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특무의 아들과 지주 딸의 로맨스
함흥대대 사무실을 둘러싼 토성이 아무리 높아도 잡아먹으려는 듯이 기승스레 휘몰아치는 눈보라를 당해내기 어려웠다. 토성 밖은 엄동설한의 추위로 하여 비술나무도 얼어서 탁탁 튈 지경이었다. 하지만 토성 안의 대대사무실 안서에는 용광로 같은 정치 열기가 끓어번지고 노루꼬리만큼한 권세를 턱대고 음충한 정치몽둥이가 음험하게 난무하고 있었다.
흥수는 토성 안 함흥대대 사무실에서 개 잡은 포수처럼 사무 상을 두드려댔다.
“너희들 결혼 못해!”
허나 경주는 머리를 숙이지 않았다.
“어째 결혼하지 못하오?"
"너희들 지주 딸과 남조선 특무 아들이야."
"그걸루 결혼하지 못한다는 법이 있소?”
경주의 결혼 꿈은 어수선한 하늘에서 잠꼬대를 하고 미련의 아름다운 사랑의 추억은 눈보라를 따라 룡트림하며 흩날렸다.
흥수는 조개턱을 쳐들고 경주에게 손사래를 쳐댔다.
“너 이놈, 감히 대대 간부한테 말 대꾸질할래?”
“왜 결혼하지 못하오.”
흥수는 허리를 쭉 펴면서 걸상 등받이에 잔등을 대더니 틀을 차리며 말했다.
“너 정말 답답해. 미련은 너보다 열 살도 넘어 이상이잖아? 네겐 누나라도 한창 위 누나야. 게다가 너희들은 지주와 특무 새끼야. 가정 성분이 나빠도 한참 나빠.”
“그런다고 결혼하지 못한다는 법이야 없잖소?”
“야, 이 자식아. 너 할배캉(할아버지하고) 물어봤어?”
이때 기다렸다는 듯이 덕성이 철규와 함께 사무실에 들어섰다.
“부르지도 않았는데 왜 왔어?”
덕성은 들어오자마자 울상이 돼 흥수의 두 손을 덥석 잡고 구부정한 허리를 꿉썩거렸다.
“리간부, 제발 얘들이 결혼하게 소개신을 떼 주오. 얘들이 그만, 야, 어떻게 말하겠어?”
그는 사위를 둘러보고 흥수한테 다가가 나직이 뒷말을 이었다.
"우린 다 남조선이 고향이 아니오? 좀 봐달라고."
흥수는 외까풀 눈을 가슴츠레 뜨고 경주와 미련을 번갈아 보면서 물었다.
“뭐 어째?”
“작은할아버지!”
경주가 벌떡 일어나 황급히 손으로 덕성의 입을 마구 막아버렸다.
흥수는 세 사람을 흘금 훑어보더니 여기에 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버릇처럼 조개턱을 쳐들고 경주를 뚫어지게 쏘아보았다.
“사실대로 말해. 뭐 속이면 경칠라.”
허나 경주는 식은땀을 줄줄 흘리면서도 이로 입술을 깨물며 한마디도 토설하지 않았다.
흥수는 외까풀 눈을 가슴츠레 뜨고 눈길을 미련에게 돌렸다. 그는 우먹한 신눈으로 미련의 아랫배를 흘금흘금 곁눈질 해보았다.
“혹시 너희들이 우리 대대 비준도 없이 그걸 하지 않았니?”
경주는 “아니오.” 하고 한사코 능청을 부리면서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허나 노처녀 미련은 능청을 떨지 못하고 머리를 숙이었다.
“네 놈들 잘하는구나. 우리 대대 비준도 없이 사통한단 말이냐? 감히 계획생육정책을 위반해?”
흥수는 일어나더니 미련의 앞으로 다가갔다.
“너, 일어서 봐!”
미련이 경주의 눈치를 흘금흘금 보면서 일어나지 않았다.
“못 들었어? 일어나라니께!”
허나 미련은 흥수를 쏘아볼 뿐 일어날 염을 하지 않았다.
“일어나지 못할까?!”
흥수는 다가가 미련의 손을 잡아 억지로 일궈 세웠다.
“어디 보자!”
흥수는 불시에 미련의 치포자락을 활 줴 들었다. 순간 허옇고 불룩한 아랫배가 훌 드러났다.
“아야 마야! 애 떨어지겠다!”
미련은 불시에 당한 일에 놀라 소리치면서 치포를 내리었다.
“반동 놈 새끼, 어디 보자.”
흥수는 치마우로 미련의 아랫배를 슬슬 만져 보더니 입을 짝 벌렸다.
“이 연놈들이 정말 비준도 없이 남조선특무 놈의 새끼 씨를 심었구나.”
그는 사무상에 돌아가 앉으면서 미련을 쏘아보았다.
“벌써 한 서너 달 되는 것 같구나. 능청스러운 연놈들, 오늘 저녁부터 투쟁을 단단히 받아야겠어. 집에 돌아가 검사서나 준비해.”
덕성은 두 손을 발이 되게 싹싹 비비면서 빌었다.
“애들이 주책없어 사고를 쳤는데 양해하시우. 제발 창피하게 투쟁은 하지 마시우. 제발, 비나이다.”
흥수는 목에 지렁이 같은 핏줄을 세우고 고함쳤다.
“개소릴 작작 쳐! 이게 어디 양해할 일인고? 우리 나라 산아제한정책을 어겼어. 개짓해?”
덕성은 흥수 앞에 넓적 엎드려 절을 마구 하면서 빌었다.
“제발 투쟁하지 말게나.”
“이 영감이, 누구한테 반말로 명령해? 영감도 오늘저녁부터 투쟁 받아야겠구먼.”
덕팔은 옆에서 보다가 말렸다.
“이 선전위원, 아니, 이 대대간부, 덕성 영감의 맏아들 칠백은 항일유격대 중대장이었고 조선인민군 대대장이 아니었소? 조선전쟁에서 목숨까지 바치지 않았소? 혁명열사 아버지 낯을 봐서 경주를 용서해주오.”
“영감, 중뿔나네 삐치지 말라니께. 됐소, 됐어. 더 말하지 말란께. 영감, 계선을 분명히 갈라야지. 왜 특무의 삼촌을 대신해 말해? 어째 영감도 특무 새끼를 보호했다는 모자 쓰고 투쟁을 받자고 그래?”
그러자 덕팔은 허리를 구부정하고 돌아서더니 사무실에서 나가버렸다.
그날 저녁이었다. 해가 어슬어슬 져가기 바쁘게 흥수는 돌멩이를 들어 토성 안 아름드리 비술나무에 처맨 종을 두드려댔다.
댕! 댕! 댕! 댕!
“투쟁대회를 합니다. 대대 사무실 마당에 모이십시오.”
흥수가 왜가리 목을 빼들고 소리치자 토성안집 새금이 집에서 나와 물었다.
“생원이, 오늘은 누굴 투쟁하오?”
흥수는 종을 서너 번 더 치고 돌멩이를 던지더니 두 손을 툭툭 마주 털었다.
“미련이 반동 놈의 새끼를 가졌시우.”
“뭐라오? 결혼도 하지 않고 노처녀가 애를 배다니? 세상에 별 희한한 일도 다 보겠다.”
새금이 마을에 나가 소문을 퍼뜨리는 바람에 사원들은 구경거리 생겼다고 야단쳤다. 그들은 곤한 대로 일찍이 대대 마당에 모여들었다.
토성 주위에서는 눈보라가 윙윙 휘몰아쳤지만 토성 안은 투쟁대회 열기로 끓어 번졌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지주 장학산과 지주의 아들들인 장충국, 지괴호 등이 사원들 앞에 고깔모자를 쓰고 죽 늘어서서 머리를 숙였다.
흥수는 나서서 투쟁대회를 사회했다.
“반동 놈의 연놈들을 끌어내라!‘
흥수의 “명령”이 떨어지자 민병들이 경주와 미련을 숱한 사원들이 모인 투쟁마당 앞에 끌어냈다.
흥수는 투박한 손으로 경주와 미련의 뺨부터 찰싹찰싹 갈겼다.
“이 반동 놈의 새끼들아, 연놈들이 감히 대대 비준도 없이 반동 놈의 새끼를 배? 엉? 로실히 탄백해라!”
숱한 사원들은 지주 장학산네 노처녀 미련이 결혼도 하지 않고 배가 불룩한 것을 보고 쑤군거렸다.
