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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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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3    詩作初心 - 명상과 詩 댓글:  조회:5247  추천:0  2016-02-24
명상과 시       장석주                 시를 쓰는 자들이 “비가 온다.”고 표현하는 일은 드물지 않다. 그러나 본디 비는 오고 가는 것이 아니다. “비가 온다.”는 것은 사람의 관념일 뿐이다. 그것은 사람이 지구상에 출현하기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항상 있어온 현상이다. 비는 언제나 있다. 그것은 오고 가지 않는다. 다른 시대 다른 장소에도 비라는 현상은 있었던 것이다. 사람을 주체로 고정시키고 사물들을 객체화하는 인간 중심의 오래된 인습이 비를 제 몸 가까이 끌어당겨 “비가 온다.”라고 쓰게 한다. 국소적 공간 경험에 갇혀 있는 자들만이 “비가 온다.”고 쓴다.       좋은 시인은 “비가 온다.”라고 쓰지 않는다. 제 몸의 경험을 받들어 이렇게 쓴다. “점, 점, 점, 사나워지는 누에들의 뽕잎 갉아먹는 소리,”(주용일, 「봄비」)     “나무에서 나오는 방법은 나무를 통하는 길뿐이다.”(프랑시스 퐁쥬)       명상은 인습적 관념의 속박에서 사람을 해방시키는 일이다.     명상은 시의 반숙(半熟)이다. 그럼 완숙은 어떤 경지일까 ? 열반(涅槃). 하나의 현전. 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순간. 하지만 냉정하게 말하자. 시는 도덕적으로는 비난받을 짓이다. 시는 우주의 데이터 베이스를 훔치는 짓이다. 플라톤이 역정을 내며 이상국가에서 시인들을 모조리 추방한 이유도 거기에 있다. 공화국에서 시인들은 파렴치한 자들이라고 낙인찍힌다. 이것은 우화가 아니다. 현실이다.     1964년에 소비에뜨 공화국의 법정은 훗날 노벨문학상을 받는 시인 브로드스키를 “사회적으로 유용한 일을 하지 않는 기생충”이라고 규정지었다. 그 법정에서 있었던 심문 내용의 일부를 보자. 판사 : 당신은 누구인가 ? 브로드스키 : 나는 시인이다. 그렇다고 생각한다. 판사 : ‘~ 라고 생각한다’는 표현은 허용되지 않는다. 당신의 직업은 무엇인가 ? 브로드스키 : 나는 시를 쓴다. 출판도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판사 : 당신의 ‘생각’을 묻는 것이 아니다. 일을 하지 않는 이유를 말하라. 브로드스키 : 나는 시를 썼다. 그것이 내 일이다. 판사 : 당신을 시인으로 공인한 것은 누구인가 ? 브로드스키 : 없다. 그것은 나를 인간으로 공인한 사람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판사 : 소비에뜨에서는 누구나 일을 해야 한다. 당신은 왜 일을 하지 않았는가. 브로드스키 : 나는 일을 했다. 시가 나의 일이다. 나는 시인이다. 결국 브로드스키는 공화국에서 추방되어 미국으로 건너갔다. 브로드스키의 재판은 시의 DNA가 생물학적 합목적성과 무관하며 공익적 세계의 건설에 기여하는 바가 전무하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밝혀준다.     아리스토텔레스(B.C. 384 ~ B.C. 322)는 기원전 4세기에 이미 『시학』에서 “시인들에 대한 비난은 다음의 다섯 종류, 즉 불가능, 불합리, 도덕적으로 해로운 요소, 모순, 시 창작 기술의 올바른 기준에 반하는 것 등으로 구분된다.”고 쓰고 있다. 시, 무용한 짓. 상상임신. 옐로카드를 받는 헐리우드 액션. 쇼펜하우어는 그것이 의지와 표상 사이에 있다,고 선언했다. 베르그송은 그것이 생의 비약이다,라고 했다. 그렇다고 시의 미학적 선택에 내재한 반도덕성, 무용함이 가려지는 것은 아니다.     명상은 초언어를 지향한다. 초언어는 ‘나’와 ‘너’의 분별이 없는 태허(太虛)의 상태다. 가령 “잘 익은 똥을 누고 난 다음 / 너, 가련한 육체여 / 살 것 같으니 술 생각 나냐?”(김형영, 「일기」). 잘 익은 똥을 누고 난 뒤 비어서 가뿐한 몸에서 태허를 겪는다.       명상은 그 태허의 상태에서 사물들의 저편에 숨은 신을 만나는 일이다. 숨은 신은 죽은 고양이다. 어느 선사에게 물었다. ―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것이 무엇입니까 ? 선사가 대답했다. ― 죽은 고양이다. “국도 한 가운데 널브러져 있는 / 죽은 고양이의 / 저 망가진 외출복 !”(이창기 「봄과 고양이」)     명상과 시는 그 계통분류상 다른 가지에 속해 있다. 하지만 명상과 시는 여러 면에서 닮아 있다. 명상에서 깨달음은 갑자기 온다. 시의 영감도 어느 날 갑자기 예기치 않은 순간에 뇌속에서 부화한다. “그러니까 그 나이였어……시가 / 나를 찾아왔어. 몰라, 그게 어디서 왔는지, / 모르겠어, 겨울에서인지 강에서인지. / 언제 어떻게 왔는지 모르겠어, / 아냐, 그건 목소리가 아니었고, 말도 / 아니었음, 침묵도 아니었어, / 하여간 어떤 길거리에서 나를 부르더군, / 밤의 가지에서, / 갑자기 다른 것들로부터, / 격렬한 불 속에서 불러어, / 또는 혼자 돌아오는 길에 / 얼굴 없이 있는 나를 / 그건 건드리더군.”(파블로 네루다, 「시」)       사람들은 깨달음이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 말한다. 일본 불교의 한 맥인 본각사상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깨달음의 세계로 받아들인다. 이미 깨달았으니 다른 좌선도 필요 없고, 악을 행하는 것도 자유다. 조악무애(造惡無礙)의 뿌리가 본각사상이다. 도겐(道元, 1200 ~ 1253)도 그 영향권 아래에 있던 승려다. 도겐은 수행의 결과로써 깨달음에 이르는 게 아니라 좌선 그 자체가 깨달음이라고 말했다. 깨달음은 없다. 깨달음을 향한 지향이 있을 뿐이다.     명상은 언어를 내려놓는 일이다. 시도 마찬가지다. 언어라는 도구에 의지해 앞으로 나아가되 궁극에는 언어를 버려야 한다. 프랑시스 퐁쥬는 새를 오랫동안 관찰하고 새에 관한 시를 여러 편 썼다. “하늘의 쥐, 고깃덩이 번개, 수뢰, 깃털로 된 배, 식물의 이”도 그 중의 일부다. 그러나 새는 공중에서 미끄러지듯 활강하지만, 프랑시스 퐁쥬가 원할 때 그의 시 속으로 날아들지는 않는다.       시는 언어를 딛고 언어를 넘어간다. 시는 없다. 시를 지향하는 마음 그 자체가 있을뿐이다.     시와 명상은 다 함께 초언어(超言語)를 지향하지만 시는 방법적 도구로 언어를 쓴다. 언어는 물(物)을 지시하는 기호다. 언어는 물이 아니다. 언어는 관념이다. 언어는 나와 물 사이에 있다. 언어는 나와 세계, 존재와 부재 사이에 걸쳐진 다리다.       시는 언어가 만들어내는 의미론적 연관의 장(場)이다. 하지만 우리가 시를 만나는 것은 언어가 지시하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언어와 언어 사이의 여백들에 메아리치고 있는 비언어적인 울림 속에서다.     시는 언어가 아니다. 시는 언어와 언어 사이 그 여백에서 아직 형태소(形態素)를 얻지 못한 생성하는 언어, 발효하는 언어다.     시는 의미가 아니다. 의미 이전이다. 이를테면 “달팽이가 지나간 자리에 긴 분비물의 길이 나 있다”, 혹은 “물렁물렁한 힘이 조금씩 제 몸을 녹이며 건조한 곳들을 적셔 길을 냈던 자리, 얼룩”(김기택, 「얼룩」)와 같은 구절들은 시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의미의 잠재태(潛在態)임을 말해준다.       보르헤스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나라는 존재가 정말로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내가 읽은 모든 작가들이 바로 나이며, 내가 만난 모든 사람들이, 내가 사랑한 모든 여인들이 바로 나다. 또 나는 내가 갔던 모든 도시이기도 하며 내 모든 조상이기도 하다.”     거울과 부성(父性)은 시와 상극이다. 다시 보르헤스는 말한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 세계를 증식시키고, 마치 그것을 사실인 양 일반화시키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인은 거울의 뒷면, 그 텅 빈 공허를 본다. “내가 보는 것은 늘 청동거울의 뒷면이다”(조용미, 「청동거울의 뒷면」)     의미로서의 시는 사물로서의 시보다 하급이다. B급이다. 하이쿠는 17자로 끝난다. 의미가 언어의 양에 비례한다면 하이쿠는 가장 무의미한 언어의 형식이 될 것이다. 그러나 시의 의미는 대개는 언어와 반비례한다. 하이쿠는 지구상에 존재하는 시 형식 중에서 가장 슬림하다. 하이쿠는 해석의 언어가 아니다. 사물과 만나는 순간의 아주 희미한 떨림을 기록한다. 그것은 아직 시로 진화하기 이전의 원시적 흔적이다. 하이쿠에서 언어에 대한 근검절약은 의미에 대한 태만으로 이어진다. 가장 성공한 하이쿠는 무의미의 의미를 체현해낸다. 하이쿠는 언어가 아니라 사물의 은폐된 후경(後景)을 겨냥한다. 하이쿠는 오류와 우연들에 필연의 에너지를 수혈하는 선(禪)과 명상에 가깝다. “같은 두 번의 입맞춤도 없고 / 하나같은 두 눈맞춤도 없다.”(쉼보르스카, 「두 번이란 없다」)     명상은 사물의 계통분류상 속(屬)이고 시는 그 하위에 속하는 종(種)이다. 명상은 유실수고, 시는 앵두나무다.  =====================================================================================   시인이라면 한 번 쯤 새겨두고 싶은 글이다.   =======================================================================================   266. 삶의 거처 / 백무산                         삶의 거처                                                    백 무 산   강이 어디에 있냐고 그가 물었다 길을 묻는가 해서 내가 되물었다 이리 쭉 가면 다리가 나오느냐고 다시 물었다 비닐 가방에 때 절은 작업복 거친 손등에 머리는 반백인 사내   늦가을 찬바람 안고 돌아서는 그를 불렀다 그리고 나는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모든 걸 잃은 사람에겐 사람의 체온이 종교다   저들의 탐욕과 음모와 속임수로 많은 사람들 찬 거리로 내몰렸지만 우린 또 기억한다 그 숨 막히던 날들 모두가 졸부가 되던 뻔뻔스럽던 날들   그 사람 앞에 앉아 나도 밥 한 그릇 받는다 어쩐지 목숨 비치는 국밥 한 그릇 받는다 강이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던가 목숨이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던가     백무산 시집  중에서   ---------------------------------------------------------------   267. 잡초 하나 / 백무산                                 잡초 하나                                                백 무 산   종일토록 나는 지리산 잡초를 뽑고 있었다   깜장 고무신에 벗은 발등이 까만 여자 거친 손 까만 얼굴에 눈 푸른 여자   고물 트럭을 몰고 와 절집 볼일을 보고는 가던 길에 날 보더니 다가와 묻는다 잘 되느냐고   내사 별일 없는 사람이지요, 하니 공부란 것이 원래 별일 없는 일이지요, 한다   여자는 고물 트럭에 시동을 걸었고 나는 벼랑에 잡초 하나 붙들고 있었다     백무산 시집  중에서 우리는 읍으로 간다 / 이상국 우리는 읍으로 간다 이 상 국 우리는 읍으로 간다 한때는 슬픈 식민지 백성으로 또는 인공의 인민이 되어서, 자유당 공화당 지나 세상이 자꾸 바뀌어도 읍에서 부르면 우리는 간다 할아버지 지게 지고 부역 가던 길 볏가마 실려 나가고 아이들 공장으로 떠나던 그 길 머나먼 유엔 사무총장에게 메세지를 보내고 반나절이면 혁명과 쿠테타에도 도장 찍어 주고 오던 길로 오라면 우리는 간다 읍에서 오라면 우리는 간다 걸핏하면 프레카드 앞세우고 가 그렇게 손을 흔들어 주었음에도 세상이 뒤숭숭하고 나라가 위험하면 오늘도 우리는 읍으로 간다 이상국 시집 중에서 이상국 연보 1946년 강원도 양양 출생. 1976년 신인상으로 등단. 1985년 첫 시집 간행. 1989년 제2시집 간행. 1992년 제3시집 간행. 1995~1998년 민예총 강원지회장 1998년 제4시집 간행. 이 시집으로 제1회 백석문학상, 제9회 민족예술상 수상. 1999~2002년 민족문학작가회의 강원지회장 2003년 제1회 유심작품상 수상. 2003~2004년 민족문학작가회의 부이사장. 2005년 제5시집 간행. 2011년 불교문예작품상 수상. 2012년 육필시선집 , 제6시집 간행. 제24회 지용문학상 수상. 한국작가회의 자문위원으로 활동 ---------------------------------------------------------------------- 270. 내 가는 모든 길의 검문소에서 / 이상국 내 가는 모든 길의 검문소에서 이 상 국 젊어서는 그랬다 대대리 삼거리에 차가 멈추면 죄 없이도 가슴이 방망이질했다 권총 찬 경관이 경례를 올려붙이며 잠시 검문이 있겠습니다 하면 나는 까닭 없이 오줌이 마려웠다 화진포 삼불사로 어머니 사십구제 모시러 가던 그해 겨울 수염 거칠고 주민등록증마저 없어 수상하다고 나는 사정없이 정강이를 차였다 돌아가신 어머니도 아무 소용없던 십수 년 전 조국의 국도 마흔이 넘은 지금도 그렇다 그 삼거리에 아직 차는 어김없이 멈추고 엠식스틴 움켜쥔 경관이 통로를 훑어 오면 나는 아직 뭔가 불어야 할 게 있는 것 같다 내 가는 모든 길의 검문소에서 오늘도 나는 가슴이 뛴다 이상국 육필시선집 중에서  
1122    [아침 詩 한수] - 오징어 댓글:  조회:4286  추천:0  2016-02-24
오징어 3 - 최승호(1954~ ) 그 오징어 부부는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부둥켜안고 서로 목을 조르는 버릇이 있다 말(言)의 부유(浮游). 말은 세계 위를 떠돌면서 세계를 구성하고 해체한다. “사랑한다고 말”할 때 비(非)사랑은 (일시적이지만) 사랑이 된다. 언어가 현실을 만든다. 그러나 그 언어 아래에서 행위는 늘 전복(顚覆)의 틈을 노리며 언어가 결국은 껍데기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폭로하려 한다. 언어-행위 사이의 이 팽팽한 긴장 속에 우리의 삶이 존재한다. 그러니 “사랑한다고 말하면서”(언어), “서로 목을 조르는 버릇”(행위)은 꼭 이 시에 나오는 ‘오징어 부부’만의 것은 아니다. 언어와 행위가 행복한 합일의 지경에 도달할 때, 말이 필요 없어지고 행위는 자유로워진다.      
1121    [아침 詩 한수] - 기러기 한줄 댓글:  조회:4549  추천:0  2016-02-23
하루 사이에 양달의 눈들이 녹는다. 눈 녹는 것이 신기하다. 눈 위에 찍힌 그 첫발자국도 길게 먼저 녹는다. 발자국을 통해 기러기 한줄 본 사람, 그 기러기의 여정을 생각하고 있을지 모른다. 이제 그 눈 다 녹고 없다. 아니 그 눈은 물이 되었으므로, 냉이 뿌리를 간질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 감(感)이라는 건 어쩌면 이 봄에 가장 어울리는 단어다. 봄이 오는 쪽으로 꽃나무들이 일제히 그림자를 비트는 게 보인다. 잘 보인다. / 이소연 시인 시평.
1120    열심히 쓰면서 질문을 계속 던져라 댓글:  조회:4387  추천:0  2016-02-21
시인 김정환, 공적인 죽음을 말하다 공적인 죽음, 인문주의적 파르티잔의 욕망 글 김도언 | 사진 이흥렬 죽음이 있으니 인생에 불가능은 당연히 있고 문제는 언제 어디서부터 불가능인가, 불가능한가다. 죽음이 끊임없는 (불)가능의 변증법을 모두 치르거나 겪고 난 후에도 있는 마지막 불가능이고 가능이다. 그 이전 불가능은 대개 지쳤거나 게으른 것에 다름 아니다. 잔당(殘黨)의 울화를 닮은. ―김정환 산문 ‘현실의 물증, 접속사로서의 죽음’(《21세기문학》 2015년 봄호)에서. “모든 시는 정치적이다” 합정동에서 양화대교로 한강을 건너면 곧 당산동이다. 거기 오래된 아파트에, 거실 한 가운데 놓인 책상 앞에 ‘그’는 정물처럼 그대로 있다. 그는 그냥 있을 뿐인데 사람들이 그를 마음대로 사용했다. 신기한 것은 수많은 이들의 손을 탄 이후에도 그는 그대로, 처음처럼 닳지 않고 남아 있다는 것이다. 닳지 않고 그냥 거기에 있는 사람, 시인 김정환 얘기다. 가장 최근의 것으로 보이는 시인 서효인과 가진 인터뷰(《21세기문학》 2015년 봄호)에서 그는 의미심장한 말을 한 적이 있다. “사실 모든 시는 정치적이야. 김수영이 모든 좋은 시에는 죽음의 리듬이 있다고 말한 것, 그게 바로 정치적인 것이라는 말이야. 정치는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을 나누는 일인데, 공적이라는 것은 세상을 좀 더 나은 방향으로 가게 하기 위한 자기 죽음 같은 거거든. 일단 죽음을 통과해야 당대의 미학을 끌고 나갈 수 있다는 것이지. (그렇다면 그건) 공적인 희생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 공적인 죽음과 공적인 희생. 그가 죽음과 희생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것이 내게는 어딘지 심상하지 않게 다가왔는데, 자신이 선택하고 자신의 입으로 발음한 그 단어들이 자기가 끌고 나갔던 문학적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그가 연역적으로 재구성하는 데 관심이 있는 건 아닐까, 그러니까 그가 해 온 모든 방대한 작업이 공적인 죽음을 이해한 자의 의식과 연관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추정을 가능케 한 것이다. 그는 앞서 얘기한 강변동네의 오래된 아파트에서 수십 년째 살고 있다. 이 한결같음은, 시인으로서, 저술가로서, 그리고 번역가로서 그의 삶의 전모를 이해하는 데 제법 중요한 실마리 구실을 한다. 글을 쓴다는 것은 사실 매우 적극적이고 구체적인 행위다. 그 행위의 구체성이 시인과 작가의 세계를 구성하는 것일 테다. 시인은 군인이나 경찰처럼 신분적 존재가 아니라 행위적 존재라는 말은 이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런데, 행위란 운동성을 지니는 것이어서 지속가능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더군다나 그게 사유에서 의미를 뽑아내는 일임에야 더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런데, 내 생각에 글쓰기라는 ‘행위’ 속에서 가장 적확하게 정의되고 있는 시인이 바로 김정환인 듯하다. 그 말고 누가 중단 없는 ‘행위’의 운동성을 통해 자신이 시인인 것을, 당대의 지식인인 것을 의심의 여지없이 증명해 보였는가. 그가 그동안 펴낸 책은 물경 200권. 1년에 한 권씩 펴내도 200년, 1년에 두 권을 펴내도 100년이 걸리는 놀라운 양이다. 글만 쓰는 게 아니다. 그는 우리나라 최초로 셰익스피어 전집과 세계 현대 시인들의 전집을 번역하고 있다. 이 멈추지 않는 운동성의 행위는 행위 자체에 대한 객관적 타자성을 탈색해야 가능하다. 객관적 타자성이란, 수요를 계산하는 공급자의 시각이다. 그런데, 시인 김정환에게 있어 글을 쓴다는 행위는 내면의 각성에 의한 공적인 죽음을 수행하는 행위여서 수요와 공급의 ‘관제성’을 일치감치 뛰어넘는다. 그에게 글쓰기는 차라리 회의와 성찰과 자기긍정이 극적으로 통합된 아니 애초부터 무화된 주술성과 즉물성의 지배를 받는 것으로도 보인다. 참으로 신비하고 경이로운 삶. 내가 인터뷰어가 되어 그를 만나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은, 바로 관제성을 뛰어넘는 순수한 정치 행위자로서의 시인의 삶과, 죽음까지 엮어내고자 하는 그의 ‘총체적’ 노력이 오늘 우리 문학의 조건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알아보고 싶었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어딘지 부족한 것 같고, 인문주의적 파르티잔이라 칭할 만한 그의 비정상적인 에너지에 대한 원색적인 호기심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도 마음에 안 들고. 아무려나, 이 인터뷰는 100퍼센트 실패가 예정된 것이다. 콤플렉스와 분열 문청 시절부터 그의 글을 따라 읽으면서 궁금했던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이 압도적인 괴물 같은 능력의 소유자에게도 혹여 콤플렉스 같은 것이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그래, 인간이라면 열등감이 어찌 없을 수 있을까. 더군다나 상처에서 꽃을 피운다는 문학을 하는 사람인데. 나는 그래서 인터뷰어로서 그 앞에 섰을 때 작심을 하고 첫 번째 질문을 통해 그의 콤플렉스를 유인해보고자 했다. 그에게 콤플렉스가 있다면 나는 그것이 그의 출생지 ‘서울’이라는 향토성이 거세된 공간의 어떤 한계로부터 촉발되는 건 아닐까라는 짐작을 했다. 그래서 예의를 가장해 도발적으로 물었다. 그가 담배를 빼어 물 때, 그러니까 방심할 때를 기다려. 김도언 : 선생님은 서울에서 태어나셨잖아요. 비교적 서울의 전통적인 정서가 남아 있는 마포라는 곳에서 태어나셨는데, 보통의 지방 출신 시인 예술가들이 각각 자신의 고향을 독자적인 감수성의 전진기지로 삼아 문학을 시작하고 심화시키는데, 대한민국의 중앙이자 수도인 서울에서 태어나신 선생님은 다른 작가나 시인들의 문학적 고향을 부러워하신 적은 없으신가요? 김정환 : (다소 어이없는 표정을 지으며) 지금은 풍토가 달라졌는데 옛날에는 문단 어른들이 내가 술 잘 먹고 잘 노니까 좋아하다가도 서울 출신인 걸 언급하면서 너 글 쓰기 힘들겠다. 그러다 또 몇 달 지나면 내가 서울대 나온 것까지 곁들여 너 정말 글쓰기 힘들겠다, 이런 말씀들을 했어요. 거기에다가 난 또 영문과잖아. 그러니까 문단 어른들 말씀은 자기가 제일 똑똑한 줄 알고 잘난 척하다가 글을 제대로 못 썼던 서울대 출신 문인들의 현실적인 한계를 지적한 거였지. 사실 뭐, 서울대 출신들이 문학에 약하긴 하지. 그런데 지금은 달라진 게 요즘 젊은 작가들은 50퍼센트 이상이 서울 출신이에요. 그만큼 서울이 넓어졌지. 내가 마포 살 때는, 사실 사대문 안이 아니면 서울로 쳐주지도 않고, 마포 촌놈이라고 했거든. 그래서 시골 출신 그리고 서울 사대문 출신 양쪽에서 모두 날 안 쳐줬지.(웃음) 근데 내가 성격이 뻔뻔스러운 데가 있어서 그런지 후회한 적도 없고, 서울 출신이라고 생각한 적도 없고. 뭐, 별로 신경을 안 쓰고 살았어. 그리고 내가 서울을 좋아해요. 서울이 내 고향이니까 말야. 물론 내 세대에는 서울과 지방에 대한 구분이 좀 있었고, 근대화된 도시에서 산다는 것과 시골에서 산다는 것은 다른데, 나는 오히려 서울 출신인 내가 그 이야기를 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어. 경상도, 전라도가 정치적으로만 경쟁심이 있는 게 아니라 워낙 역량이 엄청나. 서울이나 충청도도 별로 내색을 못했을 때부터요. 나보다 한 열 살 정도 위로 가면 경상도랑 전라도 문학이 정말 쎄지. 여기까지 들었을 때, 그로부터 콤플렉스를 유인해보겠다는 내 졸박한 의도가 애초부터 잘못된 것이라는 걸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사실 우리 문학은 근대화 과정에서 향토로서의 농촌이 와해되고, 그곳을 탈주하는 자들의 상상력과 감수성을 수용하고 배려하면서 성장해 온 측면이 있다. 김정환이 지적한 것처럼, 그의 바로 윗세대에서 내로라하는 전라도 경상도 출신 문인들이 배출됐는데, 그들이 상경해 각기 문학의 정부 역할을 자임하면서 한국문학 특유의 에콜이 만들어진 것이다. 이런 배경에서 서울 출신의 희귀한 시인이 위축됨 없이 자기 문학을 밀고 여기까지 온 것은, 그리고 자신의 이름으로 파르티잔의 정부를 세운 것은, 사실 문학사적으로도 매우 의미 있는 이색으로 기록되어야 한다. 김정환이 덤덤하게 말한 것처럼, “뻔뻔스러운 데가 있어서” 가능했던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것 역시, 그가 말했던 공적인 죽음과 연결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콤플렉스란, 사적인 죽음이나 삶의 세계를 배회
1119    남에 일 같지 않다... 문단, 문학 풍토 새로 만들기 댓글:  조회:4374  추천:0  2016-02-21
한국 문단의 4대 비극 이승하/ 시인 제자 중에 '문예진흥원 창작지원금'이란 것을 받은 이가 있어 시집 출간을 알선하게 되었다. 유명 출판사의 사장님께 편지를 드렸으나 몇 주가 지나도록 아무런 연락이 없어 전화를 해보았다. 이런 말을 들려주는 것이 아닌가. "시내 대형 서점 몇 군데를 제외하고는 서점마다 시집은 판매대 자체를 없애버렸습니다. 시집 코너가 다 사라진 지금 이 상태에서 시집을 출간하는 것은 바보짓이지요. 요즘 저희는 아동물 출간에 전력하고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닌게아니라 그 출판사에서는 다른 이름을 2개 더 등록하여 실용서와 아동물 출간에 전력을 다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 출판사를 인수한 사장님은 처음 몇 년 동안 시집과 시 평론집 출간에 열을 올렸으나 재미를 못 보았는지 어느새 '팔리는 책' 출간을 통해 생존을 모색하기에 이른 것이다. 시와 시 비평을 겸하고 있는 나로서는 모골이 송연해지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었다. 서점에서 시집 판매대 자체가 다 사라져버렸다니. 이것이 현실이라면 나는 도대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시집을 다년간 출간해온,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출판사에서 시집 출간 종수를 확 줄인 것도 어느덧 5, 6년이 되었다. 문학과지성사·문학동네·문학세계사·민음사·세계사·시와시학사·실천문학사·창비 같은 출판사에서 시집 출간 종수를 줄인 것은 시장의 논리를 따른 것일 터인데, 무슨 대안이 없는 것일까. 시집이 도무지 안 팔린다고 이런 출판사에서는 울상을 짓고 있지만 이른바 '베스트셀러 시집'은 불황을 모르니 도대체 어떻게 된 노릇일까. 지금 이 글을 읽고 여러분 가운데 류시화·서정윤·용혜원·원태연·이정하·이해인 같은 시인의 시집이 몇 판을 찍었는지 아신다면 눈이 휘둥그레질 것이다. 어마어마한 판매고를 자랑하고 있다. 수십 쇄를 넘어 100쇄 넘긴 것이 수두룩하다. 이들이 내는 시집은 예외가 없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것도 놀랍다. 1. 시인에게는 문제가 없는가 시인의 수가 많은 것이 문제가 될 수는 없다. 그런데 문예지의 폭발적인 증가로 말미암아 해마다 엄청나게 많은 수의 시인이 배출되고 있는 것은 문제이다. 기본기를 충분히 닦고서 시인이 되지 않고 창작실기지도를 하는 사숙에 1, 2년 다니고서 시인이 되려고 애를 쓰고, 어떤 경로를 통해서든 시인이 된다. 너도나도 쉽게 시인이 되다 보니 고급독자층이 무너지고 아마추어 수준의 시인들이 시인 행세를 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이 땅 시인들의 쓸데없는 난해함은 시집 독자의 외면을 사게 된 주범이 아닐까. 시인 자신도 뜻을 알고 썼을까 하는 시들이 문예지마다 넘쳐난다. 독자에게 무엇을 말해주고자 시를 쓰는 것이 아니라 독백에 가까운, 자기 고백적인, 혹은 유아독존적·자가당착적인 시들이 난무하고 있다. 그래서 시집 판매의 주고객이라는 청소년층과 대학생층, 그리고 직장여성층은 정통문학권 출판사에서 내는 시집을 읽는 것을 '마침내' 포기한 것이 아닐까. 시의 다른 이름이 운문인데 이 땅의 시들이 산문화로 치닫고 있고, 한편으로는 너무 길어진 것도 한 원인일 수 있다. 같은 산문시라도 정진규 같은 분의 시에는 내재율이 있어 겉모습만 산문일 뿐 엄밀히 말해 운문이요 시이다. 그런데 요즈음 많은 시인들이 운율을 버리고 산문을 취하고 있다. (베스트셀러 시집의 특징 중 하나는 산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설사 외양은 운문 같을지라도 여러 행 계속 이어진 문장이라 산문과 진배없는 시들도 많다. 기성시인들의 시가 이렇다 보니 백일장에 오는 고등학생들조차 태반이 시를 산문조로 쓰고 있다. 그래서 줄글로 쓰지 말고 행과 연을 적절히 나눠 운문형식으로 써달라고 따로 당부를 하고 있는 실정이다. 2. 문예지에는 문제가 없는가 웬만한 문학단체마다, 지방 대도시마다 문예지 안 내는 곳이 없어 이제 문예지는 춘추전국의 시대로 돌입하였다. 국민 총수와 문인 총수에 비겨 이렇게 많은 문학잡지가 출간되는 나라가 세계에 또 있을까? 문예지의 수가 많다 보니 거기 실리는 작품들의 수준에 참으로 문제가 많다. 또한 세력 확보를 위해 신인을 뽑지 않을 수 없으니, 충분한 습작기를 거치지 않은 사람들이 신인상을 받으며 시단에 나온다. 예전 같으면 시인 지망생으로서 꾸준히 시집을 사보며 절차탁마 습작을 하고 있을 사람들이 시인이 되었으므로 남의 시를 감상하며 연구하지 않고 자신의 시를 발표하고 있다. 정직한 문예지라면 '신인상 수상작 없음'이라는 사고를 낼 줄 알아야 한다. 어떤 문예지는 신인을 내보내면서 책 구입을 강요하여 문제가 된 적도 있는데, 재정상태가 열악한 일부 문예지의 횡포일 테니 이 자리에서는 거론하지 않겠다. 수준이 영 안 되는 기성시인의 작품을 되돌려보내는 횡포는 부려도 좋을 것이다. 그런 것을 문예지 제작의 방침으로 삼는 문예지가 있으면 좋겠다. 또한 안면을 배제하고 공정한 시각으로 시인을 선별하여 작품을 청탁하고, 엄정한 신인 배출과 문학상 시상으로 이미지를 잘 가꾸는 문예지가 좀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어차피 문예지가 잘 팔리지 않는 상황에서야 정직성을 내세우지 않는다면 무엇 하러 문예지를 만든단 말인가. 문예지의 또 다른 문제점은 논점이 없거나 논쟁이 없다는 것이다. 월간 {현대문학}이 한때 '죽비소리'라는 코너를 마련해 화제작이나 유명 문인의 신작에 대해 죽비를 내려친 적이 있었다. 그런데 반박의 목소리를 두려워해 익명으로 글을 올림으로써 근본적인 한계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무렵에 "문예지에서 읽을 만한 글은 {현대문학}의 '죽비소리'밖에 없어"라는 말을 여러 사람한테서 들었다. 그만큼 우리 문단에서는 '사심 없는 비판'이 없다는 말일 것이다. 문학적 경향이나 이념이 다른 사람이 한 자리에 모여 대담을 가지면 좋은 방안이 나올 수도 있을 텐데……. 지나친 욕심일까? 오래 전 {문예중앙}에서는 김정환과 이인성의 대담을 실었는데, 대단히 신선한 느낌을 받았었다. 아직도 상호 존중을 전제로 한 두 분의 화려한(?) 설전이 잊혀지지 않는다. 3. 문학평론가에게는 문제가 없는가 나 자신 간간이 비평류의 글을 쓰고 있기에 자기 얼굴에 침 뱉기이겠지만 문학평론가들도 반성해야 할 부분이 있다. 문학평론가들은 대개 다소간의 권력을 지니고 있다. 가령 어느 문예지에서 특집으로 '90년대를 대표하는 시인 10인의 시 세계'란 것을 마련했고, 어느 문학평론가가 그 일에 관여했다면 그는 분명히 권력을 행사한 것이다. 그의 권력은 신인 등용과 문학상 심사에 관여하면서도 나타나지만 작품 청탁을 하거나 특집을 정하는 일, 시집 출간을 결정짓거나 각종 평문을 쓸 때도 나타난다. 첫 번째 문제는 '식구 의식'에 대한 것이다. 내가 활동의 무대로 삼고 있는 문예지 혹은 문학단체의 일원이 아니면 작품을 읽지도 않고 논하지도 않는 문학평론가들이 있다. 달리 말해 '우리 식구'이면 작품의 수준에 대해 양심적으로 논하지 않고, 대개의 경우 칭찬을 일삼는다. 해설이나 서평은 애당초 한계를 지닌 글이라서 그렇다 치더라도 사사건건 우리 식구만을 감싸고도는 비평적 행위가 만연해 있다. 그래서 '주례비평'이니 '골목비평'이니 하는 욕을 먹고 있지 않은지. 두 번째 문제는 권력을 가진 문학평론가들이 사실상 두려움이 많다는 것이다. 특히 대학에 몸담고 있는 나 같은 사람이 겁이 많다. 그 한 예가 유명 문인의 태작에 대해 비판을 하면 불이익을 당할까봐 아예 입을 봉하고 있는 것이다. 몇 개월 전, 장석주 씨가 김춘수의 시에 대해 비판하는 글을 쓴 것을 읽었는데 솔직히 큰 감동을 받았다. 재야에 있는 분이어서 그런 용기를 발휘한 것일까, 오랜만에 가슴이 다 후련해지는 글을 읽었다. 그 글은 이렇게 끝난다. 시와 삶은 따로 가지 않는다. 그것은 한 뿌리에서 갈라져 나온 두 가지이다. 김춘수의 백일몽에서 나온 이미지들이 머금고 있는 의미들은 심약함, 패배주의, 소외, 존재의 고독, 불안, 자기분열이다. 김춘수는 자신의 뜻없는 말놀이들의 시들을 두고 '무의미 시'라고 명명하지만, 그것은 타자와의 소통이 차단된 자의식에 갇혀버린 자의 자기분열과 심약함을 드러내는 기표에 지나지 않는다. 김춘수의 언어들은 실재의 세계로부터 끝없이 도피하는 언어, 그 내부로부터 의미를 지워감으로써 현실에 대해 아무 책임도 지지 않는 상상적 유희로 환원해버리는 비본래적인 언롱(言弄)의 세계이다. 그런 까닭에 나는 김춘수의 시에서 아무런 감동도 받지 못하며, 그를 이미지 조형술의 천재, 혹은 수사의 달인이라고 부를 수는 있을지언정 감히 큰 시인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언롱의 한계와 파탄], {시경}(2004. 상반기)에서 와병중이신 시인에게는 외람된 말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이 글을 읽고 내심 '옳은 말씀이로고' 라며 쾌재를 불렀다. 대가일지라도 명작만을 쓸 수는 없다. 대가이기에 양지만을 골라서 걸어온 문인이 있다면 작품의 음영을 따지는 문학평론가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한국문학은 발전할 수 있다. 장석주 씨 같은 용기 있는 평론가가 이 땅에는 불행히도 많지 않다. 젊은 문학평론가 최현식 씨는 계간 {파라 21} 여름호에 발표한 [질문의 실종과 포에지의 응고]라는 글에서 한국 현대 시단에서 각광받고 있는 최승호·안도현·김용택·고재종의 최근 시들을 '현실을 회피하는 신비주의'라는 측면에서 비판적으로 검토했다. 이 글을 시인 당사자가 읽었다면 기분이 나빴겠지만 일리 있는 지적이라고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을 것이다. 최현식의 말마따나 "시인의 시적 직관과 통찰이 상투화·범속화되고" 있는 이 때, 그것을 지적하는 용기 있는 발언은 시인이 정신을 차리는 데 일조하리라고 나는 믿는다. 세 번째 문제는 두 번째 문제의 연장선상에 있으면서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문예지 혹은 출판사라는 더욱 큰 권력에 대한 두려움을 문학평론가가 갖고 있지 않은가 하는 점이다. 자기 목소리를 낼 줄 아는 문학평론가가 많이 나와야 한다. 기댈 언덕, 혹은 비빌 언덕에 대해 너무 골똘히 생각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유명 출판사에서 문학평론집을 못 냈다고 하여 누가 그를 멸시하는가? 천하를 호령하던 조연현의 평론을 지금 이 시대에 누가 읽고 있단 말인가. 문학평론가가 권력을 두려워하거나 권력에 아첨하면 상갓집의 개만도 못한 존재가 된다. 4. 독자에게는 문제가 없는가 앞에서도 말했지만 고급독자나 문학애호가들이 튼튼한 층을 이루고 있지 않고 너나없이 시인이며 소설가, 수필가가 되어 글을 쓰고 있다. 스스로 글을 쓰려고 들지 남의 글을 읽으려 하지 않는다. 읽고 연구하고 공부하지 않고 잽싸게 쓴 글로 재빨리 인정받으려 한다. 독자들은 또한 아픔과 슬픔의 세계를 굳이 외면하고 기쁨과 즐거움의 세계를 찾으려 든다. 딱딱하면 배격하고 심각하면 외면한다. 시건 소설이건 베스트셀러의 경우, 인생과 인간에 대한 깊은 통찰은 찾아보기 어려우며, 짧은 즐거움과 위안을 제공한다. 혹은 최루성을 띠기도 한다. 독자층이 있기는 있되 PC통신문학과 환타지소설에 열광한다. 좋은 작품을 좋다고 하고 나쁜 작품을 싫다고 하는 양식 있는 독자층이 없다면 정통문학의 앞날을 결코 밝을 수 없다. 대학로에 가서 놀란 것이 있다. 장식품이며 선물용 물건을 파는 가게가 곳곳에 눈에 뜨이고 액세서리를 파는 행상도 즐비한데 서점은 도무지 눈에 안 뜨인다는 것이었다. 그런 가게마다 사람들이 빼곡한데 어느 한 서점에 갔더니 사람이 한두 명만 있었다. 독자는 어디로 갔는가? 독자는 다 사라져버렸는가? 한국 문단의 4대 비극을 더 이상 보게 되지 않기를 갈망하지만……. 나는 시인이면서 문예지 편집에 관여하고 있고, 문학평론 유의 글도 간간이 쓰고 있고, 또한 문학 독자이기도 하다. 이 모든 비극적 진단에서 나만은 그렇지 않다고, 나만은 독야청청하다고 변명하고 싶지 않다. 이 모든 것을 껴안고서 좀더 나은 문단 풍토, 문학 풍토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싶을 뿐이다.
1118    동주, 흑백영화의 마력... 댓글:  조회:4521  추천:0  2016-02-21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흑백 저예산 영화라 깔보지 말라. 대한암흑기(일제강점기)의 상징으로 딱 맞는 기법이 아닌가. 자신의 속내를 숨겨야 하는 세상은 흑백의 세상이다. 화려한 칼라는 시선의 산만함을 가져온다. 흑백은 오직 인물의 표정에만 집중할 수 있게 몰입도를 높여 주는 장점도 있다. 인물들의 미세한 표정에서 그 내면까지도 들여다보게 만드는 효과가 있다.     이준익 감독은 '꿩 먹고 알 먹고'로 비유한 그 우스갯소리에도 뼈가 있는 말이다. 윤동주만 내세우기엔 영화적 서사가 부족할 것 같아서 다른 기둥으로 송몽규를 함께 대입했다고 한다. , 등을 만든 그 내공으로 를 110분 동안 몰입도 높게 끌고 갔다.     어둔 시대에 청춘을 구겨 넣고 떠난 윤동주는 지금까지 국민시인으로 많은 혜택을 보고 있지만 송몽규는 상대적으로 별로 평가되지 못한 인물이라 이의 발굴에도 힘을 보탠 것이다.     동아일보 신춘문예 산문부분 당선자인 송몽규는 결국 주권 잃은 현실임을 실감하고 독립단체에 참여하는 행동인이 된다. 그러면서 동주에게는 '너는 시를 써라 총은 내가 든다'고 하는 몽규의 말이 가슴에 아련히 남는다. 내성적이고 수줍은 많은 동주는 '시인이 되길 원했던 내가 부끄럽다'고 응수한다.     주권을 잃은 그 암흑의 시대에 지식인인 동주가 할 수 있는 것은 시 쓰는 일뿐이었다. 오랜 친구이자 외사촌 송몽규의 행동에 자극을 받아 부끄러움을 느끼지만 암울한 시대 조국이 사무치게 그리울 때도 그는 시를 썼다. 하지만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윤동주가 먼저 죽고 한 달 뒤 송몽규도 죽는다. 미완의 청춘 29살의 나이에 그들 둘은 광복 5개월을 남겨두고 대한 암흑기를 처절하게 살다 갔다.     '20대에 청춘을 마감한 아름다운 청년 그 청년이 남긴 시가 7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 마음 한구석 깊이 숨어 있으며 때로는 그 것이 나를 울렁이게 한다'고 이준익 감독은 토한다. 그 시대적 아픔과 부끄러움을 묻어둘 때도 됐는데 왜 또 들춰내느냐고 책망하고 싶은데 그는 대변한다. '두 사람이 어떻게 어둔 시대를 이겨냈고 그 시가 어떻게 이 땅에 남았는지 그 과정을 영화로 담고 싶었다. 그리고 비명에 간 그들의 청춘과 그 시대를 위로하고 싶었다'는 게 이준익 감독의 의도이니 내가 어쩌랴.     영화엔 13편의 시가 나온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의 사랑과 별 하나의 쓸쓸함과… 별이란? 우리 천손민족에겐 별이란 하나의 초월 의지이며 온 곳으로 돌아갈 곳이다. '별 헤는 밤'과 '서시' 가 인상적이다. 적진의 형무소 창에서 내다보는 밤하늘엔 초롱초롱한 별들만 가득하다.     형무소에서 알 수없는 약물주사를 맞고 각혈하면서 죽어갈 때 읊는 시 '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서시'는 그렇게 감정선을 절정으로 밀어 올린다. 이 영화의 전편을 흐르는 기조는 '부끄러움'이다. 어느 시대이건 부끄러움을 알고 사는 이는 덜 부끄러운 것인 만큼 지금 기득권 세대들에겐 부끄러움을, 젊은 세대들에겐 전쟁이나 식민의 상황을 그저 관념적으로만 여길 뿐 구체적 감각을 인지하는 지를 거듭 묻고 있는 듯하다.     영화를 본 후 내 삶의 의미가 겹쳐진다. 주권 없는 대한 암흑기를 당시 지식인들이 빠져 나가야 하는 어둠이듯이 나는 이 자본의 어두운 터널을 어떻게 빠져 나가야 하는지 답을 찾지 못하고 있다. 좌절감만 엄습해서 나를 당혹하게 하고 아릿한 뒷맛을 만든다.     시의 정서만이 나를 후려치는 게 아니라 시대상의 아픔이 사정없이 나를 후려치는 채찍이다. 요즘 말하는 참여문학의 개념이 아닌 문학의 본질이자 시대적 아픔을 녹여낸 문학의 정수를 느끼게 한다. 그것이 문학의 역할이 아닐까? 문학은 대중들 앞에서 큰소리로 선동하는 것이 아니고 대중들의 밑가슴에서부터 공감을 갖게 해서 스스로 뒤에서 밀고가는 저력이 아닐까 한다. 소위말해서 '정서적 공감'이랄까.     당시 몽규에게는 일제라는 구체적인 싸워야 할 적이 있었고 동주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억압하는 거대한 힘과 자기 정체성의 괴리에서 오는 인간적인 부끄러움을 대중들의 정서로 확대하고 있다.     이 시대 알수 없는 수많은 적들에게 둘러싸여 현재 나는 무엇을 추구하며 살아야 하는가? 하는 나의 정체성마저 놓쳐버린 이 시대의 정신적인 고아가 되어 버렸다는 자각이다. 무엇과 싸워야 하고 어떤 정체성을 갖고 대항해야 하는지?… 현재 이 어려운 세상과 싸우는 나를 위로하고 힘을 주는 이는 진정 없는가? 한마디로 '방황'이란 대응으로 투정질을 부려볼 뿐이다.         글/정노천(시인)
1117    詩作初心 - 현대시의 靈性 댓글:  조회:4348  추천:0  2016-02-20
현대시의 종교성과 탈종교성                                                 /박남희  세상 만물에는 종교성이 깃들어있다. 여기서 종교성을 영성으로 바꾸어 말해도 무방하다. 그런데 그것을 발견할 수 있는 존재는 인간밖에 없다. 굳이 애니미즘이나 토테미즘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만물에 영성이 깃들어있다는 생각은 이미 고전적인 사유에 해당된다. 하지만 르네상스 시대를 지나오면서 인간의 이성은 영성을 억압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이성주의를 기반으로 한 근대 자본주의 사상은 근본적으로 종교성과 탈종교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막스 베버의 지적처럼 근대 자본주의 윤리 속에는 칼빈의 종교개혁 사상의 핵심인 프로테스탄티즘이 자리하고 있다. 현대철학이 이성 중심에서 탈이성 쪽으로 나아가고 있는 현상을 프로테스탄티즘과 직접적으로 연계시킬 수는 없지만, 이성이 가지고 있던 절대 권력은 이미 그 힘을 상실한지 오래다. 세상 만물에 종교성이 깃들어 있다면, 시에도 종교성이 깃들어 있다는 명제는 타당하다. 왜냐하면 시야말로 세상만물을 대상으로 한 인간의 사유와 무관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읽고 쓰는 시 속에는 종교성과 탈종교성이 동시에 들어있다. 여기서 말하는 시의 종교성은 시에 내재해 있는 종교적 사상뿐 아니라 창조자적 관점에 서있는 시인을 포함한다. 이러한 사유는 시의 종교성을 신앙적 차원에 가두어두지 않고 시적 차원으로 확장시킴으로써 가능해진다. 따라서 시인은 시적 대상을 자신의 독특한 관점으로 믿고 있는 신자인 동시에, 대상을 새롭게 창조해내는 창조자이기도 하다. 하지만 시는 그 자신이 스스로 존재성을 지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탈종교적인 성격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시 스스로가 미적 자율성을 가지고 있다는 믿음은 이미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이처럼 우리 시는 이미 시의 종교성과 탈종교성 사이에서 무수히 길항하면서 발전해왔다. 하지만 우리시의 종교성과 탈종교성을 탐색하는 논의는 아직 매우 단편적인 차원에 머물러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시의 종교성과 탈종교성을 신앙적 차원을 뛰어넘어 시적 차원에서 논의하는 작업은 의미가 있다.         한때 나는 뿌리의 신도였지만 이제는 뿌리보다 줄기를 믿는 편이다     줄기보다는 가지를, 가지보다는 가지에 매달린 잎을, 잎보다는 하염없이 지는 꽃잎을 믿는 편이다     희박해진다는 것 언제라도 흩날릴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     뿌리로부터 멀어질수록 가지 끝의 이파리가 위태롭게 파닥이고 당신에게로 가는 길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다     당신은 뿌리로부터 달아나는 데 얼마나 걸렸는지?     뿌리로부터 달아나려는 정신의 행방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허공의 손을 잡고 어딘가를 향해 가고 있다     뿌리 대신 뿔이라는 말은 어떤가     가늘고 뾰족해지는 감각의 촉수를 밀어 올리면 감히 바람을 찢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무소의 뿔처럼 가벼워질 수 있을 것 같은데     우리는 뿌리로부터 온 존재들, 그러나 뿌리로부터 부단히 도망치는 발걸음들     오늘의 일용할 잎과 꽃이 천천히 시들고 마침내 입을 다무는 시간     한때 나는 뿌리의 신도였지만 이미 허공에서 길을 잃어버린 지 오래된 사람     ―나희덕,「뿌리로부터」전문(『문예중앙』, 겨울호)         나희덕의 시에서 ‘뿌리’에 대한 사유는 그의 등단작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나희덕의 신춘문예 당선작 「뿌리에게」는 뿌리에게 무한한 사랑을 베푸는 모성적 대지의 상상력을 근간으로 하고 있다. 나희덕의 시는 초기작에서부터 일관되게 모성성을 드러내고 있지만, 최근에 이르러서는 여성으로서의 존재성에 더 깊이 천착해있다. 최근의 나희덕 시가 여성의 ‘사랑’이라는 주제에 더 많은 관심을 보여주고 있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인용 시는 그의 관심이 모성적 뿌리에서 이파리를 거처 우듬지로 이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여기서 이파리나 우듬지는 모성성보다는 여성성을 나타내는 은유이다. 나희덕이 이파리나 우듬지의 삶을 믿는 것은 “뿌리로부터 멀어질수록”“당신에게로 가는 길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나희덕은 모성의 견고한 집을 벗어나는 일이 여성적 사랑을 성취할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깨닫기 시작한다. 이러한 시인의 의식변화는 이 시의 후반부에 오면 ‘뿔’ 이미지에 귀결된다. ‘뿌리’와 ‘뿔’의 발음의 유사성에서 출발한 시인의 진술은 ‘무소의 뿔’에까지 상상력이 미치면서 이 시가 본질적으로 페미니즘을 지향하는 시라는 것이 드러난다. ‘무소의 뿔’은 1993년 한국 사회에서 여성들에게 가해지는 차별과 억압을 사회 전반의 문제로 끌어올려 페미니즘에 관한 논쟁에 불을 붙였던 공지영의 소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를 염두에 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시인의 사유는 “가늘고 뾰족해지는 감각의 촉수를 밀어 올리면/감히 바람을 찢을 수 있을 것 같은데/무소의 뿔처럼 가벼워질 수 있을 것 같은데”같은 구절에 구체적으로 드러나 있다. 여기서 “가늘고 뾰족해지는 감각의 촉수”는 여성으로서의 육체적 감각과 연관되어서 여성의 성적 즐거움인, 자크 라캉의 ‘주이상스(jouissance)’를 연상시켜준다. 나희덕은 모성적 뿌리의 삶으로부터 도망쳐서 여성적 아름다움과 성적 즐거움이 있는 ‘잎과 꽃’의 세계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이제 한 그루 나무인 나희덕의 삶 속에서 ‘잎과 꽃’은 더 이상 장식품이 아니라 매일매일 상용하는 ‘일용할 잎과 꽃’이다. 이 시는 형식적으로는 믿음을 강조함으로써 종교성을 지향하지만, 그 정신은 오히려 탈종교성을 지향한다.         사람은 참말로 알 수 없는 것이어서 신께서 내게 옷 한 벌 지어주셨다. 의심이라는 환한 옷, 얼마나 잘 어울리는지 잠을 잘 때도 벗지 않는다. 견고한 이 한 벌의 옷을 입고 사람을 만나고 술을 마신다. 나는 너를 의심한다. 잠들지 못하는 밤을 위해 의심이 내 등을 다독인다. 내가 너를 지키마. 편히 쉬어라. 어떤 평안이 광배처럼 나를 둘러싸고 있다. 당신은 나의 아버지이고 전지전능하사 나를 보호하시며 한없이 사랑하시는도다. 꿈속에서 나의 찬양은 오래도록 울려 퍼졌다. 배화교도처럼 의심의 불을 조용히 밝히고 내 아버지마저 그 제단에 바치기로 결심한 어느 새벽, 당신도 내 의심의 눈길을 피할 수 없다고 고백했을 때 천둥과 벼락으로 인해 의심의 옷이 더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우대식,「의심」전문(『시안』, 겨울호)         우대식의 시「의심」은 나희덕의 시와 마찬가지로 형식적으로는 종교적 외피를 입고 있으면서도 내용적으로는 탈종교성을 지향하는 시이다. 이 시에 나오는 신은 “당신은 나의 아버지이고 전지전능하사 나를 보호하시며 한없이 사랑하시는도다.”라는 구절로 보아, 기독교의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시인은 신이 만들어준 ‘의심’이라는 옷을 입고 사람들을 의심하고 아버지를 배반하고 급기야는 신까지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게 된다. 이 시의 어법은 “의심이라는 환한 옷, 얼마나 잘 어울리는지 잠을 잘 때도 벗지 않는다”는 시인의 진술에서도 알 수 있듯이 반어적이다. 일반적으로 반어법을 사용하는 시들은 알레고리적 속내를 보여준다. 이 시 역시 세상이 서로를 믿지 못하고 끝없이 의심하는 불신풍조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자기반성의 거울을 가지고 있다. 이 시의 말미에 나오는 ‘천둥과 벼락’은 의심으로 점철된 세상에 대한 하늘의 준엄한 꾸짖음을 상징하는 이미지이지만, 그것으로 인해서 오히려 “의심의 옷이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는 결구는 반성할 줄 모르는 자아와 시대에 대한 반어적 풍자라고 볼 수 있다. 나희덕과 우대식의 시는 공통적으로 종교적 외피를 입고 있으면서도 내면적으로는 탈종교성을 지향하고 있다. 이것은 현대를 살아가는 젊은 시인들이 문학을 종교의 도구로 사용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종교마저도 과감하게 비유로 사용하는, 금기에 대한 위반의 정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텐션(tension)이 문학의 본질이라면 종교적 틀이 그 무게로 인해 종종 문학적 긴장관계를 갖게 해주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나의 神은 언제나 왼쪽 귀로만 온다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편애에 익숙한 그는 왼손잡이인지도 몰라 사륵 사르르 긴 옷자락을 끌며 하루도 빠짐없이 전례처럼 그가 다녀가고 내 왼 귀는 그래서 종교적이다 지극히 도덕적이다 오른 귀의 낭만과 사철 부는 바람을 이해하지 못한다 좌우의 기류가 풀 멕인 하늘처럼 팽팽한 날 그런 날은 성난 신의 발자국 소리가 더욱 거칠어진다 데칼코마니 같은 내 몸의 경계에는 반절짜리 연애가 산다 절반쯤 달려가다 돌아오고 돌아오는 슬픈 연인이 산다 그래도 모른 척 신은 왼쪽 귓속에 더 깊은 소리의 동굴을 파고 사르륵 사륵 오늘 밤도 내 왼쪽 귀는 거룩한 순교를 꿈꾸며 신의 무릎을 베고 잠이 든다     —이화은,「이명」전문(『미네르바』, 겨울호)           이 시는 종교적 모티브를 이명 현상에 비유하여 쓴 시이지만, 그 종교성을 단순히 비유로 사용하지 않고 삶의 중요한 원리로 인식하고 있다. 이것은 시인이 종교적 도덕성을 자신의 삶의 일부로 깊이 있게 인식하고 있다는 반증이다. “나의 神은 언제나 왼쪽 귀로만 온다”는 이 시의 첫 구절은 표면적으로는 왼쪽 귀에만 이명 현상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만, 그 속뜻은 ‘왼쪽’으로 상징되는 삶의 부정적인 측면에서 종교적 도덕성이 작동하여 “오른 귀의 낭만과 사철 부는 바람”에 제동을 거는 것을 의미한다. 이 시는 보편적인 인간이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신에 대한 순종과 위반이라는 양면성을 이명 현상의 비유로 설명하고 있다. 시인은 종종 “좌우의 기류가 풀 멕인 하늘처럼 팽팽한 날”을 경험하기도 한다. 이것은 이화은 시인의 내면에서 종교적 도덕성이 여전히 크게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연애는 ‘반절짜리 연애’일 수밖에 없고, 그의 몸의 경계에는 “절반쯤 달려가다 돌아오고 돌아오는 /슬픈 연인”이 살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이상이 그의 소설 「날개」에서 ‘아내’와 '나'의 관계를 '숙명적으로 발이 맞지 않는 절름발이'로 표현하고 있는 것과 흡사하다. 어쩌면 천형과도 같은 종교적 도덕성이 시인에게는 숙명적인 것인지도 모른다.         시는 무신론자가 만든 종교, 신 없는 성당, 외로움의 성전, 언어는 시름시름 자란 외로움과 사귀다가 무성히 큰 허무를 만든다. 외로움은 시인들의 은둔지, 외로움은 신성한 성당, 시인은 자기가 심은 나무 그늘 밑에서 휴식을 취하지 않는다. 나는 나무에 목매달고 죽는 언어 밑에서 무릎 꿇고 기도한다. 시인은 1인 교주이자 그 자신이 1인 신도, 시는 신이 없는 종교, 그 속에서 독생獨生하는 언어. 시은市隱하는 언어 나는 일생 동안 허비할 말의 허기를 새기리라.     —조정권,「은둔지」전문(『동리목월』 겨울호)         혹자는 시를 구원의 도구로 여기기도 하지만, 조정권 시인은 “시는 무신론자가 만든 종교”라고 단언한다. 이런 말의 이면에는 시로서는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인식이 자리하고 있다. 시를 종교적 관점에서 바라봄으로써 오히려 시의 탈종교성을 부각시키고 있는 이 시는 일종의 메타시라고 볼 수 있다. “언어는/시름시름 자란/외로움과 사귀다가 무성히 큰 허무를 만든다.”는 구절에서도 알 수 있듯이 조정권의 시는 다분히 노장적 허무의 세계에 닿아있는 듯하다. 이 시에 의하면 시인은 “나무에 목매달고 죽는 언어 밑에서/무릎 꿇고 기도”하는 존재이다. 그의 신앙관에 의하면 시의 언어는 구원의 언어가 아니라 죽은 언어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인은 신이 없는 종교를 믿고 그 속에서 독생하는 언어로 시를 쓰면서 일생동안 말의 허기를 가슴에 새길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시인의 이러한 말들 속에는 시는 종교가 될 수 없다는 시의 탈종교성이 부각되어 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이러한 탈종교성이야말로 ‘말의 허기’로 대변되는 시인의 열정의 원천이 될 수 있다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일찍이 브룩스가 말한 ‘시의 언어는 역설의 언어’라는 명제는 조정권 시인이 말하고 있는 시의 탈종교성과 무관한 것이 아니다. 종교에 매몰되지 않고 종교성을 넘어선 시가 일반적으로 좋은 시로 평가받고 있는 현실은 현대시의 본질이 탈종교성에 더 가깝게 자리하고 있다는 반증이 된다.             ---------------- 박남희 : 경기도 고양 출생. 고려대 대학원 국문과 졸업(문학박사). 1996년 경인일보, 199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 시집으로 『폐차장 근처』『이불 속의 쥐』『고장 난 아침』, 평론집으로『존재와 거울의 시학』이 있다. 현재『시산맥』주간, 『창작 21』편집위원으로 있으며, 고려대, 숭실대에 출강하고 있다.  
