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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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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3    생태문학과 소통해보다... 댓글:  조회:4808  추천:0  2016-02-01
  인간 중심시대의 생태문학                                                          김병중(시인, 문학평론가)     1. 들어가며   세계에서 손꼽히는 경제 강국 일본이 얼마 전 진도 8.8의 대지진으로 인해 전국이 초토화가 되는 엄청난 재앙을 입었다. 다행히 우리는 일본 열도가 방패막이 역할을 해 준 덕분에 직접적인 피해를 입지는 않았지만 그 후유증은 우리와도 무관하지 않다. 일본 앞바다에 유출된 핵물질로 인해 일부 농수축산물은 수입이 금지되는 특단의 조치가 내려지기도 했다. 지금 지구는 매우 불안하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지구는 무절제한 산업화의 진전으로 하늘의 오존층이 구멍 뚫려 피부암 환자가 증가하고 있고, 북극과 남극, 그리고 히말라야 만년설이 녹아내리고 있으며, 아프리카 들소들의 대이동이나 중국남방 난대림지역에는 상상하지 못할 폭설같은 기상이변이 일어나고 있다. 이러한 참혹한 재앙 앞에 우리는 하늘에 운명에 맡긴 채 이대로 방관하고 있을 것인가? 아니면 이를 극복할 대안을 찾아야 할 것인가? 라는 화두를 던져야만 할 때가 도래한 것이다. 무참히 자연을 파괴한 인간들의 행위가 더 이상 용서받지 못하고 자연의 재앙으로 단죄를 받고 있는 형상이지만 아직도 정신차리지 못하고 지구 곳곳에서는 쉼 없이 환경파괴가 지속되고 있으니 이제는 이 시대 정신세계를 선도해 가는 문학인들이 이대로 침묵하고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귀에 다소 생소하게 들릴지는 모르지만 생태문학, 환경문학, 녹색평론, 녹색시, 자연시 등은 이미 1990년대부터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했다. 생태문학을 거론하자면 그리스시대 신화로 거슬러 올라가야하며, 또한 독일 낭만주의 문학을 거쳐 2차 세계대전 후의 독일의 생태문학을 빼놓을 수 없다. 2008년 8월 대만에서 열린 국제아동문학대회의 주제가 “생태문학”으로 결정된 것도 그만큼 환경문제에 대한 국제적 관심도가 증대되고 있다는 반증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새만금 방조제사업이나 경인운하사업 같은 환경과 관련된 대규모 개발로 인해 사회 전반적인 여론은 환경의 중요성을 무시한 개발로 후일 자연재앙이라는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어 이제 문학인들이 앞장서서 생태문학 붐 조성에 나서만 하는 책임감을 느끼고 있어 이 시점에서 한번쯤 우리나라 생태문학의 근황을 살펴보고자 한다.   2. 우리나라 생태문학의 태동   우리나라에서 생태학적 세계관은 1990년대로 들어서면서 본격적으로 파급되었고, 장르로는 시, 소설, 비평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 중에서도 단연 시가 주를 이루고 있는 데
1042    력사속의 시인 모윤숙... 댓글:  조회:4741  추천:0  2016-01-31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 /  모윤숙 나는 광주 산곡을 헤매다가 문득 혼자 죽어 넘어진 국군을 만났다. 산 옆 외따른 골짜기에  혼자 누워 있는 국군을 본다. 아무 말, 아무 움직임 없이 하늘을 향해 눈을 감은 국군을 본다. 누른 유니폼 햇빛에 반짝이는 어깨의 표시 그대는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소위였고나. 가슴에선 아직도 더운 피가 뿜어 나온다. 장미 냄새보다 더 짙은 피의 향기여! 엎드려 그 젊은 주검을 통곡하며 나는 듣노라! 그대가 마지막 주고 간 마지막 말을…… 나는 죽었노라, 스물다섯 젊은 나이에 대한민국의 아들로 나는 숨을 마치었노라. 질식하는 구름과 바람이 미쳐 날뛰는 조국의 산맥을 지키다가 드디어 드디어 나는 숨지었노라. 내 손에는 범치 못할 총자루, 내 머리엔 깨지지 않을 철모가 씌워져 원수와 싸우기에 한 번도 비겁하지 않았노라. 그보다도 내 핏속엔 더 강한 대한의 혼이 소리쳐 나는 달리었노라. 산과 골짜기, 무덤 위와 가시숲을 이순신같이, 나풀레옹같이, 시이저같이,  조국의 위험을 막기 위해 밤낮으로 앞으로 앞으로 진격! 진격! 원수를 밀어가며 싸웠노라. 나는 더 가고 싶었노라. 저 원수의 하늘까지 밀어서 밀어서 폭풍우같이 모스크바 크레물린탑까지 밀어 가고 싶었노라. 내게는 어머니, 아버지, 귀여운 동생들도 있노라. 어여삐 사랑하는 소녀도 있었노라. 내 청춘은 봉오리 지어 가까운 내 사람들과 함께 이 땅에 피어 살고 싶었었나니 아름다운 저 하늘에 무수히 나르는 내 나라의 새들과 함께 나는 자라고 노래하고 싶었노라. 나는 그래서 더 용감히 싸웠노라. 그러다가 죽었노라. 아무도 나의 주검을 아는 이는 없으리라. 그러나 나의 조국, 나의 사랑이여! 숨지어 넘어진 내 얼굴의 땀방울을 지나가는 미풍이 이처럼 다정하게 씻어주고 저 하늘의 푸른 별들이 밤새 내 외롬을 위안해주지 않는가? 나는 조국의 군복을 입은 채 골짜기 풀숲에 유쾌히 쉬노라. 이제 나는 잠에 피곤한 몸을 쉬이고 저 하늘에 나르는 바람을 마시게 되었노라. 나는 자랑스런 내 어머니 조국을 위해 싸웠고 내 조국을 위해 또한 영광스레 숨지었노니 여기 내 몸 누운 곳 이름 모를 골짜기에 밤이슬 내리는 풀숲에 나는 아무도 모르게 우는  나이팅게일의 영원한 짝이 되었노라. 바람이여! 저 이름 모를 새들이여! 그대들이 지나는 어느 길 위에서나 고생하는 내 나라의 동포를 만나거든 부디 일러다오. 나를 위해 울지 말고 조국을 위해 울어 달라 일러다고. 조국이여! 동포여! 내 사랑하는 소녀여! 나는 그대들의 행복을 위해 간다. 내가 못 이룬 소원, 물리치지 못한 원수, 나를 위해 내 청춘을 위해 물리쳐다오. 물러감은 비겁하다. 항복보다 노예보다 비겁하다 둘러싼 군사가 다아 물러가도 대한민국 국군아! 너만은  이 땅에서 싸워야 이긴다. 이 땅에서 죽어야 산다. 한번 버린 조국은 다시 오지 않으리다. 다시 오지 않으리다. 보라! 폭풍이 온다. 대한민국이여! 이리와 사자 떼가 강과 산을 넘는다. 내 사랑하는 형과 아우는 서백리아 먼길에 유랑을 떠난다. 운명이라 이 슬픔을 모른 체하려는가? 아니다. 운명이 아니다. 아니 운명이라 해도 좋다. 우리는 운명보다 강하다. 강하다. 이 원수의 운명을 파괴하라. 내 친구여! 그 억센 팔다리. 그 붉은 단군의 피와 혼, 싸울 곳에 주저 말고 죽을 곳에 죽어서 숨지려는 조국의 생명을 불러일으켜라. 조국을 위해선 이 몸이 숨길 무덤도 내 시체를 담을 작은 관도 사양하리라. 오래지 않아 거친 바람이 내 몸을 쓸어가고 저 땅의 벌레들이 내 몸을 즐겨 뜯어가도 나는 즐거이 이들과 함께 벗이 되어 행복해질 조국을 기다리며 이 골짜기 내 나라 땅에 한 줌 흙이 되기 소원이노라. 산 옆 외따른 골짜기에 혼자 누운 국군을 본다. 아무 말, 아무 움직임 없이 하늘을 향해 눈을 감을 국군을 본다. 누른 유니폼 햇빛에 반짝이는 어깨의 표지 그대는 자랑스런 대한민국의 소위였고나. 가슴에선 아직 더운 피가 뿜어 나온다. 장미 냄새보다 더 짚은 피의 향기여! 엎드려 그 젊은 주검을 통곡하며 나는 듣노라. 그대가 주고 간 마지막 말을.   ―시집《풍랑》(1951)수록. ―김희보 엮음『한국의 명시』(가람기획 증보판, 2003)     1940년대 문단秘史- 시인 모윤숙의 사랑과 우정 최정희를 둘러싸고 노천명,모윤숙(毛允淑·1909∼1990) 세 여인 사이를 오간 편지에 가장 자주 등장하는 인물은 이 선희(李善熙)이다.함흥 출신인 그녀는 원산 루시여고를 나 온(1928) 뒤 서울 이화여대에서 수학,여러 잡지사를 전전 했는데,유부남인 연극인 박영호(朴英鎬)와 결혼,그리 순조 롭지 못한 가정생활 때문에 이들 모임에 끼어들곤 했었다. 8.15후 월북,작품활동을 재개했으나 괴혈병으로 이내 타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세 여인의 서신 내용으로 미뤄보면 필시 이선희의 편지도 있을 법한데 빠져 있다. 같은 함경 도 출생인 모윤숙에게 이선희는 애물단지 후배였던 셈이다 .최정희의 회고록에는 자신에게 편지를 가장 많이 보내기 로는 노천명이라 했지만 정작 더 많은 건 모윤숙이었다.그 녀의 편지는 거의 ‘렌의 애가’처럼 춘원 이광수를 향한 연모의 사무침이 가져다 준 외로움의 하소연으로 차 있다. 한 여인의 사랑에 대한 집착이 이다지도 강렬하고 끈질기 며 삶의 모든 것을 지배하는 것일까 경이스럽기 조차 하다. “이 마음이 혹시 흩어져 제 슬픔을 흘리며 미쳐 방황할 것만 같아서 나는 내 마음에 독약을 뿌려가며 눈을 감고 앉았소.…언제나 당신은 이 아픔을 알아주는 따뜻한 벗이 오.내가 이 아픔을 사랑하듯이 당신도 이 아픔으로 사랑해 주는 이라고 믿소. 내 연령이 쇠해져서 이 아픔조차 나를 떠나간다면 나는 공허해서 어떻게 살겠소.그래서 나는 이 아픔 속에 숨긴 행복을 남 몰래 남 몰래 가슴에 파묻고 혼 자 즐기고 혼자 눈물 지오.…오관에 감각이 모두 제 맥을 잃도록 나는 슬픈 내 행복에 사로잡혀 있소.내가 생각하는 고운 제단엔 언제나 아름다운 불꽃이 피고 있다오. 이게 무언지도 모르오.나는 그 파란 불꽃에 타면서 타면서 한없 는 쾌감을 느끼오.나의 베아트리체는 어느 빌딩에 있는 것 이 아니오.내 가슴 한복판에서 제 고집대로 나를 좌우하고 살아 간다오.정희! 지난 밤엔 또 못잤지.그렇게 못자는 밤 이면 유난히 나는 초점 없는 상념서 벽을 쳐다보다가 유리 창을 쳐다보다가 그만 날을 새고 만다오.…나는 얼마나 아 름다운 장미를 피게 하려던 것이 황량한 낙엽을 안고 운다 는 사실-이것이 내 성격이 만들어놓은 재앙인가 하오.불행 도 행복도 다-제게 달린 게 아니오.나는 불행한 감정을 사 랑하는 여성이라 그대로 나는 불행에 싸여 걸어가나 보오. 영원히 안 보(이)는 앞을! 잔인한 행복이오. 그러나 나는 이 무서운 잔인을 찬미하지 않으면 안될 사람이 되었다오.” 이 글은 아마 우리 근대 문학사에서 공개된 것 중에서는 메달권 안에 들만한 연애편지일 것이다.춘원에 대한 사랑 의 간접 고해성사의 대행자이자,그녀의 메신저 역할도 담 당했던 최정희에게 모윤숙은 속을 탁 터놓고 이루지 못한 사랑을 하소연했는데,이들의 미묘한 시샘은 재밌는 일화도 많이 남긴다. “모윤숙을 '다알리아'라고 하고,이선희를 ' 백일홍'이라고 하고,노천명을 '들국화'라고 하고,나(최정 희)를 '채송화'라고 했다”(최정희 ‘조광·삼천리 시절’ )는 이 네 여인 중 남자문제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기로는 단연 모윤숙이다.1909년 원산에서 태어나 함흥에서 소녀기 를 보내곤 개성 호수돈여고를 나와(1928) 이화여대를 졸업 한 모윤숙은 간도 명신여학교(1932),배화여고(1933) 교사, 연극과 문단활동 중 춘원을 사랑하게 되어 일생동안 그의 사상적 영향권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런 처지에서 기이하게도 모윤숙은 춘원의 중매로 독일 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한 안호상(安浩相)과 결혼 ,딸(일선)까지 얻었으나 사랑의 우상에 대한 열정은 도리 어 더욱 뜨거워만 갔다.무작정 경원선 열차에 몸을 싣고 친정으로 내려간 모윤숙의 속내는 최정희의 회고록에서 익 살스럽게 까발려진다.“함흥 친정에 내려간 모윤숙”을 만 나러 그곳엘 찾아간 최정희에게 모의 어머님이 어느 날 “ 너네들은 밤낮으로 니광신이 니광신이하구 지껄이니,도대 체 니광신이가 뭐가?”하고 물었는데,바로 이광수의 함경 도식 와전 발음이었다.어머니 앞에서도 친구와 애인 이야 기를 끊임없이 해야만 했던 그녀인지라 편지엔들 '니광신' 이가 빠질 수 없다.“이선생” 어쩌구 하는 건 바로 그였 는데,이 무렵 춘원은 개인적으로 깊은 은혜를 입은 김성수 의 ‘동아일보’를 떠나 ‘조선일보’ 부사장으로 자리를 옮겼으나(1933) 여의치 못해 이듬해에 사직,아들까지 잃은 허전함을 달래느라 여행, 홍제동 소림사에 칩거 등으로 들 락날락할 때였다. 모윤숙의 애타는 심경을 가장 잘 보여주는 일화는 역시 최정희가 전해 준다.남의 연애편지를 대신 전해 주는 게 유행이었던 때라 모윤숙은 춘원에게 줄 서찰을 최정희에게 의뢰하고 초조하게 그 회신을 기다렸으나 종무 소식.저간 의 상황을 최정희는 이렇게 묘사한다.모윤숙의 편지를 가 지고 가던 날 밤은 산장에 달이 유난히 컸다.저녁 여덟시 면 히틀러가 연설을 하니 듣고 가라면서 '니광신'씨는 나 를 막 잡았다.기다리고 있을 모윤숙의 일이 딱했으나 한편 으로는 골탕을 먹여주자는 짓궂은 마음도 있어서 나는 '니 광신'씨의 말에 좇았다.이튿날 아침 열한 시가 넘어서 출 근을 한 내게 먼저 출근해서 기다리고 있던 모윤숙은 참으 로 깊은 시선을 내게 던지고 있다가 “왜 그렇게 됐수?” 하고 말을 건네었다. “점심을 먹고 나니까 니광신씨가 저녁을 먹고 가라는 거 아냐,히틀러가 연설을 한다나,그걸 듣고 가라는 거야.” “아니 그이하구 점심을 먹구 저녁을 먹었단 말이지?” “그럼.” “밥이 넘어가?” “활갤 치구 넘어가던걸.” “어쩜!” 하고 모윤숙은 말을 다시 못하고 나를 보고만 있었다.모윤 숙은 '니광신'씨하고 밥을 마주앉아 먹은 내가 부러운 얼 굴이었다.또 얄밉기도 한 모양이었다.(최정희 ‘조광·삼 천리 시절’) 이 대목에서 모윤숙의 애절한 사랑 말고 이광수의 뇌리에 아련히 묻혀있는 파시즘에 대한 환상을 읽을 수 있다. 이 룰 수 없는 애정의 정열을 잠재우기 위한 도피처로서의 함 흥이나 원산 일대는 센티멘탈한 여성시인의 감각만으로는 접근할 수 없는 역사가 고동치고 있었다.“여보! 함흥은 난(亂)이 난다고 인심이 대단 불안하오.밤마다 암흑 천지 요.여기가 매우 안심되지 않소이다”란 서두의 편지는 일 제의 식민 철권 통치가 1930년대 중엽에 저 북녘 땅에서는 강력한 도전을 받았던 것을 반증해 준다. 국내 항일운동의 근간이었던 적색 농민. 노동조합의 파급과 보천보전투(193 7.6)를 상기하면 함경도 지역이 지녔던 풍문만이 아닌 실 체로서의 위기감을 감지할 수 있을 터이다.더욱이 중일전 쟁 발발(1937) 이후 정세는 사뭇 험악했다. 그러나 불륜의 사랑에 빠진 시인에게 민족의 당면 과제나 역사는 먼 전설이어서 더 이상 관심도 없었을 터이다. 편 지는 곧장 “아침 시가에 나가 '사슴군' 계신가고 학교로 전화를 걸었으나 벌써 1주일 전에 상경하셨다니 우리가 셋 이서 싸다닐 때 그는 어느 구석에서 망원경으로 다-살피지 않았으리오”라는 대목을 읽게된다. 여기서 '사슴'이란 19 36년 1월 20일에 100부 한정판으로 ‘사슴’이란 시집을 낸 정주 출신의 백석(白石)이다.오산학교를 나와 조선일보 장학생으로 일본 청산(靑山)학원에서 영문학을 수학, 조선 일보 출판국의 ‘여성’지에 최정희와 함께 근무하다가 나 중엔 종합월간지 ‘조광’에서 일하던 그는 함흥 영생고보 교사(1936-1938)로 있었다. 그의 해맑은 모습은 당대 여성들에게 제법 인기를 끌었는 데,낙향한 모윤숙을 찾았던 최정희와 셋이서 한 판 어울렸 음을 이 대목은 증명해 준다.이때 모윤숙이 애독했던 책이 ‘차탈레이 부인의 사랑’이었던 것도 흥미거리다.거듭 이 소설을 들먹이며 예찬한 것으로 미뤄 볼 때, 정열적인 이 시인이 감내할 수밖에 없었던 육욕에 대한 향수 때문에 매 우 감동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시 편지를 면밀히 뜯어 보면 “상경한 사슴 군을 죽기 전 상봉하여 원하던 이야기 를 해 보시오”란 대목에 뭔가 냄새가 풍긴다.백석을 가운 데 둔 삼각관계였을까? “사슴군이나 어서 왔으면 하오” 란 구절도 나온다. 여담이지만 백석은 최정희에게 장문의 연애편지를 겸한 사랑의 철학론을 보냈다.도저히 보통관계로는 볼 수 없는 내용이다.사랑은 우정도 선후배도 의심하게 만든다.임옥인 (林玉仁)을 만난 대목에서는 “그저 자기는 벌써부터 그이 (이광수)를 존경할 수 없이 되었다고”하는데,역시 뭔가 수상쩍다. 춘원을 둘러싼 이 여성들의 베일은 여전히 두껍기만 하다. 대체로 파인은 여성작가들을 집단으로 만나길 즐겼으나,춘 원은 개별적으로 만나길 선호했다는 속설이 여러 정황에서 사실로 굳어진다. 함흥에서 “사하라 사막의 떡장수 여편 네 모양”처럼 변해간다고 투정부리던 모윤숙은 이내 상경 ,경성방송국에 다니며 이광수와 사상적인 보조를 맞춰 친 일에 나섰다. /임헌영 문학평론가·중앙대 겸임교수
1041    력사속의 시인 노천명... 댓글:  조회:5255  추천:0  2016-01-31
  노천명 시모음         사슴 / 노천명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얹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 관(冠)이 향기로운 너는 무척 높은 족속이었나 보다.   물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 보고 잃었던 전설을 생각해 내고는 어찌할 수 없는 향수에 슬픈 모가지를 하고 먼 데 산을 바라본다.     위키백과 ―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노천명(盧天命, 1912년 9월 2일 ~ 1957년 12월 10일)은 한국의 시인이다. 황해도 장연 출생이다. 본명은 노기선(盧基善)이나, 어릴 때 병으로 사경을 넘긴 뒤 개명하게 되었다.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와 이화여자전문학교를 졸업했다. 1932년〈밤의 찬미〉를 발표하며 등단한 이후 《조선중앙일보》, 《조선일보》, 《매일신보》에서 기자로 근무하면서 창작 활동을 했으며,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로 시작되는 시 〈사슴〉이 유명하다. 독신으로 살았던 그의 시에는 주로 개인적인 고독과 슬픔의 정서가 부드럽게 표현되고 있으며, 전통 문화와 농촌의 정서가 어우러진 소박한 서정성, 현실에 초연한 비정치성이 특징이다. 그러나 태평양 전쟁 중에 쓴 작품 중에는 〈군신송〉등 전쟁을 찬양하고, 전사자들을 칭송하는 선동적이고 정치적인 시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이화여전 동문이며 기자 출신으로서 같은 친일파 시인인 모윤숙과는 달리 광복 후에도 우파 정치 운동에는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1950년 한국전쟁 당시 조선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했을 때 피신하지 않고, 임화 등 월북한 좌파 작가들이 주도하는 조선문학가동맹에 가입하여 문화인 총궐기대회 등의 행사에 참가했다가, 대한민국 국군이 서울을 수복한 뒤 조경희와 함께 부역죄로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모윤숙 등 우파 계열 문인들의 위치를 염탐하여 인민군에 알려주고, 대중 집회에서 의용군으로 지원할 것을 부추기는 시를 낭송한 혐의로 징역 20년형을 언도받아 복역했으며, 몇 개월 후에 사면을 받아 풀려났다.       민족문제연구소가 2008년 발표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문학 부문에 선정되었다. 총 14편의 친일 작품이 밝혀져[1] 2002년 발표된 친일 문학인 42인 명단에도 포함되어 있다. 일제 강점기에 보성전문학교 교수인 경제학자 김광진과 연인 사이였다. 노천명과 절친한 작가 최정희가 시인 김동환과 사귄 것과 함께 문단의 화제 중 하나였고, 두 사람의 사랑을 유진오가 소설화하여 묘사한 바 있다. 김광진은 광복 후 가수 왕수복과 함께 월북했다. 경기도 고양시 벽제면의 천주교 묘지에 언니와 함께 묻혀 있다.       노천명은 1941년부터 1944년까지 일제의 “태평양전쟁을  찬양한 “기원(祈願)”(조광 1942년 2월호), “싱가폴 함락”(매일신보 1942년 2월 19일), “勝戰의 날”(조광 1942년 3월호), “부인근로대”(每日新報 1942년 3월 4일), 그리고 “님의 부르심을 받고서”(매일신보 1943년 8월 5일) 등의 시들과 “여인연성”(咸南女子訓練所 參觀記, 國民文學 1943년 6월호, 日文)같은 글 을 발표하여  일제의 조선인 강제징병과 강제동원을 정당화 시키는데 적극 협조하였다. 하지만“노천명”은 훗날 “한국전쟁”당시, 미처 피난을 떠나지 못하다가 북한군에 붙잡혀 “문학가동맹”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던 것을 감안하면, 그녀의 친일과 친공이 소설 “꺼삐딴 리”에서의 주인공 “이인국 박사”처럼 “단순 기회주의자로서의 행위” 이상도 이하도 아니지 않은가? 하는 의문이 든다.       님의 부르심을 받고서     --노천명--   남아라면 군복에 총을 메고 나라 위해 전장에 나감이 소원이리니 이 영광의 날   나도 사나이였드면 나도 사나이였드면 귀한 부르심 입는 것을 갑옷 떨쳐입고 머리에 투구 쓰고 창검을 휘두르며 싸움터로 나감이 남아의 장쾌한 기상이어든   이제 아세아의 큰 운명을 걸고 우리의 숙원을 뿜으며 저 영미(英美)를 치는 마당에랴   영문(營門)으로 들라는 우렁찬 나팔소리 오랫만에 이 강산 골짜구니와 마을 구석구석을 흥분 속에 흔드네   위의 시는 일제 강점기 시절 대표적인 친일신문이었던 「매일신보」 1943년 8월5일자에 실렸던 라는 시로 조선청년들에게 황국신민의 군인이 되길 종용하는 내용이다.   이윤옥 시인은 친일작가 노천명을 이렇게 풍자한다.    황군의 딸 되어 소화 천황 만수무강 빌던 그날    인쇄소 윤전기는 "그 처참하든 대포소리 이제 끝나고 공중엔 일장기의 비행기 햇살에 은빛으로 빛나는 아침 남양의 섬들아 만세를 불러 평화를 받어라" 찍어 내었지 바쁘게    이윤옥 시인에 따르면 노천명은 해방되기 몇 달 전인 1945년 2월25일 시집 《창변》을 펴내고 성대한 출판 기념회를 열었다고 한다. 이 시집 끝에 친일시 9편이 실려 있었는데 그해 해방이 되자 그녀는 이 시집에서 뒷부분의 친일시를 부분만 뜯어내고 그대로 팔았다고 한다.   한겨레 신문 2004년 10월3일자에는 '노천명 친일시 또 발견'이라는 제목으로 보다 상세한 내용이 소개돼 있었다.   한겨레에 따르면 노천명은 해방 후 《창변》에서 친일시 부분만 빼고 다시 출간했지만 그 흔적이 일부 남아있었다고 한다. 목차에서 친일시 제목만 나열돼 있던 마지막 페이지는 뜯어냈고 다른 시와 함께 친일시 제목이 인쇄된 부분은 친일시의 제목 부분만 창호지로 붙여 보이지 않게하여 출간했다고 한다. 뜯어낸 부분이야 확인할 수 없지만 창호지로 붙인 부분은 친일시의 제목을 희미하게나마 확인할 수 있었는데 총 4편이었다고 한다. 그 4편의 제목은 ,〈진혼가>, 〈출정하는 동생에게>, 〈승전의 날〉이었다.  노천명이 그렇게 바랬던 증거인멸은 그녀의 바램으로 끝났던 모양이다.  《창변》의 원본이 발굴됨으로써 그녀가 증거인멸을 시도했던 친일시 5편이 추가되었는데 제목만 본다면  , 〈창공에빛나는>, 〈학병>, 〈천인침>, 〈아들의 편지>였다고 한다.  노천명의 친일시는 그녀의 시집 《창변》에 실린 9편이 모두가 아니란다. 앞서 에 소개된 라는 시 말고도 1944년 매일신보에 이라는 제목의 시를 또 발표한 적이 있는데 그 내용은 조선인 출신으로 가미가제 특공대에 나가 최초로 죽은 마쓰이 오장을 찬양한 노래라고 한다. 마쓰이 오장을 노래했던 서정주보다 더 앞서 발표된 친일시인 셈이다.      조선일보 사람들 문예부흥│ 신세대 문인들 골방에서 나오다   오만하고 고독한 ‘슬픈 사슴’ ― 노천명   조선일보 출판부 기자로 근무하던 최정희가 1937년 4월 30일자로 사임하고 그 자리에 조선중앙일보 학예부 기자를 지낸 시인 노천명(盧天命)이 5월 3일자로 입사했다.   이화여전 영문과를 졸업한 노천명은 1935년 기자 생활을 하면서 처녀시 을 동인지 《시원》 창간호(1935년 2월)에 발표해 문단에 데뷔했다. 그는 기자가 되고 난 뒤 기자를 소재로 한 시 를 발표했다. 기자라는 직업이 그에게는 별로 좋게 생각되지 않았던 듯 하다.   큰불이라도 나라 폭탄사건이라도 생겨라 외근(外勤)에서 들어오는 전화가 비상(非常)하기를 바라는 젊은 편집자 그는 잔인한 인간이 아니다 저도 모르게 되어버린 슬픈 기계다 (중략) 오늘은 또 저 붓끝이 몇 사람을 매장할테냐은 훗날 젊은이 수기에 참회가 있는 날 그 날은 무서운 날일지도 모른다 ― 《조광》 1936년 9월   노천명은 훗날 “그럭저럭 한 10년 동안 신문기자 생활을 하였고 신문사도 제법 옮겨다녀 보았으나 여성에게 한해 이것은 화려한 직업은 못 되었던 것 같다”고 회고했다.   그도 처음에는 가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신문기자가 되기를 고집했다. 부모는 “여자가 신문기자를 하면 못쓴다. 시집을 갈 때도 데려가는 집에서 좋아하지 않는다”며 말렸지만 졸업하자마자 곧바로 신문사(조선중앙일보)에 취직했다.  그러나 그의 시에서처럼 아슬아슬한 붓끝 때문에 참회할 날이 올까 봐 두려웠던 것일까. 노천명은 기자 생활을 접고 용정, 북간도, 연길 등지를 여행한다. 조선일보 입사는 여행에서 돌아온 직후였다. 조선일보 출판부는 신문처럼 시간에 쫓기며 아슬아슬 펜대를 굴려야 하는 것도 아니었고 여러 문인들을 접하면서 시작(詩作) 활동을 겸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었다.   노천명은 여성 편집을 맡았다. 그는 최정희, 모윤숙, 이선희 등 여류 문인들을 필진으로 끌여들여 여성을 여성 문단의 중심에 올려놓았다. 이때부터는 본격적으로 시도 쓰기 시작했다. 북간도 여행의 감흥을 담아 처녀시집 《산호림》을 출간한 것이 출판부 기자로 근무하던 1938년이었다.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로 시작되는 시 도 이 시집에 실렸다.   노천명은 여류 문인들을 규합해 현대조선여류문학선집을 조선일보 출판부에서 출간했다. 강경애, 김말봉, 김오남, 이선희, 모윤숙, 박화성, 백신애, 장덕조, 최정희 등 당대를 풍미하던 여류 작가들의 작품들을 모은 것이었다. 노천명은 이 책을 내기 위해 건강이 나빠질 정도로 열심히 뛰어다녔다. 수필 에서 그는 “만나는 사람마다 나더라 얼굴이 요새 못됐다는 인사”라며 “메모첩을 보면 날마다 나갈 일이 있고 저녁 때 집으로 발을 옮길 무렵이면 정말이지 몸이 괴롭다. 여성문화총서를 내보려고 힘에 부치는 것을 애를 쓰고 다니노라니 정신적으로 지친 것을 속일 수 없이 육체로 나타나는 모양이다”라고 토로했다.   노천명은 내성적인 성격에다 오만할 정도로 도도했다. 경제부 기자 김광섭은 그를 “인간으로 보지 않았다”고 할 정도였다. 시인 최하림에 따르면 노천명은 비타협적인 성격 때문에 동료와 자주 트러블을 일으켰다. 다른 기자와 실랑이 끝에 자신의 옷이 찢어진 일이 있었는데 노천명은 똑같은 옷감으로 다시 옷을 해 오라고 버티며 몇 년 동안 화해하지 않았다. 그는 평소 말이 없다가도 한순간 화를 내면 걷잡을 수 없었다.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한 번 토라지면 다시는 화해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신문사에서도 결벽스러울 만큼 냉정했다. 남자 기자들과 비교적 스스럼없이 지냈던 최정희와는 달리 노천명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노천명은 “이 나라 남성들의 인색함과 완고함, 그 시멘트같이 굳어진 여성 무능력시 및 멸시의 관념은 어느 세월에나 청산이 될 것인지”라고 했다. 그는 시 에서 자신의 성격을 스스로 “대竹처럼 꺾어는 질망정 구리 모양 휘어지기가 어려운 성격”이라 했다.   이런 노천명이 1938년 조선일보 사원 ‘부수 확장운동’에서 26부로 2위를 차지한 적이 있었다. 114부로 1위를 차지한 윤석중의 실적에는 턱없이 못 미쳤지만 다른 사람들이 대개 2~5부에 그친 것을 감안하면 내성적 성격인 그로서는 놀라운 실적이었다.   노천명은 남자들과는 거리를 두었지만 최정희, 이선희, 모윤숙 등 여류 문인들과는 친하게 어울려 다녔다. 이들은 “비가 오면 비가 온다고 서로 찾고 눈이 오면 눈이 온다고 서로 찾았으면 서로 찾지 못하는 때면 편지로써 마음을 서로 알렸다”고 한다. 노천명은 특히 최정희와 깊은 우정을 나누었다. 1·4후퇴 때 세간살림 하나 챙기지 못하면서도 최정희와 주고받은 편지는 꼭 안고 갔을 정도였다.   노천명의 냉정하고 도도한 성격은 오히려 남자들의 주목을 받았던 모양이다. 조선일부 학예부장이자 시인인 김기림은 한때 그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어느 눈 내리는 겨울 밤 노천명의 집을 찾아간 김기림은 밤 늦도록 노천명이 나오기를 기다리다가 끝내 나오지 않자 발자국만 남기고 돌아갔다. 최정희는 “구두 발자국은 댓돌 앞까지 왔다가 되돌아나갔다”며 “ 김기림 씨 하면 시보다 눈 위에 발자국을 남긴 것이 먼저 떠오르게 된다”고 회고했다.   정작 노천명은 보성전문 경제학 교수 김광진을 사랑했다. 노천명이 1938년 극예술연구회가 공연한 안톤 체홉 원작의 에서 주인공 라프네스카야의 ‘아냐’ 역으로 출연했을 때였다. 김광진이 관객으로 와서 그에게 꽃다발을 전해 준 것이 인연이 되었다. 김광진은 유부남이었지만 노천명은 혼수감을 마련하면서 결혼을 준비했다. 그러나 본처와 이혼할 작정으로 고향으로 내려간 김광진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노천명은 실연의 아픔을 안고 이후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두 사람의 연애담은 유진오가 이라는 소설로 작품화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후 김광진은 6·25 때 본처도 뒤로 하고, 가수로 활동하면서 ‘방가로’라는 다방을 운명하던 유명한 기생 왕수복과 함께 월북한 것으로 알려졌다. 노천명은 1939년 조선일보를 떠났다. 이후 조선문인보국회 활동을 하며 1942년 , 등의 시를 썼으며 1943년부터 매일신보 문화부에서 일했다. 광복 후에는 서울신문과 부녀신문사 등에서 일했다.     노천명은 625 때 미처 피난을 가지 못하고 서울에 남아 있다가 공산군에게 붙들려 이른바 ‘부역 문인’ 노릇을 해야 했다. 이 때문에 그는 서울이 수복된 후 20년형을 선고받고 수감 생활을 했다. 이때 노천명은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있던 시인 김광섭에게 “거기 있으면서 왜 나를 구하지 못하는가. 삼일절에 나가도록 하라”는 명령에 가까운 편지를 보냈다. 김광섭은 조선일보 출신으로 공보처 국장과 차장을 맡고 있던 이건혁, 이헌구 와 함께 세 사람 명의로 노천명의 선처를 호소하는 진정서를 썼다. 이 덕분인지는 모르지만 노천명은 1951년 4월 4일 출감했다. 노천명은 이후 ‘부역 사건’을 언급하는 사람과는 가차없이 절교했다. 박종화 역시 625 이후 부역 문인 문제를 언급하는 바람에 노천명과 서로 등지는 사이가 되었다.   노천명의 원래 이름은 기선基善이었으나 6세 때 홍역으로 죽을 고비를 넘기자 ‘하늘의 뜻으로 살아났다’해서 ‘천명’으로 개명했다. 1957년 를 쓰던 중 뇌빈혈로 쓰러져 자택에서 숨을 거뒀다.    책 『조선일보 사람들』 중 발췌 p.505~510              이름없는 여인이 되어      어느 조그만 산골로 들어가 나는 이름 없는 여인이 되고 싶소..  초가 지붕에 박넝쿨 올리고 삼밭엔 오이랑 호박을 놓고..  들장미로 울타리를 엮어 마당엔 하늘을 욕심껏 들여놓고...  밤이면 실컷 별을 안고 부엉이가 우는 밤도 내사 외롭지 않겠오.  기차가 지나가 버리는 마을 놋양푼의 수수엿을 녹여 먹으며..  내 좋은 사람과 밤이 늦도록 여우 나는 산골 애기를 하면..  삽살개는 달을 짖고 나는 여왕보다 더 행복하겠오         망향(望鄕)   언제든 가리  마지막엔 돌아가리  목화꽃이 고운 내 고향으로 -  아이들이 한울타리 따는 길머리론  鶴林寺 가는 달구지가 조을며 지나가고  대낮에 여우가 우는 산골  등잔 밑에서  딸에게 편지 쓰는 어머니도 있었다  둥글레山에 올라 무릇을 캐고  접중화 싱아 뻑꾹새 장구채 범부채 마주재 기룩이  도라지 체니곰방대 곰취 참두릅 개두릅을 뜯던 소녀들은  말끝마다 '꽈' 소리를 찾고  개암쌀을 까며 소녀들은  금방맹이 놓고 간 도깨비 얘길 즐겼다  목사가 없는 교회당  회당지기 전도사가 講道상을 치며 설교하던 村  그 마을이 문득 그리워  아프리카서 온 班馬처럼 향수에 잠기는 날이 있다  언제든 가리  나중엔 고향 가 살다 죽으리  모밀꽃이 하아얗게 피는 곳  조밥과 수수엿이 맛있는 마을  나뭇짐에 함박꽃을 꺾어오던 총각들  서울 구경이 소원이더니  차를 타보지 못한 채 마을을 지키겠네  꿈이면 보는 낯익은 동리  우거진 덤불(叢)에서  찔레순을 꺾다 나면 꿈이었다         남사당 나는 얼굴에 분칠을 하고 삼단같이 머리를 땋아 내린 사나이. 초립에 쾌자를 걸친 조라치들이 날나리를 부는 저녁이면 다홍치마를 두르고 나는 향단이가 된다. 이리하여 장터 어느 넓은 마당을 빌어 람프 불을 돋운 포장 속에선 내 남성이 십분 굴욕되다. 산 넘어 지나온 저 동리엔 은반지를 사주고 싶은 고운 처녀도 있었건만 다음 날이면 떠남을 짓는 처녀야 나는 집씨의 피였다. 내일은 또 어느 동리로 들어간다냐. 우리들의 도구를 실은 노새의 뒤를 따라 산딸기의 이슬을 털며 길에 오르는 새벽은 구경꾼을 모으는 날나리 소리처럼 슬픔과 기쁨이 섞여 핀다.       봄의 서곡   누가 오는데 이처럼들 부산스러운가요. 목수는 널판지를 재며 콧노래를 부르고 하나같이 가로수들은 초록빛 새 옷들을 받아 들었습니다. 선량한 친구들이 거리로 거리로 쏟아집니다. 여자들은 왜 이렇게 더 야단입니까? 나는 鋪道에서 현기증이 납니다. 삼월의 햇볕아래 모든 이지러졌던 것들이 솟아오릅니다. 보리는 그 윤나는 머리를 풀어 헤쳤습니다. 바람이 마음대로 붙잡고 속삭입니다 어디서 종다리 한놈 포루루 떠오르지 않나요 꺼어먼 살구남기에 곧 올연한분홍「베일」이 씌워질까 봅니다       女心 새벽하늘에 긴 강물처럼 종소리 흐르면 으레 기도로 스스로를 잊는 그런 여성으로 살게 해 주십시오. 한번의 눈짓, 한번의 손짓, 한번의 몸짓에도 후회와 부끄러움이 없는 하루를 살며 하루를 반성할 줄 아는 그런 女性으로 살게 해주십시오. 즐거울 땐 꽃처럼 활짝 웃음으로 보낼 줄 알며 슬플 땐 가장 슬픈 표정으로 울 수 있는 그런 女性으로 살게 해주십시오. 주어진 길에 순종할 줄 알며 경건한 자세로 기도 드릴줄 아는 그런 여성으로 살게 해 주십시오       별을 쳐다보며 나무가 항시 하늘로 향하듯이 발은 땅을 딛고도 우리 별을 쳐다보며 걸어갑시다. 친구보다 좀더 높은 자리에 있어 본댔자 또 미운 놈을 혼내주어 본다는 일 그까짓 것이 다- 무엇입니까 술 한 잔만도 못한 대수롭잖은 일들입니다. 발은 땅을 딛고도 우리 별을 쳐다보며 걸어갑시다     길 솔밭 사이로 솔밭 사이로 걸어 들어가자면 불빛이 흘러 나오는 고가가 보였다. 거기- 벌레 우는 가을이 있었다. 벌판에 눈 덮인 달밤도 있었다. 흰나리꽃이 향을 토하는 저녁 손길이 흰 사람들은 꽃술을 따 문 병풍의 사슴을 이야기했다. 솔밭 사이로 솔밭 사이로 걸어 지금도 전설처럼- 고가엔 불빛이 보이련만 숱한 이야기들이 생각날까봐 몸을 소스라침을 비둘기같이 순한 마음에서......        묘지 이른 아침 황국(黃菊)을 안고 산소를 찾은 것은 가랑잎이 빨-가니 단풍드는 때였다. 이 길을 간 채 그만 돌아오지 않는 너 슬프다기보다는 아픈 가슴이여 흰 패목들이 서러운 악보처럼 널려 있고 이따금 빈 우차(牛車)가 덜덜대며 지나는 호젓한 곳 황혼이 무서운 어두움을 뿌리면 내 안에 피어오르는 산모퉁이 한 개 무덤 비애가 꽃잎처럼 휘날린다.       장미 맘 속 붉은 장미를 우지직끈 꺾어 보내 놓고 그날부터 내 안에선 번뇌가 자라다 늬 수정 같은 맘에 나 한 점 티 되어 무겁게 자리하면 어찌하랴 차라리 얼음같이 얼어 버리련다 하늘보다 나무모양 우뚝 서 버리련다 아니 낙엽처럼 섧게 날아가 버리련다       장날 대추 밤을 돈사야 추석을 차렸다. 이십 리를 걸어 열하룻장을 보러 떠나는 새벽 막내딸 이쁜이는 대추를 안 준다고 울었다. 송편 같은 반달이 싸릿문 위에 돋고, 건너편 성황당 사시나무 그림자가 무시무시한 저녁, 나귀 방울에 지껄이는 소리가 고개를 넘어 가까워지면 이쁜이보다 삽살개가 먼저 마중을 나갔다.     임 오시던 날 임이 오시던 날 버선발로 달려가 맞았으련만 굳이 문 닫고 죽죽 울었습니다 기다리다 지쳤음이오리까 늦으셨다 노여움이오리까 그도 저도 아니오이다 그저 자꾸만 눈물이 나 문 닫고 죽죽 울었습니다     비연송(悲戀頌) 하늘은 곱게 타고 양귀비는 피었어도 그대일래 서럽고 서러운 날들 사랑은 괴롭고 슬프기만 한 것인가 사랑의 가는 길은 가시덤불 고개 그 누구 이 고개를 눈물없이 넘었던고 영웅도 호걸도 울고 넘는 이 고개 기어이 어긋나고 짓궂게 헤어지는 운명이 시기하는 야속한 이 길 아름다운 이들의 눈물의 고개 영지못엔 오늘도 탑그림자 안 비치고 아사달은 뉘를 찾아 못 속으로 드는 거며 그슬아기 아사녀의 이 한을 어찌 푸나     사월의 노래 사월이 오면, 사월이 오면은.... 향기로운 라일락이 우거지리 회색빛 우울을 걷어 버리고 가지 않으려나 나의 사람아 저 라일락 아래로  라일락 아래로 푸른물 다담뿍 안고 사월이 오면 가냘푼 맥박에도 피가 더하리니 나의 사람아 눈물을 걷자 청춘의 노래를 사월의 정령을 드높이 기운차게 불려 보지 않으려나 앙상한 얼골이 구름을 벗기고 사월의 태양을 맞기 위해 다시 거문고의 줄을 골라 내 노래에 맞추지 않으려나 나의 사람아!       유월의 언덕 아카시아꽃 핀 유월의 하늘은 사뭇 곱기만 한데 파라솔을 접듯이 마음을 접고 안으로 안으로만 들다 이 인파 속에서 고독이 곧 얼음모양 꼿꼿이 얼어들어옴은 어쩐 까닭이뇨 보리밭엔 양귀비꽃이 으스러지게 고운데 이른 아침부터 밤이 이슥토록 이야기해 볼 사람은 없어 파라솔을 접듯이 마음을 접어가지고 안으로만 들다 장미가 말을 배우지 않은 이유를 알겠다 사슴이 말을 하지 않는 연유도 알아듣겠다 아카시아꽃 핀 유월의 언덕은 곱기만 한데...     당신을 위해 장미모양 으스러지게 곱게 되는 사랑이 있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시죠? 감히 손에 손을 잡을 수도 없고 속삭이기에는 좋은 나이에 열없고 그래서 눈은 하늘만을 쳐다보면 얘기는 우정 딴 데로 빗나가고 차디찬 몸짓으로 뜨거운 맘을 감추는 이런 일이 있다면 어떻게 하시죠 행여 이런 마음 알지 않을까 하면 얼굴이 화끈 달아올라 그가 모르기를 바라며 말없이 지나가려는 여인이 있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시죠.     구름같이 큰 바다의 한 방울 물만도 못한 내 영혼의 지극히 적음을 깨닫고 모래언덕에서 하염없이 갈매기처럼 오래오래 울어보았소. 어느 날 아침이슬에 젖은 푸른밤을 거니는 내 존재가 하도 귀여운 것 같아 들국화 꺾어들고 아침다운 아침을 종다리처럼 노래하였소 허나 쓴웃음 치는 마음 삶과 죽음 이 세상 모든 것이 길이 못풀 수수께끼어니 내 생의 비밀인들 어이 아오 바닷가에서 눈물짓고... 이슬언덕에서 노래불렀소 그러나 뜻 모를 이 생 구름같이 왔다가나보오     아름다운 얘기를 하자 아름다운 얘기를 좀 하자 별이 자꾸 우리를 보지 않느냐 닷돈짜리 왜떡을 사먹을 제도 살구꽃이 환한 마을에서 우리는 정답게 지냈다 성황당 고개를 넘으면서도 우리 서로 의지하면 든든했다 하필 옛날이 그리울 것이냐만 늬 안에도 내 속에도 시방은 귀신이 뿔을 돋쳤기에 병든 너는 내 그림자 미운 네 꼴은 또 하나의 나 어쩌자는 얘기냐, 너는 어쩌자는 얘기냐 별이 자꾸 우리를 보지 않느냐 아름다운 얘기를 좀 하자.     봄비 강에 얼음장 꺼지는 소리가 들립니다 이는 내 가슴속 어디서 나는 소리 같습니다 봄이 온다기로 밤새것 울어 새일 것은 없으련만 밤을 새워 땅이 꺼지게 통곡함은 이 겨울이 가는 때문이었습니다 한밤을 즐기차게 서러워함은 겨울이 또 하나 가려 함이었습니다 화려한 꽃철을 가져온다지만 이 겨울을 보냄은 견딜 수 없는 비애였기에 한밤을 울어울어 보내는 것입니다  
1040    詩는 언어를 통해 언어의 구속에서 벗어나야... 댓글:  조회:5692  추천:0  2016-01-31
불교와 한국 현대시 박상천 1. 시와 불교의 존재론적 자유 시가 지향하는 바는 근본적으로 불교적 사유와 유사하다. 시는 언어를 통해 언어에 매여 있는 존재를 자유롭게 하려고 하고 불교적 사유도 또한 사고의 전환을 통해 존재를 자유롭게 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불립문자 교외별전 직지인심 견성성불(不立文字 敎外別傳 直指人心 見性成佛)’이라는 선(禪)에 관한 불교의 게(偈)는 진정한 도(道)의 세계는 언어로서는 표현되지 않는, 언어의 바깥에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도가 언어로는 표현되지 않는 세계에 있다는 말은 언어의 한계를 말하는 것이다.  우리의 일상 언어는 근본적으로 사물을 구속할 수밖에 없다. 일상 언어는 사물과 사물을 분별하여 결정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일상 언어의 세계에서 ‘하늘’이 ‘꽃잎’이 될 수 없고 ‘그녀’가 ‘딱따구리’가 될 수는 없다. 그것은 일상의 언어가 지닌 ‘지시성’ 때문이다. 그러므로 일상 언어의 세계에서는 ‘하늘’은 ‘하늘’이요, ‘그녀’는 ‘그녀’일 수밖에 없다. 일상의 언어 속에는 분명한 ‘분별’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일상의 언어는 무엇인가를 대신하는 지시적 기호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이 세계 속에서의 사물들은 ‘사물성’을 잃어버리고 사물들은 철저하게 언어에 의해 결정되고 언어에 구속당하고 만다.  그러나 언어가 일상의 세계를 벗어나는 순간, 즉 시의 세계에서의 언어는 사물을 구속하지 않는다. 언어가 사물을 구속하지 않는다는 것은 사물과 사물을 분별하지 않음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시의 세계에서는 ‘하늘’이 ‘꽃잎’이 되기도 하고 ‘그녀’가 ‘딱따구리’가 되기도 하고 ‘나’는 ‘병든 숫캐’가 되기도 한다. 이처럼 시는 언어에 매인 존재들을 언어를 가지고 자유롭게 풀어 놓는다. 시의 언어는 결정된 의미에 매이지 않고 의미를 구속하지도 않는다. 시의 언어가 사물들을 자유롭게 풀어놓는다거나 시의 언어가 결정된 의미에 매이지 않고 의미를 구속하지도 않는다는 말은 결국 사물과 사물을 분별하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시인은 시를 통해 독자들에게 자신의 사상이나 감정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 세계와는 다른 세계를 창조해 놓을 뿐이다. 독자 또한 시인이 창조해 놓은 세계와 접할 때, 시인의 의미에 구속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체험을 하게 된다. 따라서 시의 세계는 끊임없이 의미가 소멸하면서 끊임없이 의미가 새롭게 탄생하는 ‘제법생멸(諸法生滅)’의 현장이라고 할 수 있다. 시가 지향하는 세계는 언어에 의해 존재가 결정된 세계가 아니라 존재의 자유가 실현되는 세계이다. 시가 존재의 구속이 아니라 존재의 자유라 함은 불교에서 말하는 무심(無心)이요 무념(無念)의 경지라고 할 수 있다. 시는 존재를 결정하려고 하지도 않고 존재를 구속하려고 하지도 않기 때문에 우리는 시에서 결정된 존재를 만나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체험되는 세계를 만나게 된다.  시를 통해 새롭게 체험되는 세계란 어떤 세계인가? 우리의 주위에 있는 모든 사물들이 존재의 자유를 얻은 세계이다. 따라서 그 세계는 ‘무분별(無分別)’의 세계이며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의 세계라고 할 수 있다. 불교는 그러한 세계를 ‘반야(般若)’의 세계라 부르고 시는 그러한 세계를 ‘창조(創造)’의 세계라고 부른다. 시는 언어를 가지고 언어를 파괴함으로써 존재의 자유를 성취한다면 불교는 ‘깨달음’으로 존재의 자유를 성취하는 것이 다를 뿐이다.  시와 불교는 이렇게 존재론적 자유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그 지향하는 세계가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불교의 ‘게(偈)’가 시의 형태로 나타나게 되고 시가 근본적으로 선(禪)의 측면을 가지고 있는 이유는 시와 불교의 이러한 존재론적 유사성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불교 특히 불교의 선(禪)과 시가 존재론적인 측면에서 유사하다는 것은 현실과 도(道)의 관계 또는 현상과 본질의 관계에 많은 시사점을 준다. 즉, 우리를 구속하고 있는 현실이 본질의 세계는 아니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인간들은 끊임없이 새로운 세계를 꿈꾸게 되고, 인간이 꿈꾸는 세계의 본질은 자유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 한국시와 불교적 사유 그러면 이제 시와 불교의 이러한 존재론적 유사성을 바탕으로 하여 한국의 현대시는 불교와 어떠한 관련을 가지고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본고의 근본 논지는 한국의 현대시가 불교적 주제를 어떻게 시화(詩化)하고 있는지에 관한 것이다.  이는 결국 따지고 보면 한국의 현대 시인들의 시적 사유에 불교가 어떻게 관련을 맺고 있는지를 밝히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또 어떻게 보면 우리의 역사 속으로 불교가 들어온 이후 한국인의 의식과 무의식 속에 불교가 어떠한 모습으로 각인되어 있는가를 살피는 일이라고도 할 수 있다.  편집자가 요구한 본고의 주제는 ‘한국 현대시와 불교적 주제’였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불교시’의 범위를 어디까지로 잡느냐는 것이다.  먼저 두 편의 시를 살펴보도록 하자.  당신 앞에선 말을 잃습니다. 미(美)란 사람을 절망(絶望)케 하는 것 이제 마음 놓고 죽어 가는 사람처럼 절로 쉬어지는 한숨이 있을 따름입니다.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당신의 모습을 저만치 보노라면 어느 명공(名工)의 솜씨인고 하는 건 통 떠오르지 않습니다. ―박희진, 「관세음상(觀世音像)에게」 일부 바람으로 지나가는 사랑을 보았네 언덕의 미류나무 잎이 온 몸으로 흔들릴 때 사랑이여 그런 바람이었으면 하네 붙들려고도 가까이서 얼굴을 보려고도 하지 말고 그냥 지나가는 소리로만 떠돌려 하네 젖은 사랑의 잔잔한 물결 마음 바닥까지 다 퍼내어 비우기도 하고 스치는 작은 풀꽃 하나 흔들리게도 하면서 사랑이여 흔적없는 바람이었으면 하네 ―김석규, 「사랑에게」 全文 위의 두 편의 시는 근본적으로 큰 차이를 보여준다. 앞에 놓인 박희진의 「관세음상(觀世音像)에게」는 직접적으로 불상을 시적 대상으로 삼고 있는 불교시 또는 찬불시라고 할 수 있다.  반면에 김석규의 「사랑에게」는 비록 시적 대상으로 불교적인 것을 택하고 있지는 않지만 불교적인 사유를 읽을 수 있는 시라고 할 수 있다. 전자를 쉽게 ‘불교시’라고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후자를 ‘불교시’라고 부르기는 어렵다. 그러나 불교라는 종교 그리고 그 사상과 시의 연관성을 이야기하기 위하여서는 시적 대상으로 직접 불교적인 것을 택했느냐 택하지 않았느냐의 문제보다는 불교적인 사유가 한국의 현대시의 저변에 어떠한 모습으로 놓여져 있는가하는 것이 더 중요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위에서 김석규의 「사랑에게」는 분명히 직접적으로 불교와 관련되는 그 어떠한 용어도 사용하지 않고 있지만 사유의 저변에는 분명히 불교적인 내용이 놓여져 있다고 할 수 있다. ‘지나가는 소리로만 떠돌려 하네.’ ‘흔적없는 바람이었으면 하네.’라는 시적 화자의 새로운 삶에 대한 원망(願望)은 불교적인 사유의 한 가지인 제행무상(諸行無常)의 깨달음에 근거를 둔 초연(超然)을 추구하는 모습이며 무념(無念)과 무상(無相)의 경지에 대한 희구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한국의 현대시는 직접적으로 불교적인 대상을 다루지 않는다 할 지라도 그 저변에는 불교적인 사유가 짙게 깔려 있는 경우가 대단히 많은 것으로 보인다. 직접적으로 불교적인 내용을 다루지 않으면서도 한국의 현대시에 불교적인 사유가 깔려 있다는 것은 불교적인 사유가 한국인의 무의식에 크게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물론 노장(老莊)의 무위(無爲)의 사상과 불교의 공(空)사상의 유사성 때문에 한국인의 무의식 속에 깔려 있는 내용이 불교적인 것인지 노장적인 것인지를 쉽게 판단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한국인의 무의식 세계 속에는 그것이 불교적인 것이든 노장적인 것이든 삶의 본질적인 자유에 대한 희구와 염원이 짙게 깔려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면 한국의 현대시에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불교적 사유는 어떠한 것일까?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아무래도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상(諸法無常)’이라는 사유가 아닌가 한다.  지혜로와라 은행잎이여,  붓다는 가을날 어느 늦은 오후 세종로를 거닐며 내게 이렇게 일렀다. 시절을 마련할 줄 모르는 불자(佛子) 있거든, 하늬바람에 지천으로 떨어지는  저 은행잎을 보게 하라. 은행잎은, 높은 가지 끝에서 스스로의  알몸을 땅으로 떨어뜨림으로써, 나무로 하여 겨울을 살게 하고 그것으로 또 인간을 깨쳐 주느니, 아, 차바퀴 아래 저렇게 아우성치며 굴러가는 은행잎은 차라리 그 날 이 거리에 쏟아지던 데모대(隊)의 구보행렬(驅步行列)― 흰 눈을 뒤집어 쓰고 누렇게 매어달린 미련스런 은행잎을 보았는가. 자연(自然)의 이법(理法)을 따라 피고 질 줄 모르는 완명한 권자(權者) 있거든 깨쳐주라고.  ―장 호, 「은행경(銀杏經)」 일부 어디론가 흘러가는 바람소리밖에 없던 허공(虛空)에 문득 고추잠자리 한마리가 나타나 팔천개의 눈으로 나를 내려다 보고 팔천개의 나도 그를 바라볼 때 허공(虛空)에서 부딪치는 우리의 눈길에 어느 위의 민들레 꽃씨가 뿌리를 내리며 그만큼의 꽃망울을 피워 흔들 때 마침내 부딪치고 부딪치던 우리의 눈길을 휘몰아오는 불길로 모든 것은 불붙어 슬어지고 허공(虛空)엔 꽃망울 흔드는 것같은 어디론가 흘러가는 바람소리만 남아 ―박제천, 「어디론가 흘러가는 바람소리」 전문 만유(萬有)는 그 어떠한 것도 항구성을 가질 수 없다는 ‘무상(無常)’의 불교적 사유가 이들 시의 근저에 깔려있다고 할 수 있다. 장호의 「은행경(銀杏經)」은 ‘알몸을 땅으로 떨어뜨리는’ 은행잎을 보면서 삶의 무상함을 깨닫고 있다. 은행잎이 낙엽이 되어 떨어지는 지극히 평범하고 사소한 일에서 ‘자연(自然)의 이법(理法)’을 깨닫고 그러한 깨달음을 주는 은행잎을 ‘은행경(銀杏經)’이라 부르고 있다. ‘흰 눈을 뒤집어 쓰고 누렇게 매어달린 미련스런 은행잎’이 없듯이 우리들의 삶은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말하여주는 것이며 불교에서 말하는 ‘자연(自然)의 이법(理法)’이란 다름 아닌 ‘무상’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다.  박제천의 「어디론가 흘러가는 바람소리」 역시 ‘무상’의 사유를 잘 드러내고 있다. 눈길과 눈길이 만남으로써 ‘민들레 꽃씨가 뿌리를 내리며 그만큼의 꽃망울을 피우지만’ 결국은 ‘어디론가 흘러가는 바람소리만 남는’ 우리들 삶의 무상함을 잘 드러내주고 있다. 만남을 통해 이루어지는 생명의 탄생도 허공(虛空)에서 이루어지고, ‘바람소리’ 역시 허공(虛空)에 남게 된다. 이들 시와 같이 한국 시에는 삶의 ‘무상’에 대한 시적 사유가 드러나는 경우가 대단히 많다.  이렇게 삶의 무상함을 깨달을 때 나타나는 반응은 대개 두 가지가 있을 수 있다. 그 하나는 허무주의에 빠지는 일이며 다른 하나는 삶에 대하여 초연해지는 일이다. 그런데 근본적인 불교의 사유의 방식으로 본다면, 만유가 영원하고 항구적인 것은 없다는 무상에 대한 깨달음은 초연주의로 갈 수밖에 없다. 불교적 사유에서 본다면 그것은 있음과 없음이 다르지 않고, 이것과 저것이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있음과 없음이 다르지 않고 이것과 저것이 다르지 않으며 삶과 죽음이 결국 하나라는 ‘생사일여(生死一如)’의 불교적 사유에서 본다면 무상의 삶을 허무하다고 보기 보다는 그러한 삶에 초연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국 현대시에 흔히 드러나는 ‘초연주의(超然主義)’는 이러한 ‘무상’에 대한 깨달음과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섭섭하게, 그러나  아주 섭섭하지는 말고 좀 섭섭한 듯만 하게, 이별이게,  그러나 아주 영 이별은 말고 어디 내생에서라도 다시 만나기로 하는 이별이게, 연(蓮)꽃 만나러 가는 바람 아니라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엊그제  만나고 가는 바람 아니라 한 두 철 전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서정주, 「연(蓮)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전문 서정주의 「연(蓮)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는 죽음에 대하여 초연한 자세가 두드러진다. 죽음에 대한 이러한 초연한 자세는 현세와 내세를 동질적인 것으로 인식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현세에서 내세로 건너가는 것을 ‘섭섭하게, 그러나 아주 섭섭하지는 말고 좀 섭섭한 듯만 하게’라고 초연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결국 생사일여(生死一如)의 인식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이 시는 현실로부터의 완벽한 초월을 꿈꾸기보다는 한편으로는 인간적인 삶에 대한 약간의 아쉬움을 남기고 있지만 결국 죽음 자체에 대한 자세는 초연하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초연주의는 결국, 삶이란 영원하지도 않고 ‘무상’한 것이라 변화할 수밖에 없지만 그러나 이쪽에서 저쪽으로의 변화가 결국은 같다는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의 불교적 사유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 아닌가 한다.  한국의 많은 현대시가 보여주고 있는 초연주의는 초월주의와는 같지 않다. 초월주의가 현실 부정에 바탕을 두고 현실과는 완벽하게 다른 세계를 추구하는 공격적인 것이라면 초연주의는 현실과 또 다른 세계를 동시에 인정하는 그리하여 그 속에 인간적인 냄새가 배어 있는 포용적인 삶의 자세라고 할 수 있다. 삶에 대한 이러한 포용적 자세는 이것과 저것이 다르지 않다는 ‘불이(不二)’의 사유에 기초를 두고 있는 것이다.  비록 우리가 가진 것이 없더라도 비록 한 점 없이 지는 나무 잎새를 바라볼 일이다. 또한 바람이 일어나서 흐득흐득 지는 잎새를 바라볼 일이다. 우리가 아는 것이 없더라도 물이 왔다가 가는  저 오랜 썰물 때에 남아 있을 일이다. 젊은 아내여 여기서 사는 동안 우리가 무엇을 가지며 무엇을 안다고 하겠는가 다만 잎새가 지고 물이 왔다가 갈 따름이다. ―고 은, 「삶」 全文 죽음을 ‘다만 잎새가 지고 물이 왔다가 갈 따름’이라고 인식하는 이러한 시적 사유는 한국인들의 삶과 죽음에 대한 초연함을 잘 보여준다. 삶과 죽음을 잎새가 지는 것처럼, 썰물 때 물이 빠져나가는 것처럼 담담하게 바라볼 뿐이다. 모든 것은 결국 내가 어떻게 바라보느냐고 어떻게 생각하느냐의 문제에 지나지 않는다. 혜능(慧能)의 게(偈)에서처럼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이기 때문이다. 불교적으로 본다면 삶과 죽음이라고 하는 것도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달라질 뿐이지 그것 자체가 어떤 상(相:성질)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들어낸다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생각은 불교의 깨달음의 세계란 결국 사고의 대전환을 일컫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사고의 전환을 통해 만남과 헤어짐이 다르지 않고 있음과 없음이 다르지 않고 나아가 삶과 죽음도 다르지 않다는 초연주의로 귀결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욕심을 놓고 돌아서면 사방에서 소리치고 있는 안개 안개 속에 떠 있는 無重力의 사랑을 본다. 돌아가리라  가진 것 다 돌려주고 이제야 몸 가볍게 시작하는 여행 휘적이며 휘적이며 조금씩 소멸해 가는 우리들의 매듭 돌아가리라  이른 아침 승천하는 맨살의 안개 다친 몸 거두어 비단 수건으로 닦아내고 이제  無緣의 들판에 돌아 가리라. ―강계순, 「안개 속에서」 一部 불교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세계는 존재론적 자유의 세계이다. 이러한 존재론적 자유의 세계는 무념무상의 세계이며 모든 것을 다 비운 무연(無緣)의 세계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의 현대시에서 ‘비움’의 미학을 노래하는 시가 많은 것도 결국은 이러한 존재론적 자유의 성취를 희구하기 때문이다. 강계순의 「안개 속에서」가 보여주는 ‘무중력(無重力)의 사랑’이란 무념무상의 경지에 대한 시적 희구라고 할 수 있다. 중력이란 결국 ‘연(緣)’의 무게라고 할 수 있고 그러한 ‘연’의 무게를 버리고 비우는 ‘무연의 들판’은 존재론적인 자유가 성취된 광막한 들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3. 글을 마치며 불교가 이 땅에 들어와 뿌리내린 이후 한국인들 의식과 무의식 속에는 불교적인 사유의 방법이 크게 자리잡고 있음이 사실이다. 그러한 정신의 뿌리는 개인이 부정한다고 해서 부정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마치 유전자와 같아서 끈질기게 우리의 사유의 방식에 영향을 주고 우리의 사유방식을 지배하고 있다.  몇 편의 시를 통해 한국의 현대시와 불교적 사유 방식에 대하여 고찰하여 보았다. 한국인의 정신의 근저에 놓여 있는 불교적 사유의 방식은 한국의 현대시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직접적으로 불교적인 대상물을 시적 대상으로 택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시인들의 의식의 깊숙한 곳에 놓여진 불교적인 사유는 근본적으로 시가 추구하고자 하는 존재론적 자유와 맞닿아 있다고 할 수 있다. 언어를 통해 언어의 구속을 벗어나 존재론적 자유를 성취하려는 시와 사고의 대전환을 통해 만상의 구속을 벗어나 존재론적 자유를 성취하려는 불교는 우리들 삶의 본질이 현실에 머물지만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시인, 한양대 교수) ==============================================================================================   237. 가재미 / 문태준                          가재미                                                 문태준     김천의료원 6인실 302호에 산소마스크를 쓰고 암투병 중인 그녀가 누워 있다    바닥에 바짝 엎드린 가재미처럼 그녀가 누워 있다    나는 그녀의 옆에 나란히 한 마리 가재미로 눕는다    가재미가 가재미에게 눈길을 건네자 그녀가 울컥 눈물을 쏟아낸다    한쪽 눈이 다른 한쪽 눈으로 옮겨 붙은 야윈 그녀가 운다    그녀는 죽음만을 보고 있고 나는 그녀가 살아온 파랑 같은 날들을 보고 있다    좌우를 흔들며 살던 그녀의 물속 삶을 나는 떠올린다    그녀의 오솔길이며 그 길에 돋아나던 대낮의 뻐꾸기 소리며    가늘은 국수를 삶던 저녁이며 흙담조차 없었던 그녀 누대의 가계를 떠올린다    두 다리는 서서히 멀어져 가랑이지고    폭설을 견디지 못하는 나뭇가지처럼 등뼈가 구부정해지던 그 겨울 어느 날을 생각한다    그녀의 숨소리가 느릅나무 껍질처럼 점점 거칠어진다    나는 그녀가 죽음 바깥의 세상을 이제 볼 수 없다는 것을 안다    한쪽 눈이 다른 쪽 눈으로 캄캄하게 쏠려버렸다는 것을 안다    나는 다만 좌우를 흔들며 헤엄쳐 가 그녀의 물 속에 나란히 눕는다    산소호흡기로 들어마신 물을 마른 내 몸 위에 그녀가 가만히 적셔준다        문태준 시집 중에서  -----------------------------------------------------------------------------   238. 빈집의 약속 / 문태준               빈집의 약속                                                                                                           문태준       마음은 빈집 같아서 어떤 때는 독사가 살고 어떤 때는 청보리밭 너른 들이 살았다   별이 보고 싶은 날에는 개심사 심검당 별 내리는 고운 마루가 들어와 살기도 하였다   어느 날에는 늦눈보라가 몰아쳐 마음이 서럽기도 하였다   겨울 방이 방 한 켠에 묵은 메주를 매달아 두듯 마음에 봄가을 없이 풍경들이 들어와 살았다     그러나 하릴없이 전나무 숲이 들어와 머무르는 때가 나에게는 행복하였다   수십 년 혹은 백 년 전부터 살아온 나무들, 천둥처럼 하늘로 솟아오는 나무들   뭉긋이 앉은 그 나무들의 울울창창한 고요를 나는 미륵들의 미소라 불렀다   한 걸음의 말도 내놓지 않고 오롯하게 큰 침묵인 그 미륵들이 잔혹한 말들의 세월을 견디게 하였다   그러나 전나무 숲이 들어앉았다 나가면 그뿐, 마음은 늘 빈집이어서   마음 안의 그 둥그런 고요가 다른 것으로 메워졌다   대나무가 열매를 맺지 않듯 마음이란 그냥 풍경을 들어앉히는 착한 사진사 같은 것   그것이 빈집의 약속 같은 것이었다           문태준 시집 중에서
1039    예쁜 詩는 좋은 詩가 아니다... 댓글:  조회:5780  추천:0  2016-01-31
내가 생각하는 시 혹은 그 고민들-신용목(시인)   시는 우리를 둘러싼 메마르고 거친 현실을 뛰어넘는 어떤 것입니다. 현실을 뛰어넘기 위해서는 현실을 통과해 나가야 합니다. 저는 늘 ‘예쁜 시’는 좋은 시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스스로 올바른 말, 문득 깨닫게 된 어떤 것들에 대해 쓰지 말자고 다짐하기도 합니다. 그런 시들은, 우리를 현실 너머로 안내하기보다는 현실에 만족하며 살아가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는 아름답습니다. 질문은 여기서 발생합니다. 시는 어떻게 아름다움에 도달할 수 있게 되는가? 이것은 얼핏 너무 빤해서 무의미한 질문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어떤 질문들이 빤해 보이는 것은 빤한 해답이 이미 있어서가 아니라 해답 없는 질문이 숱하게 반복되었기 때문입니다. 정색하고 다시 물어야 합니다. 어떤 시가 아름다움에 도달하는가? 아도르노라는 철학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합리적 인식은 고통과 거리가 멀다. 그것은 고통을 총괄하여 규정하고 그것을 완화하는 수단을 만들어낼 수 있다. 그러나 고통을 체험으로써 나타낼 수는 없다. 합리적 인식이 볼 때 고통은 비합리적인 것이다. 고통이 개념화되면 그것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게 되고 일관성도 없어질 것이다.” 요컨대, 현실에서 필요하다고 말하는 합리적 인식은 고통을 이해할 수도 표현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고통은 있습니다. 그것은 어디에 있을까요? 그것은 의사의 청진기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시인의 시에 있습니다. 아도르노는 고통의 이해와 표현이 오로지 예술에서만 가능하다고 단언합니다. 그에 따르면 예술은 “축적된 고통의 기억”입니다. 그는 예술이 고통을 잊어버릴 것이라면 차라리 예술 자체가 없어져버리는 편이 낫다고까지 했습니다.  그렇다면, 모든 시는 고통만을 이야기해야 할까요? 스탕달은 예술을 “행복에의 약속”이라 했습니다. 행복이 지금-여기에 있다고 말하는 예술은 허위입니다. 우리는 언제가 행복해져야 합니다. 그러나 아직은 아닙니다. 우리는 각자가 가진 고유한 빛깔과 향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주 속에 두 개의 모래알이 똑같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한 명 한 명이 각자의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모두가 같은 삶을 살아야 하고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고 살아야 한다고 강요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이코가 되거나 사회부적응자가 되고 맙니다. 그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가 우리에게 가하는 폭력입니다. 시는 바로 그 폭력 속에 살고 있는 우리의 현실을 발견하고 그것을 되새길 수 있게 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예쁜 시, 깨달은 시는 현실의 고통을 긍정적 사고를 통해 그냥 견디라고 이야기하는 마취제와도 같습니다. 그런 시들은 아름다움이 현실 속에 있다고 말함으로써, 고통스런 현실이 지속되게 만듭니다. 그런 시를 쓰기는 쉽습니다. 남들이 살라는 대로, 남들이 생각하라는 대로 하면 된다고 쓰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 시들은 대체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고통을 너무 쉽게 다 안다고 말해버리거나, 그들의 고통을 마치 자기의 것인 양 포장합니다. 내가 말한 ‘예쁜 시’나 ‘깨달은 시’는 그렇게 씌어진 시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것이 아닌 고통을 다 안다고 말하는 것은 시를 사이비 종교에서나 가능한 설교의 수준으로 떨어뜨리는 것입니다. ‘세상은 이러한 것이다’,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시는 세상의 이치나 처세술을 가르치는 장르가 아닙니다. 우리가 무심히 지나치고 말 순간을 정지시키고 그 순간에 영원성을 부여하는 것. 시는 우리 모두의 얼굴을, 이 우주의 진실을 들여다보게 하는 유일무이한 장르입니다. 물론, 시에도 아름다움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은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여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저 먼 바깥에 있습니다. 아름다움이 우리가 도달하지 못한 미지에 있다고 말하는 것―그것이 시가 가진 아름다움일 것입니다. 그 아름다움은 어떻게 구현되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의 몸을 통해, 우리가 볼 수 있는 세계를 통해서만 구현될 수 있을 것입니다.  물이 신고 가는 물의 신발과 물 위에 찍힌 물의 발자국, 물에 업힌 물과 물에 안긴 물 물의 바닥인 붉은 포장과 물의 바깥인 포장 아래서 국수를 만다 허기가 허연 김의 몸을 입고 피어오르는 사발 속에는 빗물의 흰머리인 국수발, 젓가락마다 어떤 노동이 매달리는가 이국의 노동자들이 붉은 얼굴로 지구 저편을 기다리는,  궁동의 버스종점 비가 내린다, 목숨의 감옥에서 그리움이 긁어내리는 허공의 손톱자국! 비가 고인다, 궁동의 버스종점 이국의 노동자들이 붉은 얼굴로 지구 이편을 말아먹는, 추억이 허연 면의 가닥으로 감겨오르는 사발 속에는 마음의 흰머리인 빗발들, 젓가락마다 누구의 이름이 건져지는가 국수를 만다 얼굴에 떠오르는 얼굴의 잔상과 얼굴에 남은 얼굴의 그림자, 얼굴에 잠긴 얼굴과 얼굴에 겹쳐지는 얼굴들 얼굴의 바닥인 마음과 얼굴의 바깥인 기억 속에서 ―신용목, 「붉은 얼굴로 국수를 말다」 이 시는, 저기 부천 가는 길에 있는 궁동이라는 곳 포장마차에서 국수를 말아먹는 외국인 노동자를 보고 쓴 시입니다. 만약, 이 시가 외국인노동자들의 아픔을 마치 자기의 것인 양 서술을 했다면, 읽는 이에게 순간적인 감흥을 제공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감흥 그 이상을 선사하지는 못하였을 것입니다. 감동은 시에서 필요한 덕목 중 하나일 뿐 전체일 수 없습니다. 시는 특유의 느낌을 통해 우리가 현실 속에서 짚어내지 못하는 먼 곳을 가리킬 수 있어야 합니다. 외국인 노동자가 국수를 마는 일시적인 한 순간을 영원한 한 순간으로 바꾸어놓았을 때, 우리는 슬픔의 복판에서 우리 모두가 가진 삶의 얼굴을 온전하게 들여다보게 될 것입니다. 외국인 노동자의 생활은 언젠가는 좋아질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은 아닙니다. 우리는 쉽게 그들의 아픔을 우리가 알고 있다고 말하지 않음으로써, 그들의 행복이 먼 미래에 있다고 말함으로써, 우리의 현실을 뛰어넘어 미지의 영역을 시 속에 불러들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주 오랜 동안 시를 통해서, 문학을 통해서 함께 영혼을 나누게 될 것입니다. 문학은 오랫동안 우리를 고통스럽게 할 것이고 또 고독하게 만들 것입니다. 그렇지만, 문학은 비로소 우리를 뜨겁게 살아 있는 한 명의 인간으로 만들어줄 것입니다.  새의 둥지에는 지붕이 없다  죽지에 부리를 묻고  폭우를 받아내는 고독, 젖었다 마르는 깃털의 고요가 날개를 키웠으리라 그리고 순간은 운명을 업고 온다  도심 복판,  느닷없이 솟구쳐오르는 검은 봉지를  꽉 물고 놓지 않는  바람의 위턱과 아래턱,  풍치의 자국으로 박힌  공중의 검은 과녁, 중심은 어디에나 열려 있다 둥지를 휘감아도는 회오리 고독이 뿔처럼 여물었으니 하늘을 향한 단 한 번의 일격을 노리는 것 새들이 급소를 찾아 빙빙 돈다  환한 공중의, 캄캄한 숨통을 보여다오! 바람의 어금니를 지나 그곳을 가격할 수 있다면 일생을 사지 잘린 뿔처럼 나아가는 데 바쳐도 좋아라, 그러니 죽음이여 운명을 방생하라 하늘에 등을 대고 잠드는 짐승, 고독은 하늘이 무덤이다, 느닷없는 검은 봉지가 공중에 묘혈을 파듯  그곳에 가기 위하여 새는 지붕을 이지 않는다 ―신용목, 「새들의 페루」 시는 절대로 한 발만 걸치는 자에게 자신을 보여주지 않는다고 믿습니다. 바로, 흠뻑 젖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 그랬을 때, 우리는 우리가 도달하고 싶은 지점을 향해 날아갈 수 있다고 믿습니다. 자신을 던져 자신이 명중시키고픈 자신의 시―그 과녁이 도대체 무엇이고 또 어디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것을 위해 때로 비를 맞고 흠뻑 젖은 채 밤을 지새우는 날이 있더라도, 사지가 잘린 뿔처럼 단 하나의 몸둥어리로 나아가는 것―그때, 우리는 하늘의 급소를 찌르게 될 것입니다. 그때를 위해, 기꺼이 우리는 저 안락과 안일의 지붕을 걷어내고, 고통과 고독과 슬픔과 서러움의 별빛 아래 반짝이고 있을 것입니다. 어줍잖게, 또 쑥스럽게도 제 시를 예로 들며 이야기를 이어가 보았습니다. 이 자리는 시에 대한 제 고민을 이야기하는 자리이면서 제 시에 대해 여러분들게 수줍게 고백하는 자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제 시 2편을 첨부하는 것으로 짧은 강연을 마치고자 합니다. 여러 선생님들의 시가 세상을 더 아름답게 한다는 것을 늘 믿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 232. 나의 하나님 / 김춘수                 나의 하나님                                                    김 춘 수   사랑하는 나의 하나님, 당신은 늙은 비애다. 푸줏간에 걸린 커다란 살점이다. 시인 릴케가 만난 슬라브 여자의 마음속에 갈앉은 놋쇠 항아리다. 손바닥에 못을 박아 죽일 수도 없고 죽지도 않는 사랑하는 나의 하나님, 당신은 또 대낮에도 옷을 벗는 어리디어린 순결이다. 삼월에 젊은 느릅나무 잎새에서 이는 연둣빛 바람이다.     김춘수 시집  중에서   ----------------------------------------------------------------- 233.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 김춘수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김 춘 수   샤갈의 마을에는 삼월에 눈이 온다. 봄을 바라고 섰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은 정맥이 바르르 떤다. 바르르 떠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은 정맥을 어루만지며 눈은 수천수만의 날개를 달고 하늘에서 내려와 샤갈의 마을의 지붕과 굴뚝을 덮는다. 삼월에 눈이 오면 샤갈의 마을의 쥐똥만한 겨울 열매들은 다시 올리브 빛으로 물이 들고 밤에 아낙들은 그 해의 제일 아름다운 불을 아궁이에 지핀다.     김춘수 시집  중에서      
1038    詩의 재료는 바로 시인 자신 댓글:  조회:6647  추천:0  2016-01-31
[ 2016년 01월 27일 09시 30분 ]     오스트랄리아 퍼스의 바닷가에서...  시의 재료는 바로 시인 자신이다 / 김 경 주  어떤 죽음  죽은 그의 얼굴엔  젖은 신문이 흡착되어  그의 눈과 귀와, 그리고 코를  그 입을,  잘 염습하여  숨을 막고 있었다  죽은 그의 귀와 눈  시즙이 흐르는 입 속엔  썩은 텔레비전이, 텔레비전 애벌레가  살았다, 살아있었다  신문을 뚫고 기어 나왔다  졸시 ‘어떤 죽음’은 신문으로 얼굴을 덮어 둔 어느 노숙자의 주검을 본 순간 충동을 받아 쓴 시조이다. 그것은 평소 내 의식과의 돌연한 만남이었다. 그 노숙자는 아마 기아와 한기 때문에 죽었을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얼굴에 덮혀 있는 신문지 한 장 때문에, 그 죽음의 원인이 신문이나 텔레비전 언어 등에 의한 무차별적 공격성에 있다는 충동을 받은 것이다. 사람들은 매스미디어 등의 언어에 의해 종속되고 오염되고 세뇌되어 휩쓸린다는, 그래서 개인의 생명력은 사라지고 신문이나 텔레비전만 얼굴 없는 대중(민중) 속에 살아있다는 평소의 고뇌가 헝클어진 실뭉치처럼 풀리지 않고 있었는데 이 노숙자의 죽음을 보는 순간 부싯돌을 치는 것처럼 뜨거운 영감과 함께 풀려나온 것이다.  신문이 젖어 흡착되었다느니, 생명의 구멍들을 모두 막아 염습하였다느니, 시즙이 흐르는 입 속에서 텔레비젼이 기어나온다는 것 등은 물론 팽배한 의식이 만들어낸 환상이다.  사람은 태어남과 동시에 본디 온전한 생명력을 어느 정도 상실하게 된다고 한다. 분별심이 생기기 시작하면서부터는 더 많은 능력을 잃게 된다고, 그것이 곧 적응이라고 탈무드에서도 그리했듯이, 성경에서는 에덴의 동산에서 선악과를 따 먹음으로써 분별심(선이니 악이니 하는)이 생겨 마침내 완전한 삶을 상실하고 고통의 삶이 시작되었음을 비유적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불가에서는 알음알이와도 같은 분별심을 버리는 것을 해탈의 기본으로 삼고 있다.  분별심은 언어에 의해 발생하는 관념이다. 우리들은 언어로 사고하고 언어로 삶을 표현하고 완성한다. 그러나 사실 언어 때문에 관념이 형성되고 모든 고통은 관념 때문에 일어난다. 언어가 없는 동식물이나 무정물은 사고하지 못하고, 그러므로 관념을 만들어 괴로워하지도 않는다. 사람들은 언제나 사람들이 만든 것에 종속되고 노예처럼 끄달리는 것이다.  환언하면 우리는 모두 행복 때문에 불행한 것이며, 그런 분별의 언어 장난으로 생사를 구별하기 때문에 죽음이 두려운 것이다. 신神 또한 인류가 만들어낸 환상의 지팡이이며 굴레가 아니던가. 시인이라고 다르지 않다. 우리는 언어로 사고하고 언어로 삶을 표현하거나 완성한다. 그러나 시인이 표현하고 완성코자 하는 세계는 일상적인 의미와는 다른 창조의 세계이다. 언어에 종속되는 것이 아니라 언어로 다시 태어나고자 하는 것이다.  우리는 점점 많은 량의 언어를 소유하고 이용하지만 언어에 대한 믿음과 애착은 옛 사람들에 비해 빈약하다. 언어의 지시성, 도구성에만 의지하다 보니 언어가 가진 고유의 정서적 환기나 음악성 등을 믿지 않는다.  그러나 시인은 일반인들과는 다르게 언어와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어 언어의 객관적 일반적 지시성보다는 주관적인 창조성과 음악성을 믿고 있다. 시인은 언어의 내부에 켜진 불뿜는 이미지를 사냥하는 사람들이다. 시인에게 있어서 언어는 도구나 수단이 아니라 목적 그 자체이다. 이 불가분의 관계에 의해 시인은 언어에 종속되지 않고 언어와 함께 숨쉬고 살아가며 새로운 삶을 창조하는 동반자가 된다.  언어는 인간과의 관계 없이 존재할 수는 없다. 그래서 언어를 사고의 통로라고도 하고 존재의 집이라고들 하는 것이다. 한 겨레의 언어는 그 겨레가 전 역사를 통해 이룩해 낸 온갖 사고의 집약이라고 일찍이 석학들은 설파했다. 그러므로 언어 속에는 의미가 갖는 지시성 외에 그 겨레의 얼과 문화와 정서, 역사적인 환기, 음악적 문양 등 독자적으로 내포되어 있는 생명력이 있다.  그런데 시인은 이미 언어가 만들어 놓은 상황에 대해서 다시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 상황을 새롭게 한다. 다시 말하면 일상적 의미와는 다른 차원의 언어를 느끼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언어의 내포적 의미를 확산시키는 작업이다. 언어에 새로운 질서를 부여하고 일상적인 삶 또한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게 한다.  언어의 일상적 의미 즉 지시성이나 도구성에 의존하는 신문 같은 기사 속에는 그것을 쓴 개인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대량의 언어군이 우리 생활 속에 정보라는 이름으로 홍수처럼 밀려들지만 우리는 그 정보에 대해 자신 있는 결단을 내릴 수도 없다. 정보는 넘쳐나는데 오히려 상황은 더욱 혼미해지는 것이다. 그것은 신문에 사용되는 언어가 기업이나 권력 따위에 종속되기 때문이다. 신문의 언어가 권력화하고 있는 현실 속에서 우리는 얼마나 핍박당하고 있는가. 그들이 보도하는 뉴스는 사건을 재료로 하여 만들어낸 그들의 상품에 불과하다.  이러한 상황 속의 언어는 온갖 관념을 만들어 사람들을 현혹하는 죽은 언어이다. 사어의 바다에서 숨가쁘게 자맥질하는 시인은 이러한 현실이 괴롭다. 어떤 대상이 언어에 의해 종속되어 그 생명력을 잃어가고 있는 상황도 괴롭다. 그러므로 시인은 이러한 외부현실을 내부적 현실로 받아들여 고뇌한다. 그리하여 비로소 그 외부현실을 의식 속에 가열케 하고 성숙케 하여 새로운 내부적 현실로 발효시킨다.  말이 한참 돌아왔지만, 결국 시인은 일상적인 언어를 사용하면서도 일상적의 의미와는 다른 차원의 언어를 구사하는 것이다. 그것은 마침내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이나 관념이 아닌 구체적인 내용을 형상화하여 설명이나 객관성을 벗어나 감각적으로 느끼도록 하는 것이다.  시의 작법에 대해 소개해 놓은 대부분의 책들은 시를 쓰는 순서가 정해져 있는 것처럼, 소재, 제재, 모티브(동기), 테마(주제)의 등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시 쓰기의 통일된 생명력을 분해하여 나열해 놓은 것으로서 마치 삶을 분해, 분석하여 설명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것은 삶의 일부분을 이해시킬 수 있을지 모르나 새로운 삶을 창조할 수는 없다. 삶이란 총체적으로 느끼고 체험하는 것이다. 시 또한 삶에 대한 이해와 주장이므로 이러한 방법은 시를 쓰는 데 있어서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실제로 시를 써 보면, 의식화되어 있는 혹은 시인의 내부에 잠재해 있는 어떤 강렬한 충동이(동기,주제) 어떤 대상이나 현실과의 돌연한 만남에 의해 구체화되고 형상화된다는 걸 알 수 있다.  시인의 내적 충격이 재료를 선택하는 것이다. 이때 언어는 비로소 도구적 차원에서 승화되어 시적상황, 시적현실로 창조되어 나타나는 것이다. 시인의 내적충격은 목적이나 본질에 앞서는 불가피성에 의한다고 볼 수 있다. 그 불가피성은 평소 시인이 쌓아온 경험과 사상과 철학과 사회현실 혹은 역사의식 같은 총체적으로 들끓고 있는 에너지에서 분출하게 된다. 늘 깨어 있어야 한다는 말은 이러한 에너지가 늘 충만해 있는 긴장상태에 있어야 한다는 말의 다른 표현일 것이다.  백일장 같은 행사에서는 소재 혹은 주제를 먼저 정해 놓고 시 쓰기를 강요하기 때문에 소재가 시를 쓰는 사람의 내적충동과 맞아떨어지지 않으면 아무리 능력 있는 시인이라 하더라도 실패할 수 있다. 화가들은 자기가 터득한 기법에 의해 언제나 어느 정도 수준의 작품을 내놓을 수 있겠으나, 시인은 한 마디도 쓸 수 없을 수 있다. 시는 손끝에 의해 씌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를 문학의 꽃, 예술의 꽃이라고 특별히 지칭하기도 하는 것이다. 시적 언어는 허구를 만들어내는 언어이다. 그것은 시인의 개인적인 체험, 언어 안에 불씨처럼 박혀있는 상상력에 의한 영상의 환기 같은 것이다.  한 편의 시의 가치는 현실 속에 있는 외적인 사물이나 외적인 진실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소재는 시의 가치와는 관계가 없다. 시에 동원된 소재, 현실의 상황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들은 일단 시적 언어 속, 허구 속에서 해체 되거나 재조립을 본 언어의 관계 속에서 새로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림의 재료는 물감이고 시의 재료는 언어이다. 화가는 물감으로 되어 있지는 않지만, 시인은 언어로 되어 있는 환등이요 꿈이다. 시인이 언어로 되어 있다는 말은 시의 재료가 바로 시인 자신이라는 뜻이다. 시인 내부에 몽롱하게 켜져 있는 의식의 등불이 대상(언필칭 '소재'는 촉매일 뿐이다)을 꿈속처럼 비추어 새롭게 하는 것이다  ========================================================================   230. 꽃 / 김춘수                   꽃                                               김 춘 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김춘수 시집  중에서   ---------------------------------------------------------------------   231. 꽃을 위한 서시 / 김춘수                                        꽃을 위한 서시                                             김 춘 수   나는 시방 위험한 짐승이다. 나의 손이 닿으면 너는 미지의 까마득한 어둠이 된다.   존재의 흔들리는 가지 끝에서 너는 이름도 없이 피었다 진다. 눈시울에 젖어드는 이 無名의 어둠에 추억의 한 접시 불을 밝히고 나는 한밤내 운다.   나의 울음은 차츰 아닌 밤 돌개바람이 되어 탑을 흔들다가 돌에까지 스미면 金이 될 것이다.   ……얼굴을 가리운 나의 신부여,     김춘수 시집  중에서  
1037    詩씨기에서 동심적 발상을 하라 댓글:  조회:4815  추천:0  2016-01-31
- 어린애가 첫 세상을 보듯 시 앞에 앉을 때  어떤 신인이 나한테 시를 보여주는데 소쩍새가 겨울에 울고 있더라구요. 소쩍새는 초여름부터 웁니다. 그래서 내가 없는 것을 상상력으로 만드는 것은 정말 좋지만 실제로 있는 것을 왜곡시키는 것은 안 됩니다. 여름에 우는 소쩍새를 겨울에 운다고 하면 되겠습니까. 마음속에 생물을 넣고 다녀야 합니다. 살아있는 식물, 새소리 등 생물을 넣고 다녀야지 역동적인 시를 쓸 수 있습니다. 그리고 변화에 민감해야 합니다. 계절의 변화나 날씨의 변화에 민감해야 합니다.  비가 와도 그만, 달이 떠도 그만, 눈이 와도 그만 종소리를 들어도 아무 감흥이 없으면 생각이 죽어버립니다. 죽은 생각을 가지고 어떻게 살아있는 시를 쓸 수가 있겠습니까. 여러분도 연애를 하지 않아도 연애 감정을 좀 가져 보세요. 그리고 자기를 살려보세요. 그러면 시를 쓰는데 굉장히 도움이 됩니다.  낯설게 하기를 해야 합니다. 낯설게 하기라는 단어는 러시아의 형식주의자들이라고 일컫는 문학 이론가들이 있었는데 '시의 기능은 사물의 낯설게 하기'라고 쓴 데서부터 기인했다고 합니다. 낯설게 하기의 본보기의 시로는 김광균의 [추일서정]의 첫 구절에 '낙엽은 폴란드 망명정부의 지폐'라는 대목이 있는데 얼마나 새로운 인식입니까.  또 영국 작가 체스터튼은 가로수를 가리켜 '노상 누워 있던 땅의 일부가 지루함을 견디지 못해 벌떡 일어선 모습'이라고 했습니다. 얼마나 새로운 인식입니까. 관습적인 인식에서 완전히 벗어났지요. 이런 것을 여러분이 앞으로 좀 써야 합니다. 남의 시를 읽되 자기가 쓸 때에는 보지 마세요. 그러면 비슷비슷한 시를 쓰게 됩니다. 그때는 떠나 보내버리세요. 완전히 자물통을 채워놓고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쓰는 게 좋습니다.  다음은 동심적 발상을 해라. 왜냐하면 어린애가 처음 세상을 보았을 때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그리고 얼마나 신선합니까. 시인은 그런 발상을 해야 합니다. 맨날 나이만 먹다가 나는 늙었는데 하면서 왜 자기를 빨리 늙게 합니까. 주름살이 늘어서 늙는 게 아니고 영혼이 깜깜해질 때 늙는다고 했습니다. 나이가 많이 든 사람이라도 마음이 늘 살아있고 마음에 언제나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겠다는 사람은 얼굴이 훨씬 젊어 보입니다. 화장을 해서 젊게 보이는 게 아니고 마음을 색칠하라는 얘기입니다. 마지막으로 현실을 직시해라. 아무리 시를 잘 써도 자기 인생이 들어가 있지 않거나 존재의 그런 게 없거나 현실과 너무 분리된 시나 음풍영월조의 시는 가치가 없습니다.  이런 방법을 써도 시가 안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우울하고 죽어야 되나 살아야 되나 하면서 새벽시장도 가보고 미친 듯이 다닙니다. 낯선 곳도 가보고 어디 가다가 노을을 보고 앉아서 펑펑 울어보기도 하고 나를 자꾸 닦달을 해야 됩니다. 고목도 바람이 흔들어주지 않으면 죽습니다. 저는 거실에 풍경을 달아 놓았습니다. 풍경 밑에 물고기가 달려 있는데 왜 물고기를 달았을까요. 물고기는 잘 때도 눈을 뜨고 잔답니다. 그래서 용맹정진하는 수도자처럼 물고기가 눈을 뜨고 자듯이 정신이 깨어 있으란 뜻으로 물고기를 달아 놓았다고 합니다.  우리 시인도 눈을 뜨고 자는 물고기처럼 정신이 깨어 있어야 합니다. 남이 잘 때 잘 것 다 자고 남이 먹는 것은 다 먹고 배가 불러서 정신은 어디로 가고 배부를 때 시가 됩니까. 하루에 두 끼만 먹어도 죽지 않습니다. 꼭 세 끼를 먹어야 합니까. 그 한 끼를 아껴서 불쌍한 사람을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나는 시가 안될 때는 하루에 몇 번씩 풍경을 칩니다. 아마 옆집 사람은 스님이 와 계실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겁니다. 나는 그럴 때 정신이 바싹 듭니다. 물고기한테 부끄럽습니다.  그 미물도 잘 때 눈을 뜨고 자고 스물 다섯 번을 허물벗기를 하고 공중으로 아주 멋있게 나르고 짝짓기를 한 다음 하루를 살다가 죽는답니다. 하루를 살다 죽는 그 미물도 성충이 되려고 천 일을 물 속에서 보내고 스물 다섯 번의 허물을 벗는데, 오관을 가진 인간이 허물도 하나 벗지 않고 고통도 받지 않고 고뇌도 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어려운 시를 쓸 수 있을까요.  그래서 나는 미물한테서 시인의 치열성을 배웁니다. 그 미물의 치열함이 나의 새로운 가치가 됩니다. 왜냐하면 그 치열한 깨우침이 나로 하여금 시를 쓰게 만들면서 그 시가 정신의 밥이 되거든요. 그리고 나를 잘 살게 하기 때문입니다. 잘 산다는 거는 시로 된 정신의 밥을 먹으면서 살아야 잘 사는 겁니다. 마지막으로 함민복 씨의 시 [긍정적인 밥]으로 강의의 결론을 대신하겠습니다.  시 한 편에 삼만원이면  너무 박하다 싶다가도  쌀이 두 말인데 생각하면  금방 마음이 따뜻한 밥이 되네  시집 한 권에 삼천원이면  든 공에 비해 헐하다 싶다가도  국밥이 한 그릇인데  내 시집이 국밥 한 그릇만큼  사람들 가슴을 따뜻하게  덮여줄 수 있을까 생각하면  아직 멀기만 하네.   =================================================================   228. VOU / 김춘수                                          VOU                                                                                                                                           김 춘 수   VOU라는 음향은 오전 열한시의 바다가 되기도 하고, 저녁 다섯시의 바다가 되기도 한다. 마음 즐거운 사람에게는 즐거운 한때가 되기도 하고, 마음 우울한 사람에게는 紫色의 아네모네가 되기도 한다. 사랑하고 싶으나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그만한 이유가 되기도 한다.               김춘수 연보   1922년 11월 25일 통영읍 서정 61번지에서 김영팔과 허명하의 3남 1녀 중 장남으로 출생.        (엄격한 유교 가풍이 흐르고 있던 유복한 집안이었다.)   1929년 통영 근처 안정의 간이보통학교에 진학 하였다가 통영제일고등보통학교로 진학.   1953년 통영공립보통학교 졸업.        5년제 경성 공립제일고등보통학교(4학년 때 경기공립중학교로 바뀜) 입학.   1939년 11월 졸업을 앞두고 경기공립중학교 자퇴, 일본 동경으로 건너감.   1940년 4월 동경의 일본대학 예술학원 창작과 입학.   1942년 12월 일본대학 퇴학.        일본 천황과 총독 정치를 비방하여 사상혐의로 요코하마 헌병대에서 1개월 유치,        세다가야 경찰서에서 6개월간 유치되었다가 서울로 송치.   1943년 금강산 장안사에서 요양.   1944년 부인 명숙경씨와 결혼   1945년 통영에서 유치환, 윤이상, 김상옥, 전혁림, 등과 통영문화협회를 결성해 근로자를 위한        야간중학교와 유치원을 운영하면서 연극, 음악, 문학, 미술, 무용 등의 예술운동을 전개,        극단을 결성해 경남지방 순회 공연.   1948년 통영중학교 교사로 부임하여 1948년까지 근무.           조향 김수돈과 함게 동인 시화집  발간. 3집 발간 후 폐간.   1948년 8월, 첫 시집 를 자비로 간행.   1949년 마산중학교로 전근. 1951년까지 근무.   1950년 3월, 제 2시집  출간.   1951년 7월 제 3시집  출간.   1952년 대구에서 설창수, 구상, 이정호, 김윤성 등과 비평지  창간(창간호로 종간).   1953년 4월 제 4집  출간.   1954년 시선집  및   출간.   1956년 5월 유치환, 김현승, 송옥, 고석규, 등과 시 동인지  발행.       (고석규씨의 타계로 창간호로 종간)   1958년 10월 첫 시론집  출간.        12월 제2회 한국시인협회상 수상.   1959년 4월 문교부 교수자격 심사규정에 의거 국어국문학과 교수 자격 인정받음.        6월 제5시집  및 11월 제6시집  출간.       12월 제7회 자유아세아문학상 수상.   1960년 마산 해인대학(현 경남대학교 전신) 조교수로 임용.   1961년 4월 경북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전임 강사로 자리를 옮김. 6월 시론집  출간.   1964년 경북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임용(1978년까지 재직).   1966년 경상남도 문학상 수상.   1969년 11월 제7시집  출간.   1972년 시론집  출간.   1974년 8월 시선집  출간.   1976년 5월 수상집 , 8월 시론집  및 11월 시선집  출간.   1977년 4월 시선집  및 10월 제8시집  출간.   1979년 4월 시론집 , 수상집  출간.        9월부터 1981년 4월까지 영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   1980년 1월 수상집  및 11월 제9시집 
1036    詩쓰기에서 고정관념 깨고 상상의 날개를 활짝... 댓글:  조회:4624  추천:0  2016-01-31
[ 2016년 01월 27일 09시 12분 ]     영국 스케그네스(斯凯格内斯)의 한 바다가에서 고래 죽음... - 고정 관념을 깨고 자유로운 사유의 날개를  만일 이 키팅 같은 선생이 우리 나라에 있다면 아마 지금쯤 쫓겨났고 왕따당하고 있을 겁니다. 이 왜곡된 시 교육이 얼마나 나쁜 영향을 미치는가 하면 21세기 문학 행보를 늦추게 할지도 모릅니다. 앞으로 좋은 시인, 훌륭한 시인이 어떻게 왜곡된 시 교육을 받고 나올 수 있다는 생각이 들겠습니까. 이런 게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법이 많은 사회는 범죄가 많다고 합니다. 반면 시를 권하는 사회는 삶의 질을 높이는 사회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옛날에는 술을 권하는 사회였고, 요즘은 인터넷을 권하는 사회, 골프를 권하는 사회지요. 언제 시를 권하는 사회가 올까요.  '삶의 질'이란 어떻게 해서 생긴 단어일까요. 이 단어를 제일 먼저 쓴 사람은 영국 작가 프리스틸인데, 그는 1943년에 어느 글에서 '모든 시민에게 한층 더한 안정과 보다 나은 가치와 보다 고귀한 삶'이라고 쓴 데서 따온 거라고 합니다. 삶의 질이라는 건 무엇을 뜻할까요. 삶의 질이라는 건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고, 아름다운 생활을 설계할 수 있고 사람을 참으로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것이라고 합니다. 얼마나 근사한 말입니까.  그게 될 때 삶의 질을 높이는 것이지 무조건 삶의 질이 높여집니까. 사람에 따라서는 물질이 풍부하면 삶의 질을 높였다고 생각하겠지만 물질은 삶을 편리하게는 하지만 사람답고 아름답게 행복하게 살게 하지는 않는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래서 물질이 아무리 풍부해도 정신이 결핍되면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1947년에 사르트르가 미국을 처음 방문했을 때 뭐라고 했느냐 하면 미국은 물질은 풍부하지만 풍요로운 삶은 없다고 한마디로 그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지금은 미국이 달라졌지요. 그래서 밥을 많이 먹으면 배가 부르듯이 시를 가슴 속에 넣고 있으면 정신이 부릅니다. 시는 우리 정신의 밥입니다. 우리가 배가 부르다고 해서 살 수 있습니까. 밥이 아무리 배를 채워도 정신은 채워줄 수 없거든요. 그래서 밥이 행복의 기본 조건은 되어도 충분 조건은 못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물질로 배가 부른 시대일수록 정신은 점점 더 고파갑니다.  예수와 석가를 한번 생각해 봤습니다. 이 분들은 우리 인류가 출현한 이래 최고 최상의 정신을 보여준 분들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분들이 말씀하신 거는 전부가 시입니다. 경전이나 성경을 보면 그토록 오래 되어도 뭐든지 사랑하고 읽고 또 읽어도 감동을 줍니다. 얼마나 소중합니까. 그러나 우리는 지금 경전도 성경도 소중하게, 크리스천이나 불교 신자들은 그렇지 않겠지만 일반 무신론자나 종교가 없는 사람들은 그까짓 것 골치 아프게 읽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거든요. 그래서 시는 우리의 삶의 중심과 정신의 정수를 한데 묶어놓는 그 어떤 거라고 생각합니다. 보이지 않는 것과 보이는 것, 이쪽 세계와 저쪽 세계를 함께 보여주는 황홀한 세계라는 것입니다. 그런 황홀한 세계를 여는 문이 바로 시입니다. 여러분들이 시를 많이 읽고 많이 사랑하면 그 황홀한 세계를 자기 스스로 문을 열고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희열이라는 것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옛말에 '시를 알아야 사람다운 말을 할 수 있고 또 모든 이는 자기가 읽은 것으로 이루어진다'고 했습니다. 사람은 사십이 넘으면 책을 읽은 사람과 읽지 않은 사람은 관상이 다릅니다. 사람이 영혼의 기쁨이 고갈되면 피폐해진다고 합니다. 그 굶주림을 채우는 길은 시가 가장 좋은 치유 방법이고 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좋은 시를 만나면 감동하게 되고 그게 바로 기쁨입니다. 그럴 때 마음이 환해지지 않습니까.  우리가 머리를 하고 마음에 들면 하루종일 기분이 좋듯이 하물며 좋은 시를 읽을 때의 감동이 금방 사라지겠습니까. 인류의 역사가 지속하는 한 우리의 시는 결코 멸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아무리 위기라고 하고 다른 좋은 놀이기구들이 나와도 그건 금방 사라집니다. 그래서 시인이 시를 통해서 진실을 말하지 못한다거나 시를 정신의 밥으로 만들지 못할 때에는 진정한 시인이 될 수 없다는 사실도 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언어로 밥을 쌓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시집이 많아도 시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시집이 많아도 시가 없고, 진정한 독자가 없다면 우리가 정신 공황에 빠져서 정신의 거지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정신의 거지라는 단어가 얼마나 슬픈 단어입니까. 그래서 시인을 판단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시입니다. 그리고 시를 판단하는 것은 진정한 독자의 몫이기도 합니다. 여러분이 진정한 독자가 되면 우리는 꼼짝못합니다.  어떻게 함부로 시를 써서 여러분한테 보여주겠습니까. 정신이 팍 차려지지요. 시인은 시를 끝낸 순간이 존재하는 게 아니라 시를 쓰는 순간에만 존재합니다. 마찬가지로 독자들도 시 읽기를 끝낸 순간에 존재하는 게 아니라 시를 읽고 있는 그 순간에 존재하는 겁니다. 독자가 없는 시는 있을 수도 없고 독자들도 시를 모르면 독자가 되겠습니까. 그러니까 독자의 위치라는 것은 상당히 소중한 존재입니다.  여러분 중에 시 창작을 하고 있거나 앞으로 시인이 되고 싶다는 염원을 가진 분들이 있을 것 같아서 시 창작의 방법을 얘기해 주면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내가 제일 강조하는 것은 많이 생각하고 많이 읽고 많이 써라. 이게 시 창작의 기본 방법입니다. 이것 없이는 절대로 좋은 시를 쓰지 못합니다. 왜 많이 생각하라고 하느냐면 상상력이 아주 폭이 넓어집니다. 책을 많이 읽는다던가 세상을 읽는다던가 사람을 읽는다고 하면 생각의 폭이 굉장히 깊어집니다. 많이 쓰라는 것은 저절로 문장수업이 됩니다.  만일 오랜 습작 기간도 없고 피나는 노력 없이 그냥 좋은 시를 쓸려고 과욕을 부리면 그나마 갖고 있던 사고도 흐려지고 재능도 박탈당합니다. 우선 창작하는 즐거움을 가지시고 그 다음에 욕심을 부려야지 창작하는 즐거움은 저쪽으로 보내놓고 과욕만 부리면 절대로 좋은 시가 나오지 않습니다. 시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금방 붓을 떼고 말면 시는 가차없이 시 쓰는 사람을 처단합니다. 말하자면 어떤 즐거움을 우선하지 않고 결과를 탐하면 언어 나열이 되고 남을 모방하기 쉽습니다. 그건 아주 위험한 일입니다. 상식적이고 상투적인 낡은 고정관념의 벽을 뛰어넘어야 됩니다. 그리고 앵무새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남이 지저귀고 남이 한 말을 따라하는 사람이 많은데 절대로 안됩니다. 내가 좀 서투른 목소리라도 내 지저귐이 있어야 됩니다. 마음 속에 가위 하나를 넣어놨다가 내가 너무 잡다한 말을 많이 쓸 때에는 그 가위를 꺼내서 잘라 버리세요.  헤밍웨이가 지방신문의 기자로 있을 때 젊은 시절 문학에 대한 열망도 많고 해서 기사를 쓸 때마다 어렵게 쓰고 길게 써가지고 가면 부장한테 굉장히 야단을 맞았다고 합니다. 글은 간결하고 쉽게 써라. 그때의 문장 훈련이 자기가 명작을 쓰는데 굉장한 도움을 줬다고 합니다. 그 당시는 부장이 야속하고 미웠지만 정말 감사하다고 그는 회고록에 쓰고 있습니다.  어휘가 쉬워야 되고 외워서 읽기가 쉬워야 되고, 문장이 쉬워야 됩니다. 너무 어렵고 잡다하게 쓸려고 하면 오히려 맥을 못 찾습니다. 자기 글을 자기가 못 찾아서 폐쇄성에 빠져버리면 시를 쓸 수가 없게 되어 버립니다. 발상의 전환이 아니라 역발상을 해야 됩니다. 미와 추, 추와 미 해도 되지 않습니까. 하늘과 땅, 남자 여자, 나와 너, 체험이나 지식까지도 확 뒤집어야 합니다. 한번 깨보고 뒤집어 보는 겁니다.  내가 똑바로만 걸어가는 게 아니라 물구나무서서 걸어갈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너무나 똑바로만 걸어가려고 하는 겁니다. 시범을 보여줄 때 물구나무서서 걸어가는 사람도 있잖아요.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만 새로운 인식을 하게 되고 독창적인 시를 쓰게 됩니다. 그리고 자기의 독특한 경험세계를 가진다는 것도 중요합니다.  이것도 독특한 시를 쓰게 되는데 기여를 하게 되는데, 하지만 주의해야 할 것은 구체화시켜서 공유할 수 있는 부분이 있어야지 그게 없으면 주관적인 자기 폐쇄성에 빠져버립니다. 남들은 아무런 감흥도 없는데 저 혼자만 북 치고 장구 치면 안 됩니다. 그리고 시어를 잘 다뤄야 됩니다. 논개의 '강낭콩보다도 더 푸른 물결 위에' 하는 시구를 읽고서 사전을 찾아봤더니, 강낭콩이 놀랍게도 흰색이거나 약간 자줏빛, 아니면 연분홍색이었습니다. 그런데 '강낭콩보다도 더 푸른'이라고 했으니까 그건 시어로서는 맞지 않습니다.  ===============================================================================   226. 생가 1 / 이기철                          생가 1                                      이  기  철     이곳에 오면 서쪽 길이 잘 보인다 무너진 다릿목도 보이고 다릿목에서 죽은 물새의 꿈도 보인다     백 년 전에 핀 안개꽃이 보이고 동구 밖에 묻힌 흰 달빛도 보인다     이곳에 오면 늙은 느티나무의 생애가 보이고 서쪽 길이 잘 보이고 가을에 우는 새의 그리움이 잘 보인다       이기철 시선집 중에서                     이기철 연보       1943년 1월 9일 경남 거창군 가조면 석강리에서 이명의와 박순주(朴順朱)의 5남매 중 네 번째로 출생.   1956년 중학시절부터 국어과목을 좋아해서 국어책을 받아오는 날 하루만에 독파.            나무와 곤충들의 이름을 있는 그대로 부르지 않고 스스로 지어 부르는 습관이 있었음.   1959년 읍내에 있는 고등학교에 진학. 윤충묵, 박경묵 등과 친교, 평생친구가 됨   1960년 고등학교 2학년 때 제1회 ‘아림예술제’의 한글시 백일장에서 라는 작품으로 장원.   1962년 대구로 나와 대학에 진학했고 이때부터 아동문학 이론가인 이재철 선생에 사사함.   1963년 대학 2학년 때 경북대학교 신문사 주최 전국대학생 문예작품 현상모집에 시 당선.   196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 을 내어 최종심에서 오탁번에게 밀림.   1972년 11월호 [현대문학]에 등의 시가 추천 완료.   1973년 이순남씨와 결혼.   1974년 첫 시집 간행.   1976년 [자유시] 창간 동인으로 활동.   1978년 [세계의 문학] 여름호에 등 5편의 시를 함께 발표.   1974년 영남대 대학원에서 라는 논문으로 석사학위 받음(지도교수 박철희).   1978년 영남대 대학원 박사과정 입학하면서 포항 전문대학 전임강사가 됨.   1980년 마산대학 전임강사로 자리를 옮김.   1981년 마산대학에서 영남대학으로 자리를 옮김.   1982년 김우창 선생의 주선으로 두 번째 시집 을 냄.   1985년 김주연 선생의 주선으로 세 번째 시집 를 냄.   1986년 영남대학에서 논문 로 문학박사 학위 받음. 대구문학상 받음.   1988년 민음사에서 네 번째 시집 를 냄.            대구에서 교양종합지 [문화비평]을 5년간 발행하면서 대구의 기업인들을 두루 만남.   1989년 문학과비평사에서 김시태 선생의 주선으로 다섯 번째 시집 를 냄.   1990년 시론집 를 [심상사]에서 냄.   1991년 [우리문학사]에서 장시집 냄.   1992년 제1회 후광문학상 받음.   1993년 일곱 번째 시집 를 냄. 이 시집으로 김수영문학상을 받음.   1993년 대구에서 금복문화예술상을 받고 아울러 경북 문경에서 시행하는 도천문학상 받음.            이 해부터 2년간 대구시인협회 회장을 맡음.   1994년 소설집 을 냄. 편집부의 의도에 의해 이 소설집을 이라 명명함.   1995년 교육부 한국학술진흥재단으로부터 연구비를 받아 미국 뉴욕에 있는 스토니 부룩(StonyBrook)의            뉴욕 주립대학에 1년간 연구교수로 감.            민음사에서 여덟 번째 시집 를 냄   1996년 2월 귀국   1997년 시선집 을 냄.   1998년 시선집 , 비평집 를 냄.   1998년 3월 아홉번째 시집 을 냄. 이 시집으로 제3회 시와시학상 작품상 수상.            학술단체 [한민족어문학회](구 명칭, 영남어문학회) 회장을 맡음.     -----------------------------------------------------------------------     227. 죄 / 이기철                                       죄                                                        이 기 철     요컨대 내 생은 밥숟갈을 위한 노역이었다 나는 누굴 위해 살지 않았고 철저히 나를 위해 살았다 나는 내 월급을 떼어 남에게 주지 않았다 그리하여 모든 밥숟갈은 아세였고 곡학이었다     나는 남을 사랑할 시간이 없었다 내 안에 꽃피는 시간들이 나를 죄짓게 했다     나는 오늘 무엇을 용서받아야 하는가 다리가 아프도록 서서 읽은 편지 대합실에서 읽던 시     그런데 나는 왜 눈물 흘리는 새에 대해서는 한 줄도 안 썼는가 서리의 예감에 몸을 떠는 나무에 대해서는? 안 굽어지려고 기를 쓰는 분재묘목에 대해서는? 바닥이 즐거운 넙치에 대해서는? 아, 모든 사람의 가슴 속에 그리운 바보가 된 사람을 위해서는?       이기철 시집 중에서                              
1035    독서광 - 책벌레 - 1억1만3천번 읽다... 댓글:  조회:4881  추천:0  2016-01-26
김득신 (조선 시인)  [金得臣]   1604(선조 37)~1684(숙종 10).   조선시대의 시인.         영감과 직관을 통해 자연의 생명을 조화롭게 읊은 시가 으뜸이라고 했다. 본관은 안동. 자는 자공(子公), 호는 백곡(栢谷)·구석산인(龜石山人). 진주목사 시민(時敏)의 손자이며 부제학 치(緻)의 아들이다. 1662년(현종 3)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가선대부에 올랐으며 안풍군에 봉해졌다. 정두경·임유후·홍석기·홍만종 등과 친하게 지내면서 시와 술로 풍류를 즐겼다. 예로부터 학문을 많이 쌓은 사람은 책읽기를 많이 하여 그러한 경지에 이르렀다고 생각하고 책읽기에 힘썼는데, 특히 〈백이전〉을 가장 좋아하여 1억 1만 3,000번이나 읽어 자신의 서재를 '억만재'라 이름짓기도 했다. 또한 시를 짓는 어려움보다 시를 제대로 평가해내는 어려움이 더 크다고 하고, 당시 사람들이 과거에만 열중하다보니 시의 개성이나 예술성을 무시한 채 시가 오직 입신양명의 수단으로 쓰이고 있음을 비판했다. 특히 5언·7언 절구를 잘 지었으며 시어와 시구를 다듬는 것을 중요시했다. 문집인 〈백곡집〉에 시 416수가 전하며, 홍만종의 〈시화총림〉에 실려 있는 그의 시화집인 〈종남총지〉는 비교적 내용이 전문적이고 주관이 뚜렷하게 나타나 있어 시학연구의 좋은 자료가 된다.           김득신(金得臣) 1604(선조37)∼1684(숙종10) 조선의 시인. 본관은 안동(安東),자는 자공(子公), 호는 백곡(栢谷)·귀석산인(龜石山人), 충무공 시민(時敏)의 손자, 부제학(副提學) 안흥군(安興君) 치(緻)의 아들. 어머니는 사천(泗川) 목씨(睦氏)로 목첨(睦詹)의 딸이고, 아내는 경주 김씨이며, 조선 중기의 시인이다. 1642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다. 당시 한문 사대가인 이식(李植)으로부터 “그대의 시문이 당금 제일”이라는 평을 들음으로써 이름을 세상에 알렸다 1662년 (현종3) 증광문과(增廣文科) 병과(丙科)로 급제. 장악원 정·지제교(掌樂院 正·知製敎) 등을 거쳐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라 동중추부사(同中樞府事)를 지냈다. 뒤늦게 벼슬에 올랐으나 장차 일어날 사화(士禍)를 예견하여 벼슬을 버리고 괴산읍 능촌리에 있는 취묵당(醉默堂)에 내려와 시인으로서의 삶을 살았다. 74세에는 사도시정으로 증광시 시험관이 되었고, 78세에는 통정대부가 되었으며, 80세에는 가선대부에 올랐고 안풍군(安豊君)으로 습봉되었다. 이듬해인 81세에 생을 마쳤다. 묘는 충북 괴산군 증평읍 율리에 있다. 당대 유명한 시인으로 이름이 나 있으며 문집으로 이 있고 평론집인 , 등이 있다. 백곡은 백이전(伯夷傳)을 1억1만3천번을 읽고 그의 서재 이름을 '억만재(億萬齋)'라 했으며 그의 뛰어난 문장이 세상에 알려지니 효종이 그의 '용호한강시(龍湖漢江詩)'를 보고 감탄했다고 한다. 문보다는 시, 특히 오언 · 칠언절구를 잘 지었다. 그의 작품으로는 백곡집 외에 시화집인 '종남총지(終南叢志)'가 있으며 그 밖의 작품으로 술과 부채를 의인화한 가전소설 〈환백장군전(歡伯將軍傳)〉과 〈청풍선생전(淸風先生傳)〉을 남기기도 했다. 이것은 '국순전' '국선생전' 등 고려의 한 시대만 한정된 줄 알았던 술 가전계통의 소설이 조선조에도 그 면모가 지속됐다는 사실을 입증해 주는 중요한 작품으로 인정받고 있다. 백곡은 노둔한 천품에도 불구하고 후천적인 노력을 통하여 시(詩)로 일가를 이룬 '고음과 다독' 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그는 경세치평(經世治平)이라는 유가적 이상을 당쟁의 현실 속에서 실천하지 못한 번뇌를 토로하기도 하지만 진보적인 시(詩)의식을 가지고 중세에서 근대로 가는 변천기에 활동했던 문예담당자로서의 역할을 다했다. 실제 그는 창작활동의 소산으로 주옥같은 시를 남겼는가 하면 한시비평의 기준을 마련한 비평가로 한국한문학사에 확고히 자리매김 되어야 할 것이다. 조선 중기에 명문장가로 이름을 날린 백곡 김득신의 서재 억만재에 얽힌 내력은 아주 유명합니다. 백곡 김득신(1604~ 1684) 태어날 때 그의 아버지 김치(金緻) 는 꿈에 노자를 만났고 그 연유로 아이적의 이름을 몽담(夢聃)으로 지어주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신몽을 꾸고 태어난 아이답지 않게 김득신은 머리가 지독하게 나빴습니다. 10살에 비로소 글을 배우기 시작했고 흔히 읽던 십구사락의 첫 단락은 26자에 불과했지만 사흘을 배우고도 구두조차 떼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쉽게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는 오히려 엄청난 노력을 하였습니다. 그의 노력은 간서치였다는 말을 통해 보여주고 있습니다. 간서치는 책벌레라는 말입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편집증, 독서마니아 즉 독서광이었을 것입니다.   부친이 감사를 역임할 정도로 명문 가문 출신인데도 머리가 나빴던 그는 유명 작품들을 반복하며 읽으며 외웠습니다.   충북 괴산군 괴산읍 능촌리 괴강 근처에 자리하고 있는 김득신의 옛집, 취묵당(醉墨堂)에 걸려 있는 ‘독수기(讀數記)’에 보면, 그는 1634년부터 1670년 사이에 1만번 이상 읽은 옛글 36편을 밝혔는데, 그 횟수가 상상을 초월합니다.  그가 평생 1만 번 이상 읽은 글 36편의 목록이 가득 적혀 있다. 여기에는 김득신이 (史記) ‘백이전(伯夷傳)’을 무려 1억1만3천 번이나 읽었다고 기록되어 있기도 합니다. ‘억만재(億萬齋)’는 글자 뜻 그대로 김득신이 글을 읽을 때 1만 번이 넘지 않으면 멈추지 않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책벌레 김득신의 책읽기에 대한 일화가 적잖이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백곡이 혼례를 치르던 날의 이야기다.백곡이 책을 좋아한다는 말을 들은 장모는 소문을 확인하기 위해 신방에 있는 책을 모두 치웠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첫날밤 신랑은 신부를 제쳐두고 방을 뒤지며 책을 찾았습니다. 경대 밑에서 백곡이 발견한 것은 책력(冊曆). 밤새도록 읽고 또 읽은 백곡은 날이 새자 “무슨 책이 이렇게 심심하냐”고 말했다 합니다.   80이 넘도록 장수한 백곡은 먼저 딸을 여의었는데, 분주한 장례 행렬을 따라가면서도 그가 손에서 놓지 않고 보았던 글이 바로 ‘백이전’이었다. 또 부인의 상중에 일가친척들이 ‘애고, 애고’ 곡을 하는데, 그는 곡소리에 맞춰 ‘백이전’의 구절을 읽었다고 이의현은 전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어지간한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백곡은 재주가 뛰어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의 자질을 알아본 사람들은 글공부를 포기하라고 권고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수치요 굴욕적인 말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책벌레 김득신은 40여년간 꾸준히 읽고 시를 공부한 끝에 그는 말년에 ‘당대 최고의 시인’(택당 이식)으로 불렸습니다. 그는 스스로 지은 묘지명에서 이렇게 말했다. “재주가 남만 못하다고 스스로 한계를 짓지 말라. 나보다 미련하고 둔한 사람도 없겠지마는 결국에는 이룸이 있었다. 모든 것은 힘쓰는 데 달려 있을 따름이다.” 시작도 하지 않고 재주가 없다고 하지 마십시오. 노력도 하지 않고 머리가 나쁘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미련하고 둔하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시작하다가 얼마 하지도 않고 좌절하고 포기하지 마십시오. 책벌레가 되는 과정은 그리 쉽지 않습니다. 끈기가 필요합니다. 목표가 필요합니다. 독서광이야기/ 김득신의 독수기에서 “그는 무언가에 몰두하면 아예 끝장을 보는 성격이었다.” 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능력의 한계를 탓하지 않고 끊임없는 노력으로 당대 최고의 시인이 되었던 것처럼 책벌레가 되어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고 꿈을 이루며 성공적인 삶을 사시지 않으시렵니까? 또한 책벌레 중의 책벌레가 되어 최고의 지성으로 남고  싶지 않으십니까? ▣ 용호(龍湖) ▣ 고목한운리(古木寒雲裏) / 고목은 찬 구름 속에 잠기고 추산백우변(秋山白雨邊) / 가을 산엔 소낙비 들이치네. 모강풍랑기(暮江風浪起) / 날 저문 강에 풍랑이 일자 어자급회선(漁子急回船) / 어부는 급히 뱃머리를 돌리네.           "재주가 남만 못하다고 스스로 한계를 짓지 마라. 나보다 어리석고 둔한 사람도 없겠지만 결국에는 이룸이 있었다." -백곡 김득신 선생님 비문에서   어릴 적 우둔하다고 놀림 받았고, 환갑이 다 되어서애 과거에 급제한 백곡 김득신 선생님은 엄청난 독서량과 배껴쓰기의 힘으로 당송 8대가에 뒤지지 않는 조선 최고의 시인으로 이름을 날리게 됩니다. 10살에야 글을 배우기 시작했을 정도로 아둔하였으나 읽고 또 읽고 읽은 책은 또 베껴 써가며 고스란히 자신의 것으로 만듦으로써 둔재에서 천재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1034    문덕수시론 댓글:  조회:5829  추천:0  2016-01-22