“아이고, 어쩜 노처녀가 임신을 해?”
“못된 쇄지 엉덩이에서부터 뿔이 난다더니? 저 경주 새끼를 보오. 아비를 닮아서 못된 짓부터 하지 않소?”
“글쎄 말이오. 어쩜 자기보다 열 살도 더 많은 어미 같은 년을 들쑤셔 저런 사고를 다 치오?”
그 소리에 경주는 머리를 들고 떳떳이 말했다.
“좋은 약혼자들끼리 애를 뱄는데 무슨 죄가 있다고 이러오?”
그러자 흥수는 손가락으로 경주의 이마빼기를 쿡쿡 찌르며 야단쳤다.
“이걸 봐라! 자기 지은 죄도 모르고 허둥대겠냐? 여기 네놈의 아비 고향인가 해? 여긴 한국, 아니, 남조선 경주인가 해? 여긴 중국 사회주의 조국 땅이야. 비준도 받지 않고 마구 애를 배는 건 반동 죄야. 나라 국책을 어긴 반동 죄. 알만해?”
흥수는 숱한 사람들의 앞인지라 꽤나 점잔을 빼며 투쟁대회를 이끌어나갔다.
“범죄경과를 얘기해.”
“뭘 말이오?”
흥수는 경주와 미련의 턱을 손가락 끝으로 쳐들고 뚫어지게 쏘아보면서 고함쳤다.
“누가 먼저 그 짓을 하자고 했어? 상세히 탄백하란 말이여.”
경주와 미련은 서로 쳐다보며 부끄러워 시물새물 웃으면서 누구도 먼저 입을 떼지 못했다.
이윽고 경주는 제꺽 말해 버리고 시름 놓으려고 했다.
“난 미련을 진짜 사랑하오. 지난해 여름에 태평강에서 목욕하다가 태평강을 건너 지나가는 미련을 붙잡아 가지고 옥수수 밭으로 갔지. 그런데 미련은 고모사촌 지괴호한테 시집가겠다고 하지 않겠소.”
“가만!”
흥수가 손을 쳐들었다.
“가만! 미련아, 저 말이 맞어?”
그러자 미련은 머리를 약간 들었다.
“맞소. 우리 아버지는 나를 고모사촌 오빠한테 시집가라고 했소.”
미련은 다시 머리를 숙여버렸다.
흥수는 사원들 앞에 머리를 숙이고 마주 서있는 지괴호한테 물었다.
“저 계집애 네한테 시집가려고 했다는데 사실이 맞는가?”
“예.”
지괴호는 목구멍으로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겨우 대답하였다.
장학산은 미련을 흘겨보았다. 그 눈길은 “아비 말도 듣지 않고 이게 무슨 일이냐?”고 하는 상 싶었다.
흥수는 경주에게 몸을 돌렸다.
“계속 탄백해!”
경주는 뒷덜미를 긁적거리더니 자랑삼아 뒤 말을 이었다.
“그래서 괘씸해서 그랬소.”
“뭐? 상세히 말해라! 모두 다 듣게.”
흥수의 핍박에 못이겨 경주는 머뭇거리다가 천천히 입을 뗐다.
“옥수수 밭에서 미련을 와락 끌어안았소.”
“어마나! 그런 거 왜 다 얘기해? 창피하게!”
미련은 옆에 선 경주의 팔을 툭 쳤다.
“너 이년, 입 다물지 못해!"
흥수는 미련을 쏘아보면서 을러메고나서 경주한테 돌아섰다.
"계속 말해!”
“그래서…”
“아니다! 이 대목은 노처녀 미련이 말하면 더 재미있겠다.”
흥수가 기발한 생각을 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좋습니다.”
학수도 사원들 앞에 나서서 소리쳤다.
“지주놈의 년, 아니, 딸년, 탄백해라!”
미련은 마지못해 머리를 숙인 채 떠듬떠듬 한어로 얘기했다. 그 목소리는 모기 소리 같았다.
“나는 지괴호 오빠한테 시집가야 한다고 했소. 그런데도 경주는 계속 자기와 결혼하자고 했소. 난 나이도 열 살이나 이상이지. 지주 딸이자 국민당 특무의 여동생인데 괜히 고생하자고 그러는가 했소. 그런데 경주는 지주네 딸과 특무네 아들은 사랑하지 않고 시집장가 가지 않겠는가고 했소. 그래더니 나를 와락 끌어안지 않겠습니까?”
흥수는 옆에서 경주의 머리카락을 쥐여 쳐들면서 “그랬어?” 하고 따졌다.
“예. 그랬소."
“그래서 어떠럭하데이(어쩌더냐)?”
미련은 죽어 들어가는 소리로 뒷말을 이었다.
“그래서 그렇게 됐습니다.”
흥수는 들볶아댔다.
“뭐야! 얼버무려 넘어 가려고 하지 말랑께. 가장 관건적인 죄행을 낱낱이 탄백해라! 이 추운 겨울에 모두 일찍이 끝내야 집에 가 쉬고 내일 일하러 가지.”
미련은 갑자기 머리를 쳐들더니 젖 먹던 힘까지 다해 고래고래 고함쳤다.
“자기 몸에 달린 걸로 하는 것도 당신 비준받고 해야 하오!? 당신 비준받아야 애를 밴다는 도리 세상에 어디 있소?!”
“이 년이 이거 정말 호랑이 담 짝이구나! 죽을 죄도 모르고 언감 누구한테 고함질이냐?”
흥수가 미련의 긴 머리카락을 마구 쥐여 흔들었다. 그러자 흥수의 손이 끄당기는 대로 미련의 불룩한 배가 휘청거렸다.
“저 쌍년의 보*짝에 고춧가루를 쑤셔넣어라!”
이때 숱한 사원들 속에서 누군가 쌍욕을 들이댔다.
“옳다!”
“고추가루를 쑤셔 넣어라!”
“쑤셔 넣어라!”
허나 흥수가 구호를 부르는 사원들에게 손사래쳤다.
“건 안 돼. 도리 없이 그럼 안 돼.”
뜻밖에도 흥수는 점잔을 뺐다.
“죄범 미련은 계속 탄백해라. 그래서 경주가 먼저 널 건드렸니? 아니면 노처녀인 네가 남자 맛을 보려고 경주를 얼렸니?”
“별 걸 다 묻소?”
“건 누가 주범인가를 가리기 위해서이다. 어서 말해!”
그리하여 미련은 별 수 없었다.
“경주가 먼저 나를 와락 끌어안더니 입술로 내 볼을 마구 핥고 빨고 했습니다.”
"저런, 저런!"
“또 어쩌더니?”
미련은 몸을 탈면서 뒷말을 잇지 못했다.
“그래 어쨌니?”
흥수가 족따지자 옆에서 지켜보던 경주가 머리를 들고 떳떳이 말했다.
“미련은 지괴호한테 시집가겠다면서 그래는 거 내 막 깔고 들어앉아 그랬소.”
“그랬다는 건 뭐야?”
“남자와 여자가 하는 걸 했소.”
“몇 번 했니?”
“그날 옥수수 밭에선 한번 밖에 하지 못했소.”
“거짓말!. 노처녀와 노총각이 처음 하는 게 딱 한번만 했다고? 누가 곧이들어?”
“미련의 치마에 피 질벅하게 묻어 겁나 더 못했소.”
흥수는 머리를 끄덕이다가 또 따지고 들었다.
"아니, 그걸 했는데 어째 피 다 나왔어? 거짓말이야."
"리간부. 진짜라니까. 미련은 노처녀지만 숫처녀였소."
"내 결혼해 그럴 땐 피 나지 않았어. 너 거짓말 하겠어?"
그 말에 여기저기서 웅성거렸다. 춘실은 머리를 푹 수그렸다.
경주는 억울하다는듯이 머리를 절레절레 젓다가 춘실한테 눈길을 박았다.
"그 집 아줌마 숫처녀 아니여서 그랬겠지."
"너, 이놈, 무슨 개소리야?"
경주는 입이 뿌죽해 두덜거렸다.
"그래 그 집 아줌마 숯처녀요?"
"이놈 새끼!"
찰싹!
"왜 때려?"
경주는 뺨이 아파 손으로 만지면서 계속 게두덜거렸다.
"그 집 아줌마 상순하구 어려서부터 바람 피워 애까지 낫지 않았소? 숫처녀 아니니깐 그렇지. 그런 것두 모르면서, 씨."
