 덮인 밀림에 잠복해 있으면서 섣불리 진공하지 않았다.       이튿날 한철주가 골짜기와 협곡에서 한창 얻어맞는 틈을 타 야마마도는 별동대를 끌고 생각지도 못한 남쪽으로부터 장백산 유격대 밀영을 습격하기 시작하였다.    야마모도는 수길을 보고 쑤근거렸다.    “그저 강공만 해선 안되겠어." 그는 허꺽쇠를 불렀다. "허꺽쇠 분대장은 10여명을 유격대원들로 가장시켜 저 놈들의 밀영을 기습하게 해라.” “옛!” 야마모도는 유격전술에 능한 유격대가 빤히 드러난 장백산 밀림속의 밀영에 남아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헛물을 켜면서 자기들의 정체를 드러낼까봐 걱정되었던 것이다. 허연 겨울 한복차림에 털조끼를 껴입고 개털 모자를 쓰고 수길과 허꺽쇠 등은 밀림의 밀영 쪽으로 어슬렁어슬렁 다가갔다. 그때 병수가 멀찍이 나무 뒤에 숨어 이상한 사냥군 복색의 한무리 낯선 사람들을 발견하였다. “군호!” “장백산!” 허꺽쇠는 제법 군호까지 주어 댔다. 그러나 병수는 제일 앞의 허꺽쇠가 별로 눈에 익은 것을 발견하였다. “누군가? 군호!” “장백산!” 이전에 쓰던 군호였다. 유격대는 특무사건 후 군호를 “진달래”로 바꿨던 것이다. 그러나 놈들은 가메다와 응세에게서 들은 묵은 군호를 썼던 것이다. “우린 사냥꾼들이오. 항일유격대하구 일본 놈들이 싸우는지라 지나가다가 유격대를 도우려고 찾아 왔소.” “꼼짝 말엇!” 병수는 당년에 한길수의 마차를 몰고 우시장에 갔을 때 허꺾쇠가 경찰이었다는 것을 대뜸 알아보았다. 나뭇가지 우에 있던 득호도 그 놈을 알아보고 총을 겨누었다. “꼼짝 말라!” “까딱하면 쏜다!” 땅! 나뭇가지 위에서 득호가 먼저 총을 쏘았다. “에쿠!” 허꺾쇠가 왼팔에 총을 맞고 장총을 눈 우에 떨어뜨렸다. 그러나 그 놈은 인차 오른 손으로 허리춤에서 권총을 꺼내 득호를 쏘았다. 땅! 죄악의 총소리와 함께 득호가 흉탄에 맞아 총을 뚝 떨어뜨리더니 가슴을 부둥켜안고 눈 우에 털썩 쓰러지었다. 땅! 병수도 총알을 맞아 나무 우에서 거꾸로 퉁 떨어졌다. “여보!” 은녀는 통나무집에서 그 광경을 보고 목숨 걸고 뛰어갔다. "가지 말라!’ 성칠은 소리치며 허꺽쇠를 겨누고 총을 쏘았다. 땅! 허꺽쇠는 다리에 총상을 입고 푹 꼬꾸라졌다. 뜻밖에 통나무집과 나무 가지 우에서 울린 총소리에 깜짝 놀란 적들은 눈 우에 납작 엎드리었다. 그 놈들은 나무 가지에서 총을 쏘는 성칠 등을 향해 몰 사격을 가했다. 은녀는 눈 덮인 땅바닥에 엎드리어 품에서 권총을 빼들어 적들에게 사격하면서 한 뼘 한 뼘 남편 병수한테로 기어갔다. “진달래야! 저 대장 년의 대가리를 떼 오면 황군이 큰 상을 준다! 돌격!” 적들은 병수에게 기어가는 은녀를 진달래로 알고 맹사격을 가하였다. 은녀는 다리에 총을 맞고 뻘건 피를 흘리었다. 그러나 총상을 입은 다리를 질질 끌며 눈 우에 뻘건 피를 줄줄 흘리면서도 병수 옆으로 계속 기어갔다. 그가 한 뼘 한 뼘 기어간 뒤에는 뻘건 피로 하얀 눈에 핏줄을 그리었다. 그러나 득호는 이미 숨져 있었다. “은녀! 가지 마라!” 성칠이 고함치며 뛰어갔다. 땅! 총소리와 함께 성칠이 푹 쓰러지며 은녀를 뒤덮었다. 총알이 날아와 그들의 주위에서 눈 꼬치를 튕기었다. 성칠은 은녀를 안고 데굴데굴 옆으로 굴러 통나무집 문 앞으로 굴러 돌아왔다. 진달래랑 상순이랑 통나무집 문에서 엄호 사격했다. “오빠, 병수를 살려야 하오.” “병수는 이미 희생됐다. 빨리 동굴 안에 들어가라!” 은녀는 부상당한 왼쪽다리를 질질 끌고 동굴 안으로 들어가면서 대성통곡쳤다. 형내는 동굴어귀에서 은녀의 부상당한 왼쪽다리를 약솜으로 처치해주고 붕대로 꽉 동여 매 주었다. 동굴 밖에서는 눈보라 휘몰아치고 총소리 콩 볶듯 했다. 병수의 선혈은 밀림의 하얀 눈 덮인 산비탈을 빨갛게 물들이며 연분홍 진달래꽃을 피우는 상 싶었다. 장백의 밀림도 비통한 나머지 세찬 눈보라에 몸부림쳤다. 아름드리 미인 송 나무 가지들에서 눈 더미들이 눈물을 쏟으며 와르르 무너지어 내리며 눈가루를 흩날리었다. 쒹- 딱! 허꺽쇠가 날아 오는 돌멩이에 대갈통을 얻어맞고 즉살하였다. 쒹 딱! 또 한 놈이 꺼꾸러지었다. 수길은 대갈통을 싸쥐고 어데서 날아오는 돌멩이냐고 두리번거리었다. 이때 나무 가지를 구르며 이 나무 저 나무 이리저리 날아다니는 하얀 옷을 입은 날랜 여인이 눈에 띄었다. 그녀는 나무 사이를 평지 달아 다니듯 날아다니면서 염낭에서 돌멩이를 꺼내 연신 돌팔매질 하였다. 또 몇 놈이 돌멩이에 대갈통을 맞고 쓰러지었다. 수길은 권총을 휘두르며 “저 나무 우의 귀신을 쏴!” 하고 고함치며 총을 쏘았다. 그러나 진달래는 몸을 날리어 피하며 조약돌로 적들을 까부시며 통나무집 쪽으로 날아 갔다. 야마모도는 접전해 보고 유격대 주력은 북쪽에서 한철주 부련대장의 관동군과 싸우고 있고 장백산 밀림속의 밀영에는 소분대만 남았다고 추측하였다. 그는 군도를 뽑아 들고 부하들을 돌아보더니 “도쯔께끼!” 하고 고함치었다. 약 두개 소대나 되는 적들이 남쪽에서 불의에 장백산 밀림속의 밀영에 덮치어 들었다. 적정을 알리는 총소리가 울리자 눈보라 속의 밀영에서는 큰 전투가 시작되었다. 성칠은 함정을 팠던 골짜기 눈 동굴에서 소 분대 유격대원들을 거느리고 관동군을 앞 찔러 가산의 갱도에 뛰어 들어 갔다. 그들은 재빨리 갱도로 하여 밀영의 가산과 통나무집들로 통한 갱도에 들어갔다. 별동대 놈들은 나무우로 날아다니며 돌팔매질하는 진달래를 겨누고 몰 사격을 가하였다. 진달래는 아버지가 엄호 사격하는 틈을 타 발로 나무 가지를 힘껏 구르며 날아 내리어 자기 통나무집 안으로 철퇴하였다. 상순은 통나무집 뒤 가산의 갱도 총구멍에 총을 걸어 놓고 덮쳐드는 적들을 향해 사격하였다. 그러나 명중률이 높지 못하였다. 충국도 통나무집 안에서 사격하였다. 저쪽 통나무집에서 사냥꾼 출신 최구철이 쏜 총소리가 날 때마다 한 놈씩 꼬꾸라지었다. 진달래는 통나무집안 부엌의 갱도로 뛰어 들어가 어둠을 더듬으며 성칠의 통나무집으로 황급히 뛰어갔다. (하옥 언니를 갱도로 업어 들여와야 해!) 진달래가 갱도에서 성칠의 통나무집 안에 들어갔을 때였다. 상순과 충국은 총을 쥐고 문을 지키고 형내는 하옥을 업고 안 칸의 동굴로 들어가고 있었다. 이때 갱도 안에서 성칠이 뛰어나왔다. 하옥은 형내의 잔등에 업힌 채 성칠을 보고 손사래를 치었다. “여보, 날 놔두고 빠, 빠지어 나가세요. 몽땅 잘, 잘못 돼요.” 허나 성칠은 하옥을 바꿔 업으면서 결연히 말하였다. “여보, 절대 그런 말 하지 마오. 이제 오래잖아 광복을 맞게 될 거요. 우린 조국이 광복되는 날 고향에 돌아가 살아야 하오.” 성칠은 하옥을 업고 동굴 속으로 들어갔다. 뒤에서 진달래는 문고리에 수류탄을 처매놓고 문선의 고리에 수류탄 심지를 뽑아 달아 매 놓았다. 그녀는 권총을 뽑아 들고 상순이네를 이끌고 집안의 동굴 속으로 들어가면서 통나무동굴 문을 꼭 닫아걸어 버리었다. 이윽고 야마모도가 별동대를 끌고 장백산 밀림의 밀영에 쳐들어 왔다. 한 놈이 총을 쏘며 밀림의 밀영 문어귀에 이르렀다. 그 놈은 수류탄을 통나무집 안에 들이 뿌리려고 문을 활 열어 재끼었다. 꽝! 꽝! 순간 진달래가 문고리에 달아맸던 수류탄과 놈이 쥐였던 수류탄이 연발로 폭발하였다. 수류탄 폭발폭음과 함께 그 놈은 형체도 없이 산산이 날아나 버리었다. “샤께끼(사격)!” 뒤따라 덮치어 온 야마모도는 성칠의 통나무집을 향해 군도를 휘두르며 고래고래 고함쳤다. 적들은 기관총까지 사격해댔다. 그러나 집안에서는 아무런 반격도 없이 잠잠했다. 의아해 하던 야마모도는 “도쯔께끼!” 하고 군도를 휘두르며 제일 먼저 무너진 통나무집 앞으로 뛰어갔다. 그때 가산에 난 총구멍에서 총소리가 울리었다. 땅! 야무진 총소리와 함께 야마모도 옆에서 돌격하던 일본 졸개 놈이 푹 꺼꾸러지었다. 야마모도는 무너진 통나무집자리 통나무 틈새에 납작 엎드려 총알이 날아 온 나무가 드문드문 들어선 가산 쪽을 두리번거렸다. “여기 갱도 있다!” “갱도 어귀를 찾아 내!” 적들은 헛총질을 해대며 허장성세해댔다. 통나무가 폭파되면서 마구 흩날렸다. 쌓인 통나무들 속에서 동굴 문을 발견하였다. “동굴을 찾았어!” 갱도 통나무 문을 열어 재끼자 야마모도는 졸개들에게 고래고래 고함치며 군도를 휘둘렀다. “갱도로 들어가 유격대를 잡앗!” 땅! 진달래가 총을 쏘았다. “앗!” 야마모도 놈이 군도를 툭 떨어뜨리더니 가슴을 붙안고 쓰러지었다. “대장님!” 그러나 야마모도 놈은 다시는 그 흉악한 눈을 뜨지 못하고 네 각을 쭉 뻗고 뒈지고 말았다. 땅! 가산 동굴에서 상순이 총을 쏘았다. 수길의 옆에서 총을 쥐고 가산 쪽을 기웃거리던 놈이 푹 꼬꾸라지었다. 적들은 기관총으로 가산 쪽을 맹렬히 사격하였다. 기관총질의 엄호하에 몇 몇 놈들이 갱도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땅! 땅! 땅! 갱도 안에서 진달래가 유격대원을 지휘해 사격하였다. 최구철까지 자기 집 뒤 가산에 판 동굴 어귀에서 합세하며 교차로 사격하였다. 복수의 탄알이 빗발치며 날아갔다. 갱도 안에 뛰어 든 적들은 컴컴한 갱도 벽을 더듬으며 들어 가다가 몽땅 격살 당했다. 적들은 최구철과 성칠의 집 뒤 가산에 판 갱도 어귀에 수류탄을 뿌리었다. 꽝! 꽝! 수류탄이 폭발하는 굉음과 함께 최구철이 사격하다가 쓰러졌다. 뒤이어 갱도 안은 조용해지었다. 진달래와 성칠은 동굴어귀가 폭파되자 진달래네 통나무집 동굴로 전이하였다. 진달래는 동굴에서 사냥총을 쥐고 쓰러진 아버지를 발견하고 꿇어 앉아 붙안고 목 놓아 불렀다. “아버지!”       최구철이 가산 갱도 어귀에서 사격하다가 그만 불행하게도 수류탄에 폭사했던 것이다. 진달래가 아무리 아버지를 흔들며 애타게 불러도 아버지는 머리가 터진채 대답이 없었다. 성칠도 달리어 왔다. “사돈어른! 사돈어른!” 성칠은 애타게 부르며 진달래 품 속에 안긴 최구철을 흔들었다. 그러나 얼굴이 피투성이 된 최구철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성칠은 이미 숨진 최구철을 업었다. “철퇴!” 성칠은 고함치더니 최구철을 업고 갱도 안쪽으로 달리어 들어갔다. 진달래는 뒤에서 따라 가며 “아버지!” 하고 통곡쳤다. 상순은 하옥을 업고 성칠을 따라 새까만 갱도를 더듬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수길은 놈들을 갱도 안에 몰아넣으면서 지껄였다. “들었지? 계집 유격대가 썩어진 애비를 부르는 소릴. 숱한 유격대들이 갱도 안에서 썩어졌어. 빨리 들어 갓! 나머지 유격대들을 몽땅 잡아 내!” 몇몇 조선인 별동대원들이 갱도 안에 들어갔다. “꽝!” 요란한 소리와 함께 갱도 안에 들어간 적들이 몰살하였다. 수길이 또 졸개들을 들여보내려 할 때다. “닥쳐!” 한철주가 적군 대부대를 끌고 덮치어 왔다. 한철주는 가산에 난 총구멍 쪽에 대고 사격을 들이댔다. 수류탄묶음도 날아갔다. 총구멍이 폭발하면서 깜깜한 꺼먼 동굴이 드러났다. 숱한 일본 놈들이 동굴 안에 맹사격을 가하면서 덮쳐들어갔다. 하지만 갱도 안에는 유격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정말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수길은 “갱도로 진공!” 하고 고함치었다. “닥쳐!” 철주는 수길을 욕지거리를 해댔다. “갱도에 들어가면 몽땅 죽어! 네놈도 별동대 부대장이란 말이냐?” 수길은 욕을 먹고 뒤 덜미를 긁적거리었다. “우리 별동대는 먼저 밀림의 밀영을 선제공격해 성칠 놈을 죽였습니다.” “뭐? 성칠을?!” 수길은 강보에 싼 수급을 내밀었다. 강보에 싸인 피 묻은 수급을 들여다보던 한철주는 도리머리를 가로 흔들며 수길을 한쪽으로 끌고 가 나직이 말하였다. “이 놈아, 이건 우리 집 머슴 병수의 수급이야. 이걸 성칠의 수급이라면 누가 곧이듣겠는가?” “예?” 수길은 다시 강보 안을 보고 놀랐다. 그러나 한철주의 안경 건 우멍한 눈이 교활하게 판들거리었다. “스즈끼 국장 성칠을 모르잖아. 가지고 가 성칠 놈의 대가리라고 하자.” “예- 도련님 고명합니다. 참 고명해.” 수길은 머리를 끄덕이며 뒷말을 이었다. “야마모도 대장도 마을에서 애기 엄마 머리를 떼 두고 진달래를 잡지 못하면 대용대가리로 쓰자고 하더니. 허허허. 참 고명합니다.” “떠들지 마! 일본 놈들이 듣겠다!” 한철주는 너털웃음을 웃으며 일본 놈들을 돌아보았다. 수길도 징글맞게 웃으며 졸개들 보고 잘 건사하라고 강보에 싼 수급을 넘기어 주었다. 한철주는 졸개들을 지휘해 저쪽에서 저항하는 진달래네 통나무집으로 돌격해 갔다. 놈들은 한철주와 수길의 지휘하에 텅빈 밀영의 통나무집들과 갱도어귀를 돌아가면서 수류탄으로 폭발해버리고 미리 준비한 휘발유를 치고 불을 질렀다. 그러고도 성차지 않아 갱도 안에 한바탕 수류탄을 뿌리고 사격하였다. “유격대 놈들 꾀임수에 들지 말라. 갱도에 들어가면 몰살당해!” 철주와 수길은 일본 놈들을 지휘해 텅 빈 유격대 밀영을 불살라 버리었다. 뒤이어 폭발하고 불타는 갱도와 통나무집 앞에서 병수의 수급을 쳐들어 보이면서 기념사진까지 찰칵찰칵 찍었다. 그건 상부에 보고할 때 쓸 좋은 전리품이었으니까.  
90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53) 댓글:  조회:1744  추천:0  2016-10-19
                        8. 대학살      별동대 야마모도 대장은 윙-윙- 눈보라 기승을 부리는 어둠 속 들판을 쓸어보다가 수길한테 대가리를 홱 돌렸다. "대오를 집합시켯!" "옛!" 야마모도는 유격대 재차 습격이 두려웠다.  즉시 논밭에 흩어진 별동대 놈들이 우르르 모여왔다. 야마모도는 뻘건 피로 물든 논밭 두렁들을 돌아보고 나서 두덜거리었다. “또 일여덟 잃었구나.” 먼동이 튼 후에야 야마모도는 별동대를 끌고 마을에 들어갔다. 마을 어귀에서 한철주가 안경알을 춰올리면서 마중하였다. 야마모도는 숱한 졸개들 앞에서 한철주를 쏘아 보면서 훈계하였다. “눈깔 네개 가지고도 우리한테 사격해?!” 철주는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죄송합니다. 죽을 죄를 졌습니다. 그 쪽에서 총알이 날아오니까 유격대인가 하고 사격했습니다. 확실히 우리한테 유격대가 사격한 거 같습니다.” 야마모도는 눈알을 희번뜩거리면서 두덜거렸다. “흥! 그 놈들은 도망친지도 오래!” 철주는 야마모도와 함께 촌공소 쪽으로 들어가면서 자랑스레 지껄였다. “그 놈들 어디로 달아난단 말입니까? 눈 위에 찍힌 발자국도 메우고 달아나지 못하죠. 이미 한 소대를 파견해 뒷산 골짜기를 따라 추격하게 했습니다.” 야마모도는 코 방귀를 뀌어댔다. “아직까지 총소리가 나지 않는 걸 보면 공 추격한 게 분명해!” 야마모도는 마을 뒤 두 갈래 산골짜기를 보고 물었다.  “저 북으로 난 산골짜기 쪽을 추격했소이까? 아니면 동북쪽 산골짜기를 추격했소이까?” 한철주는 수하들을 다 나가게 하였다. “두 산골짜기에 다 발자국이 어지럽게 났습디다. 동북쪽 산골짜기보다도 장백산 쪽으로 달아났겠다고 서남쪽으로 추격하게 했습니다.” 한참 궁리하던 야마모도는 수길을 돌아보았다. “어떻게 생각 했쏘가?” 수길은 머리를 조아리면서 한철주를 개여 올리었다. “한 련대장의 말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 놈들은 꼭 우리를 몇 매 쳐 놓고는 우리 대부대를 보고 겁나 자기 소굴로 되돌아갔을 겁니다.” 야마모도는 도리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동북쪽 산골짜기에 난 발자국은 우리 발자국과 유격대발자국이 마구 찍혀 있네. 그러나 확정하게 알 순 없지만 유격대 놈들의 유격전술을 보면 동을 치는 척 하면서 서쪽을 치군 했네. 놈들은 우리를 밀림속의 밀영에 쳐들어가지 못하게 교란하면서 우리를 동만 쪽으로 유인하려고 한 거 같아.” 여기까지 생각하자 야마모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즉시 한 개 소대를 파견해 동북쪽 산골짜기 쪽도 추격하게 하게나.” 한철주는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또 한개 소대를 보내고 밀림속의 유격대 밀영은 무슨 병력으로 친단 말입니까? 병력을 자꾸 나누지 말고 곧추 장백산 밀림속의 밀영으로 쳐들어갑시다. 그러지 않으면 유격대 놈들한테 코를 꿰어 여기서 헤매다가 말겠습니다.” “밀영의 놈들만 유격대고 여기 유격대는 유격대가 아닌가? 대일본제국의 큰 국면부터 생각하게나.” 야마모도의 말에 한철주는 내키지 않은 대로 수하 중대장한테 포치했다. “한개 소대를 동북쪽 산골짜기 발자국을 따라 추격하게.” 일본 놈 중대장은 두덜거렸다.  “우리 중대는 이미 한개 소대나 별동대에 떨어져 나갔는데도 또 파견해야 합니까?” (조까짓 조선 민병 같은 별동대 대장 다 뭐라고 우리 관동군과 이래라저래라 한단 말인가?) 다른 중대장들도 달갑게 생각하고 있지 않는 것 같았다. 기실 한철주는 수백명 명천 조선청년들을 사기쳐 관동군에 강제 입대시킨데다가 친일조선인토벌대를 끌고 만주벌에서 유격대를 토벌한 덕에 부련대장까지 승진했던 것이다. 그가 부련대장이지만 일본 수하들이나 야마모도나 모두 그를 안중에 두지도 않았다. 그러나 개도 주인을 보고 차라고 한철주 수하 일본 장교들은 아무리 허수아비라도 자기 상전 한철주를 마구 휘두려는 야마모도가 눈에 거슬렸다.  (한 련대장 애비를 이래라저래라 하던 개 버릇을 어데 와서 해?) 그런 줄도 모르고 야마모도는 살기등등해 고래고래 고함치었다. “이 놈 안보촌에 유격대 있는 게 분명해. 유격대 놈들은 마을 사람들과 결탁해 이 마을에 미리 잠복했다가 우리를 매복 습격한 거야. 이 마을 백성을 백 명을 잘못 죽이더라도 유격대 한 놈을  살려 둬선 절대 안돼.” 한철주도 이를 뿌드득 갈며 일어섰다. “마을 사람들을 몽땅 끌어 오라!” 한 중대장이 보고하였다. “다 달아나고 열대엿 밖에 없습니다.” “제길 할, 됐어. 이전에 이 마을에서 우리 지게꾼과 십가장이 유격대한테 죽었어. 마을에 숱한 자위대가 지켰다는 게 모두 눈깔을 펀이 뜨고 뭘 했어? 허수아비 같은 놈들.” 이윽고 미처 달아나지 못한 남녀노소 열대여섯이 끌리어 왔다. 한철주와 야마모도는 유격대에게 얻어맞은 앙갚음을 무고한 마을 백성들에게 하려고 피비린 학살을 감행하기 시작하였다. 한철주는 군도를 빼들고 머리를 숙인 백성들을 두루 돌아보다가 어린애를 업은 한 여성에게 눈길이 뚝 멎었다. “나와!” 한 바깥노인이 여성 앞을 막아 나섰다. “우리 며느린 안 되오.” 한철주는 그 노인의 팔을 홱 채더니 발길로 아래 배를 걷어찼다. “죽고 싶어?!” “날 죽여라! 내 며느린 다치지 못해.” 노인은 일어나면서 라고 고함치며 며느리 앞을 또 막아 나섰다. 한철주는 군도를 빼들어 노인의 쳐든 오른팔을 탁 내리 찍었다. “앗!” 노인의 팔이 썩 뚝 잘려 땅바닥에 떨어졌다. 떨어진 팔의 손가락이 꼼지락거리었다. “아버지!” 며느리는 꿇어앉으면서 시아버지를 부축하였다. 로인은 상을 찡그리더니 왼팔을 들어 한철주를 손가락질하며 욕설을 퍼부었다. “이 개다리 놈아, 넌 조선 사람이 아니냐? 개 같은 네 놈들이 썩어지고 광복의 날도 멀지 않을 거다.” 한철주는 악이 치받치어 군도로 노인의 왼팔을 탁 내리 찍었다. 양팔을 다 잃은 노인은 계속 욕설을 퍼부었다. “유격대들이 네 놈의 목을 치어 꼭 내 원수를 갚을 거다!” “이 영감태기 유격대군. 죽어 봐라!” 한철주는 피 뚝뚝 떨어지는 군도로 노인의 목을 툭 치었다. 로인은 일본 주구 놈의 군도에 비참하게 살해됐다. “아버지!” 며느리는 머리가 없는 시아버지를 안고 대성통곡 쳤다. 잔등에 업힌 어린애도 어머니와 함께 애고사리 손을 입에 물고 자지러지게 울었다. 백성들은 그 참경을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었다. 한철주는 졸개들을 시켜 시아버지 몸을 안고 우는 며느리마저 끌어내게 했다. “이년, 누가 유격댄가? 대라!” 며느리는 한철주를 쏘아 보며 챙챙한 목소리로 “모른다!” 하고 고함치었다. “안 되겠어! 이 년이 정말 죽어 봐야 알겠니?” 한철주가 그 애 어머니의 목을 겨누어 군도를 쳐들 때다. “잠간!” 야마모도가 하얀 장갑을 낀 손을 쳐들었다. “그 년의 대가리를 우리 가져 가겠네.” 야마모도는 가메다와 수길을 불러 수군거리었다. “우린 여자 대가리를 몇 개 가져가야 하네. 유격대 진달래 대장 년의 대가리로 말이야. 스즈끼 국장이 알 턱이 있나?” 류강철이 옆에서 통역하자 입이 빠른 수길이 떠들어댔다. “오, 참 고명합니다. 고명해! 우리 스즈끼 국장도 진달래를 본적이 없으니까.” 야마모도는 황급히 손으로 수길의 입을 틀어막았다. “얘, 임마, 떠들지 말라.” 그제야 수길은 머리를 끄덕이었다.      한철주는 피씩 웃었다.      관동군이나 조선에서 온 별동대나 다 그저 거짓말쟁이들이었으니 말이다. 이전에 국자가와 용정의 관동군과 경찰들도 계수동과 함흥촌을 기습해 숱한 무고한 백성들을 살해한 후 그들의 귀를 잘라다가 바치고 전공메달을 타지 않았던가. 그런데 웃기는 일도 있었다. 어린애들 귀까지 잘라다 바치면서 유격대 수자를 부풀린 바람에 거짓보고 진상이 드러났던 것이다. 이번에도 별동대에서 딱 관동군이 했던 것처럼 거짓을 꾸미고 있어 한철주로선 코웃음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야마모도는 수길과 류강철, 가메다, 응세까지 끌고 애를 업은 애 어머니한테로 어슬렁, 어슬렁 다가갔다. 여성은 시아버지 몸을 놓고 뒤로 물러앉았다. 야마모도는 애 어머니에게 달려들어 잔등에 업은 애를 쑥 뽑아냈다. 어린애가 엄마를 부르며 애고사리 손을 쳐들고 처절하게 울었다. “말해! 이 마을에 누가 유격대구 누가 공산당이냐?” 야마모도가 호통 치는데 옆에서 수길도 개처럼 짖어댔다. “네년이 말하지 않으면 애를 불에 태워 죽여 버릴 테야!” 그러나 애 어머니는 단말마적으로 애를 안아 가려고 달려들었다. “이 년이! 말하지 않겠는가!” 야마모도는 흉악하게 이발을 뿌드득 갈았다. “북데기를 가져다 불을 질러라!” 졸개들이 울안에 나가 벼 짚과 북데기를 가져다 쌓아 놓고 불을 질렀다. 야마모도는 애를 들어 활활 타오르는 삼단 같은 불길 우에 대면서 호통 쳤다. “말해! 공산당과 유격대가 누구냐? 유격대 어데 갔어?” “죽어도 모른다!” “대지 않으면 애를 불에 처넣는다!” “형철아!” 애 어머니는 애한테로 달리어 나갔다. “말해!” “이 개놈 새끼들아, 오늘 내 죽고 네 죽고 해 보자! 내가 바로 공산당 유격대다!” 여자는 육탄이 돼 야마모도에게 달려 들어 애를 쳐든 손을 깨물었다. “이야! 이다이!(아갓! 아파라!)” 순간 야마모도는 애를 툭 떨어뜨리며 물린 왼손을 붙잡았다. 애 어머니는 애를 안고 달아나려고 하였다. 그때 수길이 발길로 애 어머니를 걷어찼다. “앗!” 애 어머니는 애를 안은 채 수길의 발앞에 폭 꼬꾸라졌다. 독이 오른 야마모도는 살기등등해 덮쳐들어 엉엉 우는 애를 빼앗아 활활 타오르는 불에 처넣었다. 불길 속에서 애의 비명소리가 나며 뿌지직 타버렸다. “말해!” 류강철이 을러멨다. 애 어머니는 천천히 일어나 비칠거리었다. 그녀는 불시에 수길을 떠밀면서 함께 불구덩이에 뛰어 들었다. 수길은 깜짝 놀라 불에 엎어졌다가 그 여자를 뿌리치며 불길 속에서 요행 빠지어 나왔다. “저 년 대가리를! 빨리!” “옛!” 수길은 불에 데 가지고서도 여자를 끄집어냈다. 그 여자는 온 몸이 불에 데여 보기 흉하게 됐다. 놈들도 그 참상에 눈이 동그래졌다. “목을 쳐!” 야마모도가 호통 치자 가메다가 비수로 목을 툭 쳐 잘라 냈다. 야마모도는 피 쿨쿨 쏟아지는 여자의 머리를 군도로 꿰들고 쳐다보면서 중얼거리었다. “그 대가리 항일유격대 진달래 대장 대가리 같구먼. 흐흐흐.” 마을 사람들은 모두 그 흉물스러운 악귀를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어 머리를 숙이고 외면하였다. 한철주는 개 잡은 포수처럼 우쭐해 거들먹거리었다. “모두 봤지? 공산당과 유격대를 대지 않으면 모두 저런 끝장이야!” 마을 사람들은 모두 두려워 뒤로 물러서려고 하였다. 그러나 뒤에는 일본 놈들의 서슬 푸른 날창 뿐이었다. 안경을 낀 한철주의 흉측한 우멍눈이 한 열서너 살 되는 소녀 애한테 멎었다. 소녀 애는 질겁해 사시나무 떨듯하며 뒤로 물러서며 어른들 속에 숨으려고 하였다. “저년을 끌어내!” 여기저기에서 비명소리가 들리었다. 소녀 애는 공포 어린 눈길로 한철주를 흘끔흘끔 훔치어 보았다. “이년 말해 봐. 이 마을에 누가 유격대냐? 말하면 네 일가 몽땅 살려 준다. 허나 말하지 않으면 네년을 우리 황군들이 윤간하게 할 테야!” 그 말에 일본 놈들은 “헤헤헤.” 하고 징글맞게 웃어댔다. “어서 말해!” “모르오.” “모른다구?” 소녀는 겁을 먹고 말하리라고 꿈꾸었던 한철주는 군도를 쳐들었다. “정말 죽고 싶니?” 한철주는 쳐들었던 군도를 내리우더니 일본 놈들을 뒤돌아보며 고함쳤다. “이 년을 윤간해!” “하이!” 일본 놈들이 승냥이가 양을 덮치듯이 소녀한테 덮치어 들었다. 일본 색마들은 소녀를 밀고 닥치고 하며 눈 덮인 언 땅에 깔고 넘어갔다. 소녀의 허연 몸이 홀랑 드러났다. "히히히." "허허허." 색미치광이들은 애어린 소녀의 두 팔을 내리누르고 바둥거리는 두 다리마저 깔고 들어앉았다. 놈들은 가냘프게 몸부림치는 소녀를 앞다퉈 강간하기 시작하였다.       “닥쳣!”      이때 하늘땅을 뒤흔드는 고함소리와 함께 웬 중년사나이가 천정 구멍으로부터 뛰어 내려 마당에 나섰다. “내가 바로 네 놈들이 찾는 공산당 간부다! 그 소녀하군 아무런 관계없다! 무고한 마을 사람들을 학살하지 말라!” 당당한 목소리와는 달리 졸개들이 몸을 수색했지만 몸에 무기가 없었다. 다만 호주머니에 꽁다리연필과 종이조박이 둬 장 나왔다. 류강철이 통역하자 야마모도와 철주는 전리품이나 얻은 듯이 헤벌쭉해 하였다. “결박해!” 야마모도는 물리어서 아픈 왼손을 주무르며 호통 쳤다. 공산당 간부는 집 대들보에 거꾸로 높이 매달리었다. 야마모도는 또 고문을 들이댔다. “네 놈 공산당 간부? 유격대 대장?! 이름이 뭔가?” “난 종래로 이름을 속이지 않는다! 리성화다!” 한철주는 피씩 웃었다. “간만은 큰 놈이구나! 말해! 유격대에서 무슨 간부냐?” 리성화는 거꾸로 매달려서도 턱짓으로 마을 사람들을 가리키며 말하였다. “저 마을 사람들을 다 풀어 줘라. 그래야 말하겠다.” 리성화는 마을 서당 훈장으로 위장한 지하당 공작일군이었다. 한철주는 코 방귀를 “흥!” 하고 뀌었다. “네놈의 잔꾀에 넘어갈 관동군인가 하는가? 이 놈 말해! 네 놈을 내놓고 마을에 또 누가 항일유격댄가?” “없다! 내 혼자다! 무고한 백성들을 풀어 놔라!” “네 놈이 말하지 않으면 풀어 줄줄 아는가. 말해!” 리성화는 혀를 물어 끊어 야마모도 놈의 낯에 내뱉었다. 야마모도는 “에크!” 하고 피 튕긴 낯을 닦으며 땅바닥에 떨어진 피 묻은 혀를 보았다. “이 놈이 악질이구나!” 야마모도는 강철이를 시켜 리성화에게 금방 들춰낸 종이조박과 꽁다리연필을 주었다. “이 놈, 말하지 못하면 연필로 유격대 이름을 써라!” 그러자 리성화는 손가락을 입에 넣더니 마구 물어뜯어 내뱉었다. “이 놈을 불태워 죽여!” 야마모도가 고함치자 졸개들은 리성화의 밑에 짚을 쌓고 불을 질렀다. 활활 타 번지는 불길이 삽시에 리성화를 삼켜 버렸다. 리성화는 불에 타면서도 계속 일본 놈들과 그 주구들을 욕하며 구호를 불렀다. “일본 침략자들을 타도하자!” “일본 놈들이 망할 날이 오래잖다!” “중국 공산당 만세!” “조선 공산당 만세!” “항일유격대 만세!” … 커다란 촌가에 불이 달리었다. 그러자 놈들은 바깥에 뛰어 나왔다. 그 놈들은 총창으로 마을 사람들을 불타는 집안에 마구 밀어 넣었다. 야마모도가 소녀만은 끄집어 낸 후 문을 꽉 닫았다. 일본 놈들이 문마다 돌아가면서 널을 가로 세로 대고 대못을 꽝꽝 박아버렸다. “아니, 그년도 태워 죽입시다.” 한철주의 말에 야마모도는 “종군위안부로 써야지. 흐흐흐.”라고 하며 징글맞게 웃었다. 땅! 땅! 땅! 이때 뒷산 쪽에서 총소리가 자지러지게 울리었다. “유격대다! 유격대!” 혼비백산한 놈들은 총칼을 빼들고 촌공소를 빠지어 나갔다. 불타는 집안에서는 한참 아우성소리 높이 들리었다. 그러나 천정이 불타버리면서 안으로 쿵 무너지어 버리자 모든 것이 잠잠해지었다. 다만 세찬 불길에 나무가 타면서 탁탁 튀는 소리가 세차게 들릴 뿐이었다. 불타는 촌가의 외양간 벽 밑으로 하여 소똥을 치던 자그마한 구멍이 있었다. 몇몇 노인들은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도 그 자그마한 구멍을 막은 돌을 치웠다. 그들은 소똥구멍으로 어린애들을 데리고 빠지어 나가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구했던 것이다. 그러나 미처 빠져 나가지도 못한 나머지 마을 사람들은 몽땅 불에 타 장렬히 희생됐다.                     9. 밀림으로 진군       일본 놈들은 유격대에 기습당하기까지 해 분이 풀리지 않았다.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불을 지르고 약탈하면서 만행을 저질렀다.      어떤 놈들은 닭 우리의 닭을 붙들어 집에 불을 지른 후 그 불에 구워 먹었다. 놀란 닭들이 푸 닥닥 풍기어 사처로 날아났다. 어떤 놈들은 돼지우리에 들어가 총창으로 돼지를 찔러 죽이고 엉덩이 살을 도려내 돼지우리에 붙은 불에 구워 먹었다. 삽시에 온 마을에는 삼단 같은 불길이 치솟아 올랐고 여기저기에서 돼지와 소 같은 집 짐승들의 비명소리가 요란하였다. 온 하루 불에 탄 마을은 잿더미로 돼버리었다.       한철주는 “별동대라는 놈들이 마을 사람들과나 우쭐거렸지. 흥!” 하고 야마모도 대장을 못내 비웃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야마모도는 간음하고 놀 소녀 애를 끌고 가면서 흐뭇해 헤벌쭉거렸다. 그가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후에 진짜 진달래를 잡지 못한다고 해도 진달래 머리로 대용할 여자 머리도 잘라 내 뒀으니까. 또 스즈끼 국장에게 처단당할 근심도 없게 됐으니까. 이제 그는 유격대를 잡든 잡지 못하든 간도에서 살아남아 명천으로 돌아가면 그만이었다.        땅! 땅! 땅! 갑자기 여기저기에서 총소리 울렸다. 몇놈이 썩박나무 쓰러지듯 쿵쿵 눈바닥에 처박혔다. "이게 뭐야?!" 야마모도는 깜짝 놀라 군도를 빼들고 수레바퀴 밑에 한쪽 무릎 꿇고 살폈다.  일본 놈들이 기습유격대 꼬리를 물고 인차 추격하지 않고 마을에서 대학살을 감행하자 인삼 중대장이  유격대를 이끌고 되돌아와 재차 기습하고 있었다. 그들은 백성들을 더 학살당하게 수수방관할 수 없었다. 야마모도는 죽을 위험이 많은 원시림 항일유격대 대부대와의 싸움을 피하려고 꾀를 썼다. “한 련대장! 저  놈들부터 족치게!” 꼬리를 빼려는 야마모도의 속내를 빤히 꿰뚫어 본 한철주는 이젠 콩으로 메주를 쓴다고 해도 듣지 않았다. “우리를 기습하면서 교란 작전하는 유격대 놈들에게 언제까지 코를 꿰여 끌려다닐 예산입니까? 우리 관동군은 곧추 원시림속의 밀영을 치겠습니다. 별동대나 여기 소 분대 유격대 놈들과 싸우십시오. 흥!”       야마모도는 혹시 스즈끼 대대장에게 고발이라도 올라 갈까봐 억지로 마지못해 장백산 밀림에 가기로 하였다. 하지만 한철주를 떨어져 단독으로 별동대를 데리고 유격대를 기습한 척 하면서 몸을 숨길 속궁리를 따로 해두었다. 그런데 유격대는 백성들이 다 살해되고 마을이 이미 잿더미 된 것을 보고 기습작전을 펼치다가 수림 속으로 신출귀목해버렸다.  야마모도는 절호의 기회를 잡은듯이 한철주 눈을 피해 별동대 두개 소대 병력을 끌고 서남쪽을 향해 부랴부랴 떠나가 버렸다. 한철주가 관동군을 끌고 눈 덮인 황야를 허우적거리며 곧추 원시림을 향해 들어갈 때다. 갑자기 앞에서 통신병이 뛰어왔다. “보고! 한 련대장!” “무슨 일인가? 또 유격대 기습부댄가?” “아닙니다. 의사라고 하는 놈과 농사군 같지 않은 놈 두 놈을 붙잡았습니다.” “그래? 무기는 없던가?” “소금과 약 밖에 없었습니다.” 한철주는 수하들과 눈길을 맞췄다. “흥, 이 밀림 속에 약과 소금을 가지고 왔다? 필시 유격대와 관계있는 놈들이야! 끌어 왓!” “하이!” 이윽고 통신병과 졸개들이 앞에서 배낭을 멘 세 사나이를 끌고 왔다. 한철주는 세 귀 눈을 치뜨는 청년이 어쩐지 눈에 퍽 익어 보였다. “너 이놈, 이름이 뭔가?” 상대방도 일본 장교복을 입은 한철주가 안경알 밑의 우멍한 눈을 판들거리며 조선 말을 하는 것에 퍽 놀라는 눈치었다. “김호입니다.” “김호?” “고향은 어딘가?” 한철주는 한걸음 다가서며 물었다. 그러나 상순은 아주 태연자약하게 대답하였다. “조선 함흥 산골입구마.” “지금 어데서 사는가?” “일성촌에서.” “그래? 딱 어데서 본, 아, 아니야. 딱 기준 놈 같은데. 나이가 너무 차 나.” 한철주는 머리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너 혹시 조선 명천군 상우남면 운주동에서 온 김병완이나 김기준을 아느냐?” “모릅구마. 건 왜 묻습둥?” “아니야, 우린 한 고향 친구야.” 그 말에 상순과 규혁도 이 놈이 바로 철천지원수 한철주 놈이겠다고 대개 짐작했다. 그 놈 안경을 끼었지만 생김새가 우멍한 눈이나 날선 코는 한길수 놈을 똑 빼닮았기 때문이었다. 철주는 물음이 끝이 없었다. “뭘 하러 이런 밀림에 온 거야? 약과 소금은 누굴 주려고?” 상순은 호주머니에서 종이 장 한 장을 꺼내 건네었다. “이건 용드레분주소 소장이 써준 소개신입구마.” 졸개의 손에서 소개 신을 받아 보니 이렇게 씌어 있었다.          대일본제국 장병 여러분:       저의 관할구역 일성촌의 장충국과 김호, 김형내는 전선에서 유격대와 싸우는 대일본제국 장병들의 로고와 부상병들을 헤아려 특히 약과 소금을 가지고 위문하러 갑니다.      대일본제국의 충신들을 여러모로 도와 줄 것을 희망하나이다.                                             용드레분주소 소장 스즈끼희로시마                                                                                                                                                               소화 18년 12월 24일          아무리 아래 위를 살펴보아도 일어로 쓴 소개신은 흡잡을 데 없었다. 황차 용드레분주소 도장과 소장의 도장까지 박혀 있지 않겠는가! “좋아, 대일본제국의 충신들이구만.” 그러면서도 한철주는 우멍한 눈에 교활한 눈빛을 감추지 못하였다. “보자, 무슨 약을 가져 왔는가?” 상순이랑 배낭을 내리워 헤쳐 놓았다. 철주는 배낭안의 소금이랑 약재랑 두루 번지어 보는 것 이었다. 그는 상순이랑 끌고 온 졸개들에게 일어로 물었다. “몸에는 총이랑 없던가?” “하나도 없습니다.” “비수도?” “예.” 철주는 규혁의 길쭉한 얼굴을 우멍한 눈으로 보면서 머리를 끄덕이었다. 규혁은 진작 일어를 알기에 다 알아들었지만 그런 속내는 내비치지 않았다. 그런 줄도 모르고 철주는 한족 장충국까지 그들 속에 끼어 있는 것에 못내 감탄하였다. “한족청년까지 자진해 우리 대일본제국 장병들을 돕는다? 참 보기 드문 일이구먼.” 마지막 말만은 조선 말로 중얼거리었기에 상순도 알아들었다. 상순은 장충국을 내세우면서 “얘 삼촌은 분주소 소장입구마.” 하고 말하려고 하다가 함흥촌에서 산다는 것이 드러 날까봐 그만 두었다. 그는 담대하게도 한철주에게 “오늘 장관님을 만나 기쁩니다. 어쩜 우리 대일본제국에 조선 장관님도 있습니까? 우린 대일본제국 장병들을 위해 뭐든 하겠으니까. 여기 소개 신에 장교님께서 서명해 주시오.” 하고 당돌한 요구를 들이댔다. “그래? 허허허. 좋아. 그러나 자네들이 우릴 위해 일을 한 후에 내 서명해주지. 어때?” 형내는 인차 “좋습니다. 그래도 늦지 않습니다.” 하고 소개신을 받아 품에 깊숙이 넣었다. 사실 그 소개신은 일어를 배운 형내가 가짜로 만든 것이었다. 그들은 일본 관동군과 별동대가 장백산 밀영을 토벌하러 가는 긴급군사정보를 유격대에 알리라는 병완의 말을 듣고 눈보라를 무릅쓰고 장백산지역 밀림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그리고 적들을 원시림 밀영이 있는 협곡과 산꼴짜기에 유인해들이라는 성칠 대장의 지시를 받고 장백산지역 밀림에서 내려와 인삼 중대장 부대를 찾아왔다.        한편 새날이 밝아왔는데도 적들이 추격해오지 않고 꾸물거리는 것을 보고 인삼 중대장은 상순과 형내에게 구체적으로 적들을 유인할 전술을 포치했다. 그리하여 상순과 형내는 위험을 무릎쓰고 담대하게도 일본 관동군 부대를 곧추 찾아 왔던 것이다. 그들은 기어이 적들의 코를 꿰어 장백산 밀림 속 밀영 부근의 눈 덮인 협곡과 골짜기에 끌어 들여가야 했다. 더는 이것 저것 따질 것이 없었다.       사전에 병완은 미리 장충국을 시켜 해동분주소 소장 지학구를 통해 용드레분주소 소장의 이름이 스즈끼히로시마라는 것을 알아 내 소개신에 써 넣었다. 그리고 용정 도장방에 가서 엄청난 돈을 주고 분주소 도장과 소장의 도장을 새긴 후 소개신에 그럴듯하게 찍어 놓았던 것이다. 김진과 김형내는 각기 상순과 규혁의 지금 쓰는 이름이었다. 그러나 상순은 혹시나 해서 김진이라고 밝히지 않고 김호라고 가짜이름을 써넣었던 것이다. 그들은 하옥이 부상당했다는 말을 듣고 전번에 최구철에게 임시구급약을 보낸 후 용정약방에 가서 첩약을 지었고 용정에 있는 일본 놈들의 병원에 가서 처치할 소독제랑 지혈제랑 여러 가지 약을 가지고 일본 놈들까지 코를 꾀 가지고 장백산 밀림속의 유격대 밀영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다행히 병완과 형내가 꾸며 낸 소개신 덕분에 위험에서 간신히 벗어났다. 철주는 속으로 말투를 보아도 함경도 말투 맞지만 시름이 놓이지 않았다. 그는 졸개를 보고 일어로 “박응세를 데려 오게.”라고 명령하였다. 이윽고 박응세가 헐레벌떡거리며 뛰어 왔다. 철주는 교활하게 우멍한 눈으로 상순이랑 힐끔힐끔 곁눈질하며 응세를 한쪽으로 끌고 가서 귀속 말을 하였다. “이자들을 장백산 유격대 밀영에서 본 적이 있는가?” 박응세는 벼룩 눈을 띠룩거리며 한참이나 상순과 형내를 훑어보았다. 그는 상순을 자꾸 보더니 도리머리 질 하였다.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세 귀 눈을 가진 놈이 딱 유격대 김성칠 대장이란 놈의 세 귀 눈과 비슷합니다." “음~” 철주는 속으로 자기 생각과 같구나 하면서도 겉으로는 티를 내지 않았다. 그는 가메다와 응세를 한쪽으로 끌고 가서 쑤군거렸다. “좋아, 저 놈들을 인질방패로 삼아 앞에 세워서 길을 인도하게나. 저 놈들을 잘 감시하게나.” 가메다와 응세는 머리를 끄덕이면서 상순이랑 형내랑 독기어린 눈길로 건너다보았다. 교활한 한철주는 가메다와 응세를 시켜 상순이랑을 대오 제일 앞에 세운 후 관동군에게 계속 밀림으로 진군하라고 명령하였다.  
89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52) 댓글:  조회:1931  추천:0  2016-10-07
                    6. 전시 번개식결혼        원시림 유격대 밀영은 적들의 시야에 완전히 들었기 때문에 제일 위험한 곳으로 됐다. 그러나 진달래는 성칠 대장이 자기와 함께 생사를 기약할 수 없는 밀영에 남아 적들을 유인하는 “미끼”로 된 것이 아주 고마웠다. 진달래는 그간 성칠의 통나무집에서 하옥의 대소변을 받아낸다, 옷을 씻어 갈아입힌다 하면서 혼미상태에서 깨어나지 못한 하옥을 살뜰히 간호하느라고 바람개비처럼 돌아갔다. 은녀도 유격대의 밥을 짓고는 달려 왔다. 그녀는 대야에 성칠의 오줌을 끓이어 놓고 따뜻한 오줌에 수건을 씻어 짠 후 하옥의 상처를 닦아 주었다. 진달래는 은녀가 하옥의 발을 닦아 주는 틈을 타서 하옥의 머리를 왼손으로 받들고 사슴의 피를 넣고 끓인 사슴고기국물을 숟가락으로 떠서 호호 불어 입에 한 술, 한 술 떠 넣었다. 하옥의 얼굴에 점점 핏기가 돌기 시작하였다. 이젠 국물이라도 몇 숟가락 씩 넘기는 것이었다. 성칠은 더부룩한 구레나룻을 어루만지면서 하옥을 살뜰히 보살피는 진달래와 은녀를 고마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진달래는 성칠을 쳐다보면서 “오빠, 언닌 며칠 후면 정신을 차릴 거 같아요.” 하고 웃음을 지었다. “살아났으면 얼마나 좋겠니? 내게 시집 와서 평생 고생만 했어.” 진달래와 은녀를 내려다보며 성칠은 진심을 털어 놓았다. “난 해준 게 아무 것도 없어. 그저 이렇게 보낼 순 없구나.” 그 말에 진달래는 감동돼 눈물을 주르르 흘리었다. 그때 하옥의 눈귀가 실룩거리더니 뜨거운 눈물을 귀밑에 주르르 흘리는 것이었다. “여보, 깨났어?” 그러나 하옥은 눈을 뜨지 못하였다. “오빠, 언닌 살아났어요. 이젠 살았어요.” 진달래는 환성을 질렀다. 은녀도 수건으로 종아리를 닦아 주면서 기뻐 어쩔 줄 몰라 했다. “오빠 정성에 형님은 살아날 거 같아요.” 성칠도 퍼더버리고 앉아 하옥의 손을 잡고 중얼거리었다. “그래, 꼭 살아 날 거야.” 뒤이어 그는 진달래를 돌아보았다. “은녀에게 맡기고 우린 바깥에 진지정황을 돌아보자.” “예. 그럼 은녀, 수고해요.” 진달래는 하옥의 머리를 베개에 살짝 내리어 놓고 숟가락을 은녀에게 넘겨주고는 일어 섰다. 바깥에서는 눈보라가 윙윙 세차게 불어치었다. 여기 저기 아름드리나무에서 눈덩이들이 날려 풍풍 떨어지었다. 성칠은 진달래를 데리고 전초진지를 둘러보았다. 경위원 조 꼬마가 뒤따라오면서 경계하였다. 통나무집들에서 멀리 떨어진 아름드리나무 우에서 나무 가지를 가로 타고 앉아 보초를 서는 병수와 득호가 보일락 말락 하였다. 성칠은 진달래를 돌아보면서 “보초를 겹겹이 강화해라. 요 며칠 새 특무들이 오거나 별동대가 습격하러 올 게야.” 라고 하였다.      “예. 병수와 득호 등 10여명 증가해 세 겹으로 보초를 서고 있어요.” 성칠은 머리를 끄덕이었다. “외곽보초는 청년들을 윤번으로 세워라. 나이 들면 노련하지만 반응이 늦어.” “알았어요. 즉시 청년들과 중년을 섞어 보초를 세우겠어요.”     “군호도 바꿔라.”     성칠은 진달래 귀에 대고 나직이 말하였다. “군호를 ‘진달래’로 바꿔라.” “예?” 진달래는 놀란 표정으로 성칠을 바라보다가 한참 후에야 머리를 끄덕이었다. 뒤에 멀찍이 서서 보초를 서는 조 꼬마를 돌아보고 나서 진달래에게 정색해 말하였다. “진달래야, 전번에도 말했지만 넌 용천 대장과 결혼해라.” 진달래는 도리머리를 가로 흔들었다. “됐어요. 됐어. 오빤 날 시집보내고 시름 놓을 예산이죠? 적들의 대토벌을 앞두고 결혼은 무슨 결혼인가요?” 성칠은 앵돌아지는 진달래의 손을 잡아당겨 돌려 세워 놓고 정중하게 말하였다. “그런 게 아니야. 우린 가정문제와 혁명의 후대문제도 잘 해결해야 한다. 날 봐. 자식 하나 없이 얼마나 비참하냐?” “픽!” 진달래는 코웃음을 치었다. “오빠도 걸 알아요? 누가 자식을 보지 말라고 붙들어 뒀어요? 낳을 수 있어도 낳을 방도를 대지 않아 그렇지요.” 성칠의 눈치를 보던 진달래는 뒷말을 다른 데로 돌려 버리었다. “명천에서 형내사돈이 금방 함흥촌에 들어왔대요. 전번에 아버지 큰아버지를 보러 함흥촌에 갔다가  규혁 사돈에게서 첩약을 지어왔댔잖아요. 그 약을 달여 언니를 대접하면 언닌 일어날 거라고 해요. 언니하구 행복하게 살아요.” “남의 걱정 말구 네 대상문제나 근심해라. 전번에 넌 하옥을 붙잡고 울면서 분명히 말하지 않았니? 용천대장과 결혼하겠다고?”      진달래는 정색하였다. “용천 대장이 동의하면 결혼할 게요. 나도 양심 있는 계집애예요. 절대 하옥 언니 발등을 밟지 않을 거예요.” 진달래는 돌아서더니 아름드리나무에 기댄 채 어깨를 들먹이며 흑흑흑 흐느끼어 울었다. 성칠은 진달래의 어깨를 다독이어 주었다. “잘 생각했다. 이제 용천 대장이 오면 전시 결혼식을 치르자.” 진달래는 눈물을 줄줄 흘리며 주먹으로 성칠의 가슴을 마구 치어댔다. 성칠은 진달래를 꼭 껴안아 주었다. “넌 영원히 내 여동생이야.” 성칠은 뒤이어 “내세가 있으면 얼마나 좋겠느냐? 그때 우리 함께 살자.” 라고 말하려다가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억지로 꾹 삼키어 버리었다. 이때 눈보라치는 밀림 속에서 인기척이 들리었다. “군호!” “장백산!” “군호!” “장백산!” 옛 군호를 대자 보초병과 조 꼬마는 모두 총을 그 쪽으로 겨누었다. “꼼짝 말엇!” 아름드리나무 뒤에서도 총부리를 이쪽에 돌리어댔다. “왜 이래? 난 용천 대장이야! 저쪽 성칠 대장이나 진달래 중대장과 물어 보라고.” 그러자 성칠은 권총을 허리춤에 되 꽂아 넣으며 나무 뒤에서 나와 보초병에게 “그만!” 하고 손을 들었다. 나무 뒤에서 개털 모자를 쓴 용천 대장이 “허허.” 웃으면서 나와 이쪽으로 걸어 왔다. “용천 대장, 범이 자기 흉을 하면 온다더니 정말 왔구먼. 허허허.” 성칠은 마주 나가 용천을 끌어안았다. 그러나 진달래만은 권총을 허리춤에 찔러 넣고 아름드리나무 쪽으로 돌아 서서 외면한 채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었다. 용천은 진달래가 이상했지만 먼저 성칠에게 위문부터 하였다. “아주머니 상했다더니 어때요?” 성칠은 한숨을 내쉬며 “괜찮네. 진달래 아버지 가져온 약까지 달여 먹이면 괜찮을 거 같아.” 라고 하였다. 용천은 그때까지도 돌아서 못 본 척 하는 진달래의 잔등을 보고 의아해 성칠을 보고 물었다. “저 진달래 아닌가? 왜 날 보고 인사도 안 해?” 그제야 진달래는 몸을 돌리더니 “돌아왔어요?” 하고 인사하며 다가왔다. 용천은 진달래의 손을 굳게 잡아 흔들었다. “그래, 진달래 중대장은 여중호걸이야. 우시장까지 쳐나가 자위대 대대장 한길수 놈캉 백승만 형제까지 처단하고 큰아버지까지 모셔왔다면서. 허허허.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몰랐데이.” 진달래는 머리를 숙이고 발끝으로 눈 바닥을 살살 허비었다. “왜 오늘 따라 진달래중대장이 이렇게 말수 적고 수집어졌제이?” 용천은 성칠을 돌아보면서 “집에 들어가 얘기합세. 바깥에서 얼게 할 예산인고?” 하고 말하였다. 성칠은 용천의 팔을 잡고 고의로 진달래네 집으로 끌고 갔다. 진달래는 뒤돌아보면서 눈을 찔끔 하는 성칠을 곱게 흘겨보면서 성칠의 집 쪽으로 발길을 돌리었다. 토끼 꼬리만한 겨울해가 벌써 서산으로 뉘엿뉘엿 넘어 가고 있었다. 성칠이 용천을 데리고 들어가자 최구철은 사냥총을 들고 보초 서러 바깥으로 나갔다. 자리를 정하고 마주 앉자 용천은 “그래 그간 정황이 어떠오?” 하고 물었다. 성칠은 그간 적아 정황을 상세히 말하고 나서 “인삼 중대장을 영월구 쪽에 보내 선제기습작전을 벌려 적들을 교란시킬 작전계획도 세웠네. 여기 밀림 속의 통나무집들에 적들을 깊이 유인해 매복습격전두 벌릴 계획이오.” 라고 덧붙이었다. 성칠은 구들에 목데기와 담배통, 부시 돌을 죽 벌리어 놓고 이리저리 움직이면서 작전계획을 설명하였다. “우리가 매복 습격할 때 용천 대장은 북만의 유격대를 거느리고 동북쪽에 매복해 있다가 인삼 중대와 함께 밀영에 쳐들어온 적들을 포위해 협공해 주오.” 성칠은 목데기를 쭉 북으로 밀고 부시 돌을 뒤따라 밀면서 뒷말을 이었다. “최후에 매복 습격 전을 끝낸 후 우리 밀영의 유격대는 북만으로 이렇게 전이한단 말이오. 용천 대장넨 우리 뒤를 이렇게 뒤따르는 적들을 매복 습격해 주오.” 용천 대장은 성칠의 말을 듣고 머리를 끄덕이었다. “참 좋군. 이 작전계획이 성공하면 일본 놈들의 반동기염을 여지없이 꺾어 놓겠는데.” 그는 머리를 숙이고 한참이나 궁리하더니 무겁게 뒷말을 이었다. “그런데 이 작전계획은 너무나도 모험인데이. 적들이 접대(이미) 장백산 밀림속의 밀영를 발견했다는데이. 한개 중대 유격대원들의 목숨을 미끼로 삼다니? 너무 위험하제이. 우린 유격대원 한사람이라도 아껴야 하는 기여. 있자노, 우린 희생정신과 용감성에만 의거해 전투해선 절대 안 된다이.” 그러나 성칠은 자기 작전계획을 고집하였다. “희생정신이 없이 어떻게 일본 놈들을 소멸하겠는가?” 용천도 목에 지렁이 같은 피 줄을 세우며 양보하지 않았다. “우리 유격대는 이제껏 기동 령활한 유격전술로 적은 대가를 내면서 일본 놈들을 족치었제이. 다 발각된 밀영으로 진지전을 해선 안 된다니께. 김 대장은 매복습격 전을 하려지만. 적들이 꼬임에 들겠는가? 황차 난도 한개 소대 30여명 밖에 데리고 오지 못했제이. 지금 몇 백명 적들이 여길 토벌하러 떠났다고 하데이. 유격대원들의 목숨으로 모험하지 말라니께.” 성칠이 머리를 숙인 채 도리머리를 흔들며 잘 납득돼 하지 않자 용천은 주먹으로 구들장을 쿵 치며 질책하였다. “그래 이전에 성칠 대장이 고향에서 모험적으로 저목장을 습격했다가 상호캉 은희 목숨까지 잃게 한 피의 교훈을 잊었단 말인가?!” 이때 문이 벌컥 열리더니 최구철이 들어왔다. “살랑살랑 말하라니까. 바깥에서 다 들리네.” “예. 알았습니다.” 최구철이 나가자 용천은 나직하면서도 과단성 있게 말했다. “우리 작전계획을 조절하자니께. 매복습격 전을 다 부정하는 거 아니라니께.” 용천은 이젠 원시림유격대 대장은 성칠이라는 것을 생각하고 조금 타협하기로 마음을 고치어 먹었던 것이다. 성칠은 그제야 다가앉았다. 그들 둘은 등잔불을 밝히어 놓고 담배통과 목데기, 부시 돌, 재떨이까지 이쪽저쪽에 옮기어 놓으면서 작전계획을 반복적으로 검토하면서 조절하였다. 성칠은 더부룩한 구레나룻을 쓰다듬으며 장기 쪽처럼 펼치어 놓은 담배통이랑 재떨이랑 내리어다 보았다. “참 좋구먼. 조절했기에 더 빈틈없이 됐네 그려. 허허허.” 용천은 허리를 펴며 성칠을 마주 보았다. “접대(이전에) 고함쳐 미안하이. 히야(형님), 허허허.” 성칠은 사람 좋게 허허 하고 마주 보며 웃었다. “허, 사람이라고. 몇 해 갈라졌더니 좀스러워졌군 그려. 경상도 남도치답잖게.” “그래? 잘 못했데이.” 바깥에서는 눈보라가 윙윙 세차게 휘몰아치어 통나무집 문을 모래알을 마구 쥐여 뿌리는 듯이 두드리었다. 성칠은 용천의 손을 굳게 잡았다. “우리 장백산 밀림과 북만 유격대가 잘 합작해 여기서 일본 놈들을 소멸합세.” 말을 마치자 일어나려다가 그는 되앉더니 “용천이, 내 자네하구 꼭 할 말이 있네.”라고 하였다. “뭔데?” 성칠은 정색해 말하였다. “아우, 아우도 이젠 마흔이 넘었는데 결혼해야지.” “전투를 앞두고 웬 결혼 말이제이? 누가 내 같은 빈 털털이한테 시집온대?” 성칠은 용천의 손을 잡아 쥐었다. “내 여동생 진달래도 이젠 마흔 고개를 올리다 보네. 진달래하구 결혼하면 좋지 않은가?” “아니, 아니, 무슨 농담하는 기오?” “농담 아니야.” 용천은 등잔불을 빌어 성칠의 진지한 표정을 보고 한숨을 후 내쉬었다. “우리 유격대는 언제나 목숨을 내 놓아야 할지 몰라. 진달래를 데리어다 무슨 고생시킬락꼬?” 성칠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한마디만 묻겠네. 내 누이 진달래 어때? 마음에 들어?” 용천도 정색해 대답하였다. “진달래는 여중호걸인 기오.” 그러나 성칠의 눈치를 흘끔 보더니 도리머리를 가로 흔들었다. “안 돼, 말도 안 돼. 전투를 앞두고 무슨 결혼인감?” 성칠은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그럼 됐네. 아우와 여동생 중매는 성공했네. 허허허. 오늘 저녁에 말이 나온바 하곤 맺고 끊기요. 내 진달래를 데려 올 테니 오늘 저녁에 여기 묵게나.” 라고 하였다. “이보라우, 히야, 어데 번개 불에 마른 소고기 구워 먹는 격을 할래요? 진달래 말도 받아 보지도 않고스리.” 용천도 따라 일어났다. 성칠은 용천을 마구 밀어 앉혀 놓고 신을 신으러 방바닥으로 내리어 갔다. 이때 문이 벌컥 열리었다. 최구철이 들어섰다. “사돈어른, 진달래를 용천 대장께 주겠습둥?” 최구철은 사냥총을 벽에 걸면서 “내 밖에서 다 들었네. 세상 듣다 반가운 소식이네. 용천 대장은 훌륭한 사위 감이지. 다만 진달래 어쩌겠는지?” 라고 하였다. “허허허, 근심맙소. 내 이미 전에 진달래와 말이 있었습니다. 내 가서 진달래를 데려 옵지. 전시인데 전시 번개식결혼식을 올리어 줍시다.” 성칠은 통쾌하게 웃더니 문 밖을 나섰다. 이윽고 성칠은 진달래를 데리고 집안에 들어섰다. 진달래는 머리를 다소곳이 숙이고 방바닥에 서 있었다. 구철은 “얘야, 이리 올라오너라. 넌 용천 대장께 시집가는 게 어떠냐?” 하고 물었다. 진달래는 오늘 밤 따라 수집은지 머리도 들지 못하며 외면하였다. 성칠은 앵돌아진 진달래를 보다가 “여자란 말하지 않으면 좋다는 말입니다. 이전에도 용천 대장한테 시집가겠다고 나한테 말한 적이 있습니다.” 라고 하며 진달래를 끌어다 구들에 올라와 용천과 나란히 앉히어 놓고 선포하였다. “용천 대장과 진달래 중대장은 오늘부터 한 쌍의 혁명적인 부부로 됐음을 천하에 공포합니다. 사위 용천 대장은 가시아버지께 예를 올리게나.” 용천은 최구철에게 큰절을 올리었다. “곱게 길러 주신 진달래와 잘 살겠어요. 감사해요.” 최구철은 머리를 끄덕이었다. “사위도 반자식이라고 몸조심하고 오래오래 금술 좋게 살게나.” “예.” 용천이 앉으려는데 성칠은 “부부 맞절이오.” 하고 둘을 마주 세웠다. 용천과 진달래는 맞절을 올리었다. 성칠은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결혼을 축하하네. 축배라도 한잔 드려야 하는데 전시라 별 수 없군. 그럼 둘이 잘 얘기하게나.” 라고 하였다. 용천은 송구스러워 엉덩이를 들며 “형님, 세상에 이렇게 마른 나무 꺾듯 하는 결혼도 있어?” 하고 중얼거리었다. 방바닥을 내리어 가는 성칠이 비틀거리었다. 등잔불 밑에서 비틀거리는 성칠의 너부죽한 뒤 잔등을 바라보며 진달래는 손으로 입을 막으며 뜨거운 눈물을 주르르 흘리더니 어깨를 들먹이었다. “이보게, 사돈, 내 할 말이 있네.” 최구철은 성칠을 따라 바깥으로 나오면서 자리를 비웠다. 성칠은 뒤따라 나온 최구철을 모시고 자기 통나무집으로 발걸음을 무겁게 옮겼다…                     7. 개싸움        장백산 지역으로 통하는 교통요새에 자리 잡은 영월구에 고약딱지기발이 펄럭이고 금방 기차에서 내린 수백 명 일본 놈들이 총칼을 번뜩이며 영월구를 짓밟는 군화 소리 어지럽게 요란하였다. 오토바이 한대가 달려와 영월구파출소 앞에 멈춰 섰다. 안경을 건 한철주 부련대장이 내려 우멍한 문을 번뜩거리었다. 마중 나온 영월구파출소 소장 등 경찰 놈들이 차렷하고 군례를 척 붙이었다. 한철주가 파출소 안으로 들어가기 바쁘게 모두들 일어나 군례를 척 붙이었다. “한 련대장, 오셨소?” 한철주는 어안이 벙벙해 하였다. (명천 림업파출소 야마모도 소장이 어찌 여기까지 왔단 말인가?) 이때 뒤에서 류강철이 나오면서 소개했다. “야마모도 대장입니다. 이번에 별동대 대장으로 왔습니다.” 그제야 한철주는 일일이 악수하였다. “모두 멀리서 왔구먼. 야마모도 대장, 수고 많습니다. 아니, 수길 형님도 오고.” 강철은 옆에서 굽실거리면서 일일이 소개하였다. “한 련대장, 수길 친구는 자위대 대대장을 하다가 이번엔 별동대 부대장으로 왔소.” 한철주는 머리를 끄덕이면서 수길의 어깨를 툭툭 치었다. “이전에 내 아버지께서 하시던 일인데 잘 하게나.” “충성을 다하겠소.” 모두들 인사를 끝마치고 자리에 앉자 영월구파출소 소장은 졸개들을 시켜 따뜻한 차물을 올리었다. 한철주는 일본 놈들의 앞잡이 본성을 잃지 않았다. “야마모도 대장님, 정말 오래간만입니다. 여기서 함께 합동 작전할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야마모도 대장은 발바리 상을 하는 한철주의 굽힌 잔등을 툭툭 치며 치하하였다. “한 군은 일본에 유학까지 갔다 와서 일본 말을 스라스라(술술)하는구먼. 벼슬도 직상승하고. 허허허.” 한철주는 안경알을 춰올리며 헤벌쭉 웃어 보이었다. “다 대일본제국에서 길러 준 덕분이죠. 너무 너무 감사합니다.” 야마모도 대장은 슬슬 개여 올리는 한철주가 좋았다. 그는 말 속에 말이 있는 말을 하였다. “군의 가친은 유격대 계집의 돌멩이에 맞아 사망했소다. 정말 안 됐소.” 한철주는 숱한 사람들 앞에서 창피하기도 하고 악이 나 이를 뿌드득 갈았다. “이번에 부친의 원수를 갚지 못하면 원시림에서 돌아오지 않겠습니다.” 그는 사무 상을 꽝 쳤다. “난 원수를 갚자고 신경에서 스즈끼 국장님의 편지를 받고 동만에 나왔습니다. 김성칠, 최동욱, 김칠백 그리구 진달래 계집년을 잡아 죽이지 않고선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하겠습니다.” 야마모도는 자기 격장법이 수가 든 것 같아 희죽이 웃으면서 지껄였다. “이번에 원시림 유격대를 장백산 원시림에서 모조리, 깡그리 소멸해 버립시다.” 야마모도는 한철주에게 뭐라고 귀속 말을 하더니 수하 사람들을 다 내 보내고 둘이 딱 남았다. 한철주가 통역도 필요 없어 강철마저 내보냈다. “한 부련대장, 조용히 작전을 연구합세.” 한철주는 차 컵을 들어 후후 불며 “먼저 대장님의 고견부터 들어 봅시다.”하고 슬쩍 피해버리었다. 야마모도 대장은 사양하지 않고 떠벌여댔다. “한 부련대장도 알겠지만 장백산 지역 항일유격대는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신출귀몰하면서 유격전에 능하네. 우린 기동 영활한 이동작전으로 그 놈들의 유격전을 제압하면서 한 놈 한 놈, 한개 소 분대 씩 소멸해야 하오.” 그 말에 한철주는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유격대 꽁무니나 따라 다녀서야 언제 유격대를 전멸시키겠습니까? 청산리나 봉오동 전투에서도 바로 그래서 토벌에 실패했습니다. 우린 우세한 병력으로 원시림 유격대를 포위 섬멸해야 합니다.” 젖내 나는 놈이 장교노라고 우쭐거리는 것이 눈에 거슬렸지만 야마모도는 억지로 꾹 참으면서 지껄이어댔다. “이건 내 혼자 의견이 아니네. 스즈끼 국장께선 우리 별동대를 보내 밀림 속의 유격대를 기습해 진달래 년의 대가리를 베 오라고 했네. 우리 기습에 배합해 자네가 포위섬멸전을 하든 이동작전을 하든 마음대로 하라고 했네. 알만한가?” 삼림이나 지키던 야마모도가 대부대작전도 모르면서 손가락질하는 것이 거슬리었지만 한철주는 큰 국면을 돌보기로 하고 침묵을 지키었다. 야마모도는 그래도 시름이 놓이지 않아 지껄였다. “사실 이번에 자네한테 스즈끼 국장의 편지를 보내게 한 사람도 나일세. 자네도 알겠지만 전임 경찰국장 끼무라나 가친께서도 진달래 년을 어쩌지 못했네. 그런 고로 끼무라 국장은 할복해 죽고 자네 가친도 참살 당했네. 자네가 짜개바지를 입고 젖내를 풍기면서 달아 다닐 때부터 우린 의병과 항일유격대와 싸워 왔네. 유학이나 했다고 선배들의 가르침도 받지 않고 우리 대일본제국의 황군을 마음대로 지휘할 작정인가? 쓸 데 없는 자존심을 버리고 우린 잘 협동작전해야 하네.” 묵묵히 앉아 있는 철주를 보고 야마모도는 자기 말에 완전히 승복한 것으로 오해하고 바위 돌처럼 굳었던 얼굴이 좀 풀리었다. “유격대를 기습하려면 정규군이 좀 필요하네. 내 데려온 별동대는 몇 달 밖에 훈련받지 못한 오합지졸들이네. 자네 관동정규군에서 한개 소대쯤 떼 주게나.” 한철주는 더는 물러 설 데 없게 되자 반발하였다. “그게 어디 아이들 장난입니까? 상부의 허락을 맡아야 합니다. 군법이 무섭지 않습니까?” 야마모도 대장은 얼리고 닥치기 시작하였다. “하하, 금방 말했는데도, 황군 앞에서 마구 헤덤비는가? 저 오합지졸들을 가지고 어떻게 백전백승하는 밀림 유격대를 소멸한단 말인가? 큰 국면을 생각하게나. 황차 세상 사람이 모르게 유격대 두목들의 머리를 베자마자 정규군에 돌려주면 그만이네.” 머리를 숙이고 궁리하는 한철주를 보고 야마모도는 가련한 표정도 지어 보이었다. “이번에 진달래 대가릴 떼 가지 못하는 날엔 자네나 내나 몽땅 자기 대가리를 쳐 가지고 가야 돼.스즈끼 국장도 목이 날아 나고. 어떤가? 떼 주지?” 그제야 한철주는 머리를 들고 속으로 이 일본 영감태기 유격대에 겁을 먹기도 먹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비밀을 지키겠습니까?” 그러자 야마모도는 한철주에게 다가앉으면서 “암, 여부가 있겠는가?”하고 반색하였다. “그럼 한개 소대를 대장께 드리죠. 꼭 감쪽같이 기습해 진달래 년의 대가릴 떼 오십시오.” 야마모도는 한철주의 어깨를 툭툭 치며 호언장담하였다. “우린 박응세와 가메다를 통해 진달래의 통나무집이 밀림 속 어데 있는 것까지 다 손금 보듯 하네. 꼭 자네 아버지 원수를 갚아 주지.” 뒤이어 그들 둘은 오래도록 꿍꿍이를 꾸미었다… 이튿날 눈보라를 무릅쓰고 별동대 놈들은 먼저 떠나고 관동군은 휴식정돈한 후 둬 시간 후에 떠났다. 별동대가 해질 녘에 영월구에서도 한 50여리 떨어진 안보촌 뒤 산골짜기에 이르렀을 때다. 별동대 일본 군 소대는 아무 군소리 없는데 조선인 소대에서 쑤군거리는 소리가 들리었다. 야마모도는 수길에게 “저 자들이 왜 떠드는 거요?” 하고 물었다. 수길은 다가와 “저 놈들이 맥이 없다면서 산골짜기 아래 마을에 들어가 한잠 푹 자구 갔으면 좋겠답디다.” 하고 대답하였다. 류강철이 통역해주자 야마모도는 발을 탕 굴렀다. “정신 나간 놈들, 여기가 어디라고? 산세가 험한 걸 봐라. 여긴 분명 유격대가 출몰할 수 있는 산골짜기야. 흥!" 그때 영월구파출소 소장이 끼어들었다.  "이전에도 지게군과 십가장까지 척살당했습니다." 그 말에 야마모도는 더럭 겁나 더 고집썼다. "계속 전진해야 돼!” 통역을 듣자 수길은 뒷덜미를 긁적거리었다. “정말 지쳐서 이젠 모두 가지 못하겠답니다.” 야마모도는 한숨을 후 내쉬더니 지형을 둘러보다가 산골짜기 아래쪽을 가리키었다. “저기 시야가 넓게 트인 벌판에 가서 논두렁 밑에 누워 자자.” 그 말에 수길은 기 번지어질 지경이었다. “환히 드러난 곳에서 자다가 유격대 습격을 받자고?” 그러나 야마모도는 고집하였다.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놈들, 눈이 덮인 벌판에서 자면 적어도 유격대들이 접근하는 걸 멀리서두 발견할 수 있어. 허나 이런데서 자다간 유격대가 와서 목을 다 베가도 모를 거 아냐?” 수길은 듣고 보니 그럴 법해 수긍하고 말았다. 관동군 소대장도 쉰다는 말에 따라 나섰다. 여기저기에서 “벌판에서 자다가 유격대 총알받이 되겠다.”라고 하는지 뭔지 별 말이 다 들리었다. 야마모도는 권총을 빼들고 “내 명령에 복종해! 복종하지 않는 놈은 당장 총살할 테야!”하고 호통 쳤다. 땅! 산골짜기에서 야무진 총소리가 메아리치었다. 총소리와 함께 제일 뒤에서 걷던 놈이 눈 위에 푹 꼬꾸라졌다. 놈들은 질겁해 부들부들 떨며 야마모도의 권총을 힐끔거리며 산 아래로 뒷걸음질 쳤다. 처음에 적들은 야마모도 대장이 겁을 주느라고 뒤떨어진 자를 쐈나 여기고 계속 앞으로 빨리 걸음을 재우쳤다. 땅! 땅! 총소리와 함께 또 뒤꽁무니에서 뒤따르던 두 놈이 푹푹 쓰러지었다. 그제야 야마모도대장이 총을 뽑아 들었지만 총을 쏘지 않은 것을 발견하였다. “유격대!” “엎드렷!” 야마모도 대장의 아우성소리를 듣고 적들은 제각기 흩어져 아우성치며 눈 우에 쓰러지듯이 엎드리어 맞불질하였다. 원래 밀림에서 미리 내려 매복 진을 치고 있던 유격대는 인삼 중대장의 지휘아래 놈들에게 선제공격을 들이댔던 것이다. 야마모도는 저지러진 총소리를 듣고 고함쳤다. “유격대 소 분대야! 겁먹지 말고 사격하라!” 관동군 놈들은 사격해댔지만 별동대 놈들은 눈 속에 대가리를 파묻고 까딱하지 않았다. 유격대 사격도 뜸해졌다. 야마모도는 코 수염을 씰룩거리며 유격대가 사격하는 산꼭대기를 쏘아보았다. 눈보라 속에 사격하는 불빛이 몇 가닥 보이지 않았다. 야마모도는 군도를 뽑아 들고 산꼭대기를 향해 휘두르면서 고함쳤다. “돌격!” 적들은 단말마적으로 산꼭대기를 향해 돌격해 올라갔다. 관동군 놈들은 날창을 번뜩이며 산중턱에까지 덮치어 갔다. 그러나 별동대 놈들은 수길의 지휘아래 겨우 산비탈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저런 등신들 데리고 어떻게 신출귀몰하는 유격대를 기습하겠는가?” 야마모도는 중얼거리다가 “아차, 잘 못될 번했어.”라고 중얼거리더니 “벌판으로 철퇴하라!”하고 고래고래 고함치었다. 산중턱에까지 겨우 기여 올라 온 수길은 헐레벌떡거리며 의아해 하였다. “넌 지휘관 감이 아니야.” “예?” 수길은 뒷덜미를 긁적거리며 의아해 하였다. “우리 별동대 여기서싸우는 게 아냐! 장백산유격대 두목 진달래년을 잡아야 해! 백 놈을 놓치더라도 그 년만 잡으면 돼!” 그제야 수길은 “에, 알 거 같습니다.”하고 야마모도를 뒤따라 벌판으로 내리어 갔다. 졸개들도 눈먼 총질을 하면서 벌판으로 달아났다. 땅! 땅! 땅 땅 땅 땅! 적들이 퇴각할 때었다. 또 산꼭대기에서 또 유격대원들이 맹렬히 사격하였다. 몇몇 놈들이 또 쓰러지었다. “수길 부대장, 유격대 꼬임 수에 걸리어 들지 말고 빨리 조선별동대를 데리고 벌판에 철거하라.” “예. 정말 야마모도 대장 짐작 대롭니다.” 적들은 눈 우에 뻘건 피와 함께 여러 놈의 더러운 시체를 남기고 피가 질벅한 눈을 밟으면서 벌판으로 꼬리 빳빳해 도망치어 내려갔다. 유격대는 야마모도 대장이 짐작한대로 더 추격하지 않았다. “이젠 살았구나.” 수길의 말에 야마모도는 군복웃옷 단추를 벗기고 헐떡거리며 지껄었다. “내가 뭐라던가? 벌판에 내려와야 산다는데. 저 놈들이 벌판에까지 감히 내리어오기만 해보라지!” “에- 정말 대장님 고명합니다. 고명해!” “이럴 줄 알고 한 련대장과 어제 작전을 짜 놓았네. 산에서 유격대만 만나면 우리 별동대에서 그 놈들을 유인해 벌판에 끌어 내오면 한 련대장네 관동군 대부대가 포위섬멸해 버리기로 했네.” “그런데 저 놈들이 꼬임 수에 들어야겠는데.” “두구 보게. 아무 때나 우리 함정에 빠지지 않는가?” “그런데 놈들을 유인하는 미끼로 된 우리 위험하겠는데.” “닥쳐! 재수 없는 말 말라!” “옛!” “전투대형으로 논두렁에 의지해 매복해 자고 있으라.” “여기서 잔다고? 미끼로 써도 너무 하잖습니까?” 곤해 빠진 별동대 놈들은 눈 우에 털썩털썩 쓰러지었다. 수길이 여기저기 힐끔거리며 두덜거릴 때었다. 땅! 땅! 땅 땅 땅! 마을 쪽에서 총소리가 요란히 울리었다. “일제 놈들의 대갈통을 까 부셔라!” “쐇!” 금방 눈 우에서 일어난 몇몇 놈들이 비명소리를 지르며 눈우에 푹푹 꼬꾸라지었다. “유격대다! 쏴!” 수길이 고함쳤다. 야마모도도 “사격!”하고 고함치었다. “개새끼들 덤벼라!”       별동대 조선인놈들은 조선말로 고함치며 일제히 눈보라 치는 마을 쪽에 대고 사격하였다. 숱한 불줄기가 마을로 날아갔다. 웬 일인지 마을 쪽에서 총소리가 뜸해지었다. 기실 그때 인삼 중대장의 지휘대로 유격대는 벌판의 놈들에게 사격한 후 마을에 금방 들어선 동북쪽의 적에게 돌려 대고 몰 사격을 하였다. 그들은 별동대와 관공군을 서로 맞불질하게 개싸움을 붙여놓고 서북쪽 산골짜기로 신출귀몰했던 것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마을에 들어선 관동군은 자기들에게 사격하는 벌판의 별동대를 유격대로 오해하고 맹사격을 퍼부었다. 한철주는 웬 초가집 구새 목에 숨어 군도를 뽑아 들고 벌판을 향해 휘둘렀다. “유격대다! 사격!” 한철주의 명령이 떨어지자 관동군은 벌판의 별동대에게 몰 사격을 가하였다. 유격대는 마을에 갓 들어선 관동군과 벌판의 별동대를 개싸움을 시켜 놓고 살짝 빠져 전이하였던 것이다. 관동군과 별동대는 한식경이나 왝왝 고함치며 싸웠다. 한참 후에야 서로 일본 말로 왝왝 고함치는 소리를 듣고 사격을 멈추었다. 한철주가 둘러보니 눈보로 치는 마을의 눈 덮인 길바닥 여기저기에 숱한 더러운 시체가 나뒹구는 것이었다. “제길 할, 속았군, 속았어! 유격대 놈들에게 속았단 말이야!” 야마모도는 그때까지도 몰랐든지 성이 꼭뒤까지 치밀어 올라 군도를 빼든 채 마을 쪽을 쏘아 보며 고함치었다. “사격!” 수길이 다급히 손사래 치며 말리었다. “야마모도 대장, 저쪽은 한 련대장네 부댄 거 같습니다. 사격을 멈춥시다.” 야마모도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고래고래 고함치었다. “사격!” 일본 놈들은 한 련대장의 일본군을 향해 계속 사격하였다. 저쪽에서 고함소리가 들리었다. “사격을 멈추십시오. 야마모도 대장!” “한 련대장 부댄가?” “예!” 그제야 야마모도는 군도를 논두렁에 내리꽂으며 짚고 서더니 황급히 명령했다. “사격을 멈췃!” 별동대 놈들이 여기저기서 두덜거렸다. “제길 할, 유격대 놈들에게 놀아났군." "온 밤 개싸움을 했군!” 야마모도는 군도로 눈 덮인 논바닥을 쿡쿡 찍으면서 성이나 씩씩거리었다. 맞은편에서 한철주도 뒷덜미를 긁적거렸다. 허허 벌판에서는 피비린 눈보라가 휘몰아쳤다. 공포가 어둠 속에서 승냥이처럼 마을로 슬금슬금 기어들고 있었다.  