    시쓰는 법 /문덕수 1. 詩란 무엇인가? 1) 詩의 첫 모습 -시의 맨 처음 모습; 우리 조상들이 농사를 짓기 이전, 곧 원시 시대에서 그들이 짐승을 발견하거나, 짐승을 추격하거나, 또 짐승과 싸워 이길 때 부르짖는 소리는 시의 최초의 모습 -천지 자연에게 소원을 호소하고 , 그 소원을 들어 준다는 확신에서 종교적 풍습, 또는 추수 감사절 같은 의식이 발생(고구려의 동맹, 예 나라의 무천 ,부여-영고의 제천 의식) 이러한 의식에는 춤(동작), 음악(노래), 시(말)의 세 가지가 어우러져 있는 것으로서, 이 중에서 세월이 흐르고 역사가 발달함에 따라 동작, 노래, 말이 서로 떨어져 나가 문학, 곧 시가 독립하게 된 것이다. -말이 기쁨의 부르짖는 소리라면, 시도 마찬가지로 기쁨의 부르짖는 소리라고 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는 이다' 라고 말하고, 모방한 것에서 기쁨을 느낀다고 말한 바 있다. -흔히 시는 감정이나 의지를 나타낸다고 하지만, 그러한 감정이나 의지 이전에 세계를 발견하고 그것을 알려고 하는 국면이 있음을 덮어 둘 수 없다. - 詩의 어원 * 포위트리(poetry): , 라는 두 가지 뜻을 가지고 있다. * 詩: 한자로 와 라는 두 가지 의미가 있음 2) 최초의 시인 -호머(Hommer): 기원전 10세기, 장님 -17세기 영국의 시인 밀튼: 서사시 을 쓸 때에는 장님이 되어 있었다. -원시사회의 공동 생활체에서 노동력에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 사물의 이미지를 만들었다. -시대의 발전에 따라 시인의 특별한 기능이 강조되어짐 3) 민요와 민중 -시의 한 원형이라고 볼 수 있는 민요의 지은이는 모든 민중이요, 따라서 민중 전체가 시인이라고 할 수 있다. -민요 특히 노동요에서 실제로 그것이 불리어지는 과정을 통하여 개작되어 가는 흥미 있는 현상을 볼 수 있다. 4) 현대와 시인 -현대의 영국시인 루이스는 히브리의 많은 예언자들이 시인이었다. 시인의 영감이란 어떤 영혼이 외계로부터 시인의 마음 속으로 불어넣어진 것을 말한다. -우리말에 신명 들다, 신명 난다는 말이 있다. 시인은 바로 신명 들린 사람, 귀신에게 홀린 사람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이런 예를 무당에서 들 수 있다. 무당이란 신과 인간 사이를 연결시켜 그 중개 역할을 하는 존재이다. 어쨋든 신을 불러내어 인간과 관계를 맺어 주고, 신의 말을 인간에게 전해 주는 구실을 맡아 하는 사람이 무당인데, 시인이란 바로 이러한 무당의 존재에 비유되기도 한다. 이런 관점에서 무가(굿을 할 때 부르는 노래)는 바로 시라고 할 수 있다 -구약성서의 예언자들이 쓴 기록은 그대로 시임을 알 수 있다.( 시편) -흔히 시를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성서, 불경, 시경 등을 읽기를 권유한다. 고대의 신화와 더불어 이러한 경서는 문학의 원천이므로 반드시 읽어야 할 것이다. -과학문명이 발달하면 할수록 시의 예언적, 또는 문명사적 가능과 시의 존재 이유가 더욱 증대되어 가고 있다는 역설적인 사실도 눈감고 넘겨서는 안 될 줄 안다. * 현대가 시를 요구하는 몇 가지 중요한 사항 (1) 현대 사회의 분열현상을 들 수 있다. -19세기 프랑스의 철학자인 콩트는 실증주의에 의거하여 를 세웠는데 그 체제는 수학, 천문학, 물리학, 화학, 생물학, 사회학이다. 갈라져 나가고 있는 각 분야는 서로의 연관성을 잃고 분열되어 가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이같이 토막토막 갈라져 나가고 있는 문명 사회를 전면적으로 살피고, 근원적인 입장에서 통합해 볼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하는 의문을 가지게 되는데 그 가장 중요한 것이 문학, 즉 시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분열되어 가는 현대 문명사회를 전면적으로 관찰, 파악하고, 그것을 어떤 근원에서 서로의 관련성과 질서를 찾고 통합해 보려고 노력하는 것이 문학, 특히 현대시에 맡겨진 매우 중요한 구실의 하나가 아닐 수 없다. 즉 현대 문명을 그 근원에서 떠받드는 튼 일을 맡고 잇다. 이것이 현대시의 문명사적 역할의 하나일 것이다. (2) 현대인간은 마치 기계의 부속품과 같은 존재로 바뀌어 가고 있고, 현대 사회는 그러한 부속품으로 조직된 메카니즘으로 바뀌어 가고 있다는 점이다. 이와 같이 인간이 하나의 기능으로 유형화되면 그 기능은 그대로 물질적 가치로 계산될 수 밖에 없고, 모든 인간 관계는 물질적 관계로 바뀌고 마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바로 사람의 전인적인 인격을 파괴하게 되고, 생명의 존엄성은 사라지고, 참된 인간 관계의 모럴도 없어지게 된 것이다. 시가 인간 생명과 영혼을 떠나서 존재할 수 없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오늘의 사회가 메카니즘으로 바뀌고 있고 인간이 물질주의의 한 원소로 변질되고 있다는 사실은 시 자체의 위기이면서 , 시의 기능과 존재 이유의 중요성을 역설적으로 반증한 것이라고 하겠다. (3) 현대를 일컬어 단절의 시대라고 말한다. 단절의 현상을 도처에서 볼 수 있다. 인종 차별, 종교 분쟁, 개인간의 반목과 불화, 개인과 사회와의 갈등 등 단절이란 고립, 고독, 소외를 가져오고, 나아가서는 이것이 현대인의 불안, 고뇌, 고통의 원인이 되고 있다. 현대의 시가 단절의 시대를 극복하여 연속의 시대로 바꾸어 놓을 수 있는 노력을 떠맡고 있다. 이런 점에서 현대시는 이쪽과 저쪽, 이 언덕과 저 언덕, 너와 나-모든 단절의 깊은 물위에 다리를 놓는 일을 하고 있다. -새로운 공동 운명에 직면: 핵전쟁의 위험, 인구의 폭발적 증가, 국제적 분쟁, 여러 가지 공해, 식량 문제, 빈부의 차이, 인종문제, 동서 이데올로기의 대립 등 * 현대시가 현대 문명 사회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는 점, 따라서 현대시의 예언적 기능만이 아니라, 비판적, 통합적 기능까지 더욱 증대되었다는 점 5) 현대시와 국어 -시는 언어의 예술이다./언어란 국어이다./시인은 국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다. 우리의 현대시는 우리가 쓰는 국어의 예술이므로, 민족 문화의 바탕이 되는 국어를 갈고 닦아서 아름다운 겨레의 언어로 창조할 책임을 현대 시인은 떠맡고 있는 것이다./시를 언어의 예술이라는 깨달음에서 국어의 순화가 아름다움을 중시하기 시작한 때는 1930년대 시문학파에서 부터 라고 하겠다.(정지용/ 김영랑 / 신석정 등의 시인이 의식적으로 시작을 통하여 국어 순화에 힘씀..이러한 국어순화의 노력은 서정주에게로 계승...정지용의 추천을 받은 조지훈, 박목월, 박두진 등 청록파 시인들에게로 계승됨) ............................................................................................................................................................................ 하늘로 날을 듯이 길게 뽑은 부연 끝 풍경이 운다/처마 끝 곱게 느리운 주렴에 半月이 숨어/아른아른 봄 밤이 두견이 소리처럼 깊어가는 밤/곱아라 고아라 진정 아름다운지고/라르란 구슬빛 바탕에/자지빛 호장을 받힌 호랑저고리/호랑저고리 하얀 동정이 환니 밝도소이다./살살이 퍼져나린 곧은 선이/스스로 돌아 곡선을 이루는 곳/열 두 폭 기인 치마가 사르르 물결을 친다./초마 끝에 곱게 감춘 雲鞋(혜) 唐鞋/발자취 소리도 없이 대청을 건너 살며시 문을 열고/그대는 어느 나라의 고전을 말하는 한 마리 胡蝶/호접인양 사푸시 춤을 추라 蛾眉를 숙이고...나는 이 밤에 옛날에 삶아 /눈 감고 거문곳 줄을 골라 보리니 ........................................................................................................................................................................................................................ : 자주 빛 호랑 저고리와 열 두 폭 긴치마를 차려 입고, 운혜와 당혜(唐鞋)를 신은 이 도전적 미인도는 한 폭의 동양화를 연상하게 한다. 이 고전적 미인도와 국어의 조화는 국어 순화의 한 방향을 안내한다. 국어의 순화란 단지 아름답고 부드럽고 섬세한 말을 골라서 쓴다는 뜻만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새로운 자연, 새로운 풍속, 새로운 세계의 인식과 그 순화에 관련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현대 사회의 순화, 다시 말하면 현대의 풍속순화와 관련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2.. 詩想 은 어떻게 잡는가? 1)시의 종자 -철이 덜 든 어린아이 때, 먼 낯선 곳으로 난생 처음으로 홀로 여행을 떠나거나 부모의 슬하를 떠나서 해외로 유학을 간다고 가정해 보자. 어머니의 손등이나 손수건은 하나의 충격일 수도 있다. 그러한 이미지가 마음 속에서 언제나 지워지지 않고 갈수록 절실해질 때, 그것이 시상으로 자리를 잡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시의 종자라고 할 수 있다. -예시문: 박 목월의 시 를 읽고 시의 종자가 어떤 것인지 찾아보자 답: 청운사(마음의 자연지도/내 영혼의 자연-지은이의 서러운 이미지에 떠오르는 절),자하산, 느름나무 속잎 피는 열 두 굽이, 청 노루-네 이미지가 중심/꿈속의 한 자연을 연상케 함 -가장 중요한 이미지 :청운사/ 자하 의 청운사와 청 노루-조국을 강탈한 일제에 의하여 잃어버린 고향에 대한 서럽고도 열렬한 그리움으로 창조된 세계는 지은이 자신의 삶의 유일한 근거요, 삶의 구원이 될 수 있는 자연이기도 하다. -마음 속에서 거의 완전한 상상의 지도를 그려놓고, 그 이미지를 언어로 다시 그려낸 작품이다. -마음 속에 하나의 이미지가 떠오르면 그것을 거의 완전한 하나의 세계, 또는 하나의 형태로 성숙할 때까지 창조 활동을 계속한다는 오랜 상상 속의 창작 과정을 거치는 지극히 중요한 비밀이 있음을 알게 된다. -처음 떠오른 하나의 이미지는 하찮은 충격일 수도 있고, 약간의 파문과 같은 사소한 느낌일 수도 있고, 일상의 슬픈 일이나 기쁜 일일 수도 있고, 꽃이 피고 지는 계절의 변화에 대한 신비스러운 느낌일 수도 있으나, 이러한 것들이 모두 시의 종자가 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자기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먼저 시의 종자를 붙잡는 일이 중요하다. 그 다음에는 그것을 마음 속에 깊이 간직하고, 혹은 한동안 잊어버리고 있다가 훗날 어떤 계기에 다시 생각해 내고서는 새로운 경험을 덧붙여 서서히 가꾸고 풍부하게 하면서 키우는 것이다. 2) 詩想의 성장과정 -사냥을 하여 먹고 살던 원시 시대의 시인은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노동을 할 수 없을 만큼의 신체적 결함이 있는 사람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들은 자연이나 다른 사람들에 관하여 생각하기도 하고 공상에 잠기기도 하는 고독이 많았다. -너는 왜 시인이 되었느냐? 는 물음에 고독하기 때문에 또는 어리석고 약하기 때문 에라고 대답하는 이들이 흔히 있다. 시인이 다른 보통 사람들 속에 끼이지 못한다든지, 사회에서 소외되어 있다든지, 매우 외로운 처지에 있다든지 하는 것은 오늘의 시인들에게도 많이 있는 일이다. 어쨌든 이러한 처지에 있거나, 적어도 사물이나 인생을 관찰하는 동안만이라도 이러한 처지로 돌아가야 하는 시인들은 보통 사람들보다는 훨씬 예민한 감수성과 풍부한 상상력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없거나 약하거나 보통 사람의 그것과 비슷하거나 하면, 그런 사람은 시와 소설을 쓸 수가 없을 것이다. 어떤 시상을 잡고 그것을 더욱 가꾸고 풍부하게 하고 키우는 능력은 바로 예민한 감수성과 풍부한 상상력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즉 시인은 남달리 감수성이 예민하고 상상력이 풍부해야 한다는 , 곧 시인의 재질의 특수성을 이야기한 것에 지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예시: 김 남조의 아가에게 ) 3) 이미지의 상호관계 -맨 처음에 붙잡은 시의 종자라고 할 수 있는 이미지를 흔히 우리는 착상이라고 말한다. 착상은 이제 겨우 시상을 붙잡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착상, 곧 하나의 이미지는 종자이므로, 심고 북돋우고 비료를 주고 손질을 하면서 가꾸지 않으면 안 된다. 시의 종자도 그와 같이 하지 않으면 안 된다. -현대시에서는 착상된 첫 이미지를 중심으로 하여 과거에 경험했던 여러 가지 이미지나, 앞으로 경험하게 될 여러 가지 이미지가 어떤 공통점이나 유사점을 찾아 서로 관련을 맺고 유기적으로 조직되어 비로소 한 편의 시작품으로 완성되는 것이다. * 시의 종자를 어떻게 붙잡고 어떻게 키워 나가는가? 1) 먼저 시의 종자를 잡아야 한다. -시의 종자는 하나의 느낌일 수도 있고, 하나의 인상일 수도 있고, 하나의 관념일 수도 있고, 하나의 이미지일 수도 있다. 우리는 일상의 생활 경험에서 이러한 종자를 붙잡아야 한다. 이러한 종자는 갑작스러운 우레 소리를 듣거나. 불시의 폭발로 인하여 번쩍하는 섬광을 보거나, 오랫동안 잊어버리고 있던 친구가 돌연히 찾아올 때와 같이, 어떤 충격이나 놀라움을 준다. 이것을 인스피레이션(Inspiration), 곧 靈感이라고도 하다. 그러한 종자는 갑자기 왔다가는 갑자기 사라지는 바람과 같으므로, 반드시 노우트에 적어두는 것이 좋다. 그리하여, 그것을 한 편의 실 형상화하려고 서둘지 말고 한동안 마음 속에 넣어두고 잊어버린다. 물론 당장에 쓸 수 있는 즉흥시라는 것도 있기는 있다. 2) 마음속에 넣어 둔 시의 종자는 일주일, 한 달, 길면 일 년-이렇게 무의식 속에 묻혀서 잠잘 수 있다. 그러다가 어떤 계기, 이를테면 여러 가지 생활 체험과 우연 혹은 의식적으로 결부되어 싹이 트고 줄기를 뻗어 성장하게 된다. 많은 생활 체험이 퇴토의 종자에 거름이 되고 , 물이 되고, 햇빛과 기온이 되기 때문이다. 이때에도 처음 시의 종자를 붙잡을 때와 같은 어떤 충격이나, 놀라움을 줄 수가 있다. 말하자면, 시의 종자를 가지고 왔던 맨 처음의 영감이 한동안 혹은 꽤 오랫동안 사라져 있다가 새로운 생활 체험과 결부되는 순간, 그 맨 처음의 영감에 불이 붙어 다시 작동하기 시작한다. 그것은 일종의 흥분 상태라고도 할 수 있다. 영감이란 충격적인 계시나 암시와 같은 거인데, 그것이 상상력과 어울려 시의 맨 처음 종자를 성장시켜 서서히 시의 형태를 이루는 것이다. 영감과 상상력은 불과 같아서 한 동안 뜨겁게 타오르다가는 이내 꺼지는 성질이 있으므로, 이것을 계속시켜 나간다는 것은 다소 힘드는 일이다. 3) 이렇게 해서 성장한 이미지는 서로 연결되고 구성되어 한 편의 시의 형태로 자리를 잡는다. 이 때 우리는 처음 단순한 메모에 지나지 않았던 시의 종자는 비로소 한 편의 어느 정도 완성된 시의 형태를 갖추게 된 것을 보게 되고, 그것은 곧 언어에 의한 표현을 요구하게 된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정신을 집중시킨 표현의 단계, 오랫동안의 산고를 일단 마무리 짓는 탄생의 순간을 맞이하는 것이다. 마치 만삭을 맞은 산모가 아기를 낳는 것과 같은 것이지만, 시의 탄생은 그보다 더욱 의식적이고 비판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만큼 고통도 크고 기쁨도 크다. 4) 이렇게 해서 탄생된 한 편의 시는 다시 깍고 보태고 다듬는 단계로 들어간다. 한 편의 시가 탄생되었다고 느끼는 것은, 후일 그러한 흥분이 사라지고 냉정한 객관적 태고로 돌아가서 마치 다른 사람의 작품을 보듯이 보면 어떤 결함이나 어색한 점을 반드시 발견하게 될 것이다. 곧, 깍고 보태고 다듬는 퇴고의 단계를 거쳐야 한다. 3. 제목은 어떻게 정하는가? 1) 제목의 중요성 -시의 제목은 그 작품의 주제와 일치하거나 주제를 암시하는 것이 가장 좋다. (예; 단테의 신곡, 엘리어트의 황무지 등) ㅇ 작품의 주인공을 제목으로 삼은 것(예; 일리어드, 오디세이) ㅇ 작품의 중요 제목으로 삼은 것(예; 진달래꽃, 청노루 등) -시를 쓰는 과정에서 시인이 제목을 정하는 방식에는 대충 다음 세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첫째; 제목을 미리 정해 놓고 작품을 쓰는 경우 둘째; 작품을 써가는 도중이나 완성해 놓고 나중에 제목을 붙이는 경우 셋째; 제목이 없이 그저 일련 번호를 매겨서 구별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적당한 제목이 생각나지 않아서 라는 제목을 붙이는 경우 -명사, 명사형, 체언구 등의 제목이 있다(편지/생명의 서/내 너를 내우 노니 등) 2) 제목을 정해 놓고 쓰는 경우 -시인 김용호: 시가 먼저 생기느냐, 제목이 먼저 생기느냐 하면, 물론 시가 창조된 이후에 제목이 있어야 할 것은 순서상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상에 있어서 어떤 분은 제목부터 먼저 생각해 가지고 시작한 분이 있습니다. 말하자면, 이것은 아이를 낳기 전에 이름을 짓는 것과 마찬가지로 본말 전도하고 할 것입니다. 곧 시를 먼저 다 지어 놓고 그 다음에 이름을 붙이는 것이 바른 순서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꼭 바른 순서라고 우길 수는 없다. 시인에 따라 제목을 먼저 정해 놓고 시를 쓰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고, 또 그렇게 할 만한 이유가 충분히 있기 때문이다. 시를 쓰는 일은 집을 짓거나 물건을 만드는 일에도 비유하여 나는 이러이러한 모양,이러이러한 용도의 물건을 만들겠다는 생각을 먼저하고 그 다음에 집을 짓거나 물건을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제목으로 표현되기 마련이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제목은 주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좋은 제목은 주제와 일치하거나 주제를 암시한 것이므로 이 경우에 제목을 미리 정하는 일은 주제를 먼저 정해 놓고 쓰는 경우라고 하겠다. -시는 내용을 어떻게 형상화하는가, 곧 그 내용을 어떠한 이미지로 만들고, 어떠한 형태로 조직해야 하는가에 대한 깨달음이 더욱 중요한 것이다. 3) 제목을 나중에 붙이는 경우 -시를 다 써 놓은 다음에 제목을 붙이는 경우에는 두 가지가 있을 수 있다. 하나는 시의 내용이나 주제에 적합한 제목, 또는 시의 내용의 한 단어나 어구를 찾아서 붙이는 일이요, 또 하나는 내용이나 주제에 적합한 제목이 필요 없는 경우이다. 그래서 후자의 경우에는 무제 또는 실제라는 제목을 붙이기도 하고 따위와 같이 작품 번호를 붙이기도 한다.(예; 김 춘수의 꽃밭에든 거북) 4. 行은 어떻게 가르는가? 1) 시행의 중요성 -시의 행은 이라고 말하는 것을 볼 때 그 시의 운율과 밀 접한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영시에서는 시행을 line하고 하는데 한 라인은 반드시 음의 강약, 약 강을 단위로 하여 음보의 일정한 수로써 구성된다. 시행을 중심으로 여러 가지 정형시가 형성된 것을 알 수 있고, 따라서 시행이 얼마나 중요시되는가를 알 수 있다. -우리나라의 시조는 3장 곧 3행으로 되어있다. 초장 중장 종장이라고 하는데 이것이 각각 행을 이루어, 시조는 모두 3행으로 정형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2) 시행구분의 실제(1) -시를 쓰는 데 있어서 시행 구분은 기초가 되기 때문에 시행을 구분하는 방법을 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음에는 높낮이 외에 강약, 장단 등이 있다. 영시는 이 중에서 강약을 기준으로 운율의 단위를 결정한다. -7.5조의 정형시의 예 고요하고/ 어두운/ 밤이 오면은 어스러한/ 등불에/ 밤이 오면은 외로움에/ 아품에/ 다만 혼자서 하염없는/ 눈물에/ 저는 웁니다. 제 한 몸도 예전엔 눈물 모르고 조그만 세상을 보냈습니다. 그때는 지난날의 옛이야기도 아무 설움 모르고 외쳤습니다. 그런 우리 님이 가신 뒤에는 아주 저를 버리고 가신 뒤에는 전날에 제게 있던 모든 것들이 가지가지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 한때에 외워 두었던 옛 이야기 뿐만은 남았습니다. 나날이 짙어 가는 옛이야기는 부질없이 제 몸을 울렸습니다. -김소월, 전문 이 시는 7.5조의 정형시라고 할 수 있다. 7.5조는 개화기 때 일본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는 하나, 우리나라 전통적 운율인 3음보격도 7.5조로 된 것이 있다.한 행이 7.5조로 되어있고, 한 연이 4행씩 모두 4연으로 되어 있다. 한 시행은 7.5조보다 모자라서는 안 되고, 7.5도 보다 자수가 초과해도 안 된다. 그런데, 이 7.5조는 3(4),4(3),5(2.3 또는 3.2)-로 되어 있다. 한 행이 4.3.5의 음수로 된 3박자, 3음보격의 행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하나의 박자나 음보의 단을 이루는 음수(자수)는 같지 않다. 특히 마지막 박자 또는 음보는 5음절로 되어있다. 어쨌든 정형시의 경우, 그 운율 형식에서 가장 기본적인 것이 2음보격, 3음보격의 시행이라는 것도 알게 된다. 3)시행구분의 실제(2) -리듬이 시행을 구분하는 요인 -김춘추는 시의 행을 또는 이라고 말한 바 있다. 즉 리듬의 한 단위가 곧 의미의 한 단위라고 할 수 있다. 4) 시의 첫 행 -시의 첫 행은 그 시의 출발이요, 시작이라는 점에서 시인 각자가 자기 체질에 맞도록 익히는 방법밖엔 없을 것 같다. -유치환, 깃발의 첫 행인 '이것은 소리없는 아우성'이라는 첫 행은 가장 중요한 이미지요 , 만약 작자가 이 대목을 붙잡지 못했다면 이 시는 영영 이루어지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이와 같이 시의 첫 행은 맨 처음 착상된 이미지거나, 그 시에서 가장 중요한 의미의 한 토막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내 마음은 호수요, 그대 저어 보오 에서 시의 첫 행은 대체로 그 다음에 시상을 전개할 전제적 구실을 하고 있는 듯하다. 이러한 첫 행은 마치 3단논법 중의 연역법의 대전제와 비슷한 구실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5) 산문시의 시행 -산문시(Prose in poem)에서는 센텐스가 있기는 하나, 자유시나 정형시에서 보는 바와 같은 행 구분이 없음은 이미 우리가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산문시가 다른 시(정형시, 자유시)와의 겉으로 드러난 차이는 행 구분이 없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연구분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즉 산문이란 집중된 정신활동이 아니라 분산된 정신 활동에서 이루어진 글이라는 뜻이 된다. 현대 영국의 문예 비평가인 리이드는 시를 정신의 응축활동이라고 하고, 산문을 정신의 분산 활동이라고 말한 바 있는데, 산문이라는 어원적인 뜻이 바로 리이드가 말한 본질적인 의미와 일치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또 영어의 프로즈(Prose)는 똑바로 가는, 솔직한 꾸밈이 없는 이라는 어원적인 뜻이 있다. -산문이라는 말은 두 가지의 뜻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규칙적인 운율이 있는 문장인 운문과 반대되는 뜻으로서, 규칙적, 형식적으로 반복하는 운율이 없거나, 운율이 설령 있다 하더라도 안으로 은폐되어 버린 산문율을 가진 문장이라는 뜻이다. 다른 하나는 시와 반대되는 뜻으로서, 있는 대로의 사실을 토의하는 문학을 의미한다. 이리하여 미국 시카고 대학 교수였던 몰톤은 시를 창작 문학이라 하여 서정시, 서사시, 극시를 , 산문을 토의문학이라고 하여 역사, 웅변, 철학을 여기에 포함시켰던 것이다. 하나 산문시는 산문이 아니라 시라는 점을 도의시해서는 안 될 줄 안다. -絶頂에 가까울수록 뻐꾹채 꽃키가 점점 消耗된다. 한 마루 오르면 허리가 슬어지고 다시 한 마루 위에서 모가지가 없고 나중에는 얼굴만 갸옷 내다본다. 花紋처럼 版박힌다. 바람기 차기가 함경도 끝과 맞서는 데서 뻐꾹채 키는 아주 없어지고도 팔월 한 철엔 흩어진 星辰처럼 爛漫하다. 산 그림자 어둑어둑하면 그러지않아도 뻐꾹채 꽃밭에서 별들이 켜든다. 제 자리에서 별이 옮긴다. 나는 여기서 기진했다. -정 지 용, 에서 한라산 백록담의 敍景, 다시 말하면 대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산문시인데, 여기서는 리듬에서 거의 벗어나 있음을 알 수 있다. 센텐스와 센텐스 사이의 의미의 단절이나 비약이 심하지 않고, 따라서 의미의 소통도 매우 자연스럽다. 이것이 산문시의 특징이 될는지 모르겠다. -이러한 산문시를 행 구분을 하여 자유시로 바꾼다면, 아마도 김이나 맥이 빠진 것 같은 느낌이 느껴질 것이다. -산문시는 산문체로 씌어졌을 때, 곧 산문체로 조직되었을 때, 시로서의 凝縮感(응축감), 집중감을 느낄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시로서의 보다 효과적인 통일감을 가지게 되는 것 같다. 5. 詩와 素材는 어떻게 다른가? 1)시와 소재 -시를 처음 써보는 사람은 물론이거니와, 시를 웬만큼 서본 경험이 있는 시인도 소재나 제재를 시라고 착각하고 있는 분들이 의외에도 많다. 깊은 山谷 외딴 草家 사뭇 외롭다. -김 태오, 제1연 이것은 소재, 다시 말하면 작자의 감정이 약간 반영된 소재를 헹가름한 것에 지나지 않으나, 자기의 시집에 수록하고 잇는 걸 보면 작자는 일단 시라고 생각한 것 같다. 김춘수 시인은 이 대목에 대하여 山谷이니 草家니 하는 심상들이 상식적이고 따분하여 통속적인 느낌마저 주고 있기 때문에 시로서 지금의 우리에게 호소해 오는 힘이 거의 없다, 상상의 힘이 약했던 결과라 할 것이다. -김춘수, 에서 여기서 필자가 소재라고 하는 것이, 바로 , 따위와 같이 경험한 사물을 단순히 언어로 바꾸어 놓은 것에 불과한 것을 말한다. 이러한 소재의 나열이 그대로 시가 되는 것은 아니고, 이것을 다시 상상력의 용광로 속으로 넣어서 창조하는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이다 가. 세계의 民主主義의 씨를 뿌리고 세계의 民主主義 꽃에 물을 주는 民主主義園丁 나. 순이야. 영이야 . 또 돌아간 남아. 굳이 잠긴 잿빛의 문을 열고 나와서 하늘가에 머무는 꽃봉오릴 보아라. 한없는 누에실의 올과 날로 짜느린 차 일을 두른 듯 아늑한 하늘가에 빰 부비며 열려 있는 꽃봉오릴 보아라. 순이야. 영이야 . 또 돌아간 남아. 저, 가슴같이 따뜻한 하늘가에 인제 바로 숨쉬는 꽃봉오릴 보아라. -서 정 주, 전문 앞에 인용한 정치 구호 같은 似而非詩와 비교하면, 가 어떠한 것인가를 담박에 알 수 있을 것이다. 은 감옥과 다를 바 없는 죽음의 문이 굳게 잠긴 일제 36년간의 식민지 시대를 상징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 등은 광복을 맞이하여 새로운 세계를 꿈꾸는 감격과 기쁨울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시가 광복에 대한 우릴 민족의 그지없는 감격과 기쁨을 노래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2) 소재와 언어 -소재의 素는 염색하지 않는 흰 비단을 의미한다. 시의 소재란 시를 구성하는 재료를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시를 언어의 예술이라고 말한다. 우리나라에서 언어의 예술이라는 자각을 가지고 시를 쓴 최초의 시인은 정지용이며, 그러한 사실을 되풀이하여 강조한 시인이 김기림 이었다. 시는 언어의 예술이라는 말은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다른 뜻을 가질 수도 있으나, 시를 구성하는 재료는 언어라는 뜻으로도 받아들일 수도 있다. 시를 만드는 재료를 나무. 돌. 산. 냇물. 꽃등의 사물이라고는 할 수 없다. 시의 재료는 그러한 사물을 가리키거나 나타내는 언어이다. 그런데 시의 언어와 일상의 언어가 구별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일상어는 시의 언어가 될 수 있다. 19세기 영국의 대표적인 노만파 시인인 워즈워드가 일상어를 시어로 쓰기를 주장했고, 1930년대의 김 기림이 또한 일상어를 주장한 바 있다. 그러나 일상어가 그대로 시의 언어가 될 수 없다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이를테면 책상의 재료(소재)는 목재이지마는, 목재가 그대로 책상이 될 수 없는 것이다. 목재를 적당한 길이로 자르기도 하고, 대패로 반들 밤들하고 매끄럽게 깍고 다듬기도 하고, 그렇게 해서 서로 잇고 맞추어 설계한 대로의 형태로 구성해야 한다. 여기서, 목재 하나하나를 자르고 깍고 다듬는 단계와 그것을 잇고 맞추어 전재의 형태로 구성하는 두 단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시의 소재인 언어의 경우도 이와 같다고 하겠다. 일상어를 소재로 하지만 그 일상어를 깎고 다듬어야 하며, 그렇게 한 소재를 다시 의도한 대로의 형태로 구성해야 하는 것이다. 물아 쉬임없이 끝없이 흘러가는 물아 너는 무슨 뜻이 있어 그와 같이 흐르는가. 이상하게도 나로 하여금 애를 태운다. 끝 모르는 지경으로 나의 혼을 꾀이어간다. -오 상 순, 여울지어 수척한 흰 물살 갈갈이 손가락 펴고 -정 지 용, 제 5,6연 A와 B를 비교해 보면 언어를 갈고 닦은 수준에서 큰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된다. 3) 소재의 시대적 변천 -소재는 시대에 따라 또는 시인 개인의 기호에 따라 늘 바뀌고 있는 것이다. 는 것은 두 가지의 뜻을 가지고 있다. 첫째는 소재의 종류라고나 할까, 소재의 영역이라고나 할까, 그런 것이 바뀐다는 뜻이 있고 , 둘째는 소재에 대한 해석이 달라지고 있다는 뜻도 있다. 전자는 어떤 한 시대에는 주로 자연을 소재로 한 시가 많이 쓰이었는데, 다른 시대에는 사회의 사건이나 여러 가지 사회 현상을 소재로 한 시가 많이 쓰인다는 뜻이다. 후자는 같은 소재가 시대의 다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시인의 관심을 끌고는 있으나 그것에 대한 해석, 또는 의미의 발견이 달라진다는 뜻이다. *갑오경장(1894)~1910사이의 창가, 신체시-계화 계몽과 관계-조국의 자주 독립, 신문명의 예찬, 미신의 타파와 새 교육의 장려 *1918년 김 억의 시,1919년 주요한의시-인간의 보편적 정서를 담은 서정시를 쓰기 시작함 -봄날에 달을 잡으러/두른 그림자를 밟으며 갔더니/바람만 언덕에 풀을 스치고/달은 물을 건너가고요. 봄날에 달을 잡으러/금 물결 헤치고 저어 갔더니/돌 씻는 물소리만 적적하고/달은 들 넘어 재 넘어 기울고요/........................주요한, *1930년 전후부터와 의 노만주의에 대한 반동으로서 김기림 등을 중심으로 한 모더니즘 시운동이 일어나 감정대신에 지성을, 음악성 대신에 회화성을 도입하기 시작한 모더니즘 시 운동은 도시와 문명에서 소재를 가져오게 되었다.(김광균-와사등: 방향을 잃은 도시인의 비애를 읊은 시) *1940년 전후-청록파-자연친화라는 공통성을 가지고 박두진(1945년 해발표), 조지훈, 박목월등의 세 시인은 문장(1939)지를 통해 정지용의 추천을 받고 시단에 데뷔-자연을 소재로, 조 지훈의 고전적 불교적인 정서, 박목월의 토속적. 민요적 율조, 박두진의 기독교적 희구와 이상형의 동경 4) 소재의 해석 시대가 바뀌면 소재도 따라서 바뀌게 되지만 시대의 변천에도 불구하고 바뀌지 않는 소재들이 얼마든지 있다. 옛부터 시의 제재가 많이 되어온 하늘.해.달.산.강.바다.꽃.바람등은 오늘날에 와서도 여전히 시의 소재가 되고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시인에 따라 또는 시대에 따라 소재를 해석하는 내용이 각기 다르기 때문에 같은 소재를 얼마든지 되풀이하여 계속해서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오, 보아라,푸른 하늘가를/읽어 버린 고운 노래의/나직한 가락처럼/흰 구름 둥실 떠 흘러감을!//오랜 여행의 途上에서/방랑의 온갖 슬픔과 기쁨/맛보지 못한 어떠한 가슴도/구름을 이해하진 못하리라.//태양 모양 바다와 바람 모양으로/희고 정처 없는 것이 나는 좋아라./그것들은 집 없는 것이 나는 좋아라./그것들은 집 없는 사람에게는 /누이이며 天使이기에. -헤르만 헤세,전문 6. 이미지는 어떻게 만드는가 1) 想像의 기능 -사람은 누구나 상상하는 능력이 있다. 특히 시인은 강력한 상상력(imagination)이 없으면 아무것도 슬 수 없다. 상상력은 시를 쓰는 시인의 가장 중요한 무기이다. 상상은 과거에 보고 듣고 겪었던 사물의 이미지를 마음 속에서 다시 생각해 내는 일이다. 과거의 기억이라는 것은 감각적 模象 또는 인상인데, 이것이 그대로 나타나는 것을, 미국의 심리학자인 제임즈는 재생적 상상(reproductive imagination)이라고 하여, 생산적 상상(productive imagination)과 구별하고 있다. 곧 재생적 상상이란 지난날에 겪었던 이미지가 변화 없이 그대로 다시 나타나는 경우를 말한다. 그러나, 생산적 상상은 지난날에 겪었던 이미지들에서 선택된 여러 가지 요소들을 결합하여 새로운 이미지의 통일체를 만들어 내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상상이라고 할 때에는 주로 후자를 두고 이르는 것이다. -상상의 주된 기능은 과거에 겪었던 여러 가지 이미지들을 결합하여 새로운 통일체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 경우 우리는 두 가지 과정으로 나누어서 살펴보는 것이 편리하다. 첫째, 이미지들을 선택하여 결합하는 단계, 곧 다르거나 관계가 먼 여러 가지 이미지들을 선택하여 거기서 어떤 유사점을 찾아 결합하는 단계이다. 심리학자들이 말하는 觀念 聯想이란 바로 이 단계를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상상을 연합적 상상(associative imagination)이라고 이른다. 둘째, 이와같이 이미지들을 결합함으로써 그 모습과 의미가 바뀌어 새로운 이미지들의 단계를 우리는 창조적 상상(creative imagination)이라고 말할 수 있다. 상상이 이미지를 결합해서 새로운 이미지의 통일체를 창조한다고 해서, 그것이 기계적을 결합되어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상상력에는 시인의 情緖와 思想이 들어가게 마련이다. 고래가 이제 횡단한 뒤 海峽이 天幕처럼 퍼덕이오 정 지용, 의 1연 당신의 불꽃 속으로 나의 눈송이가 뛰어듭니다. 당신의 불꽃은 나의 눈송이를 자취도 없이 품어 줍니다. 김현승, 전문 에서는 고래,해협,천막의 이미지들이 결합되어 신선하고 생동감이 넘치는 해협의 이미지를 보여주고 있다. 시인은 이러한 사물들의 밖에서 되도록 그 사물 속으로 뛰어들지 않으려는 객관적 태도를 보여 주고 있으나, 그러나 이 시인만이 보는 마음의 눈에 의하여 신선하고 생동감이 넘치는 해협의 이미지가 창도되어 있다. 그리고 인해의 어떤 의미나 사상은 배제되어 있다. 반대로 에서는 이미지에 대한 사상적 추구가 더욱 치열한 모습을 보여 주는 것 같다. 단지 불꽃과 눈송이의의 연결이지만 불꽃은 신의 뜨거운 사랑을, 눈송이는 믿음이 식은 약한 신앙을 각각 상징하고 있다. 신앙이라는 정신적 가치, 또는 의미를 깨달아서 그러한 정신적 가치가 들어 있는 대상을 표현한 것이다. 곧, 사상을 감각적으로 표현한 것인데, 이러한 상상을 해석적 상성(interpretative imagination)이라고 하는 이도 있다. 우리는 이상에서 연합적 상상, 창조적 상상, 해석적 상상을 대충 알게 되었다. 연합적 상상은 관념이나 이미지들을 어떤 유사점에 의하여 결합하는 것이고, 창조적 상상은 그러한 결합에 의하여 이미지의 전일체를 만들어 내는 것이고, 해석적 상상은 정신적 가치나 의미를 깨달아 그것이 들어있는 이미지를 표현하는 것이다. 이것은 영국의 비평가인 윈체스터가 분류한 것이다. 상상 또는 상상력이 무엇인가 하는 것은 시론이나 시 짓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이다.리처즈는 상상력의 여섯 가지의 의미를 들고 있으나 그 중 세가지만 들면, 첫째는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것, 둘째는 직유나 은유와 같은 비유를 만들어 내는 것, 셋째는 통합적,마술적 상상력이다. 상상력이 만들어 내는 이미지 중에는 비유 없는 것도 있으나, 대체로 대부분의 이미지는 은유 또는 직유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리처즈는 상상력의 여섯 가지 의미 중에서 여섯째의 통합적,마술적 상상력을 가장 중요시한다. 2) 시상과 이미지 앞에서 상상력은 이미지를 만들어 낸다고 말한 바 있다. 상상력(imagination)과 이미지(image)는 그 어원도 같다. 여기서 우리는 이미지를 중심으로 하여 다시 상상과 공상(fancy)과의 다름이 실제의 작품에 있어서 어떻게 다르게 나타나는 지를 살펴보자. 오후 두 시 머언 바다의 잔디밭에서 바람은 갑자기 잠을 깨어서는 휘파람을 불며 불며 검은 조수의 떼를 몰아가지고 항구로 돌어옵니다. -김 기림, 에서 빛이 잠드는 따 위에 라일락 우거질 때, 하늘엔 무엇이 피나, 아무 것도 피지 않네 산을 헐어 뚫은 길, 바다로 이을 제, 하늘엔 무엇을 띄우나, 아무런 길도 겐 보이지 않네 바람이 수러대는 아름다운 깃발들 높은 성을 에워쌀 제, 하늘엔 무슨 소리 들리나, 겐 아직 빈 터와 같네. -김 현승, 전문 우리는 우선 이 두 편을 비교하여 그 이미지의 차이를 살펴보자. 그리고 이 차이를 깨닫는다는것은 자기의 시짓기 방향을 정하고 그 방향을 따라 자기의 상상력을 발전시키는 데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먼저 김 기림의 작품부터 살펴보자. 이 작품은 6행밖에 안 되는 짧은 시다. 먼 바다의 바람이 검은 조수를 몰아 항구로 불어오는 광경을 그림과 같이 단순히 쾌적하게 묘사한 것이다. 심원한 감정, 어떤 인생의 의미, 어떤 사상을 표현하고 있는 것은 아니므로 상상력이 아니라 팬시로 만든 이미지즘 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김현승의 시는 그렇지 않다. 감각적인 눈으로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 현실주의와 이상주의, 육체와 영혼 곧 지상과 턴사의 상반 대립되는 이미지들의 통합을 볼 수 있다. 이로 보아 김현승 시인의 시는 상상력으로 만들어 낸 시임을 알 수 있다. 3) 이미지, 그 순수성과 관념성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를 듣거나 경험한 사물들은 어떤 관념, 어떤 사상으로 기억 속에 남기보다 감각적 이미지로 더 많이 남는다. 논리나 관념은 잊어버리기 쉬우나 이미지는 좀체로 잊혀지지 않는 법이다. 우리는 갑자기 친구의 이름을 잊어버려 좀처럼 떠오르지 않아서 무척 당황할 때가 있고, 그릐 얼굴의 이미지는 눈앞에 선명하게 떠오르나 이름은 더 오르지 않아서 애를 먹는 일을 흔히 경험한다. 좋은 시, 영원히 기억에 남는 시, 절실한 감동을 주는 시도 생생한 사상이나 논리보다 그러한 이미지로 구성된 시일 것이다. 시에 있어서 이미지, 특히 시각적 이미지가 중요시되기 시작한 것은 20세기부터 하고 할 수 있다. 이미지 즘 운도의 이론적 지도자였던 파운드는 수많은 작품을 쓰는 것보다 일생동안 단 하나의 이미지를 표현하는 것이 좋다.(It is better to present one IMAGE in a lifetime than to produce voluminous works)라는 유명한 말을 한 바 있다. 포탄으로 뚫은 듯 동그란 선창으로 눈썹까지 부풀어 오른 수평이 엿보고 하늘이 한폭 나려 앉아 크낙한 암탉처럼 품고 있다. -정지용, 의 제 1.2연 분수처럼 흩어지는 푸른 종소리 -김 광균, 에서 이것은 소리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팰지어의 손수건 -유치환, 의 첫 3행 꽃처럼 붉은 울음을 밤새 울었다. -서정주, 중의 1연 구름에 달가듯이 가는 나그네 -박목월, 의 제1연 우리는 기억 속에서 영원히 지워버릴 수 없는 이러한 이미지의 중요성을 새삼스럽게 깨닫게 된다. 시를 쓴다는 것은 결국 이미지를 만든는 일이다. 앞에서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이미지는 상상력이 만들어 낸 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이미지란 무엇이냐? 라는 물음에 가장 쉽고 일반적인 대답은 , 라고 말할 수 있다.만이 시의 절대적 요건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러나 대부분의 시는 비유 있는 이미지로 구성되어 있고 또 그렇게 구성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김소월의 시에는 비유 없는 이미지들이 있다. (예:진달레 꽃, 엄마야 누나야) 현대에 와서 시를 사물시(physical poetry)와 관념시(Platonic poetry)로 구별하는 경향이 있다. 사물시라는 것은 사상이나 어떤 의지를 배재하고 사물의 이미지를 중시한 시인데, 이미지즘 시가 여기에 해당한다. 이와 반대로 관념시라는 것은 사물의 이미지보다 어떤 관념 서세계를 드러내어 독자로 설득 시키려는 의지를 지니고 있다. 인생이나 세계를 어떤 고난으로 파악하여 표현한 시가 관념시이다. 의지의 시라고도 하는데 노만주의 시가 여기에 해당된다. 이러한 구별은 현대 미국의 신비평가인 랜슴이 처음 말한 것인데 이후 시론의 주요한 술어가 되었고, 우리나라에서도 이 문제가 현대시의 주요한 경향으로 논의된 바 있다. 피아노에 앉은/ 여자의 두 손에서는 / 끊임없이 /열마리씩/스무마리씩/신선한 물고기가/튀는 빛의 꼬리를 몰고/ 쏟아진다. 나는 바다로 가서/가장 신나게 시퍼런/파도의 칼날 하나를/집어 들었다. 전 봉건, 전문 이 시는 사물 이미지로 구성된 사물시라고 할 수 있다. 교회당/십자가에 못박힌/ 음산한/겨울/-마침내는 눈이 내린다/바람이 햝고 간/감기 든 골목에/코 먹은/저음./-나직이 기침하는 우수의 숲 조 영서, 이 시도 역시 사물이미지로 구서오딘 사물시다. 제 1연은 눈이 내리는 음산한 겨울 날씨를, 제2연은 싸늘한 겨울 바람이 골목을 휩쓸고 간 광경를 각각 묘사한 것이다. 이상 말한 작품등은 모두 사물이요, 이미지즘 계열의 작품이다. 흄이 말한 공상에 의하여 창조된 순수 이미지가 아닌가 생각된다. 거룩한 분노는/종교보다 깊고/불붙는 정열은/사랑보다 강하다. 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양귀비 꽃보다도 더 붉은/그 마음 흘러라 -변영로, 에서 논개의 애국 순절이라는 관념 세계를 읊은 것이다. 관념시는 사상과 더불어 격렬한 감정, 어떤 의지, 병적인 감상 등을 표현 하나 그 사상에서 벗어나서 그 사상을 다시 감각적 이미지로 표현하지 못한다. 이 밤이 다하기 전에/이 무한한 벽을 뚫어야 하는 囚人/또는/허무를 데굴대는 쇠똥구리. -유치환, 전문 관념시로서 성공한 작품인 것 같다. 이 시는 벽 속에 갇힌 죄수나 허무 속에 데굴대는 시똥구리와 같은 자아의 존재 상황이라는 관념을 드러내고 있다. 인생과 관련된 관념시이다. 4) 形而上詩의 이미지 사물시나 관념시는 보는 관점 특히 형이상시의 입장에서 보면 각각 한 쪽으로 치우친 시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랜슴 같은 이는 바람직한 제 3의 타입으로서 형이상시(Metaphysical poetry)를 내세운다는 것은 이미 말한 바 있다. 네 마음은/네 안에 있다 하지만/ 나는 내 마음 안에/있다./마치 달팽이가 제 작은 집을 /사랑하듯...//나의 피를 뿌리고/살을 찢던/네 이빨과 네 칼날도/ 내 마음의 아득한 품속에서/어린아이와 같이 잠들고 만다./마치 진흙 속에 묻히는 납덩이와도 같이./............이하중략...... 이 시에서, 우리가 보아야 할 가장 중요한 점은 사상을 감각화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상을 감각화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7. 비유는 어떻게 만드는가 1) 비유의 발생 비유(Figure of speech)는 詩作에 있어서 필수적인 것이지만, 시만이 가지는 것은 아니다. 일상의 담화나 산문에서도 흔하게 볼 수 있다. 교통전쟁, 입시지옥, 등은 신문에서 흔히 볼 수 있고 찌 뿌린 날씨라는 말도 예사로 쓰고 있다. 책상다리, 시계 바늘, 싸늘한 목소리 등과 더불어 시적 비유로서는 죽은 비유, 곧 死比喩(Dead Metaphor)라고 할 수 있지만 일상생활이나 산문에서도 많이 쓰이고 있다. 언어는 음성, 의미, 대상의 세 가지 측면을 가지고 있다. 표현의욕이 강렬하면 강렬할수록 비유를 쓰게 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의 감정을 아주 압축하여 명확하게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까마귀 싸우는 곳에 백로야 가지 마라」라는 시조를 우리는 알고 있다. 「이 몸이 죽어가서 무엇이 될꼬 하니 ,봉래산 제일 봉에 落落長松 되어 있어, 백설이 만건곤할 제 독야 청청하리라」라는 시조도 알고 있다. 까마귀, 백로, 소나무 등이 상징하는 의미는 조선조 사회의 윤리를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그 상징이 가능한 것이다. 까마귀를 「逆臣」,백로를 「忠臣」, 소나무를 「節槪」로 보는 상징은 그러한 윤리의 반영이다. 일상적인 언어는 이미 알고 있는 것만 전달하지만, 비유는 「새로운 세계」를 창조한다. 그러므로, 이미 아리스토텔레스가 「이것은 우리가 남에게서 배울 수 없는 한 가지 일이며, 이것은 천재의 표시이다.」라고 말한 바와 같이, 은유는 천재의 표시이다. 2) 성공한 비유와 실패한 비유 비유를 흔히 기교의 한 가지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의외로 많다. 수사법 전체를 기교하고 보는 이가 있으므로 비유를 기교라고 본다면 그렇게 볼 수도 있으나, 정신이나 상상력이 거으 고려되지 않는 기교는 손재주나 다름이 없을 것이다. 비유를 기교라고 의식적이건 무의식이건 그렇게 생각하면, 좋은 비유, 참신하고 발랄하고 매력 있는 비유는 만들지 못할 것이다. 연면 4천년의 역사를 꿰뚫어 흐르는 「민족혼」위에 터를 닦으라. 불같이 뜨겁고 샘같이 정한 「동포애」의 갸륵한 마음씨로 주춧돌을 놓으라. 독립 자주의 굵고 둥글고 미끈한 대리석 기둥을 화려하게 다듬어 세우라. 이 시는 그 나름대로의 건축적인 뼈대는 가지고 있다. 는 것이다. 민족혼 위에 터를 닦으라, 불같이 뜨겁고 샘같이 정한 동포애, 독립 자주의 굵고 둥글고 미끈한 대리석 기둥을 등은 모두 비유이다. 그러나, 문제는 상상을 자극하는 것도 별로 없고, 미적 쾌감도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이러한 비유들은 결코 성공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비유란 원래 설명을 줄이고 압축하여 새로운 의미로 전환시키는 데서 매력과 생명감을 느낄 수 있는 데, 여기서는 비유자체가 너무도 논리적이어서 그것을 느낄 수 없다. 제목이 인데 이 주제를 논리적으로 전개하고 있는 것 같다. 민족혼, 동포애, 독립 자주 등의 관념어를 겉으로 드러내지 말고 생략하거나, 은밀화해야만 비유로서의 효력을 발휘할 수 있다. 그러기에 옛 시인들은 은유, 직유, 같은 비유를 전혀 몰라도 그들의 작품에서 뛰어난 비유를 쓸 수 있었던 것이다. 黃眞伊의 「동짓 달 기나 긴 밤을 한 허리를 베어 내어...」라는 시조도 그런 보기의 하나이다. 해와 하늘빛이/ 문둥이는 서러워// 보리밭에 달 뜨면/ 애기 하나 먹고// 꽃처럼 붉은 울음을 / 밤새 울었다. -서 정 주, 전문 이 시에서 가장 아름답고 뛰어난 비유는 「꽃처럼 붉은 울음」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기교를 일부러 부려서 만든 조각의 티가 조금도 없는 깨끗한 이미지이다. 天刑의 병이라고 할 수 있는 문둥이의 자기 운명에 대한 처절하고 도 참혹한 슬픔의 울음임을 알 수 있다. 성공한 비유의 일례이다. 언어나 언어로 이루어지는 비유는 사물이나 세계의 새로운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방법이라고도 할 수 있다. 3) 직유와 은유 비유는 언어 자체가 가지는 본질적 기능이다. 언어는 그 수나 그 의미에 있어서 한계가 있으나, 비유에 의하여 무한한 의미를 표현할 수 있다. 직유(Simile)나 은유(Metaphor)등의 비유를 성립시키는 근거라고 할까, 조건이라 할까 그런 것을 좀 살펴보자. 이 문제는 어려운 문제이나 대체로 다음 두 가지를 생각할 수 있다. 첫째, 비유에는 두 가지 사물, 두 가지의 의미의 비교가 있어야 한다. 에서 보는 바와 같이, , 이라는 두 개의 사물이 연결되어 비유가 이루어진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구약 성서 창세기에서 볼 수 있는 천지 창조, 에덴 동산, 아담과 이브의 원죄와 에덴에서의 추방, 이러한 신화도 세계를 인식하는 기능으로서의 비유와 상징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어쨌든, 모든 비유는 두 가지의 다른 사물, 다른 의미의 비교에서 성립된다. 이질적이며 상반되는 두 사물 사이에서 어떤 유사점이 발견되어 그 유사점을 근거로 연결되어야 비유가 효과적으로 성립된다. 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변영로, < 논개 > 이런 경우에는 비유가 되는지, 얼른 대답하기가 어렵다. 비유가 된다면 직유인데, 강낭콩 꽃과 물결, 양귀비꽃과 마음의 단순한 비교하고도 할 수 있고, 직유라고도 할 수 있다. 보통 우리가 직유라고 할 때에는 「처럼」「듯이」「같이」등의 연결어로 본의와 유의가 연결되어 있는 경우를 가리킨다. 그런데 이 시에서는 「보다도」와 같은 차이 보조사에 의하여 연결되어 있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등은 형식적으로는 직유의 방식을 취하고 있으나 직유가 된다고는 할 수 없을 것 같다. 둘째, 비유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본의와 유의는 「이질적」인 것이라야 한다. 이질적이라 함은 종류의 차원을 달리 한다는 뜻이다. 하늘과 땅, 생물과 무생물, 천국과 지옥, 신과 악마, 밝음과 어둠, 슬픔과 기쁨 등, 서로 다른 종류거나 모순 상반되거나 먼 거리에 있는 것을 말한다. 「사람은 갈대가 아니다」라는 부정이 전제되어 이 비유는 성립된다고 할 수 있다. 셋째, 이와 같이 이질적인 두 개의 사물에서 어떤 유사성 또는 관련성이 있어야 한다. 가령「내 사랑은 빨간 빨간 장미꽃 같다」라는 유명한 시구에서 「사랑」과 「장미꽃」과의 유사성은 무엇일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님이 입고 있는 의상, 또는 님의 얼굴이 장미꽃과 같다는 것일까.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이 경우에는, 님에 대하여 느끼는 아름다움의 정서와, 장미꽃에서 느끼는 아름다운 정서-말하자면 정서의 유사성을 기초로 연결된 직유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곧 비유 구조의 요소는 (1) 본의(本義) (2) 유의(喩義) (3) 이질성(異質性 (4) 유사성(類似性)의 네 가지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네 요소가 어떻게 결합되고 어떻게 나타나는 가를 보아서, 직유.은유.상징 등으로 크게 구별 된다. 백악관 앞/ 휑한 거리에/호머의 싯귀 같은 낙엽이/ 바람 따라 휘몰려 가는 거리./그들의 몸집같이/세계 제일 큰 로마식 건물이며/돔식 국회 의사당/그 돔처럼 뚱뚱한 경비원이 지키는/상하양원은 비어 있고/ 관광객 코리아의 발자국 소리가/ 한 동안 복도를 울린다. -김 규 화, 에서 이 시에서는 직유가 네 군데 있다. 이 중에서 「그 돔처럼 뚱뚱한 경비원」이라는 직유를 분석해 보자 등의로 분석되는데, 보는 바와 같이 비유 구조의 네 요소가 다 겉으로 드러나 있다. 직유의 경우에는 대체로 네 요소가 다 표면으로 드러난다. 다음에는 은유를 분석해 보자. 는의 두 요소는 표면에 드러나 있으나, 이질성과 유사성은 겉으로 드러나 있지 않다. 해석에 의해서 그것을 찾아 낼 수 는 있으나, 어쨌든 안으로 숨겨져 있다고 하겠다. 그런데, 상징(Symbol)의 경우에는 「유의」만이 표면에 드러나고, 본의.이질성.유사성 등은 모두 숨어 버린다. 흔히 비둘기는 평화를, 여우는 교활성을, 십자가는 죽음과 같은 희생을, 까마귀는 음흉성을 각각 상징한다고 말한다. 이 경우, 표명에 드러나는 것은 들뿐인데, 이것들은 모두 유의이다. 4) 의인법, 제유, 환유 의인법(Personification)은 앞에서 설명한 은유의 특별한 한 종류이다. 보통 활유(活 )라고도 말한다. 수사학자들 중에는 일찍이 은유를 나누어, 무생물에 생명을 불어넣어 표현하는 은유와, 반대로 생명이 있는 것을 무생물로 만드는 은유의 둘로 구별하고 있다. 이를테면 로마시대의 수사학자 퀸틸리아누스가 그렇게 나누고 있다. 이 경우 앞에 것이 이른바 의인법이다. 창유리에 등을 비비는 노오란 안개 창유리에 주둥이를 비비는 노오란 연기 밤엔 나무도 잠이 든다. -T.S. 엘리어트, 에서 잠든 나무의 고른 숨결소리 자거라 자거라 하고 자장가를 부른다. -이 형기, 에서 안개와 연기, 그리고 나무를 의인화 또는 생명화하여 표현한 것이다. 이러한 의인법은 위로는 신에서부터 아래로는 나무나 돌에 이르기까지 다 가능하다. 의인법은 감정적 오류라고도 하고 , 감정이입이라고 일컬어져 왔던 것이다. 감정적 오류는 감정이 없는 무생물에 감정이 있는 것처럼 인식한 다는 데서 오는 오류라고 말하는 것 같고, 감정이 없는 예술 작품이나 자연의 대상에 자기 자신의 감정이나 정신을 투영하여 이해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다. 생명을 생명 없는 사물로 만들어 표현하는 은유는 의인법과 반대적인 것이다. 이것을 어떤 이는 결정법(結晶法)이라고도 말한다. 「사람은 갈대다」도 일종의 결정법이라고 할 수 있다.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 아예 愛憐에 물들지 않고 喜怒에 움직이지 않고 비와 바람에 깍이는 대로 억년 비정의 緘默에 안으로 안으로만 채찍질하여 드디어 생명도 망각하고 흐르는 구름 머언 遠雷 꿈 꾸어도 노래하지 않고 두 쪽으로 깨뜨려져도 소리하지 않는 바위가 되리라. -유 치 환, 흔히 의지를 드러낸 시라고도 말한다. 그 의지란 인간적인 생명, 모든 감정, 모든 생각, 모든 소리, 다시 말하면 인간에 속하는 모든 것을 버리거나 없애거나 잊어버리고 「바위」같은 비정적인 사물이 되겠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인간 존재, 곧 실존을 초월하여 사물 자체의 존재, 즉자 존재(卽自 存在)가 되고자 의지한 것이다. 이 작품이 암흑 시대인 일제식민지 시대에 씌여진 작품임을 생각할 때, 오히려 현실과의 단절을 의지하는 작자의 처절한 태도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비유의 종류가 몇 가지나 되는지 우리는 잘 알 수 없으나 자세하게 나누면 약 250가지 정도가 된다고 한다. 그런데, 비유를 인접의 비유(Figures of contiguity)와 유사의 비유(Figures of similarity)로 나눌 수 있다. 유사성이란 본의와 유의의 유사성을 말한다. 본의와 유의의 관련성을 가진 비유를 인접의 비유라고 하고 인접의 비유의 대표적인 것이 이른바 제유와 환유이다. 제유에 있어서는 유의가 나타내는 의미나 사물이 전체의 한 부분인 경우를 말한다. 다시 말하면 어떤 부분이(유의) 그것의 전체(본의)를 나타내는 것을 제유라고 한다. 따라서 제유는 본의와 유의와의 관계는 부분과 전체, 혹은 유(類)와 속(屬)의 이른바 양적 관계이다. 미국 대통령을 백악관, 임금을 왕관, 또는 금관, 한국의 대통령을 청와대, 미국이나 미국정부를 워싱턴, 일본이나 일본 정부를 토오쿄오 라고 부르는 것도 환유이다. 8. 상징과 알레고리는 어떻게 만드는가 1) 象徵 비유의 방법을 설명할 때 상징(Symbol)도 은유나 직유와 마찬가지로 본의와 유의가 있다는 것을 말한 바 있다. 다만 상지의 경우, 비유를 구성하는 네 가지 요소, 곧 본의, 유의, 유사성, 이질성 중에서 오직 유의만이 겉으로 드러나고 나머지는 모두 숨어 버린다는 것도 설명하였다. 이를테면 비둘기가 평화를 상징한다고 볼 때, 비둘기라는 유의만이 겉으로 드러나고, 나머지는 모두 숨어버리는 것이다. 19세기 영국의 노만파 시인인 워즈워드의 와 같은 시에서 무지개를 상징으로 본다면 그 의미(본의)는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물론 워즈워드 자신도 무지개는 무엇을 상징한다고 미리 마음속에서 정해 놓고 읊은 것은 아닐 것이다. 영국의 상징주의 시인이라고 하면, 예이츠를 생각하게 될 것이다. 예이츠는 시의 상징 외에 회화의 상징을 들고 있다. 시의 상징에서는 정서 상징과 지성상징으로 나누어서 보고 잇는 것 같다. 정서를 환기하는 것은 음조, 색채, 형식 등이 서로 음악적인 관련을 가질 때 정서를 환기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하얀 달은 하얀 물결 뒤로 지고 시간은 아 나와 더불어 지는 구나! 로버트 번즈의 시로서, 이른바 정서 상징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우수의 정서를 환기하는데, 햐얀 이라는 수식이 특히 그러한 역할을 다하는 것 같이 보인다. 하얀 달, 하얀 물결, 그리고 시간이 와의 관계는 지성으로서는 그 정서를 음미할 수 있다. 이 대목은 따라서 은유적이라기 보다 상징적이라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2) 상징주의의 두 경향 우리가 어떤 사상이나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를 통해서 나타내는 것이다. 사상을 사상 그대로, 감정을 감정 그대로 표현하는 것은 가장 서투른 방법이다. 는 표현은 시가 되지 않으나, 는 표현은 시가 된다. 는 것은 사랑의 고백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이 말하자면 이다. 구체적 이미지는 마치 이미지즘 시처럼 거기서 사상이나 감정을 배제한 순수한 것도 있으나, 대부분 그것은 어떤 사상이나 감정을 환기한다. T.S 엘리어트는 그것을 객관적 상관물이라고 말한다. 가령 3) 풍유 이제 우리는 풍유, 곧 흔히 알레고리(Allegory)라고 하는 비유법을 살펴봅시다. 현대 시에서는 옛날 시만큼 알레고리를 많이 쓰고 있지는 않지만, 많이 씀으로써 현대시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알레고리는 직유, 은유, 상징등과 마찬가지로 원래 나타내고자 한 뜻과, 그것을 나타내기 위하여 비유로 끌어들인 뜻-곧 본의와 유의의 구조를 이루고 있다. 감장새 작다 하고 大鵬아 웃지 마라./ 구만 리 長天을 너도 날고 저도 난다. 두어라, 一般飛鳥이니 네오 긔오 다르랴. -李 澤- 감장새와 대붕을 등장시켜 사람을 함부로 깔보고 멸시해서는 안 되는 뜻(본의)을 나타내고 있다. 풍유라고 하는 것은 대체로 이와 같이 동물, 식물 등을 의인화한 이야기, 곧 일종의 우언(寓言)이라고 하겠다. 이솝의 우화, 신약성서의 탕아의 비유(마태 13장~9절) 등은 모두 이러한 우언이다. 그런데 의 주인공은 인간이다. 우화는 알레고리와 구별하기도 하고 , 알레고리 속에 포함시켜서 보는 경우도 잇다. 굳이 구별 한다면, 우화는 거의 동식물이 주인공으로 등장하여 유의를 이루고, 교훈적인 것을 내포하고 있으나, 알레고리는 사람도 등장할 수 있으며, 반드시 교훈적인 것이 아니어도 괜찮다. 현대시에서는 알레고리가 직유, 은유 만큼 즐겨 쓰이지는 않고 있다. 그 이유는, 첫째로 오늘의 문학작품은 그 시인, 그 작가의 개인의 사상 감정이나 세계관을 표현한다는 생각, 둘째는 감각적으로 보고 듣고 만질 수 있는 현상만이 진실한 세계라는 생각-이 두가지 이유 때문인 것같다. 그리이스 로마의 신화, 성서의 많은 비유담이 모두 알레고리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이 살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 신소설인 안국선의 , 조지 오웰의 등도 모두 알레고리 소설이다. 흔히 우리는 현실의 부조리를 들먹거리고 현실 비판이니 참여 문학이니 하는 말을 쓰고 있다. 부조리라는 현실을 비판적으로 표현하려고 할 때 노골적으로 또는 직설적으로 표현 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그런 경우, 동물이나 식물을 의인화한 사건을 구성함으로써 간접적으로 현실의 보조리한 어떤 단면을 암시할 수 있다. ㅡ이런 관점에서 볼 때 알레고리는 결코 죽은 비유법이 아니라, 현대시의 새로운 영역과 방법을 열어 주는 중용한 분야임을 알게 될 것이다. 9.감정은 어떻게 표현하는가 1) 感情과 情緖 우리는 흔히 知, 情, 意라는 말을 쓰는데, 감정은 이 중의 정(情)에 해당하는 말이다.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감정은 미묘하고 복잡하고, 다양해서 일일이 다 들 수는 없으나, 우리가 느끼는 심정의 모든 움직임은 다 감정이라 할 수 있다. 감정은 주관성과 개별성을 가지고 있음이 그 두드러진 특징이다. 감정이라는 말의 영어(Feeling) 나 독일어(Gefuhl)는, 는 뚯의 동사에서 온 말이라고 한다. 또 프랑스어의 감정도 추위나 더위를 느낀다는 듯의 동사에서 만들어진 말이라고 한다. 감정이 일어나는 원인은 사물과의 접촉, 곧 본다든지, 듣는다든지, 맡는다든지, 만진다든지 하는 감각적 자극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곧 이러한 감각적 자극에서 형성되는 자기의 기분, 자기의 느낌, 자기의 심정 등이 감정이다. 그러나 사물의 자극을 깨닫거나 인식하느 感性이나 知覺과는 다른 것이다. 시에서는 감정이라는 말과 정서(Emotion)라는 말이 섞이어 쓰이고 있다. 근래에는 정서라는 말이 더 많이 쓰이기도 한다. 정서란 감정 주에서 격렬하고 육체적인 감정이다. 그래서, 어떤이는 情動이라는 말을 대신해서 쓰고 있다. 아이들이 운덩에서 우승을 했거나, 상을 탔거나 하면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르고 깡충깡충뛰면서 기뻐한다. 그 때의 기쁨도 몸짓을 동반한 정서다. 정서란 일시적 현상이긴 하나, 이와 같이 몸짓을 동반한 격렬한 감정인 것이다. 내 마음 어딘 듯 한 편에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돋혀 오르는 아침날 빛이 빤질한 은결을 돋우네 가슴엔 듯 눈엔 듯 또 핏줄엔 듯 마음이 도른도른 숨어 있는 곳 내 마음의 어딘 듯 한 편에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김영랑, 전문 감정 중에는 情操(Sentiment)라는 것이 있다. 학문, 도덕, 종교와 같은 일정한 문화 가치를 가진 사물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감정이 통합된 것을 가리키거나, 인간 관계에 있어서 어떤 사람에게서 느끼는 감정이 변함이 없고 계속적인 것이면 그것도 정조라고 할 수 있다. 부모가 자식에게 가지는 계속적인 애정은 정조이다. 또 우리는 시에서 어버이의 사랑을 읊은 시를 많이 볼 수 있는데, 그러한 시에 표현된 감정도 정조이다. 부부의 사랑도 계속적이며 변함이 없는 것이라면, 그것도 정조이다. 백제 가요인 는 아내가 남편을 기다리면서 남편의 신변을 염려하는 심정을 읊은 것인데, 여기에 표현된 애정도 일종의 정조이다. 당신은 신앙이 있습니까? / 사나이의 영혼이 북극성처럼 빛났다. 당신의 신은 어디에 계십니까? 전도사가 다시 물었다. / 사나이는 묵묵히 돌아서서 어머니가 묻힌 청산을 가리켰다. -임병호, 전문- 이것은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지극한 애정을 읊은 거이다. 돌아가신 후에도 신앙처럼 변함이 없는 이 애정은 분명히 정조하고 할 수 있다. 2) 감정과 센티멘탈리즘 19세기 영국의 노만파 시인인 워즈워드는 시를 정의하여, 라고 말한 바 있다. 이처럼 감정이 시의 중요한 요소가 된다. 19세기 노만주의 시인들은 지성이나 시의 형태보다도 특히 감정을 가장 중요시했다. 그러니까 노만주의 시는 힘차고 풍부한 감정을 아무런 제한이나 구속이 없이 자연적으로 표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히 주정주의(主情主義)의 태도하고 할 수 있다. 19세기는 감정 시대이기도 하다. 우리 나라에서 특히 감정이 중시된 시대는 1919년 전후의 일, 특히 장미촌 ,폐허, 백조 시대라고 할 수 있다. 3.1운동 그 자체의 역사적 의의는 크나 이 운동의 실패로 인한 실망, 좌절, 불안, 근심, 울분, 허무, 고독등의 시대적 분위기, 일본을 거쳐 들어온 유럽의 세기말의 사조, 당시의 시인들이 대부분 20대의 젊은 나이라는 점-이러한 조건 때문에 당시의 시들이 감정 표현을 위주로 노만주의적 경향으로 달린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고 하겠다. 현실을 잃은 감정의 무한한 세계가 도달할 수 있는 종착지는 바로 이러한 센티멘탈리즘 밖에는 없을 것 같다. 3) 지성과 감정 감정의 과잉에서 마침내 센티멘탈리즘으로 빠진 노만주의 시에 대한 비판이 1930년 전후부터 불길처럼 일어 나기 시작했다. 모더니스트로 자처한 시인은 시와 이론의 양면에 걸쳐 1920년 대의 센티멘찰리즘의 시를 혹독하게 비판하면서, 우리 나라의 시사(詩史)를 지성 중시의 모더니즘으로 전환시키는 데 큰 몫을 떠맡았던 것이다. 1935년 지에 발표한 김기림의 이라는 글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또한 시를 감정에 맡겨 두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감정은 늘 혼돈하려고 하고 비만하려고 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이 감저으이 비만이 다시 말하면 감상이다. 시를 이러한 비대증에서 건져내서 그것에게 스파르타 인과 같은 건강한 육체를 부여하는 것이 오늘의 시인의 임무다. 이와 같이 모더니스트는 노만주의, 특히 감상적 노만주의를 배척하고, 지성을 내세우면서 시의 명랑성과 건강성 및 회화성을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김 기림이 배척한 것은 물론 노만주의만이 아니다. 노만주의와 관계가 있는 모든 사조, 이를테면 휴머니즘, 톨스토이적인 인도주의, 무의식의 세계와 꿈의 세계를 기록하는 초현실주의, 영감, 시의 애매성, 자연만을 읊고 문명과 도시를 외면한 시-이러한 것들을 모두 배척한 것이다. 모더니스트들의 이론적 업적으로는 (1) 시에서 감정보다는 지성을 중시한 점 (2) 시의 음악성이나 시간성보다는 이미지의 조형을 중시하여, 시의 명랑성, 회화성, 건강성을 회복하려고 한 점, (3) 시의 방법이나 기교등에 무관심했던 종래의 태도를 비판하고 새로운 방법론을 주장한 점 (4) 자연이나 개인의 감정마을 읊던 종래의 태도에서 도시와 문명으로 눈을 돌리게 한 점, (5) 현실을 등진 상상의 무한한 비상에 제동을 걸고 정확하고 한정된 이미자를 창조하는 상상력을 곧 지적 상상력을 내세운 점 등이다. (A) 바다는 다만 / 어둠에 반란하는/ 영원한 불평가다. 바다는 자꾸만/ 헌 이빨로 밤을 깨문다. (B) 보라빛 구름으로 선으로 두른/ 회색의 칸바스를 등지고/ 구겨진 빨래처럼/ 바다는/ 산맥의 첨단에 걸려 퍼덕인다. 1920년대의 황석우, 박종화, 이상화, 박영희 등의 노만파 시인들의 작품과는 판이하게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노만파 시인들의 작품에서 볼 수 있는 어둠, 눈물, 꿈, 한숨, 죽음, 허무 등의 감정을 볼 수 없다. 감정의 노출보다는 그러한 감정을 되도록 제거하고, 대상을 그림처럼 선명한 이미지로 표현한 것이다. 센티멘텔리즘을 거부하고 건강하고 밝은 명랑성을 통제하고 계획된 이미지로 그려낸 것이라고 하겠다. 4) 지성의 기능 흔히 지성(Intellect, Intellegence) 이라고 하면 인틸렉트아 인텔리전스는 구별할 수도 있다. 사고 나 사색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지성이란 을 의미한다고 본다면, 이 속에는 사고 나 사색도 포함될 수 있고, 비판이나 판단 작용도 포함될 수 있다. 이미 모더니스트의 시에서 본 바와 같이, 지성은 감정과 상상력을 통제하고, 현실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방향을 규제하고 있는 것이다. 감정과 상상력을 적절하게 통제하고 조절하는 것이 지성의 가장 중요한 기능으로 생각된다. 10. 기법은 어떻게 향상되는가 1) 기법의 다양성 이라는 말을 가끔 듣는다. 머리가 비어 있다는 것은 시에 사상이 없다는 뜻이요, 손재주란 이른바 기법(Technique)에만 능숙함을 이르는 말이다. 시의 기법은 삶과 존재의 근원에 뿌리를 내리고, 그런 근원에서 의식적으로 확립된 것이라야 할 것이다. 리듬, 이미지, 시어, 시의 구조 은유, 직유, 상징, 알레고리 등의 비유-이 모두가 기법이라면 기법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는 먼저 기법을 익히는 과정으로서 (1)정형시에서 자유시로 나아가는 과정 (2) 언어에 대한 감각의 훈련 (3) 시의 발상 차원의 단계 (4) 객관적 상관물 (5)중층 묘사 (6) 자동 기술법 등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2) 정형시에서 자유시로 시를 처음 써보는 사람은 을 먼저 배우고, 그 다음에 정형시에서 자유시의 순서로 나아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 희곡에서 먼저 그 구조와 구성의 엄밀성을 배워 두는 일은 시작의 기초가 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면, 먼저 정형시를 익혀야 할 이유를 좀 알아보기로 하자. 시조를 먼저 써보라는 것은 반드시 시조 시인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시조가 가지고 있는 정형적 구조를 익혀, 그 형식적 규제를 터득하는 것이 자유시의 전제적 토대가 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비오자 장독간에 봉선화 반만 빌어 해마다 피는 꽃을 나만 두고 볼 것인가 세세한 사연을 적어 누님께로 보내자. 누님이 편지 보며 하마 울까 웃으실까 눈앞에 삼삼이는 고향집을 그리시고 손톱에 꽃물 들이던 그날 생각하시리. -김 상옥, 전문- 이것을 숫자로 표시하면 다음과 같다. 3 4 4 4 (4음보) 3 4 4 4 (4음보) 3 5 4 3 (4음보) 이것은 기준이 되는 자수율이고, 실제의 작품은 이 기준에서 다소 오르내리고 있다. 시조 짓기에 있어서 종장 초구 3자는 반드시 , 그 다음의 5자는 되도록 지키도록 되어 있다. 이러한 자수율의 통제 훈련을 받는다는 것은 시의 형식적 구조의 체득을 위하여 대단히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한 시 절구는 起, 承 , 轉, 結로 이루어진다. 이것은 시상의 전개과정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다. 기는 시작이요, 승은 그것을 이어받아서 부연(敷衍)전개하고, 전은 전개된 시상을 한 번 크게 전환시키며, 결은 끝 맺는 것이다. 시조의 시상 형성 과정도 대체로 이와 같으나 종장은 전결을 포함한다. 정형시부터 먼저 써보고 그 다음에 자유시로 넘어가는 것이 바른 순서인데, 이러한 순서를 밟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다. 첫째, 율격의 묘미를 터득하게 된다. 율격이라는 것은 음수의 제한이 있다. 리듬의 제한 속에 들어감으로써 사상 감정과 리듬의 조화 , 사상 감정이 리듬에 미치는 영향, 반대로 리듬이 사상 감정에 미치는 영향--이러한 두 요소의 구조적 관계를 유기적으로 터득하게 된다. 둘째, 의 묘미를 터득하게 된다. 압축과 생략은 산문과는 다른 시의 본질적 측면인데, 이런 측면은 은유나 상징과 같은 비유에서도 가능하지만, 율격에서 받는 형식적 통제에서도 가능한 것이다. 아무리 사상 감정이 풍부하더라도 리듬을 지키려고 하면 부득불 감정이라는 것은 형식적 통제를 받을 때 효과적으로 표현된다. 셋째, 운율의 묘미를 체득함으로써 비로소 그 다음 단계인 자유시를 쓸 수 있다는 점이다. 어둠이 있기 때문에 빛의 밝음을 알 수 있다. 리듬의 구속, 제한 , 통제의 묘미를 깨닫게 되는 것은 자유시의 내재율을 깨닫게 되는 터전이 된다. 자유시를 써 보면 완전히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행을 끊고, 행을 모아서 연을 만드는 형식적 구속이 따르는 것이다. 내재율의 적절한 조화도 요구된다. 자유시라고 해서 리듬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것이 아니다. 시는 형식적 구속과 그것에 저항하는 정신과의 갈등에서 창작되는 것이라고 하겠다. 3) 언어에 대한 감각 시는 언어의 예술이며, 시인은 언어의 직공(職工)이다. 시인은 언어를 매만져 시를 만드는 사람이다. 마치 요술사(妖術師)와 같이, 언어를 마음대로 자유롭게 다룰 줄 알아야 한다. 그러자면 언어에 대한 감각적 훈련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어떤 언어가 부드럽고 아름답고 어떤 언어가 거칠고 투밖하고 아름답지 못한가, 어떤 언어가 감각적이고 생채가 있고 어떤 언어가 관념적이며 어두운가, 하는 것을 식별할 줄 알아야 한다. 언어는 의미와 음성과 이미지의 세 요소를 가지고 있다. 이 세 요소로 이루어진 복합체는 실제로 천차 만별의 미묘한 느낌을 주는 것이다. 언어는 흔히 살아 있다고 한다. 빛깔, 음상, 무늬, 감촉, 무게, 리듬...이러한 여러 가지의 미묘한 감각을 식별할 줄을 모른다면, 그런 사람은 언어 감각에 대한 훈련이 모자란다는 증거이다. 언어는 의미, 음성, 이미지의 세 요소를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세 요소로 이루어진 언어도, 그 언어를 쓰는 사람, 그 언어의 사회적, 문화적 배경, 지역적 배경, 역사적 배경 등에 따라서 그 의미와 어감도 다양하게 드러나기 마련이다. 돌담에 소색이는 햇발같이 풀 아래 웃음 짓는 샘물같이 내 마음 고요히 고흔 봄 길 위에 오날 하로 하날을 우러르고 싶다. 새악시 볼에 떠오르는 부끄럼같이 詩의 가슴을 살포시 젖는 물결같이 보드레한 에메랄드 얕게 흐르는 실비단 하날을 바라보고 싶다. -김 영 랑, 전문 언어감각이 얼마나 셈세하고 세련되어 있는가를 볼 수 있는 시다. 맑고 고운 정서와 섬세하고 부드러운 언어감각, 미묘한 음악성 등이 잘 드러나 있다. 특히 음성적 어감은 절묘하다고 하겠다. 4) 발상차원의 단계 일본의 현역 시인인 이토오케이이치의 말에 의하면 자기의 작시 기술을 향상시키기 위하여는 에서부터 단계에까지 나아가기 위하여, 시의 발상의 차원을 높혀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한 그루의 나무를 보고 있다고 가정하고, 그것을 보는 차례를 다음과 같이 들고 있다. (1) 나무를 그대로 나무로서 본다. (2) 나무의 종류나 모양을 본다. (3) 나무가 어떻게 흔들리고 있는 가를 본다. (4) 나무의 잎사귀가 움직이고 있는 모습을 세밀하게 본다. (5) 나무 속에 승화(昇華)하고 있는 생명력을 본다. (6) 나무의 모습과 생명력의 상관 관계에서 생기는 사상을 본다. (7) 나무를 흔들고 있는 바람 그 자체를 본다. (8) 나무를 매체(媒體)로 하여 나무의 저쪽에 있는 세계를 본다. 이 차례는 이토오 케이이치 시인이 말하고 있는 그대로, 나무를 보는 차원이 한 단계 한 단계 차례대로 상승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1)에서 (4)까지는 나무를 눈에 비치는 그대로를 보고 있을 따름이다.(객관적 관망) 그러나 (5)와 (6)은 단지 그것뿐이 아니고 보이지 않는 것까지 보려고 한다. (7)과 (8)은 그것을 더욱 깊이 추구하고 있다. 5) 객관적 상관물 시를 처음 공부하는 사람에게는 조금 어려운 말이 될는지 모르나, 여기서 엘리어트가 말하는 이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좀 살펴 보아야 할 것 같다. 앞에서 일본시인 이토오 케이이치가 말한 발상의 과정을 예로 들었거니와, 그 중의 마지막 단계인 (8)의 는 것은 , 바로 나무가 상징성을 띠거나, 엘리어트가 말한 객관적 상관물이 되어야 가능한 단계이다. 곧 객관적 상관물을 통하여 표현하고자 의도했던 세계를 암시하는 것이다. 암시하여 놓음으로써 독자가 그 수수께끼를 서서히 풀어나가듯 점차적으로 의도했던 세계로 들어가는 데서 시의 기쁨을 느끼는 것이다. 엘리어트가 말하는 객관적 상관물이란 자기가 의도한 사상이나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직접 표현할 수 없다고 보아 추상적인 관념이 많은 관계로 그대로 드러낸다면 시가 될 수 없다.이러한 추상 관념을 서서히 환기할 수 있는 다른 구체적, 감각적 사물이나 사건을 가져와야 한다. 서 정주의 에서는 해방된 겨레의 환희와 희망이라는 추상관념을 직접 드러내지 않고 뺨 부비며 열려 있는 꽃봉오리 라는 구체적 이미지로 암시한 것이다. 이것이 엘리어트가 말하는 객관적 상관물이요 말라메르가 말한 바와 같이 서서히 대상을 환기시키는 것이다. 6) 중층 묘사의 방법 객관적 상관물과 더불어 중요한 방법의 하나로서, 중층 묘사(Multipul description) 라는 것이 있다. 증층 묘사는 우리 현대시에 있어서 가장 결여되어 있는 방법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앞으로 우리 현대시의 중요한 방향이라는 점에서 중요시되어야 할 것이다. 앞으로는 감각과 사사이 통합된 시가 발전되어야 하겠고--김 현승의 시가 대체로 이 방향의 가능성을 보여 주고 있다-그러자면 자연히 객관적 상관물과 더불어 중층 묘사의 방법이 강조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중층 묘사란 한 가지 대상이나 사상에 대한 구체적 표현(감각적 표현)과 추상적 표현(사상적 표현)을 교차시켜 서술하는 방법이다. 말하자면, 감각적 레벨에서 묘사하고 , 다시 그것을 추상적 레벨에서 관념적으로 서술하는 것이다. 이렇게 표현하면, 한 가지 대상이나 사상이 이미지와 관념 작용이 교차되어 입체적으로 드러나게 된다. 있었을 법한 것은 한 抽象이다 다만 사색의 세계에서 영구한 가능으로 남는, 있었을 법한 것과 있은 것은 한 끝을 지향한다. 그런데 그 끝은 언제나 현재한다. 발자취들이 기억 안에 反響한다. 우리가 통하지 않는 복도를 내려가 우리가 통 열지 않은 문을 향하여 장미원 속으로. -엘리어트, 에서 는 추상 표현이다. 이러한 관념만으로 일관되어 있다면 산문이지 시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다음에 라는 구체적 이미지로 반복되어 입체적 표현을 보여 주고 잇다. 추상과 구체가 교차된 중층 묘사를 하고 있다. 7) 가동기술법 초현실주의의 방법은 자동 기술법(Automatisme)만이 아니지만, 자동 기술법은 초현실주의 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방법의 하나이다. 자동기술법은 초현실주의의 이론적 지도자였던 프랑스의 시인 앙드레 브르통이 고안해낸 방법이다. 심리주의 소설의 방법으로 알려져 있는 의식의 흐름과 거의 비슷한 자도 기술법은 프로이트의 정신 분석 방법을 응용하여 정신병 환자에게서 말을 들으려고 한 것을 자기 자신에게 들으려고 시도한 데서 고안해 낸 것이다. 말하자면 현실의 이미지가 아니라, 무의식의 이미지, 꿈의 이미지인 것이다. 나는 깨달았다 그녀의 음성의 회상이 나무에 머물었는데 나의 육체는 나의 사상을 조용히 흔들고 있었다. 부딪힌 돌멩이가 정오를 알렸다. -필립 수포, 의 전문 이러한 시는 해석하기가 매우 어렵다. 그러나, 심층의식 속에서의 우연한 접촉 또는 폭력적인 강제 결합에 의한 이미지의 무리들을 느낄 수는 있다. 11 詩壇에는 어떻게 데뷔하는가 1) -의 관문 제한된 일정한 편수의 작품을 신문사의 문화부에 보내면 거기서 위촉한 심사 위원에게 심사를 맡긴다. 당선이 확정되면 기성 시인으로 인정을 받는다. 천 편이상이 넘는 시에서 당선자 한 두 사람을 고르므로 당선 확률은 거의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를 통과하는 일 -각 문학지마다 심사 위원이 내정되어 있어서 투고자들이 심사 위원을 미리 알고 있다. 심사 위원은 투고자의 작품을 보고 재능이 있고, 장래성이 있다고 판단할 때에는 개별적으로 만나거나 서신으로 지도하는 일이 가능하다. 지도를 할 수있고 지도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은 추천제 만이 가지고 있는 강점이라고 말할 수 있다. 보통 추천제는 2회 내지 3회를 거쳐야 되는데 그 기간은 1년에서 2년 정도는 걸린다. 그 동안에 투고자는 수십 편 내지 백여 편을 써서 보내야 하므로 추천제란 일종의 훈련 기간을 가진 제도라고 할 수 있다. 2) 동인 활동이나 시집 간행으로서도 가능하다. -기성시인의 충고나 지도를 받은 경험이 없기 때문에, 일단 시집을 내거나 동인지를 통해서 문단에 ㅣ나오면 그대의 자기 역량이 그대로 고정되어 버리는 일이 많다. 끊임없이 자기 성장은 자기 역량과 작품의 성과에 관해서 항상 자기 비판을 게을리 하지 않는 겸허한 자세를 취하는 데서 가능한 것이다. 특히 선배나 동료의 비판이나 충고를 솔직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아량이 있어야 한다. 그러면 어떠한 경향의 시, 어떤 방법의 시를 쓰는 것이 좋을까 이 문제는 우리 시의 몇 가지 방향을 앞에서 예시하였다. 곧 (1) 전통적 서정주의 (2) 이미지즘 또는 사물시 (3) 노만주의 경향의 관념시 (4)메시지나 사상 전달을 위주로 한 현실적의적 관념시, (5) 심리주의(초현실주의) 시, (6) 형이상시-이러한 방향들이 있다. 이러한 여러 가지 방향을 개별적인 측면이나 통합적인 측면에서 받아들여 자기의 좌표를 성정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부록- 읽어야 할 주요 詩작품 1.빗소리-주요한 / 2. 님의 침묵-한용운 / 3.복종-한용운/ 4.사의 예찬-박종화/ 5.산유화-김소월 6.초혼-김소월 / 7.봄은 고양이로다-이장희/ 8.백록담-정지용/ 9.비로봉-정지용/ 10.구성동-정지용 11.모란이 피기까지는-김영랑/ 12.내 마음을 아실 이-김영랑/ 13.성북동 비둘기-김광섭 14.마음-김광섭/ 15.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신석정/ 16.아직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신석정/ 17.광야- 이육사/ 18.절정-이육사/ 19.오감도-이상/ 20.거울-이상 / 21.꽃나무-이상/ 22.깃발-유치환/ 23.울릉도-유치 환/ 24청춘-유치환/25.생명의 서-유치환/26.국화 옆에서-서정주/27.귀촉도-서정주/28.동천-서정주/29.설야 -김광균/30.추일서정-김광균/31.뎃상-김광균/32.눈물-김현승/33.가을의 기도-김현승/34.프라타나스-김현 승/ 35향현-박두진/36.해-박두진/37.고풍의상-조지훈/38.승무-조지훈/39.봉황수-조지훈/40.나그네-박목월 /41.청노루-박목월/42.또 다른 고향-윤동주/43.십자가-윤동주/44.초토의 시11,12-구상/45.백련-구상/46.귀 향-김춘수/47.꽃-김춘수/48.향수와-김춘수/49.부재-김춘수/50.목숨-신동집/51.얼굴-신동집/52.악수-신동 집/ 53.송신-신동집 이 내용은 문 덕수 저; 을 요약 정리한 것입니다           body{border :2 solid red :} .comment {COLOR: green}.comment_pos {COLOR:#FFCCCC ; BACKGROUND-COLOR:#FFCCCC }.recomment {COLOR: blue}.recomment_pos {COLOR: #ffffff ; BACKGROUND-COLOR:#ffffff}#uploader_replyWrite-5904 {VISIBILITY: hidden} textarea{background color:url(http://cfile277.uf.daum.net/image/194CA6484DE9CEB11B8D36); background-repeat:no-repeat;background-position: bottom center !important; ; border-width:1; border-style:dotted;}
1033    詩를 왜 사랑하는가?! 댓글:  조회:4555  추천:0  2016-01-22
우리는 왜 시를 사랑하는가?             .bbs_contents p{margin:0px;}     정호승(시인)     우리들은 누구나 가슴에서 치솟아 오르는 시의 덩어리들을 하나씩 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남북의 정상이 만나는 순간 그 자체가 하나의 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정도의 감격이 있는 시를 우리가 평생 동안에 한편이라도 쓸 수 있다면 얼마나 큰 기쁨이겠습니까? 두 사람이 손을 맞잡은 것을 보면서 문득 몇 년 전 백두산 천지에 갔을 때 일이 떠올랐습니다. 저는 1989년경 중국 땅을 통해서 백두산 천지에 가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천지를 바라보면서 '아! 이 천지는 절대자가 쓴 시다'라는 생각이 저절로 우러났습니다. 남북의 두 정상이 만나면서, 북한이 우리들에게 준 어떤 감동과 같은 것이 가슴속에 자리잡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동화작가 정채봉 씨가 쓴 짧은 시가 있습니다. 그 역시 백두산 정상에 올라 천지를 본 다음 '이렇게 큰 산도 눈물샘을 가지고 있구나' 하고 노래했지요. '슬픔 없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부제는 백두산 천지에서)는 제목의 시인데, '이렇게 크고 웅대한 산도 가슴속에 눈물샘을 감추고 있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습니다' 하는 감동이 표출된 시입니다. 어느 긴 시보다도 정채봉의 짧은 시가 제 가슴을 울렸던 적도 있습니다. 우리는 백두산을 항상 민족의 상징으로만 생각하고 분단과 통일의 상징으로만 여겨 왔습니다. 시를 쓰는 제 경우에는 '절대자가 쓴 시'라고 생각했었는데, 그가 '천지는 백두산이 흘린 눈물샘이다'라고 노래하자, 저도 모르게 가슴이 뭉클해졌던 것입니다. 이런 일들을 돌아보면 시의 소재는, 사실은 우리 일상 어디에나 널려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현재 21세기를 맞이하면서 정치·경제적으로 급변하는 삶의 환경들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저는 1970년대에 20대를 보냈고, 1960년대에 중학생이었고, 1950년대에 초등학교를 다니기 시작하여 유년 시절을 보냈습니다. 오늘의 시점에서 보면, 저의 중고등학생 시절과 지금 중고등학생들의 삶, 그리고 제가 이십대를 보낸 경험과 오늘 이십대들의 삶의 형태는 너무나 다르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습니다. 저에게는 필요 없으리라고 생각해 왔던 휴대폰이 이제는 없어서는 안 될 필수품이 되어 버렸습니다. 예를 들어 아침 출근길에 휴대폰을 집에 놔두고 왔을 때면 하루종일 마음이 불안합니다. 또 사무실 책상 위에 휴대폰을 놓아둔 채 퇴근이라도 했을 때에는 개운하지가 않습니다. '다시 가서 가지고 올까', '꼭 만나야 할 사람에게 걸려올 전화를 놓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 뭔가 불안하고 허전합니다. 이것은 결국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기계 친화적인 삶을 철저하게 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금까지는 저는 팩스 세대였는데, 할 수 없이 저도 이메일(e-mail)을 통해서 원고를 보내고, 이메일로 원고가 도착된 것을 확인하는 걸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얼굴을 모르는 사람과의 채팅에도 도전하여, 야후(YAHOO) 사이트를 통해서 들어가 보기도 했습니다. 채팅 방에서 「'나는 오십대 아저씨입니다'라고 솔직하게 밝히면 쫓겨나겠지. 그러면 20대라고 그럴까. 이름을 뭐라고 대지」 하는 궁리에 부산한 적도 있습니다. 이렇듯 우리 삶의 형태는 짧은 기간 안에 너무나 바뀌어 버렸습니다. 우리들이 지나치게 기계 친화적이고 정보 친화적인 삶 속에 몰입되어 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앞으로도 그럴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입니다. 기계에 매여 있는 삶에서 벗어날 때 제가 처음 전화를 걸어본 것은 중학교 2학년 때입니다. 은행원이셨던 아버지에게 어머니가 갑자기 급하게 연락할 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에게 심부름을 시켰는데, "아무개 집에 가면 전화가 있다. 그 집에 가서 아버지한테 전화를 드려서 이러이러한 이야기를 전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머니의 말대로 그 집에 갔더니, 정말 안방에 전화기가 있었습니다. 그 집에 심부름을 가면서 얼마나 가슴이 두근거렸는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전화를 한 번도 사용해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가르쳐준 대로 다이얼을 돌렸더니, 한참 후 수화기 속에서 아버지의 목소리가 흘러 나왔습니다. "호승입니다!" 하고 이야기를 하는데, 제가 생각해도 놀랄 만큼 제 목소리가 무지무지하게 컸습니다. 어찌나 크게 고함을 질렀던지 옆에 있던 주인 아주머니가 깜짝 놀라셨습니다. 제 목소리가 아버지한테 들리지 않을 것 같아 목청껏 높여 전화를 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그 이후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제 소원은 줄곧 전화 있는 집에서 살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처음 가진 직장이 숭실고등학교 교사 자리였습니다. 시동인 활동을 하면서 주소와 이름을 교환했는데, 가장 기뻤던 것은 저의 연락처인 전화번호가 찍힌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각자 전화기를 하나씩 가지고 사는 이런 시대에 살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전화선을 통해서 인터넷 세상 속으로 들어가기도 하죠. 글만 쓰고 지내다가 얼마 전 '현대문학사' 출판부를 맡아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얼마 전 제 직장에 올해 고등학교를 졸업한 여직원이 두 명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오후 두세시만 되면, 그녀들이 자기 책상에 앉아서 휴대폰을 들고 막 누르는 거에요. 20분도 좋고 30분도 넘게 그러는 걸 보면서, "직장에 와서는 휴대폰을 가지고 그러는 게 아니다."고 나무랐습니다. 하지만 제 말에 그들이 얼마쯤 야속해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렇듯 전화는 우리 깊숙이 들어와 있습니다. 전화기 저쪽 상대방의 얼굴을 보면서 전화를 하고 싶다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요즈음에는 아무리 멀리 있는 사람이라도 지척인 듯 말을 주고받을 수 있는 화상 전화기까지 나왔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급변하는 기계 친화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또한 앞으로도 기계 친화적이고 정보 친화적인 삶에서 벗어날 수 없으리라고 여겨집니다. 얼마 전 중앙일보에 나온 한 기사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사이버 결혼식이라는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결혼한 지 1년 내지 2년 된 신혼부부인데 여자 쪽에서 이혼소송을 제기해서 승소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결혼 전에 남자가 컴퓨터에 미쳐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렇게 심할 줄은 미처 몰랐다는 것이 여자 쪽에서 제기한 이혼의 사유였어요. 그런데 남자는 사이버 공간에 들어가서 밤새도록 어떤 여대생과 결혼해서, 사이버 공간 속에서 둘이 여행도 가고 같이 잠도 자고 하면서 꼬박 밤을 새우고 뜬눈으로 출근하는 게 다반사였답니다. 퇴근해 돌아오면 또 사이버 공간 속의 그 여대생과 만나서 신혼살림을 살고 애도 낳고 그렇다는 겁니다. 남자의 부인이 너무 화가 난 나머지 참다못해 이혼 소송을 제기했고, 이혼 판결이 났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렇듯 사이버라는 제3의 공간은 우리들에게 혁명의 공간입니다. 그 가상의 공간이 현실의 공간에 사는 우리의 삶을 침범하여 파괴시키고 있습니다. 저는 유년 시절에 팽이도 직접 제 손으로 만들고 썰매도 만들었습니다. 전승현이라는 분이 우리 나라 최초로 스케이트를 만들었습니다. 그분의 스케이트를 보고 얼마나 그게 타고싶었는지, 제가 직접 나무를 가지고 발 밑에 철사를 대어서 서서 탈 수 있는 스케이트를 만들어서 타곤 했습니다. 제가 어릴 때는 놀이기구를 직접 만들고 제기나 연도 직접 만들고, 여름에는 여치집조차도 만들었습니다. 자연 친화적인 놀이를 통해서 유년 시절을 보냈는데, 요즈음 아이들은 변신 로봇을 갖고 놀기를 더 좋아하고, 좀더 나이가 들면 컴퓨터 게임에 빠져들곤 하죠. 자동차만 해도 우리는 검정 고무신을 두 개 포개어서 자동차라고 생각하면서 앵앵하는 소리도 직접 내면서 놀았는데, 지금은 리모콘으로 움직이는 자동차를 가지고 놀지 않습니까. 또 컴퓨터 게임에 푹 빠져서, 컴퓨터 게임을 하지 않으면 살 수 없다는 젊은 세대들이 부쩍 늘어가고 있다고 합니다. 저도 두 아들의 아버지입니다. 저는 막내아들이 중학생입니다. 그 애가 노는 것을 보면 책과는 거리가 멉니다. 심지어 아버지인 제가 쓴 책도 읽지 않습니다. 제가 얼마 전에 어른이 읽는 동화집 '항아리'를 내게 되어, '사랑하는 아들 후민에게'라는 사인과 함께 아들 방에 놓아 두었습니다. 어느 날 너 '항아리' 읽었느냐고 물었더니 안 읽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너 너무하다'며 섭섭한 마음을 표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아들녀석은 컴퓨터 게임은 자기 반에서 제일 잘한다고 저한테 자랑합니다. 녀석이 즐기는 스타크레프트 게임을 옆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게임의 내용이란 게 정조준해서 사람을 죽이는 것, 살인입니다. 그리고 폭파하는 것을 즐기는 거예요. 그래서 한창 게임에 빠져 있을 때 밥 먹으러 오라고 부르면, 컴퓨터 앞을 떠나 총 쏘는 흉내를 내면서 옵니다. 거기에 젖어 있는 거예요. 한번은 아들녀석이 애니메이션을 같이 보자고 해서 동참한 적이 있습니다. 그 애니메이션이란 게 일본에서 밀수입된 CD 4개짜리였습니다. 「십지훈검」이라는 건데 굉장히 감동적이고 재미있다며 함께 보자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보면 아빠도 고마워할 거라면서 부추기는 아이에게 이끌려 보기 시작했는데,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첫 장면이 열리자마자 '이 애니메이션은 조금 잔인하지만 애니메이션의 극화(劇化)를 위해서는 불가피하므로 이해하고 보시기 바랍니다'라는 글자가 나왔어요. 내용은 일본의 어느 검객의 가족들이 몰살을 당했는데. 간신히 살아남은 한 소년이 나중에 검객이 되어서 원수를 갚는다는 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장면이 잔인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을 보고 저는 너무나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칼을 가지고 사람을 찌르면 장면을 너무 리얼하게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가슴을 찌르면 가슴에서 피가 콸콸 쏟아지는 것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게임에서도 정조준해서 사람을 죽이는 장면이 그대로 나옵니다. 죽이면 굉장히 통쾌한가 봅니다. 사람의 목을 자르는 장면에서는, 목이 또르르 굴러가는 것을 이제까지의 영화에서는 본 적이 없을 만큼 사실적으로 그렸습니다. 그런 것을 보면서 성장하는 아이들의 마음속에 무엇이 가득 차 있을까, 매우 염려스러웠습니다. 기계 친화적인 삶을 사는 오늘의 젊은이들과 달리 저는 물고기도 잡고 나무와 포옹하면서 자연 친화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제가 만든 연도 날리고, 언 손을 불며 눈사람도 많이 만드는 등 자연 친화적인 삶을 살았던 저와, 오늘의 젊은이들 사이에는 많은 차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점점 오늘을 사는 사람들의 마음이 정보와 기계로 가득 차 있다고 할 때 과연 인간은 정보와 기계로만 만들어져 가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기 때문입니다. 앞으로는 인간의 평균 수명이 상당히 늘어날 전망이라고 합니다. KBS에서 방영하는 '일요스페셜' 시간에 인간의 수명과 노인들의 문제를 다루는 것을 보았습니다. 영국에서 나온 한 보고서에 따르면, 지금 태어나는 아이들은 평균 수명이 130에서 140세고, 현재의 40대나 50대는 평균 수명은 80이나 90세가 될 것이라고 합니다. 인류는 앞으로 상당히 긴 기간 동안 수명이 연장될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삶의 형태는 보다 더 기계화되고 정보화되는데, 그런 사회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될까요. 앞으로는 복제된 장기가 우리의 건강을 더 지켜줄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생명은 더 연장되는데 인간은 계속 기계화될 것인가. 제 견해로는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인간에게는 육체만이 아닌 고귀한 영혼이 있다 인간은 육체만으로 존재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은 기계가 아니고, 인간에게는 가장 중요한 영혼의 부분이 있습니다. 인간을 한 그루의 나무라고 생각해 본다면, 나무가 살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합니까? 땅 속에서 뿌리를 통해서 수분과 영양분을 공급받아야 살 수 있지 않습니까? 그래야 인간이라는 나무가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인간이라는 나무의 수분과 영양분은 나무의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 나무의 육체일까요? 그 나무의 영혼일까요? 그 나무의 육체를 통한 영혼이겠지요. 그런데 그 인간이라는 나무가 실뿌리를 통해서 필요한 정보만을 빨아올린다고 한다면 그 나무는 과연 살 수 있을까요? 인간은 기계로서의 삶으로 존재하기보다는, 장차는 영혼으로서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지금 오늘의 삶에서 어느 부분에 중요한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인가? 저는 그것은 서정(抒情)의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조용필도 좋아하고 최진희씨도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조용필 씨의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부르면 그 가사 속에는 서정이 있습니다. 부산항이라는 항구도 있고 갈매기도 있고 동백섬도 있고 서정이 있습니다. 오늘날 십대들이 부르는 노래의 가사를 보면 서정이 거의 상실되어 가고 있습니다. 욕으로 이루어지는 노랫말의 시대입니다. 그것은 서정이 말살된 산문(散文)의 시대라는 뜻입니다. 제 견해로는 인간이 정보에만 매몰되지 않기 위해서는 서정성의 회복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서정성의 회복이 필요할 때에, 저로서는 시를 통한 서정성의 회복을 여러분에게 권하고 싶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어쩌면 산문의 시대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산문의 시대에도, 운문의 정신을 회복할 수 있는 삶을 살아야 되겠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건물의 벽돌이라는 고체화된 물질이 산문이죠. 담쟁이 넝쿨이라는 운문이 감싸고 어루만져 주고, 물을 공급하고 다시 생명의 피를 공급하는 것을 그렇게 느꼈습니다. 마찬가지로 여름날의 나무 한 그루가 서울에 없다고 생각해보면 우리는 살 수 없습니다. 이 뜨거운 여름에 서울 시내에 있는 한 그루의 나무가 바로 시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평소에 사람은 누구나 다 시인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 가운데 하나입니다. 사람의 가슴속에는 아름다움을 보고 아름답다고 느끼고자 하는 기본적인 정서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 기본적인 정서가 아름다운 것을 만나면 아름답다고 느끼는 서정을 갈구하는 마음의 바탕입니다. 저 자신도 그런 경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어느 봄날 아침에 일어나서 냉수를 한 잔 마시러 가다가 창밖을 봤더니, 갑자기 눈이 막 내리고 있었습니다. 지금 눈이 내릴 철이 아닌데 웬 눈이지 하면서 다시 보니까, 창 밖에 백매화가 활짝 피어 있었습니다. 분부시게 하얀 백매화를 보고, 하얀 눈으로 착각했던 거지요. 말을 못하고 입만 탁 벌리고 있어야 했습니다. '아! 내가 저 백매화가 핀 것을 보고 봄눈이 내렸다고 생각했구나. 역시 인간은 형편없는 존재야.' 하는 탄식이 마음속에서 저절로 우러나왔습니다. 아름다운 것을 보고 아름답다고 느끼는 마음 그 자체가 바로 시인의 마음입니다. 그렇게 느끼는 것은 우리 인간의 마음속에 시가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단지 그 시를 발견하지 못할 따름입니다. 자기 자신을 기계화된 인간, 산문화된 인간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 시가 가득 들어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누르기만 하면 시가 나올 것입니다. 물이 가득 들어 있는 통에 구멍을 내고, 약간의 자극만 주어도 물이 쫙 나오듯이 말입니다. 우리의 온몸이 시로 가득 차 있는데, 여러분들은 자극을 주지 않고 그냥 눈과 마음을 통해서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망만 생각하기 때문에, 시심이 솟지 않는 겁니다. 그러나 여러분 가슴속에 가득 차 있는 시를 한번 자극해 보십시오. 그러면 한없이 많은 시들이 나올 것입니다. 시를 발견하는 눈이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가슴속에 있는 시를 끄집어낼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가슴속의 시를 끄집어내는 능력 있어야 제 경우를 예로 들겠습니다. 어느 날 퇴근을 해서 집에 갔더니 제 처가 시장에서 무지개떡을 사왔습니다. 무지개떡을 보니까 '아! 무지개떡 옛날에 엄마가 많이 사주셨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먹으면서 '무지개떡 참 맛있다. 마누라가 사주니까 더 맛있다. 잘 먹었어.' 하고 말면 그 속에는 시가 없다는 거죠. 무지개떡 속에는 무엇이 들어 있습니까? 무지개가 들어 있지요. 무지개떡을 먹을 때는 무엇을 먹었습니까? 저는 무지개를 먹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제가 짧은 시를 하나 썼습니다. 엄마가 사오신 무지개떡을 먹었다 떡은 먹고 무지개는 남겨 놓았다 북한산에 무지개가 걸렸다 마누라가 사온 무지개떡을 먹었다고 하면 재미가 없는데, '엄마가 사온 무지개떡을 먹었다'라고 표현한 데 시의 비밀이 있습니다. 시적 화자가 소년의 마음이 된 거죠. 떡은 먹고 무지개를 남겨놓을 수 있는 마음, 그 마음이 내 마음속에 있는 시를 그냥 자연스럽게 밖으로 내보낸 거죠. 제가 무지개떡을 먹으면서 시를 발견한 겁니다. 여러분들의 마음의 눈 속에도 시를 발견할 수 있는 눈이 다 있는데, 스스로 가지고 있는 마음의 눈을 활용하지 않기 때문에 시를 발견하지 못한 채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어린 왕자'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마음의 눈으로 보는 거지, 눈에 보이는 것으로 보는 것이 아니다." 즉 마음의 눈으로 보는 것이 가장 소중하다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마음의 눈을 가진 때에는, 모든 사물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것입니다. 무지개떡이니까 분명히 그 속에는 무지개가 있듯이…. 얼마 전에 '종이학'이라는 시를 썼습니다. 종이학은 저의 큰 아이가 군에 입대를 하게 된 것을 계기로 씌어졌습니다. 녀석은 군에 입대하기 전날 술에 취해서 제 방에 천 마리의 종이학이 담긴 커다란 유리 항아리를 가지고 들어왔습니다. 그러면서 "아빠, 제가 제대할 때까지 이걸 잘 좀 보관해 주세요." 하고 말했습니다. 저는 아이에게 대답했습니다. "걱정하지 말아라. 내가 이 종이학을 제대하는 그날까지 한 마리도 죽이지 않고 잘 보관했다가 너한테 돌려주겠다." 그런데 녀석이 입대한 후 천 마리의 종이학이 유리 항아리 속에서 사는 모습을 보니까 너무너무 불쌍해 보였습니다. 아! 저 종이학들은 어떤 생각을 할까? 갑갑한 항아리 속을 뛰쳐나가서 저 푸른 하늘 속으로 날아가고 싶을 텐데…. 종이학은 비상의 꿈을 끊임없이 꾸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아들이 잘 간직하라는 말만 듣고, 명색이 시인인 아버지가 종이학들을 날려보내지도 않고 있다는 것은 시인으로서의 직무를 방기(放棄)하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유리 항아리를 들고 옥상으로 올라가서 종이학을 날려 보낼까도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시인으로서 가장 치졸한 방법이었습니다. 아주 물리적인 방법이라는 거지요. 마지막으로 시인이 종이학들을 날려 보내는 방법으로 택한 것은 시였습니다. 시를 썼는데 어떻게 하면 종이학이 날아갈까요? 시인이 종이학이 날아간다고 하면 날아가는 거에요. 시인이 꽃이 웃는다고 하면 꽃이 활짝 웃는 거에요. 꽃이 핀 것을 보고 시인이 '꽃이 운다. 한 방울 두 방울 눈물을 떨군다.' 하면 꽃이 눈물을 흘리는 겁니다. 그것은 시인의 힘입니다. 그래서 내가 '종이학이 날아간다'고 썼더니 종이학들이 막 날아갔습니다. 유리 항아리를 뛰쳐나와서 날아가는 것이 보였습니다. 이왕이면 멀리 날려 보냈으면 해서, '관악산을 넘어서' 하고 생각하다가 너무 가까운 것 같아서, '지리산으로 날아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종이학이 날아간다. 지리산으로 날아간다'라고 썼습니다. 그러자 지리산을 향해서 날개에 힘을 싣고 천마리나 되는 종이학이 날아갔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걱정이 되었습니다. 비가 오면 어떡하지? 종이학이 날아가는데 갑자기 폭우가 쏟아지면 어떻게 됩니까? 종이학이 다 젖어서 떨어져서 죽을 것 아닙니까? 종이학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하고 생각했는데 간단하다고 생각했어요. '비가 오면 종이는 슬쩍 남겨두고 날아간다.' 라고 쓴 거죠. 그러자 비가 와도 아무런 걱정이 없어졌습니다. 그렇게 해서 저는 좁은 항아리 속에 갇혀 있던 종이학 천 마리를 날려보냈습니다. 당신은 시를 쓰는 사람이니까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느냐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큰 오산입니다. 여러분들과 제 가슴속에는 누구에게나 시가 가득 들어 있습니다 그 가득 들어 있는 시를 발견할 수 있어야 됩니다. 그것을 발견하는 가장 쉬운 방법으로 제가 무지개떡과 종이학을 빌어 말씀드렸습니다. 제 친구의 이야기입니다. 아이가 초등학교 1, 2학년 때 저녁 시간이 되었는데 골목에서 '고등어 사려. 금방 바다에서 가져온 싱싱한 고등어 사려!' 하는 소리가 들리더랍니다. 저녁에 고등어나 좀 지질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고등어를 사러 나갔는데, 자기 아들이 골목 쪽 창문을 열고 내다보더니, 고등어 장사 아저씨한테 "아저씨, 고등어 얼굴 예쁜 걸로 주세요." 하고 말하더랍니다. 그 말을 들은 제 친구가 깜짝 놀랐습니다. 그는 고등어의 얼굴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자기 아들이 "얼굴이 예쁜 고등어로 달라."고 말하는 걸 들으면서, 친구는 너무너무 감동을 받아서 이 아이를 낳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답니다. 친구는 자기 아들의 말 한마디가 바로 시라고 했습니다. 금방 양념이 발라지거나 해서 죽어버릴 고등어이지만, 소년의 마음속에서 이왕이면 예쁜 얼굴인 걸로 달라고 하는 마음이 바로 시의 마음입니다. 어느 봄날 여수까지 가는 기차를 타고 여수역에 내렸습니다. 역에 내린 순간 '아니 왜 기차가 여수역에서 더 가지 않고 멈추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 생각에는 여수역에서 기차가 멈추지 않고 여수 앞바다에서 오동도로 한 바퀴 휙 돌고 저쪽 바다로 기차가 계속 가면 될 텐데 왜 여기서 멈추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제 머리 속에서는 기차가 여수역에 멈추지 않고 그대로 바다속으로 달리는 장면을 그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속에 탄 승객들이 기분이 좋아서 창문을 열고 갈매기들과 손짓도 하고 바다 속으로도 기차가 은하철도 999처럼 들어갔다 나왔다 하고 물고기들도 함께 타고…. 기차를 타고 수평선 위를 달리는 기차를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현실 속의 기차는 부산역이나 목포역이나 여수역에서 더 이상 앞으로 달리지 못하지만, 우리 마음속의 시는 그 기차를 얼마든지 수평선 위로 달리게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다 내리고 빈 기차가 달리면, 바다 속에 있는 물고기들이 전부 자기들이 승객이 되어 차창에 기대어 애인 물고기들끼리 서로 손을 잡고 서로 사랑하는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지 않을까요. 저는 그런 생각을 하곤 했습니다. 그런 생각이 바로 시입니다. 우리 가운데 있는, 시를 표현하는 마음인 것입니다. 바꾸어서 말하면, 인간의 눈으로만 사물을 바라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있는 시를 어떻게 하면 잘 끄집어 낼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보다 자극을 주어서 끄집어 낼 수 있을까요. 그 가장 좋은 방법은 눈이 아닌 인간의 마음으로 사물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또는 어떤 현상만을 바라보지 말라는 말씀을 여러분들한테 드리고 싶습니다. 시계가 있다고 하면, 이 시계의 마음으로 인간을 바라보면은 인간의 모습이 달라지고 시계의 모습이 달라지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안도현이 쓴 「연탄재」라는 짧은 시가 있습니다. 아마 이런 내용이었을 겁니다. '연탄재를 함부로 차지 말아라. 당신은 언제 이 연탄재만큼 뜨겁게 누구를 사랑해 봤느냐?' 그런데 이 시에 감동이 있습니다. 이 시는 어떻게 쓰여졌을까요? 인간의 눈으로 연탄재를 바라보고 썼을까요? 아닙니다. 연탄재의 눈으로 연탄재의 마음으로 쓴 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연탄재가 뜨겁게 누구를 사랑했다'고 쓴 겁니다. 항상 우리는 인간의 눈으로만 사물을 바라보지 말고 사물의 마음이 되어서 인간을 바라보는 그런 마음을 가질 때 우리 마음속에 가득 들어있는 시는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고 또 쓸 수 있을 것입니다. 시는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단지 우리가 발견하지 못했을 따름이지요. 시는 은유의 세계입니다. 시는 은유의 방법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기본입니다. 은유는 시의 본질입니다. 은유를 이해해야만 시가 쉬워집니다. 먼저 국어사전에서 은유를 찾아보면 '비유법의 하나다. 예를 들면 그 사람은 전봇대다라고 표현하는 것이다.'라고 씌어 있습니다. 키가 큰 것을 전봇대로 비유한 것이 바로 은유입니다. 백마디의 말보다 한 송이 장미가 한번은 신사역에서 지하철을 타려고 가다가 어떤 젊은 남녀를 보았습니다. 여학생이 개찰구 표를 넣은 다음 남학생을 쳐다보면서 계단을 내려가려고 하는데, 남학생이 "선영아!" 하고 불렀어요. 그러자 여학생은 "서로 인사해놓고 왜 불러?" 하고 말했습니다. 그러다 그녀는 남학생 쪽으로 갔습니다. 이윽고 그 남학생은 감추어 놓았던 한 송이의 장미꽃을 내밀었습니다. 아무 말 없이 눈만 쳐다보면서 주었더니, 갑자기 선영이의 얼굴에 웃음꽃이 막 피어나면서 아무 말 없이 장미꽃을 받아든 채 계단을 내려갔습니다. 남학생은 기분이 좋은지 입이 벌어지는 게 보였습니다. 남자가 선영이한테 장미꽃을 전했다는 건 무엇을 의미할까요. "나는 너를 사랑해."라고 말했을 때와 말 없이 장미꽃을 건네줬을 때와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말을 했을 때는 산문의 세계고 말없이 장미꽃을 건네줬을 때는 운문의 세계, 즉 시의 세계입니다. 그 장미꽃을 건네주는 행위 자체는 은유(隱喩)입니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라는 것에 대한 은유죠. 그리고 그 장미는 하나의 은유물입니다. 그런 은유의 행위를 여러분들의 일상 속에서 누구나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은유의 세계이고 시의 바탕이 되는 세계입니다. 건물을 뒤덮고 있는 담쟁이와 같은 것이 시입니다. 여름날에 쏟아지는 소나기가 바로 시입니다. 만일 바다가 보이는 곳에 창이 하나도 없는 곳에 있으면서, 바닷가에 있는 건 무의미합니다. 우리가 바닷가에 있을 때, 바다를 바라볼 수 있게 해주는 창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시입니다. 여러분 모두 마음의 눈으로 사물을 보십시오. 자신의 마음에 들어와 있는 사물이 말을 하게 할 때 시심은 무르익을 것입니다. 그리고 시의 꽃은 활짝 피어날 것입니다.      