1116    詩作初心 - 시에서의 상처, 죽음의 미학 댓글:  조회:4116  추천:0  2016-02-20
상처와 죽음을 바라보는 몇 가지 방식                                                                                           /박남희(시인) 1. 상처와 죽음의 시간적인 의미 시간을 선형적으로 인식할 때 인간의 삶이란 탄생에서 죽음에 이르는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죽음은 생의 마무리이며 매듭인 셈이다. 시학에서 삶을 이야기 하면서 종종 죽음에 천착하게 되는 것은 죽음이야 말로 삶의 비의를 숨기고 있는 뇌관과 같은 것이라는 신념이 있기 때문이다. 선형적으로 보면 죽음은 시간의 끝에 존재하며 그동안 시간이 걸어온 길에 대한 반성적인 거울을 내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남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죽음은 삶의 끝에 있으면서도, 매 순간의 삶의 의미를 환기시켜주고 있고 삶과 죽음 사이에 있는 무수한 상처를 매듭지어주는 신비한 손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선형적 시간의식 속에는 이미 상처가 내장되어 있다. 인간의 삶에 있어서 상처란 집단적이고 개인적인 차원의 상처를 포함하는 것인데, 이 두 가지 상처는 엄밀한 의미에서 각자 분리되어 있으면서도 다른 각도에서 보면 서로 연결되어 있다. 이것은 개인이 스스로 개체성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개인과 집단이 서로 분리될 수 없다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고대의 역사가 집단에 치중되어 있었다면 근대의 역사는 차츰 개인을 중시하는 쪽으로 발전해왔다. 근대 시 역시 근대 이전의 시에 비해서 개인의 정서와 사상을 중시해 온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양상은 문학의 다른 장르에 비해서 시에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는 점에서 시야말로 현대성의 첨단을 달리고 있는 장르라는 것이 드러난다. 특히 시에 있어서 서정성은 개인적 정서를 드러내는데 유용하고, 서사성은 대체로 집단의 공통적인 화두를 시적으로 형상화 시키는데 적합하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하지만 상처는 서정성이나 서사성과는 무관하게 거의 모든 시에 나타나 있다. 시에 있어서 상처를 읽어내는 방식은 시간을 전경화시켜서 바라보려는 것과 다르지 않다. 시간을 전경화 시키는 방식은 기억이나 체험을 현재화 시키는 수법이 일반적이다. 2. 상처, 혹은 기억과 체험의 현재화 물이 흘러가다 돌부리에 부딪쳐서 부서지기도 하고 물방울로 튀어서 낯선 곳에 버려지기도 하듯이, 인간의 삶을 시간이라는 관점에서 전경화시켜서 바라보면, 개인과 역사 속에서 부서지고 분리되고 고립되는 상처의 연속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이러한 상처들은 커다란 흐름 속에서 어긋남을 특징으로 하고 있는데, 이러한 어긋남은 주로 타의적이고 집단적인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점에서 쉽게 치유되기가 쉽지 않다는 구조적 모순을 안고 있다. 근대문학의 시점을 20세기 초로 본다면 우리의 근대문학은 근대사의 상처와 더불어 성장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제 36년간의 암흑기와 6.25전쟁, 4.19 혁명과 5.16 군사구테타, 그 후의 군사독재 정권과 광주민주화 운동 등으로 이어지는 우리의 근대사는 그 자체가 다양한 상처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문학 역시 이러한 근대사와 함께 상처의 길을 걸어왔으며,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이러한 상처야 말로 우리 근대문학의 원동력이 되었다는 점에서 문학이 지니고 있는 아이러니를 엿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상처는 주로 과거의 기억이나 체험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그것을 문학으로 수용하려면 기억이나 체험의 현재화가 필요하다. 우선 다음의 시를 읽어보자. 그 상수리나무 지금도 그 자리에 서 있는지 진달래 피는 금강변 신동엽시비 곁에는 죽은 상수리나무 하나 봄비에 젖어 있었는데요 진달래 꽃그늘 아래 장총을 베고 잠들던 소년병사처럼 그 상수리나무 지금쯤 흔적도 없이 사라졌는지 살아생전 열매 털던 모진 떡메에 시달려 엉덩짝처럼 짓이겨진 상처 두어 개 옆구리에 매달고 비 그친 하늬바람에 감기어 있었는데요 발길질 해댈 때마다 이 세상에는 용서 못할 것들이 끝끝내 있다는 듯이 털릴 열매도 없이 신동엽처럼 부르르 부르르 진저리치고 있었는데요 ―정양,「상수리나무」전문(『문학과 경계』2005년 여름호) 이 시에서 ‘상수리나무’는 신동엽과 소년병사로 상징되는 근대사의 상처를 현재화시켜서 보여주는 환유적 대상물이다. 상수리나무는 이 땅의 민주화의 첨단에서 껍데기는 가라고 외쳤던 신동엽의 시비 곁에 죽은 채 서있는 나무라는 점에서 신동엽과는 환유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3연 역시 상수리나무는 “진달래 꽃그늘 아래/장총을 베고 잠들던 소년병사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진 나무라는 점에서 소년병사와 환유적 관계에 있다. 그런데 이러한 환유적 관계는 이상하게도 은유적으로 읽혀지는데, 이것은 신동엽과 상수리나무가 죽었다는 점에서 상동관계에 있고, 상수리 나무와 소년병사가 사라졌다는 점에서 유사점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동엽과 소년병사는 상수리나무로 완전히 환치되어 있지 않다는 점에서 은유라고 볼 수는 없다. 4연에 오면 상수리나무는 신동엽과 소년병사로 상징되는 우리의 근대사의 상처와 직접적으로 만나게 된다. 상수리나무 열매를 털기 위한 “모진 떡메에 시달려/엉덩짝처럼 짓이겨진 상처 두어 개/옆구리에 매달고”있는 상수리나무야말로 우리의 근대사의 또 다른 이름이다. 하지만 역사의 ‘발길질’은 이러한 아픔과는 상관없이 지속되고 있다는 것이 시인의 생각이다. 마지막 연의 “발길질 해댈 때마다/이 세상에는 용서 못할 것들이/끝끝내 있다는 듯이/털릴 열매도 없이 신동엽처럼/부르르 부르르/진저리치고 있”다는 표현에서 이러한 시인의 관점이 직접적으로 드러나 있다. 털릴 열매도 없는데 무작정 털어대는 행위야말로 시인의 관점에서 보면 역사의 무자비한 폭력이고 모순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의 ‘어긋남’과 상처는 종종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잊혀지기도 한다. 더운 바람에 갈대만 술렁인다. 개성 뒷산을 바라보며 강변을 어슬렁거릴 때 강물 타고 떠내려온 철모 하나 나는 이것이 누구의 것인 줄 알 수가 없다 쪼그리고 앉아 해묵은 갈대 알구지로 철모를 건져올린다 뚜껑 없는, 속이 빈 화이버 흰 물새 날개짓 같은 글씨가 또렷하다 믿음, 소망, 사랑 ­ 이건 참 이상하다 20년전 참호 속에 숨어 내가 00군번으로 썼던 낙서 이 글자판의 화이버가 녹슬지 않고 지금도 떠내려온 것은 아침 세수길에서 그때 내가 멍청히 흘려보낸 철모일까 아 오늘 이 강가에 나와 내가 다시 만난 침묵 하나 이 침묵은 너무 두렵고 고요하다 ―송수권,「임진강」부분(『창작 21』2005년 여름호) 이 시의 인용되지 않은 후반부와 연결시켜 보면, 시인은 일요일 한낮에 자유의 다리 밑 임진강에 가서 개성 뒷산을 바라보며 어슬렁거리다가 우연히 철모를 줍게 되는데, 이 철모는 시인이 20년 전 군대에서 세수하다가 멍청히 흘려보낸 철모와 너무나 닮아있다는 점에서 시인에게 새롭게 전경화 된다. 떠내려 온 철모에 씌어 있던 “믿음, 소망, 사랑”이라는 글씨는 시인이 20년 전에 화이버에 썼던 낙서와 동일하다는 점에서 까맣게 잊혀졌던 과거를 현재화시키는 동인이 된다. 하지만 이러한 글은 시인 자신의 창작품이 아니라 성서에 나오는 글이라는 점에서 시인이 발견한 화이버가 20년 전에 자신이 물에 떠내려 보냈던 화이버와 동일하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이 이 화이버에 주목하게 되는 것은 이 화이버가 20년 전의 화이버와 동일한지의 여부를 떠나서 이 화이버를 통해서 20년 전의 역사를 새롭게 환기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인은 이 철모를 시의 말미에 ‘침묵’으로 은유함으로써 역사의 침묵에 대한 무언의 항변을 하고 있다. 시인은 “이 침묵은 너무 두렵고 고요하다”고 말한다. 이 시의 인용되지 않은 후반부에서 시인은 “이 침묵을 깨뜨릴 자 누구인가, 답답한 산도/이제 한번쯤 돌아앉아 입을 열 때가 되지 않았을까”라고 말함으로써 여전히 분단이 지속되고 있는 한반도의 현실을 한탄하고 있다. 상처는 그 상처가 생긴 그 순간에는 그 상처의 아픔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 순간에는 상처의 정체를 똑바로 인식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처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아파온다. 이러한 아픔은 그 상처를 치유하려는 몸속의 저항과 관계된다. 아픔을 인식시키는 감각이야말로 상처에 대항하게 해주는 안티테제인 것이다. 칼날이나 칼날 같은 것이 살갗을 베고 지나간 후 바로 들여다보면 상처가 잘 보이지 않는다 그 때는 아프지 않다 조금 더 기다리면 통증은 배어나는 핏물과 함께 온다 상처는 피로 증명되고 피가 나면 통증이 온다 그 아침, 피를 보지 말아야 했다 고개를 돌린다고 다 피할 수 없는 것들이 세상에는 있다 ―이희중,「상처에 대하여」부분(『문학마당』2005년 여름호) 이 시 역시 상처가 살갗을 베고 난 후 금방오지 않고 시간이 어느 정도 경과 한 후 “핏물과 함께 온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의 ‘핏물’은 상처를 가시적으로 확인시켜주는 시각적인 상황을 가리키는 것이지만, 역사와 연결시켜보면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서 역사의 상처를 객관적으로 새롭게 인식하게 되는 단계를 가리키는 것이다. 이 시에 따르면 상처는 피로 증명된다. 하지만 시인은 그렇다고 피를 보지 않는 행위를 통해서 상처를 피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시인은 “고개를 돌린다고 다 피할 수 없는 것들이 세상에는 있다”고 말함으로써 필연적으로 닥쳐오는 역사의 소용돌이나 상처가 이미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 것임을 암시해주고 있다. 3. 상처의 풍경과 치유의 방식 오래된 상처는 그 상처가 우리의 눈에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오랜 세월 속에서 그 상처가 어느 정도 지워졌거나, 아픔의 감각이 이미 무뎌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픔이 느껴지지 않는 것이 상처의 존재를 아주 무화시켜주지는 못한다. 상처는 살갗이 아문 뒤에도 우리의 기억 속에 남아서 우리를 괴롭히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상처의 온전한 치유는 물리적인 치료 뿐 아니라 기억을 통한 심리적인 요인과도 연관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상처란 뿌리가 깊고 복잡하다. 따라서 그 치유의 방식도 복잡할 수밖에 없고, 완치 가능성도 쉽게 장담할 수 없다. 아래의 시는 우리에게 상처의 풍경을 보여주고 그 치유방식을 나름대로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를 끈다. 그녀는 49년생 소띠에 무남독녀로 자랐다. 타고 난 것일까, 성격이 우직해서 근본은 잘 울지 않는다. 두 살 때 아버지를 여의었다. 얼굴도 모르는 슬픔에 대해 울 일 없다. 아버지는 6.25 전쟁 때 전사했다. 역사에 대해 물론 울 일 없다. 그 힘센 홀어머니 이제 다 늙었다, 낯익은 슬픔에 대해 더 이상 울 일 없다. 그 고생에도 어머니, 울지 않았으므로 그 속 다 물려받았으므로 그녀는 잘 울지 않는다. 도대체, 그녀의 인생은 담수 중인 것일까. 드디어 대학까지 나오고 시집가고 아들 딸 낳아 키웠고 사십 여 년 직장생활 동안 그러나 남편은 일평생 백수이고 별 볼 일 없고 그녀는 낙이 없고 그래서 성당 나가고 맹신하고 건강을 위해 운동하고 한탄해도 늙어가고 마침내 한 번, 행복하지 못하지만 그녀는 잘 울지 않는다. 인체의 70% 이상이 물이라고 했던가, 그녀는 좀 뚱뚱한 편이다. 그녀의 꾹 다문 인상에선 만수가 느껴진다, 그녀는 잘 운다. 연속극 같은 걸 보다가도 걸핏하면 운다. 이산가족 찾기 실황방송을 보면서 많이 울었고 무슨 유가족들 슬피 우는 것 보다가 덩달아 운다. 어딜 좀 부딪쳐 아프기라도 할라치면 비로소 살아나는 상처가 있는지 울고 당신 밖에 없단 말에 울고 선물 하면 울고 아이들한테 위로 받으면 찔끔, 운다 근본은 잘 운다, 그녀는 무넘이처럼 운다. 눈물 어룽거리면서도 끔벅, 소처럼 소리가 없다. 그녀는 가끔 방류한다. ―문인수,「저수지 풍경」전문(『현대시』2005년 7월호) 시인은 저수지를 보면서 49년생 소띠에 무남독녀로 힘겹게 자라온 그녀를 떠올린다. 이 시는 저수지의 ‘담수’와 ‘방류’를 ‘울지 않는 행위’와 ‘우는 행위’에 대비시키고 있는 것이 흥미롭다. 이 시의 전반부는 그녀가 울지 않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녀가 울지 않는 이유는 그녀가 행복하거나 울만한 일이 없어서가 아니다. 그녀가 ‘얼굴도 모르는 슬픔’이나 ‘낯익은 슬픔’에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은 ‘그 고생에도’ 울지 않았던 어머니의 모진 성격을 그대로 물려받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시는 후반부에 와서 그녀가 걸핏하면 우는 여자임을 말함으로써 그녀의 본성이 울지 않음에 있지 않다는 것을 폭로한다. 그녀의 몸이 좀 뚱뚱한 편이라는 진술은 그녀의 몸에 수분이 많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따라서 그녀의 몸에는 눈물이 많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지시해준다. 시인이 잘 울기도 하고 울지 않기도 하는 그녀를 저수지에 빗대서 바라보고 있는 것은, ‘운다’고 표현되는 그녀의 상처가 단순히 개인의 상처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보편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기 때문이다. 저수지가 물을 담수하고 방류하는 행위는 그 안에 물이 있고 그 물을 수용할 만한 공간이 있다는 것을 함의하고 있다. 그녀를 저수지로 본다면 물은 그녀 안에 있는 눈물이고, 상처의 또 다른 기표라고 말할 수 있다. 그녀로 상징되는 저수지는 자신의 내면으로 흘러드는 물을 담수하고 방류하는 행위를 통해서 자신의 존재성을 확인한다. 저수지가 물을 담수하고 방류하는 행위는 모두 저수지에게 있어서는 자신의 존재성을 확인하는 방법이고 자신의 삶의 방식이라고 말 할 수 있다. 이런 저수지의 행위를 역사나 인간의 상처에 빗대어 보면, 일종의 치유의 행위라고도 볼 수 있다. 위의 시에서 그녀가 울지 않는 것은 나름대로 세상을 모질고 꿋꿋하게 살아가는 방식이고, 우는 것은 자신의 내면에 뭉쳐있던 상처의 응어리를 풀어내는 방식이라는 점에서 두 가지가 다 나름대로의 치유의 방식이고 존재의 방식인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울음은 ‘무넘이’처럼, 소처럼 소리 없이 운다는 점에서 그녀로 표상되는 상처의 주체, 즉 역사가 처해있는 현실이 그리 낙관적이지만은 않다는 것을 암시해 준다. 위대한 생애가 위대하게 다하고 울음이 끝나고 썩음의 생애가 다하고 기억과 시간의 생애가 다하면 생명 아닌 그 무엇으로 우리가 다시 태어나는지 저녁놀 직전 왕릉을 우러르면 보인다. 빛도 크기도 없다 색깔도 없다 깊음도 없다 모양도 없다 동그라미는 수천년이 애매하다. 왕릉의 동그라미는 가라앉으며 솟아오르므로 제자리이다. 가라앉음이 솟음이므로 제자리다. 우리의 남은 생애가 생애 너머로 흔들린다. 저녁놀 직전 우러르면 왕릉은 빛 없는 빛이다. 크기 없는 크기다. 냄새, 남은 생애의 냄새 없는 냄새 코끝에 물씬하다. ―김정환,「왕릉」전문(『내일을 여는 작가』2005년 여름호) 죽음의 위대성은 크기나 모양으로 측량되지 않는다. 왕릉은 보통사람의 묘에 비해서 크기도 크고 웅장하지만, 그 묘는 더 이상 권위를 갖고 있지 않다. 과거의 어떠한 영화나 위대함도 시간 앞에서는 그 형체를 잃는다. 왕릉은 그 위대성과 더불어 무덤 스스로 숨겨진 상처를 내장하고 있다. 하지만 왕릉의 위대함이나 상처는 모두 “기억과 시간의 생애가 다하면” 빛도, 색깔도, 깊음도, 모양도 없어진다. 다만 하나의 동그라미만 남는다. 여기서의 동그라미는 시간의 원형이며 시간의 끝인 죽음에 닿아있는 부재의 상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시간을 원환적으로 바라보면 윤회의 시간이고 원의 시간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태양이 뜨고 지는 것은 존재의 있고 없음도 아니고, 밝음도 어둠도 아니다. 시인은 “동그라미는 수천년이 애매하다”고 말한다. 여기서 애매하다는 것은 우리의 감각을 혼동시킨다는 개념으로, 겉으로 보이는 왕릉의 모습이 노을이 지는 시간 즉, 죽음의 시간 속에 들어가서 보면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말해준다. 왕릉의 동그라미는 왕릉의 광휘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러한 광휘 즉 이 땅의 영화야 말로 가라앉았다가 솟아오르는 것이고, 결국은 그것조차 구별되지 않는 ‘제자리’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 시는 결국 이 땅에서 영원한 영광은 없으며 모두 시간 앞에서는 무기력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시간이야 말로 상처를 치유해주는 가장 확실한 방법인 셈이다. 시간의 끝을 죽음으로 본다면 죽음은 상처를 치유해주는 또 하나의 방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네 식구였다 하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콘크리트 바닥을 훑고 다니고 하나는 안전선 밖에서 종종거리고 하나는 뜨거운 레일 위에서 왔다 갔다 하다가 푸득 날아 건너편으로 가고 하나는 제 집인 듯한 전철 플랫폼 슬레이트 지붕 밑에서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나같이 빠알간 맨발이었다 ―이경림,「비둘기들」전문(『현대시』2005년 8월호) 본래 비둘기는 평화의 상징이라고 해서 인간은 비둘기를 잘 해치려 들지 않는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 비둘기들은 도심 어디서나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이 시는 지상의 전철역 부근에 살고 있는 네 마리의 비둘기 가족을 소재로 하고 있다. 이 시를 읽다보면 김광섭의 「성북동 비둘기」가 떠오르는데, 이것은 두 시가 유사해서라기보다는 도심에 살고 있는 비둘기의 집 없음(homeless)이라는 모티브가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김광섭의 성북동 비둘기가 성북동 산에 번지가 생기면서 비둘기의 번지가 없어지면서 ‘홈리스’의 처지로 전락했다면, 이경림의 비둘기는 도시의 임시 거처에 세 들어 살고 있다는 점에서 문명의 폭력에 의한 ‘홈리스’를 경험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 점에서 이 시는 생태 환경 시로도 읽을 수 있지만, 이 시는 단순히 생태 환경 시의 차원을 넘어서 문명에 의해서 침해받는 ‘평화’와 ‘자연’의 결핍을 동시에 지적하고 있다. 이 시에 등장하는 비둘기들은 한결 같이 안전과 생존을 침해 받고 있으며, 불안한 환경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이 시의 끝부분에서 시인이 비둘기의 ‘맨발’을 전경화시키고 있는 것은, 문명의 폭력 앞에서 무방비상태로 놓여있는 비둘기들의 힘없음과 헐벗음을 고발하기 위한 것이다. 도심에 사는 비둘기는 그 안에 상처를 가지고 있다. 그들의 집 없음과 불안은 문명에 의해서 훼손되었다는 점에서 분명히 상처라고 말할 수 있다. 그들은 이러한 상처를 도심에 적응해서 살아가는 방식으로 치유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시인이 이 시에서 제시한 “빠알간 맨발”은 한편으로는 문명에 대한 순응의 표시이고 한편으로는 문명에 대한 반항의 표시라고 말할 수 있다. 시간은 이렇듯 지상에 있는 모든 것들을 일순간 ‘맨발’로 만들어 버리기도 한다. 인간의 삶의 마지막 역시 ‘空手來 空手去’라는 점에서 ‘맨발’이다. 그런 점에서 비둘기들의 ‘맨발’이야말로 세상의 어긋남이나 상처와 대면하는 가장 정직한 삶의 방식인지도 모른다. *     박남희 시인   경기 고양(원당)에서 출생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1996)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1997) 고려대. 숭실대 강사 일산문학학교 시창작반 강사 시집 2005년 문학과경계 평론, 「탈주와 회귀 욕망의 두 거점-장정일론」등 다수  
1115    같은 詩라도 행과 연 구분에 따라 감상 차이 있다... 댓글:  조회:4635  추천:0  2016-02-20
시에서 행과 구분을 굉장히 중요시하게 여기는데 어떤 때는 한 편의 시가 여러 편의 시집에 실리면서 연과 행 구분이 달라지기도 합니다.   례를 들면 (문인수), 이 시가 그러한데 시가 좋아 여러 시집 여기 저기에 실렸지요. 출간된 시집들을 서로 대조해보면...   그런데 인터넷에 떠다니는 시도 아니고 시집마다 행과 연 구분이 달라 참 혼란스럽더군요.   그래서 문인수 시인에게 메일로 문의를 했었는데 문인수 시인은 나희덕 편을 정본으로 삼고 싶다고 하시더군요.   이 시는 조선일보가 연재한 한국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편 중 43편에 들어 있는데 저는 조선일보에 실린 시의 형식이 가장 좋은 것 같더군요.   한번 보세요. 시에서 행과 연 구분에 따라 감상의 차이가 어떻게 다르게 느껴지시는지를...       쉬/문인수     그의 상가엘 다녀왔습니다. 환갑을 지난 그가 아흔이 넘은 그의 아버지를 안고 오줌 을 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生의 여러 요긴한 동작들이 노구를 떠났으므로, 하지만 정신은 아직 초롱 같았으므로 노인께서 참 난감해하실까봐 "아버지, 쉬, 쉬이, 어이쿠, 어이쿠, 시원허시것다아" 농하듯 어리광 부리듯 그렇게 오줌을 뉘었다고 합니다. 온몸, 온몸으로 사무쳐 들어가듯 아, 몸 갚아드리듯 그 렇게 그가 아버지를 안고 있을 때 노인은 또 얼마나 더 작 게, 더 가볍게 몸 움츠리려 애썼을까요, 툭, 툭, 끊기는 오 줌발, 그러나 그 길고 긴 뜨신 끈, 아들은 자꾸 안타까이 따에 붙들어매려 했을 것이고, 아버지는 이제 힘겹게 마저 풀고 있었겠지요. 쉬- 쉬! 우주가 참 조용하였겠습니다.     -문인수 쉬 -「쉬」, 문학동네, 2006년 -반경환 명시1,2 제1권 102쪽 -제49회 現代文學賞수상시집. 2004. 현대문학 -도종환, 안도현 시인이 추천한 에 비치 돼 있는 시집(자연속에서 읽는 한 편의 시) 제2편 25쪽   ------------------------------------------------------ 쉬 문인수   그의 상가엘 다녀왔습니다. 환갑을 지난 그가 아흔이 넘은 그의 아버지를 안고 오줌을 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생(生)의 여러 요긴한 동작들이 노구를 떠났으므로, 하지만 정신은 아직 초롱 같았으므로 노인께서 참 난감해 하실까봐 "아버지, 쉬, 쉬이, 어이쿠, 어이쿠, 시원허시것다아" 농하듯 어리광 부리듯 그 렇게 오줌을 뉘였다고 합니다.   온몸, 온몸으로 사무쳐 들어가듯 아, 몸 갚아드리듯 그렇게 그 가 아버지를 안고 있을 때 노인은 또 얼마나 더 작게, 더 가볍게 몸 움츠리려 애썼을까요.   툭, 툭, 끊기는 오줌발, 그러나 그 길고 긴 뜨신 끈, 아들은 자꾸 안타까이 따에 붙들어매려 했을 것이고 아버지는 이제 힘겹게 마 저 풀고 있었겠지요. 쉬- 쉬! 우주가 참 조용하였겠습니다.     나희덕 시인이 엮은 '아침의 노래 저녁의 시' 에 실린 시 '아침의 노래 저녁의 시' 104쪽 --------------------------------------------------------- 쉬 문인수   그의 상가엘 다녀왔습니다. 환갑을 지난 그가 아흔이 넘은 그의 아버지를 안고 오줌을 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생(生)의 여러 요긴한 동작들이 노구를 떠났으므로, 하지만 정신은 아직 초롱 같았으므로 노인께서 참 난감해 하실까봐 "아버지, 쉬, 쉬이, 어이쿠, 어이쿠, 시원허시것다아" 농하듯 어리광 부리듯 그렇게 오줌을 뉘였다고 합니다. 온몸, 온몸으로 사무쳐 들어가듯 아, 몸 갚아드리듯 그렇게 그가 아버지를 안고 있을 때 노인은 또 얼마나 더 작게, 더 가볍게 몸 움츠리려 애썼을까요. 툭, 툭, 끊기는 오줌발, 그러나 그 길고 긴 뜨신 끈, 아들은 자꾸 안타까이 따에 붙들어매려 했을 것이고 아버지는 이제 힘겹게 마저 풀고 있었겠지요. 쉬- 쉬! 우주가 참 조용하였겠습니다.     -『한국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편 중 43』(조선일보 연재, 2008) -출처 : 조선일보 입력 : 2008.02.26 00:12 / 수정 : 2008.02.28 11:12   ---------------------------------- 흐르는 물 검색을 해보니 문인수 시인의 그 유명한 시 '쉬' 가 올려져 있지 않네요. 나희덕 시인이 엮은 '아침의 노래 저녁의 시' 에 실린 시를 원본으로 삼고 싶으시다니까 참고로 했으면 좋겠네요. 09.09.08 18:30 답글 | 묘묘 연을 구분한 것은 그렇다쳐도 산문시의 행들은 올리시는 분들의 게시표현에 따라 변한 듯 싶네요. 연은 후에 나누었더라도 행갈이를 달리 했다고 보여지지는 않습니다만...... 09.09.08 18:32 답글 ┗ 흐르는 물 나희덕 편에는 결구인 한 연 한 행으로 되어있는 것이 아니라 4연의 마지막 행으로 되어 있으니 게시표현하고는 다르다고 생각됩니다. 09.09.08 18:42 묘묘 시인의 시 한편에 대한 지극한 애정으로 정확성을 찾아본다는 일도 참 귀한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잘 읽었습니다. 09.09.08 18:50 답글 제4막 이부분을 한 연 한 행으로 하지 않고 4연의 마지막행으로 쓰인 것까지 문인수 시인이 동의한 것으로 보이진 않는군요... 09.09.08 18:50   답글 ┗ 흐르는 물 나가려다 다시 한번 보고 갑니다. 나희덕 편 제가 옮긴 것은 글자 한 자도 틀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따로 멜로 보내드리겠습니다. 09.09.08 19:09   흐르는 물 한 편의 시를 행, 연이 구분이 안 된 시와 구분이 다른 시로 읽어보니까 의 시가 가장 자연스럽게 읽혀지네요. 개인적으로도 이 시를 원본으로 삼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09.09.08 22:10 ------------------------ [문인수]쉬 (시집 '쉬!'14쪽의 경우)|   .bbs_contents p{margin:0px;} // 쉬   문인수 그의 상가엘 다녀왔습니다. 환갑을 지난 그가 아흔이 넘은 그의 아버지를 안고 오줌을 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生의 여러 요긴한 동작들이 노구를 떠났으므로, 하지만 정신은 아직 초롱 같았으므로 노인께서 참 난감해 하실까봐 "아버지, 쉬, 쉬이, 어이쿠, 어이쿠, 시원 허시것다아" 농하듯 어리광 부리듯 그렇게 오줌을 뉘였다고 합니다. 온몸, 온몸으로 사무쳐 들어가듯 아, 몸 갚아드리듯 그렇 게 그가 아버지를 안고 있을 때 노인은 또 얼마나 더 작게, 더 가볍게 몸 움츠리려 애썼을까요. 툭, 툭, 끊기는 오줌발, 그러 나 그 길고 긴 뜨신 끈, 아들은 자꾸 안타까이 따에 붙들어매 려 했을 것이고, 아버지는 이제 힘겹게 마저 풀고 있었겠지 요. 쉬- 쉬! 우주가 참 조용하였겠습니다.     - 시집 (문학동네/ 2006.1.27 초판본)     * 시집의 판형 관계로 이렇게 된 것임을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따라서 '시원/ 허시것다아'나 '그렇/게 그가 아버지를' 식으로 행갈이를 할 필요는 없으나 '그의 상가엘 다녀왔습니다'를 1연 한행으로, '쉬! 우주가 참 조용하였겠습니다.'를 4연 한 행으로 한 것은 이 시의 구조상 꼭 지켜져야할 형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은 연 구분 없이 4행으로 된 시지만 행을 연으로 간주하면) 특히 마지막 연의 한 행은 길게 한 호흡을 쉬고 내뱉는 말로서 이 시의 핵심 문장인바 3연에 붙여 쓰는 것은 시 본래의 의미와 맛을 훼손하는 처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젊고 순하게 생긴 여성시인이 그렇게 인용한 것을 두고 면전에서 까칠하게 대꾸하기 힘들었던 시인이 대수롭지않은 듯 좋게 얘기해서 그걸 정본으로 삼겠다 한 것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는 생각입니다. 낭송용 원고로서는 그게 유용할 수는 있을테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마지막 부분은 연행 구분을 해야 옳다고 여겨집니다. 그리고 시의 제목이  '쉬'로 되어 있고, 시집의 제목도 '쉬!'로 되어 있음을 참고 바랍니다.     ------------------- 혼란스러워 문인수 시인한테 문의 했더니 이렇게 답장이 왔더군요. ...         죄송합니다. 제 시에 이만한 성의를 보여주어서 감사합니다.   "따 = 땅"이 맞습니다. 이북어일 뿐만 아니라 일부 고어체 문장에서도 '따'를 볼 수 있습니다. 시의 리듬이나 읽는 맛이 나은 것 같아 일부러 '따'로 하였던 겁니다.   발표 당시, 그리고 시집에도 연구분을 안 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기회에 이 시를 낭송하면서 편의상 연구분을 해보았더니 읽기도, 의미 파악도 훨씬 낫습디다. 그래, 나희덕 편 그 책자에 실린 것을 앞으로 '원본'으로 삼기로 작정했습니다. 양해바랍니다.   관심, 거듭 고맙습니다. 건필하십시오.   -문인수
1114    詩作初心으로 되돌아가다 - 詩의 다의성(뜻 겹침, 애매성) 댓글:  조회:4750  추천:0  2016-02-20
시인은 왜 애매하게 말하나 엄경희 (문학평론가, 숭실대학교 교수) 말의 첫 번째 기능은 상대에게 자신의 의사를 정확하게 전달하는 데 있다. 우리는 오해를 불러일으키지 않기 위해 애쓰며 논리적으로 자신의 뜻과 입장을 설명하곤 한다. 그러나 시인은 가급적 비논리적으로, 애매하게 말한다. 시가 어렵게 느껴지는 또 하나의 이유이다. 애매한 말은 일반적으로 곤혹스러움을 낳는다. 우리가 명쾌함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시인은 왜 애매하게 말하나? 말하기 방식에는 이도가 내재해 있다. 시인이 애매성을 추구하는 이유는 단적으로 말해 인생사가 복합적이고 애매하기 때문이다. 내가 시의 애매성에 대해 이처럼 설명하면 대부분의 학생들은 웃는다. 그 답이 너무 당연하고 싱겁게 느껴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삶이 애매하기 때문에 애매하게 표현한다〉는 시작 원리를 우리는 매우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시인들은 애매한 것을 애매하게 이야기함으로써 인생의 진실에 닿을 수 있다고 믿는다. 여기에는 삶을 정확하게, 논리적으로 다 말할 수 없다는 경험과 통찰이 담겨있다.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잔여들을 아우르고자 할 때 시적 애매성은 탄생한다. 이 대목에서 짚고 넘어갈 것은 〈애매성〉이라는 문학 용어에 대한 이해가 문학 이론을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 사이에 다소 다르게 이해되고 있다는 점이다. 시 전문가나 교육자가 애매성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는 주로 영미의 신비평가 윌리엄 엠프슨(Empson, Sir William, 1906~1984)이 말한 다의성의 의미로 사용하는 반면 대부분의 학생들은 애매성을 그야말로 의미가 불분명한, 수수께끼 같은, 직접적 이해가 가능하지 않은 문장이 발생시키는 성질로 이해하곤 한다. 이상섭은 이러한 오해를 줄이기 위해 앰프슨의 문학용어로서 〈애매성〉을 〈뜻 겹침〉이라는 용어로 바꾸어 사용하는 것이 온당하다는 제안을 하기도 한다. 하나의 문장이나 단어에 뜻이 겹쳐 있는 것과 의미가 불분명한 것은 매우 다른 차원에 속한다. 뜻 겹침은 의미가 복합적이며 불분명한 것은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음을 뜻한다. 뜻 겹침이 의식의 복잡성이나 상상력의 풍부함에 의한 것이라면 궁극적으로 무슨 말인지 도무지 알 수 없게 만들어진 문장은 시인의 실수 혹은 역량미달에 의한 것이다. 뜻 겹침으로서의 시의 애매성을 시의 미감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애매성이 클수록 시적인 맛이 더 증가할 가능성이 농후한 것이다. 애매성을 옹호하는 이 같은 시의 미학은 언어의 일반적 기능을 배반하는 것처럼 보인다. 애매성이란 의미가 하나로 고정되지 않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애매성은 의미가 다양하게 해석될 여지를 갖는 것을 말한다. 이때 애매성은 난해성으로 이어질 가능성을 갖는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의미가 막연하거나 부정확한 것을 난해하다고는 할 수 있으나 애매하다고는 하지 않는다. 피상적 주제의식에 의해 대충 얼버무린 듯 보이는 언어의 집합은 애매한 것이 아니라 의미가 부적절하게 혹은 불충분하게 표현된 경우이다. 감식안이 있는 독자라면 애매성과 불분명함을 구분할 것이다. 그럼에도 이 둘은 종종 그 경계가 모호하기도 하다. 뜻 겹침을 드러내는 문장은 해석의 여지가 다른 부분에 비해 많이 내포되어 있을 가능성이 크며 시의 문법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라면 이러한 부분을 매우 불분명한 것으로 감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는 문장의 의미만이 아니라 정서적 효과를 불러일으키기 위한 뉘앙스, 분위기, 울림 등이 언어에 스며 있기 때문에 더욱 그 불분명함이 증폭될 수 있다. 상기할 것은, 시의 언어가 애매성으로 독자를 곤혹스럽게 만들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명료함이 낳은 단순성과 배제적 성격을 넘어서고자 한다는 것이다. 막 이삭 패기 시작한 수숫대가 낮달을 마당 바깥 쪽으로 쓸어내고 있었다 아래쪽이 다 닳아진 달을 주워다 어디다 쓰나 생각한 다음날 조금 더 여물어진 달을 이번엔 洞口 개울물 한쪽에 잇대어 깁고 있었다 그러다가 맑디맑은 一生이 된 빈 수숫대를 본다 단 두 개의 서까래를 올린 집 속으로 달이 들락날락한다 ——장석남, 「달과 수숫대 ―“貧”」전문 이 시는 달과 수숫대가 어우러진 풍경을 묘사하고 있지만 그 묘사의 언어 운용이 매우 애매한 작품이다. 그 애매성은 1연에서 보이는 주어와 술어, 수식어와 수식 대상의 연결이 일반적 어법에는 안 맞는 형태로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발생한다. 우선 수숫대를 묘사한 부분부터 보면, 주어인 수숫대는 달을 〈쓸어내다〉, 닳아진 달을 어디다 쓰나 〈생각하다〉, 여문 달을 〈깁다〉등의 동사와 연결된다. 이러한 동사들에서 연상되는 것은 빗자루, 사람, 바늘이다. 시인은 빗자루나 바늘과 같은 생활도구를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은 채 쓸어내고 깁고 하며 이어가는 〈貧〉으로서의 생활을 암시하는 것이다. 즉 1연의 동사들은 자연과 생활을 연결하는 가교 기능을 한다. 따라서 수숫대가 서 있는 자연 풍경은 다만 자연 풍경이 아닌 빈궁한 생활과 겹쳐 있는 자연 풍경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이 시의 애매성은 1연의 주어와 서술어의 불일치로부터 생겨나며 시인은 이러한 불일치가 발생시키는 간극 속에 가난한 생활상을 압축시키고 구질구질한 빈궁의 실체를 생략해버린다. 다음으로 달을 보면, 낮달에서 아래쪽이 다 닳아진 달로 다시 조금 더 여물어진 달로 변화한다. 달을 수식하는 말에서 연상되는 것은 닳아진 사물(그릇), 단단해진 곡식 등이다. 이 부분에서도 뜻 겹침이 발생한다. 기울고 다시 차오르는 달의 형상처럼 닳아지고 다시 여물고 하는 것이 우리들의 생활이라고 시인은 말하는 것이리라. 그때마다 쓸어내고 꿰매지 않으면 생활의 말끔함을 잃게 된다. 한편 쓸어내고 깁고, 기울고 차오르고, 닳아지고 여물고 하는 과정의 변화는 시간의 변화를 나타낸다. 그 과정의 최종 단계가 이 시에서는 〈맑디맑은 一生이 된/ 빈 수숫대〉와 〈단 두 개의 서까래로 올린/ 집〉으로 형상화된다. 각각은 자연과 생활을 대변한다. 이 앙상한 두 개의 이미지의 병치가 환기하는 것은 무엇일까? 병치는 그야말로 겹쳐놓기이다. 비어있는 자연과 생활에는 시인이 생각하는 가난의 의미가 투영되어 있다. 그것은 비루한 가난이 아닌 바로 淸貧을 뜻한다. 결핍과 고통으로 가득한 가난이 아니라 맑고 깨끗한 가난을 강조함으로써 시인은 한 정신주의자의 지향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시인은 열매를 맺고 비워내는 수숫대, 차오르고 기우는 달의 형상 즉 자연의 형상과 쓸어내고 깁고 하는 생활의 형상을 겹쳐 하나의 풍경으로 결합시킴으로써 성취한다. 자연의 순리를 따라가는 생활의 청빈은 이 같은 겹침에 의해 의미화되는 것이다. 달이 들락날락하는 동양화풍의 여백이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때 〈貧〉의 분위기는 한적함으로까지 이어지게 된다. 이 시는 〈安貧樂道〉라는 전통적 관념을 표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안빈낙도의 정신의 근간은 욕심의 채움이 아니라 비움이다. 이러한 주제는 그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과 같은 현실 구조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자칫하면 고리타분한 혹은 시대착오적인 주제가 될 수도 있다. 장석남은 자연과 생활의 결합이라는 전통적 맥락을 수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맥락에 애매성을 증폭시키는 서술전략을 구사함으로써 자연과 생활을 그대로 직결시키려는 전통시의 도식적 수용으로부터 자신의 시를 구출해낸다. 이때 안빈낙도의 멋스러움은 살아나고 그 주제는 새로운 묘미를 갖게 되는 것이다. —————————— 엄경희 * 200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평론 부문 당선 * 저서 『未堂과 木月의 시적 상상력』『저녁과 아침 사이 詩가 있었다』『한국시의 미학적 패러다임과 사회적 전통』외 ==================================================================================== 264. 그런 날이 있다 / 백무산 그런 날이 있다 백 무 산 생각이 아뜩해지는 날이 있다 노동에 지친 몸을 누이고서도 창에 달빛이 들어서인지 잠 못 들어 뒤척이노라니 이불 더듬듯이 살아온 날들 더듬노라니 달빛처럼 실체도 없이 아뜩해 살았던가 내가 살긴 살았던가 언젠가 아침 해 다시 못 볼 저녁에 누워 살아온 날들 계량이라도 할 건가 대차대조라도 할 건가 살았던가 내가 살긴 살았던가 삶이란 실체 없는 말잔치였던가 내 노동은 비를 피할 기왓장 하나도 못되고 말로 지은 집 흔적도 없고 삶이란 외로움에 쫓긴 나머지 자신의 빈 그림자 밟기 살았던가 내가 살긴 살았던가 백무산 시집 중에서 ------------------------------------------------------------ 265. 눈을 기다려 / 백무산 눈을 기다려 백 무 산 사나흘 눈 내리고 녹기도 전에 또 눈 내리자 사람들은 하늘 보며 지겹다 하지만 나는 눈이 모자라 하늘을 보네 길 끊겼다 투덜대고 원망들 하지만 내사 이때라도 세상길 한 번 뚝 끊어 먹는 일 반기고 좋아라 사방팔방 들뜬 길 지르고 뚫린 다음 마음 길 돌아보지 못해 나무들과 형편없이 멀어져버렸네 흰 눈 내려 사방팔방 뚫린 길 지우고 눈밭에 나무로 서서 한 철 겨울을 나고 싶어 눈을 기다려 폭설을 기다려 하늘을 보네 백무산 시집 중에서
1113    詩作初心으로 되돌아가다 - 술 한잔 권하는 詩 댓글:  조회:4856  추천:0  2016-02-20
시치미 떼는 시 / 신형철 의뭉스럽고 천연덕스러운 윤제림의 시집 『그는 걸어서 온다』 무릇 좋은 시란 ‘분단된 영혼의 내전’ 같은 것이어서 시를 제대로 읽기 위해서는 종군기자처럼 현장으로 뛰어들어야 한다. 단어 하나, 구두점 하나, 행갈이 하나에서조차 화약 냄새를 맡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어떤 시들은, 어이 기자 양반, 카메라 내려놓고 술이나 한잔해, 이런다. 머쓱하고 유쾌하고 나른해진다. 그런 시집을 최근에 읽었다. 윤제림의 다섯 번째 시집 (문학동네, 2008). 안 그래도 정부가 국민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고 있는 터라 술 한잔 권하는 이 시집이 더욱 청량했다. 이 시집은 서정적 시치미 떼기의 진수를 보여준다. ‘매의 주인을 밝히기 위해 주소를 적어 매의 꽁지털 속에다 매어 둔 네모꼴의 뿔’을 ‘시치미’라 한다. 매를 주인에게 돌려주지 않고 갖고 싶으면 시치미를 슬쩍 떼면 된다. 시에서도 시인이 시치미를 떼는 순간이 있다. 알고도 모르는 척, 아프면서 안 아픈 척, 웃기면서 안 웃긴 척하는 순간이 있다. 그게 잘만 되면 시는 의뭉스러워지고 천연스러워진다. 본래 의뭉스러움(엉큼함)과 천연스러움(꾸밈없음)은 반대에 가까운 것 같은데, 그게 이렇게 동석할 때가 있다. 싸리재 너머 비행운 떴다 붉은 밭고랑에서 허리를 펴며 호미 든 손으로 차양을 만들며 남양댁 소리치겠다 “저기 우리 진평이 간다” "우리나라 비행기는 전부 진평이가 몬다." ―‘공군소령 김진평’ 전문 이 시에서 시치미를 뗀 곳은 말할 것도 없이 마지막 두 행이다. “우리나라 비행기는 전부 진평이가 몬다.” 이 의뭉스럽고 천연스러운 문장 앞에서 무표정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한 편 더 읽자. 재춘이 엄마가 이 바닷가에 조개구이집을 낼 때 생각이 모자라서, 그보다 더 멋진 이름이 없어서 그냥 ‘재춘이네’라는 간판을 단 것은 아니다. 재춘이 엄마뿐이 아니다. 보아라, 저 갑수네, 병섭이네, 상규네, 병호네. 재춘이 엄마가 저 간월암 같은 절에 가서 기왓장에 이름을 쓸 때, 생각나는 이름이 재춘이밖에 없어서 ‘김재춘’이라고만 써 놓고 오는 것은 아니다. (…) 재춘아, 공부 잘해라! ―‘재춘이 엄마’에서 이 시에서 시치미를 뗀 곳은? 물론 “재춘아, 공부 잘해라!”다. 재춘이는 실로 부담스럽겠지만, 이 문장에 일격처럼 붙어 있는 느낌표에서 우리는 기분 좋게 웃는다. 짧은 시 세 편 엄선해서 옮긴다. 어느 날인가는 슬그머니 산길 사십 리를 걸어내려가서 부라보콘 하나를 사먹고 산길 사십 리를 걸어서 돌아왔지요. 라디오에서 들은 어떤 스님이야긴데 그게 끝입니다. 싱겁지요? ―‘어느 날인가는’ 전문 스님의 ‘싱거운’ 욕망이 무구하다. 꽃이 지니 몰라보겠다. 용서해라. 련(蓮). ―‘목련에게’ 전문 ‘목련에게’라고 시치미를 떼고 있지만 아무래도 꽃 시절을 다 보낸 첫사랑 여인이라도 만난 것 같다. 부여중학교, 오늘도 이층 창가에 서서 당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저 여선생을 이기려면 나는 아무래도, 여기 표 파는 여자나 되어야 할까봐요. 정림사지 오층석탑 당신을 흔들자면. ―‘춘향가’ 전문 ‘석탑’ 같은 당신과 여선생과 매표소 직원의 이 춘향(春香) 같은 삼각관계. 윤제림의 시를 읽으면서 생각했다. 짧은 시가 대체로 체통을 잃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감정이 뛰어놀 운동장이 좁아서일 것이다. 시에서 감정은 문장들을 갈기갈기 찢어낼 정도로 격렬하게 방출되거나 그 그림자조차도 보이지 않게 문장들 속으로 꼭꼭 여며져야 한다. 그러니까 ‘자기’라는 것을 파괴해버리거나 아예 모른 척해버려야 한다. 어중간하면 흉하다. 어중간할 때, 감정은 더러 자기애 쪽으로 끌려간다. ‘제림’은 필명이고 본명은 ‘준호’다. 서울예술대학 광고창작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문예창작학과가 아니고? 본래 좋은 카피는 한 줄짜리 시이기도 하니까. ― 신형철 (문학평론가) ================================================================= 262. 경계 / 백무산 경계 백 무 산 누가 이런 길 내었나 가던 길 끊겼네 무슨 사태 일었나 가파른 벼랑에 목이 잘린 길 하나 걸렸네 옛길 버리고 왔건만 새 길 끊겼네 날은 지고 울던 새도 울음 끊겼네 바람은 수직으로 솟아 불고 별들도 발 아래 지네 길을 가는 일은 언제나 길을 버리는 일 새 길은 길에 있지 않고 발끝에서 일어나네 나 이제 경계의 길을 가려네 아스라히 허공에서 일어나는 길 나 이제 모든 경계의 길을 가려네 백무산 시집 중에서 -------------------------------------------------------- 263. 꽃 / 백무산 꽃 백 무 산 내 손길이 닿기 전에 꽃대가 흔들리고 잎을 피운다 그것이 원통하다 내 입김도 없이 사방으로 이슬을 부르고 향기를 피워 내는구나 그것이 분하다 아무래도 억울한 것은 네 남은 꽃송이 다 피워 내도록 들려줄 노래 하나 내게 없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내 가슴을 치는 것은 너와 나란히 꽃을 피우는 것은 고사하고 내 손길마다 네가 시든다는 것이다 나는 위험한 물건이다 돌이나 치워주고 햇살이나 틔워 주마 사랑하는 이여 백무산 시집 중에서
1112    詩作初心으로 되돌아가다 - 만드는 詩, 씌여지는 詩 댓글:  조회:4382  추천:0  2016-02-20
만들 것인가, 발견할 것인가 최근에 다음과 같은 시를 한 편 썼다. 썼다라기보다는 라고 해야 더 가까운 표현이 될 것이다. 그만큼 이 시에는 시 자체로서의 자율성이 앞서고 있다. 로 정의되는 낭만주의 시의 본질론과는 다른 생명의 작동 같은 것이 거기 있었음을 말하고자 함이다. 시에도 라는 것이 있음을 나는 근간 적극 동의해오고 있다. 제 스스로 언어의 몸짓을 하는 시와 더불어 나는 이즈음의 내 삶을 이끌고 있다. 내 의지로서의 이른바 언어적 조율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건 언제나 후행의 작업으로 왔다. 그런만큼 퇴고의 시간이 전에 없이 줄어들었다. 미리 젖어 있는 몸들을 아니? 네가 이윽고 적시기 시작하면 한 번 더 젖는 몸들을 아니? 마지막 물기까지 뽑아 올려 마중하는 것들, 용쓰는 것 아니? 비 내리기 직전 가문 날 나뭇가지들 끝엔 물방울들이 맺혀 있다 지리산 고로쇠나무들이 그걸 제일 잘 한다 미리 젖어 있어야 더 잘 젖을 수 있다 새들도 그걸 몸으로 알고 둥지에 스며들어 날개를 접는다 가지를 스치지 않는다 그 참에 알을 품는다 봄비 내린다 저도 젖은 제 몸을 한 번 더 적신다 -⌈봄비⌋ 전문, 『시인세계』, 2003. 봄. 우이산록에 삼십여 년 가깝게 살고 있는 나는 어지간히 산의 냄새를 맡을 줄 알게도 되었지만, 자연을 느끼는 내 수준은 봄철이면 환경운동가들이 라고 작은 팻말들을 나뭇가지에 내어 걸은 것을 보고는 그저 발자국 소리를 스스로 죽이는 경외감을 가지는 그 정도였다. 그런데 요즈음엔 조금 다른 눈이 뜨이고 귀가 트이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 있다. 누구의 말대로 이순의 나이가 되었으니 가는귀가 먹어 이젠 들리는 소리보다 들리지 않는 소리를 더 잘 듣게 된 것일까. 어쨌건 그 발견에 호들갑을 떨지 않도록 나를 스스로 다독이고 있다. 삼십여년 세월로서는 사뭇 늦깎이이다. 이 시를 쓴 지난 3월 하순, 나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산을 오르다가 푸른 기가 감도는 나뭇가지들에 눈이 갔다. 그런데 나뭇가지들 끝에 물방울들이 조롱조롱 맺혀 햇빛에 반짝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지난 밤 내린 이슬들의 결로結露현상이 아닌가 했더니 아무래도 그게 아니었다. 시간으로 보거나 물방울의 크기로 보거나 그렇게 볼 수가 없었다. 스스로 뽑아 올린 것이었다. 용쓰듯. 의아해하고 있는 내게 지나가던 노인이 봄이 와서 한참 가물다가 봄비가 내릴 징후가 보이면 나무들이 그런다는 것을 일러 주었다. 온몸에 찌르르르 전율이 왔다. 식물학적으로 확인을 해 보지는 않았으나 수긍이 감동과 함께 온몸으로 왔다. 생체를 지닌 것들의 관능적인 반응이 모두 저러하지 않은가. 로 나타나지 않던가. 절대적인 사랑은 스스로 제 몸을 적시는 실체의 것이 아니던가. 절대적 교감의 실물반응, 오!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 < 미리 젖어 있어야 더 잘 젖을 수 있다>는 말이 저절로 나왔다. 감히 라는 말에까지 의식의 더듬이가 가서 닿았다. 나무들도 예외가 아니라니! 눈을 돌려보니 올해도 어김없이 라 쓰인 그 작은 팻말들이 나무들에 새로 걸려 있었다. 새들도 나무들과 봄비의 그 을 생명으로 실체화하는 절대의 시간과 공간 속에 스스로를 고요히 가두고 있었다. 어디선가 그랬던 것처럼 더 확신에 찬 어조로 나는 또 한 번 외쳤다. 자연에는 이토록 아름다운 우주적 화응이 있다. 나무들과 새들에게도 무슨 영성이 있는 것일까. 저러한 모습으로 보아 그들에겐 몸이 영성이자 영성이 몸이다. 우리 사람들처럼 따로따로에 늘 빠져 시달리지 않는 그들에게서 나는 초월의 궁극, 그 실체를 보았던 셈이다. 뛰도록 기뻤다.(호들갑 떨지 말자. 내 안을 흐르는 그간의 번뇌와 갈등, 마음공부의 기류가 막히지 않도록 몸을 잘 간수하자. 내 이 좀더 나가야 하리라.) 얼마 전에도 나는 라는 고전시화의 한 대목을 인용한 바가 있다. 이 말은 기존의 이론이나 시를 하나의 규범으로 삼아 거기 갇혀 버린 교주고슬膠柱鼓瑟의 답답함을 비판하고 경계한 것이겠으나, 한 걸음 더 나아가 생각할 필요가 있다. 이는 곧 시의 성령으로서의 을 적극 내세운 말이다. 그러나 저간의 우리 시의 형편은 어떠했는가. 이 같은 본체는 뒷전에 밀어 두고 소위 지적인 방법을 앞세우거나 윤리적 주장을 위한 도구로서 시를 전락시켜 왔음은 우리 모두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 아닌가. 또한 화자의 우월적 포즈에 의한 관념의 화법으로 무엇보다 오염되지 않은 시의 생체를 매장시키고 있는 시편들이 창궐하고 있음은 어찌해야 하는가. 물론 저러함들도 일면 시가 담아야 할 ?의 또 다른 모습들이며 시 또한 그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는 것이지만, 그저 한낱 도구로서 시를 수용할 때 시는 정말 자유로울 수가 없다. 나무들이 제 몸의 물기를 용쓰듯 뽑아 올려 봄비를 마중하듯, 봄비가 젖은 제 몸을 다시 한 번 적시듯 화응하는 시의 우주적인 울림, 그게 시의 본체요 자유가 아닌가. 저러함은 가 아니라 생체를 통한 만남으로 획득되는 이다. 만들 것인가, 발견할 것인가. 시의 생태에 온몸으로 동의하면서 나는 오늘도 산으로 간다. 이자 을 읽으러 나는 거기 간다. 그러나 놀러 가야 한다. 가서 함께 이 그것들을 잘 읽어 내는, 한 몸이 되는 지름길이다. 어제는 내가 오래 전부터 정해 놓고 놀러 가는 소나무 숲에서 장자가 말한 이른바 송뢰松籟소리를 듣다가 바람이 스스로 소리를 내는 것이 아니라 소나무들이 열어 놓은 으로 바람이 지나가느라고 소리가 난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피리가 왜 소리를 내는가. < 만파식적萬波息笛>을 비로소 요해了解하였다. 아하, 우주는 큰 이다. 그것만이 아니다. 한참 소나무를 바라보며 무심코 고장난 내 무릎 관절을 쓰다듬다가 소나무는 무릎 관절이 없다는 것도 비로소 알았다. 무릎 관절이 없어 줄창 한평생 제자리에만 서 있는 소나무는 고장을 모르는 삶을 살고 있음을 발견했다. 무릎 관절이 있다고 잘난 체하며 세상을 마음대로 쏘다니고 그래 보았댔자 말이 굴신자재屈伸自在 예저기 피하고 피해다닌 꼴이 아닌가. 그게 내가 아닌가. 부끄러웠다. 쏘다닌 만큼 때는 때대로 묻히고, 제자리를 제대로 지켰다 할 수도 없고 퇴화해 버린 나의 남루. 결국은 나무보다 수명도 짧은 내 허무를 아프게 읽었다. 나는 오늘도 숲으로 간다. ================================================================== 260. 슬프고 놀라운 / 백무산 슬프고 놀라운 백 무 산 내가 가꾼 텃밭에 잡초만 무성하네 내가 심어 싹을 틔운 것은 그늘에서 햇빛도 받지 못하였네 잡초들만 꽃을 피워 가득하네 내가 가꾼 것은 꽃망울도 맺지 못하였네 내가 꿈꾸어 온 것은 어디 가고 낯선 것만 내 텃밭에 뿌리내렸네 어쩌다 이리 낯선 삶만 무성한가 그래도 저것은 모두 내 텃밭에 핀 꽃들 저 꽃들 모두 날 찾아온 꽃들 뱉고 나면 언제나 낯선 말처럼 삶은 낯설어 슬프고 놀라운 것 백무산 시집 중에서 백무산 연보 1955년 경북 영천 출생(본명 백봉석) 1984년 1집에 〈지옥선〉등을 발표하면서 등단. 1988년 첫 시집 간행. 1989년 제1회 이산문학상 수상. 1990년 제2시집 간행. (이 시집은 1988~1989년까지의 현대중공업 파업사건을 주제로 씀.) 1996년 제3시집 간행. 1997년 제12회 만해문학상 수상. 1999년 제4시집 간행. 2003년 제5시집 간행. 2004년 제6시집 간행. 2007년 제6회 아름다운 작가상 수상. 2008년 제7시집 간행. 2009년 제1회 임화문학상, 제2회 오장환문학상 수상. 2012년 제8시집 , 육필시선집 간행. 편집위원, 노동운동가로 활동. ------------------------------------------------------------------------------ 261. 운문행 / 백무산 운문행 백 무 산 운문에 가려고 버스를 기다리네 시골 낡은 정류장 무싯날 오후 온다는 차는 좀체 오지 않고 칠이 벗겨진 낡은 의자에 노인 두엇 졸고 매표구 안에는 남녀 서넛이 화투 패를 돌리고 뿌연 창에 비친 오후 햇살이 졸음을 몰고 오네 노인 하나 들어와 시간표를 하염없이 보다 가고 개 한 마리 어슬렁 대합실을 돌고 가네 신문을 사서 볼까 책을 읽을까 하다 말고 이럴 땐 생애를 읽어두는 게 좋을 듯하네 낡은 시간이 다 빠져나간 정류장에 글씨 몇 자 드러낼 것 같네 이토록 한없이 늘어진 졸음 끝에 글귀들이 먼지를 털고 일어날 것 같네 이럴 땐 갈 길도 잊어버리고 하염없이 졸다 차도 다 놓쳐 버리고 싶네 운문이 졸음 끝에 매달려 기둥이 썩고 있네 백무산 시집 중에서  
