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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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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3    이육사 <<靑포도>>는 <<풋포도>> 댓글:  조회:5538  추천:1  2016-03-15
"이육사의 詩 '靑포도'는 청포도 아닌 덜 익은 '풋포도'"  2016.03.15 근현대사 연구자 도진순 교수, '역사비평'에 재해석 논문 "청포도, 덜 무르익은 민족 의미"   /조선일보 DB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항일시인 이육사(李陸史·1904~1944·사진)의 대표작 '청포도(靑葡萄)'에서 청포도가 연둣빛 포도가 아니라 '풋포도'라는 해석이 제기됐다. 한국근현대사 연구자인 도진순 창원대 교수는 계간지 '역사비평' 2016년 봄호(114호)에 실린 '육사의 '청포도' 재해석―'청포도'와 '청포(靑袍)', 그리고 윤세주'라는 논문에서 "이 시에서 청포도는 품종으로서의 '청'포도가 아니라 익기 전의 '풋'포도여야 제대로 독해된다"고 주장했다. 도 교수는 육사의 고향인 경상북도 안동군 도산면 원촌리에는 일제시대는 물론 지금도 청포도가 없으며, 그래서 육사가 시상(詩想)을 얻은 곳이 청포도가 재배되던 포항 동해면의 미쯔와포도원이었다는 주장이 나왔지만 당시 청포도는 와인 제조용이었을 뿐 시에 나오는 것처럼 손님 접대용으로는 사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볼 수 없다고 했다. '강희자전'에 따르면 '청(靑)'이란 접두어는 '생물이 태어날 때의 색상'을 의미하며 우리말 '풋'에 해당하는데 이 시에서 '청포도'는 그런 뜻이라는 것이다.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이란 부분도 청포도는 물이 들지 않기 때문에 풋포도로 해석할 때 자연스럽다는 것이다. 도 교수는 시에서 '청포도'가 아직 무르익지 않은 우리 민족을 의미한다고 보았다. 육사는 지인에게 시 '청포도'에 대해 "내 고장은 조선이고 청포도는 우리 민족인데, 청포도가 익어가는 것처럼 우리 민족이 익어간다. 그리고 일본은 끝장난다"고 말했다. 도 교수는 또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靑袍)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에서 '청포'를 '벼슬아치가 공복(公服)으로 입던 푸른 도포'로 해석하여 시의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지적하는 것에 대해 "중국 한시에서 청포는 비천한 사람이 입는 옷이며 중국에 망명한 우리 혁명가들이 입었다"고 주장했다. 퇴계 이황의 14대 손(孫)인 육사는 한시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다. 육사가 기다리던 '손님'으로 도 교수는 가장 가까운 동지 윤세주(尹世胄·1901~1942)를 지목했다. 밀양 출신인 그는 육사와 친분이 깊었고 1932년 9월 함께 의열단에 합류하여 군사훈련을 받았다. 육사는 1933년 7월 귀국 직전 아끼던 인장을 그에게 선물했고, 1941년 1월 발표한 산문 '연인기(戀印記)'에서 그를 애틋하게 그렸다. 윤세주는 김원봉과 함께 조선민족혁명당과 조선의용대를 만들어 항일운동을 계속했고, 1942년 태항산 전투에서 전사했다. 중국을 오가며 독립운동을 하던 육사는 1943년 서울에서 체포돼 베이징으로 송치됐고 1944년 1월 옥사했다. 도진순 교수는 "육사는 평생 독립·혁명운동과 문학을 넘나들었기 때문에 그가 지은 시를 제대로 해독하려면 그의 독립운동에 대한 이해가 필수"라고 말했다.  ========================================================================= 청포도 (靑葡萄) 이육사 내 고장 칠월(七月)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 주저리 열리고 먼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 시인 이육사(李陸史) 1904. 5. 18 ~ 1944. 1. 16 ****************************************************************************************************** 본명 이원록(源綠) 1904년 4월 4일(음), 경북 안동 출생. 별명은 원삼(源三) .후에 활(活)로 개명. 그의 호 육사(陸史)는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루되어 대구 형무소에서 투옥되어 있을 때의 수인번호 264를 딴 것. 예안 보문의숙에서 신학문을 배웠고, 대구 교남학교에 잠시 다녔다. 1921년 10월경 항일독립운동단체인 에 가입. 항일운동 중 10여 차례 투옥. 1933년 귀국해 사 등의 언론기관에 근무하면서 라는 필명으로 시를 발표. 1937년에는 신석초·윤곤강·김광균 등과 시동인지〈자오선〉을 펴냄. 1941년에는 폐결핵으로 한동안 요양생활. 북경과 서울을 오가며 독립운동을 하다가 1943년 4월 서울에서 검거되어 북경으로 압송되었고, 이듬해 일본헌병의 악랄한 고문에 건강이 악화되어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한 채 1944년 1월 베이징 감옥에서 마흔의 나이로 생을 마감. 유해는 고향인 낙동강변에 안장되었다. 1964년 경상북도 안동시 안동호수 입구에 시비가 세워졌으며, 발표작품으로는 1933년〈신조선〉에 발표한 시〈황혼〉,〈한 개의 별을 노래하자 - 풍림1936. 12>,〈노정기 - 자오선1937.12>,〈연보 - 시학1939. 3>,〈청포도 - 문장1939. 8>,〈 교목 - 인문평론1940.7>,〈파초 - 춘추1941.12> 등이 있다. 1946년 신석초·김광균 등이〈육사시집〉을 펴냈다. 이후 1956년 재간본과 1964년 재중간본이 나왔고, 재중간본을 펴낼 때 시집 이름이〈청포도>로 바뀌었다. *************************************************************************** 4월 4일은 이육사 시인 탄생일, 는 시인이 잠시 포항에 기거했을 당시 포항시 동해면 도구리의 언덕에 있는 포도밭을 보며 고향과 조국의 광복을 생각하며 썼다고 한다. 등의 시어 보면 밝고 청초한 느낌을 주고 있으며 라는 한 사물을 통해 끊임없는 향수와 기다림, 미래를 향한 염원을 드러내고 있다. 즉, 조국 광복의 날을 기다는 을 바라보는 시인의 마음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이 시대, 작은 자원 하나라도 낭비하지 않고 분리수거라도 똑똑히 하는 범시민으로써 말이다. ...가뭄이 괘 오래 지속되고 있다. ... 하루 빨리 비가 오기를 오늘도 기도 해본다.  ////////////////////////////////////////////////////////////// 이육사 시조 2편 뵈올가 바란 마음 그 마음 지난 바램 하로가 열흘같이 기약도 아득해라 바라다 지친 이 넋을 잠재올가 하노라 ------ ------ 잠조차 없는 밤에 燭태워 안젓으니 리별에 병든 몸이 나을 길 없오매라 저달 상기 보고 가오니 때로 볼가하노라 ‘청포도’ ‘광야’ 등을 쓴 항일 저항시인 이육사(1904∼1944·사진)가 남긴 시조 2편이 처음으로 공개됐다. 이 시조는 육사가 1942년 동료 시인 신석초에게 보낸 편지에 쓴 것으로 신석초의 유족이 발견해 최근 육사 탄신 100주년을 기념해 발간된 ‘이육사 전집’(깊은샘)에 실리게 됐다. 전집을 엮은 김용직 서울대 명예교수(국문학)는 “지금까지 육사의 자유시 이외에는 한시(漢詩)가 세 수가 전해져 왔다”며 “육사가 시조를 썼다는 사실은 처음 알려진 것”이라고 밝혔다. 김 교수는 또 “육사의 시조는 표면적으로는 신석초에게 보내는 것이지만 내용면에서 국가 민족에 대한 그리움과 항일 저항의 정서를 깔고 있다”고 평했다. 외형적으로는 3장 6구라는 평시조의 형식을 지켜 전통적인 율격을 따르고 있다. 두 편 모두 1942년 8월 4일 씌어진 것으로 ‘(경북 경주) 옥룡암에서 신석초에게’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이육사 전집’에는 지금까지 알려진 육사의 작품들과 함께 신석초에게 보낸 편지 4통과 2편의 산문 등 총 6편의 새로 발굴된 글이 실렸다.  ////////////////////////////////////////////////// '호남 3월에 오얏꽃 날리는데 / 보국하려던 서생이 철갑을 벗는다 / 산새는 시국 급할 줄은 모르고 / 밤새도록 나를 불러 불여귀(不如歸)라 하네.' 구한 말 의병을 이끌며 일제에 항거한 의병장 중 대표적 의병장인 왕산(旺山) 허위(許蔿·1855~1908)가 남긴 시(詩)다. 김해 허씨인 왕산은 1855년(철종 6년) 4월 경북 선산군 구미면 임은리(현 경북 구미시 임은동)의 덕망 높은 학자 집안에서 아버지 허조와 어머니 진성이씨 사이의 네 형제 중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맏형 허훈은 영남 유림의 종장(유교의 학자들 가운데 특별히 학문이 높아 스승으로 섬기는 사람)으로, 1896년 진보로 이주해 진보의진을 결성했다. 셋째 형 허겸은 훗날 허위의 막하에서 의병에 참가했다. 왕산은 7세때 부터 숙부 허희와 20살 위인 맏형 허훈에게 한학을 배웠다. 15살 때 '시경'·'서경'·'역경'을 읽었고 천문·지리·병진·산수 등도 두루 익힌 것으로 알려졌다. 맏형 허훈은 아우에 대해 "유교의 학문에 있어서 내가 아우에게 양보할 것이 없지만, 포부와 경륜에 있어서는 내가 아우에게 미치지 못한다'"고 극찬했다. 1894년 전봉준 등 동학교도와 농민들을 중심으로 탐관오리들의 횡포와 외세에 항거하고자 하는 동학운동이 일어났다. 왕산은 허훈 등과 함께 흥구(현 청송군 진보면 흥구리)로 몸을 피했다. 왕산이 의병운동에 나선 것은 나이 40세 들어서다. 1895년 일제는 명성왕후를 시해하고, 전국에 단발령을 내렸다. 전국의 유생들은 '근왕창의'(勤王倡義)의 기치 아래 친일내각을 타도하기 위한 을미의병을 일으켰다. 안동에서는 권세연, 김도화, 김흥락 등을 중심으로 의병운동이 일어났으며, 허위 형제 역시 의병을 일으키키로 결심, 막대한 집안의 재산을 팔아 허훈은 진보에서, 허위는 김산에서 각각 의병운동을 시작했다. 김산의진은 수백명의 장병을 모집, 김산군 금릉의 무기고를 열어 무장했지만 조직을 채 갖추기도 전에 관군에 의해 흩어졌다.   【서울=뉴시스】박주연 기자 = 독립운동가 왕산 허위 선생 판결문. (사진=국가보훈처 제공) 왕산 등은 상주·선산 등지에 편지를 보내며 재기를 노렸고, 호서지방에서 활동하고 있던 유인석과 합세키로 했다. 하지만 '의병을 급속히 해산하라'는 왕의 명령을 받고 활동을 중지했다. 을미의병 해산 후인 1899년 2월1일 허위는 고종으로부터 환구단참봉 벼슬을 받았다. 그는 같은 해 2월6일 영희전참봉, 2월22일 조경원봉사 4월2일 성균관박사 등을 거치며 초고속으로 승진했다. 그는 중추원의관, 평리원수반판사를 거쳐 지금의 검찰총장격인 평리원재판장이 됐다. 1905년에는 현 대통령실장격인 비서원승에 올랐다. 왕산은 1904년 6월부터 일본의 침략을 만천하에 알리기 위한 격문을 쓰는 등 반일투쟁을 전개했다. 당시의 격문에는 '앉아서 망하기를 기다리느니 보다 온갖 힘을 다하고 마음을 합해 빨리 계책을 세우자. 진군해 이기면 원수를 보복하고 국토를 지키며, 불행히 죽으면 같이 죽자.… 옷을 찢어 깃발을 만들고, 호미와 갈구리로 칼을 만들자'등의 내용이 담겨 있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왕산은 1905년 3월 일제에 의해 구금, 같은 해 7월부터 경상도·충청도·전라도 등 3도의 경계인 삼도봉 아래 두대동에서 일제 관헌의 감시를 받으며 은거해야 했다. 1905년 일제는 대한제국을 강압해 외교권을 박탈하고, 통감부를 설치하는 것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을사늑약을 체결했다. 사실상 대한제국이 일제의 식민지가 된 것이다. 왕산은 경상도·충청도·강원도·전라도 등지를 다니며 우국지사들을 만났다. 1906년 6월 의병봉기를 계획했다. 허위는 안동을 시작으로 강원도 일대를, 이강년은 상주를 시작으로 충청도 일대를, 여중룡은 김산을 시작으로 전라도 일대를 각각 거쳐 경성에서 합류하자는 계획이었다. 1907년 7월 고종이 강제 퇴위했고, 같은 해 8월 대한제국의 군대가 해산됐다. 왕산은 경기도 북부와 남부, 그리고 강원도 일원에 걸치는 한반도 중북부 일대에서 의병활동을 하고 있었다. 1908년 12월 전국 의병장은 경기 양주에서 집결해 이인영을 총대장으로 하는 통합 의병부대 '13도창의대진소'를 만들었다.   【서울=뉴시스】박주연 기자 = 저항시인 육사 이원록. (사진=국가보훈처 제공) 이때 왕산은 작전참모장 격인 군사장을 맡았다. 당시 양주에 집결한 의병의 규모는 총 48진에 1만여명에 달했다. 13도창의대진소는 즉시 서울 진격작전에 돌입했고, 왕산의 선발대 300명은 서울 동대문 밖 30리 지점까지 진격했다. 하지만 일본군의 선제공격을 받아 패했다. 왕산은 1908년 6월11일 경기 포천에서 일제에 체포돼 9월18일 사형선고를 받아 10월21일 교수형을 당했다. 향년 54세였다. 왕산의 아들 허학은 1907년 21살의 나이로 의병장 간 연락과 무기조달을 담당하며 부친의 의병활동에 참여했다. 그는 1913년 독립의군부 사건의 주모자로 활동하다 1914년 일제에 체포돼 옥고를 치렀다. 허학은 만주로 망명한 후인 1925년 김혁을 위원장으로 한 신민부에서 참의원에 선출돼 항일운동을 벌였다. 그와 아우 허영 허준 등은 당시 일본군의 수배대상이었다. 1940년 카자흐스탄에서 외롭게 사망한 그는 1968년에야 대통령 표창을 추서받았다. 왕산의 맏형 허훈과 셋째형 허겸, 허훈의 손자 허종은 모두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허위의 사촌인 허형과 허필 일가 역시 독립운동에 몸을 아끼지 않았다. 허형의 아들 허민, 허발, 허규와 허필의 아들 허형식도 독립운동에 나섰다. 허형의 딸 허길은 진성이씨 이가호와 결혼해 이원기 이원록 이원일 이원조 이원창 이원홍을 낳았다. 이중 육사 이원록은 저항시인이자 독립운동가로 이름을 날렸다. 이원기도 독립운동에 투신해 훗날 건국포장을 받았다. 육사는 1904년 4월4일 안동군 도산면 원촌동 881에서 퇴계 이황의 14대손으로 태어났다. 이가호와 허형의 딸 허길이 그의 부모이고, 도산서원 보문의숙의 초대 숙장을 지낸 이중직이 그의 조부다. 허형은 의병장 허훈·허겸·허위와 사촌으로, 허형·허훈 등은 모두 예안의 진성이씨 집안으로 딸이나 손녀를 시집보내 중첩혼을 맺고 있었다.   【서울=뉴시스】박주연 기자 = 저항시인 육사 이원록의 친필 서한. 독립기념관 소장 이미지. (사진=국가보훈처 제공) 육사는 어린시절부터 조부에게 한학을 배웠고, 보문의숙을 거쳐 1918년 설립된 도산공립보통학교에 1회로 입학해 신학문을 익혔다. 17세에 형 이원기를 따라 대구로 이주했고, 18세가 된 해에는 부인 안일양과 결혼했다. 1925년 9월에는 암살단을 조직했고, 1926년 봄에는 베이징으로 가 중국 대학에 다니며 독립운동을 벌였다. 1927년 8월 귀국 직후에는 장진홍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탄사건에 연루돼 2년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한 후 '중외일보', '조선일보' 기자로 일하던 그는 1930년 다시 대구격문 사건에 연루돼 동생 이원일과 함께 다시 6개월간의 옥고를 치렀다. 이후 건강이 악화된 그는 시와 글을 통해 민족의식을 일으키기 위해 문인으로 활동하기로 결심했다. 1936년 '한개의 별을 노래하자'라는 시를 발표했고, '해조사', '노정기' 등 산문도 썼다. 1939년에는 '절정', '청포도'등의 시를 썼고, 1942년에는 사실상의 유고시인 '광야'를 발표했다. 육사는 1943년 9월 일경에 잡혀 옥살이를 하던 중 고문을 못이겨 옥중 순국했다. 그와 함께 투옥됐던 9촌 조카 이병희 지사가 육사의 유품과 시신을 수습했다. ==============================================     도진순 교수, 이육사 논문 발표 ‘청포도’ ‘절정’ 등 새롭게 해석 ‘광야’는 불교와 니체적 사유로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꾸려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 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靑袍)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이육사 ‘청포도’ 전문)   도진순 교수 이육사의 시 ‘청포도’를 새롭게 해석한 논문이 나왔다. 한국사학자인 도진순 창원대 교수가 봄호에 발표한 논문 ‘육사의 ‘청포도’ 재해석-‘청포도’와 ‘청포(靑袍)’, 그리고 윤세주’가 그것이다. 이 논문에서 도 교수는 ‘청포도’를 익기 전인 ‘풋’포도로, ‘청포’는 독립투쟁을 벌이던 이들이 입었던 옷으로 풀었다. 그리고 “손님”을 대표하는 인물로 육사의 혁명 동지였던 석정 윤세주를 지목했다.   도 교수는 우선 육사가 시 ‘청포도’를 쓸 무렵 한반도에는 청포도 품종이 거의 재배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그리고 에서 푸를 청(靑) 자를 “생물이 태어날 때의 색상”이라 한 데 착안해 그것이 우리말 ‘풋’에 해당한다고 보고 ‘청포도’는 독립과 혁명의 미래를 기다리고 준비하는 조국을 상징한다고 해석한다.   ‘청포’의 해석을 위해 도 교수는 두보의 한시에 의지한다. 그러나 조선의 두보 시 해설서 는 두보의 시 ‘지후’(至後)에 나오는 “청포백마가 달리 무슨 뜻 있으리오./ 금곡과 동타가 있던 낙양은 옛 모습 아니로다” 중 ‘청포백마’를 안록산과 사사명 같은 반란군으로 해석했다. “안록산과 사사명은 대체 무슨 뜻으로 난을 일으켰는가. 왜 그들은 내 고향인 낙양의 금곡과 동타마저 파괴하였는가”라고 해석한 것이다. 도 교수는 한학에 밝았던 육사가 의 ‘지후’를 읽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두보의 또다른 시 ‘세병마’(洗兵馬)에도 “푸른 도포에 백마 탄 반란자들이 다시 어찌 있겠는가”라고 하여 ‘청포백마’가 반란자의 상징으로 다시 등장한다. 도 교수는 “육사는 두보가 부정적인 반란자로 표현한 이 청포백마를 긍정적인 혁명가의 이미지로 전환했다”며 “‘청포도’는 지치고 쫓기는 혁명가들을 맞이하는 향연을 노래한 것”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이육사 도진순 교수의 이육사 시 재해석은 ‘청포도’에 그치지 않는다. 다음달 발간 예정인 60호에 실리는 ‘육사의 ‘절정’: ‘강철로 된 무지개’와 ‘Terrible Beauty’’라는 논문에서 그는 육사의 또다른 절창 ‘절정’ 역시 새롭게 해석하는데, 특히 마지막 행에 나오는 ‘강철 무지개’에 대한 해석이 독창적이다.   “매운 계절의 채쭉에 갈겨/ 마츰내 북방으로 휩쓸려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 서리빨 칼날진 그 우에서다// 어데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발 재겨 디딜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절정’ 전문)   정한모와 김종길 같은 선행 연구자들은 강철 무지개가 ‘비극적 황홀’ 식의 긍정적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해석해 왔다. 그러나 도 교수는 기존의 해석과는 전혀 다른 견해를 내놓는데, 이번에는 진시황을 암살하려 했던 형가 이야기에서 근거를 가져온다. ‘추양열전’에는 형가의 암살 기도 사건 당시 하늘에서 “흰 무지개가 해를 꿰뚫었다”(白虹貫日)는 묘사가 나오는데, 이로부터 ‘백홍관일’은 군주 암살 또는 국가 변란의 상징으로 문학작품 및 천문현상 기록에 자주 등장하게 되었다. “‘강철로 된 무지개’는 검의 기세로 해를 찌르는 ‘흰 무지개’”를 상징하며 “물론 해(日)는 일제(日帝)”를 가리킨다는 것이 도 교수의 해석이다.   도진순 교수는 이달 말 발행되는 제76집에도 ‘육사의 한시 ‘만등동산’과 ‘주난흥여’: 그의 두 돌기둥, 석정 윤세주와 석초 신응식’이라는 논문을 발표한다. 육사의 두 한시를 분석한 이 글에서도 그는 ‘만등동산’ 중 “높은 데 올라 해가 긴 것을 한탄한다”에서 ‘恨日長’을 일제 지배의 지속에 대한 한탄으로 해석하며, ‘주난흥여’에 나오는 ‘지음’(知音)과 ‘노석’(老石)을 ‘청포도’ 해석에도 등장했던 혁명동지 윤세주로 보는 등 기존 해석들과 다른 참신한 해석을 선보인다. 도진순 교수는 이 논문들과 함께 자신이 육사의 ‘절명시 삼부작’이라 이름한 ‘나의 뮤-즈’ ‘광야’ ‘꽃’에 대한 논문들의 초고 역시 완성한 상태이며, “육사의 심상 공간과 여성관계 등을 다룬 기행문 및 논문을 추가해 단행본으로 낼 계획”이라고 밝혔다. 그는 “마지막 시 세 편은 불교와 깊은 관련성을 지닌다”며 “황현산 선생이 최근 저서 에서 육사의 시 ‘광야’를 인간의 역사와 진보에 대한 믿음으로 해석했지만, 육사는 오히려 근대화론을 비판하는 쪽이었으며 불교나 니체 같은 카이로스의 수직적 시간관을 ‘광야’에서 표현했다”고 주장했다.   최재봉 선임기자  
1202    [ 이 아침 詩 한잔 드리꾸매]- 시간에 관한 짧은 노트 댓글:  조회:4064  추천:0  2016-03-15
시간에 관한 짧은 노트 1                                            / 이원  첫째날   해가 지기도 전에 별이 하나 떴다 그 옆에 새가 발자국을 콱 찍었다 둘 다 반짝거렸다 그 사이로 시간의 두 다리가 묻힌다 더 이상 별은 떠오르지 않았다 이해되지 않는 모국어 같은 순간이 있다   둘째날   흰 초생달이 서쪽에 떴다 그 달 아래 별도 하나 떴다 버려진 거울 속에 갇힌 지난 시간이 자꾸 운다 눈앞에서 허물어지고 금방 다시 지어지는 집들의 동쪽에도 별이 두 개 떠올랐다 그 곳으로 머리를 한데 모아 비벼대는 시간들 초록색으로 떨며 서서 지구의 지붕을 뒤지는 시간들 흰 달 위에 위태롭게 올라탄 외눈박이 별들   세째날   낮이 되어도 몸을 지우지 못하는 달이 하늘 밖에 떠 있다 창들이 화분을 허공에 내놓았다 내 앞으로 시간이 사람들을 이쑤시개처럼 쑤시며 지나갔다   넷째날   연이어 시간이 사람들을 이쑤시개처럼 쑤시며 지나갔다   다섯째날   달이 뜨지 않았다 달이 떴던 자리에서 시간의 녹슨 뼈대가 덜커덕 올라온다 공기들이 자주 길을 바꾼다 시간은 잘 구겨지는 금속인지도 모른다 꺼진 스피커처럼 둘러선 하늘에 녹이 슬어간다 사방에서 말더듬이 같은 별들이 돋아났다................ 부패한 별들도 자기 자리를 잡는다   여섯째날   반달이 떴다 별똥별이 떨어져왔다 은색을 칠해 창앞에 걸어둔다 바람이 부니까 시간과 함께 달그락거린다 반달너머 하늘에도 상표처럼 납작하게 별 하나가 박힌다 순식간에 그 적막 안으로 시간이 돌멩이를 집어던진다 지나가던 사람들도 맞는다 나?   일곱째날   휴일이었다 시간이 되감기 버튼을 눌렀다
1201    내 인생은 처음부터 저주받았음이... 댓글:  조회:4388  추천:0  2016-03-14
1821.4.9 프랑스 파리에서 시인 보들레르 태어나다 "내 인생은 처음부터 저주받았음이 틀림없습니다. 이러한 운명은 평생 계속되었지요." 시인은 이렇게 자신은 태어나면서부터 저주를 받았다고 회고했다. 프랑스, 파리의 우울, 악의 꽃, 금치산, 댄디즘. 시인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단어다. 19세에 이미 현대성을 획득한 이 천재 시인은 자신의 태생을 '저주'라는 무서운 단어와 결부시켰다. 보들레르는 1821년 4월9일 아버지 프랑수아 보들레르와 어머니 카롤린느 드파이,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났다. 환갑의 나이에 젊은 여인과 결혼한 그의 아버지는 환속한 사제 출신으로 당대 자유주의 사상에 영향을 받은 대단히 지적이고 특이한 인물이었다. 미술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을 갖췄고, 아마추어 화가이기도 했다. 보들레르가 훗날 미술에 관한 비평과 스케치를 한 연유를 그의 핏줄에서 찾아볼 만하다 19세에 이미 현대성을 획득한 천재 시인의 아버지는 보들레르가 6살 때 별세했으니, 어린 보들레르에게는 인자한 할아버지와 같은 인상만 남아 있었다. 사제 출신의 남편과 34살이나 차이 나는 젊은 엄마는 건장하고 전도가 유망한 오픽 장군과 재혼을 한다. 그리고 돌아가신 친부가 어린이 보들레르에게 물려준 재산을 관리하는 가족회의가 구성되었고, 군인 출신의 계부 아래서 예술가의 피를 이어받은 아이는 고독했다. 보들레르의 이미지인 고통과 우울, 비참한 삶, 모멸감과 같은 정서는 유년기의 외로움에서 스며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탄생을 저주받았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환속한 사제의 아들이니 신의 노여움을 산 것일까? 보들레르, "[악의 꽃]에 세상의 모든 고통을 담아 놓았다."   보들레르는 자신의 유일한 시집인 [악의 꽃]을 남김으로써 시인 보들레르가 되었다. 시인이 시집을 낸다는 건, 자신의 생명과 시간을 조탁한 언어의 집을 독자들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보들레르는 이 시집을 '세상의 모든 고통을 담아 놓은 사전'이라고 자평했다. 그의 생명과 시간의 집인 시집에 거주하는 고통들을 통하여 우리는 그 '상징'의 숲으로 걸어 들어간다. 시인은 이란 '영혼이 초자연적인 어떤 상태에 있을 때 아무리 평범한 풍경이나 사물일지라도 그 속에 생명의 깊이가 그대로 드러날 수가 있다. 이것이 곧 상징이 된다'라고 쓴다. 시인과 보통 사람들은 같은 세상에 살면서 같은 풍경이나 사물을 본다. 세상은 시인에게만 특별한 풍경이나 사물을 선물하지 않는다. 그러나 시인은 그것들과 교감하고 소통하여 '영혼의 초자연적인 어떤 상태'로 자신을 끌어올린다. 거대한 새가 날개를 펴는 모습이고, 항구를 출발한 범선이 돛을 올리는 이미지이다. 보들레르는 19세기를 살면서 이미 근대의 폭풍우를 지나 '현대'라는 항구에 닻을 내린 시인이다. 그가 교감하고자 하는 세상은 현실적으로 매우 지난한 세상이었다. "그 시절 어머니는 저와 함께 오랫동안 산책을 하며 다정한 모습을 보여주셨지요. 저는 아직도 그 강둑을 기억하는데, 저녁 풍경이 어찌나 슬퍼 보였던지. 아! 어머니의 정을 느낄 수 있었던 행복한 순간이었어요. 어머니에게는 틀림없이 고통스러웠을 순간을 제가 행복한 시간이라고 부르는 것을 용서해 주세요. 어머니는 어린 저에게 우상이며 동시에 친구였으니까요." 보들레르가 40살 되던 해에 어머니에게 보내는 편지의 일부이다. 시인이 말하고 있는 행복한 순간은 보들레르가 6살 되던 해, 즉 보들레르의 아버지가 죽고 어머니가 재혼하기 전까지 2년이 조금 안 되는 기간이다. 만 스물한 살 되자 떼를 써서 아버지 유산을 받은 뒤부터 방탕한 생활   계부인 오픽 소령은 결혼 후에, 장군으로 승진하고,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 주재 전권공사를 거쳐 외교관 생활을 하다가 상원의원으로 진출하는 잘 나가는 인생의 전형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계부와는 달리 보들레르는 파리 대학 법학과에 입학하면서부터 '노르망디파'라고 불린 문학 동아리에 참여했고, 어둠 속으로 빠져 들어간다. 거리의 창녀를 알게 되고 매독에 걸려 평생의 지병이 된다. 보들레르는 1842년 4월 9일 만 21세로 법적인 성인이 되자 선친의 유산을 달라고 떼를 써 가족들로부터 금화 십만 프랑을 받았다. 그 돈으로 대학을 다니면서 방탕한 생활을 하느라 진 빚을 다 갚고 펑펑 돈을 써대기 시작했다. 그 무렵에 그의 평생 연인이자 고통의 동굴인 잔느 뒤발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이 역시 행복한 시간이기도 하다. 그녀는 단역배우 출신이라고는 하지만 모계 3대가 창녀 집안인 '아름다운' 창녀였다. (두 사람의 관계는 이후 14년간이나 지속되다가 끊어지게 된다. 하지만 보들레르가 '검은 비너스'라고 노래한 그녀와의 인연은 그의 문학과 인생에 생명 줄과 같은 것이었다. 관계를 끝냈다고는 하지만 그녀가 중풍에 걸리자, 경제적으로 다시 돌보아주는 연민의 정을 보여주기도 했다. 육감적이고 아름다운 여인은 늙고 병들어 거기에다 중풍에 걸려 목발을 짚고 어두운 파리 거리를 걸어 다니다가 사라져 버렸다.) 유산을 받고 쓰기 시작한 지 2년이 지나자 어머니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보들레르에게는 천형과 같은 '금치산 선고'를 의뢰하고 법원은 그를 법적으로 미성년자로 취급하여 금치산자 선고를 내렸다. 그는 46세의 나이로 죽을 때까지 경제적으로는 미성년자였다. 그의 인생은 항상 빚을 지고, 어머니에게 돈을 달라고 조르고, 빚쟁이에게 쫓겼다. 지병인 매독이 불청객이 되어 간헐적으로 온몸에 찾아들고 보들레르는 이러한 고통 속에서 시인으로 단련되었고, 숙성되었다. 진흙 속에서 연꽃이 피었다. "내게 생각하는 법을 가르쳐 준 이는 드 메스트로와 에드거 앨런 포" 시인 보들레르의 첫 번째 저작은 이다. 미술전시회에 출품된 작품을 연구 평가한 글이다. 보들레르는 연이어 도 출판한다. 미술비평가로서도 보들레르는 꾸준히 활동했다. 그는 화가 들라크루아를 높게 평가했고, 독일의 바그너 공연을 보고 열광하여 음악 평론도 쓴다. 그는 시와 음악 미술을 모두 받아들인 지성이었다. 그리고 1847년에 에드거 앨런 포의 작품을 만나게 된다. 보들레르와 에드거 앨런 포는 국적만 달랐지 여러 가지로 공감대가 형성되는 시인들이었다. 작품을 통하여 천재는 천재를 알아보았고, 보들레르는 포의 작품을 번역하면서 배우고 익히고, 교감했다. 그는 포를 만난 것을 행운으로 여기고 '내게 생각하는 법을 가르쳐 준 이는 드 메스트르와 에드거 앨런 포이다'라고 고백했다. 역시 저주받은 천재 포와 마찬가지로 어려운 경제적인 환경과 광기 어린 생활을 하던 보들레르의 영혼은 당시 부르주아들의 안락한 생활을 속물적인 것으로 보았다. 보들레르는 세속적인 부르주아를 극단적으로 혐오하고 부정하면서 귀족주의적 태도를 취한다. 그는 실용주의적인 세상에 맞서 '댄디즘'으로 무장했다. 지금도 문학청년들은 한 때 댄디즘의 세례를 받는다. 댄디즘은 가난한 시인이 입기 좋은 외투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 외투 안에서는 배고픈 위장이 있다. 19세기에 이미 현대적인 시를 쓴 시인이 물질주의와 민중, 민주주의에 대해 갖는 거부감은 묘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공중 도덕 훼손죄'로 기소된 시집 [악의 꽃] 1857년 소설가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이 외설죄로 재판을 받고 무죄가 선고 되었다. 이즈음에 보들레르는 [악의 꽃]의 원고를 풀레-말리사스 출판사에 넘겼다. 그리고 그 해 4월 계부인 오픽 장군이 사망하고 홀로 된 어머니는 옹플뢰르의 별장으로 이사했다. 보들레르의 [악의 꽃]은 6월 25일 출간된다. 초판 [악의 꽃]에는 모두 100편의 시가 실렸다. [악의 꽃]이 '풍기문란하다'라는 서평에 자극을 받은 프랑스 내무부 공안국이 이 책을 고발했고, 보들레르와 출판사는 '공중도덕 훼손죄'로 기소되었다. 플로베르에 이은 필화사건이었다. 저자와 출판사는 벌금형을 받았고 시 6편은 삭제 명령을 받았다. ([악의 꽃]에 대해 법적인 구속이 없어진 것은 한 세기가 지난 1949년이었다. 프랑스 대법원은 보들레르의 [악의 꽃]에 대한 유죄선고를 파기하고, 그와 작품에 법적인 명예를 회복시켜 주었다. 그날은 8월 31일 그의 제삿날이었다. 이 시집으로 그는 현대시의 시조가 되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후 시인은 파리를 떠나 어머니 곁에 머물 생각도 하고, 단상집인 [벌거벗은 내 마음]의 원고를 쓴다. 이 작업은 보들레르 말년의 내면 풍경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산문들이다. 절망적인 상태의 금치산자, 연인 잔느 뒤발과의 결별, 고독, 우울, 매독, 집필 구상 중인 원고에 대한 절망감 등 보들레르 존재 자체를 위협하는 가시나무와 같은 단상들이다. 이 단상과 더불어 산문시집인 [파리의 우울]은 그가 인생의 마지막 나날들에 기록한 산문 시편들이다. 그리고 보들레르의 단편소설인 [라 팡파를로]는 그의 유일한 소설이고, 문학청년 시절 소설에 대한 보들레르의 관심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 소설은 단행본으로 출간되어 12,000부를 발행한다. '시인은 폭풍우를 넘나들고 사수들을 비웃는 구름의 왕자와 비슷하다' 보들레르는 우울한 파리를 떠나 벨기에로 인생의 마지막 여행길에 올랐다. 하지만 그 생활 역시 저주받은 시인을 행복하게 하지는 못했다. 오히려 더 어려운 지경이 되어 보들레르는 [불쌍한 벨기에여]라는 산문집을 집필하면서 그곳의 사람들에게 독설을 퍼부었다. 시인은 브뤼셀에서 현기증과 구토를 극심하게 일으키고 결국 반신마비의 상태가 되어 늙은 어머니의 손을 잡고 파리로 돌아왔다. 그가 사랑하고 미워하였던 우울한 파리에서 이 세상의 여행을 끝냈다. 1867년 8월 31일 오전 11시, 시인의 나이 46세였다. '알바트로스'라는 새가 있다. 거대한 바닷새이다. 우주의 심연과 같은 바다 위를 날아다니는 장자의 대붕과 같은 이 새는 간혹 항해를 하는 선원들의 손에 잡혀 무기력한 모습이 되기도 한다. 보들레르는 자신의 모습을 알바트로스에 투영한다. 자주 선원들은 심심풀이로 붙잡는다. 거대한 바다 새인 알바트로스를 아득한 심연 위를 미끄러지듯 나아가는 배를 태평스레 뒤따르는 길동무를. 선원들이 갑판 위에 내려놓자마자 창공의 왕자는 서툴고 창피해하며 그 크고 하얀 날개를 배의 노처럼 가련하게 질질 끌고 다닌다. 날개 달린 이 여행객은 얼마나 어색하고 무기력한가! 조금 전까지도 멋있던 그는 얼마나 우습고 추해 보이는지 선원 하나가 담뱃대로 그의 부리를 성가시게 하고 절뚝거리며 다른 이는 더 이상 날지 못하는 불구자를 흉내 내는구나 시인은 폭풍우를 넘나들고 사수들을 비웃는 이 구름의 왕자와 비슷하다. 야유 속에 지상에 유배당하니 거인의 날개가 걷기조차 힘겹게 하는구나. 이 시는 1859년인 그의 인생 하반기에 발표된 시이지만, 이 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1842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시인의 가족들이 방탕한 생활을 하는 청년 보들레르를 인도행의 배에 실어 바다 위에 올려놓았다. 환락의 도시에서 먼 이국으로 유배를 보낸 셈이다. 시인은 항해 도중 폭풍우를 만나 잠시 머물렀던 열대 이국의 섬들을 보고 그 정서를 마음에 담았다. 시인은 인도 행을 거부하고 10개월 만에 다시 파리로 되돌아 왔다. 중년의 나이가 된 시인은 그때 보았을 거대한 바다 새를 떠올리면서 '지상에 유배' 당한 자신의 삶을 시로 노래했다. 나다르와 카르자가 촬영한 보들레르의 사진에 담긴 우울한 눈빛 카르자가 찍은 보들레르의 사진을 들여다본다. 마치 회화 작품과도 같은 절묘한 사진 한 장이다. 미술 평론가인 보들레르는 사진을 경멸하곤 했지만(그는 '현대의 대중과 사진'이라는 에세이에서 사진을 '이것은 재능이 없다거나 게을러서 실패한 모든 화가들의 피난처가 되었다'라고 했다.) 당대 사진예술가였던 나다르와 카르자는 보들레르를 보들레르 답게 찍어서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보들레리앙에게는 일종의 축복이다. 보들레르는 말년에 젊은 말라르메와 베를렌이 자신에게 열광하는 모습을 보고 '이 젊은이들은 나를 몹시 무섭게 한다'고 했다. 병들고 피곤한 육체는 이제 후배 시인들의 열광마저도 부담스러웠다. 시인이란 누구인가? 간혹 그런 생각을 한다. 그때 보들레르의 사진 한 장이 떠오른다. 어둡고, 외롭고, 무서운 어둠 속에서 별처럼 빛나는 보들레르의 우울한 눈빛을 떠올린다. 필자가 추천하는 덧붙여 읽으면 좋은 책 보들레르의 [악의 꽃(문학과 지성사)]을 우선 권한다. 보들레리앙 윤영애 선생의 번역으로 나온 이 시집은 보들레르가 남긴 단 한 권의 시집이다. 낭만주의 정신을 담고 있으며 동시에 낭만주의의 결점을 뛰어넘어 상징주의, 초현실주의 등 현대시에 길을 터놓은 것으로 평가되는 작품이다. 1861년 출간된 제2판을 번역 텍스트로 삼았다. 더불어 역시 윤영애 선생의 번역인 [파리의 우울(민음사)]은 [악의 꽃]과 함께 보들레르의 독창적인 시 세계를 보여주는 산문시집이다. 그가 개척한 이 산문시라는 형식은 베를렌, 랭보, 로트레아몽, 말라르메 등 근대 상징파 시인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시인은 노파, 거리의 소녀, 노름꾼, 넝마주의 등 파리의 거리를 헤매는 모든 서글픈 암시들을 산문 시편으로 그려내고 있다. 그리고 김붕구 선생의 명저인 [보들레에르(문학과지성사)]를 읽어야만 한다. '알면 보인다'라는 말처럼 이 평전을 통하여 한 시인의 총체적인 모습과 시에 대한 이해가 깊어질 것이다. 김붕구 선생도 지난한 삶을 살아오신 분이다. 문학청년 시절 이 두툼한 책 한 권을 끼고 혜화동 거리를 배회하던 생각이 난다. 그땐 보들레르의 외투를 입고 싶었다. 가난해서 댄디한 척 하고 다녔었다. 마지막으로 [지상의 낯선 자 보들레르(민음사)]도 곁에 둔다면 다 읽지는 않더라도 행복할 것이다. /원재훈 이미지를 클릭하면 다음이미지가 보여집니다. 6 /
1200    詩공부시간- 詩퇴고 장소는 화장실... 댓글:  조회:4407  추천:0  2016-03-14
시를 쉽게 쓰는 요령 - 김영남 11. 퇴고는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누가 필자에게 시창작 과정중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요소 두 가지만 들라고 한다면 필자는 아마 상상력과 퇴고력을 들지 않나 싶습니다. 그 이유는 시의 내용을 상상력이 좌우하고, 작품의 완성도는 퇴고력이 좌우하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따라서 상상력이 조금 떨어지더라도 퇴고를 잘 하면 그 시는 크게 흠이 드러나지 않고, 또한 퇴고가 좀 어설프더라도 상상력이 특출하면 이 시 또한 큰 문제점이 노출되지 않고 넘어갈 수 있지 않나 싶습니다. 그러나 두 가지 요소에 문제가 있을 땐 정말 작품이 형편없이 추락하게 되죠. 하여, 가장 바람직한 것은 상상력과 퇴고력을 겸비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능력을 겸비하면 작품성이 폭발적으로 상승하지 않나 싶습니다. 그러면 퇴고를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요? 이 또한 필자의 경험을 들려주는 것으로 이 강좌를 대신할까 합니다. * 상상을 할 때는 뜨겁게, 퇴고를 할 때는 냉정하게 상상을 할 때 마음의 자세는 기본적으로 뜨겁고 깊게 해야 하지만, 퇴고를 할 때 마음의 자세는 이와 정반대 자세인 냉정하고 넓게 해야 되지 않나 싶습니다. 이와 같이 작품을 쓸 때와 작품을 고칠 때에는 정 반대의 심성이 필요한 이유는 작품을 바로 써서 완성시키면 흥분된 감정상태에 있기 때문 시도 흥분되어서 좋은 시 건지기가 어렵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러나 초보자 시절에는 시를 써서 곧바로 완성시키고 누구에게 자랑하고 보여주고 싶은 조급함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이게 초보자 시절에 자주 빠지게 되는 함정입니다. 힘들여 퇴고를 해보지 않으면 그만큼 발전이 더디고 아집에 사로잡히기 십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퇴고기간은 어느 정도 가지는 것이 바람직할까요? 필자의 경험을 말하자면 퇴고는 오래할수록 좋지 않나 싶습니다. 필자는 아무리 짧은 시라도 곧바로 써 바로 완성한 경우는 한 번도 없습니다. 현재도 시 한 편을 구상해서 남에게 보여줄 정도까지는 아무리 빨라도 최소한 보름 이상의 퇴고기간을 갖습니다. 그러니깐 필자의 경우 상상은 한두 시간에 깊고 뜨겁게 해서 서랍에 두었다가 2-3일이 지난 다음에 다시 꺼내 이 시에 새로운 상상을 조금씩 덧붙이고 삭제하는 것을 반복하면서 작품을 완성시켜 나갑니다. 그래야 내용이 흥분되는 것을 예방할 수 있고, 시에 침착성과 보편성도 확보할 수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런 퇴고와 관련해 시를 효과적으로 다듬는 어떤 구체적인 방법이 있을까요? * 정신이 가장 맑은 시간에 퇴고하라. 필자는 퇴고를 위해 정신이 가장 맑은 상태를 잠시잠시 아주 자주 가졌습니다. 정신이 맑은 상태를 잠시잠시 자주 가진 이유는 아무리 맑은 정신상태라 하더라도 그 분위기에 또 오랫동안 잠기게 되면 이 또한 마음이 흥분되기 쉽기 때문입니다. 하여 필자는 아침에 맨 처음 가는 화장실을 시 퇴고 장소로 아주 잘 이용하였습니다. 2-3일전에 쓴 시 초고를 갖고 네모난 밀실에 쪼그리고 앉아서 읽으면 정말 시의 어수룩한 부분, 미흡한 부분, 참신하지 못한 부분 등이 눈에 잘 띄게 되더라구요. 그리고 이 상태에서 지적된 부분은 과감하게 버리고 고치고 그랬습니다. 하여 게시판 독자들도 이번 기회에 자신의 정신이 가장 맑고 평온한 상태가 어느 순간인지를 확인해 퇴고를 할 때 이를 자주 활용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나 싶습니다. * 작품을 볼 줄 아는 사람에게 보여주라. 마지막 퇴고와 관련해 이와 같은 정신, 즉 작품을 볼 줄 아는 사람에게 보여주고, 이의 지적을 빨리 받아들일 줄 알며, 아끼는 작품도 과감하게 버릴 줄 아는 마음 자세의 확보가 중요해서 소개하였습니다. 특히 초보자 시절에 자기 동료들의 작품평과 훈수를 귀담아들으면 망하는 길로 가는데 첩경이라는 걸 명심해둘 필요가 있습니다. 작품을 보여줄 땐 가능한 한 어느 정도 수준에 있는 사람이거나, 아니면 시를 쓴 경력이 충분한 사람에게 보여주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나 싶습니다. 경력이 어느 정도 있는 사람은 시를 잘 쓸 줄 모른다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시를 볼 줄 아는 안목은 있게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여하튼 이 게시판 독자들은 많은 퇴고는 곧 시 창작력의 향상이다라는 것을 항상 명심하시기 바라고, 이 게시판에 시를 올릴 때에도 정말 최선을 다한 작품을 올리시기 바랍니다. 많은 퇴고를 해보지 않으면 그만큼 발전이 느리게 됩니다.   ========================================================================================== 299. 술 한잔 / 정호승 술 한잔 정 호 승 인생은 나에게 술 한잔 사주지 않았다 겨울밤 막다른 골목 끝 포장마차에서 빈 호주머니를 털털 털어 나는 몇번이나 인생에게 술을 사주었으나 인생은 나를 위해 단 한번도 술 한잔 사주지 않았다 눈이 내리는 날에도 돌연꽃 소리없이 피었다 지는 날에도 정호승 시집 중에서
1199    [ 안녕?- 따끈따끈한 아침 詩 한잔]- 풍경 댓글:  조회:4032  추천:0  2016-03-14
달력에 기억하고 싶은 생일을 써넣는 일로 한 해를 시작해요. 멀어진 사람, 몇 백 년 전 사람의 생일도 있어요. 양력이면 요일이 새삼스럽고 음력이면 날짜가 새삼스럽죠. 생일을 써넣어야 한 해의 달력이 도착했다는 느낌이 들어요. 뭐 생일이 별 거라고, 엄마가 잘하는 말이에요. 특히 본인 생일을 그리 말합니다. 그러면서 자식들 생일은 일찌감치부터 챙깁니다. 엄마 말대로 생일이 뭐 별 거라고…. 별 거는 아닌데 반짝반짝, 따끔따끔 마음이 생겨나는 날입니다. 당사자보다 축하해주는 사람이 환해지는 날이니, 생일인 사람이 자신의 생일을 선물해주는 날인지도 모르겠어요. 누구나 한 번 가는 길을 내가 어슬렁어슬렁 갈 수 있는 것은 싱그러운 거목 때문입니다. 멀리 가도 거목이 함께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언덕은 아름답습니다. 나도 환합니다. 천천히와 어슬렁은 잘 어울립니다. 거목들은 처음 생겨난 곳, 연한 그곳을 잊지 않습니다. 거목이 고목이 되지 않는 비결이기도 하겠지요. 세상에 나오지 않은 악기를 가진 아이와 손쥐고 가는 것은 누구일까요? 나일까요? 거목일까요? 언덕일까요? 아이 자신일까요? 어쩌면 거목과 나와 아이와 언덕은 서로가 있어 점점 더 길어지는 손을 갖게 되는 것은 아닐까요? 말개질 때까지 씻긴 언어라서 김종삼 시를 청교도적이라고 하지요. 김종삼 시는 말을 덧붙이기 어려워요. 다만 너무 조용하죠. 생일처럼요. 생일이라는 풍경. 들리지 않는 악기 소리를 듣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세상에 나오지 않은 아이를 만나러 온 사람들이 있습니다. 길이 만들어집니다. 모두가 숨죽였을 때 울음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다행이에요. 일 년에 한 번씩 생일이 돌아와서요. 당신의 처음 시간에 닿아볼 수 있어서요. 되돌아오는 시간이 점점 길어져도 괜찮아요. 당신이 있잖아요. 생일의 풍경. 어둠 속에서 케이크에 켜진 촛불을 막 끄려는 순간처럼 ‘너무 조용’해도 괜찮아요. 오늘은 당신의 생일입니다. / 이원 시인  
1198    [안녕?- 따끈따끈한 아침 詩 한잔]- 목련꽃 우화 댓글:  조회:4128  추천:0  2016-03-14
목련꽃 우화 - 한석호(1958~ ) 내 사랑은 늘 밤하늘 혹은 사막이었다. 멈칫멈칫, 허공의 쟁반을 돌리는 나뭇가지에 흰 불덩이들 걸려 있다. 염천의 사막을 탈주한 낙타의 식욕인지 고압 호스를 들이대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다. 순정한 저 불의 잔이 나를 유혹하며 숨 막히게 한다. 시인이여, 지옥에서 보낸 한 철이 이런 것이라면 그대가 살았던 곳이 이 같은 지옥이라면 그건 환한 축복이었겠다. ( … ) 랭보는 “모든 감각의 착란상태를 통해 미지의 것에 도달할 것”을 소위 “견자(見者)”의 목표로 삼았다. “모든 독(毒)을 자기 안에 품고 그 독의 진수들만을 유지하는 것”을 통해 그가 본 것은 충격적이게도 “지옥에서 보낸 한 철”이었다. 그는 이름하여 ‘저주받은’ 시인이었다. 한석호 시인은 허공에 걸려 있는 “불의 잔”, 목련의 “흰 불덩이들”이 그 지옥을 상쇄한다고 본다. 불타는 사막도 고압 호수도 능가하는 “목련꽃 우화”가 봄마다 우리를 유혹하고 숨 막히게 한다. 지옥을 넘어서는 그 “환한 축복”에 잠시 눈멀어도 괜찮다.  
1197    [ 안녕?- 따끈따끈한 아침 詩 한잔]- 그림자와 길 댓글:  조회:4165  추천:0  2016-03-14
기사 이미지 보기 혼자 걸어서 갔다 왔다니요? 어디까지입니까? 봄을 마중하러 나가는 아침에 당신은 혼자 어디까지 갔다 오실 건지요. 발자국 위에서 꽃망울 그림자가 쉬고 있습니다. 어둑어둑해질 때쯤 꽃망울 그림자는 꽃망울에 돌아가고 당신의 그림자는 당신에게로 돌아갈 테지요. 아직 가야 할 길이 먼 아침입니다. / 시평 김민율 시인 
1196    조병화 시모음 댓글:  조회:4909  추천:0  2016-03-13
조병화 시모음 남남 27 네게 필요한 존재였으면 했다. 그 기쁨이었으면 했다. 사람이기 때문에 지닌 슬픔이라든지 고통이라든지 번뇌라든지 일상의 그 아픔을 맑게 닦아 낼 수 있는 네 그 음악이었으면 했다. 산지기가 산을 지키듯이 적적한 널 지키는 적적한 그 산지기였으면 했다. 가지에서 가지로 새에서 새에로 꽃에서 꽃으로 샘에서 샘에로 덤불에서 덤불로 숲에서 숲으로 골짜기에서 골짜기로 네 가슴의 오솔길에 익숙한 충실한 네 산지기였으면 했다. 그리고 네 마음이 미치지 않는 곳에 둥우릴 만들어 내 눈물을 키웠으면 했다. 그리고 네 깊은 숲에 보이지 않는 상록의 나무였으면 했다. 네게 필요한 그 마지막이었으면 했다.     고독하다는 것은 고독하다는 것은 아직도 나에게 소망이 남아 있다는 거다 소망이 남아 있다는 것은 아직도 나에게 삶이 남아 있다는 거다 삶이 남아 있다는 것은 아직도 나에게 그리움이 남아 있다는 거다 그리움이 남아 있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곳에 아직도 너를 가지고 있다는 거다 이렇게 저렇게 생각을 해 보아도 어린 시절의 마당보다 좁은 이 세상 인간의 자리 부질없는 자리 가리울 곳 없는 회오리 들판 아 고독하다는 것은 아직도 나에게 소망이 남아 있다는 거요 소망이 남아 있다는 것은 아직도 나에게 삶이 남아 있다는 거요 삶이 남아 있다는 것은 아직도 나에게 그리움이 남아 있다는 거요 그리움이 남아 있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곳에 아직도 너를 가지고 있다는 거다   내 마음에 사는 너 너의 집은 하늘에 있고 나의 집은 풀 밑에 있다해도 너는 내 생각 속에 산다 너는 먼 별 창 안에 밤을 재우고 나는 풀벌레 곁에 밤을 빌리다 해도 너는 내 생각 속에 잔다 너의 날은 내일에 있고 나의 날은 어제에 있다해도 너는 내 생각 속에 세월이다 문닫은 먼 자리, 가린 자리 너의 생각 밖에 내가 있다해도 너는 내 생각 속에 있다 너의 집은 하늘에 있고 나의 집은 풀 밑에 있다해도 너는 내 생각 속에 산다     하나의 꿈인 듯이 살아 있는 것이란 하나의 꿈인 듯이 ----이렇게 외로운 시절 당신을 만난 것은 개이지 않는 깊은 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가랑잎 지고 겨울비 내리고 텅빈 내 마음의 정원. 곳곳이 당신은 깊은 아지랭이 끼고 무수한 순간. 순간이 시냇물처럼 내 혈액에 물결쳐 그리움이 지면 별이 뜨고 소리없이 당신이 사라지는 첩첩이 밤. 살아 있는 것이란 하나의 꿈인 듯이 이렇게 외로운 시절 당신을 만나고 가야 하는 것은 가시는 않는 지금은 맑은 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너와 나는 이별하기에 슬픈 시절은 이미 늦었다 모두가 어제와 같이 배열되는 시간속에 나에게도 내일과 같은 그 날이 있을 것만 같이 그 날의 기도를 위하여 내 모든 사랑의 예절을 정리하여야 한다 떼어 버린 카렌다 속에, 모닝커피처럼 사랑은 가벼운 생리가 된다 너와 나의 회화엔 사랑의 문답이 없다 또 하나 행복한 날의 기억을 위하여서만 눈물의 인사를 빌리기로 하자 하루와 같이 지나가는 사람들이었다 그와도 같이 보내야 할 인생들이었다 모두가 어제와 같이 배열되는 시간 속에 나에게도 내일과 같은 그날이 있을 것만 같이 이별하기에 슬픈 시절이 돌아간 샨데리야 그늘에 서서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는 작별을 해야 한다 너와 나는...     사랑 기다린다는 건 차라리 죽음보다 더 참혹한 거 매일 매시 매초, 내 마음은 너의 문턱까지 갔다간 항상 쓸쓸히 되돌아온다 그러나 죽지 않고 살고 싶은 이 기다리는 고통은 아직 네가 있기 때문이다 비굴을 넘어서     헤어진다는 것은 맑아지는 감정의 물가에 손을 담그고 이슬이 사라지듯이 거치러운 내 감정이 내 속으로 깊이 사라지길 기다렸습니다 헤어진다는 것은 영원을 말하는 것입니다 --나도 나하고 헤어질 이 시간에 해와 달이 돌다 밤이 내리면 목에 가을옷을 말고 --이젠 서로 사랑만 가지곤 견디지 못합니다 --그리워서 못 일어서는 서로의 자리올시다 슬픈 기억들에 젖는 사람들 별 아래 밤이 내리고 네온이 내리고 사무쳐서 모이다 진 자리에 마음이올시다 헤어진다는 것은 영원을 말하는 것입니다 --나도 나하고 헤어질 이 시간에     황홀한 모순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먼 훗날 슬픔을 주는것을, 이 나이에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오히려 기쁨보다는 슬픔이라는 무거운 훗날을 주는 것을, 이 나이에 아, 사랑도 헤어짐이 있는것을 알면서도 사랑한다는 것은 씻어 낼 수 없는 눈물인 것을, 이 나이에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헤어짐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적막 그 적막을 이겨낼 수 있는 슬픔을 기리며 나는 사랑한다, 이 나이에 사랑은 슬픔을 기르는 것을 사랑은 그 마지막 적막을 기르는 것을     이렇게 될 줄을 알면서도 이렇게 될 줄을 알면서도 당신이 무작정 좋았습니다. 서러운 까닭이 아니올시다 외로운 까닭이 아니올시다 사나운 거리에서 모조리 부스러진 나의 작은 감정들이 소중한 당신 가슴에 안겨들은 것입니다. 밤이 있어야 했습니다. 밤은 약한 사람들의 최대의 행복 제한된 행복을 위하여 밤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눈치를 보면서 눈치를 보면서 걸어야 하는 거리 연애도 없이 비극만 깔린 이 아스팔트 어느 이파리 아스라진 가로수에 기대어 별들 아래 당신의 검은 머리카락이 있어야 했습니다. 나보다 앞선 벗들이 인생은 걷잡을 수 없이 허무한 것이라고 말을 두고 돌아들 갔습니다. 벗들의 말을 믿지 않기 위하여 나는 온 생명을 바치고 노력을 했습니다. 인생이 걷잡을 수 없이 허무하다 하더라도 나는 당신을 믿고 당신과 같이 나를 믿어야 했습니다. 살아 있는 것이 하나의 최후와 같이 당신의 소중한 가슴에 안겨야 했습니다. 이렇게 될 줄을 알면서도...     오히려 비내리는 밤이면 오히려 비 내리는 밤이면 귀를 기울이어 내 발자국 소리를 기다려 주오 비가 궂이게 쏟아져야 그대에 가까이 가는 길을 나는 찾아간다오 나보다 더 큰 절망을 디디고 진정 이 지구를 디디고 나는 찾아 가리오 내가 살아가기에 알맞은 풍토는 비 많이 쏟아지는 밤 이러한 밤에 절망을 뒤적거려 보는것이 얼마나 위안이 되었던가 무슨 주변에 내가 더 큰것을 바라오리오 내 것인 것만 주오 진정 내 것인 절망만 주시고 나를 괴롭지 않은 이 자리에 머물게 하여 주오 비 내리는 밤을 기다리는 사람의 절개는 그대 것인 가는 호흡을 호흡하는 것이라오 비 내리는 밤이면 귀를 기울이어 내 발자국 소리를 기다리어 주오 영 멀어가는 그대여     사랑 혹은 그리움 너와 나는 일 밀리미터의 수억분지 일로 좁힌 거리에 있어도 그 수천억 배 되는 거리 밖에 떨어져 있는 생각 그리하여 그 떨어져 있는 거리 밖에서 사랑, 혹은 그리워하는 정을 타고난 죄로 나날을, 스스로의 우리 안에서, 허공에 생명을 한 잎, 한 잎 날리고 있는 거다 가까울수록 짙은 외로운 안개 무욕한 고독 아, 너와 나의 거리는 일 밀리미터의 수억분지 일의 거리이지만 그 수천억 배의 거리 밖에 떨어져 있구나     하루만의 위안 잊어버려야만 한다 진정 잊어버려야만 한다 오고 가는 먼 길가에서 인사 없이 헤어진 지금은 그 누구던가 그 사람으로 잊어버려야만 한다 온 생명은 모두 흘러가는 데 있고 흘러가는 한 줄기 속에 나도 또 하나 작은 비둘기 가슴을 비벼대며 밀려가야만 한다 눈을 감으면 나와 가까운 어느 자리에 싸리꽃이 마구 핀 잔디밭이 있어 잔디밭에 누워 마지막 하늘을 바라보는 내 그날이 온다 그날이 있어 나는 살고 그날을 위하여 바쳐 온 마지막 내 소리를 생각한다 그날이 오면 잊어버려야만 한다 진정 잊어버려야만 한다 오고 가는 먼 길가에서 인사 없이 헤어진 지금은 그 누구던가 그 사람으로 잊어버려야만 한다.     넌 넌 그 자리에서 좋은 거다 그만큼 떨어져 있는 자리에서 좋은 거다 지금 이곳에서 널 생각하고 있는 거리만큼 머릿속에서 먼 그 자리에서 좋은 거다 때론 연하게, 때론 짙게 아롱거리는 안개 밋밋한 자리 감돌며 밤낮을 나보다 한 발 앞자리 허허 떠 있는 그 '있음' 넌 그 자리에서 좋은 거다 그만큼 떨어져 있는 자리에서 좋은 거다 지금 이곳에서 널 생각하고 있는 거리만큼 충만히 머릿속에서 넌 그 거리에서 좋은거다 항상     초상 내가 맨 처음 그대를 보았을 땐 세상엔 아름다운 사람도 살고 있구나 생각하였지요 두번째 그대를 보았을 땐 사랑하고 싶어졌지요 번화한 거리에서 다시 내가 그대를 보았을 땐 남모르게 호사스런 고독을 느꼈지요 그리하여 마지막 내가 그대를 만났을 땐 아주 잊어 버리자고 슬퍼하며 미친 듯이 바다 기슭을 달음질쳐 갔습니다     사랑의 노숙 너는 내 사랑의 숙박이다 너는 내 슬프고 즐거운 작은 사랑의 숙박이다 우리는 사랑 없이는 살 수 없다 인생은 하루의 밤과 같이 사라져 가는 것이다 견딜 수 없는 하루의 밤과 같은 밤에 우리는 사랑 포옹 결합 없이는 살 수가 없는 인간이다 너는 내 사랑의 유산이다 너는 내 온 존재의 기억이다 나는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가난한 인간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채 그대로 떠나야 하는 생명 너는 그대로 있어라 우리가 가고 내가 가고 사랑이 사라질지라도 너는 무럭무럭 자라고 있어라 때오면 너도 또한 이 세상에 사랑을 남기고 가거라 견디기 어려운 외로움과 숨가쁜 밤과 사랑을 남기고 가난히 자리를 떠나라 지금 이 순간과 같이 나와 같이 너는 이 짧은 사랑의 숙박이다 너는 내 짧은 생존의 기억이다     기다림은 아련히 이제, 여름 가고 가을 가고 인생의 겨울로 접어들면서 기다림은 먼 소식처럼 아련해지며 맑게 보다 맑게 가볍게 보다 가볍게 엷게 보다 엷게 부담 없이 보다 부담 없이 스쳐 가는 바람처럼 가물가물하여라 긴 생애가 기다리는 세월 기다리면서 기다리던 것을 보내며 기다리던 것을 보내면 다시 기다리며 다시 기다리던 것을 다시 보내면 다시 또다시 기다리며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어라, 하면서 이 인생의 겨울 저녁 노을 노을이 차가워라 기다릴 것도 없이 기다려지는 거 기다려져도 아련한 이 기다림 노을진 겨울이거늘 아, 사랑아 인생이 이러한 것이어라. 기다림이 이러한 것이어라     자유   공중을 날 수 있는 날개를 가진 새만이 자유를 살 수 있으려니 공중을 날며 스스로의 모이를 찾을 수 있는 눈을 가진 새만이 자유를 살 수 있으려니 그렇게 공중을 높이 날면서도 지상에 보일까 말까 숨어 있는 모이까지 찾아먹을 수 있는 생명을 가진 새만이 자유를 살 수 있으려니 아, 그렇게 스스로의 모이를 찾아다니면서 먹어서 되는 모이와 먹어서는 안 되는 모이를 알아차리는 민감한 지혜를 가진 새만이 자유를 살 수 있으려니 지상을 날아다니면서 내릴 자리와 내려서는 안 될 자리, 머물 곳과 머물러서는 안 될 곳, 있을 때와 있어서는 안 될 때를 가려서 떠나야 할 때 떠나는 새만이 자유를 살 수 있으려니 가볍게 먹는 새만이 높이 멀리 자유를 날으리.     산책 참으로 당신과 함께 걷고 싶은 길이었습니다 참으로 당신과 함께 앉고 싶은 잔디였습니다 당신과 함께 걷다 앉았다 하고 싶은 나무 골목길 분수의 잔디 노란 밀감나무 아래 빈 벤치들이었습니다 참으로 당신과 함께 누워 있고 싶은 남국의 꽃밭 마냥 세워 푸르기만한 꽃밭 내 마음은 솔개미처럼 양명산 중턱 따스한 하늘에 걸려 날개질 치며 만나다 헤어질 그 사람들이 또 그리워들었습니다 참으로 당신과 함께 영 걷고 싶은 길이었습니다 당신과 함께 영 앉아 있고 싶은 잔디였습니다     나 돌아간 흔적 세상에 나는 당신을 만나러 왔습니다. 작은 소망도 까닭도 없습니다. 그저 당신 곁에 잠시 있으러 왔습니다. 아시아 동방 양지바른 곳 경기도 안성 샘 맑은 산골 산나물 꿀벌레 새끼치는 자리에 태어나 서울에 자라 당신을 만나 나 돌아가는 흔적 아름다움이여 두고 가는 것이여 먼 청동색 이끼 낀 인연의 줄기 줄기 당신을 찾아 세상 수만리 나 찾아 왔습니다 까닭도 가난한 소망도 없습니다 그저 당신 곁에 잠시 있으러 왔습니다 이 세상은 사랑의 흔적 두고 가는 자리 사랑이 가기 전에 나 돌아가고 싶습니다 세상에 당신이 사라지기 전에 나 돌아가고 싶습니다 당신을 만나러 수만리 소망도 까닭도 없이 그저 당신 곁에 잠시 나 있으러 나 찾아 왔습니다     공존의 이유 깊이 사랑하지 않도록 합시다 우리의 인생이 그러하듯이 헤어짐이 잦은 우리들의 세대 가벼운 눈웃음을 나눌 정도로 지내기로 합시다 우리의 웃음마저 짐이 된다면 그때 헤어집시다 어려운 말로 이야기하지 않도록 합시다 당신을 사랑하는 나를 얘기할 수 없음으로 인해 내가 어디쯤 간다는 것을 얘기할 수 없으며 언젠가 우리가 헤어져야 할 날이 오더라도 후회하지 않을 만큼 사랑합시다 우리 앞에 서글픈 그 날이 오면 가벼운 눈 웃음과 잊어도 좋을 악수를 합시다     소라 바다엔 소라 저만이 외롭답니다 허무한 희망에 몹시도 쓸쓸해지면 소라는 슬며시 물 속이 그립답니다 해와 달이 지나갈수록 소라의 꿈도 바닷물에 굳어 간답니다 큰 바다 기슭엔 온종일 소라 저만이 외롭답니다.     혼자라는 거 밤 2시경 잠이 깨서 불을 켜면 온 세상 보이는 거, 들리는 거 나 혼자다 이렇게 철저하게 갇혀 있을 수가 있을까 첩첩한 어둠의 바닥 조물주는 마지막에 있어 누구에게나 이렇게 잔인한 거 사랑하는 사람아 오,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아     비를 좋아하는 사람은 비를 좋아하는 사람은 과거가 있단다. 슬프고도 아름다운 사랑의 과거가..... 비가 오는 거리를 혼자 걸으면서 무언가 생각할 줄 모른는 사람은 사랑을 모르는 사람이란다 낙엽이 떨어져 뒹그는 거리에..... 한줄의 시를 띄우지 못하는 사람은 애인이 없는 사람이란다. 함박눈 내리는 밤에 혼자 있으면서도 꼭 닫힌 창문으로 눈이 가지지 않는 사람은 사랑의 덧을 모르는 가엾은 사람이란다.  
1195    <아침> 시모음 댓글:  조회:4325  추천:0  2016-03-13
  플라이 간헐천 - 네바다, 미국 천자산 ㅡ 중국      +== 아침 == 밤의 자식들이 우르르 몰려온다 창가에 참새들은 작은 음악회 열고 뒷산 뻐꾸기는 소프라노로 화답한다 농부의 쟁기는 라르고로 신문배달부는 비바체로 고속도로 차들은 프레스토로 줄행랑친다 어제의 약속이 와르르 펼쳐진다 (반기룡·시인, 1961-) +== 참새의 아침 == 댓잎 사이 이슬 젖은 부리 깨어나 조개 같은 하품 한 번 하고 오늘은 어디에서 하루해를 쪼을꼬? 생각하는 쥐눈이콩 같은 참새의 까막눈에 안골 둠벙 아래 우리 논 풋 나락이 묻어있다 (김종구·시인, 1957-) +== 아침에 == 창으로 밝아오는 아침 햇살 속에서 그대의 모습도 함께 보았습니다 커튼을 걷어내며 따스한 빛깔 곳곳에 그대의 고운 눈길이 빛나는 걸 느낍니다 밤새 그 빛을 그리워 헤매인 꿈길인 것을 잠이 깨고서 이제서야 알게 됩니다 오늘 아침은 세상이 나를 다르게 깨웁니다 . (성기석·시인) +== 새 아침에 == 간밤 이슥토록 눈이 오더니만 새 아침 밝은 햇살 안고 옛 친구 날 찾아오다 찌갤랑 끓거라 두고 이 골목 저 골목 눈을 밟는다 고드름 맺힌 지붕 정다워 창문을 기웃대면 거기 옛날에 듣던 낭랑한 토정비결 읽는 소리 세월은 솔나무 스치는 바람 삶은 댓돌에 쌓인 눈송이 문득 서러워 눈을 드니 친구의 허연 머리칼 착한 웃음 어느새 또 한 해가 갔구나 (신경림·시인, 1936-) +== 아침과 할머니와 요강단지 == 어머니 살아 계시면 아마 저 연세쯤 되셨지 그래서 예사로 보이지 않는 앞집 할머니 나는 아침마다 비짜리 들고 얼쩡거리면 할머니는 요강단지 들고 남새밭에 가시느라 얼쩡이시고 어쩌다 눈 마주쳐 나는 어머니 생각하며 인사 삼아 씨익 웃으면 할머니는 쑥스러워 씨익 웃으시고 이제 저 모습도 이 시대 마지막 풍경이려니 싶어 내가 새삼 돌아보며 다시 한번 씨익 웃으면 할머니는 더욱 쑥스러워 요강단지 허리 뒤로 황급히 감추며 씨익 웃으시고 (오하룡·시인, 1940-) +== 아침에 관하여 == 그 여자는 냉장고에서 사과 하나를 꺼낸다. 그 여자는 낮게 중얼거린다. 나에게 달려온 이 사과 그 여자는 계란 하나도 꺼내어 프라이팬에 지진다. 나에게 달려온 이 계란. 멀고도 먼 길을 달려 빛과 그늘을 지나 달려 소리와 소리를 넘어 달려 그 여자는 버섯 몇 개도 꺼내어 프라이팬에 넣는다 지글지글지글 버섯들이 프라이 팬 안에서 고개를 맞대고 수군거린다 나에게 달려온 이 기름 구름이 힘들게 빛의 날개를 들고 있는 아침 (강은교·시인, 1945-) +== 이 아침이 불쾌하다 == 밤샘 작업 지친 팔이 무거운 듯 뜨거운 입김 연신 토하며 흐느적거리는 선풍기 열어놓은 창 바람 한 점 없는 안과 밖 분간이 가지 않고 소나기 쏟아지듯 등줄기 타고 흐르는 땀 냄새 이 아침이 불쾌하다 (나상국·시인, 충북 괴산 출생) +== 월요일 아침 == 월요일 아침이면 나는 우울하다 찌부둥한 몸뚱이 무거웁고 축축한 내 영혼 몹시 아프다 산다는 것이 허망해지는 날 일터와 거리와 이 거대한 도시가 낯선 두려움으로 덮쳐누르는 날 월요일 아침이면 나는 병을 앓는다 날카로운 호루라기 소리로 나를 일으키는 먹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 이 엄중함 나는 무거운 몸을 어기적거리며 한 컵의 냉수를 빈속에 흘러보낸다 푸르름 녹슬어가도록 아직 맛보지 못한 상쾌한 아침, 생기찬 의욕, 울컥이면서 우울한 월요일 아침 나는 또다시 생존 행진곡에 몸을 던져 놓는다 (박노해·시인, 1957-) +== 아침의 노래 == 간밤의 어둠은 사라지고 지금 세상은 빛으로 충만하네 하늘과 땅 사이의 모든 것 아침 햇살에 환히 빛나고 있네. 꽃잎에 구르는 눈물방울 같은 이슬도 햇살 받아 잠시 영롱하다가 깨끗이 말라서 스러지네. 가슴속 사무쳤던 지난날의 슬픔과 괴로움도 어쩌면 그저 한 점 이슬에 지나지 않는 것 새 아침 새 희망의 햇살에 스러지리. (정연복·시인, 1957-)  
1194    이시환 산문시 감상하기 댓글:  조회:4167  추천:0  2016-03-13
이시환의 자선 산문시散文詩 12편 감상 -------------------------------------------------------------------------------------------------------------        [산문시 12편]   네거티브 필름을 들여다보며 서울 예수 강물 굴비 나사 로봇 바람의 연주演奏 우는 여자․2 그리움 詩 -작은 침술 잠 오랑캐꽃     [작품해설]   Ⅰ. 존재의 초월을 위한 바람의 변주곡/서승석 - 이시환 산문시집『대공』에 부쳐   Ⅱ. 自然化된 人과 人化된 自然/김은자 -이시환의 산문시집『대공(大空)』을 통해 본 시인의 시세계   Ⅲ. 산문시 이해를 위한 시론試論/이시환 -산문시의 본질       -------------------------------------------------------------------------------------   네거티브 필름을 들여다보며   사는 동안 까마득히 잊어 버렸거나 부인해 온 나의 꾀 벗은 모습. 원시림 속의 내가 모니터 화면에 잡혀 암실暗室로부터 끌려나오고 있다. 가까이 들여다보면 이미 검은 것은 희뿌옇게, 뿌연 것은 온통 검게 변해있다. 솟은 곳은 들어앉아 있고 패인 곳마다 솟아있는 뜻밖의 나는, 웃음 하나를 앞니 사이로 물고 서 있었지만 긍정肯定이냐 부정否定이냐, 좌左냐 우右냐, 안이냐 밖이냐를 강요받고 있었다. 그의 몸을 포박하고 있는 나의 편견과 독선이 더욱 오만해 지고 있을 무렵.       서울 예수   십자가를 메고 비틀비틀 골고다 언덕길을 오르던 예수는 끝내 못 박혀 죽고, 거짓말같이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깨어나 하늘나라로 가셨다지만, 도둑처럼 오신 서울의 예수는 물고문 전기고문에 만신창이가 되고, 쇠파이프에 두개골을 얻어맞아 죽고 죽었지만, 그것도 부족하여 온몸에 불을 다 붙였지만 달포가 지나도 다시 깨어날 줄 모른다. 이젠 죽어서도 하나님 우편에 앉지 못하는 우리의 슬픈 예수, 서울 예수는 남북으로 갈라진 땅에 묻혀서, 죽지도 못해 살아남은 우리들을 오히려 위로하고 격려하네.       강물   이제야 겨우 보일 것만 같다. 눈을 뜨고도 보지 못한 나의 눈이 정말로 뜨이는 것일까? 그리하여 볼 것을 바로 보고 안개숲 속으로 흘러 들어간, 움푹움푹 패인 우리 주름살의 깊이를 짚어낼 수 있을까. 달아오르는 나의 밑바닥이 보이고, 굳게 입을 다문 사람 사람들의 가슴에서 가슴으로 흐르는 강물의 꼬리가 보이고, 을지로에서 인현동과 충무로를 잇는 골목골목마다 넘실대는 저 뜨거운 몸짓들이 보일까. 지금도 예고 없이 불쑥불쑥 들이닥치는 안바람 바깥바람에 늘 속수무책으로 으깨어지다 보면 어느새 주눅이 들어 키 작은 몸을 움츠리는 버릇이 굳은살이 되고, 더러는 살아보겠다고 이리저리 몰려다니는 어깨 부러진 활자들의 꿈틀거림이 정말로 보이는 것일까. 그런 우리들만의 출렁거리는 하루하루, 그 모서리가 감당할 수 없는 무거운 칼날에 이리저리 잘려 나갈 때 안으로 말아 올리는 한 마디 간절한 기도가 보일까. 언젠가 굼실굼실 다시 일어나 아우성이 되는, 그날의 새벽놀이 겨우내 얼어붙었던 가슴마다 터지는 봇물이 될까. 그저 온몸으로 굽이쳐 흐르는 우리들만의 눈물 없는 뿌리가 보일까.       굴비   무심코 내뱉은 나의 말이 또 하나의 말을 감금監禁하고 있는 동안 내가 그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같이 할 수 있었다면 그것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말과 말들이 내 손아귀에서 감금되고 풀려나곤 하는 사이, 나는 이미 겁 없는 공룡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내게 밟힐수록 살아나 틈을 엿보던 그들이 돌아설 숨조차 주지 않은 채 그들 머리 위로는 그물을 던지고 그들의 뒷걸음이 놓이는 곳마다 어김없이 덫을 놓는다. 그런 나의 음모가 무성해지던, 지난 여름, 줄줄이 걸려든 말과 말들은 목이 졸리면서 핏대를 세울 수밖에 없지만 그들이 꿈꾸는 것은 탈출도 반란도 아니다. 어쩌면, 소금에 절여진 한 마리 굴비가 되어 너의 살이 되고 피가 되고 싶은지도 모른다. 불현듯, 소금단지 속에서 나오는 한 마리 굴비 앞에서 한없이 부끄러워지는 나는 얼굴을 붉힌다.       나사   어루만지는 곳마다 스멀스멀 안개가 피어오른다. 아픈 곳을 잘도 골라 꾹꾹 쑤셔주는, 그리하여 등을 돌리고 있는 것들조차 마주보게 하는, 살아있음의 큰 숨, 남근男根이다. 너는 이승의 풋내 나는 알몸 구석구석 깊이 박힌 채 눈을 뜨고 있는 몸살 같은 뜨거움. 불현듯 찬바람이 불면 내 몸뚱이 속, 속들이에서 일제히 쏟아져 나올 것 같은, 조용한 흔들림. 하양과 검정을 이어주는, 무너지며 반짝이는 논리.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를 잇는 난해한 길이다. 어루만지는 곳마다 스멀스멀 안개가 피어오르는, 알몸에 박힌 세상의 구원이다.       로봇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로 난, 수없는 난해한 길들을 은밀히 왔다갔다하는 정체불명의 숨이다. 그것은 아주 구체적인 기능을 갖는 부품과 부품의 결합으로 시작되지만 물질에 혼을 불어넣는 일로서 자신을 베끼는 불안한 공정工程이다. 열심히 로봇이 사람을 닮아 가는 동안 사람들은 점차 완벽한 로봇이 되어가면서도 여전히 꿈을 꾼다. 깊은 어둠의 자궁 속으로 길게 뻗어있는 뿌리의 꿈틀거림처럼 로봇이 나의 시녀가 되고 내가 로봇의 하인이 되는 것이다.       바람의 연주演奏   내가 낮잠을 즐기는 낮에도 캄캄한 수면실의 출입문틀과 유리문 사이의, 그 좁은 틈으로 끊임없이 바람이 지나며, 아니, 허공虛空이 무너지며 소리를 낸다. 문이 열리는 정도와 바람의 세기에 따라 그 소리가 달라지지만 일 년 열두 달 위험스럽게 다가오는 벌떼 소리 같기도 하고, 어찌 들으면 이 안과 저 밖이 내통하는 소리 같기도 하다.   그런 바람의 연주를 들을 수 있는 곳이 어디 이곳뿐이랴. 저 외로운 나무와 나무 사이에서도, 그 외로움이 모여 있는 숲과 숲 사이에서도, 넓고 좁은 빌딩과 빌딩 사이에서도, 높고 낮은 지붕들 사이에서도, 크고 작은 골목에서도, 평원에서도 시시때때로 달라지는 바람의 연주를 들을 수 있듯이 사람과 사람 사이 마음의 틈에서도, 하늘과 땅 사이 그 깊은 틈에서도 나는 바람의 연주를 듣는다.   눈에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를 은밀히 잇는, 그 좁은 틈으로 대공大空이 무너져 내리며 만물을 일으켜 세우는 소리 소리를 듣는다.       우는 여자․2   세상엔 그런 여자도 있다. 세상엔 그런 풀꽃 같은 여자도 있다. 오르가즘이란 산의 7부 능선만 올라가도 신음 대신 간헐적으로 울기 시작하는 여자. 8부, 9부, 정상에 가까워질수록 슬픔의 바다를 토해 놓듯이 허허벌판에서 엉엉 우는 여자. 그녀의 입을 한손으로 틀어막으면서 더욱 힘 있게, 더욱 깊숙하게, 더욱 빠르게 구석구석 몸 안에 퍼져있는 불씨에 불을 댕기면 그녀의 험준한 계곡에선 쏟아지는 폭포수 소리 들린다. 분명 이 세상을 처음 나올 때의 울음소리보다 더욱 격렬하고, 더욱 원시적인, 기쁨과 슬픔이 분화되기 전의 울음을 천지간에 쏟아놓는 여자. 세상엔 그런 여자도 있다. 세상엔 그런 풀꽃 같은 여자도 있다.       그리움   너는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方言. 아니면 판독해 낼 수 없는 상형문자. 아니면 가늠할 수 없는 어둠의 깊이이고, 그 깊이만큼의 아득한 수렁이다. 너는 나의 뇌수腦髓에 끊임없이 침입하는 바이러스이거나 그도 아니면 치유불능의 정서적 불안. 아니면 여린 바람결에도 마구 흔들리는 어질 머리 두통頭痛이거나 징그럽도록 붉은 한 송이 꽃이다. 시방, 손짓하며 나를 부르는 너는, 차라리 눈부신 억새 같은 나의 상사병이요. 그 깊어가는 불면不眠의 나락奈落이면서 추락하는 쾌감快感이다.       詩 -작은 침술   기장 안전하게 보호받고 있는 것은 가장 깊은 곳에 있고, 가장 깊은 곳은 가장 은밀한 곳이고, 가장 은밀한 곳은 가장 어두운 곳이다. 가장 어두운 곳은 가장 조용한 곳이고, 가장 조용한 곳은 가장 뜨거운 곳이다. 가장 뜨거운 곳은 가장 비밀스런 곳이고, 가장 비밀스런 곳은 가장 깊은 곳이다. 바로 그런 곳을 잘도 짚어가며 굵은 것 가는 것을 가려 깊고 얕게 침을 놓듯 모나고 모난 세상 가장 깊은 곳의 어둠과 비밀을 흔들어 깨워 가장 뜨겁고 가장 은밀한 한 송이 붉은 꽃을 피워 놓는다.       잠   내가 살고 있는 나의 이 무거운 몸뚱어리가 당신의 조립품組立品임을 의식하면서 이미 늪 속으로 빠져버린 나는, 손이 묶인 채 더욱 깊은 곳으로 빠져들고 싶었다. 정비공장 기름바닥에 흩어져 나뒹구는 녹슨 볼트 ‧ 너트 ‧ 핀 ‧ 축軸의 숨이 곧 나의 늑골이요, 너의 긴 척추의 마디마디를 잇는 비밀임을 거듭 확인하면서 나는, 영영 깊은 잠 속 어둠이고 싶었다. 그러나 그 속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나의 시린 관절 속 틈새마다 후줄근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내리는 비는 지친 영혼의 나랠 적시고 가로누운 나의 꿈들을 적시고 적신다. 나는 젖으면서 그대로 빗물에 떠내려가는 쾌감을 예감하면서 간절히 나를 부르고 있었다. 그렇게 긴긴 터널을 빠져 나가는 사이 골반 속으로 새어 들어온 한 줄기 빗살이 어둠의 자궁을 후비기 시작한다. 이윽고 어둠 속으로 길게 뻗어있던 나의 뿌리가 꿈틀대면서 다시금 너를 깨우고, 깨어난 너의 의식意識의 투명한 바다 속으로는 참새소리만 쏟아져 구른다.       오랑캐꽃   하늘을 바라보고 누워 있는 나의 배 위로 배를 깔고 누워 있는 너는 ‘황홀’이라는 무게로 나를 짓누르네. 짓눌려 헉헉 숨이 막힐 때마다 나는 햇살 속 저 은사시나무 잎이 되어 반짝거리지만 이쪽과 저쪽을 넘나드는 너는 세상 가득 출렁이네.       -------------------------------------------------------------------------------------       존재의 초월을 위한 바람의 변주곡 - 이시환 산문시집『대공』에 부쳐   서승석 시인/불문학 박사     시를 쓰는 행위는 부단히 존재의 공허함을 채워가는 작업이다. 이시환의 시 밑바닥에 짙게 깔려있는 허무의식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주로 1980년대와 1990년대의 그의 정신세계를 엿볼 수 있는 51편이 수록된 산문시집『대공』에서, 우리는 1981년 발표한 첫 시집『그 빈자리』이후 시인이 끊임없이 탐색해온 종교적 성찰과 시적 자아의 성숙 과정을 발견하게 된다. 자유·반항·열정으로 점철되어지는 젊은 시절에 쓰인 대다수의 시들은 ‘의식적인 삶’을 살아온 그의 발자취임에 틀림없다. 젊은 날의 뜨거운 절망과 찬란한 희망이 교차하는 이 시집에서, 시인의 지칠 줄 모르는 지식과 창작에 대한 열정이 작품을 통해 발산되어, 그의 인생관과 우주관이 견실한 방향으로 확장되어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 또한 독자로서 누리는 큰 기쁨이 아닐 수 없다.     1. 시인과 탈 ‘안과 밖’, ‘이쪽과 저쪽’, 혹은 ‘좌左냐 우右냐’의 선택을 강요받고 사는 어두운 시대의 시인들은 긍정과 부정을 드러내지 않고 진실을 표현하기 위해 때로 가면 속에 숨는다. 시 「네거티브 필름을 들여다보며」나 「강물」, 「웃음 흘리는 병病」, 그리고 「각인刻印」등에서 엿볼 수 있듯이 암울한 시대의 정의로운 시인은 ‘바보’ 혹은 ‘또라이’라 불리며 사회로부터 외면당하고 외로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산문시의 진정한 묘미를 느낄 수 있는 ‘유야무야’는 사건이나 행위를 재현한다는 점에서 서술적 성격을 띠고 있다. 다시 말해, 현대시의 대표적 형식을 기술할 때 채용되는 용어를 빌리자면, 이 시는 이야기를 노래한 시로서 ‘서술시 narrative poem’에 해당한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시의 구성원인 화자는 페르소나 persona, 즉 허구적 인물이라는 사실이다. 시인의 경험적 자아와는 구분되는 페르소나로서의 화자에 의해서 어머니와 아버지라는 대상이 관찰되고 전달됨으로써 이 시는 객관성과 독창성이 확보되고 있다 :   아버지는 싸돌아다녔다. 거짓말을 보텔 양이면 한시도 집에 붙어있질 않았다. 여러 사람들 앞에서 행세하기를 좋아했고 대접 받기를 좋아했다. 대신, 어머니는 절간 같은 집을 지키면서 나이답지 않게 폭삭 늙어 버렸다. 아버지가 바깥사람들에게 친절을 베풀고, 웃고, 즐거워하는 사이 꼭 그만큼 어머니는 속이 썩으면서 허리가 굽어갔다. 언제부턴가 무당처럼 성경구절을 외우는 것이 중요한 하루일과가 되어 버린 우리 어머니. 어머니의 꿈자리가 사납던 날, 아버지는 집 앞 시골길에서 교통사고를 당했다. 차에 부딪혀 왼쪽 대퇴골이 부러졌고 부서졌다. 아버지가 누워 있던 병실을 찾는 사람들로 시골병원은 붐볐고, 아버지는 그들 앞에서조차 애써 태연한 척 몸에 밴 친절을 가꾸고 있었다. 입원 3일째 되던 날 큰 수술을 했다. 수술실 밖에서 기다리는 집안 식구들은 더욱 초조했다. 바로 그날 그 시각, 우리 집엔 도둑이 들었다. 창문은 뜯겨져 있었고, 장롱이며 침대 밑이며 할 것 없이 구석구석에서 온갖 것들이 다 불거져 나왔다. 방 가운데엔 부엌칼도 나와 날이 서 있었고, 땅문서 집문서를 포함한 갖가지 서류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가져갈 것은 다 가져갔다. 가져가지 못한 것이 있다면 그들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다. 이 또한 완벽했다.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을 뿐이다. 그토록 조금도 빈틈을 주지 않는 세상. 그것을 손바닥에 올려놓기라도 하면 하, 뜨거운 것, 귀여운 돌멩이 같은 것이다. 어느덧 희끗희끗해진 머리칼 속으로 새가 집을 짓는 줄도 모른 채 어머니는 ‘뿌린 대로 거두리라’를 눈을 감고 되뇌이면서 속을 삭이고, 정말이지 그에겐 아무 일이 없었던 것처럼 아무 일이 없었던 것처럼 유야무야 목숨만 타들어갔다. - 「유야무야」전문   작품 속의 화자는 바깥세상에서 인기 좋으신 한량 같은 아버지와 집안에서 체념한 채 기다리며 사시는 어머니를 대조시키며, 어처구니없이 당한 교통사고와 도둑이라는 두 사건을 담담히 이야기하며 인과응보라는 주제를 환기시키고 있다. 야스퍼스가 ‘비극이란 진실을 깨우치는 기호(Chiffre des Seiten)라고 말했듯이 인용 시는 한가정의 비극적 체험이 삶의 진실을 깨우치는 기호임을 재확인 시켜주고 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경험적 자아로서의 시인은 감히 아들로서 ‘아버지는 싸돌아다녔다.’라는 표현을 하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페르소나라는 탈속에 숨은 시적 자아로서의 화자는 경험적 자아의 굴레를 벗어나 자유롭게, 마치 어머니의 입장에서 아버지를 응징하는 듯한 말투로 서두를 시작하고 있다. “탈을 씀으로써 비로소 자기를 객관화하고 진리를 말하고 세계에 대한 태도를 보이는 것이 시의 특이한 존재 방식”이라고 김준오가 『현대시와 장르 비평』에서 언급하듯, 이시환은 이외의 다른 시에서도 종종 가면이 주는 자유로움에 힘입어 자신의 목소리를 한껏 드높인다. 「유야무야」에서 어머니의 인생을 버겁게 하는 가해자로서의 미운 시적 이미지의 아버지는 작품 「아버지의 근황」에서 훨씬 순화된 모습으로 등장 한다 :   서울이 답답하다며 평생을 시골에서만 사시는 아버지는, 살고 있는 집에서 대략 1킬로미터쯤 떨어진 밭에 배나무 5,000 그루를 심었다. 올해 처음으로 수확하는 기쁨을 누리면서 더욱 바빠진 71살의 아버지. (…) 배밭의 단내가 더해 갈수록 이른 아침부터 신경전을 펴는 아버지와 까치는, 오늘도 숨바꼭질하기에 바쁘지만 그렇게 한 철을 나고 보면 이미 짓궂은 친구가 되어 있다. 할 일이 없을 때엔 서로의 안부가 궁금해지는 친구가 말이다. - 「아버지의 근황」중에서   새벽부터 일어나 배밭을 돌보며 배를 쪼아 먹는 까치들과 하루 종일 전쟁을 하시는 연로하신 아버지의 모습에서 어느덧 폭군의 위력은 사라졌다. 얄미운 까치와도 그저 친구가 되어버리는. 문득 연민의 정을 느끼게 하는 이 시에서 화자와 아버지의 거리는 한결 가까워진 듯하다. 시인과 그의 젊은 시절 밉살스럽게만 여겨졌던 아버지가 동화되어가는 과정이 아버지와 까치의 신경전을 통해 극적으로 치환되어 있다.     2. 공간과 바람 이시환이 즐겨 쓰는 테마 중의 하나는 ‘바람’이다:         내가 낮잠을 즐기는 낮에도 캄캄한 수면실의 출입문틀과 유리문 사이의, 그 좁은 틈으로 끊임없이 바람이 지나며, 아니, 허공虛空이 무너지며 소리를 낸다. 문이 열리는 정도와 바람의 세기에 따라 그 소리가 달라지지만 일 년 열두 달 위험스럽게 다가오는 벌떼 소리 같기도 하고, 어찌 들으면 이 안과 저 밖이 내통하는 소리 같기도 하다.   그런 바람의 연주를 들을 수 있는 곳이 어디 이곳뿐이랴. 저 외로운 나무와 나무 사이에서도, 그 외로움이 모여 있는 숲과 숲 사이에서도, 넓고 좁은 빌딩과 빌딩 사이에서도, 높고 낮은 지붕들 사이에서도, 크고 작은 골목에서도, 평원에서도 시시때때로 달라지는 바람의 연주를 들을 수 있듯이 사람과 사람 사이 마음의 틈에서도, 하늘과 땅 사이 그 깊은 틈에서도 나는 바람의 연주를 듣는다.   눈에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를 은밀히 잇는, 그 좁은 틈으로 대공大空이 무너져 내리며 만물을 일으켜 세우는 소리 소리를 듣는다. - 「바람의 연주演奏」전문   매우 탁월한 청각적 이미지의 형상화를 보여주는 인용 시의 시적 대상은 ‘바람’이다. 그 시적 상징성을 존재론적으로 고찰해보면, 바람은 죽음과 삶의 이원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 시에서 ‘허공虛空이 무너지며’내는 소리요, ‘안과 저 밖이 내통하는 소리’이기도 한 이 바람은 다른 시에서는‘내 살 속 깊은 곳 어둠의 씨앗을 흔들어 깨우’기도하고, ‘내 살 속 깊은 곳 어디 또 다른 나를 흔들어 깨우’(「바람소묘」)는 원소이기도 하다. 발레리는『해변의 묘지』에서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라고 살고자하는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바람을 노래했다. 그러나 새로운 생명을 소생시키는 이 부드러운 바람은 죽음을 유발하는 파괴적인 타나토스의 무서운 얼굴을 동시에 지녔다. 그래서 시적 상상력에 있어서 바람은 원형적으로 삶과 죽음을 동시에 상징한다. 그러므로 이 시에서 ‘ 대공大空이 무너져 내리며 만물을 일으켜 세우는 소리’는 때로‘이 땅 위로 서 있는 것들을 모조리 쓰러뜨리’(「겨울바람」)는 위력을 과시하기도 한다. 또한 이 시에서 주목할 것은 화자가 제시하는 바람이 생성되어가는 상황이다. 여러 상황의 병렬적 제시를 통해 시간을 공간화 시키고 있다. 낮잠이라는 정지된 시간 속에 바람이라는 유체가 흘러들어와 퍼지며 생성과 소멸이라는 불멸의 테마를 아름다운 변주곡으로 연주하고 있다. 한편 다른 시에서 시인은 바람을 통해 자신의 인생론을 들려주기도 한다 : ‘저마다 제 빛깔대로 제 모양대로 제 그릇대로 머물다가 그림자 같은 공허 하나씩 남기며 알게 모르게 사라져 간다는 것, 그 얼마나 그윽한 향기더냐, 아름다움이더냐.’(「대숲 바람이 전하는 말」) . 가시세계와 불가시세계를 넘나들며 이렇듯, 바람은 일상적 존재성을 뛰어넘어 진정한 자아에 이르려는 시인의 끊임없는 화두가 되고 있다. 그래서 그는 거친 이 세상을 항해하며 떠돌다가도 고향을 향하는 회귀본능처럼 ‘내 자궁 속 또 하나의 어둠을 쓰다듬으면서 나는 바람이 되어 돌아와야 한다.’(「바람소묘」)고 다짐한다.   이시환의 시세계에서 바람은 때로 시인과 우주를 잇는 매체로 등장 한다 :   그렇게 고요의 성城 안에 머물러 있게 되면 가끔씩 비단결 같이 부드러운 바람이 소리 없이 내 알몸을 휘감았다가는 슬그머니 풀어 놓기도 한다. 그렇게 바람의 꼬리가 내 성을 빠져 나갈 때마다 내 마음 속 한 구석에 높이 매달려 있는, 작은 풍경이 흔들리면서 내는 소리가 바람에 벚꽃이 날리는 듯하다. - 「더위나기」 중에서   도심의 무더위 속에 명상으로 더위나기를 시도하고 있는 인용 시는, 시적 화자가 우주만물과 교감을 느끼며 바람과 동화되어가고 있는 과정을 그린 아름다운 정경을 보여준다. 화자는 시적 상상력의 전개를 통해, 한여름의 작열하는 콘크리트 아파트를 벗어나 바람을 타고 푸른 하늘을 날아 금성의 지표면을 홀로 걷게 된다. 구원 없는 현실, 이 황폐한 세상을 벗어나 신적 비밀로 인도하는 아리안느의 실을 찾으려는 정신적인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비좁은 방에서 우주로 확장된 허무의 공간에서 시인은 자아와 사물과 세계가 모두 경계를 허물고 하나가 되어가는 신비로운 체험을 경험하고 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바슐라르가 『공간의 시학』에서 지적하듯이, “시 속에 존재하는 공간은 실제의 공간은 아니지만 우리의 상상력을 통해 구현되고 그 가치를 갖는다.”는 점이다. 정적인 이미지로 출발한 이 시는 마침내 역동적인 이미지로 마무리를 하면서, 안에서 밖으로, 아래에서 위로의 변증법적 사유를 거슬러 올라가며, 무아경의 상태에서 우주와 합일을 하는, 시인의 우주론적 자아탐구의 다면적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마치 명상을 통한 존재의 초월을 예감하듯이….     3. 성sex 과 삶의 본능 초현실주의의 주된 탐구 중의 하나는 에로티즘이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 지대한 영향을 받은 초현실주의자들은 그의 꿈의 이론, 성욕설을 바탕으로 인간에 대한 전적인 이해를 시도했고, 욕망의 폭로를 통하여 인간에 대한 인식을 좀 더 확대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정신의학을 전공했던 브르통은 초현실주의의 시적 혁명을 위한 하나의 해결책으로 ‘무의식의 탐험’을 제시한다. 1905년 발표된 프로이트의 성의 이론에 관한 세 논문에 의하면 억압된 것의 주된 내용이 성이고, 성본능은 가장 지속적인 자연적 충동이라 한다. 그리고 히스테리, 꿈 등은 억압된 본능(리비도)의 변태적 만족이라 풀이한다. 성의 활동과 정신생활의 관계를 검토한 이 연구에서 그는 에로티즘이란 쾌락본능을 활성화시킴으로써 억압의 횡포에서 인간을 해방시키는 것이라 말한다. 이시환의 시에서도 가끔 무의식에 잠겨 있는 억압된 욕망에 대한 탐구가 시도 된다. 「바람소묘」(‘내 자궁 속 또 하나의 어둠을 쓰다듬으면서’)나 「잠」(‘한 줄기 빗살이 어둠의 자궁을 후비기 시작한다.’)에서처럼, 그의 작품에서 ‘자궁’이라는 어휘가 빈번히 발견되는 것도 이런 이유에 연유한다. 작품 「나사」에서 그는 나사를 ‘등을 돌리고 있는 것들조차 마주보게 하는, 살아있음의 큰 숨, 남근男根’이라 표현하기도 하고, ‘깊이 박힌 채 눈을 뜨고 있는 몸살 같은 뜨거움’혹은.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를 잇는 난해한 길’이라 묘사하기도 한다. 더 나아가 다른 작품에서 그는 ‘정치와 섹스는 한 통속’(「정치와 섹스」)이라 실토하기도 한다. 한편 작품‘산’은 리비도가 시각적 이미지로 전개되는 근사한 화폭이다 : ‘손끝에 와 닿는 당신의 두 개의 젖꼭지. 그 꼭지 사이의 폭과 골이 당신의 비밀을 말해 주지만 가늠할 수 없는, 그 깊은 곳으로 이어지는 사내들의 곤두박질.’ 하지만 그의 에로티즘이 가장 아름답게 은유적으로 전개되는 작품은 시「오랑캐꽃」이다 :   하늘을 바라보고 누워 있는 나의 배 위로 배를 깔고 누워 있는 너는 ‘황홀’이라는 무게로 나를 짓누르네. 짓눌려 헉헉 숨이 막힐 때마다 나는 햇살 속 저 은사시나무 잎이 되어 반짝거리지만 이쪽과 저쪽을 넘나드는 너는 세상 가득 출렁이네. - 「오랑캐꽃」 전문   이시환의 에로티즘의 특징은 인간의 욕망에 내재한 야누스적인 두 얼굴 중에 죽음의 본능보다는 삶의 본능 쪽으로 무게가 기울어있다. 그래서 그는 남근으로 상징되는 나사에 대해‘알몸에 박힌 세상의 구원’이라는 표현까지 서슴지 않는다. 또 성행위를 하며 ‘기쁨과 슬픔이 분화되기 전의 울음을 천지간에 쏟아놓는 여자’(「우는 여자․2」)는 ‘구석구석 알몸 속으로 숨겨진 슬픔의 씨앗들’(「우는 여자․1」)을 일제히 싹을 틔워 몸 밖으로 배출하기도 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불가시한 세계의 신비로 우리를 인도하는 자궁 속의 조용한 흔들림이 논리를 무너뜨리며 인간의 의식을 깨우기 때문일까?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은 리비도는 사랑으로 승화될 때 비로소 진정한 삶의 생명력을 지니게 된다는 점이다.     4. 결어 조선 후기의 예술의식을 연구한 최준식이 한국미의 원형을 ‘자유분방함’에서 찾았듯이, 이시환이 이 시집『대공』에서 선택한 산문시의 형태는 어쩌면 한국인이 자유분방한 감정을 표출하기 위한 가장 적합한 형태가 아닐까 생각한다. 정형시에 비해 산문시는 시인이 자신의 즉흥적이고. 소박하고, 해학적이고, 역동적이고, 여유로운 여백을 보여주기에 안성맞춤이기 때문이다. 이시환의 산문시는 우리 속악의 시나위 가락을 닮았다. 흐드러져야 맛이 나며, 기량이 난숙한 경지에 이르러야 비로소 가능한…. 산문시가 지루한 하나의 넋두리가 아니라 영롱한 언어로, 독자에게 한 알 한 알 사리를 줍는 듯한 즐거움을 느끼게 해주고, 더욱 사랑받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언어의 간결미와 한없이 고고한 품위와 높은 자존감이 돋보이는 작품으로, 앞으로도 이시환이 산문시를 거듭 발전시켜 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글쓰기를 통하여 보다 완성된 삶의 경지에 도달하기 위한 그의 피나는 노력이 그의 시세계의 지평을 더욱 드넓게 열어 줄 것이기 때문이다.           약력 경기도 평택 출생. 이화여자대학교 문리대 수학 및 불문학 전공. 파리 4-소르본대학교 대학원 비교문학석사 및 불문학 박사, 덕성여자대학교, 수원대학교 겸임교수, 서울대학교 초빙교수 역임. 한국시인협회 교류의원, 국제펜클럽 회원. 저서 : 시집 『자작나무』, 『흔들림에 대하여』 , 『사람 사랑』, 『그대 부재의 현기증』 번역서 : 파블로 피카소, 『시집』등이 있음.       自然化된 人과 人化된 自然 -이시환의 산문시집『대공(大空)』을 통해 본 시인의 시세계   김은자(중국, 하얼빈이공대학교 한국어학과 교사)     1. 들어가는 말   우연히 이시환 시인의 산문시집『대공(大空)』을 마주하게 되었다. 1980년대와 1990년대에 창작된 51편의 시가 실린 부피가 크지 않은 개인시집이다. 그럼에도『대공』 이란 이름 때문인지 손에 쥐여진 원고에서 그 무게가 전해진다. 시인 이시환(1957.9 ~ )으로 말하자면 일찍 1981년에 대학을 졸업하면서『그 빈자리』를 펴냄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550여 편의 작품을 창작하고, 이미 여러 권의 시집과 평론집을 펴내는 등 저력을 과시하는 중견시인이자 평론가이다. 하기에 이번 시집의 출간도 새삼스럽지 않지만 다만 새롭고 세인의 관심을 끄는 것은 시집에 실린 시들 모두가 ‘산문시’란 점이다. 산문시(散文詩)란 한마디로 정의를 내리기에는 어렵지만 말 그대로 산문(散文)과 시(운문,韻文)라는 서로 상반된 양식이 결합된 것이다. 다시 말해, 일반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시가 지닌 형식적 제약(制約)은 물론 운율(韻律)의 배열 없이 산문형식으로 쓰여진 시로 정형시와는 다른 자유시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겠다. 따라서 행과 연의 구분도 없고 운율적 요소도 없는 형식은 산문에 가깝지만 표현된 내용은 시(詩)인 만큼 당연히 시로서의 핵심적 요소인 은유, 상징, 이미지 등 내적인 표현장치나 시적인 언어를 택하고 있다. 산문시의 시초(始初)는 「악의 꽃」으로 유명한 프랑스의 시인 샤를르 보들레르(Charles-Pierre Baudelaire, 1821.4~1867.8)의 "산문시는 율동(律動)과 압운(押韻)이 없지만 음악적이며 영혼의 서정적 억양과 환상의 파도와 의식의 도약에 적합한 유연성과 융통성을 겸비(兼備)한 시적 산문의 기적"이란 평(評)에서 찾아볼 수 있다. 실제로 그가 「파리의 우울」(1869)을 발표한 이래 산문시는 중요한 시의 한 부분으로 되었고 특히 프랑스 문학에서 독특한 지위를 차지하였다. 그런가 하면 한국 현대문학에서도 어렵잖게 산문시를 찾아볼 수 있다. 가장 일찍 주요한의 「불놀이」(1919)에서 그 전형(典型)을 선보인 바 있고, 1930년대 와서 정지용의 「백록담」, 이상의 「오감도」, 백석의 「사슴」 등에서 탁월한 성과를 거두었으며, 이어 1950년대의 서정주의 「질마재 신화」로 이어지고 있음이 확인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산문시에 대한 세인의 관심은 부족한 편이고 문학론적인 측면에서 장르의 성격 규명조차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시인은 “개인의 작품세계를 정리해나가는 과정”이라고 말하지만 산문으로 된 시만 골라 펴낸『대공(大空)』이란 시집은 사뭇 의미가 있지 않나 싶다. 게다가, 산문시에 대한 남다른 애착으로 그 매력을 공유하고자 시와 함께 실은 「산문시의 본질」이란 글이 더해져 무게를 더해준다. 부담 없이 자연스레 소리 내어 읽게 되는 내재율에 의해 인간과 자연의 속삭임을 실어내는『대공』에 대한 분석을 통하여 그 주제와 시인의 시세계를 부분적으로나마 살펴보고자 한다.     2. 自然과의 대화 시도   시골 태생으로 자연을 벗 삼아 자라면서 자연의 소리를 듣고, 그 움직임을 보며, 그것들의 변화를 지켜보는 일에 익숙해진 시인이어서인지 그의 시에는 자연과 물상(物象)을 소재로 하는 시들이 많다. “자연 속에서 인간 삶의 지혜를 배우고, 내 몸속에서 자연을 읽을 수가 있었으니 자연과 인간관계 속에서의 진실과 아름다움이 나의 가장 큰 시적 관심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고 시인이 밝힌 바 있듯이 그의 시 쓰는 일은 아름답고 신비한 자연현상과 연관되면서 ‘자연을 베끼는 일’로 거듭나고 있다. 「서있는 나무」에 심상(心象)으로 등장하는 나무는 사람의 모습으로 봐도 무방하다.   서있는 나무는 서있어야 한다. 앉고 싶을 때 앉고, 눕고 싶을 때 눕지도 앉지도 못하는 서있는 나무는 내내 서있어야 한다. 늪 속에 질퍽한 어둠 덕지덕지 달라붙어 지울 수 없는 만신창이가 될지라도 눈을 가리고 귀를 막고 입을 봉할지라도, 젖은 살 속으로 매서운 바람 스며들어 마디마디 뼈가 시려 올지라도 서있는 나무는 시종 서있어야 한다. 모두가 깔깔거리며 몰려다닐지라도 , 모두가 오며가며 얼굴에 침을 뱉을지라도 서있는 나무는 그렇게 서 있어야 한다. 도끼자루에 톱날에 이 몸 비록 쓰러지고 무너질지라도 서있는 나무는 죽어서도 서있어야 한다. 그렇다 해서 세상일이 뒤바뀌는 건 아니지만 서있는 나무는 홀로 서있어야 한다. 서있는 나무는 죽고 죽어서도 서있어야 한다. -「서있는 나무」 전문-   시인은 나무는 “앉고 싶을 때 앉고, 눕고 싶을 때 눕지도 앉지도 못 한다”고 하면서 살아있음의 소중함을 말해주고 있다. ‘~지라도’로 끝을 맺는 일련의 표현들은 겪게 되는 시련을 뜻한다. 시인은 그러한 시련 속에서도 ‘서있어야 하며’ 심지어는 죽어서도 ‘서있어야 한다’고 피력한다. ‘서있는다’고 해서 시련이 닥쳐오지 않는 것도 아니고 또 ‘세상이 뒤바뀌는 것’도 아니지만 그러한 상황을 피할 수 없다면 차라리 꿋꿋하게 자리를 지켜야 함을 말해주고 있다. 「함박눈」에서는 겨울에 내리는 눈을 빌어 자연에 대한 시인의 애틋한 짝사랑 같은 마음을 고백하고 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다만, 당신에게로 곧장 달려갈 수 있다는 그것과 당신을 위해서라면 당신의 이마에, 손등에, 목덜미 어디에서든 입술을 부비고, 가녀린 몸짓으로 나부끼다가 한 방울의 물이라도 구름이라도 될 수 있다는 그것뿐이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사옵니다. 다만, 우리들만의 촉각을 마비시키는 추위가 엄습해오는 길목으로 돌아서서 겨울나무 가지 끝 당신의 가슴에 잠시 머물 수 있다는 그것과 당신을 위해서라면 충실한 종의 몸으로 서슴없이 달려가 젖은 땅, 얼어붙은 이 땅 어디에서든 쾌히 엎드릴 수 있다는 그것뿐이옵니다. 나는 언제나 그런 나에 불과합니다. 나는 나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함박눈」 전문-   재미있는 것은 시인은 ‘당신’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한 방울의 물과 구름이 될 수 있다고 한다. “이마에, 손등에, 목덜미 어디에서는 입술을 부비고”, “충실한 종의 몸으로 서슴없이 달려갈 수 있다”고 한다. ‘눈[雪]’이란 심상으로 표현되는 자연에 대한 시인의 사랑은 ‘당신’이란 존칭어의 사용과 ‘옵니다’란 시어의 극존칭어미에서 더욱 간절하게 묻어난다.   이놈의 세상, 내 어릴 적 썩은 이빨 같다면 질긴 실로 꽁꽁 묶어 눈 감고 힘껏 땡겨보겄네만 이땅의 단군왕검 큰 뜻 어디 가고 곪아 터진 곳 투성이니 이제는 머지않아 기쁜 날, 기쁜 날이 오겄네, 새살 돋아 새순 나는 그날이. 이 한 몸, 이 한 맴이야 다시 태어나는 그 날의 살이 되고, 피가 되고, 힘이 된다면 푹푹 썩어, 바로 썩어 이 땅의 뿌릴 적시는 밑거름이라도, 밑거름이라도 되어야지 않컸는가. 이 사람아, 둥둥. 저 사람아 둥둥. -「북」 부분-   제목이 「북」이란 시이다. 시의 그 어느 부분에도 북에 대한 묘사는 없다. 그저 마지막에 ‘둥둥’하고 북치는 소리만 들려올 뿐이다. 시의 전반부는 물론 인용한 부분에서도 ‘썩은 이빨’, ‘곪아 터진 곳 투성’ 등 부정적인 이미지가 가득하다. 그럼에도 시인은 곪아터진 살 위로 ‘새살 돋아 새순 나는 그날’을 기다리기에 절망적이지 않다. 결말의 ‘이 사람아, 둥둥, 저 사람아 둥둥’이란 시어는 우리민족 정서에 알맞은 가락의 하나로 특유한 흥겨움을 담고 있으며, 힘든 지금을 견디고 나면 머지않아 행복한 나날이 찾아올 것이라는 희망도 함께 안겨준다. 「나사」에서는 ‘나사’라는 매개물을 통하여 ‘등을 돌리고 있는 것들조차 마주보게 하려’는 융합의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불현듯 찬바람이 불면 내 몸뚱이 속, 속들이에서 일제히 쏟아져 나올 것 같은, 조용한 흔들림. 하양과 검정을 이어주는, 무너지며 반짝이는 논리,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를 잇는 난해한 길이다. 어루만지는 곳마다 스멀스멀 안개가 피어오르는, 알몸에 박힌 세상의 구원이다. -「나사」 부분-   시인은 ‘하양과 검정’ 이라는 한눈에 대조되는 흑백의 논리를 넘어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를 이어주려고 하고 있다. 다시 말해 시인은 흑백이 공전하는 삶의 진실을 말하고자 한다. 서로 어울려져야 빛을 발하는 나사처럼 혼자서는 ‘찬바람’이 불면 ‘흔들리기’에 더욱 간절히 조화와 융합을 꿈꾸고 있다. 조화와 융합을 시도하는 작품으로 「로봇」도 빠뜨릴 수가 없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로 난, 수없는 난해한 길들을 은밀히 왔다갔다하는 정체불명의 숨이다. 그것은 아주 구체적인 기능을 갖는 부품과 부품의 결합으로 시작되지만 물질에 혼을 불어넣는 일로서 자신을 베끼는 불안한 공정工程이다. 열심히 로봇이 사람을 닮아 가는 동안 사람들은 점차 완벽한 로봇이 되어가면서도 여전히 꿈을 꾼다. 깊은 어둠의 자궁 속으로 길게 뻗어있는 뿌리의 꿈틀거림처럼 로봇이 나의 시녀가 되고 내가 로봇의 하인이 되는 것이다. -「로봇」 전문-   이 작품에서 시인은 로봇을 만드는 과정을 ‘부품과 부품의 결합’으로 물질에 혼을 불어넣는 ‘자신을 베끼는 불안한 공정’이라고 하면서도 말미에는 ‘내가 로봇의 하인이 된다’라고 말하고 있다. 로봇이 사람을 닮아가서 불안하다는 것에 출발했음에도 로봇(기계, 나아가 물질문명)에 대한 부정은 나타나지 않는다. 오히려 함께 공존하는 그런 세상을 시인은 바라고 있다. 그런가 하면 시인은 인화된 자연과의 끊임없는 교감을 시도하고 있는데 이는 시의 서정성을 찾기 위한 노력이며 서정성이 주는 낭만에 대한 추구라고 보아진다. 시집에 자주 등장하는 바람, 나무, 강, 산, 꽃, 단풍 등의 시적 소재들이 산문시임에도 불구하도 서정성이라는 시의 특성을 확보하게 하고 있다.     3. 人의 독백   이시환의 산문시 곳곳에는 활발하게 움직이는 사람의 형상이 등장한다. 이런 사람들은 ‘수많은 시인의 분신’들로 시인 자신 내지는 인간의 목소리를 토해내고 있다. 다시 말하여 작품에 등장하는 어린이도, 아버지도, 친구도, 나아가 예수의 모습도 모종의 의미에서 결국은 시인 자신이며 시인과 함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욕망으로 인해 살아가는 이 세상에 대해 많은 것을 바라고 있기에 결국 욕구불만족에서 오는 수많은 병을 앓고 있다. 그리움, 편집증, 외로움 등 그 이름도 다양한 병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시인의 노력이 보인다. 먼저 「그리움」부터 보도록 하자.   너는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方言. 아니면 판독해 낼 수 없는 상형문자. 아니면 가늠할 수 없는 어둠의 깊이이고, 그 깊이만큼의 아득한 수렁이다. 너는 나의 뇌수腦髓에 끊임없이 침입하는 바이러스이거나 그도 아니면 치유불능의 정서적 불안. 아니면 여린 바람결에도 마구 흔들리는 어질 머리 두통頭痛이거나 징그럽도록 붉은 한 송이 꽃이다. 시방, 손짓하며 나를 부르는 너는, 차라리 눈부신 억새 같은 나의 상사병이요. 그 깊어가는 불면不眠의 나락奈落이면서 추락하는 쾌감快感이다. -「그리움」 전문-   현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라면 누구나 한번쯤을 앓아보았을 그리움이란 병을 언어의 마술사인 시인이 아니라고 할세라 수많은 명사로 환치(置換)하고 있다. ‘방언’, ‘상형문자’, ‘어둠의 깊이’, ‘수렁’ 등 일련의 표현을 얼핏 보면 아무런 연관이 없는 것처럼 보이나 ‘난해(難解)하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그런가 하면 ‘꽃’을 제외한 모든 명사는 부정적인 의미를 지니며 꽃마저도 예쁜 꽃이 아닌 ‘징그러운’ 꽃이라고 한다. 그만큼 그리움이란 지독한 것임을 말해주고 있다.   약삭빠른 세상 사람들은 그런 나의 소리 없는 웃음을 눈치 채고 그 때부터 내게 손가락질을 하며 ‘바보’라 불렀습니다. 그 때부터 나는 그들 앞에서 빈틈없는 바보가 되었고, 나는 바보가 아닌 위인들의 업적과 치부를 들여다보며 또 하나의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뒤로 세상은 온통 웃음덩어리라는 것을 슬프게도 나는 알아 차렸습니다. 때문에 내겐 실없이 웃는 버릇이 생겼고, 언제부턴가 웃음을 질질 흘리고 다니는 병病이 되어 깊어만 갔습니다. -「웃음을 흘리는 병」 부분-   「웃음을 흘리는 병」은 제목부터가 아이러니다. 기쁨과 즐거움의 표현인 ‘웃음’을 ‘병’이라고 한 것은 결국 ‘병’이 ‘병’이 아님을 역설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다시 말해 ‘웃음’이 병이 되는 그런 세상의 아이러니를 풍자하고 있다. 이는 단순한 어휘의 나열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바보’와 ‘위인’, ‘업적’과 ‘치부’같은 어휘의 병치(竝置)가 만들어내는 잔잔한 리듬감에서 비롯된다. 시 「각인(刻印)」 전편에서는 부제목에 붙인 것처럼 편집증을 앓고 있는 한 사나이의 고충을 담고 있다. 편집증증상을 갖고 있는 사나이를 ‘또라이’라고 부르지만 그것을 부정하면서 시인은 ‘나는 나이어야 한다’고 외치고 있다. 또한 시집의 마지막 시인 「봄날의 만가(輓歌)」와 첫 시가 되는 「네거티브 필름을 들여다보며」는 이야기의 서두와 결말처럼 서로 호응을 이루고 있으며, 시인이 던지는 삶의 본질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과 답을 시어로 풀어내고 있다.   있거나 이루었다고 아니 가는 것도 아니고, 없거나 이루지 못했다고 먼저 가는 것만도 아니고 보면 더는 허망할 것도, 더는 쓸쓸할 것도 없다. 세상이야 늘 그러하듯 내 눈물 내 슬픔과는 무관하게스리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여전히 분망奔忙하고 분망할 따름, 이 분망함 속에서 죽는 줄 모르로 사는 목숨이며, 한낱 봄날에 피고 지는 저 화사한 꽃잎같은 것을. 아니, 아니, 이 몹쓸 바람에 이리저리 쓸려가는 발밑의 티끌 같은 것을. -「봄날의 만가輓歌」 부분-   위의 시에서 시인의 삶에 대한 태도를 보아낼 수 있다. “있거나 이루었다고 아니 가는 것도 아니고, 없거나 이루지 못했다고 먼저 가는 것만도 아니다”란 것은 생(生)과 죽음에 대한 깨달음의 표현이다. 죽음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순간 가장 인간답게 살 수 있게 된다. 하기에 사람의 의지와 무관하게 흐르는 세상이고 봄날에 피고 지는 ‘꽃잎’같은 인생임에도 시인은 ‘허망하지’도 ‘쓸쓸하지’도 않다고 한다. 죽음을 넘어 죽음마저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이 놀랍다. 시의 마지막에 삶이 ‘바람에 이리저리 쓸려가는 발밑의 티끌’같다는 표현에서 시인의 그러한 의식은 무가내(無可奈)와 탄식(歎息)을 넘어 달관(達觀)의 경지에 이르렀음을 말해주고 있다. 이 외에도 시집에는 가족애와 우정을 다룬 시가 몇 수 된다. 「하나님과 바나나」, 「안암동일기」, 「아버지의 근황」, 「어머님 전상서」, 「벗들에게」 등 시편들은 그 일부가 문체상에서 말 그대로의 일기나 서신에 가까워 정녕 산문시라고 볼 수 있겠는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하지만 가족과 친구와 함께하는 가장 정답고 삶다운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읽는 내내 마음 한편이 따뜻해나는 정이 가는 것임은 분명하다.     4. 맺는 말   이시환의『대공(大空)』은 산문시집에도 불구하고 시적으로 정제(精製)되어 있다. 산문적인 형식에도 불구하고 시마다 분명 내재율이 존재하여 서정시와는 다른 운율의 미를 지니고 있다. 산문시라서 그런지 다소 화법이 직설적이고 함축성이 약한 편이어서 아쉬움이 남는다. 여러 시편에는 고독과 허무의 감정이 흐르고 있지만 이 또한 부정적이라고 보아지지는 않는다. 단지 시인의 관심을 갖고 있는 ‘인생무상(人生無常)’이란 불교의 가르침과 무관(無關)하지 않은 듯싶다. 하기에 어쩌면 이런 부정적이지만 진솔한 사람의 감정들을 시적 언어로 풀어내고 있는 시인 역시도 부정적인 것을 부정함으로써 긍정에로 나아가고 싶지 않았을까 싶다. 시집의 마지막 장을 조심스레 덮고 나니 시집의 첫 페이지에 쓰인 글귀가 눈에 들어온다. “눈에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를 은밀히 잇는, 그 좁은 틈으로 대공(大空)이 무너져 내리며 만물을 일으켜 세우는 소리를 듣는다.” 그렇다, 정녕(丁寧)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기에 눈을 살며시 감고 마음을 비우고서 시인의 목소리가 아닌 그렇다고 내 목소리도 아닌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본다. ‘대공(大空)’이란 메아리가 마음속에 울려 퍼진다. 클 대(大), 빌 공(空), 대공(大空)!     [산문시 이해를 위한 시론試論]   산문시의 본질 이시환     ‘산문시散文詩’라 함은 운문韻文이 아닌 산문散文으로 된 시詩를 말함에 틀림없다. 그러니까, 문장은 산문이지만 그 안에 시적 요소가 갖추어져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를 뒤집어 말하면, 산문으로 썼다고 해서 모두가 다 산문시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운문과 산문은 어떻게 다르며, 산문에서 시적 요소란 무엇을 두고 말함인가?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해서 예문을 들어서 설명해 보겠다.   ① 우주는 무수한 은하와 별들을 담을 정도로 크다. 우리가 볼 수 있는 우주의 크기는 150억 광년이다. 그러나 우주의 대부분은 암흑물질로 되어 있는 텅 빈 공간이다. -이정후・김성식・박찬 공저 『우주의 신비』32P 일부   ② 올망졸망, 높고 낮은 파도 밀려와   내 발부리 앞으로 어둠 부려 놓고 간다.   그 살가운 어둠 쌓이고 쌓일수록 가녀린 초승달 더욱 가까워지고   나를 꼬옥 뒤에서 껴안던 소나무 숲, 어느새 잠들어   사나운 꿈을 꾸는지 진저릴 친다.   -이시환의 시「몽산포 밤바다」전문   ③ 사는 동안 까마득히 잊어 버렸거나 부인해 온 나의 꾀 벗은 모습. 원시림 속의 내가 모니터 화면에 잡혀 암실暗室로부터 끌려나오고 있다. 가까이 들여다보면 이미 검은 것은 희뿌옇게, 뿌연 것은 온통 검게 변해있다. 솟은 곳은 들어앉아 있고 패인 곳마다 솟아있는 뜻밖의 나는, 웃음 하나를 앞니 사이로 물고 서 있었지만 긍정肯定이냐 부정否定이냐, 좌左냐 우右냐, 안이냐 밖이냐를 강요받고 있었다. 그의 몸을 포박하고 있는 나의 편견과 독선이 더욱 오만해 지고 있을 무렵. -이시환의 시「네거티브 필름을 들여다보며」전문     위 예문들에서 ①과 ③은 산문이고, ②는 운문이다. 그런데 운문인 ②는 당연히 시라 하지만 산문인 ③도 시詩라 한다. 그렇지만 산문 ①을 두고 시라고 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운문과 산문을 분별하는 핵심적 요소는 무엇일까? 그것의 제일 요소는 역시 ‘운韻’이다. 운의 유무(有無:있고 없음)에 의해서 운문이냐 산문이냐가 결정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운이 일정한 규칙 안에서 존재하면 운문이고 풀어 헤쳐져 흩어져 있거나 없으면[散: 흩다, 흩뜨리다, 한가롭다, 볼일이 없다, 흩어지다, 헤어지다, 내치다, 풀어 놓다] 산문이 된다. 그렇다면, 운이란 무엇인가? 소리 내기의 완급緩急・장단長短・고저高低・광협廣狹・청탁淸濁・반복反復 등의 요소들이 어우러져 내는 음악성(音樂性:음악과 같은 성질)이다. 시에서는 행行과 연聯 구분을 통해서 ‘일정한 시간 내’에 소리 내기의 완급과 장단을 조절하고, 같거나 유사한 소리 내기의 반복으로써 그 음악성이 구축構築된다. (여기서 일정한 시간이란 한 행 또는 한 연을 다 읽는 데에 소요되는 시간으로, 이것이 몇 분 몇 초라고 딱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음악에서의 ‘마디’나 ‘절’과 같은 구실을 한다.) 뿐만 아니라, 적절한 시어詩語 선택으로 소리내기의 고저・광협・청탁에까지 간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우리가 일반적으로 느끼는 시 문장에서의 운이란 행과 연 구분에 의한 소리내기의 완급・장단이며, 동음同音・동일구조 문장 반복에서 느끼는 일정한 규칙성이다. 물론, 그 규칙성에서 우리는 익숙해짐으로부터 오는 편안함을 느낄 수 있고, 동시에 그 문장의 의미가 쉽게 인지認知되는 효과를 누릴 수 있다.   위 예문들에서 ①과 ③은 공히 산문인데 ①은 시가 아니라 하고 ③은 시라 한다. 우리로 하여금 운을 느끼게 하고, 실질적으로 그 운을 부여하는 도구이자 장치이기도 한 행과 연 구분이 없다는 점에서 같은 산문이라 하는데 무엇이 이들을 시詩와 비시非詩로 갈라놓았을까? 그것은 객관적이든 주관적이든 사실을 단순 기술해 놓는 문장이냐 아니면, 주관적인 느낌이나 생각, 바꿔 말하면 감정이나 사상 등을 정서적 반응으로써 표현해 내는 문장이냐의 차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기술記述’이냐 ‘표현表現’이냐의 차이라고도 말할 수 있고, 시를 시답게 하는 요소 곧, 개인의 주관적인 느낌이나 기분을 포함한 감정과, 생각이나 의식을 포함한 사상을 드러내는 정서적인 문장이냐 아니냐의 차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운문이든 산문이든 시에서는 ‘정서적인 문장으로서의 표현’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개인적인 느낌・기분・감정・생각・의식 등을 적극적으로 반영하되 수사적修辭的 기교가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산문으로 된 시일지라도 운문으로 된 시에서 느끼게 되는 음악성音樂性 곧 리듬감과, 수사修辭로써 빚어지는 내용의 정서성情緖性과 함축성含蓄性 등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문제는, 그것들을 담아내는 방식이 운문과 다른데, 운문이 가지는 음악성을 행과 연 구분 대신에 문장이나 문단에서 느끼게 되고, 다시 말하면, 얘기 전개 과정에서 느껴져야 한다. 그리고 단순 기술이 아닌 수사적 표현기교에서 주관적인 정서를 느낄 수 있어야 하며, 또한 개별적인 문장들이 담아내거나 겉으로 드러내는 의미들보다 문장들이 얽어내는[구축해 내는] 전체적인 얘기가 환기시키거나 숨겨 놓는 의미가 이미 존재하거나 존재할 법한 세계이어야 한다. 그러면서도 전체적인 얘기의 핵심을 드러내 놓고 있는 단면처럼 함축성을 지녀야 한다. 간단히 말해서, 한 편의 산문시는, 얼핏 보면 시시콜콜하게 풀어쓴 어떤 구체적인 얘기 같지만 그 얘기가 더 큰 의미를 환기시키는 암시기능과 내장하고 있는 대표성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산문시 쓰기가 더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위 예문들을 가지고 이 같은 사실을 확인해 보자. ①은 산문임에 틀림없다. 이 산문을 가지고 아래와 같이 운문처럼 행과 연 구분을 임의로 했다 하자.     ④ ←① 우주는 무수한 은하와 별들을 담을 정도로 크다.   우리가 볼 수 있는 우주의 크기는 150억 광년이다.   그러나 우주의 대부분은 암흑물질로 되어 있는 텅 빈 공간이다.     얼핏 보면, 이것도 시라고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내용은 다르지만 이런 유형의 시들이 사실상 많이 발표되고 있는 현실을 전제하면 말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자면, 시로서는 결격사유가 많은, 시가 될 수 없는 문장이다. 화자(話者=표현자)의 인식과 판단은 들어있지만 개인의 정서적인 반응으로서 표현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제, 운문시 ②에서 행과 연 구분을 배제시켜 보자.   ⑤ ←② 올망졸망, 높고 낮은 파도 밀려와 내 발부리 앞으로 어둠 부려 놓고 간다. 그 살가운 어둠 쌓이고 쌓일수록 가녀린 초승달 더욱 가까워지고 나를 꼬옥 뒤에서 껴안던 소나무 숲, 어느새 잠들어 사나운 꿈을 꾸는지 진저릴 친다.   행과 연 구분 없이 바꾸어 읽어도 본래의 ②와 크게 다르지 않지만 ①과는 분명히 다르다. 화자의 인식과 판단이 기술되어 있다는 점은 ①과 ⑤가 같은데 왜 다르게 느껴지는 것일까? 그것은 인식과 판단에 대한 단순기술이냐 정서적 반응으로서의 표현이냐의 차이로 설명된다. 곧, 위 ⑤에서 화자의 중요한 인식이자 판단은, ‘파도가 밀려와 내 발부리 앞으로 어둠을 부려 놓고 간다’는 것과, ‘어둠이 쌓일수록 초승달이 더욱 가까워진다’는 것과, ‘소나무 숲이 잠들어 사나운 꿈을 꾸는지 진저릴 친다’ 등 크게 보면 세 가지이다. 이 세 가지 판단은 주관적인 것으로서 화자의 기분이나 상태나 감정 등이 투사된 개인의 정서적 반응으로서 인식된 세계에 대한 표현이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 화자의 기분・감정이나 인식・판단 등이 엮어내는 주관적인 의미망[意味體系]이다. 이것은 객관적인 현실의 세계가 자극刺戟으로 접수되었을 때에 화자가 그것을 해석하고 반응해 보이는 과정에서 구축되는 주관적인 가상의 세계일 뿐이다. 우리가 한 편의 시를 읽는다는 것은, 바로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사실로서 현실 세계를 그대로 전달 받거나 읽어내는 것이 아니라 화자의 개인적인 감정이나 의식 등이 투사되어 나타나는 표현으로 구축되는 주관적인 진실로서의 가상세계를 읽는 것이다. 그래서 ①은 시가 되지 못하지만 ②와 ⑤는 공히 시가 되는 것이다.   이제, 산문시라 한 ③을 가지고 아래와 같이 행과 연 구분을 지어서 읽어 보자.   ⑥ ←③ 사는 동안 까마득히 잊어 버렸거나 부인해 온 나의 꾀 벗은 모습.   원시림 속의 내가 모니터 화면에 잡혀 암실暗室로부터 끌려나오고 있다.   가까이 들여다보면 이미 검은 것은 희뿌옇게, 뿌연 것은 온통 검게 변해있다.   솟은 곳은 들어앉아 있고 패인 곳마다 솟아있는 뜻밖의 나는,   웃음 하나를 앞니 사이로 물고 서 있었지만 긍정肯定이냐 부정否定이냐, 좌左냐 우右냐, 안이냐 밖이냐를 강요받고 있었다.   그의 몸을 포박하고 있는 나의 편견과 독선이 더욱 오만해 지고 있을 무렵.     원래 산문이었던 문장 ③을 가지고 이렇게 임의로 행과 연 구분을 해 놓으면 어떻게 읽히는가? 원래의 문장인 ③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본다. 다만, ③보다는 더 천천히 읽히게 된다. 그래서 그만큼 생각을 더하게 되는 부수적인 효과가 얹어져 있을 뿐이다. 그렇다고, 그 의미가 달라지거나 깊어지지는 않는다. 따라서 별 의미가 있지는 않다. 오히려 천천히 읽는 운문보다 빨리 읽히는 산문 쪽이 효과적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까, ⑥보다는 본래의 ③이 낫다는 뜻이다. 왜 그럴까? 천천히 읽으며 생각하게 하는 쪽보다 빨리 읽는 쪽이 더 긴장감을 느끼게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떤 것은 행과 연 구분을 하는 쪽이 좋고, 또 어떤 것은 그 구분 없이 산문으로 쓰는 쪽이 좋은가? 다시 말해, 어떤 것은 천천히 그 의미를 생각하면서 읽는 것이 낫고, 또 어떤 것은 빨리 읽어내어 지각하는 시원함을 느끼는 것이 나은가? 그것은 오로지 개인적 판단에 맡겨질 일이지만 기본 원칙은 있을 수 있다. 과연, 그것이 무엇일까? 같은 산문시 ③과 ⑤의 차이로써 설명된다고 본다.   위 ③과 ⑤를 동일선상에 놓고 읽었을 때에 우리들은 어떤 차이를 느낄 수 있는가? 알다시피, ③은 이시환의 산문시「네거티브 필름을 들여다보며」의 전문이고, ⑤는 이시환의 4연 10행의 운문시「몽산포 밤바다」를 산문시로 바꾸어 쓴 것이다. ③은 네거티브 필름에 박힌 사람의 모습을 실물과 비교해 가며 들여다보고 있는데, 명암이 뒤바뀐 그 이미지를 통해서 이분법적인 논리로 재단하려는 경향이 짙은 정치 사상적 현실세계를 암시하고 있는 무겁고도 어두운 시이다. 반면, ⑤는 ‘몽산포’라고 하는 특정 지역의 밤바다 풍경을 파도・어둠・초승달・소나무 숲・바람 등의 객관적 요소들을 가지고 재구성해 놓고 있다. 그 재구성된 세계는 어디까지나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세계가 아닌 사유세계로서 구축된 주관적인 진실일 뿐이다. 물론, 이러한 점에서는 ③도 마찬가지이다. 이들이 서로 다른 점이 있다면 ③은 주관적 진실로서 인식된 판단에 대해 단순히 기술記述하는 측면이 크고, ⑤는 문장으로써 그려내는 그림에 가깝기 때문에 천천히 읽어나가며 생각을 함으로써 그 이미지를 떠올려야 하는 차이가 있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③은 산문이 어울리지만 ⑤는 행과 연 구분을 통해서 읽어나가는 속도를 통제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⑤보다는 ②가 낫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산문시가 가지는 진정한 매력은 어디에 있을까? 그 매력을 느끼려면 제대로 된 산문시를 많이 읽어봐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이로서 ‘일방적으로 꿈꾸는’ 산문시의 매력은 이러하다. 곧, 빠르고 쉽게 읽혀져야 하고, 그런 데에서 오는 쾌감이 수반되어야 한다. 그 쾌감이란 ‘알았다’ 혹은 ’나도 그렇게 느끼고 생각했다’는 지각知覺의 즐거움이자 ‘시원스러움’ 같은 것이기도 하다. 오래오래 그리고 깊이 생각하지 않지만 오래오래 깊이 생각한 결과를 펼쳐 놓아야 하며, 그 내용은 마치 무의 가운데 토막처럼 핵심적인 부분으로써 전체를 환기시키거나 암시하는 힘이 있어야 한다. 그것도 이왕이면 그 무가 인간과 자연의 아름다움과 진실을 드러내 놓는 눈[眼]이었으면 한다.  