1032    (자료) 중국조선족문학 개요 댓글:  조회:5269  추천:0  2016-01-22
연변 조선민족문학 개요 권   철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의 탄생과 때를 같이하여 발전의 궤도에 들어선 당대 연변 조선민족문학은 이미 50여년의 역정을 걸어왔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된 후 이 민족대가정의 어엿한 일원으로 역사무대에 진출한 조선민족인민은 《중화인민공화국헌법》에 토대한 《중화인민공화국 민족구역자치실시강요》의 각항 규정에 좇아 1952년 9월 연변에다 조선민족의 자치주를 세우고 민족구역자치를 실시하게 되었다. 연변조선민족자치주가 성립된 후 이곳 조선민족은 주인공적지위를 확보하면서 본 민족의 의지에 좇아 정치, 경제, 문화사업을 규획, 발전시켜 나갔다. 그리고 자치주내에서는 자치민족인 조선민족의 언어와 문자를 첫째가는 관용언어문자로 규정하였다. 연변에서 조선민족자치의 실시는 이곳 조선민족의 생활과 운명에 근본적인 변화를 초래하게 하였다. 연변 조선민족은 바로 이런 주어진 자주권리에 좇아 본 민족의 문화전통과 유산의 토대위에서 민족의 생활과 지향을 대언한 문학을 창조, 발전시켜나가기에 진력하였다. 아래에 당대 연변조선민족문학발전의 실제에 좇아 1949년으로부터 1990년대에 이르는 시기의 문학을 대체로 1949년으로부터 1966년에 이르는 17년시기, 1966년으로부터 1976년에 이르는 《대동란》시기, 1976년으로부터 1990년대에 이르는 새로운 역사시기로 나누어 고찰하려 한다. 건국 후 연변에 이루어진 새로운 현실은 조선족작가들에게 삶의 보람과 새로운 지향으로 가슴 벅차게 하였고 문학창작의 적극성을 불러일으키게 하였다. 이때 우리의 작가들은 문학창작활동을 더욱 조직적으로 벌려나가기 위하여 1950년 1월 기타 문예가들과 함께 연길에서 연변문예연구회를 조직하였다. 이 연구회는 당시 분산상태에 있던 본지 작가들간의 단합을 도모하고 문학창작에 나서게 하는 데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그후 당시 정세발전의 수요에 응하여 연변문예연구회를 해소하고 일련의 준비과정을 거쳐 1953년 7월에는 연변문학예술계연합회를 창립하였으며 또한 그의 기관지로 《연변문예》를 간행하였다. 그리고 1956년 8월에는 중국작가협회연변분회를 내오고 문학월간지 《아리랑》을 창간하였다. 중국작가협회 연변분회는 작가들로 하여금 더욱 적극적으로 문학창작에 나서게 함에 있어서 그리고 문학신진들을 육성함에 있어서 큰 역할을 하였다. 그러면서도 1949년으로부터 1966년에 이르는 이 시기에 연변 조선민족문학은 자기의 발전행정에서 오류적인, 정치, 문예노선의 간섭으로 하여 실로 적지 않은 시련을 겪으면서 곡절적인 역정을 걸어나왔다. 1956년 전국 범위 내에서 전개한 영화 《무훈전(武訓傳)》에 대한 비판운동으로부터 1954년의 《홍루몽》연구에 대한 비판운동, 1955년 소위 《호풍집단》에 대한 투쟁과 1957년 하반 년에 진행된 문예계에서의 반우파(右派)투쟁의 확대화, 그에 뒤이은 1958년의 《대약진》, 《인민공사화》운동, 1959년의 반우경투쟁과 문예계에서의 《수정주의사조》에 대한 비판운동, 《지방민족주의를 반대하는 것을 중심으로 한 민족정풍운동》등으로 이어지는 부단한 정치운동은 갓 발전궤도에 들어선 우리 문학의 발전을 저해하고 파괴하였다. 이런 연이은 정치운동 가운데서 문학에서의 정치성이 절대화되고 시비가 전도됨에 따라 적아관계가 혼동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되자 1957년에 이르러서는 당시 문단에서 활약하던 중견들인 김학철, 김창걸, 이욱, 채택룡, 김예삼, 최정연, 이홍규, 김순기, 서헌, 등이 선후로 당치 않은 죄명을 쓰고 창작권리를 박탈당하였으며 그 중 일부 작가들은 농촌벽지에 《유배》당하였고 더러는 자진한 예도 있다. 이토록 많은 중견작가들이 정치적으로 단속되고 무시로 덮쳐드는 정치운동과 비판운동 등으로 말미암아 우리 문단은 안정된 문화적 환경을 확보할 수 없었다. 그런데다 또한 문학창작에 대한 지나친 정치적 요구와 간섭은 왕왕 작가들의 창작 자유를 압제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이렇게 되자 당시 문단에는 정치과업이거나 서책을 도해하는 식의 개념화, 도식화한 작품들이 속출하였다. 이 17년 시기에 상술한바와 같은 어려운 상황과 시련 속에서도 우리의 작가들은 아주 열성적으로 문학창작에 나섰다. 이런 작가들의 노력에 의하여 시문학과 소설, 산문, 희곡 등 분야에서 나름대로의 창작성과를 이룩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 우리 시문학은 건국 전부터 시창작에 나선 이욱, 김예삼, 채택룡, 이성휘, 주선우, 임효원 그리고 새로 시단에 나선 김철, 김성휘, 조용남, 윤광주, 김태갑, 이상각 등에 의하여 활성화의 길에 들어섰다. 당시 시인들의 노력으로 하여 종합시집《해란강》(1954년),《창작선집》(1956년),《청춘의 노래》(1959년),《아침은 찬란하여라》(1961년),《푸른 잎》(1962년),《변강의 아침》(1964년),《연변시집》(1964년)이 출간되었다. 이밖에 시인들의 자선시집 이를테면 이욱의《고향사람들》(1957년),《연변의 노래》(1957년),《장백산하》(1959년), 주선우의《잊을 수 없는 여인들》(1957년), 임효원의《진달래》(1957년), 이민창의《김옥희와 팔거북》(1957년), 김철의《변강의 마음》(1957년) 등이 선후로 나왔다. 이 시기의 시작들에는 주로 변혁기에 처한 현실생활의 이모저모, 오늘의 새로운 역사를 펼치기 위하여 시대의 앞장에 선 선구자, 향도자들에 대한 다함없는 송가가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였다. 그리고 지난날 겨레의 해방을 위하여 몸바쳐 싸운 선열들을 추모하고 인민대중의 고상한 풍모를 찬미, 구가한 시편들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였다. 이밖에 현실에 나타난 부정부패 등 암흑면을 고발하고 풍자한 시편들과 애정, 윤리 등의 소재를 다룬 시작들도 가끔 나왔었다. 상기 주제들에 바쳐진 이 시기의 대표작들로는 서정시《어머니와 애기》(이욱),《지경돌》(김철),《피보다도 진한 눈물이》(설인),《산간일경》(윤광주),《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조룡남), 《고동하 시초》(김성휘),《옥중의 노래》(김태갑),《열사비》(김창석),《첫사랑》(주선우),《아, 산딸기는 익어가건만》(임효원) 등을 들 수 있다. 1949년부터 1966년에 이르는 17년 사이에 시문학분야는 일정한 성과들을 거두었으나 또한 오류적 노선의 교란을 받아 실로 평탄치 않은 길을 걸으면서 시련을 겪었다. 이때 정치성을 절대화하고 예술적 민주와 시인의 개성이 짓밟히게 됨에 따라 시단에는 시적 자아가 결여된 정책풀이식 시들이 범람하였으며, 현실의 암흑면을 고발하거나 애정, 윤리 등의 제재는 거의 금기적인 것으로 치부되었고 시작원리와 예술기법 등의 탐구 등은 아예 도외시 당하는 상태에 처하여 있었다. 건국이후 소설문학은 새로운 사회적 현실과 더불어 발전의 길에 들어섰다. 건국 후 소설창작에 나선 작가들로는 건국전 시기부터 소설을 발표하던 김학철, 김창걸, 염호렬, 백호연 등과 새로 문단에 나선 이근전, 이홍규, 박태하, 최현숙 등이다. 이 시기에 단편소설선집《세전이 벌》(1954년),《창작선집》(1956년),《빨간 다리아》(1958년),《병상에 핀 꽃송이》(1959년),《장화꽃》(1962년),《봄날의 이야기》(1962년)와 산문집《강철》(1958년),《푸른 전야》(1965년)등이 출판되었다. 그중 대표적 작품으로는 해방된 농민들의 희열과 지향을 묘사한 김창걸의 단편소설《새로운 마을》, 염호렬의《소골령》(이상·1950년), 새생활과 고상한 품성을 격정적으로 노래한 김학철의《새집 드는 날》(1953년),《고민》(1956년), 새시대 신형농민의 형상창조에 모를 박은 이근전의《과일 꽃 필 무렵》(1954년), 초등학교 교원의 미덕과 풍모를 구가한 백호연의《꽃은 새 사랑 속에서》, 애정을 소박하고 다감하게 노래한 최현숙의《나의 사랑》등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이 시기에는 지난날의 역사시대를 거시적으로 포착하고 폭넓게 예술화하려는 작가들의 노력에 의하여 선후로 장편소설《해란강아 말하라》(김학철·1954년),《범바위》(이근전·1962년), 중편소설《번영》(김학철·1955년), 중편소설《꽃삼지》(김동구·1957년) 등이 출판되었는데 이 작품들은 일부 미흡점을 동반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당대 연변조선민족문학에서 처음으로 나온 중·단편들이라는 데서 중시를 받고있다. 이 시기 소설문학도 기타 문학분야와 마찬가지로 오류적인 문예노선과 연이은 정치운동으로 하여 저해를 받았다. 소설창작에서의 정치성의 강요는 작가들의 개성을 말살하고 진정한 예술적 추구를 하지 못하게 하였다. 따라서 소설창작에서의 주제는 단일화 도식화되고 현실을 미화하는 경향에 흘렀으며 예술성을 거세하는 결과를 빚어내었다. 건국이후 희곡문학분야에서도 일부 작품들이 나왔다. 이를테면 농업호조합작자의 시책을 노래한 김태희의 장막극 《우리 조장동무》(1950년), 농민들의 문맹퇴치활동을 찬양한 최수봉의 단막극 《농민학교로 가는 길》(1953년), 신형농민의 미덕을 찬미한 황봉용의 단막극《새각시》(1954년), 농업합작화에 일떠선 새로운 면모를 묘사한 최정연의 단막극 《완두씨》(1954년), 전쟁으로 하여 빚어진 비극을 깊이 있게 파헤친 최정연의 단막극《귀환병》(1957년), 동북지구 항일무장투쟁과 항일투사들을 가송한 황봉룡, 박영일의 장막극 《장백의 아들》, 《삼노인》형식으로 농촌에서의 신구의식간의 갈등과 투쟁을 묘사한 이영근의 《풍년가》(1964년) 등이 그 대표적 작품들이다. 이 시기 희곡분야는 시나 소설보다도 더 직접적으로 극《좌》노선의 교란을 받았다. 그것은 당국에서 사사건건 직접 나서서 연극과 정치와의 결합을 강요하였기 때문이다. 극문학창작에서 정치통수의 원칙을 견지하다보니 작품의 주제는 단일화 되어갔고 작가의 각이한 시각과 특색도 무시당하였으며 그리고 극 형식에 있어서도 정극 외의 다른 희극, 비극, 풍자극 등이 거의 자취를 감추다시피 되었다. 1966년으로부터 10년간이나 지속된《문화대혁명》은《지도자가 잘못 발동하고 반혁명집단에 이용되어 당과 국가 및 각 민족인민들에게 엄중한 재난을 들씌운 일장 내란이다.》 10년간이나 지리하게 지속된《대동란》시기에 문예계에서 진행된 투쟁은 《혁명적 인민과 반혁명적 야심가, 음모가외의 투쟁이고 당의 방침과 봉건파쑈적 문화전제주의 및 문화허무주의와의 투쟁이며 문예사상의 변증법적 유물론과, 주관적 관념론, 혁명적 사실주의와 공식주의 방팔고( 八股)와의 투쟁으로서 매우 치열하고도 첨예한 투쟁이었다.》.《문화대혁명》이 시작되자《4인무리》는 이른바《건국이래 문예계에서의 모주석 사상과 대치되는 반당반사회주의 검은선》을 파낸다는 허울을 내걸고 문예계에 대 토벌과 대 청산을 들이대었다. 조선민족 문단도 결코 예외로 될 수 없었다.《대동란》의 광풍이 이곳에 휘몰아치자 곧 문학단체가 해산되고 이어서 문학잡지도 폐간 당하였으며 나아가 김학철, 최정연, 김철 등 많은 작가들이《나라의 반역자》,《현행반혁명분자》,《간첩》등으로 몰려《비판》을 받고 심지어는 감옥살이까지 하였다. 그리고 《4인무리》와 그 파벌에 속하는 자들은 조선민족 문단에도 건국이래로부터 《민족문화혈통론》을 핵으로 한 매국투항주의적 문예노선이 통치적 지위를 점하였다고 역설하면서 소위 《민족문화혈통론》에 대한 《대비판》을 전개하는 것으로써 우리의 민족적 전통과 민족문화유산을 그 근본으로부터 거세하려 들었다. 이에 따라 지난 시기에 창작된 조선민족의 역사생활과 지향을 반영한 성과작들을《매국적 투항주의》의《대독초》로 몰고 부정하였으며 민족의 얼, 민족의 감정, 민족의 특성 등은 금기로 치부하고 아예 입에 올릴 수도 없게 하였다. 《4인무리》가 통치하던 시기에 우리 문단은 산산히 흩어지고 작가들의 창작활동은 기본상 정지상태에 들어가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이 시기에 발표된 작품이란 거의 다 극《좌》적 정치노선이나 개인숭배를 선양한 것들이었다. 이때 비록 인민대중의 생활과 지향을 나타낸 작품들이 더러 나오기는 하였으나 극히 적었으며 또한 그런 작품들마저도 그릇된 정치와 문예사조의 영향을 면치 못하였다. 《문화대혁명시기에 출판된 시집《조국에 드리는 노래》(1975년),《공사의 아침》(1976년), 《단편소설집《우두봉의 매》(1972년)에 수록된 일부 작품들과 장막극《백산의 봄우뢰》(한원국 집필, 1972년)등이 그 실증으로 된다. 이 《문화대혁명》의 10년은 조선민족문단이 모진 어려움을 겪던 수난기이며 문학창작이 대퇴보를 한 시기이다. 그렇지만 우리의 작가들은 그런 역경 속에서도 자기의 지조와 의지를 굽히지 않고 침묵, 절필 등 각이한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4인무리》에 저항하면서 암흑이 가시어질 그 날을 고대하였다. 1976년 10월에 《4인무리》가 분쇄되자 조선민족 문학은 소생과 번영의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어 우리의 작가들 앞에는 오래 동안 문단을 통치하였던 극《좌》적 경향을 철저히 비판하고 우리의 머리를 짓누르던 정신적 질곡에서 벗어나 전도되었던 역사를 바로잡고 진정한 민족문학을 발전시킬 과업이 제기되었다. 민족적 사명감으로 불타던 우리 작가들은 《4인무리》가 저지른 죄악을 폭로, 공소하고 그들이 날조한 일련의 유설을 비판한 토대 위에서 시비를 가르고 억울한 사건과 그릇되게 처리된 사건을 시정하였다. 이에 따라 장기간 무고하게 정치적 권리와 창작의 권리를 박탈당하였던 김학철, 김순기, 최정연, 김철, 이홍규, 김용식, 조용남 등 많은 작가들이 해방되고 그 명예를 회복하였으며 지난날 《대독초》로 몰려 발행을 금지당하였던 많은 작품들도 다시 햇빛을 보게 되었다. 《문화대혁명》후 《4인무리》가 빚어낸 죄악에 대한 비판과 문예계의 정비작업이 심입 전개됨에 따라 더불어 우리 문단은 날로 활력을 회복하였다. 1978년 10월에는 중국작가협회 연변분회가 회복되었다. 그리고 문예지 《연변문예》를 계속 간행하는 이외에 문학지 《아리랑》과 문학평론지 《문학과 예술》을 새로이 창간하였다. 이에 따라 우리의 문학창작활동은 날로 활성화되어갔다. 10년 대동란의 결속과 더불어 우리 시단은 새로운 역사시기의 개혁, 개방의 물결 속에서 거족적인 발전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다. 재생의 기쁨을 안은 노시인들과 새로 등단한 신인들이 시창작에 열성적으로 나서자 시단은 활력으로 차넘쳤다. 이어 서정시, 산문시, 서정서사시, 장편서사시 등 다양한 형식의 시편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 중에서도 서정시 창작이 보다 뚜렷한 성과를 거두었다. 이 시기에 종합시집《시선집》(1979년),《변강의 무지개》(1979년),《봄바람》(1981년),《진달래의 노래》(1981년),《서정시집》(1982년)과 시인들의 자선시집 50여 부가 출판되었다. 이 새로운 역사시기에 인민대중 속에서 널리 애송된 시편들로는 서정시 《북방의 성격》(김철·1982년),《아침》(이욱·1982년),《북녘의 서정》(임효원·1980년),《벗들에게》(김성휘·1980년), 《흰옷 입은 사람들아》(김성휘·1987년),《백두와 설련화》(허흥식·1988년),《해빙기의 강변에서》(조용남·1983년),《파도》(이상각·1986년),《사랑의 애가》(김응준, 1985년),《나는 나입니다》(석화, 1985년) 등을 들 수 있다. 상기한 서정시들에서는 《4인무리》가 저지른 죄악에 대한 폭로와 비판, 흘러간 역사와 《대동란》에 대한 심각한 반성, 거세찬 개혁의 물결 속에 뛰어든 혁신자들의 격정과 희로애락, 현실에서 발로된 봉건의식과 각종 부패현상에 대한 고발과 타매, 애정, 윤리와 아름다운 경물에 대한 찬미에 이르기까지 자기 나름의 목소리로 노래하고 있다. 1980년 좌우로부터 장편서사시와 서정서사시 창작이 활기를 띠었었다. 이 시기에 20여부에 달하는 장편시들이 선을 보였다. 그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장편서사시 《새별전》(김철, 1980년),《장백산아 이야기하라》(김성휘, 1979년),《만무과원 설레인다》(이상각, 1981년), 서정서사시《아, 청산골》(조용남, 1985년) 등을 들 수 있다. 상기한 시편에서는 역사적 반성의식을 수용하여 지난 역사시대와 참신한 현실생활을 거시적이며 전일적으로 재조명하고 형상화하려는 시인들의 탐구적 노력을 볼 수 있다. 《4인무리》가 분쇄된 후 새로운 역사시기에 진입하자 소설문학은 다시 활력을 회복하였다. 《대동란》시기에 정치적 박해를 받아 붓을 꺾었던 원로작가들과 새로 진출한 신진작가들이 선후로 소설창작에 적극 나서게 되어 많은 작품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 중에서도 단편소설창작에서 많은 수확을 거두었는바 이 시기에 《단편소설선집》(1979년),《사랑에 대한 이야기》(1980년),《불타는 백사장》(1981년), 《단편소설집》(1982년),《군자란》(1983년)과 작가들의 자선집 이를테면 《김학철 단편소설집》(1982년), 임원춘의《몽당치마》(1984년), 정세봉의《하고 싶던 말》(1985년), 유원무의《아, 꿀샘》(1986년), 김순기의《잔치 전날》, 김훈의《청춘의 활무대》(1986년), 이광수의《새로운 길》(1987년) 등 30여부에 달하는 소설, 산문집이 출판되었다. 그 가운데서 대표성을 띤 소설작품으로는 《문화대혁명》이 빚어낸 인간들에 대한 육체적 및 정신적 유린을 고발하는 상처문학의 계보에 속하는 정세봉의《하고 싶던 말》(1980년), 박천수의《원혼이 된 나》(1979년), 과거의 역사를 엄숙하게 돌이켜보면 한심스럽게도 우롱당하였던 지난날을 신랄히 고발한 이원길의《배움의 길》(1980년), 유원무의《비단이불》(1982년), 거창한 개혁, 개방의 물결 속에서 변화하는 새로운 인간관계와 기풍을 찬미한 임원춘의《몽당치마》(1983년), 홍천용의《구촌조카》(1982년), 김훈의《그 여자가 준 유혹》(1986년), 지난날 《금지구역》에 속하였던 애정, 윤리 등을 둘러싸고 보다 높은 차원에서 부동한 인간의 내심세계와 잠재적 심리를 파헤치고  그릇된 의식을 신랄히 타매한 김학철의 《짓밟힌 정조》(1985년) 등이 있다. 이 시기에는 또 민족의 역사와 현실을 보다 폭넓게 다면적으로 묘사하기 위한 작가들의 노력에 의하여 예술면에서도 일정한 성과를 과시한 중편, 장편 소설이 적지 않게 창작되었다. 이 시기에 출판된 중편, 장편소설은 무려 40여부에 달한다. 그중 김용식의《규중비사》(1980년), 이원길의《한 당원의 자살》(1985년), 김훈의《청춘략전》(1985년), 최홍일의《생활의 음향》(1985년), 우광훈의《시골의 여운》(1985년) 등 중편소설과 김학철의《격정시대》(1986년), 이근전의《고난의 연대》(1982년), 유원무의《봄물》(1987년), 이원길의《설야》(《땅의 자식들》의 제1부) 등 장편소설이 이 시기 문단을 더욱 흥성하게 하였다. 상기한 바와 같이 새로운 역사시기에 있어서의 소설창작은 부당한 정치적 단속에서 벗어나 인민대중이 펼친 새로운 생활을 구김 없이 묘사하는 한편 현대적 의식에 토대로 하여 지난날 《대동란》의 역사적 근원을 파헤치고 존재한 부정한 면을 서슴없이 고발, 타매하는 등으로 사회적 문제를 보다 심각하게 다루었다. 《문화대혁명》의 결속과 더불어 우리의 극문학도 발전을 가져왔다. 《4인무리》가 타도된 후 지난날의 그릇된 노선을 시정하고 개혁, 개방의 새로운 방침이 시달됨에 따라 우리 극작가들의 정신면모도 일신되었다. 그들은 새로운 시대와 인민대중의 미학적 요구를 반영하기 위하여 보다 시대화한 안목으로 극 창작실천에 뛰어들었다. 극작가들의 고심한 노력에 의하여 많은 극작품이 산출되었으며 희곡집《장백의 아들》(황봉룡, 1978년), 《희곡집》(1982년), 《황봉룡 희곡집》(1985년), 《울고 웃는 사람들》(1985년), 《망각된 인간들》등이 출판되었다. 이 시기의 우수한 극작품들로는 홍성도, 박응조의 장막극《눈 속에 핀 꽃》(1980년), 최정연의 장막극《해토무렵》(1981년), 김훈의 단막경희극《두부장사》(1982년)와 《울고 웃는 사람들》(1984년)등이 있다. 이런 극작품들에서는 《4인무리》의 그릇된 노선이 빚어낸 악과들을 심각히 고발한 동시에 모진 시련을 겪어내고 행복하게 살아가게 된 인민대중의 격정과 염원과 지향을 감명 깊게 형상화하였다. 이런 극작품들은 진실성과 구체성을 생활의 흐름 속에서 생동하게 구현하고 있으며 대체로 비극이 많고 신랄한 풍자적 요소가 다분한 것이 특징적이다. 상기 새로운 역사시기에 획득한 문학성과들이 보여주다시피 이 시기는 개혁, 개방의 새로운 형세와 활성화된 국내외의 사상문화 교류 속에서 지난날 《좌경》적 노선으로 하여 형성된 그릇된 사상관념을 포기, 갱신하고 현대의식, 민족의식, 주체의식의 각성을 초래한 년대이다. 이 시기는 또한 우리의 작가들이 혁신적인 문화적 환경속에서 자기를 속박한 숱한 금지구역을 타개하고 새로운 가치관과 다양한 창작방법으로써 민족의 역사적 현실과 지향과 염원을 형상화하기에 힘써 일정한 성과들을 거둔 시기이다. 그러나 시대적 발전과 인민대중의 심미적 욕구에 비추어 볼 때 이러한 성적은 극히 초보적인 것이며 또한 일부 미흡한 점도 동반하고있다. 그러면서도 기꺼운것은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더욱 심화되는 개혁, 개방의 새로운 형세와 더불어 발랄하게 전개된 국내외의 문학교류의 영향하에서 우리 작가들의 사상관념이 진일보 갱신·제고되고 보다 성숙되어가고 있는 그것이다. 양지가 있는 우리의 작가들은 시장경제로 이행하는 변혁기에 부딪힌 그 많은 어려움과 곤혹 속에서도 민족의 위업에 자기를 바치려는 초지를 굽히지 않고 문학사업에 진력하고있다. 이런 노력으로 하여 우리의 작가대오는 날로 늘어나고 취득한 성과들도 가시적이다. 지금 연변에는 500명으로 헤아리는 연변작가협회 회원이 있다. 그리고 그 중에는 중국조선민족문학의 태두 김학철 선생을 위시하여 많은 중견과 신진작가들이 우리의 문학의 화원을 가꾸고있다. 1950년대 초반부터 시창작에 나선 김철, 조룡남, 이상각, 그리고 그 뒤를 이은 김동진, 석화, 최룡관, 이성비, 김학송, 이임원, 조광명…, 소설, 산문분야에서의 중견작가들인 림원춘, 유원무, 김영금 그 뒤를 이은 리원길, 정세봉, 김훈, 최홍일, 우광훈, 문단에 갖 나선 최국철, 이동령, 김혁 등과 희곡문하강작에서 남다른 기여를 한 리광수 등이 그 대표적 작가이다. 그리고 특기할 것은 90년대에 이르러 허련순, 리혜선 등 여러 여성 작가들로 이룩된 여성작가군의 출현이다. 그리고 90년대에, 우리 작가들의 다함없는 노력으로 하여 심각한 주제내용을 다양한 문학창작방법과 형식으로써 형상화한 무게 있는 작품들이 산출되어 국내·외의 각광을 받고있다. 그중 《20세기 중국조선족문학선집》(연변인민출판사 출판), 《새세기 조선족 중견작가 작품대계》(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 출판)에 선록된 작품중의 일부와 시집《그 언덕에 묻고 온 이름》(조룡남), 《나의 고백》(석화), 소설집《도시의 곤혹》(최홍일), 《여름은 더운 계절이 아니다》(최국철) 중의 부분작품, 장편소설《춘정》(이원길), 《눈물젖은 두만강》(최홍일), 《바람꽃》(허련순) 등이 그 예로 될 것이다. 끝으로 세기적 교체를 맞는 오늘 시대적 시점과 새로운 인식으로 지난날의 역사와 경험들을 잘 총화하고 새로운 자세로써 우리 문학을 가꾸어 나간다면 우리 문단에는 반드시 더욱 빛나는 미래가 도래하게 될 것이다. 이상으로 당대 연변조선민족문학의 지난날과 성과들을 개략적으로 살펴보았다. 이 원고에는 미흡점은 물론 오류도 적지 않을 것이다. 여러 독자들의 사심 없는 비평과 지적이 있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1031    잊혀진, 잊지말아야 할 조선족천재시인 - 주선우 댓글:  조회:5248  추천:0  2016-01-22
주선우 시인과 그의 시문학   서태문(연변인민방송국아나운서)-안녕하십니까. 문학살롱작가초대석에서 인사드리는 서태문입니다. 지난 시간에는 한국의 저명한 저항시인 조태일에 대해서 살펴봤는데요。 이번 시간에는 우리 연변의 최초의 시인중의 한분인 주선우시인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오늘도 림선생과 함께 합니다. 안녕하십니까? 림금산(시인)-네 수고합니다. 서—네 감사합니다. 지난 주일에 주선우시인에 대한 써미나르가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그 구체적정황을 먼저 소개해주시겠습니까? 림-네 지난 (2015년6월)금요일 오전 연변주도서관 4층 세미나실에서 ….해란강닷콤주최, 연변대학조선어문학부 협조. 원명 (제1회는 리욱시인, 제2회는 김창걸소설가, 이번 제3회가 주선우시인…) 이날 행사에서 주성화총편: 말---우리 “해란강닷컴”에서는 2015년도 “다시 읽는 우리 문학”이란 타이틀의 기획특별시리즈를 한다. 중국조선족문학은 중국조선족이 이 땅에서 걸어온 지난 백년 남짓한 력사행정에서 우리들의 삶과 정서를 기록하면서 발전에 발전을 거듭해 왔다. 중국조선족문학은 조선반도의 문학에 뿌리를 두면서도 중국이라는 새로운 환경에서 꽃펴나면서 수많은 시인, 작가들에 의하여 훌륭한 작품이 생산되다. 이것을 다시 조명할 필요가 있는데 올해에는 먼저 리욱, 김창걸, 주선우, 김례삼, 채택룡…등 작가들을 조명한다… 서—이번 세미나에는 어떤 분들이 참가하였습니까? 림-네 참가자 채영춘, 최국철, 석화부주석, 우상렬교수, 장정일평론가 , 림금산시인 중앙인민방송국조선말방송 아나운서 둘이 낭송. 남녀. 해란강닷콤 주성화총편, 정필단사회, 고려원과 한규닷콤유한회사 협찬—김향사장 참가 등 주성화총편이 개회사삼아 주선우시인에 대한 세미나를 조직하는 필요성과 취지에 대해서 10분간 말씀. 다음 주선우 관련 동영상 감상—15분. 주선우 사진, 군공메달 등 다음 석화(연변작가협회 부주석) 우상렬(연변대교수) 최삼룡(문학평론가) 등 시인, 평론가들이 기조발언. 석화는—라는 제목으로 우상렬—란 제목으로 최삼룡—이란 제목으로 기조발언을 했다.   서—주선우시인이라면 별로 잘 알려지지 않은 시인이라 생각되는데요. 주시인의 생평을 간단히 개괄해주시겠습니까? 림-네 이 부분은 이번에 주성화, 우상렬, 석화, 최삼룡 등 분들의 발언에서 가담가담 나왔는데요. 시인 주선우는 1924년 조선 평양 사암리에서 출생, 학도병으로 일본군에 끌려갔다가 탈출하여 1944년 11월 길림 통화지구의 조선의용군1지대에 참군, 의용군 선전대 편집조 조장 등직을 맡고 《긴급임무》, 《특수임무》, 《돌격임무》를 수차 완성하여 동북해방전쟁이 결속될무렵 사단정치부로부터 대공 1차를 수여받았다. 그후 항미원조전선에 나간 그는 모 군단 정치부 선전원으로 활약, 최전선에서 용맹하게 싸웠고 미제와의 전투에서 불행이 척추부상을 입고 군공메달, 국기훈장 등을 수여받았으며 영예롭게 퇴역하였다. 1952년 가을, 연변조선족자치주정부 문교처에 배치, 연변교육출판사 문예창작조 조장, 연변작가협회 창작위원회 주임 등 직을 맡고 창작활동에 종사하였다. 1957년 4월에 출판된 그의 시집 《잊을수 없는 녀인들》이 그의 인생을 바꾸어놓았다. 하루아침에 정치권리와 창작권리를 박탈당하고 그를 따랐던 동료작가와 문학도들로부터 배척을 당한 주선우는 《우파분자》의 모자를 쓴채 조선으로 망명을 떠났고 조선에서도 여의치 못한 생활을 이어가다가 중병에 걸려 1986년 다시 연길에 돌아왔다. 하지만 안식처가 없이 길림, 할빈 등지로 떠돌다가 1987년초 할빈에서 기구한 운명을 마쳤다. 그의 이런 창작적성과들은 문단의 큰 인정을 받았는바 주선우시인은 1954년에 장시 “조국의 동켠에서”로  《동북조선인민보》 신춘문예우수작품평의 2등을 받은데 이어 1956년 8월25일에는 연변작가협회에서 펼친 1955년-1956년도 우수문학작품시상식에서 서정시 “대가정의 축배”가 수상하는 영광을 받아안았다. 서- 주선우 시인의 생평에 대해서 알아보았는데요. 평단에서는 주시인의 시들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림-네 최삼룡평론가의 평가,       우상렬 연변대학 교수의 평가.       세미나에서 연변대학 교수 우상렬, 평론가 최삼룡 등이 주선우시인의 생평, 작품, 문학성과 등을 다각적으로 조명하였고 평론가 장정일, 시인 림금산, 한규닷컴 총경리 김향, 칼럼작가 주청룡 등이 소감을, 연변주당위선전부 전임 부부장 채영춘이 축사와 소감, 총화발언을 하였다.   해란강닷컴 주성화총편은 20살에 일본군 학도병으로 끌려왔다가 탈출하여 조선의용군에 참가했던 비운의 천재시인 주선우, 33살에 첫 시집을 내고 그로 인하여 우파분자로 타격받아 어찌할수 없이 망명길에 올랐다가 62세의 초로의 병든 몸으로 중국땅을 찾았던 조선족전쟁문학 시초의 시인 주선우, 언제 어디서 어떻게 이 세상을 하직하였는지도 모르는 주선우시인의 일생을 조명하고 그와 함께 동시대를 풍미했던 조선족문학인들의 문학적업적을 재조명하는 《다시 읽는 우리 문학》은 앞으로 6-7차 이어질것이며 이를 통해 우리 중국조선족문학의 가장 어려웠던 로정과 성과를 규정하는것이 이번 문학포럼의 취지라고 밝혔다. 서—듣고 보니 주선우시인에 대한 호기심이 더 커지는데요. 그럼 주선우시인의 구체 시작품들을 감상하면서 더 상세하게 알아보겠습니다. 먼저 감상할 시는 입니다. 중대의 약속          주선우 짙어가는 가을이 애닮었는지 귀뚜라미 쓰르르 낮에도 우는데   처녀는 들창에 기대여 서서 나를 바라보았네 나도 그를 보았네   입술가에 웃음띄고 눈동자 젖었는데 하고 싶은 말도 많고 해야할 말도 많네   어쩌나 처녀에게 무슨 말 해야하나 두루 두루 살펴도 줄것이 없네   시간은 닥쳐오고 신들메도 맺었고 맨끝에 뛰여나가 대렬에 서는데   중대장이 뚜꺽뚜꺽 창문가에 다가서서 처녀의 손을 잡고 잠간 말하더니   대렬앞에 돌아와 나를 보며 구령쳤네 중대 차렷----- -------사랑하는 우리 처녀들을 위하여 앞으로 ----갓!   서—네 주전우시인의 시 이였습니다. 사랑하는 처녀을 두고 전쟁터로 떠나야 하는 이야기를 적고있습니다. 림—해설:전쟁장면보다 전쟁가운데 있었던 눈물나는 사랑의 리별장면을 그려냈다. 전쟁이 아니였더면 그들 남녀는 갈라질수도 없다. 또 갈라지는 장면을 모든 평화를 사랑하는 청춘들의 집단적인 정서로 이전시켜 장중하고 비장하게 묘사함으로써 더욱 사람을 감동시킨다. 마치도 카츄사를 위하여, 하던 쏘련홍군들처럼… 서—네 좋은 시였는데요. 그럼 계속해서 다음시를 감상하겠습니다. 입니다. 함께 감상하고 선생님의 해설을 듣겠습니다. 처녀의 고백          주선우 전사의 깨끗한 마음으로 생도 죽음도 잊는 폭격이 지나간후 나는 간호병처녀에게 물은 일이 있었다 ---이런 시각일때마다 그대는 무엇을 생각하는가고   처녀는 내 붕대를 어루만지다 터진 손을 가슴에 가져가며 웃으며 내 어깨에 머리도 얹었노라   그러나 다시 명령이 내려 얼음우로 나란히 전진하다가 처녀는 가슴에 총탄을 맞고 희고 흰 가슴을 여미지 못하였다   아--- 아무도 보일수없는 처녀의 젖가슴을 어떻게 감추어야 하느냐 처녀들이여! 돌처럼 얼어붙은 굳은 대지 무엇으로 가리워야 하더냐 파편뿐이니…   시퍼런 얼음덩이를 날라다 놓을때마다 희고 흰 가슴에 내 눈물이 얼었으니 이리하여 얼음으로 덮힌 이 처녀의 고백은 내 가슴속에 오늘도 분노의 불을 켜고 있노라.   서—주선우시인의 시이였습니다. 아주 짧은 시지만 전쟁마당이 그대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림-해설…역시 가렬처절한 전쟁속에서의 생에 대한 열망과 사랑에 대한 불타는 생명의식을 잘 구현한 감동적인 시이다. 모멘트도 잘 잡았고 순간을 잘 포착하였다. 전쟁중의 그 많은 순간순간속에서 시인은 가장 전형적인 , 을 쓰고있다. 진한 생명의 의식과 사랑의 몸부림을 토로해 독자들의 가슴을 친다.   서- 계속해서 다음 시를 감상하겠는데요. 입니다. 함께 감상하고 선생님의 해설을 듣겠습니다.   저고리 고름          주선우   전송하는 길에서 심장을 베이시는 듯 저고리 고름을 뜯어 선물로 주신것을 포탄에 끊어진 피줄을 잘라매고 하루종일 싸웠으나 아픈 줄 몰랐네.   서-주선우시인의 시이였습니다. 아주 짧은 시인데요. 역시 전쟁터을 그리고 있습니다. 림-해설…..저골고름은 사랑하는 사람이 사랑의 마음을 담아서 주었을것이다. 그것으로 포탄에 끊어진 피줄을 잘라매고 하루해 싸웠어도 아프지 않았다고 한다. 왜 그것에는 사랑의 힘이 있기때문이다. 소설 에서 왈랴가 여러 쏘련홍군들한테 키스를 날려준것과 같은 도리이다. 그런 키스하나하나에 사랑이 묻어있고 그런 사랑의 감정은 또 원쑤에 대한 힘으로 화한다. 서-넉줄의 시편으로 많은 내용을 담아낸 아주 좋은 시였습니다. 계속해서 다음를 감상하겠는데요. 입니다.   빨간 들창          주선우   먹물을 뿌린듯이 캄캄한 밤 명령을 받고 후퇴하는 포 부대가 어둠속에 우뚝 선다   저 솔밭속 빨간 들창에서 갑자기 터지는 갓난아기의 첫울음소리 시커먼 얼굴들에 미소가 퍼지는구나   고난이 뒤따라 오는 이 시각이언만 우리들에게는 또 하나의 생명이 탄생하였으니 전사들은 지금 귀를 귀울이고 서서 잠시 후퇴명령을 잊었다   앞에서 움직이지 않고 뒤에서도 가자는 말없어 일분 이분 ……. ……..   그러나 침묵을 깨뜨리는 지휘관의 추상같은 명령   아기의 울음소리는 멎어진듯 또다시 포바퀴가 스럭스럭 부대는 앞으로 전진하는데   그 어둠속에서 누가 알랴 지휘관도 전사도 산비탈을 돌아설때까지 빨간 들창을 바라보며 걸었다는것을.   서-주선우시인의 시이였습니다. 아주 긴장한 전쟁터에서 새 생명의 탄생을 적고있습니다. 림-해설: 역시 가렬처절한 전쟁속의 눈물겨운 한장면 해산하는 장면을 집어내 쓰고있는데 감동적이다. 마치도 화면을 보는듯 하다. 일제히 눈길이 한곬에 쏠린다. 우리의 생명이 전쟁의 불도가니속에서도 태여난다. 우리의 군대는 다 죽일수가 없는것이다. 태여난다. 새로운 힘이 태여나고 새로운 희망이 태여난다. 저 엄마와 저 애기를 위해서 우리는 전선으로 나아가고 재진공하려 나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더욱 고무적이고 비장미가 철철 흐른다. 왜 하필이면 포병부대냐? 밤길에 거무슥한 포신들이 축축 솟아있는 차들이 일렬로 지나간다. 포는 거무슥한 하늘을 겨냥하고 있고 이제 아이들을 위해 적진에 불벼락을 토할 그런 포들이 묵묵히 갓난아기의 자지런진 울음속에서 밤길을 가고있다…장엄하고 비장하고 팽팽한 분위기가 흐르고 장엄하다…   서-전쟁터의 장면을 아주 상세하게 적어낸 좋은 시였다고 생각됩니다. 그럼 마지막으로 감상할 시는 입니다. 어떤 내용을 담고있는지 함께 감상하고 선생님의 해설을 듣겠습니다.   떡갈나무             주선우   전사는 적진에 쓰러졌네 한 낮을 누워있고 한 밤이 돼도 감은 눈은 한번도 떠보지 않네   떡갈나무 한그루 지켜섰다가 봄비를 잎에 모아 입술에 떨구며 이슬 맺어 방울방울 눈물 흘릴때  돌격신호를 들은 전사 눈을 떴네   눈앞에선 적의 화구가 갑자기 불을 뿜고 돌격대의 함성은 멎어지거니 전사는 최후의 힘으로 우뚝 서서 수류탄을 던지고 다시 쓰러졌네   뜨거운 가슴들이 전사를 안고 웨치며 흔들며 이 기적을 묻건만 전사는 떡갈나무를 향하여 영원한 미소를 띄우고 있었네   서—주선의 시인의 시였습니다. 정말 전쟁터의 장면을 보는듯이 그려낸 좋은 시라고 생각되는데요. 해설부탁드리겠습니다. 림---해설…..참 묘한 순간을 포착하였다. 즉 적진에서 쓰러진 전사, 헌데 죽지않은 전사 혹은 죽었다 살아난 전사, 그것도 떡ㄷㅁㄷ갈나무때문에 소생한 전사, 다시 대공을 세우고 전우들의 환호속에서 비장하게 쓰러진 전사, 미소를 머금은 우리의 가장 사랑스런 전사…떡갈나무와 비물과 전사의 소생과 나중에 떡갈나무를 보면서 미소하는 전사…역시 한폭의 그림과 장면이 우리 눈앞에 펼쳐지고 아름답고 비장한 화폭이 우리 눈을 황홀히 자극한다. 시인의 재치를 한껏 펼쳐보이는 좋은 시다.   서—지금까지 우리는 전쟁을 여러층면으로 적어낸 주선우시인의 시 5수를  감상했습니다. 아주 감동적인 이야기로 가슴을 적시게 한 좋은 시들이였는데요. 그렇다면 주선우시의 시 예술특점을 개괄해본다면 어떻게 말할수있을가요? 림-네 1.   우선 전쟁문학의 새로운 령역을 개척하였다 이른바 “전쟁문학(戰爭文學, war literature)”이란 전쟁을 소재로 한 문학으로 전쟁의 참상을 고발하고 진단하는 문학으로서 전쟁이라는 사건 자체 혹은 그와 련관된 부수적 사건들을 직접 소재로 삼아 담아낸다. 다시말해 전쟁을 소재로 해서 진정한 인간상과 참다운 진실을 부각시켜 전쟁이라는 현대적 병을 고발하고 진단하는 문학이라고 말할수 있다. 이러한 전쟁문학에서는 전쟁이라는 극한상황 속에서 나타나는 인간의 행위와 그로 인한 실존적 고민을 다루는 일, 이념의 차이가 어떻게 전쟁에서 구체적으로 반영되는가를 생각하는 일, 거대한 세력간의 구조적 마찰의 결과로 일어나는 전쟁이라는 사건과 그것을 수행하는 한 개인의 삶의 의미와의 상관성을 짚어 가는 일, 전쟁을 수행하면서 혹은 전쟁을 거친 뒤 인간은 어떠한 변화를 겪고 어떻게 현실에 적응하는가를 살피는 일 등이 다루어진다. 우리는 주선우시인의 시집 《잊을수 없는 녀인》에서 우리문학에서 이제껏 보기드물었던 전쟁문학의 표현과 의미을 찾아내여 우리 문학의 경지를 더욱 풍부하게 할수 있을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이제 풀어가야할 또 하나의 과제이기도 하다.    또 전쟁이란 동적인속에서 정적인 장면을 잘 그렸다 쓰러진 전사가 하루해 밤까지 고요히 적진에 쓰러져 누워있는 장면이라든가, 잠시 싸움이 멈춘사이 라고 처녀한테 묻는 장면이라든가, 부대는 떠나는데 처녀는 창가에 기대서서 말이 없이 침묵만 하면서 떠나는 전사를 바라본다든가, 숲속의 빨간들창에 일제히 시선을 준다든가…모두가 가렬처절한 전쟁속에서의 조용하고 고요하고 정적인 장면들이다. 2.   시마다 극적인 장면이 있어서 독특한 전쟁문학을 만들었다 불시에 정신차리고 일어나 수류탄을 뿌려던진다든가. 적탄에 맞아 헤쳐진 앞가슴마저 여미지 못한채 희생된다든가, 그 드바쁜 와중에도 해산한다든가, 하는 장면이라든가 대결전을 앞두고 집에 편지를 쓰는데 누군가 노래를 부른다든가, 등등 극적인 장면들이 많아 독자들의 구미를 부쩍 돋군다. 3.   화면이 잘 나타나서 마치도 전쟁의 속사같다 장면을 눈앞에 보는듯하다.\ 에서 일제히 걸음멈추고 숲속의 한곳에 시선을 집중하는 화면이라든가, 에서 떨어지는 비물이 쓰러진 전사의 입술을 적셔주는 화면이라든지, 4.   편편마다 장면보다 사랑과 혼으로 숨쉬는 생명의식이 흘러넘친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그 의미가 훨씬 크고 넓은 사랑이다. 물론 남녀의 사랑이 많고 또 고향에 대한 사랑과 조국에 대한 사랑 전우지간의 사랑 지휘관과 전사들지간의 사랑, 어머니에 대한 사랑, 평화에 대한 사랑 등등 서-네 해방후 최초로 시집을 펴낸, 그것도 전쟁문학을 독특하게 구사한, 주선우시인의 시편들을 감상하다보니 어느덧 약속된 시간이 다 되였습니다. 오늘은 오래도록 주목받지못하다가 요즘에야 다시 각광을 받게 된 저명한 시인 주선우선생의 시들을 감상했습니다. 반우파투쟁이 없었다면 좋고 많은 시들을 더 써냈을 시인인데요. 참 아쉽습니다. 하지만 오늘의 시점에서 다시 주시인과 만난것도 우리들에겐 행복이 아닐가 생각됩니다. 네 림선생님 오늘도 좋은 이야기를 많이 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수고많았습니다. 림-네 수고하셨습니다. 서-그럼 이것으로 오늘 문학살롱프로 여기서 이만 줄이겠습니다. 저는 다음 시간에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이 시간 프로편집에 김철운이였습니다.  
1030    건국후, 조선족시인으로서 첫 개인시집 출판한 주선우 댓글:  조회:5465  추천:0  2016-01-22
혜성처럼 빛난 조선족전쟁시문학의 대부 주선우   《다시 읽는 우리 문학》(3)《시인 주선우를 다시 읽다》세미나 연변도서관서 개최  편집/기자: [ 김태국 ]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5-06-05 16:12:31 ]   중화인민공화국 창건이후 조선족으로서는 처음으로 개인시집 《잊을수 없는 녀인들》(1957.4 연변교육출판사)을 출판했던 중국조선족 전쟁시문학의 대표적인 시인 주선우, 오늘날 그를 잊었거나 아예 모르는 사람이 대다수다.   6월 5일 오전, 해란강닷컴 주최, 연변대학 조선어문학부 협조, 연길고려원, 연길시한규닷컴휴한회사 협찬으로 진행되는 《다시 읽는 우리문학》 제3회에서는 기구한 운명의 천재시인 주선우를 재조명하였다.   시인 주선우는 1924년 조선 평양 사암리에서 출생, 학도병으로 일본군에 끌려갔다가 탈출하여 1944년 11월 길림 통화지구의 조선의용군1지대에 참군, 의용군 선전대 편집조 조장 등직을 맡고 《긴급임무》, 《특수임무》, 《돌격임무》를 수차 완성하여 동북해방전쟁이 결속될무렵 사단정치부로부터 대공 1차를 수여받았다.   그후 항미원조전선에 나간 그는 모 군단 정치부 선전원으로 활약, 최전선에서 용맹하게 싸웠고 미제와의 전투에서 불행이 척추부상을 입고 군공메달, 국기훈장 등을 수여받았으며 영예롭게 퇴역하였다. 1952년 가을, 연변조선족자치주정부 문교처에 배치, 연변교육출판사 문예창작조 조장, 연변작가협회 창작위원회 주임 등 직을 맡고 창작활동에 종사하였다.   1957년 4월에 출판된 그의 시집 《잊을수 없는 녀인들》이 그의 인생을 바꾸어놓았다. 하루아침에 정치권리와 창작권리를 박탈당하고 그를 따랐던 동료작가와 문학도들로부터 배척을 당한 주선우는 《우파분자》의 모자를 쓴채 조선으로 망명을 떠났고 조선에서도 여의치 못한 생활을 이어가다가 중병에 걸려 1986년 다시 연길에 돌아왔다. 하지만 안식처가 없이 길림, 할빈 등지로 떠돌다가 1987년초 할빈에서 기구한 운명을 마쳤다.    좌우로부터 석화, 우상렬, 최삼룡, 주성화, 채영춘, 장정일   세미나에서 연변작가협회 부주석 석화, 연변대학 교수 우상렬, 평론가 최삼룡 등이 주선우시인의 생평, 작품, 문학성과 등을 다각적으로 조명하였고 평론가 장정일, 시인 림금산, 한규닷컴 총경리 김향, 칼럼작가 주청룡 등이 소감을, 연변주당위선전부 전임 부부장 채영춘이 축사와 소감, 총화발언을 하였다.   해란강닷컴 주성화총편은 20살에 일본군 학도병으로 끌려왔다가 탈출하여 조선의용군에 참가했던 비운의 천재시인 주선우, 33살에 첫 시집을 내고 그로 인하여 우파분자로 타격받아 어찌할수 없이 망명길에 올랐다가 62세의 초로의 병든 몸으로 중국땅을 찾았던 조선족전쟁문학 시초의 시인 주선우, 언제 어디서 어떻게 이 세상을 하직하였는지도 모르는 주선우시인의 일생을 조명하고 그와 함께 동시대를 풍미했던 조선족문학인들의 문학적업적을 재조명하는 《다시 읽는 우리 문학》은 앞으로 6-7차 이어질것이며 이를 통해 우리 중국조선족문학의 가장 어려웠던 로정과 성과를 규정하는것이 이번 문학포럼의 취지라고 밝혔다.   === 잊지 말아야 할 시인 —시인 주선우와 시집 《잊을수 없는 녀인》을 다시 읽다 석화   1. 들어가며 “해란강닷컴”에서  2015년도의 주요한 사업일환으로 기획한 “다시 읽는 우리 문학” 계렬세미나의 세번째 주인공으로 리욱시인과 김창걸소설가에 이어 주선우시인을 선정하였다. 이는 아주 명철하고 적시적인 결정이다.    중국조선족문학은 지난 백년 남짓한 력사행정에서 우리들이 이 땅에서 걸어온 삶과 정서를 기록하면서 나날이 발전하여 왔다. 이 과정에서 우리의 중국조선족문학은 수많은 훌륭한 시인, 작가들에 의하여 우수한 문학작품들이 창작되였다. 오늘날에 이르러 이와 같은 훌륭한 시인, 작가들을 다시 만나고 그들이 창작한 우수한 문학작품들을 다시 읽으면서 그 작가와 작품에 대하여 깊이 있는 연구를 진행하는것은 새로운 력사시기 우리 문학의 번영과 발전에 도움이 될뿐만 아니라 전반 중국조선족사회의 문화창달에도 큰 기여가 될것이다.    근년에 이르러 연변작가협회와 연변대학 등 유관부문에서는 새로운 시기 새로운 관점에 기반하여 우리 문학사를 정리하고 많은 귀중한 사료를 발굴하며 문학의 다양한 현상을 연구하는 등 괄목할만한 성과들을 거두었다. 하지만 다시 되돌아보면 이 과정에서 일부 특정 작가와 시인에게만 무게가 크게 실리고 그들에 대하여 어쩌면 정도이상의 열기를 불러일으키면서 뜨거운 화제로 부각시키는 대신 우리 문학사에서 특별히 기억하고 반드시 잊지말아야할 적지 않은 훌륭한 시인, 작가에 대하여서는 거의 거론하지 않고 연구하지 않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자신의 훌륭한 작품으로 우리 중국조선족문학의 보물고를 빛내고 가득 채웠으며 남다른 노력으로 우리 중국조선족문학의 발전에 큰 기여를 하였지만 오늘에 이르러서는 기억속에 거의 사라지고 지워져가는 그들의 이름을 다시 불러내여 그들의 작품을 다시 읽고 감동하며 오늘까지 걸어온 우리 문학이 길을 되새기는것이 바로 오늘 “해란강닷컴”에서 펼치는 이 계렬세미나의 과제이다.      주선우, 우리는 오늘 “잊지 말아야할 시인”으로 그의 이름을 부른다. 지난 세기 50년대 초반, 적탄이 빗발치는 항미원조전장에서 갈비뼈에 탄환이 박혔어도 목숨을 다해 싸웠고 그 피터지는 싸움의 과정을 아름다운 시행에 적어낸 지원군전사가 젊은 시인 주선우였다. 또한 그렇게 포화가 울부짓는 싸움터에서 써낸 고운 시편때문에 그처럼 소중히 아끼고 생명을 다 바쳐 사랑해온 이 땅에서 쫓겨나야했던 불운의 시인도 바로 우파분자 주선우였다. 주선우시인은 전장에서 목숨과 바꾼 한글자 또 한글자로 내려 쓴 시로 시집 “잊을수 없는 녀인”을 엮었고 또한 바로 이 시집때문에 우파모자를 썼으며 나중에는 언제 어디서 어떻게 돌아가셨는지도 모르는 이 땅의 무주고혼이 되고 말았다. 말 그대로 사나운 적탄에도 빼앗기지 않았던 귀중한 생명을 한권의 시집으로 그냥 다 말아먹은것이였다.      2. 우리 문학사에서의 시인 주선우 중국조선족문학사가 처음 정리되여 공식적으로 출판된것이 1990년 7월이였다. 바로 조성일, 권철, 최삼룡, 김동훈이 집필하고 연변인민출판사에서   펴낸 《중국조선족문학사》 이다. 그런데 이 문학사에는 시인 주선우의 이름이 없었다. 당시 력사상황에서 우파분자모자를 썼다가 외국에 망명한 시인을 거론하기 불편하였을것임을 우리는 모두가 주지하는 바이다.    그후 2006년 12월, 북경대학 조선문화연구소에서 총 11권으로 된 “중국조선민족문화사대계”를 편찬했는데 이 대계의 제2권으로 《문학사》를 발간했다. 북경 민족출판사에서 출판한 이 책에서 처음으로 주선우시인과 그의 작품이 문학사에서 거론되였는데 바로 이 책의 “제1편 시문학사”, “제3장 1949년부터 1976까지의 시문학”의 “제4절 기타 시인들” 장절에서 서헌의 시 “청송두그루”, 김태갑의 시 “옥중의 노래”와 함께 주선우의 시작품 “잊을수 없는 녀인”을 다뤘던것이다.    이어서 2007년 12월 북경시고등교육정품교재프로젝트로 북경 민족출판사에서 출판한 《중국조선민족문학사》 (김동훈 고문, 오상순 주필, 최삼룡, 장춘식 집필)에서도 같은 내용으로 주선우시인과 작품을 담았다. 이 책에서“제2편 정치공명시기의 문학, 제2장 1945년-1978년의 시문학, 재1절 1945년-1978년의 시문학”의 내용으로 주선우시인의 서정시 “잊을수 없는 녀인”을 기술한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상기 “중국조선민족문화사대계 · 2”의 《문학사》와 《중국조선민족문학사》 두권의 책에서 주선우시인은 단지 몇줄의 략력에 불과한 소개글과 몇행 안되는 시작품의 절록 및 몇글자의 해설로 간단히 기재되고있을뿐이다.    우리 문학사에서 주선우시인과 그의 작품을 비교적 자세하게 다루게 된것은 2011년에 이르러서이다. 연변대학211공정 제3기프로젝트의 일환으로 김호웅, 조성일, 김관웅 등이 편찬한 《중국조선족문학통사(상권)》(연변인민출판사. 2011.12) “제2편 정치공명시기의 문학”, “제3장 정치공명시기(1946-1976년)의 시문학”, “제2절 임효원, 김철, 주선우”편에서 이 책의 406페지에서 411페지에 이르는 적지않은 편폭으로 시인의 생애와 작품에 대하여 다양한 각도로 서술하고 자세히 분석하였으며 비교적 공정하게 평가하였다. 그러나 이 《중국조선족문학통사》에서도 상, 하 두책에 거론되는 대부분의 시인, 작가들의 사진이 수록된데 반하여 그의 사진은 한폭도 들어있지 못하였다.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주선우시인에 대한 연구는 우리들이 이상에서 보아온 여러 종류의 문학사에서 기술한 상황에서와 마찬가지로 매우 미흡하다. 주선우시인에 대한 서지문헌도 1957년 시집 《잊을수 없는 녀인》이 발간되고 곧 이어 들이닥친 “반우파투쟁”에 휩싸여 곤경을 치르던 1957년과 1958년 사이에 발표된 몇편의 쟁론문장과 비판문장에 불과하다. 그것들을 살펴보면 “에 대하여”(김성휘, 《연변일보》 1957년), “을 찾아서”(리령호, 《아리랑》1957년 9월호),  “”(박상봉, 권철, 《아리랑》 1957년 12월호), “주선우의 립장과 붓끝 -시집 에 대하여”(철봉, 《아리랑》 1958년3월호) 등 몇편이다.    그로부터 근 반세기 세월, 50년이 가까워오는 시간이 지난 2004년, 연변대학 우상렬교수가 론문 “인간성을 노래하는 시인(唱人性之歌的诗人)”을 써내여 주선우시인의 시세계에 대하여 새롭고 깊이 있는 론의를 전개하였는데 이 론문은 우리의 문단과 평단에 주선우시인연구에 대한 새로운 화두를 던진 의미가 있는 론문이 되였다.    또한 2011년 12월, 한국 경남대학교 대학원의 진립립학생이 인문학과 석사학위론문으로 “중국조선족시인 주선우연구(지도교수 박태일)”를 제출하였는데 이것은 오늘에 이르러 국내외에서도 주선우시인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각일각 깊이 있게 전개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주선우시인의 인생궤적에 대하여서는 현재 관련기관의 당안실에 보관된 몇페지밖에 안되는 개인당안 이외에는 기록된 문서자료가 거의 남아있지 않고있다. 다행히 조선의용군 제1지대(동북민주련군 1지대)에 참가하여 주선우시인과 동북해방전쟁터에서 3년간 어깨겯고 함께 싸운 전우이며 또한 1952년 가을, 부대에서 퇴역하여 함께 연변에 와서 지방의 문화부문에서 같이 일한 동료이기도 하지만 1957년 반우파투쟁 당시에는 함께 모자를 쓰고 우파분자가 되였던 극작가이자 소설가인 최정연선생이 1997년 7월에 쓴 글 한편이 시인에 대한 거의 유일한 단서로 남아있게 되였다. 최정연선생이 2000년도에 료녕민족출판사에서 출판한 작품집 《울고 웃는 인생길》에 수록한 “분노에 차는 편지”라고 제목한 산문이 바로 그 글인데 이 글은 이후 여러 사람들이 주선우시인에 관하여 쓴 대부분 문장에서 인용되고있는 실정이다.       기구한 운명의 시인 주선우  시인 주선우(朱善禹)는 1924년 조선 평양 사암리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학도병으로 일본군대에 끌려나갔다가 도망쳐나와서1945년 8월, 일본 천황이 무조건 항복하기 9개월전인 1944년11월에 길림 통화지구에서 조선의용군 1지대(동북민주련군 1지대)에 참군하였다. 열렬한 문학청년이였고 시쓰기를 즐겼던 그는 부대 선전대 편집조에 배속되였고 얼마후 조장으로 천거되였다. 그는 3년 동북해방전쟁가운데서 전투부대를 따라 행동하면서 많은 “긴급임무”, “특수임무”, “돌격임무”를 완성하였다. 동북해방전쟁이 결속될무렵 사단정치부에서는 그에게 대공 1차를 기입해주었다.   이어서 항미원조전선에 나갔을 때, 그는 모 군단 정치부 선동원으로 임직하여 최전선에 나가 용맹히 싸웠으며 전투에서 척추에 부상을 입게 되었다. 그후 군공메달, 국기훈장 등을 수여받고 영예롭게 퇴역하였다가 1952년 가을, 연길에 와서 연변조선족자치주정부 문교처에서 일하였고 연변작가협회가 성립되자 창작위원회 주임직을 맡았다.    주선우는 행정사업에 투신함과 더불어 시창작에 열을 올렸다. 그는 해방전쟁과 특히 조선전쟁에서 겪었던 가렬처절한 전투장면을 떠올리면서 사랑과 평화를 주제로 서정시 창작에 몰두하였고 1957년 4월, 비로소 연변교육출판사에 의해 첫 개인시집《잊을수 없는 녀인들》을 출판하였다. 그러나 그의 이 시집이 이른바 “문제”가 되여 그는 “우파분자”모자를 쓰게 되였다. 정치권리와 창작권리를 박탈당하고 지난날의 혁명전사가 하루아침에 “계급의 적”이 되자 그는 1960년 하반년, 외국으로 망명하는 길을 걷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러나 기구한 운명을 타고난 그는 외국에서의 망명생활도 불우하기 마찬가지였다. 1986년에 다시 연길에 돌아왔으나 안식처가 없이 길림, 할빈 등지로 떠돌다가 1986년말 아니면 1987년초에 사망되였을것으로 추정되지만 구체적으로는 확인할수 없다.   이를 다시 개괄하여 보면 그는 1944년, 20살 나이에 입대하여 전선에서 싸우다가 부상을 입고 1952년, 28살 나이에 퇴역하여 지방에 왔으며 1957년, 33살에 첫 시집을 내고 그해 우파분자가 되였다. 1960년, 36세에 망명길에 오르고 1986년, 62세의 초로의 나이로 되돌아왔다가 그후 언제 어디서 어떻게 이 세상을 하직하였는지 모른다. 이 몇구절로 쓰여진 글이 바로 중국조선족시인 주선우의 기구한 운명의 일대기이다.      4. 시집 《잊을수 없는 녀인》의 의미 시인 주선우는 1957년 4월, 자기의 첫 시집이며 또한 건국후 조선족시단의 첫 개인서정시집인《잊을수 없는 녀인》을 연변교육출판사에 의해 출판하였다.    주선우의 시집 《잊을수 없는 녀인》이 중국조선족시인이 건국후 첫 시집이라는것은 시인 본인에게 있어서뿐만이 아니라 당시 금방 첫걸음을 내디디기 시작한 우리의 전반 중국조선족문학의 각도에서 보아도 모두 매우 중요하고도 매우 큰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 이것은 주선우시인 본인의 문학적이고 시적인 성숙을 의미하는것일뿐만이 아니라 전반 중국조선족시단의 새롭게 성숙되였다는것을 의미하는것으로서 오늘에 이르러 우리의 시단이 비로소 자신의 모습을 갖추었다는것을 표시하는것이기때문이다.    백여년의 우리민족 이주사와 함께 하여온 중국조선족문학의 발전과정을 되집어보아도 매개 환절마다 중요한 표시가 있었다. 그것은 과정이주민족인 우리 중국조선족이 조선반도에 문학적근원을 두었지만 새로운 토양에서 새로운 삶을 살며 새로운 문학을 개척하고 발전시켜 나간다는것을 의미하는것이기때문이다.    중국조선족시문학의 정초자로서 리욱시인이 “8.15”해방후 개인서정시집을 발간하였는데 그것은 1947년에 발간한 시집 “북두성”과 1949년 1월에 발간한 시집 “북륜의 서정”으로 모두 1949년 10월1일, 중화인민공화국 건국이전시기였다.    건국이후, 바야흐로 신중국의 새로운 질서에 발맞추어 온 나라의 모든것이 신속하게 변화되고 있었고 이것은 우리의 중국조선족문학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 과정을 걸쳐 1957년에 이르러 비로소 개인서정시집이 처음 출간되였다는것은 우리의 시문학도 그만큼 안정기를 지나고나서 원만하게 새출발을 시작한다는것을 의미한다.    1957년 4월, 주선우의 시집 《잊을수 없는 녀인》이 연변교육출판사에서 발간된데 이어 그해 8월에 김철의 시집 《변강의 마음》이 같은 연변교육출판사에서 발간되였다. 또한 같은 달 8월, 임효원의 시집 《진달래》가 북경의 민족출판사에서 출간되고 이어 9월에 리욱의 시집 《고향사람들》이 동일한 민족출판사에서 출간되였으며 또다시 12월에 리욱의 장편서사시 《연변의 노래》(한문)가 북경의 작가출판사에서 출간되였다. 건국후 7,8년간의 안정기를 원만하게 거치고나서 1957년에 이르러 이처럼 여러 시인의 개인시집이 한꺼번에 수두룩 쏟아져나온다는것은 류례가 없는 일이였다.    그러나 건국후 첫 개인서정시집 《잊을수 없는 녀인》의 출간, 이것은 주선우시인 개인으로 볼때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였다. 1952년, 부대에서 돌아온 젊은 시인 주선우는 시창작에 혼신을 불태웠다. 그는 《동북조선인민보》, 《연변문예》, 《해란강》, 《연변일보》, 《아리랑》 등 신문, 잡지들에 서정시 “어머니의 부탁”(1954년), “궁전을 지을 때도”(1954년), “봄전투”(1954년), “무산령”(1954년), “대가정의 축배”(1955년), “가자!”(1955년), “파란 댕기”(1956년), “포성을 다시 울리지 말라”(1956년), “잊을수 없는 녀인”(1957년), “첫사랑”(1957년), “민화시 2수”(1957년), “이 세상 광명앞에서 부른 노래”(1957년) 등 시작품들을 줄기차게 지속적으로 발표하였다.   그의 이런 창작적성과들은 문단의 큰 인정을 받았는바 주선운시인은 1954년에 장시 “조국의 동켠에서”로  《동북조선인민보》 신춘문예우수작품평의 2등을 받은데 이어 1956년 8월25일에는 연변작가협회에서 펼친 1955년-1956년도 우수문학작품시상식에서 서정시 “대가정의 축배”가 수상하는 영광을 받아안았다.      남은 과제 주선우시인의 시집 《잊을수 없는 녀인》에는 서정시 26수가 수록되였다. 이 시집의 주요한 주제적경향은 사랑과 생명의 가치 그리고 전쟁과 평화이다. 많은 경우 그의 시의 저변에 흐르는 정서적기조는 비장함과 락관적인데 이는 그의 시적추구와 관련이 있다.    이에 대하여 주선우시인은 어느 좌담회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거대한 비장과 거대한 락관 이 두가지를 매개 시에 결합했습니다. 어떤 시에는 슬픔이 더 많고 어떤 시에는 기쁨이 더 많은데 이는 내 주인공이 죽었을 때는 슬픔이 더 많고 주인공이 살았을 때는 기쁨이 더 많은것입니다. 그러나 나의 시의 전반 빠뽀스는 락관적이며 죽음의 비애를 복수와 분노와 미래에 대한 승리로써 안받침하고있다고 생각합니다.”(1957년 3월, “작가, 시인, 평론가들의 친목좌담” 기록요지에서)    이것은 시인의 직접적인 체험과 관련이 있다. 1944년 스무살의 나이에 군대에 가서 1952년 스물여덟살까지 옹근 8년간 군인으로 있으면서 조선전쟁이라는 가렬처절한 전투를 거치며 비발치는 총탄속에서 부상당하고 살아남은 그가 죽고 죽이는 전쟁의 참상을 너무나도 많이 목격하고 너무나도 많이 겪어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거대한 비장과 거대한 락관”이라는 이 극과 극의 표현이 시줄에 나타나지 않을수 없었다.    이는 또한 우리 중국조선족문학에 결여되였던 전쟁문학이라는 한 장르의 개척을 시사해 주는것이 되기도 한다. 주선우시인은 “떡갈나무”, “영구화점”, “무산령” 같은 시편들에서 우리들에게 전쟁에서의 처절한 죽음과 그것을 뛰여넘는 승리에 대한 불타는 신념으로 그동안 만나지 못하였던 전쟁문학의 새로운 경지를 펼쳐주었다. 전쟁에 직접 참가하고 그것을 시에 담아낸 작품이 우리 문학에 흔치 않았던 것인데 우리는 그것을 주선우시인과 그의 작품에서 생생한 형상으로 만날수 있기때문이다.    그리고 “빨간 들창”, “중대의 약속”, “보초선에서”, “아름다운 밤”과 같은 시편들에서 우리는 “아기-처녀-사랑-어머니-생명”이라는 흐름을 읽게 되고 평화와 행복을 위해서 목숨바쳐 싸우는 리유를 확인하게 된다. 이것이 전쟁문학의 가치이다.    이른바 “전쟁문학(戰爭文學, war literature)”이란 전쟁을 소재로 한 문학으로 전쟁의 참상을 고발하고 진단하는 문학으로서 전쟁이라는 사건 자체 혹은 그와 련관된 부수적 사건들을 직접 소재로 삼아 담아낸다. 다시말해 전쟁을 소재로 해서 진정한 인간상과 참다운 진실을 부각시켜 전쟁이라는 현대적 병을 고발하고 진단하는 문학이라고 말할수 있다.    이러한 전쟁문학에서는 전쟁이라는 극한상황 속에서 나타나는 인간의 행위와 그로 인한 실존적 고민을 다루는 일, 이념의 차이가 어떻게 전쟁에서 구체적으로 반영되는가를 생각하는 일, 거대한 세력간의 구조적 마찰의 결과로 일어나는 전쟁이라는 사건과 그것을 수행하는 한 개인의 삶의 의미와의 상관성을 짚어 가는 일, 전쟁을 수행하면서 혹은 전쟁을 거친 뒤 인간은 어떠한 변화를 겪고 어떻게 현실에 적응하는가를 살피는 일 등이 다루어진다.   우리는 주선우시인의 시집 《잊을수 없는 녀인》에서 우리문학에서 이제껏 보기드물었던 전쟁문학의 표현과 의미을 찾아내여 우리 문학의 경지를 더욱 풍부하게 할수 있을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이제 풀어가야할 또 하나의 과제이기도 하다.
