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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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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101) 댓글:  조회:1079  추천:1  2018-05-15
                                                                             12. 반란 먹장구름이 덮쳐 오더니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대지의 연기가 구름에 올라가 붙은 듯이 살풍경이다. 갑작스레 덮쳐오고 밀려가는 비구름은 풍운을 짐작하기 어려웠다. 사람들은 대체 비옷을 입어야 할지 반팔적삼을 입어야 할지 갈팡질팡하면서 변덕스러운 하늘만 욕하고 있었다. 요즘 함흥소학교에서는 기상천외한 일이 벌어졌다. 흥수는 공사에 가서 무슨 충성 무라는 것을 배워가지고 돌아와 사원들에게 배워주었다. 그는 근본 상순과 회보하기는 고사하고 한마디 토론도 없이 충성 무를 보급했다. 원래 미제와 육박전을 할 때 왼팔을 총창에 찔린 흥수는 별스레 쩔뚝거리는 시늉을 하면서 두 팔을 들어 윗사람을 받드는 시늉을 반복하는 춤을 배워주다. 홍자랑 충성 무를 배우다가 도리머리를 했다. “어째 우리 도라지만은 아주 달라. 영 추기 힘들어.” 그러자 흥수는 길죽한 말상을 기우뚱 했다. 움푹이 팬 외까풀 눈을 희번뜩거리면서 눈알부라리며 고래고래 고함쳤다. “무슨 잔소리냐? 두말 말고 충성 무를 잘 배워. 충성 무를 배우지 않는 사원은 모 주석에게 충성하지 않는 사람이야. 알만하지?” 홍자랑 정자랑 신자랑 입을 홀랑 내밀었다. 그녀들은 모두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충성 무를 배웠다. 한 사흘 배우니 제법 쩔뚝거리면서 손을 위로 쳐들어 올리면서 빙빙 돌아갔다. 상순은 처음에는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지만 위로부터 충성무를 정치적으로 내리 먹이니 별 수 없어 따라 쩔뚝거리면서 모주석의 초상에 받들어 올리는 팔을 휘저으면서 충성 무를 췄다. 지어 흥수는 위의 정신이라면서 집집마다 남녀노소가 몽땅 식사 전이면 벽에 높이 모신 모택동 주석의 초상을 향해 밥상을 돌아가면서 충성무를 추라는 것이었다. 상순은 그것이 정말 위의 정신인가고 박우성 서기한테 물어 보려고 진수해 공사에 찾아 올라갔다. 공사 벽돌토성 안에서는 숱한 사람들이 별스레 뻘건 복숭아 판에 “충”자를 새긴 패쪽을 목에 걸고 한창 충성무 표현을 하느라고 야단이었다. 상순은 목에 뻘건 충성패쪽을 걸고 뻘건 완장을 낀 홍위병들이 지키는 대문 안에 들어가려고 서둘렀다. “이게 어디서 온 촌놈이야?!” 한 홍위병이 상순의 아래위를 훑어보면서 몽둥이 끝으로 땅바닥을 쿡쿡 찍으며 막아 나섰다. “박서기를 찾아 왔소. 좀 들어가기요.” 허나 그 홍위병은 퉁명스레 한 마디 내 뱉을 뿐이었다. “박우성은 일본특무야. 일본특무를 만나 뭘 하려고 하오?” “뭐라오?!” 상순은 몽둥이에 정수리를 맞은 듯이 몸을 가누지 못했다. “박 서기가 일본특무라니? 되지도 않는 말.” 그러자 홍위병들은 상순을 둘러싸며 달려들었다. “이 놈이, 너도 일본특무지?” “뭐라고? 일본 특무? 난 항일전쟁 때 일본 놈들과 싸운 항일유격대 출신이다. 뭘 알아서 떠드느냐? 생사람을 잡지 말라!” 상순은 홍위병들의 말이 믿어지지 않았다. “피해라. 박 서기는 어디에 있느냐?” “이 나그네 정말 한 대 맞고 싶어?” 그러자 상순은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이러지 말라! 내 새끼 같은 애들과 싸우고 싶지 않구나.” 그때 분명 한 마을의 황종연이 있었건만 알은체도 하지 않고 홍위병들에게 뭐라고 시키는 것 같았다. 종연의 부추김을 받자 한 홍위병이 상순의 멱살을 쥐어 공사 대문 밖으로 떠밀었다. “썩 물러가지 못하겠는가?!” 상순은 재차 떠밀려는 자 팔목을 척 잡아 채 어깨에 둘러멨다가 태를 탁 쳐놓았다. 홍위병이 쉰 고개를 바라보는 나그네라고 준비 없은 것도 있었다. 하지만 그 날랜 솜씨는 한 폭의 유도 명장면을 방불케 했다. 홍위병은  땅 바닥에 머리를 박고 나동그라져 다시 일어나지도 못했다.. 황종연이 소리쳤다. “저 나그네 특종병 출신이다. 몽땅 달려들어라!” 홍위병들이 몽둥이를 휘두르면서 덮쳐들었다. 상순은 바람개비처럼 날아드는 몽둥이를 피해 몸을 훌쩍 날려 한 키나 되는 벽돌토성 위로 올라 가 날래게 달아났다. 홍위병들이 토성바깥에서 쫓아오면 토성 안으로 몸을 훌쩍 날려 들어가고 토성 안에 따라 들어오면 몸을 날려 토성바깥으로 날아나가면서 제일 먼저 쫓아오는 홍위병 한 둘씩 쳐 눕혔다. 뒤에서 두목인 종연이 죽어가는 소리로 고함쳤다. “그저 나그네 아니다. 달아나라!” 홍위병들은 뿔뿔이 흩어져 도망치기 시작했다. 숱한 구경꾼들이 상순의 날랜 솜씨에 혀를 내두르면서 구경했다. 상순은 토성을 넘어 달아나려는 홍위병 두목의 뒷다리를 잡아끌어 내리었다. 상순은 무쇠주먹을 쳐들고 눈알을 부라리었다. “박 서기를 어데 가뒀느냐?!” “모릅니다. 밤에 잡아오자마자 위에서 그날로 잡아갔습니다.” “어디로 잡아갔느냐? 죽고 싶지 않으면 말해라.” 상순은 주먹으로 그 홍위병의 머리를 한 대 딱 내리쳤다. “앗! 정말 모릅니다. 특무라고 잡아갔습니다. 어르신님.” 상순은 홍위병을 땅바닥에 훌 뿌리치고 공사 사무실로 들어갔다. 홍위병들은 저쪽 먼발치 벽 모서리에 반쪽 얼굴을 내밀고 로지심 같은 상순을 바라보면서 부들부들 떨었다. 상순이 공사 박 서기 사무실로 찾아가보니 문에 열십자로 널을 대고 대못을 박지 않았겠는가! 그 위에 “일본 특무 박우성을 타도하자!”라고 쓴 대문짝 같은 대자보까지 더덕더덕 붙어 있지 않겠는가. “무슨 특무야?! 개새끼들, 진상도 모르면서 좋은 간부를 타도해?” 상순은 대자보를 와락와락 뜯어 땅바닥에 내동댕이치고 발로 짓뭉개버렸다. 이때 파출소 허영호 소장이 소문을 듣고 살기등등해 뛰어왔다. “아이고, 김국장이구먼. 무사합니까?” 허 소장은 상순을 보자 권총을 옆구리에 되차면서 머리를 조아렸다. 홍위병들은 자기들이 그렇게 믿던 허 소장이 상순을 “김 국장”이라면서 허리까지 꿉썩거리며 공손히 대하는 걸 보고 쉬쉬거리면서 뒤로 물러났다. “어서 돌아가지 못하겠느냐? 네 같은 놈들이 우리 김 국장을 이길 거 같니? 옛날 내 스승이자 우리 공안국 국장이시다.” 허 소장이 몽둥이를 들고 복도에 들어오는 홍위병들을 뒤돌아보면서 욕했다. 그제야 홍위병들은 상순을 업신여기지 못하고 뒤로 비실비실 물러섰다. “박서기는 어디에 있는가?” 상순은 다짜고짜 물었다. 허영호는 상순의 두 손을 잡고 공손히 말했다. “김 국장, 갑시다. 우리 사무실에 가서 천천히 얘기합시다.” “언제 국장이 지금도 국장이오? 그렇게 부르지 마오. 홍위병들이 웃겠소?” 상순은 허영호 소장을 따라 진수해파출소로 들어갔다. 상순을 윗자리에 모신 후 허영호 소장은 천천히 입을 뗐다. “김 국장은 나의 영원한 국장입니다. 김국장이 안보 촌에 있는 저를 영월구 공안국에 받아들이지 않았더라면 오늘 소장도 하지 못했을 겁니다.” 상순은 허영호의 진심을 받아들였다. “건 그만 말하고. 박서기 어데 있소?” 허영호는 어조를 낮추어 대답했다. “이건 비밀입니다. 아무와도 말하지 마십시오.” “뭔가?” 상순은 의자 등받이에서 잔등을 떼면서 영호의 두툼한 입을 쳐다보았다. “박서기는 일본 와세다대학 유학생이 아니고 뭡니까?” “그거야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일이지.” 상순은 의자 등받이에 잔등을 붙이면서 심드렁해 했다. 허나 허영호는 의연히 심중한 태도를 보였다. “박 서기는 일어를 잘 하지 않고 뭡니까?” “그래서 어쨌단 말이오. 한마디로 뚝 찍어 말하오.” 상순은 갑갑해 언성을 높였다. 허나 허영호는 일어나 권총집을 뒤로 하면서 상순한테 가까이 다가와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이 일은 나 밖에 모릅니다. 위 공안국에서 저에게 특수임무를 주었습니다. 박우성에게 일본특무 모자를 씌워 투쟁하라고 했습니다.” “뭐라고?” 상순은 놀라는 기색을 보였다. “위에서는 그에게 일본특무 모자를 씌워 투쟁한 후 특수임무를 맡겨 어디에 보냈습니다.” 상순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디로 파견했다는 말이오?” “모르겠습니다.” “이건 너무 하지 않소. 뭐로 파견하겠으면 할 거지. 일본특무라는 억울한 누명을 씌워 붙잡아가듯 하면 박 서기 처자들은 어쩌오?” 허영호도 일어나면서 말했다. “이렇게 혼란한 정황에서도 우에서는 나에게 박 서기는 일본특무가 아니라 우리 공안부문과 안전부문에서 파견한, 특수임무를 맡은 분이라는 것을 몇 십 년 후에까지 증명서라고 했습니다. 박 서기 아내는 누구도 모르는 통화지구 어느 한 소학교에 전근시켰습니다. 이제 몇 해 후면 아무도 모르게 연길의 어느 소학교에 전근시킬 예산이라고 합디다. 박 서기의 종적을 누구도 모르게 감쪽같이 사라지게 한 것입니다.” 그제야 상순은 의자에 되앉으면서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었다. “그러루하면 알만 하오. 고육계를 쓰는 거구만. 어쩌겠소? 나라 안전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바칠 수도 있지. 억울한 모자를 쓰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지.” 상순은 담배쌈지를 꺼내 한 대 피워 물었다. “충성무를 추라는 건 공사 지시오?” 허영호는 아무런 고려도 없이 대답했다. “예. 박우성 서기가 떠나가기 전에 내린 지시입니다. 먼저 각 대대 선전위원을 불러다 충성무 학습반을 꾸리고 전 공사에 보급할 예산입니다. 류소기를 타도한 후 지금 전국적으로 모두 모주석께 충성하는 충성무를 보급하고 모주석의 최고지시를 구절마다 암송하듯이 학습해야 한답니다. 집집마다 모주석의 최고지시를 옹호는 구호를 붙이고 흑판에 모주석의 지시를 색분필로 써놓아야 한답디다. 김 서기도 형세에 뒤떨어지지 마십시오. 그 마을의 선전위원 흥수란 사람도 와서 먼저 충성무를 배우더구먼요.” 흥수 말이 나오니 두 사람 모두 콧방귀를 뀌었다. 허영호도 자기 사촌형 허백호를 물어 먹은 흥수를 두고 속에 앙금이 어지간히 앉은 것이 아니었다. 상순은 허영호를 보고 궁금한 것부터 물었다. “지금 위 정황은 어떠오? 허영주 부 현장이랑 무사하오?” “그러지 않아도 김 서기한테 알리려고 했습니다.” “무슨 일이 있소?” 허영호는 벌떡 일어나는 상순을 보고 일어났다. “지금 반란 파들이 허영주 부현장을 투쟁한답니다.” “뭐라고? 그놈 반란파들이 무슨 이유로 허 현장을 투쟁하오? 그는 항일유격대 출신 노간부요. 조선의용군에서 정성해 서기와 함께 파견한 노간부인데 누가 감히 투쟁한단 말이오?” 허영호도 답답해 담배를 태우면서 두덜거리었다. “무슨 판인지 모르겠습니다. 정성해를 따라 할빈에서 나온 조선족간부들을 돌아가면서 몽땅 붙잡아 감옥에 가두고 억울한 모자를 씌워 투쟁하는 판입니다. 이계삼 서기도 허 현장 같은 조선간부들을 보호한 보황파라고 몰아서 투쟁한답니다.” “개새끼들이 개수작 한다. 다 항일 노간부들인데 타도해? 국민당이나 지주들보다 더 한 놈들이구나.” 상순은 격분해 씩씩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지금 홍위병들은 무슨 놈들인지 모르겠습니다. 쩍 하면 노간부들을 잡아다가 투쟁하면서 말마디마다 혁명한다고 떠듭니다. 아마 이계삼 서기나 허 현장은 그 자리에 있을 것 같지 못합니다.” “누가 감히 그들을 다쳐?” 상순은 눈을 부릅뜨고 허영호를 쏘아보았다. “홍위병들이 반란을 일으킨 목적은 바로 허 현장이나 이서기를 말에서 끌어내리고 자기들이 올라가려는 것입니다. 지금 정성해 서기 가족들이나 친척들마저 농촌에 쫓아 보내 노동개조를 시킨답디다. 이계삼 서기와 허영주 부 현장도 철직시켜 우리 공사 어느 시골 농촌에 보내 노동개조를 시킨답디다.” 상순은 억이 막혀 입을 딱 벌렸다가 다물었다. 한참 후 상순은 천천히 무거운 입을 열었다. “허 소장, 자네나 내나 알지 않는가? 이계삼 서기나 허영주 부 현장은 착오 없네. 모두 항일전쟁 때부터 항일유격대였네. 지금까지 수십년 동안 변항 없이 줄곧 당과 인민에게 충성해온 충직한 간부들이네. 우리는 그들을 보호할 의무가 있소. 다른 곳으로 가면 꼭 여러 모로 고생할 게 아닌가? 될 수 있으면 이 서기와 허 현장을 우리 대대에 보내게나. 내 잘 보필해야겠네. 그 분들은 모두 나를 혁명의 길에 들어서게 이끌어준 스승이고 입당소개인들이네. 목숨으로라도 그 분들을 보호해야겠네.” 그 어조는 어찌나 간곡한지 허영호는 상순의 참된 인간성을 실감할 정도였다. “알았습니다. 홍위병들의 눈치는 보이지만 함흥 촌에 보내드리겠습니다.” 상순은 한숨을 후 내쉬면서 물었다. “홍위병이란 건 어데서 깨난 물건짝들인가?” “북경으로부터 생겨난 조직인데 위로부터 그 기세가 사납습니다. 연길의 반란파들은 할빈으로부터 온 이씨라는 자의 지휘아래 위로부터  지방에 이르기까지 처처에서 노 간부들을 잡아내 투쟁하고 타도하고 노 간부들의 자리를 빼앗아 차지하고 있습니다. 홍위병들은 정성해 서기를 타도하고도 모자라서 정성해 서기를 보호한 김문보 부서기까지 타도했답디다. 그 놈들은 정성해 서기를 붙잡아다가 가두고 무슨 정 서기를 ‘민족반역자’요, ‘민족우파’요, 독립왕국을 꾸리자고 날뛴 놈들을 보호한 ‘매국역적’이라는 모자까지 씌워 투쟁한답니다. 이씨(모원신)는 직접 조남기, 김문보 등 조선족간부들을 불러다놓고 심문하면서 정성해 서기한테 별의별 억울한 죄장을 들씌웠답니다. '정성해는 조선족들이 많이 모여사는 목단강지구와 길림지구를 연변에 떼달라고 했다.',  '연변자치구를 자취주로 고친건 잘못이다. 응당 연변조선족자치구로 회복해야 한다.'  '연변에 조선족독립왕국을 세우려고 했다. 이러루한 억울한 죄명을 들씌워 정성해 서기를 타도하고도 모자라서 정성해 서기가 반역자, 매국역적이라는 걸 승인하라고 조남기, 김문보 부서기 등 조선족간부들을 핍박했답니다. 그런데 조남기, 김문보 부서기 등은 리씨의 터무니없는 날조를 견결히 반격했답니다.  그들은 '정성해 서기는 중국혁명에 중대한 공헌을 한 훌륭한 조선족간부'라고 주장하면서 억울한 루명을 씌주지 말라고 했답니다. 그래서 그들도 지금 날마다 투쟁 맞고 로동개조를 한답니다. 심지어 정성해 서기를 보호한 자치주급 한족간부 전인영이랑 배극이랑 요흔이랑도 비판투쟁받았답니다. 리씨는 그들을 비밀리에 불러다 놓고 '너희들은 한족간부인데 모주석을 따라 혁명하겠는냐? 아니면 조선족매국역절들을 따라 한평생 투쟁받고 지옥에 처박힐 거냐?'고 위협했답니다. 그러나 전인영과 요흔, 배극은 의연희 진리를 견지해 '정성해 서기는 훌륭한 간부이지 반역이나 매국 행위를 한게 없다.'고 증명 섰답니다. 그래서 그들 한족간부들도 조남기나 김문보처럼 투쟁받고 투옥됐답니다. ” 상순은 땅이 꺼지게 한숨을 후- 내쉬었다. “허, 세상에 별난 일을 다 보겠소. 발톱까지 무장한 일본 놈들이나 국민당 앞에서도 꺼꾸러지지 않고 싸워온 노간부들이 그 놈 홍위병들에게 꺼꾸러진단 말인가?” 상순은 김빠진 공처럼 의자에 털썩 물앉았다. "홍위병들을 동원해 로간부들을 타도하는 건 위로부터 새로운 투쟁방식이랍니다." "원참, 교활한 놈들이라구야!" 한참 후 상순은 쇠덩이 같이 무거운 침묵을 깼다. “정성해 서기를 타도하자는 홍위병들이 나왔으면 정성해 서기를 보호하는 조직을 결성해야 할 게 아닌가? 그래 훌륭한 조선족간부가 타도되는 것을 눈을 뻔히 뜨고 보고만 있겠소?” 허 영호 소장은 일어나 권총집을 뒤로 돌리더니 사무실 안을 뚜벅뚜벅 거닐었다. “우리 민경들이야 형사사건이나 처리하면서 중립을 지키라는 상급 부문의 지시가 있습니다. 이번 군중운동에는 참가하지 못합니다. 김문보 부서기랑 정성해 서기를 보호하자고 반란파들에 맞서 싸우다가 목숨까지 바쳤습니다. ” “정치민감성으로 세상이 돌아가는 걸 잘 살피오. 무슨 일이 있으면 알리게나.” 상순의 가르침에 허영호 소장은 순순히 대답했다. “예. 저도 눈과 귀가 있으니까요. 세상형편이 돌아가는 걸 보고만 있을 수 없습니다. 전번에 내 사촌형을 구해 줘서 정말 고맙습니다. 형님도 강한 분이었는데 어쩜 그렇게 억울한 누명을 쓰고 약해졌는지 모르겠습니다. 마음은 꽤나 비좁은 분이어서 전번에 백양나무에 목을 매기까지 하지 않았습니까? 아무쪼록 우리 백호 형님을 많이 도와주십시오. 이전에 백호 형님이 김서기한테 죄를 졌는데 널리 양해해 주십시오. 당시 저도 김서기는 좋은 분이니까. 김서기와 그러지 말라고 형님한테 여러 번 귀띔했습니다. 그런데도 형님은 대약진을 한다고 고집을 부리면서 김서기를 못 살게 굴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아도 김서기한테 미안합니다.” “됐어. 고까짓 일을 잊은지도 오라오. 관건은 지금 어떻게 홍위병들을 대처하는가 하는 문제요.” 이윽고 상순은 영월구에서 수하에게 명령하듯이 허 영호에게 말했다. “허 소장은 먼저 공사마당의 홍위병들부터 철수시키게나. 눈 골 사나워서 어디 공사를 다니겠소?” 허나 허 소장은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힘듭니다. 그들은 권총이 없다 뿐이지만 기세가 사납습니다. 우리 진수해만 해도 몽둥이를 끌고 온 시내를 싸다니는 홍위병들이 수백 명에 달합니다. 그들은 파출소고 뭐고 마구 포위하고 공격합니다.” “좋은 권총을 뒀다가 뭘 하오?” “아직 적아모순이 아니기에 파출소와 군부대에서는 중립을 지키고 어느 쪽에도 무력을 쓰지 못한다는 상급 명령이 있습니다. 헌데 YJ에서는 정성해 서기를 보호하려는 ‘항대’조직과 정성해를 타도하려는 ‘홍색’조직에서 서로 자기 정치주장을 대자보에 써서 붙이던 데로부터 이젠 개판이 됐습니다. 변론하던데로부터 무리 싸움질을 하다가 나중에는 서로 총질을 했답니다. 8.27이란 조직도 나왔답니다. 조선족 여자들은 코신부대라는 걸 무어가지고 정성해 서기를 보호하겠다고 나섰답니다. 그들은 부르하통하에 가서 자갈을 치마에 주어 담아 ‘홍색’ 반란 파들을 맞서 족치는 ‘항대’와 YB대학의 ‘붉은기연대’의 사내대장부들에게 날라다 주었답니다. 싸워서 열세에 처하자 반란파조직의 홍위병들은 중앙에서 파견한 반란 파 두목 이 씨의 지시에 따라 군 분구 무기창고에서 총기를 발급받아 ‘항대’조직에 총으로 사격까지 했답니다. 돌 총 질만 하다가 총을 든 반란 파들의 총격에 수많은 사상자를 낸 ‘항대’조직의 골간들은 적수공으로 반란 파들에게 쫓기어 노동자구락부에 철거해 문을 닫아걸고 걸상과 책상 다리를 끊어 쥐고 최후까지 싸울 각오를 했답니다. 그들을 포위한 홍위병 반란 파들은 두목의 명령에 따라 악독하게도 구락부에 휘발유를 치고 불을 달았답니다. 수많은 ‘항대’의 조선족 사내대장부들은 불길을 피해 구락부 천정에까지 올라가 아래로 벽돌장과 기와를 벗겨 내리 던지면서 필사적으로 최후까지 싸웠답니다. 마지막에 불길 속에서 뛰어나온 ‘항대’의 골간들은 모두 체포돼 감금됐고 모진 고문을 당했답니다. 구락부에서 철거한 나머지 골간들은 모두 의학원 2층 사무청사에 철거해 책상과 널판자로 문을 막고 결사적으로 항거했답니다. 그런데 총을 든 반란 파들을 어찌 당하겠습니까? 그들은 먹을 것이 다 떨어지고 물 한모금도 마시지 못하면서도 사흘을 뻗치었답니다. 2층 사무 청사에서 적수공권인 그들은 권투를 연습하면서 최후결사전을 다짐했습니다. 후에 반란 파들은 스피카에 대고 ‘손을 들고 투항해 나오면 살려준다. 허나 끝까지 항거하면 몽땅 총살할 테다.’라고 을러멨답니다. 그래도 투항하지 않자 반란파들은 작약으로 의학원 토성을 폭파하고 기관총으로 엄호사격하면서 2층 청사로 쳐들어갔습니다. 련 며칠 포위공경에 굶어 모두 쓰러질 지경으로 되어 ‘항대’의 골간들과 ‘코신부대’ 골간 200여 명은 핍박에 의해 손을 들고 하나하나 의학원 사무 청사에서 나왔답니다. 할빈에서 왔다는 반란 파 두목 이씨의 지시에 따라 그들은 몽땅 공안국 경찰들에 의해 반혁명 폭동분자들이라는 모자를 쓰고 감옥에 들어갔답니다.” “큰일은 큰일이구먼. 우리 여기에서 한족과 조선족 형제들은 원래 항일전쟁시기로부터 사회주의 혁명시기까지 얼마나 단결했소? 그런데 반란파들은 민족 분열을 조성하고 있구먼.” 상순은 땅이 꺼지게 한숨을 쉬었다. “그 이 씨란 놈은 중뿔나게 할빈에서 우리 연변에 와서 반란한다오?” 상순은 기실 정규상한테서 대충 들어서 문화대혁며 혀세는 좀 알았다. 그러나 그는 여기저기서 하는 말을 귀담아 들으면서 침묵할뿐  소홀히 말하지 않고 있었다. 허영호는 로상전 앞인지라 시름놓고 들은 말을 줄줄 내리했다.        “듣는 말에 의하면 그 이 씨라는 자는 성이 모씨라고 합니다." "오- 모씨?" "예, 그자는 자기 진정한 신분을 속이려고 일부러 이 씨 성을 달고 막후조종을 한답니다. 그자는 중앙의 모모한 지도자의 조카라고 합니다." 상순은 그저 머리만 끄덕였다. "모씨는 기세가 하늘을 찌를 듯이 사납다고 합니다. 정성해 서기를 타도하고서도 성차지 않아 정성해 동지를 따라 혁명해온 숱한 노지도일군들을 타도하자고 미쳐 날뛰고 있습니다. 주 당교 청사에 전문 심문실을 설칠해놓고 반란파들은 날마다 밤낮 노간부들한테 몽둥이찜질을 한답니다. 당교 청사는 진짜 노간부들의 아우성소리와 신음소리 처참하답니다. 반란파 놈들은 로간부들한테 고춧가루를 눈에 치고 쇠못을 발등에 박아넣고 송곳으로 손톱눈과 항문을 찌르면서 고문한답니다…” “큰일 났구먼. 정성해 서기도 살아나지 못했으니까 다른 조선족지도간부들도 살아남기 어렵겠구먼.” “조선족 간부뿐만 아니라 정성해 서기를 따라 혁명한 한족간부들인 전인영 동지랑 모두 타도대상으로 몰아 부친답니다. 그러니 정성해 서기랑 이계삼 서기랑 허영주 부 현장이랑 농촌에 쫓겨 가지 않고 배기겠습니까? 일부 조선족들도 반란 파들과 합세해 이 기회에 노 간부들을 몰아내고 권력을 장악하려고 미쳐 날뛰고 있습니다. 함흥대대에서는 흥수랑 종연이랑 주의해야 합니다.” 상순은 땅이 꺼지게 한숨만 푸푸 내쉬었다. 속이 탄 마음이 연기로 돼 담배연기와 함께 꾸역꾸역 풍겨 나와 파출소 사무실을 숨 막히게 꽉 채웠다. 그날 상순은 허영호 소장이 식당에 가서 사주는 점심까지 잘 대접받았다. 식당 주위에서 몽둥이를 끌고 맴돌던 홍위병들은 상순이가 허영호 소장이 모는 찌프에 앉아 함흥 촌에 돌아가는 것을 먼발치에서 보고 그저 농촌 나그네 아니구나 하는 낯짝들을 절레절레 흔들어보였다. 상순이 찌프에 앉아 마을에 들어서면서 보니 건조실 부근에서 숱한 마을 사람들이 모여 뭘 만들고 있었다. 허 영호 소장을 먼저 보내고 상순이 다가가 여겨보니 종연이랑 경만이랑 풍로 불에 양철 위에 연을 녹여 충성할 “충(忠)”자를 부어 만들고 있었다. 그것도 마음 “심(心”자 모양 복판에 제법 “충”자를 새겨 은빛처럼 번쩍번쩍 하는데다가 고리를 걸 구멍까지 뒷면에 내서 긴을 꽂아 목에 걸 수 있게 만들고 있었다. “그걸 만들어 뭘 하느냐?‘ 상순이 묻자 종연이 풍로의 풀무를 돌리면서 “모 주석께 충성하는 충성심을 보여주려고 만듭니다. 김서기는 어째 형세에 그리 떨어집니까? 진수해에 갔다가 어째 충성패쪽을 목에 걸고 다니는 걸 못 보았습니까?”라고 했다. 그제야 상순은 진수해 공사 울안에서 충성 무를 추는 사람들과 대문을 지키던 홍위병들이 모두 충성패쪽을 건 것이 눈에 떠올랐다. “헤이 참, 목에 그런 충성패쪽을 걸어야 충성심을 보여준다더니?” “그래도 이걸 걸지 않으면 반동분자로 몰릴 판인데?” 상순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이때 덕돌이 다가와 졸라댔다. “아버지, 나도 충성패쪽을 만들어 줍소.” “애들이 그걸 해 어쩌니?” “성묵이랑 동림이랑 다 만들어 목에 걸었는데도?” 상순은 덕돌의 손을 쥐고 집으로 가더니 물었다. “덕돌아, 연이 없어 불시에 어떻게 만드느냐? 후에 만들자.” “성묵의 아버지는 칫솔 깎지를 녹여 만들었답니다.” “그래? 어디 보자.” 상순은 엉거주춤 일어나더니 조왕간 덕대 위를 두루 살펴보다가 치분을 쳐들었다. “이걸 봐라. 아직도 치분이 절반이나 있는데 어떻게 벌써 녹이겠니?” 그러자 덕돌은 구들에 발랑 들어 누워 발버둥질을 치면서 떼를 썼다. “안 된다, 안 돼. 오늘 꼭 충성패쪽을 만들어 줘야 하오.” “어디 보자.” 덕돌이 울며 두 손으로 눈물을 비비고 닦다가 손가락 새로 여겨보니 아버지가 집안을 두루 살피다가 고기 그물을 쳐들고 보는 것이었다. “됐다. 이거면 충성패쪽을 몇 개라도 만들겠다.” 덕돌은 제꺽 일어나 앉았다. 아버지가 그물에서 모래무치처럼 생긴 것을 떼 내는 것이었다. “그게 뭡니까?” “고기그물의 연돌이야. 몽땅 연이다.” “와, 좋아라.” 상순은 연돌 세 개를 가지고 덕돌의 손을 잡고 건조실로 나갔다. 종연은 연돌 세 개나 보고 욕심나서 손바닥에 놓고 매만지면서 물었다. “연돌 세 개나 필요 없습니다. 한 개면 하나 만들 수 있습니다.” “아니오. 덕돌이 걸 하나에 내꺼 하고 홍자 꺼도 하나 만드오.” 종연은 아쉬운 듯이 “헛 참, 연을 남겨서 내 하나 가질 까 했더니. 안되겠어.”라고 했다. “그럼 충성 패를 만든 수고비를 주는 셈 치고 하나 만들어 가지게나.” “그럼 그렇겠지. 김서기 제일이야.” 한참 후에 종연과 수봉은 덕돌에게 은빛이 번쩍번쩍 나는 연충성패쪽을 주었다. 덕돌은 아직도 따뜻한 충성 패쪽을 가지고 모택동 주석의 충성스러운 전사로 된 듯한 긍지감으로 한 가슴이 뿌듯해났다. 생글방글 하는 늘그막에 본 아들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상순은 흐뭇해 세월의 풍파에 벌거스름하고 거멓게 그은 얼굴에 벙긋이 웃음을 지었다. 정오가 지난 하늘에는 따가운 태양이 불비를 퍼붓고 있었다. 곡식 잎사귀들이 타들어갈 듯이 녹아내려 맥없이 축 늘어졌다. 사원들은 축 늘어진 옥수수 이파리와 수수 이파리들을 보고 하늘을 쳐다보면서 죽는 소리로 중얼거렸다. “에이유, 저 놈의 해, 어째 불처럼 뜨거운 열기만 내리 뿜소. 가물어서 올해 농사는 또 끝장이로구먼.” “글쎄 말이오. 하늘도 무심하오. 소낙비를 억수로 쏟아 붓지 않으면 불비를 쏟아 부으니 어쩌오? 또 졸라매야겠구먼.” 그때 어디에서인가 스피카에서 “동방홍”이란 노래 소리가 벌판을 휩쓸면서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동방홍 중국에 모택동이 태어났네 그이는 인민에게 행복을 주네 후얼 헤이요 그이는 인민의 대구성이라네             13. 돌을 들어 자기 발등을 까      어제는 태양이 불비를 퍼부어 가문가 싶었는데 오늘은 소낙비가 연속 사흘이나 퍼부어 태평강 강물이 불어 홍수가 제방 둑을 뚝 끊어 놓고 논밭을 마구 뜯어갔다. 상순은 사원들을 데리고 버드나무를 끊어다 큰물이 제방 둑을 더 뜯어가지 못하게 막는다, 패용천산과 칼산의 돌을 실어다 제방 둑을 구축하느라고 여념이 없었다. 상순은 바위 돌을 굴려 제방 둑을 쌓다가 하늘을 쳐다보았다. 허나 하늘은 구름이 흩어지기는커녕 먹장구름이 점점 더 두텁게 몰려와 어둠침침하게 대지를 뒤덮었다. 대살 같은 소낙비가 쏟아지더니 나중에는 밤알 같은 우박을 마구 쏟아 부었다. 여기저기에서 탁구공 같은 우박들이 떨어져 흙물방울이 사처로 튕겨 올랐다. 소들은 우박에 맞아 아픈 대가리를 흔들어대면서 하늘을 원망하듯이 눈알을 부라렸다. 코 깜장이는 벌써 돌을 꽉 박아 실은 수레를 끌기 싫어 대가리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한 발자국도 나가려고 하지 않았다. 상길은 별 수 없이 소를 멈춰 세우고 수레 밑에 들어가 소낙비와 우박을 피하지 않으면 안 됐다. 흥수의 그림자는 근본 뚝 막기 공지에서 보이지도 않았다. 이 시각 그는 어떻게 하면 “문화대혁명”의 동풍을 빌어 병완과 상순을 쓸어버리고 대대 당 지부 서기자리를 차지하겠는가고 길쭉한 남북골을 쥐여 짜고 있었다. “그래 ‘문화대혁명’ 동풍을 빌어 청년 반란 파들의 힘을 빌려 병완과 상순, 으흠, 김 씨 네 족벌체계를 부셔 버려야지. 이번에는 확실하게 김씨 네를 몰아내고 대대 일인자 자리를 차지해야지.” 그는 외까풀 눈을 내리 깔더니 좁은 이마를 딱딱 치면서 함흥 촌에서 합당한 반란 파들을 물색했다. 한참 후에 그는 무릎을 탁 치면서 일어났다. “옳다, 바로 그 놈이야. 종연과 승연이, 송희야, 그 놈들이야.” 흥수는 사기 올라 어깨춤을 덩실덩실 추더니 흥분이 가라앉지 않아 대대 사무실 안을 왔다 갔다 했다. “그래, 바로 그 놈들이야. 종연 형제나 송희는 권력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반란을 일으킬 놈들이야. 성환은 폐결핵에 걸려 피를 토하다나니 대학시험장에도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농촌에 돌아온 놈이야. 그래, 그 놈 자식은 농촌에서 썩기 아까운 놈이지. 그 놈이 어찌 이 좋은 기회에 반란을 일으키지 않겠는가!” 흥수는 인차 종연과 송희를 불러 반란할 구체 계획을 말해 주었다. 종연은 흥수를 마주 바라보며 말했다. “예, 아주 좋은 일입니다. 반란해야지오. 우리 마을 청년들을 동원해 먼저 상순 서기네 집을 치게 할게. 치보 주임은 구경만 하십시오.” 허나 흥수는 손사래를 저었다. “아니오. 나도 가겠소. 이 관건적인 혁명투쟁마당에 내가 뒤에 물러서서야 되오? 난 정면으로 나서 상순을 붙잡아다가 투쟁하겠소.” 흥수는 그들을 보낸 후 피씩 웃었다. “자고로 권력과 돈, 여색에는 그저 넘어가는 영웅이 없다고 했다더니. 허 참, 권력투쟁을 위해서는 숙질간에도 마구 잡아먹는 세상이지.” 흥수는 철봉이랑 자기 삼촌에게 반란을 일으키지 않아 반란을 망칠 까봐 근심됐다. 하여 만일을 대비해 따로 한족청년들을 비밀리에 동원했다. 그러나 흥수는 오산했다. 그날 저녁에 성환은 흥수랑 반란파들이 반란을 일켜 외노할아버지와 외큰아버지를 붙잡아 투쟁하련다는 중요한 정보를 병완과 상순에게 알리면서 미리 피신하라고 귀띔해 주었던 것이다. 허나 병완과 상순은 피신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 놈들이 어찌 하는가 어디 두고 볼 테다.” 상순은 반란 파들이 오기를 기다렸다. 한편 흥수는 반란 파들을 토성 안 대대 사무실 마당에 불렀다. 그런데 종연과 승연, 인국과 인철이 보일뿐 철봉과 종학, 지어 성환마저 보이지 않았다. “아니, 어떻게 된 판인가?” 흥수는 조카 인철에게 물었다. 그러자 인철은 손사래쳤다. “삼촌, 생각해 봅소. 누가 자기 노 할아버지나 오촌 숙을 붙잡으러 나서겠습둥?” “내 오산했구나.” 흥수가 한창 실망한 나머지 김이 빠진 공처럼 마루에 들어앉을 때었다. 숱한 한족 청년들이 삼삼오오 토성 안에 모여들었다. 그들 속에는 지주 자제들인 장충국, 장미련 오누이에 지학사네 아들 지괴호, 지주 장풍객의 아들 장신하도 끼여 있었다. 장풍객은 장학산의 동생인데 금방 죽은 자기 형의 원수를 갚으려고 아들 장신하를 반란파들을 따라 나서서 상순과 병완을 투쟁하라고 추겼던 것이다. 장신하는 장풍객의 일본 첩에게서 얻은 아들로서 사촌형 충국의 말을 듣고 담대하게 나섰던 것이다. 흥수는 반란 파 수십 명을 무어가지고 손을 홱 저었다. “출발!” 반란파들은 구질구질 내리는 비도 아랑곳 하지 않고 기세등등해 곧추 조개덕으로 내려갔다. 먼저 병완의 집을 들이쳤다가 풀을 건드려 뱀을 놀랠 까봐 그만 두었다. 황차 늙은 병완은 이미 대대에서 물러나 앉았는데 반란해 보았자 먹을알이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대대 당지부 서기 상순부터 타도하는 것이 관건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비가 내려 반란파들이 동요할까 봐 계속 선동했다. “오늘 우리는 김서기를 확실하게 반란해 우리 대대 사무실에서 몰아내야 하오. 그러잖으면 우리 함흥촌은 대대로 그 김 씨들 세상이 되고 마오.” 반란 파들은 “옳소.”하고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 대답소리에는 한족 말과 조선말이 섞여 들렸다. 한편 명옥은 성환에게서 반란파들이 들이칠 것이라는 기별을 듣고 상순을 보고 피신하라고 했다. 허나 상순은 애들을 피하게 해놓고 자기는 피할 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문 뒤에 방치를 한 자루 갖춰 놓고 비 내리는 밤 어둠이 두텁게 포위한 바깥을 내다보면서 반란 파들이 오기를 기다렸다. 이때 저쪽에서 몇 가닥의 전지불이 소낙비가 대살처럼 쏟아지는 밤하늘을 어지럽게 헤가르면서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옳지, 정말 오는구나.” 상순은 한 손에 방치를 잡고 다른 손에 전지를 잡았다. 이때 숱한 전지불이 일시에 상순이네 집 안을 비추더니 구호소리가 비가 구질구질 내리는 어두운 동네에 울려 퍼졌다. “김상순을 타도하자!” “김서기를 타도하자!” “상순 놈 새끼는 대대 당 지부 서기를 내놓고 물러가라!” 그러자 상순은 창문을 열어 재끼고 전지불로 억수로 쏟아지는 소낙비 속에 반란 파들의 어두운 그림자들을 하나하나 비춰보았다. 그는 전지불로 흥수의 낯을 찾아내자 목청을 가다듬어 고함쳤다. “흥수!  잘 하는구나. 지주 새끼들을 데리고 와서 공산당 서기를 반란할 텐가! 넌 공산당원이냐? 지주, 부농, 반동파들의 이익을 대표한 국민당원이냐?” “반란이다! 반란! " "어서 서기 자리를 내놓고 함흥대대를 떠나라! 그러지 않으면 네 놈의 대갈통을 까부시고 집에 불을 질러버려!” 그 소리에 반란 파들은 당장 집으로 들이덮쳐 올 잡도리를 했다. 허나 상순은 아주 침착하게 전지불로 이번엔 어두운 그림자 속에서 주봉을 비추더니 고함쳤다. “주봉아, 넌 자기를 젖을 먹여 살린 양 엄마를 붙잡아갈 테냐? 잡아 가겠으면 어서 집에 들어와서 잡아 봐라!” 어둠 속에서 주봉의 죽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가 들릴락 말락 했다. “내 어디 양 엄마를 붙잡잡니까?” “그럼 흥수를 따라 와 뭘 하니?” “구경하러 왔습니다. 어느 새끼 우리 양아버지와 양엄마를 건드려 봐라. 가만 놔두지 않겠다.” 그 소리에 반란 파들 어두운 그림자들 속에서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흥수는 반란 파들이 동요하기 시작하자 고함쳤다. “반란파 동지들, 겁내지 말라. 나를 따라 쳐들어가 허영주 현장과 이계삼 서기 보황파 두목을 붙잡자!” 상순은 전지 불에 방치를 쳐들어 보이면서 맞받아 고함쳤다. “어느 놈이 감이 우리 집에 한 발자국만 들여놓았다간 이 방치가 가만 있지 않을 거다! 난 적수공권으로 일본 놈들과 장개석 토비 놈들도 때려 눕혔다. 미국 놈들도 내 무쇠주먹에 즉살했어. 네깐 놈들이 어쩔 테냐? 어디 덤벼봐라!” 총알이 빗발치는 숱한 전쟁마당에서 숱한 놈들을 족치면서 살아남은 특전사 출신 상순의 무예솜씨를 알만큼 아는 황종연 형제와 반란 파들은 서로 눈치를 보면서 감히 덤벼들지 못했다. 그때라고 상순은 무서운 무기를 썼다. “너희들은 들어라! 이 상순이 무슨 죄 있느냐? 난 손바닥만 한 땅도 없이 조선 고향을 떠난 너희 부모들을 이 마을에 받아 주었다. 우리 할아버지와 함께 당의 영도아래 저 장학산과 지학사 같은 지주를 청산해 너네 부모들한테 밭을 나눠주고 배불리 먹고 살게 했다. 우리 할아버지와 나는 너희들의 부모들을 이끌고 토비를 숙청해 마을을 보위했고 너희들이 공산당의 따뜻한 품속에서 행복한 나날을 보내게 했다. 우리 조손 3대는 제일 일찍 이 마을에 들어와 황무지를 개간한 밭을 몽땅 내놓고 너희 부모들을 이끌어 멍지뫼산 앞 모래밭을 개간해 논을 풀었고 칼산과 패용천산 사이 골짜기에 과수원을 차렸다. 그래서 너희들은 배불리 먹고 살게 됐다. 이것도 죄냐? 너희들이 대대권력찬탈에 눈이 벌개 미쳐 날뛰는 흥수의 꼬드김에 들어 이렇게 반란하면 누가 좋아하겠느냐? 너희들이 그래 저 장충국이나 지괴호 같은 지주 새끼들이 좋아하는 노릇을 하겠느냐?” 반란파들 속에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뒤이어 반란 파 무리 속에서 몽둥이를 버리고 어둠속에서 하나, 둘 떠나가는 것이 보였다. 황급해난 흥수는 돼지 멱따는 소리를 쳤다. “개 소릴 작작 치고 오라나 받아라!” 흥수는 미리 준비한 바를 상순에게 훌 뿌렸다. 허나 날랜 상순은 날려 오는 바줄을 피하면서 방치에 걸아 감아쥐어 홱 당겼다. 흥수가 어찌 힘으로 상순을 당할 수 있었겠는가! 흥수는 앞으로 무릎을 딱 쪼면서 푹 꼬꾸라졌다. “뭣들 하느냐? 보황파 두목을 붙잡아라!” 그제야 충국과 장신하, 지괴호가 문께로 다가들었다. 딱! 딱! “아야!” “마야!” 비명소리와 함께 쓰러진 것은 상순이가 아니라 충국이다. 상순은 창문 밖으로 뛰어 나가면서 방치로 날아드는 몽둥이를 막으면서 연신 발길과 방치를 날렸다. 충국과 흥수가 연이어 꺼꾸러졌다. 지괴호는 맹호와도 같이 펄펄 날뛰는 상순을 보자 질겁해 뒤로 비실비실 물러서다가 도망쳤다. 상순은 그래도 덮쳐들려는 반란 파들을 보고 흥수의 목을 짓밟고 서서 땅방울 같이 고함쳤다. “물러서지 못할까! 어째 흥수 꼴이 되고 싶은가!” 그때 갑자기 뒤에서 “앗!” “아이쿠!” 하는 비명소리가 들렸다. 상순이 전지 불을 비춰 보니 어둠 속에서 매부 최학철과 사위 경만, 조카들인 철봉, 종학, 철국, 성환, 그리고 양아들 주봉까지 반란 파들을 뒤에서 족치고 있었다. “뛰어라!” 반란파 무리 속에서 누군가 소리치자 반란 파들은 소낙비 속에서 질척질척한 진창을 밟으면서 어지럽게 도망쳤다. 상순은 한발에 한 놈씩 흥수와 충국을 걷어차 놓았다. “흥수야, 서기 자리가 그렇게도 욕심나더냐?” 상순은 흥수의 좁은 낯에 침을 택 뱉었다. 뒤이어 그는 충국의 배를 걷어 차놓으면서 을러멨다. “너 같은 지주 놈 새끼 감히 대대 서기를 반란해도 되는 세월인가 하느냐? 망상이다. 망상!” 상순은 방치를 내동댕이치면서 호통 쳤다. “충국아, 이 놈, 아직도 반동사상을 개조하지 않았구나. 어째 하늘땅이 뒤바뀐 줄 아느냐? 어림도 없다.” 흥수는 목을 밟혀 숨이 막혀 진창에서 허우적거리며 이를 뻑뻑 갈았다. 반란은커녕 찍소리 한번 제대로 치지 못하고 개꼴망신 당한 흥수는 이튿날부터 대대 사무실에 얼씬거리지도 못했다. 그는 집에서 팅팅 부은 낯가죽을 매만지며 이를 뿌득뿌득 갈았다. 그는 진종일 집구석에 박혀 있으면서 어떻게 상순을 몰아낼 것인가 궁리하며 속을 끙끙 앓았다. 그는 상순의 과거를 훑으면서 어디를 비수로 푹 찌르면 단통 피를 왈칵 쏟으며 쓰러지겠는가고 흠집을 찾기 시작했다. 온 종일 낑낑거리던 그는 끝내 뭔가 찾아낸듯이 일어나 앉더니 머리를 싸맨 수건을 잡아 홱 벗겨 내던졌다. “옳지. 이번엔 네 놈이 어찌 하겠느냐? 어디 살아남는가 보자!” 허나 그는 신으려고 잡았던 신짝을 놓으면서 다시 생각해보았다. (나도 한국에 나갔을 때 상순이네 친척집에 숨어 목숨을 건지지 않았는가? 괜히 잘 못 건드렸다가 나도 한국특무라고 몰리지 않을까?) 한참 후 흥수는 다시 신을 신고 바깥으로 나갔다. “어디로 가오?” 토성 밑으로 나가다가 흥수는 토성 안에서 나오는 처형 지새금의 길쭉한 얼굴을 만났다. “상순을 놔두는가 보오. 그 놈은 남조선 특무요.” 흥수의 살기등등한 말을 듣자 지새금은 팔소매를 붙잡고 말리었다. “생원이, 우리 시동생이 뭘 잘 못했다고 이러오? 양? 자넬 입당시켰고 선전위원까지 시켰으면 됐지. 뭐가 모자라서 항상 그러오? 제발 그만하오.” “픽! 아주머니, 삐치지 말락꼬.” 흥수는 외까풀 눈을 부라렸다. 지새금은 팔소매를 활 뿌리치는 흥수를 따라가면서 말렸다. “제발 그만두오. 우리 시동생 없이 내 누굴 믿고 살겠소?” “근심도 하지 마오. 그 새끼 없으면 이 사촌생원이 있잖아.” 지새금은 말려서 듣지 않자 위협조로 한 마디 내뱉었다. “이제 돌을 들어 제 발등을 까지 않는가 봐라!” 허나 흥수는 어깨가 으쓱해 토성 안으로 쥐새끼처럼 쪼르르 달려 들어갔다. 그는 종연이랑 반란 파 무리를 데리고 두 번째로 반란을 꾀하였다. 그는 상순을 힘으로 체포하려 해선 안 된다는 것을 심심히 느꼈다. 하여 그는 우선 상순이가 확실히 나쁜 놈이라는 여론을 조성한 후 서서히 일을 도모하기로 작심했다. 그리하여 그는 먼저 너무 투쟁을 맞아 사상고민을 하다못해 거의 죽어가는 덕성 영감을 대대 사무실로 끌어다가 얼리고 닥쳤다. 흥수는 사무 상에 틀스레 앉아 허수아비처럼 서있는 덕성의 아래 위를 훑어보더니 단도직입으로 위협했다. “김 영감, 죽고 싶소? 살고 싶소?” 덕성은 어정쩡해 흥수를 바라볼뿐 입에 빗장을 지르고 있었다. “영감은 한국 특무의 삼촌이란 말이야. 한국 특무로 몰리어 감옥에 가서 노동개조를 하다가 죽겠어? 아니면 내 말을 고분고분 듣고 한국 특무모자도 벗어버리고 함흥 대대에서 편안히 살겠어?” 덕성은 숙였던 머리를 천천히 들면서 흥수를 쳐다보았다. “어쩌자는 기여? 이 치보?” 흥수는 외까풀 눈을 가슴츠레 뜨고 흥수를 깔보면서 음흉한 속심을 서서히 드러냈다. “영감, 살겠으면 내 하라는 대로 하면 돼. 듣는 풍문에 이전에 고향 명천에 있을 때 병완 영감은 일본 경찰국을 짓는 공지의 총 도감이라면서? 일본 특무 아니고 뭐요? 병완 영감이 일본 특무면 상순은 일본 특무의 손자라 당 지부 서기는커녕 감옥에 가야 할 게 아닌가?” 덕성 영감은 구부정한 허리를 겨우 펴면서 흥수를 흘낏 쳐다볼 뿐 아무 말도 없이 목석처럼 덤덤히 서있었다. 흥수는 자기 말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알고 계속 늘여놓았다. “영감이 내 시키는 대로 하기만 하면 내 영감의 특무 모자를 벗겨 주겠네. 지금 ‘문화대혁명’ 바람이 세차게 불어오고 있어. 상순은 더는 서기를 할 수 없어. 대대 치보인 나는 영감을 살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단 말이야. 알만 해? 명지하게 선택하란 말이야.” 덕성은 주름살이 조글조글한 얼굴을 들더니 흥수를 흘겨보면서 중얼거리었다. “어찌 병완 영감을 물어 먹으락꼬 그래? 그 영감은 총 도감이었지만 경찰국을 무너지게 지었어. 건데 일본 특무라니 무슨 말인고?” “영감!” 흥수는 생강처럼 바짝 마른 손으로 사무 상을 꽝 내리치더니 벌떡 일어났다. 그는 외까풀 눈을 부릅뜨고 고래고래 호통 쳤다. “어째 죽고 싶은가?!” 덕성은 파뿌리처럼 흰 머리를 숙이었다. “영감, 똑똑히 노오. 병완 영감과 상순을 보호해 먹을알이 있어?” 흥수가 구슬렸지만 덕성은 우물거렸다. “그래도 어찌 한 고향에서 온 짜개바지 친구를 물어 먹겠어?” “김 영감, 병완과 상순이 한 고향 친구라고 영감에게 사정을 두던가?” 흥수는 덕성의 가까이에 다가와 귀에 대고 낮은 목소리로 존대를 쓰면서도 선뜩선뜩한 말을 횡설수설했다. “병완과 상순이 영감의 조카 용천 대장을 한국 특무라고 체포해 총살한 일을 벌써 잊었어요? 그 놈들이 영감과 한 고향 친구라고 사정을 두던가? 어째 이 기회에 원수를 갚을 생각을 하지 않아요? 잘 생각해 보세요.” 덕성은 머리를 점점 숙이더니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대대 사무실 안에서 흥수는 한참이나 덕성 영감을 얼리고 닥쳤다. 그날 저녁에 흥수는 돌멩이를 쥐어 토성 안 늙은 비술나무에 매단 쇠 종을 댕, 댕, 댕 두드렸다. “사원대회를 합니다. 여섯시 전에 대대 토성 안에 모이시오!” 해 지기 전에 사원들은 토성 울안에 모이었다. 상순은 할아버지를 부축하여 토성 안에 들어섰다. 그들은 흥수가 또 무슨 회의를 소집하는가를 알아보려고 왔던 것이다. 덕성은 병완과 상순을 보더니 머리를 숙이면서 한쪽으로 피해 앉아 있었다. 흥수는 마루 위에 올라서서 가물에 실 돌피 같은 목을 빼들고 득의양양해 고래고래 고함쳤다. “병완과 상순은 들으라. 병완 영감이 일본 특무라고 고발하는 사람이 나타났어.” “일본 특무라니?” “말도 안 되오.” 병완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 병완 영감은 우시장 경찰국을 지을 때 일본 끼무라 국장한테서 총 도감을 임명받은 일이 없었는가?” 병완은 숨김없이 말했다. “있소. 허나 나는 일본 놈들의 경찰국과 다리를 무너지게 만들었소. 그런데 일본 특무라니?” “건 새빨간 거짓말이야!” 이때 덕성이가 숱한 사람들 속을 비집고 앞에 나서더니 병완을 손가락질 하면서 대성질호했다. “저 병완 영감은 일본 경찰국장 끼무라 놈이 우리 민공들 속에 파견한 특무였네.” 그 생 똥 같은 소리에 여기저기에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병완 영감은 일본 놈들에게서 로임을 받아먹으면서 총 도감을 해서 경찰국을 지어 바친 극악무도한 일본 간첩이네! 이건 내가 증명 설 수 있어.” 덕성의 터무니없는 무함에 병완은 머리를 숙이는 덕성을 바라보았다. “덕성이, 우린 남쪽 경주에서 온 자네를 우리 고향에 받아주고 함께 산 친구가 아닌가? 일본 놈들의 피해를 받아 우린 함께 정든 고향을 떠나 여기까지 쪽박을 차고 왔지. 이젠 우리 모두 저세상으로 갈 사람들인데 이제 몇 년을 더 살려고 사람을 무함하는가? 에이, 참. 사람이 원, 흥수가 그렇게 무서운가? 사람이 아무리 겁을 집어먹어도 얼빠진 사람처럼 횡설수설해서야 쓰는가? 사람이 양심이 있어야지. 양심을 잃고서야 후에 어찌 이 세상 사람들을 보고 살겠소?” 덕성은 뒤로 비실비실 물러서면서 머리를 숙였다. 흥수는 병완의 앞으로 다가오면서 고래고래 고함쳤다. “일본 특무 영감, 누구 입을 막으려고? 어림도 없어. 분명 영감은 일본 경찰국 공지 총 도감이야. 일본 놈들의 경찰국도 지어준 거 사실이야. 계속 떼를 쓸 작정인가?” “여러분, 이젠 일본 개다리 병완 영감은 다시는 공산당원이 아니오. 상순은 일본 개다리 손자이기에 서기 자격이 없습니다.” 흥수는 득의양양해 뒷말을 이었다. “상순은 남조선 특무입니다!” “남조선 특무?!” “예.” 흥수는 두 팔을 걷고 역설했다. “나에게는 증거가 있습니다. 항미원조 전쟁 때 우린 대대장인 상순을 따라 군복을 싣고 남으로 나가다가 령 길을 잘못 들어서서 한국 충청남도 서현군 한산면의 한 마을에 피신한 적이 있었습니다. 상순은 그 마을에 친척이 있었습니다. 그때 김치 움에서 버스럭거리며 무슨 쪽지 같은 거 써서 함지에 두고 나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분명 한국 놈들과 내통했습니다. 그러지 않으면 우리가 그 마을에 숨었을 때 어떻게 인차 한국 괴뢰군 놈들이 마을까지 뒤쫓아 와 수색할 수 있었겠습니까? 병수랑 돼지 굴에 숨었다가 들키어 하마터면 죽을 번했습니다.” 흥수는 병수를 찾아내 도움을 받으려고 들었다. “병수, 옳지?” 그러자 병수는 앞으로 나오면서 “그런 일이 있긴 있소.”라고 말하더니 뒤 말을 이었다. “그러나 짝 시비를 해선 안 되오. 그때 상순의 고모부네 일가가 밥을 지어 주지 않았더라면 우린 몽땅 남조선 땅에서 굶어 죽었을 겁니다.” 태수랑 나서서 흥수를 손가락질하면서 욕했다. “사람이 양심이 있어야 하지. 그때는 상순의 친척 덕분에 살아남아 가지고 지금 와선 남조선 특무로 물어먹으면 되오? 당신은 괴뢰군 동생과 전장에서 만나 뭐라고 쑤근거렸소?” 병수는 아주 격분해 했다. “상순이 남조선 특무면 남조선 괴뢰군 동생까지 있는 당신은 남조선 특무가 아니란 말이오?” 그때 종연이가 나서서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옳소. 몽땅 특무들이오.” 그러자 반란 파들이 소리쳤다. “남조선 특무들을 타도하고 새로운 당 지부를 건립하자!” “남조선 특무 상순과 흥수를 몽땅 타도하자!” 흥수는 병완과 상순을 한국 특무로 몰아 타도하자고 벌린 연극인데 이런 반전 결과를 가져 오리라고 생각지도 못했다. 참말로 돌을 들어 자기 발등을 깐 격이 되고 말았다. 흥수는 입을 짝 벌리고 종연이랑 반란 파들을 멍해 바라보았다. 병완과 상순은 흥수를 흘겨보면서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반란 파들은 그날 저녁부터 대대 사무실을 점령하고 병완과 상순 그리고 치보주임인 흥수마저 대대 사무실에 얼씬하지 못하게 했다. 이튿날 이른 아침 춘실이 물동이를 이고 토성 바깥에 있는 우물로 물을 길으러 갔다가 깜짝 놀라 비명을 질렀다. 드레박 줄에 덕성 영감이 목을 맸던 것이다. “어마나! 목을 맸다!” 상순과 덕팔이 달려가 보니 덕성은 혀를 한발이나 빼물고 드레 박 줄에 목을 맨 채 데룽데룽 매달려 있었다. “이 우물의 물을 어떻게 먹겠니?” 다가오는 상순과 흥수를 보고 춘실이 중얼거렸다. 그런데 상순과 덕팔이 드레박 줄을 끌어올린 후 덕성 영감의 목에 맨 드레박 줄을 풀면서 보니 그의 손에는 무슨 종이 쪼박이 쥐어져 있었다. 꽛꽛하게 굳은 손가락을 겨우 풀고 꼬깃꼬깃한 종이 조박을 펼쳐보니 거기에는 연필로 이런 글이 또박또박 쓰여 있었다.   병완이, 난 양심이 없네. 목숨을 걸고 일본 경찰국을 무너뜨린 자넬 물어먹었으니까. 항일투사께 죽을죄를 졌네. 자네와 마을 사람들을 볼 면목이 없네. 양심 없는 고향 친구를 용서하게.   이때 경주가 달려왔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그는 눈을 뻔히 뜬 채 혀를 빼문 덕성을 보는 순간 그 참상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는 할아버지를 껴안고 “할아버지!” 하고 목 놓아 태성통곡을 쳤다. “할아버지, 이 험악한 세상에 나 홀로 남겨놓고 떠나가시면 어떻게 해요? 난 누굴 믿고 살아가래요? 네?” 그 와중에도 흥수는 상순의 손에서 덕성의 쪽지를 빼앗아 가려고 홱 채갔다. 덕팔은 쪽지를 빼앗으면서 고래고래 고함쳤다. “이건 좋은 증거네. 아무렴 덕성이가 그렇게 양심 없는 짓을 할라고? 흥!” 상순은 허리를 쭉 펴고 일어나면서 흥수를 쏘아보았다. 흥수는 겁을 집어먹고 뒤로 비실비실 물러섰다. “사람이, 서기 자리가 욕심나는가? 정 하고 싶으면 해보게나. 우리 마을 사원들을 배불리 먹고 살게 할 수만 있다면 난 대대 서기를 내놓겠네.” 흥수는 아직도 미련을 가지고 좁은 얼굴에 시무룩이 웃음을 지었다. 먹장구름이 뒤덮인 하늘에서는 장마 비가 구질구질 내리었다. 소문을 듣고 병완은 지팡이를 짚고 와서 덕성의 뒤처리를 거들면서 뜨거운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저 멀리 칼산에서 불구렁이가 산허리를 자를 듯이 번쩍 휘감더니 우르릉 꽝 요란한 천둥소리가 하늘땅을 진감했다. 소낙비가 억수로 퍼붓는 천지꽃산 비탈에 또 정치투쟁마당에서 희생된 한 원혼이 묻힌 묘지가 하나 더 생겨났다.  
155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100) 댓글:  조회:1039  추천:1  2018-05-11
                          9. 사라진 여 교원        소낙비가 내린 후 동녘 하늘에는 칠색무지개가 곱게 걸렸다. 반짝 뜬 햇빛은 이슬을 꿰어 끊임없이 황홀한 무지개를 발산했다. 진짜 신화나 동화 속 한 폭의 아름다운 산수화 같았다.       초가집 추녀 끝에는 아직도 빗물이 대롱대롱 매달렸다가도 땅바닥에 고인 빗물에 촐랑촐랑 떨어져 수많은 물방울로 부서져 튕겼다. 흥수네 집 추녀와 구새 사이에 거미가 슬금슬금 기어 나와 한창 다시 먹이를 낚으려고 거미줄을 치고 있었다.       집안에서는 애들이 학교를 다 간 뒤라 춘실이 한창 댕댕거렸다.       “더러운 나그네 새끼, 되놈 가시나 새끼와 지랄해 보니 어떻던? 어쩌지 못하면서 달려들기는 잘 달려든다. 맥이 뻗히면 변소나 칠 게지. 똥이 엉덩이를 찌를 지경이다.” 흥수는 머리를 가로 저으면서 바닥에 내려가 신을 신고 밖으로 훌 나가버렸다. 등 뒤에서는 춘실의 앙칼진 목소리가 귀전을 때렸다. “젊은 각시들과 지랄해보면 시래기처럼 된 게 살아날 거 같아?” (그래, 어쩐지 미련한테 들이대니 그게, 헤헤헤.) 흥수는 히쭉 웃고 나서 대대 사무실로 나갔다. 상순은 대대에 별로 다른 일이 없자 일 밭으로 나갔다. 흥수는 대대 간부답게 사무실을 지킬 줄을 모르고 일 밖에 모르는 상순을 코웃음 치면서 신문을 뒤적였다. 그런데 좀 앉아 있으니 그것이 또 꿈틀거리면서 간질거려 참을 수 없었다. “허 참, 내 약을 먹은 것도 아닌데. 왜 이러지?” 흥수도 이상할 정도였다. (혹시 미련과 그걸 했더니 양물이 치료된 건가?) 흥수는 조개턱을 설레설레 저으면서 미련한테 다시 갈까 하다가 쌍까풀눈을 뚝 부릅뜬 충국이 떠올라 그만두었다. 그런데 그것이 자꾸 불룩하게 치밀어 올라 어쩌는 수 없었다. 흥수는 충국의 부릅뜬 쌍까풀눈을 말상을 흔들어 쫓아 보냈다. 충국의 성난 사자 얼굴이 사라지자 불현듯 오옥선의 보름달 같은 얼굴이 눈앞에 삼삼거렸다. “옳다, 네 놈들이 내 비준도 없이 먼저 임신부터 해. 온 동네에 소문을 자자하게 놓으면서. 충국 놈은 담이 큰 놈이야. 목숨을 내걸고 덤벼든단 말이지. 더러운 개구리 새끼 감히 학의 고기를 탐내? 뭐, 결혼 소개신을 떼 달라고? 임신 했어? 말도 안돼.” 흥수는 옥선을 찾아가 임신했는가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옳다. 도대체 어떤 정황인가?” 그는 사무 상 위의 신문을 활 집어 던지고 벌떡 일어섰다. “정 선생을 데리고 갈까?” 주춤 멈춰 서서 궁리하던 그는 생각을 고쳤다. “아니야. 혼자 가야지. 꽃도 따고 임도 보고 좀 좋아서.” 흥수가 대대 사무실을 나가려고 할 때다. 범이 자기 흉을 하면 온다더니 생각 밖에도 옥선이 토성 안에 들어서지 않겠는가! 흥수는 대번에 반색했다. "에헴, 에헴"      흥수는 헛기침을 하며 인차 치보 주임의  위엄을 차리면서 못 본 체 했다. 아래 칸 위생소에 정 선생도 있고 그 위집에는 새금이 일 밭으로 나가려고 서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위생소로 들어가려니 한 옥선이가 뜻 밖에도 대대 사무실에 들어섰다. “치보 주임, 저 충국을 가만 놔둡니까?” “어, 그러잖아도 널 찾아가려고 했어. 너희들 언감 이 치보주임 비준도 없이 임신부터 했어? 어디 오늘부터 투쟁받을 준비나 해.” 허나 옥선은 대수로워 하지 않았다. “죄 없는 사람한테 또 누명을 씌울 예산입니까?” “그래 치보 주임 비준도 없이 임신한 게 죄가 아니란 말이냐?” 흥수는 외까풀 눈을 부라리면서 을러멨다. “너희들, 무법천지로구나.” 옥선은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내 말을 들어보십시오.” “무슨 말을?” 전라도 남도치 돼서 그런가? 흥수는 성질도 꽤나 팩했다. 허나 그는 야욕을 내리누르며 신문을 들어 보는 척 하며 옥선의 반응을 기다렸다. 한참 기다려도 옥선이 달라붙지 않자 흥수는 신문을 뒤척이다가 사무 상 위에 놓고 창문 밖을 흘금흘금 곁눈질했다. 새금은 간 것 같고 옆 칸에 정 선생만 있는 것 같았다. “전 정말 억울합니다. 근본 임신한 적이 없습니다.” 옥선이 눈물이 글썽해 사무상 옆에까지 다가와 하소연했다. “처녀가 애를 낳은 소문은 감추지 못해. 온 동네 소문이 자자한데도 승인하지 않겠어?” 흥수는 목소리를 낮추었으나 분명 살기가 선뜩 했다. “건 지주 아들 충국이 나와 억지로 결혼하려는 목적으로 없는 소문을 낸 겁니다.” “불을 때지 않은 굴뚝에 연기가 날까?” “정 믿어지지 않으면 옆 칸의 정의사 보고 검사해 보라구 하십시오.” “너희들이 미리 짜고 들었는지 누가 알아? 우파 의사 검사해서야 어찌 믿어?” 옥선은 두 손으로 눈물을 닦으면서 정색해서 말했다. “그럼 치보 주임이 직접 검사해 보십시오.” 뜻밖의 말에 이흥수는 입이 함박만 해졌다. 바로 그런 말이 나오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흥수는 창문 밖을 내다보았다. 토성 안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흥수는 마른 침을 꿀꺽 삼키면서도 속과는 다른 말을 내뱉었다.  “내 의사 아닌데 어떻게 검사해?”  옥선은 누명을 벗으려는 일념 밖에 없었다. “눈이 저울이라고 내 배를 보면 모르겠습니까? 홀쪽한 배에 무슨 애가 있다고 그럽니까?” 흥수는 능글스럽게  옥선에게 다가섰다. "치보 주임의 투철한 계급투쟁 안광은 배속에 애가 있는지 없는지까지 다 꿰뚫어 볼 수 있어.”  그는 옥선의 배를 보려다 말고 창가에 다가가 문발을 치고 문마저 닫아걸었다. “문은 왜 걸어요?” “철면피한 연, 누가 들어오면 부끄럽지 않아?” 그제야 옥선은 한숨을 호 내쉬면서 적삼을 올려 걷고 배를 드러내 놓았다. 흥수는 제법 의사 흉내를 냈다. “아니야, 여기 사무상 위에 누워. 그저 보기만 해서 되겠느냐?” “그래 이 배를 보면 모르겠습니까? 근본 임신이 아닙니다.” “아니야, 누굴 속이려고? 손으로 만져 봐야 안다. 애가 만지우지 않으면 때를 벗을 수도 있어.” 옥선은 하는 수 없이 사무상 우에 누우면서 한숨을 호 내쉬며 다리를 맥없이 죽 폈다. 흥수는 양을 덮치려는 늑대처럼 어슬렁어슬렁 다가와 정욕이 끓어 번지는 눈길로 옥선의 하얀 배를 넋 잃고 바라보더니 마른 침을 꼴깍 삼켰다. “어디 보자. 으흠.” 흥수는 마른 삭정이 같은 메마른 손으로 옥선의 배를 꾹꾹 눌러 보기도 하고 아랫배를 슬슬 매만져보았다. 옥선은 징그러워 상을 찡그리면서도 배를 내맡기는 수밖에 없었다. 허나 흥수의 손이 어지럽게 점점 아래로 내려갈수록 그녀는 참을 수 없어 손으로 아랫배 쪽을 막으며 다리를 가두었다. “애기 정말 없습니다. 치보 주임이 증명 서 줄 수 있습니까?” “으흠, 임신하지 않았다는 거 증명을 서주려면 쉬운가?” “배를 만져보고 애기 없으면 증명을 서면 되는 거죠.” 흥수는 외까풀 눈을 가슴츠레 뜨고 옥선을 내려다보면서 누런 이발을 드러냈다. “허허허. 유일한 방법은 네가 아직도 처녀인가 아닌가 하는 것을 알아야 증명을 설수 있다.” “난 아직도 처녀예요. 하늘땅이 증명을 설 수 있어요.” “누가 아느냐? 우파인 네가 이제 치보 주임 비준도 없이 애를 설었을 경우 넌 나라 산아정책과 법을 어긴 범죄자로 돼 감옥살이를 해야 해.” “그럼 어떻게 처녀인지 아닌지 검사한단 말입니까?” “건 간단하다. 네가 하기에 달렸다.” 순간 흥수는 온 몸에 야욕의 피가 끓어 번지면서 세차게 흐르는 감을 느꼈다. “입을 꽉 다물고 치보주임의 검사를 받아.” 흥수가 거센 숨을 몰아쉬면서 배를 슬슬 만지다가 능구렁이처럼 손을 아래 하신에 쑥 걷어 넣었다. 뜻밖의 침입에 옥선은 와닥닥 일어나면서 적삼을 내리워 아랫배를 가리었다. “뭐 하는 거예요? 내가 어디 세 살 짜리 앤가요?” 흥수는 머리가 뗑 해나 신경질을 썼다. “좋다. 네 년은 죄가 드러날까 봐 겁났구나. 그만두려면 그만둬!” 옥선은 사무상에서 내리면서 욕설을 퍼부었다. “검사할 게면 검사나 온전히 할 게지 손은 왜 아래로 들어갑니까?” “뭐라고? 그래 아래로 들어가 보지 않고 어떻게 검사해?” 옥선은 머리를 휙 휘저어 치렁치렁 땋아 늘인 쌍태 머리를 뒤로 홱 젖히었다. 그녀는 쌍까풀눈을 딱 부릅뜨고 벌겋게 달아오른 흥수를 쏘아보더니 침을 땅바닥에 탁 뱉었다. “더러운 놈!” 흥수는 닭 쫓던 개 지붕을 쳐다보듯이 멍해 서서 사무실 문고리를 철꺽 벗기고 나가는 옥선의 등 뒤에 대고 두덜거리었다. “어디 두고 보자! 더러운 년놈들! 날마다 투쟁하고 비판하고 똥 짐을 메게 하지 않는가. 두고 봐!” 그러나 옥선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문을 쾅 닫고 나가버렸다. 저녁에 흥수는 옥선과 충국을 투쟁하자고 대대 사무실 마당에 투쟁대회를 열었다. 토성 안 마당에 전등불까지 환히 밝혔다. 사원들이 곤해 하품을 하면서 모여들었다. “오늘은 누구를 투쟁하오?” 사원들은 곤했지만 뒤숭숭해 물었다. “충국과 옥선이 임신했다고 투쟁한다오.” “어쩜 치보주임 비준도 없이 임신부터 하오?” “볼만 하겠소. 국민당 노총각과 우파 노처녀 결혼 전에 애부터 설었으니까.” “허허허.” “호호호.” 사원들이 거의 모여들었다. 하지만 충국만 왔을 뿐 옥선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흥수는 황종연이랑 황승연이랑 시켜서 옥선을 잡아오라고 했다. 그러나 그들은 조개덕으로 달려갔다가 반시간도 안 돼 달려와 긴급정황을 알렸다. “여우파 오옥선이 집에 없습디다.” “뭐라고?” 모두 놀랐다. 충국은 “헤헤.” 웃으면서 흥수를 조롱하듯이 쳐다보더니 침을 퉥 뱉었다. 흥수가 충국을 쏘아보았다. “네놈이 알지? 옥선이 어디에 갔어?” “내 알 턱이 뭐야? 달아나면 어디로 갔겠니? 너희들 조선 고향에 갔겠지 뭐.” "뭐? 조선에 도망쳐? 매국역적! 우리 민족을 다 팔아먹는 개쌍년이구나!' 흥수가 성나 고래고래 고함칠수록 충국은 꽤 고소해 "허허허." 하고 너털웃음을 웃었다. “안 되겠구나. 네 놈이라도 투쟁해야겠다.” 흥수는 시어미 역정에 개 배때기를 차듯이 옥선을 놓치고 대신 충국을 꼬챙이에 꿰 쳐들었다. “말해! 네 놈들이 언제부터 관계를 발생했어?! 몇 번 했어?! 언제 임신했어?!” 흥수는 연발탄을 발사하듯이 고래고래 소리쳤다. 장충국은 “허허허." 하고 웃으면서 고함쳤다. "다 내 잘못했소. 난 오옥선과 근본 성관계를 발생한 적이 없었소.” “뭐라고? 그런데 어째 온 마을로 다니면서 그런 소문부터 퍼뜨렸는가?” 장충국은 노실하게 말했다. “오옥선과 결혼하자고 그랬소. 임신했다고 소문내면 나와 결혼 하겠는가 해서 그랬소.” 여기저기에서 웅성거렸다. “괜히 옥선 선생만 당하지 않았소?” “글쎄 말이오.” 흥수는 입을 딱 벌렸다. “나쁜 놈!” 흥수는 충국의 따귀를 찰싹 갈겼다. 상순은 앞에 나가 충국을 쏘아보면서 욕했다. “결혼하겠으면 정당하게 결혼해야지. 오선생을 무함해 못 살게 굴건 뭐야?!” 그날 회의는 흐지부지하게 끝났다. 그 후 옥선은 개학이 됐는데도 학교에도 집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충국의 말대로 옥선은 조선 고향으로 가버렸을까? 그녀가 어디로 갔는지는 누구도 알 수 없었다. (설마 의지 가지 없는 늙은 부모를 버리고 조선 고향으로 달아났을까?) 상순과 병완은 모두 도리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10. 청춘의 고백      신록이 짙어가는 7월 중순에 어머니가 농학원까지 허둥지둥 찾아가 순자를 찾았다. “엄마, 왜 일하지 않고 왔소?” 순자는 적이 놀라 엄마의 두 손을 잡고 물었다. 숙사의 다른 여동창생들도 놀란 표정을 짓고 순자 어머니에게 얼굴을 돌렸다. 명옥은 순자를 데리고 숙사에서 나가 세면실 쪽으로 가서 말했다. “홍자가 글쎄 맹장이 터져 하마터면 죽을 번했다.” “양? 그래 홍자는 어디 있소?” 순자는 단통 눈물을 흘리면서 물었다. “진수해병원에 있다. 문화대혁명인지 뭔지 양패 의사들이 패싸움을 하다나니 수술을 늦게 해 일을 치고 말았다.” “예? 빨리 가봅시다.” 순자는 숙사에 들어가지도 않고 어머니를 따라 진수해 병원으로 달려갔다. 명옥은 버스에 앉아 진수해로 가는 길에 순자의 손을 잡고 “그새 우린 하나 밖에 없는 아들과 막내딸도 잃을 번했다.”라고 했다. “예? 무슨 일이 있었습둥?” 순자는 놀라 눈이 뒤집혀질 지경이었다. 명옥은 며칠 전에 있은 일을 말했다. 칼산과 천지꽃산 쪽에 먹장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덕돌은 토끼풀을 캐다가 덮쳐오는 먹장구름을 보고 성욱과 동림에게 소리쳤다. “야, 집으로 가자! 소낙비 내리겠다.” “응, 가자!” 그들은 토끼풀을 담은 바구니를 들고 마을 쪽으로 내리달렸다. 그들이 태평강을 건너 마을에 들어서기 바쁘게 천지꽃산 쪽에서 번개가 번쩍했다. 불 구렁이 혀를 날름거려 산중턱을 내리 핥더니 우르릉 꽝꽝 우레 소리가 천지를 진동했다. 그들이 집에 들어가자마자 소낙비가 대야로 퍼붓는 듯이 억수로 쏟아졌다. 추녀 끝에서 실폭포들이 쏟아져 내리었다. 덕돌이 토끼 굴 쇠살창 안에 금방 캐온 능쟁이랑 쑤셔 넣어 토기를 먹였다. 토끼는 물기를 머금은 생신한 능쟁이를 오물오물 맛있게 먹었다. 구들에 앉아 담배를 피우던 상순은 창 밖을 내다보다가 덕돌을 돌아보면서 “비가 멎으면 소를 풀어 오너라. 코 깜장이 비를 폭 맞았겠다.”라고 했다. “예.” 이윽고 억수로 쏟아지던 비가 언제 왔느냐 시피 뚝 멎었다. 덕돌이 혼자 소를 풀러 가려고 할 때다. 성숙이 따라 나섰다. “나도 함께 가자!” “누나도 가겠니?” “응.” “혼자라도 되는데 무슨 오겠니?” “가서 버섯을 따오겠다. 비 온 뒤에는 버드나무 밑에 새하얀 버섯이 뾰족뾰족 돋아나.” “그럼 같이 가자.” 그리하여 성숙은 낫을 들고 덕돌과 함께 소를 풀러 태평강 가로 갔다. 덕돌은 소를 맨 긴 바를 풀어 소를 끌고 집으로 오려고 했다. 허나 소는 한 곳에 매여 있으면서 풀을 제대로 먹지 못했던지 대가리를 흔들면서 좀처럼 떠나오려고 하지 않고 비에 흠뻑 젖은 파란 풀을 자꾸 뜯어먹었다. 이때 갑자기 논물을 막아버리던 집안 집 이상형님 만석이 이쪽에 소리쳤다. “덕돌아, 큰물이 터졌다. 빨리 태평강을 건너오라!” 덕돌이 위쪽을 바라보니 싯누런 흙물이 보 둑을 마구 넘어 덮쳐 오고 있었다. “이라! 이라!” 덕돌이 아무리 안간힘을 다해 앞에서 긴 고삐를 쥐어 당겨도 깜장이는 대가리를 흔들면서 떠나려고 하지 않고 자꾸 풀만 뜯어 먹었다. 정말 코등이 새까만 암소는 말을 잘 듣지 않는다고 명옥이 말하더니 틀린 말이 아니었다. 황급해난 덕돌은 고삐를 어깨에 둘러메고 앞에서 끌었다. 그제야 깜장이는 마지못해 한 발자국씩 움직이면서도 계속 풀을 뜯어먹었다. 집채와도 같은 흙물이 사품 치며 각일각 덕돌의 앞으로 덮쳐왔다. “빨리 소를 던지고 태평강을 건너오라!” 만석은 논물을 보다가 덕돌을 보고 고함쳤다. 허나 덕돌은 소를 버릴 수 없었다. 빚을 가득 걸머져서 온 집 식구들의 명줄이나 다름없는 소를 큰물에 띠워 보내는 날에는 아버지한테 맞아 죽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라! 이라!” 이때 난데없이 버섯을 따러 갔던 성숙이 뛰어와 낫등으로 소잔등을 탁탁 쳤다. 깜짝 놀란 깜장이는 그제야 풀을 먹지 않고 부랴부랴 태평강을 건넜다. 그들이 소를 몰고 강물을 건너 강둑에 올라자마자 저게 뭔가! 그들의 발밑을 툭 치면서 누런 흙물이 들이덮쳤다. 아름드리나무랑 물에 떠 내려와 강둑을 마구 치며 흘러지나가면서 그들의 발밑이 마구 울릴 지경이었다. “빨리 높은 둑 위로 올라가자!” “응!” 그들 오누이 제방 뚝 위로 올라갈 때다. 마을 저쪽에서 상순과 명옥이 아들딸을 큰물에 잃어버린 것 같아 소리치면서 이쪽으로 달려 나왔다. “덕돌아!” “성숙아!” 그들은 제방 뚝 위에서 소를 몰고 마을 쪽으로 다가가는 오누이를 보고서야 달음박질을 그만두고 걸어왔다. 상순은 다가와 덕돌과 성숙을 와락 끌어안았다. “덕돌아!” "성숙아!" 명옥도 덕돌의 머리를 매만졌다. “어떻게 얻어 본 아들인데 큰물에 잃을 번했구나.” 아버지와 어머니가 덕돌만 끌어안고 야단치자 성숙은 꽤나 섭섭했다. “어이구, 아들만 아들이라고 하면서. 딸은 자식이 아닙둥? 원, 내 달려와 낫등으로 소 궁둥이를 쳤으니 말이지. 깜장쇠 강물이나 건넜겠구먼? 쳇. 내 오지 않았더라면 덕돌이 살았겠습둥?” 그제야 명옥은 성숙이 머리도 만지면서 칭찬했다. “그래, 네가 아니었더라면 금이야 옥이야 하는 덕돌을 잃어버릴 번했다. 네가 정말 덕돌을 따라 나오기를 잘했다.” 상순은 깜장이를 끌고 가면서 “주의를 주었다. "덕돌아, 이후부터는 소낙비가 쏟아진 후에는 소를 풀러 가지 않아도 된다. 소낙비가 온 뒤에는 큰물이 질 수 있다는 걸 생각하지 못했구나.”        그들은 다시 살아난 기쁨에 겨워 웃고 떠들면서 깜장이를 몰고 집으로 돌아왔다… “천만 다행이구먼요.” 엄마 하는 이야기를 듣고 순자는 한숨을 후 내쉬었다. 그들이 진수해 공사 병원에 이르러 병실에 들어갔을 때다. 침대에 누워 있는 홍자의 얼굴은 창백하다 못해 백지장 같았다. “홍자야, 이게 웬 일이냐?” “언니!” 순자는 홍자를 안고 울었다. 홍자도 울면서 일어나려고 했다. 그때 옆에 있던 간호사가 말렸다. “누워 있소. 옆구리에서 대변이 나오겠소.” “옆구리에서 대변이 나오다니.” 간호사가 다급히 말했다. “저걸 보오. 꾸르륵 소리 나는 거 보니 또 대변이 나온 모양이오.” 알고 보니 홍자는 맹장이 터져 밸을 한 뼘이나 떼 내고 옆구리에 구멍을 내고 대변을 보게 만들어놓았다. 하루에도 몇 번이고 밥을 먹으면서도 옆구리로 대변을 보았다. 항문으로 대변을 볼 때는 대변이 나가는 기별이 있었지만 옆구리에 낸 구멍은 시도 때도 기별도 없이 아무 때건 불시에 밀밀 괴여 나왔다. 순자는 엄마를 도와 옆구리에 붙인 붕대를 떼 내고 구멍으로 나온 대변을 받아 닦아낸 후 약으로 소독하고서야 붕대를 대고 반창고로 붙여 놓았다. “엄마, 집으로 돌아가오. 이젠 내 홍자를 간호하겠소.” 명옥은 순자를 마주보면서 근심했다. “넌 대학공부를 하지 않고 이래 되겠니?”        그러나 순자는 “여동생을 내가 돌보겠습니다. 엄마는 집에 돌아가 일을 하시오.”라고 하더니 뒤 말을 이었다.       “농학원에선 공부도 하지 않습니다. ‘문화대혁명’을 합네 하고 무슨 빠얼치('8.27’)요, ‘항대’요, "홍색"이요 하면서 패싸움만 합니다.” “그럼 수고해라. 그러지 않아도 아버진 생산대 일만 하다나니 돼지랑 닭이랑 제대로 먹이는지 모르겠다.” 명옥은 순자에게 홍자를 맡겨놓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때부터 순자는 반년 동안이나 날마다 홍자 옆에서 대소변을 받아냈다. 붕대도 돈이 든다고 버리지 않고 대변을 털어버리고 비누 물에 손으로 씻어 말린 후 병원의 소독실에 가서 고압가마를 빌어다가 손수 소독해 재차 쓰곤 했다. 순자는 매번 홍자의 옆구리에서 대변을 닦아내고 헤벌린 옆구리에 낸 벌건 구멍을 볼 때마다 마음이 아파 눈물이 샘솟곤 했다. 순자는 정규상과 YB병원에서 내과 의사로 일하는 고모사촌 언니 해옥의 소개로 YB병원에 가서 재차 수술을 받게 됐다. “근심하지 말라. 내 외과에서 제일 유명한 이성일 의사를 소개해줄 터이니 꼭 저 홍자를 항문으로 대변을 보게 수술해줄 거야.” “그럼 얼마나 좋겠소.” 순자는 고모사촌언니가 고마웠다. “언니, 정말 고맙소. 이전에 신자가 앓을 때에도 언니가 담보를 서고 치료했기에 신자를 살려냈소.” 순자의 말에 해옥은 식지를 입가에 대면서 “쉿-” 하면서 병원 복도 주위를 둘러보았다.       “얘야, 그런 말을 하지 말라. 병원에서 신자 치료비도 물지 못한 거 알면 홍자를 수술해 주자 하겠느냐? 이번에도 내 담보를 섰다. 치료비를 후에 꼭 문다고 말이다. 외삼촌네 물지 못하면 내가 물겠다고 했다.” 순자와 홍자는 그저 해옥 언니 손을 잡고 감동의 뜨거운 눈물만 주르르 흘렸다. 수술을 받기 전에 마음이 더운 해옥은 자기 외사촌여동생 순자와 홍자를 자기 집에 데리고 가서 맛있는 음식을 대접했다. 해옥은 영월구에 이사해간 후 공부를 잘해 연변위생학교를 졸업한 후 YB병원에 배치돼 내과의사로 됐던 것이다. 그는 YB대학 졸업생 차대균과 결혼해 문일과 영일 두 아들에 딸 영애를 낳아 기르면서 신화서점 옆에 자리를 잡고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그런데 한창 식사를 할 때 그만 홍자가 실수했다.       꾸르륵 소리가 나더니 또 옆구리로 대변이 흘러 나왔다. 순자는 황급히 숟가락을 놓고 홍자를 데리고 한쪽으로 가서 대변을 닦아내고 옆구리 구멍에 붕대를 바꿔 채워 주었다. 홍자와 순자는 아저씨를 보기 미안해 머리를 숙이었다. “어쩌겠니? 이제 이성일 의사라는 유명한 외과 의사한테 보이고 수술하면 항문으로 대변을 볼 수 있을 거야.” 해옥은 점심 식사가 끝나기 바쁘게 홍자를 데리고 이성일 의사를 찾아가 보였다. 그때 외과의 이성일 의사는 홍자의 옆구리 구멍을 보고 대장을 항문에 이어놓을 수 있다고 했다. 그리하여 홍자는 다시 수술대에 올랐다.  고명한 이성일 의사의 수술은 아주 성공적이었다. 홍자는 마음이 뜨거운 해옥 언니의 정성과 리성일 의사의 고명한 수술재간 덕분에 다시 항문으로 대변을 보게 됐다. 옆구리의 구멍도 한 달이 지나자 봉합이 돼갔다. 그때 여동생 홍자를 살려낸 것으로 해 해옥과 순자는 얼마나 기뻤는지 몰랐다. 순자가 홍자를 간호할 때 남동창생들은 순자의 여동생 홍자를 문안하러 오는 척 하면서 순자를 만나보자고 YB병원에 찾아갔다. 순자와 홍자가 진수해공사 병원에 있을 때부터 리동수는 여러 번 자전거를 타고 병원에 찾아갔다. 이전에 홍자가 옆구리로 대변을 볼 때 있은 일이다. 홍자는 옆구리로 똥이 밀밀 나와 일어나지도 못하고 다급했다. 허나 그때 동수는 순자에게 자전거 타기를 배워주고 있었다. “언니, 똥이 나왔소!” 홍자는 고함치고나서 중얼거렸다. “남은 바빠 죽겠는데 저네는 희죽거리면서 자전거연습 해?” “오, 알았다. 내 갈게.” 순자는 자전거를 쾅 번져놓은 채 병실로 뛰어 들어갔다. 그녀는 여동생의 옆구리에 나온 대변을 닦아내고 붕대를 갈아대주었다. 동수는 YB병원에 찾아갔다가 순자와 홍자가 고향으로 돌아갔다는 말을 듣고는 얼굴이 가려워 찾아 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순자는 환하게 생긴 인물에 체격이 쭉 빠찐데다가 배구까지 잘 쳤기에 남학생들 속에서 아주 인기가 있었다. 그와 연애를 거는 남학생들만 해도 적게 쳐서 열대여섯은 됐다. 허나 순자는 조만에 어느 남자와도 가까이하지 않았다. 한 마을에 사는 경산은 성환을 시켜 자꾸 순자에게 연애를 걸었다. 그러나 순자와 경산은 한 마을에서 태어나 소학교로부터 초중, 고중, 대학까지 동창생이다 보니 너무나도 친하고 서로를 잘 알았다. 상순은 순자가 한 마을의 경산과 함께 농학원으로 갔다 왔다 하는 것을 보고 순자를 불러 을러멨다. “경산과 연애하는 날엔 종아리를 분질러 놓겠다. 알았니?” 어리둥절해난 순자는 눈을 치켜 떴다. “아버지, 경산이 너무 좋아 그랩둥?”  입이 무거운 상순은 그저 호통만 쳤다. "안 된다면 안 되는 거지. 무슨 잔말이냐?” 순자는 아버지를 믿었다. 허나 아무리 경산과 그 집 식구들을 두루 여겨보면서 궁리해보아도 아버지가 반대하는 영문을 알 수 없었다. (혹시 삿갓봉 집 할머니 보고? 아니면? 정말 모르겠어. 경산은 얼마나 꼼꼼하다고. 나하고 나란히 앉아 이야기 할 때면 손수건을 바위돌 위에 펴놓고 나보고 손수건 위에 앉으라고 하지 않는가? 그렇게 살뜰히 여자를 관심할 사람이 어데 있어?” 순자는 안개 속처럼 흐리흐리한 오리무중에 빠졌다. 허나 그녀는 아버지 말을 따르기로 했다. 황차 자기가 경산과 연애를 해 성공한다고 해도 아버지가 대답하지 않으면 허사였기 때문이었다. 그 후부터 순자는 경산과 허물없는 친구이자 동창생, 아니, 어떻게 말하면 오누이 같이 친한 사이이었지만 연애까지는 발전하지 못했다. 어떤 때 경산은 순자의 손을 잡고 진정으로 고백했다. “우정이 사랑으로 변할 수 없소? 나는 우리 둘의 우정이 사랑으로 발전할 수 있다고 보오.” 허나 순자는 대답해주지 않았다.       평소에 동수는 농학공부를 하고 나머지 시간이면 도서관에 가서 연애소설을 빌어다 읽으면서 어떻게 하면 순자를 낚아채겠는가  연구하는 판이었다. 그는 연애소설을 보고 멋진 구절을 벗겨가지고 순자에게 자주 연애쪽지를 써서 동창생들의 눈을 피해 슬쩍슬쩍 쥐어주곤 했다. “… 달빛을 빌어 사뿐사뿐 침실로 걸어가는 순자, 그대를 보고 나는 미칠 것만 같소…” “… 하루라도 보지 못하면 삼추나 보지 못한 것 같이 그립소. 나는 그대를 비단보에 싸서 업고 다니면서라도 천하에 둘도 없이 행복하게 해 주려오…” “… 나는 피 끓는 청춘과 정열을 다 바쳐 그대를 사랑하오. 아니, 내 심장과 생명을 다 바쳐 사랑해 …” 그러나 순자는 누구에게도 대답하지 않았다. 순자는 어쩐지 자꾸 첫사랑 허송림과 비하게 됐다. 허송림은 조개덕의 함흥소학교 때부터 고중을 다닐 때까지 한 학급을 다닌 동창생이었다. 훤칠한 체구에 쩍 벌어진 어깨, 남성다운 어글어글한 눈이라던가, 우뚝한 코, 언제나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휘잡는 말을 하는 입. 어디를 보아도 이상적인 남자이다. 허송림은 순자를 마음에 두고 한 학급에 다니는 성환을 내세워 자꾸 사랑을 고백해왔다. 허나 순자는 허송림이 마음에 들어 하면서도 고중시절이라 대답하지 않았다. 허송림은 연길에 가서 대학시험 두 과목을 치고 나서 갑자기 순자를 찾아 말했다. “난 대학시험을 치지 않겠다.” “건 왜?” 순자는 공부를 잘하는 송림의 말에 깜짝 놀랐다. 허나 송림은 대수로워 하지 않았다. “네 봐라. 우리 영숙 누나 의학원을 졸업하고 의사 하지? 형님도 의사지. 그런데 나도 의사를 하겠니? 난 부대에 가서 군관을 해보겠다. 그래야 진짜 사내다울 게 아니야?” “그래도 다시 잘 생각해봐라. 나도 의학원에 가려고 그러는데 너도 함께 가면 좋지 않니?” “아니야. 난 시험을 치지 않겠다.” 허송림은 그렇게 대학 시험을 중도에서 그만두고 부대로 자원해 가게 됐다. 순자는 울먹울먹해 떠나가는 송림을 전송했다. 송림은 역에 나온 숱한 동창생들 속에서 순자를 찾아내 손을 내밀었다. “손이라도 잡아보자.” 순자는 손을 내밀면서 머리를 숙이었다. “잘 가라. 안전에 주의하고.” “그래. 내 군관이 된 후 다시 찾으마.” 순자는 머리를 끄덕였다. 그 후 허송림은 부대에 가서도 농학원에 간 순자에게 끊임없이 연정이 꽉 밴 편지를 날려 보냈다. 부대생활이 간고할수록 보고 싶고 그립다고. 지어 순자의 충고를 듣지 않은 자기 잘못을 뉘우치기도 하고. 그 후 그는 또 부대에서 패장으로 제발됐다고 전해왔고 얼마 안 있어 련장으로 승급했다고 하면서 부대에 시집오라고까지 했다. 허나 순자는 소홀히 대답하지 않았다. 다섯 살 위나 되는 반장 박위동은 공부도 잘하고 사업도 잘하는데다가 크라네까지 아주 잘 불어 농학원의 악대 대장으로 활약했다. 박위동은 쩍 하면 농학원 배구대 대장인 순자를 불러 사업을 토론하는 척 하면서 연애를 걸었다. 그는 안경알을 춰올리면서 순자를 보고 “순자, 내 악대 대장을 그만둘까?”라고 했다. “그만 두겠으면 그만두오. 나하고 무슨 상관이오?” 순자는 씁쓸해 하면서 “더 할 말이 없으면 가겠소.”라고 했다. 그러자 위동은 순자의 손을 와락 잡으면서 빈정거렸다. "가지 마오. 내 악대에서 대장으로 활약하면 숱한 여동창생들이 광목에 가시처럼 매달리면 순자가 질투나지 않겠소?”  “어마나, 박 반장이 악대 대장을 하는데 내가 왜 질투 나겠소? 정말 우습소.” 박위동은 외까풀 눈을 곱게 흘기는 순자를 보고 안 되겠다 싶었다. “그래 순자는 내 마음을 모르겠소?”  순자는 외까풀 눈을 치켜뜨면서 복성스레 생긴 얼굴에 그늘을 지었다. “뭘 말이오?” 박위동은 순자 손을 잡으면서 고백했다. “난 순자를 사랑하오. 동의되오?” 순자는 손을 빼면서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어머나! 이러지 마세요.” 순자는 어쩐지 평소에 지분거리는 위동이 그리 좋지 않았다. 쩍 하면 술을 마시고 여대생 숙사에 와서 이 여자 저 여자 지껄이곤 했다. 어쩐지 정파답지 못해 보였던 것이다. (아무리 능력이 있고 공부를 잘 해 뭘 해? 술주정뱅이 같은게.) 그러나 순자는 겉으로는 그런 내색을 내지 않았다. “난 아직 어려서 대상문제를 고려하지 않소.” 그러나 박위동은 순자를 놓아주지 않고 집에까지 쫓아왔다. 그러나 순자는 만나주지 않고 은숙과 홍자를 보고 두부나 바꿔 두부장국이나 끓여 대접하게 했다. 그 먼 곳에서 이런 시골까지 왔다가 순자의 복숭아얼굴도 보지 못하고 장국만 마시고 말 그가 아니었다. 그래서 은숙을 보고 이젠 농학원으로 돌아가겠으니 함께 돌아가자고 알리라고 했다. 동네 정자네 집에 피해있던 순자는 그제야 돌아와 위동과 함께 농학원으로 떠났다. 40리 멀고 먼 밤길을 걸으면서 위동은 내내 순자에게 사랑을 고백했지만 순자는 기어이 대답하지 않았다. 삼봉동을 넘어 말발굽산이 보일 때는 동녘이 푸름히 트기 시작했다. 박위동은 마지막으로 “정말 내 싫소?” 하고 물었다. 허나 순자의 대답은 변함이 없었다. “난 아직 어려서 대상문제를 고려하지 않소.” 박위동은 어처구니없어 했다. “아니 스물세 살이나 되는데 아직도 어리오? 그 허춘림인지 뭔지 하는 군관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소?” 그 말에 순자는 머리를 숙였다. “지금도 편지가 눈송이 날아내리 듯이 자꾸 날아오는 걸 보면 서로 잊지 못하는 모양이지? 군관이 무슨 좋아서 그러오? 부대를 따라 어느 산골로 갈지도 모르오. 그까짓 련장이 다 뭐요? 우리 대학생은 부대에 가자마자 부 패장급이오. 이후에 내 농업국 국장을 하지 않는가 보오. 나를 따라 연길에 가 행복하게 살지 않겠소?” 순자는 함구무언한 채 이렇게 속으로 대답했다. (사람이 착실해야 되지 어느 고장에서 사는게 중요한가? 사람을 얼려도 유분수지. 난 연길이 아니라 한족들이 욱실거리는 곳이더라도 사람만 좋으면 신랑을 따라 어디든지 갈 테야.) “어디 두고 보기오. 어떤 놈한테 시집가는가?” 둘은 이렇게 영영 갈라졌다. 박위동은 다시는 순자를 찾지 않았다. 확실히 순자는 춘림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부대에 간 후 춘림은 계속 연정이 폭폭 배인 편지를 써 보냈다. 그리하여 박위동과 동수, 송영은 가만히 순자에게 날아온 편지를 뜯어보고 다시 밥풀로 붙여 원 자리에 놓곤 했다. 영상해서 순자는 허춘림이나 동수에게서 온 편지나 쪽지를 몽땅 신문지에 싸서 집으로 가져다 엄마한테 맡겼다. 글을 볼 줄 모르는 엄마한테 맡기면 제일 안전하고 비밀을 지킬 것 같아서였다. “엄마, 이 편지를 누구한테도 보이지 마오.” “응, 그래.” 그때 덕돌이 옆에서 그 말을 들었다. 엄마는 순자만 보는 데서 윗방 종이천정을 뜯고 그 위에 편지꾸러미를 올려놓고 다시 천정 종이를 풀로 붙여 놓았다. 그런데 엄마는 순자가 떠나 간 후 며칠도 되지 않아 홍자를 불렀다. “여기 무슨 편지가 있는가 보자.” “큰 언니한테 들키면 큰 봉변을 당하겠는데. 난 무서워 못 다치겠소.” 홍자가 덴겁해 하자 명옥은 “근심하지 말라.."라고 했다. "우리 쥐도 새도 모르게 가만히 뜯어보고 원래대로 붙여 천정에 올려놓으면 된다.” 그리하여 명옥과 홍자는 쪽걸상을 가져다 놓고 올라서서 천정종이를 가위로 살짝 도려내고 편지끄러미를 내리웠다. “엄마, 난 그래도 겁나오.” “겁나 말라. 들키면 내 막아나설게.” 그리하여 홍자는 겨우 담을 키워 가지고 콩당콩당 뛰는 가슴을 눅잦히면서 순자에게 날아온 두툼한 편지꾸러미를 헤치었다. 숱한 편지와 쪽지 그리고 일기책이 나졌다. 거기에는 허송림과 동수 그 외에도 이름 모를 남자들의 연애편지와 쪽지가 가득했다. 홍자는 명옥의 앞에서 그 편지와 쪽지를 하나하나 몽땅 뜯어 내리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옆에서 덕돌이 신기해 보다가 물었다. “엄마, 어째 큰누나가 아무한테도 보이지 말라 했는데 셋째누나와 함께 보오?” 섬찍해난 명옥은 덕돌의 눈을 두 손으로 꽉 막으면서 말했다. “요걸 어쩌니? 덕돌아, 이 담 큰누나가 오면 절대 엄마와 셋째누나 편지를 뜯어본 말을 하지 말라. 알았지? 말해선 안 돼. 큰누나 아는 날이면 보지 말라는 거 봤다고 야단난다. 알았지?” 덕돌은 머리를 끄덕였다. 그날 명옥과 홍자는 편지와 쪽지 그리고 일기까지 몽땅 읽어본 후 밤늦게야 보꾸러미에 잘 싸서 천정에 올려놓고 다시 천정종이를 원래대로 붙여 놓았다. 그들은 빈틈이 없이 원래대로 된 걸 보고 코를 싸쥐고 윗방에 나와 코를 싸쥐고 순자를 두고 웃고 떠들었다. 허나 며칠 후 큰누나가 오자마자 큰 일 났다. 덕돌은 순자에게 마주 달려 나가면서 첫마디에 고발했다. “큰누나, 큰누나! 저 엄마하고 셋째누나 큰누나 편지를 다 뜯어봤소.” “뭐라고?” 순자는 두 손을 싹싹 비비면서 공포에 떠는 셋째 여동생과 엄마를 번갈아보더니 덕돌을 내려다보았다. “그게 무슨 소리냐?” 덕돌은 깜장 쌍까풀눈을 똑바로 뜨고 큰누나를 쳐다보면서 곧이곧대로 일러바쳤다. “정말이오. 엄마는 나를 보고 큰누나한테 말하지 말라고 했소. 큰누나 아는 날이면 큰일 난다고 했소.” 순자는 윗방에 달려 올라가 천정종이를 와락와락 뜯고 편지꾸러미부터 내리워 보더니 왕왕 대성통곡 쳤다. “홍자, 네 썩어진다. 감히 내 편지를 뜯어봐!” 홍자는 무릎을 꿇고 빌다가 큰언니한테 귀쌈을 찰싹 한대 얻어맞고 울면서 바깥으로 달아났다. 명옥은 더 할 말이 없었다. 그는 두 손을 잡고 서성거리며 맴돌다가 순자를 말렸다. "다 엄마 보자고 해서 그랬다. 홍자를 욕하지 말라." 순자는 편지를 와락와락 쥐어뜯더니 그중에서 동수의 쪽지만 골라 두고 나머지는 몽땅 들고 부엌으로 내려가 태워버렸다. 순자는 어쩐지 서란에서 온 남도치 동수에게 마음이 조금씩 끌려가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송영이나 박위동이나 다른 남동창생들은 술을 퍼먹고 쩍하면 여자 숙사에 와서 주정을 부리고 여자들을 지껄이다가 돌아가곤 했다. 하여 순자는 저런 남자를 만나면 한뉘 평생 마음고생을 하면서 살겠다고 그들에게 반감을 가졌다. 허나 서란 농촌에서 자란 동수는 여자숙사를 한 번도 온 적이 없었고 술을 마시고 주정을 부리는 것을 한 번도 본적이 없었다. 청년답지 않게 백지장처럼 하얀 얼굴이나 숱이 많고 검은 머리나 짙은 눈썹, 그리고 새별처럼 반짝이는 한쌍의 눈, 우뚝 솟은 코 마루… 그때만 해도 순자 앞에서 동수는 술을 그리 마시지 않았다. 그는 농학원 도서관에 붓박혀 연애소설을 보면서 5년 동안이나 고금동서의 명구를 다 써먹으면서 순자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연애쪽지를 쓰고 또 썼던 것이다. 그리하여 순자는 점차 동수의 매력에 빠져 정이 가는 것을 어찌할 수 없었다. 기실 동수는 그때 순자가 인차 대답하지 않기에 인내성이 거의 거의 동강 날 번했고 가만히 용정에 가서 답답한 술을 마시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여자 숙사에는 얼씬거리지도 않았다. 자칫 주정뱅이로 몰리어 대사를 망칠 까봐 겁났던 것이다. 그의 인내성 있고 아량 있는 처사가 순자의 마음을 끌었다. 그때 대학생들이 북경으로 가서 모주석의 접견을 받는 바람이 불었다. 그런데 순자는 차멀미를 심하게 해 왝왝 토하곤 했다. 그때마다 그녀의 옆에는 항상 동수가 있었다. 그들은 인산인해를 이룬 북경 천안문 앞에서 하이야를 타고 씽- 지나가는 모주석의 접견을 받고 의화원에 가서 배도 타고 놀았다. 순자는 남동창생들이 자꾸 치근거리는 것이 싫어 혼자 가만히 집으로 돌아오자고 북경 역에 빠져갔다. 그런데 역에서 동수를 만날 줄이야 누가 알았으랴. “어, 순자, 여기서 만났구먼.” 동수는 우연하게 만난 것처럼 꾸몄지만 순자는 그가 진작 자기 뒤를 미행했다는 짐작이 갔다. 멀미가 심한 순자를 동수는 어린애를 간호하듯이 줄곧 농학원으로 돌아올 때까지 “간호”해주면서 돌아왔다. 그때 그 살뜰히 간호해주던 동수가 고마워 순자는 동수를 믿기 시작했다. 어느 달 밝은 밤에 동수는 조용히 만나자고 했다. 순자는 흔연히 약속한 지점에 나갔다. 동수는 순자와 나란히 앉아 달을 쳐다보더니 사랑을 고백했다. “난 순자를 죽기내기로 사랑하오. 내 그대를 한뉘 행복하게 해주겠소.” 순자는 머리를 숙이더니 동수의 품에 안겼다. “대답해주오.” “나도 동수동무를 사랑하오.” 그러자 동수는 너무나도 기뻐 순자를 꽉 끌어안고 고함쳤다. “하하하, 이 날은 끝내 왔구먼. 숱한 남자들이 따라다녀도 순자는 내것이구먼. 허허허.” 동수는 순자에게 뜨거운 키스벼락을 안겨주었다. 그들은 달빛아래에서 오래도록 꼭 포옹했다. 달도 부끄러운듯이 얇은 구름 속으로 얼굴을 살짝 감추었다.                                               11. 사위 달빛도 밝은 어느 날, 박경만은 상순이네 집 마당에 와서 사위를 둘러보더니 머리를 들어 구리바라 같이 밝은 달을 쳐다보면서 뻐꾸기 우는 소리를 냈다. “뻐꾹, 뻐꾹.” 뻐꾸기 소리가 나자마자 저녁을 먹던 은숙은 숟가락을 놓고 바깥으로 나갔다. 로 경찰의 특유한 민감성으로 해 상순은 은숙의 거동이 이상해 뒷간으로 가는 척 하면서 따라 나갔다. “에헴, 에헴.” 상순이가 보니 달빛아래 바자 저쪽에서 은숙이 머리를 숙이고 서있는데 웬 남자가 서서 어깨에 손을 얹고 있었다. “가기요. 조용한데 가서 말하기요.” “난 아직 나이 어려서 연애를 하지 않겠소.” “허, 정말, 스무 살을 먹고서도 어리다니? 옛날 우리 엄마랑은 열여섯 살에 우리 큰누나를 낳았소.” 사내의 목소리가 퍽 귀에 익었지만 딱히 누군지는 알 수 없었다. “옛날과 지금 어디 같소? 지금 어디 스무 살에 결혼하는 여자들이 있소?” “내 지금 결혼하자는 게 아니요. 먼저 서로 얘기나 하자는 거지.” “결혼할 생각을 하지 않으면서 무슨 연애 소리요? 연애하는 거야 결혼하기 위한 거지.” “하긴 그렇소. 그래 나와 결혼하겠소?” “어마나. 별, 누가 그 집과 결혼한다 했소? 약혼도 하지 못하고 결혼하는 법이 어디 있소?” (저, 저, 못된 놈들이 연애하는구나.) 자기와 명옥도 19세에 결혼했으니까. 애들도 이젠 시집을 갈 나이가 된 것이었다. 상순은 한숨을 후 내쉬더니 집으로 들어갔다. 은숙이 들어오자마자 상순은 따지고 들었다. “이제 금방 만난 건 누구야?” “소변보러 갔는데 누굴 만났다고 그럽니까?” 상순은 세 귀 눈을 부라리면서 을러멨다. “너 날 속이겠어? 내 이제 다 들었다. 말해라! 누구야?” 그제야 은숙은 속일 수 없었다. “박경만입니다. 난 연애를 하지 않겠다는데 계속 연애를 겁니다.” “음.” 상순은 주먹을 쳐들었다가 내리었다. 박경만이란 안도 저수지를 건설하면서 조개덕에 이사 온 안도 박 씨 집 청년이었다. 사람이 역빠르고 힘도 세기로 소문이 있었다. 글쎄 온 마을에서 혼자 자전거를 사 타고 논 드럼으로 마구 달려 다니는가 하면 한손으로 자전거를 머리 위로 추켜올릴 정도로 힘이 셌다. 그의 말에 의하면 그는 중학교 때 현 중학생축구팀의 선수였다고 하는데 확실히 축구를 잘 해 공사대회에서도 소문이 높았다. 둘째인 그는 성격이 부드러운 형 경권과는 달리 꽤나 팩하고 자존심이 강했다. 마을의 단서기인 그는 당 지부 서기인 상순을 부지런히 찾아다니면서 가르침을 받으면서 청년들을 이끌어 당지부의 호소에 따라 발을 벗고 일해 나갔다. 그리하여 상순은 경만을 장차 전도 있는 청년으로 손꼽았다. 상순은 단 지부 일로 문턱이 다슬 지경으로 찾아 다녔는가 했더니 은숙을 넘보고 다닌 줄은 눈치도 채지 못했던 것이다. 상순은 한숨을 후 내쉬었다. (은숙이 마음에 들어 하면 아무 때라도 시집보낼 앤데 줘 보내야지. 그러나 맏딸 순자가 아직 약혼도 하지 않았는데 둘째부터 줄 순 없지 않은가? 참 답답한 일이야.) 몇 달 후 농학원에 다니는 순자가 집으로 놀러 왔다. 큰언니를 너무 따르는 홍자는 인차 둘째 언니가 마을의 경만과 좋아한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그러자 순자는 은숙을 불러 물었다. “야, 너 경만과 무슨 관계냐?” “연애 관계요.” “그래 경만이 마음에 드니?” “양, 한 마을에서 자꾸 얼리는 거 어쩌오?” “그래도 쉽게 대답하지 말라.” “내 어찌 하던 언니 무슨 상관이오?” “야, 정신 있니? 이제 스무 살 밖에 안 되는데 그리 일찍 시집가면 고생이나 했지 뭣이 좋니? 황차 너보다 세 살이나 이상인 언니도 아직 약혼하지 않았는데 너부터 서둘면 어쩌니?” “내 시집가는데 언니와 무슨 상관이오? 누가 언니를 스물 셋이나 되도록 약혼하지 말라 했소?” 은숙은 이전에는 언니 말이라면 무조건 따랐지만 이번만은 물러서지 않고 딱딱 들이 받치면서 고집을 썼다. “너 정말 동네 망신을 시킬 예산이냐?” “누가 먼저 약혼하면 누가 먼저 시집가는 거지 뭐? 형제간에 순서를 정해 놓았소?” 순자는 은숙을 흘겨보면서 한바탕 훈계하려다가 물앉으면서 그만 두었다. 그때 아버지가 들어오자 은숙은 왕왕 울면서 “아버지, 나와 경만의 약혼을 허락해 주시오.”라고 지청구를 들이댔다. 상순은 윗방에 올라가 다리를 틀고 앉았다. 이때 명옥도 일 밭에서 돌아와 정지에 들어섰다. 상순은 윗방에서 “어험.” 하고 마른기침을 떼더니 은숙을 불러 “그래 경만이 마음에 딱 드냐?” 하고 물었다. 은숙은 윗방에 무릎을 꿇고 앉아 대답했다. “예. 남자답습니다.” 상순은 머리를 끄덕이었다. 명옥도 들어와 한마디 했다. “숱한 딸애들을 두고 줄 때 되면 주기요. 큰 아들도 없는데 든든한 사위라도 한 마을에 있으면 좋지 않소?” “음. 알았소.” 상순은 명옥에게서 눈길을 떼더니 은숙을 바라보면서 뒷말을 이었다. “헌데 경만이 팩해서 혹시 너를 마음고생을 시킬 까봐 근심된다.” “일 없습니다. 내가 다짐을 따니 이후에 절대 나에게 손을 대지 않고 밸을 쓰지 않겠다고 합디다.” 상순은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약혼할 때는 다 그런다. 허나 결혼만 하면 약속을 저버리는 게 사내들이다.” “근심하지 마십시오. 내 맞춰 살겠습니다.” 상순은 “너네 정 마음이 맞는다면 언제 경만을 데리고 와서 말을 떼거라.”라고 허락했다. 은숙은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상순은 순자를 돌아보면서 타일렀다. “어쩌겠니? 저 애들이 연애한지 오래니 먼저 약혼을 허락하겠다. 넌 언제 약혼하겠니?” 그러자 순자는 머리를 숙이며 나직이 말했다. “나도 남자는 있습니다. 그런데 아직 약혼까지는 생각해보지 못했습니다.” “여동생이 이젠 약혼하는데 너도 빨리 약혼해라.” 아버지 말씀에 순자는 귀밑을 살짝 붉히면서 머리를 숙이었다. 그날 경만은 형 영권과 5촌 삼촌이랑 4촌 형이랑 함께 술과 떡을 메고 와서 사돈보기를 하러 왔다. 상순이네 비좁은 집에는 윗방과 정지에 숱한 친척들로 꽉 들어앉았다. 경만은 상순과 명옥의 앞에 태산이 무너지듯 넓적 엎드리면서 절을 올렸다. “가시아버지, 가시어머니 은숙을 데려다 잘 살겠습니다.” 상순은 둘째사위의 절을 받으면서 정중히 말했다. “은숙은 아직 나이 어려서 모르는 것이 많소. 데려다 함께 잘 사오.” 경만은 철색얼굴을 들지도 않은 채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었다. “예, 귀여운 딸을 20년이나 길러서 주어 살게 해서 고맙습니다.” 그때 경만이 어찌나 공손했는지 은숙은 저쪽에서 속으로 못내 감탄했다. 뒤이어 경만은 한 마을에 있는 큰 가시어머니 지새금 그리고 가시고모 금옥과 가시고모부 최학철로부터 시작해 상길과 봉선, 채선, 경학 그리고 가시외가편의 근룡과 근삼에게까지 돌아가면서 일일이 절을 다 올리고 나니 땀을 줄줄 흘렸다. 그는 뒤에 선 형한테 가만히 중얼거렸다. “무슨 친척이 이렇게 많은지 모르겠소. 절을 하는 게 허리 불러질 번했소.” 그러자 영권은 옆구리를 툭 치더니 곰보 얼굴이 굳어지면서 “아무 말이나 하지 말라. 장가가는 게 그리 쉬운 줄 알았니?”라고 했다. 가시집에서 술상을 차리자 경만은 무릎을 꿇고 공손히 두 손으로 가시집 어른 들게 술을 따라 올렸다. 상순은 별로 술을 마시지 않았다. 하지만 이날만은 사위가 부어주는 술을 받아 한잔 쭉 냈다. 경만이 어찌나 공손하고 깎듯 한 예절로 대하는지 명옥은 사람이 밸이 있는 사람 같지 않아 보일 정도였다. 경만은 연신 머리를 조아리었다. 경만은 앞집에서 사는 가시고모부 최학철과 진수해의 가시외삼촌 최근룡에게도 일일이 술을 따라 드렸다. 앞집에 사는 금옥 가시고모네는 맏아들 최철국이 아래로 인자와 인숙이, 국범이, 국빈이가 있었는데 철국은 경만과 친구 사이었다. 상순은 철국에게서 경만이가 뽈도 잘 차고 남자답다는 말을 듣고 둘째딸과의 결혼을 허락했던 것이다. 둘째가시외삼촌 최근룡은 태씨네 딸을 데려다 덕돌보다 한 살 지하인 정옥이 아래로 영길, 현길, 호길, 홍길이를 줄줄 나아 기르면서 재미나게 살고 있었다. 다만 항미원조 전쟁에 나가 부상당해 심장병에 기관지도 좋지 않아 불구자퇴역군인의 접대를 받으면서 농사도 짓지 못하고 정부 보조를 받으면서 힘겹게 살고 있었다. 그런데 작은외삼촌 최근삼에게 술을 부을 때는 주춤 했다. 근삼은 은숙과 동갑이었고 경만보다는 한 살 지하였던 것이다. 허나 별 수 있나. 작은 가시외삼촌인데. 경만은 머리를 숙였다가 들면서 술을 따랐다. “가시외삼촌, 술을 받소.” 근삼은 몇해전에 금방 장가를 가서 딸애 순애를 보았던 것이다. 후에 또 원길도 낳고... “양, 행복하게 잘 사오.” “예.” 뒤이어 그는 시집도 가지 않은 처형 순자에게까지 술을 따라 올렸다. “처형이라 불러야 할지, 아주머니라 불러야 할지 모르겠소. 시집도 가지 않았으니 아주머니라고 부르기도 그렇고. 뭐 어떻게 부르면 좋겠소?” 순자는 웃음을 띤 경만의 철색얼굴을 마주 보면서 술잔을 받아 쥐고 한손으로 입을 가리면서 웃었다. “그저 처형이라고 부르오. 아주머니는 무슨 아주머니?” “그럼 좋소. 처형은 언제 약혼 술을 내겠소?” “동생네 결혼한 후에 보기오.” “우리 먼저 결혼해서 안 됐소.” “무슨 말을, 약혼과 결혼이 어디 정해놓은 순서가 있소? 이제 내 졸업하면 술을 낼게.” 경만은 처형과 잔을 마주치면서 통쾌하게 웃었다. “은숙이, 처형과 함께 한잔 마시기오.” 그제야 은숙은 고방에서 나와 언니 순자 옆에 앉아 술잔을 들었다. “언니, 고맙소.” 순자는 진심 어린 눈으로 여동생 부부간을 마주 바라보았다. “동생네 서로 아끼면서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오.” “고맙소. 우린 땅을 뒤지는 농민들이 돼서 아무 것도 모르오.” 은숙은 옆에서 경만의 무릎을 툭 쳤다. “언니하고 무슨 말을, 또 걸고 들겠소?” “괜찮다.” 순자는 은숙을 보며 웃으면서 뒤 말을 이었다. “동생 신랑은 단지부 서기 사업도 하지 않소?” “그래도 대학생 처형보다 사회를 모르고 사오.” 순자는 경만이 어지간히 자존심이 강하지 않음을 느끼면서 동생이 근심돼 한숨을 호 내쉬었다. 순간 그녀는 동창생 동수의 하얀 얼굴과 너부죽한 이마를 가리는 숱 많은 머리카락이 눈앞에 겹쳐 보였다. 이듬해 5.1절에 은숙은 한 마을 여주 박 씨네 둘째아들 경만한테 시집가게 됐다. 생활이 가난한 상순이네는 아내 명옥이 돼지를 친 덕분에 그래도 은숙에게 첫날 한복에 삼일에 입을 옷으로 겨우 몇 견지 사주어 시집보낼 수 있었다. 물론 대대 당지부 서기인 상순이네가 돼지를 두 마리나 쳤다고 뒤에서 흥수가 콧방귀를 뀌었다. “내 때문에 아버지가 자본주의 길로 나간다는 말을 들어 어쩌겠소?” 은숙이 눈물을 흘리면서 근심했다. 허나 명옥은 대수로워 하지도 않았다 “그까짓 거, 개소리거니 하면 돼. 그래 당원은 시집가는 딸에게 첫날 한복도 해 입히지 말아야 한다니?” 이른 아침에 경만은 길을 하나 사이 둔 가시집으로 반시간이나 걸려서야 올 수 있었다. 마을의 종연이랑 창식이랑 주봉이랑 마을 큰길에다 새끼줄을 띠워 놓고 가로 막았던 것이다. “이보, 경만이, 어디로 가오?” 경만은 중산 복을 빼입고 씩씩하게 걸어오다가 주춤 멈춰서 웃었다. “각시 데리러 가오.” 종연은 안도에서부터 경만과 잘 아는 친구였다. 명육은 “각시는 누구요?” 하고 물었다. “뻔히 알면서 묻소?” “우리 어떻게 아오? 도대체 누구요?” 경만은 시간을 끌기 싫어 “우리 마을 김서기네 둘째딸 은숙이오.”라고 시원히 대답해주었다. 그러자 종연은 “어떻게 돼 한 마을에서 약혼했소?” 하고 물었다. 창식은 길쭉한 얼굴을 찡그리면서 “약혼 경과를 말하지 않으면 이 큰길을 지나가지 못하오.”라고 단단히 잡도리를 하면서 새끼줄을 매만졌다. 경만은 새끼줄을 손으로 쥐어 당겨보면서 “요까짓 게 다 뭐요?”라고 하면서 쥐어 들려고 했다. 그러자 청년들은 경만의 두 팔을 비틀려고 들었다. 경만이 두 팔에 힘을 주며 뻗치자 움쩍도 하지 못했다. “첫날 신랑과 싸울 예산이오? 장난도 한도 있지. 정말 한심하오.” 그때 덕돌의 팔촌형 경학이 동네 청년들을 나무랐다. 그러자 종연이랑 명육이랑 물러섰다. “보내주면 술을 주겠소?” 창식이 묻자 경만은 시원히 “양, 큰상 옆에 오오.”라고 했다. 그 말에 창식이 새끼줄을 풀어주면서 “신랑을 따라가 큰상이나 받자.”라고 했다. 새끼줄이 풀리자 경만은 성큼성큼 걸어 은숙이 네 집에 갔다. 철국이 대반을 들면서 경만을 집 윗방에 모시고 들어가 큰상에 앉혔다. 명육이랑 종연이랑 창식이랑 큰상에 앉은 경만의 앞에 두 줄로 죽 둘러 앉아 고주망태 될 지경으로 술을 잘 마신 것은 두 말할 것이 없다. 오전 11시쯤에 신랑 경만과 색시 은숙이 부모와 집안 이상 분들에게 절을 하고 문을 나섰다. 노할아버지는 거동이 불편해 오시지 못했기에 후일 전문 찾아가 절을 올리도록 했다. 경만과 은숙은 서로 팔을 끼고 걸었다. 연분홍비단한복을 입은 은숙은 아주 예뻤다. 화장까지 한 쌍까풀눈이 특별히 정신이 나게 고왔다. 종연이랑 창식이랑 신랑 큰상을 물리자 이번에는 신랑각시 먼저 경만이 네 집으로 뛰어가 술을 먹으려고 들어앉았다. 상순은 하나 밖에 없는 외동아들을 칠촌조카 경학과 함께 상빈으로 딸려 보냈다. 덕돌은 둘째 누나와 매형을 따라 가서 상빈 상을 받고 잘 먹었다. 경학은 동네 분들에게 술을 따라 부어주고 말했다. “팔촌이 한 구들이라고 내 오늘 한 마을에 사는 팔촌 동생 덕돌을 데리고 상빈으로 왔는데 모두 술을 포근히 드오.” 그러자 모두들 상순이 네 집 기둥인 덕돌을 보고 재미있어 하면서 술을 마셨다. 덕돌은 상다리 부러지게 차린 상빈 상의 과자며 돼지고기며 보지도 못했던 음식을 배 터지게 먹었다. 그는 심심해 누나 은숙이 들어있는 사돈집에 가서 마당에서 뛰놀았다. 그러다가 목이 말라 사돈집도 가리지 않고 들어가 부엌에 가서 물을 달라고 해 마셨다. 사돈 아주머니들은 상빈으로 온 새 각시 남동생인 것을 보고 사발에 물을 퍼서 두 손으로 드렸다. 그러자 덕돌은 물을 마시고나서 배를 슬슬 마시면서 “에이고, 상빈으로 와서 정말 배 터지게 잘 먹었다.”라고 했다. 숱한 사돈들이 배를 그러안고 웃음보를 터뜨렸다. 동네 사위를 삼은지 얼마 되지 않아 초겨울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는 어느 날이었다. 순자가 남대 치 이동수를 데리고 부모에게 인사하러 왔다. 동수는 사탕과자에 술을 사들고 왔다. 그는 가시부모 상순과 명옥에게 절을 올렸다. 상순과 명옥은 금방 동네 사위를 삼고 또 남대 치 대학생 사위까지 삼게 돼 기뻐 어찌할 줄을 몰라 싱글벙글 했다. 노 할아버지는 거동이 불편해 오시지 못했기에 후일 전문 찾아가 절을 올리도록 했다. 그때 덕돌이 바깥에서 달려 들어왔다. 그는 얼굴이 백지장처럼 새하얀 동수를 보고 어려워서 두 손을 싹싹 비비면서 구들 끝에 서있었다. 순자가 소개하기도 전에 동수는 싱글벙글 웃으면서 일어나더니 “처남이겠구나. 어서 오라.”라고 하며 덕돌에게 손짓했다. 덕돌은 동수에게 안기면서도 어떻게 불러야 할 지 몰라 우물쭈물했다. 그때 순자가 옆에서 덕돌의 손을 잡고 “매형이라 불러라. 큰 매형이야.”라고 알려주었다. “매형.” “오, 그래.” 동수는 열다섯 살이나 지하인 어린 처남을 품에 안고 내려다보면서 “언제 커서 내 술동무를 하겠어?”라고 중얼거리었다. 순자는 동수를 곱게 흘겨보면서 “술을 안 마신다더니 쩍 하면 술 말시오?”라고 했다. 그러자 동수는 고수머리를 쓱 쓰다듬으면서 가시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상순은 동수를 보고 “큰사위 네는 부모가 다 계시오?” 하고 물었다. 그런데 덕돌이 어찌나 무릎 위에 앉아 호돌 매돌 하는 지 좀처럼 가시아버지 말을 들을 수 없었다. 동수는 덕돌을 내려놓고 사탕 알을 쥐어 주고 나서 가시아버지 묻는 말에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시고 집에 어머니 계셔요. 형 둘에 누나 둘이 있어요. 전 막둥이예요.”라고 대답해 드렸다. “음.” 상순은 조용히 들으면서 머리를 끄덕였다. 그때 옆에서 순자가 한마디 보탰다. “큰조카는 저 동무와 동갑입니다.” “음-” 상순은 동수를 보고 “서란에 있다던가? 그 곳 농사는 잘 되오?” 하고 물었다. 그러자 동수는 별로 고려도 하지 않고 “예. 우리 고향 서란은 땅이 많은데다가 농사가 잘 돼요.” 하고 남도말로 대답했다. 그 남대 말에 홍자는 뒤에서 “저 남대 치 말을 봐라.” 하고 웃었다. 그녀는 큰형부를 남대 치라고 놀리다 못해 항상 “남대 치”(남도치)를 거꾸로 “치대남(치도남)” 이라고 놀려주곤 했다. “집에 빚이랑 없소?” 상순의 물음에 동수는 대수롭잖게 대답했다. "한 400원 푼히 빚 졌어요. 아무 것도 아니래요.”  그 대답소리에 상순은 한숨을 후 내쉬었다. 괜히 딸을 고생시킬 까봐 근심됐던 것이다. 눈치 빠른 동수는 인차 말꼬리를 달면서 해석했다. “건 큰 형님 빚이지 이제 세간나서 살 우리와는 상관없어요. 근심하지 마세요.” 상순은 바로 앉으면서 물었다. “지금 ‘문화대혁명’ 바람이 대단한데 무슨 조직에 들었소?”  그러자 동수는 가시아버지 눈치를 살피면서 소홀히 대답하지 못하고 어물 주물 했다. 사실대로 말하면 서기질하는 가시아버지한테 정치 불문이라고 말을 들을 까봐 망설였다. 그때 순자가 옆에서 끼어들었다. “저 동무는 ‘문화대혁명’에 영 소극적입니다. 내랑 든 ‘봉화’란 조직에 들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소설책을 읽기만 좋아합니다. 저 동무는 농학원에 왔는데 도서실의 연애소설과 세계명작을 수태 읽었습니다.” 그러자 상순은 머리를 끄덕이더니 동수에게 물었다. “언제 결혼하면 좋겠는지? 큰 사돈어른께 물어보았소?” 그런데 동수는 이런 말을 했다. “결혼식을 따로 할 필요가 없습니다. 결혼식을 할 돈이 있으면 생활에 보태 쓰세요. 이렇게 와서 가시집 부모형제를 보면 됐어요.” 그 말에 상순은 놀라하면서 동수를 똑바로 마주 보았다. “그게 어디 될 말이오? 우리 집이 아무리 가난해도 맏딸을 시집보낼 돈도 없을 정도는 아니오. 우리 조선족들은 한뉘에 큰상을 세 번 받는다오. 갓 태어나서 돌 생일상을 받고 시집장가 가면서 큰상을 받고 예순에 환갑상을 받는다지 않소?” “괜찮아요. 지금은 문화대혁명시기어서 결혼도 봉건전통예식을 타파하고 혁명적으로 해요. 이렇게 와보면 결혼이라고 여기면 돼요. 딱 큰상을 받아야만 하나요.” 허나 상순은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그래도 어찌 큰상도 받기지 않고 시집보내겠소? 사위에게 큰상을 받기지도 않고 결혼식도 하지 않고 어떻게 그렇게 엉터리로 하겠소? 이번 걸음은 인사라 치고 집에 돌아가 사돈어른과 토론해 결혼 날자를 정해 결혼식을 올리기로 하기요.” 허나 동수는 고집을 부렸다. “괜찮아요. 원래 결혼식을 할 새도 없어요. 이번에 북대황으로 가면 한 1년 있어야 돼요. 우리 그저 이렇게 떠나가면 함께 살면 결혼과 마찬가지예요. 전 순자만 데리고 가면 모든 거 만족인데요.” 순자도 옆에서 한 마디 올렸다. “아버지, 근심 마십시오. 이 동무는 저와 약혼하고 얼마나 기뻤던지 가시집에 부담을 주지 말자면서 결혼식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습니다. 그저 저와 살기만 하면 된다고 했습니다.” “그래도 그렇지. 어찌 결혼식도 하지 않고 산다니?” 상순은 동수를 마주 보면서 다시 부언했다. “종신대사인데 잘 생각해보오. 결혼식은 치르지 않고 두고두고 후회하지 않겠소?” 허나 동수와 순자는 괜찮다고 했다. “절대 후회하지도 원망도 하지 않겠습니다. 근심하지 마십시오. 우리 하자는 대로 해주십시오.” 그때 홍자도 옆에서 끼어들었다. “지금은 혁명적으로 결혼한다고 시집갈 때면 모두 대장 함에 모택동 선집 네 권을 달랑 걷어넣고 낫에 붉은 댕기를 매서 보낸답니다. 결혼식 날에 밭에 나가 일하다가 점심에 큰상이라고 겨 떡을 먹는다오. 과거의 쓰라림을 잊지 말고 오늘의 해복을 생각하게 한다던가?”       허나 아버지가 “어른들 말에 끼어들긴?”하고 흘겨보자       홍자는 혀를 홀랑 내밀더니 입을 싸쥐고 일어나 조왕 쪽으로 가버렸다. 그 말에 동수와 순자는 희죽이 웃었다. 그들은 착한 효심에서 결혼식마저 치르지 않겠다고 했던 것이다. 홍자가 앓아서 숱한 빚을 진 부모에게 번다하게 결혼하느라고 또 빚더미를 더 지워주지 않으려는 것이었다. 종신대사도 마다하고 큰상마저 받지 않은 효심이야 말로 심청이 울고 갈 일이었다. 허나 부모로 된 상순과 명옥은 그 일을 두고두고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그리하여 상순은 동수와 순자의 요구대로 동수에게 큰상은 차려주지 못했지만 친척들을 다 불러 맏딸 순자의 결혼식 삼아 술상을 차렸다. 손님들이 많이 오자 덕돌은 정지와 방을 달아 다니면서 진정하지 못했다. 동수는 “덕돌아, 내 수수께끼 하나 내면 맞출래?”하고 물었다. 그러자 덕돌은 좋아라고 매형의 옆에 앉았다. “돌이 두 개 있는 거 뭐야?” “돌이 두 개 있는 게?” 덕돌은 인차 손벽을 쳤다. “아, 알았소. 눈이오.” “눈이 어디 돌이냐?” “그럼 뭐요?” 덕돌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한참 궁리해도 맞추지 못했다. 그때 옆에서 순자가 제꺽 알려 주었다. “호돌 매돌!” “양? 호돌 매돌? 그게 어디 돌이 두 개오?” “네가 어찌나 호돌 매돌 했으면 매형이 너에게 그런 수수께끼를 냈겠니?” “아, 아니야! 그게 무슨 수수께끼요?” 덕돌은 매형의 품에 안기면서 떼를 썼다. “다른 거 내오. 안되오.” 동수는 인차 “그럼 다른 거 내면 맞춰봐. 응?” “양. 내오.” “물이 두 개인 거 뭐야?” “물이 두 개?” 덕돌은 이번에도 맞추지 못했다. 그러자 큰누나가 또 말했다. “흐물흐물이지 뭐야?” “아, 또 나를 놀리는 게구나. 안 되오.” “그렇게 자꾸 흐물거리지 말라. 그러면 그런 수수께끼를 내지 않는다. 숱한 손님들이 오는데 어른답게 놀아라. 알았지?” 큰누나 말에 그제야 덕돌은 서적을 쓰지 않고 똑바로 앉아 주는 사탕과 과자나 받아가지고 마을에 나가 성묵이랑 동림이랑 나눠 먹으면서 놀았다. 어린 처남 덕돌을 떼놓았지만 동수는 둘째동서 경만과 육촌 형들인 성환과 종학이가 어찌나 “대학생, 대학생” 하고 놀리면서 술을 많이 권하는지 혼났다. 술을 과하게 마신 동수는 입을 싸쥐고 바깥에 나가더니 왈칵왈칵 토했다. 순자는 찬 물을 떠가지고 나가 잔등을 두드려주면서 책망했다. “동무, 무슨 술을 이렇게 마십니까? 술을 마시지 않는다 해놓고서도…” “순자, 미안하오. 동서가 술이 꽤나 세구먼.” 여동생들인 은숙과 홍자 그리고 신자와 성숙이가 큰언니의 결혼을 축하해 밤이 깊어가도록 홍심 충성 패를 목에 걸고 “문화대혁명”시기 제일 유행한 충성가를 쟁쟁한 고음으로 부르면서 충성무를 절룩절룩 추었다. 동수와 순자는 서로 마주 보며 싱글벙글 생글방글 웃으면서 박수를 치고 노래를 불렀다. 동수도 일어나 걸걸한 목소리로 사랑타령을 아주 멋있게 불러 박수갈채까지 받았다…  