88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51) 댓글:  조회:1740  추천:1  2016-09-23
                   4. 샘물터의 총소리 원시림에 눈보라가 윙윙 세차게 휘몰아쳐 협곡과 산골짜기에는 어느덧 허연 눈이 몇 길씩 뒤덮이었다. 그 두꺼운 눈은 세찬 산바람에 떵떵 굳어 사람이 딛고 건너가도 됐다. 협곡의 막바지는 원시림 밑바닥에 1 미터 남짓한 넓이로 패인 깊은 협곡으로 사시장철 새하얀 물이 흐르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물이 흐르는 밑바닥은 자연 석굴처럼 널찍하고 윗부분은 좁아 천연적인 은신처나 다름없었다. 성칠은 진달래를 데리고 작전계획대로 돌아다니면서 매복습격전투준비정황을 검사하였다. 그는 협곡과 골짜기에 뒤덮인 눈을 직접 건너보면서 진달래를 돌아보았다. “정말 용천대장이 말한 대로 될 거 같구나. 이제 여기에 놈들의 커다란 무덤을 만들어 놔야지.” 진달래도 동을 달았다. “그래요. 놈들은 통나무집 안의 갱도를 생각지도 못했을 거예요. 더구나 이 협곡과 산골짜기의 눈은 생각지도 못했을 거예요.” 성칠은 진달래의 흩날리는 단발머리를 마주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 그 놈들은 가메다와 응세의 거짓 정보를 믿고 한바탕 너덜거릴 거야. 죽탕 먹을 줄은 모르고. 흥!” 뒤이어 성칠은 주저주저하다가 무거운 입을 열었다.  “진달래야, 넌 용천대장을 어떻게 생각하니?” “참 훌륭한 지휘관이죠." 진달래는 어망간에 대답했다가 이상해났다. " 밤중에 홍두깨라더니 건 왜?” 진달래는 의아해 깜장 눈을 치켜떴다. 성칠은 옆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고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너도 이젠 마흔 고개를 올려다보지 않니? 용천 대장한테 시집가면 좋잖니?” “안 가요.” 진달래는 눈을 곱게 흘기며 앵돌아졌다. “용천 대장만큼 좋은 신랑감이 어데 있다고 그러니?” “시집 안 간대도. 오빤 내 마음 몰라 그래요?” 성칠은 떠나려는 진달래 손을 잡아챘다. “너 미쳤니? 날 조강지처를 버린 나쁜 놈으로 만들자고?” “그러게 안 간다지 않아요.” 진달래는 앵돌아져 눈덮인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어깨를 세차게 들먹였다. 눈보라치는 수림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그녀는 홱 돌아서며 당돌하게 물었다. “오빤 날 사랑하지 않았는가요?” “그래, 나도 널 사랑해.” 성칠은 이렇게 말하려다가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억지로 삼켜 버리었다. 뒤이어 그는 두 손으로 진달래의 어깨를 잡고 흩날리는 눈보라 속에 진달래의 까만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간곡히 말했다. “난 절대 조강지처를 버릴 수 없어. 더구나 본댁을 두고 절대 후처를 할 수도 없다.” 성칠은 어깨를 들먹이며 흑흑 흐느껴 우는 진달래의 어깨를 놓고 주먹으로 언 소나무를 꽝꽝 쳤다. “누가 나더러 유격대 대장이 되라고 했는가!” 진달래는 성칠의 허리를 뒤로 꼭 끌어안고 가슴이 미여지게 울었다. 이때 아름드리나무 위에서 눈가루가 우수수 흩날려 내려 두 사람의 머리 위에 꽃 너울을 씌워주었다. 그들은 꿈속에서나마 사랑하는 신랑, 각시로 돼 보았다. 땅! 이때 갑자기 샘물터 부근에서 총소리가 울리었다. “뭐야?!” 성칠이 허리춤에서 권총을 빼 들고 허리 굽히더니 샘물터 쪽으로 뛰어갔다. 진달래도 권총을 빼 들고 뒤따라 뛰어갔다. 땅! 땅! 땅! 총소리가 자지러지게 울리었다. 그들이 뛰어 갔을 때 눈 덮인 샘물터에 하옥이가 권총을 쥔 채 가슴에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깨진 물동이마저 깨져 있었다. 성칠은 하옥을 와락 끌어안았다. “여보, 이게 어찌 된 일이오?”  “언니, 이걸 어쩌나? 가슴에 총을 맞았네요.” 경위원 조 꼬마가 저쪽에서 밀림에 대고 총을 쏘며 경계하다가 뛰어 왔다. “김 대장, 특무 놈이 불시에 나타났습니다. 나와 아주머니가 먼저 특무를 발견하고 총을 쏘았습니다. 특무 놈은 달아나면서 아주머니를 쏘았습니다. 칠백 중대장이 유격대원들을 데리고 추격해 갔습니다.” “알았소. 계속 경계하오.” “옛!” 성칠은 하옥을 진달래에게 맡기고 총소리 난 쪽을 향해 뛰어 갔다. 총소리에 놀란 산짐승들이 여기저기 뛰어 다니었다. 피뜩 아름드리나무 사이에서 흰 옷 위에 털조끼를 끼어 입은 놈이 얼른거리는 것을 발견하였다. (어디로 도망쳐?) 성칠은 나무 뒤에 딱 붙어 섰다. 저쪽에서 총소리 또 울리었다. 그 놈이 기대선 나무에  총알이 푱 하고 박히었다. 질겁한 그 놈은 성칠이 숨은 나무쪽으로 비실비실 뒷걸음질 쳤다. “꼼짝 말엇!” “앗!” 그 놈은 권총을 쥔 손을 쳐들며 몸을 천천히 돌리었다. 땅! "앗!" 그 놈은  비명을 지르더니 몸을 날리어 눈 바닥에서 데굴데굴 굴면서 총을 쏘았다. 성칠은 나무 뒤에 몸을 착 붙이며 날래게 피했다. “어디로 도망쳐?!” 성칠은 눈 바닥에서 나뒹구는 놈에게 호랑이가 승냥이를 덮치듯이 덮쳐들었다. 둘은 눈 위에서 엎치락뒤치락하며 싸웠다. 성칠이 왼팔을 상했지만 특무 놈은 근본 적수가 되지 못했다. 성칠은 상한 왼손으로 권총을 쥔 특무의 손을 내리눌렀다. 특무 놈은 깔리어서도 방아쇠를 자꾸 당기었다. 땅! 땅! 땅! 성칠이 총신을 허공에 탈아 버리어 총알은 허망공중에로 날아갔다. 권총에 이젠 탄알이 없었다. 성칠은 권총으로 최후 발악하는 특무의 대가리를 딱 내리깠다. 특무 놈은 당장에서 이마에 피를 흘리면서 까딱하지 못했다. 이때 칠백이랑 뛰어왔다. “김 대장, 괜찮소?” “빨리 이 놈을 압송하오. 아직도 특무가 더 있을 수 있으니까 주의하오.” “옛!” 몇몇 유격대원들이 특무 놈을 압송해가려고 할 때었다. 경위원 조 꼬마가 뛰어왔다. “보고! 응세 특무 놈이 혼란한 틈을 타서 도망치었습니다.” 그러자 성칠은 피씩 코웃음을 치었다. “모든 게 우리 계획대로 돼 가는구먼.” 유격대원들은 어안이 벙벙해 하면서 특무를 끌고 갔다. “잠간!” 유격대원들이 특무 놈을 눈으로 질질 끌고 가다가 주춤 멈춰서 성칠을 쳐다보았다. 성칠은 권총을 허리춤에 찌르며 말하였다. “그 놈을 야영지에까지 끌고 갈 게 없어. 산골짜기 쪽에 가서 심문하오. 전번에도 응세 놈이 우리 진영을 다 정찰해가지고 도망치지 않았고 뭐요.” 그러자 유격대원들은 머리를 끄덕이었다. 특무를 압송하고 나머지 유격대원들은 밀림에 흩어지어 특무가 더 있나 수색하기 시작하였다. 이윽고 저쪽에서 바위돌과 억복이가 다른 특무 놈을 끌고 왔다. 그 놈도 통나무집들에서 그리 멀지 않은 산골짜기 어귀에 압송돼 아름드리나무에 결박되었다. 성칠이 자기 통나무집 앞에 돌아왔을 때다. 집안에서 하옥의 목소리가 들리었다. “진달래야, 김성칠은 참 좋은 남자야. 자네한테 맡, 맡기네.” “언니, 무슨 말을 해? 난 용천 대장한테 시집 갈라요. 언닌 꼭 살아야 해. 언니—” 성칠이 황급히 통나무 집 안에 들어가니 하옥은 진달래 품에 안긴 채 또 중얼거리었다. “난, 난 둘이 서로 사, 사랑하는걸 아, 알고 있어.” 진달래는 성칠이 들어 온 줄도 모르고 눈물을 줄줄 흘리며 도리머리를 가로 흔들었다. “아니야, 아니! 언닌 꼭 살아야 해. 흑흑흑.” 성칠도 무릎을 꿇고 하옥의 얼굴을 매만지면서 진정을 토로하였다. “여보, 당신은 내 조강지처요. 죽어선 안 되오. 꼭 살아서 고향의 광복을 봐야 하오.” 하옥은 눈물을 주르르 흘리면서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손으로 성칠의 손을 더듬으려는 듯이 허우적거리었다. 성칠은 제꺽 하옥의 손을 잡고 퍼더버리고 물앉았다. “여보, 미안해요. 애, 애 하나 나아 주지 못, 못해. 진달래하구 꼭 행복, 행복하게 사, 살아요.” “무슨 소리요. 진달랜 용천 대장과 결혼한다 하잖았소. 당신 죽지 않소! 아니, 죽어선 안 되오.” 성칠은 눈물을 쫙 쏟더니 하옥의 손을 잡고 애타게 흔들었다. “조 꼬마!” “옛!” “위생원을 불러 왓!” “옛! 이미 불렀습니다.” 이때 통나무집 문이 벌컥 열리더니 위생원이 뛰어 들어 왔다. 성칠은 자리를 내주면서 “내 아내를 꼭 살려 내오. 구하지 못하면 군법으로 처리할 테다!”라고 을러멨다. “옛!” 위생원은 처음으로 성칠 대장이 이다지도 이지를 잃은 것을 보았다. 그는 두말없이 약솜으로 하옥의 상처를 닦아주고 손맥을 짚어 보았다. “약이 없어 어쩌지?” 위생원은 진달래와 경위원을 돌아보며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놈들의 봉쇄로 산에는 쌀과 약이 다 떨어지었던 것이다. 약이 없이 위생원인들 아무리 김성칠 장의 아내라도 어떻게 구한단 말인가? 성칠은 우두커니 서서 눈물을 훔치면서 “어떤가?” 하고 물었다. 위생원은 성칠을 한쪽으로 데리고 가서 나직이 알려 주었다. “탄알이 페 한쪽을 뚫어 위험합니다. 우선 수술해 탄알을 빼내야겠습니다. 그런데 마취약도 없지.아주머니가 피를 너무 많이 흘리어 혈압이 내려 갈 거 같아 손을 대기 무섭습니다. 베니실린이 있어야 총상 염증을 빼겠는데... ” 성칠은 씩씩거리며 “그렇다고 죽어가는 사람을 보고만 있겠는가?” 라고 하더니 함지를 들고 바깥으로 씽 나갔다. 이윽고 들어온 성칠은 함지를 들고 하옥의 곁으로 가서 내리어 놓았다. 그는 진달래와 은녀를 보고 “한쪽으로 앉아라."라고 하더니 하옥의 저고리를 헤쳤다. 진달래는 “왜 이래요?” 하고 물으며 까만 포도알눈을 치켜떴다. 성칠은 약솜을 가져다 함지에 잠그면서 “조상이 물려준 비방 약으로 상처를 처치해 줄 테다.”라고 하였다. 은녀는 의아한 눈길로 “오빠, 이게 뭔가요?”라고 물었다. 성칠은 붕대마저 풀어내고 약솜으로 하옥의 탄알구멍 상처에 괴여 오른 뻘건 피를 닦아내면서 대답하였다. “세상에 둘도 없는 조상들의 비방 약이야." "뭔데요?" " 내 오줌이야.” “오줌?” 진달래는 의아해하다가 성칠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머리를 끄덕였다. 이전에도 처음 만났을 때 성칠 오빠는 자기 오줌으로 동상을 치료한 적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총상 염증도 뺄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은 아직 의문스러웠다. 그때 옆에 있던 위생원이 해석해 주었다. “놔두시오. 옛 의서에 오줌으로 소독하고 소염도 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성칠은 오줌으로 총알구멍을 닦아 낸 후 위생원을 돌아보았다. “빨리 수술해 탄알을 빼 내오!” 그러나 위생원은 “마취약이나 지혈제가 없이 어떻게 수술하겠습니까?”라고 하며 난감해 했다. “이건 명령이오! 당장 수술해 탄알을 빼 내오!” 위생원은 대장의 아내여서 수술하기 적이 손이 떨리었다. 그래도 별수 없었다. 위생원은 수술칼로 하옥의 오른쪽가슴에 난 총알구멍을 십자로 한 칼, 한 칼 짜갰다. 하옥의 신음소리가 토굴 방을 아프게 톱질하였다. 성칠은 자기 가슴을 오리, 오리 칼로 저며 내는 것 같아 차마 눈 뜨고 보지 못하고 바깥으로 나가 눈보라 치는 하늘을 우러러 보며 한숨만 푸, 푸 몰아쉬었다. 한참 후 진달래가 머리를 숙이고 바깥으로 나왔다. “어떠냐? 수술 다 했느냐?” 진달래는 머리를 끄덕이었다. “이 걸 보세요.” 진달래가 내민 손에서 피 묻은 총알을 받아 들고 보는 성칠의 눈에서는 복수의 불길이 이글거리었다. “특무 놈을 살려 두지 않을 테다!” 이때 보초 서던 경위원 조 꼬마가 다가와 머리를 숙이었다. “김 대장, 처분하십시오. 아주머니를 경위하지 못해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성칠은 “아니오. 이제부터 잘 보호하오.”라고 말하고는 통나무집으로 화닥닥 뛰어 들어 갔다. 하옥은 고요히 잠들어 버린 것처럼 두 눈을 꼭 감고 누워 신음소리마저 내지 못하고 있었다. 위생원은 성칠을 한쪽으로 데리고 가서 조용히 말하였다. “위험에서는 벗어났습니다. 다행히 총알이 폐를 빗뚫으면서 페 동맥은 상하지 않았습디다. 오줌 약 덕분에 지혈도 됐습니다. 지금 맥박도 고릅니다.” "음." 성칠은 응어리진 어혈을 토해내듯이 신음에 가까운 소릴 냈다. “음, 그래."  하옥은 죽을 수 없어. 절대 죽지 않아!” 성칠은 바깥으로 나오면서 “은녀야, 그 오줌으로 좀 더 상처를 닦아 줘라.”라고 당부하고 바깥으로 나왔다. 경위원 조 꼬마가 뒤따라 나왔다. “특무 놈은 어데 있소?” “저 인삼 중대장의 통나무 앞 산골짜기에 있습니다.” “알았소. 동무는 여기서 보초를 잘 서오.” 성칠은 이렇게 분부하고 떠나가려다가 조 꼬마의 귀에 대고 뭐라고 귀속 말을 하였다. 조 꼬마는 “예- 알았습니다.” 하고 머리를 끄덕이었다. 성칠은 특무 놈을 결박해 놓은 아름드리나무 쪽으로 가면서 주먹을 으스러지게 틀어 쥐었다. “어떻게 하면 원수를 갚을까?” 성칠의 발길 앞에서 눈보라가 세차게 휘몰아쳐 눈 파도가 사납게 휘몰아치었다.                               5. 매복       성칠은 이를 부득부득 갈면서 특무 놈들한테로 다가갔다. 대가리를 얻어맞고 정신을 잃었던 특무 놈이 놀랍게도 깨여나지 않았겠는가.      그는 특무를 지키는 칠백중대장과 바위돌을 보고 말했다.       “두 놈을 멀리 떨어진 곳에 끌고 가서 따로 심문하기요. 한마디만 거짓말을 하면 당장에서 총살해 버리오.” 라고 하였다.      “양!”      칠백과 바위돌은 몇몇 유격대원들과 함께 한 특무를 끌고 고개를 넘어가서 심문하였다.      성칠은 증오의 불길이 이글거리는 세 귀 눈으로 특무를 쏘아보면서 “대가리를 들어!” 하고 을러멨다. 그러나 그 특무 놈은 아까 깔리어서도 단말마적으로 발악하던 놈 같지 않고 대가리를 점점 숙였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아래 백지장같이 허연 낯과 매부리코가 퍽 눈에 익었다. “대가리를 들어!” 옆에서 억복이 특무 놈의 머리카락을 쥐어 대가리를 쳐들었다. 순간 그 놈은 대가리를 툭 떨어뜨렸다. “백승철, 이 놈, 대가리를 쳐들고 날 봐라!” 성칠은 주먹으로 그 놈의 가슴팍을 꽝 치었다. “형님, 날 살려주오!” “형님? 누가 네 형님이냐? 개 같은 놈!” 억복과 유격대원들은 그 놈과 성칠 대장을 번갈아 보면서 의아해 하였다. “일본 개다리질 하는 네 놈을 웅진에서 죽여 버리어야 했어. 그랬더라면 네 놈의 손에 우리 여유격대원이 목숨을 잃지 않았을 거야 성칠은 비수 끝으로 그 놈의 턱을 쳐들고 심문하였다. “말해! 일본 놈들이 뭘 정찰해오라던가?” 백승철은 불티 튕기는 눈길로 성칠을 쏘아보았다. “모른다! 죽어도 모른다! 어서 죽여라!”        “네놈이 당장 죽게 돼서도 갱갱 소릴 지를 테냐?” 성칠은 억복에게 눈짓하였다. 억복은 특무의 대가리를 언 나무에 마구 쪼아 놓았다. 성칠은 승철을 쏘아보며 “저 놈을 저녁에 승냥이들이 뜯어먹게 묶어 둬라!”라고 말하고는 고개 넘어 스적스적 걸어갔다. 이윽고 고개 넘어 눈 덮인 산비탈에서 칠백이랑 아름드리나무에 특무를 결박해놓고 심문하는 것이 보이었다. 성칠은 칠백을 한쪽으로 불러 조용히 심문결과를 묻고 나서 고개를 끄덕이었다. “됐소. 이 놈을 끌고 백승철한테로 가기요.” “양!” 칠백은 힘차게 대답하고 나서 “그 놈을 끌고 가자!” 하고 명령하였다. 눈보라 속에서 고개를 넘어가면서 성칠은 결박돼 끌려가는 특무 놈을 보고 말하였다. “우린 네놈들의 소조장이 백승철과 무슨 죄악적 임무를 맡고 여기 왔다는 걸 다 알아냈다. 백승철, 그 놈은 웅진이란 곳의 날강도야. 놈의 형 둘도 우리 유격대에 몽땅 총살당했어. 알았어?” “이 놈과 더 물을 필요 없소. 총살해 버리기요.” 그러자 특무는 풀썩 물앉으면서 두 손을 싹싹 비볐다. “장관님, 제발 목숨만 살려 줍소. 몽땅 다 교대하겠습니다.” 그때라고 성칠은 심문을 들이댔다. “말해. 우리한테 쓸모 있는 말인지 어디 들어보자.” 특무 놈은 꿇어앉은 채로 대가리를 쳐들어 성칠을 보고 참대 통에서 콩알을 굴리듯이 주어 댔다. “이번에 사실 별동대 야마모도 대장과 한철주 부련대장은 대군을 끌고 토벌하기 전에 유격대 군영지도를 그려오고 병력과 무기, 쌀 같은 정황을 속속들이 탐지해 오라고 했습니다. 응세가 붙잡힌 바람에 겁을 집어먹고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백 소조장은 유격대 정황을 알아내지 못하고 돌아가면 총살당한다면서 여기서 계속 정찰하자  했습니다. 오늘 샘물터에서 물을 긷는 여 유격대원을 발견했죠. 백 소조장이 총을 쏘려고 하자 난 말렸습니다. 총소리 나면 숱한 유격대 몰려온다고. 그런데 백 소조장은 김 대장네 여편네, 저, 아니, 부인이라면서 기어이 죽여 버리겠다고 총을 쏘았습니다.” “거짓말! 총은 네가 쏘고서도.” 억복이 총 박죽으로 그 놈의 잔등을 내리 치었다. “아닙니다. 정말 백 소조장이 쐈습니다. 정말입니다. 거짓말을 하면 당장 죽이십시오.” “됐어.” 성칠은 그 놈이 뭐라고 또 말하려는 것을 중도이폐했다. “토벌하러 오는 별동대와 관동군이 얼마나 된다던가?” 그 놈은 “아마 별동대 30여명에 관동군 300여명이 토벌하러 온다는 거 같습디다.”라고 말하였다. “언제 온다던가?” “양력설 전에 토벌해 음력설전엔 원시림의 항일유격대를 몽땅 소멸하겠다고 합디다.” 그 말에 성칠과 칠백은 눈을 맞추었다. “한마디라도 거짓말을 하면 죽인다!” 권칠백이 어름 장을 놓자 특무는 “누구 앞이라고 함부로 거짓말 하겠습니까?” 하고 너스레를 떨었다. “끌고 가자!” 유격대원들은 그 특무 놈을 끌고 눈보라 치는 고개를 넘어 백승철을 결박해 놓은 아름드리나무 앞으로 갔다. 성칠은 군화발끝으로 백승철의 턱을 춰올리며 호통쳤다. “백승철, 이 놈, 우린 응세와 다른 특무 놈들 입에서 모든 걸 알아냈다.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는가?” 백승철은 이를 쁘득, 뿌득 갈며 성칠과 유격대원들을 둘러보았다. “네놈의 여편네를 죽이어 치우지 못한 게 아쉽다. 네놈하구 진달래 년을 대가리를 쳐서 두 형님의 원수를 갚지 못한 것이 한일뿐이다! 어서 죽여라! 응세가 도망쳤으니 이제 야마모도 대장과 한 련대장이 토벌하러 올 게다. 그들은 응세와 가메다를 앞세워 대부대를 데리고 와서 네 놈들을 몽땅 죽일 거다! 으하하하. 네놈들의 제사날도 멀지 않다! 어서 죽여라!” 성칠은 밀림이 떠나가게 고함쳤다. “300명이 아니라 3천명이라도 오라고 해라! 한철주 애비도 우리 여대장 손에 썩어졌어. 철주 놈도 오면 장백산 밀림의 귀신으로 만들 테야.” 칠백도 격분해 고함쳤다. “일본 놈들과 주구 놈들을 여기서 몽땅 소멸해 버릴 테다!” 백승철은 대가리를 툭 떨어뜨렸다. “어서 한방에 죽여라!” 그러나 성칠은 비수를 뽑아 들고 호통쳤다. “네놈을 그리 쉽게 썩어지게 할 거 같은가? 우리는 중조 인민들을 대표해 일본 놈들의 개다리를 처단한다!” “가만!” 이때 진달래가 저쪽에서 눈보라 속을 헤집고 뛰어 왔다. “이 놈은 언니를 총으로 쏜 놈이닌데요. 내 끝장낼 게요.” 진달래는 염낭에서 조약돌을 꺼내 돌팔매를 날리었다. 딱! "앗!" 백승철 놈의 이마빼기에서 피가 주르르 흘렀다. 딱! 딱! 유격대원들이 연신 돌팔매질을 하였다. 백승철은 대가리가 볼품없이 터져 피와 뇌 장이 마구 흘러 나왔다. 일본 놈을 등에 업고 세상에서 못된 짓이란 짓은 다 하던 일본 주구 백승철 놈은 이렇게 더러운 끝장을 보고야 말았다. 유격대원들은 눈 덮인 산골짜기에 더러운 일제 개다리의 시체를 나무 가지와 눈으로 덮어 버리었다. 나머지 특무 놈은 백승철의 끝장을 보고 풀썩 물앉더니 대가리로 눈 덮인 언 땅을 떵떵 쪼면서 목숨을 구걸하였다. “제발 살려 줍소. 낱낱이 탄백하면 살려준다 해 놓고 왜 죽이자고 자꾸 이럽니까?" 그 놈은 벼룩이 눈을 끔쩍이더니 중얼거렸다. " 아차, 잊을 번했구나. 한철주 련대장은 ‘이번에 아버지 원수를 갚겠다고 했습니다. 별동대 기습과 관동군 포위섬멸전을 결합해 토벌하겠는데 우리 보고 적정을 잘 정찰해오라.’고 했습니다.” 성칠은 발길로 특무 놈의 잔등을 밟고 섰다가 툭 차 놓았다. “이 놈, 작작 지껄여라. 우린 벌써 알고도 남음이 있다. 이 놈을 가둬 둬라! 우리 일본 놈들을 소멸하는 걸 구경시켜! 네 놈 대가리를 잠시 붙여 뒀다가 네 놈 말이 한마디만 거짓말인 날엔 그때 가서 대가리를 쳐버릴 테다!” 특무 놈은 끌려가면서도 대가리를 조아리었다. “장관님, 살려 줘 고맙습니다. 이제 더 생각나면 유격대에 이실직고하겠습니다.” 유격대원들이 그 특무 놈을 끌어갔다. 성칠은 픽 냉소하더니 눈보라치는 밀림의 하늘을 쳐다보며 한숨을 후 내쉬었다. 이때 인삼 중대장과 동욱 중대장이 다가왔다. 인삼은 성칠을 보고 조용한 곳에 가서 “응세란 놈이 도망쳤으니 우리 군영을 놈들이 손금 보듯 빤할 게요. 우린 빨리 전이해야 하지 않겠소?” 하고 물었다. 진달래도 동을 달았다. “글쎄. 통나무집이 아까운대로 당장 전이해야 할 거 같아요.” 그러나 성칠은 “아니오. 지금 전이할 때 아니오.” 라고 하더니 주위를 둘러보고 아무도 없는 것을 보고 조용히 귀속 말을 하였다. “내 조 꼬마를 보고 응세란 놈을 고의적으로 놔 주게 했소.” “양?” 성칠은 주위를 다시 둘러보았다. “낮 말은 새가 듣고 밤 말은 쥐가 듣는다는데 집에 들어 가 말하기요.” 그들은 진달래네 집안에 들어갔다. 모두들 자리를 정하고 앉자 성칠은 나직이 말하였다. “그 놈을 고의로 놔줘서 거짓정보가 놈들한테 가게 한 거요. 놈들은 우리 밀림속의 군영에 병력이나 무기나 형편없고 쌀도 떨어진 걸로 알고 마음 놓고 쳐들어 올 거요. 예로부터 교오하는 병사는 싸움에서 진다고 했소. 우린 여기 통나무집들로 된 밀영에 적들을 깊이 유인해 들이어 섬멸전을 벌리잔 말이오.” 인삼은 머리를 끄덕이면서 “참 그럴듯하구먼.” 라고 찬동하였다. 그러나 진달래가 도리머리를 가로흔들었다. “안 돼요. 환히 드러난 군영에 적들을 끌어 들인다는 건 놈들의 기습을 당할 수도 있어 너무 위험해요.” 그러나 성칠은 고집을 썼다. “여자들이란 왜 그리 생각이 짧아? 그런 담도 없이 어떻게 싸워? 예로부터 담과 용기 있는 자가 싸움에서 이긴다고 했다. 희생정신이 없이 어찌 일본 놈들을 소멸하겠느냐?” 뒤이어 그는 중대장들을 몽땅 불러다 작전포치를 하였다. 유격대 각 중대는 김성칠 대장의 포치에 따라 눈보라를 무릅쓰고 급급히 움직이었다. 인삼 중대장은 자기 중대를 영솔해 군영을 떠나 영월구 쪽으로 진군하였다. 그들은 토벌하러 오는 적들을 기습하여 교란하고 피곤하게 만들 전략임무를 맡았던 것이다. 동욱 중대장과 칠백 중대장은 각기 자기 중대를 거느리고 밀영에서 5리 쯤 떨어진 서쪽과 북쪽에 가서 매복하였다. 다만 진달래중대장만이 성칠 대장과 함께 제일 위험한 밀영에 남아 유격대원들을 영솔해 전투준비를 하였다…  
87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50) 댓글:  조회:1677  추천:0  2016-09-13
              2.사냥      장백산 수림 속은 하얀 눈이 뒤덮이어 은세계를 방불케 하였다. 다만 여기저기 미인 송과 소나무들이 하얀 눈을 떠이고 있어 드문드문 수림이라는 것을 알릴뿐이었다.       눈 덮인 밀림 속에서 낮에 밥을 짓지 못했다. 밀림 속에 연기가 자오록해지면 밀영이 발각될 위험이 있었다. 성칠 대장은 유격대 여러 중대에 밥을 지을 때 여러 모로 주의를 돌릴 것을 지시하였다.       진달래중대장을 비롯한 하옥과 은녀 등 여대원들은 늘 밤도와 이튿날에 먹을 죽을 끓여 놓곤 했다. 진달래는 성칠과 토론하고 만일을 대비하어 주먹밥을 가득 지어 얼군 다음 군영 토굴 방마다 돌아가면서 뒤울안 눈 속에 파묻어 놓았다.       이날 밤에도 진달래와 하옥이, 은녀 등 여대원들은 샘물터에서 달빛을 빌어 쌀을 일었다. 경위원 조 꼬마와 최구철, 병수, 득호 등이 나무 위에서 샘물터 주위를 보초 서고 있었다.       하옥은 옆에서 쌀을 이는 진달래의 단발머리와 탄력 있는 잔등을 보면서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못난 계집애야, 마흔이 가깝도록 남의 유부남을 사모해 시집도 안 가? 쯧쯧쯧, 네 인생 정말 불쌍해. 애도 낳지 못한 내 빨리 자리를 내놔야 하는 건데.) 하옥은 위쪽 샘물터에서 물독에 바가지로 물을 퍼 담는 은녀를 보자 진달래도 좋은 신랑을 찾아 시집갔으면 얼마나 좋겠는가고 궁리도 해보며 한숨을 호 내쉬었다. 한참 후 하옥은 쌀 함지를 이고 진달래와 함께 돌아가면서 슬쩍 속뽑이를 해 보았다. “진달래야, 좋은 신랑감이 있으면 시집가겠어?” 진달래는 쌀 대야를 인 채 “시집 안가요. 일본 놈들을 다 몰아내기 전엔 절대 시집가지 않겠어요.”하고 막아 버리었다. “여자가 나이 들면 시집가기 마련이지. 처녀가 시집가지 않겠다는 건 다 새빨간 거짓말이야. 황차 시집간다고 항일유격전쟁을 하지 못하겠어?” “시집가 애나 덜컥 생기면 어떻게 달구 다니면서 일본 놈들과 싸우겠어요?” 말을 마치자 진달래는 빠드득빠드득 발검을 재우쳐 총총히 자기 통나무집 쪽으로 걸어갔다. 하옥은 뭐라고 말하려다가 목구멍까지 올라 온 말을 겨우 삼켜 버리었다. 이때 성칠이 나타나 하옥의 머리에서 쌀 함지를 받아 안고 통나무집으로 성큼성큼 걸어 갔다. 조 꼬마가 나무 위에서 내려와 열댓 미터 떨어져 뒤따라왔다. 통나무집에 들어가자 성칠은 “어데 좋은 신랑감이 있소? 중매를 서 주지.”라고 물었다. 하옥은 머리 위에 곱게 내려앉은 눈송이들을 털어 버리면서 나직이 말하였다. “인삼 시동생과 용천 대장 다 좋은 신랑감이지요. 진달래야 신랑 퇴를 낼 지경이지. 사달은 진달래 시집가지 않겠다는 거죠.” 성칠이 무슨 궁리를 하는데 하옥이 밤중에 불쑥 홍두깨 내밀듯이 물었다. “어째 시집보내기 아까와요?” “거 무슨 소리요? 이십여 년 함께 살아오고서도 날 믿지 못하오? 난 절대 조강지처를 두고 다른 생각을 하지 않소.” 성칠이 문을 쾅 닫고 나가자 찬 기운이 통나무집 안에 확 풍기어 들어왔다. 하옥은 서러워 사슴 가죽을 깐 구들에 탈싹 드러누워 서럽게 울었다. 한편 바깥에 나간 성칠은 경위원 조 꼬마를 시켜 인삼이, 최동욱, 칠백 등 중대장을 진달래 중대장의 집에 불러 오라고 하였다. 성칠과 인삼 중대장이 진달래네 통나무집 앞에 이르러 보초병과 군호를 맞추고 통나무집 앞에 들어가자 밥을 짓느라고 불을 때던 진달래가 반겨 맞았다. 최구철은 사냥총을 들고 보초를 서러 나갔다. 진달래는 무슨 긴급정황이 생기었는가 하여 구들에 올라 왔다. 성칠은 여러 중대장들을 둘러보면서 말하였다. “지금 일본 놈들이 집단부락을 꾸리어 우리와 인민군중들 간의 연계를 차단하고 산을 엄밀히 봉쇄하구 있소. 그래서 전번에 상순이랑 보낸 쌀이 오래지 않으면 밑바닥이 나오.” 모두들 서로 마주 보며 머리를 끄덕이었다. 성칠은 과단하게 말했다. “우린 사냥도 하고 친일주구와 친일부자들도 습격해 식량문제를 긴급히 해결해야 하겠소.” 인삼은 한숨을 후- 내쉬었다. “혹시 우리 발자국을 따라 일본 놈들을 밀영에 묻혀 오면 어쩌겠소?” 칠백은 “눈 내리는 날에 행동하면 되오.”하고 계책을 내놓았다. 인삼은 “며칠이고 눈이 내리지 않으면 어쩌겠소?”하고 근심하였다. 그때 성칠이 과단성있게 말했다. “짚신을 거꾸로 신을 수 있게 삼으라 하오. 그런 신을 신고 사냥하기요. 어쨌든 우린 식량문제를 해결해야 하오. 인삼 중대장은 중대에서 꼴꼴한 대원들을 골라 기동부대를 조직해 친일 부자 집을 습격해 식량을 얻어 오오. 우리 명천 사냥꾼 출신들은 내일 밀영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나가 사냥하기오.”       칠백은 동욱을 마주보며 팔소매를 걷어붙이었다.       “우리 오랜만에 사냥 솜씨를 피우게 됐구먼.” 회의가 끝나 흩어질 때 인삼이 코로 냄새를 맡으며 황급히 소리치었다. “무슨 탄 냄새야!” “에구머니, 죽이 탄 냄새구나.” 진달래가 새된 소리를 치며 일어나 가마 덮개를 열고 바가지로 물독에서 물을 퍼 마구 가마 안에 끼얹었다. 쌔-애- 앵- 가마 안에서 쌕 김이 통나무집 안이 꽉 차게 솟구치어 올랐다. 그 바람에 등잔불이 가물거리다가 꺼져 버리었다. 이윽고 진달래가 부엌에서 불붙은 나무를 꺼내 쳐들어서야 다들 겨우 짚신을 찾아 신고 바깥으로 나갔다. 성칠만은 가지 않고 구들에 앉아 있었다. “그 죽 먹을 만 하냐?” “밑이 탔지 속은 괜찮아요. 정 안 되면 물가마치처럼 먹지요. 뭐.”        진달래는 쌀이 아까워 죽 가마를 들여다보며 밥주걱으로 자꾸 긁었다. 성칠이 짚신을 신고 나오는데 통나무집 안에서는 가마 밑굽을 빡빡 긁는 소리가 아츠럽게 들려왔다. 이튿날 하늘에서 밤송이 같은 눈송이들이 펑펑 쏟아지었다. “하늘이 우리를 돕는구먼. 아무 발자국도 남기지 않게 됐잖소.” 성칠은 개털모자에 하얀 눈을 들쓴 채 칠백과 동욱을 돌아보며 희죽이 웃었다. “사냥하러 가기오.” 명천의 사냥꾼들은 모두 주먹밥을 몇 덩이씩 호주머니에 넣고 성칠을 따라 사냥하러 나섰다. 나이 먹은 검둥이도 오랜만에 주인을 따라 사냥하러 나섰다. 한참 눈 덮인 밀림 속으로 걷던 성칠이 두덜거렸다.  “눈이 적게 덮이었으면 말을 타고 사냥하러 가는 건데. 이거 원, 언제 걸어서 사냥터에 가겠는가?” 동욱은 한숨을 쉬었다. “에이, 장백산에 눈이 내리면 말은 무용지물이오. 오히려 말먹이가 없는데 저 아래 영월구 농가들에 맡긴 게 잘 했지. 이 눈에 말을 타기는 고사하고 말을 메고 다녀야겠소.”       숱한 사람들이 너털웃음을 웃었다. 성칠이 우뚝 멈춰 섰다. “아차, 사냥총을 들고 와야 하는 건데.” 칠백은 장총을 들어 보이었다. “에이, 장총이 좀 좋아 그러오? 탄알도 없는데 언제 화약하구 철환을 얻어 사냥총 탄알을 만들겠소?”       성칠은 도리머리를 가로 흔들었다. “혹시 밀림에서 일본 놈의 특무라도 만나면 인차 신분이 폭로될 게 아니냐?” 동욱은 머리를 끄덕이다가 “밀림에서 의심스러운 특무를 만나면 몽땅 쏴 버리기요.”라고 통쾌하게 귀띔했다. 성칠은 뭔가 궁리하더니 “그럼 가자.”하고 성큼성큼 밀림 속으로 걸어 나갔다. 그들은 썩어빠진 아름드리나무가 누워 있는 밀림 속에 이르러 성칠과 칠백이 등이 한개 소조로, 동욱과 억복, 바위돌 등이 한개 소조로 나뉘어 사냥하러 떠나기로 하였다. 갈라 질 때 성칠은 분부했다. “적정이나 긴급정황이 있으면 연발사격으로 서로 알리기오.” 모두들 머리를 끄덕이었다. 성칠 등은 둬 식경 무릎까지 푹푹 빠지는 눈 속을 헤매다가  밀림 속에서 사냥하기 시작하였다. 먹이를 찾던 꿩이나 독수리들이 푸르릉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러나 그들은 자그마한 사냥물을 겨눠 총소리를 내면 혹시 적들에게 노출될까봐 감히 총을 쏘지 못하였다. 성칠은 칠백을 데리고 산골짜기 쪽으로 내려가 보았다. 내려 갈수록 눈이 허벅지까지 푹푹 빠지고 점점 더 큰 아름드리나무들이 앞을 막아섰다. “살았어.” 성칠이 가리키는 쪽을 보니 눈 덮인 산비탈에 아름드리나무들 속에 웬 벌거숭이 구새 먹은 나무통에 꺼먼 구멍이 나타났다. “구새통 속에 곰이 있지 않을까?” 칠백의 물음에 성칠은 머리를 끄덕이며 구새통 쪽으로 턱짓 하였다.그는 사냥총을 들고 눈을 헤치며 허우적허우적 구새통에 다가가 구멍을 들여다 보았다.구새통 구멍에 서리가 끼었던 것이다. “곰이 있어.” “허허허, 우리 유격대 먹으라고 하느님이 내린 곰이로구먼.” “쉿- 낮말은 새가 듣고 밤 말은 쥐 들어. 혹시 적들이 있으면 어찌 하느냐?” 칠백은 계집애처럼 혀를 홀랑 내밀었다. 성칠은 장총 끝의 총창으로 구새통 안을 쑤셔 놓았다. 구새통 안에서 놀란 곰이 대가리를 쑥 내밀었다. 성칠과 칠백은 총창으로 숨통을 푹푹 찔렀다. 빗 찔려 성난 곰은 구새통에서 뛰어나와 무섭게 덮쳐들었다. 땅! 성칠은 하는 수 없이 총을 쏘았다. 총소리는 눈 덮인 밀림 속 골짜기에서 오래도록 메아리쳤다. 대갈통을 맞은 곰은 당장에서 태산이 무너지듯이 쓰러졌다. 여기저기서 놀란 사슴이며 노루며 깡충깡충 뛰어 달아나고 산새들이 푸르릉 하늘로 풍겨 올랐다. 성칠과 칠백은 총을 쏜바하고는 사슴이며 노루며 겨냥해 방아쇠를 당겼다. 사슴과 노루가 총소리와 함께 거의 동시에 눈 위에 푹푹 꼬꾸라졌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도 총소리가 울렸다. “아마 동욱도 사냥을 시작한 거 같아.” 칠백이 중얼거리는 말이었다. 땅! 땅! 저쪽에서 연발 사격하는 총소리가 울리었다. “적정이 있구나. 은페해 주위를 살펴라.” 성칠의 명령에 따라 칠백 등 사냥꾼들은 모두 눈을 파고 엎드려 경각성을 높여 눈 덮인 밀림을 살피었다. 이때 빽빽이 들어선 아름드리나무사이로 사냥꾼 복색을 한 서너 사람이 사위를 기웃거리며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제길할, 금방 본 사냥꾼들은 사슴이랑 잡았더구먼. 우린 사슴은커녕 쥐새끼도 못 잡았어.” “재수 없어.” “사냥은 아무나 하나?” 지껄이는 소리를 들어 보면 사냥꾼 같았다. 칠백이가 일어나려는데 성칠이 붙잡아 꾹 눌러 놓았다. “잠간! 저 자들이 쥔 총은 사냥총이 아니야. 저걸 봐. 신도 일본군화야.” 칠백도 놀랐다. “일제 장총! 쏴버릴까?” 성칠은 도리머리 질 했다. “좀 더 살펴보자.” 성칠은 칠백의 귀에 대고 뭐라고 말하였다. 뒤이어 그들은 갈라져 눈 속에 숨었다. 그 자들은 가까이까지 다가왔다. “어 참, 엄청 큰 곰이구나.” 한 놈이 발로 곰을 툭툭 걷어차며 중얼거리었다. “사냥꾼은 어데 갔어?” 그 자들이 두리번거릴 때었다. 땅! 성칠이 공중에 총을 쏘았다. 순간 그 자들은 나무 뒤에 숨으며 아우성치었다. “유격대다!” 땅! 땅! 성칠과 칠백은 사격했다. 두 놈이 꼬꾸라졌다. 나머지 두 놈은 그제야 성칠 등을 발견하고 장총을 버리고 품속에서 권총을 뽑아 들고 맞불질하였다. 푱! 푱! 성칠은 왼팔에 총알을 맞고 총을 떨어뜨렸다. 땅! 위기일발의 시각에 성칠을 겨누는 놈을 칠백이 쏘았다. 땅! 총소리와 함께 그 놈이 푹 꺼꾸러졌다. 나머지 놈은 총소리와 함께 곤두박질쳐 골짜기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이때 동욱이 합세하여 이쪽으로 덮쳐 왔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자지러진 총소리가 울리자 유격대 밀영은 즉시 전투태세에 들어갔다. 성칠은 권총을 쥔 오른손으로 왼쪽 팔을 붙잡고 명령하였다. “산골짜기로 도망친 놈을 수색하라!” “예!” 사냥꾼 출신의 유격대원들은 산골짜기 아래로 수색해 내려갔다. 그러나 그 놈이 어디로 도망쳤는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동욱이 총을 맞고 쓰러진 놈들의 허연 한복과 껴입은 조끼를 헤치고 보니 일본군 속벌이 드러났다. “특무놈들이구나.” 성칠은 칠백에게 몇몇 유격대원들을 데리고 계속 밀림 속을 수색하라고 명령하고 곰과 사슴을 메고 숙영지로 돌아가자고 하였다. 그들이 금방 자리를 떴는데 느닷없이 “뻐꾹, 뻐꾹.”뻐꾹새 울음소리가 들리었다. 뻐꾹 뻐꾹 뻑뻑꾹 이쪽에서 화답하자 밀림 속에서 인삼이가 기동분대를 데리고 달려 나왔다. 인삼은 허연 천으로 동여맨 성칠의 팔을 보고 “김 대장, 모질 상하진 않았소?”하고 물었다. “괜찮소. 우린 빨리 이 곳을 떠나야 하오. 한 놈을 놓쳤으니까 그 놈에게 우리를 노출시켜선 안 돼.” “알았소.” 유격대원들은 성칠의 명령대로 놈들의 시체를 눈 속에 파묻어 버리고 노획한 권총과 장총 여섯 자루에 사냥물을 메고 밤도와 고의적으로 여러 갈래로 흩어져 군영으로 돌아왔다. 곰을 멘 유격대원들만 곧추 군영으로 돌아가고 나머지 유격대원들은 여러 갈래로 나뉘어 영월구 쪽으로, 남만 쪽으로, 삼도구촌 쪽으로 흩어져 내려가다가 멀리 에돌아 이튿날에야 군영으로 돌아왔다.                            3.특무         눈 덮인 밀림 속의 군영은 전투 준비로 발칵 뒤집히었다. 일본 놈들이 파견한 특무놈들이 군영 부근까지 깊숙이 잠입한데다가 특무 한 놈을 놓쳤기 때문이다. 유격대에서는 더욱 경각성을 높이게 됐다. 성칠은 통나무집 안에서 한숨을 후 쉬면서 대비책을 궁리하고 있었다. 그때 하옥이가 사슴고기를 끓일 물을 길으러 물동이를 이고 나가려고 하였다. “여보, 특무 한 놈을 놓쳤으니 각별히 주의하오.” 하옥은 옆구리에서 권총을 꺼내 보이면서 “이거 있잖아요. 나도 쏠 줄 아니깐요. 근심하지 마세요.”하고 말하고는 바깥으로 나갔다. 그래도 시름이 놓이지 않아 성칠은 경위원 조 꼬마를 보고 “따라 가 보오.”하고 당부하였다. “옛.” 경위원이 나간 후에도 성칠은 칠백이네가 이틀 날 밤에까지 돌아오지 않자 속에 걸리었다. 하옥과 경위원 조 꼬마가 집에 들어서자 “중대장들과 상의할 일이 있어 나가 봐야겠소.”하고 말하였다. “왼팔을 상했는데 주의하세요.” 성칠은 웃으면서 “양, 내 오른팔이면 둬 놈쯤은 문제없소. 근심하지 마오.”하고 장담하며 바깥으로 나갔다. 경위원이 따라 나오려는 것을 성칠은 “동문 집에서 아주머니를 지키오.”라고 지시하였다. “옛.” 성칠은 곧추 진달래네 통나무집으로 찾아 갔다. 그가 들어서니 최구철은 보이지 않고 진달래가 부엌에서 불을 때고 있었다. 진달래는 일어나면서 “오빠, 어서 올라 가세요.”라고 인사하며 쌕 김이 쌕 뿜기는 가마 덮개를 바로 잡아 덮어 놓았다. 성칠은 곰과 호랑이 가죽을 깐 구들에 앉자마자 구들에 올라오는 진달래를 보고 입을 열었다. “군영을 버리고 동만이거나 북만 쪽으로 전이해야 될 거 같아.” 진달래는 구들에 쪼그리고 앉으려다가 철색얼굴에 놀란 표정을 지었다. “조만간에 일본 놈들이 토벌하러 오겠지요. 어제부터 계속 궁리했어요. 어찌 이 좋은 군영을 그저 버리고 달아나겠어요? 견고한 밀림 속의 군영을 이용해 일본 놈들을 몇 놈이라도 죽여 치우고 떠났으면 좋겠어요.” 성칠은 너무도 기뻐 진달래의 손을 덥석 잡았다. “옳다. 어쩜 내 생각하구 똑같니?” 진달래는 쑥스러워 머리를 좀 숙이면서도 손을 빼가지 않았다. 이때 바깥에서 빠드득빠드득 다급하게 눈 밟는 소리 들리었다. “군호!” “장백산!” 군호를 맞추는 소리에 뒤이어 문이 벌컥 열리었다. 성칠은 손을 스르르 놓았다. 인삼과 동욱이 들어왔다. “김 대장, 칠백중대장이 특무 놈을 붙잡아 가지고 돌아 왔소.” “양?”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칠백과 억복 그리고 바위 돌은 특무를 끌고 들어 왔다. 그런데 억복의 종아리 각반은 피로 얼룩져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인가?” 억복은 특무의 엉덩이를 총 박죽으로 툭 쳤다. “이 놈이 눈 속에 숨었다가 선제사격을 하는 바람에 장딴지를 빗맞았습니다. 다행이 칠백 중대장이 이 놈을 뒤에서 깔고 들어 앉아 제압했기에 큰 일은 없었습니다.” “음, 다행이오.” 성칠은 구레나룻을 어루만지며 바닥에 선 특무 놈을 쏘아보았다. “네 놈은 누가 파견한 놈이냐?” “말해!” 억복은 악이 나 총 박죽으로 그 놈의 종아리를 툭 내리쳤다. “앗!” 특무 놈은 비명을 지르며 물앉았다. 성칠은 손을 들어 억복을 제지시키고 나서 위엄 있게 심문하기 시작하였다. “어서 말하지 못할까?” 특무 놈은 피 말라붙은 입술을 감빨며 벼룩 눈으로 성칠의 독기어린 세 귀 눈을 쳐다보고 쥐구멍으로 들어가는 소리로 중얼거렸다. “말하지 않아도 죽고 말해두 죽을 판인데. 어서 죽여라!” “닥쳐!” 성칠은 구들을 꽝 치며 호통 쳤다. “우리 유격대는 종래로 말하면 말한 대로 한다. 낱낱이 탄백하면 관대하게 처리하고 항거하면 총살해 버릴 테다!” 특무 놈은 벼룩 눈을 깜짝이더니 두 손을 싹싹 비볐다. “장관, 제발 살려 줍소.” 성칠은 허리를 펴며 심문하였다. “네놈은 이름이 뭔데?" " 누가 파견한 특문가?” 특무 놈은 머리를 뚝 떨어뜨리며 탄백하기 시작하였다. “난 박응세라고 하는데 우린 우시장 경찰국 스즈끼 국장이 파견한 특무입니다.” “닥쳐! 우시장 경찰국 국장은 끼무란데? 스즈끼라니?” “끼무라는 할복해 죽고 헌병총대 부대장을 하던 스즈끼가 강직돼 우시장 경찰국 국장으로 왔습니다.” “우린 진작 다 안다. 네 놈을 떠본 거다. 한마디만 거짓말을 했다간 목을 베 버리겠어." "너희들 모두 몇이 왔는가? 두목은 누구냐?” “누구 앞이라고 언감 거짓말을 하겠습니둥? 우린 모두 일곱이 왔는데 두목은 백승철입니다.” “엉?!” “사실인가?” “예.” 성칠은 속으로 놀라 인삼과 칠백을 둘러보았다. “거짓말! 일곱이 온 게 셋이나 격살됐는데 왜 나머지 네 놈은 대가리도 내밀지 않았는가?” “사실입구마. 장관. 우린 두개 소조로 나뉘어 정찰했는데 왜 백승철 소조장은 우릴 보고 누가 격살당하든 몽땅 나서지 말고 한사람이 살아남더라도 돌아가 스즈끼 국장께 보고 해야 한다고 명령했는데.” 성칠은 일부러 건너짚기를 했다. “우린 네 놈들의 정체를 다 안다. 백승철이라면 함경도 경성 지나 웅진 부근에서 날강도질이나 하던 놈 아닌가? 그 형은 우리 유격대에 둘이나 죽고.” “그 놈이 여기까지 특무를 파견해 뭘 하라던가?” 특무는 말하기 시작한지라 술술 대답하였다. “별동대를 파견하기 전에 우리 보고 장백산 기슭의 유격대 군영하구 병력과 무기 배치, 쌀 정황을 구체적으로 잘 정찰해 오라고 했는데.” “별동대는 모두 몇 명이나 되는가?” 성칠은 중대장들과 눈을 맞추며 물었다. 박응세는 벼룩 눈을 끔적이더니 “한 30여명 되는 모양입디다.”라고 이실직고했다. “30명? 흥! 30명이 아니라 300명이 오라구 해라. 몽땅 소멸해 버릴 테야!” 성칠은 코 방귀까지 뀌면서 놈들을 멸시하였다. “네놈들이 동만 관동군과는 연계 없었는가?” “예. 있었습구마. 동만 관동군 부련대장 한철주 양반이 우리를 접견하고 관동군이 유격대 군영을 토벌하자면 우리가 잘 정찰해 와야 한다구 하면서 구체적으로 포치했는데.” “한철주? 그 놈은 명천 우시장 자위대 대대장 한길수의 맏아들이 아닌가?” “맞습니다. 어떻게 압니까?” “어떻게 생긴 자인가?” “안경을 건 우먹한 눈이 퍽 인상적이었는데. 연설도 참 잘하고.” “키는 훤칠한 편이 아닌가?” “맞습니다. 잘 아시는구먼. 장관. 제발 날 살려 줍소.” 성칠은 한숨을 후- 내쉬더니 “한 가지만 더 묻겠다.”하고 더 심문했다. “한철주 놈이 우리 군영을 언제 토벌하겠다던가?” “구체적인 날자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양력설 전에 한개 대대 병력을 파견해 우시장 별동대의 기습에 배합해 토벌하겠다고 했습구마.” “음. 우시장 별동대 대장은 누군가?” 박응세는 벼룩 눈을 굴리었다. “야마모도 소장입니다.” “림산파출소 야마모도 소장이 아닌가?” 응세는 깜짝 놀랐다. “장관님은 어쩜 일본 군관을 그렇게 잘 압둥? 보쇼. 난 거짓말을 한마디도 한 적이 없습구마. 장관, 제발 살려줍소.” 성칠은 눈을 감고 뭔가 궁리하더니 인삼 중대장과 뭐라고 귀속 말을 하더니 특무를 쏘아보았다. “네 놈은 죽어 마땅해. 그러나 탄백했기에 살려둔다.” 억복과 바위돌이 끌고 나간 후 성칠 대장은 경위원을 불러 특무를 어찌어찌 하라고 가만히 귀띔해 주었다. 경위원 조 꼬마까지 나간 후 성칠 대장과 중대장들만 남았다. 통나무집 안의 등잔불이 가물거리었다. 그들은 밤중까지 반 토벌작전계획을 반복적으로 작성하고 검토해 보았다. 나중에 성칠 대장이 허리를 펴면서 일어났다. “좋소. 우리 작전계획을 북만으로 간 김용천 대장에게 알리기요. 여러갈래 유격대들이 연합작전을 펼쳐야 섬나라 오랑캐들의 대토벌을 분쇄할 수 있소.” 모두들 머리를 끄덕이었다.  