1029    詩의 시대, 詩의 위기, 詩의 소멸... 댓글:  조회:5713  추천:0  2016-01-21
 내가 아닌 것은 연줄을 끊듯 버려라 어느 스승이 거문고를 앞에 두고 제자한테 물었습니다. 줄을 너무 당기니까 어떻느냐고 했더니 줄이 끊어집니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면 너무 느슨하게 하면 어떻더냐고 했더니 음이 잘 나지 않습니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시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즘 문학 지망생들이나 등단한 신인들은 가오리연처럼 너무 빨리, 높이 올라가려고 하고 오래 견딜 줄을 모릅니다. 시대가 너무 급변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짧은 시간 내에 많은 시를 써서 등단하려 하고 빨리 시집을 내서 유명해졌으면 하는 욕구가 강합니다. 하지만 시라는 것은 잡초 전략도 아니고 흥부전략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아이디어를 쫓아가서 되는 것도 아니고 유행을 따라간다고 해서 시가 되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그러니까 자기 삶에서 체득을 해야 됩니다. 누구도 시를 써주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자기의 경험도 중요하고 평소의 마음 씀씀이도 중요하다는 게 누구나 시를 쓸 수는 있지만 아무나 좋은 시를 쓸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자기 자신의 시에 임하는 태도가 매우 중요합니다. 좀 느리고 좀 미흡하더라도 나는 나여야 합니다. 내가 남이 아니잖습니까. 나는 하나밖에 없는데 그런 나의 개성을 버리고 괜찮다 싶은 것을 닮으려고 하면 그건 벌써 이미 자기가 아닙니다. 자기가 아닌 사람이 시를 써놓으면 좋은 시가 되겠습니까. 그러니까 아닌 것은 따라가지 말고 버릴 것은 버리는 게 좋습니다. 연도 잘 날다가도 어느 순간 줄이 끊어져서 얼레를 떠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미련 없이 떠나 보내야 합니다. 그걸 찾으려고 하지 마세요. 시어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던 언어들도 어느 땐가는 나와 맞지를 않습니다. 그럴 때는 자꾸 거리에 매달리지 말고 미련 없이 버리는 것이 좋습니다. 버릴 줄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버린다는 것은 자기 안으로 단단해진다는 겁니다. 단단해진다는 것은 어떤 외부의 조건이 닥쳐도 견뎌낼 힘이 있다는 얘기입니다. 견뎌낼 힘이 있다면 방패연과 같은 좋은 시를 쓸 수 있게 됩니다. 이런 것은 아주 평범한 것 같아도 중요한 일입니다. 독자의 관심은 시를 쓰는 사람이 아니고 시 자체입니다.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시인을 만나보고 싶지만 그 시인의 시가 별로 아니면 시인도 만나보고 싶지 않거든요. 그런데도 요즘의 시들은 너무 바깥에 민감합니다. 말하자면 자기 자신이나 세계에 대해서 새로운 인식도 없이 아주 포즈에 능한 시들이 많습니다. 다변과 요술을 문학적 열정과 혼동하는 시들이 있습니다. 문맥이 잘 안 통하는 시들이 있는가 하면, 전혀 해독이 불가능한 시들이 있습니다. 이름만 덮으면 누구의 시인지도 모르게 비슷비슷한 시들이 있습니다. ' 아, 이런 시들은 안 되겠다'는 생각과 함께 나 자신 그런 시들을 보면서 거울처럼 생각한 적도 있었는데, 어느 평자가 이런 말에 크게 공감을 했습니다. 이렇게 감동은커녕 공감조차 할 수 없는 시들이 양산되면 너무 위험합니다. 시 독자들이 그렇게 많지도 않은데 자꾸 수가 줄어들지 않겠습니까. 시도 매력이 있어야 합니다. 시 독자 수도 줄어들고 그 동안 시인한테 갖고 있던 기대나 관심조차도 줄어들게 되면 참 안되겠다는 생각이 드는데, 독자들을 걱정하기 전에 시인들 자신이 그 치열성을 놓지 말아야 된다고 생각됩니다. 여러분도 앞으로 시를 쓰실 분들이 많은 것 같은데, 그걸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요즘 시의 위기를 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80년대를 시의 시대라 하고 90년대를 시의 소멸 시대라고 하잖아요. 나는 그런 표현이 좀 지나치다고 생각됩니다. 소멸이나 쇠퇴라는 말을 쓰기에는 90년대 시가 80년대 시에 결코 뒤지지 않았습니다. 지금 독자들이 시를 외면하고 있고 고립시킨다고 하지만 그렇지가 않습니다. 종이책이 줄어들고 전자책이 나온다고 해도 종이책은 종이책 나름대로 소중함을 갖고 있을 테니 그렇게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이 세상의 문명이 디지털화되면 될수록 시의 세계는 자꾸 서정성을 회복합니다. 시라는 게 시대의 변화에 민감하게 따라간다고 해서 좋은 시가 아닙니다. 우리의 전통 없이 어떤 실험시가 있겠습니까. 전통이 바탕이 되는 그런 실험시가 제대로 실험시가 되지 전통을 완전히 무시해버리면, 농부들이 그렇게 잘 가꾸어 온 밭에 형편없는 씨를 뿌려서 완전히 농사를 망치는 그런 실험시들은 실험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시의 위기라고 말하는 것 중에 신춘문예에 응모자 수가 날로 늘어가고 문예지의 응모자 수도 늘어갑니다. 각종 문예 창작 학교의 프로그램들이 굉장히 활성화되고 있습니다. 시집이 줄어든다고 해도 많이 나오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위기가 아닌 것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뭐가 더 위기냐 하면 많이 양산되고 프로그램들이 많이 나오는 것은 좋습니다만 시인을 양산하게 되면 치열성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 치열성을 잃어버릴 경우에 매너리즘에 빠지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정신적 공황이 생기게 됩니다. 그럴 경우에 오히려 위기가 아닐까, 청소년들의 왜곡된 시 교육이 대학생이 되어도 마찬가지고 어른이 되어도 시에 대해서 가까이 갈 수가 없습니다. 어느 날 TV를 보고있는데 수능시험에 대비한 국어시간이었습니다. 어떤 시인의 시를 강의하고 있었는데 전문은 살짝 한번 보여준 다음, 시 한 구절 한 구절을 해체시키고 분석하고 있었습니다. 분석하더니 상징이 어떻고 비유가 어떻고 도치가 어떻고 난도질을 하는 겁니다. 그러더니 시 한 편은 어디로 가고 없고 아주 쓸모없는 수사만 남발되었습니다. 그걸 보면서 너무 충격을 받았습니다. 저런 왜곡된 시 교육을 하니 어떻게 우리 청소년들이 시를 제대로 느끼고 이해하고 시를 가까이 하고 사랑할 수 있겠는가 말입니다. 우리 나라의 입시제도에 정말 분통이 터졌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런 걸 없앨까, 위기라고 하지만 경제위기만 위기겠습니까. 문화위기가 나는 더 큰 위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프랑스와 같은 나라에서는 유치원에서부터 시를 들려준답니다. 학년이 높아갈수록 시를 자꾸 이해시켜서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는 거의 100편을 외운다고 합니다. 그냥 외우는 게 아니고 자기의 가슴 속에 들어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나라같이 시를 획일화시키고 분석하는 나라가 어디에 있습니까. 미국의 엠허스터라는 대학이 있는데 문학창작이 유일한 필수 과목이라고 합니다. 그 교육 이념이 뭐냐고 하면 종합 사고력을 갖춘 지성인을 양성한다는 것입니다. 국가 경쟁력이 그 학교에서는 문학, 철학, 자연과학에서 나온다고 굳게 믿고 있는 학교랍니다. 그래서 1,600명밖에 안 되는 초미니 학교인데도 미국 전체 인문과학대학에서 1등 자리를 몇 년간 고수하고 있답니다. 이 창작강의를 패스하려고 과외공부까지 한답니다. 일본에도 자매학교가 있다고 하는데 우리 나라는 언제 이런 학교가 생기겠습니까. 맨 일류학교만 생각하다가 언제 제대로 된 훌륭한 시인 작가가 배출되겠습니까. 정말 통탄하지 않을 수 없는 현실인데 개인의 힘이 미약하니까 어떻게 할 수도 없고 참 분통이 터집니다. 영국이 인도를 지배하고 있을 때 왕에게 영국하고 셰익스피어 중에 뭘 택하겠느냐고 누가 물었는데 인도는 버려도 셰익스피어는 포기하지 않겠다고 대답했답니다. 우리 나라 같으면 뭘 택하겠습니까. 뻔하지 않습니까. 그래도 우리의 옛날 조상들은 시를 짓고 노래하는 걸 자기네 생활 속에서 아주 오랜 전통으로 여겨왔습니다. 왕에서부터 촌부까지 다 시를 사랑하고, 뿐만 아니라 시를 통해서 삶의 도리를 배우고 자기의 꿈을 드러냈습니다. 과거시험 제도에도 관리등용 시험을 보는데 시가 제일 중요한 과제로 제시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잘 산다고 해서 과연 잘 사는 겁니까. 퇴행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이런저런 것들이 시를 죽이고 시인을 죽인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톰 슐만의 {죽은 시인의 사회}라는 소설을 보셨지요. 영화도 상영이 되었고 비디오도 나와 있으니까 안보신 분은 빌려보시고 아이들도 한번 보게 하세요. 공부만 하라고 해서 제대로 되지 않습니다. 이걸 보면 왜 인간한테 시가 소중한가를 알게 해줍니다. 그리고 아이들을 굉장히 마음을 트이게 해줍니다. 대강의 줄거리를 얘기하면 이렇습니다.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명문학교인 웰튼 아카데미에 키팅이라는 국어선생이 새로 부임을 합니다. 첫날 첫 시간에 키팅 선생이 휘파람을 불면서 교실로 들어옵니다. 애들은 어리둥절하고 있는데 오 선장이여, 우리 선장이여. 그러면서 이 시는 휘트먼의 시 한 구절인데 링컨 대통령을 찬양한 시인이 앞으로 자기를 그렇게 불러도 좋다고 얘기합니다. 그래서 이 엄격한 교육에 찌들려 있는 학생들이 너무 충격을 받고 어리둥절해 있으니까 또 이렇게 말합니다. "제군은 알겠나, 너희들은 지금 전쟁중이란 말이야 전쟁. 그리고 너희들의 혼은 위기에 빠져있다. 나 너희들로 하여금 언어를 사랑하며 자비를 베푸는 일을 가르치겠다." 그러면서 느닷없이 에반스 프리차드 박사가 쓴 감상문 21쪽을 찢으라고 합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너무 놀라서 어쩔 수 없이 선생님이 하라는 대로 찢습니다. 그걸 왜 찢게 했겠습니까. 이 키팅 선생은 너무 보수적이고 엄숙자의자의 교육장인 웰튼 아카데미에서 아이들이 가식과 강제의 허울 속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 허울 속에서 아이들을 빼내어서 창조적인 인간들을 만들어 보려고 시도를 했던 겁니다. 이런 시도가 사실은 에반스 프리차드 박사의 감상문을 찢게 한 데 대한 의미심장한 점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사실 시 쓰는 데 이론이 필요합니까. 물론 기초는 되어야지요. 하지만 이론에 대입시킨다고 해서 시가 안되거든요. 오히려 손해볼 일이 더 많습니다. 이론에 밝으면 시를 못씁니다. 사람들이 시를 읽는 것은 우리가 인류의 한 일원이면서 정열에 넘치는 생물이기 때문이다. 의학이나 법률, 은행업들은 우리가 살아가는데 아주 필요한 분야임에 틀림이 없다. 그렇다면 시나 로맨스, 사랑이나 아름다움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존재하는가, 존재해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면서 시는 우리 인간 삶의 양식이다고 선언을 합니다. 그렇게 화두를 던져놓고 학생들로 하여금 스스로 해답을 찾도록 끊임없이 시를 읽히고 쓰게 하고 토론하게 합니다. 그런데 우리 나라는 토론문화가 없습니다. 내가 대학 모교인 이대에 가서 창작강의를 두 학기를 했었는데 죽 앉아 있는 게 싫어서 둥글게 앉혀 보았습니다. 그러면서 내가 뭘 주면서 토론을 해보라고 했더니 아무도 입을 열지 않는 겁니다. 우리 나라는 토론문화가 이렇게 안 되어 있으니 서로 주고받는 대화도 잘 안되고 소통이 불가능합니다. 요즘 학생들한테는 두 가지 결핍이 있다고 합니다. 감동할 줄 모르는 것과 자연하고 친화할 줄 모르는 것입니다. 데이트 할 때도 컴컴한 곳이 아니면 백화점입니다. 북한산과 청계산도 좋은데 거기는 갈려고 생각을 안합니다. 연애하는 애들이 한번도 산에 오는 것 보지 못했습니다. 돈도 들지 않고 얼마나 볼 게 많습니까. 그래가지고 나중에 아이들에게 뭘 가르치겠습니까. 그러니까 감동없는 인간으로 크게 마련이지요. 그래서 이 키팅 선생은 한창 감수성이 예민한 학생들을 구태의연한 틀 속에 가둬놓고 교육을 시킨다는 것은 강제교육이고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본 것입니다. 그래서 학생들과 호흡을 맞추면서 학생들로 하여금 정말 창조적인 인간으로 만들려 했는데, 보수적인 교장과 일류병에 병든 학부모들로부터 쫓겨나고 맙니다. 그래서 키팅 선생은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쫓겨나지만 학생들은 자기들의 의식을 전환시켜 주고 창조적인 인간으로 만들려고 했던 키팅 선생을 영원히 잊지 못합니다. =======================================================================   224. 엄마 걱정 / 기형도                           엄마 걱정                                  기 형 도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춧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간 창 틈으로 고요한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기형도 시집 중에서   --------------------------------------------------------------   225. 내 인생의 中世 / 기형도                        내 인생의 中世                                         기 형 도   이제는 그대가 모르는 이야기를 하지요 너무 오래되어 어슴프레한 이야기 미루나무 숲을 통과하면 새벽은 맑은 연못에 몇 방울 푸른 잉크를 떨어 뜨리고 들판에는 언제나 나를 기다리던 나그네가 있었지요 생각이 많은 별들만 남아 있는 공중으로 올라가고 나무들은 얼마나 믿음직스럽던지 내 느린 걸음 때문에 몇 번이나 앞서가다 되돌아 오던 착한 개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나는 나그네의 깊은 눈동자를 바라보았지요     중에서   ※ 기형도의 미완성의 시 「내 인생의 中世」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첫부분                          
1028    詩와 함께 평생을 살기로... 댓글:  조회:6025  추천:0  2016-01-21
네 번째 시집 {마음의 수수밭}을 내기 전까지는 전국 방방곡곡을 여행하며 다녔습니다. 관광여행이 아니라 서울에서 살기가 너무 힘이 들면 살아서 돌아오려고 한 여행도 있었고, 여행을 가서 정말로 살아서 못 돌아오면 안 돌아와도 좋다는 두 가지 생각을 가지고 여행을 떠났습니다. 그 때의 여행이 나한테는 고행이었고 내 삶의 수행으로 삼았습니다. 방방곡곡을 떠돌아다닐 때의 경험이 {마음의 수수밭} 속에 많이 깃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의 수수밭}에 가장 애착이 갑니다. 어떤 일이 내 생명보다 더 소중하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래도 내가 죽고 나면 이 시는 남아 있을 것 아닙니까. 이렇게 해서 다섯 번째 시집까지 나왔는데 생각해 보면 시의 길에는 에누리도 덤도 없습니다. 그래서 시라는 것이 예수의 고난을 상기시키잖아요. 왜냐하면 부활의 환희도 십자가의 수난 뒤에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그 정도로 글쓰기가 힘들다는 것입니다. 이 글쓰기의 궁극은 불교에서 말하는 소신공양(燒身供養)이고 그 결과는 등신불(等身佛)이지 않겠습니까. 그만큼 시에 대해서 어떤 오체투지(五體投肢)를 해야 합니다. 자기 몸을 완전히 바닥에 엎드려서 낮춰야 됩니다. 치열하더라도 겸허하게 치열해야 합니다. 자기 시가 조금 잘 써진다고 해서 턱을 쳐들고 못 쓰는 사람을 무시하면 발전이 안 됩니다. 그러니까 겸허한 마음으로 치열하게 시를 써 나가야 됩니다. 말하자면 이렇게 힘든 시하고도 나는 한몸이 되어서 정말 평생을 살고 싶습니다. 아무리 괴롭더라도 말입니다. 그건 왜 그런가 하면 시와 같이 있으면 내가 진실 곁에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진실하고 배가 맞는다는 확실한 느낌이 옵니다. 그래서 나는 평생을 시와 같이 살기로 했습니다. 어느 시인은 시를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맨몸으로 철조망을 통과한 사람들의 등판과 같다.' 이성복 시인의 이 말을 들으니까 내게 전율이 오더군요. 이제 시를 쓰는 자체도 우리들 삶의 문제잖아요.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는 노력의 하나라면 희망이 너무 넘쳐도 시가 안 되고 절망에 너무 질식해도 시가 되지 않습니다. 부정과 긍정이 이중적으로 교차하는 그 자리에 꽃이 핍니다. 너무 한쪽으로 치우치면 안 됩니다. 자기 폐쇄성에 빠지고 맙니다. 어느날 내가 한강을 지나가는데 아이들이 연날리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연을 보는 순간 '아, 시를 저기에 비교해도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연도 가오리연과 방패연이었습니다. 가오리연은 가볍기 때문에 공중으로 올라가는 시간은 굉장히 빠릅니다. 하지만 굉장히 까붑니다. 요리조리 공중을 까불다가 결국은 균형을 잃고 땅바닥에 꽂히고 맙니다. 반면 방패연은 아주 의젓합니다. 그래서 올라갈 때는 굉장히 힘이 듭니다. 상승 속도가 무척 느리지만 한번 공중으로 올라갔다고 하면 자기 스스로 균형을 잡습니다. 그래서 꽂히는 일 없이 아주 의젓하게 하늘을 가릅니다. 가오리연과 방패연은 외형부터 다르고 몸집은 비교도 안 됩니다. 나는 가오리연을 조금 나쁜 시에, 방패연을 좋은 시에 비교해 봤습니다. 그리고 연도 날리기 전에 절대로 빨리 날려서는 안 됩니다. 잘 만들어서 띄울 때는 아주 높이 올라가고 오래 하늘을 납니다. 마음이 급해서 빨리 날리려고 하면 실패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연을 날릴 때는 얼레를 잡은 손의 역할이 참 중요합니다. 얼레를 잡고 당길 때 줄을 너무 많이 당기면 끊어지고, 느슨하게 당기면 풀어집니다. 그래서 손으로 당길 때는 당기고 놓아줄 때는 놓아줘야지, 균형을 잘 잡아서 높이 올라가고 하늘을 오래 날 수가 있는 겁니다. 연이 빨리 올라간다고 해서 반드시 높이 올라가는 것만은 아닙니다. 오래 견디는 것도 아닙니다.  =========================================================================   222. 질투는 나의 힘 / 기형도                                               질투는 나의 힘                                     기 형 도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기형도 시집 중에서       기형도의「질투는 나의 힘」시작 메모   저것들이 다 내가 승부해온 것들인가 눈동자, 아름답다, 미(美) - 질투 이것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저것은 무엇인가. 너에게 가기위하여 그대 나는 얼마나 무관심하고자 애썼던가 어리석게도 헛소리들, 돌연한 변화가 있었던가, 대결. 아무도 없는 찻집에 들어서다         기형도 연보   1960년 2월 16일 경기도 옹진군 연평도에서 3남 4녀중 막내로 출생.   1965년 부친의 서해안 간척사업에 실패로 유랑하다가 경기도 시흥군 소하리에 정착.   1985년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작인 "안개"는 이 마을이 배경이 됨.   1967년 시흥국민학교에 입학.   1969년 부친이 뇌졸중으로 쓰러져 병석에 눕다. 가계가 힘들어짐.   1975년 당시 고등하교 2학년이던 셋째 누이가 불의의 사고로 죽음.   1979년 신림중학교을 거쳐 중앙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 연세대학교 정법계열 입학.        교내 문학동아리 '연세문학회'에 입회, 본격적인 문학수업 시작.   1980년 대학문학상인 박영준 문학상(소설부문)에 가작('영하의 바람').   1981년 방위병으로 입대, 복무중 안양의 문학동인인 '수리'에 참여.   1982년 6월 전역 후 가 윤동주문학상(시부문)에 당선.   1984년 10월 중앙일보사 입사.   198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부문에 당선('안개').        2월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졸업, 신문사 수습을 거쳐 정치부에 배속.   1986년 정치부에서 문화부로 옮김. 지속적으로 작품을 발표 주목을 받음.   1988년 문화부에서 편집부로 옮김.   1989년 3월 7일 새벽(만29세), 종로의 한 극장 안에서 숨진 채 발견.(사인 뇌졸중)        시작메모로 채워진 푸른 노트, 이국에서 온 몇 통의 편지, 꼼꼼히 줄쳐 읽던 몇 권의 책과        소화제 알약이 든 가방을 가지고 있었음.        경기도 안성 소재 천주교 수원교구 묘지에 묻힘.        5월 유고시집 발간.   1990년 3월 산문집 발간.   1994년 2월 추모문집 발간.   1999년 3월 전집 발간.   ------------------------------------------------------------   223. 빈 집 / 기형도                               빈 집                                  기 형 도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기형도 시집 중에서    
1027    詩는 언어로 짓는 寺院 댓글:  조회:5925  추천:0  2016-01-21
낮설게 하기의 아름다움 천양희 (시인) 저는 평소에 시는 언어로 짓는 사원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시(詩)라는 말의 한자어는 말씀 '언(言)'과 절 '사(寺)'자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왜 절 사자를 거기에다 붙였을까요. 다 아시는 대로 절은 용맹정진하는 구도자들의 수행장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시를 쓰는 사람들도 구도자의 정신과 자세로 시를 쓰라는 뜻에서 '시(詩)'자가 만들어졌다고 생각됩니다. 내가 언어로 사원을 짓기 시작한 것은 1965년 이화여대 3학년 때로, 박두진 선생님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을 통해서 등단을 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등단 통로가 두 군데밖에 없었습니다. 신춘문예 당선과 {현대문학}지 추천 통과밖에 없었는데, 현대문학이 유일한 문예지였습니다. 올해로 내가 시인의 길을 걸어온 지가 35년이 됩니다. 시의 나이가 35세가 되는 셈이지요. 그런데 그 동안 걸어온 삶의 길이나 시의 길이 너무 꾸불텅해서 내 자신을 바꾸는 데도 20여 년이 걸렸습니다. 이 나이쯤에는 앞서간 여러 사람을 생각해 보게 됩니다. 예수도 석가도 이 나이쯤에 삶의 절정에 다다랐지요. 예수는 33세에 인류를 구원했고, 소월(素月)도 영랑(永郞)도 파울 첼란도 실비아 플라스도 요절했지만 불멸의 시를 남겼습니다. 그런데 나는 지금도 컴퓨터를 하지 못해서 원고지로 글을 쓰는데, 원고지 앞에 앉으면 사각의 모서리가 절벽같이 느껴집니다. 그래서 내가 그 절벽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여러분이 제게 왜 시를 쓰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잘 살기 위해서 시를 쓴다"고 분명하게 대답할 수 있습니다. 또 누군가 시가 밥 먹여주냐고 물으면, 나는 "시가 내 정신의 밥이다"라고 분명히 얘기할 수 있습니다. 쌀로 된 이밥은 우리 배를 부르게 하지만, 시는 우리의 정신을 살찌우는 밥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한 편의 시를 가슴에 넣고 하루를 너끈히 살아가는 사람도 있고, 한 편의 좋은 시가 가슴 속을 따뜻하게 해서 평생을 거기에 기대면서 풍요롭게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느끼는지 모르겠지만 한 끼의 밥은 굶을 수 있어도, 정신의 허기는 사람을 황폐하게 만듭니다. 시가 밥의 길로 이어지지 않는다고 해도 시로써 배부른 사람이 분명히 있습니다. 시인이 되려고 마음먹은 사람들이 돈도 밥도 안 된다고 주저하고 두려워한다면, 이런 사람들은 아예 다른 길로 가야지 시인이 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피나는 노력 없이, 오랜 습작 기간 없이 시인이 되려 하고 좋은 시를 쓰겠다는 생각은 좋지 않은 생각입니다. 니체는 일찍이 '좋은 글은 피의 여로를 거쳐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피로 쓴 글만이 진실하다고 얘기했고, 불멸의 명작을 남긴 플로베르는 글쓰기의 어려움을 가리켜, '내 심장과 두뇌를 짜서 그걸 고갈시키는 과정이다'라고 갈파했습니다. 그만큼 작품 쓰기가 어렵다는 걸 나타내는 말입니다. 또 그는 '한 마디의 말을 찾기 위해서 나는 하루 종일 내 머리를 쥐어짰다'라고도 토로했습니다. 오늘날 활동 중인 시인들이나 시인 지망생들조차도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이 두 사람이 얘기한 것은 그만큼 시인 정신이 치열해야 한다는 것을 대변해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 자신에게 반문해 봅니다. 너는 과연 피의 여로를 거쳤느냐? 너의 심장과 두뇌를 짜서 토로하는 과정을 거쳤느냐? 그렇게 반문하면 어떤 때는 말문이 콱 막혀 버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나는 내 나름대로 수많은 밤을 정말 피 흘리는 것처럼 지샌 적도 많고 수많은 파지를 버렸습니다. 수많은 파지를 버린다는 게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한 편의 시를 만나기 위해서 몇 달이 걸리기도 하고, 몇 년이 걸리기도 합니다. 몇 년 걸린 나의 시 중에 [직소포에 들다]가 있습니다. [직소포에 들다]는 13년 만에 완성된 시입니다. [마음의 수수밭]은 8년 만에 얻어졌습니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면서 얻어지는 시가 있는가 하면, 어머니를 생각하며 쓴 [그믐달]이라는 시는 30분 만에 썼습니다. 왜 그랬는가 하면 포도가 익어서 향기가 나듯이 어머니가 늘 내 가슴속에 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나온 겁니다. 그런 게 흔하지는 않고 단 한 편밖에 없습니다. 나는 낯선 곳에 여행을 갔다가 오면 금방 시를 쓰지를 못합니다. 그때그때 메모해 두었다가 다시 한번 그곳에 찾아가서 그때 내가 왔던 심정과 지금 내가 여기 서있을 때의 심정이 어떤가 내 자신을 닦달해 봅니다. 너는 이걸로 올라가서 시를 쓸 수 있겠는가. 그래서 거기서 느낌을 메모해 두었다가 와서 겨우 시를 완성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과작(寡作)인지 모르지만, 과작이라고 해서 나쁜 것도 아니고 다작(多作)이라고 해서 반드시 좋은 것도 아니라고 봅니다. 무슨 시를 몇 편이나 쓰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쓰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 지하철 계단에서 번개 같은 시상을 매만지며 나는 메모지를 꼭 넣고 다닙니다. 그때그때 생각이 떠오르면 장소를 생각하지 않고 멈춰 서서 그 생각이 떠날까봐 메모를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눈총을 받은 적도 많습니다. 지하철 계단을 올라갈 때 사람들이 올라가는데 무슨 생각이 팍 떠오르는 겁니다. 생각이 떠날까봐 딱 멈춰 서 있는데, 뒤에 올라오는 사람들이 가지를 못하고 짜증을 내는 겁니다. 그래서 미안하다고 고개를 숙이는 찰나에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한번은 지하철을 기다리는데 내 차례가 되었습니다. 뒤에 사람들이 서 있고 내가 타야 하는데 문득 시상이 떠올랐습니다. 눈총을 받는 게 차라리 낫지 싶어서, 옛날같이 연기처럼 날려보내지 않는다는 생각에 버티고 서 있다가 겨우 한 줄을 건졌습니다. 그럴 때의 희열이라는 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누가 미친 여자라고 해도 좋습니다. 자기가 정말 붙잡아야 된다는 것을 메모해 두지 않으면 다 사라집니다. 그렇게 해서 내가 메모한 노트가 지금 수십 권에 이릅니다. 그래서 그걸 보면서 나는 돈이 많은 부자가 아니라도 메모 부자구나 하고 생각합니다. 남들이 볼 때는 참 웃기는 여자라고 할지 몰라도 나는 참 행복할 때가 많습니다. 내가 시에 대해서 이렇게 순장을 바치거든요. 그 순정을 시가 알아주었던지 시가 나를 받아줬어요. 옛날에는 내가 시를 받아준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시가 나를 받아줘야지 한 편의 시를 만들 수 있습니다. 아, 이 시가 나를 받아주고 있으니까 시와 함께 살면서 어떤 걸 겪더라도 나는 그걸 고통이던 괴로움이던 행복한 괴로움과 행복한 고통으로 받아들이고, 시를 내 생업으로 삼는 게 팔자라면, 시를 팔자로 삼아 세상을 남들이 아무리 빨리 가도 나는 터벅터벅 낙타처럼 걸어가려고 합니다. 등단 18년 만인 1983년에 첫 시집을 냈습니다. 굉장히 늦게 낸 셈입니다. 그 동안 우여곡절을 거치는 동안 시 한편 한편이 너무 구원이고 나의 구명줄이었습니다. 남들이 볼 때는 감동이 없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때는 시 외에는 아무 것도 의미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시를 구원으로 삼고 계속 시를 썼는데, 두 번째 시집 낼 때까지 내가 그렇게 맹목적으로 사랑을 바쳤지만 짝사랑으로 그치고 마는구나 하는 괴로움 때문에 굉장히 힘들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내 마음에 딱 차지 않는 시들이라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처음으로 상재한 시집이 {신이 우리에게 묻는다면}입니다. 영국의 시인 셀리는 "신이 나에게 묻는다면 때때로 울었노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라고 했는데, 나도 그런 말밖에 할 수가 없었습니다. 자꾸 눈물만 나는 겁니다. 두 번째 시집은 {사람 그리운 도시}인데, 도시에 그렇게 사람이 많아도 사람이 그립다는 걸 느꼈습니다. 그래서 세 번째 시집 {하루치 희망}을 낼 때는 언어의 모순을 통해서 세상의 모순을 드러내는 전략을 써 보기로 했습니다. 세 번째 시집을 보면 언어유희, 동의어, 반복어 들이 참 많이 나옵니다. 그러면서 나는 세상에 대해서 발길질을 한번 한 거지요. 왜 말놀이를 많이 했느냐고 사람들이 할지 몰라도 내게는 타당성이 있습니다. 내가 사람들을 많이 만나지 않고 혼자서 갇혀 있을 때 무엇과 놀며 지냈습니까. 만화를 보겠습니까. 무슨 게임을 할 줄 알겠습니까. 나는 말로써 놀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말놀이를 그 책으로 끝내려고 했는데 다섯 번째 {오래 된 골목}에도 조금 들어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나의 외로움이 말놀이로도 다 메워지지를 않으니까 그칠 수가 없었습니다. 말놀이를 하고 동의어, 반복어를 씀으로써 내 의식의 전환기를 보냈던 것 같습니다.  ===================================================================================== 220. 성냥 / 김남조                               성냥                           김 남 조   성냥갑 속에서 너무 오래 불붙기를 기다리다 늙어버린 성냥개비들, 유황 바른 머리를 화약지에 확 그어 일순간의 맞불 한 번 그 환희로 화형도 겁 없이 환하게 환하게 몸 사루고 싶었음을     김남조 시집 중에서 --------------------------------------------------   221. 그대 있음에 / 김남조                       그대 있음에                        김 남 조   그대의 근심이 있는 곳에 나를 불러 손잡게 하라 큰 기쁨과 조용한 갈망이 그대 있음에 나이 맘에 자라거늘 오, 그리움이여 그대 있음에 내가 있네 나를 불러 손잡게 해   그대의 사랑 문을 열 때 내가 있어 그 빛에 살게 해 사는 것의 외롭고 고단함 그대 있음에 사람의 뜻을 배우니 오, 그리움이여 그대 있음에 내가 있네 나를 불러 그 빛에 살게 해     중에서     1964년 한국일보사가 새해맞이 기념으로 위촉하여 만들어진 것으로, 1964년 새해 아침에 한국일보사가 독자들에게 드리는 노래 선물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4분의 4박자, 바장조, 자유스러운 3부형식의 유절가곡으로 되어 있다.  
1026    '2016 신춘문예 童詩 당선작 댓글:  조회:4455  추천:0  2016-01-21
  [2016 신춘문예 동시 당선작 ]         모내기                   김종훈               모내기 하는 날은   세상에서 제일 큰   밥상보를 만드는 날입니다           황새가   이리저리   훨훨 날아다니며   치수를 잽니다           아빠는   이앙기로   탈탈탈탈   초록 천을 펼칩니다           엄마는   못짐을 들고   논둑을 따라   시침질이 한창입니다           때마침 내리는 비가   은침으로 박음질을 끝내면   들판은 세상에서   가장 큰 밥상보입니다           한 여름 땡볕을 견디고   가을 햇살이 익을 무렵   저 큰 밥상보를 가만히 들추면   푸짐한 밥상이   들판 가득 차려지겠지요           [2016 경상일보 신춘문예 동시 당선작] -------------------------------------------             콧구멍에 낀 대추씨                             안안미               우리 할머니 집 세탁기는           덜커덩덜커덩           참 요란스럽게도 일한다           명절 때마다           할머니 집 수리기사가 되는           우리 아빠           두리번두리번           세탁기 한 쪽 받칠 만한 걸 찾는다           -쪼매만 있어봐라잉           창고에 다녀온 할머니 손에는 내 손바닥만한 장판 한 조각           -콧구멍에 낀 대추씨도 다 쓸 데가 있제잉           한 번 접고 두 번 접어           세탁기 밑에 끼어 넣었더니           수평이 딱 맞는다           세탁기에 낀 장판 조각       콧구멍에 낀 대추씨               [2016 한국일보 신춘문예 동시 당선작] ---------------------------------------------------                털장갑                   윤형주                            오래 기다렸어요.       깜깜하고 답답한 곳에서.                       다른 친구들이 바깥 구경을 하고       이야기 한 보따리 안고 올 때면       슬펐어요.       날 잊은 게 아닌가 걱정도 했구요.                       오늘 나를 찾아온 걸 보니       첫 눈이 왔군요.       손에 잡힐 만큼 펑펑.                       손을 내밀어요.       따뜻하게 해 드릴게요.       마음껏 만져요.       너무 신나서 차갑지도 않아요.                       눈싸움도 하고,       손도장도 찍고,       눈사람도 만들고,       내 이야기에 모두들 부러워 하겠죠?                       하지만 내일 들려주어야 겠어요.       지금은 눈사람 아저씨 손을       따뜻하게 감싸고 있거든요.             [2016 대전일보 신춘문예 동시 당선작]   -------------------------------------------         엄마의 마음                                김대성                        나사못이       나무를 뚫고         들어갑니다       한 바퀴       두 바퀴       빙글빙글 돌다가        더는 돌 수 없어       딱, 멈춘 곳에서       나무가         나사못을 안아줍니다       꼬옥       안아줍니다           [2016 강원일보 신춘문예 동시 당선작]   ---------------------------------       숙제 안 한 날                             박미림                       친구랑 둘이 남아 벌 청소 한다       하늘을 나는 대걸레       배는 점점 고파오고       대걸레 휘휘 돌리니       아하,       대걸레가 몽땅 짜장면이다       꿀꺽, 침 삼키고 바라보니       세 그릇쯤 된다       색종이로 오이 송송       단무지 한 쪽       후루룩 쩝쩝       하하하       일기 안 쓴 예찬이 한 그릇       나 한 그릇       에라, 모르겠다       선생님도 드리자.       에궁에궁       신기한 짜장면, 배는 안 부르고       예끼       선생님이 주신 짜장면 값       꿀밤 한 알       미소 한 접시.       [2016 조선일보 신춘문예 동시 당선작]   -------------------------------------       엄마 생각                  이상윤             오늘도       엄마는 오지 않는데     잠들기 전     엄마에게 편지를 써       발자국이라 쓰고       귀를 대면     엄마의 구두 굽 소리가 들려     쓰다만 편지를     아침에 다시 펼쳐 보면     엄마에게로 가는     길 하나가 나 있을 것 같아     내 발자국이란 글자를     두 손가락으로     살며시 집어 들어     문밖에다 내다 놓으면       또각또각     엄마에게로     걸어갈 것 같은 밤이야       [2016 매일신문 신춘문예 동시 당선작] 
1025    (자료) - 현대시 흐름 댓글:  조회:5317  추천:0  2016-01-21
[ 2016년 01월 20일 11시 37분 ]   7 /   장가계(張家界) 대협곡 유리 교량 시공. 대협곡 유리 교량은 총 길이 430미터, 폭 6미터로, 계곡 밑에서 약300미터 상공에 위치. 다리 바닥을 전부 투명한 유리로 시공하는 이 다리의 최대 수용가능 관광객수는 800명 가능... 한국 현대시의 흐름  개화기의 문학은 1890년대 이후 성립된다. 그 내용에서 개화기의 현실 인식을 담고 있는 개화기 문학은 산문에서는 역사·전기 문학과 이른바 신소설류가 그 중심이 되고, 시가에서는 전통 시가의 형식을 계승한 개화 가사, 개화기 시조와, 외래 문화의 영향으로 새로 소개된 시형인 창가와 신체시가 그 중심을 이룬다.  개화 가사와 개화기 시조는 공통적으로 개화 의식에 대한 비판적 경계심이 그 중심 주제를 이루면서 작가도 봉건적 인물이거나 미상인 경우가 대부분인 반면, 창가와 신체시는 개화기의 신흥 문물에 대한 찬양과 진취적인 기상을 드러내는 전문적 작가의 작품인 경우가 많다. 창가와 신체시는 개화기에 활발하게 설립된 각종 학교의 교가와 응원가, 그리고 기독교의 찬송가와 서양식의 행진곡 등의 음악의 영향을 크게 받아 성립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전대의 가사와 시조, 그리고 민요의 형식도 동시에 존재하고 그 어떤 하나의 형식이라고 볼 수도 없는 이른바 자유시형을 지닌 시가도 다수 발표되기도 하였다. 따라서 개화기 시가의 어떤 작품을 특정한 한 형식에 담아 두거나, 최초의 신체시 아니면 최초의 자유시 등으로 규정하는 것은 올바른 작품 이해의 방법이 되지 못한다.  이러한 1910년대의 시는 1919년 일대 전환을 이룬다. 1919년 1월 김동인과 주요한이 중심이 되어 창간된 [창조]는 최초의 근대 문예 동인지로서 자각적인 문학 활동으로서의 시와 소설을 다수 싣고 있으며, 1919년의 3·1 운동의 실패는 때마침 유행하던 세기말적 풍조와 맞물려 많은 지식인 시인으로 하여금 허무와 좌절을 읊조리게 하였던 것이다. 1910년대에까지 위력을 가졌던 계몽적이고 교훈적인 시가 청산되고, 시다운 시가 등장한 1920년대의 시는 대략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첫째, 시의 정형시적 형태로부터 자유시로의 전환이 두드러지게 되었고, 또한 主情的인 시가 많이 나타나게 되었다.  둘째, 독립운동의 좌절로 인한 우울한 시대 의식과 비애 및 현실로부터의 탈출을 노래하는 영탄적이고 감상적인 경향을 띤 시가 나타나게 되었다. 여기에는 시대적 분위기도 물론이지만 서구 문학의 상징주의, 퇴폐주의 및 낭만주의의 영향이 또한 적지 않게 작용되었다. 주요한, 황석우, 오상순, 박종화, 김억, 이상화, 홍사용 등과 같은 사람들이 그 대표적인 시인들이다. 특히, '백조'의 시인들인 이 상화의 '나의 침실로', 홍사용의 '나는 왕이로소이다', 박종화의 '흑방비곡' 등은 눈물, 꿈, 죽음과 같은 감상적이고 환상적인 세계에의 동경과 도취적인 몽환과 죽음의 미화를 주로 다루게 되었다. 그러나, 이들 가운데에서도 이상화는 '나의 침실로'와 같은 감정의 노출과 반현실관을 드러내는 작품을 쓴 반면에,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와 같은 강한 현실 의식을 노출하는 작품을 쓰기도 했던 것이다.  세째, 경향파 또는 '카프'의 결성을 전후로 하여 강한 사회의식을 드러내는 시가 등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들 문학은 시 자체의 독자성과는 관계 없이 지나치게 이념적 주장만을 강조한 나머지, 시로서의 성과도 거둘 수가 없었던 것이다.  네째, 서정시의 면모가 확실하게 정립되게 되었다. 김소월과 한용운은 어떤 특정한 문학의 사조와도 관계됨이 없이 이 시대에 있어서 가장 탁월한 성과를 드러낸 서정 시인들이다. 김소월은'진달래꽃' , '산유화' , '금잔디', '가는길' 등의 시를 통해서 민요적인 서정의 情恨과 운율적인 가락이 조화된 시의 세계를 보여 주었다. 그리고, 독립 운동가요, 승려이기도 한 한용운은, 그의 시집 '님의 침묵'을 통해서, 존재와 정신의 지주가 되는 님이 떠나 버린, 침묵한 시대에 있어서 굽힐 줄 모르는 초극 의지와 희망에의 염원을 불교적인 발원과 교합시킴으로써 서정의 의연한 경지를 열어 놓았다. 기타 전통문학에 대한 관심은 김억 등의 민요적 서정과 함께 최남선, 정인보, 이병기, 이은상 등에 의한 시조문학의 계승 현상으로 나타나기도 하였다. 1930년대의 우리 현대시는 다음과 같은 다섯 갈래의 성격적인 다양성을 지니게 되었다. 첫째, 순수 서정시에의 지향과 옹호가 두드러지게 된 현상이다.  이 순수 서정시 운동은 주로 박용철, 김영랑, 신석정 등이 중심이 된 '시문학' 동인들에 의해서 주도 되었다. 이들은 시가 지나치게 사회성을 가지고 사회적 이념의 전파를 위한 수단으로 도구화되는 것을 거부했으며, 또 지나치게 기교 위주로만 치닫는 경향도 마땅하지 않게 생각한 나머지, 시 자체의 순수성과 서정성을 지향하고 옹호하려고 했던 것이다.이의 이론적 기수인 박용철은 릴케의 영향을 받은 시론 '시적 변용에 대하여'란 글로 시의 서정성을 강조했으며, 이를 시로써 실천한 것은 김영랑이다. 김영랑은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 '끝없는 강물 흐르네' 등의 시에서 보듯, 감각적인 언어의 섬세한 다듬질과 가락의 음악성 등으로 순수 서정시의 한 경지를 열어놓은 시인이다.  둘째, 모더니즘의 주지적이고 기교주의적인 경향이다. 이 유파는 평론가인 최재서와 시인인 김광균, 장만영 등이 주도적 중심 인물들이었다. 이들은 영국의 현대 시인인 엘리어트와 파운드 등의 모더니즘 또는 이미지즘의 영향을 받음으로써, 주로 이전의 시가 낭만적이고 음악적이며, 주정적인 시작 태도나 경향파 등의 내용 편중의 문학을 거부하고, 도시적 감성과 문명비판의 요소를 지닌 주지적이고 기교적인 시에 역점을 두게 되었다. 따라서, 이들의 시에 있어서는 감정이 배제되고 시각적이고 회화적인 이미지가 강조되었던 것이다.한편, 전통보다는 변혁을 위주로 한 '오감도' 등 이상의 시는 서구의 초현실주의나 미래파와의 친근성을 가지고 있었다.  세째, '시인부락'을 중심으로 한 이른바 '생명파'의 등장이다. 서정주, 김달진, 김동리 등이 중요 동인인 '시인부락'의 성격은, 주로 서정주의 관능의 열기와 숨결을담은 '화사집의 시로 대변된다. 이들 생명파는 모더니스트들의 감각적인 기교, 경향파의 이념적인 목적, 시문학파의 순수 서정의 표출과는 달리 생명의 깊은 충동과 고뇌, 삶의 절박한 갈망을 시화하려고 하였다. '생리'지의 동인 유치환 역시 그러한 생명의 현실을 표현하고 있는 점에서 생명파인 것이다.  네째, 전원적인 목가시의 반도시적 경향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망향'이란 시집을 낸 '시원'의 동인 김상용은 전원에서의 단순한 삶의 예찬을 '남으로 창을 내겠소'라는 시에서 노래하고 있다. 그리고, '촛불'의 시인 신석정도 '아직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에서 도시나 문명과는 멀리 떨어진 전원과의 화해와 자연에 친화된 삶을 노래했던 것이다.  다섯째, 여류 시인의 본격적인 등장이다. '시원'의 동인으로서 여성적인 정념의 표출을 주로 하는 모윤숙의시집 '빛나는 지역'과 산문집 '렌의 애가'를 사슴의 시인으로 절제의 아름다움을 보인 노천명이 시집 '산호림'을 발간한 것도 이 시대이다. 1930년대 후반과 40년대의 초반 오륙 년이란 시기는 우리의 현대 문학사에 있어서 가장 불행한 문학적 '암흑기'로 평가된다. 중일 전쟁과 태평양 전쟁등 침략 전쟁을 도발함으로써 세계를 전화속에 몰아놓은 일제가, 전쟁의 수행을 위해서 식민 통치의 철저한 통제화 탄압을 더욱 가중시켰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이 기간에 일제는, 한국어의 사용을 금지, 창씨 개명을 강제함은 물론, 민족 언론지인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를 폐간 시키고, 작품 발표의 매개인 문예지 '문장'과 '인문평론'마저 폐간 또는 개제시키는 등, 문학 활동을 철저하게 통제하는 한편, 전시동원의 명목으로 '국민 총력 연맹'이란 조직 단체를 결성, 한국 사람에 대한 이른바 황국 신민화운동을 전개하고, 신사 참배와 궁성 요배를 강제하였으며, 징병제의 실시와 학병제의 시행 등으로 무고한 한국 사람의 인명과 재산을 모조리 바칠 것을 강요했던 것이다.  이런 무단 정치의 강압적인 통치 체제 아래서 건실한 문학의 생성은 거의 불가능할 수 밖에 없었다. 강요에 못이긴 일부 문인들이 '조선 문인 협회'와 '조선 문인 보국회'란 친일적인 어용 문학 단체의 이름 아래 치욕스런 문화적 용병 노릇을 한 경우가 없지 않았다. 그러나, 많은 문인들은 붓을 꺽는 문화적인 정적의 길을 택했으며, 시인 이육사와 윤동주는 체포되어 끝내 감옥에서 옥사하였다.  이육사는 시인이요 항일 투사로서, 웅혼한 남성적 기상과 의지를 담은 '광야', '청포도', '절정'과 같은 시를 남겼으며, 윤동주는 양심과 고뇌를 짊어진 자아에 대한 끊임없는 성찰을 노래한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남겼다. 이들은 다 같이 혼몽한 역사의 어둠 속에서도 밝아 올 새벽을 예감하고 기원했던 시인들이며, 암흑기에 있어서 불멸의 시혼을 대표한다. 북쪽 툰드라에도 찬 새벽은 눈 속 깊이 꽃 맹아리가 옴짝거려 제비 떼 까맣게 날아오길 기다리나니 마침내 저버리지 못할 약속이여. 이제 새벽이 오면 나팔 소리 들려 올 게외다.  1945년 8월 15일의 광복은 국권 회복이라는 의미와 함께 우리의 현대 문학에 있어서도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그것은 국어의 회복이며, 현대 문학의 생성 이래 줄곧 식민지 통치의 제약과 검열 아래 시달리던 문학적 상황이 이와 더불어 비로소 자유의 넓은 지평을 열어 갈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좌우익의 대립으로 인한 사회적인 혼란이 거듭됨으로써 문단과 문학 역시 창작의 성과보다는 좌우익의 상반하는 이념의 대치 현상을 빚게 되었으며, 이런 현상은 1948년의 정부 수립을 계기로 어느 정도 정리 되었다. 이 기간에 있어서의 우리 시문학의 성과는, 주로 '문장' 등의 폐간으로 정체되었던 자연파나 생명파의 시적인 서정과 정조가 회복된 점에 있다. 특히, 조지훈, 박목월, 박두진 등의 이른바 '청록파'의 등장은 해방 문단에 있어서 가장 주목되는 사실이었다. '문장'의 마지막 세대로서 공동 시집 '청록집으로 새로운 시단에 나타난 이들은, 서로의 시 세계의 차이, 즉 고전적 풍류, 향토색의 서경, 갈망과 기도 등을 각각 보이면서도, 한결같이 시가 자칫하면 이념의 수단으로 전락하기 쉬운 시대적 상황에 맞서 시의 독자성을 지킨 시인들이다. 이들의 시는 자연을 서정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같은 맥락 관계를 가지고 있다. 또, 생명파 시인으로 불리는 서정주와 유치환은 이 무렵 시집 '귀촉도'와 '생명의 서'를 각각 내놓았다. 유랑과 관능의 열기 및 몸부림으로 일관하던 서정주는, 여기에서 마침내 동양적 내지는 한국적인 서정의 세계에로 돌아오는 의의를 가지게 되었으며, 유치환은 삶의 앙양과 확산에의 의지와 극기의 모습을 더욱 심화했다. 이밖에도 박남수, 김현승의 특이한 시 세계가 이 시대를 전후해서 나타나게 되었다. 분단의 비극은 1950년 6·25 전쟁으로 폭발한다. 1950년대는 6·25 전쟁으로부터 1960년 4·19 혁명으로 이어지는 소용돌이의 시대이다. 전쟁에 의한 피해와 이의 복구는 1950년대의 시대사적 과제였고 전쟁의 비극적 체험과 상흔은 우리 모두에게 인간 실존의 무의미함과 허무주의를 남겨 주었다. 전쟁은 시인들에게 참전과 종군이라는 적극적 대응 방식에서부터 풍자와 역설의 날카로운 비판 정신, 그리고 센티멘탈리즘이나 폐쇄적 자아 의식으로의 굴절 등 다양한 정신적 편차를 드러내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이와 함께 전쟁은 다시 분단의 고착화를 낳게 되고, 이에 따라 냉전 체제하의 안보의 논리는 그 어떤 이데올로기보다도 신성한 절대불가침의 명제로 굳건히 자리잡게 된다. 1950년대의 시는 전장시로부터 출발한다. 6·25 전쟁이 발발하자 구상, 박인환, 유치환, 박두진, 조지훈 등 많은 문인들은 이에 대응하여 격시(激詩)를 쓰고 '문총구국대'를 조직하여 1·4 후퇴를 전후한 시기에 특히 체계적으로 활동한다. 이러한 와중에 이광수, 김동환, 김억, 정지용, 김기림 등은 납북되고, 설정식, 이용악 등 좌익계 시인들은 월북하고, 박남수, 이인석, 양명문 등은 월남한다. 이러한 상황으로 인하여 문단은 재편될 수밖에 없었고, 분단시대의 문학이라는 멍에를 벗을 수 없는 비극적 현실에 빠져들게 되는 것이다.  한편, 1951년 피난지 부산에서 결성된, 박인환, 조향, 김경린, 이봉래, 김차영, 김규동 등의 [후반기] 동인들은 1930년대 모더니즘의 감각과 기법을 보다 직접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청록파류의 보수적인 서정시에 정면으로 반기를 들고 현대문명의 메커니즘과 그 이면을 형상화하는 데 주력한다. 그러나 1950년대 시단은 중견 시인들의 전통적 서정시와 정한모, 박재삼, 조병화, 송욱, 이형기, 김춘수, 김종길 등 신진 시인들의 휴머니즘이나 전통적인 정한(情恨), 혹은 존재론적 성찰의 시 세계가 여전히 그 중심을 이룬다. 이러한 특성은 분단 이데올로기가 경직화될수록 더욱 뚜렷해져서, 대역사적 목소리의 발로나 분단 현실에 대한 자기 반성적 성찰은 1960년대 이후의 김수영이나 신동엽을 기다려서야 비로소 가능해진다.  1955년 [현대문학]과 [문학예술], 1956년 [자유문학]의 창간으로 인해 [문예] 폐간 이후 공백 상태이던 문단의 지면이 확보되었을 뿐 아니라, 1957년 [한국시인협회]가 결성되어 기관지 [현대시]를 간행하고 국제시인협회에 가입하는 등, 1950년대 후반에 이르러 시단은 새로운 변화와 질서를 모색하는 활발한 기운을 맞게 된다. 그리하여 1955년부터 1959년에 이르는 1950년대 후반에는, [시와 비평], [시연구], [시작업] 등 각종 시 전문지와 시 동인지가 간행되는 한편, 100여 권이 넘는 개인 시집들이 상재되어 가히 현대시의 르네상스를 이루게 되고, 본격적인 현대시의 출발이 가능하게 된다.   그러나 1950년대 시인들의 거의 모두가 이후 1960년대의 시단의 중견으로 활동하기 때문에 1950년대와 1960년대가 명확히 구분되는 것은 아니다. 비록 1960년은 4·19 혁명이라는 분명하고도 상징적인 역사적 사건이 존재하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그 시기를 10년 단위로 구분하고 있기는 하지만, 실제로 1950년대 시와 1960년대 시 모두가 뚜렷한 시대적 변별성을 지니는 것은 아니다. 1960년대는 1960년 4·19 혁명의 거대한 민중의 열기로 시작한다. 그러나 이러한 민주화의 열망은 1961년 5·16 군사 쿠데타로 좌절되고, 민주화의 과제는 근대화의 발전 논리와 냉전 체제의 안보 논리에 휘말려 결국 길고 긴 나락으로 떨어지고 만다. 이렇듯 1960년대는 모순과 갈등의 시대였다. 식민지 시기를 뒤이은 분단비극의 연장선상에서, 다시 4·19 혁명과 5·16 쿠데타라는 역사적 사건을 연이어 겪으면서, 한국의   시단은 이러한 1960년대의 상황을 맞아 다양한 시적 응전력을 시험하기에 이른다. 우선 첫째로, 4·19와 5·16의 충격과 영향으로 투철해진 현실 인식에 근거하여 적극적으로 변혁의 의지를 작품 내에 수용하고자 하는 일군의 작품들이 있다. 이러한 작품의 선편은 김수영이 쥐고 있다. 그는 1950년대의 소시민적 비애를 담담하게 노래하다가, 4·19를 계기로 이후 에 이르기까지 현실 참여의 시작 활동을 전개한다. 그의 이러한 현실 인식은 , 의 신동엽의 민족주의적 역사 의식과 연결되고, 이성부의 와 조태일의 등으로 계승된다.  한편, 사회적 관심을 특히 강조한 시와는 달리 순수한 서정과 낭만성을 강조한 경향의 시들도 크게 대두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1950년대 이후 계속되어 온 주된 흐름으로, 정한모, 조병화, 김남조, 박재삼, 박성룡 등이 그 중심적 위치에 선다. 이러한 전대의 흐름과도 달리 현대시의 지성적 영역을 개척하려는 일군의 시인이 등장하는데, 1950년대에 등장한 김춘수, 김광림, 김종삼, 황동규 외에도 이승훈, 오세영, 이수익, 정현종, 오규원 등의 신인들이 주로 이 경향에 가세한다. ////////////////////////////////////////////////////////////////////////////////////////////////////////  현대시의 흐름   1. 3 ·1운동 무렵 ∼ 1920년대의 시   1. 시대 배경 민족의 최대 희망이었던 3·1운동의 좌절은 민족 전체에게 절망과 방향 상실의 비애를 안겨 주었다. 국권 상실 이후, 정치적 좌절감에 빠져 있던 우리 민족은 경제적으로는 일제의 식민지 착취와 세계 공황으로 인한 경제적 궁핍화 현상의 심화로 민족 생존의 위협을 받았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몇몇 선각자들은 민중을 계몽하고 민족 의식을 일깨우기 위해 온 힘을 기울였다.   2. 특 징 (1) 자유시형(自由詩形)의 확립 : 최남선(崔南善)의 신체시 '해(海)에게서 소년(少年)에게'의 계몽성, 개념성, 비예술성을 극복한 본격적인 자유시가 창작되었다. 주요한(朱耀翰), 김억(金億), 김여제(金輿濟) 등이 그 선구자다.     시 인 작 품 실린 곳 연대 김여제 만만파파식적(萬萬波波息笛) 학지광(學之光) 10호 1917 주요한 시내, 봄, 눈, 샘물이 혼자서 학우(學友) 창간호 1919 김 억 겨울의 황혼 태서문예신보 13호 1919 주요한 불놀이 창조(創造) 창간호 1919 (2) 동인지(同人誌) 문단의 형성 :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 신문의 창간, , 등의 잡지의 출현과 때를 같이 하여 많은 문예 동인지가 나와 동인지 문단 시대를 열었다. ① 창조(創造)     연 대 1919. 2. 1 ∼ 1921. 5. 30(통권 9호) 동 인 김동인, 전영택, 주요한, 김동환 의 의 - 최초의 순 문예 동인지 - 근대 문학 개척에 이바지 - 완전한 언문일치체 문장 확립 - 최초의 근대시인 '불놀이(주요한)', 사실주의 단편 소설 '약한 자의 슬픔(김동인)'을 실음 경 향 - 시 : 상징적 / - 소설 : 사실적 ② 폐허(廢墟)     연 대 1920. 7. 25 ∼ 1921. 1. 20(통권 2호) 동 인 황석우, 염상섭, 김억, 남궁벽, 오상순 경 향 퇴폐적, 상징적 ③ 장미촌(薔薇村)     연 대 1921 동 인 박종화, 변영로, 노자영, 박영희 의 의 - 시 동인지의 효시 - 의 전신 - 현대시 창작에 이바지함 경 향 낭만적 ④ 백조(白潮)     연 대 1922. 1. 9 ∼ 1922. 9. 6(통권 3호) 동 인 현진건, 나도향, 이상화, 홍사용, 박종화 의 의 - 순 문예 동인지 - 가장 활발한 시 창작 활동이 이루어짐. - 투르게네프 산문시 소개(나도향) 경 향 낭만적 ⑤ 금성(金星)     연 대 1923 동 인 양주동, 유엽, 백기만, 이장희 의 의 시 동인지 경 향 낭만적 ⑥ 영대(靈臺)     연 대 1924(평양) 동 인 김소월, 주요한, 김억, 전영택, 이광수 의 의 순 문예지, 의 후신 경 향 일정치 않음 (3) 감상적 낭만주의, 상징주의, 계급주의, 민족주의, 해외문학파 시의 전개 ① 초기 : 감상적(퇴폐적) 낭만주의 김억과 황석우가 를 통해 프랑수 상징주의 시를 번역 소개했으며 3ㅗ1운동의 실패로 인한 좌절감, 프랑수 상징주의 시의 퇴폐적 경향(특히 C.P.보들레르 풍), 우울한 분위기의 러시아 문학의 영향, 당시 청년들의 치기(稚氣)어린 감상성 등이 어울려 애상(哀想), 탄식(歎息), 절망(絶望), 도피(逃避), 죽음의 찬미(讚美) 등 감정의 과잉 노출 현상을 빚었다. ② 중기 이후 : 서사시, 계급주의 시ㅗ시조와 민요시의 출현, 해외문학파의 순수시 소개 3ㅗ1운동 실패의 충격이 다소 가라앉게 된 1920년대 중반부터 문인들은 민족의 갈 길이 나라 찾기와 민족의 생존권 회복에 있음을 재인식, 새로운 삶의 전망을 품게 되었다. 이에 파인(巴人) 김동환(金東煥)은 3편의 서사시를 썼고, 중심의 계급주의파 시와 중심의 민족주의파의 문학이 대립했다. 최남선, 이은상, 이병기 등이 시조 부흥운동을 폈고, 김소월, 김동환, 주요한 등이 민요시를 썼다. 한편 계급주의 시의 개념성, 전투성, 공격성을 비판하여 해외문학파가 순수시를 소개했다. ㉠ 김동환의 서사시(敍事詩)     시 집 발행처(실린 곳) 연 대 국경 (國境)의 밤 한성도서 1925. 3. 우리 사남매(四男妹) 조선문단 1925. 11. 승천(昇天)하는 청춘(靑春 신문화사 1925. 11. 이 시들의 서사시 여부에 대한 논란은 아직도 그치지 않고 있다. ㉡ 개벽(開闢)     연 대 1920. 6. 25 ∼ 1926. 8. 1(통권 72호, 발행 금지) 동 인 박영희, 김기진 의 의 - 월간 종합지(천도교 후원) - 신문지법에 따른 첫 잡지 - 근대 문학에 이바지함 경 향 계급주의 ㉢ 조선문단(朝鮮文壇)     연 대 1924. 9 ∼ (통권 25호), 1927년 속간, 1935년 복간, 1936년 폐간 동 인 이광수, 방인근 의 의 - 순 문예지 - 최초의 신인 등용 추천제 실시 - 박화성, 최학송, 채만식, 계용묵 등 많은 신인 배출 경 향 민족주의, 반계급주의 ㉣ 해외문학파(海外文學派)와     연 대 1927 ∼ 1931 동 인 김진섭, 정인섭, 손우성, 이하윤, 이선근, 이헌구, 함대훈, 김광섭 의 의 - 최초의 번역 문학지 - 해외문학연구회(1926)의 기관지 - 연극(번역) 공연의 모체 경 향 순수 문학, 반계급주의 ㉤ 민요시(전통시에의 관심) 뒷동산에 꽃 캐러 언니 따라 갔더니, 솥가지에 걸리어 다홍치마 찢었습네. 누가 행여 볼까 하여 지름길로 왔더니, 오늘따라 새 베는 임이 지름길로 나왔습네. 뽕밭 옆에 김 안 매고 새 베러 나왔습네, ( 주요한, '부끄러움' ) 이같은 소박한 민요시를 김소월만이 성공적인 자유시로 승화 발전시켰다. (4) 김소월과 한용운의 등장 : 한국시의 전통성과 서구적 현대시의 기법을 조화시켜 현대시의 기반을 다진 소월(素月) 김정식(金廷湜)과 만해(卍海) 한용운(韓龍雲)의 시집 (1925)과 (1926)으로 등단한 것도 이 시기이다. 2. 1930년대의 시   1. 시대 배경 만주 사변(1931), 중일 전쟁(1937) 등으로 일제가 전시 체제를 구축하면서 민족 문화를 탄압, 말살하기 위한 억압 정책을 가속화해 가던 시기로서, 세계의 경제 공황(1929)과 전체주의 파시즘(fascism)이 대두하던 위기의 시대가 1930년대였다. 이 때는 탈이념(脫理念)이 등장하게 마련이었다.   2. 특 징 (1) 계급주의 문학의 퇴조와 순수시의 대두 : 발표 지면은 확대되었으나, 일제의 검열과 계급주의(KAPF)파의 검거와 자진 해체, 목적 문학인 계급주의 시의 무장ㅗ전파ㅗ선동의 전략적 행태(行態)와 도식적(圖式的)이고 이념 지향적(理念指向的)인 경향에 대한 독자의 반발 등을 계기로 하여 순수시가 대두했다. (2) 현대시 유파(流派)의 형성과 실험 : 1930년대 초기에는 순수시파, 중기에 모더니즘파, 후기에는 생명파가 다분히 의도적인 시 운동을 전재하여 본격적인 현대시의 기틀을 잡았고, 청록파가 30년대 말을 장식했다. ① 순수시파 : 순수시는 넓게 보아 (1927), , (1931), (1934), (1935) 등의 문예지를 중심으로 발표된 시를 가리키며, 좁게는 파 시인인 김영랑, 박용철, 정지용을 시를 지칭한다. ②     연 대 1930 ∼ 1931(통권 3호) 동 인 박용철, 김영랑, 정지용, 이하윤, 변영로, 정인보 의 의 - 시 동인지 - 순수시 운동의 모체(母體) 경 향 - 반목적적 순수시, 시에 대한 현대적 인식 - 모국어의 조탁(彫琢)과 순화(醇化)된 정서, 음악적 율격의 강조 ③ 모더니즘파 : 모더니즘(modernism)은 니체, 마르크스, 다윈이 제시한 시대 이념에서 유래하는 서구 사조이다. 근대 서구 사회의 정신적 지주이던 기독교 사상과 휴머니즘이 설득력을 잃고, 뉴턴 물리학의 합리성이 세계를 구원하리라는 가냘픈 기대가 19세기 서구 사회를 지탱해 왔다. 그러던 것이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여러 과학적 징후들은 과학 자체마저 비합리적이라는 것을 입증하게 되었다. 프랑크의 양자론(量子論),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 돌연변이성, 방사선 방출, DNA의 합성 등이 그것이다. 이에 따라 서구의 정신사(精神史)는 세계의 구원을 위해 새로운 휴머니즘을 모색(摸索)하게 되었고, 이에 부응하여 추구된 것이 모더니즘이다. 넓은 의미의 모더니즘은 이미지즘(imagism), 다다이즘(dadaism), 초현실주의(sur-realism), 입체파(cubism), 미래파(futurism), 주지주의(intellectualism) 등을 포괄한다. 우리 나라의 경우는 주로 이미지즘의 김광균(金光均), 장만영(張萬榮) 등의 시를 가리킨다. 즉 이미지즘과 주지주의 문학이 우리 나라 모더니즘 시의 핵이다. 이상(李箱)의 다다이즘 내지 초현실주의의 시를 비롯한 동인들의 시는 넓은 의미의 모더니즘 시이다. 모더니즘(주지주의)은 최재서(崔載瑞), 백철(白鐵), 김기림(金起林)이 소개했다. 김기림은 평론을 쓰고 시를 실험했으며, 김광균은 이를 실현했다. ④ 생명파(生命派) : 1930년대 초반 순수시파의 유미주의(唯美主義), 중반 모더니즘파의 감각적 기교주의가 인생 문제를 도외시한 데 대한 반발을 보이며 등장한 1930년대 후반의 문인들 일파가 이른바 '생명파'이다. 1936년에 발간된 의 동인인 시인 서정주, 소설가 김동리를 선두로 하여 이와는 다른 처지에서 등장한 시인 유치환이 이 유파의 문인을 대표한다. 생명파의 대다수는 동인 중의 시인이며, 김동리는 그 중 소설가이다. 유치환과 윤곤강, 신석초는 동인이 아니면서도 경향의 유사성 때문에 '생명파'라 불린다.     연 대 1930년대 후반 동 인 유치환, 서정주, 오장환, 함형수, 김달진 김상원, 김동리, 윤곤강, 신석초 의 의 생명의 본질, 본능적 조건을 기초로 한 인간의 이해와 인식을 추구함. 경 향 - 순수시파 유미주의의 관념성, 모더니즘 시의 반생명성에 대한 도전 - 시적 성공을 거두어 오늘날의 한국 문학에 영향을 끼침 - 휴머니즘 문학(김동리의 주장)은 순수 문학론으로 발전, 계급주의 문학과 대결하게 됨. - ⑤     연 대 1936 ∼ 1937(통권 5호) 편집, 발행 서정주(1호), 오장환(2호 이후) 동 인 서정주, 김동리, 함형수, 김달진, 김상원 경 향 생명과 인간의 구경(究竟) 탐구 3. 암흑기의 시   1. 시대 배경 중일 전쟁(1937) 이후 태평양 전쟁(1941)이 일어나기까지 일제의 탄압이 극심하였으나, 이 시기에는 오히려 많은 시집이 간행되고, 예술적으로 괄목할 만한 작품들이 빛을 보았다. 그러나 1941년에 들어 일제는 조선일보, 동아일보는 물론, 과 인문평론(人文評論)>의 두 문예지마저 폐간하였으며, 한국어, 한국 문자의 사용을 금지시켜 그야말로 역사와 문화의 암흑기를 맞이하였다.   2. 특 징 (1) '청록파(靑鹿派)'와 자연 회귀 : 지 추천을 거쳐 등단한 이 시인들은 자연에 회귀하여 위안을 찾으며 밝아올 새날의 역사를 노래했다. 1946년에 을 내었다. ① 박목월 : 동양의 이상향인 도화원(桃花園)과 같은 선경(仙境)을 추구했다. '청노루', '산도화(山桃花)', '불국사(佛國寺)' 등이 그 예이다. ② 박두진 : 기독교(구약성서 이사야서)적 평화 사상으로 자연을 추구하며 밝아올 새 역사의 소망을 노래했다. '향현(香峴)', '해', '어서 너는 오너라' 등이 그 예이다. ③ 조지훈 : 우리 전통 - 멸망하는 것에 대한 짙은 향수(鄕愁), 선(禪)과 은일(隱逸)의 경지에 침잠했다. '고풍의상(古風衣裳)', '봉황수(鳳凰愁)', '완화삼(玩花衫)', '낙화('落花)', '고사('古寺)', '범종('梵鍾)' 등이 그 예이다. (2) 암흑기의 별 - 저항 : 육사(陸史) 이원록(李源祿)과 윤동주(尹東柱)의 시는 암흑기의마지막 밤을 밝히는 불멸의 별이다. ① 이육사 : 유교적 선비 정신으로 지절(志節)의 표상이 된 대륙적 기질의 시인. (語調)가 남성적이어서 도도하고 당당하다. '광야(曠野)', '절정(絶頂)' 등이 그 예이며, '청포도'는 인구에 회자되는 애송시이다. ② 윤동주 : 기독교적 속죄양 의식으로 순결과 참회와 그리움의 시를 썼다. '서시(序詩)', '십자가', '참회록', '또 다른 고향', '쉽게 씌어진 시' 등이 그 예이다.   4. 광복 후의 시   1. 시대 배경 1945년 '도둑처럼 찾아온' 해방은 이 땅에 정치적 선동과 파쟁을 빗었다. 좌익 문인 단체인 '조선 문학 동맹'(1945. 2) 소속의 시인들이 낸 시집은 경직된 좌익 이념만 노출, 선전하였을 뿐 예술성의 확보와는 먼 거리에 있었다. '조선 문학가 협회'를 중심으로 한 우익 계통의 시인들의 시도 해방을 맞이한 격정과 소박한 찬가풍(讚歌風)의 어조로 하여 긴장을 잃은 행사시(行事詩)들을 양산했다.   2. 특 징 (1) 전통의 계승 : 이런 가운데 출현한 목월(木月) 박영종(朴泳鍾), 지훈(芝薰) 조동탁(趙東卓), 혜산(兮山) 박두진(朴斗鎭)의 공동 시집 (1946)과 청마(靑馬) 유치환(柳致環)의 (1947), 미당(未堂) 서정주(徐廷柱)의 (1948), 윤동주의 (1948) 등은 광복된 조국의 시사(詩史)를 빛낸 기념비적 업적이다. 그러나 청록파의 시는 전통적 자연 서정주의에 지나치게 편중된 흠이 있다. (2) 시단에서 활동한 시인들 ① 광복 전 : 김광섭, 노천명, 모윤숙, 신석초, 김광균, 신석정, 장만영, 김현승, 김상옥, 윤곤강 등 ② 광복 후 : 구상, 정한모, 조병화, 김춘수, 김경린, 김수영, 김윤성, 설창수, 이경순, 한하운 등 (3) 6·25 직전에 발간한 는 전쟁 전후의 문단에 크게 공헌 했다.   순문예지 주재자 연대 등단 문인 문예(文藝) 발행인 : 모윤순 편집인 : 김동리 조연현 1949 ∼1954 .3 (통권 21호) - 시인 : 손도인, 이동주, 송 욱, 전봉건, 천상병, 이형기 - 소설가 : 강신재, 장용학, 최일남, 서근배 - 평론가 : 김양수 5. 1950년대의 시   1. 시대 배경 1948년 8월 15일 대한 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한국 문학은 분단의 비극을 연출하며, 북한의 남침으로 6ㅗ25의 대참화를 체험한다.   2. 특 징 (1) 새 시인군(詩人群)의 등장 : 신동집, 김구용, 김요섭, 장호, 김남조, 홍윤숙, 이인석, 김종문 등과 지 출신 이원섭, 이동주, 송욱, 전봉건, 이형기, 한성기, 박양균, 천상병, 이수복 등 역량 있는 시인들이 본격적인 활동을 개시했다. (2) '후반기(後半期)' 동인의 모더니즘 : 김경린, 박인환, 김규동, 조향 등은 시의 소재를 현대의 도시 문명에 두고 주지적, 감각적 기법으로 처리했다. 1930년대 모더니즘 시인 김기림이 밝고 건강한 '오전의 시'를 썼음에 비해 이들은 짙은 불안감과 위기 의식을 표출하고 있다. (3) 반서정주의의 상황파 시 : 6ㅗ25 전란의 참담한 상황을 몸소 체험하여 강렬한 생명 의식ㅗ민족애ㅗ조국애ㅗ인류애를 노래한 시인들이 등장하여 새와 바람, 푸나무와 냇물, 달과 꽃만 노래하는 전통적 자연ㅗ서정주의를 극복하려 했다. 유치환, 구상, 박남수, 전봉건, 송욱, 신동문 등이 반서정주의 시인이다. 특히 유치환의 종군 체험 시집 (1922), 강렬한 조국애와 민족애, 인류애, 원죄 의식을 노래한 구상의 연작시 '초토(焦土)의 시'(1956)가 이런 경향의 시를 대표한다. 또, 존재의 탐구에 골몰한 김춘수, 도시인의 애수를 직설적으로 노래한 조병화, 내향적 자아 의식을 추구한 김구용 등의 시도 반서정주의의 특성을 드러낸다. 뿐만 아니라 자연 발생적 감정을 거부하고 언어를 지성적으로 조작하여 시를 구성하려 한 주지적 심상파 김종삼, 성찬경, 문덕수, 김광림, 김요섭 등의 시도 빼어 놓을 수 없다. (4) 전통적 서정파의 자기 수호의 시 : 위와 같은 도전을 받으면서 전통적 서정파는 자기 정체성을 지켰다. 서정주를 필두로 박재삼, 황금찬, 구자운, 김관식, 이동주, 박용래, 박성룡, 박희진 등이 이 계?!... ...  
1024    詩를 주문제작해 드리는 시대가 왔다... 댓글:  조회:4859  추천:0  2016-01-21
당신의 사연, 시로 써드려요... 민음사 프로젝트 '주문제작 시'  박준·오은 등 젊은 시인 참여 기사 이미지 보기 “저는 예비신부입니다. 졸업 후 둘이 함께 좋은 곳에 취업해 날을 잡았는데 제 곁엔 이제 엄마가 안 계세요. 2014년에서 2015년으로 해가 바뀌는 그 날, 내 나이 스물아홉에서 서른이 되는 그 날, 엄마는 짧은 암투병으로 끝내 저와 이별했습니다. 결혼 날을 잡아둔 채로 제 결혼식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으셨네요.” 지난해 11월 민음사 편집부로 한 통의 이메일이 왔다. 자신의 결혼식을 앞두고 돌아가신 어머니를 그리워하던 예비신부는 시인에게 ‘햇살처럼 따뜻한 시 한 편’을 부탁했다. 사연을 받은 박준 시인(34)은 ‘숲’이라는 시를 지었다. ‘그해 셋이 함께 장마를 보며 저는 비가 내리는 것이라 했고 그는 비가 날고 있는 것이라 했고 당신은 다만 슬프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오늘은 그 숲에 대해 더 쓸 것이므로 슬픔에 대해서는 쓰지 않을 것입니다.’(‘숲’ 부분) 민음사가 회사 블로그에서 진행하고 있는 시 창작 프로젝트 ‘주문제작, 시:당신의 모티브’가 독자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 사람들이 겪는 일상의 소재를 바탕으로 시인들이 시를 쓴다는 점이 친근감을 주기 때문이다. 시인이 다른 사람의 사연을 받아 시를 쓴다는 것은 문단에선 낯선 시도다. 지난해 6월 ‘주문제작 시’의 첫 문을 연 오은 시인은 향수를 심하게 뿌리는 상사 때문에 괴로워하는 직장 여성의 이야기를 시로 썼다. ‘킁킁거리기라도 했다가는/ “향기 좋지?”라는 물음이 분사될 거예요/ 내 안의 폭력성은 상승하겠죠/ ‘아니요! 아니요!’ 속으로만 신나게 소리치겠죠/ 연습은 실전과 다르다는 걸 뼈저리게 느끼겠죠.’ (‘그 냄새 좀 제발!’ 부분)    한 달에 두 편씩 ‘주문생산’되는 시들은 내년 상반기께 단행본으로 출간될 예정이다. 프로젝트에 참가한 시인은 오은 박준 성동혁 황인찬 송승언 등 한국 시단을 이끌 기대주로 주목받는 젊은 작가군이다. 박 시인은 “최근 한국 현대시의 주요 문제 중 하나가 소통의 단절이라는 것을 시인들도 알고 있다”며 “이런 프로젝트가 문제 해결을 위한 새로운 방법 중 하나라고 생각한 시인들이 힘들어하면서도 즐겁게 시를 쓰고 있다”고 말했다.  민음사 편집자 서효인 시인(35)은 “시를 본 독자들이 ‘사소해 보이는 사연이 시로 바뀌는 것을 보니 신기하다’고 말하는 등 반응이 좋다”고 설명했다. 박상익 기자
1023    윤동주 시인을 좋아하는 리유?- 댓글:  조회:5035  추천:0  2016-01-21
윤동주 시인의 "별 헤는 밤"이란 시를 좋아하는 리유... 최근 윤동주 시인이 한국과 일본에서 동시에 관심을 받게된 사연은 무엇인가요?   지난 2월16일은 윤동주 선생이 일본의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29세의 삶을 마감한 지 70주기가 되는 날이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일본 곳곳에서 에 열렸고 일본의 주요 일간지인 아사히 신문에서도 이 낭독회를 상세히 보도하였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70주기 맞는 추모행사들이 열리고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윤동주 시인의 시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무척 많다고 합니다. 이는 한국과 일본이라는 나라대 나라의 관계가 아닌 인간대 인간의 관계로 순수한 윤동주 시인의 시를 좋아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많은 일본인들이 윤동주 시인의 시를 통해 한국과 일본이 풀리지 않는 역사의 숙제를 함께 풀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윤동주에 대해서 일본에서 1984年에 伊吹郷에 의해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空と風と星と詩』翻訳에 의해 日本語로 紹介되었습니다. 伊吹訳에 의한「序詩」는、日本의 教科書에 掲載되는 등 普及되고 있습니다. 그후, 複数의 翻訳이 出版되고 있는데、原文의「하늘」을 그대로「空」이라고 번역을 할지, 그리스도교 信仰에 입각하여「天」으로 번역할지 등, 번역의 차이가 크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1995年2月16日에는、尹東柱没後50年을 記念하여 同志社大学構内에「尹東柱詩碑」가 세워졌습니다. 이것은 尹東柱詩碑建立実行委員会에 의한 것인데,建碑를 위한 浄財가 모금되었다는 점과, 大学当局도 尹東柱의 詩와 그리스도교精神이 新島襄의 精神과 共通된다는 認識을 나타냄으로써 実現되었습니다. 毎年、命日인 2月16日 직전 土曜日에「同志社코리아同窓会」(同志社을卒業한在日朝鮮・韓国人・留学生・帰化한 코리안等도 포함한 組織)와「尹東柱를 추모하는 会」가 共催에 의한 献花式이 거행되고 있습니다. 尹東柱를 추모하는 会는 1992年2月16日이 尹東柱를 顕彰하기 위하여 同志社出身의 코리언(南北・国籍・New Comer等 상관없음)을 中心으로 組織되었습니다. 主로 同志社大学을 中心으로 活動. 단, 会員은 널리 門戸를 개방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詩를 사랑하는 사람들、크리스찬、歴史的인 観点、등 각종 立場의 人間이 参加하고 있습니다. 参加者는 日本人・韓国人에 상관없이自由입니다. 또한、京都의 下宿(左京区田中高原町)은、그후, 京都造形芸術大学의 敷地의 一部가 되어 있습니다. 2006年6月、京都造形芸術大学内의 下宿跡地에 「尹東柱留魂之碑」가 세워져 있습니다. 現在、日本의 市民団体「詩人尹東柱記念碑建立委員会」는 京都府에 対해서、観光客에게 人気가 높은 宇治川의 塔의 島에、尹東柱의 記念碑가 設置가능한 土地를 提供하여 달라고 요구 중입니다.       저 역시 윤동주님의 서시를 좋아해서 가장 먼저 산 시집이 윤동주님의 시집이었습니다. MBC에서 2011년에 가을, 윤동주 생각이라는 다큐멘터리를 방영했었습니다. 그때 일본 사람들이 윤동주시인에 대한 자료를 정성껏 모으고, 시동호회 모임도 활성화 되어 있는 것을 보고 놀란 적이 있습니다.   윤동주 70주기를 맞은 지난달에 모교이자 시비가 세워져 있는 연세대에서 추모행사가 열렸고, 일본의 릿쿄 대학과 도시샤 대학에서도 의미있는 행사를 가졌다고 합니다. 일본의 아사히 신문에서도 사설을 통해 윤동주님을 소개했다고 합니다.   별헤는 밤                                              윤동주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합니다   가슴 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는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 마디씩 불러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 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 경, 옥,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아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잼',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스라이 멀 듯이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에 계십니다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 위에 내 이름자를 써 보고 흙으로 덮어 버리었습니다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거외다
1022    문학을 기존안에 가두려는것 폭력? 전통시는 死亡? 댓글:  조회:4242  추천:0  2016-01-21
    “…문학도 기준 안에 가두려는 건 폭력”   ■ 대구 미래파 시인의 ‘詩를 위한 변명’…여정·김사람·김하늘 그룹 인터뷰     스스로 ‘외행성 계열의 시인’으로 불리길 좋아하는 지역 대표적 미래파 시인인 김사람·김하늘·여정씨(왼쪽부터). 스스로 ‘나쁜 시인’이라는 김하늘 시인은 사진촬영 때 정면을 거부하고 뒤돌아서버렸다.   2005년 ‘제2의 이상’으로 불리는 젊은 시인이 등장했다. 황병승이다. ‘하늘의 뜨거운 꼭짓점이 불을 뿜는 정오/ 도마뱀은 쓴다/ 찢고 또 쓴다/ (악수하고 싶은데 그댈 만지고 싶은데 내 손은 숲 속에 있어)/ 양산을 팽개치며 쓰러지는 저 늙은 여인에게도/ 쇠줄을 끌며 불 속으로 달아나는 개에게도 (하략)’ 해석 자체가 대략난감한 그의 첫 시집 ‘여장남자 시코쿠’(문학과지성사 간행). 한국시의 전형으로 여겨진 서정성을 과감하게 버렸다. 시의 화자와 주인공이 다르고, 주인공이 여러 명일 때도 있다. 인디음악, B급영화, 퀴어(성적 소수자) 담론까지 비주류의 모티브까지 섞었다. 이 난해한 시집은 무려 5쇄를 돌파했고 얼마 전 복간됐다. 김춘수 시인의 ‘무의미시’, 80년대 황지우·이산하·박남철·장정일 시인 등이 주도한 ‘해체시’보다 더 난해했다. 황병승은 미래파 시의 돌풍을 일으켰고 현재 국내 젊은 시인들의 시풍에 절대적인 영향을 주고 있다. 하지만 이해불가한 난해시는 시가 아니라는 ‘극서정시파’(문학평론가에서 시인으로 변신한 최동호씨 등이 주창)가 그들을 무시하고 있다. 오세영 시인(서울대 명예교수)도 마찬가지다. 지난 토요일 남구 대명동의 한 카페에서 지역의 대표적 미래파 시인으로 불리는 여정·김사람·김하늘씨와 그룹 인터뷰를 벌였다. 그들이 그려가는 미래파시의 속내를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여정은 1998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김사람은 2008년 ‘리토피아’, 김하늘은 2012년 ‘시와반시’로 등단했다. ▶여정= 독자가 좋아하는 시와 시인들이 좋아하는 건 확연히 다르다. 일반인은 가슴 따뜻하고 힘든 일상을 위로해주는 힐링적인 시를 원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좋은 시와는 거리가 있다. ▶하늘= 나는 나쁜 시, 부조화하고 은밀한 걸 좋아한다. 시인이 되기 전 내가 읽은 시집은 기형도의 ‘입속의 검은 잎’뿐이다. 솔직히 예전의 가슴 절절한 서정시는 전혀 와닿지 않고 시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삶이 달달하냐. 무지 쓰다. 그러니 더 쓴 시가 필요하다. 그게 미래파시다. 쉽고 달달하자는 것, 거래하자는 건가. ▶사람= 시단이 획일화를 강요한다. 힐링이라고 하면 다들 힐링만 얘기한다. 국정교과서처럼 ‘국정시’를 만들 건가. 모든 게 존재하는 세상이고 그 모든 게 다 의미가 있다. 기준 안으로 몰아넣으려고 하는 건 개인에 대한 폭력이다. 문학도 마찬가지다. 내 시는 모든 종류의 폭력에 대한 저항이다. 세계의 모든 경계는 폭력이며 그것이 나를 구속한다. 그래서 삶은 슬프다. 과거와 현재의 경계, 현재와 미래의 경계. 땅과 하늘, 이곳과 저곳, 내면과 외면, 육체와 영혼, 삶과 죽음의 경계로 우리는 유리되고, 소외되고, 죽는다. 내 시는 태초로의 귀환이다. ▶여정= 개인적으로 좋은 시일수록 독자를 생각하지 않아야 된다. 작가 중심일 때 자기와 세계의 가장 깊은 부분으로 갈 수 있다. 대중, 권력, 유명세 등이 개입되면 작가정신이 변질된다. 그것과 거리를 두고 내면으로 파고들면 시문화는 더욱 튼튼해진다. ▶하늘= 나는 독자와 시단으로부터 소외되어도 상관없다. 주목보다 나를 찾고 싶다. 개인이 사회를 다 바꿀 수 없다. 그러니 내 맘껏 쓴다. 난 히키코모리(은둔형 외톨이)다. 내 방식으로 살겠다. ▶사람= 쉬운 시를 외치는 사람일수록 검증받은 고전조차 단지 난해하다는 이유로 읽지 않는다. 이들은 편하고 쉬운 데 익숙하다. 자본주의의 폐해일 수 있다. ▶여정= 자꾸 기성시인은 서정시파, 젊은 시인은 미래파로 양분하려고 한다. 미래파도 얼마나 세분화되고 있는가를 더 알려주어야 한다. ▶사람= 사람들은 너무 빨리 이해하고 싶어 한다. 음미할 여유가 없다. 그래도 시인데 어떻게 보자마자 이해가 되나. 괜찮은 독립영화도 몇 번 봐야 비로소 감독의 의도를 겨우 알 수 있다. 존재보다는 소유, 소유보다는 소비에 길들여진 세상이다. 편리병에 걸린 탓이다. 그러니 뭣하러 시집을 읽겠나. 시는 기존 질서에 대한 언어배열이 아니다. 질서를 파괴하려고 한다. 그러니 어렵다. ▶하늘= 서정파는 자연과 사람 속에서 잘 놀았다. 나는 인간이 얼마나 음습하고 우울하고 비자연적이고 반자연적이고 반감성적이고 유령적인가를 까발리고 싶다. ▶사람= 많은 시인들이 누구 눈치만 보는 것 같다. 뭘 위한 눈치인가. 그러니 다 비슷한 시만 쓰지. ▶여정= 시인과 시는 구분해서 봐줘야 할 것 같다. ▶사람= 구분해선 곤란하다. 최소한 같아져야 하고 시인은 거의 같아져야 된다고 본다. 시만 잘 쓰면 괜찮은 사람처럼 봐줘선 안된다. 친일을 했고 독재 미화를 한 미당 서정주 시가 교과서에서 빠지는 건 당연하다. 문학적으로 뛰어나다는 게 뭐가 그렇게 대단한가. ▶하늘= 난 예술 이전에 삶이 우선이라고 본다. 정직하고 솔직하고 강직해야 한다. 내가 삶이고 그 삶이 언어를 뱉어낸다. 그 언어가 갑자기 하나의 사람이 되고 행동하고 생각을 하게 된다. 잘못 산 시는 설 자리가 없다. ▶여정= 미래파시를 이해 못하겠다고 하는데 92년 ‘서태지와 아이들’이 등장했을 때 가요계는 ‘도무지 이해 못하겠다’ ‘저건 노래가 아니다’라고 했다. 김기림은 이상의 ‘오감도’ 때문에 조선문단이 난해시 파장에 휩싸이자 ‘시는 태생적으로 난해할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서정은 농경사회의 산물인지도 모른다. 산업시대 때 이성파 시인이 등장하고 지금은 혼성모방·이종교배가 난무하는 ‘모바일세상’이다. 클릭 한 번으로 모든 곳으로 갈 수 있고 모든 걸 알 수 있다. 그래서 감성보다 감각이 지배하는 세상이다. 감성파가 감각파를 이해 못하는 것, 그건 다시 말해 ‘미래파시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요즘 젊은 시인은 ‘공감각지성’으로 시를 적는다. 지금은 이미지와 영상이 활자를 능가한다. 어쩜 전통적 의미의 시는 사망했는지도 모른다. 새로운 시가 태어나야 한다. 그게 미래파시다. 서정파 시절에는 경험이 거의 같다. 하지만 지금은 제각각이다. 하나로 통합할 수도 없다. 예전에는 커피란 상품에 주목하지만 지금은 수천만 가지로 파생되는 커피 브랜드에 치중한다. 스마트폰은 시간과 공간을 뒤섞어버렸다. 젊은 시인들은 이것에 반응하고 대응할 수밖에 없다. 미래파도 능동파와 수동파로 나뉜다. 98년 난 ‘자모의 검’으로 신춘문예를 통과했다. 그땐 새로운 미래파였는데 이제는 나도 ‘늙은 미래파’다. 김사람의 시보다 김하늘이의 시는 더 새롭다. 이들의 시는 논리적 연관성으로 풀 수 없다. 현실과 꿈이 다중인격적으로 휙휙 날아다닌다. 김경주 시인은 프랑켄슈타인 같은 문장, 권혁웅 시인은 계보·지도학적으로 무장했다. 김하늘은 ‘다중입체적 표현주의 미래파’로 볼 수 있다. 자연현상, 이념, 사회적 이슈, 남북통일 이런 담론은 그녀의 시에 아무런 영향을 못 준다. 제발, 우리한테 쉬운 걸 강요 말라. 진행·정리·사진=이춘호기자
1021    <론쟁> = 시인는 언어질서 파괴자? / 극단적 "미래파 시"는 사기? 댓글:  조회:4394  추천:0  2016-01-21
  박재열 시인, 시인은 질서도 봐야 하지만 카오스도 함께 거느려야 해 “제대로 된 시인은 기존 언어질서 파괴하려고 나온 자…뻔한 생각 벗어나야”       시의 난해성은 익숙한 것을 뒤집을 때 오는 건지도 모른다. 뒤집힐 때 낯섦을 느낀다. 김소월의 ‘진달래꽃’ 이래로 거의 같은 운율과 시법으로 쓴 시는 이제 식상하다. 익숙한 것일수록 사람들은 별 의식 없이 자동으로 인식한다. 우리 시단의 시를 보면 ‘수필 쓰면 되지 굳이 왜 시를 붙들고 있는지 이해가 안 되는 경우’가 많다. 제대로 된 시인은 기존 언어질서를 파괴하려고 나온 자다. 노벨문학상(1948년)을 수상한 T. S. 엘리엇(1888~1965)이 22세 때 쓴 시 ‘알프레드 프루프록의 연가’는 무명시절 숱한 잡지사에 투고했지만 난해하다는 이유로 퇴짜를 맞는다. 하지만 그의 천재성을 알아본 에즈라 파운드의 천거로 시카고의 잡지사 ‘포에트리지(誌)’를 통해 발표된다. 후에 ‘황무지’와 함께 위대한 작품으로 사랑받게 된다. 일제강점기의 이상은 진짜 시인이란 생각이다. 여전히 독창적이고 긴장을 준다. 요즘 미래파의 시는 실험적이다. 그걸 나무라는 서정파 시인이 많은데 그건 잘못이다. 누구나 알아서 좋은 게 아니라 아무도 몰라서 더 좋을 수도 있다. 진정한 실험의 결과라면 좋을 수 있다는 게 형식주의자인 나의 생각이다. 누구나 이해하는 그런 의미로 와닿는 시적 세상은 인간을 크게 카타르시스시키지 못한다. 완성도가 높은 시일수록 독자를 ‘당황’시킨다. 시는 의미와 무의미의 경계, 질서와 무질서와 혼돈의 경계에 서 있다. 시인은 질서도 봐야 하지만 카오스도 함께 거느려야 한다. 경계의 시인이 ‘미치광이’처럼 보일 때도 있다. 뻔한 생각에선 뻔한 시밖에 나오지 못한다. 이춘호기자 =========================================== 오세영 시인, ㅡ난해한 시를 지향하더라도          금기와 지켜야 할 원칙 있다.  “충분히 쉬운 표현으로 더 깊은 메시지 전달 가능…                                                      극단적 미래파 詩는 사기”   나같이 50여 년 시를 쓴 사람조차 이해하기 힘든 극단적 미래파 시는 ‘사기’다. 시를 ‘인질’로 삼은 것이다. 예컨대 마누라가 도망쳤다고 해서 무단히 행인 납치소동을 벌이는 것처럼 난해하다. 그냥 주목을 끌어 자기를 내보이려는 행동이다. ‘사슴이 오늘 과수원에 갔습니다’ 혹은 ‘사슴 한 마리가 학교에 갔습니다’, 이 경우 사슴과 과수원, 나와 학교는 각각 등가성을 가진 단어들로 나를 사슴으로, 학교를 과수원으로 환치시킨 것이다. 이 문장은 비록 단어들을 등가성을 지닌 다른 단어들로 바꾸어 놓긴 했으나 아직 언어 질서를 완전히 무시하지는 않았다. 가령 ‘사슴, 하늘, 나무, 달린다’란 문장을 보자. 의미를 읽어내기가 어렵다. 등가성과 인접상이 배제된 언어들의 무분별한 공간적 나열밖에 없기 때문이다. 미래파 시는 마치 신을 배제한(혹은 타살한) 오늘의 물질문명이 결과적으로는 인간 그 자신조차 비인간화시키는 결과물로 보인다. 신사조에 사로잡혀 비록 난해시를 지향한다 하더라도 깨버려서는 안 되는 금기와 지켜야 할 원칙이 있다. 더 이상 언어의 본질을 훼손한 언어, 소통 불능의 난해한 언어를 지향해선 안 된다. 충분히 쉬운 표현으로 더 깊은 메시지를 전할 수 있다. 이춘호기자 //////////////////////////////////////////////////////////////////////////////  
1020    시문학의 현주소? / 오감도! 육감도? 댓글:  조회:4567  추천:0  2016-01-21
감각의 논리로 무장한 미려한 평문 스물여섯 편이 든 시론집 젊은 비평가 권혁웅의 새 비평집이 출간됐다. 알려진 대로 그는 잡지 『문예중앙』에 둥지를 틀면서 새해 벽두부터 불붙은 문단의 젊은 피 수혈이란 뜨거운 화두 속 주인공이다. 2005년 봄 『문예중앙』 혁신호를 내면서 새로운 문학의 적극적인 옹호자임을 자처하고 나선 권혁웅은, 기존의 문단이 ‘경박하다’ 혹은 ‘상업적이다’라는 이유로 이렇다할 주목을 하지 않았던 작가와 작품에 대한 열렬한 애정 고백을 이번 비평집에 담고 있다. 총 3부로 나뉜 이 책은, 필자 자신이 이미 시를 써서 등단했고 두 권의 시집을 상자한 이력에서 짐작할 수 있듯, 지난 20년간 지인들과 함께해온 시 합평회의 산물로서 어제의 시와 오늘의 시에 대한 비평들로 빽빽하다. ‘사랑처럼, 아름다움도 움직인다, 시 또한 낡은 감각의 갱신을 통해서만 그 미래를 보장받을 수 있다’는 그의 당찬 문학론은 새로운 감각의 출현, 젊은 시에 대한 편애의 변들을 통해 2005년 우리 문학의 현주소를 밝히는 작업으로 이어지고 있다. 1부에서는 이미 제 나름의 독자적인 문체와 어법을 구축한 시인들의 이전 시와 근작들에 대한 현재적인 의미를 묻는 6편의 글과 아직 비평적인 조명을 받지 못한 최근의 젊은 시인들을 소개하고 있는 「상사(相似)의 놀이들」과 「미래파」라는 제목의 두 개의 글을 싣고 있다. 2부 전반부에 실은 다섯 편의 글은 필자가 “먼 훗날 쓰게 될 시사(詩史)의 밑그림을 염두에 두고 쓴 글들”이라고 밝혔듯이 한국 시단에 방점을 찍은 별들, 이를테면 김수영을 위시하여 황동규 오규원 서정주 김춘수 기형도 황지우 최승자 정진규 최승호 등의 시세계를 들여다보며 한국 시사를 조명하는 글들이다. 2부 후반부에 실은 다섯 편에서는 몇 가지 키워드(집과 시, 구멍들, 흔적들, 사이들, 내통들)로 좋은 시들을 소개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3부는 황인숙, 이진명, 이문재, 차창룡, 이윤학, 안도현 등 몇몇 시인들에 대한 작품론이다. “나는 달을 가리켰는데 그대는 왜 손가락만 보는가?” 이 상투어구가 우리 시 비평계의 현실을 설명하는 데에도 도움이 될 것 같다. 달이 초월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실체’라면, 손가락은 내재적이고 형이하학적인 ‘수단’이다. 과연 그런가? 비평은 가치평가에 이르러야 한다는 점에서 도리 없이 형이상학을 편들 수밖에 없지만, 손가락의 도움 없이 그곳에 이르는 길이란 없는 법이다. 나는 우리의 비평이 늘 주제론에만 편향되어 있는 현실에 문제가 없지 않다고 생각한다. 분석 대신에 분류가, 해석 대신에 정의(定義)가 앞서는 게 현실이다. 주제론에 함몰되면 실질적인 작품 생산의 결과를 가늠하기보다는 작품을 낳았다고 생각되는 가상의 정신작용에만 주목하게 된다. 의도와 결과는 같은 말이 아니다. 분류와 정의에 따른 영역들, 이를테면 환상시, 여성시, 생태시, 몸시 따위는 시가 구현하는 혹은 시를 산출하는 내재적인 감각의 도움 없이는 제 영역을 확보할 수 없다. 최근 시에 대한 적지 않은 오독은 대개 의도의 오류라고 불러야 할 이 착란에 의해서 생겨난 것이다. 실제로 시를 낳는 것은 몸의 논리를 따라가는 바로 그 감각이다. 비평에서 가장 중시되어야 할 것이 이 감각의 논리를 재구하는 길이라고 믿는다. 시를 몸으로 쓰는 것이라고 했을 때, 이 말은 비유적인 표현일 수 없다. 시인의 몸은 세상의 여러 자극과 정보를 받아들이는 수용기(受容器)이거나 공명통이다. 시에서의 관념은 그런 여러 감각에 대한 상위개념으로서만 제 역할을 할 수 있다. 관념을 우선해선 안 된다. 한 시인의 시란 그가 세상을 관통해오면서 몸에 기록한 여러 흔적들이며, 비평은 그 흔적의 넓이와 깊이와 모양을 먼저 측정해야 한다. 과격하게 말해서 시인론은 작품론의 총합일 뿐이며, 그 역일 수 없다. 비평은 무엇보다도 먼저 이 감각의 기술론이 되어야 한다. 이 책에 실린 글을 쓰면서 늘 이 점을 의식했다. 감각이 어떻게 시를 낳는가? 그래서 앞의 말 역시 다음과 같이 수정될 필요가 있다. “나는 손가락을 가리켰는데, 그대는 왜 달을 보는가?” _「책머리에」에서 나는 여전히 시의 역사가 감각의 역사라고 믿고 있으며, 그래서 시사의 기술은 전대 시인과 후대 시인 사이에 이루어지는 감각의 주고받음, 곧 시적 영향의 수수관계에 대한 해명에서 시작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의 감각적 현실이 이후의 감각을 보증하고 예견하는 것, 시는 그런 형식으로 발전해 왔다. 정신(精神)의 역사는 순수 추상의 역사다. 이 말로, 내가 정신사의 기술을 반대한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추상(抽象)이란 구상을 딛고 올라선 곳에서 비로소 생겨난다. 추상은 구상을 삭제하거나 배제하지 않는다. 요컨대 추상은 구상들을 종합하는 원리로서 기능하는 것이다. 한 구절의 전이(轉移), 한 이미지의 유로(流路), 한 말투의 모사(模寫)들이 쌓이고 쌓여 시의 발화 주체를 만든다. 발화 자체에 주목하지 않고 이 주체들의 역사를 기술할 수는 없을 것이다. _본문에서 1부 감각의 논리―이성복·김행숙·이덕규의 시 기호의 제국―박상순·김형술·이기성의 시 아프로디테의 자식들―김언희·채호기·박서원 시의 에로티즘 뜨거운 환상과 차가운 환상―우리 시의 네 가지 판타지 풍경과 나―배용제·조용미·정재학의 시 진선미(眞善美), 혹은 모던한 것―김영승·김정란·전영주의 시 상사(相似)의 놀이들 미래파―2005년, 젊은 시인들 2부 전범들 서정주와 김춘수가 만나는 자리―황동규·정진규·오규원 시의 일단 김수영 시의 계보 한 줌의 시―한국시의 이분법 실험에 관하여 집과 시 구멍들 흔적들 사이들 내통들 3부 도플갱어의 꿈―황인숙의 시 세계 유비·연대·승화―이진명의 『단 한 사람』 ‘오래된 미래’로 난 길―이문재 시의 역학 ‘이다’와 ‘아니다’ 혹은 그 사이―차창룡의 『나무 물고기』 복화술사의 고백―이윤학의 시 왜곡·분절·연장―김록의 『광기의 다이아몬드』 사랑의 아이콘들―안도현의 『너에게 가려고 강을 만들었다』 내 안의, 이토록, 낯선―이규리의 『앤디 워홀의 생각』 권혁웅 지음 1967년 충주에서 태어나 1997년 『문예중앙』에 시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나왔다. 시집으로 『황금나무 아래서』 『마징가 계보학』 『그 얼굴에 입술을 대다』, 비평집으로 『미래파』 『시론』이 있으며, 이 밖에 산문집 『두근두근』, 신화연구서 『태초에 사랑이 있었다』 등을 펴냈다. 현재 한양여대 문예창작과에서 시를 가르치고 있다.   =========================== ----------------------------------- 가려워진 등짝                                          황병승 오월, 아름답고 좋은 날이다 작년 이맘때는 실연(失戀)을 했는데 비 내리는 우체국 계단에서 사랑스런 내 강아지 짜부가 위로해주었지 '괜찮아 울지 마 죽을 정도는 아니잖아' 짜부는 넘어지지 않고 계단을 잘도 뛰어내려갔지 나는 골치가 아프고 다리에 힘이 풀려서 '짜부야 짜부야 너무 멀리 가지 말라고 엄마가 그랬을 텐데!" 소리치기도 귀찮아서 하늘이 절로 무너져 내렸으면 하고 바랐지 작년 이맘때에는 짜부도 나도 기진맥진한 얼굴로 시골집에 불쑥 찾아가 삶은 옥수수를 먹기도 했지 채마밭에 앉아 병색이 짙은 아빠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괜찮아 걱정하지 마 아직은 안 죽어' 배시시 웃다가 검은 옥수수 알갱이를 발등에 흘렸었는데 어느덧 오월, 아름답고 좋은 날이 또다시 와서 지나간 날들이 우습고 간지러워서 백내장에 걸린 늙은 짜부를 들쳐업고 짜부가 짜부가 부드러운 앞발로 살 살 살 등짝이나 긁어주었으면 하고 바랐지         *월간《현대문학》2010년 2월호       오감도와 달리 찌릿찌릿 육감도의 전율이 엄습하는 시  시를 써도 어떻게 이다지도 다를 수 있는가. 황병승의 오월풍경은 이렇게나 남다르다.    어느덧 오월,    아름답고 좋은 날이 또다시 와서    지나간 날들이 우습고    간지러워서 등짝을 살 살 살 긁어주는 오월의 햇볕이 사랑스럽기도 하지만, 실연 후 '비 내리는 우체국 계단에서/ 사랑스런 내 강아지 짜부가/위로해주'는 오월의 추억이란 이처럼 착잡하기만 한 것이다. 그는 말한다. '괜찮아 울지 마 죽을 정도는 아니잖아' 짜부가 어느 집 강아지인지 병색이 짙은 아빠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괜찮아 걱정하지 마 아직은 안 죽어' 라고 말하는 화자는 분명 짜부가 아닐 텐데  죽음에 이르는 현대인의 병, 아무리 태연한 척 스스로를 달래려 해도 왜 아니겠는가. 오월의 태양은 억장 미어지는 심사를 못 본 체 뒤로 하고 역설적이게도 찬란하기만 한 것이다.       백내장에 걸린 늙은 짜부를 들쳐업고     짜부가 짜부가     부드러운 앞발로     살 살 살 등짝이나 긁어주었으면 하고 바랄 뿐인 그는 햇볕 안 드는 반지하 단간방에서 아내 금홍이 흐트러 놓고 몸 팔러 나가면 하릴없이 온종일 화장품 뚜겅이나 열어보며 허송세월 하던 저 1930년대의 날개 없는 시인, 이상의 분위기를 연상케한다.  아니 오감도와는 달리 별개의 육감으로 우리를 당혹케 하는 육감도의 전율이 시의 행간 행간에 점철한다. 김영찬(시인 )        황병승 /서울예대 문창과 추계예대 문창과 명지대 대학원 문창과 졸업. 2003년 《파라21》신인문학상 당선. 시집 『여장남자 시코쿠』『트랙과 들판의 별』.         배가 고파서 문득 잠에서 깨었을 때    꿈속에 남겨진 사람들에게 미안했다 나 하나 때문에    무지개 언덕을 찾아가는 여행이 어색해졌다      나비야 나비야 누군가 창밖에서 나비를 애타게 부른다    나는 야옹 야아옹, 여기 있다고, 이불 속에 숨어    나도 모르게 울었다    그러나 내가 금세 한심해져서 나비는 나비지 나비가 무슨 고양이람,    괜한 창문만 소리나게 닫았지      압정에, 작고 녹슨 압정에 찔려 파상풍에 걸리고    팔을 절단하게 되면, 기분이 나쁠까      느린 음악에 찌들어 사는 날들    머리빗, 단추 한 알, 오래된 엽서    손길을 기다리는 것들이 괜스레 미워져서    뒷마당에 꾹꾹 묻었다 눈 내리고 바람 불면    언젠가 그 작은 무덤에서 꼬챙이 같은 원망들이 이리저리 자라    내 두 눈알을 후벼주었으면.      해질 녘, 어디든 퍼질러 앉는 저 구름들도 싫어    오늘은 달고 맛 좋은 호두파이를 샀다    입 안 가득 미끄러지는 달고 맛 좋은 호두파이,    뱃속 저 밑바닥으로 툭 떨어질 때    어두운 부엌 한편에서 누군가, 억지로,    사랑해 ······ 하고 말했다.   - 멜랑꼴리호두파이         소년도 소녀도 아니었던 그해 여름   처음으로 커피라는 검은 물을 마시고   처음으로 나 자신에게 삐뚤빼뚤 엽서를 쓴다 누이가 셋이었지만 다정함을 배우지 못했네   언제나 늘 누이들의 아름다운 치마가 빨랫줄을 흔들던 시절 거울 속의 작은 발자국들을 따라 걷다 보면   계절은 어느덧 가을이고 길을 잃지 않기 위해 놓아둔 흰 자루들   자루 속의 얼굴 없는 친구들은 시간이 해결해줄 거라고     스무 살의 나에게 손가락 글씨를 쓴다   그러나 시간이 무엇을 해결해줄 수 있을까   새들은 무거운 음악을 만드느라 늙지도 못했네   언제나 늘 누이들의 젖은 치마가 빨랫줄을 늘어뜨리던 시절 쥐가 되지는 않았다 늘 그 모양이었을 뿐.   뒤뜰의 작은 창고에서 처음으로 코밑의 솜털을 밀었고    처음으로 누이의 젖은 치마를 훔쳐 입었다, 생각해보면   차라리 쥐가 되고 싶었다   꼬리도 없이 늘 그 모양인 게 싫어 자루 속의 친구들을 속인 적도 상처를 준 적도 없지만    부끄럼 많은 얼굴의 아이는 거울 속에서 점점 뚱뚱해지고 작은 발자국들을 지나 어느새 거울의 뒤쪽을 향해 걷다 보면   계절은 겨울이고, 아무도 돌봐주지 않는 시간   나아갈 수도 돌아갈 수도 없는 어둠 속에서     조금 울었고 손을 씻었다   조금만 더     - 너무 작은 처녀들                                                
1019    이상한 시나라에서 이상한 시인모임 댓글:  조회:4343  추천:0  2016-01-21
주치의 h, 주체 h -- 황병승 -주체의 분열, 독자의 분열, 파괴된 주체                                                                                                                                             임동확 시창작   1 떠나기 전, 집 담장을 도끼로 두 번 찍었다. 그건 좋은 뜻도 나쁜 뜻도 아니었다.   h는 수첩 가득 나의 잘못들을 옮겨 적었고 내가 고통 속에 있을 때면 그는 수첩을 열어 천천히 음미하듯 읽어 주었다.   나는 누구의 것인지 모를 커다란 입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깊이 더 깊이   아버지와 어머니 사랑하는 누이가 식사를 하고 있었다 큰 소리로 웃고 떠들며 더 크고 많은 입을 원하기라도 하듯 눈이 있어야 할 자리에 귀에 이마에 온통 입을 달고서 입이 하나 뿐인 나는 그만 부끄럽고 창피해서 차라리 입을 지워버리고 싶었다.   2 입 밖으로 걸어나오면, 아버지는 입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로 조용한 사람이었고 어머니와 누이 역시 그러했지만, 나는 입의 나라에 한번씩 다녀올 때마다 가족들과 함께 하는 침묵의 식탁을 향해 ‘제발 그 입 좀 닥쳐요’ 소리가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집을 떠나기 전 담장을 도끼로 두 번 찍었지만 정말이지 그건 좋은 뜻도 나쁜 뜻도 아니었다.   버려진 고무인형 같은 모습의 첫 번째 여자친구는 늘 내 주위를 맴돌았는데 그때도(도끼질 할 때도) 그 애는 멀찌감치 서서 버려진 고무인형의 입술로 내게 말했었다.   “네가 기르는 오리들의 농담 수준이 겨우 이 정도였니?”   해가 녹아서 똑 똑 정수리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h는 그 애의 오물거리는 입술을 또박또박 수첩에 받아 적었고 첫 번째 여자친구는 떠났다 세수하고 새 옷 입고 아마도 똑똑한 오리들을 기르는 녀석과 함께였겠지.   3 나는 집을 떠나 h와 단둘이 지내고 있다 그는 요즘도 나를 입의 나라로 안내한다. 전보다 더 많은 입을 달고 웃고 먹고 소리치는 아버지와 어머니 사랑하는 누이가 둘러앉은 식탁으로 어쩌면 나는 평생 그곳을 들락날락 감았다 떴다, 해야할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더는 담장을 도끼로 내려찍거나 하지 않게 되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4 이제부터는 연애에 관한 이야기뿐이다. 악수하고 돌아서고 악수하고 돌아서는, 슬프지도 즐겁지도 않은 밴조 연주 같은... 다른 이야기는 없다 스물 아홉, 이 시점에서부터는 말이다 부작용의 시간인 것이다.   그러나 같이 늙어 가는 나의 의사선생님은 여전히 똑같은 질문으로 나를 맞아주신다. “이보게 황 형. 자네가 기르는 오리들 말인데, 물장구 치는 수준이 어느 정도라고 생각하나?” 낡고 더러운 수첩을 뒤적거리며 말이다. -황병승, 「주치의 h」       황병승의 시를 무어라 표현할 수 있을까. 원래 앨리스는 이상한 나라에 살지 않았다. 단지 어떤 이끌림에 따라 초대받은 손님일 뿐. 황병승의 시의 세계는 말그대로 ‘이상한 나라’이다. 그 속으로 초대받은 독자들은 앨리스처럼 걷잡을 수 없이 헤메이게 된다. 보고 다시 또 봐도 이해가 안가는 구문들. 종잡을 수 없는 거친 상징의 세계.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기존의 언어세계를 거부하며 주류 문화를 배제하는 이질적이고 잡스러운 혼성문화의 세계. 어떠한 도식적인 틀조차도 거부하는 이러한 시에 비평이나 분석의 잣대를 들이댄다는 것이 어쩌면 무모하게도 보일 수 있겠다. 그러나 독자가 시를 받아들이고 나름대로 해석한다는 것은 작품을 새롭게 재생산하고 또다른 영역을 구축하는, 바르트적인 의미에서의 ‘즐김’일 것이다. 지금부터 우리는 황병승의 ‘이상한 나라’를 탐험하는 ‘앨리스’가 된다. 이 이상한 나라를 탐험하는데 있어 주의할 점은, 우리가 그동안 가지고 있던 전통적인 형이상학적 체계, 즉 이성중심주의(로고스 중심주의)적 사고를 탈피하고 해체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텍스트에 담긴 남성적인 질서나 권위를 사후적으로 해체하겠다는 으름장이 아니라, 텍스트를 탐험하기에 앞서 우리가 사전적으로 갖춰야 할 기본적인 ‘준비운동’이라는 데에 역점이 있다. 즉, 그만큼 황병승의 나라는 이미 전통적인 사유체계를 철저하게 파괴하고 해체하는 언어를 사용하고 있으며, 이러한 시의 세계 속에서 우리는 완전한 의미에 도달할 수 없는 의미 해석의 무한한 확산, 분산, 산종을 만끽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부터 우리는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코라 기호학’이라는 도구를 가지고 황병승의 대표적인 작품인 「주치의 h」를 살펴볼 것이다. 코라 기호학의 ‘과정 속의 주체’ 이론을 통하여, 우리는 작품 속에 나타나는 화자의 정신분열적인 증상들을 흥미롭게 접근해 볼 것이다. 또한 번호별로 구성되어 있는 시 문단을 순차적으로 살펴보고, 산별적으로 구성되어 있는 시어들의 충동적인 의미 체계를 분석하면서, 그야말로 우리들만의 ‘앨리스 맵’을 그려나갈 것이다.     1 떠나기 전, 집 담장을 도끼로 두 번 찍었다. 그건 좋은 뜻도 나쁜 뜻도 아니었다.   h는 수첩 가득 나의 잘못들을 옮겨 적었고 내가 고통 속에 있을 때면 그는 수첩을 열어 천천히 음미하듯 읽어 주었다.   나는 누구의 것인지 모를 커다란 입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깊이 더 깊이   아버지와 어머니 사랑하는 누이가 식사를 하고 있었다 큰 소리로 웃고 떠들며 더 크고 많은 입을 원하기라도 하듯 눈이 있어야 할 자리에 귀에 이마에 온통 입을 달고서 입이 하나 뿐인 나는 그만 부끄럽고 창피해서 차라리 입을 지워버리고 싶었다.   왜 도끼로 두 번 찍었을까. 그리고 도끼라는 기표는 무엇을 의미할까. 황병승의 시에서 ‘왜’라는 것은 사실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단지 화자는 어떠한 ‘행동’을 했을 뿐이며, 그것은 ‘좋은 뜻도 나쁜 뜻도 아닌’, 한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없는 시니피앙(기표)의 유희인 것이다. 다만 도끼가 등장할 때의 전후관계를 살펴보면, ‘도끼’라는 기표가 화자의 세계 속에서 어떤 ‘신호’를 주고 있음을 유추해 볼 수 있다. 'h'라는 존재는 과연 무엇일까. ‘h’라는 기표가 황병승 자신의 이름을 뜻한다면, h는 황병승의 내면에 있는 또다른 자아, 즉 일종의 ‘초자아’라고 상정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화자를 치료해준다는 주치의라면서 화자의 잘못들을 옮겨적고, 화자가 고통속에 있을 때면 잘못했던 것들을 상기시켜주는 h의 특성을 보았을 때 더욱 명확해진다. (또는 ‘대문자 H’가 아닌 ‘소문자 h’라는 점에서 ‘소타자’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화자는 갑자기 ‘입’ 속으로 들어간다. ‘누구의 것인지 모를’ 이 입의 세계 깊숙한 곳에는 입이 여기저기 달린 화자의 가족들이 왁자지껄 식사를 하고 있다. 무언가 유동적이고 불안하며 충동적인 이 세계 속에서, 입이 하나뿐인 화자는 입을 지워버리고 싶을 만큼 소외되어 있다.     2 입 밖으로 걸어나오면, 아버지는 입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로 조용한 사람이었고 어머니와 누이 역시 그러했지만, 나는 입의 나라에 한번씩 다녀올 때마다 가족들과 함께 하는 침묵의 식탁을 향해 ‘제발 그 입 좀 닥쳐요’ 소리가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집을 떠나기 전 담장을 도끼로 두 번 찍었지만 정말이지 그건 좋은 뜻도 나쁜 뜻도 아니었다.   버려진 고무인형 같은 모습의 첫 번째 여자친구는 늘 내 주위를 맴돌았는데 그때도(도끼질 할 때도) 그 애는 멀찌감치 서서 버려진 고무인형의 입술로 내게 말했었다.   “네가 기르는 오리들의 농담 수준이 겨우 이 정도였니?”   해가 녹아서 똑 똑 정수리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h는 그 애의 오물거리는 입술을 또박또박 수첩에 받아 적었고 첫 번째 여자친구는 떠났다 세수하고 새 옷 입고 아마도 똑똑한 오리들을 기르는 녀석과 함께였겠지.   ‘입’이란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우리가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입 속의 세계’는 어지럽고 혼란스러우며 충동이 가득한 공간이고, ‘입 밖의 세계’는 ‘침묵의 식탁’이라는 시어에서 알 수 있듯, 질서가 잡힌 공간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코라 기호학의 관점에서, ‘입 속의 세계’는 시니피앙(기표)의 끊임없는 연쇄가 이루어지는 충동적인 ‘기호계’로, ‘입 밖의 세계’는 시니피에(기의)의 질서와 의미가 고정되는 ‘상징계’로 상정해 볼 수 있다. ‘입’이라는 기표를 통하여 기호계와 상징계를 넘나드는 시 속의 ‘주체’는, ‘언어화 과정’을 통해 상징계에 안착하여도 끊임없이 기호계의 영향을 받는다는 크리스테바의 ‘과정 속의 주체’ 이론과 일치한다. 즉, 기호계와 상징계의 역동적인 상호작용을 매게해주는 ‘언어화 과정’은 시 속에서 ‘입’이라는 기표를 통해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인간의 신체에서 유일하게 ‘말’을 할 수 있는 기관이 ‘입’이라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더욱 명확해진다. 기호계의 무질서하고 본능적인 욕동의 세계를 경험한 화자가 상징계의 ‘침묵의 식탁’을 향해 ‘제발 그 입 좀 닥쳐요’라고 말하고 싶은 것은, 공고하게 질서화된 상징계의 세계 속에서 기호계적인 ‘균열’을 일으키려는 시도임에 틀림없다. 이러한 ‘균열’의 시도는 ‘도끼’로 두 번 찍는다는 화자의 강박적이고 반복적인 ‘신호’, 내지는 ‘증상’을 통하여 더욱 명확하게 드러난다. 이를 통해 ‘도끼’라는 기표는 침묵의 상징계에 틈을 내어 기호계적 ‘진실’을 밝혀내려는 화자의 강박적인 ‘증상’이라 할 수 있겠다. 이 때 느닷없이 등장하는 ‘고무인형과 같은 모습의 여자친구’는 상당히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듯한 느낌을 주는데, ‘도끼질 할 때’ 등장했다는 점에서 이 여자친구는 상징계의 균열된 틈을 비집고 들어온 ‘기호계적 존재’라고 할 수 있겠다. 여기서 여자친구는 ‘오리들의 농담 수준’을 물어보는데, 여자친구가 기호계에서 온 존재라면, ‘오리들’은 기호계 속의 입만 달고 사는 가족들을 의미할 것이고, ‘농담 수준’은 기호계 속 가족들이 하는 말들이 시덥잖은 ‘농담’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드러내준다. 앞에서 ‘도끼질’에 대해 살펴볼 때, ‘기호계적 진실을 밝혀내려는 화자의 강박적인 증상’이라고 했는데, ‘기호계적 진실’이 아니라, ‘기호계적 농담’으로 바꿔야겠다. 이는 ‘기호계’라는 공간조차도 진실을 보장할 수 없는 모호한 공간이라는 시인의 관점을 표현하고 있다. 여자친구의 질문을 받은 화자는 ‘해가 녹아서 정수리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즉, 감추고 싶은 치명적인 약점을 어떤 초월적인 존재에 의해 들켜버린 듯한 기분을 느낀다. 이 때 다시 등장하는 h는 여자친구의 ‘말’이 아닌 오물거리는 ‘입술’을 적는다. (아주 중요한 부분이다) 그리고 여자친구는 화자의 오리들과는 수준이 다른, ‘똑똑한 오리들’을 기르는 녀석과 함께 떠나버린다.     3 나는 집을 떠나 h와 단둘이 지내고 있다 그는 요즘도 나를 입의 나라로 안내한다. 전보다 더 많은 입을 달고 웃고 먹고 소리치는 아버지와 어머니 사랑하는 누이가 둘러앉은 식탁으로 어쩌면 나는 평생 그곳을 들락날락 감았다 떴다, 해야할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더는 담장을 도끼로 내려찍거나 하지 않게 되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4 이제부터는 연애에 관한 이야기뿐이다. 악수하고 돌아서고 악수하고 돌아서는, 슬프지도 즐겁지도 않은 밴조 연주 같은... 다른 이야기는 없다 스물 아홉, 이 시점에서부터는 말이다 부작용의 시간인 것이다.   그러나 같이 늙어 가는 나의 의사선생님은 여전히 똑같은 질문으로 나를 맞아주신다. “이보게 황 형. 자네가 기르는 오리들 말인데, 물장구 치는 수준이 어느 정도라고 생각하나?” 낡고 더러운 수첩을 뒤적거리며 말이다.   화자는 집을 떠나 더이상 가족과 함께 살지 않는다. 단지 h가 안내하는 입의 나라 속에서만 ‘더 많은 입을 달고’ 왁자지껄 농담이나 일삼는 가족들을 만난다. 이제 집을 떠난 화자는 더 이상 상징계를 균열시키는 행위인 ‘도끼질’을 할 필요도 없어진다. 이 때부터 화자는 상징계의 가족들과 완전히 배제된 상황 속에서, 무료한 ‘밴조 연주 같은’, ‘악수하고 돌아서는’ 반복적인 형태의 ‘연애’를 하게 된다. 화자가 누구와 연애를 하는지는 시 속에 잘 드러나지는 않지만, 아까의 ‘고무인형과 같은 여자친구’과 연결해서 생각해 본다면, 이 연애는 인형과 같이 인위적으로 무료하게 반복하는 연애이며, 또는 실제의 사람이 아닌 집 떠나온 인형과 연애한다는 점에서, 타자와의 소통불가능성을 암시할 수도 있다. 여기서 화자는 갑자기 자신의 나이를 밝히면서, “이 시점에서부터는 말이다 부작용의 시간인 것이다”라는 의미심장한 시구를 남긴다. 그리고 화자의 위치가 갑자기 전환되는데, 초자아로 상정했었던 주치의 h가 ‘같이 늙어가는 의사선생님’으로 전환되고, ‘나’는 의사선생님이 부르는 ‘황 형’이라는 이름으로 전환된다. 그러면서 우리가 지금까지 상정했었던 ‘입 속의 세계’와 ‘입 밖의 세계’, 즉 ‘기호계’와 ‘상징계’라는 세계의 구분조차 혼란스러워진다. 지금까지의 모든 해석이 와해되고 해체되고 분열되는 순간이다. 만약 ‘의사선생님’이라는 존재가 ‘황 형’에게 정신분석을 시도하는 ‘명확한 주체’라면, 지금까지 ‘입 속의 세계’와 ‘입 밖의 세계’를 넘나들며 생쇼를 하던 ‘나’라는 화자는 결국 ‘분열된 주체’로써 의사선생님께 치료를 받는 ‘환자’일 뿐이었고, 이렇게 의사 선생님과 함께 치료를 받는 공간 자체가 ‘진짜 상징계’이고, 화자가 생쇼를 하던 입 속과 입 밖의 세계 전부가 ‘진짜 기호계’였던 것이다. “이 시점에서부터는 말이다 부작용의 시간인 것이다”, 이 시구는 그야말로 시 속 ‘화자의 분열’뿐만이 아니라 읽는 ‘독자의 분열’까지도 불러일으키는 시구라 할 수 있는데, 특히 ‘말’이라는 시어에 주목해보자. 앞에서 ‘입’이라는 신체기관이야말로 유일하게 ‘말’을 할 수 있는 기관이라 했는데, 화자가 있던 ‘진짜 기호계’의 공간, 즉 ‘입 속의 세계’와 ‘입 밖의 세계’에서는 ‘입’이 정작 중요한 ‘말’을 하지는 않는다. 입이 무수히 달린 가족들도 그저 ‘큰 소리로 웃고 떠든다’고 표현될 뿐 ‘말’을 한다고 표현되지는 않는다. 이러한 특징은 앞에서도 살펴보았던, h가 여자친구의 ‘말’이 아닌 ‘입술’을 적고 있었다는 대목에서도 두드러진다. 이런 의미에서, ‘말’이야말로 ‘진짜 상징계’로 진입하는, 진정한 ‘언어화 과정’을 뜻하는 시어라고 할 수 있겠다. 결국 ‘진짜 기호계’의 세계(분열된 주체 내부의 충동적 공간) 속에서 ‘입’이라는 기호는 ‘말’이라는 ‘언어화 과정’을 드러내지 못하는 오리들의 ‘농담’(기표)일 뿐이었으며, ‘말’(언어)로서 드러난 ‘진짜 상징계’의 세계(분열된 주체 외부의 의사선생님과의 질서가 잡힌 공간) 속에서는 결국 오리들의 ‘농담’(기표)이 문제가 아니라 오리들의 ‘물장구’(기의)가 문제였던 것이다. 또한 ‘의사선생님’이라는 ‘명확한 주체’는 오리들이 ‘농담’할 수도 있다는 ‘분열된 주체’의 기호계적․충동적 질서(기표의 질서)를 도외시하고 ‘물장구 치는 수준’(기의의 질서)이나 물어보는, 즉 문제의 본질을 보지 못한 채 곁다리나 집는 한계성을 드러낸다. 상징계의 고정된 질서로 정립된 낡은 수첩이나 뒤적거리면서 말이다. 아무튼 시적 화자, 즉 분열된 주체는, 비로소 ‘입’이 아닌 ‘말’이 통하는 시점으로서 ‘이 시점에서부터는 말이다’라는 표현을, 그리고 정신분열증 환자로서의 자신이 드러나는 시간으로서 ‘부작용의 시간인 것이다’라는 전복적인 표현을 쓴 것이다. 이렇듯 에서 황병승 시인은 독자의 이론적인 접근이나 비평적 시도까지도 끊임없이 와해시키는 돌발적이고 갑작스러운 시어 사용과 구조적인 반전을 드러냄으로써, 말그대로 ‘독자의 분열’을 조장하고 극대화한다. 시의 문단을 번호순으로 나눈 것은, ‘이 시는 반드시 번호순서대로 보시오’라는 시인의 독특한 암시효과라고 볼 수도 있겠다. 필자가 번호대로 시를 나누어서 부분적으로 차근차근 살펴본 것도, 이러한 시 해석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결론: 황병승의 ‘이상한 나라’에서 ‘주체’란? 황병승의 시에서 ‘주체’는, 기존의 정신분석학에서 상정하는 ‘분열된 주체’의 틀을 벗어난 그야말로 ‘파괴된 주체’의 역동성을 보여준다. 정신분석학에서 말하는 ‘상징화 과정’ 또는 ‘언어화 과정’을 통한 주체의 성립과정도 황병승의 시에서는 결코 ‘정상적’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어머니와의 이자관계에서 부터 시작하는 상상계, 아버지의 팔루스 기표로부터 발생하는 상징적 거세 과정, 그리고 상징계에 성공적으로 안착하는 ‘정상적인’ 주체화 과정이 황병승의 시에서는 무분별하고 난잡하게 그려진다. 심지어 정신분석학에서 어머니의 품과 같은 따뜻한 공간이라고 상정하는 ‘상상계’조차 황병승의 시에서는 무질서하고 혼돈이 가득하며 파괴와 공포가 서려있는 공간으로 탈바꿈한다. 여기서 말하는 ‘상상계’의 무질서는 단순히 ‘상징계’의 안정화된 질서와 대비된다는 원론적인 틀을 벗어나, 코라 기호학에서 말하는 ‘코라’의 모성적 공간, 즉 원초적이고 충동이 가득하지만 선험적이며 어머니의 자궁과 같은 편안한 공간과 대비된다는 데에 역점이 있다. 「주치의 h」에서도 시적 화자는 ‘기호계’에서조차 아버지는 물론 어머니를 포함한 온가족에게 소외되어 있고, 제대로 된 ‘주체화 과정’을 거치지 못한 화자는 결국 ‘상징계’의 공간 속에서도 ‘부작용의 시간’을 보내는, -‘분열된 주체’라는 표현으로는 불충분한- ‘파괴된 주체’의 일면을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단순히 이론에 갇혀있기보다는 그 이론을 변칙적으로 적용하여 자신의 언어를 창출해낸 황병승의 시적 세계는 그동안 정신분석학을 도식적으로 적용해 온 많은 시들과는 다른 그만의 독창성을 드러내주고 있으며, 그의 ‘파괴된 주체’를 통해 보여지는 ‘이상한 나라’는 그야말로 세상의 변두리에서 살아가는 이질적인 혼성문화의 세계를 파격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더욱 빛을 발하고 있다.  