춘실은 너무 창피해 우쭐 일어나 회의실에서 훌 나가버렸다.
상순은 눈을 지그시 감고 모로는 척했다.
흥수는 개 잡은 포수처럼 우쭐해 경주를 보고 손사래를 쳤다.
"너 이놈, 왕청 같은 생사람 물어메치겠어?! 죽을락꼬 환장했어?!"
"어째 그 집 아줌마는 바람 피워 애까지 나았는데두 투쟁하지 않아? 씨, 아직 애두 안 낳았는데두 우리만 투쟁하면서, 흥!"
여기저기서 키득거렸다.
"조용해!"
흥수는 낯짝도 황소 엉덩짝보다도 더 두꺼웠다.
그는 창피한줄도 모르고 계속 경주를 족따지면서 투쟁했다.
“그 후에는 몇 번 했니?”
“한 스무번?”
“어디서?”
“패용천산에서도 했고 강냉이 밭에서도 했소. 태평강변 버드나무 숲속에서도 했고 소서구 천지꽃산에서도 가만히 했소.”
흥수는 경주의 뺨을 찰싹 갈겼다.
“무치한 놈! 이 놈, 자랑 삼아 얘기하는 거 봐! 우리 마을 산과 들, 밭을 몽땅 네놈들이 돌아다니면서 더럽혔구나. 반동년놈들이라구. 쯧쯧쯧.”
그러자 경주는 흥수를 쏘아보면서 두덜거렸다.
“당신들이 일하고 곤한데 저녁에 이런 누추한 얘기를 들어야 집에 가서 잠도 잘 오지. 흥!”
“이 놈 새끼, 죽을 죄는 모르고 통통한 소릴 줴쳐? 우리 신성한 투쟁대회를 모욕하겠어?”
흥수는 주먹으로 경주의 면상을 꿍 쳐박았다. 경주는 코피를 랑자하게 흘렸다.
그 바람에 그날 투쟁대회는 놀라움과 호기심, 웃음 속에서 흐지부지해서 끝나버렸다.
10. 시련
이튿날 흥수는 대대 위생소 정규상을 찾아갔다.
정규상은 간호사가 없어 한창 주사기를 소독하다가 흥수를 보고 알은체 했다.
“누가 또 앓소?”
“어, 아니오.”
흥수는 정규상이 폐 염에 걸려 죽어가던 미선을 구해 준 후부터 마구 투쟁하지 않고 은근히 보호해 주었다.
“정 의사, 미련의 배속의 애를 떼버리자고 왔소.”
“양? 어째?”
“그 반동의 씨를 없애 버려야 하겠소. 속담에 풀을 베자면 뿌리부터 뽑아버려야 한다고 하지 않았소?”
그러나 정규상은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흥수는 조개턱을 쳐들더니 눈초리마저 꼿꼿해났다.
“왜?”
“아무리 지주 딸이라고 해도 어떻게 배속의 애를 마구 떼버리겠소?”
정규상은 소독한 주사기를 꺼내 주사기 통에 넣으면서 심중하게 말했다.
흥수는 화가 치밀었다.
“미련이란 년이, 내 비준도 없이 애를 배고서도 뭐라고 했는지 아오? ‘자기 몸에 달린 걸로 하는 것도 당신의 비준을 받아야 하오!? 내 몸도 당신의 비준을 받아야 애를 밴다는 게 어디 있소?!’ 이 말은 자기 몸도 정부의 건가고 따지고 드는 거 아니겠어? 원, 무정부주의자라도 그런 무정부주의자가 어디 있어?”
흥수는 정규상의 눈치를 흘금 살폈다.
“사람은 항상 평화로울 때일수록 간고하던 전쟁 년대를 잊지 말아야 하오. 가겠소? 가지 않겠소?”
정규상이 그 말귀를 알아듣지 못할 수 있겠는가!
정규상이 위생가방을 메고 따라 나서자 흥수는 개 잡은 포수처럼 어깨 으쓱해 위생소를 나갔다.
(내 말을 듣지 않으면 네 놈을 놔 둘 거 같으냐? 미선이 앓으면 큰 병원에 가면 되지. 흥! 더러운 우파분자!)
흥수는 건 가래를 땅바닥에 뱉고 나서 정규상을 되돌아보면서 물었다.
“뭘로 애를 떼버리오?”
“애가 대여섯 달 됐다면서? 약물로도 바쁘고 수술칼로 배를 째고 꺼낼까 하오.”
“음, 그래? 그년이 칼을 맞을 노릇을 했지. 이런 걸 두고 쌍통, 맨통, 꼬부랑 통, 영감 노친 담배통, 우정국의 전화통, 노처녀 젖통이라는 거야. 음메- 하하하, 허허허. 꽤나 볼만하겠구먼. 배를 쭉 째고 피가 뻘건 애를 꺼내? 어허허, 허허허. 지주 놈의 새끼는 씨를 말려야 해.”
흥수가 흥이 나서 어깨춤까지 추면서 눈보라치는 소서구로 올라 갈 때다.
“여보시오, 대대 선전위원동지, 나 좀 보소.”
흥수가 되돌아보니 미련의 오빠 충국이 뒤따라오지 않았겠는가?
“왜 그래?”
충국은 규상이 뒤에 있는 것을 보고 흥수를 한쪽으로 끌고 가서 털외투 단추를 열고 품속에서 대들보 같은 술병을 꺼내 보였다.
“사실, 난 형님을 찾아 갔소. 그런데 없더구먼.”
“뭐? 형님? 그래 어쩔 셈이야?”
흥수는 조개턱을 쳐들고 가물에 실 돌피 같은 허리를 쭉 펴면서 틀을 차렸다.
충국은 술병을 꺼내 주면서 “형님, 이 술을 마시고 미련을 놔주오. 우리 집안에는 걔까지 애를 낳지 못하면 대가 끊어지오.”
그 말에 흥수는 술병을 받아 땅바닥에 꽝 메치면서 발끈 성을 냈다.
“이놈 새끼! 날 보기를. 이까짓 술병 보고 한국 특무놈 씨를 남기게 할 거 같아?”
충국도 자존심이 있었다.
“그럼 어찔 예산이야?”
“배를 째고 특무놈 씨를 꺼내 얼궈 죽이겠다.”
충국은 깜짝 놀라 입을 항아리 아가리만큼 쫙 벌리더니 헐금씨금 소서구로 올라갔다.
윙윙 휘몰아치는 눈보라에 외투자락을 날리면서 씽씽 앞서 가는 충국의 잔등을 보면서 정규상은 싸늘한 살기가 느껴졌다.
허나 흥수를 따라가지 않을 수 없었다.
한참 후 소서구 어귀 토성 안에 들어서자 황둥개가 씽 달려 나오면서 왕왕 짖었다. 황둥개 목 바를 풀어 놓지 않았겠는가!
“개자식, 우리를 물라고 개까지 풀어놨구나.”
흥수는 대문에서 빗장을 빼들고 달려드는 개를 탁 쳐 눕혔다.
황둥개는 깨갱거리더니 대갈통이 터져 쓰러졌다. 대가리에서 흐른 피가 허연 눈을 뻘겋게 물들였다.
흥수가 정규상을 데리고 집안에 들어서자 미련은 보이지 않고 충국이 쏘아보며 구들에 말뚝처럼 박혀있었다.
“야, 미련을 어디에 숨겨 놓았어? 당장 내놓지 못해?”
흥수는 외까풀 눈에 독살을 피우면서 충국을 쏘아보았다.
“저 윗방에 있소.”
장충국은 아주 유창한 조선말로 말했다.
장학산은 흥수의 팔을 붙잡고 비난사정을 했다.
“몇 십년 만에 보는 앤데 낳게 해주오.”
그러자 흥수는 장학산을 활 밀어재꼈다.
“물러나지 못해? 더러운 지주놈 새끼, 옛날에 우리가 조선에서 갓 왔을 때 네놈들이 우리를 사람으로 보았어? 그저 병완 영감과 기준영감 밖에 모르더니. 흥, 어때? 그 영감들이 널 구해줘? 네놈을 청산하고 투쟁했지. 쌍통이야! 흥!”
장학산은 넘어졌다가도 허연 수염을 끌면서 일어나 가냘픈 손을 뻗쳐 흥수의 바지가랭이를 잡고 빌었다.
“흥수! 제발, 제발, 애를 다치지 마오.”