154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99) 댓글:  조회:1288  추천:1  2018-05-01
             6.외롭게 우는 외기러기 먹장구름에 가린 해가 서산으로 서서히 넘어가버린 후 을씨년스러운 하늘에는 또 먹장구름이 몰려왔다. 언제 맑게 갠 하늘의 환한 해를 보고 말 것 같지 못했다. 하늘의 풍운조화는 참말로 짐작하기 어렵려운 변덕꾸러기어서 농사군들을 괴롭히고 시달리게 했다. 사원들은 장탄식하면서 변덕스런 하늘을 쳐다보며 원망하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상순은 마을에 돌아오자마자 높다란 토성 안으로 들어갔다. 할아버지가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번마다 관건적인 시각이면 상순은 할아버지를 찾아가 의논하군 했다. 병완은 대대 사무실에서 기다리다가 상순이 들어서자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이제 장마철이 오기 전에 태평강과 부르하통하에 제방뚝을 잘 쌓아야 한다. 그러잖으면 우리 대대 사원들이 몇십년 동안 고생스레 일궈 놓은 밭이 다 밀려가겠다.” “예. 알았습니다. 나도 궁리해 두었습니다. 제방뚝 양쪽에 버드나무와 비술나무를 심어놓을 예산입니다.” 병완은 가슴까지 내리두리운 하얀 수염을 매만지면서 머리를 끄덕이었다. “음, 백양나무는 안 돼. 곧은 뿌리 밖에 없어서 물에 밀리면 뿌리 채로 뽑혀. 더구나 모래 뚝에 심어놓아선 견디지 못해. 그래도 비술나무와 버드나무가 잔뿌리 많아서 물엔 견딘다.” 상순은 담배를 말아 붙이면서 할아버지께 말했다. “장개골 안과 돌문 안에 저수지를 만드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해마다 쩍 하면 큰물이 져서 어디 감당하겠습니까? 저수지를 만들어서 소낙비가 오면 물을 가둬 두고 가물 때는 물을 빼서 쓰면 일거양득이 아니겠습니까?” 병완은 이가 다 빠져 좁아진 볼이 움푹 파이게 곰방대를 뿍뿍 빨더니 머리를 끄덕였다. “그래, 그게 원대한 계획이구나. 부르하통하를 막아 모래밭에 논을 풀었고 패용천산과 칼산 사이에 과수원을 만들었지. 이제 장개골 안과 돌문 안에 저수까지 만들어 놓으면 우리 마을은 살기 좋은 고장으로 되겠구나. 허허허.” “할아버지, 제 생각엔 산비탈 밭머리와 령 길에 모두 비술나무를 심으면 좋을 거 같습니다.” “건 왜?” “가물 때면 땡볕을 피할 나무 한 대도 없어 틀렸습니다. 이전에 대약진 때 가물어 더위를 먹고 사원들과 소가 쓰러지지 않았습니까. 비술나무를 심어 더위도 피하고 장차 구부정한 비술나무를 베다가 가대기나 호리 같은 농기구도 만들면 좀 좋습니까?” “오- 그거 정말 일거양득이구나.” 병완은 가슴까지 내려온 흰 수염을 슬슬 매만지더니 뒷말을 이었다. “밭을 일구지 못할 산비탈에 백양나무를 심어 청산을 조림해라. 이 담 몇 십년 후에 우리 자손들이 그 나무를 베다가 새 집을 짓고 살게. 지금 지은 집은 우리 고향을 떠나서 대충 바람이나 막자고 지은 초가삼간들이 아니냐? 낡았다. 낡았어. 이후에는 벽돌기와 집을 덩실하게 짓고 살아야 하지.” 상순은 할아버지 두 손을 잡고 바라보면서 말했다. “이 좋은 세월에 오래오래 앉으십시오. 이제 자손들이 우리 뒤를 이어 우리 마을을 잘 건설하는 것을 오래오래 지켜봐주십시오.” “그래. 넌 내가 하지 못한 일을 해 달라. 난 다만 우리 사회주의 새 농촌을 잘 건설해 모든 사원들이 남부럽지 않게 배불리 먹고 사는 걸 보기만 하면 눈을 감아도 원이 없겠다.” 병완은 눈물이 글썽해 손자에게 부탁의 말을 하더니 기침을 쿨룩쿨룩 했다. 상순은 날 따라 수척해가는 할아버지를 보고 마음이 아팠다. “할아버지, 좋은 의사 마을에 있는데요. 규상에게 폐에 좋은 약을 지어달라고 하겠습니다. 형내한테도 약을 지어달라고 하랍니까?” 병완은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아니야, 아니. 난 큰 속병이 없다. 다만 ‘문화대혁명’인지 뭔지 하는 바람에 근심스럽구나. 층층이 한다하는 조선족간부들을 다 끌어내다가 투쟁한다는데 그게 무슨 혁명이란 말이냐? 진짜 세상 모르는 애들을 시켜서 공산당 노간부들을 반란하고 투쟁하고 못살게 구는 게 아니고 뭐냐?” 상순은 천정을 쳐다보면서 땅이 꺼지게 한숨을 후 내쉬었다. “듣는 말에 의하면 허영주 부현장도 홍위병들과 학생반란파들에게 끌려 나가 투쟁당했답니다. 진수해공사 박우성 서기도 반란파들에게 끌려 나가 일본특무라고 투쟁당했답니다.” 병완은 곰방대를 뻑뻑 빨면서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일본 특무라니?” 상순은 담배연기를 길게 뿜더니 두덜거렸다. “우성이 일본 와세다대학을 졸업한게 죄로 됐답니다. 정규상도 일본 국비생으로 장춘의과대학을 졸업했다고 일본 특무라고 반란파들이 또 투쟁하겠다고 떠듭디다. 내 말렸으니 말이지 끌려 나가 투쟁당하고 얻어맞을 번했습니다.” “우리 마을에도 ‘문화대혁명’ 바람이 불어오겠구나. 각별히 주의해라. 청년 애들 가운데서 누가 반란파 두목이냐?” “아직 잘 알리지 않습니다. 삼합에서 이사해온 황종연과 황승연 형제 좀 말이 있습니다. 진수해 시내에서 한다하는 싸움꾼이랍니다.” “그 부대 갔다 왔다는 종연이 말이냐?” “예. 걔가 진수해 싸움꾼들과 무리를 지어 사처로 돌아다니면서 로간부들을 투쟁합니다.” “그 놈 새끼, 진상을 알면서 그런다니?” “걔는 흥수 덕분에 제대해 대대 기업에 들어갔는데. 기업의 일은 하잖고 쩍하면 시내에 내려가 싸움질을 한답니다.” “참 대사는 대사야.” 상순은 한참 머리를 숙이고 궁리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할아버지, 이젠 서기를 내놓을까 합니다.” “건 왜?” 상순은 머리를 천천히 들고 허리를 쭉 펴더니 말했다. “전번에도 얘기 드렸지만 흥수 삼형제가 어찌나 짜고 들어 서기 자리를 욕심내는지 시끄럽습니다. 흥수가 서기를 해서 우리 대대를 더 잘 건설하면 괜찮습니다.” 그러나 병완은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벼슬을 초개처럼 여기는 정신은 귀하다. 넌 부모를 잘 모시고 마을 사람들을 이끌어 사회주의 새 농촌으로 건설하려고 공안국 국장도 내놓고 함흥 촌으로 돌아오지 않았느냐? 절대 약하게 나오지 말라. 흥수에게 자리를 내준다고 해서 우리 마을이 새 농촌으로 건설될 거 같니? 날마다 투쟁대회나 열다나면 언제 건설을 하니?” 병완은 머리를 숙이고 눈을 지그시 감고 도정신해 듣는 상순을 보고 말했다. “계속 서기를 하는 게 옳다.” 그러자 상순은 머리를 들더니 “치보 주임을 흥수에게 맡기면 어떻습니까?”라고 물었다. “왜?” 병완은 축 처진 눈시울을 치켜뜨면서 물었다. 상순은 “흥수가 어찌나 모든 권력을 우리 조손 삼대가 다 틀어쥔다고 여론을 조성하는지 말이 아닙니다.”라고 했다. “건 생각하지 못한 일이구나.” 병완은 곰방대를 뻑뻑 빨면서 궁리하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래, 치보주임을 계속 흥수를 시켜라. 그러나 서기는 내놓지 말라. 남을 너무 믿지 않고 모든 걸 다 틀어쥐는 건 틀린 공작 작법이지. 우린 어떻게 하나 군중들과 한 덩어리가 돼야 한다. 군중들의 의견을 귀담아 듣고 군중들의 어려운 일부터 해결해 주어야 한다. 그러나 모든 걸 회피하고 뒤로 물러서는 것도 잘못이야.” 상순은 “예, 할아버지 가르침을 명심하겠습니다.”라고 말하고는 할아버지를 부축해 집으로 모셔갔다. 상순이 함흥 촌에서 조개덕으로 내려오다가 조씨네 묘지 부근을 지날 때었다. 묘지에는 범이 새끼를 칠 지경으로 풀이 한길씩이나 자라나 있어 무시무시했다. 묘지 옆을 지나는 순간 이전 일이 떠올랐다. 그때 상순은 이 묘지 옆을 지나다가 웬 울음소리를 듣고 다가가보니 아버지가 글쎄 무릎을 꿇고 쪼그리고 앉아 울지 않겠는가! 하여 상순은 그날 밤으로 수레를 가지고 부모와 여동생 금옥을 모셔 자기 집으로 내려왔댔다. 또 이 한족묘지 속에는 국민당 토비두목 조덕산의 시체도 파묻혀 있었다. 조덕산은 국민당군의 파견을 받고 장춘으로부터 국민당 군 한 개패를 끌고 고향마을에 돌아와 전보흥을 괴수로 하는 삼도만 토비들을 사촉해 함흥 촌 일대 공산당조직을 여지없이 짓부시려 했다가 민주련군에 나포돼 총살당했던 것이다. 그의 동생인 지주 조덕림이 조덕산의 깨진 두개골을 주어 맞춘 후 조상들의 뼈가 묻힌 이 무덤군에 파묻었던 것이다. 매번 마을 사람들은 이 곳을 지날 때마다 등 곬에 싸늘한 식은땀이 오싹 돋을 지경으로 무시무시해 했다. 그러나 상순은 군인출신인지라 이 곳을 지날 때마다 겁이 나기는커녕 속으로 계급투쟁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며 마음을 굳게 먹었다. 그런데 오늘 밤 달빛에 피뜩 보니 누군가 을씨년스러운 묘지 옆의 백양나무로 바라 오르는 것이 보이지 않겠는가. (저게 뭐야? 혹시 덕성 영감이 또 자살하려는 게 아닌가?) 상순은 이상해 주위를 둘러본 후 경각성을 높여 백양나무에 바라 오른 사람의 동태를 살폈다. 휘영청 밝은 달빛을 빌어 여겨보니 검은 그림자는 그리 높지 않은 나무 가지에 바 줄을 감아 매더니 올가미에 목을 걸려고 하지 않겠는가! “누구야?!” 상순의 고함소리에 그 검은 그림자는 멈칫 목에 걸려던 올가미를 멈추었다. “뭐 하는 짓이야?! 내려오지 못하겠는가?” 나무 위에서 맥 빠진 소리가 들렸다. “상순이, 말리지 마오.”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 “아니, 허 서기 아니오? 이게 무슨 짓입니까?” 상순은 달려가 백양나무에 바라 올라갔다. “난 이 세상에서 살 멋이 없소.” 상순은 허 백호의 손에서 올가미를 빼앗아 풀어내면서 말렸다. “이렇게 약하게 나올 줄은 몰랐습니다. 빨리 내려갑시다. 아무리 갈 길이 험난하고 곡절을 겪더라도 중국 공산당을 믿고 살아야 합니다. 당에서는 아무 때든 허 서기를 공정하게 평가할 날이 있을 것입니다.” 상순은 허백호를 부축해 나무에서 내려갔다. 허백호는 한 키도 넘는 풀이 깔린 땅바닥에 김이 빠진 공처럼 풀썩 주저앉았다. “왜 이런 좁은 생각을 다 했습니까?” “상순이, 난 살 용기가 없소. 이 놈의 세월이 언제 끝나겠소?” “먹장구름이 걷히면 해 뜰 날이 있을 게 아닙니까?” 상순의 말에 허백호는 한숨을 땅이 꺼지게 후 내쉬었다. “언제 이 놈 세월이 끝난다고? 보오. 반 우파투쟁에 뒤이어 또 ‘문화대혁명’이 시작됐소. 우에서 5, 6년에 한 번씩 새로운 형식으로 나타나는 계급의 적들과 투쟁해야 한다고 했소. 이젠 지주나 국민당보다도 당내 투쟁에 중점을 두고 있소. 류소기를 타도하자고 하더니 층층이 로 간부들을 다 타도하오. 날마다 투쟁을 받으면서 살아서 뭘 하오?” 상순은 머리를 툭 떨어뜨리는 허백호 서기를 와락 끌어안으면서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아니오." 상순과 흥수는 나이 비슷했다. 그러나 상순은 옛날 민주련군 때 삼도만 토비 숙청전투에서 자기 반장할 때의 련장이였다고 항상 존대말을 썼다. 급할 땐 때론 대등의 말이 불쑥 튀여나갈 때도 있었다. "허서기, 우리 당은 꼭 인민들을 정확한 길로 이끌 겁니다. 우리 당을 믿고 역경 속에서도 굴하지 말고 함께 꿋꿋이 살아갑시다.” “사는 게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럽네.” 상순은 무릎을 꿇고 앉아 허백호의 두 손을 잡고 머리를 조아렸다. “모진 정신타격을 받은 허 서기를 잘 보필해주지 못해 미안합니다. 저는 삼도만 토비 숙청 전투 때나 영월구 공안국에 있을 때나 허 서기를 존경해왔습니다. 그런데 제가 잘 모시지 못해 미안합니다.” 허백호도 엉거주춤 일어나 무릎을 꿇더니 상순의 두 손을 꽉 맞잡았다. “상순이, 정말 자네한테 미안하네. 내가 살아서 뭘 하는가? 이렇게 좋은 사람도 몰라보고 지도자를 뜬다고 계속 짓밟았으니. 흑흑.” “무슨 말씀을, 다 오해해서 그렇게 됐지요. 자기 입 안의 혀도 깨물 때가 있지 않습니까?” 허백호는 솔직히 말했다. “아니야. 자네가 삼도만에서 날 퇀장에게 고발했다고 그게 속에 내려가지 않아 처처에서 흠집을 잡아내 메치려고 했네. 정말 미안하네. 날 용서해 주오. 으흐흑, 흑, 흑흑.” 상순은 흑흑 흐느껴 우는 허백호 서기를 넓은 품에 꼭 껴안아 주었다. “저는 나쁘게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그럴수록 결점을 고치고 굳세게 일해 왔습니다. 허 서기가 자리를 냈지만 계속 스승으로 모시겠습니다.” “야, 상순이, 자넨 정말… 흐흑, 흑흑.” 백호는 흑흑 흐느껴 울며 상순의 잔등을 손으로 다독였다. “상순이, 자네가 한 노선이 옳았네. 사회주의라는게 백성들을 굶기고서야 무슨 우월성이 있겠소? 우리는 군중들을 이끌어 배불리 먹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사회주의 새 농촌을 건설해야 하오. 이전에 내가 내밀었던 심갱밀식재배법은 대약진 때 잘 못한 농사법이었네. 자네가 옳았네. 날 용서해줄 수 있겠는가?” “용서라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허 서기도 혁명을 하느라고 그랬습니다. 나는 절대 그 일을 마음에 두지 않습니다.” 허백호는 상순을 와락 끌어안았다. 둘은 서로 꽉 끌어안고 오래도록 놓지 않았다. 하늘의 먹장구름도 서서히 걷히더니 휘영청 밝은 달빛이 설레는 수풀 속에서 서로 부둥켜안은 두 사람에게 은빛 옷을 입혀 주었다. 상순은 삼도만 토비숙청전투 때부터 허백호를 상전으로 모신 후 한 번도 그에게서 사랑을 받지 못하고 타격만 받아왔다. 하지만 그는 죽지 못해 사는 허백호가 불쌍해 마음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자네와 흥수는 판판 달라. 기실 흥수는 내가 그때 얼떨떨해 화선입당을 시켰소. 양심이 없소. 내게 붙어서 입당하고 지부서기까지 하자다가 내가 우파 모자를 쓰자마자 헌 신짝 차버리듯 했소. 믿지 못할 사람이오. 지금 난 얼마나 후회하는지 모르오.” 상순은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었다. 허백호는 상순의 두 팔을 붙잡고 속심을 털어놓았다. “기실 흥수는 요즘 자기 여조카 정옥도 조선에 갔다가 돌아왔기에 이른바 조선특무 말을 입 밖에 내지도 않으면서 투쟁대회를 다시 하지 않는 거요.” “근심하지 마십시오. 우린 당과 사회주의 조국에 미안한 일을 하지 않은 이상 세상에 두려울 게 없습니다.” 그들은 수풀이 우거진 묘지 군에서 나와 태평강 가에서 오래도록 이왕지사를 얘기했다. 삼도만 토비숙청으로부터 항미원조 전쟁 때 일로, 영월구 공안국에 있을 때 일로 초생 눈썹달이 서산으로 기울 때까지 얘기를 나누었다. 어디에서인가 외기러기가 날아가면서 외롭게 우는 소리가 끼룩끼룩 애처롭게 들리었다.              7. 치보 주임 높다란 토성 안 늙은 비술나무 위에서 참새 한 마리가 요 가지 조 가지 옮겨 앉으면서 짹짹거렸다. 참새는 발로 부리를 싹싹 닦다가 짹짹 자지러지게 울다가도 다른 나뭇가지에 포롱 날아가 앉아 온 토성 안이 부산하게 짹짹 울었다. 요즘 흥수는 어깨 으쓱해 개 잡은 포수처럼 우쭐거리면서 마을을 돌아다니다가도 토성 안대대 사무실에 틀을 차리며 앉아 신문을 척 보곤 했다. 치보 주임으로 된 그는 나라 주석이나 대통령이나 된 듯이 조개턱을 쳐들고 안하무인격이었다. 어느 하루, 충국이 흥수를 찾아 대대 사무실로 들어와 두 손을 싹싹 비볐다. “이 치보 주임, 저,” 흥수는 서기 사무상 옆에 앉아 신문을 내리 보다가 머리를 들더니 의자 등받이에 잔등을 대며 허리를 쭉 펴고 틀스럽게 물었다. “무슨 일이야?” “소개신 한장 떼 주오.” “무슨 소개신?” “결혼등록소개신.” “뭘? 누가 너 같은 지주 놈 새끼한테 시집간다더니? 흥!” 충국은 흥수를 쏘아보면서 정색해 말했다. “지주 아들은 사람이 아니오?” “누구한테 장가가?” “조개덕 오옥선과 결혼해야겠소.” “뭐라고? 옥선과?” “예?” 흥수는 외까풀 눈이 뒤번져지게 치켜뜨며 놀란 표정이었다. 그러나 인차 랭정성을 회복하더니 천천히 눈을 내리깔았다. “우파 여자와 지주 아들이 결혼해? 흥! 내 계급투쟁 안광을 어떻게 보고 그래? 꿈도 꾸지 말라니께.” 허나 충국은 물러가려고 하지 않았다. “우린 오래잖으면 애까지 낳게 됐소.” “뭐라고? 이 놈 새끼, 바로 무법천지로구나. 결혼을 동의하지도 않았는데 애까지 설어? 당장 긁어 버려! 너희들 오누이는 결혼 전에 애를 만드는 전문가로구나. 흥! 더러운 연놈들. 애를 먼저 만들면 결혼시켜 줄 거 같아?” 흥수는 충국을 쏘아보더니 휭 하니 대대 사무실 옆에 있는 위생소로 나갔다. “정선생, 빨리 조개덕으로 가야겠네.” 정규상은 주사기를 소독하다가 말고 물었다. “누가 앓소?” 흥수는 조개턱을 쳐들고 떠들어댔다. “말이나 돼. 저 충국 새끼캉(하고) 우파 오옥선이 애까지 설었다니께(니까).” 정규상도 놀라면서 뒤에 들어서는 충국을 흘끔 곁눈질했다. 충국은  울먹울먹해 통사정을 들이댔다. “정 선생, 제발 애를 긁지 마십시오. 제발 빕니다.”  허나 흥수는 외까풀눈을 부릅뜨고 충국을 쏘아보았다. “이 놈 새끼! 아직도 떠들겠느냐? 썩 꺼져!” 뒤이어 그는 정규상을 돌아보면서 명령하듯 고함쳤다. “어서 가. 정선생.” 정규상은 소독한 수술칼이랑 갖춰 위생가방에 넣어가지고 둘러메고 흥수를 따라 조개덕으로 떠나갔다. 바빠 맞은 충국은 황급히 그들 앞서 조덕림의 묘지 부근에 달려갔다. 흥수도 필경은 삼도만 토비숙청전투와 조선전쟁에 참가해 백전노장답게 기민한 치보주임이었다. 이전에 미련의 절육수술을 하려다가 충국에게 당한 적이 있어 그는 충국을 방비해야 했다. 그는 정규상을 데리고 토성 밖을 나가 마을 어귀를 벗어나려다가 주춤 멈춰 섰다. “정 선생, 가지 말자니께.” “왜?” 규상은 이상해 걸음을 멈추면서 가슴츠레 뜬 흥수의 외까풀 눈을 마주 보았다. “아무래도 우리 힘으로 저 충국을 이길 거 같지 못해. 전번에도 혼나지 않았나?” 지난 달에 흥수는 미련의 배속에 있는 애를 수술해 버리려고 정규상과 함께 소시거로 올라간 적이 있었다. 그때 장충국은 성난 사자처럼 세길네길 뛰었다. 그는 불시에 정규상의 손에서 수술칼을 빼앗아들고 흥수를 깔고 들어앉아 그걸 움켜쥐고 베버리겠다고 야단쳤다. 정규상이 뜯어말려서야 흥수는 그걸 간신히 건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도 생각하면 머리끼 곤두서고 등곬이 싸늘해졌다. “그때 저 놈한테 그걸 잡힌 후부텀 이게 통말을 듣지 않는다니께. 항상 여섯시를 가리키는 벽시계처럼 꼼짝할 수 없어.” 규상은 입으로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느라고 손으로 입을 감싸 쥐고 기침을 하는 척 했다. “못된 놈의 암캐 부뚜막에 뛰어 오른다더니. 허, 참, 세상에 별 일을 다 보겠네.” 정규상은 흥수를 따라 토성안 대대 위생 소로 들어가면서 물었다. “그래 오옥선을 어쩔 예산이오?” 흥수는 대대 사무실로 들어가면서 두덜댔다. “쌍 빌어먹을 년, 확실히 지주 놈의 새끼를 뱄는가 알아보고 손 써도 늦지 않는기요. 충국을 다른 데 일하러 보낸 후에 옥선한테 손을 써도 늦지 않소. 그 우직한 놈을 잘 못 건드렸다가 경을 치겠네. 안 그래?” (겁을 먹긴 단단히 먹었군. 흐흐흐.) 정규상은 속으로 웃으면서 위생 소로 들어가 주사기를 계속 소독했다. 한편 충국은 함흥촌과 조개덕 사이에 수풀이 무성한 조덕림의 무덤 부근에서 기다리다가 흥수가 나타나지 않자 덜컥 이상한 감이 들었다. 그는 함흥촌에 돌아와 대대 사무실을 들여다보고 더욱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저 놈들이 무슨 꿍꿍이지?) 충국은 도리머리를 흔들다가 “에라, 모르겠다. 될대로 되라지.” 하고 중얼거리면서 팔소매를 휙 젓고 나서 소서구로 성큼성큼 돌아갔다. 흥수는 대대 사무실에 앉아 한가하게 신문을 뒤적였다. 상순은 서기이지만 평소에 항상 밭에 나가 사원들과 함께 일했기에 흥수만 대대 간부처럼 무더운 여름날에 일하러 나가지 않고 서늘한 사무실에 들어앉아 있었던 것이다. 한참 신문을 뒤적이다가 웬 일인지 눈앞에 불시에 정규상과 함께 소서구에 갔다가 본 미련의 하얀 허벅다리가 눈앞에 삼삼해났다. (뭐야? 사람이 편안하니 여자 생각이 많이 나?) 글쎄 흥수는 아래 하신이 근질거려나더니 그것이 놀랍게도 칼산처럼 서서히 솟아오르지 않겠는가. 그는 신문으로 아래를 가리고 손으로 슬슬 주물다가 창문 밖을 내다보았다. (충국이 소서구로 돌아갔을까?) 그는 도적고양이처럼 살금살금 바깥에 나가 마루에 서서 여기저기 살피다가 마루에서 내려섰다. 그는 늙은 비술나무 밑으로 해 대문께로 쪼르르 달려갔다. 토성 밖을 한 고패 돌면서 살펴보아도 충국의 그림자는 보이지도 않았다. 그는 토성 남쪽에 자리 잡은 미련이네 집을 바라보면서 군침을 꼴깍 삼켰다. 허나 어쩐지 어디에선가 자기 행적을 감시하는 눈길이 따갑게 느껴져 토성 안으로 되돌아들어갔다. 남의 집 구새 목에 숨어 먼발치에서 토성 대문을 감시하던 충국은 반나절이나 돼도 흥수가 토성 안에서 나오지 않는 것이 이상했다. 그는 너무 이상해 한참 더 살피다가 고개를 기웃거리면서도 투쟁을 받을까봐 소서구 상우지로 일하러 갔던 것이다. 흥수는 집에 가서 점심을 먹고 모두들 일 밭으로 나간 후에야 대대 사무실로 갔다. 헌데 이상하게 축 쳐져 있던 그것이 미련의 하얀 젖무덤을 떠올리기만 하면 대가리를 쳐들까 했다. (별 일이야. 이 놈도 젊고 예쁜 가시나 알아보는 모양이지. 어디 참겠어. 이거.) 그는 마흔을 넘긴 춘실의 펑퍼짐한 엉덩이를 봐서는 아무런 감각도 없었다. 허나 윤택이 나고 하얀 미련의 허벅지를 눈앞에 떠올리기만 해도 그것이 뻣뻣이 머리를 쳐들지 않겠는가? (충국한테 잘못 됐는가 했더니. 아니야. 이 놈도 젊은 연들을 만나면 용을 쓰겠지.) 흥수는 더는 참을 수 없어 슬금슬금 토성 밖으로 나갔다. 그때 때마침 저쪽 우물가에서 삐꺼덕 삐꺼덕 드레 박을 잣아 올리는 소리가 들리었다. 때마침 애를 업은 채 드레박을 잣는 미련이 보였다. “어험, 어험.” 흥수는 마른기침을 하면서 다가가 말을 걸었다. “미련아, 그래, 애는 잘 자라느냐?” 미련은 드레박을 잣다가 깜짝 놀라 멈칫 하다가 억지로 해시시 웃었다. “예. 치보주임, 덕분에 잘 자랍니다.” 흥수는 조선말도 꽤나 잘하는 미련을 흘금흘금 곁눈질 했다. 드레박을 잣아 올려 초롱에 물을 붓는 미련이가 오늘따라 하야말쑥한게 더 고와 보였다. (아이고, 저 허연 젖가슴을 봐. 말랑말랑한게 쥐면 톡 터질 거 같아.) 흥수는 혼 나간 야수처럼 미련의 가슴을 노려보았다. “세상에 별일이야. 지주네 딸이 이렇게 고와보이다니?” “예?” 미련이 듣고 누런 이빨을 다 드러내며 헤헤헤 웃었다. “응? 어, 그래 어째 네가 영 곱구나.” “어마나, 치보주임도.” 미련은 눈을 곱게 흘기면서 물 초롱을 들고 집으로 떠나갔다. “힘들겠구나. 내 들어다 줄게.” 흥수는 능글맞게 물 초롱을 들고 앞서 미련의 집으로 들어갔다. 미련은 여기저기 사처를 둘러보면서 입을 싸쥐고 뒤따라 집으로 들어갔다. “치보 주임, 남들이 지주네 딸을 도와주었다고 욕하지 않겠습니까? 헤헤헤.” “괜찮아. 난 너를 위해서라면 뭐든 해주고 싶구나.” “어마나!” 미련은 허리를 비꼬며 손으로 낯을 가리면서 부엌으로 들어와 물을 물독에 부으려고 했다. “가만, 내가 부어 줄께니.” 흥수는 물독에 물을 부어주기까지 하면서 중얼거렸다. “미련아, 내 소개 신을 떼주지 않았더라면 네가 이렇게 애를 낳고 살 수 있었겠어?” “감사합니다. 치보 주임.” 흥수는 물을 다 붓고 음충한 눈길로 미련을 돌아보면서 능글맞게 구슬렸다. “너 이런 말 알아?” 미련은 이상해 물었다. “뭘 말인가요?” “우물의 물을 마실 때 우물을 판 사람을 잊지 말라.” “예? 저 토성 밖의 우물은 병완 할아버지네 부자들이 조선에서 이 마을에 처음 왔을 때 팠다던데요.” “그래, 허나 너 네 살 게 만든 건 누구냐?” “그거야 치보 주임이죠.” “그래.” 흥수는 미련을 활 채 끌어안았다. “왜 이래요? 애 다치겠네. 별라냥 한다. 우추 같은게.” 미련은 흥수를 활 밀쳐버리고 나서 애 띠를 풀고 애를 잔등에서 내려 구들에 눕혔다. 흥수는 구들에 올라가 단통 미련의 젖가슴에 손을 쑥 넣어 꽉 움켜쥐면서 호통쳤다. “사람이 은공을 갚을 줄도 알아야지. 함흥대대에서 이 치보주임을 모르고 살 수 있어?” “이러지 맙소!” 미련은 흥수의 손을 빼려고 안간힘을 다해 몸부림쳤다. 허나 흥수는 미련을 꽉 껴안아 부엌 장판 밑에 밀어넣었다. 뒤이어 깔고들어앉아 야수처럼 그걸 하려고 달려들었다. 아녀자 미련은 흥수의 억센 팔을 이길 수 없었다. 물초롱이 넘어져 물이 와르르 부엌바닥에 흘러내렸다. 흥수는 거센 숨을 몰아쉬면서 소리치는 미련의 입을 손으로 막았다. “쉿- 한번만 참아. 널 투쟁 맞지도 않고 편안히 살게 할 거니께.” 허나 미련은 발버둥치면서 발악했다. 흥수가 치마를 걷어 올린 후 괴춤을 까는 새에 미련은 소리쳤다. “애 깨나겠다. 동네서 알면 난 어떻게 살아? 우리 오빠 치보주임을 놔 둘 거 같은가?!” “지주 아들놈이 감히 이 어른을 어쩐다고?” 흥수는 발버둥질치는 미련을 어찌할 수 없어 통사정했다. “얘, 내 말을 고분고분 들어. 그럼 네 오빠하고 옥선도 결혼시켜주마.” “예?” 미련은 자기 귀를 의심하면서 발버둥질을 멈췄다. 그새 흥수는 미친듯이 덮쳐들었다. “아!” 미련은 반사적으로 소리가 나갔다. “아, 아, 그럼 우리 오빠, 오 선생과 결혼, 결혼 시켜주지?” “응, 그래.” 미련은 눈을 질끈 감고 입을 하 벌리고 말았다. “하긴 잘한다!” 이때 갑자기 느닷없이 귀에 익은 목소리가 울렸다. 흥수가 머리를 들어보니 춘실이 집에 뛰어 들어왔다. 흥수는 괴춤을 춰 입고 황급히 문 밖으로 뛰어나갔다. 춘실은 물이 줄줄 흐르는 부엌바닥에 쓰러진 미련의 머리채를 잡아 쥐고 마구 흔들어댔다. “이 년아, 죽자고 이러니?” “내 어쩌래? 죽기내기로 달려드는 걸.” 춘실은 물참봉이 된 미련의 허벅지를 쏘아보았다. “저 나그네 나와는 어쩌지 못하면서.” “아, 아니,” “무슨 소리냐?” “어째 그게 어쩌지두 못하더구먼.” “그래? 그래도 바람을 쓰면 그 병이 낫는다더니. 젊은 계집을 봐도 안 돼?” 춘실은 중얼거리더니 미련을 표독스럽게 마주 보면서 다짐을 땄다. “너 누구한테도 이 일을 말하면 안 돼. 그때면 너 죽는다. 알겠지?” “예.” 미련은 머리를 끄덕이었다. 춘실은 미련의 귀쌈을 찰싹 갈기고 우쭐 일어나 흥수를 흘겨보면서 문 밖으로 나갔다. 바깥에서는 까마귀 한 마리가 하늘을 찌르고 선 백양나무 가지에 올라 앉아 진절머리 나게 까욱까욱 울고 있었다.                             8. 밝은 달밤이 오면    봄기별을 알리는 종달새들이 지종지종 지저귀고 봄바람에 넘실거리는 버드나무가지에 알락까치들이 앉아 “까, 까, 까.” 노래하고 있다. “이라! 이라!”  버드나무숲이 우거진 해란강변 습개지에서 종호와 장묵은 써레질을 하느라고 분주했다. 종호는 새하얀 옷을 입고 써레질을 했지만 흙물 한 점도 옷에 띠지 않게 깐지고도 깨끗하게 일해 모내기를 하는 아낙네들이 혀를 끌끌 찰 지경이었다. 이때 장묵의 걸기를 끌던 황소가 습개구덩이에 풀렁 빠졌다. 원래 습개자리에 흙을 파다 펴고 푼 논이기에 장묵이 아무리 궁둥이를 채찍으로 때려도 황소는 습개구덩이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황소가 근육이 불뚝불뚝 살아날 지경으로 뻐둑거릴수록 더 빠져 들어가 이젠 엉덩이마저 흙탕물에 들어가고 말았다. 급해난 장묵은 아우성쳤다. “종호! 빨리 오라!” 종호는 “와.” 하고 황소를 세워놓고 채찍을 걸기에 걸어놓았다. “소가 습개에 오래 빠져 있으면 배가 불어 죽소.” 종호는 다가와 장묵의 손에서 채찍을 받아 쥐어 소등을 짱짱 내리쳤다. 허나 황소는 움쭉 거리다가 주춤 물앉았다. 황소는 이젠 각일각 배가 붓기 시작했다. 도리머리를 흔들던 종호는 소 궁둥이 쪽으로 가서 여겨보았다. “형님, 내 소 궁둥이를 들면 채찍으로 소를 치오.” “에이고, 어떻게 소 궁둥이를 든다고 그러니?” “그러지 않으면 소 죽는걸 보고만 있겠소?” 종호는 사원들을 보고 가마니를 가져오라고 해 소 궁둥이 뒤쪽에 폈다. 그는 습개 위에 편 가마니를 밟고 서더니 두 팔을 쓱쓱 걷고 용처럼 꿈틀거리는 두 팔로 소 궁둥이를 두 손을 잡았다. 두 팔의 근육이 울뚝불뚝 살아났다. “어-차!” 종호가 몸을 뒤로 젖히면서 두 팔에 힘주어 소 궁둥이를 번쩍 들어 올렸다. 그때 장묵이 “이라!” 소리치며 채찍을 날리자 잔등을 얻어맞은 황소가 앞으로 벌컥 내짚더니 습개에서 빠져나왔다. “와! 꼬리 없는 소구먼!” 사원들은 입을 딱 벌렸다. 여기저기에서 감탄소리가 터져 나왔다. “저게 어디 사람이오?” “글쎄 말이오. 어쩜 습개에서 소 궁둥이를 건뜻 든단 말이오?” “이전에도 수레 멍에에 애들을 둘이나 앉히고 수레 채를 쥐고 수레를 들어 몇 바퀴씩 돌린 적이 있소.” “힘이 무적이오. 무적.” 장묵은 힘장수 동생이 대견스러워 사원들을 돌아보면서 자랑을 늘여놓았다. “종호는 이전에도 땔나무하러 갔다가 빠진 수레를 땔나무를 실은 채로 건뜻 들어 빼낸 적이 있소. 우리 내력은 나를 내놓고 모두 힘이 세오. 우리 아버지는 성지 촌에 있을 때 소가 조단을 싣고 산비탈 길을 받지 못하자 소를 벗겨놓고 자기가 수레 채를 안고 내리막을 내려 온 적이 다 있소.” “야, 원래 천하장사는 유전이 있는 모양이오.” “대를 물린 힘장사들이구먼.” 장묵은 황소를 논밭머리 둔덕 위에 끌고 갔다. 황소는 배가 좀 불렀지만 종호가 인차 구해냈기에 살아났다. 장묵이 황소의 배에 묻은 흙물을 닦고 씻고 해주었더니 오줌과 똥을 질질 내 쏘더니 꼬리를 휘휘 휘둘렀다. 동쪽 하늘에서 금빛태양이 구름을 뚫고 전원을 비추었다. 이때 마을 쪽에서 옥선이랑 아낙네들이 아침밥을 이고 치맛자락을 날리면서 이쪽으로 다가왔다. “아침이나 먹고 일하기오.” 종호가 외치자 모두들 논도랑 물에 손을 대충 씻고 논머리 둔덕위로 올라갔다. 옥선이랑 아낙네들은 이고 온 함지를 내려놓고 함지 안에서 이밥과 부추달걀볶음이랑 두부모랑 막걸리랑 내놓았다. 종호와 장묵은 사원들과 함께 밥함지에 둘러앉았다. 종호는 막걸리 잔을 들었다. “자, 막걸리나 시원히 마시고 식사하지.” 장묵도 잔을 들었다. 나그네들은 막걸리를 뻘꺽뻘꺽 마시더니 기분이 좋아했다. “막걸리를 마시고 일을 할 만할까?” 장묵의 말에 종호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옛날 무송은 술을 서른 사발이나 마시고서도 범을 때려잡았다오. 막걸리를 마시면 힘이 나서 걸기질을 더 잘 할 수 있소.” 그 말에 옥선은 눈을 곱게 흘기면서 생글생글 웃었다. 옥선이 눈을 흘기면서 방실방실 웃을 때면 넓은 눈시울이 좁아지며 쌍까풀이 되면서 더 고왔다. 종호는 막걸리 잔을 내려놓으면서 “둘째형님도 이 마을에서 가지 않았더라면 얼마나 좋았겠소.”라고 했다. 그러자 장묵은 밥숟가락을 내려놓고 한숨을 후 내쉬었다. “글쎄 말이다. 숱한 잔 밥을 먹여 살리자고 목재판에 갔다가 잘못되지 않았을 수도 있겠는데.” 그들 형제는 둘째형 장은의 불행에 마음이 아파 막걸리를 들 생각이 나지 않았다. 장은은 목재판에 갔다가 불행하게도 넘어가는 아름드리나무에 깔려 사망했다. 장은의 맏아들 명수가 황급히 목재판에 달려가 보니 아버지는 얼굴이 알아 볼 수 없게 퍼렇게 팅팅 부었다. 사망한 지 며칠 돼 얼굴이 썩어 들어가면서 진물이 괴어 나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명수는 눈앞이 깜깜했던 것이다. 어머니도 계시지 않는데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났으니 말이다. 그때부터 명수는 어시로 돼 어린 동생들인 경자, 영찬, 경애, 영일을 거느려야 했다. 너무나도 힘든 명수는 할 수 없이 다섯 살 밖에 안 되는 영일을 투도에서 교원사업을 하는 민씨 네 집에 양아들로 줘 보냈던 것이다. “이젠 춘삼 큰아버지하고 인삼 둘째큰아버지도 사망했지. 형님들도 뿔뿔이 흩어져 보기도 힘들어졌다.” 형의 말에 종호는 한숨을 후 내쉬면서 “고향에 있을 때보다 재미없소.”라고 동을 달았다. 종호와 장묵은 그리운 친척들로 해 한숨을 후 내쉬었다. 한참 후 마을 어귀에서 종호의 셋째 딸 경숙과 둘째 아들 춘수가 나무수레를 끌고 이쪽으로 달려왔다. 그러자 종호는 “얘들아, 물도랑에 빠지겠다. 마을에 가서 놀아라!” 하고 소리쳤다. 그러자 춘수는 몸을 배배 탈면서 떼를 쓰고 경숙은 춘수를 데리고 가려고 수레와 춘수의 팔을 잡아끌었다. 옥선은 나그네들이 아침을 다 먹자 황급히 함지에 빈 그릇을 담아 이고 치맛자락을 휘날리면서 애들 쪽으로 반달음 쳐 갔다. 그녀는 바삐 경숙과 춘수를 데리고 마을로 돌아갔다. 춘수는 엄마를 올려다보면서 “엄마, 오늘 저녁에 영화를 한다오. 구경하기오. 양?” 하고 종알거렸다. 옥선은 “응, 그래. 너네나 구경해라. 엄마는 곤해서 보지 않겠다.”라고 했다. “엄마~ 같이 보자. 응?” 허나 옥선은 떼를 쓰는 춘수를 끌고 가면서도 대답을 하지 않았다. 옆에서 경숙도 졸라댔다. “영 재미있는 전투영화를 한답니다. 아버지랑 엄마랑 같이 가서 보기요. 내하고 춘수 먼저 제일 앞에 자리를 잡아 놓을게.” 그래도 옥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분주한 하루 일이 끝나고 종호랑 장묵이랑 사원들은 소를 벗겨 몰고 마을로 돌아왔다. 옥선이랑 벼 모 내기를 하고 비닐박막을 허리에 띤 채 집으로 돌아왔다. 마을 앞쪽으로 해 있는 탈곡장에는 벌써 남쪽을 향해 허연 영사막을 쳐놓았다. 애들은 해도 지기 전에 좋은 자리를 서로 앞 다퉈 차지하느라고 누룽지랑 먹으면서 영사막 앞에 조롱조롱 앉아 있었다. 경숙과 춘수는 벌써 검둥이를 데리고 영사막 제일 앞에 널따랗게 자리를 차지해놓고 감자누룽지를 먹느라고 여념이 없었다. 그 옆에 경숙의 큰언니네 여 조카 송선까지 데려다 앉혀 놓았다. 이윽고 온 하루 대지를 달구던 해가 서서히 서산인 모아산 쪽으로 져가고 고기비늘구름에 누르스름한 황혼이 불타기 시작하고 대지에는 황혼의 낙조가 비끼었다. “오래지 않아 영화를 돌리겠는데 어째 아버지 하고 엄마가 오지 않을까?” 춘수의 말에 경숙은 “집에 가서 데려올게. 넌 여기서 송선과 함께 자리를 지켜라.”라고 했다. “응, 그러자.” 이때 경숙은 탈곡장에 오던 경숙의 큰 언니 금자와 아저씨 김승준이 그리고 둘째언니 순자와 마주쳤다. “넌 어디로 가니?” 순자의 물음에 경숙은 “아버지하고 엄마를 데리러 가오.”라고 했다. 그러자 금자와 순자는 서로 마주 보다가 경숙의 손을 잡고 내려다보면서 말렸다. “아버지와 엄마는 전투영화를 보지 않는다.” “어째? 전투영화 얼마나 재미있소?” “너네는 애들이 돼서 모른다. 데리러 가지도 말아라. 가자, 언니들하고 아저씨랑 함께 보자.” 큰언니 말에 어리둥절해진 경숙은 몸을 탈면서 떼를 썼다. “싫소. 난 기어이 엄마를 데려오겠소.” 어려서부터 고집이 센 경숙을 말리지 못하는 언니들이었다. 경숙은 언니네를 뿌리치고 조그만 주먹을 쥐고 부랴부랴 집으로 뛰어갔다. 그런데 집안은 전등마저 죽여 놓아서 깜깜하게 어두웠다. “엄마! 엄마! 전투영화를 하오. 빨리 가기요. 오래지 않으면 영화를 시작하오.” “너네나 봐라. 난 곤해서 가지 않겠다.” 옥선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경숙은 구들에 올라와 누워있는 아버지와 엄마를 돌아가면서 흔들었다. “엄마, 아버지, 가기요. 예? 오랜만에 온 영화를 보러 가기요.” 허나 옥선은 돌아누우면서 “빨리 가 봐라. 영화를 시작하겠다.”라고 했다. 아닌 게 아니라 탈곡장 쪽에서 무슨 노래 소리가 높이 울렸다. 바빠 맞은 경숙은 어머니를 마구 흔들면서 떼를 썼다. “영화 보러 가자, 응~ 응~” 이때 아버지가 돌아누우면서 말했다. “경숙아, 우린 전투영화를 보지 않는다. 전투영화에서 사람이 죽는 걸 보면 속이 아파서 보지 못한다. 너네나 가 봐라. 어서! 아빠, 엄마 말을 잘 듣지? 응?”  그제야 경숙은 구들에서 옴찔 일어나 나가면서 종알거렸다. “별나다. 재미나는 전투영화를 보는데 속이 아프다니?” 경숙이 집에서 나가 탈곡장으로 달려가는 발자국 소리를 들으면서 옥선은 뜨거운 눈물을 주르르 흘려 베갯잇을 적셨다. 옥선은 전투영화에서 빗발치는 탄우 속에서 총칼을 들고 뛰쳐 나가는 전사들을 보기만 하면 그 속에 스무 두 살 난 전 남편 조철호가 있는 것 같았다. 기실 조철호는 김성칠 련대장 휘하에서 무명고지전투에서 지휘부를 사수하다가 절벽 아래에서 장렬히 희생되였었다. 그런데 옥선은 남편 조철호의 소식을 모르고 있었다.  하여 그녀는 마음이 비길 데 없이 아파 전투영화를 보지 않았다. 그런 줄을 애들이 어찌 알겠는가!     옥선은 전 남편 조철호를 13년이나 기다리다가 소식이 없자 종호한테 재가해 와서 첫아이를 폐 염으로 잃고 경숙과 춘수 오누이를 낳아 재미나게 살았다. 그녀는 경숙을 1962년에 낳고 춘수를 3년 후에 춘수를 낳아 오누이를 정말 재미나게 키웠다. 허나 스무 한 살에 결혼해 백날도 되나마나해 유복자를 남겨놓고 조선전쟁터에 나간 신랑이 돌아오지 않아 옥선은 속을 태울 대로 다 태웠다. 오늘처럼 휘영청 달빛이 밝은 달밤에 깜깜한 집안에 누워있으면 어쩐지 신랑이 어디에 이름 모를 산기슭 어느 나무 밑에 쓰러져 있는 것 같아 뜨거운 눈물로 눈시울을 적시었다. 구새 목에서 쿵쿵쿵 울리는 발자국 소리를 들으면 혹시 신랑이 돌아오지 않는가 하여 문고리를 쥐고 내다보다가도 문 앞을 지나가면 스르르 무너지듯 물앉아 쓰라린 눈물을 흘리었다. 그녀가 달을 바라보며 흑흑 흐느껴 운 달밤이 얼마나 되는지 모른다. 오늘도 전투영화를 돌린다고 하자 옥선은 또 기분이 상해 어려서 잃은 신랑 생각으로 속절없이 눈물로 베갯잇을 적시었다. 그러나 경숙이랑 애들이 어찌 그렇게 아픈 엄마의 속마음을 알 수 있었겠는가! 탈곡장 마당에서는 대포소리가 요란하고 총소리가 자지러지게 울렸다. 사람이 죽으면서 지르는 비명소리도 높아갔다. 처량한 달빛이 쓸쓸히 집안 구들을 휩쓸었다. 종호는 후처 옥선의 마음을 헤아려 전투영화만 돌린다고 하면 가지 않고 옥선을 동무하며 위안해주었다. 종호는 모로 돌아누워 들먹이는 옥선의 어깨를 붙잡아 돌려 눕히고 꽉 끌어안아주었다. 옥선은 종호의 드넓은 품에 안겨 흑흑 흐느껴 울었다. 집 안에는 한숨과 흐느낌 소리가 반죽해 어둠이 깔린 구석구석까지 쓸쓸하게 울렸다.
153    대하소설 진달래 소야곡(17) 댓글:  조회:1785  추천:1  2018-04-30
                32. 의심병 먹장구름이 뒤덮인 하늘에서는 뻘건 불구렁이 몇마리가 대지에 내리박혔다가 능청스레 훌 사라졌다. 꽈르릉 꽝! 꽝! 하늘땅을 뒤흔드는 우뢰소리와 함께 대줄기 같은 소낙비가 대야로 퍼붓는듯이 창창 쏟아져내렸다. 승호는 패륜이 드러나 감옥관리대대에서 제명된 후 애비 덕에 겨우 백화상점 구입원으로 들어갔다. 그는 어머니 덕분에 큰 병원을 돌아다니면서 그걸 성형수술을 한 덕분에 무난히 영희와 결혼했다. 영희는 선금과 한 소학교에서 일하는 친구였다. 그녀는 선금의 중매로 승호를 알게 됐다. 승호가 훤칠한 체격에 사내답게 생긴 대학생인데다가 공안국 과장의 아들이라는데 유혹돼 경솔히 결혼했다. 치명적인 생리흠집이 있는 것도 알아볼 새 없었다. 그녀는 숫처녀여서 원래 남자 건 그렇게 생겼는가고 지나쳐버렸다. 그 바람에 승호는 근심하던 고비를 얼렁뚱땅 얼려넘길 수 있었다. 그들은 허송파네 깡패무리한테 보복당할가봐 결혼해 얼마 안돼 자그마한 세집을  맡고 세간났다. 승호는 집에 상점을 차려놓고 영희를 보고 교편을 내려놓고 상점을 돌보게 하였다. 영희는 잘 납득되지 않았지만 승호의 말을 거역할 수 없어 막무가내로 고양이 굴 같은 상점에 들어 앉고 말았다. 자기 밑구멍이 칫칫하면 남의 밑구멍도 더러운가 한다고 승호는 쩍하면 영희가 다른 남자들과 눈을 맞추는가고 의심했다. 어느날 승호는 외지로 복장을 구입하러 떠나면서 부탁이 끝이 없었다. “영희, 이번에 심양에 가면 한 대엿새 걸릴 것 같소. 그거 알만하지?” 해말쑥하고 박씨처럼 걀쭉하게 생긴 영희는 앵두입술을 쫑깃하면서 눈을 곱게 흘기더니 종알거렸다. “예- 이젠 몇번 말했는가요? ‘밤이면 문을 꽁꽁 닫아 걸고 잘 것!’ 맞지요?” “빠진게 있어.” 영희는 제법 무릎까지 탁 치며 소리쳤다. “‘상점에서 사내들과 작작 술을 마셔.’ ‘사교무도 작작 춰!’ 맞죠?  호호호.” 승호는 문고리를 쥐고 떠날 념을 하지 않고 머뭇거리리더니 영희 어깨를 잡고 아주 정색했다. “이번엔 두개 항목을 더 보태야겠소.” “두개나?” 영희는 포도알눈이 휘둥그래졌다. “그래. 첫째, 저금통장을 잘 건사해.” “저금통장을 잘  건사해.” 영희는 승호를 따라 외웠다. “둘째, 밤이면 일찌기 문을 꽁꽁 걸고 자라.” “문을 꽁꽁 걸라.” 승호는 계속했다. “또 있어!” 영희는 입이 귀 밑까지 째질 지경이다. “또 있다고?” “그래. 무릇 어떤 놈이 달려들 땐 목숨을 걸고 반항하라. 그저 당하지 말고. 좋기는 낯빤대기에 생채기를 낼 것!” 영희는 량미간을 찌프렸다. “녀자 몸으로 그럴 새 있겠어요?” “그래야 흉수를 추적할 수 있어. 그보다도 정조를 목숨처럼 여긴다는 걸 믿지.” “제 색시 다 만들어놓고서 아직도 정조 말을 해요?” “시집간 녀자라도 정조는 생명이야. 정조를 잘 지켜. 알만해?” “알았어요.” 영희는 뾰로통해서 콕콕 찌르는 듯한 눈길로 승호를 곱게 흘겨보았다. “별, 언젠 제가 청백하지 못했는가요? 믿지 못하겠으면 외지로 가지 마세요. 나 대신 상점을 지키세요. 대신 제가 구입하러 갈게요.” 승호는 슬슬 구슬렸다. “믿지 못해 그러는게 아니요. 그저 강가에 내놓은 애처럼 항상 근심돼 그러지. 어쨌든 내 하라는대로 하면 랑패없을게요.” “예, 알았어요. 꼭 그렇게 할게요. 잘 다녀오세요.” 그제야 승호는 목구멍까지 올라왔던 말을 삼키더니 문을 쾅 닫고 떠나갔다. 영희는 문을 닫아 걸면서 도도거렸다. 하긴 영희는 물 찬 제비같이 예쁜데다가 성격이 활달한 편이여서 처녀 때 숱한 총각들이 꽃편지를 보냈다. 다 뿌리치고 가정배경이 좋다고 승호한테 시집왔다. 그런데 외지로 구입하러 갈 때마다 색시를 믿지 못하는지 항상 의심병이 도질줄은 진짜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영희는 울고 불며 자기를 믿지 못하는가고 한바탕 행악질했다. 승호는 익살을 피워대며 구슬리군 했다. “색시가 너무 귀여워 강변에 내놓은 어린애처럼 시름놓지 못해 그래. 이건 영희를 너무너무 사랑한다는 표징이 아니고 뭐요?” 승호가 영희를 의심하는데는 조금 그럴만한 리유도 있었다. 좀 예쁜 영희를 보고 사내들은 게침을 질질 흘리면서 상점에 찾아왔다. 술군들은 영희가 떠준 술이 더 시원한지 상점이 꽉 차게 들어서서 선술을 마셨다. 항상 영희를 안주로 해 지껄여대며 얼근히 취해 밤중에야 아쉬운대로 돌아갔다. 어떤 때에는 보다못해 역겨워 영희를 불러 집 안에 들여보내고 승호가 대신 상점에 나왔다. 그제야 사내들은 술맛이 없다면서 가버렸다. 코수염쟁이와 멀쑥이 나그네는 승호네 상점의 단골손님이였다. 코수염쟁이는 상점에 와서 척 들어앉으면 영희를 안주로 해 지껄이면서 맥주 열병을 굽내지 않고서는 밤이 깊어도 자리를 뜰 념을 하지 않았다. 코수염쟁이는 상점에 걸어놓은 결혼사진을 피뜩 보더니 흠칠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저게 신랑이요?” 영희는 별로 개의치 않고 “예.” 하고 대답했다. 코수염쟁이는 술잔을 쥔 채 결혼사진 가까이에까지 가서 찬찬히 뜯어보더니  돌아와 술잔을 들어 영희한테도 권했다. 그는 영희 잔에 술을 찰찰 넘치게 부어주고나서 맞잔을 했다. “야, 이런 각시를 얻은 나그네는 얼마나 좋겠는가?” “어째? 질투라도 나는가요?” “질투는 무슨? 저네 나그네 얼마나 훤칠한게 잘 났소?” “어머, 반신사진을 보고 훤칠한지 난쟁인지 어떻게 알아요?” 영희의 말에 콧수염쟁이는 “아, 그런가? 실수했구먼.” 하고 술을 들며 다시 결혼사진을 쳐다보았다. 그 후부터 코수염쟁이는 상점에 들어설 때면 나그네가 혹시 있지 않는가 살핀 후  구렁이처럼 스리슬쩍 기여들어 술을 마시군 했다. 기실 코수염쟁이와 멀쑥이는 모두 송파네 깡패무리였다. 그들은 시내에 도처로 싸다니면서 승호가 어디 숨었는가고 서캐 훑듯 했다. 그런데 여기서 승호 녀석을 찾아낼줄은 몰랐다. 그것도 자기네가 단골이 돼 쓸어다니는 상점의 아주 예쁜 녀주인이 바로 승호의 색시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 줄도 모르고 영희는 영업액을 올리려고 날마다 싶이 코수염쟁이와 멀쑥의 안주로 돼 술판에 끼여들었다. 승호가 코수염쟁이만 탓할게 아니였다. 코수염쟁이나 멀쑥이가 상점에 오지 않는 날에는 영희가 오히려 궁금해 할 정도였다. 그녀는 손님이 없는 날에는 상점문을 철컥 닫아 걸고 부근에 있는 사교무청에 가서 황홀하게 반짝이는 샨데리아불빛 아래에서 격조 높고 우아한 음악에 맞춰 뭇사내들의 품에 안겨 빙글빙글 돌아갔다. 승호는 집에 왔다가 문에 자물쇠가 잠겨있는 것을 보면 사교무청에 갔는가고 찾아가 볼 때가 잦아졌다. 승호가 말려도 영희는 혼자 상점을 돌보느라고 받은 스트레스를 푸느라고 그러는데 괜히 의심한다고 했다. 어떤 때에는 사교무청에서 춤 추던 사내들을 하얀 찰떡에 고물을 묻히듯이 수태 묻혀가지고 상점에까지 달고 와서 술판을 벌리고 술을 부어주기까지 하는 판이였다. (송파 깡패무리에는 코수염쟁이들이 욱실거리는데 혹시 그 놈 코수염쟁이가 송파 무린지 어떻게 아는가? 암컷이 꼬리를 치지 않고서야 어찌 수컷이 매달리겠는가?) 사내들은 아예 사교무청에 가기보다 영희네 상점에 와서 술도 마시고 록음기를 틀어놓고 예쁜 영희와 춤을 추니 좀 좋아서. 승호는 외지에 나갔다가도 돌아와 상점 안에서 뭇사내들에게 안겨 돌아가는 영희의 꼴을 보기도 역겨웠다. (천길 물속은 알아도 한치 사람 속은 모른다!) 물과 녀자는 에우기에 달린다고 생각한 승호는 영희 안전을 고려해서라도 단단히 단속하기 시작했다. 외지로 구입하러 떠날 때마다 영희한테 행동규범까지 몇 조목 내놓고 한바탕 훈계해놓고서야 떠나군 했다. 그날 저녁 영희는 승호의 말대로 일찌감치 상점문을 닫아 걸었다. 똑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바깥에는 땅거미가 어둑어둑 지기 시작했는데 단골손님인 코수염쟁이가 와서 헤벌죽거리면서 서 있지 않겠는가. “문을 여오. 단골손님을 이렇게 문 밖에 세워놓겠소?” “오늘부터 저녁엔 영업하지 않아요.” “야, 불시에 무슨 소리요? 난 이젠 이 집에 오지 않으면 병이 날 것 같소.” 코수염쟁이는 징글스레 금니를 드러내며 웃기까지 하며 수작을 부렸다. “야, 시꺼먼 구름이 몰려오는 걸 보니 소낙비 오겠는구나. 좀 비나 피하게 문을 여오.” “안돼요. 래일 낮에 오세요.” 영희는 문발을 꼭 닫기까지 하고 집안으로 들어가버렸다. “야, 비 오는구나. 너무 하는구먼.” 코수염쟁이는 별 수 없이 가버렸다. 멀쑥이도 왔다가 문발까지 꼭 친 상점을 기웃거리다가 도리머리를 흔들면서 가버렸다. 바깥에서는 소낙비가 대살처럼 창창 쏟아져내리기 시작했다. 영희는 일찌기 이불을 펴고 자려고 하다가 사랑에 치워둔 저금통장이 근심되였다. “내가 어떻게 번 돈이라고 그래?’ 영희는 우산을 들고 사랑방에 나가서 구석에 놓인 소금단지에서 9천원짜리 저금통장을 꺼내 품 속에 간직하고 집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집안을 돌아보다가 침대 밑이 안전할 것 같아 침대 아래 장판지를 들고 살짝 밀어넣었다. 거기에 눌러두면 침대 우에 누어서 수시로 감시할 수 있지 않는가. 그런데 침대에 누워서 생각해보니 그 곳도 안전한 것 같지 않아 천정을 쳐다보다가 무릎을 탁 쳤다. “그래, 저기야.” 그녀는 걸상을 들어다놓고 중천정 종이를 가위로 썩썩 금을 내고 그 위에 저금통장을 슬쩍 올려놓고 밥풀로 종이를 붙여놓았다. 그런데 그녀는 천정을 쳐다보다가 그것도 안전한 것 같지 않았다. 도적이나 강도가 들어와 천반을 쳐다보면 눈에 잘 띄여 인차 들통이 날 것 같았다. 한참 궁리하다가 그래도 사랑칸의 소금단지가 도적들의 눈에 잘 들지 않아 안전하다고 생각되였다. 그녀는 천정에서 저금통장을 꺼내 사랑칸으로 나갔다. 그녀는 소금단지에 저금통장을 파묻은 후 손으로 소금을 고루고루 공글러놓고서야 안도의 숨을 호~ 내쉬면서 돌아섰다. 집 안에 들어서자 그녀는 만일의 경우를 생각해 앞뒤 문께에 방치를 세워놓았다. 그리고 특별히 위험구역이라고 생각되는 뒤문께에는 녀성의 특유한 깐깐한 솜씨로 “반침략대책”을 댔다. 어느 놈인지 뒷문으로 덮쳐든다면 펄러덩 빠지라고 부엌의 널장판을 둬장 슬쩍 빼놓고 그 옆에 뜨물을 가득 담은 뜨물통을 놓아두었다. 밤이 깊어지자 대살 같은 소낙비가 창 밖에서 쫙쫙 쏟아졌다. 갑자기 뒤울 안에서 철써덕 소리 났다. “뭐지?” 영희는 침대에서 발딱 일어나면서 뒤울안을 경계했다. “혹시 비물에 사랑채 벽이 무너졌는가? 아니면 토성이?” 영희는 발뼘발뼘 뒤문께로 발끝 걸음으로 다가가 문발을 살며시 젖히고  창문으로 바깥을 내다보았다. “아니, 저 놈이!” 그녀는 하마트면 고함칠번했다. 웬 꺽다리놈이 글쎄 뒤담장을 넘어와 사랑칸의 자물쇠를 비트는 것 같았다. 피뜩 보니 코수염쟁이 같았다. “저 놈이, 저거! 그 안에 어떻게 번 돈이 있다고.” 영희는 황급히 문께에 세워둔 방치를 찾아들고 당장 뛰쳐나갈 판이였다. 그녀가 문 걸개를 절컥 벗겼다. 웬 걸, 그때를 기다리가나 한듯이 그놈이 홱 돌려 문을 활 열어제끼더니 집 안에 뛰어들어왔다. “어마나! 사람 살…” 외마디 비명도 지를 새도 없이 그 놈이 영희의 입을 손으로 막으며 장판바닥에 죄악적인 “침략”의 발을 내딛였다. 기다리기나 한듯이 그녀는 몸을 움츠려 살짝 뺐다. 덜커덩! 꽈다당! 그 놈이 장판널을 두개나 빼놓은 함정에 빠졌다. 그놈은 나자빠지면서 뜨물을 들썼다. 은희가 발길로 잽싸게 뜨물통을 걷어찼다. 쫘르르- 쏴- “에- 퉤, 퉤, 퉤!” “이 놈, 어디 된방매 맞아봐! 이 놈, 이 놈!” 영희는 문께에서 방망이를 찾아들고 그 놈의 대가리를 호되게 족쳤다. “아이구, 나 죽는다, 죽어. 그만, 그만! 아이고!” “뭐, 어찌고 어째, 이 놈, 죽어봐라! 이놈!” 욕지거리와 방망이벼락이 계속 안겨졌다. 그 놈이 머리를 싸쥐고 신음소리를 내며  엉거주춤 일어섰다. 방망이벼락을 막아내며 문께에 있던 스위치를 더듬어 쥐여당겼다. 찰칵! 졸지에 전등불이 대낮같이 켜졌다. “어마나!” 영희는 겁기어린 눈길로 그 “침략자”를 노려보다가 깜짝 놀랐다. 넌덜거리는 국수오리와 사래기를 푹 뒤집어 쓴 그 놈, 뻘 건 피가 줄줄 흐르는 대가리를 두손으로 싸쥔 그놈, 뜨물을 괴죄죄하게 푹 들쓴 그 음흉한 침략자, 그 놈이 바로 의심 많은 신랑 승호일줄이야! 영희는 방망이를 훌 던지고 풀렁 물앉았다. 그녀는 복잡한 심태를 이기지 못하고 흐느끼면서 한바탕 통곡쳤다. 그녀는 자기를 의심하는 승호가 괘씸했다. 자기를 믿지 못해 이런 음험한 수로  떠보는 승호가 야속했다. 의심이 많은 승호한테 시집온 것이 후회됐다. 의심병 환자를 어떻게 믿고 살겠는가. 생각할수록 앞날이 캄캄했다. 교단을 때려치우고 상점에 나앉은 것이 후회막급이였다. 영희가 가엽었다. 한참 후에야 영희는 제 정신이 들어 부엌바닥에서 기여나오는 승호의 멱살을 틀어쥐고 따지고 들었다. “왜 이래요? 절 믿지 못하겠어요? 예?” 승호는 수도물에 피투성이 된 더러운 머리통으로부터 온 몸을 툭툭 털고 쓱쓱 닦으면서 대답이 없었다. 한참 후에야 한다는 말은 삶은 소대가리 다 웃다 꾸러미 터질 지경이었다. “이번 고험에 만점이야! 경각성 O K!” 능구렁이 같은 승호는 능청스레 횡설수설했다. “지금 송파 깡패무리들이 날 찾아 보복하자고 쌍불을 켜도 쏘다니오. 우리 집에 왔던 코수염쟁이가 별로 허송파 깡패무리 같아더란 말이요. 경각성을 높이지 않고 되오? 강가에 내놓은 애처럼 난 항상 근심된단 말이요.” 방망이에 맞아 피투성이 돼가지고서도 입만은 성해 잔소리 끝이 없었다. “수건 가져 오지 못해? 이 지경으로 만들어놓고서도 잘한 것처럼. 눈길이 곱지 않소? 에이, 울어?” 영희는 더 할 말이 없었다. (세상에 이런 철면피한 인간도 있어?) 그녀의 눈길이 고울리 만무했다. 밤중까지 티격태격 말다툼이 끊지 않았다. “어쩜 사람을 그렇게 믿지 못해요?” 영희가 장판널을 제자리에 놓고 걸레로 뜨물이랑 국수오리랑 닦으면서 볼멘 소리를 했다. 승호는 할 말이 없었지만 영희를 구슬려야 했다. “경각성을 떠보았다지 않았소?” “아버지와 말해서 깡패들을 몽땅 붙잡아 감옥에 처넣으면 다죠.” 승호는 영희의 두덜거리는 소리를 귀등으로 흘려보냈다. 승호는 이젠 자기 일로 아버지를 더 애태우게 하고 싶지 않았다. 요즘 아버지가 허철만 서기와 암거래를 한 사건이 탄로났는지 공안국에서 아버지를 조사한다고 하지 않는가. 승호는 믿던 기둥이 와그르르 무너져가는 충격을 받았다. 그는 얼얼한 얼굴을 매만지면서 침대로 가서 벌렁 드러누웠다. 영희는 계속 도도거렸다. “나그네새끼, 허우대나 컸지, 허수아빌줄은 몰랐어. 깡패들 앞에서 벌벌 떨면서  색시나 떠보고 감시해라. 옛날부터 바깥에서 어쩌지 못하는 사내들이 집 안에서 안해하고나 우쭐거리다더라. 에이고, 내 눈이 멀었지. 저런 허수아비를 뭘 보고 시집 왔어? 아이고, 분해라. 원통해라. 엉~ 엉~” 그녀는 밤중까지 서럽게 울고불며 대성통곡쳤다. 며칠 후에 또 사단이 생겼다. 영희가 창고에서 맥주상자를 들고 상점에 들어갈 때였다. 갑자기 바깥이 소란스러워졌다. “개새끼, 이런 쥐굴에서 숨었구나.” 영희가 황급히 나가 보니 훤칠한 처녀가 옆구리에 두 손을 찌르고 콤파스처럼 벋티고 서서 떠들어댔다. “아니, 누군데요. 아침부터 재수없이 이래요? 경찰에 신고하겠어요.” “그래, 승호 애비한테 신고해. 날 잡아갈 거야. 흥!” 처녀는 허경옥이였는데 겁기 하나 없었다. “아마 승호 색시 같은데요. 몇번째 색신지? 불쌍하구나, 불쌍해.” 그때 승호가 집 안에서 나오다가 딱 마주쳤다. 승호는 깜짝 놀라 쥐구멍에라도 숨었으면 좋을 것 같았다. “어디로 도망쳐?!” 경옥은 승호의 팔소매를 붙잡고 늘어졌다. “이 놈, 얼마나 많은 처녀들을 짓밟았느냐? 뻔뻔스레 색시를 차고 사니?” 숱한 구경군들이 모여들자 경옥은 더 목청을 돋궈 승호의 죄악을 공소했다. “이 놈은 련애하는 척하면서 숱한 처녀들을 해쳤습니다. 이 놈의 녀동창생 홍희는 이 놈에게 무참히 짓밟혀 자살까지 했습니다. 은영이란 녀학생은 이 놈한테 짓밟혀서 정신병에  걸렸어요. 나도 이 놈에게 당해, 아이구. 이 놈을 어쩜 좋아? …” 경옥은 더 말이 나가지 않아 땅바닥에 물앉아 엉엉 대성통곡쳤다. 그 새 승호는  구경들 속으로 빠져나갔다. “이건 정신환자요. 무슨 구경할게 있다고 그러오?” 승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흩어지는 사람들 속으로 자취를 감춰버렸다. 영희는 멍해 서서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경옥은 땅바닥을 치면서 공소했다. “저 놈이 얼마나 많은 처녀들을 망쳐놓았는데 뻔뻔스레 법망 밖에서 산단 말입니까. 어이구, 하늘도 무심하지. 저런 놈을 어째 생벼락이 쳐가지 않는가?” 영희는 경옥의 공소를 듣고 불쌍했다. 또 눈이 멀어 승호한테 시집온 자기 신세가 한없이 가엾었다. (더러운 새끼, 제 놈  밑구멍이 더러워가지고 남을 내내 의심했구나.) 영희는 경옥한테서 승호의 과거사를 다 들었다. 한참 후 경옥은 간신히 일어나 떠나가버렸다. 영희는 구들에 펄러덩 물앉아 엉엉 대성통곡했다. 동네 망신을 당한 건 둘째고 앞날이 캄캄해 구들을 치면서 상치기 난 집 상주처럼 서럽게 울고 또 울었다. 그후부터 승호네 집은 밤낮 초상난 집처럼 티격태격 싸우는 소리, 투닥투닥 패대는 소리, 영희의 통곡소리 그칠 새 없었다. 영희는 막 자살하고 싶었다. 그러나 불어오르는 배 속에서 꿈틀거리는 태아가  불쌍했다. 몇번이고 긁어버릴가고 하다가도 차마 그러지 못했다. 그녀는 당장 승호와 리혼하고 싶었다. 그녀는 농촌시골에서 무남독녀로 자랐다. 부모가 불쌍해 그렇게 할 수도 없었다. (야, 농민의 딸이 불쌍하지.) 그녀는 잘 사는 총각한테 시집가 시내에 남아 부모에게 효도하려고 했다. 그런데 승호가 세상에 둘도 없는 색마일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그녀는 고민의 심연에서 갈팡질팡 사선을 헤맸다. 잘라당! 퉁탕! 코수염쟁이 쇠파이프를 든 깡패무리를 끌고 들이닥쳤다. 그런데 깡패무리 속에는  교활한 두목 송파나 경옥이 보이지 않았다. “왜 이래요?” 영희가 막아서자 코수염쟁이는 영희를 활 밀어제끼고 상점 안으로 쳐들어갔다. “어제 저녁에 왜 문을 열지 않았어?” 코수염쟁이는 멀쑥 등 무리한테 손을 홱 휘둘렀다. “박살냇!” “야!” 깡패무리들은 상점 유리창문과 매대를 쇠파이프로 퉁퉁 부셨다. 잘라당! 잘라당! 그 놈들은 매대에서 술병과 명태를 주머니에 넣어가지고 독사들처럼 꼬리를 감춰버렸다. 영희의 외씨같이 걀쭉한 얼굴은 새파랗게 질린 채 바위돌처럼 굳어져버렸다. 경찰들이 뛰여왔다. 경찰들은 사건현장을 일일이 사진을 찍고 영희한테서 사건경과와 깡패들의 생김새를 묻더니 파출소로 돌아갔다. 며칠 후에 코수염쟁이와 멀쑥은 파출소에 붙잡혀 치안구류를 당했고 상점을 파괴한 배상도 했다. 그러나 깡패들을 막후조종해 승호네 집과 상점을 부신 허송파는  의연히 법망 밖에서 너덜거리면서 유유히 싸다녔다. 이튿날, 승호와 영희는 남몰래 다른 세집에 이사해갔다. 깡패는 잠시 피할 수 있었지만 승호네 집에는 더 무서운 “정신깡패”가 들이닥쳤다. 그 “정신깡패”가 바로 그들 신혼부부의 “의심병”이였다. 경옥에게서 승호 과거를 알게 된 영희도 승호와 살면서도 색안경을 끼고 승호의 일거일동을 모두 의심하게 되였다. 승호의 의심병이야 더 말해 뭘 하겠는가. 치명적인 의심병에  걸린 그들 부부는 행복할 리 만무했다. 영희는 승호가 바깥에서 들어오면 친절히 마중하는 척하면서 끌어안고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코개처럼 웬 녀자 냄새 나는가고 냄새를 맡았다. 옷을 벗겨  걸면서도 다른 녀자의 긴 머리카락이 없는가, 수상한 쪽지나 사진 같은 것이 없는가를 서캐 훑듯 하였다. 또 집을 비운 틈에 승호가 외간녀자를 끌어들여 침대에서 뒹굴지나 않았는가 의심해 침대에 혹시 길다란 노란 머리카락이랑 없는가 살피군 했다. (한번만 들키는 날엔 그걸  밑둥까지 베버릴테야. 다신 바람을 피우지 못하게.) 승호는 의심병에 걸린 영희한테서 무서운 기운은 눈치채지 못하고 깡패들 때문에 장탄식했다. (송파 깡패무리를 제거하지 않고선 발편잠을 잘 수 없어. 아버지만 과장 자리에서 철직당하지 않았더라도 송파 무리를 무난히 제거하겠는데. 재수 없어. 아버지가 허서기와 짜고들어 송파와 나를 서로 봐준 일이 탄로날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웬 놈이 아버지가 허서기와 나눈 담화내용 록음테프마저 공안국에 제공했단 말인가? 웬 음흉한 놈이 우리 집과 허서기 집을 은밀히 노려보면서 도청했단 말인가? 강운룡 과장이 아버지 자리에 올라가더니 그런 짓 한게 아닐가? 성호는 소 궁둥이를 치러 갔으니 그럴 새 없고. 아니, 걔는 그런 사람이 아니지. 아무렴 성호는 착하고 순박한 농부의 아들인데.” 승호는 한숨을 후~ 내쉬였다. “성호, 그 자식만 곁에 있어도 겁날게 없는데. 헤이,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그 자식을 시내에 들여와야지.” 승호는 온 시내에 바람둥이로 소문나서 취직하기도 힘들었다. 게다가 송파네 깡패무리가 시시각각 보복하려고 혈안이 돼 미쳐 날뛰는 바람에 항상 자기 목에 칼이 날아들지 않는가 조심해야 했다. 집에서도 영희가 칼로 목이거나 그 걸 썩뚝 자를가봐 겁났다. 그는 공포에 휩싸인 어두운 밤에 집에서도 항상 다리를 옹송그리고 새우잠을 자야 했다. (진짜 생지옥살이구나. 숱한 처녀들한테 진 죄값을 치르는 걸가?)  승호는 그제야 모든 것은 인과보응이란 말이 맞는다는 것을 느꼈다. 무참히 짓밟힌 경옥과 은영 그리고 자살까지 한 홍희의 혼이 유령처럼 떠돌아다니면서 무시로 공포에 몰아넣고 있는 것 같았다. 의심병에 걸린 승호와 영희의 예측하기 어려운 앞날은 칠칠흑야처럼 캄캄했다. 구경 그들이 어떻게 암흑한 앞날을 저벅저벅 걸어나갈가? 하늘도 땅도 모두 다 짐작하기 어려웠다.                                              33. 구입과장 승호는 이젠 지옥 같은 집으로 들어가기도 싫었다. 영희의 의심에 찬 눈길을 받으면서 하루를 사는 것이 딱 징역살이를 하는 것만 같았다. 심지어 밤에 잠을 자다가도 영희가 면도칼로 자기 뭘 베버릴가봐 겁났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의심병에  걸린 것은 털끝만치도 반성하지 않았다.  설상가상 그는 사회나 단위에서도 립지가 점점 졻아졌다. 아버지가 과장을 하는 세월에는 대학교에서 숱한 처녀를 참혹하게 짓밟고서도 퇴학과 당적제명 처분을 피했다. 그러나 이젠 승호의 아버지도 철직받고 감옥의 문지기로 된 처지여서 더 바바볼 수 없게 됐다. 대학교 규률검사위원회 허철만 서기도 리철갑 과장과 짜고들어 승호와 깡패두목 아들을 덮어준 일이 탄로나서 서기직에서 철직당했다. 승호는 이젠 뿌리가 허망 뽑힌 나무로 돼버렸다. 그는 취직하려고 헤매다가  백화상점 구입과에 간신히 들어갔다. 그런데 원쑤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백화상점 총경리는 바로 경옥의 어머니일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뜻밖에 안수련 총경리는 승호에게 눈을 흘기지 않았다. (아무리 흉금이 넓어도 이럴 수야?) 승호는 안수련 총경리가 더욱 두려웠다. (속담에도 짖지 않는 개 더 문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렇다. 안수련 총경리라고 왜 자기 무남독녀를 짓밟은 승냥이 같은 승호가 곱겠는가. 그러나 그녀는 여태껏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승호는 바늘방석에 앉은 것처럼 조마조마하고 불안했다. 어느날, 안수련 총경리가 승호를 불렀다. (끝내 올게 왔구나.) 승호는 한숨을 후~ 내쉬며 승강기를 타고 총경리실로 올라가면서 오만가지 생각을 다했다. (경옥 때문일가? 극상해야 백화상점에서 쫓겨나겠지.) 순간 이상하게 홀가분해짐을 느꼈다. 승호는 총경리실에 들어서면서 높다란 의자에 틀스럽게 앉아 있는 안총경리한테 마지막이라고 허리를 구십도로 굽혀 인사했다. “여기 쏘파에 와 앉소.” 생각 밖으로 안총경리는 반색하면서 맞아주었다. (호랑이 사슴을 잡아먹기 전에 베푸는 선심인가?) 승호는 치를 떨었다. 세상에서 내노라던 자기가 이렇게까지 취약해질줄은 몰랐다. 그는 안총경리 뜻밖의 말에 놀랐다. “승호, 난 개인 감정으로 사업을 대하지 않소. 물론 승호가 경옥과 련애하다가 헌신짝처럼 차버린 건 괘씸하오. 그러나 사랑을 어찌 강요할 수 있겠소.” 그녀는 컵에 따뜻한 차물까지 부어주면서 뒤말을 이었다.  “경옥의 아버지나 내나 승호를 용서하기로 했소. 깡패들이 저네 집에 가서 행패를 부린 것과 우리 일가는 아무런 관계가 없소.” 성호는 머리를 점점 더 숙이면서 콩크리트바닥을 쏘아보았다. 안총경리는 높다란 의자에 돌아가 앉으면서 정색했다. “승호, 구입과 과장을 맡아주오.” “예?” 승호는 자기 귀를 의심하면서 안총경리를 쳐다보았다. “웬 말씀을? 전 죄인입니다.” 안총경리는 분명히 말했다. “나는 인간적으로는 승호를 곱게 보지 않지만 사업에선 승호를 믿소. 승호는 구입 과장을 잘 해낼 수 있는 재목이오. 대학교 때  학생총회 부회장에 체육위원이였다지?” 승호는 머리를 숙였다. “경력이 얼마나 출중하오. 조직능력 있고 장사도 잘하지. 구입과를 이끌어 질 좋은 현대상품을 잘 구입해들여오오.” 승호는 손사래를 쳤다. “감사합니다. 안총경리, 전 과장 재목이 아닙니다. 다시 고려해보십시오.” “사내대장부가 어찌 연약한 말을 하오? 오래동안 고민해보고 내린 결정이오. 잘해보오.” 안수련 총경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오더니 승호의 어깨까지 툭툭  다독여주면서 말했다. 승호는 재삼 “감사합니다.” 하고 허리를 굽신거리고 나서 총경리실에서 비실비실 물러나왔다. 그는 꼭 닫긴 총경리실 문을 되돌아보면서 도리머리를 절레절레 가로 저었다. (도대체 어쩌자는 거야. 병 주고 약 주고. 혹시 나를 안심시켜놓고 잡아먹자는 건가?) 승호는 더 깊은 고민의 수렁에 빠졌다. (어떤 때는 ‘바람둥이 과부네 아들’이라는지, ‘더러운 피 섞인 과부네 새끼’라는지 별의별 욕을 다하더니, 오늘 짧은 바지를 잔뜩 춰올려? 불여우 같은 년. 내게 인심을 베풀어주고 깡패무리들 행패는 자기네 일가와 무관하다는 걸 말하자는 건가?) 그는 엘레베이터를 타고 구입과로 내려가면서 중얼거렸다. “우리 엄마를 그렇게 업신여기지 않았어도 경옥하구 그 지경까진 되지 않았을 거요.”  승호는 구입과 과장으로 제발되긴 했지만 항상 바늘방석에 앉은 것처럼 안절부절하지 못했다. 그는 이번 기회에 자기 사람들을 구입과에 끌어다넣고 기반을 닦을 예산이였다. 승호의 시선에 제일 먼저 성호가 떠올랐다. (자식, 소궁둥이를 친다던데. 그 놈만 곁에 있으면야 세상 무서울게 없이 든든하겠는데.) 승호는 인차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이전에 아버와 말해서 공안국 경찰대대에 넣어주겠다고 했을 때도 성호는 배부른 흥정하던 일이 속에 걸렸다. (자식, 이번에야 말을 듣겠지. 소궁둥이를 치고 있겠어? 시내에 들어와서 구입원을 하면 돈도 벌고 정희와 함께 한 시내에서 살면 좀 좋아서? 흥!) 승호는 그날로 구입과 소형자동차를 몰고 행인들한테 길을 물으면서 태평거촌으로 쏜살같이 달려갔다. 그는 태평거촌에 이르러 늙은 비술나무 아래 차를 세워놓고 마을을 둘러보았다. 천지꽃산의 칼날 같은 절벽이 병풍처럼 둘러선 성호의 고향 마을은 진짜 범이 새끼를 칠 듯한 심심산골이였다. (진짜 개천에서 룡이 났구나. 못난 자식, 대학을 졸업하고 이런 골 안에서 소궁둥이를 쳐?” 그는 비술나무 그늘 아래에서 한창 한담하는 로인들한테로 다가가 공손히 물었다. “말씀 물읍시다. 성호네 집을 알려주겠습니까?” 때마침 상진이 로인들 속에서 일어나 승호의  아래우를 훑어보았다. 딱 누구 같은데 기억 속에서 아물거렸다. “어디서 왔소?” “성호 대학동창생입니다.” “오, 그렇소? 난 성호 아버지요.” “안녕하십니까? 처음 뵙습니다.” 상진은 속으로 어쩜 성호처럼 생긴 동창생이 다 있는가고 이사야릇했다. 승호가 볼라니 어깨가 쩍 벌어지고 세귀눈이 부리부리한 성호 아버지는 젊었을 때 호랑이도 때려잡았을 것 같았다. “자, 우리 집에 가기요.” “성호는 어데 있습니까?” “저기 천지꽃산 골안 어구지 우사에 있을게요.” 승호는 성호 아버지를 찌프에 모시고 성호네 집으로 가면서 그간 성호의 형편을 대충 들었다. 승호는 성호네 집 마당에 이르러 찌프 뒤바곤에서 돼지고기를 꺼내 상진한테 주었다. “처음 뵙는데요. 적은대로 성의를 받으십시오.” “아니, 뭘 들고 왔소? 잘 먹겠소.” 드디여 승호는 찌프를 몰고 먼지를 새뽀얗게 일구며 곧추 서쪽 천지꽃산 골짜기 어귀로 달려갔다. 상진은 찌프차가 아물거릴 때까지 눈바램을 했다. 처음 보는 청년이지만 성호처럼 생겨서 퍽 인상이 깊었다. 진흙탕 호박길이여서 찌프차는 소사양실을 얼마 두지 않고 덜커덩 멈춰섰다. 승호는 찌프에서 내려 골안으로 헐금씨금  걸어갔다. (자식, 이런 골 안에서 소궁둥이를 쳐? 짐승은 골안으로 들이몰고 사람은 시내로 몰아라는데. 진짜 호박을 쓰고 돼지 굴에 들어온 격이구나.) 승호는 돌토성안 대문으로 들어가 커다란 우사를 들여다보고 너무 한심해 입을 쫙 벌렸다. 토성 안에 돼지무리가 우글거리고 개들이 “왕, 왕, 왕” 짖어댔다. 승호는 개들이 두려워 코 싸쥐고 멀직이 서서 우사 안을 재차 들여다보았다. “지개!” 성호는 소똥 구린내 물씬 풍기는 우사에서 한창 소똥을 치다가 주춤 일손을 멈추고 내다보았다. “승호야!” 뜻밖에 나타난 승호를 보고 성호는 소똥을 치던 삽을 구유에 기대세워놓고 대문어귀로 달려나왔다.  “성호야!”  “얘, 네가 어떻게 돼 이런 우사에 다 왔니?” 성호는 반년만에 만난 승호를 보자 손을 내밀다가 그만뒀다. “소똥이 묻은 손이 돼서…” “자식!” 승호는 성호의 손을 덥썩 잡아 흔들었다. “어떻게 사는가 보고 싶더라.” 승호는 소똥물이 튕긴 성호의 옷을 보고 상을 찡그렸다. “야, 이게 뭐야? 시내에 가서 함께 살자.” 성호는 삽을 구유에 기대 세워놓으면서 허구픈 웃음을 지었다. “난 시골이 편안해 좋아. 물고뜯는 시낸 딱 질색이야.” “에이구, 대학 졸업생이 소궁둥이를 쳐?” 성호는 기다란 소채찍을 들더니 대문을 열어제끼고 소무리를 몰아 천지꽃산으로 떠났다. 승호는 하는 수 없이 성호를 따라 천지꽃산으로 스적스적  걸어갔다.  소들은 풀을 뜯어먹으면서 천지꽃산 기슭으로 올라갔다. 어떤 소들은 성호의 눈치를 흘끔흘끔 보다가 옥수수밭으로 뛰여 들어가 옥수수이파리를 뜯어먹었다. 어떤 소들은 산기슭에 있는 혁명렬사기념비와 그  옆에 누워 있는 산소에 마구 뛰여올라가 밟았다. “저 놈 소새끼!” 성호는 돌팔매를 휙휙 날렸다. 한마리는 산소에서 달아났지만 몇마리는 계속 옥수수 이파리를 뜯어먹었다. 황급해난 성호는 사냥개들을 추겼다. “축! 축!” 사자 같은 누렁이들은 왕왕왕 짖으면서 소들한테 덮쳐갔다. 그러나 소들은 대가리를 낮추더니 사냥개들을 뜰 상했다. 황급해난 성호는 채찍을 휘두르면서 옥수수밭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금방 눈 소똥을 밟고 미끌어져 그만 허망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성호는 창피해 승호의 눈치를 흘끔 보면서 제꺽 뛰여일어났다. 궁둥이에는 시누런 소똥이 묻어 꼴불견이였다. 그는 이젠 습관됐는지 소똥을 닦을 새도 없이 소들한테로 쏜살같이 달려갔다. 옥수수밭으로 들어간 소들을 쫓아내고나니 성호의 옷은 이슬에 흠뻑 젖어버렸다. 성호는 옥수수 이파리를 훑어 엉덩이에 묻은 시누런 소똥을 쓱쓱 닦고 대수롭지도 않아했다. 그는 승호를 건너다보면서 헐레벌쭉 웃었다. “성호야, 뉘네 저렇게 밭 가운데 산소를 썼니?” 승호는 묘지 옆의 진달래를 손으로 쭉 훑다가 “아가!” 하고 새된 소리를 쳤다. 진달래 나무가시에 찔렸다. “봐라! 우리 조상들하구 큰형님이 자기 묘지 진달래를 꺾었다고 노여워 하는 모양이야.” “이건 네 형님 묘지냐?” “응, 그래. 밭도 우리 밭이야. 우리 아버진 제 집 밭에 항일투사들을 모셨구 그 아래쪽에 맏아들 산소를 썼지.” “네 큰형님은 언제 세상떴냐?” “내 나기도 전에 뇌출혈로 사망했다더라.” “오- 그래?” “큰형님은 사돈보기까지 한 약혼녀도 있었다는데 결혼도 하지 못하고 사망했다더라.” “쯧쯧, 참 안됐구나.” 승호는 그 산소를 바라보면서 머리를 끄덕였다. 그는 머리를 돌려 성호를 바라보면서 본 화제를 꺼냈다. “백화상점 구입과에 들어가서 나와 함께 일하자. 잘하면 한해에 상금까지 한 2천원 탈수 있을 거야. 정희도 아마  54원 밖에 못타는데. 2천원이면 어디 적은 돈이냐? ” “그만 둬라! 난 우사가 제일 좋아. 깡패들하구 악연을 끊으니 얼마나  편안한지 모르겠어.” 승호는 성호를 비웃었다. “대학졸업생이라는게 이런 골 안에서 소궁둥이나 쳐? 부모와 고향 사람들 볼 면목이 있니?” 성호에게는 그따위 격장법이 근본 통하지도 않았다. “빛갈 좋은 개살구 따위 무슨 소용있어? 이제 한해만 소를 치면 2천원이겠니?” 승호는 어이없어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에이유, 돈 밖에 모르는 새끼, 수전노로 돼버렸어? 사람이 돈만 따지면 눈이 어두워지는 법이야.” “돈보다 시골이 편안해서 좋단 말이야. 날마다 순진한 소들과 동무해 고향 산에 올라 시원한 산공기를 들이켜면 얼마나 가슴이 뿌듯한지 몰라. 하하하.” 승호는 자극하면 말을 듣겠는가 오해했다. “너 인생관에 문제 있어. 골 안에서 범이 물어가도 모르겠다. 우리 백화상점에 가서 한데 뭉치자.” “야, 임마, 네나 련애관을 고쳐라.” 그 말에 심장이 찔린 승호는 머리를 좀 숙이더니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였다. “고쳐야지. 네처럼 진짜 서로 사랑하는 녀자를 만나 진정한 사랑을 하면서 살고 싶구나.” 성호는 자기 귀를 의심했다. 소들은 풀을 뜯어먹으면서 순순히 천지꽃산 기슭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그들은 시름놓고 너럭바위 우에 앉아서 잠간이나마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래, 송파 깡패무리는 어떻게 됐니?” 승호는 또 한숨을 길게 내쉬였다. “전번에 은영일 륜간한 놈들은 처단됐어.” “송파는 어떻게 됐니?” “증거가 부족해 놔준 것 같아. 주악은 처음엔 송파가 시켰다해놓고 후엔 몽땅 부인했어.” “후환을 남겼구나.” 성호는 한숨을 길게 내쉬였다. “이번엔 뿌리 뽑혔다. 허철만 서기도 철직맞았어. 그런데 그 놈새끼 계속 코수염쟁이랑 멀쑥이랑 시켜서 날 못살게 굴어.” 그는 전번에 코수염쟁이와 멀쑥이 등 무리가 집에까지 찾아와 행패를 부린 일을 쭉 이야기했다. 성호는 바위 우에 서서 멀리 내다보더니 한숨을 길게 내쉬였다. (자식, 허서기랑 누구한테 끝장 난 걸 알기나 하면서 종알거려? 흥!) 그는 코방귀를 뀌더니 몸을 승호 쪽으로 돌렸다. “승호야, 백화상점을 즉시 떠나라. 지금 위험해.” “무슨 소리야? 경옥의 어머닌 생각 밖으로 흉금이 넓은 분이더라.” 그는 안수련 총경리와 나눈 이야기도 상세히 말했다. 성호는 도리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니야. 안팎이 다른 사람이 더 무섭다. 미운 개한테 떡을 더 줄 수도 있잖니?” “흥!” 승호는 코방귀를 꼈다. “안경리는 딸을 짓밟은 건 괘씸하지만 사업을 개인감정으로 대하지 않는다고 하더라.” 성호는 어린애처럼 천진한 승호를 보고 갑갑했다. “생각해보았니? 널 슬쩍 제발시켜 놓고 송파 무리가 널 못살게 구는 건 나와 상관없어. 이런 묘한 발뺌 말이야.” 승호도 바보는 아니였다. “간대로?” 그는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송파가 살아있는 한 내가 무사할 리 없어. 내 옆에 네가 있으면 든든하겠는데 말이야. 우리 시내에 가서 한데 뭉치자.” 성호는 구렁텅이에 빠진 승호를 도와주고 싶었지만 소와 돼지, 개들을 어쩌고 간단 말인가? 진짜 난감했다. 그보다도 어쩐지 승호와 가까이 지내고 싶지 않았다. “넌 지금 위험하다. 백화상점을 인차 떠나라. 아무리 세집을 옮겨도 쓸데 없어. 깡패들은 네 뒤를 밟아 계속 박살낼 거야.” 승호는 성호의 예리한 분석에 머리를 끄덕였다. 승호는 자기 설계한 방어선이 물거품으로 되는 것을 실감했다. 그는 성이 나 씩씨거리면서 발길로 바위 틈에 자란 애어린 진달래를 마구 걷어찼다. “야, 바위틈에서 얼마나 의악스레 자란 진달랜데 걷어차?” 승호는 개의치 않고 “권총만 있었으면 그 놈새끼들이 무섭지 않겠는데.” 하고 또 걷어찼다. “앗!” 승호는 발길질하다가 그만 소똥을 밟고 허망 엉덩방아를 찧었다. 재수없는 놈은 뒤로 번져져도 코등을 깬다고 승호는 칼날같이 뾰족뾰족한 나무그루가시에 엉덩이를  찔려 오만상을 다 찡그렸다. 성호는 코웃음쳤다. “야, 야들야들한 진달래라고 업신여기지 말라. 우리 고향산에 자란 진달래는 키는 크지 않고 수수하게 생겼지만 생명력이 아주 강한 꽃나무야. 걸 봐라, 바위틈에도 뿌리 박고 악착같이 살아남지 않았니? ” 승호는 진달래를 산에서 처음 보았다. 꽃은 진지 오래고 수수한 이파리만 앙상한 가지에 붙어있을뿐이였다. 그리 희한한 꽃도 아니건만 성호가 장황히 춰올리는 것이 우스웠다. “진달래도 가시 돋쳤나?” “아니야. 그러나 자기를 못살게 구는 놈만 보면 사정없이 찔러주지. 허허허.” 승호는 피 즐벅한 엉덩이를 씃더니 일어나면서 “어참, 재수 없어.” 하고 두덜거렸다. 말 속에 말이 있는 성호의 그 말은 바늘처럼 승호의 마음을 아프게 찔렀다. 성호는 너럭바위 우에 올라가 서더니 길다란 채찍을 잽싸게 휙휙 휘둘렀다. 쨩! 쨩! 쨩! 성호는 소를 몰면서 노래를 구성지게 불렀다.   진달래 곱게 피면 다시 온다고 이 손을 잡던 그 사람 갈대가 흐느끼는 가을이 가도 울리고 떠나간 그 사람…   성호는 천지꽃산에서 소를 방목할 때도 답답한 심정을 달래려고 항상 바위에 서서 고향산 아래 들과 벌 그리고 사래긴 밭을 내려다보면서 어떻게 하면 돈을 벌어 이 농촌을 떠나겠는가 궁리하며 노래를 부르고 또 불렀다. 노래를 부르고나면 이상하게 갑갑하던 가슴이 열리고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이 시각 성호는 승호와 자기 처지가 너무 갑갑해 노래를 부르고 또 불렀다. 승호도 멋을 모르고 성호를 따라 코노래를 흥얼거렸다. 그렇다. 승호가 경옥이, 은영이, 홍희를 짓밟은 대가가 얼마나 큰가? 이제 또 무슨 경을 치를지 누가 알겠는가? 승호는 성호와 갈라져 돌아온 후에도 불운의 운명을 순순히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성호한테 코를 떼우자 궁리 끝에 범송을 방패막이로 점찍었다. “꺽다린 씨름도 잘했지.” 일요일에 승호는 종수를 불러 정희와 범송이 교편을 잡은 천수해중학교로 놀러 갔다. 승호는 찌프에 돼지고기랑 맥주상자랑 주어싣고 신문사에 들려 종수를 싣고 천수해로 쏜살같이 달려갔다. 천수해중학교 당징실에서 쉽게 범송을 찾을 수 있었다. 범송은 당직실 문을 열고 그들을 데리고 들어갔다. “이게 숙사야.” 승호와 종수는 입을 딱 벌렸다. 6평방메터 되나마나 한 당직실 외통방에서 당직교원이 앉아 있는 책상 옆에 침대가 놓여있고 침대 머리에 놓인 자그마한 책궤 우에 이불과 요가 달랑 놓여있었다. 범송이 그들을 데리고 들어가자 당직교원은 바깥으로 훌 나가버렸다. “간고하구나.” 승호는 돼지고기를 들고 어디에 놓을가 서성거리면서 당직실 구석에 놓인 쟁개비와 전기밥가마를 보면서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뭘 사들고 왔니?” 범송은 돼지고기를 쟁개비 안에 놓고 돌아서더니 “우리 식당에 가서 한잔 하자. 여기서 언제 저 걸 끓여 먹겠니?”라고 했다. 범송은 일요일에 불시에 나타난 승호와 종수를 보고 반갑게 인사하면서도  이상해했다. (무슨 바람이 불어서 여기까지 찾아왔지?) 범송은 대학교 때부터 승호를 인간적으로 썩 좋아하지 않았다. 미꾸라지처럼 매그러운 승호한테 꼭 밑지고 마니깐. 승호는 종수와 범송을 찌프에 태우고 천수해식당으로 달려갔다. “정희도 데리고 오겠는 걸.” 종수의 말에 승호는 코방귀를 뀌였다. “놔둬라. 괜히 주흥을 깨뜨리겠다.” 승호의 말이 지나치긴 했지만 모두 함구무언하였다. 그들도 승호와 정희 알륵을 알고 있었다. 원래 승호는 교수네 규수이자 예쁘고 활발한 정희를 눈독 들이고 호시탐탐 손에 넣을 기회를 노렸다. 그는 문예위원인 정희를 학생회에서 회의를 할 때면 스리슬쩍 건드렸다. 그러나 정희는 홍희를 치근거리면서도 자기를 지껄이는 승호가 역겨워 곁을 주지 않았다. 비록 과장네 아들이고 학생회 체육위원이였지만 그녀는 승호와  금을 그어놓고 지냈다. 정희는 승호가 찌프를 몰고 교정에 들어서는 것을 진작 보았다. 또 한 교연실의  범송을 복도에서 만나 데리고 가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왕따 된 기분보다도 부르지 않아 더 홀가분했다. 승호는 곁을 주지 않는 정희가 아니꼬와 부르지도 않았던 것이다. 해가 서쪽에서 뜨는가? 뜻밖에도 승호가 통이 크게 한상 차리지 않겠는가. 범송은 성호 생각이 났다. “야, 정희도 우리 학교에 있는데 일요일이 돼서 아마 성호네 집으로 간 것 같아. 정희와 성호도 데려오면 좋겠는데.” 승호는 코방귀를 뀌였다. “그만둬라. 언제 걔까지 데려오겠니.” 범송은 일어나 승호의 팔소매를 당겨 일궈세우려고 했다. “좋은 찌프를 뒀다 뭘 하니? 10분에서 더 걸리겠니? 어서 갔다가 오라.” 승호는 일어설 념도 하지 않았다. “어제 갔다 왔어. 걔는 소궁둥이를 치다나니 올 새도 없어.”  그는 찌프에 싣고 간 맥주를 한병 따서 종수와 범송의 잔에 찰찰 넘치게 따랐다. “자, 오랜만에 만났는데 시원하게 한잔 마시자.” “감사하다.” 범송이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 종수는 술잔을 들고 승호를 마주 보았다. “승호가 이번에 백화상점 구입과 과장으로 제발된 걸 축하해 한잔 들자.” 사실 “승호가 깡패들한테 병신이 된 내막”을 종수가 삐라로 찍어 온 시내에 뿌리지 않았더라도 가능하게 성호는 수사대대로 들어갔을지도 모른다. 종수는 악의적으로 삐라를 날린 건 아니였지만 성호에게 죄송했다. 승호는 범송의 앞에 돼지고기점을 집어놓았다. “당직실에 있으면서 얼마나 고생했니? 많이 먹어라.” 범송은 돼지고기점을 우물우물 씹더니 고생살이를 늘여놓았다. “야, 이 놈 독신생활이 언제 끝나겠는지 진짜 말이 아니야. 코흘리개들과 맨날 교탁이나 두드려대면서 장난치지 말라고 목이 쉬게 경찰질을 해야지. 자기절로  전기밥가마에 밥을 해먹어야지. 강에 가서 옷을 씻어입어야지. 이젠 신물이 난다.” 승호는 찾아온 본의를 말할까하다가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꿀꺽 삼켜버렸다. 너무 이른 것 같아서였다. “자, 그간 고생했는데 한잔 들자.” 승호는 범송과 종수의 잔에 술을 따랐다. 그들 셋은 맥주잔을 들어 꿀꺽꿀꺽 마셨다. 범송은 학교 숙사생활이 힘들어 술맛이 없어 한숨을 풀풀 내쉬였다. 그때라고 승호가 홀딱 벗고 나섰다. “범송아, 이 학교에 어떻게 있겠니? 차라리 우리 백화상점에 가자.” 종수도 맞장구를 쳤다. “옳다. 당장 전근해라. 우리 시내에 모여 살자.” 범송은 승호를 멍하니 건너다보면서 “감사하다. 갈 수만 있으면 얼마나 좋겠니?”라고 하더니 승호의 맥주잔에 술을 따랐다. “근심하지 말라. 내 총경리하구 부탁하면 될거야. 우리 서로 의지해 살자.” 범송은 승호의 두 손을 꽉 잡았다. 흐뭇해난 승호는 그날 점심에 술을 취토록 마시고 찌프를 어떻게 몰고 백화상점으로 돌아왔는지 몰랐다. 이튿날 그는 범송을 데리고 안수련 총경리한테 가서 범송을 구입과에 전근시킬 의향을 회보했다. 안수련 총경리는 훤칠한 범송을 첫눈에 마음에 들어 동의했다. 승호는 아예 범송을 자기 매부로 만들어 혈연적으로 얽어놓으려고 마음먹었다. 그가 의향을 내비치자 범송은 대뜸 이게 웬 떡이냐고 맞선을 보자고 나섰다. 일이 되자고 그랬는지 선금도 훤칠한 범송을 보자마자 마음에 들어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범송과 선금은 부모의 동의를 거쳐 국경절 쯤에 사돈보기를 하고 양력설 쯤에 결혼하기로 했다. 범송은 승호 덕분에 백화상점 구입과에 진출했을뿐만아니라 승호의 녀동생 선금과 결혼하게 돼 입이 합박만해질 지경이였다. 승호는 코노래를 흥얼거리며 일하는 범송의 모습을 보다가 불시에  성호의 모습이 떠올랐다. 자전거를 타고 물고기를 팔러 다니는 보따리장사군, 천지꽃산에서 소채찍을 쨩쨩 울리며 소방목을 하는 루추한 꼴이  떠올랐던 것이다. (흥, 성호야, 세상에 후회약은 없어.)  
