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카테고리 : 블로그문서카테고리 -> 문학
나의카테고리 : 文人 지구촌
등단 이후 난해시로 분류되며 문학계 뒷단에 서 있던 김언 작가가 올해 제 9회 미당문학상과 2009 동료들이 뽑은 올해의 젊은 시인상을 수상함과 동시에, 신간 <소설을 쓰자>로 화려하게 돌아왔다.
2000년대 중반 한국 시단을 뜨겁게 했던 미래파 논쟁의 중심에 있었던 그가 4년 만에 펴낸 시집의 제목은 참으로 엉뚱하게도 <소설을 쓰자>. 시집을 펼치면 제목처럼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간결한 형태의 시가 아닌 산문을 닮은 남다른 형태를 지닌 새로운 시의 세계가 펼쳐진다. 다양한 언어와 울림, 그리고 리듬을 가진 새로운 시로 우리가 당연히 여기는 모든 것, 우리에게 익숙한 현실의 세계에서 새삼 길을 잃게 하는 시를 쓰고 싶다는 젊은 시인, 김언 작가와 시 밖의 시가 보여주는 낯선 세계에 들어가 본다.
신간 <소설을 쓰자>의 제목이 가진 의미에 대해 설명해 주세요.
시집을 내고 나서 가장 많은 질문을 받은 부분인데요. 제목 <소설을 쓰자>의 소설은 장르로서의 소설은 아니고요. 시 밖의 시, 혹은 기존의 시와는 다른 시를 뜻하는 것이에요. 그게 말처럼 쉽지가 않아서요. 제목에 쓰자는 의지를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하시면 될 듯 합니다.
시를 읽어 보면 행간도 없고, 문장이 긴 시들이 많은데 시를 읽고 있다는 남다른 느낌이 듭니다. 실험적이라고 감히 표현해도 될지... 조금은 낯선 시를 쓰는 이유가 궁금합니다.
기존의 것과 다르게 한다는 건 의지로 끝나는 경우가 많거든요. 실제로 제게 시를 쓴다는 건 시 밖에서의 시를 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위험한 작업이에요. 조금만 삐끗하면 시가 안 되거든요. 실험적이라고 표현하셨는데, 실험이라는 게 모험+위험이잖아요. 그 두 가지를 동반한 말이기 때문에 위험하죠. 그럼에도 헤매고 다니다 보면 시가 아닌 것에서 간신히 시적인 부분이 나오고, 도약하는 순간들이 있어요. 그 때 쾌감이 크거든요. 힘은 들지만, 시 아닌 것에서 시를 구하는... 그런 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시는 쓰는 것이기도 하지만 물려 받는 것이기도 하잖아요. 그리고 후대에 물려 주는 것이기도 하고요. 자신이 물려 받은 것을 다른 식으로 물려 주는 것이 시인의 소임이자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언어 탐구에 몰두해 왔다고 소개되고 있고 시를 읽으며 언어가 굉장히 폭 넓게 쓰여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시어를 선택함에 있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부분은 무엇인가요?
시에서 시어가 되지 못하는 말은 없다고 생각해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운용하고 배열하는 문제이거든요. 보통은 새로운 단어가 들어가면 새로운 시가 된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예를 들어 시조 중 ‘어즈버’라는 단어가 들어가는 자리에 ‘아싸’라는 단어가 들어간다고 해서 현대시가 되는 건 아니잖아요. 그 단어를 운용하고 장악하는 자신의 세계가 어떤가에 따라 시어의 쓰임이 달라지고 시도 달라지며 세계도 달라지는 것 같아요. 세계가 어떤가를 보여주는 문제이죠. 즉, 시어는 단어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의 문제인 것 같아요.
읽다 보면 단어가 가지는 의미에 대해 생각하게 하고, 논리에서 벗어난 문장도 종종 있어 느리게 읽혀지고 생각을 많이 하게 하던데요. 의도하는 바가 있을 듯 합니다.
제 시를 읽으면서 한 동안 머물렀다면 저로서는 고마운 일이죠. 시라는 건 반드시 다르기 때문에 주는 의무감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동안 맴돌게 하는 구석이 있어야 무언가 다른 것을 건드려 주었다는 지표가 되는 것 같아요. 술술 잘 넘어가는 것으로는 시가 완성된다고 생각하지는 않거든요.
그렇다면 김언 작가가 생각하는 시란 무엇일까요?
이 부분은 고민을 굉장히 많이 하게 하는 부분인데요. 다 아는 세계에서 새삼 길을 잃게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너무나도 자명한 사실들을 과연 그런가 라고 다시 한번 생각할 수 있게 하고, 그러면서 새삼 길을 잃게 하는 것이 시가 해줄 수 있는 역할이자, 곧 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시를 쓸 때 가장 어려운 부분이 있다면요?