흥수는 발길로 장학산을 걷어차 번져 놓고 다짜고짜로 서쪽 윗방으로 올라갔다.
흥수가 윗방에 들어가 보니 미련이 이불을 덮고 반듯이 누워 까딱하지 않고 있었다.
(아니, 이 년, 이거.)
실한 오리도 걸치지 않은 미련의 허연 허벅다리가 이불 밑으로 반쯤 드러나 있지 않겠는가.
“이년, 얼른 옷 입고 일어나지 못해?!”
흥수는 혼 나간 사람처럼 미련에게 덮쳐나가더니 이불을 와락 걷어치웠다. 순간 실 한 오리도 걸치지 않은 미련의 하얀 알몸이 백일하에 드러났다. 집안의 해빛을 받아 미련의 풍만한 우유 빛 젖가슴이 숨결을 따라 출렁이면서 오르내렸다.
(저 야들야들한 젖가슴.)
순간 흥수는 뒤에 정규상이 있다는 것도 잊고 발가벗은 미련의 야들야들한 허벅지를 슬슬 매만지면서 중얼거렸다.
“싯허연 대낮에 왜 벗고 있어? 이년 미인계를 써서 간부를 유혹해 함정에 빠뜨리려고?! 어림도 없다!”
그때 미련은 내리깔았던 눈을 살며시 뜨고 흘겨보면서 버럭 고함쳤다.
“만지긴?!”
그제야 제 정신 좀 들었는가. 흥수는 쏘아보는 미련에게서 눈을 떼고 정규상을 되돌아보더니 호령했다.
“멍해 서서 뭘 해? 빨리 배를 째고 애를 꺼내지 않고.”
“양. 알았소.”
정규상은 위생 상자를 열고 약솜을 꺼내 미련의 배를 슬슬 닦았다. 그리고 청진기를 불룩한 배에 대고 도정신해 들었다.
이때 문이 벌컥 열렸다.
“이 놈들! 뭐 하는 짓이야!”
충국이 성난 사자처럼 고함치면서 덮쳐들었다.
그는 정규상의 위생상자에서 수술 칼을 빼들고 흥수에게 덮쳐들었다.
“이 놈, 네 놈 불알부터 까버리겠다.”
뒤에서 장학산이 수염을 흩날리면서 들어와 흥수를 깔고 들어앉아 바지 괴춤을 벗기는 충국을 뜯어 말리려고 손을 뻗쳤다.
“충국아, 그만둬라! 어쩌자고 이러니? 대대 간부를 깔고 들어앉아 이러면 되니?”
“우리 지주는 사람이 아니오? 어쩜 애마저 낳지 못하게 하오?”
충국은 아버지에게 잡힌 팔을 빼더니 흥수를 깔고 들어앉아 바지를 벗기고 사타구니에 쇠갈퀴 같은 시꺼먼 손을 넣었다.
“아이고, 나 죽는다, 죽어. 정의사, 날 살려주오.”
그제야 정규상은 충국의 팔을 잡아 뒤로 잡아당기면서 말렸다.
“충국이, 이걸 놓소. 이러면 안 되네. 청진기를 대보니 애가 아주 건강하오.”
“건강해 뭐라오? 빼버리겠는데.”
장충국은 흥수의 그걸 꽉 거머쥐었는데 정규상과 장학산은 말리느라고 잡아당겼다. 그 미세 당기세 판에 밑에 깔린 흥수가 죽는 소리를 쳤다.
“아이고! 알이 다 터진다, 터져! 제발 날 살려라.”
그러자 충국은 시퍼런 수술칼을 들고 불알을 꽉 움켜쥐면서 위협 절반, 흥정 절반 들이댔다.
“내 여동생 애를 빼내겠는가?!”
“아, 아니, 이걸 놔라. 내 눈 감아 줄게.”
“결혼 소개 신을 떼 주겠는가?”
“응, 응, 이젠 이걸 놔라.”
“여기서 당장 써라.”
“아, 아, 그래. 어- 나 죽는다. 아야.”
충국이 놓아주자 그제야 흥수는 숨이 올라왔다. 충국은 수술칼을 든 채 저쪽 칸에 가서 종이와 연필을 가져왔다.
“어서 써!”
흥수는 너무 아파 왼손으로 사타구니를 감싸 쥐고 오만상을 찡그리면서 겨우 일어나 누런 종이에 몇 글자를 썼다.
소개신
함흥대대 김경주와 장미련의 결혼을 소개하오니
공사에서는 등록해 줄것을 바랍니다.
함흥대대 당 지부 선전위원 이흥수.
1965년 12월.
이흥수는 소개신을 써주고나서 절룩거리면서 방에서 나가려고 헤덤볐다.
“아, 아, 아파 죽겠다.”
“난 조선어를 몰라. 옳게 썼는가 보오.”
장충국이 정규상에게 소개신을 내밀어보였다. 정규상이 대충 내리 훑어보고 머리를 끄덕였다.
흥수는 충국이 괘씸하면서도 힘으로 용빼는 수 없었다. 한시 급히 이 마귀 굴 같은 지주네 집에서 벗어나야 했던 것이다.
“정 의사, 빨리 위생소에 돌아가서 나를 검사해 주오. 아이고, 아파 죽겠소.”
정규상은 좋아라고 충국에게 왼눈을 찔끔 감아 보이면서 흥수를 따라 나갔다.
흥수는 절룩거리면서 토성 밖으로 나간 후에야 뒤돌아보면서 악에 받쳐 이를 뿌드득 갈았다.
“내 저 지주놈 새끼를 가만 놔두는가 봐라.”
위생소에 돌아 온 후였다.
아파서 상을 찡그리는 흥수를 침대 위에 눕히고 나서 정규상은 바지 괴춤을 까고 검사해 보았다. 그런데 정말 거짓말을 보태 **중태가 한뼘이나 늘어나지 않았겠는가? 그건 두개 다 붙어 있나 주물러 보니 있긴 있는데 쓰게 된 것 같지 않았다.
“어떤가? 아가. 아파라.”
흥수는 외까풀 눈을 거슴츠레 뜨고 정규상을 올려다보았다. 어쩐지 정규상의 표정이 굳어져 있는 것이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어째?”
“자기절로 잘 보오, 어떻게 됐는가?”
흥수는 일어나 앉아 가지고서도 감히 내려다보지 못해 한참만에야 조개턱을 내리우면서 외까풀 눈을 슬며시 내리 깔았다.
“어! 이게 뭐야? 아이고!”
흥수는 울상이 돼 정규상을 붙잡고 야단쳤다.
“이보, 이게 아픈 건 둘째고 써먹을 수 있을까?”
정규상은 속으로 터져 나오는 웃음보를 겨우 참느라고 돌아서서 대답했다.
“그거야 아주머니한테 물어봐야지.”
“아갸갸. 이걸 어쩌나?”
흥수는 너무 아파 공양이가 불알을 앓는 상을 짓고 죽어가는 소리를 질렀다.
이튿날 이른 아침에 흥수는 아픔을 참으면서 상순을 찾아갔다.
그는 전날에 있은 일 자초지종을 쭉 말하고 나서 민병을 데리고 가서 충국을 붙잡아오겠다고 했다.
상순도 아주 분개해 자리에서 일어나 중얼거렸다.
“그 놈 자식이 언감 대대 간부에게 손을 대? 당장 붙잡아야지.”
“그러게 내 뭐라고 했소? 지주 딸이라도 결혼하고 애를 낳는 거까지야 어떻게 막소? 이젠 이 일을 막지 마오.”
흥수는 후회막급이었다. 괜히 저네 좋아하는 판에 끼어들어 심술을 부리다가 미련의 살맛도 보지 못하고 그것까지 상했으니 좆 떼우고 불 떼우고 뒤로 엎어져도 콧등을 깼으니 말이다.
상순과 흥수가 총까지 든 철국이랑 성환이랑 청년민병들을 대여섯 데리고 소서구 어귀로 달려갔다.
그들이 소서구 어귀 토성안집을 포위하고 뛰어 들어가니 충국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상순은 미련을 보고 물었다.
“충국인 어디로 갔어?”
“말로는 내 결혼 증을 떼러 간다던데요.”
허나 장학산은 밭고랑 같은 주름이 잡힌 얼굴에 죽을상을 지었다.
“저기 쪽지 써놓고 갔소.”