152    대하소설 진달래 소야곡(16) 댓글:  조회:1263  추천:0  2018-04-23
             30. 둥지 새들도 둥지가 있는데 황차 사랑하는 신혼부부야 첫날이불을 펼 자그마한 집이라도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성호와 정희의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시내에 엉덩이를 들여놓을 손바닥만한 집마저 없었다. 핍박에 의해 량산에 오른다고 그들은 태평거촌에 있는 부모의 집에서 밀월을 보내야만 했다. 개학하자 정희는 태평거촌에 있는 시부모의 집으로 부터 10여리 떨어진 천수해중학교로 통근해야 했다. 눈풍설이 미친듯이 이는 날에도 아녀자의 몸으로 자전거를 타고 통근하기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였다. 자전거를 타고 힘겹게 퇴근한 정희는 구들에 맥없이 물앉아 성호를 쳐다보며 조용히 물었다. “친정집에 가서 있으면 어떨가요?” 성호는 눈이 데꾼해졌다. “내 처가살이를 하란 말이요?” “그럼 난 출근하지 말고 태평거촌에서 당신만 쳐다보고 살란 말인가요?” 성호는 한숨을 후~ 내쉬였다. “천수해에 세집을 잡으면 어떻소?” 정희는 한참 궁리하더니 간신히 입을 열었다. “좋아요. 허나 세집도 어디 그리 쉽게 찾을 수 있겠어요?” 정희는 성호의 가래짝 같은 손을 잡고 정답게 입을 열었다. “세집 찾기 전에 친정집에 가 있으면 어때요? 녜? 친정집으로부터 천수해까진 포장도론데다 눈이 내리면 도로공사에서 말끔히 치니까. 자전거를 타고 통근하기 더 편리할 것 같아요. 여기 태평거촌으로부터 천수해까진 흙길인데다가 눈이 내리면 치지 않아 다니기 힘들어요. 이제 봄부터 비가 내리면 자전거를 어떻게 타요? 매일 왕복 20여리를 아녀자 몸으로 통근하는게 불쌍하지 않아요?” “어찌 처가살일 해?” “자리 보고 다리를 펴라고 가시집에 놀러 간 셈 치세요.” 성호는 뒤더수기를 긁적거렸다. “가시아버지 눈치 보인단 말이요. 원래 농민 아들이라고 우리 결혼 반대하지 않았소?” “또, 또.” 정희는 길다란 손으로 성호의 입을 막았다. “이젠 그런 말 하지 마. 결혼 전에 한 말 계속 외우는 건 좀 그렇죠.” “에헴.” 성호는 주먹으로 입을 막으면서 헛기침을 했다. 정희는 신랑의 두 손을 꼭 잡았다. “눈을 질끈 감고 우리 집에 가 한동안 있으면서 세집을 찾아보자요.’ 성호는 묵묵부답했다. 집 안에는 납덩이 같은 침묵이 흘렀다. 한참 후 성호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코구멍만한 세집으로 저 큰 이불장이랑 어떻게 끌고 다니겠소?” “여기 잠시 두면 되죠.” “이러면 어떻소?” 성호는 무슨 생각이 들었던지 “제나 본가집에 가서 출근하오.” 하고 말했다. “동문?” “여기서 소와 돼지를 치면서 경제토대를 닦아야겠소.” 정희는 어처구니 없어 앵두입을 함박만큼 짝 벌렸다. “이제 결혼한지 며칠이라고 생리별하겠어요? 저 보고 싶지 않겠나요?” “그립긴 하겠지. 별 수 있소? 일요일이면 우리 집에서 만나면 되지.” “일주일에 하루 부부로 되려는 건가요?” “일주일에 한번씩 만나도 리별의 아픔과 상봉의 기쁨을 맛볼 수 있는게 얼마나 좋소?” “쳇, 어처구니 없어서, 원.” 정희는 파랗게 질린 얼굴을 징그리면서 곱게 흘겨보았다. 그러나 성호는 개의치 않고 중얼거렸다. “어쩌다 만나면 사랑도 더 열렬할 거야. 그리운 정은 진한 사랑으로 승화하고.” “하루라도 떨어지기 싫은데요. 쉽지 않을 걸.” 정희는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는 창문 밖을 내다보면서 한숨을 호~ 내쉬였다. “눈이 내리면 뻐스가 통하지 않겠는데.” “하느님이 우릴 도울 거야.” 정희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면서 머리를 숙였다. 그녀는 성호는 고집이 웬간하지 않아 벽이라도 마구 차고 나갈 성질이라는 것을 알고도 남음이 있었다. 성호는 정희에게는 속에 걸리는 것이 많았다. 남들처럼 사돈보기를 해주었는가, 결혼기념품으로 금반지라도 사줬는가. 아무 것도 해준 것이 없지 않는가. 그러나 가시집에서는 정희가 무남독녀라고 옷장으로, 이불장으로, 례단까지 푸짐히 갖춰 보냈다. 더군다나 하나 밖에 없는 사위라고 자전거까지 사주었다. 결혼식날에 온 마을 사람들은 성호네 집에 모여 구경하고 색시가 예뻐서 술맛이 좋다고들 했다. 시내에 가서 복장점과 양고기뀀집을 차린 순희와 철주 부부는 음력설을 쇠려고 고향에 돌아왔다. 그녀는 성호가 자동차에 색시를 싣고 와서 내리는 것을 구경하면서 “질투”의 눈길까지 보냈다. 성호는 정희가 결혼식 이튿날에 젖값을 두고 벌어진 일을 잊을 수 없었다. 정희가 웃방에서 화장을 하고 있을 때 어머니가 들어와 보따리에서 옷감을 두개 꺼내 정희한테 주면서 “본가집 어머니 젖값으로 가져가오.”라고 했다. 그때 다섯째 은자가 문을 뚝 떼고 들어오더니 주책없이 끼여들었다. “엄마, 성호 가시어머니한테 옷감 한벌 더 보냅소. 올케 숱한 례단을 가지고 왔는데 젖값을 고걸 보내 됩둥?” 원래 그런 일은 어머니가 결정하면 그대로 하는 것이 옳았다. 또 만약 토론이 필요하다고 해도 새 색시가 없을 때 조용히 토론하는 것이 옳았다. 그런데 영옥은 딸이 주책없이 끼어드는 바람에 색시를 념두에 두지 못하고 핀잔을 주었다. “젖값은 내가 결정할 일이지. 네가 왜 끼여드니? 저게면 됐다.” 왜 그랬을가? 무남독녀 교수네 귀한 딸을 데려왔으면 고까짓 젖값으로 옷 한벌을 더 줘보내면 뭐라는가? 기어이 자기 소견대로 옷감 두개를 주고 말았다. 정희는 그 자리에서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은자가 주책없이 끼어드는 바람에 은자는 인심을 냈지만 시어머니 영옥은 미움개를 사게 되지 않았는가. 집안이 화목하려면 제일간 고부 사이가 화목해야 했다. 그런데 이 일로 해 고부 사이가 벌어질가봐 저으기 근심됐다. 비록 정희는 속에 꼭 넣고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성호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에서 그녀의 얼굴에서 모든 속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그는 미안해 될수 있는 한 처가살이를 하지 않으려고 했다. 더는 정희의 걀죽한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는 일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결혼 첫날밤에 정희의 걀죽한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보고 마음이 아팠다. 복잡한 결혼행사를 마치고 밤중이 되여서야 그들은 첫날이불을 편 조용한 웃방에 단둘이 마주 앉을 수 있었다. “곤하구만, 우리 잘가?” 정희는 머리를 끄덕이면서 성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성호는 희미한 전등불빛 아래 꽃너울을 쓴 정희가 그렇게 예쁠 수 없었다. 그는 저도 몰래 다가앉으면서 정희를 꽉 끌어안았다. “너울을 벗겨주세요.” “그래.” 성호는 정희의 머리 우에 10여시간이나 얹혀 있은 꽃노을을 벗겨 벽 옷 걸이에  걸어놓았다. 그때 첫날색시 대반을 섰던 막내누나 성숙이 노크하고 들어왔다. “성호, 각시 저고리 고름을 풀어줘라.” 성호는 씨무룩이 웃었고 정희는 부끄러워 머리를 숙였다. 막내누나가 나가자 성호는 시키는 서방질을 해나갔다. 그가 넉가래 같은 손으로 정희의 저고리 옷고름을 더듬어 풀어 스르르 당겼다. 그러자 정희는 걀죽한 얼굴에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지금 왜 우오?” 정희는 도리머리를 살래살래 저었다. “후회되오?” 정희는 저고리 팔소매를 잡아당겨 팔을 빼면서 성호의 귀에 대고 조용히 속삭였다. “너무 행복해서요. 이젠 끝내 당신 색시로 됐구만요. 널 끝내 내 신랑으로 만들었어.” “영원히 후회하지 않지?” “후회란 말 이젠 다시 하지 마세요. 너무너무 행복해요.” 정희는 성호의 품에 얼굴을 묻으면서 속삭였다. “사랑해, 내 신랑 성호!” “사랑하오, 정희.” 성호는 그녀를 누구한테 빼앗기기라도 할가봐 두려운듯이 꼭 껴안고 놓지 않았다. 정희는 분명 흐느끼면서 온몸을 떨고 있었다… 성호는 사랑스런 정희의 걀죽한 얼굴에 다신 눈물을 흘리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어찌 결혼하자마자 가시집에 기여든단 말인가.  그는 가시집에서 사준 자전거를 타기도 미안했다. (당당한 사내가 가시집 신세에 자전거를 타?) 정희는 성호의 그런 속내를 꿰뚫어보고 “개학 첫날에 지각하겠어요. 저를 천수해까지 자전거로 실어다주겠어요?”라고 했다. 성호는 눈이 내리는 바깥을 내다보면서 한숨을 후~ 내쉬였다. 뻐스를 기다려서는 근본 시간이 안됐다. 성호는 용빼는 수가 없어 자전거에 색시를 태우고 시내로 달려갔다. 눈길이여서 속도를 죽였지만 반시간 푼히 달려 시내 중학교 대문 앞에 이르렀다. “오늘 실어왔으면 다야. 본가집에 가서 있소.” “잠간만!” 정희는 자전거를 타고 돌아가려는 성호를 보고 한쪽 골목으로 데리고 가서 나직이 말했다. “시내에 일을 보러 오면 들러요. 그래 가시집에 놀러 오지도 않겠어요? 친정부모한테도 인사하면 좋지 않아요? 이모부가 송파 무리를 감시하라는 일 그만두면 어때요? 괜히 앞뒤집에서 사는 우리까지 보복당하겠어요.” 정희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고 있지 않겠는가. “공안국에 갈 거 같지도 못한데 괜히 삐치지 말아요. 승호 아버지 뒤처리를 하지 않으리라고 그래요?” 그러나 성호는 굳은 표정을 지었다. “아니요. 송파네 깡패무리를 제거하지 않고는 승호와 은영, 아니, 숱한 사람들이  편안히 살 수 없소.” 성호의 성질을 아는지라 정희는 화제를 돌렸다. “가시집에 살기 싫으면 세집이나 찾아봐요. 송파네를 감시하는 일은 아빠 보고 도와달라고 할게요.” “가시아버지?” 정희는 머리를 끄덕였다. “아버진 공학원 교수이기에 최첨단기술로 송파를 감시할 수 있어요.” 성호는 뜻밖의 말에 놀랐다. “눈길에 조심해 다녀가요.” 성호는 생글방글 웃음 지으며 손을 흔드는 색시를 뒤에 두고 눈풍설을 맞받아 힘겹게 페달을 밟았다. 성호는 가시집에 있기보다 세집을 잡으면 정희도 편리하고 고향의 부모를 자주 들여다볼 수 있어 좋을 것 같았다. 며칠 후 그는 천수해 시내에 내려와서 세집 같은 집이 있기만 하면 무작정 문을  두드리고 들어가 세집을 주지 않겠는가고 물었다. 그렇게 반나절이나 돌아다녀도 세집을 찾기란 참 힘들었다. 성호는 집 한칸도 없는 고통을 통절히 느꼈다. 새도 둥지가 있는데 황차 만물의 령장이란 사람이, 그것도 80년대 초 대학졸업생이 첫날이불을 펼만한 손바닥만한 집도 없으니 말이다. 딱 마치 허허벌판에 허망 나앉은 신세 같았다. 아니, 집구걸을 다니는 거지 같은 감까지 들었다. 이젠 남의 집 문을 두드리고 세집을 주지 않겠는가고 묻기도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래도 세집을 얻어야지.) 성호는 골목을 두루 살피면서 돌아다니다가 뉘네 원집 앞에 지은 낮다란 창고가 별로 세집 같아보였다. (그래, 구들만 있으면 요만한 창고에서라도 살 수 있지.) 성호는 일루의 희망을 품고 원집의 문을 똑똑똑 두드렸다. “계십니까?” 그는 문을 여는 사람을 보지도 않고 “세집을 주지 않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어마나!’ 그제야 머리를 든 성호도 놀랐다. 선녀음식점의 주인 선화가 아니겠는가. “어서 들어오세요.” 성호는 창피해 머리가 화끈 달아올랐다. “아니, 아니, 잘못 봤구먼.” 성호는 세집을 구하려 온 말을 하지도 못하고 황급히 몸을 돌려 도망쳤다. 그러나 선화는 끌신을 짝짝 끌고 뒤따라 나왔다. “성호, 결혼했나 보지? 세집 얻으러 다니는 걸 보니.” “아니야, 친구가 얻어달라고 해서. 그래.” “그래? 오빠, 잠간!” “?” 성호가 주춤 멈춰서자 뒤따라온 선화는 성호의 팔소매를 잡아당겼다. “온바하고 이 집 보고 가오.” 그녀는 성호의 비길데 없는 심정은 모르고 집문을 열어보였다. “오빠, 이걸 보오. 이 집은 내 시집가면 아빠가 세간내려던 집이요. 지금 비였으니까. 어떤 친구인지 세를 주지.” 성호가 들여다보니 10평방메터도 되나마나 한 창고 같은 집에 구들을 놓고 반질반질한 쇠가마까지 두개 걸어놓았었다. 그만한 집이면 세간살이는 넉근히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성호는 자존심이 상해 선화네 집 마당에 와서 세집살이를 할 수는 없었다. “감사하오. 친구하고 말해보고 다시 찾아오든지. 만약 소식이 없으면 그만 둔 걸로 아오.” “알았어요. 신문에까지 난 정의용사, 식당에 좀 자주 와요.” “그래오.” 성호는 날 살려라고 황급히 위축감과 창피함이 휘몰아치는 그 자리에서 간신히 발뺌을 했다. 다른 골목에 굽어들어 한숨을 후~ 내쉬였다. 순간 잔등에 식은땀이 후줄근히 내뱄다. (아, 제 집이 없이 세집살이 한다는 건 정말 피눈물 나는 일이구나. 창피해 어디 시내에서 살겠니?) 성호는 세집이고 뭐고 그만두고 자전거를 타고 시내에서 달아나고 말았다. 쏜살같이 달리는 자전거 뒤로 비운의 눈발이 흩날렸다. 아니, 돈 없고 집도 없는 성호의 쓸쓸한 마음이 갈기갈기 찢어져 하얗게 흩날리고 있었다. 집에 돌아와 성호는 텅텅 빈 웃방에 들누워 천정을 쳐다보았다. (세집살이는 피눈물 나는 하루살이야. 한 2~3천원이면 덩그런 집 한채를 사서 보란듯이 살겠는데.) 그는 더는 정희에게 실망을 안겨주고 싶지 않았다. 순간 일전에 정희가 하던 말소리가 귀전을 아프게 때렸다.  “일요일 쯤엔 세집에라도 들어 살자요. 신혼부부가 어떻게 항상 갈라 살겠어요?”                                                      31. 장사군 성호는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는 고향 산천을 둘러보면서 꿈과 현실의 지나친 불균형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떨쳐버리려고 모지름을 썼다. 웬 일일가? 갑자기 그의 눈 앞에 결혼 때 찾아왔던 20여명 조카들 가운데서 둘째누님네 맏아들 정춘의 하얀 우유빛얼굴이 떠올랐다. “자식, 이젠 열일곱살. 전 시에서 4등으로 고중에 입학했다면서. 성과 시 3호학생! 얼마나 우수한 조카인가. 정일도 이젠 초중 2학년생이라지. 이젠 다 컸구나.” 키가 훤칠한 정춘은 중학교 때부터 달래기를 아주 잘했다. 긴 다리로 성큼성큼 어찌나 가볍게 달리는지 전문 륙상선수를 방불케 했다. 순간 성호는 길림에 있는 둘째누나 춘자와 매형 홍수, 정춘과 정일, 넷째누나 봉금과 송준, 영희와 근봉이 보고 싶었다. 순간 그의 눈 앞에는 문뜩 초생달이 걸린 밤에 정춘을 앞세우고  아래집 영화를 만나보던 일도 떠올랐다. 그때 성호는 영화의 남동생 송철한테 권투를 배워주었다. 영화는 어글어글한 눈을 치켜뜨고 말렸다. “오빠, 싸움질해 머리 아픈데요. 권투까지 배워주면 매일 싸움질하라고?” 그러나 성호는 고집을 부렸다. “부모도 없이 불쌍하게 자라는 송철이 업신여김을 당하게 말아야지.” “맞아요. 내 주먹이 세면 정춘이랑 맞아대면 말려줅게요.” 송철은 어깨 으쓱해 했다. 성호는 자기 안속이 따로 있었다. (송철한테 권투를 배워주는 척하면서 영화를 만나볼 수 있어 일거량득이 아닌가.) 영화도 성호의 말에 일리 있어보였는지 더 말리지 않았다. 춘자와 홍수는 대학때 동창생이였다. 그들은 부모한테 빚을 지우지 않으려고 결혼잔치 큰상도 받지 않았다. 사람이 평생 첫돌생일상으로부터 결혼잔치 큰상, 회갑상까지 큰상을 모두 3개 받는다고 한다. 그런데 그들은 부모형제가 그렇게 받으라는 결혼잔치 큰상도 기어이 받지 않고 그저 결혼술상으로 대체했다. 춘자는 항상 막내동생인 성호의 학습을 지도해주었고 인생의 앞길을 밝혀주었다. 어떻게 보면 춘자는 성호의 앞길을 비춰주는 등대와도 같았고 파도가 세찬 망망한 인생의 바다를 헤가르며 나가는 성호의 키잡이나 다름없었다. 춘자는 막내동생이 영화를 좋아하는 것 같은 눈치를 채자 말렸다. “대학졸업생이 어찌 고중생 민영교원과 련애해? 장차 시내호구로 올리기도 힘들고 전도를 그르치게 돼.” 누나의 랭정한 말에 성호도 랭정히 고려하게 됐다. 이제껏 둘째누나의 말이라면 죽으라는 말 내놓고는 다 들어온 그였다. 춘자와 홍수는 북대황에 가서 대학교실습을 마치고 길림지구 한 자그마한 진의 농업보급소에 배치받았다. 춘자는 낮에는 남편과  한 책상에 마주 앉아 일하고 밤이면 임신한 몸으로 습한 사무실에서 새우잠을 자야 했다. 심지어 밥을 지을 부엌이  없어 직원들의 식당에 가서 근근득식하면서 살았다. 11월이면 당장 첫애를 낳게 돼 그들은 할 수 없이 39원을 주고 7평방메터 밖에 안되는 세집을 맡고 나갔다. 11월 11일에 그 비좁은 세집에서 본가집 어머니 영옥이 와서 조산부로 돼 손수 정춘을 받아냈다. 춘자는 낳은지 11달 밖에 안되는 정춘을 시집에 보내 시어머니를 보고 봐달라고 했다. 그런데 시어머니는 몇달이 안돼 애를 못 보겠다고 했다. 홍수는 난지 10달만에 아버지를 여의였다. 홍수는 크면서 다른 애들은 다 아버지 있는데 왜 자기는 아버지가 없는가고 하는가 했다. 심지어 어머니를 보고 돈 200원을 주고 아버지를 사달라고 떼를 쓰면서 울었다고 한다. 그런데 정춘이 밥을 먹을 때나 잘 때나 아버지 사진을 안고 울어서 불쌍해 못 보겠다고 했다. 설상가상 둘째 정일이 생겨서 춘자는 정일을 업고 정춘을 안고 소학교로 출근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본가집에서 한 마을에 이사해온 후 영옥이 애들을 봐주어서 한 1년은 무사히 보냈다. 정춘은 어릴 때부터 아주 참했다. 항상 할머니네 집에 갈 때면 꼭 기차표를 손에 쥐고야 렬차에 올랐다. 후에 커서도 절대 도적렬차를 타지 않은 참하고 성실한 애였다. 초중을 다닐 때 농촌의 한 동창생 부모가 좋은 종자를 사기 힘들어하자 현 종자공사에 다니는 아버지한테 부탁해 해결해주었다. 가을에 대풍작을 거둔 동창생의 아버지는 산에서 손수 캔 신선한 버섯을 아들한테 보내왔다… 성호의 마음은 어느덧 누나와 조카들이 있는 송화강변에 날아갔다. 순간 그의 머리 속에는 정춘을 시켜 영화를 불러내 초생달이 뜬 송화강변에 가서 빨래를 하며 이야기를 주고 받던 일이 삼삼히 떠올랐다. “쳇!’ 순간 성호는 모기에게 종아리를 물리면서도 영화 옆에 앉아 있던 자기 모습을 떠올리면서 허구픈 웃음을 지었다. “송화강, 송화호! 물고기도 많았지.” 그는 정춘과 송철을 데리고 물고기를 잡던 일로, 영화가 끓인 물고기 된장국을 후후 불면서 맛있게 먹던 일도 떠올랐다. “지금쯤은 송화강과 송화호가 떵떵 얼었겠지.” 순간 그는 무릎을 탁 쳤다. “그래, 지금 한창 겨울 물고기잡이철이야.’ 성호는 수많은 아이디어가 꼬리를 물고 떠올랐다. (송화호에 가서 물고기를 고향에 가져다 팔면 어떨가? 만약 장사가 잘 되면 세집 값이라도 장만할 수 있잖겠는가? 시내에 집을 한채 척 사놓고 정희를 데리고 보모를 모시고 남들이 보란듯이 알콩달콩 살아야지! 그래, 경제시대에는 돈이 살림살이 토대야.) 성호는 물고기장사를 할 일념에 가슴이 한껏 부풀어올랐다. 그는 집으로 돌아와 아버지와 부림소를 팔자는 말을 해야겠는데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부림소는 농사군의 목숨과 같았기 때문이였다. 그는 먼저 태평거촌에 있는 상점으로 가서 물고기 있는가 살펴보았다. 상점 매대에는 고마이로 보이는 물고기가 몇개 있긴 했다. 그러나 어찌나 들여온지 오랜지 절고 부스러져 물고기 원 모습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런 물고기 부스러기를 둬개 사왔다. 어머니가 정성스레 기름에 볶아 담아 밥상에 올렸지만 죽은지 오랜 물고기 부스러기가 어찌나 짠지 소금덩이를 씹는 것만 같아 고기맛이 나지 않았다. (송화호 생신한 물고기를 고향 사람들한테 가져다 팔면 좀 좋겠는가. 음력설과 보름에 잘 팔릴 거야.) 성호는 큰 마음을 먹고 물고기장사를 할 생각을 털어놓았다. “물고기장사라도 해서 집을 사야지. 어떻게 세집살이를 하겠습니까? 아버지, 소를 팔깁소.” 상진은 대뜸 화를 냈다. “야, 부림소를 팔고 새 해 농사를 어떻게 짓니?” 영옥도 말렸다. “야, 그만 둬라. 옛날 아버지 장사해서 쫄딱 망했다.” 상진도 사정했다. “넌 대학을 나왔으니 배운 지식으로 살 궁리를 해라. 장사라는게 어디 그리 쉬운 일이냐?” 영옥은 더 한심한 말을 했다. “장사를 해서 내남이 다 돈을 벌 수 있으면 다 부자로 됐지.” 상진은 “금의환향한다더니. 쯧쯧쯧, 어쩜 아버지를 초과하지 못하느냐?” 하고 여간 안타까워 하지 않았다. 성호는 아버지 고민을 짐작할 수 있었다. “아버지, 내라고 대학졸업장을 그저 버리겠습니까? 장사를 해서 살림집이나 갖춰놓고 아무 사업이라도 할 작정입니다.” “피는 못 속여. 어쩜 딱 날 떼닮았니?” 아버지가 아무리 말려도 성호는 자기 꿈을 접을 수 없었다. “아버지, 근심하지 맙소. 개혁개방세월에 그까짓 대학졸업장에 매달려 산다는 건 낡은 고정관념입구마. 장사 해서 경제토대를 닦으면 장차 월급쟁이들보다 부모를 더 잘 모시고 행복하게 살 수 있습구마.” 그는 부모가 말리는 것도 무릅쓰고 사랑방에 들어가더니 마대 둬개를 가방에 넣어가지고 길림으로 떠났다. 호주머니에는 “정의용사” 상금 100여원 밖에 없었다. 상진은 속으로 은근히 자기 능력으로 앞길을 개척하려는 막내아들을 장하게 생각하였다. 만약 그가 천룡해 국장과 한마디만 사정하면 성호가 공안국 수사대원으로 들어가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수도 있었다. 그러나 지청구를 들이대지 않는 막내아들이 장했다. 한편 성호는 둘째누나네 집에 들리지 않고 곧추 송화호로 달려갔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물고기장사를 하러 왔다고 하면 누나나 매형이 기필코 동의할리 만무했다. 또 영화와 더 걸버무리지 않으려는 다짐도 했다. 그는 해지기 전에 곧추 송화호에 달려갔다. 과연 바다와도 같이 넓은 송화호에는 물고기장사군들이 여러가지 물고기를 팔고 있었다. 성호는 언 련어 한근에 30전씩 250근 사서 두 마대에 꼴똑 담았다. 그는 아주 로련한 솜씨로 삯짐군에게 삯을 6원 주고 당나귀차에 물고기를 실어 길림역에 와서 고향에 부치기까지 했다. 그가 이튿날 아침에 고향 역에서 내려 화물처로 가 보니 글쎄 물고기 두마대가 벌써 화물처에 와 있었다. (살았다.) 성호는 곤기를 잊고 종주먹을 쥐고 반달음쳐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아침 숟가락을 놓기 바쁘게 외양간에 나가 소를 풀어 수레에 메웠다. “야, 어디로 가니? 소를 팔아선 절대 안돼!’ 상진은 근심이 태산 같았다. “근심맙소. 길림에서 사온 물고기를 실으러 갑구마.” “뭐라고? 벌써 물고기를 사왔다고?” 상진은 도리머리를 홰홰 저었다. 영옥은 뒤따라나와 눈깔린 땅바닥에 풀썩 물앉아버렸다. “아이구, 저 자식, 딱 애비를 닮았구나. 또 고생문이 열렸구나. 에이구, 저 놈을 어쩌니?” 점심 쯤에 성호는 소수레에 물고기 두 마대를 싣고 들어섰다. 온 아침 욕하던 상진과 영옥은 마대아구리를 열고 생신한 물고기를 들여다보고선 입을 딱 벌렸다. 순간 늙은 량주의 주름 진 얼굴에 만면춘풍이 흘러넘치고  할미꽃이 필 지경이다. “야, 물고기 먹음직하구나. 한근에 얼마에 샀어?” “어데서 사왔어?” 성호는 물고기마대를 훌 들어 집 안으로 들여가면서 동문서답했다. “한근에 1원 35전씩 팝소.” “애비한테도 비밀이냐?” 성호는 제법 물고기장사 티를 냈다. “장사는 애비도 속인다고 귀띔해주지 않았습니까? 허허허.” 상진은 머리를 끄덕였다. “그래, 장사를 하자면 그래야지. 넌 나보다 훨씬 나아. 난 남을 너무 믿고 장사를 하다가 쫄딱 망했어.” 성호가 물고기를 사왔단 소문이 한 집 건너 온 동네에 소문이 자자하게 퍼졌다.  마을사람들이 삼삼오오 몰려왔다. 그들은 생신하고 먹음직한 물고기를 보자 너도나도 몇개씩 사갔다. 사흘도 안돼 두 마대 물고기를 다 판 후 어머니가 돈을 세여 보니 250원이나 벌었다. 장사에 재미를 붙인 성호는 아버지와 사정해 부림소까지 800원에 팔아가지고 대련으로 가서 청어랑 홍어랑 낙지랑 새우랑 사다가 팔았다. 철주는 고향에 놀러 왔다가 저울과 물고기를 자전거에 싣고 시골마을을 누비면서 물고기를 사라고 소리치며 돌아다니는 성호를 보고 뒤에서 빈정거렸다. “대학을  밑구멍으로 다녔어? 물고기장사를 하다니?” 성호는 철주와 말다툼할 새도 없었다. 그는 고향에서 20여리 떨어진 골안까지 자전거를 타고 물고기를 팔러 돌아다녔다. 눈길이 막히면 자전거를 밀고 다니면서도  끝내 한수레나 되는 물고기를 다 팔았다. 보름이 지나 그는 아버지한테 부림소를 살 돈을 주고서도 천여원을 벌었다. 목돈을 손에 거머쥐자 성호는 생각이 달라졌다. (이젠 고향 사람들은 설과 보름도 쇴고 3.8절마저 쇴지. 이제 물고기를 사와도 금방 사먹었기에 더 사려고 하지도 않을 거야.) 사실 고향 마을 사람들뿐만아니라 거의 모든 농촌사람들은 한해에 설 같은 명절에 돼지고기나 물고기를 몇근 사먹으면 만족이였다. (봄에 언 물고기가 녹아서 차에 부치기도 힘들어. 장사를 바꿔보자.) 우둔한 놈이 범을 잡는다고 그는 암송아지를 사서 소새끼낳이를 하는 것이 어떨가고 궁리했다. (그래, 암송아지를 사서 한 1년 키우면 해마다 새끼를 낳을 것이 아닌가? 그 다음해부턴 새끼가 또 새끼를 낳을 거야. 그럼 몇해 후에는 소 몇마리 되겠는가? 둥글소 한마리에 한 800원부터 천원 좌우 하니까. 한 열마리 팔면 만원을 쥐게 된다. ) 성호는 벌떡 일어나 두주먹까지 불끈 쥐고 미친듯이 고함쳤다. “만원호! 난 부자로 될 거야!” 그의 눈앞에는 찬란한 미래가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덩실한 고래등 같은 벽돌기와집을 시내에 척 사놓는다. 부모를 모시고 효성을 다한다. 사랑하는 색시와 함께 애를 낳아 기르면서 알콩달콩 행복하게 산다. 희망이 눈 앞에 한들한들 춤추며 떠오른다. 심지어 그는 세집살이에 새파랗게 질렸던 정희의 걀죽한 얼굴에 행복의 금물결이 이는 환한 모습을 방불히 보는 것만 같았다. 상진과 영옥은 웃방에서 나는 고함소리에 미닫이를 열고 들여다보았다. “이제 소장사를 해서 갑부로 될 예산입구마.” “뭐라고? 대학을 졸업하고 소장사를 한다고?!” 영옥은 맥이 풀려 구들에 물앉아버렸다. “이젠 네가 뭘 사오든지 팔아주지 않겠다.” 상진은 미닫이를 쿵 닫아버리면서 혼자말로 두덜거렸다. “에이, 하뉘 소궁둥이나 칠 놈! 대학을  밑구멍으로 다녔어?” 그러나 성호는 기어이 자기 푸른 꿈을 향해 달려갔다. 고향의 천지꽃산의 잔설은 발버둥질치다가 끝내 녹고야 말았다. 겨우내 모진 풍설에도 끄떡하지 않고 엄동설한의 동장군을 이겨낸 진달래꽃이 만발했다. 천지쫓산은 마치 한송이 커다란 진달래 꽃송이 같았다. 꾀꼴새들이 지종지종 노래를 부르며 푸르른 창공을 훨훨 날아옜다.      
151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98) 댓글:  조회:1697  추천:0  2018-04-20
                         4.먹장하늘 감때사납게 불어치던 눈보라가 동장군과 함께 물러가 사람들이 좀 기를 펴고 살까 했다. 훈훈한 봄바람이 불어오고 만물이 소생하자 농민들은 또 희망의 씨앗을 심었다. 상순 서기의 지휘아래 사원들은 부르하통하를 가로 막고 산종을 개간했기에 올해에는 산종에서 난 벼를 찧어 먹으면서 보릿고개도 무난히 넘길 수 있었다. 이제야 살맛이 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하늘에 먹장구름이 뒤덮여 오며 마을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농사꾼들은 하늘을 쳐다보면서 밭으로 나가는데 그 놈의 하늘은 변화가 무쌍하고 심술궂었다. 맑은 하늘에서 불비를 퍼부어 대지를 불태우며 곡식을 시들어 죽게 하다가도 변덕스레 먹장구름을 몰고 와서 일하는 농사꾼들에게 생벼락을 내리치고 우박을 퍼붓고 소낙비를 퍼부었다. 룡호상박에 하늘에서는 번개 번쩍이고 우뢰가 으르릉거리며 요란하게 부산을 떨었다. 룡과 호랑이 모양의 먹장구름은 을씨년스런 하늘에서 아가리를 쫙 벌리고 서로 물고 뜯었다. 상아만큼한 커다란 껌정송곳이를 빼물고 불찌가 탁탁 튕긴다. 불꼬리로 높은 산마루를 툭 쳐 불찌가 튕긴다. 불비가 창대처럼 산과 들에 툭툭 떨어져 불찌가 사처로 튕긴다. 나중에 호랑이 구름이 패해 어디론가 형체도 찾아볼 수 없이 가뭇없이 사라졌다. 룡구름만이 하늘에서 룡트림하며 먹장구름 쪼각 사이를 유유히 날아예면서 패왕노릇을 한다.          농사군들은 그저 일방으로 변덕스런 하늘의 룡구름에 당하기만 하면서 하늘과 땅을 원망하며 살아야 했다.       용트림하는 것 같은 먹장구름이 하늘을 어둠침침하게 뒤덮더니 불용이 불을 뿜어 대지를 번쩍 채찍질 하더니 우레 소리가 천지를 진동했다. 룡구름은 어느 산마루가 높은 것 같거나 어느 산천초목이 자기 말을 고분고분 듣지 않는 것 같으면 불채찍을 휘둘러 사정없이 후려쳤다. 천지가 놀라 뒤짚일 지경이였다.        상순은 반 우파운동에 뒤이어 또 휘몰아쳐 오는 새로운 정치운동의 폭풍을 보고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이른바 "문화대혁명"이 홍수처럼 북경으로부터 전국에 범람하면서 감때사납게 터졌다.       상순은 도리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는 착오적인 한마디 말 때문에 한 사람에게 한뉘 우파나 현행반혁명이란 엄청나게 큰 모자를 씌워 투쟁하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정규상은 당총지 서기 포치대로 당 조직을 도와 군중들에게서 의견을 청취해 당총지에 바치지 않았는가. 그런데 아직도 투쟁하다니? 오옥선은 말을 한마디 잘못했다고 아직도 투쟁해? 그게 ‘병을 치료해 사람을 구하는 것’인가? 이젠 착오를 고치고 새 사람이 될 기회를 줘야 하는데. ) 그는 오옥선과 정규상이 불쌍했다. 그러나 무슨 회의에서나 눈을 지긋이 내리감고 남의 말을 듣기만하고  입장을 꽉 찌르고 묵묵히 침묵만 지켰다. 그는 집에 있는 물초롱과 반디를 찾아들고 정규상을 찾아갔다. 규상과 집식구들은 그를 반갑게 인사했다. 정규상 일가는 이 두메산골에 와서 상순 일가를 큰집처럼 믿고 살고 있었다. “동생, 속이 답답한데 오늘 우리 물고기잡이나 갈까?” “양?” 정규상은 시내에서 살면서 물고기 잡이를 해본 적이라고는 없었다. 허나 상순이 모처럼 찾아 왔는데 가지 않을 수 없었다. 허나 그는 몇걸음 걷지 못하고 주춤 멈춰서더니 먹장구름이 몰려오는 하늘을 쳐다보더니 적이 근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소낙비가 쏟아질 거 같은데도 가겠소?” “농촌에서 살면 소낙비를 맞는 것쯤은 예상사요. 어서 비닐박막이나 준비해 가지고 따라 오오.” 정규상은 집에 들어가더니 비닐박막을 들고 나오더니 상순의 손에서 물 초롱을 빼앗아 들고 따라 나섰다. 그들이 태평강을 건너갔을 때였다. 패용천산을 감싸면서 덮쳐들던 먹장구름 속에서 뻘건 불 뱀이 산허리를 번쩍 휘감아 채찍질했다. 꽈르릉! 천지를 진동하는 우레 소리가 울렸다. 패용천산의 천년 이끼 낀 벼랑도 마구 무너질 것만 같이 진동했다. 이윽고 대줄기 같은 소낙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정규상은 황급히 비닐박막을 쓰면서 물었다. “이렇게 소낙비가 쏟아지는데 물고기 있겠소?” 상순은 앞에서 비닐박막을 쓰고 걷다가 뒤돌아보면서 손까지 쳐들며 말했다. “걱정 마오. 이런 소낙비가 내린 뒤에 흙탕물에 미꾸라지들이 더 많소.” “오, 그렇구먼.” 정규상은 머리를 끄덕였다. 그들이 패용천산 앞의 차방까지 갔을 때다. 산기슭을 마구 휩쓸면서 내린 흙탕물이 허벅다리를 넘는 큰 물도랑에 마구 쏟아져 들어왔다. “어째 비가 끊을 거 같지 않소?” 상순은 여기저기 살피다가 반비를 들고 큰 물도랑 우에 놓은 나무다리를 가리켰다. “저기 가서 비를 피하기오.” 그들은 바지를 벗어 안고 나무다리 밑으로 들어갔다. 수레도 지나가게 놓은 나무다리 밑은 비 한 방울도 떨어지지 않아 좋은 은신처로 됐다. 한참 논과 산비탈을 강타하던 소낙비는 한 시간 후에야 뚝 그쳤다. 먹장구름이 동쪽으로 밀려가자 동쪽하늘에 칠색무지개가 아름답게 걸렸다. 서쪽 하늘이 건뜻 들리더니 활짝 트이면서 밝은 해가 부채살처럼 내리 비췄다. 상순은 소용돌이치면서 다리 밑으로 흘러내리는 흙탕물을 보더니 “빨리 저 다리 아래 골통으로 가기요.”라고 했다. “양.” 상순은 반디를 들고 둑으로 올라가 큰 물도랑의 골통으로 질척질척 뛰어갔다. “야, 고기 많소.” 정규상이 뒤따라 가보니 고패를 치는 흙탕물에 미꾸라지들이 마구 뛰노는 것이 보일 지경이었다. 어떤 미꾸라지들은 소용돌이치는 물 옆의 자갈 우에 마구 뛰어나와 구불거리면서 흙탕물 안으로 기어들어가고 있었다. 상순은 아랫목으로 해 반디를 들이대더니 소리쳤다. “빨리 고기를 쫓소.” “양.” 정규상은 물 초롱을 들고 흙탕물에 뛰어들어 발로 물을 구르면서 고기를 상순이가 아랫목에 댄 반디 쪽으로 몰아갔다. 상순이가 반디를 들자 미꾸라지랑 버들치랑 미꾸라지랑 한 사발은 들어있었다. “허허허. 오늘 물고기 탕을 배 터지게 먹게 생겼구먼.” 정규상은 처음 물고기를 잡는지라 희구해 입이 함박만이 벌어졌다. 그들은 한참 흙탕물에서 그렇게 반디를 대고 쫓으면서 반디 질을 해서 물고기를 한 초롱이나 잡았다. “이만 하면 되지 않았소?” “무슨 소리를 하오. 더 잡아야 하오.” 상순은 한참 쉬어 달아났던 물고기가 골통 쪽으로 다가오게 했다. “아차, 초롱이 차서 고기를 어디에 담겠소?” 규상의 말에 상순은 물 초롱의 고기를 들고 둑 저쪽 옥수수 밭에 올라가더니 밭고랑을 손바닥으로 단단히 다져놓고 물고기를 와르르 쏟아놓았다. “어째 이런 골통에 고기들이 이리 많소?” 규상의 물음에 상순은 반디를 들면서 대답했다. “대체로 물고기는 골통에서 쏜살같이 쏟아져나오는 소용돌이나 물살이 센 곳에 잘 모이는 거 같소. 특히 오늘과 같이 소낙비가 내린 후 흙탕물에 물고기가 많이 모이오. 아마 물이 흐려서 숨을 쉬기 바빠 물살이 센 곳으로 모이잖소?” “오- 도리 있소. 물이 흐리면 물에 산소가 결핍하니까.” 그들은 또 한식경이나 반디 질 해 한 초롱을 더 잡았다. 상순은 옥수수 밭고랑에 쏟아놓았던 물고기를 비닐박막에 담아 메고 정규상과 함께 물 초롱의 물고기를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상순은 물 초롱에 담았던 물고기를 정규상에게 주고 비닐박막에 담아 멘 물고기를 자기 집으로 가지고 왔다. 정규상의 아들딸들은 처음 숱한 보고 희구해 어쩔 줄 몰라 했다. 한편 집으로 돌아온 상순은 덕돌을 시켜 물고기를 작은 대야에 담아 할아버지를 잡수라고 먼저 가져가게 한 후 성욱과 동림, 순녀한테도 한 사발씩이라도 가져다주게 했다. 동림과 성욱은 물고기를 보고 군침까지 넘기면서 야단쳤다. 하지만 순녀는 구불거리는 거먼 미꾸라지를 보고 상을 찡그렸다. 그날 저녁에 명옥이 풍로 불에 물고기된장국을 보글보글 끓여놓자 상순은 정규상을 불렀다. 정규상은 대대 합작사에 가서 소주 한 근과 사탕과자를 사들고 왔다. 그들 둘은 윗방에서 물고기국을 퍼 후후 불며 마시면서 소주를 들었다. 순간 정규상은 우파 모자를 쓴 스트레스를 다 잊고 물고기국을 맛있게 먹었다. 상순은 술잔을 들더니 “자, 한잔 들기요.”라고 하더니 규상의 잔과 딱 마주치고 쭉 굽을 냈다. “우리 조개덕에 와서 고생이 많소. 동생이 아니면 우리 마을은 폐 염이 전염돼 몰살했을 거요.” 상순의 말에 정규상은 “형님도 별 말씀을 다 하오.”라고 겸손하게 말하며 물고기국을 후후 불며 맛있게 먹었다. 규상은 술을 별로 마시지 않던 상순이 술을 쭉쭉 마시는 것을 보고 한잔 쭉 냈다. “폐 염은 수그러들었는데 극산 병이 돌까봐 더 무섭소.” 정규상의 그늘진 얼굴을 바라보며 상순은 “극산 병?” 하고 눈을 치켜떴다. “양. 극산 병은 무서운 병이오. 별나게 여성들과 애들이 아침에 왈칵왈칵 토하다가도 저녁이면 죽소.” “뭐라오?.” 규상은 물고기를 떠서 맛있게 먹으면서 말했다. “이전에 내 돈화현 태평령과 현유공사, 안도현 명월구, 대전자(만보향)에 갔을 때 극산병 환자들을 많이 치료했소. 그때 돈화현에서 몇 백 명이 죽고 안도현 대전자에서도 17명이 죽었소.” 상순은 생선국도 먹을 맛이 없어 숟가락을 내려놓고 공포의 빛이 어린 얼굴로 정규상을 쳐다보았다. “허나 너무 근심하지 마오. 그때 나는 학생들을 데리고 거점을 잡고 기초조사를 해서 극산 병 근을 밝혀내고 현 방역소 협조를 받아 비타민C와 포도당, 강심제를 혈관 주사해 많은 환자를 구해냈소. 그 후부터 그 곳에서 극산 병으로 죽은 사람은 없소. 옥수수 대를 삶은 달달한 물에는 당분이 많은데 그 물을 먹으면 극산 병이나 폐 염을 예방하는데 아주 좋았소. 면역력이 높아지니까.” 그제야 상순은 한숨을 후 내쉬었다. 바깥에서는 우레가 울고 번개가 번쩍였다. 뒤이어 또 소낙비가 억수로 쏟아졌다. 초가집 추녀 끝 조이 짚대 끝에서 실 폭포수가 줄줄이 쏟아져 내렸다. “형님, 이럴 때 또 고기 많잖소?” “그래. 많지. 또 잡기 싶소?” 정규상은 머리를 가로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니오. 집에 숱한 물고기를 언제 다 먹겠소? 어쩜 그 골통에 물고기가 그렇게 많소?” 상순은 다시 숟가락을 들고 물고기국을 퍼 먹었다. 그때 벽에 간장 물 같은 빗물이 흘러내리고 천정에서 빗물이 새 물고기국에 방울방울 떨어졌다. “아니, 집에 비가 새는구먼. 형님도 이영을 잇을 게지.” 상순은 대야랑 큰 사기사발이랑 들어다가 여기 저기 벌려 놓아 빗물을 받으면서 대수롭잖게 말했다. “언제 자기 집 이영을 이을 새 있소? 난 밤낮 어떻게 하면 우리 마을 사원들을 이끌어 배를 곯지 않게 하겠는가고 달아다니기에 집 손질을 할 새 없소.” 정규상은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그래도 손질할 건 하고 일해야지. 쯧쯧.” 정규상은 빗물이 새는 천정 여기저기를 쳐다보았다. 꾸불꾸불한 나무대로 중 천정을 댄 여기저기에서 빗물이 새 물 도랑 형 지도를 그리면서 주르르 흐르다가 구들의 여기저기에 벌려 놓은 대야와 사발에 뚝뚝 떨어졌다. 실로 바깥에서 소낙비가 쏟아지면 집안에는 실 폭포수가 쏟아지는 격이었다. “형님, 할 말인지는 모르겠소만. 아무리 당원은 사심이 없다지만 그래 집 손질도 하지 말아야 하오?” 상순은 세 귀 눈으로 규상을 치켜보았다. “동생, 누구 앞이라고 그런 말을 하오? 또 우파 모자를 쓰고 싶은가?” 그러나 정규상은 시무룩이 웃었다. “형님 앞에서야 무슨 말인들 하지 못하겠소?” “허허허. 사람이. 아직도 덜 혼났구먼.” 상순은 통쾌하게 웃고 나서 속심을 털어놓았다. “참 답답하오. 정치운동이 끝이 없소. 우파를 한 10년 두드리더니 이번에는 또 뭘 타도하려는지 ‘문화대혁명’을 한다오. 자, 한잔 들어.” 그들은 또 한잔을 통쾌하게 마시고 생선국을 국자로 퍼서 사발채로 굽을 냈다. “어, 진짜 둘이 먹다가 하나 죽어도 모르겠구먼.” 상순의 말에 정규상은 생선국 사발을 내려놓으면서 입귀를 닦았다. “양. 헌데 심상치 않소. 내 전번에 시내 병원에 돌아가 보니 ‘문화대혁명’이 터져서 온 시내가 발칵 뒤집혔더구먼. ‘정성해 서기를 타도하자’는 대자보가 시내 한판에 나붙고 정성해 서기를 따라 사업하던 간부들마저 수태 잡혀 지하실에 갇힌 채 날마다 고문을 당한다오.” “양?” 상순은 놀라움과 격분을 금치 못하면서 상을 찡그렸다. “그분이 우리 지역 건설을 잘하려고 얼마나 고생하신 분이라고. 쳇, 말도 안 돼.” 상순과 정규상은 술맛이 다 떨어져 물러앉아 한숨을 땅이 꺼지게 후 내쉬었다. 상순은 속이 타 담배를 말아 붙이더니 담배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집안에는 담배연기로 꽉 차 매캐한 연기냄새가 코를 찔렀다. “정 서기는 항일전쟁 때 로 항일투사 아니고 뭐요? 해방전쟁에도 얼마나 뛰어난 지휘관이었소? 그런데 그를 타도한다고? 정말 무슨 혁명인지 모르겠소?” “말을 주의하오. 나를 보오. 혀끝을 한번 잘못 놀렸다가 한뉘 고생을 하는 거.” 상순은 코 방귀를 “흥” 하고 뀌었다. “정말 이해되지 않소. 이제 또 내리 내리 다 붙들어 투쟁하겠구먼.” “양. 돌아가는 정치형세가 심상치 않소. 군분구 지도자 조남기동지는 정성해 서기를 보호했다고 철직당하고 농학원에 가둬 넣고 변소청소나 시켰다오. 정성해 서기를 보호하던 정치문교를 주관하던 김부서기도 반란 파들에게 붙잡혀 갖은 고문을 다 받다가 자살까지 했다오.” “아니, 그게 무슨 말이오? 김부서기는 흑룡강성에서 정성해 서기를 따라 여기 나온 분이 아니오?” “양, 그게 문제로 된다오. 정성해 서기를 따라 흑룡강성에서 나와 제발된 숱한 간부들이 감옥에 들어가고 투쟁 받고 심문을 당한다오. 방송국에 간 김영만 국장도 아무런 죄도 없는데 반란 파들이 지금 그를 투쟁한다오. 김영만 국장은 정성해 서기를 따라 조선민족간부학교 동창생들과 함께 흑룡강성에서 나와 당교 교장을 하다가 방송국 국장으로 제발됐소. 그런데 터무니 없이 민족우파요, 반혁명분자요, 반역자 모자를 씌워놓고 투쟁한다오.” “말도 안 되오. 조선족간부들을 다 투쟁하는게 ‘문화혁명’이라오? 김부서기하구 김영만 국장이 뭘 잘 못했다오?” 정규상은 비가 새는 천정이 다 날아나게 한숨을 후 길게 내쉬었다. “참 답답하오. 김 부서기는 반란 파들이 정성해 서기를 나쁜 놈이라고 승인하라고 어찌나 핍박했는지 층집에서 뛰어내려 사망했다오. 반란파들은 그를 지하 감방에서 몽둥이로 때리고 코에 고추 물을 쏟아 넣고 손가락에 참대가시를 찌르면서 고문했다오. 그 놈들은 김부서기를 보고 정성해 서기가 나쁘다는 말만 하면 반동분자나 민족우파라는 모자를 벗겨주고 이른바 ‘해방’시키겠다고 얼리고 구슬렸다오. 그러나 김부서기는 끝까지 '정성해 서기는 중국 혁명에 공훈이 큰 훌륭한 조선족지도자'라고 했다오. 반란파들은 김부서기에게 하루만 고려할 시간을 더 주겠다고 최후통첩을 했다오. 김부서기는 그날 밤에 감방에서 나와 아픈 다리를 쩔룩쩔룩 끌며 하남다리를 건너면서 깊은 고민에 빠졌다오. 그는 방송국의 김영만 국장네 집을 가만히 찾아가서 울면서 반란 파들의 악독한 행위를 공소했다오. ‘난 절대 정성해 서기를 반동분자라고 말할 수 없소. 내가 살자고 어떻게 당과 인민의 훌륭한 정성해 서기를 나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단 말이오. 난 절대 양심을 어기고 그렇게 할 수 없소. 김국장, 나와 함께 목숨으로 꼭 정서기를 보호해 싸우기오.’ 그렇게 자기 굳은 결의를 말하고 나간 후 김 부서기는 홍색반란파들이 불을 질러 불길이 활활 불타는 층집에서 뛰어내려 사망했다오. 그는 목숨으로 정성해 서기를 보호했고 정의를 지켰다오.” “야, 불쌍한 지도일군들이오. 어쩜 세월이 이렇게 변했을까? 참 답답하오.” “군 분대의 조선족책임자 조남기동지와 김영만 국장도 정성해 서기를 보호했다고 투쟁을 받는다오.” “그 놈 반란파들은 무슨 담이 있어 그런다오?” “지금 시내에 할빈에서 나온 이 씨란 자가 반란파 두목이라오." 정규상은 허리를 굽히더니 입을 상순의 귀에 가까이 대고 나직이 말했다. "누구와도 말하지 마오. 그 이씨란 자는 모주석의 조카 모원신이라오. 모원신은 할빈공업대학 출신이라오..." "오- 그래?" "양." 정규상은 상순한테 나직이 뭐라고 중얼거리고 나서 뒷말을 이었다. "그 자가 할빈으로부터 팔에 '홍위병'이란 뻘건 완장을 낀 숱한 학생 반란파들을 데리고 연길에 기어들어 진상을 모르는 청년들로 홍위병이라는 무리를 조직해 가지고 노간부들을 돌아가면서 타도한다오. 백화상점으로부터 아래개방지로 쭉 내려가면서 정성해 서기 이른바 죄상을 적발비판한 대자보와 만화가 다닥다닥 나붙었습데. 이씨는 조남기동지를 보고 기어이 주덕해를 반역자라고 승인하라고 핍박했다오. 그러나 조남기동지는 주덕해동지는 중국 혁명에 공훈이 큰 중국 공산당 훌륭한 혁명간부라고 하면서 정의를 지켜 이씨와 견결히 맞서 싸웠다오. 그래서 조남기동지는 이씨라는 자의 정치피해를 받아 연변군분구 지도자에서 철직당하고 노동개조를 한다오. ” “이씨가 무슨 놈이기에 할빈에서 와서 우리 이 곳의 문화대혁명을 지휘하오?” “이씨는 대단한 인물 모주석의 친조카라지 않소. 흥!” “그렇게 대단한 인물이니깐. 우리 이 곳의 모모한 간부들도 다 타도하지.” “양, 참 답답하오. 후에 모원신은 심양군구 사령원이 되지 않았구 뭐요. 그러니깐 진상을 모르는 청년들은 모주석의 조카 모원신이 하는대로 하는게 혁명이라고 여겨 개 잡은 포수들처럼 우쭐렁거리면서 망종하지.” 그들은 답답한 이야기를 밤중까지 나누면서 생선국 쟁반이 굽이 난 후에야 헤어졌다. 풍로불도 다 죽어 재만 남았다. 상순은 정규상을 바래면서 먹장구름이 몰려오는 하늘을 쳐다보았다. 숱한 반란파들의 주먹에 얻어맞았는지 마을 상공의 먹장구름에 구멍이 펑펑 뚫렸다. 저쪽 패용천산과 칼산 쪽에는 벌써 먹장구름에 뒤덮여 공포의 어둠이 야수들처럼 슬금슬금 기어들어와 어디가 어딘지 분간하기 힘들었다. 한줄기 희망의 빛줄기를 기대하기는 허무맹랑한 먹장구름이 뒤덮인 하늘이 아닌가.        기막히고 침침하고 한심하기 짝이 없는 하늘이었다.                                         5. 여우파와 지주 아들       세찬 비바람에 태평강 가의 가는 버드나무들이 허리를 굽혔다 폈다 하면서 몸부림치고 있었다. 비탈 밭의 강냉이 대들은 폭풍우와 우박을 맞아 부러지고 담배 잎에 구멍이 펑펑 뚫려 살풍경을 이루었다.       오옥선은 우파 모자를 쓴 채 “문화대혁명”이란 12급 태풍에 날려 날 까봐 방황하고 있었다. (이 놈의 정치투쟁은 끝이 없구나. 우파 모자를 벗고 환한 날을 볼 거 같잖아.) 그녀는 몇 번이고 집 외양간에 감춰 둔 장 바를 쥐었다 놓았다 하면서도 부모 앞날이 불쌍하고 나이 아까워 차마 목을 매지 못하고 그만두었다. 한 것은 외동아들을 삼도만 토비숙청에서 잃은 데다 유일한 희망인 딸마저 잃으면 늙은 부모가 어떻게 살겠는가 걱정됐던 것이다. 요즘 옥선은 장충국이 자꾸 지분거려 퍽 귀찮았다. 며칠 전에도 옥선이 지친 몸으로 학교에서 마을로 돌아올 때었다. 충국은 함흥 촌과 조개덕으로 갈라지는 갈림길 어귀 늙은 비술나무 아래에서 사위를 둘러보더니 말을 걸었다. “오 선생, 오 선생은 우파, 나는 지주 아들. 오 선생은 노처녀, 나는 노총각. 우린 천생배필이오. 어찌 한뉘 노처녀로 늙어?” 충국은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이런 거 생각해 보았소?” “뭘?” 충국은 마흔 고개를 넘은 중년답지 않게 뒷더수기를 긁적이더니 겨우 입을 뗐다. “미련과 경주를 보오. 떡돌 같은 아들까지 보지 않았소? 지주 딸과 남조선특무 아들이지만 결혼해 얼마나 재미있게 살고 있소? 우리도 결혼하면…” 오옥선은 귀찮아 그의 말을 채 듣지도 않고 자리를 떴다. “됐소, 됐소. 누가 한뉘 고생하자고 지주 아들하고 살아? 정말 머리 뜨거워도 분수가 있어야지.” 그런데 오늘도 충국이 또 찾아와 올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충국은 여기저기 늙은 비술나무 주위를 맴돌며 살피더니 오옥선의 집 문을 뚝 떼고 들어와 또 그 말을 꺼냈다. “생각해 보았소?” 허나 오옥선은 단 마디에 딱 잡아뗐다. “싹 걷어 치워!” 허나 충국은 물러서려고 하지 않았다. “난 다른 지주 아들들과 달라. 우리 아버지와 난 모두 항일유격대에 쌀을 대준 애국항일투사란 말이다.” 오옥선은 입을 딱 벌렸다. “그래도 지주 아들은 지주 아들이야. 지주 성분을 고칠 순 없어. 내가 분명히 말해두지. 난 말 한마디 잘 못해 억울하게 모자를 쓴 것뿐이야. 허나 성분만은 깨끗한 빈농이야. 오빠는 해방전쟁 때 삼도만 토비숙청을 할 때 영용히 국민당 반동파와 싸우다가 장렬히 희생된 열사야! 그때 네놈은 국민당의 편에 서서 삼도만 토비 두목으로 되지 않았니?” 충국은 주위를 돌아보았다. “그때 잘못을 나는 뉘우친다. 계속 공산당이 영도하는 항일유격대 편에 서야 하는데 말이다. 그때 어찌 공산당이 국민당과 싸워 이길 거 알았겠냐?” “길게 말할게 없다. 절대 지주 아들과 결혼할 수 없어. 더욱이 우리 오빠를 죽인 삼도만 토비와 결혼하지 않는다.” 충국은 섬찍해났다. 사실 충국은 삼도만 토비무리에서 반장을 할 때 한 개 반의 토비들을 데리고 함흥촌 민병들의 정황을 정찰하러 왔다가 일성촌에서 한 가족을 몽땅 살해했던 것이다. 물론 그때 충국은 직접 손을 대지 않았지만 어쨌든 학살을 지휘한 죄악만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일성촌에서는 아직도 충국의 그 죄악을  밝혀내지 못했다. 충국은 아닌 보살을 떨면서 옥선한테 마지막으로 애원했다. “공산당 정책은 명확하다. 지주 아들도 현재표현을 봐서 지주 아버지와 계선을 나눠 본다고 했다. 제발 우리 둘이 결혼하자.” 충국은 떠나가려는 옥선의 팔을 와락 잡아 끌어당겼다. “왜 이래?” 옥선은 팔을 팽개치며 꼿꼿한 눈길로 충국을 쏘아보며 욕했다. “소릴 칠 테다! 오줌을 싸놓고 제 주제를 보고 덤벼들어라!” 충국은 입을 악물고 옥선을 노려보다가 저쪽에서 상순이 삽을 둘러메고 오는 것을 보고맥 없이 팔을 스르르 놓았다. 옥선은 충국을 뿌리치고 학교 쪽으로 뛰어갔다. 충국은 늙은 비술나무 아래에서 닭 쫓던 개 지붕을 쳐다보는 신세로 되고 말았다. 충국은 저 멀리 학교 쪽으로 달아나는 옥선을 멍해 서서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상순은 지나가다가 이상해 충국의 어깨를 툭 쳤다. “뭘 그렇게 쳐다보는가?” “어, 허허. 형님.” 충국은 상순을 돌아보고 어색하게 웃었다. “옥선을 작작 지껄여.” “형님은 어째 나를 관심하지 않소?” “감옥에서 끌어내왔으면 됐지. 그만 관심했는데도 모자라니?” 충국은 눈을 흘겼다. “형님은 아들딸이 한 구들이나 되지 않소? 허나 나는 이게 뭐요? 쉰 고개를 쳐다볼 때까지 홀아비로 늙는단 말이오.” “옥선을 건드리지 말라!” “어째? 지주 아들이라서? 국민당 토비 돼서?” “옥선은 너와 달라!” 상순은 눈을 똑바로 뜨고 똑똑히 말했다. “저 앤 언젠가는 우파 모자를 벗을 수 있다. 허나 넌 안 돼! 열사 여동생을 넘보지도 말아!” “개 XX 같다! 원!” 이때 흥수가 다가와 끼어들었다. “그래, 이 지주 놈 새끼, 아직도 갱, 갱 살아나서 대들겐?” 충국은 흥수의 뾰족 턱을 한 대 올리 쳐놓고 싶은 강한 충동을 느꼈다. 허나 억지로 참느라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어째 덤벼들 테냐? 어디 덤벼봐라!” 흥수는 손바닥을 쫙 편 채로 충국의 귀쌈을 쨩 후려 갈겼다. “누구를 쳐?!” 충국은 흥수의 팔을 틀어쥐고 콱 밀쳤다. 흥수는 저 만치 뿌리어나가 썩박나무 넘어가듯이 자빠지었다. 흥수는 엉덩이를 만지면서 상을 찡그리었다. 허나 자존심이 상한 나머지 벌떡 일어나 충국에게 달려들었다. 그들이 밀고 닥치고 하자 상순은 달려들어 뜯어놓았다. “손을 떼지 못하겠는가?!” 상순은 누구에게라 없이 소리쳤다. 그러자 흥수는 상순을 가로보면서 욕설을 퍼부었다. “서기라는게 지주 아들 말리잖고 날 욕해? 계급입장이 어데 갔어?” 상순은 흥수를 콱 밀어놓으면서 책망했다. “입은 뒀다 뭘 하고 쩍 하면 주먹질인가?!” 흥수는 조개턱을 쳐들고 외까풀 눈으로 상순을 무섭게 쏘아보면서 주먹을 휘둘렀다. “어, 잘한다, 잘해! 이제 보니 너희들 해방 전에 의형제였지?” 이때 충국이 흥수를 콱 밀어놓으면서 떠들어댔다. “옳다. 어째? 우린 항일전쟁 때 장백산에서 항일유격대와 함께 목숨을 내걸고 일본 놈들과 싸웠다. 그때 넌 낯짝도 보이지도 않았다! 어째?” 상순은 충국을 쏘아보면서 고함쳤다. “너 아무 개소리나 마구 치겐?!” “사실이 아니오?” “그래도 그렇지.” 흥수는 뒷걸음질을 쳐 모여드는 사람들 속으로 물러가면서 고함쳤다. “여러분, 보았지? 우리 저 김 서기를 보슈. 지주 아들과 전우라고 하지 않아? 계급입장을 완전히 상실한 사람이우.” 그때 학수와 성수 형제까지 와서 맏형 흥수 역성을 들었다. “당신, 치보주임이라는 게 누구 편을 들어?” 학수는 자기 맏형을 두둔해 나섰다. "맞지 않았어?” 성수는  흥수의 얼굴을 들여다보더니 우먹눈덕에 퍼런 자국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 새끼!" 성수는 주먹을 으스러지게 틀어쥐고 충국한테 달려들었다. 이성을 잃은 충국도 주먹을 쥐고 권투 자세를 취했다. 성수가 주먹질을 하면서 덮쳐들자 충국은 자세를 낮춰 날아드는 주먹을 피하며 주먹으로 성수의 아랫배를 강타했다. 성수는 “억!” 소리와 함께 맥없이 푹 꺼꾸러졌다. “이 새끼!” 뜻밖의 강타를 받은 성수는 배를 부둥켜안고 물앉아 헐떡거리었다. “지주 놈 새끼, 감히 주먹을 휘둘러?” 학수와 흥수가 단번에 충국에게 덮쳐들었다. 허나 필경 충국은 이전에 상순과 함께 장백산에서 항일유격대 성칠 대대장에게서 권투와 무술을 배웠기에 그들 둘이 달려들어도 식은 죽 먹기로 대처했다. 충국이 몸을 날려 덮쳐드는 학수와 흥수의 어깨 넘어 날아지나가면서 원앙 발길을 날리자 둘은 동시에 꺼꾸러졌다. “손을 떼지 못하겠니?” 상순이 충국에게 고함치면서 팔을 걷고 나섰다. “네 놈도 다 한가지야!” 충국은 상순에게 씽 덮쳐들었다. 독수리가 토끼를 덮치듯이 훌쩍 몸을 날려 상순의 목을 노리고 덮쳐들었다. 상순은 뒤로 몸을 슬쩍 번져 누우면서 토끼가 매를 걷어차는 동작을 취하며 두 발로 날아드는 충국의 아랫배를 탁 걷어차 올렸다. 사타구니를 찼더라면 *알이 툭 터졌을 것이다. 허나 상순은 모든 사람들 앞에서 그저 충국을 치는 시늉을 했을 뿐이다. 기세등등하게 덮쳐들던 충국은 저 만치 뿌리어나갔다. 상순은 몸을 뒤지기로 벌떡 일어나면서 쓰러진 충국의 목을 조였다. “언감 우리 대대 간부에게 달려들어?!” 충국은 희죽이 웃으면서 눈물까지 주르르 흘렸다. “날 죽여라! 총살해라! 죽기보다 못하단 말이야!” 일 밭으로 나가던 사원들은 상순이 충국을 쳐 눕히는 정채로운 장면을 보고 혀를 끌끌 찼다. 그러나 흥수는 픽 코웃음 쳤다. “의형제 간에 연극을 잘 노는구먼. 흥!” “그래야 대의멸친 하는 척 하지.” 학수도 맞장구를 치면서 흥수를 부축해 일으켜 세웠다. 성수도 가만있지 않았다. 그는 상순을 손가락질 하면서 “당신은 서기 자격이 없소. 당장 내놓소.” 하고 떠들어댔다. 형제들의 역성에 흥수가 일어나더니 또 나섰다. “금방 김 서기 충국을 보고 뭐라 했는지 아오? 감옥에서 끌어 내왔으면 됐지. 그 보다 어떻게 더 관심하는가 하지 않겠소? 분명 의형제를 암암리에 돕고 있소.” 그러자 상순은 시비를 똑똑히 가르려고 나섰다. “우리는 지주와 아들에 대해 계선을 나눠 봐야 하오. 충국은 지주 아들이지만 항일전쟁 때 목숨을 내걸고 항일투쟁을 한 사람이오. 비록 국민당 삼도만 토비무리에 들어갔지만 현재 개조표현을 봐서 지주와 아들은 갈라 봐야 하오. 황차 장학산은 다른 지주와는 다르오. 항일전쟁 때 자기 집 쌀을 몽땅 항일유격대에 지원한 애국주의 사상을 가진 지주였소. 후에 국민당의 입장에 선건 우리 당과 인민에게 죄를 지은 게요. 우리는 한 사람을 평가할 때 전면적으로 봐야 하오. 그의 죄만 볼게 아니라 혁명에 한 공헌도 봐야 하오. 그래서 우리 정부에서는 장학산과 장충국을 감옥에서 풀어주고 지방에서 노동개조를 하게 했소.” 흥수는 그래도 콧방귀를 뀌었다. “장 지주 팔자 얼마나 좋아? 거지로 중국에 들어온 상순이네 할애비부터 황무지를 줘서 개간해 살게 한 덕분에 감옥에서도 나오고. 한뉘 보호를 받는 게.” 상순은 분명히 말했다. “나는 절대 개인 인정으로 혁명과 계급투쟁을 대하지 않았소. 원칙을 견지했고 우리 당의 계급성분과 계급투쟁 정책대로 처사했소.” “서기를 내놓게. 계속 서기 할 예산인기여?” 흥수의 말에 학수도 맞장구를 쳤다. “옳다니까. 김 서기한테 권력이 너무 집중됐소.” 그 말에 상순은 머리를 숙이고 뭔가 궁리했다. 그들의 말에 일부 도리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머리를 들더니 사원들을 보고 소리쳤다. “모두 일하러 갑세!” 사원들은 구경하다가 그제야 일 밭으로 우르르 쓸어나갔다. 저쪽 패용천산 상공에 먹장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우박이거나 소낙비가 내리려는 모양이었다.  
150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97) 댓글:  조회:1236  추천:0  2018-04-12
                    2. 풍년의 희열 풍년이 왔다. 사원들이 흘린 신근한 땀방울이 알알이 여문 벼알로 황금물결로 변신했다. 사원들은 멍지뫼산 앞의 산종에서 거둔 벼부터 수레에 실어다 물레방아로 돌리는 수동탈곡기에 신나게 탈곡했다. 멍지뫼산 앞에 새로 푼 논 이름을 산종(散种)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벼 씨를 모래 논에 마구 뿌려 벼농사를 지은 논이기 때문이었다. 풍년에 탈곡을 하는 사원들의 일손은 성수 났다. 상순은 물레방아로 돌아가는 수동탈곡기 앞에서 걸이대로 검불을 슬슬 누비어버리면서 사원들에게 소리쳤다. “물레방아 물이 얼기 전에 벼 탈곡을 끝내야 하오.” “예.” “발마선으로 탈곡하자면 얼마나 힘드오." "물레방아 돌아갈 때 일손을 다그쳐야 하오!” “예!” 사원들은 저쪽에 척척 쌓아올린 벼 마대를 보고 사기났다. 상순의 말대로 그 벼는 제일 어려운 보리고개를 넘을 때 먹을 벼라고 한다. 박성근은 기침을 쿨룩쿨룩 깇으면서도 기쁘니까 또 횡설수설하는 본병이 드러났다. 그는 탈곡기 앞에서 벼단을 들어 마선에 먹이면서 싹아 빠져 싯누런 이발을 다 드러내며 너털웃음을 웃었다. “허허허, 이제야 소련 꼴호쯔에서 벗어나서 살 때를 만났소.” 말수가 적은 경학이도 검불을 걷어내면서 흥이 났다. “올해처럼만 풍작이 들면 쌀 고생은 하지 않을 거 같소.” 그러자 성근은 우파 모자를 쓴 것도 다 잊은듯이 횡설수설 흥이 도도해졌다. “다 위 정책 탓이오. 개체농사를 지으면 다 자기 일이기에 더 알뜰하게 농사를 짓는단 말이오. 허나 집체로 농사를 지으면 모두 건성으로 일한단 말이오. 죽게 일하나 노라리를 치나 그러루하게 평등하게 사니까. 누가 일할 열정이 있겠소? 또 편한 날 없이 자꾸 고깔모자를 씌워 투쟁만 자꾸 하다나니 언제 농사를 짓겠소?” 경학은 계급투쟁 말이 나오자 입에 빗장을 지르고 못 들은 척했다. 덕성은 마선 옆에서 성근이 내던지는 벼 짚단을 거두어 메면서 주위를 흘끔거렸다. 그는 저쪽에서 벼짚단을 메 나르는 흥수 눈치를 힐끔 곁눈질하더니 벼 짚단으로 성근의 다리를 툭 쳤다. “그만해. 또 어째 투쟁 받을락꼬?” 허나 성근은 대수로워 하지도 않았다. “밥 먹듯 투쟁받아 그런지. 이젠 습관 돼 괜찮소. 투쟁하겠으면 하라지. 뭐. 흥!” 그때 흥수가 이쪽으로 다가와 고래고래 고함쳤다. “일하잖고 뭘 쑤군거려?!” 그 고함소리에 쥐도 새도 죽은 듯이 말소리가 뚝 끊어졌다. 다만 물레방아로 돌아가는 탈곡기에 벼를 터는 쯔르르 소리 밖에 들리지 않았다. 탈곡이 끝나자 상순은 창걸과 경학, 학수 등을 데리고 홀로 살아 제일 가난한 “오보 호(五保户)” 마반산 집 할머니 집에부터 쌀 마대를 수레에 실어갔다. 마반산 집 할머니는 쌀 마대를 윗방에 메 들여오는 상순을 보고 감격에 목이 메여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아이고, 이럴 법이라고야. 김서기, 고맙소, 정말 고맙소.” “이 쌀로 보릿고개를 넘읍소.” 마반산집 할머니는 상순의 어깨에 묻은 쌀 먼지를 말라버린 삭정이 같은 두 손으로 툭툭 털어주면서 연신 치하했다. 상순은 오히려 허리굽히며 인사말을 했다. “옛날에 마반산 집 할머니 아니었으면 우리 덕돌이 살아남았겠습니까?”  그러자 학수는 뒤에서 콧방귀를 뀌면서 두덜거렸다. “농사는 누가 짓고 인사는 누가 내오? 덕돌을 구해준 은혜를 집체 쌀로 인사를 내긴?”  그 소리에 상순은 수레에 바줄을 거둬실으면서 희죽이 웃었다. “당신네 주봉은 저 할머니 덕분에 세상에 나오지 않았소? 이 마을 숱한 어린이들을 받아냈는데 마반산 집 할머니 은공을 어찌 쌀 몇 마대로 다 갚을 수 있겠소?” 그 말에 학수는 말문이 막혔다. 확실히 주봉은 학수의 아내가 난산에 걸린 것을 마반산 집 할머니가 손으로 빼내 살려냈던 것이다. 학수의 아내가 난산으로 사망한 후 상순의 아내가 은숙과 주봉을 젖을 한 짝씩 먹여 키우지 않았던가! 그 일로 해 학수는 명옥을 주봉의 양어머니라고 하면서 내내 감사하게 생각해왔다. 허나 이젠 주봉이 다 크자 큰아버지 흥수 편에 서서 그 은정을 잊기 시작했던 것이다. 하긴 흥수한테서 자기 동생이 남조선 유격대원한테, 그것도 상순의 외육촌동생한테 사살당했다는 말을 들은 후부터 상순을 눈에 든 가시처럼 여기기 시작했던 것이다. 상순이 오후에 우파 오옥선의 집에 쌀을 실어가자는 말을 듣고 학수는 수레에 싣던 쌀 마대를 활 던지고 탈곡장에 씽 달려가서 흥수한테 일러바쳤다. “저 상순이 제 정신이 있니?” 흥수는 벼짚단을 메나르다가 조개턱을 쳐들었다. “어째 그러오?” “아, 글쎄 우파 오 선생네 집에 쌀을 실어가자고 하오. 쌀이 썩어났니? 빈농들도 먹을 게 빳빳한데.” 흥수는 벼단을 주어 메려다가 활 팽개쳤다. “가 보자.” 흥수는 학수를 따라 정미소에까지 씽 달려왔다. “아니, 김서기, 우파 오선생 엉덩이에 꿀이 붙었어? 아까운 입쌀을 왜 우파네 집에 가져 가? 어째 오 선생이 덕돌의 담임교원이라고 면목을 내려고 그래?” 상순은 흥수를 거들떠보지도 않으면서 말했다. “속에 없는 소리를 하지 마오. 우파는 사람이 아니오? 황차 오 선생의 오빠는 해방전쟁에서 목숨을 바친 혁명열사고, 오 선생의 부모는 열사의 부모요. 오 선생이 혼자 일해서 살기 어려운데 생산대에서 도와주는 게 잘 못이오?” 그 말에 흥수는 입을 쫙 벌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수레에 실은 세 마대나 되는 쌀을 보자 흥수는 수레에 뛰어 올라가 쌀 마대를 마구 부리려고 날뛰었다. “아무리 열사유가족이라도 두 마대 주면 됐지. 세마대나 줘?” 상순은 한 치의 양보도 하지 않고 소리쳤다. “손을 떼지 못하겠는가? 오 할아버지네 농사도 제대로 짓지 못했는데 어떻게 두 마대로 보릿고개까지 넘는단 말이오? 부리기만 해봐라!” 흥수는 상순의 독기서린 세 귀 눈에 기 꺾여 찍 소리 못하고 수레에서 내리면서 두덜거렸다. “오 선생에게 잘 보여서 먹을알이 있을 거 같소? 흥!” 상순은 못 들은 척하고 쌀 수레를 몰고 오옥선 선생의 집으로 갔다. 오 선생의 집은 상순이네 뒷집이었다. 외아들을 중국 해방전쟁에서 잃고 무남독녀 외딸 오옥선 선생에 의지해 사는 일흔도 넘은 오철석 양주는 정말 불쌍했다. 그리하여 상순은 평소에도 항상 그들을 돌보군 했다. 그는 자기 집에 비가 새도 이영을 제때에 잇지 못했다. 그러나 해마다 봄이면 온 마을에서 제일 먼저 오 할아버지네 이영을 산뜻하게 이어주군 했다. 그리하여 흥수랑 뒤에서 상순이가 오옥선한테 눈독을 들여 슬그머니 호감을 사고 있다고 헐뜯었던 것이다. 오옥선은 옆에 말해주는 사람이 없어 그렇게 쉬쉬 거리는 줄도 모르고 덕돌을 제일 고와하고 공부도 열심히 배워주었다. 상순이가 쌀 마대를 실어다 주자 오철석 양주가 너무 반가와 주름살이 쪽쪽 간 얼굴에 비꼈던 어두운 그림자가 사라져버렸다. 오옥선 선생은 너무 반가와 금방 길어온 찬 샘물을 한 바가지나 퍼 상순에게 드렸다. 상순은 오옥선의 손에서 물바가지를 받아 꿀떡꿀떡 밑굽을 내 버렸다. 풍작을 거둔 마을에서는 기쁨의 물결이 출렁거렸다. 집집마다 찰떡을 치는 떵, 떵 떡메 질 소리가 들렸다. 상순은 마을 식당에 큰 잔치를 베풀기로 했다. 덕팔과 병완은 흰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마당의 상순과 상길이 떡을 치는 것을 구경하면서 만면에 웃음꽃을 활짝 피웠다. 그 바람에 수심이 어렸던 검은 그림자가 어렸던 주름살도 쫙 펴지는 상 싶었다. “오랜 만에 찰떡을 치는구나. 우리도 떡을 쳐보자.” 병완은 흰 팔소매를 걷고 나서 상순한테 손을 내밀었다. 상순은 떡메 질을 멈추더니 말렸다. “할아버지, 쉬십시오. 떡은 우리 쳐도 됩니다.” 그러나 병완은 상순의 손에서 떡메를 빼앗다 시피 했다. “우리도 떡을 치는 기쁨을 함께 맛보려는 게다.” 그제야 상순과 상길은 떡메를 내주었다. 병완과 덕팔은 떡메를 받아 쥐자 힘 있게 떵떵 쳤다. 아직도 당년에 고향에서 떡을 치던 힘이 남아있었다. 그 뒤로 박성근과 학수도 떡메를 받아 쥐어 쳤다. 그때 흥수가 성근의 손에서 떡메를 빼앗았다. “아니, 이거 떡을 한매도 쳐보지 못했네.” “놓으라면 놔!” “왜 이래?” “이 자식, 몰라 물어? 폐병을 앓으면서 떡을 더럽히려고?” “우파는 떡도 마음대로 못 치는가?” 폐병이라는 소리에 모두들 상을 찡그렸다. 상순은 딱한 표정을 지었다. 흥수는 떡메를 빼앗아 내고 성근을 저쪽으로 밀어놓고 떡을 떵떵 치면서 두덜거렸다. “제 주제를 알고 아무데나 덤벼들라고!” 흥수와 학수가 마주 서서 떡을 쳤다. 그때 성수도 이쪽으로 다가왔다. 그 바람에 모두들 떡을 치는 떡돌 옆에서 물러섰다. 어째 그랬는지 흥수네 삼형제가 나타나면 모두들 뒷걸음질을 쳤다. 명옥이랑 지새금이랑 지춘실이랑 모두들 새하얀 찰떡을 베 숱한 밥상에 올렸다. 덕돌이랑 성욱이랑 어른들이 베서 고물에 묻혀주는 찰떡을 받아 입에 물고 바깥에 나가 먹으면서 뛰놀았다.   양양 맛있다 오래오래 맛있다   덕돌이랑 성욱이랑 부른 노래에 순녀랑 미선이랑 마주 보며 화답이나 하듯이 노래를 불렀다.   아갈 딱딱 벌려라 영채김치 쑤셔 넣게   “하하하.” “호호호.” 집안에서는 막걸리를 서너 잔씩 마시고 미역국에 찰떡을 잡순 동네 어른들이 어깨춤을 덩실덩실 추면서 노래와 춤판을 벌렸다. 상순은 동네 남녀노소 앞에서 오랜만에 애창하던 노래 “호미가”를 목청껏 불렀다. 동산천리 돋으신 해는 점심때가 되어 온다 에라 에라 에라 호미야 호미 호미를 메고 가자 알뜰하게 가꾸어라 땀에서 나오는 곡식이로다 에라 에라 에라 호미야 호미 호미를 메고 가자   상순이 부른 그 노래 소리에 맞춰 병완과 덕팔이 그리고 덕성을 비롯한 동네 어른들이 어깨춤을 덩실덩실 추었다. 아래쪽의 명옥이랑 춘실이랑 지새금이랑 웃새집 이연옥이랑 도라지 춤을 너울너울 추었다. “쩌, 쩌, 쩌.” 흥수는 춘실이가 상순이 부른 노래에 흥이 나 너불대는 것이 눈꼴 사나와 외까풀 뱁새눈으로 흘겨보았다. 그는 한쪽으로 돌아앉아 미역국 사발을 들어 후루룩 후루룩 마시더니 바깥으로 훌 나가버렸다. 마을 사람들은 점심때부터 해가 지고 밤이 깊도록 먹고 마시며 춤을 추고 노래하며 풍작을 거둔 희열을 만끽했다.             3. 여자대장 오옥선 선생은 요즘 덕돌이가 남자애들에게 자주 얻어맞는 것을 어떻게 말려 줄 것인가 궁리했다. 사실 덕돌은 너무 총명해 공부는 산수나 어문이나 모두 평균 100점을 맞았지만 일곱 살에 학교에 붙다나니 낙제생 애들보다 너무 어리고 힘이 약해서 쩍 하면 얻어맞곤 했다. 그때마다 오옥선 선생은 덕돌을 때린 꺽다리 애들을 교실에서 끌어내 숱한 애들 앞에서 훈계했다. “공부는 꼴찌고 어린 덕돌과나 센 척 해라. 다시 때리겠니?!” 정덕이랑 오 선생에게 얻어맞으면서 연신 비명을 질렀다. “아이고, 다신 아이 때리겠습니다.” “다시 때리기만 해봐라! 가만 놔두지 않겠어!” 혼쭐이 난 낙제생 애들은 선생만 없으면 덕돌을 “산수골”이라는지 “남북골”이라는지 별의별 입에 담지 못할 말로 놀려주었다. 원순의 동생 송철은 덕돌과 한반에 다니는 동갑이었다. 그런데 형인 원순이가 두 번이나 낙제를 하는 바람에 형제가 한반에 다닐 수 없어 부득불 아래 학년에 내려가고 말았다. 낙제생 정덕이랑 원순이랑은 자기 동생만한 덕돌을 학교에서 돌아올 때면 가만가만 주먹이나 나무꼬챙이로 머리나 종아리를 때리면서 “다시 선생한테 일러바치겠니?” 하고 족 따지군 했다. 그때마다 덕돌은 “아이, 아이 말하겠다.”라고 했다. 덕돌은 더 얻 맞을 까봐 정말 오 선생뿐만 아니라 부모에게도 낙제생 애들에게 얻어맞은 소리를 하지 못했다. 그러나 부모나 오선생은 터진 머리나 긁힌 얼굴을 보고 덕돌이 또 얻어맞은 것을 알고 뒤조사를 해내 호되게 족치곤 했다. 개구쟁이 덕돌은 낙제생애들에게 자꾸 얻어맞으면서부터 점차 남자애들과 놀지 않고 미선이랑 순녀랑 여자애들과 놀기 좋아했고 차츰 여자애들과 우쭐거리는 “여자대장”으로 돼버렸다. 덕돌은 집에서 밥을 대충 먹고서는 학교에 젖은 누룽지를 가지고 가서 난로 연통에 쪽쪽 비벼 김이 몰몰 나는 누룽지를 먹기 좋아했다. 그해 따라 생산대에서 과수원의 애 어린 사과배나무 사이에 심은 감자를 걷어 들여 몇 마대씩 나눠 주어 집집마다 감자떡을 해먹는다, 숯불에 감자를 구워 먹는다, 감자밥을 해먹는다 하면서 배불리 살았다. 덕돌은 어머니가 빨간 열콩 알을 딲딱 박고 만든 감자떡을 아주 맛있게 먹었다. 더욱이 노랗게 구워진 감자 누룽지를 바싹바싹 씹어 먹기를 좋아했다. 그런데 막내누나 성숙과 나누고 나면 덕돌은 배가 차지 않았다. 그리하여 생각해낸 것이 미선이랑 순녀랑 은숙이랑 월금이랑 금란이랑 족쳐서 감자누룽지를 얻어먹는 것이었다. 덕돌은 성욱과 동림과 짜고 들어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조개덕과 함흥 촌으로 가는 갈림길 목에 서 있는 늙은 비술나무아래에서 미선이랑 순녀랑 붙잡았다. “어째 이러니?” 성욱과 동림이 미선이랑 순녀랑 팔을 비틀어 쥐었다. 은숙이랑 월금이랑 놀라서 함흥 촌 쪽으로 달려가다가 저 먼 발치에서 이쪽을 되돌아보았다. 덕돌은 나무꼬챙이를 쥐고 여자애들 앞에서 왔다 갔다 하면서 호통 쳤다. “내일 젖은 감자누룽지를 가져오라. 안 그럼 학교에 다 간다. 이 어르신들이 여기서 기다릴 테니 순순히 길세를 가져다 바쳐라.” 순녀와 미선은 죽는 상을 했다. “가져 오겠니? 안 가져 오겠니?” 순녀는 제꺽 “응, 가져올게.” 하고 대답했다. 그런데 사무러운 미선은 입술을 쫑긋거리면서 인차 대답하지 않았다. 덕돌은 나무꼬챙이로 미선의 잔등을 치면서 호통 쳤다. “왜 대답하지 않니?” 미선은 울까 말까 울먹거리었다. “가져오겠니? 안 가져오겠어? 가져 안 오면 내일 학교를 다 갈 줄 알아!” “흑, 흑, 흑. 이씨, 내 우리 엄마하고 다 말하겠어.” 미선은 흑흑 흐느껴 울면서 어름 장을 놓았다. “뭐라고? 그래만 봐라! 내 오 선생과 말해서 네가 내 숙제 베낀 걸 다 말하겠다.” 그러자 미선은 머리를 숙이더니 “내 말하지 않을 게.”라고 했다. “감자누룽지는?!” 미선은 머리를 까딱였다. 덕돌은 나무꼬챙이를 휘두르면서 개 잡은 포수처럼 우쭐거렸다. “그럼 그렇겠지! 흥! 내일 이 늙은 비술나무아래에서 기다릴 테다! 감자누룽지를 꼭 가져다 길세로 바쳐라!” 덕돌은 성욱과 동림을 보고 말했다. “놔줘라!” 그제야 미선과 순녀는 풀려났다. 저쪽에서 지켜보던 은숙이랑 미선을 기다려 함께 함흥 촌쪽으로 달아났다. 순녀는 혼자 집으로 돌아갔다. 이튿날 덕돌은 정말 성욱이랑 동림이랑 함께 아침 일찍이 함흥 촌에서 내려오는 늙은 비술나무 아래에서 나무꼬챙이를 쥐고 왔다 갔다 하면서 기다렸다. 저쪽에서 순녀가 다가왔다. “가마치를 가져 왔니?” 덕돌이 나무꼬챙이를 쳐들고 물었다. “응.” 덕돌은 우쭐해서 “그래. 난 순녀가 말을 잘 들어서 제일 곱다.”라고 했다. 그 말에 순녀는 귀밑까지 붉히면서 눈을 곱게 흘겼다. “넌 학교로 가도 된다.” 순녀를 놓아 보내고 덕돌은 감자누룽지를 세 쪼각으로 나눠 성욱과 동림과 함께 먹으면서 종알거렸다. “어째 미선이 가시나 새끼 아직도 오지 않니?” 범이 자기 흉을 하면 온다고 윗마을의 미선이랑 은숙이랑 월금이랑 금란이랑 살금살금 다가왔다. “서라, 섯!” 이번에는 성욱이 우쭐해 나섰다. “누룽지를 가져왔니?” “가져왔다.” 미선이랑 이구동성으로 대답하며 호주머니에서 젖은 감자누룽지를 꺼내 내밀었다. “그럼 그렇겠지. 길세를 바치지 않고 학교로 갈수 있어? 흥!” 덕돌은 누룽지를 일일이 받아 챙기면서 쌍까풀 깜장 눈을 부라렸다. “너네도 학교로 가도 된다.” “야, 좋다. 학교로 가자!” 미선이랑 은숙이랑 와 소리치면서 다리야 날 살리라고 학교 쪽으로 달아났다. “가만, 가만!” “어째?” 미선은 걀죽한 철색얼굴을 잔뜩 찌푸리면서 딱 멈춰 서서 되돌아보았다. 덕돌은 김이 몰몰 나는 누룽지를 먹으면서 호령했다. “내일부턴 샛노란 감자누룽지를 가져오라! 알았니?” “우리 집엔 요즘 감자누룽지 없는데 어떻게 하니?‘ 미선이 죽는 상을 하자 덕돌은 양미간을 찌푸리더니 말했다. “방법은 생각하면 있는 법이야. 너네 엄마 보고 아침밥을 지을 때 감자누룽지를 꼭꼭 앉히라고 해라.” “엄마 말을 듣지 않으면 어쩌니?” “그럼 학교를 다 갔다. 알아?” 덕돌은 미선의 코 앞에 주먹을 쳐들어보였다. “알았다, 꼭 가져올게.” 그제야 덕돌은 머리를 흔들면서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성욱과 동림과 함께 학교로 갔다. 누룽지를 먹으면서 학교로 가다나니 눈보라가 휘몰아쳐도 추운 줄을 몰랐다. 학교에서 수업을 마치고 점심시간이거나 휴식시간이면 덕돌과 성욱, 동림은 먹다 나머지 젖은 누룽지를 꺼내 달아오른 난로 연통에 쪽쪽 문댔다. 그들은 김이 몰몰 나는 누룽지를 먹으면서 콧노래를 흥얼흥얼 불렀다. 그런데 그 멋도 오래가지 못했다. 어느 날, 덕돌은 엄마를 따라 함흥 촌에 군일이 있어 갔다. 그런데 미선이 엄마 춘실이 숱한 어머니들의 앞에서 덕돌의 엄마 명옥에게 고충을 털어 놓을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조 놈 덕돌이 몹쓸 놈이오.” 그 말에 명옥은 적이 기분이 잡쳤다. “어째 남이 금이야, 옥이야 하면서 쥐면 부서질 까봐 애지중지 하는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그렇게 욕하오?‘ “아무리 금이야, 옥이야 해도 그렇지. 우리 미선을 못 살게 군다는데. 요즘 미선이 별나게 날마다 아침이면 가마 옆에 붙어 있다가도 누룽지를 꼭꼭 뭉쳐 주면 가지고서야 학교로 가는가 했지. 그런데 어느 날 내가 밥을 다 푸고 그만 물을 부어넣었더니만 우리 미선이 가마를 붙들고 왕왕 울지 않겠소? 그래 어째 그러는가 물었더니 뭐라는지 아오?” 춘실은 표독스러운 눈길로 명옥과 덕돌을 쏘아보면서 뒷말을 이었다. “우리 미선이 왕왕 울면서 ‘누룽지를 가지고 가지 않으면 덕돌이 학료로 가지 못하게 하오.’라고 하지 않겠소? 못된 쇄지 엉덩이에서 뿔부터 난다고 미선이 누룽지를 받아먹고 자지 얼마나 컸는가 보자.” 춘실이 정말 덕돌이 바지를 벗기려고 달려들자 명옥이 두 팔을 벌려 막으면서 말렸다. “덕돌아, 다시는 그러지 말라. 엄마 감자누룽지를 많이 해줄 테니 미선이랑과 달라 하지 말라.” 은숙의 엄마랑 순녀 엄마랑 월금의 엄마랑 다 자기 딸들을 못살게 굴었다고 덕돌을 욕했다. 덕돌은 밥상 밑으로 기어들어가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었다. 그 후부터 덕돌은 다시는 여자대장 질을 하지 못하고 미선이랑 여자애들에게서 누룽지를 얻어먹지 못했다. 대신 엄마가 뭉쳐 주는 감자누룽지만 먹게 됐다. 눈보라가 윙윙 휘몰아치는 맵짠 추운 겨울 날씨에도 애들은 썰매를 탄다, 스케트를 탄다, 외날박이 쪽바기를 탄다 하면서 강판에서 놀았다. 허나 덕돌은 외날박이 쪽바기가 없어 타지 못해 집에서 굴면서 떼 질을 썼다. “나도 쪽바기를 만들어주오.”  “내 언제 그런 걸 다 만들 시간이 있니?”        상순은하고 퉁명스레 말하고는 곡괭이를 둘러메고 둼을 끄러 나가려고 했다. “아버지, 남들의 아버지는 다 자기 아들을 만들어주는데 왜 아버지는 만들어주지 않소? 엉, 엉, 엉.” 허나 상순은 대수로워하지 않고 문 밖으로 나가버렸다. “엄마, 쪽바기를 만들어주오.” “쪽바기라는 게 어떤 게야?” 명옥은 덕돌의 손을 쥐고 얼음판으로 나갔다.  애들이 한창 얼음판에서 쪽바기를 타고 있었다. 그걸 보고 명옥은 덕돌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인차 대답했다. “응, 알았다. 네 양형님에게 말해서 만들어줄 게.” 덕돌은 엄마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물었다. “내게두 형님이 있소?” “응, 그래. 네게도 양형님이 있지.” 덕돌은 호기심이 부쩍 동했다. “어디 있소?” “우리 마을 이주봉이 네 양형님이야.” “예? 내게도 형님이 있구나. 야, 좋다!” 덕돌은 너무 좋아 깡충깡충 뛰었다. 그는 흥분된 나머지 길바닥의 눈을 쥐어 마구 뿌렸다. “내게도 형님이 있다. 누가 덤벼봐라! 주봉형님과 다 말하겠다. 씨!” 순간 덕돌은 낙제생 원순이나 정덕에게 맞아대도 친형님이 없어서 말하지 못하던 울분이 터졌다. 이제부터는 양형님이 있어 단통 업신여김을 당하지 않을 거 같아 좋았다. “엄마, 주봉형님은 어떻게 돼 내 양형님이 됐소?” 명옥은 덕돌의 손을 잡고 마을로 돌아오면서 천천히 말했다. “주봉 형님의 어머니는 주봉을 난산으로 낳고 세상을 떠났단다. 그래서 엄마가 주봉 형님을 안아다가 둘째누나와 함께 한쪽 젖씩 먹여 키워주었단다. 그래서 그 집에서는 나는 주봉의 양어머니로 됐단다.” “오. 그랬구나. 그럼 정말 내 형님이구나. 야, 정말 좋다야.” 덕돌은 너무 기뻐 외발 뜀으로 눈길을 퐁퐁 뛰다가 그만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그거 봐라. 애들이 좋아하면 울 일이 생긴다고.” 덕돌은 상을 찡그리면서 일어나 서적을 부렸다. “엄마, 빨리 주봉형님을 보고 쪽바기를 만들어 달라고 하오. 이제 방학도 며칠 남지 않았는데 얼음이 녹으면 언제 타겠소?‘ “응, 그래.” 덕돌에게 엄마가 대답한지도 며칠 지났는데도 주봉 형님이 쪽바기는 가져오지 않았다. 그러자 덕돌은 또 구들에서 땔땔 굴면서 울며불며 떼를 썼다. “어째 형님이 쪽바기를 만들어 가져오지 않소? 빨리 가져오라고 하오.” “인차 가져온다고 했다. 근심하지 말라.” “빨리 가져오오.” 바빠 맞은 명옥은 떼를 쓰는 덕돌을 떼놓고 주봉이네 집으로 달려갔다. 이윽고 문을 뚝 떼는 소리에 덕돌은 떼를 쓰다가 눈을 떴다. 헌데 주봉형님은 쪽바기를 가져오지 않았다. “형님, 쪽바기를 만들어주오.” 그러자 수무살이 다 된 주봉은 쇳날을 하나 꺼내 보이었다. “덕돌아, 이거 봐라. 쪽바기 날이다. 내 금방 대대 철공소에 가서 쪽바기 날을 반들반들하게 갈아왔다.” 그러나 덕돌은 쪽바기 날을 쥐어 보고 또 떼 질을 썼다. “이걸로 어떻게 타오?” 주봉은 황급히 쪼그리고 앉아 설명해주었다. “이제 여기에 나무를 대패질해서 대면 된다. 그런데 내 지금 대패 없어서 빌려고 마을에 나가는 길이다.” 그제야 덕돌은 눈물을 조막손으로 닦더니 떼질을 멈추었다. “그럼 오늘 탈 수 있소?” “탈 수 있어.” “그럼 우리 집에서 지금 만드오.” “응, 그래.” 주봉은 명옥의 부탁대로 덕돌이 조급해하니까 덕돌이네 집에 대패랑 빌어 오고 나무판자랑 쇠못이랑 가져다가 만들기 시작했다. 온 오전 만들어 해가 중천에 걸려서야 쪽바기를 다 만들었다. 신난 덕돌은 쇠 송곳 자루에 쪽바기를 걸어 둘러메고 양형님과 엄마와 함께 강판으로 나갔다. 애들이 와 몰려 왔다. “야, 덕돌의 쪽바기 좋구나.” “제일 멋있다야.” 덕돌은 사기 나서 얼음 강판에서 쪽바기를 타고 씽씽 달렸다. 성욱이랑 동림이랑 덕돌의 뒤에서 쪽바기를 타고 뒤따라 왔다. 저쪽 먼발치에서 덕돌이 쪽바기를 씽씽 타고 달아 다니면서 좋아하는 모습을 보면서 주봉과 명옥은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런데 덕돌은 교실에서 사달을 쳤다. 그만 교과서에 있는 모주석의 초상화를 보고 쓸데없는 말을 해서 학교 교무실에 불리어 갔다. 교무처 허 주임은 덕돌에게 교과서 첫 페지에 있는 모주석의 채색초상화를 내밀면서 안경알 너머로 쏘아보면서 따졌다. “애들이 그러던데 넌 모주석의 키가 이렇게 클 수 있는가고 했다던데 옳니?” “그랬습니다.” “어째 위대한 영수를 모욕했니?” “모욕이라는 건 무슨 말입니까?” “응? 어째 모 주석을 욕했는가는 말이다!” “내 언제 욕했습니까?” “그게 욕이 아니고 뭐니?” “내 언제 욕했습니까? 모주석의 키가 다른 사람의 키보다 열배나 클 수 있는가고 물었지?” 사실 교과서에 그린 그림은 모주석이 서서 손을 젓는데 그 발밑으로 해 밥알만큼 밖에 안 되는 숱한 군중들이 박수를 치면서 환호하는 장면을 그린 것이었다. 아마 모 주석을 돌출하게 나타내느라고 군중들보다 열배나 더 크게 그린 것 같았는데. 그걸 보고 천진한 덕돌은 그런 의문을 제기했던 것이다. 그런데 미선이랑 누룽지를 빼앗아 먹은 악감을 갚으려고 한어선생에게 일러바쳤는데 교무처 허주임에게까지 올라갔던 것이다. 교무처 허 주임은 오옥선 선생을 불러다가 훈계했다. “담임교원이 우파니까 애들을 어떻게 교육을 잘 했으면 위대한 혁명도사이며 위대한 혁명령수이시며 위대한 키잡이시며 위대한 뭐더라 모 주석을 이렇게 욕하게 한단 말이오?” 그러자 오옥선도 지려고 하지 않았다. “애들이 뭘 안다고 그럽니까? 그저 그림을 보고 키 비례가 맞지 않는다고 한 말을 가지고 그럽니까. 쩍하면 정치투쟁에 귀결시킬 건 뭡니까? 물론 제가 애들에게 주의를 주지 못한 건 잘못입니다. 후에 주의를 주겠습니다.” “이런, 이런! 이렇게 정치 민감성이 없으니까. 처녀시절에 우파 모자를 썼지. 우파 모자를 쓰고 10년 가까이 고생을 했으면 정치 두뇌가 명석해야지. 아무리 우리 대대당지부 서기 아들이라고 해도 이 일은 그저 넘어갈 수 없소.” 그는 덕돌에게 눈길을 돌리더니 “덕돌이라 했지? 검사 서를 써 바쳐라.”라고 했다. “검사서? 건 뭡니까?” “네가 모 주석을 모욕한 죄를 승인하고 잘못했다고 써라.” 교무처 허 주임은 책상을 꽝 치면서 덕돌에게 겁을 주었다. 덕돌은 울면서 교실에 돌아와 머리를 책상에 파묻고 홀짝홀짝 울었다. 그날 저녁에 오옥선 선생은 앞집인 덕돌의 집에 찾아와 대낮에 있은 일을 상순과 명옥에게 죽 말하고 나서 격분해 했다. “애들에게마저 억울하게 모자를 씌우는 작법은 잘못이라고 봅니다. 저렇게 천진난만한 애들의 가슴에 옹이 박히는 일을 해서야 됩니까?” 상순은 한숨을 후 내쉬더니 천천히 무거운 입을 열었다. “오 선생, 올라와 천천히 얘기하기요. 지금 세월에는 입을 놀리기 정말 무섭소. 더운 밥을 먹고 식은 소리를 해서 생이를 상할 게 있소. 애들도 어려서부터 이런 환경에서 살면서 주의하게 검사 서를 쓰게 하기요.” “아니, 절대 그렇게 할 수 없어요. 세상을 모르는 어린 가슴에 억울한 못을 박을 순 없어요.” 명옥과 홍자나 은숙도 저으기 긴장해 하면서도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상순은 담배쌈지를 꺼내 담배를 말았다. “방법이 하나 있소. 검사서지만 사건경과를 그대로 밝히면 되오. 과분하게 모 주석을 모욕했다고 억지로 과장해 검사할 필요는 없다고 보오.” “예~” 오옥선은 구들에서 일어났다. “그럼 먼저 그러루하게 써서 바치고 봅시다.” 그리하여 상순이가 먼저 이른바 검사서를 쓴 후 덕돌이 그대로 베껴 썼다. (김 서긴 진짜 로련한 정치9단이야.) 이튿날 오 선생은 덕돌의 손을 잡고 교무실에 허 주임을 찾아갔다. 덕돌이 이른바 “검사서”를 바쳤다. 허 주임은 안경너머 그 “검사서”를 읽어보더니 “네가 읽어라.”하고 쌀쌀하게 말했다. 덕돌은 검사서를 받아 그대로 내리 읽었다. “검사서, 나는 모 주석이 우리 위대한 영수인 걸 몰랐습니다. 그저 모 주석과 사람들의 키가 어째 너무 차나는 것 같아 잘 못 말했습니다. 이후에는 모 주석께 충성을 다하고 아무 말을 함부로 하지 않겠습니다. 덕돌.” “흥!” 허주임은 콧방귀를 뀌더니 “이게 어디 검사서요?” 하고 소리쳤다. 그는 덕돌의 손에서 검사 서를 와락 채다가 안경 너머로 두루 여겨보더니 사무상 한쪽에 훌 던져버렸다. 이윽고 허 주임은 오선생을 훑어 보더니 “혹시 오선생이 대신해 쓰지 않았소?” 하고 물었다. “아닙니다.” 그러나 허 주임은 뭔가 짚이는 데가 있었든지 오선생을 안경너머 꼿꼿한 눈길로 콕콕 찌를 듯이 쏘아보았다. “애가 이렇게 간단하고도 중점이 돌출하게 쓸 수 있소? 변명도 심통하게.” 옆에 서있던 덕돌이 어망간에 입을 열었다. “아닙니다. 그 검사서는…” 옆에 서있던 오 선생이 제꺽 덕돌의 입을 막았다. 허 주임은 숨이 막혀 상을 찡그리며 벌개져 가는 덕돌의 얼굴과 오 선생의 복숭아 같은 얼굴을 번갈아보았다. “오 선생, 지금 뭐 하는 거요?” 오 선생은 덕돌의 입을 막았던 손을 떼면서 눈을 질끔 해보였다. 영리한 덕돌은 인차 그 뜻을 알아차렸다. 허 주임은 덕돌을 쏘아보면서 겁을 주더니 가까이 다가와 무릎까지 꺾고 앉아 따졌다. “그래, 넌 김서기네 아들이지. 거짓말을 할 줄 모르지?” 덕돌은 머리를 끄덕이었다. “그럼 사실대로 말해라. 이 검사 서를 누가 썼니? 오 선생이 써주었지?” “아닙니다. 그 검사서는 내 썼습니다.” “누가 쓴 걸 베끼지 않았니?” “아닙니다. 내 썼습니다." 주임은 머리를 흔들더니 일어나 사무상에 돌아가 앉았다. “고 놈 죄꼬만 자식, 애비를 닮아서 속에 영감이 들어찼구나.” 허주임은 의자 등받이에 잔등을 대며 틀을 차리며 거만하게  말했다. “못된 놈새끼, 좌우간 덕돌은 우파 혐의가 있소. 난 상급 교육기관에 회보해야겠소.” 이때 오옥선은 더는 참을 수 없었다. “허 주임, 내게 우파 모자를 씌워놓고서도 모자랍니까?! 이젠 세상을 모르는 어린 애한테마저 우파 모자를 씌우자고 미쳐 날뜁니까?! 절대 안됩니다.” 허주임은 오 선생을 멍해 쳐다보다가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너, 가만히 보자보자 하니 아직도 속은 파속처럼 새파랗구나. 내 말을 듣지 않은 후과가 얼마나 큰 줄을 아직도 모르니? 노처녀로 늙도록 시집도 못가자고 그러니?” “말 한마디를 잘 못한 걸 가지고 한평생 우파 모자를 씌워놓고 투쟁하면 속이 풀리겠구먼.” “어디 네가 이기는가 두고 보자! 자초부터 내 말을 고분고분 들었더라면 우파 모자도 쓰지 않았지?” “더럽다!” 오옥선은 땅바닥에 침을 택 뱉고 덕돌의 손을 쥐고 나왔다. 원래 유부남인 허 주임은 오옥선에게 치근거리었다. 조용할 때면 오옥선에게 자기 아내의 허물을 한바탕 늘여놓으면서 이혼하고 싶다고 했다. 어느 날 해 질 무렵에 허주임은 교무실에 아무도 없을 때 한창 숙제책을 검사하는 오옥선에게 뒤로 다가와 와락 끌어안았다. 깜짝 놀란 오옥선이 와닥닥 일어나면서 허시종의 두 팔을 뿌리치었다. “왜 이래요?” 그 바람에 허씨의 안경이 땅바닥에 떨어져 잘라당 깨졌다. 오옥선은 쌍까풀눈으로 허 주임의 대머리를 쏘아보았다. “히히히, 옥선이, 딱 한번만이라도 오선생과 살아 보고 싶소.” “픽!” 오옥선은 쓴 웃음을 지었다. “저를 어떻게 보고 하는 말인가요? 허 선생은 애 셋이나 달린 나그넨데요. 열 살 이상이면 페물이 다 된 나그넨데요.” “뭐라고?" 허주임은 성이 꼭두까지 치밀었다. 그러나 용케도 참아냈다. 그는 한숨을 길게 내쉬더니 " 사랑에도 나이나 가정이 문제요?” 하고 덧걸이를 걸었다. “큰 문제죠." 옥선은 교무실에서 나오면서 두덜거렸다. "픽! 오줌을 싸놓고 제 즛쌀이나 보고 개지랄해라.” 옥선은 그 후부터 허씨를 경계하면서 멀리했다. 허 주임은 꽃 같이 예쁜 쌍태머리 처녀를 앞에 두고 먹어치우지 못하는 것이 한이었다.  허 주임은 그게 속에 내려가지 않아 먹지 못할바에는 아예 그녀를 짓밟아버리려고 앙심을 먹었다. 그러던 차 옥선이 “당원은 특수재료 강철로 만들어졌다는게 뭐요? 당원도 남자의 정자와 여자의 난자가 결합돼 만들어진 사람이겠지.”라고 말했다. 허씨는 그 꼬리를 틀어쥐고 상급당위에 물어먹어 오옥선에게 우파 모자를 들씌워 투쟁받게 해 10년 거의 고생시켰던 것이다. 허 주임은 덕돌의 사건이 터진 그날로 오옥선의 담임교원직을 철직시켰다. 파직 이유는 간단했다. 우파 여선생에게 애들을 맡겼다가는  숱한 우파학생들을 길러내겠다는 것이었다. 함흥소학교에는 또다시 세찬 흑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어린 덕돌은 세찬 눈보라 앞에 나선 등잔불처럼 몸부림치고 있었다. 그런데 그날 저녁에 상순이 직접 찾아 뭐라고 해 놓았던지 교무처 허 주임의 태도는 급변했다. 그는 교무실에서 교원대회를 열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문화대혁명의 뚜껑을 열려면 교원들 내부부터 파재껴야 한다면서 애들을 가지고 이러쿵저러쿵 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덕돌의 일은 다시 묻지 말기를 바랍니다.” 그후터 허주임은 그 일을 더 거론하려고 하지 않았다. 하긴 “빈하중농이 없으면 혁명도 없다. 빈하중농이 일체를 영도한다.”는 위대한 수령님의 지시가 있는 한 함흥대대 서기자 빈하중농 대표인 상순을 등지고 허씨는 교무처 주임은커녕 함흥소학교에서 교원을 하기도 어려울 것은 불 보듯이 빤한 일이었다. 자칫하면 소 궁둥이나 쳐야 할지 누가 알겠는가? 허씨는 상순이 하던 말을 떠올리기조차 싫었다. 정말 잔등에 식은땀이 나고 온 몸에 소름이 쫙 끼치는 말이었다. 말마디마다 선뜩선뜩한 면도칼날이 되어 자기 온 몸을 찌르는 것만 같이 날카로웠던 것이다. 철부지 덕돌은 하마터면 10대도 되기 전에 우파나 반혁명분자로 몰리어 억울한 모자를 쓸 번했다. 다행히 로련한 아버지 힘에 의해 겨우 그 번 “정치곤경”을 모면했던 것이다.