86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49) 댓글:  조회:2206  추천:0  2016-08-24
                                            9.오랑개령을 넘어        최구장은 공포와 어둠을 밟으며 어부와 함께 두만강 변으로 나갔다. 큰 버드나무 아래 철썩이는 두만강 물에 쪽배가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이윽고 진달래가 유골상자를 말배에 단 말을 몰고 왔다.         어부는 닻줄을 와락와락 걷어 배우에 쾅 처박았다.        “오르라우.” 어부는 볼 부은 소리로 퉁명스레 말하면서 삿대를 들었다. 말투마저 남대말투로 바뀌었다. 그는 바위돌과 면목 모를 사내가 벌건 상자를 말배에서 끌러 들고 쪽배에 실으려고 하자 우먹한 눈 확에 겁기를 띠었다. “아니, 저 벌건 상자!” “쉿!” 바위돌은 어부의 입을 손으로 막으면서 주위를 살폈다. “까딱 말고 삿대를 젓소.” 어부는 겁기를 띈 눈으로 바위돌과 유격대원 그리고 최구장과 진달래를 훑어보았다. 유격대원이 벌건 상자를 쪽배에 실었다. 진달래는 어부를 보고 나지막이 말했다. “우린 장백산 항일유격대예요. 우리 유격대는 백성을 해치지 않아요.  겁내지 마세요. 누가 우리 조선 사람들이 조상마저 제대로 모시지 못하게 했는가요? 일본 날강도 놈들도 사람인가요? 그 놈들의 말을 듣지 마세요.” 어부는 한숨을 후 내쉬더니 근심어린 말을 했다. “쪽배에 네 사람이 다 탈 수 없다니께.” 진달래가 나지막하나 위엄있게 말했다. “큰아버지와 바위돌 두 분만 타면 돼요.” 그래도 어부는 도리머리를 가로 흔들었다. “이쪽에 일본 놈들이 없어도 저쪽에 위만 경찰들이 득실거리오.” 진달래는 최구장과 바위돌이 쪽배에 올라타자 대안을 건너보다가 말했다. “근심마세요. 저길 보세요. 벌써 우리 유격대원들이 마중하러 왔어요.” 어부도 밤장막이 드리운 두만강 대안 버들강변에서 초롱불빛 같은 것을 보았다. 진달래가 허리춤에서 권총을 빼냈다. “저건 안전하다는 신호를 보내는 거예요. 안심하고 도강하세요. 일본 놈들과 위만경찰놈들이 나타나기만 하면 우리가 몽땅 해치울 테예요.” 진달래 말에 어부도 담이 커졌는지 한숨을 푸 내쉬더니 삿대를 강바닥에 쿡 박아 힘껏 떠밀었다. 쪽배는 사품 치며 흐르는 두만강 강심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큰아버지, 잘 가세요.” 최구장은 머리를 끄덕이면서 물러가라고 손을 내저었다. 진달래와 유격대원은 쪽배를 따라 버들강변을 내려가면서 바랬다. 일단 정황이 있으면 맞대응하려는 것이었다. 쪽배가 두만강 격류를 타고 아래로 떠내려가면서 강심으로 다가갈 때까지 아무런 정황이 없었다. 쪽배가 대안에 거의 닿을 때였다. 갑자기 마을 쪽에서 개 짓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었다. 뒤이어 이쪽으로 말발굽소리가 요란하게 다가왔다. "네놈이 그 놈들과 내통했지?"  뒤이어 웬 조선말 대답소리가 들려왔다. “ 면목모르는 강도 놈들입구마. 그 놈들이 우리 집 쪽배를 빼앗아가지고 이쪽으로 달아났소이다.” 분명 부자영감 허창수의 우렁우렁한 목소리였다. “저기 쪽배가 두만강을 다 건너는구만.” 뒤이어 일본 놈의 독기어린 목소리가 울렸다. “샤게끼(사격)!” 땅! 땅! 땅! 야무진 총소리가 두만강 변 밤하늘에 울려 퍼졌다. 그러나 쪽배는 두만강 대안 버들강변에 악착스레 저어갔다. 말을 탄 유격대원들이 이쪽으로 습격해오면서 총질과 돌팔매질을 했다. 유격대원들은 일본 놈들을 가로막아 상류 쪽으로 유인해갔다. 진달래와 유격대원은 그 틈을 타서 버들강변에서 산기슭 수림 속으로 숨어들어갔다. 모든 것이 고요해졌다.        한 많은 두만강물소리가 철썩철썩 들릴 뿐이었다. 유격대원들은 산기슭 수림 속에서 진달래 등과 합세한 후 말을 타고 상류 쪽으로 쏜살같이 전이했다. 한편 최구장네는 쪽배를 타고 한 일리쯤 내려가 두만강을 건너 순조롭게 유골상자를 쪽배에서 내리워 버들방축에 들어갔다. 어부는 울상이 되여 중얼거렸다. “당신들은 훌 떠나가면 그만이지만 난 인젠 어찌는기우?” “옛소. 이걸 로비를 해가지구 처자를 데리고 만주로 들어오오. 난 최구장이라고 부르는데 오늘 이 은혜는 후일에 꼭 갚아드릴게요.” 어부는 동전 열 몇 닢을 손으로 만지작거리면서 중얼거렸다. “이젠 그럴 수밖에 없는이오.” 바위돌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아예 그 놈의 어부를 그만두고 만주에 들어가서 우리 유격대에 드오. 일본 놈들을 몰아내지 않고서야 우리 조선 사람들이 편안히 살 수 있소?” 최구장이 물었다. “은공은 명함을 어떻게 부르오?” “리흥수라고 부르는데유. 난 전라도 사람인디 여기서 사공을 하면서 집식구들이 오길 기다리는 중인뎁쇼.”        사실 리흥수는 전라도 고향을 떠나 간도로 들어오는 난민이였다. 전라도 깍쟁이라는 말이 있다. 전라도 깍쟁이는 부채가 아까워 부채를 흔드는 것이 아니라 자기 얼굴을 부채에 대고 흔든다는 말이 있다. 그런데 전라도 사람인 리흥수도 어찌나 깍쟁이질했으면 마을 사람들이 리깍쇠라고 별명까지 지어 불렀겠는가.        "알았소. 우린 진수해 함흥촌으로 들어갈 예산이니까. 함흥촌에 와서 나 최구장을 찾소.” 어부는 무거운 목소리로 “알았는지라고.”라고 하더니 밤하늘을 쳐다보면서 땅이 꺼지게 한숨을 후- 내쉬었다. 이때 버들방천에서 버드나무들을 헤치는 소리가 들리었다. 뻐꾹뻐꾹 버들숲속에서 뻐꾸기 울음소리가 들리었다. 바위돌도 입에 손가락을 넣더니 뻐꾸기 소리를 냈다. 뻐꾹뻐꾹 뒤이어 버들숲속에서 대여섯 사람이 나타났다. 바위돌은 어둠속에서도 인차 상대방을 알아보았다. “억복이!” “바위돌아!” 억복과 바위돌은 서로 얼싸 안았다. 최구장도 뒤에 나타난 자식들을 알아보았다. “얘들아, 어떻게 여기까지 왔느냐?” 맞아들 경순이가 아버지 앞에 넙적 엎드리면서 절을 올렸다. “아버지, 그간 무사합니까? 우린 아버지랑 건너올 때가 된 것 같아 마중 나왔다가 근형을 이쪽 나루터에서 만났지요.사위도 왔습니다.” 경인과 경욱 그리고 상순도 절을 올렸다. 최구장은 상순을 보고 여간 반가워하지 않았다. “명옥의 신랑도 왔구먼.” 버드나무숲속에서 상순은 최구장에게 절을 꾸벅 올렸다. “가시할아버지, 그간 고생이 많았겠습니다. 항상 근심하면서도 제때에 마중하지 못해 미안합구마.” 최구장은 상순의 몸을 두 손으로 부축해 일으켰다. “별 소릴." 그는 몸을 돌리더니 리흥수의 손을 잡아 상순 앞에 왔다. "은공 리흥수오. 이 후에 함흥촌에 오면 잘 도와 주게나. 이 분 쪽배 아니면 어떻게 유골상자를 모시고 두만강을 건넜겠소." 상순은 흥수의 손을 두 손으로 잡았다. "감사하오. 난 상순이라고 부르오. 이후에 진수해 함흥촌에 오면 날 찾소." 흥수는 어깨 쩍 벌어진 상순을 보고 아주 반색했다. "상순이라지? 후에 찾아갈게유." 최구장은 넷째아들 경욱에게 몸을 돌리면서 물었다. “네까지 왔는데 셋째 경민은 어떻게 됐느냐?” 튼튼하게 생긴 경욱이가 대답했다. “셋째형님은 칼에 잘리운 손을 치료하려고 함흥촌에 갔다가 진수해에 내려 왔습니다. 조카사위 상순이네 칠촌 아저씨 되는 시준 의사한테 가서 치료를 받는 중입니다. 시준 영감이 의술이 높아서 약을 몇 첩 달여 마시나 염증은 치료됐습니다.” “음. 그럼 됐어.” 최구장은 머리를 끄덕였다. “그래 손비는 어떻게 되었느냐?” “손비도 형내 약을 쓰고 하혈은 멎었습니다.근심 하지 마시오.” 서로 인사가 끝났을 때였다. 억복은 바위돌의 어깨를 툭툭 치였다. “됐어, 우린 끝내 도강하였어.” 이때 진달래가 말했다. “인차 이 자리를 떠야 해요. 총소리를 듣고 꼭 위만 경찰들이 수색하러 올 거예요.” 그리하여 최구장 등은 유골상자를 메고 마중 나온 억복과 근형, 상순을 뒤따라 버들 숲을 빠져 어둠을 타서 두만강 변을 떠났다. 리꺽쇠는 쪽배를 저어 두만강을 되 건너가 조선쪽 두만강 변 마을로 돌아갔다. 이때 뒤에서 꽥꽥 고함소리에 뒤이어 버들 숲을 헤치는 소리가 들렸다. “분명 이 부근 대안에서 총소리 울렸어. 꼭 이 부근에 웬 놈들이 들어와 잠복했을 수 있어. 버들방천을 서캐 훑듯 수색하란 말이야.” 억복과 바위돌이 마주 쳐다보더니 허리를 굽히고 뒤로 슬금슬금 다가갔다. 상순이가 비수를 뽑아들고 버드나무숲속에 숨어 뒤에서 다가오는 놈들을 기다렸다. 근형이와 최구장은 유골상자를 버드나무 잎으로 훑어 덮어놓고 숨을 딱 죽이고 버드나무숲 속에 엎드려있었다. 뒤쪽에서 말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 왔다. “여보게, 밤중에 이 무인지경에서 유격대나 만나면 어떡하나?” “소대장님, 괜히 우리나 목숨을 잃을게 아닙니까?” “저길 보십시오. 별들이 보이지 않는걸 보니 소낙비가 쏟아질 자정입니다. 돌아갑시다.” “작작 지껄여! 총소리가 울렸는데도 수사하지 않으면 돌아가서 일본 헌병대 놈들에게 목을 잘리울 게 아니냐?” “일본 놈들은 어째 수색하지 않고 밤에 일이 나면 우리만 못살게 군답니까?” “조선쪽에서 총소리가 났는데 저쪽에 일이 있겠지. 여기에 무슨 일이 있다고 그럽니까?” “너희들 정말 죽고 싶으냐? 잔말 말고 버들방천을 수색해라!” 그러자 바위돌과 억복은 괴춤에서 조약돌을 꺼내 거머쥐었다. 이때 위만 괴뢰군 세 놈이 슬금슬금 다가오면서 버들 숲을 와삭와삭 헤치었다. 한 놈은 억복의 머리앞에 와서 오줌을 쏴 내갈기였다. 억복이 조약돌을 뿌리려고 손을 쳐들었다. 그 찰나 바위돌이 쳐든 손을 잡아 내리웠다. 이때 번개가 번쩍이고 우레가 하늘땅을 진동했다. “아이고, 소낙비를 맞겠어. 어서 돌아가자.” 괴뢰군 놈들은 꼬리 빳빳해 도망쳤다. 억복이는 한숨을 후- 내쉬었다. 바위돌과 억복은 괴뢰군이 가버리자 비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하는 버드나무숲을 나섰다. 그들은 최구장과 상순이 그리고 유골상자를 멘 근형을 보호하면서 산기슭 길에 올라섰다. 뒤이어 장대 같은 소낙비가 억수로 퍼부었다. “잘 됐어. 소낙비는 맞겠지만 따라오는 놈들이 없을게 아닌가?” 억복의 말에 바위돌은 팔소매로 이마의 비 물을 쓱 닦으면서 맞장구를 쳤다. “그래, 그 놈들이 이렇게 억수로 퍼붓는 비를 맞으려 하겠냐?” 바위돌과 억복은 안전을 생각하여 상순의 말을 따라 골짜기에 난 벌판길을 택하지 않고 산기슭에 난 길을 택해 어둠과 소낙비를 무릅쓰고 걸어 나갔다. “이제 오랑캐령만 넘어서면 선바위가 나지고 용드레촌과도 그리 멀지 않을 겁니다.” 상순의 말에 최구장은 허리를 구부정하고 걸으면서 물었다. “여기서 함흥촌까지는 몇 리나 되오?” “함흥촌까지는 백칠팔십리 됩구마. 어떤 사람들은 이백 리는 된다고 합니다.” 최구장은 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 걸음으로는 한 사흘 걸어야 하겠구먼.” 이때 상순이가 말했다. “가시할아버지, 아예 가시증조할아버지를 아무도 모르는 진수해 남산에 모시면 어떻습둥? 함흥촌에 모시면 시끄러운 일이 생길 것 같습니다. 어떤 놈들이 우리 뒤를 밟아 함흥촌에까지 오면 증조할아버지를 어떻게 면례해 또 다른 곳에 옮겨 모시겠습니까?” “진수해라는 곳은 함흥촌에서 몇 리나 되나?” “함흥촌에서 한 십오 리는 떨어진 자그마한 시내입니다.” “그게 좋을 것 같구먼. 옛날 조조도 누가 자기 산소를 다칠까봐 숱한 무덤을 만들어 자기 시체를 숨기게 했다고 하지 않았는가. 우리도 아무도 몰래 아버지 산소를 써서 숨겨보세.” 그들이 이런 말을 주고받으면서 두만강 버드나무숲속을 떠나 한 삼리를 걸었을 때였다. 갑자기 뒤쪽에서 말발굽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바위돌과 억복은 바삐 최구장등을 보고 산기슭 나무숲속에 엎드리라고 했다. 바위돌은 혹시 진달래랑 오지 않았는가 하여 입에 손가락을 넣더니 뻐꾸기 소리를 냈다. “뻐꾹뻐꾹” 요란하게 울리던 말발굽소리가 뚝 멎더니 말을 탄 한패의 그림자들이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멈춰 섰다. 산기슭 밤하늘에는 비방울이 쏟아지는 소리와 말들의 투레질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숨 막힐 듯이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바위돌이 또 뻐꾸기 우는 소리를 냈다. 말무리 속에서도 뻐꾸기 우는 소리가 났다. “뻐꾹뻐꾹 뻑뻑 꾹 - ” 그러자 바위돌과 억복은 나무숲속에서 엉거주춤 일어나 령 길에 나갔다. “바위돌이 맞아요?” “예, 진달래 중대장!” 진달래는 말에서 내리면서 기뻐했다. “귀신이 곡할 듯이 우린 여기서 면바로 만났구먼요. 다들 무사한가요? 큰아버지랑은 어데 있어요?” 바위돌이 나무숲속에서 나오는 최구장 등을 되돌아보면서 말했다. “저기 계십니다. 다 무사히 도강하였어요.” 그러자 진달래는 말고삐를 유격대원에게 넘겨주고 이쪽으로 달려왔다. “큰아버지, 무사해요?” “오, 그래. 너희들도 무사하였나?” “예. 우린 큰아버지를 보낸 후 일본 놈들을 따돌리고 상류 쪽으로 말을 달려 곧게 건너왔댔어요. 이쪽에 무슨 정황이 있나 찾아 헤매다가 함흥촌 쪽으로 올라가면서 큰아버지를 찾는 중이였어요. 그런데 여기서 만나리라고는 정말 천만 뜻밖입니다요.” 뒤이어 진달래는 유골상자를 말 잔등에 처매라고 하고 최구장에게 얼굴을 돌렸다. “우리는 해가 밝기 전에 함흥촌으로 가서 할아버지를 모셔야 해요.” “그래, 그런데 아버지 산소를 진수해에 쓰기로 했다. 진수해로 가자.” “예? 그럼 10여리는 가까워 졌구먼요. 빨리 이 두만강 변을 떠납시다. 소낙비가 쏟아지지만 일본 놈들이 오지 않는다고 할 수 없어요. 조선 쪽의 일본 놈들이 꼭 이쪽에 기별을 보내 우리를 수색하라고 했을 거예요.” 최구장은 밀짚모자를 쓴 머리를 끄덕였다. “잠간!” 모두들 떠나려는데 최구장이 말 잔등에서 내리면서 말했다. “잠간만 기다려라. 아버님께 드릴 말씀이 있다.” 모두들 어안이 벙벙하여 서로 쳐다보았다. 이때 최구장은 바위돌 옆의 말잔 등에 실은 유골상자에로 다가가더니 질척질척한 진흙탕에 무릎을 꿇고 엎드리었다. 진달래도 황급히 그 옆에 엎드렸다. 모두들 꿇어앉았다. 최구장은 머리를 진흙탕에 조아리면서 말했다. “존경하는 아버님, 이 불효자식을 용서하옵소서. 아버님을 고향에 편안히 모시지 못하고 이렇게 이국땅에 모시고 와서 정말 죄송하옵니다. 유교경전을 통달하여 전생에 남과 악한 짓을 한 게 없건만 왜놈들은 왜 이다지도 우리를 못살게 굽니까? 별 수 없이 만주로 아버님을 모시고 와서 계속 모시려고 하오니 이 불효자식을 용서하옵소서.” 옆에서 진달래도 한마디 올렸다. “할아버님, 이젠 만주에 넘어와서 산소자리로 길을 떠나겠는데요. 마차에 모시지 못하고 말 잔등에 모셔서 불편하시리라 믿습니다. 이 불효한 손녀를 용서하옵소서.” 최구장과 진달래는 유골상자를 향해 절을 올렸다. 그러고서야 최구장은 꼬부장한 허리를 펴면서 일어났다. 진달래는 일어나자마자 손을 홱 저었다. “출발!” 그들 일행은 몽땅 말에 올라 진수해를 바라고 질척질척한 산길을 달렸다.                  10.이국 타향에 모신 조상의 산소 한 둬 시간 말들을 타고 거침없이 달려 그들은 진수해역에서 서남쪽으로 하여 자리 잡은 남산에 이르렀다. “뿡-” 밤차가 경적을 드높이 울리면서 칙칙폭폭 칙칙폭폭 산 기슭 철길에서 달렸다. 최구장은 말꼬리를 잡아당겨 세우고 산정에 서서 새벽의 어둠 속에 잠긴 사위를 둘러보았다. 삐죽삐죽 산세가 험준한 산들이 푸르른 쪽빛속에 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어디선가 뻐꾹새가 뻐꾹뻐꾹 구슬피 울었다. 산수에 밝은 최구장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상순이, 자네 사는 함흥촌은 어느 부근인가?” 상순이 머리를 들어 서북쪽을 훑어보더니 손을 들어 가리켰다. “저쪽으로 한 십팔 리쯤 가야 합니다.” “음, 그래?” 이때 최구장의 마음을 환히 읽은 진달래가 최구장과 말머리를 나란히 했다. “큰아버님, 함흥촌에는 모시지 못해요. 놈들이 우리를 추적하면 꼭 함흥촌으로 먼저 찾아갈 게 아닌가요? 여기서 좋은 자리를 찾아 모시자요.” 최구장은 땅이 꺼지게 한숨을 후- 내쉬었다. “그러는 수밖에 없구나. 올 추석에나 네 아버지를 모시고 산소에 오너라.” 진달래는 최구장의 옆에 바싹 다가서며 정답게 말했다. “예, 추석에는 할아버지께 꼭 제주를 올리도록 하겠어요.” 최구장은 편안한 때가 아니어서 별 수 없었다. 한참 두루 산정과 산기슭을 돌아다니면서 보았다. 그는 서북으로 도끼봉을 바라보고 서쪽으로 뭇산 위에 높이 솟은 삼형제산을 바라보고 북에 유유히 흐르는 부르하통하를 유심히 바라보더니 말했다. “여기 양지바른 언덕아래에 모시자. 비록 명당자리는 아니로되 아버님을 모실만한 곳이라고 할 수 있어.” 상순과 근형은 말 잔등에서 유골 궤를 조심스레 내리워 둔덕진 곳에 모셔놓았다. 삽이 없어서 근형이 산 아래로 달려 내려갔다. 말을 타고 가면 좋겠는 것도 남들의 눈에 날까봐 그러지도 못하고 질척질척한 진창길을 주먹을 쥐고 달려 내려갔다. 최구장은 아버지의 유골을 산소 오른쪽으로 하여 모셔놓고 안신 제를 지냈다. 그는 진달래를 보고 조선에서 가지고 온 낙지와 물고기 몇 마리를 안신자리 앞에 놓게 하고 자손들을 이끌고 유골에 절을 올렸다. 천천히 머리를 든 최구장은 유골을 향해 말씀을 올렸다. “아버님, 어머님, 이 불효자식을 용서해주옵소서. 섬나라 오랑캐 놈들의 등살에 이기지 못해 아버지를 정든 고향 개성에도 모시지 못하고 두 번째 고향 명천에도 고이 모시지 못했습니다. 이런 산 설고 낯선 만주 허허벌판에 모시게 돼 원통하고 죄송스러워요. 여기까지 오시느라고 아버님과 어머님은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습니까요? 이 죄 많은 자손들을 용서하옵고 자손들이 만주에서나마 일본 놈들의 철 발굽 밑에서 벗어나 배불리 먹고 잘 살게 구천에서라도 도와주옵소서. 이제 아버님과 어머님을 여기 양지바른 곳에 모시겠습니다. 아버님과 어머님께서 안심하시고 편안히 계십시오.” 최구장은 말을 마치고 땅을 치면서 흑흑 흐느껴 울었다. “할아버님, 할머님, 편안히 계십시오.” 경숙과 경인을 비롯한 손자들 그리고 손녀 진달래도 흑흑 흐느끼면서 울면서 절을 올렸다. 마을에 가서 삽을 들고 달려온 증손자 근형도 넙적 꿇어 엎드려 절을 연신 세 번 올렸다. 최구장은 손수 자손들과 함께 유골상자를 열고 유골을 조심스레 하나하나 꺼냈다. 뒤이어 머리로부터 목, 척추, 다리 뼈를 순서대로 다시 상자에 조심스레 넣었다. 이때 동녘하늘이 희붐히 밝아오고 있었다. 진달래는 바위돌을 보고 “유격대원들을 데리고 산정 곳곳에 올라가서 주위를 경각성을 높여 잘 살피세요.”하고 명령했다. 총알을 맞아 구멍이 펑 뚫린 골반 골을 들고 유심히 보던 최구장은 또 목 놓아 울었다. “어버이, 용서하세요. 일본 놈들 때문에 죄 없는 어버이 골반에 관통상까지 맞게 한 이 불효한 자손들을 용서하옵소서. 뼈에 구멍까지 뚫렸으니 얼마나 아팠겠어요. 아, 세상 독종 일본 놈 새끼들을 어떻게 하면 이 원수를 다 갚을고?” 저쪽에서 무덤을 파던 경인과 경숙이 놀라운 눈길로 골반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한참 후 무덤도 다 파고 유골도 상자 안에 다 정성 들여 넣었다. 최구장은 미리 준비한 하얀 천으로 유골을 싼 후 상자덮개를 덮어놓았다. “아버님, 어머님, 이제 부모님을 이국 타향에라도 모시겠어요. 편안히 고이 잠드세요.” 경숙과 경인은 하얀 천으로 된 여러 갈래 바 줄로 유골상자를 들어 무덤 속에 천천히 내리워 모셔놓았다. 최구장이 허리를 구부정하고 삽을 주어들고 흙을 관 위에 조심스레 눈물방울과 함께 주르르 흘려 내려 보냈다. 그러자 자손들이 차례로 삽을 쥐여 흙을 무덤 속에 흘려 내려 보냈다. 진달래도 떨리는 손으로 삽을 쥐여 흙을 떠 관 위에 흘려 내려 보냈다. 근형까지 흙을 퍼 넣자 모두들 아주 빨리 흙을 퍼 넣었다. 드디어 자그마한 봉분이 산중턱에 외롭게 생겨났다. 최구장과 자손들은 연신 아홉 번이나 큰절을 올렸다. 뒤이어 최구장은 자손들을 둘러보면서 엄숙하게 말했다. “너희들도 우리 최 씨의 유구한 역사를 알아둬야 한다. 우리 최 씨는 조선 성씨가운데서 제일 긴 성씨의 하나이다. 우리 시조는 신라 건국 전설에 나오는 신라 서라벌 여섯 촌중의 돌산고허촌 촌장 소벌도리이다. ‘삼국사기’ 에 따르면 신라 3대왕 유리왕님께서 기원 32년에 신라 6개 큰 마을 촌장들에게 성을 하사하였느니라. 알천양산촌장 알평에겐 이씨를, 무산대수촌장 구례마에겐 손씨를, 취산진지촌장 지백호에겐 정씨를 하사하셨어. 금산가리촌장 기타에겐 배씨를, 명활산고아촌장 호진에게는 설씨를 하사하셨고 우리 시조 돌산고허촌 촌장 소벌도리님께는 최씨를 하사하셨다. 그 최씨가 380여개 본으로 나뉘었는데 우리 개성 최씨는 신라 말기 개경, 그러니까 지금의 개성에서 대장을 지낸 최우달 장군님을 시조로 모시고 있느니라. 그의 아들 최응은 문장에 뛰여나 후고구려 왕 궁예 휘하에서 신임을 받아 대관을 지냈다. 후손 천보는 리조 초기에 한성부윤을 지냈고 그의 증손 최명창은 황해도 관찰사를 지냈다. 나의 아버님은 개성 최씨 네 집안에서 10대 장손이느니라. 그러니까 나는 11대 장손이고 경숙은 12대 장손이다. 근형은 13대 장손이야. 모두들 잘 기억해둬라.” 모두들 작달막한 근형을 부러운 눈길로 쳐다보았다. 최구장은 계속 뒷말을 이었다. “아버님과 어머님은 모두 우리 조상들이 대대로 살아온 개성에서 태여났는데 일본 놈들의 핍박으로 50여 년 전에 명천에 들어왔다. 저 내 동생 최구철과 진달래네 모녀간도 할아버지를 모시고 개성에서 살다가 일본 놈들의 핍박에 의해 정든 고향을 떠나 머나먼 장백산에 들어가 피신해 있으면서 살게 됐다. 원래 아버지를 할아버지와 조상들이 계시는 개성에 모셔야 하겠지만 일본 놈들의 성화에 모시지 못하였구나. 그리고 일본 놈들이 득실거리는 명천에도 모셔 둔 채 우리 몸만 빠져 나올 수 없어 여기에 모셔 왔다. 일본 놈들의 성화에 우린 이젠 자기 고향에도 찾아갈 수 없게 되였구나. 우리는 자기 조상들도 보지 못하게 되였고 산소도 고향에 쓸 수 없게 됐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울면서 여기 외로운 산에 아버님과 어머님을 모시게 됐어. 이제부터 우린 대대로 여기에 산소를 써야겠다. 비록 고향에 돌아갈순 없지만 여기를 두번째 고향으로 생각하고 황무지를 개간하고 자자손손 배불리 먹으면서 살아보자. 이제 나라를 되찾게 되는 날 너희들이 내 아버님과 어머님 그리고 나까지 모셔 내갈 것을 부탁한다.” 자손들은 몽땅 엎드려 머리를 조아리면서 섧게 흑흑 흐느껴 울었다. 제사까지 다 지내자 동녘하늘이 환히 밝아왔다. 삼라만상이 기지개를 켜면서 사위를 둘러본다. 최구장 일행은 흐리멍덩한 하늘아래 쓸쓸한 산소를 되돌아보면서 산에서 천천히 내려왔다. 그런데 경석이가 보이지 않았다. 약 담배 인이 박힌 그가 또 아버지와 형제들의 눈을 피해 약 담배를 피우러 숲속으로 달아난 것이 분명했다. “에구, 또 약 담배 인이 올라온 모양이구나. 저 놈 막내를 어쩌겠니? 조선에서 떼버리고 왔더라면 시름을 놓았을 걸. 쯧쯧쯧.” 최구장은 속이 답답해 메마른 주먹으로 가슴을 쾅쾅 두드렸다. 진달래는 한숨을 호 내쉬더니 최구장 일행과 일일이 작별인사를 했다. “큰아버님, 오빠들, 몸조심하면서 잘 계셔요. 무슨 일이 있으면 인편에 알리세요.” 최구장은 진달래의 해 빛에 탄 철색얼굴을 쓰다듬으면서 머리를 끄덕였다. “그래, 돌아가면 구철 동생에게 문안 전해라. 편할 때 진수해로 놀러 오라고 해라. 그런데 넌 언제 시집가겠냐?” 최구장의 한숨 섞인 말에 진달래는 생글 웃어보였다. “일본 놈들을 다 몰아내면 시집가지요.” “에이, 일본 놈들을 언제 몰아내겠냐? 쯧쯧.” 진달래는 최구장께 넙쩍 큰절을 올린 후 말에 올라탔다. 바위돌과 억복이랑 유격대원들이 몽땅 말을 탔다. 최구장은 말을 타고 산정으로 치달아 달려 올라가는 진달래 일행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진달래 네가 수림 속으로 사라진 후에야 그들은 외롭고 쓸쓸한 무덤을 떠나 천천히 산에서 내려왔다.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                                 제4권                                           김장혁                      제17장 장백산에 피어난 진달래                1.음흉한 획책      우시장 경찰국과 헌병대대 사무실은 벌둥지를 쑤셔놓은듯이 발칵 뒤집혔다. 업동 경찰총국 부국장이며 헌병총대 부대대장 스즈끼가 강직돼 우시장 경찰국 국장 겸 헌병대대 대대장으로 내려 왔던 것이다. 그는 졸개들을 끌고 우시장 경찰국 국장 사무실에 들어가 끼무라 국장의 자리에 도고히 앉았다. 그 앞에 끼무라가 꿇어앉았다. 스즈끼 국장은 상부의 처벌서를 읽었다.   끼무라는 연약하고 무능해 관할구역에 출몰하며 살인, 방화하는 김용천, 김성칠과 진달래를 괴수로 하는 유격대 놈들과 김병완과 김기준 등 반일파괴분자들을 한 놈도 나포하지 못했다. 또 우시장 자위대대 한길성 대대장, 야마다 면장, 유격대에 피살당하게 했다. 똘만 경찰도 중상입게 했고 숱한 대일본제국 병사들이 기습받아 참살당하게 했다. 김병완과 김기준 등 반일파괴분자들은 우시장 경찰국과 숱한 군용다리를 무너지게 만들었다. 경찰과 헌병의 기강을 바로잡고 우시장 일대 치안을 유지하기 위해 끼무라를 철직시키며 할복 형으로 처벌한다. 스즈끼 부국장은 뱀의 혀 같은 혀바닥을 날름거렸다. "나도 무능한 널 잘 단속하지 못했다고 강직처분받았어."  스즈끼 국장은 시퍼런 군도를 끼무라 앞에 덜러덩 쥐어 뿌렸다. “하이(옛)!” 끼무라는 무릎을 꿇은 채 머리를 숙였다. 뒤이어 군복과 허연 적삼을 벗고 선뜩선뜩한 군도 끝을 불룩한 배에 가져다 댔다. “천황페하, 대일본제국에 충성을 제대로 하지 못한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시체 돼 혼이라도 유격대 놈들을 물어뜯게 해주옵소서.” 말을 마치자 끼무라는 군도로 배를 푹 찔렀다. 꽈당! 끼무라는  바닥에 대가리를 쪼으며 쿵-덩- 쓰러졌다. 뻘건 피가 흐르는 군도를 틀어쥔 채 코통스런 오만상을 찡그리였다. 맥없는 눈길로 어딘가 한 곳을 쏘아보고 있었다. 그의 뚱뚱한 배는 군도에 쭉 째져 있었다. 그 자가 쓰러진 채 재차 푹 찌르자 더러운 피가 주르르 흘러 널 바닥을 메스껍게 적시었다. 한참 버둑거린 끼무라는 천천히 죄악적인 한생을 끝장 보았다. 스즈끼는 이마에 손을 얹고 눈을 지그시 감아 버리었다. 그 끔찍한 참상을 보기도 섬직했다. 하긴 자기도 언젠가는 끼무라와 같은 끝장을 보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한참 후 스즈끼는 수하 대소 장교들을 몽땅 사무실에 불러들이었다. 일본 놈들과 자위대대 놈들은 배를 가르고 피 못 속에 쓰러진 상전을 보고 눈이 휘둥그래졌다. 스즈끼는 닭을 잡아 원숭이를 훈계하려고 들었다. “다들 보았지? 누구든지 대일본제국에 제대로 충성하지 못하고 유격대와 그 족속들을 한 놈이라도 놓치는 날엔 저런 끝장을 볼 줄 알라.” “하이!” 수하 놈들은 스즈끼 국장과 쓰러진 끼무라를 번갈아 흘끔흘끔 곁눈질하면서 공포에 떨었다. 스즈끼는 훈계를 계속했다. “바로 네놈들이 병완과 기준을 살려 간도에 보냈어. 네놈들은 한개 소대나 되는 사냥꾼들이 포수대에 들었다가 유격대원으로 되게 만들었어. 네놈들은 우리 명천 우시장에 유격대들이 마구 쳐들어오게 했다. 네놈들은 야마다 면장과 한길성 대대장, 똘만 경찰을 반주검으로 만든 죄인들이야! 네 놈들은 경찰국과 숱한 다리가 무너지게 만든 죄인들이야! 범죄자들이야!” “하이!” 놈들은 차렷하고 또 군례를 올리었다. “병완과 기준은 경찰국 청사와 다리를 파괴한 주모자들이야. 네놈들은 그 놈 부자를 놓친 하늘에 사무치는 죄를 졌어. 네놈들의 목엔 이미 칼이 대져 있다. 이제 조금만 군사임무를 완수하지 못하는 날엔 언제든지 네 놈들의 목을 쳐 버릴 거야! 알만한가?!” “하이!” “옛!” 스즈끼는 모두들 나가라고 손짓하고 나서 야마모도 소장을 쏘아보았다, "남게.” 한쪽에 우두커니 서있던 야마모도는 복판으로 나서고 다른 놈들은 힐끔거리며 사무실에서 기신기신 나갔다. 몇몇 졸개들이 끼무라의 시체를 줄줄 끌어 내갔다. 한때 숱한 무고한 백성들을 살해한 끼무라 놈은 개처럼 줄줄 끌리어 나갔다. 널판바닥에 더러운 피가 주르르 흘러 내렸다. 졸개들은 시체를 치우고 뻘건 피를 걸레로 말끔히 닦아낸 후 스즈끼 국장의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나갔다. 야마모도는 감히 스즈끼를 쳐다보지도 못하고 말뚝처럼 서 있었다. “앉게, 야마모도 소장.” 스즈끼는 맞은 편 의자에 앉으라고 손짓 했다.그제야 야마모도는 안도의 한숨을 후 내쉬며 스즈끼 앞 왼쪽 의자에 조심스레 앉았다. 스즈끼는 옆에 다가와 나란히 앉았다. “야마모도 소장, 자넨 여기 정황을 손금 보듯 하지 않는가?” “하이!” 야마모도는 벌떡 일어나 군례를 척 붙이었다. “믿어 줘 감사합니다. 국장님을 위해 성심을 다하겠습니다.” “좋아, 대일본제국에 충성하게나.” “예. 천황페하께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앉게나. 내 상의할 일이 있네. 이제껏 끼무라 국장이 큰 그물을 쳐서 큰 고기를 잡는 전술은 실패했네. 조선 사람을 백 명 잘못 죽이더라도 유격대 한 놈을 놓쳐선 안 되네. 우리 황군은 중국 대륙을 쳐 들어가면서 ‘삼광정책’을 쓰지 않는가? 몽땅 죽이고 몽땅 불태우고 몽땅 약탈해야 해.” “알겠습니다.” 스즈끼는 졸개가 가져온 차물을 후후 불면서 마시고 나서 뒷말을 이었다. “항일유격대를 자기 구역에서 기다렸다가 소멸한다면 계속 얻어맞기만 하게 되네. 명천이나 우시장을 기습하고 장백산 일대 밀림 속에 숨어 버리면서 신출귀몰하는 유격대를 여기서 기다리기만 해서야 되겠는가?” 스즈끼는 야마모도 쪽으로 다가앉으면서 나직이 물었다. “우린 특무소조를 간도에 파견해 놈들의 정황을 정찰해야겠어. 별동대를 조직해 그 놈들을 파악 있게 기습해야 하겠네.” “예, 고명합니다. 참 고명합니다.” 야마모도는 연신 허리를 굽실거리었다. “여기 특모 소조장을 시킬 조선 사람 없는가?” “왜 하필 조선 사람입니까?” “우린 일관적으로 조선 사람으로 조선 유격대를 치는 수법을 쓰네. 자위대하구 별동대 조선 사람들을 위주로 조직할 예산이네. 똘만이 그간 간도에 드나들면서 유격대 정보를 많이 수집했겠는데 참, 이젠 페물짝이 됐어. 기억력이 도끼등으로 돼버렸어.” 야마모도는 한참 생각을 더듬다가  입을 열었다. “특무 소조장 할 놈이 있습니다." "누군가?" " 뱅승철이란 놈인데요. 그의 형 둘이나 진달래네 유격대에 죽어 원한이 깊습니다. 이전에 경찰국을 지을 때부터 끼무라 국장님을 도와 특무노릇을 아주 잘 했습니다.” “음, 그래 그자는 김성칠이라던가? 그 놈 유격대 대장을 잘 아는가?” “잘 알다 뿐이겠습니까.” “조선 경찰 허꺽쇠가 특무 소조장을 시키자는 사람도 있네.” “허꺽쇠는 너무 나섰기에 유격대 대장들에게 환히 드러났습니다. 백승철은 그저 건달인가 하지 우리가 파견한 특무 소조장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됐네. 그럼 백승철한테 특무 소조장을 맡기고 허꺽쇠를 부소장으로 임명해서 훈련시키게나. 우리 일본군으로 별도로 특무소조를 조직합세. 이미 간도에 여러 번 드나든 적이 있는 가메다를 특무소조 소조장으로 임명합세. 장백산 유격대 놈들이 기병소분대두 있다던데 눈이 온 후에야 말 발자국을 명심해 정찰해야 되네. 자위대대 대대장은 영팔한테 맡기고 부대대장은 수길한테 맡기겠네.” 스즈끼는 허리를 의자등받이에 기대며 정중하게 말하였다. “자넨 별동대 대장을 맡게. 부대장엔 헌병소대장 나까노라이찌로를 시키겠네.” “예?!’ 야마모도는 깜짝 놀라 벌떡 뛰어 일어났다. 그는 삼림을 지키는 것이 낫지 신출귀몰하는 유격대와 정면으로 싸우기 겁났던 것이다. 형 야마다와 자위 대대장 한길수가  살해당한 꼴을 보지 못했는가. 꿈에도 유격대에 놀라 벌떡 깨난적이 한두 번만 아니었다. “야마모도 대장, 내일부터 특무소조와 별동대를 조직해 훈련시키게나. 올해 천혜의 눈이 녹기 전에 장백산 항일유격대를 몽땅 없애 버려야겠네.” 스즈끼의 명령이었다. 야마모도는 울며 겨자 먹기로 하지 않으면 안됐다. “또 있네.” “예?” “우리 별동대만으로는 수 십 년 조선반도와 간도에서 유격전술을 써온 의병대 출신 유격대를 소멸할 수 없네. 우리 별동대는 기습해야 하네. 그래도 유격대토벌은 관동정규군에 의거해야 하네. 그런데 용정통감부 간도파출소 소장 사이또도 이젠 늙어 무능하네. 문제는 간도 여러 파출소들에서 치안을 잘 유지해야 유격대 놈들이 여기까지 기습하지 못하겠는데 말일세. 내 사이또 소장을 탄핵하는 편지를 써서 상부에 보냈네.” 스즈끼는 한숨을 후 내쉬더니 야마모도에게 편지 한통을 꺼내 주었다. “간도 용정에 있는 관동군 장교에게 줘야겠네. 어쨌든 우리 별동대 기습에 관동군 주공이 필요하단 말이네. 민병 같은 우리 별동대로만은 유격대를 기습하기는커녕 매복습격당하지 않아도 다행이야. 관동군 속에 잘 아는 장교가 없는가?” 야마모도는 한참 궁리하더니 머리를 끄떡였다. “있습니다.” “누군가?” “바로 한길성 대대장의 맏아들 한철주입니다. 그는 관동군에서 부련대장을 하는데 길림에 있다가 동 만에 돌아왔다는 거 같습디다.” “동만?” 스즈끼는 김빠진 공처럼 맥이 풀려 의자에 스르르 물앉으며 안경알을 춰 올렸다. “장백산 기슭에 돌아왔구먼.” 스즈끼는 이마에 손을 얹고 한참 궁리하다가 머리를 버쩍 들었다.        “그런 천재일우의 인맥을 놓칠 순 없네. 이 편지를 한 련대장한테 전하게. 관동군의 토벌이 없인 이번 기습작전이 실패하게 되니까.”        “하이!” 야마모도는 벌떡 일어나며 군례를 올리고 나갔다. 그는 관동군이 주공을 맡으면 자기는 협공이거나 기습이나 슬슬 하면서 살 구멍을 찾을 궁리를 했다. 그제야 조금 안도의 숨이 나왔다. 이튿날 스즈끼 국장은 일본 경찰 스까다를 시켜 별동대와 두개 특무소조, 자위대 두목들을 몽땅 불러 들여 임명사항을 공포하고 임무를 포치하였다. 일본 놈들과 친일주구들은 대일본제국과 천황페하에게 충성을 다할 것을 맹세하였다. 야마모도 등 대소 두목들이 나간 후에도 스즈끼는 이마를 짚고 안경알 속의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면서 한참이나 골똘히 궁리하였다. 이윽고 벌떡 일어난 그는 군도를 쓱 뽑아 들고 날이 선뜩선뜩한 칼날을 손가락 끝으로 쓱쓱 훑으며 이빨을 뿌드득뿌드득 갈았다. “김병완, 김용천, 김성칠, 최진달래, 김기준… 네놈들을 나포하지 않고선 이 세상에서 살지 않을 테야!” 군도가 의자등받이에 탁 내리박혀 부르르 떨었다. 보름 후 바깥에서는 거위 털 같은 눈이 풀풀 흩날려 내렸다. 스즈끼 국장은 별동대 야마모도 대장을 불렀다. “백승철과 가메다에게서 소식이 있는가?” 야마모도 대장은 바위 돌처럼 굳어진 얼굴을 풀지 못하면서 대답하였다. “가메다한테서 장백산 밀림 속의 유격대 군영 위치를 파악해냈다는 기별이 금방 왔습니다.” “그래도 털 한 모숨이 해냈군. 구체적으로 말하게나.” 야마모도 대장은 목이 말라 혀끝으로 입술을 축이더니 뒷말을 이었다. “간도 영월구에서 그리 멀지 않은 안보라는 집단부락은 장백산 일대로 통하는 교통요충지입니다. 이전에도 유격대 놈들이 그 집단부락을 습격하여 십가장과 촌장을 살해했다고 합니다. 이번에 집단부락의 자위대에서 장백산 쪽으로 쌀과 소금을 싣고 가는 장사꾼차림의 사람들 셋을 발견하고 털 한 모숨한테 보고했답니다. 털 한 모숨이가 특무 둘을 데리고 사냥꾼인 척 하면서 멀찍이 뒤를 밟아 유격대 장백산 군영을 알아냈답니다.” “좋아, 우린 상부에 보고하지도 말고 유격대 놈들을 일망타진해야 하네. 자넨 즉시 별동대를 거느리고 간도에 들어가 관동군 주공을 협조해 장백산 항일유격대를 기습해 김성칠과 진달래의 대가리를 떼 오게!” “상부에 보고하지 않고 괜찮겠습니까?” “관계하지 말게. 상부에서 우리 출병사실도 모르니까. 별동대가 몽땅 죽어도 모르지 않는가?” 그 말에 야마모도는 혼이 훌 날아 날 번하였다. 그러나 인차 상전이 듣기 좋은 말을 골라 하였다. “오, 참 묘합니다. 만약 우리 별동대가 전공을 세우면 그때 보고 해도 좋을 게 아닙니까? 헤헤. 정말 고명합니다. 고명해. 허허허.” 스즈끼 국장은 일어나 다가오더니 야마모도대장의 어깨를 툭툭 쳤다. “야마모도 대장, 절대 소홀히 기습하지 말게. 가메다와 백승철을 재차 파견해 장백산 유격대 병력과 군영 배치 지도를 그리게 하게나. 유격대 정보를 구체적으로 정찰해 오게 한 후 불시에 기습하게나.” “하이!” 스즈끼 국장은 야마모도의 군례에 군례로 답하고 나서 말하였다. “야마모도 대장, 별동대의 원정습격승리소식을 기다리겠네. 사꾸라관에서 당신의 승리적인 개선을 축하해 질탕하게 놀아 보세.” “하이! 꼭 국장님의 명령대로 올 겨울 안에 김성칠과 진달래 놈의 목을 쳐오겠습니다.” 야마모도 대장은 재차 군례를 척 올리고 나갔다. 그러나 그는 눈보라가 윙윙 휘몰아치는 바깥에 나오자마자 뒤더수기를 긁적거렸다. (이 머리가 온전히 목 위에 붙어 돌아올 수 있을까?) 야마모도 대장은 소름이 끼쳐 뒤잔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스즈끼 국장은 사무 상에 앉아 이마에 왼손을 얹고 머리를 숙이더니 오래도록 못된 궁리를 하였다.         사무실 난로 안에서 간혹 석탄덩이가 탁탁 튀는 소리가 납덩이 같이 무거운 침묵을 깼다.  
85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48) 댓글:  조회:2154  추천:0  2016-07-21
                        7.흐느끼는 두만강 흐리멍텅한 하늘 아래 나무숲이 점점 우거지자 백승철은 더럭 겁났다. 그는  결박된 채 말잔등에 앉아 황군을 따라가다가 똘만을 보고 주둥이를 놀렸다.     “여보, 우리 승만 형님은 경찰국 사무 청사를 지을 때부터 끼무라 국장님을 위해 밀정노릇까지 했소. 황군을 위해 일해 주겠다는데 왜 나를 묶어 가오? 당신은 조선 사람이 아니요? 좀 풀어주게 사정해주오.”     똘만이가 대충 번역해준 말을 듣고 가메다는 말고삐를 잡아당기더니 뒤돌아보았다. 그는 마을이 보이지 않자 교활한 웃음을 지었다.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멍청이. 원, 어찌 무삼이 보는데서 자넬 써 주겠다고 말해? 정체가 다 드러나면 장차 어떻게 우리 황군을 위해 일하겠는가?” “예 - ” 가메다는 똘만을 돌아다보면서 “풀어주게.”하고 말했다. 똘만은 승철을 부축해 말에서 내리게 한 후 바 줄을 풀어주었다. 그러자 승철은 넙적 꿇어앉자 가메다에게 큰절을 올리면서 두 손을 싹싹 비비었다. “감사합구마. 이 목숨이 붙어있는 한 황군을 위해 무슨 짓이든 다하겠쏘다.” 가메다는 씨물 웃으면서 지껄이었다. “좋아, 자넨 최구장과 돌멩이 유격대 두목 진달래랑 본적이 있지 않는가? 먼저 그 놈들의 행방을 알아내게나." “내 손으로 그 년놈들을 잡아 칼탕 치지 않고선 절대 눈을 감지 못하겠습구마.” “요로씨이(좋아),먼저 그 놈들 행방부터 빨랑빨랑 알아내라는데. 으흠,” 가메다는 호주머니에서 엽전을 한줌 꺼내 짤그락거리더니 승철에게 훌 넌네주었다. “진달래 년을 찾아내게. 그 놈들 오래잖아 두만강을 건너 갈거야. 간도까지 쫓아가서라도 그 몇몇 놈들의 행방을 알아내게.” 백승철은 엽전을 호주머니에 넣으면서 지껄였다. “그 놈들을 보기만 하면 도끼로 찍어죽이겠습구마.” 가메다는 도리머리를 가로 흔들었다. “아니야, 풀을 건드려 구렁이를 놀래우지 말게. 알았어?" "예, 예. 허허." "그 놈들 꼬리만 밟으면 돌멩이 유격대 놈들 줄줄이 걸려들게 아닌가?” “예, 예, 예. 긴 낚시를 놓아 큰 고기를 잡자? 그겝지비. 헤헤헤.” 가메다는 머리를 끄덕이었다. 그 놈은 턱의 한 모숨 털을 슬슬 매만지면서 백승철을 만족한 표정으로 내리보며 교활한 웃음을 지었다. 똑 마치 사냥군이 훌륭한 사냥개를 한 마리 얻어 웃음주머니 흔들흔들 하는 상이었다. “자, 어서 떠나게.” “아니, 함께 가지 않고?” “이이에(아니), 단독으로 행동하게. 우리와 함께 다니면 신분이 드러날 수 있지 않는가?” 백승철은 어깨를 툭 떨어뜨리면서 난처한 기색을 지었다. “그 놈들은 총을 가진 놈들인데. 내가 어떻게 빈손으로 그 놈들을 당하겠습둥?” 가메다는 말 잔등에서 내려 자기 허리춤에서 권총을 빼 백승철에게 척 건네주었다. “자, 받게. 자넨 돌멩이 유격대에 원한이 깊어쏘까. 우린 믿네. 자네 우리 황군 위해 대단히 잘하리라고 믿는단 말이야.” 백승철은 다시 무릎을 꿇었다. “돌멩이 유격대 놈들은 불공대천의 원숩구마. 그 놈들을 붙잡지 않고서는 고향으로 돌아오지 않겠습구마.” “요로씨이(좋아)!” 가메다는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뒤이어 그는 똘만을 보고 백승철에게 권총을 쓰는 요령을 일일이 가르쳐 주게 했다.       백승철은 일본 놈의 특무로 되여 백마를 타고 먼저 한발 앞서 떠났다. 한편 가메다는 헌병 소분대를 끌고 동북쪽을 바라고 먼지를 새뽀얗게 일구면서 달려갔다. 그들은 아예 중도에서 아무 곳에서도 멈추지 않고 두만강 강변 변경검사소에 이르렀다. 철조망을 늘인 두만강 철교우의 망루 앞에는 간도로 들어가는 조선 백성들로 하얀 물결을 이루었다. 일본 군대들이 두만강변경검사소에서 두만강을 건너가는 조선 사람들의 몸을 일일이 수색했다. 가마를 빼 지게에 진 장정들로, 이부자리를 이고 애를 업고 양 손에 어린이를 이끌고 따라가는 여인들로 고향을 떠나 살길을 찾아 만주벌로 들어가는 서러운 조선 사람들로 장사진을 쳤다. 털 한 모숨과 똘만은 헌병 소분대를 이끌고 망루에 이르자마자 말에서 내려 망루에 뛰어 들어갔다. 망루를 지키던 일본 경찰은 발뒤꿈치를 척 붙이고 군례를 척 붙혔다. 그러자 가메다도 군례로 답례했다. 그는 망루에서 보초를 책임진 변경검사소 소장을 찾아 유골궤짝을 가진 최구장과 진달래를 비롯한 돌멩이유격대 정황을 일일이 말했다. “이 놈들은 우리 우시장 헌병대의 자위대 대대장을 살해한 장백산 돌팔매유격대들이오. 꼭 협조해 나포해주시오.” 검은 경찰복을 입은 경찰소장은 머리를 조아렸다. “와까리마시다(알았습니다). 그 놈들이 나타나기만 하면 꼭 나포해 헌병대에 보내겠습니다.” 검사소 소장은 이윽고 근심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뒷말을 이었다. “장백산 유격대 말은 많이 들었소. 그런데 그 놈들이 시허연 대낮에 여기 다리로 건너가자고 오겠소이까?” 가메다는 열이 부쩍 올라 사무 상을 탕 치면서 벌떡 일어나 고함쳤다. “그게 무슨 소리요? 돌멩이 유격대는 교활한 놈들이어서 바로 당신들이 그렇게 경계를 늦추는 코밑에 나타 날 수도 있단 말이요.” 검사소 소장은 황망히 일어나면서 손을 저어댔다. “알았소이다. 좌우간 오늘부터 그런 자가 나타나면 붙잡지요. 당신들은 망루 안에 숨어서 바깥에 지나가는 자들을 살피란 말이요. 바깥초소에 당신들이 서 있으면야 그 놈들이 괜히 놀라 달아날게 아니요?” “그렇게 합세.” 변경검사소의 검사는 더 엄밀해졌다. 검사소의 경찰들이 몽땅 출동해 조선 난민들의 머리로부터 발끝까지 일일이 검사하고서야 지나보냈다. 털끝만치라도 수상한 자가 발각되면 망루 안에 끌어다 고문했다. 가메다 등 일본 헌병들은 망루 안에 숨어 창문으로 바깥 초소를 지나는 조선 사람들을 하나하나 감시했다. 그때 백성철이 나타났다. "아니, 저 놈은 어째 여기 왔어? 똘만이, 저자를 빨리 데려오게." "하이," 이윽고 백승철이 망루에 들어섰다. "우둔한 놈, 넌 진달래 패거리 눈에 띄면 안돼." "네? 내 변장했기에 알아보지 못합구마. 여기엔 그 년놈들이 얼씬하지두 않았습구마."  가메다는 턱의 털을 슬슬 만지다가 명령했다. "피난민들 속에 들어가 잘 살피게." "예." 그리하여 똘만과 백승철은 조선난민으로 가장하고 난민 속으로 왔다 갔다 하며 살폈다. 그들은 이따금 먼발치에 쭈크리고 앉아 담배를 풀썩풀썩 피우면서 두만강 다리를 건너는 난민들을 서캐 훑듯 살폈다. 한참 후에 웬 40대중반의 사나이가 고리짝 하나를 지게에 지고 허리를 굽히고 스적스적 다가왔다. 그 뒤에 자그마한 솥에 보자기를 넣어 인 아낙네가 어린것을 업고 손에 잔밥들을 하나 잡고 두 어린애들을 이끌고 뒤따라왔다. 가메다는 턱의 털 한 모숨을 슬슬 매만지다가 벌떡 일어나면서 바깥쪽으로 손을 홱 저었다. 헌병들이 일제히 망루 밖으로 뛰쳐나갔다. 가메다는 바깥에 나가자마자 고리짝을 지게에 진 사나이를 불러 세웠다. 그 사내는 아무런 겁기도 없이 묵묵히 서서 가메다를 마주 바라보았다. 가메다가 여겨보니 최구장도 근형도 아니었다. 그런데 엄청나게 육중한 몸집을 보면 힘깨나 쓸 사내였다. “궤짝 안에 뭐 있쏘까?” 사내는 사발 같은 눈으로 땅바닥을 내려다보면서 선선히 대답했다. “농기구요.” 검사소 소장도 다가와 그 사내의 아래위를 훑어보면서 을러멨다. “궤짝을 내려놓으란 말이야.” 사내는 두말없이 지게를 땅바닥에 내리워 손에 쥐였던 받침대를 받쳐놓고 고리짝을 조심스레 내리워놓았다. 검사소 소장이 군도 끝으로 고리짝을 가리키면서 을러멨다. “히라이데(열엇)!” 똘만이가 옆에서 번역해주었다. “열라.” 사내는 시끄럽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씩씩거리며 고리짝을 열었다. 가메다가 들여다보니 안에는 보습 날이며 낫이며 괭이 날이며 식칼이 들어있었다. 변경검사소 소장은 시퍼런 식칼을 쥐여 쳐들고 바라보다가 손가락을 칼날에 대고 슬슬 쓸어보았다. “날이 선뜩선뜩해. 이걸로 살인도 할 수 있다.” 똘만이가 옆에서 번역해주자 그 사내는 픽 코 방귀를 뀌었다. “아니, 그까짓 식칼을 가지고 왜 이렇게 시끄럽게 굽니까? 빨리 건너가게 해줍소. 만주에 가서 땅을 일궈야 죽물이라도 먹지.” “이 놈, 입을 벌리면 다 말인가 하는가?” 가메다는 군도를 빼들고 그 사내 목에 대고 호령했다. “웃통을 벗어!” “벗으라면 벗지.” 그 사내가 웃통을 벗어버리자 가메다는 실눈을 해가지 양어깨를 살펴 보는 것이었다. “봐라, 양어깨 다 뻘건걸 보니 총을 메고 다닌 게 틀림없다. 네가 돌멩이 유격대 놈이야!” 가메다의 말에 사내는 억울하여 픽 코웃음 쳤다. “아니, 이보, 우리 조선 사람들은 지게를 메고 다니다나니 어깨가 뻘겋소. 총이란 게 어떻게 생긴 줄도 모르는데 날 보고 총을 메고 다녔다고? 나 원 참, 한심하기 짝이 없소.” “뭣이?” 가메다는 군도를 쳐들면서 버럭 고함쳤다. “이 놈이 감히 나한테 대들어? 죽고 파?” 아낙네가 두 팔을 벌리며 남편 앞을 막아 나서면서 두 손을 싹싹 비볐다. “황군님, 제발 살려주십시오. 우리 여섯 식솔은 다 이 나그네 두 손을 바라 보고 농사를 지어 삽구마.” 가메다는 아낙네의 꽤나 예쁜 얼굴을 쳐다보더니 쳐들었던 군도를 내리우면서 희죽이 웃었다. “우쯔꾸씨이 온나요.(고운 계집이군) 이년, 이후에 황군의 말을 많이많이 잘 들었쏘까. 빠가요로(멍청이야).” 아낙네는 고맙다고 두 손을 싹싹 빌면서 허리를 굽실거렸다. 아낙네가 남편을 보고 빨리 지게를 지고 다리를 건너자고 눈짓했다. 사내는 한숨을 땅이 꺼지게 쉬면서 고리짝을 지게에 올려놓고 지고 떠나려고 했다. 천하의 까마귀는 다 검다고 변경검사소 소장 놈은 군도로 아낙네의 앞길을 막았다. 그러자 잔밥들은 겁을 집어먹고 어머니의 양손을 잡고 엉엉 울었다. 소장 놈은 음충한 눈길로 아낙네 엉덩이를 노려보면서 지껄였다. “넌 만주에 못 가. 우리 변경검사소 밥을 지어.” “아니, 이건 또 무슨 날벼락 같은 소립네까? 애들 넷이나 키우는 에미를 떼 내면 우린 어떻게 사오?” 아낙네가 솥을 인 채 입을 딱 벌렸다. 사내도 억이 막혀 흐린 하늘만 쳐다보며 황소숨을 몰아쉬면서 씩씩거렸다. 그러건 말건 소장 놈은 아낙네를 자기 여편네나 다 된 것처럼 망루 안으로 마구 끌고 들어갔다. 아낙네는 끌려가면서도 나그네를 돌아보면서 통곡 쳤다. “여보, 여보~” 사내도 눈물을 흘리면서 처량하게 고함쳤다. “여보, 점순이!” 차마 보지 못할 그 참경을 보고 두만강을 건너려던 아낙네들은 모두 자기 머리를 수그리면서 자기 얼굴을 감추었다. 어떤 아낙네들은 밉게 보이려고 땅바닥의 흙먼지를 낯에 마구 쳐 바르기도 했다. 애들은 어시 손을 놓지 않고 떼를 쓰면서 울었다. 나그네는 끌려가는 아내를 놔달라고 똘만을 보고 사정했다. 똘만인들 어떻게 하랴. 황군 소장의 말 한마디면 시퍼런 대낮에도 남의 아낙네를 빼앗아가는 판인데. 아낙네와 사내가 애들을 데리고 두만강을 건널 때에는 건너가지 못하게 하더니 인제는 아내를 빼앗더니 사내를 강제로 다리목에서 쫓아 두만강을 건너가라고 몰아세웠다. 이윽고 변경검사소 소장 놈이 망루에서 나오더니 사내를 보고 지껄였다. “여편네 근심하지 말어. 황군이 밥을 입빠이(많이) 준다. 빨랑빨랑 만주국에 가. 돈이나 많이 벌어서 여편네 찾아가.” 사내는 일본 놈들의 총칼 앞에서 별수 없이 아내를 멍해 쳐다보면서 나지막하게 “여보, 당신을 두고 어떻게 가라오?”하고 애달프게 한마디 내뱉었다. 소장 놈은 졸개들을 시켜 그 사내를 총칼로 두만강 다리 쪽으로 마구 밀어냈다. 그 사내는 아내를 빼앗긴 원한을 한가슴 가득 안고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두만강을 건너 만주벌에로 들어가야만 했다. 사내는 총박죽에 떠밀리어 몇 걸음 비칠비칠 걸어 나갔다. 다리목에서 아내가 발을 동동 구르며 대성통곡 치면서 “여보! 얘들아!”하고 부르는 목소리를 듣고 그 사내는 머리를 천천히 돌렸다. “내 꼭 당신을 데리러 올게!” 무쇠 같던 사내도 참지 못하고 고함치면서 두 볼에 피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애들은 두 팔을 벌리고 “어머니-!” 하고 부르며 애처롭게 대성통곡 쳤다. “하야꾸 이께(빨리 갓)!” 일본 놈들이 총 박죽으로 사내의 엉덩이를 탁 밀쳤다. 사내는 총 박죽에 떠밀리어 지게를 진채 애들을 양손에 하나씩 거머쥐고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걸어 두만강다리를 건너갔다. 두만강도 흐느끼며 그 사내와 처자의 이별의 피눈물을 싣고 철썩 철썩 노호하면서 흐르고 있었다.             8.두만강 나루터 한편 두만강다리 근처에 다가와 동정을 살피던 진달래 등은 변경검사소 일본 놈들의 검사가 심한 것을 발견했다. 하여 부득불 다리를 건널 계획을 포기하지 않으면 안됐다. 그들은 산기슭 수림 속에 숨어서 철썩철썩 사품치며 감때사납게 흐르는 시퍼런 두만강을 내려다보면서 도강계획을 세우고있었다. 진달래의 철색얼굴에는 준엄한 표정이 굳어져있었다. “큰아버지, 우린 대담히 대낮에 나루터를 건너야겠어요. 등잔불 밑이 더 어둡다는 속담도 있잖아요.” 최구장은 아버지 유골이 담긴 벌건 상자를 매만지면서 한숨을 후~ 내쉬었다. “그래보자. 건데 군마랑 어쩌지?” 진달래는 결단성이 강했다. “큰아버지랑 건넌 후 우린 두만강 상류로 가서 건널 예산인데요.” “음, 그게 비슷해.” 최구장은 머리를 끄덕이다가 턱을 홰홰 저었다. “야, 야속하다, 야속해. 어쩜 아버지 유골을 제대로 모시자고 해도 죄 취급을 당한단 말이냐?” 진달래도 눈시울에 뜨거운 이슬이 맺혔다. “일본 날강도 놈들은 나라마저 빼앗아갔는데 조상들을 잘 모시게 하겠어요? 일본 날강도 놈들을 이 땅에서 몰아내야 편히 살 수 있어요.” 최구장도 머리를 끄덕였다. “내가 여직껏 너희들한테 ‘공자’ 왈, ‘맹자’ 가라사되, ‘지호자야’를 가르쳐오면서 중용지도를 주장했지. 허나 이제야 새 도리를 하나 알게 됐다. 날강도 놈들에게는 인정을 베풀어선 안 돼. 총칼을 든 날강도 놈들은 총칼로 몰아내야 해.” 그는 기침을 쿨룩쿨룩 했다. 진달래가 옆에서 큰아버지 잔등을 톡톡톡 다독여주었다. 최구장은 흰 머리카락을 마른 생강 같은 손으로 훔치고 나서 구부정한 허리를 폈다. “우리 진달래는 참 장하다. 머슴아도 아닌 게 총을 메고 일본 날강도 놈들과 싸우고 있지 않나. 나도 늙지만 않았어도 총칼을 들고 일본 놈들과 싸우겠다. 근형도 이제 만주에 들어가면 진달래를 따라 총을 들고 일본 놈들과 싸워라. 그게 효성을 다하는 거야.” 이때 두만강 나루터에 건너갔던 나룻배가 천천히 다가왔다. 진달래가 근형을 보고 포치했다. “먼저 큰조카가 내려가 봐라. 알아보는 사람이 있나 떠 보자.” “알았소. 내 먼저 가서 동정을 살피고 올게.” 근형은 말을 마치자 밀짚모자를 꾹 눌러쓰고 스적스적 산기슭을 내려 나루터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두만강 물은 연 며칠 억수로 쏟아진 장맛비로 하여 흙탕물이 사납게 사품 치며 흐르고 있었다. 나루터에는 남루한 한복을 입은 조선 아낙네들이 애들의 손목을 쥐고 바구니에 주먹밥인지 뭔지 이고 나루쪽배가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일본 놈 두 놈이 장총을 둘러메고 나룻배에 오르려는 사람들의 짐과 몸을 수색하고 있었다. 소용돌이를 만나 나룻쪽배는 뒤꽁무니를 자꾸 물에 떠밀리면서 겨우 나루터에 다가섰다. 근형이 다가가자 일본 놈이 경계하는 눈길로 아래위를 훑어보았다. 그 놈은 근형의 꾹 눌러쓴 밀짚모자를 훌 벗기었다. “아, 이 놈이?!” “앗! 털 한 모숨!”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두만강나루터에서 털 한 모숨이 가메다와 근형의 눈길이 딱 마주쳤던 것이다. “네놈들이 다리를 건너지 못하니 나루터에 나타날 줄 알았어. 내 여기서 기다린 지 오래다!” 가메다 놈이 근형의 팔을 잡으려는 순간 근형은 콱 떠밀어버리고 두만강 물에 첨벙 뛰어들었다. 장총을 메고 보초놈으로 가장했던 가메다 놈이 허리춤에서 권총을 쑥 뽑아 사품 치며 흐르는 두만강 물을 겨누었다. 근형이가 머리만 들면 방아쇠를 당길 판이었다. “아니, 저 놈이!” 그 위기일발의 시각에 진달래가 주머니에서 닭 알만 한 돌멩이를 꺼내 날렸다. “아이쿠!” 딱 소리와 함께 가메다 놈은 비명을 지르며 권총을 두만강 물에 떨어뜨렸다. 그 놈은 피 낭자하게 흘러나오는 뒤통수를 싸쥐고 나루터에 보기 좋게 쓰러졌다. 다른 한 일본 놈이 장총을 벗어들고 이쪽을 겨냥했다. “땅!” 고요하던 두만강가 수림 속에 야무진 총소리가 울려 퍼졌다. 십여 명 헌병대 놈들이 총을 들고 초소에서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진달래는 황급히 자기 말의 고삐를 최구장에게 쥐어 주면서 말했다. “큰아버지, 빨리 이 자리를 떠야 해요. 빨리 말을 타세요.” “너희들이나 타고 빨리 가라. 이 늙은게 무슨 죄 있다고 저 날강도 놈들이 이다지도 못살게 군대?” 진달래는 수하의 유격대원들을 보고 “시간이 없어요. 빨리 큰아버지를 모시세요.” 하고 명령했다. 최구장은 유격대원들의 부축임을 받으면서 진달래의 말에 올라탔다. 모두들 말에 올라 그 자리를 떴다. 다급한 형편에서도 진달래는 말배에 처 맨 유골상자가 제대로 있나 살피면서 수림 속으로 달렸다. 나루터에서는 일본 놈들이 대적이나 만난 듯이 왝왝 고함치고 총을 쏘면서 진달래 등이 숨었던 수림 속으로 돌격해왔다. 그러나 놈들이 산기슭의 수림 속에 이르렀을 때는 진달래 등이 두만강 상류 쪽으로 바람결처럼 사라진 뒤였다. 닭 쫓던 개 신세로 된 일본 놈들은 그제야 두만강에 뛰어든 근형의 생각이 떠올라 총구멍을 두만강 쪽으로 돌려대고 두만강 나루터로 되돌아갔다. 그제야 제 정신을 차린 가메다는 뒤통수를 싸쥐고 상을 찡그리면서 기여 일어났다. “물에 뛰어든 그 놈, 그 놈은 최구장네 맏손자야. 놓쳐선 안 돼!” 놈들이 한참 두만강수면을 살펴보았지만 근형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가메다가 그래도 머리가 베아링처럼 빨리 돌아갔다. “고노 빠까야로라(이 바보같은 놈들아), 그 놈이 물에 뛰어든 지도 오랜데 아직도 여기 강물을 사발눈깔로 쏘아봐서야 어떻게 찾아내느냐? 빨리 저 아래쪽으로 내려가면서 찾아봐!” 그제야 일본 놈들은 뒷덜미를 긁적거렸다. “맞다. 그 놈이 아래로 떠내려간 지도 오래 되잖아!” 놈들은 총을 꼬나들고 아래쪽으로 달려 내려갔다. 그러나 그들이 어찌 사품 치며 쏜살같이 흐르는 두만강 급류에 떠내려간 근형을 따라잡겠는가! 근형은 진작 가메다 놈이 진달래가 날린 돌멩이에 맞아 쓰러진 순간 물 위에 머리를 내밀어 숨을 돌린 후 물속으로 자맥질하면서 두만강급류를 타고 몇 리 아래에서 만주 쪽의 강기슭에 올랐던 것이다. 한편 두만강변의 변경검사가 심한 정황에 대비해 진달래는 일행을 이끌고 두만강 강변을 달리지 못하고 내지 쪽으로 에돌아 두만강 상류의 한 마을에 이르렀다. 진달래가 말을 탄 유격대원들을 이끌고 두만강 강변에 가 정찰했다. 그 곳 두만강은 하류 쪽보다 강폭도 넓지 않고 물살도 잔잔했다. 게다가 산골 쪽이어서 일본 놈들의 검색도 심하지 않았다. 다만 반나절에 한번 정도로 일본 헌병대가 지나다녔다. 그런데 만주 쪽의 정황은 위만 괴뢰군들이 자주 출몰하여 이쪽보다 경계가 삼엄해보였다. (아무리 지킨들 우리를 알아보지 못하는 위만 괴뢰군이야 쉽게 따돌릴 수 있을 거야.) 저녁에 그들은 마을에 들어가 가져온 죽으로 야외에서 저녁을 대충 요기했다. 진달래는 입가심으로 샘물에 양치질을 하는 최구장에게 다가가 무릎을 굻고 주저앉았다. “큰아버지, 지체할 수 없어요. 빨리 도강합시다. 도강할 좋은 방도가 없어요?” 최구장은 천천히 구부정한 허리를 펴면서 말했다. “다시는 나루터에 나가지 말아야 한다. 보아하니 일본 놈들은 나루터마저 지키고 있는 거야. 마을에 들어가서 좋기는 고기잡이꾼들의 쪽배를 얻었으면 좋겠는데. 안되면 문짝 같은 거라도 있으면 아버지 유골만 무사히 건너가면 돼. 우리야 말을 타고 저 상류 쪽으로 건너가도 되겠는데 말이다. 저 유골이 우리 표적이 돼 놈들에게 계속 꼬리를 잡힌 거야.” 한참 궁리하던 진달래가 무릎을 치면서 일어났다. “큰아버지, 그렇게 하자요. 큰아버지는 바위돌과 함께 고기잡이꾼으로 가장해가지고 먼저 할아버지 유골을 쪽배에 싣고 건너면 돼요. 만일 일본 놈들이 나타나면 우리가 더러 여기서 막고 더러 말을 타고 상류 쪽으로 건너가서 마중하겠어요.” “그런데 만주 쪽 정황을 모르고 건넜다가 큰 코 다칠라. 세밀히 계획을 짠 후 도강하자.” “그래요. 그럼 억복이란 대원을 파견해 대안의 정황을 알리라고 하지요.” 그리하여 진달래는 대부분 유격대원들을 보고 군마를 지키게 하고 억복을 불렀다. 훤칠하게 생긴 억복은 장수다웠다. “억복 동무, 헤엄칠 줄 아오?” 억복은 가슴을 치면서 자신 있게 말했다. “저는 어려서부터 강원도 영월부근의 북한강에서 헤엄치면서 자라서 헤엄만은 자신이 있어요.” 진달래는 억복을 엄숙하게 바라보면서 명령했다. “좋소. 대안의 정황을 정찰하러 가오. 만약 대안에 일본 놈들과 위만 괴뢰군들이 없으면 초롱불을 세 번 켰다 껐다 하는 것으로 암호를 보내오. 만약 정황이 좋지 않으면 초롱불을 한번만 켰다가 꺼 버리오.” “알았습니다.” 억복은 인차 두만강으로 가서 세찬 물결에 첨벙 뛰어들었다. 진달래는 억복이 뱀장어처럼 슬슬 두만강을 헤엄쳐 건너가는 것을 보고 혀를 끌끌 찼다. 뒤이어 진달래는 농촌아낙네차림을 하고 최구장과 함께 마을로 쪽배를 빌러 들어갔다. 물론 백여 미터 뒤에는 바위돌이 보위하면서 뒤따랐다. 최구장은 마을 동구 밖에 이르러 마을을 들여다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마을 앞에 있는 저 높다란 토성을 두른 집에 가 빌어보자. 부자네만이 고기배가 있지 가난한 사람들에게 고기 배 있겠니?” 그러자 진달래는 절레절레 도리머리를 가로 흔들었다. “부자들이란 다 깍쟁이들인데요. 쉽게 훌훌 빌려 줄까요?” “돈은 귀신도 매돌을 돌리게 한다는데 돈을 줘보자. 빌려 주지 않는가?” 그제야 진달래는 머리를 끄덕였다. “글쎄요.” 그들은 두만강 변을 따라 마을 앞으로 슬금슬금 다가갔다. 그러다가 피뜩 두만강 물에 둥 둥 떠있는 쪽배에서 어부 같은 중년사나이가 고기그물을 정리하는 것이 보였다. 최구장은 허리를 구부정하고 다가가 물었다. “여보, 배를 좀 빌려 쓸 수 없어요?” 중년사나이는 흘끔 이쪽을 쳐다보면서 쓴 웃음을 날렸다. “당신들을 빌려주고 난 뭘로 고기를 잡겠소. 주인영감께 혼나라구?” 그러자 최구장은 다가가 손바닥만 한 물고기들이 가득 담긴 쪽배를 들여다보면서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배 값은 우리가 푼푼히 물게.” 그러자 중년사나이는 힐끔힐끔 최구장과 진달래를 번갈아보더니 시끄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건 내 고기배도 아닙구마. 주인영감네 걸 세 맡았수다. 허창수 영감은 얼마나 깍쟁이라고 빌려 줄 것 같소? 고뿔도 남을 그저 주지 않을 영감태기구마.” “주인영감과 말해 빌려줘요.” 중년사나이는 뒤따라온 바우돌을 힐끔 쳐다보면서 나지막하게 말했다. “사실, 오후에 일본 놈들이 두만강변을 따라 여기까지 달려와서 혹시 벌건 상자를 싣고 건너려는 늙은이가 있으면 고발하라고 했소. 만약 그런 사람을 건너 주었거나 알고도 고발하지 않는 자가 있으면 목을 쳐서 대가리를 두만강 물에 처 녛겠다고 한바탕 을러메고 갔단 말입구마.  내 골이 몇개라구 배를 빌려 주겠습둥." 그러자 최구장은 막막하여 한숨을 땅이 꺼지게 쉬더니 진달래를 되돌아보면서 엉거주춤 일어났다. 최구장이 언덕우로 올라오자 바우돌은 허리에 찬 권총을 만지여보이면서 중얼거렸다. “이거 한방이면 알아볼 걸 가지구. 흥!” 그러나 진달래는 도리머리를 가로 흔들었다. “안돼요. 우리 유격대는 백성의 유격대인데 백성을 다쳐서야 돼요? 지주 영감과 말해서 안 되면 그때엔 마지막수를 쓰기요. 바위돌은 멀찍이 서서 저 고기 배를 지키오.” 최구장과 진달래는 별수 없어 요행을 바라고 마을 앞에 있는 토성 안 집으로 찾아갔다. 그 뒤에 백여 미터 거리를 두고 바위돌이 뒤따라갔다. 높다란 토성을 두른 큰 집 앞에 이르자 최구장은 커다란 구리문고리를 잡아 대문을 두드렸다. “주인님, 계십니까?” “해두 다 넘어가는데 웬 놈이 시끄럽게 굴어?” 이윽고 토성 안에서 신발을 짝짝 끄는 소리가 들리었다.  대문중간의 작은 문이 삐꺼덕 열리면서 머슴 같아 보이는 중년사나이가 머리를 내밀었다. “웬 일이요?” “아니, 주인 영감을 만나 긴히 상의할 일이 있어 그러오.” 머슴은 최구장과 진달래 아래위를 눈여겨보면서 물었다. “무슨 일이요?” “아따, 이 양반, 주인과 만나야 말한다고 하지 않았소?” 이때 토성 안에서 우렁우렁한 목소리가 들리었다. “무슨 일이냐?” 머슴이 머리를 돌리면서 시끄럽다는 듯이 말했다. “기어이 주인을 만나 의논할 일이 있다고 합구마.”  “들여보내라." 최구장은 머슴을 따라 대뜰 안으로 들어갔다. 마루에는 곰방대를 문 뚱뚱한 영감이 앉아 그들의 아래위를 가슴츠레 뜬 눈으로 훑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일입둥?” 최구장이 다가가면서 말했다. “난 지나가던 길손인데요. 이 집 배를 세내 타고 두만강을 건너가려고 그러오. 세는 푼푼히 줄 테니까.” 영감은 곰방대를 뿍 길게 빨아 후 연기를 내보내더니 일어나 앉았다. “혹시 무슨 짐을 싣고 건너가려는 게 아니요?” 최구장은 진달래를 되돌아보면서 말했다. “예. 이 애 애비에게 뭔가 줘 보내야 할 게 있습구마.  이 애는 원래 만주에 사는데 우리 집에 놀러 왔다가 그만 큰물이 져서 그만, 헛참,  고기 배에 이 애를 잠간 건네주고 오려고 그러오.” 부자 영감은 곰방대를 툭툭 재떨이에 털면서 말했다. “안되오. 내일 저 아래 나루터로 가서 건너면 될 걸 가지구. 자꾸 시끄럽게 구지 마오. 우리 집 쪽배는 고기잡이로 세를 주고 없소.” 진달래는 듣다못해 허리춤을 만지었다. 눈치 챈 최구장이 진달래의 손을 잡아 내리웠다. 허창수는 눈치채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최구장은 마지막으로 지주 영감에게 말했다. “영감, 내 실토정을 하오리다. 사실 내 동생을 따라 처자들을 데리고 만주에 들어가 살려고 하오. 그런데 어찌 아버지 산소를 여기 고향에 두고 간단 말이요? 아버지 산소를 파서 유골을 상자에 담아 모시고 만주벌로 들어가려오. 그런데 일본 사람들은 자기 조상의 유골을 모시고 만주벌로 들어가려는 것도 막고 있소. 좀 내 딱한 사정을 봐주오.” 허창수는 맨 발 바람으로 마루에서 내려와 최구장의 손을 잡고 마루 우로 안내했다. “야, 그런 줄도 모르고. 빌려주지, 빌려주지. 듣고 보니 당신은 효성이 대단하구만. 만주에까지 아버지 유골을 모시고 가다니. 쯧 쯧 쯧.” 부자 허창수 영감은 최구장을 안방에 모시고 들어가 자리를 정해 앉은 후 인사수작을 걸었다. “길주에서 이사온 허창수라고 부르오. 이름도 괴상하지. 이 마을 사람들은 내가 창고에 자꾸 뭔가 끌어들인다고 이름도 창수라고 졌다고 놀리오. 심지어 ‘깍쟁이영감’이라고까지 별명을 달아 부르오.” 그러자 최구장도 속이지 않고 답례했다. “난 명천에서 온 최구장이라고 부르오. 어떻게 쪽배를 빌려주오. 내가 마지막효성을 다하게 말이요.” 그러자 허창수는 개기름이 유들유들한 낯에 억지로 웃음을 띄우며 시원히 대답했다. “좋소. 알고 보니 우린 한 고향 친구로구먼. 당신 효성에 감복되오. 세구 뭐구 다 그만두구  배에 아버지를 잘 모시고 두만강을 건넙소.” 최구장은 “고맙소.”라고 하면서 동전 열 몇 닢을 내놓았다. “아니, 이건 뭐, 쯧쯧, 한 고향 친구네 집에 왔다가 저녁도 먹지 않구 가겠수?” 허창수는 인사말을 하면서도 어느 결에 동전을 까래톱 밑에 스리슬쩍 쓸어 넣었다. 이때 때마침 두만강 변에서 만났던 어부사나이가 성큼성큼 들어섰다. “어, 마침 잘 왔다. 고기는 얼마 잡았는가?” “날씨 차지 흙탕물이 져서 몇 마리 잡지 못했습구마.” 그 사내는 고기 대여섯 마리를 내놓았다. 허창수는 대뜸 눈을 치켜뜨면서쏘아보다가 곁에 최구장이 있어 억지로 성을 참았다. “자네, 좀 수고하게나. 이 분들을 쪽배로 두만강을 건늬워주게나.” 사나이가 뒤로 주춤주춤 물러섰다. “주인님, 일본 놈들에게 들키면 목이 떨어지자고 이럽둥? 난 못하겠습구마.” “이 배운 게 없는 쌍놈아, 웬 잔소리냐? 목줄을 끊어 놓기 전에 얼른 갔다 오지 못할까?” 어부사나이는 목을 움추리더니 마지못해 최구장 등을 데리고 두만강 변으로 나갔다. 뒤에서 허창수는 그들을 아주 인정스레 바래주었다. 그리고 최구장네가 대문을 나서기 바쁘게 집안에 들어와 까래 밑의 동전을 허벼내 세여 보았다. 허창수는 불시에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는 황급히 엽전을 농궤에 집어넣고 중절모를 쓰고 휭하니 어디론가 바람결처럼 나갔다.  