상순은 장학산이 가리키는 창턱에서 종이쪽지 한 장을 주어 들고 내리 훑어보았다. 흥수는 한자를 몰라 상순이 보는 옆에서 들여다보면서 물었다.
“뭐라고 했소?”
“이 놈이 기고만장하기로서니. 흥수와 대대 간부들이 경주와 미련의 결혼을 막는 날엔 언제든지 나타나 가만 놔두지 않겠다고 했소. 가자, 공사에 가서라도 이 놈을 잡아야 해.”
상순은 민병들을 데리고 눈보라가 윙윙 휘몰아치는 산길을 따라 달렸다.
“가만!”
상순은 토성안집에 달려 들어가 전화로 공사 파출소 허영호 소장에게 정황을 알렸다.
허 소장이 다음과 같은 정황을 알려주었다.
“김서기, 장충국은 확실히 공사 민정소에 와서 경주와 미련의 결혼 증을 냈습니다. 그런데 지금 어디로 갔는지 우리 민경들이 추적해도 찾을 수 없습니다. 우전국 치보주임이 금방 전화가 왔는데 충국과 비슷하게 생긴 마흔이 푼한 한족사내가 소포에 결혼증을 넣어 함흥대대 소서구에 부치고는 어디로 가버렸다고 합니다. 우리 파출소에서 계속 추적하겠습니다. 함흥대대에서 군중들의 생명안전을 주의해 보위하십시오.”
“알았소.”
상순은 전화를 놓으면서 흥수의 낯에 대고 삿대질했다.
“다 당신 탓이오. 미친 개는 막다른 골목에 이르면 지붕을 뛰어 넘는다는 거 모르오? 괜히 긁어서 부스럼을 만들지 않고 뭐요? 흥!”
흥수는 아직도 아파 상을 찡그리면서 상순의 칼날 같은 세 귀 눈길을 피해 머리를 숙였다.
어느덧 추운 겨울은 가고 비단결로 얼굴을 만지는 듯이 부드러운 봄바람이 불어치는 새 봄이 왔다.
상순은 사원들을 세개 대로 나눠 이끌고 조개덕 앞의 체전 논밭머리에 물도랑을 파고 그 우에 커다란 물레방아를 놓는다, 과수원에 사과 배나무를 심는다, 멍지메산 앞에 새로 논을 푼다 하면서 분망히 보내고 있었다.
사원들은 상순의 호소에 따라 일을 하면 할수록 성수났다. 하긴 밭이랑 개인에게 나눠줘 개인도급제로 농사를 지은 후 웬 일인지 집체로 농사를 지을 때보다도 사원들의 쌀독에 쌀이 꼴딱꼴딱 찼다. 마을에는 찰떡이랑 감자누룽지랑 먹으면서 “양양 맛있다. 오래오래 맛있다.”고 동요를 부르면서 뛰노는 애들이 많아지지 않는가!
(별 일이야. 아무튼 집체로 농사를 지을 때보다 개인으로 농사를 지으면 지은 것만큼 자기에게 차례지니까. 더 열정이 나고 책임지고 농사를 지은 모양이지? 허, 참. 알고도 모를 일이야.)
어느 날, 상순이 멍지뫼산 앞에서 논을 풀고 돌아오는 길에 태평강에서 손을 훌훌 씻을 때었다.
지춘실이 옆에 와서 손을 씻으면서 말을 걸었다.
“여보, 난 어쩌라오?”
“여보라니? 사람을 웃기지 마오.”
허나 춘실은 주위를 핼끔 둘러보더니 사람이 없는 것을 보고 “정색해 말했다.
"저 나그네 몇달 채 그걸 꼼짝하지 못하오. 난 생과부로 되지 않겠소?”
“그걸 나하고 말하면 어쩌오?”
상순은 싱거워하면서 우쭐 일어나 가려고 했다.
“여보, 당신은 내 첫사랑이오. 남의 고통도 알아줘야 하지 않소?”
“그런 일은 모르오. 흥!”
상순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아름드리 버드나무 숲속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춘실은 허연 머리 수건을 벗어 쥐고 뒤따라 달려가 상순을 붙잡아 풀밭 속으로 끌고 가려고 했다.
“어째 이러오? 또 이전처럼 나를 함정에 빠뜨리자고 이러오? 어림도 없어. 내가 함정에 빠진다고 흥수가 서기로 될 거 같소.”
상순이 쌀쌀하게 말하면서 붙잡힌 팔을 홱 뿌리쳤다.
허나 춘실은 울상을 지으면서 애원했다.
“상순아, 야, 이 놈 새끼야. 너무 청백한 것처럼 놀지 말라. 넌 사람이 아니야? 감정이 없는 돌부처야? 난 네가 명옥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거 다 안다. 또 나를 사랑하는 것도 안다. 어찌 감정을 속이고 살아야 하니?”
상순은 자기 약점이라고 할까 아픈 데를 푹 찌른 그 한마디 말에 정신방선이 와그르르 무너지는 감을 느꼈다.
그는 몸이 달아 자기에게 안겨오는 춘실을 꽉 껴안았다.
야드르르한 이파리가 뾰족뾰족 돋아나는 버드나무 가지들이 그들의 머리 우에서 봄바람에 하느작거렸다.
이윽고 제 정신을 차린 상순은 껴안았던 춘실을 훌 풀어놓으면서 중얼거렸다.
“안 돼, 우린 합법적인 부부가 아니야. 난 어려서 셈이 없어 널 임신시킨 거야. 절대 사랑한 거 아니야. 난 한평생 너에게 미안할 뿐이다. 이젠 모든 게 끝났어. 무슨 사랑이고 바람이고? 난 당원간부야. 내 인생에 다시는 남의 유부녀를 다치지 않을 거야. 모든 건 무덤으로 가지고 가자.”
상순은 해가 뉘엿뉘엿 져가는 버드나무숲 속에 춘실을 혼자 남겨두고 성큼성큼 조개덕으로 떠나갔다. 사랑의 시련을 이겨낸 상순은 버드나무 숲속을 빠져 나오자 홀가분한 감을 느꼈다. 허나 인차 애석함이 물결쳐오는 감을 어찌 할 수 없어 땅이 꺼지게 한숨을 내쉬었다. 실로 정치투쟁의 시련 못지 않게 사랑이 시련도 이겨내기 쉽지 않은 것이었다.
춘실은 설레는 버드나무에 몸을 맡긴 채 오도카니 서서 눈물이 글썽한 눈으로 멀어져가는 상순의 너부죽한 잔등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이윽고 그녀는 가냘픈 어깨를 들먹이면서 허연 머리 수건으로 두 볼을 타고 줄 끊어진 구술처럼 줄줄 흘러내리는 뜨거운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그녀의 머리 위로 빨간 잠자리가 날개를 하느작거리면서 하늘하늘 날아예고 있었다.
(지금까지 여러분께서는 김장혁 작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 제5권까지 읽었습니다. 이제껏 저의 대하소설 향연을 음미한 여러분께 경의를 드립니다.
이제부터 김장혁 작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 제6권이 시작됩니다.)
김장혁 작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
제6권
제26장 폭란
1. 폭풍우 전야
황금물결이 출렁이는 가을이 왔다. 이태동안 사원들이 애쓰면서 멍지뫼산 앞에 새 논을 푼 보람으로 사원들은 이전보다 쌀 고생을 덜하게 되어 가을걷이에 신바람이 났다.
병완은 손자가 모는 소수레에 앉아 흰 수염을 흩날리면서 풍년 가을을 하는 사원들을 바라보면서 밭고랑 같은 주름살이 잡힌 얼굴에 춘풍이 넘실거렸다.
“참 좋구나. 올해는 풍작이 들었구나. 허허허.”
병완은 수레를 멈추게 하고 머리를 숙인 벼이삭들이 넘실거리는 멍지뫼산 앞의 산종 논을 바라보았다.
“모래밭이어서 벼농사가 될가 근심했댔는데 괜찮구나. 올해는 산종을 했지만 명년에는 둼을 많이 내고 산종보다 줄이 가쯘하게 벼모를 꽂게 해라.”
“예. 할아버지, 과수원에 가 보겠습둥?”
“그래, 그래.”
상순은 소수레를 돌려 칼산과 패랑산 사이에 차린 과수원으로 향했다.