1018    김철호 詩評/ 최삼룡 ... 김철호론/ 김만석... 댓글:  조회:4682  추천:0  2016-01-20
시적상상ㅡ존재와 부재 사이에서 ㅡ김철호의 근작시 6수를 놓고 최 삼 룡 김철호의 근작시 6수는 시인의 상상력이라는 이 시미학의 가장 중요하고 근본적인 개념상에서 우리에게 계시해주는바가 많다. 주지하다시피 시적인 상상력은 시인의 시창조과정에서 발휘되는 창조력중에서 가장 중요하고 관건적인 요소이다. 시창작이란 언어의 부호로서 예술적인 시형상을 창조하는 작업이라고 할수 있는데 이 과정에 무수한 존재와 부재의 변증관계가 번복되며 시적상상력은 바로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하고도 관건적인 작용을 논다. 다시 말하면 시적상상력은 창조주체의 시적창조력의 가장 중요한 능력이라고 말할수 있다. 김철호의 근작시 6수 가운데네 바다를 시적대상으로 삼은 시가 가장 돋보인다. 바다란 지구우의 륙지를 둘러싼, 짠물이 괴여있는 크나큰 부분으로서 고금중외의 시에서 녀성, 혹은 미지의 상징으로도 되고, 광활함과 적막함을 표출하는 공간의 배경이 되기도 하며 삶과 죽음이 공존하며 이승과 저승이 하나가 되는 신화의 공간으로 상징되기도 하고, 거대하고 력동적이며 생명력이 넘치는 물로서 가변성과 생기 넘침, 싱싱한 활동력으로 이미지화되기도 한다. 그리고 바다앞에서 인간은 왕왕 자신의 왜소함과 본연적인 물음, 심연의 고독과 마주하게도 되고 또한 삶의 의지와 인고를 배우는 깨달음의 장소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고금중외에는 바다를 읊은 시가 많은데 바다를 자유의 원소라고 노래한 뿌쉬낀의 “바다에”와 바다를 뿔뿔이 달아나려는 도마뱀에 비유한 정지용의 시”바다·2” 그리고 바다를 푸른 띠를 두른 세계주의자라고 지칭한 조병화의 시 “바다”  등은 너무도 유명하여 필자에게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시이미지로 살아있다. 키(箕)가 용납할수 없는것이 있었다   붉은색, 하얀색, 노란색... 이것은 시 “바다”의 첫 두 시구인데 여기서 시인은 바다를 키(箕)라고 하면서 그 키가 붉은색, 하얀색, 노란색을 용납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바다와키(箕)라는 어떤 공동성이라고는 거의 없는 두가지 사물을 만나게 된다. 그아래에서 물결로 결어 만든 커다란 키가 까불린 붉은색, 하얀색, 노란색들이 뭍으로 밀려나온다고 하였고 또 그아래에서 붉은색, 하얀색, 노란색을 더러운 색, 찌꺼기라고 하였으며 나중에 제일 마지막 시구에서는 이렇게 바다는 “다른 세상이다” 라고 읊고있다. 이제 이 시에 그려진 바다를 우리가 다시 정리해보면 더러운 색깔이 없고 찌꺼기가 없는 파란 색깔만 있고 찌꺼기가 없고 알맹이만 있는 바다이다. 이처럼 이 시에서 바다는 세상에서 더러운 색깔과 오물과 찌꺼기를 까불여내는 키로 창조되였다. 여기서 필자가 힘주어 내세우고싶은것이 바로 존재와 부재 사이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창조주체 즉 시인의 시적상상력이다. 편폭이 3천자로 제한된 이 단문에서 깊이 전개할수는 없지만 여기서 몇 마디 더 하고싶다. 상식적으로 바다는 객관적인 대자연으로서의 존재이고 키는 인간의 작은 로동도구로서의 존재이다. 다시말하면 바다에는 키가 부재하며 키에는 바다가 부재한다. 그러나 분명히 김철호의 시 “바다”에서 바다는 더러운 색과 찌꺼기를 까불이는 키로서 창조되였다. 다시말하면 바다에 부재하는 키에 바다가 존재하는 시적형상이 창조된것이다. 이 시적형상은 창조주체의 주관적인 창조물이면서 또 백지흑자로 그 탄생의 고고성을 울리면서 세상에 나타난후에는 완전히 독창적이고 완전히 신선하고 완전히 예술적이며 아울러 세상에 전대미문의 유일무이한 개관적인 존재로 된다. 이렇게 존재와 부재 사이를 넘나들면서 부재에서 존재를 찾아내고 존재에서 부재를 찾아내며 존재와 부재의 사이에서 어떤 공동성을 찾아내는 능력이 바로 창조주체의 상상력이다. 이 시에서 김철호씨는 바로 뭍으로 찌꺼기를 밀어내면서 끝없이 격랑을 일으키는 바다에서 곡식따위를 까불어 쭉정이나 티끌을 골라내는 도구 키를 련상하면서 량자의 어떤 공동성을 찾아냈던것이다. 그러면서 시인은 한발자국 더 나아가서 더러운 색이 없고 파란색만 있고 쭉정이가 없고 알맹이만 있는 순수하고 풍만한 인간세상에 대한 상상을 펼치고있다. 이제 이 6수의 시를 잘 읽어보면 우리는 존재와 부재의 사이에서 자유롭게 넘나드는 시인의 상상력에 감탄하게 된다. 시”파도”에서 시적인 상상력은 파도에서 곡절많은 인생과 굴함없는 생명의지를 찾아냈으며 시 “세월”에서 시적인 상상력은 바다에서 인생의 미미함과 허무함을 찾아냈으며 시 “빛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에서 시적인 상상력은 물푸레나무에서 인간의 처절한 생존경쟁을 찾아냈고 “칼과 물”에서 시적상상력은 칼과 물의 싸움에서 인간실존의 내적강인성을 찾아냈다. 물론 시인의 상상력에 천성적인 일면이 있다는것을 부인할수 없지만 그 천성적인 상상력은 시인의 부단한 감촉, 감지, 표상, 감각의 기초위에서 생성되고 성숙되는것이다. 여기서 필자는 특히 뿌쉬낀의 시적상상에 대한 명언 한마디가 련상되는데 그는”진정한 상상은 천재적인 지식을 요청한다”라고 하였다. 이 졸문에서 필자는 김철호의 시에서 시적발견을 놓고 담론하였는데 그밖에도 시인의 창조적인 상상력은 창작활동의 전부의 과정, 다시 말하면 시인이 생활과 인간에 대한 인식, 매 한수 시의 구상, 시적형상을 창조하는 매 하나의 작업과정에 관통관통되고있다는 점을 망각하여서는 안될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분석은 더 많은 편폭을 수요하므로 여기서 졸문을 이만 줄인다. 2016년 《장백산》 제1기  //////////////////////////////////////////////////////////////////// 경이로운 반전 그 여운에 젖어 -김철호시인 근작시 3수를 읽고 심숙 드라마는 반전으로 살아난다. 소설에서도 반전은 매우 중요하다. 시에서는 반전이 필요할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절대 필요하다는것이다. 그렇다면 그토록 짧은 서정단시에서 반전이 가능할가? 역시 결론부터 말하자면 가능하다는것이다. 이제 김철호시인의 근작시 3수를 같이 읽으며 서정단시에서 반전의 매력에 심취되여보는 시간을 가져보도록 하자. 시에서 반전은 사유의 비약이라고들 말한다. 폭포가 쏟아지는 장면을 은하수가 쏟아진다고 과장적으로 표현하는것 역시 이 사유의 비약에 다름아니다. 시 “바다”에서 시인은 바다를 푸른 잔디가 깔린 매립장으로 보고있다. 온갖 오물, 쓰레기들 절대대부분을 바다에 처넣는 인간들의 말세적행위를 고발하고있는것이다. 그 푸른 아우성속에서 새의 몸부림은 처절하면서도 비장하다. 그리고 그 새는 수많은 칼들에 난도질을 당하며 깃털을 수없이 날리고있다. 정의의 화신이라고 해도 크게 빗나가지 않는 새는 반대세력의 포위속에서도 퍼덕임을 계속한다. 비장하다못해 장엄하다. 여기까지 보면 이 시는 인간에 의해 오염되여가는 바다 및 자연생태를 지켜주자는 호소로 볼수 있겠다. 그러나 시인은 거침없는 사유의 비약으로 통념을 시원히 깨는 반전을 보여준다. “저 푸른 천을 장대에 매달면 푸른 기발이 될것이다/ 누가 저 기발을 들고 달리려는가” 푸른 바다를 푸른 천으로 보고 그것을 장대에 달아서 푸른 기발을 휘두르며 미래에로 달려간다는 이 시구는 독자들의 상상을 뛰여넘는 반전매력을 유감없이 보여주고있다. 이제껏 시인들이 온갖 사물들을 라렬하는식으로 쓴 시들은 결코 한두수에 그치지 않는다. 시 “우리들의 리력서” 역시 비금한 범주에 속하는 시이다. 그러나 이 시는 그 자체의 반전매력으로 다른 여타의 시들과 차별된다. 별, 별찌, 먼지, 물, 강, 바다, 태양, 돼지, 풀 등등등등 수많은 이미지들이 등장하는 이 시는 자칫 장난처럼 보여질지도 모르지만 “사람”이라는 이미지에서 반전이 생긴다. 자연생태속의 수많은 이미지들 속에 박혀있는 사람은 지극히 자연스럽지만 또 유별난 존재이기도 하다. 사람은 자연계를 좋게도 나쁘게도 변하게 만들수 있는 변수인 까닭이다. 그래서 “우리들의 리력서”는 결국 자연의 한 존재으로서의 인간임을 자각해야 한다는 넌짓한 어드바이스라 할수 있겠다. 자연속에 자연스레 박혀있을 때는 인간도 자연이지만 주변 자연을 깎고 떼고 뭉개고 파괴할 때는 반자연적인 존재인것이 바로 인간인것이다. 시 “페허를 향하여”에서는 흰, 검은, 얼룩, 누런, 갈색 등 색색의 고양이들이 등장한다. 밝은 눈의 이 고양이들은 다양한 모습을 보이고있지만 쥐를 잡아야 하는 고양이들이 닭을 노리고있는것이 이 시의 반전이라 할수 있겠다. “닭 한마리/ 커다란 고양이로 변한 닭 한마리/ 볏이 빨개 야옹 한다/ 튀해 고아먹을…// ㅋㅋㅋ/ ㅎㅎㅎ…” 아이러니하다. 고양이가 쥐를 잡지 않고, 개가 집을 지키지 않고, 양이 풀을 뜯지 않고, 소가 일을 하지 않고, 당나귀가 석마를 찧지 않는 등 이런 현상들이 어디 한두가지인가. 그러나 그런 현상들이 지속됨에 따라 세상은 페허를 향하게 되고 우리는 부메랑으로 돌아온 그런 변이된 세상을 떠안을수 밖에 없는것이다. 이 역시 우리 인간이 저지른 죄에 대한 인과보응이라 할수 있다. 모두어보면 김철호시인은 근작시에서 거침없는 반전으로 생태를 파괴하고 자연을 짓밟는 인간들을 고발하고있으며 자연과 더불어 공생하면서 보다 아름다운 지구를 만들어가자는 호소를 담고있다. 중국조선족시단에 한때 바람처럼 왔다가 바람처럼 사라진 생태시를 다시 화두로 떠올려준 김시인의 시적행보를 다같이 지켜볼 일이다.   흑룡강신문 2015년 11월 20일 제2면     ///////////////////////////////////////////////////////////// ============================= ///////////////////////////////////////////////////////////// 김철호동시론 2017년 10월 11일 작성자: 김만석 김철호동시론 김만석   연변주 조선족아동문학연구회에서는 지난 7월 14일 회장단회의에서 보다 과학적이고 보다 실사구시적인 제3를 집필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기 위하여서는 먼저 동요동시,동화우화,아동소설,평론 등 장르발전사부터 연구하기로 하였다 그 첫걸음으로 먼저 금년부터 명년까지 동시발전과정을 검토하여 보기로 하였다   필자는 아동문학연구가로서 이 운동에 동참하여 최근에 우리 동시단에서 인기를 모으고 있는 동시인 김철호부터 연구하여보려고 나섰다   김철호는 1951년 3월에 태여났다 얼핏 보기에는 나젊은 사람 같지만 김철호는 벌써 66세에 나는 사람으로 되었다.   그는 연변대학 문학반을 졸업한 뒤 1974년부터 문학창작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는 주로 동시를 창작하면서 선후하여 (한국2002),(민족출판사 2002), (연변인민출판사20013)등 동시집을 출판해냈다.   그 사이 김철호는 제1회 연변작가협회 yust문학상, 주정부 진달래문화상,제1회 단군문학상 등을 수상하였다.   김철호는 이런 창작활동을 통하여 자기의 동시풍격을 이미 수립한 작가로 주목된다 필자는 이번에 김철호의 동시창작과정을 단계적으로 조명하고 실사구시적으로 분석하고 과학적으로 평가하면서 김철호가 우리 동시단에서의 위치와 작용을 해아려 보려고 한다   김철호동시 초기풍격   김철호는 일찍 1987년 처녀작 동시을 발표한 다음 1995년에 동시를 발표하면서부터 전문 동시를 쓰기 시작하였다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동년기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자기의 동시풍격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그는 동시집와 에서 성과작들을 배출하였다.   동시 는 는 더 없이 경제적인 언어로 쓴 놀라운 동시이다 작자는 의도적으로 제목에 원관념 를 나타내고 본문에 그것을 은유적인 형상으로 깜찍한 시적형상을 창조한 동시이다 이것은 시적대상을 대상화한 회화적 동시인데 작자의 대담한 환상처리를 통하여 우아한 형상으로 꽃피여난 동시이다   동시 은 은 너무나도, 간결한. 동시로 깜찍하기 이를데 없는 동시이다 동시는 청각적인 소리를 도입하여 독자들더러 깜짝 놀라게 한 다 그 다음 피여난 보라오각별을 바라보고 그런 오각별이 저 먼 산에 피여난 예술적인 화면을 슬쩍 도입하여 독자들을 현혹시킨 동시이다   동시 은 라고 노래하였는데 이것은 간결하면서도 우아한 동시로 안겨온다 이것은 산꼴물을 솔밭,진달래,마을을 형상화의 매쳐로 리용하여 우리민족의 개성적특징을 남다르게 노래한 동시이다   김철호는 시적대상을 로 삼았지만 사실은 그 산골물이 비껴 담긴 마을을 노래하고 있다 이것은 아주 묘한 수법이다 하여 김철호의 대표작인 이런 동시들은 김철호의 동시풍격으로 된다 즉 동년기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형식상에서 간결하고 깔끔하며 느낌에서 깜찍하고 엉뚱한 동시를 써내여 김철호는 자기의 풍격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이런 동시는 그때까지 7.5조 1행, 4행 1련의 정형적인 그런 동시,그리고 작자의 리념을 적라라하게 표출하던 그런 동시,독자는 아무런 사상준비도 없는데 작자가 병태적으로 감탄사,>를 련발하던 그런 동시가 판을 치던 때 김철호동시는 새로운 동시로 각광를 받으며 참신하다는 평가를 받게 되였다   그런데 이런 풍격에서 시의 생명으로 되는 서정성이 결여한 부족점도 동반하고 있었다 그래서 묘하고 깜직한 형식면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반면에 아이들다운 희로애락의 그런 정서는 배제되는 그런 경향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이런 풍격의 동시는 바로 김철호가 알심들여 동심을 파헤치면서 자기식의 회화적동시와 화적동시를 창작하였기 때문에 성공한것이며 또 그런 성공으로 하여 김철호는 자기의 동시풍격을 형성한 것으로 된다 이런 풍격의 동시는 김철호 동시를 일정한 수준에 오르게 하였다   중에서의   김철호동시   중국조선족 동시단은 2008년부터 2013년까지 이른바 을 하게 되였다 당시 이른바 에 뛰여든 사람들은 림금산,김철호,최룡관 등이였다   이 운동의 급선봉으로 나선 사람은 2013년에 동시집을 출판하여 냈다 어떤 평론가는 이 동시집을 극구 찬양하였다   , 여기서 짚고 넘어갈것은 동시는 생활을 그리는것이 아니라 생활을 노래하는것이라는것이다   그 평론가는 그 사람의 동시에 대하여 , 라고 과대평가하였다   이것은 당시 동시혁신운둉에 대한 그 평론가의 견해이다 다시 말하면 그 동시인의 창작기법이 참신하고 새로운 표현수법이라는것이다   여기서 그 평론가가 그 사람의 동시 창작기법이 참신하다고 한것은 동시언어를 비탈고 굴절시켜 낯설게 표현한 그것을 두고 하는 말인것 같다   이런 엉뚱한 소리가 참신한 표현인가? 가 그래 철을 알고 하는 소리인가? 가 정신 있는 소리인가? 이게 그래 무슨 넋두리인가? 이게 그래 동시란 말인가?.   이것은 성인시의 표현수법을 그대로 절제 없이 동시창작에 인입하여 이른바 난해동시를 실험해 본 한차례의 우둔한 동시혁신운동이였다   력사는 준엄하다 력사는 객관적이다 오늘 와서 회고하여 보면 그번 동시혁신운동은 우리의 동시를 병들게 만든 그런 재난적인 이른바 동시혁신 운동이라고 하여야 하겠다   김철호도 2008년부터 이른바 동시혁신운동에 뛰여들었다 이라는 작품집에서 김철호는 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소년시를 써보려고 하였다 다시 말하면 소년시로부터 동시를 혁신하는 실험을 하여 보았다   1,작자 본신의 사고방식으로는 동심을 구현할 수가 없다 물론 동시를 쓰는 사람은 성인이기에 시적대상을 보고 먼저 성인적인 사고부터 하게 된다   그러나 일단 동시를 쓸 때면 그런 성인적인 사고방식을 동심에 려과시켜 아이들의 사고방식을 취하여야 한다 여기에서 이른바 동시인의 아동화가 수요된다 아동화를 선행시킬 때라야만 동시는 동심의 노래로 될 수가 있는것이다 이것은 동시창작에서의 대전제로 되며 또한 출발점으로 된다   동시 는라고 쓰고있다   여기서 작자는 는 주제를 표현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시인은 시적형상으로써가 아니라 점층적인 설명으로 그 주제를 표현하면서 사색적인 동시로 구사하였다   는 식으로 복잡한 사유과정을 여섯번이나 파고들었다   아이들의 사유방식에서 보면 3차 반복이면 그만으로 여긴다 이런 엎치고 덮치며 갈마드는 너무나 지루한 설명은 동심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게 된다 결과적으로 깡깡 마른 설교는 동시로서의 형상성에 차질을 보여 주고있다 이렇게 동시가 동심과 거리를 두면 동시가 아니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할것이다   2,지금 현대동시를 창작할 때 직유보다도 은유적인 수법을 널리 쓰고 있다 그런데 은유를 쓸 때 원관념과 보조관념의 관계처리를 잘하여야 한다 다시 말하면 원관념과 보조관념 사이에 상사성이 있어야 한다 이 상사성은 본질적인 속성의 상사성이 아니라 표상에서의 상사성을 중시하게 된다 이것이 일반적으로 말하는 은유의 원리이다   례를 들면 는 직유적인 표현이고 라고 한것은 은유적인 표현이다 여기서 과 은 표상에서의 는 상사성에 의하여 은유가 성립된것이지 본질적인 속성에 의하여 은유가 성립된것은 아니다   한시기 현대동시를 쓴다면서 라는 은유적인 공식에 대입하는데 그치는 페단이 존재하였다 하여 라는 동시가 내달아왔다 은유적인 상징동시는 그 은유적 형상의 예술적 의의와 미학적 가치가 탐구되여야 하지 그저 공식에 대입하고 동시라고 내던져서는 아니된다   이런 공식대입식의 은유적인 동시가 창작되다가 그 후로부터는 은유적인 원리를 떠나 작자가 제 마음대로 은유적 표현을 하는 그런 자유주의 경향이 나타났다 특히 이른바 개성적인 동시를 쓴다면서 그런 풍조가 대두하였다   이라는 동시집에서 은유처리에서 문제가 되는 작품으로는과 같은 작품들이 있다   동시 은 라고 쓰고있다   필자가 추측하건대 이 동시는 작자가 밤에 아파트 창문을 바라보고 쓴것 같다 김철호가 원관념 을 보고 그에 상응한 은유적인 상관물을 찾은것이 바로 이다 창문과 달은 원래 은유가 성립될 수가 없다 달은 둥근것이고 창문은 네모난것이 어찌 상사성이 있을수 있단 말인가?   어떤 사람은 달과 창문에서 는 공동점이 있어 은유가 성립되지 않는가고 여길수도 있다 그런데 창문 자체는 집안에 불이 켜질 때만이 밝게 되지 창문 그 자체가 밝은것은 아니다 즉 2차적 변화를 이르켜야 달과 밝다는 속성의 공동성이 이루어 진다 다시 말하면 과 은 은유관계가 성립된다는 말이다 하기에 이것은 억지스러윤 은유를 합법화하려는 그런 억지론리인것이다   작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억지로 은유관계를 설정하고 그걸 설명하느라고 무진 애를 썼다 그 결과 어색하기 그지없는 그런 이른바의 동시로 된것이다   얼핏 보면 착상이 그럴듯하여 보인다 이런 경우 어떤 사람은 라고 변명할 수가 있다 그러나 우겨서 되는것이 아니다 독자 일반이 어떻게 느끼는가가 관건으로 된다 독자 대부분이 동의 하지 않는 그런 은유를 자기만 그렇다고 우기는것은 절대 개성이 아니다그것은 작자 본신의 사유방식이지 동심에 의한 사유방식으로는 절대 될 수가 없다는것을 명기하여야 할것이다   그리고 하나 밖에 없는 달을 많다고 하니 이게 또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린가? 나어린 동시대상들에게 그릇된 천체지식을 전수하는것은 아니 될 일이다 아무리 예술이라고 하여도 일반상식을 떠나서는 어니 될줄로 안다   한시기 어떤 사람들은 동시는 자기가 보기 위해 쓴다고 떠든 적이 있다 그래 동시를 자기가 보기 위하여 쓰는가? 동시는 원래 어른들이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여 쓰는 글이다! 자기만 알고 아이들은 모르게 어리둥절하게 쓰는것이 그래 동시혁신인가? 아니다 그것은 언어장난에 불과하다   3,동시 언어는 뜻을 전달하고 정서를 표현하며 뉴안쓰를 보여주고 이미지를 나타낸다 현대에 와서 시어를 비탈고 굴절시켜 동시의 언어를 낯설게 하는것이 현대동시창작의 한가지 수법으로 되고있다   그런데 이때의 낯선 표현은 반드시 아이들의 정도에 맞는, 다시 말하면 아이들이 좀만 생각하면 터득이 갈수가 있는 그런 방향에서 탐구되여야 한다   김철호의 동시 가운데서 는 연구하여 보아야할 작품이다 둘러/강까지 소각하는/연분홍 향기의 화염//산아,너 인젠 죽었다>>라고 쓰고있다   진달래가 빨갛다는것을 념두에 두고 작자는 그것을 로 낯설게 표현하고 가지에 핀 진달래꽃도 고 낯설게 표현하였다 그리고 강에 비낀 진달래를 한다고 하면서 진달래의 를 으로 둔갑시키였다   여기서 작자가 우리의 동시의 언어를 비틀어 낯설게 표현하여 보려고 한 시도는 알린다 그런데 꽃을 불씨로 삼고 그 불씨가 산자락을 태우고 그 불씨가 강을 소각한다고 하니 롬리적 비약이 너무 갑작스러워 깜짝 놀라지 않을수가 없다 나중에는 라고 하니 더 아니 놀라지 않을수가 없다 이것은 성인시를 구사하던 방법을 동시에 억지로 끌어들인 례라고 본다   그 아름다운 진달래가 불이 되고 그 그윽한 향기가 으로 되어 산자락을 불태운다니 이것은 순전히 작자의 주관적인 스트레스에서 오는 신경질적인 감정의 토로이지 아이들의 동심적이고 아이들의 정서적 표현이라고 할 수가 없다   이상 김철호는 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동시창작에서 일정한 노력은 하여 보았으나 그럴만한 돌파는 가져오지 못한 것으로 보여진다 그 주되는 원인은 작자가 동심을 멀리하고 자기의 주관적인 감정을 토로한데 있다   김철호는 2005년에 들어 서서부터 한 시기 성인시를 쓰기 시작하면서 현대시의 표현수법을 학습하고 그것을 동시창작에 도입하여 소년기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동시를 혁신하여 보려고 하였다   하지만 김철호는 동시창작의 대원칙인 동심을 점차 멀리하고 작자 본신의 성인적 사고방식에 따라 자기딴의 엉뚱한 생각을 굴리면서 그것을 낯설게 표현하였던것이다   하여 동시혁신 시기의 김철호의 동시는 지난날과 달리 아주 지루하고 번잡하고 낯설고 억지스러운 감이 난다 그래 이것이 우리 동시가 나아갈 길인가?   당면 김철호동시의 상황   동시혁신운동에서 김철호는 특히 소년시 창작에서 이렇다할 돌파를 가져오지 못하고 말았다 당시 필자는 평론을 써서 김철호더러 지난날의 자기의 동시풍격을 절대 버리지 말라고 당부하면서 동시는 동심의 노래라고 충고하였다   김철호는 당시 라는 필자의 견해를 완전히 동의 한다고 태도를 표시 하였다 그로부터 김철호는 동시는 동심의 노래라는것을 다시 확인하고 창작에 달라붙은것 같다   하여 최근 김철호동시를 일별하여 보면 동시의 언어를 비탈고 굴절시키면서 낯설게 한 현상을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김철호는 초기단계에서 수립하였던 자기의 풍격을 살리면서 동시를 동심의 노래로 확신하는 단계에 다시 들어서게 되었다   최근에 창작한 동시과 같은 동시들은 성과작들이라고 본다 동시은 새로운 차원에 오른 작품이다     작자는 생활에서 동시의 핵을 가려잡고 그것을 집중 조명하면서 무척 깜찍하고 재미나는 화적동시를 창작하여 냈다 그런데 이왕의 화적동시보다도 더 간결한 이야기로 간추려 쓰면서 동시의 이미지를 극대화한 것이 새로운 발전이라고 본다 그리고 화적인 동시를 은유적으로 써서 아이들의 눈동자를 이라고 상징한것은 동시표현수법을 다각적으로 운용한 실제적 례로 된다   이런 성과작들이 있는 반면 김철호동시들은 새로운 시기에 들어서면서 또 다른 새로운 문재점도 동반하고 있는것 또한 사실이다   이런 문제는 김철호의 창작에 영향을 주고 있을뿐만 아니라 우리 동시단의 전반 동시창작에 대하여서도 일정한 영향를 끼치고 있는것 또한 사실이다   첫째 동심 찾기에서 나타난 문제점   최근에 동시인들마다 동심을 찾기에 골몰하고 있다 이런 동심찾기에는 두가지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첫경향은 진짜 아이들이 그렇게 보고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느끼는 그런 진짜동심을 찾는경우이다 이런 경우의 동심은 깜직하고 재미나고 우아한것이 그 툭징으로 된다   두번째 경향은 작자가 아이들이 그렇게 보고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느끼려니 생각하고 추측하여 꾸며 내는 그런 가짜동심의 경향이다 이런 경우에는 어색하고 억지스럽고 경악스러운것이 특징으로 나타난다   둘쩨, 동시 형상화문제점   이 문제에서도 두가지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첫경우에는 이른바 동심을 아이들의 수준에서 자연 그대로 재현하는데 그치면서 그것을 동시라고 하는 경향이다   일직 김철호는 라는 동시를 발표한적이 있다 ,그래 이것이 동시인가? 그것은 아이들이 공작새를 보고 느낀 현상을 그대로 예술적 가공없이 대상화한 회화적 현상이다   여기에 작가가 파고든 동시형상의 예술적 의의와 미학적 가치가 나타나지 못하였다 하여 작자의 의무를 채 완성하지 못하고 말았다 하기에 이것은 성공한 동시라고 하기에 어렵다   이런 동시를 성공하려면 그 형상의 예술적 의의를 파고 들어야 한다 그래서 라고 보충하면 아이들 정도에서 한 차원 승화된 예술적 형상으로 될것이다   최근에 발표한 동시 는 다음과 같다이러하다   여기서 아이들의 본것을 그대로 재현하.고 그 재현의 가치와 의의를 아이들 정도에,서 피력하고 말았다 .그래 작자가 보여 주자는것이 인가? 이것은 아이들의 느김 정도에 머무른 것으로서 작가로서의 새로운 발견은 없는 것으로 되었다   최근에 연변동시단에서 물의를 일으키고있는 강소천의 동시를 보기로 하자 는 작자 강소천이 시적대상 을 그대로 재현하는데 그친것이 아니다 그것은 작자가 닭의 형상을 빌어 자신이 북간도에 있는 문우 윤동주를 그리는 마음을 안받침하여주었기에 그 형상에는 미학첮가치가 어려있는것이다   둘째 경우에는 김철호가 최근에 발표한 은 작자가 억지로 고안해 낸 동심을 어색하게 형상화한 례로 된다     여기서 아이들이 사슴을 보고 무엇부터 생각할가?사슴 뒤애 숨어있는 아이부터 생각할가? 아이들의 인지능력으로부터 보면 먼저 사슴뿔을 보고 그 다음 그것을 나무로 련상할 수가 있다 이것이 아이들의 인지숩관인것이다   그런데 작자는 그 나무를 제쳐 놓고 대번에 그 나무를 심은 아이들부터 찾아 쓰고 있으니 이것은 아이들의 인식능력을 초월한 작자의 인식능력에서 고안해 낸 동심에 지나지 않는다 하기에 이 동시는 억지스럽게 되였다   셋째 동시형식문제와 정서문제   아이들은 진공 속에서 살고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에게도 기쁜 일, 슬픈 일, 즐거운 일, 격분한 일들이 있고 또 그에 따르는 감정과 정서가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오늘에 이르러서도 김철호동시의 서정성문제는 해결되지 못하고 있다 서정성이라고 하여서 문화혁명때처럼 ,감탄사를 늘여 놓으라는 말은 아니다   우리의 동시에 그런 아이들의 감정과 정서를 얼마든지 반영할 수가 있는것이다 한국의 리상현 동시인은 라는 동시를 이렇게 쓰고 있다 여기서 두 아이의 정다운 사랑의 정서가 흐뭇이 풍겨 오지 않는가!!   지금의 김철호동시는 그런 정서보다도 형식상에서의 오묘성과 깜직한 면에 너무 치우치면서 동시의 서정을 희석화 하여 우리의 동시를 풍만하지 못한 깡깡 메마른 동시로 써나가는 페단이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마땅한 중시를 돌려야 할 문제로 제기되고있다   모두어 보면 김철호의 당면 동시 가운데서 이렇게 작자가 꾸며낸 동심을 형상화한것과 동심을 아이들 수준에서 재현하는데 그치는 그런 동시들이 두루 눈에 띄운다   이런 것은 창작하기 헐하다고 하여야 할것이다 하기에 어떤 사람은 김철호는 동시를 너무 헐케 쓰는 사람이라고들 한다 다시 말하면 아이들이 본것 그대로 재현하고 아이들이 생각한 그대로를 재현하고 아디들의 느낀 그대로를 재현하는데 그치고 말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재현이 감직하고 엉뚱한데서 이른바 김철호의 특징이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동시 쓰기는 결코 그렇게 쉬운 작업은 아니다 그것은 동시 역시 예술작품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예술적인 가공을 거쳐 미학적인 가치를 창조하는 그런 임무를 절대 저버리지 말아야 한다   당면 김철호 동시는 이러저러한 미흡한 점들을 가지고 있지만 자기의 독특한 풍격은 그대로 과시하고있다   문제는 김철호 본신이 그런 풍격의 동시를 창작할뿐만 아니라 김철호동시와 같은 풍격의 동시가 대량창작되고 있기에 우리 동시단은 마치 그런 동시만 판을 치는 그런 국면을 형성하고있다   하여 이른바 동시 단일화경향이 나타나 문단에서는 동시 다양화구호가 내달아 나오고있다 이것은 김철호 동시풍격을 승인하지만 그런 풍격의 동시만 동시가 아니라는것을 성명하는 것으로 된다   김철호동시가 나아갈 방향   동시에는 김철호동시 같은 감찍한 회화적동시와 화적동시가 있는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동시에는 그런 김철호식의 동시만 있는것은 절대 아니다 김철호식의 동시는 동시의 일종이지 동시의 전부는 아니다 이것은 김철호 본신도 알아야 할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알아야 할바라고 본다   동시는 어른들이 아이들을 위하여 쓰는 글이다 아이들 동심 그 자체에 머무르면 작가의 의무를 다 하지 못한 것으로 된다 초기 김철호동시는 아이들의 동심을 파헤치는데서 일정한 돌파를 가져 왔다 그런데 오늘 계속 그 수준에 머물러 있어서는 아니 된다 제고하여야 한다   김철호가 2000년대에 갖춘 자기의 동시풍격을 계속 살려 나가는것은 우리 동시단에 확실히 필요한것이다 그리나 더 발전시켜 나아가야만 한다   동시는 동심의 노래이다 동심을 떠난 동시는 동시라 하기 어렵다 그리고 혁신한답시고 동시표현수법인 은유의 원리를 어기고 또 무턱대고 낯설게 표현하는것은 지난날 한국동시가 걸어온 굽은 길을 우리가 다시 걷는 것으로 된다   동시는 다양화 되여야만 한다 한국에서 문삼석동시와 같은 깜찍한 회화적동시와 화적동시가 있는가하면 신현득동시와 같은 철리동시가 있고 선용의 동시와 같은 은유적인 상징동시도 있고 리상벽의 동시와 와 같은 낯선동시도 있다   동시는 절대 하나의 류형으로 창작되여서는 아니된다 반드시 백화만발하여야 한다 이 백화만발은 그런 개성을 가진 동시인들이 저마끔 자기의 개성적인 창작을 하는데서 이루어 질수도 있고 한 작가가 그런 여러 가지 풍격의 동시를 쓰는것으로도 이루어 질수가 있다   모두어 보면 김철호는 전문 동시창작에 정진하면서 풍만한 성과를 올리여 자기의 동시풍격을 형성하고 2000년대 우리 동시단 의 대표 동시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등단한 동시인이다   그러나 오늘 새로운 시기에 지난날의 동시 수준에서 답보하는 것은 퇴보를 의미 한다 새로운 혁신을 하여야 한다 새로운 제고를 가져야 한다   끝으로 김철호는 자기의 동시풍격을 계속 살려 동시를 창작하고 그에 뒤따르는 문제점들을 애써 극복해 나가면서 새로운 혁신을 거듭하여 새로운 차원의 동시를 창작할것을 바란다   그리하여 우리의 동시를 질적으로 제고하고 우리의 동시를 다원화 하는데서 새로운 공헌을 하기 바란다   2013년 9월 8일  
1017    시에 안부를 묻다... 김영건 시인 댓글:  조회:4445  추천:0  2016-01-20
제1회 단군문학상 시상 수상자 김영건 시인  누군가 시인은 우주의 만물과 인간세상을 이어주는 존재라 말했다. 김영건시인은 멈춰있는것에서 움직임을 보고 부재에서 존재를 찾아가는 일이 바로 자신의 시쓰기라고 말한다. 그래서 돌이나, 바위, 풀, 새, 구름, 바람, 강물은 그 어느것 하나 움직이지 않는것이 없으며 그것이야말로 이 세상의 질서라 했다. 그러한 질서속에는 언제나 본연의 에너지가 있고 그 에너지의 흐름에 도달해야 시는 비로소 울림을 주고 령혼을 깨울수 있다고 했다. 한편, 이러한 질서속의 움직임들은 그 어떤 소리도 없었으며 오로지 색채와 빛갈로 시인에게 다가왔는데 김영건시인은 그것들을 전개를 생략한 단절된 이미지로 표현했다. 하여 연변대학 교수이며 문학평론가인 김경훈은 그의 시를 “시적인 공간과 색채미학으로 주제를 보다 풍성하고 오묘하게 조각해낸다.”고 평가했다. 제1회 단군문학상 시상을 수상한 김영건시인의 시집 《아침산이 나에게로 와서 안부를 묻다》는 지난 2010년에 출판되였으며 그가 새천년에 들어서 10년간 창작한 결과물들의 총화이다. 10년 동안 김영건시인은 텔레비죤방송국의 PD로부터 영화공부를 하는 늦깍이 류학생으로, 다시 출판사 잡지의 주필로 역할을 거듭 바꾸며 그의 생활 그라프를 크게 움직여갔다. 삶의 궤도 역시 크게 바뀌면서 김영건시인은 여러가지 형태로 주변에 존재하는 모든것들의 숨결을 느낄수 있었고 이 또한 스스로의 삶에 대해 더 깊이 반추하는 계기가 되였다. 그때 그는 가장 중요한 깨달음 한가지를 얻었는데 바로 세상 모든것은 본연의 모습을 버릴수 없다는것이였다. 그것은 일종의 법칙이며 질서였다. 하여 그는 《아침산이 나에게로 와서 안부를 묻다》에 움직이는 모든 존재를 집대성하려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시들에서 그는 언제나 본연의 흐름을 따랐으며 그것을 통해 매개물의 운동을 보아내려고 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언제나 시인이 있고 시인의 기억이 있으며 자연의 질서가 있었다. 즉 그의 모든 시는 시인이 중심이 되여 기억에서 출발하여 오늘로 이어지면서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이미지를 보여주고있다. 때문에 전설과 민족, 고향은 그의 시에서 빼놓을수 없는 한폭의 그림이 되기도 한다. 김영건시인은 또 시는 생명의 환희를 써야 한다고 말한다. 그 환희는 본연의 추구에서 오지만 어쩔수없이 질서와 충돌하며 그때 본연의 추구를 선택해야만 시는 희망이 되고 감동이 되며 아름다움이 된다고 말했다. 사실 현실생활에서도 김영건시인은 자신을 “생각하면 포기를 못하는 성격”이라 평가하며 언제나 스스로가 인생의 주체가 되여야 한다는 생각을 바꿔본적이 없다고 말했다. 그때문에 더욱 자주 질서와의 충돌에 빠져들며 그때마다 고민을 휩싸이는 한 사람이라고 했다. 하지만 언제나 새로운 도전으로 에너지를 충전받으려는 노력을 해왔기에 그는 생활은 늘 재미나며 살만하다고 말한다. 시를 써온 지난날들을 떠올리며 김영건시인은 “시를 썼기에 시안에서 나를 공제할수가 있었다”고 했다. 어렸을적엔 수리화공부를 더 잘했지만 어쩌다가 시를 접근하게 되였고 마음속의 울림에 집중하니 그속에서 질서를 지킬수 있었고 위로를 받을수 있었다는것이다. 지금도 그는 하루에도 수십번씩 지난 과거를 성철하며 미래를 그린다고 했다. 그래서 삶이 그래야 하듯 시 역시 지난날 질서속에서 깨달음을 찾던것을 토대로 부단히 새로워야 하고 공감으로 령혼을 살찌워야 한다고 말한다. 연변일보/글·사진 박진화 기자 
1016    미래파 = 전위예술운동 댓글:  조회:4308  추천:0  2016-01-20
한마디로 20세기 초에 일어난 이탈리아의 전위예술운동입니다. 이탈리아어로 푸투리스모라 한다. 전통을 부정하고 기계문명이 가져온 도시의 약동감과 속도감을 새로운 미(美)로써 표현하려고 하였다. 이 운동은 1909년 시인 F.T.마리네티가 프랑스의 신문 《피가로 Le figaro》에 을 발표한 것이 그 효시이다. 이 선언에서 마리네티는 과거의 전통과 아카데믹한 공식에 반기를 들고 무엇보다도 힘찬 움직임을 찬미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전쟁을 찬미하기도 하고, 미술관이나 도서관을 묘지(墓地)로 단정, 그 파괴를 바랄 정도로 과격한 것이었다. 이를 이어받아 U.보초니, C.카라, L.루솔로, G.발라, G.세베리니가 이듬해 을 발표함으로써 미래주의의 미술운동이 조직되었다. 이 밖에도 역시 다섯 사람이 서명한 , 보초니에 의한 (모두 1912)이 있다. 그들은 같은 시기에 프랑스에서 전개되었던 입체주의와 마찬가지로, 시점을 고정시키지 않고 복수(複數)의 시점에서 움직임을 파악하려고 하였다. 예컨대 “질주하고 있는 말의 다리는 4개가 아니라 20개이다”라고 주장하고, 잔상(殘像)에 주의하면서 보고 있는 것과 기억하고 있는 것을 종합함으로써 관객을 화면의 중심으로 몰아넣으려고 하였다. 구체적인 방법으로서는 여러 시점에서 파악한 이미지를 같은 화면에 중복시키고 그러면서도 ‘역선(力線)’이라고 불리는 힘찬 선으로써 형체의 추이(推移)를 뚜렷하게 새겨넣는다. 그들은 이것을 ‘면(面)의 상호침투’라고 부르고 ‘물리적 초월주의’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현대도시의 ‘환경’이 의식화되고 일상생활과 예술의 상호침투가 주장되었다. 특히 보초니는 공업소재의 적극적인 활용에 의한 공간구성으로 환경의 새로운 창조를 시도하여 1950년대 후반부터 전개되는 움직이는 예술과 빛의 예술의 선구자가 되었다. 이 밖에도 카라에 의한 선언 (1913)나 마리네티의 선언 (1921) 등이 있으며, 시각뿐만 아니라 여러 감각에 호소하여 전체적인 현실을 표현하려고 한 미래주의의 취지를 설명하고 있다. 또한 요절한 건축가 A. 산텔리아의 미래도시의 계획은 새로운 공업소재에 의한 거대한 기계와 같은 도시를 상정(想定)하고 있어, 미래주의가 어떤 면에서는 현대도시의 양상을 미리 내다보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공업화를 서두르고 있던 후진국 이탈리아의 특수한 상황을 반영하고, 힘찬 것에 대한 성급한 찬미는 결국 무솔리니의 파시즘과 결부되었으나, 현대 예술의 새로운 지평을 개척하는 데 커다란 구실을 한 사실만은 부정할 수 없다. 【연극】 마리네티는 새로운 연극에 관해서도 두 차례에 걸쳐 선언을 발표하였으나 그가 주장한 ‘미래주의 연극’이란 20세기가 상징하는 ‘기계의 시대’를 무대에 도입하는 일이었다. 즉, 전세기(前世紀)부터의 과학적 대발견이나 밀어닥치는 새로운 사상의 물결은 우리의 감성과 지성을 완전히 바꾸어놓아, 현대인은 누구나 그러한 상황 속에서 혁명적인 전율(戰慄)을 느끼고 있다. 미래주의 연극은 이 현실에 즉응(卽應)하여 일체의 논리적인 수사법(修辭法)을 버리고 자유로운 공상 아래 논리를 초월한 종합을 통해 외관상의 현실보다 더욱 진실한 현실을 무대에 나타내야 한다고 하는 것으로, 요컨대 종래의 부르주아 연극을 철저히 파괴하려고 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가 시도한 것은 동시적(同時的) 무대의 설정이었으며, 나중에 프랑스의 부르통 등이 주장한 자동기술법(自動記述法)과도 닮은 비이성적(非理性的) 언어의 사용이었다. 마리네티의 주장은 결국 이탈리아의 무대미술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을 뿐, 희곡운동으로서는 실패로 끝났으나 곧 이어 일어난 프랑스의 다다이즘, 독일의 표현주의(表現主義) 등을 생각하면 이들 운동의 선구자 역할을 했다. //////////////////////////////////////////////////////////////////////////////////   미래파는 20세기 초 이탈리아에서 일어난 전위예술 운동을 일컫는다. 이 운동은 시인 필립포 마리네티가 효시인데, 마리네티는 기존의 낡은 예술을 모두 부정하고 기계 대에 어울리는 새로운 다이내믹한 미를 창조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에 자극되어 이듬해 2월 카를로 카라, 옴베르토 보치오니, 지노 세베리니, 루이지 루솔로, 쟈코모 발라의 5인의 화가가 연명으로 미래주의 화가 선언을 발표함으로써 미술운동으로 전개되었다.   미래주의의 커다란 공적은 기계가 지닌 차가운 역동적인 아름다움을 조형 예술의 주제로까지 높였다는 것과 스피드감이나 운동을 표현하기 위해 회화에 시간의 요소들을 도입하려고 시도한데 있다. 이 유파가 뛰어난 조형작품을 낳았다고 할 수 없지만, 현대에 있어서 예술의 소재에 대해 새로운 문제제기를 한 의의는 크다.
1015    사전에 없는 말, 장난처럼 꺼낸 말... 댓글:  조회:4528  추천:0  2016-01-20
젊은 문인들이 만든 문예지 '후장 사실주의' 1호 이달 초 열린 독립출판물 축제 ‘언리미티드 에디션’에 수상한 문예지 한 권이 출품됐다. 양장본에 사진 한 장 없는, 외양은 영락 없는 단행본이지만 표지엔 ‘analrealism vol.1’이라고 쓰여 있다. 소설가 정지돈, 박솔뫼, 오한기, 이상우, 평론가 강동호, 서평가 금정연, 편집자 황예인, 홍상희씨 등 젊은 문인 8인이 자비를 털어 출간한 문예지 ‘후장 사실주의’ 1호다. 후장(後腸)사실주의는 사전에 없는 말이다. 정지돈 작가가 3년 전 장난처럼 꺼낸 말이 언젠가부터 문학상 심사 자리 등에서 마치 비평 용어처럼 쓰이더니, 채 뜻이 정립되기도 전에 잡지가 나온 것이다. 책 안쪽은 한층 더 모호하고 수상쩍다. 문학평론가 신형철, 소설가 백가흠씨 등이 희곡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소설가 백민석씨와 한 인터뷰는 마치 검열을 당한 양 상당 부분이 공란으로 비워져 있다. 칭찬연구소 소장 신형철씨가 미셸 우엘벡에게 납치 당해 죽는 바람에 세상에서 칭찬이 사라지자 미래 사회에서 전사를 급파, 그를 살려낸다는 희곡은 대체 무슨 의도로 쓰인 것일까. 8인은 서면 인터뷰에서 “후장사실주의는 로베르토 볼라뇨의 소설에 등장하는 문예사조 ‘내장(內裝)사실주의’를 패러디한 것이지만 그 자체로는 아무 의미도 없다”며 “모인 사람들끼리 통일된 이념이나 공유하는 철학은 없고 그저 서로를 한눈에 알아”보고 뜻을 같이 하게 된 것이라고 밝혔다. 의미를 채워 넣지 않은 단어는 그 자체로 집단의 성격을 암시한다. 역사상 수많은 전위그룹이 의미 없는 ‘미친 짓’을 통해 기존의 세계를 비웃은 것처럼, 후장사실주의도 진지한 비판과 그에 따른 방향 제시보다는 익살스런 패러디를 통해 기성 질서를 조롱하거나 모른 척 한다. 그러나 백민석 작가와 8인의 대화 속에서 나온 “문학하는 애들이 길들여졌다” “모든 출판사가 (…) 서사 위주의 소설에만 상을 주고 히트작을 내고 싶어서 안달이 난 상태” 같은 발언에는 이들이 기성 문단에 대해 갖고 있는 문제의식이 직ㆍ간접적으로 드러난다. 이들은 서면 인터뷰에서 “확실히 체감되는 건 한국문학이라는 용어에 대해 반응해온 독자들의 퓨즈가 완전히 꺼져버렸다는 것”이라고 단언했다. 기성 문단의 무엇을 부정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후장사실주의는 아무 것도 부정하지 않고 또는 모든 것을 부정하지만, 사람들이 기존의 것들을 부정하거나 비웃는 데 이 말을 사용한다면 굳이 반대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답했다. 꺼져버린 독자들의 ‘퓨즈’를 되살리겠다는 친절한 약속도 없이, 잡지는 초판 1,000부 중 언리미티드 에디션에서만 250부가 팔렸다. 후장사실주의자들은 책에 실린 희곡을 영화로 만들기 위해 내년 여름 삼척이나 훗카이도로 촬영을 떠날 예정이라고 했다. 또 “마음 내킬 때” 2호를 출간할 계획이며 인터뷰이로 김기덕 감독 등을 염두에 두고 있다고 밝혔다. 젊은 문인들의 도발이 문단에는 어떤 신선함을 몰고 올까. 이들은 ‘후장 사실주의’가 문학권력 논쟁 이전부터 기획된 것이라고 강조했지만, 올해 신경숙 표절 논란 이후 쏟아져 나온 전복적 움직임의 첫 줄에 이 잡지가 놓이지 않을 수 없다. 한 중견 평론가는 “2000년대 초반 시단에 등장했던 미래파 시인들처럼 새롭고 실험적인 움직임에는 늘 찬반이 갈리게 마련”이라며 “자본에서 완전히 독립된 젊은 작가들이 기존 세계를 불신하고 새로운 현실에 대한 열정을 보였다는 점에서 상당히 기대되는 잡지”라고 말했다.
1014    <<서정시파>>냐?! <<미래파>>냐!?... 댓글:  조회:4136  추천:0  2016-01-20
詩의 계절, ‘無詩’의 사회… 시인들, 詩를 이야기하다        ◆ 1=지난 토요일 한 식당 여주인에게 ‘이육사 시인을 아느냐’고 물어봤다. ‘모른다’고 했다. ‘평소 시를 읽느냐’고 물었다. ‘사는 게 지랄맞아 그럴 겨를이 없다’고 했다. ‘시간이 되면 시를 읽겠냐’고 되물었다. 그냥 웃었다. ‘만약 손자가 할매를 위해 시를 적어오면 그때는 읽지 않겠냐’고 되물었다. ‘그건 당연히 가슴에 넣고 다녀야지’라고 깔깔댔다. 그 여사장은 시보다 노래가사가 훨씬 좋다고 했다. 그러면서 요즘 여성에게 크게 어필하고 있는 노사연의 노래 ‘바램’의 한 구절을 알려주었다. ‘~우린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익어가는 겁니다.’ 한 시인 지망생이 지갑에 꼬깃꼬깃 접어 넣어둔 공광규 시인의 ‘소주병’의 한 구절을 읽어준다. ‘(초략) 바람이 세게 불던 밤/ 나는 문밖에서 아버지가 흐느끼는 소리를 들었다/ 나가보니/ 마루 끝에 쪼그려 앉은/ 빈 소주병이었다’ 대뜸 ‘그런 달달한 시는 시도 아니다’며 대구에서 암약(?)하고 있는 김하늘 시인이 시큰둥한 표정으로 ‘플로럴 폼이 녹는 시간’이란 시의 초입을 들이민다. ‘73일 동안 내 발목은 라피아로 감겨있었지, 장미 한 송이를 아랫배에 심던 날부터 우리는 서핑 보드 위에서 석류를 핥았지…’ 현재 대한민국에는 ‘바램·소주병·플로럴 폼’이 공존한다. 셋은 소통일까, 불통일까? 쉬운 시 군단은 ‘서정시파’, 어려운 시 군단은 ‘미래파’로 불린다. 아무튼 대한민국의 시는 무한히 다양해졌다. 일제강점기 김소월의 ‘진달래꽃’, 박목월의 ‘나그네’와 같은 서정시 일색의 세상에도 한국 모더니즘 시학의 도입자로 불리는 김기림 시인은 ‘아모도 그에게 수심(水深)을 일러준 일이 없기에 흰 나비는 도모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는 지금 봐도 세련된 ‘나비와 바다’란 시를 적었다. 그때 1934년 발표된 국내에서 가장 난해한 시로 평가받는 이상의 ‘오감도’도 공존했다. ◆ 2=이제 한국에선 시보다 시인이 더 세다. 시가 시인한테 휘둘린다. 대구에만 대구문협, 대구시인협회, 한국작가회의 등에 가입된 시인이 700여명. 비회원까지 합치면 1천명이 넘을 것 같다. 1950년대 중반 대구의 인구는 65만여명. 시인은 고작 30여명. 60년 사이에 30배 이상 폭증했다. 시인의 양적팽창, 하지만 시문학은 질적하락 중이란 지적이다. 가장 큰 문제는 좋은 애독자로 남아 있어도 될 감성파 시민들이 창작대중화에 편승, 너도나도 시인으로 양산된 것. 독자가 시인이 된 탓일까. 도무지 남의 시집을 사 읽지 않는다. 시집은 사는 게 아니고 ‘선물로 받는 것’으로 통용된 지 오래다. 일제도 가고 독재도 사라졌다. 국부(國父)·지사·혁명가적 시인도 필요치 않단다. 거대담론·시대정신 부재의 틈으로 ‘인터넷 디지털공화국’이 스며들어왔다. 그래서 그런지 시정신은 갈수록 세속화돼 ‘취향’ 수준으로 퇴락해버렸다. 시 아니라도 감동 주는 게 지천으로 깔렸다. * 3=매년 11월1일은 ‘시와 시인의 날’. 1908년 이날 육당 최남선이 우리나라 최초의 현대시(신체시)로 일컬어지는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소년’지에 발표한 것을 기념하여 87년 처음 정해졌다. 107년 역사의 한국 현대시. 숱한 시인이 명멸했다. ◆4=예전엔 독자가 ‘별(시인)’을 뒤에서 빛내주었다. 그래서 독자까지 빛났다. 어느 날부터 그 독자도 나도 시인이라며 대거 별이 되었다. 이제 모두 별이다. 독자가 사라진 하늘(시단), 별은 더이상 빛이 없다. 새 독자는 없고 새 시인뿐이다. 시인만의 시행사만 난무한다. 독자로 남는게 더 행복했을 ‘무늬만 시인’들은 ‘8학군 시인’들로부터 한없이 멸시당하고 있다. 시인들끼리 잔치일뿐 일상은 시와 무관하게 돌아간다. 집나간 한 명의 독자가 시인보다 그리운 시절이다. 무시(無詩)의 시대, 무시(無視)의 시대다. 이제 그 무시의 틈속으로 들어가 볼 때가 된듯...  
1013    미래파시와 미래파시인은 미래가 있을가... 댓글:  조회:5129  추천:0  2016-01-20
    시인들의 시 이렇게 읽었다 미래에 관한 몽상                                          /이경수(문학평론가) 1.<웰 메이드(Well-made)>의 비애 먼저 고백할 것이 있다. 2000년대 상반기의 일군의 젊은 시인들의 시적 경향에 대해 <미래파>라고 규정하는 것에 대해 솔직히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이러한 명명하기의 방식에는 개별 시인들의 차이에 주목하기보다는 이들에게서 공통적인 성향을 추출해 그것을 집단화하고자 하는 인정투쟁의 욕망과 세대론적 전략이 숨어 있게 마련이다. 명명하기에 동의하지 않으며 이들의 공통점보다는 차이에 좀더 주목하겠다는 뜻이다. 권혁웅은 황병승, 장석원, 김민정, 유형진의 시를 대표적으로 들며 역사와 시대에 대한 채무의식이 없고 전통 서정의 흐름에 포섭되지 않는 일군의 젊은 시인들을 새로운 흐름이라 보며 <미래파>라 지칭한다. 오래 전에 잊혀진 역사적 이름을 재호명하기는 했지만, <미래파>라는 정의에 이들이야말로 우리 시의 미래를 열어갈 만한 새로운 흐름을 보여주고 있다는 긍정적 평가가 전제되어 있다. 좀더 엄밀하게 말해서 내가 <미래파>라는 명명에 동의할 수 없는 이유는, 이들이 보여주는 시세계가 새롭다는 사실에 대한 부정이라기보다는 그 새로움에 대한 가치평가에 동의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미래파>라는 명명에 대한 우리의 역사적 선이해에 이들의 시가 그다지 부합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지적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아니,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적어도 이들의 시가 지니는 미학적 전복성만큼은 미래파라는 규정에 얼마간 부합한다고 양보할 수 있겠다. 다만, 그것이 과거와는 달리 삶의 기반을 뒤흔드는 인식의 전복성에로 나아가지 못하고 미학적 전복성에 그친다는 데 과거의 미래파와 새로 호명된 <미래파>의 차이가 있을 것이다. 어떤 것을 구획 짓고 정의내리지 않으면 논의를 진행하는 데 훨씬 어려움이 따르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한 어려움을 감수하면서까지 이 글이 <미래파>라는 정의에 동의하지 않는 이유는 앞서 말한 차이가 지니는 의미가 생각보다 큰 것임을 환기하고자 함이다. 새로움은 인정하되 그 새로움에 대한 가치평가에 생각의 차이가 있는 것이므로, <미래파>라는 규정을 따르지는 않더라도 이 글에서 다루는 시인들의 범위는 우리가 암묵적으로 동의하는 선을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이러한 시들과 얼마간의 공통점을 지니면서도 출생년도라든가 시집 출간 시기, 작품의 다양한 성향 등에서 어긋나 논의의 중심에서 소외된 시인들의 시 역시 이 글에서는 가급적 논의의 대상으로 끌어들이려고 한다. 편의상 배제되었던 시들에서 이질적인 흐름을 포착할 수만 있다면 우리 시의 <다른> 미래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미래파>라는 규정에 대해 동의하거나 혹은 침묵하거나로 일관해 왔던 평단의 반응에 아주 작은 파장이라도 일으켜 우리 시의 미래에 대한 논의가 활성화되기를 희망하며 <다른> 미래를 꿈꾸는 몽상을 이제 시작하려 한다. 먼저 오해의 소지를 없애기 위해, 2000년대 상반기의 새로운 시적 경향이 보여주는 언어적 완성도에 대해 나 역시 인정하고 매혹을 느끼고 있다는 점을 밝힌다. 조금 과장되게 말하면 이들의 시적 경향은 우리 시의 스펙트럼을 다양하게 넓히고 있으며, 첫 시집을 내는 시인답지 않게 이들은 개성적인 자기 언어와 전략을 가지고 새로운 시를 쓰고 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이들의 시는 잘 제작된 시이다. 바로 여기에 이 시들의 매력과 한계가 동거하고 있다. 전략이 분명하고 시집 한 권이 고른 완성도를 보이고 있다는 점은 칭찬할 만하지만, 신기하게도 바로 그 점으로 인해 이 시들은 가슴보다는 머리로 읽는 시에 가까워진다. 분석의 욕망을 불러일으키지만, 가슴을 치거나 울리는 절절한 감동은 없는 시. 아니, 애초에 그런 감동을 노리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분명한 시론과 기획을 가지고 씌어지되, 애초에 선을 분명히 긋고 시작하는 시. 잘 정제 된 만큼 거친 단면이 잘 보이지 않는 시. 아니, 거친 단면조차도 철저하게 계산된 시. 날것의 언어를 쓰고 기성의 언어를 끊임없이 전복하는데도 소수만이 읽을 수 있는 마니악(maniac)한 시. 그래서 아무리 부정해도 엘리트주의의 잔향을 풍기는 시. 다른 매체나 장르와의 혼종적 상상력을 통해 놀이로서의 문학을 구현하되 놀이 뒤의 배후가 궁금해지는 시. 나는 잘 제작된 최근의 시들을 읽으며 <웰 메이드>의 한계랄지 비애를 느꼈다. 즐거워야 할 언어의 유희가 그다지 즐겁지 못한 까닭은 이러한 비애감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2. 자기모멸과 냉소의 배후 어느 시대나 문학예술은 기성의 문학을 극복하고 넘어서고자 한다. 새로움이라는 가치가 부상하게 된 까닭도 여기에 있다. 새로움에 대한 추구는 우리 문학의 자장을 넓혀 왔지만, 그것이 강박으로 작용할 때 자기 함정에 빠지기도 한다. 물론 문학사에서 어떤 성공보다 의미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상기하면, 이러한 실패가 이후의 문학에 미친 영향을 무시할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이미 지난 세기에 하늘 아래 더 이상 새로운 것은 없다고 선언되었지만, 여전히 새로운 것을 향한 강박적 추구는 계속되고 있다. <지금, 여기>에서 그러한 추구는 시라는 장르 관습을 허무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서정시를 정의해온 수많은 이론들은 <지금, 여기>의 한국 현대시를 설명하는 데 무력해지진 지 오래이다. 황병승, 장석원, 김민정의 시는 오랫동안 통용되어 오던 서정시의 장르 관습을 허물고 있다는 점에서 함께 다룰 만하다. 이들의 시가 취하는 전략은 저마다 다르지만, 서정시의 원리로 <회감>을 말하거나 <세계의 자아화>를 떠올리거나 <동일성>을 거론하는 기성의 관점을 거부하고 다성성과 혼종성을 구현하려 한다는 점은 공통적이다. 황병승 시의 주체는 통합되지 않은 분열의 양상을 보이고, 장석원의 시는 다성적 발화를 실험하며, 김민정의 시는 기괴한 것을 가볍게 다루는 유희의 전략을 시도한다. 이들의 시는 서정시라는 장르 관습을 파괴하며 넘치는 발화의 욕망을 시에 담아내고자 한다. 기존의 서정시라는 그릇으로는 그것을 다 담아낼 수 없으므로 기존의 그릇을 깨뜨리고 <다른> 그릇을 찾고자 한다. 적어도 이들의 시에서는 여러 개의 가면이 동시다발적으로 출현하는 일이 가능하며 그것이 하나의 얼굴로 통합되지 않는다. 아니, 통합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결국 모든 것은 진력이 나게 마련이다 크로켓이든 카드놀이든 앨리스 부인은 창밖으로 펼쳐진 눈세계를 바라보다, 소설책을 내려놓았다 십 년 만의 외출, 그녀는 스케이트를 어깨에 메고 생쥐들과 함께 눈물 호수 쪽으로 걸었다 혹한이 휩쓸고 간 숲 속의 고요한 아침 태엽장치 돼지들의 함성도 오리앵무새의 구슬픈 노랫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텅 빈 허공에 대고 입술을 맞춰보는 시간) 이것 봐, 올겨울엔 아무도 스케이트를 타지 않았어 눈물 호수 앞에서 앨리스 부인이 소리쳤다, 칼자국 하나 없는 이 빙판 좀 봐! 그녀는 생쥐들과 함께 빙판을 내달렸다. 언제나 그렇듯, 왼편은 원숭이 오른편은 토끼 이쪽은 춤추고 저쪽은 눈물바다지 어느 쪽으로 가도 상관없어 어차피 양쪽 다 미친 것들이니까 구름을 흔드는 웃음소리, 하늘에 걸린 체셔 고양이의 얼굴 스케이트 날이 지나간 자리마다 검은 물이 엷게 배어나왔고 나쁜 냄새가 났다. ―황병승, 「Cheshire cat′s Psycho Boots 7th sauce―여왕의 오럴섹스 취미」(『여장남자 시코구』,2005)부분 크로켓이나 카드놀이에 진력이 난 앨리스 부인처럼 황병승 시인 역시 서정시를 둘러싼 장르 관습에 진력이 난 것인지도 모른다. 칼자국 하나 없는 빙판에서 스케이트를 타듯 자유롭게 어디든 갈 수 있다고 그의 시는 말한다. <왼편은 원숭이 오른편은 토끼>로 나뉘어 한쪽은 놀이에 빠지고 다른 쪽은 과장되게 진지해져 신파가 되는 일은 어디서든 일어난다. 왼편과 오른편이 낡은 이분법을 겨냥한다면, 우리의 문학 역시 오랫동안 낡은 이분법의 망령에 시달려 왔다. 여기서 황병승 시인은 <어느 쪽으로 가도 상관없어 어차피 양쪽 다 미친 것들이니까>라고 말하며 왼편과 오른편을 동일시해 버린다. 이들이 비슷한 오류를 범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고 말하는 것은 그가 역사와 시대에 대한 채무의식이 없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선언은 언제든 이분법의 양극단의 차이는 물론이고 그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마저 일거에 무화하는 또 하나의 폭력이 될 수 있다. 이쯤에서 혁명적 새로움에 매혹된 미래파의 문학이 초기의 파시즘과 쉽게 제휴하는 오류를 범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이제 그는 어디로 가든 광기를 벗어나기는 어려워 보인다. 기존의 것을 부정하고 파괴하여 다른 새로운 것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부정의 대상이 분명해야 한다. 황병승 시인이 부정하고 싶었던 것은 기성의 언어, 기성의 장르 관습이었겠지만, 과거에 있었던 모든 것을 부정의 대상으로 삼음으로써 그의 시는 어디로 가든 마찬가지가 되어 버린다. 전방위적 부정은 부정을 위한 부정이 되기 쉬우며, 허무주의와 냉소주의에 닻을 내리기 쉽다. <구름을 흔드는 웃음소리>는 통쾌한 폭로의 웃음이라기보다는 공허하고 헛헛한 웃음이 된다. 그의 시가 피우는 <나쁜 냄새>는 어디까지나 기성의 도덕적 관점으로 봤을 때 나쁜 냄새인 것이지만(여기까지라면 <나쁜 냄새>는 다분히 문학적이다), 그것이 유일무이한 자유와 미래라는 가치를 획득하는 순간 아이러니하게도 정말 <나쁜 냄새>를 피우고 만다. 이 시들이 열어갈 미래에 대한 긍정적 찬사가 <스케이트 날이 지나간 자리마다> 엷게 배어나오는 <검은 물>마저 가릴 수는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황병승 시의 미덕은 천연덕스럽게 웃으며 자기모멸의 언어를 내뱉는 바로 그 아이러니에 있는 것이 아닐까. 끝난 것은 사랑이 아니라 혁명이고, 여전히 끝나지 않은 것이 혁명이라는 반혁명도 존재하고, 반혁명의 혁명을 꿈꾸기에 아직도 미래를 열어보이겠다고 호언하는 방사성 동위원소 같은 존재들도 있다. 혁명 너머를 생각하지 않는 나의 후배 혁명이는 그래서 오토바이를 조그만 반역의 불수레라고 생각한다. 그의 이름은 주민등록증에 革命이라고 지재되어 있다. 진실은 저 너머에 있지 않고 행정 서류에 기재되어 있다. 시대를 관통하는 사슬과 그 사슬에 묶여 있는 노인의 초상을 본다. 종교적인 긴장이 찾아온다. 갑자기 행성과 항성이 충돌하고, 중성자가 원자핵을 관통하고, 남자가 여자를 지나가고, 그가 나를 돌파한다. 때로 유령이 떠돌기는 했으나 안전했다. 안전한 춤을 추기에 이 집은 적당하다. ―장석원,「동방의 서점에는」(『아나키스트』, 2005)부분 장석원의 시에서 지난 시대의 꿈이었던 혁명은 이미 끝난 것으로 선언된다. 아직도 색깔론이나 이념논쟁을 들먹이며 혁명을 경계하는 세력(반혁명)과 아직도 시대착오적 망상에 사로잡혀 장밋빛 미래를 열어 보이겠다고 호언장담하는 낭만주의자들을 시인은 방사성 동위원소 같은 존재들이라고 규정한다. 이러한 규정에 진실이 전혀 없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그들을 동일시해버리는 순간 지난 시대는 죽은 과거가 되어 폐기처분당하고 만다. 그리고 혁명은 한낱 언어유희의 대상으로 전락해 버린다. 그것이 우리 시대의 단면을 정확히 겨냥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노리는 바가 어디에 있는지를 좀더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진실은 저 너머에 있지 않고 행정 서류에 기재되어 잇다>고 냉소적으로 진단하는 순간, 지난 시대의 진실은 파시즘으로 규정되며 차이 없이 묻혀 버리고 만다. 그러나 그렇게 비웃어 버리기에는 지난 시대의 진실의 무게가 그리 가볍거나 만만치 않다. 시인은 자신이 살아온 시대를 모멸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안전한 춤을 추기에> 적당한 집을 비웃고 싶었는지도 모르지만, 이 자기 모멸에서는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그의 말마따나 끝난 것은 사랑이 아니라 특정한 의미로 제한된 혁명일 뿐이다. 혁명을 향한 지난 시대의 꿈은 사랑의 다른 이름에 다름 아니다. 아니키스트를 표방하는 지독한 모멸과 냉소 뒤에는 이 시대에 더 이상 희망이 없다는 단호한 사형선고가 깔려 있는 셈인데, 이제 장석원 시인은 아니키스트를 동경하며 자기모멸을 퍼붓고 있는 자신의 얼굴을 똑바로 응시할 필요가 있다. 냉소를 지지함으로써 희망 없음을 미리 전제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혹여 안전한 춤을 추기에 적당한 집에 덜 미안하게 정착하기 위한 자기합리화는 아닌지, 아나키즘과 자유라는 이름으로 오히려 시인이 그토록 부정하고 싶어하는 제도와 국가와 권력에 대한 무관심을 조장하는 정치성을 모른척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문하면서 말이다. 그가 새롭게 시도하는 다성성의 전략이 냉소와 자기모멸과 전방위적 부정을 넘어서 사랑의 발견으로 나아가는 언어의 혁명을 이룰 수 있기를 기대한다. 그러기 위해서 그는 자기 시로부터 한걸음 물러설 필요가 있어 보인다. 김민정의 시에 나타나는 만화적 상상력에 대해서는 이미 다른 지면에서 언급한 적이 있으므로 이 글에서는 엽기적인 만화적 상상력을 통해 그녀가 노리는 가벼움과 유희의 전략에 대해서만 간략히 논하려고 한다. 김민정의 시는, 감추고 숨기는 것이 미덕이었던 시어의 함축성에 과감히 도전장을 던진다. 그녀의 시는 노골적으로 까발려 보여주는 노출의 전략을 통해 시 장르의 경계 확장에 공헌하고 있다. 가족과 성이라는 이름으로 <지금, 여기>에 남아 있는 금기를 위반하고 해체하기 위해 그녀의 시는 서정시를 둘러싸고 있던 언어의 감옥을 부수어 버린다. 가볍게 웃어젖히며 그녀의 시는 모든 종류의 도덕적 금기와 진지함을 조롱의 대상으로 삼는다. 그러나 그 웃음은 통쾌하기보다는 히스테릭해 보인다. 웃음의 배후에는 <지금, 여기>에 대한 불안함이 깔려 있지만, 아무것도 책임지고 싶어하지 않는 그녀의 시는 불안의 징후를 은폐하며 끝없이 달아나려고 한다. 허기진 듯 미끄러지는 그녀의 언어는 좋게 말해서 탈주의 상상력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것은 머릿속의 유목이자 모니터 앞에서의 환상일 뿐이다. 그녀가 구사하는 위반의 전략이 파괴력을 지니기 위해서는 불안의 정체에 대한 탐색이 이루어져야 할 것 같다. 러시아의 미래파가 마야코프스키라는 걸출한 시인을 낳았고 이후 1917년의 러시아 혁명으로 이어지는 계기를 마련한 데 비해, 이탈리아에서 미래파가 초기의 파시즘과 결합되었다는 사실은 아이러니하게도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있다. 차이와 다양성을 내세우며 <지금, 여기>에 대해 허무주의적이고 냉소주의적인 태도로 일관하고 있는 이들의 시가 <지금, 여기>을 불가항력이자 대안이 없는 세계로 규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단호한 배제의 전략을 내세우는 또 하나의 파시즘을 산출할 수 있다는 점은 정말이지 아이러니하다. 90년대 중반 이후 집중적으로 비판받았던 80년대의 파시즘이 단순하고 순진한 면을 지니고 있었던 데 비해, 차이를 가장한 <지금, 여기>의 파시즘의 가능성은 훨씬 교묘하고 여러 겹으로 은폐되어 있어서 그만큼 더 프로페셔널하고 더 위험해 보인다. 머릿속으로는 자유로운 유목을 펼치지만 그것은 불가항력의 현실에 대한 대리만족의 수단일 뿐이어서 자칫 냉소적 태도만을 양산할 우려가 있다. <다른 미래>의 가능성을 애초에 봉쇄해 놓는다는 점에서 그것은 또한 분명히 정치적이다. 3. 메타시의 빛과 그늘 2000년대 상반기의 젊은 시인들의 시는 낡은 서정성을 신봉하는 기성의 시를 겨냥하고 있다. 90년대에 생태주의의 유행과 함께 떠오른 신서정은 낭만적 신화와 근대적 계몽의 한계를 동시에 노출했다. 자연으로 도피하고 고향을 신화화하는 시들이 대거 씌어지면서 90년대 이후 집단적 흐름을 형성하기에 이른다. 2000년대 상반기에 젊은 시인들이 보여준 새로운 감수성과 언어 실험은 생태주의에 기반을 둔 신서정의 흐름에 대한 거부라는 점에서 일정한 의미를 지닌다. 생태주의의 이념은 진보적인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지만, 불행히도 그것이 문학적 성취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우리의 생태주의 문학은 <지금, 여기>에 대한 고뇌보다는 낭만적 환상으로의 도피를 선택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지금, 여기>에서 자연은 이미 근원으로서의 순수성을 훼손당한 존재임을, 생태주의와 결합한 서정시는 간과했다. 이 글에서 다루는 일군의 2000년대의 젊은 시인들이 자연과 고향을 잃어버린 존재로 자기 세대를 규정하는 까닭은 생태주의 문학이 놓친 지점을 환기하기 위해서이다. 유형진은 디지털적 감각을 지닌 자신의 세대를 <모니터킨트>(「모니터킨트」, 『피터래빗 저격사건』, 2005)라 부르며 이들에게 자연과 고향은 더 이상 서정적인 의미를 지니지 못함을 고백한다. 오히려 이들에게는 모니터 속에 펼쳐지는 시각적 인공 세계야말로 정신적 고향이라고 할 수 있다. 기존의 서정시를 대타향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들의 시는 메타시라불릴 만하다. 표제시인 「피터래빗 저격사건」 연작 세 편은 유형진 시인이 왜 그토록 고향에서의 낭만적 시간을 망각하고 싶어하는지 좀더 분명히 보여준다. 유년의 고향을 기억하면서부터 시적 주체는 불면증에 시달리게 되고 평화로움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는 피터래빗의 저격을 의뢰하면서 자신에겐 고향이 없다고 선언한다. 고향을 잃어버린 것도 잊은 것도 아닌, 그냥 없을 뿐이라는 선언은 유년의 고향에 대한 전면 부정이다. 애초에 돌아갈 고향이 없다는 점이야말로 자기 세대의 특징임을 유형진 시인은 간파한다. 등단작인「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나는 바나나파이를 먹었다」에서만 해도 아날로그적 감성과 변화한 디지털적 감각 사이에서 흔들리는 시적 주체의 모습이 발견되지만, 이후 그녀의 시는 피터래빗을 죽이고 디지털적 감각에 스스로를 맡긴다. 디스토피아적 인식이 엿보이는 「UN 성냥」이나 「애주가i」, 「버블버블랜드의 츄잉」(『현대시학』,2005.10) 같은 시에서 <지금, 여기>의 현실에 대한 세기말적 진단과 절망감이 느껴지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논리적이고 전략적인 그녀의 시에서 해석의 잉여는 그리 풍부하지 못하다. 특히 「애버뉴b」연작시 같은 작품은 그녀의 시적 관심이 <지금, 여기>의 현실을 환기하거나 반성적 시선을 견지하는 것으로부터 자신의 언어로 독립된 세계를 구축하는 것으로 이동해 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자기 언어와 전략을 가져야 한다는 강박이 그녀의 시에 냉소와 환멸의 그림자를 짙게 드리우게 하는 것은 아닌지 조금은 우려 섞인 시선으로 그녀의 시집 이후의 추이를 지켜보아야 할 것 같다. 권혁웅의『마징가 계보학』(2005)은 치밀한 전략으로 짜여진 지난 시대에 대한 후일담이라는 점에서 메타시로서의 성격을 지니는 시집이다. 그의 시에서 만화영화나 대중가요, 에로영화 같은 대중문화의 체험과 그가 체험한 폭력(시대적 폭력으로부터 개인사적 폭력에 이르기까지)은 교묘히 맞물리며 웃음의 전략을 구사한다. 그의 시에서 웃음은 해석의 시선으로부터 발생한다. 가령 아내에게 지칠 줄 모르고 폭력을 행사하는 고철 수집상(마징가Z)과 그의 폭력을 보다 못해 나서서 그를 흠씬 두들겨 팬 오방떡을 파는 사내(그레이트 마징가)와 그가 열심히 일하는 사이에 바람나서 집을 나가버린 그의 아내(찡가)와 그들의 위력과 세월마저 잊게 하는 힘(그랜다이저)을 늘 새롭게 업그레이드되었던 만화영화 속 로봇의 계보학으로 구성해냄으로써 지난 시대의 후일담이라는 서사를 완성하는 것은 그의 두드러진 시적 전략이다.(「마징가 계보학」)거기에 만화영화 주제가의 적절한 삽입과 계란 사용법이라는 비유적 장치를 활용해 짐짓 딴청을 피우는 시적 주체의 어법과 전략이 웃음을 자아낸다. 그 웃음은 냉소보다는 실소에 가깝다. 「애마부인 略史」나 「광기의 역사」등을 통해 권혁웅 시인이 구축하는 계보학은 아날학파의 미시사의 방법론을 시에 도입한 형태에 가깝다. 이러한 방법론은 그의 시에서 기원과의 낯선 마주침을 통해 <지금, 여기>를 흔들거나 간섭하는 방식으로 작용하기보다는 세목들을 부각시킴으로써 인간사의 지리멸렬함을 보여준다. 그가 펼쳐놓은 후일담에는 시적 주체의 해석의 시선이 들어있지만, 그의 관심사는 시대와 역사적 의미를 들어낸 인류의 보편사에 놓여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권혁웅의 시 역시 지난 시대의 시, 좀더 정확하게는 거대 역사에 대한 관심이 지배적이었던 80년대의 시에 대한 메타시로서의 기능을 갖는다. 자칫 단조로워질 수 있는 메타시의 한계를 시인이 너무 잘 알고 있어서 그 역사의 세목들을 시적 주체를 둘러싼 가난의 체험이라는 서사와 웃음의 전략으로 채우고 있을 뿐이다. 4. 차이를 만들기 위한 첫걸음 <미래파>라 명명되어 온 2000년대의 젊은 시인들을 묶어서 보았을 때 가질 수 있는 장점은 분명하다. 이들의 시가 공통적으로 지니는 새로운 감수성에 세대론적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고, 그것이 집단적 흐름을 이룬다면 새로움의 의미가 지니는 파장이 더욱 커질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공통점 못지않게 이들 시인에게서 발견되는 차이가 크고 그것이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는 사실에 주목하면, 이러한 정의 내리기가 흐름에 쉽게 포섭되지 않는 많은 시인들을 배제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설령 앞서 살펴본 시인들과 함께 묶여 논의된다 해도, 환상성이라든가 대중문화적 상상력의 유입, <다른 신체―되기>의 상상력 등이 집중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시인들의 경우라든가 의도된 전략이 앞서의 시만큼 강하게 드러나지 않는 시를 쓰는 시인들, 주된 흐름에 포섭되기보다는 이질적으로 빠져나가는 부분이 더 많은 시를 쓰는 시인들의 경우에는 논의의 중심에서 소외될 게 뻔하다. 이제 2000년대 시인들에 대한 논의의 중심에서 배제되거나 주변화 되어 온 몇몇 시인들의 가능성을 살펴보면서 이 글을 마무리해야겠다. 앞서 다룬 시인들과 전략적으로나 감수성의 측면에서나 얼마간의 유사점이 발견되면서도 이질성을 띠는 시인으로 정재학, 진은영, 이재훈, 김이듬 등을 들 수 있다. 2004년 1월에 『어머니가 촛불로 밥을 지으신다』라는 첫 시집을 낸 정재학 시인은 환상성의 구현이라는 측면에서 오히려 선구적이었지만 최근의 젊은 시인들을 대상으로 한 논의의 장에서는 소외되어 왔다. 앙드레 브루통의 초현실주의 선언을 문득문득 떠올리게 하는 정재학의 시는 그로테스크하고 암울하고 잔혹하고 병적인 환상의 세계를 구축한다. 반복의 주술을 종종 활용하는 정재학 시의 환상에서는 <지금, 여기>의 현실을 환기하는 이미지들이 이따금씩 발견되어 슬픔을 유발한다.<어머니가 촛불로 밥을 지으신다>라는 불가능한 언술이 주문처럼 반복되면서 희생과 구원의 이미지를 형성하게 되고 마침내 제의가 완성된다. 반복의 주술성은 정재학의 시에 靈性을 불어넣는데, 이러한 특징은 그의 시가 환상의 허무주의에 함몰되는 것을 막는다. 진은영의 시에도 환상은 자주 출몰하는데, 그것은 대개 낭만과 잔혹이라는 양극단의 얼굴을 하고 있다. 대립적이고 모순적인 언술이 공존하는 것은 진은영 시의 특징이다. 그녀의 시가 부정하는 대상은 근대적인 제도로서의 가족으로부터 낡고 고정적인 시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그녀의 시에는 천상과 지상을 잇는 상상력이 종종 등장하는데, 그녀가 자유자재로 펼치는 환상의 배후에는 천상의 세계에 속한 <어머니―손가락>으로의 근원적인 회귀가 자리 잡고 있다.(『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2003) 진은영 시의 환상은 유희성과 관계가 없다는 점에서 동시대 시인들의 시와 차별된다. 광활한 시공을 끌어들임으로써 시원에 대한 신비한 상상력을 보여주고 있는 이재훈의 경우는 쉽사리 포섭되지 않는 시적 개성으로 인해 최근의 시에 관한 논의에서 배제되었지만, 오히려 개성적으로 우리 시의 또 다른 미래의 가능성을 열어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2005)는 치밀하게 짜여진 전략에 의해 구성된 시집은 아니지만, 들쑥날쑥하다는 약점에도 불구하고 표제시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가 보여주는 세계는 우리 시의 형이상학의 한 영역을 개척할 수 있는 긍정적인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2005년에 『별 모양의 얼룩』이라는 시집을 출간한 김이듬 시인은 황병승, 김민정, 이영주 등과 함께 묶여서 종종 거론되지만, 상대적으로 덜 전략적인 특성으로 인해 논의의 중심에서는 소외되어 왔다. 유년의 상처가 시의 원천을 질기게 형성하고 있는 김이듬의 시는 몸이나 성적인 이미지가 자주 출현한다는 점에서 김민정의 시와 함께 논의될 때가 많지만, 유희적 전략을 구사하는 김민정의 시와는 달리 억눌리고 닫혀 있는 자폐적인 세계를 구축함으로써 깊은 슬픔을 자아낸다. 김이듬의 시는 전략을 내세우거나 시론을 내세우는 시가 아니지만, <노력해야 한다면 그만둬야 해요>(「로시니 혹은 누가 누구와 잤는가 하는 사소한 문제」)라는 발언을 통해 제작하는 시에 대한 거부 의사를 표명하고 있어서 동시대 시에 대한 반성적 언술로도 주목할 만하다. 그녀는 시집 제목처럼 <별 모양의 얼룩> 같은 시를 쓰고 싶어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별 모양> 같은 의미로 읽힐 수 있고, 지우려 들수록 더 스며들고 번져서 통증처럼 자리 잡은 시. 죽음 가까이 갔다가 모두의 기대를 배반하며 눈을 뜨는 시. 김이듬의 시 역시 아직은 자신의 상처를 들여다보는 데 급급하지만, 적어도 전략을 전면에 내세워 시를 제작하려 들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녀의 시에서는 진정성이 느껴진다. 특정한 경향의 시인들을 주로 다루는 글이므로 여기서는 서정의 흐름을 계승한 새로움의 징후를 보이는 시인들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지 못했다. 라는 명명은 새로운 경향의 젊은 시에 속하지 않는 흐름을 노골적으로 배제하면서 긍정적 미래의 가능성을 미래파에 부여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에게서 대체로 나타나는 는 판단은 도저한 허무주의와 냉소주의를 동반한다. 냉소주의는 종종 폭로의 전략과 어우러지는데, 이 글에서 다루는 시인들의 시는 장르 관습과 기성의 시적 언어에 대한 위반과 전복을 꾀하기는 하되, 자기 기반을 폭로하지는 않는다. 이들의 시가 이미 전제하고 있는 이 세계의 불가항력은 뿌리 깊은 절망을 생산하지도 못하면서 의 가능성을 아예 차단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제 물어보아야 할 때이다. 를 위한 첫 걸음은 상상만으로 오지 않는다. 분류와 명명의 욕망에 굴복하지 전에 이질적인 차이를 발견하고 다른 흐름을 만들어 가려는 실질적인 노력이 뒷받침될 때, 불가항력의 벽에도 균열이 생기기 시작할 것이다. 는 를 위해 한 걸음을 내딛는 데서부터 시작될 것이다. 냉소와 자기모멸에 우리 시의 미래를 헌납하기 전에 를 여는 이질적인 흐름을 만들기 위해서는 우선 개개의 시인들이 보여주는 이질적인 면모에 좀더 주목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라 명명된 시인들 역시 우리 시의 미래의 한 축을 담당하겠지만, 이들 개개의 차이에 대해 좀더 주목할 필요가 있고, 이들과는 다른 이질적인 흐름에서 의 가능성을 발견하려는 움직임이 지속될 필요가 있다. 시대와 역사에 대한 부채의식이 없다고 말해지는 이들의 시에서도 아이러니하게도 80년대 문학의 그림자가 여전히 어른거린다고 말하면 내가 과민한 것일까. 그 억압으로부터 온전히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지난 시대의 문학을 어떻게 버리고 갈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축적되어야 한다. 미학적으로는 급진적이되 현실 앞에서는 무기력하고 불가항력인 의 젊은 시를 우리 시의 미래라고 추켜세우기에 앞서, 문학은 물론 문화 전반에 출몰하고 있는 유희적인 문학의 가능성과 한계에 대해 좀더 진지한 성찰이 필요해 보인다. 요동치는 波高 위에서는 발 빠른 것만이 능사는 아닌 듯하다. 유행과는 무관하게 움직이는 이질적인 흐름들을 포착하는 밝은 눈이 그 어느 때보다는 그립다.
1012    詩밖의 詩의 낯선 세계에로 들어가 보다... 댓글:  조회:4542  추천:0  2016-01-19
등단 이후 난해시로 분류되며 문학계 뒷단에 서 있던 김언 작가가 올해 제 9회 미당문학상과 2009 동료들이 뽑은 올해의 젊은 시인상을 수상함과 동시에, 신간 로 화려하게 돌아왔다. 2000년대 중반 한국 시단을 뜨겁게 했던 미래파 논쟁의 중심에 있었던 그가 4년 만에 펴낸 시집의 제목은 참으로 엉뚱하게도 . 시집을 펼치면 제목처럼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간결한 형태의 시가 아닌 산문을 닮은 남다른 형태를 지닌 새로운 시의 세계가 펼쳐진다. 다양한 언어와 울림, 그리고 리듬을 가진 새로운 시로 우리가 당연히 여기는 모든 것, 우리에게 익숙한 현실의 세계에서 새삼 길을 잃게 하는 시를 쓰고 싶다는 젊은 시인, 김언 작가와 시 밖의 시가 보여주는 낯선 세계에 들어가 본다.     신간 의 제목이 가진 의미에 대해 설명해 주세요.   시집을 내고 나서 가장 많은 질문을 받은 부분인데요. 제목 의 소설은 장르로서의 소설은 아니고요. 시 밖의 시, 혹은 기존의 시와는 다른 시를 뜻하는 것이에요. 그게 말처럼 쉽지가 않아서요. 제목에 쓰자는 의지를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하시면 될 듯 합니다.    시를 읽어 보면 행간도 없고, 문장이 긴 시들이 많은데 시를 읽고 있다는 남다른 느낌이 듭니다. 실험적이라고 감히 표현해도 될지... 조금은 낯선 시를 쓰는 이유가 궁금합니다.   기존의 것과 다르게 한다는 건 의지로 끝나는 경우가 많거든요. 실제로 제게 시를 쓴다는 건 시 밖에서의 시를 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위험한 작업이에요. 조금만 삐끗하면 시가 안 되거든요. 실험적이라고 표현하셨는데, 실험이라는 게 모험+위험이잖아요. 그 두 가지를 동반한 말이기 때문에 위험하죠. 그럼에도 헤매고 다니다 보면 시가 아닌 것에서 간신히 시적인 부분이 나오고, 도약하는 순간들이 있어요. 그 때 쾌감이 크거든요. 힘은 들지만, 시 아닌 것에서 시를 구하는... 그런 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시는 쓰는 것이기도 하지만 물려 받는 것이기도 하잖아요. 그리고 후대에 물려 주는 것이기도 하고요. 자신이 물려 받은 것을 다른 식으로 물려 주는 것이 시인의 소임이자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언어 탐구에 몰두해 왔다고 소개되고 있고 시를 읽으며 언어가 굉장히 폭 넓게 쓰여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시어를 선택함에 있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부분은 무엇인가요?   시에서 시어가 되지 못하는 말은 없다고 생각해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운용하고 배열하는 문제이거든요. 보통은 새로운 단어가 들어가면 새로운 시가 된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예를 들어 시조 중 ‘어즈버’라는 단어가 들어가는 자리에 ‘아싸’라는 단어가 들어간다고 해서 현대시가 되는 건 아니잖아요. 그 단어를 운용하고 장악하는 자신의 세계가 어떤가에 따라 시어의 쓰임이 달라지고 시도 달라지며 세계도 달라지는 것 같아요. 세계가 어떤가를 보여주는 문제이죠. 즉, 시어는 단어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의 문제인 것 같아요.    읽다 보면 단어가 가지는 의미에 대해 생각하게 하고, 논리에서 벗어난 문장도 종종 있어 느리게 읽혀지고 생각을 많이 하게 하던데요. 의도하는 바가 있을 듯 합니다.   제 시를 읽으면서 한 동안 머물렀다면 저로서는 고마운 일이죠. 시라는 건 반드시 다르기 때문에 주는 의무감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동안 맴돌게 하는 구석이 있어야 무언가 다른 것을 건드려 주었다는 지표가 되는 것 같아요. 술술 잘 넘어가는 것으로는 시가 완성된다고 생각하지는 않거든요.    그렇다면 김언 작가가 생각하는 시란 무엇일까요?   이 부분은 고민을 굉장히 많이 하게 하는 부분인데요. 다 아는 세계에서 새삼 길을 잃게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너무나도 자명한 사실들을 과연 그런가 라고 다시 한번 생각할 수 있게 하고, 그러면서 새삼 길을 잃게 하는 것이 시가 해줄 수 있는 역할이자, 곧 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시를 쓸 때 가장 어려운 부분이 있다면요?   저한테는 산문과 시의 차이인 듯 한데요. 산문은 힘들더라도 오래 붙잡고 있으면 성과가 나오는데, 시는 초고가 오래 걸리면 대부분 실패예요. 시를 제대로 쓰려면 95%는 초고가 단숨에 나와 줘야 돼요. 나머지 5%를 가지고 시간을 들여 단어 하나, 조사 하나, 한 문장을 가지고 어떻게 넣을 것인가를 고민하면서 나머지 95%를 조정하는 것이거든요. 써놓고 결합을 하는 경우는 있지만, 아무튼 초고가 빨리 나와야 하죠. 저한테는 그래요. 초고가 오래 걸린 건 다시 읽어 보면 아무 것도 남지가 않더라고요. 이번 시집에 들어간 시들은 시적인 부분에 진입하는 데 어느 정도 성공한 것이지만 그 전에 실패한 시들이 정말 많아요. 쓴 시를 100이라고 한다면, 발표하는 시는 50, 시집에 들어간 시들은 20~30 정도 비율 밖에 안 되죠.   시를 쓸 때 습관 같은 게 있나요?   그런 질문에 멋지게 답하는 시인들도 많던데요. (웃음) 전 특별한 습관은 없는 것 같아요. 사람의 인연이라는 게 기다리고 있을 때 지나가기도 하고, 자신도 모르게 지나가기도 하는 거잖아요. 시가 들어갔다가 나가는 것도 자기 마음대로인 것 같아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잡아내는 게 중요하지, 자기가 만들어 놓는다고 해서 반드시 오는 건 아니거든요. 산문은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을 듣거나 아늑한 환경에서 쓰는 게 가능할지 모르겠는데, 시는 성미가 까다로운 것 같아요. 자기가 와야지 오는, 그런 남다름이 있습니다.     으로 ‘미당문학상’을, 로 ‘동료들이 뽑은 올해의 젊은 시인’으로 선정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축하드리며, 소감 한 마디 부탁합니다.   ‘미당문학상’은 사실 상상도 못했던 일이고요. 저뿐 아니라 시 쪽에 몸담았던 사람이라면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일 거예요. 당황스럽기도 하고, 말 그대로 과분한 상이죠. 반면 ‘동료들이 뽑은 올해의 젊은 시인상’은 시집을 내면서 꼭 받고 싶은 상이었어요. 1차적인 문학에 대한 평가는 선배들이 하는 것이지만 궁극적인 평가는 후배들이 하는 것이거든요. 아직 후대는 오지 않았지만, 그 사이에 있는 동료들의 평가는 의미가 꽤 크다고 생각해요. 더군다나 앞서 받았던 진은영, 김행숙 시인들은, 확신하건대, 한 세대가 지나도 남을 시인들이거든요. 그 분들의 뒤를 이어 받았다는 게 너무나 기분 좋은 일이죠. 또 한편으로는 저와 다르지만 제 인생의 시인이라고 할 수 있을 시인들이 동년배에 있다는 게 참 행복한 일인데, 그들이 많은 피를 흘린 대가가 저한테 온 것 같아서 문학적인 부채감이 있어요. 그게 사실은 가장 큽니다.    그 동안 시가 어렵다거나 주류시와는 거리가 있다는 평들도 많았는데, 그런 점에서 이번 두 개 상의 수상은 더욱 큰 의미가 아닐까 싶습니다.   신문지상에는 지방출신 시인으로서의 서러움, 억울함 등이 많이 부각됐는데요. 물론 그런 점이 없지는 않았죠. 하지만, 사실 더 컸던 것이 한국 시 풍토에서 제 문학적인 이상, 시적인 이상을 구현하는 것은 힘들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이번 수상을 통해 그 가능성을 봤다는 부분이 더 크죠. 한동안 미래파 논쟁이라 이름 붙여져 외적으로는 젊은 시인들의 시를 부각시키려는 움직임이 있었거든요. 그 요지는 시가 무겁지 않아야 하고, 사유보다는 감각을, 그리고 기존 시에서 다루지 않았던 하위 문화들을 적극적으로 포용해야 한다는 것이었어요. 그런데, 전 단 하나도 포함이 되지 않더라고요. 일단 제 시는 무겁잖아요.   스스로도 본인의 시가 무겁고 어렵다고 생각하나요?   요즘 주목 받고 있는 젊은 시인들의 시와 제 시는 다른 것 같아요. 일부, 그들의 시를 공격하는 분들은 경박하다고까지 하는데, 표현이 어떻든 저는 그들의 시를 좋아합니다. 거기에 비한다면 제 시는 경쾌하지는 않은 듯 해요. 조금 무겁고, 감각도 들어가 있기는 하지만 사유 쪽에 가까운 것 같고, 하위 문화 쪽이 없어요. 젊은 시인들의 표지라고 할 수 있는 그 부분이 없죠. 그 때문에 한동안 비평가들에 의해 미래파로 분류되는 젊은 시인들 중 제외가 되던가, 순위를 두면 항상 특색이 덜 드러나는 후순위에 가있거나 했어요. 그 논쟁이 있던 2007년에 웬만한 또래 시인들이 시집을 제안 받고 출간할 때 전 아무런 제안도 받지 못했거든요. 그 때 좀 힘들었죠. 좌절은 아니지만 체념을 많이 했었어요. 시집만 낼 수 있으면 다행이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죠.   그 당시 가장 어렵게 느껴졌던 부분은 무엇이었나요?   일단 제 시가 기존 정통시와는 많이 다르다고 생각해 주는 것만으로도 좋겠는데, 뒤처지는 것처럼 평가되더라고요. 그게 참 힘들었는데, 이번에 두 가지 상을 받고 나니 정당한 평가라고 생각되기 보다는 과분하다는 생각과 한편으로는 부담이 많습니다.     김언 작가의 시가 난해하다는 평에 대해서 평론가에 기준에 맞춰 평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서 강한 반론을 제기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김언 작가의 시가 어렵고 난해하다는 평에 대한 견해가 궁금합니다.   당시 문학동네 산문에 썼던 글인데, 제 반론이 시인들에게는 통쾌한 면들이 많았죠. (웃음) 연장선상에서 이야기를 이어가자면 국문과 박사학위를 받으면 시를 다 알아야 한다는 의무감과 함께 자신감도 있는 것 같은데, 그건 엄연히 다른 분야라고 생각해요. 시는 예술이고, 그 분들이 공부한 것은 말 그대로 학문이거든요. 그런데, 대학의 시스템 안에서 논문을 발표하고, 1920~30년대 문학도 아닌 서지학을 공부하던 분들이 갑자기 현장 비평가가 되어 요즘 시는 못 읽겠다는 평을 한다는 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시라는 건 시인들은 나름대로 현장에서 엄청나게 고민하면서 쓴 것이거든요. 그런 분들이 그 동안 내가 현장을 떠나 있었으니까 열심히 읽어 봐야 한다는 생각을 갖는 게 아니라, 자신이 못 읽겠으니 이건 난해시라고 치부해 버리는 거예요. 그들이 말하는 난해시는 어렵다가 아니라 접근불가의 의미거든요. 그런 의미를 가진 보편적인 난해시가 되어 버리는 거예요. 자기 입장에서 소통이 되지 않는 것을 가지고, 모든 독자가 소통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과장하며 그 시를 밀쳐내는 것이죠. 평론가들 사이에서 대접 받지 못하고 난해시로 치부된 시들이 대학에 갓 입학한 새내기들 사이에서는 널리 읽히고 인기를 끌 수도 있거든요. 일반 독자들이 난해하다, 어렵다라고 한다면 충분히 이해할 수도 있지만, 현장비평가라면 난해시라는 카드는 가장 마지막에 꺼내 들어야 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너무 남발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어요. 사실 비평가가 난해시라고 이야기하는 순간, 그 시는 포기를 한다는 의미이고 자신의 밑천이 다 드러나는 것이기도 하거든요.    김언 작가의 시가 난해하다는 평이 불편하다는 의미인가요?   꼭 그렇지만은 않아요. 난해하다는 평이 기분 좋은 면도 가지고 있죠. 난해하다는 건 소화하기 어렵고, 이해도 어렵고, 의무감을 주며 불편하다는 뜻인데, 새로운 건 항상 불편함을 주기 마련이거든요. 편안함을 주면서 새롭기는 어렵죠. 새로운 것은 늘 저항감을 주기 마련이잖아요. 그렇다고 불편한 것이 늘 새로운 건 아니고요. 불편하게 했다면 새로운 가능성은 있다는 것이거든요. 그런 면에서는 비평가가 하는 직무유기식의 난해시라는 평이 아니라 독자들이 이야기하는 불편하고 난해하다라는 평은 고마운 면이 있어요. 받아들이는 느낌 자체가 다릅니다.    그렇다면 가장 기억에 남는 독자가 있나요?   대체로 잘 모르겠다는 분들이 많은 것 같아요. 잘 모르겠다는 분들은 그 이상의 발언을 하지 않죠. 그런데, 잘 모르겠는데 뭔가 있다거나 재미가 느껴졌다, 시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는 독자평들이 종종 있거든요. 그런 글을 읽으면 굉장히 고맙죠.    남다른 시라는 이유로 기존 문학계에서 인정 받지 못하지만, 많은 독자들에게 호응을 받는 시들이 있는데, 그런 부분에 대한 견해가 궁금합니다.   어차피 시로 세상 모두와 소통할 수는 없어요. 시라는 건 세상에 몇 안 되는 애인과 아주 은밀하게 소통하는 것이거든요. 세상 모두가 소통하는 시를 쓴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에요. 애인이나 다름 없는 몇 안 되는 독자를 찾아가는 것이 시를 쓰는 것인데, 이미 수 많은 독자들에게 사랑을 받았다면 그것 자체만으로도 큰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여러 문학 장르 중 김언 작가에게는 왜 시여야 했을까요? 시를 쓰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처음에는 소설을 썼었어요. 말 그대로 ‘소설을 썼다’죠. (웃음) 제가 공대 출신이거든요. 문과를 가고 싶었지만, 당시에 남자는 이과를 가야 하고, 공대를 가야 한다는 흐름 때문에 공대를 선택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반년도 안 되어 후회가 되더라고요. 서클 활동을 하거나 그런 건 아니었지만, 1학년 여름 방학 때부터 소설을 쓰기 시작했어요. 그러면서 제가 쓴 소설을 친구들에게 보여주는 재미로 학교를 다녔죠. 그러다가 2학년을 마치고 방위로 군대를 가게 됐는데, 출퇴근을 하다 보니까 소설을 쓸 수는 있지만 지속적으로 쓰기는 어렵더군요. 그래서 짤막하게 쓰다 보니 어느 순간 그게 시적인 부분과 이어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 전향을 했어요. 전향이라는 말이 좀 그렇긴 하네요. 아무 것도 모를 때 소설 조금 쓰다가 시를 쓰게 된 것이니까요.   그 시기가 현재 김언 작가의 시의 형태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하나요?   그 때도 그랬던 것 같고, 중 3때 시를 좀 썼던 것 같아요. 연애시도 있었지만, 대부분 철학적인 내용이 담겨 있죠. 예를 들어 창 밖의 나무들은 왜 저렇게 서있을까 라는 등 관념적인 내용들인데, 제게 그런 피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김언 시인이 닮고 싶은 시인이 있습니까?   우리나라 시인들 중 적지 않은 경우가 첫 번째, 혹은 두 번째 시집에 모든 에너지를 쏟아 붓고는 40, 50대가 넘어가면 달관한 듯 도사가 되어 버리는 경우들이 있거든요. 아예 도로 넘어가면 좋은데, 도로 넘어가기 직전에서 계속 도를 이야기해요. 그러다 보니 시적으로 많이 약해지죠. 달관한 시가 되고요. 그 이유야 파헤쳐 보면 할 말이 많겠지만, 그리 바람직해 보이지는 않아요. 물론 모든 시인이 다 그렇다는 건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폴란드의 시인, 비슬라바 심보르스카(Wislawa Szymborska)는 팔순이 넘어서도 계속 세계를 달리 하는 시를 쓰고 있으니 본받을 만 하죠. 그 분이 노벨문학상을 받았다거나 그렇기 때문이 아니에요. 저 역시 벌써 세 권째 시집을 냈는데, 앞서 말한 시인들처럼 된다면 재미가 없어서라도 앞으로 시를 못 쓰겠죠. 꾸준히 세계를 바꿔가며 시를 쓰는 시인들이 제게는 롤 모델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우리 시대 큰 주목을 받고 있는 젊은 시인으로서 시인을 꿈꾸는 후배들에게 조언해 주세요.   등단을 하던 하지 않던 간에 글이 써지지 않을 때 항상 고민하는 게 자신의 재능을 의심하는 거거든요. 하지만, 재능을 의심할 필요는 없는 것 같아요. 자기 재능은 다른 게 아니라 자신이 그것을 좋아하는 정도거든요. 자신이 좋아하는 만큼 다 자신의 재능이 되기 때문에, 굳이 자신의 재능을 의심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죠. 할까 말까를 고민하는 게 아니라 좋아하는 상태에서 앞으로 무엇을 쓸 것인지 고민하는 게 생산적이라고 생각해요.    앞으로의 어떤 시를 쓰고 싶은지, 꿈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제가 생각하는 시, 다 아는 세계에서 길을 잃게 만드는 시를 쓰고 싶습니다. 본인이 내리는 시의 정의가 본인이 가고 싶은 시의 길이잖아요. 그런데, 쉽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세계가 그렇게 호락호락하거나 만만하지 않거든요. 허술하게 작동하는 것도 아니고요. 세계란 자신을 포함한 전부죠. 그 세계에서 누구나 길을 잃고 싶지 않은 게 본능이기 마련인데, 그 안에서 길을 잃고 싶은 의지를 갖고 실천한다는 게 쉽지는 않겠죠. 거의 불가능하다는 표현이 맞을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불가능하기 때문에 해 볼만 한 것 같아요. 가능하다면 어느 정도 하면 되겠지 라는 생각을 갖겠지만, 불가능하기 때문에 오히려 계속 할 수가 있는 것이죠.    