149    대하소설 진달래 소야곡(15) 댓글:  조회:1335  추천:0  2018-04-12
                         28. 미궁        함박눈이 펑펑 쏟아져내리는 동장군이 덮쳐와 대지를 휩쓸었다. 삼라만상이 새하얀 이불과 자오록한 연기를 들쓰고 자취를 감추었다. 흩날리는 눈발 속에 모든 단서가 오리무중에 빠져 헤맸다.       성호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번 사건이 미궁에 빠진 듯한 감을 느꼈다.       그는 이모부네 집에서 아침을 먹으면서 이상한 점을 말했다.        “승호와 은영을 해친 깡패들의 뒤에 뭔가 더 묻어나올 것 같습니다.”        운룡은 버릇처럼 주먹으로 메부리코를 쓱 씃으며 “뭘?” 하고 물었다. “하나는 어느 놈이 승호의 귀두를 잘랐을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번 사건 배후가 궁금합니다. 혹시 주악의 말대로 송파가 시켰는지?” “문제를 제대로 봤다. 우린 계속 수사하고 있다.” 운룡은 속으로 성호의 예리한 판단에 감탄했다. “넌 우리 수사대원들을 협조해 은영과 승호한테 접근해 실마리를 찾아 봐라.” “예.” 순옥은 돼지고기점을 성호 국그릇에 더 떠주면서 대견하게 조카를 바라보며 혀를 끌끌 찼다. “텔레비죤방송에서 네가 ‘정의용사패’를 타는 장면을 보고 얼머나 기뻤는지 몰라. 넌 천생 수사대원 감이야.” 그녀는 남편을 보고 성호를 수사대대에 받아들여 달라고 여러번 부탁했다. 열다섯살 난 강호는 “나도 크면 성호 형님처럼 경찰이 될 거야.”라고 하면서 돼지고기국을 쭉 들이켰다. 순옥은 “그래, 우리 강호 장해.”라고 하면서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성호는 어깨가 무거워나는 감을 느끼면서 이모네 집을 나섰다. 그가 골목길에 나서자마자 기다린듯이 파랑새 정희가 뛰여나왔다. “축하해. 정의용사!” 그녀는 들가방에서 신문을 꺼내 보였다. 성호가 신문을 받아보니 그가 “정의용사패”쪽을 받는 사진, 수길과 함께 김광일을 나포한 사적이 큼직하게 실려 있지 않겠는가. “아버지는 학교에서 신문을 보고 너무 기뻐 집으로 가져 오지 않았겠어. 농민의  아들이지만 아주 전도 있는 청년이라고 했어.” 정희는 걀죽한 얼굴에 홍조를 띄우더니 어린애처럼 애교를 부렸다. “아버지 또 뭐라고 했는지 알아?” 성호는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정희는 골목에 행인들이 없는지라 성호의 팔을 끼고 딱 붙어서서 걸으면서 나직이 말했다. “오늘 널 우리 집에 데려오라고 하더라.” “?!” 성호는 저으기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가 오매에도 기다린 반가운 소식이 아닌가. 그러나 짐짓 아닌 보살을 떨었다. “건 왜?” 정희는 성호의 팔을 쥐여 흔들면서 교태섞인 어조로 말했다. “가보면 알겠지.” 성호는 모든 일이 슬슬 풀리는 것이 속으로 못내 흐뭇했다. “깡패들을 깊이 파 봐야지.” 정희는 성호에게 바싹 붙어서서 나란히 걸었다. “공안국에서 널 받겠다더니?” “아직 몰라.” 정희는 주춤 멈춰서더니 성호를 희망의 빛이 반짝이는 눈길로 바라보았다. “전번에 학교에서 퇴근해 집으로 가다가 종수를 만났어. 그 앤 소식공개회에 참가했다더군요.” “뭐라던?” “천국장이 너에게 직접 ‘정의용사상패’와 상금을 수여했다더구나. 또 수사대대에 받겠다고까지 했다더구나. 맞지?” “음-” “잘 됐어. 우리 부모 얼마나 기뻐하는지 알아? 이젠 우리 집에 가 있으면서 공안국에 출근하렴.” “결혼하기 전에 가시집에 가 있으면 남들이 뭐라고 하겠느냐? 이모부네 집에 있으면 수시로 이모부한테서 수사재간을 배울 수 있어 좋아.” “내 언제 너와 한 이불에 든다고 했니?” “그래도 그렇지. 온 동네에 소문을 놓으라고?” “별 소릴 다해. 결혼하면 다지. 안 그래?” “그래도 어쩐지…” “이모네 집보다 좀 좋아 그래? 로임도 타지 못하면서 언제까지 이모네 집에 얹혀 살 예산이냐?” “그래도 어찌 결혼 전부터 처가살이를 한단 말이냐? 아직 이모네 집에 있는 것이 편안해.” “글쎄, 정 그럼 편리할대로 해.” “감사하다고 전해라. 사돈보기는 취소! 아예 음력설 이튿날 쯤에 결혼해버리자!” “어머나. 진짜 급하구나. 진짜 우물에 가서 숭늉 달라는 판이군요. 호호호.” 성호는 시무룩이 웃으면서 화제를 돌렸다. “은영이 참 불쌍해.” 정희는 성호의 아픈 마음을 조금이라도 리해할 것 같았다. 빙장에서 은제비처럼 쌩쌩 나래치던 생기발랄한 처녀대학생이 극악무도한 깡패들에게 무참히 짓밟히지 않았는가. “문안이라도 해야겠는데. 좀 도와달라.” “아직도 걜 잊지 못했어?” “아니, 동정해서 그래. 같은 녀자로서 불쌍하지도 않아?” “불쌍하죠.” 정희는 혀를 홀랄 내밀면서 성호의 눈치를 살짝 살폈다. “뭘 사가지고 갈가? 때마침 어제 로임을 탔어.” “언제까지 네 돈을 쓰겠니? 상금으로 꽃이나 사가지.” 정희는 대뜸 백지장 같던 우유빛얼굴이 새파래났다. “병문안을 하러 가는데 웬 꽃이냐? 과일이나 사가지.” 성호는 들었는지 마는지 “진달래꽃이 있으면 더 좋겠는데.” 하고 꽃가게에 다가갔다.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는 엄동설한에 웬 진달래꽃이냐?” 성호는 고집을 부렸다. “인조꽃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는데.” “그래?” 그들은 병원 근처에 있는 여러 생화점을 돌아다녔다. 허나 겨울에 진달래꽃이 있을리 만무했다. 더구나 인조진달래꽃도 보이지 않았다. 성호는 맥이 풀려 정희를 데리고 마지막 생화집에서 나오면서 아쉬워했다. “야, 봄이면 얼마나 좋겠니? 우리 고향 천지꽃산에는 진달래꽃이 많은데.” 생화점 녀주인이 그들을 불러세웠다. “잠간만요. 우리 집 애들이 병에 꽂아놓은 거라도 사겠어요?” 성호는 정희를 마주 보며 싱글벙글 웃었다. “고맙습니다.” 성호와 정희는 끝내 연분홍 진달래꽃을 얻어 들고 병원으로 향했다. “진달래꽃에도 가시가 돋혔나?” 정희는 진달래꽃을 두루 살펴보았다. “진달래꽃에 웬 가시냐?” 정희의 말에 성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가시야 뭐 있겠냐? 그러나 진달래꽃에도 분명 가시가 있다고 생각해.” “호호호. 문학적인 상상일뿐이야.” 성호는 주춤 멈춰서더니 정희에게 진달래꽃을 쥐여주었다. “네가 가지고 가서 대신 문안해라.” “왜?” 성호는 정색했다. “은영은 날 보기 불편해 할 거야. 네가 한가지만 알아봐달라.” 성호는 정희의 귀에 대고 뭐라고 귀속말을 했다. “알았어요. 친애하는 정의용사동지.” “이 사건을 끝까지 해명해 깡패무리를 일망타진하지 않고선 승호나 은영이나 한뉘 편안히 살 수 없어.” “야~ 네 같은 친구를 만난 승호나 은영이 얼마나 행복해?” “걔들이 언제까지 부모와 경찰들의 보호를 받으면서 살아야 하니?” 정희는 눈을 살풋이 내리깔며 꽃다발을 내려다 보더니 비장한 마음다짐을 하였다. 정희는 종종 걸음을 쳐 병원으로 향했다. 정희가 꽃다발을 들고 입원실 2층복도로 올라가자 경찰들이 삼엄한 경계를 서고 있었다. 낯선 그녀가 은영이 든 병실에 다가가자 경찰이 막아섰다. “누굴 찾습니까?” “최은영을 문안하러 왔어요.” “어떤 관계입니까?” 경찰은 꼬치꼬치 캐여 물었다. “대학교 친군데요. 한 침실에서 근 3년이나 지냈어요.” 경찰은 머리를 끄덕였다. “잠간 여기서 기다리십시오.” 경찰은 병실에 들어가더니 이윽해 복도로 나왔다. “들어가보십시오. 환자 정신상태가 좋지 못하니까. 10분을 초과하지 마십시오.” 정희는 꽃다발을 들고 들어가려고 했다. “잠간!” 그때 뒤에서 경찰이 불러세웠다. 경찰은 다가와 정희의 손에서 꽃다발을 받아들고 이리저리 헤쳐보더니 되주었다. “미안합니다. 들어가십시요.” 정희는 조용히 문을 열고 병실에 들어섰다. 새하얀 병실 문어귀 침대에 녀경찰이 앉아 있었다. 정면 침대에 은영이 누워 있고 그 옆에 어머니가 앉아 있다가 엉거주춤 일어섰다. “은영아, 괜찮니?” 은영은 머리까지 덮었던 이불을 훌렁 내리더니 발딱 일어났다. “언니!” 은영은 정희가 내민 진달래꽃다발을 받아 향기를 맡더니 탁상에 올려놓았다. 그녀는 꽃다발에 걸린 글쪽지에 눈길이 갔다. “하루속히  건강과 행복을 찾기를 바래. 리성호, 엄정희.”  은영은 정희를 끌어안더니 눈물을 펑펑 쏟으면서 왕왕 대성통곡쳤다. 정희는 은영이 생각보다 정신상태가 호전된 것 같았다. 그녀는 성호의 부탁을 받았는지라 두루 문안을 둬마디 하고는 인차 관심사부터 물었다. “수사가 아직 끝나지 않았어. 언제까지 경찰들의 보호를 받으면서 살아야 하겠니? 깡패놈들을 일망타진하지 않고선 편안한 날이 없어.” “원쑤는 갚아야죠. 언니, 성호 오빠랑 수사대원들을 도와 강도들을 몽땅 나포했단 말을 들었소.” “얘, 우리 손잡고 깡패들의 죄상을 몽땅 밝혀내는게 어때?” “좋죠. 내 할 수 있는 일이 뭐요?” “승호도 모질 상했는 모양이더라.” 은영은 녀경찰한테 머리를 돌리더니 “잠간 자리를 피해줄 수 없어요?” 하고 물었다. 녀경찰이 나갔다. “어머니도 자리를 내줘요.” 어머니도 병실을 천천히 나갔다. 정희는 계속해 물었다. “승호가 병문안을 왔댔느냐?” 은영은 머리를 가로저었다. “며칠 전에 다른 병원으로 가버렸대요.” “웬 일이냐? 모질 상했는 모양이지. 아, 그날 너희들 련애하러 학교 뒤산에 갔다면서?” “그랬어요.” “네가 처음부터 사실 제대로 말했더라면 사건해명을 더 빨리 했을 걸 그랬어.” “그렇지요.” 은영은 이불을 훌훌 개이면서 혼자말처럼 중얼거렸다. “승호는 아마 종신병신이 됐을 걸. 그런 개자식은 귀두뿐이겠소? 개XX 같은 걸 썩뚝 잘라버려도 속이 씨원찮아.” “야, 무슨 소리냐? 너희들은 모두 피해자들인데.” “그 개놈 새끼!” 은영은 대뜸 눈에서 불찌가 탁탁 튈 지경이였다. “승호, 그 수캐 같은 놈이 얼마나 많은 처녀들을 짓밟았는지 아오? 경옥이, 홍희. 홍희는 비참하게도 목숨으로 사회에 도덕이 없는 놈을 처벌할 걸 호소했어요. 그러나  승호는 아무런 처분도 받지 않고 뻔뻔스레 살고 있소.” 정희가 한마디 했다. “승호는 공안국 감옥관리대대에 들어갔다가 쫓겨났다더라.” 정희는 정신이 아주 말쑥한 은영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경옥이나 내나 다 얼마나 고통 속에서 사는지 아는가요? 죽지 못해 억지로 이를 악물고 살아요. 원쑤 갚을 날을 기다리면서. 기실 이번 사건도 우연히 생긴 건 아니예요. 다 승호 때문이죠. 경옥이 사촌오빠들 깡패무리를 시켜 보복한 것 같아요. 자존심이 면도칼날처럼 시퍼런 송파 깡패무리가 승호를 놔둘리 없겠어요? 송파를 놔두는 한 승호나 내나 하루도 편안히 살 수 없어요.” 정희는 성호한테서 들은 말을 했다. “그런데 주범과 광일은 죽어도 송파가 시킨 일이 아니라고 딱 잡아뗀단다. 오히려 자기넨 네가 시켜서 보복했다고 물고 늘어진단다.” 은영은 쓰거운 비웃음을 입귀로 흘렸다. “쳇, 내 깡패들을 시켜 나를 강간하게 했단 말이요?” 정희는 말이 나온바하고는 끝까지 나갔다. “승호의 귀두도 자기네 자른게 아니라고 딱 잡아뗀단다. 오히려 너, 은영이 짓일지 모른다고 했단다. 정말 너와 승호 앞날이 걱정이야. 어쩜 좋아? 호~” 정희가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면서 은영의 반응을 살폈다. 은영은 자꾸 혼자말처럼 중얼거렸다. “승호, 그 개새끼, 잘 됐소. 그렇찮으면 이제도 얼마나 많은 처녀들이 짓밟힐지 누가 아오? 이 세상에 도덕법정이 없는 것이 한이죠.” 정희도 동감이 갔다. “약자들인 우리 녀성들은 자기절로 자기를 보호할줄 알아야 해. 진짜 자기를 사랑하는 남자인지 아닌지 잘 판단해야지.” “정말 후회돼요. 어쩌다 참된 다른 오빠 순진한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고 저런 미친 개를 좋아했던지. 으흐흑, 눈이 멀었지, 멀었어. 으흐흑, 흑흑, 야~ 억울해 못살겠어.” 병실문이 열리면서 어머니와 경찰이 들어왔다. “됐습니다. 환자의 심리안정에 불리합니다.” “예, 알았습니다.” 정희는 자리에서 일어나 은영을 꼭 껴안았다. “공안국을 믿어라. 강도들은 법망에서 벗어나지 못해.” 은영은 엉~엉~ 서럽게 울었다. 그녀는 이불을 머리까지 훌 뒤집어쓰더니 훌렁  들어누웠다. 정희는 차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입원실 대문을 나서자 성호가 서성거리다가 마중했다. “어떻게 됐니?” 정희는 머리를 끄덕이였다. “조용한데 가서 말하죠.” 그들 둘이 금방 병원 대문을 나설 때였다. 난데없이 종수가 병원으로 들어오다가 그들과 맞띄였다. 그는 사건을 좀 더 알아보려고 승호를 찾아간다고 했다. “승호는 다른 병원으로 갔대요.” 정희의 말에 종수는 도리머리를 흔들면서 “불시에 어데 가서 그 자식을 찾아?” 하고 성호를 쳐다보았다. “너희들 어디로 갔댔어?” “은영 병문안했죠.” “음, 가자. 한잔 하면서 얘기나 하자.” 성호는 손사래를 쳤다. “형님, 좀 일이 바쁘오. 전번에 신문에 내줘서 고맙소.” 종수는 성호의 팔소매를 잡아끌었다. “가자, 금강산구경도 식후라고 하잖았어?” 성호와 정희는 종수한테 끌려 선녀음식점으로 들어갔다. “아니, 정의용사 아냐?” 선화가 마중하면서 아양을 떨었다. “조용해라.” 성호는 선화를 보고 구석의 조용한 방을 내게 했다. “이후엔 좀 모르는 척해라. 그래야 널 보호할 수 있어.” 선화는 섬찍해났다. “아니, 오빠 무슨 죄라도 졌어?” 성호는 자못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 “깡패들이 나와 친한 걸 알면 큰 일 나.” 선화는 머리를 끄덕였다. 성호는 선화를 안심시켰다. “공안국이 있는 한 그까짓 깡패들이 어쩌지 못할 거요. 송파 깡패무리들 거동을 살펴주오.” 선화는 머리를 무겁게 끄덕였다. 종수는 자리에 앉자마자 료리메뉴를 들추며 말했다. “어제 로임 탔는데 한턱 내지.” “형님한테 얻어먹기만 하는군.” “형제지간에 사양하지 말기.” 선화가 나가자 종수는 기자의 직업병처럼 성호와 정희한테 물었다. “은영인 정신상태 어떻소?” “많이 나아졌어요.” “그래? 다행이야.” 종수는 캡을 벗어 걸어놓고나서 또 물었다. “처음에 은영인 책을 보러 뒤산에 갔다고 수사대원들한테 거짓말을 했잖아. 왜 그랬을가?” “거야 창피해 그랬겠지.” “아니야, 여기에 뭔가 있어. 승호와 함께 갔다는 걸 말하면 은영한테 뭔가 불리할 수도 있다는 거야. 은영이 얼마나 약삭빠른데 꼭 뭔가 따져가면서 말한 같아.” “글쎄.” 정희가 끼여들었다. “제가 금방 병원에 갔을 때 은영이 승호를 대하는 태도가 아주 반상적이더군요. 그들 둘은 피해자가 아니고 뭐예요? 그런데 승호를 저주하고 증오했어요.” 정희는 은영한테서 들은 말을 하다가 못마땅해 하는 성호의 눈길을 보고서야 입을 다물었다. “바로 그거야!” 종수는 아주 탐정가처럼 추측을 늘여놓았다. “숱한 처녀들의 정조를 짓밟았는데도 승호를 처벌할 수 없지. 그래서 은영이 보복했다는 생각 들잖니?” 그는 성호를 마주보았다. “글쎄. 짓밟힌 숱한 처녀들을 대신해 은영이 승호의 귀두를 잘랐을 수도 있소. 그러나 은영이 깡패를 불러다 승호를 치게 했다는 건 성립될 수 없소. 이제 은영이나 승호가 입을 열면 알 것 같소. 그런데 창피해 통 입을 열어야 말이지.” “고육계를 썼다면?” 종수는 상상 외의 질문을 던졌다. “고육계?” 성호는 놀랐다. 정희가 도리머리를 흔들며 끼여들었다. “그럴 순 없어요. 은영이 아무리 악이 난들 깡패들이 자기를 륜간하게 하면서 승호를 해쳤겠어요? 은영은 수술칼로 광일의 허벅지를 찌르고 베고 했다던데요.” 종수는 안주가 들어오자 잔에 술을 부어 성호와 정희에게 권했다. “자, 한잔 들면서 얘기하자.” 종수와 성호는 한잔씩 굽내고 정희는 입술에 술잔을 대고 홀짝 드네하고 잔을 내려놓았다. 종수의 추측과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흘러나왔다. “사건혐의는 경옥한테 넘어갔어. 그녀가 이전에도 깡패들을 불러 기숙사에 뛰어들어 은영을 해치려고 들지 않았어? 주악과 주범, 김광일, 이 세 깡패는 송파가 시켰어.” “지금 추측으로 간단히 결론짓기 어렵소.” “왜?” 종수는 개고기를 집은 저가락을 입에 가져다가 되내려놓으면서 물었다. “주악은 송파가 시킨 거라고 승인했소. 그런데 주범과 광일은 딱 잡아떼고 있다오.” “송파를 잡아다가 심문하면 알 거 아닌가?” “그렇소.” 종수는 머리를 끄덕이더니 또 한잔 권했다. “야, 성호야, 너희들 잔치술은 언제 마실 수 있니?” “차차. 청하지.” “성호야, 넌 정말 복이 넝쿨채로 떨어졌어.” 종수가 정희를 힐끔 훔쳐보면서 춰올렸다. “농민의 아들인데 교수네 귀공주를 따먹었으니 말이야.” 성호는 역정을 냈다. “형님, 그런 말 작작 하오. 농민의 아들이 뭐가 모자라오? 어째 지금도 반상이요, 문벌이요, 그런 말 하오?” 종수는 머리를 끄덕였다. “모르고 하는 소리. 지금 농민과 국장은 천차만별이야. 부부간도 짝이 너무 기울지 말아야 해. 우리 부부를 보면 너 아주머니 한족인데다가 고중 밖에 다니지 못했는데 말이야. 국장네 딸이느라고 어쩌나 턱을 쳐들고 세도를 부리는지. 원, 시집살이 정말 피곤해.” 성호는 정희를 바라보면서 정색했다. “에이, 난 죽어도 형님처럼 처가집엔 기여들지 않겠소.” 정희는 대뜸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딱 처가살일 못한다는 법은 없잖아요?” “됐다, 됐어.” 종수는 술잔을 쳐들었다. “그만하고 술이나 마시자.” 성호는 종수와 갈라져 정희를 데리고 바깥으로 나왔다. 흐리터분한 바깥을 둘러보면서 이번 사건의 실마리가 잡힐듯 말듯 해 골치아팠다.                                                                                                 29. “한뉘 소궁둥이나 칠 놈” 성호는 강운룡 부과장의 지시에 따라 승호를 찾아가 직접 사건정황을 알아보기로 하였다. 그는 먼저 리철갑 과장을 찾아가 자기 의향을 말했다. 리철갑 과장은 이전에는 허송파 깡패무리에 관계되는 사건이라면 대충 얼버무려버렸다. 그런데 이번에는 승호가 상해받았기에 송파네 깡패무리를 놔두려고 하지 않았다. “우리 수사사업을 협조해서 감사하오. 전번에 사회치안질서정돈회의에서 시정법위원회 서기 허철군은 이번 사건을 철저히 수사해 사회질서를 엄중히 교란하는 깡패무리를 견결히, 철저히 척결하라고 지시했소. 주관부시장 최웅봉은 누가 면목을 봐주면 법에 의해 처리해야 한다고 강조해 지적했소. 시 주요지도자들의 지지가 있는 한 송파 깡패무리는 큰 길에 나선 쥐새끼들로 될 거요. 이 사건에서 수사 중점은  배후 교사범들이오.” “예~ 알겠습니다.” 성호는 머리를 끄덕였다. 이때만큼은 리철갑 과장이 달리 보였다. “한가지 더 부탁하기오. 송파 일당을 은밀히 감시하오.” “예, 알겠습니다.” 리철갑과장은 성호한테 다가오더니 뜨거운 물까지 부어주었다.                                                                                                                                                                                                     “전번에 승호가 말한 적이 있는데. 우리 집 사위를 하면 어떠오?” 성호는 허구픈 웃음을 지었다. “전 이미 결혼날자까지 정한 약혼녀가 있습니다.” 리철갑 과장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승호도 압니다. 정희라는 녀동창생입니다.” 성호는 뒤를 달지 못하게 했다. “오~ 그렇구만. 아까운 사위감을 놓쳤네 그려. 허허.” 리철갑 과장은 실망하면서 속으로 욕했다. (흥, 한뉘 소 궁둥이나 칠 놈, 주제에 배 부른 타령을 해? 두고 보자.  이 리과장을 모르고 형사정찰대대에 들어오는가? 아무리 정의용사니 떡대가리니 어쩌겠니? 퉤!) 이때 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천국장이 신문을 들고 들어와 노발대발했다. “이게 뭐요?! 온 시내에 이런 삐라가 날아다닌단 말이요. 소식공개회를 열 때면 보도의 신중성을 강조하란 말이요. 엄격한 심열제도를 세워서 절대 우리 수사사업에 저애되는 보도를 하지 못하게 해야 하오.” 리철갑은 성호를 나가라고 하였다. 성호는 삐라내용이 궁금했지만 복도로 해 공안국 대문 밖으로 나갔다.  그는 그 길로 상점에 가서 바나나며 사과며 사 들고 승호가 들어 있다는 시병원으로 총총히 갔다. 병실 복도에는 사복경찰이 늘어서서 삼엄하게 경계를 서고 있었다. 성호가 다가가자 불러세웠다. “무슨 일로 찾아왔소?” “난 승호 친구입니다. 병문안을 하러 왔습니다.” “오~ 정의용사구만.” 경찰은 들어가라고 병실 문까지 열어주었다. 성호는 병실에 들어가 과일꾸럭을 침대머리 탁상 우에 올려놓으면서 승호를 보고 “어떠냐?” 하고 문안하였다. 승호는 몸이 많이 나았는지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이젠 괜찮아.” 선금은 성호를 보고 알은 체하더니 어색한지 자리를 피했다. 성호는 승호의 옆에 앉으면서 손을 잡고 말했다. “그날 너와 은영을 상해한 세 강도는 아마 몽땅 총살당할 거야.” “어, 속이 씨원하다.” 승호는 성호의 손을 꽉 잡고 진정으로 말했다. “성호야, 뭐니 뭐니 해도 너 같은 친구가 있어 든든하구나. 관건적인 때는 그래도 너야.” “아니야. 네가 수사에 잘 협조했기 때문이야.” 성호의 말에 일리가 없는 건 아니였다. 승호는 성호나 수사대원들에게는 창피해 말하지 않았지만 아버지한테는 허송파 일당의 많은 단서를 제공했다. “에이, 이젠 병실에 누워 있기 지긋지긋해.” 성호는 승호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한가지 궁금한게 있다. 추측해 보면 이번 사건은 뒤에서 누군가 주악이랑 시킨 것 같아.” 승호는 이불을 훌 걷어치우면서 혼자말처럼 중얼거렸다. “만약 송파가 시켰다면 이번에 송파네 깡패무리를 일망타진할 수 있겠는데. 그럼 얼마나 좋겠니? 내 언제까지 경찰의 보호를 받으면서 살아야 하니?” 승호는 두팔을 머리뒤로 해 깍지 걸이를 해 끼고 침대머리에 기대앉으면서 분명히 말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송파새끼 나와 경옥의 일로 앙심을 먹고 시킨 것 같아.” “그런데 세 흉수의 공술은 달라. 주악은 송파가 시킨 일이라고 했다. 몇번 심문해도 주범은 은영이 시켰다 하고 괄일은 네가 시킨 것이라고 했단다.” “개새끼들이 누굴 무함해? 주범과 광일은 죽어도 송파를 불지 않을 거야. 송파 눈에 나면 주범이나 광일이 집식구들이 살고 남을 것 같니? 썩어져도 나와 은영을 물고 늘어지지.” 성호는 바나나를 뜯어 승호한테 건넸다. “나도 짐작했어. 썩어지기 전에 남을 물어뜯는 승냥이지. 그런데 셋이 말이 다  다른데다 주범과 광일이 송파의 교사죄를 승인하지 않는 거야. 이제 송파를 잡아다가 심문하면 알겠는지. 그 놈이 승인하겠니?” 성호는 조용한 틈에 귀속말로 물었다. “너 귀두는 주악이네 자른 거야?” 승호는 창피해 외면했다. “그래. 주악이랑 한 짓이야. 뭐, ‘숱한 처녀들의 정조를 해친 놈에 대한 복수’라던가. 한뉘 장가도 가지 못하고  고통 속에서 살게 한다.’는지. 한바탕 개소릴 치더라.” 생각 밖으로 승호는 상세히 얘기했다. 성호는 호주머니에서 노트를 꺼내 뭐라고 적더니 승호 앞에 내밀었다. “야, 여기에 서명해라.” 승호는 노트를 받아쥐고 들여다보더니 “이건 몽땅 사실이다.” 하고 썩썩썩 서명하고나서 “아직도 견습수사대원질을 하니?”하고 놀라했다. 승호는 성호를 간절한 눈길로 마주보면서 입을 천천히 열었다. “야, 이젠 귀두문제를 작작 파라. 창피해 못 살겠다. 전번에도 홍희가 자살한 사건 때문에 난 감옥관리대대에서 쫓겨났어. 이제 귀두를 잘린 추문이 온 시내에 퍼지면 어떻게 머리를 들고 사니?” “사건진상을 조사해 흉수를 징벌하려는 것뿐이야.” 이때 노크소리와 함께 사복경찰이 통화기를 들고 들어왔다. “성호, 지도부에서 찾소.” 성호는 황급히 통화기를 받아쥐고 복도에 나갔다. “성호, 급히 사무실로 오오.” 승호 아버지였다. 성호는 황급히 승호와 몇마디 위안의 말을 하고는 부랴부랴 리철갑 과장의 사무실로 달려갔다. 성호가 노크하고 사무실에 들어서자 리철갑 과장은 자못 엄숙한 표정으로 쏘아보았다. “성호, 이젠 수사에서 손을 떼오.” “예? 절 수사대대에 받겠다고 하잖았습니까?” 성호는 어깨가 맥없이 축 처졌다. “수사사업에 도움은커녕 방애작용을 놀고 있단 말이요.” “예? 무슨 말씀입니까?” 성호는 맥없이 리과장 사무상 맞은 켠의  걸상에 물앉았다. 리과장은 삐라를 들어 흔들어댔다. “이게 뭐요? 온 시내에 우리 수사비밀을 공개했단 말이요.” 성호는 황급히 신문을 받아 뜯어보았다. 신문에는 성호와 수사대원들의 사진과 함께 이번 사건해명기가 실렸다. 그런데 삐라에는 “피해자 리모의 귀두에 숨겨진 비밀”이란 소제목 아래 숱한 추측이 란무했다. 게다가 공안국 수사대대에서 이번 사건 배후를 파고들어 교사범을 꼭 나포하리라는 것도 씌여 있지 않겠는가. (이건 진짜 수사비밀을 몽땅 폭로한 것이 아닌가?) 성호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전날 종수와 한 말이 사단을 일이켰다는 직감이 들었다. (자식, 어쩜 이런 짓을 한단 말인가?) 그러나 성호는 리지를 상실하지 않고 종수를 물어먹지 않았다. “이 삐라와 제가 무슨 관계 있습니까?” “우린 증거를 쥐기 전에 추측해 누가 한 짓이라고 판단을 내리지 않소. 그러나 수사비밀루설은 누가 한 것이라는 걸 대개 알 수 있소.” 리철갑 과장은 안경알 너머 가슴츠레한 눈길로 성호를 마주 보았다. “…” “더 추궁하지 않겠소. 수사대원을 하려면 수사비밀을 지켜야 하오. 이후엔 수사에 절대 손을 대지 마오.” 성호는 두손을 맞잡고 공손히 물었다. “이제부터 주의하면 안되겠습니까?” 리과장은 사무상에 돌아가 앉았다. “늦었소.” “리과장님, 한번만 용서해주십시오. 모르고 한 일이니까.” 리과장은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모든게 끝났소. 설상가상으로 동무는 신분이 너무 로출됐소. 신분이 로출될수록 수사사업에 불리하오. 모든 건 운명이 아니겠소? ” 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내 사위감이면 몰라도. 농부의 아들놈 주제에 언감 내 딸을 나무려. 배부른 흥정을 해도 유분수지. 흥!) 성호는 비틀거리면서 문 밖에 나섰다. 그는 곧추 복도 건너편에 있는 이모부의 사무실로 들어갔다. 때마침 이모부가 서류를 정리하고 있었다. “이모부, 난 경찰대대에 들어오지 못하게 됐습니까?” “음. 들었다.” 운룡은 성호를 자기 옆의 소파에 앉게 하고 따가운 물까지 따라주었다. “너무 락심하지 말라. 사람이 사노라면 그런 곡절 쯤은 아무 것도 아니야.” 성호는 따뜻한 물을 받아 말라붙는 목을 축이고나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는 농민의 아들입니다. 그저 자기 밭에 농사나 지어 차례진만큼 먹고 사는 농민의 자식입니다. 아무리 봐도 여긴 제가 있을 곳이 못되는구만요.” 운룡은 눈물을 줄줄 흘리는 성호를 보고 마음이 아팠다. “자식, 사내대장부가 고까짓 일로 눈물을 흘려? 좌절당할수록 허리를 꿋꿋이 펴고 살아야 해. 교훈으로 삼고 이제 천천히 기회를 보자. 계속 이번 사건을 수사해라.” “아니, 난 수사대원을 할 사람이 아닙니다.” “넌 수사대원을 할 천부적인 자질이 있는 놈이야.” “아니, 한뉘 소 궁둥이나 치면서 살 놈입니다.” “못난 놈, 다시 그런 말 했다간 날 찾지도 말라.” 운룡은 사사로이 성호를 계속 견습수사대원으로 쓸 예산을 하고 송파를 감시하라는 임무를 주었다. 성호는 맥이 풀려 이모부의 사무실에서 나왔다. 그는 결혼을 며칠 앞두고 청천벽력 같은 좌절을 당하고보니 량가집 부모와 정희를 볼 면목이 없었다. (시내란 참 더러운 곳이구나. 어디 사람이 살 곳인가? 자칫하면 철직당하고 밥통이 날아나구. 이런 신세에 어떻게 정희와 결혼한단 말인가? 아예 속시원히 정희와 다 털어놓고 태평거촌에 돌아가 쇠나 돼지를 치면서 살자.) 순간 그는 이상하게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그는 씨엉씨엉 정희네 집으로 찾아갔다. 그는 엄교수를 볼 면목이 없어 집 부근에서 서성거리며 정희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원쑤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그 골목에서 송파 형제와 딱 마주칠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송파는 우멍눈으로 그를 유심히 쏘아보다가 도리머리를 흔들더니 송호한테 눈짓했다. 순간 성호는 경계심이 들어 주먹을 으스러지게 쥐고 일부러 대학교 울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이상하게 송파와 송호는 성호를 놔두고 정희네 집 뒤 2층집 울안으로 들어가버리는 것이였다. (쳇, 예전 같으면 다짜고짜 덤벼들 놈들인데 무슨 일일가?) 성호는 수림 속에 숨어 그자들이 들어간 정희네 뒤집을 주시해보았다. (저게 송파네 집인가?) 성호는 송파를 감시하라던 이모부의 말이 귀전을 아프게 때리는지라 아름드리 비술나무가지를 잡으면서 바라올라갔다. 그는 비술나무아지에 다리를 걸고 나무가지 사이 잎새로 그 2층 집을 유심히 살폈다. 이윽고 땅딸보로, 뚱뚱보로, 꺽다리로 성호의 발 밑으로 지나가 그 2층집으로 들어가는 것이였다. 깡패무리는 이상하게도 표나 해놓은 것처럼 몽땅 코수염을 기르지 않았으면 하이칼라머리를 하고 있었다. (또 무슨 꿍꿍이야?) 땅딸보가 나오더니 정희네 앞집 상점에 가서 술 몇병을 사들고 갔다. 한참 비술나무에서 감시하던 성호는 자전거 방울소리와 함께 정희가 자기 발 밑으로 지나가려고 하는 것을 발견했다. “정희-” 나지막한 부름소리에 정희는 자전거에서 내려 사처를 두리번거렸다. 자기 머리 우의 비술나무 가지에서 성호가 쭉 미끌어져 내려왔다. “아이구머니. 간 떨어지겠어.” 정희는 얼굴이 대뜸 새파랗게 질렸다. “집에 들어가지 않고 나무에 올라가 뭐 해?” “쉿-” 성호는 식지를 입술에 대고 2층 집을 눈길로 가리키면서 귀속말을 했다. “저기 저 집에 송파무리가 들어갔어.” “픽- 난 또 무슨 큰 비밀이나 안다고. 저건 송파네 집이야.’ “그래? 진작 알려줄게지.” 성호는 이모부가 송파를 감시하라고 준 임무를 알려주었다. 순간 그는 수사비밀을 또 루출한 것 같아 말끝을 얼버무렸다. (진짜 소궁둥이나 치면서 살 놈인가 봐.) 그는 화제를 돌려야 했다. 그런데 정희와 결혼을 그만두자는 말을 하자니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성호는 정희의 자전거 방울을 만지작거리면서 머리를 숙이였다. 정희는 성호의 팔을 끼면서  “집에 들어가자요. 우리 집에서 뒤집을 감시하기 더 쉬울 거예요.” 하고 집 쪽으로 걸어갔다. “정희, 할 말이 있소.” 정희 성호의 두 눈을 유심히 마주보았다. 마음의 창문이라는 쌍까풀눈에서 무슨 비밀이라도 찾아내려는듯이 뚫어지게 들여다보았다. “정희, 미안하오. 우리 결혼 그만두자.” “무슨 소리냐?” 성호는 정희를 교정의 수림 속으로 데리고 들어가 나직이 오전에 있었던 일을 쭉 말했다. “난 또 큰일 났다고? 그 일로 결혼 그만둬?” 정희는 종주먹으로 성호의 가슴을 쳐댔다. “나쁜 놈, 수사대원을 못하면 말라지. 취직이야 아무 거나 하면 되지. 우리 아빤  광고회사 김경리하고 교섭 중인데.” 성호는 정색했다. “난 시내에서 살기 싫어.” 정희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더니 앵돌아졌다. “혹시 아직도 은영일 련민하는 거 아니야?” “아니야. 잊은지도 오래. 은영의 비참한 처지를 동정할뿐 사랑한 건 아니야?” “그럼 뭐야?” 성호는 정희의 손을 잡고 정중히 말했다. “나처럼 눈치 도끼등처럼 무디고 안팎이 같은 사람은 시내에서 살기 힘들 거 같아. 아예 고향에 돌아가서 돼지나 소를 치면서 살기보다도 못해.” “못난 놈, 그 것도 말이라고 해?” 정희는 어처구니 없어 멍든 퍼런 하늘을 쳐다보면서 허구픈 웃음을 지었다. “대학을 어디로 다녔어? 어째 자그마한 곡절을 겪자마자 호박을 쓰고 돼지굴로 들어갈 궁리냐? 너 정말 한뉘 소궁둥이나 치면서 살 놈이란 말이냐? 난 소 똥 구린내 나는 농촌에 가서 못 살아.” “그러니까. 결혼하지 말자는 거야. 너한테 미안해 어떻게 살아? 난 시내에  엉덩이를 들여놓을만한 집도 없어. 널 괜히 데려다 고생시키자고 결혼해? 난 부모를 모셔야 해.” 정희는 분해서 새파랗게 질린 걀쭉한 얼굴에 눈물을 좔좔 쏟았다. 성호는 멈추지 않았다. “결혼해도 말썽이 많을 거야. 농부 아들이라고 깔보는 교수님 부부 말이야. 결혼했다가 리혼할 거면 아예 결혼하지 않는게 낫아. 괜히 세상 사람들을 웃기지 말자…” “말하지 말라니까. 엉~ 엉~” 정희는 한참 서럽게 울더니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네가 어디로 가든 결혼은 포기 못해. 집이 없으면 세집살이를 하지 뭐. 정 안되면 우리 집에 들어와 살아도 돼.” 그녀는 비장한 결의를 다졌다. “이러자. 농촌에 가 사는가, 시내에서 사는가 하는 건 천천히 토론하자. 어디서 사는게 더 좋으면 어디서 사는 걸로 하자. 허나 결혼은 절대 미루지 못해. 시내서…” “널 한평생 고생시키고 싶지 않아.” “봐라. 마음 속으로부터 날 아끼고 사랑하고 있잖아. 그 사랑심이면 족해!” “소똥 구린내 나서 어떻게…” “소똥 구린내 나는 시골이라도 죽어라고 따라 갈거야.” “뭘 보고 고생 사서 하려니?” 정희는 성호의 품 속에서 머리를 들더니 눈물이 그윽한 포도알눈으로 성호의 두 눈을 찬찬히 들여다보면서 종알거렸다. “성호야, 요 진정어린 쌍까풀눈이 좋단 말이야. 교활한 빛이 하나도 없는 진정어린 요 눈, 도끼등처럼 무딘 요 눈, 눈치코치 없는 커다란 요 눈 말이야.” 그녀는 성호의 넓은 가슴에 얼굴을 파묻으면서 조용히 흐르는 노래처럼 종알종알 속삭였다. “거짓없이 로실한 네 마음이 좋아.” “마음 하나면 다야? 내 마음 따위 몇푼 간다고? 남들처럼 해줄 힘도 없고 돈 한푼도 없어. 부모를 모셔야지. 너에겐 미안한 일만 생길 것 같아. 이제라도 절대  후회될 일을 하지 말라. 부탁이야.” 허나 정희는 굳은 마음을 보여주는 짙은 사랑의 감정을 토로했다. “후회라니? 네 사랑을 차지한 것만 해도 행복해. 진정한 사랑이 있는 한 그 어떤 곤난과 곡절도 우리 사랑을 깨뜨릴 순 없어. 정 농촌이 살기 좋으면 널 따라가마. 난 뭐나 자기 능력으로 살려는 네 능력을 믿어.” 성호는 정희가 이 순간처럼 사랑스러운 적이 없었다. 그는 눈물범벅이 된 정희를 꽉 껴안았다. “사랑해, 정희야, 이 목숨 다 바쳐 변함없이 사랑할 거야.” “고마워. 성호야, 널 하늘과 땅 끝까지 따라가면서 영원히 사랑할 거야.” 분명 사랑하는 처녀총각의 피끓는 두 심장이 하나로 되여 쿵쾅쿵쾅 높뛰면서 티없이 맑은 순정으로 사랑의 멜로디를 울리고 있지 않는가! 그 사랑의 멜로디는 세상에서 제일 격조 높고 가장 아름다운 선률이 아니겠는가!  
148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96) 댓글:  조회:1303  추천:0  2018-04-03
                         9. 특무의 아들과 지주 딸의 로맨스      함흥대대 사무실을 둘러싼 토성이 아무리 높아도 잡아먹으려는 듯이 기승스레 휘몰아치는 눈보라를 당해내기 어려웠다. 토성 밖은 엄동설한의 추위로 하여 비술나무도 얼어서 탁탁 튈 지경이었다. 하지만 토성 안의 대대사무실 안서에는  용광로 같은 정치 열기가 끓어번지고 노루꼬리만큼한 권세를 턱대고 음충한 정치몽둥이가 음험하게 난무하고 있었다. 흥수는 토성 안 함흥대대 사무실에서 개 잡은 포수처럼 사무 상을 두드려댔다. “너희들 결혼 못해!” 허나 경주는 머리를 숙이지 않았다. “어째 결혼하지 못하오?" "너희들 지주 딸과 남조선 특무 아들이야." "그걸루 결혼하지 못한다는 법이 있소?” 경주의 결혼 꿈은 어수선한 하늘에서 잠꼬대를 하고 미련의 아름다운 사랑의 추억은 눈보라를 따라 룡트림하며 흩날렸다.  흥수는 조개턱을 쳐들고 경주에게 손사래를 쳐댔다. “너 이놈, 감히 대대 간부한테 말 대꾸질할래?” “왜 결혼하지 못하오.” 흥수는 허리를 쭉 펴면서 걸상 등받이에 잔등을 대더니 틀을 차리며 말했다. “너 정말 답답해. 미련은 너보다 열 살도 넘어 이상이잖아? 네겐 누나라도 한창 위 누나야. 게다가 너희들은 지주와 특무 새끼야. 가정 성분이 나빠도 한참 나빠.” “그런다고 결혼하지 못한다는 법이야 없잖소?” “야, 이 자식아. 너 할배캉(할아버지하고) 물어봤어?” 이때 기다렸다는 듯이 덕성이 철규와 함께 사무실에 들어섰다. “부르지도 않았는데 왜 왔어?” 덕성은 들어오자마자 울상이 돼 흥수의 두 손을 덥석 잡고 구부정한 허리를 꿉썩거렸다. “리간부, 제발 얘들이 결혼하게 소개신을 떼 주오. 얘들이 그만, 야, 어떻게 말하겠어?” 그는 사위를 둘러보고 흥수한테 다가가 나직이 뒷말을 이었다. "우린 다 남조선이 고향이 아니오? 좀 봐달라고." 흥수는 외까풀 눈을 가슴츠레 뜨고 경주와 미련을 번갈아 보면서 물었다. “뭐 어째?” “작은할아버지!” 경주가 벌떡 일어나 황급히 손으로 덕성의 입을 마구 막아버렸다. 흥수는 세 사람을 흘금 훑어보더니 여기에 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버릇처럼 조개턱을 쳐들고 경주를 뚫어지게 쏘아보았다. “사실대로 말해. 뭐 속이면 경칠라.” 허나 경주는 식은땀을 줄줄 흘리면서도 이로 입술을 깨물며 한마디도 토설하지 않았다. 흥수는 외까풀 눈을 가슴츠레 뜨고 눈길을 미련에게 돌렸다. 그는 우먹한 신눈으로 미련의 아랫배를 흘금흘금 곁눈질 해보았다. “혹시 너희들이 우리 대대 비준도 없이 그걸 하지 않았니?” 경주는 “아니오.” 하고 한사코 능청을 부리면서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허나 노처녀 미련은 능청을 떨지 못하고 머리를 숙이었다. “네 놈들 잘하는구나. 우리 대대 비준도 없이 사통한단 말이냐? 감히 계획생육정책을 위반해?” 흥수는 일어나더니 미련의 앞으로 다가갔다. “너, 일어서 봐!” 미련이 경주의 눈치를 흘금흘금 보면서 일어나지 않았다. “못 들었어? 일어나라니께!” 허나 미련은 흥수를 쏘아볼 뿐 일어날 염을 하지 않았다. “일어나지 못할까?!” 흥수는 다가가 미련의 손을 잡아 억지로 일궈 세웠다. “어디 보자!” 흥수는 불시에 미련의 치포자락을 활 줴 들었다. 순간 허옇고 불룩한 아랫배가 훌 드러났다. “아야 마야! 애 떨어지겠다!” 미련은 불시에 당한 일에 놀라 소리치면서 치포를 내리었다. “반동 놈 새끼, 어디 보자.” 흥수는 치마우로 미련의 아랫배를 슬슬 만져 보더니 입을 짝 벌렸다. “이 연놈들이 정말 비준도 없이 남조선특무 놈의 새끼 씨를 심었구나.” 그는 사무상에 돌아가 앉으면서 미련을 쏘아보았다. “벌써 한 서너 달 되는 것 같구나. 능청스러운 연놈들, 오늘 저녁부터 투쟁을 단단히 받아야겠어. 집에 돌아가 검사서나 준비해.” 덕성은 두 손을 발이 되게 싹싹 비비면서 빌었다. “애들이 주책없어 사고를 쳤는데 양해하시우. 제발 창피하게 투쟁은 하지 마시우. 제발, 비나이다.” 흥수는 목에 지렁이 같은 핏줄을 세우고 고함쳤다. “개소릴 작작 쳐! 이게 어디 양해할 일인고? 우리 나라 산아제한정책을 어겼어. 개짓해?” 덕성은 흥수 앞에 넓적 엎드려 절을 마구 하면서 빌었다. “제발 투쟁하지 말게나.” “이 영감이, 누구한테 반말로 명령해? 영감도 오늘저녁부터 투쟁 받아야겠구먼.” 덕팔은 옆에서 보다가 말렸다. “이 선전위원, 아니, 이 대대간부, 덕성 영감의 맏아들 칠백은 항일유격대 중대장이었고 조선인민군 대대장이 아니었소? 조선전쟁에서 목숨까지 바치지 않았소? 혁명열사 아버지 낯을 봐서 경주를 용서해주오.” “영감, 중뿔나네 삐치지 말라니께. 됐소, 됐어. 더 말하지 말란께. 영감, 계선을 분명히 갈라야지. 왜 특무의 삼촌을 대신해 말해? 어째 영감도 특무 새끼를 보호했다는 모자 쓰고 투쟁을 받자고 그래?” 그러자 덕팔은 허리를 구부정하고 돌아서더니 사무실에서 나가버렸다. 그날 저녁이었다. 해가 어슬어슬 져가기 바쁘게 흥수는 돌멩이를 들어 토성 안 아름드리 비술나무에 처맨 종을 두드려댔다. 댕! 댕! 댕! 댕! “투쟁대회를 합니다. 대대 사무실 마당에 모이십시오.” 흥수가 왜가리 목을 빼들고 소리치자 토성안집 새금이 집에서 나와 물었다. “생원이, 오늘은 누굴 투쟁하오?” 흥수는 종을 서너 번 더 치고 돌멩이를 던지더니 두 손을 툭툭 마주  털었다. “미련이 반동 놈의 새끼를 가졌시우.” “뭐라오? 결혼도 하지 않고 노처녀가 애를 배다니? 세상에 별 희한한 일도 다 보겠다.” 새금이 마을에 나가 소문을 퍼뜨리는 바람에 사원들은 구경거리 생겼다고 야단쳤다. 그들은 곤한 대로 일찍이 대대 마당에 모여들었다. 토성 주위에서는 눈보라가 윙윙 휘몰아쳤지만 토성 안은 투쟁대회 열기로 끓어 번졌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지주 장학산과 지주의 아들들인 장충국, 지괴호 등이 사원들 앞에 고깔모자를 쓰고 죽 늘어서서 머리를 숙였다. 흥수는 나서서 투쟁대회를 사회했다. “반동 놈의 연놈들을 끌어내라!‘ 흥수의 “명령”이 떨어지자 민병들이 경주와 미련을 숱한 사원들이 모인 투쟁마당 앞에 끌어냈다. 흥수는 투박한 손으로 경주와 미련의 뺨부터 찰싹찰싹 갈겼다. “이 반동 놈의 새끼들아, 연놈들이 감히 대대 비준도 없이 반동 놈의 새끼를 배? 엉? 로실히 탄백해라!” 숱한 사원들은 지주 장학산네 노처녀 미련이 결혼도 하지 않고 배가 불룩한 것을 보고 쑤군거렸다. “아이고, 어쩜 노처녀가 임신을 해?” “못된 쇄지 엉덩이에서부터 뿔이 난다더니? 저 경주 새끼를 보오. 아비를 닮아서 못된 짓부터 하지 않소?” “글쎄 말이오. 어쩜 자기보다 열 살도 더 많은 어미 같은 년을 들쑤셔 저런 사고를 다 치오?” 그 소리에 경주는 머리를 들고 떳떳이 말했다. “좋은 약혼자들끼리 애를 뱄는데 무슨 죄가 있다고 이러오?” 그러자 흥수는 손가락으로 경주의 이마빼기를 쿡쿡 찌르며 야단쳤다. “이걸 봐라! 자기 지은 죄도 모르고 허둥대겠냐? 여기 네놈의 아비 고향인가 해? 여긴 한국, 아니, 남조선 경주인가 해? 여긴 중국 사회주의 조국 땅이야. 비준도 받지 않고 마구 애를 배는 건 반동 죄야. 나라 국책을 어긴 반동 죄. 알만해?” 흥수는 숱한 사람들의 앞인지라 꽤나 점잔을 빼며 투쟁대회를 이끌어나갔다. “범죄경과를 얘기해.” “뭘 말이오?” 흥수는 경주와 미련의 턱을 손가락 끝으로 쳐들고 뚫어지게 쏘아보면서 고함쳤다. “누가 먼저 그 짓을 하자고 했어? 상세히 탄백하란 말이여.” 경주와 미련은 서로 쳐다보며 부끄러워 시물새물 웃으면서 누구도 먼저 입을 떼지 못했다. 이윽고 경주는 제꺽 말해 버리고 시름 놓으려고 했다. “난 미련을 진짜 사랑하오. 지난해 여름에 태평강에서 목욕하다가 태평강을 건너 지나가는 미련을 붙잡아 가지고 옥수수 밭으로 갔지. 그런데 미련은 고모사촌 지괴호한테 시집가겠다고 하지 않겠소.” “가만!” 흥수가 손을 쳐들었다. “가만! 미련아, 저 말이 맞어?” 그러자 미련은 머리를 약간 들었다. “맞소. 우리 아버지는 나를 고모사촌 오빠한테 시집가라고 했소.” 미련은 다시 머리를 숙여버렸다. 흥수는 사원들 앞에 머리를 숙이고 마주 서있는 지괴호한테 물었다. “저 계집애 네한테 시집가려고 했다는데 사실이 맞는가?” “예.” 지괴호는 목구멍으로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겨우 대답하였다. 장학산은 미련을 흘겨보았다. 그 눈길은 “아비 말도 듣지 않고 이게 무슨 일이냐?”고 하는 상 싶었다. 흥수는 경주에게 몸을 돌렸다. “계속 탄백해!” 경주는 뒷덜미를 긁적거리더니 자랑삼아 뒤 말을 이었다. “그래서 괘씸해서 그랬소.” “뭐? 상세히 말해라! 모두 다 듣게.” 흥수의 핍박에 못이겨 경주는 머뭇거리다가 천천히 입을 뗐다. “옥수수 밭에서 미련을 와락 끌어안았소.” “어마나! 그런 거 왜 다 얘기해? 창피하게!” 미련은 옆에 선 경주의 팔을 툭 쳤다. “너 이년, 입 다물지 못해!" 흥수는 미련을 쏘아보면서 을러메고나서 경주한테 돌아섰다. "계속 말해!” “그래서…” “아니다! 이 대목은 노처녀 미련이 말하면 더 재미있겠다.” 흥수가 기발한 생각을 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좋습니다.” 학수도 사원들 앞에 나서서 소리쳤다. “지주놈의 년, 아니, 딸년, 탄백해라!” 미련은 마지못해 머리를 숙인 채 떠듬떠듬 한어로 얘기했다. 그 목소리는 모기 소리 같았다. “나는 지괴호 오빠한테 시집가야 한다고 했소. 그런데도 경주는 계속 자기와 결혼하자고 했소. 난 나이도 열 살이나 이상이지. 지주 딸이자 국민당 특무의 여동생인데 괜히 고생하자고 그러는가 했소. 그런데 경주는 지주네 딸과 특무네 아들은 사랑하지 않고 시집장가 가지 않겠는가고 했소. 그래더니 나를 와락 끌어안지 않겠습니까?” 흥수는 옆에서 경주의 머리카락을 쥐여 쳐들면서 “그랬어?” 하고 따졌다. “예. 그랬소." “그래서 어떠럭하데이(어쩌더냐)?” 미련은 죽어 들어가는 소리로 뒷말을 이었다. “그래서 그렇게 됐습니다.” 흥수는 들볶아댔다. “뭐야! 얼버무려 넘어 가려고 하지 말랑께. 가장 관건적인 죄행을 낱낱이 탄백해라! 이 추운 겨울에 모두 일찍이 끝내야 집에 가 쉬고 내일 일하러 가지.” 미련은 갑자기 머리를 쳐들더니 젖 먹던 힘까지 다해 고래고래 고함쳤다. “자기 몸에 달린 걸로 하는 것도 당신 비준받고 해야 하오!? 당신 비준받아야 애를 밴다는 도리 세상에 어디 있소?!” “이 년이 이거 정말 호랑이 담 짝이구나! 죽을 죄도 모르고 언감 누구한테 고함질이냐?” 흥수가 미련의 긴 머리카락을 마구 쥐여 흔들었다. 그러자 흥수의 손이 끄당기는 대로 미련의 불룩한 배가 휘청거렸다. “저 쌍년의 보*짝에 고춧가루를 쑤셔넣어라!” 이때 숱한 사원들 속에서 누군가 쌍욕을 들이댔다. “옳다!” “고추가루를 쑤셔 넣어라!” “쑤셔 넣어라!” 허나 흥수가 구호를 부르는 사원들에게 손사래쳤다. “건 안 돼. 도리 없이 그럼 안 돼.” 뜻밖에도 흥수는 점잔을 뺐다. “죄범 미련은 계속 탄백해라. 그래서 경주가 먼저 널 건드렸니? 아니면 노처녀인 네가 남자 맛을 보려고 경주를 얼렸니?” “별 걸 다 묻소?” “건 누가 주범인가를 가리기 위해서이다. 어서 말해!” 그리하여 미련은 별 수 없었다. “경주가 먼저 나를 와락 끌어안더니 입술로 내 볼을 마구 핥고 빨고 했습니다.” "저런, 저런!" “또 어쩌더니?” 미련은 몸을 탈면서 뒷말을 잇지 못했다. “그래 어쨌니?” 흥수가 족따지자 옆에서 지켜보던 경주가 머리를 들고 떳떳이 말했다. “미련은 지괴호한테 시집가겠다면서 그래는 거 내 막 깔고 들어앉아 그랬소.” “그랬다는 건 뭐야?” “남자와 여자가 하는 걸 했소.” “몇 번 했니?” “그날 옥수수 밭에선 한번 밖에 하지 못했소.” “거짓말!. 노처녀와 노총각이 처음 하는 게 딱 한번만 했다고? 누가 곧이들어?” “미련의 치마에 피 질벅하게 묻어 겁나 더 못했소.” 흥수는 머리를 끄덕이다가 또 따지고 들었다. "아니, 그걸 했는데 어째 피 다 나왔어? 거짓말이야." "리간부. 진짜라니까. 미련은 노처녀지만 숫처녀였소." "내 결혼해 그럴 땐 피 나지 않았어. 너 거짓말 하겠어?" 그 말에 여기저기서 웅성거렸다. 춘실은 머리를 푹 수그렸다. 경주는 억울하다는듯이 머리를 절레절레 젓다가 춘실한테 눈길을 박았다. "그 집 아줌마 숫처녀 아니여서 그랬겠지." "너, 이놈, 무슨  개소리야?" 경주는 입이 뿌죽해 두덜거렸다. "그래 그 집 아줌마 숯처녀요?" "이놈 새끼!" 찰싹! "왜 때려?" 경주는 뺨이 아파 손으로 만지면서 계속 게두덜거렸다. "그 집 아줌마 상순하구 어려서부터 바람 피워 애까지 낫지 않았소? 숫처녀 아니니깐  그렇지. 그런 것두 모르면서, 씨." 춘실은 너무 창피해 우쭐 일어나 회의실에서 훌 나가버렸다. 상순은 눈을 지그시 감고 모로는 척했다. 흥수는 개 잡은 포수처럼 우쭐해 경주를 보고 손사래를 쳤다. "너 이놈, 왕청 같은 생사람 물어메치겠어?! 죽을락꼬 환장했어?!" "어째 그 집 아줌마는 바람 피워 애까지 나았는데두 투쟁하지 않아? 씨, 아직 애두 안 낳았는데두 우리만 투쟁하면서, 흥!" 여기저기서 키득거렸다. "조용해!" 흥수는 낯짝도 황소 엉덩짝보다도 더 두꺼웠다. 그는 창피한줄도 모르고 계속 경주를 족따지면서 투쟁했다. “그 후에는 몇 번 했니?” “한 스무번?” “어디서?” “패용천산에서도 했고 강냉이 밭에서도 했소. 태평강변 버드나무 숲속에서도 했고 소서구 천지꽃산에서도 가만히 했소.” 흥수는 경주의 뺨을 찰싹 갈겼다. “무치한 놈! 이 놈, 자랑 삼아 얘기하는 거 봐! 우리 마을 산과 들, 밭을 몽땅 네놈들이 돌아다니면서 더럽혔구나. 반동년놈들이라구. 쯧쯧쯧.” 그러자 경주는 흥수를 쏘아보면서 두덜거렸다. “당신들이 일하고 곤한데 저녁에 이런 누추한 얘기를 들어야 집에 가서 잠도 잘 오지. 흥!” “이 놈 새끼, 죽을 죄는 모르고 통통한 소릴 줴쳐? 우리 신성한 투쟁대회를 모욕하겠어?” 흥수는 주먹으로 경주의 면상을 꿍 쳐박았다. 경주는 코피를 랑자하게 흘렸다. 그 바람에 그날 투쟁대회는 놀라움과 호기심, 웃음 속에서 흐지부지해서 끝나버렸다.                  10. 시련 이튿날 흥수는 대대 위생소 정규상을 찾아갔다. 정규상은 간호사가 없어 한창 주사기를 소독하다가 흥수를 보고 알은체 했다. “누가 또 앓소?” “어, 아니오.” 흥수는 정규상이 폐 염에 걸려 죽어가던 미선을 구해 준 후부터 마구 투쟁하지 않고 은근히 보호해 주었다. “정 의사, 미련의 배속의 애를 떼버리자고 왔소.” “양? 어째?” “그 반동의 씨를 없애 버려야 하겠소. 속담에 풀을 베자면 뿌리부터 뽑아버려야 한다고 하지 않았소?” 그러나 정규상은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흥수는 조개턱을 쳐들더니 눈초리마저 꼿꼿해났다. “왜?” “아무리 지주 딸이라고 해도 어떻게 배속의 애를 마구 떼버리겠소?” 정규상은 소독한 주사기를 꺼내 주사기 통에 넣으면서 심중하게 말했다. 흥수는 화가 치밀었다. “미련이란 년이, 내 비준도 없이 애를 배고서도 뭐라고 했는지 아오? ‘자기 몸에 달린 걸로 하는 것도 당신의 비준을 받아야 하오!? 내 몸도 당신의 비준을 받아야 애를 밴다는 게 어디 있소?!’ 이 말은 자기 몸도 정부의 건가고 따지고 드는 거 아니겠어? 원, 무정부주의자라도 그런 무정부주의자가 어디 있어?” 흥수는 정규상의 눈치를 흘금 살폈다. “사람은 항상 평화로울 때일수록 간고하던 전쟁 년대를 잊지 말아야 하오. 가겠소? 가지 않겠소?” 정규상이 그 말귀를 알아듣지 못할 수 있겠는가! 정규상이 위생가방을 메고 따라 나서자 흥수는 개 잡은 포수처럼 어깨 으쓱해 위생소를 나갔다. (내 말을 듣지 않으면 네 놈을 놔 둘 거 같으냐? 미선이 앓으면 큰 병원에 가면 되지. 흥! 더러운 우파분자!) 흥수는 건 가래를 땅바닥에 뱉고 나서 정규상을 되돌아보면서 물었다. “뭘로 애를 떼버리오?” “애가 대여섯 달 됐다면서? 약물로도 바쁘고 수술칼로 배를 째고 꺼낼까 하오.” “음, 그래? 그년이 칼을 맞을 노릇을 했지. 이런 걸 두고 쌍통, 맨통, 꼬부랑 통, 영감 노친 담배통, 우정국의 전화통, 노처녀 젖통이라는 거야. 음메- 하하하, 허허허. 꽤나 볼만하겠구먼. 배를 쭉 째고 피가 뻘건 애를 꺼내? 어허허, 허허허. 지주 놈의 새끼는 씨를 말려야 해.” 흥수가 흥이 나서 어깨춤까지 추면서 눈보라치는 소서구로 올라 갈 때다. “여보시오, 대대 선전위원동지, 나 좀 보소.” 흥수가 되돌아보니 미련의 오빠 충국이 뒤따라오지 않았겠는가? “왜 그래?” 충국은 규상이 뒤에 있는 것을 보고 흥수를 한쪽으로 끌고 가서 털외투 단추를 열고 품속에서 대들보 같은 술병을 꺼내 보였다. “사실, 난 형님을 찾아 갔소. 그런데 없더구먼.” “뭐? 형님? 그래 어쩔 셈이야?” 흥수는 조개턱을 쳐들고 가물에 실 돌피 같은 허리를 쭉 펴면서 틀을 차렸다. 충국은 술병을 꺼내 주면서 “형님, 이 술을 마시고 미련을 놔주오. 우리 집안에는 걔까지 애를 낳지 못하면 대가 끊어지오.” 그 말에 흥수는 술병을 받아 땅바닥에 꽝 메치면서 발끈 성을 냈다. “이놈 새끼! 날 보기를. 이까짓 술병 보고 한국 특무놈 씨를 남기게 할 거 같아?” 충국도 자존심이 있었다. “그럼 어찔 예산이야?” “배를 째고 특무놈 씨를 꺼내 얼궈 죽이겠다.” 충국은 깜짝 놀라 입을 항아리 아가리만큼 쫙 벌리더니 헐금씨금 소서구로 올라갔다. 윙윙 휘몰아치는 눈보라에 외투자락을 날리면서 씽씽 앞서 가는 충국의 잔등을 보면서 정규상은 싸늘한 살기가 느껴졌다. 허나 흥수를 따라가지 않을 수 없었다. 한참 후 소서구 어귀 토성 안에 들어서자 황둥개가 씽 달려 나오면서 왕왕 짖었다. 황둥개 목 바를 풀어 놓지 않았겠는가! “개자식, 우리를 물라고 개까지 풀어놨구나.” 흥수는 대문에서 빗장을 빼들고 달려드는 개를 탁 쳐 눕혔다. 황둥개는 깨갱거리더니 대갈통이 터져 쓰러졌다. 대가리에서 흐른 피가 허연 눈을 뻘겋게 물들였다. 흥수가 정규상을 데리고 집안에 들어서자 미련은 보이지 않고 충국이 쏘아보며 구들에 말뚝처럼 박혀있었다. “야, 미련을 어디에 숨겨 놓았어? 당장 내놓지 못해?” 흥수는 외까풀 눈에 독살을 피우면서 충국을 쏘아보았다. “저 윗방에 있소.” 장충국은 아주 유창한 조선말로 말했다. 장학산은 흥수의 팔을 붙잡고 비난사정을 했다. “몇 십년 만에 보는 앤데 낳게 해주오.” 그러자 흥수는 장학산을 활 밀어재꼈다. “물러나지 못해? 더러운 지주놈 새끼, 옛날에 우리가 조선에서 갓 왔을 때 네놈들이 우리를 사람으로 보았어? 그저 병완 영감과 기준영감 밖에 모르더니. 흥, 어때? 그 영감들이 널 구해줘? 네놈을 청산하고 투쟁했지. 쌍통이야! 흥!” 장학산은 넘어졌다가도 허연 수염을 끌면서 일어나 가냘픈 손을 뻗쳐 흥수의 바지가랭이를 잡고 빌었다. “흥수! 제발, 제발, 애를 다치지 마오.” 흥수는 발길로 장학산을 걷어차 번져 놓고 다짜고짜로 서쪽 윗방으로 올라갔다. 흥수가 윗방에 들어가 보니 미련이 이불을 덮고 반듯이 누워 까딱하지 않고 있었다. (아니, 이 년, 이거.) 실한 오리도 걸치지 않은 미련의 허연 허벅다리가 이불 밑으로 반쯤 드러나 있지 않겠는가. “이년, 얼른 옷 입고 일어나지 못해?!” 흥수는 혼 나간 사람처럼 미련에게 덮쳐나가더니 이불을 와락 걷어치웠다. 순간 실 한 오리도 걸치지 않은 미련의 하얀 알몸이 백일하에 드러났다. 집안의 해빛을 받아 미련의 풍만한 우유 빛 젖가슴이 숨결을 따라 출렁이면서 오르내렸다. (저 야들야들한 젖가슴.) 순간 흥수는 뒤에 정규상이 있다는 것도 잊고 발가벗은 미련의 야들야들한 허벅지를 슬슬 매만지면서 중얼거렸다. “싯허연 대낮에 왜 벗고 있어? 이년 미인계를 써서 간부를 유혹해 함정에 빠뜨리려고?! 어림도 없다!” 그때 미련은 내리깔았던 눈을 살며시 뜨고 흘겨보면서 버럭 고함쳤다. “만지긴?!” 그제야 제 정신 좀 들었는가. 흥수는 쏘아보는 미련에게서 눈을 떼고 정규상을 되돌아보더니 호령했다. “멍해 서서 뭘 해? 빨리 배를 째고 애를 꺼내지 않고.” “양. 알았소.” 정규상은 위생 상자를 열고 약솜을 꺼내 미련의 배를 슬슬 닦았다. 그리고 청진기를 불룩한 배에 대고 도정신해 들었다. 이때 문이 벌컥 열렸다. “이 놈들! 뭐 하는 짓이야!” 충국이 성난 사자처럼 고함치면서 덮쳐들었다. 그는 정규상의 위생상자에서 수술 칼을 빼들고 흥수에게 덮쳐들었다. “이 놈, 네 놈 불알부터 까버리겠다.” 뒤에서 장학산이 수염을 흩날리면서 들어와 흥수를 깔고 들어앉아 바지 괴춤을 벗기는 충국을 뜯어 말리려고 손을 뻗쳤다. “충국아, 그만둬라! 어쩌자고 이러니? 대대 간부를 깔고 들어앉아 이러면 되니?” “우리 지주는 사람이 아니오? 어쩜 애마저 낳지 못하게 하오?” 충국은 아버지에게 잡힌 팔을 빼더니 흥수를 깔고 들어앉아 바지를 벗기고 사타구니에 쇠갈퀴 같은 시꺼먼 손을 넣었다. “아이고, 나 죽는다, 죽어. 정의사, 날 살려주오.” 그제야 정규상은 충국의 팔을 잡아 뒤로 잡아당기면서 말렸다. “충국이, 이걸 놓소. 이러면 안 되네. 청진기를 대보니 애가 아주 건강하오.” “건강해 뭐라오? 빼버리겠는데.” 장충국은 흥수의 그걸 꽉 거머쥐었는데 정규상과 장학산은 말리느라고 잡아당겼다. 그 미세 당기세 판에 밑에 깔린 흥수가 죽는 소리를 쳤다. “아이고! 알이 다 터진다, 터져! 제발 날 살려라.” 그러자 충국은 시퍼런 수술칼을 들고 불알을 꽉 움켜쥐면서 위협 절반, 흥정 절반 들이댔다. “내 여동생 애를 빼내겠는가?!” “아, 아니, 이걸 놔라. 내 눈 감아 줄게.” “결혼 소개 신을 떼 주겠는가?” “응, 응, 이젠 이걸 놔라.” “여기서 당장 써라.” “아, 아, 그래. 어- 나 죽는다. 아야.” 충국이 놓아주자 그제야 흥수는 숨이 올라왔다. 충국은 수술칼을 든 채 저쪽 칸에 가서 종이와 연필을 가져왔다. “어서 써!” 흥수는 너무 아파 왼손으로 사타구니를 감싸 쥐고 오만상을 찡그리면서 겨우 일어나 누런 종이에 몇 글자를 썼다.   소개신 함흥대대 김경주와 장미련의 결혼을 소개하오니 공사에서는 등록해 줄것을 바랍니다. 함흥대대 당 지부 선전위원 이흥수.                                             1965년 12월.   이흥수는 소개신을 써주고나서 절룩거리면서 방에서 나가려고 헤덤볐다. “아, 아, 아파 죽겠다.” “난 조선어를 몰라. 옳게 썼는가 보오.” 장충국이 정규상에게 소개신을 내밀어보였다. 정규상이 대충 내리 훑어보고 머리를 끄덕였다. 흥수는 충국이 괘씸하면서도 힘으로 용빼는 수 없었다. 한시 급히 이 마귀 굴 같은 지주네 집에서 벗어나야 했던 것이다. “정 의사, 빨리 위생소에 돌아가서 나를 검사해 주오. 아이고, 아파 죽겠소.” 정규상은 좋아라고 충국에게 왼눈을 찔끔 감아 보이면서 흥수를 따라 나갔다. 흥수는 절룩거리면서 토성 밖으로 나간 후에야 뒤돌아보면서 악에 받쳐 이를 뿌드득 갈았다. “내 저 지주놈 새끼를 가만 놔두는가 봐라.” 위생소에 돌아 온 후였다. 아파서 상을 찡그리는 흥수를 침대 위에 눕히고 나서 정규상은 바지 괴춤을 까고 검사해 보았다. 그런데 정말 거짓말을 보태 **중태가  한뼘이나 늘어나지 않았겠는가? 그건 두개 다 붙어 있나 주물러 보니 있긴 있는데 쓰게 된 것 같지 않았다. “어떤가? 아가. 아파라.” 흥수는 외까풀 눈을 거슴츠레 뜨고 정규상을 올려다보았다. 어쩐지 정규상의 표정이 굳어져 있는 것이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어째?” “자기절로 잘 보오, 어떻게 됐는가?” 흥수는 일어나 앉아 가지고서도 감히 내려다보지 못해 한참만에야 조개턱을 내리우면서 외까풀 눈을 슬며시 내리 깔았다. “어! 이게 뭐야? 아이고!” 흥수는 울상이 돼 정규상을 붙잡고 야단쳤다. “이보, 이게 아픈 건 둘째고 써먹을 수 있을까?” 정규상은 속으로 터져 나오는 웃음보를 겨우 참느라고 돌아서서 대답했다. “그거야 아주머니한테 물어봐야지.” “아갸갸. 이걸 어쩌나?” 흥수는 너무 아파 공양이가 불알을 앓는 상을 짓고 죽어가는 소리를 질렀다. 이튿날 이른 아침에 흥수는 아픔을 참으면서 상순을 찾아갔다. 그는 전날에 있은 일 자초지종을 쭉 말하고 나서 민병을 데리고 가서 충국을 붙잡아오겠다고 했다. 상순도 아주 분개해 자리에서 일어나 중얼거렸다. “그 놈 자식이 언감 대대 간부에게 손을 대? 당장 붙잡아야지.” “그러게 내 뭐라고 했소? 지주 딸이라도 결혼하고 애를 낳는 거까지야 어떻게 막소? 이젠 이 일을 막지 마오.” 흥수는 후회막급이었다. 괜히 저네 좋아하는 판에 끼어들어 심술을 부리다가 미련의 살맛도 보지 못하고 그것까지 상했으니 좆 떼우고 불 떼우고 뒤로 엎어져도 콧등을 깼으니 말이다. 상순과 흥수가 총까지 든 철국이랑 성환이랑 청년민병들을 대여섯 데리고 소서구 어귀로 달려갔다. 그들이 소서구 어귀 토성안집을 포위하고 뛰어 들어가니 충국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상순은 미련을 보고 물었다. “충국인 어디로 갔어?” “말로는 내 결혼 증을 떼러 간다던데요.” 허나 장학산은 밭고랑 같은 주름이 잡힌 얼굴에 죽을상을 지었다. “저기 쪽지 써놓고 갔소.” 상순은 장학산이 가리키는 창턱에서 종이쪽지 한 장을 주어 들고 내리 훑어보았다. 흥수는 한자를 몰라 상순이 보는 옆에서 들여다보면서 물었다. “뭐라고 했소?” “이 놈이 기고만장하기로서니. 흥수와 대대 간부들이 경주와 미련의 결혼을 막는 날엔 언제든지 나타나 가만 놔두지 않겠다고 했소. 가자, 공사에 가서라도 이 놈을 잡아야 해.” 상순은 민병들을 데리고 눈보라가 윙윙 휘몰아치는 산길을 따라 달렸다. “가만!” 상순은 토성안집에 달려 들어가 전화로 공사 파출소 허영호 소장에게 정황을 알렸다. 허 소장이 다음과 같은 정황을 알려주었다. “김서기, 장충국은 확실히 공사 민정소에 와서 경주와 미련의 결혼 증을 냈습니다. 그런데 지금 어디로 갔는지 우리 민경들이 추적해도 찾을 수 없습니다. 우전국 치보주임이 금방 전화가 왔는데 충국과 비슷하게 생긴 마흔이 푼한 한족사내가 소포에 결혼증을 넣어 함흥대대 소서구에 부치고는 어디로 가버렸다고 합니다. 우리 파출소에서 계속 추적하겠습니다. 함흥대대에서 군중들의 생명안전을 주의해 보위하십시오.” “알았소.” 상순은 전화를 놓으면서 흥수의 낯에 대고 삿대질했다. “다 당신 탓이오. 미친 개는 막다른 골목에 이르면 지붕을 뛰어 넘는다는 거 모르오? 괜히 긁어서 부스럼을 만들지 않고 뭐요? 흥!” 흥수는 아직도 아파 상을 찡그리면서 상순의 칼날 같은 세 귀 눈길을 피해 머리를 숙였다. 어느덧 추운 겨울은 가고 비단결로 얼굴을 만지는 듯이 부드러운 봄바람이 불어치는 새 봄이 왔다. 상순은 사원들을 세개 대로 나눠 이끌고 조개덕 앞의 체전 논밭머리에 물도랑을 파고 그 우에 커다란 물레방아를 놓는다, 과수원에 사과 배나무를 심는다, 멍지메산 앞에 새로 논을 푼다 하면서 분망히 보내고 있었다. 사원들은 상순의 호소에 따라 일을 하면 할수록 성수났다. 하긴 밭이랑 개인에게 나눠줘 개인도급제로 농사를 지은 후 웬 일인지 집체로 농사를 지을 때보다도 사원들의 쌀독에 쌀이 꼴딱꼴딱 찼다. 마을에는 찰떡이랑 감자누룽지랑 먹으면서 “양양 맛있다. 오래오래 맛있다.”고 동요를 부르면서 뛰노는 애들이 많아지지 않는가! (별 일이야. 아무튼 집체로 농사를 지을 때보다 개인으로 농사를 지으면 지은 것만큼 자기에게 차례지니까. 더 열정이 나고 책임지고 농사를 지은 모양이지? 허, 참. 알고도 모를 일이야.) 어느 날, 상순이 멍지뫼산 앞에서 논을 풀고 돌아오는 길에 태평강에서 손을 훌훌 씻을 때었다. 지춘실이 옆에 와서 손을 씻으면서 말을 걸었다. “여보, 난 어쩌라오?” “여보라니? 사람을 웃기지 마오.” 허나 춘실은 주위를 핼끔 둘러보더니 사람이 없는 것을 보고 “정색해 말했다.  "저 나그네 몇달 채 그걸 꼼짝하지 못하오. 난 생과부로 되지 않겠소?” “그걸 나하고 말하면 어쩌오?” 상순은 싱거워하면서 우쭐 일어나 가려고 했다. “여보, 당신은 내 첫사랑이오. 남의 고통도 알아줘야 하지 않소?” “그런 일은 모르오. 흥!” 상순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아름드리 버드나무 숲속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춘실은 허연 머리 수건을 벗어 쥐고 뒤따라 달려가 상순을 붙잡아 풀밭 속으로 끌고 가려고 했다. “어째 이러오? 또 이전처럼 나를 함정에 빠뜨리자고 이러오? 어림도 없어. 내가 함정에 빠진다고 흥수가 서기로 될 거 같소.” 상순이 쌀쌀하게 말하면서 붙잡힌 팔을 홱 뿌리쳤다. 허나 춘실은 울상을 지으면서 애원했다. “상순아, 야, 이 놈 새끼야. 너무 청백한 것처럼 놀지 말라. 넌 사람이 아니야? 감정이 없는 돌부처야? 난 네가 명옥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거 다 안다. 또 나를 사랑하는 것도 안다. 어찌 감정을 속이고 살아야 하니?” 상순은 자기 약점이라고 할까 아픈 데를 푹 찌른 그 한마디 말에 정신방선이 와그르르 무너지는 감을 느꼈다. 그는 몸이 달아 자기에게 안겨오는 춘실을 꽉 껴안았다. 야드르르한 이파리가 뾰족뾰족 돋아나는 버드나무 가지들이 그들의 머리 우에서 봄바람에 하느작거렸다. 이윽고 제 정신을 차린 상순은 껴안았던 춘실을 훌 풀어놓으면서 중얼거렸다. “안 돼, 우린 합법적인 부부가 아니야. 난 어려서 셈이 없어 널 임신시킨 거야. 절대 사랑한 거 아니야. 난 한평생 너에게 미안할 뿐이다. 이젠 모든 게 끝났어. 무슨 사랑이고 바람이고? 난 당원간부야. 내 인생에 다시는 남의 유부녀를 다치지 않을 거야. 모든 건 무덤으로 가지고 가자.” 상순은 해가 뉘엿뉘엿 져가는 버드나무숲 속에 춘실을 혼자 남겨두고 성큼성큼 조개덕으로 떠나갔다. 사랑의 시련을 이겨낸 상순은 버드나무 숲속을 빠져 나오자 홀가분한 감을 느꼈다. 허나 인차 애석함이 물결쳐오는 감을 어찌 할 수 없어 땅이 꺼지게 한숨을 내쉬었다. 실로 정치투쟁의 시련 못지 않게 사랑이 시련도 이겨내기 쉽지 않은 것이었다. 춘실은 설레는 버드나무에 몸을 맡긴 채 오도카니 서서 눈물이 글썽한 눈으로 멀어져가는 상순의 너부죽한 잔등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이윽고 그녀는 가냘픈 어깨를 들먹이면서 허연 머리 수건으로 두 볼을 타고 줄 끊어진 구술처럼 줄줄 흘러내리는 뜨거운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그녀의 머리 위로 빨간 잠자리가 날개를 하느작거리면서 하늘하늘 날아예고 있었다.                               (지금까지 여러분께서는 김장혁 작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 제5권까지 읽었습니다. 이제껏 저의 대하소설 향연을 음미한 여러분께 경의를 드립니다.        이제부터 김장혁 작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 제6권이 시작됩니다.)                   김장혁 작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                                                                                                                  제6권                       제26장 폭란                                1. 폭풍우 전야       황금물결이 출렁이는 가을이 왔다. 이태동안 사원들이 애쓰면서 멍지뫼산 앞에 새 논을 푼 보람으로 사원들은 이전보다 쌀 고생을 덜하게 되어 가을걷이에 신바람이 났다.       병완은 손자가 모는 소수레에 앉아 흰 수염을 흩날리면서 풍년 가을을 하는 사원들을 바라보면서 밭고랑 같은 주름살이 잡힌 얼굴에 춘풍이 넘실거렸다. “참 좋구나. 올해는 풍작이 들었구나. 허허허.” 병완은 수레를 멈추게 하고 머리를 숙인 벼이삭들이 넘실거리는 멍지뫼산 앞의 산종 논을 바라보았다. “모래밭이어서 벼농사가 될가 근심했댔는데 괜찮구나. 올해는 산종을 했지만 명년에는 둼을 많이 내고 산종보다 줄이 가쯘하게 벼모를 꽂게 해라.” “예. 할아버지, 과수원에 가 보겠습둥?” “그래, 그래.” 상순은 소수레를 돌려 칼산과 패랑산 사이에 차린 과수원으로 향했다. 상순은 할아버지가 지팽이를 짚고 여기까지 벼농사 구경하러 오려는 것을 말리면서 수레에 모시고 왔던 것이다. 세월이 무서웠다. 호랑이도 단매에 때려눕힌 할아버지가 이젠 허리도 구부정하고 걸음걸이도 점점 못해가는 모습을 보고 마음이 아팠다. 그리하여 명옥과 함께 종종 닭을 잡아 고아 할아버지에게 드리라고 웃새집에 올려 가군 했다. 아버지를 여의고 할아버지를 모시는 상길 부부는 효성을 다해 극진히 대접했다. 그간 후할머니마저 세상을 떠서 상길은 할아버지가 외로워 할 까봐 정신적으로도 위안될까 해 옛날 고향에서 살던 얘기랑 들려주었다. 수레가 덜커덕거리면서 어느 덧 새로 가꾼 대대 과수원에 이르렀다. 아직 애어린 과수나무들이 누런 이파리를 나풀거리면서 돌로 쌓은 다락밭에 서 있었다. 그 사과배묘목은 상순이 몇몇 사원들을 데리고 사과배종수가 있는 로투구진 소기촌에 가서 최령감에게서 가져다 심은 것이었다. 병완은 방불히 누런 사과배가 주렁주렁 달린 과수나무들을 보는 상 싶었다. “허허허. 이제 5, 6년 있으면 그럴듯한 과수원이 되겠구나. 그때면 우리 대대 사원들이 조선 고향에서 먹던 배 맛을 보겠구나. 우리 조선에서는 북청에 사과배가 많이 난다더구나. 그것도 조선의 위대한 수령 김일성 주석께서 지시한대로 함경북도 북청 땅에 사과를 많이 심었는데 해마다 사과풍작이 든다고 하더구나. 이제 우리 대대 과수원에서 조선 고향보다 못지 않은 사과배가 주렁주렁 달리겠구나.” “예. 할아버지, 오래오래 앉으셔서 꼭 우리 과수원 사과배를 맛 보셔야 합니다.” 손자의 말에 병완은 기침을 쿨룩쿨룩 하더니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내 이만 살았으면 더 바랄게 뭐냐? 아들 셋이나 앞세우고 더 살아 뭘 하겠느냐? 이젠 네가 나를 대신해 우리 대대 사원들을 배불리 먹고 살게 하니까. 한시름이 놓인다. 이젠 죽어도 한이 없을 거 같아.” 병완은 버릇처럼 곰방대에 담배를 재우려다가 생강같이 마른 손을 거두었다. “아차, 가을에 야산에서 담배를 피우다가 경 치겠다.” 병완은 바싹 마른 나무이파리들에 불이라도 달릴까봐 그만 두었다. 그는 과수원을 둘러보다가 상순을 돌아보더니 곰방대로 과수원둘레를 동서북으로 둥그렇게 돌아간 칼산과 패용천산 뒤의 산마루를 가리켰다. “상순아, 저기 산마루 길을 따라 돌아가면서 길 양옆에 비술나무를 두줄로 쭉 심어 놓았으면 좋겠구나.” “예. 그거 정말 좋은 생각입니다.” “이전에 대약진 때 가물어서 얼마나 고생했니? 사원들과 소들이 무더운 여름에 나무그늘도 없어 더위를 먹고 마구 쓰러지지 않았니? 밭머리에 나무그늘도 있으면 얼마나 좋니? 그리고 이담 비술나무가 크면 구불렁한 비술나무를 드문드문 베여다가 가대기랑 농쟁기를 만들면 얼마나 좋겠느냐?” 상순은 연신 머리를 끄덕였다. “예- 아무튼 할아버지께선 목수이셔서 생각이 넓으십니다.” 병완은 덜컥거리는 수레에 앉아서도 집 식구들의 근심을 했다. “은숙이랑 돌아왔다니 시름놓았다. 그 놈 계집애 어쩜 조선으로 달아날 궁리를 다 했니? 정신 있니? 제 어시들을 다 잡아 먹고 혼자 잘 살아보려고? 망할년의 계집애. 흥!” 병완은 욕설을 하고 나서 상순을 보고 “소수레를 세워라.”라고 부탁했다. 이윽고 병완은 수레에서 내리더니 칼산과 패랑산 사이 골짜기를 두루 살펴보더니 양지바른 언덕아래 평평한 곳을 지팽이로 가리켰다. “상순아, 저기 저 곳을 봐라. 저 둔덕아래에 과수원 보초막을 지으면 좋을 거 같아. 저 곳은 칼산과 패랑산 중간 골짜기에 있기에 두 산을 다 살피기에 안성 맞춤한 보초막자리야.” “예. 정말 하늘이 내린 보초막자리입니다.” 그들 조손 두 사람은 해가 뉘엿뉘엿 져가는 것도 잊고 함흥대대를 지상낙원으로 건설할 웅대한 설계도를 그려갔다. 해가 서산에 져서야 상순은 수레에 할아버지를 모시고 돌아왔다. 상순이 저녁 식사 후에 토성안 대대 사무실에 나갔을 때였다. 흥수가 편지봉투를 사무상에 휙 뿌리면서 야단쳤다. “조선 특무한테서 또 편지 왔어.” “누구 편지요?” “김인섭한테서 왔소.” “뭐? 아즈바이한테서 왔다구?” 상순은 부랴부랴 편지봉투를 보다가 흥수를 흘겨보았다. “자네 남의 편지를 뜯어보지 않았소?” 흥수는 말상을 외면하면서 “모르고 그랬어.” 하고 대충 대답했다. 상순은 편지봉투를 뜯어 전등불 밑에 가지고 가서 단숨에 읽어 내려갔다.   보고 싶은 병완 큰아버지, 그간 건강한 몸으로 잘 계십니까? 세 자식을 앞세우고 고통이 많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칠 형님은 우리 조선인민과 중국인민의 이익을 위해 몸 바쳐 싸운 장령입니다. 나는 개인적으로 대장부답고 장군다운 성칠 형님을 우러러 따랐고 존경해왔습니다. 정말 중조 인민들에게 미안하지 않은 훌륭한 군인입니다. 그런 열사 아드님을 둔 것으로 하여 큰아버지는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러움도 없이 자호 감을 느끼리라고 믿습니다. 큰아버지는 고향 명천 적후에서 경찰국을 무너지게 만들었고 군사요충지의 교통교를 무너지게 놓으면서 일본 놈들과 지혜롭게 싸워온 로 항일투사입니다. 그리고 핍박에 의해 고향을 떠나 우리 함흥 촌에 들어와 자손들과 마을 사람들을 이끌어 일제와 그 주구들과 싸웠고 항일유격대에 쌀을 지원하면서 항일투쟁을 지원했습니다. 해방 후에도 중국 공산당의 영도아래 상순이랑 상길이랑 자손들을 데리고 토지개혁을 해 지주를 청산하고 가난한 빈고농민들에게 토지를 나눠주었습니다. 큰아버지는 함흥 촌 인민들을 영도해 토비를 숙청하고 국민당 잔여세력과 지주무장과의 투쟁을 했고 사회주의 새 농촌을 건설하는데 한몫을 톡톡히 해왔습니다. 참말로 큰아버지가 걸어온 인생길은 조선족이민사의 력사적인 축도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조선족인민들은 조선에서 고생하던 우리 조선족 빈고농민들이 간도에 들어와 황무지를 개간하고 일본 놈들과 당지 지주와 싸우고 사회주의 혁명과 건설을 해왔습니다. 큰아버지, 오래오래 앉으셔서 상순이랑 상길이랑 함흥촌 백성들이 사회주의 한길에서 새 농촌을 건설하고 부유하게 사는 그 날을 지켜 봐주십시오. 전도가 유망한 상순아, 그간 넌 공안국 국장 벼슬도 버리고 함흥촌에 돌아와 당 지부 서기를 맡고 마을 사람들을 이끌어 사회주의 새 농촌 건설을 잘 하고 있다는 말도 진달래아주머니한테서 듣고 알았다. 효성이 지극한 너의 마음도 내가 다 안다. 함흥 촌에 돌아와 조부모와 부모에게 효성을 하면서 사회주의 새 농촌을 건설하려는 너 효성과 혁명성을 나는 아주 높이 평가하고 싶다. 자기 부모도 온전히 모시지 않는 불효자식이 어찌 군중들을 위해 일할 수 있겠느냐? 아무튼 네가 수고가 많다. 지금도 나는 항일투쟁의 어려운 나날에 네가 할아버지와 아버지와 함께 어두운 밤에 쌀수레를 몰고 항일유격대를 찾아오다가 멍지메 산 앞에서 우리와 만나던 일이며 상길이랑 상우랑 함께 쌀수레를 몰고 수림에 나타나던 일이며, 백두산 밀림에 들어와 나와 성칠형님에게서 권술을 배우고 할아버지와 아버지와 함께 밀림에 통나무집을 지어주고 형내랑 함께 약이랑 항일유격대에 가져다 주던 일이며, 토비숙청에서 한몫을 톡톡히 하던 네 모습을 보는 상 싶구나. 그런데 들을라니 흥수라는지 하는 진상을 잘 모르는 애들이 진달래랑 은녀랑 심지어 나까지 조선특무라고 몰아댄다니 참말 답답하구나. 조상들이 대대로 살아온 조선과 고향을 위해 목숨 바쳐 일본 놈들과 싸우다가 조선에 나온 우리가 어찌 조선특무냐? 지금 중조 두 나라는 피로써 맺어진 전통적인 친선을 아주 귀중히 여기고 대대로 전해내려가려고 정성을 다하고 있다. 중조 두 나라는 형제국가인데 흥수랑 무슨 특무고 뭐고 하면서 떠들게 있느냐? 그런 행위는 피로써 맺어진 중조 친선에 먹칠을 하는 불량한 행위로서 중조 인민들의 질책을 받아야 하며 제지해야 한다. 진달래 대대장은 항일투사야. 남조선특무 김용천을 나포할 때도 듣자니 너희를 협조했다더구나. 그런데 어찌 조선특무로 몰아 함흥대대에서 살지 못하고 조선에 도망쳐 오게 한단 말이냐? 더구나 열사 성칠 형님의 친척이라고 너네 일가까지 조선특무라고 마구 몰아대는 것은 하늘이 용납하지 못할 착오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용천 대장도 이전에는 항일투사였기에 그의 아들 경주를 남조선특무라고 마구 몰아대는 것은 잘못이다. 경주는 어려서 자기 아버지 얼굴을 보았을 뿐인데 어찌 그가 아버지 대신 특무 질을 했다고 억지로 특무로 몰아 투쟁한단 말인가? 특무 아버지와 아들은 계선을 똑똑히 나눠 투쟁해야 한다. 물론 남조선특무의 아들에 대해 경각성을 높여 현실표현을 잘 관찰하고 감독할 필요는 있지만 과도하게 근거도 없이 특무로 몰아대는 것은 잘 못이다. 지금 진달래는 군당위원회에서 여성동맹위원회 위원장으로 되었다. 은녀도 고향에서 여성동맹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사업하고 있다. 학준 동생은 김일성종합대학을 졸업하고 내가 있던 군에 돌아와 중학교 교장사업을 하고 있다. 나는 군당위원회 위원장으로 사업하다가 군부대로 돌아가 서부전선 모 포병부대로 나가게 됐다. 떠나기 전에 나는 도당위원회에 제기해 함흥대대에서 이른바 조선특무를 투쟁하는 운동을 확대하는 폐단을 얘기했다. 꼭 타당한 처리가 있으리라고 믿는다. 상순아, 어떠한 시련이 오더라도 너는 꼭 냉정하게 매사를 처리해야 한다. 명석한 정치두뇌로 매사를 분석한 후 기본 원칙과 양심을 어기지 말고 인민의 이익을 보호하면서 한 발작 한 발작 온당하게 나가야 한다. 모든 시련과 곡절, 폭란 앞에서 굳세게 살리라 믿는다. 중국에 있는 친척 여러분 안녕히 계십시오. 아차 잊었구먼요. 오늘은 연변조선족자치주 성립 14주년이 되는 경사스러운 날이구먼요. 그 얼마나 많은 우리 조선족 선열들의 피로 바꿔온 연변조선족자치주인가요? 우리 민족은 중국 대지에 뿌리를 깊이 내리고 굳세게 살아나가야 하겠습니다. 언제 다시 만나 그간 회포를 나누겠는지요? 그날까지 친척들과 함흥촌 여러분 안녕히 계십시오. 군례! 조선인민군 노전사 김인섭 1966년 9월 3일.   흥수는 씩씩거리면서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당신들은 한 집안 친척이니까. 숙질간이 아니고 뭐요? 한 편이 돼서 서로 감싸고 도는 걸 눈꼴 사나와 보기도 싫어.” 상순은 흥수를 쏘아보면서 말했다. “흥수, 계급투쟁을 잊지 않고 잘 하겠으면 지주나 부농, 국민당 잔여세력과나 싸우오. 투쟁방향을 절대 잊지 말게. 쩍하면 왜 우리 할아버지나 나하고 투쟁하려고 하오? 우린 다 공산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분투하는 당원들이오. 당원들끼리 단결할 대신 물고 뜯어서야 되오?” 그러나 흥수는 걸상에 물앉아 담배쌈지를 꺼내 담배를 말면서 피씩 쓴 웃음을 지었다. “지금 지주나 부농들이 문제요? 그 놈들은 죽은 듯이 가만있는데.” “그래 이 마을을 개척한 우리 집안이 문제요? 우리 당원간부가 문제요?” “그렇소. 당내 투쟁이 더 치열하단 말이오.” 상순은 말을 시작한 바 하고는 시비를 따지려고 들었다. “우리 당원들끼리 싸우면 좋아 하는 게 누구요? 결국 계급의 적들이 좋아 하지 않겠소?” 그러나 흥수는 담배 연기를 후 내뿜으면서 대수로워 하지 않았다. “만약 당신이 내 서기 자리가 욕심나면 내주겠소.” 상순의 뜻밖의 말에 흥수는 상순의 얼굴을 힐끔 곁눈질해 보았다. 그는 엄숙한 표정을 훔쳐보면서 정말인가 아니면 속뽑이를 하는가를 시탐하려는 것 같았다. 말하지는 않아도 “정말 물러나겠소?”라고 묻는 상 싶었다. 상순은 분명히 말했다. “올해까지 과수원도 다 차려놓았고 멍지뫼산 앞에 논도 다 풀어놓았소. 올 가을에 벼를 거둬들이면 사원들이 배를 곯을 것 같지 않소. 지난해 토지를 개인에게 떼주어 농사를 지었기에 풍작을 거두지 않았소? 이전에는 모두 보리 고개도 넘기기 전에 쌀이 떨어져 죽물도 온전히 먹지 못하지 않았소? 그런데 올해는 이제야 묵은 벼를 정미소에 가져다 찧는 집도 있소. 물레방아도 저 앞 체전에 놓았으니까 발마선이나 도리깨로 벼 탈곡을 하지 않아도 될 거 같소. 그러니 난 우리 마을을 위해 해놓을 일을 이젠 다 한 거 같소. 누가 당지부 서기를 하든지 문제 없을 거 같소.” “안 된다! 절대 안 돼!” 상순과 흥수가 고함소리가 나는 문 께를 돌아보니 병완이 지팽이를 짚고 들어오는 것이었다. “할아버지, 흥수가 서기를 하더라도 우리 마을만 잘 건설하면 나는 서기를 내놓아도 아깝지 않겠습니다.‘ 허나 병완은 지팡이로 사무실 널판을 탕탕 치며 호통쳤다. “당내 투쟁에 혈안이 된 흥수에게 서기를 내줘서는 안 된다. 저 애게 서기를 맡기면 날마다 투쟁대회만 하다나면 언제 마을을 건설한다고 그러니?” 흥수도 지려고 하지 않았다. “아바이, 말씀을 주의하시오. 이 마을이 그래 당신네 조손이 아니면 돌아가지 않을 거 같습니까?” 병완은 주름살이 죽죽 간 목에 지렁이 같은 피 줄을 세우면서 호통쳤다. “얘게 서기를 시켰다간 한지에 방아를 걸겠다.” “뭐라고?!” 흥수는 버릇없이 병완에게 외까풀 뱁새눈으로 가로 쏘아보았다. 그러자 상순은 흥수를 마주 쏘아보며 양보하지 않았다. “서기 자리를 탐내지도 말라. 네가 하는 꼴을 보니 서기 자리를 내놓을 생각이 없어졌다.” 흥수는 꼴이 보기 싫다는 듯이 “흥!” 하고 코 방귀를 뀌더니 휑 바깥으로 나가 버렸다. 병완은 상순을 나무랐다. “얘야, 왜 이렇게 약하게 나오느냐? 그까짓 파리 새끼 무서워 장을 담그지 못하겠느냐?” 상순은 머리를 숙이었다. “할아버지, 똥이 무서워 피합니까? 더러워 피하지.” 병완은 이가 빠져 혀가 들여다보이는 입으로 똑똑히 말했다. “정치라는 건 무원칙하게 물러서는 게 상수가 아니야. 청렴하고 벼슬을 중히 여기지 않는 것도 좋지만 원칙을 지켜야 한다. 흥수에게 지부서기를 맡겨서는 우리 마을에 날마다 투쟁대회나 열고 말썽이 생기게 될 거다. 어떻게 그런 지부서기 밑에서 사원들이 마음 놓고 살 수 있겠니?” 상순은 한숨을 후 내쉬었다. “할아버지, 내가 잘 못 생각했습니다. 흥수와 다투기 너무 피로해 그만두려고 했습니다. 사원들의 평안을 념두에 두지 못해 미안합니다.” “그래, 이제야 내 손자답구나. 손을 싹 씻고 나앉아서 자기 혼자 편안히 살아서야 어디 공산당원 간부냐? 아무리 힘들어도 사원군중들을 위해 강하게 살아야 한다. 알만 하지?” “예. 사원군중들부터 먼저 생각하는 할아버지 깊은 마음을 이제야 알만 합니다. 꼭 명심하겠습니다.” 병완은 한숨을 후 내쉬였다. "은숙이 돌아왔다니 시름놓게 됐다. 계집애 조선에 가면 덕대 돈을 번다더니?" 상순은 허구픈 웃음을 지었다. "그 놈 계집애 조선에 가는 바람에 흥수한테 물리웠잖고 뭡니까? 저 두만강 변에 있는 학준이네 집에 가서 있으면서 어떻게 호미를 버리고 노동자로 될가 했답니다. 그런데 겨우 농업중학교를 졸업하구 어데 가서 취직하겠습니까? 여기 저기 어떨까 다니다가 소외감에 서러워서 되돌아왔답니다." "그래, 두만강 저 쪽에서 우리 보다 더 잘 살더라니?" "예. 조선에서는 우리보다 확실히 더 잘 살더랍니다. 그러니깐 대학생들도 밤을 자고나면 달아난다 하잖습니까?" "조선 인민들은 위대한 인민들이야. 물론 쏘련과 중국 두 사회주의 대국의 원조를 받기도 했지. 조선로동당의 영명한 영도아래 전쟁 후 잿더미 위에 사회주의 새 마을이랑 건설하고 잘 살잖니?" "예. 우리 여기 잘 살기만 하면 은숙이랑 정옥이랑 자꾸 달아나지 않겠는데." 병완과 상순은 대대 사무실에서 인섭에게서 온 편지로, 함흥대대를 건설할 계획으로 한참이나 얘기를 나우었다. 나중에 병완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상순아, 내 부탁할 말이 있다.” “예. 얘기하십시오.‘ 상순은 바로 앉으면서 할아버지 얼굴을 바라보았다. 상순은 두툼한 입술을 무겁게 열었다. “지금 무슨 ‘문화대혁명’을 한다고 하는데 심상치 않구나. 어떤 일이 있어도 당과 인민을 믿고 당과 백성을 마음속에 품고 양심적으로 처사하고 일하면 된다.” “명심하겠습니다.” 상순은 할아버지인 것도 있지만 더욱이 로당원의 민감성과 드높은 각오를 존경했다. 그는 할아버지를 집에까지 부축해 모셔간 후에야 조개덕으로 내리 걸었다. 그가 숱한 한족 묘지들 속을 지나갈 때었다. 희미한 달빛아래 범이 새끼 칠 지경으로 풀이 한 키도 넘게 자란 한족묘지에서 매미들이 찌르륵찌르륵 울어 꽤나 무시무시했다. 그런데 어둠속에서 보니 웬 검은 그림자가 달빛이 비추는 백양나무 우에 바라 올라가는 것이었다. “뭐 하려는 거야?” 상순은 호기심이 부쩍 동했다. “혹시 계급의 적이?” 순간 상순은 경각성을 높여 달빛을 빌어 백양나무 위를 뚫어지게 올려다보았다. 저게 뭔가? 백양나무 가다리까지 올라간 검은 그림자는 무얼 꿈지럭 거리더니 바줄을 나무아지에 거는 것이었다. “혹시 목을 매려고 저러는 게 아니야?” 진짜 바 줄로 올가미를 치는 것 같더니 목에 걸려고 서두르는 것이었다. “누구야?!” “어!” 퍽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 “뭐 하는 거야? 어서 내리지 못하겠는가?” 그러나 검은 그림자는 내릴 궁리를 하지 않고 목에 올가미를 거는 것이었다. 털렁! 검은 그림자는 올가미를 건채 둥둥 달렸다. “아니, 저 사람이.” 상순은 황급히 백양나무에 올라갔다. 그런데 나무지가 툭 끊어지는 바람에 상순은 검은 그림자와 함께 땅바닥에 퉁 떨어졌다. 상순은 검은 그림자를 안아 일으키고 달빛을 빌어 찬찬히 보다가 깜짝 놀랐다. “아니, 이게 아주바이 아닙니까?!” 상순은 안타까워 덕성을 흔들면서 애타게 부르짖었다. 이윽고 덕성은 길게 숨을 들이 그었다가 후 하고 한숨을 토해냈다. “아니, 삼촌, 어떻게 돼 이렇게 짧은 생각을 다 합니까?” 이윽고 천천히 눈을 뜬 덕성은 어둠속에서 사위를 둘러보더니 “오, 자네가 어떻게…” 하고는 인차 눈을 스르르 감았다. “왜 이렇게 못난 짓을 합니까?” 점차 정신이 들어가는 덕성은 맥없이 상순의 팔을 잡고 나직이 진정을 토로했다. “난, 난 이 세상에서 살, 살 멋이 없네.” 상순은 황급히 식칼을 빼앗아냈다. “무슨 소리를 합니까? 우린 삼촌을 기시한 적이 없습니다. 왜 이렇게 짧은 생각을 했습니까?” 덕성은 맥없이 일어나 앉더니 한숨을 후 내쉬었다. “삼촌? 우리 마을 사람들이 자네처럼 나를 삼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소? 우린 필경 한 고향에서 쪽박을 차고 이 함흥 촌에 와서 이 땅을 개척했네. 그리고 일본 놈들을 몰아내고 이 땅을 국민당군의 손아귀에 빼앗기지 않게 보위하려고 난 아들 둘이나 잃었네. 칠백과 칠석이 다 조선전쟁에 나가 희생됐지 않았어? 칠백과 칠석은 다 항일유격대에서 중대장과 소대장을 했고 항미원조 전쟁에서 조선인민군 대대장을 했네. 내가 무슨 죄가 있다고 조선 특무라고 투쟁하느냐? 또 용천이가 한국특무이었다고 나를 남조선 특무라고 몰아서 투쟁해서야 되느냐?” 그 말에 상순은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확실히 억울하게 됐소. 흥수랑 제 정신이 아니오. 흥수가 남조선태생이지만 난 그를 남조선특무라고 몰아준 적도 없습니다. 무고한 사람을 자꾸 무니깐. 어쩌오? 정말 답답하오. 우린 아즈바이와 흥수가 남조선 태생이지만 남조선 특무로 생각한 적도 없습니다. 절대 좁은 생각을 하지 말고 용기를 내서 살아가야 합니다. 언젠가는 억울한 루명을 벗을 날이 있을 겁니다.” 그러나 덕성은 픽 코웃음을 쳤다. “아니, 언제 훤한 날이 온다고 그래? 날 왜 죽게 놔두지 않았는가?” 상순은 덕성의 두 손을 꽉 잡았다. “무슨 말씀을 이렇게 합니까? 경주를 봐서라도 살아야 합니다. 그 어린 놈이 남조선 특무로 몰리우면서도 꿋꿋이 사는데 왜 살지 못합니까? 죽을 용기가 있으면 왜 목숨을 내걸고 억세게 역경을 이기고 살아갈 용기는 없습니까?” 덕성은 한숨을 땅이 꺼지게 후 내쉬었다. 태평강 가의 버드나무들이 쉼 없이 써늘한 가을바람에 흐느적거렸다.