1111    詩作初心으로 되돌아가다 - 시의 비상 이미지 동사화 댓글:  조회:4664  추천:0  2016-02-20
새들 우리 시에서 가장 빈도 높게, 그리고 깊게 하나의 상징적인 체계를 획득하고 있는 사물, 말 가운데 하나가 바로 라고 생각된다. 기록된 문헌상의 첫 시가로 꼽히는 옛 시가 「황조가」에서 박남수의 「새」, 또는 「새의 암장」에 이르기까지 그 의 대표적인 속성인 비상의 이미지는 우리 시를 동사화하는 여러 모습의 움직임들로 우리 곁을 날아다니고 있거나 우리 시의 바탕을 이루는 사상의 한 무늬마저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또 한 마리의 새가 우리 시의 하늘을 깊게 날고 있다. 혹은 이 겨울에도 맨발로 우리 곁을 종종거리고 있음을 만난다. 장석남의 「새떼들에게로의 망명」이 바로 그것이다. 1. 찌르레기떼가 왔다/쌀 씻어 안치는 소리처럼 우는/검은 새떼들//찌르레기떼가 몰고 온 봄 하늘은/햇빛 속인데도 저물었다//저문 하늘을 업고 제 움음 속을 떠도는/찌르레기떼 속에/환한 봉분이 하나보인다 2. 누군가 찌르레기 울음 속에 누워 있단 말인가/봄 햇빛 너무 뻑뻑해//오래 생각할 수 없지만/오랜 세월이 지난 후/나는 저 새떼들이 나를 메고 어디론가 가리라,/저 햇빛 속인데도 캄캄한 세월 넘어서 자기 울음 가파른 어느 기슭엔가로/데리고 가리라는 것을 안다//찌르레기떼가 가고 마음엔 늘/누군가 쌀을 안친다/아무도 없는데/아궁이 앞이 환하다 이라는 말이 지닌 농도로 보아 그 표제가 좀 크고 그 때문에 이미지의 누수현상을 빚고는 있지만, 그것은 지금의 척박한 삶으로부터의 적극적인 초월을 현실적인 행위가 있는 말로 자리바꿈한 때문으로 보인다. 그 힘을 새떼들, 찌르레기떼의 움을 속에서 그는 훔쳐 내고 있다. 이 시에서는 물론 그 울음소리가 , 곧 배고픔(결핍)에 충만을 주는 음성상징으로 처리되어 따뜻하고 밝은 극복의 힘(아무도 없는데/아궁이 앞이 환하다)이 되고 있지만, 이 또한 에서 로 데리고 갈 수 있는 의 원초적인 비상의 이미지에 깊게 닿아 있다. 놀라운 것은 그 찌르레기떼의 울음 속에서 을 만나고 있다는 점이다. 주검의 봉분마저 그에겐 밝음의 그것이다. 적극적인 만남, 자연과의 화응이 거기에 있다. 모든 상처와 생명의 단절마저 수용하는, 그래서 시는 혁명이다. 시인은 프롤레타리아다. 시는 이다. 나도 그렇게 쓴 적이 있다. -「몸시.52-새가 되는 길」부분, 「몸시」, 세계사, 1994. -「새.2」부분, ꡔ별들의 바탕은 어둠이 마땅하다ꡕ, 문학세계사, 1990. 의 2차적인 상징은 극복과 초월을 통한 적극적인 화응이다. 에서 로 데려가 주는 힘이며 마침내는 하나가 된다. 우리는 그것을 우리 무속에서 흔히 만나기도 한다. 높은 솟대 위에 나무로 깎아 앉힌 새들이 그것이다. 우리 시는 비극적인 정황과 인식 속에 있으면서도 언제나 의 그것을 통해 을 꿈꾼다. 이른바 프로이트의 Unheimlich, 드러난 고통과 불안에 시달리고 있지만, 그것마저 힘으로 바꾸어 로 가는 이행 속에 있다. 우리 시의 사상의 는 절망의 편이 아니다. 의 날개짓이거나 그들이 척박한 땅 위에 찍는 발자국이다. ========================================================================== 258. 용인 지나는 길에 / 민영 용인 지나는 길에 민 영 저 산벚꽃 핀 등성이에 지친 몸을 쉴까. 두고 온 고향 생각에 고개 젓는다. 도피안사(到彼岸寺)에 무리지던 연분홍빛 꽃너울. 먹어도 허기지던 三春 한나절. 밸에 역겨운 가구가락(可口可樂) 물냄새. 구국 구국 울어대는 멧비둘기 소리. 산벚꽃 진 등성이에 뼈를 묻을까. 소태같이 쓴 입술에 풀잎 씹힌다. 민영 시집 중에서 민영 연보 1934년 음력 9월 6일 강원도 철원군 월하리에서 민준식과 나창훈의 외아들로 출생. (본명 : 병하 丙夏) 1937년 3세 부친의 부름을 받고 모친과 함께 만주 용정으로 이사. 1939년 5세 명신소학교 입학(이후 신민소학교로 이름이 바뀜). 1946년 12세 부친 별세, 9월에 귀향. 철원 제3인민학교 5학년 편입. 1947년 13세 월남하여 생계를 위하여 명동에서 담배 장사를 시작. 1950년 16세 숭실중학교 입학. 한국전쟁 발발로 휴학(이후 학교를 다니지 못함.) 12월에 부산으로 피난. 1951년 17세 부산에서 부두노동 및 신문팔이 등을 함. 1952년 18세 부산시청 회의실에서 열린 ‘문예강좌’ 청강. 대한체신협회 인쇄부 해판공으로 취직 후 자유민보사 공무부로 이직. (김상옥, 박재삼, 송영택, 천상병 등을 알게 됨.) 1953년 19세 대한교과서 공무국 입사. 1954년 20세 서울로 이사. 1957년 23세 서정주의 추천으로 9월호에 시 ‘동원’이 수록(1회 추천). 1959년 25세 시 ‘죽어가는 이들에게’가 2월호에 추천(2회 추천). 시 ‘석장에서’가 9월호에 추천(천료)되어 등단. 1960년 26세 전후문학인협회 가입. 11월에 한경재와 결혼. 1967년 33세 대한교과서 사직 후 학원사 편집사원으로 취직. 1972년 38세 첫 시집 간행. 1973년 39세 소설가 정인영과 함께 도서출판 창원사 창립. 1974년 40세 자유실천문인협회 회원 가입. 1976년 42세 창원사을 그만두고 독서신문사 출판부장이 됨. 1977년 43세 제2시집 간행. 계몽사 편집차장으로 이직. 1979년 45세 출판대행 를 창립하여 독립. 1982년 48세 번역서 , 간행. 1983년 49세 제3시집 간행. 이 시집으로 제2회 한국문학평론가협회상 수상. 번역서 간행. 1984년 50세 신경림, 정희성, 하종오 등과 함께 창립. 1985년 51세 모친 별세. 1987년 53세 제4시집 간행. 자유실천문인협회 고문으로 추대. 1988년 54세 재일교포 시인 허남기의 번역서 간행. 1989년 55세 민요연구회 회장이 됨. 설화집 간행. 1990년 56세 위인전기 간행. 1991년 57세 제5시집 간행. 이 시집으로 제6회 만해문학상 수상. 민족문학작가회의 부회장으로 추대. 창작과비평사에서 기획한 1·2·3권의 편집위원으로 활동. 1992년 58세 를 물려주고 전업작가로 활동. 1995년 61세 민족문학작가회의 시분과위원장으로 피선. 1996년 62세 재6시집 간행. 1997년 63세 설화집 간행. 1999년 65세 수필집 간행. 2000년 66세 민족문학작가회의 고문으로 추대. 2001년 67세 제7시집 간행. 2002년 68세 간행. 2003년 69세 唐詩 번역서 간행. 2004년 70세 시선집 간행. 2007년 73세 제8시집 간행. 2012년 78세 육필시전집 간행. ---------------------------------------------------------- 259. 답십리 하나 / 민영 답십리 하나 민 영 땅거미 지면 거나해서 돌아온다 양어깨 축 늘어진 빨래가 되어. 새벽에 지고 나선 靑石의 소금 짐은 발끝에 채이는 돌멩이만도 못하구나! 촬영소 고개 너머 十里의 불빛 중랑천 둑방에는 낄룩새 운다. 민영 시집 중에서
1110    무명 작고 시인 윤동주 유고시 햇빛 보다... 댓글:  조회:5137  추천:0  2016-02-19
경향신문 강처중 기자와 정지용 주필이 아니었다면 오늘날의 윤동주는 있을 수 없다." 한국인의 애송시를 선정할 때면 늘 선두를 다투는 '국민 시인' 윤동주(1917~1945). 그는 59년 전 오늘인 1947년 2월13일자 경향신문에 유고시 '쉽게 씌어진 시'가 게재되면서 처음 세상에 알려졌다. 당대 최고 시인으로 경향신문 주필이던 정지용은 이날 시인 소개글에서 "시인 윤동주의 유골은 용정동 묘지에 묻히고 그의 비통한 시 10여편은 내게 있다. 지면이 있는 대로 연달아 발표하기에 윤군보다도 내가 자랑스럽다"고 썼다. 경향신문은 같은 해 3월13일자, 7월27일자에 그의 유작 '또 다른 고향'과 '소년'을 실었다. 경향신문, 정지용, 당시 무명의 작고 시인 윤동주를 연결한 데는 경향신문 조사부 기자였던 강처중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 그러나 강처중은 월북했다는 이유로 우리 역사에서 잊혀졌다. 그의 존재는 윤동주 연구가인 송우혜씨('윤동주 평전'의 저자)에 의해 학계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 대시인 정지용, 고민에 빠지다 1947년 2월, 정지용은 며칠째 낯선 시 10여편을 눈앞에 펼쳐 놓고 고민에 빠져 있었다. 이미 작품을 가려 뽑는 일이라면 이골이 난 그로서도 처음 겪는 일이었다. 이미 서른도 되기 전인 1930년에 박용철, 김영랑 등 내로라 하는 시단의 총아들과 함께 '시문학'을 창간, 무수한 시들을 천거하고 평해 온 그였다. 39년 창간된 '문장'지의 시 심사위원으로 나서 조지훈, 박두진, 박목월 등 청록파 3인과 이한직, 박남수 등 쟁쟁한 신인들을 뽑아 올린 공적은 벌써부터 문학사적 기록이 될 정도였다. 그런 그가, 해방 이후 좌우익으로 갈린 문단의 틈새에서 문학적 지향점도 열정도 잃어버렸다고 자학하던 차에 신기하게도 문학작품 선발 때문에 갈등을 겪는 셈이었다.   용정제1중학교에 있는 윤동주 시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육필 시집 원고. 룡정 명동의 윤동주 생가. 그는 해방 직전 유명을 달리한 한 젊은이의 시 원고를 보고 있는 중이었다. 40대 중반 나이로 당대 최고의 권위를 누리고 있는 시인이었지만, 그보다는 전해에 창간한 경향신문의 주간(현재의 주필)으로서 비명에 죽은 한 시인이 남긴 시편들 중 한 편을 뽑아 이 세상에 처음으로 내세우는 일을 맡은 것이다. 시인으로 등단하는 순간 이미 그 이름 앞에 '故'(고) 자를 붙여야 하는 사람은 1917년 간도 출신으로 서울 연희전문 문과를 졸업했다. 일본 도쿄의 닛교 대학에서 수학하다, 교토의 도시샤 대학 영문과로 편입해 다니던 중 독립운동 혐의로 체포돼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복역 중 44년 2월 옥사한 그의 이름은 윤동주였다. 정지용은 읽을수록 그의 시가 슬픔과 열정을 불러일으켰고, 생각할수록 그 생애는 뜨겁고 비통했다. 소리를 내어서 시를 읽으면 눈앞에 병든 세상을 아파하고 괴로워하고 참회하는 젊은이의 표정이 살아나는 듯했다. #죽은 시인을 되살리려는 친구들 정지용에게 맨 처음 이런 갈등을 선물한 사람은 윤동주의 연전 동기생으로 46년 10월 경향신문 창간 때부터 조사부 기자로 있은 강처중이었다. "시를 잘 쓰는 동기생이 있었는데 선생님 시를 무척 좋아했어요." 그런 얘기는 정지용으로서는 자주 들어온 편이었다. 게다가 일제에 개죽음을 당한 청년이 한둘도 아니던 터라 그저 가슴만 먹먹할 뿐 별로 호기심이 일지 않았다. 특히 해방 후 좌익 문사들이 문학가동맹을 창립하면서 중앙위원으로 정지용의 이름을 올린 일로부터 좌우익 모두에게 농락당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어 문학 얘기는 애써 피해오던 차였다. 도쿄에 있을 때 윤동주가 강처중에게 보냈다는 시는 모두 다섯편이었다. 부드러운 듯하면서도 안으로 힘이 꽉 차 있는 듯 보이는 윤동주의 육필을 보고 나서야 정지용의 마음 속에서 알 수 없는 사명감 같은 것이 꿈틀거렸다. "저희들은 동주가 쓴 시를 모아 시집을 내려고 합니다." 유고 시집 발간 뜻을 밝힌 강처중은 며칠 뒤 윤동주의 연전 후배로 서울대에 편입해 다니던 정병욱(서울대 교수 역임)을 데려왔다. 정병욱은 윤동주가 연전 졸업 한 해 전 발간하려 했다는 친필 시집 원고를 정지용에게 펼쳐보였다. "사정이 여의치 않아 시집을 내지 못한 동주형은 대신 필사본으로 세 권을 만들어 본인이 한 권, 은사 이양하 교수 한 권, 그리고 제게 한 권을 줬습니다. 그 뒤 동주 형은 감옥에 갇혔고, 저는 학병에 끌려갔지요. 우리가 다 죽어도 이 시집만은 남겨져야 한다는 생각에서 어머니에게 신신당부해 남겨 두었습니다." 지은이도 죽고, 보관하던 사람도 사선을 넘어서는 우여곡절 끝에 남은 시집 원고에는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제목이 붙어 있었고, 모두 19편이 들어있었다. 모두 쉽게 보아 넘길 수 없는 것들이었다. 윤동주라는 생면부지의 시인의 시와 생애가 준 감동과, 그 친구들의 적극성이 결국 정지용 입에서 책임 있는 말을 하게 하고 말았다. "시집을 내기 전에 우선 신문에 실어서 세상에 알리도록 하세." 이후 정지용은 윤동주의 돋보이는 시편들을 베껴 쓰고 빌리고 해서 10여편을 가방에 넣고 다녔다. 이제 윤동주의 사후 2주기를 앞두고 있었다. #시인 탄생, 우리의 자랑 정지용은 고심 끝에 윤동주가 42년 6월에 쓴, 유작 중에서 가장 마지막에 쓴 것으로 추측되는 시 한 편을 택했다. 바로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려/육첩방은 남의 나라"로 시작되는 '쉽게 씌어진 시'였다. '육첩방'은 일본의 다다미 방을 뜻한다. 자기 나라를 빼앗은 침략국에 유학가 있으면서 참다운 삶의 길을 찾으려는 자의 몸부림이 잘 묻어나는 시였다. 아마도 정지용은 특히 시의 마지막을 보았을 것이다.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어두운 시대를 욕되게 살아가는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을 딛고, 이제 새로 태어날 자신과 만나고 있는 역동적인 전환으로 정리된 대목이다. 이 전환은 현실 삶에서 시인의 죽음으로 탈바꿈하고 말았다. 정지용은 그 비극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당시 경향신문은 목·일요일에만 4면, 다른 날은 2면을 발행했다. 정지용은 2월 13일 목요일자 4면에 이 시의 전문을 싣고, 간단한 해설을 달았다. "간도 명동촌 출생. (……) 복강(지금의 후쿠오카)형무소에서 복역 중 음학한 주사 한 대를 맞고 원통하고 아까운 나이 29세로 갔다. 일황 항복하던 해 2월26일에 일제 최후 발악기에 '불령선인'이라는 명목으로 꽃과 같은 시인을 암살하고 저이도 망했다. 시인 윤동주의 유골은 용정동 묘지에 묻히고 그의 비통한 시 10여편은 내게 있다. 지면이 있는 대로 연달아 발표하기에 윤군보다도 내가 자랑스럽다-지용." 험악한 세상을 뜻깊게 살려고 몸부림치다 비명에 간 한 젊은 시인을 소개하는 뛰어난 선배 시인의 자랑. 윤동주는 이렇게, 우리에게 슬픔과 분노로 와서 어느덧 그런 자랑을 선사하는 존재로 살아남게 되었다. 〈박덕규/ 소설가·단국대 교수〉
1109    윤동주 시집 초판본의 초판본; 세로쓰기가 가로쓰기로 댓글:  조회:5021  추천:0  2016-02-19
정음사 대표 최영해의 장남 최동식 교수(외솔 최현배 손자), 최초본 공개 (연합뉴스)  = 1948년 출판사 정음사에서 발간한 윤동주(1917~1945) 시인의 유고시집이자 첫 시집인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는 '서시' '별 헤는 밤' '십자가' '쉽게 씌여진 시' 등 주옥같은 시가 담겨 있다. 생전 시집을 한 편도 내지 못하고 1943년 독립운동 혐의로 체포돼 1945년 2월 젊은 나이에 안타깝게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3주기 추도식은 외롭지 않았다. 윤동주 시인의 3주기(1948년 2월16일) 추도식에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최초본이 헌정됐다는 증언이 나왔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펴낸 정음사 최영해(1914~1981) 대표의 장남 최동식(71) 고려대 화학과 명예교수는 윤동주 시인의 3주기 추도식에 헌정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최초본을 공개했다.   최 교수는 선친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오랫동안 간직하던 최초본을 공개한다며 윤동주 시인의 지인들이 시인의 3주기에 맞춰 시집 출간을 준비했는데 출간이 늦어지자 급히 만든 시집 10권을 추도식에 헌정했다는 얘기를 선친에게서 전해 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시집의 본문을 다 만들어 발간일을 1월30일로 잡았는데 표지 때문에 발간을 못 하고 있다가 동대문 시장에서 구한 갈포벽지로 추정되는 섬유질로 된 벽지를 마분지에 입혀 표지를 만든 뒤 시집 10권을 급하게 제본해 3주기 추도식에 가져갔다"고 전했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최초본은 같은 해 발간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초판본과 정지용 시인이 쓴 서문, 본문, 인쇄 및 발행 일자(1948년 1월20일 인쇄·1948년 1월30일 발행), 속표지 등은 같지만, 파란색의 겉표지가 없다. 최 교수는 "본문은 (초판본과) 다 똑같고 겉표지만 다르다"면서 "초판본은 대략 1천 부정도 만든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 중 10권만 따로 뽑아서 제본해 3주기 추도식에 가져갔고 나머지는 제대로 된 파란색 표지를 만들어 한 달 후쯤 발간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또 "추도식이 끝나고 모였던 사람들이 시집을 한 권씩 나눠 가졌다고 한다"고 전했다. 3주기 추도식에는 윤동주 시인의 동생인 윤일주, 윤동주 시인의 후배로 그의 시를 보관했던 정병욱, 시집에 추도시를 쓴 유영, 발문을 쓴 경향신문 기자 강처중 등 지인들이 참석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최 교수는 덧붙였다. 시집 본문 곳곳에는 잉크펜으로 그은 표시 등이 남아 있다. 최 교수는 "아버님이 나중에 재판을 낼 경우에 대비해 삭제할 부분 등을 표시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정음사는 우리말 연구와 보급에 평생을 바친 한글학자 외솔 최현배(1894~1970) 선생이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재직하던 당시 강의를 위해 '우리말본' 중 '소리갈'을 등사본으로 찍은 것을 계기로 1928년 설립됐다. 이후 최현배 선생의 아들 최영해 씨가 대표를 맡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등 문학 작품과 국문학 서적 등을 펴냈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초판본은 당시 보기 드물게 가로쓰기를 택했다. 최 교수는 "해방 직후 당시 대부분 세로쓰기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써내려오는 방식으로 책을 펴냈는데 한글 가로쓰기를 주창한 할아버지(최현배 선생)의 뜻을 아버님이 실천에 옮긴 것"이라면서 "윤동주 시인이 할아버지에게서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고 말했다. 최동호 고려대 국문과 명예교수는 "그런 행사가 있었다는 것은 들었지만 '초판의 초판'으로 볼 수 있는 그 시집을 가져다가 추모 행사를 했다는 것은 처음 듣는 얘기"라고 밝혔다. '윤동주 평전'을 펴낸 사학자 송우혜 선생은 "윤동주 시인의 지인들이 1948년 소공동 플라워 다방에서 3주기 추도식을 가졌다"면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3주기에 맞춰 펴낸 것이기 때문에 추도식에 초판본이 헌정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1108    별이 시인 - "부끄러움의 미학" 댓글:  조회:6045  추천:0  2016-02-19
                별헤는밤   季節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속의 별들을 다 헤일듯합니다。 가슴속에 하나 둘 색여지는 별을 이제 다 못헤는것은 쉬이 아츰이 오는 까닭이오、 來日밤이 남은 까닭이오、 아직 나의 靑春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 니다。 별하나에 追憶과 별하나에 사랑과 별하나에 쓸쓸함과 별하나에 憧憬과 별하나에 詩와 별하나에 어머니、어머니、 어머님、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식 불러봅니다。 小學校때 冊床을 같이 햇든 아이들의 일홈과、佩、鏡、玉 이런 異國少女들의 일홈과 벌서 애기 어머니 된 게집애들의 일홈과、가난한 이웃사람들의 일홈과、비둘기、강아지、토 끼、노새、노루、「랑시쓰․쨤」 「라이넬․마 리아․릴케」 이런 詩人의 일홈을 불러봅 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슬이 멀듯이、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北間島에 게십니다。 나는 무엇인지 그러워 이많은 별빛이 나린 언덕우에 내 일홈자를 써보고、 흙으로 덥허 버리엿습니다。 따는 밤을 새워 우는 버레는 부끄러운 일홈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一九四一、十一、五.) 그러나 겨을이 지나고 나의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우에 파란 잔디가 피여나듯이 내일홈자 묻힌 언덕우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 할게외다。       암흑기를 빛낸 별의 시인 윤동주(尹東柱.1917.12.30∼1945.2.16)             시인. 북간도 명동촌(明東村) 생. 아명은 해환(海煥). 기독교 장로인 조부의 영향을 받고 성장, 평양 숭실 중학을 다니다가 용정(龍井) 광명중학(光明中學) 전학, 졸업(38). 연희 전문 문과 졸업(41) 후 일본 입교대(立敎大) 영문과 입학(42), 동년 도오시샤(同志社) 대학 영문과 전학 중 1943년 여름 방학을 맞아 귀국 직전 독립 운동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검거되어(43) 2년 형을 받고(44) 규슈(九州) 후쿠오카(福岡) 감옥에서 복역 중 1945년 2월 29세를 일기로 옥사했다. 당숙인 윤영춘(尹永春)이 확인한 죄목은 ‘사상 불온, 독립 운동, 비일본신민, 서구사상 농후’였다. 그의 유해는 그를 낳은 북간도 용정에 묻혀 있다. ‘부끄러움의 미학’으로 불린다. 1968년 시비가 모교 연세대학교 안에 세워졌다. 윤동주는 29세의 젊은 나이로 해방을 앞둔 1945년 2월 일본의 후쿠오카 감옥에서 안타깝게 순절한 저항 시인이다. 그가 옥사하고 3년 뒤에 나온 유고시집(遺稿時集)은 그가 연희전문 졸업을 기념하기 위하여 뜻 깊게 남긴 자필시고(自筆時稿) 3부 중에서 1부를 유일하게 보관하던 친구 정병욱과 아우 윤일주에 의하여 로 출간되었다.         윤동주는 대부분의 작품마다 작품의 연대를 적어놓고 있는데 이 1939년 9월로, < 별헤는 밤>이 1941년 11월 20일로 되어 있다. 이로 보아 자필 시고 3부를 만들 무렵에는 이 가장 마지막 쓴 작품으로 추정된다. 윤동주는 그의 시집 의 제목에서 시사하듯이 하늘과 별과 바람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던 것 같다.그에게 있어서 하늘과 별은 주로 그리움과 꿈의 대상으로 나타나 있다. 이 그리움과 꿈은 자신의 삶에 대한 외로움이며 슬픔이기도 하다. 그의 시세계는 그리움과 슬픔으로 점철된 세계였고 그러한 세계에 대한 지향은 하늘과 바람과 별로 투영되었다. 하늘과 바람과 별은 윤동주에게 있어서는 현실의 괴로움을 초월할 수 있는 유일한 표상이었다.     육필 원고   1943년 7월 윤동주는 방학을 맞아 고향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던 중에 송몽규 등과 함께 일본 특고경찰에 체포되었다. 중국 군관학교 입교 전력 때문에 ‘요시찰인’으로 일본 경찰의 감시를 받던 송몽규와 더불어 조선인 유학생을 모아놓고 조선의 독립과 민족문화의 수호를 선동했다는 죄목이었다. 특고경찰은 여기에 ‘재쿄토 조선인 학생 민족주의 그룹사건’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윤동주와 송몽규는 1944년 3월과 4월 쿄토지방재판소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각각 징역 2년의 형을 선고 받고, 후쿠오카형무소로 이감되었다. 그리고 1년 뒤인 1945년 2월 16일 원인 불명의 사인으로 후쿠오카형무소에서 29세의 짧지만 굵은 생을 마감하였다. 윤동주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아버지 윤영석과 당숙 윤영춘이 후쿠오카 형무소에 도착해 송몽규를 면회했을 때, 송몽규는 피골이 상접한 모습으로 감옥에서 정체 불명의 주사를 놓아 이 모양이 되었다는 증언을 했다. 윤동주의 죽음이 ‘생체실험’ 때문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갖게 하는 대목이었다. 그 같은 증언을 한 송몽규 또한 20일 남짓 지난 3월 7일 윤동주의 뒤를 따라 옥중 순국하였다. 윤동주의 유해는 3월 6일 문재린 목사의 집례로 북간도 용정 동산의 중앙장로교회 묘지에 안장되었다. 그 해 6월 그의 무덤 앞에는 집안 사람들의 정성으로 ‘시인 윤동주지묘’라는 비석이 세워졌다. 윤동주의 유시는 해방 후 연희전문 시절 절친한 벗이었던 강처중이 자신이 보관하고 있던 유고와 후배 정병욱이 가지고 있던 필사본 시집 등 31편의 시를 모아 1948년 1월 정지용의 서문과 강처중의 발문을 붙인 시집 를 정음사에서 출간하면서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1968년 11월에 유작 가 새겨진 가 모교인 연세대 교정에 건립되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90년 8월 15일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윤동주는 해방을 눈앞에 두고 일제의 어두운 옥중에서 젊은 나이로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 저항 시인이다. 그의 외로운 삶과 시편들은 오히려 어두운 밤하늘의 별처럼 더욱 빛을 발할 것이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이' 살다 간 윤동주, 그는 암흑기에 산 우리 민족을 가장 투철하고 아름답게 빛낸 별의 시인이었다.
1107    윤동주 유고시집이 나오기까지... 댓글:  조회:5904  추천:0  2016-02-19
윤동주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정지용의 서문   서(序)―랄 것이 아니라,   내가 무엇이고 정성껏 몇 마디 써야만 할 의무를 가졌건만 붓을 잡기가 죽기보담 싫은 날, 나는 천의를 뒤집어쓰고 차라리 병(病) 아닌 신음을 하고 있다. 무엇이라고 써야 하나? 재조(才操)도 탕진하고 용기도 상실하고 8․15 이후에 나는 부당하게도 늙어간다. 누가 있어서 “너는 일편(一片)의 정성까지도 잃었느냐?” 질타한다면 소허(少許) 항론(抗論)이 없이 앉음을 고쳐 무릎을 꿇으리라. 아직 무릎을 꿇을 만한 기력이 남았기에 나는 이 붓을 들어 시인 윤동주의 유고(遺稿)에 분향(焚香)하노라.   겨우 30여 편 되는 유시(遺詩) 이외에 윤동주의 그의 시인됨에 관한 목증(目證)한 바 재료를 나는 갖지 않았다. ‘호사유피(虎死留皮)’라는 말이 있겠다. 범이 죽어 가죽이 남았다면 그의 호피(虎皮)를 감정하여 ‘수남(壽男)’이라고 하랴? ‘복동(福童)’이라고 하랴? 범이란 범이 모조리 이름이 없었던 것이다. 내가 시인 윤동주를 몰랐기로소니 윤동주의 시가 바로 ‘시’고 보면 그만 아니냐? 호피는 마침내 호피에 지나지 못하고 말 것이나, 그의 ‘시’로써 그의 ‘시인’됨을 알기는 어렵지 않은 일이다.     ........... 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곳에 찾아왔다. 그러나 나의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을 모른다. 나한테는 병이 없다고 한다. 이 지나친 시련, 이 지나친 피로, 나는 성내서는 안 된다. - 그의 유시(遺詩) 「병원」의 一節     그의 다음 동생 일주 군과 나의 문답, ― “형님이 살었으면 몇 살인고?” “설흔한 살입니다.” “죽기는 스물아홉에요―” “간도에는 언제 가셨던고?” “할아버지 때요.” “지나시기는 어떠했던고?” “할아버지가 개척하여 소지주 정도였습니다.” “아버지는 무얼 하시노?” “장사도 하시고 회사에도 다니시고 했지요.”   “아아, 간도에 시(詩)와 애수(哀愁)와 같은 것이 발효(醱酵)하기 비롯한다면 윤동주와 같은 세대에서 부텀이었고나!” 나는 감상하였다.     .......... 봄이 오면 죄를 짓고 눈이 밝어 이브가 해산하는 수고를 다하면   무화과 잎사귀로 부끄런 데를 가리고   나는 이마에 땀을 흘려야겠다. - 「또 태초의 아침」의 一節       다시 일주 군과 나와의 문답, - “연전을 마치고 동지사에 가기는 몇 살이었던고?” “스물 여섯 적입니다.” “무슨 연애 같은 것이나 있었나?” “하도 말이 없어서 모릅니다.” “술은?” “먹는 것 못 보았습니다.” “담배는?” “집에 와서는 어른들 때문에 피우는 것 못 보았습니다.” “인색하진 않았나?” “누가 달라면 책이나 샤쓰나 거져 줍데다.” “공부는?” “책을 보다가도 집에서나 남이 원하면 시간까지도 아끼지 않읍데다.” “심술(心術)은?” “순하디 순하였습니다.” “몸은?” “중학 때 축구선수였습니다.” “주책(主策)은?” “남이 하자는 대로 하다가도 함부로 속을 주지는 않읍데다.”     ............... 코카사스 산중에서 도망해온 토끼처럼 둘러리를 빙빙 돌며 간을 지키자.   내가 오래 기르던 여윈 독수리야! 와서 뜯어 먹어라, 시름없이   너는 살지고 나는 여위어야지, 그러나, - 「간」의 一節     노자 오천언(五天言 )에, ‘허기심(虛基心) 실기복(實基腹) 약기지(弱其志) 강기골(强其骨 )’이라는 구가 있다. 청년 윤동주는 의지가 약하였을 것이다. 그렇기에 서정시에 우수한 것이겠고, 그러나 뼈가 강하였던 것이리라. 그렇기에 일적(日賊)에게 살을 내던지고 뼈를 차지한 것이 아니었던가? 무시무시한 고독에서 죽었구나! 29세가 되도록 시도 발표하여 본 적도 없이! 일제 시대에 날뛰던 부일문사(附日文士) 놈들의 글이 다시 보아 침을 배앝을 것뿐이나, 무명(無名) 윤동주가 부끄럽지 않고 슬프고 아름답기 한이 없는 시를 남기지 않았나? 시와 시인은 원래 이러한 것이다.     ..................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 「십자가」의 一節     일제 헌병은 동(冬) 섣달에도 꽃과 같은, 얼음 아래 다시 한 마리 잉어와 같은 조선 청년 시인을 죽이고 제 나라를 망치었다.   뼈가 강한 죄로 죽은 윤동주의 백골은 이제 고토(故土) 간도에 누워 있다.     고향에 돌아온 날 밤에 내 백골이 따라와 한방에 누웠다.     어둔 방은 우주로 통하고 하늘에선가 소리처럼 바람이 불어온다.     어둠 속에 곱게 풍화작용하는 백골을 들여다 보며 눈물 짓는 것이 내가 우는 것이냐 백골이 우는 것이냐 아름다운 혼이 우는 것이냐 지조 높은 개는 밤을 새워 어둠을 짖는다.     어둠을 짖는 개는 나를 쫓는 것일 게다.     가자 가자 쫓기우는 사람처럼 가자 백골 몰래 아름다운 또 다른 고향에 가자. -「또 다른 고향」     만일 윤동주가 이제 살아 있다고 하면 그의 시가 어떻게 진전하겠느냐는 문제.   그의 친우 김삼불 씨의 추도사와 같이 틀림없이, 아무렴! 또 다시 다른 길로 분연 매진할 것이다. - 1947년 12월 28일 지 용               강처중의 「발문」   동주는 별로 말주변도 사귐성도 없었건만 그의 방에는 언제나 친구들이 가득 차 있었다. 아모리 바쁜 일이 있더라도 “동주 있나” 하고 찾으면 하던 일을 모두 내던지고 빙그레 웃으며 반가히 마조앉아주는 것이었다. “동주 좀 걸어보자구” 이렇게 산책을 청하면 싫다는 적이 없었다. 겨울이든 여름이든 밤이든 새벽이든 산이든 들이든 강까이든 아모런 때 아모데를 끌어도 선듯 따라 나서는 것이었다. 그는 말이 없이 묵묵히 걸었고, 항상 그의 얼굴은 침울하였다. 가끔 그러다가 외마디 비통한 고함을 잘 질렀다. “아-” 하고 나오는 외마디 소리! 그것은 언제나 친구들의 마음에 알지 못할 울분을 주었다. “동주 돈 좀 있나” 옹색한 친구들은 곳잘 그의 넉넉지 못한 주머니를 노리었다. 그는 있고서 안 주는 법이 없었고 없으면 대신 외투든 시계든 내주고야 마음을 놓았다. 그래서 그의 외투나 시계는 친구들의 손을 거쳐서 전당포 나드리를 부즈런히 하였다. 이런 동주도 친구들에게 굳이 거부하는 일이 두 가지 있었다. 하나는 “동주 자네 시 여기를 좀 고치면 어떤가” 하는데 대하여 그는 응하여 주는 때가 없었다. 조용히 열흘이고 한 달이고 두 달이고, 곰곰이 생각하여서 한 편 시를 탄생시킨다. 그때까지는 누구에게도 그 시를 보이지를 않는다. 이미 보여주는 때는 흠이 없는 하나의 옥이다. 지나치게 그는 겸허온순하였건만, 자기의 시만은 양보하지를 안했다. 또 하나 그는 한 여성을 사랑하였다. 그러나 이 사랑을 그 여성에게도 친구들에게도 끝내 고백하지 안했다. 그 여성도 모르고 친구들도 모르는 사랑을 회답도 없고 돌아오지도 않는 사랑을 제 홀로 간직한 채 고민도 하면서 희망도 하면서…… 쑥스럽다 할까 어리석다 할까? 그러나 이제와 고쳐 생각하니 이것은 하나의 여성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이루어지지 않을 ‘또 다른 고향’에 대한 꿈이 아니었던가. 어쨌던 친구들에게 이것만은 힘써 감추었다. 그는 간도에서 나고 일본 복강에서 죽었다. 이역(異域)에서 나고 갔건만 무던이 조국을 사랑하고 우리말을 좋아 하더니 - 그는 나의 친구도 하려니와 그의 아잇적동무 송몽규와 함께 ‘독립운동’의 죄명으로 2년형을 받아 감옥에 들어간 채 마침내 모진 악형에 쓸어지고 말았다. 그것은 몽규와 동주가 연전을 마치고 경도에 가서 대학생 노릇하던 중도의 일이었다. “무슨 듯인지 모르나 마지막 외마디 소리를 지르고 운명했지요. 짐작컨대 그 소리가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는 듯 느껴지더군요.” 이 말은 동주의 최후를 감시하던 일본인 간수가 그의 시체를 찾으러 복강 갔던 그 유족에게 전하여준 말이다. 그 비통한 외마디 소리! 일본 간수야 그 뜻을 알리만두 저도 그 소리에 느낀 바 있었나 보다. 동주 감옥에서 외마디 소리로서 아조 가버리니 그 나이 스물아홉, 바로 해방되던 해다. 몽규도 그 며칠 뒤 따라 옥사(獄死)하니 그도 재사(才士)였느니라. 그들의 유골은 지금 간도에서 길이 잠들었고 이제 그 친구들의 손을 빌어 동주의 시는 한 책이 되어 길이 세상에 전하여지려 한다. 불러도 대답 없을 동주 몽규었만 헛되나마 다시 부르고 싶은 동주! 몽규! - 강처중   -『윤동주 평전』중에서   윤동주 평전 소개글 : 작가이자 사학자인 송우혜가 되살려낸 윤동주의 순결한 초상 의지와 신명의 인물로서 그네타기까지 즐겼던 증조부, 소박한 농부이자 관후한 장자였던 조부, 시적 기질을 지닌 창백한 지식인이었던 부친, 따뜻하고 너그러운 인품의 어머니. 동경제대 출신 노스승 명희조의 날카로운 역사 인식. 고종사촌 송몽규의 파란 많은 인생 역정. 그의 시 가운데 가장 즐겁고 밝은 시 「봄」의 배경이 된 성악 전공의 동경 유학 여학생. 웃는 얼굴로 한인들의 혼을 빼던 일본 대륙낭인 일고병자랑. 형무소 간수들에게서 '함경도 미남'이란 별칭으로 불렸던 사형수 강처중. 선배의 작품을 눈 밝게 알아보고 소중하게 보존해낸 정병욱…… 그처럼 다양했던 주변인물들과 함께 살다간 다채로운 삶의 자취, 북간도의 역사와 당시의 시대상황, 일경의 극비취조문서, 일본 경도재판소의 판결문 등을 비롯한 각종 자료들에 대한 예리하고 집요한 추적과 분석을 통해서 황홀하게 떠오른 민족시인 윤동주의 삶과 시. - 푸른역사 출판부     송우혜는 견고한 작가이며 사학자이다. 이번에 그가 이룩해낸 윤동주의 삶과 죽음 그리고 그 문학의 순결한 초상은 이 시대가 뜻하는 문학행위의 일단이자 역사행위의 한 열매에 값하고 있다. 결코 과장하지 않고 일탈하지 않는 충실한 탐구정신과 정열과 책임이 어우러진 이 업적을 나는 크게 자랑한다. - 고은     송우혜 씨의 '윤동주 평전'은 풍부한 자료 섭렵과 빈틈없는 현장답사로 씌어진 역저로 윤동주 연구에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하였다. 그의 치밀한 자료 검증은 명망 높은 소설가로서의 상상력과 역사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조화되어 더욱 생동하고 있다는 점에서 현대문학 연구자들에게 미개척의 영역을 향한 새로운 도전을 강요한다. - 최동호   /////////////////////////  윤동주의 시를 세상에 알린 사람은 경향신문 주필인 정지용 시인이다. 윤동주의 친구인 강처중은 경향신문 기자로 있으면서 1947년 윤동주의 시를 정지용에게 보였다. 윤동주는 생전에 정지용의 시를 좋아했다. 정지용은 윤동주 시의 뛰어난 작품성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1947년 2월 13일자 경향신문에 윤동주의 시 ‘쉽게 씌어진 시’가 처음 실렸다. 정지용은 1948년 발행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시집에 서문을 실었다. 서문 일부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일제 헌병은 동(冬) 섣달에도 꽃과 같은, 얼음 아래 다시 한마리 잉어와 같은 조선청년 시인을 죽이고 제 나라를 망치었다. 뼈가 강한 죄로 죽은 윤동주의 백골은 이제 고토 간도에 누워있다.” //////////////////////////////////////////////////////// "잊어서는 안되는 분들인데…." 정병욱이 고개를 들고 하늘을 쳐다보았다. 그 앞에 앉은 윤동주의 아우 윤일주가 침통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그들은 1948년 1월30일 발간된 초판본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펼쳐 놓고 말을 아끼고 있었다. 55년 초, 윤동주 서거 10주기를 앞두고 있는 때였다. 윤동주가 시인다운 면모를 갖춘 지면에 처음 소개된 것은 앞서 말한 대로 47년 2월13일자 경향신문에서였다. 이후 같은 해 3월13일자에 '또다른 고향'이, 7월27일자에 '소년'이 같은 지면에 게재되었고, 아마도 정지용이 그해 7월 초에 경향신문을 그만두고 이화여대 교수로 복직하지 않았다면 시 몇 편이 더 게재되었을 것이다.   ‘서시’ 의 육필 원고. 정지용(왼쪽), 강처중. 그러나 정지용은 자신을 좋아한 후배 시인 윤동주와의 인연을 더 한층 뜻깊게 이어간다. 47년 2월16일 윤동주와 송몽규를 기리는 추도회를 가진 바 있는 친구들은 이후 유고 시집 발간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 강처중 등 친구들이 시집의 서문 집필자로 정지용을 지목한 것은 거의 필연적인 일이었을 것이다. 정병욱이 보관한 '서시'로 시작되는 원래 시집 원고 19편과 강처중이 보관하고 있던 시들에서 가려 뽑은 시들을 합해 모두 31편을 담은 윤동주 유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정지용의 서문과 강처중의 발문을 달고, 3주기 무렵인 48년 1월 정음사에서 발간된다. 정지용은 각박해진 이념 시대에 생각을 미루고 붓을 머뭇거리던 태도를 씻고 보기 드문 품격의 문장을 선보인다. "청년 윤동주는 의지가 약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서정시에 우수한 것이겠고, 그러나 뼈가 강하였던 것이리라. 그렇기에 일적(日賊)에게 살을 내던지고 뼈를 차지한 것이 아니었던가? 무시무시한 고독 속에서 죽었구나! 29세가 되도록 시도 발표하여 본 적도 없이!" 윤동주에게 "동 섣달에도 꽃과 같은, 얼음 아래 다시 한 마리 잉어와 같은" 시인이라는 찬사를 바칠 수 있었던 사람이 정지용이었다. 한편, 정지용에게 윤동주를 알리고, 연전 동창생들과 후배 정병욱, 그리고 윤동주의 아우 윤일주를 독려하면서 유고시집 발간을 주도한 인물이 강처중이다. 정병욱과 윤일주는 윤동주를 세상에 알린 두 사람의 공적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그들은 윤동주 서거 10주기를 맞아 누이 혜원이 가지고 온 윤동주의 다른 시 원고를 보충해 새롭게 선보이는 증보판 시집에서 두 사람의 글을 삭제하고 함께 입을 다물기로 묵계하고 있었다. 대시인 정지용은 이때, 6·25때 남침한 북한군을 따라 북으로 가 행방불명된 시인이었다. 강처중은, 그때껏 믿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좌익 활동을 배후에서 지휘한 인물로 지목되어 사형 언도를 받은 인물이었다. 윤동주에게 있어 빼놓을 수 없는 두 인물은 이렇듯 한국 역사에서 지워져 갔다. 그리고 오랜 세월이 흘러 정지용이 우리 곁에 먼저 돌아왔다. 이제는 '빨갱이'였던 강처중마저 소설가 송우혜에 의해, 사형수였다가 6·25의 와중에 감옥을 나와 '쏘련'을 향해 월북한 뒤 소식 없는 인물로 취재되고 있다. 윤동주는 우리에게 읽히고 사랑 받으면서 절로 굴곡의 역사를 중심에서 지켜온 인물로 살아 있었던 것이다.        
1106    윤동주 시인의 언덕과 序詩亭 댓글:  조회:4805  추천:0  2016-02-19
  윤동주 시인의 언덕 [윤동주 시인의 생애] -의 천부적 시인, 일제식민지배하에서 요절한 통한의 짤막한 생애 1917년 12월 30일, 북간도서 출생. -명동소학교 은진중학교 숭실중학교 편입, 광명중학교 졸업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했다. 1941년 12월 27일 연희전문학교 졸업. -틈틈이 쓴 시 19편을 골라 시집 를 내려다 이루지 못했다. 1943년 7월 14일, 귀향 바로 전 사상범으로 일경에 체포돼 교토 카모가와 경찰서에 구금되. -이듬해 교토지방재판소서 독립운동죄목으로 2년형언도로 후쿠오카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945년 2월 16일, 후쿠오카형무소서 옥사. -그 해 3월 간도 용정에 유해를 안장, 그의 죽음은 일제말기 생체실험에 의한, 옥살이 중 정체를 알 수 없는 주사를 맞아왔다고 전해진다. (1) 창의문 쪽에서 올라오는 윤동주 시인의 언덕의 초입 (2)  창의문 쪽에서 올라오는 윤동주 시인의 언덕의 초입 [윤동주 시인의 언덕] 서울특별시 종로구는 2009년 7월 11일 윤동주 시인의 문학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인왕산 자락 청운공원(부암동)에 [시인의 언덕]을 조성하고 이곳에 을 새긴 시비(詩碑)룰 건립하였다. 윤동주 시인은 연희전문학교 재학시절 종로구 누상동에 있던 소설가 김송의 집에 하숙하면서 등 대표작들을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윤동주 시인은 인사동과 광화문, 인왕산 자락을 거닐며 시상을 구상했을 것으로 보인다. (3) 창의문 쪽에서 올라오는 윤동주 시인의 언덕 내부의 길로,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 본 길. (4)  윤동주 시인의 언덕 내부 오르는 길 중간 부분쯤에 평판으로 놓여진 [시인 윤동주 영혼의 터] 비. 윤동주를 흠모하고 그의 시와 애국혼을 기리는 시민이 꽃다발을 헌화하고 갔다. (시) [별헤는 밤] / 윤동주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차 있읍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합니다. 가슴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하나에 추억과 별하나에 사랑과 별하나에 쓸쓸함과 별하나에 동경과 별하나에 시와 별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 마디씩 불러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 했든 아이들의 이름과, 패(佩), 경(鏡), 옥(玉)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애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짬,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읍니다. 별이 아슬히 멀듯이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北間島)에 계십니다.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 많은 별빛이 나린 언덕 우에 내 이름자를 써 보고 흙으로 덮어 버리었읍니다.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우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우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게외다 "무시무시한 고독에서 죽었구나! 29세가 되도록 시도 발표하여 본 적도 없이!" 그의 사후 출간된 시집 서문에 정지용은 이렇게 썼다. (5)  윤동주 시인의 언덕 정상에 설치한 [윤동주 시인의 언덕] 碑. (6) 윤동주 시인의 언덕 정상에 설치한 [서시] 詩碑 (시) [서시] / 윤동주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입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7) 윤동주 시인의 언덕 정상에 설치한 [슬픈 族屬] 詩碑 (시) 슬픈 족속(族屬) / 윤동주 흰 수건이 검은 머리를 두르고 흰 고무신이 거친 발에 걸리우다. 흰 저고리 치마가 슬픈 몸집을 가리고 흰 띠가 가는 허리를 질끈 동이다. (1938. 9 ) (8) 윤동주 시인의 언덕 정상 부근에 있는 무대광장. (9) 부암동 인왕산 자락에서 윤동주 시인의 언덕으로 오르는 길이 내려다 보인다. 저아래 보이는 정자가 [서시정序詩亭]이다. (시) 십자가(十字架) / 윤동주 쫓아오던 햇빛인데 지금 교회당(敎會堂) 꼭대기 십자가에 걸리었습니다. 첨탑(尖塔)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종소리도 들려 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붉은 피를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10)  정면 가까이서 본 서시정序詩亭 (시) 간(肝) / 윤동주 바닷가 햇빛 바른 바위 위에 습한 간(肝)을 펴서 말리우자. 코카서스 산중(山中)에서 도망해 온 토끼처럼 둘러리를 빙빙 돌며 간을 지키자. 내가 오래 기르는 여윈 독수리야! 와서 뜯어먹어라, 시름없이 너는 살찌고 나는 여위어야지, 그러나 거북이야 다시는 용궁(龍宮)의 유혹에 안 떨어진다. 프로메테우스 불쌍한 프로메테우스 불 도적한 죄로 목에 맷돌을 달고 끝없이 침전(沈澱)하는 프로메테우스 (11) 옆에서 바라본 서시정序詩亭 (12) 윤동주 시인의 언덕에 핀 늦장미 (13) 윤동주 시인의 언덕을 半面 에워 싸고 있는 성곽. (14) 윤동주 시인의 언덕 마루쯤에 성곽이 꺾여져 끝나는 모서리 부분에 서있는 큰 소나무 (15) 윤동주 시인의 언덕, 성곽 끝의 큰 소나무 밑에는 전망대가 있다. (16) 윤동주 시인의 언덕 아래 갓길 도로옆 담장. (17) 성벽과 담장이 덩쿨 (시) [유언] / 윤 동주 후어-ㄴ한 방에 유언은 소리 없는 입놀림. 바다에 진주 캐러 갔다는 아들 해녀와 사랑을 속삭인다는 맏아들 이밤에사 돌아오나 내다봐라.... 평생 외롭든 아버지의 운명 감기우는 눈에 슬픔이 어린다 외딴집에 개가 짖고 휘양찬 달이 문살에 흐르는 밤. (18)  귀가길에 만난 가을풍광 (19)  귀가길에 만난 가을풍광(사진/함동진) (20) 문학문인인물 자료사진- *[윤동주시인의연보] -1917년 ( 1세) 12월 30일 만주국 간도성 화룡현 명동촌에서 본관이 파평인 부친 윤영석과, 독립운동가, 교육가인 규암 김약연 선생의 누이 김용 사이에서 장남으로 출생. 1910년에는 조부 윤하현이 기독교 장로교에 입교, 윤동주가 태어날 무렵에는 장로직을 맡게 되는데, 윤동주는 태어나자 유아 세례를 받는다. 윤동주는 본명이며 어릴 때 불리던 이름은 해환이다. 뒤에 [카톨릭 소년]지에 동요를 발표할 때 '윤동주(동주)' 또는 '윤동주(동주)'라는 필명을 쓴 적이 있다. 윤동주의 형제로는 누이 윤혜원, 동생 윤일주(성균관대 교수), 윤광주가 있다. / *1925년 ( 9세) 4월 4일, 만주국 간도성 화룡현에 있는 명동 소학교에 입학. 명동 소학교는 외삼촌 김약연이 설립한 규암서숙을 명동 소학교와 명동 중학교를 발전시킨 것으로, 윤동주가 재학할 당시는 중학교는 폐교된 상태였다. 당시의 급우로는 함께 옥사한 고종 사촌 송몽규, 문익환, 외사촌 길정우 등이 있다. / *1929년 (13세) 송몽규 등의 급우와 함께 벽보 비슷한 '세명동'이라는 등사판 문예지를 간행. 이 무렵 썼던 동요, 동시 등의 작품을 발표. / *1931년 (15세) 3월 25일, 명동 소학교를 졸업. 송몽규, 김정우와 명동에서 30리 남쪽에 있는 중국인 도시 대랍자에 있는 중국인 소학교 6학년에 편입. / *1932년 (16세) 4월, 캐나다 선교부가 경영하는 미션계 은진중학교에 입학. 재학중 급우들과 함께 교내 문예지를 발간하여 문예작품을 발표하는 한편, 축구 선수로도 활약. / *1934년 (18세) 12월 24일, '삶과 죽음', '초 한 대', '내일은 없다' 세편의 시 작품을 쓰다. 이날 이후 모든 자작품에 시를 쓴 날자 명기. / *1935년 (19세) 은진중학교에서 평양 숭실중학교 3학년에 편입. 숭실중학 시절 '남쪽 하늘', '창공', '거리에서', '조개껍질' 등의 시를 씀. / *1936년 (20세) 숭실중학교 폐교, 용정 광명학원 중학부 4학년에 편입. 간도 연길지방에서 발행되던 [카톨릭 소년]지에 동시 '병아리', '빗자루' 발표. / *1935년 (22세) 2월 17일, 광명중학교 5학년 졸업. 연희전문 문과에 송몽규와 함께 입학. / *1941년 (25세) 연희전문 문과에서 발행한 [문우]지에 '자화상', '새로운 길'을 발표. 12월 27일, 연희전문 문과를 졸업. 19편으로 된 자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졸업 기념으로 출간하려 했으나 미간. 이 무렵 윤동주의 집에서는 일제의 탄압에 못이기고, 또한 윤동주의 도일을 위해 성씨를 히라누마로 창씨함. / *1942년 (26세) 도쿄 릿쿄 대학 영문과에 입학. 가을(10월 1일)에는 교토 도시샤 대학 영문과에 편입. / *1943년 (27세) 7월, 첫학기를 마치고 귀향길에 오르기 직전 교토대학에 재학중인 송몽규와 사상범으로 체포되어 교토 키모가와 경찰서에 구금됨(7월 14일). / *1944년 (28세) 2월 22일 기소되고, 3월 31일, 일제 당국의 재판 결과 '독립운동'의 죄목으로 2년형(3년 구형)언도받아 큐슈의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 / *1945년 (29세) 2월 16일, 윤동주 사망. 시체 가져가라"라는 전보가 윤동주의 옥사 사실을 알려옴. 부친 윤영석과 당숙 윤일춘이 일본으로 건너감. 송몽규도 윤동주가 죽은 뒤 23일 만인 3월 10일 옥사. 3월 초, 용정 동산에 안장. / *1947년 2월 16정지용, 안병욱, 이양하, 김삼불, 정병욱 등 30여명이 모여 소공동 플로워 회관에서 윤동주 2주기 추도 모임을 갖다. / *1948년 1월 유고 31편을 모아 정지용의 서문으로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정음사에서 간행. / *1955년 2월 10주기 기념으로 유고를 보완, 88편의 시와 5편의 산문을 묶어 다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로 정음사에서 간행. / *1968년 11월 2일 연세대학교 학생회 및 문단, 친지 등이 모금한 돈으로 연희전문 시절에 지내던 기숙사 앞에 시비 건립.    