1011    왜 미래파?... 시, 시인, 독자... 댓글:  조회:6599  추천:1  2016-01-19
* 왜 미래파인가, 무엇이 다른가                                                            / 권혁웅     이들의 시를 일군 특징으로 묶지 말고, 먼저 개별적인 성과의 집적으로 보아야 한다.   새로운 시들의 주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로 흔히 이야기되는 것이 환상성이다. 최근의 시들에는 비사실적인 진술이 전면에 드러나 있으며, 이를 통해 이들 시인들이 사실주의 문학에서 누리지 못했던 정신의 자유를 그 극한까지 누리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의 시가 환상으로 간주되는 것은 일차적으로 추측과 비교와 설명을 단순한 현재 시제로 처리하기 때문에 생긴 현상이다.   - 권혁웅 시인의 평론 부분     * 미래파 시인들이 시, 이렇게 읽었다 / 이경수     먼저 고백할 것이 있다. 2000년대 상반기의 일군의 젊은 시인들의 시적 경향에 대해 미래파라고 규정하는 것에 대해 솔직히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이러한 명명하기의 방식에는 개별 시인들의 차이에 주목하기 보다는 이들에게서 공통적인 성향을 추출해 그것을 집단화 하고자 하는 인정투쟁의 욕망과 세대론적 전략이 숨어 있게 마련이다. 명명하기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것은 미래파라는 규정이 산출하는 집단적 흐름을 의심한다는 것이며 이들의 공통점 보다는 차이에 좀 더 주목하겠다는 뜻이다.   - 이경수 평론가의 평론 부분             뱀의 시간 / 김병호   녹슬어 가는 별자리를 더듬어 강을 건넌다   사내의 앞을 비문처럼 가로지른 뱀의 흔적 눈 덮인 강물 위를 온몸으로 헤쳐나간 그 자국이 절벽으로 향하는 동안 얼음자 아래의 파문들이 미늘처럼 온몸에 박혔으리라   멀리 강얼음 무너지는 소리가 천둥같이 사내를 떠민다   물 아래 뿌리를 묻은 나무에 돋은 검은 종소리 강 건의 풍문은 낡은 경첩처럼 사납고 강 위에 벗어 놓은 허물은 가시처럼 빛나는데 새벽은 어느새 수의처럼 다가온다   비밀을 잃고 눈물마처 닳은 사내가 겨울잠 놓친 뱀마냥 눈 덮인 강물을 흐르고 있다       앙상한 둔부의 노래 / 김록     자신의 값에 대하여 문제의 값이 정해졌다 그 값을 자신이 능가하는 일은 앞으로 없으리라 이성과 이성의 분신의 함수에 의해. 자신을 만족시키지 않는 집합 속에서, 만약 문제와 문제의 값 둘 다 구할 수 없다면 이렇듯 미칠 지경에서 증명 하나를 보이고 그 순간 죽을 지경에서 공식을 얻자 자신은 자신의 증명이 부끄러워 한 사막의 공식에서 모래 바람과 전갈을 대입하지 않았다 내 사막엔 모래 바람이 불지 않고 불길조차 지나가지 않는다, 라고는       지나간다 / 박판식     어는 가을날, 너의 입술은 독이 가득 든 벌침 너의 심장은 온실 없는 정원에서 생강뿌리를 갉아먹다 지친 재색 쥐 추문을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너는 왜 자꾸 감사 싹을 잘라 버렸을까 살인도 저지를 수 있는 새들의 독감이 유행하던 날들이었다 쌀쌀한 날씨 때문에 서로에게 달라붙어 있는 그러나 서로를 미워하는 멧새들에게 우리는 사랑했지 결말은 언제나 천둥이 치더니 장대비가 내리고 무지개가 떴다는 식이지 일본식으로 드디어 에도시대도 저물었군, 하고 중얼거릴만한 낭만적 시절이 우리에게도 있었던가 갈대 사이로 불던 바람이 도시의 사람들 사이에도 분다 그러나 바람은 가을의 화환을 묶다 말고 사라진다 한밤중 달을 보고 짖는 개의 그리움과 무리를 쫓아가지 못한 병든 기러기의 노래를 입술에 담고 가을이 지난간다       꽃 / 안시아     점점 한쪽으로 짙어지는데 어떤 色이냐고, 사람들이 캐물었다 계절을 함구하고 있었으므로 시들지 않았다 그림자에 낡은 햇살이 얹히고, 연애는 말라비틀어진 비누처럼 더 이상 거품이 나지 않았다 잎들은 무성하게 자라고 가지들은 과묵하게 뻗어나갔다 내부가 고요해질수록 화분 틈으로 뿌리가 드러났다 저녁은 지루한 음계의 도돌이표, 두 세 겹 씩 창문을 닫았다 色을 가지자 무늬가 되어 읽혔다 어떤 날은 만성이 된 노을이 기웃거렸지만 향기만 단속하면 그만이었다 오래 신었던 흙을 벗고 계절을 걷다가 울다가 뛰다가 바람이 되고 싶었다 아무 것도 시들지 않는 동안 도무지 난 살아있었다       멜랑콜리호두파이 / 황병승     배가 고파서 문득 잠에서 깨어났을 때 꿈속에 남겨진 사람들에게 미안했다 나 하나 때문에 무지개 언덕을 찾아가는 여행이 어색해졌다   나비야 나비야 누군가 창밖에서 나비를 애타게 부른다 나는 야옹 야아옹, 여기 있다고, 이불 속에 숨어 나도 모르게 울었다 그러는 내가 금세 한심해져서 나비는 나비가 무슨 고양이람, 괜한 창문만 소리 나게 닫았지   압정에, 작고 녹슨 압정에 찔려 파상풍에 걸리고 팔을 절단하게 되면, 기분이 나쁠까   느린 음악에 찌들어 사는 날들 머리 빗, 단추 한 알, 오래된 엽서 손길을 기다리는 것들이 괜스레 미워져서 뒷마당에 꾹꾹 묻었다 눈 내리고 바람 불면 언제가 그 작은 무덤에서 꼬챙이 같은 원망들이 이리저리 자라 내 두 눈알을 후벼주었으면.   해질녘, 어디든 퍼질러 앉는 저 구름들도 싫어 오늘은 달고 맛 좋은 호두파이를 샀다 입 안 가득 미끄러지는 달고 맛 좋은 호두파이, 뱃속 저 밑바닥으로 툭 떨어질 때 어두운 부엌 한편에서 누군가, 억지로, 사랑해...... 라고 말했다.       사라진 입들 / 이영옥       잠실방문을 열면 누에들의 뽕잎 갉아 먹는 소리가 소나기처럼 쏟아졌다 어두컴컴한 방안을 마구 두드리던 비, 눈 뜨지 못한 애벌레들은 언니가 썰어주는 뽕잎을 타고 너울너울 잡들었다가 세찬 빗소리를 몰고 일어났다 내 마음은 누가 갉아 먹었는지 바람이 숭숭 들고 있었다   살아있는 것들이 통통하게 살이 오를 동안 언니는 생의 급물살을 타고 허우적거렸고 혼자 잠실 방을 나오면 눈을 찌를 듯한 환한 세상이 캄캄하게 나를 막아섰다 저녁이면 하루살이들이 봉창 거미줄에 목을 메러 왔다 섶 위의 누에처럼 얕은 잠에 빠진 언니의 숨소리는 끊어질 듯 이어지는 명주실 같았다   허락된 잠을 모두 잔 늙은 누에들은 입에서 실을 뽑아 제가 누울 관을 짰지만 고치를 팔아 등록금으로 쓴 나는 눈부신 비단이 될 수 없음을 알았다 언니가 누에의 캄캄한 뱃속을 들여다보며 풀어낸 희망과 그 작고 많은 입들은 어디로 갔을까 마른고치를 흔들어 귀에 대면 누군가 가만가만 흐느끼고 있다 생계의 등고선을 와삭거리며 종종걸음 치던 그 아득한 적막에 기대   ////////////////////////////////////////////////////////////////// 시와 시인, 그리고 독자들 / 박제천 시란 무엇인가. 여기 대해서는 역사 이래로 수많은 답이 마련돼 있다. 그 답안을 읽는 일은 어찌 보면 시문학사 전체를 섭렵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시인된 자는 거의 누구나 이 질문에 매력을 갖고, 자문자답해 보기 때문이다. 하늘의 성좌도를 바라보듯, 그 답안들은 시인 각자의 개성만큼이나 휘황하게 빛난다. 그렇구나 하고 무릎을 칠 만한 답안도 있고, 그 답안을 화두 삼아 하염없이 빠져들 만큼 황홀한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제까지는 그 수많은 답안 중에서도 엘리엇이 말한 ‘시에 대한 정의에는 정답이 없다는 정의’가 가장 고전적인 모범 답안으로 꼽힌다. 시인들은 누구나 시란 그 무엇이 아닐까 궁리하고, 거기서 얻은 깨우침을 한편의 시로 써나간다. 다시 말해 시인들은 평생에 걸쳐 그들이 찾아 헤매고, 꿈꾸며 느끼고 깨우치는 시를 써나간다. 작품 한편 한편이 그 순간 순간 시인이 찾아낸, 시에 대한 최선의 정의라 할 수 있다. 사정이 이러하니 시에 대한 누군가의 특별한 정의에 시인 모두가 동의한다는 것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희망이 아니겠는가. 이 때문에 엘리엇의 정의는 시를 쓰고자 하는 시인들, 시란 무엇인가 궁금증을 참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최상의 화두로 남아 있다. ‘시에 대한 정의에는 정답이 없다는 정의’로 요약된 이 모범 답안은 대체로 시인들을 만족시키고 있지만 일반 독자로서는 아쉽기 그지없는 답안이다. 다시 말해 시에 대한 전문적인 정의이기에 다만 시가 무엇인지 궁금한 일반 독자의 궁금증까지 채워주지는 못한다. 시의 정의에 관한 독자용의 해답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지만 시가 무엇이고, 시를 읽으면 무엇을 배우거나 즐기는지, 무엇을 얻거나 깨우치는지 알고 싶어하는 단순한 독자들의 궁금증은 여전히 문제로 남아 있게 마련이다. 이 문제를 단번에 해소시킬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논리상으로는 거의 불가능하지만 어쩌면 시인들이 자신의 시에 대해 솔직하게 정의를 내린 몇몇 작품들 중에 그 해답이 있을 수는 있다. 실제로 나는 처음 시를 공부할 때 시의 정의에 대한 내 목마름을 해갈시켜준 작품을 만났었다. 뿐만 아니라 40여 년 시를 쓰고 읽으면서 아, 시란 이런 것이구나 하고 섬광처럼 지나쳐가는 시의 비의에 황홀해 한 적이 적지 않았다. 생각지도 못했던 먼 먼 아지랑이 너머 상상의 세계에서 날아와 가슴 속에 내려앉고 이내 하얀 뿌리를 내려 가슴의 진액을 빨아들이며 잎과 꽃을 피우고 나를 허무로 앓게 하고 몸져 눕게 하는 저것 …후략… ―문효치, 「시」 문효치의 ‘시’는 어느 날 갑자기 시인의 가슴에 날아드는 것이다. 시인이 생각지도 못했던 미지의 생명체는 상상의 세계에서 날아와 시인의 가슴에 뿌리를 내리고, 시인의 진액을 다 빨아들여 마침내 시인을 몸져 눕게 한다. 시에 시달려본 시인이면 누구나 공감할 만한 작품이다. 시인의 손에 닿을 듯 닿을 듯 감질만 내는 작품, 시인이 좇아가면 도망쳐버리고, 시인이 포기하면 다시 달려들기에 시는 많은 시인들에게 ‘시마(詩魔)’라 불리우기도 한다. 시를 쓰고 싶은 열망에 비례해 써나갈수록 깊어지는 상실감과 자괴감에 몸을 망친 시인이 얼마나 많은가. 한 일년 시를 잊어버리면 몸이 날아갈 듯 가뿐해지고 머리가 시원해지지만, 시를 완전히 잊었는가 싶으면 어느새 다시 찾아와 시름시름 앓게 하는, 마치 무당병처럼 평생 떨쳐버리지 못하는 것이 시인의 천형(天刑)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시가 이렇듯 시인을 괴롭히기만 한다면 어느 누가 시를 쓰겠는가. 잘 나오는가 안 나오는가 그대의 이름을 써보네 만년필을 고르면서. 가느다란가 굵다란가 나의 이름을 적어보네 시라고 써보네. 새 만년필로 시 한 편 잘 써서 지갑에 넣네. ―윤제림, 「시인의 사랑」 시는 어느 날 만년필을 고르면서 무심히 써보는 그대의 이름, 새 만년필로 써보는 나의 이름이기도 하다. 우연히 샘솟아 오르는 그리움이자 새롭게 설레는 마음이자 누구에게 보여주기보다는 가슴 속 지갑에 잘 갈무리해두는 사랑이기에 시인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또 한편의 시를 쓰고 있을 것이다. 이 때문에 시인들은 잠에서 깨어나면 문득 육신과 자연의 어둠이 걷혀가는 신새벽을, 그 처음의 순간을 기록하고 싶어한다. 신새벽, 그 처음의 순간을 기록하고 싶다 벌이 날아드는 그 순간, 꽃의 열림을 새가 날아오르는 그 처음의 날갯짓을 그러나 내게 보이는 건 오로지 상처받고 묶이고 갇힌 사람들뿐 저들을 보며 나는 깨닫는다 나는 결코 새벽, 새, 벌 따위의 시를 쓸 수 없다는 걸 ―제임스 매슈, 「시」 꽃이 제 몸을 열어보이는 그 순간을, 새들이 비상의 몸짓을 보여주는 그 처음의 날갯짓을, 시인은 기록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마음의 한쪽에는 사람의 세상에서 상처받고 묶이고 갇힌 사람들이 살아 있기에 시인은 시인이 살고 있는 이 세상을 온몸으로 껴안지 않을 수가 없다. 그렇지만 세상은 때로 그러한 시인을 사람이 사는 세상에서 내칠 때도 많다. 사람들은 서로 소통하기를 원하지만, 마음과 달리 소통의 손길이 불화의 발길질로 바뀌기도 한다. 사람은 누구나 홀로이다. 그래서 어떤 시인은 사람을 섬으로 보고, 사람과 사람 사이를 바다로 본다. 지하철 정거장의 군중 속에서 홀연히 나타난 얼굴들을 보면서 “검은 가지위의 꽃잎”으로 느끼기도 한다. 누군가 내게 물었다 늙마에 애인이 있느냐고 나는 애인이 수도 없이 많다고 대답하였다 그 비결을 일러 달라기에 마음이 끌리면 주저없이 눈을 맞추고 눈이 맞으면 그 자리에서 한 몸 한 마음이 되는 것이라고 일러주었다 비결이 신통치 않았던지 혀를 끌끌 차며 재주가 없어서… 어깨가 축 늘어지더군 그래서 시를 읽어보라고 권하였다 시경 이래로 시인이란 자들은 하늘의 별님 달님은 물론 풀이나 나무, 하늘 아래 움직이는 것들, 심지어는 바닷속의 물고기까지 이름을 지어주고, 입 맞추고 껴안고 춤추면서 한 몸 한 마음이 되지 않았던가 백석이 갈매나무와 눈 맞추고 기림이 나비와 입 맞추고 미당이 달과 한 몸 한 마음이 되는 그 방법을 배우라고 하였다 배워서 되는 일은 아니겠지만 한겨울 눈 내리는 벌판이라도 껴입은 입성 훨훨 다 벗어던진 맨몸, 맨마음이라면 왜 눈과 눈이 맞지 않겠는가. ―박제천, 「두번째 詩論 ―애인」 사람이 사람과 따듯하게 만나는 데에도 기술이 필요하다. 한 몸 한 마음이 되지 않으면 사람은 물론 자연이며 자연의 어느 생명체조차 가슴에 받아들이지 못한다. 시라 해서 다를 바가 없다. 시란 바로 사람들의 삶이며 사랑이며 추억이며 죽음이며 운명, 헤어짐과 만남, 그리움과 외로움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시란 바로 그러한 사람들의 기록을 미학적 장치로 바꾸어 줌으로써 독자 또한 시인과 함께 시의 그 비밀한 뜻과 향기를 가슴 가득히 채울 수 있는 것이다.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시가 뭐냐고 나는 시인이 못됨으로 잘 모른다고 대답하였다, 무교동과 종로와 명동과 남산과 서울역 앞을 걸었다. 저녁녘 남대문 시장 안에서 빈대떡을 먹을 때 생각나고 있었다. 그런 사람들이 엄청난 고생 되어도 순하고 명랑하고 맘 좋고 인정이 있으므로 슬기롭게 사는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알파이고 고귀한 인류이고 영원한 광명이고 다름아닌 시인이라고. ―金宗三,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의 평범한 진술은 그 ‘누군가’의 해석조차 천 갈래 만 갈래로 나뉠 수 있는 상징성을 지님으로써 비범한 의미로 전환된다. “시가 뭐냐고”에 누가 대답할 수 있으랴. 시인은 결코 그 대답을 할 수가 없다. 시인의 답은 그 누구라도 같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나 같은 대답을 찾기 위해서 그는 차라리 시인이기를 거부한다. 그 대답은 오직 빈대떡을 먹는 사람들, 바로 독자의 가슴과 가슴이 닿는 곳에 있었던 것이다. 바다속에서 전복따파는 濟州海女도 제일좋은건 님오시는날 따다주려고 물속바위에 붙은그대로 남겨둔단다. 詩의전복도 제일좋은건 거기두어라. 다캐어내고 허전하여서 헤매이리오? 바다에두고 바다바래여 詩人인것을 ―서정주, 「詩論」 결론하자면, 미당 서정주는 시란 “님 오시는 날 따다주려고 바다 속에 남겨 놓은 제일 좋은 전복”이라고 제주 해녀를 빗대어 말한다. 그 좋은 시를 ‘바다 속에 두고서, 바다를 바래는’ 것이 시인의 운명이라고 말한다. ‘다 캐어낼 수‘도 없지만, 아끼고 아끼는 그 마음이 시라는 생각은 공자의 ‘시즉절(詩卽切)’, 쓰고 싶은 것 중에서도 ‘가장 절실한 것이 시’라는 생각과 맥이 닿아 있다. 그러나 시란 무엇이고, 시를 통해서 우리는 무엇을 얻는가, 그와 상관없이 나는 오늘 또 한편의 시를 무심히 써나갈 것이다. =========================================================================================   218. 상사 / 김남조                        상사 想思                         김 남 조   언젠가 물어 보리   기쁘거나 슬프거나 성한 날 병든 날에 꿈에도 생시에도 영혼의 철삿줄 윙윙 울리는 그대 생각, 천번 만번 이상하여라 다른 이는 모르는 이 메아리 사시사철 내 한평생 골수에 전화電話 오는 그대 음성,   언젠가 물어 보리 죽기 전에 단 한 번 물어 보리 그대 혹시 나와 같았는지를     김남조 시집 중에서   ------------------------------------------------------------ 219. 참회 / 김남조                            참회                             김 남 조   사랑한 일만 빼곤 나머지 모든 일이 내 잘못이라고 진작에 고백했으니 이대로 판결해다오   그 사랑 나를 떠났으니 사랑에게도 분명 잘못하였음이라고 준열히 판결해 다오   겨우내 돌 위에서 울음 울 것 세 번째 이와 같이 판결해 다오 눈물 먹고 잿빛 이끼 청청히 자라거든 내 피도 젊어져 새봄에 다시 참회하리라     김남조 시집 중에서    
1010    詩를 보면 詩人을 알것 같은, -시의 문을 두드려라... 댓글:  조회:4396  추천:1  2016-01-19
  ​ 원룸 속의 시인들   이병철       1990년대 온라인 문화는 홈페이지가 주도했고, 2000년대는 ‘미니홈피’의 전성시대였다. 그리고 바야흐로 SNS 시대가 활짝 열렸다. 디케이드(decade)가 거듭될수록 온라인 세계를 장악하는 웹 공간의 부피와 무게가 가벼워졌다. 90년대 홈페이지를 떠올려보면, “이 홈페이지는 무엇에 대해 소개하는 곳으로 어떤 내용들을 담고 있으며……” 따위의 ‘홈페이지 소개’가 반드시 있었다. 사상이나 세계관이 곧 공간의 성격을 규정했다. 개별화된 공간이지만 거기 사는 개별자는 드물었다. 대부분 보편자로서 다른 보편자들과 공유할 수 있는 주제를 들여놓았다. 개인의 일상이나 생활 정보 같은 것들이 들어올 자리가 없었다. 사소한 소품은 손님들에게 환영 받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개인 홈페이지를 갖는다는 것은 요즘의 내 집 마련처럼이나 쉽지 않은 일이었다. 홈페이지를 만들어 운영할 줄 알면 능력자였다. 아무나 만들 수 있는 것도, 아무 내용이나 막 담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말하자면 홈페이지는 앙코르와트나 이구아수 폭포 같은 관광 명소의 역할을 수행해야 했다. 근사하고 멋진 것, 지적인 것, 보편감동과 공감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이어야 했다. 홈페이지처럼, 우리 시도 그랬다. 모더니즘, 리얼리즘, 해체시 등 뚜렷한 ‘대문’을 통해서 시의 공간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   2000년대에 미니홈피가 등장하면서 모든 사람이 개인 홈페이지를 갖게 됐다. 똑같은 크기와 형태의 보급형 주택이 날개 돋친 듯 분양되자 무겁고 뚱뚱한 기존의 홈페이지는 거의 옛 유적이나 보기 드문 고택으로 취급받았다. 모두가 홈페이지를 가지니 홈페이지는 더 이상 감탄과 경외의 대상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동일한 프레임의 사진첩과 일기장에 저마다의 일상과 생각을 담으며 보편자들 속의 개별자들로 서기 시작했다. 인터넷 세상에 ‘개인’이 침투하자 그간 잠복돼있던 관음과 노출의 욕망들이 ‘파도’로 밀려왔다. 모두들 남의 집을 열심히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방문자 수를 올리기 위한 거짓과 허세가 횡행하기도 했다. 여전히 ‘무엇’을 담고 있느냐가 중요했지만, 개인의 내밀한 일상보다는 그래도 다수가 누릴 수 있는 콘텐츠가 환영받았는데, 진지함보다는 가벼움, 얌전보다는 파격과 엽기가 주를 이뤘다. 그 과정에서 텍스트와 서사가 저물고 이미지와 캐릭터가 부각됐다. 미니홈피의 시대에 등장한 ‘미래파’ 시인들은 시에 파격과 엽기, 또 ‘미니룸’처럼 다채롭고 환상적인 시공간을 들여놓았다. 그 안에서 시인들의 퍼스나는 다양한 ‘아바타’로 형상화됐다. 새롭고 낯선 시적 퍼스나들이 수많은 아바타로 쏟아져 나왔다. 사람들은 ‘파도타기’로 일촌과 일촌의 일촌을 왕래하듯 ‘미래파’라는 파도를 타고 황병승에서 김민정으로, 김민정에서 이승원과 유형진으로 넘나들었다. ​   그리고 마침내 SNS 시대가 열렸다. ‘심플’과 ‘슬림’으로 2000년대를 장악한 미니홈피는 이미 무겁고 둔한 인터페이스가 돼버렸다. 트위터와 페이스북은 미니홈피에서 ‘일기장’만 분리되어 나온 형태다. 단독주택(홈페이지)과 아파트먼트(미니홈피)의 시대를 지나 이제는 원룸이다. 생활에 직접 연관된 최소한의 것들만 들일 수 있으므로 공간이 곧 그 사람을 나타낸다. 그러나 홈페이지 시대처럼 사상이나 세계관과 결부되지 않는다. 그저 구체적이고 내밀한 일상과 취향에 대해서다. 긴 글이나 지나친 진지함은 환영받지 못한다. 단순히 관심을 끌기 위한 그로테스크와 엽기도 마찬가지다. 꾸밈없는 일상의 기록, 구체적인 감정의 결, 짤막하지만 재치 있는 유머 따위가 사람들의 호응을 얻는다. 원룸의 주민들은 단독주택처럼 대문을 세우고 정원을 꾸밀 수 없다. 서재나 응접실을 따로 둘 수도 없다. 아파트먼트처럼 ‘단지’나 ‘반상회’ 같은 연대단위로 묶일 수도 없다. 사상을 나타내거나 서로 연대할 수 있는 인프라가 아예 구축되지 않으므로, 이제 사람들은 자신의 일상과 취향 말고는 내보일 것이 따로 없는, 철저한 개별자들이 되었다. ​   2000년대 시인들은 그래도 ‘미래파’라는 아파트먼트에 공동 입주할 수 있었는데, 2010년대 젊은 시인들은 개별화된 공간의 개별자들로서 원룸에 거하고 있다. 특별한 문제의식이나 사상, 실험적 태도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요즘 젊은 시인들에게 겨누어진 비판의 칼끝이다. 그런데, 시대를 주도하는 어떤 경향이나 담론이 없다는 것에서 오히려 다양성이 움튼다. 2010년대 젊은 시인들의 원룸은 단독주택처럼 웅장하지도 않고, 아파트먼트처럼 세련되지도 않다. 바꿔 말해 근대적 이데올로기에서도 자유롭고, 동일한 범주로 묶일만한 일률적인 (몰)개성도 아니라는 것이다. 지나치게 진지하지도 않고, 전위라 할 만한 파격도 없다. 그러면서 서로 닮아있지도 않다. 문학적 가치를 떠나, 나름대로 다양하다. 그래서 2010년대 시인들의 원룸을 들여다보는 일은 즐겁다. 이를테면 황인찬은 이케아 가구로 여백을 부각시킨 방이고, 이혜미는 까사미아 앤틱 가구를 들여놓은 방이다. 박준은 80~90년대 풍의 하숙집이고, 이제니는 후크송이 재생되는 클럽, 유병록은 내셔널지오그래픽 채널을 종일 틀어놓은 방이다. 방을 보면 사람을 알 듯 시를 보면 시인을 알 것 같다.   무기명으로 받은 소포들이 쌓이고 있었지. 계단, 계단들처럼. 나는 무릎을 끌어안고 계단 속 발자국 소리를 듣고 있었지. 서표, 읽지도 않은 책에 꽂아둔 서표들처럼.   처음 나랑 잔 애인은 누구였지. 난간에 기대니 계단은 풀어지는데. 소포 속 발자국 소리가 미끄러질 때마다 계단은, 계단을 지워내는데. 묻고 싶다. 하룻밤 애인이 있긴 있었니.   애인들은 일제히 고무줄을 끊고, 어둠이 튕겨 나갈 땐 술을 끊고, 나는 손톱을 기르고 있었지. 내가 울었어, 내가 울릴 거야. 자꾸 브래지어는 부드러워졌지.   클럽에서 처음 본 애인들은, 언제나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이었지. 내 손은 분주했지. 많아졌지. 나쁜 것은 헤프도록 헤프게. 애인 아닌 것들만 가끔 물었지. 내 진짜 이름은 뭐냐고.   미친 것! 난 이미 실명을 밝혔다구.   무기명으로부터 달아날 때마다 소포들은 쌓였지. 계단은 부풀어 오르다 빵빵 터지기도 했지. 처음 본 애인들에게 전화를 걸어보지.   나야 나!   실명을 밝힐 때마다 나는 계속 반송을 당했지. 계단이 쌓인 순서조차 기억이 없지 나는 진짜 애인에게 전화를 걸어보지.   나야 나! ― 황종권, 「무기명 애인」 (《시와세계》봄호)     이제 시인들은 SNS 글쓰기처럼 시를 쓴다. 시의 형식과 언어로 SNS를 한다. SNS가 원룸인 것처럼 시도 원룸이다. 시에다 원룸을 들여놓고 거기에 지극히 개인적이고 내밀한 사담들, 구체적인 에피소드, 다양한 감정들을 직설적으로 집어넣는다. 위 시에서 화자는 시인일 것이다. 시인 자신의 체험을 시로 옮긴 것 아니고서야 나타날 수 없는 구체성이다. 시인은 자기 일상과 연애사를 꾸밈없이 펼쳐 보인다. 어떤 사상이나 세계를 향한 문제의식 대신, 개인의 욕망이 있고, 개인을 둘러싼 사회적 관계에 대한 통찰이 있다. 시인은 캐릭터나 이미지 뒤에 숨어서 진술하지 않는다. 이것이 SNS 시대의 젊은 시인들이다. ​   관공서와 통신사 등 제도권의 우편물이 잔뜩 쌓인 반지하 원룸, 거기 “실명을 밝힐 때마다 계속 반송을 당”하는 청춘이 산다. 아직 ‘이름’을 얻지 못한 젊은 시인의 초상이다. 비록 좁은 방이지만 나름의 인테리어로 자신의 개성과 취향을 표현해놓았는데, 와서 머무는 이가 없다. 오늘도 젊은 시인은 솔직한 감정과 구체적 일상이 있는 원룸 안에서 당신을 기다린다. 당신은 휴지와 주스를 들고 가 기꺼이 문을 두드려주겠는가? ​ ​
1009    미래파 시인들과 다시 보는 李箱, 그리고 白石 댓글:  조회:4656  추천:0  2016-01-19
          "...나는 이곳에서 외롭고 심히 가난하오. 오직 몇몇 장 편지가 겨우 이 가련한 인간의 명맥을 이어주는 것이오..."                                     : 일본 동경에서 이상이 김기림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2000년대 이후 나타나는 문학적 흐름들, 가령 장석원이나 황병승, 김민정 등의 시인들이 보여주는 시적 실험들은 대체로 ‘전복, 부정, 해체, 반항’ 등의 수식어와 함께 논의된다. ‘자아와 세계의 동일성’으로 요약되는 근대적 세계관(혹은 서정의 문법)을 극복하기 위한 사상의 모색과 예술적 실천으로서 그들의 작업은 분명 긍정적이지만, ‘근대의 초극’에 대한 갈망이 1930년대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2000년대의 이른바 미래파 시인들이 보여주는 시적 실천의 대부분은 새로운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낡은 것의 반복일 수 있다. 게다가 어떤 면에서는 1930년대의 이상이나 백석에 의해 성취된 정신적 높이에도 다다르지 못한 채 허공에서 부유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사실이 우려스럽다. 이것은 단순히 문학과 정치의 문제를 새롭게 사유한다고 해서 해결될 일은 아닐 것이다. 새로운 시인들이 그저 아름다움의 유토피아에 갇혀 ‘홀로’ 있다는 식의 비판은 아주 오래된 비판의 한 방법일 뿐이다. 진리와 혁명의 ‘불가능성’에 함몰되어 있다는 비판 또한 사실, 크게 다르지 않다.   그들의 한계는, 불행은 혹 다른 곳에 있는 것은 아닐까. 물론, 좀 더 생각해보아야 하겠지만, 현재의 시단에서 나타나는 시적 방법과 정신적 사유들은 너무 ‘단절’에만, ‘혁명’ 따위의 어휘에 포함되어 있는 부정과 대립과 갈등, 전복, 해체, 파괴 등에만 스스로를 가두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근대의 초극을 위한 이러한 방식들은 이미 이상(우리에게 알려진)에 의해서 충분히 사유되었다. 기교와 절망의 그 무한하고 허망한 순환에 대해 토로한 것도 이상이다.   그런 점에서 2000년대의 미래파 시인들이 스스로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이상을 다시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그가 기교(즉, 해체)의 악순환에서 벗어나기 위해 원시성(근원적인 무한)의 세계를 탐구하였듯이 새로운 시인들 또한 그러한 가능성을 탐색해야 하지 않을까?   해체라는 방법을 사용하지 않고서도 새로운 세계를 창출할 수 있는 시 형식과 정신을 사유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현재의 시인들이 탐닉하고 있는 ‘해체’에 대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들의 예술적 한계에 대한 여러 비평들은 오히려 그들의 ‘한계’에 대한 장막(帳幕)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총체적인 문제를 다시 숙고해야 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닥’이다. 2000년대 시인들의 근원적인 바닥에 가닿아야만 한다. 이는 이상이라는 거대한 시인의 그 은밀한 심연에 가닿는 일이기도 하다.   그리고 백석을, 떠올려야 할 것이다. 백석이야말로 이상과는 또 다른 방식으로 동일한 지점을 탐구한 시인이며, 어떤 면에서는 더 높은 지점까지 나아간 시인이라고 할 수 있다.      ‘자기모순, 역설적 상황, 이중부정, 이중구속’ 따위와는 다른, 그리하여 존재의 비명이니 불가능성이니 하는 ‘공통된’ 수식에서 벗어나는 방식. 여기에 시인들의 돌파구가 있지 않을까?...
1008    시, 시인, 그리고 그 가족들 - 이육사시인 형제들 댓글:  조회:7331  추천:0  2016-01-18
가족 이야기- 시인 이육사의 딸 李沃非 "아버지는 위대한 시인이었으나 우리 집은 몰락해"       〈청포도〉 〈광야〉 〈절정〉의 시인 이육사(李陸史·1904~1944)의 딸 이옥비(李沃非·75) 여사를 만나러 경북 안동으로 향했다. 새벽 눈발이 날린 국도를 시외버스가 엉금엉금 기어갔다. 도산서원을 지나 ‘땅재’를 가까스로 넘은 버스가 다다른 마을이 안동 도산면 원천리. 육사가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 가는 시절’이라 노래한 마을이다. 저 눈이 녹으면 어딘가 알알이 익어 가는 청포도가 있을지 모를 일이다. 문득 감정이 벅차 올랐다.     눈 덮인 ‘이육사문학관’을 50m가량 내려와 ‘목재(穆齋) 고택’에서 여사를 만났다. 이 고택은 조선후기 문신(文臣)이자 퇴계(退溪) 후손인 목재 이만유(李晩由·1822~1904) 선생이 살던 집이다. 고택 아래 펼쳐진 겨울 들판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미음자 한옥의 자그마한 마당을 가로질러 안채로 들어가 이옥비 여사와 마주앉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우리 집안은 몰락한 집안이었어요. 친구들은 아버지가 투사고 시인이라며 부러워했지만 속으로 지게꾼이라도 좋으니 곁에 계시면 좋겠다고 원망했어요. 삼촌들이 월북(越北)하고 집안에 피해가 많았어요. 연좌제 때문에…. 아버지나 삼촌의 흔적을 찾고 싶었지만 행여 어린 아이들에게 해(害)가 될까 봐 침묵했어요. 그렇게 세월이 흘러 지금까지 왔어요.”   목재 고택 앞 〈청포도〉 詩碑.   육사는 6형제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첫째 원기(源祺), 둘째 원록(源祿), 셋째 원일(源一), 넷째 원조(源朝), 다섯째 원창(源昌), 여섯째 원홍(源洪)이다. 둘째 원록이 바로 이육사다.     이들 6형제 중 3형제가 일제시대 《조선일보》 기자로 근무했는데 육사가 대구주재, 원조가 본사 학예부 담당, 원창이 인천주재 기자로 활약했다. 형제는 민족의식도 투철했다. 1927년 대구조선은행 폭탄사건이 터졌을 때 첫째 원기부터 넷째 원조까지 대구형무소에 수감됐다. 다섯째와 여섯째는 너무 어려 잡혀가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광복과 6·25를 거치며 셋째 원일과 넷째 원조는 월북했고, 다섯째 원창은 셋째 형을 만나러 북으로 갔다가 소식이 끊어졌다. 황해도 해주에서 폭격을 맞아 숨졌다고 한다. 이데올로기의 이산(離散)으로 육사 집안의 내력은 오래 불문(不問)에 부쳐졌었다.       陸史 집안 내력은 불문에 부쳐져   ‘민족시인’ 이육사의 생전 모습. 왼쪽은 1943년 중국으로 떠나기 직전 친지들에게 돌렸다는 사진. 오른쪽은 1934년 독립운동을 하다 일제에 붙잡혀 찍힌 사진.   이 여사는 아버지 6형제의 우애가 남달랐다고 기억했다. 형제는 용감했고, 정도 넘쳤다. “퇴계 후손들이 다 곱상하게 생겼지만 자존심이 강하다. 잘 안 굽힌다. 삼촌이 우리 집에 오면 유토피아 세계를 들려주셨다”고 말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6·25 전까지 원일·원조·원창이 삼촌이 한 달에 세 번은 우리 집에 오셨어요. 우리 어머니(안일양)를 위로하려고요. 삼촌들이 어머니께 술·담배를 다 가르치셨어요. ‘형수가 아니라 누나’라면서…. 삼촌 주량이 꽤 쌨는데도 나중에는 어머니가 대작할 정도가 되셨어요. 오시면 정치 얘기도 하고, 나라 돌아가는 얘기도 하고…. 어머니도 그런 사상이 머릿속에 박혀 있었나 봐요. 아버지는 아나키스트였다는 생각이 들어요. 형제간 우애가 워낙 좋았으니 사상을 공유했을 겁니다.”     육사가 1944년 1월 16일 베이징 일본총영사과 임시감옥에서 순국할 당시 아내 안일양(安一陽)씨의 나이는 38살이었다. 육사는 1921년 경북 영천이 고향인 안씨와 결혼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평생 흰옷만 입으셨어요. 바느질 솜씨가 좋아 부잣집 침모 노릇을 하며 한 달에 비단 두루마기를 40~50벌 지으셨지만 자신은 무명옷만 입으셨죠. 환갑이 지나시고, 제가 자꾸 권하니까 회색 옷을 입으시다가 나중엔 차츰 옥색도 걸치시긴 했어요.”     이런 일도 있다. 1934년 육사와 정치군사간부학교 1기생 동기인 처남 안병철이 자수한 뒤 1기생들이 연이어 잡혀갔다. 육사도 그해 3월 경기도 경찰부에 구속됐다. 처남이 고문에 못 이겨 자백한 것이다.     “그 일이 있고 아버지가 제 외할아버지, 그러니까 장인과 처삼촌에게 두루마리 편지 6장을 써서 보냈대요. ‘더러운 혈통을 물려받은 딸과 함께 살 수 없으니 데려가라’고요. 우리 집에 와도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문안인사만 하고, 잠은 집 근처 여관에서 주무셨어요. 무려 7년 동안이나요. 우리 어머니 참 마음고생이 많으셨어요. 아버지가 워낙 강인하시니까…. 어머니는 하도 수치스러워 여러 번 목숨을 끊으려 하셨대요. 할머니가 말리지 않았다면 살 수 없었어요. 고부(姑婦) 사이가 그렇게 좋으셨어요.     아버지 같은 분이야 모진 고문도 다 이겨낼 수 있었지만 외삼촌(안병철)은 힘이 드셨을 거예요. 외삼촌은 배우를 하면 딱 맞을 분이셨어요, 젊었을 때 무대에서 ‘아리랑’ 공연도 하셨대요. 그 일이 있고 외삼촌은 제게 미안해하셨어요. 어디 출타하셨다가 돌아오면 꼭 제게 선물을 사 주셨어요. 처음 두 분의 관계를 몰랐다가 중2 때 처음 알았어요. 큰 충격이었습니다.”       李活, 大邱二六四, 肉瀉·戮史·陸史   이육사(왼쪽)와 동생 이원창.   —‘저항의 시인’답게 육사는 평생 꼿꼿하게 사셨네요.     형제들은 1927년 조선은행 대구지점에 폭탄 투척을 한 ‘장진홍의거 사건’에 연루돼 6형제 중 4형제나 구속됐다. 1년6개월 형을 받은 둘째 원록의 수인번호가 ‘264’다. 그때부터 자신의 이름 대신 ‘이육사’로 불렸다.     “어린 다섯째와 여섯째 삼촌을 빼고 4형제가 잡혀갈 때 아버지는 그저 ‘사과밭에 서리하러 간다. 놀러간다’고 하셨대요. 그날 대구에선 신문 호외(號外)가 돌고, 일경의 호루라기가 요란할 정도로 사건이 컸다고 해요. 아버지는 붙잡혀서 고문을 당해도 ‘나는 모른다’고만 하셨대요. 돌아가실 때 마지막 작성된 조서에도 ‘나는 모른다, 뭐든지 모른다’고 하셨답니다.”     —아버지의 필명에 대해 들은 게 있나요.     육사의 필명은 여러 개를 썼다. 이활(李活), 대구이육사(大邱二六四) , 육사(肉瀉·戮史·陸史) 등 다양하다.     “이육사라는 필명은 대구형무소에 수감돼 받은 수인번호(264)에서 나왔다고 해요. 어떤 분은 성씨가 ‘이씨’고 수인번호가 64라고 하는데, 전혀 사실과 다른 얘기입니다. 처음 필명을 ‘죽을 육(戮)’ 자를 써서 육사라 썼다고 합니다. 역사가 일제 역사니까 일제 역사를 죽이겠다는 뜻인가 봐요. 그걸 두고 한학자이신 집안 어른이 아버지에게 ‘네 뜻은 가상하지만 그렇게 쓰면 시를 발표하기 전에 잡혀간다. 대신 땅육(陸) 자를 써라. 이 자는 우리 옥편이나 일본 한자사전에 나와 있지 않지만 중국 자전에는 육(戮)자와 같은 의미’라고 하셨대요. 그 뒤로 육사(陸史)를 쓰셨다고 합니다.”     독립운동가를 남편으로 둔 아내의 삶도 고달프긴 마찬가지였다.     “아버지가 요시찰 인물이니까 무슨 일이 터지면 아버지부터 잡아갔대요. 어머니도 덩달아 끌려가 따귀를 맞고…. 순사가 아버지 행방을 추궁해도 어머니는 ‘모른다’고만 하고, ‘그것도 모르냐’고 때리면 ‘소박데기여서 나는 모른다’고 맞섰대요. 한번은 아버지가 체포되자 어머니가 잣죽을 끓여 갔더니 ‘소박데기가 왜 왔냐’며 또 따귀를 때리더래요. 어머니가 ‘비록 소박은 맞았어도 남편이 위급할 때 도리를 다하는 것이 동방예의지국의 예절’이라시며 ‘임부(姙婦) 따귀를 때렸으니 천황에게 고발하겠다’고 엄포를 놓으셨어요. 당시 저를 배셨는데 임부는 때려선 안 된다는 규정이 있었나 봅니다.”     독립운동가를 남편으로 둔 ‘죄’로 육사 아내는 늘 일경에 끌려가 따귀를 맞았고 청상과부로 수절해야 했으나 1984년 사망할 때까지 흐트러짐 없이 당당한 여장부였다는 것이 이 여사의 회고다.       이육사의 조카가 평양시장이 되다?   맏형 이원기가 남긴 간찰.   육사의 형제 이야기를 좀 더 듣고 싶었다. 첫째 원기는 3명의 동생과 함께 대구 조선은행 폭파사건에 주범으로 검거돼 대구형무소에서 가혹한 고문을 당하고 불구의 몸이 돼 종신(終身)토록 고생했다고 한다. 1968년 대통령표창,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됐다. 육사보다 앞서 1942년 순국했다.     1930년 12월 24일 이원기가 보낸 간찰(簡札)이 남아 있는데, 상(喪)을 당한 상대의 안부를 묻고 자신의 동생이 격문(檄文)으로 구속된 정황을 언급했다. 1927년 대구조선은행 폭파사건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리고 흉년으로 부모와 형제가 곤란을 겪고 있으니 도와달라고 부탁한다.     〈… 원일(셋째)은 어제 저녁에 그곳(대구형무소)에서 병을 안고 돌아왔습니다. 돌아온 것은 기쁘지만 병든 것은 놀라워 곧바로 의사로 하여금 증세를 진단하니 증세가 얕지 않다고 합니다. 또 활(活·이육사) 군도 옥살이 하는 속사정을 탐문해 보니 고통당하는 것이 예사롭지 아니하여 감방에서 병들어 누웠다고 합니다. 위독한 것을 생각하면 말하지 않아도 알 만하니 이 무슨 사람의 일입니까? …〉   경주 불국사에서 친지들과 함께 찍은 사진. 왼쪽 끝이 맏형인 이원기이고 오른쪽 앞에 앉은 이가 이육사다.   이 여사의 말이다.     “큰아버지도 글이 좋으셨대요. 남겨진 글들이 지금도 간혹 나오고 있어요. 슬하에 2남3녀를 두셨는데 장남이 이동영(李東英·작고) 부산대 명예교수입니다. 큰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큰어머니와 사촌들하고, 대구 삼덕동 한집에서 같이 살았어요. 우리 집은 밥 먹는 식구가 언제나 스물이 넘었어요. 대구 살 때 주소가 삼덕동 88번지였는데 다들 ‘88여관’이라 불렀지요.”     —셋째 원일씨 가족 얘기를 들려주세요.     “셋째 삼촌은 그림을 잘 그려 서화가셨다고 해요. 숙모님이 단계(丹溪) 하위지(河緯地·1412~1456) 가문이셨는데 6·25 전에 돌아가셨어요. 슬하에 남매를 뒀는데 사촌언니 동탁이는 정말 재주가 좋았대요. 7살 때 가사를 썼어요. 돌이켜 생각하면 그때 가사 두루마리를 보관하지 못한 것이 안타까워요. 제가 두 돌 지나고 어머니가 병에 걸려 격리치료를 받느라 저를 그 집에 맡기셨는데, 언니가 저를 두루마기까지 해 입혔대요. 9살짜리가 말이죠. 그렇게 재주가 좋았는데 장질부사 앓다가 시름시름 죽었어요.     동선이 오빠는 아버지(원일)를 찾으러 혼자 북으로 가셨대요. 그분이 북에서 자신을 ‘육사 아들’로 소개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주위 사람이 ‘육사가 젊은시절 중국을 많이 오갔으니 아마 그때 혈맥을 떨어뜨렸나 보다’고 생각했다고 해요. 동선이 오빠는 나중 김일성대학을 나와 평양시장이 됐다는 얘기가 있어요. 옛날 허흡(許洽) 대구시장도 그런 얘기를 들었다고 하는데, 확인할 길이 없어요.”     이 여사는 “원일이 삼촌은 남로당 활동을 하다가 월북한 뒤 6·25가 나고 조선노동당 재산담당 직책을 맡아 남한으로 내려왔다는데 고향인 안동까지 오진 못했다고 들었다”고 했다.       덕혜옹주 6촌동생과 결혼한 이원조   《조선일보》 학예부 기자였던 이원조.   넷째 원조는 일제시대 ‘냉혹한 비평가’로 당대에는 이육사보다 더 유명했다. 1935년 일본 호세이대(法政大) 불문과를 나와 《조선일보》 학예부 기자로 활약했다. 당대 내로라하는 문인들에게 혹독한 비평을 가해 그의 펜은 화제가 됐다. 그는 광복 후 좌파 문학단체인 문학가동맹의 일원으로 임화·김남천·설정식과 함께 박헌영(朴憲永)을 따라 1946년 월북했다.     “셋째 삼촌은 조부에게 한문을 배우고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 문하에도 들었는데 위당께서 ‘장안(長安) 3재(才)의 1인’으로 꼽았을 정도로 똑똑했다고 해요. 당시 명망 높으셨던 이관용(李灌鎔)의 따님과 결혼(주례 조병옥 박사)했어요.”     이관용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파리위원부의 부위원장으로 김규식 등과 함께 활동했다. 학부대신 이재곤(李載崑)의 손녀인 이정원(李貞媛)과 이원조의 결혼은 ‘국혼(國婚)’이었다.     “넷째 숙모님은 덕혜옹주의 6촌 동생이셨는데, 슬하에 딸 셋을 데리고 남편을 찾으러 월북하셨어요. 왕족이었으나 현대여성처럼 서글서글하게 생기셨대요. 큰애 이름이 혜정이고 둘째가 정소, 셋째 이름은 기억이 안 나요. 원조 삼촌은 1955년 옥사(獄死)했다는데 숙모님도 따라 숨졌다고 해요. 아마 자손이 북한에 남아 있을 겁니다.”     이원조는 비평만이 아니라 1928년, 1929년 연속으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와 소설이 당선될 정도로 문재(文才)가 출중했다.     다섯째 원창은 1940년 《조선일보》가 폐간될 때까지 인천지국 주재기자로 일했다. 폐간호인 1940년 8월 11일자 지방특파원 방담기사에서 “무슨 인연인지 3형제가 본사에 관계한 것은 잊을 수 없는 사실입니다”라고 한 일화가 회자한다. 그는 광복 후 《인천신문》 창간에 참여해 사회부장을 지냈으며 1946년 미(美)군정을 비방했다는 이유로 필화를 겪기도 했다.     “다섯째 삼촌은 조봉암 비서를 지냈다고 하고 이승만 대통령 시절 요시찰 인물이 되었다고 해요. 6·25전쟁 때 셋째 삼촌(원일)을 만나 보고 온다고 이북으로 갔는데 소식이 끊어졌어요. 해주에서 폭격에 맞아 죽었다고 해요. 원조 삼촌이 조용하고 위트 있는 성격이라면, 원창 삼촌은 호탕했다고 합니다.”     여섯째 원홍은 19살 때 일찍 세상을 떠났다. 이 여사는 “삼촌들이 막내에게 문학을 권했으나 싫어했다”고 말했다.     “문학보다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하셨대요. 원일 삼촌이 어느 미술선생에게 막내가 그림소질이 있는지 1주일만 봐달라고 맡겼는데, 사흘만에 ‘소질이 있다’고 찾아왔대요. 첫 출품한 전국미술대회에 입선으로 당선됐다고 해요. 삼촌들이 모두 모여 빈대떡을 굽고 잔치를 하는데, 갑자기 ‘머리가 아프다’고 했대요. 삼촌들이 ‘니가 흥분해서 체했나 보다’며 등을 두드리는데 쓰러졌대요. 그 길로 돌아가셨어요. 요즘으로 치면 심장마비였다고 합니다.”     이옥비 여사의 이름은 ‘기름져서는 안 된다(沃非)’는 뜻을 갖고 있다. 육사가 손수 지었다고 한다. 이념으로 찢긴 ‘몰락한 집안’을 그녀는 육사가 지어 준 ‘경계의 이름’으로 버텨 왔다. 2007년 육사의 고향에 ‘이육사문학관’이 세워지자 안동에 정착했다.     “삼촌의 사상을 깊이 들여다보면 이해되는 측면도 있어요. 당대 지식인이 그랬듯 공산주의를 유토피아로 보았던 거죠. 그분들이 독립투쟁을 하며 헌신하지 않았다면 오늘의 대한민국이 없을지 모릅니다. 좌우 이념이 경직된 시대에 태어난 것이 불행하고 한스러워요.”⊙ ////////////////////////////////////////////////////////////////////////////////////////////////////////////////////// 매화향기 홀로…" 아버지 정이 더욱 그리워         대구 북구 이육사 문학관 건축현장을 찾은 이육사의 딸 이옥비 여사가 상량문을 작성하고 있다.         시인이자 독립운동가 이육사(1904~1944)의 고명딸 이옥비(75) 씨가 아버지의 흔적을 찾아 대구를 방문했다. 대구가 이육사가 40년 인생 중 절반가량(1920년대~1937년 서울로 이사)을 보낸 곳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 씨는 대구 북성로에 현재 공사 중인 가칭 대구이육사문학기념관에 들러 상량문이 새겨질 대들보에 이육사의 시 '광야'의 한 구절을 직접 적었다. '매화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기념관은 올 연말 또는 내년 1월 16일 이육사의 기일에 맞춰 개관한다. 기념관은 안동에 있는 이육사문학관과 함께 대구에서 유년기와 청장년기를 보낸 이육사의 흔적을 기리는 공간으로 조성된다. 이 씨와 박현수 경북대 교수 등 일행은 이날 이육사의 대구 흔적을 두루 찾는 시간도 가졌다. 서문로교회 자리에는 원래 '실달사'라는 일본 사찰이 있었는데, 그 옆에 이육사의 숙부 이세호의 집터가 있다. 이육사가 16세 때 대구로 와 거처를 찾지 못해 잠시 머문 곳이다. 이육사가 기자로 일했던 계산동 중외일보 대구지국 자리에는 현재 모텔이 들어서 있다. 이육사가 문인 등 사람들을 만났던 달성공원 건너편 조양회관 자리에는 지금 빌딩이 위치해 있다. 이 씨는 "모두 옛 모습을 찾을 수 없다. 조금만 더 일찍 찾아왔더라면 좋았을 텐데…"하며 안타까워했다. 일행은 이후 남산동으로 이동, '대구부 남산정 662번지'라는 이육사의 경찰 신문조서 속 기록이 가리키는 곳을 방문했다. 이육사의 부모와 형제들이 한데 모여 살던 곳이다. 이옥비 씨는 아버지가 젊은 시절 살던 이곳을 난생처음 찾았다. 그러나 미로 같은 골목길 속 굳게 대문이 잠긴 이곳과 주변 주택가는 재개발을 이유로 향후 철거될 예정이다. 오래전부터 이육사의 대구 흔적을 발굴하고 있는 박현수 교수는 “이곳은 대구에 유일하게 실물이 남아 있는 이육사의 흔적이다. 늦었지만 보존 방안이 절실하다”고 했다.   황희진 기자 ▲ 이육사열사의사진과 육사시집    ▲ 감옥살이로 인해 붙여진 이름, 이육사   이육사 열사는 ‘광야’, ‘절정’, ‘청포도’ 등의 시를 남긴 시인이자 독립 운동가로써 초등학교 6학년 사회에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지킨 사람들(홍난파, 김소월, 안익태, 이육사) 중 한 명으로 꼽힌다.    그는 1927년에 방년 23세의 나이로 ‘장진홍의거(10월 18일)’에 얽혀 구속되어 첫 옥살이를 시작하였고, 그 후에도 16회를 더 투옥되어 40세 나이로 북경 감옥에서 옥사하게 되었다.   이육사는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원촌리 881번지에서 1904년 5월18일(음력4월4일)에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이듬해에 일본에 의해 외교권이 박탈당하고, 군대가 해산되고, 고종이 폐위되는 힘든 역사 가운데 어린 시절을 보낸다.    ▲ 이육사열사의 생가 그는 퇴계 이황의 14대손으로 그의 문학적 기질을 조상인 퇴계 학통에서 나왔다고 한다. 그의 고향 안동은 독립운동역사가 처음으로 시작된 곳이며 가자 많은 독립 운동가를 배출한 곳이기도 하다. 특히 원촌은 항일 투쟁사에 우뚝 섰던 마을로써 이육사 열사도 그 영향을 받아 나라를 지켰다.    그의 형제는 6형제로 그 당시 주위에 우애가 깊기로 소문이 자자했다고 한다. 첫 옥살이 때도 첫 옥살이를 함께했다. 그리고 이육사·원조·원창 3형제가 함께 조선일보 기자로 일하기도 했다. 그 시절에는 육사가 ‘이원조의 중형(仲兄·둘째형)’으로 소개될 정도였다. 이원조는 광복 후 죽은 이육사의 시를 모아 ‘육사시집’을 펴냈다.    ▲ 이육사열사의 형제들 (사진=이육사문학관 홈페이지) 이육사 열사의 원래 이름은 원록,원삼,활로 불리웠으나 감옥살이로 인해 붙여진 264를통해 이름을 바꾼 것이 지금 널리 알려진 이름이다.    처음에 육사란 이름을 쓸때  죽일 육(戮) , 역사 사(史) 육사(戮史)라는 뜻을 사용했으나 집안 아저씨인 이영우가 “육사(戮史)는 역사를 죽인다는 표현이니, 혁명을 일으키겠다는 말 아닌가? 의미가 너무 노골적으로 드러나니 차라리 같은 의미를 가지면서도 온건한 표현이 되는 '陸史'를 쓰는게 좋겠다"고 권하여 그의 생애 마지막까지 그 이름으로 숨을 거두었다.   그의 글은 전통적인 요소를 지니면서 일제강점기에 의해 많은 고난과 역경을 겪은 경험으로 여성적 감수성과 대륙적 기상과 남성적 의지로써 광복에 대한 갈망 표현했다... ////////////////////////////////////////////////////////////////////////////////// 육사 고향 안동 원천리 문학관 세워져 애국정신 추모  4살때 여읜 아버지… 포승줄 묶여 끌려가신게 마지막  일본인 용서 어려워… 생가복원·후원회 만드는게 꿈  □ 아버지를 죽인 일본 건너가  현재의 이옥비 여사가 있기까지는 이육사문학관 건립의 뜻을 품은 김휘동 전 안동시장의 끈질긴 권유와 설득 덕분이다.   지금도 이 여사는 이육사문학관을 통해 상·하반기 문학축전을 비롯해, 백일장, 문학기행 등 다양한 문학관련 사업을 활발하게 펼치면서 아버지의 숭고한 뜻을 전하고 있다.  이 여사가 아버지를 잃은 시기는 겨우 4살 때였다. 우여곡절의 시기를 지나 대구여고, 대구여사대 등을 졸업하고 1964년 결혼해 서울로 거처를 옮겼다. 이후 궁중요리 꽃꽂이 등을 공부해 제자를 양성하다가 1999년 나이 예순에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해 남편과 사별한 그녀는 일본 한국총영사관에 근무하면서 일본을 조금씩 배워갔다. 이것이 첫 번째 일본행 이유였다.          ▲ 안동시가 저항시인이자 퇴계 이황의 14세손인 육사 이원록 선생을 기념하기 위해 도산면 원천리에 건립한 이육사문학관. 먼저 그녀는 왜 그토록 아버지를 힘들게 하고 죽게 만들었는지 알아야 했다. 이 여사는 일본을 이렇게 평가했다. “개인적인 일본인은 아주 착실하고 진실하지만 여러 명만 모이면 악독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잦은 지진 등 불안감이 들어서인지 땅에 대한 애착이 우리가 느끼는 것과는 첨예한 차이가 있어 침략과 같은 생각을 자주하게 된 것은 아닐까요”  또 “초상이 나도 형제자매 구분 없이 꼭 필요한 사람에게만 알리는 모습을 보면서 그들의 개인주의가 안쓰럽기도 했습니다”  이 여사는 이런 일본 생활이 아주 힘들고 외로웠지만 2~3년이 지나면서 익숙해졌다. 가슴에 큰 아픔을 지니고 있어서인지 일본인이 가깝게 다가오면 나도 모르게 한 발 뒤로 물러나는 모습을 보게 됐다. 그렇게 일본을 알게 됐지만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신앙적으론 용서하나 이성은 도저히 용서하기 어려울 것 같다고 소회했다. □ 아버지에 대한 기억 그래도 선명  겨우 4살 때 영결했는데도 딸에겐 아버지 육사 기억이 선명한 듯했다. “아버지는 아이보리색 양복을 즐겨 입는 멋쟁이였습니다. 어린 저를 특별히 귀여워하셔서 핑크색 모자, 자주빛 원피스, 주름 넣은 반바지, 구두 등을 사다주곤 하셨지요. 그러던 어느 날 밀짚으로 얼굴이 가려진 채 포승줄에 묶여 어디론가 끌려가신게 마지막이었습니다”  이 여사는 다른 사람을 통해 전해들은 아버지 모습도 전했다. 아버지의 성품이 늘 강직했다는 어머니의 전언도 그 중 하나였다. 원기, 원일, 원조 등 육사의 6형제가 모여 시를 발표하고 논평하는 시회(詩會) 날이면 장원을 가려 서로를 격려하는 등 우애가 깊었다는 얘기도 전해졌다.   학창시절이던 1960년 시인들이 모인 자리에서는 신석초 시인도 아버지의 이야기를 전해줬었다. “너희 아버지는 장안 최고의 신사였던데다 자존심마저 대쪽 같았다. 변장술에 능하고 말을 타고 총을 쏘는 실력은 가히 명사수 수준이었다”는 것이다.          ▲ 이육사의 시를 비석에 새겨 공원화한 이육사시비공원. □ 이옥비 여사의 남은 꿈   이육사문학관이 조성된 지 10년이 지났지만 이곳을 찾은 일본인이 겨우 10명뿐이다. 이옥비 여사는 “문학적으로 방문한 일부 일본인은 먼저 사과부터 하지만 모른척하기도 한다. 문학관 영상 내용이 일본인 입장에서 자존심 상할 수 있다보니….”라고 말끝을 흐렸다.  그러면서 일화 하나를 소개했다. “문학관에는 일본인들이 찾지 않지만 인근 도산서원에는 많이들 찾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동경에 있을 때 퇴계 15세손이라고 하니까 한 일본인이 존경을 표하고 방문한 적이 있지만 난 너희를 존경할 수 없다고 마음속으로 맹세했지요”  이 여사는 앞으로 해야 할 두 가지 소원이 있다.   하나는 1976년 안동댐 축조로 수몰 당시 형태도 맞지 않게 이건된 안동시 태화동의 육사 생가를 도산면 원천리로 제자리에 옮기는 일이다.  이 여사는 3대문화권사업의 일환으로 시행되는 이육사문학마을조성사업을 통해 생가를 예전모습그대로 복원할 계획이다.          ▲ 이육사 선생이 1943년 중국 북경으로 넘어가기전 지인들에게 주었던 사진. 두 번째로 서울에 육사후원회를 만드는 일이다. 안동만이 아니라 전국, 세계의 육사가 되기 위한 전초기지 역할을 담당하려면 반드시 후원회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제가 태어난 곳이 서울시 종로구 명륜동입니다. 그 말은 곧 아버지가 그곳에 살았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종로구에서 지번이 살아있다고 전해왔습니다. 그곳에 육사로를 만들고 육사후원회도 만들어 안동의 문학관과 같은 역할로 아버지의 문학세계를 널리 알리고 싶습니다”   비록 소원이지만 아버지의 작품세계와 애국애족정신을 널리 알리고 싶어 하는 딸의 절실한 마음이 고스란히 베여 있었다.  안동/권기웅기자 /////////////////////////////////////////////////////////////////////////////////////////////////////////////////////   이육사 형제와 이상화의 관계 시사 일제 강점기 대표적 저항시인인 이상화와 이육사 형제들이 밀접한 관계를 맺었음을 시사하는 중요한 자료도 나왔다. 베이징에 머물고 있는 이두파(李斗坡)란 이가 창간호에 기고한 축시 '이역의 봄'는 '오- 때의 봄은 왔는데, 우리의 봄은 언제나 올까, 이역의 봄'이란 탄식으로 마무리된다. 이듬해 발표된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떠올리게 하는 구절이다. 박 교수는 "'두(斗)'는 육사 형제들이 쓴 호인데, 여러 점으로 미뤄 항일 항쟁에 몸을 던지고 동생 둘을 이끌던 육사의 맏형 이원기가 쓴 것으로 추정된다"며 "이상화의 시는 이에 대한 화답의 성격을 띠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고 말했다. 그는 "육사 형제들과 이상화 시인과의 관계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데, 경북 안동 출신인 육사 형제들과 대구 출신인 이상화가 이 지역 청년 사회의 저항적 흐름 속에서 상당한 관계를 맺었음을 시사한다"고 덧붙였다... ///////////////////////////////////////////////////////////////////////////////////////////////////////// 당시 민족시인 이육사(1904~1944)와 경성제대 중문과 출신의 문학자 김태준(1905~1949), 무용수 최승희(1911~1967) 등이 중국의 루쉰(迅·1881~1936), 장아이링(張愛玲·1920~1995) 등과 각각 교류했던 내용과 자료, 증언 등을 홍 교수가 중국 현지로 찾아가 발로 써내려간 연구서다. 이육사가 루쉰과 실제 교류했고, 학문적으로 사숙했음 또한 연구자들 중심으로 확인된 바 있다. 하지만 상세한 내용은 여전히 연구가 필요하다. 홍 교수는 이육사가 1926년 겨울학기부터 이듬해 봄학기까지 다녔던 중국 베이징의 ‘중국대학’의 캠퍼스 위치를 확인하고, 당시 신문과 잡지, 일기 등 중국 현지의 다양한 자료는 물론, 중국대학 졸업생 인터뷰 등을 통해 이육사가 어떻게 중국현대문학에 지대한 관심을 갖게 됐는지 실증적으로 고찰한다. 또한 1933년 6월 중국 상하이에서 딱 한 차례 루쉰과 조우한 경험이었지만 이육사는 전통이 해체되고 근대가 수립되는 시기에 자신처럼 전통과 근대를 내면화하는 루쉰에게 문학적 교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음도 이해할 수 있다. 이육사는 루쉰의 글뿐 아니라 쉬즈모(徐志摩), 후스(胡適), 궈모뤄(郭沫若) 등의 작품을 소개하는 데 힘썼다.  또 ‘색, 계’(色, 戒)로 한국에서도 널리 알려진 장아이링은 현대 중국이 가장 사랑하는 작가 중 한 사람이다. 장아이링은 1945년 4월 9일 당시 아시아를 떠들썩하게 한 최승희를 만난다. 상하이 월간문예지 ‘잡지’는 ‘최승희의 두 번째 상하이 방문기’ 글을 통해 중국 최고의 경극배우 메이란팡(梅蘭芳), 장아이링과의 좌담 내용을 실었다. ‘신중국보’ 신문사가 개최한 좌담회였다.   홍 교수는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당시 최승희와 장아이링의 사진까지 실었다. 장아이링의 장편소설 ‘앙가’(秧歌)와 ‘적지지련’(赤地之戀)에서 한국전쟁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우연만이 아님을 짐작게 한다.  //////////////////////////////////////////////////////////////////////////////////////////////////////////////////////////////////////////////////// '쇠창살 통풍구' 등 일부시설 확인…70년간 '도심흉물'로 방치 거주민 "무서워 들어가 보지도 못해"…中 '재평가 작업' 시사   베이징 도심 왕푸징(王府井) 대로에 인접한 '둥창후퉁(東廠胡同) 28번지' 내에 위치한 일제 시설물. 베이징의 문화유산 보호활동가들과 국역사학자들에 따르면, 일제는 이 건물을 1937년부터 패망 직전까지 감옥시설로 사용했다.   (베이징=연합뉴스) 진병태 홍제성 이준삼 특파원 = '청포도의 시인' 이육사(1904∼1944) 열사가 모진 고문으로 순국한 곳으로 추정되는 베이징(北京)의 '일제지하감옥' 시설이 지금도 70년 전 모습 그대로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고증 작업조차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이 시설물은 재개발 등으로 조만간 완전히 역사 속으로 사라질 것으로 알려져 왔다. 하지만 최근 베이징시는 "추가조사가 필요하다"고 밝혀 앞으로 새로운 항일유적지로 보존·개발될 가능성이 주목된다.  베이징지역의 문화유산 보호전문가와 국내 일부 역사학자에 따르면, 베이징 도심 왕푸징(王府井) 대로에 인접한 '둥창후퉁(東廠胡同) 28번지'에는 일본 헌병대가 1937년부터 패망 직전까지 감옥시설로 사용했던 일제식 2층 건물이 남아있다.   '일제감옥' 1층에 설치된 굵은 쇠창살. 지역 주민들은 이 쇠창살이 감옥시설의 일부라고 말했다.   연합뉴스가 지난 2015년 5∼7월 두 차례에 걸쳐 이 시설물의 실태를 자세히 살펴본 결과, 지하감옥으로 쓰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거대한 지하공간과 지상감옥 시설의 일부로 보이는 오래된 쇠창살 등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현재는 민가로 쓰이는 이 건물의 크기는 대략 가로 25m, 세로 8m다. 10대 때부터 줄곧 40여 년을 이곳에서 살았다는 주민 자오쥔(趙軍) 씨는 "지하에서 지상 2층까지 건물 전체가 감옥으로 사용된 것으로 알고 있다"며 지하실은 중범죄자 고문·감금 등 사용됐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실제로 이 건물의 외벽 바닥 부분에서 굵은 쇠창살이 박힌 길이 50㎝의 환기구멍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일제건물의 외벽 바닥 부분에 설치된 길이 50㎝의 구멍. 구멍 사이로 굵은 쇠창살이 설치돼있는 모습이 보인다. 거주민들은 이 구멍이 지하감옥의 통풍구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카메라 플래쉬를 사용해 촬영한 '지하감옥' 모습. 일제 헌병들이 이곳에서 이육사를 포함한 많은 항일운동가들을 가둬두고 고문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주민들 사이에서는 "지하감옥 전체에 1m 깊이의 작은 구덩이가 파여 있다", "전체가 큰 물감옥(水獄)이었다"는 이야기도 나오지만, 이 지하실의 구체적인 모습은 일제 패망 70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사실상 '미확인' 상태다. 자오 씨 역시 "감히 지하실에 들어가 볼 생각은 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지하로 통하는 입구는 이미 오래 전에 주민들에 의해 봉쇄된 상태였다. 이육사는 1943년 서울에서 체포돼 베이징으로 이송됐다. 국내 일부 역사학자와 이육사 후손들은 일제 헌병들의 시신 인계장소 등을 고려할 때 바로 이곳에서 이육사가 모진 고문 끝에 숨을 거뒀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지상 1∼2층 내부공간은 수십년 간에 걸친 걸친 증·개축으로 옛 모습이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주민 자오쥔 씨가 과거에 촬영해온 '일제감옥' 내부시설의 흔적. 건물 1~2층 사이에 설치된 이 커다른 타원형 구멍은 수감자들에 대한 감시용도로 사용됐을 것으로 보인다고 자오 씨는 말했다. 주민 자오쥔 씨가 과거에 촬영해온 '일제감옥' 내부시설의 흔적. 지상감옥에 설치돼있었던 굵은 쇠창살.   이 일제시설물은 중국의 많은 항일지사들이 고초를 겪은 현장이라는 점에서 중국내 역사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일찍부터 보존 필요성이 제기돼왔지만, 베이징시는 "구체적인 사료를 확보하지 못했다"며 줄곧 미온적인 태도를 보여왔다. 탐사보도 언론가이자 중국문물학회 회원인 쩡이즈(曾一智) 씨는 연합뉴스와의 전화통화에서 2011년에 베이징시에 이 시설물에 대한 보호조치 필요성을 요청한 바 있지만, 아직까지 제대로 된 평가작업은 이뤄지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최근 '중국인민의 항일전쟁 승전 70주년'(2차대전 종전 70주년)을 계기로 중국 내에서 미확인 항일유적지 보존에 대한 관심이 점차 고조되면서 베이징시도 이 일제 시설물에 차츰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베이징시 둥청(東城)구 문화위원회는 최근 연합뉴스의 관련 서면질의에 대한 답변서에서 "예전에 실시한 전문가 조사에서는 이 시설물이 일제감옥이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구체적인 증거를 확보하지 못했다"면서도 "추가조사를 통해 충실하고 믿을 수 있는 사료를 확보한 뒤 (보존 여부를) 판단하겠다"고 말했다. ///////////////////////////////////////////////////////////////////////////////////////////////////////////// 1. 유난히도 무더웠던 지난여름 내내 필자는 대구MBC가 기획한 ‘이육사 최후의 진실’이라는 다큐멘터리에 매달려 있었다. 8월 25일에 방영된 이 다큐멘터리는 이육사의 삶과 죽음을 조명한 작품이었는데, 작품의 기획단계에서부터 이 다큐멘터리의 전체적인 내러티브는 이육사의 최후를 목격했던 유일한 생존자인 항일운동가 이병희 선생(여, 86세)을 중심으로 한다는 것이 정해져 있었다. 따라서 이 다큐멘터리의 구성과 글을 맡았던 필자로서는 이육사에 대한 자료 수집만큼이나 이병희 선생에 대한 자료 수집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병희 선생에 대한 가장 정확한 기록이 남아 있는 곳은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이다. 이병희 선생은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바 있는 일제시대의 항일 운동가들 중 유일한 여성 생존자인 까닭에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에는 이병희 선생의 육성 증언이 담긴 영상 기록물을 비롯해서 다양한 기록들이 전시되고 있다.   필자는 그 곳에 전시돼 있는 기록을 토대로 하여 이병희 선생의 항일운동 경력을 되짚어 볼 수 있었는데, 그 과정에서 필자는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 두어야 할 두 명의 인물이 이병희 선생의 항일운동에 깊숙이 개입돼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중 한 명은 말할 것도 없이 이육사였고, 또 다른 인물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아스라이 사라져 간 전설적인 항일운동가 이재유였다. 이재유를 그렇게나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인물을 만났다는 것, 그것은 정말이지 예기치 않은 뜻밖의 소득이었다.       2. 이육사와는 한 집안인 이병희 선생은 1918년 생으로 1904년 생인 이육사 보다 열 네 살이 어리지만 항렬로는 손녀 뻘 된다. 촌수는 굳이 따질 필요도 없을 정도로 멀지만 아버지인 이경식 선생이 일찍이 이육사와 교류를 해 온 까닭에 이병희 선생은 어린 시절부터 이육사와 알고 지냈다.    이병희 선생은 아버지인 이경식 선생과 이육사가 큰아버지인 백농 이동하 선생을 중심으로 해서 어울려 지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대구에 거주하며 대구지역의 독립운동을 지원하던 백농은 종로에서 하해여관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이 하해여관이 이경식, 이육사를 비롯한 대구 지역의 지사들이 모여들곤 했던 아지트였다는 것이다.   이 아지트에 모여든 지사들은 자연스럽게 항일운동을 모색했다. 그러던 중 터진 것이 바로 1927년의 장진홍 의거였다. 조선은행 대구지점을 폭파하려다 미수에 그친 이 사건을 통해 이경식, 이육사 등의 지사들은 일본 경찰에 구금된다. 주범인 장진홍 의사가 도피해 버리자 평소에 장진홍의사와 자주 어울리던 이경식, 이육사 형제 등이 일본 경찰에 의해 공범으로 체포 구금됐던 것이다. 이 사건은 당시 9살이던 이병희 소녀에게 깊은 인상으로 남는다.   이 사건에 대한 이병희 선생의 기억은 다음과 같다.   “원래 이 사건은 아버지(이경식)와 이육사 형제, 그리고 장진홍 의사가 함께 모의한 사건이었어. 그런데, 아버지랑 이육사 형제는 때를 기다리자는 신중한 입장이었고, 장진홍은 빨리 하자는 입장이었지. 그런데 어느날 장진홍이 거사를 도모해 버린 거야. 그런데, 폭탄을 쌌던 종이가 이육사의 집에 있던 신문지였다고 해. 이육사의 집에 모아둔 신문지 가운데 폭탄을 쌌던 신문지 날짜만 쏙 빠져 있었다는 거야. 그래서 이육사랑 아버지랑 늘 함께 어울렸던 사람들이 죄다 체포됐던 거지.”   훗날 장진홍 의사가 체포되면서 자신의 의거가 단독 범행이었음을 주장하게 되고 그 결과 공범으로 연루됐던 이들은 모두 무죄 석방된다. 하지만 그들 모두는 2년 7개월가량의 옥고를 치른 뒤였다. 이 사건에 대해 설명하면서 이병희 선생은 의미 있는 말을 한마디 던진다.   “내가 어렸을 적에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뭔지 알아? 그건 말이야. ‘죽으려면 혼자 죽어라’라는 말이야. 동지들을 끌어들이지 말고 너 혼자 다 안고 가라는 말이었다고. 당시 우리 집안 분위기는 그랬어.”   3. 이병희 선생에게 있어 이육사는 참으로 소중한 인물이다. 이병희 선생은 부친인 이경식 선생과 더불어 1996년 광복절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게 되는데, 해방 된지 51년이나 지난 뒤에야 일제시대의 활동 공로를 인정받게 된 것은 모두가 이육사 때문이었다. 이육사의 항일운동에 대한 연구 결과 이병희, 이경식 선생의 항일운동의 내용이 알려졌고 그래서 뒤늦게나마 두 사람의 항일 운동은 평가받게 되었던 것이다.   이육사의 항일운동을 추적하던 사람들이 맨 처음 주목했던 것은 수수께끼와도 같은 이육사의 죽음이었다. 이육사가 북경의 감옥에서 순국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었지만 이육사가 정확히 어디에 수감돼 있었고 또 무슨 죄목으로 감옥에 갇혀 있었던 것인지에 대한 조사는 이병희 선생의 증언이 있기 전까지는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이육사가 북경 감옥 순국사실이 거짓이라는 주장까지 제기되었다. 이러한 주장이 나오게 된 이유는 이육사가 투옥되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으며 호적부에는 그가 이병희라는 친척의 집에서 사망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이병희라는 인물이 나서지 않는 한 이육사의 옥사 주장은 이 새로운 주장에의해 대체될 지경에 이르렀다.   이병희 선생의 실체를 맨 처음 확인한 것은 대구MBC의 다큐멘터리 제작팀이었다. 1994년에 ‘광야에서 부르리라-이육사’라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고 있던 당시의 제작팀은 이병희라는 인물이 살아 있을 가능성에 주목하여 탐문을 거듭한 끝에 그동안 남자일 것이라고 짐작돼 오던 이병희라는 인물이 여성이며 생존해 있다는 것을 밝혀냈다.   이병희 선생의 실체가 드러남에 따라 이육사와 관련된 풀리지 않았던 수수께끼들이 일거에 풀렸다. 당시 이육사는 북경과 중경, 연안의 인맥들을 엮는 좌우합작을 추진하고 있었으며, 서울에서 체포된 뒤 북경으로 압송돼 와 북경주재 일본총영사관 지하 감옥에서 심문을 받던 중에 순국을 했다는 구체적인 사실이 밝혀졌던 것이다. 또한 그의 최후를 지켜 본 이병희 선생 역시 이육사와 정치적 선택을 함께 했던 동지였으며, 함께 투옥돼 옥고를 치렀다는 사실까지 추가로 밝혀졌다.   1994년 8월 8일에 방영된 대구MBC의 다큐멘터리 ‘광야에서 부르리라-이육사’ 이후에도 새로운 사실들은 속속 드러났다. 이병희 선생의 입을 통해 그의 부친인 이경식 선생이 이육사 형제와 더불어 장진홍 의거에 연루돼 투옥된 바 있으며, 그 자신 역시 1930년대에 노동쟁의를 주도하던 노동운동가였다는 주장이 제기되었고, 이러한 주장이 각종 문헌을 통해 사실로 확인되는 과정이 이어졌다.   또한 이 과정에서 이병희 선생이 서대문 형무소에 투옥된 경험이 있는 생존해 있는 유일한 여성 항일운동가라는 것도 새로이 밝혀졌다. 이러한 새로운 사실을 바탕으로 하여 정부는 1996년의 광복절에 이들 부녀에게 건국훈장 애족장과 독립유공자 표창을 한다. 이육사의 삶과 죽음을 다룬 한편의 다큐멘터리가 계기가 되어 두 명의 잊혀질 뻔한 항일 운동가가 독립유공자로 부활하게 된 셈이다.     4. 오늘날, 이병희 선생을 이야기할 때는 누구나 이육사를 먼저 떠올린다. 하지만, 16세의 나이에 종연방적이라는 공장에 위장 취업하여 파업을 주도하다 4년여의 옥고를 치른 항일노동운동가 이병희 선생의 뿌리는 이재유에 닿아있다.  “공산주의자로서 일생을 마치고 혁명가로서의 미명을 후세에 남기려고 결심했다..........나는 ‘자본론’을 정독하여 마스터했다. 형무소야말로 나에게는 공산주의의 대학이었다.”   1930년 11월에 ‘제4차 조선공산당 재건운동’과 관련되어 구속되었던 이재유는 출옥한 직후 위와 같은 말을 남겼다. 그랬던 그가 1936년 연말에 다시 체포되자 당시의 어용신문인 ‘경성일보’는 ‘집요 흉악한 조선공산당 마침내 괴멸되다.’라는 호외를 내기도 했다. 이재유의 체포로 인해 조선공산당이 괴멸되었다고 할 수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 기사는 당시 국내의 공산주의 운동에서 이재유가 차지하는 비중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이병희 선생이 이재유와 인연을 맺었던 것은 집안 분위기와 무관치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경성여상(서울여상의 전신)에 재학 중이던 무렵 여학생 이병희는 사촌오빠 등의 영향으로 공산주의에 눈을 뜬다. 그리하여 이병희는 이른바 ‘이재유 그룹’의 일원이 된다.   당시 국내의 대표적인 자생적인 공산주의 그룹인 ‘이재유 그룹’은 국제주의 노선을 추종한 운동방식과 대비되는 조선의 특수한 현실상황의 요구에 기반을 둔 사회주의 운동을 벌여왔다. 당시 ‘이재유 그룹’이 가장 치중했던 것은 적색 학생서클을 조직하여 노동현장에 투입하고 적색 노동조합을 건설하여 파업을 일으키는 노동운동이었다. ‘이재유 그룹’에 속해 있던 여학생 이병희 역시 이런 노선에 적극 호응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학업을 포기하고 ‘종연방적’이라는 공장에 위장 취업을 하기에 이른다.   이재유가 ‘제4차 조선공산당 재건운동’과 관련한 옥살이를 마치고 출옥한 1933년부터 그가 일제의 대대적인 검거 선풍에 휘말려 다시 구속되던 1936년 연말까지, 서울 일대의 노동현장에서는 대대적인 파업이 일어났다. 물론 '이재유 그룹'의 작품이었다. 여공 이병희 역시 이 움직임 속에 있었다. 당시 16세이던 이병희는 직공들을 선동하여 동맹파업에 동참한다. 하지만 이 들불 같이 피어올랐던 노동운동은 일제의 대대적인 검거 작전으로 실패로 끝나고 만다.   “그때 내 나이가 16살인데 내가 뭘 알았겠어? 시킨 대로 한 거지. 근데 체포돼서 보니까 일이 이상하게 돼 있더라고. 내가 삼택 교수의 직계로 돼 있는 거야.”   이병희 선생이 말하는 삼택 교수란 당시 경성제국대학교 교수였던 미야케 시카노스케(三宅鹿之助)를 말한다. 이재유는 같은 사상을 공유하고 있던 미야케 교수와 투쟁방법을 논의해 왔는데, 1934년에 일제에 일시 검거됐다 탈옥하는 과정에 미야케 교수의 관사에 잠시 숨어지내게 된다. 그러던 중 이 사실이 일본 경찰에 의해 적발돼 미야케 교수는 체포되고 이재유는 다시 도피생활을 하게 되는데, 미야케 교수의 체포 소식은 당시 사회에 큰 충격파를 안겨준다. 미야케 교수의 체포 뒤, 당시 신문들은 ‘미야케 교수 적화공작 사건’이니 ‘경성제대 연구실, 관사는 공산운동의 총본영’이라는 식의 제목 하에 이 사건을 크게 보도했던 것이다.   미야케 교수의 직계로 분류된 이병희 선생은 상당기간 옥고를 치르지 않을 수 없었다. 약 4년여의 옥고를 치른 뒤, 이병희 선생은 대구로 내려와 있다가 1940년에 중국으로 망명의 길을 떠난다. 그리고 그로부터 몇 년 뒤인 1943년에 북경에서 이육사와 재회를 한 뒤 그와 좌우합작의 방법을 논의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됐다 단독 행위임을 주장한 이육사의 배려로 풀려나게 된다. 그리고 풀려난 직후인 1944년 1월에 이육사의 죽음이라는 비보를 접하게 되고 그의 시신을 수습하여 가족들에게 인계하는 역할을 맡게 된다.   한편, 1936년 연말에 체포돼 있던 이재유는 그 무렵 공주교도소로 이송돼 있었는데, 그 역시 조국의 해방을 보지 못하고 1944년 10월에 옥사하고 만다. 이병희 선생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미쳤던 인물들인 이육사와 이재유는 같은 해에 조국의 해방을 보지도 못하고 차례로 유명을 달리하고 말았던 것이다.   5. 지난 광복절 기념사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좌파 항일운동가들의 공로도 평가해야 할 시기가 됐다는 요지의 발언을 한 뒤 좌파 항일운동가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그 중 대표적인 인물이 이재유다. 해방을 10개월 앞둔 1944년 가을에 세상을 뜬 탓에 좌우 대립이 극심했던 해방공간에서 활동을 할 수 없었던 것이 아무래도 유리(?)하게 작용하는 듯 하다. 북한의 정권과 직간접적으로 관련을 맺지 않았으니 복권에 있어 유리하지 않겠느냐는 것이 학계의 판단인 것이다.   아직까지도 대한민국 사회에 있어서는 항일 운동가들을 평가함에 있어서 좌우의 이념이 무슨 상관이랴 하는 민족중심의 사고가 확고하게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참으로 용인하기 어려운 시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친북이라는 논란에만 휩싸이지 않으면 과거의 항일운동 경력이 인정받을 수도 있는 시대 쯤은 되었다는 점일텐데, 이러한 시대에도 과거의 좌파 항일운동가들이 제대로 평가받기는 쉽지 않을 듯 하다. 아직도 민족보다 반공의 가치가 더욱 더 값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사회의 기득권을 누리고 있는 탓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시대다.   과연 언제쯤 이재유에 대한 다큐멘터리는 만들어질 수 있을까? 과연 언제쯤 우리는 이병희 선생이 회고하는 이재유의 이야기를 방송에서 보고 들을 수 있을까? 시간은 많지 않다. 이병희 선생의 나이 올해로 87세. 우리에게 남아있는 시간은 그리 많지 않다. ////////////////////////////////////////////////////////////////////////////////////// 애국지사 이병희 여사 타계 옥중 순국한 이육사 유골단지 日 훼손 걱정해 품에 안고 다녀… 방적공장 일하며 항일운동도 의열단원으로 독립운동을 하고, 옥중 순직한 시인 이육사의 시신을 거둔 애국지사 이병희(李丙禧·94) 여사가 2012년 8월 2일 오후 2시 35분 숙환으로 별세했다. 1918년 서울에서 태어난 이 여사는 독립운동가 집안에서 자랐다. 조부인 이원식 선생이 동창학교 설립에 참여해 민족교육을 이끌었고, 부친 이경식 선생은 1925년 대구에서 조직된 비밀결사 암살단 단원으로 활동했다. 이 여사는 동덕여자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5세 때인 1933년 일본인이 경영하던 종연방적(鍾淵紡績)의 여공(女工)으로 근무하며 항일활동에 나섰다. 그는 500여명의 근로자를 이끌고 파업을 주도했다. 그는 생전 언론과 인터뷰에서 "당시 일제가 운영하던 공장은 초등학교를 졸업한 어린 여성들만을 직공으로 받았다"면서 "파업에서 보여준 여공들의 저항은 대단했다"고 말했다. 그는 파업을 주동한 혐의로 1936년 12월 일본 경찰에 체포됐다. 서대문형무소에서 고춧가루 고문, 전기 고문 등 큰 고초를 당했다.   생전의 이병희 여사. 1939년 4월 출옥 후 이듬해 베이징(北京)으로 망명해 의열단에 가입, 문서와 무기 등을 전달하는 연락책을 맡았다. 1943년 국내에서 베이징으로 건너온 이육사(李陸史)와 독립운동을 협의하기도 했다. 이 여사와 이육사는 같은 문중(진성 이씨)으로, 먼 친척이었다고 한다.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이 여사는 그 해 9월 일본 경찰에 체포돼 베이징 감옥에 구금됐다. 잠시 국내로 잠입했던 이육사도 체포돼 베이징 감옥에 함께 투옥됐다. 이 여사는 1944년 1월 11일 풀려났으나, 이육사는 5일 뒤인 1월 16일 옥중 순국했다. 이 여사는 "형무소 간수로부터 (이)육사가 죽었다고 연락이 와서 (베이징 일본 총영사관 감옥으로) 달려갔더니 (이육사의) 코에서 거품과 피가 나와있더라"며 "아무래도 고문으로 죽은 것 같았다"고 증언했다. 이 여사는 이육사의 시신을 거둬 급히 빌린 돈으로 화장하고 '광야' 등 이육사가 마분지에 쓴 시와 만년필 등 유품을 수습했다. 그는 일제가 유골을 훼손할까 봐 이육사의 유족에게 전달할 때까지 한동안 유골 단지를 품에 안고 다녔다고 한다. (‘광야’ ‘청포도’ 같은 육사의 주옥같은 시는 이병희 여사가 없었더라면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병희 여사는 지난 50여 년간 자신의 독립운동을 숨기고 살아야 했습니다. 이른바 ‘사회주의계열’ 여성 독립운동가로 낙인 찍혀 조국 광복에 혁혁한 공을 세우고도 그늘진 곳에서 숨죽이며 살아야 했던 것입니다. 1996년에 가서야 겨우 정부로부터 독립운동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게 되는데 이렇게 숨죽이며 살았던 여성 애국지사로는 이효정 여사, 이녀사는 이병희 여사의 친정 조카입니다...)  이 여사는 해방 이후엔 사회주의계열 여성 독립운동가로 분류돼 스스로 독립운동 사실을 숨기고 살았다. 정부는 1996년 이 여사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했다. 유족은 아들 조영철씨, ////////////////////////////////////////////////////////////////////////////////////////////////////////...