84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47) 댓글:  조회:2057  추천:0  2016-07-14
                       5. 경성 여관집 울울창창한 수림 속을 말 타고 달려가면서 진달래는 근형에게 물었다. “그래 큰아버지는 이맘때면 어디까지 갔을까?” 근형은 말을 타고 작은고모와 나란히 달리면서 대답했다. “글쎄 말이요. 수레를 몰고 떠났기에 잘 갔으면 경성군 경내에나 들어섰을 게요. 할아버지가 애타게 기다리겠는데 빨리 가기요.” “그래. 무사히 갔는지 근심스럽구나.” 근형은 새단과 함께 타서 늦은 것 같아 달리는 말에 채찍질을 했다. 검둥이도 그들이 탄 백마를 따라 달렸다. 장사꾼으로 가장한 유격대원 셋이 말을 타고 뒤따랐다. 황혼이 붉게 타오르고 땅거미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경성군의 시골에서 깎아지른 절벽 앞에 자리 잡은 마을에 이르렀다. 절벽 앞에 도사리고 있는 첫 집은 좀 잘 사는 여관인 것 같았다. 진달래는 깎아지른 절벽과 같은 산세와 절벽 앞의 마을 그리고 여관집을 살펴보더니 철색얼굴에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 “여긴 회룡 쪽으로 가는 길목이기에 일본 놈들이 꼭 중시할게요. 이전에 성칠 오빠도 이 부근에서 날강도를 만나 적토마를 빼앗기고 목숨마저 잃을 번한 적이 있다고 했소. 꼭 안전에 각별히 주의하오. 말이 지쳤기에 먹이를 먹이고는 인차 떠나기요. 금별 장군께서 우리 소식을 애타게 기다릴 거요. 바위돌과 근형인 저 집에 먼저 들어가오. 정황이 발생하면 조카가 검둥이를 내보내고 바위돌은 총을 쏘아 신호를 보내오. 우린 여기 있다가 쳐들어가겠소.” 두 어깨가 쩍 벌어지고 바위처럼 튼튼하게 생긴 유격대원 바위돌이 나서면서 “옛!” 하고 대답한 후 근형 쪽으로 돌아섰다. 근형은 머리를 긁적거리면서 “작은고모 네는 저녁 식사도 하지 않겠소? 배고프겠는데.”하고 근심했다. 진달래는 말 잔등에 달아맨 주머니를 툭툭 쳤다. “여기 며칠 먹을 주먹밥이 있어. 돈 좀 주고 말들이나 잘 먹여라.” 근형은 머리를 끄덕이더니 바위돌과 함께 말 다섯 필이나 끌고 여관집 쪽으로 조심스레 걸어갔다. 진달래는 새단과 유격대원들을 데리고 길옆의 나무숲에 들어가 숨었다. 근형이 앞장서 나가 높다란 대문을 두드렸다. “주인님, 계십둥?” 울안에서 신발을 끄는 소리가 작작 들리었다. 이윽고 대문의 작은 문짝이 삐꺼덕 열리더니 안에서 허리가 구부정하고 구레나룻을 기른 곱사등이 나와 사팔뜨기 눈으로 근형과 바위돌의 아래 우를 훑어보았다. 그의 눈길은 말 다섯 필 가운데서도 백마에게서 멈추더니 희색을 감추지 못했다. “예, 말장사군인 모양이구먼. 아, 이 좋은 말을 다섯 필이나 끌고 오다니. 쯧쯧. 정말 희한한 백마로구먼요.” 곱사등은 대문을 열면서도 사팔뜨기 눈으로 백마와 근형이 네를 흘끔흘끔 훔쳐보며 끝없이 중얼거렸다. “오늘 맨 부자들만 우리 집을 찾는구먼. 허허, 참 재수 좋은 날인데.” 곱사등이영감은 구레나룻을 매만지다가 백마의 고삐를 덥석 잡더니 왼손으로 대문 안을 가리켰다. “어서 들어 오시우. 내가 마구간에 가서 말먹이를 푼푼히 줄 테니까. 숙비나 푼푼히 주오.” “예, 근심하지 마오.” 근형은 대문 안에 들어서면서 여기저기 살펴보았다. 여관은 몸채에 사랑방에 모두 두 채나 됐고 마구간과 우사간도 있었다. 마당에는 수레가 있고 우사간에는 소 한마리가 먹이를 먹고 있었다. 그런데 그 수레와 소가 퍽 눈에 익어보였다. (저건 상철이 부자네 증조부 유골을 싣고 가던 수레 같은데. 혹시 할아버지네 여기에 든 게 아닐까?) 근형은 곱사등이영감이 백마를 마구간에 매놓고 나오는 것을 보고 뒤따라 사랑채에 있는 손님방에 들어갔다. 아니나 다를까. 사랑방에는 할아버지와 상철의 부자가 벽에 기대앉아 있었다. “아니, 이 불효자식아, 어데 달아났다가 이제야 왔느냐? 엉?” 최구장은 벌떡 일어나 근형의 뺨을 찰싹 갈겼다. 근형은 바깥동정을 살펴보더니 그간 있었던 일의 자초지종을 간단히 말했다. 최구장은 근형을 품에 꽉 끌어안으면서 눈물을 흘렸다. “참 잘했어. 넌 과시 효자로구나. 엄마 유골을 외가 집에까지 모셔가다니. 쯧쯧. 과시 내 장손답구다. 넌 우리 가문의 14대 장손이야,  오해해서 미안해.”       최구장은 바위돌의 너부죽한 어깨를 툭툭 쳤다.  “참 수고 많았소. 당신들이 아니면 우리 일가는 정말 몇 번이나 죽었겠는지 모르겠소. 우리도 이제 금방 이 집에 들었소.” 이때 밖에서 신발을 끄는 소리가 작작 들렸다. “손님들, 저녁상을 올리랍둥?” 북으로 올라갈수록 함경도 사투리가 짙었다. “빨리 들여오오.” 한참 후 신발을 작작 끄는 소리가 들리더니 사랑방문이 삐꺼덕 열리였다. 양태머리를 딴 열댓 살 돼 보이는 처녀애가 먼저 작은 개다리 밥상을 들여오고 중년여성 둘이 멱국에 조이밥사발들을 쟁반에 들고 들어왔다. 뚱뚱한 중년여성이 밥상을 다 차려놓고 치마를 걷어쥐고 일어나면서 손님들을 보고 말했다. “먼 곳에서 오느라고 허기 나겠는데 갖춘 건 없어도 많이 듭소.” “예, 맛있게 들겠습구마.” 최구장이 인사를 받으면서 벽에 기댔던 허리를 떼고 밥상에 다가앉았다. 그는 어쩐지 뚱뚱한 중년여성은 별로 눈 덕에 살이 진 것이 살이 세보였다. 모두들 밥상에 다가앉았다. 이때 처녀애가 중년여성을 따라 나가면서 까마잡잡한 얼굴로 바위돌을 흘끔 보더니 눈을 찔끔 감았다 뜨면서 턱 끝으로 밥상을 가리키고는 돌아나갔다. 바위돌은 그 표정에 뭔가 암시하는 것이 있는 거 같아 밥상을 쳐다보면서 양미간을 찌푸렸다. 근형이 배고파 숟가락을 들어 밥을 퍼먹으려고 할 때였다. “가만!” 바위돌이 손으로 근형의 밥숟가락을 막았다. “어째? 배고파 죽을 지경이오.” “쉿-.” 바위돌은 입에 손가락을 갖다 대고 바깥동정을 살피였다. 뒤이어 그는 웃 호주머니에서 가늘고 짤막한 은침을 쏙 뽑더니 멱국사발에 찔렀다. 그는 한참 후 은침을 쏙 뽑아 창문 쪽에 가더니 창호지에 비껴드는 저녁 노을빛에 대고 이리저리 보았다. 금방 은빛이 나던 은침은 시꺼멓게 타버렸다. 그는 밥상으로 다가와 까맣게 타버린 은침을 여럿에게 보이면서 조용히 “멱국에 독약이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모두들 “양?”하고 놀라 어안이 벙벙해 했다. “이전에 작은 집 성칠 삼촌이 이 근방에서 날강도 삼형제를 혼내줬다더니 이 집이 아닌지도 몰라.” 상철이 하는 말에 모두들 머리를 끄덕였다. “옳소. 이 집이겠소. 어떻게 이 날강도들의 집을 벗어나 아버지 유골을 모시고 무사히 만주로 갈까?” 최구장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바위돌이 말했다.  “아직 산 사람두 살아나가기 힘든데 유골 근심을 다 합니까? 내 하라는 대로 합소. 밥과 국을 다 버리고 죽은 척 하시요.” 이때 밖에서 신발을 끄는 소리가 들렸다. 모두들 황급히 국과 밥을 몽땅 부엌아궁이에 쏟아 넣었다. 그들은 바위돌의 말대로 밥을 먹다가 다 쓰러진 것처럼 배를 끌어안고 여기저기 쓰러져 게 침을 입귀에 게 발랐다. 바위돌은 근형을 보고 검둥이를 진달래부대장에게 보내라고 하고 문 가까이에 쓰러져 있었다. 이윽고 몸채에 벅적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가보기요. 이 맘 때면 다 쓰러졌을 게요.” 뒤이어 삐꺼덕 사랑채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허허허, 약을 푼푼히 넣었더니 몽땅 뒈졌구먼. 승핵이 하구 승철인 빨리 주검이나 거둬라. 이젠 희한한 백마랑 몽땅 우리들 게다. 저 궤짝 안엔 이장사군들이 무슨 금은보화를 걷어넣었는지 어디 열어보자.” 바위돌이 눈을 가슴츠레 뜨고 보니 곱사등이영감이 들어오면서 구레나룻을 슬슬 매만지면서 지껄여 대고 있었다. 그 뒤에 더 젊고 뚱뚱한 두 중년사내가 들어왔다. 꺾다리가 지껄이었다. “형님의 날강도 버릇은 개를 떼 주겠소? 이전에 명천의 성칠이란 놈에게 혼 나고서도 이런 짭짤한 맛에 자꾸 사람을 죽이지 않고 뭐요. 흐흐흐.” “그 놈 새끼, 잔말 말고 빨리 시킨 일이나 해라.” 곱사등은 구들에 올라오면서 발길로 바위돌의 다리를 툭 걷어찼다. “에이구, 곰같이 생긴 놈도 독약을 먹고 이 모양을 봐라. 딱 썩어진 멧돼지 같아. 얘들아, 오래두면 누구한테 들키겠어. 싹 산골짜기에 실어다가 깊숙이 파묻어버려라. 에헴, 어디 궤짝이나 열어볼까. 무슨 보물단지가 있는지? 에헴, 에헴.” 키꺽다리 승핵이란 놈이 바위돌에게로 다가올 때 바위돌이 벌떡 일어나면서 권총을 뽑아들었다. “꼼짝 말엇!” “아이쿠!” 승핵이와 승철이란 놈은 문밖으로 뛰어나갔다. 땅! 승핵이 비명소리와 함께 바깥에 쿵 쓰러졌다. “이게 뭐야?” 곱사등이는 홱 돌아서면서 바깥으로 쫓아나가는 바우돌의 손에 든 권총을 보고 바들바들 떨었다. 형내와 상철이, 근형이 덮쳐들어 곱사등이를 땅바닥에 허공 재껴 놓고 팔을 비틀고 깔고 들어앉았다. 땅! 바우돌은 마구간에서 백마를 타고 말 잔등에 납작 엎드려 달아나는 난쟁이 승철을 향해 또 총을 쏘았다. 그러나 말의 배때에 총알이 푱푱 박혔다. 승철은 비수를 뽑아들었다. 그자는 몸을 반쯤 일으키더니 바위돌한테 비수를 날렸다. 바위돌이 옆으로 급히 피하였지만 비수가 팔에 꽂혔다. 그새 승철은 말 잔등에 다시 납작 엎드린 채 열린 대문을 빠져나갔다. 이때 대문바깥에 있던 진달래가 덮쳐왔다. 진달래는 백마잔등에 납작 엎드려 달아나는 사람이 모를 사람인지라 진작 쥐고 있던 조약돌을 날렸다. 딱! 면바로 그자의 대갈통을 명중했다. “아이쿠!”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백마는 납작 엎드린 그 놈을 태운 채 저 멀리로 먼지를 새뽀얗게 일구면서 달아났다. 검둥이가 쫓아 달려가면서 “왕! 왕! 왕!”짖어댔다. 진달래가 유격대원 둘을 거느리고 대문 안에 들어서면서 호통 쳤다. “장백산 유격대다! 몽땅 꼼짝 말고 바깥에 나와!” 집안에서 여성들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아이구, 큰일 났구나.” 뚱뚱한 중년아낙네가 치마를 걷어안고 제일 먼저 엎어질듯이 나오면서 애걸복걸했다. “제발 살려 주십시오. 우린 아녀자들이라 날강도 짓을 한 게 없습구마.” 진달래가 유격대원들을 돌아다보더니 집안을 향해 손을 홱 저었다. “집안을 수색해!” 유격대원들이 집안에 뛰어 들어가 수색하기 시작했다. 이때 집안에서 상철과 근형이 곱사등이를 끌고 나왔다. 진달래는 뜻밖에 큰아버지 최구장을 만나 기뻐 어쩔 줄 몰랐다. “큰아버지, 그러잖아도 큰아버지 행적을 몰라 바삐, 바삐 쫓아온 길이예요. 몸이 어때요?” 진달래는 큰아버지 얼굴을 매만지면서 말했다. “난 괜찮아. 넌 참말로 장해, 진달래야, 네가 유격대를 거느리고 마천령에까지 쫓아가서 오라비들을 다 구했다는 걸 근형에게서 다 들었다.” 최구장은 진달래를 끌어안고 잔등을 다독여주었다. 진달래는 몸을 돌려 바위돌에게서 자초지종을 보고 받았다. 이때 유격대원들이 얄팍한 중년아낙네와 양태머리를 땋아늘인 처녀애를 끌고 나왔다. “대장, 이 둘 밖에 없습니다.” “알았소.” 뚱뚱한 아낙네는 살진 눈 덕을 치뜨면서 진달래라는 유격대 여자대장을 흘끔 훔쳐보았다. 철색 얼굴에 까만 포도알눈은 일반 여성들보다 퍽 달랐다. 여자 대장은 퍽 위엄 있고 날래 보이었다. 진달래는 바위돌의 팔 상처를 수건으로 싸매주고 몸을 돌렸다. 그는 곱사등이 백승만과 뚱뚱한 아낙네를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네 놈들은 여기에 여관을 차리는 척하면서 전문 길손을 살해하고 재물이나 약탈하는 날강도들이구나. 네놈들을 살려뒀다간 얼마나 많은 무고한 사람들을 해치겠는지 모르겠구나.” “제발 살려주오. 강도질이야 사내들이 했지비. 우리 아녀자들이야 어찌?” 뚱뚱한 아낙네는 승핵의 시체와 진달래를 번갈아보면서 겁에 질려 바들바들 떨며 애걸복걸했다. 곱사등이영감이 하늘을 쳐다보다가 머리를 푹 떨어뜨리면서 중얼거렸다. “그만 떠드오. 명이 이만한 걸 빈다고 살려주겠소? 죽어도 함께 죽는 게 낫지?” “저 영감을 봐라. 당신 죽더라도 여편네와 제수는 살려 달라고 빌지 못할망정 쯧쯧!” 옆에 있던 바위돌이 진달래의 귀에 대고 양태머리 처녀애를 가리키면서 귀속 말로 뭐라고 말했다. 진달래가 머리를 끄덕이었다. 그는 양태머리 처녀애한테 다가가 다정하게 손목을 쥐고 물었다. “이 날강도 집 애냐?” 처녀애는 뚱뚱한 아낙네와 곱사등을 번갈아 할끔할끔 곁눈질해보면서 진달래가 묻는 말에 대답하지 못했다. “일없어. 말해 봐. 겁나 말고 말해 봐!” 처녀애는 목구멍으로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겨우 “머슴인데요.”라고 했다. “알았어. 넌 이쪽으로 오너라.” 양태머리 처녀애는 뚱뚱한 아낙네 눈치를 흘끔흘끔 보면서도 진달래 쪽으로 건너왔다. 진달래는 건 가래를 떼더니 권총을 뽑아들었다. 이때 옆에 서 있던 최구장이 나서서 진달래의 권총을 내리누르면서 말했다. “얘, 조카야, 살생을 그만해라. 이 사람들은 길을 잘못 들어서서 날강도질을 하는 게야. 한길수처럼 일본 놈들의 개다리질은 한 것 같지 않아. 내버려 둬라. 우린 갈 길이나 빨리 가자.” 이때 토성 밖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었다. 진달래가 대문 밖을 내다보니 숱한 마을사람들이 총소리를 듣고 먼발치에서 구경하다가 유격대가 왔다는 말을 듣고 모여왔다. 진달래는 마을 사람들 쪽으로 걸어 나갔다. 한 사내가 나서더니 백승만을 손가락질했다. "이 놈을 죽여치웁소. 이 놈은 명천에서 경찰서를 지을 때도 일본 놈들한테 병완 영감이랑 우릴 고자질한 개다립니다. 죽여 치웁소." "옳습구마. 죽여치웁소!" "우리 마을 사람들을 못 살게 구는 악당들입구마!" "저 미친개 같은 삼형제 없애치우면 우리 편안하게 살겠는데. 흥!" 진달래는 최구장과 눈길을 맞추고나서 다시 권총을 빼들었다. 최구장은 머리를 끄덕였다. “여러분, 우리는 일본 놈들과 싸우는 장백산 항일유격대입니다. 유격대는 우리 조선 인민들의 군대입니다. 오늘 날강도질을 일삼는 악질지주 백승만을 처단하고 곡창을 열어 여러분께 식량을 주겠습니다.” 진달래 말을 듣고 마을사람들은 살 때를 만났다고 웅성거렸다. 어떤 사람들은 유격대가 왔다고 하면 이런 좋은 일이 있을 것을 예견하고 벌써 쌀 주머니랑 버치랑 들고들 왔다. 여기저기서 고함소리가 들렸다. “그 악질날강도 삼형제를 죽여 버려라!” “죽여 버려라!” 진달래는 바위돌을 돌아보면서 명령했다. “백성들을 대표해 이 날강도 놈을 처단하라!” 바위돌이 권총을 들었다. 땅! 날강도 곱사등이 백승만은 한뉘 날강도질을 하다가 자기 집 문 앞에서 처단 당했다. “여러분, 곡창을 열고 쌀과 가정기물을 마음대로 가져가십시오!” 마을 사람들은 “와야!”하고 쳐들어와 창고 문을 괭이로 까부시고 식량을 주머니에 가마니에 버치에 퍼 담아 메고 들고 좋아 야단쳤다. 진달래는 유격대 대원들을 거느리고 궤짝을 까부시고 들춰낸 금은붙이들을 꺼내 로비로 남기고는 백성들에게 몽땅 나눠주었다. 그는 기뻐 어쩔 줄 모르는 백성들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그는 대장답게 유격대원들을 거느리고 최구장 등을 모시고 길을 떠났다. 최구장은 상철과 형내를 보고 “사돈, 우리 일을 돕느라고 연루될 건 빤하오. 아예 이 길로 함께 만주국으로 가기요. 상철을 보내 집식구들을 데려오게 하면 안 되오?”라고 권고했다. 상철은 머리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우리가 언제 일본사람들을 노엽힌 일을 하였소? 사돈어른의 유골을 모셔다주었는데 무슨 죄가 있단 말이요? 부모자식들을 고향에 두고 어찌 내 혼자 살겠다고 만주국으로 가겠소? 우린 될 수 있으면 그래도 고향에서 병을 보면서 살겠소.” 최구장은 더는 권고하지 못하고 근심스레 말했다. “내 조카랑 말을 가지고 왔으니 아버지 유골을 말 잔등에 실어가도 되오. 이젠 사돈어른들은 고향으로 돌아가오.” 상철도 머리를 끄덕였다. “그럼 우린 사돈들을 더 바래지 못하고 돌아가겠소.” 진달래 중대장은 두 유격대원에게 상철과 형내를 고향에까지 호송하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백승만의 뚱뚱한 첩과 얄팍한 제수를 한바탕 훈계하고 놓아주었다. 진달래는 두 유격대원과 함께 최구장 등을 호송하면서 북쪽을 바라고 밤도와 떠났다. 그녀는 자기 말에 곱단이라고 부르는 양태머리처녀애를 태워가지고 떨꺼덕떨꺼덕 북으로 뛰어갔다.                      6. 추포           연속 유격대에 골탕을 먹은 늙다리 끼무라 국장은 앓아 눕고 말았다. 운주동에서도 유격대 습격을 받아 응삼을 잃었고 마천령에서는 서대문형무소로 반일분자들을 압송하다가 유격대 습격을 받고 빼앗겼다. 이번에는 신설동 뒷산 기슭에서 유격대에게 습격당해 한길수 대대장을 비롯한 졸개를 여섯이나 잃고 말았다. 그 번 유격대의 매복습격을 받아 그도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번했던 것이다. 요행 한길수가 목을 매워 끌려가는 새에 매복 권에서 빠져나와 도망쳤으니 말이지 늘그막에 천당으로 갈 번했던 것이다. 일본 헌병대병원의 새하얀 병상에 누운 끼무라 국장은 생각할수록 잔등에 소름이 쪽 끼쳤다. “또 돌팔매유격댄가?!" 그는 최구장 등을 쫓다가 돌멩이가 날아오자 도망쳐 돌아간 일본 놈과 개다리들의 보고를 받고 이를 뿌드득 갈았다. 일본 헌병총대 대장 놈은 헌병대와 자위대에 경성으로부터 두만강가까지 길목을 봉쇄하고 돌팔매유격대를 검거할 것을 명령했다. 특히 돌팔매유격대가 자주 출몰하는 명천과 경성, 회령, 종성, 무산 등 군의 헌병대 대장들에게 유격대를 한해 내에 모조리 나포해야 하며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면 군법으로 목을 치겠다고 했다. 끼무라 등 헌병대장들은 말을 타고 운주동에 번쩍, 수 백 리나 떨어진 마천령에 번쩍,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면서 일본 놈들을 족치는 최동욱과 진달래가 거느리는 유격대의 그림자도 붙잡지 못했다. (쳇, 그래 전문 군사학원에서 훈련을 받은 우리 대일본제국의 헌병대가 일개 시골의 계집년이 이끄는 돌멩이유격대도 당하지 못한단 말인가? 이대로 물러설 순 없어. 한길수의 백마를 빼앗아갔으니 백마를 탄 놈만 나포하면 돌팔매유격대 꼬리를 잡을 수 있을 거야. 혀를 잡기만 하면 간도사령부거나 관동사령부에 보고해 그 놈들의 장백산 본거지를 소탕해버려야 해. 뭐? 금별장군이라지. 그 괴수부터 나포해야 하는 건데. 에이, 골머리야.” 끼무라 대대장은 주먹으로 이마를 툭툭 쳤다. “옳아, 먼저 관준 조손 3대를 쥐어짜면 뭔가 필시 나올 거야.” 이때 노크소리가 들렸다. “들어와!” 곱살하게 생긴 일본 간호사가 들어왔다. 예쁜 간호사의 새하얀 위생복 밑으로 드러난 하얀 우유빛 다리를 보자 끼무라는 아랫배로보터 전기에 붙은 듯 찡해오면서 온 몸에 정욕이 끓어 번지는 것을 참지 못했다. 그는 간호사를 와락 끌어안았다. “대장님, 왜 이래요? 이젠 건강이 많이 회복됐는가 봐요.” “너 대장님을 위안해주면 안 돼?” “대장님, 이러지 마세요. 이러면 제가 어떻게 대장님의 병을 치료해드려요? 이러지 말고 위안부나 기생집에 가 예쁜 기생들을 찾으세요.” “그래?” 끼무라는 간호사를 스르르 놓으면서 기생 생각을 하자 온몸이 조금 흥분되는 감을 느꼈다. 그러나 인차 도로 자기를 욕질했다. (그까짓 돌팔매유격대와는 꼼짝하지도 못하면서 야들야들한 기생들과 큰 소릴 쳐? 쳇, 난 군인이야. 그 놈의 돌팔매유격대를 붙잡지 못하고선 기생방에 안 갈 테야! 음.) 끼무라 대장은 이불을 활 차버리면서 벌떡 일어났다. “이리 급히 기생집에 가나요? 주사나 맞고 가요.” “그만 둬!” 끼무라 대장은 간호사를 밀쳐버리고 환자복을 활활 벗어버렸다. 그는 군복을 척 갈아입더니 권총과 군도를 허리에 차고 병실 문을 박차고 뚜벅뚜벅 걸어 나갔다. 뒤에서 간호사가 눈이 똥그래 놀란 표정을 짓다가 코를 싸쥐고 캐득거렸다. "까르르, 깔깔깔, 캐득캐득." 헌병대사무실에 돌아간 끼무라 대장은 수하들을 몽땅 불러 모았다. 사무 상에 위엄 있게 마주 앉은 끼무라가 수하들을 둘러보니 맨 무능한 밥통들 밖에 눈에 뜨이지 않았다. “가메다!” “하이(옛)!” 끼무라 대장은 벌떡 일어나서 가메다 앞으로 씨엉씨엉 걸어가더니 귀쌈을 찰싹, 찰싹 갈겼다. 가메다는 두 발을 착 붙이면서 “하이(옛)!”하고 군례를 붙이였다. “무능한 놈! 신설동 뒷산 기슭 길에서 돌멩이가 몇 개 날아오니 유격대라고 도망쳐? 운주하에서는 탄약상자를 메고 강을 건넌 유격대 놈을 왜 놓쳐 버렸어? 빠가요로(멍청한 놈)!” 끼무라 대장은 발을 탕 구르면서 호통 쳤다. “사흘 내에 유격대 한 놈이라도 잡지 못해 봐. 네 놈의 배를 군도로 갈라놓겠어. 당장 신설동의 관준을 잡아와!” “하이(옛)!” 가메다가 황급히 밖에 뛰어나가 울안에서 대기하고 있던 졸개들을 데리고 말을 타고 황급히 신설동으로 덮쳐갔다. 끼무라 대장은 눈길을 야마모도 소장에게로 돌렸다. “지금 유격대는 수림속이거나 령 길을 타고 출몰하고 있네. 자넨 삼림경찰들을 거느리고 운주동과 신설동, 영월동, 신흥동, 운주동과 가마골 일대의 수림과 령 길을 몽땅 봉쇄하게! 개미 한 마리 빠져나가지 못하게 말이야?! 알았어?! "하이!" "이제 그 곳에서 유격대가 출몰하는 거 놓치는 날엔 네 놈부터 군법에 의해 목을 칠줄 알아!” 야마모도 소장은 십여 년 전만 해도 다 같은 소장이었지만 지금은 헌병대장과 소장이란 엄연한 급별 차이가 있고 당상급인지라 용빼는 수가 없었다. “왜 꾸물거리면서 대답이 없쏘까?” 야마모도 소장은 마지못해 느릿느릿 “예.” 하고 대답했다. 좀 지나 이런 말꼬리를 달았다. “끼무라 대대장, 전번 신설동 수림속 전투를 잊었소? 대대장네 헌병대와 우리 삼림파출소 경찰에 한길수 대대장의 자위대까지 합세해 포위공격해서도 유격대를 한 놈도 붙잡지 못했지 않았소? 한길수 대대장마저 유격대의 돌멩이에 맞아 처참하게 죽었잖소? 그런데 우리 삼림파출소 경찰들로만 신출귀몰하는 유격대를 나포하라는 건 너무 무리한 것 같소.” 끼무라 대대장은 사무 상을 탕 쳤다. “저런 멍청한 놈을 봤나? 다 당신같이 무능한자들이 소장자리를 차지했기에 그까짓 돌팔매유격대를 번마다 놓친단 말이야!” 끼무라 대대장은 일어나 야마모도소장을 교활한 눈길로 보면서 간사한 웃음을 지었다. “자넨, 잊었나? 유격대 손에 처참하게 죽은 형님을.” 야마모도 소장은 축 쳐졌던 어깨를 들먹이더니 눈에 복수의 불길이 이글거렸다. “어떤가? 할만 한가?” “하이, 내 손으로 그 놈 돌팔매유격대를 붙잡아 칼탕 치지 않고선 돌아오지 않겠소이다! 한 대대장 백마를 빼앗아 타고 달아 난만큼 백마를 찾는 날엔 유격대 꼬리를 밟을 수 있소이다.” “참 좋아. 항상 저렇게 머리를 써야 돼. 꼭 이 명천에서 유격대 씨를 없애치우잔 말이야. 그래야 우린 살 길이 있는 거야. 군법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네.” “하이!” 야마모도 소장도 군례를 척 붙이고 문 밖으로 나가 헌병대 울안에서 대기하고 있던 졸개들을 데리고 떠나갔다.  졸개들 속에는 조선 친일구 경찰 허꺽쇠를 내놓고도 친일특무 똘만이도 있었다.        똘만은 함흥촌 동쪽 늙은 비술나무 부근에서 밤중에 기준을 우연히 만나 붙잡아가다가 유격대 기습을 받아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던 것이다. 그때 기준이 권총을 빼앗아 대갈통을 연신 까는 바람에 똘만은 하마트면 죽을 번했다. 그는 정신 잃고 피를 줄줄 흘리며 쓰러졌댔다. 그런데 유격대가 기습하고 수림 속으로 사라진 후 졸개들이 되돌아와 숨이 가물거리는 그를  업어갔던 것이다. 똘만은 용정 일본군병원에서 반년이나  치료받고도 정신을 제대로 차리지 못했다. 일본 놈들은 몸값이 꽤나 높은 특무라고 똘만을 서울 일본군 병원에 보내 치료받게 하였다.  그리하여 일년 후에야 똘만은 겨우 살아났던 것이다. 그런데 그 놈은 육체는 살았지만 기억력이 형편없이 떨어져 기준을 붙잡은 일, 지어 기준한테 맞아 죽을번 한 것마저 아리숭해했다.        끼무라가 병완 부자 행방을 물었을 때 함흥촌 부근에서 발견한 것도 다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끼무라는 페물이 된 똘만을 잠시 간도에 보내지 않고 업동 헌병대에서 개처럼 부려먹었다.       가메다 경찰은 똘만과 허꺽쇠 등 조선 졸개들을 끌고 신설동에 있는 신설집 관준의 집으로 쳐들어갔다. 그들이 삽작 문안에 쓸어 들어갈 때 관준이 마루에까지 나와 쏘아보면서 서있었다. “잡아 족쳐!” 관준은 졸개들에게 끌리어 마루에서 내려가면서 욕설을 퍼질렀다. “아니, 이 놈들아, 왜 이래? 내가 무슨 죄를 졌다고 이래?” 가메다는 볼의 털 한 모숨을 슬슬 만지면서 실눈으로 관준을 노려보았다. 허꺽쇠란 경찰 놈이 꺽꺽거리면서 지껄여댔다. “어, 김, 김영감, 의사, 의사인척하면서 장백산유격대, 유격대하구 내통하였지? 탄백해!” 관준은 바 줄에 양팔을 뒤로 비틀리어 묶이면서도 허리를 펴려고 애쓰면서 고함쳤다. “이게 무슨 망발이요? 난 앓는 사람을 치료했지 유격대란 말은 듣다 첫소리요.” 이때 부실한 상철의 아낙네가 문 밖으로 나오면서 혀를 끌끌 찼다. “아이고, 시아버님, 내 뭐랬습둥? 그 최구장을 묻어 다니지 말라는데두. 쯧쯧쯧, 최구장네 유골을 싣고 가라더니 꼴 보기 좋게 됐습구마.” 경학이가 엄마를 쏘아보았다. “이 부실한 엄마를 봐라. 아버지를 잡아가라는 게요? 아무 말이나 하지 말고 집에 들어가오.” 경학은 참다못해 자기 엄마를 마구 부엌으로 떠밀어 들여보냈다. 형내의 아내는 문설주를 짚고 밖을 내다보면서 그저 눈물만 속절없이 흘리다가 돌아서면서 동전으로 눈 굽을 찍었다. 이때 가메다 놈은 경학을 가리키면서 고래고래 고함쳤다. “저 놈 새끼를 잡아라! 저 놈도 전번에 유격대 유골을 실은 수레를 따라 갔다. 돌멩이질을 한 유격대와 내통한 적이 있어.” 졸개들인 허꺽쇠와 똘만이 부엌 문 어귀에 있는 경학에게로 덮쳐들었다. 경학은 울상을 지으면서 몸부림쳤다. “아니, 이걸 놓소. 내 무슨 죄 있소? 남의 면례하는 걸 도와 유골수레를 몰았는데도 죄요?” “잔말 말고 헌병대로 가자! 네 형과 애비는 어디로 갔어?” “우리 아버지와 형님이 무슨 죄 있다고 이러오?” 경학이가 변명하려고 해도 가메다는 점점 더 고래고래 고함쳤다. “그 날 네놈들이 분명 수레를 몰고 나를 유인했어. 그 바람에 난 산에 매복해있던 유격대 놈들의 돌멩이에 맞아 하마터면 죽을 번했다! 끌어가!” 졸개들은 관준과 경학을 마구 묶은 채 밀고 닥치면서 삽작문을 나섰다. 경학은 근형이 수림 속에서 돌팔매질을 한 걸 가지고 돌팔매질을 한 유격대라고 떠들어대는 꼴이 너무나도 가소로와 쓴 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그는 입술을 깨물며 내막을 밝히지 않았다. 이때 신설집에서 아우성소리가 나자 마을사람들이 모여와 억울하다고 혀끝을 쯧쯧 찼다. 가메다는 허꺾쇠와 똘만이 등 졸개들과 함께 관준과 경학을 끌고 개를 잡은 포수처럼 우쭐거리면서 명천을 바라고 휭 하고 떠나버렸다. 뒤에서는 관준의 노친과 부실한 상철의 아내가 아우성쳤다. 오후에야 가메다 일행은 관준과 경학을 끌고 헌병대 대문 안에 들어섰다. 끼무라 대장은 사무실에서 시퍼런 군도를 뽑아들고 살기어린 가슴츠레한 눈길로 칼날을 훑어보면서 관준의 일가를 어떻게 심문할 것인가부터 못된 궁리하고 있었다. “보고! 관준과 손자 녀석을 잡아왔습니다.” 가메다가 사무실에 들어와 널 바닥이 다 울리게 발뒤축을 척 붙이면서 군례를 올리며 보고했다. 끼무라 대장은 군도를 칼집에 척 박아 넣고 몸을 홱 돌렸다. “그래 유골을 싣고 간자들은 어쨌는가?” 가메다는 털 한 모숨이 날아날듯이 숨을 몰아쉬고 나서 가슴을 쑥 내밀며 대답했다. “그자들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습디다. 아마 아직 돌아온 것 같지 않습니다. 이제 돌아만 오면 당장 나포해오겠습니다.” “요로씨이(좋아), 그 놈들을 혹독하게 족쳐 돌멩이유격대 향방을 알아내게.” “하잇(옛)!” 가메다는 군례를 척 붙이고 나갔다. 그는 씩씩거리면서 지하에 있는 고문실로 들어갔다. 허꺽쇠와 똘만이가 한창 관준과 형내의 웃통을 벗기고 심문대 가름대에 두 팔을 머리 위로 쳐들어 단단히 비끌어 매고 있었다. 가메다는 먼저 가죽채찍을 골라 쥐더니 다짜고짜 관준의 가슴을 사정없이 쨩, 쨩 후려쳤다. “말해! 돌팔매유격대가 어데 갔어?” 관준은 신음소리를 내더니 간신히 머리를 쳐들었다. “모르오.” “네 아들과 손자들이 유격대와 내통하지 않았으면 산에서 돌멩이가 날아왔겠어?” 그때 경학이가 머리를 쳐들고 어망간에 “그건 유격대가 아니라 …” 하다가 입술을 깨물더니 말끝을 삼켜버리었다. 맞은편에서 관준이가 “어험.”하고 건 가래를 뗐다. 제꺽 눈치 챈 경학은 입에 빗장을 꼭 채워버렸다. 제꺽 눈치 챈 가메다는 허꺾쇠에게 눈짓 했다. 허꺽쇠와 똘만이 경학한테 늑대처럼 슬금슬금 다가갔다. “그래, 네 놈이 그날 그 자리에 있었으니까 제일 잘 알겠구나. 산 위에서 돌멩이를 뿌린 자들이 유격대가 아니면 누구냐?” “모르오.” 똘만은 만두 낯에 박힌 빈대 눈을 때록거리면서 채찍질했다. “얼른 말하지 못해? 죽기 전에!” 경학은 아파 눈물방울을 똑똑 떨어뜨리면서 신음소리를 냈다. “난 그저 최구장 사돈어른이 조상의 유골을 간도에 가져가는 걸 도와주었을 뿐이요. 무슨 죄가 있다고 이러오?” 가메다는 경학이 어린것을 보고 돌파구로 삼으려고 들었다. “묻는 말만 사실대로 대답하면 넌 어리기에 내보내겠다. 그래 그 날 산에서 돌멩이를 뿌린 게 누구냐?” “유격대가 아니란데.” 가메다는 채찍으로 경학의 턱을 쳐들면서 턱밑에 다가들며 언성을 낮춰 물었다. “그래 누구냐?” “최구장네 맏손자입꾸마. 유격대도 아닌데 그저 겁이 나서 도망쳐 가지고.” 그 말에 허꺽쇠와 똘만은 적이 놀랍고도 우스워 서로 눈길을 마주쳤다. 가메다는 뒤로 물러서면서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아니야, 아니, 분명 유격대가 돌을 뿌렸어.” 관준이 또다시 건 가래를 떼자 경학은 입을 꼭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실망한 털 한모숨이 가메다는 채찍을 놓고 멍하니 서서 관준과 경학을 쳐다보면서 착잡한 궁리를 하고 있었다. (최구장의 맏손자 근형이란 녀석을 가지고 유격대라고 거짓보고 할까? 진상이 밝혀지는 날에는 군법이 나를 용서하지 않을 거야.) 그는 자기 배를 내려다보았다. (끼무라 대장은 유격대를 붙잡지 못하면 군법에 따라 배를 갈라버리겠다고 했다. 아니야, 이 놈들을 쥐어짜선 아무것도 얻어낼 게 없어. 시간이 없어. 빨리 최구장과 근형을 붙잡아야 돌팔매유격대의 꼬리를 밟을 수 있다.) 털 한 모숨은 몸을 홱 돌리면서 똘만을 날카로운 눈길로 쏘아보면서 명령했다. “허꺽쇠에게 이 놈들을 맡기고 넌 날 따라 최구장 네를 붙잡으러 가자!” “옛!” 가메다와 똘만은 채찍소리와 신음소리가 어울려 울리는 고문실에서 황급히 나왔다. 그들은 그 바람으로 한개 헌병 기병 소분대를 끌고 경성 쪽을 바라고 성난 사자들처럼 덮쳐갔다. 그들은 한길수의 백마를 타고 달아난 돌멩이유격대정황을 알아보려고 백승만이네 여인숙에 들리었다. 그런데 여인숙 마당에 들어가자마자 가메다네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곱사등이 백승만의 시체가 그때까지도 집 마당에 쓰러져있었다. 돌멩이에 맞아 피투성이로 된 낯은 팅팅 부어서 딱 잡아놓은 여윈 돼지대가리 같았다. 말을 탄 일본 헌병들이 들이닥치자 백승만의 여편네랑 기절초풍했다. 똘만이가 말에서 뛰어내려 썩 나서면서 바들바들 떨고 있는 백승만의 여편네에게 질문했다. “고약한 놈들, 이건 누구의 시첸데 아직도 치우지 않느냐? 황군이 왔는데 썩은 냄새를 피우면서.” 백승만의 처는 똘만을 핼끔 쳐다보면서 말했다. “사실, 우리 집 영감인데요. 며칠 전에 유격대에게 맞아 죽었어요. 며칠 전에 산에 장례를 지냈는데 마을의 고약한 놈들이 시체를 파내서 마당에 되가져다 버렸어요.” 그간 조선어를 전문 배워서 진작 알아들은 가메다는 머리를 끄덕거리었다. 뒤이어 그는 말에서 내려 채찍으로 승만의 대가리를 이리저리 건드려보면서 한숨을 후- 내쉬었다. “네 영감이 와루이고도(나쁜 짓)을 많이 했소다. 마을 사람들이 이러는 거야.” 가메다의 말에 승만의 로친은 머리를 땅바닥에 떨어뜨릴 지경이었다. 똘만이 물었다. “유격대들이 어느 쪽으로 갔느냐?” 승만의 처는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 그러자 가메다가 피 묻은 채찍으로 승만의 여편네를 툭툭 건드리면서 지껄였다. “우리 황군은 너희 영감 원수를 갚아 주겠소. 말이 해. 유격대 어디로 갔어?” 유격대에게 경고를 받은 적이 있는 승만의 여편네는 감히 혀끝을 놀리지 못했다. 가메다는 턱에 난 털 한 모숨이를 쓱쓱 매만지다가 서슬 푸른 군도를 쑥 뽑아 승만의 여편네의 목에 척 들이대면서 고함쳤다. “말하지 않으면 죽어, 죽었쏘까! 유격대 어디로 갔어? 엉?!” 승만의 여편네는 그만 풀썩 물앉으면서 입을 열었다. “저기 경성 쪽으로 달아났는데요. 두만강 변으로 갈 거예요." "유격대 몇 사람인가?" 가메다의 호령에 여편네는 흘끔 도적눈을 치뜨다가 내리깔며 목구멍으로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말했다. "서넛 밖에 안됩니다. 우리 영감은 어떤 계집애가 쏜 총에 죽었수다. 그 계집애 우두머린 거 같았소이다." "쏘까? 전번에도 계집이 지휘했어. 그 유격대 계집년을 추포해야 해." 가메다는 군도를 칼집에 도로 척 꽂아 넣고 말에 오르면서 을러멨다. “이후에도 그 놈 돌팔매유격대들이 나타나면 인차 황군에게 고발해라. 그러지 않으면 목이 날아날 줄 알아라.” 한바탕 을러메 놓고 가메다는 똘만이랑 끌고 집 대문을 나가자마자 동북쪽을 바라고 먼지를 새뽀얗게 일구면서 덮쳐갔다. 그들은 말을 타고 한참 달려가다가 경성군 주을면의 한 산기슭에서 웬 괴한이 팔뚝만한 나무를 두 손으로 잡고 어깨로 떠밀어서 툭툭 끊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세상에 저런 괴물도 있단 말인가?” 가메다는 말을 달리다가 말고 그 괴한한테로 말을 탄 채 달려갔다. “어이, 당신 누구요?” 그 괴한은 힐끔 가메다의 낯을 쳐다볼 뿐 의연히 나무를 어깨로 떠밀어 툭 끊을 뿐이었다. “이 놈, 묻는 말이 왜 대답 안 했소까?” “내가 누구든 당신들과 무슨 상관이요?” 똘만이 나서면서 말했다. “네 놈이 언감 누구 앞에서 쌍스럽게 말대답이야?” 가메다가 채찍을 들어 똘만을 제지시켰다. 그러자 똘만은 어조를 좀 부드럽게 고쳤다. “이보. 힘장사, 이분은 우리 황군 헌병대 소대장이란 말이요. 댁은 누구요?” 조금 누그러든 그 말에 그 괴한은 마지못해 대답했다. “난 이 마을에 사는 리무삼이요.” 사실 원삼의 동생 무삼은 어려운대로 고향을 지키려고 춘삼이, 인삼이, 원삼이 세 형님을 따라 간도로 가지 않고 남았던 것이다. “리무삼? 음, 참 대단한 힘장사구먼.” 가메다는 리무삼을 손아귀에 넣고 싶었다. “힘장사, 여기 산골에 묻혀서 고생하지 말고 우리 자위대에 가서 일하지 않겠소? 황금을 푼푼히 줄게.” 리무삼은 허리를 펴면서 가메다를 쳐다보다가 머리를 절레절레 가로 흔들었다. “왜?” “난 여기 산골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사는 게 제일 편안하오. 총을 메고 개 잡은 포수처럼 우쭐거리면서 살기 싫단 말이요?” 가메다는 아주 실망스러워 격장법을 피웠다. “당신 사내대장부 옳소까?" 그는 새끼손가락을 내들어 아래로 내리 찌르는 시늉을 했다. "당신 이거야, 쫄장부!” 리무삼은 가메다를 힐끔 곁눈질하더니 묵묵히 대답하지 않았다. 똘만은 리무삼의 자존심을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 자칫 잘못 건드렸다가는 심기가 곧은 자이기에 끌어당겨오기 힘들 것 같았던 것이다. “저, 한 가지 물어보기요. 며칠 전에 여기로 유골궤짝을 멘 사람을 보지 못했소?” 똘만의 물음에 리무삼은 소잔등 같은 잔등이 흠칫 하는 것 같았다. 그는 며칠 전에 자기 집에서 묵어간 최구장 네를 묻는다는 것을 번연히 알았다. 그러면서도 천천히 몸을 일으키더니 머리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못 봤소.” 가메다는 교활한 눈빛을 번쩍이더니 한걸음 다가서면서 물었다. “그럼 백마를 탄자가 여기로 지나가는 건 보지 못했는가?” 그것은 며칠 전에 백마를 타고 자기 집에 들린 승철이란 자를 두고 하는 말이라는 것이었다. 무삼은 경성 일대에서 소문 높은 날강도 삼형제 백승만, 백승핵, 백승철을 귀못이 박히게 들어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승철은 며칠전에 그의 마을에 나타나 무삼을 보고 처음에는 자기가 날강도들에게 쫓기어 피신해 다닌다면서 먹을 걸 달라고 가련하게 사정했다. 그러나 하루도 아니고 먹을 것이 떨어지면 사흘이 멀다하게 찾아왔다. 나중에 승철은 실상 자기는 유격대에게 쫓기어 달아났다고 이실직고했다. 한참 궁리하다가 무삼은 승철과 같은 날강도는 경성 일대에서 없어져야 백성들이 편안히 살 수 있을 게 아닌가고 생각됐다. “봤소.” “어데 있소까?” “며칠 전에 우리 집에 왔다가 먹을 걸 가지고 밀림 속으로 들어갔소.” “좋아, 참 좋아.” 가메다는 똘만에게 눈짓하더니 꽥 고함쳤다. “이 놈을 묶어라!” 뜻밖에 결박된 리무삼은 어안이 벙벙해 고함쳤다. “왜 이럽니까? 묻는 말을 제대로 대답해도 죕니까? 이건 너무 억울하오.” 그러자 가메다는 살기찬 낯에 냉소를 지으면서 코 수염을 옴짝거리면서 지껄였다. “하하하, 이 시골뜨기야, 네놈은 분명 최구장을 알고 있어." 그 놈은 뒤를 돌아보면서 팔을 홱 휘둘렀다. "이 놈 집으로 가자. 이 놈의 집에 매복해있으면 최구장과 백마를 탄 돌팔매유격대 꼭 나타날 거야!” 가메다 일행은 리무삼을 꽁꽁 바줄로 묶어 앞세우고 산기슭아래 마을로 향했다. 리무삼이 일본헌병들에게 꽁꽁 묶이워 산에서 끌리어내려 오는 것을 보고 무삼의 아내와 자식들은 놀랐다. “아니, 나무하러 간 사람에게 무슨 죄 있다고 이러오?” 키가 작달막한 무삼의 아내가 도도거리었다. 똘만이가 나서면서 무삼의 아내를 활 밀어 재끼고 집안으로 늑대처럼 어슬렁어슬렁 들어갔다. “네 놈 집 식구들은 돌멩이질을 하는 유격대와 내통한 혐의를 받고 있어. 한 놈도 꼼짝 말고 집안에 있어!” 무삼의 일가식솔들은 뜻밖의 봉변을 당했다. 그들은 몽땅 집안에 갇히어 밖으로 얼씬하지도 못하게 됐다. 혹시 뒷간으로 가도 일본 헌병 놈이 따라가 뒷간을 지켰다. 교활한 가메다 놈은 자기는 고방에 들어가 몇몇 헌병들과 함께 편히 자면서 몇몇 헌병들이 교대로 집안과 수림 속에서 보초 서게 했다. 일단 마을 사람들이라도 이 집에 얼씬거리기만 하면 다 잡아가둬 아무도 자기들이 이 집안에 있는 동정을 알지 못하게 했다. 사흘이 지났다. 백승철이 백마를 타고 이 집 마당에 나타날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살기 찬 이 집안에 일본헌병들이 한개 분대나 들어있는 줄도 모르고 승철은 거들먹거리면서 집안을 향해 소리쳤다. “여보게, 무삼이, 먹을 게 다 떨어졌네. 주먹밥을 해놓았는가?” 그자가 지껄이면서 마당에 들어섰을 때다. 몇몇 일본헌병들이 승냥이가 양을 덮치듯이 일제히 덮쳐나가 백마를 탄 승철을 나포해 말 잔등에서 끌어 내리었다. 가메다와 똘만도 뒤따라 뛰어나갔다. 똘만은 백마를 보자 말대가리를 어루만지면서 지껄였다. “허허허, 사랑스런 백마야, 이 백마는 분명 한길수대대장의 백마입니다.” “요로씨이(좋아), 한 대장 백마가 끝내 우리 손에 돌아왔구먼.” 가메다는 버릇처럼 턱의 털을 슬슬 어루만지면서 꽁꽁 묶인 채 꿇어앉은 난쟁이 승철의 턱을 채찍으로 쳐들었다. “이 놈, 유격대 놈아, 네 놈이 담대하기로 우리 한 대장을 살해하고도 시퍼런 백마까지 척 타고 돌아다녀?” 승철이 가메다를 보고 고함쳤다. “뭐? 유격대라니요? 난 유격대 놈들에게 형님 잃고 겨우 목숨을 건져가지고 이렇게 수림속에서 근근득식하면서 피난살이 하는뎁쇼.뭘? 유격대?! 이거 억울해 어떻게 살아랍둥?” 가메다와 똘만은 승철을 들여다보았다. “그래 네놈이 누, 누군데. 유격대와 그런 원, 원수를 졌다고 그, 그래?” 가메다는 급하면 말을 먹는 모병이 또 도졌다. “난 백승철이요. 웅진의 백승만의 막내동생이란 말이오.” “백승만?” 순간 가메다는 눈깔의 흰자위마저 번져지게 희번뜩거리며 승철의 아래위를 훑어보는 것이었다. 백승철은 진달래가 이끈 유격대에 당하던 전후과정을 쭉 이야기했다. “그래, 유격대를 이끈 놈이 확실히 계집이었단 말인가?” “예, 피뜩 그자들이 주고받는 말을 들으니 그 계집 대장은 진달래라고 부르는 거 같았습구마.” “음, 진달래 대장? 그년을 꼭 잡아야 해.” 가메다는 백승철을 풀어주라고 한 후 가을바람에 우수수 울부짖는 산을 멀리 바라보면서 한숨을 땅이 꺼지게 후- 내쉬었다. (또 헛수고를 했어.) 가메다는 몸을 홱 돌리더니 교활한 눈으로 무삼을 쏘아보더니 “저 놈도 풀어줘라.”하고 명령했다. 똘만은 의아해 가메다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가메다는 이렇게 지껄였다. “이 놈은 우직한 놈이야. 금방 백마를 탄 승철이 왔다간걸 고하지 않았던가?” 백승철은 무삼을 원망어린 눈길로 힐끔 쳐다보았다. “알고 보니 영감이 날 물어 먹었구먼.” 그 말에 무삼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황군에게 거짓말을 할 수 있나? 자넨 한뉘 날강도질을 해먹는 자가 아닌가? 언제 자네한테 당할지 누가 아는가? 일찌감치 황군에게 바치는 게 낫지.” 그들 둘이 말싸움을 하는 것을 보던 똘만이 신경질을 썼다. “됐네, 됐어. 이후에 둘 다 우리 황군을 위해 일해 주게나.” 무삼은 묵묵부답 하였으나 백승철은 만면춘풍이었다. “대장님, 권총 줍소. 우리 형님들을 살해하고 우리 집안 여인숙을 망하게 만든 유격대 놈들을 몽땅 잡겠습구마.” 가메다가 피씩 코웃음을 치면서 말 잔등에 올라탔다. “저 놈을 묶어가지고 가자. 저 놈이 우리 황군을 우습게 보는구나. 우리가 잡지 못하는 돌팔매유격대를 저 놈이 혼자 잡아?” 뒤결박을 당하면서 승철은 억울하다고 고함쳤다. “황군을 돕겠다는데 무슨 죄라고 이럽니까? 당신들 꼭 후회할 겁구마.” 그러건 말건 가메다 일행은 백승철을 결박해가지고 동북쪽을 바라고 말을 놓아 산길을 달려갔다. 그 놈들의 뒤로 먼지가 새뽀얗게 일었다.  
83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46) 댓글:  조회:1983  추천:0  2016-07-04
                         3. 면례 형내와 상철이 소 수레를 몰고 질척질척한 길로 걸어 나가고 근형과 최구장이 주위의 동정을 살피면서 앞뒤에서 소 수레를 옹위하여 한 걸음 한 걸음 북으로, 북으로 힘겹게 걸어 나아갔다. 그들은 점심때가 되자 걸으면서 주먹밥으로 대충 끼니를 에웠다. 뒤에 다시 섬나라 오랑캐들이 따라오는가 해 흘끔흘끔 되돌아보기도 했다. 오후에도 그들은 별일 없이 한 삼십 리 길을 걸었다. 서산으로부터 땅거미가 어둑어둑 지기 시작했다. 어둠의 장막이 서서히 드리웠다. 그들은 길옆 마을의 한 집에 렴치를 불구하고 비비고 들어가서 쪽잠을 잤다. 그때 사달이 생겼다. 최구장 옆에서 자는 것 같던 근형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이 놈 새끼 어디 갔을까?” 최구장은 사돈들을 보기 민망스러웠다. “사돈들이 목숨을 걸고 나선 마당에 어디 갔어? 할배 버리고 이놈 호로 자식.” 최구장이 한바탕 욕지거리를 하는 소리를 듣고 상철이 말리었다. “돌아 오겠습지비. 너무 신경 쓰지 맙소.” 최구장은 계속 하얀 머리를 절레절레 가로저으면서 푸념 질을 했다. “도대체 뭘 하러 갔을까?” 사실 근형은 어두운 장막을 헤치면서 고향 운주동으로 돌아갔다. 그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다섯 살에 여읜 어머니를 홀로 고향 운주동 뒷산기슭에 모셔둔 채 만주국으로 빠져 가는 것이 속에 내려가지 않았던 것이다. (안 돼! 자식 된 놈으로 그럴 순 없어. 증조할아버지 유골은 사돈들이 수레로 모셔서 두만강 강변까지 가면 돼! 그새 난 엄마 유골을 파와야 하겠어. 삼촌이랑 새단이랑 일본 놈들의 범 아가리에 물리었는데 찾아보지도 않고 혼자 만주국으로 갈 순 없지.) 이젠 어둠속에서 우뚝 치솟은 기운봉 절벽이 지척에 보였다. 저 멀리 고향 운주동 마을과 산기슭을 감돌아 흐르는 고향의 강 운주하도 희읍스름하게 바라보였다. 이젠 고향의 뒷산 성산도 산발을 따라 희미하게 바라보였다. 엄마가 묻혀있는 선산을 바라보면서 그는 생각을 바꾸게 됐다. “안 돼, 할아버지는 어머니와 증조부를 다 만주국에 모시고 갈수 없다면서 반대할 거야. 어제 저녁에 내가 엄마산소 말을 하자 ‘어떻게 한 번에 증조부와 네 엄마를 만주국에 모시고 가겠는가’고 말씀하신 적이 있지 않는가!” 한참 걷다가 그의 머리를 탁 치는 궁리가 떠올랐다. “옳다. 엄마를 면례해 어머니 고향 업동에 모셔 가자. 그곳엔 외가 집 선산이 있지 않는가!” 근형은 이튿날 동녘하늘이 희읍스름하게 밝아올 때에야 운주동 마을 뒤 선산발치에 이르렀다. 그는 돌 토성 안에 들어선 후 먼저 증조부 산소자리에 가서 묻어 두었던 삽을 손으로 파냈다. “됐어!” 그는 곧추 산중턱에 있는 어머니 산소에 달려 내려갔다. 빗물에 씻긴 엄마 산소 앞에 꿇어앉은 근형은 할아버지한테서 배운 대로 목 놓아 울면서 말했다. “엄마- 젊은 년세에 세상 떠난 엄마, 엄마 산소마저 온전히 모시지 못하는 이 불효한 도리깨아들을 용서하옵소서. 흑흑. 이 못난 자식은 엄마를 만주국에 모시고 가지 못해 외가 집 성산에 모셔가려고 합구마. 날 용서하옵소서.” 인사말을 마치자마자 그는 팔소매로 눈물을 쓱쓱 닦고 일어나 삽으로 산소를 파재꼈다. 어쨌든 날이 완전히 밝기 전에 일을 끝내야 했다. 한참 무덤을 파다가 말고 그는 주위를 살피면서 마을 쪽으로 슬금슬금 달려 내려갔다. 절처럼 쓸쓸한 고향집에 이른 그는 울안에 다른 동정이 없자 인차 집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집안 식구들의 체취가 풍기는 집안을 눈으로 쓸어보다가 그는 바 줄을 얻어다가 안방에 놓여있던 궤를 묶어 둘러멨다. 삽짝문을 열고 바깥동정을 살펴보아도 아무런 인기척이 없었다. 근형은 궤짝을 메고 바깥으로 살금살금 나와 걸음아 날 살려라고 뒷산으로 줄달음쳤다. 그가 산중턱에 있는 엄마 산소에 이르렀을 때는 동녘하늘이 희붐히 밝아왔다. 그는 궤짝을 산소 옆에 내려놓기 바쁘게 엄마 유골을 하나하나 궤안에 담으면서 중얼거렸다. “엄마, 이 불효자식을 용서합소. 엄마 산소를 이 좋은 고향에 모시지 못하고 엄마 고향에 모셔 갑구마. 놀라지 말고 내가 모시는 대로 가깁소. 이제 엄마 고향에 엄마를 모셔가겠습구마. 외할머니랑 함께 편안히 계십소.” 그는 엄마 유골을 다 궤안에 담자 덮개를 닫고 꾸벅꾸벅 절을 아홉 번이나 올렸다. 그리고나서 그는 궤를 업고 수림 속을 꿰지르고 나가 령 길을 잡아타고 남으로 걸었다. 한참 걸으니 동녘하늘에 구름을 꿰뚫고 아침햇살이 몇가닥 내리 비추었다. 그런데 그는 온밤을 자지 못해 곤기가 몰려 오는 것을 어찌하는 수가 없었다. “안 돼! 일본 놈들에게 잡히기 전에 엄마를 엄마 고향에 편안히 모셔가야 해.” 근형은 머리를 흔들면서 도정신하여 운주하 강변까지 다가갔다. 그 곳은 운주동과 한 오리 떨어진데다가 키 넘는 버들 숲이 우거진 강변이여서 보통 일본 놈들의 시선이 와 닿지 않는 곳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근형은 궤를 벗어 조약돌 우에 올려놓고 누런 흙물에 세수를 했다. 순간 곤기가 사라지고 정신이 들었다. 하여 그는 누런 흙물을 둬 모금 들이마시고 궤를 업으려고 두 손을 궤를 묶은 바 줄에 걷어 넣었다. 이때 갑자기 버들 숲에서 돼지 멱따는 소리가 날벼락 치듯이 울렸다. “뭘 하는 놈이야? 꼼짝 말고 손 들엇!” 근형이가 머리를 돌려 피뜩 보니 일본헌병대 옷을 입은 조선 자위대 개다리 놈들이 총을 겨냥하고 버들 숲에서 뛰쳐나왔다. “에쿠! 큰일 났구나.” 근형은 궤를 제꺽 업고 사품 치며 흐르는 강물에 철썩 뛰어들었다. 푱 푱! 총알이 날아와 궤짝에 꼽혔다. 근형은 궤에 머리를 딱 붙이고 헤엄치면서 하류 쪽으로 둥둥 떠내려갔다. 그는 놈들이 자기를 겨냥하기만 하면 물속으로 머리를 숨겼다. 어려서부터 자맥질에 이름 있는 그여서 물속에 갈아 앉아 한 일, 이분은 숨어 있을 수 있었다. 한참 후에 멀리 떠내려가서 물위로 머리를 살며시 내보내 강변 쪽을 살펴보았다. 저 먼 발치에서 놈들끼리 지껄이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아마 총에 맞아 물귀신이 됐을 거야!” “그래! 물 위에 다시 대가리를 내밀지 않는구먼.” “돌아가자! 끼무라 국장에게 유격대 한 놈을 쏴 죽였다고 보고하자.” “허허허, 그래! 우린 상을 톡톡히 타게 됐어!” “우린 탄약을 메고 가는 유격대원을 쏴서 물귀신을 만들었으니까. 하하하.” 근형은 궤짝에 머리를 딱 붙이고 하류 쪽으로 떠내려가다가 놈들이 저 멀리 버드나무숲으로 사라지기를 기다려 궤짝을 묶은 바 줄을 왼손으로 잡고 남쪽 대안으로 헤엄쳐 나갔다. 한식경이나 허우적거려서야 한 사품 치는 운주하를 건널 수 있었다. 궤가 강바닥에 닿자 그는 허리를 펴면서 물속에서 일어나 궤를 안고 무릎을 치면서 찰랑거리는 강물을 헤가르면서 절버덕절버덕 뭍으로 걸어 나갔다. 그는 뭍에 이르자 먼저 궤부터 훑어보았다. “아니, 이게 뭐야? 궤에 총구멍이 숭숭 뚫렸구나!” 그는 바삐 덮개를 열고 궤안을 들여다보았다. 그는 유골을 하나하나 살펴보다가 총구멍이 뚫린 대퇴골을 보고 두 손으로 어루만지면서 엉엉 소리 내 울었다. “엄마! 엄마를 욕보게 한이 불효자식을 죽여 주옵소서! 엄마는 세상 떠서도 머리로 내게 날아드는 총알을 막으셨구먼요. 엄마, 저 일본 놈들에게 천벌을 내립소! 엉엉~” 푱 푱! “서라!” 이때 갑자기 북쪽 대안에서 또 돼지 멱따는 소리가 들려왔다. 근형이 머리를 홱 들어 건너다보니 금방 총을 갈기던 놈들이 쫓아왔던 것이다. 그 놈들은 돌아가려다가 시체를 보지 못해 마음이 놓이지 않았던지 말머리를 돌려 창을 찌르는 교활한 수법을 쓴 것 같았다. 근형은 궤를 둘쳐 업고 줄행랑을 놓았다. 발밑에 총알이 죽음의 노래를 부르면서 푱 푱 박히며 모래가루가 폴싹폴싹 튕겨 올랐다. 귀전에서도 총알이 무섭게 비명을 지르면서 스쳐지나갔다. 푱 푱! 그가 논밭까지 달려갔을 때다. 총알이 날아와 머리에 쓴 삿갓마저 구멍을 뚫었다. 삿갓이 총알에 맞아 발부리에 떨어져 나뒹구는 것도 돌볼 새 없었다. 근형이 줄행랑을 놓는데  총소리는 점점 더 자지러졌다. 그는 황급히 논 둔덕 밑에 살짝 엎드렸다가 엉금엉금 기면서 궤를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끌고나갔다. 개다리들은 논 둔덕 위에 드러난, 움직여가는 궤짝 모서리를 보고 왝왝 소리칠 뿐이었다. 나중에 그 놈들은 강을 헤엄쳐 건너와 추격할 엄두도 못 내고 닭을 쫓던 개가 지붕을 쳐다보는 격이 되고 말았다. 한참 후 개다리들은 새로 놓은 운주교를 건너와서 쫓아오려고 상류 쪽으로 뛰어갔다. 그 틈을 타 근형은 일어나 또 줄행랑을 놓았다. 운주하를 건넌 다음에는 별 곡절 없었다. 하루 동안 걸어서 해질녘에는 무난히 업동에 있는 외가 집 선산에 갈수 있었다. 그는 온종일 쌀 한 알 먹지 못하였는지라 너무 배고파 외삼촌 네 집에 들렀다. 큰외삼촌 허득필과 둘째외삼촌 허명철, 그리고 이모 명실은 모두 놀랍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여 야단쳤다. “아니, 이게 무슨 일이냐?” 큰외삼촌은 근형의 잔등에서 궤를 받아내려 놓으면서 눈이 떼꾼해졌다. 근형에게서 자초지종을 들은 외삼촌댁은 혀를 끌끌 차면서 바삐 저녁밥상을 차려 놓았다. 근형은 허기 찬 나머지 볼이 메지게 기장밥을 먹었다. 그런데 빈속에 너무 급히 밥을 먹어 밥에 취해 까무러쳐 쓰러졌다. 코를 드렁드렁 고는 근형을 보고 득필과 명철은 머리를 절절 저었다. 큰외삼촌네 맏아들 성룡과 딸애 보금은 고모사촌 형님과 오빠가 초면인지라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이모네 둬 살 되는 아들 차종범은 형이 죽었는가 하여 “형님, 형님!”하고 애타게 부르면서 흔들었다. 이튿날 근형은 외가집의 도움을 받아 어머니 유골을 어머니 고향 업동 뒷산에 편안히 모셨다. 근형은 어머니 산소에 꾸벅꾸벅 절을 하고나서 무릎을 꿇고 한바탕 대성통곡 쳤다. “엄마, 이젠 눈을 감으시고 편안히 주뭅소. 이곳엔 일본 놈들이 알지 못하는 외가 집 선산입구마. 지척에서 엄마를 모시지 못하는 이 불효자식을 용서해줍소. 이제 만주국에 가면 언제 올지 모르겠습구마. 언젠가는 조선 강산에서 일본 놈들을 몰아내고 강산을 찾은 다음엔 꼭 다시 찾아와 잘 모시겠습구마. 서른 살도 안 되는 새파란 연세에 돌아가신 우리 불쌍한 엄마, 흐 흐 흑, 아이고, 불쌍한 우리 엄마, 엄마를 두고 살길을 찾아가는 이 도리깨아들을 용서해주옵소서. 다행히 외가 집이 있으니 대신 잘 모시리라고 마음 놓고 갑구마. 이제 기회만 있으면 고향에 와서 엄마를 찾아 뵙겠습구마. 엄마! 흑흑흑.” 큰외삼촌 허두필이 땅을 치면서 대성통곡치는 근형을 일궈 세웠다. “됐다. 우리가 네 엄마 산소를 잘 보살필게. 근심하지 말고 떠나거라.” 근형은 이후에 찾아와도 엄마 산소를 쉽게 찾아 볼 수 있게 비석처럼 모와 날이 선 둬자 길이 되는 바위 돌을 들어다가 산소 앞에 세워놓았다. 그리고 산소자리를 잘 기억해두려는 듯이 주위를 죽 돌아보았다. 업동 북산 양지바른 곳에 자리 잡은 외가 집 선산은 정말 풍수가 좋은 명당자리였다. 근형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가슴에서 큰 맷돌을 내려놓은 듯이 시름은 놓은 홀가분한 심정이었다. 그는 외가 집에 돌아가 외삼촌댁에게서 주먹밥을 한주머니나 얻어가지고 그 길로 북쪽을 향해 떠났다. 작별하는 외삼촌은 눈물을 머금고 어깨를 들먹이는 근형을 안고 어루만지면서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근심 말고 떠나거라. 종종 인편에 소식이나마 전해 달라.” “삼촌네도 여기 맞갖잖으면 만주국에 들어오오. 우린 아마 명옥이 시집간 함흥촌에 가서 살 거 같소.” “응, 그래. 우리도 조만간에 일본 놈들의 성화에 여기서 살 것 같지 못하다. 그때 함흥촌에 가든지 하지. 일본 놈들을 조심해 잘 가거라.” 근형은 무거운 발걸음으로 어머니 고향마을을 떠났다. 저 마을 동구어귀에서 외가 집 식구들은 석별의 정을 금치 못하면서 눈물을 흘리면서 되돌아보는 근형에게 끊임없이 손을 저었다.                   4.친일주구의 끝장        근형은 할아버지가 자기를 애타게 기다릴 것 같아 바지가랭이에 휘파람소리 나게 발걸음을 다그쳤다. 그는 일본 놈들이 지키는 운주교를 건널 엄두도 내지 못하고 황급히 사품 치는 운주하에 뛰어들었다. 한참 소용돌이치는 강물 속에서 허우적거리면서 개발헤엄을 쳐서야 겨우 운주하를 건넜다. 닭 알만큼 한 조약돌을 보는 순간 그의 뇌리에는 돌팔매로 일본 놈들을 겁 먹여 도망치게 하던 생각이 번개같이 스치고 지나갔다. (옳지, 일본 놈 새끼들이 달려들면 조약돌로 대갈통을 까버리고 도망치자. 그 놈들은 돌멩이만 날아가면 유격대가 왔는가고 질겁하지 않는가. 허허허. 그게 묘수로다.) 그도 돌팔매질에 재미들었다. (진달래 고모만큼 돌팔매질 하면 얼마나 좋겠니. 흥!) 그가 한창 조약돌을 주어 호주머니에 넣을 때었다. 갑자기 검둥이가 뛰어와 끼깅거리면서 앞다리를 들고 주인의 품에 매달리며 어리광을 부리는 것이 아니겠는가. “아니, 검둥이야, 넌 어데 갔다가 불쑥 나타났니?” 근형은 큰 어선을 만난 것 같았다. 검둥이는 주인의 말을 알아들었던지 앞에서 달리다가 주춤 멈춰서더니 되돌아보면서 꼬리를 휘휘 저었다. 근형은 다가가 검둥이의 대가리를 툭툭 다독여 주고 나서 조약돌을 넣어서 묵직한 자기 젖은 옷을 검둥이 잔등에 달아맸다. 그리고 양손에 닭 알만큼 한 조약돌을 서너 개씩 골라 쥐고 뒷산으로 씨엉씨엉 발걸음을 다그쳤다. 그가 검둥이를 앞세우고 운주동 뒷산기슭에 올랐을 때였다. 갑자기 검둥이가 왕왕 짖어댔다. 근형이 숲속에 납작 엎드려 길을 내려다보니 말발굽소리가 어지럽게 박근해왔다. 뒤이어 털 한 모숨이가 한길수가와 수길 등 놈들을 한 무리 이끌고 뛰어왔다. 분명 놈들은 운주하를 건넌 근형을 발견한 것이 틀림없었다. “에크, 저놈들을 어쩌느냐?” 근형이 중얼거리는데 검둥이가 뒤에 대고 “왕왕!”짖어댔다. 근형이 황급히 몸을 홱 틀며 돌아섰다. 뒤에서 외눈깔백이 야마모도 소장 놈과 코 수염 쟁이 끼무라 국장 놈이 말을 타고 시퍼런 군도를 빼들고 숱한 졸개들을 휘몰아 덮쳐왔다. 근형은 숱한 놈들을 당할 수 없는지라 검둥이를 보고 짖지 말라고 주둥이를 틀어막고 나무숲속에 몸을 숨겼다. “금방 개 짖는 소리를 들었지? 분명 이 뒷산에 올랐어! 샅샅이 뒤져!” 끼무라 국장 놈이 돼지 멱따는 소리를 쳤다. 근형은 숨을 딱 죽이고 슬슬 기여 머루덤불속으로 들어가 숨었다. 이때 한길수란 놈이 외눈깔을 해가지고서도 권총을 뽑아들고 두리번거리면서 이쪽으로 어슬렁어슬렁 다가왔다. 검둥이가 한길수를 보고 벌떡 일어나면서 짖으려고 했다. 근형이 검둥이의 주둥이를 꽉 쥐고 눌러 앉혔다. 그러나 때는 늦었다. 푱! 푱! 한길수는 머루덤불 속에서 버스럭거리는 소리를 듣고 총을 쏘았다. “유격대 놈들이 여기 머루덤불속에 있다! 붙잡아라!” 근형은 들킨 것을 알고 몸을 일으키면서 조약돌을 날렸다. 딱! 면바로 외눈깔배기 한길수놈의 낯빤대기에 맞았다. “앗!” 한길수놈은 말 잔등에서 퉁 떨어졌다. 질겁한 그 놈은 말을 버린 채 도망치면서 되돌아보지도 않고 뒤에 대고 헛총을 갈겼다. 졸개들도 다른 머루넝쿨에 대고 헛총을 갈기면서 덮쳐들 엄두도 못 내었다. 그 새 백마는 어디로 달아났는지 꼬리도 보이지 않았다. 이때 뒤쪽에서 야마모도소장과 끼무라 국장의 무리가 덮쳐왔다. 한길수는 주춤 멈춰 서서 다시 이쪽 머루 덤불 쪽을 권총으로 가리켰다. “저 머루덤불속에 있습니다.” 끼무라는 한길수를 쏘아보면서 욕지거리를 했다. “한 대장, 유격대 저 머루덤불속에 있는데 왜 이쪽으로 도망쳤쏘까?” 끼무라 국장 놈은 시퍼런 군도로 머루덤불 쪽을 가리키면서 고함쳤다. “샤게끼(사격)!” 땅! 땅! 땅! 물샐 틈 없이 날아간 총알에 한 오십 미터 떨어진 곳에 덮여있는 머루넝쿨이 마구 끊어져 내려앉고 잎사귀가 튕겨났다. “깨갱!” 개 비명소리가 들리었다. “도쯔게끼(돌격)!” 끼무라 국장이 군도를 휘두르면서 명령했다. 놈들은 일제히 머루넝쿨 쪽으로 덮쳐갔다. 그런데 머루넝쿨을 샅샅이 뒤져도 사람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이게 웬 일인가?” 끼무라 국장은 한길수를 쏘아보면서 투덜거렸다. “당신 눈에 똥이 폈쏘까? 머루넝쿨속의 개를 보고서도 유격대인가고 소리쳤쏘까?” "아니, 분명 머루덤불 속에서 인기척이 났는뎁쇼." "헛소릴 작작 쳐! 금방 개새끼 깨갱거리는 소릴 듣지 못했어? 눈이 멀었지. 귓구멍도 멨어?" 끼무라의 비난소리에 한길수는 피 묻은 볼을 가리키면서 자기 판단을 고집했다. “아닙니다. 끼무라 국장님, 이걸 보십시오. 난 분명 유격대가 뿌린 돌멩이에 맞았습니다.” 끼무라 국장은 졸개가 머루넝쿨 속에서 들춰낸 피 묻은 조약돌 서너 개를 가져오라고 하여 오른손으로 만지작거렸다. 그는 오른손으로 코 수염을 매만지더니 혀를 날름거렸다. “음, 소까(그래). 분명 유격대야! 그 놈은 총에 맞았어! 빨리 수색해!” 야마모도 소장 놈이 옆에서 의문스러워했다. “금방 개가 깨갱거리는 소리 들렸소. 혹시 개가 총에 맞지 않았을까? 개가 버스럭거리는 걸 가지고 한 대장이 놀라 소리친 게 아닌가?” 끼무라 국장이 거드름을 피우면서 고함쳤다. “나니(뭣이)? 아니야, 아니? 개가 돌멩이를 우리 한 대장한테 뿌릴 수 있쏘까? 한 대장 백마도 감쪽같이 잃어졌어! 개가 백마를 타고 달아날 수 있쏘까? 유격대는 백마를 타고 달아났어! 잔말 말고 빨랑빨랑 이 산을 샅샅이 수색해!” 야마모도도 머리를 끄덕였다. 놈들은 머루 숲을 꿰뚫고 나가 산중턱 수림 속을 수색하면서 나갔다. 사실 근형은 한길수가 말을 버리고 달아나는 순간 백마를 제꺽 타고 수림 속으로 도망쳤던 것이다. 그런데 검둥이가 뒤에서 주인을 엄호하느라고 머루덩쿨 속에서 조약돌주머니를 멘 채 맴돌면서 뒤에서 쫓아오는 놈이 있으면 물어 메치려고 하다가 총에 엉덩이를 맞았던 것이다. 한참 백마를 타고 달리던 근형이 뒤를 흘끔 보니 검둥이가 따라 달려올 뿐 놈들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말에서 내려 검둥이의 대가리를 쓰다듬어주다가 검둥이의 엉덩이 털에서 피가 낭자하게 흐른 것을 발견했다. “아니, 이게 웬 일이냐?” 근형이가 살펴보니 검둥이가 엉덩이에 총알을 빗맞고 피를 흘리고 있었다. 다행히 조약돌을 호주머니에 넣은 웃옷을 달아맸기에 총알이 조약돌에 맞으면서 빗맞은 것 같았다. “에이, 너를 하마터면 목숨 잃게 할번 했구나.” 그는 매부 상순에게서 배운 대로 괴춤을 까고 검둥이의 엉덩이에 대고 소변을 보았다. “검둥이야, 내 매부 알려준 약이란다. 오줌은 지혈시키고 소염시킨단다.” 검둥이는 꼬리를 휘휘 저으면서 주인의 소변을 몸에 받았다. 일을 마치자 근형은 검둥이를 안고 말 잔등에 뛰어올랐다. “저놈이야! 백마를 탄 저 놈을 나포햇!” 뒤를 보니 한길수무리가 추격해오고 있었다. 근형은 검둥이를 안은 채 고삐로 말 잔등을 힘차게 갈겼다. “쨔!” 백마는 주인을 갈았지만 말을 잘 들었다. 백마는 네 굽을 안고 산기슭 수림 속으로 달아 들어갔다. “땅!” “땅!” 갑자기 뒤에서 자지러진 총소리가 울렸다. 함성소리와 비명소리도 들리었다. 근형이 뒤를 돌아다보니 산기슭을 에돌아간 수림 속 길에 한길수의 무리가 보이지 않았다. (웬 일일까?) 근형이 의아해하면서 수림 속 오솔길 갈림길에 이르렀을 때였다. 앞에서 달리던 검둥이가 근형의 팔소매를 물고 끼깅거리다가 산중턱 수림 속을 향해 “왕왕!” 짖는 것이었다. “이 놈 개새끼, 갈 길이 바쁜데 왜 이래?” 손바닥으로 대가리를 슬쩍 때려도 깨갱거리면서도 막무가내였다. “무슨 일이 있어?” 검둥이는 몸뚱이를 꿈지럭거리다가 근형의 팔에서 빠져나가 땅바닥에 풀썩 뛰어내리더니 수림 속을 향해 “왕왕!” 짖어댔다. 그러고는 꼬리를 휘휘 저으면서 근형을 쳐다보았다. 심상치 않음을 느낀 근형은 놈들을 멀리 따돌린 것을 보고 검둥이가 달리는 쪽으로 백마를 타고 따라 뛰어갔다. 한참 뒤따라가 보니 웬걸 그 곳에 셋째삼촌과 넷째삼촌 그리고 새단이 피 못이 된 채 쓰러져 있지 않겠는가. “아니,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새단이!” 근형은 궤를 내리워 놓고 새단의 어깨를 쥐여 흔들었다. 그 소리에 경민과 경욱이 천천히 눈을 떴다. “으흐흑, 근형이구나. 네가 어떻게?” 넷째 삼촌 경민이가 끊어진 오른손을 잡고 가까스로 일어나 앉으면서 기뻐 어쩔 줄 몰라 했다. “아니, 삼촌, 어떻게 돼 이런 수림 속에 누워 있습둥?” 넷째삼촌 경욱이 벌떡 일어나 앉으면서 앞질러 대답했다. “어제 저녁에 진달래랑 유격대들이 우리를 구해냈다. 야마모도랑 우리를 서대문형무소에 끌어가라고 헌병 놈들에게 명령하더라. 우리는 뛸 데 없이 죽었구나 하면서 며칠 전에 남쪽으로 정처 없이 끌리어갔다. 그런데 업동을 지나 마천령을 넘을 때 난데없이 돌멩이가 쉭쉭 날아와서 헌병 놈들이 넷이나 쓰러지지 않겠느냐? 뒤이어 길 양옆의 수림 속으로부터 십여 명 말을 탄 복면괴한들이 덮쳐 나와 나머지 두 놈을 비수로 단칼에 목을 썩뚝 베 버렸지. 복면한 검정헝겊을 푼걸 보니 진달래중대장이랑 최동욱 중대장이랑 데리고 온 항일유격대 대원들이 아니겠느냐? 그들에게 구원돼 어제 밤으로 여기까지 왔단다.” “그래 진달래고모랑 어데 있소?” 근형이 묻자 경욱은 “산 아래로 우리 식구들을 데리러 갔다. 그들은 우리가 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장백산으로 들어가려다가 말고 말머리를 돌려 마천령 부근에 매복해있다가 우리를 구원하였단다.”라고 대답했다. 이때 경민이가 산 아래를 가리키면서 “저기 온다! 진달래 여동생이랑 온다.” 산 아래를 보니 진달래랑 셋째삼촌네 맏아들 근활(봉문)이랑 넷째삼촌네 근호랑 데리고 왔다. 그런데 놀랍게도 결박한 한길수란 놈을 말에 태워가지고 스적스적 끌고 오지 않겠는가. 근형은 한길수란 놈을 보자 눈에 불티가 튕기었다. “작은고모, 저놈을 당장 처단하오. 저놈한테 아까운 말을 태울게 있소?” 근형은 검둥이 잔등에 처맨 옷에서 조약돌을 꺼내 연속 한길수놈에게 뿌렸다. 딱! 딱! 한길수 놈은 조약돌에 대갈통을 맞고 “아이쿠!” 비명을 지르면서 말 잔등에서 거꾸로 떨어졌다. 진달래는 유격대원들에게 명령했다. “저 섬나라 오랑캐 개다리 놈을 나무에 묶어라!” 유격대 대원들은 피투성이로 된 한길수 놈을 피나무에 묶어놓았다. 진달래는 모젤권총을 빼들고 한길수 놈한테로 다가갔다. “늙다리 개다리 놈아, 네 놈도 조선 사람인데 왜 내 나라 강토를 짓밟는 일본 놈들의 개가 돼 우리 조선 형제자매들을 못살게 구는 거냐? 네 놈의 죄악은 만 번 죽어도 마땅해!” 진달래가 모젤권총을 들고 방아쇠를 당기려 할 때였다. 한길수 놈이 피범벅이 된 우멍한 눈을 가슴츠레 뜨고 지껄였다. “총만 쏴 봐라! 끼무라 국장과 야마모도가 당장 뛰어와 네 놈들을 한 놈도 없이 소멸해버릴거야!” 진달래는 권총 끝으로 한길수 놈의 턱을 쳐들고 암범처럼 호통 쳤다. “끼무라 놈 보고 오라고 해. 몽땅 네 놈처럼 죽여 버릴 테다! 금방 보았지? 산기슭 수림 속 길에서 그 놈들이 우리 용맹한 장백산 항일유격대에 혼쭐난 걸. 우멍한 개 눈깔로 똑똑히 보았지? 그 놈들이 도망치지만 않았으면 우리 돌멩이에 몽땅 죽었을 게다!” 원래 진달래랑 경민과 경욱의 식솔을 데리고 산기슭을 에돌아 빠진 수림 속 길에서 금방 산에 올랐을 때였다. 야무진 총소리와 함께 앞에서 근형이가 개를 안은 채 말을 타고 도망치는 것이었다. 뒤에서 한길수와 끼무라 국장 놈이 말을 탄 한 무리 일본 헌병들과 개다리들을 끌고 뒤쫓아 오고 있었다. 그리하여 진달래 중대장은 최동욱 중대장과 함께 산기슭 수림 속에 숨었다가 일본 놈들과 한길수 등 개다리들에게 매복습격 전을 들이댔던 것이다. 그들은 제일 먼저 달려오던 한길수 놈에게 오라를 뿌려 목을 걸어 생포했다. 최동욱 중대장은 유격대원들을 지휘해 일제히 보총과 권총으로 사격해 뒤따르던 놈들을 대여섯 놈 살상했다. 특히 진달래 중대장이 뿌린 조약돌에 몇 놈이 보기 좋게 대갈통이 터졌다. 한길수 놈도 오라를 받고서도 도망치려다가 진달래가 날린 조약돌에 얻어맞고 쓰러졌다가 유격대원들에게 생포됐던 것이다. 진달래 중대장은 권총으로 한길수를 겨누었다. “오늘 우리는 일본 놈들에게 수난당한 백의동포들을 대표하여 네놈을 처단한다!” 근형이 검둥이의 잔등에 매단 옷에서 큼직한 조약돌을 꺼내들면서 말했다. “작은고모, 아까운 총알을 쓸게 있소. 아예 조약돌로 이 놈의 대가리를 박산내기요.” “좋아!” 진달래는 권총을 옆구리에 차고 조약돌을 쥐여 한길수의 대가리에 뿌렸다. 딱! “앗!” 한길수는 비명을 질렀다. “이건 네놈에게 수난당한 우리 큰아버지랑 새단 조카랑 원수를 갚는 게다.” 이번에는 근형이 조약돌을 뿌렸다. 딱! “아이고! 날 더 욕보이지 말고 총을 놔라!” 조약돌에 턱을 빗맞은 한길수가 애걸복걸했다. “네 놈을 그렇게 쉽게 죽게 할 순 없어!” 경민과 경욱 그리고 새단이랑 조약돌을 쥐고 우르르 쓸어왔다. 근활과 근호도 돌멩이를 들고 달려들었다. 딱! 딱! 딱 따 닥! 따다닥! 숱한 조약돌이 원한을 안고 한길수에게로 사납게 날아갔다. 한길수의 대가리는 성한 곳이 없었다. 나무 아래에는 한길수의 더러운 피가 낭자하였고 피 묻은 조약돌이 널려 있었다. 이젠 비명소리도 없고 피가 낭자한 한길수 놈의 대가리도 앞으로 축 늘어뜨려졌다. 진달래는 숨진 한길수 놈을 나무에 비끌어 매 놓은 채 말 잔등에 올라탔다. 한길수 놈을 처단한 후 진달래가 거느린 유격대는 네 개 소조로 나뉘어 최구장의 일가식솔들을 만주국으로 호송하는 길에 올랐다.  