1105    무명詩人 댓글:  조회:4788  추천:0  2016-02-18
무명시인             /함명춘     그는 갔다 눈도 추운 듯 호호 손을 불며 내리는 어느 겨울, 가진 것이라곤 푸른 노트와 몇 자루의 연필밖엔 없었던 난 그가 연필을 내려놓은 것을 본 적이 없다 아니, 한 두어 번 부러진 연필을 깎을 때였을까 그가 연필을 들고 있을 때만큼은 언제나 바나나 같은 향기가 손에 와 잡히곤 하였다 그는 마을 어귀 가장 낮은 집에서 살고 있었다 마당엔 잎이 무성한 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밤낮없이 그는 푸른 노트에 무언가를 적어넣었다, 그러면 나비와 새 들이 하늘에서 날아와 읽고 돌아가곤 했다 그런 그를 사람들은 시인이라 불렀다 하지만 그가 어디에서 왔는지 이름은 뭔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인기척이라곤 낙엽 같은 노트를 찢어대는 소리일 뿐 아니, 밤보다 깊은 울음소릴 몇 번 들은 적이 있었을까 난 그의 글을 읽어본 적이 없다 하기야 나무와 새와 바람과 별 들이 그의 유일한 독자였으니 세상을 위해 쓴 게 아니라 세상을 버리기 위해 쓴 시처럼 난 그가 집 밖을 나온 것을 본 적이 없다 잠자는 것을 본 적이 없다 먹는 것도 본 적이 없다 밤낮없이 그는 푸른 노트에 무언가를 자꾸 적어넣었다 더이상 쓸 수 없을 만큼 연필심이 다 닳았을 때 담벼락에 도무지 읽을 수 없는 몇 줄의 시를 새겨넣고 그는 갔다 눈도 추운 듯 호호 손을 불며 내리는 어느 겨울 무명시인 끝내 그의 마지막 시는 세상 사람들을 감동시키지 못했다 그 몇 줄의 시를 읽을 수 있는 것들만 주위를 맴돌았다 어떤 날은 바람과 구름이 한참을 읽다가 무릎을 치며 갔다 누군가는 그 글이 그가 이 세상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발표한 시라 하고 또 누군가는 그건 글도 시도 아니라고 했지만 더이상 아무도 귀에 담지 않았다 그가 떠난 집 마당, 한 그루 나무만 서 있을 뿐 도무지 읽을 수 없는 몇 줄의 시처럼 세월이 흘러갔다, 흘러왔다   ------ 시인은 홀로 연필을 깎는다. 아무도 살지 않는 그 집에 들어와 연필을 깎으며 살기로 한 사람이다. 그는 연필을 깎으며 마른 나무 같은 글들을 노트 속에 심기 시작한다. 한 그루 연필이 노트 속으로 들어가고 또 한 그루의 연필이 노트 속에 심겨지는 동안 세월이 갔다. 그가 그 방으로 들어와 열심히 연필을 깎았기 때문이다. 연필로 시를 쓰면 볏짚 타는 냄새가 나고, 저물 무렵 연필 속에서 흘러나온 글씨 속에는 비 냄새가 난다는 사실을 그는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비가 오는 날 젖은 볏짚이 타는 냄새를 쓰고 싶어서 그는 혼자 연필을 깎는 사람이다. 감추어 두었던 울음이나 세상이 자신을 지나가며 남겼던 것들이 혼자 헛웃음이 되면 그의 연필에서 흘러나온 젖은 볏짚들은 두엄이 되어 노트 귀퉁이에 쌓여간다. 그와 함께 그윽하게 썩어가기로 한 것이다. 그는 시인이다. ‘가진 것이라곤 푸른 노트와 몇 자루의 연필’밖에 없는, 허명을 남기는 일보다 자신의 노트 속에 새들을 남기겠다고 다짐한, 그래 진짜 시인은 부러진 연필을 깎아 새들을 불러 모으는 존재니까.   시평/김경주 시인 ---------------------------   산중여관1   마당엔 제비가 낙엽을 쓸고 몇 개인지 모를 방을 옮겨다니며 물고기들이 걸레질을 할 동안 오동나무와 족제비는 아궁이를 지펴 서둘러 밥을 짖는다 뒤뜰에는 장작을 패는 바람의 도끼질 소리 혹시 오늘은 어느 객이 찾아오려나 주인인 듯한 허름한 옷차림의 산국화 현관문 앞 숙박계를 어루만지며 길고 흰 수염을 쓰다듬듯 시냇물이 산골짜기를 빠져나가는 창밖을 우두커니 바라본다 세상의 길이란 길은 모두 잃어야 한 번 쯤 묵어갈 수 있는 산중여관                                                                    - 함명춘 (1966~ )   "겨울의 초입에 서니 이런 산중여관에 가고 싶다. 가을은, 낙엽은 다 졌겠다. 나목이 되어 조용히 서 있어도 좋겠다. 산중여관의 주인은 까다롭지 않고 무던해서 노랗고 작은 산국화처럼 나를 보고 반겨 웃을 것이다. 그 러면 엷은 향기가 그에게서 내게로 올 것이다. 나는 세상을 떠나와 산중여관에 묵고, 시냇물은 세상을 찾아가 라고 거룻배를 띄워 보내도 좋겠다. 방과 마루에 걸레질을 하고, 불을 때 밥을 짖고, 밤새 문 밖에서 낙엽을 비질하는 바람의 소리를 듣고 싶다.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늦은 밤에 물을 끓여 차를 마시면 어느새 나도 수수해져 사람이 좋아질 것이다. 목침 을 베고 누우면 깊은 산속에 사는 사람처럼 순하게 잠들 것이다. 어느 날에는 소복하게 내린 눈을 순은의 아 침에 보게도 될 것이다" 시를 올린 문태준 시인의 글이다.          
1104    윤동주 코드 / 김혁 댓글:  조회:5020  추천:0  2016-02-17
  . 후기 .   “별”의 기호를 풀이하다   김 혁     1. 출판계와 서점가를 강타한 “다빈치 코드”라는 초베스트셀러가 있다. 추리소설과 비슷한 쟝르적특성으로 미스터리함과 긴장감을 유지시킨 특징이 그 작품을 베스트셀러로 떠오르게 한 원인이였지만 무엇보다도 압권은 작품에 새삼스럽게 기호학을 잉용(仍用)해 작품의 골조를 이룬것이였다. 기호라는것은 우리 주위에서 쉽게 볼수 있고 인지하고있는것으로 우리가 일상에서 특별한 의미 없이 받아들였던것이다. 교통표지판, 상표, 간판, 영화포스터, 시, 그림, 핸드폰속 이모티콘 등등 다양한 기호학적문화읽기는 사실 은연중 우리의 일상 가까이에 사처에 널려있다. 하지만 “다빈치 코드”의 작가는 기호를 통해 그 단순함 리면에는 뭔가 특별한것이 있다는 기대를 독자들에게 던져주어 다양한 독자층의 관심을 끌고 작품에 나름 깊숙한 의미를 부여했다. “다빈치 코드”의 흥행은 광범위한 범위에서 “코드열풍”을 일으켰다. 이어 쉐익스피어, 단떼, 피카소, 모짜르트 등 문화, 예술 분야 인물에 대해 기호학적으로 분석한 책자들이 수없이 쏟아져나왔다. 그 일례로 중국에서의 “병마용 코드”, “진시황 코드”, “청명상하도 코드” 등 일련의 관련 연구서들을 들수 있다.   이처럼 근년 들어 기호학은 단순히 언어학적분석의 패러다임에 머물지 않고 문화콘텐츠의 해석을 통해 일반문화의 령역으로 폭넓게 확장될 가능성을 보여주고있다.   2. 윤동주는 연변이 낳은 걸출한 민족시인이다. 학계에서는 그이를 리욱, 김학철 등과 더불어 중국조선족문학의 으뜸 가는 우수한 대표로 꼽는다. 또한 올해는 중국의 항일전쟁 승리 70돐 기념일이자 “저항시인” 윤동주가 반일운동의 죄목으로 일본 후꾸오까감옥에서 숨진지 꼭 70주기 되는 해이다.   외국에서 윤동주연구 관련 석사, 박사가 50여명이나 배출되고 그 연구물이 수백편에 이르는 방흥미애(方兴未艾)의 열조에 비해 우리 조선족문단에서는 윤동주 관련 연구물이 몇손가락 꼽을 정도로 미비하고 그 기림의 열조 또한 미온적인것은 세계가 자호하는 고향의 시인에 대한 “홀대”이며 자라나는 새 세대에 그의 문학적재부를 승계해주지 못한 부끄러운 일이 아닐수 없다.   필자는 10여년전부터 윤동주연구에 몰두하여왔고 언론사시절에는 관련 추모, 연구 행사들을 빠짐없이 보도했으며 이미 2010년에 윤동주의 생애를 문단 최초로 소설화한 장편소설 “시인 윤동주”를 《연변문학》에 일년간 련재하였고 또 윤동주 관련 연구 시리즈물들을 여러 간행물들에 평론, 칼럼, 수필 등 여러 쟝르를 동원하여 수십편 창작, 게재하기도 했다.   하지만 고향의 시인에 대한 추모와 선양이 외려 다른 지역들에 비해 미온적인데 대해 늘 가슴 깊은 곳에 체증 같은것을 담고있었다. 그러다 윤동주 70주기를 맞으며 새로운 격식, 새로운 시각의 윤동주연구물을 내놓으려 나름 시도해보았다. 윤동주에 대한 연구는 여러가지 텍스트로 나왔지만 새로운 격식과 문체, 다각적인 시각으로 나름 조명하고싶었다. 몇해전 대학가의 청탁을 받고 연변대학의 문학도들에게 윤동주 관련 문학특강을 한적 있었는데 그때 어린 문학도들이 윤동주의 보편적이면서도 심대한 문학생애를 비교적 알기 쉽게 접하도록 열개의 편린으로 나누어 이야기했었다. 평론가의 말투나 난해한 해설이 아니라 독자와 공감할수 있는 언어로 특히 삶의 의미와 관련해 스토리텔링으로 전해주고싶은 마음에서였다. 그후 연변작가협회 문학강습반에서도 이런 형식으로 강의했고 몇번의 윤동주 생몰일 기념모임에서도 그 뼈대를 계속 보완해 이야기했다. 그 연구물을 지난 2012년경에는 문화종합지 《문화시대》에 근 1년간 련재를 하기도 했다. 나는 본 책자에서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론문이나 특강, 칼럼, 기행 형식으로 써놓았던 글들을 련작칼럼으로 다시 다듬었다. 스물아홉해의 짧은 인생을 보낸 윤동주의 생과 문학에 대해 29개의 코드로 풀이해보았다. 29개의 코드에 윤동주의 중요한 대표시들을 빠짐없이 선정해 싣고 해제를 달아 문학생애에 대한 료해와 더불어 그의 시집을 접하는것과도 같은 다중효과를 거두기로 꾀했다. 윤동의 생애와 직결되는 인물, 사건에 대해 사진자료들을 곁들어 해설함으로써 당시 시대상의 면면을 살펴볼수 있도록 노력했다. 비록 타이틀을 련작칼럼이라 달고 몇배로 되게 크게 보완하고보니 련작칼럼이 내용도 충실해지고 부피도 묵직하니 짜장 인물연구서처럼 되였다.   집필의 과정은 그야말로 고된 작업이였다. 적지 않은 작품을 량산(量产)했지만 막상 집필에 앞서 윤동주라는 이 우리 민족 모두가 애대하는 걸물을 나의 졸필로 그려낼수 있을가 하는 부담감에 지독한 창작슬럼프에 시달렸다. 출판사에서 청탁한 시간이 거의 만료되도록 한 글자도 적어내려가지 못했다. 이는 그 이전에 작가협회 계약작가로 선정되여 장편소설 “시인 윤동주”를 집필할 때와 꼭같이 겪게 된 슬럼프였다. 그 슬럼프를 이겨내게 해준것이 또 다름아닌 그 슬럼프를 안겨준 윤동주의 삶이였고 윤동주의 시였다. 송우혜작가의 윤동주연구의 결정판이요 평전문학의 진수인 《윤동주 평전》이라는 경전이 이미 앞서 있지만 “외계에서 들여다본 윤동주”가 아닌, “고향에서 내다본 윤동주”로 시각의 차이를 바꾸고 윤동주가 오래동안 생활해온 룡정지역이라는 이 유서깊은 곳의 지역특색의 문화풍토를 덧입히려는 나름의 시도가 슬럼프로 흔들리려는 나의 필에 힘을 실어주었다.   그리고 고향 시인의 민족정신과 문학정신의 승계를 위한 나의 작업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음을 이 기회에 다시한번 천명하고싶다. 장편소설은 련재가 끝난지 몇해가 지난 오늘도 계속 탁마에 탁마를 거듭하고있고 인물평전은 유명 문학지에 련재를 시작했으며 청소년전기물도 곧 출시될 예정이다.   3. “민족시인”, “저항시인”, “별의 시인” 등으로 윤동주에게 붙는 수식어는 많다. 하지만 오늘날 윤동주라는 코드는 그저 시인이라는 수식과 호칭을 뛰여넘는 풀이를 우리앞에 숙제처럼 남기고있다. 오늘도 우리가 윤동주라는 코드를 굳이 여러 각도로 풀이하는것은 그이의 아름다운 생각, 맑은 령혼, 진리를 향한 열정, 인간을 향한 순수함 그리고 민족이나 나라를 뛰여넘는 우주적, 보편적 량심이 지금도 우리에게 꼭 필요하기때문이다. 윤동주의 소꿉친구 문익환의 말 그대로 오늘날 그이를 “떠올리는것만으로도 우리 모두의 넋이 맑아짐”을 우리는 경험한다. 오늘날 그를 기억하고 그의 시를 되뇌이는 일은 우리 민족공동체의 운명을 걱정하고 비전을 위해 뛰고있는이들에게 더없이 보배로운 체험과 계시로 될것이다.   전대의 력사는 후대의 전성기에 쓴다는 성세수사(盛世修史)라는 말이 있다. 그 민족과 민족의 시인이라는 깊은 명제의 코드를 풀이해내는 벅찬 작업을 나름 완수할수 있어 마음은 뿌듯하다. 한편 걱정 또한 갈마든다. 플라톤의 제자였던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의 스승의 생애를 연구, 정리하면서 이렇게 말한적 있다. “천한 사람의 입으로는 찬양하는것조차도 그를 모욕하는것이다.” 이처럼 내 작은 둔필로 그이를 찬양하는것이 오히려 시인의 고매한 생애에 흠결(欠缺)을 주는것이 아닐가 내심 조심스러워진다. 관련 연구를 선행한 작가, 학자들에게 경의를 드리며 많은 연구가와 윤동주를 사랑하는이들의 동참과 편달을 바란다.   - 청우재(听雨斋)에서   2015년, 백로(白露)       윤동주 코드 - 29개의 코드로 풀이해 보는 스물아홉 살 시인의 삶과 문학   김혁 지음 출판 연변인민출판사 20015년 12월 페이지 수 324 정가 30원   목차   코드 1. 파평 윤씨 코드 2. 월강곡 코드 3. 선바위 코드 4. 공덕비 코드 5. 생가 코드 6. 명동학교 코드 7. “3.13” 코드 8. 15만원 코드 9. 우물 코드 10. 영국더기 코드 11. 은진중학 코드 12. 청년문사 코드 13. 처녀작 코드 14. 신사참배 코드 15. 늦봄 코드 16. 낭인(浪人) 코드 17. 카톨릭소년 코드 18. 연희전문 코드 19. 순이 코드 20. 자필시집 코드 21. 창씨개명 코드 22. 육첩방 코드 23. 구름다리 코드 24. 판결문 코드 25. 의문사(疑问死) 코드 26. 장례식 코드 27. 오오무라교수 코드 28. 아우 코드 29. 시비(诗碑)   책소개   용정윤동주 연구회 회장인 김혁작가의 인물연구서. 스물아홉해의 짧은 인생을 보낸 윤동주의 생과 문학에 대해 29개의 코드로 풀이해보았다. 특히 윤동주가 대부분의 시간을 지냈던 북간도 용정과 명동의 풍토에 대해 더욱 많은 편폭을 들여 세세하게 조명했다. 29개의 코드에 윤동주의 중요한 대표시들을 빠짐없이 선정해 싣고 해제를 달았다. 윤동의 생애와 직결되는 인물, 사건에 대해 사진자료들을 곁듦으로써 당시 시대상의 면면을 살펴볼수 있다.     저자소개   중국 길림성 용정에서 출생했다. 연변대학 조선어문학부를 나와 베이징 루쉰문학원을 수료했다.   "길림신문", "연변일보"등 조선족의 주요 매체에서 20여년간 언론인으로 근무했다. 현재 "용정.윤동주 연구회" 회장, ​연변작가협회 부주석(부회장), 연변작가협회 소설분과 주임(회장)직을 담임하고 있다.   ​윤동주가 다녔던 광명중학의 후신인 북안소학교, 은진중학의 후신인 용정중학을 나온 학연(學緣)을 자각하고 10여년간 윤동주 연구에 매진했다. 중국조선족 최초로 2010년 윤동주의 생애를 소설화한 장편소설 "시인 윤동주"를 창작, 발표하여 이슈가 됐고, 현재 조선족 권위간행물에 "윤동주 평전"을 2년째 연재하고 있다.   저서로는 중국의 문화대혁명의 난장 속에 스러져간 청춘의 군상을 그려낸 장편소설 “마마꽃, 응달에 피다”, 조선족 최초로 되는 위안부 장편소설, "춘자의 남경", 만주국 황후 완룽의 생애를 그려낸 "제국의 황후"등 장편소설 7부중편소설집 “천재 죽이기”등이 있다. "중국의 피카소 한낙연 평전", "자치주 초대주장 주덕해" 등 인물전 다부가 있으며 논픽션물로는 북간도 용정의 백년역사를 조명한 장편력사기행 "일송정 높은 솔, 해란강 푸른 물", 문화시리즈 "영화로 읽는 중국조선족", 한국 초청사기행각을 다룬 장편르포 “천국의 꿈에는 색조가 없었다”등이 있다.   “윤동주”문학상을 비롯하여 조선족자치주정부 “진달래”문학상, "연변문학"문학상, 연변일보 CJ문학상, 길림신문 "두만강"문학상, 연변인민출판사 “아리랑”문학상 등 조선족문단의 유수의 문학상을 석권했으며 2004년 한국재외동포재단 제1회 한민족 청년상을 수상한바 있다.
1103    99년... 70년... 우리 시대의 "동주"를 그리다 댓글:  조회:4860  추천:0  2016-02-17
▲ 사진=김현우 기자 이준익 감독은 ‘그래서 이후로 아름답게 살았습니다’가 아닌 ‘그렇게 죽어갔습니다. 이 얼마나 아픈 일인가’를 그린다. 이렇게 이준익 감독이 비극에 주목하고, 더 아름다운 비극을 찾고자 하는 이유는 “미안해서”다. 영화 ‘동주’(감독 이준익)는 이름도, 언어도, 꿈도 허락되지 않았던 어둠의 시대 속에서도 시인의 꿈을 품고 살다 간 윤동주(강하늘 분)와 열사 송몽규(박정민 분)의 청년 시절을 정직하게 담아낸 작품이다.           2016년 올해는 윤동주 시인과 송몽규 열사가 태어난 지 99년이 되는 해다. 그리고 최근 영화부터 뮤지컬, 심지어 출판계에서도 윤동주 시인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그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심지어 초판본이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이에 대해 이준익 감독은 “시대가 윤동주를 그리워하는 무의식이 있지 않았을까. 자연발생적이다”라고 말한다. 윤동주가 한국 문학사에서 가지고 있는 의미는 남다르다. 많은 시들이 문학이라는 틀 안에서 하나로 묶여버리기도 하지만, 윤동주 시인의 시는 감히 묶기 어렵다. 일제강점기에 윤동주 외에도 많은 시인이 있었고, 윤동의 시집은 그 시절 출판되지도 못했다. 하지만 이준익 감독은 윤동주에 주목했다. “식민지 후기 사람이라는 것, 더 중요한 것은 일본 본토에서 벌어진 일이었기 때문에 더 큰 의미가 있다. 조선에서 벌어진 일이었다면 또 다른 곳으로 도망갈 수 있었을 테지만 본토라 도망갈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 안에서 불안과 공포를 안고 신념을 잃지 않는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이었을지 가슴이 아팠다. 그 어린 친구들이 얼마나 떨었을까. 그 떨림의 순간에 윤동주는 ‘쉽게 씌여진 시’를 썼을 테고, 쉽게 시를 써서 부끄럽다고 했다. 이것이 내가 영화를 만들게 한 원동력이다. 오늘날 이 시는 아름다운 시로 남아서 사람들의 사랑을 받게 됐지만 그 시를 썼던 그 시절은 무서운 순간들이었다.” ▲ 사진=김현우 기자 처음 이 영화의 제목은 ‘시인’이었다. 하지만 ‘시인 윤동주’, ‘윤동주’가 아닌 ‘동주’로 제목을 선택한 이유는 윤동주 시인이 그 시대를 대변했던 사람이기 때문이며, 동주라는 이름이 상징적인 의미로 써지길 바랐기 때문이었다. 마치 우리 시대의 ‘동주들’에 대한 이야기처럼 말이다. “제목을 통해 지나치게 뭔가를 강조하는 것은 이 영화에 어울리지 않는다. 수식 하나 없이 그냥 ‘동주’다. 기억하고 싶지 않는 시대를 견뎌냈던, 아름다운 시를 썼던 시인의 영화를 만들면서 뭘 더 강조하고 뭘 더 강요하고 뭘 더 수식하겠나. ‘윤동주’라고 하면 너무 개인을 표상화하는 것 같아서 성도 붙이지 않았다. 이렇게 보면 동주는 어떤 이름보다 흔한 이름이다. 이름은 원래 고유명사지만 일반명사화 시킨 것이다.” 극중 윤동주보다 더 눈에 띄는 인물은 송몽규다. 윤동주는 아름다운 시라는 결과를 남겼기 때문에 우리에게 기억되고 있는 반면 송몽규는 결과물이 없어서 기억되지 않는 인물이다. 이 영화의 제목에서조차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는 동주를 앞세우고 몽규를 표면화하지 않았다. 그리고 결국 우리는 동주를 통해 과정만큼은 누구보다 아름다웠던 인물 송몽규를 만나게 된다. “동주를 통해 몽규를 알아가는 것이 관객들에게 친절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잘 모르는 시대, 이제 아무도 끄집어내고 싶지 않은 부끄러운 과거, 거기에 모두 기억하는 이름 윤동주를 통해 과정이 아름다웠던 몽규를 소개하는 것이 옳다고 봤다.” ▲ 사진=김현우 기자 존재조차 낯선 열사 송몽규, 그리고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흑백영화와 만주 북간도 사투리 등 이런 생경한 것들은 투박하지만 섬세하다. “인물에 집중하고 사건은 구체적으로 묘사하지 않았다. 몽규가 어떤 행동들을 했는지는 정확히 보여주지 않는데, 이게 저예산 영화의 장점이면서 한계다. 이 영화는 상업영화가 아니기 때문에 스펙터클이 없다. 대신 이 영화에서는 윤동주의 시가 스펙터클이다. 시 안에 개인의 욕망과 질투와 시기와 반성과 바람이 모두 담겨 있다.” 붓글씨로 새겨진 농도 짙은 수감번호, 스태프의 이름을 당시 느낌으로 세로로 적어놓는 오프닝 등 영화 속 곳곳에 숨겨진 디테일함에서 감독의 애정이 묻어난다. 특히 흑백영화였기 때문에 ‘빛’을 조절하는데 신경을 많이 썼다. 동주가 작은 방 안에 앉아서 하늘에 매달린 손바닥 만한 창을 바라보는 신이 있다. 어두운 방 안에는 한 줄기 빛이 들어오고, 먼지는 뿌옇게 부유한다. 고요한 이 장면은 관객들의 마음에 오랫동안 남아있을 만한 신이다. “이 장면에 먼지를 떠다니게 하고 싶었다. 이어 ‘내 마음의 탑 / 나는 말없이 탑을 쌓고 있다’로 시작하는 ‘공상’이란 시가 나오는데, 이 장면이 극사실주의적인 화면이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조명감독, 촬영감독에게 먼지가 보였으면 좋겠다고 주문을 했고, 현장에선 먼지가 잘 안 잡혀서 콩가루를 날려서 의도적으로 포착했다.” 이런 애정은 작품 곳곳뿐만 아니라 배우들을 향한 눈빛에서도 느낄 수 있다. 최근 공개된 제작기 영상에서 그는 배우들을 향해 아빠 미소를 짓기도 하고 눈물을 쏟기도 했다. “몰입했던 순간에 이 젊은 배우들이 동주, 몽규로 보였다. 그 분들이 돌아가셨던 때가 겨우 29살이었다. 이 얼마나 미안한 일인가. 측은지심이 있었다.” “특히 몽규가 맞고 토하는 장면에서는 그걸 보는데 못 참겠더라. ‘컷 오케이’를 해놓고 못 참아서 울었다. 촬영하는 동안 휴지를 달고 살았다. 사실 영화를 찍을 때 내가 가장 많이 우는 편이다. 배우는 한 번만 우는데 나는 배우들이 울 때마다 운다. ‘사도’때도 송강호가 울 때 울고, 유아인이 울 때 또 울고, 전혜진이 울 때 또 울었다.” ▲ 사진=김현우 기자 이렇게 눈물 많은 이준익 감독은 그동안 많은 사극을 통해 비극을 그려왔다. 그들에 대한 미안함을 바탕으로 이준익 감독은 비극적인 인물에 안타까움을 더하고 그들을 따뜻하게 어루만진다. “사극이 아니라 사람에 관심이 있는 것이다. 특히 비극적인 인물에 관심이 있다. 비극은 언제나 교훈을 준다. 그리스 비극, 셰익스피어의 비극 등 모두 결국에는 자신의 욕망 때문에 삶을 그르친 이야기다. 나도 인간이기 때문에 이런 비극을 통해 나를 경계하고, 삐뚤어진 욕망을 스스로 절제하려고 한다. 이런 페이소스가 카타르시스를 가져온다.” “비극은 인과응보라고, 원인 없이 결과는 없다. 그래서 ‘왜(Why)’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현대 사회는 매뉴얼이 치밀하게 짜여있어서 ‘왜’는 없어지고 ‘어떻게(How)’만 남았다. ‘왜’를 궁금해 하지 않으니 ‘왜’를 잃어버린 시대다. 요즘 학생들도 정답을 외우기만 하고 질문을 연구할 자격이 박탈됐다. 과정이 무시되고 결과만 남는다.   이런 사회에서 ‘왜’라는 질문을 던지는 나는 시대착오적이고 전근대적인 감독이다.” 시대착오적인 감독이기 때문에 이 시대에는 이준익 감독이 진정으로 필요할 것 같다. 이준익 감독의 작품을 통해 비극의 미학과 카타르시스를 느끼며 완벽하지 못했던 과거를 돌아보고, 완벽하지 못할 미래를 준비해보는 것은 어떨까.
1102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보자 댓글:  조회:4593  추천:0  2016-02-17
  출생1917년 12월 30일 중국 만주 지방 길림성 룡정 명동촌. 1945년 2월 16일 (27세) 일본 후쿠오카 현 후쿠오카 형무소 옥사, 시인, 수필가, 독립운동가, 일본 도시샤 대학교 문학부 제적활동기간1932년 ~ 1945년. 부모 윤영석(부), 김용(모) 친지 윤하현(할아버지) 윤재옥(증조부) 윤일주(아우) 윤광주(아우) 윤인석(조카) 김약연(외숙부) 김학연(외숙부) 송창희(고모부) 윤신영(고모) 송몽규(고종사촌 형) 윤영춘(5촌 당숙) 윤형주(6촌 동생) 윤정주(6촌 동생) 윤동주(尹東柱, 일본식 이름: 平沼東柱 히라누마 도슈 1917년 12월 30일 ~ 1945년 2월 16일)는 독립운동가, 시인, 작가이다. 아명은 윤해환(尹海煥), 본관은 파평(坡平)이다. 만주 지방 길림성 연변 룡정에서 출생하여 명동학교에서 수학하였고,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 숭실중학교 때 처음 시작을 발표하였고, 1939년 연희전문 2학년 재학 중 소년(少年) 지에 시를 발표하며 정식으로 문단에 데뷔했다. 일본 유학 후 도시샤 대학 재학 중, 1943년 항일운동을 했다는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후쿠오카 형무소(福岡刑務所)에 투옥, 100여 편의 시를 남기고 29세의 나이에 옥중에서 요절하였다. 사인은 일본의 소금물 생체실험으로 인한 사망인 것으로 사료된다는 견해가 있고 또한 그의 사후 일본군에 의한 마루타, 생체실험설이 제기되었으나 불확실하다. 사후에 그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출간되었다. 일제 강점기 후반의 양심적 지식인의 한사람으로 인정받았으며, 그의 시는 일제와 조선총독부에 대한 비판과 자아성찰 등을 소재로 하였다. 그의 친구이자 사촌인 송몽규 역시 독립운동에 가담하려다가 체포되어 일제의 생체 실험 대상자로 분류되어 의문의 죽음을 맞는다. 1990년대 후반 이후 그의 창씨개명 '히라누마'가 알려져 논란이 일기도 했다. 송몽규는 고종 사촌이었고, 가수 윤형주는 6촌 재종형제간이기도 하다.   윤동주는 1917년 12월 30일, 당시 북간도 간도성 화룡현 명동촌(明東村, 지금의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룡정시 지신진 명동촌)에서 아버지 윤영석과 어머니 김용 사이의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파평으로 간도 이주민 3세였다. 19세기 말, 함경도와 평안도 일대에 기근이 심해지자 조선 사람들은 국경을 넘어 간도와 연해주 등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윤동주의 증조부인 윤재옥도 집안을 이끌고 1886년경 함경도에서 만주로 이주하였다. 윤동주의 증조부인 윤재옥은 함경북도 종서군 동풍면 상장포에 살다가 1886년 북간도 자동으로 이주하였으며 할아버지 윤하현은 명동촌으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 아버지 윤영석은 1910년 독립지사인 김약연의 누이동생 김용과 결혼하여 명동촌에 정착하게 된다. 창씨개명 윤동주 집안은 1941년 말 '히라누마'(平沼)로 창씨한 것으로 돼 있다. 일본 유학에 뜻을 둔 윤동주의 도일을 위해서 성씨를 히라누마로 창씨를 개명하게 되었다. 윤동주의 창씨개명은 본인의 의사와는 관계 없는 것이었다. 그의 연보에 의하면 윤동주가 전시의 학제 단축으로 3개월 앞당겨 연희전문학교 4학년을 졸업하면서 1941년 연말에 "고향 집에서 일제의 탄압과 동주의 도일 수속을 위해 성씨를 '히라누마'로 창씨했다는 것이다. 개명 후 윤동주는 매우 괴로워했다 한다. 창씨개명계를 내기 닷새 전에 그는 창씨개명에 따른 고통과 참담한 비애를 그린 시 참회록을 썼다. 윤동주의 창씨개명설은 해방 이후에는 알려지지 않았다가 1990년대에 와서 알려지게 되었다. 소년시절 그는 어려서부터 기독교인인 할아버지의 영향을 받았다. 그의 고모 윤씨는 송신영에게 시집갔는데, 고모의 아들이 독립운동가이자 그의 친구였던 송몽규였다. 당숙은 윤영춘으로 후일 가수가 되는 윤형주는 그의 6촌 재종이었다. 1925년 명동소학교(明東小學校)에 입학하여 재학 시절 고종사촌인 송몽규 등과 함께 문예지 을 발간하였다. 중학 시절 1931년 14세에 명동소학교(明東小學校)를 졸업하고, 중국인 관립학교인 대랍자학교(大拉子學校)에 다니다 가족이 용정으로 이사하여, 용정 은진중학교(恩眞中學校)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1935년 소학교 동창인 문익환이 다니고 있는평양의 숭실중학교로 전학하였다. 그해 10월, 숭실중학교 학생회가 간행한 학우지 숭실활천(崇實活泉) 제15호에 시 공상(空想)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신사참배 거부로 숭실중학교가 폐교되어, 문익환과 함께 용정에 있는 광명중학교로 편입하였다. 광명중에서 그는 정일권 등을 만나게 된다. 연희전문 시절 1937년 광명중학교 졸업반일 무렵, 상급학교 진학문제를 놓고 부친(의학과 진학 희망)과 갈등하나, 조부의 개입으로 연전 문과 진학을 결정한다. 1938년 2월 17일 광명중학교를 졸업한 후 경성(京城)으로 유학, 그해 4월 연세대학교의 전신인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하였다. 하숙생활을 하며 그는 저녁밤 하숙집 근처를 산책하며 시상을 떠올리고 시를 짓거나 담론을 하였다. 1939년 연희전문 2학년 재학 중 기숙사를 나와 북아현동, 서소문 등지에서 하숙생활을 했다. 이때 그는 친구 라사행과 함께 정지용 등을 방문, 시에 관한 토론을 하며 의견을 주고받았다. 그 해 《소년(少年)》지에 시를 발표하며 처음으로 원고료를 받기도 했다. 1941년 12월 27일에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하였다. 이 때에 틈틈이 썼던 시들 중 19편을 골라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내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일본 유학 1942년 3월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릿교대학(立敎) 문학부 영문과에 입학하였다가 10월 교토 도시샤대학(同志社) 영문학과에 편입하였다. 도시샤대학은 윤동주가 가장 좋아하는 시인 정지용이 다닌 학교로 일본 조합교회에서 경영하는 기독교계 학교였다.   1942년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릿쿄 대학(立教大学) 영문과에 입학하였고, 6개월 후에 중퇴하여 교토 시 도시샤 대학 문학부로 전학하였다. 그러나 그는 불령선인으로 지목되어 일본경찰의 감시를 당하고 있었다. 1943년 7월 14일, 귀향길에 오르기 전 사상범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교토의 카모가와 경찰서에 구금되었다. 이듬해 교토 지방 재판소에서 2년형을 언도받고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944년 3월 31일 교토지방재판소 제1 형사부 이시이 히라오 재판장 명의로 된 판결문은 징역 2년형을 선고하면서 “윤동주는 어릴 적부터 민족학교 교육을 받고 사상적 문화적으로 심독했으며 친구 감화 등에 의해 대단한 민족의식을 갖고 내선(일본과 조선)의 차별 문제에 대하여 깊은 원망의 뜻을 품고 있었고, 조선 독립의 야망을 실현시키려 하는 망동을 했다.”라고 적혀 있다. 교토지방 재판소에서 송몽규와 함께 치안유지법 제5조 위반죄로 징역 2년을 선고받은 뒤 후쿠오카 형무소로 이송되었다. 투옥과 최후 1945년 2월 16일 오전 3시 36분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하였다. 시신은 가족들에게 인도되어 그 해 3월 장례식을 치룬 후 간도 용정에 유해가 묻혔다. 향년 29세 그가 죽고 10일 뒤 '2월 16일 동주 사망, 시체 가지러오라' 는 전보가 고향집에 배달되었다. 부친 윤영석과 당숙 윤영춘이 시신을 인수, 수습하러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런데 뒤늦게 '동주 위독하니 보석할 수 있음. 만일 사망시에는 시체를 가져가거나 아니면 큐슈제대(九州帝大) 의학부에 해부용으로 제공할 것임. 속답 바람' 이라는 우편 통지서가 고향집에 배달되었다. 후일 윤동주의 동생 윤일주는 이를 두고 "사망 전보보다 10일이나 늦게 온 이것을 본 집안 사람들의 원통함은 이를 갈고도 남음이 있었다."고 회고하였다. 한편, 그의 죽음에 관해서는 옥중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주사를 정기적으로 맞은 결과이며, 이는 일제의 생체실험의 일환이었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사후 1947년 2월 정지용의 소개로 경향신문에 유작이 처음 소개되고 함께 추도회가 거행된다. 1948년 1월, 윤동주의 유작 31편과 정지용의 서문으로 이루어진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정음사에서 간행하였다. 이후 1962년 3월부터 독립유공자를 대량으로 발굴 포상할 때, 그에게도 건국공로훈장 서훈이 신청되었으나 유족들이 사양하였다.1990년 8월 15일에야 건국공로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1985년에는 그의 시정신을 계승하기 위한윤동주문학상이 한국문인협회에 의해 제정되었다.   민족적 저항시인, 강인한 의지와 부드러운 서정을 지닌 시인으로 평가되며, 1986년에는 20대 젊은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으로 선정되었다. 북한에서는 ‘일제말기 독립의식을 고취한 애국적 시인’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의 시는 생활에서 우러나오는 내용을 서정적으로 표현하였으며, 인간과 우주에 대한 깊은 사색, 식민지 지식인의 고뇌와 진실한 자기성찰의 의식이 담겨 있다고 평가된다.    
1101    윤동주와 송몽규의 <판결문> 댓글:  조회:4546  추천:0  2016-02-16
서정의 시학은 치열한 저항의 사상을 품고 있었다. 그의 ‘독립운동’ 사실을 심각하게 의심했던 한때의 흐름은 무지와 오류의 소산이었다. 독립운동가 윤동주의 초상은 일제의 취조문서, 판결문 안에 고스란히 기록되어 남아 있다. 일본 유학 첫해인 1942년 여름방학에 귀향한 윤동주(뒷줄 오른쪽). 왼쪽이 윤동주 조부의 육촌 동생인 윤길현이다. 앞줄 가운데가 송몽규, 왼쪽이 윤동주의 당숙 윤영춘의 동생인 윤영선이다. 오른쪽은 윤영선의 조카사위인 김추형 한 사람을 이해하는 방식에는 여러 가지 통로가 있다. 한 시대를 이해하는 방식 역시 그러하다. 여기 일제 강점기에 일본 사법당국이 한 조선 청년에게 선고한 판결문이 있다. 시인 윤동주(尹東柱)는 일본 교토(京都)에 있는 도오시샤대학(同志社大學)에 유학 중이던 1943년 7월 14일에 ‘조선독립운동’의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고, 1944년 3월 31일에 교토지방재판소에서 을 선고받고 후쿠오카 감옥에서 복역하다가 1945년 2월 16일에 옥사했다. 1970년대 중반 한국 문단에 돌연 이상한 열풍이 불었다. 국민시인으로 정립된 윤동주의 위상을 깎아내리고 그의 ‘독립운동’ 사실을 심각하게 의심하는 조류가 갑자기 일어나더니 즉각 대세가 된 것이다. 그즈음 한 문학잡지에서 ‘윤동주 특집’을 마련했는데, 거기 글을 쓴 당대의 내로라하는 논객 10명 중 무려 8명이 그쪽이었다. “윤동주는 평생 공부만 한 학생이었는데, 언제 독립운동을 했다는 건가!” “재판에서 불과 ‘징역 2년형’을 받았다는데, 그가 진짜 독립운동을 했다면 그 정도로 끝났을 건가?” 이렇게 전개된 그들의 논지를 보면서 필자는 탄식을 금치 못했다. 독립운동사를 깊이 공부했기 때문에 일제 강점기 동안 독립운동사 관계 재판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그 실상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었고, 또 우리 집안 어른인 송몽규(宋夢奎) 선생의 행적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송몽규는 윤동주의 고종사촌형(윤동주보다 3개월 먼저 태어남)이자 평생의 동료였고, 또 같이 유학하고 있던 교토에서 같은 사건으로 일경에 체포되어 재판 받고 함께 후쿠오카 감옥에서 복역하다가 나란히 옥사한 분이다. 그래서 독립운동가로서의 윤동주를 알려면, 반드시 송몽규를 먼저 알아야 한다. 송몽규의 과거 경력을 알지 못하면 윤동주의 독립운동 사실을 의심하는 게 당연할 정도로 송몽규와 윤동주는 서로 매우 밀접하게 얽힌 삶을 살았다. 윤동주와 송몽규의 운명적 만남 1944년 3월과 4월 각각 징역 2년형을 선고받은 윤동주와 송몽규에 대한 일제 법원의 판결문. 송몽규는 1917년에 9월에 북간도 명동촌에서 태어났다. 명동학교 교사이던 부친 송창희 선생이 윤동주의 고모와 결혼하고 처가살이를 하고 있을 때여서, 그와 윤동주는 한 집에서 석 달 간격으로 태어났다. 그는 18세였던 1935년 초에 용정에 있는 4년제 미션계 중등교육기관인 은진중학교를 중퇴하고, 중국 남경에 가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소속 한인군관학교에 제2기생으로 입학하여 군사훈련을 받았다. 그 군관학교는 항일무력투쟁을 치를 한국 독립군 장교들을 양성하기 위한 것으로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이후 최초로 공식 설립된 임정 직할 군관학교였다. 임시정부 김구 주석의 요청에 의해 중국 장개석 정부가 전적인 지원을 했는데, 체제상 중국정부가 운영하는 낙양군관학교의 ‘한인반(韓人班)’이라는 형식으로 1934년 2월에 개교했다. 그러나 한인군관학교의 존재를 알게 된 일본정부의 강력한 항의로 개교한 지 1년 8개월여 만에 문을 닫았다. 당시 한인군관학교에 관한 정보가 모두 일본 정보당국에 노출된 까닭에 폐교 이후 중국 각지로 흩어진 학생들이 속속 일경에 체포되어 조선으로 압송되어 혹독한 신문을 받으면서 무참한 고통을 겪었다. 송몽규도 1936년 4월 10일에 중국 제남에서 일본 영사관 경찰에 체포되었다. 당시 일제 공안당국은 중국에서 체포한 학생들을 모두 조선의 본적지 경찰서로 압송하여 가둬 놓고 취조했기 때문에, 북간도 명동촌 출생인 송몽규도 그해 6월 27일에 부친의 본적지인 조선의 웅기경찰서로 압송되었다. 그는 그해 8월에 청진 검사국으로 송치되어 신문 받다가 9월에 웅기경찰서로 다시 보내져서 9월 14일에 석방되었다. 중국에서 일경에 체포된 이후 만 5개월여 동안 이리저리 끌려 다니면서 일제 공안당국에 의해서 갖은 고통을 겪은 것이다. 그가 그 시기에 겪었던 참혹한 고통을 알려주는 증언이 있다. 같은 집에서 살았던 윤동주의 누이동생 윤혜원 권사님의이야기다. “몽규 오빠는 경찰서에서 풀려나 집에 돌아온 후로는 가슴이 자꾸 안으로 구부러든다면서 항상 어깨를 반듯이 하여 가슴을 펴느라 신경을 썼지요. 그래서 가슴 펴는 데 도움이 되도록 잘 때 베개를 베지 않고 잤어요.” 당시 송몽규가 재판을 거쳐 감옥에 가지 않고 석방된 데는 이유가 있다. 당시 북간도는 만주국 영토에 속했다. 따라서 법 논리상 만주국 국민인 송몽규가 중국에 가서 군관학교를 다닌 것을 일본국 법률로 처벌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석방된 이후 그는 즉각 일본 공안당국의 ‘요시찰인(要視察人)’ 명부에 올랐고, 늘 철저하게 감시당했다. 그 시대에 ‘요시찰인’이라 하면 “말만 들어도 우는 애가 울음을 그친다”고 일컬어질 정도로 악명 높았던 고등계 형사들의 밀착 감시 대상이었다. 1938년 봄, 윤동주와 송몽규는 연희전문학교(이하 ‘연전’)의 입학시험을 치르러 서울에 올라갔다. 그해 2월에 윤동주와 송몽규는 용정에서 각기 5년제와 4년제 중학교를 졸업했다. 이들이 이때 나란히 중학교를 졸업한 데에는 사연이 있다. 송몽규는 1935년 초에 중국에 가서 임시정부 군관학교에서 공부하다가 학교가 폐교된 뒤 1936년 4월에 제남에서 일경에 체포되었고, 조선으로 끌려가서 갖은 고초를 겪다가 그 해 9월에 석방되어 북간도로 돌아왔다. 그는 자신이 직접 겪은 한인군관학교사건을 통해 조선인이 독자적인 무력항쟁으로 일본을 이겨서 독립을 쟁취하려는 계획은 성공 가능성이 너무도 희박함을 절실하게 깨달았다. 그는 방향을 바꿔서 대일항쟁의 수단과 방법을 문화 쪽에서 찾기로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공부를 해야 했다. 송몽규는 본래 문화 쪽의 기질과 재능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은진중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던 18세 때, 본국 서울에서 발간되던 의 1935년도 신춘문예의 ‘콩트’ 부문에 응모하여 당선했을 정도였다. 당시는 신문사 수도 적었고 신춘문예 제도의 권위가 대단했던 때라서 당선은 매우 큰 명예였다. 그런데도 그는 당선의 영광을 초개처럼 던지고 그해 초에 중국으로 가서 임정 군관학교에서 군사훈련을 받았다. 일본 공안당국의 감시망 속으로 이준익 감독과 배우 강하늘, 박정민이 만나 윤동주의 삶을 그린 영화 가 올해 개봉됐다. 윤동주로 분한 강하늘이 섬세한 감성의 시인 역을 맡아 열연했다. 이제 문화투쟁으로 방향을 바꾼 그는 자신이 진학해야 할 상급학교로 서울의 ‘연전 문과’를 선택했다. 두뇌가 매우 뛰어났던 그는 4년제 출신이 치르는 특별입학시험을 통해서 연전 문과에 들어가기로 결정했다. 그러면 2년에 걸친 학업 공백을 1년 줄일 수 있게 된다. 윤동주 역시 1938년 2월에 ‘중학교 졸업생’이 되어 그해 4월 두 사람은 나란히 연희전문에 입학했다. 연전 4년의 재학기간 동안, 윤동주와 송몽규는 매우 알차고 만족스러운 학창시절을 보냈다. 그들이 연전을 졸업한 날은 1941년 12월 27일, 졸업식 석상에서 송몽규는 우등상을 탔다. 본래 학제로는 1942년 3월에 졸업하는 것이 정상이었다. 그러나 일본이 감행한 선전포고 없는 진주만 기습으로 미일전쟁(태평양전쟁)이 발발한 뒤라서 ‘전시 학제 단축’이라는 명목으로 졸업 시기가 3개월 당겨졌다. 조선 천지를 뒤흔든 조선총독부의 ‘창씨개명령’이 1940년 2월부터 실시되고 있었지만, 윤동주와 송몽규는 연전을 졸업할 때까지 그에 응하지 않았다. 당시 두 사람은 일본에 유학하여 공부를 더하기로 계획하고 있었다. 일본 유학을 위해서 가장 먼저 처리해야 할 일은 ‘창씨개명’ 신고였다. 그들이 연전에 가서 창씨개명계를 계출한 결과, 이름이 ‘히라누마 도오쥬우(平沼東柱)와 소무라무게이(宋村夢奎)로 바뀌었다. 그 무렵 윤동주는 창씨개명계를 연전에 계출하는 데 따른 격심한 고통과 고뇌를 아프게 담은 저 유명한 시 ‘참회록’(1942. 1. 24)을 썼다. 그들이 이미 졸업한 연전에 창씨개명계를 계출한 이유는, 일본식 이름으로 바꾸지 않으면 일본에 건너가는 허가장에 해당하는 ‘도항증명서’ 등의 서류를 받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조선총독부의 압박과 압력을 못 이긴 각 가문에서 창씨개명을 하여 일본식 이름을 당국에 신고한 결과, 공문서 상에서 해당 가문에 속한 사람들 전체의 공식 이름이 바뀌었다. 따라서 연전에도 창씨개명계를 계출하여 일본식 이름으로 일치시키지 않으면, 호적등본 등의 공문서와 연전 서류상의 이름이 서로 다르게 되어 상급학교 진학이 불가능했다. 윤동주와 송몽규가 목표로 삼은 대학은 교토제국대학(京都帝國大學)이었다. 극심한 학벌 차별 사회였던 당대의 일본에서 ‘제국대학’은 최고의 권위였고, 특히 현재 수도인 도쿄에 있는 도쿄제대(東京帝大)와 과거의 수도였던 교토에 있는 교토제대는 제국대학 중의 제국대학으로서 그 명성이 하늘을 찔렀다. 일본의 수재들도 그 두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서 7, 8년에 걸친 재수까지 불사하는 게 다반사였다. 그들은 출신교가 비정규 코스에 해당한 ‘전문학교’라서 정규 코스 출신자들의 입시에 앞서 먼저 시행되는 특별입학시험 대상인 ‘선과(選科)’ 지망생으로 입시를 치렀다. 출신교가 비정규 코스일 경우, 연전에서는 ‘별과’라는 칭호로 구분했는데, 일본의 대학들에서는 ‘선과’라는 칭호를 써서 구분했다. 현재 일부 연구자들이 그 시대에 일본의 대학들에서 사용된 ‘선과’라는 칭호는 요즘의 ‘청강생’과 같은 의미로 쓰인 것이라고 추정하는데, 전혀 사실과 다르다. 응시 결과 송몽규는 문학부 사학과 합격, 윤동주는 불합격이었다. 그 역시 일본 유학생 출신으로 그 시대의 일본 대학 입시제도를 잘 알고 있던 문익환 목사는 “당시 연전 출신인 송몽규가 경도제대 입시에 합격한 것은 하늘의 별 따기를 한 것”이라고 술회했다. 교토제대 입시에서 실패한 윤동주는 도쿄로 가서 성공회 계열의 기독교 대학인 릿쿄대학(入敎大學) 입시에 응시하여 영문학과에 합격했다. 출신교가 비정규 코스인 ‘연희전문학교’였기 때문에 본과보다 합격이 더 어렵고 힘든 ‘선과’ 지망생으로 응시하여 합격한 것이다. 그들이 합격한 대학에 입학한 날은 송몽규가 1942년 4월 1일이고 윤동주는 1942년 4월 2일이었다. 그러나 윤동주의 릿쿄대학 시절은 한 학기로 끝났다. 2학기에는 교토에 있는 기독교 대학인 도오시샤대학(同志社大學) 문학부로 전학했기 때문이다. 송몽규가 있는 교토로 간 윤동주, 그것은 요시찰인으로서 늘 감시되고 있던 송몽규에 대한 일본 공안당국의 감시망 속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간 것과 같은 일이었다. “징병제를 민족 무력 양성에 활용하자” 이 시기 그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조선인에 대한 ‘징병제’ 실시를 눈앞에 두고 있던 매우 특수한 비상시였기 때문이다. 일본정부는 1937년 7월에 시작한 중일전쟁과 1941년 12월에 시작한 미일전쟁으로 장기전을 치르면서 날이 갈수록 전쟁 수행에 힘이 부쳤다. 군수물자가 너무도 부족했고, 무엇보다도 전투원 부족 현상이 매우 심각했다. 그간 일본의 전체 가정에서 병사들을 뽑아 보낸 결과 가족 중에서 해외의 전쟁터에서 죽은 전사자나 다친 부상자가 없는 집이 없을 만큼 인적 피해가 막심했다. 일본정부는 전투원 절대 부족 현상을 식민지의 조선인을 징병하여 해결하려는 정책을 세웠다. 그간 식민지 출신들은 믿을 수가 없어서 병사로 뽑지 않았는데, 이젠 워낙 다급해서 그런 문제점조차 꺼릴 상황이 아니었다. 일본정부는 1942년 5월부터 ‘조선인 징병제’ 실시 추진에 관한 정책 방향과 규정들을 단계적으로 발표하며 선전하다가, 1943년 3월에 드디어 “조선인에 대한 징병제를 1943년 8월 10일부터 시행한다”고 공표했다. 당시 친일파를 제외한 대부분의 조선인들은 그 정책을 두고 “조선인들을 자기들 전쟁의 총알받이로 내세우는 것”이라고 판단하고 매우 분노했다. 그러나 송몽규는 전혀 달랐다. 대일무력항쟁에 투신하려고 임정 군관학교에 가서 군사훈련을 받았으나 여건 미비로 중도에 실패한 경력이 있는 그는 ‘조선인 징병제 실시’를 매우 반기고 찬양했다. “조선인은 종래 무기를 알지 못했지만 징병제도의 실시로 새로운 무기를 갖춘 군사지식을 체득하게 되면 장래 대동아전쟁에서 일본이 패전에 봉착하게 될 때 민족적 무력 봉기를 결행하여 조선 독립을 실현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제도는 조선 독립을 실현하는 데 일대 위력이 될 것이다”라는 논리에서였다. 송몽규는 적극적으로 그런 논리를 주변에 퍼뜨렸다. 보다 많은 조선인들이 자신과 같은 관점에서 그 제도를 받아들이고 적극적으로 대응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윤동주는 그에 적극 찬동했다. 송몽규의 그런 행위는 당연히 그를 밀착 감시하고 있던 특고경찰의 감시망에 걸려들었다. 당시 일본 공안당국이 조선인 징병제 실시를 앞두고 가장 우려했던 것이 바로 조선인들이 그런 식의 대응을 하려고 들 위험성이었다. 그들이 보기에 그것은 너무도 위험하고 너무도 불온한 대응이었다. 그래서 그런 소신을 가진 자들을 사회로부터 강제 격리시키기로 결정했다. 1943년 7월 10일. 교토에서 드디어 사건이 터졌다. 조선인 징병제 실시 날짜가 공표된 1943년 3월로부터 불과 4개월이 지난 그때, 조선인 징병제 실시가 시작되는 날인 1943년 8월 10일을 불과 1개월을 앞둔 그때, 일본 특고경찰은 송몽규를 체포했다. 7월 14일에는 윤동주를 비롯한 다른 관련자들도 체포되었다. 윤동주·송몽규, 독방에서 복역하다 차례로 옥사 숭실중학교 시절의 윤동주(뒷줄 오른쪽). 가운데 안경 쓴 이가 윤 시인의 동창생 문익환 목사다. 송몽규와 윤동주는 9개월에 가까운 기간 동안 구속된 상태로 특고경찰의 취조와 검사의 신문을 받은 끝에 교토지방재판소에서 각기 따로 재판을 받았다. 윤동주에게는 1944년 3월 31일에 ‘징역 2년형(미결구류일수 120일 산입)’이 선고되었고, 송몽규에게는 1944년 4월 13일에 미결구류일수 산입이 전혀 없는 ‘징역 2년형’이 선고되었다. 따라서 그들의 출옥 예상일은 ‘윤동주 1945년 11월 30일, 송몽규 1946년 4월 12일’이었다. 그들의 출옥 예상일을 전해들은 북간도 고향에서는 ‘윤동주 징역 2년 형, 송몽규 징역 2년6개월 형’을 선고 받은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들은 후쿠오카 감옥으로 이송되어 독방에서 복역하다가 차례로 옥사했다. 윤동주는 1945년 2월 16일, 송몽규는 1945년 3월 7일에 운명했다. 우리 국민의 의식 속에는 일제 강점기의 사법체계에 대한 오해가 있다. 일제 사법당국이 조선독립운동에 관한 사건이라 하면 덮어놓고 엄청난 중형을 가했으리라고 믿는 것이다. 그래서 한때 ‘윤동주 시인이 관련으로 을 받았다’는 사실을 두고 “형량을 보니 별것 아니었겠군!”하는 반응이 큰 공감을 얻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시대의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막상 일제 재판정에서 선고된 형량은 우리의 통념을 깨는 경우가 많다. 특히 사상범죄의 선고 형량이 예상 외로 가볍다. 그러나 사상 범죄라 해도 일제 공안당국이 사건을 만들어 신문을 거쳐 투옥하는 과정에서 잔혹한 고문으로 불구자가 되거나 사망자가 나오는 일이 흔했다. 일제 강점기에 있었던 독립운동사 관계 판결문들을 모아 놓은 을 읽어보면 놀라게 된다. 재판정에서 당당하게 처신한 독립운동가들이 있었던 반면, 그보다 더 많은 판결문의 주인공들이 재판정에서 자신의 독립운동 사실을 부인하거나 후회하면서 선처를 바라고 있었다. 너무도 힘들었던 그 시대의 고통과 역경을 반증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윤동주에 선고된 판결문은 어떠한가. 윤동주와 관련된 일제의 공문서는 두 가지다. 하나는 특고경찰(특고)이 그를 체포하여 취조한 결과를 정리한 ‘취조문서’이고, 다른 하나는 그를 재판한 교토지방재판소의 ‘판결문’이다. 특고의 취조문서는 이 사건을 ‘재경도(在京都) 조선인 학생 민족주의 그룹사건’이라고 명명했는데, 사건 개요 설명이 “중심인물인 송몽규는…”이라는 문장으로 시작된다. 그런데 읽어보면 실로 눈과 마음이 모두 시원할 정도다. 그 악명 드높았던 특고의 신문을 받으면서도 송몽규나 윤동주 모두 의연하고 당당하기 그지없다. 특고를 상대로 자신들이 갖고 있던 조선 독립에 대한 열망과 대책과 소신을 가감 없이 쏟아놓았다. 취조문서와 판결문에 등장하는 이 사건 관련자는 모두 7명이다. 그들 중에서 1943년 12월에 교토 검사국으로 송국된 사람은 송몽규, 윤동주, 고희욱, 3명이었다. 그러나 특고의 수사관행으로 보아 나머지 사람들도 모두 특고에 잡혀가서 크게 고생한 뒤 석방되었을 것이다. 윤동주에게 선고된 판결문을 상세히 살펴보자. 1. 윤동주가 조선 독립을 원한 까닭 “…(윤동주는) 일찍이 치열한 민족의식을 품고 있었는데 …우리(일본)의 조선 통치의 방침을 보고 조선 고유의 민족문화를 절멸(絶滅)하고 조선민족의 멸망을 도모하는 것이라고 여긴 결과, 이에 조선민족을 해방하고 그 번영을 초래하기 위해서는 조선을 제국(일본제국)통치권의 지배로부터 이탈시켜 독립국가를 건설할 수밖에 없으며…” 2. 조선 독립을 위한 방법론 “조선민족의 현재 실력 또는 과거의 독립운동 실패의 자취를 반성하고 당면 조선인의 실력과 민족성을 향상하여 독립운동의 소지(素地)를 배양하도록 일반 대중의 문화 앙양 및 민족의식의 유발에 힘쓰지 않으면 안 된다.” 3. 현재 일본 상황에 대한 인식 “대동아전쟁의 발발에 직면하자 과학력이 열세한 일본의 패전(敗戰)을 몽상(夢想)하고 그 기회를 타서 조선독립의 야망을 실현할 수 있으리라고 망신(妄信)하여 더욱더 그 결의를 굳히고” 4. 조선인 징병제 실시에 관한 생각 “조선에 있어서의 징병제도에 관하여 민족적 입장에서 상호 비판을 가하고 그 제도는 오히려 조선독립 실현을 위해 일대 위력을 가할 것이라고 논단(論斷)하고” “조선인은 종래 무기를 알지 못했지만 징병제도의 실시에 의하여 새로 무기를 갖고 군사지식을 체득함에 이르게 되어 장래 대동아전쟁에 있어서 일본이 패전에 봉착할 때, 반드시 우수한 지도자를 얻어 민족적 무력 봉기를 결행하여 독립 실현을 가능케 하도록 민족적 입장에서 그 제도를 찬양하고…독립 실현에 공헌하도록 각자 실력 양성에 전념할 필요가 있음을 서로 강조하고” 5. 내선일체(內鮮一體) 정책에 관한 인식 “조선 내 학교에서 조선어 과목이 폐지됨을 논난하고 조선어 연구를 권장한 뒤에, 소위 내선일체 정책을 비방하고 조선문화의 유지, 조선민족의 발전을 위해서는 독립이 필수인 까닭을 강조하고” 6. 일본과 조선 사이의 차별 압박 지적 “조선의 교육기관 학교 졸업생의 취직 상황 등의 문제를 포착하고 내선(內鮮) 간에 차별과 압박이 있다고 지적한 뒤 조선민족의 행복을 초래하기 위해서는 독립이 급한 일이라는 뜻을 역설하고” 7. 미일전쟁(=대동아전쟁, 태평양전쟁)에 대한 대응자세 “대동아전쟁은 항상 조선독립 달성의 문제와 관련해서 고찰함을 요하며, 이 호기(好機)를 잃으면 가까운 장래에 조선이 독립할 가능성을 상실하고 마침내 조선민족은 일본에 동화되고 말 것이므로 조선민족인 자는 그 번영을 열망하기 위하여 어디까지나 일본의 패전을 기해야 하며” 8. 조선독립의 당위성에 대하여 “조선총독부의 조선어학회에 대한 검거를 논란한 뒤, 문화의 멸망은 필경 민족을 궤멸시키는 것임을 역설하고 예의 조선문화의 앙양에 힘써야 한다고 지시하고”, “조선의 고전예술의 탁월함을 지적한 뒤에 문화적으로 침체해 있는 조선의 현상을 타파하고 그 고유문화를 발양시키기 위해서는 조선독립을 실현할 수밖에 없는 까닭을 역설하고”, “동인(장성언)의 민족의식 강화를 돕고자 자신이 소장한 을 대여하고 조선사를 연구하도록 종용하고” 판결문에 드러난 윤동주의 모습과 자세는 너무도 당당하고 의연하여 눈이 부실 지경이다. 판결문에는 “판시 사실은 피고인의 당 공정(公廷=재판정)에 있어서의 판시와 같은 취지의 공술(供述)에 의하여 이를 인정한다”라고 기재되어 있어, 그가 재판정에서 판사들을 상대로도 위와 같은 발언을 했음을 명확하게 입증하고 있다. 그의 동료 송몽규의 경우 역시 윤동주와 똑같았음이 그에 대한 판결문으로 증명된다. 취조 시 발언과 재판정에서 발언 일치 윤동주가 가졌던 미일전쟁에 관한 의식과 대응자세를 당대 조선사회의 유명한 지도층 인사였던 J박사의 경우와 비교해 보면 너무도 크게 대비된다. 그들이 재판 받은 날은 공교롭게도 불과 하루 차이였는데, J박사는 지인에게 미일해전에서 일본이 군함을 많이 잃은 것 같다고 말한 것이 문제가 된 사건에서 “자신은 이미 황국신민화, …유언비어 운운”하면서 그런 사실을 아예 부인했다. 반면, 윤동주는 일본의 특고경찰과 검사와 판사들 앞에서 “조선독립을 위해서는 대동아전쟁(미일전쟁)에서 일본이 패전해야 한다”고 당당하게 주장했던 것이다. 윤동주의 문학이 일제 강점기의 어두운 한국문학사를 환하게 빛내고 있는 존재이듯, 독립운동가로서의 그의 존재는 참혹했던 일제 강점기 말의 한국독립운동사를 밝고 환하게 빛내고 있다. 송우혜 - 1947년 12월 5일 서울 출생. 서울대 간호학과 중퇴, 한국신학대 신학과를 졸업했다. 1980년 신춘문예에 ‘성 야곱의 싸움’이 당선되어 등단했다. 등단 이후 꾸준히 역사소설에 관심을 기울였다. 소설집으로 (1985)을 비롯, 인간의 삶과 돈의 문제를 다룬 (1990), 병자호란 당시 사대부가문 여인의 삶을 그린 (1996) 등이 있다. 필생의 작업으로 완성한 은 최고의 역작으로 평가받는다.