1193    詩作初心 - 시에서 상투어를 사용하지 말기 댓글:  조회:4593  추천:0  2016-03-13
시를 쉽게 쓰는 요령 - 김영남 9. 시어 선택 시 고려해야 할 두 가지 필자를 포함해 이 땅의 모든 시인들은 대중들, 특히 문학 수요자의 환경변화를 하루 빨리 깊게 인식해야 합니다. 예전에 대중들의 문화적 욕구를 충족시키는데는 문학이 중심 매체이었고 핵심이었을 뿐만 아니라 이를 대체할만한 마땅한 대체매체도 없어 늘 대중들의 수요에 공급이 모자랐습니다. 따라서 그 당시는 공급만 하면 수요는 절로 보장되어 있는 상황이었죠. 즉 시라는 제품의 효용성, 편리성, 유익성 등을 크게 고려하지 않더라도 시라는 제품에 언제나 충분한 수요가 있었던 시기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우리 나라가 산업화로 치달으면서 대중들의 문화적 욕구를 충족할만한 대체매체가 많이 출현하게 되었고, 또한 대중들의 욕구도 다양해졌습니다. 이젠 특별한 흥미가 없고 독자들을 유인할만한 내용이 아니면 독자들이 절로 찾아오리라는 건 기대하기 어려운 시대가 된 겁니다. 다시 말해 기존의 방식대로는 이젠 통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 시대감각에 맞는 시어를 선택하라. 그런데 대다수 시인들이 이런 환경변화를 심각하게 인식하지 못하고 아직도 기존 사고에 갇혀 시의 위기를 수요자인 독자 탓으로 돌리고 있는데 이건 번지수를 잘 못 짚고 하는 이야기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공급자인 시인 스스로가 빨리 변해 독자의 환경변화에 적응해야지요. 지금 정치도, 경제도, 행정도, 교육도, TV도, 영화도, 체육도… 모든 것이 공급자 위주에서 수요자, 즉 독자 위주로 바뀐 지 오래인데 오직 시만큼은 권위주의 귀족주의 전통주의에 너무 깊게 빠져 독자를 고려하면 마치 3류 시인인양 취급하고 전문가가 읽어도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가지 않는 시를 해설서를 곁에 놓고 감상하라는 식의 합리화에 급급하고 있는 실정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제는 달라진 독자들의 욕구환경을 고려해 시도 하나의 상품이다라는 생각을 갖고 감상하기 쉽고, 재미있고, 음악성 있고, 유익해서 독자들이 스스로 찾을 수 있을만한 시를 만들어 제공해야죠. 그렇다고 품질이 형편없는 싸구려 제품을 만들라는 소리가 아닙니다. 싸구려 제품과 사용하기 편리한 제품과는 그 기준이 전혀 다른 내용입니다. 그 동안 이용자의 편의를 고려하지 않고 제작자의 일방적인 생각으로 시 쓰는 방식은 수요자 위주로 하루빨리 변해야 한다는 소리입니다. 그러나 요즘 발표되는 시들을 한번 생각해보세요 특별한 내용도, 흥미도 없으면서 작자의 일방적인 생각으로 한 장도 아닌 두 장 세 장으로 늘어놓는 경우가 다반사인데 일반 독자들이 읽어 주리라는 걸 어디 상상이나 할 수 있겠어요? 이제는 시를 생각하는 방식, 시를 만드는 방식이 종전과 하루 빨리 달라져야 합니다. 그래야 시의 위기라는 말이 사라지죠. 하여, 초보자들이 이상의 내용을 고려해 기본적으로 유의할 점 두 가지만 소개할까 합니다. 첫째로 초보자 시절에는 老티 나는 시어를 쓰지 말기 바랍니다. 특히 , 등 혼자 술취해 영탄하는 듯한 용어는 절대 쓰지 말기 바랍니다. 이런 용어들을 보면 독자들이 바쁘고 바쁜 세상에 혼자 술취해 영탄하고 돌아다니는 소리로 여겨 그런 시는 그냥 넘겨버리게 됩니다. 즉 독자들은 이런 용어를 보면 할 일없고 배부른 소리로 생각해 기분 나빠하기 쉽다는 거죠. 그리고 , 식의 명령투도 지양하시기 바랍니다. 독자들은 기본적으로 자기보다 불행한 이야기, 슬픈 이야기, 즐겁게 하는 이야기, 유익한 이야기 등에 관심이 있고 또 이걸 읽으면서 스스로를 위로 받게 됩니다. 그러나 자기보다 잘난 체하는 이야기, 친구 가족 등 주변 자랑 이야기, 명령투의 이야기 등을 들을 땐 아주 기분 나빠하게 됩니다. 실제로 필자는 아주 젊은 시인들 중에도 이런 노티 나는 용어와 명령투의 시를 자주 쓰는 걸 보았습니다. 그러나 제 창작강의를 듣는 사람은 이런 노티 나는 용어대신 가능한 한 확신에 차 있고 박력 있고 싱싱한 용어를 구사하기 바라고, 명령투 대신 청유형을 구사하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는 고어(古語), 사어(死語), 상투어 등은 가능한 한 사용하지 말기 바랍니다. 시도 그 시대의 문화를 즐기는 하나의 매체입니다. 따라서 그 시대의 사용언어와 무관하지 않죠. 그런데 이 첨단 시대에 살면서 아직도 화랑, 신라의 달밤, 정읍사의 노래, 달구지, 신작로, 물레방아, 수틀, 바느질, 낮달, 이승, 저승 등등 그 옛날 시절의 풍경과 풍물, 남들이 지겨울 정도로 써먹는 낡은 시어를 들먹이는 경우를 자주 봅니다. 그러나 이 용어들에 특별한 관심이 있거나 사연이 있는 사람이 아니고는 대다수 독자들은 이런 용어들을 보면 기본적으로 싫어하게 됩니다. 시속에 나타나는 시간, 장소, 풍물들의 거리도 독자들에게는 현실의 거리만큼 멀고도 가깝게 느껴 특별한 이유도 없이 막연하게 먼 시간 속으로 끌고 가는 건 귀찮아해 합니다. 생각해보세요, 하늘에 UFO가 날아다니는 세상인데 아직도 낮달 운운하는 걸 보면 독자들이 어떤 생각을 갖겠습니까? 더군다나 남이 자주 쓰는 시어를 보면 '이 사람 노력도 하지 않고 맨 날 남이 쓴 시어나 갖다 쓰는 참 게으른 시인이구나!' 하고 독자들이 판단하지 않겠어요? 하여, 이 게시판 독자들 중 이런 것에 그 동안 관심이 있었다면 잠시 이를 접어두고 현재의 우리 생활 속에서 매력적인 소재를 찾아 시를 쓰도록 하기 바랍니다. 그리고 독자들이 기본적으로 가능한 한 현재의 시간 속에서 울고 웃고 놀기를 좋아한다는 걸 명심하기 바랍니다. 아울러 사투리를 쓰더라도 옛것보다는 현재의 것을 쓰기 바랍니다. 이런 것들이 공급자 위주가 아닌 수요자, 즉 독자를 고려한 전략적 시 쓰기 방법의 한 예입니다.   =================================================================================== 298. 아버지의 나이 / 정호승 아버지의 나이 정 호 승 나는 이제 나무에 기댈 줄 알게 되었다 나무에 기대어 흐느껴 울 줄 알게 되었다 나무의 그림자 속으로 천천히 걸어들어가 나무의 그림자가 될 줄 알게 되었다 아버지가 왜 나무 그늘을 찾아 지게를 내려놓고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셨는지 알게 되었다 나는 이제 강물을 따라 흐를 줄도 알게 되었다 강물을 따라 흘러가다가 절벽을 휘감아돌 때가 가장 찬란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해질 무렵 아버지가 왜 강가에 지게를 내려놓고 종아리를 씻고 돌아와 내 이름을 한번씩 불러보셨는지도 알게 되었다 정호승 시집 중에서    
1192    조선족 시문학 관하여(2000년 5월) 댓글:  조회:4414  추천:0  2016-03-12
중국 조선족 시문학의 위상 들우물 ◈ 이 글은 2000년 5월 26일, 중국 연길시 ꡐ대우호텔ꡑ에서 가졌던 문학세미나 주제 발표문이다. 이 문학 세미나 관련 정보는 다음 글인 Aꡐ중국 조선족 시문학의 위상ꡑ 에 대한 문학 세미나 결과보고 B와 부록에 첨부한 자료를 참고하기 바람. 1. 들어가는 말 솔직히 말해, 나는 중국 조선족 시문학의 위상에 대해 이야기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 물론, 한국 문단사회에서야 문단데뷰 이래 현재까지 15년 동안 시 창작과 문학평론 활동을 꾸준히 해오고 있지만, 그동안 중국 조선족 시문학에 대해서 특별히 관심을 갖거나 어떤 구체적인 연구 노력을 기울여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찌기, 한국의 여러 문학 단체에서 주관하는 문학행사를 통해 중국을 방문할 기회가 여러 차례 주어졌었지만 그 때마다 나는 스스로에게 자격을 묻지 않을 수 없었고, 또한 경제적으로도 여유롭지 못해 한 번도 실행에 옮기지 못했었다. 그런데, 지난 1998년 2월부로 격월간 문학 종합지 「동방문학」을 창간, 발행해 오면서 중국 조선족 문학에 대해 조금씩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러던 중 한춘․장지민․장정일․정세봉․석화 씨 등 몇몇 문학인들을 만나게 되었고, 허련순․류순호 씨 외 몇몇 시인․작가들의 작품을 읽어볼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작은 만남이 계기가 되어 문학 세미나를 함께 하는, 적극적인 문학 교류 차원의 일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이에 문학을 하는 사람으로서, 또 동족의 일원으로서 대단히 기쁘게 생각하며, 동시에 동포로서의 이해와 사랑을 전제로 하는 화합과 대동단결을 이루어야 한다는 희망도 갖게 되었다. 특히, 중국 조선족 시문학을 이해하기 위해서 약 3개월 동안에 걸쳐 월간 「연변문학」 11권(1999년 1월호부터 11월호까지)과 대표시인선집인 듯한 합동시집의 일부(21명의 110편), 그리고 격월간 「장백산」 1권(1999년 2월호)과 개인 시집 등을 통하여 전체 73명의 시인 작품 580여 편1) 정도를 정독했다는 사실이 그나마 이 글을 쓰는 데에 용기가 되어 주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2. 조국광복(1945. 8. 15) 전에 태어난 시인군 우리 한민족(韓民族)에게 가장 힘들었던 시기가 곧 일본 제국주의의 강점기(1910~1945)일 것이다. 이 시기를 청․장년기로 살던 우리 선대(先代)가 가장 고생을 많이 했을 터이고, 그 다음이 바로 이 시기에 태어난 사람들일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가슴 속에 ꡐ바위ꡑ(리 욱, 1935년 작) 같은 응어리를 품고 살았으며, 동시에 새로운 삶에 대한 꿈과 희망을 안고 조국을 떠나 멀리 러시아, 중국, 일본 등지로 유랑하여 정착하기까지 갖은 고초를 겪었으리라. 굶주린 창자 헐벗은 알몸들 지금 엄동설한 이 삼경에 누구의 집 모퉁이에서 지낼가 없나? 누가 그들에게 따스한 물 한모금 김나는 밥 한숟갈 그들에게 줄 사람 없는가, 없는가…… 모대기다 못해 급기야 기한에 지는 한 맺힌 이슬 누구 탓일가? 누구 탓일가? 이 밤이 왜 이다지 찰고? 아, 왜 이다지 찰고…… ■ 설인의 작품 「한야에」 전문, 1940년 작 오늘도 끝없이 울부짖는 소리 들었나니 언제나 가시 덤불속에서 아득한 지평선 너머의 아름다운 신화를 찾는 순례자의 발끝에 피방울이 맺힌 서글픈 소식 ■ 설인의 작품 「소식」 전문, 1942년 작 먼 지평선에 가뭇없이 사라진 두가닥 수레길은 벌겋게 입을 벌린 황야의 어두운 추억 젊음이 주름살에 옥매인 홀로 난 어머니의 기박한 운명을 끌고 가던 달구지의 그 삐걱소리 울어서 실성하던 산 얼어서 그만 굳어진 하늘 내 더벅머리우에 떨어지던 오, 불쌍한 어머니의 눈물…… 세월은 가고 겨울뒤끝에 봄은 오고 벌판 저 끝 어딘가서 생명의 파란 곡선이 수레길을 지우며 조용히 오건만 내 서러운 가슴속에 멀리 뻗어간 두가닥 수레길엔 달구지의 그 삐걱소리 오늘도 깊이깊이 패여온다. ■ 임효원의 작품 「황야의 추억」 전문 앞의 두 편은 1940년과 1942년에 창작된 설인의 작품이다. 일본인들의 칼날(가시덤불)과 가난을 피해 살고 싶어도(아름다운 신화를 찾는) 살 수 없었던 절망적 상황을 간접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비록, 시적화자(話者)는 같은 상황에 있지는 않지만 당시 우리 선대(先代)가 어떻게 살았으며 어떻게 죽어갔는가를 비유적인 표현으로 고발하고 있다. 뒤의 작품은 임효원의 「황야의 추억」 전문으로 시적화자인 ꡐ내ꡑ가 어머니와 함께 꿈(봄)을 찾아 달구지를 끌고 어디론가 가야했던, 어린 시절의 눈물어린 이야기를 함축적으로 잘 묘사하고 있다. 나보다도 어머니에 초점에 맞추어져 있는데, ꡐ어머니의 기구한 운명ꡑ이란 것이 겉으로 드러나기는 역시 배고픔과 추위이지만 그 진실은 ꡐ황야의 어두움ꡑ과 ꡐ내 서러운 가슴 속ꡑ에 숨어 있다. 위에 거명한 시인들은 1907년으로부터 1944년도 사이에 중국․한국․일본․러시아 등에서 태어나 중국 대륙에 정착한 세대로, 일제 강점기를 유아기로만, 혹은 아동기까지, 혹은 청소년기까지, 혹은 청년기까지 보내야 했던 세대다. 따라서 이들의 부모세대보다는 고생을 덜했다고 판단되지만 역시 당대의 가난과 문화 풍속이 다른 중국이라는 나라의 낯선 사회제도에 의해 양육되고, 적응해야 했던 시련과 고통을 감당해내야만 했으리라. 그러나, 조국이 해방되고 나서 50년이란 긴 세월이 이미 흘렀고, 중국을 구성하는 56개 소수민족 가운데 하나로 자리잡아 오면서 이들은 과거의 아픈 역사에 집착할 수만도 없었다. 가난과 적응이라는 현실적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했고, 미래 사회에 대한 꿈을 또한 저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ꡐ새 화원ꡑ(리 욱, 1940년 작)에 꽃씨를 뿌려야 했고, 땅속 깊이 뿌리박은 ꡐ질경이ꡑ(임효원, 1956년 작)처럼 억세게, 그리고 무성하게 자라나야 했다. 그러는 가운데 한반도에서는 동족상잔의 남북전쟁이 터지고, 자의든 타의든 전쟁터에 나아가 싸워야 했다.(김철의 「통행금지」, 「생의 노래」 등) 그리고 3년 1개월 동안 지속된 그 전쟁으로 얼마나 많은 동포들이 죽어야 했던가를 뼈 아프게 반성하면서(임효원의 「아, 민들레……」, 1979년 작) 남북이 분단된 채 오늘날까지도 적대시하며 살아야 하는 현실을 직시하게 되고,(김철의 「동강난 지도 앞에서」 1989년 작) 또 그러면서 역사의식이 싹트게 되었으리라.(설인의 「호태왕비」 1995년 작) 이들은, 줄곧 80년대 중후반까지 북한과 교류하면서 우리 말과 우리 글로 문학활동을 해왔기 때문에 한족(漢族)의 문화로 흡수되지 않고 소수민족 가운데 가장 정체성이 강한 자치주를 형성해 올 수 있었다고 보여진다. 특히, 중국과 한국의 수교로 오늘날은 남한의 문학인들과 교류를 보다 왕성히 하면서 어느 정도는 남과 북을 이해하게 되었고, 또 자신의 뿌리도 의식하게 되면서 비로소 마음 속의 고향인 조국을 생각하게 되었다. 나아가, 한민족의 대동단결과 화합을, 그리고 통일을 염원하고 모색하는 새로운 바람이 일기도 했다. 오, 고향의 언덕 마음의 탑아 너는 말없이 내 가슴에 솟아있고 나는 네 혈관을 흐르는 한방울 피 너로 하여 내 가슴은 언제나 끓고 있다. ■ 김성휘의 작품 「고향의 언덕 마음의 탑」 제11연 고향이 고향이 아니다. 내가 태어나 자란, 그런 단순한 고향이 아니라는 뜻이다. 지금의 나를 있게 하고 나의 어머니를 있게 했던 우리의 뿌리로서의 고향이다. 나를 나로 존재하게 하는 선대들이 한 마음 한 뜻으로 살던 곳, 바로 내 마음 속에나 있는 고향이고, 내 혈관 속을 흐르는 피와 같은 생명 그 자체로서의 고향이다. 병든 마음 무서운 설음 바람에 덜라 들국화 곱게 웃는 저 벌로 산으로 해의 문안을 가자 남에서 북으로 서에서 동으로 거침없이 부는 바람 가시를 뽑으며 가슴을 헤치고 바람타고 가자 바람타고 오자 동서남북 하나로 일어나 백두의 존엄을 안고 동해의 기량을 보이며 갈매기도 가자 수리개도 가자 두 날개 한 몸뚱이 흰옷 입은 사람아 떳떳이 떳떳이 하나로 가자. ■ 김성휘의 작품 「하나로 가자」 전문 우리는 비록 남북이 갈라져 있고, 또 중국에, 일본에, 러시아에, 저 남미에, 지구촌 곳곳에 흩어져 살아가고 있지만 백의민족(白衣民族)으로서 똘똘 뭉쳐 하나로, 당당하게 살자는 것이다. 조국이란 내 잠들었을 때에도 후둑후둑 뛰는 내 심방 가까이에 앉아 맥박을 세여보는 보모입니다. ■ 김성휘의 작품 「조국, 나의 영원한 보모」 제1연 이처럼 ꡐ고향ꡑ에 대해 눈을 뜸으로써, 바꿔 말해,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 의식하면서 ꡐ조국ꡑ이 나를 키워주고, 지켜주는 보모로서 다가오는 것이리라. 허룡구의 「먼동」, 리임원의 「동해바다」 등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는 작품들이다. 물론, 같은 세대라 해서 모두가 똑같은 생각을 갖는 것은 아니다. 주의․주장이 다르고, 현실을 받아들이는 태도 또한 다를 수 있다. 그래서 이들 가운데에는, 일상생활 속에서 경험할 수 있는, 크고 작은 일들을 통해서 느끼는 생활정서를 중심으로 노래하는 시인들(강효삼․김문회․한춘)도 있고, 자연적 요소나 현상을 통해서 인간 삶의 지혜나 진리 혹은 아름다움을 유추해 내는 시인들(김응준․리삼월․리상각)도 있다. 또한 인간의 사랑을 중심으로 노래하는 시인(김태갑)도 있고, ꡐ대중적 정서ꡑ 읽기에 발 빠르게 움직이는 시인(석화)도 있고, 대자연의 외형적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시인(김경석)도 있고, 인간 존재나 현실적인 삶에 대한 관심을 보이되 사유세계 속의 주관적 언어표현을 즐기는(?) 시인(박화․한춘)들도 있음을 간과해선 안 될 것이다. 3. 조국광복 후에 태어난 시인군 1945년 이후에 출생한 세대는 그 앞 세대보다는 고생을 덜했음에 틀림없다. 세계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크게 방황하지도 않았고, 제국주의 일본에 의한 직접적인 압제와 수탈을 당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생이 있었다면, 5, 6, 70년대의 가난과 중국내 정치 사상적 변화와 함께 ꡐ적응ꡑ해야 했던 시행착오와 그 시련이 있었을 뿐이다. 그리고, 80년대 전까지 비교적 제한된 국가들과만 교류를 해왔기 때문에 상대적 빈곤과 허탈감을 크게 느끼지도 못했을 것이다. 이런 환경상의 여건 때문인지 조선족 시인들은 자국내 현실적인 여러 문제들을 소재로 취하여 시를 쓰는 일이 드물었다. 그리고 앞 세대들이 가졌던 역사나 뿌리 의식이 또한 없어져 버렸다. 그래서 일상 생활속에서 부딪치고 경험해야 하는 데에서 갖게 되는 개인의 솔직한 느낌이나 감정, 생각이나 사상 등을 드러내는 시들이 흔치 않다.(물론, 그렇다고 해서 현실 문제를 비판하거나 간접적으로 풍자하는 작품이 전혀 없다는 것은 아니다. 한소리의 「고무풍선」 「자멸」 「방황」이라든가, 리송주의 「멀고도 가까운 별」이라든가, 전홍일의 「온실효과」 「참새들」 「시골의 설」 등은 그 내용과 표현 방법면에서 미숙하긴 하나 사회비판의식이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대개는 천편 일률적으로 자연현상이나 그 구성물에 대한 외양묘사나 감정이법으로 사회적 목적성을 띠는 객관화된 인간 삶의 유형을 환기시키는 경향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두 가지 점에서 우리는 분명히 희망을 가질 수 있다. 그 하나는, 자신의 작품 안에서 시인들이 점점 솔직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시를 쓰는 근본 목적과 관련된 문제인데, 이해하기 쉽게 빗대어 말하면, 지금 붓나무를 소재로 시를 쓴다 할 때 붓나무의 모양새나 빛깔 그 밖에 생태학적 특징 등을 중심으로 묘사하기 마련인데, 이 때 붓나무 자체의 아름다움이나 어떤 특성 자체를 들어낼 목적은 결코 아닐 것이다. 만약, 그것이 목적이라면 ꡐ식물학ꡑ이라는 과학에서나 해야 할 일이다. 어디까지나 그것은 시를 쓰는 시인 자신의 개인적인 정서를 드러내기 위해 끌어들여진 대상에 지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옛 시들이 대체로 어떤 대상 자체를 표현 목적으로 여기는 경향이 많았다면 오늘날의 시들은 그 대상들을 통해서 다름아닌 시인 자신의 주관적 정서를 드러내고, 또 그럼으로써 인간의 보편적인 정서적 반응을 기대하는 것이다. 이처럼, 시속으로 끌어들여지는 다양한 대상들은 시인의 주관적 정서를 드러내기 위해 필요하다고 판단되어 잠시 빌려 쓰이는 것인데, 이런 현상이 ­바꿔 말해, 시를 쓰는 근본 목적이 어떤 대상을 위해서가 아니라 시인 자신을 포함한 인간을 위한다는 시각과 태도 변화가­ 6, 70년대 출생한 김경희․허련화․리해룡․김충 등 적지 아니한 젊은 시인들에게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일광산 봄 푸를 때 강건너 높은 산 불타오르데 두만강 물에 나래 적셔 저 불 사그릴 큰 새는 없는가? 내 사랑 토끼와 사슴들이여 내 마음 무성한 숲에 몸을 숨겨라 아, 진달래 스러진 산 산은 타도 여름은 오려나 끌 수 없다면 차라리 불산이 되거라 저 불길 어느새 옮았는가 나도 뜨겁게 불타고 있네 ■ 허련화의 작품 「산불」 전문 위 작품에서, 강건너 높은 산이 불타오른다는 말이 진달래 꽃이 만발하여 이루어진 붉은 물결을 빗댄 것인지, 아니면 실제로 봄에 산불이 난 것인지 모호하게 표현되고 있다. 물론, 시제와 앞뒤 문맥상으로는 후자일 것이라는 판단이 앞서지만. 그런데, 중요한 것은, 산불을 소재로 하여 시를 썼지만 결국은 시적 화자인 시인 자신의 몸속에서 일고 있는 불, 곧 넓은 의미의 생명력을 노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체내의 생화학적인 변화를 수반하는 애욕인지 아니면 어떤 목표 달성에 대한 의욕인지는 분명히 알 수 없지만. 이처럼, 산불이라는 자연현상이 시적 표현의 대상이 되더라도 그것은 결국 시인 자신을 드러내는 종속물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이같은 현상은, 시작(詩作)에 있어 그만큼 시인 자신 곧 인간을 우선시 여긴다는 증거다. 바꿔 말해, 대상을 위해 시를 쓰는 것이 아니고 시인 자신을 포함한 인간들을 위해 쓴다는 사실이다. 이를 바꿔 말하면, 시인들의 시적 관심이 인간 외부에서 내부로 옮겨졌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하겠다. 또 그것은 시인이 처해 있는 현실적 여건의 변화, 곧 환경의 변화를 의미하기도 한다. 환경의 변화와 함께 시인의 관심․미의식․언어 등이 바뀌기 때문이다. 그 다른 하나의 희망은, 다양한 형식 실험과 함께 다양한 주제를 추구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시가 꼭 자연의 아름다움이나 묘사하고, 또 그것과 관련해서 시인이 갖는 감정과 사상을 정서적이고 음악적이고 비유적인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이 다양하게 바뀔 뿐 아니라 그것을 담아내는 방식 또한 여러가지 형태로 시도되고 있다는 뜻이다. 예컨대, 해, 달, 흙, 곰 등과 같이 대자연을 구성하는 대상들이 저마다 정령을 가지고 있고, 그들간 유기적인 관계 속에서 호흡함으로써 생명현상이 가능하다고 믿는 물활론적(物活論的) 사고를 바탕으로 해서 시를 쓰고 있는 남영전의 ꡐ토템ꡑ시라든가, 다양한 꽃들의 모양과 빛깔과 생태학적 특징들과 관련하여 인간의 삶이나 존재를 유추해 내는 리해룡의 꽃 연작시라든가, 운문이 아닌 산문으로 특정 이야기를 구성해 냄으로써 시에 재미라는 기능을 배가시키고 있는 김성우의 산문시라든가, 일상생활 속에서 직간접으로 경험하는, 또는 의식되는 사유세계의 단편들을 그대로 진술하는 박화의 모더니티 등이 그것이다. 물론, 세계의 시가 실험, 실습되고 있는 한국 현대시의 다양한 형식과 내용을 고려한다면 미미하기 짝이 없지만 이런 실험적인 노력이 진지하게 지속되는 과정에서 중국 조선족 시문학이 좀더 다양하고 좀더 풍성하게 발전해 나아가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4. 나오는 말 90여 명 내외가 되는 중국 조선족 시인들 가운데에서 일부 시인의 일부 작품을 읽고 시문학의 위상이나 그 성격을 운운하는 것은 극히 위험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시인이란 개인의 사사로운 느낌이나 감정, 생각이나 사상 등을 정서적이고 함축적이고 음악적인 언어로 표현하는 일을 한다 해서 모두가 시인인 것은 아니다. 쉽게 말해, 그저 시 몇 편, 시 비슷한 글 몇 십 편 썼다해서 시인이 아니라는 뜻이다. 적어도 시인이란, 인간의 본질과 그 인간들이 엮어가는 사회와, 그리고 인간의 삶(생명)과 그 사회를 가능하게 하는 자연과, 그것들이 어우러진 세계를 꿰뚫어 보는 눈을 가져야 하는 것이고, 그 눈에 비쳐진 진실을 자신의 감정이 배인 정서적이고 함축적이고 비유적인 언어로 표현해 내는 일과 관련하여 일정한 질서와 수준을 갖추어야 한다. 바로 그랬을 때 우리는 진정한 의미에서 한 시인의 탄생과 그 존재를 기억하고, 그를 우러러 보는 것이리라.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시인이란 그리 많을 수가 없다. 어쩌면 우리는 진정한 시인이 되기 위해서 부단히 시를 쓰는지도 모른다. 여하튼, 73명의 작품 580여 편을 읽으면서 이들이 공유하는 정신적 세계를 가늠하게 하는 중요한 소재이자 제재가 되기도 하는 단어(key word)를 10개 정도로 정리한다면 이렇다. 곧, ①그리움 ②고향 ③조국 ④별 ⑤달 ⑥산 ⑦강 ⑧나무 ⑨바람 ⑩바위 등이 그것이다. 이들 중요 단어들로 시를 짓고 있는 시인들의 정서를 색깔로 친다면 두루미나 백학으로 대표되는 흰색일 것이고, 계절로 친다면 생명력이 약동하기 시작하는 봄일 것이다. 표현 수단은 한글이지만 조국이 해방되면서 중국내 조선족으로서 정착, 30여 년 동안 줄곧 북한과 교류해 왔기 때문에 북한의 언어와 가깝다. 그리고 80년대 개방화 물결에 따라 그 후 15여 년 동안은 남한과 교류를 적극적으로 해오고 있는 과정에 있다. 그런 탓인지 그들은 남한이나 북한의 시문학에 대해 어느 정도는 이해하고 있으면서 나름대로 자신들의 시문학을 다듬어 가고 있다 할 것이다. 인구 200만 가운데 시인 90여 명이 중국 조선족 시문학이란 나무를 가꾸어 오고 있는 셈인데2), 50년이란 세월이 흐르긴 했지만 중국의 정치 체제와 관련, 극히 제한적인 교류와 감시의 눈 탓으로 흐른 세월에 비하면 그 나무가지와 줄기가 무성하게 자라나진 못한 것 같다. 그러나, 그동안의 중국만의 현실적인 여건을 감안한다면 그 시문학이라는 나무를 키워올 수 있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많은 시인들의 각고의 노력이 밑거름이 되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특히, 시문학은 인간의 주관적인 정서를 가장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예술형태이므로 대사회적 대인간적으로 미치는 영향력이 또한 적지 않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공유할 수 있는 뿌리 깊고, 잎 무성하고, 열매 또한 상큼한 우람한 나무로 키워 나가아야 할 것이다. 이 일을 돕기 위해 굳이 한 가지만 조언한다면, 모방이나 흉내내기가 시문학에서의 능력이고 진실일 수 없다는 사실이다. 모방은 어디까지나 습작기에 있을 수 있는 과정일 뿐이지 그 자체가 목표이어서는 안 된다. 나만이 가질 수 있는 빛깔과 향기와 열매를 위해 충분히 햇빛을 받을 수 있도록 필요하면 가지치기도 해야 하고, 영양분도 공급해 주어야 함에 틀림없지만, 철저하게 내가 서 있는 토양과 그 기후에 잘 자랄 수 있는 수종(樹種)이어야 한다는 사실이 무엇보다도 먼저 전제되어야 할 것이다. .............. 1) 필자가 읽은 중국 조선족 시인 명단 리 욱․임효원․설 인․김 철․김성휘․리삼월․리상각․김경석 김응준․김태갑․허룡구․박 화․김문회․김동진․남영전․리성비 석 화․리임원․주성화․신현철․박설매․김응룡․리근영․리해룡 마송학․최진성․리 중․박성훈․김 충․남철심․김 욱․허련화 전홍일․강효삼․윤청남․김경희․남상수․허창열․김창영․리 복 박천교․박은호․정 철․김동석․한 춘․채택룡․황장석․전경업 최정수․김기덕․리범수․김철호․한소리․김영수․김해룡․신창수 현규동․전광훈․황춘옥․김승종․양용철․리동권․리송주․한수봉 한동해․한석윤․김성우․류전영․황령향․장련춘․림 철․심정호 송정환 외(이상 73명의 580편) 2) 월간 「연변문학」 1999년 1월호에 실린 중국 조선족 문학인 주소록에 의하면 전체 문학인 375명 가운데 시인이 약 90명 내외가 되지 않을까 추산된다. 그 근거로는 연변지구에만 268명의 문학인 가운데 24%인 64명이 시인임을 감안한다면 나머지 북경․흑룡강․료녕․길림․장춘․통화 지구도 같거나 비슷하다고 전제, 꼭 그렇다고 볼 수는 없지만, 26명으로 계산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위 명단에는 작고한 문인도 몇 분 포함되어 있고, 필자가 이미 읽었지만 현재 자료를 가지고 있지 않은 흑룡강 신문 지상에 발표된 상당수의 시작품 등은 포함시키지 않은 점 등을 감안하면 73명 580편이란 숫자는 편의상의 숫자임을 이해해 주기 바란다. 그리고 연변작가협회는, 金浩根씨에 의하면 2000년 4월 현재, 505명의 회원에 87명의 이사, 주석 1명, 상무 부주석 1명, 겸직 부주석 11명으로 구성되었다 함.
1191    윤동주, 아현동 굴레방다리 옛 간이역 앞 하숙방에서 詩 쓰다 댓글:  조회:4246  추천:1  2016-03-12
尹東柱 그 介潔性의 詩와 삶/이수화| 尹東柱 그 介潔性의 詩와 삶 이수화 별 하나에 동경과 아름다운 말 한 마디씩을 불러보던 윤동주 시인-.   하늘과 바람과 별은 하늘의 존재며 영원한 세계이기에 그가 노래한 시와 생애는 아름답고, 아름답기에 숭고하지 않을 수 없다. 그의 숭고한 노래와 생애. 산도 아니며 바다도 나무도 아닌 별과 바람과 하늘을 동경한 그의 노래는 하늘에 닿아 영원히 산다. 하늘이, 별이, 바람이 끝내 숨을 거두는 일이 없듯이 그의 천상적인 것들을 노래한 시는 영원한 생명을 지니고 있다. 큰 유성이 공중에서 다 타지 못한 채 운석(隕石)이 되듯이 그의 노래 중에도 몇 몇 노래의 운석은 비록 존재할지라도-.   그리고 그의 숭고한 생애는 1940년대 암울했던 어둠 속에서도 늠렬(凜烈)한 시를 썼고 마침내 아까운 28세의 젊음을 일제에 꺾이우고 말았다는 사실로서 완성된다. 그것은 순열(殉烈)이었다. 시를 위하여 몸을 바쳐 죽은 사람, 殉烈-. 총과 칼보다도 강한 것으로써 시인은 순열에 이르렀다. 최후까지 모국어로 노래했고, 고고한 정신으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괴로워 한 생애였다. 1941년 11월 5일 별을 헤던 밤,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 위에 윤동주 시인은 이름자를 써보고 흙으로 덮어버립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그의 명시을 끝맺는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우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우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게외다. -별 헤는 밤 끝 연 그 27년 후, 그러니까 윤동주 시인이 그의 시 의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 위에 자신의 이름자를 써 보고 흙으로 덮어버린 다음, 그의 이름자가 묻힌 언덕 위에도 무업위에도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봄이 오면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것이라고 예언한 27년 후, 그의 이름자는 정녕 자랑스럽게 밤이면 밤에도 무성한 별빛처럼 빛나게 되었다. 1968년 11월 3일, 연희동산에 그의 시비가 세워졌던 것이다. 을 쓴지가 27년 후의 일이며 윤동주 시인 전생애 28년과 버금가는 세월 뒤의 일이고, 그의 순절 23주기 째 되는 해의 일이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와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1941년 2월 20일 이렇게 높이 250센티미터, 너비 115센티미터의 화강석 비면에 각자된 그의 비문 , 윤동주 시인 원고지 자필시를 확대하여 각자해 냈고, 그의 아우 尹一柱 교수의 설계와 연세대학교 총학생회 주선으로 세워진 ‘윤동주 시비’- 그 비음(碑陰)에 적힌 그의 행적기를 본다. 윤동주는 민족의 수난기였던 1917년 독립운동의 거점 북간도 명동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자랐고, 1938년 이 연희동산을 찾아 1941년에 문과를 마쳤다. 그는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학업을 계속하며 항일 독립운동을 펼치던 중 1945년 2월 16일 일본 후꾸오까 형무소에서 모진 형벌로 목숨을 잃으니 그 나이 29세였다. 그가 이 동산을 거닐 때 지은 구슬 같은 시들은 암흑기 민족 문학의 마지막 등불로서 겨레의 가슴을 울리니, 그 메아리 하늘과 바람과 별과 더불어 길이 그치지 않는다. 여기 그를 다르고 아끼는 학생, 친지, 동학들이 정성을 모아 그의 체온이 깃들인 이 언덕에 그의 시 한 수를 새겨 이 시비를 세운다. 1968년 11월 3일 연세대학교 총학생회 이와 같은 비음의 행적기가 적힌 윤동주 시인의 시비는 그가 한 때 기숙사 생활을 하던 건물 바로 앞에 자리하고 있다. 1938년부터 41년까지 연희전문 문과를 다닌 그는 1940년 일제의 침략전쟁 관계로 기숙사의 급식이 조악해지자 정병욱(鄭炳昱, 서울대 문리대 교수)과 함께 종로구 누상동에 하숙을 구해 나온다. 이 하숙방에서 1년쯤 한밤중에만 시를 썼고, 그의 노래는 유고가 되어 다른 많은 시편들과 함께 단 한 권의 유고시집로 그가 옥사한 후 정병욱 교수의 주선에 의해 빛을 보게 된다. 그가 ‘서시’를 쓰던 1941년경은 조선 총독부가 문예지 및 일간 신문 등을 폐간시키고 일본어 사용을 강요하며 한글 사용을 억제하던 시기였고, 지식인의 에비 접속과 투옥이 자심하던 때였다. 일제 암흑기, 민족혼과과 시혼과 글과 말, 그리고 하늘의 별조차 바람에 스치우는 어둡고 암울한 시대임에도 그는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겠노라고 노래했다. 정직하고 맑으며 고결한 시인의 기품이 수 놓여진 그의 ‘서시’는 결국 윤동주가 일제 말 암흑기의 민족시인으로 순교자가 됨을 예언한 십계명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남성적인 페이소스가 정제된 그의 서정 시편들에서 일본에 대한 저항정신을 읽어낼 수 없다고 한다면 윤동주 시인의 태생과 성장환경을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가 일본 땅에 건너가 영문학을 공부하다가 사상범으로 피검되어 끝내 옥사한 사실은 두말할 필요도 없고 1931년 3월 태생지인 간도에서 국민학교를 졸업할 때는 김동환의 시집을 접하게 된다. 1981년 만죽구 간도성 용정에서 출생한 윤동주에게 기독교 장로인 조부와 동경과 북경 유학을 했던 부친은 교육적으로나 훈육면에서 충분한 혈족들이었고, 특히 외삼촌 김약연은 독립운동가로서 윤동주에게 애국정신을 심어주는데 많은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간도 용정의 은진 중학 시절의 윤동주가 문학 뿐 아니라 축구와 수학 성적이 뛰어났다는 사실은 훗날 그의 시가 페이소스만으로 함몰하지 않고 이지적인 시혼을 담을 수 있었으며, 시대적인 어둠을 극복하려는 의지의 시인이 되는 정신적, 육체적 구합체였던 것이리라. 그리하여 1936년 평양 숭실 중학을 다니던 전후부터 본격적인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다. 간도 연길에서 발행되던 지에서 동시 수 편을 발표한 것이 그것이며 1938년 연희전문에 입학하면서부터 그의 시작 활동이 본격화되는 것이다. 그 결정(結晶)이 바로 연전을 졸업하고 간도로 귀향하던 때 원고본으로 상재한 였다. 그 당시 아직 세상에 내놓지 못한 그의 첫시집이자 마지막 시집 원고본 한 부를 연전 후배 정병욱에게 맡기고 도일하여 윤동주는 1942년 入校大學에 적을 뒀다가 同志社大學 영문과로 옮겼다. 그 2년 후 그는 독립운동 혐의로 체포되어 2년 언도를 받고 福岡 형무소에 투옥, 조국광복을 불과6개월 앞둔 채 그는 일제의 잔혹한 고문 끝에 옥사했던 윤동주 시인. 그는 운명하면서 일본인 간수가 듣기에 알아들을 수 없는 외마디 소리를 외치고 운명했다는 것이다. 무엇이라고 그는 부르짖었을까. 최후로 그는 이렇게 부르짖었을까.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다고.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한 죄밖에 없노라고. 그렇다. 조국을 사랑한 죄밖에 없노라고 그는 분명히 최후의 절명사를 외쳤을 것이다. 母國語로-. 그의 사랑하는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어머니이신 조국의 노래를-. “형님이 옥사하자 아버지와 당숙 윤영춘 선생은 폭격의 위험을 무릅쓰고 현해탄을 건너 한줌의 재로 변한 그의 유해를 모셔왔습니다. 그 때 우리는 살던 용정에서 약 2백리 떨어진 두만강에 있는 웃 삼봉역까지 마중을 갔었는데 그 대의 일을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그곳에서부터 유해는 아버지 품에서 내가 받아 모시고 긴긴 두만강 인도교를 걸어서 건넜습니다. 2월 말의 춥고 몹시 흐린 날, 걸어서 건너는 두만강 다리는 어찌도 그리 길어보이던지-. 그것은 동주형에게는 사랑하던 고국을 마지막으로 떠나는, 아니 세상을 마지막으로 떠나는 교량 같았습니다. 다리 끝에 이르러 그곳에 버티고 서서 날카로운 눈초리로 지켜보는 일본 헌병을 보았을 때는 다시 한번 치미는 울분을 참아야 했습니다.” (-아우 윤일주 씨의 말) 이렇게 그는 한 줌의 재가 된 채 부친의 품에 안겨 현해탄을 건넜고, 사랑하던 조국 땅에도 묻히지 못하고 아우의 품에 안겨서 두만강 긴긴 다리를 건너 마침내 고향 용정에 묻혔다. 故鄕에 돌아온 날 밤에 내 白骨이 따라와 한방에 누웠다. 어두운 방은 宇宙로 通하고 하늘가에선가 소리처럼 바람이 불어온다. 어둠 속에서 곱게 風化作用하는 白骨을 들여다보며 눈물짓는 것이 내가 아니라 우는 것이냐 白骨이 우는 것이냐 아름다운 魂이 우는 것이냐 志操 높은 개는 밤을 새워 어둠을 짖는다. 어둠을 짖는 개는 나를 쫓는 것일 게다. 가자 가자 쫓기우는 사람처럼 가자 白骨 몰래 아름다운 또 다른 故鄕에 가자. 이 시 은 윤동주 시인이 가장 정력적인 시작을 하던 1941년에 씌어진 작품이다. 뿐만 아니라 , . < 十字架> 등 그의 시편 중 탁월한 작품들이 이해에 씌어졌는데 이 작품 은 한국현대시의 문제작이 된다. 그의 서정시편들 가운데 드문 상징시이며 문학사적으로 성공을 거둔 작품으로서 시인 윤동주의 시적 이데아가 매우 함축된 작품이기 때문이다. 연희전문 졸업을 두세 달 앞둔 시절 그는 지금의 아현동 굴레방다리 옛 간이역 앞으로 하숙을 옮기고 계속 하숙방에서 한밤중에 시를 썼다. 9월에 을 쓰고 11월에 , 등 명작들이 씌어지는데, 은 제목부터가 상징적인 것이다. 즉, 육신의 고향인 북간도를 더나 마음의 고향인 조국의 서울 굴레방다리 하숙방에 돌아와 누웠으나 여기도 그의 영혼은 안주할 수가 없다. 암울한 1940년대의 조국(서울)은 그에게 정녕 마음과 육신을 편히 누일 고향이 아니었던 것이다. 하늘과 바람과 별의 天上的 인 세계를 노래하고자 동경하는 그에게 조국(서울)은 너무도 ‘어둔 방’이며 ‘하늘에선가 소리처럼 바람이 불어오는’ 음울하고 불안한 타양 같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의 의식은 지조 높은 개로 상징한 자기가 신의 내면적 의지의 소리에 쫓기듯 ‘아름다운 도 다른 고향에 가자’라고 재촉한다. 육신의 고향인 북간도도 아니고, 마음의 고향인 조국도 아닌 도 다른 아름다운 고향에 가자고. 이렇게 육신의 고향도 마음의 고향도 상실하게 된 (일제에 빼앗겼으므로) 그에게 남은 것이란 무엇이었겠는가. 고독이었을 뿐이다. 사람에게 있어서 고향(정신적 육체적) 상실처럼 고독한 처지가 도 달리 있겠는가. 하물며, 시인에게 있어서 조국이라는 정신적 고향상실처럼 참담한 고독이 또 있겠는가. 시인 윤동주의 고독은 그리하여 마침내 천상적인 구원의 길을 향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지상적인, 현실적이 아닌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즉 이데아의 세계이다. 에 이어 쓴 으로 그의 이데아를 추구하는 시작은 마침내 개화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15일 뒤에 완성한 에서 시인 윤동주는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이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겠노라고 저항의 혼불을 조용히 태워 올리는 것이다. 영원히 꺼지지 않는 천상의 불인 별의 시인 윤동주-. 하늘에 별이 뜨는 한 그는 영원히 고독하지 않을 것이다. 민족이 久存하는 한 그는 영구히 우리의 큰 별인 까닭에-.
윤동주의 散文과 詩의 관련양상 - 산문 와 시 을 중심으로 - 류 양 선 1. 머리말 2. 새로운 출발에 즈음하여 ; 산문 3. 잃어버린 ‘나’를 찾아서 ; 시 4. 맺음말 1. 머리말 윤동주는 모두 4편의 산문을 남겼다. , , , 가 그것이다. 이 산문들은 시인의 학창 시절의 모습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소중한 자료이다. 연희전문학교 시절에 씌어진 이 산문들은 당시의 시인이 어떤 생활을 하고 있었는지, 그리고 무엇에 관심을 갖고 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를 세세하게 전해주고 있는 것이다. 윤동주의 산문들은 이처럼 그 자체의 내용만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하지만 그의 산문들은 그의 시작품들과의 관련 속에서 더욱 빛을 발하고 있다. 시인의 산문은 때때로 그 시인의 시작품을 이해하는 데 귀중한 실마리를 제공해 주기도 하는데, 윤동주의 경우가 특히 그러한 것이다. 이 글은 윤동주의 산문과 시의 관련양상에 대한 일련의 연구 중의 하나이다. 윤동주의 산문을 상세히 검토하는 것은 그의 시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 무엇보다 필요한 작업이다. 이 글에 앞서 필자는 윤동주의 산문 와 시 의 관계에 대해 검토한 바 있다. 류양선, 「윤동주의 재론」(『성심어문론집』, 2003. 2) 참조. 그의 시와 산문이 모두 자신의 내면을 응시하는 데서 우러나오는 진솔한 고백을 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글에서는 윤동주의 문학이 지니는 이러한 특성에 착안하여, 산문 와 시 을 중심으로 그의 산문과 시의 관련양상에 대해 검토해 보기로 한다. 논의가 진행됨에 따라 차차 밝혀지겠지만, 산문 와 시 은 그 씌어진 시기가 거의 같을 뿐만 아니라, 그 내용에 있어서도 적지 않은 유사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 글에서는 먼저 산문 가 산문 에 대한 연구로는 홍장학, 『정본 윤동주 전집 원전연구』(문학과 지성사, 2004), 지현배, 『영혼의 거울』(한국문화사, 2004) 등이 있다. 어떤 정황 속에서 씌어졌으며, 그리하여 시인의 어떤 생각과 고민을 드러내고 있는지를 살펴보고, 이를 통해 시 이 시 에 대한 상세한 분석으로는 김남조, 「윤동주 연구」(권영민 편, 『윤동주 연구』, 문학사상사, 1995), 김현자, 「대립의 초극과 화해의 시학」(위의 책), 최동호, 「윤동주 시의 의식현상」(위의 책) 등을 들 수 있다. 씌어지게 된 최초의 시상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를 밝혀보고자 한다. 그러나 시와 관련된 산문을 검토함으로써 그 시작품 최초의 시상을 알게 되었다고 해서 그 시에 대한 해석이 완료되는 것이 아님은 물론이다. 관련 산문을 검토하는 것은 그 시작품을 쓰게 된 첫 착상을 밝혀 그 시에 대한 오독을 방지하려는 것일 뿐, 관련 산문의 내용을 뛰어넘는 시의 깊은 의미를 무시하려는 것이 아니다. 산문은 산문이고 시는 시인 것이다. 더욱이 윤동주의 시는 시어가 지닌 고도의 상징성으로 인해, 순도 높게 정화된 내면의 정신을 표현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더욱 깊은 차원의 기독교적 의미를 머금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이 글에서는 시 이 지니고 있는, 산문 을 넘어서는 이러한 차원의 의미까지 밝혀볼 생각이다. 그런데 이를 다시 생각하면, 윤동주의 시가 제아무리 순결한 내면과 깊은 종교성을 지니고 있다 할지라도, 아니 그럴수록 그것이 시인 자신의 삶에서 우러나온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렇다면 여기서 그가 실제로 겪었던 개인적 방황과 시대적 고민을 드러내고 있는 산문이 다시금 중요해진다. 말하자면 그가 처해 있던 현실상황에 대한 그만의 고유한 반응이 그의 시에 고도의 상징성을 부여하도록 했다고 할 수 있기에, 이번에는 그의 시에 대한 해석이 그의 산문으로 하여금 좀더 깊은 의미를 지닐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시와 산문은 서로를 비추어 주며 서로에게 의미를 부여한다. 그러니까 산문 읽기에서 시작해서 시의 해석으로 나아가는 것은 시 읽기에서 시작하여 산문의 해석으로 나아가는 것과 같다. 단지 논의의 편의상, 산문 를 먼저 읽을 따름이다. 2. 새로운 출발에 즈음하여 ; 산문 ‘終始’란 무엇인가? ‘마치고 시작한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산문 는 시인이 지난 일을 끝맺고 뭔가 새로운 출발을 하기 위해 쓴 글이다. 이 글에는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나면 어디로 가서 무엇을 할 것인가 하는 당면한 현실적인 문제에 대한 고민이 들어 있고, 인간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인가 하는 인생행로와 관련된 더욱 근원적인 문제에 대한 생각도 암시되어 있다. 그러면 산문 는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 글인가? 의 내용을 검토하기 위해, 먼저 이 산문에 담겨 있는 시인의 행로를 추적하면서 이 산문이 씌어진 시기를 추정하고, 다음에 이 산문이 시인의 전체 인생행로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 글인지 살펴보도록 한다. 산문 는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終點이 始點이 된다. 다시 始點이 終點이 된다. 아츰, 저녁으로 이 자국을 밥게 되는데 이 자국을 밥게된 緣由가 있다. 일즉이 西山大師가 살아슬뜻한 욱어진 松林속, 게다가 덩그러시 살림집은 외따로 한채뿐이엿으나 食口로는 굉장한것이여서 한 집웅밑에서 八道사투리를 죄다 들을 만큼 뫃아놓은 미끈한 壯丁들만이 욱실욱실하엿다. 이곳에 法令은 없어스나 女人禁納區엿다. (…중략…) 눈온날이 였다. 同宿하는 친구의 친구가 한時間 남짓한 門안들어가는 車時間까지를 浪費하기 爲하야 나의 친구를 찾어들어와서 하는 對話엿다. “자네 여보게 이집 귀신이 되려나?” “조용한게 공부하기 자키나 좋잔은가” “그래 책장이나 뒤적뒤적하면 공부ㄴ줄 아나 電車간에서 내다볼 수 있는 光景 停車場에서 맛볼수있는 光景, 다시 汽車속에서 對할수있는 모든일들이 生活아닌것이 없거든, 生活때문에 싸우는 이 雰圍氣에 잠겨서, 보고, 생각하고, 分析하고, 이거야말로 眞正한 意味의 敎育이 아니겠는가 여보게! 자네 책장만 뒤지고 人生이 어드럿니 社會가 어드럿니 하는것은 十六世紀에서나 찾어볼일일세, 斷然 門안으로 나오도록 마음을 돌리게” 나안테하는 권고는 아니엿으나 이말에 귀틈뚤려 상푸둥 그러리라고 생각하엿다. 『사진판 윤동주 자필 시고전집(증보판)』(민음사, 2002) - 이하, 『사진판 전집』이라고만 한다 -, 127∼128면. 의 초두인 이 부분은 윤동주가 문안으로 들어가게 된 동기와 그리하여 매일 아침 저녁으로 같은 길을 다니게 된 연유를 잘 말해 주고 있다. 그는 당시에 연희전문학교 기숙사에 있었는데, 친구의 친구가 하는 말을 듣고는 “공부도 生活化하여야 되리라 생각하고 불일내에 門안으로 들어가기를 內心으로 斷定해 버렷”던 『사진판 전집』, 128면. 것이다. 그리하여 “일찍이 西山大師가 살았을 듯한 우거진 松林 속”에 외따로 위치한 ‘女人禁納區’였던 기숙사에서 나와, 등하굣길에서나마 살아있는 현실을 접할 수 있는 문안으로 거처를 옮겼고, 그 결과 친구의 친구가 했던 말대로 “電車간에서 내다볼 수 있는 光景, 停車場에서 맛볼 수 있는 光景, 다시 汽車속에서 對할 수 있는 모든 일들” 즉 ‘生活’을 보게 되었고, “生活때문에 싸우는 이 雰圍氣에 잠겨서, 보고, 생각하고, 分析하”게 되었는데, 산문 는 이처럼 ‘생활’을 보고 생각하고 분석한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 요컨대 는 기숙사에 갇혀 있던 윤동주가 학교라는 좁은 울타리 밖으로 나와, 서울 거리에서 대하게 된 풍경을 기록하고 그에 대한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서술해 놓은 산문인 것이다. 이처럼 윤동주가 기숙사를 나와 문안으로 들어간 경위에 대해, 그리고 그 이후 하숙집을 이리저리 옮겨다닌 경위에 대해, 그의 지기이자 연희전문학교 2년 후배였던 정병욱은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태평양 전쟁이 벌어지자 일본의 혹독한 식량 정책이 더욱 악화되었다. 기숙사의 식탁은 날이 갈수록 조잡해졌다. 학생들은 맹렬히 항의를 했으나 막무가내였다. 당국의 감시가 철저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동주가 4학년으로, 내가 2학년으로 진급하던 해 봄에 우리는 하는 수 없이 기숙사를 떠나기로 작정을 했다. 마침 나의 한 반 친구의 알선으로 누상동 마루터기에 조용하고 조촐한 하숙방을 쉽게 얻을 수 있었다. 우리는 매우 명랑하고 유쾌한 하숙 생활을 한 달 동안 즐길 수 있었다. 그러나 한 달이 지난 뒤 하숙집 형편으로 그 집을 떠나야 할 신세가 되었다. 참 좋은 하숙이었는데, 실망과 아쉬움에 가득 찬 마음으로 두 사람은 새 하숙을 구하려 그 집 대문을 나섰다. 누상동에서 옥인동 쪽으로 내려오는 길목 전신주에서 우연히 ‘하숙 있음’이라는 광고 쪽지를 발견했다. 누상동 9번지였다. 그 길로 우리는 그 집을 찾아갔다. 그런데 집주인의 문패는 김송(金松)이라 씌어 있었다. 우리는 서로 바라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설마하고 대문을 두들겨 보았더니 과연 나타난 집주인은 소설가 김송 씨 바로 그분이었다. 1941년 5월 그믐께 우리는 소설가 김송 씨의 식구로 끼어들어 새로운 하숙 생활이 시작되었다. 정병욱, 「잊지 못할 윤동주 형」, 『바람을 부비고 서 있는 말들』(집문당, 1980), 15∼16면. 이러한 우리의 빈틈없고 알찬 일상 생활에 난데없는 횡액이 닥쳐왔었다. 당시에 요시찰 인물로 되어 있었던 김송 씨가 함흥에서 서울로 옮겨온 지 몇 달이 지난 후인지라 일본의 고등계(지금의 정보과) 형사가 거의 저녁마다 찾아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하숙집 주인이 요시찰 인물인 데다가 그 집에 묵고 있는 학생들이 연희전문학교 문과 학생들이기 때문에 그들의 눈초리는 날이 갈수록 날카로와졌다. 무시로 찾아와서는 서가에 꽂혀있는 책 이름을 적어 가고, 고리짝을 뒤지고 편지를 빼앗아가는 법석을 떨었다. 여름 방학이 끝나고 가을 학기에 올라와서 우리는 다시 이사짐을 꾸리고 이번에는 북아현동으로 하숙을 옮겼다. 7, 8명의 하숙생이 들끓는 전문적인 하숙집이었다. 오붓하고 가족적인 분위기에서 뒤숭숭한 전문적인 하숙집으로 옮겨온 우리는 퍽 당황했었다. 어딘가 어설프고 번거롭고 뒤숭숭한 그런 분위기였다. 게다가 졸업반인 동주 형의 생활은 무척 바쁘게 돌아갔다. 진학에 대한 고민, 시국에 대한 불안, 가정에 대한 걱정, 이런 일들이 겹쳐서 동주 형은 이때 무척 괴로워하는 눈치였다. 위의 글, 18면. 정병욱의 이 회고에서 당시의 시국의 불안과 일제의 탄압의 정도를 엿볼 수 있거니와, 그와 동시에 윤동주가 개인적인 문제나 시대적인 문제로 어떤 고민을 안고 있었는지를 또한 짐작할 수 있다. 어쨌든 이 회고에 의해, 연희전문학교 4학년 시절에 윤동주가 어떻게 거처를 옮겨다녔는지 밝혀진 것이다. 이것을 『윤동주 평전』의 저자 송우혜는 “누상동 마루터기 하숙집에서 한 달→누상동 9번지의 소설가 김송(金松) 씨 집으로 옮겨서 5월 그믐 때부터 여름방학 끝날 때까지→북아현동 하숙 전문집으로 옮겨서 9월부터 12월 말의 4학년 졸업 때까지”라고 송우혜, 『윤동주 평전』(푸른역사, 2004), 288면. 요약하고 있다. 이상에서 드러난 사실을 염두에 두고 산문 를 다시 읽어보면, 윤동주가 를 쓴 개략적인 시기가 저절로 밝혀진다. 산문 의 내용이 누상동에서 신촌에 이르는 등굣길의 풍경으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이 산문이 씌어진 시기를 윤동주가 4학년 때인 1941년 5월경에서 9월경 사이로 추정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지금까지 가 씌어진 시기를 1941년경으로 보아 왔던 것을 송우혜, 앞의 책, 551면 및 『사진판 전집』의 연보 참고. 그런데 홍장학 편, 『정본 윤동주 전집』(문학과 지성사, 2004)에서는 산문 가 씌어진 시기를 1939년으로 잡고 있는데(161면 및 166면), 무슨 근거에서 그렇게 추정했는지 알 수 없다. 좀더 좁힌 것으로서, 시 의 창작시기와 관련하여 중요한 의미를 띤다. 의 창작일자가 작품 말미에 1941년 9월 31일로 적혀 있음을 감안할 때, 산문 가 씌어진 시기에 대한 이러한 추정은 이 시가 산문 와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방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산문 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검토해볼 계제에 이르렀다. 하지만 여기서 잠깐, 정병욱의 회고에 다시 한 번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앞의 인용에서 정병욱이 말한 바, 소설가 김송 씨의 집에서 하숙하던 당시 윤동주와 더불어 보낸 ‘빈틈없고 알찬 일상 생활’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 하학 후에는 기차편을 이용했었고, 한국은행 앞까지 전차로 들어와 충무로 책방들을 순방하였다. 지성당(至誠堂), 일한서방(日韓書房), 마루젠(丸善), 군서당(群書堂) 등, 신간 서점과 고서점을 돌고 나면 ‘후유노야도’(多の宿)나 ‘남풍장’(南風莊)이란 음악 다방에 들러 음악을 즐기면서 우선 새로 산 책을 들춰보기도 했다. 오는 길에 명치좌(明治座)에 재미있는 프로가 있으면 영화를 보기도 했었다. 극장에 들르지 않으면 명동에서 도보로 을지로를 거쳐 청계천을 건너서 관훈동 헌 책방을 다시 순례한다. 거기서 또 걸어서 적선동 유길서점(有吉書店)에 들러 서가를 훑고 나면 거리에는 전기불이 켜져 있을 때가 된다. 이리하여 누상동 9번지로 돌아가면…… 정병욱, 앞의 글, 16∼17면. 정병욱이 윤동주와 함께 다녔던 하굣길을 적어놓은 대목이다. 두 사람은 신촌에서 기차를 타고 서울역에서 내려 전차로 갈아타고 명동에 있는 한국은행 앞까지 와서는, 그곳의 책방을 순방하고 음악다방이나 극장에 들르기도 하였다. 때로는 명동에서 도보로 관훈동까지 가서 그곳의 헌 책방을 다시 순례하다가 날이 어두워서야 그들의 거처인 소설가 김송 씨의 집으로 돌아갔던 것이다. 그런데 이 하굣길을 뒤집으면, 바로 윤동주가 산문 에서 그려낸 등굣길이 된다. 다만 등교할 때는 누상동 김송 씨의 집에서 정류장까지 걸어나와 전차를 타고 서울역까지 가서 기차로 갈아타고 신촌에 도착하여 학교에 가는 것이다. 여기까지 와서, “종점이 시점이 된다. 다시 시점이 종점이 된다.”고 하는 이 산문 첫 문장의 1차적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어제 하굣길의 종점이었던 전차 정류장이 오늘 등굣길의 시점이 되고, 아침 등굣길의 시점은 다시 저녁 하굣길의 종점이 된다는 뜻이다. 그리고 산문 에는 윤동주 혼자서 등교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 등굣길의 전차 안에서 또 기차 안에서 내다본 풍경이 곧 산문 의 주된 내용을 이루는 것이다. 여기서 잠깐, 윤동주의 등굣길을 축자적으로 따라가 보자. 윤동주는 하숙집에서 나와 전차를 타고 창 밖으로 사람들을 관찰하기도 하고, “현대로써 캄푸라지한 옛 禁城” 『사진판 전집』, 130면. (경복궁;인용자)의 성벽을 따라 달리다가 하늘을 쳐다보기도 한다. 또 성벽이 끊어지는 곳에서부터 여러 건물들을 내다보기도 하고, 여러 가지 생각에 잠기기도 하다가 남대문을 지나치게 된다. 이윽고 그는 서울역에 도착하여 종점을 시점으로 바꾸면서 기차로 갈아탄다. “느릿느릿 가다 숨차면 假정거장에서도” 『사진판 전집』, 135면. 서는 기차 안에서도 그는 창 밖으로 사람들을 관찰한다. 기차가 터널을 벗어났을 때, 그는 복선공사에 분주한 노동자들을 보면서 또 여러 가지 생각을 하다가, 신촌에 도착할 즈음 “이제 나는 곧 종시를 박궈야 한다.”고 『사진판 전집』, 137면. 생각한다. 그리하여 어떤 최종적인 목적지를 향해 새롭게 출발하고 싶어 하면서 이 산문을 끝맺는다. 홍장학, 앞의 글에서는 “원고지 23장 분량의 수필 는, 연희전문학교 기숙사에서 생활하던 윤동주의 의도적이고 주기적인 나들이, 즉 ‘신촌역⇆남대문 성벽 부근’ 체험과 그에 부수된 상념이 주된 내용을 이루고 있다.”고 하였는데, 이는 윤동주가 당시에 누상동에서 하숙을 하고 있었던 사실을 간과한 데서 비롯된 잘못이다. 에 나타난 길은 신촌에서 남대문을 왕복한 길이 아니라, 앞서 살폈듯 누상동에서 시작하여 남대문과 서울역을 거쳐 신촌에 이르는 등굣길이다. 윤동주가 전차 안에서 내다본 건물들이 “總督府, 道廳, 무슨 參考舘, 遞信局, 新聞社, 消防組, 무슨 株式會社, 府廳”(『사진판 전집』, 130면) 등이었다는 점이 이를 증명한다. 이런 건물들은 당시 경복궁에서 남대문에 이르는 길에서 볼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러면 윤동주가 등굣길의 차 안에서 내다본 풍경 또는 거리에서 마주친 풍경은 어떤 것들인가? 그리고 그는 그런 풍경을 대하면서 무슨 생각을 하게 되는가? 나만 일즉이 아츰거리의 새로운 感觸을 맛볼줄만 알엇더니 벌서 많은 사람들의 발자욱에 鋪道는 어수선할대로 어수선햇고 停留場에 머믈때마다 이많은 무리를 죄다 어디갓다 터트빌 心算인지 꾸역꾸역 작구 박아실는데 늙은이 젊은이 아이할것없이 손에 꾸럼이를 않든 사람은 없다. 이것이 그들 生活의 꾸럼이오, 同時에 倦怠의 꾸럼인지도 모르겠다. 이꾸럼이를 든 사람들의 얼골을 하나하나식 뜨더보기로 한다. 늙은이 얼골이란 너무오래 世波에 짜들어서 問題도 않되겟거니와 그젊은이들 낯짝이란 도무지 말슴이아니다 열이면 열이 다 憂愁 그것이오 百이면 百이 다 悲慘 그것이다. 이들에게 우슴이란 가믈에 콩싹이다. 必境 귀여우리라는 아이들의 얼골을 보는 수박게 없는데 아이들의 얼골이란 너무나 蒼白하다. 『사진판 전집』, 128∼129면. 나는 終點을 始點으로 박군다. 내가 나린곳이 나의 終點이오, 내가 타는 곳이 나의 始點이 되는 까닭이다. 이쩌른 瞬間 많은사람사이에 나를 묻는것인데 나는 이네들에게 너무나 皮相的이된다. 나의 휴맨니티를 이네들에게 發揮해낸다는 재조가 없다. 이네들의 깁븜과 슬픔과 앞은데를 나로서는 測量한다는수가 없는까닭이다. 너무 漠然하다. 사람이란 回數가 잦은데와 量이 많은데는 너무나 쉽게 皮相的이 되나보다. 그럴사록 自己 하나 看守하게에 奔忙하나보다. 『사진판 전집』, 134면. 이윽고 턴넬이 입을 버리고 기다리는데 거리 한가운데 地下鐵道도 않인 턴넬이 있다는것이 얼마나 슬픈일이냐, 이 턴넬이란 人類歷史의 暗黑時代요 人生行路의 苦悶相이다. 空然히 박휘소리만 요란하다. 구역날 惡質의 煙氣가 스며든다. 하나未久에 우리에게 光明의 天地가있다. 턴넬을 버서낫을때 요지음 複線工事에 奔走한 勞働者들을 볼수있다. 아츰 첫車에 나갓을때에도 일하고 저녁 늦車에 들어올때에도 그네들은 그대로 일하는데 언제 始作하야 언제 끝이는지 나로서는 헤아릴수없다. 이네들이야말로 建設의 使徒들이다. 땀과피를 애끼지않는다.(이하 2행 탈락) 그융중한 도락구를 밀면서도 마음만은 遙遠한데 있어 도락구 판장에다 서투른 글씨로 新京行이니 北京行이니 南京行이니 라고써서 타고다니는것이아니라 밀고다닌다. 그네들의 마음을 엿볼수있다. 그것이 苦力에 慰安이 않된다고 누가 主張하랴. 『사진판 전집』, 136∼137면. 여기 인용한 대목 중 첫 번째 것은 윤동주가 전차를 타고 내다본 풍경이고, 두 번째 것은 서울역에서 기차로 갈아타는 시간에 겪은 내용이며, 세 번째 것은 기차를 타고 내다본 광경이다. 여기 인용한 부분들은 윤동주가 문안으로 거처를 옮긴 뒤 등굣길에서 본 광경이 어떤 것인지 또 그러한 광경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잘 말해준다. 말하자면 기숙사에서 나와 공부를 생활화하고 있는 그의 마음을 보여주는 부분인 것이다. 먼저 위의 인용 중 첫 번째 것을 보자. 윤동주는 전차 안에서 내다본 광경, 즉 정거장마다 손에 손에 꾸러미를 들고 서 있다가 꾸역꾸역 전차에 오르는 사람들을 관찰하면서 말할 수 없는 비애감을 느낀다. 늙은이들의 얼굴은 세파에 찌들었고, 젊은이들의 얼굴은 우수와 비참 그것이며, 아이들의 얼굴은 너무나 창백하다. 도무지 활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사람들의 얼굴을 뜯어보다가, 그는 “내상도 필연코 그꼴일텐데 내눈으로 그꼴을 보지못하는것이 다행”이라고 『사진판 전집』, 129면. 생각한다. 여기까지 오면, 윤동주가 그 당시 민족의 가난한 현실과 자기 자신의 무력한 모습에 대해 거의 절망에 가까운 느낌을 지니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위의 두 번째 인용에서는 전차에서 기차로 갈아타는 짧은 시간에 마주치는 많은 사람들에 대한 느낌을 서술하고 있다. 윤동주는 그 많은 사람들과 자기 자신 사이에 어쩔 수 없는 거리감을 느낀다. 그에게는 사람들에게 다가설 방법이 없고, 그들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을 전할 길도 없다. 도무지 ‘휴머니티’를 ‘발휘’할 재주가 없다. ‘皮相的’이라는 단어가 이러한 사정을 웅변적으로 말해준다. 민족의 현실과 자신의 무력감에 대한 이러한 좌절감은 위의 세 번째 인용에서 인류역사와 인생행로로 확장되어 역시 비관적으로 나타난다. 기차가 터널 속에 들어서자 윤동주는 인류역사와 인생행로를 터널 속의 어둠에 비유하고 있다. 즉 인류역사는 암흑시대에 처해 있으며, 인생행로는 고민상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음 순간, 윤동주는 “未久에 우리에게 光明의 天地가 있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단순히 기차가 터널을 벗어나는 것만을 뜻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터널을 벗어나자, 그는 복선공사에 분주한 노동자들을 목격하게 된다. 땀과 피를 아끼지 않는 그들을 ‘건설의 사도들’이라고 부는 것으로 미루어, 아마도 윤동주는 이 노동자들에게서 미래의 희망을 발견하려 한 것인지도 모른다. 위의 세 번째 인용 중간에 2행 정도 탈락된 부분이 있는데, 홍장학은 그 앞뒤의 문맥을 검토하면서 이 탈락된 부분의 “내용 역시 ‘노동자 예찬’일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고(앞의 책, 644면) 추정하고 있다. 어쨌든 윤동주는 노동자들이 밀고 다니는 ‘도락구 판장’에 서투른 글씨로 ‘新京行’, ‘北京行’, ‘南京行’이라고 씌어 있는 것을 보고는, 그 끝없는 ‘苦力’에 ‘慰安’을 삼으려는 노동자들의 마음을 읽어낸다. 이것은 또한 자기 자신의 마음이기도 하다. 바로 여기서, 시인은 4학년 졸업반 학생으로서 지니고 있는 자기 자신의 처지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이제나는 곧 終始를 박궈야한다. 하나 내車에도 新京行, 北京行, 南京行을 달고 싶다. 世界一週行이라고 달고 싶다. 아니 그보다 眞正한 내故鄕이 있다면 故鄕行을 달겟다 다음 到着하여아할 時代의 停車場이 있다면 더좋다. 『사진판 전집』, 137면. 시인은 “곧 終始를 바꿔야 한다.” 이제는 1938년에 시작했던 연희전문학교의 생활을 마치고(終), 무엇인가를 새로 시작해야(始) 한다. 그래서 그는 노동자들처럼 “新京行, 北京行, 南京行을 달고 싶다.” 세계일주라도 하고 싶다. 하여간 어디론가 떠나서 무엇인가를 시작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종시의 바꿈이 단순히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상급학교에 진학하는 따위의 것만을 의미할 수는 없다. 그래서 그는 ‘眞正한 내 故鄕’ 또는 ‘時代의 停車場’을 생각한다. 시인은 자신의 삶에 뭔가 질적인 변화가 필요하고, 뭔가 새로운 도약이 요구되는 때가 왔음을 직감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 또는 도약은 좀더 근원적인 것으로, 한편으로는 시대적 의미를 지니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그러한 시대적 의미를 그 안에 품는, 무엇보다 깊은 차원의 내면적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지현배는 산문 가 순환론적 사고를 보여준다고 하면서, 이에 따라 윤동주의 시 전체를 ‘순환적 반복’으로 설명하고 있다.(앞의 책, 157∼174면) 그러나 산문 는 순환론적 사고를 보여준다기보다는 시인 내면에서의 근원적인 변화를 암시하고 있는 글이다. 또 연희전문 졸업반 당시에 씌어진 이 산문을 북간도 시기, 연희전문 시기, 토쿄유학 시기에 씌어진 시들 전체에 두루 관련시키는 것은 무리이다. 이 점, 그의 시 의 분석을 통해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3. 잃어버린 ‘나’를 찾아서 ; 시 윤동주의 시적 편력은 대략 3시기로 나누어 살필 수 있다. 1) 용정 은진중학교→평양 숭실중학교→용정 광명학원 시절(1934∼1937) 2) 연희전문학교 시절(1938∼1941) 3) 동경 유학 시절(1942년 이후)이 그것이다. 이 중 가장 중요한 시기는 두 번째 연희전문학교 시절이니, 바로 이 시기에 우수한 작품들이 많이 씌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연희전문 시절의 작품들을 잘 살펴보면, 그가 입학해서 졸업할 때까지 실로 눈에 띄게 시적 발전을 이루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까닭에 연희전문 시절을 다시 3시기로 나눌 수 있으니, (1938. 5. 10), (1939. 9), (1941. 2. 7)이 각각 그 3시기의 출발을 알리는 작품들인 것이다. 그러니까 연희전문 시절에만 국한시킬 경우, 과 은 각각 제1기와 제2기, 제2기와 제3기를 가르는 분수령적 의미를 지닌 작품이 된다. 은 자신의 내면을 투명하게 살펴, 스스로 존재론적 근거를 확립했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이 지닌 분수령적 의미에 대해서는 류양선, 앞의 글 참고. 은 여기서 더 나아가 시인이 종교적 실존으로 발돋움하기 시작했다는 의미를 지닌다. 이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은 이후에 씌어진 작품이다. “거 나를 부르는 것이 누구요,” 하고 시작하여 “나를 부르지 마오.” 하고 끝나는 『사진판 전집』, 154면. 의 “‘무서운 시간’이란 죽음의 사자가 오는 시간이요, ‘나를 부르는 것’은 죽음의 사자다.” 김우종, 「암흑기 최후의 별」, 권영민 편, 앞의 책, 149면. 이 시는 시인의 죽음 체험, 즉 가장 깊은 의미의 근본체험을 토로하고 있다. 그리하여 “죽음의 면전에서 훌륭한 처분 가능성으로서의 자기를 의식하는 것이다.” 김남조, 앞의 글, 30면. 이 시에서 볼 수 있는 죽음에 마주친 몸부림 이후, 시인은 홀로 하느님 앞에 마주서는 단독자 즉 종교적 실존으로 변화해 가게 된다. 윤동주는 이 ‘무서운 시간’을 거친 이후인 1941년 5∼6월경에 , (1941. 5. 31), (1941. 5), (1931. 5. 31), (1941. 5. 31), (1941. 6), (1941. 6. 2) 등의 기독교적 의미를 드러내는 시들을 쓰고, 1941년 9월에 이르러 (1941. 9)과 (1941. 9. 31)을 써서 그러한 종교적 의미를 심화시키게 된다. 그리고는 이어서 (1941. 11. 5), (1941. 11. 20), (1941. 11. 29), (1942. 1. 24)을 쓰면서 시적 성숙도를 더해가는 것이다. 이상에서 간단하게나마 윤동주의 시적 편력을 살펴보았거니와, 그렇게 한 것은 이 글에서 분석하고자 하는 작품인 (1941. 9. 31)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이다. 즉 에 대한 상세한 분석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이 작품은 이 시인이 종교적 실존으로 성숙해 나아가는 도정에 위치한 작품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먼저, 시 을 읽어보자. 잃어 버렸습니다. 무얼 어디다 잃었는지 몰라 두손이 주머니를 더듬어 길에 나아갑니다. 돌과 돌과 돌이 끝없이 연달어 길은 돌담을 끼고 갑니다. 담은 쇠문을 굳게 닫어 길우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길은 아츰에서 저녁으로 저녁에서 아츰으로 통했습니다. 돌담을 더듬어 눈물 짓다 처다보면 하늘은 부끄럽게 프름니다. 풀 한포기 없는 이길을 것는것은 담저쪽에 내가 남어 있는 까닭이고, 내가 사는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사진판 전집』, 162면. 全文이다. 이 시는 그 제목에서부터 산문 와의 관련성을 짐작하게 한다. ‘길’이란 말은 ‘종시’란 말의 변형이다. ‘마치고 시작한다’는 것이 바로 ‘길’을 떠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둘을 연결시켜 보면, 지난 일을 끝맺고 새로운 출발을 하기 위해 길을 찾아 나선다는 뜻이 된다. 산문 와 시 의 관련성은 의 문장과 의 시행을 서로 비교해 보면 좀더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의 다음 대목을 의 3, 4, 5연과 비교해 보자. 나는 내 눈을 疑心하기로 하고 斷念하자! 차라리 城壁우에 펄친 하늘을 처다보는 편이 더 痛快하다. 눈은 하늘과 城壁境界線을 따라 작구 달리는 것인데 이 城壁이란 現代로써 캄푸라지한 넷 禁城이다. 이안에서 어떤일이 일우어저스며 어떤일이 行하여지고 있는지 城박에서 살아왓고 살고있는 우리들에게는 알바가 없다 이제 다만 한가닥 希望은 이 城壁이 끈어지는 곳이다. 『사진판 전집』, 129∼130면. 여기서 보는 바와 같이, 산문 와 시 은 그 소재와 발상에서 서로 공통점을 보여주고 있다. 공통된 소재란 성벽과 돌담, 그 안과 밖, 성벽 또는 돌담 위에 펼쳐진 하늘 등이며, 공통된 발상이란 성벽 또는 돌담으로 성 안과 성 밖이 굳게 차단되어 있다는 것, 그래서 그 위로 높이 펼쳐져 있는 하늘을 쳐다본다는 것 등이다. 이러한 소재와 발상의 유사성은 시 을 쓰게 된 최초의 착상이 산문 에서 유래하였음을 말해 준다. 그러면 이제, 이 최초의 시상이 시에서 어떻게 발전하여 산문을 넘어서는 더욱 깊은 차원의 의미를 획득하게 되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길’이란 무엇인가? 사실 이 ‘길’이라는 단어처럼 다양한 의미층위를 지니는 말도 달리 찾기 어려울 것이다. 길은 어떤 목적지를 향해 갈 수 있도록 만든 일정한 너비의 공간을 뜻하는 것이면서, 또한 그 길을 가는 행위 자체인 노정이나 여정을 뜻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길은 세월(시간)의 흐름에 따라 우여곡절과 시련을 겪는 인생행로를 뜻하면서, 동시에 그런 인생을 살아가는 지혜로운 방법을 뜻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길은 진리를 찾아 나선 사람의 구도적 행각을 뜻하기도 하고, 그가 찾고 있는 진리 자체를 뜻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길이라는 말은, 땅 위에 난 일정한 너비의 공간이라는 길 최초의 의미를 제외하면, 모두가 상징이다. 요컨대 ‘길’이란 상징적 언어이며, 따라서 그 의미는 시시각각 변하면서 무한히 확장될 수 있다. 그 자유자재하고 무궁무진한 의미변용으로 인해, ‘길’이라는 어휘는 그 자체로 시적 함의를 갖는다. 그런 까닭에 ‘길’은 시인들이 즐겨 사용하는 상징적 시어가 되는 것이다. 윤동주의 시 에 나타난 ‘길’ 역시 이러한 상징적 언어로서, 그 의미의 폭이 상당히 큰 경우에 속한다. 여기서는 이러한 ‘길’의 의미변용에 유의하면서 이 시를 1∼2연, 3∼4연, 5연, 6∼7연의 4부분으로 나누어 읽어 보기로 한다. 잃어 버렸습니다. 무얼 어디다 잃었는지 몰라 두손이 주머니를 더듬어 길에 나아갑니다. 돌과 돌과 돌이 끝없이 연달어 길은 돌담을 끼고 갑니다. 1연; “잃어버렸습니다.” 하고 시작되는 이 시의 첫 행은 상실감을 다소 급박하게 토로하는 단정적 서술로 되어 있다. 이 급박하고도 단정적인 서술은 결코 잃어버려서는 안될, 가장 중요한 무엇을 잃어버렸다는 함의를 지닌다. 그게 대체 무엇인지 어디다 잃었는지 알 수 없고, 따라서 쉽게 되찾을 수 있는 성질의 것도 아니지만, 잃어버렸다는 느낌만은 확실하다. 그렇기 때문에 “두 손이 주머니를 더듬어 길에 나아”간다. 여기에는 가장 본질적인 무엇이 결여되어 있는 현재의 삶은 진정한 삶이 아니라는 느낌, 김남조, 앞의 글에서는 이 1연에 “표백된 것은 바로 신앙의 지표를 잃은 때의 그 막막함이다.”라고 하였다.(46∼47면) 어떤 의미에서는 이승의 삶 자체가 잃어버린 데서 시작하여 그것을 찾아가는 행위로 이루어진다는 생각이 숨어 있다. 그러기에 길에 나아가 걸음을 옮기면서도 두 손은 주머니를 더듬는다. 김현자, 앞의 글에서는 여기서의 “주머니는 길에 비하여 작고 내밀한 공간으로 화자의 내면과 동일화될 수 있다. 두 손으로 주머니를 더듬는 행위는 곧 잃어버린 대상이 화자의 내면에 존재해 있던 상임을 추정케 한다.”고 하였다.(266∼267면) 주머니를 더듬는다는 것은 시인이 뭔가 깊은 생각에 골똘히 빠져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더듬는 두 손은 자신의 내면세계를 향해 뻗어 있는 촉수이다. 따라서 시인이 밖으로 나간 것 자체는 무목적의 산책길에 불과하다. 이 산책길의 발걸음은 두 손이 주머니 속을 더듬는 것을, 즉 자신의 내면에 대한 성찰을 돕기 위한 행위일 뿐이다. 2연; 무목적의 산책길은 끝없이 이어지는 돌담길이다. “길은 돌담을 끼고” 간다. “돌과 돌과 돌이” 끝없이 이어진 돌담길이기에 길은 돌담에 따라 생겨났고 돌담을 의지해 계속된다. 본래적인 어떤 영원한 세상을 차단해 가리우고 있는 돌담, 그 돌담을 끼고 길이 나 있다. 담 너머 고궁 안은 바로 가까이 곁에 있지만, 그 안을 볼 수도 없고 그 안으로 들어갈 수도 없다. 하지만 그 담 너머 고궁이 있기에 돌담이 있고, 돌담이 있기에 길도 있다. 이런 까닭에 돌담길은 잃어버린 그 무엇을 찾을 수 없으나 어쩔 수 없이 그것을 찾아가야 하는 마음의 길이 된다. 1∼2연에 나타난 ‘길’은 실제 밖으로 나선 길이자 자신의 마음을 따라가는 길이기도 하다. 담은 쇠문을 굳게 닫어 길우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길은 아츰에서 저녁으로 저녁에서 아츰으로 통했습니다. 3연; 끝없이 이어진 돌담길을 걷다가 마침내 고궁으로 들어가는 문 앞에 이르렀다. 그러나 문이 닫혀 있어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 “담은 쇠문을 굳게 닫어 / 길 위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을 뿐이다. 잃어버린 무엇이 고궁 안에 있는데, 굳게 닫힌 쇠문에 막혀 들어가 찾을 수 없다. 게다가 담의 긴 그림자 또는 담이 던진 쇠문의 긴 그림자가 길 위를 덮고 있다. 이 긴 그림자는 어둠의 느낌과 함께 시간의 감각을 자극한다. 이제 해질녘이 가까워진 것이다. 이렇게 해서 지금까지의 공간 감각을 다음 연에서 시간 감각으로 바꾸기 위한 준비가 이루어지면서, 동시에 고궁의 안과 밖을 차단하고 있는 담과 쇠문은 시간의 벽이라는 의미를 띠게 된다. 인간은 이 시간의 벽을 뛰어넘을 수 없다. 여기서 또한, 다음 연과 관련하여 시간을 따라 걸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한계가 암시되기도 한다. 4연; “길은 아침에서 저녁으로 / 저녁에서 아침으로 통”해 있다. 이것은 무슨 말인가? 아침에서 저녁까지 걸었는데, 이제 다시 저녁에서 아침까지 걸어야 한다는 뜻이다. 말하자면 공간감각에 의지했던 길이 여기 와서 완전히 시간감각으로 바뀌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시에서의 공간(길)의 이동은 시간의 흐름이 그렇게 표현된 것일 따름이다. 아침이 저녁이 되고 저녁이 아침이 되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길은 이어진다. 길은 시간을 통해서만 자신을 드러낸다. 아침에서 저녁으로, 저녁에서 아침으로 통해 있는 길, 시점이 종점이 되고 다시 종점이 시점이 되는 길이다. 여기까지 와서, 이미 언급한 “종점이 시점이 된다. 다시 시점이 종점이 된다.”고 하는 산문 의 첫 문장의 2차적 의미를 알 수 있다. 즉 이것은 저녁이 아침이 되고 아침이 다시 저녁이 된다는 것, 말하자면 인생 행로란 시간의 흐름을 따라서만 걸을 수 있는 길이라는 뜻이다. 이처럼 산문과 시의 관계를 살피면 산문의 의미도 깊어진다. 인간은 이 길을 단축시켜 살아갈 수 없기에, 담 저쪽(고궁 안)을 걸어 볼 수 없다. 시간의 흐름을 따라서만 걷을 수 있는 길, 끝없이 걸어도 끝나지 않는 길, 죽음에 이르러서야 끝나는 길, 이것이 바로 인생행로이다. 이처럼 3연에 나타난 공간의 길은 4연에 와서 시간의 길, 인생행로로 바뀌었다. 돌담을 더듬어 눈물 짓다 처다보면 하늘은 부끄럽게 프름니다. 5연; ‘길’이라는 단어가 나타나지 않는다. 걸음이 멈추어졌기 때문이다. 내면세계를 더듬던 촉수가 그 바닥에 닿았기 때문이다. 이 전환점에서 시인은 자신의 내면을 고스란히 드러냄으로써, 6∼7연에서 볼 수 있는 영적인 길로의 의미변용을 준비하고 있다. 그렇다면 시인의 내면은 어떤 것인가? 담 이쪽의 삶임에도 담 저쪽을 향하는 그런 내면이다. 시인은 갈 수 없는 담 저쪽을 그리워하면서 주머니를 더듬던 손으로 돌담을, 이쪽과 저쪽의 경계를 더듬는다. 그러면서 눈물짓는다. 이 눈물은 담 이쪽, 현실세계에서의 삶에서 오는 슬픔의 표현이다. 본래적 자아를 떠나 비본래적 자아로 추락한 데서 오는 지극한 슬픔 때문에 눈물을 흘리는 것이다. 그러다가 문득 하늘을 쳐다본다. 그리고는 한없는 부끄러움을 느낀다. “쳐다보면 하늘은 부끄럽게 푸릅니다.” 이 시행은 “푸른 하늘을 쳐다보니 부끄러워집니다.”라고 바꾸어 읽을 수 있다. 이 시행은 후에 에서 “하늘을 우러러 /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로 변형된다. 쾌청한 하늘의 푸른 빛은 시인을 부끄럽게 하는데, 왜냐하면 시인의 내면이 거기 비추어 투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이 부끄러움 속에는 시인의 여리디 여린 마음이 들어 있고, 그런 시인이 스스로에게 부과하는 엄정한 자기성찰이 깔려 있으며, 시인만이 지닌 깨끗하고 명징한 윤리적 감각이 녹아 있다. 최동호, 앞 글에서는 이 시에서의 “부끄러움은 자아와 세계가 상호 이해의 한계에 부딪힐 때 자아의 내면성을 보장해 주는 감정이며, 현실에서의 자아의 비합리성을 표현하는 도덕적 가치로서 윤동주에게 의식된 것”이라고 하였다.(492면) 가슴을 열어 보여주는 투명한 슬픔과 따뜻한 사랑, 이런 것들로 시인은 6∼7연에서 볼 수 있는 영적 여로를 준비한다. 전우주적 높이를 지닌 푸른 하늘은 시인의 영혼을 비추는 거울이다. 하늘은 담 위에 높이 펼쳐져 담 이쪽과 담 저쪽을 두루 비추어 준다. 그리하여 이 세상에 추락한 비본래적 자아는 하늘에 계신 님을 통해서만 본래적 자아와 연결된다. 풀 한포기 없는 이길을 것는것은 담저쪽에 내가 남어 있는 까닭이고, 내가 사는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6연; 여기까지 와서, 신앙적 결단을 내릴 시간에 이르렀고, 시인은 조용히 마음을 정리하고 결단을 내리려 한다. 이제 시인이 내리려 하는 결단은 자신의 삶의 이유와 근거를 찾았기에 가능한 그런 결단이다. 그러기에 여기서부터 ‘∼(하)는 것은’→‘∼까닭이고’ 하는 담담한 설명적 어조가 나타난다. 시인은 “풀 한포기 없는 이 길”이지만, 그 길을 걷기로 하는 것이다. 하늘의 푸른 빛으로 자신의 내면을 맑게 씻어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담 저쪽에 남아 있는 본래적 자아, 푸른 하늘에 비추인 자신의 영혼을 보았기 때문이다. 풀 한포기 없는 길이란 말할것도없이 척박하기 짝이 없는 현실세계를 가리킨다. 여기서 “풀 한 포기 없는 이 길”은 산문 에서 보았던 윤동주의 등굣길을 연상시킨다. 등굣길에서 차창으로 내다본 창백한 얼굴들, 그런 풍경을 보고 느끼는 절망에 가까운 무력감 등은 어떤 방식의 합리적 해결도 불가능한 일제 말기 현실세계의 삶의 불모성 그 자체이다. 인간다운 본래적 삶을 영위할 수 없는 불모의 현실임에도 그 현실을 살아내겠다는 것은 본래적 자아, 즉 자신의 영혼을 찾아야만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와서, ‘길’은 두 번째의 의미변용을 일으킨다. 본래적 자아로 돌아가는 길, 그것은 이 세상의 길을 넘어선 신앙의 길이다. 본래적 자아가 남아 있는 담 저쪽은 내가 떠나온 곳이자 돌아가야 할 곳이다. 그리하여 ‘길’은 이제 영적 여로가 된다. 세상을 바라보는 나는 본래의 내가 아니다. 하늘에 비추어 그 푸른 빛에 씻기운 나만이 본래적 자아이다. 7연; 이 마지막 연에서 조용한 신앙적 결단이 드러난다. “내가 사는 것”은 6연에서 “풀 한포기 없는 이 길을 걷는 것”과 같은 의미의 다른 표현이다. 시인이 불모의 현실세계에서 살아가는 것은 오직 “잃은 것은 찾는 까닭”이다. 시인이 ‘잃은 것’은 담 저쪽에 남아 있는 ‘나’이다. 그런데 이 담은 고궁의 돌담이라 할 수 있으므로, 당시의 시대상황에 비추어 이 잃어버린 ‘나’를 민족적 정체성으로 생각해 볼 수도 있다. 특히 이것을 에서 살핀 일제 말기의 삶의 불모성과 관련시켜 보면, 이 시에 그러한 민족적, 시대적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고 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러나 그러한 의미가 이 시의 전체적 구도를 지배한다고 볼 수는 없다. 1연 첫 행에서 “잃어버렸습니다.” 하고 말했을 때의 그 ‘잃은 것’이란 지금까지 논의한 대로 본래적 자아이다. 이제부터 시인이 살아가는 것은 다만 본래적 자아를 다시 찾기 위해서, 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 그리하여 존재론적 갈망을 이루기 위해서일 뿐이다. 시인은 ‘다만’이라는 단어의 앞뒤에 쉼표를 두어, 오직 신앙으로만 가능성으로서의 인간 실존을 회복할 수 있음을 표나게 지적하였다. 오직 님을 향한 매순간의 결단을 통해서만, 나는 본래의 내가 된다. 이렇게 해서, 6~7연의 ‘길’은 인생행로이자 신앙의 길, 다시 말해 척박한 현실에서의 영적 여로가 된다. 이것은 “내가 사는 것은, 다만, /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하는, 한 치의 빈틈도 없는 명확한 서술로 뒷받침되어 있다. 김남조, 앞의 글에서는, “은 삶의 지표를 잃어버린 신앙의 회의기에 씌어진 작품으로 의 서원이 그 향방을 잃게 되는 자아 상실의 위기를 보여준다.”고(53면) 하였다. 그러나 윤동주의 시적 편력에 따르면, 은 오히려 신앙의 성숙기에 씌어진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 시의 마지막 행에서 “잃은 것을 찾는 까닭”이라 할 때, 잃었다는 그 자체에 의미가 부여된 것이 아니라, 오직 그 ‘잃은 것’을 찾기 위해서만 살아간다고 하는 다짐이 중요한 것이다. 윤동주는 이후, 등에서 이러한 신앙적 다짐을 반복하고 있다. 지금까지 ‘길’의 의미변용에 유의하면서 시 을 꼼꼼히 읽어보았다. 그리하여 이 시에 나타난 ‘길’은 땅 위에 난 돌담길에서부터 끝없이 이어지는 인생행로를 거쳐 영혼을 구원하기 위한 영적 여로까지 멀리멀리 이어져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 길은 푸른 하늘에 비추어 자신을 가다듬는 그런 길, 길 걸으며 님 그리고 님 그리며 길 걷는 그런 길이다. 시인은 이제 세상에 휩쓸려 가는 삶을 마치고, 오직 님을 향한 새로운 영적 여로를 시작하는 것이다. 시인에게는 오직 이 영적 여로만이 일제 말기 현실세계에서 삶의 불모성을 극복해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던 것이다. 끝으로 다시 한 번, 이 시에 최초의 시상을 제공한 산문 와의 관계를 생각해 보자. 이미 앞에서, 시 은 그 제목부터가 산문 의 변형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어떻게 달라졌는가? 의 ‘길’은 등굣길이자 생각의 길이었다. 의 ‘길’은 돌담길이자 마음의 길이다. 의 ‘길’은 학교 졸업을 앞두고 진로 선택 등의 현실세계에서의 방향을 찾아 고민하는 길이었다. 의 ‘길’은 잃어버린 자아, 잃어버린 영혼을 찾아 나선 존재론적 갈망에 따른 길이다. 이처럼 시 은 그 최초의 착상을 산문 에서 가져왔으나, 그것을 발전시켜 를 훨씬 뛰어넘는 시적 성과를 거두었다. 이렇게 된 것은 시 이 여러 상징시어들을 적절히 사용하여 ‘길’의 의미를 효과적으로 변용시키는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산문 가 시 의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글이라고 쉽게 말할 수는 없다. 시인은 의 마지막 부분에서, “眞正한 내故鄕이 있다면 故鄕行을 달겟다.”고 써 놓지 않았던가? 여기서 ‘진정한 내 고향’이란 시 에서 담 저쪽에 남아 있는 나, 즉 본래적 자아에 상응하는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과 같은 시기에 씌어진 (1941. 9) 역시 산문 와 밀접한 관계에 있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을 미처 다루지 못하였다. 미리 말해 두자면, 에서의 잃어버린 ‘나’는 에서의 ‘아름다운 혼’에 해당한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물론, 시 에 대한 지금까지의 분석이 다시금 산문 를 비추어 이 산문의 의미를 증폭시키는 까닭이다. 4. 맺음말 연희전문학교 시절에 씌어진 윤동주의 산문들은 그의 학창시절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소중한 자료이면서, 동시에 그의 시작품을 이해하는 데 귀중한 실마리를 제공해 준다. 그의 시와 산문 모두가 자신의 내면을 응시하는 데서 우러나오는 진솔한 고백을 담고 있어, 그 소재와 발상에서 상당한 유사성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는 윤동주의 문학이 지니는 이러한 특성에 착안하여, 거의 같은 시기에 씌어진 산문 와 시 의 관련양상을 논의해 보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먼저 산문 에 대한 꼼꼼한 이해를 통해, 시 이 창작된 그 최초의 시상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를 찾아내려고 하였다. 또한 여기서 더 나아가 산문의 한계를 넘어서는 시만이 지닌 깊은 차원의 의미까지 밝혀보고자 하였다. 산문 가 씌어진 시기는 윤동주가 연희전문학교 4학년 때인 1941년 5월경에서 9월경 사이로 추정된다. 이때 윤동주는 누상동에서 하숙을 하고 있었는데, 산문 는 그가 전차와 기차를 타고 누상동에서 신촌까지 등교하는 길에서 본 여러 광경을 기록하고 그에 대해 생각하고 느낀 것을 적은 것이다. 는 제목의 뜻 그대로 ‘마치고 시작한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이 글에는 윤동주가 연전을 졸업하고 나면 어디로 가서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나타나 있다. 뿐만 아니라 이 시인이 자신의 삶의 노정에서 어떤 질적인 변화와 새로운 도약의 필요성을 직감하고 있다는 사실도 읽어낼 수 있다. 그가 이 산문의 말미에서, ‘진정한 내 고향’ 또는 ‘시대의 정거장’으로 가고 싶다고 말한 것이 이를 암시한다. 시 은 그 제목에서부터 산문 를 이어받고 있다. ‘마치고 시작한다’는 것은 곧 새로운 길에 접어든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또한 와 은 성벽과 돌담, 그 안과 밖, 그리고 그 위에 펼쳐진 하늘 등의 공통된 소재를 보여준다. 또 그 발상에 있어서도, 성벽 또는 돌담으로 그 안과 밖에 굳게 차단되어 있다는 것, 그래서 그 위로 펼쳐진 하늘을 쳐다본다는 것 등의 공통성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공통된 소재와 발상은 을 쓰게 된 최초의 시상이 에서 유래하였음을 말해준다. 하지만 은 의 내용을 이어받으면서 그것을 넘어서고 있으니, 의 ‘길’이 지닌 다층적 의미가 이를 말해 준다. 1연에서 7연에 이르기까지, 이 시에서 표현된 길의 의미는 ‘실제로 걸어가는 돌담길’→‘자신의 마음을 따라가는 길’→‘시간의 흐름을 통한 인생행로’→‘자신의 새로운 영적 여로’의 순서로 발전해 나아갔다. 시인은 여러 상징시어들을 적절히 사용함으로써, ‘길’의 의미를 종교적(기독교적) 차원으로까지 확장시키고 있는 것이다. 에 함축된 그런 의미로서의 ‘길’이야말로 시인 윤동주가 일제 말기라는 현실에서 삶의 불모성을 극복해 나아간 길이다. /////////////////////////////////////////////////////////////////////////////////////////////////////////////////   김혁 장편소설 에 대한 평심단 의견   1, 제출된 기획서들중에서 김혁소설가의 이 작가의도, 가치가 투철하다. 쓰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준비를 잘한 것 같다. 다만 쓰는 기교문제이다. 작가의 능력으로 보면 잘 쓸수있을 것 같다. 윤동주가 실제인물이기에 자료가 많아 쓰기 쉬울 것 같으면서도 실제로는 쉽지 않다. 여태 윤동주에 관해 방송소설만 있고 분량, 질적으로 적으나 모자라며. 윤동주의 동년부분 실제와 다른부분이 많다고 했는데 실제로 력사사실 그대로 쓰면 너무 국한되며, 자서전체에 빠져 실화에 가깝게 접근한다면 우려된다. 하지만 작가의 재주로 극복할수 있을 것 같다. 2, 장편소설 의 준비가 충분하다. 제출한 기획서중에서 이 가장 기대된다. 윤동주에 대해 고민을 많이 한 것 같다. 윤동주를 통해 당시 력사에 대한 좋은 작품이 나왔으면 좋겠다. 근심은 실화로 치울칠까봐 걱정된다. 윤동주를 통해 보는 그때의 력사상황을 잘 그려냈으면 좋겠다. 예술적으로 충분히 소설화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주 어려운 문제이다. 3, 김혁소설가의 장편 이 제출된 작품중 논리가 가장 정연하고 괜찮다. 송우혜의 이 있어서 윤동주에 대한 참신한 리해가 없으면 쓰기가 어렵다. 윤동주라는 시인을 윤동주로 말할것이 아니라 력사로 말하고 그 문화를 컨트롤할 능력이 있어야한다. 이에 걱정이다. 허와 실의 관계를 어떻게 할지 걱정이 든다. 윤동주는 가치성이 있다. 진짜 좋은 소설이 되면 대단히 좋은 상황이 된다. 그때의 상황을 리얼하게 재현할수 있겠는가. 암흑기의 상황을 잘 파악해야 한다. 시대를 같이 써야한다는 것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그때 최남선까지도 투항했던 그때의 사회 암흑의 심각성을 심각하게 알아야 한다. 그때의 상황에서 윤동주는 감옥 옥사의 상황까지 갔다. 이 작자에게 기회를 주었으면 한다. 4, 우리는 연변 태생인 이 걸출한 시인에 대해 써야할 의무가 있다. 한반도를 통틀어 그렇게 뛰어난 시인에 대한 소설이 나오지 않았다는 것은 그만큼 난이도가 크다는 얘기다. 이 작품을 완성하려면 윤동주에 대한 가장 중요한 석박사 논문 50프로는 읽어야한다. 시인의 시작품은 완전히 파악해야한다는 생각이다. 윤동주시인에게는 난해시가 많고 모더니티하기도 하다. 제출한 창작 기획서와 스토리를 보면 두가지 난점이 있다. 첫째, 인물의 기본성격이 반드시 파악돼야 한다. 이 스토리에서 보면 윤동주가 남성화 돼 있는데 윤동주는 사실 여성화된 인물이다. 부끄러워 하고 참회하고. 성격설정이 기본성격과 맞지않는다고 본다. 둘째, 시인의 가장 중요한 사상을 홀시하지 않았나 본다. 외면은 아니했지만 윤동주는 가장 민족적이면서도 가장 기독교적이다. 이것이 감춰져 있다. 반드시 기독교를 잘 다뤄야 윤동주가 살아날수 있다 . 셋째, 극본화 하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김혁소설가는 영화, 극본에 각별한 흥미가 있고 소설도 많이 극화돼 있다. 5, 장편 은 시만 라렬할 것 아니라 윤동주라는 인간을 잘 써야 한다고 본다. 그래야 돌파가 있을수 있다. 그때 암흑기에 놓고 그 인간을 써야 한다. 문화함량이 적고 사실만 엮은 작품은 목적에 도달하기가 어렵다. 윤동주는 기독교영향을 받으며 성실하게 자란 사람이다. 성격이 조용하고 착한 사람이다. 그런데 현실의 벽에 부딛쳤다. 윤동주는 고민이 많았다. 자아성찰을 하고 돌파구를 찾아 자기완성을 한 사람이다. 이런 지식분자다. 고민하면서 인간답게 살려고 애를 썼다. 송몽규를 만나는데 송몽규는 윤동주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윤동주는 송몽규의 영향을 많이 받았지만 송몽규를 따라가지는 않았다. 이 인간으로 잘 부각돼야 성공한다고 생각한다. 윤동주 사건에만 매우지 말고 시대적 분위기, 배경을 잘 그려야 성공한다.   연변작가협회 제7기 계약작가 평심위원단   조성일 (평론가, 전 연변작가협회 주석, 중국조선족문화발전추진회 회장)   한석윤 (동시인, 전 중국조선족소년보 사장, 연변청소년문화진흥회 회장) 김관웅 (연변대학 교수, 문학박사, 연변작가협회 부주석) 허련순 (소설가, 연변작가협회 부주석)   김경훈 (연변대학 교수, 평론 의 저자) =============================================================== 연 변이 낳은 한민족의 걸출한 시인 윤동주의 일대기가 처음으로 소설화될 전망이다. ...장편소설 “시인 윤동주”에 대한 평심회의가 연변작가협회 회의실에서 열렸다. 40대의 중견소설가 김혁은 연변, 나아가 한민족의 자랑인 걸출한 민족시인 윤동주 시인에 대한 논픽션(非虚构) 작품은 많으나 그에 반해 픽션(虚构) 작품들이 전무한점을 감안해 사명감을 가지고 2008년부터 국내외 자료를 열심히 수집연구한데 기초해 스토리를 구성하고 반복적인 수정을 거쳐 작품을 탈고했다. 작품의 기획안은 일찍 연변작가협회 제7기 계약작가 작품으로 선정되였다. 평심회의에는 본작품의 심사위원들인 연변대학 문학박사 김관웅, 소설가 허련순, 연변대학 교수 김경훈 그리고 연변작가협회 허룡석주석과 연변작가협회 창작실 주임, 소설가 리혜선등이 참가했다. 평심위원회는 “장편소설 ’시인 윤동주’는 중국조선족문학의 개척자중의 대표시인 윤동주의 생애를 다룬 전기소설로서 중국조선족문학사에서 윤동주의 위상을 밝히는데 한몫을 했으며 전기소설의 형식을 정립하는데 기여했다. 윤동주생애에 대한 실증적재료에 대한 수집이 완비했으며 류창한 언어와 방대한 스케일의 그 자료를 담아냈다.”고 작품의 가치를 충분히 긍정했다. 장편소설 “시인 윤동주”는 “연변문학”지를 통해 2010년 1월부터 련재를 시작하고있다. 김미란 기자 ============================================   장편소설 《시인 윤동주》와 김혁 소설가   [ 길림신문] 편집/기자: [ 김청수 ] 소설이 련재되고있는 "연변문학" 표지   윤동주를 중국에 맨 처음 알린 일본 와세다 대학 오오무라 교수(가운데)와 필자(맨 오른쪽) 《연변문학》지에 김혁의 장편소설《시인 윤동주》가 련재를 마무리하게 되면서 민족시인 윤동주의 생애와 문학에 대한 작가의 소설화과정에 대해 독자들은 퍽 호기심이 동해하고 또한 위인의 령혼과의 대화시도에 탄복을 앞세우고있다. 이에 대한 김혁작가의 답을 들어본다. 연변이 낳은 걸출한 민족시인 윤동주의 위상은 력사와 시간의 검증속에 더욱 거룩한 존재로 자리매김하면서 연변, 한국, 일본 나아가 아시아 전역에서 그의 고고한 삶에 대한 추모붐이 다시금 일고있다. 한국에서는 그의 시를 문화재로 등재하고 새롭게 윤동주시비를 건립하고, 문화제가 폭넓게 열리고있다. 가해국인 일본에서까지 그의 시, 평전이 번역출판되고 그의 시 읊기활동이 해마다 펼쳐지고있으며 그의 생애를 그린 연극이 무대에 올랐다. 얼마전에는 한국에 거주하고있는 스웨덴과 아일랜드 대사가 어느 모임에서 각각 자신이 좋아한다는 윤동주의 시를 랑독해 화제가 된적도 있다. 한국과 중국에서 윤동주 관련 론문으로 석사, 박사가 된 사람도 50명이 넘다. 윤동주시인에 대한 연구론문도 수백편이 나왔다. 평전이나 위인전기물도 수십권, 이렇게 논픽션 작품은 많이 나왔는데 그에 비해 픽션작품 즉 소설과 같은 창작물은 전무한 실정이다. 너무나 알려져있는 시인이였지만 그 높은 위상때문일까? 윤동주시인의 생애를 작품화하려 한 사례가 극히 적었다. 소설로는 1992년경에 한국에서 한부가 나온줄로 알고있다. 엄격한 의미에서 방송드라마의 씨나리오이다. 그 공백의 부분이 나에게 어딘가 사명감과 창작충동을 주었다. 그리고 고향이 낳은 시인 윤에 대한 경모의 마음으로 오래전에 벌써 윤동주 관련 까페(http://cafe.naver.com/dz.cafe)도개설하면서 윤동주의 생애를 소설화하려는 작업을 한번 해보려고 오래전부터 뼈물러 먹었었다. 또 나는 순 룡정태생이다. 룡정에서 태여나고 또 학창시절을 포함하여 많은 시간을 룡정에서 보냈는데 이 요소가 《시인 윤동주》의 창작과 무관하지 않다.나는 현재 윤동주의 시비가 세워져있는 룡정중학을 졸업했다. 윤동주의 가족이 명동에서 이사를 와 거주한 영국더기부근도 우리가 즐겨 봄소풍을 다니던 곳이고 윤동주의 고향인 명동에도 동창친구가 몇명이 있어 자주 놀러다니곤 했다. 사실 윤동주의 숨결은 우리가 살고있는 지역의 곳곳에 어려있었다. 고향 연변에서는 그의 모교 명동학교를 복원하고 그의 동시비를 구축하고 문화제준비작업이 한창이지만 고향이라는 이 지리적으로 특수한 지역에서 그에 대한 추모와 연구작업은 아직도 미비한 편이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시인 윤동주 》를 장편으로 다룸에 있어서 적지 않은 어려움에 맞띠웠다. 참으로 힘든 작업이였다.윤동주시인은 천고절창의 주옥같은 시들을 창작하여 우리한테 훌륭한 문화유산을 남기신 분이지만 그이의 생활경력은 오히려 알려진 부분이 극히 적었다. 때문에 그 생활화폭수집이 아주 힘들었다. 이곳에서 발표된 윤동주에 관련 론문 수십편을 거의 다 읽었고 한국에 가서도 윤동주에 관련된것이라면 평전으로부터 론문집, 지어 아이들을 위해 씌여진 윤동주전기물까지도 시중에 있는것이라면 모조리 사들여 읽었다. 뿐만아니라 그와 관련된 인물들인 문익환평전, 문익환의 친지들의 회고록, 윤동주의 후배들이 남긴 일화, 추모문들도 세세히 읽었다. 관련된 론문, 평전들을 읽는외 윤동주가 연변에서 생활했던 곳들, 명동과 같은 지역들을 돌아보았고 옛 은진중학 졸업생들을 찾아보면서 당시 시대상, 풍물, 일화들을 들어보고 자료집과 인터넷에 떠도는 그 년대의 귀중한 사진들도 모으고 스캐너 하여 들여다보면서 당시의 분위기를 읽으려 노력했다. 윤동주의 여동생 윤혜원여사 부부와 함께 그리고 윤동주의 친지와 많은 윤동주와 관련된 연구를 하는분들을 찾아보았다. 윤동주시인의 녀동생인 윤혜원 녀사도 세번 정도 만났다. 이곳 연변문학지에서 세운 윤동주문학상과 같은 시상식관련 행사를 위해 윤혜원부부는 여러번 오스트랄리아에서 연변을 찾은적 있다. 그때마다 윤동주를 소설화하려는 의도를 표명하면서 그분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윤동주를 연변에 처음 알린 오무라 마스오 교수와도 만났다. 1994년 《연변일보》 문화기자로 뛰고있을무렵 그분을 큰 편폭으로 취재한적 있다. 일본 와세다대학 교수로서 윤동주에 대한 연구를 깊이 한분이였다. 그리고 《윤동주평전》의 일본어판 역자인 아이자와 가크씨와도 만났다. 번역가의 성함이 어쩌면 나와 이름이 꼭같은 혁, 윤동주라는 위인을 통한 인연이 참으로도 절묘했다 《윤동주 평전》 일본어판 번역자 아이자와 가쿠 선생과 함께. 자료들을 읽고 관련 연구자들을 찾아 이야기를 나누면서 점차 머리속에 작품의 륜곽을 세우고 내용을 채워나갔다. 그러는중에 연변작가협회의 계약작가창작제도가 있어 거기에 선정되였다. 작가가 자신의 창작기획을 세우고 스토리와 창작의도서를 제출하면 연변의 유명 대학가 교수, 평론가, 원로작가들로 평심단을 뭇고 제출된 많은 기획서중에서 가능성있는 작품을 엄선해낸다. 그리고 그후 일년간 선정된 작가의 작품에 창작기금을 지원하게 되는것이였다. 장편소설 《시인 윤동주》는 이런 절차를 통해 선정되였다. 잘 알려진 위인의 일생을 그리는건 작가로서는 부담감이 아주 컸다. 참으로 어려운 작업이였다. 이때문에 창작생에 처음으로 창작슬럼프에 빠져들 정도로 애초에 세웠던 창작계획에 맞추지 못하고 근 1년간 한 글자도 써내려가지 못할 정도로 부담감에 시달렸다.그것들을 해소하기 위해 윤동주 관련 서적들을 닥치는대로 통독했다. 또한 당시의 국면을 더 깊게 료해하기 위하여 일본력사며 태평양전쟁에 관한 력서서적들도 대량 통독했다. 또 나는 원체 영화광이라 소장해둔 테잎과CD가 많은데 당시 시대상을 보여주는 다큐, 영화와 드라마들을 보고 또 보았다. 그 영상물들이 나에게 극적인 스토리를 만들고 분위기를 묘사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였다. 김혁작가는 장편소설 《시인 윤동주》의 창작과정을 핍직하게 들려주면서 윤동주의 고향, 우리들의 고향에서 다시 윤동주의 붐을 일으켜가면서 그의 고고한 삶과 문학정신을 길이길이 기리여가자고 의지를 밝혔다. /////////////////////////////////////////////////////////////////////////////////////////////////////////////////////////////////////////// 불빛들 -불멸의 윤동주- 황인수 감시병 둘이 황급히 3등실 쪽으로 달려갔다. 희미한 등불에 어린 그들의 낯빛이 삶아 담가놓은 우거지처럼 검푸르죽죽했다. 성질 사나운 노동자들이 자리다툼을 하며 또 난동을 부린 모양이다. 선실문을 따고 들어간 감시병들은 개머리판으로 사정없이 그들을 내리치고 발길질을 해 대리라. “이 돼지만도 못한 조센징 놈들!” 성난 이리처럼 눈빛을 희번덕이면서 그들은 온갖 욕설로 선실에 있는 사람들은 물론 모든 조선인들을 싸잡아 모욕할 것이다. “이 비좁은 선실에서 싸움질을 해? 그러니까 너희들은 개돼지처럼 맞아야 해! 쓰레기 같은 놈들.” 그는 선실 바닥으로 거적때기처럼 내쳐진 노동자들의 모습을 떠올렸다. 영춘도 같은 모습을 상상을 했나보다. 3등실로 향하는 감시병들을 돌아다보는 영춘의 눈빛에 가시가 돋아 있었다. 그가 영춘의 옆구리를 꾹 찌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타일렀다. “조심해. 감시자들이 많아.” 영춘이 그를 바라보며 입을 삐죽거렸다. “알았어요, 형님. ……죽일 놈들……크악, 퉤-.” 영춘이 바다를 향해 가래침을 날려 보았지만, 왠지 분하고 억울한 마음이 삭여지지는 않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북간도를 뜨면서부터 영춘의 말끝에는 늘 ‘죽일 놈들’이 붙어 있었다. 그의 시야에 들어온 일본 사람들은 모두 ‘죽일 놈’이 되어 그의 입 밖으로 나갔다. “죽일 놈들.” 그도 영춘을 흉내 내어 중얼거리듯 그렇게 내뱉어 보았다. ‘죽일 놈들, 죽일 놈들.’ 그의 마음속에는 잠실에서 꿈틀거리는 누에만큼이나 많은 ‘죽일 놈들’이 꾸물거리고 있었다. 앉으나 서나 자나 깨나 그의 머릿속에는 온통 ‘죽일 놈들’밖에 없었다. 그의 온몸에 ‘죽일 놈들’이 달라붙어 스멀거리는 것 같았다. ‘내 아들의 목숨을 앗아간 죽일 놈들. 우리의 터전을 수탈하고 능멸하는 저 쳐 죽일 놈들.’ 아들의 죽음을 생각하니 자신도 모르게 주먹이 불끈 쥐어지며, 가슴으로 분노가 차올라 퍽하고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지난 해 7월, 아들이 특고 형사에게 체포되어 카모카와 경찰서 유치장에 감금되었다는 소식을 듣는 순간부터 그의 세상은 무너졌다. 집안의 기둥인 아들. 자신의 희망이요, 목숨과도 같은 아들이 아무 죄 없이 유치장에 갇히다니. 출판사로 엎어지고, 양계장하다 말아먹고, 하는 일마다 신통치 않아 생업을 전전하며 팍팍하게 살았지만 그동안의 세월이 고단하지 않았던 것은 모두 아들 때문이었다. 그의 희망이 동경의 하늘 밑에서 숨 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아들이 무죄를 선고받고 하루 빨리 풀려나기를 기도하기 위해 다시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기도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아들의 사망 전보를 받은 그날 그는 죽었다. 넋이 나갔으니 죽은 거나 다름없었다. 천붕이 바로 이런 거구나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구가 멸망한다 해도 아들의 마지막 모습은 보아야 했다. 아들이 왜 죽었는지, 어떻게 죽었는지 알아야 했다. 그는 우지끈 이를 악물고 일어섰다. 그리고 바로 사촌동생 영춘을 데리고 두만강을 건너 부산행 기차를 탔다. 부산에서 관부연락선을 타고 시모노세키까지, 거기에서 다시 후쿠오카까지 갔다. 꼬박 일주일이 걸렸다. 발걸음은 왜 그리 더디든지, 기차는 왜 그리 느리든지…… 아들의 몸뚱이가 더 식기 전에, 얼굴이 망가지기 전에 빨리 만져보고 싶은 마음은 간절한데 기차도, 배도, 걸음도 너무 느리기만 해서 조바심했던 시간들이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배는 현해탄을 지나 쓰시마 쪽을 향해 나아갔다. 거세진 않았지만 밤바람이 제법 날카로웠다. “추워요, 들어갑시다.” 팔짱을 끼고 구부정한 모습으로 2등선실을 향해 돌아서며 영춘이 그에게 말했다. 그는 먼저 올라가라고 영춘에게 손짓을 하고 다시 바다를 마주하고 섰다. 암흑의 바다. 그는 자신이 그 바다 한 가운데 떠 있음을 깨달았다. 세상은 암흑이다. 햇빛 아래서 눈을 뜨고 있어도 앞이 보이지 않으면 암흑이다. 한치 앞을 볼 수 없는 암흑 속에서 그는 자식을 잃고, 희망을 잃었다. 조선은 땅을 잃고 넋을 잃고, 갈 길을 잃었다. 전쟁이 치열해지고 있으니 꿈을 잃고, 뜨고 있어도 보이지 않는 눈으로 암흑 속을 헤매는 사람들도 더욱 늘어나리라. 배가 지나가면서 걷어내는 물결 소리와 귀를 웅웅 울리는 둔탁한 엔진 소음, 그리고 사정없이 뱃전을 치고 지나가는 바람 소리로 갑판은 소란스러웠다. 그는 눈을 감았다. ‘아들도 이 배를 타고 일본으로 갔겠지? 의대에 가라는 내 소원을 뿌리치고 문과를 선택했지만 나름 푸른 꿈을 안고 동경으로 갔겠지. 릿교대학에서 교토의 동지사 대학으로 편입하겠다고 지난 여름 고향에 오갔을 때도 이 배를 탔겠지? 3등실에 타면 개돼지 취급 받으니까 2등실에 타라고 당부했지만 돈을 아낄 요량으로 굳이 3등실에 타서 선창마저 굳게 닫힌 그 비좁고 냄새나는 선실 한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불안한 눈을 껌벅였겠지? 6개월 동안 카모카와 경찰서 유치장에서는 또 얼마나 고생했을까? 제대로 입지도, 먹지도, 자지도 못한 채 특고 경찰들이 증거자료로 제시하는 터무니없는 조서들을 보며 얼마나 억울하고 화가 났을까?’ “지난 일 년 동안 특고 경찰은 그림자처럼 나를 미행하고 엿들었어요. 내 자취방에 불이 몇 시에 꺼지고 켜지는 지, 어느 식당에서 밥을 먹었는지, 누구와 만나서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꼼꼼하게 기록했어요. 난 꼼짝없이 당했어요. 우리 유학생들 모두가 감시당하고 있어요.” 그는 아들과 함께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된 조카 몽규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가 면회를 갔던 날, 형무소에는 푸른 죄수복을 입은 50여명의 조선 청년들이 줄을 서서 주사를 맞고 있었다. 간수에 의해 이름이 불리어진 젊은이 하나가 그와 영춘이 있는 쪽으로 가까이 다가왔을 때 그것이 몽규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몽규의 모습은 처참 그 자체였다. 반쯤 깨진 안경을 겨우 콧등에 걸치고 있었고 얼굴은 알아볼 수 없을 만큼 피골이 상접해 있었다. 몽규가 뭐라고 인사말을 했지만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작았다. 그가 몽규의 두 손을 부여잡고 울음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왜 이 모양이냐?” 몽규는 힘이 하나도 없는 목소리로 간신히 말을 이어나갔다. “저 놈들이 주사를 맞으라고 해서 맞았더니 이 모양이 되었어요, 삼촌. 동주도 이 모양으로…….” 몽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는 눈앞이 깜깜해지는 절망을 느꼈다. 갑자기 가슴이 콱 막히면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아들 동주가 저런 몰골로, 저렇게 참혹한 모습으로 죽어갔을 거라고 생각하니 발밑이 무너지며 수 천길 벼랑 아래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 동주가 독방에서 깡보리밥 한 덩어리와 단무지 몇 쪽으로 연명했었다는 말은 차라리 듣지 말았어야 했다. 주사를 맞다가 갑자기 아-인지, 어머니-인지 모를 비명을 지르며 쓰러진 후,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는 말을 듣지 않았다면 학질 걸린 사람처럼 그렇게 온몸이 후들거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가 따뜻한 아랫목에 등을 지지며 편한 잠을 자고 있을 때, 자신의 분신이 차디찬 감옥 바닥에서 처참하게 죽어가고 있음을 알지 못했던 것이 그는 한없이 죄스럽고 부끄러웠다. 밀려드는 어둠이 손을 뻗어 그의 목을 죄고 흔들었다. 죽어라, 너는 아비의 자격이 없다. 죽어라 이 놈. 그가 눈을 감는 날까지 어둠은 그를 흔들리라. 죽을 때까지 자신은 새벽이 오지 않은 어둠 속에서 살리라. 그렇게 살다가 어둠 속 어딘가로 사라지리라. 꿈이 없는 인생. 빛이 사라진 세상에서의 삶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는 갑자기 눈을 떴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뱃전 쪽으로 다가섰다. 바로 발 밑, 검푸른 바닷물 위로 허연 물결이 일렁이고 있었다. 저 찬 물속에 몸을 던져 먼저 간 아들을 따라 가리라. 가서, 춥고 병든 아들의 몸뚱이를 꼭 껴안아 주리라. 못난 아비를 용서하라고 눈물로 호소하리라. 그가 난간을 잡고 바다 쪽으로 몸을 기울이려는데 누군가 그의 허리를 잡았다. “형님, 그러다가 떨어지면 시신도 못 찾아요. 추우니까 들어가서 몸 좀 녹이고, 동주는 잠시 잊읍시다. 어쩌겠소. 이미 불귀의 객이 된 것을.” 영춘이 돌려 세웠을 때에야 그는 퍼뜩 정신이 들었다. “시간상으로는 대마도 근방을 지날 때가 되었는데 구름이 드리워 어디가 어딘지 잘 모르겠네요.” 영춘이 허공 여기저기에 눈빛을 꽂으며 말을 이었다. “1926년인가? 7년인가? 그러고 보니 벌써 20년 전 이야기가 되었네요. 윤심덕과 김우진이 사건 말이오. 바로 여기 어디 쯤 될 것 같은데……. 둘이 껴안고 바다에 몸을 던져 죽었잖아요.” 지금도 인구에 회자되고 있는 윤심덕과 김우진 이야기 중에는 그들이 사실은 죽은 것이 아니라, 동반자살을 기도한 것처럼 꾸미고 로마나 파리로 도망가서 이름과 국적을 바꿔 살고 있다는 이야기도 섞여 있었다. 그들의 죽음을 믿고 싶지 않은 이들이 지어낸 이야기일 수도 있다. 그들의 사랑을 지켜주고 싶은 사람들의 마음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만들어진 이야기. 그도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동주가 죽은 것이 아니라 사실은 윤심덕과 김우진처럼 죽음을 가장하고 어딘가 자유롭고 풍요로운 나라로 도망쳐서 이름을 바꾸고 살고 있을 거라고, 그가 화장해서 들고 온 저 유골함 속에 있는 뼛가루는 동주의 것이 아니라 그냥 미숫가루이거나 쌀가루일 거라고. “기차로 갈아타면 눕지도 못해요. 가서 선실 바닥에 다리 죽 뻗고 누웁시다. 산 사람은 살아야지.” 그는 영춘의 손에 이끌려 2층 선실로 올라갔다. 선실문 앞에 등이 하나 걸려 있었고, 굳게 닫힌 선창에서는 빛 한 줄기 새어나오지 않았다. 새벽 세 시 반 쯤 되지 않았을까 하고 그는 시간을 어림해 보았다. 엔진 소리와 울렁임 때문에 사람들은 잠을 쉽게 이루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실의 불을 끄고 모두 잠을 청한 까닭은 내일의 여정을 염려한 때문이리라. 대부분의 승선객들은 부산이 목적지가 아니라 부산을 경유하여 지금까지의 거리보다 더 먼 거리를 기차로 가야하기 때문이다. 어둠 속에서 누군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와 영춘이 서 있던 갑판 난간에서 출발해서 그들이 서있는 2등실 쪽으로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선실문을 열려다 말고 다가오고 있는 사람을 바라보았다. 이런 것을 직감이라고 하는 걸까? 그는 본능적으로 그 사람이 자신을 찾아왔다는 것을 알았다. 검은 옷의 사람이 다가와서 문 앞에 섰다. 여자였다. 추위를 많이 타는지 온몸을 두꺼운 털옷으로 감고 있었고, 자주색 머플러로 머리와 목을 감고 있었다. 불빛에 비친 여자는 20대 중반쯤 되어 보였다. “저- 실례합니다만, 히라누마 도오주(윤동주)의…….” “맞소. 내가 윤동주의 아비입니다.” “난 윤동주의 당숙이오. 무슨 일로 우리 동주를 찾습니까?” 그와 영춘을 번갈아 쳐다보던 여자가 갑자기 그들 앞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갑작스러운 일에 당황한 그와 영춘이 얼굴이 마주보았다. “아니,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영춘이 여자를 일으켜 세우려 하자 여자가 고개를 바닥으로 더 깊이 숙이며 말했다. “저를 용서하지 마십시오.” 여자의 목소리에서 비장함이 느껴졌다. “저 때문입니다. 히라누마君이 저 때문에 죽었습니다.” 여자는 이마가 바닥에 닿도록 자세를 낮추었다. “아니 형님, 동주는 감옥에서 죽었는데, 왜 이 여자는 자기 때문에 죽었다고 하는 걸까요? 참, 알 수 없는 일이네…….여보시오, 사람을 잘못 찾아온 거 아니요?” 영춘이 여자에게 말했다. 여자는 영춘의 말 따위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자신을 용서하지 말라’고 말했다. 여자를 내려다보던 그의 머릿속에 불현듯 그림자 하나가 떠올랐다. 검은 옷을 입은 그림자. 아니다. 그건 그림자가 아니라 미행자였다. 검은 옷을 입고 그와 영춘의 뒤를 줄곧 따라오던 미행자. 그 미행은 후쿠오카 형무소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그는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와 영춘이 후쿠오카 형무소에 도착했던 날, 형무소 앞에는 몇몇 사람이 출소자를 기다리며 서성거리고 있었는데 지금생각해 보니까 그 검은 옷의 미행자가 그 속에 섞여 있었던 것 같았다. 천근만근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 10여리 떨어진 화장터에서 아들의 주검을 화장시켜 나올 때까지는 검은 미행자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했었다. 유골함을 들고 다시 형무소를 찾아가 몽규를 면회하고 나온 뒤부터 그는 그 미행자를 의식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조선 사람이 조선 땅에서도 감시를 당하고 사는데, 일본 땅에서는 오죽할까?’하는 생각으로 미행자에 대해 별로 신경 쓰지 않았었다. 아들이 치안유지법을 위반하고, 조선독립운동을 했다는 죄목으로 수감되었기 때문에 그도 충분히 감시의 대상이었으리라. 그래서 일본 경찰이 자신을 따라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미행자가 일경이 아니라 여자였다니……. 이 여자는 내가 동주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을까? 왜 자신의 정체를 밝히는 걸까? 그는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여자가 상체를 세우더니 몸속을 뒤져 뭔가를 꺼냈다. 그리고 두 손으로 그것을 그에게 디밀었다. 편지봉투였다. “이건 또 뭡니까?” 영춘이 그것을 낚아채 불빛 아래로 가져갔다. 두 사람은 불빛에 비친 글씨를 찬찬히 내려다보았다. 그 편지의 수신인은 ‘히라누마 도오주’였고, 두 통 모두 ‘수취인부재’라는 붉은 木印이 찍혀 있었다. “제 이름은 기타지마 마리코입니다. 히라누마君과 저는 영문과 클래스메이트였습니다.” 여자는 여전히 무릎을 꿇고 앉아 말했다. 하지만 목소리는 좀 전보다 차분했다. 여자가 잠시 침묵하다가 무슨 말인가를 막 시작하려고 하는데 갑판 쪽에서 날카로운 소리가 들려왔다. “거기, 뭐야?” 감시병 둘이 이쪽을 주시하며 달려오고 있었다. 아까 3등실 쪽으로 갔던 검푸르죽죽하고, 우거지상을 한 자들이 분명했다. 영춘은 시선을 그들에게 고정시킨 채 몸만 살짝 돌려 들고 있던 편지를 허리춤에 구겨 넣었다. 여자는 몸을 일으키려고 하였지만 오히려 다리가 꼬여 주저앉고 말았다. 세 사람이 모두 어정쩡한 자세로 잠시 ‘얼음’이 되어 있을 때 감시병들이 후닥닥 올라왔다. 그들의 눈에는 두 남자가 한 여자를 폭행하는 것으로 비쳤던 것일까? 검푸르죽죽한 감시병이 손전등을 그와 영춘의 얼굴에 비추며 여자에게 물었다. “무슨 일인가?” 여자는 뭔가 일이 잘못 되어가고 있다고 생각했는지 몸을 일으키며 당황한 목소리로 감시병에게 말했다. “아닙니다. 이 사람들은 아무 잘못이 없습니다.” 감시병들은 여자가 일본인임을 확인하고, 그와 영춘에게 도하증(渡河證)을 제시하라고 요구했다. 여자가 감시병들을 가로막으며 목소리를 높였다. “이 분들을 함부로 대하지 마세요.” 이번에는 우거지상을 한 감시병이 막무가내로 여자를 뒤로 젖히고 그와 영춘에게 총을 겨누었다. “앞장 서라. 좀 더 상세히 조사해 보아야 겠다.” 불길한 느낌이 그에게로 엄습해 왔다. 자초지종을 말해야겠는데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해야 할지 잘 몰라서 그는 길게 숨을 내쉬며 층계 쪽으로 한 발을 내딛었다. 그 때 영춘이 감시병들에게 거칠게 소리쳤다. “아, 글쎄, 우린 아무 잘못 없다니까. 저 여자가 갑자기 나타나서 자기가 우리 동주를 죽였다고 용서해 달라고 무릎을 꿇었다니까.” “닥쳐라, 조센징.” 우거지상이 총으로 영춘을 칠 기세였다. 여자가 다시 감시병들을 막아섰다. “사실이에요. 이 분은 옥사한 아들의 시신을 수습해서 고향으로 가는 길이에요. 저에게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제가 잘못했어요. 그래서 용서를 빌던 참이었어요. 이분의 아들이 저 때문에 죽었거든요. 그러니 제발 이 분에게 결례하지 마세요.” “결례라고? 이 자들은 조센징이요. 두드려 맞아야 겨우 말귀를 알아듣는 한심한 족속이라구. 아시오? 대일본제국의 황국신민이 저까짓 조센징 앞에 무릎을 꿇다니!” 검푸르죽죽한 감시병이 도끼눈을 뜨고 여자를 쏘아보았다. “아무튼 이 분들의 손끝 하나 건드리지 마세요. 만약 그랬다간 그냥 있지 않을 거예요.” 여자의 눈빛과 목소리가 단호하고 날카로웠다. 감시병들이 주춤 물러섰다. 그리고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눈짓을 주고받았다. “좋소. 잠시 따라오시오.” 우거지상이 여자에게 말했다. 그리고 그들은 층계를 내려가 선원실이 있는 오른쪽 방향으로 갔다. 여자가 그들의 뒤를 따랐다. 세 사람이 시야에서 사라지고 난 뒤 그는 안도의 긴 숨을 내쉬었다. 일이 자칫 꼬였다면 아들의 장례식은 물론 무슨 변고를 당할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는 영춘과 함께 다시 갑판으로 내려갔다. 갑자기 피로가 밀려와 눕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형언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살다간 아들을 생각하면 편안코자 하는 마음을 품은 사실만으로도 죄라고 여겨졌다. “형님, 이 편지는 어떻게 할까요?” 난간에 기대어 허리춤에 감추었던 편지를 꺼내며 영춘이 그에게 물었다. “무슨 내용일까요? 화근 덩어리가 될 지도 모르니까 그냥 바다에 던져 버릴까요?” “수취인 부재라는 도장이 찍힌 것으로 보아, 우리 동주한테 보냈던 편지가 다시 되돌아간 것 같다. 그 여자가 보냈던 거니까 그 여자에게로 되돌아갔을 테고……. 동주가 그 편지를 받을 수 없었던 것은 형무소에 있었기 때문이었겠지? 그렇다면 그 여자는 동주가 형무소에 수감되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그 편지를 보낸 것이 틀림없어.” 그는 사람들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가서 편지를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마땅한 장소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다면 선실로 들어가야 한다. 선실 어딘가에 비상용 손전등이 있을 지도 모른다. 이번엔 그가 영춘의 팔을 붙잡고 앞장섰다. 그와 영춘이 2등실로 오르는 층계에 첫발을 딛으려 할 때였다. 선원실 쪽에서 검은 그림자 하나가 뛰쳐나와서는 그와 영춘을 지나쳐 선미 조타실 쪽으로 달려갔다. 좀 전의 그 일본 여자인 것 같았다. 그 여자가 입고 있는 옷의 형태와 색감이 어렴풋이나마 느껴지는 걸로 보아 곧 날이 밝아올 모양이었다. 곧이어 선원실에 있던 감시병이 달려 나와 여자를 뒤쫓아 갔다. 여자에게 위험한 일이 생긴 건 아닐까 하는 마음에 그는 층계를 오르지 못하고 그 자리에 서서 갑판 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잠시 후에 조타실 쪽에서 급사로 보이는 선원 하나가 달려와 선원실 문을 급히 열고, 안에다 뭐라고 냅다 한 마디 지르고는 다시 조타실 쪽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다시 선원실에 있던 승조원 대여섯이 급사가 간 방향을 따라 뛰어갔다. 무슨 큰 일이 터진 게 분명했다. 그와 영춘도 그들을 따라 선미 쪽으로 갔다. 공연히 의심 받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두 사람은 멀찍이 서서 조타실 쪽을 살펴보았다. 후미 갑판 위에 감시병을 비롯해 승조원들이 모여 웅성대고 있었다. 영춘이 좀 더 가까이 가보자고 하였지만 그가 만류하였다. 그리고 잠시 후에 둔탁한 엔진 소음이 뚝 멈췄다. 그와 함께 배도 멈췄다. 사방이 조용해지자 객실에 불이 들어왔다. 그와 영춘도 적잖이 놀랐다. 그러는 사이에 날이 밝아왔다. 좀 전보다 얇아진 구름이 낮게 드리워 있었지만 비가 오거나 풍랑이 일지는 않을 것 같았다. 후미 갑판에 모여 있던 승조원들의 모습이 선명하게 보였다. 그들은 모두 갑판 난간에 매달려 여객선이 지나온 뱃길을 주시하고 있었다. 승조원과 감시병들은 다시 모여 머리를 맞대고 무언가를 협의하는 듯 했다. 그리고 잠시 후 선장인 듯한 사람이 조타실로 올라갔다. 그리고 다시 엔진이 돌기 시작했다. 뱃머리가 서서히 왼쪽으로 기울더니 시모노세키 쪽을 향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무슨 일일까요, 형님? 배가 회항하고 있어요.” 서너 시간만 더 가면 부산인데, 왜 뱃머리를 돌리는가? 그는 궁금했지만 얼른 자리를 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와 영춘이 2등실로 올라가려는데 1등실 승객 서너 명이 그와 영춘을 지나쳐 갑판으로 내려갔다. 회항의 이유를 묻기 위해 그들은 조타실로 가는 것이리라. “저들이 뭔가 소식을 알아올 테니 좀 기다려 봅시다.” 영춘이 선실 문옆 선창을 향해 돌아앉으며 말했다. 그도 영춘 옆에 쪼그려 앉았다. 영춘이 허리춤에서 편지를 꺼냈다. “날이 밝았으니 예서 읽어 봅시다. 도대체 궁금해서 원…….” 영춘이 편지 두 통을 그에게 건넸다. 그는 누렇게 빛이 바랜 봉투를 눈 가까이 가져가 들여다보았다. 소인이 지워져 잘 보이지 않았다. 수신인의 주소는 아들이 기거하던 자취집으로 적혀 있었다. 형무소에서 시모노세키로 오기 전에 그와 영춘은 아들의 자취집에 잠시 들렀었다. 아들의 유해를 안고 자취집에 들어서자 관리인 듯한 늙은 남자가 깜짝 놀랐다. 그와 영춘이 아들이 기거하던 자취방을 한 바퀴 돌아나와 인사를 하고 돌아설 때까지 ‘히라누마’와 ‘믿을 수 없다’는 말을 수없이 반복하며 허리를 굽신거렸었다. 수신인 부분에 일본어로‘히라누마 도오주’라고 쓰여 있는 아들의 이름을 읽는 순간 그는 코끝이 찡하게 아려왔다. 눈물이 핑 돌았다. 창씨개명을 하고 몇 날 며칠 동안 굴욕감으로 괴로워하던 아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조선의 독립을 위해서, 그리고 조선의 미래를 위해서 일본을 알고, 더 큰 세계를 배워야 한다며 유학을 결심했던 아들이었다. 그런 아들을 위해 제 한 목숨 따윈 아깝지 않다고 생각하며 살아온 그의 두 눈에서 이내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기 시작했다. 편지를 꺼내 펼쳤지만 눈물이 앞을 가려 그는 읽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영춘이 가져다가 조그만 목소리로 읽어내려 가기 시작했다. 히라누마君, 하루 종일 장맛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빗속을 걸어 君의 거처인 다케다(武田) 아파트까지 갔지만 君은 어제와 마찬가지로 오늘도 부재중이더군요. 조선으로 간 건가요? 아니면 소무라 무께이(송몽규)君한테로 간 건가요? ‘별 말 없었다’는 자취집 관리인의 말로 미루어 볼 때 君은 아직 교토 시내 어딘가에 머물고 있는 것으로 추측되고, 그런 君에게 혹시 불상사가 생기는 건 아닌가 하는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을 가눌 길 없어서 끼니도 거르고 학교로 갔습니다. 君이 자신의 처지가 안전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채 도서관에 틀어박혀 키에르 케고르를 탐독하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되어서요. 후텁지근하고 끈끈한 습기가 몸에 감겨 가뜩이나 어두운 마음을 더욱 무겁게 조여 옵니다. 문학부 강의실 앞 연못가 庭園石 위에 우산을 받쳐 들고 앉아서 물속으로 떨어지는 수많은 빗방울을 바라봅니다. 그 빗방울은 이내 빗줄기가 되어 물속으로 내리꽂히고, 수많은 바늘이 되어 내 마음을 찌릅니다. 히라누마君, 내 마음을 옭죄고 있는 이 불안과 고통의 원인을 君은 모를 겁니다. 장맛비 속을 헤매면서 왜 내가 君을 찾으려는지, 君은 절대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저의 사소한 불찰로 인해 君의 불행이 시작될 것 같은, 아니 이미 시작되었다고 해야 정확한 표현일 것입니다. 특별고등경찰이 이미 君의 신상조사를 위해서 움직이기 시작했으니까요. 엊그제 우리 영문과 학생 20명이 木村 俊夫(키무라 토시오) 교수를 방문했을 때 키무라 교수가 君에게 했던 말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 방에 적국 사람이 있어. 일본에 반하는 행위를 하고 있는 히라누마君, 자네는 빨리 돌아가는 것이 좋아.”라는……. “저는 그런 일은 하지 않았습니다.”라고 君은 강하게 부정했지요. 하지만 키무라 교수는 君에게 ‘조선 친구들을 만나서 민족의식을 유발하는데 전념하고, 징병제도에 대해 비판하고 다닌다는 정보를 입수했다’고 맞서면서 ‘그것이 反日이 아니고 무엇이냐’고 반문했죠. 평소 君을 따르던 영문과 친구들은 놀라움을 금하지 못했고, 분위기는 일순간 얼어붙었지요. 화제를 돌려 분위기를 바꿔보려 했지만, 君이 자리를 뜨고 난 뒤 오히려 엉망이 되었습니다. 키무라 교수댁에서 보았던 君의 분노한, 아니 절망적인 표정이 아직도 또렷합니다. 지난 10여개월 동안 君을 지켜보았지만 그렇게 험한 표정을 지은 君의 얼굴은 한 번도 본적이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뒤따라 나가서 君에게 사실대로 말하려 했으나, 君의 모습은 이미 보이지 않았습니다. 오늘까지 말입니다. 그날 친구들과 헤어져 돌아오는 발걸음이 내내 무거웠습니다. 이 모든 것이 나 때문에 일어난 일이 아닌가? 하는 자책감 때문에 카모(鴨川) 강변을 한참 동안이나 서성였습니다. 내가 君의 영문법 책을 빌리지만 않았어도 君이 키무라 교수에게 그런 말을 듣지 않았을 텐데, 그 책갈피에 끼워져 있던 君이 지은 詩가 내 눈에 띄지만 않았어도 君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나는 君이 궁금했습니다. 君에 대해서 알고 싶었습니다. 君이 어떤 詩를 썼는지 너무나 알고 싶어서 君의 시를 읽어보려 했지만 조선말이라서 도저히 알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 영문과에서는 君이 유일한 조선인이었기에 저는 그 시를 조선말을 아는 다른 반 친구에게 번역해 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그 친구는 세 편의 시를 건네받고 라는 시를 번역하여 읽어 내려가다가는 ‘이 시를 쓴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무심코 히라누마君이라고 말해버렸습니다. 그것이 실수였습니다. 전 단지 君이 시를 쓰는 사람이라는 것이 자랑스러워서 君의 이름을 밝힌 것인데, 君과 친하게 지낸다는 사실을 과시하고 싶어서 그랬는데, 그것이 화근이었습니다. 뭔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시를 읽던 그 친구가 ‘이 시를 특별고등경찰에 신고하지 않으면 우리도 다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덜컥 겁이 났습니다. ‘내가 공연한 짓을 하여 큰일을 내고 말았구나’ 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습니다. 그래서 전 그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야마다, 이 詩가 히라누마 君의 책갈피에 끼워져 있다고 해서 그가 쓴 詩라는 증거는 없어. 확인되지 않은 사실을 신고해서도 안 되고, 누구에게 함부로 말해서도 안 돼.” 저는 야마다 손에 들려 있던 詩가 적힌 종이를 낚아채 제 가방 속에 넣었습니다. 그리고 외쳤습니다. “히라누마君은 그럴 사람이 아니야.” 그가 말했습니다. “마리코, 영문과에 적군이 있었다니 믿어지지 않아. 조선말로 詩를 쓴다는 게 얼마나 큰 反日행위인지 너 정말 모르는 거야?” 야마다가 조심하라는 말을 남기고 떠나간 뒤에 엄습해 오는 불안감 때문에 잠시 서성거리다가 저는 야마다가 번역해 놓은 君의 詩 를 꺼내 다시 읽어 보았습니다. 하지만 크게 문제될 만한 부분은 없는 것 같았습니다. 시의 내용을 다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가족과 친구들을 떠나 멀리 낯선 땅에 와서 느끼는 외로움과 그리움이 느껴지는 시였고, 부모님을 고생시키며 의미 없는 공부를 계속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로 고뇌하는 모습도 엿보였습니다. 그리고 끝부분에는 힘들고 어려운 때를 잘 이겨내고자 하는 의지(‘아침을 기다리는’)와 자기연민의 감정(‘눈물과 위안으로’)이 녹아있구나 라고 생각했습니다. 단지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라는 구절이 좀 걸렸습니다. 그래서 그 구절을 ‘육첩방(六疊房)은 적막한데’라고 수정한다면 특고(특별고등경찰)에 신고 된다 하더라도 큰 피해는 없을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君의 詩를 읽으면서 저는 부드럽고 온화한 표정 속에 감추어져 들여다볼 수 없었던 君의 고뇌와 고독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난 번 송별회 때 우지(宇治)강가에서 ‘아리랑’을 부르던 君의 슬픈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강변에서 밥을 지어 먹고 우리가 바위에 걸터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三津井 慶二(미쓰이 케이지)君이 제안했었죠. “히라누마(平沼)君, 노래 한곡 불러주지 않겠어?”라고. ‘君과 헤어지는 게 섭섭해서 그래’라고 그가 덧붙였을 때 君은 거절하지 않고 곧 바로, 그 노래를 불렀죠. 조금은 부드러우면서도 허스키한 목소리로……. 애수를 띤 조용한 君의 목소리가 강물 따라 흘렀습니다. 멀리 강변에 낚시를 하는 사람들이 보였고, 신록이 우거진 강 언덕 위에는 뭉게구름이 목화꽃처럼 피어오르고 있었습니다. 모두들 조용히 듣고 있다가 노래가 끝나자 박수를 쳤죠. 좀 의외였어요. 평소에 조용하고 온화했던 君이 그렇게 용감하게? 노래를 부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거든요. 항상 강의실 뒷문 가까운 자리에 앉아 있다가 수업이 끝나면 도망치듯 나가버리는 사람이었잖아요, 君은, 수줍음 많은. 그렇게 낯가림이 심하고, 외로워 보이는 君의 얼굴 위로 특고의 포악한 고문과 쇠철창의 잔혹한 이미지가 겹치면서 君에게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이 안겨지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과 무서움으로 몸이 떨립니다. 君을 찾아다니는 일 외에 3일 동안 전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히라누마君, 진심으로 사죄합니다. 그 일이 이렇게 순식간에 키무라 교수에게 알려지고, 특고와 연결될 거라고 상상도 못했습니다. 제발 나타나지 마십시오. 제발 특고에 잡히지 마십시오. 지금은 위험합니다. 제가 君을 찾지 못하는 것처럼 특고에서도 君을 찾아내지 못하기를 빌고 빕니다. 여기, 사진 한 장 동봉합니다. 송별회 때 우지강 구름다리 위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히라누마君과의 정답던 청춘의 한 때를 영원히 기억하겠습니다. 그러니 부디, 잘 은신해 있다가 君의 고향으로 무사히 귀환하기를 간절히 기원하겠습니다. 부디 무사하십시오, 히라누마君. 이 편지가 히라누마君에게 전달되는 偶然이, 아니 기적이 일어나기를 엎드려 빌고 또 빕니다. 昭和 18年(1943年) 7月 14日 北島 萬里子(키타지마 마리코) “7월 14일이면, 동주가 용정으로 출발하겠다던 날이죠? 특고에 잡혀간 날이 그날이니까. 참, 내. 아니 이 마리콘가 말콘가 하는 이 여자는 왜 동주의 시를 번역해 달라고 해서는……. 맞네요, 형님. 맞아, 이 여자가 우리 동주를 죽인 게 맞아요.” 편지 읽기를 마친 영춘이 충혈된 눈으로 그를 쳐다보며 목소리를 높였다. 젖은 얼굴을 소매로 훔치던 그가 편지봉투를 거꾸로 흔들었다. 사진 한 장이 떨어졌다. 일곱 명의 학생이 그 사진 속에 있었다. 아들 동주가 첫째 줄 중앙에 서 있었고, 아들 옆에 그 여자, 마리코도 있었다. 그는 사진 속 아들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아들이 아직도 교토의 하늘 아래서 푸른 꿈을 꾸며 살아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사진을 자신의 가슴에 얹고 두 손으로 꼭 눌렀다. 가슴 속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문신처럼 새겨 두려는 듯. 두 사람이 편지를 읽고 있는 사이에 좀 전에 조타실 쪽으로 갔던 1등실 승객 한 명이 선실로 올라갔다. 잠시 후, 대여섯 명이 웅성거리며 다시 갑판으로 내려갔다. 그와 영춘은 두 번째 편지를 읽고 있던 중이었다. 그 편지에는 昭和 20年(1945년) 2월 15일자의 소인이 찍혀 있었다. 그것은 동주가 죽기 하루 전에 보낸 것이었다. 편지의 사연은, 1년 가까이 ‘히라누마君’의 행방을 모르다가 우연히 카모카와 경찰서 유치장에 구속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마리코가 죄책감으로 인해 불면증이 걸렸다는 내용으로 시작되고 있었다. 그리고 ‘히라누마君’이 후쿠오카 형무소로 이감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달려갔지만 면회가 허락되지 않아 몇 번 되돌아 왔다는 내용이 이어졌다. 소문에 의하면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재소자를 대상으로 생체실험을 하고 있는데, 그 실험의 희생자들의 시체가 말로 형언할 수 없을 만큼 끔찍했다는 내용까지 언급하면서, ‘히라누마君’이 생체실험 대상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죽음으로 용서를 빌고자 자살까지 기도하려 했다는 내용이었으나 그는 그 편지를 다 읽지 못했다. 왜냐하면 일등실과 이등실의 승객들이 우르르 갑판으로 몰려 내려갔기 때문이었다. 수상한 낌새를 느끼고 그와 영춘도 갑판으로 내려갔다. 승객들이 조타실 방향을 바라보며 삼삼오오 얼굴을 맞대고 수군거리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일입니까?” 영춘이 이등실에서 눈에 익은 한 사람에게 물었다. “여자가 바다로 뛰어내렸답니다. 그래서 시체를 찾느라 배를 돌린 거래요 30여분 동안 찾았지만 허탕이랍니다.” “마리코?” 그와 영춘의 입에서 동시에 그 이름이 튀어나왔다. 어둠 속에서 조타실 쪽으로 달려가던 마리코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녀가 기어코 바다 속으로 몸을 던졌구나. 선원실로 내려간 그녀에게 감시병들이 무슨 모욕이라도 준 것일까? 일본인이지만 마리코라는 여자는 순수하고 지조가 있어 보였다. 편지의 내용으로 미루어 볼 때 마리코는 자신의 부주의로 한 사람이 참혹하게 죽어갔다는 것에 대한 죄책감을 견디지 못하고 후쿠오카 형무소 주변을 맴돌았을 것이다. 동주에게 사죄하고 용서를 빌기 위해서 말이다. 2월 15일에 보낸 마리코의 편지는 18일경 형무소에 도착했을 것이고, 동주가 받을 수 없음이 확인되어 반송되었을 것이다. 반송된 우편이 마리코에게 되돌아가기까지 3, 4일이 소요되고, 그것을 받은 마리코가 형무소에 오기까지 이틀 정도가 걸렸다면 마리코는 그와 영춘보다 하루 전쯤이나 같은 날 형무소에 도착했을 거라고 그는 머릿속으로 계산하였다. 마리코는 ‘수취인 부재’라는 반송사유를 ‘동주의 사망’ 으로 인식하고 형무소에 왔던 것일까? 마리코는 화장터와 동주의 자취집 등으로 이동하는 그와 영춘을 따라다니며 고해성사의 기회를 엿보다가 여의치 못하자 결국에는 관부연락선까지 타게 된 것이리라. 그런데 감시병들이 개입하는 바람에 제대로 용서를 빌지 못한 것에 대해 무척 화가 났고, 더군다나 ‘히라누마 도오주’의 아버지인 그에게 오히려 결례를 범하는 상황이 벌어지자 담백한 성격의 그녀는 무척 난감했을 거라고, 그는 애써 마리코의 처지를 헤아려 보았다. 마리코가 우리 동주를 사랑했던 것은 아닐까? 그는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다치고 아프게 한 죄, 사랑하는 사람을 죽게 하고 용서받지 못한 죄. 마리코는 그래서 더욱 자신을 들볶으며 괴로워했을지도 모른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리고 아들을 사랑했던 젊은 여자의, 아니 아들을 사랑하지 않았더라도 그녀의 인간적인 고뇌와 상처가 고스란히 자신에게 전해지는 것 같아 가슴 한쪽이 아려왔다. 불쌍한 것들. 세상을 잘못 만나 제 명을 다하지 못하고 꺼져버린 가엾은 불빛들. 비록 적국의 사람이지만 마리코의 부모 또한 딸을 잃은 슬픔에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리라. 그가 서둘러 선실로 올라갔다. 그는 짐칸에서 흰 보자기에 싸인 물건을 꺼내 펼쳤다. 하나는 유골함, 또 하나는 골분함이었다. 유골함에 있는 유골은 머리와 팔, 가슴과 다리에서 하나씩 추려낸 것으로 용정 선산에 묻을 것이다. 그는 유골함을 다시 보자기에 싸서 있던 자리에 놓고 골분함을 들고 일어섰다. 그것은 유골을 추려내고 남은 뼈를 빻아 담은 것이었다. 의아해 하는 영춘에게 성냥을 준비시키고 그는 선실 밖으로 나왔다. 그때 승객들이 선실로 올라오고 있었다. 그는 그들이 모두 올라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갑판으로 내려갔다. 배는 바다 한 가운데를 넓게 돌아 다시 부산을 향하고 있었고, 해가 떠오르려는지 동쪽 수평선 끝이 붉은 비단을 펼쳐 놓은 듯 환해지기 시작했다. 그는 코트 안쪽 주머니에서 마리코로부터 받은 편지를 꺼냈다. 그리고 영춘에게 성냥을 그어 불을 붙이라고 하였다. 편지봉투에 불을 붙였다. 그는 불붙은 편지봉투의 한 끝을 들고 일어나서 난간으로 갔다. 손끝까지 다 탄 종이가 재가 되어 사방으로 흩어졌다. “마리코, 이제 걱정하지 마. 동주는 마리코를 용서할 거야. 동주는 마리코를 원망하지 않을 거야. 동주는 마리코 때문에 자기가 죽은 거라고 생각하지 않을 거야.” 그는 갑판 위에 있던 분골함을 들고 뚜껑을 열었다. 그리고 분골을 한 움큼 집어 바다 위에 서서히 뿌리기 시작했다. 하얀 가루가 바다로, 공중으로 흩어지며 아스라이 사라져갔다. ‘아들아, 일본제국주의는 용서하지 못할지라도 마리코는 용서하거라. 아무리 세상이 혼란해도 영혼과 양심을 지키며 살아가는 사람은 있기 마련이다. 사람에게 무슨 죄가 있겠니? 죄는 그 사람들의 욕심과 욕망에서 비롯된 것인데……. 이 현해탄을 오가며 느꼈던 모든 굴욕과 절망에서 자유로워 지거라. 이 넓은 태평양에서 맘껏 너의 꿈을 펼치거라. 이제 모든 아픔에서 해방 되거라. 네가 원했던 평화의 시간은 올 것이다. 너와 같이 깨끗하고 맑은 영혼들이 수없이 역사의 제단 위에 스러져 갔으니……. 너와 같이 작은 불빛들이 모여 큰 빛이 되리니……. 구름이 흩어지며 쇳물처럼 맑고 붉은 태양이 수평선 위로 불쑥 솟아올랐다.(끝)    
1189    詩作初心 - 텅빈것과 없음을 노래하기 댓글:  조회:4123  추천:0  2016-03-12
텅 빈 것과 없음을 노래하기 심종숙   1   카카오톡으로 저 지구 반대편에 사는 사람들과도 무제한 대화가 가능하여 인간관계의 소통이 더 폭넓어졌음에도 관계의 불화로 고통을 겪는 많은 영혼들이 있다. 자본이 금융에 먹히고, 가져도 가져도 새로운 것을 욕망케 하는 후기 산업사회의 황폐한 물신주의는 인간으로 하여금 욕망의 기계가 되기를 강요하며, 거기에는 차이를 존중하지 않고 획일화를 따르게 하는 무서운 폭력이 숨어 있다. 풍요 속의 빈곤이 이러한 후기 산업사회의 병적 징후를 나타내는 말로 오래 전부터 있어왔고, 이 말은 여전히 유효하다. 모든 것이 넘쳐나서 소중한 것이 없어져 가는 이 시대에 ‘텅 빈 것’과 ‘없음’을 노래하려는 시인이 있다. 바로 이시환 시인이다. 그는 자신의 신작 18편의 시들을 통하여 텅 빈 ‘지금 여기’를 진단하면서 그 대안으로 ‘없음’을 묵상한다. 이시환은 없음을 노래함으로써 없음마저도 있는 풍요로운 우리의 삶이 되기를 바란다. 생명이 파괴되고 인간의 영혼이 메말라 가고 인간관계가 삭막한 ‘지금 여기’에 없음마저도 있게 함으로써 생명력 넘치는 삶이 되게 그는 없음을 노래하고자 한다.     2   텅 빈 공간에 홀로 앉아 있으면 역설적으로 몸과 마음이 홀가분해지면서 편안해진다. 또한, 평생을 지지고 볶으며 열심히 살았어도 때가 되면 다 죽게 되어 그 몸도 그 마음도 모조리 사라지고 만다. 남는 것이 있다면, 우주 속으로 방사되어 다른 물질의 원료가 되는 몇 가지 원소일 뿐이다. 따라서 보란 듯이 살고, 남부럽게 많이 가졌어도 그 끝은 허무하기 짝이 없게 마련이다.   시인은 인간 존재의 종국이 죽음으로 귀결되며 그것을 허무한 일로 보면서도 그렇게 텅 빈 공간에 홀로 앉아 있으면 몸과 마음이 편해진다고 자서(自序)에서 이야기 하고 있다. 이 자서의 내용으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시인은 텅 비어 있는 것에 대하여 부정성을 이야기 하면서도 거기에 내재한 긍정성을 바라보고자 한다. 이것은 시인만이 끝까지 놓을 수 없는 내면의 두레박이며, 그가 자서에서 밝히듯 ‘마음 속의 풍경’이기도 하다. 시인은 내면의 둥글고 아래로 구멍 난 우물에 두레박으로 끊임없이 물을 길어 올리기 위해 두레박을 던져 넣기를 하면서 우물의 이쪽에서 두레박의 끈을 어느 정도의 길이로 내리면 그것이 내면의 언어를 퍼 올릴 수 있는가를 가늠하는데 이 가늠이야말로 시인은 있음으로 가득 찬 세계와 텅 비고 없는 세계의 대립을 소통하는 방식이라고 여겨진다. 그런 면에서 이시환의 시는 그 가늠하는 시간 속의 예리한 감각이 더욱더 벼려지는 순간 순간들에서 나온 언어들로 직조(織造)되고 있다. 이시환의 시에서 텅 비어 있는 세계는 ‘내 가슴 속 황량한 벌판’(「벌판에 서서」)이라고 하여 공허감, 죽음, 고요, 사막, 적막 등으로 표현되고 있다.   그곳 내가 걷는 길의 고적함 속으로 저들이 곤두박질치며 부려놓는, 짧은 한 악장의 장중한 화음을 들어보시라. 저들끼리 밀고 당기고, 질질 끌고 잡아채며, 점점 세게, 아주 여리게, 사라지는 듯하다가도 다시 소생하는, 허허벌판에 부려지는 화음이 범상치가 않구나.   죽어가는 세상을 부여잡고 그리 통곡하는 것이더냐? 이 들판 저 산천에 푸른 세상을 다시 일으켜 세우려는 것이더냐?   싸락눈이 섞여 내리는 겨울비가 부려놓는, 오늘의 짧은 한 악장의 화음이 절뚝이는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우시네. 침몰하는 세상을 다시 붙들어 일으키시네. -「겨울비」   나름대로는 열심히 산다고 살았건만 나이 팔십이 되도록 십여 평짜리 영구임대아파트를 벗어나지 못한 우리들의 이웃, 김 씨 아저씨. 하필이면, 들끓는 가래 천식으로 꽃 피는 봄날에 숨을 거두었네. 하나뿐인 자식은 탕자蕩子가 되어 돌아왔으나 눈물을 삼키며, 애비의 주검을 화장火葬하고 남은 재를 뿌리고, 손을 탈탈 턺으로써 쓰레기를 치우듯 말끔히 그의 흔적을 지우고, 그를 지워 버리네.   있거나 이루었다고 아니 가는 것도 아니고, 없거나 이루지 못했다고 먼저 가는 것만도 아니고 보면 더는 허망할 것도, 더는 쓸쓸할 것도 없다. 세상이야 늘 그러하듯 내 눈물 내 슬픔과는 무관하게스리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여전히 분망奔忙하고 분망할 따름. 이 분망함 속에서 죽는 줄 모르고 사는 목숨이여, 한낱 봄날에 피고 지는 저 화사한 꽃잎 같은 것을. 아니, 아니, 이 몹쓸 바람에 이리저리 쓸려가는 발밑의 티끌 같은 것을. -「봄날의 만가」   모래뿐인 세상, 적막뿐인 세상 그 한 가운데에 서서 머리 위로는 쏟아지는 햇살로 흥건하게 샤워하고 발밑에서부터 차오르는 어둠으로는 머릴 감으면서 나는 비로소 눈물, 눈물을 쏟아놓네.   아, 고갤 들어 보라. 살아 숨 쉬는, 저 고단한 것들의 끝 실오리 같은 주검마저도 포근하게 다 끌어안고, 혈기왕성한 이 육신의 즙조차 야금야금 빨아 마시는 모래뿐인 세상의 중심에 맹수처럼 웅크린 적막이 나를 노려보네. -「사막투어」   이시환에게 이 세상은 공허하며 참으로 고단하다. 그래서 그는‘모래뿐인 세상’,‘적막뿐인 세상’이라고 진단한다. 시적 화자는 그 힘겨운 세상의 한 가운데에 서서‘죽는 줄도 모르고 사는 목숨’에 지나지 않는다. 참담하기 그지없는 이 마음 속 풍경에 독자들은 이시환의 고뇌를 읽을 수 있다. 그 어디에도 생명을 읽을 구절이 없다. 그 세상에 사는 시적 화자 ‘나’는 절뚝이는 병신이다. 시인은 제복과 달리‘안 병신’일 수 없다. ‘지금 여기’의 현실이‘침몰하는 세상’이기에 시인은 절뚝이는 병신으로서 그를 둘러싼 세상을 말하고 싶은 것이며, 스스로 병신되기를 자처하는 자이다. 이러한 비극적인 현실은 김씨 아저씨의 죽음에서 보여주듯이 열심히 살았지만 팔십이 되도록 십여 평짜리 영구임대아파트를 벗어나지 못하는 이웃들의 아픔을 드러내고, 탕자가 되어 돌아온 아들이 아비의 시신을 쓰레기 치우듯 흔적을 지우는 데서 극에 달한다. 이와 같은 죽어 가는 세상을 부여잡고 시인은 통곡하는 소임을 맡고, 침몰하는 세상에 맞서 절뚝이는 자신을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 몸부림을 한다. 광야에 해당하는 황량한 벌판에서 시적 화자를 일으켜 세우고 침몰하는 세상을 다시 붙들어 일으키는 것은‘짧은 한 약장의 장중한 화음’이다. 이와 같이 죽음의 부정성의 세계를 생명의 긍정성으로 바꾸는 것은‘피리 소리’(「바람소리에 귀를 묻고」), ‘바람의 연주’(「바람의 연주」)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사막투어」에서 사막이라는 공간은 황량한 벌판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으로써 시적 자아가 공허감과 삶의 고단함으로부터 생성된 부정성을 회복하기 위해 정화되는 장소이다. 정화, 씻김의 공간에서 시적 화자는 자신을 대면하기 때문에 두려움에 사로잡혀 ‘맹수처럼 웅크린 적막’이‘나’를 노려본다고 말한다.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해 시적 화자는‘나는 비로소 눈물, 눈물이 쏟아지네’라고 하여 씻김으로써 정화되고 있다. 자기 응시와 내 안의‘나’ 바라보기는, 「그해 겨울」에서 ‘나도 한 그루 헐벗은 미루나무처럼/ 그 깊은 겨울에 갇혀서/ 숨죽인 대지의 심장 뛰는 소리에 귀를 묻고/ 그 텅 빈 세상에 갇혀서 / 이글거리는 눈빛을 깃발처럼 내걸어 놓는다’라고 하여 겨울과 텅 빈 세상에 갇혀서 헐벗은 미루나무의 적신(赤身)에 깃발 내걸듯 준엄히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정화, 씻김은 자기 지우기, 또는 비우기이다. 존재의 부정성은 자기 비우기나 지우기를 이행함으로써 도달되는 경지이다. 시 「태양」에서 시적 화자는 ‘태양이시여,/ 나의 심장을 조금만 가볍게 하라/ 그것이 마침내/ 한 덩이 까만 숯이 되고,/ 그마저 하얀 재가 되어 폴폴 날릴 때까지/ 불타게 하라’라고 외친다. 시인에게 텅 빈 부정성의 세계는 긍정성으로 극복되어야 할 것이며, 텅 빈 것이 편안함으로 다가오기까지 텅 빈 것의 부정성과 대결해야 하는 것이 시인이 처한 운명이다. 시인은 스스로 ‘병신되기’를 마다않고 텅 빈 것의 부정적 세계를 통곡해야할 소임을 맡는다.     3   시「겨울바람」에는 두 세계가 존재하고 있다. 그것은 ‘텅 비어 있는 가슴 속’과 같은 부정성의 세계와 ‘한 마리 귀여운 들짐승’, ‘진흙’, ‘눈먼 광인’, ‘어린 풀꽃을 터뜨리는’ ‘겨울바람’의 긍정적 세계가 대립되어 반복되고 있다. 그러나 이 두 세계가 공존하고 상호 침투함으로써 텅 빈 것의 부정성은 극복되고 있다. 그래서 시인은 「공空」에서 텅 비어 있는 것에 대해 찬탄한다.   텅 비어 있다는 것, 그 얼마나 깊은 것이냐. 내 작은 성냥갑, 야트막한 주머니, 큰 버스, 깊은 하늘 모두 비어있다는 것은 그 얼마나 아득한 것이냐. 그런 네 텅 빈 가슴 속으로 문득 뛰어들고 싶구나. 그 깊은 곳에서, 그 아득한 곳에서 허우적대다가 영영 익사해버리고 싶은 오늘, 텅 비어 있음으로 꽉 차 있는 네 깊은 눈 불길 속으로 뛰어들고 싶구나.   이 시에서는 텅 비어 있는 존재들을 나열하면서 깊은 하늘마저도 텅 비어 있고 그 비어 있는 것이 얼마나 깊고 아득하냐고 독자에게 반문한다. 텅 비어 있는 것은 허전하고 쓸쓸하고 공허한 부정성을 넘어 이시환은 깊고 아득하다고 노래한다. 그리고 텅 비어 있음으로 해서 역설적으로 ‘꽉 찬’ 것으로 치환한다. 텅 비어 있는 것과 ‘꽉 찬’ 것은 대립적인 개념이지만 이시환의 시에서는 완전한 텅 빔이 오히려 꽉 참이 되는 역설적 세계를 보여준다. 이 텅 비어 있음은 「구멍론」에서 더 구체화 되고 풍성하다.   커다란, 혹은 깊은/ 구멍이 눈부시다./ 푸른 나뭇잎에도, 사람에게도/ 바람에게도, 하늘에도, 우주에도,/ 그런 구멍이 있다./ 기웃거리는 나를 빨아들이듯/ 불타는 눈 같은,/ 그런 구멍이 어디에도 있다./ 사람이 구멍으로 나왔듯이/ 비가 구멍으로 내리고,/ 햇살도 구멍으로 쏟아진다.(후략)   텅 비어 있는 것의 구체화는 구멍이며 그 풍성한 구멍은 우주만물과 인간에게도 존재하고 있다. 구멍은 삶으로도 죽음으로도 유(有)에서 무(無)로도 또는 그 역으로도 되는 하나의 통로이며 분절적이거나 대립적인 것으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이시환은 그의 자서에서 하나의 통로로서의 구멍을 ‘한 몸 안에서 커다란 두 기둥이 되었던 것’으로 동일시하고 있다.   돌이켜보면, 죽음의 아늑함과 생명의 뜨거움이 나의 삶속에서 늘 함께 자리 잡고 있었으며, 죽음은 ‘공허’로 묶여지고, 생명은 ‘바람’으로 묶여졌다. 그리하여 공허는 생명의 존재양식 변화인 죽음의 양태일 뿐이며, 바람은 생명에 원기를 불어넣는 텅 빈 공간의 보이지 않는 움직임일 뿐이라는 막연한 생각을 해왔다. 결과적으로, 생명과 죽음,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 생성과 소멸이라는 대립되는 두 키워드가 한 몸 안에서 커다란 기둥이 되어있었던 것이다.   생성과 소멸의 구멍은 잉태와 죽음의 장소이며 여성성의 상징인 자궁이다. 거기에는 삶과 죽음이 동시에 들어있고 이시환의 구멍은 자궁으로 회귀하려는 퇴행(죽음)을 보여주는 것 같지만 거기에 머물러 있지 않은 부분이 평가될 만하다고 본다. 그 이유는 이시환의 구멍이 생명의 근원으로 기능하는 데에 있고 그것은 순환되는 우주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 구멍을 통해서만이/ 한없이 빠져들 수 있고, 침잠할 수 있고,/ 새로 태어날 수 있다./ 그것으로부터 모든 것이 비롯되고,/ 비롯된 모든 것이 그곳으로 돌아간다./   텅 비어 있는 구멍은 비어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을 품을 수 있다. 그리고 거기엔 생명을 움트게 하고 거기에서 모든 것이 시작되며, 비롯된 모든 것이 그곳으로 돌아간다는 만상동귀(萬狀同歸)의 불교적 존재론에 이르고 있다. 그러므로 시인에게 구멍은 ‘숨통, 기쁨, 슬픔’이 된다고 말한다. 이시환 시의 이러한 시법은 역설에 근거하며 존재/비존재의 영역을 넘나드는 시인의 감성이 길어낸 성과라 할 수 있다. 즉 텅 비어 있는 것이 시인에게 긍정적으로 자리매김 될 수 있는 것은 결코 한 순간에 이루어졌던 것이 아니리라. 이시환은 그의 자서에서   어리석게도 나는 어렸을 때부터, 불교(佛敎)의 영향 탓인지, 이 ‘유’와 ‘무’란 개념에 대해 집착해 왔다. 동시에 집착하며 살아있게 하는 내 생명의 본질에 대해서도 깊이 천착해 왔다. 곧, 온갖 욕구 욕망으로 들끓게 하면서도 때론 부끄러워하게도 하고, 때론 의롭게 하게도 하면서 심장을 뛰게 하는 힘의 근원과 미추(美醜)에 대해서도 오래오래 생각해 왔다는 뜻이다.   라고 밝히고 있다. 시인은 불교적 사유의 경험을 어릴 때부터 하여왔고 존재론적 문제에 대해 자연스럽게 바라볼 수 있는 내적 힘이 길러진 것이라고 간주된다.     4   「구멍론」의 구멍이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 본 구멍 보기라면 「하늘」에서는 아래에서 위로 난 구멍 들여다보기이다. 이 세상은 태초에 어둠에 둘러싸인 거대한 궁창이었으며 그 궁창의 위쪽이 하늘이 되고 아래가 땅이 되었다. 이시환의 구멍은 이렇게 창세기의 궁창의 이미지를 엮어 그 세계를 확장시키고 있다. 그러므로 창세기의 궁창은 불교적으로 말하면 거대한 우주이며, 페미니즘 시각에서는 여성의 자궁을 상징하며 생명을 잉태하고 키우는 거대한 막이고 둥근 것으로 순환의 원리에 의한다.   미루나무 푸른 잎에는 푸른 잎만한 하늘이 반짝거리고   종알대는 까치 새끼들에겐 까치 새끼만한 하늘이 실눈을 뜬다.   높은 산 깊은 계곡에는 높은 산 깊은 계곡만한 하늘이 뿌리 내리고   너른 들 너른 바다에는 너른 들 너른 바다만한 하늘이 내려와 있듯   사람 사람들에겐 저마다의 하늘이 숨을 쉬고   지나가는 바람에게도 지나가는 바람만한 하늘이 내걸려 있구나.   하늘 궁창 아래에 있는 사물들과 인간들에게 하늘 궁창은 그것만큼 현현되는 것이며 그 거대한 구멍을 한낱 풍경화처럼 보아온 것을 이시환의 구멍 보기라는 렌즈에 잡힌 하늘은 역동적이다. 즉 자궁의 막처럼 하늘이 사람과 사물, 동식물과 나아가 우주를 둘러싸고 있기 때문에 그 안의 모든 것들은 생명력을 가질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우주의 구멍에는 바람이 생명의 원천을 제공한다. 바람이야말로 이 우주의 힘의 근원이며 생명이다. 시 「바람소리에 귀를 묻고」를 보자.   먼 옛날, 할아버지가 대나무에 구멍을 내어 천 가지 만 가지 마음의 소리를 내듯 하늘과 땅 사이 커다란 구멍을 열고 닫으며 만물에 숨을 불어 넣고 만물의 혼을 다 빼가며 천 가지 만 가지 빛깔의 소리를 내는 당신의 피리 연주.   바람소리에 귀를 묻고 귀를 기울이는 동안 이미 한 생이 저물어가듯 또 한 생명의 싹이 돋는구나.   하늘과 땅 사이 커다란 구멍을 열고 닫으며 크고 작은 바람으로 만물에 혼을 다 빼가며 이 땅 가득 부려 놓는 당신의 말씀이여, 사랑이여.   하늘과 땅 사이에 시인은 거대한 구멍이 있다고 보고 그 구멍, 우리가 ‘대기’라고 부르는 그 공간에서 쉴 새 없이 바람이 순환함으로써 땅 속, 땅 위, 하늘의 모든 삼라만상이 변화를 하게 되는 우주의 이법을 이시환은 이 시에서 표현하고 있다. 만물에게 숨을 불어넣기도 하고 만물의 혼을 거두기도 하는 자는 어떤 존재자인가? 이는 우주만물을 만든 조물주이며 생명을 주재한다. ‘바람소리에 귀를 묻고/ 귀를 기울이는 동안/ 이미 한 생이 저물어가듯/ 또 한 생명의 싹이 트는구나/’ 하고 시인은 바람소리를 들으며 존재들의 생멸을 듣는다. 시인은 여기에서 성서적 기원인 창세기의 공간으로 독자를 초대하여 우주만물의 시원과 창조의 세계로 이끈다. 먼 옛날의 할아버지는 창조주를 연상하게 하고, 시의 마지막 행에서와 같이 ‘당신의 말씀이여, 사랑이여’라는 구절에서 조물의 원인이 사랑 -불교적으로는 자비- 이며 그것이 말씀으로 전해져 온 성서적 세계로 의미영역을 확장시키고 있다. 이런 부분에서 이시환의 시는 문학과 종교라는 상호텍스트적 측면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시의 세계가 지니는 깊이와 영역이 확장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여기에는 불교적인 세계와 기독교적인 세계가 어우러져 있기 때문에 종교혼합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시환은 종교혼합주의를 말하지 않는다. 어디까지나 웅대한 창조질서와 모든 생명의 만상동귀라는 기독교와 불교적 진리를 시 속에 풀어둠으로써 시 세계에 깊이를 두었다. 그리고 그것이 사랑(자비)에 의해 수행되고 로고스에 의해 세세대대로 전하여져 왔다고 말한다. 시인의 의식이 여기까지 다다르면 텅 비어 있는 것의 부정성도 극복이 되고, 그것은 오히려 긍정성으로 시에서 작용하며 텅 빈 것이나 없는 것을 보는 시선이 달라지게 된다. 인간이 생멸을 다하는 것도 불교적 진리에서는 하나의 순환일 뿐이며 이법이다. 그러기에 시인은 소멸해가는 것도 아름다운 것이라 하고 소멸해 가는 것을 노래하고 싶은 것이다.     5   텅 비어 있는 것, 소멸해 가는 것의 허허로움을 극복하고자 하는 시인의 몸부림은 「벌판에 서서」에서 나타난다.   바람이 분다.   얼어붙은 밤하늘에 별들을 쏟아 놓으며 바람이 분다. 더러 언 땅에 뿌리 내린 크고 작은 생명의 꽃들을 쓸어 가면서도 바람이 분다.   그리 바람이 부는 동안은 저 단단한 돌도 부드러운 흙이 되고, 그리 바람이 부는 동안은 돌에서도 온갖 꽃들이 피었다 진다. 바람이 분다.   내 가슴 속 깊은 하늘에도 별들이 총총 박혀 있고, 내 가슴 속 황량한 벌판에도 줄지은 풀꽃들이 눈물을 달고 있다.   바람이 분다.   한 인간이 자신의 소멸을 받아들이는 것은 쉬운 것은 아니기에 소멸을 받아들이는 것도 종교적 진리를 접하면서 인식의 지평이 열리게 되고 그것을 받아들이면서 인간은 자신도 삼라만상의 일부라는 것을 깨닫고 겸허해질 수가 있다. 인간은 지난 세기에 우주의 삼라만상의 존재들을 인간이 지닌 끝없는 욕망으로 파괴하여 왔고 인간 자신마저도 욕망의 기계가 되게 하여 파멸의 길로 인도하였다. 자연적 소멸과 파괴적 소멸은 같지 않다. 이시환은 자연적 소멸을 이야기하여 텅 비어 있을 수 있고, 없음을 노래할 수 있으며, 겸허하게 욕망을 내려놓은 인간, 즉 자유인이고자 한다. 만상을 제멋대로 부리기만 하는 지배자 인간이 아니라 만상과 함께 동귀하는 인간이고자 한다. 소멸은 욕망이 거세되는 것이기에 우주적 이법을 깨달으면서 받아들여 갈 때 아름답고 아득하며 깊이를 가진 것이라고 토로할 수 있게 된다. 「대숲 바람이 전하는 말」에서는 인간의 운명적인 죽음을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다.   이러쿵저러쿵 한 세상을 살다가 훌쩍 자리를 비운다는 게 얼마나 깊은 아득함이더냐. 그 얼마나 아득한 그리움이더냐. 저마다 제 빛깔대로 제 모양대로 제 그릇대로 머물다가 그림자 같은 공허 하나씩 남기며 알게 모르게 사라져 간다는 것, 그 얼마나 그윽한 향기더냐, 아름다움이더냐.   불확실한 시대에 가장 분명한 진리는 모든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는 점이다. 그동안 너무 살아 있는 것만을 보아왔고 그 안에 배태되어 함께 커가는 죽음에 관해서 이야기 하지 않았다. 그래서 죽음은 두렵고 꺼려지는 것이고 죽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해왔다. 성장만 있고 아름다운 소멸은 없었다. 성장만을 부르짖는 시대에 거기에 반하는 것을 외치면 아무도 들어주지 않고 외면한다. 인간이 죽을 운명이라는 것을 겸허히 받아들이게 되면 인간은 인간답게 살 수 있게 된다. 그것을 받아들이기보다 피하고 성장만을 외쳐왔다. 그러니 성장에 방해되는 모든 것들을 차별하고 부정적인 것들로 간주하여 구석에 밀어 두던지 획일화라는 이름의 제복으로부터 훈육, 감시와 처벌을 받아야 했다. 죽음이 그렇다. 저 구석에다 처박아 둔 것이 어느 날 반역을 일으키고 살아 있는 것에 도전을 해 온다. 있음만이 강조하던 시대는 성장만을 최고의 가치로 외쳐대던 시대였다. 이시환은 없음을 이야기하려 한다. 「대숲 바람이 전하는 말」에서 시인은 죽음을 향기나 아름다움으로까지 끌어올리고 있는데 죽음을 희화화하는 것이 아니라 이시환은 겸허하게 인간의 죽음을 바라보고 그 부정성을 넘어 긍정성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서씨 아저씨도 갔고, 김씨 아저씨도 갔고, 이젠 그 박 가 놈도 이런저런 이유로 가고 없다’고 시인은 그 허전함을 노래하지만 그들의 빈자리가 깊이와 향기, 그리움과 아름다움을 저마다 하나씩 간직한 존재들이었다는 것을 강조한다. 평범한 사람들의 죽음이 이렇듯 아름다운 존재의 소멸로 호명되는 순간 존재들의 죽음이 죽음이 아니라 불려짐으로써 다시 살아나는 것으로 치환됨을 알 수 있다. 이시환은 그렇게 아무 것도 아닌 것들에 대해 애정을 가지고 바라보고 있다. 없음마저 있는 풍요롭고 생명력 넘치는 세상이 되길 그는 노래한다.  