형은 시인, 동생은 소설가...... 둘 다 어린 시절에 일본에서 공부할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습니다. 평양내기 부친이 도쿄의 한국인 유학생 선교 목사, 정확하게는 도쿄 한인 연합 교회 목사로 부임한 덕분이었죠.   일찌거니 시에 재능을 보인 형은 팔 남매 중 맏아들, 열혈의 나이 열아홉 살에 도쿄에서 삼일 운동을 맞은 뒤 곧장 짐을 꾸려 상하이로 떠났습니다. 망명 정부가 있는 곳...... 그곳에서 춘원 이광수와 함께 임시 정부 기관지 에서 활약하는가 하면 도산 안창호가 조직한 흥사단 원동(遠東) 위원부에도 몸담았습니다. 흥사단 원동 위원부에 가입한 첫 번째 단우(團友)는 상하이 지역의 단우 번호 103번 이광수...... 시인은 일주일 뒤인1920년 5월 6일 두 번째 단우 번호 104번을 받고 입단식을 치렀습니다.   시인은 좀 뜻밖의 공부를 하기도 했습니다. 상하이의 후장 대학(滬江大學) 화학과를 선택했거든요. 흥사단이 난징(南京)에 설립한 동명학원(東明學院)에서 영어 교사를 지내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송진우의 요청으로 귀국하여 1926년 4월 동아일보사에 입사했습니다. 는 이상협, 민태원, 김동성을 비롯한 핵심 필진이 한꺼번에 로 옮아간 마당이어서 좀 힘겨운 참이기도 했거든요. 시인은 정식으로 입사하기 전에도 신문사를 들락거린 인연이 있고 에밀 졸라의 를 번역해서 원고를 보낸 적도 있었습니다. 는 한국에서 처음으로 번역된 에밀 졸라의 짤막한 단편 소설입니다(장편으로는 1924년 홍난파가 《나나》를 완역해서 단행본으로 출판한 바 있습니다).   팔 남매 중 둘째아들이 소설 솜씨를 뽐낸 것은 조금 나중의 일입니다. 하지만 아우도 형과 비슷한 길을 걸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습니다. 삼일 운동이 일어나자마자 귀국한 뒤 평양에서 지하 신문을 만들어 돌리다가 일단 감옥부터 다녀와야 했거든요. 열일곱 살 때의 일이죠. 형이 상하이에 투신한 동안 아우는 쑤저우(蘇州)의 안세이 중학(安晟中學)을 다니다가 후장 대학 부속 중학교를 졸업한 뒤 후장 대학에서 교육학을 공부했습니다. 흥사단 원동 위원부에서도 형과 함께했습니다. 1921년에 받은 단우 번호는 144번......   먼저 귀국한 형은 평생 시인이거나 언론계에라도 눌러앉을 것처럼 보였지만 얼마 뒤 다른 길을 걷기로 한 데에 반해 아우는 미국 유학 길에 올라 스탠포드 대학원에서 교육학 공부를 마친 뒤에 동아일보사에 입사했습니다. 소설가로 이름을 떨치게 된 것도 사실은 미국에서 귀국한 뒤의 일입니다. 다작은 아니었지만 정작 문필계에 오래 남은 것은 아우였습니다.   ●     ●     ●     ●     ●   시인인 형과 소설가인 아우...... 형은 와 《아름다운 새벽》의 시인인 송아 주요한입니다. 아우는 의 작가인 여심 주요섭입니다.   근대 문학 초창기의 문인들이 대개 일본에서 유학한 데에 비해 몇 명의 선구적인 중국 유학생 출신 작가들이 있습니다. 바로 지난번에 살펴본 현진건이 그렇듯이 한국 근대 문학사 연구에서 그리 눈길을 끌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지만 말입니다. 주요한과 주요섭 형제도 그런 축입니다.   ●     ●     ●     ●     ●   후장 대학을 졸업한 주요섭은 막 스탠포드 대학원으로 진학하기 직전인 1927년 2월부터 4월까지 주요한이 편집부 기자로 있던 에 조금 뜻밖의 소설을 번역해서 연재했습니다. 《보도 탐험기》...... 그러니까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보물섬》을 번역한 소설입니다. 소설 속의 섬 이름은 보배섬.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소설이라면 일찍이 외국인 선교사들에 의해 번역된 바 있습니다. 이를테면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만 해도 이미 언더우드 여사와 게일 목사가 각각 한 차례씩 단행본으로 내놓은 바 있습니다. 언더우드 여사는 표제를 원제와 가깝게 《제클과 하이드》라 붙였습니다. 게일은 좀 고풍스러워서 《일신 양인기》...... 한 몸에 두 사람인 이야기이라는 뜻입니다. 언더우드 여사는 《제클과 하이드》를 번역한 1921년에 《악마의 호리병》을 번역해서 《병중 소마》라는 제목의 얇은 단행본으로 출판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니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중요한 대표작은 이미 1920년대 초중반의 대여섯 해 만에 거의 번역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런 참에 드디어 모험 문학의 걸작이요 아동 문학의 고전 가운데 하나가 한국어로 번역되었습니다. 삽화를 곁들여 연재된 《보도 탐험기》는 원작이 그러했듯이 딱히 어린이를 위한 읽을거리만은 아니었습니다. 더 설렌 것은 오히려 어른이었다죠? 주요섭의 번역 역시 의 가정란이나 아동란이 아니라 공식적인 연재소설 지면을 차지했습니다.   《보도 탐험기》의 상상력, 그러니까 바다와 보물, 탐험과 모험의 신세계에 대한 꿈은 한참 뒤인 193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날개를 펴기 시작했습니다. 한국에서 최초이자 유일한 추리 소설 전문 작가 김내성...... 《마인》의 작가 김내성은 사실 《백가면》과 《황금 굴》을 먼저 내놓으면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해방 직후에도 《똘똘이의 모험》으로 아동 모험 소설의 신기원을 세웠거든요. 아예 보물섬 이야기를 다룬 《황금 굴》이야 말할 나위도 없지만 숱한 똘똘이들의 꿈과 용기를 위한 젖줄이 되어 준 것은 분명 주요섭의 선구적인 번역입니다.   ●     ●     ●     ●     ●   아우 주요섭의 《보도 탐험기》 연재가 끝난 뒤를 맡은 것이 바로 형 주요한의 《소복의 비밀》이라는 소설입니다. 1927년 5월부터 8월까지 101회에 걸쳐 연재된《소복의 비밀》...... 이런 고리타분한 제목이라니요......   연재소설 《소복의 비밀》 낭림산인(狼林山人) 역 / 오월 오일부터 게재   여자가 사랑을 잃고 비참한 경우에 빠질 때에 얼마까지나 참고 견딜 수가 있는가. 남자가 사랑을 위하여 결심하고 나설 때에 얼마나 큰 용기를 가지게 되는가. 이 소설은 그 위대한 인내력과 용기를 그려 놓은 것이다.   로라 양의 참담한 반생에 눈물 흘리지 않을 자가 누구며 배 남작의 음모와 흉계에 분노를 감하지 않을 사람이 누구인가. 매리언 양의 침착과 하대룡 군의 담력을 감탄하지 않을 이 또한 누구이랴.   열렬한 사랑과 귀신이 놀랄 음모와 무쌍한 용감— 이것이 이 소설의 골자이다. 만천하의 독자는 같이 와서 로라와 더불어 울고 또 웃지 않으려는가.   이 소설은 오는 오일부터 여러분 앞에 나타납니다.   — , 1927.4.29~4.30   요컨대 《소복의 비밀》을 관통하는 세 가지 키워드는 사랑, 음모, 용기로 간추릴 수 있겠군요. 그렇다고 가정 비극 같지도 않고 복수나 모험담도 아닌 듯싶은데...... 꼭 그렇습니다. 사랑, 음모, 용기란 실상 원작의 정곡을 제대로 짚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소복의 비밀》이라는 소설의 원작은 뜻밖에도 빅토리아 시대 전성기의 영국 작가 윌리엄 윌키 콜린스의 《흰옷을 입은 여인》이거든요.   아마 윌리엄 윌키 콜린스라는 이름도 《흰옷을 입은 여인》이라는 소설도 그리 낯익지는 않으리라 짐작됩니다. 윌리엄 윌키 콜린스는 절친한 동료이기도 한 찰스 디킨스가 런던에서 주재한 주간지에 《흰옷을 입은 여인》을 연재하면서 일약 명성을 얻은 작가입니다. 미국 유수의 월간지에 동시에 연재된 직후 1860년에 세 권의 단행본으로 출판되자마자 양국에서 격찬을 받은 《흰옷을 입은 여인》은 사실 찰스 디킨스의 숨은 명작 《두 도시 이야기》의 후속 연재소설이기도 했던 터입니다.   다양한 계급의 군상과 차분한 일상 뒤에 숨은 욕망이 생생하게 묘사된 《흰옷을 입은 여인》은 고딕 소설의 상상력과 빅토리아 시대 번영기의 부르주아적 시대감각으로 충만한 걸작입니다. 초반에 풍기는 신비주의적인 분위기나 선정 소설의 색채와 달리 점차 논리적인 추리를 통해 유산 상속을 둘러싼 진실을 규명해 가는 과정은 《흰옷을 입은 여인》의 독특한 매력입니다. 아닌 게 아니라 윌리엄 윌키 콜린스는 1868년에 내놓은 《월장석》에서도 인도에서 탈취된 신비한 다이아몬드를 둘러싸고 벌어진 초자연적인 현상을 실마리로 삼았지만 커프 경사의 합리적인 수사와 활약을 자연스럽게 이끌어 내는 데에 성공했습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흰옷을 입은 여인》은 추리 소설에 가깝습니다. 월터 하트라이트, 매리언 할콤, 퍼시빌 경, 포스코 백작과 같이 생동감 넘치는 캐릭터의 다양한 시선을 통해 탐욕스러운 비밀과 추악한 음모의 미로를 펼쳐 보인 《흰옷을 입은 여인》은 아무래도 부르주아 계급의 전성기이자 빅토리아 제국의 절정기인 19세기 선정 소설의 색깔이 짙은 게 사실입니다. 그래서 선뜻 추리 소설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는 망설여지는 편입니다. 다만 《월장석》은 적어도 영미권에서 등장한 최초의 장편 추리 소설로 꼽히곤 합니다.   논자에 따라서는 《흰옷을 입은 여인》을 세계 최초의 장편 추리 소설로 지목하기도 합니다. 프랑스의 대중 연재소설 작가인 에밀 가보리오가 《르루주 사건》을 내놓은 것이 1863년이다 보니 영국이 먼저냐 프랑스가 먼저냐 하는 말다툼을 불러일으키기 십상이죠. 물론 추리 소설이라는 새로운 이야기 양식이 처음 등장한 것은 미국 작가 에드거 앨런 포의 단편 소설 이 발표된 1841년입니다만......     말하자면 원작 《흰옷을 입은 여인》이 추리 소설이라기보다 여성의 비극적인 운명이나 사랑의 이야기로 받아들여진 것은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인 모양입니다. 1920년대의 신문 연재소설이 종종 과장된 어법으로 탐정이나 추리의 요소를 강조하곤 했던 바에 비해 왠지 음산하고도 괴기스럽다 할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표제를 단 《소복의 비밀》은 오히려 그런 색깔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지 않은 편이니까요.   윌리엄 윌키 콜린스의 원작이 워낙 방대한 분량이다 보니 주요한은 상당히 큰 폭으로 축약하여 번역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문제 인물인 로라 페어리와 앤 캐서릭을 비롯하여 매리언 할콤, 포스코 백작의 이름을 그대로 번역한 반면 주인공인 월터 하트라이트의 이름만은 한국식 이름 하대룡으로 바꾼 것도 재미있는 대목입니다.    또 주요한의 《소복의 비밀》은 일본의 경우에 비해서도 그다지 늦지 않은 편입니다. 윌리엄 윌키 콜린스의 원작은 일본에서 1921년에 다나카 사나에라는 번역가에 의해  《흰옷의 여인》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전 2권으로 출판되었는데 총 806면에 달하는 완역입니다. 다나카 사나에는 윌리엄 윌키 콜린스를 필두로 1945년에 타계할 때까지 에밀 가보리오, 아서 코난 도일, 모리스 르블랑, 가스통 르루와 같은 주요 작가의 대표적인 추리 소설을 잇달아 번역했습니다. 특히 1920~1930년대에 한국어로 번역된 주요 추리 소설이 다나카 사나에의 번역을 경유했다는 점을 기억해 둘 가치가 있습니다. 이를테면 1935년 안회남이 《르루주 사건》을 번역할 때에도 다나카 사나에의 번역을 따랐습니다.      ●     ●     ●     ●     ●   그런데 걸리는 게 또 하나 있습니다. 번역가 낭림산인......    낭림산인이라는 필명의 번역가가 바로 주요한이라는 사실은 얼마 뒤에 주요한이 남긴 짤막한 회고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주요한은 이광수가 붙여 준 송아(頌兒)라는 호 외에도 구리병(句離甁)과 벌꽃이라는 이름을 즐겨 썼는데 그 밖에도 여남은 개의 필명을 번갈아 내세웠습니다. 그중에서 낭림산인은 평양 출신의 주요한이 낭림산맥에서 따온 이름입니다. 주요한의 말에 따르자면 낭림산인은 에 소설을 연재할 때에 일부러 익명 뒤에 숨기 위해 급조되었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주요한은 《소복의 비밀》을 내놓은 지 이삼 년 뒤인 1929년 12월부터 1930년 4월까지 《사막의 꽃》이라는 소설을 역시 에 연재한 바 있습니다. 미국 소설을 번안하여 무대를 몽골로 바꾼 《사막의 꽃》이 연재될 때에도 번역가의 강력한 요구에 따라 굳이 실명을 감추어 두기로 했다 합니다(─실은 편집부 기자인 자신이 벌인 일일 따름이죠).   그런데 1932년 4월에 《사막의 꽃》이 단행본으로 출판될 때에는 출판사 측의 바람대로 번역가의 실명을 내걸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낭패가....... 주요한은 단행본에 부친 번역 후기에서 연재 전후의 사정을 언급하면서 비로소 낭림산인의 정체를 밝혀야 했습니다. 또 《사막의 꽃》이 “오락적으로 읽어 버릴 것 외에는 아무 가치가 없”으며 결코 “무슨 창작이나 예술품으로서 세상에 뭇는(—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란 것을 분명히 말해 두”기까지 했군요.     신문에 소설을 연재하거나 심지어 단행본 소설을 출판할 때에도 본명을 밝히지 않는 경우가 수두룩했으므로 주요한이 딱히 예외적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사막의 꽃》을 번역하면서 보인 태도를 감안하자면 주요한은 윌리엄 윌키 콜린스의 《소복의 비밀》을 번역하는 마당에서도 그리 높은 값을 매기지 않은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다 치더라도 윌리엄 윌키 콜린스의 《흰옷을 입은 여인》이 776면에 달하는 분량을 자랑하며 한국어로 완역된 것은 팔십여 년이나 지난 2008년에 이르러서...... 그러니까 요 근래의 일입니다. 주요한의 의도나 자평과 별개로 1927년의 《소복의 비밀》이 얼마나 선구적인 번역인지 한눈에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     ●     ●     ●     ●   1927년 봄부터 여름까지...... 시인인 형 주요한과 소설가인 동생 주요섭 형제는 그렇게 굵직한 두 편의 걸작 《보도 탐험기》와 《소복의 비밀》을, 새로운 상상력의 세계를 잇달아 한국어로 선사했습니다.     ■ 참고 문헌   주요한, , , 1925.10.3~5(3회). 주요섭, 《보도 탐험기》, , 1927.2.25~4.29(56회). 주요한, 《소복의 비밀》, , 1927.5.5~8.14(101회). 주요한, 《사막의 꽃》, , 1929.12.3~1930.4.12(79회); 대성서림, 1932; 1934(재판); 1944; 광문서림, 1949. 주요한, , , 1934.3.19(4면). 주요한, 《새벽》(전 2권), 요한 기념 사업회, 1982.   윌리엄 윌키 콜린스, 《흰옷을 입은 여인》, 박노출 옮김, 브리즈, 2008. 윌리엄 윌키 콜린스, 《월장석》, 강봉식 옮김, 동서문화사, 2003.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보물섬》, 최용준 옮김, 열린책들, 2010. 에밀 가보리오, 《르루주 사건》, 안회남 옮김, 박진영 편, 페이퍼하우스, 2011.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소설의  번역에 대해서는 ─ 스티븐슨 소설 번역의 역사, ─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의 두 가지 번역. ─ 스티븐슨의 과 언더우드 부인의 《병중 소마》.       ■ 윌리엄 윌키 콜린스의 《흰옷을 입은 여인》이 실은 1927년에 처음 번역된 바 있고, 주요한이 《소복의 비밀》이라는 표제로 연재했다는 사실을 알아낸 과정을 좀 차분하게...   ■ ...윌리엄 윌키 콜린스의 절친이기도 했다는 찰스 디킨스 이야기... /////////////////////////////////////////////////////////////// (頌兒). 평남 평양(平壤) 출생. 초등학교 졸업 후 도일, 메이지학원[明治學院] 중등부와 도쿄[東京] 제1고등학교를 거쳐 3 ·1운동 후 상하이[上海]로 망명, 후장[江]대학을 졸업하였다. 귀국 후 동아일보사와 조선일보사 편집국장을 지냈고 일제강점기 말기에는 실업계에 투신하여 화신상회(和信商會) 중역으로 있었다. 8 ·15광복 후에는 흥사단(興士團)에 관계하는 한편 언론계에 진출하여 정치 ·경제부문의 논평을 많이 썼다. 국회의원을 거쳐 4 ·19혁명 후 장면 내각 때는 부흥부장관 ·상공부장관을 역임했고 5 ·16군사정변 후에는 경제과학심의회 위원 ·대한해운공사 사장을 지냈다. 메이지학원 재학중에 문학에 뜻을 두고 학우들과 회람지를 발행하는 한편 일본 시인 가와지 류코[川路柳虹]의 문하에서 근대시를 공부하다가 1919년 《창조(創造)》 동인에 참가함으로써 문단에 진출했다. 1919년 《창조》 1호에 발표한 시 〈불놀이〉는 서유럽적인 형태의 최초의 근대시로 평가된다. 그 후 계속 〈아침처녀〉 〈빗소리〉 등, 낭만적인 서정시를 발표하였다. 1924년에 시집 《아름다운 새벽》을 간행했고, 그 밖에 이광수(李光洙) ·김동환(金東煥)과 함께 펴낸 《3인시가집(三人詩歌集)》(1929)이 있다. 한편 1943년 조선문인보국회 시부 회장, 1945년 조선언론보국회 참여 등 친일 문필활동을 하였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   동방의등불(東方─燈)은 인도의 사상가이자 시인 겸 극작가인 라빈드라나드 타고르(Rabindranath Tagore:1861~1941)의 시입니다. 동방의 등불은 1929년 4월 2일자 '동아일보'에 발표된 자유시입니다. 당시 주요한(朱耀翰)의 번역으로 실린 이 시는 '동방의 등촉(燈燭)' 또는 '동방의 불꽃'이라는 제목으로도 소개되었습니다.  /////////////////////////////////////////////////////////////////////////////////////////////...   경력 변절 '불놀이'를 지어 한국근대시 형성에 선구자적인 업적을 남겼고[1] 아호는 송아(頌兒)이며, '송아지'와 '목신'(牧神), 주락양(朱落陽[1]), 벌꽃, 낙양(落陽)이라는 필명을 사용했다는 말만 들으면 문학가로만 여겨지겠지만, 주요한은 변절한 친일파이다. 일제 강점기에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가하여 임시 정부 기관지 《독립신문》 기자로 활동하기도 했었으나,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 전후로 변절, 일제 전시체제때 총독부의 내선일체 체제에 순응하여 적극적인 협력활동을 한 친일파이다. 민족문제연구소에서 2015년 8월 15일 부천시청 광장에 게시한 선전물에서 주요한을 가리켜 "죽음과 삶을 초월한 황국정신"이라고 했다. 그 근거로 주요한은 "나라의 부름을 받고 가실 때에는 빨간 댕기를 드리겠어요"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댕기(국민문학 1941년), "나는 간다. 만세를 부르고 천황폐하 만세를 목껏 부르고, 대륙의 풀밭에 피를 뿌리고 너보다 앞서서 나는 간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지원병 이인석에게 줌(1941년 3월호 신시대)라는 글을 써서 일제의 침략전쟁을 '애국'이라며 선전했다. 친일 미청산 해방 이후에는 정치인으로 활동하였고, 제2공화국 장면 내각에서 부흥부 장관, 상공부 장관을 역임했다. 본관은 신안(新安)이다. 생애 생애 초기 출생과 수학 원적지는 평안남도 평양이며 역시 평안남도 평양에서 개신교 목사인 주공삼(朱孔三)의 8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주요한은 주공삼의 4남 4녀 중 장남으로, 소설가 주요섭과 극작가 주영섭이 주요한의 친동생이다. 1912년 평양의 숭덕소학교 재학 중 아버지를 따라서 도일하여 일본에서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메이지학원 재학 중에 문학에 뜻을 두고 학우들과 회람지를 발행하는 한편 일본 시인 가와지 류코(川路柳虹)의 문하에서 근대시를 공부하다가 1919년 《창조(創造)》 동인에 참가하였다. 그 뒤 일본어로 쓴 시를 발표하며 문단에 입문하였고, 1919년 시 에튜우드, 눈 등을 발표했다. 대표작으로 꼽히는 시 〈불놀이〉(1919)도 이 시기에 김동인, 전영택 등과 함께 발간한 동인지 《창조》 창간호에 발표했다. 〈불놀이〉는 서유럽적인 형태의 최초의 근대시로 평가된다. 그 후 계속 〈아침처녀〉 〈빗소리〉 등, 낭만적인 서정시를 발표하였다. 독립 운동과 귀국, 언론 활동 대한민국 임시정부 활동 1919년 3·1 운동을 계기로 상하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합류한 뒤 4월 임시 의정원 의원에 선출되고, 임시정부의 기관지인 《독립신문》 기자가 되었다. 임시정부가 창조론, 개조론, 임정 고수론으로 나뉘어서 파벌 싸움으로 와해상태가 놓이자 실망한 그는 《독립신문》 기자직과 임시 의정원 의원직을 모두 사퇴한다. 그 뒤 이광수는 귀국하였지만 그는 바로 귀국하지 않고 상하이의 호강대학으로 진학, 호강대학을 졸업했다. 국내 언론인 활동 중국 호강대학 졸업 후 1925년 귀국하여 《동아일보》에 입사, 동아일보 취재부 기자와 동아일보사 편집국장 및 논설위원을 역임했다.[1] 그 뒤 자리를 옮겨 《조선일보》 등에 근무했다. 그 뒤 조선일보사 편집국장 및 논설위원을 역임했다. 시집 《아름다운 새벽》(1924), 《3인 시가집》(1929), 《봉사꽃》(1930)을 간행하였다. 1927년 신간회가 조직되자 참여하였고 1929년에는 삼인시가집을 간행하였다. 조선일보사 전무를 끝으로 사퇴하고 기업 활동에 뛰어들었다. 일제 강점기 후반 사회 활동과 전향 그는 꾸준히 안창호와 연락을 주고받았는데 안창호를 중심으로 조직된 대한인국민회와 흥사단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그 뒤 안창호가 수양동우회를 결성하자 가입하여 회원이 되었다. 1930년대부터는 화신산업 취체역 등 기업 활동을 하면서 시작이 뜸해졌고, 광복 후에는 문단 활동을 접고 기업인, 언론인, 정치인으로만 활동했다. 1930년대 후반 화신상회 이사로 선출되었다. 전시체제기 활동   1942년 2월 18일자 매일신보에 실린 주요한의 시문. 일제강점기 시기 동안 주요한은 언론인으로 지내면서 '합법적인 공간'하에 실력양성운동과 사회계몽운동 발전에 힘써왔으나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지식인들이 대거 체포되었을 때 주요한도 검거되었고, 이듬해 이광수, 전영택, 현제명, 홍난파 등과 함께 전향하였다.[2] 이후 전시체제기 동안 총독부의 체제에 순응하면서 적극적인 협력활동을 하게 된다. 조선문인보국회, 조선임전보국단, 조선언론보국회 등 여러 친일 단체에 가담해 징병제를 선전하는 등 태평양 전쟁 수행에 적극 협력했다. 창씨개명한 이름도 일본의 팔굉일우(八紘一宇) 이념에서 따온 것이다. 1944년 종로의 인사들이 학도병을 독려하기 위해 조직한 종로익찬위원회의 회원[3] 이 되었다. 1945년 초 조선언론보국회에 가입하였다. 광복이후 정치 활동 정계 입문 초기 광복 후 흥사단에 관계하여 활동하였으며 1945년 9월 한민당이 창당되자 그에게 영입 제의가 들어왔으나 거절하였다. 그 해 조선상공회의소(대한상공회의소의 전신) 특별위원에 선출되었다. 그 뒤 대한무역협회 회장(1948)을 지냈고, 국제문제연구소 소장에 피선되었으며 1954년 호헌동지회에 참여한 뒤 민주당 소속 정치인으로 활동했다. 1958년 5월 서울 중구에서 대한국민당의 윤치영을 누르고 민의원에 당선되었으며 4·19 혁명으로 제1공화국이 붕괴된 뒤 그해 5월의 민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재선되었다. 8월 민주당이 정권을 잡은 제2공화국 내각에 장면에 의해 발탁되어 부흥부 장관, 상공부 장관으로 입각했으며, 1961년 초 경제과학심의회 위원에 피선되었다. 생애 후반 1961년 5월 5·16 군사정변으로 장면 정권이 무너진 뒤에는 공직을 사퇴하고 야당 정치인으로 활동하다가 《대한일보》 사장과 대한해운공사 대표이사 등을 지냈다. 이후 정치정화법에 걸렸다가 1963년 정치정화법에서 해금되면서 야당 정치인으로 활동했으나 박순천과 장면, 정일형 등의 재건 민주당에는 참여하지 않았다.[4] 이를 두고 야당에서는 그가 군사정권에 타협한 것이라며 비난을 가했다. 1964년 경제과학심의회의 위원, 1965년부터 73년까지 대한일보사 회장을 지냈다. 이후 문필 활동에 전력하다가 1979년에 사망했다. 경기도 고양군(현 고양시[5]) 벽제면에 안장되었다. 사후 〈불놀이〉는 한국 근대 자유시의 효시로 한국문학사에서 중요하게 취급되는 작품이며, 주요한은 김억과 함께 초기 시단의 개척자로 평가받고 있다. 낭만적인 찬송가 작사도 하여 한국교회 음악발전에 공헌하였다.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과 친일 문학인 42인 명단,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선정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문학 부문에 포함되어 있으며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와카 형식으로 쓴 일본어 시집 《손에 손을(일본어: 手に手を)》(1943) 등 총 43편의 친일 작품명이 공개[6] 되어, 친일 문학인 42인 명단에 선정된 문인 가운데 이광수 다음으로 편수가 많았다. 1979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받았다.[7] 가족 관계 아버지: 주공삼(朱孔三, 1875년 ~ ?, 개신교 목사. 평안남도 평양신학교 졸업.) 동생: 주요섭(朱耀燮, 1902년 11월 24일 ~ 1972년 11월 14일, 소설가, 시인, 영문학자. 前 한국문학번역협회 회장.) 동생: 주영섭(朱永涉, 1912년 ~ ?, 연극배우, 극작가, 연극연출가. 前 국립연극연구소 연구위원.) 학력 평안남도 평양 숭덕소학교 졸업 일본 도쿄 메이지 중학교 수료 일본 도쿄 제1중학교 졸업 중국 상하이 후장 대학교 물리학과 졸업 저서 시집 시집 《아름다운 새벽》 《3인시가집(三人詩歌集)》(1929), 이광수(李光洙)·김동환(金東煥)과 공저 《봉사꽃》(世宗書院) (1930) 논저 및 소설 《자유의 구름다리》(1959) 《부흥논의》(1963) 《안도산전서》(安島山全書) (1963) 상훈 경력 1979년 대한민국 국민훈장 무궁화장    
1006    시다운 詩, 시인다운 詩人을 찾아보기... 댓글:  조회:4751  추천:0  2016-01-17
    김종인 / 나의 문학관  시란 무엇인가   김종인   1. 들머리   ‘시란 무엇인가’라는 화두를 잡고 시를 쓴지는 그리 오래 되지 않았지만, 시는 내게 자연스레 찾아온 것 같다. 김천중학교 2학년 때, 작문을 가르치던 배병창 선생님은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조 ‘기(旗)’가 당선된 시조 시인이셨다. 그 때 우리들은 선생님을 모시고 ‘석정(石井)’이란 문학 동아리를 만들었다. 시를 공부하고 시를 쓰게 된 최초의 사건은 아마 이 때부터일 것이다. 우리는 선생님께 시조를 열심히 배웠다. 언어를 갈고 닦아 다루는 방법을 배우고, 시조의 전통적인 율격에 언어를 싣는 법을 그 때 배운 것 같다. 내가 쓴 ‘무지개’라는 시조가 처음 활자화되어 ‘송설’이란 교지에 실렸을 때의 전율을 잊을 수 없다. 문예반 특별활동 시간에 선생님께서는 좋은 시를 칠판에 적어놓고 감상하게 했다. 아직도 나는 그 때 선생님께서 읊어주셨던 김종한의 ‘낡은 우물이 있는 풍경’이란 시를 잊지 않고 있다. “능수버들이 지키고 섰는 낡은 우물가/ 우물 속에는 푸른 하늘 조각이 떨어져 있는 윤사월(閏四月)” 같은 구절이나 “두레박을 넘쳐 흐르는 푸른 하늘만 길어 올리시네/ 두레박을 넘쳐 흐르는 푸른 전설(傳說)만 길어 올리시네” 같은 구절이 생각나면 “언덕을 넘어 황소의 울음 소리는 흘러오는데/ ― 물동이에서도 아즈머님! 푸른 하늘이 넘쳐 흐르는구료.”에서는 그만 아득한 그리움이 밀물처럼 밀려온다. 김천고등학교에 입학하여 ‘맥향(麥鄕)’이란 문학 동아리에 가입했다. 맥향에서는 주로 선배들에게 시를 배웠는데, 지도해 주시는 선생님은 동화작가 윤사섭 선생님이셨다. 당시 도서관을 맡고 있었던 선생님이 좋아 거의 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했으며, 밤낮으로,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다. 참 행복했다. 도서관이야말로 나에게는 천국이었다. 당시 특별활동 시간에 문예반을 맡고 있었던 김문웅 선생님은 대구에서 고등공민학교 교사를 하면서 ‘밤늦게 집으로 돌아가면서 느낀’ 것을 쓴 자작시를 칠판에 적어주기도 했는데, 그것이 내 마음 속에 오래 오래 기억되고 있다. 도시 변두리의 불빛과 밤늦게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화자의 마음과 고등공민학교에 다니는 나이 먹은 학생들의 삶이 선생님의 모습과 함께 떠오른다. “오랜 세월 뒤 나는 떡갈나무 등걸에 박힌/ 내 화살을 찾았네/ 그것은 여태도록 꺾이지 않았네./ 노래 또한 처음부터 끝까지/ 내 친구의 가슴속에 고이고이 되살아 있는 것을 나는 보았네.” 헨리 롱팰로우의 시 “화살과 노래(The Arrow and the Song)"에 나오는 마지막 구절이다. 허공에 대고 화살을 쏘았는데, 어디에 떨어졌는지 몰랐으나, 오랜 세월 뒤에 떡갈나무 등걸에 박힌, 내가 쏜 화살을 발견했다는 것과 허공에 대고 노래를 불러, 그 노래가 어디에 떨어졌는지 몰랐으나, 오랜 세월 뒤, 내 친구의 가슴속에 그 노래가 처음부터 끝까지 고이고이 되살아나 있는 것을 보았다는 내용이다. 지금은 온전히 기억할 수 없지만, 선생님이 가장 절실하게 쓴, 그 현실적인 삶을 노래한 시가 내 가슴속에 화살처럼 박혀 오늘 내 시의 자양분이 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경북대학교에 입학하여 복현문우회란 문학 동아리에서 시를 공부하면서 강의시간에 김춘수 시인에게 시론을 배웠다. 시집 “타령조 기타”부터 시선집 “처용”과 “꽃의 소묘”까지 열심히 읽었다. 김춘수 시인의 시는 새로운 것이었다. 어렵고 도무지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는 무의미 시론에 대해 정말 열심히 공부했다. “인간들 속에서/ 인간들에 밟히며/ 잠을 깬다/ 숲속에서 바다가 잠을 깨듯이/ 젊고 튼튼한 상수리나무가/ 서 있는 것을 본다/ 남의 속도 모르고 새들이/ 금빛 깃을 치고 있다”와 같은 ‘처용’이나 “눈 속에서 초겨울의/ 붉은 열매가 익고 있다./ 서울 근교에서는 보지 못한/ 꽁지가 하얀 작은 새가/ 그것을 쪼아먹고 있다./ 越冬하는 인동잎의 빛깔이/ 이루지 못한 인간의 꿈보다도/ 더욱 슬프다.”라는 ‘인동잎’을 줄줄 외우며 김춘수 시인의 무의미 시를 깨우치기 위해 무진 노력했으나 도무지 가슴에 와 닿지 않았다. 다만, ‘초겨울의 붉은 열매’와 ‘꽁지가 하얀 새’, ‘월동하는 인동잎의 빛깔’과 ‘이루지 못한 인간의 꿈’이라는 선명하고 아름다운 이미지의 연결이 지금도 머릿속에 깊이 박혀 입술에 맴돌고 있다.   2. 시란 무엇인가.   시란 시인의 가슴속에 가득 차 있는 샘물을 퍼내는 행위가 아닐까. 참을 수 없는 욕구를 풀어내는 행위이며, 자기만의 방식으로 사회와 소통하는 행위가 아닐까. 시인은 자신의 시를 통해서 시대와 자연과 사회와 사물과 자기 스스로와 대화하고, 고민하고, 발언하고, 소통하는 자가 아닌가. 신동엽 시인은 스스로가 “참여, 즉 자기와 자기 이웃에의 인간적인 애정과 성실성”을 갖춘 시인이기를 원했다고 한다. 그는 시인정신론에서 “글자 다루는 공상의 기술”이나 “언어를 재료로 한 무의미한 공예품”을 비판하고 “시란 바로 생명의 발현인 것이다. 우리 인식의 전부이며, 세계 인식의 통일적 표현이며, 생명의 침투며, 생명의 파괴며, 생명의 조직”이라고 했다. 또한 “우리대로의 인생 인식과 사회 인식과 우주 인식과 우리들의 정신과 우리들의 이야기를 우리스런 몸짓으로 창조해 내야 한다”고 했다. 하여 시인은 “선지자여야 하며, 우주지인이어야 하며”, “스스로 천기를 예보”해야 한다고 했다. 아아, 시인이란 이렇게 무서운 사람인 것을 내가 왜 일찍이 몰랐던가! 군에서 제대하고 울진종고에 초임 발령을 받아 근무하던 1980년대 초, 어느 날 국어시간. 나는 교과서에 실린 유명한 시인의 시를 가르치며 시와 삶에 대해 거품을 물었다. 한 학생이 왈, 그렇게 무자비하게 비판하는 선생님은 시를 쓰느냐고, 어떤 시를 쓰는 시인이냐고? 그 말에 충격을 받아 정말 본격적으로 시를 쓰게 되었다. 등단한지 20여 년 동안, 저 가혹한 80년대의 역사 한복판, 그 현장에서 발품을 팔아 온몸으로 시를 써 오면서 ‘교육과 문학’이란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 했다. 허나 천생이 우둔하여 제대로 된 시 한 편 쓰지 못했다. 부끄러운 일이다. 김종한 시인의 ‘낡은 우물이 있는 풍경’처럼 아름다운 서정과 ‘맥향’에서 배운 현실주의적 절실함과 ‘복문’과 김춘수 시인의 무의미 시론에서 배운 아름답고 선명한 이미지와 신동엽 시인의 시인정신을 자양분으로 하여, 쉽고 아름답고 감동적인 시 한 편 쓰고 싶다. 내 친구의 가슴속에 화살로 박혀 오랜 세월이 지나도 고이고이 되살아나는 그런 시 한 편 쓰는 것이 소원이다.   3. 아! 답답하구나. 잃어버린 시를 어디 가서 찾을까?   현재 우리 나라에는 수만 명의 시인이 있으며, 한 계절에 발간되는 시집은 제쳐두고라도 20여 종의 문학지에 발표되는 시가 500여 편은 족히 될 것으로 추정된다. 서울에서 발간되는 이름 있는 문학 잡지의 경우 잡지마다 10명 안팎의 시인들이 20여 편 정도의 시를 발표하고 있다. 자타가 공인하는 좋은 시를 실었겠지만, 그 많은 시들을 읽어보아도 가슴을 울리고 무릎을 탁 치게 하는 감동적인 시 한 편, 정말 아름다운 이미지로 눈을 씻고 다시 읽게 하는 시 한 편, 읽으면 읽을수록 감칠맛이 나고, 입이 스스로 읊조리게 하는 리듬에 안달이 나는 그런 시 한 편 찾을 수가 없다. ‘푸념도 못 되는 넋두리’이거나, ‘저도 모를 소리를 암호처럼’ 나열한 것이거나, 풍자와 반어와 역설과 모순어법으로 저의를 감추고 난해함을 자랑하는 오만한 시거나, 아직도 음풍농월이요, 모더니즘이요, 이미지의 장난에 다름 아니니 “아, 답답하구나. 잃어버린 시를 어디 가서 찾을까?”하는 탄식을 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시집은 쏟아져 나오고 잡지마다 시인은 차고 넘치는데, “시인다운 시인은 찾아보기 힘들구나”라는 장탄식 뒤에는 오늘날 우리들의 시에 무언가 부족함이 있다는 말이다. 신동엽 시인은 이미 40여 년 전에 시인정신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늘 우리 현대를 아무리 살펴보아도 대지에 뿌리박은 대원적(大圓的)인 정신은 없다. 정치가가 있고, 이발사가 있고, 작자가 있어도 대지 위에 뿌리박은 전경인적인 시인과 철인은 없다. 현대에 있어서 시란 언어라고 하는 재료를 사용하여 만들어 낸 공예품에 지나지 않는다. 시인의 시인 정신이며 시인혼이 문제되지 아니하고, 그 시업가의 글자 다루는 공상의 기술만 문제된다. 핵분열 연구가가 헐리웃 광대에게 입힐 기구망신스런 옷을 꾸며내듯, 또는 발광한 빠리의 화가가 자기도 모를 색채로 화면을 난칠해 놓듯, 시업가들은 언어를 화구재료로 하여 무의미하고 불투명한 공예품을 만들어 내고 있다.” 지금 읽어보아도 조금도 어색하지 않은 비판이다. ‘시란 언어라고 하는 재료를 사용하여 만들어 낸 공예품'일 뿐이며 ’글자 다루는 공상의 기술‘만으로 언어를 화구 재료로 하여 무의미하고 불투명한 공예품’을 양산해 내고 있다는 비판이 귀에 따갑다. 주위를 둘러 보라. 신동엽 시인이 찾아 헤맨 ‘대지 위에 뿌리박은 전경인적인 시인’ 은 어디 있는가. 아니 그가 쓴 시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시인 정신이며 시인혼으로 쓴, ‘생명의 발현이며, 인식의 전부이며, 세계 인식의 통일적 표현이며, 생명의 침투며, 생명의 파괴며, 생명의 조직’인 시를 찾아 이 좋은 계절 여행을 떠난다.   4. 우리가 보통 시라고 부르는 것은 서정시를 말한다.   오늘 날 우리가 보통 시라고 부르는 것은 서정시를 말한다. 시의 종류, 시의 분류, 서정시란 무엇인가 따위의 학술적 논란은 워낙 복잡하니 그만두고, 소위 '서정시란 무엇인가'라는 것을 통해 “아! 답답하구나. 잃어버린 시를 어디 가서 찾을까?”의 해답을 구해보자.   시는 마음에서 우러난다고 한 것이 믿을 만하다. - 이인로 시는 원리와는 관계없는 별종의 취향을 갖고 있다. 오직 천기(天機)를 농(弄)하여서 심원한 조화 속을 파악하여 정신이 빼어나고, 음향이 밝으며, 격이 높고, 생각함이 깊으면 가장 좋은 시가 된다.-허균 임금을 사랑하지 않고 나라를 걱정하지 않는 것은 시가 아니며, 어지러운 시국을 아파하지 않고 퇴폐적 습속을 통분하지 않는 것은 시가 아니다. 단 진실을 찬미하고 거짓을 풍자하거나 선을 전하고 악을 징계하는 사상이 없으면 시가 아니다. -정약용 요사이에는 시가 없다. 시가 없는 것이 아니라 시다운 시가 없는 것이다. -김득신 시는 제 2 의 자연이요, 생명의 표현이므로 하나의 유기체다.-조지훈   우리들의 선조 시인들이 시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견해들을 살펴 종합해 봤을 때, 서정적 장르로서의 시를 의미하며, ‘마음에서 우러난다, 생각함이 깊다, 사상이 있어야 한다, 생명의 표현이다’라는 것을 ‘시다운 시’로 생각했을 개연성이 크다고 하겠다. 서정적인 장르로서의 시는 주관적이고, 순간적이며, 감정적이다. 뿐만 아니라 좁은 의미에서의 서정시란 순수한 감정 체험을 나타내는 것으로 되어 있다. 또한 언어의 의미 전달 기능보다는 읽는 이들에게 감동을 주는 시와 깊은 관련이 있다. “인간이 자기 개개의 상태에 있어, 체험에 있어, 줄거리 없이 표출하려 할 땐 우리들 앞에는 서정시가 놓인다.”라고 치모프예브가 「문학이론」에서 밝힌 것은 서정시에는 ‘개개의 상태, 체험, 줄거리가 필요 없는 표출’을 서정시의 기본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서정시란 개인적인 체험에 의해서 씌어진 것이다. 개인적인 체험이란 주관적임을 뜻하므로 시인의 눈을 통하여 관찰되는 사물, 시인의 영감에 의하여 감지되는 순간적인 감정이나 생각들이 하나의 모티브가 되어 나타나는 것이 서정시이다 “모든 좋은 시는 강한 감정의 자연발생적 표현이다”라고 워즈워드는 그의 「서정시집」 서문에서 말했다. 물론 이 말에는 감정의 중요성이 시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가를 잘 말해 주고 있다. 헤겔 역시 “서정시의 내용은 주관적이며 내면적인 세계이고, 숙고하고 느끼는 감정의 세계이다.”라고 했다. 19세기에 이르러 서정시를 “고양된 감성의 서술”이나“열정적 감정의 직접적 표현으로 보게 된 것이다.   5. 아아! 그렇구나. (시에서) 내가 내 감정을 말하지 않아도 사물이 대신 이야기해 준다.   그래서 새는 울고 꽃은 피었다가 또 저렇게 지는 것이다. 강물은 흘러가고 산은 언제나 푸른 자태로 저렇게 서 있는 것이다. - 연암 박지원의 예술론과 산문 미학 “비슷한 것은 가짜다” (정민) 중에서   고단한 몸 주저 마시고 오세요 가까이 와서 가만히 볼을 비벼 봐요 가파르게 오른 길보다 더 숨이 찼던 당신의 화산지대를 지워드리겠어요 사느라 이마에 맺힌 땀이 꽃보다 향기로워요 삶이란 바람과 냉기의 연속적인 기류 마음놓고 키가 클 수도 없고 앞을 내다볼 수도 없는 안개의 세월 가슴 속 깊이 뿌려주는 사랑의 비로 내 오래 간직한 빛깔을 가져가세요 내 오래 품어온 향기를 묻혀가세요 그러고도 잊지 못할 그리움이 있다면 빈손이어도 좋으니 다시 걸어오세요 맨발이어도 반가우니 다시 다가서세요 그땐 꽃잎 살포시 열어 웃고 있겠어요 (김윤현, ‘두메양귀비- 들꽃시편 Ⅱ’ 전문)   두메양귀비는 고산지대 척박한 땅에 뿌리내리고 사는데, 7-8월에 황록색의 꽃이 피는 야생화이다. 두메양귀비가 시적 화자가 되어 속삭인다. “고단한 몸 주저 마시고 오세요/ 가까이 와서 가만히 볼을 비벼 봐요”라고. 두메양귀비가 사는 곳까지 찾아갔다면, 그는 아마 지치고 피곤한 몸일 것이다. "삶이란 바람과 냉기의 연속적인 기류"이니 "사느라 이마에 맺힌 땀"이 그 얼마나 많았겠는가. 그런 사람에게 두메양귀비는 다시 속삭인다. “내 오래 간직한 빛깔을 가져가세요/ 내 오래 품어온 향기를 묻혀가세요”라고. 바람과 냉기의 연속적인 기류를 맞으면서 고단한 삶을 살아온 우리에게 빛깔과 향기를 나눠주는 사람, 그런 사람의 이미지가 두메양귀비이다. 이것이 “아아! 그렇구나. 내가 내 감정을 말하지 않아도 사물이 대신 이야기해 준다. 그래서 새는 울고 꽃은 피었다가 또 저렇게 지는 것이다.”란 깨달음이 아니고 무엇이랴. 들꽃처럼 아름답고 예쁜 서정시이다.   귀뚜라미가 울음을 멈췄을 때 어머니 돌아가셨다   마당에 동그랗게 남아 있는 달빛   고목이 된 느릅나무는 옛 자리에 그대로 서서 두 손 맞잡고 머리 숙였다   남쪽으로 갔다는 아들은 반 백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고 하늘가 저쪽 구석에서 누군가 이것이 다다 이게 다다 라고 외쳐댔다. (김규동 “임종” 전문)   어머니의 임종을 지켜보면서 쓴 시인 것 같다. 마당에 동그랗게 남은 달빛, 고목이 된 느릅나무도 어머니의 죽음을 애도한다. 아니 고목이 된 느릅나무가 곧 어머니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여기서 시가 끝났다면 거저 평범한 어머니들의 죽음일 뿐이지만 시인은 그 의미를 확산시킨다. ‘남쪽으로 갔다는, 반 백년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는 아들’을 기다리다가, 마침내 임종을 맞이하는 북쪽에 사는 어머니의 모습에서 가슴이 찡해온다. 개인의 슬픔을 넘어 민족의 슬픔이요, 그러한 어머니들이 남과 북에 얼마나 많을 것인가. 남과 북으로 헤어진 어머니와 아들들이 만나고 있다. 이대로 만남이 지속된다고 해도 몇 십 년은 족히 걸릴 것이고, 만남의 차례가 오기를 기다리며 수많은 늙으신 어머니들이 임종을 지켜보는 아들도 없이 쓸쓸하게 이 세상을 하직할 것이다. 하늘가 저쪽 구석에서 “이게 다다”라고 누군가 외치는 소리가 읽는 사람의 가슴을 울린다. 이것이 다인데 왜 그들은 만나지 못하는가. 이대로 남과 북의 수많은 어머니들의 마지막 소망을 정치적인 이유로 끝내 외면할 것인가. 하루빨리 남과 북의 모든 어머니와 아들, 형제자매들과 아버지들의 마지막 소망을 이뤄줄 수 있는 길을 마련해야 한다. 백석의 시를 보는 것 같다. 짧지만 그 속에 수많은 이야기를 함축하고 있다. 감동적이며 심금을 울린다. 서정시의 본령을 보는 것 같다.   공사판, 자갈에 깨지고 흙에 뒹군 하루를 등에 진, 사내가 방에 들어선다 장화에 곤죽이 되어 들러붙은 허기진 저녁도 그를 따라 들어선다 사내의 방에서 구절초가 꽃망울을 터뜨렸다 나날의 노동에 겨워 자신의 몸이 늪이 되는 밤, 붉은 꽃망울 터 올린 가로등이 탈진한 육신의 향기 진동하는 방에 무단 침입해 있다 저녁 끼니도 챙기지 못하고 잠에 떨어진 사내 장마 곰팡이들은 잠 속까지 번져든다 구절초 푸른 혈관을 쥐어 잡고, 꿈에서 깨어나지 않으려 몸부림친다 일터에서 하얗게 버티던 시간들이 그가 잠든 동안 삐걱거리는 그의 식탁 위에 고봉밥으로 올라와 있다 그의 몸이 맑게 개여 다시 깰 때를 기다려 구절초 수북하게 차려져 있다 (권순자 “구절초” 전문)   공사판에서 하루의 노동을 마친 사내가 곤죽이 되어 그 피로하고 허기진 몸을 이끌고 간신히 집에 왔다. 저녁 끼니도 챙기지 못하고 잠에 떨어진 사내의 꿈속에 고봉밥 같은 구절초가 핀다. “사내의 방에서 구절초가 꽃망울을 터뜨렸다”라고 하지만 기실 사내의 방에는 구절초가 없어도 좋다. 아니면 공사판에서 일하다 돌아오는 길에서 구절초 한 그루를 캐어 화분에 올리고 사내의 방에 가져다 놓았는지도 모른다. 하여튼 사내의 식탁 위에 고봉밥처럼 피어 있는 구절초, 사내는 일용할 한 끼의 고봉밥을 위해 곤죽이 되도록 일하고 집에 돌아와 쓰러졌다. 그 식탁 위에 피어난 구절초의 이미지가 바로 고봉밥 같다는 것이다. 으리으리한 저택에서 놀고 먹는 부자들의 식탁에 구절초가 고봉밥으로 피었다면 말이 되지 않지만, 공사판에서 일하고 돌아와 지쳐 쓰러진 사내의 꿈속에서 고봉밥으로 피어나는 구절초의 이미지는 선명하다. 아름답다. 꼭 맞는 표현이다. 가을의 초입에서 우리들의 산야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쑥부쟁이나 구절초의 모습을 보면서 이 시를 읽어보자. 좋은 시란 이런 것이다. 감동적인 시란 이런 것이다. 서정시의 전형을 보는 듯하다.   푸른 안개에 덮인 골짜기를 지나며 나도 머리를 깎고 싶어졌다 허공에 걸린 절집에 머물면서   새들만 날아드는 산속에서 차르르 어깨를 흔드는 기척 검고 숱 많은 내 머리카락 떨어지는 소리인 듯 서늘해지는데,   산이 꺾이는 골짜기 벼랑 위 한 뼘 햇살이 머무는 곳에 작은 무덤, 언젠가 산에서 만난 아이 웃을 때 드러나는 가지런한 이처럼 은방울꽃 피어서 웃고   무덤 주인은 오래 전에 흙으로 돌아갔을 터인데 이 향기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일생을 무덤 곁에서 우는 벌레도 있다 두 손 모아 절을 하듯 날개를 비비며 (김수영, “은방울꽃 무덤” 전문)   옛날 그리스의 전설에 용감하고 두려움 없이 싸우는 청년이 있었는데, 사냥을 갔다가 마을 사람들을 괴롭히는 독사를 만나 힘겨운 격투 끝에 승리를 했다. 그러나 심한 상처를 입고 쓰러질 듯이 걸어가는 그의 발자국에서 붉은 핏방울이 떨어졌고 그 핏방울이 떨어진 자리에서 예쁜 꽃이 방울처럼 피어났다고 한다. 바로 이 꽃이 "은방울꽃"이다. 초여름에 높이 20~35㎝의 꽃줄기가 나오며, 지름이 약 1㎝ 쯤 되는 종 모양의 순백색 꽃이 5~10개 가량 나란히 밑을 향해 핀다. 가느다란 줄기에 초롱초롱 매달린 하얀 꽃망울들을 야생화 답사에서 본 적이 있다. “푸른 안개에 덮인 골짜기”에 많이 피는 은방울꽃, “허공에 걸린 절집”을 연상하고는 하얗고 매끄러운 “종 모양의 꽃”을 보면서 머리를 깎고 싶다고 한다. “작은 무덤,/ 언젠가 산에서 만난 아이”에서 “웃을 때 드러나는 가지런한 이”로 은방울꽃의 이미지를 연결하고 있다. 절묘하게 은방울꽃을 형상화하고 있다. 아니다. 아름답다. “이 향기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라면서 딴청을 부리는 듯하지만 “일생을 무덤 곁에서 우는 벌레”로 연결하면서 향기가 벌레소리로, 다시 절을 하듯 날개를 비비는 모습으로, 즉 향기-벌레소리-절을 하듯 비비는 날개로 후각적인 이미지가 청각적인 이미지로, 다시 시각적인 이미지로 은방울꽃을 형상화시키고 있다."고양된 감성의 서술"이나“열정적 감정의 직접적 표현”은 아니지만 아름다운 서정시라 하겠다. 연암 박지원의 예술론을 풀어 쓴 정민 교수는 “비슷한 것은 가짜다”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픈 사랑의 이별을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은 시를 말할 자격이 없다고 연암은 말한다. 그런데도 정작 그는 가슴이 아프다고 쓰지 않고 새가 울고 꽃이 피었다고 쓰고 있구나. 먼데 사람까지도 이목구비를 단정히 그려 넣어야만 직성이 풀리는 화가는 이발소 그림이나 그려서 좋을 화가다. 이런 자들과 어찌 문장의 정경(情境)을 말하랴. 사랑을 모르는 자 문학을 말하지 말라. 그 사랑의 마음을 담담히 감정의 체로 걸러 사물을 얹어낼 수 없는 자 문학을 말하지 말라. 그림에 먼 뜻이 담길 때라야 경(境)은 살아난다. 할 말을 다 해버리면 경(境)은 사라진다. 이 이치를 모르고서는 문장의 정경(情境)을 운위하지 말라. 벌레의 더듬이를 보고, 꽃술을 보며 즐거워하는 자는 문심(文心)이 있는 자이다. 솥과 그릇의 형상을 보고 무릎을 치는 사람은 글자를 제대로 아는 사람이다. 사물과 만나 그 의미를 마음으로 읽을 수 있는 사람만이 글을 쓸 수 있다. 두 눈을 멀뚱멀뚱 뜨고도 사물을 보는 눈이 열리지 않는 사람은 장님이나 진배없다. 아름다운 새소리에 아무 느낌도 일지 않는 사람은 귀머거리나 한가지다. 정신의 귀가 멀고, 가슴의 눈이 멀고 보면 예술은 빛을 잃는다. 성색정경(聲色情境)은 글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사물들 속에 녹아 있다.” 좀 길게 인용한 것은 위의 시를 읽으면서 너무도 아쉬운 점이 많기 때문이다. “가슴이 아프다고 쓰지 않고 새가 울고 꽃이 피었다고 쓰고 있구나.”란 이유를 한 번 생각해 봐야 한다. 아무리 처절한 사랑의 아픔을 경험해 보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직설적으로 표현하면 시의 맛이 살아나지 않는다. 아니다. 감동이 물결쳐 오지 않는다. 아픔이 가슴을 적시면서 여운이 남아야 좋은 시라고 할 수 있다. “그 사랑의 마음을 담담히 감정의 체로 걸러 사물을 얹어낼 수 없는 자 문학을 말하지 말라.”를 보라. 얼마나 정확한 지적인가. 시는 마땅히 그러해야 한다.   6. 다시, 시란 무엇인가   고등학교에서 시를 가르치면서 아이들에게 시란 무엇인가 물어 보았다. 아이들은 교과서에서 배운 대로 시의 여러 가지 요소들과 이미지와 운율과 의미에 대해서 얘기했다. 모두 맞는 말이다. ‘시란 무엇인가’를 자꾸 되묻는 것은 지금 우리 나라의 시단에서 이미지와 운율에 경도된 많은 모더니즘 시인들의 시들이 너무도 의미를 도외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공자는 제자들에게 "너희들은 어째서 시를 공부하지 않느냐? 시는 흥기(興起)할 수 있고, 득과 실을 관찰할 수 있으며, 조화롭게 무리 지을 수 있으며, 성내지 않으면서 원망할 수 있으며, 가까이는 부모를 섬기고, 멀리로는 임금을 섬길 수 있고, 조수와 초목의 이름을 많이 알 수 있는 것이다." 라고 하면서 시(詩) 공부를 강조했다. 다산 선생은 시에 대한 뚜렷한 소신을 가지고 있었다. 시(詩)라는 것은 뜻을 말하는 것이다. 뜻이 근본적으로 낮고 추잡하면, 억지로 맑고 고상한 말을 해도 조리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뜻이 본디 편협하고 비루하면, 억지로 달통한 말을 해도 사정(事情)에 절실하지 않게 된다. 시를 배움에 있어 그 뜻을 헤아리지 않는 것은 썩은 땅에서 맑은 샘물을 걸러내는 것 같고, 냄새나는 가죽나무에서 특이한 향기를 구하는 것과 같아서 평생 노력해도 얻지 못할 것이다. 다산 선생의 말씀이다. 다산 선생은 아들에게 보낸 서신에서 “『시경』에 있는 모든 시는 간절하고 진실한 마음의 발로로써,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근심하는 내용이 아니면, 그 시는 시가 아니며, 시대를 아파하고 세속을 분개하는 내용이 아니면 시가 될 수 없는 것이며, 아름다움을 아름답다고 하고 미운 것을 밉다고 하며, 선을 권장하고 악을 징계하는 그러한 뜻이 담겨 있지 않은 시를 시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즉 나라를 사랑하고 시대를 아파하며, 세속을 분개하는 내용을 담아야 시가 되며, 아름다운 것은 찬미(讚美)할 줄 알아야 하고, 잘못된 것은 풍자(諷刺)할 줄도 알아야 하고, 선을 권장하고 악을 징계할 줄 알아야 참다운 시(詩)가 된다는 것이다. 다산 선생의 작품이 지닌 이러한 바탕에서의 미의식(美意識)은 현실 비판적 요소가 강하고, 부조리한 현실에 대해 풍자적이면서도 기법 면에서는 사실주의적 측면이 매우 강하다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사실주의적 미의식은 다산의 언급처럼 부단한 자기 수양과 성실한 공부를 통해, 한 시대를 관통할 수 있는 예리한 통찰력과 나라를 걱정하고 시대를 고민하는 현실 인식 하에 이루어진 것이다. 고려의 대시인 이규보는 “무릇 시(詩)는 뜻을 주장으로 하는데, 뜻을 갖추기가 제일 어렵고 사연을 엮는 것이 그 다음이다. 뜻은 또한 기(氣)를 주장삼으니 기의 우열(優劣)에 따라 깊고 얕음이 있다. 그러나 기는 하늘에 근본하여 배워서 얻을 수 없다. 그러므로 기가 모자라는 자는 글을 만들기에만 힘쓰고 뜻을 먼저 두려 하지 않는다. 대개 그 글을 새기고 치장함에 있어서, 구절을 단청(丹靑)하면 실로 아름답지만 그 안에 감추어진 깊고 무거운 뜻이 없어서 처음 읽을 때는 잘된 듯하나 두 번째 씹으면 벌써 맛이 없다.”고 했다. 또한 농암 김창협은 그의 진시(眞詩)론에서 이르기를 “시의 정도(正道)는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것은 시 형식에 얽매이는 것이 아니라 시인의 성정과 천기가 드러나는 꾸밈없는 시, 즉 여야 한다.”고 했다.   7. 마무리 - 대저 시란 무엇인가?   이 계절에 수백 편의 시를 읽으면서 느낀 아쉬운 점은 조태일의 “고여 있는 시와 움직이는 시”에서 말하고 있는 “시인은 사회 현실과 자기 내부 간의 갈등을 끊임없이 부딪쳐 현실도 밝히고, 미래도 밝히는 불꽃을 점화시켜야 합니다. 이 점화의 순간이 시를 쓰는 순간이요, 시 완성의 순간이 됩니다.”라는 말에 합당한 시를 찾지 못함이다. 또한 이 계절에 그리운 서정시를 찾아서 떠난 여행에서 정말 아쉬운 점은 다음과 같은 신동엽 시인의 말이다.   “하여 내일의 시인은 제왕을 실직케 할 것이며, 제주를 실업케 할 것이며, 스스로 천기를 예보할 것이다.”   아, 나는 스스로 천기를 예보하는 시를 찾고 싶다.       [
1005    시의 구석진 곳에서 시인을 만나다 - 이은상 시인 댓글:  조회:10070  추천:0  2016-01-15
이은상은 고유한 전통의 시 형식인                                   시조의 현대화에 기여하며 이은상(李殷相)    예술가명 : 이은상(李殷相)    다른이름 : 호 - 노산(鷺山)    생몰년도 : 1903년~1982년    전공 : 시 이은상은 고유한 전통의 시 형식인 시조의 현대화에 기여하며 시조의 한 유형을 완성시킨 것으로 평가된다. 대부분의 작품이 작곡되어 가곡으로 불려질 만큼 전래의 시조형식을 현대적 운율로 소화해냈다. 대체로 다작인 점과 가곡으로 불려지고 있음을 들어 문학적 평가에서 소홀한 듯한 경향도 있으나, , 등에서 발견할 수 있는 고전적 서정의 계승, , 등에서 이룩한 시조의 현대적 감각에 의한 재현 등으로 현대시조 부흥의 1인자로 지목받고 있다. 1932년에 나온 첫 개인시조집 은 향수, 감상, 자연예찬 등의 특질로 집약된다. 광복 후 그의 시조는 국토 예찬, 조국분단의 아픔, 통일에의 염원, 우국지사들에 대한 추모 등 개인적 정서보다는 사회성을 보다 강조하는 방향으로 기울어갔다. 이러한 작품들은 과 마지막 작품집인 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그는 한때 주요한에 이어 두 번째로 양장시조를 실험해 시조의 단형화를 시도한 바 있으나, 말기에 이르러서는 오히려 음수가 많이 늘어나는 경향을 띠었다. 사학자이자 수필가이기도 한 그는 해박한 역사적 지식과 유려한 문장으로 국토순례기행문과 선열의 전기를 많이 써서 애국사상을 고취하는 데 힘썼다. 광복 후에는 문학보다 사회사업에 더 많이 진력했다.           생애         경남 마산에서 출생한 이은상은 1918년 아버지가 설립한 마산 창신학교 고등과를 졸업하고 연희전문에서 수업하다가 일본 와세다대학 사학과에서 수학하였다. 1922년 시조 , 등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1931년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를 비롯하여, 동아일보 기자, 편집인, 조선일보사 출판국 주간 등을 역임하였다.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에 연루되어 홍원경찰서와 함흥형무소에 구금되었다가 이듬해 기소유예로 석방되었다. 1945년 사상범 예비검속으로 광양경찰서에 유치 중 광복과 함께 풀려났다. 광복 후 이충무공기념사업회 이사장, 안중근의사숭모회장, 민족문화협회장, 독립운동사편찬위원장,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이사, 문화보호협회 이사 등을 역임하였다. 1976년부터 노산문학상 운영위원회에서 노산문학상을 제정해 시상하고 있다.      약력   1903년 경남 마산 출생 1914년 마산 창신학교 보통과 졸업 1918년 마산 창신학교 고등과 졸업 · 동교 보통과 교원 1920년 서울연희전문학교 문과 입학 1923년 연희전문 수료 / 마산 창신학교 고등과 교원  1926년 일본동경 와세다대학 사학부 청강 1927년 일본동경 동양문고에서 국문학 연구 1931년 이화여자대학교 교수 역임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에 연루되어 구금 1945년 호남신문사 사장 1950년 청구대학교(지금의 영남대학교) · 서울대학교 교수로 재직 1954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1959년 충무공이순신장군기념사업회장 / 안중근의사숭모회장 1967년 시조작가협회장 / 한글학회 이사 1969년 독립운동사편찬위원장 1970년 경희대학교에서 문학박사 학위 수여 1972년 숙명여자대학교 재단이사장 1974년 연세대학교에서 명예문학박사 학위 수여 1976년 성곡학술문화재단 이사장 / 총력안보국민협의회 의장 / 시조작가협회 종신회장 1978년 대한민국예술원 종신회원 1981년 국정자문위원      상훈   1964년 대한민국예술원문화공로상 1969년 대통령상 1970년 대한민국국민훈장무궁화장 1973년 5·16민족상 예술부문 본상         저서           • 시집 (1932) (1954) (1960) • 기타 (1931) (1946)  (1947) (1962)         작품세계        작가의 말       나는 유달리 산수(山水)를 즐겨하는 사람이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외로운 마음을 붙일 곳이 없어 고향 가까운 산과 물을 찾아다니며 거기 하소연하고 또 거기서 위로를 받았었다.  더구나 일제의 사나운 정치 아래서 가슴에 피가 맺히고 눈물이 고일 적이면 바랑 메고 막대 짚고 바람과 달을 벗하고 나서서 북으로 압록강 상류에서부터 남으로 한라산까지 역내의 명산대천을 두루 밟아 어느 때는 산머리에서 소리쳐 울어도 보고 또 어느 때는 강기슭에서 쓴웃음을 웃어도 보았다.  보고 볼수록 아름다운 조국의 강산! 여기가 바로 하느님이 우리에게 허락해주신 기름진 낙원이던가 하고 생각할 적에 고맙고 느꺼워 소맷자락 훌쩍 들고 춤추고 싶다가도 이러한 복지를 남의 손에 빼앗긴 일을 헤아려 보고서는 부끄럽고 분한 생각에 펄썩 주저앉아 땅을 치며 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언제든지 간 곳마다 참을 수 없었던 것은 ‘노래’이었다. 반만년의 긴 역사가 아로새겨져 있고 다시 그대로 우리 민족의 현실생활이 벌어져 있는 조국강산이라 저절로 나오는 온갖 노래를 어찌 눌러 둘 수가 있었을 것이랴. (……) 우리는 노래하는 국민이 되어야겠다. 진실로 조국을 사랑할진대 조국의 강산을 노래하는 국민이 되어야겠다. 애국이란 것이 다른 것이 아니다. 제 국토를 사랑하고 제 동포를 사랑하는 그것이 곧 나라를 사랑하는 것이다. (……) - ‘머리말’, 이은상, , 민족문화사, 1954      평론   시인이나 소설가임을 불문하고, 그 시인이나 그 작가의 전모를 빠짐없이 다룬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특히 그 작가가 시인의 그릇이 크고 넓으며 유현한 조화를 부리고 있을 때엔 더욱 그렇다. 노산의 세계도 역시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그는 그만큼 한학자이면서도 사학가요, 동시에 뛰어난 문장가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직 그의 시조를 중심으로 해서 논하는 것까지도 두려운 마음이 든다 하겠다.  이러한 이유로 말미암아 그의 시조만을 주로 논한다 하더라도, 불가피한 경우 말고도 광복 이후의 것은 언급하지 않을 예정이다. 그리고 광복 이전의 것이라도 노산의 모든 시조 하나하나 다 다룰 수 없다는 것도 재언할 필요조차 없다.  무엇보다도 먼저 노산 시조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어느 시조를 읽어보아도 거부 반응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점이라 하겠다. 그 어떠한 것을 제재로 택한다 하더라도, 거기에 쓰인 낱말 하나하나가 모두 부드럽게 가슴에 와 닿는다는 뜻이다. 이런 점을 중시한다면 기교파라고 명명해도 상관없을 것이다. 그러나 오직 글재주 그것 하나만으로 쓰는 기교파는 물론 아니요, 선천적으로 타고난 체질이 있었음에 틀림없다. (……) 그동안에 노산 시인이 써놓은 시조 740여 수 가운데에서 우선 300수쯤만 추린 것이 이라 하면서, 그러나 생각하면 서러운 노력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니, 어느 노래가 마음을 따를 수 있겠는가, 너무도 큰 것은 마음이요, 너무도 작은 것은 노래라는 것을 강조한 내용이다. 아무리 기교가 승하다 하더라도 그 상(想)을 따르지 못한다는 것과 뜻이 똑같다.                   노산은 고향을 방문할때 마다 노비산(제비산)과 어릴적 놀던 바닷가를 찾았다         마산을 이야기할 때 많은 사람들이 이은상 시 김동진 곡 가곡 "가고파" 를 떠올린다.   "가고파 문학축제 ",  "가고파 국화축제" 등 '가고파'란 이름을 내건 행사나 각종 간판들을 마산에서는 쉽게 볼 수 있었다.  비단 마산뿐이 아니다. 전국적으로도 "가고파" 란 단어가 널리 사용되고 있는데, 그것은 마산에서 태어난 불세출의 문인 노산(鷺山) 이은상(李殷相) 선생(1903.10.22~1982.1.1)의 시조 "가고파"의 영향이다.   서울의 재경동창회 회보도 "가고파" 라는 명칭을 사용한다.   '내 고향/ 남쪽바다/ 그 파란 물 눈에 보이네…'로 시작되면서 고향을 그리워하는 심정을 잔잔히 표현한 이 시조는 국민가곡으로 애창되면서 한국인들의 뇌리에 자리잡게 되었다.   현대시조의 개척자로서 가고파뿐만 아니라 수많은 작품을 남기면서 한국문학사에 큰 획을 그은 노산 이은상 선생.  그러나,  1960년 그의 3. 15 의거 관련 발언과 군사독재 정권에 대한 협력 논란으로 정작 그가 태어난 고향 마산에서는 제 자리를 못찾은 비운의 문인이다.  하지만, 대다수 지역 문인들은 "과거 문제를 들어 일방적으로 그의 존재 자체와 문학적 위업을 부정하는 것은 문제가 많다"면서 "문학적 공과와 개인적 과거사를 바르게 정립하여 재평가해야 한다"고 말한다.   노산 선생은 생전에 2,000여 수의 작품을 남긴 현대 시조의 대표적 시인이다. 국문학자 양주동 선생은  “육당(六堂ㆍ최남선)은 박달나무, 위당(爲堂ㆍ정인보)은 인절미 떡, 가람(嘉藍ㆍ이병기)은 난초에 비견될 정도로 그들이 하나씩 체(體)와 풍(風)을 익혀온 데 반하여 노산은 그 모든 것을 갖추었다”  고 말했다.                         마산 여러곳에 노산의 시비가 있다. 월영동, 산호공원,   돝섬등에 모두 다른 형태의 시비가 있다.       노산의 발자취        # 노산 생가, 은상이 샘, 노비산(제비산)   노산 선생이 생전에 마산에 내려오면 가포해변, 노비산공원, 추산공원, 산호공원(가고파시비) 등을 자주 찾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마산에서 자라면서 삶의 일부분이 되었던 곳들이다.    노산 선생의 생가는 구 태양극장터 부근이다. 지금은 태양극장도 사라지고 고층 아파트가 들어섰다. 현재의 6호 광장 (구 마산역 자리) 에서 북마산 쪽으로 난 도로 끝 부근 왼쪽의 북마산파출소 자리는 노산 선생 생가 사랑방이 있던 곳으로 3·1운동 당시 이극로·최봉선 선생 등이 태극기를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노산 선생은 상남동 생가에서 1903년 태어나 부친이 작고한 이듬해인 1923년 서울 연희전문학교로 가기 전인 20살 때까지 살았다. 이 시절 그는 집에서 1Km 정도 떨어진, 회산다리 옆에 있었던 창신 학교를 다녔는데, 현재는 한효아파트가 들어서 당시의 흔적은 전혀 남아있지 않다.   창신학교 자리 인근에 있었던 나직한 노비산은 현재는 능선까지 집들이 올라와 옛모습을 떠올리기 힘들지만 노산의 꿈과 포부를 키우는 정신적 터전이 되었던 곳이었다. 노산은 노비산 숲속에서 홀로 턱을 괴고 생각에 빠져 있곤 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그 시절부터 문학소년의 기질을 타고났던지 그는 노비산을 떠올리면서 훗날 시조 '옛동산에 올라'(1928년)와 '그네'를 지었다고 전해진다.   안타까운 것은 노산 선생의 후손(아들)은 오래전에 미국에 정착한 교포인지라 거의 국내에는 들어오지않는 것으로 알고있으며, 노산의 부모 묘소가 있는 일대 부지는 예전 창신학교에서 관리하다가 제 3자에게 매각된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노비산 (제비산) 제일 윗부분에 있는 마산문학관 은 노산을 기리기 위해 "노산문학관" 으로 추진됐다가 논란 끝에 명칭이 바뀌는 곡절이 있었다. 그의 호 노산은 춘원 이광수의 권유에 의해 "노비산" 에서 땄다고 한다.   '내 놀던 옛동산에 오늘와 다시 서니/산천의구란 말 옛시인의 허사로고/ 예 섰던 그 큰 소나무 버혀(베어)지고 없구려'라고 노래한 그의 시조 처럼 문학사적으로 뛰어난 업적에도 불구하고 그의 큰 자취가 그의 고향에 남아있지 않은 쓸쓸한 노산의 모습을 보면, 언젠가는 제대로 평가되어 그의 업적을 기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 놀던 옛동산에 오늘와 다시 서니                                    산천의구란 말  옛 시인의 허사로고                                    예 섰던 그 큰 소나무 버혀지고 없구려                                                                      지팡이 도루 짚고 산기슭 돌아서니                                    어느해 풍우엔지 사태져 무너지고                                    그 흙에 새솔이 나서 키를 재려 하는구려       #노산과 가고파, 김동진    노산이 생전에 남긴 수많은 작품 중 일반인들에게 가장 잘 알려진 것이 가고파다. 10수 연작으로 된 이 작품은 시로서보다는 국민가곡으로 널리 불리고 있다.    노산은  이 시를 1932년 1월5일 서울 행하촌에서 완성했다.  어릴적 집 부근에 있던 노비산과 산호공원을 오르내리고 바닷가를 거닐면서 보았던 고향 마산 앞바다를 떠올리면서 고향에 대한 향수를 시에 담았다.   이 시는 타향의 이향민을 위시하여 분단상태의 실향민, 그리고 먼 이국으로 이민간 사람에 이르기까지 어린시절의 추억을 되새기는 공통인자에 눈물이 섞여진 예술품으로의 역할을 하고 있다.  가곡으로서의 가고파는 작곡가 김동진이 19살이던 1932년에 작곡하면서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당시 평양숭실전문학교의 교원이었던 양주동이 가고파를 소개하자 학생이던 김동진이 너무 감격해서 노래를 부르는데 편리하도록 10수 중 4수만 작곡하였다고 한다.   김동진은 이후 나머지 6수도 작곡을 하려고 했지만 잘 되지 않아 70년대에 이르러 빛을 보게 되었고 10수 모두의 초연은 지난 73년 12월10일 숙명여대 강당에서 숭의여고 합창단에 의해 이뤄졌다.   가곡파의 주된 주제는 고향바다와 고향동무이며 1수는 고향바다와 물새, 2수 고향동무에 대한 그리움, 3수 고향을 떠나 사는 회한, 4수 한데 얼려 옛날 같이 살고 싶은 심경, 5수 고향바다에서 추억 등 10수 모두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짙게 베어 있다.   # 노산과 박태준 : 동무생각 (사우)   *박태준(朴泰俊1901~1986)은 대구 동산동에서 태어났다. 박태준은 대구 계성학교를 졸업하고 대구제일교회의 오르간 연주자가 된다. 평양숭실전문학교에서 음악을 전공한뒤 1921~1923년 마산 창신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이 무렵 박태준은 창신학교에서 노산 이은상을 만난다. 이런 인연으로 그들은 친밀한 관계로 발전했다. 어느날 박태준은 계성학교에 다닐 무렵 한 여학생을 사랑하였던 자신의 고민을 이은상에게 털어놓는다. 노산은 대구에서 있었던 박태준의 첫사랑이야기를 듣고 “ 박 선생이 잊지 못할 그 소녀를 노래로 승화시켜 그 곡에 담아 두면 소원이 이루어지는 게 아니냐.”며 “노래 가사를 써 줄 테니 곡을 붙여보겠소?” 하고 시를 써서 박태준에게 건네준다. 이것이 가곡 ‘동무생각’ (사우)이다.  일설에 의하면 박태준이 먼저 곡을 만들어놓고 여기에 노산 선생이 시를 붙였다는 설도 있다.                          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 청라언덕위에 백합필 적에                       나는 흰나리 꽃 향내 맡으며 너를 위해 노래 노래 부른다.                       청라언덕과 같은 내 맘에 백합 같은 내 동무야                       네가 내게서 피어 날 적에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더운 백사장에 밀려 들오는 저녁 조수 위에 흰 새 뛸 적에                       나는 멀리 산천 바라보면서 너를 위해 노래 노래 부른다.                       저녁 조수와 같은 내 맘에 흰 새 같은 내 동무야                       내가 네게서 떠돌 때에는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소리 없이 오는 눈발사이로 밤의 장안에서 가등 빛날 때                       나는 높이 성궁 쳐다보면서 너를 위해 노래 노래 부른다.                       밤의 장안과 같은 내 맘에 가등같은 내 동무야                       네가 내게서 빛날 때에는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전국시조백일장 심사위원들과 함께한 노산 (앞줄 중앙)   #노산 이은상   1903년 마산시 상남동에서 태어나 1922년 시조 '아버님을 여의고', '꿈깬 뒤' 등을 발표하면서 등단한 이후 인생의 무상과 허무를 동양적 호흡으로 노래하였다. 특히 시조의 부흥을 기울여 독특한 이론으로 양장 시조론을 전개하고 작품을 쓰기도 했다.  1918년 마산창신학교를 졸업하고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수료한뒤  1925년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 사학과에서 수학했다.  귀국한 뒤로는 1931~32년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를 지낸 뒤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 언론기관에서 근무했다.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에 연루되어 구금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났으며, 1945년에는 사상범 예비검속으로 광양경찰서에 갇혀 있다가  광양지역에서 피신생활을 했었고, 8·15해방이 되어 풀려났다.  해방되던 해 전남 광주에서 호남신문사 사장에 취임했고, 1950년 이후 청구대학(지금의 영남대학교)·, 서울대 문리대 교수로 재직했다.   1954년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이 되었고, 1959년부터 충무공이순신장군 기념사업회장, 안중근의사숭모회장 등을 역임했다. 1967년 시조작가협회장, 한글학회 이사를 지냈고, 1969년 독립운동사 편찬위원장, 1972년 숙명여자대학교 재단이사장이 되었다. 1970년 경희대학교에서 문학박사학위, 1974년 연세대학교에서 명예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76년 성곡학술문화재단 이사장, 시조작가협회 종신회장, 1978년 예술원 종신회원으로 추대되었고 1982년 지병으로 별세했다. 장례는 사회장으로 치러져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1976년부터 노산문학상 운영위원회에서 노산문학상을 제정해 시상하고 있다. 타계하기까지 60여년간의 창작활동을 통해 시조 외에도 수필, 기행문집, 평전, 평론, 국학연구 관련서 등 40여권의 저서를 남겼다.    # 노산의 재평가 요원한가?   현재 마산에는 가고파를 기리기 위해 노산이 자주 오르내리면서 마산 앞바다를 내려다 보던 산호공원과 무학산 자락(월영대 부근), 돝섬 등 3곳에 가고파 시비가 세워져 있다. 가고파가 마산에 시심이 흐르는 도시, 문학과 낭만, 서정의 도시로 이미지화 하는데 기여했다고 할 수 있다.  고향을 떠나 수십년 객지에 살았던 나 뿐만 아니라 고향 떠난 대부분의 친구들은 이 노래를 들을때 마다 옛 추억을 떠올린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지역언론과 단체는 노산 선생의 친독재정권 행적을 부각시키며  마산사람들 정서엔 "가고파" 라는 것은 이미 없어졌다 라고 주장하며, 그런  정신은 이미 사라진것이라고 말한다.  자기들 논리대로, 경마장의 경주말처럼 앞만 쳐다보는 획일적 시각만으로는 더불어 사는 이들과 함께 내일을 이야기하기가 쉽지않다. 우리 주위에 벤치마킹할 상생의 사회통합 주제가  너무도 많은데, 그들의 행보가 안타까울 따름이다.   노산은 가고파 외에도 수많은 노래말을 남겼다, 당신의 가슴을 울리는 우리 가곡이 있다면 그 가곡 노랫말의 상당 수는 노산이 썼을 것이라고 단언해도 별로 틀리지 않는다. 봄처녀, 고향생각, 그리움, 그집앞, 성불사의 밤, 장안사, 동무생각, 옛동산에 올라, 금강에 살으리랏다,,, 등등 수많은 주옥같은 작품들이 모두 노산 선생의 작시다.  노산의 몇 싯귀를 보자, 봄처녀 제 오시네 새 풀옷을 입으셨네 하얀 구름너울 쓰고 진주 이슬 신으셨네 꽃다발 가슴에 안고 뉘를 찾아 오시는고 봄의 교향악이 울려퍼지는 청라언덕위에 백합 필적에 나는 흰나리꽃 향내 맡으며 너를 위해 노래 노래 부른다 어제 온 고깃배가 고향으로 간다하기 소식을 전차하고 갯가으로 나갔더니 그 배는 멀리 떠나고 물만 출렁거리오 장하던 금전벽우 잔재되고 남은 터에 이루고 또 이루어 오늘을 보이도다 흥망이 산중에도 있다하니 더욱 비감하여라 뉘라서 저 바다를 밑이 없다 하신는고 백천길 바다라도 닿이는 곳 있으리라 님그린 이 마음이야 그릴수록 깊으이다 오가며 그 집 앞을 지나노라면 그리워 나도 몰래 발이 머물고 오히려 눈에 뛸까 다시 걸어도 되오면 그 자리에 서졌습니다 어느누가 우리말을 이보다 더 아름답게 표현할 수 있을까?  과연 누가 있어서 우리 민족의 가슴에 흐르는 정서를 저렇게 쉽고 간결한 시귀로 만들 수 있었을까?  우리말이 죽고 우리민족이 소멸하던 일제시대에 노산은 민족정서가 담긴 운률을 이용하여 아름다운 우리말로 민족의 심금을 울렸다.   노산은 가곡뿐만 아니라 많은 학교및 기관의 교가도 작사했다. 경남지역에서는 경남대,창원대, 창원전문대,해군사관학교,창신고,마산중앙고,마산용마고(마산상고),마산여고,마산제일여중고, 무학여고(마산여상), 거창대성고 등 경남지역의 수많은 학교를 비롯,전남대, 영남대, 충북대, 한국외국어대, 홍익대, 경성고, 국립부산해사고는 물론 광주일고, 목포고, 수피아여고, 순천금당고, 신진공고, 인성고, 군산중, 동양중, 광주중앙초등,해군 군가, 대한의 노래, 경남도민의 노래, 창원시민의 노래, 강원도의 노래, 진천군민의 노래, 철도의 노래 등등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북한의 우연오 교수는 「반일·애국·광복 이념을 노래한 계몽기 서정가요」란 논문을 발표했는데, 그 속에서 노산의 「사우」, 「그리움」, 「성불사의 밤」, 「옛동산에 올라」 등을 높이 평가했다. 빼앗긴 조국에 대한 애절한 그리움을 직설적으로 표현하지 못하고, 일제의 검열을 피하기 위하여 은유적인 수법을 통해 간접적으로 표현했다고 평가했다. 이렇게 그는 북한에서도 주목받는 민족시인이다.   몇해전 나는 전북 고창 선운사를 찾으면서 미당 서정주 시비, 서정주 시문학관등을 둘러보며 당시 마산지역사회에서 논쟁이 되었던 노산 선생의 평가와  연관시켜 생각했던적이 있었다. 미당 서정주 시인 역시 친일, 친독재 행적으로 인해 문학단체들로부터  언론기관에서 제정한 "미당문학상" 수상 거부운동까지 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개인적인 생각인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문학 작품은 작가의 손을 떠나면 그것은 더 이상 작가만의 작품이 아니라고 여긴다. 훌륭한 예술작품은 보고, 듣고, 읽으며  가슴으로  예술적 감흥을 느끼면 그것은 우리 모두의 정신적 자산이다.  화합과 상생의 미래지향적 공동사회를 이야기 하면서 퇴로없는 이념에만 사로잡혀 작가의 작품에 대한 순수한 문학성마저 부인한다는 것은 글로벌 시대를 사는 사람들로서는 편협한 시각이다. 그것이 그들의 생각이 지금 살고있는 지역사회에 대한 어떠한 규범적 사명감을 부여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말 없는 다수의 고향지킴이들도 너무 많다는 것도 헤아려 보아야 할 것이다.     미당 서정주 시인의 고향 고창에서는 미당을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노산의 과거행적을 들추어 여론화했던 분들이 마음을 열고 더불어 함께사는 우리 사회 모든 이들의 화합과 창조적인 내일을 위해 대승적 차원에서 재고했으면 한다.  노산은 이미 1982년 세상을 떠났다. 사라진 한 문인이 그 시대에 살며 겪었던 시대의 아픔을 포용의 반석위에서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보다는 한 쪽으로만 치우친 잣대로 그의 업적을 폄훼하며 설왕설래 하고있다는 것은 아직도 우리사회가 균열의 시대에 있다는 증거다.  뜨거운 마음으로 치열한 시대정신을 가지고 살아왔던,  조용히 자신의 일에 충실하며 살아왔던,  우리 모두 지나온 인생을 살아오면서 한점 부끄럼 없이, 자신들에게 과연 얼마나 떳떳하였고 이웃과 사회와 나라에 정의로웠는지 성찰해봤으면 한다.      일부 단체에서 주장했던 노산 이은상의 친일은 노산이 만주국의 무슨 신문사에 잠시 몸을 담았다는게 죄목이었다. 그러나, 노산이 그 신문사에 재직했다는 기록도 전혀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그의 친일을 주장했던 곳에서는 이에 대해 묵묵부답이었다.노산 선생의 평생의 업적과 나라사랑을 깊이있게 제대로 살펴본다면, 일방적이고 편협된 이념의 잣대로 함부로 논할 인물이 결코 아니다.    중국땅에 이백과 두보가 있었다면 한반도 땅에는 소월과 노산이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국민시인의 위치에 있는 거목이 제대로 평가받아 하늘나라에서 부디 영면하셨으면 한다.  ////////////////////////////////////////////////////////////   이은상 시 모음 15편 ☆★☆★☆★☆★☆★☆★☆★☆★☆★☆★☆★☆★ 가고파  - 내 마음 가 있는 그 벗에게           이은상  내 고향 남쪽 바다 그 파란 물이 눈에 보이네  꿈인들 잊으리오 그 잔잔한 고향 바다  지금도 그 물새들 날으리 가고파라 가고파.  어린 제 같이 놀던 그 동무들 그리워라.  어디간들 잊으리오 그 뛰놀던 고향 동무  오늘은 다 무얼하는고 보고파라 보고파.  그 물새 그 동무들 고향에 다 있는데  나는 왜 어이타가 떠나 살게 되었는고  온갖 것 다 뿌리치고 돌아갈까 돌아가.  가서 한데 얼려 옛날같이 살고지라  내 마음 색동옷 입혀 웃고 지내고저  그 날 그 눈물 없던 때를 찾아가자 찾아가.  물 나면 모래판에서 가재 거이랑 달음질하고  물 들면 뱃장에 누워 별 헤다 잠들었지  세상 일 모르던 날이 그리워라 그리워.  여기 물어 보고 저기 가 알아 보나  내 몫엔 즐거움은 아무데도 없는 것을  두고 온 내 보금자리에 가 안기자 가 안겨.  처자들 어미 되고 동자들 아비 된 사이  인생의 가는 길이 나뉘어 이렇구나  잃어진 내 기쁨의 길이 아까와라 아까와.  일하여 시름없고 단잠 들어 죄 없는 몸이  그 바다 물소리를 밤낮에 듣는구나  벗들아 너희는 복된 자다 부러워라 부러워.  옛 동무 노 젖는 배에 얻어 올라 치를 잡고  한바다 물을 따라 나명들명 살까이나  맞잡고 그물 던지던 노래하자 노래해.  거기 아침은 오고 거기 석양은 져도  찬 얼음 센 바람은 들지 못하는 그 나라로  돌아가 알몸으로 살 꺼나 깨끗이도 깨끗이. ☆★☆★☆★☆★☆★☆★☆★☆★☆★☆★☆★☆★ 갈림길에서         이은상  체온도 지탱하기 어려운  이 음산한 고난의 땅  역사의 실패한 땅에서  일어서야 할 민족이기에  한 가닥  희망의 길을 찾아  우리 갈 길을 가야 한다  인류의 역사 위에  수많은 의인들이 걸어간  거룩한 피와 눈물이 밴  진리와 아름다움의 길  그 길이  너무도 또렷이  우리 앞에 놓여 있구나  눈물과 땀과 피는  인간이 가진 세 가지 재산  기원과 봉사와 희생  거기 영생의 길이 있네  험하고  가파로와도  오직 그 길만이 사는 길!  너와 나, 식어져버린  가슴 속의 사랑의 피  그 피 다시 끓이면  거기 화사한 장미꽃 피고  눈부신  부활과 영광의 길  우리 앞에 열리리라 ☆★☆★☆★☆★☆★☆★☆★☆★☆★☆★☆★☆★ 강둑에 주저앉아           이은상  문득 보니 미국 병정  총 들고 길 앞을 막네  미군의 담당구역이라  통행증을 보이라 하네  남한 쪽  분계선 안에서마저  자유 없는 이 지역!  산도 내 산이요  강도 내 강인데  날더러 그 누구 앞에  무슨 증표 뵈란 말요  강둑에  주저앉아서  목을 놓고 울어버린다  지지리도 못난 주인아  네 강산 보기가 부끄러우냐  정녕 부끄럽거든  고개 숙이고 지나가렴  말 없이  돌장승처럼  눈 내려감고 서 있는 사람  언덕에서 내려다 뵈는  악마의 골짜기 군사분계선  옛날엔 남북으로  기차 다니던 정거장 자리  레일은  우거진 잡초 속에  가로누운 채 잠들었고  녹슨 레일 위에  괴물 같은 저 기관차  벌떡 일어나 우렁차게 울어  이 적막한 하늘 못 흔드느냐  지금 곧  북으로 북으로  냅다 한 번 달리자꾸나 ☆★☆★☆★☆★☆★☆★☆★☆★☆★☆★☆★☆★ 검은 구름 토하는 고개                      이은상  이름조차 험한 산 고개  '검은 구름 토하는 고개'  구름이 장막처럼 몸을 휩싸고  비를 몰아오는 바람소리  세기의  종말을 고하는  선지자의 선언과도 같이  진실! 진실을 잃어버리면  거기는 캄캄한 지옥  허위의 얼굴을 대하면  악마보다 더 무서워  지구가  온통 검은 구름에  휩싸여 있는 오늘이다  여기 불타고 말라 죽어  잎사귀 하나 없이 헐벗은 나무  인간들이 받아야 할 형벌을  대신 받고 서 있는 것 같아  경건히  그 십자가 아래 서서  속죄의 기도를 올린다  방향을 잃은 인간들  허위적거리는 발등에  차라리 이 순간  뇌성벽력이라도 쳤으면 싶다  주춤 서  검은 구름 토하는 고개  올려다 보는 심정이여! ☆★☆★☆★☆★☆★☆★☆★☆★☆★☆★☆★☆★ 고석정(孤石亭)                이은상  아름다 와라 절경 한 구역  예부터 이름난 고석정  물은 깊어 검푸르고  골은 돌아 몇 굽인데  3백 척  큰 바위 하나  강 복판에 우뚝 솟았네  위태론 절벽을  다람쥐? 기어올라  갈길도 잊어버리고  강물을 내려다보는 뜻은  여기서  전쟁을 끝내고  총 닦고 칼 씻던 곳이라기  소석정 외로운 돌아  오늘은 아직 너 쓸쓸하여도  저 뒷날 많은 사람들  여기 와 평화의 잔치 차리는 날  낯 익은  시인은 다시 와서  즐거운 시 한 장 또 쓰고 가마 ☆★☆★☆★☆★☆★☆★☆★☆★☆★☆★☆★☆★ 고지가 바로 저긴데        이은상 고난의 운명을 지고, 역사의 능선을 타고 이 밤도 허우적거리며 가야만 하는 겨레가 있다. 고지가 바로 저긴데 예서 말 수는 없다. 넘어지고 깨어지고라도 한 조각 심장만 남거들랑 부둥켜 안고 가야만 하는 겨레가 있다. 새는 날 핏속에 웃는 모습 다시 한번 보고 싶다. ☆★☆★☆★☆★☆★☆★☆★☆★☆★☆★☆★☆★ 고통과 부활            이은상  이 고통 아프다 말라  차라리 값진 고통이다  발로 짓밟고 눈 얼음 쌓여도  새 싹 움트는 밀알과 같이  믿어라  의심치 말고 믿어라  우리에겐 분명히 부활이 있다  길이 끝났다 말라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길  철조망 장벽 앞에서  우리 갈 길을 보았다  열어라  살육의 광야에서  부활의 길을 뚫어라  통일과 사랑 이뤄지는 날  자유와 평화 도로 찾는 날  탁류에 휩쓸려 가는  인간의 양심 회복하는 날  거기에  민족과 인류가 되살아나는  영광의 부활이 있다 ☆★☆★☆★☆★☆★☆★☆★☆★☆★☆★☆★☆★ 그 집 앞       이은상 오가며 그 집 앞을 지나노라면 그리워 나도 몰래 발이 머물고 오히려 눈에 뛸까 다시 걸어도  되오면 그 자리에 서졌읍니다 오늘도 비 내리는 가을 저녁을 외로이 이집앞을 지나는 마음 잊으려 옛날 일을 잊어버리려 불빛에 빗줄기를 세며갑니다 ☆★☆★☆★☆★☆★☆★☆★☆★☆★☆★☆★☆★ 나무의 마음       이은상 나무도 사람처럼 마음이 있소  숨쉬고 뜻이 있고 정도 있지요  만지고 쓸어주면 춤을 추지만  때리고 꺾으면 눈물 흘리죠  꽃 피고 잎 퍼져 향기 풍기고  가지 줄기 뻗어서 그늘 지우면  온갖 새 모여들어 노래 부르고  사람은 찾아가 쉬며 놀지요  찬서리 눈보라 휘몰아쳐도  무서운 고난을 모두 이기고  나이테 두르며 크고 자라나  집집이 기둥 들보 되어주지요  나무는 사람 마음 알아주는데  사람은 나무 마음 왜 몰라주오  나무와 사람은 서로 도우면  금수강산 좋은 나라 빛날 것이오  ☆★☆★☆★☆★☆★☆★☆★☆★☆★☆★☆★☆★ 새 역사는 개선장군처럼         이은상    사랑의 큰 진리를  배반한 죄의 값으로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는  조국과 아시아의 세계  멸망의  낭떠러지에서 발을 멈추고  새 역사를 기다리자  우리들의 새 역사는  어떤 모습으로 올 것인가  순풍에 돛 달고 오는  유람선같이 오진 않으리  얼굴과  몸뚱이 성한 데 없이  상처투성이로 오리라  우리들의 새 역사는  상처투성이지만 이기고 돌아오는  역전의 개선장군으로  우리 앞에 다가서리니  그 날에  우리는 그와 함께  분명 그와 함께 서리라  ☆★☆★☆★☆★☆★☆★☆★☆★☆★☆★☆★☆★ 스승과 제자         이은상 또 한 고개 높은 재 넘어  낭떠러지 길가에 앉아  고달픈 다리를 쉬노랄 제  뒤에서 돌격대처럼 달려와  '선생님'  부들부들 떨면서  나를 껴안는 병정 한 사람  반가와라 이게 누군고  군인이 된 나의 제자  길목 지키는 파수병으로  이 깊은 산협에서 만나보다니  두 손목  서로 붙들고  어루만지다 이야기하다  산협길 멀고 험하고  해조차 뉘엿이 기울건마는  차마 서로 못 나뉘어  손목을 놓았다 잡았다  헤어져  산모퉁이 돌 때까지  몇 번이나 되돌아보고  ☆★☆★☆★☆★☆★☆★☆★☆★☆★☆★☆★☆★ 신록 속에 서서        이은상 흙탕물 쏟아져 내리던  전쟁의 악몽과 화상  여기선 신록조차 눈에 서툴러  다른 나라의 풍경화 같네  역사의  배반자라는  낙인찍힌 우리들이기에  이 시간에도 온갖 죄악을  아편처럼 씹으면서  갈수록 비참한 살육의  설계도를 그리면서  거룩한  신록의 계절을  모독하는 무리들!  그러나 우리들 가슴속에는  마르지 않은 희망의 샘 줄기  어둠의 세기 복판을  운하처럼 흐르고 있다  기어이  이 물줄기 타고 가리라  통일과 평화의 저 언덕까지  ☆★☆★☆★☆★☆★☆★☆★☆★☆★☆★☆★☆★ 오륙도(五六島)            이은상 五六島 다섯 섬이 다시 보면 여섯 섬이 흐리면 한두 섬이 맑으신 날 五六島라 흐리락 맑으락 하매 몇 섬인 줄 몰라라. 취하여 바라보면 열 섬이 스무 섬이 안개나 자욱하면 아득한 먼바다라 오늘은 비속에 보매 더더구나 몰라라. 그엣 날 어느 분도 저 섬을 헤다 못해 헤던 손 내리고서 五六島라 이르던가 돌아가 나도 그대로 어렴풋이 전하리라.  ☆★☆★☆★☆★☆★☆★☆★☆★☆★☆★☆★☆★ 천지송      이은상 보라, 저 울멍줄멍 높고 낮은 산줄기들 저마다 제자리에 조용히 엎드렸다. 산과 물 어느 것 한 가지도 함부로 된 것 아니로구나. 황금 방울같이 노오란 저녁 해가 홍비단 무늬 수를 놓고 있다. 저기 저 구름 한 장도 함부로 건 것 아니로구나. 지금 저 들 밖에 깔려 오는 고요한 황혼! 오늘밤도 온  하늘에 보석 별들이 반짝이리 그렇다! 천지 자연이 함부로 된 것 아니로구나. ☆★☆★☆★☆★☆★☆★☆★☆★☆★☆★☆★☆★ 칡꽃마을 이야기            이은상  시인은 막대 끌고  또 한 고지에 올랐더니  파수 서 있는 병정 한 사람  산 밑 마을 가리키며  겪어 온  기구한 사연  들려주는 이야기--  '바로 저 아래 보이는  칡꽃마을이 내 고향이죠  저기 약수터가 있어  거기 가 빌면 소원성취 한다기  약속한  처녀랑 하냥  아침저녁 같이 다녔죠'  '그러다 전쟁이 터져  온 마을이 불타버리고  모두들 죽고 흩어지고  나는 뽑혀서 군인이 되고  처녀는  마을을 못 벗어나  비참하게도 숨져버리고'  '나는 전투부대 따라  이곳 저곳 옮아 다니다  지금은 뜻밖에도  이 고지 감시대 파수병이 되어  날마다  칡꽃마을 내 고향  내려다보며 섰지요'  '저기 있는 약수터도  영험이 없나봐요  그렇게도 빌었었는데  소원성취 못하고서  옛 처녀  그려 보면서  명복을 빌며 살지요 ☆★☆★☆★☆★☆★☆★☆★☆★☆★☆★☆★☆★ 시비(詩碑)냐  시비(是非)냐... 순천만정원 내 한국정원 앞에 설치된 노산 이은상의 시비(詩碑)가 뒤늦게 논란이 되고 있다. 친일․친독재 활동으로 논란을 빚고 있는 이은상은 그의 고향 마산에서도 문학관과 시비 설치에 지역 시민사회단체가 거세게 반발했던 경험이 있는데, 순천에서도 철거 요구 움직임이 일고 있다.  순천시가 이은상의 시비를 설치한 것은 지난해 정원박람회 개장을 앞두고였다. 순천만정원 내 한국정원 입구 수목원 부지에 폭 3m, 높이 5m의 큰 돌에 이은상의 시 ‘나무의 마음’을 새겨 놓았다.          이를 두고 문인협회 문두근 전 회장은 “정원박람회를 개장한 후 이은상 시비가 설치된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며 “그의 고향 마산에서도 마산역 앞에 시비 설치한 것을 두고 논란이 되고 있는데, 순천에서, 그것도 한국정원 앞에 설치해 놓은 것은 문제”라고 말했다.  그는 “지난해 문인협회에서 일정 예산을 부담해서 박람회장 곳곳의 쉼터에 시비를 설치하고 싶다고 했을 때는 ‘예산도 없고, 어떠한 시설도 설치하지 않겠다’고 하더니 이은상 시비만 설치했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이번 지방선거 때 시장 후보들에게 이에 대한 처리 계획을 묻고 싶다”고 말했다. 순천예총 이승정 회장도 “지난해 정원박람회 할 때 찬물을 끼얹을 수 없어 말하지 못했는데, 올해는 말해야겠다고 생각했다.”며 예술계 전체 의견이 아닌 사견임을 전제로 “철거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 같은 지적에 대해 순천시 관계자는 “시비가 설치된 장소가 수목원인데, 나무와 관련한 시를 찾다 보니 이은상의 ‘나무의 마음’을 시비로 설치한 것”이라고 말했다. 누가 설치를 요구했던 게 아니라 직원 토론회를 통해 결정했는데, 나무의 중요성을 일반인에게 알리면 좋겠다는 취지로 설치했다는 설명이다. 이은상의 친일․친독재 논란과 지역 예술계의 철거 요구에 대해서는 “99%의 사람은 그것을 모르고 있고, 나도 몰랐다”며 “논란을 제기하는 것은 하는 수 없는 것이지만 시장 후보들에게 철거 여부에 대한 의견을 묻는 것은 너무하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근본주의 개념보다는 세상의 변화를 이해했으면 좋겠다는 말이다. 한편 이은상의 고향인 경남 마산에서는 마산시가 31억 원을 들여 노산(이은상)문학관 건립을 추진하다 시민사회단체의 적극적인 반대활동으로 6년 동안의 논란 끝에 무산되었다. 결국 노산(이은상)문학관은 마산문학관으로 이름을 바꿔 수십 명의 문학인을 기념하는 공간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마산역장의 제안으로 마산의 한 로타리클럽이 3000만 원의 예산을 들여 마산역에 이은상 시비를 설치하면서 논란이 커졌다. 설치되자마자 누군가 페인트로 세 차례나 훼손하여 미관을 해치고 있고, 지역의 시민사회단체가 강제 철거를 시도하는 등 논란을 빚었다. 결국 지금은 이은상 시비 옆에 시민사회단체가 ‘민주성지 수호비’를 함께 설치하였다. 마산에서 이은상 기념사업을 반대해 온 열린사회 희망연대 김영만 대표는 “친일을 했던, 친독재를 했던 사람을 시하나 잘 썼다고 기념하는 것은 문제”라고 지적했다.  순천만정원 내 이은상 시비와 관련해서는 “나무나 숲에 대해 시 쓴 사람이 많을 텐데, 왜 하필이면 이은상 시냐?”며 “이은상을 인정하지 않는 시민들에게 이은상 시비는 혐오감을 조장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페인트를 뿌리고 계란을 투척하는 시민들.      밀가루를 투척하자 주위가 온통 뿌옇게 보입니다. 마치 최루탄이 터진듯....     페인트와 계란, 밀가루를 뒤집어 쓴 이은상 시비의 모습.   마산역 광장 가고파 시비     2013년 2월 건립되면서 페인트로 훼손되었던 가고파 시비가 말끔이 복원되었다.   마산역 앞 ‘가고파 시비’ 곁에 세워진 이은상 선생 폄훼 철판 碑는 없어져야 한다   -고향의 위대한 선조를 왜 억지로 지우려 하는가   오하룡 시인, 마산문협 고문   1.들어가기, -노산 선생의 허물을 억지로 만드는 사람들   마산역 광장에는 마산의 상징 문인 이은상 시인의 작품 가 웅장한 돌에 새겨져 서 있다. 이 비는 저 지난해(2013년) 2월 ‘가고파’를 사랑하는 시민 단체인 마산 로타리클럽에 의해 세워진 것이다. 그런데 어색하게도 이 ‘가고파’ 시비 옆에는 ‘한국 민주주의의 요람 민주성지 마산 수호비’라는 이름의 철판 비가 낯설게 서 있다. 이 비는 노산 이은상 선생에 대한 해당되지 않는 허물을 들추어 마산에서의 노산 선생 지우기에 앞장선 일부 시민단체가 세운 것이다. 이들은 얼토당토않게도 노산 선생의 친 독재 협조, 3.15폄하 등 제대로 검증되지 않은 일방적 이유를 들어 '가고파 시비' 설치 반대를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그들은 그 시비를 제막하려하는 전날 밤, 시비 전면에다 페인트를 들이붓는 상식을 벗어난 행동을 하였다. 그러나 시비제막식은 예정대로 진행되었고, 그 자리에서 반대시위를 벌이던 그들도 마산로타리클럽 회원과 마산 문인들을 비롯하여, 노산을 사랑하는 시민들의 완강한 대응에 의해 자신들의 주장은 무색해졌다. 그러자 그들은 상습화된 왜곡된 논리로서 이 비를 세우고 나선 것이다. 그것도 이 땅의 관리인 마산역의 반대에도 아랑곳 않고 불법으로 세운 것이다. 그들의 주장에 대해서는 그 허구성을 낱낱이 지적한 마산문인들의 입장발표가 있었고, 그 밖에도 본인을 비롯하여 여러분이 칼럼 등을 통해 그들이 문제 삼는 불합리한 부분을 해명하여 왔다. 이런 사정에 밝은 분들에게는 중언부언의 군소리가 될 것으로 여겨지나, 그간의 사정을 모르는 분들은 자칫 이들의 주장에 대해 이해가 쉽지 않을 우려가 있어서 다시 둔필을 들어 이들의 허구성을 지적하는 용기를 가져본다. 여기서 용기를 들먹거리는 것은, 이 문제의 비를 세운 사람들이 또 거친 대응을 해오리라 여겨져서이다. 그렇다고 진실을 왜곡한 현실을 어찌 그냥 방관할 수 있으랴.   비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비의 ‘상단 평면’에는, 그들의 눈에는 노산 선생의 행적에서 허물로 덧씌운 내용을 열거하고, ‘비의 정면’에는 시 노래 형식을 빌어 ‘가고파’를 패러디한 노래 글을 만들어 읊어 놓았다. 그 아래에는 이 비를 세운 취지문, 참여한 단체를 밝히고 있다. 그 내용을 보면, 이들이 그동안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노산 선생을 흠집 내어 왔는지를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이들은 처음에는 이은상 선생에게 친일혐의를 씌워 가장 큰 문제인 것처럼 앞세웠다. 친일 혐의가 없자 이번에는 이승만과 박정희 정부의 친 독재와 3.15의거에 대한 폄하를 문제 삼아 왔다. 이 비문의 핵심도 이것에 집중되고 있다. 그동안 마산문인들은 이들의 부당성을 끊임없이 지적하여 왔다. 그러나 이들은 쇠귀에 경 읽기 식으로 진실을 외면하고, 일방적이고 편파적인 왜곡 행위를 계속하고 있다. 친일 흔적이 없으면 그 부분만이라도 솔직히 사과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이것이 명색이나마 사회 정의를 표방하는 시민단체의 올바른 자세일 것이다. 없는 친일로 하여 그동안 노산 선생은 얼마나 명예를 훼손당해 왔는가를 생각하면 이 사실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도 이들은 한번 문제 삼으면 비록 그 내용이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 하더라도, 반성은커녕 다른 문제 꺼리를 들고 나와 우겨대는 행동을 계속하고 있다.   여기서는 기왕에 이런 비가 섰으므로 이에 대해 아무런 반론이 없으면 이 자체가 진실인양 인정될 우려가 있으므로, 새삼 중언부언 되는 일이지만 다시 해명성 설명을 곁들이고자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어떤 분들은 침묵이 금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진실은 언젠가는 드러나는 것이 철칙이므로 지금 서둘 것이 없다’고 자위하기도 한다. 그러나 필자는 마냥 침묵한다는 것은 진실을 외면하는 것으로, 양식 있는 자세가 아니라고 보며, ‘언젠가’라는 불확실한 미래를 무한정 기다리는 것은 책임회피로 보여 둔필을 들기로 한 것이다. 이제 노산선생은 마산 출신의 대 시인으로서의 위치에 당당히 복원되어야 하는 시점에 왔다고 보는 것이다.   2.철판비의 내용   그러면 구체적으로 문제의 철판비 속의 내용을 진실 측면에서 분석하여 보기로 한다. 철판비를 구성한 기둥에 ‘불합리 불합법’이란 글씨가 낙서처럼 흐리게 쓰여 있는 게 보인다. 이 글씨가 이 비의 핵심임을 드러내고 있다. ‘불합리 불합법’은 노산 선생이 3.15 의거를 그렇게 표현한 것으로 몰아가는 저의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노산 선생이 언급한 ‘불합리 불합법’은 당시 3월15일 일어난 ‘마산사태’ 또는 ‘마산사건’을 일어나게 한 원인이 당시 집권 자유당 정부라는 점을 지칭한 것이다. 그러나 저들은 노산 선생이 ‘3.15의거를 불합리 불합법한 불상사’라 한양 몰아가는 것이다.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본문에서 다시 자세히 풀어가겠지만 ‘불합리 불합법한 불상사’가 아니라 ‘불합리 불합법이 빚은 불상사’로 언급한 점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진실의 접근인 것이다.   1) 철판비 상단 평면의 비문모두 선으로 8개 단락으로 구획 짓고 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좌측부터 시작 첫째 단락   이승만 정권하에서 3.15가 일어나기 얼마 전 이은상은 문예유세단을 조직하여 자유당 대구 유세에서 시국을 임진왜란과 비교하면서 “이순신 같은 분이라야 민족을 구하리라 그리고 그 같은 분은 오직 이대통령이시다”고 말하였다고 한다.   둘째단락   ‘28일 인천 유세에 이어 실시된 동당의 전국유세 계책은 다음과 같다. 오일 하오 2시(대전) 이은상’ -1960년 2월 28일자    셋째 단락   “대통령 선거 유세 중에 시인 이은상 씨는 이승만 박사의 위대함과 아울러 이기붕 의장의 성실하고 자애로운 인간성을 설명하여 깊은 감명을 주었다.” -1960년 3월 5일자   넷째 단락   “(이은상 선생에게 나온 문교부 지원금을) 군사혁명을 하는데 좀 써야겠다, 이해해 달라고 하니까 (이은상 선생이) 동의해 주셨어요. 516 군사혁명 공약을 이은상 선생에게 맡기자는 얘기도 있었는데, 거사시기가 노출 될까 포기했습니다.” -2002년 4월호 (‘두목 김용태, 혼신의 5시간 증언’)에서 *김용태는 군사정권의 무임소 장관을 지내기도 함.   다섯째 단락   “...조상의 얼과 전통을 찾아서 되살리고 세계의 한국으로 큰 발자국을 내디뎠기 민족의 영도자외다, 역사의 중흥주의자외다”라고 찬양 -박..묘비 헌시비문 中     여섯째 단락   소위 마산사태에 대한 질문에 ‘불합리 불 합법이 빚어낸 불상사’ ‘지성을 잃어버린 데모’, ‘비정상적인 사태’ ‘무모한 흥분’이며 ‘시위가 확대되면 ‘과오와 과오의 연속으로 이적의 결과‘가 되고 말 것이므로 마산시민들에게는 ‘내가 마산사람이기 때문에 고향의 일을 걱정하는 마음이 더 크다. 자중하기를 바란다.’ -1960년 4월 15일자  ‘마산사태를 이렇게 본다’ 라는 인터뷰 기사 中   일곱째 단락   이 겨레 위하시어 한평생 바치시니 오늘의 백수홍안 늙다젊다 하오리까 팔순은 짧으오이다 오래도록 삽소서 우리나라 대한나라 독립을 위해 일생을 한결같이 몸 바쳐 오신 고마우신 이 대통령 우리 대통령 그 이름 길이길이 빛나오리다-   1955년  4월호에 ‘송가(頌歌)’라는 제목으로 이은상이 지은 이승만 대통령 탄신 80주년을 기념하는 축시   여덟째 단락   당신 원로 중 원로인 이은상이 체육관 선거로 대..이 된 전..에게 바친 경하글에는   “전..의 당선을 경하하며” “한국의 특수한 상황으로 보아 무엇보다도 강력한 지도자를 원하는 것이 거의 일반적인 여론“ “아울러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새 대..에게 바라는 국민의 간절한 뜻을 이 자리를 빌어 말씀 드리고자 한다.”며 글 아래 자필 서명을 남겨 놓았다. - 1980년 9월호    2) 앞 정면의 글 (위 평면 비면의 내용을 ‘시인의 친독재가’라는 제목을 붙여 가고파 시풍으로 패러디 하고 있다. 필자 주)   시인의 친독재가   이.. 자유당 영구집권 음모 동조 독재자와 그 후계자 정부통령 당선 위해 전국을 유세하며 부정 선거 힘보탰네   3.15와 4.11 마산 사건은 도대체 불합리 불합법이 빚어낸 불상사라 지성잃은 데모요 비정상적 사태로다   고향걱정 한다면서 은근슬쩍 겁주기를 무모한 흥분으로 과오를 범치 마라 과오와 과오 연쇄는 필경은 이적행위   4월 학생혁명 탑문 516위해 써 줬을 뿐 쿠테타 협력 유신지지 학살자에 아첨 떨며 독재 권력 품속으로 가고파라 가고파라   (사이에 ‘큰 글자로 한국민주주의 요람 민주성지 마산 수호비‘라고 제목을 달고 그 아래 취지문을 넣음, 필자 주)   “모든 사람을 잠시 속일 수는 있으나 영원히 속일 수는 없다. 진실을 덮을 수는 없고 거짓은 드러나기 마련이다.”   민주주의 역사의 정수, 3.15 마산 정신과 결코 양립할 수 없는 이은상의 반민주 친 독재 행적을 널리 시민에게 알리고 3.15정신을 올곧게 계승하기 위하여 뜻있는 시민들의 성금으로 이 비를 여기에 세운다.   2013.10. 315정신계승 시민단체연대회의 전국철도노동조합 부산지방본부 민주노총 경남지역본부   3. 진실 접근을 위한 내용 분석   1) 비면의 평면에 나열된 8개 단락의 글에 대하여 첫째단락; *‘이은상은 문인유세단을 조직하여’라고 된 부분; 이은상 선생이 직접 유세단을 조직하였다는 것은 확실한 근거가 있을 때 그렇게 몰아갈 수 있다. 그런 제시 없이 두루뭉수리 그가 선거유세단을 조직한양 즉, 주체인양 표현한 것은 진실이 아니다. *‘고 말하였다고 한다.’라고 한 어미 부분; 직접 확인하지 않았으므로 애매하게, ‘말하였다고’ 하고 있다. 누가 어디서 그렇게 말했는지, 아니면 어떤 매체가 보도했는지 밝히지 않으면서 이처럼 얼버무린 것은 진실이라 할 수 없다. *이승만 대통령이 독재의 상징인물이 된 것도 그가 퇴진(하야)하고 난 이후다. 그 전에는 그런 개념이 없거나 희박하였다. 그렇다면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호불호 표현은 이은상의 개인적인 신념이므로 문제될 것이 없다.   둘째 단락; *서울신문 1960년 2월 28일 날짜, 그날 오후 2시 자유당의 인천 유세에 이어 다음달 5일 2시 대전 유세에 이은상 선생이 나선다고 밝힌 기사로, 첫째 단락에서 의문시 되는 선생의 유세 참여 근거 제시로, 그 연장선상에서 문제를 인식하라는 것으로 억지 나열에 불과하다.   셋째 단락; *서울신문 3월 5일자에 난 기사로 유세에서 ‘이은상 시인이 이승만 박사의 위대함과 아울러 이기붕 의장의 성실하고 자애로운 인간성을 설명하여 깊은 감명을 주었다.’고 소개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에서 그런 표현을 썼는지 밝혀야 하고, 강연 전문의 전체 문맥에서 파악해야 할 문제이지 부분만으로 그를 부정선거의 앞잡이인양 모는 것은 진실이 아니지 않는가. *이 부분도 첫째 단락에서처럼 애매한 의문제시로 문제 삼자는 나열에 불과한 것이다.   넷째단락; * 5.16혁명 세력과 친밀함을 허물삼아 노산 선생의 도덕성에 흠집을 내기 위한 증거제시로 보인다. 5.16주체세력인 김용태 씨의 2002년 4월호 월간 조선의 증언으로 노산 선생에게 개인적으로 지원된 금액을 혁명에 쓰겠다니까 동의했다는 것이다. 혁명이후 40년이나 지난 일로 김용태 씨의 기억이 얼마나 정확한지도 의문이고, 그들로서는 노산의 협력이 그들이 한 짓을 합리화 하는 수단으로 중요하므로 이런 말을 늘어놓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이런 증언을 신뢰하기가 쉽지 않다. 이런 식의 흠을 잡자면 누군들 흠 없는 사람이 있을 수 있겠는가. 이 부분은 노산 선생의 행동이 그간의 모든 것을 말하고 있다. 당시의 분위기로 봐 혁명세력은 노산을 어떻게든 이용하려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권력에 노산 선생이 직접 가담하였다는 기록이 없다.   다섯째 단락; * 박..