1100    윤동주, 이 지상에 남긴 마지막 절규... 댓글:  조회:4507  추천:0  2016-02-16
칼럼   “언브로큰” 그리고 윤동주   김혁     1   화제의 영화 “언브로큰(Unbroken)”이 드디어 중국에서 상영되였다. 중국에서는 영화에 앞서 지난 1911년경에 원작소설이 이미 출간되였고 영화의 개봉에 맞추어 소설이 새로운 디자인으로 재출간되였다. 할리우드의 톱스타 안젤리나 졸리가 출연 대신 연출한 영화는 상영전부터 일본 극우들의 온갖 음해와 날조 왜곡으로 일관에 년초 화제가 되었다. “언브로큰”의 개봉 소식에 일본 극우단체들이 보이콧에 나서는가 하면, 평소 좋아했던 배우 안젤리나 졸리의 일본입국금지를 요구하는 서명운동을 벌이는 등등 그 행태가 도를 넘어 상식을 벗어난 행동과 말로 이어지고 있다. 게다가 영화에 출연한 재일 교포도 때문에 곤욕을 치르고있다고 한다. 일본 우익들이 이 영화에 발끈한 원인은 무엇일가? “언브로큰”은2010년 발간된 후 180주 동안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랐던 미국 작가 로라 힐렌브랜드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실존 인물인 루이 잠페리니의 실화를 스크린에 담은 작품이다. 루이 잠페리니는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 역대 최연소 국가대표로 참가한 미국의 육상선수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작전을 수행하던중 전투기 고장으로 태평양 한가운데 추락해 47일 동안 표류하다 적국 일본의 함선에 의해 구조된다. 영화는 루이 잠페리니가 일본 포로 수용소에 끌려가 850일 동안 일본군에 의해 겪게되는 무자비한 역경의 과정이 담겼다. 제2차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의 만행을 소재로 했기에 영화가 상영전부터 일본우익의 심기를 건드렸던것이다. 하지만 막상 영화를 보니 영화적 제약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일본군들이 저지른 비인간적인 수많은 만행을 대부분 다루지 않아 원작에 비해 훨씬 관대했다. 원작에 일본군의 중국 난징대학살 문제나, 십여번 나오던 위안부 얘기도 생략됐다. 일본군이 잠페리니를 비롯한 미군 포로들의 정맥에 희뿌연 코코넛주스를 놓으며 생체 실험을 한 얘기도 영화에는 나오지 않는다. 원작에는 전범 용의자였지만 수년 뒤에는 일본 총리가 됐던 기시 노부스케와 관련된 일화도 들어있다. 기시 노부스케는 현 아베 일본 총리의 외조부이다. 영화를 보면서 내내 떠오르는 인물이 있었다. 뜬금없는 비약일지 몰라도 바로 윤동주였다.   2   일전에도 태평양전쟁 당시 일제가 미군 포로를 상대로 비인도적 생체실험을 자행했음을 보여주는 미국 측 문서가 발견됐다.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이 소장한 “전 일본해군 군의관(중위) 나카무라 시게요시와의 인터뷰”라는 제목의 문서에 이같은 내용이 기록된 사실을 확인되였다. 나카무라는 당시 심문에서 자신이 1944년 1월 말~2월 초 태평양 서부 트루크 41경비대 의무실에서 생체실험 장면을 목격했다고 증언했다. 포로들의 팔 정맥에는 연쇄구균 계열의 생박테리아가 주사됐으며, 일본군은 포로들이 주사를 맞고서 호흡곤란 등으로 상태가 악화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2~3일 후 이들이 패혈증으로 사망하자 시신을 해부해 장기 상태 등을 분석했다. 또 압박지혈대를 착용시켜 동맥과 정맥의 혈류를 차단하고 그 결과를 지켜보는 실험이 이뤄졌다. 이들은 팔과 팔꿈치, 허벅지, 무릎 등을 지혈대로 압박당하고서 실험 직후 극도의 고통을 호소하다 경련과 쇼크를 일으키고 10여분 만에 사망했다. 나머지 2명에 대해서는 의식을 잃자 물로 소생시키고, 다음날 이들을 상대로 폭파 충격 실험을 하고서 살해했다. "이 문서는 태평양전쟁기 일제가 731부대뿐 아니라 태평양 지역에서도 비인도적 생체실험을 했음을 확인해준다” 2차세계대전 당시 영화에서 나오는 루이 젬페리와 비슷한 경력의 사건이 또 하나 있다. 1945년 5월에미군 B29 폭격기에 타고 있던 승무원 11명이 추락, 일본군에 체포되었고 이들 중 여섯명은 산 채로 해부된뒤 소각되었다. 규슈제대 의학부는 이들을 상대로 산 사람의 혈액을 뽑아낸 뒤 바다물을 주입하는 생체실험을 진행했다. 미국 정부기록보존소(NARA)에서 요코하마 전범 재판 기록에는 후쿠오카에 있는 규슈제대에서 실시한 미군 대상 생체실험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   3   바로 같은 해인 1945년 2월16일 후쿠오카형무소의 한 독방 감옥에서 외마디 비명이 내질러진다. 간수가 바짝 청각을 돋우고 달려갔다. 이는 윤동주라는 한 문학청년이 이 지상에 남긴 마지막 절규었다. 민족해방의 날을 불과 6개월 앞둔 1945년 2월 16일, 향년 29년의 한 나 젊은 민족시인이 감방에서 의문사를 당한것이다. 1943년 7월 여름방학을 앞두고 윤동주와 송몽규는 교또경찰서에 검거되여 수감되였다. 사상범으로 피체된 그들의 죄명은 일본 형사의 취조서에는 “독립운동”이라고 기록되여 있었다. 윤동주는 2 년, 송몽규는 2 년 6 개월의 언도를 받고 후코오카(福岡)형무소에 수용되였다. 1945년 고향집으로 매달 초순에 배달되던 엽서가 이해 2월 중순가지 도착되지 않고 대신 "2월 16일 동주사망. 시체를 가져가라."라는 전보가 날아왔다.   윤동주의 시신을 찾으러 오라는 연락을 받은 아버지 윤영석은 일본으로 건너가 사촌인 윤영춘과 함께 후쿠오카 형무소로 갔다. 두 사람은 먼저 살아 있는 송몽규를 면회했다. 알이 반쯤 깨진 안경을 간신히 걸치고 있는 송몽규를 두 사람은 쉽게 알아 보지 못했다. 피골이 상접한 그가 먼저 무슨 말인가 건네 오는데 그게 마치 저 세상에 들려오는 말소리 같았다. “저놈들이 주사를 놓아서 이 모양이 됐고, 동주도 이 주사를 맞고….” 간수의 눈을 피해 몰래 우리말로 간신히 주고 받은 한마디였다.   후쿠오카 형무소는 규슈대학 의학부의 생체실험과 관련이 있는 곳으로 이곳 형무소에서 생체실험이 이루어졌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윤영석이 후코오카 감옥에 갔을 때에도 푸른 죄수복을 입은 조선인 청년 50여명이 강제 주사를 맞기 위해 줄 서 있는것이 목격되었다. 가족이 윤동주의 유해를 찾아간지 한달도 되지 않은 3월7일 송몽규 역시 감옥에서 숨을 거두었다.   일제가 저지른 대표적 만행인 세균전과 생체실험에 대한 의혹은 중국에서도 강력히 제기되였고 그 진상이 세상에 공개된지 오래다. “언브로큰”에서 코코넛을 미군포로에게 주입했듯이 윤동주와 송몽규가 맞았다는 주사에 강력한 의문의 초점이 모아진다. 이에 대해 일본인 문학평론가 고노 에이지 는 “그 의문의 주사”는 당시 규슈제국대학에서 실험하고 있던 “혈장 대용 생리식염수”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한다. 당시 힘겹게 전쟁을 치르고 있던 일제는 부족한 수혈용 혈액을 대신할 물질을 찾고 있었다는 것이다. 생리식염수 대신 바다물을 주입한 규슈제대의 실험을 감안하면 윤동주가 맞았다는 주사 역시 “바다물”일 가능성이 크다. 약리학자의 의견에 따르면 인체에 바다물을 주입할 경우, “바다물에 포함된 동물성 플랑크톤 등으로 인한 세균 감염이 발생할 수 있고, 뇌까지 혈액이 전달되면 혈액이 뇌로 빠져나오게 되는데 이 때의 증상이 뇌일혈과 같다.”고 한다. 같은 시기 후쿠오카 감옥에서 수감자들이 주사를 맞은뒤 받았다는 “암산 테스트”는 현대의학에서도 임상실험의 부작용을 알아보기 위해 널리 사용하는 방법이라고 한다. 암산은 “신경기능을 통합적으로 판단하기 위한 판단 도구”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일본의 전시행정실록을 보면 후쿠오카형무소에서는 1943년 64명, 1944년 131명, 그리고 1945년에는 259 명이 옥사하였다. 이러한 수치는 후쿠오카형무소에서 재소자들을 상대로 대규모의 생체실험을 했으리라는 심증을 안겨준다. 윤동주의 사인에 대하여 일제의 생체실험의 제물이라는것이 주되는 주장이다.   올해는 일본의 패전 70주년, 민족의 해방 70주년이다. 또한 윤동주의 옥사 70주기이기도 하다. 할리우드의 한편의 영화를 계기로 중.한·일 과거사전쟁은 이제 미·일 역사전쟁으로 확전되고 있는 가운데 다시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29세의 젊은 나이에 순절한 우리의 시인을 다시금 환기해 본다. 이 처럼 일본으로서는 감추고 싶은 치부와도 같은 전쟁의 역사가 우리 시인의 애닲은 삶에도 깃들어 있다.   - “청우재”에서 2015년 2월 16일
1099    詩와 함께 윤동주 발자취 더듬어보다... 댓글:  조회:4385  추천:0  2016-02-16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부끄러움'을 노래한 시인 윤동주, 그는 71년 전 오늘(2월 16일)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29년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 조선인 유학생을 모아놓고 민족문화를 알리며 독립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수감된 뒤 1년 만이었다. 생은 짧지만 발자취는 길다. 윤동주는 독립투쟁 일선에서 장렬하게 산화한 투사는 아니었고, 당대에 이름이 널리 알려진 시인도 아니었다. 남긴 작품도 많지 않다. 그럼에도 '가장 좋아하는 시인'이자, 애송시 1호로 그의 '서시'를 꼽곤 한다. 짧지만 파란만장했던 그의 삶과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빛을 발하는 시를 통해 그가 남긴 발자취를 더듬어본다...                             【서울=뉴시스】영화 '쎄시봉' 중 강하늘(왼쪽), 윤형주 윤형주, 윤동주와 강하늘 그 詩 같은 인연 【서울=뉴시스 = 가수 윤형주(69)가 영화 ‘쎄시봉’과 ‘동주’로 남다른 인연을 맺게 된 강하늘(26)이 극중 캐릭터와 “잘맞는다고 생각했다”고 평했다. 강하늘은 ‘쎄시봉’(2015)에서 윤형주, 17일 개봉하는 ‘동주’에서는 윤형주의 육촌형인 시인 윤동주(1917~1945)를 연기했다. 윤형주는 “이번 주 중 영화를 볼 계획이라 영화에 대해 어떤 말을 하기에는 시기상조”라면서도 “우리 삶을 재현해보라고 해도 힘들 텐데, 하늘이가 70~80년 전 그 시대의 삶을 연기하다는 게 얼마나 어려웠을까, 얼마나 노력했을까 싶다”며 애정을 드러냈다. 강하늘은 앞서 시인 윤동주와 가수 윤형주와의 각별한 인연에 대해 “캐스팅되고 윤형주 선생님에게 전화했더니 윤씨로 성을 바꿔야하는 거 아닌가 말씀하셨다”고 밝혔다. 또 “영화를 꼭 보고 싶다는 말도 하셨다”고 덧붙였다. 한 방송 프로그램에서는 자신의 아버지가 젊은 시절 윤형주를 보면서 가수의 꿈을 키웠던 비화도 공개했다. “영화를 통해 윤형주 선생님을 만나 제일 첫 번째로 아버지와 실제로 만나게 해드렸다. 진짜 좋아하셨다.” 윤형주는 1983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윤동주 시 낭송집’(서울음반)을 통해 자신이 작사·작곡한 ‘윤동주님에게 바치는 노래’를 발표했다. 윤동주의 시를 노래로 만들 법도 한데, 그리 하지 않은 데는 사연이 있다. 시인이자 학자였던 아버지 때문이다. 1945년 2월16일, 아들이 28세의 꽃다운 나이에 옥사하자 부친 윤영석(1895~1962)과 함께 시신을 거두러 간 사람이 바로 시인의 당숙이자 윤형주의 아버지(윤영춘·1912~1978)였던 것이다. 시인은 일본 유학 시절인 1943년 7월14일 사상범으로 체포된 후 의문사 당했다. 생체실험에 동원된 것으로 알려졌다. 2010년 ‘쎄시봉 열풍’이 불던 당시 윤형주가 회고한 바에 따르면, 부친은 윤동주를 조카가 아닌 시인으로 존중하고 존경, “시를 절대 건드리지 말라. 시도 노래다”라고 했다. 윤형주는 한때 윤동주의 시를 노래로 만들고 싶었으나 아버지의 엄중한 말씀에 단 한곡도 짓지 않았다. 대신 내놓은 게 바로 ‘윤동주님에게 바치는 노래’다. 이 노래가 실린 음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윤동주 시 낭송집’에서 윤형주는 윤동주의 시를 놓고 오간 부자간의 대화를 공개했다. “14년 전의 꾸지람이 기억납니다. 이 시들이 노랫말이 되어졌으면 하는 생각에 아버님께 정중히 여쭈어 보았습니다. ‘동주 형님의 시들을 노래로 만들어 보고 싶습니다.’ 거북스러울 만큼의 긴 시간이 흐른 뒤에 아버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시는 그 자체가 하나의 노래이다. 이 시가 가지는 아름다운 선율과 리듬을 너는 왜 깨뜨리려 하느냐’.” 윤형주의 글은 이어진다.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숨진 동주 형님의 유해를 안고 현해탄을 건너 고향인 북간도 용정 동산 마루턱에 묻으셨던 아버님이 그 이후로 동주 형님이 잠든 그곳을 찾아보지 못하시고 세상을 떠나신 지도 꼭 4년이 되었습니다. 동주 형님의 모든 것과 누구보다도 그 시를 아끼셨던 아버님의 마음을 헤아려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이렇게 노래를 만드는 것뿐입니다. 시는 하나의 노래였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서울=뉴시스】강하늘, 영화 '동주' 16-02-14 윤형주는 1988년 윤동주의 묘소를 처음 찾았다. 한·중 수교가 이뤄지기 전이라 비자를 신청해놓고 홍콩에서 며칠간 기다린 끝에 도착한 중국이었다. “우리 가족이 무려 43년 만에 윤동주 묘소에 간 것이다. 1945년 2월16일 별세하고 며칠 후 북간도에 안장했다. 6개월 후 조국이 해방됐고 남북이 가로 막히면서 아무도 못갔다.” 윤동주의 묘소를 찾은 사람은 영화 ‘국제시장’에서 흥남철수 작전 당시 9만8000여명을 살려낸 한국의 쉰들러 현봉학(1922~2007)이었다. “현봉학 박사가 윤동주를 사랑했다. 주변 지인의 증언에 입각해 20차례 기억을 더듬어 윤동주의 묘소를 찾아냈다. 가족 중에서는 내가 그 묘소를 처음 찾았는데 그게 88년이었다.” 앞서 윤형주는 "단도 없고 풀도 엉망인 묘소가 너무 초라해서 충격을 받았다”고 밝힌 바 있다. “감동보다는 속에서 격한 감정이 느껴졌다. 그곳에 그렇게 가보고 싶어 하던 집안 어르신이 많은데 그중 일부는 돌아가셨다. 육촌 동생이라기보다는 유족 대표, 윤동주를 좋아하는 남한 사람들을 대표해서 온 거라고 생각했다.” 윤형주는 2010년부터 매년 윤동주의 고향인 중국 지린성 옌벤과 전북 지역에서 윤동주 시낭송대회를 열고 있다. 전주기전대학의 이사인 그는 “옌벤대학과 공동주최해 옌변, 지린과 헤이룽성 조선족 아이들을 모아서 시낭송대회를 열고 내가 유족대표단 심사위원으로 참석한다. 올해는 9월24일 7회 행사가 열린다”고 전했다. 21일에는 일본에서도 첫 행사를 연다. 나고야 한국학교와 전주기전대학이 공동주최하는 ‘윤동주 시 낭송대회’다. 윤형주는 “한국어를 배우는 중학생 이상의 일본인들이 윤동주의 모국어로 시낭송을 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남다르다”며 “20일 일본으로 출국한다”고 말했다. 윤형주의 미니콘서트도 예정돼 있다. 윤형주가 작사·작곡한 ‘윤동주님에게 바치는 노래’는 이렇다. “당신의 하늘은 무슨 빛이었길래/ 당신의 바람은 어디로 불었길래/ 당신의 별들은 무엇을 말했길래/ 당신의 시들이 이토록 숨을 쉬나요/ 밤 새워 고통으로 새벽을 맞으며/ 그리움에 멍든 바람 고향으로 달려갈 때/ 당신은 먼 하늘 차디찬 냉기속에/ 당신의 숨결을 거두어야 했나요/ 죽어가는 모든 것을 사랑했던 당신은/ 차라리 아름다운 영혼의 빛깔이어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왔던 당신은/ 차라리 차라리 아름다운 생명의 빛깔이어라/ 당신의 땅/ 당신의 자리에/ 하늘이 내리네/ 별이/ 내리네.”
1098    풍경 한폭, 우주적 고향 그리며 보다... 댓글:  조회:4604  추천:0  2016-02-16
강에 비친 한 시절의 풍경을 떠나보내면서, 어머니의 자궁을 떠나면서, 탯줄을 띄워 보내면서, 그렇게 우리는 자라날 운명이었나 봅니다. 우리는 자라나 강 저편에 과거가 돼버린 더 먼 나, 혼이 되고 추억이 돼버린 배냇기억의 나를 남겨두고 레테의 강, 그 망각의 강을 건너 어느새 잊혀진 전설이 되었나 봅니다. 우리가 건너온 강 저편, 우주적 고향이 고요하게 반짝이는 풍경 한 폭을 건너다봅니다.
1097    詩作初心으로 되돌아가다 - 시의 그로테스크 댓글:  조회:4918  추천:0  2016-02-15
그로테스크 어원과 정의 그로테스크라는 단어는 1500년 무렵 로마유적 발굴 과정에서 나온 이질적인 요소들이 한데 섞여 식물, 동물, 인간, 건축 형식이 얽혀있는 형식의 벽화에서 나온 것이다. 그로테(grotte)라는 단어는 동굴이라는 이탈리아 어로 그것의 형용사형인 그로테스코(grottesco)와 명사형인 그로테스카(la grotesca), 불어로는 끄로떼스끄 (crotesque)라는 말이 1532년에 쓰이고 있었고 영어에서도 이 말이 쓰이다가 1640년 무렵 그로테스크(grotesque)에 의해 대치되었다. 초기에 이 단어는 고대와 16세기에 발굴된 형식의 모방형태에 관한 것으로 국한되어 쓰였고 ‘그로테스크’라는 말을 문학과 비미술 분야로까지 확대시키게 된 것은 프랑스의 경우 16세기 경이었지만 영국과 독일의 경우는 18세기에 와서이다. 이렇게 그로테스크가 확산됨에 따라 초기에 그로테스크의 끔찍하거나 무시무시한 성질들이 억제되고 그에 따라 우스꽝스럽고 뒤퉁그려진, 괴상한 것을 지나칠 정도로 강조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러한 그로테스크의 의미는 19세기에도 그대로 통용되었으며 또한 상당한 정도까지 20세기에도 계속되며 많은 사람들에게 오랫동안 부정적, 경멸적인 것으로 배척당하였다. 이는 그들이 고집스럽게 현실세계의 질서와 그에 따른 고전적인 미학 규범이란 척도에 의해서만 그로테스크를 평가했기 때문이었고 그로테스크에 대한 당시의 지배적인 거부감에도 불구하고 웃음과 공포, 현실과 비현실의 결합이란 양면성을 지닌 그로테스크의 미학적 정당성과 가능성을 모색하려는 노력이다. //////////////////////////////////////////////////////////////////////////////////////////////////////////// 그로테스크/최승호 사나운 빗줄기가 유리에 흘러내리고 와이퍼가 빠르게 움직일 때, 천둥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며 번개가 밤하늘을 찢어놓을 때, 고속도로 갓길에 차를 세워놓고 나는 불현듯 그 기이한 문어를 떠올렸다. 발 하나를 떼어내듯 자신의 음경을 어둠 속으로 출발시키는 문어를. 달의 뒷면으로 하강하는 달착륙선처럼, 그것은 목표물을 향해 내려가고 있을 것이다. 태고의 흑암이 깔려 있는 바다에서 그 괴상한 음경은 홀로 떠돌아다니다가 마침내 원하는 것을 찾았을까. 눈 먼 채 개흙에 우글거리는 먹장어들이나 입 큰 아귀, 왕코브라처럼 성질 사나운 곰치의 먹이가 되지 않았을까. 눈앞에 벼락불이 떨어지고 천둥이 치고 사방이 점점 더 캄캄해진다. —시집 『북극 얼굴이 녹을 때』 //////////////////////////////////////////////////////////////////////////////////////////// 그로테스크 / 최승호 나는 말을 한다. 있을 수 없는 죽음에 대해서...... 어느 날 나는 지상에 나 혼자 살아남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빙하기가 지상의 피를 다 얼려버린 것이다. 만약 내가 사람이었다면 내장까지 다 얼어붙은 채 동사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만은 예외였다. 얼어죽기는커녕 눈보라가 칠 때마다 살이 찌는 느낌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뚱뚱한 몸에 雪片들이 들러붙어 나를 더 뚱보로 만들고 있었다. 옥상 위 뚱보의 고독, 그렇다. 소름 끼치는 무서운 고독이 빙하기에 있었다. 내려다보면 거리는 텅 빈 백색 동굴처럼 고요했다. 마네킹이 뛰쳐나와 울부짖을 것만 같은 적막의 거리. 소음도 소란도 없었다. 사람 하나 없었고 개 한 마리 없었다. 다 죽었는데 나만 혼자 구경꾼처럼 남아 있어도 되는 것일까. 마치 지구의 종말에 대한 긴 보고서를 작성해야 하는 어느 우울한 외계인처럼, 빌딩 옥상 위에서 허구헌 날 망원경도 雪眼鏡도 없이 얼음과 눈에 파묻힌 문명의 폐허를 지겹도록 지켜보는 것, 별로 살아남고 싶지도 않았지만 산 자의 몫은 이것이다. 시간은 얼음과 더불어 굳어버린 것일까. 옥상에서 바라볼 때 적어도 인간적인 시간은 끝장이 난 것처럼 보였다. 변화를 몰고 올 시간이란 존재하지 않았으며 과거는 얼음으로 굳어진 현재일 뿐이었다. 흘러가는 것도 없고 흘러오는 것도 없이 모든 사물들이 굳어 머무는 세상의 한 꼭대기에서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일까. 종말의 현장 검증에 필요한 유일한 증인으로서 계속 이렇게 소금기둥처럼 얼어붙은 채 결빙된 선과 면과 굳어버린 각도와 구도들을 한없이 관찰해야 하는 것일까. 차라리 내가 화가였다면 이 장엄한 설경을 거의 흰 물감만으로도 캔버스에 담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재능 있는 화가였다 해도 지금은 그림 그릴 심정도 아니고 붓 하나 없다. 물감도 없고 관객도 없고 뭐든지 없다. 사정이 그렇다. 나는 옥상에서 내려갈 수 없는 것이다. 어제는 진종일 눈보라가 쳤다. 이미 지워버린 세상을 완벽하게 뭉개버리겠다는 기세로 유리조각 같은 눈발들이 끝없이 날아왔다. 하늘도 땅도 없고 오직 눈보라만 보였다. 허공에 붕 떠 있는 느낌, 왠지 불안했다. 밑이 보이지 않으니까 추락할 것 같았다. 내가 잠든 사이 빌딩이 붕괴되기를...... 현기증 속에서 그런 자살 같은 생각을 했다. 왜 나만 혼자 죽지도 못하고 빙하기에 불멸의 존재인 양 남아 있으란 법이 있는가. 이건 끔찍한 형벌이다. 옥상은 나의 감옥이고, 그렇지 않은가. 어쩌면 존재의 이유라는 게 이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감옥을 위해서 나는 존재한다. 그리고 나를 위해서 감옥이 존재한다. 이상한 논리지만, 적어도 이 논리는 어처구니없이 고독하고 암담한 나의 현존보다는 덜 이상하고 덜 비논리적이다. 이론에 의지해 살아야 한다면 이상한 이론들을 많이 만들어서 불안한 사람들을 조금이나마 안심시켜야 한다. 물론 제멋대로 만드는 것이긴 하지만 말이다. 존재의 이유, 그럴듯한 말이다. 똥주머니가 대가리 안에 들어 있는 문어처럼, 이유는 대가리 안에서 만들어져 문어발처럼 너희들을 움직였다. 너희들은 이제 다 얼어 죽었기 때문에 존재의 이유는 나 하나 만의 문제이다. 하지만 나는 존재의 이유가 있다 해도 움직일 수 없지 않은가. 소금기둥처럼 부동의 자세로 굳어 있는 나에게 사실 이유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없는 게 낫다. 생각은 그렇지만 이유가 없으면 불안해진다. 바로 이 점이 문어와 나의 차이인 듯하다. 문어는 존재의 이유를 몰라도 움직이지만 나는 움직이는 데 이유가 필요하고 그것이 없으면 되도록 움직이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다. 움직일 수도 없는 주제에 이런 말을 하다니! 나도 두족류로 태어나볼 걸 그랬다. 대가리에 발이 달려 결국 가슴이 생략된 두족류 말이다. 밤이다. 보름달이 광할한 얼음도시를 비추며 떠오른다. 텅 빈 건물마다 들어찬 어둠, 이제는 최후의 그 늙은 유령도 어디서 얼어 죽은 것 같다. 날마다 교회 지붕에 항아리 같은 모습으로 나타났다 사라졌는데 오늘은 보이지 않는다. 모르긴 해도 아마 자살했을 것이다. 빙하기의 유령이야말로 빙판 위에서 오래 방황하지 말고 용단을 내려 제 목을 끊는 순간 얼굴을 집어 던져 거울처럼 산산조각이 나게 해야 미혹에서 깨어나는 길이 열릴 것이다. 훌륭한 충고 같다. 누구에게도 충고해본 적은 없지만 기억해둘 만한 말을 모처럼 하는 것 같다. 구원이 끝난 밤, 지상에는 구원받을 사람이 없다. 옥상 위에 구원받지 못한 내가 하나 남아 있지만 바라는 것이 오직 죽음이기 때문에 이 빙하기에 구원의 문제는 끝장이 났다. 들을 사람 하나 없는데 왜 이렇게 중얼거리는 것일까. 봄이 오려면 아직 멀었기 때문이다. 봄이 와야 나는 죽을 수가 있고 말을 멈출 수가 있다. 그리하여 이렇게 밤의 옥상 위에서 고독만이 나의 뼈라고 생각하면서, 강물이 흐르고 새들이 지저귀는 먼 봄을 마냥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 그로테스크? 이게 그로테스크가 아닌가. 자판을 두드리다가 팔목 관절에 염증이 생겨 약을 먹으면서 아무도 보지 않을 시를 , 장장 5쪽이나 되는 시를, 저도 읽지 않은 시를, 최승호 자신도 읽지 않을 시를, 미친 듯 입력하고 있는 너의 모습이야말로 바로 그로테스크가 아닌가.   ////////////////////////////////////////////////////////////////////////////////////// 그로테스크의 시학: 최승호 론 이병용(시인, 문학평론가) 인생에는 추위가 있고, 추위는 견뎌야 하고, 견디다 보면 끝장이 나버리는 인생, 그것도 인생일까. 그렇다고 북극곰이 될 수도 없고. - 중에서 그랬더라면 내 이름이 어떻든 이름의 감옥에서 멀리 벗어나 삶을 사랑하는 일에 삶이 바쳐졌을 것이다. - 중에서 Ⅰ. 문제 제기 『달맞이꽃에 대한 명상』(세계사, 1993)을 기점으로 최승호의 시세계가 조금씩 변모하고 있다. 첫 시집 『대설주의보』(민음사, 1983)부터 『고슴도치의 마을』(문학과지성사, 1985), 『진흙소를 타고』(민음사, 1987), 『세속도시의 즐거움』(세계사, 1990), 『회저의 밤』(세계사, 1993)까지의 그의 초기 시집들은 "도시문명의 비판적 사실화"라는 "절대 부정"의 시세계였다면, 그 이후 출간된 『반딧불 보호구역』(세계사, 1995), 『눈사람』(세계사, 1996), 『여백』(1997), 『그로테스크』(민음사, 1999), 『모래인간』(세계사, 2000)과 최근작 『아무 것도 아니면서 모든 것인 나』(열림원, 2003)에 이르는 후기시집에서는 내면적 자성(自省)을 통한 "긍정적" 세계로 나아가고 있음을 살필 수 있다. 하지만, 최승호의 시에 대한 지금까지의 접근은 대략 "표현의 즉물성"(김우창), "도시산업문명에 대한 비판"(유종호, 김준오), "구멍 또는 뿔 이미지"(도정일, 남진우), "불교적 혹은 생명적 세계관"(정효구, 이승하)이란 네 갈래 길에서 서로 교차하고 있었다. 그러면 그의 시집의 해설들을 통해 그간의 공유되고 있는 대표적 논의들을 간략하게 소개하는 것으로부터 이 글을 시작하기로 하자. 먼저 김우창은 최승호의 "관찰의 즉물성"에 주목하고 그의 시가 "지나치게 산문적인 느낌"을 주긴 하지만 뛰어난 사실적 묘사에 이르고 있다고 지적한다. 유종호는 "난폭 운전 시대의 비인간화 경향에 대한 유력한 문학적 대안을 탐문"한 시인으로 그의 현실 인식에는 "두려움"과 "불안"이 특징이어서 "일상의 이모저모를 차분히 반추하면서 그 미세한 음영에 대응하는 섬세한 내향적 시인"이라는 것이다. 이와는 달리 김현은 그의 "부패의 상상력은 인간의 육체가 죽음 앞에서 해체되어가는 과정"으로 드러나는데, 특히 그것은 "변기-똥의 이미지" 즉, "그의 시를 채우고 있는 것들은 전부 쓰레기들이다" 라는 것이다. 김준오는 최승호의 시가 "문명비판의 시고 죽음의 시고, 정치시고, 그리고 세계관의 시"인데 그것이 다분히 "종말론"적이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도정일은 세상을 보는 최승호의 방식은 이라는 것이고 이 세상에 대한 그의 집중적인 시적 주제는 생각컨대 "이라는 것이다. 최승호의 시집이 세상에 쌓인 것만큼 그의 시의 "신비"가 지금 우리 앞에 놓여 있다. 그러나 현재까지의 비평들은 지극히 상식적인 수준의 논의일 뿐 최승호라는 작가(작품)론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다. 이들의 평론들을 도전적으로 읽은 듯한 남진우의 말을 들어보자. 최승호의 모든 시적 진술은 일관되게 삶의 문명의 허망함에 바쳐지고 있다. 그는 삶의 부질없음을 되풀이해서 묘사한다. 그는 건설·생산·발전보다는 폐허·몰락·소멸 등의 단어에 상대적으로 더 친근감을 느끼는 부류의 시인이다. 물론 최승호 말고도 우리 시대엔 이와 비슷한 감수성과 사유를 갖고 있는 시인들이 상당수 있다. 최승호가 이들과 다른 것은 이들과 다른 이미지, 다른 어법으로 그것을 표현해낸다는 데 있다. 우리는 보통 자신이 살아있다고 열심히 생을 영위해나가고 있지만 실제로는 죽어 있는 존재에 불과하다고 말하기는 얼마나 쉬운 일인가. 중요한 것은 "무엇을 말하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말하느냐에 있는 것이다. 윗글에서 최승호가 시집을 새로 펴낸 것만큼의 시의 변모양상을 간과하고 있음은 물론, 그간의 평론들이 "무엇을 말해왔나"가 기존의 작가들을 분석해오던 내용과의 차이를 전혀 보이지 못하고 있음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죽어 있는 존재"를 노래해온 수많은 작가, 예를 들면 송욱이나 고석구와 최승호의 시들은 어떻게 다른 것인가? 남진우에 의하면, 그 차이는 그들 작가의 면면들을 "어떻게" 작품 속에서 구체적으로 밝혀내느냐로 귀착되어지는 것이다. 이 글에서 지금까지의 최승호에 관한 저간의 평들에서 과연 "무엇"을 "어떻게" 갈아엎을 수 있는지를 진지하게 검토해보기로 한다. 그런데 필자가 생각하기에 조금씩 그 모습을 완성해오던 최승호의 시적 방법론이 가장 잘 체적(滯積)된 시집이 바로 『그로테스크』이다. 하여 이 시집은 최승호의 시적 형상화의 창작술을 엿볼 수 있는 "대문"이 될 것이 틀림없다. 문제는 이 문을 여는 열쇠를 "어디서" 구할 것이며 또한 찾은 열쇠로 열고 "어떻게" 그 안을 들여다 볼 것인가가 우리의 관건이 되는 것이다. Ⅱ. 기법으로서의 그로테스크 "그로테스크"란 원래 회화 용어로 "그로테"(grotte: 동굴[cave]이라는 이탈리아 낱말인데 발굴이라는 말도 이와 관련된다)라는 말에서 생겨났으며 이 말은 "기괴하면서도 우스꽝스러운" 형식의 그림을 의미하게 되었다. 다음은 볼프강 카이저의 『회화와 문학에서의 그로테스크』(The Grotesque in Art and Literature, 1957)에 나오는 글로 그로테스크의 본질을 가장 잘 파헤친 설명 부분이다. 그로테스크는 낯설어진 혹은 소외된 세계의 표현이다. 즉, 새로운 관점에서 봄으로써 친숙한 세계가 갑작스럽게 낯설어진다(그리고, 아마도, 이러한 낯설음은 희극적이거나 또는 으시시한 것, 아니면 그 둘 다를 포함하는 것일 수 있다). 그로테스크는 터무니없는 것과 벌이는 게임이다. 다시 말해서 그로테스크를 추구하는 예술가는 존재의 깊은 부조리들과 반쯤은 우스개로 반쯤은 겁에 질려 장난을 한다. 그로테스크는 세상의 악마적 요소를 통제해서 쫓아내려는 시도이다. 윗글에서 서로 겹치는 여러 특질을 종합하여 그로테스크의 정의를 내려보면, 하나는 "우스꽝스러운 것과 무서움 혹은 협오감이 동시에 함께 있는 상태"이고, 다른 하나는 "양립할 수 없는 것들의 작품과 반응 속에서 해결 안 된 충돌", 즉 양면성이 공존하는 비정상이다. 한마디로 그로테스크 이미지란 희극적이면서도 공포스런, 이 양가적 감정을 동시에 수반하는 것으로, 바흐찐 (『라블레와 그의 세계』)의 경우가 희극적인 측면을 보다 주목한 경우라면, 카프카(『변신』)의 경우는 끔직스럽고 괴이한 것에 보다 가까운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로테스크 이미지 속에서 이 양가적 감정은 혼돈된 채로, 갈등의 상태에서 해소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있는 것이지만, 희극적인 측면을 띤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웃음을 유발하기보다는 불안하고 섬뜩한 느낌을 환기시킨다. 이러한 사실은 그로테스크가 적어도 "지적"인 효과만큼이나 강력한 "감정적"인 효과를 동반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또 한가지 주목해야 할 사항은 위에서 희극적인 효과를 유발한 것으로 언급한 불균형이 또한 공포를 부채질하는 근원이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섬뜩한 유머" 혹은 "섬뜩한 농담"이라는 말이 이를 잘 대변해준다. 최승호가 우리의 관심을 끄는 이 "그로테스크"란 용어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필자의 생각으로는 도정일의 아래에 나오는 평론의 지적이 최초가 아닌가 한다. 그러나 우리를 섬뜩하게 하는 것은 이런 이미지들의 선택만이 아니다. ... 그의 묘사는 날카롭고 정확하면서 동시에 섬득하고 괴이하다. 그 묘사는 30년대 독일의 표현주의 그림들을 연상케 하는 -사실성을 괴이함의 상상력에 나염하여 생생하고 충격적인 심상과 특이한 형상으로 변환해 낸다. 이를테면 (4: 44)이라든가... 위에서 최승호 시의 "충격적"이면서도 "사실적"인 묘사를 처음으로 "그로테스크 상상력"이라 이름 붙인 것이 우리 논의의 출발점이 된 것 같다. 그러나 실제로 최승호의 시에서 그로테스크란 단어는 단 두 번 나온다. 한번은 『여백』이란 시집에서 란 시 제목으로 "구원이 끝난 밤. 지상에는 구원받을 사람이 없다. 옥상 위에 구원받지 못한 내가 하나 남아 있지만 바라는 것이 오직 죽음이기 때문에 이 빙하기에 구원의 문제는 끝장이 났다."라고 그로테스크한 상황을 적고 있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우리가 중시하여 다루고 있는 『그로테스크』시집의 책명이 그것이다. 그렇다면 『그로테스크』라는 시집은 어떤 구상을 가지고 있는 것인가? 무엇이 "그로테스크"하단 말인가? 이 물음에 최적의 답을 주는 시가 이다. 무력감에서도 악취가 난다. 산 송장들, 시화호 바닥에 누워 공장 폐수와 부패한 관료들의 숙변을 먹은 산 송장들, 이것은 그로테스크한 나라의 풍경인가. 시화호라는 거대한 변기를 만드느라 엄청난 돈을 배설했다. ... 나는 무력한 사람이다. 절망의 벙어리, 그래도 세금은 낸다. 세금으로 시화호를 죽였다. 살인청부자? 내가 시화호의 살인청부자였다. 나를 처형해 다오. 달 뜨는 시화호에 십자가를 세우고 거기 못 박아다오. 아니면 눈 푸른 달마를 십자기에 못 박아 피 흘리게 하든지. - 중에서 위 시에서 "그로테스크한 나라의 풍경"이 핵심어이다. 그러면 이 나라가 어떠하기에 그로테스크하단 말인가? 사건의 발단은 시화호의 "악취"에서 비롯됐다. 그러나 "누가 시화호를 죽였는가?"라는 시인의 질문에 대한 그 정답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나라 안 그 어느 누구도 "살인청부자"의 죄를 피해갈 수 없겠기에 시인의 눈에 그로테스크하게 비쳐지고 있는 것이다. 분명 "시화호라는 거대한 변기를 만드느라 엄청난 돈을 배설"한 것은 웃음을 자아낸다. 그러나 그 "웃음"은 또한 어이가 없어 웃는 너털웃음 내지는 쓴웃음일 수밖에 없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그로테스크라는 표현은 좁게는 한 나라의 실패한 환경 정책을, 넓게는 "악취"가 날 정도로 "부패"한 그 나라의 정신적 혹은 윤리적 혼돈 상태를 비판하기 위한 수사적 "장치"라고도 볼 수 있다. 또 한편에서 그로테스크한 풍경은 최승호의 다른 시에서는 "기괴한" "무시무시한" "불가사의한" "공간 인식"으로 확장 되어 나타난다. 이때의 공간은 일차적으로는 "초현실"적으로 지각하고 있다. 익사자는 북어처럼 금세 뻣뻣해져서 강물 밖으로 끌려나온다. 수영복을 입은 유원지의 마네킹 300여 명 가량이 갑자기 물에 예배하는 엄숙한 자세로 서서 번뜩이는 강을 바라보는 지금은 오후 3시 17분 59초. 산중턱 무덤지기 돌말은 툭 불거진 돌멩이눈으로 파라솔 색색인 유원지를 굽어보며 벙어리 말 울음을 운다. 누가 선그라스를 깨뜨린다. 뜨거운 자갈들이 노른자도 없이 이글거리는 태양을 품었다. - 전문 위 시에서 산 자는 "마네킹"으로 무감각하고 사자(死者)는 오히려 "북어"로 생명이 없을 뿐이다. 강 "안"과 "밖"이 삶과 죽음의 경계인데 최승호의 시에서 "문"으로 상징되어 많이 등장한다. 그리고 "송장"과 "시체"와 같은 섬뜩한 이미지도 선명한 색상과 더불어 자주 사용한다. 왠지 모르게 "긴장"할 수밖에 없는 삶의 공간을 "초현실"적으로 묘사한 것이 어찌 보면 그로서는 현실을 버터내기 위한 안간힘으로 보여져서 "부조리"한 상황과 닿아 있다 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최승호 시의 공간이 그로테스크한 까닭은 시원(始原)으로 돌아갈 곳이 없기 때문이다. 그의 시에 나오는 자연은 "인공"적인 물질문명의 진행으로 이제 더 이상 생명을 잉태하는 모태가 되지 못한다. 그러므로 현대판 생명 현상은 도처를 떠돌지만 정착하지 못하고, 또한 그 "위기"를 근본적으로 벗어날 수도 없는 것이다. 마을버스는/마을이 없는 곳으로 돌아간다/마치 내가/나 없는 곳으로 돌아가듯이. - 중에서 우리는 돌아갈 모천이 없는 사막의 연어들, ... - 중에서 그래서 그는 더 늦기 전에 마지막 방편으로 삶과 죽음의 "목록"을 작성한다. 에 나오는 "황사반죽 질료"의 목록은 "죽음"의 목록이다. 그러나 에서 시인이 읽고 있는 『동강 유역 산림 생태계조사 보고서』는 모든 생명체들이 그로테스크해지기 이전의 오염되지 않은 자연 세계를 대변한다. 다시 말해 시인이 이 시의 제목을 통해 암시하고 있듯이 『동강 보고서』가 "죽음의 목록이 아니"라면, 그의 시집이 기록하고 있는 그로테스크한 풍경들은 다름 아닌 "죽음의 목록"이라는 점에서 가히 역설적이다. 그리고 이 역설적인 것 또한 기법적으로 그로테스크한 것이기도 하다. Ⅲ. 변신으로서의 그로테스크 그로테스크는 또 다른 한편에서 이상하게 만들기, 즉 미학적으로 보아 상(像)의 변형(變形)이고, 가장(假裝)이며 또한 강등과 비하(卑下)요, 일상적인 세계의 전도인 것이다. 이런 상과 생활의 왜곡화와 변형은 그로테스크의 모태가 되는 것이다. 이 말은 최소한 그로테스크가 "신체적으로 비정상적인 것"과 강한 친화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로테스크가 유발하는 웃음과 그와 뒤섞인 협오, 공포 따위의 반대반응은 둘 다 신체적으로 "잔인한" 혹은 "비정상적인" 혹은 "음란한 것"에 대한 반응일 수 있다는 가능성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면 이러한 관점에서 우선 최승호의 란 어리둥절하면서도 전혀 외설적이지 않은 아래의 시를 살펴보자. 성인(聖人)들을 생각하면 샘 같은 젖통이 떠오른다. 어린 세상에게 젖을 물리려고 그들이 왔었는지 모른다. ... 오늘 내 유두 곁에 철사처럼 털이 하나 솟은 걸 발견했다. 영영 부풀지 않고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젖꼭지가 어떻게 두 개씩이나 못대가리처럼 내 가슴팍에 붙어 있는 것일까. - 중에서 위 시에서 "젖(통)""유두""젖꼭지"와 같은 낱말들은 성적 환상을 불러일으키는 단어들이다. 그러나 첫 연에서 성인(聖人)들이 어린 세상에게 젖을 물리려고 왔다는 "비유적" 진술을 사용함으로써 전혀 성적이지 않다. 2연에서 "털"을 "철사"로 "젖꼭지"를 "못대가리"로 연관짓는 시인의 상상력은 심지어 아찔하기까지 하다. 그러므로 이 시는 신체의 성적 부위를 자극적으로 표현하고도 실제적으로는 성인이 되지 못하는 자괴감을 표출하는 것으로 그 내용이 뒤바뀌고 마는 극적 아이러니의 효과를 낳는다. 흥미로운 것은, "관상학적" 기형 또는 "변형된" 인간의 탄생과 관련된 최승호의 시가 주로 "동물지(誌)"로 출현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최승호의 시에서 죽음 의식의 편재성과 함께 "곤충"이나 "동물"의 이미지에 대한 의존도가 매우 높다는 사실을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동물의 이미지는 단순한 시작적 유추나 비유를 위해 사용된 경우도 있다. 이 경우의 동물 이미지는 단순한 "시각적 비유"의 수준을 크게 넘어서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가파르고 잔혹스러운 삶의 조건을 "상징적 소도구"로 동물 이미지가 동원되어 있다. 이것은 그의 시가 그려내고 있는 폐허, 변기, 쓰레기통, 푸줏간으로서의 세계와 일정한 "환유적 인접체계"를 이루는 것으로 마치 중국의 고서 『산해경』의 분류목록과도 같은 "특이함"과 "괴이함을" 보여주고 있다. 이 부분에 있어서 최승호의 대표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를 아래에서 살펴보기로 한다. 왼쪽 오른쪽으로 나누어졌던 눈을 한 곳에 모으느라 넙치는 얼마나 고통스러웠을 것인가. 눈알 하나를 밤마다 끌어당겨 왼뺨으로 옮긴 뒤 넙치는 원했던 사시(斜視)가 되어버렸다. 넙치 눈은 배꼽을 쏙 빼닮았다. 눈도 배꼽처럼 단절의 흉터인가, 껌벅거리는 흉터, 시선은 남아 있는 탯줄, 한없이 뻗어나가는 투명한 탯줄? 엇갈리면서 뒤 없는 투명함을 마중나가는. ... 어제 넙치가 있던 바닥에 오늘은 벽돌이 놓여 있다. 넙치가 벽돌로 변신하는 것은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그러나 나는 이해했다. 오해한 것인지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이해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 중에서 위 시에서 넙치의 필연적인 "진화"는 상식으로 보면 기형에 가깝다. 시인은 그러한 넙치의 변신을 "적어도 이해한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말로 회피한다. 왜냐하면, 여기서 "변신"(變身)이라 함은 누에가 나비 되는 "자연질서 속의 변신"이기는 하나 문명적 공간으로 강제적으로 옮겨와서는 부정적 변신, 즉 누에가 날개 달아보기도 전에 삶겨져 통조림 번데기로 바뀌는 것과 같은 "피동적 변신"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최승호의 변신에 대한 분석은 단연 도정일의 그것이 돋보인다. 그는 최승호의 "인간의 인간 아닌 것 되기"로의 변신이 발생하는 원인을 인간의 "욕망"혹은 "탐욕"으로 보고 있다. 그러므로 최승호의 시에 등장하는 변신의 이미지들은 바로 이 역사적 형태의 욕망인 탐욕 때문에 제 모습을 잃어버린 것들, 자기 아닌 다른 것으로의 둔갑을 강요당한 것들의 이미지이다. 이 점에서 최승호의 시는 탐욕의 문법에 지배된 삶의 양식이 인간을 어떻게 인간 아닌 것으로 바꾸어 놓는가라는 문제 -타락한 부족의 변신술에 대한 시적 탐구이며, 그 변신술이 초래한 고통의 보고서이다. 이 때문에 변신의 주제와 이미지들은 그의 시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차원을 이루고 있다. 윗글에 나오듯이 문명사회 안에서 인간은 어느덧 "제 모습을 잃어버"렸고, 형태마저 완전히 일그러져 버렸다. 그런데 최승호의 시에 나타나는 변형은 어느 의미에서는 인간의 "원형 찾기", 즉 "자기 돌아보기"에 대한 기록일 수도 있다. 이 경우 그로테스크란 황당무계한 "공상"과 필연적인 친화관계를 맺고 있기는커녕, 사실적인 틀 속에서 "사실적인 방식"으로 제시된다는 사실에서 적어도 그 효과를 상당부분 성취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따라서 그의 시속에서 예를 들면 시인은 "구토물"을 "뜯어먹"고 "가짜 날갯짓"(을 하기도 하고, 할머니는 "늙은 쥐며느리처럼 뻘뻘거리시다 입적"()하시고, 택시 기사와 승객은 "질겨빠진 몸싸움"()을 해야 하고, 생존자는 "오직 살아남았다는 이유만으로도 이 나라에서는 영웅"()이 될 수밖에 없는 인간의 "비극적" 상황을 처절하리만큼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Ⅳ. 낯선 시간으로서의 그로테스크 시간의 흐름은 엄청난 변화를 가져온다. 그것은 한 개인에게는 희노애락(喜怒哀樂)의 감정과 생노병사(生老病死)의 고통을 안겨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역사적이고 문명적인 전환의 동력이 되기도 한다. 전자의 경우는 개인이 체험하는 몸과 마음의 변화가 주가 되지만, 후자의 경우는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환경과 불가피하게 관련지어 생각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그로테스크한 시간은 누구에게나 "해체"와 "구성"을 반복하는 "낯선 타자"로 다가온다. 따라서 "신구교체"와 "일신우일신"으로 간단없이 찾아오는 시간의 역동적인 힘이 어떻게 일상 혹은 문명의 모습을 바꿔놓는지 아래의 시들에서 살펴보기로 하자. 1) 굴러간다 해도 텅 빈 고무껍질에 불과한 페타이어는 석유문명에 버림받은 듯 길을 벗어나 넘어져 있다. 속도 제로 그 안에서 강아지풀들이 늙은 개털의 질감으로 시들고 있다. - 중에서 2) 자동차를 타고 있었고 뒤에서 자동차들이 무서운 속도로 쫓아오고 있었으므로 브레이크를 밟을 수가 없었다. ... 사실은 우리가 빠르게 도망자들처럼 멀어져가고 있었다. 에어컨을 틀고 있었고 차 유리문을 다 닫고 있었기 때문에 비둘기의 절규도 그 어떤 울부짖음도 들려오지 않았다. - 중에서 위 시들은 모두 현대산업문명을 낳은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의 "파괴적"인 속성을 잘 말해주고 있다. 1)에서 "석유문명"은 자원이 고갈되면 "속도 제로"가 되는데 그 속에서 생명이 다시 소생할 수 있을지 하는 회의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2)에서 역시 "속도" 사회의 "비인간적"인 동력학을 비판하고 있다. 생명의 "절규" 혹은 "울부짖음"에 귀기울이지 않고 그냥 "질주"하는 근대문명의 그 끝은 어찌 보면 "속도 제로의 폐허"가 아니겠는가? "속도"에 마냥 안주할 수도 없겠기에 "불안"하고, 그렇다고 여기서 "멈춤"은 또 다른 "공포"에 사로잡히게 한다는 점에서 "막다른 상황"에 다다른 느낌을 전달해준다. 최승호의 초기시 속에는 놀라우리 만치 "일상"이 한결같이 "비역사적"이고 "비시간적"이다. 이것은 그의 시가 앞선 비평가들이 잘 지적하고 있는 바처럼 "즉물적"이고 "파편적"인데 기인한다. 그로테스크는 정상상태를 벗어난 것이고, 그것의 두드러진 특징은 "과장"과 "극단"적 표현으로 나타나는데, 이러한 특질로 인해 흔히 그로테스크는 "공상적"이고 "환상적"인 것과 연관지어 생각할 수 있다. 이와 같이 현실과 비현실이 마구 뒤얽혀 있는 최승호의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등이 있다. 3) 붉고 붉은 살덩어리에 척 들러붙은 축축한 신문지를 손톱으로 떼내다 보면 피에 절여진 독재자 사진도 조각조각 찢어지던 일이 어제 같은데 이제는 비닐봉지에 피가 흐를 뿐. - 중에서 4) 배를 위로 하고 누워서 송장헤엄을 치는데 송장이 되어서야 송장헤엄을 그친다. 절망도 송장이 되어서야 송장헤엄을 그칠 것이다. 절망에 절망해 버리는 절망까지도. 중에서 위 시들에서 최승호는 "육체"에 대한 존재론적 인식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3)에서 "육(肉)을 담은 포장"을 보고 "분열"적인 사고(思考)를 확실하게 드러내는데, 그 착란이 매우 충격적이다. 분명 "신문지"에 스며든 피가 그 면에 실린 "독재자 사진"을 "조각조각 찢어" 소멸시킨다. 그러나 "비닐봉지"는 그러한 변화가 없다. 그래서인지 "검은" 비닐봉지로 상징되는 근대문명의 "암흑"은 무엇이든 감춰버린다. 이러한 역사의 종언은 인간의 종말을 의미할 수도 있다. 4)에서 산 자는 "송장헤엄"을 치지만, 역설적이게도 사자(死者)는 그 짓을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전자는 "절망"하지만 후자는 그럴 필요도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육체"는 산 자에게는 가시적이기에 자유롭지 못하지만 사자에게는 불가시적이기에 자유롭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자연의 "몸"은 문명의 옷을 입은 그 순간부터 "자유"를 잃어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마지막으로 "그로테스크 패러디"를 주목해볼 수 있다. 이 용어는 패러디가 극단적으로 행해져 마침내 패로디의 원작, 혹은 내용과 형태 사이의 갈등이 지탱될 수 없을 지경에 이르는 것을 지칭한다. 문학은 작가와 독자간의 대화 혹은 소통이다. 패러디는 그러한 "시·공간의 자율성"에 끼어 들어 "간섭" 또는 "폭력"을 행사한다는 점에서 그로테스크하다. 이러한 최승호의 패러디 시들로는 아래의 작품들을 들 수 있다. 5) 봄이 와도 봄에 내놓을 꽃 한 송이 준비하지 못하였다. ... 그리고 개의 슬픔을 느꼈다. - 6) 질화로의 식어가는 재를 부젓가락으로 뒤적이고 바람 새는 문틈에 걸레를 끼우는 것이 겨울나기의 풍경이다. - 위 시들에서 최승호는 선배 작가들의 작품들을 자신의 시속으로 고스란히 녹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5)에서 정현종의 "한 꽃송이(시)" 예감은 최승호 시로 와서는 "꽃 한 송이 준비하지 못"한 "개의 슬픔"으로 감정이 전이된다. 6)에서 정지용의 가 "참하 꿈에도 잊힐 리"없는 겨울 추억의 되풀이라면, 그의 는 "추위"를 나야하는 현재를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다. 원작(原作)의 "낭만적" 삶의 태도들은 최승호의 종말의식 때문인지 모두 사그라지고 그로테스크한 풍경만이 목하(目下)에 남는다. 즉, 최승호의 패러디는 그의 "사실적" 정황에 맞게 적절하게 대치되어진 것이다. 따라서 각자의 경험은 서로 "대화"하면서도 "충돌"한다는 점에서 해석의 여지를 층층이 남겨두고 있다. Ⅴ. 그로테스크 시학: 일상적 리얼리즘을 위하여 최승호의 『그로테스크』는 간행 시기로 보면 후기 시집에 속한다. 그러나 이 시집은 그의 문명 비판적인 "부정적" 세계관을 투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초기 시의 특징을 그대로 적립(積立)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작시법에 있어서는 초기 시와 좀 다른 수사적 방법을 동원하고 있다. 즉, 처음에는 회화적 기법이었지만 점차 문학적인 수사법과 맞물려 정착이 된 "그로테스크"를 그의 시적 묘사의 "문법"으로 확립한 것이 그것이다. 따라서 그의 "투철한" 사실적 표현에 아이러니, 패러디, 풍자, 부조리 등과 같은 "장식"을 곁들이게 되어 이전보다도 훨씬 더 풍요로운 "시적 정의"에 도달할 수 있게 되었다. 최승호는 단순한 "시적 유희"를 즐기지 않는다. 그는 참여시와는 다른 방법으로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려 하는데, 그것이 바로 "알몸"의 시이다. 그의 이러한 시학을 정립(定立)하고 있는 시행들을 뽑아보면 다음과 같다. 자물통처럼 생긴/자라야,/네가 껍질을 벗어놓고 글을 써볼래?/나는 네 대신 늪으로 돌아가/흐린 물 속을 알몸으로 헤엄칠 테니. - 중에서 「문법을 잘 지켜라. 제군들 그 누구도 문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 비유하자면 문법은 형무소장이요 너희들은 죄수들인 것이다」- 중에서 등에 펜이 꽃힌 채/글을 쓰는 것은 아닌지, ... 등에 쟁기 박힌 하늘소가/볕밭을 갈아엎는다, 라고. - 중에서 밤이 오고/사라진 수평선으로/불 밝힌 내 손가락들이 어기적거리며 지나간다. - 중에서 그렇다. 그는 "알몸"의 시인이고, 그의 문법에 갇힌 "죄수"이고, 펜으로 농사를 짓고, 손으로 여행을 떠난다. 이제 그는 "부정"을 넘어서, "긍정"을 절대시하는 새로운 미로에 갇혔다. 나는 그가 근대문명의 일상에 벗어나는 그로테스크의 시학을 완성했다고 믿는다. 아니 믿고 싶다. 그리고 그가 "명상"과 "초월"을 꿈꾸는 새로운 시학에 정진하는 것이 즐겁다. 그래서 그를 진정 시인이라 예찬해마지 않는 것이다.