1188    남영전 민족토템시 파헤쳐보기 댓글:  조회:5081  추천:0  2016-03-12
[ 2016년 03월 09일 08시 20분 ]       인성 본연의 부름                             민족 영혼의 재주조 ─남영전의 민족토템시 연구 곽 지 우 (중국인) 1. 시인 남영전의 시를 읽고 나면 우리는 자기도 모르게 엄숙하고도 眞率한 시인, 민족과 시대 앞에 숭고한 책임감을 지닌 의젓한 시인을 보게 된다. ꡒ시인의 인생은 自我의 이해이거나 개별적인 사소한 일이 아니라ꡓ 그것은 민족 내지 인류의 ꡒ전체적인 생명ꡓ인 것이다. 심오한 민족감정과 끊임없는 시대적인 인생추구, 그것이 시종 그의 詩魂으로 살아 숨쉬고 있다. 詩壇에 그 어떠한 迷妄함이나 輕妄함이 나타나든지 아랑곳하지 않고 대단한 슬기로 침묵하면서 냉정하고 신중하였으며 자신의 사유방향과 창작항로를 확고히 다지여 心靈의 불길은 민족의 희망과 시대의 진보에로 활활 타올랐다. 그는 바로 이 길에서 집요하게 개척하고 탐색하면서 자신의 착실한 생명 체험으로 시를 써서 선후로 『상사집』 『푸른 꿈』 『산혼』 『백학』 『해와 달』 등 여러 부의 시집을 출간했다. 이러한 작품들은 죄다 시대의 맥박속에서 조선민족 문화정신의 내포에 대한 探究와 高揚이였다. 최근 몇 년간에 창작한 남영전의 24首의 민족토템시는 이런 사상적 취지의 새로운 사색이고 새로운 개발이고 시인의 상상영역과 사유공간의 새로운 확장이며 시인의 창작에서의 또 하나 기꺼운 새 수확이다. 민족토템시 창작에서의 근본은 토템숭배와 그로부터 생긴 토템신화이다. 원시인들의 일종 심리상태로서의 토템숭배는 인류학자들의 장기간의 고찰과 연구를 거쳐 발견되고 확인된 것이다. 초기에 어떤 분들은 원시인들의 심리상태는 3대 숭배 즉 實物崇拜, 自然崇拜, 祖上崇拜라고 인정하였다. 그 후 어떤 학자들은 대량적인 원시재료에 대한 연구를 거쳐 3대 숭배 이전에 또 만물이 생명, 혼,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物活論을 제기하였다. 그런데 북아메리카와 오스트랄리아 등지의 토템숭배의 발견 그리고 그 후의 고찰과 연구는 토템숭배가 또 만물유령(有靈) 숭배보다도 더 일찌기 있었는 바 그것은 최저 단계 원시인들의 심리상태였고 민족문화정신의 진정한 始原이었다고 표명하였다. 토템숭배관념은 인류가 천성적으로 지니고 있는 호기심의 부추김을 받아 만물의 起源, 특히는 인류 자신의 기원에 대해 追窮하는 데서 생겨났다. 미국의 인류문화사학자 스원은 ꡒ인류와 하등동물의 생활방식 지간의 하나의 구별점은 바로 생명의 기원과 영원의 가능성에 대한 흥취가 다름에 있다. 이런 실정에 대해 동물이 흥취를 가진다고 우리에게 알려주는 직접적인 증거는 없다. 그러나 인류는 늘 자신의 기원에 관해 탐구한다…ꡓ라고 하였다. 원시사회의 원시인들은 ꡐ탐구ꡑ를 거쳐 매개 씨족마다 모두 그 어떤 특정적인 物種에서 기원되었는데 그것은 동물이거나 식물이거나 자연현상이라고 믿었고 씨족이 기원한 그 물종이 바로 씨족의 토템이라고 믿었다. 토템이라는 단어는 북아메리카 인디안어의 음역인 바 ꡐ친속ꡑ과 ꡐ표기ꡑ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이런 관념에 대해 ꡐ生命一體化ꡑ라는 이름을 붙히고 나선 독일학자 엔스트 카시르는 다음과 같이 천명하였다. ꡒ기본적이고 불가 摩滅적인 일종 생명일체화가 형형색색의 多種多樣한 생명형식을 소통하였다. 원시인들은 자기들이 자연등급에서 결코 唯一無二한 특권적 지위에 있다고는 인정하지 않았다. 모든 생명형식이 모두가 친족관계가 있다는 것은 신화적 사유의 보편적인 예비였던 것 같다. 토템숭배의 신념은 원시문화의 가장 전형적인 특징이다.ꡓ 원시인들은 이런 ꡐ모든 생명형식이 다 친족관계가 있다ꡑ는 ꡐ생명일체화ꡑ의 관념으로 인류기원에 관한 의문에 해답을 얻었고 이로써 자연계와의 조화를 얻었다. 원시인들이 토템을 숭배하게 된 것도 한면으로는 문화심리 요소였고, 또한 생활경험의 제시였다. 영국 인류학자 말린노브스끼는 이렇게 말하였다. ꡒ우리가 토템제에서 보게 되는 것은 원시사회 사람들의 신비현상에 대한 환상이 아니라 두 가지 심리상태의 복합인 바 일면으로는 환경에서 가장 긴요한 것에 대한 실리주의적인 고려이고, 일면으로는 고운 새, 기어다니는 벌레, 위험한 동물 따위들에 대한 상상이다. 그들의 생명과 관계되는 대상ꡓ과 ꡒ위험이 있을 수 있는ꡓ 그런 것에 대해 우상숭배의 방식을 취하게 됨은 원시민족들의 생활의 理想, 念願, 慾求를 반영하는 바 이는 자기들의 목표보다 높이 추구하는 적극적인 진취의 염원이고 현존하는 생존조건을 초월하려는 욕구였다. 연구가 표명하는 바 토템숭배에서 생겨난 토템신화의 많은 관념들은 모두다 인류 자체의 속성으로 자연을 억지로 비교하여 자연을 재건한 결과였다. 심리학자 알레이가 말한 것처럼 ꡒ모든 사건은 意志적인 것이다. 의지적인 행동은 그 뒤에 사람이거나 인격화한 실체가 있기 때문이다. 원시인들은 바로 이런 방식으로 모든 자연현상을 해석하였다.ꡓ 예컨대 신과 신의 행위의 창조는 바로 인간행위의 屈折이고 그것은 에드와 타일러의 말처럼 ꡒ자기 생활의 모든 뛰여든 이야기를 신의 왕국에 끌어 들였다.ꡓ 그러므로 자연이 아니라 사회가 토템신화의 原形을 구성하였다. 그것은 민족의 동년시절 초기의 사회현실의 일종 素描로서 사람들의 생활의 희망과 추구를 표달한 동시에 현실생활에서도 큰 역할을 일으켰다. 이는 원시민족에게 형상적인 聯想의 풍부한 상상력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ꡒ이성적 사유가 싹트기 시작하고 각종 의식의 胚胎가 이미 형성ꡓ되었음을 표명한다. 이로부터 알 수 있는 바 토템신화는 여러가지 소박한 원시적 관념이 沈澱되고 凝結되어민족문화심리의 심층구성의 원시적인 蓄積層임을 알 수 있다. 거기에 민족문화의 本源이 있고 민족영혼의 根源이 있으며 인간성의 本然이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시대적인 시인으로서의 남영전이 토템숭배에 흥취를 가지게 된 원인이 되는 것이다. 그는 현대적 視野를 희생시키면서 원시적인 부락에 되돌아가 풍경을 감상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현대인이 문명을 창조하고 또 문명에 해소되어 나타나는 인성도덕 정신의 엄중한 상실 속에서 토템숭배가 형성한 민족문화 원형이 민족문화의 역사적 발전에서 일으키는 永久한 의의를 보았고 민족문화심리의 심층구조로서의 원시적 침적층이 현대문화정신 건설에서 일으키는 活性, 滋養 역할을 보았던 것이다. 시인이 토템신화를 시에 引入한 것은 그 영원한 가치원소를 환기하여 초기인간의 아름다움과 착함에 대한 관념을 현실에 融合시켜 토템숭배의 풍만한 생명력이 현실적 의의를 가지게 함으로써 잃어버린 것을 다시 회복시키고 다시 주조하여 민족문화정신의 성장과 발전을 추진시키려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시인은 자기의 창작적 추구를 말할 때 ꡒ나는 縱的인 역사정신의 連結과 橫的인 세계문화의 참조속에서 민족의 넋을 발굴하고 다시 鑄造하여 방대하고 깊이 있는 民族史詩를 쓰려고 한다ꡓ라고 하였다. ꡐ다시 주조함ꡑ은 바로 창조이며 민족의 문화정신 가치의 발전이다. 남영전의 귀중한 점이 바로 민족의 전통적 문화가 그를 기르고 그를 양성시켰다면 그는 또 자신의 숭고한 책임감으로 자신의 탁월한 智慧와 才質로, 자신의 격정과 열정으로 민족의 새로운 문화를 창조한다는 점이다. 그것이 바로 민족적 시인이고 시대적 시인으로서의 그의 본색이며 또한 걸출한 시인으로서의 본색이다. 민족토템시를 창작함에 있어서 시인은 시간과 정력을 소모하는 간난신고를 치루었다. 조선민족의 민족토템에 그 물종이 아주 많으나 現傳하는 자료는 문화적 記載나 구두적 傳承이거나를 물론하고 극히 분산적이다. 이러한 자료들을 전면적으로 발굴하고 소유하려면 정력을 죄다 쏟아부어야 하였다. 그래서 1986년부터 시인은 국내와 국외에서 널리 자료를 수집하면서 선후로 3백여만 자의 문화 史料를 찾아 읽고 여러 가지 문자로 출판된 문화사, 민족사를 읽으면서 8년이란 시간을 소모하였는데 그것은 고급학교를 수학한 것만큼이나 거창한 공부였다. 그는 끝내 전부의 민족토템자료를 소유하였고 깊이 연구한 결과에 토대하여 24수의 민족토템시를 창작함으로써 보기 드문 열정, 엄숙, 집요한 심령을 표출하였다. 이런 시들은 이미 한국 도서출판 전예원에서 상재한 중, 한, 영 3종 문자대조본 「남영전시선집」에 수록되었다. 詩歌史에서 신화를 시에 인입한 명시인들은 적지 않다. 롱사르, 괴테, 말라르메, 예이츠 등은 모두 신화를 시에 인입해 명시들을 써낸 거물들이다. 그러나 민족의 토템숭배를 시에 인입하여 그것을 系列化한 실례로는 남영전 씨가 바로 시가사에서의 첫사람이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 여기에서 꼭 짚고 넘어가야 할 사항이라면 남영전은 조선족 시인이지만 이런 시들은 조선어가 아닌 한어로 직접 씌여졌다는 점이다. 그런데 모국어 아닌 언어로 쓴 시들임에도 그의 시어에서 나타나는 깊은 조예와 치밀한 琢磨의 재능, 그리고 옛스러운 언어스찔은 무릎을 탁 치며 찬탄해 마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이런 시작품들의 내포와 의의를 이해하는데 편토록 민족기원에 대해 묘사한 토템시와 일반적인 토템시를 두 부분으로 갈라 감상하련다. 2. 民族始祖 시들은 토템신화에 근거하여 天神과 祖上을 합일체로 조상의 숭고한 품성과 정신을 찬미하였다. 이런 시들로는 「곰」, 「신단수」 그리고 「달」, 「해」, 「백학」 등 5수이다. 묘사대상에 대한 시인의 깊은 연구, 독특한 感悟, 재능있는 예술적 창조로 말미암아 우리는 이 시편들에서 신화중의 참신한 인성 세계를 볼 수 있게 된다. 이런 생소하고 독특한 시들은 우리 당대 시단에다 신기롭고 아름답고 비상한 예술적 景觀을 제공하였다. 「곰」은 민족의 ꡐ시조모ꡑ의 생명정신에 대한 禮讚이다. 구라파, 아세아 대륙에 널리 유전되고 있는, 천신이 흙을 빚어 사람을 만들었다는 民族起源 시와는 달리 한민족의 선민들은 자기가 ꡐ웅녀ꡑ와 ꡐ천신ꡑ이 결합한 후대라고 인정하였다. ꡐ웅녀ꡑ는 바로 민족의 ꡐ시조모ꡑ인데 그는 ꡐ곰ꡑ이 수련을 거쳐 사람으로 변한 여인이다. 이 감동적인 신화가 시인에게서 지혜와 격정으로 충만된 심령으로 파악되었을 때 그의 시적 정서는 날개를 활짝 펼친 새가 푸른 하늘을 날아예듯이 자유로운 상상의 예술적 天空에 나래쳐 독창적인 예술성격을 갖춘 시편을 창조해 내게 되었다. 시는 처음부터 곰이 행동한다. ꡒ산악같은 그림자 끄을고/엉기정/엉기정/엉기정ꡓ 시작의 두 구절은 근근히 과장된 은유 하나와 무게있는 동사 셋으로 곰의 정태적인 행동상이 글속에 생생해 생동하고 간결하다. 그것은 언어구사에서의 정상급 수준과 세련된 창작스찔을 과시한다. 바로 이 우람지고 온건하고 걸음걸이가 듬직한 곰이 사람이 되기를 갈망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사람으로 되기를 원하는 범이 함께 천신 앞에 빌었을 때 천신이 가르치기를 우선 쓰디쓴 쑥을 먹어 불결을 없애고 그 다음 맵디매운 마늘을 먹어 부정을 없애고 연후에 궁혈에서 백날을 수련하여 영혼을 정화하면 사람으로 변할 수 있다고 하였다. 범은 물러났으나 곰은 천신의 가르침대로 하였다. 여기서 시인은 상상력을 펼쳐 깊이 파고 멀리에 미치여 신화를 되살리면서 그 신화를 시로 제련하여 곰이 수련해 사람으로 되는 위대한 盛事를 묘사하였다. 긴긴 세월 엉기엉기 걸어오다가 / 컴컴하고 적막한 동굴속엔 왜 들었수? / 쓰고 떫은 약쑥 신물나게 맛보고 / 맵고 알알한 마늘 몸서리나게 씹을제 / 별을 눈으로 / 달을 볼로 / 이슬을 피로 받아 / 아릿답고 날씬한 웅녀로 변해 / 이 세상 인간들의 시조모 되었느니라. 이는 의식적인 생명진화활동인 바 한 민족의 어렵고도 영광스런 생명의 해돋이 그리고 그 심리, 성격, 영혼의 발생이다. 시인이 민족문화정신의 원시적 표상으로서의 ꡐ시조모ꡑ의 독특한 생명정신을 묘사할 때 ꡐ쓰고 떫은…… 신물나게ꡑ, ꡐ맵고 알알한…… 몸서리나게ꡑ 이러한 언어를 쓴 것은 이 민족이 인생의 온갖 간난신고 속에서 태어나고, 또 덕성과 심신을 修養하는 수련을 거쳐 순결하고 선량하고 수양있는 민족으로 되었음을 顯示하였고, ꡐ별을 눈으로 달을 볼로 이슬을 피로 받아ꡑ 등 아주 과장된 비유의 원용은 이 민족의 탄생과 대자연의 연결을 썼는데 이런 연결은 하늘의 ꡐ휘황찬란한 빛ꡑ과 땅의 良質을 받아들여 하늘의 뭇별을 한눈에 받아들이고 마음에 우주를 품어안는 흉금이 드넓은 민족임을 현시하며, ꡐ시조모ꡑ가 고생하며 수련하는 생각과 그 유일무이한 행동방식은 슬기롭고 용기있는 민족임을 현시한다. 이 민족은 천성적으로 진보와 변화를 추구하고 난관을 극복함을 목표로 하는 심리와 문화소질을 지녔으며 신념이 견정하고 또 세상에서 앞장에 서려는 실천정신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바로 민족문화의 生成이다. 문화와 문화환경이 ꡐ웅녀ꡑ가 삶의 생리를 가지게 하고 문화심리구조를 지니게 하여 동물에서 갈라져나와 사람으로 되게 하였다. 그러므로 민족은 문화적 존재이고 독특한 문화적 顯示體이다. 또 민족의 문화성 혹은 문화심리구조는 그의 인성의 구체적인 소재이기도 하다. 완정한 의미에서 말하면 민족문화는 ꡐ시조모ꡑ의 생명정신에서 이룩되었을 뿐만 아니라 ꡐ시조모ꡑ가 그의 아들딸에 대한 양육과 양성에서 이룩된 것이다. 왜냐하면, 이 때에 이르러서야 완정한 의미에서의 민족이 비로소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시편에서 계속 묘사한데서 제시된 것이다. 후대가 많이 퍼지게 하려고 ꡐ웅녀ꡑ는 망망한 태백산 신방 삼아서 / 신단수 그늘밑에 천신 모셔 합환하여 / 수림속, 들판, 해변가에서 / 오롱이 조롱이 아들딸 길렀네. 사람과 자연이 하나로 조화되고 진정이 充溢하는 시구는 민족문화의 발상지와 북방문화권의 배경을 드러내 보였고, 더구나 인성이란 의미에서의 ꡐ天人合一ꡑ로 眞, 善, 美에 대한 ꡐ웅녀ꡑ의 추구와 소유를 표현하였으며, 또 민족을 위해 생육한 비범한 정신적 기백을 표현하였다. 그런데 이것은 또한 ꡐ시조모ꡑ가 아들딸의 성격, 정신, 의지를 양성한 목표이기도 한 것이다. 끓는 피와 담즙을 젖으로 / 무던한 성미와 도량을 풍채로 / 끈질긴 의지와 강기를 뼈대로 / 날카론 발톱마저 도끼와 활촉 삼아 / 한숨도 구걸도 없이 / 길 아닌 길을 찾아 / 첩첩 천험도 꿰뚫고 나갔더라. 시의 이 대목에서 시인은 ꡐ떠돌며 확산하는 상상ꡑ으로 민족의 정신적 품성을 깊이있게 체득하였고, ꡐ착각성 이미지ꡑ를 교묘하게 원용하여 새로운 이미지형태를 창조함으로써 이 민족문화정신의 기나긴 흐름의 원천에서 온후하고 너그럽고 선량한 인성을 볼 수 있게 하였으며, 희망과 욕념에 끓어넘치지만 自尊, 自强, 自信하는 심리를 볼 수 있게 하였으며, 진보와 정복을 추구할 뿐더러 또한 용감히 진격하는 성격과 정신을 볼 수 있게 하였고, 완강하고 견인하고 百折不屈하는 의지를 볼 수 있게 하였다. ꡐ시조모ꡑ는 아들딸들에게 進取하고 征服하는 영혼을 길러주었다. 이 영혼은 정복하지 못할 험난이 없고 점거하지 못할 풍광이 없다. ꡒ최고 의미에서의 시는 상상속에 창조한 새로운 세계이다.ꡓ -디르타이 「곰」은 이런 ꡐ최고 의미에서의 시ꡑ이고 ꡐ신단수ꡑ는 더구나 ꡐ상상속에서 창조한 새로운 세계ꡑ이다. 「곰」과 쌍벽을 이루는 「신단수」는 ꡐ아릿다운 웅녀와 인연을 맺은ꡑ ꡐ천신ꡑ 시조가 민족의 생명과 영혼에 대한 영원한 결체를 묘사하였다. 파아란 하늘 조각조각 받쳐들고 / 무연한 땅 갈래갈래 갈마쥐고 / 시베리아 마파람 휘감아 회오리칩니다 / 회오리칩니다 / 회오리칩니다 ßU 천국의 사닥다리 / 지상의 푸른 기둥 / 대지의 배꼽과 북두성 이어놓고 / 해와 달을 긴 아지에 꿰여 / 영혼의 새에게 커다란 둥지지어 ßU 광막한 우주에서 지성을 깨칩니다 / 지혜를 부릅니다 이는 상상의 榮光이 비춘 豪悍하고 超凡한 시적 境地이다. 시인은 ꡐ정신이 온 세상을 내달리고 마음이 만인절벽을 노닐ꡑ어 그 어떠한 시공간도 날아넘는 상상으로 ꡐ천지를 모아 형상에 넣고 만물을 받아들여 붓끝에 담는ꡑ, 우주를 쥐락펴락하는 기백으로 세밀하고 아름다운 이미지를 투입하고 보기 드물게 기발하고 독특한 비유와 과장을 원용하여 기세찬 창조를 함으로써 空間美의 奇觀을 창조하였다. 그런데 이런 상상은 일심들인 구상에 의해 나래쳤으므로 이렇게도 교묘한 구성으로 짜이게 된 것이다. 신단수가 하늘을 떠받치고 대지를 갈마쥐어 한없이 넓은 공간에서 그리고 자신의 몸으로 ꡐ영혼의 새ꡑ에게 ꡐ커다란 둥지를 지어ꡑ 주었는 바 천지간에 우뚝 솟은 민족적 형상이라고 할 수 있으니 그것은 바로 민족의 생명인 것이다. 그런데 ꡐ둥지를 지어ꡑ준다는 이 하늘 높이 오르는 이미지를 중심으로 日月星辰을 융합하여 우주가 지성과 지혜, 빛나는 기질과 창조력을 이 민족에게 주입하였음을 표출하였다. 이 민족은 ꡐ광막한 우주ꡑ와 연결된다. 신단수는 조상의 화신으로서 자연과의 조화로운 一致를 이루는 연결속에서 天地間에 우뚝 솟은 민족적인 영웅적 형상으로 창조되었고 또한 이런 연결속에서 민족의 ꡐ크나큰 힘ꡑ을 환기하며 왕성한 영혼을 환기한다. 하늘의 구름 죄다 마시고 / 땅속의 물을 죄다 마시고 / 북반구에 덧쌓인 먼지 죄다 마셔, 잎새마다 넓은 지역 / 가지마다 높은 공간 / 무연한 녹음 뭉게뭉게 펼치면서 / 크나큰 힘 환기하고 / 무성한 영혼 환기하여 / 생의 영원을 갈망합니다 그 기세가 기이하고 굉장하며 묘사가 황홀한 절정에 이르렀다. 이렇게 이미지가 하늘을 뒤집는 듯한 기이한 경지, 하늘 높이 치솟는 듯한 盛大한 구성은 풍부한 총기와 상상력으로 보이지 않는 정신적 대상을 창조하는 출중한 능력을 현시한다. 이것이 바로 이른바 ꡐ기묘한 발견ꡑ이며 이것이 바로 이미지이다. 이는 워즈워드의 명언 ꡒ상상은 절대적인 힘의 별명이다ꡓ를 상기시킨다. 교묘한 것은 ꡐ커다란 등지ꡑ가 여기에 이르러서는 생태적 형상으로 바뀌어 ꡐ무연한 녹음 뭉게뭉게 펼치면서ꡑ 하늘의 구름과 땅속의 물을 자양분으로 ꡐ덧쌓인 먼지ꡑ를 마셔 정화하는 것이다. 이 강력한 생명세계는 자신의 심층적인 含蓄에서 ꡐ크나큰 힘 환기하고ꡑ ꡐ무성한 영혼을 환기ꡑ한다. 이 ꡐ무성한 영혼ꡑ은 왕성하고 크나크며 적극적으로 上向하고 청춘으로 영원하며 피로를 모르는 ꡐ활동하는 영혼ꡑ이며, 갈망을 싣고 영원에로 날아가는 영혼이다. 신의 공적과 크나큰 힘의 묘사는 상상과 이상속에서 민족의 형상과 영혼의 형성을 펼쳐보았다. 아래의 시구들은 그 개괄로 된다. 만물의 영험과 정수를 모아 / 세상의 패기와 의지를 모아 / 의젓하고 영준한 신으로 화해 / 아릿다운 웅녀와 인연 맺었습니다. ꡐ만물의 영험 모아ꡑ, ꡐ정수ꡑ와 ꡐ의지ꡑ 이런 시어는 ꡐ천신ꡑ 시조는 바로 우주의 정화이고 천지의 우수함이며 眞善美의 완정한 결체임을 말해주며, ꡐ죄다ꡑ를 세번이나 반복함은 시인의 붓끝에 용솟음치는 감정의 파도와 강렬한 민족적 자호감과 자신심을 현시한다. 이러한 감정과 심리는 시의 마지막에 더욱더 강렬하게 표현된다. 신비론 신단수 / 천년간들 만년간들 / 칼바람에 찍히우랴 / 불갈기에 먹히루야 / 눈보라에 서서 죽으랴 / 그 언제나 언제나 / 창천을 떠이고 / 대지를 거머쥐고 떳떳이 / 솟았습니다. 민족의 생명과 견인성과 힘이 하나로 융합된 불패의 저력, 무한과 영원에 융합된 휘황한 형상이 정감 깊고 열렬한 예찬속에 심각하고도 생동하게 표출되었다. 곰과 박달나무는 생명형식이고 자연물상인데 전자는 착하고(본디 흉악하지 않은데 換骨奪胎하는 수련을 거쳐 야수성을 버렸음) 후자는 아름답다(질이 단단하고 결이 가늘며 키가 크고 향기로움). 한민족의 조상들은 이들을 골라 자신의 선조로 인정하였으니 그것은 이 민족이 착함과 아름다움에 대해 선천적으로 동경하고 추구하였음을 반영한다. 놀랍고도 이상한 것은 이 선민들이 색채마저 자기들 민족의 발상과 관계된다고 여긴 점이다. 이 색채는 다른 것이 아니고 무색인 흰빛인데 이 흰빛은 해에서 온 것이어서 해도 자기들의 선조로 된다. 이 선조가 자기들에게 흰빛을 주었는데 이 흰빛속에 생명과 생존에 필요한 모든 것이 깃들어 있다. 「해」에서 묘사한 것이 바로 이러한 독특한 관념이다. 조상의 하얀 문 아득한 해에 끼워져 / 조상의 하얀 靈光 / 사그니 검은 도깨비와 검은 사악 나포하고 / 조상의 하얀 온기 / 시나브로 첩첩한 설산과 덧쌓인 원한 녹이고 / 조상의 하얀 자애 / 가벼이 귀한 자손과 적막한 마음 어루만져 / 광야에서 수림에서 / 혼미한 정령을 소생케 하고 / 길상스런 부락이 태여나게 합니다 시인은 소박하고 명쾌한 生成적인 언어로 조상들의 시각에서 흰빛의 의의를 제시하였다. 조상들은 태양의 흰빛이 지닌 뜻은 해석할 수 없었으나 생활실천에서 이미 태양의 흰빛이 있어 광명이 있고 만물의 소생과 생장이 있으며 생명있는 세계가 있음을 느꼈으며 자기들에게는 흰빛이 ꡐ영광ꡑ(靈光)이고 ꡐ온기ꡑ이고 ꡐ자애ꡑ이며 생명의 원천인데 이는 선조의 은혜임을 또한 느끼었다. 선조의 이런 은혜를 시인은 ꡒ피부에 녹이고 피에 녹이고 / 골수에 녹이고 영혼에 녹이여 / 가장 아름다운 결백을 몸에 입음은 / 선조에게 가장 경건한 부복입니다ꡓ라고 찬미하였다. 이로부터 한민족은 흰옷을 입기 시작하였고 세상에 둘도 없는 백의겨레로 되었다. 이 흰옷은 겉치레하는 옷일 뿐만 아니라 그것은 또한 민족의 내재적인 성품이고 영혼의 외형화이다. 흰빛은 민족의 순결과 淡雅와 安謐함을 상징하며 흰빛은 또한 무한한 생기와 무한한 창조와 무한한 풍치를 배태한 공백이며 흰빛은 자손들에게 대한 조상들의 기대이며 허락이다. 백의겨레는 흰빛이면 무작정 숭배한다. 하아얀 학의 깨끗한 얼이 백의 넋입니다 …… 백의 넋의 결백한 깃을 옷으로 백의 넋의 능란한 날음을 춤으로 이는 「백학」에서 묘사한 백학숭배이다. 그런데 이 시에서는 민족의 강대한 생명력을 두드러지게 묘사하였다. 이는 흰빛의 암시이고 백학의 암시인데 흰빛은 영원하고 백학은 장수한다. 시에서는 우선 흰빛의 신비하고도 깊은 본질을 묘사하였다. 흰빛은 검은빛에서 왔다. 검은빛이 ꡐ천만년ꡑ, ꡐ절고ꡑ, ꡐ몸부림치고ꡑ, ꡐ터져나오고ꡑ, ꡐ불태워ꡑ 비로소 흰빛으로 엉킨 결정체이다. 이런 묘사는 백의겨레가 장기간의 투쟁을 거쳐 암흑을 벗어났음을 암시한다. 암흑을 벗어난 ꡐ백의 魂ꡑ은 자유를 위해, 아름다운 보금자리를 이룩하기 위해 두려움없이 ꡐ오연히 머리들고 날아예면서ꡑ ꡐ눈보라 몰아치는ꡑ ꡐ소나기 쏟아지는ꡑ 온갖 험난을 겪고 더구나 민족 내외의 피와 불의 싸움과 피흘리는 희생을 겪으면서도 오히려 ꡐ더더욱 많고 많은 백의 넋 기르옵니다.ꡑ ꡐ배의 넋ꡑ은 불멸의 혼이고 왕성한 혼이고 영원한 혼이다. 흰빛은 ꡐ천만년ꡑ 주조된 영원인 까닭이다. 이것이 시의 뜻이다. 신앙으로서의 태양숭배와 백학숭배는 善民들이 흰빛에 대해 형상적 연상을 하고 생명의 오묘한 비밀을 추궁한 표현이다. 그럼 생명은 과연 어떻게 온 것인가? 선민들은 「달」에서 답안을 얻었다. 달은 몽롱하고 신비하며 영원하다. 달은 ꡐ내일의 등불ꡑ이다. 형상적 연상으로 사유한 선민들은 달에서 생명을 보았고 또 풍작과 단란한 모임을 보았다. 시인이 자신의 총명으로 이 천진한 연상을 感悟할 때 ꡐ상상의 용암ꡑ이 터져나와 기이하고 아름다운 시적 경지를 창조하였다. 「달」에서는 우선 ꡐ박쥐의 날개에 은신했다가ꡑ ꡐ미소와 더불어 / 친절함과 더불어ꡑ 새벽 안개 걷히기 시작할 때에 어여쁘게 하늘에 솟아 ꡐ얇은 베일 가리운 어여쁜 얼굴 / 어깨에 기대인듯 머리우에 날려가는ꡑ 뛰어나게 훌륭함과 유연한 아름다움이 우아하고 매력있는 동태적 공간미를 이루었다. 시의 절주는 느린데 우리는 ꡐ감정이 점차 밝아지면서 더욱 새롭고 물상이 명석하고도 서로 진전되는ꡑ 이미지가 상상력을 따라 점차 또렷해지고 생동해지는 정경을 보는 것만 같다고 해야 할 것이다. 시의 첫구에서 ꡐ박쥐의 날개ꡑ라는 이미지로 달이 떠오름을 안받침했는데 참신하고 독특하다. 풍부한 상상력이 없이는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이다. 시의 세번째, 네번째 구절에서는 ꡐ얇은 베일ꡑ ꡐ어깨에 기대인듯 머리 위에 날려가는ꡑ이라고 ꡐ기대인듯ꡑ, ꡐ날려가는ꡑ 짧은 순간일 뿐이지만 시인은 예민하게 이 순간적인 미감을 포착하여 생동한 화면을 창조하였다. 이는 의식이며 또한 능력이다. 시에서 예술적 저력을 보다 뚜렷이 나타냄은 파생이미지군의 창조이다. 달이 떠오르고 달빛이 대지에 흐르고 고산대해가 흐릿한 월색에 싸여 몽롱하다. 시인이 이런 朦, 朧, 美를 구체적으로 형상에 응결시킬 때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은 참신한 파생이미지군이다. 세상만물이 무게를 잃습니다 / 희붐한 산그림잔 햇솜마냥 / 부풀고 퍼어런 바다물결은 은실인 양 날립니다 / 말없는 울룩바위도 온몸으로 / 달콤한 달빛젖을 머금습니다. 이는 달빛에서 파생된 이미지들이다. 달빛 아래 일체가 변형되어 가볍고 아름답고 향기롭고 달콤하다. 이런 변화는 달에 대한 시인의 신기로운 상상에서 온 것이다. ꡐ퍼어런 바다물결은 은실인 양 날립니다ꡑ는 상상의 걸작이다. 시인은 파생이미지의 시적 경지를 창조할 때 여러가지 예술수법들을 썼는데 거기에는 예술적인 聯覺도 원용하여 후각이미지를 찾아냄으로써 향기를 그려냈다. 울룩불룩한 바위는 달빛 아래의 돌의 형태적 특점, ꡐ머금습니다ꡑ는 돌 내지 모든 것이 다 달빛에 푹 젖는 형상을 묘사한 것이다. 이런 이미지의 창조는 시인의 성정에 졸졸 흐르는 시의 원천을 보여 주었고, 또 조형적인 상상으로 이미지 형태를 物化함에 능란한 시인의 출중한 창조력과 표현력을 보여 주었다. 달은 어여쁘고 溫柔하고 밝으며 또한 흐릿하고 신비롭고 알기 어렵다. 그래서 선민들은 시끄러운 일이 생기거나 무엇을 알려고 할 때면 ꡐ점괘와 암시ꡑ, ꡐ예시와 계시ꡑ를 달을 향해 祈求했고 마음속에 달을 향해 부복하는 典當을 쌓았다. 생명의 有無, 만물의 생명, 사람의 禍福도 달에 물었다. 선민들은 달이 이즈러지면 생명과 희망이 생길 수 없고 오직 쟁반같이 둥근 달이 솟아야 생명을 창조할 수 있다고 여겼다. ꡐ월경, 월경ꡑ, 둥근 달 하늘을 경과해야 ꡐ월경ꡑ이 있게 되고 ꡐ월경ꡑ이 있어야 생명을 잉태할 수 있다. 그래서 ꡒ교묘한 달밤 / 아들 낳기를 원하는 아낙네들 / 수집게 우물가에서 사쁜사쁜 걸어가 / 달 비낀 맑은 우물 한 바가지 마셨습니다.ꡓ 그런 다음에는 귀동자가 태어나기를 기다렸다. ꡒ경건하고 집요한 그 신앙 그 숙원ꡑ에서 새로운 생명, 새로운 공작, 새로운 복지를 얻어 달이 둥근 밤이면 노래와 춤을 즐기었다. 고요한 잔디밭…… / 백의 숙녀 둘레둘레 나리꽃원무 / 강강수월래 강강수월래 / 설레이는 원은 하늘에서 내린 달 / 펄렁이는 사람은 하늘우의 선녀 / 풍요의 원리는 그래서 밀물이고 / 모성의 원리는 그래서 선회하고 / 생명의 원리는 그래서 연속됩니다. 열렬하고 경쾌하고 생동하고 감정이 북받쳐 그야말로 ꡐ붓도 춤을 추고 글자도 날아예는ꡑ 듯하여 시를 읽노라면 ꡐ강강수월래ꡑ 소리가 들리고 흥겨운 품판에 섞여있는 듯하다. 이 밤의 축제에 대한 묘사에서 시인은 이미지겹가하기 수법으로 하늘에 운행하는 ꡐ둥근 달ꡑ과 땅위에 빙빙 도는 ꡐ원무ꡑ를 겹쳐 놓았고, 하늘 위의 ꡐ선녀ꡑ와 땅위의 ꡐ숙녀ꡑ를 겹쳐놓아 사람과 자연, 情感과 物象이 渾然一體를 이루게 함으로써 사람과 자연지간의 상호 감응과 계합을 전달하였다. 무한한 환락과 행복이 어울려진 ꡐ원무ꡑ에 대한 묘사에서 시인은 ꡐ풍요의 원리ꡑ, ꡐ모성의 원리ꡑ, ꡐ생명의 원리ꡑ를 抽出하여 表象 뒤의 이념, 有限 뒤의 무한을 제시하였고, 그들 각자의 법칙성의 영원을 제시하였다. ꡐ달춤판의 나리꽃 억만번 피고지고ꡑ 하면서 생명이 피여나고 영원이 열린다. ꡐ우물속의 보름달 억만번 마시ꡑ면서 생명을 길어내고 영원을 길어냈다. 달은 영원한 것이다. 달을 토템으로 달과 함께 춤추는 민족은 영원한 것이다. 이런 영원이 민족에게 무한한 희망과 이상과 격정을 준다. 3. 시대의 시인은 上古時期 제재에서도 마찬가지로 자신의 개성을 구현하여 현실의 생명과 모순을 반영한다. 시인이 황량한 원시사회를 묘사함은 신화를 소개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 활달한 사유와 현대적 가치취향과 현대적 시야로 민족토템관념의 원천에서 현실과의 연결고리를 찾았고, 또 심각한 생활감수와 생명감으로 토템묘사와 현실생활이라는 옛날과 오늘을 다채로운 인생화폭에 조화롭게 응결시킴으로써 인간의 본성이란 높이에서 현실의 인생을 觀照하는 시를 창조하여 ꡐ민족의 넋을 다시 주조ꡑ한다는 큰 뜻을 구현하였다. 이것이 바로 토템시조시 이외의 많은 시편들이 이룩한 ꡐ새우주ꡑ이다. 여기서 우리는 현실을 위해 창작한다는 시인의 의식이 명철하고 강렬함을 보게 된다. 철학의 가장 중요한 점이 인생 이정표로 되어 사람들에게 進路를 찾을 수 있게 한다면 철학적 사고에 푹 젖은 남영전의 시편들은 역시 이런 의미에서 그 풍부한 가치와 효능을 과시한다. 이 시편들은 죄다 시대풍운의 氣脈이 철철 흐르고 모두 다 聲과 情이 분명한 묘사속에 미와 선과 희망을 민족과 시대에 봉헌하였으며 시편마다 ꡐ인간성을 깨우치는 경종ꡑ으로 되게 하였다. 이 시편들의 풍부한 내포를 우리는 대체로 다음의 네 가지 측면에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① 도덕가치에 대한 시인의 고찰과 연구로 토템묘사에서 착함을 구가하여 순결하고 선량한 인간성의 본연을 환기시킨다. 현대적 시야에서의 미래의 전망은 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현실의 모순을 사고하게 하는 바 그것은 사회도덕이 상품경제관념의 모독을 받아 인간의 도덕정신이 어리둥절해진 것이다. 이런 현상이 사람들의 심령에 조성하는 압박은 날로 더해지고 날로 무거워진다. 이른바 ꡐ지위를 근심하지 않으면 존중받지 못하고 덕성을 걱정하게 되면 숭고하지 못한다ꡑ는 말은 도덕이 인성의 근본이어서 그것을 잃으면 착한 본성을 잃게 되어 가지가지 邪惡을 빚어냄을 설명해준다. 이는 역사와 윤리의 갈등이다. 이런 갈등에 직면한 우리는 역사도 존중해야 하거니와 도덕도 존중해야 한다. 도덕정신은 건설해야 하고 제창해야 한다. 거기에는 모종의 전통적 도덕관념에 대한 제창도 포괄되는데 그것이 우리를 이전 역사에로 되돌아가게 하지는 않는다. 반대로 그 가치있는 전통적 도덕관념은 자체의 영구한 생명력으로 자연스럽게 현대와 미래에로 진입하게 한다. 바로 이런 이해에 근거하여 시인은 토템숭배에서 인생의 본연을 끄집어내서 시작품들이 도덕적 진리에로 나아가는 언어로 되게 하였다. 시드니의 견해에 의하면 선은 모든 학문의 최종적 목적이고 시가는 일체 학문의 아버지이므로 시가는 도덕교양이 미감향속에 깃들게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남영전은 바로 이런 창작이념으로 시가의 가치를 뚜렷하게 현시하였고 인생을 계시해 주게 하였다. 작품 「흙」을 보기로 하자. 세상만물은 흙의 도움으로 이루어졌다. ꡒ흙은 만물을 생육하고 만물을 등에 업은 神靈이다.ꡓ 인류는 탄생된 그 날부터 흙에 棲息하고 흙에서 옷과 음식물을 얻으면서 흙과 밤낮으로 면접하여 흙문화의 배양과 보양을 많이 받았다. 흙은 인류 및 일체 생명의 위대한 養母이다. 그런데 ꡐ흙ꡑ에서 두드러지게 표현한 것은 흙의 정신적 측면 말하자면 흙의 드넓은 흉금, 흙의 성격적 함양이다. 흙은 ꡐ침묵한다.ꡑ ꡐ생령에게 / 만물에게 / 흙은 언제나 침묵한다 / 말없이 소리없이 오직 / 묵묵히 바라는 건 / 새들의 노래와 사람들의 벅적임 / 짐승들 아우성과 바다의 울부짖음ꡑ 침묵, 절대적인 침묵에서 흙의 성격에서의 한 측면을 볼 수 있다. 흙이 이렇게 침묵할 수 있음은 흙의 ꡐ참고 견디는ꡑ 힘에 있다. ꡐ흙은 언제나 참고 견딘다 / 우뢰가 울고 / 불이 굽고 / 물이 잠그고 / 산이 눌러도ꡑ 워낙 참고 견딜 수 없는 것도 참고 견디면서 절대적으로 인내한다. 흙이 이렇게 참고 견딜 수 있음은 그 영혼에 ꡐ寬容ꡑ이 있는 까닭이다. 흙은 가장 너그럽게 용서한다 / 악한 자도 버리지 않고 / 독균조차 버리지 않고 / 나중에는 끝끝내 / 자신의 품속으로 돌아오게 한다. 아무도 흙의 침묵, 인내, 관용을 묘사한 적이 없으나 흙은 확실히 ꡐ언제나 침묵ꡑ하고 ꡐ언제나 참고 견디ꡑ며 ꡐ가장 너그러이 용서한다.ꡑ 이것이 바로 남들이 못본 것을 보아내고 남들이 못한 말을 하는 독특한 식견이다. 더구나 ꡐ악한 자도 버리지 않고 / 독균조차 버리지 않는ꡑ디고 하였는데 이는 더욱 탁월한 목소리여서 그야말로 시에서의 명언이라고 할 수 있다. 그 震感力은 ꡐ악에서의 미를 발굴ꡑ한 보들레르에 못지 않다. 兩者의 선악관은 본질적으로 다르지만 말이다. ꡐ악한 자ꡑ와 ꡐ독균ꡑ에 대하여 인류는 향불 피우고 발원하면서 소멸되기를 바라지만 종래로 근절된 적이 없다. 로맹 롤랑은 ꡐ선과 악은 하나의 동전의 앞뒤 두 면과 같다ꡑ고 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ꡐ무서운 균형ꡑ이다. 시인은 보살님의 눈으로만 볼 수 있는 정관과 심오한 철리적 사색으로 ꡐ관용ꡑ이 ꡐ악한 자ꡑ와 ꡐ독균ꡑ을 선에로 돌아오게 함을 제기하였는데 심각한 현실적 의의가 있다. 이미지는 시인의 주관적인 정감과 의지가 외재적인 물상과의 결합이다. ꡐ흙ꡑ이 ꡐ관용ꡑ으로 ꡐ악한 자ꡑ와 ꡐ독균ꡑ을 ꡐ자신의 품에 돌아오ꡑ게 한다고 한 것은 심미객체의 내포에 대한 시인의 새로운 발견이며, 또한 시대가 진보하는 요구와 부합되는 시인의 주관적인 정감과 의지의 투사이다. 시인의 붓에서 흙의 함의가 진정으로 해석되었다. 흙은 넓고 큼과 선의 상징이다. 그것은 흙을 토템으로 하는 민족의 숭고한 도덕 정신을 상징하며 또한 선의 위대한 힘을 현시하기도 한다. ꡐ접수ꡑ라는 각도에서 말하면 우리는 ꡐ흙ꡑ을 읽고 확실히 최상의 도리를 깨닫는 것만 같다. 여러가지 모순들이 들이닥치는 현대인에게는 흙과 같은 그런 흉금과 성격이 아주 필요되여 침묵해야 할 데는 침묵해야 하니 ꡐ침묵 속에 황금이 있다ꡑ. 또 참고 견디어야 할 데는 참고 견디어야 하니 ꡐ한걸음만 참으면 하늘이 높고 땅이 두껍다.ꡑ 여기서의 침묵과 인내는 결코 개성발전을 제한하고 개인가치를 경시하는 것이 아니라 조화로운 인간관계를 자각적으로 창조함이다. ꡐ관용ꡑ의 품격을 말할 것 같으면 더구나 꼭 구비해야 할 점이다. 열려진 시대에 현대철학의 다원적인 사유취향은 사람들이 서로 疏通하고 서로 이해하기를 바라며 사람들의 관용하는 소질을 바란다. 관용은 ꡒ남에게 겸양할지언정 남들이 나에게 겸양하게 말아야 하고 남을 너그러이 용서할지언정 남들이 나를 너그러이 용서하도록 하지 말아야 한다.ꡓ 이것은 미덕이고 힘이어서 그것은 인생을 위해 사업을 위해 정채로운 악장을 마련토록 할 것이다. 善은 美이다. 인성 가운데서 미의 최고 구현은 착한 일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또 다각적인 시각으로 性情의 면모가 각이한 선행자의 형상을 묘사하였다. 우선 말해야 할 것은 ꡐ범ꡑ이다. 어떤 시작품에서 범을 인성의 악한 상징으로 삼는데 반하여 ꡐ범ꡑ에서의 범은 대단히 선하고 대단히 용감하며 정을 중히 여기고 의가 두터운 형상이다. 흉악하거나 잔인한 것이 아니라 안녕을 지켜주는 ꡐ수호신ꡑ이다. ꡐ환한 대낮ꡑ이나 ꡐ캄캄한 오밤ꡑ이거나를 물론하고 ꡐ속세의 음양 뚫어지게 통찰하ꡑ는 ꡐ시퍼런 두 눈ꡑ은 ꡐ불의와 사악을 원수로ꡑ 그 어떠한 ꡐ교활함ꡑ이나 ꡐ가장ꡑ도 속일 수 없고 숨길 수 없어 ꡐ너절하고 어리석음이 꼴사나와 / 뒤쫓노라 덮치노라 물어뜯노라 / 잔뼈 하나 남기잖고……ꡑ범이 이렇게 악함을 깡그리 쓸어 버리는 선과 용감함이 범의 성품과 인간의 성품이 동질성을 가지게 한다. 원시민족은 범이 인성과 통하여 좋은 사람 해치지 않아 만일 누가 범에게 잡아먹혔다면 그것은 사람으로 가장한 도깨비 따위들이지 결코 좋은 사람은 아니라고 인정했다. 범은 사람에게 구원된 적이 있어 은혜를 갚는다. ꡐ선행하고 은혜 갚아ꡑ ꡐ숲속에 들고 동굴에 들기도 한다.ꡑ 시집갈 나이의 처녀를 업어다 자기를 구해준 총각에게 주어 ꡐ경사로 인연 맺어주고ꡑ 호사가 끝나 염원을 성취하고는 ꡐ묵묵히 산중으로 돌아간다.ꡑ 악을 제거하고 선을 행하고 은혜를 보답함이 범의 생명관념을 이룬다. 범의 관념에서 ꡐ선을 행하고 은혜에 보답함ꡑ이 곧 생명의 영혼이고 생존의 起点이다. 그것은 인간세상의 화평과 복지를 영위하기 위해 존재한다. 이런 묘사는 상징의 뜻에 그치지 않고 이미 선의 本源에 다가섰다. 신문보도에 의하면 최근의 연구는 ꡒ靈長動物의 성품은 본디 선하며ꡓ, ꡒ동정심 지어는 기본권리, 공평, 공동의리 등 개념도 영장동물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데 가능하게는 대뇌의 특정적인 구조가 그 기능을 일으켜 조성되는 것이다ꡓ라고 하였다. 여기서 알 수 있는 바 토템숭배는 전적으로 환상에서 생긴 것은 결코 아니며 거기에는 일정한 생활적 실재성이 있는 것이다. 토템숭배에서 인성의 본연을 찾는 것은 또한 그 원천에로 박진한 것이다. 원시민족이 선을 추구하는 관념은 강렬할 뿐더러 풍부하였다. 이는 「까마귀」에서 화를 당하고 오해를 받으면서도 선행에 집착하는 묘사에서 보아낼 수 있다. 까마귀는 사람들의 心目 가운데서는 상서롭지 못한 예조이고 추한 상징으로 되고 있다. 그러나 시인은 이것이 까마귀의 잘못이 아니라 사람들의 무지와 오해라고 알려준다. 까마귀는 가장 정을 중히 여기는 착한 새이고 또한 어여쁜 옷차림으로 ꡐ세인들의 경모와 찬탄ꡑ을 받는 아름다운 새이다. 사악함과 추함이 질투하여 그의 미모를 불살라버려 그는 화재속에서 ꡐ날씬한 몸매 밤에다 맡겼습니다 / 어여쁜 옷차림 밤에다 맡겼습니다 / 구성진 목소리 밤에다 맡겼습니다.ꡑ 그리하여 자기 자신마저 검은 색으로 변하였다. ꡐ하건만 / 눈물 없이 낙심 없이 실망도 없ꡑ다. 자신의 불행이 사람들에게서 再演되지 않게 하려고 그는 ꡐ가슴 아픈 사연과 문득 깨달음은 다만 / 반짝이는 눈동자 되었습니다 / 경계하는 목소리 되었습니다.ꡑ 이 눈으로 정보를 포착하고 이 목소리로 정보를 알려 ꡐ이상스런 징조를 우짖습니다ꡑ, ꡐ재앙을 물리치라 우짖습니다ꡑ, ꡐ숨은 사정 사라지면 곧 / 시름없이 나무위에 되돌아갑니다ꡑ, 수난자가 남의 수난을 걱정하고 또 자기 운명의 기구함도 아랑곳하지 않고 인간세상의 재난을 피하려고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는 이것이 바로 까마귀의 도덕이다. 그러므로 ꡐ인류 위해 순시하는 신령ꡑ, ꡐ밤에 경보 알리는 신령ꡑ이라고 선민들은 稱頌하였다. 그런데 후세 사람들은 까마귀에게 감격할 대신 그의 ꡐ경보ꡑ를 ꡐ부고ꡑ라 여겨 쩍하면 욕하고 죽였다. 사람들이 선악을 전도함은 사람들의 무지와 편견 때문이고 ꡐ문명ꡑ에 이른후 사람들의 인성이 갈수록 취약해져서 ꡐ경보ꡑ를 듣지 못하고 ꡐ귀띔ꡑ을 싫어하게 된 때문이다. 그러나 까마귀는 그것을 탓하지 않고 또 그것을 변론하려고도 하지 않고 오직 일편단심 선행하고 ꡐ경보ꡑ를 알려 사람들이 영혼의 순결과 투명을 체험하도록 한다. 시인은 시문학사에서 처음으로 까마귀의 명예를 바로잡아주어 까마귀가 본래의 면모를 되찾도록 했는데 여러가지 의의가 있다. 까마귀의 명예를 바로잡음은 사람들의 無知와 偏見에 대한 시정이고 또 인성에 대한 시정이다. 사람은 무지와 편견을 극복하고 취약을 견강으로 바꾸어 모든 유익한 귀띔과 충고를 선뜻이 받아들여야 한다. 오직 이래야 착한 세상을 창조하고 ꡐ샘물과 과일ꡑ은 바라볼 수만 있는 것이 아닐 수 있다. ꡐ까치ꡑ는 선행자의 다른 목소리이다. 까마귀는 재해를 막으려고 사람들에게 ꡐ경보ꡑ를 알리고 ꡐ귀띔ꡑ해준다면 까치는 사람들을 위해 ꡐ애오라지 기쁨되라 축원ꡑ뿐이고 ꡐ애오라지 기쁨되라ꡑ 축원의 노래 뿐이다. 그런데 ꡐ애오라지 기쁨되라ꡑ 노래하는 까치도 화재의 피해로 인한 수난자이다. ꡐ黑白이 분명한ꡑ 옷은 불길에 타버린 까닭이고 ꡐ쉬여버린 목청ꡑ도 불길속에서 외친 까닭이다. 그날에 타버린 몸은 / 독한 불에 까맣게 타버린 몸은 / 영원토록 / 흑백이 분명한 색갈이 되고 / 그날에 쉬여버린 목청은 / 이제 더는 치유되지 못한다 / 회복되지 못한다 이는 가슴 아픈 일이다. 귀중한 것은 그가 자신의 재난을 아랑곳하지 않고 여전히 인간세상을 위해 기원함이다. ꡐ인간세상 향하여 / 애오라지 절절한 충고뿐이고 / 애오라지 기쁨되라 숙원 뿐이다.ꡑ 또 상한 목청으로 ꡐ경건히ꡑ ꡐ가지위에서 우짖ꡑ고 부른다. 선악이 공생하는 현실세계에서 도덕정신이 상실된 오늘 사람들에게는 ꡐ경보ꡑ를 알려 ꡐ귀띔ꡑ해주어야 하고 또 ꡐ기쁨되라ꡑ 축원해주어야 한다. 시인은 이 두 수의 시에서 새로운 시각으로 남들이 쓴 적이 없는 주제를 표달하였다. 자신을 희생해 남을 위함은 날로 보기 어려운 시절에 인간세상에는 ꡐ까마귀ꡑ와 ꡐ까치ꡑ가 필요하며 또한 ꡐ까마귀ꡑ와 ꡐ까치ꡑ와 같은 독특한 시편도 있어야 한다. 생명개체가 그 전부의 생명열정으로 착한 세상을 건설할 수 있음은 이미 순결과 고상의 極致에 이른 것이고 죽은 후의 충혼이 다시 생명으로 화하여 계속 전생의 착한 일을 한다면 그 공덕은 지고무상한 숭고여서 언어로는 형언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인간세상의 착한 일에서 이보다 더한 일이 있겠는가? 시인은 「뻐꾹새」에서 우리가 이러한 착함과 아름다움의 격동을 체험하게 한다. 피맺힌 부름소리 / 명명에서 오누나 / 명명에서 와 명명한 체내에 삼키우고 / 오열에서 와 오열하는 입가에 엉키고 / 요원에서 와 다시 요원한 풍경. 이러한 시구들은 감동적인 이야기를 내포하고 있다. 전하는데 의하면 머나먼 옛날에 치수(治水)와 농사에 능한 젊은이가 있었는데 거대한 기여를 한데서 악한 자의 모해를 받아 죽었다. 그가 죽은 후 忠魂이 두견새되어 늦봄, 이른 여름이면 머나먼 곳에서 날아와 사람들에게 ꡐ뻐꾹ꡑ, ꡐ뻐꾹ꡑ 끊임없이 우짖는다고 한다. 그 소리 처연하고 정성어려 너무도 슬플 때는 피가 흐른다고 한다. 두견새의 울음 소리는 봄갈이 어서 하라 독촉하고 풍년을 기원하는 듯 하지만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피맺힌 부름소리 / 차마 다시 볼 수 있으랴, 들을 수 있으랴 / 눈과 야초의 물고뜯음을 / 백골의 고독한 그림자를 / 황야의 적막한 탄식소릴 이는 분명 사람들에게 자기들끼리 싸우지 말고 다시금 비극을 빚어내지 말라는 깨우침이다. 시에서 ꡐ눈과 野草ꡑ라는 두 이미지의 조합은 대단히 교묘하여 그것은 추운 황야에서 서로 의지해도 환경과 운명의 억누름에 대항할 수 없거늘 어찌 서로 물고 뜯을 수 있겠느냐고 일깨움이 분명하다. ꡐ집안 사람끼리 다투는ꡑ 비극이 너무도 많은데 어찌 그것이 다시 발생하도록 하랴! 그런데 비극과 악행을 제거하는데는 양심의 각성이 필요되고 인간세상에 선을 베풀음이 필요된다. 피맺힌 부름소리 / 피가 듣어 빠알갛고 / 피가 듣어 설설 끓는다 / 갈라터진 가슴을 축여주고 / 말라죽은 생명을 축여준다 / 따사로운 봄철을 되돌려주고 / 다채로운 희색을 무르익힌다 / 인간세상 희구가 / 순금의 온기로 되게. 너무나도 경건하고 감동적이다. 수난자가 자신의 피로 말라죽은 인심의 대지를 관개하고 봄과 색채가 없는 인간세계를 관개하여 인간세상의 희망이 귀중한 온기로 되게 한다. 빅토르 위고는 선량한 역사에 대한 稀貴한 진주라고 비유한 적이 있는데 선량한 사람은 위대한 사람보다도 월등한 것 같다. 두견이 바로 이런 ꡐ진주ꡑ를 지닌 ꡐ인간ꡑ이 아니고 무엇인가. 선악이란 ꡐ동전ꡑ의 앞면만 인간세상을 영원히 직면하게 하도록 인류는 오래도록 부르고 또 외쳐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장닭」의 주제이다. 장닭은 ꡐ홰를 칩니다 / 귀신이 물러가는 때 / 밤의 장막 제치는 때ꡑ 그리하여 ꡐ광막한 우주가 소생합니다 / 왕성한 생명이 태여납니다.ꡑ 장닭은 사악과 암흑을 몰아내고 광명과 신생을 맞아들이는 착함의 위대한 사신이여서 자각적으로 두고두고 홰를 치고 또 어디에나 있는 것이다. ꡐ날마다 달마다 / 세세대대로ꡑ 홰를 치고 사람이 사는 곳 어디라없이 해를 친다. 일정한 의미에서 광명과 착함은 ꡐ부름ꡑ에 오는 것이나 오래오래 경종을 울리듯이 불러야만 선량한 인생을 건설할 수 있으며 선량한 인생은 또 모든 것보다 높다. 왜냐하면 ꡐ하나의 민족에게는 하나의 법률-선량이 있을 뿐ꡑ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장닭이 바로 이 법률의 꺼지지 않는 홰불이다. ② 시인은 윤리환경에 대한 근심스런 관심으로 토템묘사에서 생명의 경난과 고통을 묘사하여 정의와 동정과 우애와 호조의 정신을 환기시킨다. 좋은 고장에서 秀才가 나온다고 하지만 양호한 倫理的 환경도 있어야 한다. 생활에서 사람들은 자유롭고 조화로운 생활을 갈망하며 모순이 없고 정신적 압력이 없는 환경에서 자신의 개성적인 재능을 충분히 발전시켜 자신의 인생가치를 실현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생활은 흔히 상반되는 경우를 조성해 인생패리를 준다. 그러므로 인간관계는 보편적인 의의에서 가장 진귀한 호조와 동정이 결여하다. 이는 ꡐ인류초기ꡑ의 그런 감정의 함량과 淳厚한 진정과는 비길 수도 없다. 郭沫若은 이렇게 찬탄한 적이 있다. ꡒ온유돈후한 옛사람들이여! 당신들의 성정이야말로 훌륭한 시였다. 당신들의 생명은 충실하여 모든 자연현상을 생명화하였다. 당신들의 호조정신은 인간세상을 초월하여 해와 달에까지 퍼뜨렸다ꡓ ─일식 오늘날 사람들에게 결여한 것이 바로 민족 유년시기의 이런 博愛와 情과 ꡐ호조정신ꡑ이다. 그런데 많은 것은 되려 존중이 없고 존엄이 없는 ꡒ세상풍기의 악함이고 인정의 박함이다.ꡓ 어떤 철학가는 말하기를 ꡒ인류의 본질에서 가장 심원한 構思力은 바로 희망이 중요성을 가진다는 것이다.ꡓ 사람은 마땅히 긍정을 받아야 하고 배려를 받아야 하고 중시를 받아야 한다. 그런데 현실의 인간사에서는 잘못 만난 불량한 환경이 주체를 이기적인 세계에로 던져 수많은 非情한 이야기와 신생비극을 만들어 낸다. 우리는 물론 ꡒ인간세상에는 아직도 진정이 있다ꡓ고 말할 수 있으나 민족의 유년시기에 비하면 그 빛은 ꡐ반디불ꡑ과 ꡐ밝은 달빛ꡑ에 비기는데 불과하다. 그러므로 환경에 대해 동일시하는데서의 危機는 필연적이다. 시인은 그 속의 인생진미를 자상히 헤아려 온기있는 인간환경의 영위에 대해 부르짖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먼저 「고래」를 보기로 하자. 「고래」에서는 일종 환경을 묘사하였고 이런 환경의 압박에 놓인 문화인격을 묘사하였다. 고래는 선량하다. 하지만 사람들과 어울려 / 사람들과 가까이 / 사람들을 힘껏 돕건마는 / 질투당하고 / 타매당하여. 유유한 창천, 유유한 만사, 인간세상에는 천지간의 정도가 있기 어려워 ꡐ인간ꡑ에 대한 ꡐ힘껏 도움ꡑ이 오히려 ꡐ인간ꡑ의 질투와 배척을 당하고 仁愛와 선량은 냉혹과 증오를 받게 된다. 세르반테스가 ꡒ도덕적인 길은 좁고도 험하다ꡓ고 한 말을 알 것 같다. 물론 고래가 만난 자는 배은망덕자이고 ꡒ이를 갈도록 미워하거나 골수에 맺히게끔 사랑하게 하는ꡓ 계산에 능한, 긴 소맷자락 너울거리며 춤추는 자이다. 아니, 만난 것이 아니라 피할 수 없었을 수도 있다. 도덕이 가치를 잃은 토양에서는 다만 영혼에 정의가 없이 사위에 도사리고 있는 쓸개빠진 소인배들이고 또 라 톤덴의 ꡐ전대ꡑ를 짊어진 자들이 생장할 것이다. 이렇게 험악한 환경에서 고래는 경솔한 믿음이 자신에게 초래한 고통을 심각히 체험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인식의 지둔함이 자신에게 초래한 위해를 심각히 체험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이것은 그더러 내재적인 가치에 속하는 인생경험을 얻도록 하였다. 그는 이런 내재적 가치를 중시하였고 그래서 자기의 인생 方位를 다시 정하여 세상을 버리고 떠나가 ꡐ쓰라린 슬픔을 안은 채 / 바다속에 숨어 산다ꡑ. 바다를 서식처로 삼을지언정, 이별과 더불어 살지언정 절개를 굽히여 세력에 아부하고 더러운 환경에 타협하려 하지 않는다. 이는 성격이고 또한 인격이며 인격의 자위이다. 고래가 바다로 간 것을 극적으로 볼 것이 아니라 그것은 부득이한 경우이니 인생을 벗어나 인생을 보는 것이다. 바다속에 숨어 살며 / 억만년의 인정세태 반추하고 / 억만년의 쓰거움을 반추하며 / 우매함을 증오하고 / 혼탁함을 증오하고 / 더 참을 수 없는 때라야 / 후─ / 기나긴 울분을 뿜는다 말할 것은 모두 남겨두고 저 홀로 그것을 맛본다. 세상에 몇이나 이런 고독, 이런 무거운 부담, 이런 억울함을 용감히 감수해 낼 수 있겠는가?! 고래가 우울한 기분에 장탄식함은 헤아릴 수 없는 고초에서다. 일에는 냉막하나 남을 괴롭히는데는 열심하는 절어든 환경에서 尨棄가 바로 부정이고 비판이고 방법이다. 명성 높은 隱居之士와는 달리 고래가 바다에 은거함은 은거로 명성을 날리려는 것이 아니라 ꡐ바다속에 숨어 살며 / 세속과 싸울 념 없다ꡑ. 이렇게 하려고 ꡐ예민한 두 귀를 / 몸 속에 깊이 묻는다.ꡑ 숨어 살면서 다시금 세상에 나오는 뒤길을 끊어버린다. 그는 바다와 정을 나누고 영혼을 함께 하면서 ꡐ떠도는 산ꡑ이 되고 ꡐ움직이는 섬ꡑ이 되어 자신의 품성소행을 견지하고 위풍이 꺾이지 않는다. 물속의 모든 악한 자들이 두려워 도망친다. 고래는 정기(바른 기풍)와 고독으로 자신의 계시적 힘을 이룩한다. 시에는 善의 點檢이 있고 더구나 恨의 憂慮가 있다. 묘사에서 우리는 환경의 압박을 받는 정감과 인격에 대한 시인의 독특한 시각을 볼 수 있고 선량하고 청순한 문화인격에 대한 긍정 그리고 환경에 대한 비판을 볼 수 있다. 개체와 환경의 관계는 상호작용으로만 단순히 해석할 수는 없다. 사실상 환경은 부단히 개체의 자리매김과 운명에 결정적인 작용을 현시한다. 개체가 압박과 배척에 직면했을 때 그는 이미 정신의 고향을 잃어버려 安全感과 歸屬感을 되찾기 어렵다. 「거북」에서 묘한 것이 바로 이런 곤혹의 처량하고 심오한 사색을 제공하였다. 거북은 ꡐ바다를 집으로ꡑ 삼으려 하나 ꡐ탁류의 충격ꡑ을 받고, ꡐ육지를 집으로ꡑ 삼으려 하나 ꡐ모래불 사장속에ꡑ 처한다. 그래서 ꡐ날마다 해마다 / 괴로움도 쓰라림도 답답함도 / 속시원히 터놓을 곳 없어라.ꡑ 돌아갈 집이 없고 생에 출로가 없거늘 그 무슨 귀속이나 落着이 있으랴! 천지간에서 자신에게 속하는 것은 유독 ꡐ한ꡑ, ꡐ고통ꡑ, ꡐ답답함ꡑ이다. 이런 생활의 險景을 벗어나려면 멀리 타향으로 떠나는 길뿐인듯하나 ꡐ돗대ꡑ가 없고 ꡐ돛폭ꡑ이 없어 갈 수도 없다. 하지만 희망은 주관적 상상이여서 그래도 ꡐ행여나 돛대에 별무리 걸고 / 행여나 돛폭에 금노을 펼치ꡑ여 본다. 살아가려면 스스로 수련하여 강자가 되어야 한다. ꡐ별ꡑ의 기를 받고 ꡐ노을ꡑ의 빛을 받아 ꡐ천만년 바래여 / 눈동자 주정알로 버려지고 / 등어린 철갑으로 굳어져ꡑ ꡐ칼끝도 활촉도 튀겨나ꡑ고 ꡐ깨뜨릴 수 없고 / 태울 수 없는 넋ꡑ이 되어 ꡐ해적들이 침노할제ꡑ, ꡐ쳐오는자 / 뒤엎어 쳐박아 파묻어 버렸더라ꡑ. 이는 생존을 위해 자위를 위해 연마해낸 造詣이며 압박자가 피압박자에게 준 거대한 彈力이다. 거북은 자기의 지반을 마련해 생존을 유지할 것 같다. 하지만 환경은 항거를 용허하지 않는다. 거북은 온갖 무예를 닦았으나 ꡐ운명의 막고비엔ꡑ 여전히 ꡐ고달픈 몸 끄을고 / 쓰러지는 성곽 받쳐주고 / 우람진 비석 업어주며ꡑ 영원한 압박을 감내할 수밖에 없게 된다. 거북이 환경에 항쟁하는 묘사에서 시인은 거북으로부터 비석을 받치는 돌거북을 연상하고 또 그로써 시편을 마무리지은 것은 교묘하고도 심각한 필치인 바 그것은 시작품이 인생경험의 심처에로 들어가게 하였다. 거북은 ꡐ천만년ꡑ의 생명력으로 압박자의 사치한 희망을 이루어주고는 자신은 도리여 끊임없는 압박의 무거운 부담과 고초를 감내해야 한다. 처량감, 天地開闢之感이 충만되어 경감할래야 할 수 없이 심오한 ꡐ무거운 사색ꡑ을 자아낸다. ꡐ거북ꡑ과 비교하면 「백조」에서는 보다 확대된 환경이 생명에 조성하는 생존의 불온감과 위기감을 묘사하였다. ꡐ이사갑니다 / 이사갑니다 / 이사갑니다ꡑ 북으로 가면 ꡐ눈채찍 바람채찍ꡑ이 후려치고 남으로 가면 ꡐ불 혓바닥 비 혓바닥ꡑ을 내뿜어 재난을 하나 피하면 또 하나의 재해가 덮쳐와 ꡐ끊임없이 이사갑니다 쉬임없이 이사갑니다 / 끝끝내 몸 붙일 곳 찾지 못했건만ꡑ. 시에서는 그윽한 분위기를 한껏 살려 정서와 뜻이 충족하며 생동하고 절절하여 불온감이란 이 주제는 아주 쉽게 공명을 일으킨다. ꡐ개구리ꡑ는 고적하고 걱정스럽고 괴로운 시어로 환경에 ꡐ매몰ꡑ되어 ꡐ탈출ꡑ하려는 근심을 썼다. ꡐ영어에서 뛰쳐나ꡑ왔거늘 또 무슨 근심이 있게 되는가? ꡐ밑바닥ꡑ에 ꡐ묻혀ꡑ ꡐ눈과 입이 봉해ꡑ지는 ꡐ북풍ꡑ, 빙설ꡑ, ꡐ동토ꡑ, ꡐ세상의 가장 잔혹한 무게와 함께 인간의 가장 잔인한 질식과 함께ꡑ, ꡐ다시금 슬금슬금 덮치려 한다ꡑ. 그러니 다시금 묻히지 않을 수 없다. ꡐ겨울ꡑ은 가도 다시 올 것이고 ꡐ묻힌ꡑ 者는 다시금 ꡐ묻힐 수ꡑ 있다. 시에서는 사계절의 변화가 순환하는 것으로 사회생활에 부단히 나타나는 ꡐ반복ꡑ을 隱喩하여 ꡐ시달림ꡑ을 아주 묘하게 표출하였다. 또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개구리가 ꡐ묻힌ꡑ 것은 무의식 聖靈인 자연계뿐 아니고 인간세상의 ꡐ가장 잔혹한 무게ꡑ, ꡐ가장 잔인한 질식ꡑ 때문이다. 이것은 ꡐ환경ꡑ이 깊은 사색을 자아내는 복잡한 내포를 가지게 한다. ꡐ개구리ꡑ의 묘사는 시인의 情感視野와 環境視野가 풍부하고 넓음을 다시 한번 현시한다. 이상의 작품들에서 시인이 무겁고 우울한 필치로 묘사한, 劣惡한 환경의 학대를 받는 가지가지 시달림과 고통을 참아내는 감정은 문화비판의 분위기에서 외친 부름인 바 심령의 陽地를 부르고 정의와 동정을 부르고 화목과 온기를 부른다. 그런데 「산」에서 시인은 시각을 바꾸어 다른 필치로 다른 音調의 부름을 외친다. 「산」에서는 배척받았으나 자신의 힘으로 환경을 개변하고 화목과 온기를 창조하는 뛰어난 덕행을 갖춘 형상을 묘사하였다. 산은 대자연만 묘하게 가진 凝固物이다. 산으로 배척받은 사람을 비유함은 대단히 깊은 뜻을 가진다. 땅에는 본래 산이 없었으나 ꡐ우매 때문에 혼돈 때문에 / 밀리고 억눌려ꡑ 비로소 ꡐ거대한 근골 / 거대한 육체 / 거대한 혈맥ꡑ이 생겨 산을 이루었다. 시에서는 산의 ꡐ거대함ꡑ을 두드러지게 표출하여 환경의 밀어내고 억누름이 사나움을 연상하게 하고 또한 배척받은 자는 필연코 남보다 뛰어난 점이 있음을 암시하였다. 바로 이 거대한 체구에 지조가 굳세여 굴할 줄 모르는 영혼, 그리고 德義와 더불어 생존하는 영혼이 자리잡고 있어서 아무리 미친듯이 날치며 마구 학대하여도 ꡐ알몸이 되어도 / 상처투성이 되어도 / 불구자가 되어도 / 불굴의 신념으로 / 크나큰 기백으로 / 천지간에 우뚝 섰다ꡑ. 잔혹하고도 험악한 투쟁에서 오직 자기의 신념만이 가장 믿음직한 것이다. 신념이 꺼꾸러지지 않는 한 힘은 無窮無盡하게 된다. 자기의 신념을 믿음은 타고르가 말한 것처럼 ꡐ삶의 싸움터에서 나는 同盟者를 바라지 않고 / 나의 힘을 쓰도록 하리라ꡑ는 것이다. 더구나 귀중한 것은 ꡐ산ꡑ이 자기의 힘에 의해 싸울 때 자기 개인의 우려로 우려하지 않고 천하의 우려로 우려하며 이런 憂患意識을 진정한 사랑과 숭고한 책임감으로 轉化시킨 점이다. 기고 걷고 나는 모든 정령 포용하고 / 읊고 노래하고 춤추는 모든 영혼 양육해 / 냉담한 세상에 / 생기 넘칩니다 / 화목해 집니다. 꺼꾸러지지 않고 무너지지 않는 꿋꿋한 기개, 흉금이 넓고 사심이 없어 至高至公한 大德은 ꡐ산ꡑ이 참으로 강대하고 넉넉함을 나타낸다. 배척받는 사람, 남을 배척하는 사람은 도덕품성과 생명가치의 계선에서 어찌 天壤之差가 아니겠는가! ꡐ산ꡑ은 개체운명의 浮沈에 대한 묘사이며 민족운명의 興衰에 대한 묘사이다. ꡐ산ꡑ을 읽으면 우리는 한 민족이 역사의 폭풍을 헤쳐온 모습을 볼 수 있다. 시인은 자신의 깊은 감수력과 사고력으로 자기들의 민족성에는 유구하고 무한한 미덕이 있고 위대하고 불가전승적인 힘이 있으며 꺼질 줄 모르는 호기와 열정이 있다고 굳게 믿고 있다. 바로 이런 신념이 시인으로 하여금 ꡐ산ꡑ에서 위대하고 고상한 인격정신을 재주조하게 하였는데 이런 정신이 가지고 있는 거대한 미감각적인 힘은 새 세계를 창조하는 민족의 격정과 용기를 격발시킬 수 있게 한다. ꡐ산ꡑ은 내용이 독특할 뿐만 아니라 형식에서도 기성작법에 구애되지 않는 독창성을 가지고 있다. 시의 형식은 시의 내용을 전달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므로 남영전은 외재적인 것을 애써 추구하지 않고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죄다 ꡐ내용의 자연스러움으로 성공ꡑ하였다. 물론 그도 이미지조합의 변화에서의 질서성 등을 원용하여 절주감을 조성하려고 애쓴다. 이 시에서 시인은 자기의 시정이 자유분방하게 하려고 아주 啓示的인 표현형식을 창조하였는데 예컨대 본래 가로쓰기를 하던 시행에 갑자기 ꡐ우뚝 섰다ꡑ는 세로쓰기가 나타나 한 글자가 한행으로 되었다. ꡐ우뚝 섰다ꡑ는 그 내재적인 뜻에 맞는 외재적 형태의 생명감을 얻게 되었고 또 독자들이 감정의 震動을 체험하게 한다. 시의 결말에서 시인은 또 기발한 생각으로 ꡐ山ꡑ자가 셋이 피라미트형으로 겹쳐진 글자를 써서 새로운 시각에서 산의 아슬아슬하고 감동적인 숭고함을 감수하게 함으로써 시의 주제를 진일보 深化하였다. ③ 시인은 인생의 의의에 대한 심각한 사고로 토템묘사에서 사심없는 봉헌정신을 찬송하여 인간 활동의 진실한 가치를 환기시킨다 사회학자들은 일찍 인류는 자신의 생존능력을 높이려고 찬란한 문화를 창조하였으나 또 자신이 창조한 문화에 의해 ꡐ이화ꡑ되었다고 하였다. 인류의 물질 문명의 진보, 물질 수단의 증가는 물질생활의 제고와 만족을 얻게 하지만 그와 대응되게 정신상의 진보를 가져오지는 못하고 오히려 ꡐ위기ꡑ를, 특히는 인생의 의의에 대한 ꡐ위기ꡑ를 引起하였다. 어떤 인생이라야 의의가 있느냐 하는 문제는 사실상에서 어떠한 가치의식으로 인생가치의 판단과 선택을 지도하여야 하느냐 하는 문제이다. 의의관념의 ꡐ위기ꡑ는 필연코 가치판단과 가치선택의 오류를 가져오게 되어 인간의 정신적인 결함과 失策을 조성하게 된다. 그러나 인간이 자신을 ꡐ이화ꡑ하는 환경을 창조해낼 수 있다면 또 이런 환경을 성공적으로 개조할 수도 있어 ꡐ이화ꡑ현상을 止揚하고야 말 것이다. 시인은 바로 이러한 관심과 신념으로 그의 창조를 전개하였고 또 작품에서 역사적 진보의 요구를 구현하는 인생의 가치방향과 가치원천을 내놓아 인간의 진실한 가치를 가송하고 인생의 진정한 의의를 외쳤다. 「황소」에서 시인은 꾸준하게 일하고 사심없이 봉헌하는 정신을 묘사하여 고상한 인격을 부각하고 일종의 가치원천을 제공하였다. 황소와 토지는 탯줄로 이어진다. 조상들의 미묘한 환상속에서의 황소는 평생 대지에서 일만 하는 것이 아니라 또한 강토를 넓혀주는 ꡐ창조자ꡑ이기도 하였다. 신화에서는 대지가 워낙 물 가운데 떠 있는 자그마한 섬이었으나 황소가 떠받쳐주어 일망무제한 대지가 나타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ꡐ그는 자그마한 섬의 밑받침 / 그는 이 땅이 뻗어가는 시조ꡑ라고 한 것이다. 시인은 이런 신화구성으로 황소에게 비범한 기개와 개척하고 창조하는 힘을 부여하였고 가치관, 도덕관과 예술성의 통일속에서 평범하면서도 위대한 생명개체가 사심없이 봉헌하는 세계를 구축하였고 생명가치에서의 진정한 숭고성을 창조하였다. 황소는 생명력과 창조력의 종합체이므로 영원히 희망과 수확과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그는 ꡐ묵묵히, 묵묵히 걸어가ꡑ고 묵묵히 봉헌한다. 오직 묵묵하여 그에게는 충성이 있고 집착이 있으며 그래서 고요함에로 통하고 멀리에로 통하여 ꡐ그는 쓸쓸한 황야의 희망이고 / 그는 희망이 무르익을 징조입니다.ꡑ, 황소는 결코 멀리에로 가는데서의 간난신고를 모르는 것도 아니고 또 ꡐ사색이 없어서랴.ꡑ 하지만 희망이 깃들인 땅이 멀수록 ꡐ커다란 위속에다 온갖 어둠 삭이며 / 아스라이 머나먼 길을 떠났습니다.ꡑ 또 자신의 노동으로 희망이 현실로 되게 하여 ꡐ움직이는 골짜기를 싣습니다 / 눈부신 빛발을 싣습니다.ꡑ 이렇게 세상에 봉헌한다. 황소는 자신의 노동으로 풍요함을 가을하고 휘황함을 거두어 들인다. 하지만 어려운 생활과 고된 일을 견디어내고 堅忍不拔하고 고생을 마다하지 않고 원망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대지는 풍성한 오곡을 바친다. 황소의 견인성, 끈질김은 이런 귀중한 소질과 영원히 이어지도록 한다. 수확을 위해 황소는 ꡐ밤낮없이 / 언제나 가고 갑니다 / 춘하추동 / 언제나 가고 갑니다ꡑ, ꡐ돌밭과 더불어 / 눈얼음과 더불어 / 가시밭과 더불어 / 진흙탕과 더불어 / 땀과 피와 눈물을 흘리면서ꡑ 가고 간다. 그 어떠한 험난도 앞길을 막지 못하고 그 어떠한 艱難辛苦도 의지를 꺾지 못한다. 영원히 앞으로만 나아간다. 산전수전 다 겪고 고초를 맛볼대로 맛보면서 종래로 고생도 근심도 입밖에 내지 않고 ꡒ가시길, 벼랑길도 아랑곳없이 / 운명의 파란곡절 탓함이 없이ꡓ 묵묵히 후회없이 봉헌뿐이다. 황소로 말하면 생명의 가치와 생존의 도덕은 일치한 것이어서 봉헌이 거대하나 보답받을 생각은 하지 않는다. ꡒ풀포기만 있으면 씹어삼키며 / 그보다 더 큰 욕망 없답니다.ꡓ 창조하는 것은 풍요함이나 먹는 것은 풀포기이며 바치는 것은 가장 많으나 얻는 것은 가장 적은 이것이 바로 황소의 도덕풍모이며 황소의 생종가치관이다. 시인은 생명의 빛이 번쩍니는 작열하는 시구로 같지 않은 각도, 같지 않은 측면에서 황소의 사심없는 봉헌정신을 낱낱이 써서 자기 민족의 조각상을 부각하였다. 황소는 민족정신의 상징이며 가치의 원천이다. 이런 정신적 가치는 민족의 동년으로부터 지금까지 줄곧 빛내여가고 있다. 한민족이 지금도 황소를 사랑하고 황소정신을 숭상하는 데서 우리는 일종 문화원형의 생명연속, 그리고 그 가치정신의 역사적인 전승과 발전을 볼 수 있다. 황소는 민족에게 가치사유와 가치선택의 방향을 제공한다. 생명의 가치와 매력은 사심없는 봉헌에서 구현되며 또한 철저한 희생정신에서 구현된다. 「사슴」에서 시인은 민족개성과 민족정신의 이 측면을 펼쳐보인다. 사슴은 천국에서 온 天使이고 인간세상의 아름다움을 구축하는 神靈이다. ꡒ실 안개 감도는 신비로운 천국에 / 울울창창한 인간세상 밀림에 / 오르내리고 넘나들며ꡓ ꡒ온순한 천사로 지치도록 / 경건한 소망 기도드리며 / 풍요한 푸르름 찾기도 하고 / 角逐하는 신으로 날쌔게 달리여 / 사악한 도깨비 쫓아버리고 / 아늑한 낙토로 이룩해 간다.ꡓ 널리 착한 씨앗을 심으며 인간세상에 복을 이룩한다. 이런 신념, 이상, 목적을 위해 사슴음 힘껏 앞으로 끊임없이 내달린다. 자기 운명의 돛을 틀어잡지 못하고 지어는 생명의 훼멸될 위험이 기다려도 격정 가득히 정의를 위해 주저없이 앞으로 나아가 끝내 ꡒ생명은 엉키어 가루로 되고 / 몸체가 찢기면 선혈로 적신다.ꡓ 모든 것을 바치는 것이다. 신념은 영혼을 인도한다. 사슴은 비록 신념과 이상의 오아시스에 이르지 못하였으나 자신의 고귀함으로 ꡐ典當ꡑ에 들어가고 신비한 鹿角은 ꡐ대붕의 날개, 신단수 가지와 함께ꡑ 산체 같은 도안을 왕관에 아로새긴다. 그리하여 사슴은 또 ꡐ숭엄한 왕관에 우거지고 / 장엄한 전당에도 솟아오른다ꡑ. 神聖함과 존엄을 남기고 철저히 헌신하는 영생불멸의 정신을 남긴다. 바로 이런 정신이 ꡒ깊이 잠든 심금을 울려주고 / 백두의 뭇불들을 밝힌다.ꡓ 내일의 아름다움과 영광을 예기하는 것이다. 시인이 자신의 고상한 이상과 심미적 정조로 시작품에서 인생의 진정한 가치를 제시할 때 시인은 또 이런 가치적 주제의 훼멸을 써서 작품은 거대한 張力중에 독특한 각성과 사고의 힘이 생기게 한다. 이는 우리가 「사슴」을 읽은 후 또 「양」에게서도 보게 된다. 양은 사심없이 봉헌하는 精靈이다. 그의 옷은 결백하고 그의 영혼은 그의 옷처럼 결백하다. 살아 봉헌하고 봉헌하며 살고 남을 위해 사는 것이 바로 그의 생명의 전부이다. 바로 그가 사람들이 ꡐ굶주릴ꡑ 때 ꡐ잡초ꡑ와 ꡐ돌부리ꡑ가 해침도 두려움없이 ꡒ아득히 머나먼 하늘밖의 하늘에서 / 큼직한 곡식이삭 물어와 / 마른 땅에 싹이 터 푸르른 강이 되고 / 굶주린 자 푸짐하게 밥사발을 들었건만 / 저물녘 풀들이 서식하는 그 곳에서 / 저 홀로 바장입니다.ꡓ 바로 그가 ꡐ풍성ꡑ과 ꡐ얼음ꡑ 속에서 ꡒ따스한 제 몸의 털옷으로 / 차디찬 세상에다 봉헌해 / 헐벗은 자 몸을 감쌀 옷이 생기고 / 체류자는 먼길 떠날 노래 생기고 / 제만은 몸둘 곳 찾지도 않고 / 차디찬 밤 별들이 사학하는 그 곳에 / 저 홀로 사색합니다ꡓ 삶의 따스함과 배부름을 인류에게 주고 죽음이 위협하는 굶주림과 추위는 자기에게 남겨 세상과 사람을 구원하고는 떠나가 버린다. ꡐ주는 것ꡑ을 목적으로, ꡐ봉헌ꡑ을 가치로 삼는 이것이 바로 양의 생명 가치관이며 양의 생존의의이다. 양의 진선미의 결정체와 극치로 시인의 붓끝에 나타난다. 시인의 정 깊은 찬송에는 또한 열렬한 부름이 있다. 하지만 시인의 찬미 속에 비판도 하였다. 양을 해치는 악행을 비판하였다. 이는 이 시의 다주제를 나타냈다. 사람은 양심이 황폐하고 도덕이 메말라 포악하고 잔인하여 때로는 착함을 원수로 삼아 고상한 것을 없애기 즐기므로 그 은혜 태산같은 양을 ꡐ속죄ꡑ자로 삼는다. 지어는 양이 ꡐ위엄스런 제단 앞에 죽음을 당합니다 / 기도하는 아침녘에 죽음을 당합니다ꡑ. 이것이 바로 시의 거대한 장력을 이루어 대단히 착한 자의 대단한 비극을 음미하고 심사숙고해 계시를 받게 한다. 이런 비판은 인간성을 각성시키는 警鐘을 울리려는 것이다. 물론 여기까지 읽고 우리는 자연히 시는 은유여서 말한 것과 겨눈 것이 다름을 생각하게 된다. 시를 읽는다는 것은 마음의 눈으로 그것이 가리키는 다른 것을 보아냄이다. ④ 시인은 민족 희망에 대한 열렬한 추구로 토템묘사에서 원시적 역도감(力度感)을 전시하여 창업의 원대한 포부, 격정, 힘을 환기시킨다. 역사는 어느덧 신구 세기의 교차점에 이르렀다. 인류의 생존배경은 바야흐로 격변이 일어나고 있다. 전 지구성적인 경쟁이 날따라 격렬해져서 복잡한 태세를 이루었다. 이런 현실에 직면하여 한 민족이 강대한 생존, 발전, 경쟁 능력을 가지려면 반드시 민족의 마음밭에 새로운 희망과 이상의 불을 질러야 하고 반드시 끊임없이 자아초월을 실현하여야 한다. 그런데 현실에서 희망의 미래에로 가려면 원대한 포부, 격정, 그리고 그것에 의하여 움직이는 거대한 행동적인 힘이 있어야 한다. 바로 민족의 이런 정신적 소질을 부활시키고 재창조하기 위하여 시인은 원시적 역도감을 묘사하였다. 토템숭배란 단순한 신화의 가치의 하나가 바로 그것이 사람의 본성에 고유하나 운명 역사에 의해 비탈려진 이런 귀중한 소질, 이를테면 작열하는 격정, 놀라운 용감성, 무비의 견인성, 두려움없는 모험성, 빼어난 상상력과 창조력 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소질들은 모두 현대민족이 흠모하고 바라는 바이다. 이런 작품들에서 우선 「물」, 「불」 두 편을 보기로 하자. 물은 ꡐ모든 생명 모든 영혼의 / 온갖 문을 여닫는 신령ꡑ이고 불은 ꡐ우리 백성 영원한 불멸의 신명ꡑ이여서 모두 생명의 영원불멸의 상징이다. 그것은 민족 생명의 영원함이다. 그러나 우리는 역도감에서 그것을 이해할 수 있다. ꡐ물ꡑ에서 시인은 물의 특성 및 그 형태변화에서 구체적이고도 생동한 묘사를 하고나서 물의 비할 바 없는 가치와 힘을 두드러지게 묘사하였다. 물은 ꡐ인간과 자연을 낳아 기르는 / 인간의 시원입니다 / 만상의 시원입니다ꡑ. 만물을 낳아기르는 물의 이런 창조가 바로 그의 힘이고 力度이다. 이런 力度가 때로는 성격상 ꡐ온화ꡑ하게 구현되어 ꡐ수양버들 봄바람에 흐느적이듯 / 호수우에 새들이 지저귀는 듯ꡑ 하고 때로는 성격상 ꡐ凶猛ꡑ하게 구현되어 ꡐ독을 쓰면ꡑ 수세가 방종하여 순간에도 만리에 사품치고 바다같이 망망하게 펼쳐져서 하늘을 삼킬듯 한데 ꡐ高山도 峻嶺도 당해 못내고 / 타오르는 열화도 못당합니다ꡑ. 물은 이렇게 ꡐ온화ꡑ하기도 하고 또 이렇게 ꡐ흉맹ꡑ하기도 하여 ꡐ생령의 明滅도 / 대지의 浮沈도 / 손안에 꽈악 거머쥐고 있습니다ꡑ. 모든 것을 창조하고 모든 것을 훼멸하는 그 모두가 다 힘에 있다. 물은 바로 힘이다. 물은 그것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과 이용 가운데서 사람들을 도와 힘과 역도의 관념을 이룩하였다. 불의 형태와 특성은 물과 다르지만 ꡐ불의 위력ꡑ은 마찬가지로 거대하다. 불은 ꡐ수리에서 진펄에서 / 산기슭에서 동굴에서 / 아름다운 생령들을 무수히 낳아 기르고 / 따사로운 복음을 무수히 내려줍니다ꡑ. 그리하여 사람들은 ꡐ불에서 생을 얻고 / 불에서 풍요함을 얻고 / 불에서 정결함을 얻고 / 불에서 강녕을 얻습니다ꡑ. 구하는 그 속에는 거대한 힘에 대한 신뢰와 의지함이 포함되어 있다. 토템숭배물 가운데서 물, 불과 같은 자연물과 마찬가지로 원시적 역도감을 체현하는 것으로는 또 큰 동물들도 있는데 사자가 바로 그 중의 하나이다. 원시민족들은 사자가 사악을 몰아내고 암흑을 물리치는 광명의 수호신으로 간주하였다. 그런데 그 직책을 다하는 가운데서 사자는 또 놀라운 힘과 용맹을 과시하였다. 그 역도를 두드러지게 표현하려고 시인은 ꡐ사자ꡑ의 구상에서 사자의 갈기가 길고 아름다우며 외침소리가 매우 큼을 두드러지게 하였고 또 가장 폭발력 있고 가장 속도감 있는 이미지들을 조합하여 묘사함으로써 사자의 용맹한 힘을 충분하고도 생동하게 펼쳐 보였다. 사자의 외침 / 사자의 갈기 / 팔방을 진감하고 / 금빛으로 눈부셔 / 우뢰 되고 / 눈사태 되고 / 선회하는 태양 되고 / 질주하는 유성이 되어 / 캄캄한 밤 멀리멀리 달아나고 / 악마와 요괴는 / 숨을 곳을 찾지 못한다 이런 강렬한 동태적 이미지의 연속적인 원용은 강렬한 예술적 효과를 낳는데 사자의 질주는 무서운 힘을 폭발하여 천지를 진감하고 귀신을 울리며 우주에 위엄을 떨친다. 이렇게 천하무쌍한 용맹의 역도는 추구의 격정을 구현하고 또 희망의 담보를 체현한다. 그래서 사자는 ꡐ희망의 사신ꡑ으로 존대되며 그래서 사람들은 돌사자를 조각해 ꡐ다리목에ꡑ 세우고 후세에까지 그 은혜와 혜택이 미치고 ꡐ영원한 광명을 지키ꡑ기를 바란다. 사자에 대한 사람들의 이런 숭배는 사실상 과감성, 용맹성에 대한 일종 숭배이며 원시적 역도에 대한 일종 숭배이다. 사자도 그래서 숭배하는 민족의 위력의 상징으로 된다. ꡐ사자ꡑ는 시적 의미의 폭발력을 가지는데 그것은 시인이 민족의 이런 격정과 힘을 심각히 이해하여 달성한 정감 역도에 의한 것이다. 이런 격정과 힘은 대지에서 희망을 추구하는 일종 정신적 폭발이라 한다면 「백마」에서 ꡐ끝없이 씽씽 네 먼저 내 먼저 나래쳐가는ꡑ 백마의 날음은 조상들이 하늘에 날아보려는 높은 이상의 나래침이다. 이 시는 시작에서 벌서 시의가 높고도 개척 역도감이 풍부하다. ꡐ뭉게뭉게 타래치는 / 매지구름 헤치며 / 아득한 창천에서 / 줄달음쳐 내린다ꡑ. 천마는 첩첩한 장애를 뚫고 기세차게 하늘을 나는데 그것은 우주에 광명을 주기 위해서이다. ꡐ지축을 울리며 / 살같이 달려 / 눈부신 번개불 일으키고 / 황홀한 서기를 실어온다.ꡑ, ꡐ한낮의 불먼지 털고 / 오밤의 흑장막 찍어 / 해빛 안고 / 달빛 안고 / 발자욱 닿는 곳에 하얀 빛 뿌려준다.ꡑ 백마의 말발굽은 ꡐ하얀 빛 뿌려준다ꡑ. 그래서 세계는 광명해지는데 백의겨레가 광명을 갈망하고 광명을 창조하고 광명과 함께 있는 민족적인 추구와 개성을 보여주며 백의겨레의 강렬한 민족문화 동질성과 자호감이 은근히 내비쳐지고 있다. 그런데 광명은 사람들에게 생존조건을 제공한다. 생기발랄한 민족은 당전의 현실에서 살 뿐만 아니라 희망과 이상에 살며 희망과 이상이 창조한 미래에 산다. 오직 이런 미래가 예기한 성공이 펼쳐주는 경지, 새로운 성공만이 민족을 이끌어 비약하게 한다. 그래서 백마는 또 갈망과 숙원 싣고 / 지성과 신념 싣고 / 자유의 영지 향해 / 아름다운 산천과 이상의 언덕 향해 / 살같이 달려간다, 피로를 모르는 개척자 / 끓는 피 멎더라도 / 날개와 발굽 접을 줄 모르고. ꡐ아름다운 산천과 이상의 언덕ꡑ은 무엇이며 그것은 또 어디에 있는가? 창조해야 할 인간세상 진선미의 극치이며 심령의 백마가 날아갈 수 있는 곳이며 혹은 ꡐ살같이 달리ꡑ는 그 자체일 수도 있다. 이상이 현실로 되게 하려고 위험도 무릅쓰고 대가도 아끼지 않으면서 나래치면서 목숨을 잃더라도 ꡐ날개와 발굽 접을 줄 모르고ꡑ 영원히 ꡐ나래치는ꡑ 자태와 ꡐ개척ꡑ하는 원기를 확보하여 후세에 꺼질 줄 모르는 격정을 남겨주고 이상을 추구하고 또 그것을 위해 헌신하는 전통을 남겨준다. 백마정신은 열렬하거나 냉정한 빛을 뿌리는데 그것들은 모두 다 민족은 기필코 영광스런 미래를 소유하게 될 것이라고 얘기한다. 마지막으로 「수리개」를 보기로 하자. ꡐ수리개ꡑ와 ꡐ백마ꡑ는 모두 구중천 높은 곳을 무대로 하여 意境이 요원하고 상징적 의의가 심각하다. 그런데 ꡐ백마ꡑ는 이상의 하늘에서의 민족의 욕망, 격정, 힘과 집요한 추구의 표출이고 ꡐ수리개ꡑ는 심각한 인생감오의 投射가 있어서 인간세상 경험으로써 민족이 높이 멀리 날려는 격정과 힘의 불길을 지핀다. 이른바 인간세상 경험이란 사실상 환경과의 관계를 처리하는 경험이다. 수리개는 창공에 도전하는 뛰어난 포부와 능력을 가지고 있어 ꡐ하많은 질투의 화살 / 그리고 뜻밖의 기소ꡑ를 받는다. 어리석은 자들은 ꡐ굶주려 나는 것ꡑ이고 ꡐ외로와 나는 것ꡑ이라고 貶下한다. 안작은 물론 큰 기러기의 뜻을 알 수 없다. 게다가 ꡐ시기ꡑ까지 있으니 심보가 고약할 수 있다. 하지만 수리개는 너무 슬기로와 어리석은 듯하고 너무 용기있어 겁을 먹은 듯하여 ꡐ개의치 않을건 죄다 / 개의치 않ꡑ는데 이것이 바로 ꡐ천하에 진정 용기있는 자가 있어 뜻밖에 닥치는 일에 놀라지 않고 까닭없이 당함에 노하지 않는데 이는 그가 가진 것이 크고 그 뜻이 원대한 까닭이다ꡑ라는 것이다. 높이 날고 멀리 날아 언제나 / 빙천협곡 천리만리 / 망망림해 어디서나 / 이 땅의 온갖 밝음과 어둠 / 한눈에 안았구나 / 목표만 정해지면 / 번개같이 과감하다 / 슬기롭고 용맹하다 수리개의 원대한 포부, 넓은 시야, 예리한 안광, 과감하고 용맹함, 이러한 것들이 생동한 예술적 과장 가운데 두드러지게 표현되었는데 특히는 만리창공에 날아예며 망망대지를 굽어살펴 모든 것을 간파함으로써 간악한 일을 폭로하고 숨겨진 일을 적발하는 안력, 목표를 향해 번개같고 우뢰와 같이 용맹한 용력은 정복의 지혜, 격정, 힘을 보여준다. 바로 이런 지혜, 격정, 힘이 수리개로 하여금 불리한 생존환경을 이겨 자기의 포부를 실현하게끔 한다. 수리개는 선회하며 날 수 있으나 선회에서 생존을 얻지는 못한다. ꡐ망망창창 어디나 날고 / 명명 광검 살펴보ꡑ는데서 알 수 있다. 반드시 박투속에 생존을 구하고 정복속에서 발전을 구해야 한다. 그러므로 그는 환경에 순순히 굴복하지 않고 천지를 깔보면서 ꡐ뛰어난 담략으로 / 드넓은 흉금으로 / 우주바람 일으킨다 / 우주의 푸른 바람 일으킨다 / 우주의 생명 바람 일으킨다ꡑ. 이 바람은 비할 바 없는 격정의 바람이다. 그것은 박투에서 일어나고 그것은 박투를 위해 울부짖으면서 생명을 싣고 바야흐로 개처갛고 싸우고 정복한다. ꡐ한생ꡑ의 ꡐ추구ꡑ ꡐ깨어있ꡑ기 때문이다. ꡐ싸우지 않으면 망하고 / 강하지 않으면 망하니 / 애오라지 용맹히 박투함이 이 세상에 살아갈 길이어늘ꡑ 그래서 우리는 넓고 ㅡ고 웅장하고 기발한 시적 경지, 천지를 진감하는 기세가 떠올리는 형상, 목표가 높고 원대하며 지혜가 뛰어나고 담략과 식견이 출중하며 과감히 모험하고 과감히 정복하는 박투자의 형상을 보게 된다. 직접적인 인격화로 묘사한, 상징적인 뜻이 심각한 형상에서 시인은 진보와 정복을 목표로 앙양되고 분발한 민족의 문화정신, 그리고 스스로 경계해 조심하고 스스로 고무격려하는 우수한 품성을 깊은 감정으로 찬송하였고 세기의 풍운을 휘감아쥐고 강성과 행복을 추구하는 파랑새의 호성과 염원을 표달하였다. 이러한 민족토템시들은 낯설고 강렬하고 선명한 형상으로 심각한 인상을 남겨준다. 이런 시들은 시편마다 정감과 지혜의 빛이 번쩍이고 시편마다 독특한 예술적 탐구의 결정체이며 시편마다 예술적 감화력이 강렬한 상등품들이다. 그것들은 시문학의 새로운 족속들로서 참신한 모습과 품질로 시단에 경희로움과 새로운 예술정보를 가져왔다. 이러한 시작품들에서 우리는 시인이 민족문화의 원천과 미래를 展望하는 시공에서 생활에 접근하고 물화에 주목하는 넓은 안광으로 민족의 소질 높고 문명 높은 새로운 문화정신의 육성에 관하여 탐구하고 창조하였음을 보게 된다. 무릇 민족정신이 갈구하고 마땅히 소유해야 할 것이기만 하면 시인은 시에서 탐구하고 반응하고 외쳤다. 이런 시들은 외침중에서 생활을 열애하고 진선미를 추구하고 아름다운 이상을 위해 분투하도록 고무하며 새로운 사상규범, 가치관념, 행위방식을 가르치고 새로운 희망, 신념, 분발하여 나아가는 정신을 가르쳐 주어 인성품위의 제고와 민족문화소질의 승화를 실현한다. 그리하여 시인은 자기들 민족혼을 성공적으로 재주조하고 민족문화정신을 풍부히 하고 高揚하였다. 이는 新舊 세기의 교차점에서 시인이 민족과 시대에 바치는 진귀한 禮物이다. 청조 때 사람 徐增은 ꡐ시는 바로 사람의 行狀이어서 사람이 높은 즉 시도 높다ꡑ라고 하였다. ꡐ사람이 높은 즉 시도 높다ꡑ로 남영전의 인간됨과 시를 개괄한다면 그에게는 부끄러울 것이 없을 것이다  
1187    詩作初心 - 詩의 大空을 위하여 댓글:  조회:4391  추천:0  2016-03-12
自然化된 人과 人化된 自然 -이시환의 산문시집『대공(大空)』을 통해 본 시인의 시세계   김은자(중국, 하얼빈이공대학교 한국어학과 교사)     1. 들어가는 말   우연히 이시환 시인의 산문시집『대공(大空)』을 마주하게 되었다. 1980년대와 1990년대에 창작된 51편의 시가 실린 부피가 크지 않은 개인시집이다. 그럼에도『대공』 이란 이름 때문인지 손에 쥐여진 원고에서 그 무게가 전해진다. 시인 이시환(1957.9 ~ )으로 말하자면 일찍 1981년에 대학을 졸업하면서『그 빈자리』를 펴냄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550여 편의 작품을 창작하고, 이미 여러 권의 시집과 평론집을 펴내는 등 저력을 과시하는 중견시인이자 평론가이다. 하기에 이번 시집의 출간도 새삼스럽지 않지만 다만 새롭고 세인의 관심을 끄는 것은 시집에 실린 시들 모두가 ‘산문시’란 점이다. 산문시(散文詩)란 한마디로 정의를 내리기에는 어렵지만 말 그대로 산문(散文)과 시(운문,韻文)라는 서로 상반된 양식이 결합된 것이다. 다시 말해, 일반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시가 지닌 형식적 제약(制約)은 물론 운율(韻律)의 배열 없이 산문형식으로 쓰여진 시로 정형시와는 다른 자유시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겠다. 따라서 행과 연의 구분도 없고 운율적 요소도 없는 형식은 산문에 가깝지만 표현된 내용은 시(詩)인 만큼 당연히 시로서의 핵심적 요소인 은유, 상징, 이미지 등 내적인 표현장치나 시적인 언어를 택하고 있다. 산문시의 시초(始初)는 「악의 꽃」으로 유명한 프랑스의 시인 샤를르 보들레르(Charles-Pierre Baudelaire, 1821.4~1867.8)의 "산문시는 율동(律動)과 압운(押韻)이 없지만 음악적이며 영혼의 서정적 억양과 환상의 파도와 의식의 도약에 적합한 유연성과 융통성을 겸비(兼備)한 시적 산문의 기적"이란 평(評)에서 찾아볼 수 있다. 실제로 그가 「파리의 우울」(1869)을 발표한 이래 산문시는 중요한 시의 한 부분으로 되었고 특히 프랑스 문학에서 독특한 지위를 차지하였다. 그런가 하면 한국 현대문학에서도 어렵잖게 산문시를 찾아볼 수 있다. 가장 일찍 주요한의 「불놀이」(1919)에서 그 전형(典型)을 선보인 바 있고, 1930년대 와서 정지용의 「백록담」, 이상의 「오감도」, 백석의 「사슴」 등에서 탁월한 성과를 거두었으며, 이어 1950년대의 서정주의 「질마재 신화」로 이어지고 있음이 확인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산문시에 대한 세인의 관심은 부족한 편이고 문학론적인 측면에서 장르의 성격 규명조차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시인은 “개인의 작품세계를 정리해나가는 과정”이라고 말하지만 산문으로 된 시만 골라 펴낸『대공(大空)』이란 시집은 사뭇 의미가 있지 않나 싶다. 게다가, 산문시에 대한 남다른 애착으로 그 매력을 공유하고자 시와 함께 실은 「산문시의 본질」이란 글이 더해져 무게를 더해준다. 부담 없이 자연스레 소리 내어 읽게 되는 내재율에 의해 인간과 자연의 속삭임을 실어내는『대공』에 대한 분석을 통하여 그 주제와 시인의 시세계를 부분적으로나마 살펴보고자 한다.     2. 自然과의 대화 시도   시골 태생으로 자연을 벗 삼아 자라면서 자연의 소리를 듣고, 그 움직임을 보며, 그것들의 변화를 지켜보는 일에 익숙해진 시인이어서인지 그의 시에는 자연과 물상(物象)을 소재로 하는 시들이 많다. “자연 속에서 인간 삶의 지혜를 배우고, 내 몸속에서 자연을 읽을 수가 있었으니 자연과 인간관계 속에서의 진실과 아름다움이 나의 가장 큰 시적 관심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고 시인이 밝힌 바 있듯이 그의 시 쓰는 일은 아름답고 신비한 자연현상과 연관되면서 ‘자연을 베끼는 일’로 거듭나고 있다. 「서있는 나무」에 심상(心象)으로 등장하는 나무는 사람의 모습으로 봐도 무방하다.   서있는 나무는 서있어야 한다. 앉고 싶을 때 앉고, 눕고 싶을 때 눕지도 앉지도 못하는 서있는 나무는 내내 서있어야 한다. 늪 속에 질퍽한 어둠 덕지덕지 달라붙어 지울 수 없는 만신창이가 될지라도 눈을 가리고 귀를 막고 입을 봉할지라도, 젖은 살 속으로 매서운 바람 스며들어 마디마디 뼈가 시려 올지라도 서있는 나무는 시종 서있어야 한다. 모두가 깔깔거리며 몰려다닐지라도 , 모두가 오며가며 얼굴에 침을 뱉을지라도 서있는 나무는 그렇게 서 있어야 한다. 도끼자루에 톱날에 이 몸 비록 쓰러지고 무너질지라도 서있는 나무는 죽어서도 서있어야 한다. 그렇다 해서 세상일이 뒤바뀌는 건 아니지만 서있는 나무는 홀로 서있어야 한다. 서있는 나무는 죽고 죽어서도 서있어야 한다. -「서있는 나무」 전문-   시인은 나무는 “앉고 싶을 때 앉고, 눕고 싶을 때 눕지도 앉지도 못 한다”고 하면서 살아있음의 소중함을 말해주고 있다. ‘~지라도’로 끝을 맺는 일련의 표현들은 겪게 되는 시련을 뜻한다. 시인은 그러한 시련 속에서도 ‘서있어야 하며’ 심지어는 죽어서도 ‘서있어야 한다’고 피력한다. ‘서있는다’고 해서 시련이 닥쳐오지 않는 것도 아니고 또 ‘세상이 뒤바뀌는 것’도 아니지만 그러한 상황을 피할 수 없다면 차라리 꿋꿋하게 자리를 지켜야 함을 말해주고 있다. 「함박눈」에서는 겨울에 내리는 눈을 빌어 자연에 대한 시인의 애틋한 짝사랑 같은 마음을 고백하고 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다만, 당신에게로 곧장 달려갈 수 있다는 그것과 당신을 위해서라면 당신의 이마에, 손등에, 목덜미 어디에서든 입술을 부비고, 가녀린 몸짓으로 나부끼다가 한 방울의 물이라도 구름이라도 될 수 있다는 그것뿐이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사옵니다. 다만, 우리들만의 촉각을 마비시키는 추위가 엄습해오는 길목으로 돌아서서 겨울나무 가지 끝 당신의 가슴에 잠시 머물 수 있다는 그것과 당신을 위해서라면 충실한 종의 몸으로 서슴없이 달려가 젖은 땅, 얼어붙은 이 땅 어디에서든 쾌히 엎드릴 수 있다는 그것뿐이옵니다. 나는 언제나 그런 나에 불과합니다. 나는 나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함박눈」 전문-   재미있는 것은 시인은 ‘당신’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한 방울의 물과 구름이 될 수 있다고 한다. “이마에, 손등에, 목덜미 어디에서는 입술을 부비고”, “충실한 종의 몸으로 서슴없이 달려갈 수 있다”고 한다. ‘눈[雪]’이란 심상으로 표현되는 자연에 대한 시인의 사랑은 ‘당신’이란 존칭어의 사용과 ‘옵니다’란 시어의 극존칭어미에서 더욱 간절하게 묻어난다.   이놈의 세상, 내 어릴 적 썩은 이빨 같다면 질긴 실로 꽁꽁 묶어 눈 감고 힘껏 땡겨보겄네만 이땅의 단군왕검 큰 뜻 어디 가고 곪아 터진 곳 투성이니 이제는 머지않아 기쁜 날, 기쁜 날이 오겄네, 새살 돋아 새순 나는 그날이. 이 한 몸, 이 한 맴이야 다시 태어나는 그 날의 살이 되고, 피가 되고, 힘이 된다면 푹푹 썩어, 바로 썩어 이 땅의 뿌릴 적시는 밑거름이라도, 밑거름이라도 되어야지 않컸는가. 이 사람아, 둥둥. 저 사람아 둥둥. -「북」 부분-   제목이 「북」이란 시이다. 시의 그 어느 부분에도 북에 대한 묘사는 없다. 그저 마지막에 ‘둥둥’하고 북치는 소리만 들려올 뿐이다. 시의 전반부는 물론 인용한 부분에서도 ‘썩은 이빨’, ‘곪아 터진 곳 투성’ 등 부정적인 이미지가 가득하다. 그럼에도 시인은 곪아터진 살 위로 ‘새살 돋아 새순 나는 그날’을 기다리기에 절망적이지 않다. 결말의 ‘이 사람아, 둥둥, 저 사람아 둥둥’이란 시어는 우리민족 정서에 알맞은 가락의 하나로 특유한 흥겨움을 담고 있으며, 힘든 지금을 견디고 나면 머지않아 행복한 나날이 찾아올 것이라는 희망도 함께 안겨준다. 「나사」에서는 ‘나사’라는 매개물을 통하여 ‘등을 돌리고 있는 것들조차 마주보게 하려’는 융합의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불현듯 찬바람이 불면 내 몸뚱이 속, 속들이에서 일제히 쏟아져 나올 것 같은, 조용한 흔들림. 하양과 검정을 이어주는, 무너지며 반짝이는 논리,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를 잇는 난해한 길이다. 어루만지는 곳마다 스멀스멀 안개가 피어오르는, 알몸에 박힌 세상의 구원이다. -「나사」 부분-   시인은 ‘하양과 검정’ 이라는 한눈에 대조되는 흑백의 논리를 넘어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를 이어주려고 하고 있다. 다시 말해 시인은 흑백이 공전하는 삶의 진실을 말하고자 한다. 서로 어울려져야 빛을 발하는 나사처럼 혼자서는 ‘찬바람’이 불면 ‘흔들리기’에 더욱 간절히 조화와 융합을 꿈꾸고 있다. 조화와 융합을 시도하는 작품으로 「로봇」도 빠뜨릴 수가 없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로 난, 수없는 난해한 길들을 은밀히 왔다갔다하는 정체불명의 숨이다. 그것은 아주 구체적인 기능을 갖는 부품과 부품의 결합으로 시작되지만 물질에 혼을 불어넣는 일로서 자신을 베끼는 불안한 공정工程이다. 열심히 로봇이 사람을 닮아 가는 동안 사람들은 점차 완벽한 로봇이 되어가면서도 여전히 꿈을 꾼다. 깊은 어둠의 자궁 속으로 길게 뻗어있는 뿌리의 꿈틀거림처럼 로봇이 나의 시녀가 되고 내가 로봇의 하인이 되는 것이다. -「로봇」 전문-   이 작품에서 시인은 로봇을 만드는 과정을 ‘부품과 부품의 결합’으로 물질에 혼을 불어넣는 ‘자신을 베끼는 불안한 공정’이라고 하면서도 말미에는 ‘내가 로봇의 하인이 된다’라고 말하고 있다. 로봇이 사람을 닮아가서 불안하다는 것에 출발했음에도 로봇(기계, 나아가 물질문명)에 대한 부정은 나타나지 않는다. 오히려 함께 공존하는 그런 세상을 시인은 바라고 있다. 그런가 하면 시인은 인화된 자연과의 끊임없는 교감을 시도하고 있는데 이는 시의 서정성을 찾기 위한 노력이며 서정성이 주는 낭만에 대한 추구라고 보아진다. 시집에 자주 등장하는 바람, 나무, 강, 산, 꽃, 단풍 등의 시적 소재들이 산문시임에도 불구하도 서정성이라는 시의 특성을 확보하게 하고 있다.     3. 人의 독백   이시환의 산문시 곳곳에는 활발하게 움직이는 사람의 형상이 등장한다. 이런 사람들은 ‘수많은 시인의 분신’들로 시인 자신 내지는 인간의 목소리를 토해내고 있다. 다시 말하여 작품에 등장하는 어린이도, 아버지도, 친구도, 나아가 예수의 모습도 모종의 의미에서 결국은 시인 자신이며 시인과 함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욕망으로 인해 살아가는 이 세상에 대해 많은 것을 바라고 있기에 결국 욕구불만족에서 오는 수많은 병을 앓고 있다. 그리움, 편집증, 외로움 등 그 이름도 다양한 병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시인의 노력이 보인다. 먼저 「그리움」부터 보도록 하자.   너는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方言. 아니면 판독해 낼 수 없는 상형문자. 아니면 가늠할 수 없는 어둠의 깊이이고, 그 깊이만큼의 아득한 수렁이다. 너는 나의 뇌수腦髓에 끊임없이 침입하는 바이러스이거나 그도 아니면 치유불능의 정서적 불안. 아니면 여린 바람결에도 마구 흔들리는 어질 머리 두통頭痛이거나 징그럽도록 붉은 한 송이 꽃이다. 시방, 손짓하며 나를 부르는 너는, 차라리 눈부신 억새 같은 나의 상사병이요. 그 깊어가는 불면不眠의 나락奈落이면서 추락하는 쾌감快感이다. -「그리움」 전문-   현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라면 누구나 한번쯤을 앓아보았을 그리움이란 병을 언어의 마술사인 시인이 아니라고 할세라 수많은 명사로 환치(置換)하고 있다. ‘방언’, ‘상형문자’, ‘어둠의 깊이’, ‘수렁’ 등 일련의 표현을 얼핏 보면 아무런 연관이 없는 것처럼 보이나 ‘난해(難解)하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그런가 하면 ‘꽃’을 제외한 모든 명사는 부정적인 의미를 지니며 꽃마저도 예쁜 꽃이 아닌 ‘징그러운’ 꽃이라고 한다. 그만큼 그리움이란 지독한 것임을 말해주고 있다.   약삭빠른 세상 사람들은 그런 나의 소리 없는 웃음을 눈치 채고 그 때부터 내게 손가락질을 하며 ‘바보’라 불렀습니다. 그 때부터 나는 그들 앞에서 빈틈없는 바보가 되었고, 나는 바보가 아닌 위인들의 업적과 치부를 들여다보며 또 하나의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뒤로 세상은 온통 웃음덩어리라는 것을 슬프게도 나는 알아 차렸습니다. 때문에 내겐 실없이 웃는 버릇이 생겼고, 언제부턴가 웃음을 질질 흘리고 다니는 병病이 되어 깊어만 갔습니다. -「웃음을 흘리는 병」 부분-   「웃음을 흘리는 병」은 제목부터가 아이러니다. 기쁨과 즐거움의 표현인 ‘웃음’을 ‘병’이라고 한 것은 결국 ‘병’이 ‘병’이 아님을 역설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다시 말해 ‘웃음’이 병이 되는 그런 세상의 아이러니를 풍자하고 있다. 이는 단순한 어휘의 나열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바보’와 ‘위인’, ‘업적’과 ‘치부’같은 어휘의 병치(竝置)가 만들어내는 잔잔한 리듬감에서 비롯된다. 시 「각인(刻印)」 전편에서는 부제목에 붙인 것처럼 편집증을 앓고 있는 한 사나이의 고충을 담고 있다. 편집증증상을 갖고 있는 사나이를 ‘또라이’라고 부르지만 그것을 부정하면서 시인은 ‘나는 나이어야 한다’고 외치고 있다. 또한 시집의 마지막 시인 「봄날의 만가(輓歌)」와 첫 시가 되는 「네거티브 필름을 들여다보며」는 이야기의 서두와 결말처럼 서로 호응을 이루고 있으며, 시인이 던지는 삶의 본질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과 답을 시어로 풀어내고 있다.   있거나 이루었다고 아니 가는 것도 아니고, 없거나 이루지 못했다고 먼저 가는 것만도 아니고 보면 더는 허망할 것도, 더는 쓸쓸할 것도 없다. 세상이야 늘 그러하듯 내 눈물 내 슬픔과는 무관하게스리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여전히 분망奔忙하고 분망할 따름, 이 분망함 속에서 죽는 줄 모르로 사는 목숨이며, 한낱 봄날에 피고 지는 저 화사한 꽃잎같은 것을. 아니, 아니, 이 몹쓸 바람에 이리저리 쓸려가는 발밑의 티끌 같은 것을. -「봄날의 만가輓歌」 부분-   위의 시에서 시인의 삶에 대한 태도를 보아낼 수 있다. “있거나 이루었다고 아니 가는 것도 아니고, 없거나 이루지 못했다고 먼저 가는 것만도 아니다”란 것은 생(生)과 죽음에 대한 깨달음의 표현이다. 죽음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순간 가장 인간답게 살 수 있게 된다. 하기에 사람의 의지와 무관하게 흐르는 세상이고 봄날에 피고 지는 ‘꽃잎’같은 인생임에도 시인은 ‘허망하지’도 ‘쓸쓸하지’도 않다고 한다. 죽음을 넘어 죽음마저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이 놀랍다. 시의 마지막에 삶이 ‘바람에 이리저리 쓸려가는 발밑의 티끌’같다는 표현에서 시인의 그러한 의식은 무가내(無可奈)와 탄식(歎息)을 넘어 달관(達觀)의 경지에 이르렀음을 말해주고 있다. 이 외에도 시집에는 가족애와 우정을 다룬 시가 몇 수 된다. 「하나님과 바나나」, 「안암동일기」, 「아버지의 근황」, 「어머님 전상서」, 「벗들에게」 등 시편들은 그 일부가 문체상에서 말 그대로의 일기나 서신에 가까워 정녕 산문시라고 볼 수 있겠는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하지만 가족과 친구와 함께하는 가장 정답고 삶다운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읽는 내내 마음 한편이 따뜻해나는 정이 가는 것임은 분명하다.     4. 맺는 말   이시환의『대공(大空)』은 산문시집에도 불구하고 시적으로 정제(精製)되어 있다. 산문적인 형식에도 불구하고 시마다 분명 내재율이 존재하여 서정시와는 다른 운율의 미를 지니고 있다. 산문시라서 그런지 다소 화법이 직설적이고 함축성이 약한 편이어서 아쉬움이 남는다. 여러 시편에는 고독과 허무의 감정이 흐르고 있지만 이 또한 부정적이라고 보아지지는 않는다. 단지 시인의 관심을 갖고 있는 ‘인생무상(人生無常)’이란 불교의 가르침과 무관(無關)하지 않은 듯싶다. 하기에 어쩌면 이런 부정적이지만 진솔한 사람의 감정들을 시적 언어로 풀어내고 있는 시인 역시도 부정적인 것을 부정함으로써 긍정에로 나아가고 싶지 않았을까 싶다. 시집의 마지막 장을 조심스레 덮고 나니 시집의 첫 페이지에 쓰인 글귀가 눈에 들어온다. “눈에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를 은밀히 잇는, 그 좁은 틈으로 대공(大空)이 무너져 내리며 만물을 일으켜 세우는 소리를 듣는다.” 그렇다, 정녕(丁寧)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기에 눈을 살며시 감고 마음을 비우고서 시인의 목소리가 아닌 그렇다고 내 목소리도 아닌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본다. ‘대공(大空)’이란 메아리가 마음속에 울려 퍼진다. 클 대(大), 빌 공(空), 대공(大空)!       金銀子 (中國) 2005.9 - 2009.6 연변대학 조선언어문학교육 전공. 2009.9 - 2012.6 연변대학 조선언어문학 석사과정. 2012.7 - 현 재 하얼빈이공대학 한국어과 교사. E-mail: kyzspace@hanmail.net
1186    시평론의 바른 자세와 "30년대 수준론" / 리상각 댓글:  조회:4364  추천:0  2016-03-12
평론의 바른 자세 리 상 각 (중국 동포 시인) 『동방문학』 8월호(통권 제16호)에서 「민족 시문학의 발전을 위하여」(고명수)라는 특별기고를 읽었다. 부제는 「조선족 시인들의 시를 다시 읽으며」이다. 이 글은 중국 연길에 와서 세미나에 논의가 되었던 그의 ꡐ30년대 수준론ꡑ을 다시 증명하기 위하여 쓴 고명수 교수의 두번째 평론이다. 그것을 또 다시 증명하기 위해서는 조선족 시문학의 낮은 차원을 끄집어내는 것이 주 목적이 되었다. 끝구절에는 ꡒ필자의 이러한 지적과 충언이 같은 동포로서 민족 시문학 발전을 위한 것이니만치 충정이 어린 고언으로 받아들여 주었으면 한다ꡓ고 썼다. 지난 5월 25일, 『연변문학』지와 『동방문학』지가 공동으로 가졌던 세미나 전경을 스스로 떠올리게 된다. 그 때 고명수의 주제발표에는 없었지만 『동방문학』에 발표된 그의 문장에는 중국 조선족 문학이 한국의 30년대 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내용의 글을 누군가 나에게 귀뜸해 주었다. 그래서 내가 의문을 제기하자 시우들이 다투어 발언하고 질문을 했던 것이다. 고명수 교수의 해답은 시원치 않았다. 우리가 너무 열을 올린 것이나 아닌가 싶어서 교수와 조용히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하지만 세미나가 끝나자 그는 저녁행사에도 나타나지 않았으므로 대담을 가질 수 없었다. 기분이 잡쳤을까 아니면 몸이 불편한가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보았다. 나의 질문은 고 교수의 평론을 부정한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귀 아프게 들어온 말이 납득되지 않아서 물었을 뿐이다. 그러니 우리가 남의 충고를 겸손하지 못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오해하지 말기를 바란다. ꡐ50년대 수준ꡑ이니 ꡐ30년대 수준ꡑ이니 하는 말은 고 교수의 발명이 아니다. 아주 일찍부터 귀 아프게 들어온 건방진 소리이다. 한국에는 시인이라는 사람들이 시간과 자금과 종이를 낭비해 가면서 만든 수두룩한 쑤세미를 안고 와서는 조선족 문학이 한국의 50년대 수준이라고들 하였다. 원로시인이나 명시인의 입에서는 이런 말을 들어보지 못했다. 이념이 다르고 체제가 달랐던 두 나라 문학을 어떻게 종적으로 비교할 수 있는가? 경제생활은 그렇게 말할 수 있어도 문학은 그렇게 말할 수 없지 않는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러던 차에 고 교수의 주제 발표문에는 더구나 ꡐ30년대 수준론ꡐ이 나왔으니 우리의 귀가 번쩍 열리지 않을 수 없었다. 30년대는 김소월, 정지용, 이상, 한용운, 이상화 그리고 윤동주 등 절세의 명시인을 낳은 문학의 황금기였는데 조선족 시단을 거기에 비기니 초풍할 지경으로 놀라웠다. 우리가 겸손하지 못해서 이런 말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인가. 아니면 한국의 어떤 이들이 우리를 얕잡아 뱉은 말인가? 이런 비교법은 비과학적이다. 고국의 30년대 문학과 90년대 문학, 어느 것이 수준급인가? 고 교수는 그 이유를 지금의 다양화에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문학의 다양화가 문학의 발전표지로 되는가? 아무리 이리 치고 저리 둘러쳐도 신통한 소리가 없는 궤변이다. 큰 부자도 아닌 사람이 큰 부자인 체하고 헛소리를 치고 다니거나 물거품처럼 둥둥 떠있는 문인이 아무런 가치도 없는 쑤세미를 걷어 안고 와서는 큰 소리를 땅땅 치며 중국이 어떻고, 조선족이 어떻고, 세계를 주무르기나 하듯이 말하는 사람들은 흔히 이런 어처구니없는 소리를 식은죽 먹기로 한다. 더욱 유감스러운 것은 수준이 있는 교수들이 깊은 생각이 없이 덩달아 이런 말을 되풀이하고 있다는 것이다. 고 교수는 ꡐ30년대 수준론ꡑ을 증명하기 위하여 『동방문학』 6월호(통권 제15호)에 발표된 우리의 시 작품들을 수두룩이 들고나와 혹평하였다. 그 중에서도 설인 선생의 시와 리상각의 시가 만신창이 되도록 얻어맞은 셈이다. 더러는, 마지못해 절반쯤 긍정하고 절반쯤 부정했으며, 더러는 찬양한 시편들도 있다. 이렇게 써 놓고는 ꡒ필자의 판단은 역시 옳았다.ꡓ고 ꡐ30년대 수준론ꡑ을 고집한 것이다. 우선, 나는 고 교수가 보귀한 시간을 따내여 알심들여 조선족시단을 분석해 준데 대하여 고맙게 생각한다. 글은 썼는데 좋다궂다 아무런 반응이 없으면 이것처럼 슬픈 일이 없다. 앓는 이빨을 뽑으러 갔는데 의사가 그만 생이빨을 뽑았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평론이 이러하다면 해독을 끼칠 뿐이다. 어느 작품이라는 명확한 지적도 없이 두루 둘러쳐서 한 사람의 시 전반을 악평한다면 이런 평론이야말로 무단적인 것이다. 한 시인이 쓴 수많은 시편은 그것이 다 명작일 수 없다. 수수한 시가 더 많을 것이며 실패작도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누구도 미신을 할 수 없다. 가령, 한 시인에게서 가장 수준이 낮은 시를 골라들고 그 시인을 매도해 버린다면 과연 그러한 비평이 정확하달 수 있는가? 고명수 교수는 우리의 존경하는 원로시인이며 윤동주 시인의 창작연대와 같은 시기에 써두었던 설인 선생의 미발표작을 혹평하였다. 일제의 고압정책에 말도 할 수 없던 그 시절, 친일파가 욱실거리던 세월에 항일투사들이 피를 흘린 소식을 듣고 민족의 선구자를 노래한 시 「소식」과 「5월」을 습작품이라고 혹평했다. 시의 저항정신은 팽개치고 아무런 구체적 분석도 없이 한마디로 결론을 내린 것은 언어도단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예술성과 시어가 단순할 수 있지만 고 교수는 그 시의 정신이 뭔지도 모르고 쓴 것이 분명하다. 윤동주 시인 작품도 대표작은 손으로 꼽을 수 있다. 그렇다고 편편이 다 명작인 것은 아니다. 단순하고 깊이가 옅은 시들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그렇다고 윤동주 시를 과소평가할 수 있는가. 평자가 찬양한다고 해서 시인이 영웅이 되고, 평자가 내리깎는다 해서 시인이 매장되는 것이 아니다. 한 시인에 대한 연구는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다. 과학적으로, 전면적으로, 역사적으로 평가되어야 정확한 결론이 나온다. 다음으로 나는 좀 계면쩍은 얘기지만 고 교수가 평한 나의 시에 대하여 솔직히 말하고 싶다. 문단생활 45년에 자기변명을 해보기는 처음이다. 고 교수는 어느 시편이라는 지적도 없이 이렇게 썼다. ꡒ사상은 깊이가 없고 매우 상투적이어서 이미지의 새로운 차원을 열어보지 못하고 있으며, 상상력의 수준이 소박하고 메시지가 약한 점이 아쉬웠다.ꡓ라고. 한마디로 말해서 이런 것이 다 시냐 하는 뜻이다. ꡐ서울에서 뺨을 맞고 시골에서 눈을 흘긴다ꡑ는 식으로 자기 변명을 좀 해야겠다. 오늘 세월에는 ꡐ시골에서 뺨을 맞고 서울에 가서 큰 소리치는ꡑ 것도 심심잖게 보고 있는 상황이 아닌가. 앞에서도 말했지만 평이 혹평이라도 감사를 드린다. 내가 지금까지 쓴 2천여 수 시편들에는 고 교수가 지적한 그런 문제점이 수두룩할 것이다. 나의 시편들에는 가라지와 쭉정이가 많다. 설사, 고 교수의 지적이 타당하지 않더라도 그런 지적은 시창작에 대한 요구인 만큼 참조로 받아들여도 나쁜 점이 없을 것이다 이를 데 있는가. ꡐ건너산 꾸짖기ꡑ 평론은 도대체 어느 시를 두고 그렇게 썼는지 알수 없어서 『동방문학』 6월호(통권 제15호)를 뒤져 보았다. 시 「그리움」, 「두루미」, 「물빛으로 살고싶다」 세 편이었다. 평자는 내가 시단을 이끌어 나가는 시인이어서 ꡒ주의깊게 읽어보았다.ꡓ는 말을 덧붙였다. 아주 신중하게 읽어보았다는 말이 되겠다. 평론가는 법관이 아니요 시인은 피고석에 앉은 죄인도 아니다. 얼마든지 자신을 변호할 권한이 있다. 예절적인 말은 진작 다 했으니 이제는 허심하지 않다고 나무라지 말기를 바란다. 시 「그리움」은 1960년에 쓴 작품이다. 정치적 압력과 도식주의 창작이 범람하던 때 투고해도 실어주지 않았던 시인데 몇 십년이 지나 발표된 뒤 반향이 컸고 중문으로 번역된 뒤 미국에서 영문으로 번역되어 발표되었다. 이번에는 『동방문학』에 명시 소개로 발표되었다. 시는 소박한 순수애정을 절절하고도 진실하게 그렸다는 평을 받았다. 시정은 그 자체가 사상인데 그 무슨 사상의 깊이가 없다는 평에 나는 그만 억장이 막힌다. 시 「두루미」는 1980년에 썼다. 두루미는 자기 아름다움을 알지 못한다. 자기 아름다움을 알지 못하는 그것이야말로 진짜 아름다운 것이요 자기 아름다움에 놀라서 높이 나는 두루미는 더더욱 아름답다. 이것은 우리 백의겨레의 형상을 두루미로 상징해서 쓴 것이다. 이 시가 우선 중문으로 번역된 뒤 중국소수민족전국상을 받았고, 이 시에 곡이 붙여져 2백만 조선족 가운데 거의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즐겨 부르는 노래가 되었다. 그후 이 시가 영문으로 번역되고 일본에서 일어로 번역되어 발표되었다. 모르는 것이 아는 체하고, 미운 것이 고운 체하고, 없는 것이 있는 체하는 것이 현대인이라면 진짜로 고운 것이 자기가 고운 줄 모르는 두루미야말로 미의 천사일 것이다. 우리 겨레 여성들의 이런 숨어있는 미를 나는 잘 알고 있다. 이것이 시의 사상이 아니고, 시의 상상력이 아니고, 이미지가 아닌가. 고 교수가 말한 사상이니 이미지니 상상력이니 메시지니 하는 따위는 대체 무엇을 두고 한 말인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고 교수는 그렇게 아무 것도 아닌 맹물 같은 시로 평했지만 나는 나의 시 「두루미」가 명작으로 인정받고 있으며, 세계에로 진출하고 있으며, 후세에 오래 남을 나의 대표작 중의 하나임을 확신하고 있다. 시 「물빛으로 살고싶다」도 우리 겨레의 미덕을 읊은 것이다. 물론, 이상 세 편의 시도 제한성과 결함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고 교수의 그와 같은 극단적인 전면부정의 평은 접수할 수 없으므로 마이동풍격으로 흘려보내는 수밖에 없다. 고명수 교수의 평론에서 첫장은 본주제와 거리가 먼 서술인데 이른바 원로, 중견이라는 허명이 높은 ꡐ허술한 시인ꡑ이니 ꡐ허명에 사로잡힌 인간ꡑ들이니 하는 투의 말 훈계와 질책으로 얼룩진 이 장은 참다운 평론이라기보다 욕지거리요 어딘가 위협조가 있는 것 같다. 욕지거리는 궤변과 마찬가지로 진리가 아니다. 이러한 평론자세로 우리 문단을 이끌 수 있겠는가. 오히려 반감을 살 뿐이다. ꡐ예술의 세계에도 등급이 있다ꡑ느니 ꡐ예술에도 훈련이 필요하다ꡑ느니 따위 하등의 상식에도 속하지 못하는 말들을 지저분하게 널어놓고, 지금이 어느 때라고 ꡐ음풍농월ꡑ인가? 누가 ꡐ음풍농월ꡑ이나 일삼고 있는가. 같은 동포로서 ꡐ그냥 보고만 있을 수 없다ꡑ고 질책을 했다. 그래 무엇이 ꡐ음풍농월ꡑ인가? 이백은 ꡐ음풍농월ꡑ을 안 했는가? 자연미와 인간미를 접목시키는 시도 ꡐ음풍농월ꡑ인가? 대체 시를 얼마나 써봤고 시를 얼마나 읽어봤기에 이백을 운운하고 해외 동포시인을 운운하는가? 이론적으로 논쟁할 가치가 없는 평론이어서 나는 다만 평론자세에 대해서만 논했다. 고 교수가 그처럼 알심들여 우리 조선족 시인들의 시를 이러니 저러니 논했더라도 그것은 여전히 ꡐ30년대 수준ꡑ이라는 것을 증명하지 못했다. 그러하니 고 교수도 나의 충언을 받아들이기를 바란다. (2015, 3)  
1185    詩作初心 - 詩에서 道와 깨달음 댓글:  조회:4160  추천:0  2016-03-12
운율에 풀어놓는 道의 길과 깨달음 -이시환의 시집 「상선암 가는 길」을 읽고   김준경(시인/문학평론가)   ‘현대시(modern poetry)'를 논할 때에 생각해 볼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도식은 ’현대시(modern poetry) = 운율(meter) +비유(metaphor)‘로 말하곤 한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앞의 운율보다도 뒤의 비유에 무게 중심이 옮겨져 있는 형편이다. 그만큼 옛 시와 오늘의 시는 형식적인 면에서 많이 달라진 것이다. 길고 길었던, 화려한 20세기를 거쳐서 21세기에 당도한 영국의 현대시도 운율체계를 잘 지키는 부류가 있는가 하면, 전적으로 무시하는 부류도 없지 않다. 그러나 영시에서는 약강격(弱强格:iambic), 강약약격(强弱弱格:dactyl), 강약격(强弱格:trochee)이라 하여 매우 과학적인 운율체계가 과거에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지켜져 오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의 경우에는 과거의 시가나 시조에서의 음수율을 운율체계로 볼 수 있는데 오늘날까지 잘 지켜지고는 있다. 그만큼 노랫말로서 출발한 시는 운율이 대단히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시는 노래로 불리어지는 게 아니라 그저 소리 내어 읽는 정도로 그치고 말기 때문에 정형적인 외형률은 거의 다 사라지고 편 편마다의 독자적이면서 자유로운 리듬 감각으로 대체되어 있다. 최근에 필자가 읽은 이시환 시인의 시집 「상선암 가는 길(신세림, 2004)」은 한국적 내재율이 아주 강하게 작동되고 있는 것을 느끼고 확인할 수 있었는데, 딱히, 7.5조니, 3.4조니, 3음보니 하는 외형률이 아니라 작품 내부에서 자연적으로 흘러나오는, 그래서 소리 내어 읽어도 흥이 절로 나는 일정한 리듬 감각이 살아나고 있다. 필자는 이것을 우리 시의 전통적 운율이라고 말하고 싶은데 물론 이 점에 대해서는 별도의 연구가 구체적으로 진행되어야 한다고 본다. 어쨌든, 필자는 자연스레 소리 내어 읽게 되는 흐름 곧, 내재율에 불교적인 명상과 선적 정신세계를 실어내고 있는, 매우 특수한 시적 성취를 이루고 있는 이시환의 시집 「상선암 가는 길」을 분석하여 그 주제와 두드러진 특징을 말하고자 한다. 시집 속의 첫 작품에서부터 시인은 언어를 초월하는 진리를 용하게도 직관적인 언어로써 표현해내는 데에 성공하고 있다.   하, 인간세상은 여전히 시끄럽구나./문득, 이 곳 중선암쯤에 홀로 와 앉으면/이미 말(言)을 버린,/저 크고 작은 바위들이 내 스승이 되네. -작품 전문   불과 4행밖에 되지 않는, 매우 짧은 시이지만 실로 많은 아니, 실로 깊은 의미를 담아내고 있다. 말 많은 인간세상과 그 말을 버린 크고 작은 바위를 대비시키면서 오히려 침묵하는 돌덩이가 말 많은 인간의 스승이라는 단 한 마디의 말로써 인간세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놓으면서 침묵의 무게를 심감하게 한다. 그야말로 촌철살인(寸鐵殺人)하는 절창(絶唱)이라 아니 말할 수 없다.   일평생 어찌 그리 즐거움만 있겠는가./어느 날 갑자기 슬프디슬픈 일도 닥쳐 올 수 있음을/예비해야 하지 않겠는가.//일평생 어찌 그리 괴로움만 있겠는가./어느 날 갑자기 기쁘기 한량없는 일도 밀물져 올 수 있음을/예비해야 하지 않겠는가.//길든 짧든 한 생을 다 지나고 보면/한 때의 즐거움도 괴로움도 다 헛것이었음을/어찌 되돌릴 수 있으리오.//아무리 붙잡으려 해도 머무르지 않고/아무리 버리려 해도 버려지지 않는 것이/우리네 꿈같은 인생 그 실상이네 그려. -작품 전문   위 작품에서 보는 바와 같이, 시인은 기본적으로 불교의 ‘공(空)’과 ‘무(無)’에 대해서 깊이 천착하고 있다. 일상의 즐거움과 슬픔에 대해서 너무 집착하지 말라는 의미에서 인생이 일장춘몽(一場春夢)임을 환기시키고 있는 듯하다. 그러면서 ‘유(有)’와 ‘무(無)’ 곧 집착과 버림의 적절한 균형을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작은 창문이지만 열어 놓고 살며/쌀쌀한 아침저녁 바람이 부는 것을 체감하며/이 가을에 숨을 쉬고 있다는 게/얼마나 큰 기쁨이더냐?//땅에 바싹 엎드려 지붕이 낮은 집이지만/두 다릴 쭉 뻗고/조용히 잠을 청할 수 있다는 게/얼마나 큰 행복이더냐?//이 한 잔에 맑은 물을 마시지만/더 이상 바랄 것도 없는/이 몸의 투명함과 가벼움이,/얼마나 큰 축복이더냐?//일백 년을 산다 해도/일백 억 년을 산다 해도/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고/끝이 있으면 시작이 있듯이/잠시 잠깐임엔 마찬가지.//길고 짧음을 잊고 사는 것이,/얼마나 농익은 맛, 그윽한 향이더냐? -작품 전문   작은 창문이 딸린 낮은 집에 살지라도, 아니, 진수성찬이 아니라 맑은 물과도 같은 소찬을 소식하며 산다 할지라도 살아있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큰 즐거움이고 행복이라는 가치관의 표현인 듯싶다. 더 나아가, 많고 적음에서, 높고 낮음에서, 길고 짧음에서 이미 초월한, 그래서 어떠한 굴레로부터 속박되지도 않는 안빈낙도(安貧樂道)와 해탈(解脫)의 경지를 여유롭게 표현해내고 있다. 필자는 부득이‘해탈(解脫)’이라는 용어를 빌려 쓰고 있지만 시인은 이미 ‘있음’과 ‘없음’에서조차도 영원히 벗어나라고 말한다. 과연, 인간의 굴레를 쓰고서도 그것이 자유롭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인가.   양 어깨 위를 짓누르는/무거운 짐들을 다 내려놓고, //하늘을 바라보며 누워 있는/몸뚱이조차 벗어놓아라.// 그리하여 우주를 떠도는 먼지처럼 가벼워진/ 그런 너마저 놓아 버려라.// 그리하여 모든 것과의 연(緣)이 끊어져/공간도 없고 시간도 끊긴//세계의 소용돌이가 되어라./ 아니, 있고 없음에서 영원히 벗어나라. -작품 전문   이 세상 모든 일이 덧없으니/그것은 나고 죽는 법이라?//나고 죽음이 다 끊어진 뒤/열반 그것이 곧 진정한 즐거움이라?//그대도 한낱 꿈을 꾸었구려./그대도 한낱 꿈을 꾸었구려.//이 세상 모든 일이 덧없다 하나/그 덧없음 속에서 온갖 꽃들이 피었다지고//지는 일조차 새 씨앗을 잉태하는/ 자궁의 긴 침묵일 뿐//그 덧없음 속에 머물지 아니한 것 없네./그 덧없음 속에 머물지 아니한 것 없네. -작품 전문   물론, 궁극적으로는 원하든 원치 않든 그렇게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모은 인생을 포기하고 먼지처럼 우주를 유영하듯이 살자는 뜻은 아닐 것이다. 모든 존재는‘덧없음’이란 덫에 갇혀 있지만 그 안에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는 엄연한 사실을 직시하라는 암시가 깔려있기 때문이다. 자칫, 인생의 의미를 부정하거나 축소시키는 허무주의자들의 말이나 태도처럼 비추어질 소지가 없지 않으나 분명,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자궁의 긴 침묵’이라는 단단히 응축된 말이 그 단적인 증거이다. 필자가 잘 못 이해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김춘수 시인의 ‘무의미(無意味)’ 시론은 말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의미 없는 시란 있을 수 없으며, 설령, 있다 해도 그것은 말장난일 뿐 시의 윤리 상 옳지 않다. 독일의 철학자 헤겔은 “존재하는 모든 것은 다 옳다.”라고 했는데 무의미는 의미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기에 옳다고만 말할 수 없지 않은가. 영국의 비평가 존. 드라이든(John Dryden)의 작품인 를 보면 ‘무의미’란 말이 엄청난 비난을 할 때에 쓰였음을 알 수 있다. 이야기가 잠시 옆길로 새어나갔지만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서, 이 시인의 해탈의 마음은 순수한 동심의 세계와도 동일시되는 경향을 띤다. 아래 ‘폭설을 꿈꾸며’라는 작품이 잘 말해 준다.   어쨌든, 밤사이/눈이 많이많이 왔으면 좋겠다./어쨌든, 내일 아침엔/세상이 온통 하얀 눈으로 덮여 있었으면 좋겠다.//그리하여, 움직이는 사람도, 자동차도,/나는 새조차 없었으면 좋겠다./그리하여, 지구촌의 62억 인류가 착한 마음으로 살고 있는지/저마다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다.//어쨌든, 하얀 세상을 바라보며,/인간의 오만함도 비추어 보았으면 좋겠다./그리하여, 하얀 눈처럼 깨끗해지고,/그 깨끗함으로 세상이 온통 뒤덮였으면 좋겠다. -작품 전문   그리고 시인은 여행에서 얻은 교훈을, 여행이라면 엄연히 현실세계이지만, 아주 함축적으로 표현해내고 있다. 곧, 동서남북 지구촌 어디를 가도 사람 사는 곳이고, 사람 사는 곳이라면 그 빛깔과 모양새와 향기가 다를 뿐 모두가 다 저마다 사연을 가지고 있다는 인식이 그것이다. 그런데 그 사연이라는 것도 알고 보면 같은 하늘, 같은 땅의 역사라는 것이다. 시인의 시계(視界)가 얼마나 광대한 것인가를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그것의 빛깔과 향기와 모양새가 다를 뿐/동서남북 지구촌 어디를 가도/사람 사는 곳마다 이런 저런/사연이 있네.//그것의 빛깔과 향기와 모양새가 다를 뿐/동서남북 지구촌 어디를 가도/생명이 숨쉬는 곳마다 이런 저런/아름다움이 있네.//그저 태어나 죽고 사는 일이건만/그것으로 전부이고/그것으로 결백한/한 하늘 한 땅의/역사가 있을 뿐이네. -작품 전문   위 시와 유사한 구조와 내용을 갖는 또 다른 시 한 편을 더 보자.   지구촌 어디를 가고 또 가도/사람 사는 곳엔 사람의 어제와 오늘이 있네.//수많은 사람과 사람들이 대를 이어 오면서/아리아리 슬픔을 묻어두고/기쁨을 다 묻어두고/커다란 강물이 되어 흐르네.//지구촌 어디를 가고 또 가도/사람 사는 곳에 사람의 역사가 있듯/그 밉고 고운 사람들을 다 한 품안에 두고서/함께 체온을 나누어 온 대자연의 모성(母性)이 있네./아슴아슴 세월을 다 묻어두고/태초의 말씀을 다 묻어두고/한 숨결로 온갖 신비의 꽃을 피우네. -작품 전문   지구촌 어디든 땅에는 사람의 역사가 있고,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의 가슴 속에는 대자연의 숨결이 흐른다. 그래서 사람과 땅이, 땅과 사람이 ‘역사’라고 하는 한 울타리 안에서 하나가 되어 살아가고 있다는 인식이 갈려 있다. 어쩌면, 시인은 인류의 역사를 슬픔과 기쁨의 역사로 보고 있고, 그것을 다시 대자연의 모성으로 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참으로 놀라운 시각이요, 발상이요, 거시적인 안목(眼目)이 아닐 수 없다.     ������ 이시환 시인은 젊었을 때부터 오늘(2009년 현재)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시와 문학평론 활동을 해온 중견 시인이자 평론가이다. 젊었을 때에 시에 흥미를 잃고 시를 내던져 버린 프랑스 시인 A. 랭보와는 전혀 다르다. 필자도 문학을 계속해왔지만 잠시 휴식을 취하던 시기가 있었다. 하지만 이 시인은 줄기차게 시집과 문학평론집을 발간해 왔다. 특히, ‘신시학파 선언’까지 했던, 매우 탁월한, 중요한 시인(major poet)이다. 물론, 그 신시학파 선언에 대해서는 별도의 연구가 필요하다. 문제의 시집 「상선암 가는 길」에는, 인생과 존재에 대한 통찰의 작품집으로, 도를 깨우쳐가는 과정에서 얻어진 작품들로 가득 차있다. 연작시 ‘애인여래’만을 읽어도 그가 무엇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것들을 ‘시’라고 하는 그릇에 어떻게 담아내고 있는지 판단할 수 있으리라 본다. 부처가 어디 인디아에만 있으란 법이 있는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랜 기간 동안 명상을 해온 시인인지라 인생과 우리 사회를 바라보는 시인만의 농익은 시선이 시작품을 완숙되게 한 것 같다. 나는 그를 하산한 도인(道人)으로 여기며, 우리 한국현대시의 짧은 100년의 역사에서 정신적인 사유세계의 영역을 확대 심화시킨 시인으로 기억하고 싶다. 앞으로, 시인으로서, 그리고 문학평론가로서 해야 할 많은 일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터이다. 부디, 하나하나 일구어 나가 우리 ‘한국문학사’라고 하는 커다란 산맥의 높은 봉우리가 되어 솟아나기를 기대해 마지않는다. 다만, 필자가 원하는 바, 한두 가지는, 문학의 대 사회적 기능 회복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본질적으로 혼자 살 수 없기에 부족(部族)이 있고, 종족(宗族)이 있고, 사회(社會)가 있고, 민족(民族)이 있고, 국가(國家)가 있다. 따라서 순수서정시를 쓰는 것은 시의 본령을 지키는 일이긴 하지만 동시대(contemporary)의 문제와 공동체(community) 사회의 관심사에 대해서도 애정 어린 눈으로 바라보아 주고, 함께 호흡해 주기를 바란다. 주문하고 싶은 떠 하나의 말은, 현대문학의 맹목적인 난해성 곧 나쁜 의미의 모더니티를 극복하는 일이다. 문장을 구사함에 있어 지나치게 현학적인 수사에 의존한다거나 공유될 수 없는 주관적 정서를 묘사해 내는 일에 급급해 하는 경향성을 배제해야 한다는 생각한다. 물론, 이 점에 관한 한 이 시환 시인에게 해당되는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 굳이 이 자리에서 이를 언급함은 오늘날 너무 많은 시인이나 작가들의 작품들을 보면 알아먹을 수도 없고 알아들을 수도 없는 것들이 범람하는데, 그들과는 변별성을 지녀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솔직히 말해, 어떤 작가들은 독자들이 작품의 내용을 해독하느라 헤매는 동안에도 한가로이 손톱이나 깎고 있다면 그것은 문학을 모독하는 처사라고 생각된다. 바야흐로, 21세기에 들어와서는 전 세기의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을 지양, 극복해야 하는데, 그러자면 우리 한국의 현대시의 전통이, 다시 말해, 최남선으로부터 소월, 만해, 미당, 영랑 등의 시적 전통을 잇는 일이 매우 요긴하다고 본다. 여기에 사상적 깊이를 더해서 한국 현대시의 위대한 전통(great tradition)을 잇는 일에 나는 이 시인이 크게 기여하리라 믿는다. (끝)