저한테는 산문과 시의 차이인 듯 한데요. 산문은 힘들더라도 오래 붙잡고 있으면 성과가 나오는데, 시는 초고가 오래 걸리면 대부분 실패예요. 시를 제대로 쓰려면 95%는 초고가 단숨에 나와 줘야 돼요. 나머지 5%를 가지고 시간을 들여 단어 하나, 조사 하나, 한 문장을 가지고 어떻게 넣을 것인가를 고민하면서 나머지 95%를 조정하는 것이거든요. 써놓고 결합을 하는 경우는 있지만, 아무튼 초고가 빨리 나와야 하죠. 저한테는 그래요. 초고가 오래 걸린 건 다시 읽어 보면 아무 것도 남지가 않더라고요. 이번 시집에 들어간 시들은 시적인 부분에 진입하는 데 어느 정도 성공한 것이지만 그 전에 실패한 시들이 정말 많아요. 쓴 시를 100이라고 한다면, 발표하는 시는 50, 시집에 들어간 시들은 20~30 정도 비율 밖에 안 되죠.
시를 쓸 때 습관 같은 게 있나요?
그런 질문에 멋지게 답하는 시인들도 많던데요. (웃음) 전 특별한 습관은 없는 것 같아요. 사람의 인연이라는 게 기다리고 있을 때 지나가기도 하고, 자신도 모르게 지나가기도 하는 거잖아요. 시가 들어갔다가 나가는 것도 자기 마음대로인 것 같아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잡아내는 게 중요하지, 자기가 만들어 놓는다고 해서 반드시 오는 건 아니거든요. 산문은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을 듣거나 아늑한 환경에서 쓰는 게 가능할지 모르겠는데, 시는 성미가 까다로운 것 같아요. 자기가 와야지 오는, 그런 남다름이 있습니다.
<기하학적인 삶>으로 ‘미당문학상’을, <소설을 쓰자>로 ‘동료들이 뽑은 올해의 젊은 시인’으로 선정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축하드리며, 소감 한 마디 부탁합니다.
‘미당문학상’은 사실 상상도 못했던 일이고요. 저뿐 아니라 시 쪽에 몸담았던 사람이라면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일 거예요. 당황스럽기도 하고, 말 그대로 과분한 상이죠. 반면 ‘동료들이 뽑은 올해의 젊은 시인상’은 시집을 내면서 꼭 받고 싶은 상이었어요. 1차적인 문학에 대한 평가는 선배들이 하는 것이지만 궁극적인 평가는 후배들이 하는 것이거든요. 아직 후대는 오지 않았지만, 그 사이에 있는 동료들의 평가는 의미가 꽤 크다고 생각해요. 더군다나 앞서 받았던 진은영, 김행숙 시인들은, 확신하건대, 한 세대가 지나도 남을 시인들이거든요. 그 분들의 뒤를 이어 받았다는 게 너무나 기분 좋은 일이죠. 또 한편으로는 저와 다르지만 제 인생의 시인이라고 할 수 있을 시인들이 동년배에 있다는 게 참 행복한 일인데, 그들이 많은 피를 흘린 대가가 저한테 온 것 같아서 문학적인 부채감이 있어요. 그게 사실은 가장 큽니다.
그 동안 시가 어렵다거나 주류시와는 거리가 있다는 평들도 많았는데, 그런 점에서 이번 두 개 상의 수상은 더욱 큰 의미가 아닐까 싶습니다.
신문지상에는 지방출신 시인으로서의 서러움, 억울함 등이 많이 부각됐는데요. 물론 그런 점이 없지는 않았죠. 하지만, 사실 더 컸던 것이 한국 시 풍토에서 제 문학적인 이상, 시적인 이상을 구현하는 것은 힘들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이번 수상을 통해 그 가능성을 봤다는 부분이 더 크죠. 한동안 미래파 논쟁이라 이름 붙여져 외적으로는 젊은 시인들의 시를 부각시키려는 움직임이 있었거든요. 그 요지는 시가 무겁지 않아야 하고, 사유보다는 감각을, 그리고 기존 시에서 다루지 않았던 하위 문화들을 적극적으로 포용해야 한다는 것이었어요. 그런데, 전 단 하나도 포함이 되지 않더라고요. 일단 제 시는 무겁잖아요.
스스로도 본인의 시가 무겁고 어렵다고 생각하나요?