82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45) 댓글:  조회:1975  추천:0  2016-06-24
                      제16장 조상들의 산소 1.외로운 무덤 골짜기 어디에선가 샘물이 졸졸 흐르는 소리가 귀맛 좋게 들리었다. 일본 놈들한테 빼앗긴 고향 산천에는 의연히 샘물이 흐르고 있어 다행이었다. 경인은 수림이 꽉 뒤덮인 산속에서 헤매다가 골짜기에 내려가 끝내 퐁퐁 솟구치는 샘물을 찾아냈다. 그는 두 손으로 샘물을 퍼 마셔 타는 목을 축이었다. 그런데 어디에선가 뭘 파는 듯 괭이소리 들렸다. 경인은 골짜기에 듬성듬성 난 쑥대를 헤가르면서 소리 나는 쪽으로 슬금슬금 다가갔다. “아니, 아버지와 근형이 이런 산골짜기에 뭘 팔가?” 경인은 허리를 펴고 황급히 아버지한테로 달려갔다. “아버지, 큰일 났습구마. 경민과 경욱이 몽땅 일본 놈들에게 잡혀갔습구마. 경민은 야마모도란 놈이 휘두른 검에 왼손이 날아났습구마." “뭐라고?!” 최구장은 맥없이 비 물에 괴죄죄한 땅바닥에 풀썩 물앉았다. “그 놈들과 정말 한 하늘을 쓰고 못살겠구나.” 근형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최구장은 근심이 태산 같았다. “에이, 손비는 어쩔까? 하혈이 심한데 관준네 약도 못 쓰고. 경민은 검에 찍혀 끊어난 팔을 어쩌니? 신설집 병관네 약을 썼으면 팔이 썩지 않겠는데.” 최구장이 한숨을 쉬면서 하는 말에 경인은 다소 미심쩍은 듯이 물었다. “아버지, 그 집안이 정말 그렇게 용한 명의내력입둥?" 최구장은 머리를 끄덕였다. “그래. 한번은 한 처녀애가 두 손을 머리 위에서 내리우지 못해 어미와 함께 신설집에 찾아왔댔어. 건데 병관 영감이 그 처녀애를 보자고 가까이 오라 손짓하더니 불시에 치마를 활 들어 올렸단다. 속치마도 입지 못한 그 처녀애는 부끄럽고 놀라 두 손을 내려 치마를 붙잡더래. 그래 두 손이 자연스레 내려왔대.” “어허, 거 정말 용하구만요.” 경인은 혀를 내두르며 감탄했다. 최구장은 근형이가 잡은 괭이자루를 잡고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경인과 근형이 최구장을 부축했다. “아버지, 여기다 움을 파서 뭘 합니둥? 만주로 가깁소. 일본 놈들의 등살에 이런 동굴에서 못 삽구마. 황차 장마철이지.” 최구장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나도 만주로 당장 가야 한다는 걸 알아. 허나 성남에 묻힌 아버지 산소를 홀로 둔 채 차마 떠나가지 못하겠다. 아버지 고향 개성에 모셔가든지 만주국에 모시고 가든지 해야 하겠어 경인은 머리를 홰홰 가로저었다. “지금 일본 놈들이 우릴 죽이지 못해 헤맵구마. 잡히면 어쩌자고 그래요?” 근형도 괭이를 내려놓으면서 삼촌의 말에 찬동해 나섰다. “옳습구마. 할아버지 산소를 가만히 남겨두고 가면 누가 다치겠습둥? 고향이나 만주국에 모시고 가기보다 계속 여기 모시는 게 어떻습둥?" 최구장은 먹장구름이 뒤덮인 먼 북녘하늘을 바라보면서 장탄식했다. “얘들아, 아무리 험난한 일이 있더라도 조상들의 산소는 잘 모셔야 한다. 조상이 없이 우리가 있을 수 있냐? 조상들을 잘 모시면 덕을 쌓고 후대들도 복을 받는 법이야. 산소에 가토를 많이 하면 후대들이 번성하고 풀이 무성하면 재앙을 입게 된다는 말이 있어. 아버지를 어떻게 이 일본 놈들이 득실거리는 눈물 젖은 땅에 외롭게 남겨두고 가겠느냐? 아버지를 아버지 고향인 개성에 모시자면 기차를 타면 한 이틀 가면 당도할게야. 그러나 이젠 일본 놈들의 눈에 나서 기차에 모시고 갈수 없게 되였구나. 만주국에 모시고 가는 게 옳아. 만주국에 가서 아버지 산소를 잘 모시는 게 옳다. 얘들아, 아버지 유골을 파서 그곳까지 메고 갈만하겠느냐?” 경인과 근형은 머리를 끄덕이더니 지지해 나섰다. “우리 번갈아 할아버지 유골을 업고 만주국까지 가겠습꾸마.” 최구장은 아들과 장손의 어깨를 툭툭 치였다. “참 장하구나. 너희들은 정말 효자현손들이야. 경인은 더 지체말구 처자들을 데리고 먼저 만주국에 들어가라. 우리 들어가면 살 집이나 봐둬라. 내 근형과 함께 손비도 구해내고 집도 팔아 뒤처리해가지구 아버지를 모시고 들어갈게.” “어찌 아버지와 형제, 조카들을 사지에 남겨두고 내 혼자 살겠다고 몸을 빼겠습니까?” 경인이 떠나갈 념을 하지 않자 최구장은 화를 버럭 냈다. “네 이 놈, 아버지 말을 거역해? 만주에 가는 게 나를 생각하는 게야.” 경인은 아버지에게 절을 꾸벅 올리었다. “아버지, 몸 조심합소. 만주국에서 다시 만납시다.” 경인은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신설집으로 갔다. 그는 신설집에서 아내와 아들딸들을 데리고 정든 고향을 떠났다. 고향을 떠나면서 그는 먼 산기슭을 감돌아 흐르는 고향의 강 운주하를 돌아다보았다. 순간 운주하 백사장에서 땀을 흘리면서 검무를 추던 일로, 빨래터에서 어금을 만나던 일로, 버들강변에서 어금과 연애하던 일이 삼삼히 떠올랐다. 그는 저도 몰래 코마루가 시큼해나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열 살도 되나마나한 근현은 종알거리면서 물었다. “아버지, 우린 어디로 가는가요?” “이밥도 배불리 먹는 살기 좋은 곳으로 가지.” 근환은 새까만 눈을 한번 깜짝하지도 않고 아버지를 쳐다보면서 물었다. “이래 가면 언제 우리 집으로 돌아오는가요?” 그 천진한 물음에 경인은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그저 한숨만 땅이 꺼지게 내쉬었다. 한참 후에야 그는 무겁게 입을 떼였다. “이담 너희들이 크면 꼭 고향 집으로 찾아오너라.” 근환의 물음은 끝이 없었다. “그럼 우리 클 때까지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는가요?” “그거 몰라? 이담 우리 크면 집으로 찾아오라고 하잖아.” 옆에서 근원이가 아버지 손을 쥐고 걸으면서 아는 척 하면서 끼어들었다. “안 돼, 난 운주하에서 고무신 배랑 띄우면서 놀겠는데. 언제 그렇게 오래 있다가 오겠니?” 근현도 끼어들어 종알거렸다. “난 배불리 먹기만 하면 인차 돌아올 테야. 운주하에서 모래에 물도랑이랑 파고 물레방아를 돌리면서 놀고 싶어.” 철부지 애들 말에 어금은 하염없이 눈물을 줄줄 흘렸다. 그들의 섭섭한 기분을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경학은 떠나가는 그들의 뒤에서 빈정거렸다. “쳇, 별게 다 공밥을 처먹구서 약값도 내지 않고 달아나! 흥!” 옆에 서 있던 형내가 경학을 쏘아보았다. “그럼 못 써. 저 분은 내 스승님의 둘째아드님이시어.” 그래도 경학은 까만 눈을 깜빡거리면서 툴툴거렸다. “형님 스승의 아들이면 어때? 나하고 무슨 관계있소. 우리 집 쌀독만 바닥이 날게 아니요?” 형내는 더는 참지 못해 경학의 귀 쌈을 찰싹 갈겼다. “인정머리 없는 놈 새끼야, 저분은 우리 칠촌고모부야. 팔촌이 한 구들이라는데 친척도 모르는 새끼, 다시 개소릴 쳤다간 없어! 알아?!” 경학이 볼을 싸쥐고 엉엉 울면서 집안으로 들어가자 상철과 관준이 형내를 나무랐다. “말할 거지 왜 손찌검이냐?” 경인은 뒤에서 하는 수작들을 다 들었지만 못들은 척 하고 길만 다그쳤다. 최구장은 동굴을 파다 말고 새단의 약 첩을 달일 데 없는데다가 배고파서 수림에서 내려와 신설집으로 들어왔다. 마당에서 조약돌로 차기를 놀던 경학과 광학이 보기 싫어 쓴 눈길을 보냈다. “별 것들이 다 밥 축을 내러 온다.” 형내가 무섭게 경학을 쏘아보았다. 그러자 경학은 겁나 혀를 홀랑 내밀더니 삽작문 밖으로 달아났다. 형내는 바삐 마루에서 땅바닥에 내려나가면서 인사했다. “스승님, 모처럼 우리 집을 찾아오셔서 반갑습구마.” “고맙네.” 이때 상철과 관준이 마중나와 반갑게 인사했다. 최구장이 장손을 데리고 마루에 들어서자 상철의 처가 헤헤 웃으면서 함지에 발을 씻을 물을 담아 들여왔다. “발에 묻은 싯누런 흙을 씻고 들어가시우. 구들을 다 어지럽히겠습구마.” 상철은 안해한테 흘끔 눈을 흘기더니 상을 찡그렸다. “사람이 부실한데는 약이 없어. 거 무슨 소리오.” 상철은 미안해 허리를 굽히면서 “그대로 방에 들어갑소. 괜찮습꾸마.” 하고 말했다. “아니, 며칠 만에 발을 씻는데 좋지” 최구장과 근덕은 널찍한 널마루에 앉아 함지 물에 발을 담그고 말끔히 씻었다. 뒤이어 최구장은 제일 위방에 들어가고 근덕은 형내와 함께 아래 방에 들어갔다. 그날 저녁에 최구장과 근덕은 한 끼 잘 대접받고 잠자리에 들었다. 밖에서는 번개가 번쩍이면서 집안까지 환하게 비추었다. 뒤이어 집 천정이 날려갈듯 천둥소리가 하늘땅을 진감했다. 최구장은 종내 잠이 오지 않았다. (일본 놈들에게 잡히는 날엔 아버지를 만주에 모시고 가지도 못해! 자칫하면 아버지 산소마저 욕보일 수도 있잖아. 하루 급히 아버지를 모시고 만주에 가야 해!) 그는 막걸리를 마신 관준이 코를 드렁드렁 고르는 소리를 듣고 살며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아래 방에서 근형도 잠을 이루지 못해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다가 위방에서 누군가 밖으로 나가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소변도 볼 겸 스르르 방 미닫이를 열고 밖으로 나갔다. 번쩍 하는 번개 불을 빌어 허리를 구부정하고 삽작문을 나서는 분이 바로 할아버지라는 것을 알았다. “할아버지!” 근형이 소리치면서 삽짝문을 나섰다. “쉿- 남들을 깨우겠어.” 최구장은 손을 휘저어 재차 소리 치려는 손자를 제지시켰다. 근형은 의아해 “할아버지, 야밤삼경에 어디로 갑둥?” 하고 나지막한 소리로 물었다. “넌 곤하겠는데 집에 들어가 쉬렴.” “아니, 나도 가겠습꾸마.” 최구장은 한숨을 길게 내쉬더니 머리를 끄덕였다. “그래, 난 아버지를 하루속히 파 모시고 만주국으로 가야겠어. 나온바 하곤 이 밤으로 아버지를 파내자. 소낙비 내리기에 일본 놈들이 찾아올 근심은 없을 거 같애.” “예? 이젠 오래잖아 동이 트겠는데요.” 최구장은 먼동이 아직 트이지 않은 동녘하늘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그걸 가릴 새 있냐? 일본 놈들에게 잡히면 아버지를 만주에 모시고 가지 못할게 아니냐? 어서 서두르자.” 근형은 최구장의 팔을 부축하면서 산골짜기로 내려갔다. 그들은 질척질척한 산길을 밟으면서 먼저 동굴을 파던 골짜기에 이르러 괭이와 삽을 찾아들고 수림으로 하여 성남 쪽으로 더듬어나갔다. 소낙비가 억수로 쏟아져 옷이 다 젖어 후둘 후둘 떨리고 덜덜 아래위 이를 쪼면서도 그들은 한사코 성남으로 찾아갔다. 근형은 정작 만주국으로 떠나가게 되니 불시에 다섯 살에 잃은 어머니 생각이 났다. (내 어머니를 어찌 홀로 이 일본 놈들이 득실거리는 조선 땅에 남겨두고 가겠는가? 먼저 증조부를 모셔간 후 어머니도 모셔가자.) 그들은 어느덧 양지바른 산중턱 돌 토성을 두른 옛 성에 모신 산소 앞에 이르렀다. 번개가 번쩍이면서 쓸쓸한 무덤 앞에 꿇어앉은 최구장과 근형을 비추었다. 꽈르릉 우레 소리가 천지를 진감했다. 억수로 퍼붓는 소낙비를 맞으면서 최구장은 손자 근형을 데리고 절을 아홉 번이나 올렸다. “아버지, 이 불효한 아들을 용서해 주옵소서. 일본 놈들이 득실거리는 이 더럽혀진 땅에 아버지를 홀로 남겨 둘 순 없어 만주국에 모셔 가려고 합니다. 놀라시지 마시고 제가 모시는 데로 함께 가옵소서. 괭이질과 삽질에 많이 편하지 못하시더라도 불효자손을 용서해 주옵소서.” 최구장은 말을 마치자 훌쩍 일어나 근형을 돌아보았다. “됐어. 이젠 시작하자.” 뒤이어 근형은 괭이질을 하고 최구장은 삽질을 했다. 그들이 한 둬 자 깊이 파 들어가자 썩은 관 널조각이 나왔다. “아버지 뼈를 다치겠다. 이젠 괭이는 치우고 살살 삽질해.” “예.” 최구장은 구덩이 속에 들어가 비 물에 질벅한 구덩이 위층 누런 흙을 매만지다가 나지막한 소리를 쳤다. “나오셨다. 여기 머리가 만지는구나. 아버지, 양해하옵소서. 온 몸을 단번에 모시지 못해서 잠시 머리를 먼저 모셔 내갑니다. 차차 온몸을 다 모셔 내가겠습니다.” 최구장은 더듬어 내는 족족 “이건 머리다.”, “이번에는 목 뼈 같구나.” 하면서 근형에게 넘겨주었다. 근형은 구덩이 밖에서 하나하나 받아서 비 물이 줄줄 흐르는 땅바닥에 사지를 맞추어 죽 이어놓았다. 한참 후 일을 마치자 최구장은 근형의 손을 잡고 구덩이 밖으로 나왔다. 이때 뜻밖에 근형이 왕왕 대성통곡을 쳤다. “아니, 얘가 웬 일이냐? 누가 듣고 오겠다.” “할아버지, 난 엄마 산소를 저기 두고 만주국으로 못 가겠습꾸마. 엄마도 모시고 가겠습꾸마.” 그제야 최구장은 허리를 쭉 펴더니 근형의 어깨를 툭툭 쳤다. “너도 효자는 효자로구나. 네 엄마 생각을 하지 못했구나. 그런데 단번에 두 사람을 업고 그 먼 만주국으로 가지야 못하지. 어떻게 한다?" 최구장은 뒤더수기를 긁적거리었다. "옳다. 네 엄마를 네 외가 집 산소에 모셔 가면 어떨까? 저 길주로 나가는 업동에 네 외가 집 산소들이 있잖니?” “거기에 모시고 만주에 가면 어떻게 다시 찾아 봅둥?” “야, 이 놈아, 증조부와 엄마를 단번에 만주국에 데리고 갈순 없지 않아? 먼저 거기에 모셔 뒀다가 후에 천천히 만주국에 모시고 가자.” 그제야 근형은 뒷덜미를 썩썩 긁적이었다. “이젠 먼동이 트는구나. 어서 서두르자. 어데 가서 가마니라도 얻어다가 먼저 아버지를 안전한 곳에 피신시켜야 하겠어.” 그제야 근형은 비 물에 폭 젖은 팔소매로 눈물을 닦으면서 연신 “예, 예.”라고 하면서 괭이와 삽을 구덩이 속에 파묻어두었다. “야, 그건 경인이네 쓸만 한 삽이야. 가지고 가자.” “아니, 여기 뒀다가 엄마도 파서 모시고 만주로 가겠습꾸마.” “응, 그게 바로 효자 처사야. 자기 어시나 조상의 산소도 온전히 모시지 않는 놈이 어찌 다른 사람들을 위해 일할 수 있겠어?” 그들은 비바람 속에서 유골을 하나, 하나 주어 냈다.                 2.부모의 유골을 모시고 근형은 가마니를 얻으러 떠나갔다. 최구장은 합장한 아버지와 어머니의 유골을 머리로부터 발가락까지 죽 순서대로 맞춰놓았다. 아버지 유골을 내려다보는 최구장의 주름 잡힌 얼굴에는 뜨거운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아버지, 어머니, 부모를 고향에 모셔야 하는데 일본 놈들 때문에 길이 막혔어요. 어이, 어이. 생전에 잘 모시지 못했는데 세상을 떠난 아버지마저 내 고향에도 모시지 못하는 이 불효한 아들을 용서하옵소서. 어이, 어이. 흑흑. 어이, 어이.” 최구장은 처음에는 곡을 하면서 하소연하다가 저도 몰래 흐느끼면서 대성통곡 했다. 이 시각 그는 일본 놈들이 자기를 뒤쫓는다는 것마저 다 잊었다. 그의 머리속에는 다만 세상을 떠난 아버지마저 고향의 산소에 편안히 모시지 못하는 것을 뉘우치려는 것 밖에 없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근형이 벌건 나무궤짝을 바 줄로 묶어 등에 지고 오지 않겠는가. “아니, 손자야, 어데서 이렇게 좋은 궤짝을 가져 왔냐?” 최구장은 단단한 나무궤짝을 매만지면서 물었다. “관준 사돈과 가마니를 좀 달라고 하니까 자초지종을 묻더니 사랑방에서 이 궤짝을 내다가 줍디다. 그는 ‘너 할아버지는 참말로 유교학설을 닦은 효자로구나.’하고 말씀하지 않겠습둥?” “어이구, 감사할 변이라고. 적송으로 짠 단단한 궤로구나.” 근형은 궤짝을 벗어놓고 팔소매로 이마의 땀을 닦더니 손으로 뒤쪽을 가리켰다. “저기, 사돈아바이네 옵구마.” 최구장이 뒤를 돌아다보니 관준과 상철, 형내까지 3대가 솔밭에서 걸어 나오는 것이 아니겠는가. “아니, 여기까지 올 거야 있소? 사돈, 저렇게 좋은 궤를 주어서 정말 고맙소.” 너부죽하게 생긴 관준은 사람 좋게 웃으면서 말했다. “아니, 사돈할아버지를 모시는 이런 중대사가 있으면 말씀이라도 하셔야지. 우리도 흙 한 삽이라도 파주지 않았겠소? 야밤삼경에 혼자 이렇게 나와서 면례를 하오?” 최구장은 연신 허리를 굽히면서 인사치례를 했다. “자다가 불시에 아버지 생각이 나서 나왔는데 사돈까지 깨워서 미안하오다.” 관준도 허리를 굽히면서 맞 인사를 했다. “에이, 천만에 말씀을. 사돈이 한집안이라는데 별 말씀을 다 하오다.” 관준은 쪼그리고 앉아 최구장을 도와 비 물에 하얗게 바래진 유골을 궤에 순서대로 담았다. 최구장은 아버지를 모신 궤 앞에 꿇어앉아 눈물을 휘 뿌리면서 절을 올렸다. 관준, 상철과 근형도 따라 절을 올렸다. 뒤이어 최구장은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 어머니, 이 불효자식을 용서해 주옵소서. 이렇게 총망히 면례행사도 올리지 못하고 부모를 모시고 정든 고향을 떠나가는 불효를 널리 양해해 주옵소서. 시국은 이 불효한 아들이 례도 올릴 경황이 없게 만들고 있사옵니다. 이제 만주국에 아버지를 모시고 가면 산소에 편안히 모시고 가토도 많이 올리겠나이다. 아버지! 어이, 어이, 이 불효자식을 용서하옵소서. 어이.” 최구장은 곡을 하다가 대성통곡 쳤다. 근형도 팔소매로 얼굴을 닦으면서 흑흑 흐느껴 울었다. 모두들 한동안 “어이, 어이.” 하고 곡을 했다. “자. 그만하고 길을 떠나기요. 일본 놈들한테 잡히면 큰일 나겠소.” 관준은 최구장을 부축해 일으켰다. 형내가 먼저 궤를 지겠다고 나섰다. “아니요. 내 손자 메면 되오.” 형내는 기어이 자기가 지겠다고 나섰다. “그러지 맙소. 만주국까지는 몇 천리도 되겠는데 근형 사돈의 힘은 남겼다가 쓸 일이 많고도 많습니다.” “고맙소.” 최구장은 다시 산 사람과 말하듯이 정중하게 말했다. “아버지, 놀라지 마옵소서. 이젠 정든 고향을 떠나 천천히 만주국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최구장은 아버지가 묻혔던 산소자리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자꾸 되돌아보았다. 근형도 팔소매로 눈물을 쓱쓱 닦으면서 삽을 파묻어둔 자리를 재확인하듯이 자꾸 되돌아보았다. 한 일리나 걸은 후 근형이 형내의 어깨에서 궤를 받아 지고 질척질척한 누런 산길을 걸어 나갔다. 근형이 나무 궤를 메고 신설집 삽작문 안에 들어서자 상철의 처가 중얼거리면서 마중 나왔다. “이 양반들이 신새벽에 나가더니 뭘 메고 들어와? 어머, 간밤에 소낙비가 쏟아지더니 송이버섯을 한 궤나 캐가지고 왔잖아?”        관준은 억이 막혀 입을 딱 벌리고 뒤에 서 있다가 눈을 둑 부릅뜨고 발을 탕 굴렀다. “에이, 상철이 어데서 저런 부실한 후처를 데려왔소? 양해하오. 사돈어른.”        최구장은 그저 한숨만 후 내쉬였다. "원래야 저렇지 않았는데. 그만 일본 놈들 총박죽에 머리를 맞은 후부터 저렇게 부실하게 됐다니까. 우리 가문이 아무리 대대로 명의라  해도 저 며느리 부실한 병을 떼는 약은 없소. 참 답답하오.” 최구장과 관준이 시키는 대로 상철과 형내, 근형은 우방에 고인의 유골을 모시고 아침식사를 했다. 식사 후 관준은 숭늉 물에 양치질을 하더니 이런 말을 꺼냈다. “아무래도 만주국까지는 천리나 되겠는데 어떻게 저 무거운 궤를 지고 가겠소. 상철과 형내를 보고 우리 집 수레에 모시고 두만강 강변까지 바래다드리게 하겠소.” 최구장은 황망히 “감사하오." 하고는 손사래를 쳤다. "우린 일본 놈들에게 쫓기는 몸이오. 어찌 사돈들을 연루시키겠소. 그러지 마오.” 이때 아래 방에서 경학이 형내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형님, 들었지. 형님은 이 소낙비 오는 날에 절대 소 수레를 몰고 나서지 마오. 괜히 일본 놈들의 군도에 목이 뚝 떨어지겠소.” 형내가 경학을 훌 밀어놓았다. “그럼 못써!” 위방에서 그 괘씸한 행동거지를 다 내려다본 관준은 얼굴색이 확 어두워졌다. 그는 마른기침을 몇 번 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에헴, 사돈어른, 저 철없는 애들의 말을 탄하지 마오.” 최구장은 “아니, 건 자연스러운 일이지요. 애들을 탓해 뭘 하겠소?” 하고는 덤덤히 앉아 있었다. 최구장은 엉거주춤 일어났다. “뒤 근심이 나는데다가 갈 길이 멀어서 인차 떠나야겠소.” 관준도 너부죽한 얼굴에 긴장한 빛을 띠웠다. “양. 더 말리지 않겠소. 형내야, 소수레를 메워라. 경학도 함께 가라.” 아래 방에서 경학이 투덜거리자 관준이 더는 참지 못하고 아래 방으로 성큼성큼 내려갔다. “너 이 놈 새끼, 감히 내 말을 거역해? 네놈이 이렇게 부덕하기에 의술을 물려주지 않은 거야. 항상 맏형에게만 의술을 물려주고 자기한텐 목수재간만 배워줬다고 입에 다발을 걸 지경이라도 별수 있어? 사람의 목숨을 구하고 죽이고 하는 의술은 너같이 덕이 없는 놈에게는 물려주었다간 큰 경을 치겠다. 네 오늘 사돈어른의 유골을 두만강변까지 모셔가지 않는 날엔 이 집에 발을 들여놓게 하는가 봐라!” 최구장은 말리었다. “사돈어른, 이러지 마오. 내 더 미안하다니까.” 할아버지 성질을 알만큼 아는 경학은 할 수 없이 투덜거리면서도 수레를 메웠다. “별, 사돈의 부모 유골이지 우리 부모 유골이라데?” 관준은 최구장의 눈치가 보여 더 욕하지 못하고 건 가래만 크게 뗐다. 좌우간 관준의 덕에 최구장은 아버지 유골을 수레에 모시고 비 오는 날에 두만강을 바라고 길을 떠나게 됐다. 최구장은 아침에 수림으로 돌아올 때 나무숲에서 버스럭거리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어 이제껏 속이 불안했다. 순간 웬 늑대가 자기들을 노리면서 살피고 있는 듯한 불길한 예감이 들었던 것이다. 최구장은 숟가락을 놓기 바쁘게 엉거주춤 일어났다. “사돈어른, 실례하기요. 일본 놈들의 개가 도처에서 우리를 노려보고 있소. 우리는 갈 길이 머니까 떠나야 하겠소. 폐를 끼치는바에 주먹밥이라도 좀 주오.” 그러자 관준은 하얀 염소수염을 슬슬 내리쓸면서 양미간을 찌푸리더니 입을 열었다. “최구장, 두만강 강변까지는 오백리길이나 되오. 그러니 아예 저 상철과 형내를 보고 우리 집 수레에 유골을 모시고 가게 하겠소.” 상철도 동을 달았다. “사돈어른, 우리 부자가 수레에 모셔다 드리겠습꾸마.” 최구장은 머리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아니요. 우린 일본 놈들에게 쫓기는 몸들이요. 사돈어른 일가를 연루시킬 순 없소.” 이때 아래 방에서 형내가 선뜻이 나섰다. “스승님, 근심하지 마십시오. 스승님을 위해서라면 오백리 아니라 천리라도 모셔다드려야죠.” “그러오. 이 소낙비 오는 날에 어떻게 유골을 메고 만주국까지 가겠소? 둘째손자 경학도 딸려 보내야 하겠소.” 병관의 말에 최구장은 바늘방석에 앉은 듯이 안절부절 못했다. “아니, 둘째손자까지 보낼 게야 있소?” “철부지애지만 효성이라는 게 뭔가를 알아야 하오. 저놈에겐 최구장의 가르침을 받을 좋은 기회요.” 최구장은 관준의 덕분에 아버지 유골을 수레에 모시고 길을 떠나게 됐다. 상철의 후처가 정지에서 나오더니 주먹밥 한주머니를 수레에 실으면서 투덜거렸다. “송이버섯이랑 많이 캤으면 내놓을게지. 깍쟁이 같은 양반들이 그 채로 싣고 장마당에 가?” 그녀는 얼굴을 들어 상철을 보면서 “여보, 시내 장마당에 가면 생선이나 한 구럭 사오오.”라고 말했다. 상철이가 눈을 흘겼다. “에이유, 저 부실한 여편네를 어쩌겠소. 누가 바로 장마당에 가는가 하오. 쯧쯧.” 그는 뒤에 서 있는 최구장을 돌아다보면서 “사돈어른, 부실한 사람의 말을 탄해 듣지 맙소.” 하고 사과의 말을 했다. 최구장은 그저 묵묵히 서 있다가 바래러 나온 관준에게로 다가갔다. 상철과 형내가 수레를 몰고 앞에서 걷고 경학은 마지못해 느릿느릿 뒤따라갔다. 최구장과 근형은 뒤에서 관준과 인사를 나누었다. “고맙소. 사돈어른, 덕분에 쉽게 두만강까지 가게 되였소.” 관준은 너부죽한 얼굴에 웃음을 지으면서 인사를 받았다. “마땅히 도와야지요. 사돈어른의 효성에 정말 감동을 받았소. 다 남의 일이 아니요. 내야 감사를 드려야 하겠소. 자식들에게 사돈의 훌륭한 본을 잘 보여주게 되여 일거양득이요. 이담 우리도 만주국에 가게 되겠는지 조상들의 산소가 참 근심스럽소. 에이유, 이 놈의 세월에 아무 일도 없이 고향에서 살았으면 얼마나 좋겠소. 그러면 조상들의 산소도 아무 문제없이 고향에 모시겠는데 말이요. 후유-” 관준은 땅이 꺼지게 한숨을 내쉬고 나서 궤 춤에서 동전 한줌 꺼내주었다. “이걸 적은대로 로비로 쓰오.” 최구장은 관준의 손을 굳게 잡고 흔들면서 작별인사를 했다. “사돈어른, 참 고맙소. 여기 고향에서 살기 힘들면 만주국 함흥촌에 오오. 거기서 우리 함께 잘 살아보기요.” 인품이 좋은 관준은 최구장의 손을 놓을 줄 몰랐다. “양, 그때 보기요. 내 삼촌도 함흥촌에 간지 몇 해 되는데 살기 괜찮다고 자꾸 오라고 하오. 내 가보니 함흥촌도 일본 놈들의 포위토벌까지 받았던데 그 놈들의 성화에 어디 마음 놓고 병이나 보면서 살겠는지 모르겠소? 조만간에 우리도 만주국에 들어가야 할 것 같소. 허나 근심은 태산 같소.” 이쯤 하고 그는 화제를 돌렸다. “우리 애들은 일본 놈들에게 괜찮으니까 수레를 몰고 큰길로 가고 사돈네는 썩 떨어져서 가든지 위험한 시내를 지날 때는 피해 가오. 아픈 머리를 치료도 하지 못하고 떠나가는구먼.” 최구장도 관준의 손을 으스러지게 잡고 흔들었다. “이렇게 갈라지면 언제 또 만나겠소?” 최구장과 관준은 오래도록 손을 잡고 흔들면서 뜨거운 눈물을 흘리면서 작별했다. 최구장이 허연 팔소매로 눈물을 훔치면서 몸을 돌려 형내가 모는 수레 쪽으로 비칠비칠 걸어갔다. 앞에서 경학이가 하는 신경질적인 말소리가 최구장의 귀전을 아프게 때렸다. “에이 씨, 사돈영감네 뼈다귀가 무슨 그리 대단해다고 이렇게 흐린 날에 우리를 보고 실어가라는 게야?” “닥치지 못해?! 이놈 새끼, 다시 개 주둥이를 놀리기만 해봐라. 가만 놔두지 않겠다.” 형내가 경학을 욕하면서 뒤를 힐끔 돌아다보았다. 최구장은 못들은 척 하면서 머리를 숙이고 한숨을 땅이 꺼지게 쉬면서 질척질척한 길을 터벅터벅 걸었다. 그들이 마을에서 한 이리쯤 떨어진 산기슭에 이르렀을 때였다. 갑자기 마을 쪽에서 개들이 짖는 소리가 요란스럽게 들려왔다. 상철은 황급히 최구장의 팔을 잡아끌었다. “사돈어른, 빨리 산에 올라가 피합소. 일본 놈들이 쫓아오는 것 같습구마.” 최구장은 마을 쪽을 돌아다볼 뿐 발에 뿌리라도 내린 듯이 뜰 념을 하지도 않았다. “빨리 피합소! 스승님!” 형내도 옆에서 발을 동동 구르면서 재촉했다. 그러나 최구장은 개의치 않는 표정이었다. “피하려면 다 함께 피하기요. 나만 도망가고 사돈네를 욕보게 해서야 되오? 연루시킨 것만 해도 죄송스러운데.” 그러자 형내는 스승 최구장을 마구 끌고 산기슭으로 가면서 말했다. “스승님과 저 사돈만 피하면 일본 놈들은 전과가 없는 우리 집 식구들과는 어쩌지 않을 겁니다. 어서 피하십시오.” 그 말에 도리가 있는지라 최구장은 근형과 함께 산기슭으로 올라가 수림 속으로 안개처럼 사라져버렸다. 경학은 옆에서 또 투덜거렸다. “괜히 사돈네 유골로 해서 우리가 봉변을 당하게 되였구나.” 형내가 눈알을 부라렸다. “주둥이를 다물어. 자칫 목이 날아나.” 가메다란 헌병 놈이 말을 타고 영팔이 등 대여섯 명의 개다리를 끌고 덮쳐왔다. 가메다 놈은 별스럽게 입귀 오른쪽으로 하여 노란 털 한 모숨이 자랐다. “이 놈들아, 그 궤짝 안의 건 뭐냐?” 가메다가 채찍으로 궤를 가리키면서 건방지게 물었다. “조상의 유골입니다.” 형내 말에 가메다는 영팔에게로 낯을 돌렸다. “나니까?(뭐야?) 유격대에 쌀을 실어가는 건 아냐?!” “유골이라는뎁쇼.” 영팔의 말에 가메다는 의아해 하더니 을러멨다. “유골을 실어가서 뭘 해? 들춰 봐!” 영팔이 팔을 홱 젓자 개다리들이 말 잔등에서 뛰어내려 우르르 수레에 뛰어올라가 궤짝을 활 열어 재꼈다. 삐꺼덕! 흐리멍덩한 하늘아래 산기슭에서 비명소리와 같은 삐꺼덕 궤를 여는 소리가 울렸다. “에크!” 졸개들은 궤짝안의 유골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 놈들은 우르르 수레에서 뛰어내렸다. “진짜 유골입니다. 유골!” 영팔과 졸개들의 말을 듣고서도 가메다는 믿어지지 않았던지 자기 눈으로 궤짝 안을 들여다보았다. “유골 옆에 놓은 저 주머니 건 뭐냐?” “쌀밥입니다.” “쌀밥? 너희들 셋이서 저렇게 많은 쌀밥을 처먹어? 혹시 유격대에 실어가는 건 아냐?” “멀리 가야기에 푼푼히 가져 왔소.”         가메다는 하얀 수갑을 낀 왼손으로 코를 싸쥐고 궤짝 덮개를 닫으라고 오른손으로 손시늉을 했다. 한 졸개가 궤짝덮개를 쾅 닫아버렸다. 최구장과 근형은 산 아래에서 벌어지는 광경을 내려다보다가 한숨을 후- 내쉬었다. 이젠 떠나가려니 한 가메다는 말을 탄 채 수레 주위를 빙빙 돌면서 요것조것 따지고 들었다. “조선 사람들은 왜 죽은 사람의 유골을 파가지고 다니는가?” 일본 말을 배운 형내가 나섰다. “우리 조선 사람들은 효성이 지극해서 돌아가신 조상들을 더 좋은 곳에 모시려고 면례합지비.” 형내의 유창한 일어대화를 듣고 가메다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면서 계속 지껄여댔다. “넌 우리 대일본제국 말을 참 잘하는구나. 황군의 양민이 돼야 살아남을 수 있어. 이실직고해라. 최구장과 손자 놈이 운주동 산소에서 해골을 파가지고 너희들 집에 간적이 있다고 밀고 들어왔어. 우린 다 알고 따라왔어. 어서 말해! 최구장과 손자 놈이 어디로 갔어?” 상철은 겁에 질려 부들부들 떨었다. 그러나 형내만은 아주 태연자약하게 일어로 대꾸했다. “우린 최구장을 본 적도 없습니다. 이 유골은 우리 노할아버지 유골입니다. 혹시 새벽에 우리가 간걸 누가 잘못 보고 고발한 게나 아닌지요?” 가메다는 형내의 너부죽한 얼굴과 예지로 빛나는 까만 쌍가풀 눈을 뚫어지게 쏘아보았다. “교할한 놈, 헌병대에 끌려가 죽겠냐? 실토정하지 않겠어?” 이때 경학이 겁을 집어먹고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려고 했다. “황군, 사실, 저…?” 가메다는 인차 털 한 모숨을 만지작거리면서 교활한 눈길을 경학의 새파랗게 질린 낯에 돌렸다. “이실직고해. 너만은 살려줄게. 최구장이랑 어데 갔어?” 형내가 주먹을 으스러지게 쥐고 부르르 떨면서 경학을 무서운 눈길로 쏘아보았다. “사실 우리는 그들이, 그들이 어데 갔는지 모, 모릅구마.” 가메다 놈은 채찍을 들어 경학의 어깨를 짱짱 내리쳤다. “앗!” 경학은 두 손을 들어 날아오는 채찍을 막으면서 비명을 질렀다. “말햇! 말하잖으면 온 집 안 몽땅 몰살이야! 알았소까?!” 영팔이 옆에서 섬나라 오랑캐처럼 고래고래 고함쳤다. 졸개들이 우르르 덮쳐들어 상철과 형내, 경학을 질척질척한 길바닥에 꿇어앉히고 포승으로 뒷결박을 지었다. 거메다는 군도를 뽑아들고 당장 목을 내리칠 상을 하면서 호통 쳤다. “당장 말해! 최구장과 그 아들놈 경인이, 그 놈들은 우리 황군을 살해하고 도망쳤다. 운주동 구장 응삼도 죽였어. 대지 않으면 당장 죽여치우겠다.” 쉭! 쉭! 이때 난데없는 돌멩이가 날아와 면바로 가메다의 대가리를 깠다. “앗!” 가메다 놈은 대갈통을 싸쥐고 말 잔등에 쓰러지면서 비명을 질렀다. “돌멩이 유격대!” 가메다는 말 배때기를 탁 찼다. 그 놈은 말 잔등에 낯을 딱 붙이고 선불 맞은 노루처럼 꼬리 빳빳해 도망쳤다. 당황해난 영팔이 등 졸개들도 상철이네 삼부자를 놓고 말 잔등에 뛰어올라 줄행랑을 놓았다. “네놈들이 어디로 도망쳐?! 어디 죽어봐라!” 형내가 산쪽을 올려다보니 근형이가 수림 속에서 돌멩이를 뿌리면서 고함치고 있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유격대가 왔는가고 도망치기 시작하여싿.     바줄만 봐도 뱀인가 한다고   유격대애 혼 줄이 난 적 있는 가메다와 영팔 등은 이젠 돌멩이가 날아와도 돌멩이를 잘 뿌리기로 소문난 장백산 유격대인가고 겁을 집어먹고 도망쳤던 것이다. 하긴 일본 놈들은 명천에서뿐만아니라 만주 함흥촌에서도 여러차례 돌멩이를 뿌리는 유격대한테 혼났으니까. 놈들이 도망치자 이윽고 최구장과 근형이가 산에서 황급히 뛰어내려왔다. “놀랐겠소. 사돈, 이젠 돌아가오. 괜히 우리 일로 해 고생하겠소.” 최구장은 상철을 결박한 바줄을 풀어주면서 권고했다. 상철은 한숨만 땅이 꺼지게 내쉬었다. 형내가 대수롭잖게 말했다. “우리 잘못이 뭐입둥? 스승님, 근심 말고 령 길을 타고 가십시오. 우리가 꼭 궤를 두만강 변에까지 모셔다드리겠습니다.” 경학은 결박당했던 팔을 어루만지며 아버지와 최구장의 눈치를 힐끔힐끔 보면서 슬금슬금 마을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몇 발자국 모로 걸어간 그는 투덜거렸다. “형님이나 실어가라지. 난 몰라. 괜히 그 유골 때문에 일본 놈들의 손에 죽겠어.” 최구장은 뒤걸음 질 치다가 줄달음질쳐 달아나기 시작하는 경학의 등 뒤에 대고 소리쳤다. “작은사돈! 집에 가면 관준 어른께 자초지종을 알리오.” 경학은 들었는지 마는지 걸음아 날 살리라고 달아났다. 그들의 뒤로 무형의 공포가 서리서리 휩싸고 있었다.  
81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44) 댓글:  조회:2256  추천:0  2016-06-17
               9. “무죄석방”         하늘도 울고 산도 몸부림치고 들판도 흐느낀다. 근형은 어릴 때 동갑인 막내고모와 함께 기운봉에 가서 돌 버섯을 캐던 일로, 함께 놀던 일이 눈물 흐르는 눈앞에 삼삼히 떠올랐다. (오늘 오전에만 해도 살구를 먹겠다고 살구나무 우에 올라가 바가지에 살구를 뜯어가지고 내려오던 막내고모, 그 막내고모가 큰물에 세상을 떠나다니?) 그는 최구장을 따라 가마골 앞산에 올라 걸으면서도 자꾸 손등으로 눈시울을 적시는 뜨거운 피눈물을 훔치었다. 뒤이어 그는 피뜩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할아버지 쪽으로 몸을 돌렸다. “할아버지, 이대로 저 산 아래 보이는 운주동엔 갈 거 같지 못합구마. 내 여기로 오는데 운주동 개울가 버드나무숲 속에서 개를 만났습니다.” 최구장은 이상하다는 듯이 눈을 치켜뜨더니 “개라니? 사냥개보다도 일본 놈의 개가 더 무섭지.” 하고 두덜거리었다. “내 뒤를 밟는 거 보니 일본 놈의 개가 틀림없습구마. 집에 갔다간 영락없이 붙잡힐 겁니다.” 장손의 말에 최구장은 손으로 나무를 잡고 몸을 의지하더니 아무것도 개의치 않았다. “붙잡겠으면 붙잡으라지. 딸을 앞세우고 살아서 뭘 하겠나? 내 이젠 칠순이 넘었으니 살만큼 다 살았어. 집에 가 볼테니 넌 저 고모부랑 함께 먼저 만주로 들어가라. 나도 처리할 걸 다 처리하고 인차 들어갈게.” 최구장은 노친을 데리고 곧추 운주동쪽으로 발길을 돌려 산 아래로 성큼성큼 걸어 내려갔다. 근형은 따라 가면서 계속 위험하다고 말리었지만 최구장은 대수로워 하지도 않았다. “저 노친이랑 계순이랑 무슨 죄가 있단 말이냐? 제 고향의 버섯을 뜯어먹어도 죄란 말이냐? 고향의 버섯도 몽땅 날강도 같은 일본 놈들의 거라더냐?” 근형은 별수 없이 할아버지를 따라 운주동으로 떠나기로 했다. 야마다 면장 놈을 죽인 형만과 석수 그리고 용기는 그럴 수가 없었다. “그럼 가시아버지, 인사를 드리고 떠나가겠습구마.” 형만은 진창에 털썩 꿇어앉아 최구장과 순금에게 절을 올리고 둥실한 어깨를 들썩이면서 흑흑 흐느껴 울었다. 최구장은 두 손으로 사위를 부축해 품에 끌어안고 잔등을 치면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허리가 꼬부장한 순금이도 사위가 불쌍해 빗물과 눈물이 줄줄 흐르는 얼굴을 매 만졌다. “자네들이 잘 사는 걸 보자 했는데 이게 웬 일이요? 죽은 사람이야 어쩌겠소. 빨리 만주에 들어가오. 일본 놈들에게 붙잡히면 죽고 마오.” 형만은 손등으로 눈물을 쓱 닦더니 떨어지지 않는 걸음으로 령 길을 타고 북으로 떠나갔다. 그는 떠나가면서도 자꾸 산 아래로 내려가는 최구장과 저 가마골 중턱에 누워있는 계순과 흥기의 봉분을 번갈아 보았다. 그의 눈길을 따라 한 가닥의 피눈물과 슬픔이 줄줄 흘러내렸다. 최구장네는 두려울 것 없이 비바람을 무릅쓰고 운주동의 집으로 돌아왔다. 뭉청 끊어진 창살과 펑 구멍 뚫린 창호지, 여기저기 박산 나 나뒹구는 오지동이, 고리짝을 보면서 최구장은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었다. 순금은 깨진 물독을 매만지면서 주름살이 죽죽 간 눈시울에 눈물을 줄줄 흘리었다. 근형은 부랴부랴 뒤울안에 가서 사닥다리를 가져다 중천정구멍에 대놓았다. “여보, 내려오오.” 중천정 위에서 신음소리에 가까운 새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예, 내려가겠소.” 이윽고 중 천정 구멍이 열리더니 새단의 얼굴이 보이었다. 뒤이어 치마에 둘린 가는 다리가 사닥다리 위에 조심스레 내려왔다. 새단은 근형을 따라 방에 나와 최구장과 성단을 보고 문안인사를 했다. “할아버지, 할머니, 무사히 왔습둥?” 최구장은 손비를 보고 “응, 너희들이 무사한 것만 해도 다행이야.” 하고 인사를 받았다. 새단은 근형과 함께 깨진 물독을 주어치우고 가마를 부시었다. 그런데 순금이 어디 불편한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있었다. 이때 갑자기 어두워지는 바깥에서 말발굽소리가 요란하고 말 호용 소리가 들렸다. 근형이 바깥을 내다보고 새된 소리를 질렀다. “왜놈들이 왔습구마. 할아버지, 할머니 천정에 어서 피신합소.” 새단은 비명소리를 지르면서 고방 쪽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최구장은 까딱하지 않고 타리대를 치고 편안히 앉아 있었다. “죽이겠으면 죽이라지. 우리 무슨 죄가 있대?” 근형은 황급히 할아버지를 부축하여 일으켜 고방 쪽으로 모셔가려고 했다. 최구장은 근형의 팔을 뿌리치면서 고함쳤다. “이걸 놔! 난 안 달아나. 여기서 저 놈들이 어쩌나 꼬락서니를 보겠어.” 이때 구멍이 펑 뚫린 문구멍에 숱한 꺼먼 그림자들이 언뜰거리었다. 드디어 다 찌그러진 문이 벌컥 열렸다. “참 좋아, 네 놈들이 몽땅 여기 있었구나.” 응삼이 졸개들을 데리고 뛰어 들어왔다. 근형은 새단의 손목을 잡고 고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들은 고방 문을 박차고 뒤울안으로 달아났다. 근형은 울바자 밑에 가서 울바자에 매달려 바둑거리는 새단을 받쳐 들어 나무울바자 밖에 내보내려고 했다. 그러나 울바자가 높아 인차 들어 올려 내보내지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새단의 허벅지에서 거무스름한 피가 주르르 흘러내렸다. 새단이 이를 옥물더니 상을 찡그리면서 신음소리를 냈다. 근형은 새단의 엉덩이를 나무바자우로 떠밀었다. 이때 응삼의 무리가 고방 문을 쾅 박차고 뛰어들 나왔다. 근형은 더 지체할 수 없어 나무울바자를 화닥닥 기어 올라가 뛰어 넘어갔다. 그는 울바자 밖에서 나무 사이로 피 흘러내리는 새단의 다리를 쥐여 우로 춰 올렸다. “어디로 달아나! 이년!” 울바자 안에서는 응삼이 울바자를 거의 넘는 새단의 종아리를 쥐여 아래로 당기면서 을러멨다. 새단은 통곡치면서 울바자를 틀어쥔 손을 놓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녀는 악착스레 두 다리를 바둑거리었다. 그러나 마수를 벗어나지 못하고 퉁 땅바닥에 떨어지었다. 졸개 한 놈이 근형의 손을 칼로 찍어댔다. 다른 놈은 새단의 뒷다리를 마구 끌어내리어 집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여보!” 근형은 손을 뻗치며 고함쳤다. 졸개 몇이 울바자에 기어 올라갔다. 그러나 근형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비바람 속에 나무들이 몸부림칠 뿐이었다. 소낙비가 억수로 퍼붓자 응삼과 졸개들은 더 쫓고 싶은 생각이 없어졌다. 한길수와 야마모도 소장 놈이 살기등등해 졸개들을 데리고 들어왔을 때 집안에는 최구장과 성단 밖에 없었다. 야마모도 소장은 손을 홱 휘둘렀다. “젠부 다바네(몽땅 묶엇)!” 영팔 등이 우르르 덮쳐왔다. 성단이 비명을 쳤다. 최구장이 안간힘을 다하여 고함치면서 팔을 뿌리쳤다. “닥쳐라! 우리 무슨 죄 있다고 이러는 거냐?!” 응삼이 개를 잡은 포수처럼 우쭐거리었다. “황군을 칼로 찍어 죽인 죄를 모르는가?” 수길과 림호가 졸개들과 함께 최구장과 성단을 묶었다. 야마모도 소장은 근형과 형만을 놓쳐서 속이 내려가지 않았다. 하지만 늙은 최구장 양주와 손비를 붙잡았으니 분풀이를 할 데 있어 좋았다. 야마모도 소장과 한길수 등은 최구장 양주를 말 뒤에 매 끌고 곧추 상우남면 사무소 옆에 있는 일본 파출소로 돌아갔다. 파출소안에 들어서자 끼무라 국장이 사무상 정면에 코 수염을 잔뜩 살리고 콩 알 눈깔을 부릅뜨고 살기등등해 앉아 있었다. 그의 옆에는 일본 놈들을 그림자처럼 붙어 다니는 통역 류강철이 서있었고 그 앞에는 좌우로 스까다 이찌분로 경찰과 개다리경찰 등이 죽 늘어서있었다. 야마모도 소장은 끼무라 국장에게 뭐라고 일본 말로 지껄여댔다. 끼무라 국장은 코 수염을 쓱 만지더니 머리를 끄덕이었다. 한참 후에야 그는 비에 후줄근히 젖은 최구장을 쏘아보면서 호통쳤다. “영감, 타고난 이름이 구장이라. 구장에서 떨어졌다고 대일본제국에 불만이 있는 거지? 맞지?” 강철이 통역해 주어도 최구장은 끼무라 국장놈을 쓴 외 보듯 하면서 머리를 조금도 숙이지 않았다. 끼모라 국장은 의자에서 몸을 앞으로 기울이면서 음흉한 눈길로 최구장 네를 쏘아보았다. “이에(말해)! 네 놈의 막내사위 형만이 어데 갔소까? 석수, 용기 어데 갔소까?” 최구장은 목석처럼 서서 입에 빗장을 지른채 끄덕하지 않았다. “이찌분로, 히도꾸 다다께(호되게 족쳣)!” “하잇(옛)!” 이찌분로는 다짜고짜 덮쳐와 몽둥이로 최구장의 잔등을 땅 내리쳤다. 칠순이 넘는 최구장은 “억!” 비명소리와 함께 걸상에서 푹 꼬꾸라져 땅바닥에 맥없이 쓰러졌다. 성단이 묶인채 비명소리를 지르면서 영감 쪽으로 다가왔다. “우리 영감이 뭘 잘못했다고 이렇게 치느냐?” 새단도 “할아버지!” 하며 다가왔다. 새단은 최구장이 입귀로 피를 흘리자 닦아주고 싶었지만 두 손을 뒤로 묶이어 용빼는 수가 없었다. 야마모도는 성단의 가슴을 발길로 걷어차 넘기었다. “이년아, 여기가 어디라고 함부로 고함쳐? 네년이 우리 대일본제국의 버섯과 딸기를 뜯어먹고서도 죄를 승인하지 않아?” 순금은 가슴을 부둥켜안고 너무 억이 막혀 “내 고향의 버섯을 뜯어먹어도 죈가?” 라고 대들었다. 열이 부쩍 오른 한길수는 채찍으로 성단의 얼굴이고 목이고 사정없이 내리치며 고함쳤다. “이년아, 지금 이 곳이 어데 옛날 조선 땅인가 하니? 이젠 대일본제국의 땅이 됐단 말이야. 대일본제국의 버섯을 도적질해 먹고서도 계속 악다구니질 할 테냐?” 한길수는 상전들에게 잘 보이려고 채찍으로 성단의 잔등을 사정없이 내리쳤다. 그 호된 채찍질에 순금의 베적삼이 째지면서 핏자국이 나는 잔등이 드러났다. 성단은 비명소리를 지르면서 땅바닥에 쓰러졌다. 새단은 새된 소리를 지르며 자기 몸으로 시어머니에게 날아드는 채찍을 막았다. 한길수의 채찍질에 베저고리가 째지면서 새단의 하얀 잔등이 드러났다. 음흉한 눈길로 까만 무명치마 밑으로 드러난 성단의 피에 젖은 하얀 허벅다리를 본 끼무라 국장 놈이 하얀 장갑을 낀 손을 척 쳐들었다. “가만! 그 년이 정말 예쁘구먼. 하하하.” 끼무라 국장 놈은 의자에서 일어나 성단의 옆으로 다가왔다. 성단은 겁기어린 눈으로 끼무라를 쏘아보면서 엉덩이 걸음으로 뒤로 비실비실 물러앉았다. “어우, 혼또니 우쯔꾸씨이네(정말 예쁘네).” 끼무라 국장 놈은 장갑을 벗고 손으로 새단의 턱을 고이더니 야수의 눈빛이 번쩍이는 사발눈깔을 희번뜩거리며 새단의 얼굴을 쏘아보았다. “히히, 난 조선에서 이처럼 예쁘고 순수한 색시를 처음 봐.” 끼무라 국장 놈이 히죽거리면서 수작을 하였다. 색마 한길수는 옆에서 새단의 피 묻은 허벅지와 가슴을 노려보면서 괜히 닭 알 침을 꼴깍 넘기었다. 야마모도 소장은 끼무라와 한길수를 번갈아 보다가 채찍으로 사무 상을 짱 쳤다. “끼무라 국장! 난 형님의 원수도 갚지 못했는데 이게 뭔가? 심문은 하지 않고 히히거리다니?" 이찌로 경찰도 맞장구를 쳤다. "무슨 심문? 아예 한 칼에 한 놈씩 칼 탕을 쳐버리면 다지?” 그제야 끼무라는 창피해 한숨을 후 내쉬면서 엉거주춤 일어나 사무 상 앞으로 되돌아갔다. “야마모도 소장, 범인을 심문하는 건 우리 파출소에서 할 일이지 당신 임산파출소와는 상관없네. 당신은 가서 삼림이나 잘 지키게. 내가 어련히 이 범인들을 심문해 당신 형을 죽인 형만을 잡아올게. 당신에게 칼을 휘두른 그 이름 모를 그 놈도 다 잡아오지 않으리라고 그래?” 야마모도는 벌컥 성을 냈다. “나와 한길수가 비바람을 무릅쓰고 저 연놈들을 잡았으니 그렇지. 자네들은 쥐 새끼처럼 비를 피해 집안에 떡 들어앉아있기나 했지. 언제 잡을 궁리나 했는가?” 끼무라는 어이없다는 듯이 “아하, 야마다 소장, 말이 너무 지나치지 않은가? 상전을 보고. 쯧쯧.” 이때 입에서 피를 흘리면서 쓰러졌던 최구장이 천천히 정신을 차리면서 일어나 땅바닥에 앉았다. “그래, 이 영감두상이 어디 얼마나 질긴가 보자.” 끼무라는 책상을 땅 치면서 위엄을 돋우어 소리쳤다. “최 두상! 거기 걸상에 앉게. 거 당신네 집에 온 그 스무살 푼한 자는 누군가?” “난 몰라. 지나가던 길손이겠지.” 그제야 최구장이 입의 빗장을 뽑더니 입귀의 피를 손바닥으로 쓱 닦았다. “그래, 이제야 입을 여는구먼. 저런 나약한 선비 놈에게는 매가 제일이야. 생떼를 쓰지 말고 어서 말해! 그렇잖으면 당신의 손비를 부하들에게 줘 버릴 줄 알라!” 최구장은 똑바로 앉더니 끼무라를 증오에 찬 눈길로 쏘아보면서 욕설을 퍼부었다. “죽이겠으면 나를 죽일게지 내 손비를 욕보이지 말라! 머리카락 하나 까딱 다쳐 봐. 내 죽어서라도 악귀로 돼 네놈들을 물어뜯어 황천에 보내 줄거야.” 성이 꼭뒤까지 치밀어 오른 끼무라 소장은 군도를 쓱 뽑아들었다. 옆에서 통역하던 강철이 끼무라를 말리면서 귀에 대고 일본 말로 뭐라고 지껄였다. 그러자 끼무라는 “요로씨이. 요로씨이.” 하고 연신 머리를 끄덕였다. 옆에서 구경하던 실 돌피 같은 응삼이 끼무라에게 귀속 말로 “어째 거 보지 못했던 길손이 어데서 딱 본 것 같다니까. 아, 옳지, 거 세 귀 눈이랑 주먹코랑 생김새가 영월동에 있던 병완 영감이나 기준이란 놈처럼 생겼단 말이야.”라고 했다. 그 소리에 끼무라는 뭐가 집히는 데가 있었던지 교활한 눈길로 최구장을 쏘아보더니 능구렁이처럼 지껄였다. “최 영감, 당신이야 직접적인 죄가 없어. 난 영감을 풀어주겠네. 그 길손이 다시 오면 우리 파출소에 알리게. 다시 숨겨놓으면 안 돼.” 최구장은 응삼이 일본 말로 끼무라에게 뭐라고 하였는지 알아듣지 못했다. 그는 피투성이로 된 노친과 손비를 돌아보면서 “가기요.”라고 말하고 걸상에서 일어났다. 야마모도는 최구장 네를 가지 못하게 두 팔을 벌려 막으면서 일본말로 야단쳤다. “우리가 저 비바람을 무릅쓰고 어떻게 잡아 왔다구 놓아줘? 안 되오. 이 놈들을 내놓아서는 안 되오.” 그러자 끼무라 국장은 실망스럽다는 듯이 도리머리 질 했다. 뒤이어 그도 일본말로 지껄였다. “야마모도 소장은 하나만 알았지 둘은 몰라. 저 놈들을 고와서 내 놓는 거 같은가. 큰 그물을 넓게 쳐서 큰 고기를 낚자는 게요. 저 비틀거리는 늙은 영감태기나 노친이나 나약한 아녀자를 붙잡아 둬 무슨 소용 있어? 관건은 형만과 그 길손인지 하는 자를 잡는 거야.” 야마모도는 더 할 말이 없었다. 형사범죄자를 다스리는 권리는 끼무라 국장에게 있으니까 말이다. 그리하여 최구장과 성단은 하신에서 피를 줄줄 흘리는 새단을 데리고 파출소 밖으로 비칠거리면서 간신히 걸어 나왔다. 그들은 휘몰아치는 비바람도 무릅쓰고 어두운 밤에 주린 배를 달래면서 비칠비칠 집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들의 뒤로 보이지 않는 그물, 그리고 섬나라 오랑캐들의 감시의 눈길, 생사고비를 넘나드는 공포가 엄습하고 있었다.                              10.야습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 새단은 시조부모를 양팔로 부축해 모시고 비바람을 무릅쓰고 질척질척한 진창길로 비틀거리며 걸었다. 운주동 동쪽 산모퉁이를 돌아 걸을 때다. 산마루에서 번개가 번쩍 하더니 우르르 꽝꽝 천둥소리가 울렸다. 바람이 휙- 소용돌이치자 주먹 같은 비방울이 빗발치듯 쏟아져 기름종이우산도 들지 못한 가여운 세 사람의 몸을 덮쳤다. 그들 셋은 그래도 정신을 가다듬고 비칠거리면서 한사코 마을 쪽으로 걸어갔다. 그들이 이제 거의 운주동 마을 어귀에 들어설 때 웬 일인지 억수로 퍼붓던 소낙비기 둑 끊었다. 갑자기 앞에서 웬 검은 그림자들이 마주 오는 것 같았다. 뒤에서도 말발굽 소리가 급촉하게 들리더니 전지불이 이쪽을 어지러이 비추며 덮쳐왔다. 앞의 검은 그림자들은 인차 길옆 수풀 속에 쓸어 들어갔다. 그들 셋은 머리끼 곤두설 지경이었으나 조심스레 버스럭거리는 수풀 곁을 지나갔다. 이때 뒤에서 말발굽 소리가 더욱 요란스럽게 들려왔고 전지불이 환하게 비추면서 가까이 다가왔다. “서라!” 뒤에서 한 무리 검은 그림자들이 말을 타고 달려왔다. “최구장, 어디로 가?!”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 전지불이 쭉 이쪽을 비춘다. 순간 비를 흠뻑 맞은 최구장 양주와 새단이 비틀거리면서 겨우 몸을 지탱하며 주춤 멈춰 섰다. 한길수가 졸개들을 데리고 덮쳐왔던 것이다. “우릴 더 못 살게 굴지 말고 죽이겠으면 어서 죽여라.” 어둠속 에서 한길수가 지껄여댔다. “끼무라 국장은 네 놈을 놔주지만 우리 야마모도 소장님은 절대 놔두지 못해.” 한길수의 옆에서 실 돌피 같은 응삼이 손을 홱 휘둘렀다. “저 놈들을 당장 묶어라!” 최구장은 어둠 속에서 그자를 손가락질하면서 욕했다. “응삼이, 자넨 내 제자건만 왜 왜놈들의 개다리로 돼 이다지도 못살게 구는가?” 그러자 응삼은 “날 나무라지 마쇼. 황군을 죽인 죄인의 가시아버지니까. 나도 별수 없습구마.”라고 지껄였다. “잔말 말고 어서 묶어!” 한길수가 재차 나무숲이 떠나갈듯이 을러메자 검은 그림자들이 말에서 뛰어내려 최구장에게 바 줄을 들고 욱 덮쳐들었다. 쉭! 딱! 쉭! 쉭! 딱! 딱! “앗!” “아이쿠!” 숲속에서 날아온 돌멩이에 먼저 응삼이 대갈통을 붙잡고 비명을 질렀다. 뒤이어 연신 대여섯 놈이 삼대 쓰러지듯이 꼬꾸라졌다. 뒤이어 돌멩이가 날아와 말을 탄 한길수의 이마빼기에 딱 맞았다. “아이쿠!” “웬 놈들이야?” 숲속을 전지불로 비추었다. 그러자 숲속에서 복면한 사람들이 방망이며 검이며 몽둥이를 들고 뛰쳐나왔다. “이 놈들아, 칼을 받아라!” “죽여라!” 한길수와 야마모도는 황급히 허리춤에서 권총을 꺼내 괴한들을 겨누었다. 딱! 딱! 한길수와 야마모도는 돌멩이에 손목을 맞고 권총마저 떨어뜨렸다. “이크!" "웬 놈들?” 겁을 집어먹은 야마모도와 한길수는 날 살려라고 말 배때기를 두 발로 차더니 꼬리 빳빳해 달아났다. 응삼과 졸개들은 최구장 네를 놓고 말을 탈 새 없이 다리야 날 살리라고 도망쳤다. 이때 웬 사내가 말에 훌쩍 뛰어 올라 검을 휘두르면서 뒤쫓아갔다. 다른 한 그림자도 말에 뛰어올라 쫓아가면서 소리쳤다. “오빠, 쫓지 말아요!” 앞에서 쫓던 오빠란 사람은 계속 뒤쫓아 갔다. 그는 전지 불을 쥐고 달리는 응삼을 쫓아가 검을 번쩍 휘둘렀다. “어이쿠!” 비명소리와 함께 응삼이 어깨에 칼을 맞고 썩박나무 넘어가듯이 쿵 떨어져 쓰러졌다. 전지불이 질척한 땅바닥에 떨어지면서 앞에서 달려가는 한길수가와 야마모도 등뒤를 비췄다. 복면괴한이 말을 타고 쏜살같이 뒤쫓아 갔다. 검이 휙 소리와 함께 번쩍했다. “앗!” 한길수가 비명소리와 함께 팔을 붙잡고 말 잔등에 납작 엎드려 도망쳤다. 괴한은 검을 휘두르면서 야마모도에게 덮쳐들었다. 야마모도는 뜻밖에도 말머리를 돌리더니 시퍼런 군도를 빼들었다. 괴한은 검으로 야마모도의 목을 내리 찍었다. 검이 내려오다가 야마모도의 칼날에 맞아 불꽃을 튕겼다. 괴한의 검이 재차 날아 내려오는 척 하더니 독사처럼 야마모도의 눈깔을 팍 찔렀다. 비명소리와 함께 야마모도는 눈깔을 싸쥐고 군도를 발악적으로 휘둘렀다. 괴한은 날아오는 군도를 검으로 비켜치우고 야마모도의 목을 찔렀다. 야마모도는 목을 틀어 검을 피하더니 말을 놓아 꼬리 빳빳해 도망쳤다. 뒤에서 웬 여자가 말을 타고 달려오면서 돌멩이를 날렸다. “앗!” 야마모도는 눈깔을 붙들었던 왼손으로 뒤통수를 싸쥐고 말 잔등에 납작 엎드려 꼬리 빳빳해 도망쳤다. 졸개들은 몽둥이고 칼이고 버린 채 숲속으로 도망쳤다. 그러나 숲속에서 복면한 괴한들과 부딪쳐 난투를 벌리다가 죽은 놈은 죽고 몇몇 놈만이 간신히 살아 면사모소 쪽으로 달아났다. “오빠, 더 쫓지 말아요!” “알았어. 진달래야, 빨리 큰아버지를 말에 모시고 이 자리를 뜨자.” “알았어요.” 그들이 말머리를 돌려 돌아올 때였다. 앞에서 한 괴한이 응삼의 손에서 전지 불을 빼앗아 비추었다. 괴한은 진창에 쓰러져 신음소리를 내고 있는 응삼의 목덜미를 틀어쥐더니 시퍼런 칼을 목에 들이대는 것이었다. “이 놈아, 네 놈이 응삼이란 개다리 놈이겠구나.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잘 만났어. 우리 일가를 제 고향에서 못살게 굴더니 내 손에 죽어봐라.” 응삼은 검에 찍힌 팔을 붙잡고 기어일어나 앉으면서 애걸복걸했다. “장수님, 누군지 제발 살려주오.” “옳아, 죽어도 알고 죽어라. 난 네놈들이 못살게 굴어 일곱 살에 만주로 쫓겨 간 상순이야. 네 놈들이 우리 조손 삼대를 얼마나 못살게 굴었냐? 다 알았지? 에이, 죽어라.” 상순이 칼로 응삼의 가슴을 찌르려는 순간 최구장이 말리였다. “이보게, 상순이, 그자를 살려주게. 내 제자니까.” 그러나 그 말을 들을 상순이 아니었다. 그는 칼로 응삼의 가슴이고 낯이고 마구 찍으면서 고함쳤다. “이 놈이 어디 가시할아버지를 선생으로 알아줍디까? 이 놈 개다리하구 길수가란 놈의 성화에 못 이겨 우리 온 집 조손 3대가 고향에서 못살고 풍설이 이는 날에 만주로 갔댔습니다. 오늘 원수를 갚겠습구마.” 근형도 달려왔다. “에이, 이 일본 놈의 개다리야, 어디 죽어봐라!” 그는 고함치면서 몽둥이로 응삼의 대가리를 땅땅 내리쳐놓고도 성차지 않아 마구 차놓았다. 응삼은 피 못이 낭자하게 된 채 네 각을 쭉 뻗었다. 그는 비바람 속에서 상순의 칼을 열네 차나 맞고 일본 놈의 개다리 구장을 하던 더러운 일생을 끝장보고 말았다. “놈들이 되 쫓아오기 전에 이곳을 떠나야 하오.” 한 괴한이 소리치자 진달래와 괴한들은 졸개들이 버리고 달아난 말에 최구장 양주와 새단을 태우고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금방 검을 휘두르면서 끼무라와 한길수를 쫓아가던 괴한은 경인이었고 돌팔매질을 한 여자는 최구장의 동생 최구철의 딸 진달래였다. 그리고 한패의 괴한들은 진달래가 백두산에서 데리고 내려온 항일유격대 대원들이였다. 원래 낮에 형만은 지친 몸을 끌고 먼저 불붙이에 있는 처남인 경인이네 집으로 찾아 갔다. 그곳에서 상순과 명옥이 그리고 죽순도 만났던 것이다. 경인은 형만에게서 자초지종을 들은 후 수염을 쓱쓱 내리쓸더니 상순의 부부를 보고 말했다. “처남, 여긴 위함하네. 형만과 함께 만주로 빨리 떠나오.” 상순은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매형, 이제 그 놈들이 되돌아와 나를 잡지 못하면 가시할아버지를 해치자고 하지 않겠소? 그 놈들과 생사결단을 내고 싶소. 우리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어째 고향에서 쫓겨났소? 다 그 한길수와 응삼이 놈이 일본 놈들을 등에 업구 못살게 군 때문이요. 이번에 왔을 때 복수를 하지 않고 또 언제 하겠소?” 어금이 말렸다. “오라비, 어쩌자고 그래? 매형 말을 들어라. 내 마른 누룽지와 미시가루를 한주머니 줄 테니 얼른 각시를 데리고 만주로 떠나라.” 큰누나까지 말하자 상순은 앉아 곰곰이 생각을 하더니 무겁게 입을 떼였다. “가시고모 내 각시와 함께 먼저 가오. 내 일을 쳐 놓고 가시할아버지를 혼자 고생하게 놔두고 혼자 살겠다고 만주로 빠져갈 순 없소.” 형만도 동감을 표시했다. “내 야마다 면장 놈을 죽였소. 나도 가시아버지를 혼자 남겨두고 갈순 없소.” 그들이 어떻게 최구장 등을 안전한 곳으로 모셔오겠는가고 한창 궁리하고 있을 때 운주동에서 근형이가 헐떡거리면서 달려왔다. “삼촌, 큰일 났소. 할아버지랑 할머니랑 일본 놈들에게 잡혀갔소.” “뭐라고?” 경인과 상순이 놀라 벌떡 일어났다. 경인은 “얘, 천천히 말해라.”라고 하면서 근형의 어깨를 잡아 흔들었다. 근형은 숨이 차 헐떡거렸다. “해질녘에 우리 집에 들어섰을 때 야마모도 소장 놈과 한길수의 패거리들이 욱 쓸어 들어 와서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묶었소. 나는 바삐 고방 문을 열고 뒤울안으로 해서 달아났댔소.” 이때 진달래가 한패의 괴한들을 데리고 집안에 들어섰다. “너는 어떻게 돼 여기로 왔냐?” 경인이가 마중 나가면서 묻자 진달래는 철색얼굴에 웃음꽃을 피우며 “일이 있어서 지나가다가 들리었어요.”라고 하였다. 그녀는 뒤에 따라 들어오는 괴한들은 자기 친구들이라고 덧붙였다. 진달래는 사촌오빠 경인에게서 큰아버지 최구장 등이 일본 놈들에게 붙잡혀갔다는 소식을 듣고 펄쩍 뛰었다. “의논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요. 어서 큰아버지를 구해야지요.” 경인도 아버지가 붙잡혔기에 더는 참을 라야 참을 수 없었다. 그는 오래 동안 쓰지 않았던 검을 찾아들고 복면한 후 진달래와 함께 아버지를 구하러 나섰다. 상순과 근형도 각기 식칼과 몽둥이 찾아들고 보자기로 복면한 후 비바람을 무릅쓰고 떨쳐나섰다. 그들은 최구장을 찾아 면사무소로 가다가 운주동 마을 어귀에서 면바로 최구장네를 만났고 최구장 네를 뒤쫓아 온 끼무라 국장과 한길수의 패거리를 딱 마주쳐 접전을 벌렸던 것이다.                             11. 핍박에 고향을 떠나        최구장은 집에 돌아와 쥐마당같이 돼버린 쓸쓸한 구들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는 등잔불을 켠 어두운 집안을 둘러보았다. 경인은 “아버지, 일이 이 지경이 됐으니 먼저 우리 집에 피신하깁소. 일본 놈들이 꼭 덮쳐 올겝구마.”라고 했다. 최구장은 한숨을 후- 내쉬었다. “거기 간들 쫓아가지 않겠냐?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됐어? 이젠 정말 운주동에서 다 살았구나.” 성미가 불 같은 상순이 최구장 앞에 나서서 권고했다. “가시할아버지, 아예 우리 만주국 함흥촌에 들어갑시다. 설마 일본 놈들이 그곳까지 찾아오겠습둥?” 그 말에 온 집안이 웅성거렸다. 여기저기서 만주국으로 가는 게 옳다고 했다. 그때 진달래가 나섰다. “큰아버지, 함흥촌이라고 일본 놈들이 없겠어요. 전번엔 일본놈들의 소탕까지 받았습구마. 아예 우리 아빠랑 사는 장백산에 들어가죠. 거기엔 유격대도 있어 보호받을 수 있어요.” 최구장은 진달래를 피뜩 쳐다보더니 머리를 가로저었다. “공자 성인이 가로사대, ‘자기를 억제하고 예에 맞게 행동하라.’ 그래, 중용지도가 제일인 거야. 일본 사람들도 자기들을 해치지 않는 나를 어쩌겠냐? 그놈들도 사람인데 어찌 량심을 항상 개한테 맡기겠나?” 유격대 대장 최동욱은 썩 앞에 나서면서 권고했다. “처음엔 우리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영월동을 떠나지 말고 살려고 머리를 숙였습구마. 그러나 일본 놈들은 우리 나라를 빼앗았고 착한 마음을 가진 우리를 어디서도 못살게 짓밟고 있습구마. 심지어 내 앓는 안해마저 짓밟았습구마. 우린 일본 놈들의 철 발굽 아래서 자기 여편네도 가정도 지키기 어렵게 됐습구마. 그래서 나도 총칼을 들고 일어섰습구마. 지금 일본 놈들은 만주국에까지 쳐들어가 우리 조선 사람들을 못살게 굴고 있습구마. 일본 놈들을 이 땅에서 몰아내기전엔 우린 고향에서도 살 수 없고 만주국에서도 허리를 펴고 살 수 없습구마.” “그만하게. 건 알만하네. 그러나 칠순이 넘은 내가 이제 총칼을 들고 일본 놈들과 어떻게 싸우겠는가? 우린 좌우간 운주동에선 못 살고 나앉게 됐네. 만주국에 들어가지 않으면 칼에 피를 묻힌 경인이랑 어떻게 하겠어?” 한숨을 후- 하고 땅이 꺼지게 내쉬던 최구장은 가슴을 탕탕 치며 통탄했다. “어떻게 돼 이 좋은 조선 강산을 두고서도 고향에서마저 살지 못하게 됐는고? 하늘도 너무 무심하구나. 창천이여, 굽어 살피옵소서. 으 흐 흐 흑, 흑흑.” 최구장은 천정을 쳐다보면서 땅바닥을 탕탕 쳤다. 등잔불 밑에 비낀 그늘진 그의 두 볼에서는 눈물이 하염없이 줄줄 흘렀다. 뒤이어 그는 애들에게 공부를 배워주던 서당방의 마루를 어루만지더니 어깨를 들먹이면서 흑흑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리었다. 경인은 뒷근심이 컸다. “아버지, 먼저 불붙이에 있는 신설집 형내네 집에 가서 숨어 있으면 어떻습둥? 아버지 상처하구 며느리 병도 치료하고.” 최구장은 맥없이 진달래와 경인을 번갈아보면서 조금 궁리하다가 머리를 끄덕였다. “그래, 얼른 운주동을 떠나자.” 최구장은 피와 빗물로 흠뻑 젖은 옷을 활활 벗어 버리고 농짝에서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경인과 근형은 집안에서 입을만한 옷이랑 농짝에서 꺼내 보자기에 쌌다. 소문을 듣고 달려온 셋째 경민과 넷째 경욱은 어안이 벙벙해 했다. “밤중에 어디로 간다고 야단들이오?” 경욱이 밤중에 홍두깨를 내밀듯 하는 말에 최구장은 핀잔부터 했다. “일본 놈들의 등살에 어디 운주동에서 살겠냐? 차차 만주로 달아나야겠어. 맏사위 사는 만주국 함흥촌에 가든지. 너희들도 준비하거라.” 경민은 납득되지 않았다. “이 팔간집이랑 어쩌고?” 그는 좁은 얼굴에 마땅찮은 표정이 흘렀다. “상순이 말하지 않더냐? 만주에는 땅이 넓고 황무지가 많아서 부지런히 밭을 일구기만 하면 기장밥에 감자 국을 먹는다더라.” 어느 결에 앞집에 있던 막내 경석도 들어왔다가 그 소리를 듣고 빈정거렸다. “만주에 가면 목침을 베고 누워 있어두 된장국에 기장밥이 입에 마구 쏟아져 들어오겠구먼.” 그 말에 경욱이 제 딴에는 고명한 방법으로 동생을 훈계했다. “너, 이 놈, 목침을 베고 약 담배 질이나 해서야 어떻게 살아? 약 담배장사래도 해야 살지!” “넷째야, 너 언제 그 놈의 약 담배 질을 그만 두고 살림살이나 온전히 해라.” “아버지도 웬 말씀인가요? 나도 살림살이를 잘하자고 약 담배장사를 합니다.” 최구장은 하얀 머리를 홰홰 가로저었다. “너 언제든지 그 놈의 약 담배로 경을 치겠다. 일본 놈들이 오겠다. 어서 떠나자. 끼무라란 놈의 상통을 생각만 해도 치 떨려.” 모두들 우르르 집을 나섰다. 최구장은 등불을 쥐고 이 구석 저 구석 살피다가 팔간 집 한가운데 어두커니 서서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는 정든 팔간 집을 떠나기 아쉬웠고 마음이 여간 아프지 않았다. 경숙이가 들어와서 다급히 소리쳤다. “아버지, 빨리 떠납시다. 일본 놈들이 들이닥치면 어쩌겠습둥?” “그래, 어서 가자. 이젠 영영 떠나가야 될 것 같구나.” 최구장은 발길이 떨어지지 않아 대답은 해놓고서도 발 뿌리가 내린 듯이 계속 어두커니 서있었다. 경숙이 억지로 아버지를 부축해 집 문을 나섰다. 경숙이가 비칠거리는 아버지를 옆에서 모시고 기름종이우산을 들었지만 비바람에 하얀 바지가 빗물에 젖어들었다. 새단이 자꾸 까무러쳐서 봉인이 아예 둘쳐 업고 불붙이 쪽으로 황급히 떠났다. 그들은 비 내리는 밤중에 신설집 병권이네 집으로 들어가지는 못하고 먼저 경인이네 집으로 들어갔다. 최동욱과 진달래는 유격대를 거느리고 바람결처럼 비바람 치는 수림 속으로 사라졌다. 경인이네 고방에 들어간 새단이 가는 앓음 소리를 냈다. 뒤이어 근형이가 방으로 들어와 상순을 찾았다. “아무래도 안 되겠네. 내 처가 하신에서 자꾸 피가 흐르오. 신설집에 찾아가 형내를 불러오든지 하오.” 상순은 한마디 대답하고는 인차 떠나갔다. 근형과 경인은 최구장의 옆에서 머리상처의 피 자국을 솜으로 닦아드렸다. 한참 후 상순이 큰아버지 관준과 칠촌조카 형내를 데리고 비바람을 무릅쓰고 경인이네 방에 들어섰다. “가시할아버지, 큰아버지와 조카가 왔습니다.” 최구장은 몸을 일으켜 일어나려고 했다. “사돈어른 누운 대로 계십소.” 관준은 최구장의 손을 잡으면서 구들에 앉았다. 그래도 최구장은 일어나 간신히 앉았다. “내 근심은 하지 말구 먼저 내 손비를 봐 주오.” 관준은 먼저 근형과 함께 고방에 들어가 새단의 병을 보았다. 그 사이 형내가 최구장의 손맥을 짚어보고 머리도 손으로 매만져 보았다. “스승님, 세상에 둘도 없이 착한 선생님께서 어쩌다가 이런 봉변을 당하셨습니까?” 최구장은 그저 눈을 지그시 감고 한숨만 후~ 내쉬었다. 한참 후 관준이 고방에서 근형과 함께 나왔다. “새 색시가 너무 놀라서 하마터면 낙태할 번했습니다. 허나 안궁 약을 몇 첩 쓰고 지혈제를 쓰면 될 것 같습구마.” 최구장은 한숨을 후~ 내쉬었다. “우리 손비에게 무슨 죄가 있다고 일본 놈들이 저렇게 모질게 굴어? 에이, 고약한 놈들이라고. 제 놈들이 우리 운주동 주인행세를 하고 있단 말이요. 어디 될 말인가?” 관준도 눈을 지그시 감고 최구장의 손맥을 보면서 머리를 끄덕였다. “사돈어른, 외상이니깐. 지혈제를 쓰면 되겠습구마.” 관준은 침통을 꺼내 최구장의 머리와 볼, 어깨 등 여러 부위에 침을 쏙쏙 꽂아놓았다. “에이, 내야 이젠 팔순고개를 바라보니까 죽어도 괜찮지만 저 손비나 좀 살려 주오.” 관준은 침을 하나하나 뽑아 약솜에 닦아 침통에 걷어 넣으면서 말했다. “무슨 소릴 하오. 우리 다 살아서 만주국으로 들어가 잘 살기요. 만주국에 먼저 들어간 내 조카가 몇해 전 생전에 고향에 왔다가 하는 말이 일본 놈들이 적은 만주국에 가면 땅도 넓고 사람이 적어서 지나가던 길손에게도 기장밥에 토장국을 대접한다고 했소.” 최구장은 도리머리를 가로저었다. “만주국에 일본 놈들이 없으면 몰라도.” 관준은 침통을 주머니에 넣고 새하얀 염소턱수염을 슬슬 만지면서 최구장을 보고 말했다. “글쎄, 직접 들어가 제 눈으로 똑똑히 봐야 알지. 여기서 소문만 들어서야 어찌 제대로 알겠소? 그러나 저러나 최구장과 손비는 우리 집에 가 있으면서 치료해야 되겠소. 인차 떠나도록 하기요. 손비 병은 중하오. 다시 놀라면 애도 떨어지게 되오.” 그 말에 최구장은 “그럼 먼저 내 손자하구 손비나 데리고 가서 잘 치료해 주오. 난 내일 날이 밝으면 약을 가지러 경인을 보내겠소.” 하고 말했다. 이튿날 이른 새벽에 상순은 최구장과 경인 등과 일일이 인사하고 만주국을 바라고 떠났다. 그는 매형 경인과 어금을 이슬 맺힌 눈길로 바라보면서 떠나기 아쉬워했다. “매형과 누님도 인차 만주로 들어오오. 가시할아버지랑 가시부모랑 모시고 다 함흥촌에 들어오오. 함흥촌에서 우리 함께 살기요.” 상순의 말에 경인은 머리를 끄떡이었다. “그래기요. 우리도 인차 들어가야 하겠소. 내 검에 피를 묻혔으니 일본 놈들의 등살에 어디 고향에서 더 살 수 있겠소?” 상순은 고향을 떠나면서 계속 한숨만 땅이 꺼지게 내쉬었다. (야, 내 고향 운주동이 어쩌다가 이 모양이 되였는가? 다 일본 놈들 때문이야. 이제 성칠 큰아버지를 만나면 총 한 자루를 달라고 해야지. 일본 놈들을 하나하나 쏘아 죽일 테야.) 상순은 명옥을 데리고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떠났다. 그는 령마루에 올라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 고향 산천을 휘 둘러보았다. 저 멀리 바라보이는 구름 속에 우뚝 솟은 기운봉과 치마봉 허리에 은띠를 두른듯이 사품 치며 흐르는 운주하, 고향마을 뒤에 뻗은 산발 따라 조상들의 선산도 바라보였다. 마치 눈에, 마음에 고향 산천을 다 담아가지고 떠나가지 못하는 것이 아쉬워 오래도록 눈을 떼지 않았다. 그는 명옥의 손을 잡고 장탄식했다. “여보, 우리 언제 고향으로 또 돌아오겠소?” “글쎄. 일본 사람들과 싸우지만 않아도 몇해 후에 오겠는 걸 그랬소.” 명옥이 하는 말에 상순은 벌컥 성을 냈다. “개소릴 작작 치오. 섬나라 오랑캐들을 몽땅 몰아내야 우리가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는게야.” 상순은 씩씩거리면서 령길을 씨엉씨엉 앞질러 걸어 나갔다. 명옥은 나그네의 성질을 아는지라 감히 다른 말을 하지 못하고 뒤따라갔다 … 처남 상순이 떠나간 후 경인은 약을 가지러 신설 집으로 떠나가고 최구장과 근형은 삽과 괭이를 들고 산속으로 몸을 숨기었다. 경인이 신설집 팔간 집 삽작문에 들어서니 형내의 아버지 상철이 널마루에서 내려오면서 반겨 맞았다. “어이구, 불붙이 검객사돈이 왔구먼. 그래 사돈어른 병은 어떻소?” “아버진 괜찮은데 큰조카네 색시가 하혈이 심하오.” 이때 관준과 그의 아들 상철이 안방에서 들어오라고 경인을 불렀다. “사돈, 어서 들어오오. 약을 다 지어놓았소.” 상철의 고조부 수종, 증조부 승중, 조부 병권, 아버지 관준 그리고 그의 맏아들 형내까지 6대를 내려오면서 이 집안은 대대로 명의였다. 고조부 수종과 증조부 승중은 모두 리씨 왕조의 궁중어의였다. 승종영감은 궁정에서 오줌약을 왕후에게 썼다가 왕후의 병은 치료하였지만 사실진상이 발각된후 왕에게 축출당하였던것이다. 그는 이 명천 골안에 낙향한 후 맏아들 병권에게 의서를 물려주었고 둘째아들 병완에게는 힘과 목수재간을 물려주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큰집 신설집은 병권으로부터 대대로 조상이 물려준 비방으로 병을 보면서 여유있게 살았고 둘째집 성남집은 병완으로부터 시작하여 대대로 목수재간과 뚝심을 믿고 어렵게 살아왔다. 경인이 황급히 인사를 드리고 약 첩을 들고 나오면서 보니 상철의 열둬 살 푼한 둘째아들 경학과 일여덟 살 돼 보이는 셋째아들 광학이가 피뜩 보였다. 그러나 그들은 새까만 눈알을 때굴때굴 굴리면서 입을 꼭 닫아 맨 채 종내 인사할 줄 몰랐다. (저 애들은 뜨거운 형내와는 달리 차지고 꽁한 애들이야. 이런 집에 어떻게 우리 할아버지네가 와있겠는가.) 이런 궁리 저런 궁리 하다나니 어느덧 불붙이에 이르렀다. 그런데 개 짓는 소리가 요란했다. 경인이 소나무 뒤에 몸을 숨기면서 자기 집 쪽을 내려다보았다. “앗!” 경인은 하마터면 고함칠 번했다. (저게 뭐야? 일본 헌병대 놈들이 아니야?) 경인은  깜짝 놀랐다.  야마모도 놈은 왼눈 통을 붕대로 싸매고 헌병들을 데리고 자기 셋째동생 경민과 넷째동생 경욱을 묶어 앞세우고 자기 집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뒤이어 한길수도 졸개들을 끌고 들이닥쳤다. 집 마당에서 경욱이 목에 지렁이 같은 핏줄을 살려가지고 고함치고 있었다. “우리 형님에게 무슨 죄가 있다고 이렇게 못살게 구오?” 경민은 그저 겁이 나서 온몸을 사시나무 떨듯 바들바들 떨기만 했다. 이윽고 한길수는 경인의 집에서 쌍검을 찾아냈고 복면하였던 검은 보를 찾아냈다. “물증이 다 있는데도 떼를 쓸 테야? 이게 바로 어제 저녁에 저 야마모도소장의 눈을 찌른 검이야. 이 피를 보아라. 아직 채 마르지도 않았어.” 영팔이 고함쳤다. “맞소. 건 경인이란 놈 거 틀림없어!” 야마모도 소장 놈은 외눈깔 통에 불이 이글이글거렸다. 그는 한길수 손에서 쌍날 검을 빼앗더니 씽 덮쳐가 경민을 내리찍었다. 경민이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막다가 왼손이 뭉청 끊어져나갔다. “앗!” 비명과 함께 그의 손이 피바람과 함께 땅바닥에 떨어졌다. 경민도 쓰러져 대굴대굴 굴렀다.야마모도가 내리찍으려는데 끼무라 국장이 말리였다. “이 놈들을 잡아가둬야 범을 산에서 끌어낼 수 있단 말이요. 그만해.” 야마모도는 허우적거리면서 검으로 하늘을 마구 찍어대며 고함쳤다. “당신들은 또 그물을 넓게 쳐서 큰 고기를 낚겠어? 난 동생과 눈마저 잃었어.저놈들을 요정내고 말겠어.” 야마모도가 미쳐 날뛰자 끼무라소장은 부하들을 시켜 야마모도마저 묶어가지고 경민이 형제 그리고 근형의 색시까지 함께 끌고 산 아래로 내려갔다. 어금은 잡혀가는 시동생들과 시조카들을 바라보면서 어쩔 줄 몰라 마당에서 두 손으로 앞섶 잡고 발을 동동 굴렀다. 경인은 주먹을 불끈 쥐고 부르르 떨었다. (안 되겠어. 도망쳐야지.) 그는 일본 놈들이 사라지기를 기다려 아내와 딸 해옥을 데리고 약 첩을 쥔 채 산속으로 달아났다. “이보, 근덕은 어쩌고 이렇게 달아나오? 그 애도 데리구 달아나야지.” 경인은 숨이 차 헐떡거리면서 말했다. “당신은 먼저 해옥을 업고 신설집 쪽으로 피하오. 내 우시장에 가서 인편에 근덕을 만주국에 가자고 기별하겠소.” 어금은 해옥을 업고 뒷산 속으로 사라지고 경인은 령길을 타고 남쪽으로 사라졌다. 한편 우시장의 일본 놈의 상점에서 일하던 근덕은 그날도 상점에서 일하다가 면목 모를 사람이 찾아와 쪽지를 한 장 주고 가는 걸 받아 쥐었다. 근덕은 뒷간으로 가는 척 하면서 뒤울안에 가서 쪽지를 가만히 펴보았다. 쪽지에는 이런 글이 또박또박 씌어있었다. 분명 아버지의 필적이었다.         근덕아, 우리는 사고를 쳐서 부득이 만주국으로 들어가게 된다. 너도 속히 기차를 타고 외할아버지랑 계시는 만주국 함흥촌으로 들어오너라.   쪽지를 받자마자 근덕은 일본 상점의 주인을 보고집에 급한 일이 있어 돌아가야 하겠다고 했다. "차비를 하게 봉금을 주오." 일본 주인은 안경알 밑으로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더니 동전 몇 잎을 달랑 내놓았다. “중도에 나가면 없어. 불쌍해 주는줄 알아." 근덕은 원통한 대로 동전 몇 닢을 받아 넣고 우시장 역으로 나갔다. 그는 아버지가 직접 오지 못하고 쪽지를 보냈을 때에는 집에 꼭 무슨 일이 생겨 먼저 떠나갔으리라고 짐작했다. 그리하여 그는 고향에도 들리지 않고 그날로 기차를 타고 명천을 떠나 만주국으로 떠나갔다. 정든 고향을 떠나는 근덕의 눈에는  고향을 빼앗긴 슬픔이 피눈물로 흘렀다. 나어린 그도 나라를 잃은 망국노의 아픔이 마음속 깊이 폐부에 맞혀오는 것을 가슴깊이 느꼈다.    