1184    詩作初心 - 詩로 상처를 어루만지기 댓글:  조회:4277  추천:0  2016-03-12
이시환의 제1시집 『안암동日記』 -이미지를 통한 위무의 시학     심종숙(시인, 문학평론가)     1   어디를 둘러보아도 서울의 길거리에는 크고 작은 빌딩을 뒤에 세운 상가(商家)들이 즐비하게 서있고 그 상가들 앞을 언제나 사람들이 바삐 오가고 있다. 대개의 사람들은 발아래 딛고 있는 땅이나 저 높은 빌딩 어디에도 자신의 소유물은 없이 살아가고 있다. 지금의 50대 중반에서 60대 초반의 베이비붐세대 사람들은 이 서울에 꿈과 일자리를 찾아 정든 고향을 등지고 객지생활, 삶의 순례 여정을 시작한 것이다. 이른바 70, 80들의 심정을 ‘여기 길 떠나는/저기 방황하는 사람아/오늘도 어제도 나는 울었네/이제 우리가 얻은 것은 무엇인가/잃은 것은 무엇인가’라며 소외와 상실과 이별과 방황, 그리움을 우울하게 노래로 불렀다. 그렇게 살아온 사람들은 자신과 세상의 틈바구니에서 끊임없는 줄다리기를 하면서 때로는 절망으로 울면서 그 울음의 밑바닥에서 뜨거운 눈물 속에서 희망을 한 가닥 이끌어내며 저린 가슴을 쓰다듬고 다시 일어서서 한강의 기적을 일구었던 것이다. 한강의 기적 뒤에는 한국전 이후 잿더미에서 태어난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 일구어낸 눈물의 결실이다. 분단 70년 휴전 60년을 맞이하면서 이 한반도의 남쪽의 삶도 북녘의 삶 못지않게 팍팍하였다.     2   이시환의 첫시집 『안암동 日記』(초출, 1992, 잠꼬대)는 이런 세대들의 정서와 삶을 잘 대변해주고 그런 의미에서 어느덧 노년기로 접어드는 인생의 길목에서 젊은 시절 그들의 인간 소외와 노년기로 접어든 그들에게 상실의 허무감을 쓸어주는 시집이라고 할 수 있겠다. 물론 이 시집이 이 세대들만이 아니라 지금-여기의 우리들 80년대를 살아온 세대들에게나 소통이 부재하고 성과나 스펙 위주의 노동시장에서 청년 실업으로 희망이 요원한 이들의 상처감을 위무해 주리라 믿는다. 시인은 스스로 이런 사람들에게 위무자의 역할을 하는 데에 불림을 받은 존재임을 시「함박눈」에서 자신이 알고 있는 듯하고 거기에 충실한 종으로서 존재하길 원한다.   내가 가진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만, 당신에게로 곧장 달려 갈 수 있다는 그것과 당신을 위해서라면 당신의 이마에, 손등에, 목덜미 어디에서든 입술을 부비고 가녀린 몸짓으로 나부끼다가 한 방울의 물이라도 구름이라도 될 수 있다는 그것뿐이옵니다. (중략) 당신의 가슴에 잠시 머물 수 있다는 그것과 당신을 위해서라면 충실한 從의 몸으로 서슴없이 달려가 젖은 땅, 얼어붙은 이 땅 어디에서든 쾌히 엎드릴 수 있다는 그것뿐이옵니다. 나는 언제나 그런 나에 불과합니다. 나는 나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함박눈」 p.46)   시인 자신이 ‘27편의 산문시는 세상 사람들을 향해 내놓은 나의 공개적인 첫 시집’이라고 밝히고 있듯이, 이시환의 시집 『안암동日記』에는 자서인 머리글(2페이지), 차례, 27편의 산문시, 후기에 해당하는 ‘덧붙임-나의 허튼 소리-(10페이지), 시인의 모습(사진), 나의 散文詩集 「안암동 日記」에 부치는 詩作노트(2페이지)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 산문시 중에 대개는 평서체의 문말 표현을 택하였으나 「살 속에 모래알 하나」, 「함박눈」이 두 편은 ‘-ㅂ니다.’의 경어체를 선택하고 있어서 의도적으로 변별성을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두 편의 시에서 전해져오는 것은 시인 이시환이 자신과 세상, 자신과 타인들과의 관계에서 때로는 대결도 하고 다쳐서 절망의 밑바닥을 가면서까지도 그것들을 지속적으로 밀어내기보다는 유연하게 삭이는 과정을 살아오면서 자신을 다듬어온 내면의 겸허한 낮은 고백을 통하여 표현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기에 더 감동으로 다가오고 있다. 불완전함을 완전함으로 바꾸고 부정을 긍정으로 바꾸고 절망을 희망으로, 이원의 세계를 일원의 조화지경으로 바꾸는 역설의 힘은 그것을 품어서 곰삭일 때만이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인은 이미 이 시에서 그것을 체관하고 있기에 스스로 충실한 종의 몸으로 젖은 땅, 얼어붙은 땅 그 어디에도 서슴없이 달려가서 쾌히 엎드리겠으며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임을, 그것이 전부임을 고백하고 있다. 이 시가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자연 현상인 함박눈과 나를 동일시하여 시인은 그 함박눈처럼 온 세상에 낮게 나리어 ‘당신’의 이마와 손등, 목덜미와 입술을 부비고 가녀린 몸짓으로 나부끼다가 한 방울의 물이나 구름으로 변형되는 그것으로 족하다고 말한다. 이 부분에서는 함박눈인 내가 당신으로 부르는 애인을 연상시킬 수 있으나 시의 말미 부분에 그 당신은 젖은 땅, 얼어붙은 땅에도 존재하는 당신이기에 존재의 영역이 확장되어 가고 있어서 당신이 함의하는 바는 넓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함박눈이 내리는 자연 만상들과 사랑하는 여인, 그 이외에 사랑하는 대상, 절대자, 무(無), 신(神), 이시환이 기꺼이 충실한 종으로서 낮게 엎드릴 수 있는 모든 대상임을 상징하고 있기 때문에 이 시는 그 울림이 크다고 하겠다. 이와 같이 시인은 시인으로서 부도 명예도 권력도 없이 그저 겨울에 내리는 풍성하고 메마른 영혼들에게 기쁨의 감동을 안겨주는 함박눈으로서 그 역할을 다하기에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다. 시인으로서 독자들에게 안겨줄 수 있는 최대의 것이 바로 이 함박눈과 같은 것이기에 그는 이 역할을 자처하고 충실한 종이 되고 그럴 때 바로 시인인 ‘나’의 정체성이 자리매김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역할은 ‘함박눈’이나 「바람素描」의 ‘바람’이나 「살 속에 모래알 하나」의 ‘살’, 「북」의 북 이미지를 통하여 표현하고 있다고 하겠다. 다음으로 「바람素描」의 전문을 보자.   문득, 찬바람이 분다. 내 살 속 깊은 곳 어둠의 씨앗을 흔들어 깨우며 바람이 불어 일렁일 때마다 기지개를 켜는 혈관 속 어둠의 초롱초롱한 눈빛을 따라 나는 어디론가 떠나야 한다. 떠돌다 지쳐 빈 손으로 돌아올지라도 나는 시방 떠나야 한다. 나의 귀여운 어둠이 곤히 잠들 때까지는 그렇게 어디론가 쏘다녀야만 한다. 그것이 나의 잠꼬대 같은 오늘의 전부일지라도, 차츰 이목구비를 갖추어가고 더러는 짓궂게 꿈틀대기도 하면서 자라나는 내 자궁 속 또 하나의 어둠을 쓰다듬으면서 나는 바람이 되어 돌아와야 한다. 내 살 속 깊은 곳 어디 또 다른 나를 흔들어 깨우며.(「바람素描」, p.47)   삶에서 마주치는 어둠에 대해 이시환은 ‘귀여운 어둠’이라고 불렀다. 이렇게 어둠에 대해 친구처럼 연인처럼 부를 수 있는 것은 이시환 시인이 지닌 유연함의 시학에서 나오는 표현일 것이다. 누가 어둠에 대하여 이렇게 표현한 시인이 있었던가. 그러나 이시환은 이렇게 부르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어둠이 이미 어둠으로 존재하지 않기에 가능한 명명법일 것이다. 어둠과 고통이 이미 시인에게 단순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계륵(鷄肋) 같은 존재를 넘어 특유의 유연함과 여유의 시학, 삶을 짓궂게 하는 요소마저도 품어서 삭혀보려고 하는 그의 포용의식과 인내심이 일구어낼 승리가 아닐 수 없다. ‘나의 귀여운 어둠이 곤히 잠들 때까지는’ 시인은 바람이 되어 쏘다니며 다시 바람으로 돌아오길 원한다. 설사 그에게 어둠에 대한 흔들림이 있을지라도 그에게 비틀거림은 없다. 그는 다만 그 귀여운 어둠이 곤히 잠들 때까지 쏘다니고 바람이 되어 살 속 깊이 존재하는 ‘쏘다니고 바람이 되어 다시 돌아오는 나’가 아닌 다른 나를 깨우러 오는 것이다. ‘나’는 오로지 하나의 존재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의 나 안에 나의 복수들이 있다. 이 복수들의 ‘나’를 통하여 하나의 ‘나’로 다시 귀결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며 여기에서 그는 나의 역설을 보여주는 것이다. 시인은 여성화자 ‘나’의 이미지 연결고리를 통하여 자궁 속에서 자라나는 어둠을 쓰다듬는다는 표현을 함으로써 어둠을 방조하지 않고 어둠의 성장을 바람이 되어 돌아와 재회하길 원한다. 왜냐하면 자궁 안에서 자라는 어둠은 ‘또 다른 나’의 분신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어둠과 나는 하나가 된다. 어둠과 내가 대상화가 될 때, 즉 어둠이 타자로만 존재할 때 나는 결코 그 불협화음을 견딜 수 없고, 그 불협화음을 넘어 끊임없이 안아 들일 때 어둠은 친구가 되어주고 어둠이 아닌 또 다른 나로 성장함으로써 승화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어둠을 이미지화한 「살 속에 모래알 하나」에는 살 속에 박힌 모래알과의 불협화음을 ‘차라리 온몸, 온몸으로 껴안아 사랑이란 것을 해야’ 견딜 수 있는 것이라고 역설하고 있다.   나는 둘째 셋째 손가락 사이 살 속에 박힌 모래알 하나를 흔들어 흔들어도 보았지만 그는 좀처럼 깨어나질 않았습니다. 흐르는 피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거친 모래알 주위를 맴돌면서 차디찬 그의 몸을 적시면서 뜨거운 체온을 나누어 가졌지만, 그의 몸을 일으켜 세워도 보았지만 이미 돌아앉아 있는 그는 살아나 살이 되질 아니 하였습니다. (중략) 우리는 그렇게 뜬 눈으로 날을 새곤 했지만 부위 살은 점점 퇴색해 갔으며 피는 지쳐 살밑으로 시퍼렇게 죽어 고였습니다. 끝내 살 속 모래알은 모래알로 남았지만 이 몸은 썩어가면서도 그들을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차라리 온몸, 온몸으로 껴안아 사랑이란 것을 해야 했습니다. 애당초 살이 될 수 없었던 모래알이었지만 그렇게라도 얼싸안아 품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살 속에 모래알 하나」p.38-39)   시인에게 손가락 사이 살 속에 박힌 모래알은 삶 속에서 조우하는 고난이라고 한다면 그것을 원망하거나 미워하며 부정적 감정을 키우기보다 인내와 사랑으로써 오히려 온몸을 던져 껴안음으로써 그 고난의 시간을 견뎌낼 수 있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런 가운데서 시집의 제목인 「안암동日記」에는 ‘눈부신 유리와 빌딩과 자동차, 아스팔트로 城을 쌓고 있는 이 밀림 속’으로 상징되는 대도시 서울에서 ‘우리 세 식구가 누우면 꽉 차는 방’에 세 들어 살면서도 ‘우리 세 식구의 별이요 꿈’인 방벽 속에 박힌 채 ‘깨어있는 깨알만한 사금조각 하나’는 손가락 살 속에 박힌 모래알의 반대급부에 있는 어떤 것이다. 시「刻印」에서는 ‘나와 눈을 마주치는 살아있는 것들은 모두가 한결같이 나를 향해 독이 묻은 화살을 겨누고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목도하면서 그럴 때 시인은 ‘안암동으로 마포로 옮겨 다니며 대낮에도 문을 잠그고 꼭꼭 숨어 살아야만 했다’고 어둠의 원인이 된 폐쇄의 기억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러한 어둠 이미지들의 연결고리로써 시「강물」에 더 구체화되어 있다.   이제야 겨우 보일 것만 같다. 눈을 뜨고도 보지 못한 나의 눈이 정말로 뜨이는 것일까. 그리하여 볼 것을 바로 보고 안개숲 속으로 흘러 들어간, 움푹움푹 패인 우리 주름살의 깊이를 짚어낼 수 있을까. 달아오르는 나의 밑바닥이 보이고 굳게 입을 다문 사람 사람들의 가슴에서 가슴으로 흐르는 강물의 꼬리가 보이고, 을지로에서 인현동과 충무로를 잇는 골목골목마다 넘실대는 저 뜨거운 몸짓들이 보일까. (중략) 그런 우리들만의 출렁거리는 하루하루 그 모서리가 감당할 수 없는 무거운 칼날에 이리저리 잘려나갈 때 안으로 말아 올리는 한 마디 간절한 기도가 보일까. 언젠가 굼실굼실 다시 일어나 아우성이 되는 그 날의 새벽놀이 겨우내 얼어붙었던 가슴마다 봇물이 될까. 그저 맨몸으로 굽이쳐 흐르는 우리들만의 눈물 없는 뿌리가 보일까. (「강물」p.8-9)   어둠 이미지들은 주름살의 깊이, 밑바닥, 무거운 칼날, 눈물 없는 뿌리로 표현되고 있으며 이것들이 강물의 물 이미지로 형상화되어 유동적이며 유연한 이시환의 시학을 보여주고 있다. 시인 자신의 밑바닥과 입을 굳게 다물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가슴 가슴들에서 한없이 흐르는 어둠의 강물은 흘러가고 시인은 그것을 보는 내면의 눈이 열리며 그 깊이를 가늠하고 그들의 절망과 간절한 기도를, 다시 일어나 외치는 아우성을 보는 것이다. 시「서울의 예수」 전문을 보자.   십자가를 메고 비틀비틀 골고타 언덕길을 오르는 예수 그리스도는 끝내 못 박혀 죽고 거짓말 같이 사흘만에 깨어나 하늘나라로 가셨다지만 도둑처럼 오신 서울예수는 물고문 전기고문에 만신창이가 되고 쇠파이프에 두개골을 얻어맞아 죽고 죽었지만 그것도 부족하여 온몸에 불을 다 붙였지만 달포가 지나도 다시 깨어날 줄 모른다. 이젠 죽어서도 하느님 왼편에 앉지 못하는 우리의 슬픈 예수, 서울의 예수는 갈라진 이 땅에 묻혀서, 죽지도 못해 살아남은 우리들의 밑둥 밑둥을 적실꼬.(「서울의 예수」p.32)   이 시에서는 시대적 어둠과 고통을 성경의 인물인 예수 그리스도에 비유하여 성경에서의 실재인물 예수 그리스도와 도둑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예수 그리스도는 시대의 불의에 맞서 정의를 외치다가 권력의 폭압에 고문당한 70년대‧80년대 투사들을 상징하고 있다. 그래서 성경적 의미를 뒤집어 ‘하느님 왼편에 앉지도 못하는 우리의 슬픈 예수’라고 하여 분단된 이 땅에 묻혀서 우리의 밑바닥의 고통을 적셔준다고 한다. 우리 곁에 임재하는 임마누엘 서울 예수가 죽지 못해 살아남아 허깨비처럼, 사르트르의 소설 『구토』의 남자 주인공처럼 외부와 차단한 채 권태로움과 의욕을 상실한 우리들의 어두운 삶의 밑둥을 적셔준다는 의미로 변형시키고 있어 이미지의 전환을 가져오고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이러한 어둠 이미지들이 물 이미지와 결합하여 자유롭게 공간이동을 하고 그러한 운동성을 통해 어둠은 그 변모를 꾀한다. 시 「잠」을 보자.   내가 살고 있는 나의 이 무거운 몸뚱아리가 당신의 조립품임을 의식하면서 이미 늪으로 빠져버린 나는 손이 묶인 채 더욱 깊은 곳으로 빠져들고 싶었다. 정비공장 기름바닥에 흩어져 뒹구는 녹슨 볼트‧너트‧핀‧축의 숨이 곧 나의 늑골이요 너의 긴 척추의 마디와 마디를 잇는 비밀임을 거듭 확인하면서 나는 영영 깊은 잠 속 어둠이고 싶었다. 그러나 그 속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나의 시린 관절 속 틈새마다 후줄근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잠」p.10)   위의 시에서 어둠은 ‘나는 영영 깊은 잠 속의 어둠이고 싶었다’라고 말하는 바와 같이 잠이라는 고체적인 것 속에서도 나의 시린 관절 속 틈새를 내리는 비와 같은 물 이미지로 변형이 되고 있다. 그러므로 나의 몸은 어둠과 손을 잡고 내 관절과 척추 마디마디가 어둠과 접합되어 하나가 됨으로써 어둠은 어느새 어둠으로만 존재하지 않게 된다. 그러므로 시의 말미에서처럼 ‘어느새 골반 속으로 뛰어 들어온 한줄기 빛살이 어둠의 자궁을 후비기 시작하자 어둠 속으로 길게 뻗은 나의 뿌리가 꿈틀대면서야 깨어나는 너의 의식 속으론 구르는 참새소리만 쏟아지고.’ 라는 한줄기 햇살이 어둠을 와해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시 「나사」에서는 이 어둠과 희망의 접합을 나사에 투영시키고 있다.   아픈 곳을 잘도 골라 꾹꾹 쑤셔주는, 그리하여 등을 돌리고 있는 것들을 하나하나 꿰어줌으로 바로 서는, 시방 살아 있음의 숨 너는 이승의 풋내나는 알몸 구석구석 깊이깊이 박혀 눈을 뜨고 있는 몸살 (중략) 하양과 검정을 이어주는, 있는 것과 없는 것을 한 몸에 담아두는 아주 구체적인 고리. 무너지며 반짝이는 논리. 어루만지는 곳마다 아슴아슴 안개가 피어오르는 것. (「나사」p.41)   여기에서 나사는 이승과 저승, 흑과 백, 반생명과 생명을 이어주는 연결 부위에 박힌 나사일 것이다. 시인은 결코 이 이원의 세계가 영원히 독립적으로만 존재하지 않고 나사 장치를 통하여 하나로 이어지고 있음을 말한다. 이로써 우리는 그의 산문시가 지니는 유려함과 자유로움 안에서 이미지를 끊임없이 연결지우고 닫힌 세계가 열리고 비생산적이며 반생명적인 세계가 무너지고 생산적이며 생명적인 반짝이는 시적 논리와 이미지의 세계로 끌려들어간다. 그래서 그에게 시는 ‘언제나 꿈같은 현실로 서서 눈부신 알몸의 무지개로 걸려 넋 나간 나를 묶어두고 그 속에서 진정 나를 자유롭게 하고 기쁘게’ 하는 존재이며 ‘그림자처럼 따라 다니며 이젠 내 안 깊숙이 들어와 나를 차지하고 있는 당신’(「詩-그대에게」p.36)인 것이다. 이시환에게 시는 그런 것이다. 또 시는 이시환에게 ‘불안한 자신 베끼기’이며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의 난해한 길을 왔다 갔다 하는 巨人’(「로봇트」p.37)이며 ‘모나고 모난 세상의 가장 깊은 곳의 어둠과 비밀을 흔들어 깨워 가장 뜨겁고 가장 은밀한 한 송이 붉은 꽃을 피워 놓고’자 하는 침이다.(「詩-작은 침술」p.33) 이러한 시인의 자세는 「서 있는 나무」에서처럼 ‘도끼자루 톱날에 이 몸 비록 쓰러지고 무너질지라도 서 있는 나무는 죽어서도 서 있어야 한다’라고 결연한 의지로 직립하고 있는 나무에다 비유하고 있다. [끝]
1183    詩作初心 - 타령조詩를 알아보기 댓글:  조회:4002  추천:0  2016-03-12
슬픔을 기쁨으로 전이시키는 미학-이시환의 ‘타령조’시 -제 2시집 『白雲臺에 올라서서』에 부쳐-       심종숙(시인/문학평론가)       1   살다가 상처로 인한 슬픔과 서러움이 많이 쌓이면 여러 가지로 심적인 병이 든다. 특히 우리 한국사회는 인내의 미덕을 중시하다 보니 많은 부분 참는 것을 권유 받거나 강요되는 사회라 할 수 있겠다. 심인성 울화병은 많이 참고 지낸 결과 생기는 마음의 반란일 것이며 그것이 주로 중년의 여성들에게 많이 일어나는 증상인 걸 보면 가족을 위해 자신을 버리고 살았던 여성들의 아픔일 것이다. 이것은 가족주의 제도 아래서 겪어야 하는 여성들의 입장에만 그치지 않는다.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많은 외세의 침략에 시달려야 했고 조선 말기에는 탐관오리들의 학정으로 백성들이 고통을 겪었고 제국주의 시대에는 일본에 강점되어 36년간 피식민 백성의 고통은 이루 말로 다할 수 없는 것이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와 같은 어려운 시기를 이 땅에 살았던 사람들은 역경을 넘어 순경을 이루기 위해 다양한 방법으로 살아가기 위한 방편을 강구했다. 민간에서는 민요, 판소리, 가면극, 마당놀이, 사물놀이, 농악, 굿 등을 통해 이런 감정들을 풀어내었고 여기에는 타령조의 노래가 가미되었다. 이시환의 제 2시집 『白雲臺에 올라서서』에는 우리 민족의 아픔을 타령조라는 전통의 민요곡조에 실어 노래하였다. 이는 그의 제 1시집 『안암동 日記』에서 보여준 세계와는 차별화된 형식과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안암동 日記』가 시인이 세계와 자신이 길항하면서 자신의 내면을 산문시 형식으로 다채로운 비유와 이미지를 통해 드러내었다면 『白雲臺에 올라서서』는 우리 민중의 수난과 그 아픔을 타령조라는 형식을 빌어 노래함으로써 읽는 시이기보다 노래로 부르는 시의 형식으로 변모를 꾀했다. 그러므로 다양한 시적 기교들과 산문풍의 문장이 재단되고 있고 그것은 어디까지나 시가 노래가 되기 위해서 거치는 과정으로 생각된다. 이 시집은 시인 자신의 자서인 머리말, 차례, 시인의 모습, 시인 자신의 후기로 구성되어 있고 시의 본문 부분에 해당하는 차례에서는 ‘1984년부터 1989년 사이에 창작된 시들 가운데에 일부’라고 밝힌 30편의 시가 실려 있다. 그 체재를 보면 머리글 다음에 ‘打令을 아시나요’라고 하여 타령조의 시가 나오게 된 배경과 타령이 무엇인지에 관하여 시인이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쓴 자서가 있다. 그 다음에 30편의 시편들이 ‘첫째마당’(9편), ‘둘째마당’(5편), ‘세째마당’(9편)이라는 마당놀이의 형식에 따른 구성 하에 수록되어 있다. 이 구성에서도 볼 수 있듯이 그의 시들은 마당놀이에서 불리워질 수 있는 타령조 시인 것이다. ‘첫째마당’의 특징은 주로 전통 악기인 아쟁, 꽹과리, 징, 북을 시제임과 동시에 소재로 하여 타악기, 즉 두드리는 기능을 가진 그 특성으로 창작적 상상력을 동원하여 노래의 내용으로 엮은 시들과, 어깨춤, 탈춤, 살풀이춤, 풀이와 같이 동작, 행동을 통해 풀어내는 갖가지 춤의 동작적 특성으로 그 시적 내용을 구성하였다. ‘둘째마당’은 손돌바람과 아버지의 일기를 뺀 잡풀 1, 잡풀 2, 잡풀 3은 연작시적 구성을 가지고 있고 이 5편의 시편들이 모두 시름에 겨운 삶을 살아온 사람들에 관한 시이다. 마지막으로 셋째마당도 호미와 낫과 같은 농기구의 특징을 노래하면서 이것을 쓰고 사는 농부들이나 달동네와 같은 가난하고 수탈의 대상이 된 민초들의 슬픔을 노래하고 있다. 그러므로 ‘슬픔’의 미학은 이시환의 시의 기저를 이루는 중핵적인 정서임은 제1시집에서와 같이 제 2시집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다고 하겠다.     2   이시환은 시집의 머리말에서 타령조의 시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들 작품은 눈으로 읽는 것보다는 소리 내어 읽는 쪽이 효과가 있는, 그것도 간간이 무릎을 치거나 북을 치면서 읽어야 제 맛이 나는 시들이다. 이름하여 打令調라.(머리말)   시인이 말한 대로 이 시는 눈으로 읽는 시가 아니라 소리를 내어서 심지어 전통의 타악기를 두드리면서 읽어야 제 맛이 나는 시라는 의미이다. 이 타령조는 원래 민간에서 주로 서민들이 많이 부르던 노래로 금강산 타령, 도라지 타령, 신고산타령, 는실타령 등의 굿거리, 자진모리 장단이나 3박자, 중모리12박자 민요풍 등의 노랫가락에다 북이나 장구를 치면서 부르는 노래이다. 이들 노래는 주로 3‧4조, 한 구절이 4‧6‧6‧3‧3‧3조 등의 4‧4조와 4․6, 3‧3, 4‧3, 3‧5 등이 주류를 이루고 있고 북이나 장구와 같은 타악기에 맞추어 부르면 흥이 고조되는 노래들이다. 다음으로 타령에 대한 시인의 자서에서 그 의미를 알아보자.   우리 민간음악에서 聲樂으로 분류되는 唱劇調나 雜歌 등에서는 ‘打令’이라는 곡조가 근간을 이루고 있는 사실이 전제한 나의 판단을 간접적이지만 입증해 주리라 믿는다. 이 타령이라는 것은 이론적으로야 채 12에 북 8번을 치는 조금 느린 4박자이지만 조금 빠른 ‘중중몰이’ 등과 어울려 ‘두들긴다’는 단순성 이상의 비밀스런 힘을 느끼게 한다. 곧, 슬픈 사연을 얘기하고 슬픈 감정으로 노래하는 데에도 이 타령은 그 슬픔을 슬픔으로 머물게 하지 않고 오히려 샘솟는 힘을 느끼게 하니 이것이 바로 타령의 생명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다시 말하면 타령은 침몰하는 기운을 일으켜 세우는 상승하는 힘이요, 슬픔을 기쁨으로 전이시키는 흥이다.   이시환은 왜 이 타령조라는 전통의 형식을 현대시에 접목하려고 했는가? 그것은 그가 시 창작 이유를 밝힌 ‘30편의 시는 나의 개인사적인 슬픔의 무게와 우리 역사 속에서의 한민족이라는 존재의 빛깔을 한 몸으로 하여 담아보려’ 했기 때문이다. 즉 시인의 개인사적 슬픔과 운명공동체인 한민족의 슬픔을 일체화(한 몸)하려 했기 때문이다. 시인 자신이 쓴 ‘打令을 아시나요’에는 서브타이틀로써 ‘-침몰하는 기운을 일으켜 세우는 힘이요, 슬픔을 기쁨으로 전이시키는 흥이다’-라고 붙여둔 걸로 보아 이 타령이 슬픔에서 기쁨으로 전이시키는 힘을 가졌기에 현대시에 전통의 형식을 접목시켰던 것이다. 이 슬픔을 기쁨으로 전이시키는 우리 민족의 심성에 대해 이시환은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어쩌면, 기쁨보다는 슬픔을 몸에 오래 담아두고 살아온 우리에겐 무언가 두들기고 쳐대는 몸짓과 동작 속에서 나오는 흥을 통해 그 슬픔을 삭이었는지도 모른다, 이것은 분명 우리의 ‘슬픔’을 풀어내는, 극복하는 일종의 적극적인 행동양식이지만 비폭력적이어서 더욱 아름답고 큰 의미가 있지 않는가. 이 모든 것이 대립과 갈등보다는 화해와 조화를 추구하는 우리의 타고난 심성 탓일 게다.   슬픔의 정서를 관리하며 살아가는 이 땅의 민초들에게 타령을 통하여 슬픔을 풀어내는 것은 역경을 극복하려는 의지이며 대립과 갈등에서 화해와 조화를 추구하는 민족성에 기인한다고 보았다. 이와 같은 해석은 시인이 자신의 삶의 기록인 시편들에서 슬픔이 시의 중핵을 이루지만 희망을 예시하기 때문이다. 슬픔이 슬픔으로만 고착되면 희망이 사라지고 병이 든다. 그러나 그의 시는 타령을 통하여 슬픔을 풀어냄으로써 희망의 기쁨을 이끌어 내는 것이다.   더불어 눕고/더불어 일어서는/우리들의 어제와 오늘 속속/그 어느 곳이 얕고/어디쯤이 병 깊은 곳인지/짚어내기 어려운/반도땅 손금/드러누운 골골이/어찌하여 안개만 안개만/이 놈의 죄 없는 눈과 귀를/비비고 쑤셔보아도/침침한 바깥 시상은 여전해/그렁저렁 일고 잦는 바람에/시방 몸을 던지는/왼 들엔 풀뿌리/어깨를 풀지 아니허고/잠기어 가는 건 목,/목마른 이들의 몸부림뿐/아쟁 아쟁 아쟁의 걸음마/절며 오르고 올라// 못내 속구치다가/거꾸로 떨어지는 가락은/더불어 눕고/더불어 일어서는 땅/가는 허리 쥐어짜기 (「아쟁」p.16-17)   이 시를 읽으면 우리의 귓가에는 시인이 어느 새 아쟁 연주가가 되어 지나온 시간들에서 쌓인 병 깊은 곳을 활을 켜면서 더듬어 찾기도 하고 그 활이 병 깊은 곳에 이르면 때로는 부드럽게도 때로는 강하게도 강약의 풀무질을 통하여 불을 일으키듯이 아픈 곳을 치유한다. 아쟁 아쟁 아쟁의 느린 걸음마로 오르고 올라가는 동안의 삶의 고단함과 상처를 노래하여 그것이 정점에 이르러서는 거꾸로 떨어지는 가락에서 더불어 눕고 더불어 얼어서는 이 땅의 민초들을 위무한다. 이는 민초들의 기억 속에, 시인 개인의 기억 속에 뿌리 박혀 있는 깊은 슬픔의 뿌리가 결국 별개의 것이 아니라 동일한 뿌리를 가진 슬픔이라는 공동체적 의식에서 발로 되었고 시인은 이 개별자로서의 자신과 타자를 하나로 보며 치유자로 나서는 것이다. 그의 시가 지닌 이 위무와 보살핌의 미학의 바탕에는 그 깊은 슬픔 뒤에 희망이 오리라는 신념이 굳게 자리 잡고 있으므로 여유롭게 슬픔을 바라보는 힘이 생긴다. 그가 시를 쓴다는 것도 부정적인 요소들과 대립보다는 여유를 가지고 마주보고 있기 때문이다. 희망에 대한 굳은 신념은 슬픔의 부정적 정서를 걷어낼 수 있는 강력한 동인이다. 그는 시를 쓰면서 슬픔을 노래하지만 거기에 머무르지 않고 희망을 노래하고 상처와 아픔으로 폐쇄되어 있는 이들을 깨우고 마음의 어두운 방을 나와 빛으로 나오길 원한다. 그가 그들을 위무하기 위해 아쟁, 꽹과리, 징, 북 등의 타악기를 동원하여 그들을 심장을 두드려대는 것이다. 그래서 「꽹과리」에서는 ‘있는 두 눈 바로 뜨고/있는 두 귀 열어놓아/살자허니 살자허니/미어지는 이 가슴 폭폭해/(중략)자지러지게 조지러지게/두들겨야 맛이 난다’라고 말하면서 꽹과리 소리가 가진 특성을 잘 표현한 ‘앞서거니 뒤서거니 몸을 사뤄/간간히 뿌리는 소금/목구멍 속속들이/적실 곳을 적시고’라고 하여 다투듯이 들여오는 꾕과리 소리에 긴장을 하면서도 그 소리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 새 메마른 목구멍을 촉촉이 젖게 함으로써 목마른 자에게 생수를 주고 있다고 하겠다. 「징」에서는 이 때리고 두드리고 치는 행위의 끝에서 얻어지는 빛과 말씀으로 병든 상처와 슬픔을 딛고 일어서게 하는 신비로운 도구인 징을 노래하고 있다.   내리치면 칠수록 징징/굽는 허리 한 평생/잘려나간 귀 밑/스치는 바람으로 살면서/마디마디 사이사이 속속/깊고 얕은 어둠 흔들어/잠든 풀뿌릴 깨우고/다시 고쳐지면 칠수록/속으로 곪는 응어리랴/빛으로 터지면서/말씀으로 일어서는 아침/신 내리는 놋쇠 항아리/숨 고르고 채 놓으면/궁상각치우 5음계로/날아오르는 새떼/서쪽 하늘 무지개로 걸리고 (「징」p.20-21)   치면 칠수록 한 평생의 고단한 삶에서 마디마디 속에 내재해 있는 어둠과 곪아 있는 응어리를 빛으로 터지고 말씀으로 일어나게 하는 신묘한 ‘놋쇠 항아리’에 비유한 이 징은 거룩하고 경외스러움마저 자아내고 있다. 그러다 보니 우리의 생활이 결코 아름답지 못하더라도 인간에게 징과 같은 신을 감지하게 하는 악기를 통하여 슬픔으로 어두워진 안의 세계에 한 줄기 빛이 들어와 신의 말씀으로 우리 존재 자체가 신을 닮은 거룩함을 회복하게 되는 것이다. 원래 인간은 신을 닮은 존귀한 존재이기에 거기에 맞갖은 삶을 살아야 하지만 우리 민초들이 살아온 역사적 환경은 결코 삶을 편안하게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러한 환경들 속에서 민초들은 세상을 바꾸어 보려고도 발버둥을 쳤고 그 행동으로 일어서기까지 고난이 쌓이고 쌓인 것이 「북」에서 터져 나오는 것이다. 북은 곧 이러한 슬픔의 내압을 터져 나오게 하는 악기이다. 둥둥둥 치면 칠수록 슬픔의 망울망울들이 봄꽃 망울처럼 부풀어 터져 나오는 모양은 고체의 도구가 둥근 채로 치면 소리의 청각으로 변하고 그것이 가슴 속 쌓인 슬픔의 꽃망울을 터지게 하여 시각을 사로잡는 것이다. 이러한 이미지의 변화 단계들은 이시환 시가 보여주는 특징이라 할 수 있겠다.   때가 되면 터지리라/터지리라 때가 되면/그대 봄날 하늘의 햇빛이/열꽃으로 파고들면/가슴 속 구석진 곳마다 맺힌/꽃망울이 터지듯 터지리라/ (중략) 아픔뿌리 더욱 깊어지고/깊어져 삭을대로 삭으면/터져야 할 것이 터지듯/이 밝은 땅 하늘을 두들기며/맺힌 슬픔 웃음으로 터지리라/(「북」p.22)   겨우내 굶주림과 추위에 내몰리면서 살았던 이들에게 봄은 얼마나 또 눈물나는 것이랴. 그 봄 햇살이 열꽃처럼 가슴을 파고들면 맺힌 곳마다 꽃망울로 터지는 슬픔은 이제 슬픔이 아닐 것이다. 그래서 이시환은 ‘슬픔 웃음으로 터지리라’하고 외치는 것이다. ‘슬픔 웃음’이란 시어야말로 이시환의 시가 역설적 세계관을 드러내고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 이렇게 주체를 슬프게 하는 원인에는 「돈」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이 세상에/못나빠진 사람 사람/가슴마다 눈물 뿌리 내리고/웃음씨를 말리는 돈돈/한눈 파는 너와 나/혼줄을 속속 다 빼가는/돈 돈 돈이로구나 돈돈’이라고 하여 돈의 물신주의를 들고 있다. 전통타악기를 소재로 하여 슬픔을 노래하다가 그 슬픔의 원인에 놓인 것이 돈임을 밝히고 그 돈은 다른 타악기와 달리 두드리고 치고 때릴 수 없으며 오로지 끝없이 돌고 돌면서 사람들의 가슴마다 눈물 뿌리 내리게 하고 웃음씨를 말리게 하는 것으로 쓰일 뿐임으로 대립되는 도구로 병치해 놓았다고 할 수 있겠다.     3   악기를 때리고 두드리고 쳐서 슬픔이 터져 나오면 우리는 가만히 있기만 하는가? 그렇지 않다. 손뼉을 치고 발을 구르고 어느 듯 가락을 몸에 실으면서 몸은 움직인다. 그냥 흔들다가 어깨를 궁싯거리고 팔다리를 크게 벌리거나 올리거나 하면서 춤을 추게 된다. 그의 시 「어깨춤」, 「탈춤 」「살풀이춤」「풀이」는 모두 악기들을 대동하고 나와 벌이는 한바탕 춤판의 시학인 것이다. 이 춤은 혼자만 추는가 하면 그렇지 않다. 춤꾼이나 살풀이를 하는 무녀가 타령조의 노래나 춤을 추기 위한 널찍한 공간이 마련되고 화톳불이 주위의 어둠을 밝히고 굿판에서는 가지가지 음식이 놓인 단에 촛불이 켜지고 마을 사람들은 그것을 구경하려고 소문을 듣고 뉘집 넓은 마당에 모인다. 형편에 따라 크게도 작게도 마련되는 춤판이나 굿판에 사람들은 일상의 단조로움과 고단함을 풀기도 하고 타인에게 말할 수 없는 가슴 속 사연을 춤꾼이나 무녀가 읊어대는 주사와 그것이 더 깊어진 노래와 그 가락에 기대에 저마다 고통과 슬픔을 위무 받으면서 함께 울고 웃는 것이다. 그리고 나중에는 춤꾼과 무녀와 같이 모두들 어우러져서 춤을 추면서 판은 막을 내리는 것이 우리네 민초들의 생활 깊이 뿌리내린 우리네만의 소통과 교감을 통한 공동 위무의 장이었던 것이다. 여기에는 주체와 타자가 노래와 춤을 통하여 하나가 되는 장(場)인 것이다. 이시환의 제 2시집의 세계는 전통적인 우리의 슬픔의 정서를 노래와 춤을 통하여 열어 보인 춤판이거나 굿판이며 그는 거기에 걸맞는 체재로 시집을 구성하였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이는 그의 시가 타령조의 3.4음으로 이루어져 있음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으며 슬픔의 개인적 정서를 마당놀이와 같은 광장으로 불러내어서 공간을 확장함과 동시에 공동체적 정서로 확대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맺힌 가슴 풀어내어/휘휘 둘둘 온 몸으로 감는구나/궁딱 궁딱 궁궁딱/취하지 않고는 살맛이 안나/취하지 않고는 살맛을 몰라/살아 생전 못다한 말/구석구석 풀어내어 한마당/웃음 아닌 웃음으로/모두 모두 하나 되어 우는구나.(「탈춤」p.28-29)   할 말이 있네/할 말이 있네/해야 할 말/못다한 말/많으면 많을수록/이렇게 저렇게 돌아앉아/옷고름 속에 묻어두고/ (중략) 옷자락을 여미듯/살며시 몸을 흔들어/두 눈을 재우듯/앉아 휘젓는 이 몸은/뒤엉킨 한 타래 실이련가/타오르는 불덩이/타고나면 타고나면/엉긴 매듭 풀리어/장단과 장단 사이로/숨찬 바람이 되어/걸어 나오는/너는 나이고/나는 너이고.(「살풀이춤」p.30-31)   죽어서도 그 근성 못 버리는/조병갑이 나와라/변학도도 나와라/북관선생 나와라/왜놈 뙤놈 양놈 다 나와라 이잇/네 이놈들/할 말 있으면 하라하니 허허/입은 천이어도 만이어도/가만 먹통이로구나(「풀이」p.33)   풀 것을 푸는 데는/이골이 다 나있는/너와 나 우리 우리/다같이 일어나 한 데 엉겨/목판 위 엿가락이 되도록/징을 치고 북을 치고/겨드랑이 사타구니/등줄기 사이사이/흥건하게 젖어/흥건하게 젖어/東과 西,/南과 北을 잇는/우리의 한강이 되고/임진강이 되고/마침내 하나가 되거라/다시는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둘도 아닌 하나가.(「풀이」p.35)   시적 공간은 개인의 마음의 방에서 마을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행해지는 춤판, 굿판에서 우리는 개인일 때 그 웅크림과 왜소함, 폐쇄성에서 벗어난다. 가슴에 쌓아둔 못다한 말들을 말과 행동으로 쏟아내 주는 무녀와 춤꾼을 통하여 주체와 타자가 하나가 되는 것이 바로 이 공간인 것이다. 그래서 서로 하나 되어 웃고 울고 하면서 '너는 나이고/나는 너‘가 된다. 그렇게 된 우리는 짖눌림, 왜소함, 웅크림에서 벗어서 소리 맞춰 힘을 낸다. 그래서 너와 나를 반 생명으로 착취하였던 부당한 권력과 일제의 압제, 갈라진 조국의 부조리함에 대항하고 그 주모자들을 나오라고 소리치는 것이다. 그렇게 다 같이 한데 엉겨 악기 소리에 맞추어 춤을 추면서 몸에서 흐르는 땀이 흥건히 젖고 젖어 가난을 넘고 신분을 넘고(「잡풀」1,2,3) 영남과 호남을 넘고 남과 북을 넘어 한강과 임진강이 하나가 되는 미래의 이 땅을 노래함으로써 슬픔은 어느 듯 희망의 정수박이를 건져 올리는 시적 위업을 완수하고 있다. 이 위업이 가능하였던 것은 시인이 자신의 삶에 진솔하며 그것을 이 땅의 민초들의 그것과 동일시하면서 주체와 객체가 하나 되어 울리는 우리네 보편적 정서로 확장시켰기 때문에 가능했고, 거기에는 ‘바로 거기, 깊숙한 우리의 상처를 어루만져 보라’(「백운대에 올라서서」)에서처럼 위무자의 역할을 자처하면서 공감하길 원했기 때문이다. 이는 그의 이른바 ‘신시학파 선언’에서 밝힌 바대로 ‘주관적인 정서의 객관화’라는 보편적 정서에의 지향이라는 목표에 닿아 있다. 그러므로 이시환의 제2시집『白雲臺에 올라서서』는 시인이 타령조의 노래를 부르거나 춤을 추는 무녀와 춤꾼으로 분하여 고단한 삶 속에 유기되거나 방치된 이들을 독방에서 나오게 하여 울고 웃으며 서로를 위무하는 장으로 이끌어 준다. 그의 소리와 춤이 아파트 문화로 대표되는 21세기 현대 한국사회의 저 돈으로 쌓아올린 강고하고 획일화되어 있으며 산을 가리고 병풍처럼 둘러쳐진 채 닭장 속 닫쳐진 마음들을 찢고 한 줄기 따뜻한 햇살을 쪼이며 마를 대로 마른 목젖을 촉촉이 적시다가 온몸을 흠뻑 적셔주는 한 두레박의 시원한 생수로 흘러넘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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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2    詩作初心 - 한편의 시가 태여나기까지... 댓글:  조회:4239  추천:0  2016-03-12
바람의 밀어 -‘너와 나’ - 이시환의 제3시집 『바람序說』에 부쳐-       심종숙(시인, 문학평론가)       1   시인은 끝없이 꿈을 꾸는 자이다. 시인이 꾸는 꿈은 때로는 흑백사진이나 칼라사진의 이미지로 시인의 뇌수를 건드린다. 시인은 왜 꿈을 꿀까. 시인이 꾸는 꿈은 우리가 일상에서 꾸는 프로이드식의 무의식을 전치나 은폐, 자리바꿈으로 나타내는 그런 꿈일까? 여기에서 이야기 해 보고자 하는 것은 시인이 바라보는 대상들에 대하여 끝없이 꿈을 꾸고, 그 꿈은 우리가 잘 때 꾸는 일상적인 꿈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시인은 자신을 둘러싼 대상들에게 깊이 함몰하기 위하여 꿈을 꾼다. 이 때 시인이 꾸는 꿈은 대상들에 함몰하기 위한 통로나 공간의 역할을 하고, 그 꿈에서 시인은 대상들과 밀어를 나눈다. 밀어가 밀담이 되고 그것이 때로는 일방적이기도 상호적이기도 하면서 끝없이 꿈을 꾼다. 시인이 한 대상과 밀어를 나누어 갈 때 그는 대상을 몽상하는 것이며, 고요하면서 집중적이고 부드러운 긴장과 여유 속에서 이미지들을 불러 오는 것이다. 시인이 우주 만물과 밀어를 나누는 우주적 몽상은 우리를 일상의 시간에서 도피케 하며, 하나의 상태요 더 본질적으로는 ‘넋의 상태’일 것이다. 시인은 대상들과 밀담을 나눌 때 그만의 언어로 나눈다. 그러나 그 밀어가 아무도 알아들을 수 없는 불가해한 것이 아니라는 데에 경이를 금치 못한다. 분명히 시인은 은밀하게 고요히 대상을 몽상하면서 밀어를 나누지만 독자들이 그 경험을 읽을 때는 불가해하지 않다. 오히려 시인은 우리를 대상들에게 함몰할 수 있도록 데려가 준다. 거기에서 고요하게 대상들과 또 다른 밀담을 나눌 수 있게 공간을 넓혀준다. 좋은 시라면 시인이 독자들을 우선 우주 만물들과 밀어를 나누는 곳으로 데려가 주되 시인 자신이 나눈 대화는 물론 독자 각자들이 새로운 밀담을 나눌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는 역할을 하는 게 아닐까 생각된다. 그런 면에서 프랑스 상징시가 가지는 위력은 언어가 지니는 다양한 울림을 통하여 의미를 확대하고 독자들에게 더 많은 창조적 감성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을 것이다. 시는 단지 시인의 감정, 정서, 생각, 사상을 간결하게 정리하기보다 함축된 언어를 통하여 다의성을 띨 때 그 틈입을 열어주고 그 세계를 확장해 갈 것이라 생각된다. 이시환은 그의 제3시집 『바람의 序說』(1993)에서 대상들과 고요하고 아름다우며 때로는 사랑하는 연인에게 다가가듯이 끝없이 그 거리를 좁히면서 자신을 몰입하고 아낌없이 던진다. 이 시집은 그가 밝히듯이 1977년부터 1992년 사이에 창작 된 시들 중에 산문시와 타령조시를 제외한 순수서정시를 묶은 것으로 47편이 실려 있다. 시인 자신의 후기에서 밝히듯이, 이 시집은 첫째마당과 둘째마당 그리고 셋째마당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첫째마당을 새김조, 둘째마당을 斷章調, 셋째마당을 長江調라 하여 비교적 긴 3편의 시를 배치하였다. 새김조의 시편들은 ‘미의식이라든가 감정의 노출이라든가 표현위주의 기교 등의 감각적 요소보다는 단순히 의미기술에 더 많은 비중이 주어진 것들’이라고 하여 의미중심의 삶의 ‘진실’에 닿고자 하였다. 단장조의 시편들은 ‘순간적으로 이루어지는 직관이나 상상력’에 기반을 둔 ‘직감적’인 요소가 시의 전문을 이루고 있다. 그것은 시인이 설명한 바와 같이 ‘어떤 대상이 전제 되면서 그에 대한 사유 활동이 순간적 혹은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는 가운데 얻어지는 이미지들로서 그 자체가 시인의 메시지를 대신하고 있는 형태’이다. 다음으로 장강조는 3편의 장시로서 ‘삶의 본질을 총체적으로 보려는’ 시인의 세계관이 반영되어 있다. 이 세 부분의 다소 차이를 가지는 시편들을 한 권의 시집에 세 갈래로 나누어 실은 것은 시인이 분명 의도, 기획하고 있으며, 시인이 시라는 문학적 형식을 통하여 우주 만물에 대한 몽상을 삶의 진실에다 접합하여 결코 문학이 미적 표현의 집적물에 머물지 않고 삶의 현실에 뿌리를 둠으로써 모두가 공감하는 데로 이끌어가기 위한 시적 전략으로 해석된다. 그러면서도 대상에 대해 이미지로서 시인의 메시지를 대신하려는 시법은 시적 표현을 극대화 하여 신선함을 주고 독자는 시인의 감성을 통하여 제2의 제3의 이미지를 떠올려 보는 여지를 만들어 주는 것이다. 삶의 진실에 대한 의미 추구 의식과 미적 표현 의식이 만날 때 독자는 시에서 더 큰 감동을 느낀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셋째마당의 삶의 본질을 총체적으로 아우르려는 시인의 작업을 통해 공감의 가능성을 넓혀가고 있다고 하겠다. 한 편의 시가 태어나기 위해서는 시인은 끝없는 몽상에 젖는다. 그 몽상이 때로는 시인에게 즐거움도 기쁨도 가져다주지만 때로는 시인 자신의 심부 깊은 곳으로부터 그날 그날의 단순한 기분이나 감정으로부터 시작될 수도 있고, 어느 날 문득 시인의 뇌수를 자극하는 어떤 사물이나 사건일 수도 있고, 과거의 아픈 기억 속의 상처일 수도 있다. 또는 과거의 아픈 기억이 현재까지 되풀이되는 트라우마나 현재의 현실과의 사이에서, 또는 현재의 것으로 미래에 귀결될 어떤 것을 두고 일으키는 고뇌나 번민일 수도 있다. 그것이 시인의 개인적인 것이나 시인에게 관계되어진 어떤 공동체의 운명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한 시인의 사유를 통하여 독자는 한 세계를 접하는 것이다. 한 운명을 접하기도 하고 그것이 찰나이거나 영원이거나 시인이 몽상하는 사물과 우리가 직접 대화를 할 수 있게 된다면 시인은 시인으로서 역할을 다한 것이라고 봐도 될 것이다.     2     우리는 누군가와 끝없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한다. 침묵을 한다고 하여도 그것은 밀어를 나누기 위한 방법에 지나지 않는다. 침묵은 엄밀히 말해 말소리를 내지 않고 하는 끝없는 대화일 것이다. 서방의 성인성녀들이 남기고간 영적 일기나 서적들을 보면 신과 밀어를 나누기 위해 그 자신이 경험한 것을 기록으로 남겨주고 있고, 많은 이들이 그렇게 밀어를 나누는 데로 초대하고 있다. 관상(觀想)이라는 것은 신과의 밀어를 나누는 것이다. 그 밀어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그들은 신의 은총이라 여기며 기꺼이 거기에 응한다. 때로는 신의 말을 듣기 위하여 자기를 완전히 포기도 하면서 그 밀담에 집중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상대방의 말을 들으려 한다면 자신의 귀를 열어야 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귀를 연다는 의미는 그 대상인 신에게 완전히 마음을 열어야 하고 그 이유로 자신을 포기하여야 하는 것이다. 이시환이 그의 제3시집에서 보여주는 자세는 바로 이런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방법만이 대상이 전해주는 모든 것을 알아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일상에서 상대방의 이야기를 알아듣기 위해 자신의 생각이나 말하고자 하는 욕구를 꺾고 그의 말을 들어주는 상담사는 남의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다 들어 주기 위해 있는 직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시환의 시가 상담사의 그것과 다른 점은 이시환의 시에서는 서로 끊임없이 밀담을 나눈다는 점이다. 이시환이 대상을 향해 끊임없는 독백만을 하지 않고 대상에다 자신을 투신하려는 자세를 견지함으로써 독자들도 함께 밀담에로 초대하고 있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가능한 것은 바람이 밀담으로 이끄는 동인(動因)이 되어주고 있기 때문이다. 바람은 무엇인가? 현상학적 의미로 바람은 모든 힘의 근원이며 우주가 공기, 물, 불, 바람으로 이루어져 있는 까닭이다. 이시환에게 바람은 시심을 일으키는 지속적인 힘이며 사물을 몽상하여 지속적인 대화를 할 수 있게 하는 근원이다. 그러므로 그는 바람을 ‘머물러 있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다음은 「바람의 序說」전문이다.   바람이 분다 부는 것이 아니라 머물러 있는 것이다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훨훨 타는 것이다 훨훨 타는 것이 아니라 흐르는 것이다 갯벌의 진흙 내 혈관 속을 돌멩이마다 내린 뿌리 네 몸 속속들이 흐르고 흘러 시방 억새꽃을 흔들고 내 가슴 네 가슴을 흔들어대며 머물러 있는 것이다 그렇게 부는 것이다 눈이 부시게.   바람은 원래 무형, 무색, 무취한 것으로 우리가 눈으로 잎사귀나 사물들이 흔들리는 것을 보거나 심하게 불 때 나는 소리로써 감지한다. 바람은 불어왔다가 지나가 버리면서 일회성으로 다가오지만 이 바람으로 하여 강할 때는 심해의 바다를 뒤집거나 하여 생태계를 재정비하기도 하며 때로는 파괴하기도 한다. 그 강도에 따라 하는 일이 다양한 바람은 분명히 모든 힘의 근원이다. 그런데 시인은 그 바람을 부는 것이 아니라 머물러 있다고 한다. 이 시를 감상해보면 시인은 문득 어느 날 자연적으로 부는 바람을 접하여 바람이 분다고 한다. 그러다가 그 부는 바람을 한참을 맞고 있으면서 바람이 부는 것이 아니라 머물러 있는 것처럼 느낀다. 그리고 그 머물러서 계속 부는 바람은 훨훨 타는 것이다. 이것은 시인 자신의 심상 세계에 불어온 바람에 대해 이야기한다. 바람이 시인의 심상세계로 먼저 들어오고 시인은 그것을 감지하고 처음에는 분다고 생각하여 한 때 지나가리라 생각하지만 그러지 않고 자신의 심상 안에 머무는 것으로 인식한다. 그런 연후에 바람은 마음에서 훨훨 타는 불이 되는 것이고 불타던 바람도 이윽고 물처럼 흘러가는 것으로 인식한다. 흐르는 바람의 줄기는 갯벌의 진흙, 혈관, 돌멩이, 네 몸이라는 사물과 인간의 몸의 내부를 속속들이 마치 물처럼 흘러들어서 적시고 억새꽃과 나의 가슴, 너의 가슴을 흔들면서 머물러 있는 것이다. 이 과정은 바람과 같은 어떤 성질의 것들이 시인이 자신이 그것을 끌어들이기보다 그것들이 먼저 온 것이다. 그것들은 잠시 스쳐 지날 것으로 생각하였으나 시인에게 오랫동안 머물면서 불이 되어 훨훨 타는 것이다. 그러더니 갯벌, 진흙, 돌멩이와도 같이 부드럽고 미끄러운 것에서 딱딱하고 까칠까칠한 돌까지 침투하여 흐르고 갯벌의 억새꽃을 흔들고 각각의 방을 이루고 있는 너의 가슴과 나의 가슴을 흔들어대며 머물러 있고, 그 자태가 눈부시다는 의미로까지 지각되었다. ‘분다 → 머문다 → 탄다 → 흐르다 → 흔든다’라는 동사들을 나열하여 바람의 동태적 이미지를 구가하고 있고, ‘분다’와 ‘흔든다’가 어떤 매개물을 통하여 감지되는 것이라면 ‘머문다’ ‘탄다’ ‘흐르다’는 매개물을 통하지 않는 내밀한 바람의 작용이며, 시인이 은밀하게 바람과 대화하고 바람과 한 몸이 될 때 작용되는 현상들에서 추출된 동사들이라고 하겠다. 이 동사들의 변이에서 얻어지는 것은 바람이 물기를 품지 않은 ‘메마름’에서 머물러 불을 일으켜 훨훨 태우고 흐른다는 의미는 사랑하는 연인들 사이의 어떤 일치에도 비유되어 ‘내 가슴’과 ‘네 가슴’을 흔들어대며 머물러 있는 것이다. 시인이 바람을 통해 얻은 것은 ‘흐름’이라는 유동적인 이미지로 물이나 액체, 땀방울, 비, 파도, 가랑비, 봄비, 바다 등으로 표현되고 있다. 이와 같이 시인은 자신을 둘러싼 삼라만상을 마치 은밀한 만남의 대상으로 여기며 ‘당신’ ‘그대’ ‘너’로 부르고 있다. 작품 「그리움」에서는 너와 나의 관계를 ‘산’과 ‘언덕 너머 바다’를 통하여 나타내고 있다.   멀찌감치 서서 바라보는 언덕 너머 바다가 좋다   한 발짝 다가서면 한 발짝 물러서는   그렇듯 하루가 멀다고 밤마다 가슴 속 속속들이 파고드는 불면의 그 뿌리 사이로 조용한 혁명이 꿈을 꾸고   차라리 멀찌감치 서서 바라보는 산 너머 있는 그대로 네가 좋아   한 발짝 물러서면 한 발짝 다가서는     너와 나의 관계는 한 발짝 다가서면 한 발짝 물러서고 한 발짝 물러서면 한 발짝 다가서는 관계이기 때문에 그냥 멀찌감치 바라보거나 있는 그대로의 ‘너’가 좋다고 토로한다. 있는 그대로의 너를 바라볼 수 있는 것은 나의 비움이 있기에 가능하다고 하겠다. 바로 거리 두기는 나의 비움에서 출발하며 이시환의 시가 일인칭 화자 ‘나’ 드러내기보다 ‘너’라는 대상에 더 비중이 두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하겠다. 이 ‘너’에 대한 집중과 드러냄은 ‘나’를 버림으로써 가능해지는 시법이라 하겠다. 그의 시가 1인칭 화자의 넋두리에 빠지지 않는 것은 바로 이 점에 있다. 「봄비」에서는 너에 대한 그리움을 건조주의보 후의 봄비로 표현하고 있다.   발뒷꿈치 살짝 들고 숨소리마저 즈려 밟고 오는구나 나는 시방 건조주의보   속 타는 눈물이 되어 흐르는 그리움 그리움은   마른 잎 하나에 목을 놓아 더욱 빛나는.   속이 타는 그리움을 건조주의보라 하여 그 때 내리는 봄비로 그리움의 목마름이 해갈이 되어 눈물이 흐르는 것으로 형상화되고 있다. 「백목련 2」에는 ‘낮게 낮게 깔리는 내음/줄기를 타고 거슬러 올라가면/그대가 벗어놓은/그 빈 자리/내 서슴없이 빠져 죽을/하늘이 거기’라 하여 백목련을 ‘그대’라고 부르면서 나의 투신을 노래하고 있다. 또「죽음」에서는 ‘내 처음/이 세상을 나온/길을 따라/되돌아가는/삶//차례를 좇아/몸을 벗는다/저 무서운 파아란 하늘에/알몸으로 가/맞닿고 싶어’라고 하여 하늘과 죽음을 동일시하면서 몸을 벗고 알몸으로 자신을 던져 넣고 싶은 욕구를 드러내고 있다. 몸을 벗는다는 의미는 육탈을 의미하고 있고 3연의 알몸으로 가서 맞닿고 싶은 욕망은 파아란 하늘과 흰 몸둥아리의 색채대비를 통하여 허위와 가식 없이 처음 세상 나온 그 근원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시인의 소원을 담은 것이라 하겠다. 시인의 이러한 긍정적 주체 파괴 욕망은 「항아리」에서 무너져 질퍽한 ‘흙’이 되고 싶고, 깨어져 질주하는 ‘바람’이 되고 싶고, 세계를 묶어두는 하나의 ‘뜨거운 몸짓’이고 싶은 것이다. 이러한 완전한 자기 열기/긍정적 자기 파괴는 「월척」에서 ‘마음 門을 열어놓자/안겨드는 바람덜미/아자차, 휘어당기면/퍼덕퍼덕 초승달’이라고 하여 마음의 문을 열어둠에서 시작하여 대상을 낚아 올린다는 의미의 시로 형상화 되고 있다고 하겠다. 이어 장강조의 시라 명명한 장시 「바람꽃」에는 그런 너와 나의 관계에 대해 노래하고 있다.   홀로 존재하여/홀로 설 수는 있어도/온전할 수는 없어/다른 하나를 꼭 필요로 하는,/그리하여 서로가 서로를/ 받치어 주고 받들어 주는/너와 나의 관계는/ 물이지만 불같고/불이지만 물 같은/하늘과 땅과 같은 자리요,/안과 밖과 같은 바탕이요,/빛과 어둠 같으니라.//이 땅 위 하늘 아래/두 빛깔 두 존재의 어우러짐은/안과 밖이 소통(疏通)하고/음과 양이 교섭(交涉)하여/크고 작은 만물이 생기는 것과 같은/이치이자 원리여서/존재하는 모든 것은/신묘한 아름다움 그 자체니라./   꾸밈없고 가식 없는/너와 나의 어우러짐은/우둑 솟은 산과/길게 흐르는 강물 사이 같은 것/너를 위하여/나를 위하여/우리 서로 존재할 때에/비로소 하나가 되어/바로 설 수 있는/아름다움이 될지니/그것이 곧 하늘의 기운을 받는 땅이요,/땅의 기운을 머금는 하늘로/물 가운데 불이요,/불 가운데 물이니라./   시적 비유나 이미지를 동원하지 않고 오히려 삶의 지혜를 일깨워주는 지혜문학적 요소를 띠는 이 시는 너와 나의 관계가 조화를 이루어 아름다움으로 머물기 위해 어떻게 해야하는지를 깨우쳐주는 명상적인 시라고 할 수 있다. 너와 나의 관계는 우주의 이법에 따라 이원의 세계가 일원의 세계로 귀일되는 것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너와 나는 독립적이면서도 홀로는 불완전하기에 다른 하나를 필요로 하는 존재이다. 그것이 하늘과 땅, 물과 불의 바탕이며 빛과 어둠의 이치라고 말한다. 이 둘이 조화지경에 이르려면 ‘사람의 마음’이 ‘몸에 끌려가는 것’이어서는 안 되며 몸을 이끌어 가는 임자노릇을 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의 마음을 큰 그릇으로 비워두어야 하며, 이는 ‘맞은 편 이의 자리에서/자신을 들여다보는 법에 대한 터득이요/나를 통해서 너의 바탈을 꿰뚫어 보는 눈 뜸’이다. 이시환은 이 ‘자신을 들여다보는 법’에 대해 「어찌하오리까」에서 더 강한 어조로 말한다.   그리하여 나를 죽이는 일부터/철저하게 나를 죽이는 일부터/결행하고 감행해야 할지니/이것만이 당신의 품안에서/우리 스스로가 살아남을 수 있는/한 가닥 희망이요, 빛이요, 전부임을,/아니, 인간의 승리가 곧 파멸임을/깨달을지어다./깨달을지어다./   그리고 「나의 기도」에서 시인은 절대자 하느님 앞에 ‘오늘 하루 내가/숨을 쉬며 산다는 것은/다른 살아 있는 것들의 목을 조르는 일이고/크고 작은 것들의/보이지 않는 관계를 짓밟고 잘라내어/이 땅 위로/버릴 것을 만들어 내는 일입니다’라고 완전히 가식이나 허울을 벗고 한 인간으로서의 자신의 삶이 하잘 것 없음을 고백하고 있다. 그리고 ‘하늘과 땅 사이/조금도 구김살 없이 감도는 기운,/당신은 필연이 아니신가요/조금도 빈틈이 있을 수 없는.’이라고 하여 이시환의 당신은 하늘과 땅 사이에 죽어있는 것과 살아있는 온갖 것들을 다 빚어 놓으신 우주만물의 하느님으로 귀결되고 있다. 그 하느님은 바로 「파도에 부쳐」에서는 파도, 「바다」에서 바다로, 「내장산행」에서 ‘텅 빈 네 눈과 마주친 순간/내 가슴은 콱 숨이 막히고 흘려버린 듯’한 산야와 한 송이 풀꽃의 무념무상한 있는 그대로의 모습에서 만나 밀담을 나누는 영원한 이시환의 ‘임’일 것이다. 그러므로 이시환의 제2시집은 절대자이며 우주 만물을 지은 하느님, 그 하느님의 법신현현인 우주만물과 모든 힘의 근원인 바람을 통해 나누는 밀어이며, 그것도 농밀한 밀담으로 우리를 초대하고 있다고 하겠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이시환이 나를 버리고 너와 그대, 당신, 하느님과 하나 되고자 하기에 자기를 버린 그 자리에 우리가 발을 들여놓을 수 있도록 심상(心象)의 문을 활짝 열어놓았기 때문이다.  
1181    詩作初心 - 시에서 보이지 않는 세계를 찾기 댓글:  조회:4321  추천:0  2016-03-12
사랑의 시학-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자기 던지기 -이시환의 제6시집『바람소리에 귀를 묻고』-심종숙(시인, 문학평론가)   이시환의 시집 『바람소리에 귀를 묻고』(1999, 신세림)는 끝없는 사랑의 희구들로 찬란하다. 눈이 부시다. 이 사랑은 이시환에게는 시의 뮤즈들이다. 그는 이 뮤즈들을 뒤쫓아 품고자 한다. 마음으로 받아들이거나 뒤쫓는 그의 모습은 마치 아름다운 목신을 연상케 한다. 프랑스 상징주의의 대표시인인 말라르메(Stephane Mallarme,1842~1898)의 『목신의 오후(Le Faune)』에 나오는 목신이 되어 시라는 님프 요정들을 품에 안으려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의 시집에는 온화한 시정과 시의 뮤즈에 대한 그리움과 그를 갖고자 하는 욕구로 빛난다. 이것이 그의 끊임없는 짝사랑일지라도 그에겐 상관없다. 그러나 그는 짝사랑의 비극을 가지지 않는다. 그는 자신을 끝없이 바라보듯이 ‘당신’이라 부르는 타자(연인, 뮤즈, 요정)와 끝없이 소통한다. 그의 시를 이해하기 위하여 필자에게 떠오르는 두 가지 오브제 중에 하나는 한스 안델센의 『인어공주』와 말라르메의 『목신의 오후』이다. 우리에게 일반적으로 잘 알려진 동화 『인어공주』의 원전을 보면 어린이의 동화로 재화된 인어공주와 내용적으로 많은 차이가 있다. 신의 섭리로 왕자는 자신을 구해준 이웃나라 공주와 결혼하게 되고 비극의 인어공주는 다시 인어로 돌아오기 위해서 왕자를 찌르라는 언니들의 충고를 이행하지 못한 채 실연의 아픔과 사랑하는 왕자를 차마 죽일 수가 없어서 바다에 뛰어들어 물방울로 변한다. 이 물방울이 공기 요정으로 떠올라 공기 요정이 된 인어공주가 300년 동안 선행을 하여 영혼을 얻길 바라는 마음을 작가는 작품의 말미에서 드러내어 교훈적 문학이라고 불리우고 있다. 작가는 아이들이 사랑하는 슬픈 인어공주가 300년에서 한 해씩 줄어들어 빨리 영혼을 얻게 되길 원한다면 매일 자신의 부모를 기쁘게 해야하고 사랑 받는 아이로 자라 주길 바라는 것이다. 그러나 인어공주의 시련기에서 버릇없고 심술궂은 아이들을 인어공주가 보게 되는 만큼 그녀의 시련의 기간이 길어진다. 다른 오브제는 프랑스 상징주의 시의 대표시인 말라르메의 시집 『목신의 오후』이다. 말라르메의 시는 ‘물의 요정 님프님들, 그녀들에게서 나는 영원의 생명을 찾고 싶네’라는 시구로 시작한다. 어느 온후한 여름 날 오후 목신은 시칠리아 초원에서 잠을 깬다. 잠에서 깨어나 머릿속에 기억의 부유물을 떠올려본다. 꿈을 꾼 것이 남아 있는 것인지 아니면 잠들기 전의 현실이었는지 목신에게는 몽롱하기만 하다. 다만 목신은 그 둘 중의 어느 한쪽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찰나에 목동은 짧은 갈대로 만든 피리로 잔잔한 프렐류드를 불기 시작하는데 그 소리에 물의 요정들이 하늘로 날아올라 가거나 물속으로 도망치기도 한다. 그러나 목신은 눈앞에 서로 얽혀있는 한 쌍의 요정을 보고 두 요정을 품에 안아 장미 넝쿨로 뛰어들어 헝클어진 그녀들의 머리카락에 입을 맞추었을 때 문득 양팔의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낀다. 바로 그 때 두 요정은 그의 품에서 날아가 버린다. 목신은 그 아쉬움을 잊기 위해 몽상을 하거나 한낮의 태양을 향해 입을 벌리고 넋을 잃기도 하며 갈증을 느끼고 모래 위에 쓰러진다. 목신은 다시 꿈을 꾸면서 나른한 잠 속에 빠진다. 신화 속의 목신이 꿈꾸는 것은 요정들이듯이 인어공주가 꿈꾸는 것은 왕자이다. 꿈꾸는 것을 품기 위해 목신은 끊임없이 몽상을 할 것이다. 인어공주가 영혼을 얻기 위해 300년을 선행을 해야 하듯이 시인은 시의 뮤즈를 품에 안기 위해서 끝없이 희구해야 한다.     이시환은 그의 시적 몽상을 꿈꾸고 그의 뮤즈를 만나기 위해 어떻게 하는가? 다음의 「기차여행」시 전문을 보자.   기차를 탔다. 이 얼마만인가? 그동안 나를 이리저리 묶어두는 바깥세상과의 관계를 모두 끊어버리고, 나는 오로지 내 몸을 의자 깊숙이 묻고 나를 풀어 놓았다. 그러자 미끄러지듯 어디론가 나를 낚아 채가는 기차. 그에 이끌려 나는 오늘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이대로 공중으로 떠 가다보면 나는 분명 없어져 버리고 말 것이다. 어젯밤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던 캡슐 속의 작은 미립자들처럼 물에 녹아 풀어져 버릴 것이다. 그리하여 작은 먼지의 부유조차 허락할 수 없는 적막 속에서 나는 나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이시환은 자기를 만나기 위해 바깥세상과의 관계를 모두 끊고 기차에 자신의 몸을 맡긴다. 그 기차는 어디로 가는가? 어떨 때는 목적지를 설정하거나 때로는 목적지를 고집하지 않은 채 자신을 부려놓는다. 기차는 시의 뮤즈를 찾아 떠나는 시인을 이끌고 가는 인도자다. 그의 동행자이다.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그도 알 수 없다. 가다가, 가다가 보면 지상이 어느 새 공중으로 바뀌어 ‘나’는 공중에 떠다니다 사라져 가기도 한다. 또는 작은 미립자들처럼 녹아버릴지도 모른다. 그런 고요 속에서 저 심부 깊은 곳에 있는 참 ‘나’를 만나다. 이 시에서 이시환의 뮤즈는 참 ‘나’가 곧 그것이다. 그는 부유하는 것들을 다 끊기 위하여 일상을 떠나고 기차에 몸을 부려 자신의 뮤즈를 만나기 위해 떠난다. 떠남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부유하는 것들을 비워내어야 한다. 이 비워내기 작업은 「대숲이 전하는 말」에서 떠남과 죽음, 사라지는 것들로 형상화되고 있다.   허연 허벅지 살점을 드러내 보이며 웃음을 흘리던 너도 어느 날 훌쩍 떠나 버리고, 가지 끝 그 빈자리론 가을 햇살만이 숨어 수줍음을 타는구나. 코 흘리던 내가 불혹을 넘기는 사이 동네 서씨 아저씨도 갔고, 김씨 아저씨도 갔고, 이젠 박가놈도 그런저런 이유로 가고 없다. 이러쿵저러쿵 사는 것처럼 한 세상을 살다가 훌쩍 자리를 비운다는 게 얼마나 깊은 아득함이더냐. 얼마나 아득한 그리움이더냐. 저마다 제 빛깔대로 제 모양새대로 머물다가 그림자 같은 공허 하나씩 남기며 알게 모르게 사라져 간다는 것, 그 얼마나 그윽한 향기더냐. 이름다움이더냐. -「대숲이 전하는 말」전문   이웃들의 죽음을 통해 시인은 그 떠난 것을 비움으로 보고 깊고 아득하며 그리움이라고 하였다. 그윽한 향기이며 아름다움이라 했다. 죽음에 대하여 두려움이나 공포, 추함, 피하고 싶음, 절망, 고통과 같은 부정적 정서보다 그에게 인간의 죽음은 허무하고 무상한 것이지만 그것이 아름답다고 하였다. 그 이유는 ‘저마다 제 빛깔대로 제 모양새대로 머물다가 그림자 같은 공허 하나씩 남기며 알게 모르게 사라져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대숲의 바람이 전해주는 풍문처럼 어린 시절 함께 했던 사람들의 죽음은 인간의 삶이 바람처럼 와서 제각각의 빛깔과 모양새로 살다가 사라져 감은 그윽하고 향기로우며 아름다운 것이라는 의미이다. 이러한 비움의 거대한 의식이 사람에게 누구나 다 예비되어 있기 때문에 시인의 시의 뮤즈를 향한 갈구는 더욱 더 가열해진다. 시인의 갈구는 고요와 적막함과 비움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시정은 호수에 이르면 한층 깊어진다.   잔잔하다. 아주 고요하다. 그래, 그 속을 알 수가 없다. 얼마나 깊은지, 표정을 짓지 않아 그 속을 가늠할 수 없다. 돌멩이 하나 던져도 풍덩, 하고 가라앉으면 그 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저 잔잔할 뿐이다. 그저 덤덤할 뿐이다.   그런 호수 하나 앞가슴에 지니고 산다면… 그런 적막 하나 앞가슴에 지니고 산다면… -「호수」전문   눈앞의 호수를 보고 시인이 열망하는 것은 호수가 지닌 잔잔함과 고요함, 그 덤덤함이다. 시인은 자신이 호수처럼 되고자 한다. 삶에서 돌멩이가 날아와도 의연하고 덤덤해질 수 있길 바란다. 그 의미는 그가 어쩌면 부유하는 나로 인하여 마음의 적요를 잃거나 흔들릴 때 이런 호수가 되고자 하는 것처럼 호수를 통하여 시인은 잔잔함과 고요, 덤덤함을 지닌 참 ‘나’를 만나고자 한다. 여기에서 호수는 시인이 품고자 하는 뮤즈인 것이다. 호수는 시인에게 흠모하여 닿고자 하는 ‘당신’이기도 하며, 어느 새 ‘나’의 마음속에 들어와 버린 ‘당신’이기도 하다.   어느 날 어느 순간 내 안에 들어와 나를 무력화시키고 점령해 버린 무례한 당신은 내게 무엇인가요.   보고 싶어도 다가가 만날 수 없고 당신의 음성, 당신만의 숨소리 듣고 싶어도 자유로이 전화조차 걸 수 없는 당신은 내게 무엇이고, 나는 당신에게 또 무엇인가요.   어쩌다 곁에 앉아 있어도 당신 속으로만 줄달음치다가 쓰러져 눕고 싶고, 어쩌다 손을 꼬옥 잡고 함께 있어도 외로워 외로워서 어쩔 줄 모르는, 당신과 나는 무엇인가요. 이 어둡고 추운 긴긴 밤을 불태우다 사위어가는 불꽃인가요, 한낱 바람인가요. 아니면, 아니면. 풀숲길을 맨발로 걸어 나오는 아침인가요. 나를 흔들어 깨우는 여명의 바다, 그 몸짓인가요. -「당신을 꿈꾸며·1」전문   당신을 향한 나의 연가는 나로 하여 당신을 꿈꾸게 한다. 이 시에서 시적 화자가 말하는 당신은 불꽃, 바람, 아침, 여명의 바다, 바다의 몸짓으로 느낄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시인에게 당신은 가서 닿기 어려운 존재이지만 시인의 영혼을 사로잡고 그 안에서 둥지를 튼 존재이다.   얼마나 더 숨 가쁘게 달려가야 당신의 나라에 가 닿을 수 있나요. 그리워 그리다가 지쳐 잠이 들지만 당신을 부르며 놀라 깨어나는 나는, 얼마나 더 숨 가쁘게 달려가야 당신의 손길을 맞잡을 수 있나요. 당신의 눈길을 마주 볼 수 있나요. -「당신을 꿈꾸며·2」부분   당신은 나에게서 멀리 있는 존재이기에 나는 ‘당신의 가슴 속으로/끊임없이 질주해 가느라 잠 못 이루었습니다’라고 고백하듯이 시인은 당신에게 이르기 위하여 정열을 불사른다. 당신을 향한 나의 적극적인 태도는 나의 당신에 대한 절대성에 기인한다. 그러므로 나는 당신의 나라에 당도하기 위해 당신에게 한 목숨 던지길 원한다.   실비 내리는 이른 봄날 저녁 어스름께 젖어드는 저 나목이 되어 그대 옆모습 살짝 훔쳐보노라면 그대가 더욱 그리워지네.   눈물이 고여 있는 그대 호숫가에 내려와 홀로 반짝이는 저 별이 되어   그대 눈동자 빤히 들여다보노라면 그대가 더욱 간절해지네.   그대 향한 이 그리움과 이 간절함 속에 얼굴을 묻고 오늘을 사노니   거두어 가소서, 나를 거두어 가소서, 당신의 나라, 당신의 하늘과 땅으로. -「당신을 꿈꾸며 ·4」전문   당신을 향한 나의 줄기찬 정념으로 당신의 나라에 이르기 위해 나의 목숨마저도 거두어 가길 바라는 시적 화자의 절규에서 보듯 여기에서 당신은 연인, 절대자, 시의 뮤즈, 정령, 하느님, 내가 품고 싶은 생명성, 절대적 가치 등을 상징하고 있다 하겠다. 시인이 「당신을 꿈꾸며」연작시 6편을 시집의 중간에 의도적으로 배치한 것은 이 6편이 시집의 고갱이임을 말한다. 가장 중요하고 귀한 것을 가슴 속 깊이 품어두듯이 이 6편은 당신을 향한 나의 사랑고백이기에 시집의 한 중간에 위치시킨 것이라고 생각된다. 마치, 한 여인이 자신의 정인에게 순열한 자신의 사랑의 비밀을 가슴 깊이 간직해두듯이 말이다. 「당신을 꿈꾸며·5」에 오면 이 희구의 결실을 이루는 절정의 시혼이 내가 죽어 당신의 심장이 되고 숨이 되고 당신의 정령이 되고, 내가 곧 당신이 되어 당신을 희구하는 나는 대타자와 일치하게 되고 여기에서 대타자는 전술한 연인, 절대자, 시의 뮤즈나 정령, 하느님을 가리킨다.   당신의 영접을 받으며 당신의 城門을 열고 들어가 마당 가운데 핀 당신만의 꽃을 보았습니다. 그 꽃술에 흐르는 달콤한 꿀과 향기에 취해 그만 혀끝을 갖다 대면서 비몽인지 사몽인지 진몽인지 간에 당신의 나라를 탐해 버렸습니다. 그 순간 나는 당신의 그 깊고 깊은 우물 속으로 던져져 죽고 죽어서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는 그렇게 당신의 나라, 당신의 영토 위에서 비로소 당신의 심장이 되었고, 당신의 숨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나는 새삼스러이 깨달았습니다. 내 그토록 간절히 그리워하던 당신이 나의 정령이고, 내가 곧 당신의 정령이라는 사실을. 그리하여 나는 내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보았습니다. 내가 타버리고 남은 당신의 가슴 위에 당신이 무너져 내린 내 가슴 위에 웅장한 또 하나의 새 城이 솟고 있음을. 눈이 부시게, 부시게 솟고 있음을. -「당신을 꿈꾸며·5」전문   이 시에서 나와 당신의 관계는 나의 님을 향한 일방적인 사랑의 정념을 불태우는 것에서 변화되어 당신이 나에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어 나에게 마음을 열어주는 것을 ‘당신의 영접을 받으며’라 표현하고 있다. 즉 당신이 마음을 열어 나를 받아들인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나는 당신의 성문을 열고 들어가 당신이 자신의 정원에 가꾸어둔 당신만의 꽃에 취하여 혀끝을 갖다 대어 당신을 탐한다. 그 순간 나는 당신의 깊고 깊은 우물 속으로 던져져 죽어서 당신 나라에 이르게 되어 당신의, 심장으로 숨으로 다시 태어난다. 그 순간 나는 당신이 나의 정령이며 나 또한 당신의 정령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내가 타버리고 남은 당신의 가슴 위에/당신이 무너져 내린 내 가슴 위에’ 웅장한 새 성이 눈부시게 솟아오른다고 말한다. 시적 화자는 나와 당신의 사랑이야기를 이렇게 이야기 해준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이야기인가? 내가 그리워하던 당신은 곧 나의 정령이었다는 의미는 대타자가 곧 내 안에 있는 절대자, 하느님, 연인과 같은 품성을 지닌 참 ‘나’[眞我]였다는 의미이다. 참 ‘나’를 만나기 위한 여정은 나의 줄기찬 그리움과 희구의 결과로 거짓 ‘나’[假我]는 소멸하고 ‘새 성’으로 비유되는 당신과 참 ‘나’가 합체된 진여의 ‘나’와 당신이 태어나는 것을 성이 눈부시게 솟아오르는 것에 비유하고 있다. 이 시에는 법화경 제3권의 화성유품(化城喩品)의 반대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부처는 진리를 설하기 위해 미혹하고 우매한 중생에게 이 진리가 쉽게 이해되지 않기에 화성을 사용한다. 불경적 내용을 소개하면, 어떤 이가 진리에 이르기 위해 중생을 데리고 가는데 이들이 그 길이 멀어 지치고 힘들어 할 때 잠시 화성을 만들어 거기에서 쉬게 한다. 그런 다음에 화성을 거두고 다시 진리인 불법을 향하여 인도하여 간다. 곧 여기에서 화성은 방편이다. 방편이란 비유를 들어 가르치기 위한 수단인 것이다. 방편의 진리란 쉬운 말로 비유의 진리가 되는 것이다. 비유를 통하여 진리를 설하는 이법은 성경이나 불경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성경에서 하느님의 자비는 기쁨과 희망의 복음이라 일컬어지는 루카복음에서 ‘되찾은 아들’에 비유되고, 불경에서는 법화경 제2권 신해품(信解品)에 동일한 화소를 지닌 장자와 방탕한 아들의 구전된 이야기를 변형하여 비유로써 가르치고 있다. 방편과 비유는 진리를 설하기 위해 이해를 돕고자 하는 한 방법인 것이다. 법화경의 이 이야기에는 산문체의 이야기와 이를 게송으로 읊어놓은 것이 있는데 게송이란 바로 리듬을 지닌 노래 즉 시이다. 구전된 화소를 변형하여 산문에 담은 것과 게송을 통하여 노래로 엮은 것은 산문과 시문이 지니는 고유의 특성을 잘 살려서 부처의 자비를 중생들에게 잘 감득시키기 위한 목적에서였을 것이다. 이시환의 「당신을 꿈꾸며」6편도 내재율과 외재율을 품은 산문시풍에 가깝다.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 다시 하진 않을래요. 당신을 담아낼 수 있는 그릇을 지닐 수가 없어요. 당신 또한 날 사랑한다 말하지 말아요. 내 당신을 품에 안을 수 없는 땅에 서 있듯이 당신 또한 날 가까이 할 수 없는 곳에 있잖아요. 우린 그렇게 아득히 멀리 서서 서로를 바라만 보아요.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 다시 하진 않을래요. 당신 또한 날 사랑한다 말하지 말아요. 다만, 다만, 다만, 엎치락뒤치락 선잠이 들 때마다 당신과 함께 잠들고 아침마다 잠에서 놀라 깨어날 때에도 늘 당신과 함께 눈을 뜬다는 것뿐 우린 서로 사랑한다 말하지 말아요. 그냥 그렇게 가슴 속에 묻어 두고 살아요. 그냥 그렇게 가슴 속에 묻어 두고 살아요. 우리 슬픈 사랑 받아줄 어느 구석도 이 세상엔 있질 않아요. 우리 간절한 사랑 받아줄 어느 누구도 이 세상엔 있질 않아요. -「당신을 꿈꾸며· 6」전문   이 시는 나와 당신의 사랑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사랑이 아님을 말하고 있다. 그 이유는 이 사랑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이 무의미한 세계의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적 화자는 ‘사랑한다는 말 다시 하진 않을래요’라고 하여 비밀에 봉인 시키는 것이다. 이 사랑은 이 세상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사랑이기에 가슴 속에 묻어두고 말하지 말자고 당신에게 말한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사랑이 가진 깊이와 이 사랑이 지닌 깊이가 다르기 때문이다. 이 사랑은 나를 죽여서야 열매 맺는 사랑이기 때문이다. 나를 죽인다는 의미는 나를 완전히 비운다는 의미로서 나를 희생제물로 바친다는 의미이다. 그럴 때 비로소 획득되는 사랑이다. 이 사랑은 바로 영원한 생명력을 지닌 사랑이다.   푸르고 푸를지어다. 그 속에 함성이 있고 그 속에 기쁨이 있나니.   푸르고 푸를지어다. 그 속에 네가 있고 그 속에 내가 있나니.   푸르고 푸를지어다. 그 속에 속삭임 있고 그 속에 말씀이 있나니.   푸르고 푸를지어다. -「生命」전문   ‘푸르고 푸를지어다’로 반복어법을 써서 의미를 강조하거나, ‘--할지어다’라고 하여 반복기원을 담은 이 시는 생명이 이렇듯 푸르고 푸르러 질 것을 바라는 시적 화자의 외침소리이다. 그 속에 함성이 있고 기쁨이 있고 나와 네가 있고 속삭임과 말씀이 있기 때문이다. 이 시는 「당신을 꿈꾸며」여섯 시편 뒤에 놓여 있어서 나와 당신이 이룬 그 사랑이 바로 기쁨, 함성, 속삭임, 말씀이 되어 생명력을 이룬다. 그것이 영원히 푸를지어다라고 기원하는 절창의 노래이다. 영원한 생명은 바로 사랑이며 그것의 절창이다. 말씀은 곧 진리의 말씀이며 나와 네가 먹고 자라야할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다. 이것은 때로는 내면 깊은 곳에 임재한 하느님의 속삭임이며 동시에 진여의 ‘나’가 나에게 속삭이는 말이다. 그러므로 푸르고 푸르게 그 생명의 말씀이 영원하라는 의미로서 큰 울림을 가진다. 그 뒤에 위치한 「사랑」을 읽어보자.   푸르면 푸를수록 깊고 깊으면 깊을수록 아득한   아득하면 아득할수록 두렵고 두려우면 두려울수록 눈부신   그대를 꿈꾸는 동안은 짙은 안개숲에 갇혀버린 한 그루 나무 되어   그대를 꿈꾸는 동안은 손발이 묶인 한 조각 잠언 되어   반짝이며 떨고 있네. -「사랑」전문   그대를 꿈꾸는 동안은 안개숲에 갇힌 한 그루 나무이며, 손발이 묶인 한 조각 잠언이 된다. 사랑의 포로가 된 나의 모습은 묶이거나 갇힌 모습으로 표현되지만 사랑에 묶이고 갇히는 것은 깊고 아득하며 푸른 생명력을 가진다. 당신의 사랑에 기꺼이 묶이고자 하는 욕망은 당신에게 침몰하여 당신의 정령으로 살고자 한다.   당신의 우수어린 고즈넉한 눈동자 속으로 걸어 들어가, 그 곳 푸르게 푸르게 흐르는 강물. 그 속으로 속으로 다시 유영해 들어가, 그 곳 가장 깊은 곳에서 그 곳 가장 깊은 곳에서 정지된 그대로 침몰하고 싶어, 나는. 그리하여 그 깊고 푸른 당신의 精靈으로나 살고파. -「눈동자」전문   눈은 마음의 등불이라고 한다. 당신의 눈빛을 바라보는 나는 까아만 눈동자에 빨려들어가듯 그 눈동자를 바라본다. 눈동자는 흐르는 강물의 유동적인 이미지로 바뀌어 나는 그곳으로 헤엄쳐 들어간다. 그 가장 깊고 푸른 곳에서 정지된 채 침몰하고자 한다. 거기서 당신의 정령으로 살고파한다. ‘눈동자’나 「섬」의 섬은 내가 침몰하고픈 깊고 푸른 곳, 블랙홀, 어둠의 자궁, 빛으로 상징되어 여성성의 이미지를 이룬다. 이시환이 이르고자하는 것은 구원의 여성이다. 신은 여성이미지로 현현되어 있다. 우주 만물에 깃듯 정령이 되고자 하는 욕망은 법신인 우주만물과 내가 일치하려는 욕망이고, 그 속에 나를 던지고자 하는 욕망이다. 그러니 우주만물이 나이고 내가 우주만물이 되며 우주만물은 곧 참 ‘나’이며 신의 현현이다.   이 대지의 잠든 정령을 흔들어 깨워   저들로 하여 일제히 일어나 기지갤 켜도록 엉덩짝을 내차고 달아나는 이 누군가.   저들이 저들대로 무성하여 한 세상을 푸르고 푸르게 머무나니   저들이 저들대로 쇠락하여 한 세상을 푸르고 푸르게 기우나니   저들로 하여 일제히 일어나 어깨동물 하도록 이 땅에 정령 가득 불어넣고 달아나는 이 누군가. -「봄바람」전문   만물에 존재하는 정령은 바람의 작용에 의해 생멸을 거듭한다. 바람은 이들의 생멸을 주관하는 존재이다. 바람이 우주만물에 생명력을 더하도록 소임을 받았다. 봄에 부는 바람은 꽃들을 피워 올리고 꽃들이 열매를 맺는데 기여한다. 바람은 곧 우주를 주재하는 신의 입김이며 숨이나 호흡이다. 인간에게도 이 숨은 생명이며 숨을 거두는 것은 곧 죽음이다. 그러므로 바람에 기대지 않는 만물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시환의 시가 바람에 특히 주목하고 바람을 형상화하는 시가 많은 수를 이루는 것은 이 때문이다. 바람에 관한 다른 시편들을 읽어보자.   먼 옛날 할아버지가 대나무에 구멍을 뚫어 천 가지 만 가지 마음의 소리를 내듯 하늘과 땅 사이 커다란 구멍을 열고 닫으며 만물에 숨을 불어 넣고 만물의 혼을 다 빼가며 천 가지 만 가지 빛깔의 소리를 내는 당신의 피리 연주. 바람소리에 귀를 묻고 귀를 기울이는 동안 이미 한 생이 저물어가듯 또 한 생명의 싹이 돋는구나.   하늘과 땅 사이 커다란 구멍을 열고 닫으며 크고 작은 바람으로 만물에 숨을 불어 넣고 만물에 혼을 다 빼가며 이 땅 가득 부려 놓는 당신의 말씀이여, 사랑이여. -「바람소리에 귀를 묻고」전문   이 시에서 당신은 우주만물을 만들고 주재하는 존재이다. 당신의 연주에 따라 만물은 생멸한다. 거기에는 말씀과 사랑의 이법으로 연주된다. 말씀은 곧 생명의 말씀이다. 신이 하늘과 땅을 만들고 하늘과 땅 사이의 커다란 구멍을 열고 닫으며 크고 작은 바람으로 숨을 불어넣기도 혼을 앗아가기도 하면서 우주만물은 어떤 질서를 가지고 움직인다. 이 질서가 우리 인간의 과학적인 능력으로 다 알아낼 수 없다. 그것은 과학적 인식을 넘어 생명의 말씀인 진리로만 이해될 수 있고 얼마간 감지 될 수 있을 뿐이다. 신은 그 우주적 진리를 다 드러내지 않고 숨긴다. 기독교의 계시 진리는 감추어진 것을 드러내 보인다는 의미이다. 신이 숨긴 진리는 언뜻언뜻 인간에게 감지될 뿐이다. 신의 질서는 말씀과 사랑의 이법임을 이 시에서 시인은 말하고 있다.   눈을 한 번 감아 보아요. 이 땅에 바람의 고삐를 풀어 놓아 온갖 생명의 뿌리를 어루만지고 가는, 바쁜 손이 보여요.   눈을 한 번 더 감아 보아요. 이 땅에 바람의 고삐를 풀어놓아 온갖 생명의 꽃들을 거두어 가는, 분주한 손의 손이 보여요.   그렇게 귀를 한 번 닫아 보아요. 이 땅 위로 넘쳐나는, 서 있는 것들의 크고 작은 숨소리도 들려요.   그렇게 귀를 한 번 더 닫아 보아요. 이 땅에서, 이 하늘에서 넘쳐 흐르는, 바람의 강물 소리를 들려요. 바람의 고삐를 풀어놓는 손과 손이 보여요. -「눈을 감아요」전문   이시환에게 시를 쓰는 행위는 무엇인가? 이 시에서 간취되는 것은 그가 우리 눈이 보이지 않는 세계를 꿈꾸는 것이다. 그의 시적 뮤즈는 바로 이런 세계이다. 이 시에는 그가 자신의 시가 무엇에 이르고자 하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그는 우리에게 신이 감추어둔 비밀을 하나씩 불러내어 우리 앞에 보여주고자 한다. 시적 언어가 가 닿을 수 있는 범위 내에서 그는 언어가 지닌 의미 밖의 것을 드러내고자 한다. 바람이 생명의 뿌리를 만지고 가는 손이 우리에게 보이는가? 그것은 오히려 눈을 떠서 보면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눈을 감아 보라고 한다. 우리의 시각적 눈으로 알 수 없는 세계에 대한 개척은 그가 시를 쓰는 목적이며 시인으로서의 그의 존재 이유이다. 바람이 온갖 생명의 꽃들을 거두어 가는 것 또한 우리 눈에 보이지 않듯 이 신비의 세계로 우리를 이끈다. 우리는 눈앞에 누군가가 숨을 거두는 모습을 볼 수는 있으나 그 숨을 거두어 가는 존재는 볼 수 없다. 이와 같이 바람은 우주만물의 숨을 관장하는 생명력이면서도 숨을 거두어 가는 존재이다. 우리의 귀를 닫아야 오히려 존재하는 것들의 크고 작은 숨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박인 눈과 귀는 보이지 않는 세계를 간취하는 데는 무의미함을 시인은 말하고 있다. 눈과 귀를 닫음으로써 보이고 들리는 세계의 비밀을 그는 꿈꾼다. 만물에 깃든 정령과 그의 뮤즈는 결코 가시적인 세계에 있지 않다는 것을 이 시에서 확연히 알 수 있는 것이다.   바람이 분다.   얼어붙은 밤하늘에 별들을 쏟아 놓으며 바람이 분다.   더러 언 땅에 뿌리내린 크고 작은 생명의 꽃들을 쓸어 가면서도 바람이 분다.   그리 바람이 부는 동안은 저 단단한 돌도 부드러운 흙이 되고, 그리 바람이 부는 동안은 돌에서도 온갖 꽃들이 피었다 진다.   바람이 분다.   내 가슴 속 깊은 하늘에도 별들이 총총 박혀 있고, 내 가슴 속 황량한 벌판에도 줄지은 풀꽃들이 눈물을 달고 있다.   바람이 분다. -「벌판에 서서」전문   시인은 바람 부는 벌판에 홀로 서서 바람이 밤하늘에 별을 쏟아 놓거나 크고 작은 생명을 쓸어가거나 단단한 돌이 부드러운 흙이 되어가는 소리를 듣는다. 이 모든 것이 바람이 부는 동안에 일어나는 일들이다. 시인은 그 생명들의 생멸을 홀로 바라보거나 들으면서 자신의 가슴 속 황량한 벌판과 풀꽃들의 눈물과 마주한다. 시인의 가슴은 황량한 벌판이다. 시인은 고독한 자이다. 고독하기에 바람이 하는 일을 읽는다. 시인에게 고독함이 없거나 황량함이 없다면 그는 아무것도 읽어낼 수 없다. 그의 가슴이 눈물로 가득 차 강물 되어 흐를지라도 시인은 시 쓰기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바람이 끊임없이 불듯이 시인은 끝없이 시의 뮤즈를 찾아 고독함과 황량함을 견디면서 그냥 갈 것이다. 이시환은 그것을 잘 견딜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에게 우주의 만물은 곧 비워진 참 ‘나’이고 곧 신이기 때문이다. 그의 고독함과 황량함은 바람이나 우주만물과 밀어를 나누는 이유이고, 인어공주가 왕자를 사랑한 나머지 찌르지 못하고 바다에 뛰어들었듯이 시의 뮤즈에 대한 시인의 갈구는 스스로 사랑한 나머지 투신할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1180    詩作初心 - 마음속 "여래"를 찾기 댓글:  조회:4212  추천:0  2016-03-12
사막의 여정-내 안의 ‘여래’를 찾아 -이시환의 시집『상선암 가는 길』에 부쳐-       심종숙(시인, 문학평론가)     그리스도교 동방교회에서 사막의 교부라 불리우는 이들은 하느님을 찾아서 이 세상의 부와 명예, 관계들을 끊고 스스로 고독을 찾아 나섰다. 그들은 사막의 동굴이나 보잘 것 없는 바위틈 같은 곳에 거처할 곳을 정하고 거친 음식과 불편한 잠자리를 마다하지 않고 신을 찾았다. 왜 이들이 스스로 황량한 사막과 고독을 선택한 것일까? 이들은 대부분 그 시대에 귀족 가문이나 부유한 상가에서 태어나 자랐던 사람들이다. 그들에게는 모든 것이 주어진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인간이 줄 수 있는 부와 명예가 아니라 가난하고 고독하며 내적 고요에 머물면서 오로지 기도에 열중하여 신을 만나고 자신의 삶을 신(神)에게 의탁하기 위해서였다. 그 무시무시한 사막의 거대한 침묵 속에서, 인간이 살기에는 최악의 조건인 사막에서 그들은 내적 고요에 머물면서 자신을 들여다보고 신을 만났던 것이다. 사막을 찾은 많은 이들 중 그곳을 버리고 다시 세상으로 되돌아간 이들도 있지만 오늘날 사막의 교부라 일컬어지는 성인들은 인간이 견딜 수 없는 사막에서 신을 만났기에 그들의 한 마디 한 마디는 크게 울림을 주고 있다. 이 고대 수도자들의 수행이 오늘날 서방의 모나키즘(Monasticism:수도원 제도)으로 정착하였고, 많은 이들이 불가(佛家)에서처럼 일종의 출가를 하여 기도에 열중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사람을 피하고 침묵에의 사랑, 특히 겸손이라는 그들 소명의 근본적인 요구를 지니고 그들의 어떤 덕행 실천이 누군가에게 회자되면 그 실천을 더 이상 덕행으로 보지 않고 죄악으로 간주하였다고 한다. 이 의미는 그들이 이렇게도 보이는 외적 행위를 숨기려고 애쓴 것과 같이 그들의 영적 신앙생활과 하느님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더욱 조심하며 비밀을 지키고 봉인된 채 남겨두고자 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침묵과 겸손의 자세이다. 사막에서 일어나는 만남들 가운데 특별히 중요하고 은혜로운 만남은 수도생활을 원하는 자가 그 영혼의 가장 깊은 열망에 대한 답변인 평생의 방향전환에 결정적일 수 있는 답변을 간청하면서 위대한 수도자에게 다가가는 일이었다. 지원자들은 자기의 스승이자 영적 아버지인 어느 위대한 수도자에게 본질적인 질문인 ‘어떻게 하면 내 영혼이 구원될 수 있겠습니까’였다. 이 한 마디는 그 사람의 마음속에 함축되어 있는 깊은 갈망과 구원에 대한 것이다. ‘제게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어떻게 하면 제가 구원되겠습니까?’라는 의미는 모든 것, 즉 가정, 쾌락, 부를 떠나버린 이에게 영적 투쟁의 어려움과 고뇌에 빠진 채 홀로 사막에 있는 구령자(救靈者)의 다급한 구조요청인 셈이다. 하우스 헬 교부는 ‘우리는 구원과 완덕을 너무나 분리시켜 생각한다. 믿음을 가진 선조들은 구원(soteria)의 개념 안에 완성의 개념을 포함시켰으니, 그것은 총체성, 완전한 건강, 결점 혹은 질병으로부터의 해방을 뜻하는 ’소테리아(soteria)‘라는 말 자체의 의미에 의거한 것’이라 하여 구원은 곧 해방을 뜻하였다. 이 구원은 종교를 믿든 믿지 않든, 수행자이든 아니든 세상에 사는 모든 이에게 삶의 목표일 것이다. 구령자의 ‘내게 한 말씀 해주십시오’는 러시아의 대문호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조시마 장로에게 하느님의 말씀이나 신탁을 듣기 위해 상담하러 오는 사람들을 연상시킨다. 또 조시마 장로가 죽고 뒤를 이어 그의 제자인 알료샤를 통하여 하느님의 계획이 이루어진다. ‘하느님의 사람’을 만나고자 하는 이들은 영적 육적 문제에서 부자유스러웠고, 그러기에 자기 구원을 위해 그를 만났던 것이다. 교부들이나 원로들은 바로 하느님이 임재해 계시는 사람이었으므로 그들에게 하느님을 만나는 심정으로 찾아가서 ‘한 말씀’ 즉 성경에 의거한 복음적 구원의 방법을 구했던 것이다. 성 바실리오 교부는 ‘구원은 영원한 지복과 아울러, 현세에서는 영혼의 건강에서 오는 평화의 낙원이라’ 하여 구원이 영원한 지복과 더불어 영혼의 건강에서 오는 평화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내적 고요는 바깥세계와 끊음으로써 침묵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며, 그 고독이 가져오는 고요 속에서 명상(瞑想)이나 관상(觀想)을 할 수 있게 된다. 세상을 등지고 사막으로 온 이들에게 구령은 절체절명의 순간이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에 나오는 사막과 같은 곳이다. 조종사와 어린 왕자는 사막에서 절체절명의 순간을 맞이한다. 동화 속의 사막은 두 주인공에게 고통의 시간이고, 어린 왕자의 고민을 들어주기 위해 조종사가 비행기 수리를 일시적으로 포기할 때 두 사람 간의 교감과 소통이 일어난다. 그 둘이 발견한 사막의 오아시스는 새로운 삶에로 나아갈 수 있는 생명수 역할을 한다. 그들은 죽음과 같은 사막에서 생명을 피워 내거나 자신이 지닌 한계와 부자유스러움으로부터 거듭나거나 해방된다. 이때의 사막도 역시 사막 교부들이 처한 사막과 유사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하겠다.   이시환 시인의 시집 『상선암 가는 길』은 현실세상의 부조리함과 적대감에서 탈출하거나 초월하고자 하는 시도에서 쓰여졌다. 그는 자서(自序)에서 ‘세상사로 마음이 혼란스럽고 무거워질 때마다 나는 명상과 침잠을 거듭하는 이중적인 삶을 살아온 것’이라고 밝히듯이 이 시집은 명상과 침잠의 시정(詩情)으로 쓰여졌다. 그가 ‘내 한 몸에 생태가 전혀 다른 두 그루의 나무를 키워오면서 현실 비판적인 시와 그를 초월하려는 듯한 관조(觀照)와 직관(直觀)에서 나오는 선시(禪詩)에 가까운 시들을 써왔던 것’이라고 말한 바와 같이, 이 시집이 부조리하고 욕망, 무지, 모순으로 가득 찬 현실로부터 초월하여 관조와 직관을 통해 마음을 침잠 시키고 내적 고요를 이루어 선시에 가깝지만 서정성이 풍부한 시정을 일구어 낸 것이다. 현실세상은 분명 악하여 인간을 자유롭게 하지 않고 부조리와 모순, 욕망, 무지로 가득 차 인간을 병들게 한다. 이 시집은 총 80여 편의 시가 실려 있고 제1부에서 제5부로 나뉘어져 있는데 제1부에서 제4부까지는 국내의 산사(山寺)와 산(山)을 여행하며 쓴 시들이고 제5부는 남아메리카 대륙과 캐나다를 여행하면서 쓴 시들이다. 중요한 것은 일상을 등지고 여행을 하면서 얻은 깨달음을 시로 표현하였다는 점이다. 이 시집에서는 여행이 중요한 테마이다. 명상과 침잠을 위하여 떠나는 시인에게 여행은 내적 고요를 찾기 위한 것이기에 여기에서 여행은 전술한 소테리아에 이르고자 하는 한 방법[불가(佛家)에서는 행각(行脚)이라 함]이라고 생각된다. 이 시집의 첫 자리에는 「상선암 가는 길」을 놓았는데 함께 읽어보자.   하, 인간세상은 여전히 시끄럽구나. 문득, 이 곳 중선암쯤에 홀로 와 앉으면 이미 말(言)을 버린, 저 크고 작은 바위들이 내 스승이 되네. -2004. 7. 26. 01:46 「상선암 가는 길」 전문   언어를 절제한 이 시에는 1행에서 말하듯 산 밑의 인간세상은 시끄럽다고 하여 결코 인간에게 내적 고요의 평화를 주지 않는다. 그래서 홀로 떠나는 이 길에서는 말을 버렸다고 하여 침묵 속의 여행이 되는 것이다. 다만, 그에게 스승은 말없는 크고 작은 바위들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시어는 인간세상의 시끄러움, 단독자, 침묵, 바위, 스승 등이다. 상선암은 수행자의 거처이다. 이 거처는 인간세상을 버리고 온 이들의 작은 거처이다. 옛날의 은둔자나 은수자들처럼 세상을 등지고 가족을 비롯한 모든 인간관계, 쾌락, 부와 명예를 버리고 구령을 택해 온 이들이 거하는 곳이다. 그들이 수행하는 곳으로 가는 길에서 시인은 침묵 속에 홀로 크고 작은 바위들을 스승 삼아 가는 것이다. 작은 바위가 시인에게 스승이 될 수 있는 것은 이 길에서 침묵을 가르쳐준 사물이기 때문이다. 이 자연물의 대상을 시인은 그의 영적 아버지인 스승으로 부른다. 시인은 인간을 스승으로 삼지 않고 자연물인 크고 작은 바위가 지니는, 오랜 세월 비바람에도 끄덕하지 않고 위대한 침묵의 비밀을 숨겨온 말없는 바위가 스승이 되는 것이다. 이시환 시의 특징 중 하나인 자연물의 대상을 인격화하여 친밀한 교감과 소통을 하는 모습은 이 시에서도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시집에 수록된 시들 중에는 날짜와 시간을 정확히 부기해 둔 것도 있는데 이것은 시인의 특별한 의도라 여겨진다. 여기에는 여행을 하고 와서 시를 쓴 시간이거나 여행 중에 그 때 그때 시를 쓰거나 시를 쓰기 위해 창작 메모를 하거나 시의 모티프나 장소가 되는 여행지에 이른 시간 등을 의미할 것으로 보인다. 그 어느 쪽이냐에 따라 시의 해석이 또한 달라질 수 있겠다. 만약, 이 시가 2004년 7월 26일 01시 46분에 상선암 가는 길에 쓰여진 시라면 현장성이 아주 강하고, 시인은 캄캄한 한여름밤에 홀로 야간산행을 하다 잠시 작은 바위 위에 자신의 몸을 부려놓고 명상에 잠겨 이 시를 쓰거나 구상하였다고 보아도 좋고, 아니면 상선암 간 때와 시간을 메모해 두고 여행을 마친 후 돌아와서 그 때를 기억하며 시를 썼을 수도 있겠다. 어느 쪽이든 이 시를 이해하는 자가 그냥 지나쳐버려서는 안 되는 부기인 것임에는 틀림없다.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여행을 하면서든 하고 난 후에 썼건 간에 장소성과 시간성을 시인이 중요시하고 있다는 데에는 독자도 함께 공감해야 할 부분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상선암 가는 길에서 보여준 자연물인 바위와 소통하는 자세는 작품 「벚꽃 지는 날」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간밤에 마음과 마음이 통했는가?   아주 가벼웁게 바람의 잔등을 올라타는 저 수수만의 꽃잎들이 추는 군무(群舞)가 마침내 반짝거리는 큰 물결을 이루어 가는 것이,   그 모습 눈이 부셔 끝내 바라볼 수 없고 그 자태 어지러워 끝내 서 있을 수도 없는 나는, 한낱 대지 위에 말뚝이 되어 박힌 채 그대 유혹의 불길에 이끌리어 손을 내어 뻗는 것이,   간밤에 마음과 마음이 통했는가?   아주 가볍게 몸을 버려서 하늘을 나는 꿈을 꾸는, 저 흩날리는 꽃잎들의 어지러운 비상(飛翔)! 그 마음 한가운데에서 일어나 소용돌이치는 법열(法悅)의 불길을 와락 끌어안는다, 나는   -2003. 04. 22. 00:05 「벚꽃 지는 날」전문   이 시에서는 벚꽃이 일제히 피었다가 일제히 지는 허무함을 노래하고 있지 않다. 대개의 일본의 고전시가에서 벚꽃을 노래할 때는 삶의 무상함을 노래했다. 그러나 이 시에서는 법열의 기쁨과 환희를 노래하고 있다. 무리 지어 하얗게 지는 흰 벚꽃은 마치 간밤에 그들끼리 깊은 정을 나눈 것처럼 함께 사뿐히 바람의 잔등을 올라타고 군무를 춘다. 이 군무는 희다 못해 반짝이는 큰 물결이 된다. 그러니 시적 화자는 그것을 눈이 부셔 볼 수 없고 현기증을 느끼며 지는 벚꽃이 이루는 군무에 넋이 나간다. 그 유혹의 불길에 만지고픈 충동이 인다. 그러다가 벚꽃은 아주 가볍게 몸을 버려서 하늘을 나는 꿈을 꾸며 어지럽게 비상한다. 시인의 마음은 그 가운데에서 소용돌이치는 법열을 느낀다. 그래서 시인의 마음과 벚꽃의 마음이 하나가 되기에 ‘간밤에 마음과 마음에 통했는가?’ 하고 자신과 군무를 추다 비상하는 벚꽃을 두고 자문을 해보는 것이다. 시적 화자는 자신도 이 벚꽃들처럼 한없이 마음이 가벼워져서 날아오르고픈 것이다. 법열의 불길이 일게 된 것은 벚꽃의 군무를 목도하여 일으킨 것으로 시인은 이 자연물에 마음을 통하는 것이다. 그러니 자연물을 인격화하여 대화를 나누고 끝없이 바라보다 문득 법열의 환희를 느낌으로써 시인 자신의 마음도 묶여 있는 것으로부터 가벼워지고 해방된다. 「고강 댁」 1, 2, 3 연작시는 처자를 버리고 암자 아닌 암자에서 홀로 고독과 자연을 벗하며 살아가는 은둔자의 거처에 찾아온 봄과 철따라 자연물의 변화를 통해 무상함을 노래하고 있다. 인간과 상관없이 끊임없이 변화하는 자연을 통해 시인은 생명과 말씀을 읽는다.   잠시 잠깐 피었다지는 들꽃 같은, 바람이야 불거나 말거나 사람이야 있거나 없거나 염주알이 구르듯 흘러내리는 화양계곡의 물소리를 귀담아 보게나.   아무런 의미를 담지 않아서 되려 부족할 것도 속박될 것도 없이 낮이고 밤이고 흘러내리며 물로서 한 몸이 되고 물길로서 큰 뜻을 이루어가는 화양계곡의 물소리를 귀담아 보게나.   피아노 건반 위를 미끄러지듯 달려가는, 물살의 손과 손의 숨이, 간간이 바람을 일으키며 꽃을 피우며 큰 산 깊은 계곡의 말씀이 되어 흘러내리네. 큰 산 깊은 계곡의 생명 되어 흘러내리네.   -「화양계곡에서」전문   이 시는 화양계곡의 물소리가 시적 모티프가 되고 있다. 끊임없이 아무런 의미를 담지 않고 흐르는 물은 부족할 것도 속박될 것도 없이 그저 흐르기만 한다. 그래서 물로서 한 몸이 되고 물길로서 큰 뜻을 이루어 나간다. 흐르는 물은 사람이 있거나 없거나 바람이 불거나 불지 않거나 상관없이 도도하게 흐른다. 때로는 숨 가쁘게 달려가기도 하여 물살의 손과 손의 숨이 바람도 일으키고 꽃도 피운다. 큰 산 깊은 계곡의 물이 마침내 살아있는 말씀과 생명이 되어 흐른다. ‘염주알 구르듯 흘러내리는’의 비유는 참으로 종교심을 일으키는 비유(比喩)이고 말씀과 생명이 되어 흐른다는 보리심, 거룩한 영의 임재를 느끼게 한다. 아직까지 계곡의 흐르는 물소리로 이렇게 발심을 일으키게 하는 시를 나는 읽은 적이 없다. 물이 아무런 의미를 담지 않았다는 것은 어떤 조건에서든 흘러갈 수 있는 이유이다. 물은 좁은 곳이든 큰 돌이나 바위가 버티고 있는 곳이든 아랑곳하지 않고 그것을 비켜 흘러간다. 이래서 안 되고 저래서 안 되는 것이 없다. 즉 차별이 없고 그저 평등의 경지만이 있다. 완전히 비우고 있기에 부족할 것도 속박될 것도 없다. 그런 물은 큰 뜻을 이루는 말씀과 생명이 된다. 이 시에서도 시인은 물[水]을 인격화하고 있다. 물살의 손과 손의 숨, 한 몸, 큰 뜻을 이룬다는 표현에서 더 두드러지고 있다. 물의 이 친화성과 자유로움, 개방적이며 해방됨은 물소리를 듣는 이로 하여금 종교심을 일으키거나 묶여있는 이들은 소테리아를 느낀다. 시인이 화양계곡의 물소리를 들어보라고 권고하는 까닭은 거기에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도도하게 흐르고 있음을 알고 독자와 같이 나누고 싶은 것이다. 좋은 것을 혼자 독차지 하지 않고 같이 나누고 싶은 마음이고 같이 나눈다는 것은 소통과 교감이다. 그냥 듣고 말거나 지나치고 말 깊은 산 속의 계곡 물소리가 시인의 촉수나 인식에 이르면 이렇게 변화된다. 그래서 시인은 우주만물에 깃든 거룩한 영을 감득하여 그것을 나누는 자이다. 시인에게 감득된 화양계곡의 물소리는 시「有無同體」의 “집착이요, 욕심이요, 욕망의 덩어리”인 나의 역사를 뒤바꾸는 거룩한 힘인 것이다. 이러한 힘의 작용은 시인의 눈에 보이는 사물들과 더욱 깊은 관계를 맺음으로써 일어난다. 이 관계 맺기는 주체의 자기 지우기의 차원에서 이루어진다고 생각된다. 대상을 나와 동일시하거나 대상과의 소통과 교감이 이루어질 때 대상에 몰입하게 되고 대상이 건네 오는 말을 들을 수 있게 된다. 소통과 교감은 자기를 비워둘 때 가능한 일이다.   두 눈을 지그시 감고 두 눈을 지그시 감아 버리고서 뛰어내리라 하네. 뛰어내리라 하네.   치마를 뒤집어쓰고 천 길 벼랑으로 떨어지며 춤을 추는 저 붉디붉은, 작은 복사 꽃잎들처럼 날더러 뛰어내리라 하네. 뛰어내리라 하네.   네 깊고 깊은 미소가 피어나는 無心, 無心川으로 뛰어내리라 하네. 뛰어내리라 하네.   -「芙蓉抄」부분   이 시는 시적 화자가 덕진공원에 핀 연꽃을 바라보다가 연꽃의 이끌림에서 시상(詩想)을 떠올린 듯하다. 연꽃이 시인에게 말한다. 두 눈을 지그시 감고 뛰어내리라고. 천 길 벼랑으로 떨어지는 복숭아꽃처럼 그렇게 뛰어내리라고 한다. “깊고 깊은 미소가 피어나는 무심, 무심천으로”라고 하여 무심의 경지로 자기를 던지라고 연꽃이 주문한다. ‘무심(無心)’이란 마음의 번뇌와 업장이 소멸된 적멸보궁의 상태를 말한다. 그래서 ‘무아(無我)’라고도 한다. 번뇌와 업장을 소멸시키는 길은 나를 지우고 비우는 길밖에 달리 방법이 없다. 욕망과 욕심 덩어리인 주체를 지우기 위해서는 주체의 산화(散華) 즉 복사꽃이 천 길 벼랑으로 낙화하듯이 자기를 던지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자연의 꽃들은 때가 되면 피었다가 때가 되면 말없이 낙화한다. 인간만이 이 떨어짐, 자기 지우기를 하기가 힘들다. 왜냐하면, 주체의 욕망의 역사는 쉽게 자기포기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이 자연의 이법에 따라 살려고 한다면 번뇌와 업장의 소용돌이에서 해방되어야 하며, 그 길은 무심의 경지 자기 비우기에 이르는 길이 된다. 연꽃이 더러운 진흙 속에서도 영롱한 꽃을 피워내듯 번뇌와 업장을 남김없이 불태우고 바꾸어 한 송이 연꽃을 피우는 이치는 마음을 무심의 경지에 이르게 하여 적멸보궁에 이르게 하는 것과 같다. 이러한 마음이 바로 청정의 상태이고, 위없는 보리심이며, 여여한 마음인 것이다. 이것은 곧 구령의 길에 이른 마음이고, 해방된 마음의 경지이다. 그 무엇에도 계박(繫縛)되어 있지 않는 마음이다. 사물과 소통과 교감을 이루면서 얻어지는 것은 말씀과 생명수이다. 작품 「물」에서는 마실 한 모금의 물에서 말씀과 생명수를 건져 올린다.   마실 한 모금의 물 앞에서조차 우리는 깊이깊이 생각해야 하네. 넘치는 물이라 해서 모두가 우리의 갈증을 풀어 주지 않으니 말일세.   마실 한 모금의 물 앞에서조차 우리는 간절히 기도해야 하네. 흐르던 물조차 마르고 마르면 옥토가 사막이 되니 말일세.   마실 한 모금의 물 앞에서조차 우리는 진실로 감사해야 하네. 한 방울의 물이 곧 너와 나의 생명이란 꽃을 피우는 불길이니 말일세.   깨끗한 한 방울의 물속에 해맑은 물 한 방울 속에 크고 작은 만물의 숨이 깃들어 있고 그것으로 정녕 단단한 말씀이네.   -「물」전문   이 시에서는 ‘넘치는 물’과 ‘마실 한 모금의 물’이 대조를 이룬다. 넘치는 물은 우리의 갈증을 풀어주지 못하지만 마실 단 한 모금의 물은 우리의 갈증을 풀어주고 너와 나의 생명의 꽃을 피우는 불길이 된다. 그러니 넘치는 물은 갈증을 풀어주지 못하고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우리에게 오직 중요한 것은 한 모금의 마실 물이란 뜻이다. 인간이 살아가면서 많은 것들을 필요로 하고 중요시하여 이것도 쫓고 저것도 쫓지만 우리에게 정작 필요한 것은 물 한 방울 속에 만물의 숨이 깃들어 있고 그것이 곧 생명수인 말씀이라 한다. 말씀은 곧 참다운 진리이다. 동화 「어린 왕자」에는 정원에 피어있는 수천 송이 어여쁜 장미꽃과 왕자가 두고 온 자기 별의 다소 까다로운 한 송이 장미꽃이 나온다. 어린 왕자에게 수천 송이 장미꽃은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그에게는 오직 자기별에 두고 온, 자기를 떠나게 만든 바로 그 한 송이 장미꽃이 의미가 있을 뿐이고 거기에는 어린 왕자와 장미꽃이 관계가 맺어져 있기 때문이고, 수천 송이 장미꽃은 어린 왕자와 아무런 관계가 맺어져 있지 않은 점이 의미를 갖지 못하는 이유이다. 이것은 후기산업사회의 물신주의가 새로운 디자인과 새로운 트렌드의 상품들을 대량으로 쏟아내지만 그것이 소중하게 생각되지 않고 새로운 것만을 욕망하게 하는 상품들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의미를 갖지 못하는 것과 같다. 얼마든지 교체가 가능한 상품에는 소중한 관계 맺기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유효기간이 있을 뿐이다. 한 모금의 마실 물 앞에서는 감사하고 기도의 마음이 될 수밖에 없음은 그것이 말씀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이러한 관계 맺기는 「용정(龍井)차를 마시며」에서 소통과 교감이 부드러움으로 용해된다.   너와 가까이 마주 앉노라면 창밖에 함박눈이 펑펑 쏟아져 내려도 세상 시끄러운 줄 모르고,   너와 단둘이 마주 앉노라면 높은 파도가 내 안에서 일어도 물에 젖은 내가 있는지조차 모르네.   부드러움의 그 깊이를 탐하는 나와 그런 나를 녹여주는 네가 있을 뿐….   -2004. 01. 18. 14:55 「용정(龍井)차를 마시며」전문   이 시는 날짜가 부기 되어 있는 바와 같이 추운 겨울날 오후에 시인은 용정에서 생산된 차를 마신다. 차와 만나는 시간 동안은 창밖에 함박눈이 내려도 세상 시끄러운 줄 모른다. 그만큼 고요하다. 그리고 시적 화자의 내면에서 일어난 높은 파도로 물에 젖어 가여워진 자신의 모습마저도 잊는다. 차를 마시는 시간 동안 이렇게 안과 밖으로 일어나는 번뇌를 잊는다. 그것을 계속 기억하면 마음이 비워진 상태가 아니다. 그것을 잊을 때 마음이 비워진다. 그렇게 잊을 수 있는 이유는 차의 부드러운 깊이를 탐하는 나와 그런 나를 말없이 녹여주는 차가 있기 때문이다. 시적 화자는 여기에서 차를 ‘너’로 부르고 있다. 차는 하나의 사물이지만 여기에서 차는 나를 따뜻이 녹여주는 깊고 친밀한 연인이 되어 있고 이렇게 둘이서 마주하는 시간에는 안과 밖의 모든 번뇌를 잊게 되고 둘만의 비밀스럽고 고요한 경지를 나누는 것이다. 겨울 오후 3시경의 나른함 속에서 차와 시적 화자 나는 아주 감미롭게 만나는 순간이다. 입 속의 혀끝에서 감지되는 차의 깊고 풍부하고 부드러운 미각의 자극을 불러일으키는 시여서 촉각과 미각, 차를 바라보는 시각의 감각이 융해되고 있다. 작품 「바람 속에 누워」에는 바람과 소통과 교감을 하는데 여기에는 이시환의 제4시집 『추신』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 ‘눕는다’는 행위와도 긴밀히 연결되고 있다.   바람 속으로 알몸을 눕혀 보게나. 네 알몸의 능선을 핥고 지나가는 그 놈의 혀끝이 감지되면서 무거운 몸뚱이조차 티끌처럼 가벼워지나니.   영영 바람 속으로 누워 버려 그 놈의 정령과 입 맞추어 보게나. 누추한 몸뚱이조차 바람이 되어 백 년이고 천 년이고 흘러가나니.   붙잡아 두려하면 사라져 버리고 풀어 놓으면 다가오는 바람이여, 하늘과 땅 사이 만물이 다 네품에서 비롯되고 네품에서 끝이 나는 것을.   -「바람 속에 누워」전문   시적 화자는 바람 속에 알몸으로 누워서 바람을 감지하라고 권한다. 알몸으로 눕는다는 것은 가장 정직하면서도 가장 낮은 모습을 취하는 것이다. 『추신』에서 죽은 자는 관 속에 누워 있었고, 그것처럼 누워보라고 시적 화자는 자주 말한다. 눕는 행위는 바닥에다 몸을 붙이는 것으로 땅 속과 가까우며 직립보행의 반대 행위이다. 누워서 바라보면 우주만물들이 다 커 보이고 가장 낮은 자가 되는 것이다. 또 눕는다는 행위는 남녀가 교접을 할 때의 행동이거나 아프거나 죽었을 때 인간이 취하는 모습이기도 하다. 이 시에서는 시적화자가 알몸으로 바람에 쏘이길 원하고 바람의 혀끝이 몸을 핥고 지나면 무거운 몸뚱이도 바람처럼 가벼워진다고 한다. 바람은 원래 가볍고 지나가는 것이기에 무거운 인간의 육신도 바람처럼 가볍고 지나가길 바란다. 인간은 뭔가 부정적인 일들로 인해 정신이 힘들면 육신이 무거워지고 아파서 드러눕는다. 바람의 애무를 받으면 가벼워진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바람의 정령과 입을 맞추고 누추한 몸뚱이가 바람이 되어 백년이고 천년이고 흘러간다고 한다. 붙잡으면 사라지고 풀어놓으면 다가오는 바람은 흡사 연인들 간의 밀고 당기기를 연상케 하면서 하늘과 땅 사이 만물이 다 바람의 품에서 비롯되고 바람의 품에서 끝이 난다고 한다. 이 시구는 바람은 곧 생멸의 동인(動因)이라는 의미이며, 모든 힘의 근원임을 시인은 말하고 있다.   양 어깨 위를 짓누르는 무거운 짐들을 다 내려놓고,   하늘을 바라보며 누워 있는 몸뚱이조차 벗어 놓아라.   그리하여 우주를 떠도는 먼지처럼 가벼워진 그런 너마저 놓아 버려라.   그리하여 모든 것과의 緣이 끊어져 공간도 없고 시간도 끊긴   세계의 소용돌이가 되어라. 아니, 있고 없음에서 영원히 벗어나라.   -2003. 9. 20. 00:49 「나의 進化」전문   이시환의 시세계를 아주 잘 보여주는 시이다. 그의 시가 태어나는 토대는 불교적 영성에서이다. 이 시에서는 자신마저도 놓아버려서 모든 것과 연이 끊어지고 시간도 공간도 끊겨 있고 없음에서 영원히 벗어나 해탈의 경지를 구가하는 시이다. 이시환에게 있어 구령(救靈)이란 바로 해탈(解脫)이다. 삶에서 생기는 짐도, 육신도, 자아도 모든 것과의 인연도 다 끊어져 존재와 비존재에서 영원히 벗어나 ‘무상도’에 이르는 것이다. 하루의 시작인 새벽 한 시의 시간대에서 시인은 있고 없음을 영원히 벗어나길 바란다. 육신은 ‘한 덩어리 진흙’이거나 ‘한 줌의 먼지’(「화엄사 계곡에 머물며 2」)에 지나지 않음은 사람이 흙에서 피조 되었기 때문이고, 그 숨을 거두어 버리면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나의 進化」는 바로 이런 인식 아래에서 자신의 영적 단계가 거쳐야 할 과정을 잘 보여주는 시이며, 이런 시가 창작될 수 있는 바탕에는 시인의 마음이 구도(求道)에 대한 열정으로 충만해 있기 때문이다. 구도에 대한 열정이야말로 마음이 비워진 상태라고 할 수 있겠다.   바닥에 깔린 바위 모래 나뭇잎 조각들까지 있는 그대로 그 속을 다 드러내 보이는 것이,   바닥에 고인 하늘 햇살 바람까지 있는 그대로 그 속을 다 드러내 보이는 것이,   이리도 맑을 수가 있구나. 이리도 깊을 수가 있구나.   빈 그릇 같은 이 마음도 저와 같아 머물러 있는 듯 끊임없이 제 몸을 떠밀고 내려가 울퉁불퉁 돌들을 넘고 바위틈을 빠져나가며   마침내 눈이 부시게 두런두런 길을 여는 물굽이처럼 이 생(生)에 이 몸을 다 풀어 놓을 수 있을까.   -2003. 4. 1. 20:32 「화엄사계곡에 머물며 3」전문   한 편의 시가 탄생하기 위해서, 더구나 마음의 선정을 담은 한 편의 시를 탄생시키기 위해서 시인은 자신의 마음을 비워둔다. 자기의 마음을 비워놓지 않으면 자연물은 의미 부여되지 않는다. 「화엄사계곡에 머물며 3」은 모두 네 편의 연작시 가운데 한 편으로 시인의 마음 밭[心田]을 잘 들여다 볼 수 있는 시이다. 이시환의 선정을 담은 시는 물과 바람의 이미지를 중핵(中核)으로 하여 이끌어 가고 있다. 시인은 계곡의 물가에 머물며 물속을 들여다본다. 물이 맑아서 그 속을 다 드러내 보인다. 바닥에 깔린 바위나 모래, 나뭇잎사귀까지. 그리고 거기에 겹쳐진 하늘을 바라본다. 거기에 햇살도 바람도 잔잔하게 불고 있다. 물속을 들여다보는 시인의 감수성은 마치 어린 아기와 같다. 거기에는 어떤 경계나 의심이 없다. 다만 “이리도 맑을 수가 있구나/이리도 깊을 수가 있구나”하고 감탄한다. 시인 자신도 이 맑은 물처럼 되고 싶어 한다. 머물러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제 몸을 떠밀고 내려가 돌들과 바위틈을 빠져 나가서 길을 여는 물굽이 되어 이 생(生)에서 자신의 몸을 다 풀어놓고 싶은 것이다. 빈 그릇의 마음이 된 시인은 ‘이 생에서 자신을 다 던지고 가고픈데 그게 가능할까?’고 고요히 자신에게 물어본다. 그 이유는 자연물을 대할 때는 느끼는 감정과 일이나 그 외의 관계에서 사람을 대할 때 느끼는 그것과는 달라진다. 시인이 세상의 부조리와 욕망, 무지 이런 것들로부터 탈출하고자 하는 것도 이 이유이다. 세상 것들에 대해 이렇게 맑은 물을 대하고 있는 것처럼 아기와 같은 마음이 될 수 없는 이유이다. 거기에는 물론 세상의 탓도 분명히 있겠지만, 세상을 탓하고 부정적으로 바라본 자신의 탓도 있음을 시인은 성찰해 낸다. 「여래에게 10」에서,   그동안 내가 부린, 불필요한 욕심은 얼마나 되며, 다스리지 못한 화는 얼마나 되는가? 그동안 떨쳐내지 못한 내 어리석음은 또 얼마나 되더냐? 항하(恒河)의 모래밭을 홀로 거니는 내게   그가 묻네.   -「여래에게 10」전문   하고, 여래가 자신에게 묻는다고 한다. 항하의 모래밭을 홀로 걷는 여정은 시인에게 하나의 영적 도전이요, 투쟁의 공간이며, 시간이다. 그런 영적 단련의 시기에 여래는 나에게 묻는다. 아니 내 속의 ‘참 나’가 여래가 되어 가아(假我)인 현실의 나에게 묻는다. 「여래에게」14편의 시들은 자기 성찰의 시이면서도 비워진 마음으로 여래에게 의탁하여 구령에 이르고자 하는 마음의 여정을 담을 것이다. 일체유심조라 하였던가? 마음이 모든 것을 짓는다는 뜻이다. 만해(萬海)는 그의 시「心」에서 “심은 절대며 자유며 만능이니라”라고 했다. 가아가 비심(非心)이라면 이것도 역시 심이다. “심만이 심이 아니라 비심도 심이니 심외(心外)에 하물(何物)도 무(無)하니라”고 하였다. 「여래 2」에는 “그 마음으로부터/하늘과 지옥이 나오고,/한없이 깊을 수도 있고 얕을 수도 있는, 한없이 무거울 수도 있고 가벼울 수도 있는,/그 마음 안에 모든 것이 있나니/마음의 임자가 되라 하셨나요? 이 몸의 주인은 이 마음이라 하지만/이 마음의 임자는 마음 가운데 마음인가요?”라고 하여 심이 절대며 자유며 만능이라는 만해 시의 의미와 접맥시켜 볼 수 있는 시편이다. 의미적으로 이 시의 연장선상에 있는 「여래에게 11-마음」을 읽어보자.   일만 가지 선의 주인이요, 일만 가지 악의 주인이라 하셨나요?   온갖 ‘생각’이란 파도를 일으키는, 일파만파의 주인인 바다의 욕망인 것을,   이 울긋불긋한 세상의 기쁨이야 슬픔이야,   한없이 깊을 수도 있고 얕을 수도 있는, 한없이 품을 수도 있고 뱉어낼 수도 있는 너의 꽃이로다 향기로다.   -2004. 5. 23. 15:38 「여래에게 11-마음」전문   마음은 온갖 욕망을 일으키는 일파만파의 파도이다가 일만 가지 선의 주인이기도 하다. 그래서 한없이 얕을 수도 있고 깊을 수도 있다. 품어야 될 것일 수도 있고 뱉어내야 될 것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마음 안에 모든 것이 존재한다는 의미는 마음은 하나의 미크로코스모스(Mikrokosmos)이면서 동시에 마이크로 코스모스(Microcosmos)이다. 온갖 것이 하루에도 수없이 떠오를 수 있다. 수없이 욕망한다. 거기에서 하늘도 즉 천국도 지옥도 나오고 선도 악도 나온다. 일체유심조란 말은 그런 마음을 두고 하는 말이다. 다만, 마음의 임자가 되기 위해 마음을 어디에다 매어두어야 하는가? (「여래에게 12-시스템」)에서 시인은 “나는 자유로우나/알고 보면 완벽하게 구속되어 있네.//나는 구속되어 있으나/그 안에서 한없이 자유롭네.//네 생명의 빛깔도, 네 죽음의 향기도/나를 구속하고 있는 당신의 꽃이네.”라고 하여 여래에게 의탁하고 있는 나는 자유로우면서도 구속되어 있고, 구속되어 있으나 자유롭다. 그 이유는 ‘나’의 생명도 죽음도 여래인 ‘당신’의 꽃에 구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여래란 미래의 부처를 의미하는 것으로 나에게 계시될 구원을 상징한다. 나는 그 여래와 동화되어 자유와 구속의 알뜰한 시스템에 의해 작동되는 나가 되어 있다.   몸이라는 욕망의 집 안방에 머물며 그곳으로부터 온전히 벗어나려는 마음을 이 세상에 내놓으셨네.   무거운 이 몸을 가지고는 거추장스런 이 마음을 가지고는 다다를 수 없고 들어갈 수도 없는, 나고 없어짐(生滅)조차 없는 그곳에 이르기 위해 나룻배 노를 저어 물길을 건너고 언덕을 넘고 산과 산을 넘어 끝도 없이 걸어 들어가셨네.   마침내, 당신이 타고온 나룻배도 당신이 걸어온 길과 길도 다 놓아 버리고 당신이 머물고 있는 사실조차 놓아 버려 당신은 비로소 몸을 벗고 마음조차 벗은 초월자 되셨네.   존재하지도 않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닌, 그런 길〔道〕이 되셨네. 그런 법(法)이 되셨네.   -2004. 5. 25. 12:43 「여래에게 14-법도 아니고 법 아닌 것도 아니고」전문   여래는 법도 아니고 법 아닌 것도 아니다. 생멸조차 없는 무상도에 든 여래는 나에게 길이 되고 법이 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득도의 과정에서 무상도에 이르기 위해 나룻배 노를 저어 물길을 건너고 언덕과 산을 넘어 끝없이 걷는 고행의 연속 끝에 타고 온 나룻배도 걸어온 길도 다 놓아버리고 머물고 있는 사실조차 놓고 몸과 마음을 벗을 때 초월자가 된다. 그러기에 존재하지도 않고 존재하지 않은 것도 아닌 스스로 여여한 법이 된다. 이 초월자는 여래이며, 「하늘을 걸어서 오는 이」에서 시인은 누더기를 걸친 걸인의 모습으로 형상화한다.     오늘은 하루 종일 하늘만 바라보았다.   그 어디쯤일까. 첨벙첨벙 하늘을 걸어서 오는 이가 보였다.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그는, 누더기를 걸쳤고, 맨발이었으며, 내 잠시 한눈파는 사이 흰 구름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곳에서 나를 내려다보는 그의 눈은 한없이 맑고 푸르렀으며, 그의 몸은 없는 듯 가벼워 보였다. 휘둥그레진 눈으로 내가 그에게 손을 내밀자 돌연 빛 으로 휩싸여 버린 그를 더 이상 눈이 부셔 바라볼 수가 없었다. 두 눈을 비비며 다시 바라보았을 때는 이미 그가 모습 을 감춰 버린 뒤 텅 빈 하늘만 더없이 깊었다.   오늘 하루 종일 하늘만 바라보았다.   -「하늘을 걸어서 오는 이」전문   이 시에서 시적 화자는 하루 종일 하늘을 바라보았는데 어디쯤에서인지 하늘을 걸어오는 이가 보였다. 그는 첨벙첨벙 물 위를 걸어오고 있다. 하늘이 마치 바다인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 여기에서도 이시환은 물 이미지를 동원하고 있다. 그는 누더기를 걸치고 맨발인 걸인의 모습이다. 흰 구름 위에 앉은 그는 나를 내려다보는데 그 눈이 한없이 맑고 푸르며 그의 몸은 없는 듯 가볍게 느껴진다. 시적 화자 나는 그에게 손을 내밀자 갑자기 그는 빛에 휩싸이고 나는 눈이 부셔서 볼 수 없다. 다시 그를 바라보았을 때 그는 모습을 감추고 하늘은 텅 빈 채 더욱 깊었다. 그런 하늘을 하루 종일 바라보았다는 의미이다. 환시(幻視) 속에서 나타나는 이 누더기를 걸친 이는 여래의 현현일 것이라고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시인이 여래와 동화 내지는 일치 되고자 하는 바람이 이 시에서 짧은 순간이지만 누더기를 걸치고 하늘을 걸어오는 이로 구현되어 있다. 이는 곧 시인의 마음이 선경(仙境)에 이르렀고 그런 마음의 표현으로 읽어진다. 눈에 보이는 대로 말하고 쓴다고 하였다. 그의 눈에 비친 여래의 법신은 어여쁜 한 여인이 아니라 우리 가운데 가난한 이의 모습이었다. 시인의 구도 여정은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가 세상과, 자기 속의 자기와의 사이에서 파열음을 내는 한 그의 영적 투쟁은 계속될 것이다. 그럴 때마다 그가 그 싸움에서 무너지지 않고 사막의 언덕을 넘어 우리 눈앞에 승리의 백기를 꽂을 것이다. 그 백기는 그가 차려주는 천상의 양식이라는 것쯤은 다 아는 사실이다.    