추모 헌시 쓴 것을 잘못인양 문제 삼고 있다. 박...에 대해서는 사후 40년이 가까워지는 지금에 와서도 국가산업화 발전측면에서는 긍정적인 평가, 민주화측면에서는 비판을 받고 있다. 노산 선생은 박.. 통치 18년을 지켜봐 왔다. 그런 그가 확고한 신념으로 그 인물을 평가하여 추모시를 썼다면 지극히 개인적인 신념의 소산으로 무엇이 문제인가.   여섯째 단락; 조선일보 1960년 4월 15일자 라는 6개 항목 설문에 대한 노산 선생의 답변에 대한 것이다. 노산 선생의 3.15폄하운운은 여기서 출발하고 있다. 이 부분에 대해서 필자는 작은문학 49호(2013년 봄 여름호, 29페이지)를 비롯하여 인터넷 불로그 등에 는 제목으로 분석 기고한바 있다. 이 단락에서 저들은 필자를 비롯한 문인들의 적극적인 해명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꽉 막힌 왜곡된 고집을 풀려 하지 않고 있다. 여기서는 지면 사정으로 그 6개 항목을 다시 중복 소개하지 않지만, 그 전문을 제대로 읽어보았다면 이런 억지는 계속 부리지 않을 것이다. 한번 읽어서 이해되지 않으면 몇 번이고 더 읽어보면 이해가 될 것이다, 어떤 이는 노산 선생이 좀 쉽게 답변을 했으면 이해가 빠를 텐데, 한문 투로 써서 일반인들이 어렵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고 하였다. 예를 들면, 같은 지면의 답변에 소설가 김팔봉은 ‘마산사건이 촉발된 원인이 무엇이라고 보십니까.’에 대해 ‘국민의 권리를 박탈하고 선거를 부정하게 치른 까닭이다.’라고 하였다. 이렇게 쉽게 답변했다면 노산 선생처럼 곡해하는 일이 없을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그렇더라도 쉽게 쓰면 이해되고, 한문 투로 신중한 어휘를 구사한 그것만으로 오해해도 된다는 말은 아닐 것이다. 그 뜻이 어디 가겠는가. *‘불합리 불합법(不合理 不合法)이 빚어낸 불상사(不祥事)’에 대하여; ‘마산 사건이 촉발된 근본원인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한데 대한 노산 선생의 답변은 이랬던 것이다. 한문 투의 이 말이 어려워서인가. 이들은 당시의 3.15사건을 ‘불합리 불합법이 빚어낸 불상사’라고 한 것을 ‘3.15를 불합리 불합법한 불상사’라고 한양 왜곡해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불합리 불합법’은 ‘3.15의거’를 그렇게 본 것이 아니라 ‘3.15 사태’ 즉, 폭력과 인명살상이 동반된 ‘마산사건’이 터지게끔 원인제공을 한 자유당 정부가 정치적으로 합리적이지 않고 불법적인 부정선거를 저질렀기(빚어낸) 때문에 ‘마산사태’라는 불상사가 일어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런데 저들은 ‘3.15의거’를 ‘불합리 불합법한 불상사’라고 받아들이고 있으니 기가 찰 노릇인 것이다. 불행하게도 지금 젊은이들은 그 시대의 어려운 상황을 모르고 있다. 3.15는 ‘의거’인데 왜 ‘마산사태’ 또는 ‘마산사건’이라고 하느냐에 의구심을 가지고 있다. 의거를 ‘불상사’로 표현한 것에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다. 노산 선생이 설문에 대한 답변을 쓸 때의 신문보도는 ‘마산사태’ 또는 ‘마산사건’이라고 부르는 것이 일반적인 표현이었다. 세월이 흘러 그 ‘사건’, 그 ‘사태’가 ‘의거’로 규정되기 까지는 그랬던 것이다. 비록 ‘의거’의 성격으로 마산 ‘사건’은 일어났으나 처음에는 난동으로 볼 수 있게끔 격렬한 시민운동으로 일어났다. 부정선거에 대한 자연스런 울분은 점차 국가에 대한 불만의 표출로 이어져 시위가 격화되자, 파출소 같은 공공건물이 불타고 파괴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불상사’ 즉 ‘일어나서는 안 되는 사건’이므로 ‘불상사’라고 부르게 된 사정이 거기에 있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치안을 책임진 경찰과의 필연적인 대립은 선량한 시민의 희생을 불러오게 된다. 이때는 동족상잔의 6.25 전쟁의 참화에서 휴전을 맞고 겨우 7년여가 지난 시점으로 지리산 등의 일부 지역에는 공비의 출몰로 인한 불안감이 채 가시지도 않고 있었다. 나라의 미래를 의식하는 국민이라면 진정으로 나라에 대한 걱정을 하게 되어 있다. 그러니까 이러한 당시의 시대상황을 어느 정도 이해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걱정 없는 평화시대에 부정선거가 저질어지고 그에 따라 저항운동이 일어난 한가한 나라 사정이 아니었음을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지성(知性)을 잃어버린 데모’, ‘비정상적인 사태’, ‘무모한 흥분’이며 시위가 확대되면 ‘과오와 과오의 연속으로 이적의 결과’가 되고 말 것이므로 마산 시민들에게는 ‘내가 마산사람이기 때문에 고향의 일을 걱정하는 마음이 더 크다. 자중하기를 바란다.’; 이 부분에 대해서도 작은문학49호에서 자세히 설명해 놓았으나 지면이 다르므로 여기서도 약간의 설명을 곁들인다. 이 부분 노산 선생의 우려 섞인 답변은, 어느 한 가지 합리적이지 않은 부분이 없다. 격렬한 데모에 어찌 이성이나 지성이 통할 것인가. 그러나 노산 선생은 이성적인 ‘지성’을 기대하였던 것이다. 그런 기대를 한 것이 잘못이란 말인가. 국민의 생명과 재산에 위협되는 격렬한 시위라면 ‘비정상’이지 ‘정상’일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앞에서 잠시 언급했듯이 공산세력과 전쟁을 겪은 상황이고, 종전이 아니라 전쟁을 잠시 쉬는 휴전 상황이니, 우리나라가 혼란으로 난관에 봉착한다면 누가 좋아하겠는가. 이런 사태까지 걱정하여 ‘이적’을 들먹인 것이 잘못이란 말인가. 따라서 이들이 이런 노산 선생의 답변을 문제 삼는 것은, 황당하게도 노산 선생이 그런 사태를 잘한다고 부추기지 않고 왜 만류하는 태도를 취했느냐 하는 것이 아닌지 하는 것이다. 부정한 정부를 타도하기 위한 시위이니 노산 선생까지 나서서, 도시야 망가지든 말든 시민들이야 더 희생되든 말든 사태를 확대시켜 끝장을 보아야 한다는 논리로 보이는 것이다. 한 도시의 운명이 좌우되고, 사태에 따라서는 더 많은 인명 손실은 물론이고 애써 모은 재산까지 한 순간 물거품이 될 수도 있는 상황에서 어찌 그런 일을 노산 선생이 앞장서 나서지 않고, 수습하는 태도를 취했다고 문제 삼을 수 있다는 말인가. 노산 선생은 진정으로 고향을 사랑하는 사람다운 답변을 하고 있다. “내가 마산사람이기 때문에 고향의 일을 걱정하는 마음이 더 크다. 자중하기 바란다.” (저들은 ‘자중하기 바란다.’는 표현까지 문제 삼고 있다. 그렇다면 더 ‘폭동을 일으켜야 한다.’고 해야 된다는 말인가.) 이보다 더한 절실한 당부가 있을 수 있는가. 이런 애향, 애족, 애국자를 3.15를 폄하한 사람으로 몰다니,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협소한 의식의 사람들의 행동이 아닐 수 없다 할 것이다.   일곱째 단락 *1955년 잡지 에 이승만 대통령 탄신 80주년 축시 쓴 것을 문제 삼고 있다. 지금 시각에서 보면 노산 선생이 앞장서 이..의 장기 집권을 만류하는 태도를 취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을 수 있다. 그가 앞장섰다고 실현 되는 일도 아니었겠지만, 한편으론 평생을 나라사랑과 독립운동에 헌신한 모습을 지켜본 그로서는, 진정으로 그가 나라의 기틀을 잡기위해, 독립운동 할 때의 기백으로 더 집권하기를 바랐을 수도 있다. 더욱 이때는 휴전을 2년 정도 지난 시점이어서, 그가 정치를 잘못하리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하고 장수를 기원하는 축시를 썼을 수 있다. 그렇다면 노산의 축시가 무엇이 문제된단 말인가.   여덟째 단락 * 정경문화 1980년 9월호 의 노산의 글에 대한 것이다. 여기 비문에 소개한 글과 김봉천(소설가) 지음 의 발간에 이어, (김정태·1976년). (헬만 불·이종호역·1976년). (백영웅·1976년). (이영희·1977년) 등이 나왔다. 그는 1969년에 창간된 한국 최초의 등산전문지(현 월간 산)이 재정난으로 폐간위기를 맞자 그와 친교가 돈독한 사회명사들의 모임인 '신우회(信友會)'가 인수하여 지속적으로 발간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이후 이 잡지는 조선일보가 인수하여 오늘에 이르도록 가교역할을 했다. 그의 재임기간 중에 일어난 가장 충격적인 사건은 1969년 2월에 있었다. 해외원정 등반훈련대의 설악산 죽음의 계곡에서 발생한 국내최초의 눈사태 사고다. 이 사고로 10명의 젊은 대원이 눈 속에 매몰된 채 최후를 맞는다. 현 대한산악연맹 이인정 회장도 훈련대의 일원으로 참가했던 사람이다. 당시 이 사건은 사회적인 물의를 빚었고 구조과정에서 여러 가지 잡음이 일었으며, 산악회는 비통한 분위기에 휩싸인다. 이 사건의 여파는 열정적으로 회무를 집행해온 그에게 좌절을 안겨주었고, 조직의 책임자로 도의적인 책임을 지고 스스로 사퇴를 했지만 2년 후 그는 회장직에 재추대된다. 같은 해 노산은 한국산악회의 국제적인 위상과 세계화의 흐름에 동참하고자 국제산악연맹(UIAA)의 일원으로 정식 가입하여 회원국이 된다. 국제산악연맹 가입은 눈사태사고로 10명의 대원을 잃은 후 더욱 분발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국내활동에 한정되었던 산악회의 시각을 국제무대로 확대해 희생자의 유지를 기리려는 의도에서였다. 그는 구미(歐美) 선진국가의 대표적인 산악회를 탐방하여 국제적인 견문을 넓힌다. 회의 운영과 활동상황, 도서출간 현황 등을 살펴보고 정보를 교류한다. 1973년부터 시작된 각국 산악단체 탐방 행보는 프랑스 산악회(1874년 창립)와 세계적인 명성을 지닌 프랑스 국립스키 등산학교, 등산의 국민화 운동을 전개하고 있는 스웨덴산악회(1923년). 정통성과 폐쇄성을 함께 지닌 채 운영되고 있는 영국 알파인클럽(AC. 1857년 세계 최초로 창립)과 영국등반협회(BMC.1946년), 등산의 전도사를 자처하는 아메리칸 알파인클럽(AAC. 1902년)과 '미국의 자연은 미국의 귀중한 재산'이라고 외치며 환경보존운동을 펼치는 환경단체 시에라 클럽 등을 탐방하여 많은 정보를 축적하고 견문을 넓힌다. 당시 그가 각국에서 교환해온 귀중한 자료와 도서들은 한국산악회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또한 선진등산강국의 등반기술을 습득하기위하여 경제여건상 해외진출이 어렵던 시기 등산선진국 프랑스의 국립 스키 등산학교(ENSA)에 회원을 파견하여 체계화된 설빙벽 등반기술을 전수받아 국내에 보급한다. 당초 이 계획은 노산이 회장재임시 두 사람을 파견하기로 했던 일이 무산되자 이민재 회장에게로 이어져 결실을 본 것이다. 오늘날 각급 등산교육기관에서 기초기술로 활용하고 있는 '프렌치 테크닉'이 그 당시 도입된 기술이다. 그는 히말라야 고산등반에도 열정을 가지고 추진하여 1977년 대한산악연맹의 에베레스트 한국 초등에 이어, 1978년 안나푸르나 4봉(7525m) 등정을 성공시킨다. 이 등반은 한국의 히말라야등반 개척기에 있었던 두 번째의 성과로 기록된다. 당시 이 등반대의 대장을 맡아 등정을 성공시킨 장본인이 현 산악회장 전병구다. 죽는 날까지 산악문화 위해 노력했던 이은상 한국산악회는 1945년 조국이 광복되던 해에 사회단체로는 진단학회에 이어 두 번째로 정부에 등록된 단체로 엄연한 정통성을 지녔음에도 35년 동안 임의단체 취급을 받아왔다. 조직의 틀을 다지고 좀 더 활성화하기 위해 1980년 사단법인화한다. 당시 단체의 법인화등록이 어려운 시기에 노산 회장의 끈질긴 집념이 이 일을 성사시켰다. 또한 그는 체계적인 등산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등산 아카데미 강좌'를 개설하여 수년간 지도자급 산악인들을 양성하는데 진력한다. 1982년에는 그가 와병 중에 국고지원금을 받아 파견한 마칼루(8463m)학술원정대의 등정 낭보를 병상에서 전해 듣고 기뻐하다가 4개월 후 영면한다. 노산은 회장재임 12년 동안 등산인구 저변확대와 산악지도자 배출을 위한 등산교육, 해외 선진등반기술 도입, 산악문화 활성화를 위한 산악도서 발간, 산악회의 국제기구 가입, 히말라야 고산원정, 산악회의 법인화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노산은 평생 문인으로서의 길을 걸어왔지만 생애의 후반부는 산악인으로서의 삶을 살다 생을 마감했다. 그가 회장 자리에 앉아 학문의 높이만큼 산의 높이를 쌓아나간 세월은 12년(1967~70, 1973~82년)이다. 그리고 생의 끝자락에서 산악회 수장으로 만년설에 쌓아올린 성과는 8463m의 마칼루다. 노산은 30년 전에 갔으나, 그가 심은 씨앗은 지금 성목(成木)으로 자라고 있다.  //////////////////////////////////////////////////////////////////////////////////////////////////////////////////////////////////// 민족시인 노산의 문학과 인간 (노산문학회 편, 794쪽, 1982년,햇불사)   鷺山 李殷相(1903-1982)은 한국산악회(4대, 7,8,9,10,11대 회장)의 최장수 회장이자 한국 최고의 시조작가로서 100여권의 단행본을 발간하였다. 이 책은 노산의 팔순 생신 헌정집으로 기획되었다가 작업 중 작고함에 따라 유고집이 되었다. 鷺山 文學論, 鷺山과 나, 鷺山 作品, 追慕의 章 등 4부로 구성되어있다. 여기 한국산악회 金鼎泰(1916-1988) 부회장의 글을 2회에 걸쳐 나누어 소개한다. 김정태 선생은 조선인들만의 산악단체인 백령회에서 활동하며 초기 북한산, 도봉산, 금강산 등지의 수많은 봉우리를 초 등반했으며, 해방 후에는 한국산악회와 대한스키협회를 창설하고 늘 현장을 떠나지 않았던 지도자였다. 한국산악회 서립규 자문위원은 “김정태 선생이 산악계에 남긴 공적은 어마어마하다. 세상이 그를 기억하지 못할 뿐이다“라고 했다.   노산 선생의 산과 글   金   鼎   泰     1.회상 〔묘향유기(妙香遊記)〕    1931년, 노산 선생의 「묘향산유기(妙香山遊記)」가 동아일보에 연재되고 있었다. 그 해 봄, 나는 도봉산(道峰山)에서 암벽 등반 중에 동행한 같은 또래의 종제(從弟,中2)가 실족 부상하는 바람에 집안에서 금족령이 내려 산에 나갈 수 없게 되고 말았다. 가고픈 산에 못 나가는 대신 도서관에 가서 산악도서를 모조리 섭렵 하게 되었는데 이러한 때 노산 선생의 「묘향산유기」는 주린 창자에 양식 같아서 탐독하고 스크랩하고 또 읽고는 하였다. 험한 바위벼랑을 아슬아슬하게 순간적인 감각만으로 오르던 암벽등반의 메마른 정서와 말초신경적인 좁은 산악관에 대하여  「묘향산유기」는 이 산의 수많은 기봉(奇峰), 벽계(碧溪), 담폭(潭瀑)마다 수놓은 그 분 특유의 해학과 이곳을 거처 간 옛 선인묵객(先人墨客). 고승대사(高僧大師)들과 주거니 받거니 하는 주옥같은 시문(詩文)으로 하여 보다 크게 살찌고 아름다우며 높은 산의 참 모습에 눈을 뜨게 하였다.   노산은 묘향의 이름난 명소 섭렵에 그치지 않고 이 산의 으뜸인 비로봉(毘盧峰,1,909m), 원만봉(圓滿峰,1,894m) 등 7개 연봉으로 주 산군(主山郡)을 이룬 묘향(妙香)의 가장 멀고 험한 「안산」지역을 탐험적으로 등정하여 실의에 빠진 어린 클라이머에게 여러 가지를 힘차게 일깨워 주었다.   이 산의 큰 절 보현사(普賢寺) 주지스님이 50년래 입산자를 보지 못했다는 「안산」지역의 탐험과 같은 7일간의 난행은 그야말로 노산의 개척 정신의 발로였다. 이 개척자 정신을 노산은 묘향이 백두산(白頭山)과 마찬가지로 태백(太白)이라는 고칭(古稱)이 있고 산 중턱에 있는 「단군대」(檀君臺), 「단군굴」(檀君崛)의 유서에서 비롯되는 선사(先史) 신화시대의 민족 발상과 국조 강림(國祖降臨), 고조선 개국을 이룩한 우리 조상들과 통하는 개척정신이라 하였다.   그리고 묘향 [안산]의 신비로운 은백색의 거대한 화강암의 7연봉은 옛 개척자들이 거처 간 성역(聖域)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이곳은 본받아야 할 조상들의 영혼과의 만남의 고장이며 후대에 이어져야 할 우리의 민족정신이요, 신념이요, 배움의 터전이라 설파하여 후일 이곳을 찾은 나도 3탄 4탄을 금치 못 했었던 일을 기억하고 있다.   때마침 서구(西歐)에서 옮겨온 알피니즘에 물들기 시작해서 들떠 다니다가 추락사고로 벽에 부딪치듯 허전했던 어린 클라이머의 머리에도 재정립해서 나아가야 할 길이 개척정신의 길임을 힘차게 이끌어 준 듯하였다.   2. 백령회(白嶺會) 시대와 노산의 글    근대적인 알피니즘 자체가 자연에 대한 사랑의 찬미와 학문적인 탐구가 밑바탕이 되고 민족적인 자아의식에서 자립하고 발전해 나아가듯 노산의 「묘향산유기」는 이 고장에 들어 온 서구 알피니즘이 토착의 뿌리를 내릴 수 있는 한국적인 밑바탕이 되어주고 자립해 나아갈 수 있는 지혜와 용기를 북돋아준 듯하였다.   이렇게 해서 노산의 글과 심상치 않게 접촉을 가진 나는 이 분의 글을 계속 가까이 하였다.   금강산, 속리산 등 명산마다 순례하듯 등척한 노산의 산행기는 거창하고 많아서 노산과 산을 떼어 놓을 수 없을 만큼 우리나라 산악 문학의 가장 크고 넓은 독보적인 집성을 본 것이라 생각되었다. 그래서 뜻을 같이하는 산 동지들은 서로 권해서 노산의 산행기를 보도록 했는데 37년에 이러한 동지들과 백령회(白嶺會)라는 조직체를 갖게 되었다.   일경(日警)의 눈을 피한 민족적인 자립과 자결을 뜻하는 젊은 클라이머들의 모임인데 우리들은 그때 노산의 글을 의무적으로 읽게 하였다. 그때 선정되어 구해 본 것이 33년의 「설악 행각」 37년의 「한라산 등척기」(조선일보 연재) 38년의 「지리산 순례기」(조선일보 연재) 등인데 이 외에도 26년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씨의 백두산 근참기(白頭山觀參記), 31년 민세(民世) 안재홍(安在鴻)씨의 백두산 등척기(白頭山登陟記) 등도 구해서 보았다.   그런데 백령회 동지들이 이 분들의 등산 기행을 읽으면서 이 분들과 마찬가지로 보행 등산으로 명산을 찾아올라 다닌 것은 아니었다. 1년에 한두 번 그러한 등산의 기회를 갖기도 했으나 그보다도 오히려 이러한 등산과는 전혀 대조적으로 다른 서구적인 알피니즘의 암벽등산이나 빙설면 등반의 동계 등반에 열중하고 있었으며 이러한 기록적인 외국의 등반기나 기술 연구의 산악 도서들도 함께 읽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노산이나 육당, 민세 같은 분의 등산 기행을 가까이 한 것은 전기한 바와 같이 근대적인 등반을 하면서도 그것의 선구라고 할 수 있는 우리 스스로의 근원적인 것을 그리워했고 정신적이고 원전(原典)적인 줄기를 역사적인 사실에서 찾아 이어가고 싶은 소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3. 한국적인 등산의 뿌리와 줄기     이러한 소망이 더욱 절실했던 것은 36년간 일본의 압정이 우리 민족 문화를 말살하고 단절시키려 할 때 육당. 노산. 민세 같은 분들이 이에 항거하듯 민족정신의 뿌리와 국토 강산의 참 모습을 산에서 찾고 울부짖으며 깨우쳐 주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그래서 백령회의 젊은 동지들은 이 분들의 글을 통해서 산 많은 우리나라는 국조 단군(國祖檀君)의 개척적인 신화시대부터 3국 통일을 성취한 신라 화랑들의 산수(山水) 수련의 범절과 고승대사들의 입산수도에 전국 명산 답사, 산상(山上) 사찰 건립 등 뿌리 깊은 등산의 사실(史實)을 더듬기도 했다.   또 이 분들의 한국적인 등산 기원의 직접적인 맥락을 세종(世宗)대의 문화에서 우러난 팔도지리지(八道地理誌,1432년)의 신장, 윤회 등의 행적을 비롯해서 택리지(擇里志)와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1735년)를 펴낸 이중환(李重煥), 백두산 유록(白頭山遊錄,1735년)의 박종(朴琮), 백두산 탐사(白頭山探査,1860년)의 김정호(金正浩)등의 행각에서 이어지고 있음을 공감하기도 하였다.   그 뿐 아니라 육당, 노산, 민세의 필봉은 34년에 조선일보사의 민족적인 백두산 탐험대 파견을 보게 하고 그것은 35년 한라산 탐험(노산 기행문 연재), 36년 지리산 탐험(노산 기행문 연재)으로 3년간을 힘차게 전개된 것을 볼 수 있었다.   이와 같이 한국 사회에서 우러나고 줄기를 이어온 민족적이고 탐험탐사적인 등산 풍조는 1945년 8.15광복 때 백령회 동지를 중심으로 발족한 「한국 산악회」가 우리나라 산악 운동을 선도적으로 개발해 나가는 데도 하나의 근원적인 맥락이 되어 이어지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4. 8.15 광복 후의 산악 운동     초창기의 대표적인 사업으로 「국토 구명」(國土究明)이란 명제를 가지고 46~55년의 10년간 11차에 걸쳐 줄기차게 전개된 학술조사대 파견 사업을 들 수 있다. 일제(日帝)에 빼앗겼던 국토를 되찾아 우리 손으로 밝히고 알아보자고 한 명제는 8.15 당시의 민족적으로 감동에 찬 활동으로 우리 사회 각계의 호응을 크게 받을 수 있었다.   그래서 학술. 문화. 언론. 산악 각계의 권위 있는 지도층 인사의 열렬한 참가를 보았고 태백(太白). 소백(小白). 차령(車嶺) 등 여러 산맥을 통한 명산들과 제주도. 덕적 군도. 다도해. 총도. 울릉도. 독도에 이르기까지의 남한의 전국적인 산악. 도서지역에 대하여 사상 최초로 근대적이고 학술적이며 문화적인 대 조명을 실현케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새삼 감동을 느끼는 일은 1955년 마지막 제 11차 국토 규명 사업인 수복지구 [설악산 학술 등반대]의 30여명 일행 대장(隊長) 홍종인(洪鍾仁). 부대장(部隊長) 이숭녕(李崇寧)이 행동한 코스가 24년 전인 33년 노산의 「설악 행각」 코스를 조금도 빼놓지 않고 답습한 일이다.   이 때의 코스가 남교리~12탕골~치마바위봉~장수대(당시 자양전)~대승령~백담사~쌍룡폭~봉정암~대청봉~오세암~마등령~신흥사인데 6.25 격전지로 지뢰 매몰 등 매우 위험하고 험준한 코스였으나 이를 조금도 틀리지 않게 답습한 까닭은 그때까지 학술대를 리드해 온 산악회의 지도층들이 노산의 글을 뿌리 깊게 받아들였던 젊은 백령회 동지들이였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이와 같은 학술대 활동의 한국적인 등산 풍조는 언제나 시대적인 사회 환경에 적응해서 변형하기도 하여 최근까지도 특수 지역이나 자연 환경 등의 학술적인 탐사가 계속되고 있음을 본다. 그런가 하면 명산 순례나 새로운 산경(山境), 루트의 탐방, 행사 등이 백만 등산 인구의 전국적인 국민운동과 같이 등산 행각으로 산악 운동으로 지금 우리 주변에서 활발히 전개되고 있음을 보아 1930년대 이래 노산의 산과 글의 영향도 적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 이은상(李殷相)  • 호 노산(鷺山)(1903 ~ 1982) • 작가, 사학자 • 본관 전주(全州) •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이사 1903∼1982. 시조작가·사학자. 본관은 전주(全州). 호는 노산(鷺山), 필명은 남천(南川)·강산유인(江山遊人)·두우성(斗牛星). 경상남도 마산 출신. 승규(承奎)의 둘째 아들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918년 아버지가 설립한 마산 창신학교(昌信學校) 고등과를 졸업하고, 1923년 연희전문학교 문과에서 수업하다가 1925∼1927년에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사학부에서 청강하였다. 1931년·1932년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를 비롯하여, 동아일보사 기자, ≪신가정 新家庭≫ 편집인, 조선일보사 출판국 주간 등을 역임하였다.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에 연루되어 홍원 경찰서와 함흥 형무소에 구금되었다가 이듬해 기소유예로 석방되었다. 1945년 사상범 예비검속으로 광양 경찰서에 유치 중에 광복과 함께 풀려났다. 광복 후 이충무공기념사업회 이사장, 안중근의사숭모회장, 민족문화협회장, 독립운동사 편찬위원장,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이사, 문화보호협회 이사 등을 역임하였다. 1921년 두우성이라는 필명으로 ≪아성 我聲≫(4호)에 <혈조 血潮>라는 시를 발표한 바 있으나, 본격적인 문학 활동은 1924년 ≪조선문단≫의 창간 무렵부터였다. 그는 이 잡지를 통하여 평론·수필·시 들을 다수 발표하였는데, 그의 본령이라 할 수 있는 국학이나 시조는 거의 등한시하고, 서구의 자유시 쪽에 기울어 있었다. 이 무렵에 발표한 자유시는 30편을 헤아리고 있는 데 비하여 시조는 단 한편에 불과하였다.   또, 평론부문에서도 1925년 ≪조선문단≫에 게재된 <시인 휘트만론>·<테니슨의 사세시>·<영시사강좌 英詩史講座>·<예술적 이념의 본연성>(1926.6.)이나 ≪동아일보≫에 발표한 <아관남구문학 我觀南歐文學>(1925.1.30.∼2.23.) 등의 제목들이 그간의 사정을 말해준다. 그러다가 1926년 후반에 이르러 시조부흥 논의가 본격화되면서 시조를 비롯한 전통문학과 국학쪽으로 기울기 시작하였다. 시가 분야에서는 1929∼1930년에 민요조의 리듬을 살린 <새타령>·<매화동 賣花童>·<조선의 꽃>·<말몰이>·<님 향한 생각이야>·<남산에 올라>·<말노래> 등을 발표하였다.   평론분야에서도 같은 시기에 <청상(靑孀)민요 소고>·<이언(俚諺)의 의의 및 그 형식에 관하여>·<특수 이언과 공통 이언>·<풍수(風水)를 믿던 이들>·<문학상으로 본 조선의 어희(語戱)>·<황진이의 일생과 예술> 등을 발표하였다. 그는 시조는 문학이 아니라고 낮추어 생각하였다가 시조 논의가 일어나자 비로소 시조를 문학시하게 되었다고 술회한 바 있으나, 한동안 자유시와 시조의 창작을 병행하다가 1930년대 후반부터 시조인으로서의 자리를 굳혔다. 그는 시조를 쓰는 한편, 당시(唐詩)를 시조형식으로 번역하기도 하고 시조에 관한 이론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동아일보≫에 발표한 <시조 문제>(1927.4.30.∼5.4.)·<시조 단형추의(短型芻議)>(1928.4.18.∼25.)·<시조 창작문제>(1932.3.30.∼4.9.) 등의 논고를 통하여 자수로써가 아니라 음수율로써 시조의 정형성을 구명하려 시도하였다. 1932년에 나온 그의 첫 개인 시조집인 ≪노산시조집 鷺山時調集≫은 향수·감상·무상·자연예찬 등의 특질로 집약된다. 이 중 <고향생각>·<가고파>·<성불사의 밤> 등은 시조의 평이하고 감미로운 서정성이 가곡에 걸맞아 노래로서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광복 후 그의 시조는 국토예찬, 조국분단의 아픔, 통일에 대한 염원, 우국지사들에 대한 추모 등 개인적 정서보다는 사회성을 보다 강조하는 방향으로 기울어갔다. 이러한 작품들은 시조집 ≪노산시조선집≫(1958)을 비롯하여, 특히 ≪푸른 하늘의 뜻은≫(1970)과 마지막 작품집인 ≪기원 祈願≫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그의 시조는 대체로 평이하고 기발한 표현으로 독자에게 친근감을 주고 있다.   그는 한때 주요한(朱耀翰)에 이어 두 번째로 양장시조(兩章時調)를 시험하여, 시조의 단형화를 시도한 바도 있으나 말기에 이르러서는 오히려 음수가 많이 늘어나는 경향을 띠었다.   사학가이자 수필가이기도 한 그는 해박한 역사적 지식과 유려한 문장으로 국토순례기행문과 선열의 전기를 많이 써서 애국사상을 고취하는 데 힘썼다. 광복 후에 문학보다는 사회사업에 더 많이 진력하였다. 장례는 사회장으로 치러져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마산에 그의 시조를 새긴 ‘가고파 노래비’가 세워졌다.   그 밖에 저서로는 시문집으로 ≪노산문선 鷺山文選≫·≪노산시문선≫ 등과 수필집으로 ≪무상 無常≫, 사화집으로 ≪조선사화집 朝鮮史話集≫과 기행문집 등이 있고, 전기로는 ≪탐라기행한라산 耽羅紀行漢拏山≫·≪피어린 육백리≫·≪이충무공일대기 李忠武公一代記≫ 등 100여 권의 저서를 남겼다.   /////////////////////////////////////////////////////////////////////   (... 참으로 어리석고 에너지 낭비하는 짓... 함께 머리 맞대고 힘을 모아 살아도 어려운데...)   //////////////////////////////////////////////////////////////////////////////////////         ‘김용택 고객님 안녕하십니까~*^^* 항상 저희 코레일을 이용하여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마산역 대합실에서 나오고 있는 이은상 작시인 “내 고향 남쪽바다” 노래와 관련하여 마산역을 통해 소중한 의견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코레일에서는 문화와 음악이 흐르는 역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대합실 및 승강장에서 기다리시는 고객들을 위해 음악 방송을 시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고객님이 말씀하신 것과 같이 한 가지 노래만이 계속 반복해서 나온다는 말씀에 마산역에 통보하여 조치하였습니다. 불특정 다수가 찾아주시는 역사에 특정 음악을 지속적으로 방송하는 것은 문제가 있음을 인지하여, 찾아주시는 모든 고객들을 위해 노래 선곡에 대해 수정 하도록 하였습니다.   마산역을 이용하시면서 관심과 애정 어린 의견 보내 주심에 다시 한 번 감사드리며, 마산역은 오로지 문학적 측면에서 고객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하고 지역관광 활성화를 위해 시작하였을 뿐 마산지역 시민들의 민주화 정신 왜곡 의도는 전혀 없었음을 이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봄 날씨에 옷차림이 얇아졌는데 기온차이가 심합니다. 환절기 감기 조심하시길 바랍니다. *^^*   회신부서 지역본부 > 부산경남본부 > 영업처 회신담당 조진옥’   며칠 전 마산에 갔다가 역사(驛舍) 대합실에서 본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반복해서 들어야 했던 ‘가고파’노래 방송 시정 건의에 대한 답신이다.   마산은 지금 한창 이은상의 시비건립문제로 마산시가 홍역을 치르고 있는데 공공기관이 마산역이 특정단체의 입장을 시위조로 음악을 내보내는 것은 편파적이라는 생각 때문에 역장을 찾아 시정건의를 했던 것이다.                                                   ‘가고파 노래 방송 중지 요청 건의서’   ‘지난 달에 마산에 왔을 때도 그랬고 오늘 또 마산역에 도착하자말자 가고파 노래가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왔습니다.   마산은 지금 이은상시비 건립문제로 심각한 갈등과 논쟁이 계속되고 있는 줄 압니다. 그런데 공공기관인 마산역은 왜 시비건립문제로 갈등을 겪고 있는 이은상의 가고파 노래만 반복해서 보내는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도 다른 노래와 함께 보내는 게 아니라 가고파 한곡만 계속해서 보내는게 옳은 일인지요?   앞으로 논쟁이 끝날 때까지 가고파 노래 방송을 중단해 주실 것을 요청합니다.’                                                                                 2013년  5월  2일  민원인 김 용 택                                                                                   마산역 부역장 서 정 길(인)            건의서를 제출한지 3일만인 5월 5일 이-메일로 답신이 왔다.   ‘김용택 님이 평가하여 주신 만족도는 철도발전의 소중한 밑거름이 되며 일부 고객님을 선정하여 소정의 사은품을 드리고 있으니 많은 참여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라는 인사와 함께....   마산은 지금도 이은상의 시비(詩碑)문제로 홍역을 앓고 있다. 지난 2월, 3000만 원의 예산을 들여 역앞에 가고파시비를 세우면서부터다.       시민단체에서는 역전에 세운 이은상의 시비는 '친일과 독재에 부역한 기회주의자인 이은상은 마산의 3.15정신에 역행하는 부끄러운 일'이라면 철거를 요구했고 시비를 세운 '가고파를 사랑하는 문인단체 회원'들은 '이은상은 ‘마산과 조국을 사랑한 이은상은 친일을 하지 않았다’며 시비건립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있다.   민주주의는 어떻게 정착하는가?   마산역의 '가고파 노래 방송' 어떻게 생각하면 자잘하고 보잘 것은 없는 일일 수도 있다. 그러나 언제부터 이 노래가 역대합실에 방송됐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그동안 수천, 수만명의 승객들이 지나가면서 들었을텐데 그 누구도 문제제기를 한 일이 없었던 모양이다.   노래를 들은 사람 중에는 가고파노래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노래는 좋지만 이은상이라는 인물 때문에 거부반응을 가진 사람도 있을 것이다. 잠간 시간을 내 시정을 요구할 수도 있었겠지만 귀찮아서 너도 나도 지나치는 바람에 마산역의 횡포(?)는 계속되고 있었던 것이다.   민주주의는 삶의 현장에서 가꾸고 다듬어야 성장하고 정착할 수 있다. 물론 시비건립에 반대해 현수막을 걸거나 시위에 참여해 자신의 의사표현을 할 수도 있지만,  잘못된 현실을 시정하겠다는 작은 실천이 건강한 사회를 만드는 지름길이 아닐까? 고객의 시정건의에 잘못을 인정하고 재빨리 시정 약속을 한 코레일측의 처사에도 박수를 보내고 싶다. ////////////////////////////////////////////      창원시 마산역 이은상 시비 건립을 두고 시작된 논란이 노산의 행적으로 무게 중심이 옮겨졌다. 이 탓에 묵었던 지역 내 갈등이 재연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은상 선생을 사랑하는 지역 문인단체'는 2013년 3월 4일 오후 창원시청 프레스센터에서 기자회견을 개최했다. 마산문인협회를 비롯한 25개 문인단체 회원 40여 명은 "마산역 광장에 세워진 애국 민족시인 노산 선생의 시비에 대한 일부 시민단체의 행동에 심각한 우려를 표한다"며 "마산역 시비는 마산 문화와 자긍심의 상징으로 를 사랑하는 새로운 계기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특히 이들이 강조한 부분은 노산의 행적이었다. 애초 시비에 대한 입장을 밝힐 것으로 예상했지만, 한 발 더 나아가 이들은 이은상 선생을 '애국지사이며, 위대한 민족 시인'이라고 못박았다. 갈등과 논란이 심화할 것으로 예상하는 대목이다.       가고파를 사랑하는 문인단체 회원이 4일 오후 창원시청 브리핑룸에서 마산역 광장에 설치되어 있는 가고파 이은상 시비 철거 반대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김구연 기자   문인단체는 "노산 선생은 대한민국 국민훈장, 무궁화장, 대한민국 건국포장을 받았고 국립묘지 현충원에 안장됐다"며 "국가가 이런 예우를 할 때는 철저한 검증을 거치는 것이 상례다. 노산은 국가의 검증을 받은 애국지사이자 민족시인"이라고 강조했다. 이들은 친일독재 부역 관련 행적과 3·15의거를 폄훼했다는 부분에 대해서도 전면 부정했다. 문인단체는 "노산은 일제강점기와 6·25, 분단현장을 직접 체험했다. 나라 없는 백성의 고통을 절감했던 확고한 국가관은 강한 나라를 지향하면서 이.., 박.., 전.. 정부에 부분적으로 협조하게 된 상황을 이해할 수 있다"며 "3·15를 마산 데모로 걱정하면서 불법으로 언급한 것은 긴박한 상황에서 학생 등 양민의 희생을 줄이고자 원로로서의 염려 이상의 언급이 아니다"고 설명했다. 이어 이들은 "우리는 모든 업적을 제쳐두고 문학만으로 그가 얼마나 탁월한 애국자이고 훌륭한 문학가인가를 절감한다"며 "이제라도 선생에 대한 평가가 바르게 이뤄져야 한다. 선생의 작품이 재조명되고 기리는 사업이 지속하기를 희망한다"고 강조했다. 이에 대해 마산역 이은상 시비 철거대책위원회(이하 대책위)는 마산지역 문인의 역사관·국가관이 걱정되며 이를 바탕으로 무슨 글을 쓴다는 것인지 크게 우려된다고 했다. 대책위 관계자는 "가고파라는 문학작품을 좋아하는 것은 개인 자유다. 그런 면에서 문인의 입장은 이해한다"면서도 "하지만, 이승만 초대정부를 지지하고 박정희 정권과 전두환 정권에 협조한 상황을 개인이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권리라고 말한 것은 정말 걱정스럽다"고 말했다. 이어 "이은상이 부역을 했다는 정권은 당대에 국민에게 심판을 받았다. 독재라고 심판을 받았고, 쿠데타라고 심판받았다. 이는 교과서에도 실렸다. 그런데 부역을 한 것이 뭐가 문제냐고 묻는 문인들의 생각은 매우 위험하다"며 "이러한 역사관으로 글을 쓴다면 우리 사회에 얼마나 해악을 미치겠느냐. 사회가 매우 혼란스러운 이유를 이제야 알았다"고 비판했다. 대책위는 또 "마산역에 세워진 시비는 가고파가 아니라 노산 이은상 시비라서 문제가 되는 것"이라며 "마산역이라는 공공의 장소에 세운 것은 의도가 있다고 본다. 옳지 않은 역사관을 옳은 것처럼 포장한 시비는 당장 철거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책위는 오는 15일 3·15의거 기념식이 열리기 전까지 집회 등을 진행해 노산 이은상 가고파 시비 철거를 요구할 계획이다. 애국 민족시인 노산 이은상 선생의 시비에 대한 문인들의 입장 -우리는 를 사랑한다 지난 2월 6일 마산역 광장에 세워진 애국 민족시인 노산 이은상 선생의 시비에 대한 일부 시민단체의 행동에 대한 심각한 우려를 표하며 다음과 같이 문인들의 입장을 밝힌다. 1. 노산 선생은 국가이 검증을 받은 애국지사이며, 위대한 민족 시인이다. 살피건데, 노산 선생의 인물됨은 단순하게 보더라도 그의 약력이 말해주듯이 국가유고아로서 대한민국국민훈장, 무궁화장, 대한민국건국포장을 수상했으며, 작고했을 때는 문화훈장 1등금 금관문화훈장 추서와 함께 국가가 지원하는 사회장으로 국립묘지 현충원에 안장되었다. 국가가 이런 예우를 할 때는 철저한 검증을 거치는 것이 상례다. 국가가 인정한 인물을 기리는 일이 무슨 문제가 되며, 그가 쓴 작품을 좋아하는 것이 무슨 문제가 되는가. 더욱이 올해는 노산 선생의 탄생 11주년이 되는 해다. 선행의 작품이 재조명되고, 기리는 사업이 지속되기를 희망한다. 2. 문학작품으로서 의 위상 살피건대, 노산 선행의 연치 20세인 1932년 가 발표되었다. 이 작품을 선생의 친구인 양주동 선생이 평양 숭실대에 근무할 당시 그의 제자인 김동진 작곡가에게 소개하여 같은 해 가곡으로 탄생하였다. 당시는 일제강점기로서 성악가 이용주, 이인범 등에 의해 일본은 물론 우리 동포가 있는 곳이면 어디서든 불러져 사랑을 받았으며, 해방 후에는 교과서에 실려 범국민적 애창 가공이 되었다. 이런 사실은 가 일찍부터 우리 국민정서의 근간이 되고 고전이 되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노산 선생의 고향 마산으로서 어찌 를 사랑하고 기리지 않겠는가. 3. 친 독재(?)라니 무슨 말인가. 살피건대, 1903년생인 노산 선생이 살던 시대를 어떤 필설로 제대로 헤아릴 수 있을 것인가. 암울한 일제강점기를 견뎠고, 독립해서는 공산주의자들을 비롯한 분파주의자들과 갈등을 겪었으며, 마침내 동족끼리의 전쟁참화의 분단 현장을 직접 체험했다. 나라 없는 백정으로서의 고통을 절감했던 그의 확고한 국가관은 여기서 확립된 것으로 강한 나라를 지향하면서 이승만의 초대 정부를 지지하고, 비록 혁명으로 집권했으나 박정희 정부와 전두환 정부에 부분적으로 협조하게 된 상황을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어디까지나 그의 정치적인 소신으로 대한민국 국민이면 누구나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권리인 것이다. 그가 저 중국고사의 백이 숙제나 고려말기 고려동 사람들처럼 초연하지 않았다고 하여 양지를 지향한 기회주의자로 몰아세운다면 오늘날 4∼5년마다 바뀌는 정치적인 현실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백척간두에 선 조국의 운명을 지켜보며 살아온 통한의 일생을, 광복 이후 세대들이 함부로 말하는 것을 우리는 아프게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 4. 그는 3·15 정신을 폄훼하지 않았다. 살피건대, 3·15의거는 4·19혁명으로 이어지고, 정권이 바뀌면서 ‘의거’로 그 성격이 규정지어졌다. 당시 노산이 마산데모를 걱정하면서 불법을 언급한 것은 고향 마산의 양민과 경찰과의 대치하는 긴박한 상황에서 학생들의 희생을 최대한 줄이고, 합법적으로 문제가 수습되기를 바라는 원로로서의 염려 이상의 언급은 아닌 것이다. 이제라도 노산 선생이 언급은 폄훼가 아닌 걱정과 염려 이상의 의미가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다시는 그를 3·15의거를 부정한 사람으로 몰아가는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한다. 일부의 불만은 노산 선생이 분기한 시민의 편에서 데모를 부추기는 언행을 하지 않은 것을 탓하고 있는 듯한데, 보통 사람들의 몸싸움도 우선은 말린 후, 그 옳고 그름을 따지는 우리의 정서로 보면 노산 선생의 언행은 잘못되지 않은 것으로 판단된다. 한 가지 예로 서울 수유리의 4·19 학생 비문은 노산 선생이 썼다. 당시 분위기에서 노산 선생이 3·15를 부정하는 언행을 하였다면 그에게 이 비문을 맡겼겠는가. 5. 2006년 마산문학관 결정으로 노산의 평가가 끝났다는 시각 살피건대, 일부에서는 2006년 노산문학관을 마산문학관으로 결정할 당시 마산시의회가 13대 14로 결의한 것을 완전무결한 결정인 양 몰아가고 있다. 이것은 당시 사회분위기에 편승한 일부 시민운동가들에 의해 없는 친일까지 문제 삼아 정상적인 논의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일방적으로 밀어붙여진 정황이 짙다. 따라서 당시의 판단은 결코 바르게 결론지어진 것이 아니다. 이제라도 선생에 대한 평가가 바르게 이뤄어져야 한다. 6. 우리는 를 사랑한다. 노산 선생도 신이 아닌 이상 실수한 언행이나 행동이 전혀 없다고 단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부분적으로 작은 흠결이 있다고 하여 그의 삶과 사유방식 전체를 문제 삼은 것은 민주시민이 취할 수 있는 논리적 태도가 아니다. 우리는 다른 업적은 젖혀두고, 문학만으로도 그가 얼마나 탁월한 애국자이고 민족주의자이며, 훌륭한 문학가인가를 절실하게 공감한다. 따라서 최근 마산역 광장에 세워진 가고파 시비는 마산 문화의 자긍심의 상징으로, 를 사랑하는 새로운 계기가 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 자리를 빌려 시비를 세운 마산역 당국과 마산의 15개 로타리클럽의 노고에 깊이 감사드리며, 노산을 기리는 일에 헌신적으로 참여해 주신 모든 분들께 고마운 뜻을 표한다. 2013년 3월 4일 마산문인협회, 시향, 경남시조시인협회, 목향수필동인회, 한국시조시인협회, 오늘의시조시인회의, 국제펜한국본부경남위원회, 경남문학관, 경남여류문학회, 경남아동문학회, 경남수필문학회, 가향문학회, 가락문학회, 붓꽃문학회, 화중련, 석필문학회, 경남문심회, 마창동인수필문학회, 민들레문학회, 디카시문화콘텐츠, 창원문인협회, 진해문인협회, 노산시조연구회, 계간 작은문학, 서정과 현실   //////////////////////////////////////////////////////////////////////////////////////////////////////////////////       2월5일 제막식전 설치를 끝낸 마산역광장의 이은상시비. 너무나 거대해 놀랐습니다.       헌데 2월6일 아침 시비는 누군가가 시비 뒷면, 이은상의 약력 부분에페인트칠을 해 훼손이 되었네요.제막식전 닦아 내긴 했으나 얼룩이 남아 이후의 일들을 예고 하는듯 했지요. 드디어 개막식이 예정된 2월6일3시 '시비 제막식은 바람빠진 풍선이 되고 말았습니다. 시비 건립 반대 기자회견이 그자리에서 진행되고, 제막식 참여가 예정된, 시장과 국회의원들이 불참통보를 해왔으며, 제막식은 약식으로 끝이났습니다. 제막식 행사장엔 항의 하는 손피켓과 시위대가 말없이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산역에서 걸어나오는 모든 사람들의 눈에 함께 보여지는것은 '시비'와 철거 촉구 현수막. 볼썽 사나운 모습의 마산역광장입니다.     그리고 2월20일  시비철거 대책위는 다시 기자회견을 열고 시비는 '민주성지 마산'을 죽인 행위라며 퍼포먼스를  벌였습니다. 이후 마산역장실을 항의 방문 하였으나,  역장은 시종일관 '철거불가' '가고파 사랑' 만을 되뇌었습니다.         다시 3월7일 해결의지가 없는  역장을 해임하라는 내용의 기자회견을 갖고, 시비는 검은 천으로 꽁꽁 사매 버렸습니다. 천위의 가고파 개사가 이은상의 처량한 신세를 대변하는 듯 합니다.   //////////////////////////////////////////////////////////////////////////////////////////////////////////////// 친독재' 전력이 뚜렷한 이은상(1903~1982)이 쓴 시 '가고파'가 새겨진 시비가 마산역광장에 세워져 논란을 빚고 있는 속에, 종교계․학계 인사와 변호사들이 '중재안'을 내놓았다. 허성학 신부(천주교)와 이암 스님(문수암), 김용환 목사, 안승욱 경남대 교수는 7일 창원시청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중재안 작성에는 자운 스님(관해사)과 김민오 변호사, 강인순․김남석․김학수․배대화․이승현․유장근․최유진(이상 경남대)․남재우(창원대) 교수 등이 함께했다.   ▲  마산역 광장 '이은상 시비' 철거 문제로 논란을 빚고 있는 속에, 지역 종교계와 학계 인사들은 7일 창원시청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이 시비를 기증한 로타리클럽에 설치비 3000만원을 보상하고 시비의 소유권을 넘겨받고자 한다"는 내용의 중재안을 제안했다. 사진 왼쪽부터 안승욱 교수, 허성학 신부, 김용환 목사, 이암 스님. ⓒ 윤성효   이들은 "철거를 전제로 한다"면서 "중재안은 이 시비를 기증한 측에 설치비 3000만 원을 보상하고 시비의 소유권을 넘겨받고자 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시비는 국제로타리클럽(3720지구)이 세워 마산역에 기증했다. 시비 앞면에는 시 '가고파'가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김복근씨가 쓴 이은상 약력이 새겨져 있다. 2월 6일 제막식이 열렸다. 이은상은 3․15의거를 폄훼했다. 열린사회희망연대, 김주열열사기념사업회 등 단체들은 '마산역광장이은상시비철거대책위원회'를 결성해 활동하고 있다. 누군가가 시비에 페인트로 훼손해 놓았고, 철거대책위는 계란 투척을 하기도 했다. 또 철거대책위는 지난 4월 19일 중장비를 동원해 시비를 강제 철거하려 했지만, 마산역 측이 경찰에 시설보호를 요청해 무산되었다. 당시 현장에 경찰이 배치됐다. 허성학 신부 등 인사들은 "마산역광장에 이은상 시비가 느닷없이 세워진 뒤 계속되는 시비 철거 논란 소식을 접할 때마다 안타까운 심정으로 사태의 추이를 유심히 주시하고 있었다"며 "마산역광장은 이 도시에 삶의 뿌리를 내리고 사는 시민이 철도이용 등으로 자주 들르는 공간"이라고 밝혔다. 이어 "지금까지 진행되는 상황으로 볼 때 이 시비가 역광장에 존재하는 한 관련 단체나 시민들의 갈등과 대립은 점점 더 확대되고 격화되는 양상을 띠게 될 게 불을 보듯 뻔하다"며 "더욱 걱정스러운 것은 이 시비 철거 논쟁에 일부 문인들이 개입하여 과거에 이미 끝난 노산 이은상 문학관 논쟁으로 치환시켜 해결을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들이 중재안을 제시한 것은 시비를 세운 남마산로타리클럽 김봉호 회장의 발언이 단초가 되었다. 김 회장은 지난 3월 29일 마산역장실에서 열린 창원시의원들과 가진 간담회에서 "차라리 시비 설치비 3000만원을 주는 곳이 있으면 철거를 하든 뭘 하든 상관하지 않을 것이고, 우리는 그 돈으로 다른 봉사활동을 추진하면 된다"고 했다. 허성학 신부 등 인사들은 "당시 참 좋은 제안이라는 생각을 했다"며 "이 방법만이 시비를 기증한 쪽이나 먼저 시비의 기증을 요구하여 기증을 받은 쪽이나, 이를 철거하라고 요구하는 쪽 모두 앞으로 계속해서 입어야 하는 정신적, 물질적 상처나 손실을 최소화 하는 방법이라 생각했다"고 밝혔다.   ▲  마산역 광장 '이은상 시비' 철거 문제로 논란을 빚고 있는 속에, 지역 종교계와 학계 인사들은 7일 창원시청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이 시비를 기증한 로타리클럽에 설치비 3000만원을 보상하고 시비의 소유권을 넘겨받고자 한다"는 내용의 중재안을 제안했다. 사진 왼쪽부터 안승욱 교수, 허성학 신부, 김용환 목사, 이암 스님. ⓒ 윤성효   그러면서 이들은 "3000만 원이 결코 적은 액수가 아니었기에 엄두를 내지 못했는데, 시비 철거 논란이 날로 악화되니 이런 결단을 내리게 된 것"이라며 "3000만 원은 시민모금 형식으로 마련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들은 "이 사건의 근본 책임은 이유 여하를 불문하고 마산역 즉, 한국철도공사에 있다"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지역사회에서 벌어지는 논란을 마치 강 건너 불구경하듯 하는 태도를 취하는 것은 매우 옳지 못하다. 지금이라도 공기업답게 책임지는 자세를 보여야 한다"고 밝혔다. 인사들은 "저희들의 제안이 관련 당사자 모두 만족하는 최상의 방법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며 "그러나 현재로서는 모두에게 정신적, 물질적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시비 문제를 해결하는 최선의 방안이라 생각한다"고 밝혔다. /////////////////////////////////////////////////////////////////////////////////////////////////////////////   마산역광장 이은상 가고파 시비 철거를 주장하는 측과 존치를 주장하는 측의 갈등이 더욱 깊어지고 있다. 지난 7일 학계와 종교계 인사들로 구성된 중재단이 타협점을 찾으려 시도했으나 양측의 대립은 오히려 전면전 조짐으로까지 번지고 있다. 찬반 양측은 접점 없이 뚜렷이 갈라졌고, 양측 모두 세가 부풀려지고 있으며, '보수 대 진보'라는 이념논쟁으로까지 번질 기미도 보여 '마산' 지역사회를 더욱 혼란스럽게 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이은상 시비 문제 해결을 위한 중재단(대표 허성학 신부)이 "기증자 측(로타리클럽)에 설치비 3000만 원을 보상해 시비 소유권을 넘겨받고, 모금에 참여한 시민들의 뜻을 물어 시비를 처분하자"고 제안한 데 대해 김봉호 남마산로타리클럽 회장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김 회장은 "그렇게 되면 또 새로운 갈등이 생긴다. 앞뒤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제안이 오히려 반민주적이고 독재적 발상 아니냐. 위법적인 시비 훼손행위로 순수한 국제 봉사단체인 우리 위상과 자긍심이 훼손됐다. 시비 철거는 노산 선생을 두 번 죽이는 일이다. 문인, 문화단체, 학자들의 큰 반대가 예상돼 (중재단의 제안을) 동의할 수 없다"는 강경한 의사를 내비쳤다.       8일 오전 '가고파 시비를 사랑하는 시민'들이 창원시 마산역 광장에서 시비 페인트 제거 작업 후 가고파 시비 존치를 위한 활동에 적극 동참하겠다는 뜻을 밝히고 있다. /임채민 기자   이와 관련해 로타리클럽을 중심으로 '이은상 시비 존치를 위한 대책위' 구성 움직임까지 일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수천 명의 회원을 거느린 지역 로타리클럽이 이은상 논란에 뛰어들 경우 지역 사회 갈등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커질 것으로 보인다. 이은상 시비 존치를 원하는 이들의 움직임은 점점 활발해지고 있다. '가고파 시비를 사랑하는 시민'이라는 이름표를 단 일군의 시민들은 8일 오전 이은상 시비에 묻어 있는 페인트를 벗기는 작업을 벌였다. 김복근 경남문협 고문, 오하룡 도서출판 경남 대표, 김교한 한국문인협회 고문, 정계환 태풍매미 희생자 유족회 대표, 김갑상 전 하나방송 이사, 이승일 마산상인연합회 사무처장, 김경환 마산합포구 산호동 주민, 명형대 경남대 교수 등이 페인트 제거 작업에 동참한 이들이다. 이들은 "마산은 3·15 정신과 가고파의 서정성을 융합해 잘사는 도시로 만들어야 한다"며 "뉴욕 시장이 지하철 낙서를 지우는 일에서 출발해 깨끗한 도시를 만든 것처럼 마산의 밝고 아름다운 미래를 위해 가고파 시비 페인트 제거 작업을 벌이게 됐다"고 밝혔다. 이들은 또 가고파 시비 존치를 위한 활동에 적극 동참하겠다는 뜻도 밝혔다. 이 같은 움직임에 대해 중재단 대표 허성학 신부는 "새로운 중재안을 내놓든지 해야 하는데, 중재안을 받아들이지 않는 로타리클럽도 지역사회 갈등을 증폭시킨 책임을 져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또한 허 신부는 "안 그래도 청사 문제 때문에 마산이 들끓고 있는데 이 갈등이 지속되면 엎친데 덮친격으로 더 큰 혼란속으로 빠져들 것"이라고 우려했다. //////////////////////////////////////////////////////////////////////////////////////////////////////// ‘가슴 뭉클 화합의 장’ 열린 ‘창원시민대동제’ 성료 안상수 시장 “해묵은 이념 논란 접고 문화의 큰 가슴으로 승화 시켜야” 기사입력 : 2015년11월01일 14시07분 (아시아뉴스통신=최근내 기자)  31일 경남 창원시 ‘제15회 마산가고파국화축제’가 열리는 마산항 제1부두에서 재경마산향우회 주관으로 '창원시민대동제'가 열리고 있다.  ‘예향도시 창원’의 해묵은 이념논란과 문화갈증을 해소하기 위한 ‘창원시민대동제’가 처음으로 창원에서 마련돼 성황을 이뤘다.  31일 오후 1시30분부터 ‘제15회 마산가고파국화축제’가 열리는 마산항 제1부두에서 재경마산향우, 지역원로 문화예술인, 관내 종교단체를 비롯해 축제장을 찾은 시민과 관람객 등 수 천명이 참여한 가운데 ‘시민대동제’가 열렸다.  10여 년 전 이은상, 조두남 선생을 기념하는 문화시설 건립문제로 지역사회가 찬∙반 양측으로 갈린 이래 처음 가지는 ‘시민화합의 장’이다.  행사 주최는 서울∙경기지역에 거주하는 옛 마산출신 모임인 재경마산향우회(회장 윤대식)가 맡았다.  그동안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문화예술인이었음에도 과거행적 논란으로 전면에서 밀려나있던 이은상, 조두남, 이원수 선생에 대한 문화적 차원의 재평가는 여러 곳에서 요구돼 왔다.  이날 윤대식 재경마산향우회장을 비롯한 재경향우와 안상수 시장, 이주영 국회의원, 유원석 창원시의회 의장을 비롯한 시∙도의원 등이 참석한 가운데 핸드프린팅(손자국 남기기)을 하는 등 화합행사로 진행됐다.  대미는 이날 행사에 참석한 시민과 내빈 전체의 합창으로 장식해 가슴 뭉클하게 했다.  참석자들은 모두가 창원을 대표하는 작품인 ‘가고파’, ‘선구자’, ‘고향의 봄’을 함께 부르며 화해와 상생, 그리고 미래를 향한 108만 시민의 화합을 기원했다.    31일 경남 창원시 ‘제15회 마산가고파국화축제’가 열리는 마산항 제1부두에서 재경마산향우회 주관으로 '창원시민대동제'가 열리고 있다.  안상수 창원시장은 “이은상의 ‘가고파’, 조두남의 ‘선구자’, 이원수의 ‘고향의 봄’은 전 국민뿐만 아니라 재외동포들도 애창하는 국민가곡들이다. 이제는 작가의 이념이나 공과(功過)를 떠나서 문화적 측면에서 이들을 포용할 때가 됐다”고 강조했다.  이날 행사가 가지는 의미는 크다.  우선 아직도 현재 진행형인 분열된 정서를 하나로 묶기 위해 객지에서도 창원의 화합과 발전을 기대하고 있는 향우들이 앞장섰다는 것이다.  관에서 주도하는 행사가 아니라 민간에서 주도함으로써 진정한 지역화합의 장이 될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창원시 입장에서도 걸출한 문화예술인들의 발자취가 해묵은 이념 논란으로 희석되는 것을 방치할 수만은 없는 상황에서 시민대동제로 말미암아 화합의 접점을 찾는다면 민주화 정신과 문화가 조화를 이루는 ‘예향의 도시’로 새로운 미래를 열수 있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31일 경남 창원시 ‘제15회 마산가고파국화축제’가 열리는 마산항 제1부두에서 재경마산향우회 주관으로 '창원시민대동제'가 열리고 있다.  이은상 기념사업이 시발점이 된 논쟁은 수년간 이어졌다.  옛 마산시는 지난 1996년 총 30억원을 들여 ‘이은상 문학관’을 건립하고, 생가복원과 테마공원을 조성한다는 계획을 세워 사업에 들어갔다.  하지만 당시 친일논란이 있던 조두남 기념사업과 맞물리면서 거센 논쟁을 불러왔다.  오랜 논쟁 끝에 2005년 ‘이은상문학관’이 ‘마산문학관’으로 명칭을 변경했고, ‘조두남음악관’도 ‘마산음악관’이 됐다.  지난 2013년에는 마산역 광장에 ‘가고파 노산 이은상 시비’가 건립되면서 한동안 잠잠했던 논쟁이 재점화 되기도 했다.  안상수 시장은 “더 큰 창원으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우리 지역의 강점인 문화를 잘 이끌어내야 하는데 해묵은 이념투쟁에 묵혀둘 수는 없다”며 “작가의 공(功)은 공대로 인정하고 과(過)는 과대로 비판하면서 이를 초월해 창원을 통합시키는 문화의 큰 가슴으로 승화시켜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 용문산 시비공원 이야기        ▲ 항양 박원겸 시문 유숙 용문사                                         ▲ 오봉 이호민 시문 '용문산인 김곤수 혜황정'         ▲ 용문 조욱 시문 '회 용문사 도중 우설유작'                           ▲ 매월당 김시습 시문 용문산      용문산 시비공원입니다. 이곳에는 용문산의 빼어난 풍광을 노래했던 옛 선인들의 시비(詩碑)를 세웠습니다. 백사 이항복을 비롯하여 열 분의 작품이 원문과 함께 한글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신라시대부터 용문산은 빼어난 명산이었습니다. 용문사 경내에 있는 은행나무는 1300여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습니다. 신라의 고승 의상대사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꽂고 간 것이 자란 것이라는 설이 가장 오래되었습니다. 이밖에도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태자가 나라 잃은 설움을 안고 금강산으로 가던 도중 이곳에 들렀다가 은행나무를 심었다는 설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모두 천년을 훌쩍 넘는 신비의 세계입니다. 사람은 나이가 들면 늙고 추해지지만 나무는 더 신비롭고, 경건해집니다.   용문산에는 용문사, 사나사, 상원사를 비롯하여 윤필암, 죽장암 등 여러 사찰들이 있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수많은 명현, 명사들 찾아 왔고, 용문산의 아름다움을 찬미하는 시문을 많이 남겼습니다.   양평 출신 선각자이신 영의정 백사 이항복, 용문에 은거하며 학문에만 전심하였던 용문선생 조욱, 위정척사운동의 선구자이셨던 화서 이항로 선생을 비롯하여 10여명의 시문을 시비와 함께 건립하였습니다. 시선(詩選)은 양평 인물을 우선으로 하였고 용문산을 감흥한 시를 선정하였습니다.   용문산을 찾는 관광객들에게 우리 선현들이 자연에서 느낀 감흥을 함께 느끼고 감상해 볼 수 있는 시간을 갖도록 함입니다. 천천히 걸으시면서 감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還途入 龍門山(환도입 용문산) -  白沙 李恒福1) * 돌아가는 길에 용문산에 들어가다   寺古僧稀小 사고승희소 臺傾樹老蒼 대경수노창 水聲喧下磵 수성훤하간 人語靜廻廊 인어정회랑 北望群山隔 북망군산격 西歸一影凉 서귀일영량 悲歌爲何事 비가위하사 悽斷不成章 처단불성장   절은 오래 되었으나 스님은 적으며 축대는 기울고 나무는 늙어 푸르렀네 요란한 물소리 산골짝에 흐르고 고요한 말소리는 회랑에서 들려오네   북쪽을 바라보니 산들로 막히었고 서쪽으로 돌아드니 그림자 서늘하네 구슬픈 저 노래는 무슨 사연일까 처량한 생각에 시 한수도 못하겠네   龍門僧 惟善 餉軟蔬 謝寄(용문승 유선 향연소 사기)  -慕齋 金安國2)    -용문산 승려 유선이 연한 나물을 보내주어 감사하며 시를 보내다   山蔬香軟擅龍門 산소향연천용문 遠餉深知厚意存 원향심지후의존 方丈膏粱何足羨 방장고량하족선 一簞裹罷負榮暄 일단과패부영훤   유명한 용문산 나물 향기롭고 연하며 멀리 보내주시니 후한 뜻을 깊이 알겠네 주지스님이 보낸 음식 부러울 것 없이 족하며 한 바구니 싸온 음식 다 먹고 나니 부귀영화 부럽지 않네   送 誾上人 還 龍門寺(송 은상인 환 용문사)  -사가정 서거정3)       -용문사로 돌아가는 은 상인을 전송하다   回首龍門揷碧天 회수용문삽벽천 招提一路細於絃 초제일로세어현 携筇又入烟蘿去 휴공우입연라거 四月山深屬杜鵑 사월산심속두견   머리를 돌리니 용문산이 하늘에 꽃힌 듯 거문고 줄처럼 좁은 절집으로 가는 길 지팡이 끌고 무성한 숲으로 들어가니 초여름 깊은 산에 두견새 소리만 이어지네   謝龍門人 金坤壽 惠黃精(사용문산인 김곤수 혜황정) -五峰 李好閔4)        - 용문산인 김곤수 노인의 은혜에 감사하다   仙山靈雨養瓊苗 선산영우양경묘 採奇筠籠露未消 채기균롱로미소 從此靑藜不須杖 종차청려부수장 羽衣飛過上垣橋 우의비과상원교   신령스런 산에 내린 단비 아름다운 싹을 길으며 광주리에 캐어 담은 산채 아직 이슬에 젖었네 이제부터 명아주 지팡이는 필요치 않으며 도사는 신선이 되는 듯이 날아 원교에 올랐네   龍門山(용문산) -梅月堂 金時習5)   龍門山色碧稜稜 용문산색벽릉릉 寺在寒烟第幾層 사재한연제기층 老鶴獨棲松嶺月 노학독서송령월 淸泉閑澆虎溪藤 청천한요호계등 鐘聲老杜曾深省 종성노두증심성 我欲駕風凌絶頂 아욕가풍능절정 白雲堆裏費靑騰 백운퇴리비청등   용문산은 푸르고 높고 엄숙하며 절은 쓸쓸한데 안개 속 몇 층이나 되나 늙은 학은 홀로 달빛어린 소나무에 높이 깃들고 맑은 샘물 한가롭고 정신없이 왔네 범종소리는 두보의 시에 깊이 잠기었고 물결 그림자에 물고기가 이미 뛰어올랐네 바람타고 산꼭대기 넘으려고 하다가 흰 구름 쌓인 속에 푸른 행전만 허비했네.   潤筆菴(윤필암) - 錦溪 李根元6)   高歌更上一層山 고가갱상일층산 渺渺千巖萬樹間 묘묘천암만수간 日晏天晴人氣定 일안천청인기정 鳥啼花落春心閑 조제화락춘심한     큰 소리로 노래 부르며 오르고 올라 아득한 숲속 사이에 바위들 솟아있네 해는 늦어 하늘은 맑고 인적 드문데 새 울고 꽃이 지는 봄 정취 한가롭네   遊 龍門寺(유 용문사) - 圭堂 李重夏7)   百折縈廻鳥道通 백절영회조도통 梵宮隱約積林中 범궁은약적림중 四圍巉險峯全石 사위참험봉전석 一望紅明樹盡楓 일망홍명수진풍 縱乏山門留玉帶 종핍산문류옥대 且將名字待紗籠 차장명자대사롱 更要老釋期重到 갱요노석기중도 笑중山花二月紅 소등산화이월홍   구불구불 험한 산길 이어진 좁은 길 절은 깊은 숲속에 숨겨져 있네 사면은 가파르고 산봉우리는 온통 바위뿐 바라보니 붉은 단풍 숲 다함이 없네 절은 옥 장식을 한 벼슬아치가 머물기는 부족하지만 장차 이름이 알려지기를 기다리네 노승은 또 오라고 재차 기약을 청하며 웃으면서 꽃피는 내년 이월을 기약하네   留宿 龍門寺(유숙 용문사) -恒楊 朴元謙8)   深秋林欲脫 심추임욕탈 日暮鳥投棲 일모조투서 詩興浩無盡 시흥호무진 風光自入題 풍광자입제 水成溪屈曲 수성계굴곡 山作地底高 산작지저고 促馬龍門路 촉마용문로 如梳月在西 여소월재서   가을이 깊어가니 숲은 낙엽 지는데 해는 저물어 산새는 둥지로 돌아가네 시의 흥취는 넓어 다함이 없으며 풍경이 아름다워 시제가 절로 떠오르네 물은 구불구불 흘러 시내를 이루며 땅은 높고 낮아 산을 이루었네 말을 몰아 용문산 길에 들어서니 얼개 빗 같은 반달은 서쪽에 남아있네   回 龍門寺 途中 遇雪有作(회 용문사 도중 우설유작) - 용문 조욱9)     - 용문사로 돌아오는 길에 눈을 만나   春風吹雪欲沾衣 춘풍취설욕첨의 强策羸驂上翠微 강책리참상취미 絶壑層雲迷舊路 절학층운미구로 細尋淸磬認禪扉 세심청경인선비   봄바람이 눈을 뿌려 옷깃을 적시는데 여윈 말을 채찍질 하며 산허리에 오르네 깊은 골짝 층층구름 옛길 희미하고 맑은 풍경소리 찾아가니 절 문이 보이는구나     *  次 龍門(차용문) -화서 이항노10)   蓬蓽春消息 봉필춘소식 旋旋到不齊 선선도불제 盤肥香수葉 반비향수엽 園遍乳禽棲 원편유금서 酒在壺忘酌 주재호망작 壁懸琴不携 벽현금불휴 林花看黙黙 임화간묵묵 山日在窓西 산일재창서   봄소식 사립문에 맞았는데 돌아오느라 바쁘게 못 왔네 소반위에 향기로운 나물 그득하며 동산에 어린 새 둥지에 깃들어 있네 병에 남은 술 따르는 것 잊었고 벽에 걸린 거문고 타는 것도 몰랐네 숲속의 꽃 묵묵히 바라보며 서산에 걸친 햇빛 창문을 비추네   秋懷(추회)  -택당 이식11)   萬木霑秋影 만목점추영 楓林亦自誇 풍림역자과 間松披錦瀱 간송피금계 蘸水起紅霞 잠수기홍하 偶爾明人眼 우이명인안 依然當物華 의연당물화 斜陽故嫵媚 사양고무미 一半暫交加 일반잠교가   나무들은 온통 가을 그림자에 젖어있고 붉게 물든 단풍 숲 절로 뽐내누나 소나무 사이엔 솔잎 져 비단 깔아놓은 듯 가득 찬 물에는 붉은 노을 일으키네 나도 모르게 그대 눈이 환히 밝아져 예전의 화려한 가을 풍경 다시 맞았네 석양은 옛과 같이 아양을 떨려고 하는지 절반은 갑자기 뒤섞이었네   ※ 시비공원에 있는 용문팔경(龍門八景)은 겸재(謙齋) 양창석(梁昌錫)이 쓴 시비입니다. 시인이 말하는 용문팔경은 ▲용문사 새벽종소리 ▲조계골 열 두 여울 ▲윤필암의 돌아가는 구름 ▲봉황대의 맑은 바람 ▲칠보산의 아지랑이 ▲중원산 폭포 ▲흑천의 어부피리소리 ▲백운봉의 저녁노을 등입니다.   양창석(1909~1983)은 바로 용문면 광탄리에서 사셨습니다. 광탄리에 남원 양씨 문중이 터를 잡고 있었고, 봉황대는 이 문중에서 지은 봉황정(鳳凰亭)의 별명(別名)이라고 합니다.   칠보산(七寶山)은 양평군 개군면, 용문면, 지제면에 걸쳐 우뚝 솟은 산으로 지도상에는 칠읍산(七邑山) 또는 추읍산(椎邑山)이라 적혀 있는데 용문산과 흑천을 사이에 두고 자웅을 겨루는 산입니다.   ///////////////////////////////////////////////////////////////////
1004    시의 구석진 곳에서 시인을 만나다 - 황지우 시인 댓글:  조회:5248  추천:0  2016-01-14
북평면 배다리 출신,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의 시인 황지우 교수가 최근 광주나들이를 했다. 올해 들어 처음으로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던 지난 16일 저녁, 광주 광산문화예술회관에서 열린 토크 콘서트 '지금, 윤상원 with 황지우'에는 400여 시민들이 눈 속을 뚫고 달려와 밤중까지 자리를 지키며 윤상원 열사의 정신과 오늘의 의미를 곱씹는 시간을 가졌다. 이날 콘서트의 이야기꾼으로 초대된 황지우시인은 "오늘 우리는 패배하지만, 내일의 역사는 우리를 승리자로 만들 것이다"는 윤 열사의 마지막 말을 상기하며 '윤상원 정신'이 지금 이 시대에 꼭 필요하다는 말을 이어갔다. 막혀가는 민주주의의 숨통을 윤상원 정신으로 틔워내자는 것이다. 그동안 재직했던 한국종합예술학교 총장직을 문광부의 '표적감사'압력으로 물러난 후 교수직까지 박탈당하자 황지우 시인은 국가를 상대로 교수직위확인소송을 냈었고 승소를 했지만 또다시 대법원까지 가는 과정에서 2년여 동안 심한 마음고생을 겪었다. 그러다 홀연히 중국으로 떠나 장춘에 있는 길림대학(吉林大學)의 외국인 초빙교수로 머물며 강의와 연구, 창작활동을 계속해왔다. 교수직 복귀가 이뤄지면서 그는 2학기 강의를 위해 지난 7월에 귀국을 했다.             지난 16일 저녁 광산구청이 주최한 '지금 윤상원 With 황지우'라는 토크쇼에 참석하여 민주주의의 위기를 이야기하고 있는 황지우시인. 그토록 자유, 인권을 외치던 성직자들마저 몸을 사리던 시대에, 윤상원의 희생이 없었다면 광주정신은 얼마나 퇴색되었겠느냐며 오늘 우리가 다시 윤상원을 불러내는 의미를 이야기한다.       교수님, 안녕하십니까? 신문에서 황 교수님의 토크쇼기사를 읽고 꼭 고향인 해남신문 금요초대석에도 모시고 싶었습니다. 지난해 연말 무렵 연락을 드렸는데 안계시더군요. 그동안 중국에 쭉 계셨습니까? 네. 작년 8월에 나갔다가 올해 7월에 귀국했습니다. 주변 친구들이 '생계형 망명'(웃음)이라 놀려대기도 했지만, 장춘에 있는 길림대학교 한국어과에서 1년 동안 한국문학 강의하면서 놀다 왔어요. 중국 길림성지방은 겨울에 보통 영하 30도까지 내려간다고 하는데 불편하지 않으셨어요? 꼭 중국에 가신 이유가 있으신지요? 장춘, 하얼빈, 대흥안령 등 만주 일대의 겨울을 최소 옷 다섯 벌을 입고 지냈어요. 노출된 얼굴 살갗을 면도날로 긋는 것 같은 그 혹독한 추위가, 돌이켜 보면, 뭐랄까, 중독성 같은 게 있는 것 같습니다. 지금은 그리워집니다. 제 첫번째 시집에서부터 '길림'이나 '봉천' 같은 낯설고 먼 지명에 대한 동경이 언뜻언뜻 비춰나는데, 우리 젊은 시절에 그런 거 있었잖습니까? 가슴에 밀서 하나 품고 만주 설원을 가로 질러 가던 우리 독립군에 대한 환상 같은 거 말예요.  그곳에서 무엇을 하시고, 또 시인의 눈으로 무엇을 보셨습니까? 장춘은 우리 식민지 강점기 때 일본 관동군 사령부가 있던 만주국 수도 신경이었죠. 나쓰메 소세키 등이 만주 기행을 통해 대륙 이주 러시를 조성하면서 우리 문학예술에서도 소설가 염상섭, 시인 백석, 작곡가 김동진, 김순남 등이 한때 거쳐 간 흔적들이 여기저기 있더군요. 우선 저는 필담 외에는 말이 안 통하니까 완전히 고립된 개인으로서 어슬렁거리며 응시하는 익명의 산책자로만 지냈죠. 저로서는 오랜만에 보장받은 이 단절이 행복했습니다. 그러면서도 목격하지 않을 수 없는 '오늘의 중국'. 그건 두려움이었어요. 거리의 붉은 고딕체 표어들이 '문명(文明)'과 '과학기술(科學技術)'에 집중되어 있는데, 앞으로 이 표어가 현실이 될 때 14억 인구로 소용돌이치는 중국 현대성의 블랙홀 가장자리에 근접해 있는, 그것도 분단된 한반도가 더 또렷이 바라다 보였습니다.  네. 그렇죠. 그럼 화제를 좀 바꿔서… 너무나 당연한 결과지만 대학복귀를 우선 축하드리고요. 당시 임기가 아직 남은 총장직을 사퇴한 이유와 비슷한 상황을 겪은 다른 이들도 많이 있었다고 하는데요. 이 정부 들어 대학을 비롯한 문화예술계가 당면한 어려움들은 무엇입니까?  이 정부는 건들어서는 안 될 것들, 즉 강과 문화를 건들었습니다. 그것들은 스스로 숨 쉬는 것들입니다. 문화예술은 근본적으로 가만 둬야 스스로 흐름을 만들고 창의성의 젖을 선사하는 거 아닙니까? 임기가 보장된 현대미술관 관장,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 그리고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을 마치 포클레인으로 찍어 긁어내듯이 했을 때 저는 어떤 눈먼 권력의 도취상태 같은 것을 느꼈는데요. 특히 이른바 '한예종 사태'에 대해 UN 문화 분과가 이런 식으로 "정부가 대학을 간섭해서는 안 된다"는 취지의 성명을 표하기도 했지만, 전 그때 이거는 우리 문화예술계에 가해지는, 매우 우려스러운 일종의 '반달리즘'(문화파괴행위)이라고 말한 바 있죠. 작년 대법원 승소 판결에 의해 올 9월에 학교로 복귀했습니다. 돌아와 보니 그 활력에 넘쳤던 학교 분위기가 어딘가 우울해요. 냉소주의가 만연해 있는 것 같고요. 올해에 4명의 학생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등, 카이스트에 이어 한예종도 자살 클로스터가 되는 게 아닌가, 참으로 염려됩니다.       연 보 ● 1952년 북평면 배다리 출생  ● 광주서중 3학년 때 학원 문학상에 입상, 광주일고 졸업 ● 1972년 서울대 미학과 진학   2학년 때 유신반대 시위연루로 구속된 뒤 강제징집 ● 1980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에 「沿革」이 입선 ● 같은 해『문학과 지성』에 시「대답 없는 날들을 위하여」등을   발표하며 등단 ● 1980년 5월, 광주 민주화 항쟁 가담혐의로 구속 ● 1983년 첫 시집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발간 ● 1985년 시집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발간 ● 1986년 산문집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호』 ● 1987년 시집『나는 너다』출간 ● 1990년대 들어 선(禪)적인 세계에 몰두, 조각에 몰두 ● 1990년 『게 눈 속의 연꽃』발간  ● 1994년 한신대학교 문창과 교수  ● 1995년 조각과 시를 한데 묶어 『저물면서 빛나는 바다』발간.   조각전(학고재 화랑) 개최 ● 1997년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교수 ● 1999년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 발간 ● 2006년 한국예술종합학교총장 ● 2010년 9월~2011년 8월 중국 길림성 길림대학교 연구교수 ● 2011년 ~ 현재 한국종합학교 교수     수 상 ● 1983년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로 제3회 김수영문학상 수상 ● 1991년 제36회 현대문학상 수상 ● 1993년 『뼈아픈 후회』로 제8회 소월시문학상 수상 ● 1999년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로 제 1회   백석문학상 수상  ● 2006년 옥관문화훈장       이번 토크쇼에서 "질식해가는 민주주의의 숨통을 윤상원 정신으로 틔워내자"고 하셨는데요. 윤상원 정신에 대해 좀 구체적으로 이야기해 주시겠어요? 80년대 한국문학은 숫제, 광주 오월에 내가 거기에 없었다는 알리바이에 대한 죄의식의 표현이었다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겁니다. 미안함, 죄책감, 이런 것이 지나쳐 피하고 싶은 기억, 부담감, 나중에는 또 광주야? 하는 식상함까지… 어느 정치학자는 그때의 광주 시민들이 보여준 '태도'를 '절대 공동체'라는 개념으로 해석하는 걸 읽은 적 있는데, 그 코뮌의 한 가운데 윤상원을 비롯해 도청의 마지막 날을 지킨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얼마든지 그 자리에 안 있을 수 있었지요. 역사가 피치 못할 숙명이 아닌 자유의지로서 누군가를 호명할 때 제 발로 걸어 들어간 그분들… 사람들에게서 어쩌다 정전기처럼 나타나는 '숭고'의 광채를 그들은 우리에게 보여주었습니다, 이제 우리 나이 육십인데, 그 당시 스물예닐곱 되었을 청년 윤상원은 이 절대적 공동체의 대명사라 하겠습니다. 민주주의의 잔인한 나무가 요구하는 피를 기꺼이 헌혈한 그의 자유의지와 숭고, 그게 저한테는 윤상원 정신이 아닌가 합니다.  우리가 '5·18정신을 오늘에 살려내자' 입버릇처럼 해온지가 수십 년입니다. 그것이 어느 정도 성과를 냈다고 보시며, 만약 효과적으로 이뤄지지 못했다면 원인이 무엇입니까? 아무래도 오월 정신의 핵심에는 정치적인 의미가 크겠지요. 민주화 이후의 한국 민주주의에 사실 우리가 상당 정도 안도하거나 안이하게 생각한 측면이 있죠. 반성해야죠. 어쨌든 그러는 사이 오월 정신도 바람 빠진 풍선처럼 좀 시들해진 듯한 느낌? 그러나 우리가 청춘을 바쳤던 민주주의가 얼마나 연약한 것인가를 실감시키는 오늘의 상황은 사람들로 하여금 다시금 오월 정신으로부터 답을 찾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또 이제는 오월 정신이 어떤 불의한 외압에 대한 반작용으로 불끈 치솟는 것이 아니라 외압이 없더라도 스스로 우러나오는, '작용하는 정신'으로 퍼졌으면 합니다.  황지우 총장님은 몰라도 황지우 시인은 이제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요. 어렸을 때부터 문학에 관심이 컸습니까? 초등학교시절 학우들과 고향이야기를 좀 들려주십시오. 제가 네 살 때 일가족이 광주로 이사 나온, 전후 이농 1세대로서 저의 탯자리 해남을 고향 이야기로 말할 수 있는 건 거의 없습니다. 다만 어머님 말씀과 대조해 보면 제 기억이 두 살 무렵까지 소급한다는 걸 알았고, 두륜산 남사면 기슭이 거침없이 내리뻗어 너른 들녘을 치마폭처럼 주름지게 펼쳐놓고 바다로 쑥 들어가 버리는 북평면 배다리 일대의 풍경이 저의 정서적 원형질을 이뤘다 하겠습니다. 제 첫 시집 첫 번째 시, 은 그 빼어난 명승을 배경으로 한 겁니다. 언젠가 문인 친구들과 그곳 여행을 갔을 때 "여기서 시인 하나 나올 수밖에 없네" 하는 말로 내 고향의 보답을 다 받았습니다. 시는 사춘기를 앓던 중학교 시절에 처음 썼습니다.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나는 오늘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것이다' '게눈속의 연꽃'같은 시들은 시 제목이 그대로 시집표제가 되어 교과서에도 실리고 모두 베스트셀러가 되었는데 매우 난해하고 격렬한 풍자시가 이처럼 많이 읽히는 원인은 어디에 있습니까? 정정 바랍니다. 전 베스트셀러 시인은 아니고요, 스테디셀러에 가깝다 해야 하나요? 제 독자의 상당수는 소위 옛날 386 세대인 거 같애요. 그들과 시대감이 같았다 할까요? 시인이자 교육자이며 조각 등 당양한 장르의 예술에도 전문가 못지않은 실력을 갖고 계시는데 최근 가장 몰두하신 일은 무엇입니까?  그냥 멍청하게 있습니다. 가끔 '주역'도 뒤적여보고, '시경', '굴원 초사'를 기웃거리고 있죠.      네. 작년 8월에 나갔다가 올해 7월에 귀국했습니다. 주변 친구들이 '생계형 망명'(웃음)이라 놀려대기도 했지만, 장춘에 있는 길림대학교 한국어과에서 1년 동안 한국문학 강의하면서 놀다 왔어요.장춘, 하얼빈, 대흥안령 등 만주 일대의 겨울을 최소 옷 다섯 벌을 입고 지냈어요. 노출된 얼굴 살갗을 면도날로 긋는 것 같은 그 혹독한 추위가, 돌이켜 보면, 뭐랄까, 중독성 같은 게 있는 것 같습니다. 지금은 그리워집니다. 제 첫번째 시집에서부터 '길림'이나 '봉천' 같은 낯설고 먼 지명에 대한 동경이 언뜻언뜻 비춰나는데, 우리 젊은 시절에 그런 거 있었잖습니까? 가슴에 밀서 하나 품고 만주 설원을 가로 질러 가던 우리 독립군에 대한 환상 같은 거 말예요. 장춘은 우리 식민지 강점기 때 일본 관동군 사령부가 있던 만주국 수도 신경이었죠. 나쓰메 소세키 등이 만주 기행을 통해 대륙 이주 러시를 조성하면서 우리 문학예술에서도 소설가 염상섭, 시인 백석, 작곡가 김동진, 김순남 등이 한때 거쳐 간 흔적들이 여기저기 있더군요. 우선 저는 필담 외에는 말이 안 통하니까 완전히 고립된 개인으로서 어슬렁거리며 응시하는 익명의 산책자로만 지냈죠. 저로서는 오랜만에 보장받은 이 단절이 행복했습니다. 그러면서도 목격하지 않을 수 없는 '오늘의 중국'. 그건 두려움이었어요. 거리의 붉은 고딕체 표어들이 '문명(文明)'과 '과학기술(科學技術)'에 집중되어 있는데, 앞으로 이 표어가 현실이 될 때 14억 인구로 소용돌이치는 중국 현대성의 블랙홀 가장자리에 근접해 있는, 그것도 분단된 한반도가 더 또렷이 바라다 보였습니다. 이 정부는 건들어서는 안 될 것들, 즉 강과 문화를 건들었습니다. 그것들은 스스로 숨 쉬는 것들입니다. 문화예술은 근본적으로 가만 둬야 스스로 흐름을 만들고 창의성의 젖을 선사하는 거 아닙니까? 임기가 보장된 현대미술관 관장,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 그리고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을 마치 포클레인으로 찍어 긁어내듯이 했을 때 저는 어떤 눈먼 권력의 도취상태 같은 것을 느꼈는데요. 특히 이른바 '한예종 사태'에 대해 UN 문화 분과가 이런 식으로 "정부가 대학을 간섭해서는 안 된다"는 취지의 성명을 표하기도 했지만, 전 그때 이거는 우리 문화예술계에 가해지는, 매우 우려스러운 일종의 '반달리즘'(문화파괴행위)이라고 말한 바 있죠. 작년 대법원 승소 판결에 의해 올 9월에 학교로 복귀했습니다. 돌아와 보니 그 활력에 넘쳤던 학교 분위기가 어딘가 우울해요. 냉소주의가 만연해 있는 것 같고요. 올해에 4명의 학생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등, 카이스트에 이어 한예종도 자살 클로스터가 되는 게 아닌가, 참으로 염려됩니다. 80년대 한국문학은 숫제, 광주 오월에 내가 거기에 없었다는 알리바이에 대한 죄의식의 표현이었다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겁니다. 미안함, 죄책감, 이런 것이 지나쳐 피하고 싶은 기억, 부담감, 나중에는 또 광주야? 하는 식상함까지… 어느 정치학자는 그때의 광주 시민들이 보여준 '태도'를 '절대 공동체'라는 개념으로 해석하는 걸 읽은 적 있는데, 그 코뮌의 한 가운데 윤상원을 비롯해 도청의 마지막 날을 지킨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얼마든지 그 자리에 안 있을 수 있었지요. 역사가 피치 못할 숙명이 아닌 자유의지로서 누군가를 호명할 때 제 발로 걸어 들어간 그분들… 사람들에게서 어쩌다 정전기처럼 나타나는 '숭고'의 광채를 그들은 우리에게 보여주었습니다, 이제 우리 나이 육십인데, 그 당시 스물예닐곱 되었을 청년 윤상원은 이 절대적 공동체의 대명사라 하겠습니다. 민주주의의 잔인한 나무가 요구하는 피를 기꺼이 헌혈한 그의 자유의지와 숭고, 그게 저한테는 윤상원 정신이 아닌가 합니다. 아무래도 오월 정신의 핵심에는 정치적인 의미가 크겠지요. 민주화 이후의 한국 민주주의에 사실 우리가 상당 정도 안도하거나 안이하게 생각한 측면이 있죠. 반성해야죠. 어쨌든 그러는 사이 오월 정신도 바람 빠진 풍선처럼 좀 시들해진 듯한 느낌? 그러나 우리가 청춘을 바쳤던 민주주의가 얼마나 연약한 것인가를 실감시키는 오늘의 상황은 사람들로 하여금 다시금 오월 정신으로부터 답을 찾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또 이제는 오월 정신이 어떤 불의한 외압에 대한 반작용으로 불끈 치솟는 것이 아니라 외압이 없더라도 스스로 우러나오는, '작용하는 정신'으로 퍼졌으면 합니다. 제가 네 살 때 일가족이 광주로 이사 나온, 전후 이농 1세대로서 저의 탯자리 해남을 고향 이야기로 말할 수 있는 건 거의 없습니다. 다만 어머님 말씀과 대조해 보면 제 기억이 두 살 무렵까지 소급한다는 걸 알았고, 두륜산 남사면 기슭이 거침없이 내리뻗어 너른 들녘을 치마폭처럼 주름지게 펼쳐놓고 바다로 쑥 들어가 버리는 북평면 배다리 일대의 풍경이 저의 정서적 원형질을 이뤘다 하겠습니다. 제 첫 시집 첫 번째 시, 은 그 빼어난 명승을 배경으로 한 겁니다. 언젠가 문인 친구들과 그곳 여행을 갔을 때 "여기서 시인 하나 나올 수밖에 없네" 하는 말로 내 고향의 보답을 다 받았습니다. 시는 사춘기를 앓던 중학교 시절에 처음 썼습니다.정정 바랍니다. 전 베스트셀러 시인은 아니고요, 스테디셀러에 가깝다 해야 하나요? 제 독자의 상당수는 소위 옛날 386 세대인 거 같애요. 그들과 시대감이 같았다 할까요?그냥 멍청하게 있습니다. 가끔 '주역'도 뒤적여보고, '시경', '굴원 초사'를 기웃거리고 있죠. /김원자 편집고문·언론인·호남대객원교수     너를 기다리는 동안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애리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먼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아주 먼 데서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映畵가 시작하기 전에 우리는 일제히 일어나 애국가를 경청한다 삼천리 화려 강산의 을숙도에서 일정한 群을 이루며 갈대 숲을 이룩하는 흰 새떼들이 자기들끼리 끼룩거리면서 자기들끼리 낄낄대면서 일렬 이렬 삼렬 횡대로 자기들의 세상을 이 세상에서 떼어 메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간다 우리도 우리들끼리 낄낄대면서 깔쭉대면서 우리의 대열을 이루며 한 세상 떼어 메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갔으면 하는데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로 각각 자기 자리에 앉는다 주저앉는다   출가하는 새                                                                           새는 자기의 자취를 남기지 않는다. 자기가 앉은 가지에 자기가 남긴 체중이 잠시 흔들릴 뿐 새는 자기가 앉은 자리에 자기의 투영이 없다. 새가 날아간 공기 속에도 새의 동체가 통과한 기척이 없다. 과거가 없는 탓일까. 새는 냄새나는 자기의 체취도 없다. 울어도 눈물 한 방울 없고 영영 빈 몸으로 빈털터리로 빈 몸뚱아리 하나로 그러나 막강한 풍속으로 거슬러 갈 줄 안다. 生後의 거센 바람 속으로 갈망하며 꿈꾸는 눈으로 바람 속 내일의 숲을 꿰뚫어 본다.   거대한 거울                                               한점 죄(罪)없는 가을 하늘을 보노라면 거대한 거울, 이다: 이번 생의 온갖 비밀을 빼돌려 내가 귀순(歸順)하고 싶은 나라: 그렇지만 그 나라는 모든 것을 되돌릴 뿐 아무도 받아주지는 않는다 대낮에 별자리가 돌고 있는 현기증나는 거울   재앙스런 사랑                                             용암물이 머리 위로 내려올 때 으스러져라 서로를 껴안은 한 남녀; 그 속에 죽음도 공것으로 녹아버리고 필사적인 사랑은 폼페이의 돌에 목의 힘줄까지 불끈 돋은 벗은 生을 정지시켜놓았구나  이 추운 날 터미널에 나가 기다리고 싶었던 그대, 아직 우리에게 體溫이 있다면 그대와 저 얼음 속에 들어가 서로 으스러져라 껴안을 때 그대 더러운 부분까지 내 것이 되는 재앙스런 사랑의 이 더운 옷자락 한가닥 걸쳐두고 싶구나  이 세상에서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에게 사랑한다고 한 말은 아무리 하기 힘든 작은 소리라 할지라도 화산암 속에서든 얼음 속에서든 하얀 김처럼 남아 있으리라   거룩한 식사                                             나이든 남자가 혼자 밥을 먹을 때 울컥, 하고 올라오는 것이 있다. 큰 덩치로 분식집 메뉴표를 가리고서 등 돌리고 라면발을 건져올리고 있는 그에게, 양푼의 식은 밥을 놓고 동생과 눈흘기며 숟갈 싸움하던 그 어린 것이 올라와, 갑자기 목메게 한 것이다. 몸에 한 세상 떠넣어 주는 먹는 일의 거룩함이여. 이 세상 모든 찬밥에 붙은 더운 목숨이여. 이 세상에서 혼자 밥 먹는 자들 풀어진 뒷머리를 보라. 파고다 공원 뒤편 순댓집에서 국밥을 숟가락 가득 떠넣으시는 노인의, 쩍 벌린 입이 나는 어찌 이리 눈물겨운가.   뼈아픈 후회                                         슬프다 내가 사랑했던 자리마다 모두 폐허다 완전히 망가지면서 완전히 망가뜨려놓고 가는 것 ; 그 징표 없이는 진실로 사랑했다 말할 수 없는 건지 나에게 왔던 사람들, 어딘가 몇 군데는 부서진 채 모두 떠났다 내 가슴속엔 언제나 부우옇게 이동하는 사막 신전 ; 바람의 기둥이 세운 내실에까지 모래가 몰려와 있고 뿌리째 굴러가고 있는 갈퀴나무, 그리고 말라가는 죽은 짐승 귀에 모래 서걱거린다 어떤 연애로도 어떤 광기로도 이 무시무시한 곳에까지 함께 들어오지는 못했다, 내 꿈틀거리는 사막이, 끝내 자아를 버리지 못하는 그 고열의 神像이 벌겋게 달아올라 신음했으므로 내 사랑의 자리는 모두 폐허가 되어 있다 아무도 사랑해본 적이 없다는 거 ; 언제 다시 올지 모를 이 세상을 지나가면서 내 뼈아픈 후회는 바로 그거다 그 누구를 위해 그 누구를 한번도 사랑하지 않았다는 거 젊은 시절, 내가 자청한 고난도 그 누구를 위한 헌신을 아녔다 나를 위한 헌신, 한낱 도덕이 시킨 경쟁심 ; 그것도 파워랄까, 그것마저 없는 자들에겐 희생은 또 얼마나 화려한 것이었겠는가 그러므로 나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다 그 누구고 걸어 들어온 적 없는 나의 폐허 ; 다만 죽은 짐승 귀에 모래의 말을 넣어주는 바람이 떠돌다 지나갈 뿐 나는 이제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다 그 누구도 나를 믿지 않으며 기대하지 않는다   어느 날 나는 흐린 酒店에 앉아 있을 거다           初經을 막 시작한 딸 아이, 이젠 내가 껴안아줄 수도 없고 생이 끔찍해졌다 딸의 일기를 이젠 훔쳐볼 수도 없게 되었다 눈빛만 형형한 아프리카 기민들 사진 ; "사랑의 빵을 나눕시다"라는 포스터 밑에 전가족의 성금란을 표시해놓은 아이의 방을 나와 나는 바깥을 거닌다, 바깥 ; 누군가 늘 나를 보고 있다는 생각 때문에 사람들을 피해 다니는 버릇이 언제부터 생겼는지 모르겠다 옷걸리에서 떨어지는 옷처럼 그 자리에서 그만 허물어져버리고 싶은 생 ; 뚱뚱한 가죽부대에 담긴 내가, 어색해서, 견딜 수 없다 글쎄, 슬픔처럼 상스러운 것이 또 있을까 그러므로, 어느 날 나는 흐린 酒店에 혼자 앉아 있을 것이다 완전히 늙어서 편안해진 가죽부대를 걸치고 등뒤로 시끄러운 잡담을 담담하게 들어주면서 먼 눈으로 술자의 水位만을 아깝게 바라볼 것이다 문제는 그런 아름다운 폐인을 내 자신이 견딜 수 있는가, 이리라   거울에 비친 괘종 시계                           나,이번 생은 베렸어 다음 세상에선 이렇게 살지 않겠어 이 다음 세상에선 우리 만나지 말자   ......     아내가 나가버린 거실 거울 앞에서 이렇게 중얼거리는 사나이가 있다 치자 그는 깨우친 사람이다 삶이란 게 본디,손만 댔다 하면 중고품이지만 그 닳아빠진 품목들을 베끼고 있는 거울 저쪽에서 낡은 쾌종 시계가 오후 2시가 쳤을 때 그는 깨달은 사람이었다 흔적도 없이 지나갈 것 아내가 말했었다 "당신은 이 세상에 안 어울리는 사람이야 당신,이 지독한 뜻을 알기나 해? " 쾌종 시계가 두 번을 쳤을 때 울리는 실내:그는 이 삶이 담긴 연약한 막을 또 느꼈다 2미터만 걸어가면 가스벨브가 있고 3미터만 걸어가면 15층 베란다가 있다 지나가기 전에 흔적을 지울 것 쾌종 시계가 들어가서 아직도 떨고 있는 거울 에 담긴 30여평의 삶:지나치게 고요한 거울 아내에게 말했었다:"그래,내 삶이 내 맘대로 안 돼" 서가엔 마르크시즘과 관련된 책들이 절반도 넘게 아직도 그대로 있다 석유 스토브 위 주전자는 김을 푹푹 내쉬고   발작                                                         삶이 쓸쓸한 여행이라고 생각될때 터미널에 나가 누군가를 기다리고 싶다 짐 들고 이 별에 내린 자여 그대를 환영하며 이곳에서 쓴맛 단맛 다 보고 다시 떠날때 오직 이 별에서만 초록빛과 사랑이 있음을 알고 간다면 이번 생에 감사할 일 아닌가 초록빛과 사랑: 이거 우주 기적 아녀     일 포스티노                                                자전거 밀고 바깥 소식 가져와서는 이마를 닦는 너, 이런 허름한 헤르메스 봤나 이 섬의 아름다움에 대해 말해보라니까는 저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으로 답한 너, 내가 그 섬을 떠나 너를 까마득하게 잊어먹었을 때 너는 밤하늘에 마이크를 대고 별을 녹음했지 胎動하는 너의 사랑을 별에게 전하고 싶었던가, 네가 그 섬을 아예 떠나버린 것은 그대가 번호 매긴 이 섬의 아름다운 것들, 맨 끝번호에 그대 아버지의 슬픈 바다가 롱 숏, 롱 테이크되고; 캐스팅 크레디트가 다 올라갈 때까지 나는 머리를 박고 의자에 앉아 있었다 어떤 회한에 대해 나도 가도 가해자가 아닌가 하는 생각 땜에 영화관을 나와서도 갈 데 없는 길을 한참 걸었다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휘파람 불며 新村驛을 떠난 기차는 문산으로 가고 나도 한 바닷가에 오래오래 서 있고 싶었다   당신은 홍대 앞을 지나갔다                         내가 지도교수와 암스테르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을 때 커피 솝 왈츠의 큰 통유리문 저쪽에서 당신이 빛을 등에 지고서 천천히 印畵되고 있었다. 내가 들어온 세계에 당신이 처음으로 나타난 거였다. 그것은 우연도 운명도 아니었지만, 암스테르담은 어떤 이에겐 소원을 뜻한다. 구청 직원이 서류를 들고 北歐風 건물을 지나간 것이나 가로수 그림자가 그물 친 담벼락, 그 푸른 投網 밑으로 당신이 지나갔던 것은 우연도 운명도 아닌, 단지 시간일 뿐이지만 디지털 시계 옆에서 음악이 다른 시간을 뽑아내는 것처럼, 당신이 지나간 뒤 물살을 만드는 어떤 그물에 걸려 나는 한참 동안 당신을 따라가다 왔다. 세계에 다른 시간을 가지고 들어온 사람들은 어느 축선에서 만난다 믿고 나는 돌아왔던 거다. 지도교수는 마그리트의 파이프에 다시 불을 넣고 나는 당신을 모른다. 당신은 홍대 앞을 지나갔다. 암스테르담을 부르면 소원이 이뤄졌을지도 모른다. 마그리트 씨가 빨고 있던 파이프 연기가 세계를 못 빠져나가고 있을 때 램브란트 미술관 앞, 늙은 개가 허리를 쭉 늘여뜨리면서 시간성을 연장한다. 권태를 잡아당기는 기지개; 술집으로 가는 다리 위에 자전거가 세워져 있었다. 그친 음악처럼.   소나무에 대한 예배                                      학교 뒷산 산책하다, 반성하는 자세로, 눈발 뒤집어쓴 소나무, 그 아래에서 오늘 나는 한 사람을 용서하고 내려왔다. 내가 내 품격을 위해서 너를 포기하는 것이 아닌, 너 잇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이것이 나를 이렇게 휘어지게 할지라도. 제 자세를 흐트리지 않고 이 地表 위에서 가장 기품있는 建木; 소나무, 머리에 눈을 털며 잠시 진저리친다   바깥에 대한 반가사유                                  해 속의 검은 장수하늘소여 눈먼 것은 성스러운 병이다  활어관 밑바닥에 엎드려 있는 넙치. 짐자전거 지나가는 바깥을 본다. 보일까  어찌하겠는가. 깨달았을 때는 모든 것이 이미 늦었을 때 알지만 나갈 수 없는 無窮의 바깥; 저무는 하루. 문 안에서 검은 소가 운다.    몹쓸 동경(憧憬)                                   그대의 편지를 읽기 위해 다가간 창은 지복이 세상에 잠깐 새어들어오는 틈새; 영혼의 인화지 같은 것이 저 혼자 환하게 빛난다. 컴퓨터, 담뱃갑, 안경, 접어둔 畵集 등이 공중에 둥둥 떠다니고, 천장에서, 방금 읽은 편지가 내려왔다. 이데올로기가 사라지니까 열광은 앳된 사랑 하나; 그 흔해빠진 짜증스런 어떤 운명이 미리서 기다리고 있던 다리를 그대가 절뚝거리면서 걸어올 게 뭔가. 이번 生에는 속하고 싶지 않다는 듯, 모든 도로의 길들 맨 끝으로 뒷걸음질치면서 천천히 나에게 오고 있는 그러나 설렘이 없는 그 어떤 삶도 나는 수락할 수 없었으므로 매일, 베란다 앞에 멀어져가는 다도해가 있다. 따가운 喉頭音을 남겨두고 나가는 배; 그대를 더 오래 사랑하기 위하여 그대를 지나쳐왔다. 격정 시대를 뚫고 나온 나에게 가장 견딜 수 없는 것은 지루한 것이었다. 맞은편 여관 네온에 비추인 그대 속눈썹 그늘에 맺힌 것은 수은의 회한이었던가? "괴롭고 달콤한 에로스" 신열은 이 나이에도 있다. 혼자 걸린 독감처럼, 목 부은 사랑이 다시 오려 할 때 나는 몸서리 쳤지만, 이미 山城을 덮으면서 넓어져가는 저 범람이 그러하듯 지금 이렇게 된 것은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 그대는, 이삿짐 트럭 뒤에 떨궈진 생을 두려워하지는 않는지. 신화와 뽕짝 사이 사랑은 영원한 동어 반복일지라도 트럭집 거울에 스치는 세계를 볼 일이다. 황혼의 물 속에서 삐걱거리는 베키오 石橋를 그대가 울면서 건너갔을지라도 대성당 앞에서, 돌의 거대한 음악 앞에서 나는 온갖 대의와 죄를 후련하게 잊어버렸다. 나는 그대 앞의 시계를 보면서 불침번을 선다. 그대 떠나고 없는 마을의 놀이터 그네에 앉아 새벽까지 흔들리고 있었다. 그렇다. 동경은 나의 소명받은 병이었다. 지구 위에 저혼자 있는 것 같아요. 라고 쓴 그대 편지를 두번째 읽는다.   시에게                                                   한때 시에 피가 돌고, 피가 끓던 시절이 있었지; 그땐 내가 시에 촌충처럼 빌붙고 피를 빨고 앙상해질 때까지 시를 학대하면서도, 딴에는 시가 나를 붙들고 놔주질 않아 세상 살기가 폭폭하다고만 투덜거렸던 거라.  이젠 시에게 돌려주고 싶어. 피를 갚고 환한 화색을 찾아주고 모시고 섬겨야 할 터인데  언젠가 목포의 없어진 섬 앞, 김현 선생 문학비 세워두고 오던 날이었던가? 영암 월출산 백운동 골짜기에 천연 동백숲이 한 壯觀을 보여주는디 이따아만한(나는 두 팔을 동그랗게 만들어 보인다) 고목이 허공에 정지시켜놓았던 꽃들을 고스란히 땅 우에, 제 슬하 둘레에 내려놓았드라고! 産달이 가까운 여자후배 하나가 뚱게뚱게 걸어서 만삭의 손으로 그 동백꽃 주우러 다가가는 순간의 시를 나는 아직까지 못 찾고 있어. 상하지 않고도 피가 도는 그 온전한 시를......   늙어가는 아내에게                                      내가 말했잖아 정말, 정말, 사랑하는, 사랑하는, 사람들, 사랑하는 사람들은, 너, 나 사랑해? 묻질 않어 그냥, 그래, 그냥 살어 그냥 서로를 사는 게야 말하지 않고, 확인하려 하지 않고, 그냥 그대 눈에 낀 눈굽을 훔치거나 그대 옷깃의 솔밥이 뜯어주고 싶게 유난히 커 보이는 게야   생각나? 지금으로부터 14년 전, 늦가을, 낡은 목조 적산 가옥이 많던 동네의 어둑어둑한 기슭, 높은 축대가 있었고, 흐린 가로등이 있었고 그 너머 잎 내리는 잡목숲이 있었고 그대의 집, 대문 앞에선 이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바람이 불었고 머리카락보다 더 가벼운 젊음을 만나고 들어가는 그대는 내 어깨 위의 비듬을 털어주었지 그런 거야, 서로를 오래오래 그냥, 보게 하는 거 그리고 내가 많이 아프던 날 그대가 와서, 참으로 하기 힘든, 그러나 속에서는 몇 날 밤을 잠 못 자고 단련시켰던 뜨거운 말: 저도 형과 같이 그 병에 걸리고 싶어요   그대의 그 말은 에탐부톨과 스트렙토마이신을 한알 한알 들어내고 적갈색의 빈 병을 환하게 했었지 아, 그곳은 비어 있는 만큼 그대 마음이었지 너무나 벅차 그 말을 사용할 수조차 없게 하는 그 사랑은 아픔을 낫게 하기보다는, 정신없이, 아픔을 함께 앓고 싶어하는 것임을 한 밤, 약병을 쥐고 울어버린 나는 알았지 그래서, 그래서, 내가 살아나야 할 이유가 된 그대는 차츰 내가 살아갈 미래와 교대되었고   이제는 세월이라고 불러도 될 기간을 우리는 함께 통과했다 살았다는 말이 온갖 경력의 주름을 늘리는 일이듯 세월은 넥타이를 여며주는 그대 손끝에 역력하다 이제 내가 할 일은 아침 머리맡에 떨어진 그대 머리카락을 침 묻힌 손으로 집어내는 일이 아니라 그대와 더불어, 최선을 다해 늙는 일이리라 우리가 그렇게 잘 늙은 다음 힘없는 소리로, 임자, 우리 괜찮았지? 라고 말할 수 있을 때, 그때나 가서 그대를 사랑한다는 말은 그때나 가서 할 수 있는 말일 거야   신 벗고 들어가는 그 곳                                아파트 15층에서 뛰어내린 독신녀, 그곳에 가보면 틀림없이 베란다에 그녀의 신이 단정하게 놓여 있다 한강에 뛰어든 사람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시멘트 바닥이든 시커먼 물이든 왜 사람들은 뛰어들기 전에 자신이 신었던 것을 가지런하게 놓고 갈까? 댓돌 위에 신발을 짝 맞게 정돈하고 방에 들어가, 임산부도 아이 낳으러 들어가기 전에 신발을 정돈하는 버릇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가 뛰어내린 곳에 있는 신발은 생은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듯하다; 그것은 영원히 어떤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다만 그 방향 이쪽에 그녀가 기른 熱帶魚들이 수족관에서 물거품을 뻐끔거리듯 한번의 삶이 있을 따름이다   돌아보라, 얼마나 많은 잘못 든 길들이 있었는가 가서는 안 되었던 곳, 가고 싶었지만 끝내 들지 못했던 곳들; 말을 듣지 않는, 혼자 사는 애인 집 앞에서 서성이다 침침한 밤길을 돌아오던 날들처럼 헛된 것만을 밟은 신발을 벗고 돌아보면,생을'쇼부'칠수 있는 기회는 꼭 이번만은 아니다   두고 온 것들                                               반갑게 악수하고 마주앉은 자의 이름이 안 떠올라 건성으로 아는 체하며, 미안할까봐, 대충대충 화답하는 동안 나는 기실 그 빈말들한테 미안해, 창문을 좀 열어두려고 일어난다.  신이문역으로 전철이 들어오고, 그도 눈치챘으리라, 또다시 핸드폰이 울리고, 그가 돌아간 뒤  방금 들은 식당이름도 돌아서면 까먹는데  나에게서 지워진 사람들, 주소도 안 떠오르는 거리들, 약속 장소와 날짜들, 부끄러워해야 할 것들, 지켰어야만 했던 것들과 갚아야 할 것들; 이 얼마나 많은 것들을 세상에다가 그냥 두고 왔을꼬!  좀더 곁에 있어줬어야 할 사람, 이별을 깨끗하게 못해준 사람, 아니라고 하지만 뭔가 기대를 했을 사람을 그냥 두고 온 거기, 訃告도 닿을 수 없는 그곳에 제주 風蘭 한점 배달시키랴?    제주 바닷가를 걸어간 발자국                          요즘엔 신문을 봐도 무슨 천문학자나 고고학자의 새로운 발견 같은, 그런 기사만 눈여겨보게 되대이.  南제주 대정 바닷가에서 5만년 전 舊石器人 발자국을 발견했다는 일면 톱기사를 식탁에서 읽다가 김치 썰던 주방용 가위로 스크랩 해두었어; 그때 한 인간이 빠르게 내 옆을 스쳐 지나가더라고, 어디 먹을 거 없나...... 하는 그런 필사적인 눈을 두리번거리면서 돌칼 들고 5만년 전의 바람 속으로 들어가는데 내가 맡은 바다냄새를 킁킁거리며 그 근처에서 풀을 뜯던 말들이 고개를 돌려 일제히 이쪽을 넘보는 거야 5만년 후의, 유리 깔린 내 식탁으을...... 5만년 뒤 헌 쓰리빠 같은 발자국 화석을 눌러놓은 몸이, 그 한 몸이 다음 몸을 무수히 복제하여 나에 이른 이 냄새, 수저를 들어올리는 손의 이 공기에 대한 느낌; 아, 그 맣은 새들이 내 발자국 주위로 성가시게 내려앉고 아, 살아야 해, 살아야 해!하면서 실은 나는 얼마나 많이 이미 살었등고!  게으르게 밥알 씹다가 뒤집어본 스크랩 뒷면, 전두환씨 아들의 괴자금 170억 사건; 나는 식어버린 된장국물을 후루룩 마셨어.        황지우 黃芝雨 (1952. 1. 25 -  )본명 황재우                    1952년 전라남도 해남에서 태어나 1968년 광주제일고교에 입학했다. 1972년 서울대학교 철학과에 입학하여 문리대 문학회에 가입, 문학활동을 시작했다. 1973년 유신 반대 시위에 연루, 강제 입영하였다.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에 가담한 혐의로 구속, 1981년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제적되어 서강대학 철학과에 입학했다. 1985년부터 한신대학교에서 강의하기 시작하였고 1988년 서강대학교 미학과 박사과정에 입학하였다. 1994년 한신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로 있다가 1997년부터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교수로 있다.   1980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연혁(沿革)》이 입선하고, 《문학과 지성》에 《대답없는 날들을 위하여》를 발표, 등단하였다.  김수영 문학상을 수상한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1983)는 형식과 내용에서 전통적 시와는 전혀 다르다. 기호, 만화, 사진, 다양한 서체 등을 사용하여 시 형태를 파괴함으로써 풍자시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극단 연우에 의해 연극으로 공연되었다. 《나는 너다》(1987)에는 화엄(華嚴)과 마르크스주의적 시가 들어 있는데 이는 스님인 형과 노동운동가인 동생에게 바치는 헌시이다. 또한 다른 예술에도 관심이 많아 1995년에 아마추어 진흙조각전을 열기도 하고 미술이나 연극의 평론을 쓰기도 하였다. 《게눈 속의 연꽃》(1991)은 초월의 가능성과 한계에 대해 노래했으며《어느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는 1999년 상반기 베스트셀러였다. 《어느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는 생의 회한을 가득 담은 시로 대중가사와 같은 묘미가 있는 시집이다. 이 시집에 실려 있는 《뼈아픈 후회》로 김소월문학상을 수상했고 시집으로 제1회 백석문학상을 수상했다.   그의 시는 '시 형태 파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정치성, 종교성, 일상성이 골고루 들어 있으며 시적 화자의 자기 부정을 통해 독자들에게 호탕하되 편안한 느낌을 준다. 또한 1980년대 민주화 시대를 살아온 지식인으로서 시를 통해 시대를 풍자하고 유토피아를 꿈꾸었다.    그 밖에 《예술사의 철학》 《큐비즘》등의 저서가 있고, 《겨울 나무로부터 봄 나무에로 》(1985), 《저물면서 빛나는 바다》(1995), 《등우량선》(1998) 등의 시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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