1096    오늘도 밥값을 했씀둥?! 댓글:  조회:4827  추천:0  2016-02-14
    밥값/ 정호승   어머니 아무래도 제가 지옥에 한번 다녀오겠습니다 아무리 멀어도 아침에 출근하듯이 갔다가 저녁에 퇴근하듯이 다녀오겠습니다 식사 거르지 마시고 꼭꼭 씹어서 잡수시고 외출하실 때는 가스불 꼭 잠그시고 너무 염려하지는 마세요 지옥도 사람 사는 곳이겠지요 지금이라도 밥값을 하러 지옥에 가면 비로소 제가 인간이 될 수 있을 겁니다   - 시집『밥값』(창비, 2010) ................................................................................................................................................    정호승 시인은 열 번째 시집『밥값』을 내면서 “침묵의 절벽 끝에 한 채 서 있는 작은 수도원처럼 시는 묵언의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그 무엇임을 새삼 깨닫는다.”고 하였습니다. 시를 써본 사람은 대개 경험해본 일이겠는데, 처음 시를 쓸 때는 쓸 것이 없어서 고민되어 시가 짧아지는 경우보다는 감정과잉으로 주절주절 말이 많아지고 이것저것 갖다 붙이는 통에 시가 대책 없이 길어질 때가 더 많습니다. 스스로 깨닫기는 뒷전이고 섣불리 남을 깨우치려는 생각이 앞설 수도 있겠고요. 그러니 가슴이 아니라 입과 손끝으로 쓰는 시가 되는 것이지요.    정호승 시인의 말은 ‘말씀 언(言)’에 ‘절 사(寺)’가 합쳐 가 된 것임을 다시 환기시켜줍니다. 말로 절을 짓는다는 의미이지요. 시 쓰는 일도 용맹정진하는 구도자의 정신으로 치열하게 하라는 뜻입니다. 그렇기에 그 묵언의 상태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하겠는데, 그 수행이 제대로 되지 않아 내 경우 어쩌다 시를 한 편 쓰려고 해도 시정잡배 수준의 마구잡이 언어가 곁을 떠나지 않습니다. '창피하지만' 시를 쓰서 밥을 얻어먹어본 기억은 별로 없기에 시에 대한 밥값에 미안한 마음은 없습니다만 총체적 삶에서 내가 밥값은 제대로 하고 사는지에 대한 미심쩍음은 늘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시인은 왜 어머니께 고하고 지옥에 한번 다녀와 봐야겠다고 했을까요. 이승에서 밥값 못하고 살다 죽으면 지옥행이란 생각 때문이겠지요. 바로 밥값의 여부가 선악의 기준이어서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밥값이나 제대로 하고 사는지 모르겠기에 지옥에 다녀오겠다는 것일 겁니다. 가서 지옥을 눈으로 직접 보고 반면교사라도 삼을 작정이었나 봅니다. 하지만 ‘지옥도 사람 사는 곳이겠지요’ 밥값을 하고 못하고의 분별이 어려울 정도면 지옥도 그다지 흉악한 범죄자들만 득실대는 곳은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면 시인이 꿈꾸는 모두가 밥값 하는 세상이란 어떤 모습일까요. 여전히 비루하고 비극적인 상황에서 그걸 확실히 모르겠기에 지옥에 다녀온다는 것인데, 이것 하나만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가령 어머니의 자식에 대한 헌신적인 사랑에서 인간의 생명력과 희망을 생각하며, 그 사랑이 곧 밥값이라는 사실 말입니다.    
1095    詩作初心으로 되돌아가다 - 色은 상징 댓글:  조회:4720  추천:0  2016-02-14
색은 상징이다- ...빨간색 선풍기는 돌지 않는다     색은 세계 공용의 언어이고 문자다. 기능 위주의 시대엔 모든 상품의 가치가 기능 하나에 편중된다. 자동차는 겉모양보다 고장 없이 잘 달리기만 하면 된다. 냉장고는 얼음만 얼면 그 기능을 인정받는다. 옷도 예외가 아니다. 추위를 막아 준다던가 가리고 싶은 곳을 가려 주면 그 소임을 다하는 것이다. 그러나 생활 수준이 높아지면서 눈높이도 달라지게 된다. '기왕이면 다홍치마'라던가.     기능이 비슷한 상품이라면 디자인이 더 편리하고 색상이 마음에 드는 상품을 찾게 된다. 구두를 고를 때는 옷과 핸드백에 어울리는 색상으로 눈길을 돌린다. 개성이 강한 사람과 마음이 유순한 사람이 찾는 색상이 다르고, 나이․환경이라든가 뚱뚱한 사람, 홀쭉한 사람이 찾는 디자인이 다르다. 그것은 색과의 커뮤니케이션에서 생기는 문화 현상이다. 색의 고유 이미지를 인정하고 활용하는 행위이다.   색의 이미지 전달 기능은 알게 모르게 우리 생활 속에서 이렇게 큰 몫을 하고 있다. 혹시 빨간색의 냉장고나 선풍기를 본 적이 있는가? 파란 색의 다리미나 스토브를 본 적이 있는가? 아마 없을 것이다. 그것은 상품 고유의 기능과 색의 이미지가 다르기 때문이다. 이러한 색의 이미지 정립은 문화적 관습에 의한 것도 있고, 색이 갖는 고유의 속성이 던져 주는 심리적 충동에 의한 것도 있다.   색은 약속이고 관습이다 1998년 겨울은 유난히 추웠다. 날씨도 추웠고 세상도 추웠고 직장도 추웠다. 오리털 점퍼를 입어도 추웠을 것이다. IMF 한파의 체감 온도가 아직도 영하에 머물고 있다.   아침 일찍 자동차를 몰고 출근을 한다. 큰길 한가운데에 노란색 선이 그어져 있다. "이 선을 절대로 넘시 마시오. 만일 이 선을 넘으면 마주 오는 차와 충돌을 하게 되며, 그때는 당신의 생명은 물론 죄 없는 상대방 차와 그 탑승자에게 큰 피해를 줍니다. 그 책임도 모두 당신이 져야 함을 명심하시오"라는 무언의 메시지다. 운전자는 "아이쿠" 하면서 황색선 오른쪽으로 핸들을 돌린다.   조금 더 달려간다. 네거리가 나오고 빨간색, 녹색, 노란색 등이 보인다. 녹색 등과 녹색의 화살표 등이 켜지면서 차들이 일제히 직진도 하고 좌회전을 한다. 멀리 희미하게 높다란 빌딩이 보이고 빌딩 벽면에 짙은 청색의 예쁜 타원이 그려져 있다. 타원 속의 영문 글씨를 읽지 않아도 그것이 어느 기업의 로고인지 안다. 뿐만 아니라 "우리 기업은 세계적인 기업입니다. 우리 제품은 세계에서 인정받고 있습니다"라는 기업 메시지가 느껴진다.   이처럼 우리는 이발소, 우체통, 심지어 당구장까지 색깔로 구별을 한다. 그것은 약속이고 관습에 의해 인지되는 색의 메시지다.   색에도 무게와 온도가 있다. 무겁게 느껴지는 색이 있는가 하면 가볍게 느껴지는 색이 있다. 커 보이는 색도 있고 작아 보이는 색도 있다.   찌는 듯이 더운 여름엔 거실 창문에 파란색 물결 무늬 커튼을 하면 시원한 느낌이 든다. '시원한 느낌이 든다'는 것을 달리하면 '시원하다'는 뜻이다. 검은색 핸드백보다 하얀색이나 노란색핸드백이 가벼워 보인다. 빌딩도 윗부분을 어둡게 칠하면 무너질 듯 안정감을 잃는다. 뚱뚱한 사람이 검은색 싱글 정장을 하면 훨씬 날씬해 보인다.   색의 속성을 입증하는 몇 가지 실험을 보자. 가로*세로*높이가 각 10cm인 상자에 60g씩의 모래를 넣고 겉포장 색을 달리해서 양손에 들게 한 다음, 실험 대상자 100명에게 '어느 쪽이 무겁다고 생각하는가'를 물었다. 적색 상자와 오렌지색 상자의 비교에선 84명이 적색 쪽이 무거운 것 같다고 대답했다. 청색과 흰색의 비교에선 68:32의 비율로 청색 쪽이 무겁다고 답변한 사람이 많았다. 이는 심리적인 요인이 상당 부분 작용한 것으로, 어두운 색은 밝은 색보다 무거워 보이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음은 색을 보고 춥다, 덥다를 느끼는 실험 결과다. 투명한 맥주 컵 두 개에 일정량의 물을 붓고 물감을 푼 후에 손가락을 담가 보게 했다. '어느 쪽 물의 온도가 높다고 생각하느냐'고 물었을 때 적색과 오렌지색의 비교에선 60:40으로 적색 쪽의 물이 온도가 높은 것 같다고 대답한다. 적색과 청색의 비교에선 85:15로 적색이 단연 온도가 높다고 말한다. 빨간색  계통의 색은 따뜻하다고 느끼고, 반대로 파란색 계통의 색은 춥다고 느끼는 것이다.   신세대들은 요즘 '튄다'는 어휘를 즐겨 쓴다. 색에도 튀는 배색이 있고 튀지 않는 배색이 있다. 색의 배색 관계를 활용하면 얼마든지 튀는 연출이 가능하다. 가장 튀는 배색은 교통 표지판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노란색 바탕에 검은색 글씨나 빨간색 글씨는 먼 곳에서도 쉽게 눈에 띈다.   잘 보이는 배색 관계를 찾기 위해 다음과 같은 실험을 했다. 가로 15cm, 세로 25cm의 색종이에 가로*세로 각 2cm의 다른 색종이를 올려 놓고 잘 안 보일 때까지 후진을 시키면서 색을 구별하게 했다. 그 결과 검은색 바탕에서는 흰색이 가장 멀리까지 보였고 그 다음이 황색, 오렌지색, 초록색의 순이었다. 반대로 백색 바탕에서는 검은색, 빨간색의 순으로 눈에 잘 띄었다.   어쩔 수 없이 밤 늦게 술을 마실 일이 생기면 자기의 복장 색을 다시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다. 검은색 아스팔트 위에선 검은색은 잘 보이지 않는다. 옷 색깔은 교통사고와 무관하지 않다.   색은 보고 느끼는 것도 중요하지만, 읽어야 한다. 색은 문자이고 언어다. 색의 메시지는 개발하면 개발할수록 무한한 에너지를 품고 있다. 세계 시장을 공략하려면 멋진 상품을 만들어야 한다. 멋진 상품은 디자인에 좌우되고, 디자인은 색의 활용을 얼마나 잘하느냐갸 성공의 열쇠이다. [출처] [펌] 색은 상징이다.|작성자 빛남이  
1094    詩作初心으로 되돌아가다 - 시의 함축과 암시 댓글:  조회:4069  추천:0  2016-02-14
    시에서의 함축성과 암시성     옛날 중국에서 한 스승이 세 명의 제자를 두고 그림 그리는 것을 가르치고 있었다. 몇 년 동안 그림을 열심히 배운 제자들을 두고서 그들의 실력과 예술적인 재능을 살펴보 기 위해서 스승은 ‘심산에 숨은 절’이라는 제목으로 그림을 그리도록 했다. 첫 번째 제자는 종이의 한가운데, 절의 전체적인 모습을 번듯하게 들어앉히고 그 주 위 둘레는 기암절벽으로 높게 드리운 산의 경치를 그려냈다. 두 번째 제자는 절의 한 쪽 부분만을 보이게 하고 주위에는 기복을 이루고 있는 푸른 산봉우리들이 서로 덮여 있는 모습을 그려 넣었다. 세 번째 제자는 산길 사이에 나 있는 돌층계 몇 개, 그리고 그 앞을 흐르고 있는 계 곡에서 물을 긷고 있는 스님의 모습을 그렸다. 스승은 세 명의 제자들과 함께 그림을 평하였는데, 모두가 세 번째 제자의 것이 훌륭 한 그림이라고 입을 모았다. 스승이 그 까닭을 각자에게 묻자 첫 번째 제자는 경물도 있고 사람도 있기 때문에 그림이 좋다고 했다. 두 번째 제자는 스님의 모습이 있으니 까 가까운 곳에 절이 있음을 말해주기 때문이며 또한 제목과 가장 잘 어울리기에 좋다 는 대답을 했다. 그리고 그 그림을 그렸던 제자는 자기의 그림이 잘 된 까닭은 ‘숨기 는 데 중점’을 두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스승도 이 제자의 말에 동감하면서 옛사람 이 말한 바, “경물을 숨기면 경계가 더 커지고 경물을 드러내면 경계가 작아진다”는 이야기를 빗대어 세 번째 제자의 그림이 훌륭함을 설명했다. 그 그림은 말고 가까운 곳에 보이는 산의 모습도 없을뿐더러 깊숙하게 들어앉은 절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산길 사이에 그려져 있는 몇 개의 돌층계와 계곡은 산의 축도이고 계곡에서 물 을 긷고 있는 스님의 모습은 절을 상징하고 있는 것 이었다. 즉 경물을 숨김으로써 그 그림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오랫동안 곡절과 사연들을 음미하고 상상의 날개를 펼 수 있는 경계를 넓혀 준 것이다.  
1093    詩作初心으로 되돌아가다 - 詩적 이미지 댓글:  조회:4631  추천:0  2016-02-14
  시적 이미지   제 1 절 시적 이미지의 정의   이미지(image)는 직접적 신체적 지각이나 간접적 신체적 지각에 의해 일나난 감각(感覺, sensation)이 마음속에 재생된 것을 말한다. 이미지는 흔히 심상(心象,  mental picture)이나 영상(影像, shadow picture) 이라고 번역되는데 심상이란 외부의 사물이 우리의 마음에 비춰진 그림자란 뜻이고 영상은 어떤 사물의 모습이 자막에 비쳐져 나타나는 그림자란 뜻이다. 우리가 사물을 인식한다는 것은 실제 사물의 모습이 눈이나 귀나 피부를 통하여 투영되면 이를 머리에서 감지하고 판단하는 작용을 말한다. 그런데 마음에 나타나는 그림자는 반드시 외부의 사물이 직접 투영되는 경우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과거에 경험했던 어떤 사물의 모상이 의식 속에 축적되었다가 재생되는 경우도 있다. 이처럼 과거에 경험했던 사물의 경우는 그 사물의 인상만을 의식 속에 저장해 두었다가 다시 의식의 자막에 재 투영시키게 되는데 이를 가리켜 추억이나 회상, 상상이라고 말한다. 즉 “한 때 지각되었으나 현재는 지각되지 않는 어떤 것을 기억하려고 하는 경우나 체험상 무방향적 표류의 경우나 상상력에 의해서 지각 내용을 결합하는 경우나 또는 꿈과 열병에서 나타나는 환각 등의 경우처럼 직접적인 신체적 지각이 아니더라도 마음은 이미지를 생산해 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한층 특수한 문학적 용법으로서의 이미지는 언어에 의하여 마음속에 생산된 이미지군(群)을 가리킨다.” (Allex Preminger(ed.), 《Princeton Encyclopedia of poetry and poetics》,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65. 참조.) 현대시에서의 이미지에 대한 추구는 과거의 시들에서 나타난 지나치게 감정적이고 음악적인 것에 대한 반발과 문명사회가 지니는 감수성의 분열, 언어의 추상화에 대한 비판에서 생겨나게 되었다. 현대의 문명사회는 시각형의 문화로서 모든 정신영역까지 시각화고 양적단위로 만들고 있다. 그리고 시란 결국 언어예술로서 여기서 예술이 추구하는 세계는 과학이 추구하는 논리적이며 이성적이며 객관적인 세계가 아니라 그 반대면의 또 다른 세계인 비논리적이고 비이성적이며 주관적인 세계를 가리킨다. 이와 같이 예술은 인간들에게 정서적, 환기적, 감동적 작용을 통하여 삶을 풍부하게 하고 의욕을 갖게 하고 영혼의 안식을 누리게 한다. 음악이 음성을 통하여 청각에 호소하고 미술이 색채를 통하여 시각에 호소하는 것과 같이 시의 경우도 인간의 정서적 반응을 극대화하는 매개적 수단을 이용하여 예술의 기능을 충분히 수행한다. 그것은 시에서 청각이나 시각, 촉각 등 감각적인 체험의 매개물인 이미지를 통하여 실현되는데 이는 시인이 직접 경험하고 있는 직감적 이미지와 과거에 경험했던 회상적 이미지를 동원하여 이들 이미지에서 체험되는 독특한 감각을 서술하여 정서적 환기를 시도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시는 추상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특수한 것 즉 이미지를 통하여 추상인 의미를 전달하는 것으로 바로 이 이미지는 작품에서 관념과 사물이 만나는 곳이 된다.   백공작이 날개 펴는 바다가 그립고 그리워 항시 칠색무지개를 그리며 련꽃 항아리에서 까무러친 상념이 툭― 툭― 꼬리를 친다.   안타까운 운명에 애가 타고 타서 까만 안공에 불을 켜고 자주 황금갑옷을 떨치나니   붉은 산호림속에서 맘대로 진주를 굴리고 싶어 줄곧 창 너머 푸른 남천에 희망의 기폭을 날린다.   ― 리욱,《금붕어》, 전문.   중국조선족문학 정초자의 한 사람인 리욱이 1936년에 쓴 이 시는 닫혀있음과 열려있음의 이항대립구조를 설정하여 어항에 갇힌 금붕어의 이미지와 무한한 자유를 표상하는 넓은 바다의 이미지의 대립으로 식민지치하의 젊은 지식인의 자유와 해방에 대한 갈구를 선명하게 드러내었다. 먼저 “그립고 그리운” 바다가 보여주는 그림들 즉 바다의 이미지들은 “백공작이 날개 펴는” 듯이 찬란한 해살이 펼쳐지고 “칠색무지개”가 걸려 있으며 “붉은 산호림”이 깔려 있는 “희망의 기폭”이 날리는 곳이다. 이와 같은 밝고 아름답고 열려있는 바다의 이미지들과 상반되게 금붕어로 표상되는 이미지들은 “항아리”에 갇혀서 “까무러친 상념”을 주체하지 못하여 “툭― 툭― 꼬리를” 치고 있는 모습이다. 이 금붕어는 나아가 “안타까운 운명에/ 애가 타고 타서/ 까만 안공에 불을 켜고” 몸부림치고 있으니 그것이 바로 “자주 황금갑옷을 떨치나니”하는 행위이다. 이처럼 이 시는 바다에 연계되는 열려있고 화려한 이미지들과 금붕어에 연계되는 닫혀있고 숨 막히는 구체적인 이미지들의 선명한 대립으로 자유를 억압하는 현실을 거부하고 “줄곧 창 너머” “희망의 기폭이 날”리는 “푸른 남천”을 바라보는 시인의 희망과 미래에 대한 간절한 동경을 그려내었다.   더러는  옥토에 떨어지는 작은 생명이고자…   흠도 티도 없이 금가지 않은 나의 전체는 오직 이뿐!   더욱 값진 것으로 드리라 하올 제 나의 가장 나중 지닌 것도 오직 이뿐   아름다운 나무의 꽃이 시듦을 보시고 열매를 맺게 하신 당신은 나의 웃음을 만드신 후에 새로이 나의 눈물을 지어주시다.   ― 김현승,《눈물》, 전문.   이 작품의 핵심 이미지는 제목인 “눈물”이다. 이것을 발견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이 눈물이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것은 다시 찬찬히 살펴봐야 할 것이다. 먼저 시인은 눈물이 “옥토에 떨어지는 생명”이라고 함으로써 눈물이 일반적으로 슬픔을 환기한다는 관습적인 생각을 뒤엎어버렸다. 시인의 눈물은 생명이며 그것도 “흠도 티도 없이/ 금가지도 않은” 순수한 것이다. 이로서 이 작품의 눈물은 순수한 생명이란 새로운 내포를 가지게 되었다. 동시에 이 눈물은 꽃과 열매의 관계가 웃음과 눈물의 관계에 상응하듯이 이런 “관계의 관계”를 통하여 영원하고 불변적인 가치를 이루고 있음을 암시한다. 그것은 즉 꽃은 아름답지만 쉽게 시들어버리므로 일시적이고 가변적인 것이니 그와 관계되는 웃음도 마찬가지로 일시적이고 가변적인 것임을 보여주면서 이와 대립되는 관계에 있는 열매와 눈물은 영원하고 불변적이기 때문에 이런 것들로 영원한 가치로서의 생명의 순수성을 드러내려 하고 있는데서 나타난다. 그리고 시인은 자신의 이와 같은 인생태도를 직접적인 진술로 표현하지 않고 눈물이라는 핵심이미지를 빌어서 우리들에게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시에서 이미지가 담당해내는 부분은 바로 이와 같은 것들이다. 이에 대하여 루이스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미지 “그것은 말로 만들어진 그림이다. 한 개의 형용사, 한 개의 은유, 한 개의 직유로 이미지를 만들어 낼 수 있다. 이미지는 표면상으로는 순전히 묘사적이지만 우리의 상상에 외적 현실의 정확한 반영 이상의 어떤 것을 전달하는 어구나 구절로 제시될 수 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말로 만들어진 그림”에 대한 논의는 독자가 시를 읽으며 그저 음미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 어떤 영상을 떠올려 한 폭의 그림을 감상하는 경지에 이르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작품에서 참신하고 대담하고 풍부한 이미지를 창조하는 것이야 말로 현대시창작에서의 관건이라고 말 할 수 있다. 때문에 파운드는 “수많은 작품을 쓰는 것보다 일생 동안에 단 하나의 뛰어난 이미지를 표현하는 것”이 더 낮다고까지 하였다. 이미지는 또한 형상(形象)이라는 말로 번역되어 쓰이기도 하는데 여기서 형상은 감각적 ․ 직관적으로 주어지는 구체적인 상(象)을 말한다. 그것은 반드시 오관(五官)에 의하여 직접적으로 지각되지 않더라도 뇌리에 생생하게 그려낼 수 있는 것이면 된다. 그리고 그것은 개념적 사고에 의하여 파악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감각적 ․ 직관적인 존재이어야 한다. 예컨대 삼각형의 형상은 그려져 있는 감각형의 그림 그 자체이어야 하며 “평행하지 않는 세 개의 직선에 의하여 둘러싸인 도형” 등의 개념적 설명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에이브럼즈(M. H. Abrams)는 문학적 용법으로서의 이미지의 정의를 다음과 같은 세 가지로 나누어 말한 바 있다.   1. 광의적 개념의 이미지는 축자적 묘사에 의하건 인유에 의하건 또는 비유에 사용된 유추에 의하건 간에 한편의 시나 기타 문학작품 속에서 언급되는 감각과 지각의 모든 대상과 특질을 가리킨다. 2. 가장 협의적으로 이미지를 국한하여 작품 속에 나타난 시각적 대상과 장면의 요소를 의미한다. 3. 가장 일반적으로 비유적 언어(figurative language)를 지칭하는데 특히 은유와 직유의 보조관념을 가리킨다. (M. H. Abrams, "A Glossary of literary Terms", Holt, Rinehart and Winston, Inc., 1971. 참조.)   이미지는 한편의 작품에서 하나로만 구성되기도 하지만 여러 개가 복합적으로 구성되기도 하며 단순한 한 가지 종류의 이미지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여러 가지 다양한 종류로 종합적으로 형성되기도 한다. 이와 같이 작품 속에 나타나는 여러 개의 복합적인 이미지의 덩어리를 이미저리(imagery)라고 한다. 이런 이미저리는 여러 이미지들의 결합에 의하여 시의 정서적 환기성을 이루어내며 상승적 효과를 얻게 한다. 이미지는 우리들의 마음속에 지각적 감각적 체험이나 대상을 재구성하며 시의 세계를 실감 있게 형상화 하며 정서를 환기하여 더욱 풍부한 감동을 이루게 한다. 이처럼 이미지는 시의 주제를 보다 효과적으로 드러내고 분위기나 배경, 상황을 제시하여 죽어있는 일상의 언어를 신선한 충격과 감동의 언어로 만든다.           제 2절 시적 이미지의 기능   이미지는 시에 신선함, 강렬성, 환기력을 조장시키며 작품에서 여러 가지 기능을 수행한다. 이런 기능의 수행을 위하여 이미지는 우선  참신한 것이어야 하며 반드시 감각성을 드러내는 것이어야 한다. 이처럼 이미지를 시의 중요한 요소로 인식했던 이미지즘 운동의 선구자들인 흄(T. E. Hume)과 알딩턴(R. Aldington) 등은 1915년에 채택한 “이미지스트 선언”을 통해 이미지의 중요성과 특징을 다음과 같이 표출하였다.   1) 일상어를 사용하되 정확한 말을 고르며 모호한 말이나 장식적인 말을 배척한다. 2) 새로운 기분의 표현으로서 새로운 리듬을 창조하지 않으면 안 된다. 3) 제재의 선택은 자유로워야 한다. 4) 명확한 이미지를 제공한다. 5) 모호하고 불확정한 것이 아니라 견고하고 명확한 시를 쓴다. 6) 긴축된 것만이 시의 본질이다.   여기서 두 번째 항목인 “새로운 기분의 표현으로서 새로운 리듬을 창조”한다는 것이 중요한데 새롭게 본다는 것은 눈에 보이는 것만 보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것까지 보는 것을 이야기 한다. 이에 대하여 일본시인 이토오 게이이치(伊藤桂一)는 그의 저서《서정시입문》에서 한 그루 나무를 보는 순서에 비견하여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1) 나무를 그대로 나무로서 본다. 2) 나무의 종류나 모양을 본다. 3) 나무가 어떻게 흔들리고 있는가를 본다. 4) 나무의 잎사귀가 움직이고 있는 모습을 세밀하게 본다. 5) 나무속에서 승화하고 있는 생명력을 본다. 6) 나무의 모습과 생명력의 상관관계에서 생기는 나무의 사상을 본다. 7) 나무를 흔들고 있는 바람 그 자체를 본다. 8) 나무를 매체(媒體)로 하여 나무의 저쪽에 있는 세계를 본다.   보이지 않는 것은 명료하지 않기 마련인데 어떻게 보이는 것만큼의 명확성과 실감을 느끼게 할 것인가. 바로 여기에 이미지를 잘 운용하느냐 그렇지 못하냐 하는 것이 판가름된다. 시인은 이미지 너머의 보이지 않는 것을 그려내는데 성공하여야 할 것이다. 시인은 한편의 시를 창작할 때 대개 어떠한 것을 독자들에게 전달하고 싶어 한다. 그 “어떠한 것”을 살펴보면 대개 다음의 세 가지로 나뉠 수 있다.   1) 시인이 생각하고 있는 관념 2) 시인의 실제적 경험 3) 시인의 상상적 체험   시인은 이 “어떠한 것”을 전달하기 위하여 작품에서 미학적이거나 독자가 잘 알 수 있는 상태로 만드는 수단을 찾게 된다. 이 수단의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바로 “이미지”창조이다. 그것은 이미지의 정의 속에 이미 암시되어 있듯이 이미지는 무엇보다도 해석에 도움이 되는 중요한 장치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관념과 경험, 체험들을 어떻게 이미지화하는 것이다. 관념을 이미지화하는 일은 시 창작에서 성패를 가늠할 정도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관념(觀念, idea)은 사람의 마음 안에 나타나는 표상, 상념, 개념 또는 의식내용을 가리키는 말이다. 원래는 불교용어인데 진리 또는 불타(佛陀)를 관찰사념(觀察思念)한다는 뜻으로 쓰인 말이며 심리학용어로서의 관념은 그 의미가 명확하지 않으나 대개 표상과 같은 뜻으로 사용된다. 이 관념을 육화한 것이 이미지다. 이런 의미에서 이미지는 다시 말해 “관념의 육화”라고 말할 수 있다.  시인은 작품에서 자기의 관념을 직접 진술하지 않고 이미지를 통해 전달하려고 하기 때문에 구체성의 현실감을 환기시키고 예술적 효과를 나타내지만 대신 시의 의미는 쉽게 포착되지 않게 할 수도 있다. 이것은 시에서의 모호성(糢糊性, ambiguity)을 산생시키는데 이런 시적 모호성은 하나의 단어, 어구, 문절 등이 두 개 이상의 의미를 환기하는 시적 긴장을 가리키며 다의성(多義性, )과 동의어로 시적 가기치기준이 되기도 한다. 또한 모호성은 보들레르(Baudelaire)의 상징주의 시처럼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한 고도의 상징성, 리상(李箱)의 시처럼 관습의 언어행위를 해체한 신기성, 김춘수가 추구한 절대시 또는 무의미시처럼 의미를 배제하려는 무의미성 등과 더불어 모두 현대시의 난해성(難解性, unintelligbility)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리고 이미지 분석을 통하여 시의 의미를 추적할 때 시의 의미는 세 가지 측면을 지니게 되는데 그 하나는 시인이 원래 작품 속에 표현하고자 한 의도적 의미(intentional meaning)이고 또 하나는 작품 속에 실제로 표현된 실제적 의미(actual meaning)이며 그리고 다른 하나는 독자가 해석한 의의(significance)이다. 이 세 가지 측면은 반드시 일치되는 것이 아니다. 신비평에서 시인의 의도나 작품의 모델이 된 시인의 전기적 사실을 작품 “밖”의 요소라고 하여 이것들에 의한 작품의 해석이나 평가를 “의도적 오류(intentional fallacy)”라고 배격하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고요한 샘물 우에 둥근달이 조용히 선다. 두 줄기 그리움이 깊이 뿌리내린 가운데 뿔 달린 사슴 하나 생동한 꿈이 되어 떠있다. 성숙된 꿈속에 아득한 그의 모양이 몽롱히 비칠 때 락엽 몇 잎이 소리 없이 지친 생각 우에 떨어진다.   ― 김정호, 《추억》, 전문.   1986년에 발표된 이 작품은 우리 중국조선족시단에 “몽롱시”의 바람을 안고와 제3회 “두만강여울소리” 시탐구회에서 큰 쟁론을 불러일으켰으며 그 후《문학과 예술》지에서 근 1년간 지상토론을 벌렸던 시이다. 쟁론의 중점은 한 마디로 작품의 해독성에 있었는데 쟁론의 한 측은 이 시가 도대체 무엇을 썼는지 모르겠고 소위 시인도 모르는 작품이 일반 독자들에게는 더욱 난해할 것이기에 이렇게 써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또 이런 난해시의 기법은 서방에서 벌써 일찍부터 실험하였고 이것은 그에 대한 모방에 지나지 않기에 가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쟁론의 다른 한 측은 이 시에 대하여 창작사유에서 정치에 구속되던 일원화사조를 제거하고 우리 시단에 다원화의 창작방법을 제시한 훌륭한 작품이라고 긍정하면서 이 시가 단순연상에서 자유연상에로, 접근성상상과 사상성상상에서 원근상상과 이질조합의 상상에로 사유의 길을 개척한 작품이라고 평가하였다. 한 수의 시에 대한 평가가 이렇게 찬반 양극으로 치달아 가게 된 이유는 작품에서 제시한 이미지들에 대한 이해의 혼란에서 온 것이다. 《추억》이란 제목의 이 시는 “샘물”, “둥근달”, “뿔 달린 사슴”, “락엽” 등과 같은 사실적인 이미지와 함께 “그리움”, “꿈”, “생각” 등과 같은 심리적 현상들을 담고 있다. 그런데 시는 추억 즉 “지나간 일을 돌이켜 생각함”이란 이 심리학적이고 관념적인 현상을 드러내는 데에 있어서 작품에 제시한 여러 가지 사실적 이미지들을 이용한 것이 아니라 이들 이미지에 의하여 나타난 또 다른 관념적인 현상인 “꿈”을 선택하였다. 즉 “A=a” 혹은 “A=A1”과 같이 “추억=꿈”이란 별로 의미가 없는 등식을 이룬 것이다. 여기서 관념적인 현상을 시적 형상으로 드러내는데 필요했던 “샘물”, “둥근달”, “뿔 달린 사슴”, “락엽” 등과 같은 사실적인 이미지들은 다만 시인이 표현하고자한 관념의 배경이 되었을 뿐이고 이것은 그저 이 관념에서 또 다른 저 관념으로 되돌아가는데 필요한 단순전환역할밖에 하지 못하고 말았던 것이다. 때문에 이 작품은 몽롱성에서 탈피하지 못하고 해독에 있어서 적지 않은 난해성을 조성하였다. 이와 같은 의미로 시작품의 창작실천에서 이미지창조의 성공여부가 작품전체의 완성여부를 결정한다고까지 말하게 된다. 작품에서의 이미지의 역할에 대하여 루이스(C. D. Lewis)는 신선감, 강렬성, 환기력 등 몇 가지 방면으로 나누어 말하였는데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1. 신선감   시에서 이미지는 인간의 보편적 정서에 호소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최대한 신선함을 불러일으키는 기능을 수행하여야 한다. 다음의 시 《꽃의 언어》는 “꽃”과 “언어”라는 서로 상이한 요소가 결합됨으로써 독특하면서도 선명한 이미지를 만들어 내고 있다. 시인은 “꽃”이 가지고 있는 일반적이고 통속적인 이미지에서 순수성의 이미지만을 추출하여 “언어”라는 전혀 새로운 요소와 결합시켜 여러 가지 역동적 이미지를 산생, 확산시켰으며 이는 시를 보다 탄력적으로 읽히게 하였다. 이것은 일종 “낯설게 하기” 기법이 잘 활용된 성공사례이기도 하다.   꽃의 언어는 무지개보다 더욱 빛나는 것   선화야, 경아 우리가 불러줄 때 꽃은 아침에 피는 신선한 몸짓으로 그리고 밝은 모습으로 대답해주고 백일홍 방울꽃 아이꽃… 하고  이름 지어 주면 비에 젖지 않은 이만이 듣게 구겨지지 않은 마음만이 받게 대답한다.   꽃의 언어는 수정보다 더욱 순수한 것 형님, 교수님, 국장님… 프랑스어, 라틴어, 영어, 일본어… 계선이 없이 꽃의 언어는 숨 쉬고 있다.   꽃의 언어는 꽃만이 서로 통하고   서로서로 사랑하고 슬픔을 위로할 줄 알고 꽃의 언어는 또 한 두 돌이 되는 아이들만이 듣는 소리 나는 말이다.   ― 리임원, 《꽃의 언어》, 전문.     2. 강렬성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북방으로 휩쓸려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 서릿발 칼날진 그 위에 서다   어데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감아 생각해 볼 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 리육사, 《절정(絶頂)》, 전문.   시는 함축적이고 운율이 있는 순간의 언어이다. 이미지가 때에 따라 아주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기도 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이다. 육사의 이 시에서 “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는 “서릿발 칼날진 그 위”는 극소화된 자아의 존립공간이요 자아의 생명력이 극도로 위축된 내면공간이다. 이에 비례하여 극대화된 불안의 공간은 겨울 북방의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으로 형상화되어 있다. 이런 극한점이 이뤄내는 역설적 반동과 강렬한 대립을 통해 분출되는 이미지, 그리고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등 폭력성 언어와 대항성 언어가 빚어내는 대결구조가 이 시를 한층 강렬한 분위기로 유도하는 것이다.   3. 환기력   어느 머언 곳의 그리운 소식이기에 이 한밤 소리 없이 흩날리느뇨.   처마 밑에 호롱불 여위어가며 서글픈 옛 자췬양 흰눈이 나려   하이얀 입김 절로 가슴이 메어 마음 허공에 등불을 켜고 내 홀로 밤 깊어 뜰에 나서면 머언 곳에 여인이 옷 벗는 소리   희미한 눈발 이는 어느 잃어진 추억의 조각이기에 싸늘한 추회(追悔) 이리 가쁘게 설레이느뇨.   한 줄기 빛도 향기도 없이 호을로 차단한 의상을 하고 흰 눈은 나려서 쌓여 내 슬픔 그 위에 고이 서리다.   ― 김광균,《설야(雪夜)》, 전문.   이 시가 회화적이며 관능적이라는 점은 익히 알고 있는 내용이다. 그러나 좀 더 면밀하게 살펴보면 이 시의 중간 부분인 “머언 곳에 여인이 옷 벗는 소리”의 역할은 이런 차원을 훨씬 넘어서고 있다. 지금까지 끌고 왔던 분위기를 일시에 바꾸어 놓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바꾸어진 이미지를 통해 독자의 정서에 깊게 호소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외 이미지는 시의 진정성, 내밀성(응축성, 정밀성)등에 기여하는 역할을 수향하기도 한다. 진정성은 시의 이미지가 매우 진지한 것이고 정직한 것이어야 하는 점을 말하며 내밀성은 시상이 압축이 형태를 지향하면서 고도로 집중된 정감을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또한 시적 이미지의 기능으로 간결성, 평이성 그리고 자연스러움 등을 들 수 있다.             제 3절 이미지의 종류   언어학자 어번(W. M. Urban)은 언어의 발달 단계를 세 가지 차원으로 나누어 설명하였는데 사실 그대로 흉내 내거나 그대로 기록하는 모사적(模寫的) 단계, 기지(旣知)의 사물로 미지(未知)의 사물을 미루어서 인식하는 유추적(類推的) 단계 그리고 관념의 세계를 가시적인 사물로 표시하는 상징적 단계가 그것이다. 이것은 또한 시에서 시각적, 감각적 효과를 자아내게 하는 정신적 이미지(mental image), 이미 알고 있는 사물들을 빗대어서 새로운 미지의 세계를 설명하는 비유적 이미지(figurative image) 및 시인이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내용을 보다 구체적으로 전달하기 위하여 대상의 본질을 암시적으로 제시하는 상징적 이미지(symbolic image) 등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또한 대상과의 관계 여부에 따라 상대적 이미지와 절대적 이미지로 나뉠 수 있다. 비유적 이미지와 상징적 이미지는 시적비유와 시적상상의 장절에서 다시 자세히 논의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정신적 이미지와 상대적 및 절대적 이미지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1. 정신적 이미지(mental image) 정신적 이미지란 심리적인 이미지로서 시인의 정신 속에 잠재되어 있는 인상(印象)을 말하는데 주로 감각적 체험을 통해 비롯된 심상(心象)을 가리킨다. 즉 언어에 의하여 우리의 마음속에 떠오른 감각적 이미지이다. 감각(感覺, sensation)은 빛, 소리와 같은 외계의 사상(事象) 및 통증과 같은 체내의 자극에 의하여 일어나는 의식현상이다. 자극이 신체에 수용되면 신체 내의 복잡한 작용에 의하여 중추신경에 전해졌을 때 여기서 일어나는 대응이 바로 감각이다. 감각의 말단 기능을 수용이라 하고 최종적인 뇌의 자극구별을 지각(知覺)이라 한다. 의학적인 면에서 보자면 지각이란 감각이 통합되어 구체적인 의미를 지닌 고차원의 기능이다. 자극을 받아들이려면 인체에 자극수용부가 있어야 하는데 이는 자극의 종류에 따라 그 자극에 대한 특히 예민한 장소가 신체의 부분에 따라 각기 정해져 있다. 그리고 감각기의 자극수용부에는 감각세포와 지지세포가 있는데 때로는 감각세포의 흥분을 구심적으로 전달하는 2차 신경세포 또는 3차 신경세포가 존재하기도 한다. 감각이라는 말은 최초에는 외계나 체내의 자극으로부터 직접 일어나는 의식 전체를 의미하였다. 따라서 기억이나 사고, 반성 등이 가미되지 않은 의식이지만 자극으로부터 일어나는 것인 한 감정적인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용어에 의하면 외적 대상에 대한 직접적인 인상(印象)은 감각이라 해도 좋으나 그 후 감정적 요소를 넣지 않은 것을 감각이라 하게 되었다. 또한 심리학이나 생리학에서는 자극으로부터 야기되는 의식 내용에서도 복잡한 형태를 제외한 단순한 내용을 들어서 감각이라 부른다. 즉 자극을 받아서 느끼는 경험은 시간적, 공간적 관계를 갖추고 또한 대부분은 형태를 갖춘 지각이다. 그 지각으로부터 공간적 관계나 시간적 관계, 형태성 등을 뺀 내용을 감각이라 하고 있다. 예를 들어 소리를 들으면 그 소리가 들리는 방향(공간적 방향) 및 소리가 들리고 있는 시간적 관계가 느껴지는데 이와 같은 관계를 빼고서 소리의 강약이나 음조 등을 끄집어 낸 것이 음의 성질이며 이러한 성질로서 나타내는 것이 음의 감각이다. 감각은 시각(視覺), 청각(聽覺), 후각(嗅覺), 미각(味覺) 등과 같이 신체 감각수용기의 종류로 분류된다.   1). 시각적 이미지 시각적 이미지는 사물의 명암, 대소, 색깔 및 채도, 두터움과 엷음, 움직임과 정지 등을 언어로 보여주는 이미지이다. 시각은 우리들의 지각활동 중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현대시의 특징의 하나가 사물을 보다 구체화하는 것이라고 할 때 이 시각적 이미지의 창조는 사물의 시각화를 위한 가장 유리한 방식이기도 하다. 이는 우선 눈에 보이는 사물의 외형적인 모습을 그대로 그려내어 사물을 언어로 시각화하는 방법으로 체현된다.   마른 넝쿨 늙은 나무 어지러운 까마귀   작은 다리 흐르는 물 사람 사는 동네마을   옛 길에 하늬바람 여위어 가는 말 한필   저녁 해 서녘에 기울고 애끓는 이 하늘가에 있어라   ― 마치원(馬致遠), 《천정사 ․ 가을 생각(天淨沙․秋思)》, 전문.   枯藤老樹昏鴉 小橋流水人家 古道西風瘦馬 夕陽西下 斷腸人在天涯   이는 중국 원나라 시인 마치원의 시로 떠돌이 나그네의 하늘 밖에 홀로 버려진 심정을 가장 적절하게 담을 수 있는 경물을 취하여 시인의 처량하고 외로운 심사를 잘 표현하였다. 작품은 앞의 세 구절에서 다만 열여덟 글자의 한자로 아홉 가지 경물을 열거하였는데 이 “마른 넝쿨”, “작은 다리”, “옛 길” 등 각기 다른 아홉 개 이미지들을 유기적으로 엮어 하나의 정체를 이루어냄으로써 쓸쓸한 기분이 흐르는 동양화 한 폭을 그려내었다.   흰 달빛 자하문   달안개 물소리   대웅전 큰보살   바람소리 솔소리   부영루 뜬 그림자   흐는히 젖는데   흰달빛 자하문   바람소리 솔소리   ― 박목월, 《불국사》, 전문.   박목월의 이 시에 담고 있는 것은 모두 시각과 청각에 의존된 것들이다. 따라서 어떠한 표현상의 기교도 개입되어 있지 않고 시가 궁극적으로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가 하는 점에 대해서도 시인은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오직 감각적 정취에 의해 비롯된 분위기만을 제시하는 것으로 시의 구조를 조성하였다. 이와 같이 시인은 극도의 절제를 통해 미적 분위기를 형상화하는 표현기법을 수용하여 표현대상에서 느낀 시인의 생생한 정취 즉 직접적 접속을 통해 획득한 인상과 정서적 감응을 시에 담아 감동을 극대화하였다. 이 시를 통해 감상자는 “흰달빛”에 길게 늘어진 그림자를 보는 것도 같을 것이고 고요하나 영원히 이어지고 있는 “바람”이나 “솔소리”를 듣는 것 같기도 할 것이다. 이처럼 하나같이 감각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이 이 시가 구현하고 있는 이미지의 특징이다. 또한 시적 이미지의 근본기능이 정서적 환기 즉 감동하는 마음의 움직임에 있다고 할 때 그것은 정적인 것이 아니라 동적인 것이다. 따라서 이미지는 명사형보다 동사형에 즉 동적 이미지에 그 생명력이 있다.   아침마다 창문을 열면 봄빛을 줄줄이 드리우며 수양버들이 흐느적 흐느적 그러면 내 마음의 천정에서도 무엇인지 봄빛을 흘리며 줄줄이 내리네 드리우네   온 하루 일터에서도 머리속에서 실버들이 흐느적이네 그러면 나도 모를 큰 힘이 가슴 속에 푸르게 자라나네 아침마다 의젓이 푸드러지는 실버들 어쩌면 저리도 내 마음 같으리!   ― 조기천,《수양버들》, 전문.   일반적으로 움직이는 화면은 정지된 화폭보다 눈에 더욱 잘 뜨이고 더욱 인상이 깊게 안겨온다. 조선시인 조기천의 이 시에서는 우선 “흐느적 흐느적” “드리우며” “흘리며” “내리네” “자라나네” 등 동적인 단어로 움직이는 시각적 이미지를 불러온다. 이어서 이런 움직임이 생성한 “봄빛”이 가득한 “실버들” “수양버들”의 이미지를 생생한 그림으로 눈앞에 펼쳐 보인다. 이것들은 마치 영화나 동영상의 한 장면을 보는 듯 생동하게 안겨온다.   2). 청각적 이미지 청각적 이미지란 사물의 소리를 언어로 표현하는 사물의 가청화(可聽化)로 이루어진 이미지를 말한다. 이 청각적 이미지는 주로 들려지는 소리에서 일어나는 감흥을 통하여 서정자아의 심리상태를 그려내는 역할을 한다. 여기서 들려지는 소리는 시의 분위기를 생기 있게 만들어 주는데 때로는 시적 대상의 일반적인 소리를 담아내기도 하고 때로는 아주 독특한 듣기를 통해 특수한 소리를 담아내기도 하며 서정자아의 마음을 다양하게 실어낸다. 이 사물의 가청화에서는 자연의 소리를 그대로 모방하는 의성어의 사용이 대표적인 언어형식으로 되고 있다.   기차도 여기 와서는 조선말로 붕― 한족말로 우(嗚)― 기적 울고 지나가는 바람도 한족바람은 퍼~엉(風) 불고 조선족바람은 말 그대로 바람바람바람 분다   그런데 여기서는 하늘을 나는 새새끼들조차 중국노래 한국노래 다 같이 잘 부르고 납골당에 밤이 깊으면 조선족귀신 한족귀신들이 우리들이 못 알아듣는 말로 저들끼리만 가만가만 속삭인다.   그리고 여기서는 유월의 거리에 넘쳐나는 붉고 푸른 옷자락처럼 온갖 빛깔이 한데 어울려 파도를 치며 앞으로 흘러간다.   ― 석화,《연변 3, ―기적소리와 바람》, 전문.   이 시는 우선 첫 연에서 기적소리 및 바람의 조선어발음과 한어발음의 차이로 중국내 민족자치구역의 하나인 연변조선족자치주의 특징을 드러내면서 소수민족과 주체민족의 부동한 점을 구별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어지는 두 번째 연의 새들과 귀신들의 등장 그리고 세 번째 연의 유월 거리의 풍경을 통하여 조, 한 두 민족이 연변 땅에서 어울려 살아가고 함께 조국의 운명을 짐 지고 나가는 공동한 점을 나타내었다. 기적소리와 바람으로 표상된 들리는 소리와 새들의 노랫소리 특히 우리들은 알아들을 수 없는 납골당에서 나누는 조, 한 두 민족귀신들이 속삭임은 결국 연변이라는 이 땅에서 함께 살아가는 조, 한 두 민족인민은 현실이라는 차원의 부동함을 뛰어넘어서 두 민족 간의 서로 다른 특징들보다 훨씬 크고 소중한 운명을 공동하게 소유하고 있음을 나타내었다.   오늘 저녁에도 휘파람 불었다오 복순이네 집 앞을 지나며 벌써 몇 달째 휘파람 부는데 휘휘…호호… 그리도 그는 몰라준다오.   날마다 직장에서 보건만 보고도 다시나 못 볼 듯 가슴 속엔 불이 붙소. 보고도 또 보고 싶으니 참 이일을 어찌하오.   오늘도 생긋 웃으며 작업량 3백을 넘쳤다고… 글쎄 3백은 부럽지도 않아 나도 그보다 못하진 않다오. 그래도 그 웃음은 참 부러워―   한번은 구락부에서 나더러 무슨 휘파람 그리 부느냐고 복순이 웃으며 물었소. 난 그만 더워서 분다고 말했다오. 그러니 이젠 휘파람만 불 수 밖에―   몇 달이고 이렇게 부노라면… 그도 정녕 알아주리라! 이 밤도 이미 늦었는데 나는 학습재료 뒤적이며 휘휘…호호… 그가 알아줄까?   ― 조기천,《수양버들》, 전문.   노래로도 작곡되어 우리들 특히 한반도 남북이 다 같이 즐겨 부르고 즐겨 듣는 조선시인 조기천의 시이다. 이 시는 짝사랑에 빠진 젊은이의 안타까운 심사를 휘파람에 담아 아주 생동하게 표현하였다. 낮에도 밤에도 그리고 “벌써 몇 달째” 부는 총각의 휘파람소리, 처녀는 아는 듯, 모르는 듯 “무슨 휘파람 그리 부느냐고” 웃으며 물으니 총각의 가슴은 더 타들어갈 수밖에 없다. 노동현장에서의 건강한 청춘남녀의 사랑이 “휘휘…호호…”라는 휘파람소리와 같이 우리의 귀에 쟁쟁하게 들려오며 입가에 웃음을 머금게 한다.   3). 미각적 이미지와 후각적 이미지 미각적 이미지는 혀와 같은 감각기관으로 달고 시고 짜고 쓴 등 미감(味感)을 느끼어 이루어지는 이미지이고 후각적 이미지는 코와 같은 감각기관에 의해 느껴져지는 냄새에 대한 감각이 이루어내는 이미지를 이르는 말이다.   이 맑은 가을 해살 속에선 누구도 어쩔 수 없다 그냥 나이 먹고 철이 들 수밖에는   젊은 날 떫고 비리던 내 피도 저 붉은 단감으로 익을 수밖에는…   ― 허영자,《감》, 전문.     아, 이 반가운 것은 무엇인가 이 히수무레하고 부드럽고 수수하고 슴슴한 것은 무엇인가 겨울밤 찡하니 닉은 동티미국을 좋아하고 얼얼한 댕추가루를 좋아하고 싱싱한 산꿩의 고기를 좋아하고   ― 백석,《국수》, 부분.   앞의 시 《감》에서는 “떫고 비리던” 등의 단어로 뒤의 시 《국수》에서는 “찡하니 닉은” “얼얼한” 등의 단어로 미각을 담아내어 시의 효과를 높이고 있다.   여승은 합장하고 절을 했다. 가지취의 내음새가 났다. 쓸쓸한 낯이 옛날같이 늙었다. 나는 불경처럼 서워워졌다.   ― 백석,《여승(女僧)》, 부분.   이 시에서는 “가지취의 내음새” 등 후각적 이미지가 시에 환기성과 강렬성을 일으키는데 일조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미각적 이미지와 후각적 이미지는 함께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인간의 감각기관중에 미각과 후각은 매우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코가 막히면 냄새만 못 맡는 것이 아니라 맛까지도 잘 느끼지 못하게 되는 경우를 보더라도 이 두 감각 사이의 상관관계가 얼마나 긴밀한지 잘 말해준다.   내일같이 명정날인 밤은 부엌이 째듯하니 불이 밝고 솥뚜껑을 놀으며 구수한 내음새 곰국이 무르끓고 방 안에서는 일가집 할머니가 와서 마을의 소문을 퍼뜨리며 조개송편에 달송편에 죈두기송편에 덕을 빚는 곁에서 나는 밤소 팥소 설탕 든 콩가루소를 먹으며 설탕 든 콩가루소가 가장 맛있다고 생각한다.   ― 백석,《고야》, 부분.   이 시에서 시인은 명절 전날의 정취를 여러 가지로 묘사하는 중에 다양한 먹을거리를 준비하는 모습을 묘사하기 위해 여러 가지 음식을 나열한다. 곰국이나 여러 가지 송편, 그리고 그 속에 들어가는 소를 나열함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미각적 감각을 느끼게 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 중의 하나는 곰국 끓이는 냄새이다. 이것은 냄새이기도하면서 곰국이 주는 구수한 입맛을 함께 살려내는 것으로 미각과 후각이 함께 작용하는 이미지라고 할 수 있다.   시큼한 배척한 퀴퀴한 이 내음 속에 나는 가느슥히 여진(女眞)의 살내음새를 맡는다.   얼근한 비릿한 구릿한 이 맛 속에 가마득한 신라(新羅)백석의 향수도 맛본다.   ― 백석,《북관》, 부분.   여기서 시인은 냄새와 맛으로 대상을 파악하고 묘사한다. 말하자면 시인은 조선 함경도를 여행하면서 그 곳의 냄새를 통해 그들의 조상 여진을 확인하고 더 멀리의 신라백성의 향수도 찾아 나서고 있다. 미각이나 후각은 본능적인 감각 중에서 그 기억강도가 매우 강한 것 중의 하나라고 말 할 수 있다. 어릴 때 길들여진 맛은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하는 것이 그 예이다. 이처럼 미각적 요소나 후각적 요소에는 그 집단 특유의 내적인 특성이 유전자처럼 내려온다고 할 수 있다. 그러하면 백석이 이러한 미각과 후각을 통해 여진과 신라를 기억해낸다는 것은 상당히 설득력 있는 논리인 셈이다.   4). 촉각적 이미지 촉각적 이미지는 신체접촉에서 감지되는 단단하거나 부드럽고 예리하거나 뭉툭하고 또 차거나 뜨거운 등 무엇에 닿아 생성하는 느낌이 이루어내는 피부감각(皮膚感覺)적 이미지를 가리킨다. 인체의 피부에는 촉각, 온각, 냉각, 통각 등 4종의 감각수용기가 있다. 따라서 촉각적 이미지는 피부감각뿐만 아니라 “춥다, 덥다, 시원하다” 등의 전신감각까지도 포함하는 개념이 되며 그러므로 이 촉각적 이미지 속에는 냉열감각 이미지, 감촉 이미지 등 감각이 모두 포함된다. 이 피부감각을 다음과 같이 세부적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촉각의 적합자극은 물체를 접촉하는 일이다. 둘째, 온각의 적합자극은 온도상승이다. 셋째, 냉각의 적합자극은 온도하강이다. 넷째, 통각은 적합자극이리고 할 정도로 특수화되어 있지 않다. 즉 어떤 종류이든 매우 강한 자극이 작용하면 흥분한다. 통각수용기는 특수한 세포가 아니라 신경섬유말단 그 자체이다. 예전에는 신체감각으로 시각, 청각, 후각, 미각, 그리고 촉각 등 5종류밖에 알려지지 않았으므로 이것을 모아 오감(五感)이라고 하고 그 이외의 감각이 아닌 직감력이나 예감(豫感)등을 제6감각(六感)으로 표현하기도 하였다.   문 열자 선뜩! 뚝 듯 듯 먼 산이 이마에 차라.   우수절(雨水節) 들어 바로 초하로 아침.   새삼스레 눈이 덮인 뫼뿌리와 서늘옵고 빛난 이마받이 하다.   얼음 금가고 바람 새로 따르거니 흰 옷고름 절로 향기롭워라   융숭거리고 살어난 양이 아아 꿈 같기에 설어라   미나리 파릇한 새순 돋고 옴짓 아니기던 고기입이 오믈거리는   꽃 피지전 철 아닌 눈에 핫옷 벗고 도로 칩고 싶어라   ― 정지용,《춘설(春雪)》, 전문.     고개턱에선 한 옛날 쇳돌을 구웠다하여 이름이 쇠골령   우러러 층암절벽 삼복 더위에서 써늘한 바람이 이마에 스미는 곳 떡갈 탱자 느름나무에 무루 다래 칡 덩굴이 칠칠 휘감이였네.   (중략)   젓나무 밑 바윗돌에 다리 펴고 앉으니 소나무 바람소리 귓가에 들리여라 황초 두둑이 한 대 말아 피우면 이제는 시름도 한숨도 아니라 주권의 고마움 가슴 속 사무치여 해야 할 많은 일 머리에 가득 차네.   ― 김조규,《쇠골령고개》, 부분.   상기 두 작품은 똑 같이 이마에 와 닿는 차가움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정지용의 시는 이른 봄의 “선뜩”한 느낌이고 김조규의 시는 한여름의 “써늘한” 느낌이다. 1939년 4월 《문장(文章)》지에 발표한 지용의 시《춘설(春雪)》은 “미나리 파릇한 새순 돋”아나서 봄이 온 듯하면서도 “꽃 피지전 철 아닌 눈”이 내려 “핫옷 벗고 도로 칩고 싶어라”는 것으로 시절의 변덕스러움을 나타내었다면 김조규가 1946년 10월에 쓴 시《쇠골령고개》은 민족의 해방을 맞아 1년 남짓한 뒤에 쓰여 “주권의 고마움 가슴 속 사무치여/ 해야 할 많은 일 머리에 가득 차네.”라는 가슴 벅찬 서정주인공의 이마에 스미는 기분 좋은 서늘함을 담았다. 이 두 작품을 비교하면서 촉각적인 이미지가 어느 정도의 강도로 나타나고 있는가에 따라서 시적 분위기가 이렇듯 달라질 수 있음을 본다.   5). 신체기관이미지 신체기관이미지는 심장의 고동과 맥박, 호흡, 소화 등과 같은 호흡기나 순환기 계통의 감각을 나타내고 있는 이미지이다. 