80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43) 댓글:  조회:2017  추천:0  2016-06-08
          7. 큰물        최구장의 집은 쑥밭처럼 됐고 어덴가 모르게 살기가 스미어 들었다.        “이제 일본 헌병 놈들이 쳐들어오겠는데. 아, 이 일을 어쩐단 말이요?” 최구장은 집안에 들어와 김빠진 공처럼 풀썩 물앉았다. 경인은 상순을 나무랐다. “에끼, 이 사람아, 좀 참지 못하고 그게 뭐요? 일본 놈들과 맞서서야 되오?” 그는 몸을 돌려 상을 찌푸리면서 어두커니 서있는 아버지를 위안했다. “아버지, 괜찮습구마. 먼저 처남을 만주국에 보내고 아버지네도 숨었다가 함흥촌에 달아 납소. 내 뒤처리를 싹 해가지구 동생들을 데리고 들어가겠습구마.” 어금도 오랍동생의 팔을 붙들고 말리었다. “얘, 어쩌면 참지 못해? 옛날에 아버지도 한길수를 떴다가 여기서 못 배기고 만주에 달아나지 않았니?” 상순은 그제야 가마뚜껑을 가마 위에 놓으면서 씩씩거렸다. “그래 가시할머니와 각시를 다 붙잡아 가자는데도 놔 두라오? 내 잘 못한 게 하나도 없소. 그 놈들이 우리를 한심하게 업신여기고 날뛴단 말이요. 자기 고향의 딸기와 버섯을 뜯었는데 무슨 죄를 졌단 말이요?” 경인은 “설마 죽겠소? 극상해서 매를 맞고 벌금이나 하면 되겠지?”라고 하면서 도리머리를 절레절레 가로 흔들었다. 성단은 계순의 팔을 붙잡고 열 당부를 했다. “얘, 시집에서 기다리겠다. 이젠 온지 일주일도 됐으니 어서 집에 가라. 여기 있다간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몰라.” 그러고 나서 성단은 죽순과 상순이네 쪽으로 얼굴을 돌리더니 “자네들도 어서 만주로 빨리 달아나오. 일본 놈들에게 붙잡히면 죽는 길 밖에 없소.” 라고 하며 발을 동동 굴렀다. 그런데도 계순은 “야, 엄마도, 더 놀고 가겠소. 이래 보면 언제 또 보겠소? 난 가기 싫소.” 라고 하면서 흥기를 끌어안았다. “이것아, 날이 개였을 때 집에 피해 있다가 정서방과 의론해서 저 죽순이네 함흥촌으로 달아나라. 우리도 들어가야겠다.” 계순은 가기 싫어하면서도 일본 놈들이 쳐들어올 것 같아 흥기를 들춰 업고 빨갛게 익은 살구 반 바가지를 천에 싸든 채 꿀꿀이를 이끌고 가마골로 떠나는 길에 들어섰다. 그녀가 울 밖에 나가서 가마골로 가는 길에 들어섰을 때였다. 앞에 숱한 까마귀들이 날아내려 앉아 “까지 마오! 까지 마오!” 하고 울어대였다. 그러자 몇 발자국 떼지 않은 계순은 바래러 나온 엄마 쪽으로 되돌아오더니 몸을 비틀면서 떼를 썼다. “엄마, 난 가지 말까? 저 까마귀들을 보오. ‘가지 마오, 가지 마오.’ 하고 울지 않소?” 그때 또 까마귀들이 참말로 그렇게 우는 것이었다. “까욱! 까욱!” “까지마욱!” “까지 마우! 까지 마우!” 그 까마귀들의 울음소리는 정말로 “가지 마우, 가지 마우.” 하고 우는 상 싶었다. 순금은 돌멩이를 쥐여 까마귀무리에 뿌리면서 “닭 수리야, 우~씨! 닭 수리야, 우~씨!” 하고 쫓았다. 그러자 까마귀들은 후닥닥 날아났다가도 또 길 앞에 내려와 앉으면서 울어댔다. “까지 마욱!” “까지 마우!” "가지 마우!" 계순은 우는 까마귀를 보고 또 되돌아서서 “어디로 갈 때 까마귀가 울면 나쁘다던데 엄마, 난 가지 말개.”라고 하면서 한발자국도 내딛지 않고 되돌아왔다. 성단은 애를 업은 계순의 잔등을 어루만지면서 달래였다. “저 까마귀들은 네가 여기 있으면 일본 놈들에게 붙잡혀가서 죽을까봐 우는 게야. 빨리 이곳에서 달아나라.” “엄마와 명옥은 어쩌겠소?” “우리도 여기서 달아나겠어. 언니네 마을에 가서 만나자. 우리 거기 가서 잘 살자.” 그제야 계순은 가기 싫은 걸음으로 마지못해 가마골로 향했다. 그는 가기 싫어서 몇 번이고 몇 발자국을 가다가도 뒤를 돌아보고 되돌아오려고 하군 했다. 그럴 때면 성단이가 어서 가라고 손짓하군 했다. 그리하여 계순은 마지못해 흥기를 춰 업고 느릿느릿 마을 어귀로 걸어갔다. 계순이가 마을 어귀를 벗어나 가마골 쪽으로 굽어들자 모두들 집안에 들어와 대책을 상론했다. 최구장은 한참이나 담배를 피우면서 궁리하더니 입을 무겁게 열었다. “명옥이 네는 죽순과 함께 먼저 떠나거라. 우리도 애들을 다 데리고 만주국에 들어가야 하겠어. 저 한길수 놈과 응삼이랑 우리를 여기서 살게 하니? 일본 놈들까지 득실거리는 여기서 하루도 삐치기 힘들구나. 공부도 배워주지 말라지, 밭에다 곡식을 심지 말라지. 이젠 버섯이구 딸기마저 뜯어먹지 말라지. 뭘 먹고 살아?” 그는 경인을 보면서 “너희들도 동생들과 함께 떠나도록 해라.” 하고 말했다. 경인은 “알았습니다.”라고 하며 머리를 숙였다. 경인과 어금은 근현과 두 살 밖에 안 되는 해옥을 각기 업고 집으로 먼저 떠나갔다. 한편 계순은 홍기를 업고 가마골에 마지못해 돌아왔다. 계순이 삐뚤게 달린 정지 문을 열고 집에 들어섰다. 그러자 열흘 만에 아내를 보는 정형만은 반가와 애를 업은 계순을 덥석 안아 빙빙 돌렸다. “이걸 놓소. 위방에서 시아버지 웃겠소.” 형만은 아내를 내려놓으면서 “그래 가시부모랑 모두 무사하오? 처형이랑 처조카네랑 만주에서 잘 보낸다오?” 하고 이것저것 물었다. “예, 우리도 언니네 사는 만주에 가서 잘 살아보기요. 이 가마골에서 어떻게 사오?” 그러자 형만은 계순을 꼭 끌어안으면서 “응, 그래. 우리 만주에 가서 잘 살아보자.”라고 하며 계순의 이마에 흘러내린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었다. “이번에 우리 엄마와 명옥이 강가에 가서 버섯하구 딸기를 따 왔다고 일본 놈들이 붙잡아가려고 하지 않겠소. 그래서 조카사위가 글쎄 가마뚜껑과 식칼을 들고 덮쳐들어 일본 놈과 응삼이 그 구장 놈을 찍어놓았소.” 그들이 이런 얘기를 주고받는데 바깥에서 꽹과리소리가 쟁쟁 울렸다. “야마다 면장님의 명령이야! 모두 저수지 둑막이를 나왓!” 형만은 아내 계순과 더 재미없는 말을 하지도 못하고 둑막이를 나가게 됐다. 계순은 문 밖에 나서는 남편을 보고 신신당부했다. “여보, 내 본가집에서 떠나는 길 앞에 별나게 까마귀들이 울더군요. 어찌나 불길하던지. 둑 막으러 가면 어찌나 물을 주의하오.” 형만은 문 밖에까지 따라 나온 아내의 근심어린 얼굴을 돌아보며 “근심하지 마오. 자네나 주의하오.”라고 말하고는 떨어지지 않는 걸음으로 떠나갔다. 형만은 또 마을 사람들과 함께 산골짜기 막바지에 둑막이에 끌려 나갔다. 그러나 형만은 그것이 아내와의 생리별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한참 후 바깥에서 요란한 소리가 울렸다. (무슨 소릴까?) 계순은 이상해서 흥기를 업고 바깥에 나가보았다. 다른 집들에서도 비행기가 날아오는 소린가 하여 비행기를 구경하려고 바깥에 나왔다. 모두들 소리 나는 골짜기 막바지 쪽 구름 덮인 하늘을 쳐다보았다. 먹장구름이 뒤덮인 하늘에 비행기는 보이지 않고 대신 골짜기막바지에 온통 누런 것이 덮쳐오는 것이 보일뿐이었다. 우르르 쓰~와~ 골짜기를 메우면서 누런 흙물이 기세 사납게 덮쳐 오고 있었다. 이때 우에서 정형만이 달려 내려오면서 고함쳤다. “큰물이다! 사람 살리오! 큰물이다!” “큰물?” 계순이 골짜기를 올려다보니 정말 큰물이 어느 결에 북쪽 마을어구지의 집을 휩쓸더니 곧추 덮쳐 오고 있었다. “에구머니!” 계순은 애를 업은 채로 내뛰기 시작했다. 그런데 물을 피해 높은 곳으로 달려가도 모르겠는데 글쎄 물 앞에서 아래쪽으로 내달렸다. 그러나 우로 뛰나 아래로 뛰나 매 한가진 것은 불 보듯이 뻔했다. 코앞에까지 덮쳐온 큰물은 사정없이 온 마을을 덮치면서 집들과 마을 사람들을 덮쳤다. 파도치면서 덮쳐온 누런 흙탕물은 흥기를 업은 계순을 훌 파묻으면서 스쳐지나갔다. 시형은 시아버지를 업고 집에서 나오자마자 흙탕물에 휩쓸려 자취를 감추었다. 형만은 령 길을 따라 마을 쪽으로 달려오다가 그 광경을 보고 훌렁 진흙탕에 물앉아 손바닥으로 땅을 탁탁 치면서 울었다. “아이고, 계순아, 흥기야, 너네 어디로 가니? 에이고, 하느님도 무심하지. 내 계순과 흥기를 데려가다니?” 형만은 땅을 치면서 대성통곡 쳤다. 형만의 삼촌 석수가 달려와 형만을 위안했다. 한참 후 그는 혹시나 하여 파도치면서 흘러내려간 싯누런 흙탕물을 눈이 뚫어지게 들여다보았다.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예쁜 아내 계순과 아들 흥기가 보이지 않았다. 흙탕물 쪽으로 저벅저벅 걸어가던 형만은 대성통곡 치면서 고함쳤다. “계순아, 흥기야, 너희들이 없이 살아서 뭘 하겠니? 옳다. 나도 너희들 따라 갈게! 기다려라.” 형만은 휘청거리더니 물에 뛰어들려고 했다. 그때 뒤따라 걷던 삼촌 석수도 울면서 형만을 꽉 껴안았다. “야, 정신 나갔니? 간 사람이 돌아오겠니?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 형만아- 어엉엉.” 그러나 형만은 몸부림치면서 기어이 물에 뛰어들려 했다. 바빠 맞은 석수는 형만을 바 줄로 허리를 묶어 나무에 매놓았다. 싯누런 흙탕물은 마을을 툭 쳐 밀고 간 다음 차차 가라앉기 시작했다. 파도치던 물도 잔잔히 흐르기 시작했다. 이때 저수지 둑을 막으려고 산골짜기막바지로 올라갔던 마을 사람들이 달려 내려왔다. 그들도 모두 자기 늙은 부모와 처자를 잃고 무릎을 꿇거나 흙탕물에 뒹굴면서 대성통곡 쳤다. 야마다 면장은 우산을 들고 내려와 지껄였다. “이 바보들아, 이젠 물귀신이 돼버렸는데 살아나겠어? 올라가 물막이나 해! 둑을 잘 막았더라면 이런 일이 있었겠어? 내 말을 잘 듣지 않더니 죽어 싸지.” 그 말에 열이 오른 형만은 바줄을 풀면서 두덜거렸다. “네놈이 마을 사람들의 말을 듣지 않아 이렇게 됐다. 비 내릴 때 저수지 물을 조금씩 빼버렸더라면 둑이 터졌겠어?” 그는 몸을 빼자마자 물 옆에 서있는 야마다 가까이 다가가더니 불시에 흙탕물에 훌 밀어 처넣었다. “네 놈도 죽어봐라.” 야마다는 흙탕물에 빠져 떠내려갔다. 다행히도 야마다는 헤염칠 줄 알아서 살겠다고 허우적거리면서 구해달라고 손을 물 밖으로 내밀었다. 석수가 황급히 달려 내려가면서 바 줄을 들이 뿌렸다. 야마다는 바 줄을 덥썩 잡고 끌리어 뭍으로 올라왔다. 금방까지도 죽은 돼지 눈 같던 야마다의 눈에는 복수의 불길이 이글거렸다. “이 놈, 황군을 물에 빠지어 죽게 하고서도 살 거 같아?” 야마다는 지휘도를 쑥 뽑아 들고 형만에게 덮쳐들었다. 형만은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고 못 박힌 듯이 서서 도끼눈으로 야마다를 쏘아보았다. 야마다가 지휘도로 내리찍는 순간 옆에 서있던 석수가 지휘도를 바 줄을 들어 막았다. 그러나 그때는 늦었다. 지휘도가 바 줄을 몇 토막 내고 석수의 왼쪽팔목을 내리찍었다. 석수의 손가락이 몇 대 흙탕물에 철썩 떨어졌다. 뻘건 피가 떨어진 손에서 흘러 흙탕물에 퍼져나갔다. 그 광경을 본 형만은 더는 참지 못하고 와락 달려 들어 바 줄로 야마모도의 목에 올가미를 걸었다. 석수도 힘을 합쳐 외손으로 야마모도의 추켜든 지휘도를 꽉 잡았다. 웃집의 용기가 야마다의 팔목을 붙잡고 군도를 빼앗아냈다. “네 놈 때문에 우리 온 가족이 몽땅 죽었다.” “에잇, 죽어봐라!” 석수와 형만이 세길 네길 뛰면서 야마모도의 두 팔을 바로 한데 옭아맸다. 그것도 모자라 형만은 옆집 용기의 손에서 지휘도를 빼앗아 야마다의 다리를 내리찍었다. 야마다의 왼다리가 보기 좋게 썩 뚝 잘리어 나갔다. 연약한 마을사람들은 옆에서 말리였다. “자네들이 어쩔 셈이요?” “이러다가 온 마을 사람들이 몰살당하겠소.” 그러나 형만과 석수는 끝내 야마다를 흙탕물 속에 처넣었다. 야마다는 허우적거리며 꽥꽥 고함치다가 흙탕물속에 가라앉아 자취를 감추었다. 뒤이어 야마다가 사라진 흙탕물에서 피가 뻘겋게 퍼져 올라 아래로 둥둥 떠내려갔다. 마을 사람들이 야단났다고 수군거릴 때였다. 가마골의 구장 림호라는 억대우 같은 사내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그는 호랑이도 맨 손으로 꼬꼬리를 잡아당겨 껍질을 다 벗겨놨다는 사내였다. 그는 오자마자 고래고래 고함쳤다. “석수, 어째 죽고 싶은가! 이게 무슨 짓이냐?” 석수와 형만은 피발이 선 눈길로 림 구장을 쏘아보았다. 그러자 림구장은 형만의 살기에 찬 눈길을 보고 뒤로 주춤주춤 멈춰섰다. 그제야 석수는 질척질척한 땅바닥에서 자기 손가락을 주어 보다가 흙탕물에 훌 쥐어뿌리고 손을 잡고 상을 찡그렸다. 형만은 석수의 손목에서 아직도 피가 흐른 것을 보고 “야, 오줌을 팔목에 누오. 피가 멎게.”라고 권했다. “그게 뭐 약이야?” 형만은 우두커니 서 있다가 석수를 재촉했다. “산 사람은 살아야지. 오줌을 빨리 누오. 손이 썩어 들어가겠소.” 석수는 마지못해 손에 오줌을 누웠다. 그런데 기적적으로 손목의 피가 멎었다. 마을사람들은 “석수, 빨리 도망치오. 이제 구장이 일본 놈들을 데리고 덮쳐올게요.”라고 말했다. 형만은 가라앉는 흙탕물을 멍해 바라보면서 “아내 시신을 거두지도 않고 어디로 간단 말이요?”라고 말하면서 떡 못 박힌 듯이 서서 좀처럼 떠나려고 하지 않았다. “빨리 달아나자! 이제 구장이 우시장헌병대에 알리면 영낙없이 죽어!” 그제야 형만은 마지못해 몇 발자국을 뗐다. “용기도 함께 달아나라.” 마을 사람들이 극구 권고하였다. 하지만 용기는 “내 어째 달아난단 말이요?” 라고 말하면서 떡 버티고 서있었다.        석수는 형만을 데리고 정처 없이 달아났다. 형만은 달아나면서도 자꾸 고향 마을과 아내가 떠내려간 물을 되돌아다보았다.        기운봉 쪽에 먹장구름이 몰려왔다. 번개가 산중턱을 번쩍 내리치더니 하늘땅을 진동하는 우레 소리가 울리었다. 뒤이어 장대 같은 소낙비가 창창 억수로 쏟아졌다.                                                                                              8. 먹장하늘 번개 불이 사무실 안에까지 번쩍 들어왔다가 나가더니 꽈르릉 요란한 우레 소리가 울렸다. 야마모도 소장은 상우남면 사무소에서 우시장 헌병대에 전화를 걸어 운주동 사건을 보고하고 헌병들이 오기를 기다렸다. 창밖에서는 또다시 소낙비가 억수로 쏟아졌다. 갑자기 면사무소 소장 사무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림호가 뛰어 들어왔다. 야마모도 소장은 그의 출현에 이상해 엉거주춤 의자에서 일어났다. “아니, 가마골 림 구장, 둑막이 하지 않고 웬 일인가?” 몸에 비를 흠뻑 맞은 림호는 헐레벌떡거리면서 두덜거렸다. “야마모도 소장, 큰, 큰일 났습니다. 야마다 면장이 살, 살해됐습니다.” 조선 말을 잘 모르는 야마모도 소장은 림호가 뭐라는지 통 알아듣지 못했다. 옆에 서있던 응삼은 자기 귀를 의심했다. “뭐라고? 야마다 면장이 살해되다니?” 갑갑해난 야마모도 소장은 안경을 춰올리면서 “니혼고데 하나세(일본말로 말하게)!” 하고 버럭 고함쳤다. 응삼이 보리 일본 말이라도 알아서 목구멍으로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전해주었다. 야마모도 소장은 자기 형을 잃은 것으로 해 펄쩍 뛰었다. 그는 림호 구장의 멱살을 틀어쥐고 흔들면서 꽥꽥 고함쳤다. “다시 말해봐! 내 형님이 어떤 놈에게 살해됐소까?” 숨을 돌릴 새도 없이 림호는 자초지종을 죽 이야기했다. 야마모도 소장은 비보를 다 듣고 군도를 쑥 뽑아들더니 책상을 탁 내리찍었다. 그 바람에 책상이 두 동강이 나고 말았다. “원수놈!" 야마모도는 이를 쁘득쁘득 갈았다.  "가자!” 응삼은 야마모도를 뒤따라 가면서도 운주동에서 당한 일이 있어 슬그머니 겁을 집어먹었다. “야마모도 소장, 우리 힘으론 그 놈들을 붙잡지 못합니다. 괜히 갔다가 우리까지 목숨을 잃겠습니다.” 성이 꼭뒤까지 치밀어 오른 야마모도 소장은 응삼의 멱살을 틀어쥐면서 안경알 밑으로 사발 눈깔을 희번덕거리었다. “겁쟁이 같은 놈, 네놈부터 죽여치우겠어!" “에이, 에이! 이러지 마십쇼. 이제 황군헌병이 오면 가마골과 운주동 그리고 최구장까지 싹 쓸어버립시다. 헤헤헤." 야마모도는 그 소리에 귀가 번쩍 띄어 운주동에서 상순에게 당한 일을 생각하고 치를 떨며 군도를 내리웠다. 그도 몇몇의 힘으로는 운주동과 가마골의 “불온분자”들을 어쩌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는 인차 한길수에게 알려 우시장의 깡패들이라도 데리고 오라고 한 후 헌병대에 다시 전화를 쳐 헌병을 보내달라고 했다. 우시장의 헌병대에서는 다른 곳에서도 불온분자들의 소동이 있어서 못 간다고 했다. 사실 다른 곳에 소동이 있은 것이 아니라 헌병들은 소낙비가 쏟아지는데다가 물이 불어 빠져 죽을까봐 오기 싫었던 것이다. 창밖에서는 닭알만큼 한 우박이 쏟아져 사무실지붕 기와에 따 당 따 당 부딪쳐 요란한 소리를 냈다. 야마모도가 사무실에서 왔다 갔다 하면서 애타게 기다릴 때, 그래도 늙은 한길수가 말을 타고 건달들을 일여덟 데리고 헐레벌떡 달려왔다. 그가 든 기름종이우산은 총알을 맞은 듯이 빈대만 남고 기름종이는 구멍이 펑펑 뚫려 너덜거렸다. 비를 폭 맞은 늙다리 한길수는 야마모도 앞에서 굽은 허리를 굽신거리었다. “참 안됐습니다. 야마다 면장께서 그런 봉변을 당하다니.” 한길수는 림호에게 낯을 돌리더니 이렇게 훈계했다. “구장이라는 게, 참, 면장 어른도 잘 보호하지 못하다니.” 림호는 상전의 앞에서 억대우 같이 구척이나 되는 몸뚱이를 굽실거리었다. “정말 죽을죄를 졌습니다. 한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가마골의 놈들을 한 놈도 남기지 않고 몽땅 죽여 버리겠습니다.” 통역이 번역해주자 야마모도는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그는 부하들 앞에서 약한 속심지를 보이는 것 같아 인차 안경을 벗고 손수건으로 눈물을 쓱 씻더니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요로씨이(좋아), 그래도 한상이 제일이야. 가자, 먼저 가마골에 가서 불온분자들을 처단하고 우리 형님의 시신을 거두자.” 한길수는 야마모도를 따라 면사무소에 준비해둔 군용방수포비옷을 입고 가마골로 쏜살같이 덮쳐갔다. 그들은 말배까지 치는 운주강을 겨우 건너 가마골 어귀에 들어섰다. 누런 흙탕물은 강바닥이 다 드러나게 가라앉았고 다만 누른 흙탕물이 탁 치고 지나간 흔적을 알리는듯 산골짜기중턱에까지 누런 진흙탕이 묻어있고 온 마을에 밭이라고는 산중턱에 강냉이 밭 세 고랑 밖에 남지 않았다. 산골짜기 막바지는 산사태가 무너지면서 골짜기를 껍질을 한번 벗긴 듯이 무너져 내렸고 여기저기에 시체들과 죽은 가축들이 지저분하게 널려있었다. 야마모도는 시체들을 보자 혹시 자기 형이 있겠는가고 살피였다. 그러자 한길수가와 가마골 구장 림호도 자기 상전을 찾느라고 세 귀 눈을 희번덕거리었다. 그래도 혈육이 혈육인가 본다. 야마모도는 누런 진흙탕 속에서 건뜻 쳐들린 군화를 발견했다. 그는 진흙탕 속에서 군화를 신은채로 있는 왼쪽 다리를 쥐여 쳐들고 이리저리 보더니 결론을 내렸다. “조선 사람들은 이런 군화를 신지 못하네. 꼭  형님의 군화 같애. 이 근처에 내 형님이 있을 것 같네. 흩어져서 잘 찾아봐!” “옛!” 한길수와  졸개들은 말에서 내려 사처로 흩어져서 야마다의 시신을 찾기 시작했다. 이때 야마모도는 군화를 신은 왼쪽다리를 쥐고 꿇어앉아 땅을 치면서 대성통곡 쳤다. “아이고, 형님, 이게 무슨 일이요? 조선에 와서 잘 살자고 하던 노릇이 이게 뭐요? 형님, 동생이 왔소. 형님, 어, 허, 헉, 흐, 흑, 흑.” 실 돌피 같은 응삼이 그래도 여기저기 널린 시체 속에서 진흙탕 속에 쓰러진 야마다의 시체를 찾아냈다. 늙은 버드나무가지에 팔과목이 바 줄로 꽁꽁 묶인 것이 야마모도의 시체가 분명했다. “여, 여기 있습니다.” 그러자 야마모도와 한길수는 황급히 그리로 달려갔다. 야마모도는 우두커니 서서 왼쪽다리가 썩 둑 잘린 형의 시체를 바라보다가 털썩 꿇어앉았다. “아니상(형님)! 아니상(형님)!”        일본 말을 잘 모르는 한길수는 다가가서 야마모도를 보고 “당신 형님이 옳습니다. 어째 아니라고 그럽니까?” 라고 말했다.        번역관은 코웃음이 났지만 겨우 참고 번역해주지 않았다. 야마모도는 꺼이꺼이 울다가 와락 야마다의 품에 쓰러져 낯을 만지면서 흑흑 흐느껴 울었다. (저러다간 가마골의 흉수들을 다 놓치겠어.) 한길수는 개화장을 홱 휘두르더니 응삼과 수길에게 명령했다. “자네들은 가마골의 림 구장과 함께 빨리 가서 흉수들을 잡아오게나. 야마다면장의 원수를 꼭 갚아야 하네.” “예이!” 응삼과 수길, 영팔 등이 림호 구장과 함께 떠나려는데 야마모도가 벌떡 일어났다. “이이에(아니야)! 내 손으로 그 놈들을 잡아 칼 탕을 쳐 놓을 테다! 가자!” 그리하여 한길수 등 졸개들은 야마모도를 따라 말을 타고 곧추 가마골 막바지 쪽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올라가면서 보니 집이라고는 한 채도 보이지 않고 큰물에 밀대를 맞아 없고 사람들도 보이지 않았다. 집도 없고 창대같은 비가 쏟아지는데 모두들 비를 피해 어디를 갔는지 찾아볼 길이 없었다.       사실 형만과 석수는 어디론가 달아났고 용기랑 마을사람들은 살길을 찾아 머나먼 다른 마을의 친척집으로 가 버렸던 것이다.        야마모도는 이를 부득부득 갈면서 말을 타고 막바지 터진 둑이 있는 데까지 달려가 보았다. 그러나 사람이라고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늙은 한길수는 더는 말을 타고 달리기 싫어서 야마모도 소장을 보고 “원수는 십년을 갚아도 늦지 않습니다. 후에 그 놈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려 감쪽같이 없애버립시다.” 통역이 그 말을 번역해주자 야마모도는 군도를 뽑아 옆에 서있던 나무 가지를 탁 쳤다. “가자! 운주동에 가서 최구장의 년 놈들을 몽땅 붙잡아가자!” “예이!” 한길수 등은 야마모도를 따라 말머리를 돌려 운주동쪽을 달려갔다. 그들이 억수로 쏟아지는 비를 무릅쓰고 가마골과 운주동 골짜기가 한데합친 목에 이르렀을 때였다. 운주동 마을 어구에서 몇 사람이 울며 불면서 기름종이우산을 쓰고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한길수가랑 말을 타고 달려 점점 가까이 다가갔지만 기름종이우산에 가리어 누군지 똑똑히 볼 수 없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 사람들의 울음소리가 둑 끊어진데다가 슬금슬금 신흥동으로 난 길 쪽으로 굽어드는 것이었다. 뱁새눈 응삼이 그래도 눈치 빨랐다. “저 놈들이 가능하게 최구장의 무리인지도 모릅니다.” 그 소리에 야마모도는 군도를 쓱 뽑아들고 말에 박차를 가했다. “하야꾸 쯔이게끼(빨리 추격)!” “빨리 추격해!” 한길수 등은 일제히 말에 채찍을 안기며 쇠방망이와 시퍼런 칼을 빼들고 짓쳐나갔다. 그러나 그 사람들이 굽어든 곳으로 덮쳐갔을 때는 사람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고 대신 버드나무와 낙엽송들이 억수로 퍼붓는 소낙비에 몸부림 치고 있었다. 그들은 말을 타고 비바람 치는 수림 속으로 헤매기도 싫었지만 야마모도의 눈치를 봐서 마지못해 이리저리 수색하는 척 했다. 한참 후 응삼이 야마모도 앞에 가서 말에서 내려 실 돌피 같은 허리를 굽실거리면서 상전의 귀에 대고 이런 잔꾀를 대주었다. “속담에 중놈은 달아나도 절은 달아나지 못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저 놈들은 달아났지만 집이야 달아 날수 있겠습니까? 집에 쳐들어가면 한 놈이라도 붙잡을 수 있을 겁니다.” 그 말에 뭔가 피뜩 떠오른 것이 있었던지 야마모도는 군도로 운주동을 가리켰다. “이께(가자)!” 그리하여 그들은 말을 타고 운주동으로 짓쳐 들어갔다. 영팔과 수길은 개를 잡은 포수처럼 최구장네 집 울안에 들어서자마자 문을 박차고 쇠방망이를 쳐들고 뛰어 들어갔다. 그런데 집안에는 아무도 없이 조용했다. “제길 할!” 수길은 쇠방망이로 물독을 땅 쳤다. 쏴- 물독의 물이 온 부엌바닥에 질벅하게 쏟아졌다. 야마모도도 뒤따라 들어왔다. 그는 텅 빈 집안을 휘둘러보더니 “개놈새끼들이 몽땅 어디로 달아갔단 말인가?” 하고 고함치면서 군도로 대들보를 탁 찍었다. 우수수 흙이 구들에 떨어졌다. 그것이 명령이기라도 한 듯이 영팔과 수길이 등 망나니들은 집안의 가정기물을 쇠방망이와 칼로 마구 쳐 부시고 찍었다. 영팔이 라이터를 꺼내들고 당장 칠상을 하면서 “아예 이 놈의 개굴에 불을 콱 지르고 말기요.” 하고 고함쳤다. “가만!” 이때 응삼이 손을 쳐들어 영팔의 손에서 라이터를 내리웠다. 그는 실눈을 가슴츠레 뜨고 야마모도와 한길수의 앞에 가서 입에 손을 대고 목소리를 죽여가면서 지껄였다. “이 집을 놔두고 갑시다. 한 두 사람을 남겨 집주위에 매복시켰다가 그자들이 이 집에 다시 기여들 때 일망타진하는 게 상책입니다.” 그러자 야마모도는 응삼의 코끝에 엄지손가락을 내들면서 “리상 요로씨이(리군 좋아), 가에로(돌아가자)!” 하고 고함치며 손을 홱 바깥으로 내저었다. 영팔 등은 통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이 머리를 절레절레 저면서 쇠방망이를 들고 문밖으로 나갔다. 수길은 문을 나서면서 시퍼런 칼로 문풍지를 쭉 내리그었다. 그 바람에 문풍지는 사람몸뚱이가 통 채로 나들게 구멍이 펑 뚫렸다. 림호는 사립짝문을 발로 걷어차서 번져놓고 가버렸다. 그자들이 우르르 쓸어나가자 말들이 대가리를 흔들면서 투레질했다. 한참 후 집안은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그때까지 중 천정에 숨어 숨을 죽이고 엎뎌 있은 근형은 천천히 일어나 앉았다. 그는 옆에 엎뎌 있는 새단을 툭툭 치고 나서 입을 그녀의 귀에 가져다대였다. “여보, 저 놈들이 집주위에 숨어서 살피는 줄도 모르고 할아버지랑 이 집에 들어오면 어찌 하겠소. 내 가마골에 가서 할아버지께 놈들의 간계를 알려줘야겠소.” 그러자 새단은 신랑의 팔을 더듬어 잡으면서 “아이고, 당신이 가면 나는 어찌 하라오?” 하고 말하면서 부들부들 떨었다. “내 올 때까지 여기 까딱 말고 엎뎌 있소.” 근형은 각시의 귀에 대고 뭐라고 열 당부를 하고 나서 천정구멍 쪽으로 살금살금 기어가서 뚜껑 한쪽을 빠금히 열고 숨을 죽인 채 아래 동정을 한참이나 엿들었다. 바늘이 떨어지는 소리가 다 들릴 정도로 조용했다. 그제야 근형은 뚜껑을 열고 중 천정에 끌어올려놓았던 사닥다리를 구멍으로 끌어다가 내려놓고 고방으로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내려갔다. 그가 사다리를 옮기려고 들 때 구멍을 올려다보니 어느새 새단이 뚜껑을 꼭 닫아놓지 않았겠는가? 근형은 사닥다리를 들고 고방 뒷문 쪽으로 살금살금 다가갔다. 그는 고방 문을 살며시 열고 뒤울안으로 나가 사다리를 내려놓았다. 밖에서는 아직도 대살 같은 소낙비가 비바람 속에 쏟아졌고 기와 추녀 끝에서는 숱한 실 폭포들이 쏟아져 내려오고 있었다. 이따금 번개가 번쩍 하고 우레가 천지를 진동했다. 근형은 우산이고 뭐고 들새 없이 비바람 치는 뒤울안 바자를 뛰어넘어 몸부림치는 수림 속으로 숨어 들어갔다. 사실 야마모도와 응삼이 행패를 부리다가 간 후 상순과 명옥이 그리고 죽순은 최구장과 성단의 분부대로 먼저 떠나가 버렸다. 그런데 점심쯤에 형만과 석수 그리고 용기가 헐레벌떡거리면서 최구장네 집으로 달려왔던 것이다. 형만에게서 계순과 흥기가 잘못된 자초지종을 듣고 최구장과 성단은 백사불구하고 형만과 함께 가마골로 가서 계순과 흥기의 시신이라도 찾아 거둬주려고 떠났다. 근형과 새단은 뒤에 남아서 집을 지켰던 것이다. 그런데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그들은 마을도 채 벗어나지 못하고 야마모도와 한길수의 무리들을 만났던 것이다. 근형은 수림 속을 헤매다가 신흥동으로 가려고 제방 둑에 나섰다. 그런데 제방둑 저쪽에 웬 사람이 얼씬거렸다. 분명 한길수가 남긴 감시군것 같았다. 근형은 인차 제방 둑 아래 버드나무숲속에 몸을 숨기었다. 소낙비에 큰물이 질대로 진 강물은 세찬 파도를 일구면서 제방 둑을 당장이라도 치고 넘어올 듯 했다. (신흥동으로 못 가겠구나. 그럼 아버지랑 응삼 등이 집에 뛰여들어 야단치는 새에 산기슭을 에돌아 가마골로 다 간 게 아닐까? 저 놈을 다른 데로 유인해야겠다.) 근형은 인차 비바람을 무릅쓰고 버드나무숲 속으로 허리를 굽히고 살금살금 가마골과 반대방향으로 달아났다. 그러자 또 다른 자가 이쪽으로 따라오는 것이었다. 근형은 그자에게 잡힐까봐 양손에 주먹만 한 돌멩이를 주어들고 버드나무숲속으로 숨어 들어가 버렸다. 그자는 버드나무숲속을 헤치면서 슬금슬금 다가오다가 살기 넘치는 버드나무숲속이 싫은지 빠져나가더니 제방 둑에서 왔다 갔다 하면서 이쪽을 살폈다. 그러자 근형은 그자를 제방 둑에 따돌리고 다리야 날 살리라고 버드나무숲속으로 하여 이번에는 가마골 쪽으로 도망쳤다. 근형의 추측이 맞았다. 최구장 등은 버드나무숲 속에서 한참 한길수 무리와 숨바꼭질하다가 그 놈들이 집으로 쳐들어간 새에 버드나무숲속에서 나와 곧추 가마골 쪽으로 굽어들어 달아갔던 것이다. 근형이 가마골로 가보니 진짜 살풍경이었다. 고모네 집이고 마을이고 곡식이고 몽땅 누런 흙탕물이 쫄 밀어가고 아무것도 없었다. 여기 저기 몇몇 마을사람들이 집식구들의 시체를 붙안고 울고 있었다. 저 멀리 할아버지 최구장과 할머니 순금이가 고모부 형만과 함께 작은 고모의 시체를 찾느라고 흩어져 돌아다닌 것이 보였다. 그가 산골짜기중턱 버드나무 밭에서 할아버지를 부르며 달려가려다가 무엇엔가 걸려 넘어갔다. 찬찬히 보니 진흙탕에 반 넘어 묻힌 웬 검정무명치마였다. 발을 빼면서 보니 웬 허벅다리가 누런 진흙탕 속에 알릴락 말락 드러났다. “이크, 이게 뭐야? 막내고모 무명치마가 아니냐?” 근형은 바삐 손으로 진흙탕을 마구 파헤치고 시체의 얼굴을 보았다. 분명 막내고모 계순이었다. “막내고모! 아이고, 이게 웬 일이요? 고모!” 근형이 대성통곡 치면서 진흙탕을 손으로 마구파고시체를 끌어안아 일으켜 앉혔다. 계순의 잔등에는 포대기에 싸 업은 흥기가 업히어 있었다. “할아버지! 할머니! 고모 여기 있습구마! 엉, 엉, 엉.” 최구장과 성단, 형만 등이 황급히 뛰어왔다. 최구장은 뛰어오자마자 막내딸을 붙안고 가슴을 치면서 불렀다. “야, 계순아, 우리 왔다. 깨나라. 응? 야, 이게 무슨 일이야?” 성단은 굳어버린 흥기를 껴안고 손바닥으로 진흙탕을 치면서 통곡했다. “흥기야, 흥기야, 다 할미 내 잘못이다. 딸이 그렇게 가기 싫어하는 걸 내 너 네를 죽였구나. 자꾸 가라고 해서 너를 죽였구나. 죽순아 내가 너를 죽였구나. 길에서 까마귀가 ‘가지 마우.’ 하구 운다면서 가지 않겠다는 걸 내가 가라 해서 이렇게 죽였구나. 어이구, 나는 어쩌겠니?” 형만은 처자를 가시부모에게서 빼앗아내듯이 와락 끌어안더니 계순의 낯에 볼을 마구 비비면서 황소소리로 온 골짜기가 울릴 지경으로 처량하게 대성통곡 쳤다. “계순이, 내 어데 가서 계순 같은 각시를 얻겠소? 계순이 없으면 난 못 사오. 나도 같이 죽기요. 어 허 헉, 헉헉.” 석수도 근형도 눈물을 줄줄 흘리었다. 용기도 손등으로 눈물을 씻었다. 이윽고 최구장이 일어났다. “그만들 하오. 어쩌겠소. 다 제 명이 그만한 걸. 응삼과 림호랑 또 쫓아올지 모르니까 빨리 시체를 파묻어주고 떠나기요.” 개똥도 약으로 쓰자면 없다고 불시에 관은커녕 널판자도 쓰려고 하니 큰물에 다 떠가서 하나도 없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여기저기 널린 가마니를 주어다가 모자의 시체를 싼 후 산등성이에 메여갔다. 그들은 삽도 없어 손으로 대충 시체를 파묻을 구덩이를 파고 두 모자 시체를 나란히 내려놓았다. 그러자 형만은 죽순이를 파묻기 아쉬워 마구 구덩이에 뛰어들어가 가마니를 싼 계순과 흥기, 꿀꿀이를 끌어안고 드러누웠다. “나를 계순과 함께 파묻어주오. 어서 파묻소. 파묻어!” 그러자 석수가 엉엉 울면서 “야, 나오라. 이러면 못쓴다.”라고 하면서 형만을 겨우 뜯어 안아 내왔다. 최구장과 근형은 피눈물과 함께 계순과 흥기를 나란히 파묻어주었다. 성단은 애기 산소같이 손으로 파묻어놓은 계순의 묘를 치면서 계속 대성통곡 쳤다. “에이유, 계순아, 내가 너를 죽였구나. 이게 무슨 일이냐? 그렇게 떠나기 싫어하는 걸 내 너를 쫓아 보낼 게 뭐냐? 에이고, 아이고. 꿀꿀아, 네 이름을 돼지이름으로 지으면 앓지 않고 튼튼하게 자라겠는가구 했는데. 이게 뭐냐? 이 외할미 먼저 죽어야 하는데 너 네를 먼저 죽였구나. 에이고, 내 먼저 죽어야 하는데 새파란 너 네를 죽였구나. 흐 흐 흑. 흑흑. 흥기야!” “됐소. 우린 여길 빨리 떠나야 하오. 일본 헌병 놈들이 들이닥칠지도 모르오.” 최구장은 성단의 팔을 끌어당기었지만 끌리어 일어나면서도 발을 떼려고 하지 않았다. “에이고, 내 막내딸을 여기다 두고 어떻게 제만 살겠다고 간단 말이요?” 최구장과 근형은 성단을 끌어당기면서 울지 말라고 말리였다. 형만도 석수와 용기가 끌어안고 밀고 해서야 겨우 몇 발자국 떼였다. 아, 왜 슬프지 않겠는가? 친혈육을 잃은 그 고통이야 이루다 헤아릴수 있겠는가! 자기 혈육을 이런 누런 진흙탕에 묻고 떠나야 하는 마음이야 오죽 하랴! 사랑하는 처자를 고향 땅에 묻고 떠나는 형만의 마음은 참말로 칼로 심장을 도려내듯이 아팠다. 최구장도 성단도 형만도 모두 걸음이 떨어지지 않아 비칠거렸다. 먹장구름이 뒤덮인 하늘에서는 소낙비가 쏟아졌다. 우르릉 꽝꽝! 우레가 지동치고 번개가 번쩍였다. 먹장하늘에서는 대살 같은 소낙비가 끊임없이 쏟아진다. 아니, 아니야. 한 많은 이 고향 산천에, 처자를 묻은 고향의 진흙탕에 피눈물을 휘뿌린다.  