상순은 할아버지가 지팽이를 짚고 여기까지 벼농사 구경하러 오려는 것을 말리면서 수레에 모시고 왔던 것이다. 세월이 무서웠다. 호랑이도 단매에 때려눕힌 할아버지가 이젠 허리도 구부정하고 걸음걸이도 점점 못해가는 모습을 보고 마음이 아팠다. 그리하여 명옥과 함께 종종 닭을 잡아 고아 할아버지에게 드리라고 웃새집에 올려 가군 했다. 아버지를 여의고 할아버지를 모시는 상길 부부는 효성을 다해 극진히 대접했다. 그간 후할머니마저 세상을 떠서 상길은 할아버지가 외로워 할 까봐 정신적으로도 위안될까 해 옛날 고향에서 살던 얘기랑 들려주었다.
수레가 덜커덕거리면서 어느 덧 새로 가꾼 대대 과수원에 이르렀다. 아직 애어린 과수나무들이 누런 이파리를 나풀거리면서 돌로 쌓은 다락밭에 서 있었다. 그 사과배묘목은 상순이 몇몇 사원들을 데리고 사과배종수가 있는 로투구진 소기촌에 가서 최령감에게서 가져다 심은 것이었다.
병완은 방불히 누런 사과배가 주렁주렁 달린 과수나무들을 보는 상 싶었다.
“허허허. 이제 5, 6년 있으면 그럴듯한 과수원이 되겠구나. 그때면 우리 대대 사원들이 조선 고향에서 먹던 배 맛을 보겠구나. 우리 조선에서는 북청에 사과배가 많이 난다더구나. 그것도 조선의 위대한 수령 김일성 주석께서 지시한대로 함경북도 북청 땅에 사과를 많이 심었는데 해마다 사과풍작이 든다고 하더구나. 이제 우리 대대 과수원에서 조선 고향보다 못지 않은 사과배가 주렁주렁 달리겠구나.”
“예. 할아버지, 오래오래 앉으셔서 꼭 우리 과수원 사과배를 맛 보셔야 합니다.”
손자의 말에 병완은 기침을 쿨룩쿨룩 하더니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내 이만 살았으면 더 바랄게 뭐냐? 아들 셋이나 앞세우고 더 살아 뭘 하겠느냐? 이젠 네가 나를 대신해 우리 대대 사원들을 배불리 먹고 살게 하니까. 한시름이 놓인다. 이젠 죽어도 한이 없을 거 같아.”
병완은 버릇처럼 곰방대에 담배를 재우려다가 생강같이 마른 손을 거두었다.
“아차, 가을에 야산에서 담배를 피우다가 경 치겠다.”
병완은 바싹 마른 나무이파리들에 불이라도 달릴까봐 그만 두었다.
그는 과수원을 둘러보다가 상순을 돌아보더니 곰방대로 과수원둘레를 동서북으로 둥그렇게 돌아간 칼산과 패용천산 뒤의 산마루를 가리켰다.
“상순아, 저기 산마루 길을 따라 돌아가면서 길 양옆에 비술나무를 두줄로 쭉 심어 놓았으면 좋겠구나.”
“예. 그거 정말 좋은 생각입니다.”
“이전에 대약진 때 가물어서 얼마나 고생했니? 사원들과 소들이 무더운 여름에 나무그늘도 없어 더위를 먹고 마구 쓰러지지 않았니? 밭머리에 나무그늘도 있으면 얼마나 좋니? 그리고 이담 비술나무가 크면 구불렁한 비술나무를 드문드문 베여다가 가대기랑 농쟁기를 만들면 얼마나 좋겠느냐?”
상순은 연신 머리를 끄덕였다.
“예- 아무튼 할아버지께선 목수이셔서 생각이 넓으십니다.”
병완은 덜컥거리는 수레에 앉아서도 집 식구들의 근심을 했다.
“은숙이랑 돌아왔다니 시름놓았다. 그 놈 계집애 어쩜 조선으로 달아날 궁리를 다 했니? 정신 있니? 제 어시들을 다 잡아 먹고 혼자 잘 살아보려고? 망할년의 계집애. 흥!”
병완은 욕설을 하고 나서 상순을 보고 “소수레를 세워라.”라고 부탁했다.
이윽고 병완은 수레에서 내리더니 칼산과 패랑산 사이 골짜기를 두루 살펴보더니 양지바른 언덕아래 평평한 곳을 지팽이로 가리켰다.
“상순아, 저기 저 곳을 봐라. 저 둔덕아래에 과수원 보초막을 지으면 좋을 거 같아. 저 곳은 칼산과 패랑산 중간 골짜기에 있기에 두 산을 다 살피기에 안성 맞춤한 보초막자리야.”
“예. 정말 하늘이 내린 보초막자리입니다.”
그들 조손 두 사람은 해가 뉘엿뉘엿 져가는 것도 잊고 함흥대대를 지상낙원으로 건설할 웅대한 설계도를 그려갔다.
해가 서산에 져서야 상순은 수레에 할아버지를 모시고 돌아왔다.
상순이 저녁 식사 후에 토성안 대대 사무실에 나갔을 때였다. 흥수가 편지봉투를 사무상에 휙 뿌리면서 야단쳤다.
“조선 특무한테서 또 편지 왔어.”
“누구 편지요?”
“김인섭한테서 왔소.”
“뭐? 아즈바이한테서 왔다구?”
상순은 부랴부랴 편지봉투를 보다가 흥수를 흘겨보았다.
“자네 남의 편지를 뜯어보지 않았소?”
흥수는 말상을 외면하면서
“모르고 그랬어.” 하고 대충 대답했다.
상순은 편지봉투를 뜯어 전등불 밑에 가지고 가서 단숨에 읽어 내려갔다.
보고 싶은 병완 큰아버지, 그간 건강한 몸으로 잘 계십니까?
세 자식을 앞세우고 고통이 많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칠 형님은 우리 조선인민과 중국인민의 이익을 위해 몸 바쳐 싸운 장령입니다. 나는 개인적으로 대장부답고 장군다운 성칠 형님을 우러러 따랐고 존경해왔습니다. 정말 중조 인민들에게 미안하지 않은 훌륭한 군인입니다. 그런 열사 아드님을 둔 것으로 하여 큰아버지는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러움도 없이 자호 감을 느끼리라고 믿습니다.
큰아버지는 고향 명천 적후에서 경찰국을 무너지게 만들었고 군사요충지의 교통교를 무너지게 놓으면서 일본 놈들과 지혜롭게 싸워온 로 항일투사입니다. 그리고 핍박에 의해 고향을 떠나 우리 함흥 촌에 들어와 자손들과 마을 사람들을 이끌어 일제와 그 주구들과 싸웠고 항일유격대에 쌀을 지원하면서 항일투쟁을 지원했습니다.
해방 후에도 중국 공산당의 영도아래 상순이랑 상길이랑 자손들을 데리고 토지개혁을 해 지주를 청산하고 가난한 빈고농민들에게 토지를 나눠주었습니다. 큰아버지는 함흥 촌 인민들을 영도해 토비를 숙청하고 국민당 잔여세력과 지주무장과의 투쟁을 했고 사회주의 새 농촌을 건설하는데 한몫을 톡톡히 해왔습니다.
참말로 큰아버지가 걸어온 인생길은 조선족이민사의 력사적인 축도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조선족인민들은 조선에서 고생하던 우리 조선족 빈고농민들이 간도에 들어와 황무지를 개간하고 일본 놈들과 당지 지주와 싸우고 사회주의 혁명과 건설을 해왔습니다.
큰아버지, 오래오래 앉으셔서 상순이랑 상길이랑 함흥촌 백성들이 사회주의 한길에서 새 농촌을 건설하고 부유하게 사는 그 날을 지켜 봐주십시오.
전도가 유망한 상순아, 그간 넌 공안국 국장 벼슬도 버리고 함흥촌에 돌아와 당 지부 서기를 맡고 마을 사람들을 이끌어 사회주의 새 농촌 건설을 잘 하고 있다는 말도 진달래아주머니한테서 듣고 알았다.
효성이 지극한 너의 마음도 내가 다 안다. 함흥 촌에 돌아와 조부모와 부모에게 효성을 하면서 사회주의 새 농촌을 건설하려는 너 효성과 혁명성을 나는 아주 높이 평가하고 싶다. 자기 부모도 온전히 모시지 않는 불효자식이 어찌 군중들을 위해 일할 수 있겠느냐? 아무튼 네가 수고가 많다.