1179    詩作初心 - 로마로 가는 길 여러가지... 댓글:  조회:5015  추천:0  2016-03-12
이시환 시의 리얼리티 : 빼앗긴 이들에게 바치는 헌가   심종숙(시인, 문학평론가)     양파의 껍질을 벗긴다. 마를 대로 말라 표피를 싼 붉은 껍질을 까면 그 속에 매운 즙을 품은 하얀 몸을 보인다. 붉은 껍질은 하얀 몸이 말라서 그렇게 된 거다. 어떻게 흰 몸의 물기가 다 빠져나가 저렇게 붉고 얇은 껍질이 되었을까. 껍질을 까고 땅 속 깊이 뿌리 박아 양분을 섭취했던 뿌리를 도려내고 윗부분의 대궁이 마른 꼭지를 도려내면 둥글고 하얀 양파 하나가 된다. 둥글고 하얗게 손에 쥐어질 때까지 양파는 뿌리와 긴 대궁을 잃었다. 현재의 이 둥글고 흰 몸은 다리와 팔을 잃은 것이다. 그러니까 동체라 불리는 몸통만 남은 것이다. 이것을 반토막 내어 수돗물에 씻어 매운 맛을 없애면 양파는 도마에 오른다. 겹겹이 싸인 양파 조직의 내부는 치밀하다. 저렇게 치밀한 양파는 허망하게 죽었다. 농부의 손에 나의 손에 난도질당한다. 까고 까도 속을 잘 보여주는 않는 이 양파의 강고함은 무너져 버렸다. 단단함도 치밀함도 칼 한번 지나가면 속을 싱겁게 드러낸다. 너무 싱겁게 다 보여주는 양파의 속에는 거의 어린 대궁에 가까운 것이 서 있는 듯하다. ‘속꼬갱이’라고 하였던가? 양파와 다르게 한 사람의 머릿속은 복잡하다. 알 수가 없다. 뇌를 쪼갤 수 없다. 아니 외과적으로 쪼갤 수는 있어도 보이지 않는 생각을 잡아낼 수는 없다. 다만, 그가 하는 말이나 행동을 통해 그의 뇌수 깊이 감추어진 생각들, 의식에서 전의식, 무의식에 이르는 것들을 짐작할 뿐이다. 무의식에서 나온 행동은 본인도 이해하기 어렵지만 타인에게는 더욱 그렇다. 평소의 그의 행동과 다른 말이나 행동들을 대하면서 그 때 그 사람과의 사이에서 벽을 느끼는 것이다. 프로이드식의 이 무의식에 감추어진 것들은 마치 양파의 속꼬갱이와 같을까? 한 시인의 세계도 마치 이 양파 껍질과도 같다. 열어봐도 열어봐도 또 열어야 할 것이 있는 한 편의 작품이라면 독자들은 어떤 매료를 느낄까? 로마로 가는 길이 여러 가지인 것처럼, 카프카의 성으로 들어가는 길은 여러 가지이다. 한 편의 문학 작품이 양파처럼 칼 한번에 속을 다 들어 내어버린다면 얼마나 허망할 것인가. 우리가 부르는 명작이란 의도적으로 정전화된 점도 있지만 최소한 여러 가지 들어가는 길을 내포한 양파와는 다른 것이어야 할 거라고 기대해본다. 한 시인의 시세계가 풍성하고 깊다는 의미는 양파의 껍질처럼 벗기고 벗기는 식이 일변도가 아니라 여러 갈래의 길이 한 곳으로 향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마치 바다로 흘러들어오는 강물들처럼, 여러 시원(始原)을 가진, 여러 지류를 가진, 여러 역사를 가진, 여러 시공간을 가진, 여러 전설과 설화를 가진, 여러 추억을 가진, 여러 모형을 가진, 그런 강물처럼 말이다. 양파는 인간의 탯줄과도 같은 뿌리를 버렸다. 인간의 탯줄이 태아기의 어머니의 피로 양분을 먹고 자라듯 대지의 자궁에다 뿌리를 내려 양분을 섭취했던 뿌리를 버린 것이다. 뿌리가 잘림으로써 대지에 뿌리박고 양분을 섭취했을 때의 기억을 단절시킨 자. 물론 그 기억도 현재의 단절이지만 전의식과 무의식과 의식에는 자리가 잡혀 있을 뿐 현재의 습관은 아닐 뿐이다. 혈연, 지연, 학연의 뿌리에 얽혀있는 것을 잘라버린다. 바다에 흘러들어온 강물은 강물이었을 때를 버린다. 그의 형질마저 민물에서 소금물로 변한다. 이러지 않고서야 어떻게 바닷물과 하나가 될 수 있겠는가 말이다. 서양의 근대가 데카르트(René Descartes)와 블레즈 파스칼(Blaise Pascal)에서부터 시작하여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와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에서 끝나고 파스칼이 말한 파라디그마(전체 성좌)의 변화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요구된다. 탯줄을 잘라버려라. 하나의 탯줄에 달려오는 것들을 잘라 버려라. 혈연, 지연, 집단, 가족, 국가 이런 것들로부터 카프카는 바깥에 있었다. 그의 소설 『성』(1926)에서 K는 바로 그런 주인공이다. 그것은 서구에서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의 상징이었다. 그 어디에도 속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보이는 차별은 아우슈비츠라는 근대의 종말과 무더기 재앙을 낳았다. 거대한 뿌리인 성과 탯줄을 잇고 있는 사람들에게 카프카의 K는 얼마나 위협적인 존재였을까. 거대한 뿌리를 해체하여 잘라내려는 자들과 거기에 큰 뿌리 잔뿌리를 박고 있는 사람들에게 K는 하나의 공포, 전율, 불안의 아이콘이었을 것이다. 결국 K는 성에 들어가기 위해서 왔으나 성 안에 들어가 보지도 못한 채 이방인으로 왔다가 이방인으로 돌아간다. 마치, 알베르 까뮈(Albert Camus)의 이방인처럼. 그러나 성은 강고하게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베일에 가려져 있듯 안개에 둘러싸여 보이지 않게 K에게, 성과 관련된 인물들에게 영향을 주고 있다. 이 성은 오늘날 거대한 뿌리나 잔뿌리와 같은 크고 작은 권력 집단들, 크게는 국가라고 보아도 좋을 듯하다. 현재의 국가경쟁력이란 말에는 힘의 논리가 있고 여전히 양육강식의 논리가 힘이 되어 작동하며 인권이니 자유니 하는 분장을 하고 그 이빨을 숨기는 것이며 평화롭고 아름다운 공원 뒤에 나신을 숨긴 핵탄두미사일의 남근 모양 그것이 그 어딘가를 겨누며 조준되고 있다. 의롭지 못하며 그릇된 힘들이 모여 거대한 성채나 뿌리가 되어 혈연, 지연, 학연 등등과 같은 것들을 포섭하여 작은 성읍들과 잔뿌리들을 포식하고 한 방향으로만 치달으며 분장을 통해 끊임없이 얼굴을 바꾸어 가는 불의한 힘들에는 구토가 밀려온다. 장 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의 『구토 La Nausée』(1938)는 그런 부조리의 톱니바퀴와 모터가 계속 돌아가고 거대한 기계의 작은 부품들인 불의한 힘이 대형 컨베이어벨트에 실려 끊임없이 완제품으로 조립을 원하는, 불의한 힘의 대량생산체제에서 느끼는 권태와 무력감, 삶의 실존을 잃어버린 구토이다. 이런 힘의 대량생산체제에서 유기되고 방치된 이들이 『구토』의 주인공 앙투안 로캉탱이다.   이시환의 시에는 큰 두 줄기의 흐름이 있다. 자연관조와 묵상을 통한 관상생활을 통해 일구어낸 유심론적 시적 깊이와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처절한 몸부림이 그것이다. 후자의 경우는, 그의 시에서 시적 화자가 『성』의 K, 『변신』의 그레고르 잠자이거나 이방인이거나, 앙투안 로캉탱과 같은 억압과 수탈, 경쟁의 대상이 된 끝에 유기나 방치된 자들이다. 현실비판으로 이어지는 후자에 속하는 시편들은 제1시집 『안암동日記』와 제2시집 『백운대에 올라서서』, 제8시집 『상선암 가는 길』의 후반부, 제9시집 『백년환주를 마시며』의 후반부 등에 산재해 있다. 먼저, 제2시집 『백운대에 올라서서』둘째마당-손돌바람-에는 「손돌바람」, 「잡풀・1」, 「잡풀・2」, 「잡풀・3」, 장시에 속하는 「아버지의 일기」가 있다. 주로 조선 말기 봉건제와 일제 강점기 하의 억압과 착취의 대상이었던 하층민들과 조선의 민초들의 고통스런 삶을 형상화 하고 있다. 「손돌바람」을 읽어보자.   그냥 ‘손돌’이라 하네 이름 석자 없어 나는 오며 가며 스치는 대로 그냥 ‘손돌’이라 덕포진과 광성진을 잇는 타고난 業을 거꾸로 지고 살다보니 아닌 몽고바람 불어닥쳐 쫓기는 이 나라 어르신 물 건너 강화도를 재촉한다 가면 어디까지 갈거나 가면 어디까지 갈거나 깊고 험한 손금 따라 노를 저어 가노라니 놀란 아이 성을 내어 한 마디 말로 목을 친다 허허 나무등걸 같은 이 몸이야 두 동강이 나버려 하나는 강화땅이요 다른 하나는 김포땅에 묻혔지만 눈을 감을 수 없는 나는 살아 두 번 세 번 죽는 너를 위해 바람 바람으로 일어나 풀뿌리 사이 겨울을 굴리고 무시로 우리들의 밑둥을 흔들고   -「손돌바람」전문   이 시는 뱃사공인 ‘손돌’에 얽힌 사연을 시로 쓴 것으로 죽어서도 편안히 눈을 감을 수 없어 바람의 혼으로 떠도는 손돌의 비극적 운명을 노래하고 있다. 「잡풀・1」에는 봉건제 아래에서 지주 계급으로부터 시달림을 받은 소작인의 일생을 노래하였다.   가난이란 죗값으로 아내를 저당 잡히고 자식마저 奴와 卑로 바치니 주인나리 재산목록에서나 들랑날랑 사람탈만 쓰면 다 가지는 그놈의 족보도 항렬도 없이 돌멩이처럼 낙엽처럼 이리저리 뒹굴고 저리이리 뒹굴고 나리 나리 개나리 죄 지으면 이 몸이 대신하여 곤장도 좋고 옥살이도 좋아라 이래저래 헤어진 이 몸이야 쥐어 짜 밤을 세우며 심지를 돋우고 돋우면 숯이 되는 이 아침 뼈 속으로 비가 내리다 바람 불고 밤새 젖은 넋, 목을 휘어 깔아놓는 하얀 울음 저승 문고리를 흔들고   -「잡풀・1」전문   「잡풀」은 1, 2, 3편의 연작시로 구성되어 있고, 시적 화자는 「잡풀」 1, 2에서 가난으로 아내를 저당 잡히고 자식마저 노비로 팔린 소작농의 삶을 형상화 하였다. 잡풀 2, 3은 여성 화자인데 아씨의 몸종, 「잡풀・3」은 여종의 슬픔을 노래하고 있다. 처자식은 물론 아내까지 저당 잡히고 그렇게 산 사람들은 잡풀처럼 아무렇게나 길가에 나서 짓밟히는, 아무에게도 주목 받지 못하고 억압 받고 착취당하여 인간 이하의 짐승과 같은 취급을 당하다가 강물에 던져지거나 주인 대신에 곤장을 맞고 헤진 몸으로 저승을 가는 봉건 지주계급들에 착취당하는 하층민을 잡풀에 비유하고 있다. 「아버지의 일기」는 1~6으로 연작시적 구성인데 하나의 시제에 갈무리 하고 있는 시편으로 시인 자신의 아버지의 일생을 통하여 일제 강점기의 억압과 수탈의 역사적 리얼리티를 재구성하고 있다. 거기에는 ‘허리가 휘도록 일 년 내내 가꾼 농사/알맹이는 왜놈들이 빼앗아가고/쭉정이만 가지고 살아가기엔/너무도 기가 차고 배가 고파’하는 아버지, ‘숨길 수 없어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말/어쩌다가 들키기라도 하면/죄지은 사람처럼 주눅이 들어/교무실에 끌려가면 영락없는 호랑이/교장나리’한테 종아리를 맞으면서 ‘조선 땅에 태어난/조선의 아들임’을 깨닫는 우리말을 빼앗긴 아버지, 식민지 관리의 쪽제비 같은 왜놈들의 아들딸과 거기에 빌붙어 사는 면장나리, 순사나리 아들딸 사이에서 차별 받는 아버지, 일본 군국주의 파시즘 하의 총동원체제에서 징용, 징병, 쇠붙이, 곡식 수탈의 역사는 ‘제국주의 매서운 채찍은 우리 알몸 속으로 속으로 파고들어’ 강압에 눌린 아버지의 모습을 재현하고 있다. 이 시에서 아버지는 시인의 아버지만이 아니라 일제강점기의 억압과 수탈의 역사를 살아낸 우리들의 아버지가 됨으로써 이 땅의 아버지들로 의미가 확장된다. 그러한 혹독한 세상을 살아온 아버지이기에 ‘아버지는 좀처럼 말을 하지 않는다’로 시작하는 6의 부분은 주름살과 얼굴 속 두 눈에 침묵만이 고여 조용히 살아가는 노년의 고단한 아버지의 말없는 모습을 통해 아버지의 세월을 이야기하고 있다. 『백운대에 올라서서』의 셋째마당 -달동네-에는「안중근」, 「義兵」, 「一家」, 「놈과 者」, 「조선낫」, 「호미」, 「달동네-질경이의 노래」, 「오동도」, 「백운대에 올라서서」를 실어서 일제에 저항하는 항일 의병과 의사 안중근을, 일제에 항거하는 민초들의 역사를 조선낫이나 호미에다 비유하고 있다.   할아버지가 할아버지에게 아버지가 아들에게 물려준 조선낫은 아들이 손자에게 물려준 넋이라   멀리서 손을 저어 부르면 무뚝뚝한 검은 무쇠 네 얼굴은 차라리 컴컴한 곳간에서나 더욱 빛이 난다   밤을 새며 새며 함마소리에 귀가 트이고 불구덩이 속에서 눈을 뜨는 야무진 몸매의 조선낫이여 밑둥을 쳐도 쳐도 쉽사리 흔들리지 않고 이 빠지지 않는 조선의 뿌리련만 이 민족 모진 역사 지켜오며 닳고 닳아 이제는 혼백으로나 남아 우리들 깊은 상처 속에서나 숨을 쉬는 서슬이 퍼런 無言의 조선낫이여   세상엔 왜낫 양낫도 많다지만 낫일테면 조선낫이라 낫일테면 조선낫이라   -「조선낫」전문   낫은 농경사회의 도구이다. 주로 풀이나 벼를 벨 때 쓰는 것으로 이 시에서 조선낫은 양낫과 왜낫과는 구분이 되는 변별성을 가진다. 낫은 할아버지가 아버지에게 아버지가 아들에게 대대로 물려주는 넋으로 표상된다. 무쇠로 만든 조선낫이기에 컴컴한 곳간에서도 빛이 나고 불구덩이 속에서도 눈을 뜨며 야무진 몸매를 가진 낫이다. 낫이 불구덩이에서 벼려지듯 조선의 민초들도 고통 속에서도 더 단단해지며 야물어진다는 의미를 함축하여 양낫과 왜낫과는 변별성을 가진다. 그래서 낫일테면 ‘조선낫’이라고 주장한다. 이 안에는 한민족의 문화와 정신이 흐른다. 대대로 농경사회를 이루어온 우리네 조상들을 얼이 조선낫에 암유(暗喩)되어 있는 시이다. 낫이 할아버지에서 아버지로, 아버지에서 아들로 이어오는 남성적 이미지의 도구이라면 이와는 달리 호미는 여성적 이미지인 ‘어머니’로 비유되고 있다.   행여 놓칠세라 잠시도 쉬지 않고 하루종일 논두렁 밭두렁 따라 기우뚱 기우뚱 굼벵이처럼 풀을 매며 억척스레 살아온 조용한 아침의 나라 어머니여, 호미여 갸날픈 허리는 어디로 가고 슬프게 슬프게 엉덩이만 커진 이 땅의 우리 어머니여 평생을 호미 하나로 눈물고개 아리랑고개 넘나들며 콩 심고 팥을 심어 가난을 깨우고 아픔을 일구어 왔으니 이제는 너 없이 못살고 나 없이 힘 못쓰는 호미여, 어머니여 너는 지금 흙 속에 묻혀 타다 남은 몸뚱일 마저 풀어 삭히는가.   -「호미」전문   낮이 풀이나 벼를 베는 도구라면 호미는 잡초를 제거하거나 가볍게 땅을 일구는 도구이다. 그러므로 이 호미는 주로 아녀자들이 썼다. 곡식의 성장을 방해하는 김을 매기 위하여 조선의 여인네들은 골을 타고 앉아서 김을 맸다. 여름의 뙤약볕에 고된 노동을 인내하면서 남성들을 도와서 들일을 하는 것이 그네들의 일상이었다. 자녀를 낳고 기르고 집안일을 하면서 낮에는 들이나 밭에 나가서 일을 하였다. 그러니 여인들은 인종의 세월을 사는 동안 마음이 숯이 되었다. 가난을 깨우고 아픔을 일구어 타다 남은 몸뚱일 흙속에 풀어 삭히는 이 땅의 여인네들의 한 생애를 이 호미라는 도구를 통하여 풀어내고 있는 절편의 시라 하겠다. 이제까지는 역사적 맥락에서 살펴본 우리네 민초들의 삶의 리얼리티라면 제1시집『안암동日記』의 시편인「刻印」에서는 ‘나와 눈을 마주치는 살아있는 것들은 모두가 한결같이 나를 향해 독이 묻은 화살을 겨누고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목도하면서 그럴 때 ‘지금-여기’의 시인은 ‘안암동으로 마포로 옮겨다니며 대낮에도 문을 잠그고 꼭꼭 숨어 살아야만 했다’고 어둠의 원인이 된 폐쇄(유폐)의 기억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러한 어둠 이미지들의 연결고리로써 시「강물」에 더 구체화되어 있다.   이제야 겨우 보일 것만 같다. 눈을 뜨고도 보지 못한 나의 눈이 정말로 트이는 것일까. 그리하여 볼 것을 바로 보고 안개숲 속으로 흘러 들어간, 움푹움푹 패인 우리 주름살의 깊이를 짚어낼 수 있을까. 달아오르는 나의 밑바닥이 보이고 굳게 입을 다문 사람 사람들의 가슴에서 가슴으로 흐르는 강물의 꼬리가 보이고, 을지로에서 인현동과 충무로를 잇는 골목골목마다 넘실대는 저 뜨거운 몸짓들이 보일까. (중략) 그런 우리들만의 출렁거리는 하루하루 그 모서리가 감당할 수 없는 무거운 칼날에 이리저리 잘려나갈 때 안으로 말아올리는 한 마디 간절한 기도가 보일까. 언젠가 굼실굼실 다시 일어나 아우성이 되는 그 날의 새벽놀이 겨우내 얼어 붙었던 가슴마다 봇물이 될까. 그저 맨몸으로 굽이쳐 흐르는 우리들만의 눈물없는 뿌리가 보일까. -「강물」부분   어둠 이미지들은 주름살의 깊이, 밑바닥, 무거운 칼날, 눈물없는 뿌리로 표현되고 있으며 이것들이 강물의 물이미지로 형상화되어 유동적이며 유연한 이시환의 시학을 보여주고 있다. 시인 자신의 밑바닥과 입을 굳게 다물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가슴 가슴들에서 한없이 흐르는 어둠의 강물은 흘러가고 시인은 그것을 보는 내면의 눈이 열리며 그 깊이를 가늠하고 그들의 절망과 간절한 기도를, 다시 일어나 외치는 아우성을 보는 것이다. 시「서울의 예수」를 읽어보자.   십자가를 메고 비틀비틀 골고타 언덕길을 오르는 예수 그리스도는 끝내 못 박혀 죽고 거짓말 같이 사흘만에 깨어나 하늘나라로 가셨다지만 도둑처럼 오신 서울예수는 물고문 전기고문에 만신창이가 되고 쇠파이프에 두개골을 얻어맞아 죽고 죽었지만 그것도 부족하여 온몸에 불을 다 붙였지만 달포가 지나도 다시 깨어날 줄 모른다. 이젠 죽어서도 하느님 왼편에 앉지 못하는 우리의 슬픈 예수, 서울의 예수는 갈라진 이 땅에 묻혀서, 죽지도 못해 살아남은 우리들의 밑둥 밑둥을 적실꼬. -「서울의 예수」전문   이 시에서는 시대적 어둠과 고통을 성경의 인물인 예수 그리스도에 비유하여 성경에서의 실재인물 예수 그리스도와 도둑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예수 그리스도는 시대의 불의에 맞서 정의를 외치다가 권력의 폭압에 고문당한 70년대‧80년대 투사들을 상징하고 있다. 그래서 성경적 의미를 뒤집어 ‘하느님 왼편에 앉지도 못하는 우리의 슬픈 예수’라고 하여 분단된 이 땅에 묻혀서 우리의 밑바닥의 고통을 적셔준다고 한다. 제9시집 『백년완주를 마시며』의 후반부에는 이른바 노숙자 연작이라 할 수 있는 「던져진 話頭-안국역의 한 노숙자」, 「원남동의 한 노숙자」, 「신문지 한 장의 무게」가 실려 있다. 그 중에「신문지 한 장의 무게」를 읽어보자.   폭염 속 공원 벤치에 널브러져 이리저리 굴러 다니는 신문지 한 장으로 얼굴을 가리고, 버려지는 족족 물이 살얼음이 되는 거리에서, 지하도 모퉁이에서, 버려진 신문지 한 장 속으로 온몸을 숨기고, 부끄러움조차 잃어버린, 그 마음까지 숨겨도 하룻밤 새 목숨을 보장해 주지도 못하지만 그 얇고, 그 가벼운 신문지 한 장이야말로 구겨진 채 버려진 깡통 같은 이들에게는 두터운 이불이 되고, 깊은 그늘이 되어 주네. 그런 시문지 한 장의 가벼움과 그런 신문지 한 장의 얇음만도 못하는 나는, 냄새나는 그들의 얼굴과 눈빛을 외면하고 돌아서며 침을 뱉으면서도 밤새 그들의 안부를 물으며 안녕을 걱정하네.   -2004. 11. 05. 23:24 -「신문지 한 장의 무게」전문   ‘지금-여기’의 혹독한 사회, 경제적 환경으로부터 밀린 끝에 유기되거나 방치된 자인 노숙자는 ‘구겨진 채 버려진 깡통 같은 이들’이다. 신자유주의의 경제 구조에서 밀려난 이들이 거리를 집으로 삼아 떠돌고 있다. 물질이 넘쳐나지만 남북문제가 심각하여 아프리카의 어린이들은 굶어죽고 체제나 종교에서 오는 문제를 견디지 못하여 난민들이나 탈북자들이 엑소두스(Exodus)를 하고 있다. 그들은 진정한 해방을 위하여 자신의 터전을 버리고 목숨을 걸어야 한다. 이 노숙자들 역시 거리에서 생존하기 위하여 처절한 몸부림을 하고 있다. 인간으로서 지녀야 할 모든 것들이 유기되거나 방치된 그들에게는 박탈되었다. 이들에게 한 장의 신문지는 마음의 이불을 대신하고 있다. 그런 한 장의 얇은 신문지도 되어주지 못하는 시인은 자책하고 있다. 이런 거대한 사회문제 속에서 시를 쓰는 시인이 무슨 힘이 될 것인가. 그러나 시인은 그들을 자신의 시에 등장시킴으로써 이 문제를 공유하려고 한다. 독자들과 함께 아파하며 뭔가 세상이 바꾸어지길 바라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상선암 가는 길』의 후반부에 위치한 남미기행 시편에도 나타나 있다. 이 시편들에는 제국주의자들의 침략의 역사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인디오들의 역사와 동일시된다. 인디오들 역시 유기되거나 방치된 이들이다.   ‘이과수’ 폭포의 굉음이 들리는 것 같은 국립공원 근처 어귀 길바닥에 브라질이나 아르헨티나의 웃음을 잃어버린 인디오들의 얼굴을 바라보노라면 먼 옛날 우리의 조상 농투사니를 만난 것 같아.   잉카제국의 수도였던 ‘쿠스코’ 시내 큰 음식점을 돌며 전통악기를 연주하며 슬픈 노래를 파는, 키가 작고 광대뼈가 튀어나온, 검으튀튀한 얼굴의 인디오들을 바라보노라면 먼 예날 우리의 형제 형제들을 만난 것 같아.   -「내 슬픔의 그림자」전문   스페인과 포르투칼의 식민지였던 남미는 제국주의자들에 의해 유린된 땅이다. 시인은 그 남미의 인디오들에게서 우리의 형제를 본다. 타자를 통하여 나를 보게 되듯이 인디오들에게서 우리의 역사적 리얼리티를 발견하고 있다. 시인에게 남미의 유럽이라 불리는 상파울로, 부에노스아이레스, 리마나 잉카제국의 수도 쿠스코에 가서 본 대성당들은 한낱 침략자들의 힘의 역사가 남기고 간 유물에 지나지 않는다. 이시환은 ‘인디오들을 돼지 소 잡듯이 살육했고,/ 수많은 흑인들의 노동력을 착취하여/한 때 부귀영화를 누린 그들이기에/회개할 것이 그리 많았음일까?’라고 날카로운 비판을 가하면서 인디오들과 역사적으로 억압과 착취의 대상이었던 민초들인 우리를 동일시하고 있다. 그러면서 ‘스페인, 포르투칼 사람들에 의해 유린된/원주민들의 황토 같은 가슴 속에서 자라고 있는/침묵의 절규를 또한 들어보았는가?’(「나의 사랑하는 사람에게」)라고 반문한다. 여기에는 「아버지」에서 보여준 고통의 세월을 산 시인의 아버지이자 우리들의 아버지, 역사 속 우리 형제들의 침묵하는 모습과 겹쳐지고 있고, 그 말없는 침묵이야말로 백 마디의 말로 떠들고 주장하는 것보다 더 큰 힘을 지니고 있음을 시인은 간취하고 있다. 만해의 『님의 침묵』이 침묵하는 님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 것처럼 시인은 침묵 속에 준동하는 역사의 흐름에 귀를 기울인다. 그 흐름은 더 나은 세상을 위하여 도도히 흐르는 역사의 강물처럼 바다에 이르러 폭풍처럼 밀려오는 의롭고 거대한 힘에 의해 한 번씩 심해까지 갈아엎어지는 역사의 흐름일 것이다.  
1178    詩作初心 - 시에서 비움의 미학 댓글:  조회:4697  추천:0  2016-03-12
당신의 품속에서 완상하는 것들과… 2 . 1 -이시환의 시집『백년완주를 마시며』에 부쳐       심종숙(시인, 문학평론가)       백운대 인수봉 만경대 등 삼각산이 시원하게 보이는 집에 살면서 매일 아침 그것과 대면하다 보면 어느덧 하루를 시작하기 전에 그의 안부를 묻는 것이 습관이 되어가고 있다. 어느 날은 반쯤 구름에 둘러싸인 채로, 어느 때는 비구름에 가려져서 자취를 감추고, 어느 때는 그 옆에 두 채의 솜을 틀어 두었는지 흰 구름 덩어리와 함께 나타나곤 한다. 그도 아닐 때는 종일 비구름에 가려 볼 수 없는 채 하루가 지날 때도 있다. 그 속에서 느끼는 것은 자연도 인간처럼 어느 한 순간도 똑같은 모습을 취하지 않고 매순간 변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 인수봉을 바라보고 계곡을 따라서 3, 40도 경사진 산을 오르다 보면 진달래능선에 이른다. 그 능선의 등산길에 봄에는 길 양쪽으로 진달래가 만발하여 두 줄기 꽃불 속으로 걸어가곤 한다. 진달래능선에서 마주 가깝게 보이는 인수봉의 위용은 이 삼각산이 과연 수도의 북쪽 영산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철마다 변화되는 자연의 섭리 앞에서 인간의 삶은 하나의 티끌처럼 느껴지는 것은 아마도 말없이 전해오는 저들의 침묵일 게다. 침묵 속으로 산길을 따라 걸으면 답답한 마음도 다 정화가 되어 자연과 하나가 되어 있는 자신을 발견하곤 한다. 장마철에는 계곡에서 흐르는 시원한 물소리가 이 고요한 산의 침묵을 깨지만 과히 기분이 나쁘지 않고 오히려 생기를 찾는다. 물소리만 들어도 온몸에 물관이 잘 도는 것처럼 머리에서 발끝까지 시원해진다. 봄이면 피는 진달래, 개나리, 철쭉, 황매화, 복숭아꽃을 비롯하여 땅바닥에서 낮게 피어있는 오랑깨꽃, 할미꽃이나 까마귀발의 흰 꽃은 청초하기 이를 데 없다. 이런 산에서 생텍쥐페리의 동화 속 어린 왕자와 비행사를 만나고, 도스토예프스키 소설의 라스콜리니코프와 소냐와 카라마죠프네 알료사를 만나고, 『광장』의 이명준을 만난다. 그들은 자연의 인수봉과 꽃들과 얘기하는 새에 우리들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온다. 사막에서 러시아의 시골마을과 유형지 시베리아를, 이명준이 타고 있는 동중국해에 떠 있는 타고르호에 이른다. 이들은 사랑을 위하여 몸을 던진 이들이다. 어쩌면 그렇게 사랑을 위하여 자기 몸을 던질까. 참으로 무서운 영혼들이다. 인생을 불처럼 열정적으로 살았던 작가들의 혼이 이 주인공들에게 투영되어 있음을 가늠해 본다. 마지막 비행으로 몸을 던진 생텍쥐페리, 자신의 다시 얻은 삶을 소설에 바친 도스토예프스키, 디아스포라의 고독한 영혼인 최인훈, 이런 것들이 머리를 스친다. 현대를 사는 우리들은 모두 디아스포라인 것 같다. 분단과 산업화 과정에서 이향(離鄕)을 하였던 사람들이 사는 곳이 이 거대한 도시 서울이다. 한강의 기적 뒤에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것을 잃어야 했는가? 잃어버린 것들에 대해서 위무 받고자 하고, 잃어버린 것들과 잊혀져간 것을 위하여 조사(弔辭)를 바쳐야 될 듯하다. 우리가 이만큼 살게 된 것도 그런 과정이 없었으면 안 되었을 거라고, 그 과정의 모든 것을 정당화하기 바쁘다 보니 여전히 성장 이데올로기만 대세인 이 세태를 보면 우리는 아직도 부재의 미학을, 부재의 철학을, 비움(kenosis)의 삶을 실천하기에 역부족인 듯하다. 비움은 사랑의 표현이다. 비움을 산다는 것은 나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길이다. 이시환 시인의 시집『백년완주를 마시며』에는 비움의 미학이 있다. 비움은 너와 나,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이다. 「너와 나」를 읽어보자   네가 울면 나도 울고 네가 웃으면 나도 미소 짓는 것이 우리는 하나, 우리는 하나.   네가 아프면 나도 아프고 네가 나으면 나도 나아지는 것이 우리는 하나, 우리는 하나.   너와 내가 하나 되고 너와 내가 한 몸일 때 우리는 사랑, 우리는 자비.   -2005. 01. 31.00:13 「너와 나」전문   이 시는 두 그루의 나무가 나란히 서 있는 벌판을 배경으로 하여 인쇄되어 있다. 벌판에 선 두 나무는 서로 의지하며 지낸다. 벌판에서 불어오는 비바람도 눈도 같이 맞으며 여름의 뙤약볕을 쐬면서 함께 오랜 시간을 지내왔을 것이다. 저 멀리 나무숲으로부터 외따로 떨어져 서 있는 두 그루의 나무는 두 그루이되 한 나무이고, 한 나무이되 두 그루의 나무이다. 이 수묵화 같은 사진을 통하여 시의 의미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시인은 안배하였을 거라고 생각된다. 벌판은 광야이다. 인간의 삶은 그야말로 광야로 피투된 것이다. 어머니의 자궁 속에서 열 달을 머물러 어미의 피로 사람 모습을 갖추고 산도(産道)를 통해 안에서 밖으로 피투되면서 인간에게는 넓고 커다란 광야가 기다리고 있다. 그 광야는 인간이 건너 가야할 곳이다. 광야를 넘어 피안(彼岸)으로 들어가듯 피안을 가기 위해 광야의 여정은 반드시 거칠 수밖에 없다. 이것이 삶의 피투성이 지닌 본질이다. 광야를 잘 살아가기 위해서 너와 내가 서로 사랑과 자비로 살아간다면 광야의 삶이 수월해진다.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너 시나이 광야에서 40년을 살았을 때 그들은 어떻게 했던가? 신의 기적에도 불구하고 40일 동안 이른 아침에 내려주는 일용한 양식인 만나에도 -한 때 쫓기는 자들로 광야에 온 그들에게 만나는 신이 내린 달콤한 빵과도 같았다- 물리기 시작하고 서로 미움. 시기, 질투, 다툼, 방탕, 불륜의 생활 끝에 다다른 것이 우상숭배였다. 자신들을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해방시켜준 자신들의 신(神)을 저버렸던 것이다. 한 때의 감사와 신에 대한 사랑의 빛나던 맹세는 그야말로 빛을 바래고 이방신을 섬긴 것이다. 이것은 바로 원래 지녀야할 인간의 모습을 저버린 것이다. 인간의 창조 목적에 전혀 부합되지 않게 전도된 것이다. 삼라만상을 사랑으로 거느리고 서로 사랑하며 아름다운 세상을 창조하도록 지어진 인간이 타락하였던 것이다. 그 영적 타락의 결과는 자기가 믿었던 신을 배반한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자신의 올바른 신념을 가지고 살아오다가 어떤 기회에 그것을 배반하면 그는 스스로 타락하여 영혼의 밝은 등불이 꺼지고 만다. 하느님은 너와 내가 만나 하나의 투명한 전등을 밝게 비추어주길 바라며 인간을 창조한 것이다. 시인은 이 시에서 두 개의 밝은 등불이 하나가 되고 우리가 되어가는 것을 노래하였다. 이 빛은 바로 광야의 거친 삶을 비추는 자량(資糧)이 되는 빛이다. 그 자량은 바로 사랑과 자비이다. 시인은 제3부의 시장에 자신의 탯줄인 어머니에 대한 산문과 시를 실었고 그 어머니의 사랑, 너와 나의 사랑, 우리의 사랑 또는 자비를 노래하였다. 시인이 늘 가까이 하는 차를 소재로 한 시 중의 절편인 「용정차를 마시며」에서도 시적 화자는 차를 너로 부르면서 차를 마시며 머무는 그 고요와 침잠 속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다. 이는 「벗들에게」에서도 차를 마시는 그의 작업실과 대립적인 ‘가시 돋친 말들과 眞意를 숨기고 있는 말들이 무성하여 늘 살얼음을 걷는 것’ 같고, ‘是非를 가리고 善惡을 구분 지으려는 억지가 난무’하는 바깥 세상에 대해, 멀리 길림성 화룡에서 문우가 보내온 명차[茗茶:작설차의 한 가지임]와 웅장한 성(城)을 이룬 한 편의 시에 빠지는 기쁨과 안온함으로 바깥세상을 잊고자 한다. 시와 차는 그에게 바깥세상으로부터 ‘귀를 닫아’ 버릴 수 있는 그만의 장치인 셈이다. 「함박눈」에서는 어머니의 포근한 품 속 또는 자궁에서의 기억, 차, 벗, 너와 나, 우리가 어우러져서 아주 느리게 풍성하게 묵직하게 내리는 함박눈을 완상하면서 시인의 옆에는 한 잔의 차와 창밖에 내리는 함박눈을 연상 시키도록 이 3부가 연관성 있는 시들로 짜여져 있어서 낮으며 깊고 풍성한 시세계를 이루고 있다고 하겠다. 사랑과 자비는 느린 것이다. 어떤 통계나 수치, 타산을 구하는 세상의 반대에 있다. 느리기에 다 품어갈 수 있다. 느리게 풍성하게 내리는 함박눈처럼, 어머니의 품 또한 그렇다. 이시환 시인은 이 점을 안배한 것이다. 이 다섯 편의 시가 상호 연관을 맺으면서 서로 포섭되는 상태이다. 그러면서 차에 녹아들고 함박눈으로 두터운 이불을 덮는 것이다. 마치 연인들이 서로 깊이 몸을 나누고 도타운 한 이불을 덮어 씨앗을 품고 깊은 잠에 빠진 듯한 느낌의 시편들이다. 열락의 끝에 오는 안온함을 감지하게 한다. 제4부는 라는 산문에 이어「금편계곡에서」, 「너와 나-금편계곡에 부쳐」, 「금편계곡의 혼」, 「구름바다」, 「황룡동굴」, 「장가계를 빠져나오며」, 「동해와 서해」, 「바다-그리운 이에게」의 8편의 시가 실려 있다. 에는 부처가 “살아있는 모든 것들의 크고 작은 생명체를 강물로 빗대고 있고, 그 강물이 흘러 들어가는 곳인 바다를 여래의 세계로 빗대고 있다”고 시인은 독자에게 소개하여 준다. 강물과 바다를 통해서 유와 무의 존재를 제자 카샤파에게 설명하는 부처님의 탁월한 수사적 표현능력에 대해 시인은 감탄한다. 여기에서 바다는 부처가 깨달은 여덟 가지 도(道)를 의미한다.   누가, 눈먼 내 소맷자락을 잡아끄는가? 낯선 그대 손길에 이끌리어 한 걸음 두 걸음 더딘 발걸음을 옮겨 놓으면 놓을수록 어느새 이 몸에도 초록빛 물이 들어 물가에 서있는 한 그루 나무가 되고 마네.   누가, 벙어리가 된 내 귀에 속삭여대는가? 가도 가도 끊기지 않을 물길 따라 이미 나도 흐르기로 했네, 흘러가기로 했네. 그렇게 흐르고 흘러서 저 깊은 하늘에 이르는, 숨 쉬는 물이 되기로 했네, 구름이 되기로 했네. -2004. 12. 24. 22:37 「금편계곡에서」전문   이 시에서 시인은 금편계곡에 매료되어 한 그루 나무가 된다. 물론 금편계곡이 낯선 그대일 것이다. 그러나 제2연에 오면 계곡의 물길 따라 시적 화자는 자신도 흐르기로 했다고 하여 부처가 말한 ‘강’이 되고자 하고, 그 강은 흘러서 하늘에 이르러 숨 쉬는 물이 되고, 구름이 되기로 한다. 그 구름은 또 비가 되어 강물이 되고 바다로 이른다. 이와 같은 자연의 순환 속에 시인은 강물에서 바다로 흐르듯 부처의 바다로 이르고자 하는 것이다. 금편계곡이 여인네가 되어 시인의 소맷부리를 잡아끌고 들어가기도 하고, 시인의 귀에 속삭이기도 하는 등 활유법을 써서 정감 있게 표현하고 있다.   이쯤에서 한 사나흘 움직이지 않고 앉아서 밤낮없이 흐르는 소리를 듣노라면 눈을 감아도 저들의 알몸이 보이고, 그 알몸 속 투명한 영혼의 옷자락도 보이리라. 굳이 눈을 감지 않아도 저들이 내게 건네는 말소리 들리고, 저들끼리 낄낄거리는 웃음소리 들리고, 저들의 숨을 죽이는 숨소리마저 들리리라.   이젠 내가 뒹굴던 호남평야 끝자락 허허벌판에 서 있어도, 배회하던 서울 시내 칙칙한 뒷골목에 서있어도, 멀리 아프리카 초원이나 사막에 서있어도, 그 어디에서든 나는 듣는다, 너의 속삭임을. 발뒤꿈치를 종종 따라다니는 너의 숨소리를.   -2005. 01. 02. 11:45 「너와 나-금편계곡에 부쳐」부분   구름인 듯 안개인 듯 끼인 깊고 깊은 금편계곡은 마치 꿈길을 걷는 것과 같이 몽환적이다. 그 가운데에 고요하게 물소리가 들린다. 시인이 계곡의 물소리에 귀를 기울이듯이 독자들로 하여금 몽환의 세계로 이끌어 흐르는 물소리를 듣게 한다. 심심유곡의 암벽이 펼쳐진 구름인 듯 안개인 듯한 것에 가려 있고, 시인은 독자들에게 사진을 통해 완상 기회를 준다. 그 물소리의 속삭임과 숨소리가 얼마나 기억에 각인 되었던지 여행지에서 돌아온 일상의 공간에까지 침투한다. 물은 그 어떤 장벽 속에서도 흐른다. 기억의 벽도 부수고 시간과 공간의 벽도 부순다. 시인과 독자의 벽도 부순다. 그 부수는 품새가 부드럽고 몽환적이며 자연스러운 침투성을 가진다. 이 시에서 시인은 그것을 의도한 듯하다. 그 강물은 물론 부처의 바다에 이르는 강물이 될 계곡의 물이다. 그래서 「금편계곡의 혼」에서 시인은 “아니, 제 발로 걸어 들어간 게 아니라/나는 무언가에 이끌려 들어간 것이리라.”라고 말한다. 자연에 자연히 포섭되어 이끌려 들어가고 그것을 완상하는 시인은「구름바다」에 이르면 자연과 서로 번롱(翻弄)한다.   비행기 창밖으로 내다보는 저 뭉실뭉실한 구름바다   마치 어머니의 손길이 햇솜을 막 펼쳐놓은 듯   그 위로 뛰어내려 마냥 뒹굴고 싶어라.   오늘은 이곳 천자산(天子山)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그가   마치 비단 치맛자락을 갈아놓은 듯 나를 유혹하네.   저 거룩한 왕국의 침대로 저 황홀한 침실의 왕국으로.   -2005. 01. 02. 20:29 「구름바다」전문   뭉실뭉실한 운해를 바라보며 시인은 어머니의 손길을 느낀다. 가슴이 아슴해진다. 햇솜을 막 펼쳐 둔 듯한 운해에 뛰어내려 어린 아이처럼 뒹굴고 싶어진다. 이것은 여행 중 비행기 창밖으로 본 구름의 풍경이 어린 아이와 같은 무구하고 어머니와 아이가 한 몸일 때의 상상계(어린 시절)의 기억을 불러들인다면 오늘 천자산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운해는 제5연에서 한 여인이 되어있다. 시적 화자는 한 어엿한 남성이 되어 비단 치맛자락을 펼친 여인에게 유혹을 느낀다. 그 유혹에 이끌리어 “저 거룩한 왕국의 침대로/저 황홀한 침실의 왕국으로.” 몸을 던질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마지막의 제6연이 세속 남녀의 침상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단순히 거기에 그친다면 이 시는 더 이상의 의미를 획득할 수 없다. ‘거룩한 왕국의 침대’나 ‘황홀한 침실의 왕국’에서 알 수 있듯이 밥국(法國)의 침상이 아닐까 미루어 짐작된다. 그 이유는 그가 금편계곡의 물이 강물이 되어 법해 즉 부처의 바다로 이른다는 것을 의도하고 시편들을 배치하였기 때문이다. 계곡, 운해, 강물, 바다가 이시환의 시에서는 여성이미지로 표현되어 있고, 특히 계곡이나 「황룡동굴」에서의 동굴 등은 여성의 자궁으로 비유되어 그 생명력으로 “새 생명으로 거듭나는 나를 너를/일으켜 세우시라./일으켜 세우시라.”라고 부르짖고 있다. 이 여성은 늘 시인이 바라보는 바다이다. 「바다-그리운 이에게」를 읽어보자.   바람 속에 자그만 집을 짓고 하루 종일 창밖으로 바다를 바라보네.   일 년 열두 달을 지켜보아도 한 번도 같은 얼굴을 보이지 않는 바다.   오늘은 그 어느 때보다 너의 눈빛이 참으로 맑으이.   -2004. 11. 7. 12: 24 「바다 -그리운 이에게」전문   시인은 한밤중에 시를 쓰기 위하여 바람 속에 조그마한 집을 마련한다. 바람과 바다는 우주의 생명력을 상징한다. 그 자그만 집의 창밖으로 바다를 늘 바라보지만 한 번도 같은 얼굴로 보이지 않는다. 우주처럼 바다도 변화무상하다. 이 바다를 시인은 친구처럼 연인처럼 생각한다. 어느 때보다 눈빛이 맑은 날의 바다에 대한 시이다. 맑은 날 정오를 지난 시간대의 투명한 햇살 속에서 바다의 빛은 다정한 연인의 맑고 고운 눈빛이다. 그리운 마음속의 님의 눈빛을 하염없이 들여다보는 것처럼 투명한 바다를 바라보며, 그리운 님의 눈빛을 생각하는 시이다. 바다는 너와 나를 이어주는 것이며, 그 바다는 우리를 품어주는 곳이다. 여기엔 무슨 말이 필요할 것인가? 서로 눈빛만으로도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고 알아들을 수 있는 경지인 것이다. 그런 자연의 무아지경이 시인을 이끌어가고 있는 시편들이 이 시집에는 단단히 엮어져 있는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장가계를 빠져나오며」에서 ‘침묵, 침묵을 지키리라.’라고 다짐한다.   뽕밭이 푸른 바다가 되듯 바다가 솟아올라 높고 깊은 산이 되었는가.   실로 오랜 세월, 안개에 가리우고 구름에 덮이어서 알몸을 스스로 드러내지 않던 네가,   오늘 비로소 한 마리 거대한 地鬼가 되어 꼬리는 깊은 산정호수에 두고, 머리는 구름 밖으로 내민 채 꿈틀대는구나.   나는 분명 그런 너를 보았으나 보지 아니한 것으로 하리라. 가슴 속에 다 묻어두고 내가 죽는 날까지 침묵을, 침묵을 지키리라.   내 입을 여는 순간, 네가, 네가 굳어버린 돌산 숲이 될까 두렵기 때문이리라.   -2004. 12. 28. 23:14 「장가계를 빠져나오며」전문   중국여행 시편이라고도 할 수 있는 제4부의 시 중에서 장중한 느낌의 이 시는 장가계를 소재로 하였기에 독자들로 하여금 이국의 비경의 시세계로 이끈다. 상전벽해라 하여 이 지구의 오랜 지질학적 연대에서 빙하기 어느 때에 바다가 산이 되는 그 태고의 시간대까지 시인의 상상 속으로 독자들을 유인하여 눈앞에 보이는 굽이굽이 펼쳐진 거대한 규모의 돌산 숲이 마치 천년을 땅 속에서 살다가 비상하는 지귀에 비유하여 ‘꿈틀댄다’라고 하여 동적 이미지로 전환하고 있다. 그러한 너의 비밀을 침묵하겠다고 하였다. 말을 하는 순간 돌산 숲이 될까 두려워서이다. 자연의 비경에서 시인은 무언의 경지에 놓인다. 어떤 아름다운 말로 장식을 한다 해도 이 무언의 경지에 이르지는 못할 것이다. 말이 필요가 없어진 장가계의 비경이 단순히 풍경으로만 존재하지 않고 ‘너’라고 부름으로써 의인화되고 있다. 그래서 이 시의 뒤에 놓인 아포리즘 1에서 “내가 일평생 시를 짓는다 해도/그것들은 살아있는 한 그루 나무만 못하다”라고 말했듯이 인간의 그 어떤 창조도 조물주의 창조에 비하지 못함을 시인은 겸손한 마음으로 말해주고 있다.   누구 누구는 휘파람을 불며 푸르고 푸른 동해로 간다지만 나는 나는 서해의 저녁으로 가네. 시름을 배고 누워 있는 그대와 눈을 마주치기라도 하면 어디선가 서글픔이 밀려오지만 말없는 그대 우수 속엔 내 생명의 탯줄이 숨어 있네.   누구누구는 콧노래를 부르며 살포시 다가와 곁에 앉은 서해로 간다지만 나는 나는 동해의 아침으로 가네. 긴 다리로 서 있는 그대와 마주서노라면 그대 젊음이 나를 주눅들게 하지만 오만한 그대 기백 속엔 젊음이란 싱그러움이 넘치고 넘치네.   누구는 동해로, 누구 누구는 서해로들 간다지만 나는 나는 동해도 서해도 아닌 누워 있는 바다의 우수(憂愁)가 아니면 서 있는 바다의 젊음에게로 가네. 서 있는 바다의 아침이 아니면 누워 있는 바다의 저녁에게로 가네.   -「동해와 서해」전문   제1연에서 시적 화자는 서해의 저녁으로 간다고 한다. 다른 이들이 동해로 갈 때 그는 서해의 시름과 우수와 서글픔과 침묵 속에 들어있는 ‘나’의 생명의 탯줄을 마주하러 가겠다고 한다. 바다는 어머니이다. ‘나’는 어머니와의 기억, 어머니와 한 몸이었을 때를 기억하며 서해로 가는 것이다. 바다가 하나의 거대한 생명이며 거대한 여인, 어머니의 자궁이다. 그 속에서 나는 어머니와 한 몸이 된 탯줄로 ‘나’의 생명이 영글었기 때문이다. 제2연에서는 이와는 반대로 다른 이들이 서해로 간다지만 ‘나’는 동해의 아침으로 간다. 제1연의 서해가 시름에 겨워 누워 있는 바다라면 제2연의 동해는 젊음으로 일어서 있는 바다이다. 제1연이 노년의 어머니를 생각하게 한다면 제2연은 장년의 ‘나’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그 동해바다의 싱그런 젊음은 나를 주눅들게 하지만 그 젊음의 기백을 품으러 나는 가겠다는 의미이다. 제3연에 와서는 다른 이들은 동해로 서해로 간다지만 ‘나’는 동해도 서해도 아닌 누워있는 바다의 우수나 서있는 바다의 젊음에게로 간다고 하여 그것은 서 있는 바다의 아침과 누워 있는 바다의 저녁에게로 가겠다는 의미이다. 이 시에서 보여주는 댓구는 ‘동해/서해, 누구 누구/나, 늙은 어머니 혹은 나를 잉태했을 때의 젊은 어머니/장년의 나, 누워있는 바다/ 서있는 바다, 바다의 아침/바다의 저녁, 동해-젊음/서해-우수’, 이렇게 상반된 시적 화자의 정서가 제3연에서 붕괴되어 그저 ‘누워있는 바다의 우수/서 있는 바다의 젊음, 서있는 바다의 아침/누워 있는 바다의 저녁’으로 가겠다고 화합하는 정서로 변화되어 있다. 바다는 시인에게 생명의 우수와 젊음의 기백을 부여해 주며, 누워 있는 서해의 저녁바다에는 한 때 자신을 잉태한 어머니와 노년의 고단한 어머니의 모습이 투영되고 있다. 그와 반대로 서 있는 젊은 동해 바다는 장년이 된 시인의 모습이 겹치고 있어 ‘바다/어머니’의 태속에 장년의 내가 젊고 서 있는 바다로 겹쳐지듯이, 말없는 바다는 시인에게 생명과 젊음, 기백, 용기, 결기를 부여해 주고 있는 시라 하겠다. 이는 전술한 바와 같이 바다가 법신의 부처이기에 그 바다에 8가지 도[八正道]가 충만해 있어 시인은 그 부처의 바다에 이르고 싶은 것이다.    ////////////////////////////////////////////////////////////////////////////////////////////   당신의 품 속에서 완상(玩賞)하는 것들과 -이시환의 시집『백년완주를 마시며』에 부쳐     심종숙(시인, 문학평론가)       붉은 사과를 하나 집는다. 여름 내내 햇빛을 온몸에 받아 저리 붉을 대로 붉어진 사과를 한 입 베어 먹는다. 사각 소리를 내면서 이빨이 박힌 사과의 과육이 한 점 떨어져 나가고, 팽팽한 사과의 몸 한 군데가 떨어져 나감으로써 사과가 품은 팽팽한 생기가 허물어져 간다. 천천히 씹는다. 사과즙이 혀를 적시고 입 안을 적신다. 속으로부터 올라온 불쾌한 느낌이 사라지고 상쾌해져가는 입 안과 머리에 사과 한 입이 기여를 한다. 꼭꼭 씹어서 넘긴다. 또 한 입을 베어 먹고 나니 사과는 반쯤만 남을 지경으로 작은 사과다. 이제는 붉은 껍질보다 아이보리색 과육이 절단해 놓은 절개지의 땅처럼 많이 드러나 희고 누렇다. 이 얇은 껍질을 둘러쓰고 사과는 어떻게 자신의 속을 보호할까? 위도 창자도 없고 머리와 가슴과 팔다리도 없는 사과는 그냥 안에 씨방만 만들어 두 개의 까만 씨앗을 감춘 채 깊은 잠 속에 빠진 채 갑자기 나에게 먹힌 것이다. 사과가 눈을 떴을 때 사과는 이미 죽어가고 있다. 아니, 사과는 이미 농부의 손에 나뭇가지에서 꼭지를 분리시켰을 때부터 죽기 시작한 것이다. 그나마 사과의 이력은 이 꼭지가 말해준다. 꼭지가 사과와 나무가 연결되어 있었다는 증거이다. 사람의 배꼽이 태아기를 기억 시켜주듯 -너는 그냥 나와서 직립보행을 하는 짐승이 아니야, 너는 한낱 어머니의 탯줄에 연결되어 있지 않았다면 존재하지 않을거야- 말이다. 그 의미는 사과가 꼭지를 통하여 사과나무에 붙어있지 않았으면 이렇게 작건 크건 간에 한 알의 열매로 맺어 익을 수 없었으리라. 그것처럼 포도나무에 가지가 붙어 있지 않으면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없듯이 많은 열매들은 꼭지가 나뭇가지에 붙어있었기에 탐스럽게 익는다. 그런데 사람의 열매는 무어란 말인가. 아기가 10달 남짓 어미 배 속에서 탯줄로 엄마와 꽁꽁 연결되어 어미의 피의 양분을 먹고 배아에서 태아가 되어 몸체가 생기고 눈과 귀, 코와 입이 생기고 팔 다리와 손과 발이 생기리라. 10달을 꼬박 어미의 몸을 반쯤 피로 먹고 난 태아가 신생아가 되어 자궁을 열고 나온다. 이게 사람이다. 그 때 나올 때 어미와의 탯줄은 더 이상 필요 없어서 소독한 가위로 땡강 잘린다. 이제부터 너 스스로 빨아먹고 우물우물하여 삼키고 물어서 씹어 먹고 베어 먹고 하여 살아가라고. 태어난 아기는 어미의 돌출한 젖꼭지를 빨아 양분을 먹는다. 그러다가 이유식을 하고 미음을 먹고 밥알을 조금씩 넘기다가 밥을 먹게 된다. 그러면서 어미와 연결 되었었던 과거의 태아기의 추억을 잊으면서 배꼽을 잊고 만다. 한 때 없어서는 안 되었던 배꼽을 잊어버리고 왜 이런 게 복부의 중간에 뚫린 듯 흉한 채로 남아있는가 생각되는 것이다. 사과는 타원형의 씨방과 윗부분의 꽃이 진 자리와 아래 부분의 가지에 붙어있던 꼭지 부분을 남긴 채 나에게 완전히 죽는다. 이로써 사과의 일생은 끝이 난 것이다. 사람의 위는 모든 죽은 것들을 채워 넣는다. 아침에 일어나 커피나 차를 마시고 밥이나 빵에다 계란 후라이나 찌개 정도로 간단히 아침을 먹고 점심에는 고기를 먹고 저녁에는 또 무엇을 죽여서 먹을까? 인간이 먹는 모든 것은 죽은 것이다. 죽기 직전까지도 살아있던 것들도 결국 죽여서 먹는다. 어미의 몸을 먹었던 태아기 외에는 인간은 인간을 위해서 기꺼이 죽어준(?) 동식물을 먹고 살아간다. 아니다. 인간이 먹기 위해 무참히 죽임을 당한 동식물들을 먹고 인간은 살아간다고 정확히 말해야 한다. 동식물은 인간에게 모든 것을 빼앗긴다. 모든 것을 다 빼앗기고 죽임을 당한 그들은 인간에게 반역을 한 적이 없다. 기꺼이 죽어가 준 것처럼 말이 없다. 한 때 어미의 몸이 아니었으면 아무 것도 아니었던 인간은 동식물이나 다름없었다. 이런 인간이 태어나면서 빨아먹고 우물우물 삼켜먹고 베어 먹고 씹어 먹고 하면서 자연과 동식물, 우주의 삼라만상들을 거느리는 영리한 짐승이 된 것이다. 나에게 완전히 죽은 사과는 배속에서 으깨지고 뭉개어지고 죽처럼 되어 창자로 보내질 것이다. 아름다운 얼굴을 가진 붉은 사과는 없어졌다. 한여름의 뙤약볕을 받고 한 때 빛나던 그 붉고 탱탱한 사과는 지상에서 사라졌다. 남은 것은 사과의 과육을 뺀 나머지, 뼈대 구실을 하고 새로운 씨앗을 품은 씨방과 꼭지와 꽃이 있었던 자리만 남아 음식물 쓰레기봉투에 던져질 것이다. 내가 먹은 사과여, 나에게 먹힌 사과여, 미안하다…. 너의 사랑과 역사와 붉은 껍질과 싱그런 과육과 달콤하고 시큼한 과즙과 너의 꼭지와 꽃이 진 자리였던 너의 부끄러운 곳과 아아 이렇게 다 먹어버리고도 뻔뻔한 인간을 용서해다오. 너의 그 모든 것을 고마워하지 않고 마구 베어 먹고 깨물어 먹었던 나를, 한 알의 작고 붉은 사과여 가을의 열매 중의 열매여!   작은 한 개의 사과의 죽음과 인간의 죽음은 어떻게 비교될까? 대개는 이 지상에 살면서 먹고 사는 일에 매어달리며 때로는 탐욕도 부리고 때로는 지치거나 깨어지고 부수어지면서 인간은 동식물의 그것보다 가열찬 삶을 살아야 한다. 인간이 동식물처럼 먹여주는 대로 입혀주는 대로 살 수는 없다. 인간으로 태어났다는 의미는 스스로 생활해나가야 한다는 의미이다. 일정한 나이가 되면 독립을 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니 인간은 얼마나 고단한가? 이것이 동식물과 인간의 다른 점 중의 하나일 게다. 너나없이 경쟁에 밀려 쫓기고 쫓기거나 달려가고 달려가다 보면 지치게 되는 법, 또 어느 정도까지는 쉼 없이 달리고 쫓은 결과 이르렀지만 더 이상은 안 되어 딜레마에 빠져 허우적대다가 지치거나 나가떨어진다. 이게 우리네 삶이다. 그러면서 어느덧 머리에는 흰 빛이 한 가닥씩 번쩍하면 노인이 되었구나 생각한다. 인간의 삶이란 무어란 말인가, 한 알의 작은 사과의 생보다 더 나을 게 없다. 어쩌면 쫓아가고 달려갔기에 더 억울할지도 모르겠다. 많이 일군 사람은 그걸 일구느라 갖은 고생 했는데 다 놔두고 가야하니 기가 막히고, 적게 일군 이는 그거라도 일구느라고 지친 것이다. 세상은 많이 피폐해졌다고 아우성 치고 그렇게 아우성들만 치고 아우성의 물결이 범람하여 감에도 세상은 여전히 바뀌지 않는다. 인간이 욕망하는 한 세상은 고대에나 현대에나 기본적으로 비슷한 문제들은 늘 있었다. 부와 명예와 권력을 손에 쥐기 위하여 신들에게 의지하거나 하층민들을 수단화하여 거대한 성을 쌓고 유지해갔다. 현대에도 비슷한 구도이다. 상실감과 박탈감에 쓸쓸해하다가 늙고 병든 이들, 기가 막히는 세상이다. 이시환 시인의 시는 이런 사람들에게 위로를 준다. 그 위로를 줄 수 있는 이유는 그가 끊임없이 그런 세상과 길항하면서 시인 자신도 그것을 겪었으며 그런 이유로 자연과 대화하고 신과 대화하다 보니 묵상과 관상의 생활에 이르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현재까지 모두 16권의 시집을 출간하였다. 첫시집『안암동일기』(1992)를 시작으로,『백운대에 올라서서』(1993),『바람서설』(1993),『숯』(1994),『추신』(1997),『바람소리에 귀를 묻고』(1999),『벌판에 서서』(2002),『우는 여자』(2003),『상선암 가는 길』(2004),『백년완주를 마시며』(2005),『애인여래』(2006),『눈물모순』(2009),『몽산포밤바다』(2013),『대공』(2013), 한영대역시집『Shantytown and The Buddha』(2003)『佇立廣野』(2004)에 이르기까지 그의 시업은 근 20여 년이 넘는다. 그의 시작들은 주로 자연과 신, 생명, 사랑을 노래하고 있으며, 그것은 시인이 『상선암 가는 길』의 자서에서 밝히고 있듯이 현실세상의 부조리함과 적대감에서 탈출하거나 초월하고자 하는 그의 의지였다. 더 구체적으로 ‘세상사로 마음이 혼란스럽고 무거워질 때마다 나는 명상과 침잠을 거듭하는 이중적인 삶을 살아온 것’이라고 시인은 고백하고 있다. 그는 ‘내 한 몸에 생태가 전혀 다른 두 그루의 나무를 키워오면서 현실 비판적인 시와 그를 초월하려는 듯한 관조와 직관에서 나오는 선시에 가까운 시들을 써왔던 것’이라고 자신의 시의 경향을 말해주고 있다. 이시환 시인의 열 번째 시집인 『백년완주를 마시며』는 첫째, 관조와 직관 속에서 자연과 시인이 한 몸이 되어 서로를 완상하는 시풍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시인과 자연의 친화 속에서 빚어내는 한 편의 노래나 교향곡이 되겠다. 둘째, 교감 하는 너와 나의 사랑의 노래, 셋째로 고통 중에 있는 우리 이웃들(노숙자 시편인 「신문지 한 장의 무게」)의 눈물이 담겨있다. 이 시집에서 시인은 길항하던 세상에 대해 포근하게 바라볼 수 있는 여유를 체득하였기에 ‘사랑은 나의 기쁨’이면서 ‘사랑은 우리의 생명’이므로, “서로 서로 사랑하세”(「사랑(노랫말)」)라고 주장한다. 이 시집에는 그 전의 시집과는 다른 특색을 지니고 있다. 전체 8부로 이루어진 시장(詩章)에 각 부에는 독자들을 배려하여 그가 주간하는 『동방문학』에 문예시평으로 써온 산문들 가운데 8편이 실려 있어, 산문은 시를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주고 시는 산문 속으로 침잠해 들어가는 효과를 의도한 시인의 안배가 돋보인다. 그리고 시인이 명상생활을 해오면서 사유세계의 끝머리쯤에서 건져 올린 아포리즘을 독서과정에서 잠시 쉬어가라는 의미에서 22편을 실어놓았다. 그러니까, 이 시집은 산문과 시, 아포리즘의 형식으로 이루어진 시집인 셈이다. 그리고 수묵화나 담채화 느낌의 사진이 시집 속에 펼쳐져 있어서 비교적 두꺼우나 독자로 하여금 편안히 쉬면서 그의 산문과 시, 아포리즘의 세계로 몽환적으로 불러들여 침잠케 하여 자연물을 만나고 벌판, 바람, 눈, 구름, 계곡으로 빠져들게 하는 효과를 내고 있다. 한 권의 시집을 이렇게도 풍성하게 엮은 경우는 본 적이 없다. 아마, 이 체재는 시인의 독자를 배려한 특별한 의도요 정성이라 여겨진다. 한 권을 다 읽다 보면 어느 순간 졸음이 올 정도로 시인의 문맥 속으로 빠져 이완이 되고 몽환 계곡에서 길을 잃어버리고 문장이 지닌 논리의 냉철함과 정연함도 다 잊은 채 그냥 녹아들어버려 힐링이 된다. 이 시집은『상선암 가는 길』을 펴내고 채 1년도 안 되어 쓴 40여 편의 시를 묶은 것이다. 즉, 그가 관상의 생활로 일관한 2003년부터 시작하여『애인여래』가 쓰여지고(2003년) 수정 -주로 2005년, 서시「나의 독도(獨島)」는 2006년 6월경- 을 하게 되는 시간 동안 약 3년간의 중간에 위치하는 것으로, 이 세 시집이 연관되어『상선암 가는 길』과 『애인여래』의 중간지점에서 징검다리 역할을 하는 시집인 것이다. 왜냐하면, 여래와의 집중적인 대화를 위해서『상선암 가는 길』에서는 홀로 침묵 속에서 떠나고(여행) 자연물을 통해서 내적 대화를 하기 시작하다가 『애인여래』55편으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중간의 징검다리 역할을 하는 이 시집에는 아무래도 쉬어가게 하는 길목이 되는 셈이다. 이 시의 쉼터에서 그가 의도하고자 하는 바는 침잠과 몽환을 통한 자연물과의 완상이다. 그러나 침잠과 몽환은 역시 집중되어질 여래의 품이다. 『애인여래』가 여래의 진리에 대하여 여래와 대화를 나누며 묻고 답하는 식의 선문답 형식의 시들이 주류를 이루어 다소 추상적이거나 논리적이고 관념적이거나 이치를 따져보는 시인 나름대로의 지성으로 이루어진 시편들이라면,『백년완주를 마시며』의 세계는 침잠과 완상을 통한 관상의 깊은 정감이 흘러 넘치는 가운데 독자들을 유인하고 있다고 하겠다. 시인은 자서에서 “시가 저절로 쓰여졌다고 말하는 편이 더 적절할지도 모르겠다”라고 하여 그 때의 사정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의 시가 태어나는 배경에 대해,   나는 나 자신을 위해 시를 썼지 독자들을 위해 쓴 일이 없는 것 같다. 그들을 위해서 특별히 생각하고, 그들을 위해서 시의 모양새를 다듬고, 그들의 관심과 소망과 정서를 담아내려 적극적으로 노력하지 않았나는 뜻이다. 솔직히 말해, 이 점에 관한 한 지금도 마찬가지다. 어찌 보면, 나는 철저하게 내 안의 세계에 스스로 머물면서 세상과 세계를 바라보되 일신상의 안위를 추구한, 그야말로 소승(小乘)이란 기둥에 기대어 살아온 셈이라 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라고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번 시집은 충분히 독자를 배려하는 의미에서 묶어낸 시집임을 밝히고 있다고 하겠다. 그리고 자기 안의 세계에만 머물러 있었던 자신을 성찰하며 성문, 연각과 같은 실천이 없는 소승의 기둥에만 기대어 왔음을 고백하고 있다. 그러나 시인은 1부 산문인 에서 “맑기가 수정 같고, 향기가 그윽한 난향과도 같은, 그 달콤함이 오래오래 머무는 백년완주와 같은 시를” 쓰기를 소망한다. 이러한 시는 ‘만남의 기쁨을 안겨주는 시’이다. “거침 바람을 일으키는 부드러움 속에 숨은 불길 같은, 아니 그 불길 속에 숨어 있는 부드러움의 섬세함”을 지니는 시를 시인은 소망한다. 이런 시를 얻기 위하여 그는 세상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침잠과 관상의 생활에 스스로 깃들고자 한 것이다. 「겨울비」에서는 시를 얻기 위하여 스스로 광야를 택한 시인의 모습이 어른거린다.   오늘같이 할 일 없는 날엔 예술의 전당 대신 마른 겨울 들판으로 가자. 오늘같이 무료한 날엔 사람소리 들리지 않는 허허벌판으로 가자. 눈발이 비치는가 싶더니 빗방울이 어깨를 적시고, 빗방울이 눈썹을 적시는가 싶더니 싸락눈이 머리를 희끗하게 덮는 그곳으로 가자. 그곳으로 가자. 그곳 마른 풀섶 더미 위로, 그곳 쌓인 낙엽 위로, 그곳 내가 걷는 길의 고적함 속으로 저들이 곤두박질치며 부려놓는, 짧은 한 악장의 장중한 화음을 들어보시라. 저들끼리 밀고 당기고, 질질 끌고 잡아채며, 점점 세게, 아주 여리게, 사라지는 듯하다가도 다시 소생하는, 허허벌판에 부려지는 화음이 범상치가 않구나. 죽어가는 한 세상을 부여잡고 그리 통곡을 하는 것이냐? 이 들판 저 산천에 푸른 세상을 다시 일으켜 세우려는 것이냐? 싸락눈이 섞여 내리는 겨울비가 부려놓은, 오늘의 짧은 한 악장의 화음이 절뚝이는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우시네. 침몰하는 세상을 다시 붙들어 일으키네.   -2005. 01. 26. 18:23 「겨울비」전문   참으로 장중하고도 엄숙함과 결연함을 느끼게 하는 시이다. 겨울비라는 시제에서 전달되는 의미가 심상치 않고 희희낙락하는 예술에 대해 엄중한 경고를 내림과 동시에 무겁고 결연하며 그런 예술에 대한 반역이기까지 하다. 이 시에서는 ‘예술의 전당’과 ‘겨울들판/허허벌판’이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다. 시인은 독자들에게 예술을 관람하는 장소인 예술의 전당이 아니라 허허벌판과 같은 광야로 사람들을 이끌어낸다. 예술의 전당과 같이 먹고 살만한 사람들의 배부른 예술작품이 되기보다 절뚝이는 시인 자신을 다시 일으켜 세우고 침몰하는 세상을 다시 붙들어 세워줄 예술이 태어나는 겨울비 내리는 광야로 나가자고 한다. 예술의 전당이 이미 박제화 된 예술을 소비시키는 곳이라면 겨울들판/허허벌판인 광야는 예술이 생산되는 곳이며 상업주의와 결탁되어 있는 자들이 기획하여 향유케 하는 사치품이 된 예술이 아니라 푸른 세상을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는 예술을 꿈꾸기 위해 광야로 초대하는 것이다. 그곳에서 푸른 세상을 꿈꾸고 침몰하는 세상을 다시 붙들어 일으키고자 한다. 그에게 예술의 전당은 무가치한 것이며 더 이상 푸른 세상을 세울 수 있는 예술의 전당이 될 수가 없다는 의미이다. 그 대신 그는 진눈깨비나 싸락눈이 섞여오는 궂은 날씨의 광야로 가서 죽어가는 세상을 통곡하는 겨울비의 울음소리를 들어보라고 권하며 겨울비의 화음을 통해 소생되는 예술의 소리를 들어보길 원한다. 죽은 예술이 광야에서 다시 소생하는 순간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시는 시인이 이 시집의 제일 첫머리에 둔만큼 그가 의도하는 예술의 지향점과 그 자세를 읽을 수 있는 시이다. 광야란 무엇인가? 사막과 진배없는 불모지 아닌가? 왜 시인은 자신을, 독자들을 그곳으로 유인하는 것인가? 이집트인들의 종살이를 하던 이스라엘 백성이 그 압제 아래 고통의 신음을 할 때 야훼 이레(앞길을 예비하시는 야훼)의 하느님은 모세를 통하여 갈대바다라 불리우는 홍해를 건너고 시나이 광야에 이르러 40년의 거칠고 힘든 광야 생활을 하게 했다. 약속의 땅인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인 가나안 복지에 들어가기 전에 40년의 광야생활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이 시련 속에서 정금과 같이 단련되었듯이 예술은 정금과 같이 관련되는 과정에서 생산되어야 한다. 이시환 시인은 이것을 꿰뚫어보는 시인이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 광야를 선택하고 홀로 외로운 길을 선택한 것이다. 그 광야에서 시인이 들은 것은 겨울비의 통곡하는 울음소리만이 아니다. 그는 ‘만물을 일으켜 세우는 소리’도 듣는다. 「바람의 演奏」를 읽어보자.   내가 낮잠을 즐기는, 낮에도 캄캄한 수면실의 출입문틀과 유리문 사이의, 그 좁은 틈으로 끊임없이 바람이 지나며, 아니, 허공(虛空)이 무너지며 소리를 낸다. 문이 열리는 정도와 바람의 세기에 따라 그 소리가 달라지지만 일 년 열두 달 위험스럽게 다가오는 벌떼 소리 같기도 하고, 어찌 들으면 이 안과 저 밖이 내통하는 소리 같기도 하다. 그런 바람의 연주를 들을 수 있는 곳이 어디 이곳뿐이랴. 저 외로운 나무와 나무 사이에서도, 그 외로움이 모여있는 숲과 숲 사이에서도, 넓고 좁은 빌딩과 빌딩 사이에서도, 높고 낮은 지붕들 사이에서도, 크고 작은 골목에서도, 평원에서도 시시때때로 달라지는 바람의 연주를 들을 수 있듯이 사람과 사람 사이 마음의 틈에서도, 하늘과 땅 사이 그 깊은 틈에서도 나는 바람의 연주를 듣는다. 눈에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를 은밀히 잇는, 그 좁은 틈으로 대공(大空)이 무너져 내리며 만물을 일으켜 세우는 소리를 듣는다.   -2005. 02. 01. 15:48 「바람의 演奏」전문   이 시는 예술의 전당에서 편안한 의자에 앉아 음악연주를 듣고 관람하는 특수화된 공간 보다 거친 광야나 그와 비슷한 일상의 공간으로 시인은 독자를 유인한다. 시인 자신이 늘 잠깐 쉬기 위하여 들어가는 수면실을 오가며 문과 문 사이에서 일어나는 바람, 외로운 나무와 나무사이, 숲과 숲 사이, 크고 작은 빌딩과 빌딩 사이, 높고 낮은 지붕과 지붕 사이, 크고 작은 골목 사이, 평원에서 시시때때로 달라지는 바람의 연주를 듣는다. 시인은 박제화된 예술을 관람하는 예술의 전당에서 하는 음악연주가 아닌 자연계의 바람의 연주를 들려주고자 독자들을 인도하여 허허벌판과 같은 자연계의 공간이 아닌 일상의 공간에서도 바람의 연주를 듣게 한다. 이렇게 가시적인 공간에서 바람의 연주를 듣는 것만이 아닌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마음의 틈, 하늘과 땅 사이 깊은 틈, 눈에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를 바람은 연주되어 은밀히 잇고 그 좁은 틈으로 대공이 무너지며 만물을 일으켜 세우는 바람의 거대한 실체를 감지한다. 바람은 그야말로 만물을 소생시키는 거대한 힘을 가졌으며 시인은 광야와 다름없는 일상의 공간에서 바람의 연주를 통해 바람이 지닌 생명력을 독자들이 감지할 수 있도록 이끌어 가고 있는 시이다. 바람은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을 잇는 연결고리 역할도 하며, 사람과 사람 사이 보이지 않는 마음의 틈을 메워주고, 하늘과 땅 사이의 깊은 틈도 메워준다. 그리고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를 은밀히 연결시키면서 그 틈을 메워준다.   사람이야 좀처럼 눈에 띄지 않는, 아주 자그마한 섬 가운데 섬에 나는 와 있네.   온통 노오란 유채꽃으로 뒤덮인 이곳 가장자리에 홀로 앉아 나는 손에 들려 있지도 않는 차를 마시고 또 마시네.   그런 나의 이마 위에는 높푸른 하늘이 내려와 있고, 그런 나의 발부리에는 넘실대는 파도소리 머물고, 그런 나의 손끝에는 이 세상을 한 빛깔로 누이며 지나가는 바람도 있고, 그런 나의 가슴에는 저들을 다시금 끌어안는 포근한 햇살도 있네. 노오란 유채꽃이 가득하여 이룬 섬 그 한 가운데에 있는 낮은 흙무덤이 되어 나는, 정오 한 때를 장강(長江)에 흐르는 세월처럼 길게 길게 누리며, 멀미를 하듯 기우뚱거리는 이 고적한 섬이 된다.   -2005. 3. 24. 12:24 「유채꽃밭에서」전문   시인은 자신의 아포리즘 6에서 “나의 경전은 내가 아침저녁으로 바라보는 저 산이다.”라고 밝히고 있듯이 자연은 그에게 말씀이요 진리의 법신(法身)인 것이다. 이 시는 유채꽃이 만발한 섬에서 시인은 무르익은 봄을 즐긴다. 이 즐김은 박제된 예술에서가 아니라 자연이 인간에게 준 선물인 공간에서다. 온통 노랗게 물든 섬의 봄, 유채꽃, 높푸른 봄하늘, 넘실대는 파도, 손끝의 바람, 따뜻한 햇살, 유채꽃이 이룬 노오란 섬 한 가운데 있는 낮고 붉은 흙무덤과 가시적인 자연물들을 바라보면서 시인의 마음은 차를 마신다. 비가시적인 마음으로 마시는 차는 모든 봄의 풍경들을 한층 더 고즈넉하고 안온하고 깊고 부드럽게 만든다. 그러면서 해가 길대로 길어진 초봄의 유채꽃 노오란 빛깔 속에서 시인은 현기증을 일으킬 정도로 이 풍경과 하나가 된다. 거기에는 차의 역할이 크다. 그 시간이 봄의 길어진 해만큼, 장강의 흐르는 세월처럼 길게 길게 누리며 시인은 자연의 풍경들에 둘러싸여 그 품에서 오래오래 누리고 또 누린다. 그러면서 눈앞의 섬과 같이 자신도 고적한 섬이 된다. 자연은 이시환 시인에게 여래의 법신이었던 것과 같이 시인은 그 품에서 길게 길게 풍경과 하나 되는 완상의 시간 속에 있다. 그것은 섬이 혼자이듯 시인이 홀로 거기에 머물렀기에 가능한 일이다. 이 시야말로 1부 산문의 소재가 된 백년완주와도 같이 달콤한 시의 세계를 창출해낸 것이라 할 수 있겠다. 「겨울비」는 그와는 상반되는 시적 정서를 가지고 있어서 두 시가 대조를 이룬다고 하겠다. 제2부는 지인이 준 담채화에 대하여 그 풍경에서 여성의 자궁과 만물을 낳는 우주의 자궁을 간취하여 언제나 텅 비어 있으면서 꽉 찬 ‘谷神곡신’을 그려내었다고 보고 자연스럽게 제2부 첫머리에 「상선암 가는 길」을 배치하였다. 상선암 가는 길 계곡에 있던 크고 작은 바위들을 스승 삼아 묵상의 여정을 시인은 하며 정갈하고 고요하게 만발한 목련꽃 속에서 적요의 미를 창출하고 있다.   “아니, 왜 이리 소란스러운가?’   커튼을 젖히고 창문을 여니   막 부화하는 새떼가 일제히 햇살 속으로 날아오르고   흔들리는 가지마다 그들의 빈 몸이 내걸려 눈이 부시네.   -2005. 04. 14. 00:53 「목련」전문   이 시는 시인의 재기발랄한 모습을 보여준다. 적요의 세계를 소동의 세계에 대비하여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날아간 새떼와 빈 나무에 걸린 날아간 새떼의 빈 몸을 각각 목련꽃에다 은유하였기 때문이다. 또 식물을 동물로 치환하고 있어 정적인 식물이미지가 동적이미지로 치환되고 있다고 하겠다. 커튼을 젖히고 창문을 열기 전에 목련꽃들이 막 부화하여 날아가는 새떼로 비유되어 그 비상의 동적 소란과 그들의 빈 껍질에 비유한 목련꽃의 적요를 느끼게 하는 시이다. 정→동→정, 동→정→동(바람에 꽃을 단 목련가지가 흔들리기 때문에 동으로 봄)으로 이어지는 이 시의 구도는 자연물인 목련꽃의 개화를 시인의 감성으로 새롭게 표현해낸 뛰어난 작품이다. 짧은 시구절에 이렇게 큰 의미를 부여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러면서도 빈 껍질이 주는 공허감이 ‘눈이 부시네’ 라고 하여 상쇄되고 있다. 목련꽃과 부화하는 새떼, 비상하는 새떼, ‘그들의 빈 몸’은 새알의 껍질로 목련꽃으로 비유된다. 그리고 시적 화자는 실내에서 바깥의 소란스런 소리를 듣고 ‘아니 왜 이리 소란스러운가?’ 하는 의구심을 가지고 창문을 여니 막 부화한 새떼가 하늘로 날아오르는 것을 목도하기까지 짧은 순간이다. 그의 눈앞에 펼쳐진 피기 시작한 목련꽃은 이 새떼들의 비상과 그들의 빈 몸인 가지에 붙은 빈 몸인 껍질로 보인다. 그러니 시적 화자는 하늘로 날아가는 새떼와 흔들리는 나뭇가지에 붙어있는 그들의 빈 몸인 껍질을 바라본다. 동시에 한 대상 안에 내재된 두 개의 영상을 바라보는 것이다. 햇빛 속으로 날아간 하얀 새떼들의 모습이나 하얗게 걸린 껍질이나 둘 다 쓸쓸할 수도 있는데 시인은 그 감정을 상쇄하고자 한다. 이 모습도 ‘쓸쓸함과 공허감/따뜻함, 동적 이미지, 눈부심’과 같은 두 개의 정서가 서로 충돌하기 때문에 슬프거나 공허하거나 외롭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한 감정인 것이다. 양가적인, 복잡 미묘한 정서를 표현한 것이다. 그것을 통해 감정이 극도로 절제되고 있는 느낌의 시이다. 그래도 이 시는 생명의 힘찬 비상을 노래하는 데에 시인은 역점을 두고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껍질을 깨고 나온 새떼들의 치열한 생명력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겨우내 추위 속에서도 죽지 않고 잘 버티어 내어 환한 꽃등을 밝힌 목련꽃의 생명력과 껍질을 깨고 부화한 새가 일치되기 때문이다. 「조약돌」에 오면 이런 정서의 충돌이 일원화된 모습을 보여주며 하나의 돌멩이 속에 내재한 생명력을 간취한다.   작은 조약돌 하나 손에 꼬옥 쥐고서 지그시 눈을 감으면   아득히 먼 곳으로부터 너의 숨소리 들려오고,   아득히 먼 때로부터 너의 심장이 고동치는 체온이 전이되어 오네.   밤하늘의 별과도 같이 바닷가에 무리지어 네가 있음으로   세상은 비로소 살아숨쉬는 것들로 가득차 있고,   그것으로 세계가 한 덩어리임을 알려주네.   -2004. 11. 2. 11:20 「조약돌」전문   발끝에 채이며 별 의미 없이 나뒹구는 가치 없는 조그만 돌멩이도 시인의 손이 쥐어지면 이렇게 우주의 비밀을 듣게 된다. 아득히 먼 곳으로부터 들여오는 너의 숨소리나 아득히 먼 때로부터 심장이 고동치는 돌의 체온은 무엇일까? 그것은 아주 큰 바위의 기억이다. 작은 돌멩이는 큰 바위가 오랜 세월의 풍화를 거쳐서 현재의 조그만 조약돌이 된 것이다. 돌멩이 보다 더 작은 조약돌의 역사는 큰 바위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에 시인은 그 바위가 놓여있었던 곳과 그 시간을 묵상하며 완상한다. 바위였을 때부터 조약돌이 되기까지의 시간과 장소를 기억하며 그 속에서 있었던 크고 작은 일이 이제는 과거의 추억이 되었으므로 여유를 가지고 천천히 완상하는 것이다. 그런데 현재에는 밤하늘에 흩뿌려놓은 듯한 별처럼 바닷가에 무리 지어 조약돌이 있다. 밤하늘의 별은 무엇인가? 바로 영원을 의미하고 천상적인 이미지이다. 한 개의 보잘 것 없는 조약돌을 천상의 별과 같은 동격으로 승격시키고 있다. 그런 조약돌은 시인에게 세상이 살아 숨 쉬는 것들로 가득차고 그것으로 세계가 한 덩어리임을 일러준다. 시인이 길항한 바로 그 세상이 살아 숨 쉬는 것들로 가득 차 있고 세계가 한 덩어리라고 조약돌이 일러줌으로써 시인과 세상의 불편한 동거의 고뇌는 인식의 전환을 가져다준다. 세상이 부조리나 욕심 덩어리로 가득 차서 시인에게 모욕적일 때 시인은 자연을 만나러 떠나왔다. 떠나온 그 자리로 자연은 다시 돌아갈 수 있게 시인의 불화한 마음을 회복시켜주고 있는 시이다. 이러한 완상에는 느림의 미학이 탄생하는 자리이다. 「함박눈」에는 모든 것이 빠르게 흘러가고 새로운 상품들이 쏟아져 나오며 속도의 전쟁이라 불리는 ‘지금-여기’ 우리네의 세태와는 정반대의 정감이 펼쳐지고 있다.   소리 소문 없이 기척도 없이 눈이 내리네, 함박눈이 내리네. 아주 느리게 아주 태평하게 눈이 내리네. 함박눈이 내리네.   달리던 차들도 느릿느릿 움직이고, 분주하던 사람들의 손발도 느긋느긋해지네.   소리 소문 없이 기척도 없이 눈이 내리네. 함박눈이 내리네.   아주 느리게 아주 넉넉하게 따뜻한 사람들 품으로, 포근한 지상으로.   눈이 내리네. 함박눈이 내리네. 펄펄 아주 느리게, 아주 태평하게.   -2005. 01. 18. 13:19 「함박눈」전문   더러는 살면서 함박눈이 많이 내려쌓여서 집과 일터 사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모든 관계들이 끊겨서 홀로 자신의 집에 머무르며 묵직하면서도 소담스럽게 내리는 굵은 함박눈을 바라보면서 그 눈을 완상하는 시간이 현대인에게 필요하다.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사람들과 통신해야 되는 현대인들은 홀로 있는 것을 두려워한다. 홀로 된 것은 죽음이나 진배없이 생각되는 영적 어린 아기이다. 어울려야만 성장하고 살아갈 수 있다고 강요하듯 하는 이 움직임들은 무엇인가? 인간은 관계 속에서 사는 것은 분명하지만 이것은 인간을 오히려 홀로 설 수 없게 한다. 독립성이 없는 인간은 영적으로는 어린 아기이다. 그 많은 사막 교부들은 자신의 가족과 세속을 등지고 신을 만나기 위하여 사막으로 불편한 동굴로 들어가는 것을 선택하고 불리움을 받았었다. 하나를 선택하면 하나를 버려야 한다. 선택은 언제나 눈물겹다. 소중한 한 부분을 버려야 하기에. 그러나 현대인은 그 선택을 두려워한 나머지 모든 걸 다 가진 채로 영적으로는 어린 아이가 되어가고 왜소해져 가고 있는 것이다. 시인은 이 시에서 ‘포근한 지상’이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시인은 다시 세상을 따뜻하게 바라보는 눈이 열린 것이다. 마음을 돌린 것이다. 그것은 함박눈이 시인에게 아주 느리게 태평하게 내려왔기 때문이다. 함박눈처럼 ‘빨리 빨리’가 ‘느리게 느리게’가 되면 우주와 동식물, 우주와 인간, 동식물과 인간, 인간과 인간 사이의 먹이사슬에서 오는 모든 경계나 경쟁, 관계의 거미줄에 묶여 파닥이는 고단함도 편해진다. 함박눈은 바로 가장된 평화의 무장을 해제하고 사람과 사람, 하늘과 땅, 만물 사이의 틈을 소리 없이 메워주고 채워준다. 몽고어로 ‘뽀레뽀레’란 말은 ‘느리게 느리게’라는 의미이다. 완상이란 느림의 미학에서 나오는 것이며, 관조에서 더 깊이 침잠했을 때에 얻어지는 법락의 경지이다. 이시환 시인의 시집『백년완주를 마시며』는 완상의 경지를 독자들에게 보여주어 느림의 미학으로 이끌어 감으로써 문학적 치유를 해주고 있는 것이다.      
1177    詩作初心 - 기행시 알아보기 댓글:  조회:4593  추천:0  2016-03-12
여행하는 문학 : 풍경을 넘어・2 . 1 -이시환의 인디아 기행시집 『눈물 모순』에 부쳐   심종숙(시인, 문학평론가)     『준주성범』의 저자 토마스 아 킴피스(Thomas a kempis, 1380-1471, 독일의 수도사, 종교사상가)는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을 섬기는 것 외에는 ‘허무로다 허무!모든 것이 허무로다!’라는 코헬 1장 2절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현세를 경계하며 하느님 나라를 사모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높은 지혜다.”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이 헛된 일이란 소멸하고야 말 재물을 찾는 것, 그 재물에 희망을 두는 것, 존경 받기를 갈구하거나 높은 지위를 꾀하는 것, 후에 큰 벌을 받을 육신의 욕구를 좇는 것, 오래 살기만 원하고 착하게 살 생각을 하지 않는 것, 현세의 생활에만 골몰하고 장차 올 후세를 미리 생각하지 않는 것, 잠깐 사이에 지나가 버릴 것을 사랑하고 영원한 즐거움이 있는 곳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지 않는 것을 들고 있다. 이 영성적인 글에서 알 수 있는 것은 고대로부터 인간은 신을 섬겨왔고, 그 신을 섬기는 것이 인간이 의식주를 얻고 현세의 것을 추구하는 것보다 우선순위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삶은 유한하고 이 현세란 내세나 후세로 건너가는 징검다리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인간에게 의식주를 얻을 수 있게 하고 현세적 복락을 주는 것도 신에 의해서라고 믿든지 인간의 힘으로 이룰 수 없는 것을 기구(祈求)를 통하여 얻고자 했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죽음이 없다면 이런 것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에게 죽음이 있다는 의미는 인간이 지닌 운명임과 동시에 유한성의 본질을 가진 존재라는 뜻이다. 이것을 빼고 다른 이야기 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그러므로 다음 세상으로 건너가기 위한 인간의 현세는 어떤 것이어야 하느냐의 문제일 것이다. 그 말은 어떻게 하면 현세를 가장 가치 있게 살아가는가의 문제이다. 이때의 가치란 세상의 가치와는 구별되는 신적인 가치라고 해야 하며, 인간이 그러한 신적인 가치를 살 때야말로 신을 닮아가는 인간이 되는 것이다. 인간은 신에 의해 창조되었다고 보는 창조설과 인간이 유인원과 같은 원숭이나 침팬지, 고릴라 등으로부터 진화되었다는 진화론의 오랜 각투는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지금-여기’의 우리에겐 이 현세의 극악한 악덕들의 결과인 모순과 부조리, 그것들이 거대한 뿌리를 형성하여 만들어낸 그릇된 권력과 폭력 속에 살아가면서 그것들과 싸워가기에도 힘겨운 것이다. 의롭지 못한 일에 가담하면서도 그것이 의로운지 의롭지 못한 것인지도 분별하지 못한 채 양심과 이성을 팔았던 나치즘에 자발적으로 동조하고 시녀노릇을 한 인간의 지식이란 얼마나 쓸모없으며, 한낱 인간 형제를 죽이는 데 정당화된 말과 지식들에 지나지 않는가 말이다. 다만, 우리에게는 인간의 유한성을 넘어선 영원한 생명의 진리만을 따르는 길이 가장 고귀한 것임을이 저자는 이야기하고자 한다. 이 영원한 진리에 대한 사랑이야말로 신에 대한 영원한 사모이며 섬김이 될 것이다. 어떤 이는 신도 인간이 만들어 놓은 것이라고 한다. 이 말은 아주 큰 오류를 가지고 있다. 인간이 신에 의해 피조 되었다는 것에 정면으로 부정하는 이 생각이야말로 가장 큰 잘못을 범하는 것이다. 인간이 신을 만들었다면 그것은 하잘 것 없는 예술품에 지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만들어낸 것 중에 우리들의 눈을 매료시키는 성당이나 건물들은 신을 위해서 만들어졌기에 인간의 신을 사모하는 마음은 아주 오랜 옛날부터 해온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탈출하여 고난과 시련기인 40년의 광야생활을 하던 중 -이집트를 향한 신이 보여준 10가지 재앙을 경험하고 극적으로 갈대바다를 건너면서 신의 전지전능함과 사랑을 경험했음에도- 그들은 그들의 신을 버렸고 금송아지와 같은 우상을 자신들의 손으로 만들어 경배하였을 때 그 금송아지는 맘몬에 다름 아니며, 그 결과는 악덕의 생산에 지나지 않았다. 악덕의 대량생산은 어떻게 보면 스스로 자멸하는 길인 것이다. 신이 벌을 내렸다고 성경에서는 전해내려 오지만 어쩌면 그 악덕의 결과로 재앙이 덮쳤기에 그 재앙 속에서 다시 신을 찾게 된 과정일 것이다. 여기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원래대로 회복해 가는 데에는 성찰과 회개(metanoia)가 뒤따랐을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회개란 단순히 일상의 크고 작은 잘못을 뉘우치고 고치는 것만이 아니라 삶을 바꾸는 일이다. 금송아지에게 돌린 시선을 여호와 하느님께로 시선을 옮기는 것이다. 인간은 피조 되었기에 창조주에 대해 끊임없이 닮아가고 창조된 목적에 맞게 살아가야 한다는 진리를 따라가기만 하면 인간의 삶은 지복 -신이 주는 사랑의 선물- 이 예정되어 있음에도 그것을 믿으려고 하지도 않을 뿐더러 따르려고도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과학적 진리로 이것을 접근하다 보니 눈에 보이지 않고 실증되지 않는 것은 인정하려하지 않는다. 그러나 천문학은 그러한 계량화되고 실증적이기만 한 과학적 진리의 오류를 조금이나마 해소하기 위해 인간의 눈을 지상에만 붙잡아 두는 것이 아니라 하늘을 보게 하고 먼 시원(始原)인 우주를 바라보게 한다. 불분명한 것, 불명확한 것이야말로 신의 세계이다. 신의 세계는 눈에 보이는 것을 넘어 있기에 불분명하거나 불명확할 수밖에 없다. 인간이 신을 부정하면서 생긴 비극은 그 이전의 어떤 비극보다 더 참혹하였다. 그 이전에는 천재지변이나 약탈을 목적으로 하는 전쟁이었으나 신을 부정한 인간들에 의해 저질러진 재앙은 대학살로 이어진 것이다. 이러한 근대의 반생명적인 것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는 현대철학이나 이론들, 담론들이 풀어야 할 숙제이다. 그래서 저자는 “눈은 보아도 만족하지 못하고 귀는 들어도 가득 차지 못한다”라는 코헬 1장 8절의 격언을 기억하라고 하며 “이 세상 사물을 사랑하는 마음을 없애고 무형한 것을 찾아 나서기 위해 힘써라. 세상 것을 사랑하는 마음을 따르게 되면 결국 양심을 더럽히고 하느님의 은총을 잃게 된다.”고 권고하고 있다.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의 종 모세의 영도로 가나안 복지에 이르렀으나 광야살이 때와 같은 일 -왕국분열, 이방신 숭배와 타락- 을 저지른 끝에 결국 바빌론 유배로 귀결되었다. 바빌론의 강가 기슭에 앉아 시온을 그리며 눈물짓던 시편의 저자는 잃어버린 하느님과 나라와 고향, 가족들과 공동체을 그리워한다. “바빌론 강기슭 거기에 앉아, 시온을 그리며 눈물짓노라. 그 언덕 버드나무 가지에 우리의 비파를 걸었노라. 우리를 포로로 잡아간 자들이 노래를 부르라 하는구나. 압제자들이 흥을 돋우라 을러대는구나. 시온의 노래를 불러라. 우리에게 한 가락 불러 보아라.” 우리 어찌 남의 나라 낯선 땅에서, 주님의 노래를 부를 수 있으랴? 예루살렘아, 너를 잊는다면, 내 오른 손이 굳어 버리리라. 내가 만일 예루살렘, 너를 생각지 않는다면, 너를 가장 큰 기쁨으로 삼지 않는다면, 내 혀가 입천장에 달라붙으리라.”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을 귀향 시켜주고 포도의 수확 철에 즐기는 축제의 분위기를 다시 되돌려 줄 분은 하느님밖에 없음을 모든 것을 잃고 난 이국의 유배살이의 설움에서 깨닫게 된다. 이 애탄의 비가(137편1-6)는 뼈아픈 회개를 하는 저자의 심정이 녹아있어 읽는 이로 하여금 애처롭게 한다. 비파를 타는 손과 거기에 맞춰 부르는 혀가 굳어 버려라고 할 만큼 유대인들의 저항적 심정을 읽을 수 있는 노래이기도 하다. 이것은 만해 한용운의 『님의 沈黙』의 님을 잃은 애타는 심정과 성찰, 자기부정에 이르는 길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 하겠다. 구약성경의 모세오경이 바빌론 유배 시 유대인 지식층 디아스포라에 의해 집필되었다는 의미는 오경이 그들의 유배 전의 역사에 대한 성찰과 회개가 동인(動因)이 되었음을 알게 한다. 이 글쓰기는 페르시아 임금 네부카드네자르에 의해 포로로 잡혀간 이후(B.C 587~540)부터 키루스 임금의 귀환 칙령(B.C 539)이 내릴 때까지이다. 유배지는 바로 사막과 광야와 같은 시공간이다. 사막과 광야는 고난과 시련의 시공간이며, 성찰과 회개, 정화와 재생의 시공간이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시나이 산이 바라보이는 곳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으며 살았던 광야의 40년, 바빌론 유배지에서 근 70년간은 고난과 시련, 성찰과 회개, 정화와 재생(재건)의 시기였다. 이와 같이 고난과 시련의 시공간에 놓여진 이들도 이와 다르지 않다.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고난과 시련의 여정에로 불리움을 받은 것이며, 이것을 부정하기란 어렵다.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고해(苦海)를 건너가는 것이란 의미는 이 여정을 지나는 순례의 삶이 바로 인간의 삶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그리스도교에서 하느님을 섬기거나 그 진리인 하느님 나라를 사모하듯이 이시환 시인의 제11시집『눈물모순』에는 힌두교와 불교적 전통이 강한 인도를 통하여 문학과 종교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이 시집에서 중핵을 이루는 것은 불국토로서의 공간과 시간, 강, 돌과 사막이다. 그의 인도기행시편인 이 시집에서 보여지는 것은 사막과 광야와 같은 고난과 시련의 시공간 속으로 시인이 걸어 들어가 -시인이 여정을 수행하는 순례자로 초대되어- 일구어낸 커다란 마음의 밭이라 하겠다. ‘눈물모순’이란 바로 이 고통으로 인한 비탄과 시련 속에서 흐르는 그 눈물이 바로 은총임을 깨닫게 되는 데에서 발견한 삶의 역설적 진리가 종교적 신비로 여겨지는 과정에서 나오는 눈물이다. 이 때 흐르는 눈물은 신의 은총으로 변화 된 내면의 고통스런 고백이다. 먼저, 첫째로 서시(序詩)에서 이시환 시인에게 인식되는 인도는 “멀고 먼 길을 돌아온 강물은/비로소 망고의 과즙이 되고,/사막의 모래알조차 그대로/밤하늘의 별이 되는 광활한 세상”이며 “위아래가 따로 없고,/그야말로 귀천(貴賤)이 따로 없는,/살아 숨 쉬는 것들로/가득한 세상”이다. 인도는 인간 세계의 하나의 큰 바다인 어머니와도 같은 공간이다. 지식, 명예, 부, 권력으로 차별되는 계급과 신분의 상하가 따로 없으며 귀천이 따로 없이 모두가 동일한 존재일 뿐인 사람들이 사는 곳이다. 그래서 이곳은 오히려 “궁궐에 사는 이들에겐 수심(愁心)이 배어 있어도/남의 처마 밑에서 늦잠 자는/노숙자들의 얼굴에는/미소가 떨어지지 않는 백성들”이 사는 나라이다. 이것이야말로 성경에서 말하는 하느님 나라의 모습이 아닌가? 그리고 물이 근원에서부터 먼 길을 돌고 돌아 흘러와서 아열대 과일인 망고의 달콤한 즙(汁)이 된다는 의미는 물이 ‘멀고 먼 길’을 돌아 큰 강이나 바다에 이르듯 자신에게 부딪쳐오는 안과 밖의 모든 길항관계들을 물처럼 부드럽게 흐르듯이 삭이고 삭혀 달콤한 즙으로 변형되는 곳이다. 마치, 한 송이 연꽃이 진흙의 더러움을 삭이고 삭여서 청초한 꽃으로 탄생되듯이 말이다. 인도는 인간 간의 차별상이 없는 평등상이 실현된 불국토의 땅이며 사막의 모래알조차도 밤하늘의 별이 되는 신비한 종교적 이상-힌두이즘과 불교적 진리- 가 실현된 땅이다. 그래서 사막의 모래알과 같이 거칠고 하잘 것 없으며 쓸모없는 것조차 밤하늘의 신비스런 별이 된다. 이뿐만 아니라 인도는 인간과 동물이 한데 어울려 사는 “동화(童話) 속 같은 나라”이며 “눈에 보이는 짧은 현세(現世)보다도/보이지 않는 길고 긴 내세(來世)를 위해/오늘을 사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나라이다. 인간과 동식물에게도 미치며 두루 나투시는 부처의 진리와 자비로 가득한 이 땅에서 “신의 자비로운 아들딸들은/오늘도 강물에서/호숫가에서 목욕재계하고/밤에는 별들의 숨소리에 귀를 기울이며/신들의 심기를 헤아리느라/ 부좌를 풀지 않네.”라고 하여 수행과 고행을 하며 신의 심기에만 오직 관심을 두고 삶의 중심을 두는 사람들이 사는 대지이다. 그래서 이 땅의 사람들은 먹고사는 일의 중심에 신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그저 먹고 살기 바쁜 중생들의 궁색함에서/버려지는 것들이 이곳저곳에서/썩어가면서/피어나면서/뜨겁게 몸살을 앓는/대지여/강물이여/사막이여”라고 외친다. 그리고 “문득, 내가 태어나기 전과 내 죽은 후를/오래오래 생각하는,/그리하여 명멸(明滅)하지 않는/존재의 근원을 향해 꿈을 꾸듯/노(櫓)를 저어나가는/강가 강의 백성들”이라고 한다. 이 시 구절은 현재의 본유(本有)에서 전생과 후생을 명상하며 ‘명멸하지 않는 존재의 근원’을 향해 노를 저어나가듯이 끊임없이 수행해나가는 백성들이 사는 곳이므로 종교가 전체로서 작동하는 나라이며, 그 나라의 백성인 것이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불교의 영원무궁한 길이를 가진 시간대(나유타 겁)에서 아주 짧은 찰나에 지나지 않고 거기에서 명멸하지 않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다. 그러기에 인도인들은 내세의 삶을 위해 본유가 있을 뿐이므로 수행과 정진이 습관이 되어있고, 오히려 가진 자보다 가지지 않고 보잘 것 없는 존재들이 더 귀하게 드러나는 세상이므로 그리스도교의 하느님 나라와 다름없는 땅이다. 시인은 이 인도의 백성들을 “검게 탄 피부에 흰옷을 걸친/깡마른 사람들이 서성이며/웅성거리며,/분주하게 움직이어/나비떼가 내려앉는 듯/목련꽃을 피워놓는다.”라고 하여 열차에서 내리는 수많은 인도인들의 모습을 목련꽃에 비유하면서 “눈이 부시게/눈이 부시게”라고 감탄한다. 이것은 2008년 4월 2일쯤에 마무리된 시편인데 인도기행시집의 서시의 중요 부분들이다. 이 시 구절에서 간취되는 것은, 이시환 시인이 그렇게도 인도에 매료된 이유는 그의 눈에 비친 인도는 귀천이 없고 상하의 차별이 없는 평등상이 실현된 모습의 불국토이며, 그것이 계속 유지가 되는 것은 끊임없는 명상을 통한 수행과 고행을 하며 신을 섬기는 나라이며, 신을 삶의 중심에 두기 때문이라고 여긴 듯하다. 두 번째로 시간에 관한 시로서 「더디 가는 인디아 시간의 수레를 타고」를 읽어보자.   믿기지는 않겠지만 지구를 떠나 행성(行星)을 바꿔 타면 몸무게가 바뀌듯 우리의 시간조차 빠르고 더딘 곳이 있다네. 하루하루가 유난히 빨리 가는 사람들은 인디아로 가보시게나.   그곳에 가서, 아주 느릿느릿 가는 시간의 수레를 타고 낯선 세계를 한 바퀴 돌아보시게나. 마음이 조급한 이들의 시계바늘이야 여전히 조바심을 내겠지만 멀리 돌아가는 그들의 시계바늘은 아주 더디다네.   -「더디 가는 인디아 시간의 수레를 타고」부분   이 시에서는 인도가 동서남북 대지를 가로지르는 야간열차의 빠른 속도와 현대식 무기와 사상이 있으나 그들의 발걸음은 느리면서 무겁고 저들의 동작은 굼뜨면서도 여유롭다고 한다. 그래서 하루가 너무 빨리 가는 사람들은 꼭 인디아로 가보라고 한다. 이 나라는 과거, 현재, 미래가 한 통속이 되어 있는 기이한 나라이다. 그래서 시인은 “유별나게 느릿느릿 가는/시간의 수레 위에 앉아 콧노래를 부르는,/뚱뚱하기도 하고 깡마른/저들의 티 없는 미소가/저들의 해맑은 눈빛이/경이롭고 경이로울 뿐이다”라고 하면서 그것은 삶에서 때로는 “경우에 따라서는 지름길 보다/ 멀리 돌아가는 길이/더 빠를 수도 있음을/직접 눈으로 확인하면서/온몸으로 느껴 보시구려.”하여 인도를 가서 직접 보고 느낌으로써 체득되는 것임을 말하고 있다. 모든 것이 빠름으로 일관된 세상에서 사는 시인은 인도의 시간의 수레를 타고 느리고 여유롭게 가는 시간을 경험하면서, 그야말로 느리고 무겁고 굼뜨고 여유로운 것의 아름다움을 만끽한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인간이 신을 만나고, 신이 인간에게 말을 건네는 시간의 본질이 아닐까 싶다. 신을 늘 만나고 신에게 대화를 나누며 신을 삶의 중심에 두는 사람들에게 빠른 것은 별 의미를 갖지 못한다. 2~3개월에 신제품이 쏟아져 나오고 2~3개월 후면 그것들은 다시 옛 것이 되어 의미를 잃고 이런 것들을 대량으로 끊임없이 쏟아내는 현대의 후기산업사회는 이 신과 접속하는 나라와는 다르다. 물론, 인도에도 산업이 발전하였고 현대식 무기가 있고 빠른 속도로 대륙의 동서남북을 달리는 야간열차가 있지만 동물들과 한데 어우러져 살고 가난한 이들도 행복한 인도에는 선진 산업사회와는 다른 풍모를 지니고 있다. 다음으로 「인디아 연꽃」을 읽어보자.   눈이 부셔 바로 볼 수가 없네. 너무나 멀리 있기에 너무나 높이 솟아 있기에 가까이 다가가 만져볼 수도 없네.   다만, 그 커다란 연꽃 송이 위에서 막 태어난 갓난아이 울음소리 들리고, 그 연꽃 송이 위에서 이따금 황금빛 왕관을 쓴 새들이 날아오르네.   다만, 그 커다란 연꽃 송이 위에서 무시로 천둥 번개 치고, 그 연꽃 송이 위에서 이따금 밤하늘의 수많은 별들이 반짝거리네.   하지만 임자는 그 연꽃 송이 위에 앉아 명상 삼매에 빠져있네. 어느 날 운이 좋게도, 그 연꽃잎 한 장 떨어져서 한참을 나풀나풀 지상으로 내려오는데 그 꽃잎이 땅에 닿자마자 에메랄드 빛 작은 호수 하나가 생기네.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네 눈조차 의심할 일이 생기고 마네.   얼마 후 갈증에 지친 사람들은 제 눈들을 비비며 사방에서 모여들고, 호숫가 한쪽 귀퉁이에서는 목욕재계(沐浴齋戒)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신화(神話)를 쓰고 신전(神殿)을 세우느라 분주하네. -「인디아 연꽃」전문   희고 붉은 연꽃은 만다라화, 만수사화라고 하여 불교적 진리를 상징하는 꽃이다. 이 꽃은 불국토에 태어난 석가모니 부처를 이 시에서 상징하고 불교적 진리의 법신이 바로 그가 된다. 연꽃 송이 위에 앉아 명상 삼매에 빠진 부처의 모습은 무량한 시간 속의 한 부처에 지나지 않는다. 여러 겁의 수많은 부처들 중에 법신으로 사바세계, 인간의 눈으로 보이는 이 세계에 현현하신 것이다. 이 인연 역시도 무한한 시간대의 한 순간에 이루어진 일인 동시에 영원한 시간의 속의 일이다. 그런 불국토의 사람들은 부처를 중심으로 기도와 찬양하거나 신화를 쓰고 신전을 짓는 것이 삶의 중심일 뿐이다. 이 시간의 수레는 또한 생명의 수레이다. 다음으로 강에 관한 부분이다. 「강가 강의 백사장을 거닐며」를 읽어보자.   언제부터였을까? 강물에 실려온 모래들이 쌓이고 쌓여 어지간한 바닷가 백사장보다 더 길고, 더 넓고, 더 두터운 모래밭이 형성된 여기. ‘바라나시’라는 고도(古都)를 에돌아 흐르는 강가 강 동쪽 변에 허허벌판처럼 펼쳐진 이 모래밭을 거닐며, 먼 옛날 온갖 번뇌를 다스려 깨달음을 얻은 자, 그를 생각하네.   그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상념(想念)들을 말할 때에도, 헤아릴 수 없이 길고 긴 세월을 말할 때에도 이 곳 모래밭의 모래알을 떠올렸지.   그는, 희노애락의 굴레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중생들에게 일체의 분별심(分別心)을 내지 않고, 일체의 변함조차 없는 여래(如來)의 덕성을 말할 때에도 발 밑 모래의 모래밭을 떠올렸지.   그로부터 줄잡아 이천 오백 년이란 세월이 흐른 지금, 그이 대신에 이방인인 내가 서 있네. 그가 바라보았을 강가 강의 덧없는 강물을 바라보며, 그가 거닐었을 강가 강의 모래밭을 거닐며 나는 생각하고 또 생각하네. 분명, 그가 바라보았던 강은 아니어도 그 강물은 이미 아니고, 분명, 그가 거닐었던 모래밭은 모래밭이어도 그 모래 이미 아니건만 변한 게 없는 이 강가 강의 무심(無心)함을.   그동안 얼마나 많은 풀꽃들이 이곳저곳에서 피었다졌으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풀꽃들처럼 명멸되어 갔을까?   무릇, 작은 것은 큰 것의 등에 올라타고 큰 것은 더 큰 것의 품에 안겨 수없이 명멸을 거듭하는 것이 생명의 수레바퀴이거늘 이를 헤아린들 무슨 의미가 있으며 살아 숨쉬지 않는 것이 어디 있겠는가?   -「강가 강의 백사장을 거닐며」부분   강가 강은 인도인들에게 생명의 젖줄이다. 오염된 듯한 강가 강에서 사람들은 그날 그날의 식수를 마시고 신을 예배하기 위해 목욕재계를 한다. 이 강은 작은 인도의 지류들에서 많은 오물들과 썩은 것들을 품으면서도 끊임없이 자정작용을 하듯이 인도를 정화시킨다. 이 강에서 인도의 역사는 오래 전부터 시작하여 현재에까지 이르며, 그 모래알들이 쌓인 만큼 그 시간의 부피도 두껍다. 이 강의 역사와 함께 얼마나 많은 것들이 명멸하여 갔을 것이며, 얼마나 많은 꽃들이 피었다 졌던가? 그러나 강은 무념무상에 잠겨 있다. 시인은 이 강가 강에서 번뇌를 다스려 깨달음을 얻은 석가모니 부처를 생각하고, 그가 수많은 상념, 수많은 시간과 세월들, 일체의 변별심과 일체의 변함이 없는 부처의 덕성을 항하사(恒河沙)에 비유한 것을 이야기 한다. 그러면서 작은 것은 큰 것의 등에 올라타고 큰 것은 더 큰 것의 품에 안겨 수없이 명멸을 거듭하는 것이 생명의 수레바퀴라 하여 이 모래알을 헤아리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 일인가 반문하는 것은 그만큼 부처의 자비가 뭇 생명들에 두루두루 나투신다는 의미이다. 이 시는 강가 강의 생명력과 여래의 우주만물에 두루 미치는 생명력이 동일한 의미로 쓰였다 하겠다. 세 번째로 돌에 관한 시편들을 읽어보자. 먼저 「옛 인디아의 석공(石工)들에게」를 읽어보자.   인디아의 돌은 돌도 아니런가. 돌을 자르고, 깨고, 쪼고, 다듬고, 갈아서 모양을 내는 솜씨로 치면 그대와 견줄 자가 없구나. 이 외진 골짜기 산 밑 거대한 돌 속으로 그려지고 세워지고 구축된 사원과 신전인 그대 ‘꿈의 궁전’을 들여다보노라면 그대는 정녕 돌이, 돌이 아닌 다른 세상을 살다갔네그려.   오로지 신을 향한 간절함인가. 먹고 살기 위한 그대만의 손끝 피눈물이 흐르는 기교인가. 살아남기 위한 고육지책(苦肉之策)이었던가. 나는 알 수 없다마는 분명한 게 있다면 그대 앞에서 돌은 한낱 찰흙덩이에 불과했다는 사실이네. 그런데 나는 왜 그런 너를 생각하면 눈물이 나는 것일까?   네가 마무리 짓지 못하면 네 아들이 마무리 지었을 것이고 네 아들조차 마무리 짓지 못하면 그 아들의 아들이 마무리 지었을 수많은 석굴사원에 녹아든 행복한 절망이 부질없고 내 눈물조차 부질없음을 알고 있으련만   나는 왜, 너를 생각하면 눈물이, 눈물이 앞을 가리는 것일까? 「옛 인디아의 석공(石工)들에게」전문   백년을 하루 같이 살며 대(代)를 잇고 잇기를 오백년이 넘도록 위로부터는 쪼아 내려오고 옆으로는 파고들어가 그야말로 커다란 바윗덩이 속으로 더 큰 신(神)들과 더 생명력 넘치는 인간들이 함께 살아갈 전당(殿堂), 전당을 빚어놓았네. 분명 돌을 쪼고 새기기를 진흙처럼 여겼으니 그대 손과 그대 머리와 그대 가슴들은 도대체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갔는가?   실로 놀랍도다. 놀랍도다. 그대 믿음에 놀랍고 그대 정성에 놀랍고, 그대 순종에 놀랍고, 그대 손끝에서 피어나는 기교에 놀랍도다. 놀랍도다.(중략)   하여 나는 쓸쓸하구나 장엄하고도 거룩한 신전이여. 하여, 모든 게 부질없구나. 단단하지만 진흙에 지나지 않는 돌의 꿈이여. 돌의 말씀이여.   그저 바람결에 흔들리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가는, 저 푸른 풀잎이 나의 성(城)이요, 그저 부드러운 햇살에 미소 지으며 순간으로 영원을 사는, 저 돌에 핀 작은 꽃이 나의 궁전임을.   -「엘로라 Ellora」부분   첫 번째 시편은 ‘아잔타, 엘로라, 우랑가바드, 뭄바이, 엘리펀트 아일랜드 등 기타 석굴사원을 돌아보고’라고 부제가 달린 「옛 인디아의 석공(石工)들에게」이며, 불교 문화유산 앞에서 그것을 만든 석공들을 기리며 시인의 상념을 시로 풀어 쓴 것이다. 돌은 석공들의 삶의 방편이었든 종교적 정념이었든 간에 장인들의 손끝에서 거대한 석굴사원들이 탄생되었으며 돌을 다루는 그들의 솜씨가 마치 진흙을 다루듯 한 장엄한 예술품 앞에 시인은 감탄을 하면서도 이 석굴사원에 녹아든 행복한 절망에 울고 그 눈물조차 부질없음을 깨닫는다. 석공에게 돌이 하나의 삶에서 겪는 고난이자 기쁨이자 먹기 위한 방편이자 종교적 정념일 것이라는 것이 시인의 생각이다. 그런 돌에 새겨 넣은 석공의 꿈과 돌의 말씀은 세월의 비바람에 닳고 닳아 영원할 것도 영원하지 못하고 단단한 것조차 이미 단단한 것이 되지 못한다. 그래서 모든 게 부질없다고 하여 불교적 무상을 드러내고 있다. 차라리 그런 돌보다 바람결에 흔들리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푸른 풀잎이 시인에게는 성(城)이며, ‘순간으로 영원을 사는,/저 돌에 핀 작은 꽃’이 시인에게는 궁전이라고 하여 돌의 단단함과 같은 고체성이 풀과 작은 꽃과 같은 식물성의 부드러움으로 변화되어 거대한 사원과 궁전, 성에 상반되고 있다고 하겠다. 네 번째로 사막은 인도기행 시편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가? 「사막 투어」를 읽어보자.   나는 철없이 사막 투어를 떠나네. 얼굴엔 선크림을 바르고 머리엔 창이 긴 모자를 눌러쓰고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선글라스까지 끼고서 그야말로 철없이 사막 투어를 떠나네.   그곳 어디쯤에 서서 그곳 어디쯤을 바라보지만 그것은 분명 수억 수천 년의 세월이 빚어온 한 말씀의 성(城)이요, 그 성의 한 순간 영화인 것을.   아직도 곳곳에 솟아있는 오만한 바윗덩이 부서지고 부셔져서 내 살 같고 내 피 같은 모래알이 되고, 그것들은 다시 바람에 쓸리고 쓸리면서 오늘, 어머니의 젖무덤 같고 궁둥짝 같고 깊은 배꼽 같고 긴 다리 사이 같은   모래뿐인 세상, 적막뿐인 세상 그 한 가운데에 서서 머리 위로는 쏟아지는 햇살로 흥건하게 샤워하고 발밑에서부터 차오르는 어둠으로는 머릴 감으면서 나는 비로소 눈물, 눈물을 쏟아놓네.   아, 고갤 들어 보라. 살아 숨 쉬는, 저 고단한 것들의 끝 실오리 같은 주검마저도 포근하게 다 끌어안고, 혈기왕성한 이 육신의 즙조차 야금야금 빨아 마시는 모래뿐인 세상의 중심에 맹수처럼 웅크린 적막이 나를 노려보네.   한낱, 그 뜨거운 시선에 갇힌 두려움 탓일까? 모래 위에 찍힌 내 발길의 시작과 끝이 겹쳐 보이는 탓일까? 하염없이 흐르는 내 눈물이 마침내 물결쳐가며 머리 위로는 숱한 별들을 닦아 내놓고 발밑으로는 깨끗한 모래톱을 펼쳐 내놓는 이곳에서 숨조차 멎어버릴 것 같은, 그 눈빛 속으로 내가, 내가 드러눕네.   -「사막 투어」   이 시에 대해 시인은 ‘무엇이 내 심장을 뛰게 하는가? 태양의 두터운 입술도, 바람의 격렬한 포옹도 아니다. 오로지 내 살 같고 내 피 같은 모래알뿐인 사막의 깨끗한 적막이다. 그것은 내 생명의 즙을 빨아 마시지만 내 터럭 같은 주검조차도 포근하게 끌어안는다.’는 글을 남겼다. 이것이 부제라고 하기에는 너무 길고 사막에 대한 시인의 생각을 노트한 듯하다. 이 글에서와 같이 사막의 모래알은 시인에게 있어 피와 살이며 깨끗한 적막이라고 하였다. 시인이 마주한 생의 사막은 무엇인가? 신 앞에서의 단독자로서의 철저한 고독, 그 고독에로 초대 받은 자는 자신의 내면과 마주한다. 그 속에서 적막함이 맹수처럼 자신을 삼킬 듯한 고독이 시인에게 눈물을 불러온다. 한 남자의 고독한 울음, 한 시인의 고독한 울음, 그 울음은 그치지 않는다. 사막은 눈물방물 속에서 빙글빙글 천천히 거대하게 회전하고 시인의 울음은 사막의 적막을 서서히 부순다. 시인의 울음은 견고하게 쌓여서 점성으로 질기게 붙어있는 모래의 결속력을 해체시킨다. 모래알들이 약간 떨다가 조금씩 움직인다. 마치 울음의 폭풍이 사막의 모래알을 우리 눈앞에 거대하게 날리듯이 날리듯이 울음은 빙글빙글 원운동을 하고 사막의 모래폭풍도 둥글게 휘몰아치는 가운데 시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그 적막 속에서 눈물 흘리며 큰 소리로 흐느껴 우는 시인의 모습이 이윽고 보이지 않는다. 사막의 모래폭풍이 가려버렸다. 시인의 울음은 얼마나 그 자신의 속을 토해내었을까? 속에 차곡차곡 쌓여온 것들이 눈물과 콧물, 침과 엷고 투명한 가래로 끊임없이 가슴에서 치받쳐 올라온다. 오장육부에 쌓인 묵고 삭은 것들이 위장과 식도를 타고 밖으로 끊임없이… 그 밑바닥에 붙은 것까지 다 토하듯 게워내고 나면 사막은 시인에게 영혼의 모래욕탕이 되어 그의 비워낸 내면을 정화시켜준다. 우리의 시야에서 일순간 사라진 시인은 저 멀리서 하얗고 조그만 몸을 드러낸다. 모래폭풍이 지난 사막에 말갛게 드러나는 풍경을 우리는 본다. 시인의 인도는 이렇듯 자신을 비우는 여정(旅程)이요, 순례(巡禮)이며, 정화(淨化)요, 재생(再生)의 시공이다. 시인은 그 자신만이 들어가지 않고 우리도 거기에 불러들인다. 풍경은 일그러지지도 않고 굴절되지도 않는다. 그 이유는 우리도 거기에 초대되었기 때문이다.     ////////////////////////////////////////////// 여행하는 문학 -이시환의 인디아 기행시집 『눈물 모순』에 부쳐   심종숙(시인, 문학평론가)     저 멀리 모래 언덕을 무언가가 흔들리며 다가온다. 사막은 작열하는 태양의 뜨거운 아지랑이가 가물거리기에 물체는 시야에서 어른거리다가 희미해졌다가 멀어지거나 다가오거나 한다. 등에는 짐을 지고 모래언덕을 오르는 사람이나 낙타에 몸을 싣고 낙타가 걷는 걸음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며 늘어진 어깨와 무표정하거나 더위에 지쳐 땀에 젖고 까맣게 그을리거나 열에 달아 벌게진 얼굴이다. 하늘은 뿌옇고 낮게 가라앉은 듯한 이 낯선 풍경 속에, 한 시인이 걸어들어간다. 풍경을 찢고 사막과 동화되기 위하여 들어간다. 풍경이 풍경만으로 존재한 근대의 풍경을 넘어, 시인은 걸어 들어간다. 풍경의 겉과 속을 다 들어가 본 사람과 풍경을 바라보기만 한 사람은 풍경을 어떻게 이야기 할까? 여기에서 이야기의 방식은 달리 전개될 것이다. 풍경의 겉만 본 사람은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듯 아주 일부분의 이야기를 할 것이다. 그러나 풍경 속으로 들어간 사람은 풍경 전체를 이야기 하려하고 풍경과 하나가 되어 그 사람이 들어감으로써 풍경에 변화를 줄 것이다. 여기서는 ‘들어간다’는 의미는 어떻게 ‘던질까’의 문제이다. 이시환의 열한 번째 시집인 『눈물모순』(2009)은 풍경 속을 들어간 사람의 이야기이다. 기행(紀行)은 무엇인가? 어느 곳을 방문하고 느낀 감상이나 생각들을 정리하는 것이다. 그는 왜 그곳을 택하여 가고, 그곳에서 무엇과 대면하여 무엇을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일까? 또는 왜 그 때 그 장소에 가는 것일까? 그리고 현실의 그 시공을 있는 그대로 이야기하는 것과 그것을 상상의 공간으로 재창조하여 이야기하는 것과의 차이는 무엇인가? 그에 앞서 왜 사람은 여행을 하는가? 여행은 일상의 공간과 시간을 넘어서 다른 공간과 시간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여행의 배경에는 일상에서 오는 권태나 딜레마로부터 탈출구를 찾고자 하거나 심신의 휴양, 이국적 정취나 문화에 대한 동경 등이 동인이 되며, 여기에는 현실적으로 물질적 풍요가 밑받침 될 것이며, 특히 최근의 해외여행 붐이 구루메(gourmet), 힐링(healing)을 위한 것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 이시환 시인은 제8시집 『상선암 가는 길』에서부터 일상의 공간과 시간을 떠나 고적한 산사를 찾거나 자연물과 조우하면서 고요와 침묵의 관상생활 가운데 자기 내면을 탐색하는 여행을 하고 있고 거기에서 얻은 깨달음을 시로 표현하였다. 이 시집의 후반부에서도 남미와 캐나다 시편들을 실었다. 이 시편들에는 남미의 대성당과 같은 화려하고 웅장한 그리스도교 문화유산들 속에서 스페인이나 포르투칼과 같은 제국주의 국가들의 지배이데올로기와 억압과 착취의 역사를 간취하고 피식민인들인 인디오들에서 일제강점기의 억압과 착취의 대상이었던 조선의 농투성이를 만나면서 주체와 타자를 동일시하는 시편들을 보여주었다. 제10시집 『애인여래』에서도『상선암 가는 길』의 관상생활을 더욱 깊이 하여 여래(대타자)와 ‘나’(주체)가 하나가 되는 불심의 승화를 보여주었다. 제9시집 『백년완주를 마시며』에서는 중국과 남아시아를 여행하고 쓴 시편들이 실려 있는데, 대륙적 풍모를 지닌 중국의 웅장하고 장대한 자연물(산수)에서 대우주 자연의 신비한 비경을 통찰하여 생명력을 노래하였다. 이들 여행 시편들의 두 줄기는 관조와 관상생활을 통한 구도(求道)의 의지와 현실의 모순과 부조리로부터 비판적 성격을 지닌 시편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하겠다. 열한 번째 시집인 『눈물모순』에 이르러 그간의 여행 시편들에서 얻는 시 창작 방법이나 그 세계가 인도여행을 계기로 하면서 한 권의 기행시집으로 온전히 내용을 채워 묶게 된 듯하다. 그러니까, 이시환 시인은 국내를 비롯하여 남미와 캐나다와 같은 아메리카 대륙과 중국과 남아시아를 여행하고 난 뒤 불국토의 땅인 인도를 방문하여 인도기행시집을 남겼으며, 제12시집인 『몽산포밤바다』(2013)에 이르러 그의 시업의 정점을 이루었고, 이어 그간의 중요 시들을 엮은『대공』(2013)이 나온 것이다. 물론 제12시집인 『몽산포밤바다』에서도 아프리카 대륙을 여행하며 쓴 시편들이 실려 있다. 시인은 국내여행부터 시작하여 해외의 여러 나라를 여행하면서 각각의 시편들을 제8, 9, 10, 11, 12시집에다 산재시켰으나 열한 번째 시집인 『눈물모순』은 인디아 여행 시의 시편들만 모아서 시집으로 묶어내고 있으며, 심층 여행 에세이도 출판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의 여러 여행지 중에서 인도에서 태어난 시들이 ‘인도기행 시집’이란 이름으로 독립된 시집을 형성하고 있다는 의미는 시인 자신이 인도 여행에서 받는 문화적 충격이 그만큼 컸기 때문이다. 그가 제8시집 『상선암 가는 길』과 제9시집 『백년완주를 마시며』, 제10시집 『애인여래』에서 보여주었던 발심과 자연물에서의 불성의 발견, ‘애인여래’라 불리우는 대타자와의 일치를 향한 구도적 의지와 귀의는, 불국토인 인디아 여행에서 실제 인디아와의 대면에서 받은 문화적 충격으로 이국 문화나 생활, 관습에서 오는 이해 부분에서 생긴 정신과 이성의 균열을 보여주거나 인디아 여행의 시공을 문학적으로 재구성한 형상화의 재창조 과정이었던 것이다. 인도여행과 관련된 그의 시에 대해 남긴 글을 『눈물모순』후기에서 읽어 보자.   내가 인디아에 아무런 준비 없이 불쑥 여행을 떠났던 게 언제였던가. 그 때 한 달 가량 머물며, 이곳저곳을 배회하며 받았던 문화적 충격은 꽤나 컸었다. 귀국해서도 한동안 일손이 잡히질 않았으니 그 때 충격이 컸던 것만은 사실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 충격 해소 차원에서 심층여행 에세이집이라 하여 『시간의 수레를 타고』를 애써 펴내기도 했다. 그 책이 나온 뒤, 나는 한동안 그 기쁨에 휩싸여 있으면서 ‘이제 그 인디아로부터 자유로워졌구나.’ 싶었는데 실은, 그게 아니었다. 그 뒤에도 시간이 갈수록 자꾸만 인디아 생각이 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시 쓰기 시작한 게 이 글들인데 분명 아무리 보아도 시(詩)가 아닌 듯하고, 시인 듯하기도 하다. 그 증거가 있다면, 소리 내어 읽을 때마다 왠지 껄끄럽다는 점이다. 두세 편을 빼고는 한 편 한 편의 시가 비교적 길기는 해도 고작 스물네 편뿐인데 읽어내기조차 쉽지 않았던 게 사실이라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체념한 채 한동안 그것들을 잊어버리기로 작정했었다.   위 글에서 유추해 보면 시인에게 인도는 문화적으로 큰 충격을 받은 땅이었고 그 일환으로 심층여행에세이인 『시간의 수레를 타고』를 먼저 만들어 내고 난 후 그 충격의 여파가 가시지 않아 다시 시를 써서 인도기행 시집인 『눈물모순』을 만들어 내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시인이 밝히고 있는 바, 이 24편의 인도 여행 시는 ‘시가 아닌 듯하고 시인 듯’하기도 하다는 자평과 함께 부드럽게 읽히지 않는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아마도, 이 부분은 기행산문을 먼저 쓰고 운문으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생겨난 문제점일 수도 있지 않나하는 생각이 든다. 시인의 이와 같은 자책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이 시집은 기행시집임에는 틀림이 없고, 내재율과 외재율을 가진 시임에는 틀림없다. 이 자책은 아마 시를 쓰는 장인으로서의 철저한 자기 작품에 대한 평가가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나 시인에게는 인도여행 후의 여파가 기행에세이와 시집으로도 이 충격이나 여파를 감당할 수 없었기에(‘도무지 일손이 잡히지 않아’) 다시 지중해연안국 여행을 떠나기 위하여 3개월을 준비하면서 그리스도교의 경전인 성경과 이슬람교 경전인 꾸란을 읽으면서, 두 종교에 관한 궁금증을 40여 편의 초고를 쓰면서 풀어갔다고 한다. 그 와중에 고대 그리스와 이집트에 관한 문명사도 읽으면서 여행을 준비하여 2009년 아직은 서울이 추운 3월에 떠나 꽃이 피는 무르익은 봄에 7개국 70일의 여행을 무사히 마치고 돌아왔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는 여행 준비 차원으로 읽었던 성경에 관한 초고들을 수정, 보완하고 지중해연안기행에 관한 것들을 정리하면서 인디아 기행원고를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2009년 4월은 성경 관련 초고와 인디아 기행원고를 수정, 보완하면서 여행 중에 쓴 일기를 뒤적이며 자료를 정리하는 데 시간을 다 보냈다고 시집의 후기에서 밝히고 있다. 여기에서 간취되는 시인의 일련의 작업들이 다분히 종교적인 순례의 기행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제도적 종교의 신앙인으로서 순수한 종교적 순례와는 다른 한 사람의 시인으로서 문인으로서 자신이 따르는 불교적 진리를 추구하면서 이웃 종교들의 경전 경험을 통해 그 이동성(異同性)을 발견하지만 종국에는 진리가 하나임을 깨달아 가는 과정에서 수행된 순례의 여정이 아니었나 생각되는 것이다. 그리고 인도기행 시편의 창작과 관련하여 첫째, ‘시적 공간’의 중요성을 들어 ‘시인에 의해서 구축된 시적 공간이란 시적 화자가 머무는 물리적 공간이면서 동시에 시간적 공간이다. 즉 시인의 정신적 시계(視界)로서 시공’이며 ‘문장으로써 구축되고 형상화 되는 시공(時空)이라고 밝히고 있다. 거기에 대한 예로 시문인 “멀고 먼 길을 돌아온 강물은/비로소 망고의 과즙이 되고(인디아 서시)”를 들어서 ‘강물’과 ‘망고’라는 두 대상 간의 관계 내지는 두 대상의 본질을 형상화시킴으로써 진정한 시적 공간을 축조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둘째는, ‘속을 감추어 놓는 운문의 긴장이 아니라 그 속을 풀어 헤쳐 놓는 산문으로서 또 다른 긴장상태를 조성해 놓으려는 새로운 시도이다. 시에 관한 일반적 이론인 비유적이고 함축적인 표현으로 의미 전달하는 과정에서 탄력을 유지하는 긴장을 가진 시의 기능으로부터 탈피하여 쉽게 그 의미를 겉으로 드러내는 문장들이 엮어 내놓은, 어떤 이야기의 구조 속에서 구축되는 현실성과 상징성에 시적 진실을 환기시켜 내는 힘을 발견한 점이다. 그러므로 그의 인디아 기행시들은 이런 의미에서 기존의 시에 관한 고착화된 개념에 대해 반기를 듦으로써 새로운 형식을 모색하였다. 셋째로, 존재의 본질이나 삶의 모순을 꿰뚫어보는 직관적 판단이 중요한 시구가 되어 그 기둥이 되고 있다. 이 부분에서 이시환은 여행에서의 볼거리인 화려한 궁전이나 높다란 성이 백성들의 고혈(膏血)로 지어진 권력자의 욕망을 단적으로 들어내 주는 상징물로 보고 그것을 찬양 찬미하는 감탄의 시가 아니라 “저 푸른 풀잎이 나의 성(城)”이며 “저 돌에 핀 작은 꽃이/나의 궁전”이라고 하여 풍경에 가리어 두 눈과 귀가 멀어지고 비판적 인식과 판단이 부재된 근대의 풍경을 넘어서 그 실체를 꿰뚫어 보고 있다. 이런 점이 이시환의 기행시에서 나타나는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의미는 풍경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듯이 하는 근대의 풍경과 달리 풍경 안으로 걸어 들어가서 풍경의 실체와 본질을 꽤뚫을 때 비로소 도달할 수 있는 것으로 어디까지나 그 풍경을 바라보는 사람의 인식의 지평이 어디에 서 있느냐의 문제이다. 즉, 풍경을 바라보는 사람의 스탠스에 따라 풍경은 얼마든지 왜곡될 수도 있다. 풍경을 있는 그대로 그린다고 하여도 풍경 너머에 있는 역사성과 거기에 내재된 생명력을 보지 못할 때 풍경은 평가절하가 되어 버린다. 예를 들어 일제강점기에 일본의 문인들에게 비친 조선의 모습은 왜곡과 평가절하로 얼룩져 있다. 일제강점의 역사적 시간 속에서 일본인들에게 비친 조선의 풍경은 시간적으로 다른 양상을 띠지만 풍경의 역사는 여전히 굴절되거나 왜곡의 역사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풍경에 관한 굴절과 왜곡의 역사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여기에는 이시환 시인이 말하는 대상의 본질을 형상화할 때 극복되어 질 수 있으리라. 풍경의 굴절과 왜곡이 지양되어야 할 이유는 이 대상의 본질에 가까이 다가가기 위한 풍경을 바라보는 자의 ‘자기 지우기’ 일 것이며, 여기에서 자기 지우기란 편견이나 그릇된 인식의 바탕에서 형성된 판단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즉, 대상에 대한 이해와 대상을 바라보는 자의 스탠스를 통해 우리는 풍경을 바라보는 자가 어디에 서 있으며, 그의 인식이 어떤 맹점을 가지고 있는지 분별할 수 있게 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시환의 「돌 속의 신전-엘로라 ‘카일라시’ 사원을 둘러보고」을 가지고 이 문제를 이야기 하여 보자.   돌은 내게 이야기 하네, 너무 어렵게 말하지 말라고.   돌은 내게 말하네, 그냥 쉽게 말해 버리라고.   돌은 내게 다그치네, 차라리 입을 다물어 버리라고.   폭염에 호박잎이 다 타들어가고 사람들의 마음조차 다 녹아내려도   아니, 폭우에 집안에 기둥뿌리 뽑히고 온갖 것들이 다 쓸려 내려가도   저 단단한 돌 속으로만 들어가면 저 깊은 돌 속으로만 들어가면   세상의 근심 걱정 다 내려놓고 두 다리 뻗고 숨을 돌릴 수 있는   궁전이 있고 신전이 있고 낙원이 있으리라.   그곳은 아주 시원하며 비바람이 몰아치지도 않으며 어떠한 소용돌이에도 휩쓸리지 않고, 그곳은 언제나 아늑하고 고요하며 미움이나 질투조차 없으며 폭력이나 전쟁 또한 없으며 오로지 그곳에서는 신의 심기(心氣)만 읽으면 되고 신(神) 앞에 간절한 마음으로 엎드리기만 하면 되리라.   그렇게 바깥세상과 완전히 차단된 그곳에서 명상삼매의 꽃을 피우고 온갖 구차스러움을 다 버린 채 죽어가는 줄 모르고 죽어감으로써 사는 돌 속의 신(神)의 아들딸들이여, 바야흐로 그곳은 시간도 정지하고 시비(是非)도 끊기고, 선악(善惡)도 없는가.   그런 낙원을 꿈꾸는 자들이 있었으니 그들은 돌 속으로 모여들어 수백 년이란 시간의 육신을 풀어 삭히고 태우면서 그 속에 궁전을 짓고 그 속에 거대한 탑을 세운 신의 자식들이렷다.   그런 너를 생각하면 현기증이 일지만 네가 구축한 돌 속의 세상을 돌아나올 때에는 이 가슴 두근거림을 부인할 수 없다.   -2008. 07. 02   인도는 국토가 우리나라보다 넓고 많은 자원을 가지고 있는 나라이며, 석가모니 부처가 태어나고 자라고 득도한 나라로 오랜 전통의 종교인 브라흐마를 믿는 나라, 힌두교적 전통과 불교적 전통이 깊고도 오래된 나라이다. 우리가 ‘불국토’라 함은 석가모니 부처의 탄생지라는 의미에서 그렇게들 부르고 있는 듯하다. 이 나라는 개발도상에 있는 국가로서 사람과 식물이 한 데 어우러져 살고 있고, 더러운 강가 강의 오염된 듯한 물을 마시며 여기저기 쓰레기 더미와 오물이 사람과 동물 사이에 한 데 어우러져 있는 나라이다. 어쩌면 이런 풍경은 시인의 눈에 아직 덜 문명화되고 덜 도시화된 우리나라의 근대 정도를 보는 듯한 느낌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네들의 꾀죄죄한 얼굴에서 눈빛은 맑고 영롱하며 여유롭기 그지없고 경계의 눈빛을 던지지 않으며 항상 웃는 얼굴로 이방인을 대하고 있다. 또 시간이 천천히 옮겨가는 이곳 사람들의 생활은 급한 것이 없고 조급하지도 않다. 그러면서 타지마할이나 불교사원 등의 호화롭고 장엄한 문화유산은 보는 이로 하여금 현실의 인도를 바라보는 눈을 멀게도 하며 인도인들의 여유와 느림의 생활 태도가 어디에서 나오는지를 짐작하게 하기엔 가늠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돌 속의 신전-엘로라 ‘카일라시’ 사원을 둘러보고」에는 사원을 이루는 돌을 통하여 인도의 본질에 다가가고 있다.거기에는 현실의 인도의 겉모습을 너머 신의 나라 인도, 그 나라에 사는 사람들은 신의 자식들일뿐이다. 시인은 이 시에서 인도가 지니는 풍경을 왜곡도 굴절도 하지 않은 채 담담히 그의 인식에 들어온 인도를 독자들에게 이야기 해주고 있다. 이 시에서 돌이 여행자, 즉 풍경을 바라보는 자인 ‘나’에게 말을 들려주는 방식으로 시 속의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다. 돌은 사물이고 무생물 주어이지만 활유법을 써서 ‘내게 속삭이네’라고 말한다. 돌의 말을 인도에 관해 시를 쓰는 시인에게 너무 어렵게도 말하지 말고 그냥 쉽게 말해 버리라고 한다. 그도 저도 아니면 차라리 침묵하라고 한다. 4연, 5연과 같은 현실적 고통들이 밀려와도 돌 속으로 깊이 들어가기만 하면 세상 근심 걱정 다 내려놓을 수 있는 궁전과 신전, 낙원이 있으리라 추측한다. 그곳에는 비바람과 소용돌이와 같은 생로병사의 고(苦)도 없어 아늑하고 고요하며 인간 사이에서 일어나는 시기, 질투와 같은 부정적인 감정, 폭력과 전쟁 또한 없다. 그곳에는 오로지 신의 뜻만 읽으면 되고 신 앞에 간절한 마음으로 엎드리면 된다. 그곳에는 험한 바깥세상과 차단된 곳이며 명상삼매의 꽃이 피고 온갖 구차스러움을 버린 채로 죽음으로써 사는 돌 속의 신의 아들딸이 사는 곳이다. 그래서 그곳은 시간도 시비도 선악도 존재하지 않는 낙원이다. 신의 나라 사람들은 ‘죽어가는 줄 모르고 죽어감으로써 사는’ 사람들이 사는 곳이 바로 인도임을 시인은 이 시에서 인도의 본질을 노래하고 있다.    