147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95) 댓글:  조회:1073  추천:0  2018-03-27
                                 7. 전염병        명옥이 순자와 성숙을 데리고 집의 살구를 다 뜯어 장마당에 가져다 팔았는데도 신자의 입원치료비는 엄청 부족했다. 궁리 끝에 상순은 집의 검둥이를 팔기로 했다.       덕돌은 검은 바탕에 흰 반점이 간 검둥이를 참말 귀여워했다.       그가 학교를 갔다 올 때면 저 멀리에서부터 보고 꼬리를 흔들면서 뛰어와 반겨 맞곤 했다. 그 놈은 덕돌의 몸에 앞발을 쳐들고 매달리는가 하면 “끼깅” 하고 소리치면서 주둥이로 바지 가랭이를 들추면서 응석을 부리기도 했다. 덕돌이 고기를 잡으러 갈 때면 늘 앞에서 물도랑 옆의 숲에 코를 대고 씩씩 냄새를 맡으면서 달아다녔고 소 방목을 갈 때에도 항상 그림자처럼 따라다니곤 했다. 덕돌은 검둥이가 어찌나 귀여운지 손으로 대가리를 쓰다듬어주고 끌어안고 그 놈의 볼에 볼을 비비기도 했다. 지어 어떤 때에는 검둥이와 누룽지를 나눠 먹기도 하고 이불안에서 검둥이를 안고 자기까지도 하여 어머니의 욕을 먹을 때도 있었다. 그런데 어느 하루, 아버지가 돈 19원을 받고 검둥이의 목에 올가미를 걸어 나무대기에 감아 개장사군에게 넘겨주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때까지도 검둥이는 자기를 팔아먹는다는 것도 눈치 채지 못했다. “검둥이야, 넌 팔려 가면 죽는다, 죽어. 저 개장사군이 너를 잡아먹자고 끌고 가련다.” 그러나 검둥이는 어안이 벙벙해 아버지를 주인이라고 믿고 올가미를 걸 때까지도 가만히 앉아 있지 않겠는가. “안 돼, 내 검둥이를 가져가지 못한다!” 덕돌은 고함치면서 끌려가는 검둥이를 끌어안고 발버둥질을 쳤다. 그러나 어머니는 덕돌을 마구 뜯어내 꽉 붙잡았다. “얘야, 저 검둥이와 넷째누나 중에 누가 더 곱니?” “당연히 넷째누나 더 곱지.” “그럼 됐다. 저 검둥이를 팔아 넷째누나 병을 치료해 집으로 데려와야지. 이젠 그만 떼를 써라.” 그러나 덕돌은 계속 발버둥질을 치며 떼를 썼다. “안 된다, 안 돼! 난 넷째누나와 검둥이 다 함께 살아야 해. 안 돼. 어~엉, 엉.” 그제야 뒤늦게 상서롭지 못한 것을 눈치 챈 검둥이는 올가미를 이발로 깨물어 끊으려고 애쓰면서 “끼깅” 하고 울부짖기 시작했다. 검둥이는 왕왕 울부짖으면서 개장사군에게 덮쳐들려고 했다. 허나 목을 조인 올가미를 감은 나무대기가 길어 개장사군을 물 수 없었다. 그러자 검둥이는 덕돌에게 구원을 요구하는 애원에 찬 눈길을 보냈다. “끼깅—” 검둥이는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쳤다. 그러나 덕돌은 어머니에게 두 팔을 붙잡힌 채 발버둥질을 칠뿐 개장사군에게 끌려가면서 슬프게 울부짖는 검둥이를 구할 수 없었다. 덕돌은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었다. 검둥이는 개장사군에게 끌려가면서 구원을 요구하는 애원에 찬 눈길을 보내며 비명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그렇게 믿고 따르던 검둥이를 구해내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웠다. 검둥이에게 미안했다. 마음이 미여지는듯이 죄송스러웠다.       세상에 사노라면 검둥이처럼 주인에게 충성을 다 하던 자가 주인의 올가미에 걸려 팔려가거나 죽은 자가 수두룩하리라. 항전시기에도 그러했다.  자기가 살려고 형제와 겨레, 동지의 의리도 버리고 뒷잔등에 총을 놓은 자가 어디 한둘인가? 항일영웅 조상지도 반역자의 총에 뒷잔등을 맞고 쓰러졌다. 항일영웅 양정우도 반역자의 밀고로 일본 놈들에게 발각돼 장렬하게 싸우다가 희생되지 않았던가! 검둥이의 비극에서 믿던 도끼에 발등을 찍힌다는 속담의 철리를 뼈저리게 음미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돌다리도 두드려보면서 건너라고 하였는가 보다.       며칠 후에 덕돌이 집안에서 성욱과 함께 숙제공부를 할 때다. “넷째누나 왔다.” “뭐라고? 넷째누나 왔다고?” 덕돌과 성숙은 황급히 바깥으로 뛰어나갔다. 바깥에 나와 보니 넷째누나 신자가 아버지가 모는 수레에 앉아 내리지 않겠는가! “누나!” 덕돌은 두 팔을 벌리고 수레 위에서 내려오는 넷째누나한테 뛰어갔다. 성숙도 “신자야! 살아났구나.” 하고 뛰어갔다. 덕돌은 신자에게 안긴 채 성숙을 보고 “막내누나는 어째 넷째누나를 보고 ‘응, 응’ 하니?” 하고 종알거렸다. 성숙은 어색하게 웃었다. 신자가 대신 대답했다. “막내누나는 넷째누나보다 두 살 밖에 차나지 않는다. 괜찮다.” “그래?” 애들이 좋아하는 것을 보고 상순과 명옥은 잠시나마 덩달아 웃음꽃을 피웠다. 홍자는 뒤늦게 돌아와 신자를 보고 기뻐 야단쳤다. 그래도 홍자는 이전처럼 헛웃음을 웃지 않았다. 형내와 자준 영감의 약을 좀 쓴데다가 마을에 내려온 정규상의 치료를 받아 많이 나았던 것이다. 마을에는 또 폐염이 무섭게 돌아가면서 전염됐다. 함흥촌에서 제일 먼저 흥수네 막내딸 미선이가 앓아누웠다. 정규상은 흥수가 미웠지만 그의 딸애를 알심 들여 치료했다. 춘실이 찾아와 울며불며 하자 정규상은 두 말을 하지 않고 함흥촌에 올라갔다. 그가 흥수네 집에 가서 미선의 가슴에 청진기를 대고 가르릉거리는 소리를 들으면서 진찰해 보더니 깜짝 놀라했다. “이거 큰 일 났구먼.” 흥수는 청진기를 거두는 정규상의 손을 잡고 황급히 물었다. "무슨 급병에라도 걸렸시우?" 하고  “폐염에 걸렸구먼. 조금만 치료를 늦추면 이제 피를 토하고 목숨도 잃을 수도 있소.” 정규상의 나직한 말에 흥수는 뒤로 쿵덩 엉덩방아를 찧었다. 춘실은 덴겁한 소리를 질렀다. “아니, 폐염이라니?” 이윽고 정신을 차린 흥수는 정규상의 두 손을 꽉 잡고 애원했다. “내 막내딸을 구해주시우. 양, 닭이라도. 아니, 필요하면 소라도 잡아주겠다니께.” 정규상은 그때라고 요구조건을 들이댔다. “닭이나 소는 필요 없소. 난 밭머리에서 투쟁을 받는 게 생 질색이오.” 그러자 흥수는 머리를 조아렸다. “근심하지 말라니께. 함흥촌의 투쟁대회야 대대 당 지부 선전위원인 내가 주도하지.” 정규상이 청진기를 되 꺼내면서 흥수를 슬쩍 곁눈질해보았다. 항상 물에 빠진 개처럼 조개턱을 쳐들고 다니던 흥수 같지 않았다. 조개턱을 떨어뜨리고 눈을 내리깐 채 풀이 죽은 것이 아니겠는가. “이젠 상순 서기를 작작 괴롭히오. 우린 아버지 세대부터 각근한 세교요. 내 보건대 상순 서기와 그의 할아버지는 이 마을을 건설하려고 20년대 초부터 얼마나 고생했소. 지금 사원군중들을 배불리 먹고 살게 하려고 얼마나 속을 태우고 있소? 당신도 상순 서기가 입당시켰다고 들었소. 그런데 어찌 자기를 길러 준 은인과 그럴 수 있단 말이오?” “잉(양), 알았시우. 말이 길면 구리다니께. 알아서 할 터이니까. 미선이만 살려달랑께(달라는데).” “네깐 놈이 정치를 뭘 알아서 그래? 그리 정치를 잘 했으면 우파 모자를 쓰고 이런 시골에 쫓겨 내려 왔겠어?” 흥수는 속으로는 정규상을 욕면서도 겉으로는 수긍하는 척 했다. “예. 부탁드리니까. 꼭 합심해 이 마을을 살기 좋은 고장으로 만들어 보오. 미선은 잘 치료해보지.” 정규상은 미선의 치료를 내걸고 묘한 정치 흥정을 끝냈다. 그날부터 며칠 동안 정규상이 왕진하면서 주사를 놓았더니 미선은 기침을 깇지도 않고 페병도 인차 나아져갔다. 그때부터 흥수의 태도는 좀 변하였다. 쌀 공작대가 찾아와 생산대 쌀을 더 걷어가려고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쌀독을 뒤지었다. 흥수는 쌀공작대 미워서 겨죽을 끓여 먹였지만 정규상이 오면 꼭꼭 밀가루를 얻어서 밀국수나 물만두를 빚어 대접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흥수는 후에 마을 사람들이 정규상을 우파라고 깔보거나 투쟁하자면  이런 저런 구실을 대면서 반대해 나섰다. 그러자 정규상은 의사재간으로 흥수와 같은 정치마귀의 손아귀에서 숱한 억울한 간부들을 보호면서 어려운 정치시련을 이겨내려고 마음먹었다. 그는 상순의 방조를 받아 식당자리를 수리하고 구들을 놓은 후 이사해 나갔다. 그는 무슨 일이 있으면 꼭 병완과 상순을 찾아와 의논하곤 했다. 정규상이 찾아와 온 마을에 전염병이 돌기 시작한다는 말을 하자 상순은 한참 궁리하더니 과단성 있게 결단을 내렸다. “토성 안 대대 사무실 옆에 대대 위생 소를 앉히기요. 동생이 위생소 소장을 맡고 이번 폐염이란 전염병을 전승하기요.” 정규상은 기뻐하면서도 적이 근심어린 표정을 지었다. 상순이 피뜩 보니 그의 얼굴에 검은 그늘이 비껴 있지 않겠는가. “어째? 뭐 근심되는 일 있소?” 상순은 눈을 치켜뜨면서 물었다. 그러자 정규상은 근심을 털어놓았다. “ 위생소 소장을 우파 맡아도 되겠소? 김서기 말을 듣지 않겠소? 괜히 흥수랑 또 뭐라고 형님을 헐뜯을까 봐 그러오.” 상순은 개의치 않았다. “괜찮소. 대담히 해보오. 동생은 우파 아니오. 내가 있는 한 근심하지 마오. 마을에 도는 전염병을 없애 버리지 못하면 빈농들의 생명이 위험하오. 황차 정 선생은 미선의 병까지 치료했으니 괜찮을 거요.” “그럼 손을 걷고 전염병을 치료해 보겠소.” 가을걷이가 끝나고 초겨울에 접어들면서 마을 길바닥에 널린 옥수수 대와 지푸라기에는 서리가 하얗게 내리었다. 그런데 어느 하루 성숙이 온 몸에 열이 나면서 기침을 쿨룩쿨룩 깇었다. “아니, 얘가 마가을비가 내리는 날에 신자 치료비를 만들자고 마른 도토리랑 솔씨랑 이고 장마당으로 다니다가 감기에 걸리지 않았는가?” 명옥은 당황해 구들에 쓰러지다 싶게 누워 있는 성숙을 안고 눈물을 줄줄 흘렸다. 상순은 성숙의 이마를 짚어보았다. “안 되겠소. 열이 후끈후끈한 게 큰일 나겠다.” 뒤이어 명옥을 보고 함지에 찬물을 퍼오라고 했다. “뭘 하자고?” “얘가 몸에 열이 나는데 찬 물로 씻어줘야겠소.” “뭐라오?” 명옥이 이마 살을 찌푸리며 상순을 쳐다보았다. 허나 상순은 성미가 성급해 재촉했다. “잔말 말구 찬 물 떠오라." 뒤이어 그는 명옥이 들어 온 찬물함지를 가리키면서 성숙을 재촉했다. "성숙아, 옷을 벗고 함지에 들어앉아라.” 성숙이 언감 아버지 말을 거역하겠는가? 그 애는 부끄러운 대로 인차 옷을 벗고 함지의 찬물에 들어섰다. “물에 앉아라. 앉아.” 상순은 성숙의 손을 잡아 함지에 억지로 앉히고는 찬물을 잔등이며 배에며 끼얹고 팔이랑 씻어주었다. “그래도 정의사한테 보이는 게 어떻소? 혹시 저 윗마을의 미선처럼 폐염에 걸린 건 아닌지?” “개뿔도 모르면서 작작 떠들어라!” 상순이 세귀눈을 부라리자 명옥은 찍 소리 못했다. 상순의 호통질에 막무가내로 연 며칠 몇 번씩 성숙을 함지에 들여 앉혀놓고 찬물로 온 몸을 씻어주었다. 그러나 열은 내리기는커녕 온몸이 점점 불덩이 같았다. (이러다간 성숙을 영자처럼 집에서 죽이겠다.) 명옥은 황급히 성숙을 업고 토성안집에 차린 대대 위생 소로 가서 정규상을 찾았다. “정 선생, 얘를 살려 주오.” “양?” 정규상은 자리에서 일어나 성숙을 받아 내리우면서 덴겁한 듯이 놀랐다. “애가 불덩이 같구먼.” 그는 청진기를 꺼내 성숙을 이리저리 진찰해보더니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아니, 왜 이제야 불렀소?” “무슨 병이오?” 정규상은 청진기를 거두면서 “감기는 감긴데 폐염으로 넘었구먼. 좀 늦추었더라면 애가 잘못 될 번했소.”라고 했다. 명옥은 눈물을 흘리면서 “정 선생, 얘를 살려 주오.”하고 간곡히 애원했다. 정규상은 바삐 성숙에게 주사를 놓은 후 중약을 준비하면서 말했다. “아주머니, 근심하지 마오. 며칠 치료하면 나을 게요.” 그제야 명옥은 눈물을 훔치면서 성숙의 불덩이 같은 얼굴을 매만졌다. 상순은 정규상을 볼 면목이 없었다. 정규상은 왕진을 왔다가 꼭 짚고 넘어가야 하겠다고 상순을 바깥으로 불러 조용히 말했다. “형님, 열을 빼려면 찬 물질을 하면 절대 안 되오. 좋은 의사 동생을 두고 왜 부르지 않고 그런 도깨비짓을 했소?” “자네 온 동네에 폐염이 돌아서 바람개비처럼 돌아치는데 찾기 미안해서 그랬네. 우리 애보다 폐염에 걸린 미선이랑 다른 애들을 구하라고 그랬소.” “야, 정말 형님도. 병 치료에는 시간이 생명이오. 이후에는 누가 앓으면 인차 알려주오.” 상순은 정규상의  두 손을 꽉 잡았다.  “고맙소. 동생, 온 마을에 도는 폐염을 무슨 수를 쓰든지 전승해야겠소. 온 마을에는 지금 전염병 공포가 살판치고 있단 말이오. 이러고서야 어찌 시름 놓고 일하겠소? 무슨 뾰족한 수가 없소?” 정규상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꼭 폐 염을 전승하기요. 지금 마을의 애들로부터 어른 쪽으로 올라가면서 폐염이 전염되고 있소. 쌀 고생 때문에 영양이 따라가지 못해 면역력이 떨어진 게 주요 원인이요. 형님이 사원들을 동원해 감자를 껍질 벗기지 말고 씻어 먹게 하오. 저 흔한 강냉이 대를 그저 소를 먹이지 말고 썰어서 가마에 푹 끓이라고 하오. 단백이 나오게 푹 끓인 물에 죽이나 밥을 지어 먹으라고 하오. 그러면 밤 맛과 죽 맛도 있는데다가 영양가도 높여 면역력을 높일 수 있소. 장기로 음식습관을 개변하면 폐 염을 예방하는데 효과가 있소. 이미 폐 염에 걸린 환자는 내가 책임지고 왕진하면서 치료해주겠소. 마을 사람들이 서로 내왕을 적게 하게 하는 게 좋소. 그래야 전염을 상대적으로 막을 수 있소. 투쟁대회 같은 회의를 작작 해야 하오.” “옳소. 그게 꿩 먹고 알 먹고 둥지 털어 불을 때는 격이오. 폐 염도 치료하고 투쟁대회도 작작 열면 겨우내 사원들과 간부들이 마음 놓고 살게 아니오.” 정규상은 자기 묘안이 서는 것을 마음속으로부터 기뻐했다. 정말 기적이 일어났다. 정규상에게서 연 며칠 주사를 몇 대씩 맞고 중약을 달여 먹였더니 폐 염에 걸렸던 애들이 열이 내리고 기침도 멎으면서 치료됐다. 마을 사람들은 집안에 들어박혀 옥수수 대를 우려낸 단 물에 죽이나 밥을 지어 먹으니 맛있다고 엄지를 내둘렀다. 한 둬달 정규상의 말대로 하니 다만 성근이가 계속 기침을 쿨룩쿨룩 할 뿐 전염 세는 수그러들었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정규상에게 엄지를 내둘렀다. 미선이랑 성숙이랑 앓던 애들의 병도 완전히 나아 밖에 나와 달아다니면서 눈을 쥐여 뿌리며 눈싸움을 하면서 놀았다. 애들이 달아다니면서 뛰노는 마을 길에 하얀 눈송이들이 춤을 추며 하늘하늘 내려앉으면서 춤추고 있었다. 강아지들도 애들과 함께 밤송이 같은 눈송이 내리는 속을 깡충깡충 뛰어 다니며 놀았다.                               8. 분권과 관용         어느 날, 덕돌의 눈앞에는 노란 배가 주렁주렁 달린 사과배를 방불히 눈으로 보는 상 싶었다. “그래, 큰어머니 보고 과수원에 가서 배를 따달라고 해야지.” 덕돌은 군침을 꼴깍 넘기면서 주먹을 쥐고 윗마을에 달려가 토성안집 큰어머니네 집 문 꼬리를 쥐여 당겼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덕돌은 몸까지 배배 탈면서 서적을 부리면서 졸라댔다. "어머니, 배를 먹고파 죽겠습니다. 빨리 과수원으로 가깁소.”  그러자 새금은 어처구니 없어했다. "얘, 덕돌아, 눈이 펑펑 쏟아지는 겨울에 사과 배라니? 겨울에는 추워서 배가 없다.”  “안 돼. 이전처럼 과수원에 가서 배를 뜯어줍소.” “이 떼꾼아, 겨울에 어데 가서 배를 뜯니?” “그래도 과수원에 가깁소. 과수원에는 노란 배가 다닥다닥 달렸구마.” 지새금은 동선이 조선으로 나간 후 작은집 덕돌 밖에 믿을게 없다고 생각하고 각별히 귀여워 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가을에 덕돌이 놀러만 오면 유서집 시형 상진이네 집에 가서 비난사정을 해 그 집 아들이 보초를 서는 과수원으로 덕돌을 데리고 가군 했다. 덕돌은 과수원에 가서 파란 잎 속에 주렁주렁 달린 사과 배랑 쪽지가 길쭉한 바가지 배를 보고 군침을 꼴깍 삼켰다. 새금은 덕돌이 먹고파 하는 배를 뚝 따서 내밀었다. “옜다, 먹어라.” 덕돌은 배를 사각사각 맛있게 먹으면서 쪽지가 길쭉한 배를 가리키면서 물었다. “큰어머니, 저건 무슨 배요?” 새금은 쪽지 달린 길죽한 배를 뜯어주었다. “이건 바가지 배야. 먹어.” 덕돌은 배를 받아 돌려가며 보면서 혀를 끌끌 찼다. "바가지배? 야, 이 많은 배를 몽땅 집에 가져다가 놓고 먹었으면 좋겠다.”  “근심하지 말라.” 새금은 버들광주리에 노란 배를 무루기 뜯어 담아 이면서 말했다. “이걸 몽땅 너를 줄게. 집에다 두고 먹어.”  덕돌은 실컷 먹고서도 숱한 배를 가지고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좋아서 어쩔 줄 몰랐다. 덕돌은 가을에 큰어머니를 따라가 배를 실컷 먹던 생각을 하면서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겨울에 노란 사과배를 내라고 야단쳤다. 순애 누나는 궁리 끝에 뒤 문을 열고 나가더니 까만 언 배를 바구니에 담아다가 주었다. 그러자 덕돌은 구들에 나누워 땔땔 굴면서 떼를 썼다. “안 된다, 안돼. 노란 바가지배를 달라- 으~ 응.” 새금은 순애한테 눈을 찔끔해 보였다.안 되겠다. "얘를 데리고 과수원에 가봐라.” 순애는 별수 없이 덕돌을 데리고 과수원으로 갔다. 가는 도중에 애들이 태평강 얼음판에서 썰매를 타면서 노는 것이 보였다. 순애는 눈 덮인 과수원의 벌거숭이 배나무들을 가리키면서 차근차근 말했다. “봐라, 나무 잎도 다 떨어지고 배가 없지? 눈이 오는 겨울에는 배 없다.” “어째 이러야? 이전에 큰어머니하구 함께 왔을 때는 배가 가득했는데.” 덕돌은 이상해 뒷덜미를 긁적거리었다. “겨울에는 추워서 배가 달리지 않는다.” “그래 배 나무 이파리는 다 어데 달아났소?” 순애는 눈 밑을 가리키면서 “저기 있다.” 하고 알려주었다. 그러자 덕돌은 눈 밑에 드러난 시꺼멓게 마른 배나무 이파리를 가리키면서 물었다. “그럼 배도 추워서 눈 밑에 숨어 자지 않을까?” 순애는 너무나도 어처구니없어 웃었다. 그녀는 덕돌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겨울엔 없다, 없어. 배나무 잎이 땅에 떨어진 걸 눈이 뒤덮어 놓은 거야. 호호호. 애도 정말.” “그게 이상하다. 나무 잎은 떨어져 땅 위에 있는데 배는 어째 땅 우에 떨어진게 없니?” “배는 사람들이 가을에 다 따가서 없지. 호호호.” 순애는 덕돌의 천진한 말에 코를 싸쥐고 웃었다. 덕돌은 별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뒤를 달았다. “누나, 그럼 언제 또 배를 먹을 수 있소?” “명년 가을에. 그러니까 백날 같은 게 세 번쯤 있어야 한다.” “그렇게 오래? 그때면 배가 하늘만 하오?” 덕돌은 두 팔을 벌려 뒤로 둥그렇게 그리면서 물었다. “응.” 덕돌은 눈이 동그래졌다. 돌아오는 길에 순애 누나는 덕돌을 되돌아보면서 썰매를 타는 애들을 가리키면서 물었다. “덕돌아, 너도 저 애들처럼 썰매나 타면서 놀겠니?”  “추운데 무슨 재미 있겠소?” 덕돌은 몸을 옹송그리면서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후에 지새금이 작은 집으로 놀러 내려왔다가 상순과 명옥 앞에서 덕돌이 겨울에 배를 뜯어내라고 떼를 쓰던 얘기를 해 모두들 배를 끌어안고 웃었다. 증조부 병완은 놀러 왔다가 윗방에서 그 말을 듣고 “허허허.” 하고 웃었다. “덕돌아, 이제 패용산과 칼산 골짜기에 새 과수원에 배나무를 심으면 배를 실컷 먹을 수 있을 게다.” 덕돌은 증조할아버지 무릎 우에 올라가 앉아 하얀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물었다. "노할아버지, 언제면 배를 먹을 수 있습니까?”   병완은 무릎 위의 덕돌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면서 “이제 오, 륙 년 기다리면 될 거야.”하고  몸을 좌우로 흔들었다. “5, 6년이면 몇 날이 있어야 됩니까?” “백날 같은 게 한 스무 번?” “그리 오래 기다려야 합니까?” “그래, 네가 중학교에 올라 갈 때면 배를 실컷 먹을 수 있다.” “야, 언제 중학교에 가겠니? 배를 실컷 먹게.” “하하하.” “호호호.” 모두들 덕돌이 우스워 웃음보를 터뜨렸다. 상순은 덕돌을 오라고 해 자기 무릎 우에 올려놓았다. “아버지, 나두 성욱이 털모자 같은 거 사주십시오. 귀 시립니다.” 이때 명옥이 정지에서 소리쳤다. “덕돌아, 여기 내려오라.” 덕돌은 오쫄 일어나 정지에 나가면서 소리쳤다. “엄마, 이전에 돈을 많이 벌어 성욱 거 같은 털모자를 사주겠다고 해놓고 어째 겨울이 돼도 사주지 않습니까?” “응, 그래. 엄마 꼭 사줄게.” 윗방에서 상순은 병완에게 정중하게 말했다. “할아버지, 흥수가 지부 서기를 하고 싶어 하는데 내놓을까 합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병완은 주름살이 밭고랑 같이 패인 얼굴에 못 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약한 소리를 하지도 말아.” 그러나 상순은 자기 생각을 털어놓았다. “지부 서기가 무슨 벼슬이 아닙니다. 벼슬을 하려면 영월구 공안국 국장 자리를 내놓았겠습니까?” “지부 서기를 내놓으면 무슨 잘못이나 있는가 할 게 아니냐? 그럼 흥수는 네 머리 위에 올라 앉아 똥을 싸자고 들게다.” 상순은 기어이 자리를 내놓는 것이 옳다고 주장했다. “이 정치투쟁에서 이기고 지는 걸 떠나서 내 한 사람이 물러나면 숱한 사람들이 피곤하게 살지 않아도 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도 듭디다. 흥수가 내 자리를 차지하면 투쟁대회를 자꾸 열지 않겠는 지도 모릅니다. 사원들이 투쟁대회에서 해탈돼 편안하게 살 수만 있다면 그까짓 서기 자리를 백번이라도 내놓을 수 있습니다.” 병완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오산이야. 너 하나의 붉은 마음으로 모든 걸 해결할 수 없는 거야. 흥수는 안 돼. 개 똥을 먹는 습관 고치겠니? 지부서기 자리를 차지하면 너를 다시 일어나지 못하게 물어뜯고 짓밟으려고 들게다. 정치는 물러설수록 피동이야. 절대 약하게 놀지 말라.” 철리 있는 할아버지 말씀에 상순은 머리를 끄덕이면서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었다. 바로 그 점이 근심스러웠던 것이다. 나중에 상순은 산전수전을 다 겪은 할아버지 말씀을 듣기로 했다. “그럼 지부 서기는 잠시 내놓지 않겠습니다. 결혼 비준서를 떼 주거나 흑판 보를 꾸리는 일을 흥수한테 시킬 예산입니다.” “그래, 모든 걸 끌어안지 않는 게 맞다.” 병완은 손자의 성장에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이때 정지 문이 열렸다. 모두들 머리를 들어 보니 성욱이었다. “덕돌아!” “어째?” 덕돌은 아버지 무릎에서 일어나 정지 문 쪽으로 달려 나갔다. 성욱은 털모자를 덕돌에게 내밀었다. “내 모자를 쓰고 학교로 가자!” “나를 주고 넌 어쩌니?” “우리 아버지 또 새 털모자를 사주었다. 봐라. 얼마나 좋니?” 성욱은 자기 머리우의 새 털모자를 벗어 자랑했다. “고맙다. 성욱아. 우리 엄마도 새 털모자를 싸줄게다. 씨.” 덕돌은 입이 뽀로통해 엄마를 쳐다보았다. 윗방에서 상순은 하나 밖에 없는 아들에게 털모자 하나 사주지 못해 남의 모자를 얻어 쓰게 하는 것이 못내 가슴이 아파 “음.” 하더니 땅이 꺼지게 한숨을 후 내쉬었다. 손자와 손비가 기분이 상해하는 것을 보고 병완은 정지에 서 있는 애들을 내다보면서 소리쳤다. “성욱이라고 했지? 우리 큰형님의 고손이 벌써 저렇게 컸구나. 병완은 하얀 구레나룻을 쓰다듬으면서 학교로 떠나가는 덕돌과 성욱을 내다보며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보자, 야, 어느새 대수가 이렇게 많이 뻗었느냐? 형님의 고손자 성욱이라. 내 증손 덕돌에겐 9촌 조카로구나. 8촌이 한 구들이라더니 정말 헛말이 아니구나. 너네 대엔 벌써 9촌이 다 됐구나. 허허허.” “예, 9촌이 어디 먼 친척입니까?” 상순은 정지 덕돌과 성욱을 내다보면서 타일렀다. “얘들아, 너희들은 9촌 숙질간이야. 알았어?” “예. 우리 둘은 친척이기에 어디 가나 한편을 합니다.” 성욱이 코를 훌쩍거리더니 손등으로 허연 콧물을 쓱 문질렀다. “우리 전번에도 조선 지도 새끼 접어드니 양쪽에서 다리 하나씩 들어 메쳐놓고 두드려 놓았습니다.” “조선 지도라는 건 누구냐?” “동림입니다. 그 새끼 이마에 조선 지도 새겨졌습니다.” “오, 그래? 허나 공부를 잘 해야지. 둘이 한 당이 돼 다른 애들을 때리면 안 돼? 동림하고도 딱친구로 놀아야 해. 알만해?” “예. 그런데 우리 조선 지도를 이기지 못하겠는 거 어쩌겠습니까?” “그래도 싸우면 나쁜 애야.” 성욱은 볼우물이 패일 지경으로 입을 악물었다. 덕돌과는 달리 그 애는 좀 성질이 꽁한 편이었다. 애들이 떠나간 후 병완은 물었다. “그런데 저 경주를 어쩌겠니?” “뭘 말입니까?” 상순은 눈초리를 꼿꼿이 치켜 올렸다. “경주가 미련과 결혼하잡니다. 정신 있습니까? 지주 아들과 결혼해? 우리 집안이 어떻게 됩니까?” “글쎄 말이야.” 병완은 한숨을 후 내쉬다 기침을 쿨룩쿨룩 했다. 상순은 황급히 일어나 할아버지 잔등을 자근자근 두드려 주었다. “됐다, 됐어.” 병완은 손을 들어 상순을 앉으라고 시늉했다. “경주 결혼문제는 심사숙고해야 한다. 우리 영월김씨는 원래 경주김씨와 한 핏줄이야. 황차 우리 막내손자 경수는 경주의 동복동생이 아니고 뭐니? 흥수가 자꾸 그걸 물고 늘어지니까 큰일 났다.” 상순은 한숨을 후 내쉬었다. “지주 딸이라고 해도 혼인을 간섭할 수 있습니까? 결혼 소개 신을 떼는 일은 이젠 흥수한테 맡기겠습니다. 뭐라도 시켜야 더 물지 않겠는지?” “옳다, 개는 먹이를 줘야 짓지 않는 법이다. 분권과 관용은 어느 정도 효과를 보겠는지 모를 일이다.” 상순은 할아버지를 부축해 윗마을 함흥 촌에 올라갔다가 흥수네 집에 들렸다. 흥수는 경계하는 눈초리로 상순의 아래 우를 훑어보더니 퉁명스럽게 물었다. “왜 왔소?” 흥수는 추운 겨울에 집안으로 들어가자는 말도 하지 않고 바깥에서 막아섰다. 그러든 말든 상순은 정지 창문으로 핼끔 내다보는 춘실의 눈길을 피하면서 정식으로 말했다. “지금까지 내 독단, 독행 한 거 같아 미안하오. 이제부터 결혼 소개 신을 떼는 일이랑 대대 당 지부 회의를 사회하는 일을 하오.” 흥수는 감사하다고 할 대신 “흥! 고양이 쥐를 생각하는구먼.”하고 쌀쌀하게 한마디 내뱉었다. 상순은 더 할 말도 없어 돌아가려고 했다. 그때 흥수가 뒤에서 내쏘는 말이 들려왔다. “그런 잔일만 내놓지 말라니까. 이젠 지부 서기도 윤번으로 하자니께.” 상순은 몸을 홱 돌려 정색해 말했다. “지금 하는 꼴을 보면 자네가 지부 서기를 하면 날마다 투쟁대회만 하노라고 한지에 방아를 걸겠소.” 흥수도 한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았다. “김 씨네 조손 3대가 없으면 함흥대대 돌아가지 못하겠구먼. 세습이라도 무서운 세습이라니께. 흥!” 상순은 말할 상대도 되지 않는다고 여겨 몸을 돌렸다. 이때 정지문이 벌컥 열리더니 춘실이 불쑥 뛰쳐나왔다. “여보, 또 시작하오? 당원들은 어째 맨날 싸우기만 하오?” 뒤이어 춘실은 상순에게 눈을 흘기며 입귀를 삐쭉했다.       상순은 몸을 홱 돌리더니 문을 쾅 박차고 나왔다.       그는 마을 사원들을 이끌어 아름다운 함흥촌을 건설하려고 잠시 대대당지부 서기를 내놓지 않기로 마음을 굳혔다. (이제 봄이 오면 마을 앞에 큰 물도랑을 파고 물레방아를 놓아야지. 그럼 논머리에서 벼 탈곡을 할 수 있을 거야.)  
146    대하소설 진달래 소야곡(14) 댓글:  조회:1443  추천:0  2018-03-27
                              26. 소식공개회의 강운룡 부국장은 병원에 가서 승호에게서 직접 사건경과를 료해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병원 복도에서 피해자 은영과 맞부딪쳤다. 은영은 운룡을 보자 “경찰아저씨군요. 이 세상에는 숱한 처녀를 해친 건달놈을 징벌하는 도덕법정은 없어요?” 하고 중얼거렸다. 운룡은 강도들에게 짓밟힌 처녀애를 보고 머리 숙여졌다. 그가 급진 외과 사무실을 찾아갔다가 뜻밖의 정황에 부딪칠줄이야. YB병원에서 승호가 자취를 감추지 않았겠는가. 간호원들과 물어보아도 “다른 병원에 간 것 같아요.”라고 할뿐이었다. 그때 리철갑 과장한테서 전화가 왔다. “강과장, 빨리 돌아오오.” “무슨 일이요?” “소식공개회를 열겠소.” “아니, 지금 승호를 찾는데 병원에서 사라졌소. 걔가 어느 병원에 갔소?” “걸 알아 어쩌오? 혐의자도 아닌데.” “아니오. 알아볼 일이 있어 그러오.” “뭘 그러는지 소식공개회 끝난 후에 보기오. 빨리 돌아오오.” “알았소.” 강운룡 부과장은 급히 형사경찰대대로 돌아갔다. 그가 형사정찰대대 소회의실에 들어가보니 기자들이 빼곡이 들어앉아 있었다. 그 속에는 신문사 기자 종수도 있었다. 정치에 민감한 종수는 신문사에 배치받은 후 법률전문기자로 활약하고 있었다. 리철갑 과장은 형사정찰대대와 수사대원들의 공훈을 널리 선전하려고 한시급히 이번 소식공개회를 열려고 서둘렀다. 강운룡은 리과장을 복도에 데리고 나와 나직이 “나머지 혐의자 광일까지 나포한 후에 소식공개회를 열면 좋을 것 같소.”라고 했다. 그러나 리철갑은 고집을 부렸다. “숱한 기자들을 불러놓았는데 어쩌오?” “돌려보내든지?” “안되오. 주악을 나포했다는 걸 공포하기요. 하루라도 빨리 범죄자들의 기염을 꺾어놔야지.” 운룡은 계속 말렸다. “리과장, 괜히 풀을  건드려 뱀을 놀래지 마오. 깡패 우두머리를 놀라게 해서  나포하기 힘들겠소.” 그 말에 리과장은 좀 주저하면서 걸상에 물앉았다. “그 새끼들을 몽땅 붙잡아 총살해야 내 속이 풀리겠는데.” 운룡은 복수의 불길이 이글거리는 리철갑  과장의 눈길을 보고 입을 무겁게 열었다. “당신 심정은 리해되오. 멀쩡한 아들이 글쎄 무리승냥이 같은 놈들한테 귀두까지 잘리웠으니 말이오.” “이보, 그런 말은 하지도 마오. 얼마나 창피하오.” 운룡은 실수한 것을 알고 화제를 돌렸다. “리과장은 이 사건해명을 회피하는 것이 좋소.” “왜? 난 복수해야겠소.” “당신은 피해자 아버지가 아니고 뭐요? 피해자 가족이 해당 사건 수사에서 손을 떼는 건 형사수사사업의 준칙이요.” “음.” 리철갑 과장은 머리를 끄덕이더니 권연을 꺼내 물었다. 운룡도 한대 꺼내 물고 라이타를 꺼내 리과장에게 불을 붙여주었다. 리철갑 과장은 담배연기를 길게 빨아들였다가 후~ 내뿜었다. 그간 그는 대학교 규률검사위원회 허철만 서기와 암암리에 짜고들어 송파와 승호를 서로 봐주기를 했다. 기실 리철갑 과장은 허송파네 일가와 악연을 계속 맺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외나무다리에서 허철만 서기와 최웅봉 부시장 일가와 직접 가해자와 피해자 관계로 복잡하게 맞부딪치게 될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이번 특대상해륜간사건은 아무리 봐도 허송파 일당과 련관된 것 같았다. 승호가 시당위 정법위원회 허서기 딸 허경옥과 정법 부시장 최웅봉의 딸 최은영의 정조를 유린해 생긴 사건인 것 같아 더욱 골치아팠다. 리철갑 과장은 허철군 서기와 허철만 서기 형제를 봐서 눈 감고 지나가자니 최웅봉 부시장의 눈치가 보였다. 더구나 승호의 귀두까지 잘라낸 강도들을 생각하면  악이 날대로 났다. 그러나 이 사건을 깊이 파고들수록 승호가 귀두를 잘리운 추문이 퍼질가봐 저으기 근심됐다.  고민 끝에 그는 승호의 전도에도 영향이 가지 않고 당상급도 될 수 있는 한  건드리지 않을뿐만아니라 범죄자도 법에 의해 호되게 족칠 수 있는 묘안을 내왔다. 강운룡은 리철갑의 이런 속내는 알 수 없었다. 리철갑은 속궁리와는 달리 강운룡을 보고 강경하게 말했다. “먼저 소식공개회를 열어 강도들을 법에 의해 호되게 처단해야 한다는 사회여론을 조성해야 하오. 여론조성이란 무기로 허송파 깡패무리 우산과 수족을 잘라내야겠소.” 강운룡도 머리를 끄덕였다. 이때 복도 먼발치에서 성호가 서성거리고 있었다. 리철갑은 강운룡을 돌아보며 물었다. “저 앤 왜 이번 수사에 가담시켰소?” 강과장은 대수롭잖게 “견습시키자고.” 하고 대답했다. 리철갑 과장은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우린 사인정탐을 써선 절대 안되오. 괜히 쓸데없는 말을 듣겠소.” 사실 리철갑 과장은 성호가 아주 참한 청년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성호를 이번 사건수사에 가담시켰다가 승호의 귀두가 잘린 추문이 퍼질가봐 저으기 근심됐다. 리철갑 과장은 법의실에 가서 주범의 DNA검사단을 보았다. 은영의 질 안에서 검출된 정액중의 한 DNA와 일치했다. “주악, 주범. 이 개놈새끼들, 몽땅 어디 썩어져봐라!” 악이 날대로 난 리철갑 과장은 지하심문실에 씽 달려내려갔다. 그는 대가리를 두무릎 사이에 툭 떨어뜨린 주악과 주범을 보자 권총을 쑥 뽑아 단방에 쏘아죽이고 싶었다. 그는 국장 사무실에 올라가서 천룡해 국장과 주관부국장 김성광을 모시고 숱한 기자들이 빼곡이 들어앉은 형사정찰대대 회의실로 들어갔다. 리철갑 과장은 사무상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가더니 서류를 내려놓고 안경알  밑으로 여러 기자들을 둘러보았다. “여러분, ‘10.16특대상해륜간사건’은 기본상 해명됐습니다.” 순간 숱한 카메라가 리철갑 과장을 조준하더니 섬광들이 쉴새 없이 번쩍였다. “범죄혐의자 주악과 주범, 김광일은 10월 16일 저녁 7시반 좌 우에 련애하는 청년 리모(25세)와 녀대학생 최모(24세)의 뒤를 밟아 YB대학 뒤산 소나무숲에까지 갔다. 주범과 주악은 먼저 반항하며 박투한 리모의 허벅지와 얼굴을 수술칼로 찔러 상처를 입혔으며 미리 준비해가지고 간 헝겊바줄로 리모의 두팔을 뒤로 결박해 소나무에 묶어놓았다. 그새 범죄혐의자 김광일은 최모 처녀를 구뎅이에 처넣고 강간하려고 했다. 최모가 용감히 범죄혐의자와 박투하면서 수술칼로 범죄혐의자 김광일의 허벅지와 얼굴을 찔렀다. 김광일은 최모를 주먹으로 치고 목을 졸라 까무러치게 한 후 강간했다. 뒤이어 주악과 주범도 정신을 잃은 최모를 야수처럼 륜간했다.” 리철갑 과장은 기자들을 내려다보면서 자랑스럽게 소개했다. “우리 형사수사대대에서는 사건보고를 받자 즉시 사건현지에 가서 세심한 수사를 벌렸다. 피해자들의 진술에 근거해 과학수사방법으로 범죄혐의자들이 3명이라는 것을 수사해냈으며 이미 륜간범죄혐의자들인 주악과 주범을 체포했다. 나머지 범죄혐의자 김광일은 지금 수배 중에 있다.” 종수가 손을 들고 질문했다. “우선 이번 특대상해륜간사건을 해명한 것을 축하합니다. 리과장께 한가지 묻고 싶습니다. 어떤 과학수사방법으로 이번 사건의 단서를 쥐게 되였습니까?” 리철갑 과장은 난색한 표정을 지었다. “그건 수사비밀입니다. 수사방법을 다 공개하면 이 후에 범죄자들의 반정탐능력이 높아지기에 우리 수사사업에 거대한 장애로 될 수 있습니다.” 그는 한마디 덧붙였다. “기자들이 사건해명소식을 낼 때에도 딱 공안국에서 제공한 자료대로 기사를 쓰고 우리 심열받은 후 보도할 것을 바랍니다.” 텔레비죤방송국 기자가 또 손을 들었다. “사건해명자료를 제공할 수 없습니까?” 리철갑 과장은 랭정하게 말했다. “너무 총망히 소식공개회를 하다나니 자료를 미처 작성하지 못해 미안합니다. 제가 말한대로 보도하면 됩니다.” 리철갑 과장은 이젠 사건해명소식공개회를 여러차례 열었기에 로련한 전문가였다. 어떤 기자들은 범죄혐의자와 피해자의 성명을 꼬치꼬치 캐물어 필기장에 적었다. 어떤 기자들은 지어 자기 기록한 필기장에 서명해달라고 했다. 로련한 리철갑 과장은 완곡하게 사절하였다. 기자들은 아쉬운 표정을 지으면서 자리를 떠났다. 제2권 농민의 아들                             27. 흉수를 나포        성호는 수사대원 수길과 함께 우전국에 가서 김광일의 집식구들과 형제, 친척의 전화번호까지 다 장악한 후 공안국 제7처에 보내 전화감청을 의뢰했다.        그들은 추운 초겨울 밤에 광일의 집 부근에 잠복해 있으면서 그 자가 나타나기를 은밀히 감시했다. 초조한 밤이 무거운 침묵 속에서 흘러갔다. 희미한 초생달이 풍운조화를 부리는 먹장구름 속을 자맥질하며 서쪽으로 헤염치고 있었다.       그러나 초생달이 서쪽에 다 기울어가도 반정탐능력이 있는 교활한 광일의 그림자는 얼씬거리지도 않았다. 심지어 광일은 집식구들이거나 친척에게까지 전화 한마디 하지도 않았다. 뻐스터널과 기차역 대합실에도 수사대원들이 잠복해 있었지만 정황은 마찬가지였다. 광일의 꼬리도 보이지 않았다. 기타 현과 시에서도 광일의 종적을 발견하지 못했다. 속이 탄 성호는 옆에 잠복한 수길에게 광일의 정황을 자세히 물어보았다. “광일이랑 평소에 어데로 잘 드나듭니까?” “그 놈 깡패무리들은 늘 공원에 드나들면서 수림 속에서 부정당한 관계를 맺는 남녀들을 붙잡아 ‘파출소에 잡아가겠다.’고 협박하는 수단으로 돈을 략탈하거군 했지. 심지어 남자는 쫓아보내고 녀자를 륜간하는 일도 있었소. 그러나 피해자들이 신고하지 않았거나 피해자증명을 서지 않았소. 그래서  깡패들은 번마다 법망에서 빠졌네.” 성호는 머리에 피뜩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혹시 광일이 공원에 숨지 않았겠는지?” “공원에?’ 수길은 추위에 떠는 초생달을 쳐다보더니 머리를 절레절레 가로 흔들었다. “이 추운 초겨울에 얼어죽자고 공원에 있겠소?” “그 놈이 집이거나 친척과도 련계를 끊은 걸 보면 돈이 떨어져서 공원에서 불륜행위를 하는 남녀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릴지 어떻게 압니까?” “글쎄? 식당이거나 개인려관에 있을 수도 있지.” “죽지 않으면 살 소리군. 그 교활한 놈이 멀쩡히 식당이나 려관에서 우리 잡기를 기다리겠습니까?” “등잔불 밑이 어둡다고 항상 경찰들이 경계가 소홀한 틈을 탈수도 있지.” “글쎄.” 수길은 인차 통화기를 꺼내 나지막한 목소리로 강운룡 부과장에게 성호의 제의를 회보했다. 강운룡 부과장은 “즉시 공원부근 선녀음식점이랑 해운려관이랑 찾아가서 광일과 비슷한 놈이 나타나면 신고하라고 부탁하오.” 하고 포치했다. 강운룡 과장은 뒤이어 수사대원 창남과 천일을 광일이네 집 부근에 파견하고 수길과 성호를 공원과 식당, 려관에 파견했다. 수길과 성호는 먼저 공원부근 려관들과 식당을 돌아다니면서 범죄혐의자신고를 부탁했다. 선녀음식점에 들어서자 선화가 반겨 맞았다. “아니, 성호 오빠, 어떻게 돼 오랜만에 초라한 식당에 다 왔어요?” 성호는 한살 이상인 선화가 항상 “오빠”, “오빠” 하는 것이 안쓰러워 눈인사를 하였다. 뒤이어 조용한 경리실에 데리고 가서 귀속말로 사연을 말하고나서 부탁했다. “광일이 나타나면 알리오.” 선화는 단통 얼굴색이 새까매나더니 “아니, 깡패들을 건드렸다가 목이 날아나라고?” 하고 질겁해 바들바들 떨었다. “그 놈들은 륜간죄를 범해 몽땅 총살당할 거요. 겁내지 마오. 든든한 성호 있는데. 허허허.” 사람좋게 웃는 성호를 보고 선화가 물었다. “공안국에 들어갔소?” “아직은 아니.” “왜 그런 깡패를 건드리오?” “은영을 알지?” “양.” “그 놈들이 은영을 해쳤어.” 그제야 선화는 머리를 끄덕였다. 순간 같은 녀성으로서 은영에 대한 동정과 더불어 흉수에 대한 적개심이 북받쳐올랐다. “우리 식당에 나타나기만 하면 전화하죠.” “감사하오. 부탁이오.” 선화는 비장한 결심을 한듯 머리를 끄덕였다. 식당에서 나오자 성호와 수길은 어둠 속에 잠긴 공원으로 들어갔다. 을씨년스러운 겨울인데다 밤도 깊어서 공원 안에는 인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다만 벌거숭이 나무가지들이 초겨울 바람에 아츠러운 비명소리를 휴휴 지를뿐이였다. 수길은 주춤 걸음을 멈추었다. “그 놈이 이런 곳에 오겠소?” “더 수색해보기요.” 그들은 공원 둔덕을 타고 나무숲 속을 샅샅이 뒤지면서 올라갔다. 그러나 련애하는 련인들도 없었다. 그들이 수림을 벗어나려고 할 때였다. 쿨룩쿨룩 바람이 잔 둔덕 아래 정자에서 기침소리가 들렸다. 그들은 고양이 발걸음으로 정자에 살금살금 다가갔다. 초생달빛을 빌어 정자의 장의자에 웬 거지가 누워있는 것이 어슴프레 보였다. 수길은 성호의 옆구리를 툭 치더니 손으로 량쪽으로 덮쳐가서 포위해 목을 조이는 시늉을 했다. 성호는 머리를 끄덕였다. 수길과 성호는 량쪽으로 나뉘어 둔덕 아래로 접근해갔다. 한 대여섯메터 다가갔을 때다. 수길이 고의로 인기척을 냈다. 풀을 건드려 뱀을 놀래우는 수단이였다. 저게 뭐냐? 그 자는 화닥닥 놀라 벌떡 일어나더니 선불맞은 노루처럼 꼬리빳빳해 줄행랑을 치기 시작했다. “서랏!” 그 자는 수길을 피해 성호 쪽으로 달아났다. “어디로 도망쳐!” 성호는 번개같이 발길을 날려 그 자를 걸어 넘어뜨렸다. 그자는 떼구루루 굴러 벌떡 일어나면서 주먹을 날렸다. 성호는 날아드는 주먹을 받아쥐어 비틀면서 태를 탁 쳐놓았다. 그때 광일이 뛰여와 그 자의 팔을 뒤로 비틀었다. 수길과 성호가 쓰러져 버둑거리는 그 자의 대가리를 달빛을 빌어 여겨보니 광일이 틀림없었다. “김광일, 이 놈, 어디로 도망쳐?” 수길의 고함소리에 그 자는 꽥꽥 고함쳤다. “놔라, 야, 이렇게 붙잡힐줄은 정말 몰랐다.” 수길은 광일을 보고 “네놈을 특대상해륜간범죄혐의자로 체포한다.” 하고 말하면서 차거운 쇠고랑이를 꺼내 광일의 두 팔목에 철컥 채웠다. 이튿날 리철갑 과장은 또 두번째 소식공개회를 열었다. 형사정찰대대 회의실 정면에는 공안국의 천룡해 국장이 앉아 있었다. 숱한 기자들 속에는 종수도 눈에 띄였다. 리철갑 과장은 만면춘풍이 돼 사건해명소식을 공포했다. “어제 저녁 밤 9시에 우리 경찰대대 수사대원 최수길과 정의용사 리성호는 공원에 숨어 있던 범죄혐의자 김광일을 체포했다. 이로써 ‘10.16특대상해륜간사건’ 범죄혐의자 3명을 사흘만에 몽땅 나포했다. 이 사건은 지금 계속 심리중에 있다.” 그때 종수가 손을 들었다. 종수는 자기 동창생 이름이 공포되자 무척 호기심이 갔던 것이다. 그는 당날에 출간한 신문을 들고 앞으로 나왔다. “어제 소식공개회를 실은 신문입니다.” “양? 벌써 나왔소?” 리철갑 과장은 신문을 받아쥐여 안경알 밑으로 쭉 내리훑어보았다. 신문에는 “10.16특대상해륜간사건을 해명”이란 제목 아래 소식을 공개하는 자기 사진이 큼직이 실리지 않았겠는가. 리철갑은 내심으로 기뻤지만 신문을 종수에게 안팎이 다른 말을 했다. “아니, 내 사진을 실어 뭘 하오? 이번 사건은 우리 국장님들이 수사방향을 정확하고도 구체적으로 지시했고 수사대원들이 기민하고 영용하게 수사해 해명한 결과인데. 어제 신문과 방송에 내기 전에 형사정찰대대에 원고를 가지고 와서 심열을 받은후 내라잖았소? 이게 뭐요?” 종수는 뒤더수기를 긁적거리면서 “새벽에 신문을 찍는데 심열을 받고나면 오늘 나가지 못할가봐 그랬습니다.”라고 변명했다. “그래도 심열제도는 지켜야지. 이건 형사사건해명 소식보도의 원칙과 규률이란 말이요.” 리철갑 과장은 국장들한테 신문을 건네면서 “공훈이 제일 큰 국장님들의 이름 한번 언급하지도 않아 미안합니다.”라고 했다. 천룡해 국장과 김성광 부국장은 이구동성으로 “아니요.”라고 했다. 김성광 부국장은 자리에서 일어나 여러 기자들에게 정중하게 말했다. “이번 사건은 리철갑 과장과 강운룡 부과장이 수사대원들을 잘 지휘해 세심히 수사했기에 사흘만에 완전히 해명했습니다. 특히 정의용사 리성호는 수많은 단서를 제공하고 범죄혐의자를 용감히 나포해 공훈이 아주 큽니다.” 종수는 리철갑 과장에게 물었다. “수사대원과 정의용사의 얼굴을 신문에 내려고 합니다. 여기서 잠간 만나볼 수 없습니까?” “예. 곧 공개하겠습니다.” 리철갑 과장은 성호를 표창하는데 아주 적극적이였다. 승호의 원쑤를 나포한 친구라는 것도 있지만 사위감후보가 아닌가. 이윽고 수사대원 최수길과 정의용사 리성호가 소식공개회의장에 들어섰다. 숱한 카메라 섬광이 번쩍번쩍 번개쳤다. 종수는 성호에게 다가와 손을 잡았다. “축하합니다! 범죄자를 붙잡던 경과를 얘기해줄 수 없습니까?” 성호는 종수를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옆에 선 최수길을 가리켰다. “이분과 물어보십시오.” 수길은 간단히 경찰대대 리철갑 과장과 강운룡부 과장의 지시에 따라 김광일을 공원 정자에서 나포하게 된 경과를 말했다. “특히 정의용사 리성호가 김광일이 공원에 숨어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했기에 수사방향을 조절하게 됐습니다.” 천룡해 국장은 이번 사건해명에 공훈을 세운 최수길 등 수사대원들과 정의용사 리성호를 높이 평가하였다. “리성호와 같은 기민하고 용감한 정의용사가 있는 한 범죄자들은 인민의 법망을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그는 성호에게 “정의용사상패”와 상금봉투를 손수 드렸다. 기자들이 일제히 샷타를 눌렀다. 섬광이 번쩍번쩍 빛발쳤다. 수상감상을 말하라고 하자 성호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여러분, 미안합니다. 저는 근근히 수사대원들을 협조했을뿐입니다. 이 영광을 수사대대 전체 책임자들과 수사대원들께 드리겠습니다.” 종수가 다가가 샷타를 눌렀다. 그는 사진기를 거두고 필기장을 꺼내더니 천국장에게 물었다. “이 후에도 성호한테 수사사업을 시킬 예산입니까?” 천룡해 국장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정중하게 에둘러댔다. “우린 광범한 인민군중들이 계속 우리 수사사업을 협조할 것을 바랍니다.” 리철갑 과장은 희비가 엇갈린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아까운 사위감인데…) 성호의 앞날이 어떻게 될가?          
145    대하소설 진달래 소야곡(13) 댓글:  조회:1595  추천:0  2018-03-20
                                         24. 흉수와 피해자        련 며칠 주먹이 날아들어도 보지 못할 정도로 안개가 자오록이 끼어 어데가 어딘지 분간하기 힘들었다. 늦가을 하늘에 구멍이 뚫렸는가?        이날 따라 지꿎은 가을비가 구질구질 내리더니 가을바람에 락엽까지 우수수 져서 을씨년스럽기 그지없었다. 성호는 병원 1층 급진외과 간판을 보자 은영의 병실에 가서 문안하고 싶은 충동이 불붙 듯했다. 허나 사건해명이 급선무기에 승호부터 찾아봐야 했다. 그는 급진외과에 가서 간호원에게 이모부가 떼준 수사대대 소개신을 가만히 꺼내 보이고 이것저것 물었다. “승호라고 있습니까?” “승호? 있어요.” “증상은 어떤가요?” 간호원은 공안국 소개신을 본 뒤라 구애없이 말했다. “귀두가 절단된데다가 칼에 가슴과 허벅지를 깊게 찔렸어요.” “예?” 성호는 저으기 놀라 입을 쫙 벌렸다. (승호, 이 놈 새끼?) 그는 억지로 진정하면서 차근차근 물어나갔다. “그래 언제 입원했습니까?” 간호원은 서류철을 꺼내 보이었다. “지난 10월 16일 저녁 9시 쯤이죠. 그날 저녁에 제가 당직이였는데요. 깜짝 놀랐어요. 가슴과 다리 사처에 피를 줄줄 흘리면서 들어왔댔어요.” 그녀는 그날의 충격으로 목소리까지 가늘게 떨렸다. 성호는 안칸에 들어가 당직의사를 만나 계속 수사해나갔다. 남자의사이기에  간호원보다 묻기 편리했다. “승호가 잘린 귀두를 가지고 왔습디까?” 의사는 도리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안 가져왔습니다. 귀두가 한 2센치미턴 잘려 나갔습디다.” “이제라도 가져오면 이을 수 있습니까?” “혹시 귀두를 주었습니까?” “줏긴 주었는데 승호 건지 아직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의사는 희죽이 웃었다. 성호는 너무나도 우연이 필연으로 이어지고 있어 무엇인가 짐작됐다. 그는 황급히 벌떡 일어났다. “귀두를 가져올테니 이어보겠습니까?” 의사는 도리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젠 끊어진지 사흘이나 돼 다 썩었겠는데 어떻게 잇는다고 그럽니까?” “일루의 희망만 있다면 노력해주십시오.” “그럼 헛일 삼아 가지고 와보십시오.” “제가 수사하는 건 비밀로 해주십시오.” “그러지요.” 성호는 택시를 잡아타고 부랴부랴 수사대대로 달려갔다. 그가 복도에 달려들어갈 때 때마침 강운룡을 만났다. 성호는 강운룡을 따라 사무실에 들어가 병원에서 알아본 정황을 쭉 이야기했다. “이 사건은 분명 승호와 련관된 것 같구나.” 운룡은 랭장고에서 작은 랭동상자를 꺼내 책상에 올려놓고 조심스레 열었다. 귀두가 퍼렇게 변질되지 않았겠는가. 귀두에 콩알만한 검은 기미가 박혀 있었다. (분명 승호 거구나. 자식, 목욕할 때면 항상 제게 크다고 밑천을 자랑하더니, 꼴 보기 좋구나. 쳇, 이제 어데 가서 바람 피워?) 성호는 랭동상자 덮개를 닫으면서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운룡은 랭동상자를 들고 성호와 함께 찌푸를 타고 쏜살같이 병원으로 달려갔다. 그들은 황급히 급진외과에 곧추 들어가 의사를 만났다. 의사와 운룡은 은밀히 승호의 DNA와 귀두의 DNA가 일치한가 화험해보기로 했다. 성호는 문안하는 척하면서 승호의 병실에 들어갔다. 허연 병실에 홀로 들어누운  승호는 얼굴에 붕대를 딜딜 감은 채 쿨쿨 자고 있었다. 성호는 깨울세라 발뒤꿈치를  들고 발뼘발뼘 침대머리에 다가가 앉았다. 성호는 붕대 위로 헝클어진 승호의 머리를 슬슬 쓰다듬는 척하다가 머리카락 몇대를 쑥 뽑았다. "앗!" 승호는 눈을 번쩍 뜨고 쳐다보았다. "야, 뭐 하냐?" 승호는 상을 찡그리면서 간신히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다. "급히 오다나니 아무 것도 들고 오지 못했어." 성호는 머리카락을 호주머니에 슬쩍 걷어 넣으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잠간 나갔다가 올게." "야, 빈손이면 뭐라니? 농민 아들이 무슨 돈이 있니?" "야, 농민 아들이라고 말하지 말라." 성호가 부랴부랴 복도에 나왔을 때 승호 어머니가 저쪽에서 스레기통을 들고 마주 오는 것이 보였다. 성호는 급히 의사사무실로 들어갔다. 운룡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떻게 됐니?" "가져 왔습니다." "잘 됐어." 의사는 성호가 내민 비닐주머니를 받아가지고 화험실로 갔다. 화험 결과는 인차 나왔다. 놀랍게도 승호의 DNA와 귀두의 DNA가 일치했다. 은영의 질에서 검출된 정액중에 승호의 DNA와 일치한 정액도 들어있었다. 성호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승호의 귀두는 아쉽게도 변질해 잇지 못한다는 결론이 나왔다. 성호는 종신병신으로 된 승호가 측은했다. 운룡은 성호의 도움으로 사건해명에 실마리를 쥐게 돼 기뻤다. (은영이 제 아무리 입에 빗장을 지른들 쓸데 있어? 이 사건을 해명하려면 은영, 승호와 관계되는 자들을 수사해야 해. 특히 라이벌이거나 척진 자들을 수사해내야 한다.) 그는 자리를 뜨기 전에 성호에게 부탁했다. “수사대원들보다 네가 알아내기 더 편리할 거 같구나. 사건해명을 좀 협조해달라. 이 일은 아무도 몰래 은밀하게 조사해라." "예." "먼저 승호를 문안하면서 사건경과를 슬슬 알아봐라.” "예, 알겠습니다." 성호는 이모부와 총총히 갈라진 후 상점에 가면서 흉수와 피해자를 가린 베일을 어디로부터 벗길가 궁리했다. (이모부 말대로 은영의 애정 라이벌이거나 승호와 척진 자들이 흉수일 가능성이 아주 높지 않는가. 물론 우연히 은영과 승호가 련애하는 걸 발견한 강도들이 덮쳐들어 승호를 쳐눕히고 은영을 륜간했을 수도 있지. 그러나 우연성보다 필연성이 더 가깝다. 놀라운 건 은영의 질에서 검출된 정액 속에 승호의 DNA와 일치한 정액도 들어있다고 하지 않는가. 그날 분명 승호는 은영을 데리고 소나무숲에 가서 그 짓을 벌렸어. 혹시 그들이 한창 그 일을 벌릴 때 강도들이 덮쳐 들었을 수도 있어. 은영은 창피해 말하지 않아도 승호는 혹시 말할 수도  있지 않을가.) 성호는 승호를 돌파구로 삼기로 했다. 그는 병원 동대문 맞은 편에 있는 슈퍼마켓으로 들어갔다. 호주머니를 다 들춰 봐도 동전 몇푼 밖에 없었다. 련 며칠 이모네 집에 있으면서 술 한병 사들고 들어가지도 못했다. 그는 호주머니를 톡톡 털어 바나나를 몇줄 사들고 돌아섰다. 그가 입원실 복도에 들어섰을 때 갑자기 복도가 소란스러워졌다. "놔라니까! 왜 이래요?" "아니, 저게 은영이 아니야?!' 환자복을 입은 은영이 의사와 간호원들의 팔을 뿌리치며 야단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녀는 헝클어진 자기 머리카락을 마구 집어뜯으며 고함치면서 발광하고 있었다. 성호는 가슴을 칼로 에이는 듯했다. "놔! 이걸 놔! 또 륜간하려고? 난 처녀 아니야? 난 이 세상 짐승 같은 사내들을 몽땅 증오한단 말이야! 난 시집 안가! 정조를 짓밟힌 등신을 누가 데려가겠어? 으흐흐흐, 흑, 흑흑, 난 자살할 거야! 이 세상이 싫단 말이야! 홍희처럼 죽어버릴 거야!” 은영은 의사와 간호원들한테 붙잡혀 병실에 들어가면서도 팔을 휘두르며 발광했다. 이전에 체육머리를 흩날리면서 푸르른 잔디밭을 누비던 생기발랄한 은영이 아니였다. (어쩜 은영을 저 지경으로 만들었어? 꼭 흉수를 나포해 은영의 원쑤를 갚아야 해.) 성호는 복수심에 이를 뿌득뿌득 갈았다. 최웅봉 부시장은 은영의 병실에 들어가면서 울상을 지었다. 뒤따라 들어가며 손등으로 눈굽을 찍는 중년녀인은 아마 은영의 어머니 같아 보였다. 성호는 바나나꾸러미를 든 채 의사 사무실에 들어갔다. 그는 의사한테서 조용히 사건이 발생한 그날 은영과 승호의 정황을 두루 알아보았다. "수사대원들이 당날 밤에 조사했는데요.” “재차 확인할 것이 있습니다.” 그러자 의사가 입을 열었다. “그날 밤 110경찰들이 피범벅이 된 채 실 한오리 걸치지 못한 은영을 경찰차에 실어왔습디다." "가만, 몇시쯤 실어왔습니까?" 의사는 잠간 기억을 더듬더니 "아마 밤9시 쯤일 겁니다."라고 대답했다. "승호는 언제 들어왔습니까?" "그 환자가 먼저 들어왔습니다." 의사는 서류철을 뒤적이더니 "한 7시 반 쯤 들어왔습니다."라고 했다. "음~" 성호는 머리를 끄덕였다. (개자식, 은영을 버리고 혼자 살겠다고 도망쳤어?) "그때 은영이 정신을 차렸습디까?" "아니, 까무러친 채 허망소릴 마구 칩디다." "그날 정황을 좀 상세히 말해주십시오.' "예." 의사는 한숨을 후~ 내쉬더니 천천히 그 날 정황을 얘기했다. "우리가 은영을 실은 담가를 밀고 구급실에 들어가자 110경찰은 인차 형사수사대대에 사건보고를 하더구만요. 때마침 형사수사대대 리과장이 승호 문안을 달려왔던 차에 인차 구급실에 들어왔지요. 그는 강간사건 같다고 하면서 수사대원들을 시켜 피해자 은영의 온몸 상처를 촬영하고 법의를 시켜 질안의 정액을 검출해 화험하게 했습니다." "피해 정도는?" 의사는 터놓고 말했다. "하신이 다 터져 하혈이 심했습니다. 우린 황급히 수혈하면서 봉합수술을 했지요. 야, 그날 불시에 O형 피가 모자라 혼났습니다. 구급하려고 간호원의 피까지 뽑아 수혈했습니다." 성호는 머리를 끄덕이었다. 옆에서 간호원이 한마디 했다. "DNA 검사를 통해 법의는 질 안에 네 사람의 정액이 들어 있다는 결론을 내렸지요.” 의사가 보충했다. "예, 몇번이고 자살한다고 창문으로 마구 뛰여내리려고 했습니다. 어찌나 날랜지 간호원들이 조금만 늦었더라면 큰 일 날 번했습니다." "치료할 수 있겠습니까?" "예." 의사는 긍정적으로 대답했다. "네놈한테 륜간당했으니까. 정신충격이 아주 큽니다. 한동안 심리를 안정시키면서 약물치료를 하면 한 반년 후면 완쾌될 것 같습니다." 성호는 의사를 엄숙히 보면서 다른 정황을 물었다. "그날 저녁에 혹시 어덴가 상처를 입어 구급실에 온 사람들이 없습니까? 키 좀  큰 청년들이." "아, 있습니다." 의사는 서류철을 들추더니 성호한테 보였다. "보십시오. 그날 저녁에 꺽다리 청년 셋이 우리 구급실에 찾아와 처치를 받았습니다." 성호는 부지런히 필기장에 적다가 의사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어데 상처를 입었습디까?" "한 청년은 허벅지 안쪽을 예리한 칼날에 찔렸습디다. 낯을 벤 청년도 있었습니다. 별로 수술칼날에 찍힌 것 같습디다." "그렇지. 바로 그 놈들이야." "예?" 의사는 놀랐다. "그 자가 지금 병원에 입원해 있습니까?" "아니. 그날 처치를 받고는 다시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깊은 상처가 아니라서 지혈주사를 놓고 간단히 처치해 보냈습니다.” 성호는 서류를 들여다보다가 그 자들의 성명이 없고 다만 최씨 성에 나이만 24세라는 것이 적혀 있을 뿐이었다. 꽝! 성호는 책상을 쳤다. "왜 그 자의 성명을 기록하지 않았습니까?" "그 날 최모라 하던데 우리가 소홀해서 그만…" 의사는 뒤덜미를 긁적거렸다. 성호는 의사를 보고 목소리를 낮췄다. "미안합니다. 후에 그 자들이  다시 나타나면 보고하십시오." "예." "또 내가 수사하고 있는 걸 비밀로 해 주십시오." 그는 바나나 주머니를 들고 의사 사무실에서 나와 부랴부랴 승호네 병실에 들어갔다. 승호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녀동생 선금까지 와 있었다. 선금은 알은 체하며 귀밑까지 홍조를 피우더니 복도로 훌 나가버렸다. "에이고, 농민 아들이 무슨 돈이 있어 바나나까지 사들고 왔는가?" 리과장이 하는 말에 성호는 저으기 불쾌했지만 억지로 참으면서 바나나를 승호의 머리맡 차탁에 올려놓았다. 승호는 성호를 보고 놀랐다. 얼굴에 반창고를 더덕더덕 붙힌 그는 상처가 아파 오만상을 찡그리면서 간신히 일어나 앉았다. 리과장이 승호한테 물었다. "얘, 그날 널 칼로 찌른 새끼들이 어떻게 생긴 놈들이냐?" 승호는 성호를 흘끔 곁눈질 하더니 두덜거렸다. "잘 모르겠습니다. 후에 천천히 말합시다.” 그의 눈에서는 복수의 불길이 이글거렸다. 리철갑 과장은 이를 뻑뻑 갈았다. “꼭 원쑤를 진 놈들한테 당한 것 같아.” “아버지, 그만.” 승호는 아버지한테 불편한 눈짓을 보냈다. 그때라고 성호가 끼여들었다. “혹시 허송파네 깡패무리 아니더냐?” 승호는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아니야, 모를 놈들이였어. 송파보다 엄청 날래더라.” 성호는 한 발작 더 다가갔다. “그래 어데서 당했니?” “감옥으로 가는 뚝에서 당했어.” "먼저 상처나 잘 치료해라." “강과장이 찾아 왔댔지?” 아버지 묻는 말에 승호는 도리머리를 저으면서 눈을 흘겼다. 리철갑 과장은 불만을 토로했다. “강과장은 말이 아니야. 이번 사건을 맡겼더니 아직도 안 왔어.” “아까 왔다 갔습니다.” 벽화의 말을 듣고서야 리과장은 한숨을 후~ 내쉬였다. 이때 복도가 또 소란스러워났다. 승호는 "원 복잡해 어디 여기 있겠습니까? 당장 다른 병원으로 가야지." 하고 일어나 앉았다. (분명 은영이 있어 불편하지.) 리과장이 볼멘 소리를 했다. "어디로 간다고 그래? 어머니 일하는 병원이 좀 좋아 그래?” “여긴 위험합니다. 그 새끼들이 언제 들이칠지 누가 압니까?” “모르는 놈들이라면서. 어떻게 여기 있는 거 알고 찾아온다고 그러니?” “아버지, 병원을 옮깁시다.” 리철갑 과장은 고집을 썼다. “옮길 필요 없어. 수사원 몇을 보내 밤낮 지키게 할게. 그 놈새끼들이 나타나면 당장에서 나포하겠어.” 승호는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아버지, 날 미끼로 삼을 작정입니까? 자칫 무리승냥이들한테 죽을 수도 있잖습니까?” 리과장은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야, 수사대원들이 보초를 서는데도 무서워?” 리과장은 당장 통화기를 꺼내 지시했다. “나요. 이 병실에 그물을 쳐야 되겠소. 천일이, 수길이, 룡철이, 상길이 당장 여기 오오. 강도들이 나타나기만 하면 일망타진하오.” 벽화가 어디론가 나갔다가 이윽해 들어왔다. “저쪽 병실도 숱한 경찰들이 보초 서는 판이요. 뭐 최 시장네 딸이 륜간당해 입원했답니다. 며칠 전 밤에 반주검이 돼 온 걸 겨우 구급했습니다. 원, 그날 밤에 승호마저 구급실에 들어올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흐흑흑, 흑흑.” 벽화는 벽 쪽으로 돌아서서 어깨를 들먹였다. 리철갑 과장은 대개 짐작이 가는데 있어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그만 하오.” 그는 최시장네 딸의 병실도 지키라고 경찰들을 금방 포치해놓은 터였다. “흉수를 빨리 나포해야겠는데 단서가 통 잡히지 않는단 말이야.” 승호는 황급히 손사래를 쳐댔다. “아버지, 그만 수사하십시오.” “왜? 그래 그저 당하고 만단 말이냐?” “글쎄 그만 두십시오. 괜히 긁어서 부스럼을 만들지 말고.” “뭐라고?” “웬 놈인지 모르는 판에 괜히 더 보복을 당하지 않으면 다행입니다. 씨.” 승호는 가령 흉수를 잡았다고 해도 자기가 귀두를 잘린 추문이 만천하에 퍼질 수 있다는 것이 속에 걸렸다. 리철갑 과장은 승호의 속내는 모르고 당부했다. “겁내지 말라. 원쑤를 꼭 갚아줄게.” 승호는 가타부타 묵묵부답하고 상을 찡그리면서 가까스로 침대에 앉았다. 이때 간호원이 처치하려고 밀차를 밀고 들어왔다. “간호장도 있군요.” 그녀는 벽화를 보고 인사하면서 승호의 상처를 처치하려고 붕대랑 약을 꺼내면서 서둘렀다. 승호가 황급히 손사래를 쳤다. “가만, 손님이 있는데 좀 있다 처치하기요.” (야, 가랑잎으로 눈을 가리우고 야옹 하지 말라. 흥!) 성호는 속으로 코방귀를 끼면서 복도에 나왔다. 복도에는 벌써 경찰 둘이 삼엄히 보초를 서고 있었다.    성호는 병원 울안 나무숲에 가서 이모부가 주고 간 핸드폰을 꺼내 이모부한테 이제껏 알아낸 정황을 보고했다. 강운룡 부과장은 즉시 수사방향을 제시했다. “그날 승호가 은영과 성관계를 맺은 건 기정사실이 아니고 뭐냐? 계속 승호를 사건해명에 협조하게 이끌어내라.” “예, 알았습니다. 귀두가 잘린게 창피해서 승호가 쉽게 말할 것 같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나 알아내겠습니다.” 성호는 다 처치했으리라고 짐작하고 승호의 병실로 되돌아갔다. 병실에는 승호 모자간 밖에 보이지 않았다. “너 간첩이냐? 뭐냐? 지금 경찰로 위장해 뭐 하려고 병원에 와서 쏠락거리는 거냐?” 뜻밖에 승호가 성호를 쏘아보면서 야단쳤다. “오해하지 말라.” 성호의 말에 승호는 화를 벌컥 냈다. “썩 나가지 못해?” 성호는 노기를 띤 승호의 눈길을 피하지 않았다. 그는 승호의 침대에 다가가 앉아 툭 까놓고 말했다. “날 믿지 못하겠느냐? 난 하루속히 흉수를 붙잡아 원쑤를 갚아주려는 거뿐이야.” 승호는 오만상을 찡그리며 선금을 보고 손으로 바깥을 가리켰다. “나가라.” “야, 친구를 믿어라.” “엄마, 선금을 절대 이 새끼한테 주지 마오. 얼마나 음험한 놈이요?” 벽화는 도리머리를 흔들면서 복도로 나갔다. 승호는 성호를 쏘아보면서 “자꾸 남의 밑구멍을 파서 뭘 하려는 거야?” 하고 따지고 들었다. 성호는 뭔가 꿀꺽 삼키더니 하나하나 캐고들었다. “사실대로 말해라. 그날 은영과 련애했지?” 승호는 아닌 보살을 떨었다. “야, 임마, 그날 저녁에 강뚝에서 강도들을 만났어.” “관둬라. 법의 감정에 의하면 그날 은영의 몸에 네 정액이 들어있었다는 것이 확인됐다.” “진짜 생사람을 잡는구나.” 승호는 능청을 부리면서 베일로 진상을 가리려고들었다. 그러나 개똥은 청보자기에 싸도 구린 내를 가릴 수 없었다. 사건진상을 가리려는 베일이 인차 홀락 벗겨졌다. “아직도 시치미를 따겠니? 은영의 질에선 네 걸 말고도 세 놈의 정액이 검출됐어.” 승호는 되는대로 베일을 들어 가리려 했다. “글쎄 은영이 세 강도에게 륜간당했을 순 있어. 허나 어쩜 날 련루시킨단 말이야?” “더 시치미를 따지 말라. 과학수사는 못 속여. 분명 너와 은영이 학교 뒤산 수림에서 성관계를 발생할 때 세 강도들이 덮쳐든 거야. 수사대대를 협조해 흉수를 붙잡아 너와 은영의 원수를 갚자.” 승호는 머리를 툭 떨어뜨렸다. 성호는 승호의 정신방선이 무너지는 것을 보아냈다. “말해라! 그날 어떻게 된 일이냐?” 승호는 주먹으로 침대머리를 쾅 쳤다 “성호야, 원수를 갚아달라.” 성호는 승호의 두 손을 맞잡으면서 머리를 끄덕였다. 승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날 난 감옥관리대대에서 밀려나서 울적한 기분에 은영을 찾아갔댔다.  은영은 추운 가을에 뒤산으로 가지 않겠다고 했어. 그런데 내가 은영을 해쳤어. 걔를 데리고 가서 확실히 그랬어. 그런데 갑자기 세 강도들이 덮쳐들었어. 난 칼을 든 그 놈들과 맨 손으로 싸웠지. 헌데 한 놈이 은영을 제압하고 두 놈이 나한테 덮쳐들었어. 독불장군이라고 세 놈이나 칼을 휘두르는 바람에 가슴과 얼굴이 찔렸어. 그 새끼들은 날 바줄로 소나무에 꽁꽁 묶어놓고 은영을 구뎅이에 끌고 들어가 륜간했어. 내 앞에서 말이야.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었어. 엉엉엉~ 엉-엉-” 승호는 억울해 어린애처럼 한바탕 울고나서 로실하게 말했다. “그 놈들이 떠나간 후 난 손에 쥔 수술칼로 바줄을 끊었어. 그런데 은영은 구뎅이  안에서 피못 속에 까무러쳐 인사불성이 됐더라. 벌거벗은 하신에선 하혈이 심해 생명이 위험했어. 헌데 난 은영을 업고 병원에 갈 순 없더구나. 그래서 아버지한테 알렸지.” “야, 어찌 쓰러진 은영을 버리고 제 살겠다고 혼자 병원에 갈 수 있니?” “아니야. 경찰들한테 사건현장을 똑똑히 알려주고 병원에 갔어. 병원에 가서 얼마 안돼 은영도 들어왔다는 걸 엄마한테서 들어서 알게 됐어.” 성호는 관건적인 것을 물었다. “너 귀두는 어떻게 된 거야?” “창피해. 제발 누구한테도 말하지 말라. 걸 알면 어느 처녀 시집오겠느냐?" "응, 약속하마. 건데 묻는 말에 대답해라.“ “귀두는 그 놈들한테 잘렸어.” 승호는 머리를 끄덕이더니 숙이면서 악이 나 이를 뿌득뿌득 갈았다. “진짜 원한이 있는 놈들이야. 우연하게 지나가던 강도들이 한 짓 같잖아.” 성호는 전문 수사대원처럼 제법 그럴듯하게 추리해나갔다. “근년에 너와 척진 자가 없니?” “없어.” “그럼 넌 누가 한짓이라고 보니?” “타성에 있는 홍희 남동생이 한 짓일가?” “홍희 남동생을 본 적이 있니?” “응, 헌데 홍희 동생이 아닌 거 같기도 해. 홍희 동생은 키가 작았어. 그 놈들은 다 꺽다리들이야. 혹시 경옥이 누굴 시킨 건 아닐까?” “송파 형제는 아니라면서?” “깡패들을 시켰을 수도 있지.” “음~” 성호는 머리를 끄덕였다. 한참 궁리하던 승호는 성호를 쳐다보았다. “혹시 은영이 복수하려고 시킨 짓이 아닐가?” “야, 임마! 은영이 시킨 자들이 륜간했겠어? 괜히 생사람을 잡지 말라. 은영이 얼마나 불쌍한 피해자라고 걔를 의심해?” 이때 사복한 경찰들이 넷이나 병실에 들어섰다. 성호는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붕대를 감은 승호의 손을 잡고 당부했다. “잘 치료해라. 무슨 일이 있으면 알려라.” 승호는 머리를 끄덕였다. 병원에서 나온 성호는 하늘을 쳐다보았다. 구질구질 쏟아지는 가을비와 우수수 져서 날려다니는 락엽에 땅바닥의 어지러운  발자국들이 메워지고 있었다. “아, 흉수는 어떤 놈일가?”                                             25. 백일하에 드러난 륜간범들        강운룡은 성호가 수사한 정황을 다 듣고나서 사무상 우에 혐의자도표를 쭉 펴놓았다. 운룡은 도표를 가리키면서 상세히 설명했다. “혐의자들을 종합해보면 크게 2개 부류로 나눌 수 있다. 한개 부류는 은영, 승호와 척진 사람들일 수 있다. 여기에는 승호와 련인관계거나 척진 허경옥과 허송파, 허송호 깡패무리, 승호와 련인관계와 원한이 있는 홍희의 형제들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한개 부류는 은영과 승호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강도들일 수 있다. 그러나 우연히 만나 륜간한 강도일 가능성은 아주 적다. 중요한 혐의자는 홍희 가족보다도 허송파네 깡패무리인 것 같아.” 성호가 끼여들었다. “륜간범들 대단히 날래더랍디다.” 운룡은 머리를 끄덕였다. “물론 우연히 덮쳐든 강도들을 배제할 순 없어. 허나 지금 수사정황에 근거하면  YB병원 급진외과실에 허벅다리 상처를 처치하려고 나타났던 세 청년이 혐의가 제일 크다. 승호는 그날 수술칼로 한 강도의 허벅지와 낯을 찔렀다고 했잖았니? 급진실 의사와 간호사들을 통해 그자들의 용모팍을 장악해 모의초상화를 그려놓았어.” 운룡은 다른 종이말이를 사무상에 쭉 폈다. 짙은 눈섭에 우멍눈, 주먹코, 두툼한 입술이 퍽 인상적이 아닌가. 성호는 딱 어데서 피뜩 본 것 같았다. 강운룡 부과장은 혐의자들 도표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여러 병원에 수사대원들을 보내 그자들이 혹시 재차 병원에 나타나기만 하면 당장에서 나포하라고 했다. 그런데 며칠 되도록 통 나타나지 않는다.” 성호는 코수염쟁이가 피뜩 떠올랐다. “별로 이전에 은영의 눈을 빼가겠다고 송파와 함께 녀성숙사에 쳐들어왔던 깡패 같습니다.” “뭐라고?” “그때 복도에서 한번 붙었댔습니다. 그 놈일 수도 있습니다.” “알았다. 송파가 승호한테 보복하려고 뒤를 밟으면서 기회를 노리다가 깡패무리를 시켜 손을 썼을 수도 있어.” 운룡은 사무상 우의 모의초상화를 뚫어지게 쏘아보았다. “이젠 수사망을 졻혀야겠군.” 그는 창문께로 다가가 가을비가 구질구질 내리는 창 밖을 내다보더니 몸을 홱 돌렸다. “당장 허송파를 련행해야겠다.” 그때 문이 벌컥 열리면서 병원에 잠복했던 수사대원 창남이 들어왔다. “강과장, 시병원에서 한 놈을 나포했습니다.” “어떻게?” “그 놈이 급진외과에 처치받으로 온 거 같습디다.” “어딜 상한자요?” “허벅지를 상한 자입니다.” “창남이, 소뿔은 단김에 빼라고 몽땅 나포해야겠소.” “예.” 창남은 바람결처럼 나갔다. 운룡은 수사대원 천일과 성호를 데리고 지하심문실에 갔다. 성호는 심문실 밖 감시실에서 천일과 함께 텔레비죤 화면으로 심문실 안에서 강과장이 범죄혐의자를 심문하는 것을 보기로 했다. 지하심문실 철문이 드르릉 열리자 키꺽다리 하나 끌려왔다. 우멍눈에 주먹코, 나비코수염, 두툼한 입술…진짜 모의초상화에 그린 혐의자와 비슷했다. 성호는 이전에 녀대생숙사 복도에서 맞붙었던 코수염쟁이라는 직감이 들었다. 강과장은 비수마냥 예리한 눈길로 코수염쟁이 미묘한 표정변화도 놓치지 않고 쏘아보았다. 그 자는 운룡의 예리한 눈길을 피하더니 쪽걸상에 앉아 심문실 천정을 쳐다보았다. 억지로 태연자약한 척했다. (허파에 헛바람이 찬 놈이군.) “성명은?” “무슨 죄 있다고 이럽니까?” “묻는 말이나 대답하오. 성명?” “고주악입니다.” “나이?” “26세입니다.” “거주지?” “태평가.” 운룡과 창남은 눈길을 마주쳤다. “어째 여기 오게 됐는지 알만 하지?” “아니, 무슨 죄 있다고 이럽니까? 진짜 생사람을 잡을 예산이구나.” “닥쳣!” 운룡은 가래짝 같은 손으로 책상을 꽝 쳤다. “생떼질을 쓰지 말고 로실히 탄백햇!” “그날 밤에 뭘 했어?!” “10월 16일 밤에 그럽니까?” “뭘 했어?” “술을 마시러 갔지 뭐. 믿지 못하겠으면 내 친구들하구 물어봅소.” (어느 날이라는 걸 말하지 않았는데도 미리 답변할 준비를 다 해놓았구나. 교활한 놈, 역은 새 방아간을 지나갔군.) “누구와 술을 마셨는가?” 창남의 심문에 주악은 심드렁해했다. “친구들과 마셨습니다.” “누구와 마셨는가?” 운룡이 꽥 고함쳤다. “어서 대지 못할가?!” “야, 어째 이럽니까? 무슨 죄를 졌다고 이럽니까?” “묻는 말이나 대답해라.” “현광일과 마셨는데.” “또 하나는 누군가?” “내 다 어떻게 압니까?” “우린 다 알고 있어. 어서 대라.” “주범이.” 뻔뻔스럽던 주악은 점차 기꺾였다. 코수염을 쓱 씃고 무릎 우에 놓은 그의 커다란 손이 바르르 떨리는 것을 발견했다. “10월 16일 너희들이 무슨 짓을 한 걸 기억하겠지?” “기억합니다. 술을 마셨을뿐 아무 짓도 하지 않았습니다. 우린 깡패여서 싸울뿐  절대 도적질을 하지 않고 녀자들을 강간하지 않습니다.” “흥! 로실히 탄백하라. 그날 밤 대학교 뒤산 소나무숲 속에서 무슨 짓을 했는가?!” 창남의 그 일격에 고주악은 비수에 항문이나 찌린듯이 벌떡 일어섰다. “야, 어째 생사람을 잡습니까? 난 그 사건과 관계 없습니다.” “륜간죄는 무슨 죈지 아는가? 총살이야, 총살! 알아?!” 주악은 평소에 쇠고랑을 차고 파출소 문턱이 다슬게 잡혀다니면서 반정탐능력이  있는 깡패였다. 하지만 총살이란 말에 쪽걸상에서 썩박나무처럼 뒤로 자빠졌다. “일어낫!” 그제야 좀 제 정신을 차렸는지 그는 피기 없이 백지장처럼 질린 낯을 간신히 들고 두덜거리면서 억지로 태연자약한 척했다. “에이, 그 놈 쪽걸상이 너무 작구나. 재수 없이 허망 번져졌어.” 주악은 쪽 걸상에 되앉아 운룡과 창남을 흘끔 도적질해 보았다. “로실히 탄백해라. 허벅지는 어째 상했어?” 주악은 도리머리를 흔들면서 “술에 취해 우리끼리 싸우다가 다쳤습니다.” 하고 변명했다. “어떻게?” “광일이 손칼로 날 찔렀습니다.” “닥쳐! 우린 다 알고 있어.” “알면서 자꾸 심문할 건 뭡니까? 우린 진짜 소나무숲으로 간 적도 륜간한 적도 없습니다.” 운룡은 창남의 귀에 손을 대고 뭐라고 귀속말을 했다. 창남이 나가서 이윽해 성호가 들어왔다. “저 청년을 알만한가?” 주악은 성호를 찬찬히 뜯어보더니 흠칠 놀라했다. 그는 칼날같이 날카로운 성호의 눈길을 피하며 머리를 떨어뜨렸다. “알만한가?” “예, 한번 붙어본 적이 있습니다.” “대학 녀학생숙사에서, 맞지?” “예.” “허송파 누군지 알지?” “모릅니다.” “생떼를 쓰지 말고 로실히 대답해라.” “모릅니다. 우린 걔와 관계없습니다.” “허송파 이름도 몰라?” “이름은 들었습니다. 공원가에 이름난 깡패가 아닙니까?” “그날 송파가 너희들을 시켜서 승호와 련애하러 간 녀자를 륜간했지?” “야, 억울해 못 살겠다.” “우린 네놈들이 한 죄악을 다 알고 있어. 네놈들은 사건현장에 수많은 단서를 남겼어.” “쳇, 아무래나 합소. 좌우간 우린 그 사건과 관계없으니까. 흥!” 운룡은 창남과 귀속말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로실히 탄백해라. 그것만이 유일한 출로야. 주범과 공범의 형사처벌은 차이 있어.” 창남은 주악의 곁에 다가가더니 머리를 붙잡고 삼검불 같은 머리카락을 잡아 쑥쑥 뽑았다. “아갓! 어째? 갓나새끼들처럼 남의 머리를 끄당기긴? 정말 더럽게 노는구먼. 퉤!” 주악은 수사대원 수길에게 끌려 류치실에 가면서 두덜거렸다. 그러나 다리가 너무 떨려 비틀거리는 그 자의 뒤모습이 딱 허수아비 같았다. 창남은 주악의 머리카락을 비닐주머니에 넣어가지고 법의실로 갔다. 법의는 화험실에서 주악의 머리카락을 가지고 DNA를 분석했다. 분석결과 10.16특대상해륜간사건 때 은영의 질 안에 남긴 흉수의 DNA와 일치했다. “즉시 현광일과 주범을 나포하오!” 운룡의 명령에 따라 창남과 수길, 천일 등은 즉시 경찰차를 몰고 쏜살같이 공원가에 달려갔다. 운룡은 주악을 심문실에 끌어내 계속 심문했다. 주악은 의연히 억지로 태연자약한 척했다. “주악이, 곰곰히 생각해 봤는가?” “야~ 어째 자꾸 이럽니까? 륜간한 적이 없다는데.” “네가 10.16사건의 혐의자라는 결론이 나왔다. 피해녀 질 안의 정액과 네 DNA는 일치하다는 화험결과가 나왔어. 이제부터 묻는 말에 로실히 대답해라.” “야, 진짜 생사람을 잡네.” “그날 비수를 가지고 가서 뭘 했는가?” “아니! 난 비수로 찍은 적이 없습니다. 다 그 새끼들이 그랬지.” 주악은 어망간에 실수했음을 느끼고 딴전을 부렸다. “우린 정말 관계없습니다.” “탄백하든 말든 륜간죄는 총살이란 걸 알아라. 죽을바에는 로실히 탄백하고 하루라도 편안히 자라.” “아이고, 다 그 개새끼들 때문에 죽게 됐구나.” 정신방선이 와그르르 무너진 주악은 울상을 지으면서 통탄했다. “누가 시켰는가?” “담배하구 물을 주겠습니까? 다 탄백하겠습니다. 그 놈새끼도 나와 함께 죽어야 해.” 운룡은 수사기록원을 보고 가서 담배와 물을 가져오라고 했다. 이윽고 그는 수사기록원이 가져온 물고뿌를 손수 가져다 주악에게 주었다. 주악은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물고뿌를 받아 꿀꺽꿀꺽 들이켰다. 뒤이어 운룡의 넉가래 같은 손에서 담배를 받아 둬모금 들이빨아 길게 들이켜더니 후~ 내뿜었다. “몽땅 탄백하고 발편잠 자라.” “죽을 판에 몽땅 폭로하겠습니다. 이번 일은 허송파, 다 그 개새끼 시켰습니다.” 운룡은 수사기록원과 눈길을 마주쳤다. 주악의 탄백에 의하면 허송파는 지난 해에도 사촌녀동생 허경옥이 리승호한테  앙심을 품고 보복하려고 했다고 한다. 지난해 어느 날 밤에 허송파 형제는 주악이랑 주범이랑 광일이랑 데리고 대학 기숙사에 가서 승호를 찾아내 치려고 했다. 그러나 승호가 없자 녀학생 기숙사에 가서 허경옥의 요구대로 은영과 홍희의 눈을 빼가려고 했다. 그러나 그날 밤 기숙사 경비원과 성호가 막아나서는 바람에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그후 허송파는 항상 주악 등을 데리고 승호의 뒤를 밟으며 돌아다니면서 승호한테 손을 쓸 기회를 엿보았다. “그런데 그날 저녁에 승호가 은영이란 녀대학생과 함께 나타나자 우린 뒤를 밟았댔습니다. 그 애들이 학교 뒷산 소나무숲 으로 가는 걸 보자 송파는 우릴 보고 반주검이 되게 패놓으라고 했습니다.” “그래 송파는 보복하러 사건현장에 가지 않았는가?” “예. 승호가 자기를 알기에 인차 꼬리를 밟힌다고 하면서 빠집디다.” “범죄과정을 좀 상세히 말하라.” 승호는 물을 한고뿌를 더 달라고 해 꿀꺽꿀꺽 마시더니 계속 탄백했다. 그날 밤 주악과 주범, 광일이 승호와 은영의 뒤를 한 50메터 거리를 두고 따라갔다고 한다. 그런데 소나무숲 속 구뎅이에 들어가자마자 승호와 은영이 관계를 발생할 줄은 몰랐다고 한다. 그들이 어둠을 슬금슬금 소나무숲으로 다가갔을 때였다. 승호의 비명소리가 들렸고 승호가 은영을 마구 때리면서 “이 쌍간나새끼! 죽여버리겠다!”고 고함쳤다고 했다. 그때 주악이랑 덮쳐가 은영을 깔고 들어앉은 승호를 발길로 걷어차고 치고 박았다. 승호는 은영을 놓아주고 구뎅이에서 뛰여올라가 그들 셋과 맞붙어 주먹을 휘두르고 발길을 날렸다. 주악과 주범은 승호를 쳐눕히고 미리 준비해간 바줄로 승호를 결박해 소나무에 묶어놓고 물매를 안겼다. “누가 승호의 귀두를 잘랐는가?” “건 모릅니다. 승호 귀두가 잘리웠습니까? 허, 씨원하군. 숱한 처녀들을 해치더니, 잘코사니야.” “너희들이 승호를 보복하자고 귀두를 잘랐지?” “절대 우리 한 짓 아닙니다. 그저 승호를 한각 분질러놓으려고 했을뿐입니다.” “로실히 탄백하지 못할가?” “정말 죽어도 하지 않은 일은 안 한 짓입니다.” 주악은 도리머리를 가로 흔들었다. “아, 생각납니다. 내 승호 아래배를 주먹으로 치면서 볼라니 이상하게 벌거벗은 허벅지에 피 즐벅합디다.” 주악은 자기 죄가 아니라고 구구히 해석했다. “생각해보십시오. 주먹에  아래배를 맞아서야 어찌 허벅지에서 피가 날 수 있습니까? 혹시 은영이 한 짓이 아닌지도 모릅니다. 난 정말 모릅니다.” 며칠 후 잇따라 주범도 시내에서 빈들거리다가 경찰들에게 나포됐다. 수사대원들은 인차 지하심문실에서 주범을 심문했다. 그런데 그는 승호가 귀두를 잘린 일을 전혀 모른다고 딱 잡아뗐다. 주범과 주악은 몽땅 코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딱 깡패조직의 표징을 보는 것만 같았다. “피해녀를 누가 먼저 강간했는가?” 운룡의 심문에 주범은 무겁게 입을 열었다. “광일이 먼저 강간했습니다. 우린 원래 송파 요구대로 그저 승호를 한각 분질러 놓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나와 주악이 승호를 바줄로 묶어놓고 때리는 새에 광일은 녀대학생을 구뎅이에 처넣고 강간했습니다. 뒤따라 우리 둘도 륜번으로 강간했습니다. 그런데 녀대학생이 까무러치자 죽은 것 같아 겁을 먹고 승호와 녀대학생을 놔두고 도망쳤댔습니다.” 운룡은 주범의 낯에 멍이 든 것을 보고 또 심문했다. “누가 허벅다리를 찔렀는가?” “주악이 찔렀습니다. 아, 광일도 녀학생에게 얼굴을 칼에 찔렸습니다. 그래서 우린 인차 뒤산에서 시내에 내려오자마자 병원에 가서 처치했습니다.” “녀학생한테 칼이 있을 수 있는가?” “글쎄 말입니다. 광일은 확실히 녀학생을 강간하려고 덮쳐들었다가 구뎅이  안에서 녀학생한테 얼굴에 칼을 맞았다고 합디다. 주악은 아마 승호한테 찔린 것 같습니다.” 운룡은 주범에게 물었다. “왜 첫날 밤에 YB병원에 가서 처치한 후 자취를 감췄는가?” “주범은 송파는 승호의 어머니가 YB병원 외과급진실 간호장을 하기에 들킬가봐 가지 않기로 했습니다.” 운룡은 머리를 끄덕이더니 주범을 보고 심문기록에 서명하게 한 후 쇠고랑이를 채워 류치장에 가두었다. 베일에 가렸던 흉수와 피해자의 륜곽이 아른거리다가 서서히 백일하에 드러나기 시작했다. 대지를 을씨년스레 감쌌던 안개도 서서히 걷히더니 천하만상이 정체를 드러냈다.  
144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94) 댓글:  조회:1124  추천:0  2018-03-11
             5. 낙향한 교수         쨍쨍 내리쪼이는 땡볕을 맞으면서 집으로 돌아온 상순은 신경질 밖에 나지 않았다.        멍지뫼산 앞에서 흥수에게 조선특무로 한참 몰리고 돌아왔는데 이게 뭔가? 덕돌이랑 성욱이랑 동림이랑 마을의 조무래기들이 글쎄 살구나무에 올라가 다닥다닥 달린 살구를 뜯어 먹느라고 야단치고 있지 않겠는가.        “야, 이 놈 새끼들아, 어서 내리지 못해?”       상순은 도끼눈을 부라리면서 버럭 호통쳤다.       애들은 질겁해 살구나무에서 엉금엉금 기여내렸다. 애들은 상순의 눈치를 흘끔흘끔 보며 바자 문을 열고 와르르 도망쳤다. 덕돌이 내리자마자 상순은 손바닥으로 엉덩이를 쨩쨩 쳤다. “이 놈 새끼, 집이 빈 틈에 잘했구나. 살구를 팔아 넷째누나 병을 치료하자고 했는데. 살구나무를 전페했구나. 다시 그러겠니? 이 놈아!” “아이 그러겠습구마.” 덕돌은 너무 아파 엉덩이를 왼손으로 만지며 울면서도 오른손에 잡은 노랗게 익어 톡톡 터진 참살구만은 놓지 않았다. 상순이 살구나무를 올려다보니 살구가 발갛고 노랗게 무르익다 못해 갈라 터져 꿀물을 흘리고 있었다. 살구 한 알 뜯어 입에 넣으니 시큼하고 달달해 천하의 별맛이었다. 살구나무에 노라발간 참살구가 다닥다닥 달려 있었다. 다행히 애들은 높은 가지에는 올라가지 못해 아직도 숱한 참살구가 살아남아 있어 다행이었다. 상순은 집에 들어와 명옥이 퍼주는 멀건 죽을 후루루 마시고 사발을 밥상에 탕 놓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앞길이 막막했다. 바깥에서는 자기가 소개해서 입당시킨 흥수가 피 눈이 돼 자기를 잡아치우고 지부서기를 하려고 미쳐 날뛰고 있었다. 흥수는 북조선으로 달아난 은숙의 꼬리마저 밟고 미쳐 날뛰지 않는가. 집에 돌아와보니 넷째딸 신자가 뇌막염에 걸려 앓아누워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셋째딸 홍자가 자꾸 실없이 웃다가도 죽어 누어 팔과 다리를 주물러 주어야 겨우 살아났다. 집안 집 형내 조카에게 물어보니 신경이 좋지 않다고 했다. “안팎에 시원한 날이라고는 없구나.” 상순은 농학원에서 집으로 돌아와 가마니를 똑딱똑딱 짜는 맏딸 순자를 보자 신경질이 났다. (또 돈을 달라고 왔니?) 성이 발칵 난 상순은 구들에 있는 낫을 쥐고 일어나더니 순자가 짜던 가마니 새끼줄을 쭉쭉 베 버렸다. “아버지, 왜 이래우?” “에이, 신경질이 나 죽겠다.” "가마니를 왜 이렇게 베버립니까?” “가마니를 짜 뭘 해?” “가마니 한 장에 29전인데요." 순자는 복숭아 얼굴에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두덜거렸다. “가마니를 짜서 홍자와 신자 병치료에 보태려고 그랬는데 아버지는 왜 신경질을 쓰면서 이럽니까?” “그랬니? 후-” 상순은 순자에게 미안해 다 큰 맏딸을 품에 꼭 껴안았다. “미안하다. 네 마음을 몰라줘서.” 상순은 자기를 도울 수 있는 애는 순자 밖에 없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럴수록 순자에게 미안하고 사회 압력에 너무 취약한 자기를 욕했다. 오후에 밭으로 일하러 가려고 하는데 밖에서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김서기 있소?” “있소. 누구요? 들어오오.” 상순이 바삐 대답하면서 바깥에 나가보니 뜻밖에도 정규상이 찾아오지 않았겠는가. “아니, 어떻게 돼 이런 산골에 다 왔소?” “형님. 한마디로 다 말하기 힘드오.” 정규상은 울안에 아무도 없는 것을 둘러보고 소리를 낮춰 말했다. “형님, 사실 YB병원에서 날 보고 농촌에 내려가 노동개조를 하라고 했소. 그때 형내 선생이 병원에 말해서 광명가도위생원에서 일하게 했댔소. 그런데 이번엔 안된다오. YB병원에선 기어이 농촌에 내려가 로동개조를 해야 한다오. 낯선 마을에 가기보다 형님이 대대당지부 서기를 하는 이 마을에 오면 여러 모로 도움을 받을 거 같아 찾아왔소. 이번에도 형내 어른이 나서서 병원에 간청을 드렸소. 날 이 마을에 보내달라고.” “어서 들어오오.” 상순은 정규상을 데리고 집안으로 들어오면서 명옥에게 인사시켰다. “여보, 동생 정규상교수 왔소.” “아주머니, 안녕하오?” 명옥이도 조왕에서 설걷이를 하다가 행주치마에 손을 닦으면서 인사했다. “전번에 시아버지 앓을 때 형내 조카와 함께 와서 수고 많았습니다.” 상순은 정규상을 데리고 위방에 자리를 정하고 앉자마자 중얼거렸다. “그래도 유명한 정교수를 이런 산골에 보내 노동개조를 시키다니? 에이, 정말. 이 놈의 세상이 무슨 세상이오?” 상순은 도리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좌우간 우리 서로 의지하면서 이 혼란한 세상에서 살아 나가기요.” “고맙소.” 정규상은 마음을 놓았다. 허나 상순의 얼굴에는 근심에 찬 어두운 그늘이 더 늘어났다. (정규상을 보호한다고 또 흥수나 학수가 꼬리를 물고 늘어지겠구나.) 허나 상순은 역경을 겪더라도 억울하게 우파로 몰린 정규상을 양심적으로 끝까지 보호하리라고 마음먹었다. “가족들을 데리고 와서 폐를 끼치겠소. 형님.” “무슨 소리를 하오. 가만 있자.” 상순은 한참 궁리하더니 뒤 말을 이었다. “우리 집이 비좁은대로 위방에 먼저 들어 있소. 이제 과수원과 멍지메 논밭을 다 푼 다음에는 식당 자리를 손질하고 들면 되오.” “어떻게 폐를 끼치겠는지 모르겠소.” “야, 형제간에 내의를 하지 마오. 옛날에 우리 아버지와 할아버지 용정에 가면 당신네 아버지 신세를 얼마나 졌소. 그때부터 우린 형제간으로 되지 않았소?” 정규상은 그저 머리만 끄덕였다. 이때 덕돌이 검둥이를 데리고 순자와 함께 정지로 들어왔다. “아들이 아니오?” 정규상이 묻는 말에 상순은 “옳소.”라고 하더니 “덕돌아, 삼촌이다. 얼른 인사해라.”라고 했다. 덕돌은 부엌 바닥에서 개 목을 끌어안고 놀다가 우쭐 일어나 허리를 굽히면서 “안녕하십니까? 덕돌입니다.”라고 했다. 정규상은 일어나면서 “에이구, 우리 조카 똑똑하구나.”라고 하더니 호주머니에서 2원짜리 돈을 꺼내 쥐어 주고 나서 구들 한쪽에 놓은 가방에서 사탕이랑 과자랑 꺼내 주었다. “옜다. 먹어라.” “야, 좋다.” 덕돌은 연신 경례하면서 사탕과 과자를 두 줌이나 쥐고 마당으로 뛰어나갔다. 성욱이랑 동림이한테 자랑하면서 함께 먹으려는 심사였다. 덕돌은 항상 먹을 것이 있으면 애들과 먼저 자랑한 후에는 나눠 먹군 했던 것이다. 그래서 동네 애들은 덕돌을 좋아하고 따랐다. 순자와 성숙도 일일이 정규상에게 인사했다. 홍자는 자꾸 “히히히” 하면서 웃었다. “얘, 웃지 말라.” “예? 헤헤헤.” 홍자는 하얀 얼굴에 싱거운 웃음을 자꾸 웃었다. “동생, 양해하오. 저 앤 웬 일인지 자꾸 싱거운 웃음만 웃소.” 정규상은 홍자의 납작하고 하얀 얼굴을 찬찬히 보더니 “얘 신경이 좋지 않구먼.”라고 하더니 “약을 쓰면 인차 낫을 수 있소. 너무 근심하지 마오.”라고 했다. “약을 먹기는 먹소. 저 맏딸이 얘를 데리고 용정에 있는 자준 의사에게 보이고 중약을 져다가 달여 먹이고 있소.” “오. 자준 영감이야 우리 간도에서도 이름 있는 의사지. 만약 낫지 않으면 내 서약으로 치료해줄게.” 상순은 정규상을 보고 “고맙소.”라고 하면서 정지에 누워 있는 신자를 가리켰다. “동생, 홍자보다도 저 넷째딸이 큰일이오. 머리에 열이 나더니 저렇게 누워만 있소. 정통편을 아무리 먹여도 쓸데없소.” “뭐라오?” 정규상은 정지에 내려와 신자의 손맥을 짚어보고 이마에 손을 얹고 열을 짚어 보더니 황급히 말했다. “큰 일 났소. 얘를 YB병원에 데리고 가서 치료해야 하겠소.” 그는 뒤이어 상순을 한쪽으로 데리고 가서 나직이 말했다. “그저 감기 같지 않소. 별로 뇌막염인 것 같소.” “뭐라오? 뇌막염?” 상순은 너무나도 놀라 눈을 치뜨며 정규상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정규상은 머리를 무겁게 끄덕였다. “빨리 치료해야 하오. 생명이 위험하오.” “에이고, 공부도 영 잘하고 얘기도 아주 잘해 선생들마다 머리 총명하다던 애를 이게 뭐요?” 명옥도 놀라 신자를 붙안으면서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인차 병원으로 데리고 가기요.” 상순은 황급히 우사에 가서 코깜쟁이 암소를 풀어 수레를 메워가지고 왔다. 명옥은 수레 우에 이불을 폈고 상순은 신자를 업어 수레 우에 실었다. 덕돌은 수레우에 누운 넷째누나의 손을 잡고 발을 동동 구르면서 눈물을 줄줄 흘리며 통곡 쳤다. “내 제일 좋아하는 누나를 어디로 데려가니? 엉, 엉, 엉.” 성숙도 “언니, 병을 잘 치료하고 오라.”라고 하며 눈물을 펑펑 쏟았다. 상순은 수레를 몰고 가면서 옆에서 걷는 정규상을 보고 “이 난장판세월에 이런 산골에 와서 어찌 고생하겠소?”라고 했다. 정규상은 “그래도 형님이 서기를 하는 함흥대대에 오니 괜찮소. 속이 든든하오.”라고 했다. 그 말에 상순은 “너무 근심하지 마오."라고 하더니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었다. "우리 함께 이 어려운 세월을 이를 악물고 넘어 가기요. 세월이 흐르노라면 억울한 누명을 벗을 날이 있겠지.” 상순과 명옥은 신자를 싣고 코깜쟁이야 우리 넷째 딸을 살려 달라고 바삐 정규상을 따라 YB병원으로 떠나갔다. 순자는 눈물을 닦으면서 신자를 실은 수레가 동구 밖 언덕 아래로 사라질 때까지 바래였다. 홍자는 그때까지도 자꾸 “헤헤헤.” 하고 웃었다. 순자는 홍자와 함께 풍로에 약을 달이려고 서둘렀다. 그러나 성냥마저 없어 풍로에 불을 피울 수 없었다. 두루 살펴보던 순자는 윗집 박성근의 맏아들 숭길이 풍로 불을 피우는 것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집에 들어가 이불의 솜을 뜯어 나무가지에 감아가지고 윗집으로 달려갔다. 순자와 홍자는 숭길과 말하고 풍로 불에 솜을 감은 나무가지에 불을 붙여 가지고 달려 내려왔다. 숭길과 홍자는 동갑이었다. 숭길은 홍자의 아버지가 자기 아버지를 보호해주는 것을 못내 고맙게 생각하던 차여서 홍자와 순자를 보고 인차 불을 붙이게 했다. 원시사회를 방불케 하는 이 놈의 세월에는 성냥갑마저 흔치 않아 이집 저집에서 불을 붙여 가는 일이 종종 있었다. 한편 YB병원에 간 상순은 수레에서 신자를 둘쳐 업었다. 그때 신자는 거의 죽어서 까무러친 채 두 다리를 아버지 엉덩이 뒤에 축 드리운 채 줄줄 끌리었다. 상순은 신자를 자꾸 춰 업으면서 정규상을 따라 신경과 진찰실을 찾아갔다. 정규상은 우파지만 인간적으로 놀았기에 가까운 의사들이 많았다. 정규상의 면목을 봐서 신경과 진찰실의 주임 량 의사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신자의 병세를 아주 세심히 진찰했다. 그는 청진기로 신자의 여기저기 이리 저리 대보고 머리에 손을 대보기도 하더니 “옳소. 정 선생의 진찰처럼 뇌막염이오. 입원해 좀 치료해야 하겠소.”라고 했다. 정규상은 상순을 보고 “형님, 근심하지 마오. 우리 량주임은 신경과 창시자요. 뇌병을 아주 잘 치료하오.”라고 했다. 상순은 량주임의 두 손을 잡고 “우리 넷째 딸을 살려 줍소.”라고 애원했다. “근심하지 마십시오. 치료하면 살 수 있습니다. 다만 이미 뇌가 손상받았기에 머리가 좀 부실할 거 같습니다.”라고 했다. “부실하더라도 살리기만 하면 됩니다.” “그렇잖고. 목숨만 붙어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리하여 상순은 신자를 입원치료받게 했다. 허나 입원비가 없어 병원에서는 입원병실에서 내보내 관찰실에 눕혀 놓았다. 관찰실이란 어떤 곳인가? 임종 전 환자를 사체실에 내가기 전에 눕혀 놓고 관찰만 하는 곳이었다. 그것도 모르고 명옥은 주사 한 대도 맞지 못하고 잠만 자는 신자를 들여다보면서 지키고 있었다. 어느 하루, 명옥의 사촌여동생 해옥이 찾아 왔다가 관찰실 침대에 누워있는 신자를 보고 놀랐다. “언니, 어째 신자를 여기 놔두오?” 그러자 명옥은 “에이고, 여기 혼자 있으니 너무나 좋소. 숱한 사람들 속에 있으니 신자 몸에서 이 자꾸 기어 나오지. 창피해 죽겠소.”라고 했다. “언니, 여기 관찰실은 죽기 전 환자를 관찰하는 곳이오.” “뭐라오? 그래 우리 신자가 죽게 됐단 말이오?” 해옥이 황급히 의사들과 알아보니 병원에서는 신자의 치료비를 대지 못한다고 량주임과 말도 하지 않고 주사 한 대 놔주지 않고 관찰실에 옮겨가게 했던 것이다. “앓는 사람을 돈이 없다고 치료를 하지 않는 것이 옳습니까?” 해옥은 해당 책임자에게 바투 들이댔다. “그래 치료비는 누구한테서 받겠소? 보아하니 그 집은 돈 일전 한 푼 없는 시골 농민들이더구먼.” 그러나 해옥은 신자를 살리려고 갈비뼈를 들이댔다. “아무리 농민의 딸이라고 해도 그렇지. 어찌 앓는 사람을 치료도 하지 않고 이럽니까? 제가 치료비를 담보할 터이니깐. 치료를 해주십시오.” 그리하여 신자는 다시 입원병실에 옮겨와 치료를 받게 됐다. 어느 날, 입원실에 눈에 퍽 익은 예쁜 간호사가 들어왔다. 눈길이 마주치는 순간 상순은 눈에 익은 간호사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어디에서 보던 간호사인데. 아, 옳지. 정규상네 심장내과에 있던 박윤희 간호사가 아닌가!) 상순은 하마터면 소리칠 번했다. 박윤희도 상순이 눈에 익어 자꾸 눈길을 주더니 먼저 말을 거는 것이었다. “아주버니, 이전에 공학이라던가 입원했을 때 여기 온 적이 있었지요?” “예, 혹시 심장내과에 있던 박 간호사 아니오?” “맞습니다. 저를 어떻게 기억합니까?” 박윤희는 외까풀 눈을 살짝 치뜨면서 생글 웃었다. “그때는 정규상 의사와 한 과에 있더니 어떻게 돼 신경외과에 왔습니까?” “그저 그렇게 됐습니다.” 삽시에 윤희의 걀죽한 얼굴이 어두워지더니 얼버무렸다. “한 병원 안에서는 과실을 자주 바꿀 수도 있습니다. 좌우간 넷째 딸이 저렇게 앓아서 어찌 하겠습니까? 크게 근심하지 마십시오. 우리 량 주임은 신경병과 뇌병을 아주 잘 치료하니 한 보름 입원해 있노라면 치료될 거예요.” 그 말에 상순은 “그랬으면 얼마나 좋겠소. 절이라도 하겠소.”라고 하며 한숨을 후 내쉬었다. 옆에서 정규상도 “형님, 너무 근심하지 마오. 링겔주사를 며칠 맞으면 소염될 거요.” 하고 안심시켰다. 윤희는 키도 작달막한 농촌의 보통 노동부녀 명옥과 훤칠한 키에 멋진 나그네 상순을 번갈아 보더니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짝이 엄청 기울어. 저렇게 멋진 나그네가 어떻게 하면 저렇게 작달막하고 인물이 없는 아낙네를 얻었을까?) 윤희는 신자에게 주사를 놓고 또 다시 한번 상순과 명옥을 번갈아 보고 몸을 돌려 나갔다. 명옥이 신자를 거들어 주고 상순은 정규상네 집으로 가서 이사 짐을 함께 싸 수레에 싣고 마을로 돌아왔다. 정규상의 아내는 속으로는 이런 시골에서 어떻게 살겠는가고 불안해하면서도 내색을 내지 않았다. 허나 아들 문성과 딸 순임은 농촌 마을의 소똥과 진흙탕을 피해 밟으면서 상을 찡그렸다. “에이, 더러워. 우리 시내 길을 걷다가 여기 오니 소똥이나 돼지 똥을 밟을 까봐 겁난다.” 순임의 말에 문성은 “난 진흙탕에 빠질 까봐 겁난다.”라고 했다. 정규상은 애들을 나무랐다. “어지럽다고 말만 하지 말고 내일부터 집으로 들어가는 길에 모래를 날라다가 펴라.” “예.” 상순은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정규상네 부부와 함께 이사 짐을 부리어 윗방에 들여 놓았다. “비좁은 대로 참고 견디오. 이제 언제를 다 쌓고 과수원을 다 만들면 식당짜리를 세 칸으로 막아서 정 선생을 들게 하겠소.” 상순의 말에 정규상 내외간은 얼마나 고마운지 몰랐다. 상순은 순자를 보고 점심밥을 짓게 했다. 그리고 홍자와 성숙이랑 시켜 신자의 입원비를 마련하게 무르익은 살구를 뜯으라고 했다. 덕돌과 성숙은 살구를 뜯어 한 사발을 문성과 순임한테 먹으라고 윗방에 올려다 주었다. “와, 맛있다.” “새콤하고 달구나.” 순임은 자기보다 세 살이나 지하인 덕돌에게 사탕이랑 과자랑 두 봉지나 주었다. 애들은 인차 친해졌다. 오후부터 그들은 함께 태평강에 뛰어가 놀기도 하고 모래를 대야에 담아 마당과 길에 펴기도 했다. 상순은 은숙과 동선의 일이 답답해 멍지메산 앞으로 가기 전에 윗마을 함흥 촌에 올라가 할아버지를 찾았다. 병완은 대대 사무실에서 신문을 읽고 있었다. “할아버지, 몸이 불편하겠는데요. 오후에는 일터에 나오지 마십시오.” 병완은 돋보기를 끼고 신문을 보다가 눈을 뗐다. “왔니? 요즘 머리 아프겠구나. 허나 너무 근심하지 말라. 사내대장부란 심지가 굵고 굳어야 한다. 그까짓 일이 다 뭐냐? 네 애비와 난 일제가 살판치던 시대에 일본 놈들의 총칼 밑에서도 굳세게 살아왔다. 알만 하니?” “예. 허나 너무 억울합니다.” 병완은 한숨을 후 내쉬었다. “나도 은숙과 동선의 일로 머리 아프다. 좋기는 이제라도 편지를 띄워 동선과 은숙을 집으로 데려오너라.” 그러자 상순은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더니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그랬으면 좋겠는데. 그 애들이 돌아오자 하겠습니까? 동선은 함흥에서 조선로동당에 가입한데다가 기관사질을 한다지 않았습니까?” “은숙이라도 데려오라.” “그 앤 혹시 아직 직업을 찾지 못했으니 돌아올지 모르겠습니다.” “편지를 써라는데 그러니?” “예?” 상순은 눈을 치떴다. “또 조선과 내통한다고 억울한 모자를 씌우지 않겠습니까?” 병완은 곰방대를 길게 빨더니 쿨룩쿨룩 기침을 깇으면서 곰방대 담뱃재를 재떨이에 툭툭 털었다. “애들을 시켜 가만히 국자가에 가서 부쳐라.” “예- 알았습니다.” 그제야 상순은 안도의 한숨을 후 내쉬면서 머리를 끄덕였다. 하늘이 그래도 잘 해주었다. 상순이 함흥 촌에 올라 올 때에는 먹장구름이 밀려오면서 번개가 번쩍이고 우레가 울었다. 허나 오후에는 우레가 울뿐 소낙비는 내리지 않고 비 꼬치를 내리 뿌릴 뿐이었다. (요만한 날씨에야 일할 수 있지.)                                                 6. 싱그러운 사과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삼복염천에도 사원들은 상순의 지휘아래 열심히 돌을 캐고 다락밭 언제를 쌓았기에 가을 전에 과수원은 모양을 드러냈다. 이제 명년에는 다락밭에 사과배나무를 사다가 심으면 됐다. “이제 5~6년 후면 우리 사원들이 사과를 먹을 수 있을 거요.” 상순은 정규상을 데리고 과수원 자리를 돌아보고 말했다. 그는 정규상을 근본 개조대상이거나 우파분자라고 여기지 않았고 대대 하향간부처럼 데리고 다녔다. 그들이 나란히 멍지뫼산 앞에 강 물곬을 돌리는 공사장에 가자 흥수가 눈알을 데굴데굴 부라리면서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쳇, 저렇게 정치각오가 낮아서야 어찌 지부 서기를 해?” 그 소리를 듣고 상순은 “자네가 그렇게 지부 서기를 하고 싶어 하는데 자리를 내놓을 게. 네 놈이 콱 해봐라!”라고 쏴주고 싶었다. 그러나 꾹 참는 수 밖에 없었다. 며칠 전에 그러루한 말을 했다가 할아버지한테서 들은 꾸지람소리가 귀전을 무섭게 때려 꿀꺽 삼켜버렸다. 학수는 옆에서 동생 흥수가 너무 하는 것 같아 못 마땅한 눈길을 보내더니 상순의 앞으로 다가갔다. “김서기, 그래 신자는 어떠렇게(어떻기에)?” “며칠 치료하면 나을 거요.” 학수는 머리를 끄덕이면서 상순과 나란히 걸어 언제를 쌓는 곳으로 다가갔다. 학수는 흥수의 동생이었지만 그래도 원칙을 지켰다. 무조건 형이라고 흥수를 지지하지는 않았다. 상순이 없는 사이에 흥수가 어찌나 우파들을 투쟁하는데 열을 올렸는지 언제공사는 별로 진척이 없었다. 돌을 처넣으면 거세찬 강물이 돌 밑의 모래를 파가면서 언제가 자꾸 무너지곤 했다. 상순은 소용돌이치며 세차게 흘러가는 강물을 보며 양미간을 찌푸리고 궁리했다. 한참 후 그는 끝내 묘안을 내놓았다. “돌을 하나하나 강물에 처넣어선 안 되오.” 그는 몸을 돌려 학수를 마주 보면서 과단성있게 말했다. “쇠줄망태기에 돌을 수태 넣어 한꺼번에 강물에 처넣잔 말이오. 강물이 아무리 세차도 밀어가지 못할 거요.” “오, 그게 좋은 방법이오. 우린 왜 진작 그런 좋은 방법을 생각하지 못했을까?” 과연 그 방법은 효과를 보았다. 이튿날에  상순은 학철이랑 경학이랑 데리고 진수해공사 공소합작사에 가서 외상으로 쇠줄을 몇 수레나 사왔다. 상순은 사원들을 데리고 쇠줄망태기를 만든 후 돌을 반 수레씩이나 넣고 강물에 굴려 처넣었다. 그러자 세찬 강물도 머리를 숙였다. 쇠줄망태기에 넣은 돌들은 태산마냥 강물을 떡 뻗치고 서서 물곬을 동남방향으로 돌렸다. 뒤이어 사원들은 상순의 말대로 물에 들어가 쇠줄망태기 돌 위에 올라서서 쇠줄그물을 트는 족족 쇠줄그물 안에 돌을 처넣어 차곡차곡 언제를 쌓아올렸다. 그리하여 한 보름 만에 “ㄱ”자모양의 20여 미터씩이나 되는 언제를 십여 개 쌓아 물곬을 완전히 동남방향으로 돌리었다. 연 몇달 동안에 1킬로미터도 넘는 언제를 쌓아 3헥타르나 되는 모래밭을 얻어냈다. 사원들은 환성을 올렸다. “여기에 논을 풀면 명년 후년에는 배불리 먹고 살겠다.” “김서기니깐. 이런 엉뚱한 궁리를 다 하지. 누가 하겠소?” “그러기에 말이오. 저 흥수는 김서기 발뒤축에도 가지 못하면서 김서기 자리를 탐내서 계속 문단 말이오.” “길러준 개 발뒤축을 문다고 정말 양심이 없소.” 뒤에서 일군들의 밥을 푸던 춘실은 화를 발칵 냈다. “남의 나그네 말을 어째 그렇게 험하게 하오? 김서기 병원에 딸을 싣고 간 후에 우리 나그네 돌언제 공사를 지휘했지. 누가 했소? 보자보자 하니까. 간에 가 붙고 슬개에 가 붙는다는데. 흥! ” 덕성이랑 춘실의 눈치를 흘끔흘끔 보면서 물러가 돌을 날랐다. 상순은 떡돌 같은 돌을 움쭉 들다가 그만 놓쳐 발등을 상했다. 돌을 들고 발을 빼보니 돌에 깔린 발에서 피가 흐르고 퉁퉁 부어올랐다. 춘실은 너무나도 섬직해 밥주걱을 든 채 달려와 치맛자락을 쭉 찢어 상순의 발을 싸매주었다. “쩌! 쩌! 쩌!” 흥수는 먼 발치에서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듯 하면서 입을 함박만이 벌리고 멍청하니 서서 엿보았다. 상순은 흥수를 흘끔 곁눈질해보며 나직이 말렸다. “이러지 마오. 제 나그네 눈길을 보오.” 그제야 춘실은 치마폭을 걷어안고 땅 가마를 건 부뚜막 쪽으로 달려갔다. 상순은 점심을 먹으면서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발을 싸맨 검정 치맛자락을 내려다보는 순간 춘실의 눈물에 젖은 그윽한 눈길이 멀건 죽사발에 떠올랐다. 부뚜막에서 엉덩이를 흔들면서 가마를 부시는 춘실의 뒷모습을 가만히 훔쳐보는 순간 아랫배로부터 가슴까지 무슨 줄이 뻗치면서 찡 저려났다. 상순은 참지 못할 옛정의 충동을 느끼면서 눈을 지그시 감았다. (안 돼? 난 당원이야. 딴 생각해선 안돼.) 그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순간 끓어 번지던 정욕도 안개처럼 실실이 흩어져버렸다. 그런데 그는 놀라운 장면에 자기 눈을 의심했다. 저쪽 강변 아름드리 버드나무 밑에서 경주가 미란이랑 충국이랑과 나란히 앉아 죽물을 마시면서 웃고 떠드는 것이었다. (허참, 지주네 딸과 놀다니? 투쟁 맞자고 눈치코치 없이 놀아?) 상순은 인차 “경주, 여기 오라!” 하고 소리치면서 손을 흔들었다. 경주가 헐레벌떡 뛰어오자 상순은 손바닥으로 머리를 눌러놓았다. “이 놈아, 정신 있니? 왜 지주네 아들딸들과 노니?” 상순은 주위를 둘러보더니 아무도 없는 것을 보고 목소리를 낮춰 “너 혹시 장미련을 좋아하니?” 하고 물었다. “에이고, 형님도 무슨 소리요? 미련은 내 보다 열 살도 더 먹은 노처녀인데. 되지도 않는 말을. 황차 미련은 지주네 딸이 아니오?” 상순은 경주를 한쪽으로 끌고 가서 엄숙하게 말했다. “미련과는 절대 안 된다. 저 지주네 아들딸 놈들이 서른이 넘도록 시집장가를 가지 못하더니 너를 꾀려는지 모르겠다. 그런 날엔 끝장이야. 너네 어미를 남조선특무로 몰아붙이는데 너까지 지주 딸을 좋아해서야 되니?” 경주는 한숨을 후 내쉬며 머리를 끄덕였다. “우리 엄마가 무슨 한국특무라고 그래오?" "이놈아, 무슨 뚱딴지 같은 한국이냐?" " 흥! 난 그래 장가도 가지 말란 말인가요?” 상순은 주위를 눈짓했다. 경주는 성이 꼭뒤까지 치밀어 씩씩거리더니 휭 하니 일터로 가버렸다. 상순은 남조선 특무 김용천의 아들이지만 부리부리하게 생긴 자식이 아비처럼 사내다운 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자식이 속은 파속처럼 시퍼런 놈이야.) 상순은 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리면서도 남들 앞에서는 경주와 거리를 두는 척 했다. 경주 김씨 후손인 경주는 기실 영월 김씨와 먼 한 집안이었다. 황차 경주는 상순의 사촌동생 김경수의 동복형제가 아닌가? (난 진달래 큰어머니가 특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비록 용천의 본댁이지만 남조선 특무 용천을 붙잡도록 정보를 우리한테 제공했다. 촌공소에서 용천을 제압할 때 돌을 날려 까 눕혔다. 우리를 도와 용천을 나포하지 않았던가! 진달래 큰어머니는 성칠 큰아버지를 항일유격대 대원으로 발전시킨 로항일투사이다.) “앗!” 이런 저런 생각을 끝이 없이 하다나니 상순은 그만 손이 미끄러져 돌을 들다가 툭 떨어뜨렸다. 상한 발등을 또 상했다. 춘실은 이번에는 먼발치에서 상을 찡그릴 뿐 다가와 싸매주지 못하고 흥수와 상순의 눈치만 번갈아 보면서 멍하니 서 있었다. 이때 뜻밖에도 절뚝거리다가 물앉은 상순의 앞으로 충국과 미련이 다가왔다. 충국은 상순의 피 묻은 치맛자락 천을 풀어냈다. 미련은 상순을 보고 전율했다. “아이고, 이걸 보오. 피가 질벅하구먼. 뼈가 부서지질 않았을까? 오빠, 모질 아프지 않소?” "오빠라니?" 그는 주위를 둘러보면서 “괜찮다. 가서 일이나 해라.”고 했다. 상순은 바늘로 쿡쿡 찌르는 같은 흥수의 눈길이 싫어서 충국과 미련에게 손사래를 쳤다. “놔두고 빨리 가래도? 오줌 약을 쓰면 괜찮다.” 상순은 상을 찡그리면서 충국의 팔을 붙잡고 일어나더니 쩔룩거리면서 외발 뜀으로 뚝뚝 뛰어 아름드리 버드나무 숲속으로 한발 두발 다가갔다. 모두들 상순이가 근심돼 눈길을 떼지 않았다. 그때 흥수가 이해영의 아들 병진을 보고 빈정거렸다. “일 할 줄 모르는 사람은 항상 재국 낸다니께. 픽!” 그러자 병진도 맞장구를 치면서 두덜거렸다. “항상 철저한상 하더니 당원의 영웅형상을 보여주자고 그러겠지. 뭐.” 병진은 이전에 5대 황소와 싸움을 시켜 죽인 일을 처분 받은 일이 속으로 내려가지 않았던 것이다. 상순은 병진의 가시집 집안 집 삼촌벌이 됐다. 병진은 자기를 좀 봐 주겠는가 했지만 꼬물만치도 봐주지 않고 배상시킨 상순이 원망스러웠던 것이다. 그때부터 병진은 겉으로는 “집안 집 삼촌, 삼촌.” 했지만 속으로는 기회가 있으면 보복하려고 속으로 이를 뿌득뿌득 갈고 있었다. 나그네 귀 석자라고 상순은 먼발치에서도 흥수와 병진이 주고받는 말을 바람에 실려오는 것을 듣고서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오줌을 상한 발등에 씩 내쏘았다. “개는 짖어도, 어, 시원하다, 시원해!” 상순은 중얼거리면서 머리를 들어 바람에 흐느적거리는 버들 방천을 보며 오줌을 손에 받아 피범벅이 된 발등을 씻었다. 단통 아픔이 누그러드는 감이 들었다. (조상들이 물려준 약이 좋긴 좋아.) 그가 오줌을 다 누고 돌아서자 명옥이 흰 머리 수건을 풀어 쥐고 다가왔다. “이걸로 동이기오.” “괜찮소.” 상순은 명옥의 이슬 맺힌 눈시울을 내려다보면서 “수건으로 우둔하게 동이고 어떻게 일하겠소?”라고 하며 말렸다. 허나 명옥은 상한 발을 수건으로 꽉꽉 동여맸다. “그래도 상처에 돌가루라도 들어가면 파상풍이라도 오면 어쩌오?” (사람의 마음은 고약한 거야.) 상순은 엉덩이를 쳐들고 엎디어 자기 발을 정성껏 동이는 명옥을 내려다보면서 어쩐지 별난 느낌이 들어 자기를 욕했다. (한 고향에서 자란 소꿉친구나 다름없는 조강지처건만 어째 춘실이 발을 동일 때보다 가슴이 울렁거리지 않을까?) 이래서 정은 애인에게 주고 가정은 조강지처에게 맡긴다고 했는가! 죽어도 조강지처와 함께 묻히겠건만. 사내들의 마음이란 고약하고 이상한 거야. 그는 저쪽 뒤 먼발치에서 설거지를 하고 나서 행주치마를 벗어 함지에 담는 춘실의 엉덩이를 힐끔 곁눈질했다. 이윽고 상순은 수건으로 똥똥하게 동여매 신발도 신지 못한 채 쩔뚝거리면서도 언제를 쌓는 제일선에서 계속 지휘하고 돌을 쌓아 나갔다. 노동이 사랑이라고 상순이 상해가지고서도 일하자 사원들은 마음속으로 감복하면서 일손을 다그쳤다. 그들은 멍지메산과 칼산의 돌을 캐 수레에 실어다 돌 제 언제를 부지런히 쌓았다. 돌을 실은 수레대오가 장사진을 치고 부르하통하 강가에 돌을 실어다 부리었다. 사원들은 돌로 제방을 쌓아 올리느라고 개미처럼 달라붙어 바글바글 맴 돌아쳤다. 계급투쟁이 백열화된 세월에도 상순은 사원들을 이끌고 장마철 전에 끝내 과수원 다락 밭 언제와 부르하통하 물곬을 돌리는 일을 끝냈다. 뒤이어 논물도랑까지 다 파놓고 아름드리 버드나무도 뿌리까지 뿍뿍 뽑아버렸다. 이제 가을 전에 모래밭의 능선을 따라 논두렁을 만들고 논판을 골고루 고루어 놓으면 새 해부터 논을 풀 수 있게 됐다. 짙은 신록이 점차 누르스름하게 물들어가는 가을에 접어들었다. 벌써 선들선들한 가을바람이 산골짜기를 핥으면서 불어치더니 어느덧 산비탈의 옥수수 밭이 누르스름하게 물들어가고 옥수수마다 애기를 업은 것 같은 강냉이 이삭에서 발간 수염을 흩날리고 있었다. 송이송이 해바라기 꽃이 태양을 따라 활짝 피어 웃고 있었다. 허나 기실 해바라기는 꽃 뒤통수가 해 빛을 너무 받으면 해를 입을 까봐 두려워 자꾸 태양을 따라 돈다고 했다. 그런데 수많은 사람들은 해바라기는 따사로운 해빛을 받으려고 아침으로부터 저녁까지 태양을 따라 돈다고 노래했다. 참 무지하고 가소로운 일이었다. 어느 날, 미련은 일 밭에서 돌아오다가 태평강에서 팬티 바람에 목욕하는 경주를 발견했다. 손을 씻는 척 하면서 경주를 여겨 보고 깜짝 놀랐다. (아, 저 뿔뚝뿔뚝한 팔뚝 근육을 봐라. 불뚝 튀어나온 넓은 가슴의 흉근, 아니, 그런데 저게 뭐야?) 팬티가 글쎄 앞의 그 꿋꿋한 물건에 걸려 더 내려가지 않았으니 말이지. 그러지 않으면 그 흉물스런 물건마저 드러날 거 같았다. 다행이 엉덩이만 반쯤 드러났을 뿐이었다. 순간 경주의 알몸을 곁눈질 해 본 노처녀 미련은 가슴이 뭉클 하더니 말 못할 충동이 생기는 것을 어찌 할 수 없었다. 미련은 못 본 척 하고 강을 건너 지나갔다. 그때 미련을 본 경주는 내려간 팬티를 춰 입고 헤벌쭉 웃으면서 말을 걸었다. “이제 오오?” 미련은 귀밑을 붉히면서 “응.” 하고 응대하고는 수건을 내리 눌러 고쳐 쓰고 바삐 소서구로 돌아갔다. “미련이, 미련이!” 경주가 소리치며 옷을 입고 뒤따라 달려왔다. “누가 보겠다. 어째 이래?” 미련은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며 걸음아 날 살리라고 달아났다. 허나 어찌 날듯이 뒤따라 달려오는 경주를 떼놓겠는가! “왜 이래?” 당황해난 미련은 지지벌개 따라온 경주를 곱게 흘겨보았다. “미련이, 내 사과를 뜯어 줄까?” “뭐라니? 생산대 과일을 도적질 했다가 들통 나 투쟁받자고 그래?” 경주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누르스름한 옥수수 이파리들이 펄럭일 뿐 과수원 주위에는 사람이라고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이래도 저래도 투쟁 받기는 매 일반이야. 똥집에 넣어야 자기 거야.” “그래도 경을 치자고 그래?” “걱정 마. 지금 모두 점심을 먹으러 가서 아무도 없다. 네가 여기 옥수수 밭에 숨어 한참만 있어 봐라. 내 노란 사과 한 아름 따다가 줄게.” 경주는 대수로워 하지도 않았다. 그는 주위를 도적눈으로 흘끔거리더니 미련의 손을 와락 잡아끌고 옥수수 밭으로 들어갔다. “야, 야, 이러지 마라.” 허나 경주는 미련을 옥수수 밭에 눌러 숨겨 놓고 도적고양이처럼 옥수수 밭에서 허리를 구부정하고 나갔다. 미련이가 보니 그는 옥수수 밭을 꿰질러 나가 조 밭에 이르자 엉금엉금 기여 과수원으로 접근하는 것이었다. 미련은 두 손을 가슴에 모아 쥐고 안절부절 못했다. 귀밑에서 혈관이 부풀어 오르고 가슴에서 심장이 높뛰는 감을 느꼈다. 한참 후 경주가 런닝구 가슴에 주먹만큼 한 사과를 불룩하게 넣어가지고 돌아왔다. “응, 먹어라!” “이래도 되니?” “따온 걸 먹지 않겠니? 지주 딸과 남조선 특무 아들은 먹지 않고 산다니? 먹고 보자.” “야, 이 놈아, 담짝도 크고나. 에덴동산의 과일도 마구 따 먹을 놈이구나.” "에덴동산이라니?" "그런 산이 있다. 아무나 들어가 그 산의 과일을 훔쳐선 안된다더라." "응~ 듣다 첫소리다." "울 아빠한테서 들었어." 미련은 누르스름한 사과에서 풍기는 향기를 맡자 군침을 꼴깍 삼켰다. 이윽고 참지 못하고 경주의 손에서 와락 빼앗다 시피 해 사각사각 먹기 시작했다. 사과의 달달하고 시큼한 물이 목구멍을 넘어가는 순간 모든 공포가 산산 박산 나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사과 맛만 좋구나!” “그래. 정말 맛있구나. 네 덕분에 사과 배 맛을 다 보는구나.” 경주는 사과를 먹다 말고 지지벌건 얼굴을 들어 미련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서글서글한 커다란 쌍까풀 눈과 상큼한 코, 우유 빛 얼굴은 밉지 않았다. 미련의 귀밑머리가 가늘게 흘러내려 하얀 볼을 간지르며 가을바람에 하늘거렸다. 빠금히 열린 적삼 속에 풍만한 젖무덤이 숨소리와 함께 한들거렸다. 하얀 젖통은 쥐면 톡 터질 것만 같았다. 순간 경주는 미련을 와락 끌어안으며 키스를 뻑 안겼다. “야, 왜 이래?” 미련은 사과를 먹다가 놀라 경주를 밀어내며 곱게 흘겨보더니 귀밑까지 붉혔다. 경주는 진지하게 사랑을 고백했다. “특무 아들이나 지주 딸은 사랑을 하지 못한다데? 널 사랑해! 우리 함께 살자!” “야, 너 정말 왜 이래?” “우리 둘이 결혼해 살자. 난 너를 배불리 먹일 자신이 있다.” “너 정말 아무 말이나 다 하는구나. 지주 딸이지 너보다 열 살이나 이상인데 뭘 보고 호박 쓰고 돼지 굴로 들어가려니?” 미련은 꽉 끌어안은 경주의 팔을 풀어내면서 솔직하게 말했다. “지주 딸과 특무 아들은 사람이 아니라더냐?” “그래도 그렇지. 넌 그래도 항일투사 어머니가 계시지 않느냐?” 얼굴에 홍조를 띤 미련은 마흔 고개를 바라봐도 늙어 보이지 않았다. 곱게 흘겨보는 미련이 예뻐 경주는 아랫배로부터 찡해 나는 감을 느꼈다. 그러나 경주는 용케도 참고 뒤 말을 이었다. “기실 우리 아버지도 항일투사였다. 북만의 한 항일유격대의 당당한 대장이었어. 허나 후에 우리 아버진 글쎄...” 미련은 사과를 뚝 떼 씹으면서 입귀에 괴나온 사과 물을 쓱 닦았다. “우리 오빠와 아버지한테서 네 아버지 말을 많이 들었다. 기실 우리 아버지는 성분이 지주지만 항일투쟁 때 유격대에 쌀을 가만가만 지원했다. 우리 집 쌀은 먹고 나머지는 거의 다 항일유격대에 실어갔다.” “나도 우리 엄마한테서 네 집의 말을 들었다. 그러기에 네 오빠와 아버지는 감옥에도 들어가지 않고 덜 투쟁을 받지 않느냐? 김서기는 지주라도 부모와 자식을 계선을 나눠 노동개조표현을 보는 것 같더구나.” “픽, 우리 오빠는 글쎄 후에 국민당군에 가입했으니까. 할 말이 없지만 우리 아버지는 항일에 공로가 있지 않니? 그런데도 성분이 나쁘다고 한뉘 투쟁을 받고 개조해야 할 대상이 되지 않았니?” 경주는 미련을 꽉 껴안으면서 정색해 말했다. “지주네 딸과 특무의 아들은 사람이 아니야? 우리 결혼해 살자.” 미련은 먹던 사과로 경주의 가슴을 두드렸다. “야, 황당하다. 황당해. 넌 나보다 열 살이나 어려.” “사랑에 나이가 관계있소?” “야. 우리 아빠는 지학사 고모부네 지괴호 오빠와 결혼하라고 한다.” “사촌끼리 결혼하니?” “그래서 노처녀로 늙지 않았니?” 경주는 입을 함박만이 벌리더니 개처럼 혀를 길게 빼 내둘렀다. “부르르, 그래 쥐괴호와 정말 결혼할거니?” “쥐는 무슨 쥐야? 지 씨를 가지고.” 미련은 조선 사람들과 함께 일하다나니 꽤나 조선말귀를 알아들었다. “경주야, 아무 말이나 했다간 경 친다.” “내일 죽어도 괜찮다.” 경주는 미련한테 다가앉았다. “쥐괴호고 뭐고 싹 걷어치우고 내게 시집오라.” 경주는 미련을 와락 끌어안고 키스벼락을 마구 퍼부었다. “이 새끼야, 야, 그만해. 정말 도깨비 수작을 하는구나!” “그래, 난 도깨비야. 너만 각시로 만들 수 있다면 아무 짓도 할 테다.” 누르스름한 옥수수 이파리들이 우수수 가을바람에 춤을 추었다. 저쪽 과수원에서 싱그러운 과일 향기가 풍겨 노처녀와 총각의 코를 건드렸다. 오곡백과 무르익고 황금물결이 출렁이는 가을, 사과 맛은 별맛, 지주네 노처녀와 남조선 특무 아들은 사랑 맛이 사과처럼 새콤하고 달고도 싱그러워 용트림할 지경이였다. 그들의 비장한 사랑은 넘실거리는 황금빛으로 무르익는 오곡백과와 함께 익어 가고 있었다.