신체기관이미지는 우리의 신체조직, 신체기관의 활동을 이미지로 표현할 때 이는 우리 자신의 신체를 대상으로 했기 때문에 보다 느낌이 강하고 직접적일 수 있다.   “마돈나” 가엷어라, 나는 미치고 말았는가, 없는 소리를 내 귀가 들음은― 내 몸에 피란 피- 가슴의 샘이 말라 버린 듯 마음과 목이 타려는도다.   ― 이상화,《나의 침실로》, 부분.     달아나거라, 저놈의 대가리!   돌팔매를 쏘면서, 쏘면서 사향 방초길 저놈의 뒤를 따르는 것은 우리 할아버지의 아내가 이브라서 그러는 게 아니라 석유 먹은 듯… 석유 먹은 듯… 가쁜 숨결이야   ― 서정주,《화사(花蛇)》, 부분.   신체기관이미지는 이상화의 시 《나의 침실로》에서는 육체의 피와 물이 말라버린 듯 마음과 목이 타고 있는 간절함을 그려내고 있고 서정주의 시《화사(花蛇)》에서는 “석유 먹은 듯… 석유 먹은 듯… 가쁜 숨결이야”에서 보듯 호흡의 급박함을 통해 시적 대상의 고통의 순간을 잡아내고 있다.   6). 근육감각적 이미지 근육감각적 이미지는 근육의 긴장과 움직임을 그려내고 있는 이미지이다. 근육감각이미지는 근육의 긴장과 이완(弛緩)과 같은 감각을 제시한다. 근육감각적 이미지는 다른 이미지보다는 탄력성이 강하여 효율적으로 배치를 하면 시의 생동감을 뛰어나게 만드는 장점이 있다.   내 손에 호미를 쥐어다오 살찐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 이상화,《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부분.   이 시에서는 서정적 주인공이 호미를 쥔다거나 부드러운 흙을 밟아 보는 행위 속에서 근육의 긴장과 이완과 같은 움직임을 표현함으로써 역동적인 형상을 드러내고 있다.   벗으라 한다 벗으라 한다 벗어라 벗자   마지막 한 장의 그… 마저도   속살과 속살끼리 만나 만지고 비비고 삼키고 무너지자   맑은 그 빛깔 달콤한 그 맛 감미로운 그 향기   네가 나되고 나는 너로 된다   그 모습 다 벗고 비로소 포도들은 포도주가 된다   ― 석화, 《그 모습 다 벗고 포도들은 포두주가 된다》전문.   이 시에서 근육감각 이미지는 “만지고” “부비고” “삼키고”  등 동작과 관련되어 나타나고 있다. 시적화자는 이 시에서 포도가 포도주로 되는 과정을 재현하면서 인간은 부단히 자기를 변신시키면서 자아를 완성하고 인생의 새로운 차원으로 승화하여야 비로소 “맑은 그 빛깔/ 달콤한 그 맛/ 감미로운 그 향기”를 소유한 참된 인간으로 완성됨을 제시하고 있다. 물론 이 변신의 과정은 환희와 기쁨으로만 가득한 즐거운 과정이 아니라 오히려 “마지막 한 장의 그…/ 마저도” 다 벗고 “속살과 속살끼리 만나/ 만지고 비비고 삼키고 무너지”는 아픔과 괴로움이 넘치는 고통으로 점철된 과정임을 말하고 있다. 정신적 이미지의 다양한 종류로 이외 심부감각적 이미지, 내장감각적 이미지, 평형감각적 이미지 등을 더 찾아볼 수 있다.   심부감각(深部感覺)적 이미지: 피부보다도 심부에 있는 근육이나 건(腱: 힘줄)등에도 감각수용기가 있다. 하나는 통감으로서 피부의 경우와 마찬가지이다. 또 하나는 근육이나 건 속에 묻혀 있는 장력(張力)이다. 즉 근육이 신장(伸長)하면 이 수용기가 신장되어 흥분한다. 이 신호는 척수신경을 통하여 대뇌피질 측두엽의 피부감각령과 같은 곳에 이르러 심부감각이 된다. 가령 관절이 구부려져 있을 경우는 그 관절을 뻗히면 근육은 신장되어 있지만 구부리는 근육은 이완되어 있다. 이와 같은 근육의 정도가 감각되고 있으므로 눈을 감고 있어도 손, 발의 위치나 운동상태 또는 손에 들고 있는 물체의 무게 등을 알게 된다. 피부감각과 심부감각과는 감각신경도 같이 나란히 가고 있으며 감각령도 같은 장소에 있으므로 합쳐서 체성감각(體性感覺)이라고 한다.   내장감각(內臟感覺)적 이미지: 내장에는 통신경이 분포되어 있으므로 내장통각이 있다. 그밖에 여러 가지 수용기가 알려져 있다. 이들 수용기는 각기 장기에 특유한 상태가 적합자극으로 되어 흥분한다. 가령 직장에 대변이 차 있어 변이 신장되면 변의(便意)를 촉발시킨다. 또 방광이 신장되면 요의를 일으킨다. 이와 같은 감각을 장기감각이라 한다. 식욕, 갈증, 성욕, 구토증 등도 장기감각이다.   평형감각(平衡感覺)적 이미지: 적합자극은 직진 및 회전의 가속도이다. 수용기는 달팽이관 옆에 있는 미로(迷路)속에 있다. 직진에 대해서는 전정계(前庭階) 내의 수용기가 흥분하고 회전에 대하여는 반고리관 내의 수용기가 흥분한다. 신체가 운동하고 있다는 것은 시각이나 심부감각 등에 의해서도 어느 정도 느낄 수 있으나 그것들이 없어도 평형감각에 의하여 느낄 수 있다.         2. 상대적 이미지와 절대적 이미지   시적 이미지는 시적대상이 표상하는 “대상과의 관계”가 어떠한가에 따라 상대적 이미지와 절대적 이미지로 나뉜다. 상대적 이미지는 대상을 가지고 보편성에 기대고 있다. 즉 윤리도덕이나 진리를 비롯한 삶의 모든 의미를 전달하기 위한 수단이거나 객관적 대상을 재현하는 모방론적 이미지이다. 이는 보통 진리나 윤리 도덕의 가치관을 존중하고 그 삶의 가치를 전달하는 수단으로 쓰인다.   지금 어디메쯤 아침을 몰고 오는 분이 계시옵니다. 그 분을 위하여 묵은 이 의자를 비워 드리지요.   지금 어디메쯤 아침을 몰고 오는 어린 분이 계시옵니다. 그 분을 위하여 묵은 이 의자를 비워 드리겠어요.   먼 옛날 어느 분이 내게 물려주듯이   지금 어디메쯤 아침을 몰고 오는 어린 분이 계시옵니다. 그 분을 위하여 묵은 이 의자를 비워 드리겠어요.   ― 조병화,《의자》, 전문.   이 시는 세대교체의 자연적 질서 즉 시간적 존재의 인식을 주제로 하고 있다. 따라서 “의자”의 이미지는 “어린 분”과 “먼 옛날 어느 분”과의 유기적인 관계를 가지면서 이런 주제를 형상화하고 있는 상대적인 이미지이다. 절대적 이미지는 특정 시인의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이미지로 철저하게 개별성에 기댄다. 이는 특정개인의 시적 세계에만 존재하는 이미지로서 병렬적 이미지 구조를 보여준다.   1+3 3+1 1+3 1+3 3+1 1+3 1+3 3+1 3+1 3+1 1+3   선상의 일점 A 선상의 일점 B 선상의 일점 C   A+B+C=A A+B+C=B A+B+C=C   ― 리상,《3차각 설계도 선에 관한 각서 2》, 전문.   리상의 이 시는 언어의 의미성이나 감각성을 모두 배제하고 이미지가 하나의 기호나 사물이고자 하는 전위적 실험시이다. 절대적 이미지의 시는 이처럼 순수하게 사물의 이미지만을 추구하는 일이나 관념의 이미지화를 모두 거부하고 무의미한 기호로 남거나 전체적인 논리성이나 관련성을 거부하고 서로가 병치적인 상태에서 어떤 심리적 분위기만을 드러내려는 경향이 있다. 일반적으로 시는 일정한 의미와 정서가 결합하여 예술성을 획득하고 시의 예술성은 리듬이나 이미지에 의해서 정서적으로 구현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시는 이런 시학의 관습을 일체 거부하고 감정이나 의미가 극도로 배제된 숫자를 나열하여 어떤 형태나 궤적만을 남기고 있다. 또한 절대적 이미지에서 나타나는 사물들은 필연의 관계를 가지고 의도화되고 있지 않다. 다만 서로 어울려 어떤 풍경을 인상적으로 그려내고 있을 뿐이다. 이런 작품에서 개별 시행들 속의 연계 속에서 어떤 의미를 찾아내려고 한다면 십중팔구 실패하고 만다. 그것은 이런 이미지들이 어떤 관념으로서의 의미의 고리에 의해 연결된 것이 아니라 어떤 장면에서 받은 인상을 적절히 이미지화 할 수 있는 언어들을 자유롭게 선택하여 쓰기 때문이다.   삼월에도 눈이 오고 있어다. 눈은 라일락의 새순을 적시고 피어나는 산다화(山茶花)를 적시고 있었다. 미처 벗지 못한 겨울 털옷 속의 음산함이 남아 있는 바다의 정경 일찍 눈을 뜨는 남쪽 바다 따뜻함과 그리움 그 날 밤 잠들기 전에 물개의 수컷이 우는 소리를 나는 들었다.   삼월에 오는 눈은 송이가 크고 깊은 수렁에서처럼 피어가는 산다화의 보얀 목덜미를 적시고 있었다.   ― 김춘수,《처용단장(處容斷章)》, 전문.   이는 김춘수가 추구한 “무의미시”의 한 작품으로 병렬적 이미지의 일종으로 보이는 시이다. 이와 같은 절대적 이미지를 추구하는 작품은 이미지가 대상으로부터 떠나는 것을 시도하여 자기논리를 극단으로 몰고 가서 시적 붕괴와 아울러 이미지의 소멸까지 추구하려는데 그 핵심이 있다. 여기에는 시인의 일종의 “허무의식”이 자리 잡고 있다. 시인의 말을 들어보자.   이미지가 대상을 가지고 있는 이상 대상을 위한 수단이 될 수밖에 없다는 뜻으로 그 이미지는 불순해진다. 그러나 대상을 잃은 언어와 이미지는 대상을 잃음으로써 대상을 무화시키는 결과가 되고 언어와 이미지는 대상으로부터도 자유로운 것이 된다. 이러한 자유를 얻게 된 언어와 이미지는 시인이 바로 실존 그것이라 할 수 있다. 언어가 시를 쓰고 이미지가 시를 쓴다는 일이 이렇게 하여 가능해진다. 일종의 방임상태인 것이다.(《김춘수 전집(2) : 시론》, 한국 문장사, 1982년, 372페이지)   이러한 절대적 이미지의 시들은 새로운 시학의 창조라는 실험성은 인정되지만 시를 수업하는 과정에서는 우선 사물의 감각화, 관념의 감각화에 보다 충실해야 할 것이다.         제 4절 시적 이미지의 구조와 시적 이미지의 어울림   1. 시적 이미지의 구조   시적 이미지는 한 편의 시 안에서 부분적으로 나타나는 경우고 있지만 전체적으로 영향을 미치며 진행되기도 한다. 그 진행이 어떤 형태로 나타나느냐에 따라 지속적 이미지, 집중적 이미지, 병렬적 이미지, 확산적 또는 집약적 이미지 등으로 나뉜다.   1) 지속적 이미지: 지속적 이미지는 한편의 작품에서 전체적 이미지들이 하나의 흐름을 지니며 시작과 끝이 맺어지는 경우로서 장시, 교훈시, 선전시 등에 많이 나타난다.   삼천만이여! 오늘은 나도 말하련다! “백호”의 소리 없는 웃음에도 격파 솟아 구름을 삼킨다는 천지의 푸른 물줄기로 이 땅을 파몰아치던 살풍에 마르고 탄 한 가슴을 추기고 천년 이끼 오른 바위를 벼룻돌 삼아 곰팡이 어렸던 이 붓끝을 육박의 창끝인듯 고르며 이 땅의 이름 없는 시인도 해방의 오늘을 말하련다!   첩첩 층암이 창공을 치뚫으고 절벽에 눈뿌리 아득해지는 이 곳 선녀들이 무지개 타고 나린다는 천지 안개도 오르기 주저하는 이 절정! 세월의 류수에 추억의 배 거슬려 올리라― 어느 해 어느 때에 이 나라 빨찌산들이 이 곳에 올라 천심을 떠받으며 의분에 불질러 해방전의 마지막 봉화 일으켰느냐?   … 오오 조상의 땅이여! 5천년 흐르던 그대의 혈통이 일제의 칼에 맞아 끊어졌을 때 떨어져나간 그 토막토막 얼마나 원한의 선혈로 딩굴었더냐? 조선의 운명이 칠성판에 올랐을 때 몇만의 지사 밤길 더듬어 백두의 밀림 찾았더냐? 가랑잎에 쪽잠도 그리웠고 사지를 문턱인듯 넘나든 이 그 뉘냐? 산아 조종의 산아 말하라― 해방된 이 땅에서 뉘가 인민을 위해 싸우느냐? 뉘가 민전의 첫머리에 섰느냐?   쉬― 쉬― 바위 위에 호랑이 나섰다 백두산 호랑이 나섰다 앞발을 거세게 내여 뻗치고 남쪽 하늘 노려보다가 “따― 웅―” 산골을 깨친다 그 무엇 쳐부수련듯 발톱을 들어 “따―웅” 그리곤 휘파람 속에 감추인다 바위 호을로 솟아 이끼에 바람만 스치여도 호랑이는 그 바위에 서고 있는듯 내 정신 가다듬어 듣노라― 다시금 휘파람 소리 들릴찌 산천을 뒤집어 떨치는 그 노호 소리 다시금 들릴찌!   ― 조기천, 《백두산》머리시, 부분.   조선시인 조기천의 장편 서사시 《백두산》은 머리시와 프롤로그 및 본문 7장으로 총 1천 7백여 행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의 작품이다. 항일혁명투쟁을 형상화한 이 작품에서 “백두산”과 “호랑이”의 이미지는 일관되게 침략자 일제에 맞서 용감하게 싸우는 항일빨찌산과 유격대장 “김대장”의 모습을 담고 있다. “첩첩 층암이 창공을 치뚫으고/ 절벽에 눈뿌리 아득해지는 이 곳”, 웅혼한 기상을 품고 하늘가에 솟아오른 백두산과 “산천을 뒤집어 떨치는” 노호소리로 세상을 깨치는 “백호”, 백두산호랑이의 이미지에는 시종 “5천년 흐르던 그대의 혈통이/ 일제의 칼에 맞아 끊어졌을 때” 이 “칠성판에 오른” 조선의 운명을 구하고저 떨쳐나선 김대장 및 철호, 석준이, 꽃분이 그리고 영남이 등 항일투사들의 강의하고 영용무쌍한 불굴의 모습이 비껴있는 것이다.   2) 집중적 이미지: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海源)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 순정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理念)의 푯대 끝에 애수(哀愁)는 백로처럼 날개를 편다. 아! 누구인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달픈 마음을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 유치환,《깃발》, 전문.   이 시에는 여러 이미지가 등장하는데 결국 주된 한 이미지로 결집된다. “소리없는 아우성”과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은 모두 “깃발”의 비유적 이미지이고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는 “순정”과 “백로처럼 날개를 펴”는 “애수” 역시 “깃발”의 비유적 이미지인 동시에 시각적 이미지이며 이들 이미지들은 모두 주된 시적 대상에 이미지를 모으고 있다. 이것을 집중적 이미지라고 한다.   3) 병렬적 이미지: 주된 이미지의 간섭이 없이 모든 이미지가 동등하게 나열되는 이미지이다. 절대적 이미지의 경우가 중복적으로 구성되는 경우가 대부분 이에 속한다.   바보야, 우찌 살고 바보야, 하늘수박은 올리브빛이다 바보야, 바람이 자는가 자는가 하더니 눈이 내린다 바보야, 우찌 살꼬 바보야, 하늘수박은 한여름이다 바보야, 올리브열배는 내년 가을이다 바보야, 우찌 살고 바보야, 이 바보야.   ― 김춘수,《하늘수박》, 전문.   이 시는 적당한 리듬과 행마다 독자적인 시적문장을 형성하고 있으나 전체적으로 유기적인 논리나 필연성을 지니고 있지 않은 중복되는 이미지의 병치가 있을 뿐이다.   내용 없는 아름다움처럼   가난한 아희에게 온 서양나라에서 온 아름다운 크리스마스카드처럼   어린 양들의 등성이에 반짝이는 진눈깨비처럼   ― 김종삼,《북치는 소년》, 전문.   이 시는 북치는 소년을 “아름다움처럼”, “크리스마스카드처럼” “진눈깨비처럼” 등으로 비유하여 있는데 이런 비유들은 어느 것이 다른 어느 것에 종속되거나 연관되는 것이 없이 동등하게 나열되었다. 이런 이미지의 병렬은 시에서 의미의 한정이나 정서의 긴장성을 제고하는 기능을 하는데 조력한다.   4) 확산적 또는 집약적 이미지: 이미지가 작거나 부분적인 것에서 많거나 큰 것으로 확대되는 경우로 작품 말미에 이를수록 이미지가 커지는 것이 확산적 이미지이며 이와 반대의 경우로 이미지가 작아지거나 축소되어 압축되어 가는 경우가 집약적 이미지이다.   머언 산 청운사 낡은 기와집   산은 자하산 봄눈 녹으면   느릅나무  속잎 피어가는 열두 굽이를   청노루 맑은 눈에   도는 구름   ― 박목월,《청노루》, 전문.   이 시의 주된 이미지는 시각적 이미지인데 이미지의 구조적 측면을 살펴보면 머언 산→ 봄눈→ 느릅나무, 열두 굽이→ 청노루 맑은 눈으로 그 이미지가 원근법을 통해 큰 것에서 작은 것으로 집적화되고 있다. 단순히 시각만을 통해서 나타내고 있는데 이 원근법의 효과적인 묘사로 마치 청노루 한 마리가 열두 굽이를 뛰어내려와 바로 앞에 서서 눈알을 굴리고 있는 듯 한 착각을 하게 한다.     2. 시적 이미지의 어울림   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 그의 온몸이 흔들리우고 있는것을 알았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   ― 신경림,《갈대》, 전문.   이 시의 지배적 이미지는 청각적 이미지이다. 그러나 시상이 결코 얕아보이지도 않으며 청각 중심의 시에서 보게 되는 들떠있음도 찾아보기 힘들다. 그 이유는 바로 이 시의 지배적 이미지는 청각이지만 그것 못지않게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이미지가 있느니 그것이 바로 이 시의 배경을 형성하고 있는 시각적 이미지이라는 것이다. 어느 밤, 갈대가 온몸이 흔들리우던 밤, 바람과 달빛이 어우러진 밤, 그 어둑하게 가라앉은 모습이 다가온다. 이 시각적 이미지는 배경으로 존재하면서도 동시에 갈대의 조용한 울음이 되고 있다. 배경과 대상의 틈새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시각과 청각이 어우러져 하나의 풍경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이 시의 깊이는 바로 여기에서 연유하고 있다. 시각과 청작이 어우러져 같이 흔들리고 있으므로 하나의 이미지로 사고가 단선화 되는 것을 어느 정도 제어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서로 다른 이미지들의 교차는 좋은 효과를 빚어낼 수 있다. 시각적 이미지가 갖는 속성은 많은 부분이 정태적이며 안정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다. 물론 움직이는 상황이나 모습을 재현하고 있는 경우도 있지만 모든 상황을 움직이는 것으로 나타낼 수는 없다. 움직이지 못하는 사물들을 움직이는 것으로 나타낸다면 이는 이미지에 중점을 둔 시라고 하기보다는 불안한 심리묘사 등에 적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청각적 이미지는 시각과는 다르게 근본적으로 움직이는 속성을 지닌다. 당연히 정태적인 시각과 동작적인 청각이 만나게 되면 여기에서 시적긴장 일어나게 되고 이로 인해 시는 탄력적이고 굴곡적인 질감을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단순히 하나의 이미지로만 되거나 일정부분에서 한 이미지가 다른 이미지로 완만하게 변화되는 것과 빠르게 이미지가 교차되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존재한다. 이미지시가 가질 수밖에 없는 단조로움이나 가벼움을 극복하기위하여 감각적 이미지를 복합적으로 드러내는 방법이 있는데 이것을 공감각적(共感覺的) 이미지의 창조라고 한다. 이는 시인의 감수성의 특질로 설명할 수 있는데 한 대상에 대하여 시인은 동시에 여러 감각이 동원되어 예민한 반응을 보이며 그것을 생생하게 인식하는 것이다. 이는 대상에 접하여 촉발된 한 감각이 다른 감각으로 전이 되는 것으로 두 개 이상의 감각이 결합된 형태이다.   ㄱ) 분수처럼 흩어지는 푸른 종소리(김광균, 《외인촌》) ㄴ) 꽃처럼 붉은 울음(서정주, 《문둥이》) ㄷ) 금으로 타는 태양의 즐거운 울림(박남수, 《아침이미지》) ㄹ) 흔들리는 종소리의 동그라미 속에서(정한모, 《가을에》)   상기의 예는 모두 시각과 청각이 결합된 공감각이 제시된 점에서 동일하다. 감각의 전이방법에서 보면 (ㄱ), (ㄴ)와 (ㄹ)는 청각에서 시각으로 전이하고 있으며 (ㄷ)는 시각에서 청각으로 전이되고 있다. 이렇게 감각의 전이는 원관념에서 보조관념으로 전이되어 이루어진다. 그것은 보조관념의 감각은 시인의 실제의 감각체험에서 상상적으로 촉발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공감각적 이미지의 창조는 시상의 전개과정에 이들 이미지가 밋밋하고 막연한 것으로부터 굴곡 있는 질감의 이미지로 변화되면서 강렬한 인상을 남겨주면서 속도감 있게 진행되게 한다. 시적 이미지는 또한 시대에 따라 변하며 지역과 문화에 따라서도 많은 영향을 받는다. 중국과 조선, 일본 등 동양의 고전적 이미지는 주로 고담(枯淡)하고 질박(質朴)한 것이 많다. 조선시대에는 성리학의 유입으로 훈고(訓詁)적인 성리학의 이미지가 강했다. 강호가도(江湖歌道)의 시에 나타난 이미지는 미의식이 그러하듯 일반화된 이미지였다. “나무”나 “꽃”은 우선 나무의 특수한 종류를 불문하고 “나무”라는 일반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고 “꽃” 역시 그러했다. “매화”는 엄동설한 눈서리 속에서도 꽃을 피워내는 것으로 인고의 정신과 강인한 의지를 그리고 “난”은 푸르고 고고한 모습으로 고결함과 지조를 타나내었다. 혹 나무를 구분을 한다고 해도 “소나무”는 낙목한천(落木寒天)의 절개를 표상하는 일반적 이미지가 고정화되어 있었고 “대나무”는 곧은 의지의 선비정신을 표징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미지는 장르와 장르 사이, 계층과 계층 사이, 나라와 나라 사이, 문화권과 문화권의 차이에 따라서도 판이하게 그 양상이 다르게 나타날 수도 있다. 한수의 시에서 강렬하고 신선한 이미지를 창조해 내는 것은 작품의 성패를 가늠하는 중요한 일이 된다. 창작의 실제와 비추어 이것을 아래와 같은 몇 가지 내용으로 정리하여 볼 수 있다.                             1) 이미지의 생명은 명확성과 새로움이다. 모호한 이미지는 오히려 시상의 전개에 도움을 주지 못한다. 2) 내 시가 힘이 없이 나약하다면 시각적 이미지로 표출되는 동태적인 장면을 묘사해 보자. 더 나아가 청각이나 후각, 근육감각적인 이미지 등을 활용해 보자. 3) 내 시가 너무 들떠 있다면 동태적인 면보다는 정태적인 가운데 느릿한 움직임들이나 존재한 것을 촘촘한 사고로 엮어보자. 4) 시각적 이미지는 집중의 효과를 나타내는데 적합하고 청각적 이미지는 분산과 확산의 효과를 나타내는데 적합하다. 5) 한 이미지만을 즐겨 쓰는 것은 시인의 개성일 수 있으나 그것에 대하여 특별한 신념이 없다면 서로 다른 이미지를 적절히 교차하여 써보자. 탄력적이고 긴장감이 높은 시를 만들 수 있다. 6) 이미지 너머의 것을 생각해 보자. 보이는 것의 미세한 움직임을 따라가다 보면 너머의 것이 보인다. 그것을 과감히 잡고 보이는 것보다 더 명료하게 그려내라.   이미지의 창조가 한편의 시를 창작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요소이기는 하지만 매수의 작품에 반드시 이미지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이미지 없이도 시는 이루어질 수 있다.   생활이 그대를 속이더라도 서러워말아라 노여워말아라 울적한 날은 참고 견뎌라 즐거운 날이 찾아오리니   마음은 항상 미래에 살고 현재는 언제나 슬픈 것이니 모든 것은 순식간에 지나가고 지나간 일들은 그리우리라   ― 뿌쉬낀,《생활이 그대를 속이더라도》, 전문.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가겠어요. 어떤 희생이 따를지 따져보지 않겠어요. 그것이 잘한 일인지 생각하지 않겠어요. 그가 나를 사랑하는지 알고 싶지 않아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가겠어요.   ― 베르톨트 브레히트,《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가겠어요》, 전문.     남들은 자유를 사랑한다지마는 나는 복종을 좋아하여요. 자유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당신에게는 복종만 하고 싶어요. 복종하고 싶은데 복종하는 것은 아름다운 자유보다도 달콤합니다. 그것이 나의 행복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나더러 다른 사람을 복종하라면 그것만은 복종할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복종하려면 당신에게 복종할 수가 없는 까닭입니다.   ― 한용운,《복종》, 전문.   러시아시인 뿌쉬낀의 시 《생활이 그대를 속이더라도》는 차분한 어조로 현재와 미래의 관계를 밝혀내어 생활의 깊은 철리를 설명하고 있다. 현란한 수식이나 난해한 표현은 일절 걷어내고 다만 속삭이는 듯 한 마음의 대화로  큰 감동을 주고 있다.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시《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가겠어요》도 직접적인 표현으로 사랑에 대한 강렬한 의지를 담아내고 있다. 매우 직설적인 어조이지만 이는 오히려 솔직하고 구김 없는 진실을 이야기하면서 상황의 긴박감마저 넘쳐내고 있다. 한용운의 《복종》은 이미지의 사용 없이 문체와 어조, 주제(내용)만으로 시적 형상화를 이루어내었다. 시는 복종의 이미를 구체적으로 서술하면서 복종과 자유의 변증관계를 소상히 밝히고 “복종하고 싶은데 복종하는 것은 아름다운 자유보다도 달콤합니다.”라는 결론에 자연스럽게 도달하고 있다. 이처럼 시창작에 있어 이미지의 창조는 중요한 표현수단이기는 하나 상기의 예들처럼 무이미지로 시적 형상화가 가능하기도 한 것이다. 여기서 문체와 어조 그리고 내용이 무이미지시의 시적 형상화에 중요 수단이 되었던 것이다.           //
1092    벽에 도전하는것, 그것 바로 훌륭한 詩 댓글:  조회:4354  추천:0  2016-02-14
       【 미당 】 - 불완전한 언어가 우주를 대변하는 것, 언어의 제약이 정신의 비약을 주는 점이 시의 묘처(妙處)입니다. 시 정신은 언어라는 형식을 빌리기 전에는 예술의 공통된 정신일 따름이므로 우리는 시 정신을 독특한 언어로 구성할 때 시가 된다라고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시(시 정신)를 쓰면 시가 된다’라는 정리(定理)를 밝혀야 할 것입니다. 쓸 수 있는 시를 쓰지 않고 배길 수 있는 것처럼 말하는 것은 만삭된 아이를 낳지 않겠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 시 작품엔 어느 것이나 반드시 그 시의 눈이 있어야 한다. 초점이라고 하는 것 말이다.  그리고, 이 한 편의 시의 눈은 보통 그 시의 첫 부분에 있는 일이 거의 없다.  마지막 절이거나, 아니면 마지막 절에서 가까운 전절(前節)들 속에 있게 된다. - 인생이 그런 것과 마찬가지로 시는 사람과 자연과 유계(幽界)의 길 ― 이 세 개의 영역에 동시 병존하는 데에서 그 정신을 경영할밖에 없다. - 시는 시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하고 있는 말을 기초로 해서 구성해 내는 암시의 신기루에 아무래도 중점을 두어야 하는 것이다. - 저 ‘인체 윤회’의 상념이나, 저 ‘음향원형’의 상념이나, 저 ‘애인 갱생’의 상념 등은 ……    *  [나의 시작 과정 - 국화 옆에서]에 나오는 말씀. - 시에 쓰이는 언어는 짧고도 함축 있는 생명 그대로의 최초의 발성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현상 그대로 보여주고 들려주는 것이므로 시는 노래하는 정신의 그림이요 그림 그리는 마음의 음악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의 언어는 언어 중에도 선(線)이 있고 색채가 있는 언어이어야 하고 리듬이 있고 멜로디가 있는 언어가 아니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언어의 미술적 음악적 구성을 통한 상상의 계시가 없으면 시가 산문과 구별될 무엇이 있겠습니까. - 시란 인생의 어떤 집중적인 포인트를 문자의 율동으로서 표현하는 사업이다. - 시의 언어 구사법이 딴 산문문학의 그것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은 무슨 특별한 시적인 단어들을 골라 쓰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언어 배치의 묘를 얻는 데 있다. - 시가 생명을 가지게 하는 것은 정신이거니와 그것을 표면으로 유도하는 것은 기교인 것이다. - 상징은 사상의 깊이와 넓이에 기여한다. 비유가 시각적인 색채나 형태상의 일치점을 띰으로써만 성립하는 데 반해서 상징이라는 것은 그러한 시각적인 일치점을 띠지 않아도 된다고 그(몰턴-편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럼 상징이란 뭐냐? 상징이라는 것은 통념상의 일치점만을 띠면 성립하는 것이다. - 고대 이스라엘뿐 아니라, 고대 희랍에서도, 고대 로마에서도, 고대 중국이나 인도에서도 시의 암시는 모두 시각적 구상을 가장 많이 빌어 했었다.   시가 시각의 이미지들을 잘 짜서 거기 다시 음향의 조화까지를 부여하게 되는 것은 이 이미지의 비교를 한참 계속하고 난 뒤의 일에 속한다. - 절제 못 하는 사람에게서는 사물에 대한 사랑은 탈취되어 사막만이 남는다.  절제는 그 자연으로 사랑을 낳아 사물에게 그 사랑을 보내게 하고, 그 사랑이 가서 늘 어루만져 주면 사물들은 또 자연 같이 우리에게 그 감추었던 곳을 전부 드러내 ‘당신이 바른 주인’이라고 하며 가까이 온다.  그리하여 비로소 우리는 세계에 있는 것들의 제일 우수한 이미지 촬영사의 자격 ― 시인의 제1자격을 갖는 것이다. - 축적하는 정서를 잘 종합하고 선택하면 정조(情操)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감각과 정서가 그 시간상의 장단(長短)은 있을지언정 둘이 다 변하는 것인데, 정조는 변하지 않는 감정 내용 곧 항정(恒情)을 일컫는다.     - 많은 정서가 선택되고 종합되어 정조(情操)를 이루듯이 많은 지혜의 선택과 종합의 결과가 예지(叡智)를 빚는다. - 우리는 단 한 마디의 직유의 형용어를 찾기 위해서 밥 먹을 때도, 뒷간에 가서도, 길 걸을 때도 그 많은 언어들을 골랐다간 버리고 골랐다간 버리고 하는 짓을 언제까지나 되풀이하고 사는 자 아닌가. - 백 퍼센트의 감동과 백 퍼센트의 앎[知]이 합해진 상태 ― 이것이 시의 체득임엔 틀림없다.   시는 철학보다 한술 더 떠야 하는 제물(祭物)이어서 이것은 기막히게 울거나 기막히게 환희하는 감동의 불 숟갈을 하나 더 가진다. - 나는 시를 하는 일을, 자기가 숨 쉬고 생명 영위하기에 적합한 세계를 정신과 언어와 언어의 율동으로서 꾸미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        【 방민호 】 - 김영랑 시인이나 박목월 시인 이전에 정형시에 가까운 자유시의 묘미를 한껏 살려 보여준 시인이 바로 정지용 시인이다. - 산문시가 정형률이나 내재율의 방식 말고 어떤 음악적 원리를 갖는가 하는 것은 현대 시인이 탐구해야 할 중요한 문제 가운데 하나다. - 문학의 구체성을 대표하는 것이 바로 산문문학, 그 중에서도 소설이고 음악의 추상성을 대표하는 것은 오케스트라다. 그런데 이 언어 예술인 문학이 음악과 만나서 만들어지는 장르가 바로 시다. 그러므로 시는 언어 예술 가운데 가장 음악적인 예술이고 따라서 음악, 즉 운율 없는 시는 죽은 시나 다름없다.  그러나 반면에 이처럼 음악적 성격이 강한 언어 예술인 시라 해도 언어 예술의 본질을 이루는 구체성이라는 운명을 완전히 벗어버릴 수는 없다.  시는 음악의 추상성과 문학의 구체성이 결합하는 과정에서 빚어지는 긴장이 생명이고 따라서 추상적인 음악만큼이나 표현의 구체성을 필요로 한다.  물론 이 때의 구체성은 음악을 유지할 수 있는 구체성이어야 한다. 그리고 이 구체성을 담당하는 것이 바로 시의 이미지다. 이미지는 리듬을 유지시키면서 문학으로서의 표현의 구체성을 획득하게 하는 영약과도 같은 요소인 것이다.     - 시의 내용에 따라 미당은 주정시(主情詩), 주지시(主知詩), 주의시(主意詩)로 나누었고, 주지시는 다시 기지(機智)의 시, 지혜(智慧)의 시, 예지(叡智)의 시로 구별하고 있다. - 한국의 현대시에서 의지의 차원이 돋보이는 시를 남긴 사람으로는 이육사 시인과 유치환 시인을 곱을 수 있다. - 시는 시인의 독특한 체험의 과정이 선사하는 새로운 언어의 상징체계를 통해서 지식의 세계와는 다른, 독자적인 가치의 세계를 구성해 나간다. - 인식의 한계, 벽에 도전하는 것, 그것이 바로 훌륭한 시다.        【 박현수 】 - 시의 묘미는 언어와 언어 사이의 ‘텅 빈 충만’에 있다. 시를 처음 쓰는 사람들이 자주 범하는 잘못 중의 하나가 너무 상세한 ‘설명’을 한다는 점이다. - 기교는 정신이 이 세계에 나타나기 위해 빌려 입는 몸과 같은 것이다. 즉 기교는 정신의 육화(肉化)인 것이다. 어디가 몸이고 어디가 정신인지 누가 뚜렷이 구분할 수 있는가. - 직유가 죽은 비유로 떨어질 때 은유가 탄생한다. 그래서 은유는 절약된 직유이면서 동시에 직유의 후생(後生)이기도 하다. - 좋은 시는 음성 이미지와 주제가 자연스러운 조화를 이루기 마련이다. - 시의 최대의 적은 관념적인 진술이다. 정서 속에서 소화되지 않은 생각을 직설적으로 드러내다 보니 시는 생경한 관념어를 나열하는 수준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 서정주 시인에 따르면 주정시(主情詩), 즉 서정시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는데, 감각의 시, 정서의 시, 정조의 시가 그것이다.   정서는 감각을 많이 축적하고 이것을 선택하고 종합해 가는 동안에 형성되는 것으로, 감각에 비하여 지속적이지만 변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정서의 시는 시대와 상황의 변화라는 테두리 내에서 탄생하는 것으로 영원성에 대한 사유가 없다는 것이 한계로 지적된다. 이에 비하여 정조는 “감정 중 제일 다듬어진 것”으로, 시공간의 제약에 구애되지 않는 감성의 종류다. 이것은 지상의 유한성, 피상성에 대립되는 영원성, 본질과 관련을 맺고 있다.   서정시의 최고 단계로서 정조의 시는 인식과 정서가 하나로 이루어진 새로운 차원의 감성이다.        【 허혜정 】 - 한 편의 시는 한 장의 사진과도 같이 순간적인 포착이기 때문에 그 순간의 살아있는 느낌, 그 안에 생생한 그림처럼 떠오르는 정서를 통해 메시지를 전달한다. - 시의 눈, 시학 용어로 ‘시안(詩眼)’이라 하는 것은 대체로 텍스트의 매혹적 실체를 구성하는 힘이 집중되는 곳을 이른다. 말하자면 노래의 가장 빛나는 정수가 집중되는 초점이다. - 시는 어떤 관념이나 주장을 추상적으로 편집하고 박제한 ‘표어’가 아니라, 영혼의 맨살에 닿을 듯한 강렬한 체험의 언어라야 한다. - 리듬은 어휘의 효율적 활용을 통해 시 전체의 내용과 조화를 확보하며, 시적 정서를 환기시킨다. 때로 리듬은 소리와 의미가 일체화되어 있는 언어의 속성을 이용하여 독자에게 정서나 분위기를 전달하며 시의 암시성을 높이는 데 기여하기도 한다. - 상징은 가시(可視)의 세계인 물질세계가 연상의 힘에 의하여 불가시의 세계, 곧 본질의 세계와 일치하게 되도록 노력하는 표현의 양식이다.   상징은 명시적인 원관념을 피하고 보조관념만을 제시하므로 은유와 비슷하지만 은유보다 비확정적이며 암시적이다.   상징은 좁게는 시인의 개성적인 상상력과 표현방식을, 넓게는 문화적 관념의 표상으로까지 확대됨으로써 사상의 깊이와 너비를 넉넉하게 한다. - 이미지란 어떤 사물을 감각적으로 지각할 수 있도록 제시된 일체의 언어적 표현을 가리킨다.   여기서 미당이 ‘사랑’이라 표현한 것에는 좀더 설명이 필요하다. 시적 대상에 대한 사랑이란 시론적으로 말해서 동화(同化)와 투사(投射)의 과정을 일컫는 것이리라. 동화란 시인이 세계를 자신의 내부로 끌어들여서 내적 인격화하는 이른바 세계의 자아화이며, 투사란 자아를 상상적으로 세계에 투영하는 것, 곧 감정이입에 의해서 자아와 세계가 일체가 되는 것이다. 마치 사랑처럼. - 시의 제목은 시의 간판이자 얼굴임은 물론 독자와의 압축된 대화다.  - 시는 이 지상에 떠돌다가 사라져버릴 존재의 삶의 역력한 물증이며, 자신이 숨쉬며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세계다.    *
1091    전화가 고장난 세상, 좋을씨구~~~ 댓글:  조회:4480  추천:0  2016-02-14
즉물적(卽物的)인 시 / 강인한 하나의 대상을 보고 시인은 자기의 주관적 감정을 그 대상에 불어넣어서 표현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옛날 고교 국어의 '산정무한(山情無限)'이라는 정비석의 금강산 기행문을 기억할 것입니다. 산문이긴 합니다만 대상에 대한 글쓴이의 주관적 감정이 어떻게 나타났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 예를 들어 봅니다. 무덤 가 비에 젖은 두어 평 잔디밭 테두리에는 잡초가 우거지고, 석양이 저무는 서녘 하늘에 화석(化石)된 태자의 애기(愛騎) 용마(龍馬)의 고영(孤影)이 슬프다. 무심히 떠도는 구름도 여기서는 잠시 머무르는 듯, 소복(素服)한 백화(白樺)는 한결 같이 슬프게 서 있고, 눈물 머금은 초저녁 달이 중천에 서럽다.  마의태자 무덤 주변에 대한 묘사를 한 부분입니다. 글쓴이는 신라 마지막 태자의 무덤에서 구슬픈 자신의 주관적 느낌을 대상들에 불어넣고 있습니다. 무덤을 지키는 말 형상의 돌에 대해서는 '용마의 고영이 슬프다'고 하고 흰 자작나무도 태자의 죽음을 슬퍼하여 '소복'한 모습으로 '슬프게' 서 있다고 하였으며, 초저녁 달이 또한 '눈물 머금'은 채 '중천에 서럽다'고 한 것이지요. 무덤 가에 서 있는 용마석, 흰 자작나무들, 하늘에 떠 있는 초저녁 달― 이렇게만 쓴다면 여기에선 아무런 주관적 감정의 개입이 없는 셈입니다. 문학에 있어서 신즉물주의(新卽物主義)라는 흐름이 있습니다. 원래는 1920년대 독일의 미술 운동에서 출발하였지요. 당시 유행하고 있던 표현주의나 추상주의와는 대조적인 사실주의 양식으로 그림을 그렸던 경향을 말합니다. 문학에 있어서도 주관적·환상적인 경향을 배제하고 사물에 대한 냉정한 관찰과 정확한 묘사를 강조하는 흐름이 신즉물주의 경향입니다. 대상에 글쓴이의 주관적 감정을 될 수 있으면 집어넣지 않고 무엇보다도 실제의 사물에 대하여 냉정한 관찰을 통해 치밀한 묘사를 위주로 한다는 것입니다. 시가 '즉물적(卽物的)'이라고 하는 말을 곧잘 쓰는데 그건 바로 신즉물주의의 경향을 띤다는 뜻인 것입니다. 박남수(1918∼1994) 시인의 시 한 편을 보기로 합니다. 어둠은 새를 낳고, 돌을  낳고, 꽃을 낳는다.  아침이면,  어둠은 온갖 物象을 돌려주지만  스스로는 땅 위에 굴복한다.  무거운 어깨를 털고  물상들은 몸을 움직이어  노동의 시간을 즐기고 있다.  즐거운 地上의 잔치에  金으로 타는 태양의 즐거운 울림.  아침이면,  세상은 開闢을 한다. ―박남수, 아침 이미지 1 아침이 되면 밤의 어둠 속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던 사물들이 서서히 그 모습이 나타납니다. 새와 돌과 꽃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지요. 서서히 사물들이 어둠을 헤치고 나타남을 시인은 어둠이 그 사물들을 '낳는다'고 썼습니다. 그렇게 어둠은 아침의 시간에 밀려 땅 위에 굴복하는 것이며 그 사물(물상)들의 쪽에서 보면 어깨에 묻어 있던 어둠을 털어내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아침의 밝은 표정을 시인은 '즐거운 지상의 잔치'로 명명하며 아침의 금빛 햇살을 '금으로 타는 태양의 즐거운 울림'이라는 공감각적(共感覺的) 이미지로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금빛 햇살'이라고 하면 시각인데 그것을 '울림'이라는 청각으로 표현한 이것이 '시각을 청각화'한 공감각적 표현이지요. 마지막으로 시인은 '개벽'을 하는 세상으로 「아침의 이미지」를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 시 안에서 찾아보면 시인의 주관적 감정이 전혀 없는 건 아닙니다. '즐기고, 즐거운'이라는 감정이 있습니다만 그게 이 시의 전체적인 표현 방법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은 아니지요. 어둠 속에서 차츰차츰 그 모습을 드러내는 사물들에 대한 묘사가 위주인 것입니다.  시인 자신도 이 시에 대해서 "밤에는 모든 물상(物象)들이 어둠에 묻혀 버려 그 형상을 알 수 없게 된다. 그러던 것이 아침이 되면 밝음 속에 그 본래의 모습을 낱낱이 드러낸다. 그리하여 어둠의 세계인 밤과는 전혀 다른, 생동하는 밝음의 세계가 펼쳐진다. 이러한 아침의 건강한 모습을 그려 본 즉물적(卽物的)인 시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수리부엉이 한 마리  캄캄한 벼랑 위에 앉아 있다  어둠이 뜯어진 자국, 거기  뚫린 구멍, 거기  동그랗게 수리부엉이의  두 눈이 박혀 있다  동그랗게 두 눈 속  꽃이 박혀 있다  깎아지른 벼랑에서  일순  빛을 낚아챈  그것  ―김길나, 눈 캄캄한 벼랑 위 어둠 속에 두 개의 빛나는 구멍이 보입니다. 마치 '어둠이 뜯어진' 자리처럼 빛나는 '구멍', 그건 수리부엉이의 눈이었습니다. 동그랗게 어둠 속에 박힌 구멍이라 할까, 수리부엉이의 눈이 거기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시인은 무섭다든가, 소름끼친다든가 일체의 자기 감정을 지우고 있습니다. 다만 그 정경을 치밀한 묘사로 독자에게 드러낼 뿐인 것이지요. 이어서 시인은 부엉이 눈 속에 있는 눈동자를 깨닫습니다. 동그란 눈 속에 꽃처럼 박힌 그 눈동자…. 캄캄한 벼랑과 어둠, 빛을 발하는 부엉이의 두 눈, 꽃 같은 그 눈동자. 시인은 치밀한 관찰을 통해서 그 정확한 이미지를 표현하는 데 주력하고 있습니다. 이런 데서 느끼는 긴장된 아름다움이 바로 시가 누릴 수 있는 미감입니다. 시의 포에지란 과연 이런 것입니다. 그리고 깎아지른 아슬한 벼랑 끝 어디선가 순간적으로 낚아챈 것이 바로 부엉이의 눈빛이라고 시인은 단언하고 있습니다. 이 시는 정말 즉물적인 시의 좋은 예라 할 수 있겠습니다. 한 컵의 물이 공중에서 엎질러진다.  물은  침묵이 무서워서 저희끼리 부둥켜안은 채  공처럼 떠 있다.  무서움과 무서움으로 결합된  물의 혼은  허공에서 일순 유리공의 탄성을 지닌다.  ―강인한, 물상(物象) 이것은 1978년 《현대시학》 5월호에 발표된 필자의 졸시입니다. 언젠가 지극히 찰나적인 포착을 한 사진 한 장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 기억이 이 시의 모티브가 되었습니다. 공중에서 엎질러지고 있는 물. 그건 흑백사진이었습니다.  검은 어둠을 배경으로 피사체인 물이 엎질러지는 그 순간이 포착됨으로써 문득 물은 공중에 떠 있는 것으로 느껴졌습니다. 마치 하나의 덩어리처럼 결속된 물. 그것을 나는 '저희끼리 부둥켜안은' 공의 이미지로 표현한 것이었습니다. 투명한 액체의 덩어리인 그 물의 형상은 유리로 만들어진 동시에 탄력을 지닌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탄성(彈性)을 지닌 유리공'이라는 이미지가 이렇게 만들어졌습니다. 다음은 졸시에 대한 김광림 시인의 언급(《현대문학》1978, 6월호 「이 달의 화제」)입니다. "강인한의 「물상」은 물 한 방울의 존재성을 표출해내고 있다. 이 땅에도 즉물주의(卽物主義) 수법에 의해 작품을 영위하는 시인이 더러 있긴 하지만 박남수(朴南秀) 이후 인한(寅翰) 정도가 때로 성공한 작품을 내놓고 있는 듯하다. (졸시 전문 인용은 생략) 빈틈없이 짜여진 조형적 이미지를 볼 수 있다. 긴장과 공포가 지니는 탄성(彈性) 앞에서 포에지를 만난 반가움에 잠시 취기를 맛보게 하는 작품이다."  김소월의 「진달래꽃」처럼 정서를 표출하는 것을 위주로 하는 시도 있지만, 현대시에서는 이와 같은 주지적 경향의 즉물적인 시도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데 한 몫을 하기에 충분합니다.  ============================================================================== 256. 먹통전화 / 이형기                        먹통전화                                이 형 기   전화가 고장났다 어느 날 갑자기 한덩이 작은 어둠이 되어 책상 위에 놓여있는 먹통전화 아무런 예고도 없이 그것은 외부와의 연락을 차단하고 소문에 너무 민감했던 귀 하소할게 너무 많았던 입을 꼼짝달싹 못하게 틀어막아 버린다   그래도 아직 할말 들어야 할 소식 있으면 네가 나한테 말하고 들어라   고장난 전화는 그러나 그런 말도 하지 않고 다만 먹통 먹통같은 묵비권 하나로 제 어둠을 지키고 있다   혹시나하고 만져보면 찬피 검은 두꺼비처럼 손바닥에 감응하는 그것은 분명 살아있는 어둠 섬뜩한 어둠이다     이형기 시집 중에서              ------------------------------------------------------------------------------------     257. 절벽 / 이형기                                                            절벽                             이 형 기   아무도 가까이 오지 말라 높게 날카롭게 완강하게 버텨 서 있는 것   아스라한 그 정수리에선 몸을 던질밖에 다른 길이 없는 냉혹함으로 거기 그렇게 고립해 있고나 아아 절벽!     이형기 시집 중에서    
1090    詩는 읽는 즐거움을... 댓글:  조회:5504  추천:0  2016-02-13