1176    詩作初心 - 물이미지 댓글:  조회:4599  추천:0  2016-03-12
이시환의 시법 : 부드럽게 생동하는 이미지들 -①물 이미지   심종숙(시인/문학평론가)     하나의 사물에 또는 자연물에 시인의 눈길이 멎는다. 시인은 왜 그 사물에서 눈길을 멈추는가. 왜 그는 그 사물에다 시선을 멈추고 그저 바라보다가 응시하다가 관조하다가 묵상하다가 관상을 하는가? 이 모든 시선의 단계는 시인의 사유와 결합되어 하나의 이미지를 만들어 낸다. 그 사유가 그저 어린 시절의 기억을 불러올 수도 있고, 시인이 늘 꿈꾸는 것을 만들어내어 눈으로 손으로 입으로 귀로 완상한다. 시인에게 가장 행복한 시간은 바로 이때가 아닐까한다. 하나의 이미지가 지각되어 자리를 잡으면 그것은 오랫동안 기억이 된다. 마치 어린 시절의 특정한 한 때의 사건이 우리들 머릿속에 하나의 영상이 되어 박혀있는 것과 같이 잊는 일이 없이 계속해서 첨가되면서 변형을 거듭하기도 한다. 어린 시절에 여러 가지를 경험하면서 그것이 무의식이나 전의식, 의식 속에 자리하고 있고 알지 못하는 어떤 사물을 통해서나 어떤 사건을 통해서도 그것이 돌출되어 나올 수도 있다. 그래서 갑자기 그 낯선 기억이 변형된 채로 돌출되어 나올 때는 불가해하거나 두렵거나 공포에 사로잡힐 수도 있다. 프로이드가 늑대아이의 정신분석을 정초한 것은 소년의 어린 시절에 목도한 부모의 정사 모습이 변형되어 나와서 신경증을 일으킨 예이다. 이미지와 정신분석의 관계는 분명히 어떤 연관성을 가질 것이며, 알게 모르게 늘 무엇과 연결고리를 갖고 있듯이 하나의 쇠사슬에 연결된 고리와 같다. 이미지에 관한 사전적인 정의를 알아보면 사고, 상기(想起), 상상 등의 체험에 있어서 대상을 생각하여 묘사할 경우, 직관적 내용을 수반하여 대상의 모습을 심상(心像), 표상상(表象像), 혹은 이미지라고 부른다. 그러나 과연 이미지라고 불리는 특유의 심적 존재가 인정될 것인지 어떨지, 이미지 체험은 지각이나 사고라는 체험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에 대해서는 견해가 크게 나누어져 철학, 심리학에서 논쟁의 초점이 되어왔다. 전통적으로 그리스 이래 이미지의 라고도 부르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이 견해에 의하면 이미지는 대상의 사상(似像:닮은 형상)을 주는 ‘그림’과 같은 것이고, 상상체험이란 이 심적인 ‘그림’을 ‘마음의 눈’으로 ‘본다’, 내지는 마음속에 그려지는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플라톤에게 이미지는 참실재(眞實在)인 이데아의 ‘사상’인 감각적 사물의 ‘사상’이기 때문에 참실재에서 이중으로 멀어진 가장 가치가 낮은 위치밖에 주어지지 않았다. 뒤집어 말하면, 이미지에 구비되는 실재에서 해방된 ‘자발성’ 내지는 예술적 ‘창조성’이 주목 받았다고 할 수 있다. 거기에 대해서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이미지 즉 ‘표상상(판타스마)’은 오류를 유인하는 것인 한편 상기나 사고에 있어서 중요한 인지적 역할을 가진다고 한다. 이미지는 공통감각의 작용에 의해 생기는 것이고, 상상체험은 사고와 감각(지각)의 양자로부터 구별되어, 양자의 중간적인 위치에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즉 상상은 우리들의 의지에 의존하고 대상에 대해서 감정적인 거리를 가질 수 있는 점이며, 그와 같은 것이 없는 사고 내지는 판단으로부터 구별되어, 다른 한편으로는 진실 또는 거짓일 수 있는 점에서 항상 참으로 간주되는 감각으로부터 구별된다.(『영혼론』3.3 「기억과 상기에 관하여」) 그러나 이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한 사고와 상상, 감각과 상상의 구별과 연관의 규정은 많은 불명확한 점을 남기는 것이었다. 이미지 체험이 사고와 질적으로 다른 체험임을 인상 깊게 제시한 사람은 데카르트이다. 예를 들어 천각형의 이미지를 만각형으로부터 구별하여 생각을 떠올리는 것은 쉽지 않음에 대해 천각형에 관해 생각하는 것은 삼각형에 관하여 생각하는 것과 같이 쉽게, 그리고 명확하게 할 수 있다(『성찰』6). 이 데카르트의 견해에 대하여 사고와 상상의 구별을 연속적인 것으로 생각하여, 이미지를 심적 활동의 중심에 놓은 사람이 영국의 경험론자들이었다. 예를 들어, 흄에 의하면 지각에 있어 주어지는 감각인상과 상기나 사고에 있어 의식의 대상이 되는 ‘관념’과의 사이에는 ‘선명함’이라는 차이가 있을 뿐이며, 그리고 모든 사고는 이 관념의 조작으로 간주된다. 이와 같이 합리론자와 경험론자는 사고와 상상의 구별에 관하여 사고방식의 차이가 있으나, 이미지를 ‘심적 화상(畵像)’으로 보는 점에서는 공통적이다. 그리고 이 견해가 그 후에도 19세기에 이르기까지 영향을 끼쳤다. 언어분석과 현상학의 관점에서 이미지에 관한 철학적 사유는, 20세기가 되면 심리학에서는 내관(內觀)이라는 방법이 부정되고 행동주의로의 전향이 생겨, 그것과 함께 이미지는 심리학에서 추방되게 된다. 이 행동주의적 방향을 취한 분석 철학의 흐름 속에서도 이미지는 존재하여 오히려 그 은 철저히 비판을 받게 되었다. 이 흐름의 대표자인 라일에 의하면, 통상의 눈으로 보는 것은 심적 눈으로 ‘보는’ 것과 구조적으로 완전히 다른 활동이고, 양자는 카테고리적으로 구별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미지를 그린다는 체험은 오히려 ‘~인 척하다(pretending)’라는 행위와 유사한 것이다. 에 대한 비판은 체험 내재적 입장을 취하는 현상학 속에서도 제출되었다. 후설에서 의식의 지향성이라는 개념을 계승한 사르트르는 이미지체험에 있어 대상이 나타나는 방식의 특질에 정위함에 따라 이 체험의 지향적 구조를 해명했다. 그러나 상상으로는 대상에 관하여 미리 알고 있는 것 이상으로 새롭게 알 수는 없는 점에서(사르트르는 이 상상의 특질을 ‘준관찰-quasi-observation’이라고 부른다), 또 상상에 있어서 대상은 지각세계에는 부재 내지는 비존재의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 점에서{상상체험의 이 지향적 성격은 대상의 무화(無化 néantisation)}라고 불리운다. 상상과 지각은 근본적으로 구별된다. 따라서 물적 존재든지 심적 존재든지 이미지라는 ‘것’이 있을 턱이 없고 이미지란 오히려 대상의 특유한 현현 방식 내지는 대상에의 특유한 ‘관계 방식’을 가리키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렇게 해서 사르트르는 라일과는 완전히 다른 루트를 통하여 이미지에 관한 유사한 테제에 도달하게 되었다. 이상과 같이 20세기에는 이미지의 은 심리학에서도 철학에서도 철저하게 비판받게 되었다. 그러나 심리학에서의 를 거친 후인 1970년대가 되면 의 일종이 완전히 다른 맥락에서 부활하게 되었다. 이미지논쟁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새로운 의 대표자 중 한 사람인 코스린에 의하면 심적 이미지에 해당하는 것은 컴퓨터의 화면에 묘사된 디스플레이와 같은 것이고, 그것은 축적되어 있는 정보에 기반을 두고 그 때마다 대상의 공간적 성질에 대응하도록 나타내는 것이다. 다만 마음, 내지는 뇌 속에서 문자 그대로 의미로 컴퓨터의 화면과 같은 것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서 문제는 기능적이고 공간적인 매체 상의 이다. 코스린들이 이와 같은 을 제출한 가장 큰 이유는 여러 가지 실험 결과 이와 같은 특수한 의 존재를 지지하고 있듯이 보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3차원 공간입체의 방향을 달리한 두 개의 그림을 보이고, 피험자에게 그것들이 같은 입체 도형인지 아닌지를 물으면, 입체 회전 각도와 답으로 요구하는 반응시간이 비례관계가 되는(이라고 불리는 실험) 결과가 알려져 있다. 이 결과는 이미지를 떠올리는 것에는 주어지는 정보에 바탕을 둔 단순한 계산과정과는 다른, 지각과 유사적인 방식으로 대상을 조작하는 과정이 포함되어 있음을 강하게 시사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거기에 대해, 피리신을 대표로 하는 의 제창자들에 의하면, 도 그 외의 정보와 같이 내지는 기술의 형태로 존재하고 있다고 간주되어 진다. 에 의하면, 전술한 과 같은 실험 결과도 일의적으로 을 지지할 리가 없고, 예를 들면 라는, 대개는 피험자에게도 명확하게 의식되지 않는 에 바탕을 두고 생겼다고 생각하면 설명 가능하다. 이 논쟁은 분명히 결론이 난 것은 아니고, 현재로는 뇌 과학자를 끌어들여 이미지 체험과 지각 체험 사이에서 어느 범위의 신경기능이 어떤 방식으로 공통적으로 이용되고 있는가 하는 문제로서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이미지는 인지적 역할을 가질 뿐만 아니라 미적 체험이나 창조활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가지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으나, 양자의 관계가 어떤 것인지는 반드시 명백하지 않다. 칸트는 의 이중 작동방식 속에서, 양자의 차이와 관련을 내다보았다. 이 점을 염두에 두고 비트겐슈타인의 의 사고가 참고가 된다. 예를 들어, 의 양의적 지각이 나타내고 있는 것처럼, 지각은 단순히 대상을 뿐만 아니라, 는 점이 눈에 띠는 경우가 있다. 이미지 체험이 지각과 유사하다고 생각되어질 경우에 제일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이 는 구조를 가진 지각일 것이다. 대상을 이러이러 한 것으로 고 하는 점으로 보여지는 의지적 성격, 다른 한편, 그 알아차리지 못했던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대상이 나타난다는 자발적 성격 등은, 감각과 사고 사이에서 이미지 체험이 완수하는 미적․ 창조적 역할을 해명하는 상에서 중요한 시사점을 줄 것이다. (Mary Warnock, imagination, 1976; Ned Block, ed, Imagery, 1982.) 이상에서 살펴본 바를 정리하면 핵심은 이미지가 감각과 지각에 의해 상상되어진 어떤 것이며,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판타스마에 가까우나 오류를 유인하는 것으로 쓰이지는 않을 것이며, 플라톤의 참실재인 이데아를 닮은 어떤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니까, 이미지는 감각과 지각, 지각과 상상의 사이에 위치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사르트르의 이미지 개념인 대상의 특유한 현현 방식 내지는 대상에의 특유한 ‘관계 방식’이라는 점이 시에서의 이미지를 이해하는 데 하나의 루트가 될 것이다.   이시환의 시에서 이미지는 두드러진다. 그의 이미지는 섬세하며 여성적이고 부드러우며 생동감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그의 주요 이미지를 나누어 보면 물 이미지, 바람의 이미지, 대지 이미지, 광물이미지, 식물 이미지로 나눌 수 있겠다. 이 이미지들은 그의 시의 세계가 불교 철학적 바탕 위에 서 있으므로 불교적 세계관과 거기에 따른 인식 및 지각이 대상을 만나 감각을 통하여 관계 지워지고, 현현하는 방식이며, 구조된다고 하겠다. 이런 의미에서 비트겐슈타인의 에 기반을 둔 라는 구조를 가진 지각일 것이다. 먼저, 물 이미지는 이시환 시에서 정화와 재생의 기능을 하는데, 이것은 그의 구도정신과 그의 삶에 녹아 흐르고 있다. 물 이미지가 가지는 폭은 그의 시에서 흘러넘치는 계곡물→강물→바다로 흘러들어가고 있고, 그 바다는 여래의 품을 상징하기도 한다. 이러한 표상들은 어디까지나 그가 불교적 철학과 인식의 바탕 위에 끊임없이 자기를 비워가는 내적 작업을 하였기에 가능했으며, 거기에는 관조와 관상의 자세를 견지하여 얻었던 결실이다. 제8시집인 『상선암 가는 길』속에 실린 「물」을 읽어보자.   마실 한 모금의 물 앞에서조차 우리는 깊이깊이 생각해야 하네. 넘치는 물이라 해서 모두가 우리의 갈증을 풀어 주지 않으니 말일세.   마실 한 모금의 물 앞에서조차 우리는 간절히 기도해야 하네. 흐르던 물조차 마르고 마르면 옥토가 사막이 되니 말일세.   마실 한 모금의 물 앞에서조차 우리는 진실로 감사해야 하네. 이 한 방울의 물이 곧 너와 나의 생명이란 꽃을 피우는 불길이니 말일세.   깨끗한 한 방울의 물속에 해맑은 물 한 방울 속에 크고 작은 만물의 숨이 깃들어 있고 그것으로 정녕 단단한 말씀이네.   -「물」전문   물은 우리가 일용하는 생명수요 없어서는 안 된다. 시인은 이 시의 제1연에서 넘치는 물로도 우리의 갈증을 풀어주지 못한다고 함으로써 일상의 물의 역할을 넘어서 영혼의 갈증을 채워주지 못한다고 했다. 제2연에서는 우리가 간절히 기도해야 하는 것은 기도의 강물이 흐르면 우리의 마음이 옥토로 가꾸어지나 기도하지 않으면 그 강이 말라 사막이 되고 만다. 그것과 같이 기도는 우리의 마음밭을 길경하는 역할을 한다. 시인은 기도의 강물이 흘러넘쳐야 마음은 항상 옥토라 하였다. 제3연에서는 한 방울의 물 앞에서 감사하는 마음을 지녀야 한다고 하였다. 이 한 방울의 물은 너와 나, 우리의 생명을 꽃피우는 불길이기 때문이다. 일상에서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하는 한 방울의 물을 관상하면서 시인은 깊이 생각하여 감사하고 기도해야 한다고 했다. 왜, 이 작고 보잘 것 없는 한 방울의 물을 중요시하는가? 그 이유는 제4연에서 깨끗하고 해맑은 한 방울의 물속에 크고 작은 만물의 숨이 깃들어 있고, 그것이 곧 말씀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이르면 시인은 자연물인 물을 이렇게 보고 있다. 그가 바라보는 한 방울의 물은 이런 존재이다. 그것이 말씀이라는 의미는 우주의 생명의 숨이 깃들어 있고, 만물 안에 말씀이 깃들어 임재하시기 때문에 그 한 방울의 물이 귀하디귀한 것이 된다. 이런 물 한 방울이 모여서 계곡의 물을 이루고 그 물은 대하를 거쳐 바다에 이르게 된다. 이것은 구도자의 여정에도 비유되며, 이시환 시의 물이 지니는 이미지이다.   바닥에 깔린 바위 모래 나뭇잎 조각들까지 있는 그대로 그 속을 다 드러내 보이는 것이.   바닥에 고인 하늘 햇살 바람까지 있는 그대로 그 속을 다 드러내 보이는 것이.   이리도 맑을 수가 있구나. 이리도 깊을 수가 있구나.   빈 그릇 같은 이 마음도 저와 같아 머물러 있는 듯 끊임없이 제 몸을 떠밀고 내려가 울퉁불퉁 돌들을 넘고 바위틈을 빠져나가며   마침내 눈이 부시게 두런두런 길을 여는 물굽이처럼 이 생(生)에 이 몸을 다 풀어 놓을 수 있을까.   -2003. 4.1. 20:32 「화엄사 계곡에 머물며・3」전문   제1연과 제2연은 지리산 화엄사 계곡의 물을 바라보면서 시인은 묵상에 젖는다. 산 속의 더럽혀지지 않은 계곡 물의 바닥에는 떨어진 잎이 가라앉아 있고 바위 모래 돌들도 다 비춰 보인다. 말 그대로 계곡 물은 속을 다 드러내 보인다. 그리고 제2연에서는 땅에 있는 것이 아닌 하늘과 구름 햇살 바람까지도 고여 있는 그 맑은 물을 들여다본다. 물이 맑고 깨끗하기에 만물이 그 안에 들어와 고여 있다. 물이 있는 그대로 제 속을 다 드러내 보이니 시인은 제3연에 와서 ‘이리도 맑고 깊을 수가 있구나’라고 감탄을 한다. 사람의 마음은 이렇게 계곡의 물처럼 깨끗하거나 맑지도 않으며 제 속을 다 드러내 보이지도 않는다. 인간관계에서 뭔가를 가려놓는다. 그 은폐 속에서 위선과 거짓, 가식의 씨앗들이 자란다. 그리하여 인간관계를 헤친다. 자신의 마음을 먼저 열어 보이면 누군가가 그 마음에 깃들어온다. 마음을 열어 보이지 않으면 우리는 서로 간에 깃들 마음자리가 없다. 마음을 드러내놓는다는 것, 열어놓는다는 것은 마음을 비워놓는 것이다. 누군가를 깃들이고 싶을 때 이렇게 해야 한다. 교만과 아만심, 시기, 질투, 미움과 같은 부정적 감정으로 마음이 가득 차면 마음이 더럽기에 드러내 보일 수 없다. 그러니 스스로 감추고 닫아놓는다. 아무도 거기에는 깃들일 수가 없어진다. 시인은 그런 물과 같이 빈 그릇과 같은 자신의 마음도 온갖 것이 깃들어 있는 계곡 물같이 머무르기도 하고 끊임없이 자신의 몸을 떠밀고 내려가 돌들과 바위틈을 빠져나가 눈이 부시게 길을 여는 물굽이처럼 이 생애에 자신의 몸을 물처럼 다 풀어놓을 수 있을까하고 자문하고 있다. 비록 마음이 비워졌다고는 하나 돌들과 바위틈을 지날 때의 물처럼 자신을 버리고 물처럼 완만하게 흘러 길을 여는 물굽이처럼 생의 대하에, 바다에 몸을 풀 수 있을까 자문하는 데에는 비워진 마음이 세상과의 관계들 속에서 물처럼 부드럽게 흘러갈 수 있을까에 대한 냉철한 자기 응시라고 할 수 있겠다. 이 두 편의 시에서 시인은 관조하면서 단순히 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눈으로 -‘~로서 본다’- 보고 있기 때문에 물이 지니는 본질도 간취하고 있고, 또 시인의 의식 속에 자리하고 있는 불교의 이념을 통하여 한 방울 작은 물방울 속에서도 말씀(불법)이 있음을 깨닫는다. 왜냐하면, 우주의 삼라만상은 끊임없이 시인에게 말을 걸어온다. 시인의 비워진 마음은 그것들과 대화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래서「芙蓉抄」에서 연꽃이 시인에게 “네 깊고 깊은 미소가 피어나는/無心, 無心川으로/뛰어내리라 하네./뛰어내리라 하네.”라고 속삭이고 있다. 무심이란 바로 마음의 완전한 비움의 상태를 말한다. 그러니 진리를 받아들여 완전히 자유로워진 경지이며, 차별상이 마음에서 사라지는 ‘연꽃-무심천’으로 뛰어내리라고, 몸을 던지라고 속삭인다. 이 의미는 불법에 완전 귀의하여 득도의 여정을 걸으라는 강력한 권고가 연꽃을 바라보면서 연꽃에게 들은 말이다.   잠시 잠깐 피었다지는 들꽃 같은, 바람이야 불거나 말거나 사람이야 있거나 없거나 염주알이 구르듯 흘러내리는 화양계곡의 물소리를 귀담아 보게나.   아무런 의미를 담지 않아서 되레 부족할 것도 속박될 것도 없이 낮이고 밤이고 흘러내리며 물로서 한 몸이 되고 물길로서 큰 뜻을 이루어가는 화양계곡의 물소리를 귀담아 보게나.   피아노 건반 위를 미끄러지듯 달려가는, 물살의 손과 손의 숨이, 간간이 바람을 일으키며 꽃을 피우며 큰 산 깊은 계곡의 말씀 되어 흘러내리네. 큰 산 깊은 계곡의 생명 되어 흘러내리네.   -2003. 8. 17. 17: 25 「화양계곡에서」전문   사물을 마음의 눈으로 보면 사물은 그것을 보는 사람에게 말을 걸어온다. 이 시에서 시적 화자는 제1연과 제2연의 5행에서 “화양계곡의 물소리를 귀담아 보게나”라고 반복하고 있다. 화양계곡의 물소리는 분명히 시인에게 들어본 적이 없는 독특한 경험이었을 것이다. 제1연에서 물소리를 염주알 구르는 소리에, 제3연에서는 피아노 건반 위를 미끄러지듯 달려가는 소리에 비유하였다. 이 두 비유에서 알 수 있는 화양계곡의 물소리는 일정한 리듬을 가진 음악과 같고, 염주알에서 알 수 있듯이 단조로우면서도 기도하는 소리를 연상하게 한다. 물이 염주알 구르듯이 흐르기 때문에 무심의 경지에 들고, 제2연에서 의미도 담지 않아서 그 자체로 구족하고 자유롭게 밤낮으로 흐른다. 그런 물은 물 그 자체로서 한 몸이 되고 물길로서 큰 뜻을 이루어간다. 그 물은 제3연에서 물살의 손과 손의 숨을 지녀 간간히 바람을 일으켜 꽃이라는 생명을 움트게 하고, 큰 산 깊은 계곡의 말씀과 생명이 되어 흘러간다고 하였다. 물이 흐르는 것을 보는 것은 시각이지만 그 물소리는 청각으로 듣는다. 그러나 물이 큰 뜻을 이룬다든지 말씀과 생명으로 흐르는 것을 관조하는 데에는 마음의 눈으로 보아야 하고, 그 마음의 눈은 물이 지니는 근원적인 힘에 의거한다. 여기에서 비트겐슈타인의 구조화된 아스펙트 지각을 이해할 수 있다. 천지창조 때의 심연은 곧 생명을 잉태하는 곳이다. 모든 생명이 물에서 비롯되었음은 창세기에서 물과 물 사이의 궁창이 생겨 아랫물이 땅이 되고 위의 물이 하늘이 되었다는 구절에서 알 수 있다. 물살의 손과 그 손의 숨이 바람을 일으켜 생명의 꽃을 피우는 물의 숨을 이야기 하고 있다. 자연 속의 화양계곡의 물을 통해 심안으로 그것을 바라보고 불교적 우주 이법을 사유했을 때 나올 수 있는 시라고 생각된다. 이러한 불교적 사유는 그의 구도 기행시집이기도 한 인디아 기행시집인 『눈물모순』에서 시인은 석가모니 부처가 걸었던 강가 강을 거닐며 자신의 구도에 대해 묵상을 정리하고 있다.     전략(前略)   그는, 희노애락이란 굴레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중생들에게 일체의 분별심(分別心)을 내지 않고, 일체의 변함조차 없는 여래(如來)의 덕성을 말할 때에도 발 밑 모래의 모래밭을 떠올렸지.   그로부터 줄잡아 이천 오백 년이란 세월이 흐른 지금, 그이 대신에 이방인인 내가 서있네. 그가 바라보았을 강가 강의 덧없는 강물을 바라보며, 그가 거닐었을 강가 강의 모래밭을 거닐며 나는 생각하고 또 생각하네. 분명, 그가 바라보았던 강은 강이어도 그 강물 이미 아니고 분명, 그가 거닐었던 모래밭은 모래밭이어도 그 모래 이미 아니건만 변한 게 없는 이 강가 강의 무심(無心)함을.   그동안 얼마나 많은 풀꽃들이 이곳저곳에서 피었다졌으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풀꽃들처럼 명멸(明滅)되어 갔을까?   무릇, 작은 것은 큰 것의 등에 올라타고 큰 것은 더 큰 것의 품에 안겨 수없이 명멸을 거듭하는 것이 생명의 수레바퀴이거늘 이를 헤아린들 무슨 의미가 있으며 살아 숨 쉬지 않는 것이 어디 있겠는가.   -2008. 06. 03. 「 강가 강의 백사장을 거닐며」   강가 강은 갠지스강이라고도 부르는데 이시환 시인의 주석에 따르면 원래 천상에 사는 비시누 신의 발가락에서 흘러나와 천상의 극락세계 곳곳을 적셔주는 풍요로운 강이었으나 인간이 머물러서 지상에 가뭄이 들게 되었다고 한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선인(仙人) 한 사람이 고행으로써 기도한 결과 이 강물을 지상으로 끌어내려가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그러나 거대한 물줄기가 하늘에서 지상으로 곧바로 떨어지면 땅의 모든 것이 파괴되므로 시바신이 자신의 머리로써 강물을 받아 그 거대한 물줄기들을 조각내어 땅에 안착시킨다. 그래서 이 강을 두고 인도인들은 시바신의 머리칼이며, 시바신이 목욕하는 곳이요, 시바신이 명상하는 곳이라고 믿었다. 이러한 신화를 간직한 강가강은 히말라야 산맥의 간고토리 빙하에서 발원하여 인도 북부 지역을 흘러 힌두 성지인 바라나시와 하리드와르를 거쳐 뱅골만으로 흘러드는 2, 506Km의 큰 강인데 힌두인들에게는 신성한 곳이며 ‘자신들의 젖줄이며 어머니’라 여기고 있다고 한다. 이곳에서 2500년 전 석가모니 부처는 거닐었고, 시인은 그가 걸었던 강가 강의 모래밭을 거닐며 묵상한다. 이 큰 강이 품어준 생명들이 긴긴 세월 동안 얼마나 많이 명멸을 거듭하였겠는가. 시인은 그가 정신적으로 기댄 석가모니 부처의 족적을 더듬으면서 생명의 수레바퀴는 작은 것이 큰 것의 등에 올라타고, 큰 것은 더 큰 것의 품에 안겨 수없이 명멸해감을 깨닫는다. 그러니 강가강의 모래알을 헤아릴 수 없듯이 그것을 헤아려 무엇하겠는가. 그저 경이로울 뿐이다. 자연도 이러한데 여래의 덕성이나 가르침이 얼마나 넓고 깊은지를 비유한 ‘항하사(恒河沙)’란 말은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러니 그 넓고 깊은 불법의 강은 2500년 이래 인도인들을 비롯하여 전 세계의 사람들에게 나투시어 생명을 살려왔다는 의미다. 이것은 곧 강가 강이 인도인들의 젖줄인 것처럼 부처의 가르침은 곧 중생의 젖줄이며, 그것은 변함이 없는 영원한 진리이다. 이 진리에 머무르는 사람은 석가의 제자이며, 시인은 강가 강을 거닐며 여래와 하나가 되고, 여래의 품에 여래를 찾았던 많은 이들과 함께 깃든다. 그러니 그는 결코 이방인도 아니다. 영원한 생명과 진리의 품에 깃들어 머무는 자는 한 형제이기 때문이다. 2500년 전부터 흘렀던 그 장구한 역사를 가지고 뭇 생명들을 길러냈던 변함없는 강가 강처럼 여래의 법의 깊이를 내포한 강은 말없이 흐르지만 시인은 그 강이 품어온 생명과 말씀을 묵언으로 듣는다. 그가 화양계곡의 물소리에서 들었던 것처럼.  
1175    詩作初心 - 바람이미지 댓글:  조회:4069  추천:0  2016-03-12
이시환의 시법 : 부드럽게 생동하는 이미지들 -②바람 이미지   심종숙(시인/문학평론가)     바람이 인다. 바람이 일 때에는 모든 이동이 일어난다. 포자를 가진 꽃들의 열매들은 날아갈 준비를 한다. 많은 꽃들의 열매는 씨를 바람에 실어서 퍼트린다. 바람이 내려다 놓은 꽃들의 씨앗들은 여기저기에 산재하여 대지에 스미어 있다가 봄이 되면 정체를 드러낸다. 여기에 날아와서 있었노라고 보란 듯이 대지의 어머니 흙의 품속에서 싹을 틔우고 연한 떡잎과 줄기를 삐죽 밀어낸다. 그 하나의 생명은 바람이 실어온 것을 대지의 어머니 흙이 품어준 결과이다. 대양에 바람이 일면 파도가 치고 저 심해의 밑바닥까지 모든 생물들이 이동한다. 이동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다. 머물러 있는 것이 없다. 이렇게 바람은 한 번씩 크게 바다를 뒤엎어 갈아놓는다. 농부들이 겨울에 묵어있는 딱딱한 밭을 봄이 되면 쟁기의 보습으로 갈아엎어서 새롭게 씨를 뿌리듯이 말이다. 바다가 갈아엎어지면 새로운 숨결 속에서 바다의 동식물이 안정을 찾아 한동안 머물게 된다. 따뜻한 남풍은 춥고 메마른 겨울의 북풍을 이동시킨다. 밀어낸다. 지구가 태양의 궤도를 자전하면서 이 한반도는 뚜렷한 사계절의 변화 속에서 계절마다 다양한 바람이 불어온다. 따뜻한 남풍과 고온다습한 여름바람, 시원하고 청량한 가을바람, 메마르고 추운 겨울바람이 쉼 없이 불어온다. 거기에 따라 이 땅의 농부들은 적절하게 농사를 지어왔다. 초여름과 초가을의 짖꿎은 태풍은 농사를 망쳐놓을 때도 있지만 농부들은 이 짖꿎은 바람의 장난에도 익숙하다. 천지운기가 하는 일이니 인간이 어쩌랴 라며…. 이 체념은 인간이 대자연 앞에서 무력하기도 하지만 대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방식일 터이다. 바람은 우리 인간사에 소문을 물어온다. 바람을 타고 인간의 마음도 움직인다. 봄바람이 불면 마음이 들뜬다. 산으로 들로 나가고 자연과 햇살을 즐기면서 도시인들은 한 때의 여가를 보낸다. 메마르고 추운 겨울바람이 불면 마음이 추워진다. 가난했던 이 땅의 사람들은 이 바람이 야속했으리라. 그러나 더운 여름의 땀 흘리는 농사일 속에서 인내의 극한에 다다르면 입추를 고비로 문득 귀뚜라미가 울고 아침저녁으로 선선해지면서 드높은 가을 하늘에 시원하며 청량한 바람으로 여름의 고통을 잊는다. 그러니 바람은 원래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닌데 인간사로 인해 좋게도 나쁘게도 생각될 뿐이다. 풍차, 풍력발전소는 바람이 인간에게 주는 선물이다. 물레방아가 물이 인간에게 주는 선물이듯이 말이다. 이 바람이나 물을 이용하여 인간은 많은 도구를 만들었다. 그러니 자연이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고마운 일을 했는가. 때로는 인간에게 천재지변을 가져오기도 하지만 인간은 자연과 벗하며 자연의 심술을 슬기롭게 대처하면서 살아왔다. 사람의 마음에 바람이 일 때는 언제인가? 단조롭고 권태로운 일상이 반복이 될 때 무언가 새로운 것을 보면 강력한 끌림을 느낀다. 인간에게 중년에 이는 바람은 거의 반생을 살아왔기에 전환점에 이르러 그 전까지의 삶을 되돌아보는 시간이다. 20․30대는 빛나는 꿈을 향하여 숨 가쁘게 달려왔기에 잠시 머물러 지난 시간들을 되돌아보는 시간이다. 이 때 잘 되새김질하게 되면 남은 반생은 더욱 빛나는 삶을 영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인간은 신체와 정신의 쇠퇴와 더불어 변화된 삶을 꿈꾼다. 삶을 리모델링하는 시간인 것이다. 남은 반생에 지녀왔던 것들 중 끝까지 지녀야 할 것은 지니되 부담스러운 것들은 버린다. 그렇게 하여 비교적 가볍게 의미 있는 일을 찾아서 남은 생을 살고자 한다. 왜냐하면, 100년의 반을 살았기 때문이다. 바람이 분다. 마음에 수런수런 잎들이 자기네들끼리 이야기를 나눈다. 무슨 이야기인지 알 수 없지만 심상치 않다. 바람과 잎은 공모한다. 휭휭 불어오는 바람은 새콤한 모과를 노랗게 물들인다. 사과를 붉게 물들인다. 이 바람은 수상하다. 이 바람은 서로 의견을 나누고 사람들끼리 한 무리를 짓게 한다. 그런 무리가 수없이 많이 만들어진다. 지하에서는 더 큰 일을 비밀리에 진행한다. 지상에서는 많은 이들과 공모한다. 이들의 공모가 불온하다. 이 불온함도 바람의 탓이지 인간의 탓이 아닐 게다. 저 대기에서 산으로 불어 내려오는 한 줄기 바람은 지상의 썩은 것들을 밀어낸다. 그 바람이 지상과 지하의 바람과 만나서 큰 바람을 일으킨다. 바람이 파도를 일으켜 거대한 인간의 바다를 갈아엎는다. 농부가 그의 묵은 밭을 보습으로 갈아엎듯이 갈아엎는다. 이 갈아엎지 않으면 생명력을 잃은 바다나 밭은 갈아엎어야 한다. 인간세계도 생명력을 잃어 거기에 사는 인간들이 고통으로 몸부림을 치면 스스로 떨쳐 일어나 갈아엎듯이 엎어야 새로운 생명이 움트고 깃든다. 인간사회를 바꾸어가고자 하는 사람들의 가슴에는 늘 바람이 일고 있다. 그들은 정의롭지 못한 세상에는 머물러 있기를 원하지 않는다. 바람을 일으켜 사람들이 서로 손에 손을 잡고 꿈꾸는 세상을 만드는 데 전진한다. 이들은 바람의 방향을 늘 가늠한다. 그리고 그 바람이 부는 쪽으로 몸을 던지면 된다. 바람의 촉수가 그들의 뇌리에 닿고 온 몸과 마음을 깨우면 그들은 움직인다. 바람의 배경을 믿고 움직인다. 준동하는 그들은 허파에 바람이 꽉 찼다. 바람과 함께 그들의 몸이 가볍게 날아오를 때 세상은 이미 한바탕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에 휩싸인다.   이시환의 시에서 바람은 아주 중요한 이미지이다. 이 바람은 우주의 근원의 생명력이다. 바람 속에서 시인은 바람이 전하는 말을 듣는다. 제3시집 속의 「바람 序說」을 읽어보자.   바람이 분다 부는 것이 아니라 머물러 있는 것이다.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훨훨 타는 것이다 훨훨 타는 것이 아니라 흐르는 것이다 갯뻘의 진흙 내 혈관 속을 돌멩이마다 내린 뿌리 네 몸 속속들이 흐르고 흘러 시방 억새꽃을 흔들고 내 가슴 네 가슴을 흔들어대며 머물러 있는 것이다 부는 것이다 눈이 부시게.   -「바람 序說」전문   바람은 운동성을 가지고 있다. 바람은 한 곳에 머물러 있지 않다. 불어왔다가 스쳐지나 간다. 이것이 바람이다. 그러나 이 시에서 시인은 바람이 부는 것을 보고 부는 것이 아니라 머물러 있다가 훨훨 타다가 흘러서 갯뻘의 진흙, 돌멩이 속에 속속들이 흐르고 억새꽃을 흔들다가 나의 가슴과 너의 가슴을 흔들어대다가 머물러 있다가 눈이 부시게 분다. 그러니 바람은 자연물과 사람 사이를 이어주고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어준다. 이런 바람은 만물을 생멸을 관장하는 근원적인 생명이다. 태초에 하늘과 땅이 그 형상을 갖추지 못했을 때 어둠이 심연을 덮고 ‘하느님의 영’이 물 위를 감돌았다고 창세기 제1장 2절은 말한다. 이 하느님의 영은 곧 하느님의 입김이요 얼이며 강한 바람이다. 이 바람으로 하느님은 심연에 궁창(구멍)을 내어 아래 물인 땅과 위의 물인 하늘을 만든 것이며, 이스라엘 백성은 파라오의 군사들을 피하여 홍해를 건널 때 하느님의 영, 즉 강한 하느님의 숨, 입김인 바람이 바다에 구멍을 내어 갈라놓음으로써 그 마른 바다의 바닥을 밟고 건너갔다. 이렇게 바람은 태초에 하늘과 땅을 창조한 창조주의 숨결이었다. 시인의 바람의 이미지는 우주의 형상이 빚어지는 태초의 생명력인 바람을 인식한 바탕 위에서 창조된다.   바람 속으로 알몸을 눕혀 보게나. 네 알몸의 능선을 핥고 지나가는 그 놈의 혀끝이 감지되면서 무거운 몸뚱이조차 티끌처럼 가벼워지나니.   영영 바람 속으로 누워 버려 그 놈의 정령과 입 맞추어 보게나. 누추한 몸뚱이조차 바람이 되어 백 년이고 천 년이고 흘러가나니.   붙잡아 두려하면 사라져 버리고 풀어놓으면 다가오는 바람이여. 하늘과 땅 사이 만물이 다 네 품에서 비롯되고 네 품에서 끝이 나는 것을.   -「바람 속에 누워」전문, 『상선암 가는 길』에서   제1연에서 시적 화자는 바람 속으로 알몸을 눕혀 보게나, 제2연에서 그 놈의 정령과 입 맞추어 보게나라고 하여 독자들로 하여금 생명의 바람과 친밀한 관계를 맺기를 권하고 있다. ‘-~해 보게나’라고 그는 넌지시 독자를 유인한다. 그가 바람과 맺어왔던 그 친밀하고 농밀한 만남의 격정을 홀로 간직하기엔 벅찼던 것일까. 좋은 것은 나누고 싶은 법이다. 그러니 시인은 바람과의 나눔을 권하고 있다. 그의 바람과의 관계 맺기가 그저 겉껍데기뿐이 아닌 것은 ‘알몸의 능선을 핣고 지나가는/그 놈의 혀끝이 감지되면서’와 ‘그 놈의 정령과 입 맞추어’에서 알 수 있다. ‘너’는 이 시에서 여성인 듯하며 바람은 ‘그 놈’이라고 지칭 하고 있어 남성으로 의인화되어 있다. 그러니 이 시는 바람과의 정사를 농밀하게 권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산 위에 서서 불어오는 바람을 양팔을 벌리고 한참을 느낄 때 옷의 올과 올 사이를 투과하여 오는 바람을 알몸으로 느끼는 것은 다를 것이다. 그러니 시인은 그저 옷을 걸치지 않고 알몸으로 진실한 몸으로 바람을 느껴보라고 권한다. 그럴 때에 한해서 무거운 몸뚱이도 티끌처럼 가벼워지고 누추하여 생명력 잃은 몸도 바람처럼 동적으로 백년이고 천년이고 흐를 수 있다고 한다. 남녀의 교합으로 생명이 잉태되듯이 바람과의 교합은 생명의 숨으로 충만하게 된다. 그래서 제3연에는 붙잡으려고 하면 사라지고 풀어놓으면 다가오는 바람은 속성은 하늘과 땅 사이 만물이 바람의 품에서 비롯되고 끝이 난다고 말한다. 그러니 이 바람은 바로 인간을 비롯한 우주만물의 생멸을 관장하는 바람이며, 이시환의 바람이다.   간밤에 마음과 마음이 통했는가?   아주 가벼웁게 바람의 잔등을 올라타는 저 수수만의 꽃잎들이 추는 군무(群舞)가 마침내 반짝거리는 큰 물결을 이루어 가는 것이,   그 모습 눈이 부셔 끝내 바라볼 수 없고 그 자태 어지러워 끝내 서 있을 수도 없는 나는, 한낱 대지 위에 말뚝이 되어 박힌 채 그대 유혹의 불길에 이끌리어 손을 내어 뻗는 것이,   간밤에 마음과 마음이 통했는가?   아주 가볍게 몸을 버려서 하늘을 나는 꿈을 꾸는, 저 흩날리는 꽃잎들의 어지러운 비상(飛翔)! 그 마음 한가운데에서 일어나 소용돌이치는 법열(法悅)의 불길을 와락 끌어안는다, 나는.   -2003. 4. 22. 00:5 「벚꽃 지는 날」전문   누가 바람의 잔등을 보았는가? 아니 볼 수 있겠는가, 바람과의 관계가 얼마나 친밀하면 바람의 잔등이 보일까. 비트겐슈타인의 이미지 이론의 핵심은 ‘ ~로서 보는 것’으로 관계 맺기의 지각이 곧 이미지라고 하였다. 바람과 친밀한 관계가 맺어지지 않으면 이런 것들이 과연 보일까, 느껴질까, 언어로 표현될 수 있을까? 이것이 필자의 의문이다. 시인이 바람을 보는 것은 우주만물의 생멸을 관장하는 창조주의 숨결로서 바라본다. 그리고 자신을 거기에 던져 관계를 맺는다. 그렇게 관계가 맺어져 길들여지지 않으면 이런 농밀한 감각과 지각이 작용하여 이미지로 만들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시인이 바람을 그렇게 보아서 관계가 맺어져 친밀하게 농밀하게 지각되어 이미지를 만들듯이 시 평론가는 시인이 바람과의 정사를 통한 관계맺기를 철저히 관음(?)하지 않으면 이 관계맺기의 긴밀도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한 편의 시를 이해하는 것이 평론가에게는 늘 두렵다. 이시환 시인이 바람을 이토록 느낄 수 있는 이유는 그의 감각과 지각 속에 창조주 하느님의 얼(spiritus)이 내재하는 특수한 감각의 문이 열려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순히 불교에서 말하는 색계의 감각이 아니라 영적인 것, 심안에서 오는 영적인 감각이다. 그것이 아니고서는 이렇게 될 수가 없다. 불교에서 말하는 불성이나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느님 영의 임재는 모두 이런 영이 인간에게도 내재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그것이 제 기능을 발휘하려면 정화와 재생이 되지 않고는 보이지도 느껴지지도 않는다. 그래서 이 분야의 전문가인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영혼의 성 7궁방을 말해주고 있다. 데레사의 7궁방은 제1궁방/독충과 벌레들이 우글대는 방으로서 독충은 죄이고 벌레는 상처와 악습이라고 말한다. 즉 상처와 악습에 가려서 영안이 어둡고 마음이 깨끗지 않으며 부정적 의미의 어둠 속에 갇혀있는 상태이다. 제2궁방은 작은 독충과 벌레가 남아서 영적 갈등을 일으키는 방으로 내 뜻과 하느님의 뜻이 서로 부딪쳐서 나오는 갈등으로 여전히 자기 뜻을 고집하고 완전한 비움에 이르지 못한 단계이다. 제3궁방은 정화를 마치고 조명(照明)의 문에 들어서 빛이신 주님을 직접 뵈옵는 영적인 시기이다. 이때부터 마음의 부정적인 독충과 벌레들이 비워져서 영안이 열리고 주님이 마음에 깃들어 계신다. 제4궁방은 초자연적 기도로 은총의 수도관에 입을 대고 마시는 시기로 주부적 덕행의 시기로서 모든 것은 그 분의 은총으로 이루어져 나가기 시작하는 단계이다. 제5궁방은 하느님과 맞선을 보는 단계로 일치되기 위한 준비의 때이다. 제6궁방은 수녀로서 예수님과 약혼하는 시기로 하느님께서 주도권을 드러내는 시기이며, 제7궁방은 신비적인 혼인의 시기로 깊은 일치를 이루는 최고의 단계에 이르는 정점의 상태이다. 성녀는 이렇게 7궁방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것은 아마 마음의 영적 단계의 이미지일 것이다. 상처와 악습으로 젖은 육신은 「바람 속에 누워」에서 ‘무거운 몸뚱이’, ‘누추한 몸뚱이’로 표현되고 있다. 이 부정적인 것들이 바람에게 몸을 던짐으로써 상처와 악습을 생명의 바람이 날려 버리고 티끌처럼 가볍게 백년이고 천 년이고 바람처럼 흐르게 한다니 영생을 누리게 된다는 의미이다. 이 시에서 시인은 바람에 지는 벚꽃을 바라보면서 벚꽃이 바람의 잔등에 올라타서 군무를 춘다고 상상한다. 이 군무가 절정에 오르면 바람과 벚꽃은 하나가 된다. 그러니 간밤에 바람과 벚꽃은 마음이 통했는가하고 시적 화자는 자문한다. 그런 군무가 마침내 반짝이는 물결이 되어 흘러간다고 한다. 지는 벚꽃이 바람의 잔등에 올라타서 군무를 추고 그 절정에서 반짝이는 물결이 되어 흘러간다는 이 표현은 영적인 눈인 심안으로 보지 않으면 결코 관상할 수 없는 세계이다. 그러니 벚꽃이라는 식물의 생명을 상징하는 꽃이 바람을 만나서 군무를 추고, 그 절정에서 하나가 되어 생명의 강으로 흘러넘친다는 의미이다. 그 많은 벚꽃들이 생명으로 강이 되어 흘러가는 이 영적 지각은 이 광경을 보는 시인으로 하여금 눈이 부셔서 바라볼 수 없게 하고 현기증을 일으키면서도 그 유혹으로 이끌리어 손을 뻗게 한다. 마치, 벚꽃과 바람의 군무가 가져오는 일치를 바라보는 시인은 환시를 보듯 이끌리어 손을 뻗는다. 몸을 버리고 하늘을 꿈꾸는 꽃잎들의 어지러운 비상을 보며 시적 화자 나는 가슴 한가운데에 소용돌이치는 법열의 불길을 와락 끌어안는다고 한다. 시인은 이 불길을 ‘법열’의 불길이라고 하였다. 법열은 열락이라고도 하며, 불교적 신비에서 오는 즐거움이며, 기쁨이다. 그 도그마를 아주 잘 살았을 때에 오는 기쁨을 말한다. 창조주 하느님과의 영적 관계를 설명하는 데레사 성녀가 제시한 제7궁방의 경지와 유사하다.   그 하나   홀로 설 수는 있어도 온전할 수는 없어 다른 하나를 꼭 필요로 하는 그리하여 서로가 서로를 받들어 주는 너와 나의 관계는 하늘과 땅 같은 자리요 물과 불 같은 바탈이요 빛과 어둠 같은 이치느니라.   이 땅 위 하늘 아래 두 빛깔의 어우러짐은 하늘과 땅이 빗대어 크고 작은 만물이 생기는 것과 같은 이치여서 더할 나위 없는 아름다움 가운데 바로 그것이니라.     그 둘   꾸밈이 없는 너와 나의 어우러짐은 우뚝 솟은 산과 길게 흐르는 강물 사이 같은 것 너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우리 서로 존재할 때 비로소 하나가 되어 바로 설 수 있는 아름다움으로 머물지니 그것이 곧 물에 비친 하늘이요 땅에 스미는 물과 같은 이치라. 반드시 그 속에는 일정한 질서와 기운이 자리하는 법.   -「바람꽃」부분   이시환 시인의 제3시집 『바람 序說』 속에 실려 있는 「바람꽃」은 바람에 관한 시를 완결이라고 할 수 있겠다. 우주의 생멸을 관장하는 바람은 창조주의 얼이자 질서이다. 하늘과 땅 사이에 궁창을 만든 것이 바람이듯이 너와 나 사이에는 바람이 분다. 이 바람으로 생명이 잉태된다. 그러니 홀로 선 둘이가 만나서 살아가는 것이 세상의 모습이다. 하나로도 부족하다. 둘이 하나 되는 질서 속에 살아갈 때 생명은 끊임없이 잉태되리라. 이 시에서는 너와 나의 어우러짐에 핵심이 있고 그것이 바로 바람꽃이다. 바람이 생명을 관장하기에 바람꽃이라고 시인은 일컬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나는 너를 위해여 존재할 때, 너는 나를 위하여 존재할 때 서로의 바람꽃이 되어줄 수 있는 이치 속에 머무르는 것이 아름다움인 것이다. 그것이 일정한 질서와 기운이다. 이것은 마치 하늘과 땅, 물과 불, 빛과 어둠이 서로 상즉상입하는 세계를 만드는 데는 바람이 일으키는 질서 속에서 끊임없이 작동하는 것이 우주의 이법임을 이 시에서 시인은 말하고 있다. 이시환 시인의 바람이 불어오는 곳에는 꽃들이 피어난다. 눈이 부시다. 수런댄다, 춤을 춘다. 그 춤이 절정에 올라 꽃들은 강물이 되어 흐른다. 그 강물은 여래의 품인 바다로 흘러들어간다. 인간의 마음속에 눈물이 흘러내린다. 인간의 몸은 흩어지면 한 줌의 먼지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여래의 몸에서 인간은 영원한 생명을 누린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 인간이 얼마나 보잘 것 없으며 나약한 존재인지 먼저 깨달아야 할 것이다.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창세기 2장 7절) 이 생명의 숨을 거두어 버리면 인간은 다시 흙으로 돌아간다.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 이것이 인간의 삶이다. 이 진리를 직시하며 그 바탕 위에서 생을 창조하고 시를 창작해나가는 시인이 바로 이시환 시인이며, 그는 그 바람이 창조주의 생명의 숨이라는 진리를 아는 시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해맑은 아침햇살(하느님)이 숨 쉬는 모든 것들의 얼굴을 어루만지는 하느님의 자비의 손길을 노래한다. 그 시편인「화엄사 계곡에 머물며․2」를 인용하며 글을 마칠까 한다.   이 몸이야 한 덩어리 진흙. 그도 결국 바람이 불면 가볍게 날아가 흩어져 버릴 한 줌의 먼지인 것을. 그 자리에 남아 있는 것이 있다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 하나가 반짝거릴 뿐.   해맑은 아침햇살이 숨 쉬는 것들의 뽀얀 얼굴을 어루만지네.
1174    詩作初心 - 대지이미지 댓글:  조회:4269  추천:0  2016-03-12
이시환의 시법 : 부드럽게 생동하는 이미지들 -③대지 이미지   심종숙(시인/문학평론가)   바람 부는 벌판에 서 있거나 산 정상에 서 있으면 바람의 노래가 들린다. 바람은 우리가 딛고 서 있는 발 아래 땅으로 불어온다. 땅은 바람이 실어준 씨앗들을 품속에 품고 싹을 틔운다. 봄에 발아한 싹들이 대지의 흙을 뚫고 올라와서 뾰족한 싹을 내민다. 연초록색이거나 흰색의 싹은 떡잎과 대궁이로 이루어져 있다. 대지의 알맞은 온도와 습도, 양분을 먹고 그렇게 싹을 틔웠다. 땅은 어머니의 품이요, 인간이 흙으로 돌아가는 바로 그곳이다. 인간이 흙에서 온 것처럼 식물들은 흙속에서 자란다. 꽃과 과일, 나무들이 뿌리를 박고 서있는 땅은 생명을 품은 하나의 둥글고 큰 자궁이다. 이 식물들 사이에 동물들은 은신처를 마련하거나 그것을 뜯어먹으며 살고 있다. 초식동물과 육식동물이 서로 먹고 먹히는 먹이사슬관계 속에서 공존한다. 하늘에는 나는 새들이 있다. 이 새들은 나무나 풀숲에 둥지를 튼다. 천지창조의 사흗날에 지어진 땅은 태초의 조상 아담으로 인해 저주를 받는다. “네가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에게 따 먹지 말라고 명령한 나무에서 열매를 따 먹었으니, 땅은 너 때문에 저주를 받으리라. 너는 사는 동안 줄곧 고통 속에서 땅을 부쳐 먹으리라. 땅은 네 앞에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돋게 하고 너는 들의 풀을 먹으리라. 너는 흙에서 나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양식을 먹을 수 있으리라.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가리라.”(창세기 3:17-19) 그 신의 저주는 아담이 죽어서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땀을 흘리며 땅을 일구어야 먹을 양식을 얻을 수 있다는 노동의 고역을 말한다. 그러니 인간에게는 곡식을 얻기 위해 땅에 돋아나는 가시덤불과 엉겅퀴와 시름해야 하는 고통이 뒤따르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인간에게 먹이가 되는 풀과 그것을 방해하는 가시덤불과 엉겅퀴의 대결은 인간 노동의 역사이다. 그렇게 살다가 인간은 결국 대지의 품에 안긴다. 살아있는 모든 것의 어머니인 하와/에바에게로 돌아가는 것이 인간의 운명이다. 그러니 대지는 어머니이며 여성이다. 여성의 자궁이 생명을 잉태하는 집이듯이 대지는 인간과 동식물의 집이다. 이것이 성경의 창세기에 기록된 대지와 인간의 관계이다. 이 땅에서 나는 소출을 신께 바치고 제사 드리는 관습이 지금도 내려오고 있다. 대지를 매개로 한 인간과 신의 관계는 원시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지속성을 가진다. 환경(environment)이 문명 중심적이고 인간 중심적 개념이라면 생태(ecology)는 어른스트 헥켈(Ernst Heinrich Haeckel, 1834-1919:독일의 생물학자)에게는 자연의 동물, 물, 구름, 바람 등이 하나의 유기체로서 어떻게 생명을 유지하는가의 문제였다. 그는 정신과 물질의 일원론의 입장에서 생태학을 시작하였으며 유물론적인 경향이 강하고 마르크스의 유물사관에도 영향을 주었다. 진화의 최초의 무구조 원형질괴인 모네라의 고안이나 진화의 계통도를 그린 것도 그의 업적이다. 그의 주장은 성경적 천지창조와는 반대되며 진화론의 입장에 서 있고 우주만물을 하나의 유기체로서 보고 있다. ecology가 환경을 보호하는데 관심을 가진 정치적 행위라면 Ecology는 지켜야 할 큰 집으로서의 지구를 의미한다. 한편 표층생태학(Shallow Ecology)은 환경보호, 환경개발, 환경공학 등 인간 중심의 환경인 반면에 심층생태학(Deep Ecology)은 인간 중심이 아닌 생물 중심이며 삼라만상주의를 표방하면서 여기에는 인간도 하나의 유기체로서의 생물로 파악하고 있다. 대지를 이루고 있는 지구, 자연, 동식물, 물, 구름, 바람에 대한 생태학자들의 견해들도 있지만 이시환 시인은 불교적 세계관에 바탕을 두고 있다. 헥켈의 입장과 유사하며 인간을 비롯한 자연의 동식물, 물, 구름 , 바람 등을 하나의 유기체로 보고 생멸을 거듭하면서 유기 순환하는 존재이며, 만상동귀하는 존재이다. 그러니 이시환 시인에게 삼라만상은 묵언의 대화자이다. 그러니 그가 벌판이나 들판과 광야와 사막에 서 있을지라도 이 모든 것들과 친밀하다. 거기에 있는 바위나 돌, 동식물들과도 친밀하다. 가톨릭의 성 프란체스코처럼 빚어진 모든 것과 대화하고자 한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대상화하기보다 그것들을 하나의 존재자로서 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이러한 시인의 자세는 그의 시에서 대지의 이미지로 표현된다. 이미지는 하나의 큰 연쇄고리를 가지며, 이시환의 시에서 이들 이미지들의 집합체인 이미저리를 이루는 내용은 산, 벌판, 들판, 광야, 사막 등으로 거대한 축을 이루고 있다. 먼저, 대지에 솟아오른 「山」을 읽어보자.   손끝에 와 닿는 당신의 두 개의 젖꼭지. 그 꼭지와 꼭지 사이의 폭과 골이 당신의 비밀을 말해주지만 가늠할 수 없는 그 깊은 곳으로 이어지는 사내들의 곤두박질. 그 때마다 제 목을 뽑아 뿌리는 치마폭 사이의 선붉은 꽃잎 골골이 깔리고 누워 잠든 바람마저 눈을 뜨면 이 내 가슴 속, 속살을 비집고 우뚝 솟은 산 하나. 그 허리춤에선 스멀스멀 풍문처럼 안개만 피어오르고. -「山」전문,『안암동日記』에서   시인의 눈은 산의 모습을 두러누워 있는 여성의 이미지와 겹치고 있다. 산봉우리를 여성의 젖가슴에 비유하였고, 그런 산이 남성들이 탐하는 곳이기도 하나 어느 새 산은 시적 화자의 가슴 속에 우뚝 솟은 산으로 병치되고 있다. 산의 두 골짜기는 당신이 지니고 있는 비밀의 샘일 터 그 깊은 생명의 뿌리에로 뭇 사내들이 곤두박질한다. 그러면 산의 치마폭 사이로 선붉은 꽃잎을 뿌린다. 산인 당신의 환희의 감탄이 메아리치면 잠자고 있던 바람이 잠을 깬다. 그 때 나의 가슴 속에도 우뚝 산 하나가 솟아오른다. 그러므로 나와 당신으로 관계 맺은 산과 시적화자 나는 연인의 관계가 되고 이 관계는 뭇 사내들처럼 육적이거나 탐욕적이지 않은 영적인 관계의 연인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시는 산과 뭇사내들/나와 산의 두 관계가 겹쳐지고 있다. 전자의 관계가 감각적이고 육신의 관계라면 후자의 관계는 본질적이며 영적인 관계이다. 전자는 색슈얼리티의 표현이며 후자는 영적인 교감일 것이다. 그러니 나와 산의 관계는 하나의 풍문처럼 안개 속에 가려진 내밀한 관계인 것이다. 산은 그러니 여인이며 어머니이다. 시적 화자인 나와 뭇사내들을 깃들게 하는 품이며 어머니이다. 이는 한 여성이 여성과 어머니의 두 역할을 동시에 지니듯이 대지의 우뚝 솟은 산이 지니는 본질에 다가가고 있다. 「내 가슴 속의 산」에는 시적 화자인 나의 고통을 품어주는 당신으로 표현되어서 『안암동日記』의 「山」과는 다른, 보다 내적이며 영적인 존재로서의 산으로 변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무심한 하늘을 바라보다가 바라보다가 멀리 땅을 굽어보다가 굽어보다가 문득 문득 줄달음쳐 가는 곳이 있네.   시를 쓰다가 되려 마음 혼란스러워질 때, 사람 사이 믿음이 깨어지고 세상사 더욱 어지러워질 때, 내 허파가 썩어들어가는 것을 보며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때, 문득 문득 줄달음쳐 가는 곳이 있네.   그런 나를 안아 주며 그런 너를 품어 주며 늘 그 자리 그 빛깔로 서 있는 우람한 당신이 내 안에 있네.   무심한 하늘을 바라보다가 바라보다가 멀리 땅을 굽어보다가 굽어보다가 문득 문득 줄달음쳐 가는 산 중의 산 세상 침묵을 품어 안고 사는 네가 내 안에 있네.   -「내 가슴 속의 산」전문,『상선암 가는 길』에서   이 시에서 산은 여성이미지에서 탈피 되어 ‘우람한’ 남성이미지로 변화되어 있다. 너로 불리는 산은 내가 시쓰기,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믿음이 깨어질 때, 세상사 어지러울 때에 허파가 썩는 고통을 겪어 견딜 수 없을 때 피신처인 그곳으로 줄달음 쳐서 그 품에 안긴다. 너는 고통 중에 있는 나와 너, 우리를 품어주는 너이다. 그런 너는 나의 가슴에 고요히 존재한다. 고요는 바로 『상선암 가는 길』의 내적 여정과 묵상과 관상의 자세와 연결되어 있다. 이는 이시환의 아포리즘에서 밝히듯이 ‘나의 경전은 내가 아침저녁으로 바라보는 저 산이다’와 같다. 산은 묵언의 경전이다. 그런 산은 생명력을 지닌다. 침묵 속에 움직인다. 정중동(靜中動)의 산은 곧 내 마음의 지속적인 동적 움직임이다. 이 동적 움직임은 침묵과 고요 중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그의 시적 작업이 묵상이나 관상, 구도 여정으로 이어지 것과 궤를 같이 하고 있다. 「張家界를 빠져나오며」에는 이 정중동의 이미지를 장가계의 돌산 숲으로 표현하고 있다.   뽕밭이 푸른 바다가 되듯/바다가 솟아올라/깊고 깊은 산이 되었는가//실로 오랜 세월,/안개에 가리우고 구름에 덮이어서/알몸을 스스로 드러내지 않던 네가,//오늘은 비로소 한 마리 거대한 地鬼가 되어/꼬리는 깊은 산정호수에 두고,/머리는 구름 밖으로 내민 채 꿈틀대는구나.//나는 분명 그런 너를 보았으나/보지 아니한 것으로 하리라./가슴 속에 다 묻어두고 내가 죽는 날까지/침묵을, 침묵을 지키리라.//내 입을 여는 순간,/네가, 네가 굳어버린 돌산 숲이 될까/두렵기 때문이리라.   -「張家界를 빠져나오며」전문,『백년완주를 마시며』에서   여행지 중국의 장가계에서 돌산의 숲으로 이루어진 그 모습을 한 마리 지귀가 오랜 세월 정체를 드러내지 않다가 비로소 한 마리의 거대한 지귀로 꿈틀대는 형상으로 활유법을 써서 표현한 이 시는 실로 장엄한 자연의 정적인 산을 동적으로 바꾸어 놓고[置換] 있다. 그런데 시적 화자는 그 꿈틀대는 지귀를 보지 않았다고 침묵하겠다고 한다. 그것은 시적 화자가 입을 여는 순간 돌산으로 굳어버릴까 두렵기 때문이다. 이 의미는 실제 돌산 숲으로 존재하는 장가계의 모습을 꿈틀대는 지귀로 보고 있지만 굳어버린 돌산 숲의 그 침묵에 초점을 두고 시인은 트릭을 쓴 것이리라. 마지막연의 트릭이 돋보이는 시이다. 돌산 숲의 침묵이 지귀로 꿈틀대는 것은 침묵의 정중동을 표현한 시라고 할 수 있겠다. 대지에 우뚝 솟아 늘 말없이 서 있는 산은 움직임이 없어 보이나 오랜 시간과 함께 끊임없이 변화하는 자연으로서의 산이 지니는 침묵을 노래하였다고 할 수 있겠다. 대지의 첨탑인 산과 산 아래 넓게 동서남북으로 내달리는 광야, 벌판, 들판은 이시환 시에서 메마르고 권태로운 일상으로부터, 푸른 세상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곳, 절망 속의 침몰하는 세상을 일으켜 세우는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   오늘같이 할 일 없는 날엔/예술의 전당 대신 마른 겨울들판으로 가자./오늘같이 무료한 날엔/사람소리 들리지 않는 허허벌판으로 가자./눈발이 비치는가 싶더니/빗방울이 어깨를 적시고,/빗방울이 눈썹을 적시는가 싶더니/싸락눈이 머리를 희끗하게 덮는/그곳으로 가자. 그곳으로 가자./그곳 마른 풀섶 더미 위로,/그곳 쌓인 낙엽 위로,/그곳 내가 걷는 길의 고적함 속으로/저들이 곤두박질치며 부려놓은,/짧은 한 악장의 장중한 화음을 들어보시라./저들끼리 밀고 당기고, 질질 끌고 잡아채며,/점점 세게, 아주 여리게, 사라지는 듯하다가도 다시 소생하는,/허허벌판에 부려지는 화음이 범상치가 않구나./죽어가는 한 세상을 부여잡고/그리 통곡을 하는 것이냐?/이 들판 저 산천에/푸른 세상을 다시 일으켜 세우려는 것이냐?/싸락눈이 섞여 내리는 겨울비가/부려놓은, 오늘의 짧은 한 악장의 화음이/절뚝이는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우시네./침몰하는 세상을 다시 붙들어 일으키네.   -「겨울비」, 『백년완주를 마시며』에서   김준오는『시론』에서 이미지를 ‘관념과 사물이 만나는 곳이며, 관념의 육화’라고 하였다. 그리고 상상은 이미지를 만들어 내어 이미지들을 결합시키는 심상형성기관(image-maker)으로서 표현론에서 비평개념의 핵심으로 보았다. 그리고 그는 문학적 용법으로서 이미지의 정의를 한 편의 시나 기타 문학작품 속에서 감각․지각의 모든 대상과 특질, 협의의 의미로 시각적 대상과 장면의 요소, 가장 일반적으로 비유적 언어(figurative language), 특히 은유와 직유의 보조관념을 의미한다고 정리하였다. 그러므로 이미지는 시의 본질적 구성요소로서 시의 의미와 구조와 효과를 분석하는 중요한 시법이며, 의미 전달기능에 있어서 관념의 육화이다. 이시환의 「겨울비」는 예술의 전당과 겨울들판이 콘트라스트를 이룬다. 인위적인 예술을 꿈꾸기보다 자연의 겨울들판에서 그는 장중한 연주를 듣는다. 그 연주는 대중의 구미에 맞추어 돈에 팔리어 소비되며 일회성을 가진 예술이 아니라 영속적이며 대지의 소리이며 연주이다. 그러니 대중의 구미에 맞추어 돈으로 팔리거나 소비되지 않는다. 거래되지 않지만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 이 생명력은 죽어가는 한 세상을 부여잡으며 통곡을 하기도 하고 푸른 세상을 다시 일으켜 세우거나 절뚝이는 자신과 침몰하는 세상을 다시 일으키는 힘을 지니고 있으며, 그것은 대지가 지니는 생명력에서 온다. 이 시에서 대지의 벌판은 소생의 공간이다. 그것은 대지에 나리는 눈발과 빗방울, 싸락눈, 젖은 풀잎과 쌓인 낙엽이다. 예술의 전당식 예술을 거부하는 그의 관념에 콘트라스트의 반대급부에는 생명의 대지가 이미지를 입고 꿈틀댄다. 그는 벌판에서 서서 바람의 소리를 들으며 생명체들과 자연물의 생멸 소리를 듣는다.   바람이 분다./얼어붙은 밤하늘에 별들을 쏟아 놓으며/바람이 분다./더러 언 땅에 뿌리내린/크고 작은 생명의 꽃들을 쓸어 가면서도/바람이 분다./그리 바람이 부는 동안은/돌에서도 온갖 꽃들이 피었다 진다./바람이 분다./내 가슴 속 깊은 하늘에도 별들이 총총 박혀 있고,/내 가슴 속 황량한 벌판에도/줄지은 풀꽃들이 눈물을 달고 있다./바람이 분다.   -「벌판에 서서」, 『바람 소리에 귀를 묻고』에서   바람은 대지를 감돌아 흐르는 강물처럼 끊임없이 불어온다. 이 바람으로 대지는 생물들을 키운다. 생명력을 지니게 하는 이 바람과 대지는 서로 공조한다. 그 속에서 시인은 자신의 가슴 속에 황량한 벌판을 바라본다. 이 황량한 벌판에는 줄지어 피어있는 꽃들이 눈물을 가득 달고 있다. 그의 심상 풍경은 슬픔으로 젖어있다. 이 대지와 바람이 시인의 슬픔을 어떻게 생명력을 지닌 삶으로 다시 소생 시켜줄 것인가. 그러나 벌판과 들판은 시인의 고통스런 내면을 치유시켜준다. 대지의 인간이 신의 노여움으로 대지의 저주를 받았다. 그 저주는 대지에 끊임없이 나는 가시덤불과 엉겅퀴로 상징되고 있다. 인간이 가시덤불과 엉겅퀴와 싸워야 한다는 의미는 삶에는 그것을 극복하는 고통이 따르기 마련이라는 의미이다. 대지의 저주는 인간에게 삶의 고역이다. 불교식으로 말하면 삶은 고해(苦海)라고 하듯이 인간은 대지에서 땅을 부쳐 먹고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고역에 시달린다. 이것이 인간의 운명이지만 인간은 그 운명에 지지만은 않는다. 인간이 그 대지의 품에 안김으로써 대지의 저주라는 신의 옹박([呪縛(주박)]으로부터 해방의 길을 모색한다. 시인 이시환이 지닌 고통은 그만이 겪는 것이 아니다. 이 지상에 살아가는, 대지에 발을 딛고 있는 인간 모두의 고통이다. 그러니 그는 그런 고통 속에 있는 자들에게 그 고통으로부터의 놓여나는 방법을 다시 대지에서 찾았다. 대지의 품에 안기는 것, 마음을 비우고, 욕심을 비우는 것이야말로 고해로부터 벗어나는 길이며 그 길에 대지와 자연, 삼라만상이 함께 해준다. 이시환의 대지의 이미지는 그의 이와 같은 관념의 세계, 더 정확히 말하자면 욕심을 버리고 마음을 비워가는 과정에서 생겨난 묵상과 관상의 관념적 세계를 삼라만상을 통하여 시각적인 이미지로 바꾸어낸 산물이다. 비움의 여정은 사막의 이미지로 나타나고 있고, 사막은 대지가 지닌 극복의 땅이다. 사막은 가시덤불과 엉겅퀴와 같은 곳이다. 그러니 인간에게 극한의 땅이고 거기에서 인간은 자신의 욕망을 정화하고 비우는 여정을 걷는다. 시인은 이런 여정을 사막의 이미지를 통하여 그의 시에서 표현하고 있다.   일 년 삼백 육십오 일 내내/비 한 방울 내리지 않는/이곳에/서 있는 산은 서 있는 채로/누워 있는 돌은 누운 채로/깨어지며 부서지며/모래알이 되어가는/숨 막히는 이곳에/아지랑이 피어오르고/간간이 바람 불어/모래알 날리며/뜨거운 햇살 내려 쌓이네./수수만 년 전부터/그리 실려 가고/그리 실려 온/바람도 쌓이고/적막도 쌓이고/ 별빛도 쌓여서/웅장한 성城 가운데/성을 이루고/화려한 궁전 가운데/궁전을 지었네그려./나는/그 성에 갇혀/깨끗한 모래알로/긴 머릴 감고,/나는/그 궁전에 갇혀/순결한 모래알로/구석구석 알몸을 씻네./검은 돌은/검은 모래 만들고/붉은 돌은/붉은 모래 만들고/흰 돌은/흰 모래를 만들어내는/이곳 단단한/시간에 갇혀/나는 미라가 되고/이곳 차디찬/적막에 갇혀/그조차 무너지고 부서지며/마침내/진토(塵土) 되어/가볍게 바람에 쓸려가고/가볍게 별빛에 밀려오네.   -「사하라 사막에 서서」, 『몽산포 밤바다』에서   하나의 돌멩이가 비바람에 부서져 모래알에 되어 구르듯이 시인은 단단한 시간에 갇혀 미라가 된다. 그 미라가 무너지고 부서진다. 그 전에 시인은 순결하고 깨끗한 모래알로 머리를 감고 알몸을 씻는다. 이것은 자기 정화의식이며 이 정화의식 후에 미이라가 되는 것이니 자기 순장의식이다. 여기에서 궁전이란 사막 한 가운데 세워진 영혼의 궁전일 것이다. 이 궁전 속에서 시인은 자기 정화를 거친 순장의식을 한다. 그 만큼 사막의 고요가 시인의 영혼을 그렇게 벼리는 것이다. 완전히 정화된 영혼은 그야말로 욕망이 불러온 고통으로부터 놓여난다. 번뇌의 타오르는 불꽃이 소멸된다. 그러니 정화 이전의 나는 죽어서 미이라가 된다. 나를 비운다는 것은 정화 이전의 나의 순장인 셈이다. 그리고 긴 머리를 감는다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시적 화자는 여성이고 남성 상징인 성과 궁전은 대지인 사막이다. 이시환 시인의 대지는 남성성과 여성성을 동시에 갖는다고 할 수 있겠다.     나는 철없이 사막 투어를 떠나네. 얼굴엔 선크림을 바르고 머리엔 창이 긴 모자를 눌러쓰고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선글라스까지 끼고서 그야말로 철없이 사막 투어를 떠나네.   그곳 어디쯤에 서서 그곳 어디쯤을 바라보지만 그것은 분명 수억 수천 년의 세월이 빚어온 한 말씀의 성(城)이요, 그 성의 한 순간 영화인 것을.   아직도 곳곳에 솟아있는 오만한 바윗덩이 부서지고 부셔져서 내 살 같고 내 피 같은 모래알이 되고, 그것들은 다시 바람에 쓸리고 쓸리면서 오늘, 어머니의 젖무덤 같고 궁둥짝 같고 깊은 배꼽 같고 긴 다리 사이 같은   모래뿐인 세상, 적막뿐인 세상 그 한 가운데에 서서 머리 위로는 쏟아지는 햇살로 흥건하게 샤워하고 발밑에서부터 차오르는 어둠으로는 머릴 감으면서 나는 비로소 눈물, 눈물을 쏟아놓네.   아, 고갤 들어 보라. 살아 숨 쉬는, 저 고단한 것들의 끝 실오리 같은 주검마저도 포근하게 다 끌어안고, 혈기왕성한 이 육신의 즙조차 야금야금 빨아 마시는 모래뿐인 세상의 중심에 맹수처럼 웅크린 적막이 나를 노려보네.   한낱, 그 뜨거운 시선에 갇힌 두려움 탓일까? 모래 위에 찍힌 내 발길의 시작과 끝이 겹쳐 보이는 탓일까? 하염없이 흐르는 내 눈물이 마침내 물결쳐가며 머리 위로는 숱한 별들을 닦아 내놓고 발밑으로는 깨끗한 모래톱을 펼쳐 내놓는 이곳에서 숨조차 멎어버릴 것 같은, 그 눈빛 속으로 내가, 내가 드러눕네.   -「사막 투어」, 『눈물 모순』에서   사막 시편의 절창이라 할 수 있는 이 시에는 제목 밑에 “무엇이 내 심장을 뛰게 하는가? 태양의 두터운 입술도, 바람의 격렬한 포옹도 아니다. 오로지 내 살 같고 내 피 같은 모래알뿐인 사막의 깨끗한 적막이다. 그것은 내 생명의 즙을 빨아 마시지만 내 터럭 같은 주검조차도 포근하게 끌어안는다.”라고 시인은 쓰고 있다. 사막의 깨끗한 적막은 나의 살이요 나의 피라는 의미는 이 적막에서 오는 영적 고요가 정화의식이란 의미이고, 그것은 사막과 같은 세상으로부터 놓여나는 나의 영혼의 승리가 아닐 수 없다. 대지의 저주로부터 놓여나는 것도 대지인 사막 속에서 이루어진다. 마음의 가시덩쿨이나 엉겅퀴를 극복하는 길은 영혼을 정화시키고 재생되는 길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이시환 시인의 대지는 사막을 통해정화와 재생을 가져다주는 생명력을 지닌다. 그것은 시인의 내적 고요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며, 사막의 적요는 그 내적 고요의 정점에 있을 걸로 생각된다. 정화와 재생으로 새로 태어난 영혼은 부드럽고 생동감을 지니며 수평적이다. 그래서 함박눈처럼 포근하게 대지를 덮고 대지의 낮은 곳으로 내려와 대지에다 입 맞춘다. 대지인 당신을 위해서라면 젖은 땅, 언 땅 어디라도 서슴없이 달려갈 각오가 되어있다.   내가 가진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만, 당신에게로 곧장 달려 갈 수 있다는 그것과 당신을 위해서라면 당신의 이마에, 손등에, 목덜미 어디에서든 입술을 부비고 가녀린 몸짓으로 나부끼다가 한 방울의 물이라도 구름이라도 될 수 있다는 그것뿐이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사옵니다. 다만, 우리들의 촉각을 마비시키는 추위가 엄습해오는 길목으로 돌아서서 겨울나무 가지 끝 당신의 가슴에 잠시 머물 수 있다는 그것과 당신을 위해서라면 충실한 從의 몸으로 서슴없이 달려가 젖은 땅, 얼어붙은 이 땅 어디에서든 쾌히 엎드릴 수 있다는 그것뿐이옵니다. 나는 언제나 그런 나에 불과 합니다. 나는 나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함박눈」, 『안암동日記』에서   ‘함박눈=나’인 이 시에서 당신은 대지이며 함박눈은 시적 화자 ‘나’와 동일한 존재이다. 대지인 당신의 이마와 손등, 목덜미에 입술을 부비겠다는 ‘나’, 대지인 당신을 위해서라면 충실한 종의 몸으로 달려가서 엎드리겠다는 함박눈 나의 사랑의 맹세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함박눈인 나의 정체성이기 때문이다. ‘나’가 나일 수 있는 본질은 함박눈이 지니는 본질과 일맥상통한다. 그러니 대지인 당신을 위해서 충복이 되는 것이 나의 소명이다. 이시환의 대지의 이미지는 대지와 길항하는 인간의 고통을 대지를 매개로 정화와 재생을 이루어 대지와 화합하며 대지에 발을 딛고 대지를 사랑하는 자세로 귀결된다. 거기에는 나라는 주체의 자기 비움이 사막의 내적 고요 속에서 극복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시환 시인의 묵상, 관상에 이르는 관념의 세계가 대지의 이미지를 통하여 사막에서 절정에 이르고, 거기에서 가시덩쿨과 엉겅퀴와 같은 부정적인 내외적 원인으로 야기된 고통과 싸워서 승리하였다는 증거가 될 것이다.  
1173    詩作初心 - 광물이미지 댓글:  조회:4373  추천:0  2016-03-12
이시환의 시법 : 부드럽게 생동하는 이미지들 -④광물이미지   심종숙(시인/문학평론가)     시인은 늘 자신의 외부를 둘러싸고 있는 자연물이나 동식물, 인공물, 사람들, 그리고 눈으로 직접 보기는 어렵지만 망원경으로 바라보는 우주의 별들 속에 있다. 이 삼라만상과 인공적인 사물을 그의 주위에다 두고 시인은 자신의 내부의 세계를 말하기 위하여 이것들을 끌어온다. 그러니 시인의 눈이 그것을 바라보되 어떤 방식으로 관계를 지어 구조화하느냐는 시인의 몫이 될 것이다. 하나의 대상을 두고 시인들마다 다르게 관계를 맺는 이유는 각기 다른 개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시인이 살아온 경험과 사유 방식에 따라 다양하게 대상과 관계 맺어질 수 있다는 말이다. 비트겐슈타인이 말하는 아스펙트상은 ‘~로서 보다’라는 관계 맺기의 구조이다. 그러니 대상을 무엇으로 보고 어떻게 관계 맺어지느냐에 따라 동일한 대상이어도 관계 맺는 내용의 다양성에 따라 시인 각자의 개성을 지닌 시를 창조해내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경우는 어디까지나 주체의 입장에서 객체를 바라보는 것이라면 객체의 입장에서 주체에게 말을 걸어오게 되면 상황은 달라진다. 대상을 두고 주체를 투사하는 방식이 근대의 방식이라면 현대의 시인은 말을 걸어오는 대상과 소통을 하여 공감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되려면 주체의 마음은 늘 비워져 있어야 한다. 비워져 있지 않으면 늘 대상에 대한 주체의 투사로 대상의 본질은 가리게 된다. 주체를 비워 대상을 바라볼 때 대상은 자기의 말을 해 온다. 자신의 본질을 바라보게 한다. 근대의 대상들은 주체의 폭력적 점유, 구속, 오도로 얼룩져 있다. 대상을 가두는 주체의 힘의 남용은 대상들을 부자유스럽게 하고 대상들이 지니는 본질을 바라보지 못하게 하였다. 물론, 대상을 바라보는 주체는 주체의 일방적인 고백이나 대화가 아니라 대상으로부터 오는 것을 읽어내려는 주체의 노력에 기인한다. 자연물이나, 동식물, 인공물, 사람들, 우리들의 의식세계, 기억을 바라보고 그쪽에서 오는 메시지를 읽고 소통하려는 태도는 어디까지나 주체가 올바른 관계 맺기를 통하여 가능해지는 마음의 작업일 것이다. 우리 주위에 나뒹구는 작은 돌멩이 하나에도 메시지를 품고 있고, 그것을 주워드는 사람은 그 돌멩이와 관계 맺기가 이루어진다. 돌멩이를 귀에 갖다 댄다. 이 돌멩이의 소리를 듣는다. 돌멩이는 그 장소에서 사람과 조우하기 전에 큰 바위의 일부였을 것이다. 그것이 쪼개어져 강물의 흐름에 몸을 맡기다 보니 그렇게 둥글둥글한 모습을 갖추어 부드럽게 손에 잡혔을 것이다. 이 돌멩이는 큰 바위로부터 쪼개지고 떨어져 나오는 아픔을 겪었을 것이다. 그 바위는 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해면이 융기하여 태산준령을 이루었다가 오랜 비바람에 씻기어 몇 덩어리로 깨어졌거나 그 일부가 떨어져 나왔을 것이다. 그것이 비에 쓸려 계곡물을 따라 강에 이르러 돌이나 자갈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대하의 흐름을 따라 물의 힘을 받으면 강의 모래알이 되거나 바다의 모래알로 부수어질 것이다. 그러니 얼마나 장구한 세월이 흘렀겠는가. 이 돌 하나의 역사가 이렇게 유구하니 산천은 얼마나 많이 변하였으며, 인간의 문명 또한 얼마나 변화에 변화를 거듭하였겠는가. 생성된 모든 것이 명멸해 가지 않는 것이 없다 하였다. 다만, 시간이 장구하게 흐를 뿐이다. 대하나 바다의 모래알들도 더 시간이 지나면 먼지가 되어 우리 눈에 보이지 않게 대기로 우주로 날리거나 그 흔적조차 사라져 버린다. 그러니 불교에서 말하듯 삼라만상은 모두 명멸하고 만상동귀라 하였다. 모든 것이 사라지고 만다. 그래서 공하다고 하였다. 바위나 돌에는 그저 평범한 것도 있지만 시장에서 값이 나가는 귀한 보석도 있다. 이 보석들은 모두 지층에서 매장되어 있을 때에 지층의 운동에 따라 생긴 결정체들이다. 시에서 광물이미지는 바위, 돌, 모래를 비롯하여 화려한 색깔이나 모양을 지니며, 아주 단단한 결정체를 가진 보석류, 철, 주석, 납 등과 같은 금속류 광물들이 이미지를 이룰 때이다. 이 광물류의 모양이나 색깔, 특성에 따라 시적 이미지를 만든다. 그것은 시인이 어떤 상상이나 비유 -직유, 은유- 를 할 때 그 특성에 맞는 광물을 기억으로부터 불러와서 자기의 시에서 관계를 맺어 구조화하는 것이다. 시인의 이 시적 행위는 섬세한 지적 작업인 동시에 영적인 작업이 된다. 영적인 작업이라는 의미는 광물이 지니는 속성이나 본질을 깨닫고 그것을 시에서 이미지를 형성한다는 뜻으로, 자연이나 우주적 몽상에서 오는 영감이 있어야 한다. 바위, 돌, 모래는 자연물의 광물 이미지이며, 보석류는 시에서 이미지를 한층 섬세하거나 미적으로 탁월하게 이미지를 조형하며 고귀하고 영원성을 지닌다. 그것은 보석류 광물이 지니는 특성이다. 보석류 광물은 주로 아름다운 미적 이미지, 견고성, 영원성, 고귀함을 지닌다. 그리고 금속류 광물은 차가움, 저항성과 둔중함, 견고함을 지닌다. 만해 한용운의 시집 『님의 沈黙』에는 님과의 사랑의 맹세를 ‘황금의 꽃 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라고 비유하여 황금의 특성이 지닌 빛남과 견고성, 불변성, 영원성을 사랑의 옛 맹세에 비유하고 있다. 그밖에도 이 시집에는 시적 화자의 자기 성찰이나 님이 떠나가고 님을 기다리는 비탄과 탄식, 눈물을 진주에 비유하여 ‘진주 눈물’이라고 표현하거나 님을 기다리는 시적 화자 자신이 아공(我空)으로 되어가는 경지를 수정이나 금강석(=다이아몬드)에다 비유하여 영혼의 투명성과 견고성을 나타내고 있다. 이와 반대로 님과 나의 합일을 훼방하는 장군이나 ‘나’를 나라도 없고 민적도 없으며 인권도 없는 처지로 만든 일제에 대해서는 ‘칼’로 비유되는 차가움, 견고함의 이미지를 조형하여 만해 시 특유의 저항성을 드러내고 있다. 일본의 시인 미야자와 겐지(宮沢賢治, 1896-1933)의 경우는 그의 시나 동화에서 보석류의 광물의 이미지를 조형하고 있는데 그것은 그 작가가 어릴 때부터 돌 채집이 취미였으며, 나중에 자연과학을 배우는 학도였다는 점과 보석상의 꿈도 있었던 자전적인 요인도 있으며, 불경에 심취하고 행자였기에 불경의 진리를 비유하기 위해 보석 이미지로 쓰고 있기 때문에 그 영향이 깊었다고 한다. 이시환의 시에서 주로 등장하는 광물 이미지는 바위, 돌, 모래이다. 보석류에 비해서 아름답지도 않지만 자연물 그대로인 이 이미지는 변화무쌍한 시간과 공간, 신의 메시지(말씀, 생명, 숨)를 간취하게 한다. 그 외에는 이미지를 구성하기보다 시행에서 부분적으로 쓰이는 경우로, ‘금강석보다 더 단단한 적막(寂寞)조차도/산산조각이 나고 만다’(「무서운 태풍」)가 있다. 삼라만상들을 사라지게 하는 파괴력을 지닌 바람의 위력을 이야기 하는 시에서 내적인 적막도 산산조각 내어버리는 위력을 지니며, 그 적막은 보석류 광물 중에 결정도와 강도가 제일 높은 다이아몬드에 비유하고 있는 표현이다. 그리고 철의 가공품인 칼을 소재로 하거나 호미를 소재로 한 시 - 예를 들어, 「칼」, 「호미」, 「조선낫」과 같은 시편들은 민중의 고단한 삶과 저항성을 내포- 가 있다. 먼저, 자연 광물인 바위, 돌, 모래는 그의 시에서 어떤 이미지로 조형되고 있는지 알아보자.   하, 인간세상은 여전히 시끄럽구나. 문득, 이 곳 중선암쯤에 홀로 와 앉으면 이미 말(言)을 버린, 저 크고 작은 바위들이 내 스승이 되네.   -2004. 7. 26. 01:46 「상선암 가는 길」전문,『상선암 가는 길』에서.   자연의 크고 작은 바위들은 이 시에서 화자는 말을 버렸다고 한다. 바위의 침묵을 말을 버렸다고 의인화하여 표현한 이 시는 시인의 묵상, 관상의 여정으로 들어가는 시집『상선암 가는 길』의 세계를 잘 보여주고 있는 시이다. 그 말을 버린 바위처럼 시인은 묵상과 관상의 여정을 걸어가는 것이다. 그러니 그 바위들이 자신의 스승이라고 밝히고 있는 시이다. 이 시가 『상선암 가는 길』의 첫 시편으로 놓여진 이유도 바로 그러하리라. 시인은 말없는 자연을 통하여 서로 대화하고 그의 고요와 적막, 적요를 향한 내적 여정의 스승으로 삼았다. 자연 속에 깃들어 있는 신의 메시지를 들으려면 인간세상과 같은 시끄러운 곳을 피하여야 함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니 시인은 ‘인간세상은 여전히 시끄럽구나’라고 한탄한다. 이 소음을 피하여 하선암, 중선암, 상선암이라는 암자의 이름들은 곧 바위가 있는 자리로 그의 내적이며 영적 여정이 바로 하선암, 중성암, 상선암을 올라가는 것처럼 점점 더 고요의 세계로 침잠하고, 사막에 와서는 정화와 재생의 의식을 치르는 단계로 이어지는 과정의 초입에 이 시가 놓여져 있다. 그가 이렇게 내적 영적 여정으로 불가피하게 들어가는 이유는 「콩나물 기르기」에서 침묵을 강요하는 한 통속의 세상이 그를 억압하였기 때문이다.   정확히 알아들을 수 없는/저 밑도 끝도 없는, 무성한 말들!/분명, 저 무성한 말들이 눈을 초롱초롱 뜨고 있는/한반도의 어둠 속에는/화려한 수사(修辭)도, 궤변도, 논리도,/인간의 오만도, 눈물도, 진실도/그것들의 함정도 뒤섞여 있으리라.//저들의 목이 마르기 전에 충분히, 자주 물을 주어야/쑥쑥 길게 자라나는 콩나물이 되듯이//저들에게 실명(失明)게 하는 햇빛을 주면/푸른 싹을 내미는 자기 모반을 꾀하듯이//저들에게 때맞추어 물, 물을 주지 않으면/앞 다투어 잔뿌리와 실뿌리를 숱하게 뻗어내려/마침내는 서로 엉켜 붙어 한 통속이 되어 버리듯이/인간 세상의 무성한 말들이 무성한 말을 낳아/빽빽한 콩나물시루 속 같은,/숨쉬기조차 어려운 한 통속의 침묵을 강요하네.   -2003. 3. 30. 21:32「콩나물 기르기」전문,『상선암 가는 길』에서.   시집의 마지막 부분에 놓인 이 시는 실로 무서운 시라는 인상이다. 와글대는 인간의 소리, 주의․주장이나 논리, 궤변들이 콩나물시루 같은 무리를 이루어 자기네들끼리 뭉쳐 다니며 자기들과 다른 주의․주장과 말에는 관심이나 존중, 차이를 인정함 없이 일방적으로 힘을 행사하여 폭력을 낳는 한반도의 암울한 어둠의 일면을 시루 속의 콩나물에 비유하여 야유와 조롱, 냉소, 조소를 보내는 이 시는 아이러니적 요소를 가지고 있다. 침묵을 강요하는 한국사회의 어두운 일면을 이렇게 표현한 시인이 누가 있었던가. 시인은 아마 우리의 사회, 문단이나 세상사에서도 이렇게 느꼈기에 침묵을 강요하는 그 분위기 속에서 홀로 내적 영적 여정을 걷는 것이 불가피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폭압적인 현실을 등 뒤로 하고 그는 구도의 여정을 걸음으로써 현실에서 느끼는 실망감과 상대적인 박탈감을 구도의 여정으로 허전하고 상실로 인한 아픔을 치유, 정화하고 재생하고자 하였을 것이다. 「고인돌․1」,「고인돌․2」,「고인돌․3」,「고인돌․4」,「새해 아침에-고인돌의 傳言」에 오면 오랜 시간이 지나고 바위에서 떨어져 나온 거대한 고인돌을 바라보면서 연작시편 4편을 쓰고 있다. 이들 시편에서 고인돌의 침묵, 인간의 욕망, 소박한 믿음들을 고인돌을 통하여 이미지화 하고 있다.   어디선가 굴러온,/생긴 그대로의 사투리 같은 투박함으로//천년의 세월이 흐르고 흘러도/깨어지지 않고 부서지지 않을 단단함으로//죽은 자의 권위와/산 자의 힘을 과시하는 단순함으로//모여 사람 살던 곳에 세워진/믿음 하나.//얼핏, 지나치면 모를까/귀를 주고 눈길 주면//비로소 말문을 여는/먼 옛날 옛적의 소박한 우리네.//그저 깬돌이거나 간돌에 지나지 않건만/그저 그것으로 세우고, 괴고, 깔고 덮어서//수 천 년 전 이 땅에/모여 사람 살던 이야기보따릴 숨기고 있네.//얼핏, 지나치면 모를까/마음 주고 체온 나누면//멎은 피가 다 도는/먼 예날 옛적의 우리네 믿음 하나.   -「고인돌․2」, 『상선암 가는 길』에서   인간이 신에게 의탁하고 경배하던 시대는 지나갔다. 현대의 물신주의나 상업화된 소비사회에 신은 하나의 상품으로 거래되거나 교환되는 풍조이다. 그러나 이 「고인돌」시편에서 시인의 눈은 무엇을 바라보는가? 그는 원시의 소박하고 꾸밈없는 인간의 모습을 바라본다. 그저 천재지변에서도 불편함 없이 먹고 살아가고 자녀를 낳고 살아갈 수 있게 해달라고 소박한 소망을 신께 의탁하기 위해 신의 숨결을 담아 머물게 하려는 집인 고인돌을 세웠다. 훨씬 나중의 종교건축들처럼 화려하거나 장엄하거나 기교적이지 않아도 소박한 그대로 인간의 원의가 말없이 담겨있고 거기에 내재하는 신을 시인은 고인돌을 통해 바라본다. 그러면서 이 고인돌의 이미지들도 고인돌이 가르쳐주고 시인에게 메시지를 보내주고 시인은 그것을 착신하여 시를 쓰고 있다. 인간 스스로 신이 되어 권력을 휘두르고 말과 주의․주장도 소유화하고 그것을 일방적으로 행사하는 폭압의 시대에 고대인들의 소박한 신에 대한 경배와 믿음, 서로 따뜻하게 품어주며 어울렁 더울렁 살았던 그들에 대한 친밀감과 숨결을 느낀다. 그래서 시인은 「고인돌․3」에서 더 간명하고 더 투명하게 고인돌을 노래한다.   수 천 년 전의 바람이 깃들어 있고 수 천 년 전의 구름이 깃들어 있는,   수 천 년 전의 어둠이 고여 있고 수 천 년 전의 햇살이 고여 있는,   수 천 년 전의 사람과 사람의, 힘과 믿음과 소망이 숨 쉬고 있는,   가장 무겁고, 가장 단단한 침묵의 말씀이여, 그 말씀의 하늘이시여, 땅이시여.   -「고인돌․3」,『상선암 가는 길』에서   ‘수 천 년 전의’라는 반복 구절을 통하여 시인은 고인돌이 등장했던 석기시대로 우리를 데리고 간다. 그 시공 속에서 바람과 구름과 빛과 어둠이, 사람과 사람의 발자국이, 그들의 힘과 믿음, 소망이 깃들어 숨 쉬고 있는 말없는 고인돌 앞에서 시인은 가장 무겁고 가장 단단한 침묵의 말씀을 듣는다. 그 말씀은 하늘이자 땅이며, 인간과 우주를 지은 신의 말씀이다. 그런 고인돌은 「고인돌․4」에 오면 ‘단단함으로/무거움으로/불변함으로/그런 단순함으로/온전한 상징이요 언어가 되는/돌 가운데 돌.’이며 ‘온전한 존재요 생명이 되는 돌 가운데 돌이라.’라고 노래하고 있다. 그러니 돌은 시인에게 상징이며 진실한 언어가 되고 온전한 존재이며 생명이 된다. 왜냐하면, 고인돌은 ‘죽은 자의 집도 되고/산 자의 안녕을 지켜주는 신이 되어/다시 태어나는 너’이기 때문이다. 「새해 아침에-고인돌의 傳言」에 오면 ‘단군의 후손들이여,/넘치는 지혜의 샘물을 쏟아내고,/정열의 장작더미에 불길을 지피고,/반도땅에 흐르는 피를 더욱 뜨겁게 하라.’고 고인돌의 전언을 이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대신 전하고 있다. 고인돌은 큰 바위가 비바람에 파쇄되어 나오는 광물이나 그 바위에서 더 시간이 흘러 만들어 지는 것은 작은 돌이다. 이시환 시인은 이 지수화풍의 자연의 이치를 알고 거기에 따라 큰 것에서 작은 것으로 이동하면서 이미지를 조형하였고, 그것이 모래에 이르게 되나 나중에 공으로 모든 것이 돌아감을 이야기 하여, 불교적인 무상이나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공사상을 이 자연물을 통하여 반영하고 있다. 작품 「조약돌」을 읽어보자.   작은 조약돌 하나 손에 꼬옥 쥐고서 지그시 눈을 감으면   아득히 먼 곳으로부터 너의 숨소리 들려오고,   아득히 먼 때로부터 너의 심장이 고동치는 체온이 전이되어 오네.   밤하늘의 별과도 같이 바닷가에 무리지어 네가 있음으로   세상은 비로소 살아 숨 쉬는 것들로 가득 차있고,   그것으로서 세계가 한 덩어리임을 일러주네.   -2004. 11. 2. 11:20「조약돌」전문,『백년완주를 마시며』에서.   바닷가의 작은 조약돌 하나에서 시인은 태고의 숨소리와 심장이 고동치는 체온을 느낀다. 이 돌들이 바닷가에 무리 지어 있음으로 세상은 살아 숨 쉬는 것이며, 그것으로 세계가 한 덩어리임을 알려준다. 이 조약돌은 시인이 찾아간 바다만이 아니라 이 지구 전체에 여기 저기 있다. 그것들은 원래 커다란 바위였다. 그 바위의 파편이 조약돌이다. 그러니 무수한 조약돌의 무리는 거대한 하나의 바위에서 나온 것들이니 세계는 하나였다는 의미이다. 이 시에서는 작은 것에서 큰 것으로 상상이 옮겨지면서 세계가 각각 파편화된 것이 아니라 하나라는 인식을 갖게 한다. 현대사회의 파편화된 세태는 오랜 시간 전에 하나였던 때로 되돌아가야 함을 시인은 말하고 있고, 그 때의 숨과 따뜻한 체온이 그리운 심정을 이 시에 담았다고 하겠다. 시야말로 파편화된 현대 사회의 부정적인 양상을 복원해줄 수 있는 힘을 가졌다. 이 시에서 그런 긍정적인 힘을 시인은 바라보며, 작은 조약돌에서 그 메시지를 읽고 있다. 작품 「돌」에서는 ‘작은 돌멩이 속에 광활한 사막이 있고, 그렇듯 사막은 하나의 작은 돌멩이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며 상즉상입하는 자연물인 돌의 본질을 이야기하면서 바위, 돌, 모래가 모두 상즉상입하면서 하나인 광물임을 분명히 하고, 그 깨달음에서 그의 광물 이미지 조형의 절정을 이루고 특성을 보여준다.   아직도 내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은   수수만년 모래언덕의 불꽃을 빚는   바람의 피가 돌기 때문일까.   아직도 내 눈물이 마르지 않는 것은   수수억년 작은 돌멩이에 하나의 눈빛을 빚는   바람의 피가 돌기 때문일까.   -「돌」전문,『몽산포 밤바다』에서.   이 시의 제목 밑에 시인은 돌과 사막에 대한 자신의 사유를 이렇게 적고 있다. “작은 돌멩이 속에 광활한 사막이 있다. 그렇듯 광활한 사막은 하나의 돌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우주는 마이크로코스모스와 미크로코스모스라고 우주론자들이 말한다. 그것과 같이 이 시에서는 모래는 돌이고 돌은 모래이다. 하나의 돌에도 광활한 사막이 있고 사막의 수많은 모래알은 하나의 돌이다. 그러니 시인의 가슴은 두근거린다. 수수만년 시간의 흐름에 가슴이 두근 댄다. 그 모래가 만들어 지는 과정의 돌의 불꽃을 바라본다. 그 불꽃이 일어남은 바람의 피가 돌았기 때문이다. 바람이 없었다면 비도 내리지 않고 바위의 파쇄도 일어나지 않는다. 우주만물을 순환시키는 거대한 생명력은 곧 바람일 터 시인은 돌에서 모래를 바라보며 모래에서 돌을 바라보며 그 속에 부는 바람의 피를 본다. 그 바람의 피가 돌기에 수많은 돌들은 모래가 되어 거대하며 적막하고 인간에게는 극복의 대상이며, 옛 은수자들에게 세상 것을 버리고 신을 찾아 오직 신에게 의탁하여 들어가 수행정진하면서 신의 메시지를 읽고 인간에게 전하였던 바로 그 사막이다. 시인은 바로 그 사막의 여정에서 옛 은수자들처럼 자기 정화와 재생을 꿈꾼다. 이시환의 광물 이미지는 모래의 집합체인 사막에 와서 그 이미저리들이 서로 엉켜서 거대한 울림을 낸다. 그것이 바로 ‘사막(沙漠)’이다. 사막은 그의 광물 이미지의 절정이다. 그래서 그는 사막을 남성 혹은 여성으로도 비유하고 있으나 「사하라 사막에 서서」에서는 사막에서 정화의 주체인 자신을 여성성으로 이미지를 조형하고, 그 사막에서 알몸을 씻음으로써 씻김 의식을 치루어 정화와 재생을 통한 새 생명력을 복원하고 있다. 이 사막은 신과 같은 남성성을 지닌 사막이며, 시적 화자인 시인은 여성이다. 아주 아름답고 고요한 침묵 가운데에 이루어지는 이 의식은 참으로 독자들을 매료시키기에 충분하다. 그의 시의 힘은 바로 모래알의 점성과 같이 단단하고 응집력이 강하면서도 부드러운 남성성과 여성성을 고루 구비하여 생동하고 있다고 하겠다. 「사하라 사막에 서서」를 인용하며 글을 마칠까 한다.   일 년 삼백육십오 일 내내/비 한 방울 내리지 않는/이곳에/서 있는 산은 서 있는 채로/누워 있는 돌은 누운 채로/깨어지며 부서지며/모래알이 되어가는/숨 막히는 이곳에/아지랑이 피어오르고/간간이 바람 불어/모래알 날리며/뜨거운 햇살 내려 쌓이네./수수만 년 전부터/그리 실려 가고/그리 실려 온/바람도 쌓이고/적막도 쌓이고/별빛도 쌓여서/웅장한 성城 가운데/성을 이루고/화려한 궁전 가운데/궁전을 지었네그려./나는/그 성에 갇혀/깨끗한 모래알로/긴 머릴 감고,/나는/그 궁전에 갇혀/순결한 모래알로/구석구석 알몸을 씻네./검은 돌은/검은 모래 만들고/붉은 돌은/붉은 모래 만들고/흰 돌은/흰 모래를 만들어내는/이곳 단단한/시간에 갇혀/나는 미라가 되고/이곳 차디찬/ 적막에 갇혀/그조차 무너지고 부서지며/마침내/ 진토(塵土) 되어/가볍게 바람에 쓸려가고/가볍게 별빛에 밀려오네.   -「사하라 사막에 서서」전문, 『몽산포 밤바다』에서.