143    대하소설 진달래 소야곡(12) 댓글:  조회:1560  추천:0  2018-03-07
                           22. 소나무숲 속의 참사 가을 황혼의 락조가 철조망을 두른 높다란 담장을 빨갛고 누렇게 물들였다. 승호는 위엄있게 총을 메고 망루에서 왔다갔다 하면서 보초를 서고 있었다. 승호는 최성균 교수와 아버지 덕에 졸업 전에 저지른 패륜을 잠시나마 덮어감추고 공안국 대문으로 스리슬쩍 들어갔다. 졸업하기 전에 그는 황급히 세집에  놓았던 침대를 밤도와 들어내다 버렸다. 그 침대 우에서 어찌나 처녀들을 껴안고 삐꺼덕거렸으면  침대다리가 다  너덜거렸다. 승호는 철조망을 두른 감옥 망루에서 보초를 서다가 락조 속에 아물거리는 공원 너머 우뚝 솟은 대학교 청사를 쳐다보았다. 문뜩 은영의 걀죽한 우유빛 얼굴이 눈 앞에 보름달처럼 떠올랐다. 그는 퇴근하기 바쁘게 경찰복을 벗고 평복으로 갈아입자마자 부랴부랴 대학가로 발걸음을 옮겼다. 숱한 대학생들이 한창 식당으로 분주히 드나들었다. 성호는 멀찍이 서서  녀대생들을 참빗질을 하면서 은영을 찾았다. “승호!” 등뒤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돌아서 보니 애타게 찾던 은영이 아니고 뜻밖에도 불청객 홍희가 아니겠는가. 홍희는 둥근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승호는 별수 없이 학교 뒤산으로 따라 올라가면서 제 좋은 속궁리를 굴렸다. (슬슬 얼려보내야지.) 뒤산의 푸른 소나무숲이 서늘한 가을바람에 휴- 휴- 소리내 울면서 설레고  있었다. 소나무숲 속에는 행인의 그림자도 얼씬하지 않았다. 그들은 소나무숲 둔덕 밑에서 멈춰섰다. 둔덕 아래에는 소나무를 심으려고 파놓았던 움푹한 구뎅이가 무성한 잔나무숲 속에 쓸쓸히 누워 있었다. 그 구뎅이는 승호가 밤만 되면 홍희 아니면 은영을 갈아가며 데리고 와서 야수처럼 야욕을 채우던 은페된 장소였다. 세집에 차려놓은 지하독서실은 필경 숙사와 가까와 불편해 장소를 옮긴 것이다. 홍희는 돌아서서 손으로 눈시울을 훔쳤다. “여기 뭘 하던 곳인지 기억하지?” 찰싹! 홍희는 승호의 더러운 낯짝을 한대 갈겼다. “짐승 같은 놈!” 승호는 얼얼한 낯을 어루만지면서 초두부처럼 야들야들하던 홍희가 이렇게 날카롭게 나올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한마디만 묻겠다.” “처음부터 날 사랑하기나 했니?” “무슨 말이냐? 널 사랑했어…” “딴 소리 말라. 은영은 사랑했니?” “은영을 사랑하든말든 무슨 상관이냐?” “도대체 넌 몇을 사랑하니? 은영이냐? 경옥이냐? 이제 또 누구야?” 홍희는 격분해 따지고 들었다. “야, 이러지 말라.” 승호는 무섭게 살기 번쩍이는 홍희의 깜장눈을 피하면서 능청을 부렸다. “얘, 이러지 말라.” “이때까지 참고 또 참았다. 혹시 네가 마음을 돌리겠나 기다렸어. 이젠 끝장을 봐야겠어.” 승호는 능청스레 연극을 놀았다. “얘, 우린 아직 젊어. 아직도 갈 길이 멀다. 나도 내가 미워. 어쩜 이렇게 번져먹었는지 모르겠어. 세상 고운 녀성들을 보면 다 살아보고 싶었어. 난 짐승이야, 야수야. 아니, 개새끼야. 이런 개새끼를 잊어라. 어떻게 믿고 살겠니?” 홍희는 격분돼 내쏘았다. “이 수개야! 색마야! 숱한 처녀들의 정조를 짓밟고 엉덩이를 쓱 씃고 꼬리를 뺄 예산이냐? 하늘이 굽어본다! 네 놈이 잠시는 애비 덕에 학교 기률과 법망을 벗어났지만, 이제 천벌받을 거야. 너 같은 놈이 다 경찰 됐어? 눈깔도 멀었구나. 흥!” 승호는 홍희의 손을 잡으며 빌었다. “얘, 너무 흥분하지 말라.” “비켜!” 홍희는 승호의 손을 탁 쳐버렸다. “네놈은 날 더러운 야욕을 채우는 노리개로 여겼어. 이 개새끼야!” 그녀는 단말마적으로 달려들어 승호의 꼬슬꼬슬한 양머리를 마구 뜯어 놓았다. 승호는 미친듯이 달려들며 광기를 부리는 홍희를 뿌리면서 능청을 떨었다. “얘, 이걸 놓고 내 말 들어라.” 홍희는 색마의 낯짝을 쏘아보면서 또 덮쳐들었다. “개 주둥이에서 개 소리 밖에 더 나올 게 있어?” 성호는 뒤로 물러서면서 정색했다. “널 시내에 배치해줄게.” “듣기도 싫어! 개 낯짝이 보기 싫어 이 시내에서 살기도 싫어!” 승호는 한술 더 떴다. “기실 널 사랑했어. 이제라도 시내에서 함께 살자. 아버지하구 말해서 널 시내에 남길 수 있어.” 홍희는 너털웃음을 웃었다. “더럽다, 더러워!” 그녀는 승호 낯에 침을 퉤 뱉었다. “실련했다고 불쌍해? 이 놈아, 네놈한테 속히워 산게 분해! 억울하다, 억울해!” 홍희는 또 무섭게 덮쳐들었다. 허나 승호가 팔로 뿌리치자 저쪽에 날려가 나동그라졌다. 그녀는 소나무에 머리를 마구 쪼으면서 소나무 숲이 떠나가게 대성통곡쳤다. “야, 네놈이 어쩜 그렇게 할 수  있어. 하늘이 굽어본다. 굽어봐, 내 뭐라 했나? 날 버리면 네 놈 죽고 나 죽는다, 죽어. 꼭 천벌 받을 거야. 으~으흐흐 흑, 흑, 흑. 숱한 처녀들 악귀가 네놈 목에 올가미를 걸어 하늘에 끌고 올라갈 거야. 네놈 정수리에 숯불을 올려놓을 거야. 어~ 허허허, 헉, 헉, 헉, 네 놈은 제 명에 죽지 못할 거야!” 홍희는 갑자기 스르르 일어나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비칠거리면서 산 아래로 내려갔다. 아무리 지독한 랭혈동물이라 해도 승호는 처량한 홍희의 뒤모습을 보고 속에  걸렸다. 그는 황급히 홍희를 뒤따라달려가서 거짓말로 달랬다. “홍희, 난 은영과 언약한 것도 없어. 이제라도 우리 다시 시작해보자. 고향에 돌아가도 힘든 일이 있으면 날 불러. 내 경제적으로 힘껏 도와줄게. 정조 근심되면 미용원에 소개해줄게. 지금 성형기술이 높아서 처녀들 그거 수술해 되돌려준다고 하던데.” 홍희는 색마의 개소리를 귀등으로 흘리면서 쓸쓸히 모교 뒤산을 떠났다. 그 대학교 뒤산의 소나무숲에서 일찍 그녀는 전도를 개척할 일루의 희망을 품고 색마에게 마음과 사랑, 정조 모든 것을 짓밟히지 않았던가? 지난날 희망의 소나무숲은 치욕의 숲으로 남아 울고 있었다. 아니, 그녀를 절망에 빠뜨린 채 쓰라리게 흐느끼고 있다! 며칠 후 승호는 예전대로 감옥으로 출근했다. 그가 당직실에 가자마자 전화벨이 따르릉 따르릉 급촉하게 울렸다. “예, 당직 리승호입니다. 예, 박대장님, 곧 가겠습니다.” 승호는 송수화기를 놓기 바쁘게 부랴부랴 대대장 사무실로 달려갔다. “어디에 가서 얼굴 긁혔어?" "예. 운동하다가 그만." 기실 전날 홍희에게 허빈 흉터였지만 슬쩍 거짓말을 에둘러댔다. "큰 일 생겼소.” 승호는 황급히 박철운 대대장의 어두운 철색얼굴을 쳐다보았다. “홍희라는 처녀를 아오?” “예.” 승호는 목구멍으로 기여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하면서 박대대장의 자못 엄숙한 철색얼굴에서 대답을 찾으려는듯 살폈다. “이걸 보오.” 박철운 대대장은 서랍에서 사진 한장을 꺼내 내밀었다. (날 고발했는가?) 승호는 뇌리에서 만가지 생각이 번개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는 황급히 박대대장의 손에서 사진을 받아 보았다. “아니, 얘가?!” 그는 깜짝 놀라 하마트면 물앉을 번했다. 소나무가지에 목을 맨 녀성 시체 사진이 아니겠는가.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며칠 전에만 해도 나와 만나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했는데. 이게 무슨 일입니까?” 박철운 대대장은 또 다른 사진 한장을 내밀었다. “이걸 보오.” 승호는 사진을 받자마자 마구 찢어 호주머니에 넣으면서 머리를 툭 떨어뜨렸다. “찢어버리면 끝인가?” 박대대장은 똑같은 사진을 꺼내들었다. “이런 도리쯤은 알아야지.” 승호는 창피해 머리를 들지 못했다. “이 사진은 승호란 야수가 이른바 지하독서실 침대에서 홍희를 짓밟은 철 같은 죄증이란 말이요. 처분 기다리요.” 박대대장의 말에 승호는 낯이 새까맣게 질렸다. 승호는 용기를 내 고함을 버럭 질렀다. “무슨 죄 있다고 이럽니까? 난 홍희를 자살하라고 시킨 적도 없습니다.” 박대대장은 철색얼굴에 쓴 오이를 씹은듯이 입귀로 쓴웃음을 흘렸다. 그는 서랍을 쭉 열더니 편지봉투를 꺼내 흔들었다. “속을 거 같아? 형사수사대대에서 사건현지를 수사할 때 목을 맨 홍희의 시체 호주머니에서 이러루한 사진들과 자네의 죄악을 공소해 쓴 유서까지 나왔어. 용서할 수 없어.” 승호는 박대대장 앞에 풀썩 무릎을 꿇고 물앉았다. “제발 살려주십시오. 여기서 개처럼 쫓겨나면 어떻게 세상에서 머리를 들고 살겠습니까?” 박대대장은 자못 엄숙한 표정을 짓더니 단칼로 머리카락을 자르듯 말했다. “집법일군일수록 법을 더욱 잘 지켜야 해. 물론 자넨 홍희의 죽음에 책임이 있네. 또 숱한 녀성들과 련애를 한다는 미명하에 패륜행위를 한 건 절대 용납할 수 없네. 나와 네 아버진 20여년 동안이나 함께 공안국에서 일한 친구지만 어쩌는 수 없어. 총을 내려놓고 나가 보게.” 승호는 총을 박대대장한테 넘겨주고 김빠진 공처럼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나가려다가 되돌아섰다. “미안합니다. 그 편지를 볼 수 없습니까?” 박대대장은 복사본이 있는지라 편지봉투를 내밀었다. 승호는 편지봉투를 받아 호주머니에 넣고 어깨에 멨던몸을 돌려 나왔다. 승호는 호주머니에 넣은 편지봉투를 만지작거리면서 대학교 뒤산 소나무숲 속으로 스적스적 걸어갔다. 그날 홍희와 갈라진 곳이였다. 또 홍희가 목을 맨 비극의 지점이기도 했다. 승호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편지봉투를 꺼냈다. 편지지는 눈물로 부풀어오른 자국이 얼룩졌다.   세상 사람들은 아마 승호는 아주 능력이 있는 학생간부이고 정직한 인간으로 볼지도 모르겠다. 오늘 나는 죽음으로 만천하에 색마 승호의 죄악을 폭로한다. 야수 승호는 련애한다는 미명하에 허경옥, 최은영, 나까지 정조를 유린하고 짓밟았다. 이런 짐승 같은 놈이 감옥의 경찰로 되다니? 어떤 짓을 할지 누가 알겠는가? 이 놈이 이제도 얼마나 많은 처녀들의 정조를 유린하고 짓밟을지 누가 아는가? 또 얼마나 많은 처녀들이 야수의 함정에 빠져 고통 속에서 시달리다가 억울하게 죽어갈지 누가 알겠는가? 세상에는 도덕법정이 없는가! 이런 패덕한 놈을 법에 의해 처단하라. 정의적인 사람들이여, 나처럼 릉욕당하고 유린당하고 죽음의 심연에 빠진 억울한 처녀들의 혼을 달래주라. 만약 하느님이 있다면 꼭 이런 놈의 정수리에 숯불을 올려놓을 것이다!   편지를 읽어보고 악마 같은 승호도 몸서리쳤다. 아니, 하늘이 천벌을 내릴 것만 같아 온 몸이 떨렸다. "끝내 올 것이 왔구나. 어떻게 한단 말인가!" 승호는 유서를 쫙쫙 찢어 하늘에 훌 날려보냈다. 편지쪼박들은 가을바람에 하늘에서 쓸쓸히 날아내려 우수수 지는 락엽과 함께 휩쓸려갔다. 푸르른 소나무숲이 억울하게 죽어간 처녀가 가엾어 원혼이라도 달래주려는듯이 을씨년스런 가을바람에 몸부림치며 설레고 있었다.                                                                                                          23. 흉수의 그림자       을씨년스런 가을하늘에 흐리터분한 먹장구름이 흐트러졌다가도 뭉치면서 룡트림하며 덮쳐왔다. 구질구질 내리는 가을비가 행인들을 괴롭혔다.       성호는 광고회사에 출근한지도 어언간 두달이나 되였다. 광고회사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허굉팔 부총경리는 부영장급이느라고 개 잡은 포수처럼 우쭐렁거렸다. 참 눈꼴 사나왔다. 특히 훤칠한 허굉팔이란 부총경리 저 생김새부터 기절났다. 길쭉한 철색말상에 흰자위를 희번뜩거리며 데굴데굴 굴리는 우멍눈, 툭 튀여나온 앞이가 보기에도 좋은 사람 같지 않았다. 반면에 김범수 총경리는 너부죽한 얼굴에 부리부리한 쌍까풀눈이 첫인상에 마음이 좋아보였다. 범수 총경리는 사람 좋게 웃음지으면서 성호에게 조용히 경험을 전수해주었다. “훌륭한 광고업무원이 되려면 꿀벌처럼 부지런히 돌아다니면서 광고를 많이 얻어와야 하오. 광고수입은 바로 광고업무원의 실력이요.” “예, 노력하겠습니다.” 김범수는 성호와 나란히 앉아 관심조로 말했다. “광고를 얻어들이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요. 그러나 마음만 먹으면 광고주를 하나, 하나 얻을 수 있소. 이후에 어려운게 있으면 말하오. 내 도와주지.” “예.” 성호는 한달 동안 가을비를 무릅쓰고 시내를 헤매면서 좀 돈을 버는 거 같은 기업소와 상점을 보기만 하면 무작정 문을 뚝 떼고 들어가 명함을 건네고 광고를 하지 않겠는가고 동원했다. 그러나 장사가 잘 되지 않았다. 장마당에서 물건을 사라고 하면 할수록 사지 않는 것처럼 기업주들은 광고의식이 차해 몇천원씩 내고 거리나 교량 란간에 걸어놓는 광고를 내려고 하지 않았다. 어느 날, 시내에서 헤매다가 한 식료품상점 문 앞에 이르렀을 때다. 몇 사람이 차에서 술상자를 부리워 들여가는 것을 보았다. (저 술을 광고하면 어떨까?) 그는 곧장 상점 안으로 따라 들어갔다. “술 한상자에 얼마입니까?” “양?” 상점 보스는 술을 사려는가고 환한 표정을 지었다. “한 상자에 50원이요.” “한 상자에 몇병 있습니까?” “허, 오늘 문을 열자마자 수 붙었네. 한 상자에 다섯병 있소. 몇상자 사겠소?” “아니, 사려는 건 아니고. 이 술을 간판광고를 하면 잘 팔리겠는데요. 비용도 비싸지 않습니다. 한 500원만 내면 됩니다…” “간판광고를 하나 내자구 열상자나 처넣겠소?” 상점 경리는 손을 내저으면서 축객령을 내렸다. “우린 광고를 내지 않소. 재수없이 아침부터 돈을 빼내가려고 찾아오는가?” 미역국을 마신 성호는 시내 여러 상점을 돌아다녀도 광고 하나도 걸여오지 못했다. 굉팔 부총경리는 다짜고짜 성호를 한바탕 욕설을 퍼부었다. “일주일 되도록 광고 하나 얻어오지 못해? 진짜 밥 먹고 죽벌이도 못하는군.” 성호는 머리 숙어졌다. 굉팔은 광고서류를 책상에 탕 메치며 성호를 쏘아보았다. “농부 아들은 안돼. 진짜 무능아군. 정 광고를 못하겠으면 광고회사에서 나가라구.” 범수는 굉팔을 말렸다. “신입직원을 그러지 마오. 그래도 한 반년 하느라면 얻어오겠지.” 성호는 뜻밖의 말에 스트레스를 받았다. 굉팔은 가물의 실돌피처럼 가는 허리를 의자에 기대더니 뱀의 대가리처럼 작은 머리를 쳐들고 표독스레 성호를 쏘아보았다. “여긴 무능아를 키우는 민정소가 아냐. 시장경제시대에는 눈물이 필요없어.  능력이 없으면 도태야.” 성호는 눈앞이 깜깜해났다. “이제 술공장에 직접 찾아가서 술광고를 하자고 마수걸이를 해보겠습니다. 좀 기다려주십시오.” “대학에서 밑구멍으로 법률을 배웠소? 술광고를 하는 건 비법이라는 것도 몰라? 엉?” 굉팔은 버럭 고함쳤다. “야, 너 같은 애를 믿다간 한지에 방아를 걸겠어.” 성호는 자존심이 상해 맞장구를 쳤다. “아니, 허경리, 말이면 다 합니까?” “흥! 자식, 이 광고회사에서 내 말이면 다야. 흥!” 성호는 더 할 말이 없었다. 심지어 굉팔은 성호가 물어온 술광고를 공상국에 고발해 벌금을 안기게까지 해 골탕 먹였다. 광고회사에 코를 떼운 성호는 어디로 찾아가 하소연할가 서성거리다가 대학교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최성균 교수나 정희 아버지를 찾아가야지.) 그가 공원 대문 앞에 이르렀을 때였다. “오빠, 어디로 가?” 뒤에서 귀에 익은 처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뒤돌아보니 정희가 아니겠는가. “어째 기분 좋지 않은 거 같은데.” 성호는 머리를 푹 숙인 채 걸으면서 금방 있은 일을 말했다. “난 광고회사로 가기도 싫어. 굉팔이란 경리는 인간도 아니야. 그저 큰소리치고 협박해.” 정희는 대뜸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어디서 그런 경리도 있다오?” “광고라는게 어디 가을에 지는 락엽처럼 깍쟁이로 마구 끌어 들일 수 있니?” 의논 끝에 그들은 최성균 교수를 찾아갔다. 최성균 교수는 대머리에 돋은 식은 땀을 닦았다. “그 좋은 광고회사에 배치했는데 그만두다니? 승호도 공안국에서 쫓겨나서 찾아왔댔소. 홍희는 자살했소. 야, 정말 골치 아프오.” 성호와 정희는 깜짝 놀라 서로 눈길을 마주쳤다. “아니, 홍희가 어쩜?” 모두 비통에 잠겼다. 납덩이 같은 침묵이 흘렀다. 한참 후 최교수는 머리를 들었다. “광고회사에 눌러 있소. 시내에서 자란 정희도 천수해중학교에 갔을라니 농민의 아들인 성호는 그만하면 배치를 잘 받은줄 아오.” 그 말에 성호는 발끈했다. “예~ 알았습니다. 농민의 아들이기에 농촌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원래 난 시내 사람들이 딱 질색입니다. 교활하고 간사하고 리기적이고. 인정미라곤 하나도 없는 놈들이 득실거려서 딱 질색입니다.” 정희는 성호에게 면박을 주었다. “야, 말 같은 말 해라. 누가 널 따라 호박을 쓰고 돼지굴로 들어간대?” “오지 않겠으면 말아!” 성호는 발끈 화를 내더니 문 밖으로 나와 쥉쥉 시내로 내려갔다. 뒤에서 정희가 쫓아오면서 불렀다. “야, 내 말 좀 들어.” 그녀는 성호의 손까지 잡고 애원했다. “다 우리 앞날을 위해서야. 이제 농촌으로 떨어지면 시내에 들어오기 더 애난다. 어떻게 하나 광고회사에 있어야 해.” 성호는 정희의 손을 꼭 잡으면서 한숨을 후~ 내쉬였다. “우리 아빠도 옛날 공안국장을 했어. 아빠 옛날 수하들 속에는 국장도 있고 과장도 있어. 그들을 찾아가 청탁하면 난 공안국에도 들어갈 수 있어.” “엉? 진작 찾아갈게지.” 정희는 새파랗게 질렸던 얼굴에 화색을 띠더니 성호의 손을 꼭 잡았다. 성호는 정희를 보내고 나서 그 길로 이모부네 집으로 찾아갔다. 성호의 이모부 강운룡은 원래 교통경찰대대 민경이였다. 당시 공안국장인 리상진은 강운룡이 특수정찰부대 출신인데다 날랜 걸 보고 형사경찰과에 전근시켰고 처제 수옥까지 중매를 서서 결혼시켰던 것이다. 어려서 성호는 녀자애처럼 몸이 허약해 애들한테 놀림을 당했다. 어떤 때에는 애들한테 얻어맞아 항상 얼굴에 흉터가 났다. 강운룡이 처형 초가집으로 놀러 왔다가 그런 정황을 안 후 성호에게 특수정찰부대 권투를 배워주었다. 그후부터 성호는 애들 속에서 허리를 펴고 살 수 있게 됐다. 성호는 마음 속으로 이모부를 존경하고 따랐다. 성호가 찾아갔을 때 운룡은 창문에 비닐박막을 대다가 넉가래 같은 손을 내밀어 악수까지 했다. “이젠 졸업했겠구나. 어데 배치받았니?” 이모 수옥은 대견하게 조카를 바라보았다. 성호는 머리를 푹 숙이면서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였다. 성호에게서 사연을 들은 운룡은 소발쪽 같은 주먹으로 벽을 쿵 치면서 도리머리를 홰홰 흔들었다. “허굉팔? 그자가 뭐 대단해서 그렇게 훈계한다니?” 성호는 이모부한테 단도직입으로 지청구를 들이댔다. “제가 이모부네 공안국에 들어가면 어떻습니까?” “응?” 운룡은 한참 궁리하더니 무겁게 입을 열었다. “넌 성격은 공안일군을 하면 될 거 같애. 그런데 수사실무를 잘 모르고선 한쪽으로 밀려. 시내에 중대한 형사사건이 생기면 수사대원은 가장 짧은 시간 내에 범죄자를 수사해내야 한다. 수사사업은 사회 책임감과 사명감이 아주 높은 특수사업이야. 제때에 사건을 해명하지 못하면 아주 큰 사회압력을 받게 되고 한쪽으로 밀려.” “배워서 하면 안 되겠습니까?” “글쎄, 쉽지 않아. 첫 3, 4년 내에 사건을 척척 해명하지 못하면 한쪽으로 밀리는 거야.” 운룡은 성호의 손을 매만지면서 말했다. “요즘 권투를 연습했니?” “못했습니다.” 운룡은 “계속 연습해라. 수사일꾼으로 되겠는지 아니? 무예는 수사대원의  밑천이야.” 하고 말하더니 한가지 상식을 배워주었다. “목을 조일 때면 한 손으로 조이는 게 아니야.” 운룡은 구들바닥에 대고 두엄지손가락을 한데 겹쳐 내리누르는 시범을 보였다. “이렇게 두손으로 눌러야 파악이 있는 거야.” 성호도 운룡이 시범한대로 엄지손가락을 겹쳐 눌러보더니 머리를 끄덕였다. 운룡은 서재에 들어가 가죽가방을 들고 나왔다. “요즘 대학생들 말이 아니야. 이걸 봐라. 녀대생이 소나무숲 속에서 륜간당했어.” 그는 성호 앞에 서류를 내보였다. “이번에 사건해명을 견습해보겠니?” “예, 좋습니다.” “이게 신고인과 피해자 녀대생 진술이다.” 성호는 서류를 들여다보고 깜짝 놀랐다. 재삼 보아도 피해 녀대생은 은영이 아니겠는가! “아니, 얘가 어쩜 이런 일을 당해?!” 운룡은 주먹으로 메부리코를 쓱 닦으면서 물었다. “아는 애냐?” “예. 아래학년 앤데. 스케트랑 달리기랑 잘해 소문난 앤데요.” “그래?” “우리 주관 부시장 최웅봉네 무남독녀야. 지금 우린 사회 압력을 얼마나 받는지 몰라. 인차 해명해야겠는데.” 성호는 신고자의 진술보다 먼저 은영의 진술을 펼쳐보았다. “1983년 10월 16일 오후 3시, 제가 학교 뒤 소나무숲  속에서 책을 보는데 갑자기 괴한 셋이 뛰여와 나를 륜간했다. 당시 나는 정신을 잃고 까무러쳤다. 그후 정황은 하나도 모른다. 내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병원 구급병실에 누워 있었다...” “얘가 어느 병원에 입원했습니까?” “YB병원에 있다. 네가 면목을 잘 알면 피해과정을 좀 알아주면 좋겠는데. 피해녀대생은 입을 꼭 다물고 말하지 않고 울기만 한다. 정신타격이 심해. 몇번이고 자살하려고 해서 가정과 병원 측에서 밤낮 지키는 판이야.” 성호는 못된 은영이 자기 앞에서는 더욱 말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는 서류에서 사건 신고자의 진술을 상세히 보았다. “그날 나는 해가 진 후 약(오후 8시 반 좌우) 아무도 보지 않는 학교 뒤산 소나무숲 속에 권술을 연습하러 갔습니다. 그런데 마른 풀속 구뎅이에서 웬 신음소리를 들었습니다. 가까이 다가가보니 웬 녀인이 피못 속에 알몸뚱이로 누워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급히 학교 무장부에 가서 알려 학교 차로 병원에 호송했습니다. 나는 인차 접수실의 전화로 110에 사건을 제보했습니다.” 서류에는 은영의 하신에서 부동한 네개 DNA가 든 정액이 검출됐다고 똑똑히 적혀 있었다. “이모부, 의문이 있습니다.” 운룡은 성호한테 예리한 눈길을 돌렸다. “은영의 진술을 보면 분명 세 강도가 나타났다고 했는데 질에서 검출된 DNA는 네 사람의 거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강도 셋을 내놓고 또 한 사람이 있을 가능성이 있잖겠습니까?” “그게 수상해. 은영은 평소에 소나무숲 속에 홀로 가서 공부하니?” “은영은 보통 열람실에 가서 공부합니다. 이 추운 늦가울에 혼자 소나무수림에 책을 보러 갈 순 없습니다. 혹시 소나무숲 속에서 누군가와 련애하다가 당하지 않았을가요?” “음-” 운룡은 한참 궁리하더니 성호의 예리한 분석과 추측에 놀랐다. “어떤 남자와 소나무숲 속에서 련애하다가 세 강도에게 당했다? 그거 비슷한 추측이야.” 성호와 운룡은 정탐추리소설의 한 대목을 공연하고 있는 것 같았다. 순간 성호의 눈 앞에는 피뜩 승호가 은영을 데리고 소나무 밭에 가서 련애하는 장면, 아니, 그가 그 소나무숲 구뎅이에서 은영과 련애하다가 세 강도에게 당한 그런 가상이 떠올랐다. “가능합니다!” 성호는 자기 직감을 죽 이야기했다. 운룡은 머리를 끄덕이더니 “우리 사건현장으로 가서 자세히 재검사해보자.” 라고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날 수사대원들이 초보적으로 현지수사를 했지만 어두운 밤 수사여서 재수사가 필요했다. 게다가 성호를 견습시키려고 운룡은 현장을 재수사하기로 했다. 그들은 형사경찰대대의 찌프에 앉아 대학교 뒤산 소나무숲 속으로 달려갔다. 사건 현장에서 아직도 피가 질벅한 구뎅이를 둘러보는 순간 성호는 마음이 아팠다. 은영이 강도들에게 륜간당한 구뎅이에는 저항하느라고 발로 버둑거리면서 긁힌 흔적이 이리저리 오려져 있었다. 또 피 묻은 종이쪼박과 은영의 운동화 같아 보이는 녀성의 신 한짝이 어수선하게 널려 있었다. 분명 세 강도들은 이 구뎅이에서 나약한 은영을 짓밟았을 것이다. 운룡이 시키는대로 성호는 종이쪼박과 운동화를 가방에 주어넣었다. 운룡은 가방에서 자를 꺼내 구뎅이에 박힌 흉수들의 커다란 발자욱의 크기를 일일이 재였다. 그는 구뎅이에서 나와 발과 키의 비례를 재는 원형자를 돌리면서 흉수의 키를 추산했다. “다 키꺽다리놈들이구나. 대개 1.73, 1.75, 1.78, 아니, 한 놈은 키가 1.80메터나 되는구나. 분명 네 놈의 발자국이야.” 사건현장에는 어지러운 발자국이 찍혀 있었다. 소나무 밑에 미끌고 뻗치고 한 발자국을 보아 별로 싸운 흔적 같았다. 소나무 밑에는 피 묻은 헝겊바줄이 널려 있었다. 바줄을 주어들던 운룡은 바줄 밑에서 수술 칼 하나를 주었다. (이 수술 칼로 바줄을 끊었을까? 피해녀를 여기 묶어놓고 강간했을까?) 성호는 카메라를 꺼내 소나무에 묻은 피 흔적을 사진 찍은 후 착잡한 생각에 빠졌다. (이건 뭔가? 네 놈에게 당한 은영의 피해는 상상해봐도 불 보듯 뻔해.) 성호는 마음을 칼로 에이는듯 아팠다. (내 미치게 사랑한 은영을 어떤 놈들이 해쳤을가? 꼭 해명해 은영의 원쑤를 갚아야 해.) “이걸 봐라!” 운룡은 구뎅이에서 피 묻은 수술칼을 주어들고 보면서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피해녀 몸에는 근본 수술칼에 찔린 상처가 없었는데. 이 수술 칼은 뭐지? 1차 사건현장수사에서 이봐라. 빼놓은게 얼마나 많니? 리과장이 한 수사는  이렇다. 항상 사건현장엔 제일 먼저 달려가지. 수사는 이렇게 대충 하고. 사건해명을 하기만 하면 소식 공개회의에는 항상 먼저 나서지.” 그들 둘은 사건현장을 샅샅이 살폈다. 운룡은 풀숲에서 검퍼렇게 변질한 귀두를 발견했다. 장갑을 낀 손으로 그걸 들고 찬찬히 보니 비스듬히 썩둑 잘린 귀두는 썩기 시작해 진물이 줄줄 흐를 지경이였다. “흉수건가? DNA검사를 하면 흉수는 밝혀낼 거 같아.” 운룡은 그걸 비닐봉지에 싸서 서류가죽가방에 넣었다. “가자, DNA검사를 해봐야겠어.” 그들은 황급히 공안국 형사수사대대 사무실로 돌아갔다. 성호는 운룡한테 자기 생각을 털어놓았다. “은영한테 직접 알아보는게 좋을 거 같습니다. 그날 승호와 함께뒤산에 련애하러 갔는가? 승호한테도 알아보는게 좋을 거 같습니다.” “승호라는 앤 우리 리과장네 아들이 아니냐?” “걔네 아버지가 공안국에서 과장을 한답디다.” “리과장 아들과 관계되면 큰 일인데.” 운룡은 한참 생각하더니 이런 수사방안을 내놓았다. “넌 사인정탐 신분으로 승호의 그날 행적을 알아봐라.” “예, 알겠습니다.” 똑, 똑, 똑! 노크소리와 함께 리철갑 과장이 들어왔다. 그는 성호한테 눈길이 갔다. “안녕하십니까?” “아니, 승호네 동창생 아닌가? 지금 어디 배치받았소?” “예, 광고회사에 배치 받았습니다.” “아, 그래? 지금 세월에 시내에서 직업을 찾기 그리 쉽겠소? 저는 농민의 아들이 아니고 뭐요?” 성호는 자존심을 건드리는 리과장이 눈에 거슬렸다. 허나 허무한 웃음을 지으면서 “승호는 계속 감옥에 있습니까?” 하고 물었다. “양? 뭐 어느 회사에나 가겠는지?” 리철갑은 대충 얼버무려 대답했다. “요즘 뭘합니까?” “입원했소. 누구하구 싸웠는지 얼굴과 가슴마저 비수에 찔렸습데.” “예?” 성호는 이모부와 의미심장하게 눈길을 마주쳤다. “어느 병원에 입원했습니까?” “YB병원 급진외과 109호.” 성호는 자기 추측이 맞는 것 같아 기뻤다. (만약 승호가 그날 은영과 련애했다면 꼭 흉수를 밝혀낼 수 있을 거야.) 성호는 흉수의 그림자가 눈 앞에 보일듯 말듯 했다. 그는 일루의 희망을 품고 안개가 자오록이 잠긴 병원으로 총총히 반달음쳐갔다.
142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93) 댓글:  조회:1055  추천:0  2018-02-28
                  3. 원대한 설계도 어느덧 만물이 기지개를 쭉쭉 켜며 돌아눕는 봄이 왔다. 고향 태평강의 곧게 쪽쪽 뻗은 참버들 가지들에 물기가 파랗게 올랐다. 덕돌은 애들과 함께 낫을 가지고 태평강가 버들방천에 가서 물기 오른 참버들가지를 베다가 버들피리를 만들었다. 덕돌은 애들과 함께 버들피리를 입에 물고 온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삘리리삘리리 불어댔다. 비록 알아들을 수 없는 버들피리 소리일망정 참 귀맛을 돋우었다. 봄바람에 바자에서 울리는 대자연의 음악소리를 반주로 삼아 버들피리를 신나게 불었다. 어떤 때에는 집의 코 깜쟁이 암소를 몰면서도 버들피리를 삘리리삘리리 재미나게 불었다. 저녁노을이 비낀 황혼 무렵에 무지개 비낀 패용천산과 칼산을 배경으로 소잔등을 타고 버들피리를 부는 목동, 생각만 해봐도 한 폭의 아름다운 수채화를 보는 것 같지 않겠는가! 덕돌은 애들과 함께 놀 놀음 감이 없었다. 궁리 끝에 아버지를 보고 놀음감을 만들어달라고 했다. 허나 상순은 “언제 놀음 감을 만들 사이가 다 있겠느냐?”라고 퉁명스럽게 대답하고는 생산대 일을 하러 떠나갔다. (어쩜 아버진 저렇게 무뚝뚝할가?) 덕돌은 하는 수 없이 애들과 함께 또 세찬 봄바람에 연을 띄우면서 하늘높이 날아예는 연을 바라보았다. 다행히 뒤 집 정갑의 할아버지가 애들을 데리고 놀음 감을 잘 만들었다. 그러자 덕돌은 성욱이랑 동림이랑 정갑이랑 함께 정갑의 할아버지를 따라 수수대로 제법 그럴듯한 물레방아를 만들었다. 정갑이랑 순희랑 우리 애들은 정갑의 할아버지를 따라 태평강 모래톱에 갔다. “얘들아, 여기에 물도랑을 파라.” “예.” 덕돌 등은 정갑의 할아버지가 가리킨 모래톱에 물도랑을 파고 강물을 끌어들였다. 그새 정갑의 할아버지는 물도랑에 물레방아를 고정시켜놓았다. 실폭포처럼 쏟아지는 맑은 시내 물에 뱅글뱅글 돌아가는 수수대물레방아를 보고 애들은 환성을 질렀다. 그렇게 재미나는 놀음은 세상에 둘도 없었다. 덕돌이랑 성욱이랑 모래 언덕에 구불구불 길을 닦았다. 새알같이 반들반들하고 조그마한 조약돌들을 주어다가 구불구불한 언덕길 양쪽에 촘촘히 박아놓고 고무신에 모래랑 조약돌이랑 실어 언덕길로 밀며 입으로 “붕붕” 소리를 내면서 자동차놀음이랑 놀았다. 모래에서 곤두박질을 하면서 재미나게 놀기도 했다. 정말 금싸라기 같은 모래알을 사박사박 밟으면서 놀기란 참말 재미났다. 그뿐이 아니었다. 한 여름이면 덕돌이랑 성욱이랑 더운 줄도 모르고 참새들이 재잘거리는 고향 태평강 버들방천에 가서 버들모자를 만들어 쓰고 버드나무숲속에서 배를 모래불 둔덕에 붙이고 숨어 있다가도 “봤다, 꿍!” 하면서 전투놀음도 놀았다. 덕돌은 풀꽃모자를 쓰고 버드나무가지를 쥐고 숨은 순녀를 뒤로 가서 “봤다 꿍!” 하고 소리쳤다. “어마나! 놀라라.” 순희가 몸을 돌리면서 눈을 곱게 흘기었다. 덕돌은 “헤헤” 하고 헤벌쭉 웃으면서 지껄여댔다. “뭐? 놀을 났다고?” “야, 놀랐다 했지 언제 놀을 났다고 했니?” "금방 놀을 낳았다 해놓고서도. 헤헤헤." 덕돌은 여자애들을 깜짝 놀래우던 개구쟁이 시절이 즐겁기만 했다. 아, 버들피리를 불고 고향 태평강 강물에 물레방아를 돌리면서 놀던 천진난만한 소꿉시절이 아름답기만 했다. 대자연의 품 속에 안겨 원시적인 놀음을 놀던 애들의 소꿉시절이야 말로 대자연을 알게 되는 황금시절이었다. 덕돌이랑 동림이랑 애들은 한 여름에 달아다니면서 전투놀음이랑 놀다가 너무 더워 태평강가 큰 물도랑에 뛰어들어 목욕을 하군 했다. 그런데 그 큰 물도랑에서 큰 일이 생겼다. 어느 하루 이른 아침, 사원들이 밭일을 나갈 때었다. 5대의 최학철은 삽을 둘러메고 논물을 보러 나가다가 그만 큰 물도랑 물에 둥둥 떠내려 오는 거머스름한 떼목 같은 것을 몇개 발견했다. “저게 뭘까? 떼목인가? 건져다 불이나 때자.” 워낙 최학철은 시력이 좋지 않은데다가 날이 아직 시퍼래 어둑시그레 한 물속에서 보일락말락하게 떴다 가라앉았다 하면서 떠내려오는 거머스름한 물체를 잘 분간하기 힘들었다. 그러나 물에서 “푸, 푸.” 하는 숨소리를 듣고 깜짝 놀랐다. 찬찬히 여겨 보니 황소만큼 한 곰 서너마리 물도랑을 따라 헤염치며 떠내려오는 것이 아니겠는가! “아, 이 놈 곰 새끼들이, 이전에도 물도랑으로 가만히 내려오더니 또 왔구나!” 최학철이 소리치자 곰들은 가만히 밭으로 나오는 사람을 접근하다가 수면으로 몸뚱이를 드러내더니 곧추 학철에게 덮쳐들었다. “곰이야! 곰이야!” 학철은 고함치며 반사적으로 삽으로 곰을 내리찍었다. 그런데 곰은 학철이 찔러댄 삽을 척 받아 무릎에 대고 툭 끊어버렸다. 그때 다른 곰이 최학철을 덮석 안아 내동댕이쳤다. “곰이야! 곰이야!” 최학철은 모진 고함을 치며 단말마적으로 곰에게 덮쳐들어 메치려고 기를 썼다. 이때 논밭으로 나오던 숱한 사람들이 고함소리를 듣고 삽이며 걸이대며 괭이며를 들고 이리로 달려왔다. 최학철은 덮쳐드는 곰을 이리 저리 날래게 몸을 날려 피하면서 곰에게 드센 주먹을 날렸다. 곰은 학철을 가지고 고양이처럼 양공질을 하고 있었다. “이 놈 곰 새끼!” 상순은 고함치며 당년에 전쟁터에서처럼 걸이대를 비껴들고 곰에게 덮쳐들었다. 그는 먼저 학철의 머리를 부둥켜안은 곰의 뒤로 에돌아 덮쳐들어 걸이대로 목을 콱 찔렀다. 그러자 곰은 학철을 놓고 몸뚱이를 홱 돌리더니 상순에게 덮쳐들었다. “싸(杀)!” 함성소리와 함께 상순은 시퍼런 걸이대끝을 곰의 턱밑에 콱 박아 넣고 푹푹 찔러댔다. 곰은 모진 소리를 치더니 비칠거리다가 푹 꺼꾸러졌다. 그 틈을 타 최학철은 곰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 이때 최국선이랑 박성근이랑 이병수랑 뛰어왔다. 그들의 손에는 소총이 들려 있었다. 상순은 걸이대를 버리고 성근의 손에서 소총을 빼앗아 쥐었다. “조개덕 민병들은 명령을 따르라!” “옛!” “사격 준비!” 당년의 퇴대군인들은 상순의 명령에 따라 총을 들고 곰을 겨냥했다. “쐇!” 탕! 탕! 탕! 요란한 총소리와 함께 곰 세 마리가 쓰러졌다. 나머지 곰들은 흥수랑 학수랑 숱한 사람들이 끊임없이 몰려오자 쓰러진 동료들을 놔두고 도망쳤다. 흥수는 달려오자마자 삽으로 죽은 곰을 두들겨 패면서 고함쳤다. “죽여라! 이놈 곰 새끼들아! 분명 큰 물도랑에서 목욕하는 덕돌이랑 우리 미선이랑을 잡아먹으려고 왔는기여!” 흥수가 다 죽은 곰을 삽으로 찍으면서 고함치는 그 장면, 개 잡은 포수처럼 우쭐거리는 장면은 삶은 소대가리도 웃다가 꾸러미 터질 지경이었다. 상순은 매부 최학철의 피 흐르는 얼굴을 팔소매로 닦아주다가 놀라 소리쳤다. “아니, 또 곰에게 낯을 허비었구만. 빨리 위생 소에 가봐야겠소.” 상순은 일없다고 팔을 뿌리치는 학철을 데리고 대대 위생소로 떠나갔다. “처남이 아니면 난 곰의 밥이 될 번했소.” 학철의 말에 상순은 “이후에는 너무 일찍 밭에 나오지 마오.”라고 했다. “곰들이 칼산의 남포질에 다 달아 난 것 같던게 또 나타날 줄을 누가 알았겠소.” 한편 곰과 용감히 싸워 잡은 상순과 학철이 위생소로 간 후였다. 흥수는 마치 자기가 사원들을 지휘해 곰을 잡은듯이 자처했다. “내 제때에 갔으니 말이지 하마터면 학철이 죽을 번했소.” 그때 조선족 말을 조금 알아듣고 4대의 치해풍이 눈을 흘기면서 두덜거렸다. “흥! 제길 할, 내랑 곰의 발톱에 코를 긁히면서 싸워 학철을 구한 걸 자기 구한 척 한다. 원, 더러워서.” 숱한 사원들도 코웃음쳤다. 그러나 저러나 낯이 두껍기로 소 엉덩짝 같은 흥수는 사원들을 시켜 곰을 수레에 싣고 마을로 돌아갔다. 조개덕 세개 마을에서는 곰 고기로 큰 잔치를 차리었다. 상순은 곰에게 물린 학철과 제해풍을 위생 소에 데리고 가서 상처를 처치한 후 점심에야 마을로 돌아왔다. 상순이 조개덕의 원래 식당에 들어가니 흥수가 상순이 없는 틈을 타서 한창 연설하고 있었다. “여러분, 오늘 우리는 집단의 힘을 빌어 곰을 네 마리나 잡았는기여. 이건 모두 내캉 제때에 큰 물도랑에 나가 힘을 합쳐 싸운 덕분인기오. 세상에 독불장군이라고 학철이나 상순인들 혼자서야 어찌 그 많은 곰들을 당할 수 있겠는기여?” “뭐라고?” 모두들 흥수 말은 귀등으로 흘리어 보내면서 곰의 고기를 먹다가 출입문을 되돌아보았다. 머리를 흰 붕대로 딜딜 감은 최학철과 코를 싸맨 제해풍이 눈을 뚝 부릅뜨고 흥수를 쏘아보고 있었다. 최학철은 흥수를 손가락질 하면서 노발대발했다. “우리 없는 틈에 곰을 제 잡은 상하는가? 원, 더러워서. 내 곰하구 씨름할 때 넌 물도랑에 오기나 했니? 남이 곰을 다 잡은 후에야 화서 죽은 곰을 삽으로 찍어놓구 제사 곰을 잡은 양 하면서...” 허나 상순은 학철의 팔소매를 툭 쳤다. “이제 구구히 더 말해 뭘 하겠소. 여러분들도 사실을 다 알고 있는데.” 그제야 학철과 제해풍은 퉁사발 눈을 히번떡거리며 으르릉거리다가 밥상을 마주 앉았다. 상순은 구들에 올라가 잔을 들고 목청껏 소리쳤다. “자, 우리 모두 힘을 합쳐 곰을 잡은 승리를 경축해 한잔 들기오!” 그러자 흥수는 상을 찡그리면서 밥상 앞에 물앉았다. “한잔 들기요!” 모두들 상순의 제의에 따라 한잔씩 쭉 굽을 냈다. 허나 곰을 잡은 일등공신인 학철과 제해풍은 상처 때문에 술 한잔도 내지 못하고 곰 고기국만 둬 사발 먹었다. 온 마을 사람들이 오랜만에 술이 거나해지자 상순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러분, 오늘 온 마을 사람들이 배불리 먹으니 얼마나 좋소. 당중앙에서는 지금 류소기동지와 등소평동지가 제창한  ‘3자’ ‘1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이때 우리는 대담히 황무지를 개간하고 농사를 잘 지어 집집이 쌀독마다 쌀을 꼴딱꼴딱 채워놓고 살기요.” “좋소!” “그럼 얼마나 좋겠소.” 사원들이 호응해나서자 상순은 사원들이 배불리 먹고 기뻐하는 분위기를 빌어 동원까지 해나갔다. “우리는 이전에 범바위골에 가서 황무지를 개간해 감자와 강냉이를 심었소. 또 범바위골로 들어가는 게 어떻소?” “좋소. 우린 김서기 말만 따르겠소.” 그때 흥수가 벌떡 일어나 손사래를 쳤다. “안 돼. 이제 몇 해 지나면 또 우의 정책이  어떻게 바뀔지 어떻게 알고 그러는기여. 또 김 서기가 저 허백호 서기처럼 투쟁받자고 그러는기오?”       허백호 서기는 한쪽 구석에 김빠진 공처럼 물앉아 주는 밥이나 먹으면서 사원들의 눈치를 흘끔흘끔 보았다. 모두들 노동개조를 하는 허백호 서기를 흘끔흘끔 곁눈질했다. 상순은 여러 사원들을 올바르게 리드해나갔다. “여러분, 우리 이 좋은 때 황무지를 개간해 배불리 먹고 살지 않고 뭘 하겠습니까? 이것저것 눈치를 보다나면 항상 배를 곯으면서 살게 아닙니까?” 흥수가 냉수를 치는 바람에 푹 식어져버린 썰렁한 식당 안의 분위기는 다시 오르기 힘들었다. 병완은 더 말하지 말라고 상순의 무릎을 툭툭 쳤다. 이윽고 여기저기에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에이구, 몇 해라도 배불리 먹고 살다가 죽었으면 얼마나 좋겠소.” “그렇찮고.” “우에서도 집체식당을 하구 집체로 하니 잘 살수 없다는 걸 알고 이번에 다시 개인에게 밭을 떼맡기는 거겠지.” “우에 눈치만 볼게 있소? 개체로 농사를 지어 잘 살 수 있으면 개체로 농사를 지을 판이지.” “황무지도 마음대로 개간해서 배불리 먹고 살면 좋은게지. 무슨 두갈래 노선을 자꾸 말해 뭘 하오?” 상순은 자기 말을 한단락 매듭지었다. “그럼 좋소. 황무지를 개간하는걸로 하고 유관 부문과 잘 토론해야 하겠소.” 학수가 끼어들었다. “이보, 그 좋은 범바위골을 두고 또 어디에 가서 헤맨다고 그러오?" 그러나 상순은 소홀히 결정을 내릴 수 없어 그 자리에서는 그만두었다. 범바위골은 남의 공사 지역에 속하는데다가 거리가 너무 멀어 이러저러한 문제가 생길 수도 있었던 것이다.   해가 어슬어슬 지자 상순은 자기 집에 차례진 곰의 고기에서 몇 근 떼 들고 함흥 촌의 웃새집에 들어가서 할아버지를 찾아갔다. 병완은 더부룩한 흰 수염이 가슴에까지 흘러내리고 얼굴에 밭고랑 같은 주름이 잡힌데다가 허리마저 구부정해갔다. 로쇠해진 할아버지를 보는 순간 상순은 가슴이 뭉클해나고 코마루가 시큼해났다. “할아버지, 몸은 어떻습니까?” 그러자 병완은 기침을 쿨룩쿨룩 깇으면서 “이젠 늙어서 그러려니 하네.”라고 하며 상순에게 자리를 권했다. 상순은 할아버지를 보고 “ ‘야’, ‘자’ 하지 않으니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라고 말씀드렸다. 그러자 병완은 “이젠 마흔고개도 넘었는데 어찌 계속 어린애 취급을 하겠소?”라고 했다. “할아버지, 몸조심 하십시오. 오래 앉으셔서 손자가 하는 일을 돌봐주시고 사원들이 배불리 먹고 사는 날을 오래오래 지켜 봐줍소.” “그래? 에이유, 자손들을 대여섯이나 앞세우고 주책없이 오래 살아 뭘 하겠소?” 상순은 자리를 잡고 앉아 문안이 끝나자 본론으로 들어갔다. “할아버지, 사원들을 이끌고 다시 범바위골로 들어가 감자농사를 지어 올가 하는데 었떻습니까?” 그러자 병완은 상순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눈길은 상냥하면서도 이전과는 달리 맥이 없어 보였다. “범바위골에 들어갈 예산이오?” “예. 거기 가서는 통일적으로 이전처럼 집체생산을 해서 가져다가 노동공수와 인구 비례에 따라 나눌 예산입니다.” 한참 궁리하던 병완은 머리를 끄덕이며 한숨을 후 내쉬더니 무겁게 입을 열었다. “정치에 삐치지 마오. '범의 꼬리는 놓치면 죽는다.' '가혹한 정치는 범보다 무섭다.'고 옛날 성인들이 말했느니라. 지금 우의 정책이 자꾸 이랬다저랬다 하면서 좌우경 기회주의분자요, 뭐요 하면서 두갈래 노선투쟁이 얼마나 심하오? 자칫 잘못 발을 내딛였다간 우파가 아니면 좌파로 몰려 투쟁받지 않겠소? 보오, 허백호 서기랑 허영주 부현장이랑 다 노선투쟁에 휘말려들어 투쟁받았잖소? 매사에 주의하오.” “사원들을 배불리 먹이려고 범바위골로 들어가는 건 괜찮을 거 같습니다. 뒤근심도 좀 있습니다.” 그 말에 병완은 머리를 끄덕였다. “옳소. 뭐나 심사숙고한 후에 결단내려야 하오. 범바위골은 남의 공사 지역인데다가 멀기에 확실히 운송이랑 노동력이랑 문제 많소. 더구나 이전에 그 일 때문에 얼마나 말을 많이 들었소? 가만, 우리 날씨도 좋은데. 마을 주위를 두루 나가 돌아보면서 얘기하면 어떻소?” “좋습니다.” 병완은 지팽이에 몸을 의지해 구부정한 허리를 펴면서 상순과 함께 계수동과 소서구, 장개골을 일일이 돌아보았다. 이젠 두만강을 건너온지 50여년 동안 조선족들이 가파른 산기슭의 황무지까지 다 개간해 뙈기밭을 일굴 곳은 없었다. 다만 밭머리에 조금 더 개간할 수 있을 뿐이었다. 병완은 지팽이를 짚고 걷기 힘들어했다. 눈치챈 상순은 오후에는 할아버지를 수레에 모시고 패용천산과 칼산 골짜기를 돌아보았다. 그는 골짜기를 내려가면서 할아버지에게 말씀드렸다. “마을에 인구는 점점 불어나지 밭은 더 없지. 이 일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사원들이 배를 곯지 않게 하려면 제가 말을 듣더라도 발 벗고 나서야 될 것 같습니다.” 병완은 백성을 생각하는 손자의 착한 마음과 비범한 담력에 속으로 못내 감탄했다. “그래야지. 지금 세상에서 편안히 살려면 눈치만 살피면서 아무 일도 하잖으면 그만이지. 허나 백성들을 생각하려면 더러 말도 들을 각오를 해야 되오.” 상순은 “이것저것 눈치를 보다나면 언제 사원들의 굶은 배를 채우겠습니까?”라고 하며 굳은 마음을 내보였다. “그래, 장하오. 마음먹은 대로 해야네.” 병완은 칼산과 패용천산 사이의 골짜기를 내려가다가 갑자기 소리쳤다. “수레를 멈춰라!” 상순이 뒤돌아보니 할아버지는 바위돌이 가득한 골짜기를 두루 살피더니 무릎을 탁 쳤다. “됐소. 이 골짜기 황무지를 개간하오!” “예?” 상순은 눈이 휘 둥글해졌다. “아니, 이 가파로운 산골짜기 말입니까?” “음.” 병완은 수레에 앉아 하얀 수염을 쓰다듬었다. “바위돌도 가득한데 말입니까?” “그래. 난 이 골짜기를 보는 순간 내 고향 명천군 상우남면의 돌각담밭을 보는 것 같았소. 우리 고향에 이런 황무지가 더 있어도 여기 간도로 들어왔겠소?” 그제야 상순은 소고삐를 수레채에 매놓고 두루 살폈다. “여기다 뭘 심으면 될 거 같습니까?” 병완은 수레에서 내려 지팡이로 이곳저곳 가리키며 말했다. “산세가 가파른 이 산골짜기에 과수원을 개척하면 좋을 거 같소.” “예? 당장 사원들이 배고픈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데 과수원부터 차린단 말입니까?” “그래, 배나무를 심고 배나무 사이는 밭으로 개간해 콩이나 감자, 고구마를 심으면 되오.” 병완은 수염을 흩날리면서 허리를 굽히더니 흙을 한줌 쥐여 멀리감치 들고 여겨보았다. “보오, 모래가 많이 섞인 이 땅에는 콩이나 고구마, 감자를 심으면 잘 열릴 게요.” “예~ 거 참 좋습니다.” 상순은 가파른 산비탈에 눈길을 멈추었다. “할아버지, 이 가파른 산비탈에 소낙비라도 쏟아지면 모래밭이 다 씻겨가지 않겠습니까?” 병완은 흰 수염을 슬슬 쓸며 한참 궁리하다가 “여기에 다락 밭을 만들면 될 거 같소.”라고 했다. “다락밭이라니오?” 병완은 상순에게 머리를 돌리면서 말했다. “이전에 우리 고향 산비탈에도 소잔등 같은 바위돌이 가득 했지. 그때도 우린 숱한 돌을 주어내서 토성처럼 쌓고 그 우에 흙을 펴서 평평한 다락밭을 만들고 메밀이랑 심어 먹었지.” “예- 알았습니다.” 상순은 오래도록 머리를 끄덕이면서 할아버지의 원견과 고견에 탄복했다. 상순은 수레를 몰고 패용천산과 칼산 골짜기를 내려와 산 앞에 이르렀다. “이전에 내 저 지개틀과 이펑거지에 논밭을 풀었지. 지학사네 배추밭 옆으로 물도랑을 파면서 보니까. 부르하통하 강변에 버두나무가 우거진 모래밭이 있더라. 거기로 가보자.” “예. 가봅시다.” 상순은 비녀뿔이 끄는 덜렁거리는 수레에 할아버지를 모시고 부르하통하 강변으로 갔다. 아름드리 버드나무가 우거진 강변에는 모래로 뒤덮인 백사장이 펼쳐져 있었다. 아름드리 버드나무들이 무서운 소리를 지르면서 봄바람에 몸부림쳤다. “어떠냐? 여기에 논밭을 푼단 말이다.” 그러자 상순은 대번에 동의해 나섰다. “저의 생각과 똑 같습니다. 저도 언제부터 여기에 눈독을 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해마다 큰물이 지면 논밭이 밀려갈까봐 논밭을 풀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병완은 희죽이 웃으면서 강변을 지팡이로 가리켰다. “모래밭에 높은 돌 제방을 쌓는단 말이다. 홍수가 덮쳐들어도 끄떡하지 않는 제방 말이야.” “품이 많이 먹어야 하겠습니다.” “그만한 품이야 들어야지. 여기에 강물을 막아 제방을 한 일리 되게 쌓으면 서 너 헥타르 논을 풀 수 있잖겠소? 여기에 논밭을 일구기만 하면 천추만대로 우리 생산대 사원들이 배불리 먹고 살게 아니요?” “예, 예. 맞는 말씀입니다. 곧 지부대회를 열고 의견을 통일한 후 인차 제방을 쌓고 논을 풀겠습니다.” 병완은 머리를 끄덕이면서 주름 잡힌 얼굴에 흡족한 웃음을 지었다. 그들 조손은 그번 걸음에 6헥타르나 되는 과수원과 4헥타르나 되는 논을 풀 원대한 구상을 익히면서 수레에 앉아 5 리나 떨어진 마을로 돌아왔다. 이튿날 상순은 그 원대한 계획을 지부대회에 내놓았다. "좋소!" "동의하오!" 모두들 이구동성으로  동의해 나섰다. “참 상상 밖의 좋은 계획이오.” 그러나 흥수와 학수는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흥수는 조개턱을 쳐들고 도리머리를 저었다. “이보, 김 서기, 괜히 우리까지 말을 듣겠수.” 학수도 반기를 내들었다. “그래도 우에 청시한 후 일하기오.” 그때 함흥촌에서 노동개조를 하던 허백호도 한마디 했다. “매사에 주의하오. 이전에도 범바위골에 갔다가 말을 들어가지고 또 황무지개간이오?” 허나 상순은 가슴을 쭉 펴고 당당하게 말했다. “백성들이 굶지 않게 하려고 황무지를 개간하는데 무슨 착오란 말입니까? 사원들이 배불리 먹을 수만 있다면 난 투쟁받아도 괜찮습니다.” 그러자 흥수와 학수 형제는 더 말이 없이 동의했다. 허백호 서기도 입을 다물었다. 그는 점차 상순의 인간됨에 머리를 숙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상순은 노동개조를 하러 온 허백호를 날마다 투쟁할 대신 이전의 당위 서기로 존경하면서 매사에 그와 청시하거나 토론했고 당지부 회의에도 참가시켰던 것이다. 그러나 회의 때마다 흥수는 허백호 서기를 소 닭 보듯 하면서 아니꼬와했다. 지어 허백호 서기 앞에서 상순이 노동개조대상을 당지부 회의에 참가시켰다면서 조직원칙과 당성 원칙이 없다고 비평했다. 그때마다 상순은 단마디로 반박하군 했다. “허 서기는 잠시 착오를 져서 사상개조를 할 뿐이지 의연히 중국 공산당 당원이오. 왜서 당원회의에 참가하지 못한단 말이오?” 그 장면을 보고 허백호는 흥수를 속으로 비할 데 없이 증오했다. (어떤 때는 나한테 찰싹 들어붙어 술까지 대접하면서 당지부 서기를 시켜달라고 애원하더니. 흥! 이젠 헌 신짝 차 버리듯 하는구나. 내 눈이 멀었지. 배은망덕하는 저런 놈을 다 화선입당을 시키다니.) 그는 이전에 병완과 상순을 잘못 대한 것을 못내 후회했다. (상순이야 말로 양심적인 인간인데 내가 눈이 멀었지.) 허백호는 속으로 별의별 궁리를 다 했다. (이제 나한테 다시 한번만 기회 있어봐라…) 이튿날 상순은 함흥대대 200여명 사원들을 이끌고 패용천산과 칼산으로 줄지어 진군했다. 대자연을 정복하려고 진군한 상순을 비롯한 사원들 앞에서 패용천산도 머리 숙이고 칼산도 길을 피해주기 시작했다. 패용천산과 칼산 사이의 골짜기에서 남포 소리가 연이어 일어났다. 범과 곰들은 겁을 집어 먹고 슬금슬금 마개동을 넘어 도끼봉 쪽으로 도망쳤다. 상순은 사원들을 이끌어 돌을 캐 수레로 날라다 언제를 쌓고 시꺼먼 부식토와 모래개흙을 편 후 애어린 사과배나무를 심었다. 이때 공사당위 사무실 주임이 헐레벌떡거리면서 산비탈로 올라와 상순을 찾았다. “김 서기, 우리 박서기 산 아래에 왔습니다. 내려오랍니다.” 허백호가 상을 찡그리면서 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날 또 투쟁하려는 건가?) 상순은 대수로워하지 않으면서 퉁명스럽게 말했다. "일하는 거 보지 못했소? 어째 박서기를 보고 여기 올라오라 하지 않았소?” 그러자 사무실 주임은 난처한 기색을 보였다. “사실, 찌프가 가파른 산비탈로 올라오기 힘들어서. 에헴.” 그제야 상순은 곡괭이를 놓고 손을 툭툭 털더니 산 아래로 내려갔다. 박우성 서기는 찌프에서 내려 부채질했다. 상순이 마주 나가면서 인사했다. “무더운데 여기까지 무슨 일이오?”  박우성은 동창생의 손을 잡으면서 “더운데 고생이 많구먼."하고 인사하고나서  "그래 과수원공사는 언제쯤 끝날 거 같소.” 하고 물었다. 상순은 흐르는 도랑물에 손을 씻으면서 대충 회보했다. “사과나무는 그럭저럭 봄에 심어놓았는데 다락 밭을 만드는 일은 아마 온 여름 걸릴 거 같소. 장마 지기 전에 산비탈에 몽땅 다락밭을 만들어야겠는데 말이오. 그러잖으면 모래와 부식토에 심은 고구마와 감자가 다 밀려 갈 거 같소.” 박우성 서기는 사무실 주임을 흘끔 곁눈질하더니 상순을 데리고 한쪽으로 가서 나직이 말했다. “김 서기, 동창생이니깐 하는 말이오. 생산만 생산이라 하지 말고 혁명을 틀어쥘 생각을 하오.” “사원들이 배불리 먹게 하는 일만한 혁명이 또 어디에 있소?” 박우성은 쑥 꺼져 들어간 눈에 엄숙한 빛을 띠웠다. “어떤 사람이 자네 큰어머니 진달래 중대장이 조선으로 달아났다고 고발했소. 허나 난 이때까지 깔아두었소. 그런데 조선특무를 붙잡으라고 위에서 새로운 지시가 내려왔소. 이 일을 어떻게 하겠소? 게다가 항미원조 전쟁 때 남조선 특무 김용천의 삼촌 김덕성과 사촌동생 김칠백, 김칠석마저 특무라고 고발한 사람도 있소. 허영호 소장은 자네 둘째딸 은숙이 조선으로 달아난게 분명하다고 반영했소.” “뭐라오? 근거 없는 말. 오늘 아침까지 집에 있었는데 무슨 말이오?” 박우성은 상순의 어깨를 다독이면서 뒷말을 조용히 이었다. “허영호 소장은 농망계절에 일하지 않고 진수해에서 삼합으로 나가는 버스를 타는 걸 민경이 보고했다오. 이런 때 조선특무를 잡는 투쟁과 계급투쟁을 틀어쥐지 않고 다락밭을 만드는 데만 머리를 써서야 되겠소?” 상순은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며 호주머니에서 담배쌈지를 꺼냈다. 이윽고 그의 입에서는 속이 탄 시뿌연 담배연기가 길게 뿜겨져 나와 타래쳐 올라갔다. 꽈르릉 꽝! 꽝! 저 멀리 칼산과 골짜기에서 또 발파소리가 요란했다. 먹장구름이 패용천산과 칼산을 뒤덮고 있었다. 먹장구름 속에서 번개가 구렁이처럼 혀를 날름거리더니 요란한 천둥소리가 대지를 진동했다. “소낙비 오겠는 모양이오.” 박우성 서기는 찌프에 오르면서 상순에게 뭐라고 한마디 하고는 사무실 주임과 함께 진수해로 달려갔다.       찌프 뒤로 먹장구름이 뭉게뭉게 피여오르더니 바짝 뒤쫓아갔다. 대지에는 호두알만큼 한 비방울이 후둑후둑 떨어졌다. 드디어 밤알만큼 한 새하얀 우박알들이 와르르 떨어져 사원들을 머리를 들지 못하게 두드려댔다. 사원들은 황급히 수레와 나무 밑으로 들어가 대줄기 같은 소낙비를 피했다. 허나 수레 멍예를 목에 멘 비녀뿔이랑 코깜쟁이랑 황소들은 어디로 피할 수 없어 머리를 숙이고 우박과 소낙비를 맞았다. “은숙이 달아난 걸 어떻게 하는가? 철없는 계집애라고. 참.” 상순은 소낙비가 억수로 쏟아져 내리는 하늘을, 먹장구름이 뒤덮인 하늘을 하염없이 쳐다보며 원망했다.        “원, 하늘도 무심하지! 한창 다락밭을 만들 때 무슨 우박을 퍼부어.”                4. “북조선 특무”와 “남조선 특무”        패용천산 중턱에서 먹장구름과 안개가 흩어져 감돌고 있었다. 구름인지 안개인지 천년 이끼가 낀 바위들을 씃어 올려 더욱 기괴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패용천산 중턱의 산비탈 다락밭머리에서는 한창 이른바 남조선 특무 용천의 아들 김경주와 삼촌 김덕성 그리고 김덕성의 아들 김칠석을 투쟁하느라고 분위기가 팽팽했다. 이번에는 우파들인 오옥선과 허백호 그리고 지주 장학산과 그의 아들딸 장충국과 장미련 등은 투쟁하지 않고 남조선특무와 북조선 특무들만 투쟁하고 있었다. 이번에도 흥수가 앞장섰다. “이놈, 남조선특무 삼촌아! 대가릴 숙여!” 흥수는 나서자마자 덕성의 허연 머리를 손바닥으로 탁 치더니 내리 눌렀다. 옆에 서있던 칠석이 흥수를 쏘아보며 눈을 흘겼다. “이 놈 새끼! 눈은 왜 흘겨?!” “우리 온 집안이 어떻게 돼 남조선 특무냐?” 칠석이 머리를 들고 따지고 들자 흥수는 눈을 부라리며 고래고래 고함쳤다. “그래 모르는 척 할 테냐?” 흥수는 조개턱을 쳐들고 사원들을 돌아보더니 목에 지렁이 같은 피 줄을 세우고 호통 쳤다. “여러분들도 다 알고 있잖는기요? 항미 원조 전쟁 시기 남조선특무 김용천은 바로 이 놈들의 집에 숨어 있으면서 특무활동을 하지 않았습니꺄?” 모두들 머리를 끄덕였다. “용천이 우리 집에 들었다고 우리가 남조선 특무란 말인기여?” 덕성이 남대 치 말로 답변하자 흥수는 그의 머리를 손으로 꽉 눌러 구십도로 숙이게 했다. “이 놈, 주둥이를 다물지 못해? 무슨 말 답변 질이냐? 이 놈은 남조선 특무가 자기 집에서 활동하는 걸 공안국에 보고하지 않았지요. 아니, 특무들을 도왔단 말입니다.” “뭘? 어떻게 도왔단 말인가?” 덕성이 또 머리를 쳐들고 대들었다. 흥수는 눈을 뚝 부릅뜨고 덕성의 흰 수염이 더부룩한 턱을 쳐들었다. “이 놈, 네 놈이 특무에게 밥을 해 주지 않았는가?” “말해!” “탄백하라!” 여기저기에서 구호소리가 울렸다. “남조선특무를 타도하자!” 덕성은 두툼한 입술을 열었다. “탄백하겠어. 난 일본 놈의 통치시기에 병완 영감과 함께 우시장 일본경찰국을 무너지게 만들었다. 내 아들 칠백은 항일유격대 중대장, 대대장이었다. 그는 일제캉(와) 미제캉(와) 용감히 싸웠어. 목숨까지 바쳤어. 그래도 죄 있는 거야? 열사 아버지 대접은커녕 이건 뭐야? 투쟁해?! 너희들 누구 덕에 이밥 먹고 사는지 알기나 하고 이래?” 그 말에 흥수는 어이없다는 듯이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사원들 속에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흥수는 지지 않으려고 했다. “아들은 아들이고 넌 너야. 어찌 했든 남조선특무 김용천에게 밥을 해 먹이고 자게 했어. 이건 남조선특무를 도운 특무 죄야!” 흥수는 억지로 덕성을 특무로 몰아세웠다. “아차, 잊었어. 넌 남조선 특무자 북조선 특무야! 이중간첩, 그래, 이중간첩이야!” “북조선특무라니? 이건 또 무슨 생뚱 같은 개소리냐?” 덕성은 눈이 휘동그래졌다. 옆에 서서 투쟁받던 경주는 너무나도 억이 막혀 무서운 눈길로 흥수를 쏘아보았다. “네 아들놈이 조선인민군 대대장이 아니었어? 넌 북조선특무야.” 그러자 보다 못해 상순이 나섰다. “이보게, 그만 하오. 자네 말대로라면 나도 자네도 다 북조선특무란 말인가?” “뭐라고? 당찮은 소리.” 상순은 한술 더 떴다. “항미원조 때 자네나 내나 다 영장과  반장 하잖았는가? 여기 항미원조 전쟁에 지원군이나 조선인민군에 나가지 않은 사람들이 몇이나 되오? 그래 모두 북조선특무란 말이오?!” 흥수는 그만 말문이 막혔다. 그러나 인차 침착성을 찾고 입에서 침방울을 튕기면서 억지를 부렸다. “내야 지원군으로 나가 당신 영도 아래 팔에 부상까지 당하면서 싸웠잖아? 건데 무슨 놈의 조선 특무란기여? 김덕성 일가는 확실히 남조선특무들이지. 저자들은 모두 고향이 남조선 경상북도 경주란 말이여. 저 놈들의 마음 속에는 항상 남조선이 있는기여. 항상 남조선 고향을 그리고 남조선 위해 뭔가 하려는 놈들인기여. 용천 대장이 잡힌 후부터 입장이 바뀌어서 남조선특무로 된기여.” 그러자 허백호가 참지 못하고 나섰다. “그만 두오. 아무리 고향이 남조선 경주라고 남조선특무라는 법은 어디 있소? 우리 대부분 사람들은 고향이 남조선이 아니면 북조선인데 그래 모두 남조선 특무 아니면 북조선 특무란 말이오?” 이때 성근이 또 입술이 간질거려 참지 못해 툭 쏘았다. “이보, 흥수, 당신은 무슨 이씨요?” 흥수는 어망간에 “전주 이 씨여.” 하고 대답했다. 그러나 인차 농촌 정객의 어처구니없는 침착성과 냉정성을 회복했다. 그는 외까풀눈을 가슴츠레 뜨고 성근을 흘겨보았다. “그걸 왜 물어?” 성근은 뒷덜미를 긁적거렸다. “흥수, 당신 고향 어디요?” “나야, 고향이 이북 함경북도 경성이야. 남조선이 아니란 말이야.” “당신 할아버지 고향은 전주라고 하지 않았소?” “할아버지 고향과 내 고향이 무슨 관계 있어?” 그러나 흥수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성근은 고삐를 놓치지 않고 홱 나꿔챘다. “뿌리가 조선 땅에 박혔으면 다 같은 게 아닌가?” “저런, 우파 같은 놈, 생사람을 잡지 말어. 난 왼팔 오른팔 다 남조선 총에 맞으면서 용감히 싸운 항미원조 용사야. 내 어찌 남조선특무란 말이야?” 박성근은 상순이가 눈짓하는 것도 끈질기게 바투 들이댔다. “당신 동생 남조선 괴뢰군이라면서? 말대로라면 당신도 남조선 특무 아니고 뭔가?” “닥치지 못할까!” 흥수는 민병들이 세워 놓은 총까지 들면서 꽥 호통 쳤다. 그제야 박성근은 목을 움츠리며 입에 빗장을 질렀다. 흥수는 개 잡은 포수처럼 우쭐거리며 고래고래 고함쳤다. “이제부터 이 당지부 선전위원에게 악독하게 대드는 놈은 좋은 끝장이 없다! 반당분자와 남북조선 특무 고깔모자를 씌워 투쟁할 테야. 대드는 놈은 총살해버릴 테다!” 모두들 흥수의 손에 든 총과 독기서린 눈길을 번갈아 보면서 자기에게 불똥이 튈 까봐 눈치를 살폈다. 허나 뒤에서 일부 사원들은 쑤군거렸다. 투쟁대회는 결국 흐지부지해지고 말았다. 사원들은 다시 상순의 지휘대로 대자연을 개조하는 일에 뛰어들었다. 남포질에 맞아 금이 간 바위 돌을 괭이로 캐내 경사가 가파른 산비탈에 돌다락을 쌓고 모래와 부식토를 섞어 채워 넣었다. 가파른 산비탈에 점차 다락 밭이 생기기 시작했다. 사원들은 밭을 많이 만들어 배불리 먹고 살 욕심에 힘든 줄도 모르고 상순을 따라 억척스레 일했다. “밭이자 쌀이다.” 상순의 이 말은 사원들의 마음속에 딱 들어가는 진리였다. 상순은 천년 이끼 낀 바위 돌 틈에 긴 정을 박아 넣고 어깨를 넣어 떴다. 얼기설기 금이 쪽쪽 난 바위돌은 용케도 쩍 갈라졌다. 상순은 웃통을 벗어재끼고 용트림하는 것 같이 근육이 울뚝 뿔뚝한 두 팔로 떡돌만큼 한 돌을 “윽!” 소리와 함께 번쩍 들어 돌 언제에 쌓아놓았다. “피해라!” “돌이 굴러 내려온다!” “저걸 어쩌니?” 여기저기에서 비명소리가 울렸다. 가파른 산비탈 우에서 돌을 캐다가 그만 가마뚜껑만한 돌이 굴러 내려왔다. 그 돌은 흥수를 노리고 사납게 데굴데굴 굴러 내려왔다. “피햇!” 상순은 고함치며 흥수를 옆으로 밀어버리면서 긴 정을 휘둘러 굴러 내려오는 돌을 탁 쳤다. 돌은 불꽃을 튕기며 방향을 바꿔 굴다가 산비탈에 쓰러졌다. 모두들 안도의 숨을 후 내쉬었다. 그러나 쓰러졌던 흥수는 게두덜거렸다. “괜히 밀어놔서 무릎을 벗겼어! 씨!” 모두들 흥수가 배은망덕 한다고 쑤군거렸다. “항미원조 전쟁 때도 상순이 아니면 제 살았겠소? 압록강 바닥에서 미군 적기를 휑해서 구경하다나니 기관총에 맞아 죽을 번 했소.” 병수의 말을 이번에는 창걸이 받았다. “그때도 상순이 콱 밀쳤기에 살았지.” “어디 한두 번이오? 이전에 우리 군복을 싣고 남조선 충청남도 서현에 갔을 때오. 산에서 포위당해 유격전을 하게 됐지. 그때도 상순이 흥수를 밀어놓고 양키놈을 쳐눕히지 않았더라면 총에 맞아 죽었을 거요.” “그런데도 쩍 하면 뜨개 소처럼 김 서기를 뜬단 말이오.” “배은망덕 한 놈이지.” “길러준 개 발뒤축을 문다는 게 저런 새끼들을 두고 하는 말이지.” 나그네 귀 석자라고 오고가는 뒷말을 듣고 흥수는 손바닥을 툭툭 털며 병수와 창걸을 흘겨보았다. 해가 어슬어슬 져갔다.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사원들의 뒤로 먹장구름이 몰려오고 저쪽 칼산에는 벌써 저물어가는 하늘을 뒤덮으며 뽀얗게 소낙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사원들은 괭이랑 삽이랑 들고 집으로 부랴부랴 뛰어갔다. 상순은 저녁이라고 멀쑥한 죽물을 들어 쭉 마시고 바깥으로 나갔다. 억수로 쏟아지던 비가 멎고 서쪽 하늘에 애기 별이 하나, 둘 나타나 깜빡이기 시작했다. “아무리 봐도 흥수가 그저 일이 아니야. 제 서긴가? 마음대로 덕성을 투쟁하다니? 아무 사람에게나 우파 아니면 북조선특무, 남조선특무라고 모자를 씌운단 말이야. 그러다간 이 마을에 투쟁받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는가?” 상순은 착잡한 생각을 굴리며 곧추 함흥촌에 올라가 토성 동쪽에 있는 흥수네 집으로 찾아갔다. 창문가에 서 있던 춘실은 상순을 내다보자마자 이마쌀부터 찌푸리었다. “어떻게 나그네도 없는 집에 소리도 하지 않고 들어오오?” 상순은 윗방 문 앞에 서서 방 안을 들여다보면서 “흥수는 어디 갔소?” 하고 물었다. 춘실은 마흔이 넘었지만 상순만 보면 처녀 때 마음이 되살아나는지 입을 쫑긋했다. “없으면 어째?” “잡담할 새 없소. 어디 갔소?” “대대 사무실로 간 거 같은데.” “흥!” 상순은 콧방귀를 뀌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대대 사무실 쪽으로 휭 하니 써늘한 바람을 일구며 떠나갔다. 뒤에서 춘실이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백준이, 아니, 백호가 또 아들애를 봤다오. 제 손자도 안아 보지 않는 저런 독종놈, 저런 놈 세상 어디 또 있니?” 그 말에 상순은 주춤 멈춰 섰다가 몸을 돌리지도 않고 천천히 걸어갔다. 그의 몸이 비틀거리는 것이 보였다. (세상에 자기 자손을 고와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에 있겠니? 응준아, 백준아, 아니, 백호야, 나를 용서해라. 연길에서 애를 많이 낳아 키우면서 잘 살아라.) 그가 토성 안에 들어서는데 전기불이 환한 대대 사무실에서 뜻밖에 덕성이 한창 흥수에게 애걸복걸 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흥수, 원수 진 일이 있나? 제발 그만 투쟁하라고. 용천은 용천이지. 내 특무 노릇 한 적은 없잖나. 우리 둘은 다 남조선에서 온 남대치친구인데 왜 그래?” “아따, 이 영감이. 이거 누가 너거(네) 친군기여? 우리 당과 사회주의 조국의 안녕과 관계되는 일 아닌가? 자넨 분명 남조선 특무를 자기 집에 재우면서 밥을 지어 먹이지 않았는가? 용천처럼 처단하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인줄 알아. 두말 말고 투쟁받고 그 더러운 특무사상 개조하게나.” “흥수, 나도 중국공산당을 열애하네. 당과 사회주의에 미안한 일을 한 적 없네. 억울하게 투쟁받지 못하겠네.” “이 영감이 이게. 어째 죽지 못해 이래? 썩 나가지 못해?!” 흥수는 썩 이상인 덕성을 사무실에서 마구 떠밀어냈다. 덕성은 흥수에게 떠밀리어 마루까지 나왔다가 상순을 보자 파도가 세찬 바다에서 지푸라기라도 본 듯이 상순의 두 팔을 붙잡고 애원했다. “김 서기, 우린 한 고향 사람들이 아닌가? 자넨 어려서부터 알지 않나? 내 나쁜 행동 한 적이 없잖나? 용천 사건 때도 내 청백하다는 걸 자넨 알고 있잖나?” 상순은 덕성을 부축해 마루에서 내려가면서 말했다. “근심하지 말고 돌아갑소.” 덕성은 연신 머리를 끄덕이었다. “그럼 자네만 믿고 가겠네.” 덕성은 흥수를 쏘아보더니 토성 바깥으로 나갔다. 상순은 그를 토성 바깥에까지 바래다주었다. 토성 바깥 어둠 속에서 칠석이 아버지를 부축해 질척질척한 진창길로 절벅절벅 집으로 돌아갔다. 상순은 특무의 사촌동생이란 딱지가 들어붙어 장가도 들지 못한 칠석이 불쌍했다. 또 조선에서 피를 흘리며 싸운 덕성과 칠백 대대장이 가긍해 콧마루가 시큼해났다. 상순은 그들 부자를 바래고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대대 사무실로 들어갔다. 흥수가 오히려 성이 꼭뒤까지 치밀어 노발대발했다. “당신, 정신 있는기여? 남조선 특무와 무슨 그리 인정스레 놀아? 서기란 사람이 주책없이.” “뭐라오? 누가 할 소리를 누가 하오?” 상순은 흥수를 쏘아보며 책상을 꽝 쳤다. “앉소. 오늘 조용할 때 따져 보기요.” 흥수도 노긋노긋하게 숙어 들려고 하지 않았다. “특무하고 한 바지를 입고 춤을 추다니?” “뭐라오?” 상순은 밸 같았으면 흥수의 면상을 한매 쳐주고 싶었다. 하지만 용케도 한숨을 길게 내쉬면서 억지로 참아냈다. “무슨 근거로 어째 덕성에게 마음대로 특무 모자를 씌워 투쟁한단 말이오? 나는 당시 용천 사건을 해명한 책임자기에 증명할 수 있소. 용천은 우리 마을에 잠입한 특무지만 덕성이나 칠석은 특무가 아니란 말이오. 적아 계선을 똑똑히 나눠야 한단 말이오.” 그 말에 흥수는 풀이 좀 죽었다. 허나 자기 체면을 지키려는 듯 또 두덜거렸다. “어쨌든 덕성 영감은 특무의 삼촌이오. 칠석인 특무의 사촌동생이고.” 상순은 목소리를 낮춰 차근차근 말했다. “흥수, 특무 친척이라고 다 투쟁하면 뭐요? 우린 봉건사회 때 한 사람이 죄를 범하면 팔촌까지 련루시켜 목을 치던 작법을 그만 둬야 하오.” 그러나 흥수는 계속 고집을 썼다. “그럼 어째 빈농이고 지주고 성분을 나눴어? 그래 성분을 보지 말자는 말인기여?” “애비가 지주라고 해서 아들마저 지주로 몰아 투쟁하라고 하지 않았소. 우리 당에서는 타격면을 좁혀 적을 적게 만들기 위해 지주와 아들은 구분해 보라고 했소.” “점점 어처구니없는 말을 다 해. 그래 장충국을 투쟁하지 말래?” “아니오. 장충국은 일찍 항일도 했지만 후에 국민당에 가담해 지주 무장을 조직해 우리 사회주의 조국을 뒤엎으려고 한데다가 남조선 특무들과 야합했소. 그러나 덕성 영감네 부자는 다르오. 당지부에서 토론도 없이 당신이 마음대로 투쟁하면 되오?” “당지부 위원이 셋인데. 나와 학수 형님은 덕성을 비판하자고 토론했소.” “허나 당지부 서기인 나와는 왜 일언반구도 토론하지 않았소?” “모택동 주석께서는 소수는 다수에 복종하라고 했소. 서기든 뭐든 당신은 다수에 복종해야 하오.” “허허허. 대단하구만.” 상순은 가소로워 너털웃음을 쳤다. “내가 지부 서기인데. 토론도 하지 않고 당지부 결정이라고?! 조직원칙이 있소? 없소? 내일부터 덕성을 투쟁하지 못하오.” “소수는 다수에 복종하오! 당신 그래 당지부 서기노라고 모택동 주석의 말씀도 듣지 않을 예산이오?” “소수라고 해도 어떤 때에는 도리 있다고 모주석께서 말씀했소. 알기나 하오?” 그 말에 흥수는 입을 허 벌리고 말았다. 이론수준은 어쨌든 상순을 따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때 상순은 책상을 치면서 일어섰다. “함흥대대 당지부 대회에서 토론하고 덕성의 투쟁문제를 결정하기로 했소.” “누구하고 토론하오?” “우리 할아버지 지부 서기는 내놓았지만 아직도 당원이라는 것을 잊지 마오.” “토론을 하나 마나. 당신 할아버지 내 편을 들겠어?” 흥수는 휭 하니 사무실에서 나가면서 두덜거렸다. “이 함흥대대당지부야 당신네 집안에서 세습해오지 않았소? 누가 김씨네 집안을 이기겠소?” 흥수는 사무실 문을 쾅 닫고 가버렸다. 그 바람에 창문 유리에 금까지 갔다. 상순은 전기를 끄고 나오면서 한숨을 후 내쉬었다. 흥수는 집에 돌아가 윗방에 담배연기를 뽀얗게 피우면서 온 밤 어떻게 하면 상순을 무너뜨리고 대대 당지부 서기 자리를 뺏을까 하는 궁리를 굴리고 또 굴렸다. 창문 밖이 희붐해 올 때 흥수는 흥분된 나머지 이불을 콱 차고 벌떡 일어났다. “옳다. 옳아. 바로 그거야. 조선에 달아난 진달래와 경수, 으흐흐. 상순은 조선특무의 조카이자 사촌형이 아닌가? 으흐흐. 상순아, 서기 자리를 내놓겠어? 안 내놓겠어? 허허허.” 춘실은 나그네가 흥분된 모양을 보고 이불깃을 살며시 들면서 물었다. “웬 일이오? 남도 자지 못하게 하면서. 내일 어떻게 일하러 가오?” “작작 떠들어. 상순이 어떻게 되나 이제 보오.” 그러자 춘실은 어슴푸레 한 방안에서 입을 삐쭉해 보였다. “괜히 호랑이 코 구멍을 쑤시지 마오.” “흥! 어디 두고 봐!” 흥수는 이불을 쓰더니 이윽고 코를 드렁드렁 골기 시작했다. 쩍 하면 쏟아지는 소낙비를 보고 상순은 100여명 사원을 이끌고 멍지뫼산 앞으로 진군했다. 아름드리버드나무와 비술나무가 우거진 모래톱을 핥으며 퍼런 부르하통하가 굽이쳐 흐르고 있었다. 사원들은 모래톱과 사납게 파도치며 흐르는 강물을 보고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여기저기에서 한탄소리도 났다. “저런 감때사나운 강물을 막을 수 있을까?” “글쎄 말이오. 어떻게 저런 아름드리나무를 뽑고 논을 푼다고 저러는지 모르겠소.” “논물을 어떻게 먹이면 저 모래를 다 적실까?” 그러나 또 다른 목소리도 들렸다. “손바닥만한 논이라도 더 풀지 않으면 언제 배불리 먹고 살겠소?” “옳소.” 상순은 목청을 높여 동원연설을 했다. “여러분, 우리는 앉아 굶지 말고 우리 두 손으로 부르하통하 물곬을 바꿔 놓고 여기에 논을 풀어야 합니다. 누가 우리한테 배불리 먹으라고 쌀을 줍니까? 하느님도 신선도 주지 않습니다. 우리는 대자연을 개조해 논을 풀고 입쌀을 얻어 와야 합니다. 이제 부르하통하를 막아 물곬을 남쪽으로 돌려놓고 이 곳에 논을 풉시다.” “좋소. 배불리 먹을 수만 있다면 산이라도 옮기고 바다라도 메워야 합니다.” 어느 결에 왔는지 병완이 지팽이를 짚고 서서 상순의 말에 호응해 나섰다. 모두들 병완과 상순의 간단한 동원을 듣고 힘을 얻어 팔을 걷고 나섰다. 로촌장 병완이 상순과 허백호 앞에서 하얀 수염을 흩날리면서 서서 치수를 이리이리 하고 논도랑과 논두렁을 이리이리 하라고 지팽이로 모래에 그리는 모습을 보기만 해도 힘이 나 했던 것이다. 이젠 허백호마저 병완과 상순을 지지해 나섰다. 그는 노동개조를 하기 위한 정치수요보다도 노동개조를 하는 자기를 인간대접을 하는 병완과 상순에게 마음 속으로부터 감복되었던 것이다. 더구나 사원들은 이제껏 병완과 상순의 지휘아래 뭐든 해서 잘못된 일이 없었기 때문에 믿고 반세기동안 따라왔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병완과 상순이 설계한대로 먼저 물곬을 남쪽으로 돌리려고 제일 우로부터 시작해 동남방향으로 돌 언제를 쌓기 시작했다. 상순은 세찬 물살을 아랑곳하지 않고 진두에서 떡돌 같은 돌을 받아 물에 처넣었다. 풍덩! 커다란 돌이 물에 떨어지면서 물보라가 솟구쳤다. 사원들은 상순처럼 연이어 커다란 돌을 물에 처넣었다. 한참 역사질 끝에 부르하통하 강물에 동남방향으로 돌 언제가 서서히 솟아나오고 있었다. 사납게 덮쳐오던 강물도 점차 기세가 눌리어 머리를 숙이고 동남 쪽으로 물곬을 돌리고 있었다. 상순이 기분 나서 사원들을 이끌어 한창 바위돌을 처넣으면서 물곬을 돌릴 때었다. “북조선 특무 상순은 투쟁받을 준비를 해라!” 모두들 바위 돌을 처넣다가 머리를 돌려 보았다. 흥수가 진수해파출소의 몇몇 민경들을 데리고 달려왔다. 상순이 여겨보니 그 속에 허영호 소장과 박우성 서기도 달려 왔다. 허백호는 수레에서 돌을 부리어 물에 처넣으면서 중얼거렸다. “이거 어디 살겠니? 매일 새 사람을 붙잡아 투쟁하다니.” 상순은 허영호와 흥수 그리고 박우성을 번갈아보았다. “대체 무슨 일이오?” 흥수는 개 잡은 포수처럼 상순의 낯에 대고 삿대질하면서 우쭐거렸다. “이 북조선 특무 놈아, 그래도 너의 죄를 모르는 척 하겠어?” “내 무슨 죄 있다고 이러는가?” 상순도 뒤로 물러서지 않고 손가락질 했다. “넌 북조선특무 진달래 시조카다! 네 가문에는 숱한 북조선특무와 남조선 특무가 있다. 봐라! 너의 조카 동선도 북조선특무인 거여. 친딸 은숙마저 조선에 도망가지 않았는가? 넌 북조선 특무야! 민족우파야!” 흥수는 이를 악물고 상순의 멱살을 틀어쥐고 흔들면서 악설을 퍼부었다. “이 놈아, 당지부 서기 자리를 내놔!” 사원들은 흥수를 흘겨보았다. 그들은 속으로 진짜 길러준 개 주인의 발뒤축을 문다고 욕했다. 그러나 상순은 그저 허구픈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흥수, 당지부 서기자리 탐나오? 너무 욕심을 부리지 마오. 과욕하면 눈이 멀고 정신이 나간 짓을 하게 되오.” “뭐, 뭐라? 이 놈이 정말. 지금 조선특무를 잡으러 왔어. 쓸데없는 소리를 작작 해! 네 놈의 조카 동선과 둘째딸 은숙이 조선에서 온 편지를 읽어 줘야 정신을 차리겠어? 네놈이 조선특무들과 내통한 죄를 세상에 까밝아 놓아야겠어?” 그 소리에 상순은 조금 몸을 비틀거렸다. 저쪽에서 병완이 지팽이를 짚고 기침을 쿨럭쿨럭 깇었다. 이때 허영호가 민경들을 시켜 상순을 한쪽으로 끌고 가서 세웠다. 흥수는 호주머니에서 조선에서 온 편지 두통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이건 몇 해 전에 조선으로 도망친 조선특무 김동선의 편집니다. 여러분, 들어보십시오.”   존경하는 삼촌 삼촌을 비롯한 일가 모두 안녕하십니까? 순자랑 홍자랑 여동생들도 무사히 공부를 하고 있겠지? 하나 밖에 없는 남동생 덕돌은 이젠 컸겠구나. 네 털모자를 쓰고 와서 얼마나 고생했니? 네가 수건으로 머리를 싸매고 학교를 다닌다고 하니 마음이 아프구나. 이 다음 내가 더 좋은 모자를 꼭 사줄게. 공부를 잘 해라. 삼촌, 나는 조선 함흥에 와서 기관사로 돼 기차를 모니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습니다. 중국에서 한족들의 “꼬리빵즈”라고 놀려대는 놀림 속에서 화물차를 몰기보다 조선에 와서 기관차를 모니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습니다. 모진 마음을 먹고 어머니와 순애 그리고 노할아버지와 삼촌, 일가친척들을 간도에 남겨두고 조선에 나왔는데요. 하나도 후회하지 않습니다. 조선을 위해 벽돌 한장이라도 더 쌓는 마음으로 기관사를 몰고 조국 땅을 달리니 얼마나 성수 나는지 모르겠습니다. 노할아버지, 삼촌, 이 동선을 양해하고 동선이 잘 되는 것을 대견스럽게 생각하리라고 믿습니다.   “봐라. 북조선 특무로 나가더니 완전히 중국을 배반하고 침을 뱉았어. 이래도 북조선특무가 아닌가!” 흥수는 편지를 읽다가 고래고래 고함치더니 또 편지를 읽어 내려갔다.   나는 지난해 봄에 중국에서 나온 류정자씨와 결혼해 딸애 애숙을 보았습니다. 아내 류정자씨는 원래 중국에서 있을 때 한 신문사에서 교정을 보았댔는데 민족우파요 뭐요 하면서 반우파투쟁이 백열화되자 정치투쟁이 싫어서 조선에 나왔습니다. 그의 본가집 부모형제와 친척들은 모두 도문과 연길에 있습니다.   “봐라. 조카며느리도 중국에서 도망친 북조선 특무야. 하나하나 몽땅 붙잡아 투쟁해야 해.” 흥수는 득의양양해 편지를 내리 읽었다.   진달래 큰할머니는 조선에 나온 후 모든 일이 다 잘 풀려나가고 있습니다. 듣는 말에 의하면 큰할머니는 조선에 나온 후 성칠 큰할아버지 생전 소속부대에 찾아가 김인섭 작은 할아버지를 찾았답니다. 김인섭 작은할아버지는 항미원조 전쟁 때 김성칠 큰할아버지 수하에서 대대장을 하였고 후에 성칠 큰할아버지 대신 연대장을 했답니다. 그는 후에 사단장이 됐습니다. 이제 서부전선으로 나간다고도 합니다. 김인섭 큰할아버지 알선으로 지금 진달래 할머니는 군 녀성동맹위원회 위원장 사업을 한답니다.   “저런, 저런. 매국역적, 반동분자를 위원장으로 써? 헤이 참, 남조선 특무 녀편네 주제에 조선에 간들 오래 배길 거 같아? 제길, 이제 조선에 편지를 써서 그년의 내막을 몽땅 까밝아 놔야겠어. 어허, 이거 목이 아파 읽지 못하겠다.” 흥수는 손으로 목을 슬슬 만지더니 조개턱을 쳐들고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두 민경 사이에 서 있는 상순의 세귀눈길과 딱 부딪쳤다. “옳아. 네 놈이 읽는 게 맞아.” 흥수는 편지를 가져다 상순의 코 앞에 내밀었다. 허영호 소장은 어쨌든 옛 상전인지라 상순의 체모를 지켜주려고 쇠고랑을 채우지도 않았고 바줄로 묶지도 않았다. 옆에서 허백호가 자기 사촌동생의 귀에 대고 뭐라고 자꾸 귀띔하는 것이 흥수의 눈에 뜨이었다. (참 꼴불견이야. 저 놈들은 아직도 짜고 든듯이 의리를 지켜? 혁명하는데 무슨 봉건의리야. 저 놈 우파분자 허백호도 더 얻어맞아야 알겠는 모양이지.) 흥수는 게두덜거리면서 편지를 상순의 낯에 휙 뿌렸다. 상순은 편지를 한장 한장 주어 차곡차곡 정성껏 쥐더니 내리 읽어보았다. 얼마나 애타게 기다리던 편지인가! 흥수가 찢어버리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생각했다. 상순은 은숙의 편지를 내리 훑어 보더니 목청을 돋우어 노래하듯이 곡을 붙여 흥얼흥얼 내리 읽기 시작했다.   아버지, 엄마, 그간 둘째딸이 잃어져 근심했으리라 생각합니다. 조선으로 나올 때 부모와 말도 하지 않고 와서 미안합니다. 말하면 조선에 가지 못하게 할까봐 말하지 못하고 정옥이랑 함께 떠나왔습니다.   “어디 보기오. 제 좋은 소릴 하지 않나?” 흥수는 상순의 손에서 편지를 홱 빼앗아다 내리훑고 올리훑었다. 그러나 흠잡을 데 없었다. 그는 조개턱을 쳐들고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상순은 순순히 들이 대고 당하기만 했다. 이전에 자존심이 면도칼날 같고 독기 어린 세 귀눈을 부라리던 사내, 욱 하면 벽이라도 차고 나가던 그런 사내 성격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었다. 상순은 편지를 받아 계속 읽어 내려갔다.   지금 나는 철준 작은할아버지네 집에서 잘 지냅니다. 철준 작은할아버지는 외가집으로는 5촌 삼촌이 되기에 작은할머니(삼촌댁)도 나와 우리 친구 정옥이까지 아주 친절히 대합니다. 그런데 아직 직업을 찾지 못해 사처로 헤매고 있습니다. 철준 할아버지도 여기 저기 알아보지만 소학교 밖에 다니지 못한 우리를 받지 않는답니다. 이전에 농중이라도 계속 다녔겠는 걸 그럽니다. 정옥도 아직 직업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만! 그만!” 흥수는 바삐 편지를 빼앗아 갔다. 그러자 상순이 펄쩍 뛰었다. “이 자식, 왜 내 딸의 편지를 빼앗느냐?” 그 뜻밖의 말에 흥수도 뒤로 비실비실 물러서며 중얼거렸다. “이 놈이 되살아났구나. 네 놈이 아직도 파 속처럼 속이 새파랗게 살아 있었구나.” 상순은 와닥닥 달려들어 흥수의 손에서 편지를 빼앗았다. “애들이 살자고 자기 고향으로 찾아 갔는데 무슨 죄가 있단 말이냐?” 이때 보준도 나서서 떠들어댔다. “내 사촌동생도 회룡에 나갔기에 김일성종합대학을 다니고 지금 교장을 하오. 잘 살자고 자기 고향에 나갔는데 무슨 죄란 말이오?” 흥수는 그래도 턱을 쳐들고 보준을 쏘아보며 떠들어댔다. “사회주의 중국을 배반하고 조선에 나간 놈들은 몽땅 남조선 특무로 되지 않는가 두고 봐라.” 그는 머리를 돌려 상순을 흘겨보며 목에 지렁이 같은 피 줄을 세우면서 고래고래 고함쳤다. “당신의 조카는 북조선 특무야!" 그러자 상순도 물러서지 않고 맞섰다. “내 조카 조선에 나가 무슨 죄 있다고 그래? 그는 당당한 조선공민이자 조선로동당 당원이다.” “점점 양이 자랐구먼. 그래 당신의 조국은 어디요?” 상순은 주저하지 않고 “내 조국은 사회주의 중국이오.”라고 대답했다. 그는 외까풀 눈을 가슴츠레 뜨고 말했다. “허나 당신은 특무의 삼촌, 더 명확히 말해 조선특무 죄를 벗어메지 못하오.” 그때 상순도 맞섰다. “네 조카 정옥도 내 딸과 함께 조선에 나가지 않았는가? 그럼 너도 북조선 특무가 아니야?!” “쩌, 쩌. 쩌. 오늘 회의는 이만 하기오!” 흥수는 꼬리를 사타구니에 끼고 깨갱거리며 달아나는 개처럼 머리를 숙이고 저쪽으로 가버렸다. 사원들은 당당한 상순의 모습을 보고 머리를 끄덕였다. 박우성은 그제야 사원들의 앞에 나섰다. “우린 아무 사람이나 조선에 갔다고 다 조선특무라고 몰아붙여선 안됩니다. 중국과 조선은 친선국가입니다. 중조 친선은 피로써 맺어진 것입니다. 우리는 이 중조 친선을 귀중히 여기고 대대로 전해 내려가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자기 손으로 중조 친선에 먹칠을 하면서 반목해서야 됩니까? 여기 있는 어느 분이 조선에서 오지 않았습니까? 그래 우리 모두 북조선 특무란 말입니까? 나는 일본에 가서 대학을 졸업했습니다. 그렇다고 나는 일본 특무입니까?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우리는 친척을 찾아 조선에 놀러 갈 수도 있습니다. 놀러 간 걸 특무라고 하면 뭐가 됩니까? 이런 얼토당토 앉는 말을 하지도 마십시오. 국제공산주의 운동은 나라 계선이 없습니다. 중국과 조선은 형제국가이기에 인민들이 자유롭게 내왕할 수 있습니다. 지금 중소 관계가 복잡해졌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중조 전통적인 친선관계를 돈독히 하고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상순 서기는 조선특무가 아닙니다. 그는 우리 당의 훌륭한 농촌 기층대대 당지부 서기입니다.” 모두들 우레와 같은 박수를 쳤다. 병완은 먼발치에서 지팡이를 짚고 서서 머리를 끄덕이며 박우성과 상순을 대견하게 바라보았다. 흥수는 한쪽으로 어슬렁어슬렁 가더니 버드나무에 대고 오줌을 누는 척 하면서 외면했다. “어디 두고 보자. 박우성, 네놈도 일본 특무로 몰아 없애 버리지 않는가. 그래야 상순의 서기자리를 빼앗을 수 있겠구나.” 그는 오늘의 치욕에 백배, 천배 복수하려고 이발을 득득 갈아댔다. 상순이 강가에 가보니 그새 거센 물살이 돌 언제 밑의 모래를 파가면서 언제가 무너져 수면에서 사라졌다. “북조선 특무를 잡는다고 지랄발광 하다나니 언제가 다 무너졌구나.” 상순은 머리를 돌려 사원들을 향해 고함쳤다. “빨리 돌을 가져다가 물에 처넣소. 언제를 다 밀어가겠소.” “옛!” 사원들은 한 아름씩 되는 돌을 들어다 소용돌이치며 언제에 덮쳐드는 물에 처넣었다. 풍덩! 풍덩! 물보라가 연신 하늘로 솟구쳤다. 허나 밑 모래가 물에 패운 언제는 토대가 없어 무너져버린 채 좀처럼 다시 물 우로 솟아나지 못했다.