지금도 나는 항일투쟁의 어려운 나날에 네가 할아버지와 아버지와 함께 어두운 밤에 쌀수레를 몰고 항일유격대를 찾아오다가 멍지메 산 앞에서 우리와 만나던 일이며 상길이랑 상우랑 함께 쌀수레를 몰고 수림에 나타나던 일이며, 백두산 밀림에 들어와 나와 성칠형님에게서 권술을 배우고 할아버지와 아버지와 함께 밀림에 통나무집을 지어주고 형내랑 함께 약이랑 항일유격대에 가져다 주던 일이며, 토비숙청에서 한몫을 톡톡히 하던 네 모습을 보는 상 싶구나.
그런데 들을라니 흥수라는지 하는 진상을 잘 모르는 애들이 진달래랑 은녀랑 심지어 나까지 조선특무라고 몰아댄다니 참말 답답하구나. 조상들이 대대로 살아온 조선과 고향을 위해 목숨 바쳐 일본 놈들과 싸우다가 조선에 나온 우리가 어찌 조선특무냐?
지금 중조 두 나라는 피로써 맺어진 전통적인 친선을 아주 귀중히 여기고 대대로 전해내려가려고 정성을 다하고 있다. 중조 두 나라는 형제국가인데 흥수랑 무슨 특무고 뭐고 하면서 떠들게 있느냐? 그런 행위는 피로써 맺어진 중조 친선에 먹칠을 하는 불량한 행위로서 중조 인민들의 질책을 받아야 하며 제지해야 한다.
진달래 대대장은 항일투사야. 남조선특무 김용천을 나포할 때도 듣자니 너희를 협조했다더구나. 그런데 어찌 조선특무로 몰아 함흥대대에서 살지 못하고 조선에 도망쳐 오게 한단 말이냐?
더구나 열사 성칠 형님의 친척이라고 너네 일가까지 조선특무라고 마구 몰아대는 것은 하늘이 용납하지 못할 착오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용천 대장도 이전에는 항일투사였기에 그의 아들 경주를 남조선특무라고 마구 몰아대는 것은 잘못이다. 경주는 어려서 자기 아버지 얼굴을 보았을 뿐인데 어찌 그가 아버지 대신 특무 질을 했다고 억지로 특무로 몰아 투쟁한단 말인가? 특무 아버지와 아들은 계선을 똑똑히 나눠 투쟁해야 한다. 물론 남조선특무의 아들에 대해 경각성을 높여 현실표현을 잘 관찰하고 감독할 필요는 있지만 과도하게 근거도 없이 특무로 몰아대는 것은 잘 못이다.
지금 진달래는 군당위원회에서 여성동맹위원회 위원장으로 되었다. 은녀도 고향에서 여성동맹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사업하고 있다. 학준 동생은 김일성종합대학을 졸업하고 내가 있던 군에 돌아와 중학교 교장사업을 하고 있다. 나는 군당위원회 위원장으로 사업하다가 군부대로 돌아가 서부전선 모 포병부대로 나가게 됐다. 떠나기 전에 나는 도당위원회에 제기해 함흥대대에서 이른바 조선특무를 투쟁하는 운동을 확대하는 폐단을 얘기했다. 꼭 타당한 처리가 있으리라고 믿는다.
상순아, 어떠한 시련이 오더라도 너는 꼭 냉정하게 매사를 처리해야 한다. 명석한 정치두뇌로 매사를 분석한 후 기본 원칙과 양심을 어기지 말고 인민의 이익을 보호하면서 한 발작 한 발작 온당하게 나가야 한다. 모든 시련과 곡절, 폭란 앞에서 굳세게 살리라 믿는다.
중국에 있는 친척 여러분 안녕히 계십시오.
아차 잊었구먼요. 오늘은 연변조선족자치주 성립 14주년이 되는 경사스러운 날이구먼요. 그 얼마나 많은 우리 조선족 선열들의 피로 바꿔온 연변조선족자치주인가요? 우리 민족은 중국 대지에 뿌리를 깊이 내리고 굳세게 살아나가야 하겠습니다. 언제 다시 만나 그간 회포를 나누겠는지요? 그날까지 친척들과 함흥촌 여러분 안녕히 계십시오.
군례!
조선인민군 노전사 김인섭
1966년 9월 3일.
흥수는 씩씩거리면서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당신들은 한 집안 친척이니까. 숙질간이 아니고 뭐요? 한 편이 돼서 서로 감싸고 도는 걸 눈꼴 사나와 보기도 싫어.”
상순은 흥수를 쏘아보면서 말했다.
“흥수, 계급투쟁을 잊지 않고 잘 하겠으면 지주나 부농, 국민당 잔여세력과나 싸우오. 투쟁방향을 절대 잊지 말게. 쩍하면 왜 우리 할아버지나 나하고 투쟁하려고 하오? 우린 다 공산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분투하는 당원들이오. 당원들끼리 단결할 대신 물고 뜯어서야 되오?”
그러나 흥수는 걸상에 물앉아 담배쌈지를 꺼내 담배를 말면서 피씩 쓴 웃음을 지었다.
“지금 지주나 부농들이 문제요? 그 놈들은 죽은 듯이 가만있는데.”
“그래 이 마을을 개척한 우리 집안이 문제요? 우리 당원간부가 문제요?”
“그렇소. 당내 투쟁이 더 치열하단 말이오.”
상순은 말을 시작한 바 하고는 시비를 따지려고 들었다.
“우리 당원들끼리 싸우면 좋아 하는 게 누구요? 결국 계급의 적들이 좋아 하지 않겠소?”
그러나 흥수는 담배 연기를 후 내뿜으면서 대수로워 하지 않았다.
“만약 당신이 내 서기 자리가 욕심나면 내주겠소.”
상순의 뜻밖의 말에 흥수는 상순의 얼굴을 힐끔 곁눈질해 보았다. 그는 엄숙한 표정을 훔쳐보면서 정말인가 아니면 속뽑이를 하는가를 시탐하려는 것 같았다.
말하지는 않아도 “정말 물러나겠소?”라고 묻는 상 싶었다.
상순은 분명히 말했다.
“올해까지 과수원도 다 차려놓았고 멍지뫼산 앞에 논도 다 풀어놓았소. 올 가을에 벼를 거둬들이면 사원들이 배를 곯을 것 같지 않소. 지난해 토지를 개인에게 떼주어 농사를 지었기에 풍작을 거두지 않았소? 이전에는 모두 보리 고개도 넘기기 전에 쌀이 떨어져 죽물도 온전히 먹지 못하지 않았소? 그런데 올해는 이제야 묵은 벼를 정미소에 가져다 찧는 집도 있소. 물레방아도 저 앞 체전에 놓았으니까 발마선이나 도리깨로 벼 탈곡을 하지 않아도 될 거 같소. 그러니 난 우리 마을을 위해 해놓을 일을 이젠 다 한 거 같소. 누가 당지부 서기를 하든지 문제 없을 거 같소.”
“안 된다! 절대 안 돼!”
상순과 흥수가 고함소리가 나는 문 께를 돌아보니 병완이 지팽이를 짚고 들어오는 것이었다.
“할아버지, 흥수가 서기를 하더라도 우리 마을만 잘 건설하면 나는 서기를 내놓아도 아깝지 않겠습니다.‘
허나 병완은 지팡이로 사무실 널판을 탕탕 치며 호통쳤다.
“당내 투쟁에 혈안이 된 흥수에게 서기를 내줘서는 안 된다. 저 애게 서기를 맡기면 날마다 투쟁대회만 하다나면 언제 마을을 건설한다고 그러니?”
흥수도 지려고 하지 않았다.
“아바이, 말씀을 주의하시오. 이 마을이 그래 당신네 조손이 아니면 돌아가지 않을 거 같습니까?”
병완은 주름살이 죽죽 간 목에 지렁이 같은 피 줄을 세우면서 호통쳤다.
“얘게 서기를 시켰다간 한지에 방아를 걸겠다.”
“뭐라고?!”
흥수는 버릇없이 병완에게 외까풀 뱁새눈으로 가로 쏘아보았다.
그러자 상순은 흥수를 마주 쏘아보며 양보하지 않았다.
“서기 자리를 탐내지도 말라. 네가 하는 꼴을 보니 서기 자리를 내놓을 생각이 없어졌다.”
흥수는 꼴이 보기 싫다는 듯이 “흥!” 하고 코 방귀를 뀌더니 휑 바깥으로 나가 버렸다.
병완은 상순을 나무랐다.