1172    詩作初心 - 식물이미지 댓글:  조회:4656  추천:0  2016-03-12
이시환의 시법 : 부드럽게 생동하는 이미지들 -⑤식물이미지 심종숙(시인/문학평론가)     대지에 뿌리를 박고 빛과 물, 양분을 먹으며 식물들은 자란다. 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갖가지 야생의 풀들이 나 있는 들판에는 아름다운 꽃들이 피어 있다. 사시사철 피는 꽃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기쁨이다. 고마울 따름이다. 문학의 꽃은 시라고들 한다. 인간의 꽃은 여자라고 한다. 그렇듯, 꽃은 결실을 맺기 위하여 잠시 필 뿐이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 했던가. 어떤 아름다운 꽃도 열흘을 붉게 피어있지 못한다는 의미는, 이 지는 꽃처럼 인간의 생명도 삼라만상도 때가 되면 다 먼지 되어 사라진다는 불교의 무상과 코헬렛의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라고 말하는 것이리라. 저 들에 지천으로 피어있는 야생화도 한 포기 풀들도 모두 소중해지는 것은 그것이 영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스러져갈 것이기에 더욱 아름답다. 한 그루의 나무가 우리에게 그늘을 드리워 여름에 쉬어가게 하며, 그 가지들에 새들을 깃들여 둥지를 틀게 한다. 바람이 쉬었다 가고 새들도 쉬었다 지난다. 한 줄기 햇살이 구름 속에서 터져 나와 나ant가지 사이로 긴 발을 내릴 때 나무는 하늘에 있는 태양과 대화를 나눈다. 한 그루의 나무에는 여러 줄기 빛발이 내린다. 나무는 가볍게 빛발을 투과시킨다. 그 안에 일렁이는 빛발은 나무를 눈부시게 만든다. 일렁이는 태양의 온기를 받아 겨울나무는 추위를 잊는다. 잎들이 진 나무들이 생존하는데 빛은 필수불가결이다. 겨울바람을 쉼 없이 날려 보내는 나뭇가지들은 무섭게 휘청거린다. 그 바람에도 나무는 쓰러지지 않는다. 여름의 폭풍우를 견딘 나무는 겨울의 매서운 바람에도 휭휭 소리를 낼 뿐 꿋꿋이 버틴다. 철새들이 먼 길을 오는 동안 잠시 머물러 가는 이 나뭇가지는 새들의 쉼터이다. 봄이 되면 이 나무들의 가지에는 꽃을 먼저 피우거나 잎이 돋아난다. 초록의 계절에 나무는 화려한 꽃등을 켜고 겨우내 지친 영혼들을 기다려 맞이한다. 꽃나무 아래에서 오는 봄을, 꽃이 지는, 가는 봄을 아쉬워하며 노래한 옛 시인들은 이렇게 자연의 순환을 가슴 깊이 공감하며 그 감흥에 젖어 감정을 풀어내었다. 이시환의 식물 이미지는 크게 꽃과 풀, 나무의 이미지이다. 이 꽃과 풀과 나무가 동물이나 광물 이미지와 합성되어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먼저, 꽃과 관련되는 이미지들을 살펴보자. 그의 시적 에스프리가 살아 숨 쉬는 첫 시집 『안암동日記』의 「꽃」을 읽어보자.   너는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 아니면 판독해낼 수 없는 상형문자. 아니면 가늠할 수 없는 어둠의 깊이이고 그 깊이만큼의 아득한 수렁이다. 너는 나의 뇌수에 끊임없이 침입하는 어질머리의 두통이거나 그도 아니면 정서적 불안. 아니면 흔들리는 콤플렉스. 시방 손짓하며 나를 부르는 너는 눈이 부신 나의 상사병. 깊어가는 불면의 내 침몰. 내 기쁨.   -「꽃」, 『안암동日記』에서   꽃은 시적 화자 ‘나’에게 방언, 상형문자, 어둠의 깊이, 수렁, 어질머리, 두통, 정서적 불안, 콤플렉스, 상사병, 침몰, 기쁨이다. 꽃은 생명을 상징하기에 알아들을 수 없는 세계의 방언이며 상형문자이다. 이 눈부신 생명에 비해 내면의 ‘나’는 어둠을 지니며, 그 어둠은 깊고 나를 수렁에 가둔다. 그러니 눈부신 생명의 꽃 앞에 서면 현기증과 두통, 불안으로 심신은 떨린다. 나의 꽃에 대한 상대적인 감정에서 오는 콤플렉스이며, 일방적인 상사병으로 나는 서서히 침몰해가지만 기쁨의 침몰이다. 이 일방적인 나의 꽃에 대한 사모는 「오랑캐꽃」에 오면 더욱 농밀하며 상호적이다.   하늘을 바라보고 누워있는 나의 배 위로 배를 깔고 누워있는 당신은 황홀이란 무게로 나를 짓누르고. 짓눌려 숨이 막힐 때마다 햇살 속 저 은사시나무 잎처럼 흔들리면서 이쪽과 저쪽을 넘나들면 출렁이는 세상이야 부시게 부시게 출렁일 뿐.   -「오랑캐꽃」, 『안암동日記』에서   오랑캐꽃은 작고 땅에 붙어서 자라는 보라색과 흰색을 지닌 제비꽃을 말한다. 봄꽃이며 우리네 서민들이 좋아하는 전통적 정서가 짙은 꽃이다. 그러나 바닥에 붙어있듯 하는 오랑캐꽃인 당신은 하늘을 바라보고 누워있는 나의 배 위로 배를 깔고 포개어 누워있다고 하여 아주 농밀한 연인들의 사랑의 모습으로 의인화하고 있다. 시인이 오랑캐꽃을 대하는 자세는 연인처럼 친밀하고 농밀하게 바라보고 있다. 이렇게 활유법을 써서 움직이지 못하고 붙박혀 있는 오랑캐꽃을 나를 짓누르는 황홀로 표현하고 있다. 그러니 연인의 애무에 짓눌릴 때마다 시적 화자는 눈이 부시게 출렁이는 세상의 이쪽과 저쪽을 바라본다. 꽃의 황홀은「벚꽃 지는 날」에서는 나에게 ‘법열’을 느끼게 한다.   간밤에 마음과 마음이 통했는가?   아주 가벼웁게 바람의 잔등을 올라타는 저 수수만의 꽃잎들이 추는 군무(群舞)가 마침내 반짝거리는 큰 물결을 이루어 가는 것이,   그 모습 눈이 부셔 끝내 바라볼 수 없고 그 자태 어지러워 끝내 서 있을 수도 없는 나는, 한낱 대지 위에 말뚝이 되어 박힌 채 그대 유혹의 불길에 이끌리어 손을 내어 뻗는 것이,   간밤에 마음과 마음이 통했는가?   아주 가볍게 몸을 버려서 하늘을 나는 꿈을 꾸는, 저 흩날리는 꽃잎들의 어지러운 비상(飛翔)! 그 마음 한가운데에서 일어나 소용돌이치는 법열(法悅)의 불길을 와락 끌어안는다, 나는.   -2003. 4. 22. 00:5 「벚꽃 지는 날」, 『상선암 가는 길』에서   꽃이 지니는 아름다움과 생명력은 이 시에서 바람과 결합하여 시적 화자 나에게 ‘법열’의 불길을 일으킨다. 그 법열의 불길을 와락 끌어안는다. 바람과 꽃의 마음이 통하고 시적 화자인 나와 꽃의 마음이 통하여 일어나는 법열의 환희 앞에서 마음은 소용돌이친다. 법열이란 득도의 절정에서 느끼는 희열, 열락, 법락을 말하므로 이 시는 벚꽃이 일제히 지는 모습에서 무상함보다는 바람을 타고 도는 흰 꽃잎들의 군무가 현기증을 일으킬 정도로 득도의 법열을 일으키는 것에 비유되어 있다고 하겠다. 생명이란 이렇게도 아득하고 아찔한 것이며, 가슴이 벅차올라 기쁨으로 넘쳐나는 경지로 이 때 모든 마음의 어둠은 한 순간에 사라지고 오로지 열락만이 존재하는 완전히 충만한 세계이다. 이 시는 그런 경지를 시로 표현하고 있다. 「蘭․1」과 「蘭․2」에서는 난이 지니는 생명력을 노래하였다.   기다란 목숨으로/ 가녀린 떨림으로/시방 살아 있음//그만큼이 기쁨이요/그만큼이 슬픔이요/꼭 그만큼의 그것//더 이상/아무 것도 아닌/우리 뜨거움//이 땅 가득/어둠을 어둠이게 하라/빛을 빛이게 하라.   -「蘭․1」, 『바람序說』에서   홀로/이 세상 모서리에서//흔들리며/무너지며/부서지며/다시/태어나며//시방/이 땅을 흔드는/뜨거운/ 몸짓으로//갈아 귀를 세우고/감아 눈을 뜨는.   -「蘭․2」, 『바람序說』에서   「蘭․1」과 「蘭․2」는 난의 가는 잎사귀를 보고 시인은 그 목숨, 떨림을 읽어낸다. 그 이유는 난이 살아있기 때문이다. 한 포기 난이 살아있다는 것은 그 자체가 기쁨이자 슬픔이다. 그 살아있는 뜨거움만큼 우리 인간의 삶도 뜨겁다. 난 한 포기처럼 우리네 인생도 그와 같이 작고 보잘 것 없는 것이지만 난 한 포기가 살아있는 것이 귀하듯 우리네 삶도 소중하며 어둠이 어둠으로 빛을 빛이게 하는 것도 난이 지니는 고매함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각자 홀로 이 세상 모서리에서 한 포기의 난처럼 때로 무너지며 부서지기도 하면서도 다시 부활하고 이 땅을 흔들기도 하는 뜨거운 몸짓으로 귀를 갈아 세우고, 살아있는 것들 안에 존재하는 숨과 말씀을 듣고, 눈을 감아 마음의 눈을 떠서 시대의 징표를 읽어야 한다. 「백목련․1」에 오면 꽃을 바라보는 시인의 에스프리는 이미지를 다소 화려하게 의장하기 보다는 꽃의 본질에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주체 죽이기인 ‘나’를 죽이는 사랑의 화신으로 변화되어 있다.   문득, 귀 밑을 스쳐가는/바람의 비늘처럼//숨이 붙어있는 시간이란/그저 잠깐의 이 쪽 저 쪽이라/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순간이요 세월인데/내 이승에 발을 붙이고 살면서/이 한 몸 구석구석 살라 보았나/있는 거 없는 것 다 주어도 부족할/진짜 사랑이라는 것 한 번 해 보았을라/단 한 순간만이라도/ 너도 모르게 나도 모르게/내 아닌 너를 위해 진정/쏙 빠져 보기라도, 미쳐보기라도 했을라./시방 거추장스런 허물을 벗어버리고/쾌히 나를 죽여감으로/다시 태어나는 너의/눈부신 알몸이/나의 눈물을 굴리는 까닭은.   -「백목련․1」, 『바람序說』에서   마침내/돌아앉아 가부좌를 틀면/훨훨 불타며 터지는/이승의 껍질 속에서/나비떼가 솟아오르고//낮게 낮게 깔리는 내음/줄기를 타고 거슬러 올라가면/그대가 벗어놓은/그 빈 자리/내 서슴없이 빠져 죽을/하늘이 거기.   -「백목련․2」, 『바람序說』에서   「백목련․1」에서는 흰 목련이 피어있는 자태의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있는데, 그 아름다움은 자신을 완전히 연소하여 누군가를 사랑하고 다시 부활하는 데에 있다. 이 시의 세계는 불교적 무상감을 바탕으로 찰나에 지나지 않는 이승의 삶 동안 자신을 버림으로써 너를 위해 나를 연소한다. 그 연소의 아름다움을 희게 핀 목련을 통하여 보았다. 원래 흰 색일랑 순결, 정의, 승리를 의미한다. 사랑의 순렬함을 지니고 열정적으로 너를 위해 나를 연소하는 삶을 통해 승리를 한다. 거기에는 어떤 장식이 필요 없다. 몸을 전적으로 던지듯 삶을 온전히 바쳤기 때문에 미사여구가 필요치 않다. 그러니 거추장스런 옷과 같은 허물은 불필요하리라. 백목련은 짧은 순간 동안 피었다 지므로 그 덧없는 이승의 시간 동안 자기를 완전히 연소한다. 만개한 꽃의 모습은 완전 연소의 절정의 때여서 시인에게는 눈물겹기만 하리라. 「백목련․2」에서는 득도에 이르는 이의 완전한 자기 비움을 나비떼가 날아오르는 것에 비유하면서 시적 화자는 그 아득한 경지에 자신도 몸을 던지고픈 마음을 노래함으로써 백목련과 일치를 이루려고 하였다. 사라지는 것, 특히 순간적으로 명멸해가는 꽃의 덧없음을 「풀꽃」에서도 안타깝게 노래하고 있다.   오늘 하루/산다는 것이 무엇이냐/무엇이 참 사는 것이냐/묻지를 말게//그저 사는 것처럼/시방 살아있는 것처럼/살다가 보면/살다가 보면/그 자리 그 내음/저만의 빛깔로 터지는/풀꽃망울의/작은 흔들림같이/잠시 머물다 가는 것임을/머물다 가는 것임을//그래 더욱 안타까이 아름답고/더더욱 소중하고 절실한 것을/그저 흐르는 물처럼/바람처럼.   -「풀꽃」, 『바람序說』에서   삶은 있다가 없어지는 것에 지나지 않음을 이 풀꽃을 통해서 간취하며 잠시 머물 뿐인 이승에서의 한 때가 아름답고 소중하며 절실한 것이라고 노래한다. 「목련」에는 꽃이 피어있는 시각의 이미지를 청각의 이미지로 바꾸고 ‘부활하는 새떼’에 목련을 비유하여 동적으로 치환하고 있다.   아니, 왜 이리 소란스러운가?   커튼을 젖히고 창문을 여니   막 부화하는 새떼가 일제히 햇살 속으로 날아오르고   흔들리는 가지마다 그들의 빈 몸이 내걸려 눈이 부시네.   -「목련」, 『백년완주를 마시며』에서   바깥이 시끄러운 이유는 새떼들이 이제 막 부화하여 하늘로 날아오르느라 소란스러웠던 것이다. 활짝 핀 목련을 부화하는 새떼에 비유하여 시각을 청각으로 바꾸었다. 그러면서 가지에 남은 꽃은 새들의 알이 깨어진 껍질에다 비유한 시적 기교가 돋보이는 시이다. 새들이 날아가고 껍질만 남은 공허함을 한꺼번에 지는 봄꽃의 무상함을 간취하게 하는 이 시는 목련 시편들 중에 절창이라 할 수 있겠다. 꽃이 겨우내 추위와 바람을 견딘 끝에 꽃을 피웠듯이 새들도 껍질을 찢는 아픔을 견디어 화려한 비상이 도정된다는 동식물의 생태를 통해 인간의 삶 역시 고통 속에 은총이 있고, 그 고통을 위대한 인내로 극기할 때 승리와 열매가 찾아온다는 삶의 진리를 표현하고 있다고 하겠다. 이런 꽃들의 자기 연소는 「새삼 꽃들 앞에서」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저리 빠알간 물결 속으로 저리 노오란 바람결 속으로 저리 하아얀 세상 속으로 온몸을 던지는 저들 꽃처럼   네 아름다움의 절정에 서 보았는가? 네 생명의 불길 속에 서 보았는가?   살아있음의 쓸쓸함으로 살아있음의 기쁨으로 살아있음의 불꽃으로 온몸을 던지는 저들 꽃처럼   -「새삼 꽃들 앞에서」, 『상선암 가는 길』에서   제1연에서 꽃들은 빠알간 물결이 되고 노오란 바람결이 되고 하아얀 세상이 되어 온몸을 던진다. 꽃들을 동적으로 표현하여 연소하는 이들의 아름다움의 절정에 서 보았는가라고 반문한다. 그리고 그 꽃이 지니는 생명의 불길 속에 서 보았는가라고 반문한다. 이 반문의 반복 속에서 시인은 독자들로 하여금 꽃의 아름다움과 생명의 불길 속으로 독자들을 초대한다. 그러니 꽃들은 살아있음의 쓸쓸함이고, 살아있음의 기쁨이며, 살아있음의 불길이며, 그 속으로 몸을 던지는 분신(焚身)의 이미지를 지닌다. 이 불꽃 같은 연소의 이미지, 몸을 던짐, 분신의 이미지는 연꽃과 닮았다. 진흙에서 영롱한 연꽃을 피워내는 생명의 꽃, 연꽃으로 이미지는 변화된다.   진흙 속에 뿌리를 내렸어도 진흙을 뒤집어쓰고 나오는 연화(蓮花)의 얼굴을 나 역시 보지는 못했소.   -「여래에게․7」, 『애인여래』에서   연꽃은 불교에서 영원한 생명을 상징하는 꽃이요, 불교의 진리를 상징하는 꽃이다. 연꽃은 진흙 속에 뿌리를 내리고 살지만 연꽃에 진흙을 묻히고 나온 얼굴을 보지 못했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연꽃의 무구성을 표현한 것이다. 「연꽃․2」에서는 연꽃이 지닌 생명성을 산문시 형태로 시인은 이미지를 형상화하고 있다.   나의 고정관념이나 편견이 생기기 전 세상을 뒤덮고 있는,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늪 위로 안개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어느 날 그 위로 소리 소문 없이 솟아오른, 커다란 연꽃 한 송이가 내내 웅크리고 있다가 조용히 벌어지면서 핏덩이 같은 붉은 해 하나를 게워 놓는다. 순간, 하늘과 땅이 갈라지며, 하늘에선 별과 달이 생기고, 땅 위에서는 온갖 것들이 꿈틀대며 약동하는 소리들로 가득하다.   나는 그 한 가운데에 서있지만 어느새 그가 피어놓은 세상이 때를 다하여 서서히 오므라듦을 내다본다. 그 자궁에서 나온, 어둠과 빛이 빨려 들어가고, 온갖 소리와 형태를 가진 것들이 흡수되어 자취를 감추어버리고, 마침내 세상은 단 하나의 까만 점이 되고 만다. 연꽃 한 송이가 그렇게 피고 지는 순간을 지켜보면서 나는 수없이 연꽃 송이를 가슴에 품고 더 멀리 가는 시간의 수레를 타고 재롱을 떨 뿐이다.   -「연꽃․2」, 『눈물 모순』에서   한 송이의 연꽃에서 태초의 생명이 태동하고 대지 위의 만상이 약동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시간에 따라 명멸하여 간다. 우주의 자궁에다 비유한 연꽃은 생멸을 관장하는 꽃으로 비유되어 있다. 이것은 연꽃 한 송이가 피고 지는 일과 동일하다. 그러니 연꽃은 우주의 생성과 소멸을 상징하며 어둠을 꿰뚫는 빛이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 누가 오시려나? 집집마다 연등 하나씩을 처마 밑에 내걸어 놓았네.   안과 밖이 따로 없는 허공 속에서 붉은 마음 달래려나? 속내마저 드러낸 채 목을 빼어 저마다 한 곳을 바라보네.   -「연꽃․3」, 『눈물 모순』에서   연등을 달아놓고 부처를 기다리는 마음은 아마 그의 탄신일을 전후하여 이런 풍경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연꽃은 어둠 속의 빛과 생명, 희망이니 석가의 제자들은 모두 수행, 정진의 마음으로 이 등을 마음의 조명, 청정심, 일심의 바람을 담아 내건다. 어두운 세상의 한 줄기 빛이 되어 오실 세존을 기다리는 중생심을 이렇게 표현하였다고 본다. 그 연등 속에서 “나는 보았네./땅의 눈빛 하늘의 미소.”(「연꽃․4」)라고 하여 대지와 하늘이 하나이며, 삼라만상과 우주가 한 송이의 연꽃 속에 깃들어 있는 이 광경을 시인은 고요 중에서 바라본다. 절대 고요 속에서 한 송이 연꽃이 떠오르는 듯한 이 시는 어떤 경지에 올랐을 때 나오는 선시이다. 시집 『눈물 모순』은 이시환 시인의 구도 여행지인 인디아 기행을 계기로 쓰여진 것이며, 『상선암 가는 길』, 『애인 여래』와 같은 구도의 여정에서 나온 시집 중에 절정에 이른 시기의 것으로, 그의 불교적 사유의 꽃이 피어 있는 시집이며, 그것은 바로 연화이다. 이 연화에 대해서 대승경전의 최상경이라 불리는 『묘법연화경』에서의 묘사를 인용해 보자.   이 때 일월등명 부처님께서 대승경을 설하시니 이름을 무량의라 했으며, 보살을 가르치는 법이요 부처님이 깊이 간직하는 바이었습니다. 이 경전을 설하시고는 곧 대중 가운데서 가부좌를 맺고 무량의처삼매에 드시니, 몸과 마음이 움직이지 않으셨습니다. 이 때, 하늘은 만다라꽃, 큰 만다라꽃, 만수사꽃, 큰 만수사꽃을 비처럼 내려 부처님과 대중 위에 흩뿌리고, 널리 부처님의 세계는 여섯 가지로 진동하였습니다. (중략) 이 때, 여래께서는 미간의 백호상으로부터 광명을 놓아 동쪽 1만 8천의 부처땅을 비추시니, 두루 미치지 아니한 곳이 없어, 지금에 보는 이 모든 부처땅과 같았습니다.   (『묘법연화경』, 구인사역편, 대한불교천태종, pp.28-29)   경전에서는 석가모니 부처가 법을 설하시고 난 뒤에 가부좌를 틀고 무량의처삼매에 드실 때 하늘에서는 ‘법비’라 불리우는 만다라화와 만수사화가 내려왔다고 묘사한다. 그리고 미간의 백호상으로부터 광명을 놓아 부처땅을 두루 비추었다는 내용이다. 이 풍경은 장엄하기 그지없으며 무량의처삼매에 든 부처의 원력으로 종교적 신비를 이루었다는 의미이다. 인디아 기행시집인『눈물 모순』속의 「인디아 연꽃」은 연꽃에 얽힌 오랜 불교설화를 모티브로 하여 연꽃으로 상징되는 부처의 자비가 인도인들에게 어떻게 삶으로 뿌리를 내리게 되었는지를 시적으로 형상화하였다.   눈이 부셔 바로 볼 수 없네. 너무나 멀리 있기에 너무나 높이 솟아 있기에 가까이 다가가 만져볼 수도 없네.   다만, 그 커다란 연꽃 송이 위에서 막 태어난 갓난아이 울음소리 들리고, 그 연꽃 송이 위에서 이따금 황금빛 왕관을 쓴 새들이 날아오르네.   다만, 그 커다란 연꽃 송이 위에서 무시로 천둥 번개 치고, 그 연꽃 송이 위에서 이따금 밤하늘의 수많은 별들이 반짝거리네.   하지만 임자는 그 연꽃 송이 위에 앉아 명상 삼매에 빠져있네. 어느 날 운이 좋게도, 그 연꽃잎 한 장이 떨어져서 한참을 나풀나풀 지상으로 내려오는데 그 꽃잎이 땅에 닿자마자 에메랄드 빛 작은 호수 하나가 생기네.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내 눈조차 의심할 일이 생기고 마네.   얼마 후 갈증에 지친 사람들은 제 눈들을 비비며 사방에서 모여들고, 호숫가 한쪽 귀퉁이에서는 목욕재계(沐浴齊戒)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엎드려 기도하고 찬양하고, 또 다른 한쪽에서는 신화를 쓰고 신전을 세우느라 분주하네.   -2008. 04. 30. 「인디아 연꽃」『눈물 모순』에서   인간의 삶은 그저 먹고 입고 편안히 잠을 자면서 그날 그날의 노동만을 하면서 살아가지 않는다. 의․식․주를 얻기 위해 노동을 하고 노동을 하면서 오는 고단함과 인간의 힘으로는 극복하기 어려운 천재지변이나 인간사에서 자신의 힘으로 어쩌지를 못하는 일이 생길 때 선으로써 극복하게 될 지 또 다른 악덕으로 되갚음을 하게 될지는 그 누구도 모른다. 인간이 고난 가운데 약하다는 것은 그만큼 악, 즉 어둠의 수렁에 빠지기 쉬운 존재라는 것이다. 이럴 때 선한 신께 의지하여 선으로써 극복하고 승리할 때 인간의 고난은 지나간다. 소박한 고대의 인도인은 부처의 은덕으로 만들어진 작은 호숫가에 모여들어 기도와 찬양을 하고 신화를 쓰고 신전을 세워서 신을 기린다. 인간이 만든 신들은 모두 사라졌다. 그러나 ‘있는 나’이신 분은 영원히 계신다.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의 보증이며 보이지 않는 실체들의 확증”으로써 “믿음으로써, 우리는 세상이 하느님의 말씀으로 마련되었음을, 따라서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에서 나왔음을 깨닫습니다.”(히브리서, 11장 1-3절) 화려한 꽃들이 아름답고 칭송을 받는 것은 작고 눈에 띠지 않는 야생화가 있기 때문이다. 야생의 풀 한 포기도 소중한 것은 그 작은 것도 크신 임의 손에 의해 창조되었기에 거기에 있는 것으로도 소중하다. 인간의 이성적 판단에 따라서 그것의 용불용을 이야기 한다는 것은 가치판단의 오류에 빠진다. 이시환 시인은 그 풀에 대하여 소박하며 가진 것 없어 때로는 힘 있는 자들의 수탈의 대상이 된 우리 민초들을 비유하고 있다. 「잡풀․1」, 「잡풀․2」, 「잡풀․3」은 봉건사회의 신분제 속에서 피압박 민초들을 잡풀에 비유하여 모순과 부조리로 가득한 세상에서 고통으로 신음하는 하층민의 설움을 노래하고 있다.   들쭉날쭉 생김새만 사람이지 짐승에 다를 바 없어 사방이 캄캄하여 뿌리조차 더듬을 수 없는 이 모양 이 꼴 좀 보소 밤이 되면 이슥한 밤이 되면 거역할 수 없어 몸뚱이 하나로 누워있는 소가 되어 소가 되어 소를 타는 상전나리 숨찬 고개 넘어가다 안방마님 눈치 채는 날이면 주인 없는 이 몸은 어이 될꼬 어이 될꼬 서릿발로 꽂히는 질투 못 견디어 끝내는 裸에 쌓여 강물 속으로 강물 속으로 강물 되어 흐르는 안개꽃 바람의 넋 입을 열지 않고   -「잡풀․3」, 『白雲臺에 올라서서』에서   쥐도 새도 모르게 죽임을 당한 어느 억울한 사연을 가진 하인 신분의 여성이 이 시의 시적 화자이다. 죽어서 구천을 떠돌듯 하는 이 여인은 강물 속으로 수장 당하면서까지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할 길이 없다. 입을 봉해진 채로 수장 당하는 이 여인의 비극은 「잡풀․1」의 “가난이란 죄값으로/아내를 저당 잡히고/자식마저 奴와 卑로” 바친 어느 가난한 소작농의 비극적인 죽음과 동일하다. 상전의 죄를 대신하여 옥살이도 곤장도 강요받다가 결국에는 한 생을 마감하는 피어린 설움이 배어난다. 이시환 시인은 잡풀들 속에서 이렇게 주류로부터 버려지고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를 박탈당한 서민들의 고통을 들었다. 「잡풀․2」에는 달맞이꽃에서 어느 한 늙은 몸종의 슬픔을 “시집가는 아씨 따라/손도 되고 발도 되고/저승문을 여닫는/눈이 되어 귀가 되어/마디마디 속속/이 한 몸 거덜났네”라고 노래하였다. 상전의 딸이 시집 갈 때 몸종으로 따라가 시집살이를 함께 하면서 아씨의 손이 되고 발도 되며 산 세월이 그녀의 손등에 거북이 등껍질처럼 나 있고 몸은 이제 쓸모가 없이 되고 가슴은 텅 비어 있을 뿐이다. 그저 터져 나오는 것은 한숨의 탄식과 눈물뿐이며 의지할 곳 없는 신세를 달맞이꽃에 비유하였다. 「풀잎」에서는 풀잎을 이 땅에 사는 사람들에 비유하여 하나 되어 가는 ‘우리’로 표현하였다.   머릴 들어 위를 보면 하늘이요 굽어보면 땅이라   하늘은 언제나 당신의 마음 속 빈 주머니마냥 가득 차 있고   땅은 어디서나 숨 쉬는 크고 작은 것들로 텅 비어 있다   이 거짓말 같은 참을 거듭거듭 깨달으며 살아가는 우린 우린 이제 마시지 않고 취하는 법을 꿈꾼다   채워도 채워도 차지 않는 우리들의 가슴 속 저마다의 잔을 기울여 비우고 그득한 하늘을 바라 눕는고   마침내 하나가 되어 흘러가는 우리는.   -「풀잎」, 『바람序說』에서   들판에 가면 이름 모를 많은 풀들이 나있다. 그 풀들은 하늘을 바라보며 돋아나서 커간다. 그러나 그 풀들은 풀만큼의 키로만 큰다. 키가 작은 풀과 키가 큰 풀, 중간의 것들, 꽃을 피우는 풀들과 꽃을 피우지 않는 풀들이 나있다. 이 풀들은 그저 봄이면 돋아나 산천을 푸르게 하다가 서리를 맞고 스러져 간다. 풀잎에 구르는 이슬도 태양이 떠오르면 사라지고 만다. 특별히 우리들의 관심을 끌지 못하면서도 풀들은 봄이 되면 어김없이 돋아난다. 우리네 사람들도 뭔가로 가득 채워보려고 애를 쓰며 살아가지만 다만 풀잎처럼 사라져 간다. 마음은 공허하고 텅 빈다. 그러니 하늘을 바라보고 누울 수밖에 없는 삶이다. 하늘을 바라본다는 것 자체가 우리들에게 위로가 되기 때문이다. 우리네 삶이 그렇듯 풀잎도 그런 존재이다. 인간의 욕망은 채워도 채워도 공허할 뿐이므로 하늘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 풀들이 하늘을 바라보고 자라듯이 우리 인간도 하늘을 바라볼 때 충만 되며 모두 풀처럼 하나가 되어 흐를 수 있다. 바람이 불면 풀들은 모두 약속이나 한 듯 바람 부는 대로 눕는다. 그 중에 어느 풀이 반대로 눕는 일이 없다. 풀잎은 모두 비어 있기에 생명의 근원인 바람이 부는 대로 눕는다. 이것은 생명이 흐르는 이법이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만유는 이 이법에 의해 운행되고 있다. 시인의 눈은 그 보이지 않는 세계의 작은 것들이라도 우리에게 열어서 보여준다. 성경의 다니엘서나 요한묵시록 같은 묵시문학은 바로 가려져 있는 것을 열어서 드러내어 보여준다는 의미에서 묵시문학이라 불리우고, 우리 눈이 보이지 않는 세계를 현현하여 주는 것이다. 이시환 시의 식물 이미지 중 나무는 꽃과 더불어 주요 기둥을 이루고 있다. 먼저「가시나무」에서 ‘나’는 갈증의 불길 속으로 던져지는 가시나무로 투사되고 있다.   가시나무, 가시나무, 나는 가시나무.   비 한 방울 들지 않는 사막 가운데 홀로 사는 가시나무.   가시나무, 가시나무, 나는 가시나무.   나귀 한 마리 쉬어갈 수 있는 한 조각 그늘조차 들지 않고,   작은 새들조차 지쳐 깃들기도 어려운 가시나무.   가시나무, 가시나무, 나는 가시나무.   마침내 갈증의 불길 속으로 던져지는 가시나무.   가시나무, 가시나무, 나는 가시나무.   -「가시나무」, 『몽산포 밤바다』에서   가시나무는 물이 부족하여 생물들이 살기 어려운 사막에서 살기 때문에 키도 크게 자라지 않고 덤불처럼 가시를 잔뜩 달고 살아간다. 잎도 작고 많이 나 있지 않아서 그늘이 되지도 못하고 가지가 튼튼하지 못하니 새들도 둥지를 틀지 않으며 쉬어갈 곳도 없다. 다만, 물이 부족하여 ‘갈증의 불길 속으로 던져지는 가시나무’라는 표현에서와 같이 생명수를 그리는 끝없는 갈증에 시달리고 그 불길에 휩싸인 나무이다. 재목도 되지 못하고 인간이나 짐승이 쉬거나 깃들 수도 없는 불모지의 ‘떨기나무’ 같은 쓸모없는 나무이다. 그러니 불길 속으로 던져질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나는 이런 존재이다. 이 시는 시인의 철저한 자기 응시이다. 자신이 이런 나무라고 전체 8연 중 1, 3, 6, 8연에 네 번이나 반복하여 되풀이하고 있다. 이 시를 읽으면 이 반복되는 4개 연에 의해서 시인과 독자는 울게 된다. 인간은 불속에 던져지는 가시나무가 아니고 키가 크게 자라고 잎이 무성하며 많은 가지들에 바람을 날리며 새들을 깃들게 하고 사람을 쉬어가게 하는 기쁨과 충만의 나무가 되어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이 가시나무에는 그런 충만의 기쁨이 없고 갈증의 극단에서 절망과 철저히 유리된 고독 속에 죽어가는 가시나무이기 때문에, 그런 나의 피맺힌 고백과 절규이기에 독자들에게 더 크게 울림이 온다. 그들에게도 자신이 가시나무인지 아닌지를 생각하게 하면서도 어쩌다가 이런 나무가 된 불쌍한 처지의 자신을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며 부정적인 자기를 넘어 긍정적인 자기상을 확립해 나가야 함을 시인은 말하고 있다. 「어느 느티나무 앞에서」에는 “너는 평생을 이곳에 붙박여 살았어도/고작 햇살과 바람과 물만으로도/봄 여름 가을 겨울 낮과 밤의/삼백 년 영화를 이미 누렸거늘/그 비결이 무엇인고?”라고, 삼백년 넘는 느티나무에게 그 비결을 묻는다. 불필요한 욕심을 부리지 않고 두터운 땅과 깊은 하늘의 축복을 받아 그저 햇살과 물과 바람으로도 삼백년을 건재한 느티나무에게 시인은 경의를 표한다. 「단풍나무 아래서」는 “오늘은 내가 여기 앉아 쉬지만/내일은 다른 이가 앉아 쉬리라.”라고 짧은 경구 같은 시 속에서 사람에게 그늘을 주는 넉넉한 단풍나무에게 시인은 매료되다가 「어느 단풍나무 한 그루」에서는 단풍 든 나무를 분신(焚身)하여 자기를 던지는 사람으로 바라본다.   나도 어쩔 수 없네./이 몸조차 주체할 수 없어/그냥 내버려두었네./세상 천하 가운데에서/저 홀로 다 타버리도록/그냥 내버려두었네.//시방 분신(焚身)하는 단풍나무 한 그루.   -「어느 단풍나무 한 그루」, 『몽산포 밤바다』에서   이시환 시인은 이 시에다 부쳐놓은 자신의 소감을 “세상 사람들이 알고 있는 문학적 진실과 실재하는 그것이 너무나 다름을 절감할 수 있었고, 허상 같은 내 삶이 미워지기까지 했다”라고 술회하고 있다. 그 이유는 1998년 2월부터 격월간 동방문학을 창간하여 만 8년을 펴내오면서 경험한 심산이었다. 지친 나머지 돌연 폐간 선언을 하고 여러 나라를 여행하면서 심신의 피로를 씻었다. 그 과정에서 성경과 꾸란, 불경을 읽으며 종교적인 에세이집을 간행했고 인디아 기행시집인 『눈물 모순』과 연꽃 앤솔러지 『연꽃과 연꽃 사이』를 펴냈다. 현실의 모순과 부조리에서 오는 공허감과 피로를 종교적 경전을 탐독하고 순례의 여행을 떠나면서 그는 자신을 괴롭히는 그것들과 싸웠다. 그런 몸부림 중에 중국의 어느 자연공원에서 본 단풍나무 한 그루에 시선이 사로잡히는데 나름대로 문학을 위해서 살아온 그의 삶이었기에 분신하는 한 그루 단풍나무를 보며 위로를 얻었다고 한다. 생즉필사 사즉필생! 이럴 때 이 말이 적확하리라. 자기부정과 자기희생 없이는 이 고뇌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대숲에서」는 바로 고뇌 중의 시인에게 자연은 말없이 고뇌를 넘는 비법을 가르쳐 준다.   나는 보았네. 나는 보았네.   돌연, 바람이 불어와 키 큰 대나무들이 휘어 저 달을 가려도 나는 보았네. 나는 보았네.   커다란 대나무가 부러질 듯 휘어도 깊은 대숲은 고요하기 이를 데 없음을.   네 푸르름 싱그러움 앞에서 네 고요 네 적막 속에서   나는 한낱 깃털처럼 가벼이 들어 올려지는 것을.   -「대숲에서」, 『몽산포 밤바다』에서   대나무는 곧게 자라지만 속이 비어있다. 속이 비어있기 때문에 바람이 불어와도 대나무는 부러지지 않는다. 바람이 부는 대로 흔들릴 뿐이다. 그 고요와 적막 속에서 대나무는 한층 더 가벼워져서 부러지기는 커녕 오히려 더 탄력을 지닌다. 이 광경을 시인은 “나는 보았네”라고 2개 연 4행에 걸쳐 반복하고 있다. 시인은 드문 광경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나는 보았네”라고 반복한다. 그리고 그 광경만 본 것이 아니라 대나무가 부러질 듯 바람에 휘어도 고요하고 적막하기만 한 그 푸르름에 싱그러움에 시인의 마음도 몸도 깃털처럼 가벼이 들어 올려지는 것을 느낀다. 깃털처럼 가벼워 질 때 들어 올려질 수 있고 무거운 어둠들을 털어버리고 고뇌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 대나무는 자신의 몸을 비웠기 때문에 바람을 따라서 흔들릴 수 있고 꺾이지 않는다. 이것은 자연의 이법이다. 그 이법 속에서 시인은 비워진 자신을 느끼고 대무나무와 하나가 된다. 「서 있는 나무」에서 시인은 그를 둘러싼 세상의 어떤 조롱과 멸시, 억압과 시련, 생명을 앗아가는 고통이 따를지라도 서 있는 나무는 죽어서도 서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서 있는 나무는 서 있어야 한다. 앉고 싶을 때 눕고 싶을 때 앉지도 눕지도 못하는 서 있는 나무는 내내 서 있어야 한다. 늪 속에 질퍽한 어둠 덕지덕지 달라붙어 지을 수 없는 만신창이가 될 지라도 눈을 가리고 귀를 막고 입을 봉할지라도, 젖은 살 속으로 매서운 바람 스며들어 마디마디 뼈가 시려 올지라도 서 있는 나무는 시종 서 있어야 한다. 모두가 깔깔 거리며 몰려 다닐지라도, 모두가 오며가며 얼굴에 침을 뱉을지라도 서 있는 나무는 그렇게 서 있어야 한다. 도끼자루에 톱날에 이 몸 비록 쓰러지고 무너질지라도 서 있는 나무는 죽어서도 서 있어야 한다. 그렇다 해서 세상일이 뒤바뀌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세상일이 뒤바뀌는 건 아니지만 서 있는 나무는 홀로 서 있어야 한다. 서 있는 나무는 죽어서도 서 있어야 한다.   -「서 있는 나무」, 『안암동 日記』에서   나무는 하늘을 향해 직립한다. 이것이 나무가 지닌 생태의 본질이다. 이 시는 “서 있는 나무는 서 있어야 한다”라는 시구절의 반복을 통하여 어떤 고난 속에서도 쓰러지지 않는 굳건한 자세로 살아가야겠다는 시인의 모습이 투영되어 있다. 우리 사회의 시인은 이런 자세로 그를 둘러싼 상징계와 길항하여야 할 것이다. 그 속에서 시인은 조롱, 멸시, 억압을 받을지언정 서 있는 나무가 서 있듯이 사회적 정의와 인간과 우주만물의 존엄함, 그 안에 깃들어 있는 영원한 생명, 보편적 진리를 외쳐야 한다. 서 있는 나무가 서있어야 하듯이, 시인이 바로 그 자리에 서 있을 때 그의 시가 더욱 빛날 것이며 세상은 바뀌어 갈 것이다.     //////////////////////////////////////////////////////////   이시환의 제4시집 『숯』과 색즉시공의 세계 -역설적 진리의 형상화     ‘이탄(李炭)’이라고 하는 숯이 있다. 그것은 오얏나무를 불에 태워서 만든 숯으로 전통적으로, 숯이 지니는 해독성의 기능을 이용하여 된장을 만들 때 메주를 소금물에 띄우고 이탄을 넣어서 음식의 독성을 제거하는데 썼다고 한다. 필자에게 시를 가르쳐준 스승인 이탄 시인은 당신의 필명에 대하여 그런 경위를 말해준 적이 있다. 그 분은 시를 통하여 그런 이탄이 되고자 하였던 것 같다. 아마, 이 사회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는 당신의 시가 되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자신의 필명을 스스로 ‘이탄’이라 불렸을 것이다. 숯은 나무를 다 태워서야 비로소 제 기능을 하는 사물이다. 나무가 완전히 자신의 몸을 연소시켜서 완전한 비움으로 인하여 건져지는 결실이다. 숯은 나무가 살았을 때의 모든 기능을 정지시키고 완전히 제 몸을 불살을 때에만 얻어지는 것이기에 어떻게 보면 너무나도 순렬(殉烈)하고 장렬하기까지 한 일생을 산 한 나무의 역사인 셈이다. 숯은 나무가 온전히 죽어서야 제 기능을 발휘하는 만큼 죽은 이후부터 더욱 진가를 나타낸다. 숯은 완전히 비움의 죽은 상태로서 또 다른 생명을 살린다. 즉, 자신의 장렬한 죽음 상태 그대로 뭇 생명들을 살리는 것이다. 그 빛깔 또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시선을 때때로 사로잡는다. 새까만 것을 마주 대하고 있으면 숨이 막힌다. 검정은 그 어떤 색들에도 틈입을 주지 않는다. 검정은 슬픔, 죽음을 뜻한다. 죽었다는 의미이다. 죽었다는 것은 없다는 의미다. 완전히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숯은 숯인 채로 완전하게 나무였을 때의 기억을 말소하고 전소하였다. 이 완전한 비움 앞에 말문이 막히는 것이 숨이 멎는 듯한 착각이 드는 것이다. 숯의 쓰임은 완전한 죽음으로 다른 생명을 살리는 일이다. 여기에서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죄와 벌」에 등장하는 ‘소냐’를 이야기 해보자. 도스토예프스키는 그가 믿은 동방정교회의 비움의 영성을 이 소냐라는 나약하고 가련하며 비천하기 이를 데 없으며, 부와 명예, 세상 지식도 없으며, 가난하며 술주정뱅이인 아버지와 철없고 약하며 세상을 잘 살기엔 어려운 정신이 약한 의붓어머니를 가진 아가씨였다. 그녀에게 가진 것이 있다면 그리스도의 가르침밖에 없었다. 이 세상에서 때로 무력하며 배척 받아온 그리스도의 복음을 사는 아가씨인 소냐는 가족들을 위해 스스로 자신의 몸을 빵으로 내어주었고 지식인이지만 오류와 그릇된 허영심과 악덕의 길을 걷고 있던 가난한 고학생 ‘라스콜리니코프’의 영혼 구원을 위해 자신의 생을 바친 아가씨이다. 이 소냐가 바로 숯과 같은 존재라 할 수 있다. 자기를 완전히 버리고 죽음으로써 그녀는 가족을 부양하고 악덕을 행하고도 죄를 참회할 줄 모르는 라스콜리니코프의 무릎을 꿇게 만든 여인이다. 그 때부터 라스콜리니코프는 진정한 참인간이 되어 자신의 죄를 참회하고 갱생의 빛나는 희망의 길을 걷고자 한다. 그를 점유한 어둠의 그림자가 짙었던 만큼 그가 거기에서 벗어나 대지에 입마춤을 할 수 있을 때까지 소냐의 완전한 연소의 삶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숯은 바로 그러한 존재이다. 어느 잡념의 군더더기 하나 없다. 사제들의 수단이 검정이거나 수도자들의 수도복이 검정인 것은 죽음을 의미한다. 세속을 버렸기에 죽었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따르고자 생을 바치기로 서약한 사람들의 표시이다. 의복이 하나의 표징을 이루듯이 숯이 지닌 검정의 의미 또한 표징인 것이다. 그러나 이 죽음은 결코 비극적인 죽음이 아니라는 데에 있다. 이 죽음은 비로소 생명이 열리는 완전 긍정의 죽음이다. 그러기에 이들에게는 있는 것도 없는 것도 구별이 되지 않는 경계를 넘은 삶이다. 그러니 있는 것도 아니요 없는 것도 아니며, 없는 것도 아니요 있는 것도 아니다. 즉 있고 없고의 차별상이 없어진 평등상의 존재인 것이다. 숯은 바로 이런 평등상을 표상하는 사물인 것이다. 숯인 채로 있는 것이며 숯인 채로 나무로서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니 있는 것도 없는 아닌 사물이 된다. 이러한 숯과 숯으로 형상화되기 위해 지니는 이시환의 시법에 대해 셋째 마당/空의 부분에 나오는‘나의 허튼 소리’를 살펴보자.   ‘숯’하면 열과 빛 에너지를 낼 수 있는 형태를 가진 가시적 존재다. 그러나 그것도 궁극에 가서는 한 줌 바람으로 흩어져 버릴 것이다. 그래, 존재의 시작과 끝을 몸 하나로 보여 줄 수 있는 상징적인 존재로 여겨졌기에‘有+無=숯’이라는 억지 등식을 내세운 것이다. 어쨌든, 36편의 몸속을 흐르는 것은 커다란 모순, 곧 역설이라는 구조와 의미이다. 곧, 표현의 한계에 부딪쳤을 때에 선택되는, 모순어법의 진실이기도 하다. 말의 고비를 풀어놓아 詩(시)란 집을 짓는 행위나, 시를 짓는다고 말에 없는 고비를 꿰어 주는 행위를 일삼는 나의 詩作(시작)이 그렇고, 또 그 과정에서 인식되는 명제에 대해 구차한 설명을 하고 싶지 않을 때나,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내던지는 외침이 내포하는 모순성이 역설이라는 이름으로 치장되어 나타난 셈이다.   이시환의 제4시집 『숯』은 바로 존재론적 역설을 표현하는 세계이다. 그러므로 있는 것만으로 팽배해있는 현재의 인간 세계에 숯이 들어갈 공간을 마련하는 것이다. 이것은 다름 아닌 이 세상에 대한 도전이요 장렬한 순사(殉死)가 도정된 도전이다. 그는 이러한 세계에 어떤 공간을 마련하여 금이 가게하고 틈을 벌리고 균열을 낼 것인가, 우리는 그것이 궁금하다. 그가 가게 한 실금과 큰 금, 그가 벌려준 작은 틈과 큰 틈 사이로 그가 쪼이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스스로 숯이 되어 끊임없이 뿜어내는 대지의 독가스나 독극물을 그대로 흡수하고 순사할 작정인가? 그의 이 들이댐이 얼마나 가열 차며 죽음을 각오한 것인가. 다만, 그는 대중적인 프로파간다를 내세우지 않고 이탄처럼 그런 존재이고자 한다. 고요하면서도 온유하게 그 공간을 넓히는 것이다. 성경에서 말하는“마음이 온유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마음이 온유한 사람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는 무슨 의미인가. 대중의 힘을 입고 프로파간다 아래에 깃발을 휘날리며 저 진군하는 또 다른 힘이 되고자 하지 않는다. 다만, 그는 고요히 온유하게 침투하고자 한다. 그의 시는 이탄처럼 그런 침투력을 가진다. 어쩌면 그는 안토니오 네그리의 『제국』에 나오는 땅 속으로 파는 굴과 안의 공동(空洞), 구멍을 만들자는 의미인가? 그의 제4시집의 목적은 바로 ‘공간 만들기’이다. 물론, 한 권의 시집이 이 강고한 세상의 있음의 두터운 층을 어떻게 균열 낸단 말인가? 그러기에 그는 늘 낮은 자리로 물러나 있다. 그의 한마디, 그의 한 편의 시가 스스로 보잘 것 없다고 말하는 것은 그런 의미도 함축하고 있으리라. 그러나 계란으로 바위를 칠 수는 없을지언정 낙숫물이 바위를 뚫는다고 하였다. 그는 이 무모한 계란치기보다 시간과 공간을 점유하는 낙숫물이 되고자 하는 것인가? 계란으로 바위를 치든지, 낙숫물로 바위 뚫기든지 어려운 것은 매 한 가지이다. 그는 다만 이탄으로서, 숯으로서 존재하고자 한다. 하나의 상상을 해보자. 된장을 만들기 위하여 소금물에 메주를 띠운 독이 있다고 하자. 이 독은 이 세상 공간일 게다. 소금물과 메주와 거기에 띄우는 고추는 세상을 이루는 것들이다. 소금물이 메주에 침투가 되어 메주를 완전히 풀어놓은 동안 아마 숯의 역할은 이 삼투압의 압력에서 나오는 모든 불순물이나 독을 해독하는 작용, 즉 조절을 하는 기능일 것이다. 숯은 바로 하나의 사물이 해체될 때 즉, 금이 나고 틈이 벌어지고 균열이 될 때의 내압을 조정이나 조절을 해주는 기능을 담당할 거라는 상상이다. 거기에서 발생하는 독을 해독함으로써 된장으로 변모되고 형태가 바뀌듯이 변화하는 과정의 조정 내지는 조절 역할이란 뜻이다. 콩이 삶겨, 으깨어져 메주가 되고, 따뜻한 데에서 발효되고, 소금물에 담겨 덩어리로 된 것이 제 몸을 푸는 데에는 소금의 역할이 깊이 관여 될 것이다. 메주가 바위라면 소금은 계란이나 낙숫물일 게다. 이 때 숯의 역할은 아직도 다 규명되지 않았지만 해독 이상의 이 푸는 작업(금, 틈, 균열, 해체)을 돕는 조력자의 역할도 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좌우간, 이 숯의 주요 기능은 바로 해독작용이니 메주가 된장이 되는 데에, 완전한 새 생명을 획득하는 데에 방해가 되는 독을 제거함으로써 반생명적인 요소를 제거하는 역할을 한다고 하겠다. 이시환은 그런 의미로 ‘숯’이라는 상징성이 강한 사물을 시집의 제목으로 선택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 시집에 실려 있는 시들은 숯이 지니는 전술한 의미들을 시인 나름대로 형상화한 하나의 세계라고 볼 수 있겠다. 그러면 이 시집에 대한 시인의 소감을 들어보자.   이 제4시집 속에 실린 작품은 모두 36편이다. 이 가운데 8편이 ‘有’라 하여 첫째 마당 속에 들어가 있고, 나머지 18편이‘無’라 하여 둘째 마당 속에 들어가 있다. 이들을 ‘숯’이라는 이름으로 묶어 놓은 셈이다. 그러니까, ‘有+無=숯’이라는 등식으로써 그 모양새를 억지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곧, 有는 있음이요, 집착이요, 욕구요, 빛깔과 향기가 있는 사랑이다. 이에 반해 無는 없음이요, 버림이요, 해방이요, 무색무취의 비어 있음이다. 그런데 서로 다른 빛깔의 존재를 ‘숯’이라는 이름으로 하여 한 몸 안에 가두어 놓은 것이다. 이는 有와 無가 근원적으로 서로 통하기 때문이며, 궁극에 가서는 有가 곧 無가 되고 無가 곧 有가 된다는 사실에 대한 인식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有+無=숯’이라는 등식은 숯이 색계(色界)라 불리우는 현상계와 이와 반대되는 空의 세계를 두루 구족하고 있는 형상물이라는 의미이다. 여기에서 시인이 사물을 바라보는 정신적 토대를 읽어낼 수 있다. 숯은 다 연소 되어 숯의 상태로 죽은 것이고 그것이 또 화력을 만나면 새롭게 불을 일으키는 생명을 지니는 것이다. 시인은 하나의 사물에 집중하여 그 사물의 본질을 잘 간취하여 그의 철학적 세계로 끌어온다. 이시환 시인은 오랜 동안 불교 경전과 성경을 공부하면서 세계와 우주의 이법을 알고 깨달은 시인이다. 그러기에 그는 바라보는 자, 見者(견자)이다. 견자란 단순이 관조하는 자가 아니다. 사물을 통해 관조하면서 그 사물에 내재된 본질을 영원한 진리에 비추어 깨달아 알 수 있는 자이여야 한다. 그러므로 견자와 각자(覺者)는 늘 함께 있게 된다. 시인이 그의 종교 철학적 사유 속에서 숯이라는 사물의 보다 더 존재론적인 근원을 넓히고 이 사물을 들어 높인다. 그런 다음에 이 사물의 본질에 내재된 종교 철학적 논리를 언어로써 가시적으로 형상화한다. 이 때 문학의 시라는 형식은 도가니이다. 이 도가니에서 사물의 본질에 맞는 언어의 의장을 갖추고 나오기 위해 시인은 시의 도가니에서 마지막 담금질을 해내는 것이다. 이것이 이 숯이라는 시집이 나오는 과정이고, 이 시집의 커다란 주제인 역설적 진리가 숯이라는 사물을 통하여 우리들 앞에 현현(顯現)되는 것이다. 이시환 시인의 종교 철학적 사유의 깊이는 그의 일련의 묵상 및 관상 시집들 : 『상선암 가는 길』, 『애인여래』, 『백년완주를 마시며』, 『인디아 기행시집』 등에서 그 꽃을 피우고 있다. 제4시집 『숯』은 제 1, 2, 3 시집에서 보여준 세계를 둘러싼 것들에 대한 존재론적 물음과 인식의 맹아에서 출발한 그의 시세계가 보다 더 종교 철학에 바탕을 두면서 그 자신이 순례자의 여정을 가는 묵상 및 관상 시집들로 넘어가는 징검다리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제4시집은 시인에게는 하나의 선언이라 할 수 있다. 그 의미는 모순과 부조리로 가득한 세계를 바라보는 시인의 눈은 역설적 진리에 가 있는 것이다. 역설적 진리의 형상화야말로 시인이 그의 시의 길에서 가고자 하는 길이며, 표현하고자 하는 방법이며, 시업을 하는 시인으로서의 장인정신의 길이며, 삶의 목적인 것이다. 그의 정신의 바탕이 되는 불교 철학이란 반야바라밀다심경의 핵심을 이루는 空의 세계이다. 그 사고의 일단을 셋째마당의 글에서 보기로 하자.   반야바라밀다심경에 “色不異空(색불이공) 空不異色(공불이색) 色卽是空(색즉시공) 空卽是色(공즉시색)”이라는 구절이 있는데 여기서 色(색)과 空(공)은 전혀 다른 세계이다. 아니, 정반대되는 세계다. 色이 有(유)이면 空은 無(무)요, 色이 빛깔과 향기와 형태를 가지는 것이라면 空은 아무 것조차 가지지 않은 세계다. 그런데 공과 색이 다른지 않다는 것이다. 그것도 강조하여 말하길 色이야말로 진짜 空이요, 空이야말로 진짜 色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앞뒤가 맞지 않는 모순의 말을 피하지 못한 채 우리는 왜 그런 표현을 되풀이하고 있을까. 그것은 분명 인식된 판단에 대해 달리 표현할 재간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 우리의 논리적 사고가 그 명제에 이르는 과정을 설득력 있게 표현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표현의 한 방식인 이런 모순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글은 논리성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역설적 진리는 논리를 넘어 있다. 그러니 논리성이 바탕이 된 글로써 표현하는 것은 어렵다. 그러니 시인은 사물인 숯을 들어서 형상화 한다. 왜 불경이나 성경에서 석가모니 부처나 예수 그리스도가 비유를 들어 설명하였는가? 그 이유는 진리를 설명하는 데에 비유만큼 사람의 이해를 돕는 데 지름길이 없기 때문이다. ‘중생이 우둔하여’라고 그 이유를 말한다. ‘우둔’은 어리석고 둔하다는 뜻이다. 한 마디로 알지 못하고 영적 감각이 부재한다는 뜻이다. 그런 중생에게 논리적인 언어로만 직설하면 이해가 되지 않기 때문에 비유를 드는 것이다. 비유를 드는 것은 바로 ‘빗대는 대상’이 있는 것이다. 그 대상은 사물이나 예화 등이 된다. 숯은 바로 이시환 시인이 반야바라밀다심경의 말씀인 색즉시공, 공즉시색을 설명하기 위해 ‘빗대는 대상’이다. 숯은 제4시집의 제목임과 동시에 시집 전체를 상징하는 큰 소재이다. 숯에 깃든 우주의 역설적 진리의 내재성과 그것의 형상화인 숯을 설명해주는 여러 편의 시들과 숯과 관련된 시인의 종교 철학적 사유의 글로 채워진 이 시집은 과히 이시환 시인이 만든, 그 다운 하나의 시집이다. 하나의 시집을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는 시를 창작하는, 시의 장인이며 언어의 절에서 수행 정진하는 시인의 몫이다. 어떤 목적성을 가지고 어떤 철학적 토대 위에서 어떤 사물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봐서 자신의 사유에 들어오는 사물을 선택하여 자신의 세계관을 그 사물을 통해 형상화해 낼까는 시인의 진리를 향한 끝없는 탐구와 그 진리를 형상화 해보고자하는 열정의 강도(强度)와 시인의 장인정신의 충실도에 따라 제각각 다른 작품을 생산해낼 것이 틀림없다. 다음으로 제4집에 실린 「坐禪(좌선)」를 읽어보자.   타들어간다. 단단히 빗장을 지른 문들을 두드리며 지글지글 이 내 몸뚱어리 기름 되어 타들어간다.   그 어디쯤에선가 뜨거움이 뜨거움 아닐 때 빨간 불꽃 속에 누워 미솔 짓는 나는, 나무젓가락으로 사리를 집어내며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 나비떼를 날려 보내고 있다. -「坐禪(좌선)」전문   이 시는 좌선을 하는 승려를 연상하게 한다. 좌선이란 선불교에서 많이 하는 수행법으로 자기를 비우는 정신적인 작업이다. 비우는 작업은 자기의 내면에 있는 자기에게 먼저 집중을 해야 하며, 그것을 다 비울 때 자아도 버린다. 그렇게 하여 아공(我空)의 상태에 도달하기 위한 수행 방법이다. 이 좌선과 숯은 동일한 맥락이다. 그러니 “타들어 간다”라고 첫 행에서 시적 화자가 말하고, ‘단단히 빗장을 지른/문들’은 아(我)의 완고한 집이다. 이 집은 타들어 감으로써 해체가 된다. 즉 내가 부서지는 것이다. 하나의 기름덩어리인 몸이 타들어 감으로써 해체 되듯이 그 몸뚱어리가 품고 있었던 아만(我慢), 만심(慢心)을 몸뚱어리가 타들어가서 해체됨으로써 아만의 나를 비운다. 이는 숯이 색계, 즉 현상계의 나무였을 때의 자신의 몸을 다 태워서 숯이 되는 변모의 과정을 거치듯이‘나’의 해체도 이와 같다. ‘빨간 불꽃 속에 누워/미솔 짓는 나’는 시적 화자가 숯인 자신을 말한다. 숯이 숯이 될 수 있기 위해서는 이런 열렬한 자기 연소과정이 없이는 만들어지지 않는다. 이 연소과정의 ‘빨간 불꽃’은 바로 적색의 피와 이미지가 동일하다. 죽음을 뜻한다. 국가나 종교의 절대자로부터 부여 받은 임무를 위해에서 죽게 될 때 우리는 순국, 순교, 순직이라고 하고, 이것은 장렬하고도 처절하며 어떤 대상에 대한 사랑이 절정에 올랐을 때 가능한 죽음의 형태이므로 ‘빨간 불꽃’에서와 같이 지극히 아름다운 것이리라. 이 시는 시인이 시를 창작하는 과정의 고통에다 비유했다고 하여도 좋으리라. 한 대상에 대한 사랑은 바로 일편단심이라 하여 나무가 자기의 몸을 버려서, 완전한 연소를 통하여 숯이 되었듯이 숯으로서 존재하는 그 본질에 있다. 이와 같은 단심은 오로지 정진 수행하는 자에게 숯이 되는 것과 같이 하나의 대상에 대한 집중이며 ‘바라봄’이다. 최민순 신부는 「두메꽃」이란 시에서 “외딸고 높은 산 골짜구니에 살고 싶어라/한 송이 꽃으로 살고 싶어라/별나비 그림자 비치지 않는/첩첩산중에 값없는 꽃으로 살고 싶어라/햇님만 내님만 보신다면야/평생 이대로 숨어 숨어서 살고 싶어라”라고 가톨릭 사제로서 ‘내 님’인 하느님만이 바라봐주시는 ‘한 송이 꽃으로 살고 싶어라’라고 고백하였다. 또한 사제로서의 ‘나’가 하느님만 바라보는 ‘한 송이 꽃으로 살고 싶어라’라고 하여 일편단심의 사랑을 노래하였다. 이렇게 사랑하는 사이에는 서로가 서선을 마주하고 집중하는 법이다. 시인이 이 세상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거나 독이 넘쳐나는 이 세상에 해독과정을 통하여 조정하고 조절하는 역할을 하는 숯으로서 산다는 것은 바로 세상에 대한 이런 사랑이 없다면야 꿈꿀 수 없는 것일 터, 이러한 마음을 표현한 것이 작품 「굴뚝나비」이다.   꽃이라고 이 꽃 저 꽃 아무 것에나 눈길 주지 말게나.     꽃이라고 이 꽃 저 꽃 아무 것에나 덥석 덥석 앉질 말게나.   늘 검은 정장 검은 브래지어 검은 팬티를 착용하는 유별난 개성.   너는 그렇게 늘 당당하지만 그것으로 외로운 한 마리 가녀린 나비가 아닌가.   너는 그렇게 늘 홀로이지만 언제나 나의 시선을 묶어 두지 않았던가.   꽃이라고 이 꽃 저 꽃 아무 것에나 눈길 주지 말게나.   꽃이라고 이 꽃 저 꽃 아무 것에나 덥석 덥석 앉질 말게나. -「굴뚝나비」전문   이 시에서 나는 굴뚝나비에게 시선을 묶어둔다. 굴뚝나비는 외롭고 가녀린 한 마리의 나비이지만 나의 시선이 늘 묶여있으므로 아무 꽃에나 앉지 말게나 하고 시적 화자는 당부한다. 굴뚝나비는 이름이나 모양에서 유추되듯이 검정색이고, 시인이 다소 유머스럽게 표현하고 있지만 숯과 동일한 이미지의 곤충이다. 여기서는 이미지의 중첩을 일으키고 있다. 꽃이 여성이라면 나비는 남성에 비유되는 것이 그 하나이고, 시적 화자가 남성이라면 굴뚝나비는 여성으로 표현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시는 중복(redundancy)으로 인한 이중구조가 되어 있고, 바로 여기에 구조의 묘미가 있으며, 그래서 이 시가 더욱 깊어지는 것이다. 시적 화자 나는 결국 굴뚝나비에 자신을 겹쳐놓은 것이다. 꽃이라고 하여 아무 데나 쉽게 앉게 되면 이 오롯한 사랑의 길, 시에 대한 열정, 진리에 대한 갈망과 탐구, 구도에의 여정 등 이런 것들이 다 물거품이 되고 만다. 오로지 이 길은 가야만 한다. 그것은 선택이다. 하나를 버리지 않으면 다른 하나를 구할 수 없는 길이다. 선택은 늘 눈물겹고 하나를 버리거나 비우는 것이기에 더욱 그렇다. 종교적 신념에 대한 믿음은 사랑과 정결을 낳는다. 그 때의 일편단심은 영육의 정결을 의미한다. 티 없이 깨끗함이야말로 세상 것에 물들지 않음이며, 정결한 것이야말로 거룩함이다. 거룩함은 이 영적, 육적 정결함에서 비롯되며, 순수함과 깨끗함 그 자체이다. 한 사람만을 오롯이 사랑하는 남녀 간의 사랑을 비롯하여 종교적 진리, 종교적 도그마, 신 등에 대한 일편단심은 바로 영적 육적 정결로써 티 없는 깨끗함이며 거룩함이다. 그래서 이런 것들을 위해 자기를 버리거나 비우거나 연소시킨 이들을 거룩한 사람이라고 부른다. 정(情)의 순사(殉死), 순국, 순교, 순직, 충신, 열사 이런 말들은 모두 한 대상에 대한 사랑의 강도와 충실성이 완전함을 이루었을 때 죽음마저도 불사하는 완전한 연소의 삶이 행동으로 이어진 모습이며, 우리는 이것을 완전한 자기 비움(kenosis), 무아, 니르바나, 무라 부른다. 숯은 완전한 연소를 통해 새로운 불을 또 지필 준비를 하듯이 오로지 자기 비움, 완전 소멸로만 존재한다. 숯의 본질은 새로운 생명을 생산하고 독이 넘치는 반생명적인 세상에 조정과 조절을 하는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는 데에 있음을 시인의 예리한 시선은 거기에 집중이 되어 있다. 그러니 이시환 시인에게 이 완전한 텅 비어 있음은 얼마나 아득하고 그가 뛰어들어 익사하듯이 몸을 던지고 싶은 바로 그 텅 비어 있음이다. 이건 다름 아닌 삼라만상의 ‘시원(始原)/생명의 움’이자 궁극이며 현상계/색계의 만상이 동귀하는 곳임을 알 수 있다.   텅 비어있다는 것, 그 얼마나 깊은 것이냐. 내 작은 성냥갑, 야트막한 주머니, 큰 버스, 깊은 하늘 모두가 비어있다는 것은 그 얼마나 아득한 것이냐. 그런 네 텅 빈 가슴 속으로 문득 뛰어들고 싶구나. 그 깊은 곳에서, 그 아득한 곳에서 허우적대다가 영영 익사해 버리고 싶은 오늘, 텅 비어있음으로 꽉 차 있는 네 깊은 눈 불길 속으로 뛰어들고 싶구나. -「空(공)」전문   이 시의 끝 행인 ‘네 깊은 눈 불길 속’은 곧 시인이 자신을 비우기 위해 자신의 몸뚱어리를 태운 바로 그 ‘빨간 불꽃’(숯)이며, 너의 깊은 눈 속에 있는 타오르는 ‘불길’이다. 여기에서 숯의 완전한 연소와 중첩이 되고 있어 시가 장렬하고도(숯/완전한 비움) 장중한 생명의 노래(숯/꽉 차 있음)가 텅 빈 하늘 깊은 곳으로부터 독자들의 마음에 울려온다. 그 소리는 강물처럼 흐르고 있다. 출렁대며 넘실대고 있다. 생동하고 있다. 준동하고 있다. 약동하고 있다.   기웃거리듯 끊임없이 출렁인다는 것은, 출렁일 수 있다는 것은 그 만큼 비어있다는 것.   비어있다는 것은 무언가로 가득 채울 수 있고, 가득 채울 수 있다는 것은 아직 깨어나지 아니한 살아있는 것들의 꿈이요, 빛이요, 설렘이리라.   그것은, 그것은 나지막한 속삭임, 속삭임이요, 그대 속삭이듯 출렁인다는 것은 무언인가로 가득 채워지기를 기다리는 그리움이 아니던가. -「뚝섬에서」전문   끝으로 이시환의 숯으로 진리에 무관심하고 정의를 외면하며, 정보산업의 발달로 사람 간의 연결 가치가 절하되고 고도소비사회의 물신이 사물도 동식물도 사람도 형해화(形骸化)하는 작금의 세상에 독을 제거하여 시공을 넘고 동서와 남북을 넘어 생명으로 출렁대는 비움의 시학의 물결이 흘러 강고한 이 세상에 실금을 내고 틈을 벌이고 균열을 내어서 해체하는 데 앞장섰으면 한다. “무언가로 가득 채워지길 기다리는/그리움”으로.  
1171    생명의 씨를 뿌리는 시인 - 이시환 댓글:  조회:3906  추천:1  2016-03-12
생명의 씨를 뿌리는 시인 -이시환의 전 시집을 읽고 평문을 써가는 끝 무렵에 나와 시인과의 관계를 뒤돌아보며 심종숙     이시환 시인의 시업(詩業)은 전체 13권의 시집으로 이루어져 있다. 물론, 앞으로 어떻게, 얼마나 더 전개될지 모르지만 2015년 12월 현재까지는 그렇다. 시인은 말씀[言]의 절[寺]에서 수행(修行) 정진(精進)하는 사람이다. 시를 쓴다고 하여, 시를 쓴다기에, 대개의 사람들은 그 사람을 위해서 ‘시인(詩人)’이라고 불러준다. 그러나 나는 언젠가 일본의 어느 시인에게 들은 말이 있다. 그 시인은 스스로 시인이라 불리는 것을 꺼려하였다. 오히려, “저와 같은 사람은 시인이 아닙니다.”라고 난처해하며 말했었다. 그 중의 한 명은 “진정한 시인은 10년에 한 사람 정도가 나옵니다.”라고 말했고, 다른 한 사람은 일본근현대시사에서 100명 안에 들며, 예리한 평론가와 원로가 된 지금에도 시의 날카로운 감각을 가지고서 여전히 예술의 전위에 서서 첨병 역할을 하고 있는 분이다. 그런 분도 ‘자신은 시인이라고 할 수 없다’고 스스로 겸손한 자리에 있기를 원했다. 그런 까닭에 나에게는 좋은 인상이 아주 깊게 박힌 것이다.   이시환 시인의 시집을 다 읽고서 그의 시세계를 이해하려고 나름대로 애써본 나의 입장에서 나는 지금까지 서른 편 가까운 평문을 썼지만 그의 시세계를 다는 이해하지 못했다는 자괴감이 든다.   날씨가 춥고 동지(冬至)가 가까운 이 어두운 계절에, 나는 그의 시업을 지난 여름부터 줄곧 읽어오면서 이해하려고 노력해 왔으나 시인의 깊이에 도달하지 못한 채 서서히 심신(心身)이 지치고 있는 듯하다. 그는 이런 작업 중에 일용할 양식과, 건강과 기분전환을 위하여 밥과 술을 사주시며, 글 쓰는 고통을 위로해 왔다. 나는 내 스스로 이시환 시인과 인연이 깊다고 생각한다. 시인 본인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사실 그것은 내게 큰 관심사도 아니다. 물론, 어느 정도는 시인의 생각도 살피고는 있지만 그의 작품을 이해하려는 나의 작업에는 그렇게 그와 나의 친분관계를 따져 묻거나 신경 쓸 하등의 이유가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좌우간, 한 20년 다 되어가는 인연인 것 같다. 90년대 중반에 내가 결혼하기 전 처녀시절이었었다. 나 나름대로는 학문과 창작의 길을 걸어보리라 마음먹고, 대구에서 서울로 올라와서 낯선 환경에 적응할 때였는데, 그래도 어느 정도는 편해지게 된 3년만의 일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이곳 서울의 추위도 힘들었고, 표준어, 식초나 후추 설탕 등을 많이 쓰거나 간이 짙은 음식, 셀 수 없는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모두 지나쳐야만 하는, 냉랭하면서도 인간미가 나지 않는 빌딩 숲 사이 골목골목을 누비며 물 흐르듯이 끊임없이 흘러가는 사람들 속에서, 그러면서도 조직화된 서울은 한국 사회의 커다란 ‘견본’ 같았지만, 나는 나 나름대로 초보자인 양 열심히 살아가고 있었다. 서울의 빌딩들 속에는 크고 작은 공적 사적 단체의 사람들이, 낮에는 일하기 위하여 머물고, 저녁에는 하루의 노동에서 오는 피로를 밥이나 술로 동료들과 어울려 달래면서, 밤이 되면 자신이 소유한 집이나 세 들어 사는 집에 가서 잠을 자고 다음날 또 나오는 사람들이 사는 곳으로 인지되었었다. 수없이 많은 집들 중에서도 자기 집을 소유하지 못하고 심지어 딛고 서 있는 땅 한 평도 자기 것이 없는 서울 사람들은 종로, 명동, 을지로, 신촌, 홍대, 강남 등 거대한 부가 번쩍거리는 땅을 밟으며 끊임없이 흘러간다. 나도 그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학문을 해보겠다고 고향에서 나와 대구를 거쳐 서울로 와서, ‘안암문예창작강좌’의 문우들과 함께 문학 창작의 길을 꿈꾸었었다. 그 때에 나에게 시집을 주시며, ‘희망’이라는 글자를 써주셨던 선생님은 이제 정년을 앞두셨고, 그 때로부터 시 창작을 했던 나는 불행하게도 2003년에 이미 끝나버렸다. 나의 시 창작의 샘이 말라버려 더 이상 쓰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90년대 중반, ‘바라시’ 동인회에 들어가 총무를 할 때, 어느 날 만났던 분이 이시환 시인이다. 나는 그분으로부터 『추신(追伸)』이라는 시집을 받아서 읽다가 이해가 안 되어 읽는 걸 그만두었었지만 내 기억으로는 참으로 시 창작에 의욕적인 분이라는 인상을 받았었다. 그 이유인 즉, 그 분이 문학평론가이기도 하여 시 창작 관련 합평(合評)을 하기 위해 한 달에 한 번씩 만났던 우리 동인들에게 시 창작 지도를 해주었던 듯싶다. 그 후 내가 일본시가 전공이기 때문인지 나중에 그 분으로부터 일본 시인들의 시를 번역해달라는 요청을 받았었고, 그 때로부터 시인과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그러다가 잊을 만하면 만나는 기회가 생기고, 또 그러다가 내가 삶의 심산을 마시고 죽을 힘만 있었으면 죽었을, 그래서 어떤 글도 쓰지 못할 때에 그분의 권유로 시와 문학평론으로, 그것도 그 분이 발행인으로 있는 종합문예지 격월간 「동방문학」에서 이유식 원로 문학평론가의 심사로 등단이라는 절차를 밟았다. 그야말로, 그 무엇으로도 위로가 되지 못한 채 방바닥에 누워서 지낸 시기였었다. 내 나이 40대 초반의 일이다. 그 후 심신이 여전히 아픈 상태였는데 나에게 당신의 시 10여 편을 이메일로 보내며 촌평을 좀 써달라고 청탁했었다. 그래서 나는 그분의 원고를 읽으며 그나마 뭔가 해봐야겠는 생각이 들었고, 그때로부터 평론을 쓰기 시작한 것이다. 사실, 그 때도 내 정신은 혼미하여 논리적으로 뭘 쓸 것 같지는 않았었는데 그의 시 작품 속에는 내가 정작 말하고 싶은 것이 있어서 의욕이 생기기 시작했고, 또한 뭔가 끄적일 수 있었던 것이다. 그 후 나의 생활은 여전히 어두운 수렁 속에 가라앉아 있었는데, 겨우 ‘마음의 분노’를 구약성서에 나오는 요셉 성조의 이야기를 읽고, 묵상하며, 그 말씀의 빛으로 마음을 비추어 2년간의 정화(淨化)의 시간을 가지면서 삭이어 갈 무렵이었다. 그 해 2월에 나는 횡단보도에서 교통사고를 당하였다. 몸에 외상까지 겹쳐 책을 읽거나 글을 쓰기 위해 책상에 앉아 있을 수 없는 상태가 되고 말았다. 그리고 그 해 8월에 아버지가 심장마비로 갑자기 돌아가셨고, 그 일로 나는 충격과 슬픔으로 더 고통스런 상황의 나락으로 떨어졌었다. 심지어는, 나의 가정이 해체되는 이혼의 고통 속에서, ‘불행은 언제나 연쇄적으로 오는구나.’를 생각했었다. ‘설상가상(雪上加霜)’이라는 말이 내게 딱 들어맞았다. 눈이 내리고 그 위에다 다시 서리가 더 내린다는 말이니 ‘혹독한’ 상황일 게다. 불행의 도가니에 갇혀 있는 듯한 그 시기에는 이상하게도‘유혹(誘惑)’이 나를 괴롭혔다. 그렇게 아픈 처지로 있다 보니 대학 강의도, 글 쓰는 일도 못하게 되고, 뒤따라오는 것은 지독한 물질적 궁핍이었다. 어느 대학에 강의 갔다가 돈을 줄 테니 논문을 써달라는, 정당하지 못한 제의가 바로 그런 유혹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좋아서가 아닌 냉수욕을 하며, 한 겨울에도 연료비를 못 내어 전기장판으로 버티었다. ‘고진감래(苦盡甘來)’라고나 할까, 크리스마스이브 날, 궁색한 내 집에 도시가스가 들어오는 기쁨의 날도 있었다. 이 무렵, 나의 생활이란 거의 얻어먹으며 연명하는 수준이었다고 해도 틀리지 않는다. 나는 내 자신이 이렇게 살 수 있다는 것에 대해 스스로 놀라기도 했었다. 내 마음속에서는 양쪽(친가와 외가) 가족, 사회, 일터 등 모두에 대해 ‘알 수 없는 분노(憤怒)’로 가득 차고 있었다. 그보다 더 고통스러웠던 것은, 바보스런 나 자신에 대한 자학(自虐)과 분노(憤怒)였다. 도무지 스스로와 화해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성조 요셉을 2년에 걸쳐서 세 번을 읽고, 묵상하고, 기도하면서 통회(痛悔)로 괴로울 무렵에 뜻하지 않게 어머니의 경운기 사고소식을 들었다. 급히, 시골집으로 내려가 가슴과 어깨, 팔 등 반신을 붕대로 감고 있는 어머니 모습을 보면서, 거기에다가 제부가 갑자기 많이 아프다는 소식까지 들으면서, 나는 내가 분노로 가득하고 이렇게 원망의 세월을 보내고 있기 때문에, 저 분들이 죄 없이 고통당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한없이 슬퍼서 울고 말았다. 그러면서 내 마음을 조금씩 돌리기 시작했다. 다 내가, 죄가 많고, 못나서 그렇다고 여겼다. 그렇다고, 그 누구도 요셉처럼 나를 구렁텅이에 던진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내 스스로가 나 자신을 구렁텅이에 밀어 넣었던 것이다. 어느 순간, 이성을 잃고, 젊은 혈기를 제멋대로 썼던 나의 잘못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내 멋대로 살아온 결과였고, 내가 자초한 파국이었다. 가족들과도, 심지어 같이 살고 있는 아들에게도, 나는 아무런 소용이 되지 못하고, 어미 노릇조차도 제대로 못하는 심신의 병마를 껴안고 아들까지 괴롭히는 어미가 되었다. 그런 혼돈(混沌)과 슬픔과 분노(憤怒) 속에서 난파의 세월을 살면서 나는 늘 아들을 치유하기 위해서 심리 상담소를 들락날락 했으나,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일인가. 정작, 고쳐야 할 사람은 나 자신이었는데 말이다. 내 병이 고쳐지지 않으니 아들의 병이 고쳐질 리 없었고, 아들은 못난 어미 때문에 병이 더 날 지경이었던 것이다. 요셉은, 이복형제들이 죽이려 했고, 르우벤의 간곡한 설득으로 형제들은 그를 겨우 목숨만 살려 구렁텅이에 던져 넣듯 이집트로 종살이를 보냈던 것이다. 그런 처지의 그가 천신만고의 고난과 시련과 유혹을 극복하고, 파라오의 재상이 되었다. 7년간의 기근 동안 온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이 되어 이집트로 양식을 얻으러 온 형제들을 몇 번의 시험 끝에 자신을 정체를 밝히고 형제들과 온전히 재회하고 불행한 과거를 용서하면서 아버지 야곱과 형제들을 자신의 품에서 보살펴 주었다. 이런 내용을 몇 번이나 읽으면서 나는 참 많이도 울었다. 모두 내가 못난 탓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모든 관계(關係)들과 화해한 후 분노가 마음에서 떠나자 아버지가 돌연 돌아가셨다. 이 못난 삶을 살아온 나는 너무나도 슬프고 너무나도 죄스러웠다. 그 후, 가까스로 정신을 추스를 때였다. 이시환 시인이 당신의 전 문학 작업 결과인 저서들을 큰 박스 하나에 넣어 가지고 와서는 자신의 모든 저작물이라며 충분한 시간을 갖고 일독해 보고 가능하면 평가해 보라 했다. 나는 정말 부담스러웠고, 이 분이 도대체 나한테 왜 이러시나 싶었다. 내가 한국문학을 전공한 사람도 아니고, 시와 평론 등단도 그 분의 권유로 했을 뿐인데, 그것도 그분의 호의를 뿌리칠 수 없어서 도리 없이 응했을 뿐이지 않았던가. 솔직히 말해, 그 당시에는 죽을 힘만 있으면 죽어버리고 싶다고 늘 생각하고 있던 때였기 때문에 시인이 되고 문학평론가가 되는 일조차 나한테는 아무런 위로도 의미도 되어 주지 못했다. 내가 해왔던 모든 일에 대해 회의(懷疑)와 절망(絶望)뿐이었고, 그 어떤 일도 하기가 싫었었다. 철저한 무력감으로 젖어 있었던 것이다. 정말, 악의 세력은 한 인간을 완전히 거꾸러뜨려서 쓰러지게 해야 직성이 풀리기라도 한 듯 나는 그렇게 스스로 망가져 가고 있었던 것이었다.   나의 이런 속사정을 알 리 없는 이시환 시인은 정장을 말쑥하게 차려 입고, 그 간의 저작들을 박스에 담아 가을비가 오는 어느 날 내가 사는 동네로 와서 건네주고 갔다. 나는 그 때만 해도 어디 나가는 것도 귀찮아하고, 집과 늘 나가는 성당, 학교뿐이었다. 학교는 1주일에 한번 나갔고, 그 외에 다른 데는 가급적 나가지 않았고, 나가는 것 자체도 싫었었다. 나의 유일한 호구지책인 대학 강의도 정말 어쩔 수 없이 했었고, 그것은 심히 정신적 부담이었으며, 나에게는 괴로운 시간이었다. 그래서 학생들에게 미안하기까지 했다. 이런 죄스런 마음으로 더 강의한다는 것은 죄악을 저지르는 일이라고 생각하며 어쩔 수 없이 다녔었다. 시인으로부터 받은 책 박스를 한 달에 30만원을 주고 사는 반지하 셋방의 좁고 어두운 거실에 두고는 한 달 동안 가슴이 짓눌렸다. ‘모르겠다. 나도 모르겠다.’ 는 심정으로 지냈었다.   나는 일본문학에서 출발하여 비교문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지만 그때까지의 내 삶을 저주하면서 스스로를 괴롭히고 있었다. 한일근대시 비교, 그러나 그 안에서 문학과 종교적 영성의 접점(接點)을 찾으려다가 스스로 벽에 부딪치고 있었다. 기억 속에 1년 전 크리스마스이브 날, 도시가스를 들여 넣어 라이프라인이 제대로 가동된 바로 그 날에 나는 성경 신구약 전권을 어두운 반지하방에서 17년 넘게 쓴 나무책상에 앉아 만 1년만에 요한묵시록의 마지막 챕터를 덮었다. 그 분한테는 말할 수 없이 죄송하였다. 변명하자면, 그 해 가을은 정말이지 죽을 것만 같았었다. 그래서 결국은 병을 일으켜 한 밤 중에 응급실을 찾고, 가슴이 아파 견딜 수 없는 ‘울화병’에 시달렸다. 그 무렵, 나는 어떤 할머니를 돌보고 있었다. 가족들도 돌볼 수 없을 정도로 병이 악화되어 셋방에 독거하고 있는 할머니였다. 그 할머니는 환청(幻聽)・환시(幻視)가 보이는 정신질환을 앓고 있었고, 본당 수녀님이 써준 주의 기도와 성모송, 영광송 등으로 밤새 기도하며 바쳤던 밤에는 천국의 예수님과 성인성녀를 만났다며, 자신의 딸이 준 ‘광명진단’이라는 불교의 주문 같은 글귀가 적힌 종이 두루마리를 나보고 불태워 달라고 하여 내가 직접 나의 집 앞에서 태울 때에 ‘너무 시원하다’고 하셨는데, 나 역시도 그 불길을 바라보며 내 가슴이 시원해지는 신비(?)를 느꼈었다. 그 할머니를 일주일에 한 번씩 방문하는 기간 동안은 정말로 가슴이 너무 아팠었다. 그런데 그것이 모두 일순간에 사라진 것이다.   그런 와중에도 이시환 시인의 책은 여전히 나의 거실에 있었다. 나는 작년(2014년)에 지금의 새집으로 이사해 오면서 짐 정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한동안 창고에 넣어두었다가 지난 여름에 울화병을 또 일으키고는 몸져누워서 며칠 고생하다가 회복하면서 겨우 거실에 자리 깔고 누워서 비로소 그분의 시집을 읽기 시작했었다. 책 박스를 창고에서 거실로 가져오고, 한 권 한 권 읽으면서 나는 몹시도 눈물을 많이 흘렸다. 가슴은 아파서 움직이는 것도 힘들어했지만 그냥 누워서 할 수 있는 일이란 두껍지 않고 얇으며 가벼운 시집을 손에 들고 읽는 일이었다. 뒤돌아보면, 늘 내가 아플 때에는 책을 읽으며 그 책 속에서 생명력을 회복했듯이, 그분의 시집은 나도 모르게 나를 살리고 있었다. 어린 시절, 남동생이 죽고 무상감을 느끼고 자폐의 1년을 지내면서 친한 친구들과도 말을 하지 않았던 내가 오로지 학교 도서관 서가에 꽂힌 동화들을 읽으며 버티다가 신약 성경 루카복음 속 가나의 혼인잔치 이야기를 해주었던 주일학교 선생님을 만났다. 그 선생님의 소개로 어린 시절 알 수도 없는 나라, 멀리 이스라엘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가 나한테 처음으로 찾아오시던 날, 나에게도 물과 포도주의 기적으로 자폐가 치유되어서 해방되었듯이, 그분의 시집을 읽으며, 나는 죽음과 같은 고통 속에서 늘 나에게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의 손길을 느꼈다. 내가 아플 때에 삶과 죽음의 존재, 비존재의 고통으로 공포와 두려움에 사로잡힐 때도 그분은 부드러운 손길로 나를 인도해주시리라 믿게 되었다. 나는 바닥에 누웠다가 일어난 사람이고, 서서 걸을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직립보행,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그분의 시집에서 그분은 먼저 이런 고독과 고통을 겪었고, 그 과정에서 시적 에스프리로 넘쳐흘러 아름답고 화려한 이미지를 구조(構造)하는 언어들을 숨 쉬게도 하였다. 어떤 때에는 현실의 모순과 부조리를 온몸으로 부딪쳐 언어의 칼을 들고 맞서기도 하고, 또 어떤 때에는 스스로 초연한 모습으로 삶의 본질에 다가서거나, 또 어떤 때에는 구도하는 수행자의 모습으로 선시풍의 시편들로 가득 채우기도 하였다. 건장한 남성임에도 불구하고 신 앞에서는 아주 단아하고 겸손하며 부드러운 한 여성으로 구도의 여정을 걸어가는 모습도 내비춰 주었고, 고독과 고통 속에 가슴이 탈 때에, 현실 세계의 모순과 부조리에 신물이 나서 권태롭고 분노가 치밀어 오를 때에, 그는 벌판이나 들판으로 나갔다. 벌판에서 불어오는 바람의 속삭임에 귀 기울이고, 산 속 계곡의 흐르는 물을 바라보며 말없는 바위와 돌들과 이야기하고, 꽃 속에서 지친 마음의 생명력을 회복하고, 작은 풀 한 포기, 야생화 한 송이를 소중히 여기면서 소통하였다. 그래도 안 될 때에는 불모의 광활한 사막으로 들어가 마음을 가라앉혀 정화시키고, 불법(佛法)의 땅 인디아를 여행하면서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의 공(空)과 만상(萬象) 동귀(同歸)의 이법(理法)을 깨달았다. 그의 묵상과 관상의 생활은 소란스러운 실제의 세계를 벗어나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세계를 찾아 소통하고 공감하려한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것은 어쩌면, 눈에 보이는 실상의 세계로부터는 그의 시가 자라나지 못함을 인식하였기에 택할 수밖에 없었던 길이었고, 그는 그 길로 초대와 부르심을 받아 그곳으로 낮은 몸으로서 알몸으로 자기를 던졌던 시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알몸의 시 태동은 그런 배경과 환경에서 이루어졌다. 그것은 결코 현실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며, 더 적극적인 삶의 자세였으며, 그가 먼저 그 길을 걸었기에 나는 다만 충실히 그를 따라가기만 하면 되었다. 지금까지 내가 써온, 이 책속에 실린 나의 글들이 바로 그 증거이다.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의 보증이며 보이지 않는 실체들의 확증입니다. 믿음으로써, 우리는 세상이 하느님의 말씀으로 마련되었음을, 따라서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에서 나왔음을 깨닫습니다(히브리서, 11:1-2).” 나는 그의 문학 작업에서 성경의 이 말씀을 이해하게 되었다. 문학적 평가는 나에게 큰 의미가 되지는 않는다. 나는 평가할 위치에 있지도 않다. 설사, 내가 그런 위치에 있다고 한들 평가해서 무엇하랴. 모든 것이 다 헛되고 헛되다고 코헬렛에서 가르치지 않았던가. 다만, 한 시인의 시세계를 이해하려는 작은 몸짓과 그 글이 내게 말을 걸어와 내가 말하고 싶어진다면 그것으로써 감사하게 여기는 그 만남이 내게 큰 기쁨인 것을.   승리하리라. 승리하리라. 어린 양의 피로써 승리하리라. 죄로 물든 세상을 정화시키는 하느님의 어린 양(Agnus Dei)은 가장 약한 어린 아기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왔다. 문학은 인간의 가장 나약한 부분을 통해 인간의 고통을 이야기한다. 문학의 꽃이라는 시에서 시인이 그 역할을 다함으로써 끝까지 싸워 승리하길 바랄 뿐이다. 한국문학을 빛내는 어린 양의 피는 바로 그 시인이 흘린 고뇌의 눈물, 눈물로써 씨 뿌린 시인만이 거두는 곡식 단의 기쁨이리라.      
1170    詩作初心 - 시에서 생명의 표현 활유법 댓글:  조회:4649  추천:0  2016-03-12
이시환의 시법 : 만유에 내재하는 물활성 -생명의 표현 활유법   심종숙(시인/문학평론가)   그의 눈에는 그를 둘러싼 모든 사물들이 살아 움직이거나 그에게 대화를 해온다. 그는 자연물과도 대화를 한다. 그리고 우주로부터 오는 빛이나 바람, 공기, 별, 달과 푸른 하늘과 마주 대하고 대화한다. 그러니 그에게 이것들은 정지되어 있거나 무생물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애초에 이 모든 것이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커다란 바위가 아주 작은 먼지가 되어 사라지기까지 우주의 만물은 빠르거나 느리게 변화하고 있을 뿐이라고 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삼라만상이 모두 유기체적이며 변화한다고 인식하였다. 이시환 시인은 그의 시에서 사물들과 자연물들에 생명을 부여하고 대화하거나 그것들과 하나가 된다. 그러니 그의 시에는 활유법이 많이 쓰이고 있다. 그 중에도 특히 사물과 자연물을 사람처럼 표현하는 의인법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그가 칩거를 오랜 기간 하면서 철저한 고독 속에서 시 창작과 종교 관련 저작과 중국, 인도, 라틴아메리카 등의 성지순례, 사막 여행을 할 때 그에게 이 사물들과 자연물들은 그에게 친구가 되어주었다. 그에게 말을 걸어주었고, 그도 그것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그의 오랜 기간의 칩거는 불의한 세상에 대하여 상처도 받고 염증도 느꼈으며 거기에서는 그 어떤 생명력도 얻을 수 없어서였다. 그래서 그는 홀로 떠나기로 결심하였고 사람들과 일정기간, 일정 정도의 단절을 한 만큼 이런 것들과 친교를 나눌 수 있었다고 본다. 철저한 고독을 대면하고 맞서본 자는 곧 자기와 맞선 자이며, 신과 대면한 인간이다. 이렇게 하지 않고는 세상을 거꾸로 볼 수가 없다. 세상의 바깥에서 세상과 일정 정도의 거리를 두고 바라보지 못한다. 그것과 같이 자기 자신에 대해 거리를 두고 바라보지 못한다. 이시환의 시적 세계는 이렇게 하여 축조되었고 축성되었다. 어쩌면 세상과 자신을 바라보는 것은 동일한 것일 게다. 동일한 결론에 도달하는 과정이다. 그가 자신을 사막의 공간까지 확장시켜가며 철저히 고립시켰을 때 그 고뇌의 절정에서 시인은 사막의 모래로 자신의 알몸을 씻어내고 정화와 재생, 합일을 성취하면서 마치 거친 모래알과 같은 세상을 용의주도하게 잘 저작하여서 소화시킬 수 있는 되새김위를 가지는 쾌거를 이루었을 것이다. 삶의 모순과 부조리, 그것들의 이중성과 이율배반, 관계들이 그를 지치게 만들었을 때, 예술의 전당과 같은 백화점식의, 경제적 계급적 이념적 논리에 작동되어 섭렵되어가는 박제화 된 예술이 아니라 그는 들판이나 벌판을 찾아가 걸으면서 거기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분노와 상처를 식히고 치유하려 하였다. 그리고 숲이나 산, 계곡, 산길을 걸으면서 그는 바위들과 계곡의 강과 나무들과 이름 모를 야생화나 풀들을 바라보면서 그를 혼란스럽게 하고 분노케 한 모든 것들을 내려놓았다. 말없는 바위와 대화를 하며 그는 가슴 속에 인간들에게 할 수 없었던 못다 한 말들을 쏟아내었다. 그가 배낭을 꾸리고 등산화를 신고 문 밖을 나서기만 하면 바람은 그의 발에 힘을 불어넣어 주어서 이끌었고, 오라고 손짓하며 품에 안아 주었고, 가슴과 등을 쓸어주었다. 태양은 그에게 환하게 인사를 했다. 그 태양에 미소로 답하며 따라 걷기만 하면 되었다. 질주의 소음과 분노와 방탕, 불륜, 타락, 욕지거리, 기만, 중상, 경쟁, 먹고 먹히는 인간 먹이사슬, 불의한 권력체들, 살인, 방화 등 부조리와 모순으로 가득 찬 ‘소돔과 고모’라 같은 도시를 등지기만 하면 되었다. 그는 산의 중턱에 올라 자신이 등지고 온 소돔 성읍을 바라본다. 그곳에는 그 악한 것들이 피워 올리는 연기로 자욱하여 시야를 가린다. 마치, 룻이 불비가 내려 벌겋게 타오르는 소돔 성읍이 내려다보이는 산에서 ‘저기에서 살았구나’, ‘살아 남았구나’, ‘지금 벗어났구나’라며 스스로 오싹해오는 등골을 의식하며 한숨을 돌렸듯이, 그는 통탄해 하면서 산길을 오른다. 그렇게 삶의 자리를 떠나는 여행을 하면서 그는 순례객이 되었다. 불국토인 인도 ․ 티베트를 여행하고 한국 사람으로 드물게 아토스 성산을 오를 때까지 그의 순례는 계속 되었다. 300여 개의 수도원이나 교회당이 있다는 아토스 성산은 그야말로 인간이 하느님과 대화하는 산이다. 인간계와는 철저히 거리를 두고 기도를 통해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메시지를 매시간 수신하기 위해 그들을 늘 깨어 전파를 송신하고 수신한다. 이시환 시인은 그의 순례의 여정에서 만나는 이국의 사물들과 자연물, 사람들을 통해 자기를 발견하였다. 그곳에서 생명력을 찾았고, 그의 활유법은 그런 과정에서 나온 시법인 것이다. 활유법은 물활론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물활론[物活論 hylozoism]은 물질에 생명이 내재해 있다는 입장이다. 이와 유사한 것으로 애니미즘, 생기론(生氣論), 범신론이다. 물활론을 포함해서 이들 개념은 ‘물질’ ‘생명’ 및 인간의 ‘마음’(정신)과의 관계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구별되나, 엄밀히 구별되지 않고 쓰이고 있는 경우가 많다. 애니미즘은 자연현상에 영적인 것을 읽어내어 인간과 교섭한다는 것이며, 주로 세계에 관한 이론적인 파악이 없는 단계의 원시종교 등에 대해 쓰인다. 물활론은 이론적 반성이 생긴 후의 것이며, 고대 그리스의 이오니아 자연학이나, 르네상스기의 자연철학, 예를 들어 브르노나 18세기의 디드로, 나아가 19세기의 어른스트 헥켈 등을 들 수 있겠다. 여기에서는 인간이나 동식물 이외의 존재도 생명적 성격 즉, 성장하고 발달하는 경향을 내재적으로, 즉 질료 자체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거기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이 물질적인 것 그 자체는 수동적 질료에 지나지 않고, 생명적인 것은 형상(形相)으로서 바깥에서 주어지는 견해나, 베르그송의 철학 등은 생명주의적이나 물활론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생기론은 거기에 대해 주로 근대에 물리학에서 기계론적 자연관이 성립하여 무기적 세계가 비생명적인 것으로 된 후에 동식물 등의 생물에는, 물리화학 현상에는 보이지 않는 특유의 생명원리가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입장이다. 근대과학에 있어 생명 현상의 해명이 진보된 여러 영역에서 생명현상을 기계론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입장과 거기에 반대하는 생기론의 입장과의 논쟁이 일어나 근대 이전의 것에 관해서도 기계론적인 것으로 환원되지 않는 생명원리를 주장한 인물을 거슬러 생기론자라고 하고 앞서 물활론에서 거론한 인물도 때로는 생기론자라고 불린다. 범심론은 동식물의 생명과는 다른 인간적인 ‘마음’이 자연계에 내재해 있고, 그것은 인간에 있어서 완성한 형태로 자각되는 것이며, 버틀리, 쇼펜하우어 혹은 셸링을 들 수 있으나 물활론 또는 생기론과의 차이를 동식물의 차원에서의 설명으로 분명히 나타내는 것은 곤란하며, 오히려 인간을 포함한 전체 도식에 있어 방향성의 차이로 비로소 구별할 수 있다. 이시환 시의 활유법은 넓게는 물활론의 범주에서 쓰여진다. 자연현상에서 영적인 것을 읽어내어 시적화자인 시인과 교섭하는 것이나 인간, 동식물, 사물 등에 성장, 발달하는 경향을 내재하고 있다는 인식은 물활론이다. 그 중에 특징적인 몇 가지는 원초적 에로티시즘을 통하여 생명력을 나타내거나 자연현상이나 동식물, 사물에서 영적인 것을 읽어내어 시적화자가 친교/교섭하거나, 인간, 동식물, 사물 등에 성장, 발달하는 경향을 내재하고 있다는 인식을 보여 주는 시편들로 나누어 볼 수 있겠다. 먼저 원초적 에로티시즘을 통하여 생명력을 나타내는 시편들이다.   손끝에 와 닿는 당신의 두 개의 젖꼭지. 그 꼭지와 꼭지 사이의 폭과 골이 당신의 비밀을 말해주지만 가늠할 수 없는 그 깊은 곳으로 이어지는 사내들의 곤두박질. 그 때마다 제 목을 뽑아 뿌리는 치마폭 사이의 선붉은 꽃잎 골골이 깔리고 누워 잠든 바람마저 눈을 뜨면 이 내 가슴 속, 속살을 비집고 우뚝 솟은 산 하나. 그 허리춤에선 스멀스멀 풍문처럼 안개만 피어오르고. -「山」,『안암동日記』에서   그가 일상을 떠나 늘 찾아다녔던 산은 이 시에서 여성으로 의인화되어 있다. 그에게 산은 여성, 어머니이다. 이 시에서는 완숙한 여성의 젖가슴으로 그리고 있듯이 시적 화자가 모태 회귀적 퍼소나를 이 시를 통하여 나타내고 있다고 하겠다. 두 개의 젖꼭지란 산과 산의 두 봉우리를 말한다. 이 시는 산을 여체로 의인화 하여 사내들이 그 여체의 골짜기인 산의 계곡을 찾는 것을 사람의 성교로, 그 결과 여성의 처녀막이 찢어질 때 ‘선붉은 꽃잎’으로 비유하였다. ‘산/여성, 계곡/여성의 자궁, 거기로 뛰어드는 남성/페니스, 선붉은 꽃잎/처녀 혈’로 정리 될 수 있다. ‘내 가슴/여성, 우뚝 솟은 산/남성’ 이렇게 겹쳐서 이중적으로 의인화 되고 있다. 두 개의 산 봉우리가 여성으로, 이것은 시인의 시야에 들어온 산을 여성의 젖가슴으로, 나의 가슴 속의 속살을 비집고 우뚝 솟은 산은 남성으로 의인화 하고 있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이 시는 원초적 에로티시즘과 그 생명력을 산을 통하여 나타내었다.   하늘을 바라보고 누워있는 나의 배 위로 배를 깔고 누워있는 당신은 황홀이란 무게로 나를 짓누르고. 짓눌려 숨이 막힐 때마다 햇살 속 저 은사시나무 잎처럼 흔들리면서 이쪽과 저쪽을 넘나들면 출렁이는 세상이야 부시게부시게 출렁일 뿐. -「오랑캐꽃」, 『안암동日記』에서   오랑캐꽃과 시적화자 나와의 정신적, 신체적 교합은 황홀을 자아낸다. 이 둘은 포개어져 있다. 영적인 중첩을 이루어 그 절정에서 황홀함을 느끼기 때문에 세상은 출렁댈 뿐이다. 봄꽃인 작고 땅에 거의 붙어 있듯이 한 이 꽃을 보고 시인은 감탄한다. 그 감탄하는 생명력을 이렇게 인간과 식물의 교합을 빌어 의인화하여 표현하였다. 봄의 들판에 여기 저기 피어있는 한해살이 꽃과에 속하는 보랏빛과 흰 빛의 제비꽃=오랑캐꽃은 가을이 되어 서리가 내리면 사라져 버리기에 봄에 일찍 피어서 화려한 자태를 뽐낸다. 시인의 눈은 그 보잘 것 없이 작고 서리를 맞으면 사라질 그 꽃의 눈부신 만개(滿開)에 인간 생의 허무와 고뇌 가운데서 그것을 잊게 해주는 생명력인 교합으로 의인화한 것일까? 그런 상태에서는 모든 것이 빙빙 돌고 이성적 판단으로 스스로 고뇌하는 인간의 영혼도 이 순간은 판단정지한 채 가볍게 흔들리는 것이다. 이 한 송이 꽃으로 그 자체가 주는 아름다움과 기쁨으로만 흔들리고 싶은 심정을 노래하였다고 생각된다.   텅 빈 내 가슴 속을 파고들어 앉아 거친 숨을 쉬는 한 마리 귀여운 들짐승. 너는 이 땅 위로 서있는 것들을 모조리 쓰러트리고 시방 까아만 두 손으로 내 몸뚱아리 구석구석을 쓸어내리는 뜨거운 진흙, 눈먼 狂人이다. 목을 매어 소금기 어린 풀꽃을 터트리는 내 가슴 속의 너는. -「겨울바람」, 『안암동日記』에서   부드러운 봄바람도 아닌 차갑고 메마르고 거친 겨울바람일지라도 텅 비어 있는 시적 화자의 가슴 속에 들어오면 온순하고 따뜻하며 촉촉한 한 마리 귀여운 들짐승이 된다. 이 들짐승인 겨울바람은 땅 위에 서 있는 모든 풀과 나무들을 쓰러트리고 시적 화자의 몸뚱아리의 구석구석을 쓸어내린다. 겨울바람이 털이 보송보송하고 박동을 하여 따뜻한 온혈 들짐승이 되고 습기를 머금은 부드럽고 촉촉한 진흙이 되고 마침내 눈먼 광인이 된다. 사랑에 목을 맨다는 의미는 사랑에 목숨을 걸고 바친다는 의미이며 눈먼 광인에서 한 단계 더 올라간 경지일 것이다. 겨울바람이 들짐승→진흙→눈먼 광인→너로 동식물, 자연물, 사람으로 변화되면서 가장 마지막 단계에 광인/너로 불리우면서 사람이 된 바람과 대화를 나누고 사랑을 나눈다. 목을 매어/목이 매이어 온다. 그 어느 쪽이든지 정에 순사하거나 그로 인한 눈물의 짠맛을 머금은 어린 풀꽃을 터트리는 내 가슴 속의 너이다.   내가 가진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만, 당신에게로 곧장 달려 갈 수 있다는 그것과 당신을 위해서라면 당신의 이마에, 손등에, 목덜미 어디에서든 입술을 부비고 가녀린 몸짓으로 나부끼다가 한 방울의 물이라도 구름이라도 될 수 있다는 그것뿐이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사옵니다. 다만, 우리들의 촉각을 마비시키는 추위가 엄습해오는 길목으로 돌아서서 겨울나무 가지 끝 당신의 가슴에 잠시 머물 수 있다는 그것과 당신을 위해서라면 충실한 從의 몸으로 서슴없이 달려가 젖은 땅, 얼어붙은 이 땅 어디에서든 쾌히 엎드릴 수 있다는 그것뿐이옵니다. 나는 언제나 그런 나에 불과 합니다. 나는 나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함박눈」, 『안암동日記』에서   함박눈에 관하여 쓴 이 시에는 함박눈을 달려간다, 입술을 부빈다,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다, 충실한 종의 몸으로 서슴없이 달려가겠다, 엎드릴 수 있다 등의 동사들을 나열하면서 함박눈을 의인화하여 표현하고 있다. 이시환 시의 물활론은 동식물이나 자연물을 사람으로 의인화 할 때 동적으로 표현하기 때문에 동작이나 동사 표현이 주를 이루고 있다고 하겠다. 이것은 운동성을 지니며, 그가 모든 우주만물이 유기체이며 생성, 발전, 소멸 등의 변화를 하는 것이라는 인식의 바탕에 있기 때문이다. ‘함박눈=나’는 당신을 위해서라면 충복이 되겠다는 사랑의 서약을 하는 관계이다. 이 표현은 「오랑캐꽃」과 「겨울바람」에서와 같이 사랑하는 연인의 관계로 사람으로 의인화하여 표현되고 있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두 번째로 동식물, 자연물, 사물을 통해 영적 교감을 이루는 시편들이다.   서 있는 나무는 서 있어야 한다. 앉고 싶을 때 눕고 싶을 때 앉지도 눕지도 못하는 서 있는 나무는 내내 서 있어야 한다. 늪 속에 질퍽한 어둠 덕지덕지 달라붙어 지을 수 없는 만신창이가 될 지라도 눈을 가리고 귀를 막고 입을 봉할지라도, 젖은 살 속으로 매서운 바람 스며들어 마디마디 뼈가 시려 올지라도 서 있는 나무는 시종 서 있어야 한다. 모두가 깔깔 거리며 몰려다닐지라도, 모두가 오며가며 얼굴에 침을 뱉을지라도 서 있는 나무는 그렇게 서 있어야 한다. 도끼자루에 톱날에 이 몸 비록 쓰러지고 무너질지라도 서 있는 나무는 죽어서도 서 있어야 한다. 그렇다 해서 세상일이 뒤바뀌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세상일이 뒤바뀌는 건 아니지만 서 있는 나무는 홀로 서 있어야 한다. 서 있는 나무는 죽어서도 서 있어야 한다. -「서 있는 나무」, 『안암동 日記』에서   나무는 하늘을 바라보고 서 있다. 나무의 서 있는 모습을 사람에다 의인화하여 불의한 어둠으로 피해를 입어 병들고 만신창이가 될지라도, 누군가가 눈과 귀를 가려서 사고와 판단을 마비시킬지라도 매서운 바람으로 상징되는 고통의 시련 속에서도 나무는 서 있어야 한다. 누군가 무리지어 나무의 얼굴에 조소와 경멸, 조롱을 하며 침을 뱉을 지라도 서 있어야 한다. 목숨을 위협 받아 도끼에 찍혀 쓰러져 무너져 생명이 다할지언정 나무는 죽어서도 서 있어야 한다. 이 의미는 정의와 진리를 위해 죽음까지도 불사르는 나무의 모습을 의인/투사로 의인화한 시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그가 하나 죽어서 세상이 바뀐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그렇게 서 있는 사람이 없을 때 불의는 어느 새 우후죽순처럼 고개를 내민다. 인간의 욕망이 끊임없이 자라는 것처럼. 의인/투사는 외롭고 고독하다. 조롱과 억압을 받는다.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목숨마저 내놓아야 한다. 죽어서도 그 영혼이 편히 누워서 잠들 수 없다. 그러니 죽어서도 서 있어야 한다. 누워 있지 않고 서 있는 것이 본질인 나무에다 의인/투사와 같은 사람을 의인화한 시이다. 이 시는 식물을 통해 그 나무의 본질을 통찰함으로써 얻어지는 영적 교감을 시를 표현한 예이다. 이와 같은 시편인 「벚꽃 지는 날」을 읽어 보자.   간밤에 마음과 마음이 통했는가?   아주 가벼웁게 바람의 잔등을 올라타는 저 수수만의 꽃잎들이 추는 군무(群舞)가 마침내 반짝거리는 큰 물결을 이루어 가는 것이,   그 모습 눈이 부셔 끝내 바라볼 수 없고 그 자태 어지러워 끝내 서 있을 수도 없는 나는, 한낱 대지 위에 말뚝이 되어 박힌 채 그대 유혹의 불길에 이끌리어 손을 내어 뻗는 것이,   간밤에 마음과 마음이 통했는가?   아주 가볍게 몸을 버려서 하늘을 나는 꿈을 꾸는, 저 흩날리는 꽃잎들의 어지러운 비상(飛翔)! 그 마음 한가운데에서 일어나 소용돌이치는 법열(法悅)의 불길을 와락 끌어안는다, 나는.   -2003. 4. 22. 00:5 「벚꽃 지는 날」, 『상선암 가는 길』에서   이 시에서는 ‘간밤에 마음과 마음이 통했는가?’라는 물음의 시 구절이 제1연과 제4연에 반복 배치되어 있다. 그의 주요 기법의 하나인 반복을 배치하는 데에는 시적 화자가 지는 벚꽃과 바람의 작용으로 마음속의 법열에 이르게 되므로 그렇게 질문을 던져 보는 것이다. 2연에서 바람도 벚꽃도 사람으로 표현되고 있다. 그 이유는 바람이 잔등을 지니고 있고 벚꽃은 그 잔등에 사람처럼 올라타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람의 잔등에 올라탄 벚꽃 잎들은 군무를 춘다. 그것이 마침내 강물의 물결이 된다. 시적 화자는 제3연에서 황홀하여 손을 내어 뻗어 잡고자 한다. 그러면서 한 번 더 ‘간밤에 마음과 마음에 통했는가?’라고 벚꽃과 바람에게, 시적 화자 자신과 벚꽃/바람에게 물어본다. 그러나 법열에서 알 수 있듯이 시적 화자 나는 이 바람에 의한 꽃잎들의 눈부신 비상 속에서 한 깨달음을 얻는다. 아주 가볍게 몸을 버릴 때에야만 눈부신 비상이 가능하다는 것을. 이 가벼움은 마음의 탐욕과 번뇌를 모두 불 태우워 끄고 비워야 가능한 일이다. 바람으로 인한 벚꽃의 군무를 하염없이 바라보면서 시적 화자의 마음도 무거운 육신(색계/ 현상계)을 버려 가벼워졌기에 법락의 불길이 소용돌이 쳐 일어난다. 그러니 간밤에 시적 화자의 마음과 이 벚꽃의 마음이 통하였나 보다. 이 시는 바로 벚꽃이라는 식물과 자연물인 바람 속에서 법열이라는 영적 교섭을 통하여 ‘간밤에 마음과 마음이 통했는가’ 하고 질문을 던질 수 있는 경지의 시이다.   시「有無同體」의 “집착이요, 욕심이요, 욕망의 덩어리”인 나의 역사를 뒤바꾸는 거룩한 힘은 시인의 눈에 보이는 사물들과 더욱 깊은 관계를 맺음으로써 일어난다. 대상을 나와 동일시하거나 대상과의 소통과 교감이 이루어질 때 대상에 몰입하게 되고, 대상이 건네 오는 말을 들을 수 있게 된다. 소통과 교감은 자기를 비워둘 때 가능한 일이다.   두 눈을 지그시 감고 두 눈을 지그시 감아 버리고서 뛰어내리라 하네. 뛰어 내리라 하네.   치마를 뒤집어 씌고 천 길 벼랑으로 떨어지며 춤을 추는 저 붉디붉은, 작은 복사 꽃잎들처럼 날더러 뛰어 내리라 하네. 뛰어 내리라 하네.   네 깊고 깊은 미소가 피어나는 無心, 無心川으로 뛰어 내리라 하네. 뛰어 내리라 하네.   -「芙蓉抄」부분, 『상선암 가는 길』에서   무심이란 마음의 번뇌와 업장이 소멸된 적멸보궁의 상태를 말한다. 그래서 무아(無我)라고도 한다. 번뇌와 업장을 소멸 시키는 길은 나를 지우고 비우는 길밖에 달리 방법이 없다. 욕망과 욕심 덩어리인 주체를 지우기 위해서는 주체의 산화 즉 복사꽃이 천 길 벼랑으로 낙화하듯이 자기를 던지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자연의 꽃들은 때가 되면 피었다가 때가 되면 말없이 낙화한다. 인간만이 이 떨어짐, 자기 지우기를 하기가 힘들다. 왜냐하면, 주체의 욕망의 역사는 쉽게 자기포기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이 자연의 이법에 따라 살려고 한다면 번뇌와 업장의 소용돌이에서 해방되어야 하며, 그 길은 무심의 경지, 자기 비우기에 이르는 길이다. 이 시에서 시적 화자는 자신을 비우고 연꽃이 말을 걸어오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다. 시적 화자 ‘나’가 사물이나 자연물에 말을 걸기보다 그쪽에서 말을 걸어오는 것을 중점으로 쓴 시이다. 그쪽의 말은 ‘뛰어 내리라’이다. 이 시 구절이 여섯 번이나 반복되고 있는 점에서도 뛰어내림의 의미가 강화되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겹치지는 역사의 한 장면을 기억해 낸다. 의자왕의 삼천궁녀다. 그 궁녀들이 임금이 죽게 되자 임금을 따르는 마음으로 목숨을 버리고 낙화암에 떨어져 죽었다는 전설이다. 낙화암의 전설처럼 그 꽃 같은 여인네들이 목숨을 강물에 던진 것을 지는 복사꽃에 비유하면서 무심의 경지로 뛰어내리라고 부용이 시적 화자에게 말을 걸었으리라. 세 번째로 인간, 동식물, 사물 등에 성장, 발달하는 경향을 내재하고 있다는 인식을 보여 주는 「사하라 사막에 서서」를 읽어보자.   일 년 삼백육십오일 내내/비 한 방울 내리지 않는/이곳에 서 있는 산은 서 있는 채로/누워 있는 돌은 누운 채로 깨어지며 부서지며/모래알이 되어가는/숨 막히는 이곳에 아지랑이 피어오르고/간간이 바람 불어/모래알 날리며/뜨거운 햇살 내려 쌓이네. 수수만 년 전부터/그리 실려 가고/그리 실려 온 바람도 쌓이고/적막도 쌓이고/별빛도 쌓여서 웅장한 성(城) 가운데/성을 이루고/화려한 궁전 가운데/궁전을 지었네그려. 나는/그 성에 갇혀/깨끗한 모래알로/긴 머릴 감고, 나는/그 궁전에 갇혀/순결한 모래알로/구석구석 알몸을 씻네. 검은 돌은/검은 모래 만들고/붉은 돌은/붉은 모래 만들고/흰 돌은/흰 모래를 만들어내는 이곳 단단한/시간에 갇혀/나는 미라가 되고 이곳 차디찬/적막에 갇혀/그조차 무너지고 부서지며 마침내/ 진토塵土 되어/가볍게 바람에 쓸려가고/ 가볍게 별빛에 밀려오네.   -「사하라 사막에 서서」, 『몽산포 밤바다』에서   이 시에서는 두 가지의 성장, 발달을 보여주고 있다. 하나는 자연물로서의 사막은 산과 바위, 돌이 풍화되어 이루어진 곳이다. 이 자연물의 풍화 속에는 시간과 공간의 이동이 전제가 되었다. 광대한 사막에서 시인은 웅장한 성을 본다. 이것은 자연이 빚은 성이지 사람이 축조한 성이 아니다. 오랜 시간을 거쳐서 이루어진 성에서 시적 화자 나는 깨끗하고 순결한 모래로 머리를 감고 알몸을 씻는 영혼의 정화와 재생을 꿈꾼다. 이것이 다른 하나의 성장이다. 즉 시적 화자의 영적 성장이다. 이 시에서 시인은 비로소 자신도 자연물, 사물도 우주의 시간의 흐름 속에서 성장, 발전, 소멸하는 것을 체득한다. 이것은 하나의 영적 성장이다. 이 세상에 생멸을 하지 않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 그것이 현상계의 이법이다. 여기에서 그 어떤 우주 만물도 비껴갈 수가 없다. 시인은 미라가 되고 진토로 변화되는 자신의 미래를 바라본다. 이 우주에 존재하는 것은 모두 이렇게 되게 되어 있음을 사막의 성에서 그는 깨닫게 되어 영적 진보를 이루는 것이다. 시적 화자는 남성이 아니라 여성으로 되어 있고, 사막은 하나의 웅장한 성으로 되어 있어서 남성으로 의인화 되어 있다. 사막이라는 남성과 거기의 단단한 시간과 차디찬 적막에 갇힌 나는 여성으로서 머리를 감고 알몸을 씻는다. 이 때 사막은 성(城) 속의 거대한 욕탕이 된다. 모래알들은 물이 되어 나의 몸을 씻어준다. 사막이 성과 욕탕이 되고, 나는 알몸인 채 그 모래 욕탕물에 몸을 담근다는 것은 사막과의 결합을 말한다. 사막은 의인화되어 나를 정화 시키고 재생시키며 또 미라가 되게 하고 진토가 되게 하는 자연물이다. 즉 나의 생멸을 관장하는 자연물이다. 이 시에서 인간이 자연의 일부분이며, 자연과 상즉상입하는 존재임을 시인은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그것이 사막 시편들에서 이시환 시인이 체득한 깨달음이다. 거대한 사막에 비해 인간은 한낱 보잘 것 없는 존재임을, 인간은 우주만물들과 상즉상입할 때 우주와 교감하고 친교를 나눌 수 있으며, 사물이나 자연물, 동식물이 건네 오는 말을 알아들을 눈과 귀가 열린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인이 먼저 걸어간 삶의 여정처럼 생멸을 자연 이법에 맡기며 인간으로서의 삶을 상생의 우주 의지와 부합하면서 자기를 비우고 그들의 말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이시환 시의 물활성은 바로 자연물과 사물, 동식물을 의인화하여 이쪽과 저쪽의 경계를 허물고 상즉상입하는 데에서 이루어진 교감과 친교에 있었다. 그가 사용한 활유법이나 의인법은 자연스럽게 그들과 대화하는 과정에서 이쪽에서 보고 묻고 들은 것이나 저쪽에서 그에게 말을 건네 온 것들이었다.   ///////////////////////////////////////////////////////////////// 당근과 채찍의 역학 -이시환의 제7시집 『우는 여자』를 읽고     “저의 고통, 부자유는 민족의 그것과 일치․일체 되어 있고, 민족이 고통․불행․부자유에서 구원되었을 때, 나도 거기에서 해방되겠지요.”(1973년 3월) 이 글은 이른바 ‘서씨 형제’사건으로 투옥된 재일한국인 서승의 말이다. 1973년 3월 서울 구치소에 수감 중 한 말이다. 13년 후 그는 대전교도소에서 남긴 편지글에서 “벌써 봄이다. 3층에 있는 나의 방에서 보이는 산야는 아직 황량한 황야의 풍경이긴 하지만, 밝고 강한 햇살에 흙이 녹아서, 얼마 안 있어 강인한 들풀이 싹을 틔울 것이다. 신생新生이 이 세상에 가져다줄 것을 절실하게 기원하면서.”(1986년 3월) 70년대의 민주화운동의 흐름 속에서 서승․서준식 형제의 투옥은 한국사회와 일본사회에 큰 이슈를 던져 주었다. 무려 17년간의 긴 투옥생활 중 정치권의 민주화․반미투쟁선언을 하며 51일간의 단식투쟁(헝거 스트라이크)도 하였다는 사실과 ‘비전향’을 이유로 장기 독방 수형생활을 집행당하여 인권원칙에 반하는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 또한 부단한 전향 강요 속에서도 남북통일과 민주주의를 구하는 신념으로 거부하였다. 신체적․정신적 고통과 부자유를 민족의 그것과 동일시하면서 민족이 고통․불행․부자유에서 구원되었을 때 자신도 거기에서 해방될 것이라고 말하였다. ’87년의 대통령 직선제가 이루어지는 한 해 전인 ’86년 3월에 그는 서울의 봄과 함께 신생과 희망을 3월의 황량하고 차가운 감방에서 내다보았다. 서승에게 민족은 자신과 동일하다. 1973년 3월 13일에 무기징역의 판결이 확정되어 길고 긴 옥중 생활을 보낸 그에게 국가보다 민족이 우선이었다. 이 형제들은 1971년 4월에 반공법․국가보안법위반 등 혐의로 무기징역을 언도 받아서 17년만인 1988년 5월 25일 주거제한 처분의 조건이 붙은 상태로 동생 준식 씨가 먼저 출옥했다. 1988년 5월 25일 아사히신문 석간에서 ‘서씨 「40세의 날」의 자유’라는 제목으로 그의 출옥 소식이 보도되었다. 루이 알튀세르(Louise Althusser, 1918-1990)는 이데올로기와 무의식을 접목하면서 국가를 만들어진 거대한 조직으로 보면서 그 예로 서양 중세의 그리스도교 신국(神國)의 이데올로기와 체제를 들고 있다. 근대 국가의 기초가 이 중세의 신국과 그 시스템이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국가의 작동원리를 두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하나는 폭압적인 국가기구(RSA)와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ISA)이다. 전자는 군대, 경찰, 사법기관, 교도소, 병원 등의 기구들이고 후자는 교육, 문화, 스포츠, 매스컴 등이 이에 속한다. 국가 시스템의 유지는 이 두 개의 기구에 의해서 작동된다고 한다. 그러니 국가가 그 구성원인 국민을 길들이는 방법은 바로 이 두 기구를 통해서 이루어지므로 한 국가의 국민이 그 국가의 정권에게 자신들의 권력을 선거를 통하여 이양하면서도 그 행정력에 지배를 받는 것이다. 이것이 대의민주주의의 시스템이다. 당근과 채찍은 국가가 국민을 길들이는 방법임을 알튀세의 구분에서 찾는다. 서씨 형제들에게는 민족이 존재하지 국가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일본사회에서 재일한국인으로서의 사회적 차별과 모국의 통일을 민족에서 찾는다. 그들에게는 민족의 통일이 있지 남과 북 어느 한쪽의 국가나 정권은 투쟁의 대상이리라. 이시환의 제7시집 『우는 여자』(2003)는 ‘풍자, 비꼼, 웃음, 모순(satire)’의 기법이 두드러진다. 그가 비꼬는 대상은 무엇인가에 중심을 두며 이 시집을 읽어야 한다. 그가 ‘일러두기’에서 “겉으로 드러난 편 편의 의미에 대해 너무 집착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자칫, 천박한(?) 섹스 탐닉주의자나 비도덕적인 인간의 배설물로 내비칠 수 있으니까 말이다.”라고 부드러운 경고의 말을 하면서 이 시집을 읽는 독자들이 세상과 인간을 보는 눈의 ‘개안 내지는 개벽’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이 한 권의 시집을 통하여 세상과 그 세상을 이루는 인간에 대해 마음의 눈이 열린다는 의미는 얼마나 큰가? 어떻게 세상과 인간의 본질을 이 한 권의 시집으로 다 파악할 수 있겠는가? 그럴 수만 있다면 이 시집은 과연 성공한 시집이 될 것이다. 이 시집이 독자들에게 팔리고 안 팔리고의 문제가 아니다. 물론 팔려야 많은 이들이 개벽․개안을 하는 것이지만 불행하게도 우리 사회에서 얼마나 시집이 많이 팔릴 수 있을까? 여기에는 회의적일 수밖에 없다. 시인이 시집이 많이 팔려서 먹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시를 쓰는 것을 취미로 하지는 않는다. 먹는 것을 마련하고 시를 여기로 쓰는 것은 더욱 아닐 것이다. 시를 쓴다는 것은 무엇인가? 한 시인이 세상과 인간을 바라보면서 그가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고자 한다. 이 소통에 대한 원의를 담은 시가 얼마나 잘 제조되었고 얼마나 출판전략이 좋았느냐에 따라서 판매부수가 올라갈 수는 있다고 해도 여전히 시를 읽은 사람은 적다. 시를 쓰거나 시를 연구하거나 시를 가르치거나 시를 특별히 좋아하는 독자들에 한해서 시집은 유용할 것이다. 그럼에도 시인은 밥이 되지 않는 시를 쓴다. 왜 그는 시를 쓰는가? 시를 써서 밥이 되지는 않으나 여가생활, 명예 추구, 인간 사이에서 고독함, 세상과의 길항, 자신의 존재론적 고뇌 등과 같은 이유로 인해서 쓰는 것일까? 아니면 인간의 부정적인 감정들을 정화하기 위해서 쓰는 것인가? 아니면 뭔가의 목적성을 띠고 시라는 형식을 통하여 대중에게 선전, 선동하여 사회를 개혁하고자 하는가? 여러 가지 이유에서 시인은 쓰는 것임에 틀림없다. 이시환 시인은 이 시집의 자서에서 “여기 실리는 시들의 대부분은, 2002년 12월 30일 오후 시간부터 쓰기 시작하여 2003년 1월 5일 새벽 사이에 걸쳐, 그러니까 약 7일간 다 썼던 것으로, 내 생애 처음 있는 기이한 일”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 자서의 글에서 유추되는 바, 이 시집의 시들을 쓰기 전에 이시환 시인은 이렇게 많은 시편들 -정확히는 118편- 을 완성한 적이 없다는 의미이다. 이렇게 많은 양의 시를 약 7일간의 짧은 시간에 다 쓰는 일은 그의 시업 중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는 기이한 일이었던 것이다. 그가 이렇게 짧은 시간에 마치 자동기술처럼 내면의 솟아오르는 무언가를 게워내는 데에 7일을 걸려 다 게워내었다는 의미이다. 시인은 7일간의 어쩌면 긴 배설을 하였다. 그런데 어떤 배설인가? 배설 이전에는 어땠는가? 배설 이전에 비해 배설 이후에 어떤 느낌이 그에게 찾아왔을까? 시원함일까, 허탈함일까 아니면 후회감일까 만족감일까 이것 또한 독자의 입장에서 궁금한 사항이다. 좌우간 그에게는 시원함과 만족감이 찾아왔지 않을까 추측한다. 그 배설의 힘은 어디에 있었을까? 필자에게는 그것이 ‘비꼼’의 전략에서 그 비꼼이라는 틀 속에 집어넣어서 돌리니 이렇게 많은 시가 쏟아져 나온 것이라고 본다. 이 시집의 시편들은 그런 비꼼의 기법에서 오는 힘을 받은 것이다. 그러니 서정시의 무거운 감성의 외투가 사라진다. 가벼운 말들이 가볍게 쏟아지는 느낌으로 이 시는 술술 넘어간다. 이렇게 술술 새어나오는 내면의 시의 방에서 두루마리 화장지가 술술 풀리듯 그는 한없이 허옇게 풀려진다. 그가 풀어낸 말들의 화장지가 어디까지 닿을 것인가? 그의 이 말들이 얼마만큼의 내압에 견디지 못하고 가공할 속력으로 분출되었으며 그 말의 분사가 어느 범위까지 뿜어졌느냐는 중요하다. 그러니까, 아래로는 한없이 설사처럼 배설하고 위로는 한없이 게워낸다. 복부의 위장과 7미터의 소장과 대장에 순대 속처럼 꽉꽉 채워져 있는 것은 그의 영혼에 정신에 마음에 둥지를 트고 서식하거나 기생하고 있는 무의식과 전의식, 의식하는 단계의 모든 말들이리라. 이 말들은 어떤 의미나 기호를 정확히 가지지 않는 말과 감정이 뒤섞인 것이거나 말이 되기 전 단계의 감정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것들을 쏟아낸 것이 바로 그의 시가 된 것이다.   세상엔 그런 여자도 있다. 세상엔 그런 풀꽃 같은 여자도 있다. 오르가즘이란 산의 7부 능선만 올라가도 신음 대신 간헐적으로 울기 시작하는 여자. 8부, 9부, 정상에 가까워질수록 슬픔의 바다를 토해 놓듯이 허허벌판에서 엉엉 우는 여자. 그녀의 입을 한 손으로 틀어막으면서 더욱 힘 있게, 더욱 깊숙하게, 더욱 빠르게 구석구석 몸 안에 퍼져 있는 불씨에 불을 댕기면 그녀의 험준한 계곡에선 쏟아지는 폭포수 소리가 들린다. 분명 이 세상을 처음 나올 때의 울음소리보다 더욱 격렬하고, 더욱 원시적인, 기쁨과 슬픔이 분화되기 전의 울음을 천지간에 쏟아놓는 여자. 세상엔 그런 여자도 있다. 세상엔 그런 풀꽃 같은 여자도 있다. -「우는 여자․・2」전문   이 시에서의 여자처럼 이시환의 시편들은 세상을 향하여 사람들을 향하여 운다. 이 울음은 괴이하고 신기하고 이해할 수 없는 울음으로 슬픔과 기쁨이 분화되기 전의 울음이다. 슬픔인지 기쁨인지도 모르는 어정쩡하기도 하고 알 듯도 말 듯도 한 그런 울음이다. 그러므로 이 여자는 바로 시인 자신이다. 「우는 여자․1」에서처럼 ‘구석구석 알몸 속으로 숨겨진 슬픔의 씨앗들이/이성적 제어력이 약해진 틈을 타/일제히 싹을 틔우며 몸 밖으로 나오는 탓일까./라고 하여 이 여인은 아무리 말려도 울음을 멈추지 않는다. 바로 이 시 구절에서와 같이 시인의 무의식과 전의식 그리고 의식은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다. 이것은 멈출 줄 모르는 대량생산 체제의 컨베이어 벨트에 실린 부품처럼 낱낱이 하나의 몸체로 조립되기 전의 모습으로 계속 쏟아져 나오는 것이다. 이 시집의 시편들은 그런 컨베이어 벨트에 실린 시인의 무의식과 전의식 그리고 의식이 각각 언어로 조립되기 위하여 계속 쏟아져 나오는 것들로 가득하다. 그러니 생리적으로는 약 7일간의 긴 배설이지만 역사적으로는 그의 반생 동안 쌓인 것의 배설이니 짧은 배설의 기간에 죄다 쏟아놓은 것이라 하겠다. 그런 그의 시가 비꼼을 통해서 쏟아졌기에 더 폭발적으로 짧은 시간에 긴 배설을 할 수 있었다는 의미이다. 이 배설은 큰 소리로 엉엉 우는 대성통곡, 잔 울음인 흐느낌, 적당한 소리를 지닌 울음, ‘기쁨과 슬픔이 분화되기 전의 울음’, 교성, 땀, 여성의 분비물, 남성의 정액, 몸냄새, 눈빛, 토사물, 똥, 오줌 이런 것들이 모두 섞인 것들이다.   어인 일인가? 오늘은 유별나게 도로가 막히고 지하철조차 돼지 창자로 만든 순대 속이 떠올려질 만큼 미어 터진다. 알고 보니 오늘은 크리스마스 이브. 다들 신촌으로, 신천으로, 영등포로, 강남으로, 대학로로 몰려가 술 마시고, 노래 부르고, 춤을 추다가, 눈이 맞은 자들은 여관으로, 모텔로, 비좁지만 탄력 있는 자신들의 승용차 안으로 기어들어간다. 이 날 밤, 자지러지던 이무기들의 즐거운 비명이 현란한 네온사인 불빛 속으로 꿈틀거리며 기어 나와 발에 밟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근심 어린 얼굴은 어디에서도 보이질 않는다. 이날 밤, 여성들의 사타구니 밑으로 사정(射精)했던 남성들의 고단백질을 칼로리로 환산한다면 과연 얼마나 되며, 그 에너지로 빌딩을 세우듯 이 땅에 평화를 세운다면 어찌 될까? 크리스마스이브에 정작 우리 곁에 계셔야할 예수 그리스도는 어딜 가시고, 질척거리는 죄인들의 욕망만이 골목골목에서 성(城)을 쌓는구나. -「크리스마스이브」전문   「크리스마스이브」는 풍자나 비꼼을 지나서 웃음을 자아낸다. 이시환이 이 시집에서 보여주는 전략은 바로 이 시에서 나타난다고 하겠다. 세타이어(satire)란 비꼼과 풍자, 웃음, 모순을 말한다. 그는 거룩하며 고요하고 평화로워야 할 크리스마스는 어디가고 없는 현실을 이렇게 남녀 간의 성 풍속도를 통하여 모순되고 부조리하며 타락한 세상을 비꼬고 풍자한다. ‘남성들의 고단백질을 칼로리로 환산’이라는 우스꽝스러우면서 그로테스크리얼리즘의 기법을 정사의 모습을 통해 웃음을 자아내게 하고 여기에서는 성에 있어 우위의 점하고 있는 남성성을 뒤집으면서 비꼬고 있기도 하다. 빌딩은 남근 상징이며 사정, 고단백질 칼로리, 거짓되며 타락한 이 땅에는 사회적 정의의 결과인 진정한 평화가 존재하지 않음을 고발한다. 그러니 ‘지하철조차 돼지창자로 만든 순대 속을 떠올릴 만큼 미어터지는’ 타락한 인간들이 흥청거리며 욕망의 불꽃을 이리저리 몰려다니며 마치 개떼들의 교미처럼 인간의 동물성을 발가벗기고 그런 질척거리는 인간들의 욕망만이 뒷골목의 어둔 곳에서 성을 쌓는다고 개탄하고 있다. 빌딩과 성(城), 이무기(뱀)는 모두 남성성을 상징하고 있고, 그것의 욕망만이 넘치니 임마누엘 예수 그리스도는 부재한다는 의미의 시이다. 이러한 욕망의 메커니즘은 새디즘[sadism]과 매저키즘[masochism]의 구조로 되어 맞물려 돌아가고 있다. 이러한 힘과 권력의 역학이 남성과 여성, 국가와 국민, 개인과 전체의 사이의 구조로 작동되는 욕망의 메커니즘이다.   짓밟아 주세요. 짓밟아 주세요. 이 편안함과 안락함보다 고통이 더 짜릿한 내 몸 안의 푸른 생명의 바다로 하여금 고개를 들게 해줘요. 제발, 내 안의 나를 일으켜 주세요. 인정사정없이 나를 짓밟아 줌으로써 내 안의 나를 깨워 주세요. 이 혹한을 거든히 이겨내는 보리싹처럼 나를 짓밟아 주세요. 나를 짓밟아 주세요. -「눈으로 말해요」전문   이 시에서 시적 화자는 편안함과 안락함을 거부하고 오히려 고통을 받는 쪽을 욕망한다. 이 욕망은 매저키즘의 원리이다. 이 욕망을 답청(踏靑)에 비유한 시다. 그 목적은 ‘내 안의 나’를 깨우기 위해서이다. 굼벵이는 밟아야 꿈틀댄다고 한다. 밟히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는 굼벵이보다 밟힘으로서 꿈틀대는 굼벵이가 되고자 한다. 그 이유는 편안함과 안락함을 버리고 내 몸 안의 푸른 생명의 바다가 고개를 들게 하고 내 안에 잠자는 나를 깨우기 위한 것이다. 종교적 고행이 자신의 신체를 통해 육신을 넘어서 자기를 버리고 영원한 생명의 진리를 구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이러한 피학적 욕망은 새디즘과 함께 맞물려 돌아가는 것으로 남과 여, 국가와 국민의 관계와 같은 상징계의 질서에서 툭툭 터져 나오는 것이다.   채찍과 당근이라, 참 좋은 말이지. 그리 좋아하는 당근은 주지 않으면서 채찍만 가해 보라. 말 못하는 말도 화를 내며 그대를 거절할 거야. 그렇다고 당근만 배불리 먹여 봐라. 네가 가야할 때는 몸이 무거워 잘 뛰지도 않을거야. 그러니 적당히 당근을 먹이면서 채찍을 가하는 게 좋아. 이것은 말 타는 녀석이 말에게나 하는 짓이지. 그런데 요즈음 이 당근과 채찍이, 국가와 국가 사이에서도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도 남자와 여자 사이에서도 그대로 적용되는, 아주 편리한 공생의 원리가 되고 있잖아? 미국의 부시가 북한의 김에게, 조폭의 두목이 아랫것들에게, 가진 자가 못 가진 자에게 즐겨 쓰는 민주적 방식이니 채찍과 당근이라, 참 좋은 말이지. 스스로 말(馬)이 되고자 하는 사람이 많으니 그 말을 타고 달리려는 이도 있게 마련 아닌가 -「채찍과 당근」전문   당근과 채찍을 적당히 가하면서 굴러가는 시스템을 조롱하는 이 시는 국가/국가, 사람/사람, 남자/여자, 미국의 부시/북한의 김, 두목/아랫것, 가진 자/못 가진 자, 말이 되고자 하는 사람/말을 타고 달리려는 사람의 역학 관계 속에서 즐겨 쓰는 민주적 방식이 바로 당근과 채찍이다. 민주주의의 체제가 지니는 겉과 안을 드러내어 그 결함 부분을 꼬집고 있다고 하겠다. 그리고 스스로 말이 되고자 하는 사람과 짓밟히기를 바라는 피학적 욕망은「당신은 천사 나는 죄인」에서 “분명 내가 너에게 먹히고 싶었다./그 순간부터 나는 너의 노예가 되고 싶었고./나는 너의 순종하는 종이 되고 싶었다.”라고 시적 화자는 부르짖고 있다. 그래서 시인은 정치와 남녀 간의 섹스가 한 통속의 역학 관계의 구도에 있음을 말한다.   정치와 섹스는 한 통속이다. 여러 사람을 상대로 거짓말을 해도 그럴 듯하게 해야 통하는 정치와 섹스는 단순하지만 남자들을 현혹시키는 힘이 있다. 정치와 섹스는 한 통속이다. 한 여자를 다루는 데에도 정치적 판단과 제스추어가 필요하듯 많은 사람들을 기만하는 데에도 한 여인을 다루듯 충분한 배려가 있어야 한다. 정치와 섹스는 한 통속이다. -「정치와 섹스」전문   생 텍쥐페리는 동화 『어린 왕자』에서 상징질서의 ‘길들이기’를 여우를 통해 어린 왕자에게 ‘관계를 맺는다’는 의미라고 가르쳐준다. ‘관계를 맺는다’는 의미를 여우는 다음과 같이 설명해준다.   넌 아직 나에겐 수많은 다른 아이들과 똑같은 꼬마아이에 불과해. 그러니 나는 너를 필요로 하지 않아. 그리고 또 나 역시 너에게 아직 수많은 다른 여우들과 똑같은 한 마리 여우에 지나지 않아. 하지만 네가 나를 길들인다면 우리는 서로를 필요로 하게 되지. 너는 나에게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아이가 될 것이고, 나는 너에게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여우가 되는 거지…   정치와 섹스 역시 길들이기이며 동시에 관계 맺기이다. 여우와 어린 왕자는 일대일의 관계 맺기를 통하여 서로에게 길들여지고 여우를 친구로 얻은 어린 왕자는 여우의 지혜를 통해 자기 별에 두고 온 꽃과 관계회복을 하는데 실마리를 제공받는다. 수 천 송이 꽃과 어린 왕자가 자신의 별에서 애정을 보인 꽃과는 다르다는 의미도 그 꽃이 바로 어린 왕자의 꽃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국가와 국민의 관계인 정치는 이시환 시인에게는 하나의 기만에 지나지 않는다. 기만하며 길을 들이는 것이거나 깃대를 꽂고 따르라는 프로파간다에 지나지 않는다. 스스로 말이 되고자하는 민주주의의 인민들은 이 당근과 채찍의 맛에 길들여져 있을 뿐이며 주체로서의 자리매김 되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한국 사회의 경제 시스템인 자본주의의 추악한 몰골을 “그의 가벼운 입술과/그의 얕은 머릿속은 천박하기 짝이 없네.”라고 일갈하면서 “열리고 닫힘이 따로 없고/어둡고 밝음이 따로 없는 곳에서나/그가 설 명분이 사라지려나.”라고 하여 민주주의의 존재론적 성찰을 들여다보게 한다. 민주주의는 닫힌 사회 어두운 구석이 여전히 있을 때 존립의 이유가 있을 뿐이지 열림과 닫힘이 따로 없고 어둡고 밝음이 따로 없는 곳에서는 그 설 명분이 사라질 것이라고 진단하고 있다.   세상 사람들은, 가장 깨끗해야할 정치판이 썩어 문드러졌다고들 말들 하지만 내가 보기엔 그 국민에 그 정치꾼이네 ...................................   지금 우리에겐 혁명이, 혁명만이 필요하네. 총칼로써 사람을 죽이고 권력을 휘어잡는 혁명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의 문제가 무엇인지 눈을 바로 뜨게 하는 그런 혁명이 필요하네. 그런 뉘우침과 깨우침이 필요하네. ............................... 이제 우리는 무엇을 믿고 , 무엇에 힘을 얻어 살 것인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혁명, 혁명뿐이라네. 썩은 부분을 도려내고, 그 자리에 새 살이 차오르게 하는, 그리하여 우리의 건강한 삶과 미래를 보장해 주는 그런 혁명, 혁명만이 필요할 뿐이네. -「우리에겐 혁명만이 필요해」부분   주위의 사람들에게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행동을 일삼는 부부를 보고 주위의 사람들은 그들을 ‘똑같으니 살지’라고 말한다. 서로를 길들인 결과 그들은 둘이면서 하나의 정체성을 가진다. 한 국민은 그의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가진다고 한다. 이시환 시인은 권력을 잡기 위한 혁명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의 문제’에 눈을 바로 뜨게 하는 깨끗한 혁명이 이 시대에 요구된다고 한다. 그러므로 시인으로서의 이시환은 「나를 건드리지 마」에서처럼 ‘폭발 직전의 침묵’으로 머물고자 한다. 이 폭발 직전의 침묵이란 혁명 전야의 고요함이 될 것이며, 우리의 눈을 개안하고 천지가 개벽하는 시의 씨앗들을 내장한 것이다.   나를 건드리지마. 내가 입을 열면 세상이 발칵 뒤집혀서가 아니다. 누군가 나를 건드리면 내가 폭발하고 마는 부비추랩이거든. 나를 건드리면 내 몸 안에서는 시가 마구 쏟아져 나와. 그 알몸의 시들이 다시 새끼들를 마구 쳐대어 방심하다가는 그놈의 시들에 내가 압사당하거나 나의 진을 다 빼앗기어 시들시들 내가 죽을 수도 있거든. 그래서 나는 아직 시가 되지 못하는 말들을 가득 껴안고서 잔뜩 웅크려 부치고 있는, 폭발 직전의 고요가 더 좋아. 설령 세상에 시 한 편을 내놓지 못한다 할지라도 아직도 시가 되지 못하는 말들을 가득 품고서 잔뜩 웅크려 부치고 있는, 폭발 직전의 침묵으로 머물고 싶어. 나를 건드리지마. 내가 입을 열면 세상이 발칵 뒤집혀서가 아니다. -「나를 건드리지 마」전문   되짚으면 보면, 그가 약 7일간 썼다는 이 시집은 바로 침묵으로 일관하고자 하는 그를 건드리고 밟은 것이다. 무엇이 그를 건드렸고 밟아서 꿈틀대게 하여 그에게 내장된 부비추랩을 폭발하게 하였을까? 이 시집은 그 폭발로 마구 쏟아져 나온 시들로 가득하여 118편의 시를 약 7일만이라는 짧은 기간 내에 쓴 것이다. 시편들을 쏟아내게 된 폭발의 원인이 뭔가 수상하다. 다만 ‘70년대 모국의 민주화를 위해 폭압적인 기구에 탄압을 받으면서도 자신의 청춘을 바치고 신념을 견지했던 재일한국인 서승의 옥중 글처럼 필자도 황량한 사막이나 광야 같은 풍경 속에서도, 밝고 강한 햇살이 이 세상에 가져다줄 새 생명을 기원하면서” 글을 마칠까 한다.  