141    대하소설 진달래 소야곡(11) 댓글:  조회:1421  추천:0  2018-02-22
                                20. 규수와 목동 졸업을 앞두고 모두 배치를 잘 받으려고 최성균 교수를 찾아 달아다녔다. 어느 하루 점심에 뜻밖에도 연화가 숙사에 찾아오지 않았겠는가. “연화, 어떻게 돼 왔어?” 연화는 가리마를 쪽 낸 머리를 다소곳이 숙이면서 귀밑까지 빨갛게 홍조가 어렸다. 건너 편에서 승호가 비웃는 눈길을 보냈다. “따르는 처녀애들이 많아 좋겠다. 흥!” “실습하러 갔을 때 학생이야.” 승호는 연화의 아래위를 훑어보더니 “와싸, 진짜 예뻐.” 하면서 징글스레 누런 이발을 드러냈다. 성호는 색마한테 삼키울가봐 겁난듯이 연화를 데리고 바깥으로 나갔다. “얘!” 뒤에서 승호가 불렀다. 성호는 연화를 보고 먼저 가라고 하고 돌아섰다. 승호는 성호를 조용한 복도 구석으로 데리고 가서 나직이 물었다. “얘, 내 녀동생하구 어떻게 하겠니?” “그만 둬라.” “에이구, 배부른 흥정을 다 하네.” 승호는 도리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잘 생각해 봐라. 좀 좋아 그래? 선금이 얼마나 예뻐? 졸업배치도 문제없어. 아버지하구 말해서 널 공안국에 넣어줄게.” “네나 공안국에 가라. 이전에 넌 날 뭐라고 욕했니? 시내 처녀들 치마자락에 매달려 리상을 실현하려 한다는지. 뭐, ‘땅을 밟고 하늘을 떠인 사내가 규방 규수를 사닥다리로 삼아 전도를 개척하려는 건 제일 가련하다.’는지 하지 않았니? 그런데 지금 날 보고 녀동생을 미끼로 공안국에 비비고 들어가라고? 흥!” 승호는 얼굴이 대뜸 굳어졌다. “사랑은 구걸할 수야 없지. 선금이 시집 갈데 없어 그러는가 하나? 오해하지 말라. 널 생각해 그래.” 승호는 성호의 마음을 한참 모르고 있었다. 그는 자기와 함께 일하고 싫어 그러는줄도 모르고 계속 늘여놓았다. “사람이 살자면 멀리 내다봐야 해. 같은 값에 분홍치마라고 선금과 결혼하고 전도도 개척하고 좀 좋아 그래? 넌 선금을 지팽이로 삼아 짚고 다시 일어나야 해.” 성호는 정색했다. “정말 소힘줄보다도 더 질긴 놈이군. 이 일은 없던 일로 하자. 연화 기다려서 나가봐야겠다.” 승호는 성호의 뒤잔등을 쏘아보면서 중얼거렸다. “주는 떡을 먹지 않다가 꼭 후회할 거야. 이제 사회에 나가 봐라. 학교와는 달리 한 발작도 내딛기 힘들게야.” 성호는 몸을 돌려 승호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성의는 고맙다. 갈 길이 힘들어도 나름대로 갈 거야.” “이제 코피 터져 봐야 알겠니? 흥!” 승호는 저쪽 복도에서 은영이 얼른거리자 황급히 침실로 되들어가버렸다. 연화는 어글어글한 까만 쌍겹눈으로 성호를 정겹게 바라보면서 활짝 웃는 얼굴로 반겨 맞았다. “선생님, 바쁜데 찾아와서 미안해요.” “아니,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성호는 연화를 보고 “정희 선생한테서 이젠 무용을 적잖게 배웠겠구나.” 하고 물었다. 연화는 생글 웃으면서 “그래요. 헌데 오늘 엄선생님을 찾아가니 침실에 계시지 않더구먼요.” 하고 서운해했다. “그래? 어디로 갔을가?” “괜찮아요.” “?” 성호는 의아한 눈길로 연화를 돌아보았다. 연화는 새물새물 웃으면서 뜻밖의 말을 했다. “선생님만 봐도 됐어요.” 연화는 속심을 밝힌 것 같았는지 제꺽 말머리를 돌렸다. “선생님이 없으면 정희 선생을 알 수 있었겠어요?” 성호는 연화를 데리고 교수청사에 올라갔다. 화단에 흐드러지게 핀 코스모스들이 반겨맞았다. 연화는 코스모스꽃을 한잎 뜯어 코에 대고 향기를 맡았다. “야~ 정말 곱고 향기롭구나.” 성호는 희죽이 웃으면서 “연화는 그 코스모스보다 더 예뻐.” 하고 한마디 했다. 무심코 던진 한마디 말에 연화는 머리를 다소곳이 숙였다. 순식간에 두 볼에 새빨갛게 홍조를 띄였다. 성호는 어린 제자에게 쓸데없는 말을 한 것 같아 화제를 돌렸다. “정희선생은 다재다능해.” 그제야 연화는 머리를 들더니 “그래요. 피아노도 잘 치고 노래도 아주 구성지게 부르고 춤도 아주 잘 추죠. 또 인물 체격이 얼마나 예뻐요?” 하고 자랑을 늘여 놓았다. “아! 범이 자기 흉을 하면 온다더니!” 성호가 가리키는 저쪽 교수청사를 보니 정희가 이쪽으로 오고 있지 않겠는가. “엄선생님!” 연화는 어린애처럼 두팔을 추켜올리면서 앞으로 달려나갔다. “연화 왔구나. 오래 기다리지 않았어?” “아니, 금방 왔어요.” 정희와 연화는 예술을 향한 한 길에서 진짜 사제 간이 돼버렸다. 그날 정희는 연화에게 노래와 춤을 배워주고 나서 성호와 함께 점심까지 대접해 보냈다. 연화는 갈라질 때 정희를 보고 “선생님, 어디로 배치받아 가는지 기별해주세요. 제가 자주 찾아가 뵙죠.” 하고 나서 성호한테 얼굴을 돌렸다. “선생님은 어디로 배치받게 됐어요?” “농민 아들이 아마 산골에 가서 교편을 잡게 될 거 같소.” “우리 학교에 와요.” 연화는 환성을 질렀다. 허나 삽시에 어두워지는 정희의 안색을 보자 혀를 홀랑 내밀었다. 성호는 어색한 기분을 돌리려고 “그래, 나도 모교에 가서 교편을 잡고 싶어.”라고 말해버렸다. 정희는 성호에게 눈을 곱게 흘겼다. 연화를 보내고 정희는 성호를 불러 세웠다.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기요.” 정희는 성호를 데리고 자기 집으로 가는 것이였다. “집에는 왜?” “글쎄 긴히 할 말이 있소. 가면 알게 되겠죠.” “그래도 집엔 가지 말기요.” 성호는 정희를 데리고 교정의 수림 속으로 스적스적 걸어갔다. 화단에서는 꿀벌들이 꽃잎 속을 붕-붕- 날아다니면서 부지런히 꿀물을 채집하고 있었다. 정희는 주위를 둘러보더니 그윽한 정이 찰랑거리는 외까풀눈으로 성호를 응시했다. “이젠 당장 졸업해 산산이 흩어지겠는데 말이요.” 성호는 한숨을 후~ 내쉬더니 “난 아직 마음이 정리되지 않았소.” 하고 뒤말을 간신히 이었다. “저도 알겠지만 난 은영을 사랑해왔소. 은영이 비참히 짓밟힌 마당에 아직 련애할 생각이 없소.” 정희는 머리를 폭 숙였다. 그녀는 발끝으로 땅바닥을 허비다가 멈췄다. “그 심정을 알 수 있어요. 허나 졸업배치가 발등에 떨어졌지 않고 뭐예요. 금방 말하는 걸 듣고 실망했어요. 어쩜 그렇게 맥 빠진 말을 술술 해요.” “농민 아들이 무슨 용빼는 수 있소? 시골학교에 가도 난 만족이요.” “아버지께 말씀 드려서 성호의 소원을 풀어주자고 그러는데요.” “고맙소. 남의 신세에 팔자를 고치고 싶지 않소.” “왜 그렇게 말해요.” 정희 눈시울에 서운한 눈물이 고였다가 볼을 타고 주르르 흘러내리였다. 그녀는 대뜸 주먹으로 성호의 가슴을 내질렀다. “남의 마음을 털끝만치도 알아봐주지 못하면서. 정말 밉다, 미워!” 여름방학을 맞아서 교정의 수림 속은 전에 없이 한적했다. 정희는 수림 속으로 사뿐사뿐 걷다가 성호한테 머리를 돌렸다. “아직도 은영한테 미련이 남았어?” “…” “성호는 전통적인 정조파가 아니고 뭔가요? 은영한테 아직도 미련을 가지는 건 아니겠죠?” 성호는 묵묵부답이였다. 정희는 은영의 험담을 해서 괜히 남의 아픈 상처를 건드린 것 같아 그만두었다. “하루속히 어둠 속에서 나와. 널 기다리는 건 따뜻한 사랑의 품이야. 아버지와 말할게.” “뭘?” 성호는 의아해했다. “당신 졸업배치를 도와달라고 부탁할게요.” 정희는 성호의 손을 정답게 잡고 응석을 부리듯 몸을 흔들었다. “우리 집에 한번 가자. 헛일 삼아 아버지와 말해보자.” 성호는 성의를 저버릴 수 없어 정희를 따라갔다. 정희네 집은 대학가 아빠트구역 2층집에 있었다. 성호는 으리으리한 아빠트를 보고 눈이 번쩍 뜨였다. 집 안에 들어서니 객실에서 정희의 부모가 반갑게 맞았다. 성호는 인사를 마치자 소파에 가서 앉았다. 정희 아버지 엄삼기는 너부죽한 얼굴에 학자답게 풍채가 름름했다. “아버지, 전번에도 말씀드렸는데요. 성호 졸업배치 어떻게 됐는가요?” “광고회사 김경리하구 부탁했는데 일이 잘 풀릴 것 같아.” 엄삼기는 시원히 대답하고 나서 성호에게 머리를 돌렸다. “고향이 어디요?” “천수해 태평거촌입니다.” “부모는 아직도 농사를 짓겠구먼.” “예. 이제 제가 대학을 졸업하면 효도를 잘 해드려야겠습니다.” “음, 효자로구만.” 정희 아버지는 머리를 끄덕이더니 자꾸 궁금해 이것 저것 물었다. “집에 형제는 몇이요?” “열 남매입니다.” “열 남매?” 정희 아버지는 놀란듯이 아내를 마주 보았다. “예. 제가 막냅니다.” 정희 어머니는 담담히 들을뿐이였다. “부모 년세 계시겠구만.” “예. 올해 65세입니다.” “형님이 몇이 있소?” “형님 둘에 누나 여섯입니다. 형님 한분은 사망한지 오랩니다.” “오, 형님네는 부모하구 함께 있소?” 성호는 졸업배치와는 관계없는 가정형편을 꼬치꼬치 캐묻는 것이 기분이 얹짢으면서도 대답하지 않을 수 었었다. “아닙니다. 큰형님은 큰아버지네 아들이 없어서 앞을 섰습니다. 둘째형님은 조선에 나갔습니다.” “오, 진짜 대가정이구먼.” 정희 아버지는 머리를 끄덕이더니 “우린 아들도 없고 저 무남독녀 정희 하나 밖에 없소.” 하고 말하면서 딸을 건너다보았다. “아버지, 또 그 말씀인가요? ‘아들이 없어 섭섭하다.’는 말씀에 귀못이 박히겠어요.” 정희는 눈을 곱게 흘기더니 화제를 돌렸다. “이젠 호구조사를 그만하세요. 졸업배치나 구체적으로 얘기해 주십시오.” 엄삼기 교수는 안경을 벗어 손수건으로 쓱쓱 닦아 다시 걸었다. “내 최성균 교수와도 부탁해놓지. 최성균 교수는 아주 친한 동창생이요.  국가통일배치를 하기에 학교에서 광고회사에 배치하면 끝이오.” 성호는 머리를 숙이면서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성호는 어쩐지 정희 아버지 표정이 어두워지는 것을 느꼈다. 정희 어머니를 피뜩 바라보니 얼굴기색이 색바래진 감이 들었다. 성호는 더 앉아 있기 불편해 한시급히 엉덩이를 들더니 인사하고 바깥으로 나왔다. 정희는 성호를 따라 나와 “기쁜 소식을 기다리세요.”라고 했다. 성호는 별로 기대하지 않았다. “감사하오. 난 농민의 아들이기에 시골에 돌아가 교편을 잡아도 되오.” “이제부턴 ‘농민의 아들’, ‘목동’, 그런 얘기하지 마세요. 우리 아빠처럼 대학교  교수나 정부기관 간부, 광고회사 총경리 하면서 잘 살 생각만 하란 말이요. 호호호.” “어디 그렇게 쉽겠소?” “우리 함께 손잡고 찬란한 미래를 위해 열심히 노력해보자요.” “고맙소.” 정희는 성호를 대문 밖에까지 연의하면서 “마음을 빨리 정리하고 나한테 돌아와요.” 하고 정겹게 말했다. 성호는 한숨만 후~ 내쉬더니 무거운 발걸음을 뗐다. 정희가 집 안으로 들어가자 엄삼기 교수는 버럭 화를 냈다. “안돼! 귀여운 우리 무남독녀를 그까짓 농부 아들한테 줄 순 없어! 옛날부터 규방 규수와 초가집 목동은 배필이 안돼.” 정희는 울먹이며 반발했다. “아버지, 지금도 반상이 따로 있는가요? 아버지도 옛날 농민의 아드님이 아니셨던가요? 성호는 초가집 목동이 아니라 당당한 80년대 대학생이란 말이예요.” 엄교수는 눈을 뚝 부릅뜨고 호통쳤다. “걘 절대 안돼. 지금 혼사말이 문턱이 닳토록 들어오고 있어. 시장네 아들로, 국장네 아들로, 총경리네 아들로 줄을 섰어. 하필 부모를 모셔야 할 농부네 목동이냐? ” 정희는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애원했다. “아버지, 왜 딸의 마음을 몰라줘요? 성호 아니면 죽어도 시집 안가요.” 엄교수는 대뜸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얘, 무슨 일 치잖았니?” 정희는 도리머리를 저었다. “그런 건 아니지만요. 제발 안된단 말씀 하지 말아요. 이 딸은 성호를 목숨보다 더 사랑해요. 제발 빌어요. 성호와 행복하게 살게 허락해주세요. 네?” “얘, 정말?” 엄교수는 정희를 보고 어처구니없어 “일어나라.” 하고 도리머리를 홰홰 저었다. 정희는 일어나려고 하지 않았다. “아버지 허락하지 않으면 일어나지 않겠어요.” 엄교수는 정색해 말했다. “얘야, 우린 너 밖에 없어. 녀자는 시집을 잘 가야 해. 왜 숱한 좋은 혼처를 두고 하필 시골 농부네 집에 시집가려고 이래?” 정희는 아버지를 쏘아보면서 발버둥질치며 고함쳤다. “관둬요. 딸이 죽는 걸 보자고 이래요?” “얘, 다신 말하지 말라!” 엄교수는 황급히 딸을 끌어안고 눈물까지 흘리며 간곡히 타일렀다. “얘야, 네가 없인 우린 못 살아.” 정희 어머니 조혜숙도 정희를 껴안고 잔등을 두드려주었다. “정희야, 절대 짧은 생각을 하지 말고 천천히 의논하자. 평생대사를 어떻게 하루 아침에 결정할 수  있니?” “허락하는 거죠?” “천천히 잘 생각해보자.” 엄교수는 벌떡 일어나면서 안경까지 떨어뜨렸다. “그래, 정희야, 최교수한테 졸업배치도 부탁하고 성호를 잘 알아봐야겠다.” “알아보나마나. 마음씨 착하고 아주 참한 대학생인데요.” 정희는 무릎을 펴더니 두다리를 퍼더더버리고 펄렁 물앉아 기대에 찬 눈길로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아버지, 딸을 믿으세요. 4년 동안이나 한 학급에서 지내보아도 성호만한 남자는 없어요.” 혜숙은 정희의 눈물이 글썽한 눈시울을 바라보면서 머리를 끄덕였다. “천천히 보자.” “쩌, 쩌, 쩌, 걔한테 끌려가면 안되오.” “에이고, 당신은 농민 아들이 아닌가요? 올챙이 때를 잊었구만요.” “관두오. 그때는 그때지. 다 내 딸을 행복하게 살게 하려는게지.” 어느날 점심에 정희가 침실에 와서 성호를 찾았다. 성호는 정희와 함께 교정 수림 속으로 들어갔다. 정희는 생글방글 웃으면서 “성호, 아빠 최선생님과 말해서 시내 광고회사에 배치하기로 했어요.”라고 했다. “뭘? 내하구 무슨 일을 하고 싶은가 묻지도 않고 광고회사에 배치했소?” “시내서도 상직업인데요. 개혁개방을 하면서 경제시대에 들어섰는데요. 돈도 꽤나 벌고 좀 좋아 그래요?” 정희는 성호에게 눈을 곱게 흘기었다. “배 부른 흥정을 하긴? 어디 누구나 다 하는 일인가요?” “뭐라고?!” 뜻밖에도 성호가 빈정거렸다. “그래, 초가집 목동이 광고회사에 들어가면 큰 벼슬을 한게지. 흥!” 정희는 도와주고도 뺨을 한대 맞은 감이 들었다. 그러나 억지로 참으면서 물었다. “그래, 무슨 일을 하겠소?” 성호는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난 천수해에 돌아가 고향을 건설하고 싶소. 황페해지는 모교랑 보니 마음이 아픕데. 고향의 어린이들한테 글을 가르치고 싶소.” 성호는 발길로 수림 속의 자갈을 툭 차버렸다. “시골에 갈지언정 ‘농부의 아들’이라고 천시받으면서 살긴 싫소. 시골에서 교편을 잡더라도 자기 능력으로 살고 싶소.” 정희는 성호의 손을 주동적으로 슬쩍 잡았다. 성호는 어쩐지 그 따뜻하고 매끌매끌한 손이 싫지 않았다. 그들 둘은 손을 잡고 학교 뒤동산의 소나무 숲으로 걸어갔다. 송진 냄새가 솔솔 풍기는 소나무 밑은 삼복염천에도 그리 덥지 않았다. 정희는 입을 무겁게 열었다. “이제 경제시대에 들어서면 광고회사에서 돈을 많이 벌면 좀 좋아요? 옛날엔 무예가 사내대장부의 능력이였죠. 허나 경제시대엔 돈이 능력이지요. 지식이랑 사랑이랑 다 문화에 속하죠. 경제시대에 문무가 겸비되자면 돈도 있고 지식도 있고 사랑도 있어야죠.” “흥! 진짜 괴상한 론조군.” 성호는 랭소했다. “진짜 규방 규수의 철학미가 푹 슴밴 새 정치경제학 리론이구만.” “인생도 선지선각과 선택이 중요하죠.” 정희도 점점 더 정색해 진지하게 말했다. “고향에 돌아가 교원을 하려는 소박한 생각은 좋아요. 그러나 지금 자기를 부단히 승화시키면서 능력을 과시해 새 생활을 창조하는 것이 옳아요. 광고는 황금직업인데요. 한번 솜씨를 펴보세요.” 허나 성호는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돈을 주무는 일은 좋지 않은 거 같은데. 황금흑사심이라고 돈은 자칫하면  사람을 변심하게 만들 수도 있지.” “성호는 정직하고 착하고 진실한 사람이기에 돈에 유혹돼 변질할 사람이 아니라고 보오.” “믿어줘서 고맙소.” 정희는 적이 기뻐했다. 그녀는 성호의 손을 잡고 정답게 마주 바라보았다. “성호, 아직 그대한테서 뭔가 하나 받지 못했는데요.” “뭘?” 성호는 간절한 정희의 눈길에서 제꺽 깨닫고 머리를 숙였다. 정희는 성호를 기다리다못해 와락 끌어안더니 나직이 “사랑해요.” 하고 먼저 사랑을 고백했다. 성호는 정희 어깨에 두 손을 얹고 물었다.  “정희, 난 한가지 묻고 싶소.” “백가지라도 물으세요.”  “이후에 내가 초가집 농부네 목동출신이라고 업신여기지 않지?” 정희는 머리를 끄덕였다. “이후에 한평생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고생한 우리 부모를 잘 모시겠소?” “효성을 다해 모실게요.” “정희, 내 목숨을 다 바쳐서라도 정희를 사랑하오. 영원히 사랑하겠소.” 성호는 정희를 숨 막힐듯 꽉 껴안더니 한 고패 빙 돌렸다. 순간 정희는 성호의 얼굴 옆에 걀쭉하게 생긴 은영의 우유빛 얼굴이 겹쳐 떠올랐다. 허나 정희는 용케 질투심을 억눌렀다. “이제부터 다른 녀성한테 눈길을 팔면 안돼요. 이젠 싹 지워버리세요. 저한테 향한 진실한 사랑만 간직하세요.” 성호는 정색해 물었다. “뭘 보고 농부 가정의 목동을 사랑하오? 아무 것도 가진게 없는데. 후회하지 않겠소?” “또 그 말인가요? 절대 후회하지 않아요.” “난 막내지만 아마 부모를 모셔야 할 것 같은데. 전 무남독녀인데 난 데릴사위로 들어갈 수도 없소. 정희네 부모가 섭섭해하지 않겠소?” 정희는 뜻밖의 말에 대뜸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녀는 한참 후에야 간신히 입을 열었다. “어느 누가 부모 없이 자란 자식이 있는가요? 부모에게 효성을 하는 건 자녀의 신성한 의무죠. 우리 함께 효성을 다해 두 집 부모를 모시면 안 돼요?” 성호는 한숨을 후~ 땅이 꺼지게 내쉬였다. “형제 열이나 되는 복잡한 집에 와서 어떻게 시집살이를 하겠소?” 정희는 달아오른 쇠기둥 같은 성호의 몸에 살짝 기대면서 아주 결연히 대답했다. “우리 둘이 서로 사랑하는 한 모든 걸 달갑게 받아들일 수 있어요.” 성호는 돌아서는 정희를 와락 끌어안고 청춘의 더운 피가 끓어 넘치는 진지한 사랑의 감정을 토로했다. 그 한마디, 한마디 사랑은 정희를 무한한 감동을 먹게 했다. 정희는 뜨거운 눈물을 주르르 흘리면서 성호의 품에 얼굴을 사르르 파묻고 어깨를 가늘게 들먹였다. 성호는 얼굴을 정희의 눈물범벅이 된 얼굴에 천천히 가져가더니 뜨거운 입술로 그녀의 떨리는 빨간 입술을 포개고 따뜻한 키스를 안겨주었다. 정희는 세상의 모든 행복을 독차지한 것 같은 기분에 둥둥 떠서 황홀한 무지개 동산에 들어선듯이 경악할 경지에 이르렀다. 허나 그 모든 것은 성호와 정희 미몽의 시작에 불과했다. 농부의 아들 성호와 규방의 규수 정희, 그들 사랑의 현실은 아직도 넘어야 할 산이 너무나도 많고도 많았다. 산새들도 처녀총각의 열애하는 모습이 부러운지 소나무숲 속에서 이 나무가지 저 나무초리에 옮겨 앉으면서 짹짹 지저귀였다. 부나비는 연분홍 코스모스 꽃잎에서 나풀나풀 춤 추고 있었다.   21. 깍쟁이령감 늙은 비술나무 아래에서 령감들이 모여 앉아 바람을 쏘이고 있었다. 곽재령감이 사라지자 령감들이 왁자그르 끓어번지기 시작했다. 세린하에서 이사해온 땅딸보 천석령감은 대머리에 송글송글 돋은 땀방울을  손등으로 닦으면서 선코 뗐다. "저 깍쟁이 령감이 오늘부터 두부 장사를 한다는데 로친 발바닥에 털이 나겠다이." "늘그막에 무슨 두부장사를 한다고 저러오?" 천석 령감이 헐뜯기 시작했다. "아이고, 말도 마오. 저 령감은 두부콩을 가는 매돌소리만 들으면 그 집에 가 두부를 먹지 않고선 사흘 앓은 령감이라이." 천석 령감은 건 가래를 떼며 말을 이였다. "아들 혼삿말 하러 갔을 때는 어쩌겠소? 사돈집에서 때마침 두부와 돼지고기를 끓인 국을 상에 차려놓았지. 게걸에 득식이라고 저 령감은 맛도 보지 않고 한술 푹 떠 입에 넣었다오. 그런데 어찌나 따가웠는지 그 우멍한 실눈이 메워지고 혀로 바삐 입안의 걸 이볼 저볼 옮기며 따가운 김을 입귀로 씩 빼면서 식히는 판이요." 곽재 령감은 불쑥 사돈령감에게 이렇게 물었다. "이 집은 어느 해 졌습둥?" "예, 게걸년에 졌지." "예- 재목은 어데서 베왔습둥?" 사돈령감은 곽재 령감이 하는 상이 너무나도 우스워 겨우 웃음을 참으면서 놀려주었다. "예- 덴 당낙골에서 베 왔습구마." 사돈령감은 분명 게걸스레 돼지고기를 먹다가 입천정이 다 뎄다고 곽재 령감을 골려준게 불 보듯 빤한게 아니고 뭔가. "야, 이 집이 덥긴 덥다." 곽재 령감이 숟가락을 놓으면서 후후 거리는 걸 보고 사돈령감이 부채를 건넸다. 곽재 령감이 부채를 쥐여 훌훌 부채질하자 보다못한 사돈령감은 다른 부채를 쥐여 살랑살랑 흔들었다. "부채야 이렇게 부채질해야 견디지." 곽재 령감은 부채 아까워 아예 부채를 흔들지 않고 머리를 흔들었다. "에이, 전라도 깍쟁이라더니. 흥!" 곽재 령감은 눈에 거슬려 사돈령감을 따라하지 않고 부채질을 훌훌 했다. 천석 령감은 계속 곽재 령감 흉을 보았다. "저 령감은 그날 렴치 불구하고 돼지고기국을 세 사발이나 먹어줬다오. 또 한 마을에서 전라도깍쟁이 며느리 순희를 맞아들여 조수로 삼게 됐으니 그번 행차에 꿩 먹고 알 먹은 셈이지." "하하하." 령감들이 제 나름대로 웃어댔다. 허나 동불사에서 이사해온 덕칠 령감은 뾰족한 턱을 가로 저었다. "곽재 령감이 이전에는 그렇잖았는데." 천석 령감은 침을 튕기면서 계속 말공부를 했다. "그게 양, 십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게요." "제 고뿔도 남을 주지 않을 깍쟁이라니까.” 덕칠 령감이 동을 달았다. “전라도 깍쟁이령감은 사돈령감이 울고 갈 상깍쟁이구먼.” 천석 령감은 사기나서 팔소매까지 걷어부치고나서 연설했다. “한번은 공량을 바치고 천수해 대중식당에서 소주를 마실 때였지. 불시에 매대 쪽에서 귀에 익은 울음소리가 터졌네. '아이고, 내 돈이야, 재수 없이 떨어졌구나.' 개 달려가서 살펴보니 글쎄 흰 보자기를 허리에 질끈 동여맨 깍쟁이 령감이 우멍한 실눈에 눈물이 글썽해서 하수도구멍을 들여다보면서 통곡친단 말이요. 어째 그러는가 물었더니 '두부 한근, 술 닷 돈 잃어버렸다.'고 하지 않겠소. 사실 돈을 호주머니에서 꺼내다가 오전짜리 돈이 그만 하수도구멍에 똑또그르르 굴러 빠져들어갔단 말이요. 숱한 술군들이 왁자그르 웃음폭탄을 터뜨리면서 그런 의미에서 한잔씩 들지 않겠소." "하하하." "허허허." 령감들은 무릎을 치며 박장대소했다. 훤칠한 덕칠 령감은 덤덤히 앉아 초모자로 부채질했다. "에잇, 좀스럽긴, 원, 쯧쯧쯧." "그뿐인줄 아오? 내 보다못해 5전짜리 엽전을 꺼내 주었지. 그래서 울음을 뚝 끊었던게 잠시 후에 또 운단 말이요.” “어째?” 령감들은 의아해 천석 령감을 쳐다보았다. “'아이고, 금방 잃어버린 돈이 있으면 요 거까지 합하면 10전이 되겠는 걸. 아하이고.’ 이렇게 넉두릴 하면서 또 운단 말이오. 얼마나 창피한지. 원." 모두들 어처구니없어 "허허허." 하고 웃었다. 령감들이 무릎을 치며 배를 끌어안고 웃음보를 터뜨렸다. 동불사 덕칠 령감이 턱을 만지면서 의아해 했다. "입방아쟁이 령감, 곽재 령감 원래 그런 사람 아니라니깐. 우리 아래웃집에 살 때요. 색다른 음식이나 술이 있으면 청해 대접했다이. 인심이 후한 령감이오. 쌀독에서 인심이 난다고 그때 쌀고생이랑 돈고생이랑 얼마나 했소. 그래서 그렇게 된 거요." 천석 령감은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그게 다 낡은 그루터기에서 이밥 먹던 소리요. 그 령감을 전라도 깍쟁이라고 하면 뭐라는지 아오? '흥, 난 함경북도 길주 사람이야. 굳은 땅에 물이 고인다이.’ 이러고 개 잡은 포수처럼 어깨 어쓱해서 코방귀를 뀐단 말이요. 곽재 령감은 문 밖으로 나서기만 하면 만날 뒤짐 지고 우멍한 실눈으로 땅바닥을 참빗질하면서 다닌단 말이요. 그러다가 쇠붙이, 헌투레기, 지어 지푸라기라도 보기만 하면 주어다가 제 집 마당에 쌓아놓는다니까. 그 령감네 집은 페품수구소 같아 잡동사니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지 않았겠소?" 이때 손자녀석이 천석 령감의 대머리를 짝 치더니 오이를 뜯어달라고 몸을 탈면서 응석을 부렸다. 그 바람에 천석 령감은 마지못해 입을 거두고 자리를 떴다. 천수해 령감이 송곳니만 남은 입안이 다 들여다보이게 헐헐거리며 웃다말고 의아한듯이 물었다. "어째 천석 령감 말이 믿어지지 않는단 말이요. 무슨 놈의 깍쟁이는? 쯧쯧." 여태껏 입에 빗장을 지르고 있던 덕칠 령감이 석쉼한 목소리로 말했다. "곽재 령감은 궂은 날 갠 날을 가리지 않고 고삐를 채는대로 쟁기를 말없이 수걱수걱 끄는 황소처럼 일했소. 그런데 총결 때는 어떻게 됐소? 정치대장이노라고 말공부를 하러 사처로 싸다니던 천석 령감은 백여원 탔지만 곽재령감은 5전짜리 동전 세개 밖에 타지 못했소. 손맥이 탁 풀려 어떻게 일하겠소? 보리고개를 넘기 전에 천정이 다 들여다보이는 멀건 푸성귀죽을 마시고 소똥 말똥을 다 말려 때는 신세에 깍쟁이 되잖은 수가 있겠소? 그래 답답해 투레기를 팔아 술을 먹었지." 천수해 령감과 덕칠 령감이 머리를 끄덕이였다. 덕칠 령감이 초모자로 부채질 하자 광대뼈가 튀어난 두만 령감이 입을 열었다. "저 천석 령감이 남의 말을 혀바닥이 다슬게 해도 자기는? 곽재 령감은 두부나 얻어 먹을가구바자굽에까지 콩을 쪽 심고 겹벌로 바자를 세웠단 말이오. 걸 저 땅딸보 천석령감이 당장 콩을 없애라고 우멍한 실눈을 부릅뜨고 을러멨지. 천석 령감은 뜨개소처럼 곽재 령감을 떠밀어 제치고 바자를 와락 뽑았지. 뭐, 콩을 많이 심어 먹으면 자본주의 싹이 튼다던가. 곽재 령감도 천석 령감의 아름에 든 바자 한끝을 틀어잡고 미세, 당기세를 하는 판이요. 천석 령감이 콱 당겨 제 힘에 바자를 안은채 뒤로 엉덩방아를 찧으면서 벌러덩 넘어갔다이. 그 대머리 상통을 보고 숱한 구경군들이 코 싸쥐고 웃었다이. 두부는커녕 푸성귀죽을 겨우 얻어먹으면서 곽재  령감은 벙어리 랭가슴을 앓듯 했지." "어이, 범이 자기 흉을 하면 온다더니 곽재 령감이 또 오오." 덕칠 령감이 저쪽에 대고 뾰족한 턱짓을 했다. "아직도 곽재 령감 말이요?" 천석 령감은 너럭바위에 올방자를 틀고 도고히 앉아 또 곽재 령감을 씹어쳤다. "십여년 전에 천수해 사위가 왔을 때요. 저 령감이 사위를 쫓자고 빤빤한 마당을 쓸면서 뭐랬는지 아오? '양? 남이야 량식절약공약을 어기고 사흘이 멀다 하게 가시집에 놀러 오든 말든 더운 밥 먹고 식은 걱정 할게 있소?' 힐끔 들여다보니 사위가 듣는둥 마는둥 하는 눈친지라 마당을 몇번 썩썩 쓸다가 뭐라고 했는지 아오? '뭐? 보자는 딸은 오지 않고 사위가 와서 며칠 더 노는데는 어쨌다고 그러오? 제발 량식절약학습반엔 보내지 마오. 얼마나 창피하겠소. 괜히 가시집에 와서 망신당하고 집에 돌아가 내 딸을 못살게 굴겠다이. 오늘 돈과 량표를 내고 간다이. 뭐? 우리 집에 량식공작대까지야 보낼 필요는 없소.' 공연이라도 그런 멋진 공연이 어디 있겠소? 그래서 사위는 아침도 먹지 않고 량표와 돈을 홱 팽개치고 가버렸지." 덕칠 령감이 퉁방울눈으로 쏘아보건 말건 눈치 도끼등인지 땅딸보령감은 계속 물어뜯었다. "십여년 전 곽재 령감 생일날 내 생이 두대나 상한 걸 생각하면 헤이고, 그날 아침에 곽재 령감이 정지에서 가마뚜껑을 절거덩 챵! 들었다 놨다 하면서 오뉴월에 가마에 서리치게 잔소릴 합데. '며느리, 딸이 가져온 돼지고기는 잘게 써오. 그래야 덜 축이 날게 아닌가." '예, 근심 마소서.' 함경도 깍쟁이령감하구 전라도 깍쟁이며느리 손이 척척 맞았지. '그 아까운 돼지고기를 씻은 기름물을 버리지 말라. 뒀다 먹기요.' '예- 그럴바엔 아예 돼지고기를 샘물터에 잠궈놓고 내내 그 물을 퍼다 끓여 잡숫죠. 호호호.' '그래. 뛰는 놈 우에 나는 놈 있다더니. 전라도 며느리 진짜 함경도 도둑보다 나아. 허허허. 그러나 손님들을 수태 청해 생일상에 돼지고기점도 올리지 않아서야 쓰겠어?" "호호호." 시아비하구 며느리 부르고 쓰는 판이오. "에끼, 령감, 귀를 그 집에 떼 둬서 그리 신통한 상 하오?" 바른 총인 천수해 령감이 듣다못해 한마디 툭 내쏘았다. 땅달보 천석 령감은 개의치도 않고 또 씹어쳤다. "듣기나 하오. 콩나물 대가리고 버섯채고 소금범벅인 건 둘째고 주먹만큼 썬 돼지고기를 보고 곽재 령감은 정지에 대고 며느리를 욕해대지 않겠소? 곽재 령감은 누구 저가락이 돼지고기점에 갈까봐 우멍한 실눈이 동그래서 지켰다이. 헌데 생게나 다름없는 돼지고기를 누구도 먹지 못하고 그대로 상을 물렸다이. 곽재 령감은 며느리 코에 대고 엄지를 내밀었다이. 깍쟁이 령감이 술은 또 동네 부조를 믿고 딱 한병만 달라당 올렸다이." "에끼, 령감, 남을 헐뜯어도 유분수지.” 이때까지 실말인지 옛말인지 물고 헐뜯은 천석 령감의 말을 반신반의하던 두만 령감이 세귀눈을 부릅뜨며 바른총질 했다. “당신은 온 동네를 항상 입만 달고 싸다니면서 얻어먹어주다가 무슨 남의 소리요? 곽재 령감 생일날엔 그게 뭐요? 물을 탄 술병을 가져 가고서도 남의 말을 하오?" 그러자 천석 령감은 제꺽 덕칠 령감을 업고 똥구뎅이에 뛰어들었다. "령감은 그날 용감하게 돼지고기점을 먹더구먼." "에잇, 령감, 자기는 게걸스레 먹다가 생이를 상해가지고서도 무슨 군말이요?" 덕칠 령감이 쇠소리나게 툭 쏘았다. "령감, 항상 틀만 차리지 말고 듣소. 정치대장질을 잘 했으면 그때 모두 굶을 지경으로 살았겠소? 이전에 내 바른 총질을 한다고 동불사에 쫓아보내고서도 아직도 온 한날 곽재 령감을 물어뜯소? 입이 아프지도 않소?" "저런 령감이 우환거리라이. 퉤!" 덕칠 령감은 버릇처럼 침까지 내뱉었다. 입방아쟁이 령감은 그래도 지지 않으려고 반격을 가했다. "아니, 이거 실로 랭수에 생이 부러질 소리도 한다. 당신넨 지금 나를 물어뜯지 않고 뭐요?" 천석 령감은 우쭐해 이번엔 또 남을 업고 똥물에 뛰어들었다. "우리 마을 사람들이 쌀고생을 하면서 산게 어디 내 혼자 탓이라고 이러오? 난 다 저 대대당지부 서기 상진 령감 말대로 했다이." 그 말에 모두 입을 헤 벌린채 서로 쳐다볼뿐이였다. 한참 후에 덕칠 령감이 한마디 했다. "에이, 문화대혁명 때부터 천석 령감이야 전문 남에게 똥바가지를 덮어씌우지 않았고 뭐요? 남을 업고 똥구뎅이에 뛰여드는데야 누가 당하겠소. 개 똥 먹는 버릇 고치겠소? 자기 잘못이 어디 있소? 또 상진 령감 탓이지. 흥!" “정치야 그래도 상진 령감이 제대로 하지. 예로부터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해야 한다고 하지 않았소? 상진 령감이야 우리 마을 사람들을 구하려고 한뉘 애를 쓴 령감이지.” 이때 곽재 령감이 두부를 한판대기나 실은 수레를 몰고 지나면서 소리쳤다. "어이, 령감들, 우리 집에 가서 두부에 술이나 마시기요." "보오. 쌀독에서 인심이 난다고 저 곽재 령감은 본래 그런 깍쟁이 아니라니까." "암, 그렇구말구." 령감들의 말에 천석 령감은 대머리에 송골송골 돋은 땀을 딱으면서 엉거주춤 일어났다. 커다란 의문부호가 감탄표를 껴안고 늙고 비술나무 아래의 숱한 령감들의 머리를 놀랍게 쳤다. "?!" 이때 성호가 성큼성큼 마을로 돌아왔다. “여러분, 안녕하십둥?” 한참 한담하던 마을 로인들은 성호를 보자 반가와 야단쳤다. “에이고, 우리 마을 수재가 돌아왔네.” "소를 방목하면서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더니 대학에 척 붙었지. 뭐야?” “감사합니다. 다시 뵙겠습니다.” “그래, 그래.” 성호는 마을 로인들과 갈라져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때 밭에 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던 상진은 아들을 보고 기뻐 어쩔줄 몰랐다. “그래 어디 배치받았니?” “시내 광고회사에 가게 됐습구마.” “그래? 참 장하다, 장해!” 상진은 가래짝 같은 손으로 성호의 어깨를 다독이면서 집 안으로 들어갔다. 성호는 칠순이 다 된 머리 허연 부모가 아직도 농사를 짓는 것에 마음이 아팠다. 성호의 고향은 개혁개방하면서 집체로 농사를 짓던데로부터 개체로 농사를 지으면서 농민들의 생산적극성이 전에없이 높아졌다. 그들은 하나라도 농사수입을 올리려고 자기에게 차례진 밭을 기름이 찰찰 넘치게 다루고 있었다. 점심상에 마주 앉자 상진은 "광고회사에 들어가면 무슨 일을 한다니?" 하고 물었다. "제품광고를 하는 일입니다. 말로는 광고수입의 20프로를 수고비로 준답디다." 막내아들의 말에 상진은 한참 궁리하더니 "돈은 벌겠지만 대학에서 배운 지식은 별로 써먹지 못하겠구나."라고 했다. 성호도 한숨을 후~ 내쉬였다. "아버지, 광고회사에서 돈을 잘 벌면 부모를 시내에 모셔가겠습꾸마. 한뉘 농사를 지으면서 고생한 부모를 잘 모셔보고 싶습구마." "효성이 고맙다만 우린 농촌을 떠나지 않겠다. 시내에 가서 뭘 하니? 농사군은 밭을 떠나지 말아야 해. 선렬의 목숨과 피로 바꿔온 아까운 밭을 어떻게 버리고 시내에 가니? 묵어빠지는 밭을 보면 마음이 아파서 못 산다." 이것이 농사꾼의 근본이였다. 밭을 믿고 살고 밭에 목이 얽매여 한뉘 농사를 지어야만 사는 농사군들이였다. "칠순이 넘어서 어떻게 계속 농사를 짓겠습둥?" "저 밭을 어떻게 얻어온 밭이냐? 우리 조상들이 조선에서 가마를 빼 지고 두만강을 건너 이 곳에 와서 어떻게 개척한 황무지냐? 항일투사들의 피로 바꾼 땅이야." 성호는 머리를 끄덕였다. 이때 셋째누나 은숙이 들어섰다. 그녀는 성호한테 피뜩 눈인사를 하고는 아버지를 보고 직구를 날렸다. “아버지, 이젠 그 개꼬리 같은 밭고랑을 가지고 사위하고 다투지 맙소. 동네 영상해 못 살겠습구마.” “뭐라고?” 상진은 눈을 부릅뜨며 정색했다. “그 반고랑이 네게면 네게고 내게면 내게라고 똑똑히 갈라야 해.” 성호가 물어보니 은숙은 이런 사연을 오라비한테 하소연하는 것이였다. 천지꽃산 기슭의 밭을 제비를 뽑아 나누게 됐었다. 그런데 제비를 쥐다나니 부녀간이 나란히 밭을 나눠가지게 됐다. 그런데 부녀간 밭 사이에 반 고랑짜리가 대체 누구에게 속하는지? 은숙은 아버지 거면 어떻고 자기 거면 어떻고 시비를 하지 말고 부모한테 주려고 했다. 그런데 사위 경만은 떽 했다. 그 바람에 상진과 사위는 대판 시비가 붙었다. 대장이 상진과 경만을 데리고 가서 다시 두 집에 차례진 밭고랑을 자로 재여본 결과 그 반고랑은 확실히 상진네 것이 아니겠는가! 경만은 미터 자를 활 던져버리면서 “에이씨, 이젠 가시아버지고 뭐고 모르겠다.” 하고 욕설을 퍼붓더니 쥉쥉 산 아래로 내려갔다. 그때부터 경만은 가시집이라면 코방귀를 뀌면서 등을 돌렸다. 농민들은 밭이라면 부모자식간에도 한치  양보도 없었다. 밭은 농민의 인생 전부였고 생명선이였기 때문이다. 밭 한고랑을 떼가는 것은 생명의 일부를 떼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간주됐다. 성호는 사연을 듣고 나서 “됐소. 생산대에서 나눠준대로 하오. 이제 자꾸 시비를 해서 뭘 하겠소.” 하고 눅잦혔다. 은숙은 “에이, 깍쟁이 같은 령감이, 반고랑을 사위를 주면 어떻다고 그러오?” 하고 눈을 흘겼다. 상진은 세귀눈으로 셋째딸을 마주 보면서 정색했다. “얘야, 반고랑 밭이 아까워 그런게 아니야. 옛날부터 부모 자식간에도 돈을 세서 주고 세서 받는다고 했다. 뭐나 공짜는 공짜고 주는 건 주는 거야. 그러나 시비는 명확히  갈라야 해.” “또 그 얘기군요. 빚을 지고 살아도 시비 지고 못 사는 아버지니까.” 은숙은 그저 피씩 웃고 말았다. 영옥은 성호를 건너다보면서 "이젠 대학도 졸업했는데 데려올 새애기는 없니?" 하고 궁금해했다. 성호는 한숨을 후~ 내쉬더니 "어디 맞갖은 새애기 그리 많습니까?" 하고 심드렁해했다. 영옥은 "그래도 말이 있는 처녀라도 없니?" 하고 바투 들이댔다. "있긴 한데.” 상진과 영옥은 희망에 찬 눈길로 동시에 성호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뒤말을 기다렸다. 성호는 말을 꺼낸바 하고는 몽땅 얘기해주었다. "광고회사를 들어가게 된 것두 그 처녀애 아버지 도와준 덕분입구마." 그는 겨우 뒤말을 이였다. "그 처녀애는 교수네 집 무남독녀인데 대학생입니다." “대학생? 거 좋구나.” 상진이 한마디 했다. 영옥은 한참 묵묵히 앉아 착잡한 상념에 잠겼다가 침묵을 조용히 깼다. "새애기 아무리 좋아도 짝이 기울어선 안되지. 인물이 아무리 고와도 쓸 데 없다. 사람은 마음이 고와야 한다. 인물을 뜯어먹고 산다더니?" "쯧쯧쯧, ‘흥!’ 소리도 반간이라고 무슨 말을 하오? 교수네 딸이면 좀 좋아?" 상진이 입을 틀어막으려고 해도 소용없었다. 은숙이 끼여들었다. "가문도 비슷하면 좋다. 그쪽은 교수구 우린 농부가 아니냐? 사돈도 짝이 기우면 이후에 말썽이 생긴다." 상진은 한숨을 후~ 내쉬였다. "내 잘못이 크구나. 옛날 내 현 공안국 국장을 내놓고 이 마을에 돌아오지 않았더라도 이런 일은 없겠는데. 너네 자식들한테 한뉘 농부네 아들이란 딱지가 붙어다니게 해서 미안하구나." "예? 옛날 아버지가 공안국 국장을 했습니까?" "그래, 그랬다." 아버지 대신 엄마가 말했다. "너네 아버지 집에 오지 않았으면 현장이라도 됐을 거야." 성호는 아버지를 다시 쳐다보았다. “아버지, 왜 그때 국장을 그만 뒀습둥? 그러지 않았더라면 자식들도 잘 됐겠는데. 적어도 세상 어중이떠중이들에게 ‘농부의 아들’이란 말을 듣지 않으면서 떳떳이 살겠는데.” 상진은 땅이 꺼지게 한숨을 후~ 내쉬였다. 말머리 무거운 그였지만 이번에는 자식들에게 말하지 않으면 안 되겠는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농부네 아들이라고 심지를 굽히지 말라. 넌 당당한 대학생이야. 문화대혁명이 아니래도 이 지경은 되지 않았을게야.” 성호는 듣다가 궁금해났다. “왜 국장을 그만 두고 농촌에 돌아왔습니까? 혹시 착오라도 졌습니까?” 상진은 또 땅이 꺼지게 내쉬였다. “말하자면 길다. 그때 나는 지식이 없었다. 옛날 서당방에서 배운 글을 가지고 어떻게 국장을 계속 하겠니? 문화대혁명 때 반란파들이 날 물어먹었지. 억울한 사건을 바로잡을 땐 난 벌써 퇴직나이를 훨씬 넘겨서 공안국에 되돌아갈 수도 없게 됐다.” 영옥이 보충했다. “아버진 그래도 지금 로임을 받는 농민이다.” “고향 마을에서 부모를 모신게 다행이지.” 상진의 말에 영옥이 동을 달았다. “네 아버지는 효자다, 효자.” 상진은 가슴 아픈 과거사를 간단히 말했다. “속담에 충신은 효자로 될 수 없다고 난 국장은 못했지만 부모들께 조금이라도 효성한게 다행이야.” 아버지 말을 듣고 성호는 콧마루가 시큼해났다. “그때 고향에 돌아오지 말고 국장을 계속 했더라면 부모도 잘 모시고 잘 살 수 있지 않았겠습둥?” “농촌에 있는 부모처자를 어쩌니?” “시내에 모셔가면 됐을 걸 그랬습니다. 공안국 국장이면 가족의 호구도 시내에 올리기 쉽지 않았습둥?” “후에 조직에서도 내게 정치착오 없다고 결론지은 후 부모처자를 시내에 모셔오라고 했다. 그런데 조직에 손을 내밀기 싫더라.” “토지개혁 때 간부들은 다 저 령감처럼 사상이 새빨갛다.” “난 그때 집으로 돌아오면 곁에서 조석으로 부모를 잘 모시고 처자를 돌볼 수 있다고 생각했지. 고향에 돌아와 사업해도 마찬가지로 나라와 인민을 위해 일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저 령감이 깍쟁이 돼 출세하지 못했다. 현장한테 술이라도 사 먹였으면 지금 쯤 국장이겠니?” “헛소릴 작작 하오. 술을 사 먹이고 국장을 하면 어쩌고 현장을 하면 어떻소? 그런 부패한 관리를 해서 뭘 하오?” 성호는 아버지의 순박한 사상감정에 머리를 숙어졌다. “그때는 그렇게 하면 효성도 하고 나라의 충신도 되는 거라고 생각했지. 넌 아버지 교훈을 섭취해서 전도를 개척할 때 기회를 놓치지 말라. 사람의 평생에 좋은 기회는 몇번 차례지지 않는다. 그런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성호는 아버지의 의미심장한 말씀을 마음  속에 깊이 아로새겨두었다. 영옥은 화제를 돌려 “교수집 딸이 우리 같은 농민 시부모를 좋아할가?” 하고 우려를 나타냈다. 상진은 영옥한테 눈을 흘겼다. “쯧쯧, ‘흥’ 소리도 반간이라는데 쓸데없는 말을 하지 마오.” 그는 성호한테 머리를 돌렸다. “부모 걱정 하지 말고 전도를 개척해라. 넌 농부의 아들이란 딱지를 떼버리고 이젠 당당한 대학졸업생으로 세상에 첫발을 내디딘게야. 농부네 아들이라고 심지까지 농부의 소농경제 사상의식으로 놀아선 안된다. 이제 광고회사에 들어가 솜씨를 펴라. 배필로 될 수 있다면 교수 집 딸과 약혼하면 좀 좋아 그래?” “알았습구마.” 그때 은숙이 성호를 보고 한마디 귀띔해주었다. “넌 절대 아버지처럼 살지 말라. 기실 우리 집은 농민이지만 아버지 양성한 간부들이 지금 시내 공안국에 수태다.” “양?” 성호는 눈이 떼꾼해져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지금 공안국 리철갑이란 과장이랑 이모부랑 다 아버지 수하였어.” 성호는 흠칠 놀랐다. "아니, 리철갑 과장이란 승호 아버지 아닙둥?" "어째? 리철갑 과장네 아들을 면목 아니?" “예, 동창생입구마.” “그래?” 영옥은 상진을 돌아보면서 입을 함박만큼 쫙 벌리면서 놀라했다. “걔를 압둥?” “알다뿐이겠냐?” “쩌쩌, 그만두지 못하겠소? 저 로친 말이 많아 대사야.” 상진은 황급히 눈을 부라려 영옥의 입을 틀어막았다. 영옥은 제꺽 화제를 돌렸다. “무슨 일이 있으면 이모부한테도 찾아가라. 네 이모부도 지금 공안국 형사과 부과장을 한다더라.” 성호가 쳐다보자 상진은 머리를 끄덕였다. “옳다. 내 강운룡을 제발시켰지. 네 이모 중매도 섰지.” “진작 찾아가려다 말았습구마. 이전에 이모부한테서 권투랑 배우긴 했지만 어쩐지 졸업배치까지 부담시키고 싶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를 똑 떼 닮았구나. 네 아버진 옛날부터 남의 신세를 지려고 하지 않은  위인이야. 자기 제발한 강 과장한테 신세를 지는게 싫어 그랬지.” 상진은 성호의 손을 꼭 잡았다. “네가 자기 힘으로 이 세상에 꿋꿋이 서라고 그래. 좀 힘들더라도 자기 능력으로 사업을 잘해서 한 걸음, 한 걸음 올라가야 보람찬 거야.” 성호는 “예, 명심하겠습니다.” 하고 머리를 끄덕였다. 그는 이 시각만큼 아버지가 얼마나 존경스러워보였는지 몰랐다.
140    대하소설 진달래소야곡(10) 댓글:  조회:1433  추천:0  2018-02-13
                                            18. 춘향 어디에 있나? 모두들 졸업을 앞두고 승호가 코 다쳤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며칠 지나도록 학교 측에서는 아무런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성호는 송파와 송호 형제 깡패무리 위협 앞에서도 승호와 홍희, 은영을 보호하려고 나선 것을 결코 후회하지 않았다. 그러나 승호의 첫사랑, 약혼녀 경옥이 돌층계에 머리를 쪼아 피못 속에 기절해 넘어가던 장면을 본 후에는 생각이 좀 달라졌다. 경옥은 결코 홍희나 은영만 인물체격이 못하지 않았다. 오히려 체격은 홍희보다  나아보였다. (모두들 첫사랑은 평생 잊지 못한다고 하지 않았는가. 승호는 어쩜 첫사랑을  그렇게 헌신짝 차버리 듯할 수 있단 말인가?) 순간 성호는 자기도 마음에 걸렸다. 전도와 리상을 위해 첫사랑 순희를 대학생이 아니라고 버린 일이 떠올랐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승호처럼 순희의 정조를 짓밟지는 않았다. 아니, 손 한번도 쥐여본 적도 없었다. (자식, 결혼하지 않을게면 다치지 말게지.) 성호는 승호를 한번 따끔하게 찔러주고 싶었다. 침실에 승호가 나타나자 성호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면서 말했다. “얘, 할 말이 있다.” 승호는 갑자기 성호를 와락 포옹했다. “감사해. 이번에 네가 우리를 살려냈어.” 성호는 승호의 가슴을 떠밀어냈다. “친구끼리 당연하지.” 승호는 성호의 손을 잡아끌었다. “가자, 우리 집에 가서 술이나 한잔 마시자. 엄마 두부까지 앗아놓고 기다린다.” 성호는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려고 따라나섰다. 자그마한 호수가에 자리잡은 승호네 2층 아파트는 꽤나 으리으리했다. 높다란 담장 철문을 열고 들어서자 나팔꽃, 코스모스, 백일홍이 울긋불긋 만발한 화단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승호는 집 안에 들어서면서 소리쳤다. “친구 왔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승호 어머니는 허리를 꾸벅 굽히는 성호를 반갑게 맞았다. “아이구, 정말 남자답구먼.” 성호는 승호의 어머니가 아주 깔끔하게 생긴 미인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짙은 눈썹아래 어글어글한 눈, 우뚝 솟은 큼직한 콧마루, 두툼한 입술… 어디를 보아도 젊어서 미인이였다는 느낌이 확 들었다. “어서 2층으로 올라 가오.” 벽화는 뒤따라 올라가면서 끝없이 두툼한 입술을 널어놓았다. “승호야, 속담에 부모를 팔아서라도 좋은 친구를 하나 친하라는 말이 있다.  관건적인 시각에 생사결단하고 친구를 구하는 이런 친구는 금덩이를 주고서도 바꾸지 못해.” 성호는 승호 어머니가 침이 마를 지경으로 칭찬하는 것을 들으면서 2층에 올라갔다. 2층 객실 벽에는 경복을 입은 승호의 아버지와 한복을 입은 승호 어머니 거폭의 결혼사진이 걸려 있었다. 농촌에서는 단색텔레비죤도 보지 못하는 세월에 과장님 댁에는 색텔레비죤까지 있지 않겠는가. 승호가 랭장고를 열자 줄느런히 꽂맥주병이 긴 목을 내밀었다. 승호는 성호를 데리고 2층 베란다에 나갔다. 호수에 피여난 빨간 련꽃과 실실이 넘실거리는 수양버들이 기분을 한결 돋구며 방실방실 추파를 보냈다. 이윽고 웬 처녀애가 채를 들고 올라와 밥상에 줄느런히 올려놓았다. “녀동생 선금이야.” 승호는 처녀애 쪽에 얼굴을 돌리더니 “선금아, 인사해라. 딱친구 성호야.” 꽤나 예쁘게 생긴 선금은 생글 웃으면서 인사했다. “오빠한테서 많이 들었어요. 오빠를 구해줘서 감사해요.” 성호는 어색하게 머리를 끄덕이며 웃음으로 인사를 보냈다. 밥상에는 성호가 좋아하는 푹 삶은 돼지고기보에 노르스름한 두부지짐이 올랐다. 명태국과 시원한 배추김치도 보였다. 선금은 손수 성호와 오빠의 잔에 맥주를 찰찰 넘치게 부었다. “두 분 마음껏 드세요.” “저도 한잔 마시오.” “아니, 전 마시지 못해요.” 그때 승호가 맥주병을 성호한테 주었다. “선금아, 성호 오빠 술 한잔 받아라.” 선금은 “아니, 아니.” 하면서도 술잔을 잡았다. 그들 셋은 한잔 쭉 마셨다. “그럼 전 실례하겠어요.” 선금은 머리를 다소곳이 숙이고 쟁반을 들고 조용히 내려갔다. 이윽해 승호 어머니가 올라와 성호를 보고 부산을 떨었다. “이름이 뭐라던가?” “리성호라고 부릅니다.” “오- 성호, 어쩜 우리 승호와 형제처럼 생겼소. 이름도 똑같이 범 ‘호’라. 호랑이 형제 같은 친구들이구먼. 천천히 드오.” 벽화는 내려가다가 도리머리를 흔들더니 몸을 돌려 성호를 다시 유심히 여겨보았다. “왠지 딱 누굴 닮은 것 같은데. 성호는 고향이 어디오?” 성호는 맥주잔을 내려놓으면서 “천수해 어느 산골에 있습니다.” 하고 무심히 대답했다. “오, 그래? 고향이 어느 마을이오?” “태평구촌이라고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오- 그래?” 벽화는 어글어글한 눈이 데꾼해졌다. “아버지 명함은?” “농사군인데요. 리상진이라고 불러요.” “뭐라고? 리상진?!” “예.” 순간 벽화는 손으로 입을 가리면서 놀라는 기색을 보였다. 승호는 “혹시 아는 분입니까?” 하고 물었다. “아, 아니야. 너희들 하도 쌍둥이처럼 생겨서…” 벽화는 황급히 표정을 바꾸더니 말끝을 흐리면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승호는 객실이 조용해지자 성호에게 시원한 맥주를 부어주고 물었다. “할 말이 있다더니?” 성호는 기다렸다는듯 스스럼없이 입을 열었다. “전번에 약혼녀가 돌층계에 머리를 쪼아 피를 줄줄 흘리며 대성통곡치는 걸  보고 안됐더라.” 승호는 돼지고기점을 성호 앞의 접시에 집어놓으면서 대수롭잖게 말했다. “걔 무슨 약혼녀라고? 부모 동의도 없었어.” “부모 동의도 없이 왜 다쳤니? 그 녀자애와 결혼할 생각도 하지 않으면서.” 승호는 성호를 피뜩 마주 쳐다보더니 맥주잔을 들어 성호의 잔과 마주치고는 목구멍이 미여지게 꿀떡꿀떡 들이켜더니 더러운 속심을 털어놓았다. “딱 결혼을 념두에 두고 처녀애들과 친해야 한다는 법은 없잖니? 건 다 옛날 소리야. 련애는 결코 결혼하기 위한 건 아니지.” 성호는 어이없어 도리머리를 흔들기까지 했다. “얘, 그게 무슨 소리야. 련애는 결혼대상을 고르기 위한 과정 아니냐?” “픽!” 승호는 랭소했다. “련애는 남녀가 이성을 즐기는 거야.” “뭐라고?!” 승호는 문께를 내다보더니 격분해하는 성호를 제지했다. “얘, 흥분하지 말라. 괜히 우리 둘이 싸우는가 하겠다. 자, 술이나 마시자.” 그가 술잔을 내들었지만 성호는 술맛이 없었다. “정말 말이 아니구나. 결혼할 대상이 아니면 아예 다치지 말아야지. 그게 뭐야? 너 이제도 얼마나 많은 처녀 정조를 유린할지 모르겠구나. 사람새끼, 어쩜 그럴 수 있느냐?” “야, 피곤하다, 피곤해. 딱 결혼하기 위해 련애한다는 건 진짜 피곤해. 건 그저 후대를 보려고 녀성을 얻는 봉건전통관념이야.” 승호는 오히려 제 쪽에서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넌 진짜 봉건통이야. 어쩜 개혁개방시기 신식청년이 머리채를 땋아 늘어뜨린 리씨왕조시기 봉건통이냐?” 성호는 어이없어 입을 쩍 벌렸다가 분김에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승호는 술이 얼근히 들어가자 자기 나름대로 지껄여댔다. “난 녀자 하나로는 모든 녀자들의 사랑을 다 맛볼 수 없다고 생각해. 녀자애들마다 사랑의 맛도 달라. 이것 저것 맛을 봐라. 얼마나 새로운 감이 나는가. 옛날부터 희신염구(喜新厌旧)라는 말이 있어. 난 희신염구병에 걸려서 새 걸 좋아하고 묵은 걸 싫어해. 한 녀자를 몇년 데리고 놀면 자연히 싫어진다. 그래서 끊임없이 새 녀자애를 친해 놀아야 해. 어째?” 성호는 듣다못해 중둥무이했다. “딱 숱한 녀성들을 데리고 놀아야 사랑의 참맛을 본다고 생각하니?” “그래.” 승호는 성호에게 잔을 내밀었다. 성호는 승호의 잔을 손으로 내리눌러 상 우에 내려놓게 하고 입을 열었다. “참다운 사랑은 리몽룡처럼 벼슬이 올라가도 한 녀성을 일편단심으로 영원히 사랑하는 거야. 참사랑은 청춘남녀의 피끓는 한쌍의 심장으로 변함없는 사랑의 선률을 울리는 것이야.” 승호는 술잔을 들어 혼자 쭉 굽을 내고 잔을 내려놓았다. “이 봉건통아, 아직도 뭐 ‘일편단심’이요, ‘백년해로’요냐? 지금 어디 리몽룡이나 춘향 같은 처녀총각이 하나라도 있니? 무슨 정조고 뭐고, 떡대가리 같은 소릴 작작 해라. 다 썩어빠진 옛말이야. 인생을 헛되게 랑비하지 말고 젊어서 실컷 즐기는 것이 락이야!” 성호는 밥상을 탕 쳤다. “야, 그래 동물처럼 성애가 사랑의 전부란 말이냐? 어째 처녀의 착한 마음이나 사랑보다도 몸을 더 사랑하느냐? 그래 짐승처럼 아무 녀자나  닥치는대로 얼리고 닥치고 사기쳐서 성교나 하는 걸 지고무상의 락이라고  생각하니? 건 짐승들이나  할 짓이야!” “그래 네가 말하는 사랑이란 도대체 뭐냐? 너도 들을라니 적게 련애한 건 아니더구나. 고향에 첫사랑 순희라고 있었다지 않았냐? 왜 은영이, 정희와 련애하니?” “난 련애는 해도 정조를 짓밟진 않았다. 심지어 손도 쥐여보지 않았어.” 성호는 자기 련애관을 토로했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처녀와 백년을 두고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깊이 사랑하는 거야. 진짜 사랑하는 처녀를 위해 목숨까지도 바칠 수 있는 사랑, 그런  사랑이야 말로 진정한 사랑이야! 사랑은 상대방을 점유하는게 아니야. 베푸는 거야.” 승호는 허구픈 웃음을 입귀로 흘렸다. “누가 사랑에 사심이 없다고 했니? 로실히 말해 사랑은 자사자리해. 너도 은영을 좋아하면서도 정희와 가만히 련애하지 않니? 사랑은 성생활을 떠나 운운할 수  없는 거야. 아, 고조에 올라 머리가 붕 뜨고 온 몸이 둥둥 하늘로 날아올라가는 것처럼 황홀한 경지에 이를 때, 아, 그 때야만이 사랑의 절정인 거야. 또 한 녀성에게서 모든 녀성을 맛볼 수 있니? 련애를 할수록 녀성들마다 사랑의 향기가 각각이야. 마치 꽃마다 생김새가 다르고 향기가 다른 것처럼. 야~ 녀성들 진짜 날 죽여준다, 죽여 줘. 그 육체미에 진짜 미칠 거 같아!” 승호는 진짜 황홀한 경지에 올랐을 때처럼 흥분돼 지껄여댔다. “생각해봐라! 가슴이 밋밋한 경옥이 몸 하나로 어찌 녀성의 육체미를 다 대체할 수 있어? 녀성들 육체마다 그 미와 향기가 각각인거야. 이 멍청아, 너도 빨리 재미를 봐라.” 성호는 점점 더 어이없어 도리머리를 홰홰 저었다. 그때 승호 어머니가 문을 삐쭉 열고 들어섰다. 성호는 억지로 어색한 웃음을 지어보이며 오이쪼각을 집어 입에 넣었다. 벽화는 맛있게 구운 고등어를 담은 접시를 성호  앞에 놓으면서 나직이 말했다. “이제 주고받는 말을 다 들었소. 성호라던가. 제 말에 도리는 있소. 허나 저 승호도 그럴만한 사연이 있어 그 애와 헤여졌소.” “엄마!” “아니야. 너희들 이후에 의좋게 보내려면 말하는게 옳아.” 승호가 말려도 벽화는 기어이 두툼한 입술을 열었다. “경옥이 엄마가 저 애를 뭐라고 욕했는지 아오? 항상 '바람둥이네 새끼'라고 욕했소. 내 어떻게 키운 아들인데. 그렇게 욕지거리를 한단 말이요? 바꿔놓고 성호라면 그렇게 악다구니질하는 집 딸과 약혼하겠소? 그런 앙칼진 년을 가시엄마로 모시고 살 만하오?” 그녀는 너무 격분해 손까지 부르르 떨렸다. “경옥의 에미는 나와 중학교때 동창생이요. 그런데 어찌 우리 불쌍한 승호를 그렇게 입에 담지 못할 쌍을 한단 말이요? 자기는 그렇게 정파다운가? 검정개 돼지 흉을 한다고 하오.” 승호는 듣다못해 말렸다. “엄마, 그만 하십시오.” 성호는 승호 어머니와 경옥의 어머니가 중학교 동창생들이라는데 갈등이 심한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꾹 참고 승호 어머니 말을 듣다가 한마디 물었다. “부모들이 반대해도 둘이 좋아서 그런 관계까지 벌였으면 끝까지 책임져야지 않습니까?” 승호는 쓴 오이를 씹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 애를 사랑해?” 성호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자초에 사랑하지 않으면서 왜 다쳤니?” “그런 건 아니야. 사실 경옥은 내 첫사랑이야. 그런데 걔네 엄마 날 ‘과부네 새끼’라고 욕하니까 복수하려고 다쳤다.” 성호는 더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승호를 뚫어지게 쏘아보았다. 벽화는 보다못해 “자, 이젠 경옥이 말을 그만하고 맥주나 마시오. 채 다 식었구나. 내 데워올가?” 하고 어색한 기분을 돌려세우려고 했다. 성호는 손사래를 쳤다. “됐습니다. 술맛이 없어 더 마시지 못하겠습니다.” 벽화는 일어나 나가면서 “괜히 다투진 마오. 술이나 포근히 마시오.” 하고 억지로 웃어 보였다. 성호는 자리에서 일어나기까지 하면서 “감사합니다.” 하고 인사했다. 이윽고 성호는 승호에게 통장훈을 쳤다. “네 카멜레온처럼 이랬다저랬다 천변만화하는 그 더러운 련애관을 버리지 않는 날엔 함께 술도 마시지 않겠다. 날 찾지도 말라.” 승호는 성호를 손가락질을 하면서 피씩 웃었다. “참 답답하구나. 정말 철학을 배운 거 같잖구나. 천지만물이 다 변하는데 누가 사랑이라고 변하지 않는다 했냐?” “에이, 듣기도 싫어.” 승호는 우쭐 일어나려는 성호를 붙잡아 앉혔다. “내 말을 들어봐라. 홍희나 은영과 같이 예쁘고 따르는 대학생들이 줄을 쭉 섰는데. 왜 욕을 처먹으면서 천하디 천한 중학생출신 녀자애를 계속 사랑해야 한단 말이냐? 황차 경옥은…” 그는 눈알을 떼굴떼굴 굴리더니 고등어쪼각을 집어 입에 넣고 우물우물 씹으면서 말꼬리를 꿀꺽 삼켜버렸다. 승호는 경옥을이성에 대한 호기심으로 한 2년 데리고 놀았다. 그러나 몸만 뜨거워졌지 정은 오히려 점점 식어갔다. 설상가상으로 경옥보다 훨씬 풍만한 홍희와의 치정에 푹 빠진 후부터 경옥의 비행장 같은 밋밋한 가슴에 정이 뚝 떨어졌던 것이다… 승호는 어머니와 선금이 들을가봐 성호에게 속심의 말을 더 할 수  없었다. 성호는 승호와 련애관이 판이하게 다르다지만 누구도 누구를 설복시킬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성호는 더는 술맛이 없어 우쭐 일어났다. “됐다. 술도 잘 마셨고 속심도 잘 나눴다. 이젠 숙사에 돌아가야겠어.” 승호는 말리는 척했다. “얘, 랭장고에 맥주 몇병 더 있어. 더 마시다 가라.” 허나 성호는 기어이 그 귀족 아파트 울안 같은 높다란 담장 속에서 나왔다. 저쪽에서 경복을 입은 작달막한 매부리코가 마주오고 있었다. 피뜩 보니 승호 아버지 같았다. 성호는 보기도 싫어 황급히 골목길에 굽어들어섰다. 어느날, 성호가 학용품을 사들고 선녀음식점 문 앞을 지나갈 때였다. “야, 성호!” 등뒤에서 승호가 소리치면서 헐레벌떡 쫓아와 손을 잡았다. “한잔 마시자.” “싫다, 술맛이 없다.” “오늘 녀자 말 하지 말고 술이나 맛있게 마시자.” 승호는 성호를 끌고 선녀음식점으로 들어갔다. 숱한 손님들이 이쪽에 머리를 돌렸다. 승호를 알아보는 몇몇 손님들은 질겁해 부랴부랴 일어났다. 승호는 항상 깡패들과 싸웠기에 시내에 소문난 싸움군이였다. “아이유, 오빠들 참말 오랜만이구만요.” 선화가 아양을 떨면서 다가왔다. 그녀는 승호와 성호가 은영 때문에 갈등을 겪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지라 함께 온 것을 이상하게 생각했다. 얼굴에 여러 군데 멍이 든 그들 둘의 얼굴을 보고 혹시 싸우지나 않았는가고 의심했다. “뭘 시킬가요?” 승호는 손사래를 쳤다. “개고기 계렬로 가져오오.” “알았어요.” 이윽고 복무원아가씨가 개고기로, 개뼈다귀로, 개가죽고기로, 개간으로, 개밸로 상다리 부러지게 올렸다. “소주 할가?” “시간도 없는데 그러자.” “무슨 일이 그리 바쁘니?” “목동이여서 졸업배치생각만 해도 골치 아프다.” 승호는 성호 앞의 큰 잔에 소주를 찰찰 넘치게 부었다. 성호도 술병을 받아 승호 잔에 부었다. 그들은 술잔을 댕 부딪쳤다. “나하고 홍희, 은영을 보호해주어 각골난망이야.” 승호는 개고기를 집어 입에 넣고 질근질근 씹으면서 개기름이 번지르르한 입을 열었다. “최성균교수하구 잘 부탁해보지. 널 시내에 남겨 달라고.” “에이고, 뭘 보고 농부네 아들을 시내에 남기겠니?” 승호는 주위를 살피더니 나직이 말했다. “그럼 시내처녀와 약혼하면 어떨가?” 성호는 한숨을 후~ 내쉬였다. “배치받기 위해 가짜약혼이라도 하라는 거냐?” “그래, 살자면 마지막수라도 써야잖겠니? 사랑이라는 거 별거더냐? 만나서 살을 비비면서 사느라면 사랑이 생기는 거야.” 성호는 승호의 글러먹은 건달놈의 련애관과 혼인관을 딱 듣기도 싫어 화제를 돌렸다. “넌 어디에 배치받을 작정이냐?” “공안기관에 들어갈 예산이야.” 성호는 자기 귀를 의심했다. “야, 아버지와 함께 일할 작정이냐?” “그래, 정부기관이나 돈깨나 생기는 단위에 배치받을 수도 있어. 적어도 난 학생총회 부주석이고 학생당원이고 체육위원이 아니냐?” 승호는 술을 거나하게 마셨는지라 한바탕 큰소리를 탕탕 치면서 불어댔다. “기실 정부기관에 들어가 일하고 싶은데 이번에 일을 쳐서 정부기관에 들어갔다가 배길 것 같지 못해.” 성호는 머리를 끄덕였다. “잘 생각했다. 정부 기관에야 날뛰는 정객들이 많은데 네 같은 놈이 며칠 삐치겠니?” 승호는 한 숨을 후~ 내쉬였다. “에이, 경옥이 엄마 날 즉살나게 욕하지만 않았어도 경옥에게 복수하느라고 일을 치지 않았을 거야.” 성호는 눈이 떼꾼해졌다. “진짜 경옥을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복수하느라고 해쳤니?” 승호는 주위를 둘러보더니 머리를 끄덕였다. “경옥이 엄마가 나를 더러운 바람둥이네 새끼라고 욕한게 진짜 이발이 갈리도록 괘씸했어.” 성호는 술맛이 없어 술잔을 내려놓았다. “야, 이 놈 새끼야, 경옥의 어머니와 복수할 걸 왜 경옥을 짓밟았니?” 승호는 “글세 지금 생각하면 그래. 그 일만 없어도 난 정부기관에 가서 장차 시장이나 서기 쯤 하겠는데 말이야.” 하고 한숨을 후~ 내쉬였다. 승호는 마음이 아팠는지 술잔을 들어 성호의 잔과 마주치고 굽을 쭉 냈다. “넌 시내에 남겠으면 시내 처녀와 약혼해라. 혹시 말이 있는 처녀 있니?” “불시에 마대치기를 해오겠니? 어떻게 시내 처녀와 약혼하는 방법으로 리상과 전도를 실현해?” “종수는 시내 국장집 딸과 약혼했다더라. 이제 시내 어느 신문사에 배치받기로 했단다.” “그래? 가정배경이 든든해야 일이 슬슬 풀리는 판이구나.” 승호는 어두워지는 성호의 얼굴표정을 보고 뒤말을 꿀꺽 삼켜버렸다. 농민의 아들인 성호에게는 혹시 상처를 입힐 수도 있기 때문이였다. 그는 인차 화제를 돌렸다. “시내 처녀 소개해 줄가?” 성호는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그만둬. 사랑은 사랑이고 졸업배치는 졸업배치지. 어찌 사랑에 졸업배치를 섞울 수 있냐?” 승호는 골치 아팠다. “야, 이 봉건통아, 항상 순결성이고 뭐고? 사랑이라고 어찌 순결하기만 해? 리몽룡과 춘향이 어디에 있느냐? 아직도 그따위 개도 먹지 않는 사랑의 순결성을 고집하니? 농민출신은 시내 가시아버지 방조라도 받아야 졸업배치를 잘 받아.” “됐다, 됐어.” 성호는 승호의 말을 반박했다. “개혁개방을 한다는 건 결코 성해방을 하라거나 우리 민족의 전통적인 혼인관을 부정하라는게 아니야. 난 시내에서 좋은 일자리를 찾지 못하더라도 자기 성적만큼 가라는데로 가서 인생 가치를 실현할 테야. 난 차마 시내 처녀를 사닥다리로 졸업배치를 사기치지 못하겠어.” “이런 바보.” 승호는 꽉 막힌 성호가 답답해 도리머리를 홰홰 돌리면서 삿대질해댔다. “야, 인생길에 그런 좋은 챤스 몇번 있다고 이래? 챤스를 놓치지 말아야지.” 그는 성호의 옆에 다가와 사진 한장을 꺼내 들었다. “이 처녀애 어때?” 성호는 보지도 않으려고 했다. 그러나 눈 앞에 대는 사진 속의 처녀는 피뜩 봐도 예뻤다. “네 동생 아니야?” 그는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야, 말도 안돼.” “왜?” “녀동생까지 내놓겠니?” “넌 매부로선 손색없는 사람이야. 의리심도 강하지. 진짜 현대판 리몽룡이야. 내 매부 되면 졸업배치 근심하지 말라. 우리 둘이 공안기관에 가서 손잡고 일하면 두려울 것도 없어.” 성호는 자기에게 기대려는 승호의 허무하고 나약한 속심지가 가련하고 우스웠다. “선금은 사범학교를 다녔는데 이제 곧 시내 소학교에 배치받을 거야." 성호는 입에 빗장을 지른 채 묵묵부답이였다. "네보다 두살 지하니까. 나이도 어울리지. 얘가 춤을 얼마나 선녀같이 잘 춘다고. 어때? 전번에 녀동생 봤지 않았니?” “그래서 집에 청했던 거야?” “겸사 겸사.” 성호는 그제야 베일 속에 가리였던 승호의 속내를 알아챘다. 도와주려는 마음과 믿음만은 고마웠다. 그러나 어쩐지 건달 같은 승호가 싫었다. 성호는 저가락으로 고기점들에 고추를 마구 버무려놓으면서 내키지 않는 어투로 말했다. “이전에 그 세집 지하독서실에서 뭐라 했느냐? ‘어찌 녀성들의 치마자락에  매달려 리상을 실현하려고 하는가?’, ‘땅을 밟고 하늘을 떠인 사내대장부로서 자기 피타는 노력으로 공부를 잘해 리상과 전도를 개척해야 해.’ 그 때 넌 그렇게도 커보였다. 그런데 날 보고 그 썩어빠진 길을 걸으라는 거냐?” “사람이 살자면 허허실실, 기동령활한 전략전술이 필요해. 만약 나처럼 학습성적이 높으면 모르겠는데. 넌 중축에 가나마나 해.” 성호는 저도 몰래 머리가 숙어졌다. “사람의 일은 몰라. 네가 우리 선금과 약혼하면 시내에 남기만 하겠냐?  공안국이나 법원에서 일할 수 도 있어.” 성호는 한잔 기울이며 묵묵부답했다. 그러나 승호의 호의를 무시할 수도 없어 진퇴량난에 빠졌다. 취기 오른 승호는 또 제 좋은 소리를 줴쳤다. “처녀라는게 별게 아니야. 모두 하루 처녀야. 그런 하루 처녀가 그리 중해?” 순간 성호는 피뜩 의심이 쑥 들었다. (자식, 네 녀동생도 하루 처녀란 말이냐?) 성호는 너무 매끄러운 승호를 생각할수록 부아통이 터져 술잔으로 밥상을 꽝 치고 격분해 고함쳤다. “그 더러운 련애관에 얼마나 많은 무고한 처녀들이 정조를 짓밟혔니? 아직도 내 앞에서 그 더러운 말을 하겠니?” 승호는 손님들의 눈길이 뜨거워 손사래를 쳤다. “됐다, 됐어. 우린 아무리 말해도 한곬으로 갈 수 없어.” 승호는 잔을 쭉 굽내고 안주를 몇 저 집더니 훌 일어났다. 카운터로 가서 결산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음식점 문을 박차고 나가버렸다. 선화가 이쪽으로 걸어와 문 밖을 눈짓했다. “더러운 놈새끼.” 성호는 분김에 남은 술을 병채로 들어 꿀꺽꿀꺽 마시고 비틀거리며 나가려고 했다. 선화는 뒤따라가 부축했다. “안방에 들어가서 한잠 자고 가오.” “왜 이래? 저리 가!” 성호는 선화를 활 밀어놓고 나가버렸다. 선화가 따라 나오면서 소리쳤다.  “야, 혼자 갈만 하니?”  성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비틀거리며 팔을 휘둘러댔다. “내 시내 년들 신세에 시내에 남을 거 같애. 농, 농촌에  가더라도 내 힘으로 살 테야.” 선화는 승호에게 골나가지고 자기와 성을 내는 성호가 얄미웠다. “차도 복잡한데 교통안전 주의해라!” 성호는 들었는지 말았는지 비틀거리면서 황혼빛이 너울치는 학교 숙사로 터벅터벅 힘겹게 걸어갔다. 그의 눈 앞에는 불찌가 반짝반짝 빛났다. 홀연 그 황혼의 락조가 불타는 불티 속에서 한 미녀가 웨딩드레스를 입고 너울너울 춤을 추면서 자기한테로 달아오는 것이 희미하게 보였다. 그런데 그 미녀가 누구인지 아물거려 분간하기 힘들지 않겠는가.                                                                                19. 충고 찜통에 찌는듯한 날씨에 성호는 침대에 들누워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면서 속궁리를 굴렸다. 아무리 궁리해 봐도 어쩐지 승호의 매부로 되기는 싫었다. (개자식, 날 자기 집안에 끌어들여 호위무사로 삼으려고? 저런 놈이 공안국에 들어가면 무슨 짓 할지 누가 알아?) 성호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부랴부랴 신을 주어 신었다. 그때 문이 벌컥 열리더니 승호가 들어왔다. "야, 녀동생을 데리고 왔어." "아니, 말도 하지 않고?" 그때 문이 배시시 열리더니 선금이 사뿐 들어서서 혀를 홀랑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성호는 황급히 인사를 받으면서 승호를 돌아봤다. 선금은 귀밑까지 홍조가 번지고 있었다. 성호는 승호를 보고 나직이 “우리 둘이 조용히 말하자. 녀동생을 먼저 내보내라.” 하고 선금을 흘끔 곁눈질했다. 승호는 선금을 잠간 현관에 나가 기다리라고 했다. 선금이 나가자 성호는 "아니, 이게. 뭐야?" 하고 어처구니없어 입을 짝 벌리기까지 했다. "네가 선금을 좋아하는 것 같아 데리고 왔다." "야, 내 언제 좋다고 했니? 난 이미 사랑하는 처녀가 있어." 뜻밖의 말에 승호는 따지고 들었다. "뭐라구? 누구야?!" 성호는 명확히 말했다. "네 녀동생을 더 괴롭히고 싶지 않아. 이 일은 없던 일로 하자." 말을 마치자 성호는 문 밖으로 나갔다. 승호는 성호 뒤잔등을 삿대질하면서 대성질호했다. "야, 너 꼭 후회할 거야." 선금은 벽에 돌아서서 어깨를 가늘게 들먹였다. 성호는 더는 미룰 수 없었다. 어제 술에 만취돼 꿈 속에 떠올랐던 처녀를  찾아보아야 했다. 그는 정신을 똑바로 가다듬고 곧추 녀성숙사 쪽으로 걸어갔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고 주춤 멈춰섰다. (그래, 숙사에 없을 거야. 꼭 그녀가 잘 가는 열람실에 있을 거야.) 그는 정신을 잃고 허둥지둥 열람실로 반달음쳐 갔다. 교정의 언덕을 올라가면서도 그녀와 뭐라고 말할가고 속궁리를 베아링처럼 굴렸다. "열번 찍어 넘어지지 않는 나무가 없다고. 아무리 질겨도 이번에야 견디지 못하고 꼭 넘어갈 거야." 성호가 열람실에 올라가 보니 아닌게 아니라 은영이 습관처럼 제일 뒤에 앉아 책을 열심히 뒤지고 있지 않겠는가. (아니, 기말시험도 끊났는데 저렇게 열심히 독서해?) 그는 스적스적 그녀한테로 다가갔다. 그가 벼르고 별러 마음먹고 찾은 그녀는 바로 은영이였다. 그녀는 성호를 피뜩 보고서도 새침한 표정을 지으면서 눈을 살며시 내리깔고 책을 보는 척했다. (조 표정 죽여주는구나.) 성호는 쿵쿵 울리는 심장을 가까스로 진정하면서 은영의 곁에 슬쩍 앉았다. "안녕?" "오랜만인데요." 은영은 대충 인사하고는 버릇처럼 굽실굽실한 체육머리를 뒤로 쓸어넘겼다. "무슨 일이 있어요?" "은영이, 할 말이 있소." 은영은 주위의 눈총을 둘러보더니 "공부 바쁜데 이러지 마세요." 하고는 책을 하나 슬쩍 밀어주었다. 성호는 눈치채고 책을 보는 척하면서 얼굴을 가리고 은영에게 나직이 속삭였다. "바깥에 나가기요." 은영은 주위의 눈길이 쏠리자 마지못해 책을 가방에 주섬주섬 주어넣고 일어섰다. 성호는 피가 온몸을 세차게 박차고 흐르고 심장이 쿵쾅, 쿵쾅 높뛰는 것을  느끼면서 바깥으로 나갔다. 그뒤로 좀 거리를 두고 은영이 체육머리를 훔치면서 따라 나갔다. 성호는 은영을 데리고 나무숲에 둘러싸인 운동장으로 걸어갔다. 운동장에서는 성대학생운동대회에 참가할 준비를 하는 대학생선수들이 달리기를 하고 있었다. 진짜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운동장이였다. 이 운동장에서 은영과 함께 성대학생륙상경기대회에 참가하려고 뛰지 않았던가. 겨울에는 빙장에서 은제비들처럼 쌍쌍이 나래치지 않았던가! 그는 뒤따라 온 은영을 돌아보면서 무거운 입을 간신히 열었다. "은영이, 이 운동장은 우리 둘이 달리던 활무대였지." 은영은 외까풀눈을 곱게 흘겼다. "어머, 추억에 푹 빠질 여유도 있는가요?" 성호는 은영을 정겹게 마주 바라보았다. "은영이, 첫사랑 널 영원히 사랑해. 이 목숨과 심장을 바쳐서라도 영원히 사랑해." 은영은 너무 당황해 주위를 둘러보다가 성호에게 눈을 흘겼다. "아직도 미련 버리지 않았어요?" "그런 말 하지 말라. 내 가슴이 찢어져." "…" 성호는 은영의 눈치를 흘끔 보면서 또 입을 열었다. "은영은 아주 마음이 착하고 지조가 굳센 처녀요. 절대 승호와 그런 관계를 버무렸다고 보지 않소. 머저리 아니고서야 어찌 경옥이랑 홍희이랑 관계를 버무린 짐승과 그럴 수 있겠소?" "그만 하세요." 허나 성호는 멈추지 않았다. “승호 헛소리를 누가 믿겠소? 그 놈 새끼, 아무리 사내답고 처녀들을 꼬시는 재간이 있다고 해도 누가 그 미친 수캐 같은 놈한테 몸을 맡겨?” “…” 은영은 나무숲 속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성호는 뒤따라가면서 계속 공세를 가했다. “승호는 처녀들을 자기 더러운 욕구를 만족시키는 도구로 볼뿐이야. 그런 놈을 믿고 어떻게 살아?” “이렇게 헐뜯으면서도 친군가요? 진짜 소인배군요.” “친구를 헐뜯는게 아니요. 전번에 승호와 술을 마시면서 속뽑이를  다 해보았소. 승호는 무한한 자극을 받으려고 끊임없이 처녀를 갈아댈 놈이요.” “그만 하세요.” 성호는 진정어린 눈길로 은영을 마주보면서 뒤말을 이었다. “어째 내 마음을 몰라주오. 은영은 녀동생처럼 정든 처녀요. 은영이 전도를 생각해서 모든 체면을 잃고 충고하는 거요. 승호, 그 자식 미련의 거미줄에 묶여 작작 따라다니란 말이요. 내 순결한 첫사랑을 처참하게 만들지 마오!” 그는 은영의 손을 잡고 정중히 말했다. “내 사랑을 받아주지 않아도 되오. 허나 승호는 포기하오. 한뉘 눈물을 흘리면서 고생할 거요.” 은영은 머리를 다소곳이 숙이고 어깨를 들먹이며 발걸음을 옮겼다. 저쪽 수림 속에서 엿보는 정희의 걀쭉한 얼굴 반쪽이 보였다. 성호는 은영을 뒤따라 걷다나니 교정을 벗어나 어느덧 학교 뒤산으로 올라갔다. 서늘한 소나무숲이 그들을 시원히 감쌌다. 그는 은영을 와락 끌어안았다. "시퍼런 대낮에 뭔가요?" 성호의 가슴을 밀어내는 은영의 눈시울에는 뜨거운 눈물이 흥건했다. 그녀는 줄 끊어진 구슬처럼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과거를 묻지 말고 이제부터 다시 시작하기요." "…" "너와 승호와의 과거를 묻지 않을 거야. 우리 이제부터 시작하자." "…" 은영은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그녀의 눈시울에 뜨거운 눈물이 고였다가 줄 끊어진 구슬처럼 걀죽한 볼을 타고 주르르 흘러내렸다. 드디여 그녀는 비술나무를 짚고 어깨를 들먹였다. "야, 은영아, 울지 마라. 네 울면 내 심장이 다 터진다." 은영은 한참 후에야 간신히 울음을 멈추었다. “은영아, 속 시원히 말해. 날 사랑하지? 맞지? 널 속이지 말라.” “…” 모든 것이 그녀에게는 돌이킬수 없는 일이였다. 승호와 넘지 말았어야 할 너무 깊은 곬을 넘었던 것이다. 땅을 치면서 통탄해도 쓸데 없었다. 회상하기도 싫은 비극이였다. 색마의 감언리설에 유혹돼 청춘을 매장해버린 허무맹랑한 악몽이였고 죄악의 구렁텅이였다. 한 순진한 처녀의 청춘과 순정을 매몰한 함정이였다. 성호가 새삼스레 사랑을 고백하자 은영은 마음의 상처가 더욱 아파났다. 그러나 그 내막을 고스란히 성호에게 드러낼 수는 없었다. 목숨 같은 정조를 잃은 그녀는 자기에 대한 순정을 고이 간직한 성호 앞에 설 자격이 없다고 느꼈다. 그럴수록 후회와 고통, 상처가 독침으로 돼 가슴을 아프게 찔렀다. 그녀는 이를 옥물더니 뽁뽁  갈았다. 색마 승호가 한없이 가증스러웠다. “오빠, 자꾸 캐고 드는게 정말 지겹다고. 무슨 자격으로 남의 사생활을 자꾸 간섭하는 거요?” 그제야 성호는 은영의 비밀을 알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지막으로 충고하죠. 절 깡그리 잊으세요. 하루라도 빨리 잊을 수록 오빠에겐 좋을 거요.” “널 잊으라고? 나한텐 어떤 존잰데…” “몇번 더 말해야 해요? 난 오빠를 사랑하지도 않아요. 난 시집가지 않아. 한평생 혼자 살래. 이 더러운 세상에서 어떤 남자를 믿고 살 수 있어? 세상의 남자는 몽땅 승냥이고 색마고 변태야. 흑흑, 흑흑…" 순간 그녀는 가방을 툴렁 떨어뜨린 채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어디론가 정처 없이 허둥지둥 뛰여갔다. 성호가 은영의 가방을 주어들고 뒤쫓아갔다. 성호의 그 모습 너무나도 가엽고 작아 보였다… 오래지 않아 졸업식이 닥쳐왔다. 성호는 은영에게 마음 속으로 감사했다. 그도 은영의 상처를 자꾸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은영한테 자기를 사랑하는가를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혹시 은영이 자기를 사랑하는데 전도를 고려해 농민의 아들인 자기를 포기하고 공안국 과장 시아버지를 등에 업으려고 승호한테 몸을 맡겼는가를 알고 싶었다. 그러나 은영이 그런 말을 할리 없었다. 성호가 파고 들면 파고 들수록 은영에게는 옷을 한벌, 한벌 벗기우는 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모든 비밀을 무덤까지 가지고 가야 했다. "별, 정조를 잃은 주제에. 흥! 농부 아들이라고 나무려?" 이젠 성호도 은영에 대한 모든 미련을 버리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이 세상에서 살 것 같았다. 마음의 한쪽 구석에서는 반발심도 생겼다. (내 꼭 은영보다 더 예쁘고 어린 처녀를 만나 보란듯이 살 거야.) 후~ 그는 한숨을 후 내쉬고 나서교정 나무숲 속의 시원한 아침공기를 한가슴 가득  들이켰다. 아무리 시원한 아침 공기도 가슴 한가운데 남은 실련의 아픔은 가셔주지 못했다. 은영과 함께 뛰여다니던 교정의 운동장, 스케트를 타던 잡초가 자란 빙장을 둘러보는 성호의 마음은 비길데 없이 쓰라렸다. 은영과의 쓰라린 사랑을 기억 속에서 지우려고 해도 자꾸 은영과 지내던 일들이 새록새록 떠올라 비길데 없이 고통스러웠다. 체육머리를 흩날리면서 저 운동장에서 화살처럼 달리던 은영이, 매화꽃이 핀듯이 눈꽃을 떠인 나무들이 빙 둘러선 빙장에서 빨간 운동복을 입고 타력있는 몸매를 날렵하게 놀리며 빨간 불새처럼 훨훨 날아예던 은영이, 빙장에서 스케트를 타던 성호를 걸어넘겨 외발로 얼음가루를 날리면서 반원을 그리며 돌아와 미안해하던 은영이… (아, 그게 우리 첫 만남이였지. 하늘이 내린 우연한 만남이였는데. 얼마나 사랑스런 처녀인데. 이젠 얼마나 고통스런 추억으로 남았는가.) 성호는 쓰라린 추억에 잠겨 허무한 웃음을 지었다. (우린 숱한 학우들의 흡모의 눈길을 한 몸에 받으며 함께 빙장에서 쌍무를 추었지. 후-. 건 모두 꿈만 같은 행복한 추억일뿐이야. 이젠 다 허사로 됐어.) 성호는 고통의 심연에서 허우적거리면서 헤여나오려고 발버둥질쳤다.  허우적거릴 수록 자꾸 은영이 생각이 났다. (은영은 승호한테 당한게 분명해.) 실련의 고배를 재차 마신 성호는 가버린 첫사랑 은영이 자기 마음 속에, 아니, 골수 속에, 대뇌 속에 얼마나 깊이 배겼는가를 깊이 느꼈다. 성호는 사랑하는 은영을 사랑할 수 없어 막 죽고 싶었다. 그는 은영한테 거듭 실련당해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 되였다. 미련의 꼬리에 뺨을 한대 얻어맞은듯 얼얼했다. 뒤산 절벽에 가서 훌쩍 뛰여내리고 싶었다. 양재물을 한사발 꿀떡꿀떡 마시고 이 세상과 결별해버리고 싶었다. 성호는 머리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그는 은영이 도대체 승호한테 시집가는가 두고 보고 싶었다. 성호도 자기가 서글프고 가련하고 곤혹스러웠다. 격분해 주먹으로 교정의 백양나무를 꽝꽝 쳤다. 나무무가지에 앉아 재잘거리던 참새들이 놀라 포르릉 포르릉 날아가버렸다. 은영을 사랑하면서도 사랑할 수 없는 성호의 고통 오죽하랴. (은영의 아버지는 정부기관의 거물급지도자라고 하지 않는가? 그럼 무엇 때문에 승호를 사랑해?) 성호는 몽롱한 안개 속에 잠긴 사랑의 미로에 빠지고 말았다. 그는 아직도 막연한 심연 속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지하에 묻혀버린 그 비밀은 언제 가야 밝혀질 수 있을가? 진짜 가슴에 묻고 무덤까지 가지고 가야 하는가?