“얘야, 왜 이렇게 약하게 나오느냐? 그까짓 파리 새끼 무서워 장을 담그지 못하겠느냐?”
상순은 머리를 숙이었다.
“할아버지, 똥이 무서워 피합니까? 더러워 피하지.”
병완은 이가 빠져 혀가 들여다보이는 입으로 똑똑히 말했다.
“정치라는 건 무원칙하게 물러서는 게 상수가 아니야. 청렴하고 벼슬을 중히 여기지 않는 것도 좋지만 원칙을 지켜야 한다. 흥수에게 지부서기를 맡겨서는 우리 마을에 날마다 투쟁대회나 열고 말썽이 생기게 될 거다. 어떻게 그런 지부서기 밑에서 사원들이 마음 놓고 살 수 있겠니?”
상순은 한숨을 후 내쉬었다.
“할아버지, 내가 잘 못 생각했습니다. 흥수와 다투기 너무 피로해 그만두려고 했습니다. 사원들의 평안을 념두에 두지 못해 미안합니다.”
“그래, 이제야 내 손자답구나. 손을 싹 씻고 나앉아서 자기 혼자 편안히 살아서야 어디 공산당원 간부냐? 아무리 힘들어도 사원군중들을 위해 강하게 살아야 한다. 알만 하지?”
“예. 사원군중들부터 먼저 생각하는 할아버지 깊은 마음을 이제야 알만 합니다. 꼭 명심하겠습니다.”
병완은 한숨을 후 내쉬였다.
"은숙이 돌아왔다니 시름놓게 됐다. 계집애 조선에 가면 덕대 돈을 번다더니?"
상순은 허구픈 웃음을 지었다.
"그 놈 계집애 조선에 가는 바람에 흥수한테 물리웠잖고 뭡니까? 저 두만강 변에 있는 학준이네 집에 가서 있으면서 어떻게 호미를 버리고 노동자로 될가 했답니다. 그런데 겨우 농업중학교를 졸업하구 어데 가서 취직하겠습니까? 여기 저기 어떨까 다니다가 소외감에 서러워서 되돌아왔답니다."
"그래, 두만강 저 쪽에서 우리 보다 더 잘 살더라니?"
"예. 조선에서는 우리보다 확실히 더 잘 살더랍니다. 그러니깐 대학생들도 밤을 자고나면 달아난다 하잖습니까?"
"조선 인민들은 위대한 인민들이야. 물론 쏘련과 중국 두 사회주의 대국의 원조를 받기도 했지. 조선로동당의 영명한 영도아래 전쟁 후 잿더미 위에 사회주의 새 마을이랑 건설하고 잘 살잖니?"
"예. 우리 여기 잘 살기만 하면 은숙이랑 정옥이랑 자꾸 달아나지 않겠는데."
병완과 상순은 대대 사무실에서 인섭에게서 온 편지로, 함흥대대를 건설할 계획으로 한참이나 얘기를 나우었다.
나중에 병완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상순아, 내 부탁할 말이 있다.”
“예. 얘기하십시오.‘
상순은 바로 앉으면서 할아버지 얼굴을 바라보았다.
상순은 두툼한 입술을 무겁게 열었다.
“지금 무슨 ‘문화대혁명’을 한다고 하는데 심상치 않구나. 어떤 일이 있어도 당과 인민을 믿고 당과 백성을 마음속에 품고 양심적으로 처사하고 일하면 된다.”
“명심하겠습니다.”
상순은 할아버지인 것도 있지만 더욱이 로당원의 민감성과 드높은 각오를 존경했다.
그는 할아버지를 집에까지 부축해 모셔간 후에야 조개덕으로 내리 걸었다.
그가 숱한 한족 묘지들 속을 지나갈 때었다. 희미한 달빛아래 범이 새끼 칠 지경으로 풀이 한 키도 넘게 자란 한족묘지에서 매미들이 찌르륵찌르륵 울어 꽤나 무시무시했다.
그런데 어둠속에서 보니 웬 검은 그림자가 달빛이 비추는 백양나무 우에 바라 올라가는 것이었다.
“뭐 하려는 거야?”
상순은 호기심이 부쩍 동했다.
“혹시 계급의 적이?”
순간 상순은 경각성을 높여 달빛을 빌어 백양나무 위를 뚫어지게 올려다보았다.
저게 뭔가? 백양나무 가다리까지 올라간 검은 그림자는 무얼 꿈지럭 거리더니 바줄을 나무아지에 거는 것이었다.
“혹시 목을 매려고 저러는 게 아니야?”
진짜 바 줄로 올가미를 치는 것 같더니 목에 걸려고 서두르는 것이었다.
“누구야?!”
“어!”
퍽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
“뭐 하는 거야? 어서 내리지 못하겠는가?”
그러나 검은 그림자는 내릴 궁리를 하지 않고 목에 올가미를 거는 것이었다.
털렁!
검은 그림자는 올가미를 건채 둥둥 달렸다.
“아니, 저 사람이.”
상순은 황급히 백양나무에 올라갔다. 그런데 나무지가 툭 끊어지는 바람에 상순은 검은 그림자와 함께 땅바닥에 퉁 떨어졌다.
상순은 검은 그림자를 안아 일으키고 달빛을 빌어 찬찬히 보다가 깜짝 놀랐다.
“아니, 이게 아주바이 아닙니까?!”
상순은 안타까워 덕성을 흔들면서 애타게 부르짖었다. 이윽고 덕성은 길게 숨을 들이 그었다가 후 하고 한숨을 토해냈다.
“아니, 삼촌, 어떻게 돼 이렇게 짧은 생각을 다 합니까?”
이윽고 천천히 눈을 뜬 덕성은 어둠속에서 사위를 둘러보더니
“오, 자네가 어떻게…”
하고는 인차 눈을 스르르 감았다.
“왜 이렇게 못난 짓을 합니까?”
점차 정신이 들어가는 덕성은 맥없이 상순의 팔을 잡고 나직이 진정을 토로했다.
“난, 난 이 세상에서 살, 살 멋이 없네.”
상순은 황급히 식칼을 빼앗아냈다.
“무슨 소리를 합니까? 우린 삼촌을 기시한 적이 없습니다. 왜 이렇게 짧은 생각을 했습니까?”
덕성은 맥없이 일어나 앉더니 한숨을 후 내쉬었다.
“삼촌? 우리 마을 사람들이 자네처럼 나를 삼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소? 우린 필경 한 고향에서 쪽박을 차고 이 함흥 촌에 와서 이 땅을 개척했네. 그리고 일본 놈들을 몰아내고 이 땅을 국민당군의 손아귀에 빼앗기지 않게 보위하려고 난 아들 둘이나 잃었네. 칠백과 칠석이 다 조선전쟁에 나가 희생됐지 않았어? 칠백과 칠석은 다 항일유격대에서 중대장과 소대장을 했고 항미원조 전쟁에서 조선인민군 대대장을 했네. 내가 무슨 죄가 있다고 조선 특무라고 투쟁하느냐? 또 용천이가 한국특무이었다고 나를 남조선 특무라고 몰아서 투쟁해서야 되느냐?”
그 말에 상순은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확실히 억울하게 됐소. 흥수랑 제 정신이 아니오. 흥수가 남조선태생이지만 난 그를 남조선특무라고 몰아준 적도 없습니다. 무고한 사람을 자꾸 무니깐. 어쩌오? 정말 답답하오. 우린 아즈바이와 흥수가 남조선 태생이지만 남조선 특무로 생각한 적도 없습니다. 절대 좁은 생각을 하지 말고 용기를 내서 살아가야 합니다. 언젠가는 억울한 루명을 벗을 날이 있을 겁니다.”
그러나 덕성은 픽 코웃음을 쳤다.
“아니, 언제 훤한 날이 온다고 그래? 날 왜 죽게 놔두지 않았는가?”
상순은 덕성의 두 손을 꽉 잡았다.
“무슨 말씀을 이렇게 합니까? 경주를 봐서라도 살아야 합니다. 그 어린 놈이 남조선 특무로 몰리우면서도 꿋꿋이 사는데 왜 살지 못합니까? 죽을 용기가 있으면 왜 목숨을 내걸고 억세게 역경을 이기고 살아갈 용기는 없습니까?”
덕성은 한숨을 땅이 꺼지게 후 내쉬었다.
태평강 가의 버드나무들이 쉼 없이 써늘한 가을바람에 흐느적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