요즘 주목 받고 있는 젊은 시인들의 시와 제 시는 다른 것 같아요. 일부, 그들의 시를 공격하는 분들은 경박하다고까지 하는데, 표현이 어떻든 저는 그들의 시를 좋아합니다. 거기에 비한다면 제 시는 경쾌하지는 않은 듯 해요. 조금 무겁고, 감각도 들어가 있기는 하지만 사유 쪽에 가까운 것 같고, 하위 문화 쪽이 없어요. 젊은 시인들의 표지라고 할 수 있는 그 부분이 없죠. 그 때문에 한동안 비평가들에 의해 미래파로 분류되는 젊은 시인들 중 제외가 되던가, 순위를 두면 항상 특색이 덜 드러나는 후순위에 가있거나 했어요. 그 논쟁이 있던 2007년에 웬만한 또래 시인들이 시집을 제안 받고 출간할 때 전 아무런 제안도 받지 못했거든요. 그 때 좀 힘들었죠. 좌절은 아니지만 체념을 많이 했었어요. 시집만 낼 수 있으면 다행이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죠.
그 당시 가장 어렵게 느껴졌던 부분은 무엇이었나요?
일단 제 시가 기존 정통시와는 많이 다르다고 생각해 주는 것만으로도 좋겠는데, 뒤처지는 것처럼 평가되더라고요. 그게 참 힘들었는데, 이번에 두 가지 상을 받고 나니 정당한 평가라고 생각되기 보다는 과분하다는 생각과 한편으로는 부담이 많습니다.
김언 작가의 시가 난해하다는 평에 대해서 평론가에 기준에 맞춰 평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서 강한 반론을 제기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김언 작가의 시가 어렵고 난해하다는 평에 대한 견해가 궁금합니다.
당시 문학동네 산문에 썼던 글인데, 제 반론이 시인들에게는 통쾌한 면들이 많았죠. (웃음) 연장선상에서 이야기를 이어가자면 국문과 박사학위를 받으면 시를 다 알아야 한다는 의무감과 함께 자신감도 있는 것 같은데, 그건 엄연히 다른 분야라고 생각해요. 시는 예술이고, 그 분들이 공부한 것은 말 그대로 학문이거든요. 그런데, 대학의 시스템 안에서 논문을 발표하고, 1920~30년대 문학도 아닌 서지학을 공부하던 분들이 갑자기 현장 비평가가 되어 요즘 시는 못 읽겠다는 평을 한다는 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시라는 건 시인들은 나름대로 현장에서 엄청나게 고민하면서 쓴 것이거든요. 그런 분들이 그 동안 내가 현장을 떠나 있었으니까 열심히 읽어 봐야 한다는 생각을 갖는 게 아니라, 자신이 못 읽겠으니 이건 난해시라고 치부해 버리는 거예요. 그들이 말하는 난해시는 어렵다가 아니라 접근불가의 의미거든요. 그런 의미를 가진 보편적인 난해시가 되어 버리는 거예요. 자기 입장에서 소통이 되지 않는 것을 가지고, 모든 독자가 소통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과장하며 그 시를 밀쳐내는 것이죠. 평론가들 사이에서 대접 받지 못하고 난해시로 치부된 시들이 대학에 갓 입학한 새내기들 사이에서는 널리 읽히고 인기를 끌 수도 있거든요. 일반 독자들이 난해하다, 어렵다라고 한다면 충분히 이해할 수도 있지만, 현장비평가라면 난해시라는 카드는 가장 마지막에 꺼내 들어야 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너무 남발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어요. 사실 비평가가 난해시라고 이야기하는 순간, 그 시는 포기를 한다는 의미이고 자신의 밑천이 다 드러나는 것이기도 하거든요.
김언 작가의 시가 난해하다는 평이 불편하다는 의미인가요?
꼭 그렇지만은 않아요. 난해하다는 평이 기분 좋은 면도 가지고 있죠. 난해하다는 건 소화하기 어렵고, 이해도 어렵고, 의무감을 주며 불편하다는 뜻인데, 새로운 건 항상 불편함을 주기 마련이거든요. 편안함을 주면서 새롭기는 어렵죠. 새로운 것은 늘 저항감을 주기 마련이잖아요. 그렇다고 불편한 것이 늘 새로운 건 아니고요. 불편하게 했다면 새로운 가능성은 있다는 것이거든요. 그런 면에서는 비평가가 하는 직무유기식의 난해시라는 평이 아니라 독자들이 이야기하는 불편하고 난해하다라는 평은 고마운 면이 있어요. 받아들이는 느낌 자체가 다릅니다.
그렇다면 가장 기억에 남는 독자가 있나요?
대체로 잘 모르겠다는 분들이 많은 것 같아요. 잘 모르겠다는 분들은 그 이상의 발언을 하지 않죠. 그런데, 잘 모르겠는데 뭔가 있다거나 재미가 느껴졌다, 시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는 독자평들이 종종 있거든요. 그런 글을 읽으면 굉장히 고맙죠.
남다른 시라는 이유로 기존 문학계에서 인정 받지 못하지만, 많은 독자들에게 호응을 받는 시들이 있는데, 그런 부분에 대한 견해가 궁금합니다.