139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92) 댓글:  조회:1272  추천:0  2018-02-12
               제25장 시련                    1. 함흥대대 당지부 서기       여우도 눈물을 흘리고 박달나무가 얼어 탁탁 터질 것만 같던 겨울이 아무리 발버둥질 치며 물러가기 싫어해도 끝내는 서서히 다가오는 훈훈한 봄 아가씨한테 밀려 이영 끝초리에서 눈물로 방울방울 곤두박질쳐 떨어지고 있었다. 겨우내 눈보라에 날려와 용을 쓰던 허연 눈도 녹아 내렸다. 여기저기 얼어 갈라 터진 땅 바닥에 봄아가씨의 미소가 흘러 들어가며 진흙물을 채워가고 있었다. 백열화된 반우파투쟁 그리고 대약진, 인민공사 세 폭의 붉은 기가 대지를 휩쓸고 지나간 후 정치기후가 확 달라져 갔다. 상급당조직에서는 정성해 서기의 지시에 따라 허영주 사장의 우파 모자를 벗기고 일약 현인민정부 부현장으로 제발시켰다. 허영주 부현장은 부임되자마자 현당위 부서기 이계삼과 토론한 후 함흥대대와 조개덕 대대를 합병해 함흥대대로 재편성한 후 대대 당총지부를 재구성하는 일부터 착수했다. 허영주 부현장과 이계삼 부서기는 진수해당위 조직위원을 데리고 함흥대대에 내려 왔다. 대대 당 지부 회의에서 장수로인 김병완은 당 지부 확대회의에서 아들 셋을 앞 세운데다 나이도 많기에 더는 당 총지부 서기를 하지 않겠다고 하면서 젊은 당원을 제발시켜 양성할 것을 제의했다. 그러자 흥수가 제꺽 뛰쳐나왔다. “좋습네다. 로서기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제가 서기를 맡아 할라우.” 그는 우먹눈으로 상순과 병완의 눈치를 살피면서 계속 횡설수설 입을 널어놓았다. “병완 서기 말이 옳아요. 젊은 서기를 세워야 생기발랄하고 사업도 척척 해재낄 수 있는기우.” 학수는 이 기회에 동생 흥수가 대대의 권력을 장악했으면 하면서도 병완과 상순의 눈치를 흘끔거렸다. 관건적인 시각에 이계삼 부서기가 나서서 엄숙하게 말했다. “김병완 로서기는 광복 후 줄곧 우리 함흥촌에서 농민들을 이끌어 많은 일을 한 훌륭한 농촌 당지부 서기요. 항일전쟁시기 조선에서 일본 놈들의 경찰국과 숱한 군용다리를 무너지게 만들었소. 간도에 온 후 집 식구들을 이끌어 농사를 지어 장백산 항일유격대에 쌀을 실어 보냈습니다. 그는 또 아들 기준과 창준과 손자 상순을 데리고 장백산에 들어가 유격대에 통나무집을 지어주었고 지하당원으로 돼 항일투쟁을 여러 모로 지지하였습니다. 그는 자손들을 조직해 마을에서 항일투쟁을 하였고 토지개혁 때에는 지주를 청산하여 빈농들에게 밭과 재산을 나눠주었습니다. 항미원조 전쟁시기에는 공안부문을 도와 마을에 기어든 남조선 특무를 숙청하는데 큰 공을 세웠습니다. 반우파투쟁 속에서도 그는 상급 당조직의 영도아래 견정히 사회주의 길로 나아가면서 실제적인 일을 많이 했습니다. 그는 한평생 공산당을 따라 혁명하였고 양심에 어긋나는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젠 연세가 많으시기에 지부서기 사업을 젊은이들에게 대담히 맡기려고 하는데 이는 로지부서기의 아주 고상한 품성이라고 봅니다.” 병완은 황급히 손사래를 쳤다.      “아니, 아니, 과분하게 평가해서 몸둘바를 모르겠소.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데.” 상순이 뭐라고 입을 열려고 할 때었다. 허영주 부현장이 입을 열었다. “내 보건대, 흥수 동무는 입당한지 이제 겨우 반년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지도경험이 없어 당총지부 서기를 하기 적합하지 못합니다.” 흥수는 목에 지렁이 같은 피 줄을 세우면서 우멍눈을 부라리며 발끈 성을 냈다. “아니, 뭐라노? 반우파투쟁 때 허 현장을 투쟁하는데 앞장섰다고 보복하는 건 아니기우?” 학수도 허영주 부현장을 흘겨보았다. 그러나 허영주 부현장은 견결히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흥수 동무는 정치두뇌가 명석하지 못하오. 보오, 그때 허백호 서기가 이 마을에 와서 심갱밀식농사법을 강요했지. 내 반대해 나섰다고 동문 날 대약진을 반대한 우파분자란 모자까지 씌우지 않았소. 그때 흥수 동무는 허 서기 심갱밀식농사법이 맞는지 틀리는지도 잘 분석하지 않고 나를 투쟁하는 데만 앞장섰소. 흥수동무에게 충고하오. 이후에는 뭐나 맞는가, 틀리는가 잘 분석하고 정치투쟁에 나서란 말이오.” 심장을 찔린 흥수는 입을 쩝쩝 다시면서 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때 상순도 한마디 했다. “옳습니다. 흥수는 자칫하면 정치착오를 질 수 있습니다. 뭐나 덧대고 앞장서기만 합니다. 앞뒤를 재지도 못하는 흥수에게 우리 대대 당 지부를 맡길 수 없습니다.” 흥수는 성이 꼭뒤까지 치밀어 붉으락푸르락 하면서 상순을 손가락질하며 고함쳤다. “그럼 당신이 지부 서기를 하라우. 원래 함흥촌은 대대로 당신들 김씨네 조손 3대 세상인 거니까. 지껌은(제길할), 흥!” “당원이란 사람이 그것도 말이라고 하오?” 허영주 부현장은 흥수를 준절히 꾸짖었다. “엄숙한 당지부 회의에서 그게 무슨 말이오?” 진수해 공사당위 조직위원은 좌중을 둘러보더니 엄숙하게 말했다. “함흥촌은 확실히 병완 할아버지와 그의 자손들이 두만강을 건너와 개척한 마을입니다." 실로 그렇다. 함흥촌의 소서구나 계동이나 장개골안나의 숱한 밭과 논 어느 밭고랑엔들 그들 조손 3대의 피땀이 배지 않은 게 있겠는가? "이 마을에서 경력이나 조직능력이나 군중토대나 모든 걸 다 보아도 상순 동무가 당총지부 서기를 하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허영주 부현장은 학수를 건너다보며 “동무 보기에는 어떻소?”하고 바투 들이댔다. 학수는 대세가 기운 것을 보고 입을 열었다. “상순이 하는 것이 좋습니다. 흥수는 아직 경험도 없기에 선전위원을 시켜도 과분합니다. 상순에게서 많이 배우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그 말에 흥수는 흥! 코방귀를 뀌었다. “그럼 조직위원은 누가 하면 좋겠습니까?” 허 현장의 물음에 병완은 가슴까지 드린 흰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학수가 계속 조직위원을 하면 좋을 거 같소.”라고 말했다. “상순 동무, 어떻소?” 허영주 부현장의 물음에 상순은 인차 “동의합니다.”하고 대답했다. 허영주 부현장은 총화발언을 했다. “그럼 이렇게 합시다. 함흥대대 당총지부 서기에 김상순, 조직위원에 리학수, 선전위원에 리흥수로 결정합시다. 모두 동의되면 박수로 통과합시다.” 모두 박수를 쳤다. 그러나 흥수는 또 상순 밑에서 길 생각을 하니 썩 달갑지는 않았다. 하여 박수를 치지 않고 덤덤히 앉아 있다가 마지못해 박수를 치었다. 선전위원이라도 주어했기에 다행이었다. (학수 히야(형)까지 둘이 합세하면 당지부 서긴들 어쩐기오? 상순은 독불장군이 될거잖아.) 흥수는 속으로 시퍼런 칼을 갈며 음흉한 궁리를 굴리고 있었다. “병완 서기, 그간 수고 많았습니다. 상순 동무랑 젊은 동무들의 농촌 사업을 많이 지도해주십시오.” 그러자 병완은 사람 좋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지, 난 늙었소. 90고개를 바라보지만 난 의연히 노당원이요. 새 당총지에서 우리 대대를 잘 이끌도록 뒤에서 도와주겠소.” “감사합니다.” 허영주는 마음속으로부터 노서기에게 감사를 드렸다. 사실 병완은 년세가 든 것도 있었지만 모든 고민과 사상부담을 벗어버리려는 장구지책도 있었다. (맹자는 가혹한 정치는 범보다 무섭다고 하지 않았는가? 백열화된 정치시련을 겪을 필요 없이 깨끗이 물러나야지.) 병완은 당지부 서기를 벗어 멘 뒤 얼마나 홀가분하고 거뿐한지 몰랐다. 허영주 부현장은 진수해공사 함흥대대를 시점으로 잡고 대약진을 할 때 우에서부터 자본주의 길로 나아가는 싹이라던 “3자 1포”(시장 등 3가지 자유, 1가지(토지) 도급)를 회복시키기 시작했다. 그는 함흥대대에 내려와서 우의 지시대로 시장자유를 회복하면서 사원들이 마음대로 진수해 시내에 가서 장을 볼 수 있고 자류지에 곡식이거나 남새를 심어 먹어도 된다고 했다. 게다가 집체식당을 폐지하고 집집마다 자유로 자기 집 가마에 밥을 지어 먹어도 된다고 했다. 또 개인 집에 밭을 떼 맡겨 개체로 농사를 제 마음대로 지으라고 했다. 사원들은 위의 눈치를 흘끔흘끔 보면서도 떼 맡은 밭을 기름이 찰찰 돌게 알뜰히 다루기 시작했다. 그러나 사원들은 한쪽구석으로 이러다가 또 자본주의 길로 나가는데 앞장섰다고 투쟁을 받을까봐 겁났던 것이다. 허나 자기 집에서 밥을 끓여 먹으라는 것만은 얼마나 좋은지 몰랐다. 집체 식당에서 멀건 죽물을 마시면서 사회주의 좋다는 노래를 날마다 부르기보다 자기 집에서 자기 구미에 맛게 죽을 끓여 먹는 것이 좋았다. 봄이 짙어가자 풀이나 많이 캐다가 푸성귀라도 마음대로 많이 끓여 보태 먹을 수 있어 좋았다. 사원들은 이런 날이 얼마나 갈 까고 근심이 태산 같았다. . 박성근은 병완을 찾아갔다. “보오, 내 뭐라고 했습니까? 소련에서도 꼴호쯔가 폐단이 많았습니다. 생산 적극성이 내려가고 살기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저 이화영 영감도 그 머나먼 우즈베크에서 여기까지 달아왔지. 그 영감 말이 멀고도 먼 우즈베크에서 소련을 지나오면서 보니 다 그 즛살(모습)이더라오. 우리 여기선 절대 소련에서 한 대로 하면 안되오, 안돼." 그는 덤덤히 앉아 듣기만 하고 일언반구도 대구를 하지 않는 병완의 눈치를 보고 화제를 돌려 이번엔 지청구를 들이댔다. "김서기, 한 가지 청을 들어 주겠습니까? 나에게 씌운 우파 모자를 벗겨 주십시오.” 허나 병완은 의연히 입에 빗장을 지른 채 덤덤히 앉아 있을 뿐이었다. 성근은 이번에는 상순을 찾아갔다. “김 서기, 내 말한 말이 맞지? 내 말은 모두 진리요, 진리! 내 우파 모자를 벗겨 주오. 내 무슨 잘 못 말한게 있소.” 허나 상순도 일언반구 하지 않았다. 갑갑해난 성근은 버럭 고함쳤다. “들었소? 못 들었소? 억울하게 쓴 우파 모자를 벗겨 달란 말이오? 당신들이 뭘 잘 한 게 있소? 숱한 군중들이 집체식당에서 굶어 죽게 해놓고서! 흥!” 참다못해 상순은 입을 무겁게 뗐다. “빈 양철통이 소리가 더 난다고 개뿔도 모르면서 함부로 혀끝을 놀리지 마오! 또 다른 모자를 더 쓰기 전에! 지금 무슨 세월이라고 입을 벌리기만 하면 구렁이 나가는지 뱀이 나가는지 모르고 함부로 지껄이오?!" 그는 상순을 상냥한 얼굴로 보면서 뒤말을 이었다. "입건사만 잘하오. 그럼 우파모자를 벗기는 일은 내 상급당조직에 말해보겠소.” “에이, 씨! 서기 모자를 벗겨주면 벗는 건데. 뭘 그리 질질 끄오? 벗겨주지 않겠으면 그만두오!” 박성근은 엉덩이를 들더니 휑하니 가버렸다. 턱을 쳐들고 가는 저 모양 보소. 딱 나래 부러진 수탉 같지 않은가? 병완은 백열화된 정치마당에서 뒤로 물러나 앉으니 얼마나 편안한지 몰랐다. 게다가 손자 상순이 사원들을 잘 이끌어나가니 속으로 얼마나 대견한지 몰랐다. 어느 날 아침. 그는 상순이 정치에 계속 휘말려들어 혹시 착오라도 변하면 고생할 까봐 적이 근심됐다. (집체식당을 했다가 마스는가 하면 심갱밀식농사법을 했다가 틀렸다고 하지 않는가? 또 언젠가는 다시 집체 식당을 꾸리라고 할지 누가 아는가? 또 언젠가는 사원들에게 떼맡겼던 밭을 찾아내 집체농사를 짓겠는지, 자류지도 빼앗아 생산대에 들여놓고 집체로 다루라고 할지 누가 아는가? 이랬다저랬다 하는 노선을 어느 걸 따라 가야 한단 말인가?) 병완은 곰방대를 뿍뿍 빨았다. 담배연기를 후 내뿜자 세파에 부대끼며 시련을 겪을대로 다 겪어 밭고랑 같은 주름살이 얼기설기 잡힌 볼이 훌쭉해졌다. 이가 다 빠져 너부죽하던 그의 아래턱이 길쭉해진 것이 알렸다. (아무래도 시름놓을 수 없구나.) 병완은 상순을 찾아가려고 엉거주춤 일어났다. 그때 때마침 상순이 대대 사무실 쪽에서 이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할아버지, 아침진지 드셨둥?” “오, 그래.” 상순은 윗방에 들어갔다. “할아버지, 우에서 몇 해에 한번씩 이랬다 저랬다 해서 원, 어떻게 해야 될지 갈피를 잡지 못하겠습니다.” 병완은 곰방대를 들어 빨다가 말했다. “이런 시국에 뭐나 너무 열성을 부리면서 앞장서지 않는 게 좋아." 병완은 사위를 둘러보더니 상순의 귀에 대고 귓속말을 했다. "공자나 맹자나 왈 '중용지도'  일리 있어. 무슨 정치운동이든 젤 앞장서지 않는게 좋아. 알만해? 언제 어떤 정치몽둥이에 맞아댈지 어떻게 아니?” “글쎄 말입니다.” 병완은 속심의 말을 다했다. “공자 성인이 가로사대, ‘자기를 억제하여 례에 맞게 행동해야 한다.’ 이 세월에는 중용지도가 제일이야. 그것이 자기를 지키고 집안을 지키고 인민을 지키는 정치이다.” 상순은 한숨을 땅이 꺼지게 후- 내쉬었다. “그래도 어찌 시비에 틀린 걸 보고 가만 앉아 있겠습둥. 저 흥수랑 봅소. 소불알 달걀처럼 이 볼 쳤다 저 볼 쳤다 하는 게 보기만 해도 구역질이 납니다.” “허허허.” 병완도 가소로워 너털웃음을 웃었다. “그 인간 그렇게 벌레처럼 정치에 앞장서면서 살 놈이야. 옛날 한길성 같은 놈이야. 일본 놈들에게 아부하면서 사는 더러운 버러지 같은 놈이야.” 상순은 할아버지네 집에서 나와 대대 사무실로 돌아가면서 오랜 시련을 겪은 할아버지의 의미심장한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이때 상길이 다가와 상순을 보고 "정치에 작작 삐쳐."하고 충고했다. 그는 조선 명천에서 아홉 살 밖에 안된 자기 손목을 잡고 일본 놈들과 한길성의 추적을 피해 가녿 소서구에 들어온 삼촌이 불쌍했다. 지독한 정치세파에 못이겨 굶어 사망까지 한 삼촌이 한없이 억울했다. "범도 무서워 피할 힘장사 삼촌이 굶어 세상 뜨다니? 정말 더러운 세월이야. 무서운 세월에 정치에 작작 삐치는게 집안을 지키는 수야." 상순은 할아버지와 사촌형의 충고를 심중히 들었다. (정치파도 속에서 주의해야지. 허나 정치몽둥이에 맞아 죽을가 봐 도리에 어긋나는 일을 보고서야 어찌 목을 움추린단 말인가? 사람이 빚을 지고 살아도 어찌 시비에 지고 살겠는가?) 그는 토성 굽이에 가 서서 흐릿한 하늘을 둘러보며 한숨을 후 내쉬었다. “무슨 속 탄 일이라도 있소?” 난데없이 지춘실이 나타나 생글거리며 배죽거렸다. 상순은 거들떠보지 않고 대대 사무실로 성큼성큼 들어갔다. 춘실은 대대 사무실에까지 따라 들어오면서 상순의 팔소매를 쥐어 당겼다. “조용히 말할게 있소." “무슨 말? 흥!” 춘실은 새침해졌다. “연길에 백과부네 집에 간 을준이 결혼한다오. 가보지 않겠소?”  그 말에 상순은 주춤 섰다가 홱 돌아섰다. "백호가 벌써 결혼하게 됐는가?" 그러나 인차 자리를 떴다. “내게 무슨 상관이오?” “몰인정한 사람이라고. 제 새끼도 모르고 그래…?” 이때 지새금이 대대 사무실과 붙은 서쪽 칸에서 나오며 알은체 했다. “어우, 생원이구먼. 사촌여동생도 오고.” 그제야 지춘실은 입술을 쫑긋 하며 상순을 가로 쏘아보더니 토성 밖으로 나가 버렸다. 상순은 아주머니와 알은체 하고 대대 사무실로 들어갔다. 성이 날대로 난 그는 사무상에 마주 앉아 한참이나 씩씩거리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제대로 돼가는 일이 없었다. (효성을 하려고 공안국 국장마저 하지 않고 마을에 돌아왔건만 부모도 온전히 모시지 못했다. 마을 백성들을 배불리 살게 하려고 애를 써도 어디 잘 되는가?) 상순은 세상이 돌아가는 눈치를 보면서도 생산대 우사의 소들을 몽땅 개인 집에 나눠줘 기르게 했고 밭도 몽땅 사원들에게 나눠주었다. 사원들은 이제야 살 때를 만났다고 좋아 야단쳤다. 병완 네는 생산대에서 비녀뿔을 되찾아다가 외양간에 매고 여물을 주었다. 상순은 저녁에 집으로 돌아오면서 코 깜쟁이 암소를 집에 끌고 돌아왔다. 명옥은 코가 새까맣고 눈확도 새까만 코 깜쟁이 암소를 보고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여보, 이전에 어른들이 말하던데. 코 새까만 소는 말을 잘 듣지 않는다던데.” 상순은 벌컥 화를 냈다. “아무 소리나 줴치지 마오!” 명옥은 빗자루로 갈비뼈가 어룽어룽한 소잔등을 쓱쓱 쓸어주면서 “소가 말을 잘 듣지 않아 답답하단 말이오.”라고 했다. 상순은 안해를 닦아세웠다. “당원에게 소만 생겨도 괜찮은게지. 무슨 좋고 나쁘고 말이 그리도 많소?” 명옥은 이때까지 남편의 말이라면 두말없이 꼽싹꼽싹 순종해왔다. 그런데 이번만은 아니었다. “당원은 사람이 아니오? 당원은 욕심이 하나도 없소? 가져 오는 바 하고는 둥글소를 가져 왔으면 얼마나 좋았겠소." 상순은 우사에서 나오면서 아내를 보고 정중하게 말했다. “당원을 아무래나 말하지 마오. 정치문제에 걸리겠소. 당원은 항상 대공 무사해야 하오. 암소라도 생겼으면 입을 꾹 다물고 잘 먹이기나 하오. 노동력이 없는 집에 저렇게 비틀거리는 암소를 줘서야 어떻게 농사를 짓겠소?” 명옥은 “공산당원은 항상 대공 무사해야 한다.”는 남편의 말이 귀에 못이 박힐 지경이었다. “공산당원은 뭐기에? 당원은 자기 집 안속을 차릴 줄도 모르는 사람인가?” 명옥은 도리머리를 흔들면서 혼자말로 중얼거리었다. 코깜쟁이 암소도 이들 부부간이 주고받는 말을 알아듣기나 한듯이 귀를 벌쭉하고 그들 부부를 번갈아 보며 여물을 우물우물 씹어 꿀꺽 삼키는 것이었다.                                                                                      2. 개구쟁이 시절           어느 날, 상순과 명옥이 일하고 맥없이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은숙이랑 애들이 울안의 옥수수 밭에 모여 서서 뭐라고 떠들어댔다. “아이구, 해바라기 불쌍해라.” “이게 살 수 있을까?” “해바라기 끝내 요 새끼한테 들켰다.” 상순과 명옥이 터밭에 들어 가 보니 옥수수 속에 숨어 자라던 해바라기 대가 분질러지지 않았겠는가! 은숙이랑 분질러진 해바라기 대를 일궈세우고 한창 수수대를 대고 새끼줄로 동여맨 후 진흙을 이겨 발라 놓고 있었다. “덕돌이 한 짓이겠구나.” 상순이 세 귀 눈을 부릅뜨자 애들은 아무 말도 못하고 머리를 숙이었다. 덕돌만은 쌔물거리면서 씩씩거렸다. “내보다도 키 더 큰데 해바라기 대는 견디지도 않는다. 야.” 그 말에 명옥은 손으로 덕돌의 엉덩이를 쨩 치면서 호통쳤다. “이 놈아, 어째 해바라기 대를 끊었니? 다시 그러겠니?” “아이 그러게. 해바라기 꽃이 너무 고와서 뜯자고 쥐여 당긴게 뚝 끊어지지 않겠습니까? 으흐흑, 흑흑.” 덕돌은 흑흑 흐느껴 울면서 변명하려고 했다. 상순은 세 귀 눈으로 덕돌을 무섭게 쏘아보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집으로 들어갔다. 그는 하나 밖에 없는 덕돌과 성을 낼 대신에 은숙이가 밥상 우에 퍼 놓은 돌피죽사발을 창문으로 바깥에 훌 내던졌다. 누런 사발이 물웅덩이에 엎어져 고인 빗물에 밑굽만 보일락 말락 빙그르르 돌아갔다. “아니, 돌피죽을 어떻게 쑨 게라고 그렇게 내던지오?” 명옥은 밖에 달려 나가 물웅덩이에 엎어진 돌피죽사발을 주어들고 보았다. 사발은 이발이 빠졌을뿐 다행히 깨지지는 않았다. 허나 돌피죽은 빗물에 쏟아져 먹을 수 없게 됐다. 사실 쌀 고생이 심해 지난해 가을에 은숙이랑 홍자랑 논밭에 나가서 돌피를 뜯어다가 말리어 절구에 찧어 돌피 쌀을 얼마간 장만해두었던 것이다. 보릿고개를 넘기 바쁠 때 금싸래기 같은 돌피 쌀이었다. 애들은 모두 기분이 상해 무서운 아버지 세 귀 눈을 피해 벽 밑에서 머리를 숙이고 훌쩍거렸다. 명옥은 이발이 빠진 사발을 들고 들어오면서 아까워 두덜거렸다. “싸울 때는 싸우더라도 죄 없는 그릇을 왜 내던지오?” “뭐라니?!” 상순은 점심을 먹을 기분이 없어 숟가락을 밥상에 탕 놓았다. 그는 담배쌈지를 꺼내 담배를 말아 물고 부시를 쳐서 불을 붙이더니 하염없이 창 밖을 내다보면서 무슨 궁리를 하고 또 했다. 은숙이 돌피 죽을 퍼다 밥상에 재차 올렸지만 상순은 숟가락을 들지도 않았다. 상순은 일이 잘 되지 않아 신경질이 나면 집에 와서 가정기물을 부시지지 않으면 마구 내던졌다. 아버지가 굶어 세상을 뜬 후에는 더욱 신경이 좋지 않았다. 글쎄 약 한첩도 온전히 써주지 못하고 세상을 뜨게 했으니 아들된 마음이 오죽하랴. 그때 비를 맞으면서 순자가 집으로 돌아왔다. “아버지, 난 농학원에 붙었습니다.” “뭐? 우리 맏딸 대학에 붙었어?” 상순은 후닥닥 일어나 순자의 손에서 입학통지서를 받아 쥐고 보면서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야, 우리 맏딸 정말 장하구나. 우리 대학생 딸!” 오늘 따라 처녀 티가 나는 맏딸 순자가 얼마나 고운지 몰랐다. 금시 돌피죽 사발을 내던지던 상순이 같지 않게 만면에 춘풍이었다. 불티가 튕기던 세귀눈에는 전에 없이 자애로운 빛이 반짝였다. “순자야, 대학에 가서 공부 잘해라. 너 아비는 가난해 소학교 문에도 가보지 못했다. 만약 공부를 너만큼이라도 했으면 여기서 땅을 파고 있겠느냐?” 그 말에 순자가 한마디 덧붙였다. “아버지는 사회에서 군정대학을 나오지 않았습니까? 아버지야 말로 사회대학 대학생입니다.” “저 윗마을 봉선 여동생 네 성환은 어느 대학에 가니? 그 앤 학교에서 A생인데.” 상순의 물음에 순자는 고개를 숙이면서 도리머리질을 했다. “참 안됐습니다. 성환이, 그 앤 페결핵으로 앓아서 대학시험을 치지 못했습니다.” 울먹울먹하면서 말끝을 흐리는 순자를 보고 상순도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스쳐 지나갔다. “참 아까운 일이구나. 우리 집안에 이름난 수재감인데.” 사실 성환은 청화대학을 목표로 지나치게 몸을 돌보지 않으면서 밤늦도록 공부했기에 폐결핵에 걸려 각혈까지 하여 입원해 치료를 받고 있는 중이었다. “저 삿갓봉 집 경산은 어떻게 됐니?” 순자는 다소곳이 숙였던 머리를 들면서 말했다. “저 윗집 경산인 나와 함께 농학원에 가게 됐습니다. 그 앤 수의학부로 가고 난 농학부로 가게 됐습니다.” “오, 경산인 공부를 잘 하더니 끝내 대학에 붙었구나. 그런데 우리 조카 철국이랑 철봉이랑 안됐구나. 좀 공부를 더 했더라면 대학에 갔겠는 걸 말이야.” 상순은 순자의 대학입학통지서를 명옥에게 주고 나서 은숙에게 머리를 돌렸다. “미안하구나. 널 13세 때부터 집에서 일을 시켜서.” 은숙은 쌍까풀눈을 똑바로 뜨고 말했다. “아버지, 언니나 공부하면 됩구마. 집이 가난한데 언제 내까지 공부하겠습둥?” 은숙의 눈에 눈물이 핑그르르 도는 것을 보고 부모들은 가슴이 뭉클했다. 명옥은 순자에게 입학통지서를 돌려주고 나서 “은숙은 이제라도 농중에 다니면 안 될까?” 하고 남편을 쳐다보았다. “은숙은 어려서부터 글도 잘 쓰고 산수도 아주 잘했지.” 상순은 은숙을 돌아보았다. “농중에 가서 공부해라.” 순자도 옆에서 그러라고 눈짓했다. 허나 은숙은 도리머리를흔들었다. “부모들의 호의는 감사합니다.”라고 하더니 도리머리를 흔들면서 “언니와 하나 밖에 없는 남동생 덕돌이나 공부를 하면 됩니다.” 부모는 은숙의 말이 고맙긴 했지만 평생 자식에게 공부를 시키지 않은 죄를 질까봐 기어이 은숙을 농중으로 다니라고 했다. 그리하여 이튿날부터 은숙은 2년제 농중을 다니게 됐다. 농중을 다니면서도 은숙은 농망기만 되면 청가를 맡고 집에 달려와 부모를 도와 벼모 내기로부터 김매기, 가을걷이를 도왔다. 소낙비가 구질구질 내리는 어느 날이었다. 시 공안국에서 민경을 하는 강운룡과 옥순이 상순의 집에 놀러 왔다. 최옥순은 명옥의 넷째삼촌의 셋째딸이었는데 훤칠한 키에 어글어글한 쌍까풀눈이랑 꽤나 곱게 생겼다. 그녀는 간장물 같은 빗물이 벽을 타고 줄줄 내려 사발과 대야로 받아내는 시골의 초가집에 새 신랑을 데리고 온 것을 후회했다. 명옥은 사촌여동생보다도 새 생원을 보기 민망했다. 새 생원이 왔는데 집에 돌피 죽을 내놓고 대접할 만한 쌀과 풀채도 변변히 없어 궁색하기 그지없었다. 그래도 운룡은 허물하지 않고 사나이 대장부답게 능쟁이를 데쳐서 올린 채에 자기기 사온 술을 동서인 상순과 함께 마주 앉아 쭉쭉 마셨다. “형님도 한잔 내오.” 운룡이 술병을 쳐들고 상순의 잔에 부으려고 했다. “아니, 난 한잔만 마셔도 취하오.” 상순은 메부리코 운룡을 마주 보며 정색해 손사래를 치며 뒤로 물러앉았다. 채가 없어서는 나무리지 않던 운룡은 형님이 술을 받지 않자 상을 찡그렸다. “형님, 원래 술을 마시지 않았소?” “아니오.” 상순은 술병을 받아 운룡에게 부어주고 자기 잔에도 좀 부었다. “이전엔 좀 마셨소. 헌데 사회 공작을 하면서 술을 점점 마시지 않았소. 이젠 습관이 돼서 술이란 말만 해도 얼굴이 벌개나면서 취한단 말이오.” 그러자 운룡은 “형님, 한잔만 드오.”라고 했다. 상순은 마지못해 한잔을 드네 했다. 운룡은 술이 서너 잔 들어가자 말이 많아졌다. “그럼 그렇겠지. 사회 공작을 하려면 술도 마시는게 옳소. 술도 교제 도구인데 술을 마시지 않으면 교제가 없이 어떻게 공작을 하오. 옆에 친구가 없고 기반도 없이 어떻게 사오? 참.” 그러나 상순은 자기 관점이 있었다. “술을 마시면 실수를 할 까봐 마시지 않았소. 지금 세상 정치풍파가 얼마나 사납소? 혀를 잘못 놀리면 우파 모자를 쓰고 투쟁받고 노동개조를 해야 하는 판이 아니고 뭐요?” 운룡도 술 맛이 없어 술잔을 내려놓으면서 한숨을 후 내쉬었다. “오늘 점심상에야 정치 투쟁이 없지 않습니까? 그래두 난 형님이 영월구 공안국 국장을 한적이 있어 마음이 통하오.” “가난한 때 와서 제대로 대접하지 못해 미안하오. 이 다음 내 농사를 잘 지어놓으면 감자랑 가지러 오오.” “감사하오.” 운룡과 상순은 돌피죽을 한 사발씩 드네 마네 하고 그만두었다. 오후에 비가 멎고 날이 기적적으로 개였다. 운룡은 새 색시를 태우고 시내로 쥉쥉 돌아갔다. 명옥은 옹색한 살림에 손님이 오는 것이 두려웠다. 운룡이 가자 그녀는 한숨을 호- 길게 내쉬었다. 그녀는 간장물 같은 빗물이 흘러내리는 바람벽과 집 손질도 방정히 하지 않는 남편을 번갈아 보며 한숨만 호-호- 내쉬었다. 상순은 바깥에서 정신을 놓고 삽으로 물도랑을 파면서 장난 치는 덕돌을 내다보며 명옥에게 말했다. “저 자식, 이젠 일곱살을 먹었으니 학교에 일찍이 붙이기오.” “저 어린 걸 어떻게 붙이오? 괜히 큰 애들한테 얻어맞기나 하겠소.” 명옥은 가마를 부시다가 돌아앉았다. “일찍이 공부를 시켜야 남의 애들보다 셈이 일찍이 드오.” “그래도 그렇지. 너무 어리오. 급하기도 우물터에 가서 숭늉을 달라 할 지경이구먼.” 명옥은 내키지 않아 했다. 허나 상순은 마음을 굳게 먹었다. “저걸 보오. 집에서 저런 장난이나 했지. 배울 게 있소. 애비 어미 삽이나 괭이로 땅을 파는 게나 배웠지. 언제 철이 들겠소?” 상순은 명옥이 반대해도 일하고 돌아오면 덕돌을 불러 품에 안고 목에 팔베개를 베워주고 이러루한 물음에 대답하는 것부터 배워 주었다. “우리 하나 밖에 없는 아들 이름이 뭐냐?” “덕돌.” 덕돌은 까만 집안에서 아버지 물음에 잘 대답도 했다. “성은 뭐냐?” “김씨입니다.” “본은 뭐냐?” “영월 김씨.” “몇 살이냐?” “일곱 살입니다.” “만으로는 몇살?” “여섯살입니다.” “아버지 이름은 뭐냐?” “아버지는 김상순, 어머니 이름은 최명옥입니다.” “허허, 그 자식 총명하구나.” 상순은 아들을 꼭 껴안으면서 이마에 뽀뽀를 해주었다. “우리 하나 밖에 없는 아들 이담 공부를 잘 해라. 응?” “예, 아버지와 어머니 말씀을 잘 듣고 공부도 일등 하겠습니다.” 상순은 “그래야지. 아버지 몫까지 네가 다 공부를 해야 한다. 알만하지?”라고 다짐을 땄다. 덕돌은 아버지 품에 안긴 채 “예. 그런데 아버지, 내 어째 아버지 대신 공부를 해야 합니까?” 하고 천연스레 물어서 누나들도 구들에 누워 듣다가 키득거렸다. “이 자식아, 아버지와 어머닌 집이 가난해서 어려서부터 일하다나니 학교로 가지 못했단다.” “허, 별나다.” “넌 아직 잘 모른다. 그땐 집에 먹을 쌀도 없는데 언제 학교에 낼 돈이 있었겠니? 넌 아버지와 어머니가 굶어 허리띠를 매고서라도 공부를 시킬 테니 공부만 잘 해라. 알았지?” “예, 공부를 잘 하겠습니다. 날 학교에 보내 줍소.” “됐다. 이젠 입 다물고 자라.” “예.” 까만 집안은 조용해졌다. 이윽고 덕돌은 꿈나라로 들어가 코를 다랑다랑 곯았다. 그는 꿈에 학교로 가서 공부하는 푸른 꿈을 꾸었다. 덕돌은 꿈도 많았지만 일도 많이 치는 개구쟁이였다. 이튿날, 상순과 명옥이 일을 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었다. 덕돌은 두 손을 벌리고 달려오며 소리쳤다. “엄마, 엄마, 내 고양이를 죽였소.” “뭐라고?” 명옥은 덕돌을 안고 집 울안으로 들어서다가 깜짝 놀랐다. 아니, 글쎄 울바자에 고양이 목을 매달아놓지 않았겠는가? “아니, 이 자식아,” 상순은 말이 더 나가지 않았다. 덕돌은 울안에 있는 윗집의 철주를 가리키면서 종알거리었다. “내 양, 저 철주 말대로 고양이를 다 죽였소.” “뭐? 철주 시키는 대로 했어?” “양, 철주 말하는 게 자기 집 고양이를 죽이는 게 영 재미있더라고 하지 않겠소?” “이 놈 새끼! 철주가 똥 먹으라면 똥 먹겠니? 줏대 없이!” 상순은 아내 품에 안긴 덕돌을 욕하면서 엉덩이를 찰싹 쳤다. 그런데 윗집 철주가 제 풀에 놀라 겁을 집어 먹고 “아이쿠머니!” 하고 종 주먹을 쥐고 뺑소니쳤다. 덕돌은 한 대 얻어맞고 와 하고 울음보를 터뜨렸다. 상순은 집에 들어간 후 덕돌을 보고 을러멨다. “이후엔 철주하고 놀지 말라.” “심심한데 그래 누구와 놀라오?” “그 애 할아버지부터 애비까지 다…” 명옥이 외까풀 눈을 치뜨자 상순은 말끝을 삼켜버렸다. 윗집 철주라는 애는 역사문제가 있는 이화영의 손자요 병진의 아들이었는데 어찌나 쏠락거리면서 말썽을 일으키는지 동네방네에 소문이 있었다. 방아 호박에 똥을 싸지 않겠는가, 똥을 누는 애를 물 앉혀 놓지 않겠는가. 별의별 말썽을 다 일으켰다. 그런 불량한 철주와 함께 놀면 덕돌도 나쁘게 번질까봐 근심됐다. 설상가상으로 병진은 또 먼 집안 집 조카사위지만 심술이 바르지 않아 상순은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어느 날, 병진은 자기 집 뿔이 위로 난 둥글소 뿌죽이와 조개덕 5대 황시연이네 황소와 싸움을 시켰다. 그리하여 5대의 황소가 그만 뿌죽이한테 박혀 한쪽 뿔이 빠져 피를 줄줄 흘렸다. 그때 상순이 달려가면서 말렸다. “조카사위, 이거 무슨 짓이오? 한창 밭갈이를 할 소들을 죽일 예산이오?” 뿌죽이와 5대의 황시연네 황소는 서로 떠받으며 싸워 피를 흘리면서도 물러서려고 하지 않았다. 상순은 황급히 벼 짚단을 둬 개 얻어다가 불을 달아 뿌죽이와 5대 황시연네 황소 사이에 따라가면서 들이댔다. 활활 타오르는 불에 대가리 털이 타들어가서야 소들은 싸움을 멈추고 갈라졌다. 허나 5대의 황소는 피를 너무 많이 흘린 탓에 며칠 후에 죽고 말았다. 5대의 황시연을 비롯한 사원들은 병진을 욕하면서 대대 당총지 서기이자 치보 주임인 상순을 찾아와 떠들어댔다. “병진은 마땅히 황소 값을 내게 해야 하오" 상순은 파출소에 알렸다. 파출소 민경이 와서 조사한 후 병진을 보고 죽은 황소 값 800원을 내라고 판결을 내렸다. 그때 돈으로 800원은 적지 않은 돈이었다. 허나 남의 소를 싸움시켜 죽였기에 울며 겨자 먹기로 내지 않으면 안 됐다. 병진은 죽인 황소 고기를 팔아 얻은 돈을 제하고 나머지 300원을 물어야 했다. 불시에 돈을 낼 수 없어 늙은 비술나무 밑의 두 간 집을 팔지 않으면 안 됐다. 동지섣달에 허망에 나앉게 된 병진은 핍박에 의해 양산에 오르듯이 부득불 한족들이 사는 조개덕에 가서 토성안집 한족 장지주네 사랑방을 빌어 곁방살이를 하지 않으면 안됐다. 그 일로 한이 맺힌 병진은 쩍하면 마을 사람들과 심술을 부리었던 것이다. 상순은 조카사위지만 늘 퉁방울눈에 웃음 짓고 “아즈바이, 아즈바이.”하면서 다가드는 병진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덕돌이 병진의 아들 철주와 노는 것도 말렸던 것이다.      상순은 애를 먹이던 덕돌을 생각하면서 도롱도롱 코를 골며 자는 덕돌의 머리를 매만지면서 꼭 끌어안았다. “여보, 얘를 인차 학교에 붙이기오.” “양, 알았소. 밤도 깊었으니 어서 쉬오.” 두 간 자리 집안에는 마흔에 낳은 하나 밖에 없는 아들 덕돌에 대한 상순과 명옥의 푸른 꿈이 그윽한 향기를 풍기면서 어둠을 타고 바깥으로 나가 하늘 끝까지 훨훨 날아오르고 있었다. 상순은 낮에 밭일을 하고 돌아오면 저녁에 덕돌에게 공책을 매준다, 자대를 대고 줄을 쳐준다 하면서 무등 관심했다. 그는 또 “기윽 ㄱ, 니은 ㄴ…”를 가르친다 하면서 덕돌을 학교로 붙일 준비교육을 했다. 그때 상순이네 가난한 생활형편에서 덕돌에게 새 공책 하나 갖춰준다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처럼 어려운 일이었다. 상순이네 대학을 간 맏딸 순자를 내놓고 홍자와 신자 그리고 성숙은 늘 공책이 아까와 공책에 연필로 살짝 가늘게 첫 벌을 썼다. 첫벌을 다 쓰면 고무가 없어 대신 손가락 끝에 침을 묻혀 첫 벌에 살짝 쓴 글씨를 살살 지우고 좀 더 진하게 두 벌로 썼다. 나중에는 만년필로 세벌 글을 썼다. 이렇게 공책 하나에 세벌을 쓰곤 했다. 그러니 공책 하나가 남들의 공책 세개 노릇을 담당한 셈이었다. 상순이 대대 사무실로 나가면 대신 명옥이 덕돌에게 1, 2, 3, 4를 가르치지 않으면 손을 꼬부렸다 폈다 하면서 “하나에다 하나를 합하면 몇이냐?” 하고 물으면서 산수도 가르쳤다. 부모가 없을 때에는 누나들인 은숙과 홍자 그리고 신자, 지어 덕돌보다 네 살 밖에 이상이 아닌 성숙까지 덕돌을 가르쳤다. 총명한 덕돌은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누나들이 하나를 배워주면 둘을 알 지경이었다. “이젠 학교에 갈만하다.” 명옥은 총기 좋은 덕돌을 대견스레 바라보며 흐뭇해했다. 그녀는 양손에 덕돌과 시조카 네 아들 성욱의 손을 잡고 즐겁게 함흥소학교로 찾아갔다. “엄마, 우리 어디로 갑니까?” “너희들을 학교에 붙이러 간다.” “학교에?” “응.” “야, 좋다.” 덕돌은 엄마 왼손을 잡고 외발띰을 하며 좋아하는 성욱을 보면서 “야, 성욱아, 우리 학교에 간단다. 얼마나 좋니?” 하고 입이 함박만 해졌다. 성욱도 “그래, 우린 이젠 학생이다. 야, 야!” 하고 고사리 손을 쳐들고 흔들면서 종알거렸다. 덕돌은 엄마를 쳐다보면서 물었다. “엄마, 이제 학교에 가면 어째야 합니까?” “선생님이 묻는 걸 잘 대답해야 한다. 그래야 학교에 붙을 수 있다.” 성욱은 할머니를 쳐다보면서 “선생님이 뭘 묻습니까?” 하고 물었다. “이름이랑 나이랑 부모 이름이랑.” “아, 알만합니다.” 성욱은 자신 있게 말했다. 과연 명옥이 두 애를 데리고 교무실에 들어서자 교무처 선생님은 덕돌에게 진짜 성과 이름이랑 나이랑 부모의 이름이랑 이것저것 묻더니 “순자 동생이구먼.”라고 하면서 머리를 끄덕였다. “순자의 동생들은 모두 총명해 공부를 잘 합니다. 덕돌은 나이가 어려도 학교에 붙여도 되겠습니다.” 그 다음 성욱의 차례였다. 선생님이 덕돌과 똑 같이 묻자 성욱도 다 척척 대답했다. 나중에 선생님은 그 애들에게 노래를 시켜 보았다. 그러자 덕돌과 성욱은 목청을 돋구어 노래를 불렀다.   고개고개 고갯길 학교 가는 길 …   시간을 보고 교무실에 들어온 오옥선 선생님을 비롯한 여선생들은 덕돌과 성욱이 부르는 노래를 듣고 박수쳤다. 선생님들이 춰주자 덕돌은 사기 났다. “선생님, 난 한 자릿수 합하기도 할 줄 압니다.” “그래?” 교무처 선생님은 신기한 눈길로 어린 덕돌의 초롱초롱한 깜장 눈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하나에 하나 합하면 몇이니?” “둘입니다.” “하나에 셋을 합하면?” “넷입니다.” 그 다음에는 선생님이 묻기도 전에 덕돌은 아빠와 엄마 그리고 누나들이 배워준 걸 내리 외웠다. “…아홉에 아홉을 합하면 열여덟입니다.” “와-” 선생님들은 입을 하 벌리고 박수갈채를 보냈다. 교무처 선생님은 성욱을 보고 “너도 할 수 있지?” 하고 물었다. 성욱은 고사리 손으로 뒷덜미를 긁적거리면서 “난 하나에 하나를 합하면 둘이란 것 밖에 모릅니다.”라고 했다. 교무처 선생은 머리를 끄덕였다. “둘 다 학교에 붙입시다. 그런데 너무 어려서 한 살이나 둬 살씩 더 큰 애들 속에서 삐칠 수 있겠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명옥은 “근심하지 마십시오. 공부만 잘 하면 됩니다.”라고 했다. 그리하여 덕돌과 성욱은 일곱 살에 함흥소학교에 붙었다. 조개덕에서 일곱 살에 학교에 붙은 애들은 그들 외에 허동림과 철주가 더 있었다. 한 마을에 사는 금옥은 조카 덕돌을 고와 항상 맛나는 음식만 생기면 자기 집에다 업어다가 먹였다. 어느 하루 이른 아침이었다. 금옥은 일찍이 찾아와 아직 잠에서 깨나지도 않은 덕돌을 옷을 입히더니 업고 자기 집으로 향했다. “고모, 오늘은 뭘 맛있는 걸 했습니까?” 금옥은 잔등에 업힌 덕돌의 엉덩이를 다독이면서 “우리 큰 조카님이 좋아하는 두부를 했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야, 맛있겠다.” 덕돌은 벌써 하얀 두부를 먹을 생각을 앞세우면서 군침부터 삼켰다. 집에 들어서면서 금옥은 “우리 큰 조카 왔습구마.” 하고 말하면서 덕돌을 잔등에서 내리어 놓았다. 고모부 최학철은 퉁방울 같은 눈에 상냥한 웃음을 띠우면서 반겨맞았다. “어이구, 우리 덕돌이 왔구나.” 철국은 말을 타고 집 문 앞을 지나가다가 반겼다. “덕돌이 왔냐?” “양, 형님! 나도 말을 탈까?” 덕돌은 마구 바깥으로 나가면서 소리쳤다. 급해 맞은 금옥은 따라나오면서 소리쳤다. “덕돌아, 말은 이담 크면 타고 들어와 두부나 먹어라.” “예.” “에이유, 우리 큰 조카는 말도 참 잘 들어.” 금옥은 집에 되들어오는 덕돌에게 먼저 치하가 끝이 없었다. 그는 김이 문문 나는 네모 난 함지 안의 두부를 식칼로 쭉쭉 줄을 쳐 끊으면서 이렇게 되뇌었다. “우리 덕돌은 모나게 공부를 잘하라고 귀퉁이모를 주자.” 금옥은 네 귀의 두부모를 몽땅 사발에 담아 덕돌에게 주었다. 그러자 인자누나는 외사촌동생이 귀여워 웃음을 보냈다. 덕돌보다 한 살 지하인 인숙과 네 살 지하인 국범은 자기네도 귀퉁이모를 먹겠다고 손을 내밀었다. 덕돌은 자기 사발의 두부모를 하나씩 나눠 주면서 “옳다, 너네도 먹고 공부를 잘 하자.”라고 했다. 그러자 고모부 학철은 덕돌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혀를 끌끌 찼다. “덕돌은 속에 영감이 들어앉은 어린 영감이야!” 집안에서 항상 덕돌을 보고 공부를 잘 하라고 치하해주고 타이른 덕분인 것 같았다. 덕돌과 성욱 그리고 동림은 일곱 살에 학교에 붙었지만 나이가 두 살이나 이상인 애들보다도 공부를 잘 했다. 덕돌은 항상 100점을 맞은 시험지를 타가지고 집으로 돌아와 아빠와 엄마에게 바쳤다. 큼직하게 쓴 100점 맞은 시험지를 들고 보면서 상순과 명옥은 기뻐 어쩔 줄 몰라 했다. 어느 날 점심, 덕돌이 함흥소학교에 갔다가 집에 들어서자마자 환성을 질렀다. “엄마, 엄마. 난 달래기 해서 2등을 했습니다.” 덕돌은 공책 하나를 어머니한테 내밀면서 “그래서 이 공책을 타왔습니다.”라고 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자 명옥은 죽을 끓이다가 덕돌을 안고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물었다. “우리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이 참말 대단하구나. 그래 몇이 달았니?” “둘이 달았습니다.” “뭐라고?” 명옥은 상을 찌푸렸다. “둘이 달아 2등이면 꼴찌 아니야?” “예?” 덕돌은 자랑을 한다는 것이 꼴찌라고 하자 울먹해졌다. 그러다가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엄마, 그런 게 아닙니다. 처음에는 숱한 애들이 달았는데 나와 성욱만은 끝까지 달았습니다.” “그래 달래기 시작할 때 다른 애들도 있었니?” “예. 처음에는 일곱이 달았습니다. 그런데 다른 애들은 끝까지 닫지 않았는데도 뭐?” 덕돌은 입이 뾰족해 종알거렸다. “다른 애들은 끝까지 닫지 않고 뭘 했니?” 명옥이 이상해 하자 덕돌은 웃으면서 뒷말을 이었다. “다른 애들은 닫다가 중간쯤에 가서 ‘엄마!’ 하고 소리치면서 응원하는 엄마한테로 두 팔을 벌리고 달려가 안겼습니다.” “그랬니?” “예.” “호호호. 거 참 우스운 일이구나.” “다른 애들은 엄마한테 가서 사탕을 달라해 먹었습니다. 헌데 성욱과 나는 엄마네 응원하러 오지 않은 바람에 오 선생이 소리치는 흰 끈을 든 데로 끝까지 달려갔습니다. 그래서 이 공책을 상으로 탄 겁니다.” 덕돌은 엄마 품에 안겨서 공책을 만지작거리며 종알거렸다. “허허, 정말 우리 아들 장하다! 공부도 잘하지 달래기도 끝까지 달아 상까지 탔구나.” 명옥은 늘그막에 낳은 아들이 참말 장하기만 했다. 어느 날 덕돌은 강변에 가서 놀다가 물이 찰랑대는 한쪽 고무신짝에 모래무치 한 마리를 담아 들고 코노래도 흥겹게 흥얼거리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엄마, 엄마, 내 물고기를 잡아 왔습니다.” “뭐라고? 우리 아들 참말 장하구나. 이번에는 물고기를 다 잡아 왔구나.” 명옥은 덕돌이 고무신짝에 담아온 모래무치를 희구해 들여다보며 덕돌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때 상순이 담배를 말아 붙이면서 씨물씨물 웃으면서 빈정거렸다. “덕돌아, 그 물고기 눈이 멀지 않았니?” 덕돌은 그 말을 딱 곧이듣고 고무신짝 안을 한참이나 들여다보면서 “아니, 눈이 둘 다 있습니다. 어디 상한데도 없습니다.” “허, 이상하다. 두 눈이 다 있는 물고기 어떻게 네 손에 다 잡혔을까?” 그러자 덕돌은 사실대로 말했다. “아버지, 요건 동림이 잡은 물고기를 한쪽 고무신짝과 바꾼 겁니다.” “뭐라고?” 그제야 명옥은 덕돌의 맨 발을 내려다보고 소스라쳤다. “요놈 새끼야! 한쪽 고무신짝을 어쨌니?!” 명옥은 덕돌의 엉덩이를 쨕쨕 치며 소리쳤다. “동림을 주고 이 모래무치를 가졌습니다.” “아이고, 요놈새끼를 어쩌니?” 명옥은 덕돌의 손에 든 고무신짝을 탁 치며 욕했다. 그 바람에 덕돌은 왕 울음보를 터뜨렸고 모래무치가 땅 바닥에서 팔딱팔딱 뛰었다. 상순은 세귀눈을 치뜨더니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동림이 어디 있니?” “저기 태평강에 있습니다.” 덕돌은 손가락으로 문 밖을 가리켰다. “가자!” 명옥은 덕돌의 손을 잡고 태평강으로 쏜살같이 달려갔다. 그때 동림은 한창 태평강가의 모래톱에서 물도랑을 파면서 놀고 있었다. 명옥은 동림을 보자 황급히 “야, 덕돌의 신을 어쨌니?” 하고 물었다. 그러자 동림은 대수롭잖아 하면서 “내 모래무치와 바꾼 신이라고 저기 물에 배처럼 동동 띄워 보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뭐라고?!” 명옥은 어이없어 동림을 보고 소리쳤다. “아이고, 그 신을 어떻게 산 게라고 그러니?” “내 신인데 무슨 내 마음대지. 뭐.” 명옥은 물도랑을 파면서 거들떠보지도 않는 동림한테서 눈을 떼더니 출렁거리면서 흐르는 강물을 살피면서 아래쪽으로 달려갔다. 허나 명옥이가 강물을 따라 2, 3리나 내려가면서 아무리 찾아보아도 덕돌의 고무신짝은 보이지도 않았다. 화가 날대로 난 명옥은 돌아와 덕돌의 엉덩짝을 마구 패댔다. “너 다시 신짝을 가지고 아무 거나 바꾸겠니?” “다신 아이 그러겠습니다.” 덕돌은 엉엉 울면서 다짐했다. 명옥은 억이 막혀 웃지도 울지도 못하고 통곡치는 덕돌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그 덕분에 덕돌은 온 여름과 가을에 맨 발 바람으로 학교를 다니지 않으면 안 됐다. 서발 막대를 휘저어도 거칠 것 없이 살림형편이 가난한 상순이네는 하나 밖에 없는 아들에게 고무신짝 하나 사줄 돈도 없었던 것이다. 사실 우에서 생산대에 보조금이 내려와도 대공무사한 상순은 마을에서 제일 가난하나 다름없으면서도 자기에게 차례진 보조금을 항상 마반산 집 할머니거나 오보 호와 열사가족인 오옥선의 부모에게 더 드리고 일전 한 푼 가지지 않았던 것이다. 하여 귀여운 아들에게 고무신을 사줄 돈도 없었던 것이다. 명옥은 돈을 꿔서 검정고무신을 사주었다. 그 돈을 무느라고 후에 명옥과 은숙은 숱한 가마니를 짜야 했다. 명옥과 은숙은 가마니를 짜다가도 둬 뽐 짜고는 쉬면서 역을 틀기를 시합했다. 그런데 항상 명옥이 은숙에게 졌다. 옆에서 지켜보던 덕돌은 엄마가 졌다고 “왕~”하고 울음보를 터뜨렸다. 덕돌이 우는 것을 보려고 은숙은 제꺽 역을 틀어 엄마를 지워놓고 덕돌을 놀렸다. “또 울어. 울어! 이 울보야. 해해해.” 은숙이 이렇게 놀리면 죄꼬마한 덕돌은 “엄마, 기실 엄마 이겼소. 빨리 틀어 뭘 하오? 저렇게 밉게 틀면서. 엄마 튼게 더 곱소.”라고 했다. 그 말에 명옥과 은숙은 둘 다 가마니를 짜다가 그만두고 덕돌이 대견해 마주 바라보며 웃었다. 명옥은 은숙과 숱한 가마니를 짜서 덕돌에게 새 신을 내밀면서 신신당부했다. “이담부터 다시는 신이나 옷으로 다른 걸 바꿔선 안 돼. 온 동삼에 맨발로 어떻게 학교로 다니니?” 덕돌은 머리를 끄덕이더니 그때부터 덕돌은 신 건사를 잘하느라고 무척 왼 심을 썼다. 항상 어느 군일 집으로 가도 두 짝 신을 신끈으로 한데 무어 문 꼬리에 대롱대롱 매달아 놓았다. 그러자 집안 집 어른들은 문 꼬리에 대롱거려 불편해 하면서도 덕돌을 희구해 했다. “조놈은 뭘 닮아서 신 건사를 이렇게 무섭게 하니?” “쯧쯧쯧, 애는 무서운 애오.” “저 앤 고무신으로 물고기를 바꿔 먹더니 다신 신을 잃어먹지 않겠소.” “허허허.” “호호호.” 어른들은 덕돌과 문고리에 땅땅 매단 신을 번갈아보면서 웃고 떠들어댔다. 어느덧 눈보라가 윙윙 휘몰아치는 겨울이 다가왔다. 다른 애들은 털모자를 쓰고서도 귀가 얼까봐 털실장갑을 낀 두 손으로 귀를 잡고 학교를 다녔다. 허나 덕돌은 털모자가 없어 항상 네 귀 수건으로 머리를 동이고 귀를 얼면서 학교를 다녔다. 명옥은 학교로 갈 때면 항상 무릎을 꺾고 쪼그리고 앉아 두 손으로 덕돌의 두 볼을 싸쥐고 신신당부했다. “덕돌아, 귀 시려도 절대 울지 말라.” “예.” “울면 눈물이 얼어붙으면 눈을 뜨지 못해.” “예? 눈을 뜨지 못한다고?” “응. 그래. 그리고 귀가 시려도 손으로 만지지 말라. 귀가 더 언다.” “예. 꼭 그럴게.” 덕돌은 집에 찾아온 성욱과 함께 학교로 떠나가려다가 몸을 돌렸다. 명옥은 학교로 가라고 손을 저었다. 그런데 덕돌이 쪼르르 되 달려왔다. “왜?” 명옥은 이상해 했다. 덕돌은 성욱을 가리키면서 “엄마, 나도 성욱이 쓴 거 같은 털모자를 사주오.”라고 하면서 몸 동아리를 배배 탈면서 떼를 썼다. “얘…” 명옥은 코마루가 시큼해나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하나 밖에 없는 아들에게 돈이 없어 털모자 하나 사주지 못하는 어머니 마음이야 오죽했으랴. 가슴을 쇠 깍쟁이로 마구 허비는 것 같이 아팠다. “후에 엄마 돈을 많이 벌어서 사주마.” 명옥은 덕돌을 겨우 달래며 동구 밖에까지 손을 쥐고 가서 학교에 보내고야 돌아서면서 치맛자락으로 눈물을 훔치며 어깨를 들먹였다. 덕돌은 수업이 끝나면 엄마 부탁대로 학교 복도로 해 넷째누나 신자네 교실에 가서 문을 똑똑 두드렸다. 선생님이 나오면 “신자누나를 찾습니다.”라고 했다. 신자는 나와서 덕돌이 가져온 네 귀 수건으로 초롱초롱한 눈을 내놓고 부상병처럼 머리를 싸매주었다. 박달나무가 얼어 터질 맵짠 추위에 덕돌은 귀가 얼어들어 쨍 아파나 참을 수 없었다. 허나 눈물을 흘리면 얼어붙어 눈을 뜨기 어렵다던 엄마 말이 떠올라 억지로 눈을 크게 뜨고 집으로 달음박질쳐 돌아오곤 했다. 벌써 이맘때면 학교에서 아들이 돌아오겠다고 명옥은 동구 밖에서 기다리다가도 포대기에 아들을 싸안고 집으로 돌아 올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허나 엷은 수건은 귀여운 아들애의 얼어드는 귀를 보호해줄 수 없었다. 덕돌은 끝내 귀가 얼어들어 귀방울에서 진물이 흥건히 흘러내렸다. 그 살색을 잃고 거멓게 번져가며 진물이 흐르는 아들의 귀를 보는 상순과 명옥은 칼로 어이는 듯이 마음이 아팠다. 어느 하루 상순이가 당 지부 회의를 열고 당원들에게 “지부생활”에 난 상급의 문건정신을 전달하려고 찾으니 없지 않겠는가! “아니, ‘지부생활’이 어디로 갔어?” 아무리 찾아도 없었다. 그런데 농궤 뒤 벽밑에 쌓여있는 딱지를 보고 깜짝 놀랐다. “지부생활”을 뜯어 만든 딱지가 아니겠는가! “덕돌아, 여기 오라!” 독이 서린 아버지의 세 귀 눈을 바라보면서 덕돌은 겁부터 집어먹었다. “요놈새끼, 책을 뜯어 딱지를 만들다니?” 상순은 덕돌의 귀 쌈을 찰싹 갈겼다. 덕돌은 대뜸 얼얼한 얼굴을 만지면서 통곡을 쳤다. 그러자 명옥은 “애를 어째 이렇게 모질게 치오?”라고 기절 난 소리를 치면서 덕돌을 훌 안아갔다. 상순은 세 귀 눈을 흘기면서 “애를 그렇게 역성을 들어서 교육이 들어가겠소? 이리 보내오.”라고 하면서 손을 내밀었다. “그럼 때리지 말고 말로 타이르오. 어째 쩍하면 그렇게 치오?” “잔말 말고 얼른 이리 보내라!” 호랑이처럼 호통 치는 남편의 성미를 아는지라 명옥은 울며 겨자 먹기로 덕돌을 내리어 놓고 그 옆에 앉아 또 칠까봐 지켰다. 상순은 덕돌을 보고 어조를 낮춰 “이 책은 내가 보는 중요한 책이다. 딱지를 만들어 책이 없어 어쩌니? 이후에는 다시 책을 찢거나 딱지를 만들어선 안 된다. 알겠니?” 하고 타일렀다. 덕돌은 고사리 손으로 눈물을 닦으면서 머리를 끄덕였다. “말로 대답해라. 다시 그러겠니?” “아이 그러겠습니다.” “응, 그래야지. 그래야 훌륭한 애지. 우리 덕돌은 공부도 잘 하고 아빠 엄마 말도 잘 듣지? 응?” “예.” “그럼 내 묻는 말을 대답해라. 거짓말을 하면 못 쓴다. 알았지?” “예.” “딱지를 만들고 나머지 책 종이는 어쨌니?” 덕돌은 아버지 눈치를 할끔 쳐다보면서 “성욱에게 딱지를 만들라고 줬습니다. 우리 둘이 딱지치기를 놀자고.”라고 대답했다. “응. 알았다.” 그 자리로 상순은 한집 건너 뒷집에 있는 7촌 조카 경학이네 집에 가서 성욱에게서 딱지를 찾아왔다. 상순은 덕돌이 앞에서 딱지를 싹 풀어 페지 수를 맞춰 책을 다시 맺다. 옆에서 초롱초롱한 포도알눈으로 아버지가 책을 매는 것을 여겨보면서 덕돌은 속으로 그 책이 아버지가 정말 읽기 좋아하는 책이라는 것을 알고 자기 잘못을 새삼스레 느끼었다. 그 후부터 덕돌은 다시는 책을 찢어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책이라면 보배처럼 건사하기 시작했다. 그는 그저 책이 하늘만큼 크다고 느꼈을 뿐이었다.
138    대하소설 진다래 소야곡(9) 댓글:  조회:1409  추천:1  2018-01-30
                        16. 약혼녀 교정에는 활짝 핀 라이라크가 생글방글 웃음지으면서 처녀총각들의 싱숭생숭한 마음을 보듬어주고 있었다. 어느날 밤중에 승호가 침실문을 뚝 떼고 황망히 뛰쳐들어왔다. “성호, 날 좀 도와달라.” “무슨 일이야?” 성호는 반사적으로 벌떡 일어나 신발부터 신었다. “홍희와 은영을 지켜달라. 이전에 말이 있던 경옥이 보복하러 올 거 같아.” 성호는 굳어졌던 얼굴의 근육을 느슨히 풀었다. “녀자앤데 어쩐다구?” “숱한 친척들을 데리고 오겠다더라.” 승호는 맥없이 침대에 털썩 물앉았다. “졸업을 앞두고 이게 뭐야? 이번엔 뛸데 없이 퇴학맞을 거야.” 그는 침대 이불 밑을 더듬더니 시퍼런 비수를 들춰냈다. “요즘 좀 덜 자더라도 이걸로 홍희와 은영을 보호해 달라.” 성호는 비수를 되밀어주었다. “필요없어.” 자신만만해 하는 성호를 보고 승호는 비수를 내밀면서 타일렀다. “경옥의 사촌오빠는 악명 높은 깡패두목이야. 난 7년 전부터 악연을 맺었어. 독종들이야. 은영과 홍희 눈깔을 빼가겠다더라.” 성호는 벌떡 일어났다. “공안국에 좋은 아버지를 두고 뭘 해?” 승호는 난색을 지었다. “아버진들 어쩌겠니? 그 자식 언제나 교활하게 수하를 시켜 해치우고는 꼬리를 빼는데야.” 승호는 한숨을 후~ 내쉬였다. “또 공안국에 알리면 더 악감을 품고 무슨 짓을 할지 몰라.” 승호는 성호의 어깨를 다독였다. “홍희와 은영을 부탁하자. 난 최선생과 허서기를 찾아가 대책을 의논해 봐야겠어.” 성호는 비수를 침대 우에 훌 던져버리고 나섰다. “근심하지 말라.” “감사하다. 믿을만한 건 너 밖에 없어.” 승호는 성호의 손을 꽉 잡고 힘차게 흔들었다. 성호는 곧추 녀성숙사로 달려가 홍희네 침실 문을 노크하고 들어갔다. 침실에는 침대에 누운 홍희 외에도 정희와 연화가 있었다. 성호는 연화와 인사하고나서 홍희를 복도에 데리고 나가 조용히 찾아온 사연을 알렸다. 홍희는 맥빠진 소리를 했다. “창피해 어떻게 살아? 아예 깡패들한테 죽는게 낫지.” “쓸데없는 소릴 하지 마오.” 성호는 홍희를 침실에 들여보낸 후 정희를 나오라고 했다. “요즘 침실을 지켜야겠소.” 정희는 사연을 듣고 파랗게 질린 얼굴을 들었다. “멍청이짓 하지 마세요. 괜히 상하겠어.”  “알았어. 근심하지 마오.” 성호는 책상과 걸상을 들고 복도에 나갔다. “왜? 우리 침실에 앉아 있을게죠.” 성호는 “은영네 침실도 지켜야지.” 하고 걸상에 턱 들어앉아 복도를 지켰다. “진짜 로지심 같아.” 침실 안에서 정희와 연화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성호는 은영네 침실에 가서 은영을 조용히 불렀다. 은영은 상을 찡그리면서 복도에 나왔다. “왜 또 찾아왔어요?” 성호는 밸 같아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훌 가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용하게 놀라운 인내력으로 꾹 참았다. 성호는 은영을 복도 한켠에 데리고 가 나직이 사연을 말했다. “야, 복잡해 어떻게 살겠니?” “뭐라고 합데. 이런줄 알았으면 당초에…” 은영은 시끄러워 성호의 말을 중도무이했다. “됐어요, 됐어. 제발 날 잊어주세요. 그럼 감사하겠어요.” 성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침실로 들어가는 은영의 등뒤에 대고 부탁했다. “명심하오. 혼자 아무데나 가지 마오.” 녀학생들은 사연도 모르고 이상한 눈길로 성호를 흘끔흘끔 훔쳐보며 지나갔다. 화장실 쪽에 가서는 손으로 입을 가리면서 키득거렸다. 정희는 복도에 나와 성호를 침실에 끌고 들어갔다. “멍청이 아니야? 푸대접을 받으면서 보호해?” “승호 부탁을 받았어.” “그래도 그렇지. 복도 다 떠나가게 괄시하잖아? 분해서 어디 살겠어.” 성호는 복도에 나가 책상에 책을 놓고 보면서 스스로 위안했다. (참새들이 어찌 고니의 큰 뜻을 알리오?) 성호는 진짜 의리심이 강했다. 승호의 부탁을 받은 것도 있지만 기어이 홍희와  은영을 보호하려고 작심했다. 정희는 슬그머니 나와 책상에 종이쪽지를 놓고 눈을 흘기면서 가버렸다. 성호가 쪽지를 펼쳐보니 이런 글씨가 또박또박 씌여 있었다.   여보세요. 목숨 걸고 보호할 건 뭔가요? 괜히 남의 일에 다칠까봐 속이 다 타 죽겠어요. 그만두고 숙사로 돌아가세요. 제발 빌어요.   성호는 그 쪽지에 몇글씨 쓱쓱 쓰더니 정희가 돌아올 때 건네주었다. 정희가 침실에 들어와 펴보니 이렇게 또박또박 씌여 있었다.   녀동창생들을 구해야 되겠다는 일념 밖에 없어. 너무 근심하지 말라. 잘 자! 밤중이 되자 성호는 잠이 호르르 와서 큰일났다. “성호야, 잠을 좀 덜 자더라도 은영과 홍희를 보호해달라.” 그때 승호가 부탁하던 말소리가 귀전을 때렸다. 꺼떡꺼떡 자불던 성호는 눈을 비비고 걸상에 앉아 복도를 지켰다. 이때 홍희가 잠옷을 껴입고 복도에 나왔다. “화장실에 가려고?” 홍희는 머리를 끄덕였다. “데려다줄게.” 성호는 홍희를 화장실에 데려다주고 문어귀에 서서 로지심처럼 바깥을 지켰다. 그때 녀대성숙사 당직을 서던 경비원이 다가왔다. “여기 서서 뭘 하오?” “녀동창생을 기다립니다.” “음.” 경비원은 마땅찮은 눈길을 보내더니 경비실로 돌아갔다. 성호는 피뜩 령감이 떠올랐다. (경비원의 방조도 받아야지.) 성호는 경비원을 찾아가 딱한 사정을 이야기했다. “공안국과 보위과에 알려야지.” 경비원은 급히 전화번호를 눌렀다. 홍희가 화장실에서 나와 숙사로 뛰여들어오는 승호와 딱 마주쳤다. “승호, 이 개놈새끼, 어디 죽어봐라!” 갑자기 바깥에서 녀성의 앙칼진 목소리가 귀청을 때렸다. 성호는 황급히 경비실에서 뛰쳐나왔다. 어둑시그레한 바깥에 억대우 같은 20대 사내들이 한무리나 덮쳐들었다. 뒤에서 한 처녀애가 앙칼지게 고함쳤다. “족쳐라! 쌍가시나 눈깔을 빼가자!” 성호는 다짜고짜 녀대생숙사로 뛰쳐들어오는 사내들을 막아나섰다. “쳐라!” 깡패들은 쇠파이프를 휘두르며 쳐들어왔다. 성호는 깡패들의 머리 우로 날아나가면서 쌍발로 대가리를 탁탁 걷어찼다. 몇놈이 비명소리와 함께 나동그라졌다. “개새끼!” 뒤에서 억대우 같은 코수염쟁이 방치를 휘둘러 어깨 넘어 날아지나가는 성호의 종아리를 쳤다. 성호는 몸을 훌 날려 뒤발로 코수염쟁이 관자노리를 걷어찼다. “아야! 이 새끼.” 하이칼라도 코방귀를 뀌면서 방망이를 휘두르며 덮쳐들었다. “꽤나 솜씨 있구나!” 코수염쟁이는 방망이를 내리며 빈정거렸다. “알고 지내자. 넌 누군데?” “시골에서 온 목동이야. 넌 누구냐?” 코수염쟁이 거만스레 코웃음쳤다. “흥! 이 시내에 코수염쟁이도 모르는 놈도 있구나.” “녀자숙사에 쳐들어오는 주제에 우쭐거리긴?” “뭐 어쩌고 어째?” 성호와 코수염쟁이 맞붙으려고 할 때였다. “송파, 서라!” 뒤에서 전지불빛이 어지럽게 비췄다. “너 허서기 아들 맞지?!” 경비원이 나와서 꺽다리 코수염쟁이에게 삿대질했다. 코수염쟁이는 목을 움츠리더니 뒤에 대고 손을 홱 휘둘렀다. “돌아가자!” 뒤에서 처녀애의 앙칼진 목소리가 울렸다. “저 년놈들을 살려두고 어디로 가?!” “경찰이다!” 코수염쟁이는 뒤에서 야단치던 처녀애를 끌고 도망쳤다. 그때까지 승호는 대가리도 내밀지 않다가 그제야 기신기신 기여나와 두리번거렸다. “상한데 없니?” 성호는 승호를 보고 “홍희와 은영을 숙사에 두고 지키는게 방법이 아닌 것 같아.”라고 했다. 그는 승호의 귀에 대고 나직이 말했다. “쟤들을 너네 집에 숨겨 둬라.” 승호는 머리를 끄덕였다. 그때 담임교원 최성균선생님이 다가왔다. “홍희를 우리 집에 데려갈게.” 최선생은 대머리에 흐르는 땀을 손으로 뚝뚝 찍더니 홍희를 데리고 자리를 떠났다. 승호는 은영을 침실에서 데리고 나왔다. 때마침 승호가 리과장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아보는 경찰이 있었다. 그리하여 승호는 은영을 경찰차에 앉혀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날부터 은영은 경찰의 보호를 받으면서 집에서 학교로 통학하기로 했다. 성호는 정희마저 몸소 집에까지 데려다주고서야 침실에 돌아왔다. 그는 한숨을 후~ 내쉬고 침대에 덜렁 들어누었다. 이튿날, 웃지도 울지도 못할 희비극이 벌어졌다. 침실문이 벌컥 열리더니 승호가 뛰여들어왔다. “허서기 호출장이 왔어. 경옥이 또 숱한 깡패들을 데리고 학교 기률검사위원회까지 찾아갔어.” 성호는 보던 책을 놓고 천천히 일어났다. “천하의 호랑이가 다 놀라다니? 쯧쯧쯧.” 승호는 얼굴에 겁기까지 띠지 않겠는가. “얘, 그 쌍년 사촌오빠가 누군지 아니? 요 먼저 숙사에 쳐들어왔던 깡패두목 허송파야!” “그 코수염쟁이? 허허허. 그 새끼 뭐 대단하냐?” “웃긴? 남은 칼모태에 오른 물고기 신센데.” 성호는 승호의 어깨를 다독였다. “이후엔 범송이랑 촌뜨기라고 욕하지 말라. 바쁠 땐 그래도 동창생이잖아.” 승호는 머리를 끄덕이면서 따라나섰다. 범송과 종수는 성호 낯을 봐서 마지못해 따라나섰다. 그들이 허서기 사무실로 곧추 갔을 때였다. 층계에서 한무리 코수염쟁이와 하이칼라들이 잡아먹을 것처럼 쏘아보았다. 깡패들은 허서기 사무실  앞에 보위과 경비원들이 죽 늘어서서 대기하고 있어 손을 쓰지 못하고 있는 눈치였다. 그런데 교활한 깡패두목 허송파는 보이지 않았다. 승호가 성호네 호위를 받으면서 사무실에 들어섰을 때다. “야, 이 색마야, 오늘 네 죽고 내 죽고 해보자!” 약혼녀 경옥이 승호에게 단말마적으로 덮쳐들었다. 그녀가 승호를 마구 허비고 뜯으려고 하자 성호가 막아 나섰다. “왜 이러오? 무슨 일인지 말로 하오.” 한쪽으로 밀려난 경옥이 성호랑 둘러보더니 승호를 손가락질 하면서 쌍욕을 퍼부었다. “야, 이 개새끼, 아직도 조직능력이 대단하구나. 벌써 셋이나 데리고 왔어? 네깐 놈이 뭔데? 난 30명을 데리고 왔다. 오늘 숱한 처녀들을 해친 그 더러운 XX을 베가지 않는가 봐라!” 승호는 콧방귀를 뀌며 허서기를 바라보았다. 허서기는 경옥을 제지한 후 아니꼬운 눈길로 승호를 쏘아보며 꾸짖었다. “승호, 넌 진짜 우리 학교를 다 팔아먹는 말썽꾸러기야. 학생당원이자 학생회 체육부장이 아니요? 저 경옥과는 약혼한 사이라면서?” 승호는 억울한듯 고아쳤다. “아닙니다. 내 언제 쟤하구 약혼했습니까?” “뭐라니? 약혼도 하지 않고 날 짓밟았니? 처녀 정조 목숨 같다는 거 모르니?” 허서기는 사무상을 꽝꽝 두드리면서 승호를 훈계했다. “그게 뭔가? 약혼녀 있으면서 숱한 녀대생들을 짓밟다니?!” “아니, 경옥은 약혼녀 아닙니다.” “야, 홀딱 나눕겠니?” “결혼도 하지 않고 무슨 조강지처입니까?” “야, 썩어질 개새끼야? 내 정조를 돌려달라.” 성호와 범송은 눈길을 마주쳤다. 경옥은 헐치 않은 처녀애였다. 인물도 그만하면 시내 처녀애치고 잘 생겼다고 할 수 있었다. 독살이 오른 외까풀눈을 내놓고 훤칠한 체격에 걀쭉한 우유빛얼굴이라든가 오똑한 콧날이라든가 앵두 입이라던가  표독스러워 그렇지 매력이 엿보였다. “그만!” 허서기는 또 사무상을 꽝꽝 두드렸다. “똑똑히 말하오. 경옥과 약혼한 사이오? 아니오?” “약혼? 저를 과부네 아들이라고 항상 업신여겼는데 약혼 같은 소릴 다. 어우, 씨.” “내 언제 널 업신여겼니?” 허서기가 경옥한테 눈길을 보냈다. 경옥은 억울하다는듯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공안국 형사과장네 아들을 누가 감히 업신여겨?” “너네 부모 그래 날 과부네 더러운 새끼라면서 약혼을 거부하지 않았댔니?” “네 애비 펀히 살아 있는데 네 에미를 과부라 했다니? 말도 안돼.” 승호는 누구도 모르는 사실을 밝혔다. “허서기, 이건 사실입니다. 저의 어머니는 진짜 과부였습니다. 전 어려서부터 쟤네 에미한테서 ‘애비도 없는 과부네 아들’이라고 놀림을 당하고 무시당했습니다.” 성호랑 범송이랑 놀란 눈길로 눈물까지 핑 돈 승호를 바라보았다. “음~” 허서기도 승호를 흘끔 건너다보았다. 경옥은 우쭐해 일격을 가했다. “과부 아들 주제에 남의 정조를 짓밟고 살아남을 거 같애?” 승호는 뭐라고 맞받아치려다가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삼키고 속으로 욕했다. “항상 과부네 아들이라고 깔보는 네 에미한테 보복하고 싶었어. 어째?” 탕, 탕, 탕! 허서기는 경옥을 쏘아보았다. “그만해! 이제야 본성이 들어났군.” 그는 녀조카 경옥이 일을 궁지에 몰고가는 것이 미웠다. 둘이 약혼한 사이라면 성호가 경옥의 정조를 짓밟은 것이 정당화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줄도 모르고 떠드는 경옥이 안타까웠다. “묻는 말에만 대답해라.” “밸이 나는 거 어쩌랍니까?” 경옥이 머리를 숙이자 허서기는 승호에게 눈길을 돌렸다. “경옥의 부모가 동의하지 않았으면 약혼한 사이도 아니고 뭐요? 그런데 경옥의 정조를 짓빫은 건 강간죄요, 강간죄! 강간죄는 퇴학은 물론, 감옥에 들어가야 하오.” 승호는 벌떡 일어났다. “아니, 허서기, 허서긴 아무리 경옥의 큰아버지노라고 그러지 마십시오. 어째 짝시비만 합니까?” “뭐라오?” 허서기도 사무상을 땅 치며 일어나 승호를 손가락질 하면서 으름장을 놓았다. “너 그래 경옥을 강간하지 않았니? 깡패한테 경옥이 당한 거야.” 승호도 물러서지 않았다. “경옥이 나한테 시집오지 못해 몸을 들이댔지. 언제 강간했다고 생사람을 물어먹습니까?” “야, 이 개새끼야, 오늘도 억울하게 굴겠니? 네놈이 뭐라 했니? ‘우리 둘이 좋아하면 다야. 그걸 다 했는데 부모가 결혼 동의하지 않을 수 있니?’ 그래서 그렇게 됐지.” 허서기는 울고 불고 하는 경옥을 앉으라 하고 승호를 꾸짖었다. “문제는 결혼도 하지 않으면서 경옥을 짓밟은 거요. 또 경옥을 다쳐놓고 홍의와 은영과도 련애를 구실로 짓밟은 건 용서할수 없는 형사죄요.  진짜  악질상습강간범이구나. 이대로 놔뒀다간 얼마나 많은 처녀들을 해칠지 모르겠소.” 승호는 물러서지 않았다. “검정개 돼지 흉을 하지 마십시오. 온 시내에서 깡패두목 허송파라면 모르는 사람이 몇입니까?” 허서기는 옆에 앉은 깡패들이랑 성호랑 둘러보더니 의자에 앉더니  건 가래를 뗐다. “에헴, 승호와 경옥을 내놓고 몽땅 바깥에 나가오.” 성호랑 깡패랑 서로 쏘아보면서 슬밋슬밋 나갔다. 허서기는 훌쩍거리는 경옥을 가엽게 바라보다가 성호에게 물었다. “엎질러놓은 물을 어쩌겠소? 새 출발을 하면 어떻소? 그럼 경옥이나 동무나 다 전도를 망치지 않고…” 승호는 자기 귀를 의심할 지경이였다. 그는 한숨을 후~ 내쉬더니 무겁게 입을 열었다. “어찌 쏟은 물을 되담을 수 있겠습니까? 누가 사랑이 변하지 않는다고 했습니까? 난 경옥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어찌 억지로 결합할 수 있습니까? 정조 말을 하는데 내가 경제적으로 보상해주면 안되겠습니까? 성형외과에 가서 성형수술을 하면 될 건데요. 개방세월에 정조라는 건 봉건전통관념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두 하루밤 처녀지 무슨, 처녀면 어떻고 사랑스러워야 처녀지…” “아니, 이 자식! 그것도 말이라고 악다구니질이냐?” 허서기도 리지를 잃고 말았다. “돈으로 처녀의 생명 같은 정조를 사고 팔 수 있느냐?!” 그는 사무상을 꽝 치면서 벌떡 일어났다. “진짜 개새끼구나.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왜 경옥을 짓밟았어? 처녀들의 정조를 초개같이 여기는 네놈이 이제도 얼마나 많은 처녀를 짓밟을지 몰라. 이 세상에 살아남을 거 같아?!” 경옥도 악이 치밀대로 치밀었다. “야, 이 개새끼야! 오늘 내 정조를 돌려달라.” 승호는 능청을 떨었다. “서로 좋아서 그랬는데 어쩌란 말이냐?” 경옥은 울며불며 손을 뻗쳐 승호의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마구 뜯으며 고함쳤다. “야, 이 새끼야, 정조는 처녀의 목숨이야. 정조를 돌려주지 않으면 내 손에 죽는다, 죽어!” 승호는 단말마적으로 달려드는 경옥을 슬쩍 밀어냈다. 경옥은 머리로 벽을 마구 쪼으면서 고함쳤다. “옳다! 오늘 날 죽여라! 죽여! 죽이지 못하면 넌 여기서 죽을줄 알아라! 오늘 정조 대신 네 XX을 빼가지 않는가 봐라!” 경옥은 머리가 터져 뻘건 선지피가 마구 흘러 두볼을 흥건히 적셨다. 허서기는 경옥을 말렸다. 승호는 멍해 서 있다가 “경옥이, 미안하오. 이제 어쩌란 말이오?” 하고 서성거렸다. 그는 이젠 경옥이나 홍희나 은영이나 아무도 버리면 죄인으로 락인될 가능성이 아주 컸다. 그는 괘씸한 경옥 일가에 돌려대고 오줌도 싸고 싶지 않았다. 그런바 하고는 홍희나 은영 가운데 하나 붙잡고 늘어질 판이였다. 경옥이 행악질하자 그것이 신호로 됐다. 바깥에서 깡패들이 문을 박차고 욱 쓸어들어왔다. “쳐라!” 그자들은 호랑이처럼 성호에게 덮쳐들었다. 성호도 주먹을 쥐고 벽구석에 몸을 딱 붙이고 이리 치고 저리 치면서 몸을 피했다. 바깥에서 성호랑 쳐들어와 맞붙었다. 허서기는 황급히 두 손을 쳐들면서 고함쳤다. “닥쳐!” 그는 우두머리인 듯한 꺽다리 하이칼라를 손가락질하면서 “그만두지 못하겠느냐?!” 하고 고함쳤다. 그자는 송파의 졸개였다. 허서기는 바깥에 달려나와 고함쳤다. “경비원들은 뭘 해?! 몽땅 체포해!” 그제야 얻어맞아 쓰러졌던 경비원들이 하나, 둘 일어나 허서기 눈치를 보면서 건성으로 말리는 척했다. 그들도 비수를 들고 날치는 깡패들에게 무모하게 목숨을 잃기 싫었던  것이다. 이때 머리에서 경옥이 “으-악!” 소리치면서 사무실에서 달려나갔다. “원통해 이 세상에서 못 살겠다!” 그녀는 곧추 층계쪽으로 달려가 마구 고함치며 콩크리트란간에  머리를 탁 쫗고 폭 꼬꾸라졌다. “경옥아!” 허서기와 송호가 달려가 얼굴이 피투성이 된 경옥을 껴안았다. 경옥은 머리가 터져 뻘건 피를 쿨쿨 흘리면서 인사불성이 되였다. 경옥은 백지장같이 창백해진 얼굴에 피를 줄줄 흘리면서 까무러진 채 인사불성이 됐다. 맹강녀가 만리장성에 가서 죽은 남편을 그리며 통곡친들 어찌 저보다 더 처참할가. “어서 병원에 업어가라!” 하이칼라는 보기 구차해 경옥을 둘쳐 업고 달려갔다. 이때 호각소리 요란하게 울리더니 경찰들이 들이닥쳤다. “몽땅 체포하라!” 승호의 아버지 리철갑 과장이 팔을 홱 휘둘렀다. 숱한 경찰들이 깡패들과 범송이랑 종수랑 몽땅 나포했다. 경찰들은 깡패들에게 쇠고랑이를 채워 끌고 갔다. 어데서 슬쩍 기여나왔는지 송호가 피투성이 된 경옥을 받아업고 달렸다. 허철만 서기는 울상이 돼 발을 동동 굴렀다. “이게 뭐요?” 리철갑 과장은 허철만 서기를 흘겨보았다. 최성균 교수는 뒤늦게야 소문을 듣고 달려왔다. “야- 졸업식을 앞두고 이 일을 어쩌는가?” 그는 허서기를 한쪽으로 데리고 가서 한참이나 뭐라고 쑤군거렸다. 허서기는  그제야 제 정신이 펄쩍 들었는지 리철갑 과장의 잔등을 툭툭 치며 한쪽 구석으로 데리고 갔다. 그들 둘은 한참이나 뭐라고 쑤군거리더니 갈라졌다. 을씨년스런 하늘에는 먹장구름이 몰려왔다. 먹장구름 속에서 몇가닥의 불뱀이 대지에로 번쩍 내리꽂히며 시뻘건 혀로 채찍질하였다. 드디여 우뢰가 하늘땅을 진동했다. 소낙비가 억수로 쏟아져 어지러운 발자욱을 지워버렸다.                                     17. 베일에 가려진 진상 이른 아침에 자오록한 안개가 삼라만상을 뒤덮으면서 몽롱한 세상을 만들고 있었다. 뜨거운 아침해가 서서히 동산에 솟아오르자 자오록하던 안개층이 서서히 엷어지면서 드문드문 푸른 하늘이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삼삼오오 대학교  교정과 기숙사에 가는 대학생들도 베일 속에서 서서히 자기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베일 속에 가려졌던 희비극의 진상도 서서히 륜곽이 드러나기 시작하면서 온 대학교에서 특급뉴스보다도 현념이 더  커갔다. 며칠 전 경옥은 층계란간에 부딪쳐 머리가죽이 터지고 뇌진탕까지 좀 왔다. 다행히 아직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고 했다. 염라대왕은 어린 그녀가 너무나도 큰 상처를 입었다고 불쌍해 차마 데려가지 못한 것 같았다. 기적이 일어났다. 경옥이 서서히 흐리마리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머리에 붕대를 감은 채 병상에 누워서도 한없이 원망스러웠다. (승호를 과부네 아들이라고 욕할 건 뭔가?) 그러나 인차 도리머리를 홰홰 저었다. (아니야, 부모가 잘했어. 그런 바람둥이를 거절하길 잘했지.) 그녀는 승호한테 릉욕당하고 짓밟히고 상처입은 것이 원망스러웠다.   원래 승호와 경옥은 고중 동창생이였다. 승호는 체육위원, 경옥은 문예위원, 둘다  춤도 잘 추고 운동도 잘해 학교에서 인기인물이였다. 둘이 손도 척척 잘 맞춰 각종 활동도 본때나게 조직해 사생들의 호평을 받았다. 훤칠한 경옥은키에 물새 다리로 살같이 달려 교내 륙상대회에서 항상 일등을 따내군 했다. 그녀는 학교 문예공연대회 때마다 무대에 올라 걀죽한 우유빛얼굴에 나리꽃웃음을 꽃피우면서 학이 나래치듯 너울너울 춤 추군 했다. 승호는 그때 벌써  경옥한테 홀딱 반했다. 가슴에서는 저도 몰래 첫사랑의 씨앗이 움트기 시작했다. 옥의 티라고나 할가. 경옥은 운동이나 춤은 잘 췄지만 공는 수술하게 했다. 그러나 그 흠집은 경옥의 아름다움을 가릴 수는 없었고 그녀에 대한 승호의 사랑의 감정을 저지할 수는 없었다. 고중을 졸업하고 승호는 대학에 입학하게 됐지만 경옥은 그만 락방했다. 그들 둘의 운명은 갈림길에 들어섰다. 그러나 승호는 더 열렬하게, 아니, 더욱 무섭게  경옥한테 덤벼들었다. 경옥은 승호가 열렬해지면 열렬해질수록 미심해나고 불안해났다. 시원한 가을바람이 선들선들 불어오는 어느 하루 밤, 승호는 경옥을 불러 조용한 강가 버드나무숲 속에 갔다. 밝은 달빛은 실실이 내리드리운 버드나무 가지에 애처롭게 매달린 잎사귀들을 비추다가 아예 흐르는 강물에 뛰여들어 자맥질했다. 찬 빛을 띤 강물은 부서지는 은잔디를 싣고 촐랑촐랑 유유히 흘러갔다. 평소에 활발하던 경옥은 전에 없이 쓸쓸히 무거운 침묵을 지켰다. "왜 아무 말도 없어." 그제야 경옥은 돌아서면서 겨우 승호를 응시했다. "대학생하고 이젠 말하기도 어렵구나." "무슨 소릴 해? 너도 열심히 복습해 대학에 입학해야지." 그러나 경옥은 김 빠진 공처럼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한숨을 호~ 내쉬였다. "될 것 같잖아. 오르지 못할 나무는 바라보지도 말라고." 승호가 손을 잡으려고 하자 경옥은 홱 빼갔다. "이러지 말라. 날 잊어라. 넌 대학생이고 난 고중생이야. 우린 한 길로 갈 수  없을 거 같아." "아니야." 승호는 경옥을 와락 끌어안았다. "난 이 세상에서 너 밖에 사랑하지 않아." "픽." 경옥은 코방귀를 뀌더니 도리머리를 흔들면서 몸을 빼려고 했다. "믿지 못하겠니?" 승호는 경옥을 더 꽉 껴안았다. 경옥은 단말마적으로 몸을 빼려고 몸부림쳤다. "왜 이래? 넌 너무 역어서 믿기 어렵다." 승호는 경옥을 놓아주면서 정색했다. "날 믿어다오. 사랑에 대해선 진지해. 넌 영원히 잊지 못할 첫사랑이야." 웬 일일가? 그 말은 마디마다 경옥의 가슴을 파고 들지 않겠는가. 경옥은 한숨을 호~ 내쉬였다. 그녀도 승호를 남자 같다고 여겼고 마음 속으로  좋아하고 사랑했다. 그것은 소녀의 티없이 맑고 깨끗한 첫사랑이였다. 룡암처럼 부글부글 피끓는 청춘남녀, 아니, 처녀총각의 첫사랑은 바야흐로 사랑폭포로 요란하게 쏟아질 것만 같았다. 뜨거운 사랑은 룡암처럼 골짜기와 들이라도 불태울 수 있었다. 경옥은 온몸이 찡해나면서 전률하다못해 두다리마저 나른해져 땅바닥에 물앉고 말았다. 승호는 경옥을 한품에 꼭 껴안고 열기 확확 풍기는 사랑을 고백했다. "경옥아, 피 끓는 청춘을 다 바쳐 사랑한다. 목숨 다 바쳐 사랑해. 바다가 마르고 장백산이 무너져도 사랑할 거야. 칼산에 오르고 불바다에 뛰여들라고 해도 영원히 사랑할 거야. 혹시 마음이 변한다면 목을 쳐도 돼. 목숨으로 널 사랑한다는 걸 증명하겠어." 경옥은 승호의 팔을 천천히 풀더니 일어났다. "아직도 믿지 못하겠니?" 경옥은 뜨거운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사랑해.” 그녀는 승호의 품에 얼굴을 파묻고 어깨를 들먹였다. 승호는 두 손으로 경옥의 얼굴을 받들더니 열기 오른 입술로 키스벼락을 뻑뻑 안겼다… 달님도 부끄러운듯이 얇은 구름송이를 들어 얼굴을 가렸다. 버드나무잎들도 장작더미에 붙은 불더미처럼 활활 타오르는 처녀총각의 사랑에 도취돼 선들선들한 가을바람에 너울너울 춤추며 설레였다… 그후부터 승호는 쩍하면 경옥을 불러내 뒤산 소나무 밭에서, 빈 집에서경 사랑의 서정서사시를 엮었다. 어느 하루, 승호는 집 문을 땅땅 걸고 그녀를 침대에 쓸어뜨리고 소중한 최후방선을 무너뜨리려고 했다. "이러지 말라. 아직 사돈보기도 하지 않았는데 이게 뭐야? 더구나 어머니가 널 반대하는 눈친데…" 그때 승호는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데 뭐가 대수냐?" 하고 말하면서도 경옥의 몸에서 손을 스르르 뗐다. 순간, 승호의 눈 앞에는경옥의 어머니 표독스런 눈길이 떠올랐다. 경옥의 어머니는 백화상점 총경리 안수련이였다. 처음 경옥의 집으로 갔을 때였다. 그녀는 승호의 아래우를 훑어보더니 훤칠한 체격에 남자같이 생겼다고 그러는지 함박꽃웃음을 지었다. “부모들은 뭘 하오?” “아버지는 공안국 과장입니다.” “그래? 가정배경 좋구먼. 아버지 명함은?” “리철갑이라고 부릅니다.” “뭐? 리철갑?” 안수련 총경리 얼굴에 대뜸 어두운 그늘이 퍼졌다. “어머니는 뭘 하오?” 승호는 머리를 숙이면서 쥐구멍으로 들어가는 소리로 대답했다. “병원 간호장입니다.” “혹시 박벽화 아니오?” “예. 혹시 아십니까?” “알다뿐이겠소?” 순간 경옥의 어머니 표정이 대뜸 흐려졌다. 갑자기 팽팽해진 집 안 분위기에 보이지 않는 번개가 치고 우뢰가 지동쳤다. “경옥아, 당장 저 애하고…, 아이고, 이 일을 어쩌니?” 안수련은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채하지 못했다. 그녀는 머리를 싸쥐고 벽을 짚더니 구들에 스르르 물앉았다. “아니, 어머니, 왜 이래요?” 경옥은 어머니를 껴안아 일으켰다. 수련은 승호를 되돌아보지도 않고 손삿대질을 했다. “그만둬라. 사람을 친해도 부모가 어떤 사람인가 알고 친해라. 절대 안된다, 안 돼!”  “어머니, 왜? 승호 아버지 공안국 과장이지. 어머닌 간호장이지. 좀 좋아서?” “넌 몰라. 저 승호 아버진 친아버지 아니야.” “뭐라고?” 승호도 충격이였다. “어머니는?” “쟤 어머니는… 아이고, 이 일을 어쩌니?” (그만두겠으면 그만두라지. 흥!) 승호는 코방귀를 뀌면서 훌쩍 일어나 나와버렸다. 뒤에서 경옥이 애원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엄마, 왜 이래? 우린 벌써 헤여지지 못할 관계인데. 으흐흑.” “뭐라고? 절대 안돼! 이 일을 어쩌니? 아이고~” 승호는 문 밖에서 엿들었다. “저 애 엄마는 우리 시내에서 소문난 바람둥이야. 아이고, 이 일을 어쩌니? 뭐나 유전이 있어. 바람둥이 난 아들은 꼭 바람기가 있는 법이야. 고생문이 터지자고 이래? 절대 안돼. 쟤는 타고난 바람둥이야!” 승호는 성이 꼭뒤까지 치밀어 더는 참을 수 없었다. 그는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가 경옥의 어머니를 손가락질하면서 고함쳤다. “뭐라고 지껄이는 겁니까? 딸을 주기 싫으면 싫었지. 엄마를 모욕하지 말란 말입니다! 이제 더 모욕하면 가만놔두지 않겠습니다!” 수련은 승호를 표독스런 눈길로 쏘아보면서 욕했다. “봐라! 뛸데 있어? 더러운 피를 물려받은 놈새끼, 수양 없는 걸 봐라! 언감  누구한테?” 경옥이 중간에서 울면서 발까지 탕탕 굴러대며 말렸다. “이러지 마십시오. 어머니-!” 그는 승호의 손을 잡아 바깥으로 끌고 나갔다. “얘, 이러지 말라. 천천히 해결하자. 이러면 우리 몽땅 끝장나.” 승호는 간신히 참으면서 경옥에게 끌려 담장 바깥으로 나갔다. “야~ 왜?” 승호는 주먹으로 담장을 쾅쾅 쳤다. 벽돌들이 마구 튕겨 마당에 날아가 떨어졌다… 그때 일을 생각하면 승호는 정이 뚝 떨어졌다. 대학에 입학해 숱한 이쁜 녀대생들을 본 후에는 점점 더 멀어졌다. 숱한 예쁜 녀대생들이 줄지어 따라다니는 판에 고중생인 경옥한테 정이 가지 않았다. (헤이구, 어디 처녀 없어서 욕 먹으면서 계속 련애해?) 그러나 승호는 생각을 좀 고쳤다. 칭칭 감겨드는 경옥의 우유빛 살결과 탄력있는 몸매를 놔주고 싶지 않았다. 더욱이 경옥의 어머니가 무슨 “더러운 바람둥이  피를 물려받았다”는지, 자기 어머니를 “시내에서 소문난 바람둥이”라는지 모욕한 일이 속에 내려가지 않았다. (옳다, 네년의 외동딸도 더러운 바람둥이로 만들어줄게.) 승호는 자기 모자간을 모독한 경옥의 어머니한테 복수하려고 이를 쁙쁙 갈았다. 어느 날 승호는 이성에 대한 유혹보다도 보복심과 야성이 반죽된 복잡한 심리로 끝내 그녀의 집에서 경옥을 침대에 쓰러눕혔다.   경옥은 뜨거운 승호의 손을 딱 잡아 쥐고 똑바로 쳐다보았다. "한가지만 묻자." "백가지라도 물어라. 다 대답해주마." 승호는 경옥의 몸에서 손짓을 멈추었다. 경옥은 일어나더니 승호의 두 눈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이제부터 네 건 몽땅 내 혼자 거야! 알았지?" "그래." 경옥은 끌어안으려는 승호의 가슴을 밀어냈다. "배신하는 날엔 이걸 칼로 썩뚝 베갈줄 알아라!" 그 섬찍한 말에 승호는 질겁해 그만 뒤로 벌러덩 물앉았다. "얘, 사랑하는 사람끼리 왜 면도칼날처럼 선뜩선뜩한 말을 해?" 경옥은 의연히 백지장 같은 하얀 얼굴에 독기어린 표정을 짓더니 몸서리를 칠 말을 퍼부었다. "약속해! 아녀자라고 업신여기지 않겠다고. 배신하지 않겠다고.” 승호는 경옥의 백옥 같은 몸을 가지기 급급해 술술 대답했다. "하늘에 맹세하지. 절대 배신하지 않을게.” “대답 너무 쉽게 하지 말라.” 경옥은 정색해 승호를 마주 바라보면서 두 손으로 량귀를 꽉 움켜쥐며 물었다. “이후에 중학생이라고 업신여겨선 절대 안돼. 알았지?” 승호는 경옥의 탄탄한 허리를 꼭 끌어안고 정중하게 입을 열었다. “땅을 밟고 하늘 떠인 사내 승호, 정중히 맹세한다. 허경옥과의 사랑을 위해 추호의 배신이란 없다. 만약 배신하는 날엔 천벌을 받아 마땅하다. 하늘땅이 증명할 거야!" 경옥은 외씨같이 걀죽한 얼굴에 뜨거운 감동의 눈물을 끊어진 구슬처럼 주르르 흘렸다. “혈서라도 써라니?” "필요없어. 난 절대 후회하지 않는다. 사랑해, 승호. 모든 걸 다 줄게." 처녀총각의 첫사랑은 휘발유를 친 장작더미에 붙은 불길처럼 세차게 활활 타올랐다. 요란하게 연기가 뭉게뭉게 피여올랐다. 뻘겋게 탁탁 튕기며 모든 것을 삼켜버리면서 활활 타올랐다. 승호의 가슴에서 기승을 부리는 복수의 불길이 이글거리면서 열기오른 몸을 기승스레 불태웠다… 경옥은 사흘 만에야 정신을 차리고 병상에서 간신히 깨여났다. 그녀는 흐리멍텅한 머리 속에 승호에게 처음 당하던 정경이 희미하게 떠올라 말라 터진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경옥아, 정신이 드니? 아이유, 이게 무슨 일이냐? 흑흑흑.” 그녀의 눈에는 눈물을 줄줄 흐리는 어머니가 희미하게 떠올랐다. “어머니!” 그녀는 일어나려고 했다. 붕대를 팅팅 감은 천근무게나 되는 머리가 뻐개지는 것 같아 도저히 일어날 수 없었다. 수련은 황급히 불쌍한 외동딸을 제자리에 눕히고 이불을 덮어주었다. 병실이 어찌나 더운지 선풍기를 켜놓아도 경옥의 상처투성이 코등에 식은 땀이 송골송골 내배였다. 수련은 옆에서 땀을 닦아준다, 부채질을 해준다 하면서 바삐 맴돌았다. 경옥은 서서히 정신을 차리자 악귀 같은 승호가 떠올랐다. 사랑한다고 맹세하던 승호가 배신할줄은 꿈에도 몰랐다. 경옥은 입귀를 옥물더니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개자식, 내 손에 죽을줄 알아라.) 사랑이 원한으로, 련인은 원쑤로 돼버렸다. 그녀는 사촌동생 송호에게서 승호가 녀대생들과 좋아한다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승호 하늘 땅에 맹세했는데. 설마?” “누나, 진짜라니까. 은영이나 홍희라는 녀대생을 번갈아 데리고 선녀음식점에 드나드는 걸 보았어.” “녀동창생이더냐?” “그래. 교실에 들어가는 거 보니까.” 심한 충격을 받은 경옥은 이를 옥물었다. 그녀는 승호를 찾아가 물어볼 수도 없고 어떻게 확인할 수 도 없었다. 더구나 그렇게 가슴아픈 일을 아예 자기 눈으로 확인하고 싶지도 않았다. (진짜 그런 일 있으면 어떻게 살아?) “개자식, 진짜 딴 녀성 품는 날엔 내 죽고 네 죽을줄 알아!” 그녀는 승호를 몰래 감시하라고 부탁해놓고서도 행여나 송호 말이 거짓말로 됐으면 하고 하느님께 빌고 또 빌었다. 반년도 안돼 승호가 한 학급의 홍희를 좋아한다는 것이 사실로 드러났다. 승호가 야밤에 홍희와 학교 식당 복도에서 사고를 쳤던 것이다. 경옥은 학교 기률검사위원회 사무실에 가서 큰아버지 허철만 서기를 만나  알아보았다. 진짜 사실로 확인됐다. 하늘땅이 핑그르르 돌아갔다. 순간 경옥은 허망 엉덩방아를 찌으면서 땅바닥에 쓰러졌다. “경옥아, 경옥아!” 허서기는 녀조카를 껴안아 일으켜 사무실 소파에 앉혀 놓으면서 위안했다. “얘, 그까짓 품질이 나쁜 놈을 깨끗이 잊어버려라!” “어떻게 잊어? 우린 그런 사이 아닌데.” 허서기도 놀랐다. “뭐라고?” 경옥은 차마 입으로 번지지 못하고 소파를 치면서 대성통곡쳤다. “왜 부모 동의도 없이, 아이유, 이걸 어쩌니?” 허철만 서기는 경옥을 가엽게 바라보면서 속궁리했다. 그는 우선 승호를 불러 학생기률로 압력을 가해 경옥과 관계를 회복하게 하도록 설복시키려고 했다. 그런데 그날 격분한 경옥이 송호랑 시내 깡패들을 데리고 온데다 사무실에서 승호를 격노시켜 일을 그르치고 말았다. 그는 승호가 변심해서 홍희와 은영을 사랑하지 결코 경옥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승호와 담화하는 가운데서 경옥과 량성관계를 발생한 것은 다만 경옥의 어머니를 보복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는 승호의 말을 듣고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괘씸한 놈, 퇴학시키고 감옥에 처넣지 않는가 봐라!) 허철만 서기는 복수를 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할 수 없는 현실에 주저앉고 말았다. 승호의 뒤에 리철갑 과장의 살기등등한 얼굴이 떠올랐다. 송파랑 송호랑 어려서부터 공부하지 않고 무리싸움을 하고 강도짓을 해서 쇠살창신세를 져야 했다. 그러나 번마다 허철만이 나서서 리철갑 과장에게 례물을 먹이고 쇠살창에서 꺼내군했다. 리과장의 아들 승호가 학교에서 자주 남녀관계사고를 쳤다. 때문에 엎음갚음으로 송호 형제를 간신히 지키고 있는 형편이였다. “후~” 허서기는 이번 일도 엎음갚음으로 끝내고 싶었다. 하여 리철갑 과장과 쑤군거려 덮어두기로 했다. 그러나 경옥을 짓밟은 승호를 도저히 용납할 수 없어 속을 끙끙 앓았다. (어디 두고보자! 수캐 같은 놈새끼!)
137    대하소설 진달래 소야곡(8) 댓글:  조회:1391  추천:1  2018-01-26
                       14. 폭풍 복도에서 벌어진 희극의 후폭풍은 대학가에서 아주 거셌다. 홍희는 식사를 전페하고 이불을 들쓰고 침실에 들어누워 있었다. 그러나 승호는 오히려 아주 뻔뻔스러웠다. “어, 재수 없다.” 그날 저녁에 망신당하고서도 숙사에 돌아와서 맞은 켠 성호를 흘끔 곁눈질하더니 이불을 들쓰고 쿨쿨 자는 척했다. 아무리 낯가죽이 두껍기로 돼지 엉덩짝 같다고 해도 승호라고 왜 부끄럽지 않겠는가? 허나 그는 동창생들 앞에서 결코 나약하게 나올 수 없었다. (련인 사이에 놀다가 들켰는데 어떻단 말인가?) 그는 모든 인맥을 다 동원해 자기 목에 걸린 올가미를 벗어버리려고 애썼다. 다만 마음이 약한 홍희가 멍청이 같은 짓을 할가봐 두려웠다. 그는 밤중이기에 홍희를 찾아가 위로의 말 한마디 못하는 것이 못내 안타깝기만 했다. 성호는 이불을 들쓴 승호를 보고 어이없어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모든 일을 주도면밀하게 처리하던 승호가 이번에는 역은 참새 방아간을 날아지나간 격이 되지 않았는가. 이때 침실 문이 벌컥 열리면서 싱거운 범송이랑 작달막한 종수랑 우르르 쓸어 들어왔다. 범송은 긴 목을 빼들고 승호의 침대를 들여다보면서 빈정거렸다. “헤헤헤. 우리 부장님께서 벌써 잠들었네.” 승호는 귀에 거슬렸지만 이불을 푹 쓰고 못들은 척했다. 종수도 한마디 끼여들었다. “항상 우릴 보고 학생기률을 잘 지키라더니. 흥! 하긴 잘한다, 잘해.” “소 볼기짝이면 어디 저렇게 두텁겠니? 뻔뻔스럽긴…” “뭐라니?!” 승호가 갈범처럼 버럭 고함지르며 벌떡 일어나 범송의 멱살을 틀어쥐였다. “이 촌뜨기새끼들아! 개소릴 작작 치지 못해?!” 범송은 승호의 손을 풀면서 두덜거렸다. “시내 새끼들은 바람이나 잘 피웠지! 뭘 대단하냐?” 승호는 범송의 면상을 한대 갈겼다. “이 새끼 누굴 치니?” 범송도 승호를 한대 맞받아 쳤다. 종수도 아니꼬운 눈길로 승호를 쏘아보며 “어데 가 맞아서 반창고를 더덕더덕 붙이고 다니다가 우리하구 해내니?” 하고 승호를 말렸다. “이 촌새끼들이 몽땅 덤벼라!” 성호가 일어나 말렸다. 그는 승호가 계속 범송을 치자 훌 밀어놓으면서 “뭘 잘 했다고 이러니?” 하고 핀잔을 주었다. 승호는 범송을 놓고 성호를 이마로 떵 들이받았다. 그 바람에 승호의 눈덕에 붙었던 반창고가 성호의 이마에 철썩 붙었다. “촌놈새끼들이, 다 덤벼라!” 성호는 귀에 거슬렸다. “야, 왜 쩍하면 우릴 촌놈새끼라고 욕해? 계속 우릴 깔보겠니?” 승호는 오늘 저녁 일을 분풀이할데 없어 속을 끙끙 알았다. 때마침 성호가 나서자 팔을 썩썩 걷어붙이며 을러멨다. “걸고 들겠어?! 이 새끼들을 시켰지?” 성호도 물러서지 않았다. “어째 아직도 덜 혼났니?” 이때 문을 똑똑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고 들어선 이는 뜻밖에도 낯선  녀대생이였다. “밤중에 왜 이래요? 아래층에서 어디 자겠어요? 기말인데요. 제발 작작 떠들면 어때요?” 승호와 성호는 서로 틀어쥐였던 멱살을 놓았다. 녀대생이 문을 닫고 나가자 범송과 종수도 툴툴거리면서 자기 침실로 돌아갔다. 침실에 성호 밖에 없자 승호가 또 걸고들었다. “나가서 한판 붙어보겠니?” 성호는 침대에 들어앉으면서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난 촌뜨기여서 시내 애들하고 싸우지 못해. 어찌나 권투실력이 센지. 흥!” 승호는 성호한테 다가서면서 정색했다. “사내 대 사내로 한판 붙어보자.” 성호는 씨무룩이 웃으며 승호를 쳐다보았다. “전번에 모든게 끝나지 않았니?” “아니야. 너 아직도 은영을 사랑하느냐?” 승호는 질투가 번뜩거리는 눈길로 성호를 똑바로 응시했다. “은영이 널 사랑하지도 않는데 싱겁잖니? 짝사랑을 해도 유분수지.” 성호는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정말 리해되지 않는다. 넌 도대체 홍희냐? 은영이냐?” 승호는 직답을 피했다. “은영과 정리하겠다는 말인 거 같은데 좋다. 허나 우리 둘 사이 아직도 정리하지 못한게 있어.” 성호는 의아한 눈길로 승호를 바라보면서 “또 뭐냐?” 하고 물었다. “사내 대 사내로 한판 붙어보자.” “그만 둬라.” 성호는 승호가 어리석어보이기까지 했다. “그게 더 중요하냐? 이번 일이 전도에 어떤 영향을 미칠거 짐작이나 했니? 친구로서 충고하는데 처분을 경하게 받는게 급선무야.” 그러나 승호는 아주 아쉬운 어조로 말했다. “친구? 이런 놈과 아직도 친구야? 전번엔 널 촌놈이라고 너무 업신여겼어.” 성호는 진지해졌다. “그래 농부 아들 주먹맛을 단단히 봐야 알겠니? 이번 일 말끔히 정리한 후 제대로 붙어보자.” “좋다.” 승호는 씩씩거리면서 침대에 돌아가 두다리를 쭉 펴고 들어누웠다. “참 재수없어.” 승호는 성호 쪽으로 돌아누우면서 물었다. “너희들 어떻게 돼 미리 짜고 든 것처럼 창고에 몰려 들었어? 네가 시켰지?” 성호도 승호 쪽으로 돌아누웠다. “우연히 벌어진 일이야.” 성호는 승호에게 솔직히 말해주었다. 승호는 벌떡 일어나며 두덜거렸다. “정말 재수 없는 놈은 뒤로 넘어져도 코등을 깬다더니. 원, 참. 재수없어.” 성호는 듣다못해 한마디 더 했다. “누굴 원망하지 말고 네한테서 모든 걸 찾아야 해. 왜 그런짓을 자꾸 하니?” 승호는 침대에 되들어 누우면서 두덜거렸다. “됐다, 됐어. 누굴 교육하니?” 승호는 이불을 들썼다. 침실에는 납덩이 같은 침묵이 흘렀다. 창문으로 서글픈 달빛이 비껴들어 침실바닥을 쓸쓸히 어루만졌다. 이튿날 큰 일이 일어났다. 점심때 쯤에 담임교원 최성균 교수가 찾아와 승호를 불러갔다. 승호는 죄수처럼 머리를 숙이고 따라갔다. 그런데 선생님은 교무실로 데리고 간 것이 아니라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갔다. 거기에는 진작 홍희도 있었다. 최교수의 주름이 간 얼굴에는 검은 그림자가 흘러가고 있었다. “뭐요? 어쩜 복도에서 그런 일을 다 치오? 정말 한심하오.” 홍희는 머리를 두 무릎 사이에 파묻고 어깨를 들먹였다. 그의 어깨를 흘러 지나간 긴 머리카락이 잔잔한 파도를 일으켰다. 승호는 머리를 조금 숙이며 손가락으로 소파를 쓱쓱 긁을뿐이였다. “큰일났소. 누가 학교당위 기률검사위원회에 고발했소. 대학생들은 재학기간에 련애하지 못한다고 학생기률에 명확히 규정했는데 뭐요? 승호는 학생당원이기에 퇴학을 주지 않겠는지 모르겠소.” 최교수는 승호한테 머리를 돌렸다. “승호는 학생회체육부장에 체육위원인데 어째 련애모범을 보이느라고 그러오? 졸업을 코 앞에 두고 뭐요? 전도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아오?” 승호는 “선생님, 선생님께 부담을 줘서 정말 미안합니다.” 하고 반성했다. 최교수는 한숨을 후~ 내쉬였다. “이 일을 어떻게 뒤수습하면 좋소?” 그는 권연을 꺼내 물었다. 승호가 옆에서 제꺽 라이터를 꺼내 불을 켜 드렸다. 최교수는 담배연기를 한가슴 가득 길게 빨아들였다가 후~ 내 뿜었다. “저네 둘이 진정 사랑하오?” 승호는 “예.” 하고 기여드는 소리로 대답하였다. 그러나 홍희는 머리를 들지 못하였다. “승호를 사랑하오?” 홍희는 그제야 눈물범벅이 된 얼굴을 들었다. “네.” 최교수는 한숨을 후~ 내쉬였다. “졸업하면 꼭 결혼식을 올리오. 그래야 때를 벗을 수 있소.” “알았습니다. 이제 졸업하면 꼭 결혼하겠습니다.” 승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최교수는 너무 안타까워 고함쳤다. “헛참, 무슨 낯으로 허철만 서기를 만날가? 그러잖아도 내가 학생들을 잘 관리하지 못한다고 비평했는데. 에이, 참.” 최성균 교수는 성호와 홍희에게 여차여차 하라고 일러준 후 돌려보냈다. 오후에 대학교당위 기률검사위원회에서 승호한테 호출장이 내렸다. 승호는 성호를 피뜩 곁눈질해보더니 머리를 숙이고 나갔다. 허철만 서기는 승호와 초면강산이였다. 그는 승호를 보자마자 날카롭게 질책했다. “동무는 학생당원이고 학생회 부장 아니오? 그게 뭐요? 복도에서 부정당한 관계까지 발생하다니? 정신 있소?” 승호는 손으로 삿대질하는 허서기를 응시하면서 반박했다. “전 부정당한 관계를 발생한 적이 없습니다. 나와 홍희는 서로 사랑하는 련인 사입니다.” 꽝! 허서기는 책상을 치며 벌떡 일어섰다. “이 동무, 이게! 아직도 자기 잘못을 깨닫지 못했구먼. 대학교에서 누가 함부로 련애하라 했소? 학생기률을 엄중하게 위반했단 말이요.” 허서기는 의자에 되앉으면서 책상에 놓은 손까지 부들부들 떨었다. “안되겠소. 호되게 처분해야겠소.” 승호는 풀썩 땅바닥에 꿇어 앉아 두 손을 싹싹 비볐다. “살려 주십시오. 이제 한학기만 있으면 졸업하겠는데요. 저의 전도를 생각해서라도 선처를 해주십시오.” 허서기는 코방귀를 뀌였다. “쳇, 호되게 처분하지 않으면 이후에 이 학교를 어떻게 관리하겠소? 영향이 얼마나 나쁜지 아오? 자산계급의 더러운 생활방식이 머리에 꼴딱 찼구만. 옳바른 련애관을 수립해야 하지. 뭐요? 이번에 버릇을 떼주지 않으면 장차 또 무슨 일을 칠지 모르겠소.” 승호는 아무 말도 못하고 그저 “잘 못했습니다.”라고 했다. 허서기는 뜻밖에 나지막이 묻는 것이였다. “동무 아버지 시공안국에서 일하오?” “예. 형사경찰대대를 책임졌습니다.” “오, 그렇구먼. 동무 서류를 보고 진작 알았소. 이래서 세상은 둥글둥글하다는  거요.” 허서기는 승호를 앉으라고 하고나서 “이번 일은 덮어놓고 지나갈 순 없소. 먼저 잘 검사하오. 내 좀 돌봐주지. 누구한테도 비밀이요.”라고 하더니 희죽이 웃으면서 손을 내저었다. “가보오.” “예. 심려를 끼쳐드려 미안합니다.” 승호는 선처를 받을 실오리만한 희망을 안고 침실에 돌아왔다. 그는 침실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고 책상에 마주 앉아 검사서를 줄줄 내리썼다. 한참 후 그는 검사서를 가지고 곧추 학교당위 규률검사위원회 사무실로 찾아갔다. 그러나 허서기가 없었다. 그리하여 옆사무실을 찾아가 검사서를 전해달라고 부탁하고 시공안국으로 발길을 돌렸다. 승호는 무거운 심정으로 아버지 사무실문을 노크하고 들어갔다. 이게 웬 일인가? 아버지 사무실에 허서기가 와 있지 않겠는가! 승호는 몸둘바를 모르고 되나와버렸다. 뒤에서는 이런 말이 묻어나왔다. “송파 일은 근심하지 마십시오.” “승호 일도 근심하지 마십시오.” “이거 번마다 신세를 집니다.” “이래서 세상은 둥글둥글하다고 하지 않습니까.” “하하하.” “허허허.” 승호는 오른주먹으로 왼손바닥을 탁 쳤다. “그럼 그렇겠지.” 그는 꽉 막았던 숨이 활 나왔다. (‘송파’는 시내에서 한다하는 깡패인데. 허송파, 그 놈새끼가 허서기 아들이란 말인가? 참, 일이 별나게 돌아간다.) 승호와 송파는 시내 주먹세계에서 악연을 맺은지 오랜 라이벌이였다. 그런데 이번 일로 서로 돕는 사이로 될줄은 천만뜻밖이였다. 이튿날 허서기가 승호를 찾았다. “승호동무는 검사서를 아주 심각하게 썼더구만. 다신 련애하지 마오. 원래 동무는 퇴학을 맞아야 할 일을 쳤소. 그러나 동무 전도와 학교 위신을 봐서 학급에서 사상검토나 시키고 말 예산이오. 다시 이런 일을 치지 마오. 그땐 나도 어쩔 수 없단 말이오. 알만 하오?” “예. 허서기 감사합니다. 이후에 꼭 은공을 갚겠습니다.” “에이, 그런 말을 절대 입 밖에 내지 마오. 이건 ‘병을 치료해 사람을 구하는 원칙’에 의해 선처한 것뿐이오.” 승호는 허리를 굽신거리고 돌아서 나오려다가 되돌아서 한마디 물었다. “예, 알았습니다. 선처하는바에 학급에서도 검사를 시키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허서기는 입을 떡 벌렸다. “건 어렵소. 온 학교에 소문이 자자한데. 참, 괜히 보호우산까지 구멍이 펑펑  뚫리게 놀지 말고 검사나 잘 하오.” 승호는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우산이 구멍 나는게 더 엄중한가? 창피해서 어떻게 동창생들 앞에서 검사한단 말인가?) 승호는 또 입을 열었다. “혹시 성호랑 범송이랑 고발하지 않았는지?” 허서기는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걸 알아서 뭘 하오? 동문 검사만 잘하고 고치면 되오. 절대 보복해선 안되오. 일을 복잡하게 만들지 마오.” 승호는 우둔한 짓을 했다는 것을 깨달은듯이 혀를 홀랑 내밀었다. 그는 홀가분한 심정으로 침실로 돌아왔다. 성호를 보는 순간 의심이 부쩍 들었다. (꼭 저 새끼 고발한 거 같아. 이 기회에 나를 꺾어버리고 은영을 빼앗아가려고 그랬을 가능성이 커.) 순간 성호와 재차 결투를 벌리고 싶은 충동이 욱 치밀어 올라 흉벽을 쿵쾅쿵쾅 무섭게 두드렸다. “절대 보복해선 안되오. 그럼 일이 복잡해지오.” 귀전에 허서기가 하던 말이 떠올라 으스러지게 쥐었던 주먹을 스르르 풀었다. 며칠 후 학급에서는 회의를 열었다. 회의에는 허철만 서기, 담임교원 최성균 교수 외에 학생회 간부들과 학급 동창생들이 참가했다. 홍희는 아예 책상에 머리를 파묻었다. 승호만은 개턱처럼 턱을 쳐들고 뻔뻔스레 앉아 있었다. 최성균선생이 직접 회의를 사회하였는데 거두절미하고 이런 일이 생긴 데는 담임교원인 자기에게 주요책임이 있다고 반성부터 했다. 뒤이어 승호가 검사했다. “학생당원으로서 학생기률을 위반한 잘못을 반성하며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여기까지는 괜찮았다. 그런데 그가 쓸데없는 말을 한마디 해서 물의를 일으킬줄은 몰랐다. “유감스러운 점도 있습니다. 우리 대학교 학생기률은 인성화되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대학생들을 보고 련애하지 못한다는 기률조목은 성인이 다 된 우리 대학생들의 실제에 부합되지 않습니다.  학교당국에서 개정할 것을 희망합니다.” “아니, 저 동무, 저게!” 허철만 서기는 책상을 치며 벌떡 일어섰다. “무슨 망발이요? 엄숙한 비판대회장에서 그런 돼먹지 못한 말을 하다니?!” 최성균선생도 아주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내 발언하겠습니다.” 모두들 뒤로 머리를 돌려보니 꺽다리 범송이 일어섰다. “보십시오. 얼마나 뻔뻔스러운가? 자기 잘못을 근본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학생회 당원간부로서 창고 복도에서 련애한게 옳습니까? 창피한줄도 모르고. 학교에서 학생기률을 잘못 정했다고? 뭐 인성화되지 못했다고? 그럼 학교에서 너처럼 숱한 녀학생들의 정조를 짓밟는 개 같은 새끼들에게 마음대로 하게 놔두라는 건가? 검사가 철저하지 못하다고 봅니다. 이후에도 또 개짓을 하겠다는 겁니다. 우리 학급을 다 팔아먹고서도 뻔뻔스럽긴?!” 성호가 옆에서 범송의 팔소매를 잡아당겼다. “놔라! 어째, 저 새끼 항상 우릴 촌뜨기라고 깔보더니 잘 됐어. 퇴학이나 콱 맞아라!” 최성균선생이 제지했다. “인격모욕을 하지 말고 비평하십시오.” 범송을 피뜩 쳐다보는 승호의 눈길이 그리 곱지 않았다. “제가 말하겠습니다.” 정희가 발딱 일어나자 모두들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나는 홍희하고 한 침실에 있는 동창생으로서 정말 마음이 아픕니다. 승호 동무는 어쩜 처녀들의 정조를 헌신짝 다루듯 할 수 있소? 정조는 처녀들의 생명이나 마찬가지라는 걸 모르오? 그 얼마나 많은 처녀들이 정조를 잃고 고민하고 심지어 자살까지 했습니까? 녀성들의 정조를 사정 없이 짓밟은 승호의 착오는 그저 학생기률로 처분할 일이 아니라고 봅니다. 형사범죄로 처분해야 해요.” 숱한 학생간부들이 머리를 끄덕였다. 힘을 얻은 정희는 계속 대포를 퍼부었다. “승호를 지금 엄격히 처분해 경종을 울려줘야 다신 이런 착오를 범하지 않게 할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승호는 이른바 련애한다는 미명하에 홍희를 내놓고도 숱한 녀학생들을 해치고 있습니다…” “그만하오!” 뜻밖에 성호가 책상을 꽝 치면서 벌떡 일어나 정희에게 면박을 주었다. “칼모태에 오른 물고기를 잘 썰어서 선생님들한테 잘 보이려고 하지 마오. 이제 30년이 지나도 우린 동창생들이오. 우물에 빠진 승호 머리에 돌멩이를 작작 떨어드리란 말이오. 그런다고 학교에서 졸업배치를 더 잘 해줄 거 같소?” 뒤이어 성호는 선생님들을 돌아보면서 거리낌 없이 말했다. “허서기, 승호와 홍희는 서로 사랑하는 사입니다. 이제 한학기 지나면 결혼할지 누가 압니까? 련인끼리 련애한 게 무슨 잘못입니까?” 모두들 성호가 이렇게 나오리라고는 실로 천만뜻밖이였다. “어째 너도 속에 걸리는게 있니?” 범송이 성호에게 눈을 흘기며 두덜거렸다. “쟤들 어디 그저 련애한 거야? 복도에서 뭘 했다고 그러니?” “관둬! 량심을 지켜라.” 성호의 말에 범송은 펄쩍 뛰였다. “야, 원칙을 지켜야 해! 뭐야? 동창생이라고 잘못을 보고서도 덮어줘서야 되니?” 성호는 범송한테 한대 안겨주고 싶었다. 그는 범송과 “너는 은영과 련애하지 않았니?” 하고 묻고 싶었지만 가까스로 참았다. 이때 허철만 서기가 총화발언을 했다. “오늘 승호 동무는 심각하게 반성했습니다. 이후에 우리 학교에서 다신 이런  사고가 생기지 말 것을 바랍니다. 이후에 이런 일이 또 발생하면 그땐 엄격히 처분할 것입니다.” 허서기는 대충 몇 마디 말하고는 최성균선생한테 끝내라고 눈짓했다. 최성균선생은 홍희한테 물었다. “홍희는 진짜 승호를 사랑하오?” 책상에 머리를 파묻고 있던 홍희는 용기를 내 머리를 들며 천천히 일어났다. “예. 이 몸이 죽어죽어 백골이 진토로 될지언정 님을 향한 일편단심이야 변할 수 있겠어요? 아무리 비판해도 승호를 사랑해요.” 그 소리에 여기저기서 킬킬 웃는 소리로 부산했다. “웃지 마오. 이건 저 동무들 처분에 관건적인 대목이요.” 최성균선생은 아주 엄숙한 표정으로 교실을 둘러보더니 계속해 승호에게 물었다. “동무들은 졸업하면 결혼할 예산이요?” 승호는 사전에 시켜준대로 “예. 새해 9.3에 결혼할가 합니다.” 최성균선생은 머리를 끄덕였다. “됐소. 앉소. 모두 들었지요? 물론 공공장소에서 그런 짓을 한 건 학생기률에 어긋납니다. 그러나 이건 도덕범주에 속한다고 생각합니다. 황차 이 동무들은 당장 결혼할 사이라는 것과 전도를 감안해 허서기께서 경한 처분을 내릴 것을 바랍니다.” 허서기는 아무런 표시도 하지 않고 묵묵히 앉아 있었다. 회의는 간단히 끝났다. 승호는 숙사로 돌아오면서도 정희와 범송이 속에 내려가지 않았다. 반면에 성호의  의리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변이 아닐 수 없었다. (열길 물 속은 알아도 한치 사람 속은 모른다고 병 주고 약 주는 성호 속심을 누가 알아? 내놓고 대포를 쏘는 년놈들보다도 안팎이 다른 놈새끼 더 무서워. 저 자식 분명 자기 발등이 저려서 미리 방패를 들고 나선 거야. 넌 은영과 짝사랑을 하지 않았니? 퇴학맞을가봐 겁나지. 흥!) 승호는 침실에 돌아와 성호의 동정어린 눈길을 피하면서 침대에 털썩 들어누웠다. 한가지 풀리지 않는 의문이 피뜩 떠올랐다. (자식, 날 물어재끼고 은영을 채갈 좋은 기횐데 왜 날 비호하지?) 며칠 후 후폭풍이 잔잔해지자 승호는 목욕탕에 가서 목욕까지 하고나니 심신이 홀가분해졌다. 승호는 소고기와 돼지고기, 닭고기를 두 꾸러미나 사들고 최성균 교수네 집으로 찾아가 인사했다.   최교수는 김이 문문 나는 소고기국을 떠서 안방에 홀로 계시는 늙으신 아버님께 드리면서 혀끝이 다슬 지경으로 승호의 인사성을 칭찬했다. “승호는 인사성이 밝은 제자요. 효성과 의리가 강한 사람은 보답받기 마련이요.” 시름시름 앓던 사모님도 자리에서 일어나 김치움에 가서 대야에 김치를 담아 내왔다. 승호는 “이번에 선생님께서 미리 가르쳐주셨으니 말씀이지요. 퇴학맞을 번했습니다.” 하고 입이 마르게 개여올렸다. 또 기회를 봐서 담임교원 앞에서 성호를 춰올렸다. “최선생님, 이후에 성호를 좀 봐주십시오. 걘 진짜 의리심이 강한 친구입니다. 그날 비판회의에서 보십시오. 다른 애들은 저를 죽어라고 비평했지만 성호는 저를 두둔해 중점발언을 했단 말입니다.” 최교수는 승호를 타일렀다. “성호 은혜를 잊지 않는 건 좋소. 그러나 뭐나 속으로 많이 생각하고 적게 말해야 하오.” “예, 명심하겠습니다.” 승호는 원래 허철만 서기한테도 인사하러 가려고 했다. 그러나 승호의 아버지 리철갑 과장이 떽 했다. “야, 정신 있니? 까딱 말라. 이 일은 아무도 모르게 무덤까지 가지고 가야 해. 세상 사람들이 알면 너와 송파는 물론, 내하구 허서기까지 몽땅 끝장난다. 알겠니?” 승호는 머리를 끄덕이면서도 리해되지 않았다. (대체 내 무슨 죄를 졌다고 깡패들의 일을 덮어주기까지 해야 하는 걸가?  허송파가 무슨 일을 쳤는가?) 세상에는 지하에 암장돼 흐르는 뭔가 있었다. 승호는 아직 세상의 피상만 보고 지하에서 흐르고 있는 지하수를 보지 못하고 있었다.                                                                                   15. 목동과 파랑새 엄동설한은 대지에서 맥없이 스르르 물러가고 봄아씨가 사뿐사뿐 다가왔다. 비단결로 얼굴을 쓰다듬는 듯한 부드러운 봄바람이 대지를 간지르며 산들산들  불어왔다. 처녀총각들의 설레는 가슴에도 훈훈한 봄바람이 스물스물 스며든다. 성호는 사랑의 눈길을 은영한테서 점차 떼려고 모지름을 썼다. 아무리 예쁘더라도 색마 같은 승호한테 사랑의 목숨과도 같은 정조를 잃은 녀자애를 사귀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한날 한시에 깊이 뿌리 내린 감정을 단절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였다. 그제야 그는 자기 마음 속에 은영이 아주 깊이 얼기설기 사랑의 뿌리를 박고 있었다는 것을 느꼈다. 그 사랑의 뿌리를 흔적 없이 빼려고 할수록 마음의 상처는 더 커졌고 고통스러워났다. (아무런 미련도 없이 은영을 잊자.) 성호는 몇번이고 다짐하였다. 하지만 교정에서 우연히 흩날리는 체육머리를 보아도 사랑스러워 어쩔 수 없었다. 진짜 사랑스러운 은영의 머리카락으로부터 외씨 같은 얼굴, 탄력 있는 몸매, 어데라 없이 사랑스러웠다. 다른 이성과는 달리 은영으로 인해 감정이 무섭게 파도치는 것에 무기력해지는 자기를 꾸짖은 때도 한두번이 아니였다. 꽃노을을 쓰고 웨딩드레스를 입은 은영이 자기 팔을 끼고 사뿐사뿐  결혼례식장에 들어가는 꿈이 눈 앞에서 삼삼거리는 상 싶었다. 그런 은영을 허망 내던지기에는 너무나도 힘들고 마음 아픈 일이였다. 그는 졸업론문을 쓰는데 도정신하면서 점차 은영을 잊으려고 했다. 황차 겨울이 물러간지라 빙장에 가서 스케트를 타는 일이 없었다. 아래학급이기에 교실에서 은영을 자주 만나는 일이 없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성호는 그간 은영 때문에 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바람에 학기말 시험성적이  좋지 않았다. 농민의 아들이기에 그럴가. 자기가 땀을 흘려 가꾼 밭에서 나는 것만큼 곡식을 걷어들여 먹는데 만족하듯이 자기 기말성적에 만족했다. 승호는 성호의 그런 사상을 소농경제사상이라고 비웃었다. 그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수단을 가리지 않았다. 외교를 하고 권세에 아부하고 돈을 써서라도  목적을 달성하고야 말았다. 성호는 승호의 그런 처세술을 좋아하지 않았다. 성호는 천수해중학교로 실습하러 떠나게 되였다. 그런데 운명의 조화라고 할가. 범송과 종수, 정희도 함께 천수해중학교로 실습하러 가게 됐다. 성호가 뻐스정류소로 가는데 파랑새가 뛰여와 생글방글 웃으며 따라나섰다. 그러나 성호는 별로 반기는 기색이 없었다. “어째 범송이랑 함께 가지 못하오?” “또, 또. 무슨 일이 있어? 어째 얼굴색이 좋지 않구나.” 정희는 옆에 사람이 없는 것을 보고 나직이 물었다. “아직도 은영을 잊지 못해?” 성호는 피씩 웃었다. 그는 정희를 데리고 공원으로 들어갔다. 줄줄이 늘어선 화단에는 모란꽃, 빨간 장미꽃들이 활짝 피여 그윽한 향기를 풍기고 있었다. 원예사들이 연분홍 진달래꽃과  무궁화까지 심어 별유천지를 만들어놓아 유람객들의 눈길을 끌었다. 성호는 소나무가 우거진 수림 속으로 들어가 정희와 마주 섰다. “정희, 전번에 그게 뭐요? 승호와 홍희를 그렇게까지 사정없이 비판할 수야 있소? 동창생으로서 어찌…” “픽!” 정희는 파랑새란 별명처럼 예쁜 얼굴이 대뜸 파랗게 질렸다. “그래 승호가 잘 했어? 학생기률을 어긴 건  둘째고 그게 뭔가? 이 처녀 저 처녀 돌아가면서 정조를 짓밟고 있단 말이요. 대학교로 오기 전에 벌써 약혼녀가 있었다던데 그게 뭐요? 홍희하구 저렇게 망신스런 일을 쳤지. 어디 그뿐이야? 은영과도 지하독서실인지 세집인지 뭔지 하는데 들어가는 거 여러번 봤어. 개 같은 놈이 가만 놔뒀겠어? 나쁜 놈을 비호하는 네가 더 나빠! …” “그만해! 검정개 돼지 흉을 작작 해.” “퇴학을 줘야 해, 퇴학을! 걔는 별명이 ‘호랑이’라더구나. 이젠 발정 난 ‘수개’라고 해라. 호호호.” 정희는 어글어글한 눈이 떼꾼해지더니 정색했다. “넌 아직도 승호가 련애를 구실로 숱한 처녀애들 정조를 유린하는게 옳다고 보니? 그래 너도 걔처럼 개짓을 하겠다는 거야?” “아니지.” “왜 자꾸 승호를 보호해나서니?” “우물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는 동창생이 불쌍해서 그래지.” 정희는 머리를 끄덕이더니 성호를 맑은 눈으로 빤히 쳐다보면서 한마디, 한마디 똑똑히 말했다. “그게 동창생을 구하는게 아냐. 승호가 그 개 버릇을 고치지 않으면 이제 또 무슨 사고를 칠지 아니? 전번 비평회의 때 짯짯하게 비평해줘야 했어. 쓴 약은 병 치료에 도움이 된다는 말이 있잖아? 승호를 비호한 건 구하는게 아니라 수렁에 떠밀어넣은 살인행위와도 똑같아.” 성호는 정희가 이렇게까지 똑똑할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그는 저도 몰래 정희를 다시 여겨보면서 속으로 혀를 끌끌 찼다. 순간 정희가 은영을 비집고 자기 마음 속에 서서히 들어서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왜 그래? 내 말이 틀렸어?” 정희가 묻는 소리에 성호는 그녀에게서 눈길을 떼면서 되물었다. “자기는 련애하지 않았겠구나.” 정희는 정색해 따지고 들었다. “무슨 소리야? 이전에 승호가 련애를 하자면서 접어들더라. 난 바람기 있는 승호를 간파하고 단마디로 거절해버렸어.” 성호도 물러서지 않았다. “넌 그래 련애를 걸지 않았겠구나.” “승호하고?” “나한테.” 파랑새는 새파랗게 질린 복숭아얼굴에 홍조가 어리더니 머리를 돌렸다. “그랬던가?” “모두 남의 티끌만한 허물은 보아도 자기 태산 같은 허물은 못 봐.” 정희는 주먹으로 성호의 넓은 가슴을 쾅쾅 팼다. 이윽고 그녀는 파도치는 굽슬굽슬한 긴 머리카락을 어깨 너머 쓸어넘기면서 몸을 돌리더니 부끄러운듯이 두 다리를 배배 비틀었다. “말이 나온바 하고 묻자. 아직도 은영을 사모해?” “또, 또. 내 바보냐?” 정희는 안도의 한숨을 호~ 내쉬는 것이였다. 그녀는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이 바보야, 은영이란 애를 그렇게 따라다니더니. 왜?” 성호는 직답을 피하고 반문했다. “왜 은영한테 질기게 관심을 보여?” 정희는 소나무숲이 설렐 정도로 까르르 매력적으로 웃었다. “내가?” 성호는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네 운명이 근심될뿐이야.” 뒤이어 그는 머리를 숙이더니 나직이 중얼거렸다. “짝사랑은 아주 고통스러운 거야.” 정희는 대뜸 얼굴이 새파래났다. 그녀는 자리를 뜨려는 성호의 가슴을 손으로 찌르며 따졌다. “누가 짝사랑을 한다는 거야?” 성호가 주춤 멈춰서며 입을 떼려고 할 때다. “성호야!” “여기 있었구나.” 어디서 솟아났는가. 싱거운 꺽다리 범송과 실돌피 같은 종수가 소나무숲 속에서 나타났다. 성호가 황급히 돌려 맞췄다. “어, 너희들을 여기서 기다리는 중이야.” 그들은 웃고 떠들면서 함께 천수해로 떠났다. 천수해중학교에서 학생들과 실습교원들이 련합문예공연을 할 때 성호는 정희의  새로운 매력을 발견했다. 최성균선생은 정희를 보고 실습생을 대표해 독무를 추라고 했다. 정희는 중학생무용수들 속에서 키가 비슷한 연화라는 녀학생의 한복을 빌어 입고 무대에 올랐다. 그녀는 은은히 흐르는 음악에 맞춰 화려한 독무를 선보였다. 훤칠한 키에 탄력 있는 몸매는 심산 속에 피여난 날씬한 장미꽃 같았고 날렵히 놀리는 그녀의 껑충한 다리나 손놀림은 호수가에서 백조가 날아예는 듯했다. 사생들의 우뢰와 같은 박수소리가 울렸다. (진짜 예뻐!) 성호는 속으로 연신 감탄했다. 그러나 그는 인차 자기를 꾸짖었다. (오르지도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라고. 목동이 어떻게 규방 규수를 쳐다본단 말인가.) 순간 성호는 무대에 올라선 정희가 오르지 못할 벼랑 우의 도고한 진달래꽃으로 보였다. (싹 걷어치워.) 그는 땅이 꺼지게 한숨을 후~ 내쉬였다. 그날 무대에서 연화라는 녀학생의 쌍까풀눈에 눈길이 자꾸 갔다. 어찌나 금방울 굴리는듯 청아한 목소리로 노래를 구성지게 부르는지 사생들이 혀를 끌끌 찰 지경이였다. 정희의 실습교수를 참관하러 교실에 들어갔다가 연화가 노란 샤쯔를 입고 제일 뒤줄에 앉아 있는 것이 눈에 띄였다. 성호의 눈길이 저도 몰래 자꾸 연화의 우유빛얼굴에 가 멈춰섰다. 연화는 그 뜨거운 눈길을 감지하고 머리를 수깃하면서 쌍까풀눈을 곱게 살포시 내리떴다. 천수해중학교에서 교내운동대회를 열었다. 연화는 노래만 잘 부른 것이 아니라 달리기도 아주 날래게 달렸다. 다른 애들을 한 대여섯메터 떨궈놓고 400메터 코스를 뛰여 봉긋한 가슴에 흰 끈을 걸지 않겠는가. 학생들이 운동장 복판에서 고도를 날렵하게 뛰고 있었다. 성호가 가보니 고중생들이 1메터 50을 뛰고 있었다. 그런데 몇이 넘지 못하고 다 고도대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보다 못한 성호는 슬금슬금 닫다가 고도대를 훌쩍 뛰여넘었다. 학생들은 모두 눈이 휘둥그래 쳐다보다가 박수갈채를 보냈다. 체육교원은 성호가 얼마나 뛰여넘는가 보려고 대뜸 고도대를 1메터 60으로 올려놓았다. 성호는 고도대를 향해 닫다가 개구리 물에 뛰여드는 날렵한 동작으로 훌쩍 날아넘어갔다. “와-싸-!” 우뢰 같은 박수갈채가 터졌다. 체육교원도 혀를 끌끌 차며 성호를 흘끔 쳐다보는 것이였다. 성호가 자기 학급으로 돌아오자 학생들은 우뢰와 같은 박수갈채를 보냈다. 정희가 맡은 학급의 연화는 뒤줄에서 일어나 수건을 건네면서 “선생님, 땀을 닦으시오.” 하고 정답게 말했다. 정희도 건너와서 “어쩜 그렇게 날래? 실습생들의 본때를 보여줬구만요.”하고 감탄했다. 성호는 정희와 함께 뒤로 물러가서 연화를 가리키면서 “저 앤 예술의 싹이 보이오.” 하고 말했다. 그 말을 들었는지 연화는 이쪽을 보고 생글방글 웃어보이면서 머리를 숙였다. “글쎄 나도 전번 공연 때 저 녀학생이 노래를 잘 부른다 했어. 노래와 춤을 좀  가르쳐주렴.” 정희는 머리를 끄덕였다. “점심에 시내돌이를 하지 않겠어?” “어째?” “선물 할 거 있어.” 성호는 고의로 자빠듬하면서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오후에 계속 운동대회를 하겠는데 어디로 가?” 정희는 단통 얼굴이 새파래지더니 “주겠다고 할 때 가지지 않으면 꼭 후회할 거야.” 하고는 자기 학급으로 돌아가 앉았다. 점심에 성호는 정희의 성의를 저버릴 수 없어 범송과 종수의 눈을 피해 가만히 천수해백화상점에 따라갔다. 자그마한 진의 백화상점 치고는 없는 것이 없었다. 정희는 성호를 데리고 옷매대 쪽으로 걸어가면서 줄느런히 걸린 남자 옷을 돌아보는 것이였다. “뭘 하려고?” “옷 한벌 선물하고 싶어.” “그러지 마.” “왜?” “사내라는 게 녀자한테서 먼저 선물을 받다니?” 정희는 귀밑까지 홍조어린 걀죽한 얼굴을 들어 성호를 정겹게 바라보더니 애교섞인 어조로 말했다. “주고 싶어 주는 거니깐. 괜찮아.” “무슨 명목으로?” “말해야 알겠어?” 나직한 귀속말이였지만 성호는 자기 귀를 의심했다. “뭐라고?” “몰라.” 정희는 귀밑까지 새빨갛게 물들어가며 외면했다. 성호는 가슴이 쿵쾅 뛰는 것을 느꼈다. 백화점인지라 더 묻지 못하고 묵묵히 그 자리를 떠나려고 했다. 정희는 황급히 뒤쫓아와 성호를 붙잡아 세웠다. “어디로 가? 부담 갖지 말아요. 교단에 선게 옷이 너무 헐더군요.” 성호는 정희의 성의를 묵묵히 받아들이면서 저도 몰래 마음의 쪽문이 천천히 열리는 것을 느꼈다. 그는 은영이 못잖않게 정희를 사랑하고 있었다는 것을 서서히 온 몸으로 느꼈다. (사랑이란 뭐냐? 이 녀자 저 녀자 짓밟는다고 승호를 욕했는데. 왜 이래? 첫사랑 순희로부터 은영, 정희한테 서서히 옮겨붙는 사랑의 불씨, 참 알고도 모를 사랑이야!) 실련의 망망대해에 풍덩 빠져 허우적거리던 성호는 지푸라기라도 붙잡은   신세였다. 그는 마음먹고 은영을 잊으려고 했다. 그러나 잊으려고 하면 할수록 그녀와 함께 빙장에서 스케트를 타며 놀던 화려한 시절이 그리워지고 사랑의 흔적을 말끔히 지울 수 없었다. 뒤엉킨 사랑의 뿌리를 뽑으려고 하면 할수록 마음이 더욱 아팠다. 그는 은영이 사무치게 그리는 심정을 담아 시조 “장미꽃”을 써놓았다.   장미꽃 맘 속에 춘풍처럼 스며든 녀신 그대 혜성처럼 나타났다 별찌처럼 사라졌네 그리움 장미꽃으로 빠알갛게 꽃폈네   착잡한 내심의 갈등을 겪을 때 정희가 또다시 그의 가슴에 사랑의 불을 지폈다. 그 따뜻한 사랑의 불길이 얼어붙은 성호의 마음을 서서히 덥혀주기 시작했다.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진 그에게 하나의 구명줄을 내리드리워주었다. 그녀는 고통의 심연에서 모지름을 쓰는 그를 끌어올리려고 애쓰고 있었다. 성호는 믿던 도끼에 발을 찍힌듯 실련의 고배를 마신 후 처녀애들한테 쉽게 마음을 주지 않았다. 정희가 주동적으로 망망한 바다에 침몰하려던 쪽배에 사랑의 돛을 올리자 성호는 정희의 진심어린 사랑에 유혹돼 저도 몰래 조심스레 그 사랑의 돛배에 오를가 말가 망설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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