79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42) 댓글:  조회:2091  추천:0  2016-05-24
                                             4. 험난한 고향 길       1938년 찜통더위가 대지를 갑갑하게 품은 무더운 여름이다.        어느 하루 죽순 고모가 명옥을 찾아왔다.       명옥은 가마 목을 걸레로 닦다가 고모를 반겨 맞았다.       죽순은 구들에 올라와 가마 목에 앉더니 이런 말을 꺼냈다.       “내 조선에 갔을 때 아버지가 너희들을 영 보고 싶어하더라. 이번에 나와 함께 가보자.”       뜻밖에 상순이 가시고모의 말에 선뜻이 대답했다.      “여보, 고모와 함께 고향에 나가보기요. 고향에 퍽 가고프오.”      상순은 정말 고향에 가보고 싶었다. 물론 조선에서 일곱 살 때 중국 만주국에 건너왔지만 눈만 감으면 고향의 산천이 눈앞에 선히 떠올랐다. 이전에 홀락 벗고 목욕하고 모래불에 물도랑을 파면서 놀던 운주강도 보고 싶고 남대성하도 보고 싶었다. 그러나 고향 마을을 지척에 두고 지나가면서도 감히 들리어 보지 못했다. 또 유격대의 쌀이 긴박한지라 들릴 시간도 없어 약담배짐을 지고 박달령을 넘어 만주 허허벌판으로 돌아왔던 것이다. 명옥은 신랑이 말하자 인차 “나도 열여덟 살에 여기 들어온 후 계속 할머니와 작은고모 생각이 납데.”라고 했다. 죽순은 “그럼 채비를 해라. 내 차비를 대줄게 뒷근심은 말고 가자.”라고 말하며 고무신을 신고 집에서 나갔다. 그때 세 살 난 영자가 어른들이 주고받는 말을 알아들었는지 종알거렸다. “아빠, 나도 가겠소.” “영자야, 엄마와 아빠 인차 돌아온다. 그새 고모랑 할머니랑 함께 맘마 많이 먹으면서 있어. 응?” 영자는 도리머리를 흔들며 왕왕 대성통곡 쳤다. “싫다, 싫어. 응-응-” 명옥은 상순의 품에서 영자를 안아다가 손등으로 눈물범벅이 된 얼굴을 닦아주면서 다독여주었다. “그래, 그래. 우리 맏딸을 데리고 고향에 가야지. 이 다음에 크면 엄마가 꼭 영자를 고향에 시집보내주마.” 영자는 엄마의 얼굴을 애고사리 손으로 매만지면서 흑흑 흐느꼈다. 명옥은 상순을 건너다보며 눈을 찔끔 감아 보였다. 상순은 한숨을 후- 내쉬었다. 밖에서는 번개가 번쩍이고 우레가 울더니 장대비가 쫙쫙 쏟아졌다. 상순은 밀짚모자를 쓰고 마을에 나가 지 촌장을 찾아가 고향에 갔다 오겠다고 청가를 맡았다. 그 어지러운 세월에 일본 놈들은 조선 사람을 2등공민이라고 하면서도 조선에 두고 온 고향에 마음대로 가지 못하게 했다. 일본 놈들은 이른바 집단부락을 만들어놓고 마을 둘레를 서너길씩 되는 장대기로 바자를 세워놓고 네귀에 보초까지 세워놓았다. 놈들은 이렇게 함으로써 백성들과 유격대를 격리시키고 유격대에 쌀이랑 생활필수품을 날라가지 못하게 통제하였던 것이다. 어디로 가려면 괴뢰촌장이거나 일본 놈들의 분주소나 파출소에까지 가서 출국신고를 한 후에야 내 보냈다. 심지어 나무하러 가도 지학사 촌장한테 청가를 맡고 갔다가 와선 몸수색과 짐수색을 받아야 했다. 그간 상순과 충국은 조선에 나간 사실을 지학사 촌장에게 알리지도 않고 바자에 구멍을 내고 드나들었던 것이다. 지촌장한테 들키우면 약 캐러 갔다든지, 병 보이러 갔다든지, 장 보러 갔다든지 두루두루 왕청 같은데 둘러 대군 했다. 지학사는 걸 하나도 눈치채지 못한건 아니지만 상순은 겁나고 충국은 자기 외가집 조카인지라 한쪽 눈은 뜨고 한쪽 눈은 감고 모르는척 했던 것이다. 며칠 후 억수로 쏟아지던 장맛비가 뚝 끊고 맑은 하늘에 해가 째듯이 떴다. 소서구 오두막마을에도 따스한 아침해살이 비췄다. 상순과 명옥은 일을 하러 가는척하면서 호미를 들고 문밖에 나섰다. 영자는 열두 살 밖에 안 되는 고모 금옥의 잔등에 업혀 아빠와 엄마를 빤히 쳐다보았다. “영자야, 아빠와 엄마가 일하러 먼데 갔다가 인차 온다. 고모와 할머니 말을 잘 들어라. 응?” 영자는 머리를 끄덕이다가 고사리 손을 내밀면서 흑흑 흐느껴 울었다. 상순은 우는 영자를 끌어안고 볼에 뽀뽀를 해주었다. “영자야, 아빠 낯에 뽀뽀.” 영자는 울음을 그치고 아빠의 얼굴에 뽀뽀를 했다. 명옥이 얼굴을 들이대자 엄마의 낯에도 뽀뽀를 했다. 상순과 명옥은 어른들에게 인사하고 죽순과 함께 길을 떠났다. 그들은 부르하통하 통나무다리를 건너 진수해 시내에 들어가 곧추 남쪽 산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 기차역으로 나갔다. 일본 놈들이 게다짝을 신고 딸까닥딸까닥 자그마한 역 대합실을 휩쓸었다. 요염하게 치장한 일본 년들이 비단화복을 입고 엉덩이를 빼뚤거리면서 종종 걸음 쳐 개찰구 쪽으로 나가고 있었다. 온 세상은 모두 일본 놈들의 세상으로 된 듯 했다. 그들이 기차표를 떼서 들고 개찰구로 나가 홈에 들어섰을 때였다. 일본 헌병들과 기생 년들이 죽 늘어서서 기차가 달려오는 서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기차가 뽕- 고동을 울리면서 서쪽으로부터 천천히 들어섰다. 기차가 홈에 들어서자 일본 기생 년들이 고약딱지 기대를 흔들면서 “빤짜이!(만세!)” “빤짜이!(만세!)” 하고 외쳤다. 기차가 멈춰 섰다. 차문이 쭉 열리더니 검은 테 안경을 건 일본 장교가 하얀 장갑을 낀 손으로 군도자루를 부여잡고 거들먹거리면서 기차에서 내렸다. 일본 기생 년들이 앞장서 꽃다발을 장교의 목에 걸어주었다. 일본 헌병들이 경례를 착 붙이고 송장처럼 까딱하지 않고 못 박힌 듯이 서있었다. 일본 장교는 안경 밑의 눈깔을 번뜩거리더니 하얀 장갑을 낀 왼손을 들어 답례하면서 개찰구 쪽으로 나갔다. 상순은 그 장교 놈이 퍽 눈에 익었다. “아니, 저 놈은 한길수의 아들 한철주 놈이 아닌가? 정말 동만으로 나왔어?” 상순은 그 놈을 힐끔 되돌아보다가 그 놈에게 들키기라도 할까봐 제꺽 머리를 돌렸다. 일본 군 놈들이 기차에서 다 내려가자 일본 사람들과 상순이네가 기차에 올라갔다. 자리를 찾아 앉은 후 죽순은 한숨을 후 내쉬면서 “에이, 학준도 영자 못잖게 어찌나 떼를 쓰는지 혼났어.”라고 했다. 기차는 칙 소리와 함께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덜거덕거리면서 동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죽순은 명옥의 큰고모이자 상순의 8촌 할머니 벌이 돼 인연이 깊었다. 죽순은 석은과 결혼한 날에 우스운 일이 있었다. 첫날밤에 불시에 신방에서 “사람 살려라!” 하고 고함소리 나더니 죽순이 정지로 달려 나왔다. 정지에서 자던 어른들은 모두 깜짝 놀라 등잔불을 켰다. “웬 일이냐?” 여럿은 모두 잠자리에서 일어나 어리둥절해 새 각시를 쳐다보면서 물었다. 죽순이 한다는 말은 유치하기로 그지없었다. “신랑이란 저게 건달이요.” “어째?” 시어머니 물으니 죽순의 말은 더 웃기는 소리. “글세 날 마구 만집니다. 내 속옷까지 마구 벗기려고 들지 않겠습둥? 우추사단 말입구마. 어찌 저런 건달과 살겠습둥? 본가 집에 돌아가겠구마.” 그 말에 모두들 배를 끌어안고 웃었다. “어유, 열여덟을 먹고서도 쯧쯧쯧.” “각시, 신랑 각시 사는 게 원래 그러는 법이요.” 시어미는 며느리애기 귀에 대고 뭐라고 여쭈고 방에 억지로 잔등을 밀어 넣었다. 그는 방에 밀리어 들어가면서도 “세상에 별난 법이 다 있다. 오늘 밤에 다시 그래봐라. 내 막 물어놓겠다.” 하고 두덜거렸다. 그 바람에 석은은 사람들을 웃길까봐 그날 밤에 각시를 더 다치지도 못했다. 그러나 며칠 후 본가집에 갔다가 친정어머니에게서 설득을 받고서야 죽순은 신랑이 하는대로 억지로 수긍했다고 한다. 그들이 탄 기차는 온 하루 밤낮을 달려서야 어두운 밤에 우시장역에 이르렀다. 그런데 고향의 이전 우시장이 아니었다. 역 대합실 꼭대기에는 고약딱지 같은 일본 기발이 바람에 펄럭이고 철갑모를 쓴 일본 헌병들이 총칼을 부여잡고 개찰구와 홈에 촘촘이 늘어섰다. 손님들은 포로병들처럼 그자들의 쏘아보는 눈총을 받으면서 개찰구 쪽으로 나가야만 했다. 죽순이네가 개찰구로 나가려는데 일본 헌병이 총창 끝으로 막았다. “도꼬까라 끼다까?(어데서 왔는가?)” 그러자 죽순이가 “만슈고꾸까라 끼마시다(만주국에서 왔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일본 헌병이 꽥꽥거리자 헌병 분대장이 다가와 음흉한 눈길로 죽순과 상순이, 명옥의 아래위를 훑어보더니 물었다. “메이센니 끼데 나니오 신다이까?(명천에 와서 뭘 하려고?” 죽순은 일본 말로 줄줄 대답했다. “교리에 있데 오지상 또 오까상오 미요우(고향에 가서 아빠와 엄마를 보려고요.)” 이번에는 헌병 분대장이 상순의 밀짚모자를 벗겨 땅바닥에 던지면서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어깨를 꽉 쥐여보면서 물었다. “아나따와 나니오 스루 히도까?(넌 뭘 하는 사람이냐?)” 분명 총이나 어깨에 멨나 어깨를 만져보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상순은 시끄러워서 밀짚모자를 주어 쓰고 눈을 부릅뜨며 조선말로 대구했다. “에이 씨, 제 고향으로 가는데 시끄럽게 무슨 개소리냐?” 그 말귀를 알아들은 일본 헌병 분대장은 상순의 귀쌈을 찰싹 치면서 고함쳤다. “빠까요로! ‘개소리’? 나니? 빠까모노(멍청이같은 놈! 개소리? 뭣이?) 제길 할!” 상순은 손으로 볼을 만지면서 도끼눈을 부릅뜨고 대들었다. “고향을 찾아왔는데 무슨 상관이야?” 옆에서 바빠 맞은 죽순이가 옆구리를 치면서 말리였다. 그러나 그때는 늦었다. 일본 헌병은 호각을 불어댔다. 그러자 헌병 대여섯이 달려오더니 분대장이 뭐라고 꽥꽥 고함치자 상순을 붙잡고 초소 쪽으로 끌고 갔다. 명옥은 애가 타서 발을 동동 굴렀다. “저걸 어쩌오?” 그래도 일본 말도 알고 융통성이 있는 죽순이가 여러 번 고향나들이를 해보았기에 머리가 잘 돌았다. 그는 제꺽 머리에서 은비녀를 뽑아 일본 헌병에게 주면서 양해해달라고 했다. 일본 헌병 분대장은 은비녀를 쥐고 매만지면서 눈을 가슴츠레 뜨고 여겨보더니 입에서 이런 소리가 구렁이처럼 기어 나왔다. “요로씨이(좋아), 쯔기니 마다 고우 시레바 신데시마우(다음에 또 이랬다간 죽고말아).” 헌병 분대장은 아래 헌병에게 뭐라고 귀속 말을 했다. 이윽고 맞아서 얼굴이 퍼렇게 멍이 든 상순이가 욕지거리를 하면서 초소에서 풀려나왔다. 죽순과 명옥은 상순의 양팔을 끼고 개찰구를 빠져나갔다. 그들은 일본 놈들이 쫓아오기라도 할까봐 뒤를 흘끔흘끔 되돌아보면서 역에서 멀리 달아났다. 한참 달려 역에서 멀리 벗어난 후 명옥은 숨이 차 헐떡거리면서 꾸중했다. “당신 때문에 고모가 은비녀를 일본 놈에게 줬소.” 그러자 상순은 명옥을 흘겨보면서 “내 뭘 잘못했다고 은비녀까지 줬소?”라고 하더니 한숨을 길게 쉬었다. (아, 어쩌면 내 고향이 이 지경이 됐는가? 일본 놈들이 뭘 믿고 우리 조선을 다 먹어치우고서도 모자라 만주국에까지 쫓아가서 우리를 못살게 군단 말인가?) 그는 생각할수록 속에서 분통이 터져 참기 어려워 길가에 침만 퉤퉤 뱉었다. 그들은 마른 누룽지를 길가의 내 물에 퍼지워 먹으면서 온 종일 산을 넘고 들을 지나 끝내 어슬녘에야 고향 운주동에 이르렀다. 명옥은 열여덟 살에 고향을 떠났기에 어둠속에서도 고향 집을 인차 찾을 수 있었다. 죽순이 목조 팔간 집 울안에 들어서기 바쁘게 소리쳤다. “엄마! 아버지!” 명옥도 고함쳤다. “할머니! 할아버지!” 죽순과 명옥은 소리치면서 엎어질 상으로 집안에 달려 들어갔다. 집안에 등잔불이 켜졌다. 뒤이어 집안에서 자그마한 그림자가 나오더니 “아니, 이게 웬 일이냐? 죽순과 명옥이가 오다니? 쯧쯧!”라고 하며 반겨 맞았다. 활발한 죽순은 뒤를 가리키면서 종알거렸다. “저 뒤에 누가 왔나 보오. 명옥이 신랑도 왔습구마." 그제야 최구장과 성단은 반갑게 마주 나왔다. “오, 그래, 우리 큰사람 왔구먼. 어서 들어오게나.” 상순은 성큼 앞으로 나가면서 “할아버지, 할머니, 절을 받읍소.”라고 하면서 태산이 무너지듯이 넓적 엎드려 절을 올렸다. 최구장은 그의 절을 황망히 받으면서 혀를 끌끌 찼다. “쯧쯧, 급하기도. 집에 들어가 인사해도 늦지 않아. 쯧쯧, 어서 들어가 앉게나.” “예.” 그제야 상순은 일어나 방으로 들어갔다. 최구장은 등잔불을 빌어 상순의 얼굴과 몸을 두루 살펴보더니 무릎을 탁 쳤다. “에이, 앞으로 큰일을 할 미남이로구나.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똑 떼 닮았구나.” 그들이 밤중에 기약 없이 들어서자 고방에서 자던 근형(봉인)과 새 각시 리새단도 깨어나 위방에서 나와 서로 인사했다. “명옥아, 갈라질 때는 그렇게 싸우면서 갈라졌지만 네가 떠나가니 정말 보고 싶더라.” 근형(봉인)이가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자 명옥도 뜨거운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우리 네댓 살에 엄마를 잃고 얼마나 고생하면서 자랐소? 나도 오빠를 두고 혼자 중국에 간 후에 오빠 생각이 자주 나서 혼자 울었소.” 둘은 다 통곡 쳤다. 최구장과 할머니도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엄마 잃고 고생스레 자란 오누이를 바라보면서 한숨을 길게 쉬었다. 최구장은 죽순에게서 그간 상순이가 지방의 지주 지학사와 송사놀음을 해서 이긴 이야기도 들었기에 그가 똑똑하고 강한 사내대장부라는것을 알고 있는 터였다. 허나 너무 짝지는 것 같아 좀 근심스러웠다. 그들은 오랜 만에 한자리에 모여 앉아 저녁식사를 하면서 밤중까지 그간 있은 일을 얘기했다. 5. 쑥밭이 된 고향 이튿날 이른 아침 날씨는 유난히 좋았다. 치마봉과 기운봉 쪽을 내려다보아도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날이었다. 비가 올 것 같으면 기운봉 쪽이 시꺼멓게 흐리면서 번개가 산중턱을 치군 하였던 것이다. 근형은 밥도 먹지 않고 초신을 신고 바깥에 나가면서 집안의 할아버지에게 말했다. “할아버지, 내 저 명옥과 매부를 데리고 엄마 산소에 피뜩 갔다가 오겠습꾸마.” “그래, 산에 갔다가 가마골에 들려 계순을 데려오라.” 최구장은 수염을 슬슬 만지면서 부탁했다. “예.” 근형은 새단과 함께 명옥과 상순을 데리고 선산으로 떠났다. 한참 후 예전처럼 돌로 토성을 한 성안으로 들어가자 거기에 그간 잘 모신 산소가 나타났다. 근형은 산소에 달려가 꿇어앉더니 “엄마, 명옥과 매부 엄마를 보러 왔습구마.”라고 하며 왕왕 울었다. 명옥도 꿇어앉아 엉엉 울었다. “엄마, 엄마, 어쩜 우리 오누이를 두고 그렇게 일찍이 돌아갔습둥? 엉엉, 흐흐흑. 엄마- 엉엉.” 그들은 한참이나 선산이 떠나가게 울었다. 상순은 “처남, 그만 우오. 가시엄마에게 인사를 해야겠소.” 그제야 깨달았는지애들처럼 울던 근형과 명옥은 일어나 옷깃을 여미고 산소 앞에 죽 늘어섰다. 근형은 새단과 함께 먼저 절을 올렸다. “엄마, 명옥이 신랑을 데리고 와서 인사를 드립구마.” 상순과 명옥이 산소에 큰절을 세 번 씩 세 번 올렸다. 근형은 아주 흡족한 표정으로 매부를 바라보고 나서 명옥한테 얼굴을 돌렸다. “명옥아, 기억나니? 너는 이전에 엄마가 세상 떴을 때 네 살 밖에 안 됐다.” “양.” 명옥은 머리를 끄덕이더니 울면서 말했다. “그런데 셈이 못 든 난는 숱한 사람이 모였다고 벽 구석에 세워놓은 좁쌀가마니우에서 뚝 뛰어내리고 뚝 뛰어내리곤 했다.” 명옥은 땅을 치면서 점점 더 섧게 울었다. “아이고, 엄마, 그때 엄마가 세상을 뜬 것도 모르고 이 철부지는 사람이 많이 오니까 좋다고 그렇게 뛰놀았지 않았겠습둥. 엉, 엉. 그때 다섯 살인 오라비는 셈이 들어서 엄마 세상떴다고 엉엉 우는데 말이요. 에이, 내가 철부지였지. 엉엉.” 그들은 한창 울다가 떠나오면서 다 함께 큰절을 아홉 번이나 올리었다. “엄마, 이 딸이 이후에 오라비네와 함께 또 엄마를 찾아오겠습니다. 그때까지 편안히 계십시오.” 명옥은 산성을 떠나면서 자꾸 엄마의 산소를 돌아다보았다. 상순과 명옥은 집으로 돌아가고 근형은 가마골로, 새단은 불붙이에 들려서 명옥 부부와 죽순이 왔다고 알리러 갔다. 상순은 운주동에 돌아가자마자 어려서 놀던 운주강 강가에 가서 세수를 하려고 스적스적 걸어 나갔다. 전날 밤에는 발견하지 못했는데 이전의 고향이 아니었다. 이전에는 이 최구장 어른네 마당이 아주 널찍했고 강냉이와 감자를 심었다. 그런데 지금은 마당이 한 푼도 되나마나 하고 그 손바닥만한 마당마저 곡식이나 남새는 한포기도 볼 수 없었고 적송을 촘촘히 심어놓았다. 십여 년 살이 적송들이 촘촘히 들어앉아 수림을 방불케 하였고 그 속에 듬성듬성 배추와 파가 자라나 있었다. 온 마을을 둘러보니 몽땅 수림 속에 파묻혀있었다. (허참, 밭에다 곡식을 심지 않고 나무를 심어 팔면 더 잘 살까? 입에 풀칠도 못하면서 나무를 심다니?) 상순은 운주강에 가서 개울물에 대충 세수를 하고 집으로 들어왔다. 그는 가시할아버지인 최구장에게 물어보았다. “어째 집 마당에 나무를 심었습니까? 곡식이나 남새를 심지 않고?” 최구장은 한숨을 천정이 날아나게 후- 내쉬었다. “누가 곡식을 심어먹으면 좋은 줄 몰라? 거 일본 놈들이 제 욕심을 차려서 밭에 곡식을 심지 못하게 하고 나무를 심으라고 강박했지. 자네 할아버지도 그래서 고향을 버리고 만주에 간 거야.” 그 말에 상순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럼 내 고향의 우리 집 자리도 나무가 들어섰겠구먼요.” 최구장은 머리를 무겁게 끄덕였다. “아니, 이럴 수가 있습니까? 내 고향집에 가보겠습니다.” 최구장은 담배 물 주리를 툭툭 재떨이에 털더니 엉거주춤 일어나더니 상순을 데리고 바깥에 나섰다. 상순은 최구장을 따라 개울둑을 따라 아래쪽으로 내려갔다. 어디라 없이 밭은 보이지 않고 나무와 소나무가 우거졌다. 최구장은 집터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산을 등지고 적송이 꽉 우거진 곳으로 찾아가 발걸음을 멈추었다. “이곳이 바로 자네 아버지 기준이가 살던 집 자릴세.” 그 말에 상순은 적송 밭 속으로 걸어 다니면서 혹시 아버지랑 엄마랑 살던 흔적이라도 있겠는가고 찾아보았다. 그러나 도자기그릇 하나 없이 반반했다. 한참 눈 빗질해 겨우 나무 밭 속 평평한 곳에 재가 섞인 흙무지가 있었다. 그 흙무지에 쑥이 한 발씩이나 자라 집터라기보다 쓸쓸한 둔덕을 방불케 했다. (아, 이것이 바로 내 고향 집이란 말인가?) 상순은 억이 막혀 쑥이 한발씩이나 자란 쑥밭과 나무 밭이 된 집터에서 눈길을 떼 최구장에게 얼굴을 돌렸다. 최구장은 머리를 끄덕이며 한숨을 후 내쉬었다. 상순은 쭈크리고 앉아 손으로 재를 한 움큼 쥐고 일어나 후루루 날려 보냈다. “돌아가기요. 일본 놈들의 성화에 점점 살기 힘드네. 20년 전부터 밭이란 밭은 몽땅 나무를 심게 하고 쌀 한 되라도 줘? 저 산성 저쪽으로 해서 수림 속에 황무지를 개간하구 감자라도 심으면 꽤나 보탬이 되겠는데. 헤이, 까딱 다치지 못하게 하네. 한길수가란 놈이 일본 놈들의 말대로 나무를 심으라고 생 지랄을 했소. 별수 있소. 나무를 심으니 뭘 먹고 살겠소? 이전에 차린 서당방도 못 차리게 한지 오래오. 애들의 학비라도 받아서 메밀이라도 사 보탬을 했는데.  허참, 이젠 정말 살기 어렵게 되였소. 일본말만 배우고 말해야 되구. 조선말을 하면 큰 경을 치고 마오. 제 민족 말도 못하고 제 민족어도 배우지 못한다니 어데 될 말이요. 나는 구장 자리도 빼앗겼소. 내 대신 응삼이란 자가 구장이 돼서 개 잡은 포수처럼 우쭐하오. 저 강 건너 만춘집 김구장도 구장자리를 빼앗기고 대신 영팔이 구장을 하오.” 최구장은 한숨을 푸 내쉬더니 허무한 웃음을 지었다. 상순은 운주강 둑으로 해서 집에 돌아오면서도 자꾸 고향집 쪽을 돌아다보고 한숨을 지었다. 상순은 주먹을 부르쥐면서 “나도 어려서부터 아버지에게서 한길수란 놈의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그 악질지주가 지금도 영월동에 있습둥?”라고 물었다. “아니, 지금 우시장에 나가 자위대 대대장이 돼 갖은 악랄한 짓을 다 하네. 그 놈들의 성화에 어데 살겠나?” 상순은 걸음을 멈추고 “한길수 아들 한철주 놈이 지금 만주에서 일본 놈들을 등에 업고 일본 놈들을 미화하느라고 연설하러 다니는 거 길림에서 봤습구마.” 라고 했다. 최구장은 땅이 꺼지게 한숨을 쉬었다. “참말로 한심한 세월이구먼. 그 놈 부자 놈들이 우리 고향 마을을 일본 놈들에게 팔아먹더니. 에이, 이젠 중국 만주국마저 짓밟는 판이구나.” 상순과 최구장은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어느덧 최구장에 팔간 집 앞에 이르렀다. 그때 안에서 계순이 어린애를 업은 채 뛰어나오면서 “아버지, 편안히 계셨습둥?” 하고 허리 굽혀 인사를 올렸다. 그녀는 상순을 보더니 “아유, 조카사위는 정말 끌날같은 미남이구먼.”라고 하면서 반갑게 인사했다. 상순이가 어리벙벙해하자 옆에 서 있던 최구장이 인사시켰다. “ 막내딸 계순이네.” 상순은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최구장은 막내딸 계순의 잔등에서 외손자 녀석을 쑥 뽑아내 안고 뽀뽀를 하였다. “그래 어디 보자. 우리 홍기야.” “외할아버지, 꿀꿀이도 왔습구마.” 최구장은 방에 들어가 앉아 한 팔에 하나씩 안고 기뻐 어쩔 줄 몰라 했다. 명옥은 죄꼬만 동생들을 귀여워 머리를 쓰다듬었다. “에이, 이렇게 예쁜 애들을 이름을 별나게 꿀꿀이라고 지었소?” 계순은 “돼지처럼 잘 먹고 앓지 말고 자라라고 아버지가 그렇게 지었단다.”라고 명옥에게 알려주었다. 그때 최구장의 노친도 외손자와 외손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핥을 상했다. “아이고, 내 외손자야,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몰라.” 성단은 정지를 내려다보면서 계순에게 “그래, 정서방은 왜 오지 않았니?”라고 물었다. 계순은 걀쭉한 얼굴로 어머니를 바라보면서 입을 비쭉거렸다. “언니와 조카들이 왔을 때 같이 왔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런데 일본 면장이 구장을 데리고 마을마다 돌아다니면서 가마골의 저수지 둑을 든든히 막아야 한다고 떠들더니 끌고 갔어요.” “에이, 일본 사람들이 뭘 안다고 그래? 장마가 오면 둑의 물을 빼서 줄여야 하지 막아 물을 가두면 무슨 사고라도 치자고 그런대?” 최구장의 상서롭지 못한 말을 듣자 계순은 아버지가 더 말하지 못하게 했다. “아버지, 그만 하세요. 가뜩이나 애 아버지를 두고 와서 근심스러운데 불길한 말씀을 하지 마세요. 예?” 최구장은 외손자를 안고 뽀뽀를 하면서 “응, 그래. 말하지 않으마.”라고 했다. 이때 바깥의 검둥개가 왕왕 짓는 소리에 뒤이어 왁작 떠드는 소리가 들리었다. 약삭빠른 근형이 달려 들어오더니 헐떡거리면서 “할아버지, 삼촌과 사촌 댁들이 왔습구마.” 라고 했다. 최구장은 엉거주춤 일어서더니 마루에 나갔다. 경인과 어금은 맏아들 근덕(봉순)과 둘째아들 근원, 딸 해옥과 막내아들 근환까지 데리고 왔다. 상순이 보니 큰 매형 경인은 긴 외태머리 대신 하이칼라를 하고 있어 더 멋져보였다. 모두들 인사를 마치고 자리를 정해 앉았다. 그들이 한창 그간 회포를 털어놓으면서 이야기 꽃을 피울 때었다. 바깥이 불시에 새까맣게 어두워지더니 먼 곳에서 우르릉 꽝 하는 우레 소리가 울렸다. 명옥이가 습관대로 문밖에 나가 마루에 서서 동쪽의 기운봉 쪽을 내려다보았다. 기운봉 산중턱에서 번개가 번쩍하더니 우르릉 꽝꽝 우레 소리가 울렸다. 마당에 열콩알만한 비방울이 마구 떨어졌다. 뒤이어 쏴- 소리와 함께 마당의 적송 밭과 들판의 나무 밭에, 그 어데라 없이 대 줄기 같은 소낙비가 억수로 쏟아졌다. 추녀 끝에서 실 폭포를 방불케 빗물이 쏴 쏟아져 마당의 어지러운 발자국을 메우면서 마당 밖으로 흘러내려갔다. 최구장은 한숨을 후- 내쉬더니 “에이, 너희들이 정말 딱 맞춰 왔다. 좀 늦었으면 소낙비를 맞아 물병아리로 될 번했구나.”라고 했다. 부모자식들이 모인 집안은 큰 잔치 집을 방불케 했다. 웃고 떠들썩하면서 장밤이야기꽃을 피웠다. 특히나 성단과 죽순, 계순 그리고 명옥 등은 온 밤 이야기를 하다가 소낙비 내리는 바깥이 훤해져올 때에야 잠간 눈을 붙였다. 6. 고향의 버섯과 딸기 온밤 내리던 소낙비가 이튿날 오전 9시쯤 되여 아이들의 장난을 하듯이 믿기 어렵게 뚝 멎었다. 그때까지 최구장의 집안은 큰 잔치 집 같이 떠들썩했다. 아침 상을 물리자 경인과 경민, 경욱 네는 집에 집짐승도 있고 하여 집을 비울 수 없어 애들을 데리고 먼저 돌아갔다. 그러나 어금은 오라비 상순이 왔기에 하루만 더 묵기로 했다. 그는 상순과 만주에 간 부모형제와 친척들의 형편을 묻기도 하고 이 말 저 말 하면서 놀았다. 계순은 애를 아버지께 맡겨놓고 부엌에 내려가 버들바구니를 둬 개 얻어들고 명옥을 불렀다. “얘, 우리 엄마와 함께 저 운주강가 버드나무 숲에 버섯을 따러 가지 않겠니?” 명옥은 상순의 눈치를 보면서 “그게 좋을 것 같소. 할머니 함께 가깁소.”라고 하며 짚신을 신으러 마루에 나갔다. 이전에도 성단은 막내딸 계순과 맏손녀 명옥을 데리고 기운봉과 운주강가 버드나무숲에 가서 버섯을 따다가 보태군 했다. 이번에도 그는 막내딸의 말을 듣고 바구니를 들고 따라나섰다. 죽순은 “나는 홀랑 빼놓고 가겠습둥?” 하고 눈을 곱게 흘기었다. 그 말에 성단은 “넌 집에서 점심채비나 해라. 우리가 버섯을 따오면 버섯채나 볶아 놓고.” 라고 했다. 성단은 막내딸과 맏손녀를 데리고 운주강가로 갔다. 비온 뒤 해볕이 내리 쬐자 바람에 춤추는 버드나무아래에 하얀 버드나무버섯이 뿌죽 뿌죽 자라나 있었다. 계순은 원래 활발한 여자인지라 애 엄마가 됐는데도 엄마 앞에서는 항상 어린애처럼 뛰어다니면서 놀았다. 그녀는 버섯을 하나 뜯어서는 바구니 안에 넣으면서 “또 하나 흥흥!”하고 말하며 코 노래까지 흥얼흥얼 불렀다. 성단은 버섯을 따면서 명옥을 보고 “얘, 너 신랑이 생기기는 잘 생겼는데 밸 때기는 무섭다던데. 어떻니? 싸우지는 않고 사니?” 하고 넌지시 물어보았다. 원래 할머니를 어머니처럼 믿는 명옥이는 속이는 것이 없이 다 말했다. “에이, 잘나면 낯을 뜯어서 밥을 해먹겠소? 밸 때기는 시아버지보다도 더 유다릅구마. 한번은 아주머니가 소를 쓴다고 말한다고 작두날을 뽑아들고 씽 달려가더니 소 궁둥이를 탁 내리찍지 않았겠소. 헤이고, 농사꾼이 소를 믿고 농사를 짓는데 그 황소가 죽으면 한해농사를 어찝니까? 그래서 시아버지는 겨우 분을 참고 쩍 벌어져 피가 줄줄 흐르는 소 궁둥이에 재를 바르고 조상들의 밀 방약이라면서 대야에 눈 오줌을 쳐주었댔습니다. 그래 겨우 그 황소를 살려내서 지난해 농사를 졌습구마.” 순금은 한숨을 호- 내쉬었다. 계순은 그 끔찍스런 소리에 버섯을 뜯어 쥔 채 명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얘, 네 팔자도 불쌍하구나. 그렇게 밸 때기 더러운 신랑을 만나서 이 다음 어떻게 마음고생을 하겠니?” 그 말에 명옥은 한숨을 호 내쉬면서 할머니와 막내고모를 바라보며 뒷말을 이었다. “한번이면 모르지. 또 한 번은 동네 사람이 자기를 욕했다고 집 마당에 있는 화로 불을 들어 남의 지붕에 훌 올리던져 불이 달릴 번 한적이 다 있소.” “에이, 저 둘째오빠가 왜 저런 신랑한테 너를 소개했을까? 자기 처남이면 성질이랑 잘 알았겠는데 말이야.” 계순이가 경인까지 거들어 도도거리자 성단은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 “얘, 알지도 못하면서 둘째오빠를 나무랄게 뭐냐? 네 둘째오빠는 저 명옥이 네 살에 엄마를 잃고 고생스레 자랐다고 처남에게 시집보내면 잘 살겠는가고 중매를 섰다. 괜히 이러쿵저러쿵 하지 말라. 명옥이도 우리 앞에서는 일없는데 남들 앞에서 절대 신랑의 허물을 하지 말라. 신랑을 잘 받들어야 복을 받는다. 에이고, 이 답답한 것들아, 알겠니?” 계순과 명옥은 숨이 한 줌만 해서 찍소리 못했다. “아이유, 이 빨간 딸기를! 명옥아, 빨리 와서 딸기를 따가자.” “딸기?” 명옥과 성단이 달려가 보니 버드나무숲과 비술나무숲이 마구 어우러진 가운데 빨간 딸기가 새빨갛게 다닥다닥 달려있었다. 그들은 한참이나 딸기를 뜯어 버드나무바구니에 무드기 담겼다. 그런데 계순은 딸기를 뜯으면서 딸기를 자꾸 쥐여 입에 넣고 오물오물 먹어댔다. “아이유, 시쿨어. 어쩜 이렇게 맛있을까?” 명옥도 딸기를 씹으면서 시쿨어 상을 찡그렸다. “아재네 가마골엔 딸기 없소?”라고 물었다. 계순의 걀쭉한 얼굴에는 대번에 어두운 그림자가 흘러지나갔다. “에이고, 딸기 있으면 우리를 먹으라고 할 것 같냐? 그 일본 놈의 앞잡이 구장 놈이 버섯이고 딸기고 따오면 집까지 찾아와서 가마골에서 난 버섯이고 딸기고 다 자기한테 바쳐야 한다면서 뺏아 가지 않겠니?” 성단은 한숨을 후- 내쉬더니 말했다. “얘, 범이 자기 흉을 하면 온다고 일본 놈들의 말을 하지 말라. 운주동에서도 일본 놈들이 알면 버섯과 딸기를 따지 못하게 하고 다 빼앗아간다. 그 새끼들은 우리가 조선 말을 해도 안 되고 이름마저 조선이름을 달면 안 되는데다가 일본 사람들의 이름으로 창씨 개명해야 한다고 한다. 명옥아, 너네 만주는 좀 낫니?”       “우리 거기는 산골이 돼서 그런지 모르겠습구마. 전번에 온 마을에서 일본 파출소에 협화회라는지 뭔지 들었습구마. 그래서 그런지  일본 사람들이 우리 마을에 와서는 그렇게 행패를 부리지 않습꾸마.” 성단은 버섯을 따서 바구니에 넣으면서 “글쎄, 네 큰고모네 작년에 와서 하는 말이 만주국에 황무지도 많고 일본 놈들도 덜 성화를 부린다고 하더라. 여기서 어디 일본 놈들의 성화에 살겠니? 산나물도 못 캐먹게 하니 어떻게 사니? 우리도 만주국에 가 살아야 할 것 같아.” 라고 말했다. 계순은 엄마 팔을 붙잡고 흔들었다. “엄마, 그래 이 막내딸은 가마골에 버리고 혼자 만주에 갈 예산입니까? 나도 정서방을 데리고 만주국에 가겠습니다. 언니와 명옥이도 거기서 된장국에 기장밥을 먹고 잘 산다던데 내 무슨 저 가마골에서 일본 놈들의 눈치 밥을 먹으면서 살겠소?”  “그래, 내 어찌 막내딸을 버리고 혼자 잘 살겠다고 가겠니? 우리 다 만주국에 가서 잘 살자.” 성단은 흐릿한 하늘을 쳐다보더니 이렇게 뒷말을 이었다. “얼른 버섯이나 좀 더 뜯어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자. 저 기운봉 쪽을 봐라. 어둑시그레 해나는 게 또 비 오겠는 모양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입을 다물고 한참 버섯을 더 뜯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들어섰다. 명옥은 할머니를 보고 “우리 언제 비가 오지 않는 날에 이전에처럼 막내고모와 함께 기운봉에 돌 버섯을 따러 가지 않겠습둥?” 하고 물었다. 계순은 어린애처럼 서적을 피우면서 “엄마, 함께 가깁소. 예?” 하고 말하면서 걀쭉한 얼굴을 갸우뚱했다. 성단은 “그래. 해만 나면 가자. 돌 버섯을 캐다가 물에 퍼지어 데쳐서 기밀가루에 반죽해 먹으면 얼마나 쌀 보탬이 된다고.” 하고 선선히 응낙했다. 계순은 점점 흐려오는 하늘을 바라보면서 “에이유, 그런데 이 놈 하늘이 맑은 날이 있을 것 같지 않아.”라고 하며 입술을 쫑긋해보였다. 이때 갑자기 말발굽소리가 났다. 그들이 머리를 들어 보니 일본 군도를 차고 말을 탄 한 일본 놈이 채찍을 들고 이쪽을 살피고 있었다. “아이유, 큰일 났다. 삼림지킴 야마모도소장이다. 어서 숨자.” 성단의 황급한 말에 계순과 명옥은 숨이 한줌만 해서 버드나무숲속에 납작 엎드렸다. 야마모도는 말에서 내려 채찍으로 버드나무숲을 헤치면서 이쪽으로 슬금슬금 다가왔다. 그대로 엎드려 있으면 야마모도에게 잡힐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였다. 성단은 달아나자고 버드나무 숲속 쪽으로 손짓했다. 계순과 명옥은 바구니를 안고 허리를 굽힌 채 살금살금 버드나무숲속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겁이나 여기저기 살피던 계순이 그만 일본 놈의 눈에 딱 띠였다. “난노 온나다까?(웬 계집인가?) 고이!(오라!)” 야마모도가 채찍을 쳐들고 흔들면서 오라고 을러멨다. 당황해난 계순은 다리야 날 살리라고 버드나무숲속을 헤치고 줄행랑을 놓았다. 명옥과 순금이도 선불을 맞은 노루처럼 버드나무 숲속으로 달려 들어갔다. 야마모도는 버드나무 숲속에서 그들 셋과 한식경이나 숨바꼭질 하였지만 끝내 붙잡지 못했다. 이때 하늘에 먹장구름이 뒤덮이고 번개가 번쩍이더니 우레 소리가 하늘땅을 진동했다. 딸기 알 같은 비방울이 툭, 툭, 툭 떨어졌다. 야마모도소장은 재수 없다고 두덜거리면서 말에 올라 채찍질을 하더니 어디로인가 달려가 버렸다. 소낙비가 억수로 쏟아질 때에야 여자 셋은 물병아리로 된 채 버섯과 딸기를 무드기 담은 바구니 셋을 들고 웃고 떠들면서 집으로 달려갔다. 하늘에 큰 구멍이 났는지 연 일주일이나 소낙비가 억수로 쏟아졌다. 그새 계순은 마침 잘 됐다고 본가 집에 눌러앉아 둘째오빠 경인이네 부부와 언니 죽순이네 부부 그리고 명옥 부부와 함께 웃고 떠들면서 끝없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계순은 무슨 할 말이 어쩌면 그렇게도 많았을까? 그는 조왕간 쪽으로 앉아 죽순을 보고 물었다. “언니, 왜 복금이하구 양금이, 어금이, 학준이를 몽땅 데리고 오지 않았소? 그 애들이 영 크겠는데. 학준은 이젠 저 봉순만큼 크지 않소?" 죽순은 눈을 곡베 흘기였다. “얘를 봐라. 이젠 다 큰 봉순을 자꾸 애명을 부르지 말구 근덕이라고 불러라. 열 살 밖에 안 되는 학준을 데리고 어떻게 여기까지 오겠니? 우리 어른들이 오는 것도 기차 길이 다 끊어나서 혼났다.” 그러자 계순은 상큼한 코를 발름거리면서 “기차를 타고 오는데 무슨 일이 있소?”라고 말했다. 죽순은 상순과 명옥을 번갈아 보면서 뒷말을 이었다.  “얘, 우시장에서부터 여기까지 오는데 얼마나 고생했는지 아니? 학준을 데리고 왔더라면 당날로 밤중에라도 들어서지 못했을 게야. 이담 너네도 그 잘난 가마골에서 살지 말구 만주국에 들어오라. 그러면 조카와 저 명옥의 딸애 영자도 보구 우리 애들도 봐라. 그러지 않아도 학준이랑 복금이랑 어찌나 이모를 보고 싶다면서 외가 집으로 가자고 떼를 쓰는지 겨우 떼놓고 왔다.” 그제야 계순은 해시시 웃으면서 짙은 눈썹아래 까만 쌍까풀눈에 활기를 띠였다. 그 눈에는 앞날의 행복한 생활에 대한 갈망과 희망의 빛이 반짝였다. “야, 우리도 언제 언니와 명옥을 따라 땅도 넓고 장국에 조이 밥을 먹는 만주국에 가서 발 펴고 살까? 언니와 아저씨네 좀 우리 여기 있는 본가집식구들이 다 그곳에 가게 자리를 봐두오. 이곳에서는 일본 놈들의 등살에 어디 살겠소? 정말 신물이 날 지경이오. 이렇게 비 오는 날에 우리 정서방을 글쎄 저수지 둑막이에 내모니 어찝둥?” 이때 성단이 휘어든 허리를 펴고 바깥을 내다보더니 일허게 말했다.  “계순아, 날이 차츰 개는구나. 출가 집 외인이라고 어서 집에 돌아가라. 네가 온지도 이젠 일주일이나 된다. 정서방이 기다리겠다.” 계순은 쌍까풀 깜장눈을 곱게 흘기면서 “엄마는 어쩌다 언니와 명옥이네 왔는데 더 놀면 뭐라오? 정서방두 이제 올지 누가 아오? 아유, 나는 가기 싫다.”라고 하면서 가마 목에 드러누웠다. 애들도 어미를 따라 가마 목에 활 드러누우면서 “아이고, 가기 싫어라. 외가 집에서 더 놀자.”라고 말하며 떼를 썼다. 그 모양을 보고 최구장과 경인이 윗방에서 “허허허.” 하고 웃었다. 최구장은 위방에서 경인과 근형과 함께 상순과 마주앉아서 그 곳 형편을 이것저것 알아보았다. “그래, 우리 맏이 네가 무고한가?” “예, 세 식구가 모두 남의 밭이나 붙이고 황무지를 얼마간 개간해서 입에 풀칠이나 합니다. 남의 건너 간에 들었는데 이젠 집도 새로 지어서 들었습구마." 최구장은 한시름 놓은 듯이 염소수염을 쓰다듬으면서 머리를 끄덕이었다. 이윽고 그는 제일 관심이 가는 일을 묻기 시작했다. “그래, 그 곳에서는 일본 사람들이 여기처럼 살판치지 않는가?” 상순은 담배를 말아서 입에 붙여 물고 길게 빨아들였다가 연기를 후 내보냈다. “천하의 까마귀는 다 검다고 우리 진수해의 일본 놈들이라고 우리를 살게 하겠습둥? 그 놈들은 중국 사람들과 우리 조선 사람들을 자꾸 이간을 놓습구마. 우리 조선 사람들은 2등공민이라면서 좁쌀을 한줌 먹게 하구 중국의 한족사람들은 3등공민이라면서 수수밥이나 옥수수떡을 먹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우리 마을에 와서 어찌나 사람들을 군대에 나가라고 강박하는지 혼났습니다. 그리고 양민이 되겠으면 협조회나 협파회에 들어야 한다고 강요했습니다. 우리 함흥촌에서는 구장이 시키는 대로 거진 협파회에 들었습구마. 그런 후부터 우리가 일본 사람들의 양민이 됐다고 그리 들볶지는 않습더구마.” 경인은 조용히 앉아 듣다가 상순에게 “여기서는 일본 놈들이 우리 아버지를 서당 방에서 조선 글을 배워주지 못하게 하고 일본글을 배워주라고 강박했네. 그래서 서당 방이 문을 닫고 말았네. 그곳에서는 어떤가?” 상순은 아는 대로 대답했다. “우리 곳이라고 에누리 있겠습니까? 난 소학교 문에도 가보지 못해서 잘 모르겠소만 학교에서 조선 애들이 일본 말을 하지 않고 조선말을 하면 목에 개패를 걸구 청소를 일주일동안 시킨답구마.” 그 말을 듣더니 경인은 최구장을 돌아보았다. “봅소. 어디를 가면 우리 고향과 다르겠습니까? 다 일본 놈들의 세상인데. 아버지가 자꾸 내 보고 처남네 함흥촌으로 가서 알아보라고 하지만 난 주춤주춤 하고 있소.” 최구장도 속이 타서 담배 물 주리 재를 재떨이에 툭툭 털더니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었다. “나도 오죽하면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따라 정든 고향 개성을 떠나서 이곳에까지 왔겠느냐? 사실 아버지 산소가 저 산성에 있고 할아버지 산소는 업동에 있는데 조상의 산소를 두고 멀리 만주에 간다는 것도 조상들에게 얼마나 죄를 짓는 일이냐. 그래서 지금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오.” 옆에서 듣던 근형이 끼어들었다. “증조부 산소를 파서 업고 함흥촌에 가지 뭐.” 최구장은 외까풀눈이 대번에 휘동그레서 근형을 바라보았다. “에끼, 이 놈아. 아버지는 파서 업고 간다고 하자. 그럼 업동에 있는 내 할아버지는 어쩌겠느냐? 개성에 있는 내 증조부와 고조부는 어찌 하겠느냐? 고조부의 아버지와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랑 다 대대로 개성에 산소가 있는데 그분들을 다 어떻게 파가지고 가겠느냐? 참 답답하고 한심하구 기막힌 일이 아니냐?" 머리가 잘 돌아가는 근형이었지만 그 말에는 어찌는 수가 없었다. 경인과 상순은 다 한숨을 푸푸 내쉬었다. 납덩이같이 무거운 침묵이 한창 흘렀다. 바늘이 구들바닥에 떨어져도 다 들릴 듯이 위방과 정주는 조용해졌다. 한참 후 상순이가 코마루가 시큼해나서 말했다. “우리 증조부도 좋고 고조부도 그렇고 다 저 운주동 산성 안에 있지 않습니까? 그 우에 조상들의 산소도 대대로 다 여기 명천에 있지 않습니까? 생각하면 조상들을 여기에 모셔 두고 살 길을 찾아 고향을 떠난 게 정말 마음이 아픕니다.” 이때 바깥이 왁작 떠들썩했다. 처음에는 애들이 바깥에서 놀거니 하였는데 아니었다. “문 열어! 이 놈들아!” 근형과 경인이가 내다보니 야마모도소장과 응삼 구장이 말을 타고 울 밖에서 고함치고 있었다. 그때 계순은 살구나무 위에서 살구를 뜯다가 질겁하여 살구를 담뿍 담은 바가지를 들고 살금살금 조심조심 내려왔다. 야마모도 소장 놈은 채찍으로 계순을 가리키더니 꽥꽥 고함쳤다. “고노 빠까아맛꼬 새끼! (이 멍청이계집년새끼!) 니기리모데! (붙잡아라!)” “하이(옛)!” 응삼은 말 잔등 우에서 길쭉한 말대가리를 조아리더니 훌쩍 뛰어내려 곧추 울안으로 덮쳐들어왔다. 계순이가 새된 비명을 지르면서 집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그러자 꿀꿀이가 왕 통곡 쳤다. 그 광경을 보고 성단은 “아이고, 범이 제 흉을 하면 온다더니 끝내 왔구나.”라고 하면서 발을 동동 굴렀다. 최구장과 경인이가 바깥마루에 버선발바람으로 뛰어나갔다. “리 구장, 대체 이게 무슨 일이요?” 응삼은 채찍으로 최구장을 한쪽으로 밀어내면서 땅방울같이 을러멨다. “최 영감의 노친과 막내딸이 운주강가 수림 속에서 버섯과 딸기를 도적질해왔단 말이요. 도적 죄로 잡아가야겠소.” 가물에 실 돌피 같은 응삼이가 집안에 들어오더니 계순과 순금을 우멍한 눈으로 쏘아보면서 구들에 올라섰다. 최구장은 그래도 응삼이 학생이라고 일루의 희망을 안고 옆에 있는 응삼에게 한마디 조용히 했다. “이보게. 이 구장, 내 딸을 좀 놔주게. 자기 마을 강가의 딸기랑 버섯이랑 따왔는데 도적질이라니? 말이나 되오?” 그러나 응삼은 개 잡은 포수처럼 우쭐거리면서 실눈을 흘기었다. “지금 무슨 정신 나간 소리를 하는 거요? 대일본제국의 황군 앞에서 다시 그런 소리를 했다간 영감부터 잡아갈 테요. 흥!” 그때 상순이가 위방에서 나오면서 고함쳤다.  “네놈이 까딱 손을 대봐라! 여기서 살아서 나갈 것 같으냐?!" 깜짝 놀란 응삼이가 구들에서 주춤 뒷걸음치면서 상순을 눈알이 휘동그레서 쳐다보았다. 그러나 뒤에 야마모도 소장이 서있는지라 다시 억지로 침착성을 회복하더니 없는 용기를 내 을러멨다. “이 놈은 어데서 굴러온 놈이냐? 이 구장어른을 감히 건드려?” 야마모도 소장도 군도를 쓱 뽑아들고 상순에게 덤벼들었다. “빠까야로(제길할 놈)! 신다(죽는다)!” 그래도 상순은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고 대들었다. “제 고향 마을의 버섯과 딸기를 따왔는데 무슨 죄란 말이냐?” 응삼이 우쭐해서 상순의 가슴을 주먹으로 쥐여 박으면서 밀었다. “뭐라고? 이 미친 새끼야! 지금 무슨 세월인데 버섯을 따 가지고도 죄 없다고 변명이냐! 온 조선이 일본 천황의 땅이 됐어. 이 마을도 일본 거야! 일본 딸기와 버섯을 따왔으니 도적질이 아냐?” 야마모도 소장은 군도로 이 사람 저 사람 가리키면서 꽥꽥 고함쳤다. “니혼고데 하나세(일본말로 말햇)!” 응삼은 야마모도 놈에게 실 돌피 같은 허리를 구십 도로 굽히면서 굽실거리었다. “하이(옛)! 와까리마시다(알았습니다)!” 상순이가 세 귀 눈에 분노의 불길이 이글거리는 것을 보고 경인은 처남이 참지 못하고 일을 칠까봐 나서서 말리었다. “처남, 참소, 참아!” 그러나 상순은 참기는커녕 씽 부엌으로 달려가더니 가마뚜껑과 시퍼런 식칼을 들고 야마모도 소장 놈과 응삼한테로 덮쳐들었다. 야마모도 소장은 이 돌발적인 사태에 깜짝 놀랐다. "이런 미친 놈은 난생처음 본다." 응삼은 상순을 손가락질하며 지껄여댔다. 야마모도 놈은 군도를 번쩍 들어 상순을 내리찍었다. 상순이 가마뚜껑으로 막자 쟁강 소리와 함께 불꽃이 튕겼다. 일본 지휘도는 보기 좋게 련속 가마뚜껑에 맞아 불꽃을 튕겼다. 근형은 놀라 바깥으로 뛰어나갔고 홍기랑 와 하고 울음보를 터뜨렸다. 응삼은 일본 상전을 도와 주먹으로라도 상순을 치고 싶었다. 그러나 옆에 둘러서서 노려보고 있는 경인이나 근형을 보고 감히 손을 대지 못하고 소리만 꽥 쳤다. “어데서 굴러온 놈이야, 담대하기로 대일본제국의 소장님에게 덤벼들어?” “네놈은 언제든지 내손에 죽었어. 손을 떼지 못할까?!” 하긴 경인이가 검을 휘두르면 누가 당해내겠는가. 그의 검술솜씨를 아는 응삼은 손을 쓸 엄두도 내지 못했던 것이다. 고함소리에 놀라 칼질을 그만둘 상순이가 아니었다. “얏! 이 일본 개놈새끼야! 죽어봐라!” 고함소리와 함께 상순이가 가마뚜껑으로 날아드는 일본 지휘도를 막으면서 식칼로 야마모도와 응삼을 마구 찍었다. 이제껏 이런 반격을 받아 본적 없는 야마모도는 식칼에 왼팔을 찍히고 선불을 맞은 노루새끼처럼 비명을 지르면서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응삼도 잔등에 칼을 빗맞고 다리야 나를 살리라고 바깥으로 줄행랑을 놓았다. 야마모도는 왼팔이 아파 오른손으로 움켜쥐고 오만상을 찌푸리면서도 입만은 살아서 울바자 밖에 세워놓은 말을 타면서 꽥꽥 고함쳤다. “젠부 신데시마우(몽땅 죽여치우겠다)!” 응삼도 오른 손으로 잔등의 상처를 만지면서 고함쳤다. “어데서 굴러온 놈 새끼야! 죽어 봐라! 흥, 최구장, 어데 운주동에서 사는가 두구 보라구! 몽땅 작두날로 목을 잘라치우겠어!” “에끼, 이 놈 새끼들아! 죽어봐라!” 상순이  호랑이처럼 고함치면서 식칼을 들고 쫓아나갔다. 야마모도와 응삼은 말배를 차더니 꼬리 빳빳해 도망쳤다. 뒤에서 온 마을의 개들이 으르렁거리면서 선불맞은 노루처럼 줄행랑을 놓는  놈들을 보고 컹컹 짖어댔다.  
78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41) 댓글:  조회:1992  추천:1  2016-05-18
                                               2. 두만강을 넘나들며        삼복염천에 태평강도 부글부글 끓어 번질 지경이었다. 쨍쨍 내리 쪼이는 햇볕에 옥수수 잎도 시들어 맥없이 축 드리워지었다.        약담배 짐을 메주고 삯전을 번 상순은 속으로 자기도 혼자 약담배 장사를 해보려고 선준과 두준을 따라 나섰다. 전번과는 달리 그들은 대담하게 천수해역에 가서 기차를 타고 고향을 바라고 떠났다.       그들은 아주 순조롭게 명천에 가서  약담배 짐을 해 전번처럼 치약에 넣어 지고 산길을 타고 북으로 떠났다. 상순은 이번에는 선준과 두준의 약 담배 짐만 진 것이 아니라 선준에게서 돈을 꿔 약담배를 아홉 냥이나 사 지었던 것이다.       어느 날 그들이 인적을 피해 산마루를 타고 소나무가 우거져 원시림을 방불케 하는 명천의 박달령(지금의 칠보산 박달령임)을 넘어 수림 속을 꿰질러나갔다. 그들이 다리쉼을 하자고 둔덕에 앉아 땀을 들이고 있을 때었다. 웬 사내 대여섯이 늑대처럼 슬금슬금 다가왔다. 상순은 대뜸 호미를 쥐고 벌떡 일어섰다. 선준한테 약 담배를 판 약 담배장사꾼도 끼어 있었다. (강도들이구나. 분명 약담배를 팔아먹고 우리 뒤를 밟았구나.) “삼촌, 자리를 뜨기요.” 두 삼촌도 눈치 채고 벌떡 일어났다. “짐을 두고 가라!” 강도들이 품속에서 비수를 뽑아 들고 일시에 덮쳐왔다. 상순은 호미를 들고 그자들을 막아 싸우면서 고함쳤다. “삼촌,  빨리 달아나오!” 한 놈이 비수를 휘두르며 덮쳐들었다. 상순이 호미를 휘둘러 치는 척 하면서 발길을 날려 손목을 걷어찼다. 그 놈의 손에서 비수가 날아 났다. 상순은 재차 원앙새 발길을 날려 아랫배를 걷어찼다. 그 놈은 배를 끌어안고 나동그라졌다. “이 놈, 썩어져라!” 강도들은 동시에 칼과 몽둥이를 휘두르며 앞뒤로 덮쳐들었다. 순간 상순이가 슬쩍 몸을 낮추면서 그들 두 새로 미꾸라지처럼 빠져 나갔다. 몽둥이가 그의 잔등을 탁 내리 치었다. 다른 두 놈은 그만 칼로 서로 팔을 찍었다. “앗!” 한 놈은 칼을 뚝 떨어뜨리더니 팔을 붙잡고 땅바닥에 물앉았다. 상순은 나머지 세 놈을 이기지 못하는 척 하면서 삼촌네와 다른 쪽 수림으로 달아났다. 세 놈은 헐금씨금 뒤쫓아 왔다. 상순은 아름드리나무를 안고 홱 돌아 서면서 호미 등으로 제일 먼저 뒤쫓아 온 놈의 대가리를 탁 쳤다. “억!” 그 놈이 보기 좋게 대가리를 싸쥐고 쓰러졌다. 그 틈을 타 뒤쫓아 온 놈이 비수를 상순에게 휘둘렀다. 상순이가 호미를 휘둘러 막았다. 호미날에서 “쟁강!” 소리가 나며 불티가 튕기었다. 뒤쫓아 온 다른 놈도 합세해 상순에게 달려들었다. 상순은 또 도망쳤다. 두 놈은 죽기내기로 뒤쫓아 왔다. 그런데 상순은 그만 돌멩이를 빗디뎌 쿵 넘어졌다. “이 놈, 죽어 봐라!” 두 놈이 비수를 휘두르며 쓰러진 상순에게 덮쳐들었다. 넘어진 상순은 땅바닥에서 돌멩이를 주어 몸을 반쯤 돌리며 휙 날렸다. 딱! 한 놈이 이마를 맞고 “앗!” 소리와 함께 이마를 싸쥐고 물앉았다. 쉭! 딱! 나머지 놈도 보기 좋게 나동그라졌다. 놈들은 대가리에 피를 흘리면서 더는 쫓아 올 엄두도 내지 못하였다. 상순이가 호미를 들고 수림 속을 절뚝거리면서 걷다가 수림 속에서 인기척을 육감적으로 느끼었다. 상순은 눌러 쓴 초 모자 밑으로 수림 속을 둘러보았다. 웬 놈이 나무숲에 숨어 있는지 나무 이파리가 사시나무 떨듯이 떨리고 있었다. “겁쟁이, 어서 나오지 못해?!” “아, 천하장사, 제발 살려 주오.” 그 놈은 수림 속에서 기어 나와 꿇어 엎뎌 바들바들 떨었다. 그자는 선준에게 약 담배를 팔던 코큰이 장사꾼이었다. 상순은 멱살을 틀어잡고 호통 쳤다. “장사군도 의리가 있는 법이야. 왜 팔아놓고 되빼앗아?” 그자는 떨리는 목소리로 횡설수설했다.  “내 말을 듣소. 사실 나도 저 놈들에게 당했소. 저 놈들이 칼을 들이 대고 열흘 안에 돈 500원을 내놓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을러멨소. 또 큰 약 담배 장사꾼이 오면 기별하라고 을러멨소. 그러지 않으면 죽을 줄 알라고 했소.” 상순은 목에 지렁이 같은 피 줄을 세우며 욕했다.  “아무리 그래도 제 살겠다고 강도들에게 우릴 팔아먹어?” 그 자는 뒤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가라! 다시 그 따위 짓 해 봐라! 이 어른이 용서하지 않을 테야!” 그 자는 절을 꾸벅꾸벅 하더니 슬슬 기어 일어나 다리야 날 살리라고 꼬리 빳빳해 달아났다. 상순은 초 모자를 눌러 쓰고 호미를 든 채 쩔룩거리며 숲을 헤매면서 삼촌들을 찾았다. 그는 온 하루 산속을 헤매서야 겨우 나무숲이 우거진 한 절벽 밑에서 삼촌들을 찾아냈다. “상순아, 다리는 어째?” 선준은 조카를 보자 반가와 어쩔 줄 몰라했다. “빗디뎠소. 오줌 약을 썼으니 괜찮을 게요. 일없소?” 선준은 “덕분에 무사하다.” 하고 말하며 상순의 두 손을 잡았다. “여긴 야수들이 욱실거리는 수림속인 거 같소. 빨리 떠나기요.” 그들은 수림 속 여러 곳을 살필 수 있는 산등성이를 타고 북으로 길을 재촉했다. 상순이가 뒤를 지키며 걸으면서 보니 두준이 자꾸 뒤에 떨어지더니 여기 저기 살피면서 무슨 궁리를 하는 것 같았다. 상순은 이상해 뒤떨어진 두준에게 다가갔다. “어째 무슨 일이 있소? 자꾸 뒤에 떨어지오?” “아, 아니야. 아무 일도 없어. 발목을 좀 풀쳐서, 어, 에헴.” 두준은 발목을 붙잡고 물앉더니 상순의 눈치를 흘끔 보는 것이었다. “얘, 목이 말라 죽겠어. 네 짐을 메 줄 테니 저 아래 산골짜기 마을에 가서 물이나 한바가지 퍼 오겠니?” “양? 갔다 올 게.” 상순이 짐을 벗어 두준에게 맡기고 막 산 아래로 내려가려고 했다. “얘, 어디로 가? 강도 나타나면 어쩌니?” 선준이 근심돼 말렸다. 상순은 대수로워 하지 않으면서 “근심하지 마오. 인차 갔다 올 게요. 숨어서 기다리오.”라고 하고는 산골짜기 아래로 내려갔다. 마을에 들어가자 그는 우물을 찾아 드레박으로 물을 잣아 올려 샘물을 꿀꺽꿀꺽 마셨다. 이가 시릴 지경으로 찬 샘물은 시원하기 그지없었다. 그는 두리번거리다가 우물 옆의 한 집에 들어가 커다란 바가지를 빌어다 시원한 샘물을 한바가지 푹 퍼들고 바삐 산우로 올라 왔다. (이게 뭔가? 삼촌들은 어디로 갔어? 혹시 강도들한테 당하지 않았을까?) 상순은 물바가지를 내리어 놓고 나무숲이 무성한 곳마다 돌아다니면서 호미로 이리저리 헤쳐 보았지만 삼촌네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이 일을 어쩌면 좋은가? 삼촌네 잘 못 되지 않았을까? 숱한 빚을 져 산 약 담배를 빼앗겼으면 어쩌니? 빚더미에 깔려 죽게 생겼는데.” 상순은 중얼거리면서 한숨을 산이 날아가게 후- 내쉬었다. 그의 가슴속에서 매돌 짝이 쿵 떨어지는 것 같았다. 로비마저 다 떨어진 그는 마른 삭정이를 주어 마을에 지고 가서 밥을 얻어먹으면서 걷고 걸어 겨우 함흥촌에 돌아 왔다. 그는 마을에 들어서자마자 그 걸음으로 두준을 찾아갔다. 이게 웬 일인가? 두준은 펀펀해 집에서 빗자루로 마당을 썩썩 쓸고 있었다. “삼촌! 무사하구먼.” 상순을 보자 두준은 펄쩍 놀라 빗자루를 짚고 부들부들 떨다가 겨우 입을 여는 것이었다. “엉? 어, 너도 살아 왔구나.” 상순은 한걸음 다가가면서 물었다. “내 짐은 어쨌소?” 두준은 머리를 숙이면서 기어들어 가는 모기 소리로 겨우 대답했다. “미안하다. 우린 강도를 만나 죽을 번했다가 겨우 살아 집에 왔다. 짐을 몽땅 강도한테 빼앗겼어.” “뭐라오? 그거 어떻게 산거라고? 당장 내 짐을 내 놓소. 강도를 만났다는데 어째 상처 하나 없소?” 두준은 꺽꺽거리면서 아무 말두 못했다. “얘, 강도한테 빼앗긴 짐을 내 놓으라면 어쩌라니?” 상순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것도 말이라고 하오? 내 짐을 잃어버렸으면 갚아야 할 게 아니오?” “이런 새끼를 봤니? 남이 죽다가 겨우 살아 왔는데 무슨 망발이냐? 원, 네놈을 믿다가 괜히 약 담배나 떼었지. 우릴 지키지도 못하면서 무슨 염치로 돈을 내라고 호통질이냐? 정 믿지 못하겠으면 선준을 찾아 가서 물어 봐라.” 두준이 쪽에서 오히려 목에 지렁이 같은 피 줄을 세우면서 야단치었다. 상순은 별 수 없이 선준을 찾아 갔다. 그런데 그의 대답도 두준의 대답과 똑같았다. (더러운 새끼들이, 사촌형제끼리 짜고 들어 촌수가 먼 내 약 담배를 떼먹었구나. 어디 가만 놔두나 두고 보자.) 상순은 증거를 잡지 못했기에 빤한 일도 용빼는 수가 없었다. 그러나 가만 있자니 밸이 울컥 치밀었다. 그는 다짜고짜로 두준의 집에 다시 찾아갔다. 그는 도끼로 나무를 패는 두준의 멱살을 틀어쥐고 호통쳤다. “더러운 두상, 내 약 담배를 내 놓지 못하겠는가?!” 상순은 주먹으로 한대 치려고 쳐들었다가 주먹을 내리웠다. 순간 성칠 큰아버지가 가르친 무덕이 그의 주먹을 꺾었던 것이다. (집안 어른을 칠 순 없지.) “이 놈 새끼, 삼촌을 치겠니? 버르장머리 없는 놈, 어디 쳐봐라!” 두준은 상순이 주춤 하는 틈을 주먹질 했다. 두준의 아들 상설도 몽둥이를 들고 뒤에서 씽 달려 나오면서 상순의 뒤 골을 내리쳤다. 상순은 피하지도 않고 날아드는 몽둥이를 왼손으로 턱 받아 쥐었다. “이까짓게 다 뭐야?!” 그는 몽둥이를 무릎에 대고 툭 끊어 땅 바닥에 탁 내동댕이쳤다. “퉤! 내 집안이라고 놔두니까. 그리 알아라.” 상순은 벌벌 떠는 두준의 부자에게 침을 뱉고 그 자리를 떠나버렸다. 마을 사람들 속에서 감탄소리가 울리었다. 토성안집 지학사는 토성 안에서 졸개들을 데리고 나와 뾰족한 턱을 쳐들고 기웃거리다가 개화장을 휘두르며 집으로 되들어가버렸다. “상순은 그저 놈 새끼 아니야? 저 놈을 내 편에 끌어 왔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토성 밖의 버드나무가 시원한 가을바람에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지학사는 두준의 부자가 상순과 싸워 코 대를 꺾어 놓았으면 했는데 멋 적게 끝나자 도리머리를 가로 저었다. 그는 몇 해 전에 자기를 송사에 걸어 망신시킨 상순이가 점점 커 가는 것이 눈에 든 가시 같았다. 그는 함흥촌에서 촌장 질을 해 먹으려면 제일 먼저 상순이네 부자부터 꺾어 놓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지학사 촌장 놈은 전번에 춘실과 은실을 위안소로 잡아갈 때 일본 놈들이 늙은 비술나무에서 도끼에 찍혀죽은 일을 잊지 않고 있었다. (글쎄 총에 맞아 죽은 건 유격대 짓이라고 쳐도 돌멩이에 맞아죽거나 도끼에 찍혀 죽은 건 심상치 않았다. 마을에서 일본 황군과 맞서 싸울만한 호랑이 담을 가진 놈은 상순이나 기준이 밖에 없어. 황차 상순은 춘실을 좋아하고 배속에 애까지 싸넣었다고 하지 않는가!) 지학사는 쥐눈깔을 떼룩 굴리며 촌공소에서 왔다갔다 하면서 계속 생각을 굴렸다. (황군 앞에 모범집단부락을 꾸리자면 불온분자들부터 처단해야 해.) 룡정통감부 간도파출소에서는 춘실과 은실을 잡아가는 그날 밤에 예비로 일본 경찰들을 한 개 분대나 풀어 이른바 "흉수"를 수색했지만 꼬리도 잡지 못했다. 그 놈들은 늙은 비술나무 부근에서 피 묻은 돌멩이와 도끼를 주은 것이 유일한 단서였다. 그 놈들은 원래 함흥촌 부근 패랑산촌과 조개덕 그리고 태평거우까지 몽땅 소탕하려고 했다. 그러나 지학사가 모범집단부락을 숙청하면 이후에 누가 함흥촌에 와서 살겠는가고 간언해 소탕을 그만두었던 것이다. 대신 모범집단부락이고 뭐고 불온분자들을 세심히 관찰해 속속들이 복구하라고 명령을 내렸던 것이다. 그런데 이날 이때까지 상순의 꼬리를 잡지 못한게 문제였다. (전번에 상순은 확실히 그날부터 잃어졌는데 썩 후에 약을 캐 담은 지게를 지고 나타나지 않았던가. 말로는 약을 캐러 산에 들어갔다고 하지만 유격대와 내통했는지 누가 알겠는가.) 고심하던 끝에 지학사는 암암리에 기준과 상순 부자 일가를 망하게 해 없애버리려고 꿍꿍이를 꾸몄다.       어느 날 그는 자기 졸개를 시켜 가만히 상순이네 소여물에 독약을 풀어 넣게 해 소를 독살했던 것이다. 소임자인 손호표 지주가 상순이네 집에 찾아와 야단치자 지학사는 토성 위에 올라서서 구경하면서 잘코사니를 불렀다.       그 일로 해 기준은 울며 겨자 먹기로 집마저 팔아 소 값을 갚지 않으면 안됐다. 소를 팔아서도 소 값을 채 갚지도 못해 그들 부자는 웃새집 사랑채에 임시 들었다. 상순은 눈앞이 막막했다. 빚 구렁텅이에 빠진데다 설상가상으로 유격대는 당장 쌀이 떨어져가고 있는데 약 담배 짐까지 삼촌들한테 사기 당한 판이었다. 그는 궁리하다 못해 뇌리에 큰아버지의 말이 떠올랐다. (독불장군이라고 성칠 큰아버지 말씀 대로 군중을 동원해야 해.) 그는 집안 형님들로부터 시작해 온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쌀 몇 근 씩이라도 얻어 주머니에 담아 김치 움에다 치워 놓았다. 한편 마을 청년 희수, 붕수, 흥수, 7촌조카 의호, 충국 등한테 중국 공산당의 혁명의 도리를 알려주고 이 땅에서 일본 놈들을 몰아내고 진정 인민이 땅의 주인이 되는 나라를 세우기 위해 싸우자고 선동했다. 그리하여 청년들은 집의 쌀을 얼마간씩 밤에 상순의 집에 가져왔다. 상순은 쌀을 가만히 김치움에 가져다 놓았다. 나중에 상순은 소서구 토성안집으로 발길을 옮겼다. (장 지주는 인삼 삼촌네 양아버진데 쌀을 얼마간이라도 주겠지.) 상순은 토성 안 서쪽 채에 들어가자마자 장학산을 보고 정색해 말했다. “돈을 한 200원 꿔주오.  큰 장사를 해 돈을 벌면 은공을 톡톡히 갚겠소.” 장학산은 다가앉으면서 나직이 물었다. “혹시 약 담배장사를 하자고 그러지 않니? 목이 날아나지 못해서.” “무슨 말이요? 소금 장사 밑천으로 쓰자고 그러오.” “유격대에 쌀을 가져가자고 그러지 않고?” “듣자니 당신도 인삼 삼촌이랑 먹게 쌀을 많이 가져갔더구먼.” 장학산은 대뜸 손사래 질 했다. “난 인삼이가 유격대인 줄 몰랐어. 그 자식 때문에 난 쫄딱 망했어. 토성 안 집이 재더미로 됐지. 그거마저 일본 놈들의 촌공소로 빼앗겼단 말이야. 어떻게 지은 집인데. 아까워 죽겠어.” 상순은 쐐기를 박았다. “그게  일본 놈들 탓이지. 지금 인삼 삼촌네는 굶어서 거의 죽게 됐소. 굶고서야 언제 일본 놈들을 몰아내고 토성 안 집을 찾아내고 저 숱한 밭을 지키겠소?” 장학산은 이를 갈았다. “일본 놈들 생각만 하면 악이 난다. 요새 지학사 형님을 꼬드겨서 뭐 대일본제국에 밭을 바치라지 않겠니?” 장학산은 격분해 손까지 부들부들 떨며 황소숨을 몰아쉬었다. 이때라고 상순은 손을 내밀었다. “200원만 뀌어주오. 장사를 해 인삼네 유격대를 살려야겠소. 쌀이 거의 떨어졌소. 유격대는 우리 중국 사람들의 군대란 말이요. 밥을 든든히 먹어야 일본놈들을 족치지." 장학산은 한참 궁리하더니 시원히 대답했다. “내 300원 뀌어줄게.” 장학산은 일거양득이었다. 상순에게 인심을 내구 인삼도 돕게 됐으니 말이다. 상순은 빚 문서에 지장을 찍은 후 묵직한 돈주머니를 받아 품에 간직하고 토성 안 집을 나왔다. (장사만 잘 되면 유격대에 쌀을 가져가고 용정에 가서 공부를 좀 해야지.) 며칠 후 상순은 그 돈으로 장마당에 가서 쌀을 사 수레에 꽉 박아 싣고 달빛을 밟으며 패용천산 쪽으로 떠났다. 희수와 붕수도 따라나섰다. 흥수는 혹시 지학사한테 들키울가봐 집에서 머리도 내밀지 않았다. 상순은 희수와 붕수를 시켜 마을 대문을 보초서던 졸개들을 집에 데리고 술을 마시라고 했다. 전날 상순이 시내에서 사온 술로 희수와 붕수가 자위대 보초병 둘을 따돌리자 상순은 쌀을 꽉 박아 실은 수레를 몰고 마을을 빠져나왔다. 그들이 금방 태평강가 아름드리버드나무가 우거진 수림 속으로 들어갔을 때었다. 난데없이 뒤에서 뻐꾹새 울음소리가 뻐꾹 뻐꾹 들렸다. (혹시 유격대가 왔는가?) 상순은 손을 들어 형님들을 보고 수레를 멈추게 하고 버드나무숲 속을 둘러보았다. 우수수 낙엽 지는 소리가 들리는데 버드나무숲 속 여기저기에 희읍스름한 달빛이 비꼈다. 아무리 살펴보아도 사람의 그림자도 얼씬하지 않았다. 아주 가까운 버드나무 뒤에서 가냘픈 흐느낌 소리가 들리었다. (이게 무슨 소리야?) 상순은 비수를 뽑아 들고 살금살금 그 버드나무에 다가갔다. 그때 황둥개가 상순한테 달려 와 앞발을 쳐들고 매달리면서 꼬리를 저어댔다. 춘실이 버드나무에 기대어 훌쩍거리고 있지 않겠는가? 상순은 버드나무숲 속에 드문드문 비치는 달빛을 빌어 흐느끼며 우는 춘실을 볼 수 있었다. “아니, 밤중에 웬 일이야?” “말해야 아니? 날 이렇게 만들어 놓고.” 춘실은 주먹으로 상순의 가슴을 마구 두드리었다. 상순은 이쪽을 돌아보는 상훈과 상길을 보고 “형님네 먼저 가오. 내 춘실과 할 말이 있소.” 하고 말하고는 춘실의 손을 잡고 한쪽으로 갔다. “춘실아, 미안해. 내가 널 버린 게 아니라 부명을 어길 수 없어 그렇게 됐어. 우리 집안은 대대로 효자들이었지. 집안혼사를 망친 불효자루 될 수 없었어.” “뭐라니? 효성 한다고 나를 헌신짝 버리듯이 할 예산이야? 오늘 밤 내 죽고 너 죽고 해보자.” 춘실은 단말마적으로 달려들어 상순을 꼬집고 허비었다. “내 말을 들어라.” “안 들어. 콩으로 메주를 쓴대도 안 들어! 커가는 애를 어찌 하겠는가만 말해라. 에이고, 애비 없는 애를 보기만 하면 악이 난다. 분통이 터져 못 살겠다.” 상순은 춘실의 양어깨를 잡고 정색해 말했다. “얘, 내 장사해 돈을 많이 벌면 국자가에 집 한 채를 사 놓을게. 우리 둘이 가만히 국자가에 가서 살자.” 춘실은 도리머리를 가로 흔들었다. “또 속을 거 같니?" 그러나 상순은 춘실을 꼭 끌어안고 열변을 토했다. “춘실아, 부명을 어기지 못해 명옥과 잔치했지만 난 지금도 너와 살고 싶다. 어떤 일이 있어도 넌 내 아내야.” 춘실은 상순의 목을 꼭 끌어안으며 섧게 대성통곡쳤다. “이 나쁜 놈아, 사기꾼 놈아, 거짓말쟁이야! 내가 첩이야? 뭐야? 엉? 어 엉 엉. 흑흑.” 상순은 마음이 아팠다. 춘실은 상순의 품속에서 빠져 나오면서 욕설을 퍼부었다. “나쁜 자식! 애까지 내 쏴놓고 책임은 못 지고. 네놈은 한평생 내게 죄를 진 죄인이야. 언제든지 원수를 갚을테야!" "얘, 내가 어찌 죄인이냐? 난 네한테 둘도 없는 은인이야." "은인? 이 뻔뻔스런 놈새끼, 지금 누굴 기를 채워 죽일 작정이야?" 상순은 단말마적으로 달려드는 춘실을 꼭 끌어안고 정색해 말했다. "내 말 좀 들어봐! 내 널 임신시켰기에 넌 위안소에 붙잡히지 않았어. 숫처녀들을 봐라…" "야, 숫처녀가 문제냐? 일본 놈들이 색마돼 그렇지. 나도 애를 낳았으니 언제 또다시 잡혀 갈지 몰라. 일본 놈들의 미친 개눈깔엔 반반하게 생긴 거도 죄야." 상순은 달빛 속으로 스적스적 걸어가면서 중얼거리었다. “좋은 신랑을 찾아 잘 살아라. 그래야 일본놈들의 눈 밖에 나지." 춘실은 버드나무에 기대며 대성통곡을 그치지 않았다. 이때 저쪽에서 검은 그림자가 다가왔다. “춘실아, 집으로 가자. 그 놈을 믿지도 말아라. 하늘이 무너져도 살 길이 있겠지.” 춘실은 비칠거리다가 어머니 부축을 받으며 겨우 집으로 돌아갔다. 버드나무숲 속에서는 마른 낙엽을 밟는 소리와 춘실의 흐느낌소리가 마음 아프게 들릴 뿐이었다. 왕 왕 왕! 황둥개는 자기 여주인을 두고 떠나가는 상순을 바라보며 요란하게 짖어댔다. 한편 상순이네가 쌀 수레를 몰고 패용천산 지나 칼산앞에 이를 때었다. 갑자기 산기슭 나무숲에서 와삭와삭 소리가 나더니 웬 그림자가 뛰쳐나왔다. 상순은 비수를 빼들며 “누구야?!” 하고 물었다. 충국도 비수를 뽑아 들고 수레 양옆에 붙어 섰다. 상우와 상길도 쌀 마대 사이에서 괭이와 삽을 뽑아 들고 싸울 잡도리를 했다. 검은 그림자들이 멈춰 섰다. “혹시 상순이랑 아니야?” 맞은쪽에서 걸걸한 말소리가 울리었다. 목소리가 귀에 퍽 익었다. 가까이 다가온 것을 보니 확실히 인삼이가 억복과 철석 등 10여명 유격대원을 데리고 왔던 것이다. “삼촌!” “여기서 만날 줄은 몰랐구나.” 상순과 충국은 빼들었던 비수를 품속에 되 질러 넣었다. “깜짝 놀랐소.” 인삼은 충국을 보고 “너도 왔구나.”하고 말하고 나서 “비수를 빼든 걸 보고 난 상순인줄 알았어.” 하고 하면서 상순의 어깨를 툭툭 쳤다. 원래 인삼이네는 유격대에 쌀이 떨어져 소서구 쪽으로 내려오다가 칼산 앞에서 삐꺼덕거리는 수레바퀴 소리를 듣고 산기슭 수림 속에 매복해 있었던 것이다. 인삼은 상순을 보고 정색해 말했다. “쌀을 잘 먹겠다. 너 절대 약 담배 장사를 하지 말라. 우리 유격대는 절대 약 담배 장사를 해 산 쌀을 먹지 않겠다. 약 담배가 만연되면 나라를 일본 놈들의 손에서 찾은들 무슨 소용이 있겠니?” 상순은 건성으로 “양, 알았소.” 하고 대답했다. 상순이네는 인삼이가 이끈 유격대원들에게 쌀 마대를 넘겨주고 수레를 몰고 마을로 돌아 섰다. 유격대원들은 쌀 마대를 갈라지고 희읍스름한 달빛이 깔린 수림 속으로 유령처럼 사라졌다.              3. 신음하는 고향        소서구와 천지꽃산, 패용천산과 칼산, 모든 산과 태평벌은 가을바람에 누런 물결이 파도 쳤다. 세상에 이보다 더 재간 있는 화가는 없으리라. 들과 산기슭으로부터 시작해 올라가면서 점점 누런 물을 들이더니 이젠 산중턱에도 울긋불긋 단풍에 물들이고 있었다. 상순은 아무 장사라도 해서 유격대에 쌀을 보내려고 이튿날 이른 아침에 충국을 찾아갔다. 장학사와 충국이 생각 밖으로 유격대를 돕는 것을 알게 된 상순은 그제야 이전에 인삼 중대장이 하던 말에 도리가 있음을 깊이 느끼게 됐다. "중국의 한족형제들, 지어 중국의 양심적인 한족지주들과도 단합해 일본 놈들과 싸워야 이길 수 있다." 상순은 무작정 따라 나서는 충국을 데리고 령 길을 넘어 동불사 쪽으로 갔다. 진수해보다 동불사가 놈들의 감시가 허술했기 때문이다. 뒤따라가던 충국이 주춤 멈춰 섰다. “아차, 한 가지 잊었어. 형님, 비수를 가지고 기차에 올라도 되겠소?” 상순도 주춤 멈춰 서더니 사위를 두리번거렸다. “일본 놈들이 비수를 들춰내는 날엔 의심받을게 아니야?” 그는 주위에 아무 사람도 없는 것을 보고 충국을 데리고 한 초가집에 다가가 비수를 꺼내 이영 밑에 쑥 박아 넣었다. 충국은 “혹시 강도를 만나면 어쩌니?” 하고 물었다. 상순은 역 개찰구에 총칼을 비껴들고 왔다 갔다 하는 일본 놈들을 턱짓하었다. “저놈들이야 말로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날강도 놈들이지.” 충국은 머리를 끄덕이더니 아까운대로 비수를 이영 밑에 쑤셔 넣었다. 그는 상순을 따라 역으로 나가면서 나직이 물었다. “왜 산길로 가지 않고 기차를 타는 거야?” “시간이 없다. 어떤 땐 등잔불 밑이 더 어둡다.” 그들은 기차를 타고 아주 순조롭게 조선 함경도 명천에까지 달려 나갔다. 명천 역에서 내리자 일본 놈들이 득실거리고 있었다. 고향은 일본 놈들의 쇠발굽 밑에서 신음하고 있었다. 대뜸 긴장해난 상순은 충국을 조용한 구석에 데리고 가서 귀속 말을 했다. “넌 조선말을 잘 모르기에 이제부터 벙어리 상을 해라.” “건 왜? 우리 둘이 중국말을 하면 안 돼?" “안 돼. 꼬리를 밟혀.” “음, 알았소.” 충국은 세밀한 상순에게 머리를 숙이었다. 상순은 초 모자를 꾹 눌러쓰고 앞에서 걷고 충국은 한 일여덟 발자국 떨어져 뒤따라갔다. 상순은 유격대에 쌀을 가져가려면 다른 장사는 시간도 많이 들고 돈을 얼마 벌기 힘들어 고려 끝에 딱 이번만 약담배장사를 하자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리하여 그는 충국을 데리고 전번에 약을 사던 몇 집에 가서 약 담배를 사서 챙기어 넣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순조로웠다. “서라!” 