어차피 시로 세상 모두와 소통할 수는 없어요. 시라는 건 세상에 몇 안 되는 애인과 아주 은밀하게 소통하는 것이거든요. 세상 모두가 소통하는 시를 쓴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에요. 애인이나 다름 없는 몇 안 되는 독자를 찾아가는 것이 시를 쓰는 것인데, 이미 수 많은 독자들에게 사랑을 받았다면 그것 자체만으로도 큰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여러 문학 장르 중 김언 작가에게는 왜 시여야 했을까요? 시를 쓰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처음에는 소설을 썼었어요. 말 그대로 ‘소설을 썼다’죠. (웃음) 제가 공대 출신이거든요. 문과를 가고 싶었지만, 당시에 남자는 이과를 가야 하고, 공대를 가야 한다는 흐름 때문에 공대를 선택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반년도 안 되어 후회가 되더라고요. 서클 활동을 하거나 그런 건 아니었지만, 1학년 여름 방학 때부터 소설을 쓰기 시작했어요. 그러면서 제가 쓴 소설을 친구들에게 보여주는 재미로 학교를 다녔죠. 그러다가 2학년을 마치고 방위로 군대를 가게 됐는데, 출퇴근을 하다 보니까 소설을 쓸 수는 있지만 지속적으로 쓰기는 어렵더군요. 그래서 짤막하게 쓰다 보니 어느 순간 그게 시적인 부분과 이어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 전향을 했어요. 전향이라는 말이 좀 그렇긴 하네요. 아무 것도 모를 때 소설 조금 쓰다가 시를 쓰게 된 것이니까요.
그 시기가 현재 김언 작가의 시의 형태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하나요?
그 때도 그랬던 것 같고, 중 3때 시를 좀 썼던 것 같아요. 연애시도 있었지만, 대부분 철학적인 내용이 담겨 있죠. 예를 들어 창 밖의 나무들은 왜 저렇게 서있을까 라는 등 관념적인 내용들인데, 제게 그런 피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김언 시인이 닮고 싶은 시인이 있습니까?
우리나라 시인들 중 적지 않은 경우가 첫 번째, 혹은 두 번째 시집에 모든 에너지를 쏟아 붓고는 40, 50대가 넘어가면 달관한 듯 도사가 되어 버리는 경우들이 있거든요. 아예 도로 넘어가면 좋은데, 도로 넘어가기 직전에서 계속 도를 이야기해요. 그러다 보니 시적으로 많이 약해지죠. 달관한 시가 되고요. 그 이유야 파헤쳐 보면 할 말이 많겠지만, 그리 바람직해 보이지는 않아요. 물론 모든 시인이 다 그렇다는 건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폴란드의 시인, 비슬라바 심보르스카(Wislawa Szymborska)는 팔순이 넘어서도 계속 세계를 달리 하는 시를 쓰고 있으니 본받을 만 하죠. 그 분이 노벨문학상을 받았다거나 그렇기 때문이 아니에요. 저 역시 벌써 세 권째 시집을 냈는데, 앞서 말한 시인들처럼 된다면 재미가 없어서라도 앞으로 시를 못 쓰겠죠. 꾸준히 세계를 바꿔가며 시를 쓰는 시인들이 제게는 롤 모델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우리 시대 큰 주목을 받고 있는 젊은 시인으로서 시인을 꿈꾸는 후배들에게 조언해 주세요.
등단을 하던 하지 않던 간에 글이 써지지 않을 때 항상 고민하는 게 자신의 재능을 의심하는 거거든요. 하지만, 재능을 의심할 필요는 없는 것 같아요. 자기 재능은 다른 게 아니라 자신이 그것을 좋아하는 정도거든요. 자신이 좋아하는 만큼 다 자신의 재능이 되기 때문에, 굳이 자신의 재능을 의심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죠. 할까 말까를 고민하는 게 아니라 좋아하는 상태에서 앞으로 무엇을 쓸 것인지 고민하는 게 생산적이라고 생각해요.
앞으로의 어떤 시를 쓰고 싶은지, 꿈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제가 생각하는 시, 다 아는 세계에서 길을 잃게 만드는 시를 쓰고 싶습니다. 본인이 내리는 시의 정의가 본인이 가고 싶은 시의 길이잖아요. 그런데, 쉽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세계가 그렇게 호락호락하거나 만만하지 않거든요. 허술하게 작동하는 것도 아니고요. 세계란 자신을 포함한 전부죠. 그 세계에서 누구나 길을 잃고 싶지 않은 게 본능이기 마련인데, 그 안에서 길을 잃고 싶은 의지를 갖고 실천한다는 게 쉽지는 않겠죠. 거의 불가능하다는 표현이 맞을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불가능하기 때문에 해 볼만 한 것 같아요. 가능하다면 어느 정도 하면 되겠지 라는 생각을 갖겠지만, 불가능하기 때문에 오히려 계속 할 수가 있는 것이죠.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