1169    詩作初心 - 牧人을 기다리며 / 반복의 미학적 시법 댓글:  조회:4026  추천:1  2016-03-12
주체의 소멸과 목인(牧人)을 기다리며 심종숙(시인/문학평론가)   주체성이란 인식이나 행위의 주체였던 그것들의 책임을 지는 태도가 있는 것을 말한다. 주체는 중국에 있어 천자의 체(體) 내지는 천자를 의미하고 있었으나, 명치시대 이후 ‘subject’의 역어로서 쓰이게 되었다. 니시다 기타로는 이것을 ‘subjectum’에 위치시켜 피히테의 실천적 자아의 의미로 하였다. ‘주관’이 지식적인 자아를 의미하는데 대해 주체는 가장 구체적이며 또는 객관적인 실재로서 인식이나 행위의 담당자로서 간주되었다. 본래 ‘subjectum’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기체[基體:hypokeimenon]의 역어로서 ‘substantia’와 동일계열의 언어이고, 질료, 형상, 양자의 종합체, 속성의 담당자, 판단의 논리적 주어 등을 의미하고, 중세에는 인식 밖에 실재하는 것에 관한 것이었다. 그것에 대한 것이 ‘지성에 투영된 것’, 표상으로서의 ‘objectum’이었다. 이 관계는 칸트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회에 이르는 근대에 있어 역전한다. 라이프니츠는 ‘subjectum’을 ‘혼 그 자체’의 의미로 사용하였다. ‘subjectum’은 인식활동을 담당하는 ‘주관’이 되고 ‘objectum’은 거기에 대한 대상, ‘객관’이 된다. 그리고 ‘subjectum’이 실천적인 활동의 담당자이기도 할 때, ‘주체’의 개념이 성립하는 것이다. 인간이 주체성을 확립하는 배경에는 데카르트와 같이 무엇에도 의존하지 않는 독립적 존재일 것이라는 비판적 정신이 있었다. 그것은 근대 휴머니즘을 낳고, 사상적 문화적 사회적 정치적 변혁의 원점이 되었으나, 정신과 물체, 마음과 신체를 대립시키는 이원론을 낳고 사물만이 아니라 마음의 실체성도 부정하는 영국 경험론에 대해 첨예화한다. 칸트도 그 마음의 실체화는 배척하면서도 주체성은 확보했으나 사물 자체는 한계개념으로 할 때에 의해서였다. 독일 관념론은 이 이원론의 극복을 절대자, 무한자의 사상에서 구하여 인간을 초월한 곳에 통일을 두었다. 헤겔은 진실된 것을 실체로 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로서 간주할 것을 제언하였으나, 그것은 주체성을 절대자에게 귀의하게 하는 의미였다. 근대적 자아를 보존 하면서 고대 중세의 몰의식적 실체와의 통일을 꾀하였다. 그것은 근대의 실체상실 상황에 대해서는 살아있는 인륜적 공동체를 창출하고, 판단의 논리적 주어에 대해서는 그것을 술어와의 상관관계에 있어 다루어 주관 객관의 대립에 관해서는 사물 자체를 주관과의 상관에 초래한 것이었다. 이렇게 하여 인간 주체를 포섭하면서 역사적으로 전개하는 절대자의 사상이 성립하는 것이다. 그러나 헤겔 이후 주체성을 인간 측으로 되돌리려고 하는 운동이 현저했다. 무엇에도 의존하지 않는 유일자를 설한 슈티르너의 에고이즘이 나타나 신의 본질을 인간의 본질로 하는 포이에르바하는 소외된 인간 본질의 회복을 가리키고, 마르크스는 포이에르바하의 감성적인 직관을 실천적 주체적 활동으로 다루어 근대세계에 있어 인간 소외로부터 해방을 추구하였다. 또 키에르케고르는 진리는 주체 속에만 있는 것으로 진실한 크리스트교 신자의 길을 추구하여 그를 조상으로 하는 실존주의는 실증과학과 합리주의의 융성에 대해 ‘실존’의 입장에서 주체성의 회복을 꾀하였다. 살아있는 창조적 생의 이해를 가리키는 생의 철학, 또 의식의 명증적 경험에 돌아가려고 하는 현상학도 주체성으로의 강한 지향을 나타내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주체성의 회복은 용이하지 않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근대인의 봉기란 프란시스 베이컨이나 데카르트가 표명한 것처럼 인간이 신을 대신하여 자연의 지배자, 주인 역할을 하는 것이었지만, 그것은 빛나는 성공과 발전을 가져오는 반면, 자연의 황폐를 불러일으켜 인간의 생존 환경 바로 그 자체를 위기에 몰아넣었다. 게다가, 가치관이나 의미의 기준을 애매하게 하고 인간의 진로를 불분명하게 했다. 니체가 말하는 니힐리즘의 상황을 ‘신의 죽음’을 추도하는 ‘불행한 의식’으로서 다루고 있으나 그 소생이 불가능하다고 판단될 때 구래의 인간을 극복한 ‘초인’의 탄생이 추구되었다. 그러나 고도의 과학 기술을 구사하는 현대의 지배 권력은 자연만이 아니라 인간도 조작적 지성의 대상으로 하여, 인간의 유대를 끊어 개개의 사람을 고립시키고 아톰화하고, 더 나아가 그 내면적 통일, 인격동일성(개체성)을 파괴하기에 이르고 있다. 호르크 하이머에 의하면, 그것은 인간의 자립성과 독립성을 강조한 계몽주의와 합리주의의 역설적인 귀결이고 ‘지배 원리의 변증법적 반전’에 다름 아니다. 근대인의 내적 분열을 헤겔은 ‘찢겨진 의식’으로 표현했으나 주체는 반드시 ‘코기토 에르고 숨cogito ergo sum’과 같이 투명한 의식의 존재감으로 안주할 수 없고 분열을 내재하고 동일성의 위기에 노출되어 있다. 이것을 사르트르는 ‘즉자’와 ‘대자’의 분열로, 정신분석학의 프로이트는 의식에 떠오르지 않는 무의식으로, 구조주의자 라캉은 자기중심으로 타자를 보는 것에 의해 고찰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인간은 무엇인가, 인간성의 부활과 유지 보호는 가능한가라는 물음으로 대두되어 근대주체주의의 반성이 다가온다. 하이데거는 인간을 존재의 주인이 아니라 그 목인(牧人)으로서 유럽의 ‘주체성의 형이상학’에 경종을 울리고, 생태학은 인간을 다시 생명계로서의 능산적(能産的) 자연=퓨시스의 안에 되돌려 놓으려 하고 있다. 또 유럽 내부에서 탈유럽의 자세를 낳고, 다른 문화에의 관심과 다원적 사고태도를 지속적으로 육성시키고 있다. 하이데거는 인간 즉 현존재는 자신의 존재의 극한인 죽음의 가능성을 예측함에 따라 비로소 자신의 일상성의 내면으로 되돌아간다고 설하고 시간의 근원현상을 장래로 한다. ‘나는 존재한다 sum'의 의미는 나에게로의, 나 이외의 사람에게로의, 사람 이외의 사물로의 ‘마음씀sorge'이다. 그러므로 하이데거에게 인간은 존재의 주인이 아니라 그것을 기르는 자 목자(牧者=목인)이다. 서양철학이 인간 주체를 무엇으로 보느냐에 초점을 두었듯이 ‘나’는 누구인가의 물음은 현대 인문학의 최대 화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나’는 구성된, 만들어진 나이다. 한일국교정상화 50주년 기념 한일 시인 교류회 -소통과 상생, 매개체로서의 시- 세미나에서 일본 측 시인으로 온 기타가와 도오루(北川 透)시인의 문예 평문 「시에서의 ‘나’와 ‘타자’에 관한 여섯 개의 메모」를 한국어로 번역하면서 그의 생각에 많은 공감을 하였다. 그 중에 말(랑그=언어 규범)을 사용하여 사물을 생각 하는 ‘나’는 “언어 활동(랑가쥬)에 의해 나는 ‘나’를 자각하지만 언어(랑그)는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타자’로서 존재하였고, 내가 태어나자마자 세계와의 위화와 동화를 표현하는 신체(파롤=발화)가 되어, ‘나’를 창조한다.”고 하였다. 그런 ‘나’는 비슷한 나는 얼마든지 있으나 동일한 나는 ‘나’ 외에는 아무도 없다. 이런 나는 창조될 때에 나와 ‘나’로 만들어진다. ‘나’는 어디까지나 상징질서 속의 주형된 ‘나’라면 나는 단수이며 ‘나’는 복수의 ‘나’이다. 그래서 말에 의해서 태어난 ‘나’는 같은 말에 의해 태어난 불특정 다수의 ‘당신’을 향해 시를 쓰고 있다. 우리가 무엇을 쓴다는 것은 잠재적인 독자를 대상으로 한다. 그 독자는 ‘당신’이다. 1926년 간행된 만해 한용운의 『님의 沈黙』에는 서문 격인 ‘군말’에서 시를 쓰게 된 이유를 “해 저문 벌판에서 돌아가는 길을 잃고 헤매는 어린 양(羊)이 기루어서 이 시를 쓴다”라고 밝히고 있다. 그러면서 그는 같은 군말에서 “「님」만 님이 아니라 기룬 것은 다 님이다. 중생이 석가의 님이라면 철학은 칸트의 님이다. 장미화의 님이 봄비라면 맛치니의 님은 이태리다. 님은 내가 사랑할 뿐 아니라 나를 사랑하느니라”라고 님의 정체성에 관하여 말하면서 만해에게 님은 “해 저문 벌판에서 돌아가는 길을 잃고 헤매는 어린 양”이라고 하여 광범위한 대상이 된다. ‘길을 잃고 헤매는 어린 양’에 관하여 신약성서 루카복음서 15장 4-7절의 말씀을 보자.   “너희 가운데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에서 한 마리를 잃으면, 아흔 아홉 마리를 광야에 놓아둔 채 잃은 양을 찾을 때까지 뒤쫓아 가지 않느냐? 그러다가 양을 찾으면 기뻐하며 어깨에 메고 집으로 가서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내 양을 찾았습니다.’하고 말한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   이 글은 세리들과 죄인들이 예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모여 오는 것에 대해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그런 예수를 못마땅해 하고 비난하였다. 거기에 대한 예수의 답변으로 이어지는 루카복음서 15장의 되찾은 은전의 비유(8-10), 되찾은 아들의 비유(11-32)도 같은 의미의 비유이다. 여기에서 ‘잃은 양’은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이다. 회개metanoia는 신약성서에서 ‘회심’ 또는 ‘되돌아감’을 나타내는 그리스어이며, 라틴어로는 콘베르시오(conversio)이다. 이는 전철[前綴meta-]과 원래는 '사고'를 표현하는 후철[後綴noia]에서 이루어진 복합명사이다. 그리스어 일반 용례로서는 전철을 시간적인 의미의 ‘후에서’로 풀이하여 ‘프로노이아pronoia’의 반의어이며 ‘현자는 뒤에서 생각하지 않고 미리 생각해야 한다’(포르퓨리오스)는 용례가 있다. 그러나 신약성서의 경우 전철은 인간이 자기의 존재 전체의 자세를 역방향으로 전환하는 의미(회심)을 강조하여 예수의 하늘나라의 선포 혹은 원시교회의 말에 직면한 개개의 사람이 그 때 그 장소에서 요구되는 결단을 의미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 의미는 회개가 그만큼 어렵고 그 사람의 삶의 자세나 태도를 하늘나라 중심으로 바꾼다는 뜻이다. 그러니 선한 사람 아흔 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하나를 하늘나라에서는 더 기뻐한다고 예수는 말하였다. 이 비유를 통하여, 예수는 당시 이스라엘 사회의 지도계급인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을 비판하고 있기도 하다. 그들은 종교를 가지고 자신들의 권력만 탐욕스럽게 부풀리는 회개하지 않는 죄인이며, 자기네 백성들을 의롭게 돌보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612개의 율법사항에 저촉되는 모든 양 무리를 철저하게 죄인으로 규정하여 잘라내고, 그것으로 자신들이 심판자 노릇을 하면서 권력을 휘두르고 다닌 사람들이었다. 그런 그들은 예수의 눈에는 삯꾼이나 도둑, 강도로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신약성서 루카복음서에 나타난 ‘잃은 양’의 비유는 신약성서 요한복음서 10장에서 예수 자신이 착한 목자에 비유하면서, 착한 목자와 양 떼의 관계를 ‘착한 목자/도둑, 강도, 삯꾼’을 대조적으로 비유하여 설명하고 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양 우리에 들어갈 때에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다른 데로 넘어 들어가는 자는 도둑이며 강도다. 그러나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들의 목자다. 문지기는 목자에게 문을 열어주고, 양들은 그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그리고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 이렇게 자기 양들을 모두 밖으로 이끌어 낸 다음, 그는 앞장서 가고 양들은 그를 따른다. 양들이 그의 목소리를 알기 때문이다. (10:1-5)   목자와 양 떼들의 음성을 매개로 그 관계를 비유하는 이 말씀은 목자는 양들의 음성을 알고 있고,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알고 있다. 서로에 대해서 충분히 알고 있기 때문에 목자가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면 양들은 목자를 따라 바깥으로 나와서 목자는 앞서 가고 양들은 그를 따른다. 이것은 서로를 알고 신뢰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이 목자와 양들의 관계는 앎이 전제되어 서로의 신뢰를 바탕으로 이끎과 따름의 관계가 형성되고 있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착한 목자는 이 신뢰를 바탕으로 하며 삯꾼과 다른 이유는 양들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친다는 데까지 구체화 되고 있다.   나는 착한 목자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 삯꾼은 목자가 아니고 양도 자기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들을 버리고 달아난다. 그러면 이리는 양들을 물어 가고 양 떼를 흩어 버린다. 그는 삯꾼이어서 양들에게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착한 목자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 이는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 나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다. 그러나 나에게는 이 우리 안에 들지 않은 양들도 있다. 나는 그들도 데려와야 한다. 그들도 내 목소리를 알아듣고 마침내 한 목자 아래 한 양 떼가 될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내가 목숨을 내놓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신다. 그렇게 하여 나는 목숨을 다시 얻는다. 아무도 나에게서 목숨을 빼앗지 못한다. 내가 스스로 그것을 내놓는 것이다. 나는 목숨을 내놓을 권한도 있고 그것을 다시 얻을 권한도 있다. 이것이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받은 명령이다. (10:11-18)   목숨을 내놓을 권한도 그것을 다시 얻을 권한도 예수는 가진다고 하였다. 여기서 이 권한은 아버지로부터 상속된 권한이다. 아버지는 성부를 상징하고 아버지가 나에게 맡긴 양 떼를 위해 목숨마저 내놓기에 아버지는 나를 사랑하신다고 한다. 이 복음에서는 ‘아버지와 나/나와 양떼/아버지-나-양떼’의 관계가 이루어지며, 거기에는 서로 신뢰의 관계로써 맺어진다. 그리고 ‘나’의 아버지의 명령에 대한 스스로 철저한 희생과 복종이 뒤따른다. 삯꾼은 삯에 관심을 두고 있을 뿐 양들의 안위에는 관심이 없다. 그러니 양들에게 관심이 없는 것이다. 착한 목자는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라고 하듯이 서로가 앎을 바탕으로 한 신뢰관계이다. 이는 아버지와 나의 앎의 관계와 동일하다. 양들은 아버지가 나에게 맡긴 이들이므로 신뢰와 섬김, 전소유의 관계가 형성이 되어 있다. 삯꾼에게 양들은 자기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리가 와도 자신의 목숨까지 내놓아서 지킬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가 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믿기 때문에 아버지가 맡긴 양들을 위해 스스로 목숨을 내놓고 그것을 다시 얻을 권한도 가진다는 의미이다. 목자와 양들에 관한 신약성서의 비유는 구약성서 에제키엘 예언서의 말씀에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다.   주님의 말씀이 나에게 내렸다. “사람의 아들아, 이스라엘의 목자들을 거슬러 예언하여라. 예언하여라. 그 목자들에게 말하여라.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불행하여라, 자기들만 먹는 이스라엘의 목자들! 양 떼를 먹이는 것이 목자가 아니냐? 그런데 너희는 젖을 짜 먹고 양털로 옷을 해 입으며 살진 놈을 잡아먹으면서, 양 떼는 먹이지 않는다. 너희는 약한 양들에게 원기를 북돋아 주지 않고 아픈 양을 고쳐 주지 않았으며, 부러진 양을 싸매 주지 않고 흩어진 양을 도로 데려오지도, 잃어버린 양을 찾아오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들을 폭력과 강압으로 다스렸다. 그들은 목자가 없어서 흩어져야 했다. 흩어진 채 온갖 들짐승의 먹이가 되었다. 산마다, 높은 언덕마다 내 양떼가 길을 잃고 헤매었다. 내 양 떼가 온 세상에 흩어졌는데, 찾아보는 자도 없고 찾아오는 자도 없다.   에제키엘 예언서는 기원전 593년에서 571년 예루살렘 붕괴 이후 제2차 유배가 단행되고 난 다음까지의 기간에 예언자 에제키엘에 의해 쓰여졌다고 한다. 이 예언서의 전반부(제1장~32장)는 유다와 예루살렘의 파괴에 대한 신탁과 이민족들에 대한 신탁이 쓰여졌다. 그리고 후반부(제33장~제48장)는 쇄신에 대한 신탁과 새로운 백성에 대한 신탁이 기술되어 있다. 에제키엘은 차독 가문의 사제였기 때문에 망국과 바빌로니아 유배의 원인을 목자들에게서 찾고 있다. 그가 환시 속에서 보았던 것은 사랑하는 아내의 죽음이었고, 그 사랑하는 아내의 죽음이라는 환시를 통하여 ‘가장 사랑하는 존재의 죽음’ 즉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하게 된 것이 에제키엘 예언서의 배경이다. 만해에게 ‘가장 사랑하는 존재의 죽음’은 곧 님과의 이별이다. 님은 부재하는 님이며, 부재하는 님은 나에게는 죽어서 없는 것과 같은 슬픔을 안겨준다. 님이 조국이라면 조국을 잃은 백성은 흩어지고 남의 나라에 강제 징용이나 징집되었다. 양 떼들을 돌봐야 했던 조선 말기의 정치 지도자들은 에제키엘이 말하듯이 제 양을 잡아먹고 방치한 결과 제 양 무리도 지키지 못하고 양 우리와 목초지까지 빼앗기게 된 비극의 역사가 일제강점기이다. 이 비극의 역사는 이스라엘의 바빌로니아 유배 전 이스라엘의 불의한 지도자들의 모습과 일치함을 알 수 있다. 그런 불의한 목자들에 대하여 여호와 하느님의 경고는 계속 된다.   그러므로 목자들아, 주님의 말을 들어라. 내 생명을 걸고 말한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나의 양 떼는 목자가 없어서 약탈당하고, 나의 양 떼는 온갖 들짐승의 먹이가 되었는데, 나의 목자들은 내 양떼를 찾아보지도 않았다. 목자들은 내 양떼를 먹이지 않고 자기들만 먹은 것이다. 그러니 목자들아, 주님의 말을 들어라.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나 이제 그 목자들을 대적하겠다. 그들에게 내 양 떼를 내놓으라 요구하고, 더 이상 내 양 떼를 먹이지 못하게 하리니, 다시는 그 목자들이 양 떼를 자기들의 먹이로 삼지 못할 것이다. 나는 내 양 떼를 그들의 입에서 구해 내어, 다시는 그들의 먹이가 되지 않게 하겠다.   바빌로니아 유배 시에 망국의 원인을 되돌아보며, 망국 전 유대의 권력 주체는 자기 양 떼를 제대로 돌보지 않았다. 그러므로 불의한 목자들에게 ‘내 양 떼를 그들의 입에서 구해 내어, 다시는 그들의 먹이가 되지 않게 하겠다.’라고 경고한다. 이에 대해 좋은 목자는 목숨을 바쳐 양 떼들을 돌보는 자이다.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나 이제 내 양 떼를 찾아서 보살펴 주겠다. 자기 가축이 흩어진 양 떼 가운데에 있을 때, 목자가 그 가축을 보살피듯, 나도 내 양 떼를 보살피겠다. 캄캄한 구름의 날에, 흩어진 그 모든 곳에서 내 양 떼를 구해 내겠다. 그들을 민족들에게서 데려 내오고 여러 나라에서 모아다가, 그들의 땅으로 데려가겠다. 그런 다음 이스라엘의 산과 시냇가에서, 그리고 그 땅의 모든 거주지에서 그들을 먹이겠다. 좋은 풀밭에서 그들을 먹이고, 이스라엘의 높은 산들에 그들의 목장을 만들어 주겠다. 그들은 그곳 좋은 목장에서 누워 쉬고, 이스라엘 산악 지방의 기름진 풀밭에서 뜯어 먹을 것이다. 내가 몸소 내 양 떼를 먹이고, 내가 몸소 그들을 누워 쉬게 하겠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잃어버린 양은 찾아내고 흩어진 양은 도로 데려오며, 부러진 양은 싸매 주고 아픈 것은 원기를 북돋아 주겠다. 그러나 기름지고 힘센 양은 없애 버리겠다. 나는 이렇게 공정으로 양 떼를 먹이겠다.   나라를 빼앗겨 유배로 흩어진 양떼들을 다시 불러 모우고 푸르고 기름진 풀밭에 쉬게 하여 풀을 뜯어 먹게 하겠고 그 과정에서 상처 입은 양들을 고쳐주며 원기를 북돋워 주겠다고 약속한다. 그러면서 기름지고 힘센 양은 없애 버리며 공정으로 양떼를 기르겠다고 한다. 공정한 목자는 심판자로서 역할을 하며 양과 양 사이의 시비를 가린다.   ‘너희 나의 양 떼야,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나 이제 양과 양 사이, 숫양과 숫염소 사이의 시비를 가리겠다. 너희는 좋은 풀밭에서 뜯어 먹는 것만으로는 부족하여, 나머지 풀밭을 발로 짓밟는 것이냐? 맑은 물을 마시는 것만으로는 부족하여, 나머지 물을 발로 더럽히는 것이냐? 그래서 내 양 떼가 너희 발로 짓밟는 것을 뜯어 먹고, 너희 발로 더럽힌 것을 마셔야 하느냐? 그러므로 주 하느님이 그들에게 말한다. 나 이제 살진 양과 여윈 양 사이의 시비를 가리겠다. 너희가 약한 양들을 모조리 옆구리와 어깨로 밀어내고 뿔로 밀쳐 내어 밖으로 흩어 버렸으니, 내가 내 양 떼를 구하여 그것들이 더 이상 약탈당하지 않게 하겠다. 내가 양과 양 사이의 시비를 가리겠다. (34:1-22)   정의와 공평은 좋은 목자의 양을 돌보고 기르는 역할과 함께 중요한 역할이다. 양들 간의 시비는 양들 간의 힘의 균형이 편향되었을 때 일어나는 일이며, 권력을 가진 집단은 ‘기름지고 힘센 양’이며, 그들로 인해 억압과 소외를 당하는 ‘여윈 양’을 구하겠다고 하였다. 억압과 소외를 강요하는 사회나 권력집단은 ‘약한 양들을 모조리 옆구리와 어깨로 밀어내고 뿔로 밀쳐 내어 밖으로 흩어 버린’ 자들이다. 만해의 님은 이러한 약한 님이다. 성부와 성자의 님은 이런 님을 구원하려고 육화강생을 하였다. 이런 님들이 편안히 살아가게 하는 것이 바로 하느님 나라이다. 현실세계는 이렇게 하느님 나라가 도래하지 못했기 때문에 성자는 육화강생을 하여 하느님 나라를 부르짖었다. 하느님 나라에의 초대는 모든 이들이 공존공생하며, 서로 좋은 목자가 되어 양을 먹이는 마음으로 서로 섬기는 나라이다. 서로 존중하며 사랑하는 나라이다. 그런 나라는 아직 오지 않았다.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에, 인간의 욕망이 무한대를 달릴수록 그런 나라는 멀리 있고, 이 말씀들은 지속적으로 사모의 대상이 될 것이다.   이시환 시인의 시에는 이런 세상에 대한 비꼼과 함께 이런 세상을 위해 스스로 위로하고 상처를 싸매려고 한다. 그는 시인으로서 그런 역할을 자처하고 있다. 「강물」에서 시작 되는 그의 상생과 위로, 돌봄의 시학은 이렇게 시작된다.   이제야 겨우 보일 것만 같다. 눈을 뜨고도 보지 못한 나의 눈이 정말로 Em이는 것일까. 그리하여 볼 것을 바로 보고 안개숲 속으로 흘러 들어간, 움푹움푹 패인 우리 주름살의 깊이를 짚어낼 수 있을까. 달아오르는 나의 밑바닥이 보이고 굳게 입을 다문 사람 사람들의 가슴에서 가슴으로 흐르는 강물의 꼬리가 보이고, 을지로에서 인현동과 충무로를 잇는 골목골목마다 넘실대는 저 뜨거운 몸짓들이 보일까. -(중략)- 그런 우리들만의 출렁거리는 하루하루 그 모서리가 감당할 수 없는 무거운 칼날에 이리저리 잘려나갈 때 안으로 말아올리는 한 마디 간절한 기도가 보일까. 언젠가 굼실굼실 다시 일어나 아우성이 되는 그 날의 새벽놀이 겨우내 얼어붙었던 가슴마다 봇물이 될까. 그저 맨몸으로 굽이쳐 흐르는 우리들만의 눈물 없는 뿌리가 보일까. -시「강물」중에서   시인은 견자(見者)이다. 여느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것도 시인의 눈에는 보인다. 이 견성은 시인의 의식 깊은 곳에 견성으로 인도되는 성질이 마음에 내재해 있기 때문에 보이는 것이다. 이에 관한 신약성서의 말씀은 요한복음 제9장 1절부터 41절까지의 내용에서 알 수 있다. 태생 소경인 자를 고친 예수는 바리사이들로부터 안식일에 그와 같은 일을 했다고 죄인으로 취급받으며 하느님에게서 온 자가 아니라고 공격을 당한다. 그러나 태생 소경으로 하느님의 일에 파견 받은 청년은 회당에서 기적의 치유에 관하여 증언하면서 예수가 하느님에게서 온 이라고 하였고, 바리사이들로부터 단죄 받으며 쫓겨난다. 그것을 듣고 예수는 그를 만나 사람의 아들을 믿느냐고 묻고, “너는 이미 그를 보았다. 너와 말하는 사람이 바로 그다.”라고 말한다. 태생 소경이었던 청년은 하느님의 아들을 보게 되었고, 예수는 자신이 이 불의한 세상을 심판하러 왔으며, 그 때는 “보지 못하는 이들은 보고, 보는 이들은 눈 먼 자가 되게 하려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 때 함께 있던 바리사이들은 “우리가 눈 먼 자라는 말은 아니겠지요?”라고 묻자, “너희가 눈 먼 사람이었으면 오히려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너희가 ‘우리는 잘 본다’하고 있으니, 너희 죄는 그대로 남아 있다.”라고 말한다. 태생 소경이었던 청년은 예수를 알아보게 되었고, 바리사이들은 잘 보는 자임에도 예수를 알아보지 못하는 이 말씀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알고 바로 보지 못하는 것’에 대한 경고이기도 하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와 같은 지도자들은 그들 양들의 음성을 알지 못하고 그들이 자신이 돌봐야할 양 떼임을 알지 못한다. 그러기 때문에 612개 조항을 들어 심판자 노릇이나 그 위에서 군림만 한다. 이런 지도층에게 양 떼는 양 떼로 보이지 않고 자신의 호구로 보이는 법이다. 이어 요한복음 제10장에 목자의 비유가 나오는 것은 야들의 음성을 알아듣지 못하는 것은 그 불의한 지도층들이 양들을 전혀 모르고 있으니 바로 눈이 먼 자들이라는 뜻이다. 권력에 눈이 먼 자들은 그들의 양 떼가 보이지 않는 법이다. 이들에게 예수는 단지 마귀 들려 미친 자로밖에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를 배척하였던 것이다. 즉 그 기적의 은총을 받은 청년과 그것을 지켜본 주위 사람들은 모두 예수를 알아보는 눈이 열렸으나 이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만이 더 눈이 멀게 되어 예수를 마귀 취급했다는 뜻이다.   이시환 시인은 시를 창작한 초기에 ‘이제야 겨우 보일 것만 같다. 눈을 뜨고도 보지 못한 나의 눈이 정말로 Em이는 것일까.’라고 하여 이 견성을 통하여 시업의 길을 추구하였던 것이다. 눈을 뜨고도 보지 못한 나의 눈이 뜨일 때 존재의 본질을 바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시인의 시업은 바로 견성이 생기면서부터 이루어지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내면의 눈은 ‘달아오르는 나의 밑바닥이 보이고, 굳게 입을 다문 사람 사람들의 가슴에서 가슴으로 흐르는 강물의 꼬리가 보이고, 을지로에서 인현동과 충무로를 잇는 골목골목마다 넘실대는 저 뜨거운 몸짓들이 보일까.’라고 하여 자신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의 가슴 속에 넘실넘실 흐르는 강물의 꼬리 즉 마음의 흐름도 보일까라고 조용히 자문한다. 그러나 그런 심정으로 그들의 가슴에 가 닿을 때에 비로소 보이게 된다. 그러니 그런 그들은 ‘그저 맨몸으로 굽이쳐 흐르는 우리들만의 눈물 없는 뿌리가 보일까’라고 하여, 가슴 속에 흐르는 것이 눈물이며, 그 눈물을 시인은 바라보겠다는 뜻이다. 시인의 눈은 바로 그 자리에 있어야 견성을 획득하면서 견자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게 된다. 이 견자는 곧 다른 이들의 삶의 밑바닥에 흐르는 눈물을 헤아리고, 그 눈물을 닦아주며, 그 눈물의 원인으로부터 해방시켜 주는 이로서 돌보는 이가 되는 것이다. 이 견성을 겸비한 이는 그의 시 「함박눈」에 비유된 것처럼 낮고 겸손한 자이며, 세상의 어둡고 고통스런 곳으로 스스로 임하는 자이다.   내가 가진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만, 당신에게로 곧장 달려 갈 수 있다는 그것과 당신을 위해서라면 당신의 이마에, 손등에, 목덜미 어디에서든 입술을 부비고 가녀린 몸짓으로 나부끼다가 한 방울의 물이라도 구름이라도 될 수 있다는 그것뿐이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사옵니다. 다만, 우리들의 촉각을 마비시키는 추위가 엄습해오는 길목으로 돌아서서 겨울나무 가지 끝 당신의 가슴에 잠시 머물 수 있다는 그것과 당신을 위해서라면 충실한 從(종)의 몸으로 서슴없이 달려가 젖은 땅, 얼어붙은 이 땅 어디에서든 쾌히 엎드릴 수 있다는 그것뿐이옵니다. 나는 언제나 그런 나에 불과합니다. 나는 나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함박눈」, 『안암동日記』에서   시적 화자인 나는 함박눈이다. 시인은 함박눈을 통하여 자신의 길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런 나는 끊임없는 ‘자기 지우기’를 시도한다. 자기 지우기는 자기부정과 자기희생에 의해서 완성된다. 이 시에서 ‘충실한 종’으로 젖은 땅, 얼어붙은 이 땅 어디에도 달려가 쾌히 엎드리겠다는 의미는 스스로 종이 되고자 하는 시인의 모습이며, 이는 겸손으로 낮아진 자의 모습이며, 그것이 바로 참 목자의 모습이다. 내가 나이기 위해서는 함박눈처럼 낮은 곳으로 임할 때 나의 종으로서의 임무를 다하는 것이다. 이어서 시「북」에서는 북의 이미지를 통하여 사람들을 기만하는 이 세상에 한 알의 밀알로 썩는 ‘자기희생’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내어주는 북으로서 이미지를 창조하고 있다. 여기에는 자기희생의 본을 북을 통하여 그리고 있다.   무릇 알맹이는 가라앉고 껍데기만 뿌옇게 떠서 오락가락 가락오락 눈을 속이고 귀를 속이고 입을 속이고 속이듯 속고 속이고. 속 썩은 연놈들이야 두 겹도 좋고 세 겹도 좋아 그럴 듯이 처바르면 보이는 것 있을 수 있나. 하늘 땅 무서운 줄 모르고 두꺼운 낯짝 설레설레 휘저으면 타고나지 못한 너와 나야 저만치 밀려나고 보면 구석. 도시 힘 못 쓰는 시상 아닌가벼. 이놈의 세상 내 어릴 적 썩은 이빨 같다면 질긴 실로 꽁꽁 묶어 눈감고 힘껏 땡겨 보겄네만 이 땅의 단군왕검 큰 뜻 어디 가고 곪아 터진 곳 투성이니 이제는 머지않아 기쁜 날 기쁜 날이 오겄네. 새살 돋아 새순 나는 그 날이. 이 한 몸 이 한 맴이야 다시 태어나는 그 날의 살이 되고 피가 되고 힘이 된다면 푹푹 썩어 바로 썩어 이 땅의 뿌릴 적시는 밑거름이라도, 밑거름이라도 되어야지 않겠는가. 이 사람아 둥둥. 저 사람아 둥둥.   -「북」, 『안암동日記』에서   북은 우리네 농민들이 추수철이나 대보름날 농악대를 앞세우고 한바탕 신명나게 놀 때 둥둥 두드려 흥을 돋우는 악기이다. 이런 정서의 악기인 북은 바로 사람들을 속이는 ‘속 썩은 연놈들’로부터 구석으로 밀려난 이들을 상징하고 있다. 그러니 그 설움을 가슴에 품고 곪아터진 세상의 부조리를 향해 대항하며 새날이 오는 그날을 기다리며, 견디며, 그 울분의 가슴을 둥둥 두드려 풀어준다. 소리를 내는 북처럼 둥둥 두드려 자기희생을 하는 이 땅의 수많은 민초들, 바로 이들이 새로운 역사를 여는데 자기희생을 해준 이들이다. 그들의 설움과 울분은 북이 되어 둥둥 두드려져서 이 땅의 뿌리를 적시는 밑거름이 된다. ‘속 썩은 연놈들’의 횡포는 시 「웃음病」에도 폭로 되고 있고, 그 때부터 시인은 실소를 하며 부조리한 현실에 대해 냉소를 하게 된다.   마른 추위가 계속 되던 어느 날, 나는 모를 누군가의 명령을 받고 급히 물걸레를 들고 헬기장으로 달려가 주변 사철나무 잎새마다 내려앉은 먼지, 먼지를 닦아냈습니다. 일 년 내내 쌓인 먼지가 아니라 세상의 아이러니와 무지의 깊은 세계 구석구석을 훔쳐냈습니다. 그리고는 호루라기 소리에 반사적으로 달려나와 길게 길게 오줌을 누며 숨을 돌렸고, 화장실 앞 양지바른 모퉁이에 쪼그리고 앉아서 햇살에 손을 녹이며 곰곰이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그리고는 속으로 얼마나 웃었는지 모릅니다. 약삭빠른 세상 사람들은 그런 나의 소리 없는 웃음을 눈치 채고 그 때부터 내게 손가락질을 하며 ‘바보’라 불렀습니다. 나는 그들 앞에서 빈틈없는 바보가 되었고, 나는 바보가 아닌 위인들의 업적과 치부를 들여다보며, 또 하나의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뒤로 세상은 온통 웃음덩어리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때문에 내겐 실없이 웃는 버릇이 생겼고, 언제부턴가 웃음을 질질 흘리고 다니는 病(병)이 되어 깊어만 가고. -「웃음病」, 『안암동日記』에서   수직사회인 군대에서 시적 화자는 상관의 명령에 따라 사철나무 잎새마다 내려앉은 먼지를 닦는다. 누군가 순시를 나오고 일사분란한 모습으로 준비하는 이 광경은 세상의 아이러니와 무지의 깊은 곳을 닦아낸다. 그리고는 혼자 기막힌 이 상황을 헛웃음으로 웃는 이 체험 속에서 시인은 세상의 이면에 있는 아이러니와 어둠, 무지를 웃음으로 폭로하고 있다고 하겠다. 시인은 이 아이러니로써 세상을 전복할 에너지를 생산한다. 폭압적인 국가기구(RSA)에 의해 주도되는 국가의 권력을 시인은 군대에서의 일상적인 개인의 체험을 시적으로 재구성하여 아이러니의 풍자성을 바탕으로 실소나 냉소를 자아내게 하여 부조리나 정의롭지 못한 군대 사회를 우스꽝스럽게 창조해내고 있다. 역시 폭압적인 국가기구에 대항하는 민초들의 고통을 신약성서의 예수 그리스도와 동일시하여 공권력 경찰과 정보기관의 폭압에 맞서고 있다.   십자가를 메고 비틀비틀 골고다 언덕길을 오르는 예수 그리스도는 끝내 못 박혀 죽고 거짓말 같이 사흘 만에 깨어나 하늘나라로 가셨다지만 도둑처럼 오신 서울의 예수는 물고문 전기고문에 만신창이가 되고 쇠파이프에 두개골을 얻어맞아 죽고 죽었지만 그것도 부족하여 온몸에 불을 다 붙였지만 달포가 지나도 다시 깨어날 줄 모른다. 이젠 죽어서도 하느님 왼편에 앉지 못하는 우리의 슬픈 예수, 서울의 예수는 갈라진 이 땅에 묻혀서, 죽지도 못해 살아남은 우리들의 밑둥, 밑둥을 적실꼬.   -「서울의 예수」, 『안암동日記』에서   국가권력의 협력자인 경찰과 같은 공권력과 정보기관의 탄압은 바로 양떼들을 잡아먹거나, 약하고 야윈 양떼들을 구석으로 밀려나게 하는 ‘속 썩은 연놈들’이다. 양떼와 국가권력의 싸움은 에제키엘 예언서의 양과 양 사이, 숫양과 숫염소 사이의 시비이다. 이것을 여호와는 가리겠다고 하였다. “너희는 좋은 풀밭에서 뜯어 먹는 것만으로는 부족하여, 나머지 풀밭을 발로 짓밟는 것이냐? 맑은 물을 마시는 것만으로는 부족하여, 나머지 물을 발로 더럽히는 것이냐? 그래서 내 양 떼가 너희 발로 짓밟는 것을 뜯어 먹고, 너희 발로 더럽힌 것을 마셔야 하느냐?” 이 말씀처럼, 좋은 풀밭에서 독식하는 것으로도 모자라서 공권력과 같은 권력의 충견을 앞세워 양떼들의 풀밭을 짓밟고 양떼들이 먹을 물을 더럽힌다. 그들은 짓밟힌 풀을 먹고, 그들이 더럽힌 물을 마셔야 하는 불공정과 정의롭지 못한 이 권력을 하느님은 응징하겠다는 뜻이다. 서울에 도둑처럼 그 때와 그 시간도 모르는 새에 재림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희생되는 ‘하느님의 어린 양’이 되어 물고문, 전기고문을 당하고 쇠파이프에 두개골을 얻어맞아 죽고 분신(焚身)을 하면서도 한 달 반이 되어도 부활하지 못하고 억울하게 죽어간다. 그러니 공권력에 희생되고 스스로 분신으로 몸을 바친 영혼들은 하느님 오른 편에 앉는 영광도 누리지 못한 채 서울의 갈라진 한반도 이남에 묻히고 이런 상황 속에서도 죽지 못해 살아남은 우리들의 밑둥을 적시고자 한다. 이런 비극의 역사는 왜 되풀이 되는가? 한 나라의 정치 지도자들이 제대로 목자 역할을 하지 못할 때 생기는 사회적 불평등과 정의롭지 못함, 권력남용과 억압, 공포정치로 이어지고 그 속에서 먹을 것을 빼앗기고, 다치고, 목초지에서 내몰린 야윈 양들을 위해 싸우는 투사들은 서울의 예수 그리스도로 비유되어 대항하다가 억울하게 죽어간다. 이것은 스스로 선택한 자기희생이다. 이것이 정의와 평화가 실현되지 못한 사회의 병리현상이다. 그러니 일제강점기의 역사 속에서 시인은 의사 안중근을 통해서 이렇게 나라와 조국을 위하여 한 목숨 바친 도마 안중근을 기리는 시를 쓰고 있다.   젊은 중근 달려간다/우리 중근 달려간다/칼날에 총부리에/쓰러져 신음하는/어깨처진 풀들을 어루만지며/달려간다 달려간다/“하늘이 주는/하늘이 주는 기회라”/일그러진 떡밥 같은/늙은 도적/심장에, 갈빗대에, 복부에/세 발의 탄환(彈丸)/통쾌하게 명중시키니/하루아침에 제국주의가/땅에 떨어지도다/만천하/무사태평함을 알리고/우리 중근, 조선 의사(義士)/당당하게 걸어간다/사방천지/도탄에 빠져있는/이 나라 백성들을 일깨우고/‘義 ’하나로 살다 죽어/여한 없는 우리 중근/“조선에 사람 있도다/조선에 사람 있도다”/가장 외로운 남자 가장 뜨거운 남자/마지막 가는 길/바지 저고리 두루마기/정갈하게 갈아입고/날아가네 날아가네/훨훨 날아가네/살아있는 백성/가슴 가슴 가슴 속으로/조선의 붉은 꽃이 되어/눈부신 구름이 되어/날아가네 날아가네.   -「안중근」, 『백운대에 올라서서』에서   이 시에서 양떼들은 ‘어깨처진 풀들’로 비유되어 있고, 안중근은 그런 야윈 풀들을 어루만진다. 그렇게 하고는 하늘이 준 기회라 여기면서 한 몸을 바쳐 약육강식의 제국주의 권력의 심장인 이토오 히로부미를 하얼빈에서 저격한다. ‘조선의 붉은 꽃 되어’라는 표현은 안중근의 자기희생으로 조선 독립만이 조선 민중에게 생명을 가져다주는 꽃이 된다. 그 꽃은 순국의 안중근의 피와도 연결되어 있다. 안중근의 조선의 생명을 살리는 데에 자신의 생명을 던진 가장 뜨거운 남자이다. 시인은 안중근 의사를 통해서 서울에 재림한 예수를 완성한다. 예수는 하늘나라를 선포하여 그 당시 이스라엘의 지도층인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과 대항하다가 젊은 피를 흘려 하느님의 어린 양이 되었다. 그것은 성부 하느님의 뜻으로 이루어진 결과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상 자기희생으로 힘센 양들 사이에서 다치고, 내몰리며, 소외되고, 목초지를 빼앗기며, 짓밟힌 풀과 더렵혀진 물을 먹고 살아간 이 땅의 민초들을 구원하는 안중근 의사의 순국으로 이어져 가슴에서 가슴으로 순혈의 피의 강이 흐르고 있다. 그러니 그 역사의 강물은 도도하게 흐르며, 그것은 또한 쉼 없이 흐른다. 이 역사의 흐름도 하느님의 자비 속에서 시인의 경건한 마음과 겸손한 자세로 청하며 기도한다. 시인은 이렇게 정의롭지 못하고 공정하지 못하며 불의한 세상에 대해 시 「나의 기도」에서 하느님의 자비를 청한다.   오, 하느님 당신의 뜻대로 하늘과 땅 사이에 죽어있는 것과 살아있는 온갖 것들을 다 빚어 놓으셨지만   당신의 뜻대로 이 땅 가득 번창하여 사람들은 저마다 눈먼 욕구를 채우기 위해 충혈된 눈동자를 더 이상 숨길 수조차 없게 되었습니다.   오늘 하루 내가 숨을 쉬며 산다는 것은 다른 살아 있는 것들의 목을 조르는 일이고, 크고 작은 것들의 보이지 않는 관계를 짓밟고 잘라내어 이 땅 위로 버릴 것을 만들어 내는 일입니다.   머지않아 그런 것들 속에서 내가 허우적거릴 것이지만 오늘에 미친 우리는 내일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나의 검은 손과 무지는 다름 아닌 나의 목을 노리고 성큼성큼 다가설 것입니다. 밤마다 저려오는 그런 예감을 애써 외면하면서 마실 한 모금의 물 앞에서조차 우리는 망설여야 하고, 눈을 맛보고 빗속을 거니는 것은 이미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 되었습니다.   아뿔싸, 이대로라면 사람에겐 사람의 손이 가장 무서운 것이 될 것이요, 그쯤에선 하나뿐인 이 땅의 몸살도 아깝게 멎어버릴 것입니다   진지하고 화려했던 우리의 과거는 물론 사라진다는 것조차 의식하지 못한 채 우리는 영영 다시 일어설 수 없을 것입니다. 이 또한 당신의 뜻이라면, 이 또한 당신의 뜻이라면, 그러나 당신은 우리에게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지혜와 기회를 주셨사오니 그 뜻만은 아닌 것 같구려. 그 뜻만은 아닌 것 같구려.   이 나의 위선이 위선이 아니 되기를 이 땅에 버릴 것 하나 없는 세상으로 빛과 어둠을 부리어 주소서. 말씀으로 천 가지 만 가지 빛깔을 내시는 당신이여, 당신의 귀여운 것들이 당신과 함께 숨쉬며 당신의 뜻을 넉넉히 헤아리게 하소서.   하늘과 땅 사이 조금도 구김살 없이 감도는 기운, 당신은 필연이 아니신가요. 조금도 빈틈이 있을 수 없는.  -「나의 기도」, 『바람 序說』에서 ///////////////////////////////////////////////// 이시환의 시법 : 반복의 미학 -지향하는 세계의 도래를 위하여   심종숙(시인/문학평론가)   우리는 어떨 때 반복적으로 말할까? 이루어 지지 않은 꿈을 꾸기 위해서 스스로 수없이 되뇌인다. 마치, 자기최면처럼 ‘나는 ~가 될 거야’ 라고 속으로 수없이 반복한다. 개인적인 어떤 바람을 두고 마음속으로 또는 소리를 내어 말하거나, 때로는 공동체나 광장에 모인 이들이 어떤 이슈를 두고 다함께 반복하여 외쳐대기도 한다. 때로는 원치 않는 일로 인해서 상처가 깊을 때에 그 상처가 다 낫게 될 때까지 끊임없이 되풀이 하여 이야기한다. 아마, 그럴 때는 되풀이 하여 이야기 하는 동안에 분이 풀려서 마음에 평정을 찾고 더 이상은 이야기 하지 않게 된다. 또는, 좋은 기억들을 끄집어내어서 한 번 더 행복에 젖기도 하고, 슬픈 일을 회상하면서 눈물을 자꾸 흘려서 슬픔과 우울을 쫓아낼 수도 있다. 더 나아가, 종교적으로는 일심(一心) 정진을 위해서 기도문을 끊임없이 반복하거나 하여 마음을 비우고 일심을 이루기도 한다. 반복은 니체의 ‘영원 회귀’로 거슬러 올라간다. 들뢰즈는 ‘영원회귀’에 대해 해석하기를 모든 것이 되돌아오는 것은 아니며 동일성의 반복이 아니라 차이의 반복으로 보았다. 차이를 내포하고 생성하는 원리로서 반복을 다루게 되면 시의 언술이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지를 알 수 있고, 이는 시인이 세계를 바라보는 인식의 원리와도 관련이 있다. 문학작품에서 반복은 수사법의 하나로 다루어지거나 시에서는 주로 리듬의 구성 원리로 논의 되어왔으나, 이 글에서는 이시환 시의 반복이 시의 언술 구조를 어떻게 구성하는가에 초점을 맞추어 반복의 형태와 반복의 내용을 파악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이시환의 시에서 반복은 시의 언술을 구성하는 원리로서 사용되고 있고, 많은 시편들이 이 반복의 원리를 바탕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 중 무엇이 반복되는가에 따라서 반복의 구성 요소는 음소의 반복, 어휘의 반복, 구문 및 문장의 반복, 시행 및 연의 반복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리고 반복이 문장이나 언술을 구성할 때 대구, 병렬, 나열, 점층 등의 형태를 가진다. 이러한 반복이 시에서 쓰였을 때 한 편의 시를 어떻게 변화 시키는가는 반복이 지니는 언술구조의 힘이라고 할 수 있다. 먼저, 제1시집 『안암동日記』속의 산문시「강물」을 읽어보자.   이제야 겨우 보일 것만 같다. 눈을 뜨고도 보지 못한 나의 눈이 정말로 Em이는 것일까. 그리하여 볼 것을 바로 보고 안개숲 속으로 흘러 들어간, 움푹움푹 패인 우리 주름살의 깊이를 짚어낼 수 있을까. 달아오르는 나의 밑바닥이 보이고 굳게 입을 다문 사람 사람들의 가슴에서 가슴으로 흐르는 강물의 꼬리가 보이고, 을지로에서 인현동과 충무로를 잇는 골목골목마다 넘실대는 저 뜨거운 몸짓들이 보일까. 지금도 예고 없이 불쑥 불쑥 들이닥치는 안바람 바깥바람에 늘 속수무책으로 으스깨어지다 보면 어느새 주눅이 들어 키 작은 몸을 움츠리는 버릇이 굳은살이 되고 더러는 살아보겠다고 이리저리 몰려다니는 어깨 부러진 활자들의 꿈틀거림이 정말로 보일까. 그런 우리들만의 출렁거리는 하루하루 그 모서리가 감당할 수 없는 무거운 칼날에 이리저리 잘려나갈 때 안으로 말아 올리는 한 마디 간절한 기도가 보일까. 언젠가 굼실굼실 다시 일어나 아우성이 되는 그 날의 새벽놀이 겨우내 얼어붙었던 가슴마다 봇물이 될까. 그저 맨몸으로 굽이쳐 흐르는 우리들만의 눈물 없는 뿌리가 보일까.   이 시에서 눈에 띄는 것은 종결 어미 ‘~것일까, ~있을까, ~보일까, ~보일까, ~보일까, ~보일까’ 밑줄 친 부분이다. 이 표현은 자문하거나 확실치 않거나 의구심이 들어서 끊임없이 물음을 던져볼 때 쓰는 말이다. ‘눈을 뜨고도 보지 못한 나의 눈이 정말로 Em이는 것일까’라고 의문을 던지기 전에 ‘이제서야 겨우 보일 것만 같다’고 하여 불확실성을 담은 시 구절이 먼저 왔다. 그러나 상술한 종결 표현들은 공통적으로 바라보는 눈이 열릴까라는 것에 대한 불확실성에서 오는 불안함과 조금은 보이지만 아직은 완전히 보이지는 않는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시적 화자는 무엇을 보고자 하는가? 시적 화자가 보고자 하는 것은 심안이 열려 우리네 서민들의 주름살의 깊이를 짚을 수 있는 눈, 그런 사람들이 고통 중에도 묵묵히 가슴으로 삭이면서 그 슬픔과 고통이 가슴, 가슴마다 흐르는 뜨거운 몸짓을 보는 눈, 세상의 세찬 바람에 주눅 들고 가끔은 부러져 다시 일어서는 활자들의 꿈틀거림을 볼 수 있는 눈, 이런 삶을 살아가야 하는 생의 절박함에서 올리는 기도를 보는 눈, 이런 것이 아우성이 되고 가슴 마다 터지는 봇물 되어 흐르는 눈물 없는 뿌리를 보는 눈이다. 그러나 아직은 의문이다. 그게 다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이 시를 쓸 때 그에게 이미 언어로 토해낸 만큼은 보인다. 더 깊이 내려가 고통과 슬픔, 서러움과 분노, 상대적 박탈감 등 눈물의 뿌리를 시적 화자는 보고자 꿈을 꾼다. 그의 꿈은 강물처럼 쉼 없이 흐른다. 그래서 가슴 가슴들을 적셔준다. 시인은 그네들 가슴 속에 묻어둔 역사를 꿰뚫어 보는 견자(見者)의 눈을 가지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완전히 보이지 않는다. 이 땅의 민초들이 이렇게 서럽게 살아가는 원인을 시인은 신분, 계층, 부 등에서 그 원인을 찾고 있다. 제2시집 『白雲臺에 올라서서』(1993) 속의 「돈」에는 이러한 원인들인 돈이 끊임없이 돌고 돌듯이 반복되는 현상과 거기에 따른 서민들의 고통을 노래하고 있다. 이는 시인이 이 시집의 앞부분에서 「타령을 아시나요」라는 글에서 밝히고 있듯이 타령조에 기본 리듬을 두고 있다. 타령은 ‘침몰하는 기운을 일으켜 세우는 힘이요, 슬픔을 기쁨으로 전이시키는 흥이다’라고 말하듯이, 타령조가 지니는 전통적인 리듬을 따라 반복하다 보면 슬픔을 희망의 기쁨으로 변주시킨다. 어떨 때는 가슴 속에 삭여둔 말을 끊임없이 반복하면서, 또는 가슴에 묻어둔 말을 폭로하여 토하거나 이루고 싶은 요구사항을 함께 반복하여 외쳐댐으로써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기도 하는 것이 타령조라는 전통 리듬이 가진 힘이다. 특히, 제2시집에 타령조라는 전통 리듬을 전통의 악기가 지니는 특성을 소재로 하여 녹여 낸 시들을 모은 이 시집에서 반복을 다양하게 구사하고 있고, 이는 그의 시의 언술구조를 이루는 핵심이 되고 있다.   그 놈의/돈 돈 돈이로구나 돈돈/돌고 돌아 돈이로구나/네가 궁해 눈을 뜨면/범벅돈이 다 된 애비 애미/오늘도 타령이오 돈돈/낯짝 두꺼운 놈 손에 손에/약싹빠른 놈 주머니 속속/오래 오래 머무르지 말고/돌고 돌아 오고 가는 게/너 아니냐 돈돈/단 돈 천원에 울고 웃는 사람아/돈에 죽고 돈에 사는/사람아 세상아/돈 돈 돈이로구나 돈돈/이 세상에/못나빠진 사람 사람/가슴마다 눈물뿌리 내리고/웃음씨를 말리는 돈돈/한눈 파는 너와 나/혼줄을 속속 다 빼가는/돈 돈 돈이로구나 돈돈.   ‘돈 돈 돈이로구나 돈돈’이 세 번 반복 되고 ‘오늘도 타령이오 돈돈’, ‘너 아니냐 돈돈’, ‘웃음씨를 말리는 돈돈’이 세 번 반복되고 있다. 황금만능주의로 물신화된 세상은 돈이 사람을 울게도 하고 웃게도 한다. 그러면서 사람을 살게도 하고 죽게도 하는 돈은 그야말로 물신이며 맘몬이다. 서민들의 가슴마다 눈물뿌리를 내리게 하고 웃음씨를 말리는 돈은 영혼마저도 다 빼앗아 가는 무서운 존재로 군림한다. 이 시는 전통의 3․4나 3․5, 4․3을 기본의 리듬으로 하여 ‘돈 돈 돈이로구나 돈돈’을 후렴처럼 반복하여 돈이 지니는 위력을 점층적으로 나타내어 의미를 강화시킨다. 그리고 반복을 통해 돈이 지니는 의미가 강화될수록 돈을 갖지 못한 서민들의 삶은 더욱 피폐한 채 유기 되어가는 슬픈 사회를 표현하고 있다. 서민들이 살아가기 어려운 세상은 자연히 할 말을 다하고 살지 못한다. 그래서 늘 가슴에 응어리가 져 있다. 그러니 그것을 풀지 않으면 병들어 가는 사회가 된다. 우리의 전통 살풀이춤에다 이 부정적인 정서들을 녹여내려는 「살풀이춤」은 너와 내가 서로의 가슴에다 묻어둔 응어리를 풀고 풀어서 너와 내가 하나가 되게 하는 묘한 힘을 지니고 있다.   할 말이 있네/할 말이 있네/해야 할 말/못다 한 말/많으면 많을수록/이렇게 저렇게 돌아앉아/옷고름 속에 묻어두고/왼발 오른발 서로 엇디디며/왼손 오른손 앞뒤로 옮겨/이승 저승 틀어 엎고/아래 위로 뿌리면/양부리 버선코 치맛자락/어우러져 어우러져 흰 수건/아슴아슴/속치마 사이로 뜨고 지는/초승달 무지개 꿈/옷자락을 여미듯/살며시 몸을 흔들어/두 눈을 재우듯/앉아 휘젓는 이 몸은/뒤엉킨 한 타래 실이련가/타오르는 불덩이/타고나면 타고나면/엉긴 매듭 풀리어/장단과 장단 사이로/숨찬 바람되어/걸어 나오는/너는 나이고/나는 너이고   연 구별이 없고 행갈이만 있는 이 시는 1행과 2행에서 ‘할 말이 있네/할 말이 있네’로 병렬 반복되고 있어 살풀이춤이 주로 굿판에서 벌어지므로 동시적 의미와 주술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하겠다. 어구의 반복으로 ‘어우러져 어우러져’와 ‘타고나면 타고나면’이 살풀이춤의 과정에 따라 반복되고 있다. 살풀이춤을 추는 이유는 몸짓을 통한 춤의 동작으로 가슴 속에 쌓아둔 할 말이 있기 때문에 춘다. ‘할 말이 있네/할 말이 있네’는 두 번 되풀이 되면서 강조를 하고 있다. 그 할 말에는 해야 할 말과 못다 한 말이 있다고 한다. 꼭 해야 할 말은 뭔가를 폭로해야 할 말일 것이며, 못 다한 말은 속에서 삭이고 있는 말이 될 것이다. 할 말에 대하여 춤으로 풀어감으로써 할 말을 부연한다. 이런 의미에서 부연하는 기능으로 반복이 계속됨으로써 춤을 추는 의미를 구체화하고 있다. 실타래처럼 뒤엉킨 한 타래 실인 몸을 불사르면 엉긴 매듭은 풀어져 장단과 장단 사이로 숨찬 바람이 되어 걸어 나오는 너는 나이고 나는 너가 된다. ‘너는 나이고/나는 너이고’라는 구절의 대칭적 반복은 너와 나의 이원적 의미가 너가 내가 되고 내가 너가 됨으로써 우리가 되어 이원적 의미를 넘어서 일원적인 조화지경으로 변화되어 의미적으로 확장되고 있다. 가슴에 엉킨 실을 불태워 죄다 풀어서 너와 내가 하나로 어우러지는 살풀이춤의 광경을 반복의 리듬에 실어서 표현함으로써 가슴 속에 묻어둔 못다 한 말을 풀어헤쳐 너와 내가 서로 하나 되어 주체와 객체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우리가 된다고 하여 의미가 점층적으로 확대되어 하나로 어우러지는 춤판을 표현한 시이다. 이 시에서는 병렬 반복을 통해서 의미 강조, 어구와 어구의 반복을 통해 리듬을 생산, 대구 반복을 통해 이원적 의미가 조화지경으로 점층적으로 의미가 확장이 되어 ‘할 말’의 내용을 부연해주는 것은 반복되는 춤사위의 동작에 있다고 하겠다. 이것은 춤과 리듬을 탄 노래 즉 시를 통해 동시적 기능과 주술적 기능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정서를 지닌 반도의 백성은 그의 시 「아쟁」에서 ‘더불어 눕고/더불어 일어서는’ 사람들이다.   더불어 눕고/더불어 일어서는/우리들의 어제와 오늘 속속/그 어느 곳이 얕고/어디쯤이 병 깊은 곳인지/짚어내기 어려운/반도땅 손금/드러누운 골골이/어찌하여 안개만 안개만/이 놈의 죄 없는 눈과 귀를/비비고 쑤셔보아도/침침한 바깥 시상은 여전해/그렁저렁 일고 잦는 바람에/시방 몸을 던지는/왼 들엔 풀뿌리/어깨를 풀지 아니허고/잠기어 가는 건 목,/목마른 이들의 몸부림일 뿐/아쟁 아쟁 아쟁의 걸음마/절며 오르고 올라//못내 솟구치다가/거꾸로 떨어지는 가락은/더불어 눕고/더불어 일어서는 땅/가는 허리 쥐어짜기.   아쟁이라는 전통의 현악기가 지니는 음색이나 곡조를 연상하여 반도 땅 백성의 병 깊은 곳을 아쟁의 활로 더듬어 찾아가는 것은 아쟁 연주의 느린 음처럼 절며 오르고 오른다. 이 백성은 더불어 눕거나 더불어 일어선다. 이것은 바람에 더불어 눕고 더불어 일어서는 풀과 같다. 거기에 바람 대신에 아쟁의 활이 내는 소리고 더불어 눕고 일어선다. 그러다가 못내 솟구치다가 거꾸로 떨어지는 극적인 가락은 이 땅 백성들의 여윈 허리를 쥐어짜는 어제와 오늘의 병 깊은 곳이다. 이 시에서 ‘더불어 눕고/더불어 일어서는’ 이 시의 첫 부분과 마지막 부분에 반복된다. 이 구절 뒤에 오는 ‘우리들의 어제와 오늘’과 ‘땅 가는 허리 쥐어짜기’는 바로 그 땅에 사는 민초들의 고단한 삶을 아쟁 소리에 실어서 소리의 파장을 통하여 확장하는 효과와 이 땅의 백성이 지니는 고통이 어느 한 개인만이 아니라 공동체적인 운명의 그것임을 나타내고 있다. 「풀이」라는 시에는 징, 꽹과리, 장고, 북, 날라리, 피리 등의 전통 악기를 불고 두들기고 치면서 탐관오리들과 외세의 침탈자들에 대해 대항하고 응징하거나, 비극적 역사 속의 응어리를 풀어서 동(東)과 서(西)가, 남(南)과 북(北)이, 한강과 임진강이 하나가 되는 민족 대동의 새 역사를 기원하는 데까지 확장시켜 나가고 있다.   1 가물가물/세상 사는 일이 술술/우리 맘처럼 풀리지 않을 땐/손을 놓고 일어나/징을 치세 징을 치세/이리도 둘러보고/저리도 굴러보아/그래도 이 가슴 답답하면/박차고 일어나 꽹꽹 꽤갱/꽹과리를 치세/꽹과리를 치세/다락 속에 깊은 잠자는/날나리․장고․피리 모두 나와/큰 북 작은 북 한 데 어우러져/신이 나게 두들기고 불어 보자/그렇게 한바탕 소나기 되어/메마른 땅 위에 이 한 몸 뿌리며/돌고돌아 돌다보면/백 년 천 년 묵은/체중이 다 내려간다/죽어서도 그 근성 못버리는/「조병갑」나와라/「변학도」나와라/「북곽선생」나와라/왜놈 뙤놈 양놈 다 나와라 이잇/네 이놈들/할 말 있으면 하라하니 허허/입은 천이어도 만이어도/가만 먹통이로구나/술술 징징 꽹꽹 허허 하하.   2 오락가락/세상사는 일이 술술/우리 맘처럼 풀리지 않을 땐/헛웃음도 좋고/한숨도 좋고/唱도 좋고/어깨춤도 좋아/억울한 것도 풀고/분한 것도 풀고/슬픈 일도 풀고/심심한 것도 풀고/풀 것을 푸는 데는/이골이 다 나있는/너와 나 우리 우리/다같이 일어나 한 데 엉겨/목판 위 엿가락이 되도록/징을 치고 북을 치고/겨드랑이 사타구니/등줄기 사이사이/흥건하게 젖어/흥건하게 젖어/東과 西,/南과 北을 잇는/우리의 한강이 되고/임진강이 되고/마침내 하나가 되거라/다시는 떨어질fo야 떨어질 수 없는/둘도 아닌 하나가.   시집의 첫째 마당이며 ‘살풀이 춤’이라는 시장(詩章)의 제목에서와 같이 이 시는 이 장의 결정판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 시에서는 동어 반복이나 구문 반복 유난히 많으며 ‘징을 치세/징을 치세’, ‘꽹과리를 치세/꽹과리를 치세’ 등의 병렬적 반복도 두드러진다. 온갖 전통악기를 동원하여 가슴 답답한 개인과 민족의 비극적 아픔을 풀어내고자 한다. 마당놀이라는 형식이 갖는 힘은 공동체적이다. 개인들이 모여 무리를 짓고 집단을 이루어 가슴을 답답하게 한 원인을 처단하려고 한다. 그들을 수탈하는 탐관오리를 조롱하거나 응징하는 이 마당놀이는 근현대사에서 억눌린 가슴들을 풀어주고 갈라진 반도 땅을 하나로 만들어 나간다. 이렇게 마당놀이에 쓰이는 전통악기를 모두 동원하여 한바탕 두들기고 불고 치다보면 억눌린 가슴들이 풀어진다. 너나 할 것 없이 다 같이 일어나 흥건하게 메마른 가슴이 젖어 내리고 억울한 것도 분한 것도 슬픈 것도 권태로운 것도 모두 풀리고 만다. 이렇게 흥건히 젖어서 흐르고 흘러 한강이 되고 임진강이 되어 강과 강이 만나 마침내 하나로 흐른다. 강이 그렇게 흐르듯 갈라진 겨레가 하나가 되어 흘러간다. 대동(大同)의 흐름이다. 이렇게 풀어야 하는 게 우리네들의 근성이라고 시인은 말하고 있다. 우리네는 역사의 비극에 대해 총칼로써 복수극을 펼치기보다 이렇게 대동단결로 풀어내었다. 그것이 우리네 근성이고 본질이다. 시인은 그것을 마당놀이라는 형식을 시에다 옮겨와서 전통악기를 동원하여 그 반복적으로 두드리고, 불고, 치는 행위를 통하여 시의 언어에 리듬을 타게 하였다. 언어의 리듬은 노래가 되어 한반도가 하나 되길 기원하면서 반복하여 다함께 합창한다. 이러한 이미지의 반복은 「조선낫」에서 ‘낫일테면 조선낫이라/낫일테면 조선낫이라’하여 남성의 이미지로, 「호미」에서 ‘풀을 매며 억척스레 살아온/조용한 아침의 나라/어머니여, 호미여’ ‘이제는 너 없이 못살고/나 없이 힘 못쓰는/호미여, 어머니여’로 여성의 이미지로써 점층적으로 반복되어 그 의미가 강화된다. 여기에는 시인이 인식하는 민족 공동체 의식이 자리하고 있으며 그것이 마당놀이의 가락인 전통 리듬을 타고 불리어진 것이다. 시인은 왜 이렇게 이 땅에 자유와 평화와 정의가 꽃피워지길 희망하는가? 그것은 시인의 개인사인 가족사에서도 또 그의 이웃들에게서도 공통적인 비극의 역사를 대면하였기에 미래에는 서로 상생하며 조화롭고 생명으로 흘러넘치는 이 땅이 되길 바라는 것이다. 이시환 시인은 비극적 요인을 가족사/민족 공동체의 역사와 같이 외부에서 찾는 제1, 제2시집과 달리 제3시집『바람 序說』부터는 내면으로 침잠하여 들어가면서 사물과 자연물을 대상으로 대화를 나누어 간다. 제4시집『숯』과 제5시집 『추신』에는 존재/비존재에 대해 깊이 묵상하고 인간의 유한성에서 오는 허무감과 공허, 보잘 것 없음을 깨달으면서 제6시집 『바람 소리에 귀를 묻고』, 제8시집『상선암 가는 길』, 제9시집『백년완주를 마시며』, 제10시집『애인여래』, 제11시집『눈물모순』에서 구도의 여정을 걸어간다. 이 시기의 시들에서 반복은 제1, 제2시집에서 보이는 특성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여기에는 전통적 리듬을 바탕으로 하되 제1, 제2시집에서 보이는 음소와 동어 반복, 문장(구문) 반복, 종결어의 반복과는 달리 연을 이루어 시의 구조에 변화를 주어서 한 편의 시가 반복 구성으로 인해 시적 긴장을 형성하거나, 의미와 정서를 강화하여 보다 기능적으로 변화되고 있다. 제3시집『바람 序說』의 「그리움」을 읽어보자.   멀찌감치 서서 바라보는 언덕 너머 바다가 좋다   한 발짝 다가서면 한 발짝 물러서는   그렇듯 하루가 멀다고 밤마다 가슴 속 속속들이 파고드는 불면의 그 뿌리 사이로 조용한 혁명이 꿈을 꾸고   차라리 멀찌감치 서서 바라보는 산 너머 있는 그대로 네가 좋아   한 발짝 물러서면 한 발짝 다가서는   이 시는 그리움을 표현한 시로서 그 대상은 바다이다. 이 시에서는 전 5연 구성 중 2연과 5연에 대구 반복이 자리하고 있다. 이것은 시적 화자 ‘나’와 바다인 ‘너’의 거리를 잘 표현하면서 그리움이라는 시제에 아주 적절하게 표현하고 있다고 하겠다. 사랑하는 연인이 하나가 되기 전에 이렇게 한 발짝 다가서면 한 발짝 물러서고 한 발짝 물러서면 한 발짝 다가서는 그런 관계일 것이다. 이것은 남녀 간의 거리만이 아니라 대상과 나, 즉 객체와 주체의 거리이다. 그래서 그리움으로 바라보고 있다. 이 시의 반복은 나와 너의 거리가 대칭적으로 반복되어 이원적 의미를 띠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대상과의 거리 두기는 사랑하는 사이에는 서로가 시선을 마주하고 집중한다. 제4시집 『숯』의「굴뚝나비」에는 부정이나 금지의 반복이 두 번씩 되풀이 되어 의미를 더욱 강화시키고 있다.   꽃이라고 이 꽃 저 꽃 아무 것에나 눈길 주지 말게나.     꽃이라고 이 꽃 저 꽃 아무 것에나 덥석 덥석 앉질 말게나.   늘 검은 정장 검은 브래지어 검은 팬티를 착용하는 유별난 개성.   너는 그렇게 늘 당당하지만 그것으로 외로운 한 마리 가녀린 나비가 아닌가.   너는 그렇게 늘 홀로이지만 언제나 나의 시선을 묶어 두지 않았던가.   꽃이라고 이 꽃 저 꽃 아무 것에나 눈길 주지 말게나.   꽃이라고 이 꽃 저 꽃 아무 것에나 덥석 덥석 앉질 말게나.   이 시에서 나는 굴뚝나비에게 시선을 묶어둔다. 굴뚝나비는 외롭고 가녀린 한 마리의 나비이지만 나의 시선이 늘 묶여있으므로 아무 꽃에나 앉지 말라고 반복하여 강조하고 있다.이 반복은 전 7연 중 1, 2연과 6, 7연에 아무 꽃에나 눈길을 주거나 않지 말라는 대칭적 반복이 시의 연으로 구성되어서 굴뚝나비인 너와 시적 화자 나는 이원적으로 되고, 꽃과 굴뚝 나비의 긴장 관계는 너와 나의 긴장 관계를 내포하고 있어서 시적 화자는 금지의 당부를 하는 것이다. 숯과 동일한 이미지의 동물인 굴뚝나비를 통해서 시인은 꽃과 굴뚝나비를 대조적으로 보고 이것을 나와 너의 관계에 비유하여 긴장을 유발시키는 효과를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죽음에 관하여 본격적으로 다룬 시인의 제5시집『추신』에는 존재/비존재의 고뇌 속에서 비존재에 관한 부정적인 인식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되는데 이것은 인간의 유한성을 인정하고 그것이 공허할지라도 그가 늘 주장하듯이 유무동체(有無同體)의 인식 속에서 변화되고 있다.   문을 닫고 들어와 보게./들어오면 알게 될 거야./네 빛깔, 네 향기, 네 모양새부터 버리고/자리를 말끔히 비워둔다는 게/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를.//내가 나를 버려/온전히 비어 있다는 게/얼마나 향그런 열매인가를/너는 알게 될 거야.//연분홍빛 미소로/내내 서 있던 그 자리가/텅 비어 있음으로 가득 차 있을 때/너의 꽉 찬 비밀이/비밀이 아님을/알게 될 거야./알게 될 거야.   3연 구성의 이 시에서는 ‘알게 될 거야’ 라는 말이 반복이 되고 있다. 제1연은 자신의 빛깔, 향기, 모양새를 버리고 들어와 보면 비워 둔다는 게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를 알게 될 거라고 시적 화자는 말하면서 문을 닫고 들어와 보라고 권유한다. 제2연에서는 내가 나를 버려서 너를 내 안에 들어오게 하였듯이 그것이 얼마나 향기로운 열매인지 너는 알게 될 거라고 강조하여 반복한다. 3연에는 텅 비어 있음으로 가득 차 있을 때 너와 나 사이에 장애였던 너의 비밀이 비밀이 아님을 알게 될 거라고 두 번을 반복한다. 이 시에서 알 수 있듯이 사람의 관계란 바로 서로가 상대방이 들어올 자리를 만들기 위해서 자신을 비워놓을 때 바로 텅 비어 있는 것이 가득 차 있는 것으로 변화된다는 의미의 시로서 유무동체에 도달한다. ‘알게 될 거야’ 라는 속삭임은 ‘깨닫게 될 거야’의 의미이며, 그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나를 버려서 너가 들어올 자리를 위해 비워둘 때 가능하다. 그 때는 장애가 되었던 비밀은 비밀이 아니게 되며 함께 공유하는 것에 지나지 않게 된다. 「추신․25」를 읽어보자.   푸른 하늘에/떠가는 흰구름 같이//내 마음/내 몸도//내 생명/내 삶도//푸른 하늘에/떠가는 흰 구름같이//머물면 눈이 부시고/사라지면 깊고 깊어라.   ‘푸른 하늘에/떠가는 흰 구름 같이’라는 문장이 연을 이루어 1연과 4연에 반복되어 있는 이 시는 나의 마음, 몸, 생명, 삶도 푸른 하늘에 떠가는 흰 구름 같이 머물면 눈이 부시고 사라지면 깊고 깊을 뿐이라는 인식(認識)이다. 모든 것은 한 순간에 지나지 않는다는 의미이며, 머물 그 때 눈이 부시게 아름답고 사라지면 깊고 깊다고 한다. 그러니 시인에게는 삶도 죽음도 푸른 하늘에 떠가는 흰 구름과 같다는 인식이다. 시인은 흰 구름과 같이 비워서 가벼워진 정신세계를 지녔기에 삶도 죽음도 모두 아름답고 깊고 깊다는 인식에 도달하여 가볍고, 자유롭고, 변화하며, 유동적이면서, 유기적이다. 이 시집의 이름이나 주요 시의 제목이 ‘추신’ 인 것은 죽음을 내 안에 긍정적으로 받아들인 자가 세계와 자신을 바라보며 쓴 것이기에 비교적 짧은 시에 그 마음을 담았고 1연과 4연의 대칭적 반복으로 2연의 마음/몸, 3연의 생명/삶이 지니는 이원적 세계가 모두 일원적 세계로 귀결되게 하는 효과를 보이고 있다. 머물고 사라지는 것은 매 한 가지란 의미이다. 즉 있는 것도 없는 것도 같은 것인 세계를 시인은 제5시집『추신』에서 깨달은 것이다. 반복 기법의 다양한 변주로 ‘당신과 나’를 노래한 제6시집 『바람소리에 귀를 묻고』에는 궁극적으로 당신을 꿈꾸는 시인의 영혼을 읽을 수 있다. 먼저, 「生命(생명)」을 읽어보자.   푸르고 푸를지어다. 그 속에 함성이 있고 그 속에 기쁨이 있나니.   푸르고 푸를지어다. 그 속에 네가 있고 그 속에 내가 있나니.   푸르고 푸를지어다. 그 속에 속삭임이 있고 그 속에 말씀이 있나니.   푸르고 푸를지어다.   이 시에서는 병렬적 반복이 쓰이고 있다. ‘~할 지어다’라는 어구에서 오는 주술적 의미를 병렬 반복을 통해 강화하고 있다고 하겠다. 이는 생명이 푸르고 푸르길 시인은 주술적으로 반복하여 되뇌이고 기원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그 생명은 영원히 푸르고 푸르러야 한다. 그 생명 안에는 우리들의 함성이 있고 기쁨이 있다. 그 생명 안에는 너와 내가 존재하며 그 생명 안에는 생명 있는 것들과 없는 것들의 속삭임과 우주만물에 깃든 말씀이 임재하고 있다. 그러니 푸르고 푸를지어다라고 신들린 듯 되뇌이고 있다. 이 시는 불필요한 언어를 재단(裁斷)하고 시인이 예언자적 영감을 가지고 간명하면서도 핵심 되는 언어만으로 생명이 지닌 힘을 나타내고 있다. 이 생명은 함성, 기쁨, 너, 나, 속삭임, 말씀이기 때문에 푸르고 푸를지어다라고 하였다. 이 생명은 곧 당신이다. 이 시집에는 「당신을 꿈꾸며」라는 시가 6편의 연작시 구성으로 실려 있기 때문이다.   당신의 영접을 받으며 당신의 城門을 열고 들어가 마당 가운데 핀 당신만의 꽃을 보았습니다. 그 꽃술에 흐르는 달콤한 꿀과 향기에 취해 그만 혀끝을 갖다 대면서 비몽인지 사몽인지 진몽인지 간에 당신의 나라를 탐해 버렸습니다. 그 순간 나는 당신의 깊고 깊은 우물 속으로 던져져 죽고 죽어서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는 그렇게 당신의 나라, 당신의 영토 위에서 비로소 당신의 심장이 되었고, 당신의 숨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나는 새삼스러이 깨달았습니다. 내 그토록 간절히 그리워하던 당신이 나의 정령이고, 내가 곧 당신의 정령이라는 사실을. 그리하여 나는 내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보았습니다. 내가 타버리고 남은 당신의 가슴 위에 당신이 무너져 내린 내 가슴 위에 웅장한 또 하나의 새 城이 솟고 있음을. 눈이 부시게, 부시게 솟고 있음을.   이 산문시에는 ‘~ㅂ니다’라는 종결 어미와 ‘당신’과 ‘나’라는 말이 자주 반복되고 있다. 또 중요한 어구의 반복 중에는 ‘죽고 죽어서’와 ‘부시게, 부시게’라는 동어반복이다. 이 동어반복을 통하여 내가 죽고 당신이 무너져 내려서 새로운 성이 눈이 부시게, 부시게 솟는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당신과 나는 하나의 정령이기 때문이다. 이 시는 같은 의미를 말이 다른 시어로 구성하여 변주하거나 부연하거나 반복하고 있다. 당신의 나라, 당신의 영토는 같은 의미이고 당신의 심장, 당신의 숨 또한 같은 의미이다. 이렇게 의미적으로 전환․확장하거나 강화하는 것이 이 시에서의 반복의 기능이다. 「눈을 감아요」를 읽어보자.   눈을 한 번 감아 보아요. 이 땅에 바람의 고삐를 풀어 놓아 온갖 생명의 뿌리를 어루만지고 가는, 바쁜 손이 보여요.   눈을 한 번 더 감아 보아요. 이 땅에 바람의 고삐를 풀어 놓아 온갖 생명의 꽃들을 거두어 가는, 분주한 손의 손이 보여요.   그렇게 귀를 한 번 닫아 보아요. 이 땅 위로 넘쳐나는, 서 있는 것들의 크고 작은 숨소리도 들려요.   그렇게 귀를 한 번 더 닫아 보아요. 이 땅에서, 이 하늘에서 넘쳐 흐르는, 바람의 강물소리 들려요. 바람의 고삐를 풀어놓은 손과 손이 보여요.   이 시집에서 바람에 대한 시인의 묵상은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바람은 우주의 원력으로써 모든 생명들을 잉태하게도 하고 소멸하게도 한다. 그 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눈을 감아야 하고 귀를 닫아야 비로소 보이고 들린다는 의미이다. 그러니 제1연과 제2연에서는 눈을 감아 보라고 반복하고 제3연과 제4연에서는 귀를 닫아 보라고 한다. 왜냐하면, 바람의 바쁜 손, 즉 바람의 역할을 심안으로 보고 마음의 귀로 들으려면 눈을 감고 귀를 닫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 땅에서 하늘에서 넘쳐 흐르는 바람의 강물소리는 귀를 한 번 더 닫을 때 들린다고 하였다. 오히려 그렇게 할 때 바람의 강물은 들린다고 하니 마음의 귀로 한 번 더 들으라는 뜻이다. 이 시에서는 대구 반복이 쓰여져서 오히려 눈을 감을 때 바람의 손이 보이고, 귀를 닫을 때 바람의 강물소리가 들린다고 한다. 이것은 역설적인 의미를 지니는 이시환 시의 주요 어법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겠다. 이러한 반복은 「하늘․2」에 오면 리듬을 타고 몸의 세계인 현상계에 너무 목 메이진 말고 하늘을 바라보길 권한다.   서럽거든 보라.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라. 아무 것도 지니지 않은 채 스스로 깊어가는 저 하늘을 보라.   백 년도 순간이요 이 몸도 그림자 같은 것이니 아끼되 목 메이진 말구려. 아끼되 목 메이진 말구려.   괴롭거든 보라.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라. 아무 것도 지니지 않은 채 스스로 푸르러가는 저 하늘을 보라.   백년도 하루요, 이 몸도 바람 같은 것이니 슬퍼도 크게 슬퍼하지 말구려. 기뻐도 크게 기뻐하지 말구려.   이 시에서는 반복의 기법이 아주 탁월하게 구성되어 있으며 어휘적으로도 약간씩 변화를 주어서 대조적 반복을 통해 긴장을 형성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1연과 3연, 2연과 4연이 각각 대조적 반복을 통하여 시 전체에 긴장을 형성하고 있는 예이다. 그러면서도 각 연의 3, 4행에 변화를 주어서 진부하지 않게 하였다. 특별히 이 시에서는 이미지나 비유를 동원하지 않았고 오히려 평이한 언어를 쓰고 있지만 반복의 기법을 잘 구성함으로써 일상성을 초월한 시적 언어, 시적 구조로 변화시키고 있어서 돋보이는 시가 되고 있다.   나는 떠가네. 나는 떠가네. 저 푸른 하늘에 흰 구름처럼 누워.   나는 떠가네. 나는 떠가네. 저 강물에 풀잎처럼 누워.   당신의 품에서 나와 그저 재롱이나 실컷 부리다가 당신의 품으로 돌아가네.   저 하늘의 구름처럼 저 강물의 풀잎처럼 그리움만 가득 싣고 돌아가네.   「無題(무제)」라고 제목이 붙은 이 시는 그저 특별한 제목이 없어도 그냥 읽으면 투명하며 맑아서 어른이 아이의 동심으로 돌아가서 시심을 불러 일으켜 쓴 시와 같은 느낌으로 마치 선경에 이를 경우에 이런 시를 쓰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나는 당신의 품으로 돌아간다. 그리움을 가득 품고 돌아간다. 당신은 아마 우주를 창조하거나 주재하는 절대자일 것이고, 그 절대자의 품이다. 그런 절대자의 넓은 품에서 나와 실컷 재롱부리며 살다가 다시 그 품 안으로 돌아가는 나는 그리움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런 내가 가능한 것은 푸른 하늘의 흰 구름처럼 가볍고 강물의 풀잎처럼 가볍기에 나를 완전히 비웠기에 나는 가볍게 떠 갈 수 있다. 제1연과 제2연은 병렬적 반복으로 배치하였다. 그러나 1연 3행은 ‘저 푸른 하늘에 흰 구름처럼 누워’서 나는 떠간다. ‘나는 떠가네’라는 어구가 2연에 걸쳐 반복되었고 ‘돌아가네’가 2연 3행의 말미에 배치된 것도 시인이 의도한 것이다. 4연에 1행과 2행에 1연 3행과 2연 3행의 내용을 ‘저 하늘의 구름처럼/저 강물의 풀잎처럼’이라고 종합적으로 다시 반복하여 완결된 느낌을 준다. 이시환 시인은 반복의 기법을 다양하게 구사하면서도 자신만의 철저한 법칙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다른 시인들의 그것과 다르다. 그 이유는 이 짧고 평이한 시에서 1연 3행과 2연 3행의 ‘누워’라는 말에서 3연 3행과 4연 3행의 ‘돌아가네’로 귀결되는 것은 인간이 직립보행하면서 마음껏 재롱부리고 이 세상을 놀다가 죽을 때는 누워서 돌아가는 육신의 모습을 간취하게 하는 어구를 말미에 오게 한 것이다. 이런 부분이 이시환 시의 독특한 부분이다. 그는 늘 삶과 죽음이 유무동체임을 인식 속에 담지하고 있기에 이런 표현을 아주 자연스럽게 구사하는 것이다. 그의 시 「통일론․1」과 「통일론․2」에 오면 이 반복의 기법이 더욱 깊이를 더함을 확인할 수 있다.   통일, 통일, 통일을 외치는 것은 그만큼 간절하기 때문이지만   통일, 통일, 통일을 오늘도 외쳐야 하는 것은 그만큼 우리 안에 원치 않는 이들이 많기 때문이라네.   이 시에서는 통일, 통일, 통일이라고 반복하여 외치는 까닭은 간절하기 때문에 반복하여 외치는 것이며, 또 우리 안에 통일을 원치 않는 이들이 많기 때문에 오늘도 외쳐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반복은 간절함, 절실함에서 반복적으로 되풀이 하는 것이며, 그 간절함에 대해 같이 꿈꾸기를, 같이 이루기를 원치 않는 무리들이 내부에 있기 때문에 통일, 통일, 통일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정곡을 찌르는 통찰인가. 이 시의 반복 기법은 점층적 반복으로써 통일을 외쳐야 하는 의미를 강화하고 있다고 하겠다. 「통일론․2」에 오면 통일이 그렇게 멀리 있는 것도 어려운 것도 아닌데 현실세계에서 통일을 어렵고 멀리 있게 만드는 것에 대한 슬픔을 반어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렇게 멀리 있는 것도 그렇게 어려운 것도 아니야.   통일은, 버스를 타고 가는, 차창에 비친 낯선 사람들을 향해 가던 길 멈추고 가까이에서, 멀리 손을 흔드는 저 어린 아이들의 마음에서, 얼굴에서부터 오는 법.   통일은, 무더운 여름날, 버스 안에서 웃옷을 다 벗고 손뼉을 치며 같은 노래를 함께 부르는 남과 북 노동자들의 가슴에서, 흥에서 오는 법.   그렇게 멀리 있는 것도 그렇게 어려운 것도 아니야.   1연과 4연은 통일이 어려운 것도 멀리 있는 것도 아니라고 전제하고 그 이유에 대한 부연의 기능이 2연과 3연의 내용이다. 통일은 2연에서는 ‘저 어린 아이들의 마음에서, 얼굴에서부터 오는 법’이며, 3연의 ‘남과 북 노동자들의 가슴에서, 흥에서 오는 법’이라고 시인은 말한다. 그러니 멀리 있는 것도 어려운 것도 아닌데 현실은 너무 어렵고 두 개의 정권이 지속하기 위하여 끊임없는 줄다리기를 할 뿐이다. 이러는 과정에서 피해를 입거나 분단으로 인해 생기는 폐해는 3연과 4연의 사람들이 고스란히 지는 것이다. 시인은 이러한 현실 세계의 정치적 논리를 우회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이 시에서도 반복의 기법은 아주 돋보이며 여기서는 부가적 반복과 통일의 정서를 강화하는 기능하고 있다. 이시환 시인이 꿈꾸는 세계는 ‘너’와 ‘내’가 ‘우리’로 하나가 되고, 남과 북이 하나가 되어 서로 사랑과 자비로 살며, 그런 혼들이 모인 반도 땅이 나아가 온 세계의 사람들이 우주를 창조한 창조주의 뜻에 따라 투명한 의지와 영혼으로 자유롭고 조화롭게 만물과 교감하며 더불어 지상복락을 누리는 세계이다. 「너와 나」와 「비눗방울처럼」에는 반복을 통해 그가 꿈꾸는 세계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네가 울면 나도 울고 네가 웃으면 나도 미소 짓는 것이 우리는 하나, 우리는 하나.   네가 아프면 나도 아프고 네가 나으면 나도 나아지는 것이 우리는 하나, 우리는 하나.   너와 내가 하나 되고 너와 내가 한 몸일 때 우리는 사랑, 우리는 자비.   비누방물처럼 가벼웁게 비누방울처럼 투명하게 살고지고 살고지고       비눗방울처럼 영롱하게 비눗방울처럼 둥-글게 살고지고 살고지고   비눗방울처럼 자유롭게 비눗방울처럼 조용하게 살고지고 살고지고   세상 사람들은 인생이 덧없다하나 덧없다 할 것도 없고,   세상 사람들은 한사코 가진 게 없다하나 실은 온통 버릴 것뿐이네.   이 두 편의 시에서는 반복의 기법을 통해서 시인은 의미를 강화하거나 자신이 꿈꾸는 세계를 주술사처럼 되풀이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통일론」1, 2에서와 같이 통일이 아직 오지 않은 것처럼, 그가 꿈꾸는 세계가 아직 오지 않았거나 내부에 그런 세상이 오길 바라지 않는 사람[훼방꾼=장애물]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의 시에서 유난히 반복기법이 많이 쓰였다는 사실은, 새로운 세계를 꿈꾸며, 필연적으로 그런 세계가 올 것이라고 예언을 하며, 그 꿈이 이루어지도록 마치 주술사처럼 끊임없이 되뇌이기 때문이다. 시인은 바로 그는 역할을 하는 자이며, 그가 시를 쓰는 이유이기도 한 것이리라. 꿈꾸는 세상이 올 때까지 그의 반복은 멈추지 않을 것이며, 이것이 바로 이시환 시가 지닌 힘이라고 할 수 있다.    
1168    산문시 몇다발 / 李箱 시모음 댓글:  조회:4310  추천:0  2016-03-12
즐거운 편지                                /황동규 1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보리라. 2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 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 함박눈                                     / 이시환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다만, 당신에게로 곧장 달려갈 수 있다는 그것과 당신을 위해서라면 당신의 이마에, 손등에, 목덜미 어디에서든 입술을 부비고, 가녀린 몸짓으로 나부끼다가 한 방울의 물이라도 구름이라도 될 수 있다는 그것뿐이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사옵니다. 다만, 우리들만의 촉각을 마비시키는 추위가 엄습해오는 길목으로 돌아서서 겨울나무 가지 끝 당신의 가슴에 잠시 머물 수 있다는 그것과 당신을 위해서라면 충실한 종의 몸으로 서슴없이 달려가 젖은 땅, 얼어붙은 이 땅 어디에서든 쾌히 엎드릴 수 있다는 그것뿐이옵니다. 나는 언제나 그런 나에 불과합니다. 나는 나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 취해라                                           /보들레르 항상 취해 있어야 한다. 모든 것이 거기 있다. 그것이 유일한 문제다. 당신의 어깨를 무너지게 하는 가증스러운 시간의 무게를 느끼지 않기 위해, 당신은 쉴 새 없이 취해 있어야한다. 그러나 무엇에 취하는가? 술이든, 시든, 도덕이든, 그 어느 것이든 당신 마음대로이다. 그러나 어쨌든 취해라. 때로는 궁궐의 계단에서 도랑가의 초록색 풀 위에서, 혹은 당신 방의 음울한 고독 가운데서 당신이 깨어나게 되고 취기가 감소되거나 사라져버리거든 물어보아라. 바람이든 물결이든 별이든 새든 시계든, 지나가는 모든 것, 슬퍼하는 모든 것, 달려가는 모든 것, 노래하는 모든 것, 말하는 모든 것에게 지금 몇 시인가를. 그러면 바람도 물결도 별도 새도 시계도 당신에게 대답할 것이다. 이제는 취할 시간, 시간의 학대받는 노예가 되지 않기 위하여, 끊임없이 취하여라. 술이건 시건, 또는 덕이건 무엇에고. 그대 좋도록 ============================================================================================================ 李三晩이라는 神                                                 /서정주 질마재 사람들 중에 글을 볼 줄 아는 사람은 드물지마는, 사람이 무얼로 어떻게 神이 되는가를 요량해 볼 줄 아는 사람은 퍽으나 많읍니다. 李朝 英祖 때 남몰래 붓글씨만 쓰며 살다 간 全州 사람 李三晩이도 질마재에선 시방도 꾸준히 神 노릇을 잘하고 있었는데, 그건 묘하게도 여름에 징그러운 뱀을 쫒아내는 所任으로 섭니다. 陰 正月 처음에 뱀 날이 되면, 질마재 사람들은 먹글씨 쓸 줄 아는 이를 찾아가서 李三晩 석 字를 많이많이 받아가다 집 안 기둥들의 밑둥마다 다닥다닥 붙여 두는데, 그러면 뱀들이 기어올라 서다가도 그 이상 더 넘어선 못 올라온다는 信念 때문입니다. 李三晩이가 아무리 죽었기로서니 그 붓 기운을 뱀아 넌들 행여 잊었겠느냐는 것이지요. 글도 글씨도 모르는 사람들 투성이지만, 이 요량은 시방도 여전합니다. ============================================================================================================== 두텁나루 숲 편지 6 -슬픔                                     /박두규 슬픔은 어두운 계곡을 내려와 천리향 이파리 뒤에 숨어 청승맞게 울었다. 쫓겨난 유년幼年은 울 밖에 쪼그리고 앉아 기척도 없이 밤을 새며, 그 향내 나는 울음소리를 고스란히 귀에 담았다. 반쪽 난 달은 강을 건너지 못해 산자락을 맴돌고, 그 어느 날 까닭을 알 수 없는 슬픔 하나가 내게로 왔다. 나는 그녀를 데리고 오도 가도 못하는 반백의 세월을 살았다. 그렇게 한동안 강물이 흐르고 비로소 숲에 드는 어느 날, 나는 그 오랜 슬픔을 계곡의 옛길을 더듬어 산으로 돌려보냈다. 그리고 밤새 끄억끄억 그 세월을 다 울어 그녀에 대한 이별의 예를 다했다. 마당의 산수유나무 잎들이 수런거리는 사이로 별이 지고, 미처 따라가지 가지 못한 그녀의 그림자가 울 밖에 쪼그리고 앉아 울고 있었다. ========================================================================================================= 호모 엠파티쿠스                                                    /박두규 나이 60을 넘긴 머리 허연 퇴직 교사가 희망버스를 타고 185일째 고공농성을 하는 노동자를 보러 갔단다. 주변의 사람들이 가자고 해서 간 것도 아니고, 부당해고를 철회시키자고 간 것도 아니고, 정부나 기업의 잘못을 꾸짖으려는 국민의 입장에서 간 것도 아니고, 할 일이 없는 백수라서 간 것도 아니란다. 다만 마음이 불편해서 갔다는 것이다. 내 일은 아니지만 여자 혼자 그 높고 험한 곳에서 그러고 있는 것이 괜스리 마음에 걸렸다는 것이다. 체한 것처럼. 모든 것이 불편해서 그래서 갔다는 것이다. 가서 1박 2일 동안 비 맞으며 군중들과 경찰들 사이에 끼여 시달리고 땀 흘리고 물대포에 최루액 다 맞고 집에 돌아와 샤워 하고나서 잠자리에 들며 한마디 했단다. “세상에 이렇게 개운하고 편할 수가 있나.” /////////////////////////////////////////////////////////             거울 거울속에는소리가없오 저렇게까지조용한세상은참없을것이오 거울속에도내게귀가있오 내말을알아듣는딱한귀가두개나있오 거울속의나는왼손잡이요 내악수를받을줄모르는-악수를모르는왼손잽이요 거울때문에나는거울속의나를만져보지를못하는구료마는 거울아니었던들내가어찌거울속으나를만나보기만이라도했겠오 나는지금거울을안가져오마는거울속에는늘거울속의내가있오 잘은모르지만외로된사업에골몰할께요 거울속의나는참나와는반대요마는또꽤닮았오 나는거울속의나를근심하고진찰할수없으니퍽섭섭하오     꽃나무 벌판한복판에꽃나무하나가있소. 근처(近處)에는꽃나무가하나도없소 꽃나무는제가생각하는꽃나무를 열심(熱心)으로생각하는것처럼열심으로꽃을피워가지고섰소. 꽃나무는제가생각하는꽃나무에게갈수없소. 나는막달아났소. 한꽃나무를위하여그러는것처럼나는참그런이상스러운흉내를 내었소.     가정 문(門)을암만잡아다녀도안열리는것은안에생활(生活)이모자라는까닭이다.밤이사나운꾸지람으로나를졸른다.나는우리집내문패(門牌)앞에서여간성가신게아니다.나는밤속에들어서서제웅처럼자꾸만감(減)해간다.식구(食口)야봉(封)한창호(窓戶)어데라도한구석터놓아다고내가수입(收入)되어들어가야하지 않나.지붕에서리가내리고뾰족한데는침(鍼)처럼월광(月光)이묻었다.우리집이앓나보다그러고누가힘에겨운도장을찍나보다.수명(壽命)을헐어서전당(典當)잡히나보다.나는그냥문(門)고리에쇠사슬늘어지듯매어달렸다.문(門)을열려고안열리는문(門)을열려고.     거리 - 여인이 出奔한경우 백지위에한줄기철로가깔려있다. 이것은식어들어가는마음의圖解다. 나는매일虛爲를담은전보를발신한다. 명조도착이라고. 또 나는 나의일용품을매일소포로발송하였다. 나의생활은이런재해지를 닮은거리를점점낯익어갔다.     아침 캄캄한공기를마시면폐에해롭다. 폐벽에끌음이앉는다. 빔새 도록나는몸살을앓는다. 밤은참많기도하더라. 실어내가기도하 고실어들여오기도하고하다가잊어버리고새벽이된다 .폐에도아 침이켜진다. 밤사이에무엇이없어졌나살펴본다. 습관이도로와 있다. 다만내치사한책이여러장찢겼다. 초췌한결론위에아침햇 살이자세히적힌다. 영원히그코없는밤은오지않을듯이     수염 (수수그밖에수염일수있는것들모두를이름) 1 눈이존재하여있지아니하면아니될처소는삼림인웃음이존재하 여있었다 2 홍당무 3 아메리카의유령은수족관이지만대단히유려하다 그것은음울하기도한것이다 4 계류에서― 건조한식물성이다 가을 5 일소대의군인이동서의방향으로전진하였다고하는것은 무의미한일이아니면아니된다 운동장이파열하고균열한따름이니까 6 심심원 7 조(粟)를그득넣은밀가루포대 간단한수유의월야이었다 8 언제나도둑질할것만을계획하고있었다 그렇지는아니하였다고한다면적어도구걸이기는하였다 9 소한것은밀한것의상대이며또한 평범한것은비범한것의상대이었다 나의신경은창녀보다도더욱정숙한처녀를원하고있었다 10 말(馬)― 땀(汗)― 여, 사무로써산보라하여도무방하도다 여, 하늘의푸르름에지쳤노라이같이폐쇄주의로다       이런 시 역사를하노라고 땅을파다가 커다란돌을하나끄집어내어놓 고보니도무지어디서인가 본듯한생각이들게 모양이생겼는데 목도들이 그것을메고나가더니 어디다갖다버리고온모양이길래 쫓아나가보니위험하기짝이없는 큰길가더라. 그날밤에 한소나기하였으니 필시그돌이깨끗이씻꼈을터인데 그이틀날가보니까 변괴로다 간데온데없더라.어떤돌이와서 그돌을업어갔을까 나는 참이런처량한생각에서아래와같은작문 을지었다.「내가 그다지 사랑하던 그대여 내한평생에 차마 그대를 잊 을수없소이다.내차례에 못을사랑인줄은 알면서도 나혼자 는꾸준히생각하리라. 자그러면 내내어여쁘소서」어떤돌이 내얼굴을 물끄러미 치어다보는것만같아서 이런시 는 그만찢어버리고싶더라.     1933. 6. 1 천평위에서 삼삽년동안이나 살아온사람 (어떤과학자) 삼십 만개나넘는 별을 다헤어놓고만 사람(역시)인간칠십 아니이 십사년동안이나 뻔뻔히 살아온 사람(나) 나는 그날 나의자서전에 자필의부고를 삽입하였다이후나 의육신은 그런고향에는있지않았다 나는 자신나의시가 차압당 하는 꼴을 목도하기는 차마 어려웠기 때문에.     화로 방거죽에극한이와닿았다. 극한이방속을넘본다. 방안은견딘 다. 나는독서의뜻과함께힘이든다. 화로를꽉쥐고집의집중을잡 아땡기면유리창이움푹해지면서극한이흑처럼방을누른다. 참다 못하여화로는식고차갑기때문에나는적당스러운방안에서쩔쩔맨 다. 어느바다에호수가미나보다. 잘다져진방바닥에서어머니가 생기고어머니는내아픈데에서화로를떼어가지고부엌으로나가신 다. 나는겨우폭동을기억하는데내게서는억지로가지가돋는다. 두팔을벌리고유리창을가로막으면빨래방맹이가내등의더러운의 상을뚜들긴다. 극한을걸커미는어머니―기적이다. 기침약처럼 따끈따끈한화로를한아름담아가지고내체온위에올라서면독서는 겁이나서곤두박질을친다.     이상한 가역반응 임의의반경의원(과거분사의시세) 원내의일점과원외의일점을결부한직선 두종류의존재의시간적영향성 (우리들은이것에관하여무관심하다) 직선은원을살해하였는가   현미경 그밑에있어서는인공도자연과다름없이현상되었다. 같은날의오후 물론태양이존재하여있지아니하면아니될처소에존재하여있었을뿐만 아니라그렇게하지아니하면아니될보조를미화하는일까지도 하지아니하고있었다. 발달하지도아니하고발전하지도아니하고 이것은분노이다. 철책밖의백대리석건축물이웅장하게서있던 진진5의각바아의나열에서 육체에대한처분을센티멘탈리즘하였다. 목적이있지아니하였더니만큼냉정하였다. 태양이땀에젖은잔등을내려쬐었을때 그림자는잔등전방에있었다. 사람은말하였다. 「저변비증환자는부자집으로식염을얻으려들어가고자희망하 고있는것이다」라고 ............     절 벽(絶壁) 꽃이 보이지 않는다. 꽃이향기롭다. 향기香氣가만개滿開한다. 나는거기묘혈을 판다. 묘혈도보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묘혈속에 나는들어앉는다. 나는 눕는다. 또꽃이향기롭다. 꽃은보이지 않는다. 향기가만개만개한다. 나는잊어 버리고재차거기묘혈墓穴을판다 묘혈은보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묘혈로 나는꽃을깜빡잊어 버리고들어간다. 나는정말눕는다. 아아 꽃이또향기롭다. 보이지 않는꽃이 -보이지도않는꽃이.     위치(位置) 중요한위치에서한성격의심술이비극을연역(演繹)하고있을즈음범위에는타인이없었던가. 한주(株)-분(盆)에심은외국어의관목(灌木)이막돌아서서나가 버리려는동기요화물(貨物)의방법이와 있는의자(倚子)가주저앉아서귀먹은체할 때마침s내가구두(口讀)처럼고사이에낑기어들어섰으니 나는내책임의맵시를어떻게해보여야하나. 애화(哀話)가주석(註釋)됨을따라나는슬퍼할준비라도 하노라면나는못견뎌모자를쓰고밖으로나가 버렸는데웹사람하나가여기남아내분신(分身)제출할것을잊어 버리고있다.     최후 사과한알이 떨어졌다. 지구地球는 부서질그런정도로 아팠다. 최후最後이미여하如河한정신情神도 발아發芽하지아니한다.     오감도(烏瞰圖) - 時弟一號 13인의 아해가 도로로 질주하오. (같은 막다른 골목이 적당하오.) 제 1의 아해가 무섭다고 그리오. 제 2의 아해가 무섭다고 그리오. 제 3의 아해가 무섭다고 그리오. 제 4의 아해가 무섭다고 그리오. 제 5의 아해가 무섭다고 그리오. 제 6의 아해가 무섭다고 그리오. 제 7의 아해가 무섭다고 그리오. 제 8의 아해가 무섭다고 그리오. 제 9의 아해가 무섭다고 그리오. 제 10의 아해가 무섭다고 그리오. 제 11의 아해가 무섭다고 그리오. 제 12의 아해가 무섭다고 그리오. 제 13의 아해가 무섭다고 그리오. 십삼인의 아해는 무서운 아해와 무서워하는 아해와 그렇게 뿐이 모였소. (다른 사람은 없는 것이 차라리 나았소) 그 중에 1인의 아해가 무서운 아해라도 좋소. 그 중에 2인의 아해가 무서운 아해라도 좋소. 그 중에 2인의 아해가 무서워하는 아해라도 좋소. 그 중에 1인의 아해가 무서워하는 아해라도 좋소. (길은 뚫린 골목이라도 적당하오.) 13인의 아해가 도로로 질주하지 아니하여도 좋소. - 時弟二號 나의 아버지가 나의 곁에서 조을 적에 나는 나의 아버지가 되고 도 나는 나의 아버지의 아버지가 되고, 그런데도 나의 아버지는 나의 아버지대로 나의 아버지인데 어쩌자고 나는 자꾸 나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가 되니 나는 왜 나의 아버지를 껑충뛰어 넘어야하는지 나는 왜 드디어 나와 나의 아버지와 나의 아버지의 아버지와 나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 노릇을 한꺼번에 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이냐 - 時弟三號 싸움하는 사람은 즉 싸움하지 아니하던 사람이고 또 싸움하는 사람은 싸움하지 아니하는 사람이었기도 하니까 싸움하는 사람이 싸움하는 구경을 하고 싶거든 싸움하지 아니하던 사람이 싸움하는것을 구경하든지 싸움하지 아니하는 사람이 싸움하는 구경을 하든지 싸움하지 아니하던 사람이 싸움이나 싸움하지 아니하는 사람이 싸움하지 아니하는 것을 구경하든지 하였으면 그만이다. - 時弟四號 환자의 용태에 관한 문제 진단 0:1 26.10.1931 以上 책임의사 이상 - 時弟五號 전후좌우를제(除)하는유일의흔적(痕跡)에있어서 익은불서목불대도(翼殷不逝目不大覩) 반왜소형의신의안전(眼前) 에아전낙상(我前落傷)한고사(故事)를유(有)함 장부(臟腑)라는것은침수된축사(畜舍)와구별될수있을란가 - 時弟六號 앵무 ※ 2필 2필 ※ 앵무는포유류에속하느니라. 내가2필을아는것은내가2필을알지못하는것이니라. 물론나는희망할것이니라. 앵무 2필 "이소저는신사이상의부인이냐""그렇다" 나는거기서앵무가노한것을보았느니라.나는부끄러워서얼굴이붉어졌었겠느니라. 앵무 2필 2필 물론나는추방당하였느니라.추방당할것까지도없이자퇴하였느니라.나의체구는중추를상실하고또상당히창랑하여그랬든지나는미미하게체읍하였느니라. "저기가저기지""나""나의-아-너와나" "나" sCANDAL이라는것은무엇이냐."너""너구나" "너지""너다""아니다너로구나"나는함뿍젖어서그래서수류처럼도망하였느니라.물론그것은아아는사람혹은보는사람은없었지만그러나과연그럴는지그것조차그럴는지. - 時弟七號 구원적거(久遠謫居)의지(地)의일지(一枝)·일지에피는현화(顯花)·특이한4월의화초·30륜(輪)·30륜에전후되는양측의명경(明鏡)·맹아(萌芽)와같이희희(戱戱)하는지평(地平)을향하여금시금시낙백(落魄)하는만월·청한의기(氣)가운데만신창이의만월이의형당하여혼륜(渾淪)하는·적거(謫居)의지를관류하는일봉가신(一封家信)·나는근근히차대(遮戴)하였더라·몽몽한월아(月芽)·정일을개엄하는대기권의요원·거대한곤비(困憊)가운데의일년4월의공동(空洞)·반산전도(槃散顚倒)하는성좌와성좌의천열(千裂)된사호동(死胡同)을포도하는거대한풍설·강매·혈홍으로염색된암광채임리한망해·나는탑배하는독사와같이지하에식수되어다시는기동할수없었더라·천량이올때까지 - 時弟八號 제1부시험 수술대 1 수은도말평면경 1 기압 2배의평균기압 온도 개무 위선마취된정면으로부터입체와입체를위한입체가구비된전부를평면경에영상시킴.평면경에수은을현재와반대측면에도말이전함.(광선침입방지에주의하여)서서히마치를해독함.일축철필과일장백지를지급함.(시험담임인은피시험인과포옹함을절대기피할것)순차수술실로부터시험인을해방함.익일.평면경의종축을통과하여평면경을2편에절단함.수은도말2회. ETC 아직그만족한결과를수득치못하였음. 제2부시험 직립한평면경 1 조수 수명 야외의진공을선택함.위선마취된상지의첨단을경면에부착시킴.평면경의수은을박락함.평면경을후퇴시킴.(이때영상된상지는반드시초자를무사통과하겠다는것으로가설함)상지의종단까지.다음수은도말.(재래면에)이순간공전과자전으로부터그진공을강차시킴.완전히2개의상지를접수하기까지.익일.초자를전진시킴.연하여수은주를재래면에도말함.(상지의처분)(혹은멸형)기타.수은도말면의변경과전진후퇴의중복등. ETC 이하불상. 진단 0:1 26.10.1931 책임의사 이상 - 時弟九號 매일같이 열풍이 불더니 드디어 내 허리에 큼직한 손이 와 닿는다. 황홀한 지문 골짜기로 내 땀내가 스며드자마자 쏘아라. 쏘으리로다. 나는 내 소화기관에 묵직한 총신을 느끼고 내 다물은 입에 매끈매끈한 총구를 느낀다. 그러더니 나는 총 쏘으드키 눈을 감으며 한방 총탄 대신에 나는 참 나의 입으로 무엇을 내어배앝었더냐. - 時弟十號 찢어진 벽지에 죽어가는 나비를 본다. 그것은 유계(幽界)에 낙역되는 비밀한 통화구다. 어느 날 거울 가운데의 수염에 죽어가는 나비를 본다. 날개 축 처어진 나비는 입김에 어리는 가난한 이슬을 먹는다. 통화구를 손바닥으로 꼭 막으면서 내가 죽으면 앉았다 일어서드키 나비도 날라가리라. 이런 말이 결코 밖으로 새어나가지는 않게한다. - 時弟十一號 그 사기컵은 내 해골과 흡사하다. 내가 그 컵을 손으로 꼭 쥐었을 때 내 팔에서는 난데없는 팔 하나가 접목처럼 돋히더니 그 팔에 달린 손은 그 사기컵을 번적 들어 마룻바닥에 메어부딪는다. 내 팔은 그 사기컵을 사수하고 있으니 산산이 깨어진 것은 그럼 그 사기컵과 흠사한 내 해골이다. 가지났던 팔은 배암과 같이 내 팔로 기어들기 전에 내 팔이 혹 움직였던들 홍수를 막은 백지는 찢어졌으리라. 그러나 내 팔은 여전히 그 사기컵을 사수한다. - 時弟十二號 때묻은 빨래 조각이 한 뭉덩이 공중으로 날라 떨어진다. 그것은 흰 비둘기의 떼다. 이 손바닥만한 한 조각 하늘 저편에 전쟁이 끈나고 평화가 왔다는 선전이다. 한 무더기 비둘기의 떼가 깃에 묻은 때를 씻는다. 이 손바닥만한 하늘 이편에 방망이로 흰 비둘기의 떼를 때려 죽이는 불결한 전쟁이 시작된다. 공기에 숯검정이가 지저분하게 묻으면 흰 비둘기의 떼는 도 한번 손바닥만한 하늘 저편으로 날아간다. - 時弟十三號 내 팔이 면도칼을 든 채로 끊어져 떨어졌다. 자세히 보면 무엇에 몹시 위협당하는것처럼 새파랗다. 이렇게 하여 읽어 버린 내 두 개 팔을 나는 촉(燭)대 세움으로 내 방안에 장식하여 놓았다. 팔은 죽어서도 오히려 나에게 겁을 내이는 것만 같다. 나는 이런 얇다란 예의를 화초분보다도 사랑스레 여긴다. - 時弟十四號 고성 앞 풀밭이 있고 풀밭 위에 나는 내 모자를 벗어 놓았다. 성 위에서 나는 내 기억에 꽤 무거운 돌을 매어달아서는 내 힘과 거리껏 팔매질쳤다. 포물선을 역행하는 역사의 슬픈 울음소리. 문득 성 밑 내 모자 곁에 한 사람의 걸인이 장승과 같이 서 있는 것을 내려다보았다. 걸인은 성 밑에서 오히려 내 위에 있다. 혹은 종합된 역사의 망령인가. 공중을 향하여 놓인 내 모자의 깊이는 절박한 하늘을 부른다. 별안간 걸인은 표표한 풍채를 허리 굽혀 한 개의 돌을 내 모자 속에 치뜨려 넣는다. 나는 벌써 기절하였다. 심장이 두개골 속으로 옮겨가는 지도가 보인다. 싸늘한 손이 내 이마에 닿는다. 내 이마에는 싸늘한 속자국이 낙인되어 언제까지 지워지지 않는다. - 時弟十五號 1. 나는 거울 없는 실내에 있다. 거울 속의 나는 역시 외출중이다. 나는 지금 거울속의 나를 무서워하며 떨고 있다. 거울 속의 나는 어디가서 나를 어떻게 하려는 음모를 하는 중일까. 2. 죄를 품고 식은 침상에서 잤다. 확실한 내 꿈에 나는 결석하였고 의족을 담은 군용 장화가 내 꿈의 백지를 더렵혀 놓았다. 3. 나는 거울 있는 실내로 몰래 들어간다. 나를 거울에서 해방하려고. 그러나 거울 속의 나는 침울한 얼굴로 동시에 꼭 들어온다. 거울 속의 나는 내게 미안한 뜻을 전한다. 내가 그 때문에 영이되어 떨고 있다. 4. 내가 결석한 나의 꿈. 내 위조가 등장하지 않는 내거울. 무능이라도 좋은 나의 고독의 갈망자다. 나는 드디어 거울 속의 나에게 자살을 권유하기로 결심하였다. 나는 그에게 시야도 없는 등창을 가리키었다. 그 들창은 자살만을 위한 들창이다. 그러나 내가 자살하지 아니하면 그가 자살할 수 없음을 그는 네게 가리친다. 거울 속의 나는 불사조에 가깝다. 5. 내 왼편 가슴 심장의 위치를 방탄 금속으로 엄폐하고 나는 거울 속의 내 왼편 가슴을 겨누어 권총을 발사하였다. 탄환은 그의 왼편 가슴을 관통하였으나 그의 심장은 바른편에 있다. 6. 모형 심장에서 붉은 잉크가 엎질러졌다. 내가 지각한 내 꿈에서 나는 극형을 받았다. 내 꿈을 지배하는 자는 내가 아니다. 악수할 수보차 없는 두 사람을 봉쇄한 거대한 죄가 있다.       한個의 밤     여울에서는滔滔한소리를치며 沸流江이흐르고있다. 그水面에아른아른한紫色層이어린다.     十二峰봉우리로遮斷되어 내가서성거리는훨씬後方까지도이미黃昏이깃들어있다 으스름한大氣를누벼가듯이 地下로地下로숨어버리는河流는거무튀튀한게퍽은싸늘하구나.     十二峰사이로는 빨갛게물든노을이바라보이고     鐘이울린다.     不幸이여 지금江邊에黃昏의그늘 땅을길게뒤덥고도 오히려남을손不幸이여 소리날세라新房에窓帳을치듯 눈을감는者나는 보잘것없이落魄한사람.     이젠아주어두워들어왔구나 十二峰사이사이로 하마별이하나둘모여들기始作아닐까 나는그것을보려고하지않았을뿐 차라리 草原의어느一點을凝視한다.     門을닫은것처럼캄캄한色을띠운채 이제沸流江은무겁게도사려앉는것같고 내肉身도千斤 주체할道理가없다.           명경(明鏡)     여기 한페-지 거울이 있으니 잊은 계절에서는 얹은머리가 폭포처럼 내리우고     울어도 젖지 않고 맞대고 웃어도 휘지 않고 장미처럼 착착접힌 귀 들여다보아도 들여다보아도 조용한 세상이 맑기만 하고 코로는 피로한 향기가 오지 않는다.     만적만적 하는 대로 수심이 평행하는 부러 그러는 것 같은 거절 우편으로 옮겨앉은 심장일망정 고동이 없으란 법 없으니     설마 그런? 어디 觸診...... 하고 손이 갈 때 지문이 지문을 가로막으며 선뜩하는 차단뿐이다.     오월이면 하루 한번이고 열 번이고 외출하고 싶어하더니 나갔든길에 안돌아오는 수도 있는 법     거울이 책장 같으면 한 장 넘겨서 맞섰든 계절을 만나련만 여기 있는 한페-지 거울은 페-지의 그냥 표지-           悔恨의 章     가장 무력한 사내가 되기 위해 나는 얼금뱅이였다 세상에 한 여성조차 나를 돌아보지 않는다 나의 懶怠는 安心이다.     양팔을 자르고 나의 職務를 회피한다 이제는 나에게 일을 하라는 자는 없다 내가 무서워하는 지배는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다     역사는 무거운 짐이다 세상에 대한 사표 쓰기란 더욱 무거운 짐이다 나는 나의 문자들을 가둬 버렸다 도서관에서 온 소환장을 이제 난 읽지 못한다     나는 이젠 세상에 맞지 않는 옷이다 封墳보다도 나의 의무는 적다 나에겐 그 무엇을 이해해야 하는 고통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나는 아무 때문도 보지는 않는다 그러기 때문에 나는 아무것에게도 또한 보이지 않을 것이다.           선(線)에 관한 각서(覺書) 2     1+3 3+1 3+1 1+3 1+3 3+1 1+3 1+3 3+1 3+1 3+1 1+3     線上의一點 A 線上의一點 B 線上의一點 C     A+B+C=A A+B+C=B A+B=C=C     二線의交點 A 三線의交點 B 數線의交點 C     3+1 1+3 1+3 3+1 3+1 1+3 3+1 3+1 1+3 1+3 1+3 3+1     (태양광선은, ?렌즈때문에수검광선이되어일점에있어서혁혁히빛나고혁혁히불탔다. 태초의요행은무엇보다도대기의층과층이이루는층으로하여금?렌즈되게하지아니하였던것에있다는것을생각하니낙이된다. 기하학은?렌즈와같은불장난은아닐는지, 유우크리트는사망해버린오늘유우크리트의촛점은도달에있어서인문의뇌수를마른풀같이소각하는수검작용을나열하는것에의하여최대의수거작용을재촉하는위험을재촉한다. 사람은절망하라. 사람은탄생하라. 사람은절망하라)           선(線)에 관한 각서(覺書) 5     사람은광선보다도빠르게달아나면사람은광선을보는가, 사람은광선을본다, 연령의진공에있어서두번결혼한다. 세번결혼하는가, 사람은광선보다도빠르게달아나라.     미래로달아나서과거를본다, 과거로달아나서미래를보는가, 미래로달아나는것은과거로달아나는것과동일한것도아니고미래로달아나는것이과거로달아나는것이다. 확대하는우주를염려한는자여, 과거에살라, 광선보다도빠르게미래로달아나라.     사람은다시한번나를맞이한다. 사람은보다젊은나에게적어도상봉한다. 사람은세번나를맞이한다. 사람은젊은나에게적어도상봉한다. 사람은適宜하게기다리다, 그리고파우스트를즐기거라, 메피스토는나에게있는것도아니고나이다.     속도를조절하는날사람은나를모은다. 무수한나는말(譚)하지아니한다. 무수한과거를경청하는현재를과거로하는것은不遠間이다. 자꾸만반복되는과거, 무수한과거를경청하는무수한과거, 현재는오직과거만을인쇄하고과거는현재와一致하는것은그것들의複數의경우에있어서도구별될수없는것이다.   聯想은處女로하라. 과거를현재로알라. 사람은옛것을새것으로아는도다, 건망이여, 영원한망각은망각을모두구한다.     도래할나는그때문에무의식중에사람에일치하고사람보다도빠르게나는달아난다. 새로운미래는새롭게있다. 사람은빠르게달아난다. 사람은광선을드디어선행하고미래에있어서과거를待期한다. 우선사람은하나의나를맞이하라. 사람은全等形에있어서나를죽이라.     사람은全等形의체조의기술을습득하라, 不然이라면사람은과거의나의파편을如何히할것인가.     사고의파편을반추하라. 不然이라면새로운것은불완전이다, 연상을죽이라, 하나를아는자는셋을아는것을하나를아는것의다음으로하는것을그만두어라, 하나를아는것은다음의하나의것을아는것을하는것을있게하라. 사람은한꺼번에한번을달아나라, 최대한달아나라, 사람은두번분만되기전에xx되기전에조상의조상의성운의성운의성운의태초를미래에있어서보는두려움으로하여사람은빠르게달아나는것을유보한다. 사람은달아난다. 빠르게달아나서영원에살고과거를애무하고과거로부터다시과거에산다. 童心이여, 충족될수야없는영원의동심이여.           애야(哀夜) -나는 한 매춘부를 생각한다     애절하다. 말은 목구멍에 막히고 까맣게 끄을은 홍분이 헐떡헐떡 목이 쉬어서 뒹군다. 개똥처럼. 달이 나타나기 전에 나는 그 도랑 안에 있는 엉성한 동굴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눈병이 난 모양이다. 전등불 밑에 菊科植物이 때가 끼어 있었다. 包主마누라는 기름으로 빈들거리는 床 위에 턱을 괴고 굵다란 男性的 목소리를 내고 있다. 내 뒤를 밟은 놈이 없을까, 하고 나는 包主마누라에게 물어 보았다.     방바닥 위에 한 마리의 고양이의 시체가 버려져 있었다. 나는 깜짝 놀라서 발을 멈추었다. 그것은 역시 고양이였다. 눈이 오듯이 영혼이 조용하게 내려앉고, 고양이는 내 얼굴을 보자 미소를 짓고 있는 듯이 보였는데 그것은 세상에 둘도 없는 무서운 ??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내 어린애 똥 같은 우엉과 문어요리와 두 병의 술이 차려져 왔다.     괄약근--이를테면 항문 따위--여자의 입은 괄약근인 모양이다. 자꾸 더 입을 오므리고 있다. 그것을 자기의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다. 코는 어지간히 못생겼다. 바른쪽과 왼쪽 뺨의 살집이 엄청나게 짝짝이다. 금방 울음이 터져 나올 것 같은 얼굴이어서 나는 마음이 조마조마해 있었더니, 여자는 입술을 조용히 나의 관자놀이 쪽으로 갖고 가서 가볍게 누르면서 마치 입을 맞출 때와 같은 몸짓을 해보였다.     기름냄새가 코에 푸욱 맡혀 왔다. 때마침 천장 가까이 매달려 있는 전등에서 노란 국물이 한 방울 떨어졌다. 나는 극한 속에서처럼 부르르 떨고 있었다. 말도 안 나온다. 바리캉으로 이 머리를 박박 깎아 버리고 말까. 오후 비는 멈추었다.     다만 세상의 여자들이 왜 모두 賣淫婦가 되지 않는지 그것만이 이상스러워 못 견디겠다. 나는 그녀들에게 얼마간의 지폐를 교부할 것이다.     나는 내 자신의 얼굴을 볼 수는 없다. 손이 새파랗다. 조그맣게 되어 가지고 새로운 주름살까지도 보이고 있다. 여자는 나의 손을 잡았다. 고급장갑을 줍는 것처럼-- 그리고 나한테 속삭였다. 그것은 너무 먼 곳에서 들려오는 것 같아서 나에겐 한 마디도 들리지 않았다. 어쩌면 나는 벌써 다른 일을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일이었고 하나만 있는 일일 것이다. 내 마음 속의 불량기는 벌써 無料로 자리에 앉아 있다. 전신을 새빨갛게 물들이고 나의 목구멍 속에서 헐떡거리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될 수 있는 대로 여자의 체중을 盜取했다. 그것은 달마인형처럼 쓰러뜨려도 다시 일어나고 다시 일어나는 것이었다. 白紙는 까많게 끄슬려 있었다. 그 위를 땅의 행렬이 천근 같은 발을 끌고 지나갔다.     분주한 발걸음소리가 나고 창들의 장막은 내려졌다. 자색 광선이 요염하게 반짝거렸다. 하지만 그것은 온통 황색이었다. 손가락은 가야 할 곳으로 갔다. 눈을 감은 병사는 개흙진 沼澤地로 발을 들여 놓았다. 뒤에서 뒤에서 자꾸 밀려드는 陶醉와 같은 실책. 피의 빛을 오색으로 화려하게 하는--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어찌할 도리가 없는 어린애와 같은 失足-- 진행해 감으로써 그것은 완전히 정지되어 있었다. 술은 대체 누구를 위해서 차려온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다. 하기는 내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만이 명백하지만. 여자는 흡사 치워 버리기나 하는 것처럼 술을 다 마셔 버렸다. 홍수와 같은 동작이다. 그리고 간간이 그 페스트 같은 우엉을 괄약근 사이에다 집어넣었다. 이 여자는 이 형편없는 비위생 때문에 금방 병에 걸려 벌떡 소처럼 쓰러지지나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여자는 화려한 얼굴을 하고 있다.     배가 고픈 모양이다. 나는 그것을 알아차릴 수는 없다. 나는 그런 혜안은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치면 역시 얼마나 石碑 같은 체중이겠는가. 슬픔이 치밀어 올랐다. 이만 술로 여자는 취할 것 같지 않다. 또한 여자는 자주 내가 한시바삐 취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다.     여자의 면전에서 浮沈하고 있었던 표적이 실종했다. 그러니까 나는 아직도 슬퍼해서는 안 된다고 그러는데. 마음을 튼튼히 갖지 않으면 안된다. 나는 호주머니 속의 은화를 세었다. 재빠르게-- 그리고 채촉했다. 선금주문인 것이다. 여자의 얼굴은 한결 더 훤하다. 脂粉은 고귀한 직물처럼 찬란한 光芒조차 발했다. 향기 풍부하게--     하나 이 은화로 교부될 것은 무엇인가. 나는 그것을 깜빡 잊어버리고 있다. 이만저만한 바보가 아니다. 그러자 갑자기 여자의 두 볼은 둔부에 있는 그것처럼 깊은 한 줄씩의 주름살을 보였다. 기괴한 일이다. 여자는 도대체 이렇게 하고 웃으려고 하는 것이다. 골을 내려고 하는 것인가 위협을 하려고 하는 것인가 아니면 결국 울려고 하는 것인가. 나에게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위협이다. 여자는 일어났다. 그리고 흘깃 내 쪽을 보았다. 어떻게 하려는가 했더니 선 채로 내 위로 버럭 덮쳐 왔다. 이것은 틀림없이 나를 압사하려고 하는 것일 것이다. 나는 손을 허공에 내저으면서 바보 같은 비명을 울렸다. 말(馬)의 체취가 나를 독살시킬 것만 같다. 놀랐던 모양이다. 여자는 비켜났다. 그리고 지금의 것은 구애의 혹은 애정에 보답하는 표정이라는 것을 나에게 말했다. 나는 몸에 오한을 느끼면서도 억지로 부드럽게 웃는 낯을 해 보였다. 여자는 알겠다는 것의 너그럽게 고개를 끄덕거려 보였다. 아-- 얼마나 무섭고 純重한 사랑의 제스처일까. 곧 여자는 나가 버렸다. 찰싹찰싹하는 물소리가 들렸다. 장지문 너머에서 고양이의 신음소리가 심각하다. 아무래도 한 마리인 것 같다. 실없는 놈들이다.     말-- 말이다. 쌍말이다. 땀에 젖은 瘡痍투성이의 쌍말임에 틀림없다. 구멍은 없는가. 유령처럼 그 속에서 도망쳐 나가고 싶다. 하지만 여기가 정작 참아야 할 내가. 될 수 있는 대로 흥분해 보자. 밟혀 죽을 게 아닌가. 튼튼해 보이는 말이다. 하지만 나한테는 뼈가 있다. 뼈는 여자를 매혹할 것이다. 消毒箸를 집어서 새까만 우엉을 하나 집어 본다. 역청에 담갔던 것처럼 끈적끈적하고 달아 보인다. 입은 그것을 기다린다. 무섭게 짜다. 눈알이 튀어나올 것 같다. 여자가 들어온다. 나는 그것을 맞이할 수가 없다. 나의 얼굴 전체가 짜기 때문이다. 여자는 나에게 이유를 물었다. 나는 답변하기가 거북하지 않을 수 없다. 술이 없느냐고 말했다. 여자는 사람을 흔들어 깨듯이 술병을 흔들어 보였다. 있다. 나는 한 모금 마셨다. 고추장이 먹고 싶다. 고향에 돌아가야 한다. 그러자 여자의 백치 비슷한 표정마저도 꿈같이 그리웁게 보인다. 여자는 환상 속에서 고향의 복장을 하고 있었다. 말한테서는 垈土와 거름냄새가 났다.         황(?)     1. 시계를 보았다 시계는 멈춰 있다. ...... 모이를 주자...... 나는 단장을 부러뜨렸다. 아문젠옹의 식사처럼 메말라 있어라 x 아하 ...... 당신은 Mademoiselle Nashi 를 아시나요. 난 그 여자 때문에 유폐돼 있답니다...... 나는 숨을 죽였다. ...... 아니야 영 틀린 것 같네...... 개는 舊式스러운 권총을 입에 물고 있다 그것을 내 앞에 내민다...... 제발 부탁이니 그 여잘 죽여다오 제발 부탁이니...... 하고 쓰러져 운다.     어스름속을 헤치고 공복을 나르는 나의 隱袋는 무겁다...... 나는 어떡하면 좋을까...... 내일과 내일과 다시 내일을 위해 난 깊은 침상에 빠졌다. 발견의 기쁨은 어찌하여 이다지도 빨리 발견의 두려움으로 하여 슬픔으로 바뀌었는가에 대하여 나는 숙고하기 위해 나는 나의 꿈마저도 나의 龕室로부터 추방했다. 우울이 계속되었다 겨울이 가고 이윽고 다람쥐 같은 봄이 와서 나를 피해갔다 나는 권총처럼 꺼멓게 여윈 몸뚱이를 깊은 衾枕속에서 일으키기란 불가능했다. 꿈은 여봐라고 나를 혹사했다. 탄알은 지옥의 마른 풀처럼 시들었다. --건강체 인 채--     2. 나는 개 앞에서 팔뚝을 걷어붙여 보았다. 맥박의 몽테 크리스토처럼 뼈를 파헤치고 있었다...... 나의 墓堀 4월이 절망에게 MICROBE와 같은 희망을 플러스한데 대해, 개는 슬프게 이야기했다. 꽃이 매춘부의 거리를 이루고 있다. ...... 안심을 하고...... 나는 피스톨을 꺼내보였다. 개는 백발노인처럼 웃었다...... 수염을 단 채 떨어져 나간 턱.     개는 솜(綿)을 토했다. 벌(蜂)의 충실은 진달래를 흩뿌려 놓았다. 내 일과의 중복과 함께 개는 나에게 따랐다. 들과 같은 비가 내려도 나는 개와 만나고 싶었다...... 개는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개와 나는 어느새 아주 친한 친구가 되었다. ...... 죽음을 각오하느냐, 이 삶은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느니라...... 이런 값 떨어지는 말까지 하는 일이 있다. 그러나 개의 눈은 마르는 법이 없다. 턱은 나날이 길어져 가기만 했다.     3. 가엾은 개는 저 미웁기 짝없는 문패 표면밖에 보지 못한다. 개는 언제나 그 문패 이면만을 바라보고는 분노와 염세를 느끼는 모양이었다. 그것을 ??했다. ...... 나는 내가 싫다...... 나는 가슴 속이 막히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렇게 느끼는 그대로 내버려 둘 수도 없었다. ...... 어디?...... 개는 고향 얘기를 하듯 말했다. 개의 얼굴은 우울한 표정을 하고 있다. ...... 동양 사람도 왔었지. 나는 동양 사람을 좋아했다. 나는 동양 사람을 연구했다. 나는 동양 사람의 시체로부터 마침내 동양문자의 奧義를 발굴한 것이다...... ...... 자네가 나를 좋아하는 것도 말하자면 내가 동양 사람이라는 단순한 이유이지?...... ...... 얘기는 좀 다르다. 자네, 그 문패에 씌어져 있는 글씨를 가르쳐 주지 않겠나? ...... 지워져서 잘 모르지만, 아마 자네의 생년월일이라도 씌어져 있었겠지. ...... 아니 그것뿐인가?...... ...... 글쎄, 또 있는 것 같지만, 어쨌든 자네 고향 지명 같기도 하던데, 잘은 모르겠어......     내가 피우고 있는 담배 연기가, 바람과 양치류 때문에 수목과 같이 사라지면서도 좀체로 사라지지 않는다. ...... 아아, 죽음의 숲이 그립다...... 개는 안팎을 번갈아가며 뒤채어 보이고 있다. 오렌지빛 구름에 노스텔지어를 호소하고 있다.           무제(無題)     故王의 땀...... 모시수건으로 닦았다...... 술잔을 넘친 물이 콘크리트 수채를 흐르고 있는 게 말할 수 없이 정다워 난 아침마다 그 철조망 밖을 걸었다. 야릇한 헛기침 소리가 아침 이슬을 굴리었다 그리고 순백 유니폼의 소프라노 내 산책은 어쩐 일인지 끊기기 일쑤였다 열 발짝 또는 네 발작 나중엔 한 발짝의 반 발짝...... 눈을 떴을 땐 전등이 마지막 쓰게[被物]를 벗어 버리고 있는 참이었다. 땀이 꽃 속에 꽃을 피우고 있었다. 폐문시각이 지나자 열풍이 피부를 빼앗았다.     기러기의 분열과 함께 떠나는 낙엽의 귀향 散兵...... 몽상하기란 유쾌한 일이다...... 祭天의 발자국 소리를 작곡하며 혼자 신이 나서 기뻐하였다 차가운 것이 뺨 한 가운데를 깎았다. 그리고 그 철조망엘 몇 바퀴나 가서 低徊하였다. 야릇한 헛기침소리는 또다시 부뚜막에 생나무를 지피고 있다 눈과 귀가 토끼와 거북처럼 그 철조망을 넘어 풀숲을 헤쳐 갔다. 第一의 玄?. 녹슬은 金環. 가을을 잊어버린 양치류의 눈물. 薰?來往 아침해는 어스름에 橙汁을 띄운다. 나는 第二의 玄?에게 차가운 발바닥을 비비었다. 金環은 千秋의 恨을 들길에다 물들였다. 階□의 刻字는 안질을 앓고 있다-- 백발노인과도 같이...... 나란히 앉아 있다. 야릇한 헛기침소리는 眼前에 있다 과연 야릇한 헛기침소리는 眼前에 있었다 한 마리의 개가 쇠창살 안에 갇혀 있다 양치류는 선사시대의 만국기처럼 무쇠우리를 부채질하고 있다. 한가로운 아방궁 뒤뜰이다. 문패-- 나는 이 문패를 간신히 발견했다고나 할까--에 年號 같은 것이 씌어져 있다. 새한테 쪼아먹힌 문자 말고도 나는 아라비아 숫자 몇 개를 읽어낼 수 있었다.           斷章(단장)     실내의 조명이 시계 소리에 망가지는 소리 두 時 친구가 뜰에 들어서려 한다 내가 말린다 十六日 밤 달빛이 파도를 일으키고 있다 바람 부는 밤을 친구는 뜰 한복판에서 익사하면서 나를 위협한다. 탕 하고 내가 쏘는 一發 친구는 粉碎했다. 유리처럼(반짝이면서) 피가 圓面(뜰의)을 거멓게 물들였다. 그리고 방 안에 범람한다. 친구는 속삭인다. --자네 정말 몸조심해야 하네-- 나는 달을 그을리는 구름의 조각조각을 본다 그리고 그 저 편으로 탈환돼 간 나의 호흡을 느꼈다. ○ 죽음은 알몸뚱이 엽서처럼 나에게 배달된다 나는 그 제한된 답신밖엔 쓰지 못한다. ○ 양말과 양말로 감싼 발-- 여자의--은 비밀이다 나는 그 속에 말이 있는지 아닌지조차 의심한다. ○ 헌 레코오드 같은 기억 슬픔조차 또렷하지 않다.           각혈의 아침     사과는 깨끗하고 또 춥고 해서 사과를 먹으면 시려워진다. 어째서 그렇게 냉랭한지 책상 위에서 하루 종일 색깔을 변치 아니한다 차차로-- 둘이 다 시들어 간다.     먼 사람이 그대로 커다랗다 아니 가까운 사람이 그대로 자그마하다 아니 어느 쪽도 아니다 나는 그 어느 누구와도 알지 못하니 말이다 어니 그들의 어느 하나도 나를 알지 못하니 말이다 아니 그 어느 쪽도 아니다(레일을 타면 전차는 어디라도 갈 수 있다) 담배 연기의 한 무더기 그 실내에서 나는 긋지 아니한 성냥을 몇 개비고 부러뜨렸다. 그 실내의 연기의 한 무더기 점화되어 나만 남기고 잘도 타나보다 잉크는 축축하다 연필로 아무렇게나 시커먼 면을 그리면 鉛粉은 종이 위에 흩어진다.     리코오드 고랑을 사람이 달린다 거꾸로 달리는 불행한 사람은 나 같기도 하다 멀어지는 음향소리를 바쁘게 듣고 있나보다 발을 덮는 여자 구두가 가래를 밟는다 땅에서 빈곤이 묻어온다 받아 써서 통념해야 할 암호 쓸쓸한 초롱불과 우체국 사람들이 수명을 거느리고 멀어져 가는 것이 보인다. 그리고 나의 뱃속에 통신이 잠겨 있다. 새장 속에서 지저귀는 새 나는 콧속 털을 잡아뽑는다 밥 소란한 정적 속에서 미래에 실린 기억이 종이처럼 뒤엎어진다 벌써 나는 내 몸을 볼 수 없다 푸른 하늘이 새장 속에 있는 것 같이 멀리서 가위가 손가락을 연신 연방 잘라 간다 검고 가느다란 무게가 내 눈구멍에 넘쳐 왔는데 나는 그림자와 서로 껴안는 나의 몸뚱이를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알맹이까지 빨간 사과가 먹고 싶다는둥 피가 물들기 때문에 여윈다는 말을 듣곤 먹지 않았던 일이며 나를 놀라게 한 것은 그 종자는 이제 심어도 나지 않는고 단정케 하는 사과 겉껍질의 빨간 색 그것이다. 공기마저 얼어서 나를 못 통하게 한다 뜰을 鑄型처럼 한 장 한 장 떠낼 수 있을 것 같다 나의 호흡에 탄환을 쏘아넣는 놈이 있다 병석에 나는 조심조심 조용히 누워 있노라니까 뜰에 바람이 불어서 무엇인가 떼굴떼굴 굴려지고 있는 그런 낌새가 보였다 별이 흔들린다 나의 기억의 순서가 흔들리듯 어릴 적 사진에서 스스로 병을 진단한다     가브리엘 天使菌(내가 가장 불세출의 그리스도라 치고) 이 살균제는 마침내 폐결핵의 혈흔이었다(고?)     폐속 페인트 칠한 십자가가 날이면 날마다 발돋움을 한다 폐속엔 요리사 천사가 있어서 때때로 소변을 본단 말이다 나에 대해 달력의 숫자는 차츰차츰 줄어든다     네온사인은 색소폰 같이 야위었다 그리고 나의 청맥은 휘파람 같이 야위었다     하얀 천사가 나의 폐에 가벼이 노크한다. 황혼 같은 폐속에서는 고요히 물이 끓고 있다 고무전선을 끌어다가 성베드로가 도청을 한다 그리곤 세 번이나 천사를 보고 나는 모른다고 한다 그때 닭이 홰를 친다-- 어엇 끊는 물을 엎지르면 야단 야단--     봄이 와서 따스한 건 지구의 아궁이에 불을 지폈기 때문이다 모두가 끓어오른다 아지랑이처럼 나만이 사금파리 모양 남는다 나무들조차 끓어서 푸른 거품을 자꾸 뿜어내고 있는데도           황(?)의 記 -?은 나의 목장을 수호하는 개의 이름이다. (1931년 11월 3일 命名)     記 一     밤이 으슥하여 ?이 짖는 소리에 나는 숙면에서 깨어나 옥외 골목까지 황을 마중 나갔다. 주먹을 쥔 채 떨어진 한 개의 팔을 물고 온 것이다. 보아하니 황은 일찍이 보지 못했을 만큼 몹시 창백해 있다. 그런데 그것은 나의 주치의 R의학박사의 오른팔이었다. 그리고 그 주먹 속에선 한 개의 훈장이 나왔다. --犧牲動物供養碑 除幕式紀念-- 그런 메달이었음을 안 나의 기억은 새삼스러운 감동을 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 두 개의 腦髓 사이에 생기는 연락신경을 그는 癌이라고 완고히 주장했었다. 그리고 정기적으로 그의 창으로 뛰어난 메스의 기교로써 그 信經腱을 잘랐다. 그의 그 같은 이원론적 생명관에는 실로 철저한 데가 있었다. 지금은 고인이 된 그가 얼마나 그 紀念章을 그의 가슴에 장식하기를 주저하고 있었는가는 그의 장례식 중에 분실된 그의 오른팔--현재 황이 입에 물고 온--을 보면 대충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그래 그가 공양비 건립기성회의 회장이었다는 사실은 무릇 무엇을 의미하는가? 불균형한 건축물들로 하여 뒤얽힌 병원 구내의 어느 한 귀퉁이에 세워진 그 공양비의 쓸쓸한 모습을 나는 언제던가 공교롭게 지나는 길에 본 것을 기억한다. 거기에 나의 목장으로부터 호송돼 가지곤 解剖舞의 이슬로 사라진 숱한 개들의 한 많은 혼백이 뿜게 하는 살기를 나는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는 더더구나 그의 수술실을 찾아가 예의 황의 절단을 그에게 의뢰했던 것인데-- 나는 황을 꾸짖었다. 주인의 苦悶相을 생각하는 한 마리 축생의 인정보다도 차라리 이 경우 나는 사회 일반의 예절을 중히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를 잃은 후에 나에게 올 자유-- 바로 현재 나를 염색하는 한 가닥의 눈물-- 나는 흥분을 가까스로 진압하였다. 나는 때를 놓칠세라 그 팔 그대로를 공양비 부근에 묻었다. 죽은 그가 죽은 동물에게 한 본의 아닌 계약을 반환한다는 형식으로......     記 二     봄은 5월 화원시장을 나는 황을 동반하여 걷고 있었다. 玩賞花草 종자를 사기 위하여...... 황의 날카로운 후각은 파종후의 성적을 소상히 예언했다. 진열된 온갖 종자는 不發芽의 불량품이었다. 하나 황의 후각에 합격된 것이 꼭 하나 있었다. 그것은 대리석 모조인 종자 모형이었다. 나는 황의 후각을 믿고 이를 마당귀에 묻었다. 물론 또 하나의 불량품도 함께 시험적 태도로-- 얼마 후 나는 逆倒病에 걸렸다. 나는 날마다 인쇄소의 활자 두는 곳에 나의 病軀를 이끌었다.     지식과 함께 나의 病집은 깊어질 뿐이었다. 하루 아침 나는 식사 정각에 그만 잘못 假睡에 빠져 들어갔다. 틈을 놓치려 들지 않는 황은 그 금속의 꽃을 물어선 나의 半開의 입에 떨어뜨렸다. 시간의 습관이 식사처럼 나에게 眼藥을 무난히 넣게 했다. 病집이 지식과 중화했다-- 세상에 교묘하기 짝이 없는 치료법-- 그 후 지식은 급기야 좌우를 겸비하게끔 되었다.     記 三     腹話術이란 결국 언어의 저장창고의 경영일 것이다.     한 마리의 축생은 인간 이외의 모든 뇌수일 것이다. 나는 뇌수가 擔任 지배하는 사건의 대부분을 나는 황의 위치에 저장했다-- 냉각되고 가열되도록-- 나의 규칙을-- 그러므로-- 리트머스지에 썼다. 배-- 그 속-- 의 結晶을 가감할 수 있도록 소량의 리트머스액을 나는 나의 식사에 곁들일 것을 잊지 않았다. 나의 배의 발언은 마침내 삼각형의 어느 정점을 정직하게 출발했다.     記 四     황의 나체는 나의 나체를 꼬옥 닮았다. 혹은 이 일은 이 일의 반대일지도 모른다. 나의 목욕시간은 황의 근무시간 속에 있다. 나는 穿衣인 채 욕실에 들어서 가까스로 욕조로 들어간다. --벗은 옷을 한 손에 안은 채-- 언제나 나는 나의 조상--육친을 위조하고픈 못된 충동에 끌렸다. 치욕의 계보를 짊어진 채 내가 해체대의 이슬로 사라진 날은 그 어느 날에 올 것인가?     피부는 한 장밖에 남아있지 않다. 거기에 나는 파란 잉크로 함부로 筋을 그렸다. 이 초라한 포장 속에서 나는 생각한다--해골에 대하여...... 묘지에 대하여 영원한 景致에 대하여     달덩이 같은 얼굴에 여자는 눈을 가지고 있다. 여자의 얼굴엔 입맞춤할 데가 없다. 여자는 자기 손을 먹을 수도 있었다.     나의 식욕은 일차방정식 같이 간단하였다. 나는 곧잘 色彩를 삼키곤 한다. 투명한 광선 앞에서 나의 미각은 거리낌없이 表情한다. 나의 공복은 음악에 공명한다-- 예컨대 나이프를 떨군다--     여자는 빈 접시 한 장을 내 앞에 내놓는다--(접시가 나오기 전에 나의 미각은 이미 요리를 다 먹어치웠기 때문이다) 여자의 구토는 여자의 술을 뱉어낸다. 그리고 나에게 대한 체면마저 함께 뱉어내고 만다.(오오 나는 웃어야 하는가 울어야 하는가) 요리인의 단추는 오리온좌의 略圖다. 여자의 육감적인 부분은 죄다 빛나고 있다. 달처럼 반지처럼 그래 나는 나의 신분에 알맞게 나의 표정을 절약하고 겸손해 한다. 帽子-- 나의 모자 나의 疾床을 감시하고 있는 모자 나의 사상의 레테르 나의 사상의 흔적 너는 알 수 있을까? 나는 죽는 것일까 나는 이대로 죽어야 하는 것일까 나의 사상은 네가 내 머리 위에 있지 아니하듯 내 머리에서 사라지고 없다.   모자 나의 사상을 엄호해 주려무나! 나의 데드마스크엔 모자는 필요 없게 될 터이니까! 그림 달력의 장미가 봄을 준비하고 있다. 붉은 밤 보랏빛 바탕 별들은 흩날리고 하늘은 나의 쓰러져 객사할 광장 보이지 않는 별들의 嘲笑 다만 남아 있는 오리온좌의 뒹구는 못[釘] 같은 星員 나는 두려움 때문에 나의 얼굴을 변장하고 싶은 오직 그 생각에 나의 꺼칠한 턱수염을 손바닥으로 감추어 본다.     정수리 언저리에서 개가 짖었다. 불성실한 지구를 두드리는 소리 나는 되도록 나의 五官을 취소하고 싶다고 생각한다. 심리학을 포기한 나는 기꺼이-- 나는 종족의 번식을 위해 이 나머지 세포를 써버리고 싶다. 바람 사나운 밤마다 나는 차차로 한 묶음의 턱수염 같이 되어 버린다. 한 줄기 길이 산을 뚫고 있다. 나는 불 꺼진 탄환처럼 그 길을 탄다. 봄이 나를 뱉어낸다. 나는 차가운 압력을 느낀다. 듣자 하니-- 아이들은 나무 밑에 모여서 겨울을 말해 버린다. 화살처럼 빠른 것을 이 길에 태우고 나도 나의 불행을 말해 버릴까 한다. 한 줄기 길에 못이 서너 개-- 땅을 파면 나긋나긋한 풀의 준비-- 봄은 갈갈이 찢기고 만다.             날개 - 단편소설         '박제가 되어 버린 천재'를 아시오? 나는 유쾌하오. 이런 때 연애까지가 유쾌하오. 육신이 흐느적흐느적하도록 피로했을 때만 정신이 은화처럼 맑소. 니코틴이 내 횟배 앓는 뱃속으로 스미면 머릿속에 으레 백지가 준비되는 법이오. 그 위에다 나는 위트와 파라독스를 바둑 포석처럼 늘어놓소. 가증할 상식의 병이오. 나는 또 여인과 생활을 설계하오. 연애기법에마저 서먹서먹해진 지성의 극치를 흘깃 좀 들여다본 일이 있는, 말하자면 일종의 정신분일자 말이오. 이런 여인의 반----그것은 온갖 것의 반이오.---만을 영수하는 생활을 설계한다는 말이오. 그런 생활 속에 한 발만 들여놓고 흡사 두 개의 태양처럼 마주 쳐다보면서 낄낄거리는 것이오. 나는 아마 어지간히 인생의 제행이 싱거워서 견딜 수가 없게끔 되고 그만둔 모양이오. 굿바이. 굿바이. 그대는 이따금 그대가 제일 싫어하는 음식을 탐식하는 아이로니를 실천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소. 위트와 파라독스와……. 그대 자신을 위조하는 것도 할 만한 일이오. 그대의 작품은 한번도 본 일이 없는 기성품에 의하여 차라리 경편하고 고매하리다. 19세기는 될 수 있거든 봉쇄하여 버리오. 도스토예프스키 정신이란 자칫하면 낭비일 것 같소. 위고를 불란서의 빵 한 조각이라고는 누가 그랬는지 지언인 듯 싶소. 그러나 인생 혹은 그 모형에 있어서 '디테일' 때문에 속는다거나 해서야 되겠소? 화를 보지 마오. 부디 그대께 고하는 것이니…… "테이프가 끊어지면 피가 나오. 상채기도 머지 않아 완치될 줄 믿소. 굿바이." 감정은 어떤 '포우즈'. (그 '포우즈'의 원소만을 지적하는 것이 아닌지 나도 모르겠소.) 그 포우즈가 부동자세에까지 고도화할 때 감정은 딱 공급을 정지합네다. 나는 내 비범한 발육을 회고하여 세상을 보는 안목을 규정하였소. 여왕봉과 미망인---세상의 하고 많은 여인이 본질적으로 이미 미망인이 아닌 이가 있으리까? 아니, 여인의 전부가 그 일상에 있어서 개개 '미망인'이라는 내 논리가 뜻밖에도 여성에 대한 모함이 되오? 굿바이.   - 이하 생략 -            
1167    詩作初心 - 뒤집어 소재를 찾고 행동하기 댓글:  조회:4200  추천:0  2016-03-12
시를 쉽게 쓰는 요령 - 김영남 8. 효과적이고 매력적인 시적 표현 얻는 방식 두 가지 초보자 시절은 시 쓰는 것에 대하여 아무리 설명을 들어도 뭐가 뭔지 잘 모르겠고, 설사 알겠다 여겨지더라도 쓰려고 하면 또 막막하기 이를 데 없는 게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때는 되든지 안 되든지 간에 상관하지 말고 바로 무조건 끄적거려보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하여, 바로 끄적거려도 남보다 몇 곱절 빠르게 시적 표현을 얻는 방법 두 가지만 공개할까 합니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지만 우선 이 두 가지만이라도 잘 활용해 보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하면 남과 다른 표현을 새롭고 독특하게 효과적으로 구사할 수 있을까? 이걸 이론적으로 설명하려면 라는 개념을 알아야 하는데 이걸 또 설명하려면 한 학기 내내 설명해도 부족합니다. 그러나 필자는 여기에서 필자의 개발한 용어로 그 방법을 설명할까 합니다. 그 첫 번째 방법은, < 뒤집어 생각하고 행동하기 >입니다. 시인을 포함하여 모든 사람들의 사고와 인식 방향이 주로 한쪽으로 쏠려있습니다. 그러니까 먹고 마시고 행동하고 또 사물을 보고 느끼고 감탄하고 슬퍼하는 방식이 대동소이하고, 우리의 인식구조도 주로 그 쪽으로 익숙해 있습니다. 따라서 그 쪽에서 새로운 표현을 구하려면 지금까지의 방식보다 몇 곱절 노력과 탐구로 새로운 표현을 발견하지 못하면 결코 효과적으로 다가오지 못합니다. 이때는 거꾸로 접근해 보는 겁니다. 남들의 시선이 다 한쪽으로 쏠려있을 때 자기는 거꾸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겁니다. 그러면 남들이 전에 자주 보지 못했던 사고와 행동이니깐 우선 시선을 끌게 되고 새롭게 느껴지게 되는 거죠. 다시 말해서 고스톱도 여지껏 쳐왔던 방식으로 쳐 잘 안 풀릴 땐 거꾸로 치면 의외로 잘 풀리는 이치와 같은 전략이지요. 그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어떤 시인이 로 표현했다고 합시다. 그러나 똑같은 내용이지만 이걸 거꾸로 표현하면 어떻게 될까요? 그건 , 또는 이렇게 되는 거죠. 를 거꾸로 표현하면 . 는 , 는 가 되는 거죠. 어떻습니까? 똑같은 내용이지만 어떤 게 우리에게 더 참신하게 다가옵니까? 후자이지요. 전자가 설명이라면, 후자는 묘사에 해당합니다. 따라서 묘사란 그 동안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는 인식체계로 대상에 접근하는 방법을 말합니다. 그러나 이 방법을 구사할 때 유의할 점은 시 전편에 걸쳐서 다 이렇게 표현하면 안되요. 전편에 걸쳐서 구사하면 이것 또한 한쪽 체계의 인식구조로 전락하고 굳어지기 때문에 군데군데 양념치듯 구사해야 되요. 특히 첫연 첫구절에 이걸 효과적으로 구사하면 독자들을 아주 매료시킬 수 있습니다. 현 문단에서 이걸 잘 구사하는 시인이 바로 오규원 시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을 쓴 김수영 시인도 이 기법을 즐겨 구사했구요. 두 번째 방법은, 입니다. 이 방법은 필자가 깊이 탐구해 작품에 실제 많이 응용했고 현재도 아주 즐겨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즉 자기가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 또는 풍경 내에 있는 주변 소재들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식입니다. 이걸 잘 활용하면 시가 그림처럼 아주 선명하게 되고 초점도 또렷하게 됨을 금세 느낄 수 있을 겁니다. 특히 풍물, 풍경시를 쓸 때 이 방법은 아주 효과적입니다. 예를 한번 들어봅시다. 가령 어떤 사람이 형광등, 침대, 커튼, 그림 등이 있는 방에 갇혀 한 여자를 그리워하며 책상에 골똘히 앉아 있는 모습을 그린다고 합시다. 그러면 이렇게 표현하는 겁니다. 이렇게 한 남자가 한 여자를 그리워하는 모습을 방 속에 있는 소재들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겁니다. 이렇게 하면 그 이미지와 초점이 선명하게 되고 할 이야기도 금세 많아지게 됩니다. 대부분이 이걸 잘 모르고 방밖을 벗어나 거창한 소재와 이야기를 자꾸 끌어오려 하다보니깐 시가 초점이 흐려지고 난해해 지게 되는 거죠. 이것만 잘 해도 시가 아주 유창해 집니다. 실제로 이 기법 하나만으로도 신춘문예 당선한 필자의 시 한 편을 그 예로 살펴보고 이번 강좌를 마치겠습니다. 정동진驛 겨울이 다른 곳보다 일찍 도착하는 바닷가 그 마을에 가면 정동진이라는 억새꽃 같은 간이역이 있다. 계절마다 쓸쓸한 꽃들과 벤치를 내려놓고 가끔 두 칸 열차 가득 조개껍질이 되어버린 몸들을 싣고 떠나는 역. 여기에는 혼자 뒹굴기에 좋은 모래사장이 있고, 해안선을 잡아넣고 끓이는 라면집과 파도를 의자에 앉혀놓고 잔을 주고받기 좋은 소주집이 있다. 그리고 밤이 되면 외로운 방들 위에 영롱한 불빛을 다는 아름다운 천정도 볼 수 있다. 강릉에서 20분, 7번국도를 따라가면 바닷바람에 철로쪽으로 휘어진 소나무 한 그루와 푸른 깃발로 열차를 세우는 驛舍, 같은 그녀를 만날 수 있다. * 필자는 정동진역 풍경을 그리는데 모두 정동진역 근처에 있는 소재들로 생각하고 행동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소재들은 실제로 정동진역에 다 있던 것들입니다. 억새꽃, 벤치, 모래사장, 라면집, 소주집, 소나무 등등… 그래서 열차가 들어오는 역이니까 겨울이 오는 것도 으로 생각했고, 역도 으로 표현했고, 라면집도 삼양라면을 끓이는 라면집이 아니라 이고, 소주집도 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필자가 실제로 라면집을 묘사해야 하겠는데 구불구불한 주변 소재를 찾으니까 산 능선, 도로, 해안선 등이 보이더라구요. 그런데 이중에서 가장 주변 소재에 어울리는 게 바로 해안선이었어요. 그래서 이걸 차용한 겁니다. 또한 마주보고 술잔을 나누는 소주집도 묘사해야겠는데 쓸만한 주변 소재들을 밖을 내다보며 살펴봤더니 배, 수평선, 갈매기, 파도 등이 보이더라구요. 그런데 이 소재들이 다 어울리지만 이중에서 파도가 가장 운치 있는 소재로 생각되었어요. 그래서 이렇게 주변 소재로 둘러댔더니 읽는 사람마다 다 반하더군요. 만약 이걸 라고 표현했다고 해 봅시다. 얼마나 평범하고 싱겁겠어요? 위의 시는 시의 템포를 한 단계 높이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삽입한 마지막 구절을 제외하곤 처음부터 끝까지 정동진역을 벗어나지 않고 철저하게 정동진역 주변 소재로만 생각하고 행동했습니다. 그래도 신춘문예에까지 당선되고 성공한 시로 여기잖아요?   ========================================================================== 296. 철길에 앉아 / 정호승 철길에 앉아 정 호 승 철길에 앉아 그를 사랑한다고 말했다 철길에 앉아 그와 결혼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때 멀리 기차 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아무 말이 없었다 기차는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아무 말이 없었다 코스모스가 안타까운 얼굴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그대로 앉아 있었다 기차가 눈 안에 들어왔다 지평선을 뚫고 성난 멧돼지처럼 씩씩거리며 기차는 곧 나를 덮칠 것 같았다 나는 일어나지 않았다 낮달이 놀란 얼굴을 하고 해바라기가 고개를 흔들며 빨리 일어나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나는 그대로 앉아 있었다 이대로 죽어도 좋다 싶었다 정호승 시집 중에서 --------------------------------------------------------------------- 297. 옥수수죽 한 그릇 / 정호승 옥수수죽 한 그릇 정 호 승 북한 동포를 생각하는 옥수수죽 만찬에 참석해서 떨리는 숟가락으로 심각하게 옥수수죽 한 그릇을 다 먹고 집에 돌아와 다시 저녁을 먹는다 북한에서는 옥수숫대까지 한꺼번에 갈아 죽을 끓여 먹는다는 이야기를 중학생 막내아들에게 하면서 그것도 못 먹어 굶어죽기까지 한다는 이야기를 되풀이하면서 쌀밥 한 그릇을 다 비운다 나는 그런 놈이다 정호승 시집 중에서
1166    [안녕?- 이 아침 따끈따끈한 詩 한잔]- 진짜 어른 댓글:  조회:3720  추천:0  2016-03-11
‘나는 미남이 사는 나라에서 왔어’. 당돌한 문장이죠? 자기애덕후라고 농을 던질 수도 있어요. 시인의 첫 번째 시집 제목입니다. 일단 재미있어요. 기분도 좋아져요. 제목 투로 농을 걸어본다면, 미남이 사는 나라에서 온 이가 반드시 미남이지는 않습니다. 기준미달로 추방당했을 수도 있어요. 나는 미남이 사는 나라에서 왔어. 이러면 우선은 웃게 됩니다. 천진함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죠, 천진함은 어느 때는 참 무서운 것이기도 해요. 거두절미하고 ‘바로 그것’을 말해 버리니까요. 당황은 해도 천진한 말 앞에서는 꼼짝 못하게 됩니다. 맞는 말이니까요. 이 시는 아이의 천진한 말투로 진짜 어른을 얘기합니다. 진짜 어른이라면 사랑에 대해 꽃잎에 대해 생각할 줄 압니다. 사과를 어렵게 생각하지 않으며 깨어있는 정신을 가지며 부하(어린 시절 병정놀이 할 때 쓰던 표현 아닌가요?)를 함부로 대하지 않습니다. 문의 안과 밖처럼 부하도 그래야 공정한 것이고요. 천진한 말투만큼 진짜도 무섭습니다. 진짜, 강조할 때 써요. 주장할 때 써요. 패를 가를 때도 써요. 아닌 걸 우길 때도 쓰죠. 그럴 때는 주로 자신은 아는데 자신마저 모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마지막 연은 바람직하지 않은 어른입니다. 그렇게 하면 플라스틱 어른이 된다는 것입니다. 빛을 막지 말아야 합니다. 어른은 건물이 아닙니다. 점점 더 할 말이 없어집니다. 몸집을 불리는 게 아니라 빛이 넘나들 수 있도록, 다리가 길어지면 인기가 더 많아지겠지만, 자라는 걸 그만둔 건 어른인 나, 자신이니까요. 시인  
1165    [안녕?- 이 아침 따끈따끈한 詩 한잔]- 인사 댓글:  조회:3743  추천:0  2016-03-11
수도 없이 써 온 단어가 낯설어질 때가 있어요. 대개 그것을 깊이 생각하게 될 때 그래요.   깊이 생각하면 뒤척임도 깊어져요. 뒤척임이 깊어 생각이 깊어지는 것이기도 하겠지요. 단어를 들여다보면 담긴 것과 담고 싶은 것이 보여요. 우물 같아요. 안이 자꾸 궁금해져요. 한 단어 앞에 문득 멈추게 하는 시가 있어요. 이 시가 그래요. 인사. 가장 많이 건네는 자세예요. 말로, 목소리 없는 문장으로 건넬 때도 인사에는 자세가 들어있지요. 물론 생긴 모양도 뜻도 그러하지요. 시인은 인사를 말하지만 실은 시를 말하고 있어요. 반갑고 정답고 맑은 것이 시라고. 또 시를 얘기하지만 실은 인사 얘기예요. 세상일들과 사물과 마음들에 건네는 것이 인사라고. 그러니까, 인사가 아니면 시가 아니고 시가 들어있지 않으면 인사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인사에는 시가, 시에는 인사가 담겨야 한다는 것이지요. 주로 사람에게 인사를 건넸어요. 세상일들과 사물과 마음들에 건네는 것이 인사인데 말이죠. 사람에 대고 열심히 인사했지만 마음은 미처 못 보았어요. 세상일들에 나름의 인사를 건넸다고 생각했지만, 이 시인의 ‘모든 건 꽃핀다’에서처럼, “너의 고통에도 불구하고/내가 꽃피었다면?/나의 괴로움에도 불구하고/네가 꽃피었다면?” 까지 살펴 들어가는 자세를 만들지 못했어요. 이런 곳에 살아있는 ‘눈짓’이 생겨날 리 만무죠. 반갑고 정답고 맑은. 지극히 간명한 단어들을 한참 뒤척였어요.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즉 정확하게 라는 것이죠. 안과 밖이, 앞과 뒤가 서로를 비출 때까지 맑아지는 것. 넘치면 좋은 줄 알았죠. 마음까지 파묻혀요. 흘러 넘쳐요. 그러고 보면 언제보다는 어떻게가 먼저인 인사, 참 어려운 것이에요. 인사가 너무 많아졌어요. 잠시 메일도 SNS도 멈추고(물론 이모티콘도요) 곰곰 생각해봐야겠어요. 인사 건네고 싶은 세상일과 사물과 마음들을요. 정답고 반갑고 맑은 자세가 서투르게나마 생겨날 때까지요. /이원 시인  
1164    詩作初心 - 시의 본문과 제목과의 은유관계 알기 댓글:  조회:6276  추천:0  2016-03-11
시를 쉽게 쓰는 요령 - 김영남 7. 엉뚱하게 제목 붙이는 법 이전 창작강의 및 감상평(6)과 관련하여 효과적인 제목 붙이는 법중 세 번째인 "엉뚱하게 붙이는 방법"에 관하여 여러 군데에서 전화가 와 이에 대해 더 자세한 설명이 필요하다고 여겨 보충합니다. 엉뚱하게 제목 붙이는 법은 전통적인 방법보다 그 수준과 기교가 한결 세련을 요하는 방법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이걸 잘 못 붙이면 시가 난해해져 무엇을 썼는지 독자가 잘 모르게 됩니다. 가끔 시 전문잡지에도 본문과 관련지어 전혀 이해가 안가는 이상한 제목의 시를 종종 볼 수 있을 겁니다. 바로 이런 경우에 이에 해당할 겁니다. 그러나 제목을 제대로 찾아 붙이면 매우 뛰어난 시로 금세 둔갑하게 됩니다. * 시의 제목과 본문이 은유관계로 형성되어야 한다. 그 원리는 이렇습니다. 시의 제목과 본문이 기본적으로 메타포, 즉 은유관계가 형성되어야 합니다. 시의 제목과 본문이 참신한 은유관계가 형성될 때 그 시는 그만큼 참신한 시로 거듭 태어나게 됩니다. 이때 방법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 첫 번째는 "A는 B이다"라는 은유관계가 있는 문장을 가져와 A를 제목으로 올리고 B에 해당하는 내용을 창조해 시를 만드는 방법이고 * 두번째는 B에 해당하는 것을 먼저 써놓은 다음, 나중에 A에 해당하는 제목을 발견해 시를 만드는 방법입니다. 이중 첫 번째는 상당한 수준을 요하는 방법이고, 두 번째가 쉽게 구사할 수 있는 방법이어서 지난 강좌 때 이 방법을 소개한 것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지난 번 예로 든 시를 다시 읽고 난 다음에 설명하겠습니다. * 사춘기 / 강순 ( 위 작품 참조) 위 시는 제목과 본문이 은유관계가 잘 형성되어 있습니다. 즉 '사춘기'는 물살 빠른 '여울'이다 라는 훌륭한 메타포가 들어있는 시인 것입니다. * 위에서 언급한 방법을 설명한다면 첫 번째 방법은 이렇습니다. 자신이 "사춘기는 물살 빠른 여울이다"라는 메타포가 눈에 번쩍 띄는 문장을 발견하고 이걸 갖다놓고 제목을 로 올리고 본문에 해당하는 에 관한 내용만 창조하는 방법입니다. 즉 사춘기를 특징 지을 수 있는 물살 빠른 여울만 구체적으로 창조하는 것이죠. 하여 이 방법은 상상력으로 B에 해당하는 내용을 창조해야 하니까 테크닉과 능력이 일정 수준에 달하지 않으면 여간 힘들지 않나 싶습니다. * 두 번째 방법은 눈에 번쩍 띄는 물살 빠른 여울을 묘사해 놓은 다음, 그 내용에 메타포가 잘 조응되는 제목을 찾아 올리는 방법입니다. 위시의 작자는 아마 자신의 기억 속에서 인상깊은 여울을 먼저 상상으로 묘사한 다음에 그에 잘 조응하는 제목인 '사춘기'를 붙이지 않았나 싶습니다. 위 시는 제목을 굳이 '사춘기'로 하지 않더라도 물살 빠른 여울에 조응하는 제목이면 다 성립합니다. 즉 제목을 '나의 대학시절' '80년대' '고교시절' '어린 시절' '신혼기' 등 과도기적 상황의 제목이면 다 잘 어울려 시로 훌륭하게 성립합니다. 하여, 엉뚱하게 제목 붙이는 방법 중 필자의 경험에 의하면 두 번째 방법이 첫 번째 방법보다 좋은 시를 더 쉽게 많이 만들 수 있는 방법이 아닌가 합니다. 특히 퇴고 과정 중에 버리기 아까운 대목을 따로 떼어내어 보강한 다음 이 방법을 한번 활용해 보세요. 의외로 좋은 시를 아주 쉽게 건질 수 있을 겁니다. =============================================================== 294. 강물 / 정호승 강물 정 호 승 그대로 두어라 흐르는 것이 물이다 사랑의 용서도 용서함도 구하지 말고 청춘도 청춘의 돌무덤도 돌아보지 말고 그대로 두어라 흐르는 것이 길이다 흐느끼는 푸른 댓잎 하나 날카로운 붉은 난초잎 하나 강의 중심을 향해 흘러가면 그뿐 그동안 강물을 가로막고 있었던 것은 내가 아니었다 절말이었다 그동안 나를 가로막고 있었던 것은 강물이 아니었다 희망이었다 정호승 시집 중에서 ---------------------------------------------------- 295. 수선화에게 / 정호승 수선화에게 정 호 승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갈대숲에서 가슴검은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고 네가 물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퍼진다 정호승 시집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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