상순이가 멈칫거리며 초 모자 채양 밑으로 옆으로 곁눈질해 보니 전번에 밀림 속에서 혼 빵 낸 적이 있는 날강도 놈들이었다. 전번에 혼빵 난 코큰이는 보이지 않았다. 상순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계속 앞으로 걸었다. 충국은 겁을 집어먹고 주춤 멈춰 섰다. (비수를 두고 와서 어쩌지?) “서란 말 못 들었어?!” “우시장에서 감히 우리 어르신님들을 보고 인사도 하지 않는 놈 있어?” “그러게 말이야.” 상순은 반쯤 몸을 돌리며 초 모자를 쓴 머리를 좀 들고 쏘아보았다. “쳐라!” 우두머리가 고함치자 날강도 놈들은 일제히 몽둥이와 칼을 휘두르며 승냥이들처럼 사납게 덮쳐들었다. 상순은 날렵하게 옆으로 피하며 몸을 솟구쳐 바람개비처럼 원앙새발길을 날리었다. 두 놈이 거의 동시에 아랫배와 턱을 채웠다. “앗!” 비명소리와 함께 몽둥이와 칼을 떨어뜨리며 꺼꾸러졌다. 행인들은 우시장에서 그렇게 날랜 솜씨를 본적이 없었다. 나머지 세 놈은 수적 우세를 믿고 덤벼들었다. “얏!” 상순은 고함치며 몸을 솟구치더니 어느 결에 공중에서 뒤발로 우두머리 뒤통수를 걷어찼다. “앗!” 우두머리는 뒤통수를 붙잡고 보기 좋게 꺼꾸러졌다. 나머지 두 졸개는 덤벼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우두머리를 부축해 달아났다. “전번에 산에서 만났던 초 모자 쓴 놈이야!” 졸개들은 달아나면서 아우성 쳤다. 약방문을 열고 내다보던 약방 주인 코큰이는 수림 속에서 당한 적이 있는지라 아예 문을 닫아걸었다. 충국은 상순의 날랜 솜씨를 처음 보고 눈이 휘 동그래졌다. 그제야 상순이 자신 있게 비수를 두고 온 이유를 조금 알 것 같았다. 상순은 손을 툭툭 털면서 강도떼들이 달아난 쪽을 쏘아보았다. 충국은 골목에서 뛰어나오면서 고함쳤다. “형님, 참 멋진 솜씨야!” “이 놈 벙어리야!” 그제야 충국은 실수한 것을 알고 입을 꽉 다물었다. “중국 사람들이구나!” “초 모자를 쓴 사람은 참 대단한 호한이야!” 행인들은 여기저기서 웅성거리었다. 상순은 골목으로 피해 달아나 충국을 훈계했다. “중국말을 하는 바람에 우린 꼬리를 밟히게 됐어.” “어망간에 말이 훌 나갔소. 우리 중국말을 하면 조선 사람들이 알아듣지도 못하는데도 무슨 놈의 꼬리 같은 소리요?” “우리가 중국 사람인걸 알면 변경이거나 기차에서 시끄러워진단 말이야.” 그제야 충국은 혀를 잘못 놀린 것을 알고 뒷더수기를 긁적거리며 뒤따라갔다… 그들은 담대하게도 경성군 어느 자그마한 역에서 기차를 잡아타고 국경을 넘어 길림 쪽으로 달려 들어갔다. 기차 안에서 일본 헌병 놈 몇이 다가오더니 손님들의 몸과 짐을 일일이 검사하였다. 상순은 표독스러운 눈길로 자기를 쏘아보는 일본 놈들 앞에서 태연자약하게 등에 지었던 소금주머니를 꺼내 치약이랑 꺼내 보이었다. 일본 놈은 치약을 짜 보더니 허연 치약이 나오자 옆에 앉아 당황해 하는 충국을 쏘아 보았다. “일어섯!’ 일본 놈은 충국의 몸을 샅샅이 수색했다. 헛물을 켠 놈들은 다음 손님의 짐을 수색했다. 충국은 상순을 쳐다보면서 속으로 나다니는 머저리가 앉은 영웅보다 낫다는 말이 맞는구나 하고 감탄했다. 길림에 도착하니 밤장막이 천천히 내리 드리었다. 송화강변은 싸늘한 늦가을 바람에 나무 이파리 다 떨어져 앙상하기 그지없고 초라했다. 상순이네는 쓸쓸하고 을씨년스런 거리에서 구은 감자를 사서 대충 주린 배를 달래고 나서 북산공원에 있는 절로 찾아 갔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뭘 하러 왔는가요?” 까까머리 중이 대문 옆에서 합장하며 막아섰다. “아, 우린 외지에서 왔는데 잘데 없어 왔소.” 상순의 말에 중은 “어서 들어오오. 불쌍한 창생들이여.”라고 하며 마당을 가리켰다. 충국은 처음 왔는지라 겹겹이 늘어선 커다란 절들이 신기해 여기저기 기웃거리었다… 그들은 절에서 새우잠을 자고 동녘 하늘이 푸릇해지자 바깥에 나가 밥값을 할 양으로 빗자루를 찾아들고 절 마당을 썩썩 쓸어놓은 후 시내로 슬금슬금 내려 왔다. 상순은 충국을 데리고 송화강변에 자리 잡은 약방과 면목 있는 약 담배장사군의 집으로 찾아다니면서 약 담배를 팔아 돈을 챙겨넣었다. “서라!” 이때 일본 놈 몇이 호각을 불어대며 쫓아 왔다. 상순은 약 담배 짐을 충국에게 벗어주면서 “빨리 달아나라!” 하고 소리쳤다. “형님은?” “저놈들을 다른 데로 끌고 갈게. 북산공원 절에서 만나자.” 충국은 짐을 받아 쥐고 달아났다. 상순은 일본 놈들을 맞받아나가다가 옆 골목으로 쏜살같이 달아났다. “초 모자를 쓴 저 놈을 잡아라!” 일본 놈들은 충국을 놔두고 상순을 뒤쫓아 갔다. 상순은 일본 놈들을 끌고 이 골목 저 골목 달아나다가 송화강변의 웬 잿빛벽돌학교 울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되돌아보니 일본 놈들이 보이지 않았다. 상순은 재 빛 기와를 얹은 학교건물을 두리번거리며 신기해했다. “아참, 나도 이런 학교에서 공부했으면 얼마나 좋을까?” 이때 맞은편에서 한 교사가 다가왔다. “저, 하나 물어봅시다. 이 학교 이름이 뭡니까?” 교원은 상순의 아래위를 훑어보더니 “길림시 육문중학교요.” 하고 대답하면서 지나가려고 했다. 상순은 “선생님, 이 학교를 다니자면 학비를 얼마나 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교원은 상순을 유심히 쳐다보더니 “학비는 많잖소. 이 학교는 유명한 항일장군도 길러낸 길림에서 유명한 학교요.”라고 말했다. 상순은 흥취가 더 가서 한걸음 다가들며 물었다. “어느 장군 말입니까?” 그 교원은 주위를 살펴보더니 상순의 귀에 대고 “항일연군 김성주 사단장이 바로 이 학교출신이라오.”라고 대답했다. “아, 장백산 줄기줄기 주름잡아 다니며 일본 놈들을 호되게 족친 그 김 장군님 말인가요?” "그래요. 김 장군은 옛날 우리 학교를 다니면서 일본 놈들을 몰아내고 나라를 되찾을 웅대한 포부를 지니시게 됐네. 그는 육문중학교 동창생들을 묶어세웠을뿐만 아니라 길림지구의 청년들을 조직해 항일구국 혁명도리를 널리 홍보하고 항일투쟁사업을 했죠." 상순은 육문중학교를 돌아보며 머리를 끄덕이었다. 교원은 육문중학교에 관심을 갖고 있는 상순에게 학교 동북쪽을 가리켰다. "저기 북산공원에 가보았소?" "예." "북산공원에서 김 장군은 어릴 때 동지들과 모임을 자주 갖고 항일투쟁을 포치하곤 했죠." "예~ 그분은 지금 우리 동만일대 항일유격대를 지휘해 항일무장투쟁을 하고 있다는 전설적인 이야기도 많이 들었습니다." 그 교원은 대문 안에 들어서는 일본 놈들을 눈짓하면서 “이 학교는 일본 놈들이 항상 주시하니까 다니기 퍽 어렵네.” 하고 자리를 떴다. 상순은 일본 놈들을 보자 주먹을 쥐고 학교 복도로 달아 들어갔다가 뒷문으로 빠져나갔다. 그는 안간힘을 다해 높다란 학교 토성을 뛰어 넘어 다리야 날 살리라고 쏜살같이 달아났다. 그는 점심때 다 돼서야 북산공원에 올라가 아침에 나온 절로 들어갔다. 상순을 보자 충국은 기뻐 어쩔 줄 몰라 했다. “형님, 일본 놈들에게 붙잡힐까봐 얼마나 근심했는지 모르오?” 상순은 충국의 어깨를 툭툭 치면서 “가자, 나머지 약 담배를 팔자.”라고 하며 약 담배 짐을 메고 나섰다. “에이, 이 장사도 숨이 한줌만 해서 어디 해먹겠소?” 충국은 중얼거리면서도 뒤따라 나섰다. “그래, 돈이 하늘에서 떨어지니?” 상순의 말에 충국은 뒷덜미를 긁적거리었다. 상순은 일본 놈들이 밀짚모자를 쓴 자기를 추적하고 있다는 것을 몰랐다. 그리하여 의연히 밀짚모자를 꾹 눌러 쓰고 충국을 데리고 늦가을 비를 맞으면서 돌아다니며 나머지 약 담배를 다 처리하고 역 광장 쪽으로 갔다. 그때 일본 놈들이 역 광장에 늘어서는 것이었다. 총칼을 든 일본 놈들을 빼곡이 실은 자동차 한대가 덜커덕거리며 들어섰다. 운전실에서 한 일본 장교가 내려 자동차 적재함에 바라 올라갔다. 적재함의 숱한 일본 놈들이 차렷 자세로 군례를 올리며 양쪽에 벌려 서서 그 장교 놈을 호위하는 것이었다. 장교 놈은 흰 장갑을 낀 손을 홱 젓더니 유창한 한어로 일장연설을 시작했다. “여러분, 잠시 가던 걸음을 멈추고 내 말을 좀 들으라. 우리 대일본제국은 당신들을 해치러 온 게 아니야. 우리는 대동아공영권을 행사하여 당신들을 잘 살게 하려고 여기까지 왔다.” 자동차 아래 군중들이 여기저기서 나직이 수군거렸다. “고양이 쥐 생각을 한다.” 그 놈은 계속 오만하게 잔뜩 늘여놓았다. “봐라. 우리 대일본제국에서는 이 황야에 철도를 놓고 발전소를 세웠어. 당신들은 살기 얼마나 좋아졌는가? 기차를 타고 몇 천리 밖에도 순식간에 갈 수 있게 됐어. 등잔불을 버리고 대낮같이 환한 전등불 아래에서 살게 됐어. 우리 대일본제국이야 말로 당신들의 구명은인이야.” 그러자 행인들은 침을 퉤 뱉으면서 떠나가 버렸다. 일본 놈들은 가지 못하게 총칼로 억지로 막아 세웠다. “헛참, 중국 놈들은 내 말을 잘 듣지 않아. 이걸 어쩐다?” 그 놈이 갑자기 조선말로 지껄여대는 것이 아니겠는가? 상순은 머리를 천천히 들고 밀짚모자 채양 밑으로 그 놈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일본헌병대 장교 모자를 꼭 눌러쓰고 안경을 낀 우멍한 눈에 살기가 번뜩이었다. 우멍 눈과 메부리 코가 퍽 인상적이었다. “중국 놈들은 3등 공민대우를 받으니까 우리 말을 잘 듣지 않는 게 당연합죠.” 옆에서 또 다른 놈이 조선말로 지껄여댔다. 장교는 연설할 흥이 나지 않는지 옆의 놈과 조선말로 지껄이었다. “글쎄 말이야. 용정이나 국자가나 진수해에서 연설할 때는 달랐지. 숱한 조선 사람들이 멍해 들었던 건데.” “한 련대장, 조선말로 연설해 보십시오. 아마 한 련대장 한어말이 순통하지 못해 그러는지. 여기도 조선 사람들이 적잖은 거 같습디다. 여기서는 함경도보다 경상도 사람들이 많으니까 남대 말을 쓰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장교 놈은 실 머리를 흔들었다. “그래? 건데 난 순 함경도 치어서 남대치 말을 몇마디 모르는디.” "걸케 하면 돼요." "그래?" 이윽고 그 놈은 마른 기침을 하더니 가래를 목주래로 꿀꺽 삼키고나서 조선말로 지껄여대기 시작했다. “조선에서 들어 온 2등 공민 여러분, 우리 대일본제국에서는 고향을 떠나 이국 타향에 온 당신들을 보호하러 왔시우. 생각들 해보라니께. 우린 고향에서 손바닥만 한 밭도 없어 굶으면서 살지 않았나요? 그러나 우리 대일본제국의 덕분에 청나라 대문을 열고 역사의 비밀이 숨겨진 이 땅에 들어와 황무지를 개간하고 밭을 일궈 배불리 먹고 살게 되지 않았시우?” 상순은 밀짚모자를 꾹 눌러쓰고 물었다. “당신은 도대체 한족입니까? 조선 사람입니까?” 장교 놈은 연설하다가 이쪽을 내려다보더니 “잘 물었어요. 난 종래로 내 이름을 속인 적 없는디오. 조선 명천에서 온 조선인 출신 장교 한철주 부련대장인데요. 보세요. 대일본제국을 위해 충성을 다하면 나 같은 조선 백성도 장교로 될 수 있죠. 예.” (한철주? 그럼 할아버지하구 아버지가 늘 외우던 고향의 철천지원수 한길수의 맏아들이란 말인가?) 상순을 독기어린 눈길로 한철주를 쏘아보았다. 그 놈은 옆에 선 놈에게 귀속 말로 뭐라고 말하더니 계속 열변을 토했다. “내 고향은 조선 함경도 명천인디오. 우리 집은 조선에서 대부자입니다. 그러나 왜서 일본 유학까지 한 내가 여기까지 왔겠어요? 건 대일본제국의 2등 공민인 우리 동포들을 보호하기 위해서죠. 허허, 당신들은 중국 지주들의 성화에 소작 농사를 짓느라고 힘들지 않아요? 어려운 일이 있으면 나를 찾아오십시오. 꼭 도와주겠습니다.” 상순은 놀랐다. (바로 그 놈이야.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악패지주 아들 놈새끼야! 섬나라 오랑캐 개다리 놈아! 네놈 대갈통을 까부실 테다!" 상순이 고함치고 충국의 손을 잡아채며 금방 몇 발자국 떼였을 때었다. 자동차 우에 섰던 놈이 꽥꽥 소리쳤다. “저 밀짚모자를 쓴 놈을 잡아라!” 상순은 밀짚모자를 벗어 활 집어던졌다. 그들은 사람들 속에 몸을 숨기며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 달아났다. 숱한 일본 놈들은 상순과 충국을 찾지 못해 우왕좌왕 하였다. 순간 역 광장은 수라장이 돼 버렸다. 송하강반에 어둠의 장막이 서서히 드리웠다. 상순과 충국은 일본 놈들을 따돌린 후 배 촐촐해 이 골목 저 골목을 헤맸다. 한 어둑시그레 한 골목에 토성안에 빨간 초롱불을 걸어 놓아 유난히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그들이 지나다가 들여다보니 계집들이 일본 놈들과 팔을 끼고 복도에서 오가는 것이 드문드문 보이었다. “위안소야!” 상순이 멀리 피해 가려고 하는데 충국은 호기심이 부쩍 동해 멈칫거리었다. “형님, 배고픈데 들어가 술이나 한 잔 마시고 가기요.” “거기 어디 술 먹는 데냐? 가자.” 상순이가 충국을 마구 끌고 가려는데 맞은쪽에서 일본 헌병 놈 몇이 총칼을 빼들고 기웃거리며 오고 있었다. 상순과 충국은 그 놈들과 작은 골목에서 딱 마주 쳤기에 불시에 피할 데도 없었다. 이 위기일발의 시각에 상순은 충국을 데리고 위안소 안으로 들어가 버리었다. “어, 이 놈들이. 어디라고 들어와?” 술을 잔뜩 처마신 한 일본 놈이 한어로 말하면서 눈깔을 부라리었다. 뜻밖에도 상순은 담대하게 “우리도 일본 제국을 위해 일하는 사내들이오.”라고 했다. 다른 일본 놈이 “에이, 여긴 종군 위안부 영업을 하네. 일본 군인 외에는 들어오지 못해.”라고 했다. 상순은 “우리 돈을 벌지 않겠소?”라고 하며 동전을 꺼내 그자의 손에 쥐어 주었다. 그 자는 옆전을 손바닥에 쥐어 공중에 뿌리어 잘그락거리더니 “우리 군인만 받아서야 어디 돈을 벌겠는가? 황군을 위해 일하는 중국 놈들도 우리 위안소에 들어올 자격이 있어.”하고 말하면서 상순이네를 안방에 들여보냈다. 바깥에서 지나가던 헌병 놈들이 집안에 들어와서 주인들과 떠들어댔다. “수상한 놈들이 오면 보고하게. 오늘 역 앞에서 수상한 반일불온분자를 놓쳤네.” “예, 예, 예.” 놈들이 바깥에서 떠드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상순은 태연자약하게 호주머니에서 돈을 세여 주인한테 주면서 부탁했다. “고운 년들로 골라 보내게나.” “예, 예, 그러지.” 주인이 나가자 충국은 질겁해 부들부들 떨면서 상순의 팔소매를 툭툭 건드리더디 잡아 당겼다. "너 어쩌자고 이래?" "내 안속이 따로 있어." 얼마 지나지 않아 두 계집이 들어왔다. 한복차림을 한 계집은 상순의 곁에 와 앉으며 팔을 끼더니 교태를 부리었다. “우~메, 이 분은 조선 사람이네요. 명천을 떠난 후엔 조선 사람을 보지도 못했는데요.” “명천?” 상순은 귀가 번쩍 뜨이었다. “어째, 명천에서 혹시 왔어요?” 상순은 말이 빗나간 것을 알고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아, 아니, 난 함흥에서 왔네. 우린 한고향이군.” 그러나 계집은 “한 고향? 누가 당신캉 한고향이래? 난 있제이, 부산 출신 옥설이랑께.” 하고 종알거렸다. 상순은 어정쩡해 서 있는 다른 계집을 쳐다보고 깜짝 놀랐다. "얘, 너 은실이 아니냐? 아니, 여기서 널 만나다니?" 은실은 돌아서서 어깨를 들먹이며 쿨적쿨적 울었다. 술상이 들어오자 옥설은 술을 부어 상순과 충국에게 잔을 내밀었다. “자, 술을 드시지요. 은실을 면목 아나요?” 그녀는 멍해 앉아있는 다른 계집을 보고 “은실아, 닌도 옆 손님 권하랑께.”라고 했다. 충국의 옆에 앉은 은실은 술잔을 드리며 “자, 마셔요. 아무 말두 하지 마세요.”라고 하였다. “그 놈은 벙어리야.” 상순은 충국에게 한어로 “벙어리 놈!” 하고 말하며 눈을 찔끔해 보이었다. 상순은 술맛이 없어 한잔 드네하고 은실을 보고 말했다. "내 죄인이야. 그날 널 구하지 못해 안됐다." "오빠, 부모한테 제 말을 하지 마오. 전 이젠 망가질 대로 망가진 몸이오." "아니야, 네가 원해 그런거 아니잖니? 다 일본 놈들이 미쳐서 이렇게 된거야. 내 어떻게 하든 널 구해내야 하겠어." "안 되오. 괜히 오빠까지 다치겠소." "네 부모와 춘실이 널 얼마나 찾는지 아니?" "그래 언니는 잘 있어요? 이쯤 해선 애를 낳았겠는데." "그래. 아들을 낳았어." 상순은 체면을 잃고 그간 춘실의 일을 간단히 말하고 일어서려고 했다. “일본 놈들한테 쫓기는 판이라 오래 있지 못하겠다. 내 어떻게든 여기서 널 빼내가겠어.” 그때 상순의 옆에 있던 아가씨가 상순의 손을 꼭 잡고 발을 동동 구르기까지 했다. "오빠, 저도 구해주시유, 잉?" "그럼, 여기 위안부 몇이 있소?" "모두 십여명 되는데요. 우린 일본군을 따라 내일이면 신경으로 해서 봉천으로 간다고 해요. 이제 어디로 갈지 몰라요. 말로는 관내로 간다고 해요. 일본 놈들이 이젠 장강이란 긴 강을 건너 중국 남방으로 나갔대요. 그래서 수천수만의 위안부들이 기차에 실려 끌려 남방으로 나간대요." "그래? 오늘 저녁 밖에 시간이 없구나." 옥설은 눈물을 흘리면서 애원했다. "절 구해주세요. 전 경기도 인천 출신인데요. 바다가 개벌에 조개 주으러 갔다가 일본 놈들한테 잡혀 명천에 끌려갔다가 여기까지 끌려 왔어요. 제발 구해주세요.” 상순은 술상에 되물앉더니 술을 들어 쭉 마시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그녀들의 하소연을 들으면서 어떻게 은실과 옥설 같은 불쌍한 여동생들을 구하겠는가 궁리를 했다. 옥설은 초면이였지만 오래 갈라졌던 오빠라도 만난 듯이 계속 하소연을 했다. “날마다 열일여덟씩 달려드는 일본 놈들한테 사지가 찢기고 물러 날 지경인데요.” 이때 만금이도 건너칸에서 건너와 끼어들었다. “난 글쎄 열댓 살에 고향에서 아버지 말대로 산에 가서 소를 풀어 오다가 그만 일본 놈들에게 잡혔지요. 그 끼무라 국장인지 뭔지 하는 놈 때문이야. 그 놈의 졸개들이 우릴 끌어 왔잖아.” 이때 뽕녀라는 위안부도 건너와서 맞장구를 치었다. “다 일본 놈들 때문이야. 일본 놈들이라면 이가 갈려.” 상순은 한참만에 물었다. “오늘 일본 놈들이 적은 거 같은데. 우릴 따라 바람 쏘이는척 하다가 여기서 달아나면 안 되오?” “쉬.” 옥설은 식지를 입술에 대더니 문 밖에 귀를 기울이었다. 이윽고 그녀는 “달아난단 말 말아요. 저 놈들한테 들키는 날엔 목이 날아 나제이.” 만금은 눈이 데꾼해서 “어디로 뛰어? 겹겹이 총칼을 들고 지키는 걸 못 봤어? 전번에 뽕녀가 달아나다가 들키지 않았나. 일본 놈들이 뒤뜰 안에 매달고 몽둥이로 쳐 반 주검을 만들었어.” 하고 말했다. 상순은 한숨을 후 내쉬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오늘 한대장이 올 거니까. 빨리 자리를 뜨세요. 괜히 우리 때문에 곤경을 치르겠어요.” 충국은 바늘방석에 앉은것처럼 안절부절 못하면서 상순의 얼굴만 쳐다보았다. 상순은 바로 앉으면서 “거 한대장이란 누구요?” 하고 궁금해 물었다. 옥설은 술상을 한쪽으로 치우면서 “관동군 부연대장이라고 하더구먼요. 세상 나쁜 놈이야. 같은 조선 사람이 우릴 일본 놈 밑에서 짓뭉개져 죽게 만들었제이.” 하고 도도도-거리었다. 만금이도 공소했다. “그 놈이 우릴 끌고 동만으루 되간다잖아?” 이때 복도 쪽이 소란스러워졌다. “한 연대장, 오셨습니까?” 바깥에서 주인이 일본말로 인사하는 말이었다. “왔어요. 범이 자기 흉을 하면 온다고 그 놈이 왔어요. 빨리 자리를 뜨세요. 저 놈은 우리가 다른 손님을 모시는 걸 보면 좋아 안 한다니까요.” 옥설의 말에 만금도 “얼른 자릴 피하세요.” 하고 방에서 빠져 나갔다. “가자!” 상순이 충국에게 눈짓했다. “벙어리라더니 중국말 하네.” 만금은 앵두 같은 입을 쫑긋 했다. 상순은 돈을 술상 우에 활 주어 던지고 은실의 손목을 잡아끌며 "달아나자!" 하고 황급히 뒤 창문을 열고 뜰에 뛰어 내렸다. "은실이, 저년이, 어디로 도망쳐!" 위안소 소장놈이 고래고래 고함치며 뒤창문으로 내다보며 발을 동동 굴렀다. 상순은 담장 밑에서 은실을 떠밀어 올리려고 악을 썼다. 땅땅! 총알이 죽음의 노래를 부르며 날아와 벽돌담장에 박혀 불꽃을 튕기었다. 상순은 뒷담을 뛰어 올라 은실을 끌어올리려고 했다. 땅! "앗!" 총알이 은실의 팔에 박혔다. 은실이 관통상을 입은 팔을 붑잡으며 담장 밑에 퉁 떨어졌다. "은실아! 은실아!" 푱! 총알이 상순의 발부리에 날아와 박혀 불티가 튕겼다. "빨리 도망쳐!" 충국이 담장을 뛰어넘으며 새된 소리를 질렀다. 위안소 소장 놈이 권총 방아쇠를 재차 당기려는 순간 상순은 몸을 날려 담장을 뛰어내려 도망쳤다. "오빠~!" "빠가요로(제길할)!" 담장 안에서는 은실의 울부짖음소리가 일본 소장놈의 욕지거리가 반죽해 울렸다. 상순은 담장 모서리를 잡고 되 기어오르려고 했다. "안 돼! 총앞에서 어떻게 구한다고 그래?" 상순은 은실을 구하지 못해 맴돌이쳤다. 충국은 상순을 마구 끌고 골목길로 도망쳤다. 그들은 굽이굽이 돌아 도망치다가 뒤가 잠잠하자 멈춰서 뒤돌아보면서 헐떡거리면서 잠간 숨을 돌렸다. "안 돼, 은실을 승냥이 우리 안에 두고 돌아갈순 없어." 상순은 북산공원에까지 도망쳐가서도 은실을 구해내지 못한 것을 안타까와 맴돌아쳤다. 이튿날 동녘이 희붐히 밝아오자 상순은 위안소로 향했다. "가지 말라! 너 혼자 어떻게 구한다고 그래? 우리 어째 길림에 왔니? 유격대에 쌀을 사서 가져가는게 중요하지. 은실을 구하는게 중요하냐?" 상순은 주춤 멈춰섰다가 또 터벅터벅 산아래로 내려갔다. "안돼. 은실이 잘못 될거 같아." 상순은 기어이 산을 내려 시내에 들어갔다. 그는 골목길을 이리저리 에돌아 위안소 부근에 살금살금 접근했다. 그런데 위안소 토성을 잡고 들어가려다가 이상한 감을 느꼈다. 위안소 안에 아무런 동정도 없었다. "웬 일일가?" 상순은 위험을 무릅쓰고 당장을 기어넘어갔다. 그가 위안소 벽에 기대 집안 동정을 살펴보니 휑뎅그렁했다. "꼭 무슨 일이 있구나." 상순이 벽에 기대 앞마당쪽으로 살금살금 나갈 때였다. 만복차림의 중국인이 집안에서 나와 마당에 나왔다. "꼼짝 말엇!" 상순은 그자의 목을 끌어안고 조이면서 물었다. "위안부들을 어데 끌어갔어?" "아니, 이 목을 놓소." "바른대로 대라. 안 그럼 죽어!" "일본 놈들이 끌고 봉천으로 갔습니다." "뭐라고?" "더러는 진수해라는데 가고." "넌 무슨 놈이야?" "난 이 집 주인이요. 일본 놈들이 내 살림집을 강점해 위안소를 꾸렸던 거요." 그자는 상순의 손이 느슨해지자 울상을 했다. "장사, 이 목을 좀 놓고 말하기요." 상순은 중국인의 목을 활 놓아주었다. "그래 위안부들이 하나도 남지 않았어?" "예, 예. 그 놈들이 어제 웬 청년들이 위안부를 끌고 달아나려고 한 사건이 있었소. 위안소라는게 발각되자 급히 위안부들을 끌고 이 자리를 뜬 거 같습니다." "길림 시내에는 위안부들이 없어?" "건 잘 모릅니다." (은실아, 어데 있어?) 상순은 위안소 안을 몽땅 훑어보았다. 은실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어서 나와! 이때 언제 왔는지 충국이 손을 홱 휘둘렀다. 상순은 별수 없이 위안소에서 무거운 피눈물의 발을 뗐다. "길림 역으로 가지 말자. 위험해!" "그래." 그들은 송화강을 따라 내려가다가 룡담산 앞의 철교를 건넜다. 룡담산 령길이 아무리 험악해도 일본 놈들 눈밑을 지나기 보다는 쉬운 것 같아 산을 넘고 들을 지나 강밀봉쪽으로 걷고 또 걸었다. 그때 산굽이돌이에서 짐차가 달려왔다. "기차에 앉아 진수해로 가자." "위험해." "언제 걸어서 집으로 돌아가? 타자." 상순의 말에 충국은 포로병처럼 마지못해 뒤따랐다.        그들은 굽인돌이에서 기차가 속도를 늦추는 기회를 타서 절벽에서 짐차 바곤에 뛰여내렸다.        그들의 등뒤에서는 늦가을 바람이 무서운 비명을 지르면서 공포를 몰고 뒤따랐다…  
77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40) 댓글:  조회:2030  추천:0  2016-05-09
                               10. 효자와 사랑         상순은 그날 밤으로 어둠 속을 꿰질러 도망치다가 유격대원 바우돌을 만났다.         "마을로 돌아가지 말라."         바우돌의 말에 상순은 "지 촌장 놈이 나를 의심하지 않을가?" 하고 뒤더수기를 긁적거렸다.          그때 신출귀몰하는 진달래 중대장이 버드나무숲속에서 나타나 타일렀다.         "먼저 장백산 원시림으로 들어가 피신했다가 방법을 대면 돼."         그리하여 상순은 유격대 근거지로 들어가 버렸던 것이다.         원래 그는 춘실을 데리고 함께 유격대를 찾아가 산에서 살려고 했다. 그런데 일본 놈들에게 춘실을 빼앗긴바 하곤 진달래 중대장을 따라 유격대에 들어가 원수를 갚으려고 했던 것이다. (죽어도 총을 잡고 일본 놈들과 통쾌하게 싸우다가 죽자.) 그는 진달래 중대장이랑 유격대원들과 함께 산속으로 들어가면서 죽을 각오까지 했던 것이다. 사실 그날 밤에 진달래 중대장은 양식을 구하러 함흥촌에 오다가 우연히 춘실과 은실의 통곡소리를 듣게 돼 비술나무 밑으로 황급히 접근해 매복습격을 했던 것이다. 어둠 속에서 누군지는 똑똑히 보지는 못했지만 조선족 두 여성이 일본 놈들에게 잡혀가는 것만은 분명히 보였다. 그런데 조선여성들이 상할까봐 진달래 중대장은 총을 뽑아들었다가 쏘지 못했다. 진달래는 기민하게 돌팔매를 날려 두 놈을 처치했던 것이다. 그때 늙은 비술나무 꼭대기에서 웬 사내가 뛰어내려 도끼로 일본 놈 한 놈을 찍어 죽일 줄은 누구도 몰랐다. 도끼를 든 상순이 어둠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발견했다. "따라가 보오."  진달래 중대장은 바위돌한테 명령했다.     그리하여 바위돌은 상순을 뒤따라가  함께 산으로 떠나게 됐다.      그들은 연 며칠 산속을 가시덤불을 헤치면서 장행군해서야  끝내 장백산 원시림 속의 유격대 주둔지에 들어섰다. 성칠은 아주 반가워하며 상순을 자기 통나무집에 데리고 가서 이것저것 물었다. “불시에 왜 들어왔니? 전번에 말하잖았느냐? 농사를 잘 지어서 유격대에 쌀을 보내는 것도 항일투쟁을 하는 것이라구. 응?  일가식솔들이 다 무사하냐?” “큰일 났습구마.” 상순은 머리를 숙이고 며칠 전에 함흥촌에서 벌어진 사건을 이야기했다. "일본놈들 천하에선 귀여운 딸도 지키기 어렵구나." 성칠은 앙천개탄하면서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었다. 하옥은 상순의 파난 베적삼을 벗으라고 하여 한 뜸 한 뜸 기워주었다. 성칠은 상순의 얼굴 표정이 밝지 못한 것을 보고 “또 무슨 일이 있니?” 하고 물었다. 상순은 기다렸다는 듯이 부어오른 입을 열었다. “아버진 이해되지 않습니다. 난 춘실하구 결혼하고 싶은데 마음에 들지 않는 명옥과 결혼하라고 강다짐을 들이댑니다. 그래 밸이 나서 집에서 달아났습니다. 나도 큰아버지 밑에서 총을 메고 일본 놈과 싸우겠습니다. 어디 장학산 밑에서 소작 농사나 지으면서 살겠습니까?” 성칠은 한참 궁리했다. 이윽고 그는 상순의 어깨를 다독여주었다. “결혼은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게 아니야. 부모들의 말대로 명옥과 결혼해라. 이미 택일하고 사돈보기까지 했다니 더욱 그러하다.” “난 춘실과 이미, 에이. 며칠 전에 일본 놈들한테 아마 위안부로 잡혀간 거 같습구마. 이 세월에 일본 놈들의 성화에 어찌 삽니까?” 상순은 말끝을 흐리며 큰아버지를 흘끔 쳐다보더니 머리를 숙였다. 춘실과 살아서 이미 임신한 일을 말하려다가 욕을 먹을까봐 말끝을 삼켜버렸다. 그는 학식도 있고 무예도 있는 큰아버지를 아주 존경하면서도 두려워했다. 하기에 그의 말은 어진간해서는 부정하지 않았다. 오늘 말만은 인차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성칠도 그런 눈치를 채고 일어나면서 무거운 입을 열었다. “자식은 부명을 천명으로 받들어야 한다. 부모의 뜻대로 명옥과 결혼하는 것은 효자의 본분을 지키는 것이다. 옛날 양산박 호한 로지심이나 무송은 여색을 멀리 하고 재물을 초개같이 여긴 대신 의리를 중히 여겼다. 그게 진정한 사나이야. 너도 농사를 짓고 살 애는 아닌 것 같아. 공산당을 따라 혁명하려는 사람이라면 너는 가정과 사랑에 얽매서는 안 돼. 큰 일을 할 사람은 여색을 멀리 해야 해.” 상순이 귀담아 듣는 것을 보고 “잘 생각해 보아라.”라고 하고나서 화제를 바꾸었다. “이 먼 산 속으로 온바하고는 유격대에서 무예나 배워라. 넌 함흥촌에 돌아가면 농사만 짓지 말고 마을의 청년들을 묶어세워 민병으로 유격대 소 분대를 조직해 일제 지주 지학사 촌장 등 악질지주와 싸워라. 할 수 있겠니?” 상순은 큰아버지를 따라 바깥으로 나가면서 “큰아버지, 총만 주오. 그럼 일본 놈들과 본때 나게 싸울 수 있습니다.” 하고 말했다. 성칠은 토굴을 되돌아보더니 상순의 어깨를 다독이면서 차근차근 말했다. “얘야, 아까 큰어머니 있어서 말하지 못하였다. 너네 큰어머니도 애를 하나도 낳지 못하지 않았고 뭐니? 그러나 난 할아버지가 정해준 색시이기에 버리지 않고 계속 데리고 산다. 내라고 자식을 보고 싶지 않겠니? 조카들을 볼 때면 나도 이제라도 떡돌 같은 아들을 하나라도 봤으면 얼마나 좋겠느냐? 이런 비유 날 때도 한두 번이 아니다.” 상순은 그제야 큰아버지를 우러러보았다. “큰아버지, 그럼 큰아버지도 새 큰어머니를 하면 안 됩니까? 할아버지도 새 할머니를 모셔오고 작은 할아버지도 새 할머니를 모셔 왔는데.” 상순이 말하는 작은 할아버지는 성칠의 여동생의 남편 김범호를 말하는 것이다. 김범호는 곱순과 살아서 딸 하나를 낳고 10여년 동안 애를 보지 못해 첩실을 들여앉혀 오랜 만에 맏아들 동길의 뒤를 이어 명길까지 아들을 줄줄 보았던 것이다. 성칠의 대답은 완전히 달랐다. “우리 항일유격대 혁명 자들은 혼인문제를 완전히 다르게 대한다. 우리 혁명 자들은 전통적인 봉건 혼인과는 달리 일부일처제를 주장한다.” “일부일처제라니?” “남자는 아내를 하나만 하고 아내도 남편을 하나만 둬야 한다는 것이다. 첩을 둬서는 절대 안 된다. 할아버지처럼 아내가 사망한 후 후처를 두는 것은 허용한다. 아들을 보자고 이제껏 생사고락을 함께 해온 조강지처를 버리고 후처를 하거나 첩을 두는 건 혁명 자의 처사가 아니지.” 상순은 머리를 끄덕였다. “너도 그래. 부모가 이미 택일까지 했으면 부모의 명대로 명옥과 결혼하는 게 옳아. 혁명 자로 되려면 혁명자의 혼인 관을 세워야 한다. 개인의 감정을 억제하고 도리에 맞게 혼인을 대해야 한다. 모든 일에서도 개인의 감정이나 기분을 억제하면서 조직의 기율대로 처신할 줄 알아야 하지.” 상순은 마음속에서 잘 납득되지 않았다. 성칠은 옷을 슬슬 벗어버리더니 상순에게 덤비라는 시늉을 했다. “자, 보자, 막내조카 권투기술이 늘었는가?” 상순은 이전에 큰아버지에게서 여러 번 배운 동작대로 주먹을 쳐들고 8자를 그으면서 번개 불이 나게 덮쳐들었다. 상순이 주먹을 날리려는 순간 성칠은 몸을 낮추며 상순의 오른쪽 겨드랑이 밑으로 빠져나가면서 오른 주먹을 바람개비처럼 날려 상순의 아래 배를 슬쩍 갈겼다. “억!” 상순은 외마디소리와 함께 배를 끌어안고 앞으로 쓰러졌다. 성칠이가 매가 쥐를 덮치는 동작으로 날아 들어가며 주먹을 재차 쳐들 때였다. 상순은 공중에서 덮쳐드는 매를 두발로 차는 토끼 동작으로 성칠의 가슴팍을 탕탕 차며 뛰어 일어났다. “하하하. 그놈이 제법인걸.” 성칠은 금방 있은 접전을 총화면서 권술을 가르쳤다. “급급히 이기려고 서둘면 자기 허점을 드러내게 되여 반격을 맞게 된다. 때문에 변화 속에서 상대방의 허점을 유도한 후 일격을 가해야 한다. 말하자면 주먹을 들고 자세를 취한 후 상대방의 주위를 재빨리 맴돌다가 상대방의 자세가 흐트러질 때 번개같이 덮쳐들어 일격을 가해야 한다. 그러면서도 상대방의 반격을 피할 준비도 해야 한다. 알만하지?” 성칠은 직접 동작을 해보이면서 배워주었다. “이렇게 해라.” 상순은 주먹을 쳐들고 배워 준 대로 해보았다. “맞아. 상대방을 단매에 쳐 눕히지 못하면 치곤 즉시 옆으로 혹은 뒤로 피했다가 인차 연속 공격을 들이대야 해. 그래야 공격하면서도 반격을 피할 수 있는거야.” 상순이가 따라 하는 힘 있고도 날랜 동작을 보고 성칠은 엄지를 내둘렀다. “넌 정말 전도 있는 권투수다. 그러나 한 가지만 잊지 말아라. 지금 배우는 권투는 권투시합에 쓸 권투가 아니라 죽기내기를 건 권투다. 일본 놈들과 싸우려면 권투기교가 있어야 하겠지만 더욱 중요한건 목숨을 내걸고 싸울 용기와 담이 있어야 한다. 무쇠주먹을 연마해라. 단매에 일본 놈을 쳐 죽이지 못하면 그 놈의 총이나 칼에 내가 죽는다는 거 각오하고 생사결단하고 싸워야 해.” 상순은 무겁게 머리를 끄덕였다. 성칠은 밀림 속에서 대야만큼 한 둥글 넙적한 돌을 주어 들고 오더니 너럭바위 우에 놓았다. 성칠이가 기합을 단전에 모았다 손에 기를 넣더니 “얏!” 소리와 함께 주먹을 휘두르자 둥글 넙적한 돌이 세 토막으로 박살났다. “와~ 어떻게 이런 무쇠주먹을 연마했습니까?” 성칠은 돌가루가 묻은 자기 주먹을 쳐들어 보이며 말했다. “하루 이틀에 연마할 수 있는 게 아니야.” 뒤이어 그는 종아리에 처맨 납작한 모래주머니를 풀어 상순에게 주면서 “처음에는 이런 모래주머니를 주먹으로 치고 점차 딴딴한 마른 나무도 치고 아름드리나무도 치면서 무쇠주먹을 연마해라.” 상순은 모래주머니를 주어들고 보더니 “함흥촌 옆의 태평강 모래바닥에 가서 모래나 자갈을 치면서 무쇠주먹을 연마하면 안 됩니까?” 하고 물었다. “좋지. 아무도 몰래 무쇠주먹을 연마해라. 속담에 평소에 흥 소리도 없던 소가 뜬다고 했다.” 상순은 큰아버지의 깊은 말뜻을 알아듣고 속으로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번엔 권총을 쏴 봐.” 성칠은 땅바닥에서 자기 옷 위에 벗어놓은 권총집에서 권총을 꺼내 탄창을 뺀 후 상순에게 넘겨주었다. 상순은 제법 안전장치를 누른 후 아름드리나무를 겨눠 방아쇠를 절컥 당겼다. 그는 각종 자세를 취하면서 여기저기 겨누면서 방아쇠를 절컥, 절컥 당겼다. “참 멋지군.” 상순은 뒷덜미를 긁적거리면서 이런 청을 드렸다. “큰아버지, 권총 한 자루만 주시요. 내 지학사 같은 악질지주를 처단해 버리고 쌀을 빼앗아 유격대에 가져 오겠습니다. 지학사를 봅소. 남의 귀한 딸들을 글쎄 일본위안소에 팔아넘기지 않겠는가 인피를 쓴 승냥입니다. 춘실과 은실은 어떻게 됐는지 알수조차 없습구마. 내 언제든지 내 손으로 지학사를 죽여 치우겠습구마. ” “안 돼.” 이때 인삼이가 희죽이 웃으면서 다가왔다. “왜?” “유격대 대장들도 지금 권총을 주지 못하는 형편이야. 또 네게 권총을 줬다가 밀정들에게 들키는 날엔 함흥촌 일대 항일 근거지가 타격을 받을게 아니야? 그리고 네 일가가 몽땅 연루될 수도 있지.” 상순은 답답해 머리를 홰홰 가로 저었다. “총이 없이 어떻게 총을 쥔 지학사랑 진수해분주소 경찰 놈들과 싸우오?” 성칠은 “저 인삼동생의 말이 옳다. 먼저 넌 마을사람들을 묶어세워 소작료를 적게 내구 쌀을 유격대에 지원하는 임무를 수행해라. 그것도 우리 유격대 항일투쟁을 돕는 게야. 이전에 인삼 중대장이 직접 그 일을 했지만 지금 네가 맡아 하도록 해라. 잘 할 수 있느냐?” 상순은 주먹을 쳐들어보였다. “할만 합니다. 유격대를 위하는 일이라면 뭐든 하겠습니다.” 성칠은 상순의 어깨를 툭툭 쳤다. “좋아. 우리 항일유격대에서는 너를 믿어. 총이 없어도 비수나 주먹이 어떤 땐 감쪽같이 없앨 수 있어. 독불장군이라고 혼자 경거망동하지 말고 함흥촌의 청년들을 묶어세워 유격대에 쌀도 지원하고 유사시에 일본주구들도 처단해라. 그러나 모든 군사행동은 우리 유격대 명령을 기다려라.” “옛, 알았습니다. 한 가지 요구 있습니다." "뭐야?" "일본놈들한테 잡혀간 춘실과 은실을 구해 줍소.” "그래, 언제든지 기회를 보아 은실을 구해야 해." "감사합니다!" 상순은 제법 유격대원들처럼 군례를 올렸다. 그때 진달래가 와서 상순이 늙은 비술나무에 숨어있다가 용감하게 뛰어내려 일본 놈을 찍어 죽이고 장총을 로획한 일을 죽 이야기했다. 인삼은 미더운 눈길로 상순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우리 유격대에 후계자가 생겼군그래. 먼저 여기 있으면서 유격대와 함께 군사훈련도 하도록 해라.” “옛,” 차렷 자세를 하고 군례를 올리는 상순을 보고 성칠과 인삼은 마주보며 껄껄 웃었다. “우리 집안에 또 항일유격대 꼬마대장이 나타났구먼.” “허허허. 참말 장하오.” 저쪽에서 하옥도 시조카를 대견하게 바라보며 웃었다. 먹장구름이 뒤덮인 하늘을 가리운 밀림속에서는 유격대원들의 격투련습소리가 여기저기에서 들려왔다. 그는 유격대원들이 투지도 높이 군사훈련을 하는 것을 보고 그들의 혁명투지에 마음속 깊이 감동됐다. (항일유격대원들은 정말 목숨을 내걸고 일본 놈들하구 용감히 싸우는 투사들이야!) 상순은 두 달 동안이나 성칠과 인삼, 진달래를 스승으로 모시고 권투와 총 쏘기, 돌 뿌리기를 익힌 후 장백산 밀림의 항일유격대 군영에서 나왔다. 그는 성칠 큰아버지가 시켜준대로 산 약재 캐러 간것처럼 위장하려고 시오랑 도라지랑 산 약재를 두루 캐서 광주리에 담아 지게에 얹어 지고 함흥촌으로 돌아 왔다.         해가 뉘엿뉘엿 지면서 어둑어둑한 땅거미가 멍지뫼산 그리고 칼산과 패랑천산의 절벽과 나무숲을 서서히 뒤덮어 갔다. 상순은 이를 부드득 갈면서 토성 동남쪽에 있는 자기 집 울안에 들어섰다. 그런데 온 집 식구들이 사랑 칸 쪽에 우두커니 모여 서서 떠들썩했다.        "무슨 일입둥?" 상순이 황급히 집식구들 속을 비집고 들어갔다. “오, 상순이 왔구나.” 기준은 막내아들이 온 것을 보고 무등 기뻐했다. 상순이가 사랑 칸 안을 들여다보니 황소가 쓰러지어 있었다. “아니, 이게 어떻게 된 일이오? 또 콩을 먹었습둥?” 기준은 소의 배를 어루만지면서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었다. “콩을 먹은 게 아니야. 구유에 매 놓은 채로 있는데 주지도 않은 콩을 먹었겠니? 뭘 잘 못 먹었는지 아침부터 아무 것도 먹지 못하고 누워 있다. 손지주네 주재소를 이걸 어쩌니?” 상순은 구유 안을 들여다보더니 손을 넣어 옥수수장이랑 풀이랑 썰어 넣은 소여물을 휘저어 보았다. 소여물을 쥐여 코에 가져다 씩씩 냄새를 맡아 보고 혀끝으로 냄새를 맡아보던 그가 상을 찡그리면서 소리치었다. “무슨 독이 들어간 거 같습구마.” “뭐라고? 독이?” “예. 옥수수 대는 달겠는데 씁구마.” “그럴 리 있겠느냐?” 그런데 둥글소는 눈을 감더니 숨마저 거두었다. “에이, 또 손지주 와서 야단치겠구나.” 기준은 상순을 보고 “손 지주 뭐라고 해두 꾹 참아라.  항상 너 그 불 같은 성깔이 근심된다. 낮은 문턱일수록 머리를 숙이어야 머리가 맞아 터지지 않는 법이야.” 상순은 억지로 밸을 참으면서 사랑 칸에서 나갔을 때었다. 난데없는 황둥개가 씽- 달려 와서 상순의 바지를 물어 당기었다. “지개!” 기준은 위방 쪽을 쳐다보면서 퉁명스레 쏘아 부치었다. “황둥개 또 꼬리를 친다. 쯧쯧쯧.” 상순은 개의치 않고 황둥개가 뛰어 가는 대로 뒤 집 쪽으로 굽어 들었다. “형님! 여기 빨리 오오.” 갑자기 상순이 새된 소리를 치면서 손을 저었다. “무슨 일이야?” 기준과 상우는 황급히 달리어 갔다. 그들이 보니 뒤 집 구새가 한쪽으로 기울어지어 거의 넘어 가고 있었다. 군선이가 혼자 안간힘을 다해 넘어 지는 구새를 받치어 보려고 해도 막무가내였다. 그런데 구새목에 배가 남산만한 춘실과 머리를 싸맨 해금이가 용빼는 수가 없어 맴돌았다. (아니, 춘실이 돌아왔어?) 상순은 기뻐 어쩔 줄 모르면서 뒷집으로 달려갔다. "춘실이!"  그러나 춘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를 외면한 채 어깨를 들먹이며 손으로 눈물을 닦았다. 상순은 춘실이 우는 걸 보고 체면 따위는 다 벗어버리고 춘실을 와락 끌어안았다. 춘실은 손으로 상순을 밀어버리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때 저쪽 토성안 집 토성 우에서 지학사란 촌장놈이 이쪽에 도끼눈을 흘기며 으르렁거렸다. "아니, 춘실이, 저년이 어떻게 돌아왔어?" 지학사는 심술이 났다. "개쌍년을 일본 놈들한테 괜히 줬어. 개 놈들, 여기 와서 배부른 흥정을 다 해? 나도 데리고 놀지 못했는데. 저 고운 년을 어쩌면 좋을가?" 지학사는 사다리를 타고 토성에서 내려가며 중얼거렸다. "일본놈새끼들, 안 가져가겠으면 말어. 내 먹어버려야지. 상순, 저 놈 새끼한테 춘실을 넘겨줄순 엇어. 흥! 어디 두고 보자." 그때 춘실이네 구새는 거의 번져 지고 있었다. “기다립소!” 상순은 허리띠를 질끈 동여매고 어깨로 번져 지는 구새를 떠받치었다. 뒤에 들이닥친 기준과 상우까지 합세하여 구새를 떠밀자 구새는 도로 곧게 서기 시작했다. 구새통을 곧게 세운 후 기준이가 도끼와 못을 가지고 와서 받침목을 대고 고정시키어 놓았다. 그리하여 군선이네는 한차례 위험을 모면했다. 군선은 맥없이 구새 목에 물앉으면서 “야, 아들이 없는 게 한이로구나.” 하고 장탄식했다. “아버지, 딸은 자식이 아닙둥?” 춘실은 훌쩍이며 돌아서더니 마주 보는 상순한테 눈을 흘기며 외면했다. 춘실의 어머니는 상순을 쏘아 볼뿐 행악질은 하지 않았다. 상순은 춘실을 데리고 집으로 들어가 조용히 물었다. "어떻게 돌아왔어? 네가 살아왔으니 살맛이 있구나. 지학사 촌장이 또 붙잡으러 오지 않을가?" 춘실은 전날 상순이 목숨을 걸고 구해준 일이 있는지라 그를 미워하진 않았다. "아마 내 몸이 이런걸 보고 그만둔 거 같아." 사실 춘실과 은실은 모두 지학사란 촌장놈의 밀고로 해 밤중에 일본놈들에게 붙잡혀갔었다. 지학사는 상순을 눈에 든 가시처럼 미워했다. 그는 상순과 붙어다니는 춘실 자매를 일본 놈들한테 팔아버려 상순의 기를 꺾어놓자고 나쁜 마음을 먹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악귀 같은 지학사의 밀모에 의해 춘실과 은실 자매는 진수해 북쪽 어귀에 있는 높은 토성 안에 있는 위안소라는곳에 붙잡혀 들어갔다.       위안소 소장 놈은 아랫배가 부어오른 것도 모르고 이뻐보이는 춘실을 다짜고짜 끌고 작은 방에 들어갔다. "오, 우쯔꾸씨이 온나(이쁜 여자)!"       그 놈들은 다짜고짜로 춘실을 깔고 들어앉아 저고리를 와락와락 벗기었다.  춘실이 아무리 발버둥질을 치면서 발악해도 악귀 같은 그 놈을 당하지 못하고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춘실의 하신에서 어찌나 피를가 많이 흘러나오는지 더러워 코를 싸쥐였다. "흥! 퉤!"       재미없었다. 소장 놈은 괴춤을 춰올리면서 춘실을 툭 차버렸다. 소장놈은  이번엔 은실을 강제로 끌어내 독방에서 이른바 신체검사를 하는 척 하면서 짓밟다가 아연실색했다. "나니까(뭐야)? 빠까요로(제밀할), 이시무스메(돌처녀)!" 그 놈은 아무리 야욕을 채우려고 해도 은실의 몸속으로 그게 들어갈 수 없었던 것이다. 지독한 그 놈은 다른 일본 놈들을 시켜 은희를 짓밟게 했다. 야욕이 발정한 야수 대여섯이 연이어 은실을 짓밟았다. 은실은 너무 아파 대성통곡 치면서 "엄마! 엄마!" 하고 죽어가는 신음 섞인 소리로 고함쳤다.       일본놈들이 은실한테 덮쳐드는 틈을 타서 춘실은 도망쳤던 것이다. 그러나 춘실은 창피해 상순한테 그 내막을 제대로 말할 수 없었다.       소장 놈은 은실의 방에 계속 야욕이 발작한 놈들을 십여명씩 밀어넣어 무참히 짓밟았다. 그래도 은실의 하신이 째지지 않자 소장놈은 뾰족하게 깎은 참대칼로 은실의 하신을 미친 듯이 찔렀던 것이다.       소장놈은 피묻은 참대칼을 쳐들고 징글맞게 웃어댔다. "네 년이 아무리 돌처녀라고 해도 참대칼을 당할 수야 있어? 으하하하" 은실은 기혼하고말았다. 그러나 야수 같은 소장님과 색마들은 은실의 피흐르는 하신을 구경하면서 "오, 이시무스메!" 하고 변태적으로 으르렁거리며 지껄여댔다. 색마 같은 일보 놈들은 춘실이 임신부라는 것을 발견한 후 아쉬운 대로 며칠 잡일을 시키다가 쫓아냈던 것이다. "개놈새끼들, 이 원쑤는 꼭 갚아야 해!' 상순은 주먹으로 애꿎은 벽을 퉁 쳤다. 흙벽이 움푹 주먹자리가 나면서 마른 흙벽가루가 흩날려 떨어졌다. 춘실은 상순의 귀에 대고 귓속말을 했다. "어떻게 유격대에 연락해서 은실을 위안소에서 구해내지 못할까?" "글세, 기회를 보자." 상순은 어깨를 들먹이는 춘실을 보자 속이 부글부글 괴어 번지어 자리를 떴다. 그가 울타리를 금방 나설 때였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지학사 놈과 딱 마주쳤다. 밸 같아선 한주먹에 때려죽이고 싶었다. 하지만 상순은 용케도 꾹 참고 능청스레 인사했다. "지 촌장, 무사합둥?" 지학사는 개화장을 휘두르면서 우멍눈을 가슴츠레 뜨고 상순의 아래위를 훑어보았다. "이 촌장어른께 청가도 맡지 않고 요새 어디에 갔어?" "오, 그래잖아도 지촌장한테 산 약재를 가져다 드리자고 캐왔는데. 에헴, 내 따라 옵소. 그간 내 산에 가서 장수약재를 캐왔수다. 허허허." "뭐라고? 너 약재를 캐왔어?" "우리 마을에 유격대 쳐들어온 일 몰라? 웬 놈이 도끼로 일본 황군을 찍어 죽였어." "모릅구마. 누가 감히 그런 짓을 다 해?" 상순은 능청을 떨었다. "산약재나 어디 보자구나." 지학사는 상순을 따라 앞집에 갔다. 어둑시그레한 사랑칸에 들어가 보니 아닌게 아니라 지게 위 광주리에 도라지랑 시오랑 더덕이랑 한 광주리나 있지 않겠는가. "허허허. 너 이런 재간도 있어?" 지학사는 광주리채로 들어가려고 했다. "가만, 이 좋은 약재를 우리 아버지한테도 주게 좀 남기요." 상순은 도라지 몇뿌리를 쥐어냈다.  "놔둬. 자식," 지학사는 가슴츠레한 실오리눈깔을 해가지고 상순을 쏘아보았다. "늙은 비술나무에 귀신이 붙었어? 똘만경찰도 늙은 비술나무 아래서 돌멩이에 맞아 죽었고 이번에도 거기서 사단났거든. 그놈 늙다리비술나무를 송두리채 뽑아버려야지.흥!"  지학사는 한바탕 으르렁대다가 상순을 놓아주고 약재광주리를 안고 헐레벌떡 가버리었다. 아무 꼬리도 밟지 못하자 이빨을 쁙쁙 갈았다. (아무대든 내 손에 죽을줄 알아! 흥!) 그때 상순도 윽윽 별렀다. "개놈새끼, 언제든 피빚은 피로 갚아야 해!" 상순은 뒤에서 살기찬 눈길로 지학사의 뒤잔등을 노려보았다. 지학사가 말하는 늙다리나무란 조개덕과 함흥촌 동구에서 뻗어나간 길이 합해지는 길목에 있는 늙은 비술나무를 가리키는것이였다. 그 나무는 몇백년이나 살았는지 키는 그리 높지 않아도 둘레길이는 장정 대여섯이 팔을 펴고 손잡고 둘러서야 다 안을수 있는 엄청 실하고 늙은 비술나무였다. 기준은 어둠속에서도 구새 받침대에 못을 땅땅 박으면서 군선에게 말했다. “군선이, 우리 상순이 돌아오는 음력 10월 10일에 결혼하니까 잔치 술이나 마시러 오오.” 그 말에 군선은 구새를 잡은 채 맥 없이 말했다. “내 만났을 때 하는 말이지만. 아니, 그 집 막내 놈과 우리 애가 사고를 친 거 같소. 이 일을 어쩌오?” “양? 사고라니?” 군선은 나지막이 “우리 애가 배 남산만큼 부어오른 걸 보지 못했소?” 하고 말했다. 기준은 또 못을 단단히 박았다. “자식 놈들이 덤벙댄 거 용서해 주오. 춘실을 좋은 신랑감을 찾아 잔치를 시키우.” “그것도 말이라고 하오? 남의 애를 낳은 딸이 시집을 온전히 갈 거 같잖소.” 기준은 마지막 못을 땅, 땅, 땅 박았다. “미안하오.” 춘실은 아버지와 기준이 구새 목에서 주고받는 말을 가만히 듣고 이불을 와락와락 내려 들쓰고 들어 누워 섧게 울었다. 해금은 딸이 불쌍해 훌쩍 일어나 쌩 구새 목으로 달려 나갔다. 그러나 기준은 보이지 않고 영감만 구새 목에 맥없이 물앉아 있었다. “이 오줌 깨 같은 영감이, 앞집영감하구 찍 소릴 못 하구 마오? 내 오늘 가만 놔두는가 봐라.” 그녀는 홱 돌아서더니 앞집으로 씽 달리어 나갔다. 뒤에서 군선은 손가락질 하면서 “저, 저, 또, 또.”라고 할뿐이었다. 해금은 앞집에서 한창 저녁 숟가락을 드는데도 정지에 들어가 떠들어댔다. “앞집나그네, 우리 딸을 내놓소! 우리 딸을 제대로 내놓지 않는 날엔 내 가만 있나 보오! 흥!” 사련은 엉거주춤 일어나 “어쨌다고 이러오? 올라 와 저녁이나 들면서 천천히 얘기하오.” 하고 말하면서 바닥에 내려가 해금의 손을 잡아끌었다. “이걸 놓소. 남의 딸을 배 남산만큼 만들어 놓고 다른 집 딸과 잔치 하면 되오? 춘실의 배 속에는 이집 새끼가 자라고 있소.” 기준은 숟가락을 탕 놓았다. “뭐라오?” “그래 몰라 묻소?” 해금이 행악질하는데 새금이 막아 나섰다. “그만 하오. 삼촌댁, 아무 말씀이나 할 게 아니오.” 그는 자기 삼촌댁의 손을 잡아 구들에 올라오게 하고 뒤 말을 이었다. “동네에 소문이 나면 어찌오? 그러지 않아도 동네서 쉬쉬 하는데 창피해 어떻게 사오? 어찌 하겠소? 시아버지 고르고 골라 쥐며느리를 삼자고 그러는 거. 우리 지씨 네 딸들이 어떻다고 나무라는지 모르겠소.” 기준은 등잔불 밑에서 맏며느리를 흘기어 보았다. 상우도 너무한 것 같아 핀잔을 주었다. “여보, 아버지와 무슨 말버릇이오?” 그러나 새금은 공혁을 안고 바깥에 횡 하니 나가면서 끊임없이 도도도 거리었다. “개성 최 씨네 시어미에 며느리까지 들어와 이 집안이 재미 있겠소. 난 이 집 쥐며느린 게 무슨?” 기준은 훌쩍 일어나 위방으로 들어 가버리었다. 상순은 어쨌으면 좋을지 몰라 바깥으로 나가더니 어디론가 달아나 버리었다. 기준은 위방에서 바로 앉더니 걸걸한 목소리로 맺고 끊듯이 말했다. “좌우간 그 집과는 혼사 말을 하지 않으니까 그만 두고 가오. 우리 상순이 뭣이 모자라 데릴사위로 들어 간답데? 염치없는 집안이라구야, 원, 흥!”       해금은 가슴에 못이 꽝꽝 박히고야 말았다. 성이 날대로 난 그녀는 위방으로 씽 달려들어 가 기준의 멱살을 틀어쥐고 늘어지며 행악질했다. “이 더러운 영감두상, 개소리를 치지 말구. 내 딸을 처녀로 돌려 달라. 우리 집에 아들이 없다고 업신여기는가? 엉?” “콱 신어놓기 전에 놓지 못하겠는가?! 그 쌍년 어미에 상년 딸이지. 우리 집에 와서 종질을 하겠다고 해 봐라. 데려 오는가?!” 기준은 고래고래 고함치며 해금의 손을 풀어 활 떠밀었다. 해금은 저만치 벽 구석에 뿌리어 나가 나뒹굴었다. 상우도 해금을 말리어 위방에서 모시고 나갔다. “작은 가시엄마, 우리 아버지 고집을 돌리지 못합구마. 내 처제한테 상순이보다 더 좋은 신랑감을 얻어주겠습구마.” “관두오. 저 배속에 애는 어찌 하오? 누가 남의 애를 가진 계집애를 데려 가자 하겠소?” “바깥에서 떠들지 맙소. 누가 듣겠습구마.” 상우는 해금을 부축해 뒤 집으로 들어갔다. 새금도 공혁을 안고 훌쩍거리면서 뒤따라나갔다. 그제야 토성안집 동쪽이 조용해지었다. 어디에선가 뻐꾸기가 우는 뻐꾹뻐꾹 소리가 들리어 왔다. 해금과 상우는 이불을 들쓰고 누운 춘실을 불쌍하게 내리 보았다. 그러나 춘실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다만 이불이 풀럭거리며 가느다란 신음소리가 들릴 뿐이었다. 태평강가의 아름드리버드나무가 무섭게 몸부림치고 있었다. 상순은 성이 꼭뒤까지 치밀어 씩씩거리면서 태평강 가에 달리어 갔다. “아, 아버지는 어째 내 춘실과 살지 못하게 합니까?” 그는 장백산 밀림 속에서 큰아버지가 하던 말을 생각하고서야 겨우 고민 속에서 해탈되어 그간 배운 권술을 연습했다. 한참 발딱거리면서 주먹질과 발길질을 했더니 성이 좀 풀리었다. 그는 먼 동산에 걸린 먹장구름 속의 초생 달을 쳐다보면서 한숨만 푸푸 내쉬었다. 1937년 음력 10월 10일, 결혼식 날은 끝내 돌아 왔다. 마을 사람들과 기준의 온 집 식솔들은 밸 때기 더러운 상순이가 백마를 타고 명옥을 가마에 앉혀 데려 올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집안사람들은 곱게 단장한 명옥을 보고 혀를 끌끌 찼다. “새각시 너무나 곱구나.” “춘실과 자꾸 비해 그렇지. 저만하면 상순이 각시 복이 있지 뭐.” 백마를 탄 상순은 원래 벗어진 이마나 짙은 눈썹아래 예리하게 번쩍이는 세 귀 눈이라던가, 날이 선 코나 맵짠 입은 정말 호남아였다. 그러나 상순은 웃음 한 점 없이 머리를 숙인 채 묵묵히 백마를 타고 앞으로 나갔다. 사람들은 가마를 탄 명옥을 보고 “첫날 새 각시도 저만하면 곱다야.”라고 했다. “응아-” “응아-” 이때 뒷집에서 갑자기 갓난애 우는 소리가 울리었다. 춘실은 앞집 상순이가 백마를 타고 가마를 탄 각시를 데리고 집안에 들어설 때 애를 낳았던 것이다. 춘실은 앞집에서 왁작 떠드는 소리를 듣고 애비 없는 애를 가엾이 내려다보더니 돌아누워 어깨를 들먹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었다. 쓰라린 눈물이 흐르고 흘러 베개 잇을 적시었다. 처량한 달빛이 춘실의 모자간이 가엾어 은빛으로 감싸 주었다.       첫날밤에 상순은 어머니와 여동생 금옥이가 펴 놓은 누더기 첫날이불 속에 들어갔다. 하지만 한숨을 후 내쉬더니 새 각시 명옥의 옆으로 가지도 않고 훌 돌아누워 버리었다.       명옥은 오히려 편히 잠을 잘 수 있어 더욱 좋았다. 사랑방이 어찌나 비좁았으면 옆에는 시어머니와 시누이까지 누워 돌아누울 자리조차 없었던 것이다. 다행히 시아버지는 웃새집에 들어갔기에 넷이 누울 자리가 났던 것이다.       초겨울 밤의 희읍스름한 달빛이 첫날이불을 쓸쓸히 비췄다…                                                                                                15장 피눈물 젖은 고향                                                                                                                                                             1. 유격대 군량미         상순은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따라 간도에 들어 와 새로 닦은 터전인 함흥촌을 돌아보자 코마루가 시큼해 났다.        (뼈 빠지게 황무지를 개간해 곡식을 심어도 중국 지주 장학산에게 소작료를 바치고 나면 어디 유격대에 가져 갈 쌀이 남겠는가.)       상순은 토성 안 집에 살다가 허망 나앉은 큰아버지가 근심스러웠다. 그러자 인삼 중대장의 말이 머리에 떠올랐다.      (지주나 부자 놈들의 쌀을 빼앗아내 가져가야지. 먹을 게 없는 농민들은 총칼을 들고 일본 놈들을 이 땅에서 몰아내고 지주와 부자 놈들의 재산을 몰수해 나눠 가져야 진정 땅의 주인이 돼 떳떳하게 살 수 있다. 이게 바로 우리 가난한 사람들이 중국 공산당을 따라 혁명을 하는 도리이다.) 상순은 높다란 토성 밑에 와서 토성 안 집 자리에 독사처럼 들어앉은 촌공소를 들여다보는 순간 눈에 불티가 번쩍이었다. “지학사, 네 이 놈, 지금 일본 놈들을 등에 업고 우쭐거린다만 오래 가는가 두고 보자. 어느 땐가 내 유격대를 데리고 와서 네놈을 처단하고 재산을 청산해 버릴 줄 알아라. 이게 인삼아저씨네 토성안집이지 네 집이야? 바로 자기 집인 거처럼 개지랄이야. 흥!” 상순은 토성 대문 안에 소홀히 들어가지 않고 기웃거렸다. (유격대에 쌀이 당장 떨어지는데 얻어다 줘야지. 저놈 토성 안 촌공소를 들이쳐서 쌀을 빼앗아 가져갈까?) 그러나 한참 궁리해 보니 자칫하면 그들 삼대가 와서 개척해 놓은 함흥촌이 또 일본 놈들의 토벌을 맞을 수도 있었다. (토끼도 자기 굴 앞의 풀을 먹지 않는다는 말이 있지 않는가.) 그는 강가의 너부죽한 너럭바위 우에 앉아 궁리하다가 무릎을 탁 치면서 일어났다. “옳지, 구촌 아저씨 선준을 따라 다니면서 약 담배 장사를 해 유격대에 쌀을 사가자.” 이튿날, 상순은 선준을 찾아 갔다. 인사수작이 끝나자 상순은 단도직입적으로 “삼촌, 나도 약 담배 장사를 하고 싶소. 좀 도와주오.” 하고 간청했다. 그러자 선준은 위방 문부터 닫아걸었다. “자칫하면 목이 날아 나.” 선준은 도리머리를 가로 흔들었다. 바빠 맞은 상순은 선준의 손을 꽉 붙잡고 애원했다. “사몬, 우리 집에서 손 지주네 주재소를 죽이었는데 어찌 하오? 당장 소를 사줘야 하겠는데 목숨을 걸고서라도 장사를 해야 하겠소.” 선준은 머리를 숙이고 한참이나 궁리하였다. 등불이 가물거리는 방안에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한참 후 선준은 머리를 천천히 들더니 상순을 마주 바라보았다. 벗겨진 이마에 독기서린 세 귀 눈, 베적삼 팔소매 밑으로 드러난 울뚝불뚝한 팔 근육… 어디를 보아도 씩씩하고 믿음직한 조카였다. “밑천도 없는데 처음부터 어떻게 약 담배장사를 하겠니? 우리 약담배짐이나 메고 호위나 해 달라.” “감사하오. 삼촌.” 상순은 선준의 두 손을 꽉 잡았다. 며칠 후 상순은 호미를 들고 기음매러 가는 척 하면서 집을 나섰다. 그는 미리 약속한대로 조개덕 아래 늙은 비술나무 밑에서 구촌 아저씨들인 선준과 두준을 만났다. 선준과 두준은 사촌형제였는데 기실 상순보다 서너 살 이상이었다. “괜찮다. 호미는 왜 가지고 왔니? 저기 길옆에 파묻어 두구 가자.” 상순은 호미를 쳐들어 보이면서 호언장담했다. “이걸 보면 누가 우릴 약 담배장사군으로 보겠소? 또 강도떼를 만나면 호미로 단매에 쳐 죽일 수도 있소.” 그 말에 선준은 머리를 끄덕이었다. “성남집 조카는 머리가 비상하다니까.” 그러나 두준은 입귀를 비쭉거리었다. “그까짓 호미로 어떻게 호위한다고? 쯧쯧쯧.” 선준은 성격이 활달하고 남을 쉽게 믿지만 두준은 조금 우울한 편인데다 남에게 마음을 쉽게 주지 않았다. 상순은 호미를 쥐고 앞뒤를 살피면서 령길을 앞장서 걸었다. 가시덤불을 만나면 앞에서 호미로 길을 헤치어 나갔고 어두운 밤이면 뒤에 서서 두 삼촌을 지켜 주었다. 조선 명천에 거의 들어서자 두준은 별 말을 다 했다. “팔촌형 때문에 고향에서 살지도 못 하구 간도에 쫓기어 가서 이게 뭐야? 옛날 조선 법에 한사람이 죄를 지으면 팔촌까지 누명을 쓴다더니 어쩜 일본 놈들 법도 똑 같니?” 선준은 묵묵히 걸었지만 두준은 계속 두덜거리었다. “기준 형님네 부자간이 우시장 경찰국이 무너지게 짓지 않았더라도 우린 고향에서 쫓기어 나지 않았겠는데…” 선준이 참다 못 해 한마디 툭 내쏘았다. “기준형님 덕분에 우리 큰집 작은집이 몽땅 함흥촌에 발을 붙이게 됐는데 어째 자꾸 형님 네를 헐뜯소? 상순을 옆에 두고.” “야, 임마, 고향에서 살면 살았지. 누가 함흥촌에서 살고 싶어 사니?” 두준은 계속 말하려다가 상순이가 호미를 쥐고 되돌아보자 허 벌렸던 입을 천천히 닫아버리었다. 밀림 속은 찌는 듯이 무더웠다. 여기저기에서 놀란 새들이 푸르릉 푸르릉 날아 푸르른 나무 잎에 가리어 보이지 않는 하늘로 날아갔다. 그들은 명천 시내에 들어가지 못하고 산골짜기를 넘어 동남쪽 산기슭으로 올라갔다. 적송이 우거진 박달령을 넘어서자 깎아지른 듯한 산과 협곡이 나타났다. 몇 시간이고 령을 타고 산을 넘고 산골짜기를 몇 개 건너가자 은띠 같은 은주하가 산굽이를 굽이굽이 에돌아 뻗어 내리어 간 것이 눈에 띄었다. 강물을 끼고 산 아래 마을이 보이었다. 선준은 산 아래 마을을 가리키면서 “저게 네 고향 운주동이야.” 하고 알려 주었다. “내 고향이라고? 저 고향 마을에 가보기오. 무너진 우리 집 자리라도 있는지 가봐야겠소.” “에끼, 이 놈, 환장했니?” 두준은 상순을 흘겨보면서 손으로 목을 치는 시늉을 하였다.  “지금 일본 놈들이 너네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잡지 못해 피 눈이 돼 날뛰고 있는데 고향으로 가? 자칫하면 우리까지 작두에 목이 썩 뚝 잘리겠어.” 상순은 고향을 눈앞에 두고도 가보지 못하는 것이 못내 아쉬워 발에 뿌리 내린 듯이 멈춰 서서 고향 마을을 오래도록 내려다보았다. 선준은 상순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면서 “이담 일본 놈들을 몰아 낸 후 고향에 와서 살아도 돼. 가자.” 하고 갈 길을 재촉했다. 그제야 상순은 할 수 없이 경각성을 높이어 사위를 두리번거리면서 앞길을 헤치며 나갔다… 명천 시내에 들어서자 선준은 상순에게 귀속 말을 했다. “우리 물건을 하는 새 너는 썩 떨어져 따라 오라. 만약 우리 뒤를 밟는 놈이 있으면 가차 없이 해치워야 한다. 알만하니?” 상순은 머리를 끄덕였다. 그는 호미자루를 거머쥐고 선준과 두준의 뒤에 한 일여덟 발자국 떨어지어 따라 가면서 사처를 두리번두리번 살피었다. 선준과 두준은 우시장에 들리어 이전에 거래하던 약 담배 장사꾼들에게서 약 담배를 사 들이었다. 그들은 소금주머니 속에 약 담배를 감춰 가지고 시내를 벗어나자 또 령 길을 잡아타고 북으로, 북으로 걸어갔다. 연 며칠 산속에서 헤매 끝내 회룡 부근에 이르렀다. 선준은 잔등에 지었던 소금짐을 끌러 내리우더니 약 담배를 꺼내며 상순에게 말했다. “이대로 가져가서는 안 돼. 좀 보초 서라.”        선준은 미리 사둔 일본제 치약을 짜 버리고 치약 안에 약 담배를 쑤시어 넣는 것이었다. 두준은 치약에 넣고도 약 담배가 남자 나무숲에 가서 뒤를 보고 돌아왔다. 그는 약 담배를 비닐로 감더니 바지를 벗고 낑낑거리며 항문에 쑤셔 넣었다. 두준은 나머지 약 담배를 상순에게 건네주었다. “너도 항문에 넣어라. 강도도 없는데 공 짐삯을 받지 말고." 상순은 이제껏 공밥을 먹고 공 짐삯을 받을 것 같아 약 담배를 받아 이를 악물고 항문에 넣기 시작했다. 그런데 항문이 어찌나 아픈지 오만상을 찡그리었다. (에이, 이 놈 약 담배 장사도 쉽지 않구나.) 선준과 두준이 일본 놈들이 총칼을 쥐고 지키는 두만강 나루터 쪽으로 다가가는 것을 보고 상순은 멈춰 섰다. “어째 하필 일본 놈들이 지키는 나루터로 가오? 놈들이 없는 데 가서 고기 배라도 얻어 가지고 건너지.” 선준이 다가와 상순에게 나직이 귀속 말을 했다. “어떤 때엔 놈들을 피해 가면 더 의심받을 수 있다. 저 놈들이 얼마나 교활한지 아니? 고기 배 주인들에게 돈을 주면서 유격대나 약 담배장사를 붙잡으라고 매수했어. 알만 해?” 나루터에서 몇몇 일본 놈들이 총칼을 비끼어 들고 간도에 들어가는 조선 사람들의 몸과 짐을 수색하고 있었다. 그중에는 가마를 빼 지게에 진 사내로, 애를 업고 함지를 인 아낙네로 떠들썩했다. 선준 등의 차례가 되자 콧수염을 기른 일본 놈이 도끼눈으로 아래위를 훑어보면서 두 팔을 벌리어 들게 한 후 온 몸을 샅샅이 수색했다. 잔등에 진 짐을 벗기어 치약 대여섯개를 쥐여 만지작거리면서 선준의 눈치를 흘끔흘끔 곁눈질 했다. 선준은 일부러 고개를 들어 먼 북산을 쳐다보면서 대수롭지 않은 척 했다. “고레와 나니까?(이건 뭐야?)” 선준은 일본 말을 꽤나 하였지만 대답 대신 입을 벌리고 손가락으로 이를 닦는 시늉을 했다. 헌병 놈은 엉거주춤 일어나더니 두 손으로 선준의 볼을 잡고 “아~” 하고 “구찌오 히라께(입을 벌려)!”라고 명령했다. 선준의 벌린 입안을 들여다보더니 버럭 고함쳤다. “빠가요로(바보), 이발이 싯누런데 칫솔 약을 저렇게 많이 사 갔소까?” 헌병 놈은 치약 마개를 일일이 열어 쭉쭉 짜보았다. 그런데 안에서 하얀 치약만 괴어 나왔다. 그래도 시름 놓지 못하고 일본 놈은 소금주머니 안에 손을 찔러넣어 이러 저리 헤쳐 보기도 하고 총창 끝으로 소금을 이리저리 헤치어 보기도 하는 것이었다. “이께(가라)!” 선준은 소금 짐을 지고 나루 배 쪽으로 갔다. 두준의 차례가 됐다. 일본 놈은 소금 짐을 들춰 보고 치약이 나오자 거들떠보지도 않고 두준을 끌고 한쪽으로 갔다. “후꾸오 누게(옷을 벗어)!” 두준은 눈이 휘동그래졌다. (‘똥을 누게’? 큰 일 났는데.) “하야꾸 누게(빨리 벗어)!” “금방 누게.” 두준은 옷을 쫄딱 벗으면서 앉아 똥을 누는 시늉을 했다. 헌병 놈은 두준이 앞에서 앉았다 섰다 하는 시늉을 하며 을러멨다.  “고레요우니 야루(이렇게 해)!” 순간 숱한 눈길들이 이쪽으로 쏠리었다. 선준은 두준이 근심돼 나룻배에 오르지 못하고 서성거리었다. 그때 상순이가 두준 쪽을 주시하는 다른 헌병 놈들의 눈치를 살피다가 자기 호주머니에서 치약 깍지를 꺼내 슬쩍 선준에게 건네 주었다. 두준은 항문에 넣은 약 담배가 빠져나올까 봐 천천히 앉았다 섰다 했다. 두준이 항문이 아파 오만상을 찡그리자 헌병 놈은 헤벌쭉 웃으며 지껄여댔다. “하야꾸(빨리), 하야꾸(빨리)!’ 두준이 빨리 일어났다 섰다 해도 밑구멍에서는 다행히 피가 섞인 똥물이 흘러나올 뿐이었다. 헌병 놈은 아무것도 나오지 않자 머리를 가로 흔들었다. 그러나 그쯤 해 그만 둘 놈이 아니었다. “왜 상을 찡그려?” 몇 해 동안 나루터에서 두만강을 건너는 조선 사람들을 검사해 온 그 놈은 조선말도 놀랄 지경으로 꽤나 잘하는 것이었다. “설사를 만나서 죽겠소.” 그제야 헌병 놈은 머리를 끄덕이며 코를 싸쥐었다. 그 놈은 상순을 오라고 손짓했다. 헌병 놈은 건장하게 생긴 상순이 아래 위를 살피었다. 아무래도 예지로 번쩍이는 세 귀 눈과 불뚝불뚝한 팔뚝과는 달리 호미를 쥔 상순이가 잘 어울리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그는 상순의 손을 쥐더니 손바닥을 만지어 보는 것이었다. “손바닥에 군살이 박힌 걸 보면 농사군 같은데 비범한 생김새를 보면 아무래도 거저 농사나 지어 먹고 사는 놈 같지 않아. 이름이 뭐냐?” 하고 물었다. 상순은 처음 헌병과 띄운 일이어서 조금 긴장했다. “김진.” “김진? 어데 살아?” 상순은 제대로 대지 않았다. “태평거우.” 헌병 놈은 꽤나 긴장해 하는 상순을 보고 자꾸 물었다. “뭘 하러 조선에 갔어?” “소금과 치약 장사 하러 갔소.” “호미는 왜?” “호미 사다가 기음매자구. 강도도 막구.” 상순은 얼버무리면서 헌병놈을 곁눈질했다. “호미로 날강도의 비수를 당하는가? 총을 쥔 강도도 많은데.” 상순은 점점 침착성을 되찾았다. “우리 농사꾼들은 보지도 못한 총보다두 호미가 제일 좋은 호신봉이요.” 헌병 놈은 아무 말꼬리도 잡지 못하자 “옷을 벗어!” 하고 눈깔을 부라리었다. 상순은 두덜거리면서 한쪽에 가서 옷을 벗었다. 또 두준에게 하던 것처럼 앉았다 섰다 하라고 손시늉 했다. 상순은 앉았다 일어났다 하다가 약 담배가 빠져 나올 것 같았다. 그래서 앉았다가 일어나 오줌을 싸면서 엉덩이에 힘을 주어 약 담배가 항문 속으로 되들어가게 했다. 헌병 놈은 둬 번 더 앉았다 섰다 하게 해보고 상순도 건너가라고 손을 홱 저었다. 상순은 바삐 옷을 주어 입고 소금 짐을 잔등에 지고 선준 등이 탄 배 쪽으로 스적스적 걸어갔다. 배에 오른 후에도 겁을 집어먹고 손마저 부들부들 떠는 두준을 보고 선준과 상순은 희죽이 웃었다. 공포와 살기 넘치는 두만강을 건너 나루터를 벗어나 버드나무숲 속으로 숨어 들어간 그들은 한숨을 활 내쉬었다. 선준은 “살았다, 살았어!” 하고 좋아 야단이었다. 두준은 상순의 항문에서 약 담배를 빼내 챙기면서도 두덜거리었다. “내 뭐라데? 호미를 가지고 오지 말라는데도. 하마터면 내 약 담배를 빼앗기고 목이 떨어질 번했다.” 선준은 두준을 흘겨보았다. “형님도, 쯧쯧, 걔 덕에 약 담배를 숱해 건네오고도 그러오? 짐삯이나 푼푼히 주오.” “주지 않으리? 우리 둘이 가도 되겠는 걸 돈이나 축냈지.” 두준은 대답은 선선히 해놓고 집에 돌아온 후에도 짐삯을 공 주는 것 같아 아까워 끝내 선준보다 적게 주었다. 약 담배 짐을 날라 준 삯으로는 유격대에 가져갈 쌀을 쉰 근도 살 수 없었다. (안 되겠다. 큰아버지랑 애타게 기다리겠는데 먼저 쌀을 가져가고 보자.) 그는 궁리하던 끝에 선준에게서 돈 50원을 꿔 쌀을 사 상우 형님을 시켜 수레에 실어 유격대에 실어가게 하었다. 당시 상순이네는 손지주네 소가 독약을 먹고 죽어 숱한 빚을 걸머지었던 것이다. 할 수 없이 죽은 소고기를 팔고도 모자라 집마저 팔아 손지주네 소 값을 물어 주었다. 그러고 나니 웃새집 헛간에 되들어가 구들을 놓고 사는 구차한 형편이었다. 한편 밀림 속에서 버섯이랑 고사리와 더덕 등 산나물이나 캐먹던 유격대는 상우가 싣고 간 하얀 입쌀을 보고 기뻐 어쩔 줄 몰라 했다. 하옥과 은녀는 오랜만에 쌀알을 넣고 죽을 끓이면서 못내 상순 형제네 지원에 코마루가 시큼해 났다. 성칠은 입쌀마대들을 보고 인삼을 돌아보면서 혀를끌끌 찼다.  “상순이 그 놈이 끝내 일을 해냈구먼. 잘 배양하면 장차 훌륭한 유격대 골간이 될 거 같네.” 인삼도 머리를 끄덕이었다. “우리가 함흥촌을 떠난 후 산 속의 유격대는 쌀 고생을 많이 했소. 이젠 상순이 내 뒤를 이었으니 시름 놓아도 되겠소.” 그들의 말에 화답이나 하는 듯이 장백의 밀림도 초가을 바람에 너울너울 설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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