시는 독자에게 읽는 즐거움을 주어야 사실 시라는 건 뭡니까? 예술 아닙니까? 말이라는 것을 소재로 한 것, 그림이라는 것이 색하고 선을 제재로 한다면 음악이라는 것이 음하고 리듬이라는 것을 율하고 격을 제재로 한다면, 문학이라는 건 말을 제재로 하고 있습니다. 예술이라는 것은 일단 첫 번째로 읽는 사람들한테 즐거움을 주어야 한다고 봅니다. 읽는 재미가 없으면 아무리 훌륭한 뜻을 담고 있어도 쓰레기통에 집어넣어도 괜찮다는 얘기지요. 다른 말로 하면 독자들한테 즐거움을 주지 않아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1920년대 말에서 30년대에 걸쳐 풍미한 프롤레타리아 시가 있지 않습니까. 프로문학파 시인들이 가졌던 생각은 참 훌륭했습니다. 그리고 당시의 시인들처럼 민족 해방에 대해서 그렇게 치열하고 또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시인들 가운데서 많지 않습니다. 당시 일제 시대에 민족주의에 앞서서 독립을 쟁취하고 평등을 이룩할 수 있는 수단이 사회주의라고 생각한다고 해서, 제대로 정신이 박힌 사람이라면 누구도 이상하게 생각지 않을 겁니다. 그렇지만 그 프롤레타리아 시, 즉 카프 시들 가운데서 오늘날 우리가 읽을 만한 게 몇 편이나 됩니까. 실제로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아마 「현해탄」「3월이 온다」를 쓴 임화, 권환, 월북하여 「김일성 장군의 노래」를 작사한 이찬, 김상훈, 박세영 등 몇몇밖에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에게는 시는 말로 된 예술이라는 인식이 모자라지 않았던가 생각합니다. 시는 예술이니까 예술이 갖는 재미가 있어야 합니다. 시를 읽는 즐거움이 있어야지, 그것이 없으면, 아무도 읽어 주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냥 '내가 생각하는 옳은 것, 이것을 나만 열심히 하면 훌륭한 시가 되고, 누군가 언젠가는 다 읽어줄 것이다.' 따위의 잘못된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생각합니다. 말하자면 말에 대한 인식이 좀 모자랐다는 거지요. 그런데 어떻습니까. 이 사람에 대한 시가 기억되지 않는 대신, 오늘날까지 그 행적을 두고 말이 많은 서정주의 시는 여러분들이 좋아하지 않습니까. 해와 하늘빛이 문둥이는 서러워 보리밭에 달 뜨면 애기 하나 먹고 꽃처럼 붉은 울음을 밤새 울었다. -서정주의 「문둥이」 전문 이 시는 오늘날에도 남아 있지 않습니까. 그것은 이 시를 읽으면 뭔가 와 닿는 것이 있고 즐거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개그맨이 떠들어서 주는 즐거움하고 예술로서의 시가 주는 즐거움하고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그런 즐거움이 있어야 되는데, 그렇지 못한 탓으로 카프 시 가운데 오늘날 지금 문학사에 남은 시가 많지 않다는 것은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이 되어야 합니다. 아직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7, 80년대에는 적지 않았습니다. 7, 80년대 민중시 중에는 좋은 시가 많았지만 개중에는 예술 인식, 말에 대한 인식이 모자랐기 때문에 결코 좋은 시로 남지 못한 경우가 너무 많지 않았던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하고 싶은 말을 시로써 잘하는 사람이 좋은 시인이라고 했던 워즈워드의 말처럼, 말을 잘하는가 못하는가가 시를 판가름한다고 봅니다. 한마디로 시를 잘 쓰는 사람은 말을 잘 다루는 사람입니다. 렝보, 말라르메와 함께 20세기 초에 프랑스 상징주의를 주도한 바 있는 드가의 에피소드를 빌리죠. "내 머리 속에는 시가 가득한데 왜 시가 안 써지는지 모르겠어?" 하고 드가가 묻자, 말라르메가 말하기를 "시는 언어를 가지고 쓰는 것이기 때문이지"라고 했다고 합니다. 시는 성적순이 아니며, 말을 잘 다루는 사람이 잘 쓰는 것이라는 말에 다름 아닙니다. 말에 대한 인식이 모자라서, 이삼십년대 프로문학이 우리 문학사에서 보잘것없는 대접을 받게 되었고, 7, 80년대의 민중시에도 일부 그런 경향이 없지 않다고 봅니다. 저도 민중시 계열 시인 중의 한 사람입니다만, 아무리 좋은 생각을 가지고 있어도 좋은 내용의 시를 썼다 하더라도 그것이 언어로써 좋은 시가 되지 않으면 좋은 시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시를 쓰는 이상 힘있고 좋은 살아 있는 말을 쓰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 죽 시를 써왔습니다. 제가 시를 쓰는 신조 중의 으뜸은 '말을 결코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 한 마디 말이 바로 시의 생명력이 되는 것이므로, 생명력 있는 말 하나하나를 끄집어내어 쓰는 것이죠. 아무리 좋은 생활 체험도 말에 의해서 다시 체험될 때에만 좋은 시가 될 수 있다는 원칙하에서 시를 써왔다고 생각합니다. 시는 사유가 아니라 직관에서 쓴다고 합니다. 체 게바라 전기 중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칸트의 얘기를 빌어 '개념은 없는 직관은 맹목이다'라고 되어 있더군요. 이것은 칸트가 예술 이야기를 하면서 한 얘기죠. 예술이라는 것은 사유나 합리적인 사고보다는 직관에 의해서 더 많이 좌우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개념 즉, 이데올로기가 없어서는 안 된다는 얘기지요. 이 말처럼 시에서는 직관이 아주 중요하지만, 직관의 배경에는 어떤 이데올로기가 있어야 된다는 얘기와 다름 아닙니다. 이데올로기는 다른 말로 옮기면 '시적 지향'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바르게 사는 것인가, 어느 길이 옳은 길인가 생각하는 태도는 누구에게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시적 지향이 없을 때에는 좋은 시인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제가 좋아하는 시 중에 유치환의 「낮달」이 있습니다. 유치환은 여느 시인들과는 달리 위선이 없는 연애시를 쓴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늘에 숨어 있는 낮달을 애인과 헤어진 뒤에 가슴 속에 남은 상처에 견주어 쓴 시입니다. '쉬 잊으리라 그러나 잊히지 않으리라 가다 오다 돌아보는 어깨 너머로 그날 밤 보다 남은 연민의 조각 지워도 지지 않는 마음의 여로' 아주 짧지만 감동적인 연애시입니다. 여기에 무슨 이데올기는 없습니다. 이런 시도 좋지만, 이데올로기가 있는 시가 좋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시란 메타포 즉 은유(隱喩)입니다. 좋은 시라는 건 결국 비유를 잘한 시입니다. 네루다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일 포스티노」에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젊은 우체부가 찾아와 '시란 무엇입니까?' 하고 묻자, 네루다는 '시란 메타포다.'라고 대답하지요. 두 사람이 바닷가를 걷는데, 파도가 밀려오는 걸 보고 젊은 우체부가 '파도가 걸어옵니다'하고 말하자, 네루다는 '이 순간부터 너는 시인이다. 바로 비유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시인이다'라고 말하지요. 한 가지 사물을 다른 사물을 들어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시인이라는 거죠. 제 생각으로도 우리나라에서 좋은 시인은 비유를 잘하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비유를 썩 잘 할수록 좋은 시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병철의 시에 이런 게 있습니다. '은하 푸른 물에 머리 좀 감아 빗고/ 달 뜨걸랑 나는 가련다/ 목숨 수(壽)자 박힌 정한그릇으로 체할라 버들잎 띄워 물 좀 먹고/ 달 뜨걸랑 나는 가련다/ 삽살개 앞세운 정 좀 쓸쓸하다만/ 고운 밤에 딸그락 딸그락 나는 가련다' 무슨 뜻인지 처음에는 잘 다가오지 않을 겁니다. 「나막신」이라는 제목의 짧은 시이지만 사람살이가 은유로 잘 배어 있습니다. 이 시에는 오늘날에도 우리가 깊이 새겨들어야 할 은유가 있다고 느꼈고, 아직도 독자들에게 읽히는 까닭을 알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결국 메타포가 있기 때문에 읽히는 겁니다. 시는 교훈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냥 존재하기 때문에 읽히는 겁니다. 그 '존재'를 통해서 우리의 모습을 깨닫는다면 얼마나 좋은 일이겠습니까. 시의 존재가 우리로 하여금 뭔가를 깨닫게 해주는 메타포를 가졌을 때, 뛰어난 시가 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러기에 이병철의 시는 우리 문학사에서 기억되지 않으면 안될 훌륭한 시인 것입니다. 잠수함 속의 토끼처럼 먼저 외쳐야 또 한 가지만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25시」를 쓴 게오르규가 한국을 찾았을 때의 일입니다. 그가 우리나라를 방문한 1975년도에는 김지하 시인이 사형 언도를 받고 투옥되어 있을 때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김지하는 꼭 죽인다고 여러 사람 앞에서 죽인다고 언명을 했다. 그러니 그 사람은 꼭 죽을 것이다.'라는 소문이 돌 때였습니다. 그럴 때 게오르규가 정부 초청으로 한국에 왔습니다. 세계적인 명작을 쓴 작가가, 그런 상황 속에서 정부 초청으로 우리나라에 온 걸 보고 뜻있는 이들은 크게 분개했습니다. 그가 지금의 세종문화회관 자리인 시공관에서 '시인의 사명'이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했습니다. 그에 따르면 '잠수함이 바다 밑으로 들어갈 때는 토기를 가지고 들어간다. 왜냐하면 토끼가 수압에 가장 민감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못 견딜 수압이 되면 토끼가 먼저 소리를 지릅니다.' 즉 게오르규는 정치적으로 억압 상황, 사람이 살 수 없는 환경 등 사람이 살 수 없게 되었을 때, 못 살겠다고 가장 먼저 소리를 지르는 사람이 곧 시인이라고 은연중에 말했습니다. 한국이라는 상황은 얘기하지 않고 말한 겁니다. 비록 정부의 초청으로 왔지만 마음먹고 한 마디 하는구나 하는 걸 느꼈습니다. 어느 일본 시인은 '시에는 본질적으로 절규성'이 있다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정치적으로 못 살게 되었을 때, 환경이 나빠졌을 때, 도덕적 타락 현상이 만연되었을 때 못살겠다고 큰 소리를 지르는 것이 시인이라는 건데, 그때 저는 크게 공감했습니다. 절규성이 있음으로 해서 그 시는 역동성을 띠고 생명력을 가질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런데 한가지 도덕성의 경우에는 곧이곧대로 오늘의 잣대만을 들이대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스웨덴 같은 데서는 호적제도가 크게 바뀌어 아이들의 반수 이상이 어머니의 성을 따른다고 합니다. 가장 큰 이유는 아버지가 누군지 분명치 않기 때문입니다. 전세계적으로 가족제도가 바뀌어 가는 추세 속에서는 시대적 흐름을 반영해야지, 틀에 박힌 잣대를 들이대서는 안 됩니다. 결국 시라는 것은 남에게 하는 대화이되, 그것이 명확하고 힘이 있어야 합니다. 두 번째로 역시 언어라는 것은 남하고 함께 사는 데서 생긴 만큼, 시는 남과 더불어 사는 정서를 담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이 중요시되지 않으면 시는 난쟁이처럼 작아진다. 세 번째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을 소재로 하는 만큼 말이 주는 즐거움을 소홀히 해서는 좋은 시를 낳을 수 없다. 그러나 시는 본질적으로 절규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 등을 재삼 강조하고 싶습니다. 또한 도덕적인 면을 지나치게 강조해서는 그 시는 생명력을 갖기 어렸습니다. 이런 것들이 시를 쓰는 저의 몇 가지 중요한 태도입니다. ========================================================================================= 254. 낙화 / 이형기 낙화 이 형 기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 할 때,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 않아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하여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헤어지자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하롱하롱 꽃잎이 지는 어느 날 나의 사랑, 나의 결별, 샘터에 물 고이듯 성숙하는 내 영혼의 슬픈 눈. 이형기 시집 중에서 이형기 연보 1933년 1월 6일 경남 사천군 곤양면 서정리, 이경성과 김순금의 2남2녀 중 장남으로 출생. 1939년 요시노 소학교 입학. 1945년 진주농림학교 입학. 1946년 부친이 폐병으로 사망. 1949년 제1회 진주 개천예술제 시부 장원, 웅변부 3등 당선. 1950년 진주 농림학교 재학(17세) 중에 지에 시 추천 완료. 1951년 동국대 불교학과 입학. 9월 최계략과 동인지 발간. 1953년 연합신문사 입사(국회 출입기자). 1955년 김관식, 이중노와 3인합동시집 간행. 1956년 동국대 불교학과 졸업. 1957년 제2회 한국문인협회상 수상. 1959년 서울신문사 입사. 1961년 대한일보사 입사(정치부 차장). 1962년 조은숙과 결혼. 1963년 첫 시집 간행. 비평활동 시작. 1965년 국제신문사 입사(논설위원). 1966년 문교부 문예상 수상. 1971년 시집 간행. 1974년 주간. 1975년 시집 간행. 1976년 평론집 간행. 한국시인협회상 수상. 1979년 수상집 간행. 1980년 평론집 간행. 국제신문이 1980년 언론통폐합에 따라 폐간되자 언론사 기자생활을 청산. 1981년 시집 간행. 부산산업대학 교수로 부임. 1982년 한국문학 작가상 수상. 1983년 부산시 문화상 수상. 1985년 시집 및 시선집 간행. 윤동주 문학상 수상. 1986년 시선집 , 수필집 , 박목월 평전 간행. 동국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부임. 1987년 평론집 간행. 1990년 시집 , 간행. 1991년 , 시선집 간행. 1993년 시론집 간행. 1994년 시집 간행. 대한민국 문학상, 대산문학상 수상. 1994~1995년 한국시인협회장. 1998년 시집 간행. 2000년 수상집 간행. 2001년 만해문학상 수상 2002년 은관문화훈장 수상. 동국대학교 정년 퇴임. 2005년 2월 2일 숙환으로 별세. ---------------------------------------------------------------------------- 255. 미행 / 이형기 미행 이 형 기 문득 뒤돌아보면 놈이 또 거기 있다 정체불명의 검은 복면자 때로는 모른체 시침을 떼고 내 바로 앞에 놈이 간다 절대로 뒤돌아보는 법 없이 그러나 속지 말라 놈은 내 행선지를 미리 알고 있다 별수 없이 놈을 뒤따라 가는 무거운 발걸음 아무리 용케 따돌려도 놈은 이윽고 또 나타난다 밤중에 어두운 골목길로 도망치면 그게 얼마나 부질없는 일인가를 이튿날 틀림없이 일깨워 주는 ― 아 정말 지겨운 미행자 놈이 어느날 가까이 다가와 귀에 대고 속삭였다 뭘 그래 날더러 자네를 미행하라 했었지 그때 자네가 말한 대로 나는 자네 분신 은밀한 한통속끼리 뭘 그래 자꾸만 이형기 시집 중에서  
1089    詩에게 생명력을... 댓글:  조회:4402  추천:0  2016-02-13
생명력이 있는 시를 쓰려면 신경림 (시인) 중3이나 고1 무렵 처음으로 시를 쓰기 시작한 것 같은데, 그 동기는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아마도 그 때 저로서는 누군가에게 무슨 얘기인가를 하고 싶은 것이 있어서 쓰기 시작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사춘기였으니까 저 나름대로 세상살이에 대해서 궁금한 점, 의심나는 점들이 자꾸 생기면서, 이럴 때 남들은 어떻게 생각했을까 궁금해져서 시를 읽기 시작했겠지요. 시를 읽다 보니까 '이 말도 참 근사하지만 나는 나대로 조금은 다르게 생각한다. 나는 나대로 할 얘기가 있다.' 생각하면서 시를 쓰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어릴 때 읽은 시 중에서 기억나는 것은 김영랑 시인의 「언덕에 바로 누워」입니다. 언덕에 바로 누워 아슬한 푸른 하늘 뜻없이 바래다가 나는 잊었습네 눈물 도는 노래를 그 하늘 아슬하여 너무도 아슬하여 이 몸이 서러운 줄 언덕이야 아시련만 마음의 가는 웃음 한때라도 없더라냐 아슬한 하늘 아래 귀여운 맘 질기운 맘 내 눈은 감기었네 감기었네. 정확한 기억은 나지 않지만 중3 때 읽고서 무척 감동을 받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 시를 읽고서 나도 뭔가 먼 데 있는 것, 먼 데 있는 사람에 대한 그리움, 말하자면 제 가슴 속에 뭔가 얘기하고 싶은 것이 있구나 하는 걸 느꼈습니다. 이 시를 읽고서 나도 할 말이 한 마디 있다는 생각으로, 시를 처음 써 본 것이 첫 경험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결국 시라는 것은 자기가 남한테 하는 얘기라고 생각합니다. 저로서는 아주 뒷날의 일이지만, 시는 얘기이되 남한테 명확하고 힘있게 말할 수 있어야 된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시인은 명확하고 힘있게 말하는 사람 영국의 계관시인 워드워즈가 친구인 코울리지와 함께 서정시집을 냈습니다. 18세기 초에 나온 초판에서는 이런 말을 안했고, 재판을 내면서 그 서문(序文)에서 '시인이란 무엇인가?'라는 화두에 대해서 언급했습니다. 그에 따르면 '시란 결국 남에게 하는 얘기다. 다만 남에게 명확하고 힘있게 말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 시인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시인하고 보통 사람하고 다른 점이라면, 보통 사람은 남에게 명확하고 힘있게 얘기할 수 없지만, 시인은 명확하고 힘있게 얘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명확하다'는 말에는 '간단하고 짧게'라는 뉘앙스가 깃들어 있습니다. 또 '힘있게'라는 말에는 감동을 준다는 뉘앙스가 들어 있죠. 분명하고 짧게, 그렇지만 남한테 힘있고 감동적으로 얘기를 하는 사람이 시인이고 그 결집체가 곧 시라는 말이 되겠는데, 제가 처음에 시를 쓰기 시작한 때를 생각해 봐도 이 말은 맞는 것 같습니다. 저도 누군가에게 얘기를 듣고 싶어서 시를 읽기 시작했고, 또 힘있고 명확하게 하는 얘기를 좋아했습니다. 제가 시를 쓰기 시작할 무렵은 워드워즈를 읽기 전이었지만, 막연하게나마 남에게 명확하고 힘있게 얘기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젊을 때 시를 쓰고 늙으면 시를 못 쓴다는 말은 워드워즈 때문에 생겼습니다. 워드워즈는 젊을 때에는 굉장히 좋은 시를 쓴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산업혁명기에 시의 언어를 새롭게 발견한 시인이었습니다. 이른바 '민중 언어'를 발견한 사람이지요. 그 이전에는 모두 문어(文語) 즉, 상류층에서만 쓰는 어려운 말로 시를 썼는데 워드워즈부터 비로소 평민들이 쓰는 구어(口語)로 시가 씌어지기 시작했으므로 세계시사에서 아주 혁명적인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의 시력(詩歷)에는 문제가 좀 있습니다. 젊은 날에는 근사한 시를 쓰고 생각도 진보적이었는데, 나이가 들어 집안의 유산을 챙기고 나서는 생각이 크게 달라졌습니다. 젊었을 때 쓴 시는 민중 언어로써 참 훌륭하게 씌어진 것들이 적지 않은데, 나이 들어서 쓴 시들은 이른바 쓰레기가 된 것이 많습니다. 이를 두고 가리켜서 로버트 브라우닝 같은 사람은 "워드워즈는 39세까지만 살다가 죽었어야 할 사람"이라고 혹평을 하기도 했습니다. '일년은 봄/ 봄은 아침/ 아침은 7시/ 하늘엔 종달새가 날고'(The year's at the spring,/And day's at the morn;/Morning's at seven;/The hill-side's dew-pearl'd;/The lark's on the wing;/the snail's on the thorn;/God's in His heaven--/All's right with the world!) 하는 「비파의 노래(Pippa's Song)」라는 시를 쓴 사람이지요. 그는 자기 시보다도 워즈워드를 욕해서 더 유명해질 정도였습니다. '워즈워드는 30세까지만 살았어야 된다. 괜히 팔십 넘게 살아서 시인 모두를 망신시켰다'고 하였는데, 그 사람 때문에 나온 소리입니다. 사실 외국에는 나이 들어서도 좋은 시를 쓰는 사람들이 많은데, 우리나라에도 워즈워드를 닮은 시인들이 적지 않아서 걱정입니다. 저는 이렇듯 처음에는 남과 대화한다는 생각으로 시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시도 마음 속에 있는 것을 분명하고 힘있게 들려주는 시들이었습니다. 그 때 좋아했던 시 인 가운데 하나가 해방 후 월북을 해서 한동안 잊혀졌던 이용악입니다. 그의 시를 읽었다는 이유로 잡혀가서 몇 달씩 고생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지만 지금은 읽어도 아무 일 없습니다. 민주화가 된 덕분에 다시 우리 문학사 속에서 복권된 아주 훌륭한 시인이지요. 제가 어릴 때 좋아했던 시 중에 그의 「북쪽」이 있습니다. 북쪽은 고향 그 북쪽은 여인이 팔려간 나라 머언 산맥에 바람이 얼어붙을 때 다시 풀릴 때 시름 많은 북쪽 하늘에 마음은 눈감을 줄 모르다 제가 이것을 읽은 것은 고등학교 2, 3학년 무렵이었습니다. 읽으면서 가슴 속으로 찡하는 울림 같은 것을 받았습니다. 그 때는 이용악 시인이 월북을 했는지조차 전혀 몰랐습니다. 다만 헌책방을 돌아다니며 그분의 시집을 구해, 시집 맨 앞에 실려 있던 이 시를 읽고서 큰 감동을 받았지요. 이걸 읽으면서 저는 우리나라가 어떤 나라인가 곰곰이 생각에 잠겼습니다. 여인이 팔려가고, 외국한테도 쩔쩔매고, 가난하게 살고…. 이런 것을 깨닫게 해준 계기가 된 바로 이용악의 「북쪽」이었습니다. 얼마 뒤 대학교 2학년이 되어 문단에 나왔습니다. 「갈대」라는 시로 「문학예술」지의 추천을 받아서입니다. 제가 문단에 나와서 굉장히 실망한 것이 있었습니다. 선배나 동료 시인들을 만나서 굉장히 실망했습니다. 모두들 당대의 시만 읽을 뿐 10년이나 15년 전의 시조차 잘 읽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당장 문예지에 발표되어 여러 평론가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시들만 읽고서, 마치 그것이 문학의 전부인 것처럼 얘기를 해요. 이만저만 실망스러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고등학생 시절에 좋은 선생님을 한 분 만났습니다. 국어 선생님이셨는데, 수업 시간에 제가 이용악 시인에 대해서 묻곤 할 때마다, 당시에는 그것이 금기시 될 때였는데도 불구하고 선생님께서는 이용악 시인에 대해서 자세한 얘기를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의 이러이러한 시도 있으니까 그것들도 한번 읽어보라고 권해 주셨습니다. 그 덕에 저는 좋은 시들을 참 많이 읽었습니다. 다른 학생들이 읽을 수 없는 시들을 많이 읽었습니다. 지금 연세대 교수이자 문학 평론가인 유종호 씨의 아버지인데, 저는 그런 면에서 참 행운아였지요. 그런데 서울에 와서 동료 문인들이나 선배들을 만나 이용악 얘기를 하면, 그 사람은 벌써 옛날 시인이고 지금은 그 사람의 시는 읽을 필요가 없다고 얘기하는 것이었습니다. 백석의 시도 좋아했는데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소설도 마찬가지로, 홍명희의 「임꺽정」 얘기를 하면 아무도 귀기울여 주지 않았습니다. 그 때 저하고 술자리에서 얘기가 유일하게 통할 수 있는 사이가 작고한 천상병과 유종호였습니다. 저하고 천상병과는 여섯 살쯤 차이가 납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천상병이 저를 어린애 취급을 하고 상대를 잘 안해 주려고 하다가, 내가 현덕의 소설을 읽었다는 소리를 하니까 그제서야 이 사람이 술을 먹다가 깜짝 놀라 바라보았습니다. "야! 임마 니가 어떻게 현덕을 읽었어?" 하는 천상병의 말에, 저는 "내가 왜 못 읽어!" 하면서 현덕의 소설 한 대목을 암송해 주었지요. 그랬더니 "진짜로구나!" 하면서 백석 시 이야기로 번지고 하면서 친해졌지요. 인사동에 나오면 르네상스 다방을 찾아 천상병을 만났던 기억이 납니다. 천상병은 원래 돈이 없는 사람이니까 술 얻어먹을 희망은 전혀 없었지만, 그래도 제가 그를 찾아가는 것은 옛날 소설을 읽은 동지로서 유일하게 인정해줬기 때문입니다. 한때 문학을 포기할 생각도 했었습니다. 그 때 실망한 것과 관계가 있는 거지요. 시를 쓸 마음도 안 생기고, 동료나 선배 문인들을 만나면 아무 재미가 없었습니다. 1956년이면 한국전쟁이 끝난 지 겨우 3년밖에 안 되었을 때입니다. 길거리에 팔다리 없는 상이군인이 허다하고, 버스를 타면 옆에 와서 껌 사달라고 생떼 쓰는 상이군인들 때문에 불편할 정도였지요. 그냥은 못 갔습니다. 수없이 사줘야 되고, 돈 없으면 욕도 먹어야 했고, 거리마다 무너진 집, 폭탄 맞아서 쓰러진 집들이 복구되지 못한 판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때 당시에 시인들이 쓰는 시라는 것은 신이 어떠니, 까뮈가 어떠니 사르트르가 어떠니 하는 관념적인 소리뿐이었습니다. 그게 아니면 옛날 식으로 꽃이 어떻고 님이 어떻고 고향이 어떻고 하는 타령들뿐이었습니다. 저는 자연히 시를 쓰는 데 흥미를 잃었지만 그것 때문에 문학을 그만두려고 한 건 아니었습니다. 제가 만나는 친구들 중에 우연히 사회과학 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그들과 함께 어울렸습니다. 수요회 같은 것을 만들어 가지고 수요일마다 모여서 술도 먹고 했는데, 그런 사람들과 교유하면서 제가 어떻게 보면 세상에 대해서 새롭게 눈을 뜨게 되었다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수요일 날 만나면 일주일 동안 읽은 책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야 됩니다. 일주일 동안 무엇에 대해서 읽었는지 한 마디 제대로 못하면 병신이 되니까 얘기를 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헌책방 찾아다니면서 책을 한 권씩 구해 읽었습니다. 남들이 거의 안 읽었을 책을 구해 읽은 다음 모임에 나가 감동적으로 발표를 하면, 그날의 대장이 됩니다. 돈을 추렴해서 술값을 내는데, 그 사람은 술값을 안 내도 됩니다. 3차 4차를 가도 그냥 먹는 거지요.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헌책방을 돌아다니다가 영문판 「공산당 선언」을 구했습니다. 그것 참 신기하대요. 그 책 자체가 신기한데다가 그런 것이 있다는 소리만 들었지 처음 읽어보는 거였으니까요. 그래서 이틀 밤을 새워서 앞에서 4페이지나 5페이지 정도를 사전을 다 찾아가면서 열심히 읽었지요. 전부 읽을 힘도 없고 영어 실력도 부족했지만, 4, 5페이지는 거의 다 외울 정도가 되었어요. 술 먹는 날 다른 사람들이 다 한 마디씩 얘기를 할 때 가소롭다는 듯이 뒷짐 진 채 웃고 있다가, 마지막으로 내가 이런 얘기를 하겠다고 하면서 공산당 선언을 영문으로 한 10분쯤 외우니까 사람들이 기가 안 죽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세 번쯤을 술값을 안내고 거저 먹은 일이 있습니다. 그 모임에서 제가 얻은 것도 참 많았습니다. 많은 사람을 사귀고 배웠습니다. 우스운 얘기를 하면, 그 때 사귄 사람 중의 하나가 무슨 일로 감옥에 들어갔다가 얼마 뒤에 죽었습니다. 1980년에 모종의 사건에 연루되어 잠깐 감옥에 들어갔을 때 옆방에 젊은 사람이 있었어요. 재판을 같이 받게 되었는데 그 젊은 사람이 나한테 "혹시 신 누구 아니시냐?"고 물어요. 그렇다고 했더니 이름을 대며 정 아무개를 아느냐고 그래요. 이름은 들어본 것 같다고 했더니, "옛날에 충무로에서 학생 때 함께 공부했던 키가 꽤 크고 안경 쓴 사람이 생각이 안 나느냐?" 묻더군요. 가만히 생각하니까 충남 예산 사람이라는 생각이 났습니다. "그 사람은 왜 묻느냐?" 했더니 "사실은 제가 그 사람의 아들입니다." 하더군요. 옛날 친구의 아들하고 같이 감옥을 산 거지요. 세상은 그런 겁니다. 시를 던지고 10년 동안 시골에 박혀 지내다 제가 문학을 포기하기로 마음먹은 동기는 사실 단순합니다. 그 동안 저하고 함께 책을 읽던 선배가 진보당 사건으로 잡혀 들어갔어요. 죽산 조봉암 선생은 50년대에 우리나라 최초로 남북통일은 평화적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한 분입니다. 그 때까지만 해도 모든 사람들이 다 북진통일을 주장했었습니다. 그 때 북진통일을 주장했던 사람들이 지금 관계에서 한 자리씩을 하고 있습니다만, 당시에는 총칼로 다 뒤집어엎고 평양까지 가서 북한에 있는 사람 다 때려 죽여야지 통일이 되지, 그렇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 지배적인 정서였습니다. 그 때 유일하게 조봉암 선생만이 "그래서는 안 된다. 북한도 같은 동포인데 싸우면 되느냐? 평화적으로 해야 한다. 평화적으로 하지 않고 전쟁으로 한다고 생각하면 이건 백년 천년이 가도 절대 통일이 안 된다. 소련이라는 나라도 약하지 않고 미국도 약하지 않은데 누가 양보하겠느냐?"고 주장했습니다. 참 합리적인 소린데 그런 소리를 했다고 해서 이 사람을 잡아다 죽였습니다. 이승만 정권 말기 때 일인데, 그 사건에 선배가 끌려 들어갔어요. 저는 겁이 많은데다 당장 맨날 누가 잡으러 오는 것 같아서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시골로 도망을 갔지요. 시골로 도망갔다고 못 잡으러 올 리는 없지만, 일단 시골로 가면 마음은 편하지 않습니까? 박혀 살다 보니까 점점 문학에 대한 정열도 식고, 문학이라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는 회의도 생겼습니다. 저는 시골에서 여러 가지 고생도 해봤습니다. 광산에서 일도 해보고, 노동판에도 가보고 농사도 지어보고 장사도 하면서 여러 부류의 사람들과 어울려 살면서 '과연 문학 가지고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문학이란 무슨 의미가 있는가?' 따위의 갖가지 회의가 일었습니다. '일단 문학을 관둬 버리자. 무얼 할 것인가는 다음에 생각하고 일단 관둬 버리자'는 생각을 했습니다. 거의 10년을 시골에 박혀서 살았습니다. 제가 그 때 깨달은 것 가운데 하나는, 지금도 그것만은 진실이라고 생각하는데, 사람은 결코 혼자서는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남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고 물론 사람은 개인이라는 게 중요하지요. 결국은 마지막 책임은 자기가 지는 것이지요. 그러나 결코 남과 함께 살지 않는 삶이라는 건 이 세상에 있을 수 없다는 것을 그 때 깨달았지요. 정리하면 이렇게 되는 것 같아요. 사람은 더불어 혼자 산다. 말이 이상한 얘기지만 남과 더불어 혼자 산다. 남과 더불어 살지만 결국 혼자 책임지니까 혼자 산다. 그러나 이 더불어 혼자 산다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고, 그 때 제가 막연하게 생각한 것은 앞으로 시를 쓸 기회가 다시 온다면 나는 이제 나 혼자만 사는 것, 나 혼자만의 생각, 혼자만의 뜻, 이런 것에만 매달리지 말고 더불어 사는 정서, 더불어 사는 어떤 아름다움, 더불어 사는 의미들을 시로써 표현해야 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명확한 건 아니고 막연하게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 당시만 해도 다시 저한테 글을 쓸 기회가 온다는 생각을 못했습니다. '이렇게 시골서 영원히 떠돌다가 끝나겠지.' '어쩌다 시 한두 편 써 놓으면 누군가가 앤솔로지 따위에 발표 해주면 얼마나 다행이겠는가.' 하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예컨대 「해바라기의 비명」을 쓴 함형수가 있지 않습니까? 한 편밖에 남긴 것이 없지만 오늘날 한국에서 나온 사화집(詞華集) 가운데서 「해바라기의 비명」을 뺀 건 하나도 없습니다. 어떤 사화집에라도 다 들어가 있지요. 수만 편의 시를 쓰고서도 한 편도 건질 수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함형수처럼 한 편을 쓰고서도 우리 문학사에 남는 사람이 되면 얼마나 다행이겠는가.' 하는 생각을 했었지요. 그러다가 제가 다시 시를 쓰게 된 것은 시인 김관식을 우연히 길에서 만났는데, 그가 술김에 "야, 서울에 올라가자." 하고 잡아끄는 통에 둘이서 서울에 올라옴으로 해서였습니다. 김관식의 집은 홍은동에 있었습니다. 산중턱에 무허가로 집을 크게 짓고 살았습니다. 자기 마누라도 있고 애들도 있는데도 불구하고, 방 한 칸을 무조건 비워 주었습니다. "이 방은 앞으로 신경림이가 쓸 거니까 그렇게 알아라." 하며, 공짜로 방을 내주었습니다. 그래서 서울살이를 시작하게 된 거죠. 처음에는 술김에 올라와서 같이 술 먹고 놀았지만, 그 때 제가 결혼한 몸이어서 혼자 살 수는 없었습니다. 시골 가서 색시를 불러서 같이 왔지요. 그 집에 데려다 놓았는데 한심한 거죠. 김관식이 우선 쌀을 다섯 말을 주고 김치도 주고 해서 생활을 시작했지요. 그래서 다시 시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시를 한 10여 년 안 썼다고 하지만 무척 시를 쓰고 싶을 때가 있었습니다. 속에서 뭔가 북받쳐 올라 시를 안 쓰면 못 견딜 때가 있었습니다. 시골 사람들은 돈벌이가 없으니까 양귀비를 재배했습니다. 그걸 집에서 조금씩 만들면 상당한 돈벌이가 되었습니다. 그걸 수집하러 다니는 사람이 있었어요. 제가 수집하러 다니는 사람의 길 안내를 맡은 일이 있습니다. 길 안내를 해주면 돈을 주었습니다. 제가 원래 돌아다니기를 좋아하는 성미인데다, 공짜로 먹고 돈까지 주니까 얼마나 좋습니까. 어느 겨울이었습니다. 술을 좋아해서 주막에 들르면 일단 술 먼저 먹는 걸 생애 제일의 뜻으로 삼고 있을 때여서 잔뜩 취해서 잤습니다. 눈이 며칠 동안 퍼부어 길을 다닐 수가 없을 정도가 되어, 한 주막에서 사흘 동안 매일 술을 먹었던 것 같습니다. 원래 그 집 주인이라는 사람은 남로당이라고 총 맞아 죽었고, 여자가 혼자 술집을 하는데 농담을 잘하고 걸찍한 소리를 잘했습니다. 매일같이 동무해서 술 먹고 그랬는데, 어느 날 새벽에 일어나 보니 눈이 다 그쳤어요. 울타리가 없는 시골 뒷간에서 일을 보고 있는데, 하늘에 주먹만한 별들이 달려 있고 머리 위에서는 하얀 눈이 내리고 있었습니다. 한참 밑에는 공사장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 공사장에서 불빛이 비쳐요. 그래서 마음이 얼마나 슬픈지 시를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 때는 필기도구를 안 가지고 다녔으니까 일단 속으로 시를 썼지요. 그것을 나중에 조금 정리해서 발표한 게 「눈길」이라는 시입니다. 말하자면 시를 쓰고 싶은 욕망 같은 것은 어쩔 수 없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10년 동안에 쓴 시가 그거하고 「그날」이라는 시입니다. 「그날」은 조봉암 선생이 사형 당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의 절망적인 마음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시집 「농무」 속의 작품들은 거의 서울에서 썼지만 머리 속에는 메모가 되어 있었던 셈입니다. 메모가 되어 있던 것을 서울에 와서 옮겨놨을 뿐이지요. 「농무」를 두고서 어떤 이들은 농민의 저항 의식 등을 쓴 거라고만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런 게 아니고 농촌에 살면서 농민들이 갖는 어떤 농촌적인 정서, 개인적인 문제가 아닌 더불어 사는 삶, 남과 함께 하는 삶… 이런 것들을 시로써 한번 표현해 보고자 했습니다. 제가 첫 번째 얘기한 것은 시라는 것은 누군가에게 하는 대화라는 겁니다. 따라서 명확하고 힘이 있어야 된다는 것과 두 번째, 삶이라는 건 혼자 꾸려가는 건 있을 수 없고 더불어 사는 삶, 이것이 내게는 중요한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물론 자기의 개인적인 삶이라는 것도 중요한 것이지요. 결국 책임은 자기한테 있는 거니까. 혼자 생각하는 만큼 혼자 책임지는 것을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되겠지만, 나 혼자의 생각만 시로 다 표현한다면 시가 너무 왜소해지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그 때 했던 것 같습니다. 또 앞으로 내가 시를 쓸 기회가 생긴다면 더불어 사는 삶 쪽에 역점을 두는 시를 쓰겠다고 하는 생각도 그 때 했던 것 같습니다. =============================================================================== 252. 어떤 비닐 봉지에게 / 강은교 어떤 비닐 봉지에게 강 은 교 어느 가을날 오후, 비닐 봉지 하나가 길에 떨어져 있다가 나에게로 굴러왔다. 그 녀석은 헐떡헐떡거리면서 나에게 자기의 몸매를 보여주었다. 그 녀석이 한 바퀴 빙 돌았다, 마치 아름다운 패션 모델처럼 그러자 그 녀석의 몸에선 바람이 일었다. 얄궂은 바람, 나를 한대 세게 쳤다. 나는 나가 떨어졌다. 한참 널브러져 있다가 내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그 녀석, 비닐 봉지는 바람에 춤추며 가는 중이었다. 나는 마구 달려갔다, 바람 속으로 비닐 봉지는 나를 돌아보면서도 자꾸 달아났다. 나는 그 녀석을 따라갔다, 넘어지면서, 피 흘리면서 쓰레기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곳으로, 실개천이 쭈빗쭈빗 흐르고, 흐늘흐늘 산소가 없어지고 있는 곳으로, 우리의 꿈이 너덜너덜 옷소매를 흔들고 있는 곳으로, 비닐 봉지는 나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나는 위대해! 나는 영원해! 나는 몸을 떨었다, 귓속으로 그 녀석의 목소리가 쳐들어왔다. ─ 나는 영원히 썩지 않는다네, 썩지 않는 인간의 자식이라네. 비닐 봉지는 바람 속에 노오란 꽃처럼 피어났다. 강은교 시집 중에서 ----------------------------------------------------------------------------------------- -------------------------------------------------------------------------------------------- 253. 기적 / 강은교 기적 강 은 교 그건 참 기적이야 산에게 기슭이 있다는 건 기슭에 오솔길이 있다는 건 전쟁 통에도 나의 집이 무너지지 않았다는 건 중병에도 나의 피는 결코 마르지 않았으며, 햇빛은 나의 창을 끝내 떠나지 않았다는 건 내가 사랑하니 당신의 입술이 봄날처럼 열린다는 건 오늘 아침에도 나는 일어났다, 기적처럼 강은교 시집 중에서  
1088    詩가 원쑤?, 詩를 잘 쓰는 비결은 없다? 있다? 댓글:  조회:4764  추천:0  2016-02-13
안녕하세요^^   시는 내마음 내생각을 글로 노래하듯이 표현하면 됩니다.   시를 지을때 필요한 것은,-   우선 책을 많이 읽어서 다양한 표현 어휘력을 키우는게 좋구요, 다른 분들의 시를 많이 읽어봄으로써 시에 대한 운율이라던가 표현법을 익히는데 도움이 됩니다. 그리고 남들과는 조금 다른 시선으로 세상과 사물을 보며 생각을 가지는게 좋습니다. 중요한것은 자기 생각에 솔직히 글로 표현하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     시를 어떻게 쓸 것인가?   1) 한 작품에 많은 사연을 담지 말것. 한 편의 시가 전달하는 메시지는, 정서든 이미지든 하나여야 하고, 다른 모티프들은 그것이 뿜는 자장(磁場) 안에 들어 있어야 한다. 이때 시는 통일성을 얻는다.   2) 비유와 상징을 아낄 것. 비유는 아낄 수 있는 데까지 아껴야 오롯한 품위를 갖는다. 상징은 시인이 조립하는 것이 아니라 시의 숨결에서 우러나오는 것이어야 한다.   3) 긴 시를 경계할 것. 시의 참된 맛은 행간에 있다. 행간에는 침묵의 언어와 정서의 긴장이 깃들여 있다. 긴 시는 행간을 매립하는 위험을 안고 있다.   4) 시상을 풀어가는 수단으로써, 분명하게 몸으로 감촉할 수 있는 것들을 사용할 것. 불투명한 관념이나 감정을 시 비슷한 문법으로 채색하는 일이 없도록 주의할 것   5) 정서의 결을 잘 다듬을 것. 몇 번의 침전과정을 거친 그리움이라면 슬픔 따위가 개운하게 세척된 상태라야 한다. 물기가 없이 잘 마른 상태라면 더욱 좋다.   6) 구문이 거추장스러운 것, 관형구나 부사구가 무거운 것은 금기다. 줄기가 가지를 지탱하기 어렵다. 관형어나 부사어가 상쾌하게 오려진 문장은 조촐하고 산뜻하다.   7) 시로 삶의 각성이나 잠언적인 의도를 노출시키지 말것. 시는 철학이 아니라 미학이다.   [시안] 2002년 봄호에 실린 글을 축약해둔다. 시를 쓰면서 자칫 지나치기 쉬운 일들을 찬찬하게 지적해주었다. 두고 읽을 만 하다.   다음은
1087    詩의 벼랑길위에서 만난 시인들 - 박두진 댓글:  조회:4637  추천:0  2016-02-12
청록파 박두진 시인의 유일한 동시집   “해야 솟아라. 해야 솟아라. 말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청록파이자 ‘해의 시인’으로 잘 알려진 박두진 시인의 〈해〉는 지금도 널리 애송되고 있는 우리나라 대표시입니다. 박목월•조지훈 시인과 ‘청록파’로 활동한 박두진 시인은 이들과 더불어 해방 이후 우리 시단을 이끌어 왔습니다. 자연의 강렬한 생명력을 바탕으로 평화와 신성을 노래하였고, 광복 이후에는 어두운 사회 현실에 대한 극복 의지가 담긴 시를 썼습니다. 그 뒤 고결한 신앙시를 쓰며 시의 세계와 일치된 삶을 살고자 하여 후배 문인들의 모범이 되었습니다. 또한 생전에 윤석중, 마해송 등 아동문학계에 큰 발자취를 남긴 아동문학가들과 교류하면서 어린이를 위한 동시를 쓰기도 하였습니다. 《박두진 동시집-해야 솟아라》는 박두진 시인의 유일한 동시집으로, 어린이를 위해 쓴 동시 44편과 대표시를 곁들여 엮었습니다. 초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려 있는 〈돌아오는 길〉〈하얀 눈과 마을과〉를 비롯한 자연의 숨소리가 가득한 동시들과 함께, 〈해〉〈청산도〉〈도봉〉〈어서 너는 오너라〉등의 울림 깊은 시들을 모았습니다. 재치 있는 말놀이 동시나 생활 동시에 익숙한 어린이들에게 신선한 감각을 일깨워 주고, 자연의 경이로움을 전해 줄 것입니다. 시인의 맑고 청아한 시를 읽으며 문학의 참맛을 느껴 보길 바랍니다.   |출판사 서평|   새소리, 자연의 숨소리가 살아 있는 동시! 산길을 걷다 보면 밝고 명랑한 새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이 생기 넘치는 새소리는 동시와 잘 어울립니다. 자연의 경이로움을 깊이 있는 시 세계로 연결시킨 박두진 시인은 자연 속 숱한 소리 중에서 가장 어린이다운 ‘새소리’에 주목하였습니다. 그래서 많지 않은 동시 속에 비비새, 꿀룩새, 뻐꾹새, 장끼, 비둘기, 소리개, 종달새, 꾀꼬리 등 온갖 새가 나옵니다. 이들은 지즐대고 포르릉거리고 벅뻑구욱, 로리 롱리 롤로령…… 각기 다른 소리를 내며 어린이들을 자연 속 동심의 세계로 안내합니다. 사실 새소리는 자연의 숨소리인 동시에 자연이 자유롭게 부르는 노래입니다. 그런 이유로 새소리 가득한 동시는 우리 마음속에 더 아로이 새겨지고 따뜻하게 다가옵니다.   참된 동시는 산이나 들에서 들을 수 있는 새소리와 같아야 합니다. 그 소리는 어린이들의 감성을 열어 주어 새소리를 번역해 알아듣게 하고,자연과 대화할 수 있게 이끌어 주니까요. -엮은이(김병규_아동문학가)의 말 중에서   자연과 마음이 통하는 어린이   비비새가 혼자서/ 앉아 있었다.// 마을에서도/ 숲에서도/ 멀리 떨어진,/ 논벌로 지나간/ 전봇줄 위에,// 혼자서 동그마니/ 앉아 있었다.// 한참을 걸어오다/ 되돌아봐도,/ 그때까지 혼자서/ 앉아 있었다. 〈돌아오는 길〉의 전문   초등학교 5학년 국어 교과서에 수록된 이 동시는 오랫동안 여운이 남습니다. 길을 걷다가 비비새와 맞닥뜨린 나는 가만히 서서 바라봅니다. ‘저 새는 누구를 기다릴까, 무슨 걱정을 하나?’ 생각에 생각을 펼치겠지요. 그러고는 가다가 다시 뒤돌아봅니다. 어느새 나와 새는 하나가 됩니다. 이렇듯 혼자 있는 어린이는 실은 혼자가 아닙니다. 혼자 상상하고 사색하지만 자신을 자연 속에 파묻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연과 끊임없이 교감하고 있어서 외롭지 않지요.   그러한 사정은 2장에 수록된 〈솔바람]과 〈바닷가에서]〈산봉우리] 등에도 잘 나타납니다. 동시 속 나는 자연을 벗 삼아 휴식하고 때로는 진지하게 관찰합니다.   산봉우리는 늘 혼자서 생각한다.// 산봉우리는 풀버레와 작은 새소리에도 귀를 기울인다.// 산봉우리는 흰 눈과 달빛을 머리에 인다.// 산봉우리는 캄캄한 밤일 때마다 아침에 솟을 태양을 생각한다.// 산봉우리는 외로울 때 솔바람 소리로 나직이 노래 부른다.// 〈산봉우리〉 중에서   모든 생명을 품고 있는 산봉우리를 보면서 그 큰 뜻까지 헤아릴 줄 아는 마음이 보입니다. 이것은 더불어 살려고 하는 자세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3장에서는 자연이 다가오는 소리와 모습을 느끼며 이에 화답하듯, 나 스스로가 자연스럽게 동화되어 갑니다.   쓰르람 쓰르람 쓰르라미 소리/ 멀리서 가까이서 쓰르라미/ 소리,/ 가까이서 우는 쓰르라미 소리는/ 즐겁게 즐겁게만 들리고,/ 멀리서 우는 쓰르라미 소리는/ 슬프게 슬프게만 들린다.// 〈쓰르라미 소리〉 중에서   깊은 산 드메 숲/ 산으로 오너라./ 푸릇푸릇 산의 기운/ 산이 자라고/ 쏟아지는 하늘 볕의/ 눈이 부신 빛살// 아,/ 하나씩의 드메 산의/ 하나씩의 봄이/ 우쭐우쭐 산의 봄이/ 가슴 부풀고 있다.// 〈봄 편지] 중에서   쓰르라미 소리를 들으며 그 외로움을 함께 느낍니다. 우쭐우쭐 기운이 솟는 산을 보면서 나도 덩달아 가슴이 부풉니다. 이렇게 자연과 함께한 교감들이 우리 삶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 주고 있습니다.   하얀 마을에서 별처럼 빛나는 꿈 박두진 시인의 동시가 보여 주는 꿈은 새하얗습니다.   눈이 덮인 마을에/ 밤이 내리면/ 눈이 덮인 마을은/ 하얀 꿈을 꾼다.// 눈이 덮인 마을에/ 등불이 하나/ 누가 혼자 자지 않고/ 편지를 쓰나?/ 새벽까지 남아서/ 반짝거린다.// 눈이 덮인 마을에/ 하얀 꿈 위에/ 쏟아질 듯 새파란/ 별이 빛난다./ 눈 덮인 마을에/ 별이 박힌다.// 눈이 덮인 마을에/ 동이 터 오면/ 한 개 한 개 별이 간다./ 등불도 간다.// 〈하얀 눈과 마을과]의 전문   본래 이 작품은 [마을과 눈과 등불과 별]로 발표하였다가, 이후 [하얀 눈과 마을과]로 수정하였습니다. 동시를 읽고 있으면 눈이 소복하게 쌓인 겨울 밤 풍경이 머릿속에 그대로 그려집니다. 아울러 먼지 하나 없을 것 같은 새하얀 눈 위에서 어떤 꿈이든 자유롭게 그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눈 덮인 마을, 어느 한 집에 딱 하나 켜 있는 등불……. 그것은 시각적으로도 돋보이지만 꿈이 반짝이며 이루어질 거라는 희망이 느껴집니다. 4장은 유독 하얀 겨울 배경이 많은데, 생각해 보면 생명이 잠든 겨울 그리고 밤은 꿈꾸기 더없이 좋은 시간이지 않나 싶습니다.   시대를 고민할 줄 아는 어린이 시인은 때로 사회 불의와 겨레 문제에 대해 목소리를 드높인 동시도 썼습니다. 어린이들이라고 현실과 동떨어져 사는 건 아닐 테니까요. 5장의 〈3월 1일의 하늘〉은 일제 강점기에 3•1운동을 하며 독립을 외치던 그 간절함을, 〈꽃바람〉과 〈바람이 불고〉는 학생들이 독재 정권에 맞서 자유를 위해 싸웠던 4•19 혁명을 노래했습니다. 또한 통일에 대한 염원도 절절합니다. 이러한 동시는 더욱 목청을 돋우며 낭송하면 좋을 것입니다.   그 파란 바다/ 찰싹대는 물보래에/ 두 볼 적시고,// 아, 북으로,/ 북으로,/ 가 보고 싶은 우리 땅/ 압록강 기슭,/ 그 강가에 되어 있을/ 젖은 꽃 얼굴,/ 남쪽 하늘 그리워할/ 진달래 보고 싶다. 〈진달래꽃, 그리움〉 중에서   어둠을 살라 먹고 희망이여 솟아라! 마지막 장은 시인의 대표시를 곁들였습니다. 이는 우리 문학사에 큰 공헌을 한 시인의 시 세계를 어린이들도 만나 보면 좋을 것 같아서입니다. 그 어떤 어둠 속에서도 흐려지지 않는 희망의 상징인 해를 그린 〈해〉와 〈해의 품으로〉, 이상향을 힘차게 맞이하는 〈어서 너는 오너라〉 등의 시는 자유롭고 신명 납니다. 시에 숨어 있는 뜻을 파악하려 애쓰기보다는 시가 가지는 매력을 있는 그대로 가슴으로 느껴 보면 좋을 것입니다.   자연을 노래하다 보면 시심이 절로 생겨요! 1939년 등단한 박두진 시인은 우리나라 현대사의 아픔들을 겪으면서, 1998년 작고하기 전까지 60여년 동안 많은 작품을 썼습니다. 일제 강점기와 6•25 전쟁을 거치면서 당시 유행했던 지나치게 감상적이거나 패배주의에 빠져 있는 시, 기교에 치중하는 시를 꺼렸습니다. 대신 우리와 가장 가깝고 절대적인 자연을 통해 간절한 희망과 평화를 노래하였습니다. 인간이 저지른 불의에 항거하면서 본질을 고민하고, 건강한 이상향을 그렸습니다. 그 마음이 시뿐만 아니라 어린이들에게 전하는 동시 속에도 스미어 있습니다. 어린이이야말로 건강한 자연 속에서 꿈을 누려야 하는 존재니까요. 대부분 1950년대 후반부터 70년대 사이에 쓴 동시들이라 지금 어린이들에게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동시들을 입 밖으로 낭송해 보고 다시 들여다보면, 문학이 주는 감동이 시대를 초월하고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시인의 시 속에 오롯하게 담긴 ‘새소리’ 그리고 ‘자연’은 지금 이 순간까지도 우리와 더불어 숨쉬고 있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인공적인 환경에서 혼자 섬처럼 지내는 데 익숙해진 요즘 어린이들이기에 더더욱 순수하고 변치 않는 자연의 노래가 따뜻한 위로를 해 줄 것입니다. /////////////////////////////////////////////////// "해야 솟아라. 해야 솟아라. 말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위의 시 구절은 청록파이자 '해의 시인'으로 잘 알려진 박두진 시인이 쓴 라는 시의 일부입니다. 박목월, 조지훈 시인과 더불어 '청록파'로 활동한 박두진 시인의 호는 혜산이고, 청록은 '푸른 사슴'이라는 뜻입니다. 1946년 이 세 분이 함께 이란 시집을 내면서 이후 청록파로 불리게 된 것입니다. ​ 박두진 시인은 경기도 안성에서 태어나 1939년 에 시인 정지용으로부터 등이 추천을 받아 등단하였습니다. 문학과 종교를 인생의 가치로 삼아 자연의 강렬한 생명력을 바탕으로 평화와 신성을 노래 하였고, 광복 이후에는 어두운 사회 현실에 대한 극복 의지가 담긴 시를 쓰며 시단을 이끌어온 인물입니다. ​ ​ ​ ​ ​ 박두진 시인은 생전에 윤석중, 마해송 등 아동문학계에 큰 발자취를 남긴 아동문학가들과 교류하면서 어린이를 위한 동시도 썼습니다.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려 있는 를 비롯한 자연의 숨소리가 가득 담긴 동시 44편을 써서 어린이들에게 자연의 경이로움과 재치 있는 언어 감각을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 ​ ​그 중 를 살펴보실까요? ​
1086    詩人을 추방하라???... 댓글:  조회:4002  추천:0  2016-02-11
이번 주제는 플라톤의 ‘시인추방론’입니다. 시인을 추방하자니. 참 엉뚱한 말입니다. 시인만큼 마음이 깨끗한 사람이 어디 있나요.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 나는 괴로워했다 /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윤동주, 서시)  20대 중반인 시인이 바라는 것은 부나 명예가 아닙니다. 부끄럽지 않은 삶과 약자에 대한 사랑뿐이었죠. 맑고 아름다운 마음씨입니다. 시인이란 인간에 대한 살뜰한 애정을 가진 이들입니다.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는 거지 아이의 가련한 효심을 시인만은 알아봅니다. “조선총독부가 있을 때 / 청계천변 10전 균일상 밥집 문턱엔 / 거지소녀가 거지장님 어버이를 / 이끌고 와 서 있었다 / 주인 영감이 소리를 질렀으나 / 태연하였다 / 어린 소녀는 어버이의 생일이라고 / 10전짜리 두 개를 보였다” (김종삼, 장편 2 전문)  시인들은 욕망을 버리고 주어진 소박한 것들에 감사할 줄도 압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천상병, 귀천) 평생 가난했고 억울한 누명을 쓰고 옥고까지 치르며 고문을 받기도 했지만 시인은 고된 삶이 소풍처럼 즐거웠다고 고백합니다. 이런 사람들을 추방하자니. 플라톤 이 사람, 정말 큰 일 낼 사람입니다. 하지만 무턱대고 그를 비난할 일도 아닙니다. 저런 과격한 주장을 한 이유가 있을 테니 말이에요. 먼저 플라톤이 왜 이런 말을 했는지 알아보는 게 순서입니다. ‘시인추방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흔히 ‘이데아론’이라고 불리는 플라톤의 진리관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플라톤은 세계를 둘로 나누어 봅니다. 첫 번째 세계는 우리가 감각을 통해서 알 수 있는 현상의 세계, 감각적 사물의 세계이고, 두 번째 세계는 정신의 사유를 통해서 접근할 수 있는 이념의 세계입니다. 이 이념의 세계는 근원적인 형태의 세계로 이루어진 것으로 현실의 감각적 세계를 있게 하는 존재의 근원입니다. 예를 들자면 세상에는 수많은 삼각형 형태의 사물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삼각형들은 서로 조금씩 다르지요. 내가 가진 삼각자와 옆집 다민이, 동생 다연이가 그린 삼각형의 모습은 확실히 서로 다를 것입니다. 플라톤은 이러한 다양한 삼각형은 기본적으로 완전한 삼각형이라는 하나의 원형을 모방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원래 형태의 삼각형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모방한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현실의 삼각형은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모든 현상이 가장 완전한 자신의 ‘원형’, 즉 원래의 형태를 가지는데 그것을 플라톤은 이데아(idea)라고 부릅니다. 모든 현실의 사물은 이데아를 나누어 가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여러 식물들은 식물의 이데아를 조금씩 지니고 있기 때문에 식물로 분류될 수 있는 것이고, 책상은 책상의 이데아를 조금씩 나누어 갖고 있기 때문에 책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중략) 이데아는 현실의 세계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이데아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은 감각을 통해서가 아닌 이성의 활동을 통해서입니다. 말하자면 우리는 이데아를 볼 수도 만질 수도 없지만 이성의 능력을 동원하여 이데아를 그려 낼 수 있습니다.” (서용순 지음, 『청소년을 위한 서양철학사』 중에서) ...‘동굴의 비유’를 기억하나요? 동굴 안에 갇혀 있던 사람이 동굴 밖으로 나와 진짜 세계가 무엇인지 깨닫는 이야기였죠. 동굴의 비유는 바로 이데아론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플라톤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평상시에 우리는 마치 동굴 안에 사는 사람과 같다! 우리가 감각적으로 보고 만지는 것들은 실은 허상에 불과한 것들이죠. 진리는 우리가 사는 세계 너머(동굴 밖)에 있습니다. 현실 너머에 있는 진리를 그는 이데아라고 부릅니다. 현실은 그 이데아라는 진리를 모방한 그림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실제로 우리가 현실에서 만나는 것은 죄다 불완전하죠.  가령 누구나 완벽한 이상형을 꿈꿉니다. 하지만 처음엔 아무리 멋져 보이는 사람도 만나보면 실망스럽고 아쉬운 부분은 있기 마련입니다. 인기 많은 연예인을 만나면 다를 거라고요? 아닙니다. 그들도 사람인 이상 부족한 부분은 분명히 있을 테니까요. 결국 이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습니다. 플라톤이라면 이렇게 말하겠죠. 세상에 완벽한 사람이 없는 이유는 현실이란 한갓 그림자에 불과하기 때문이라고, 완벽한 사람(사람의 이데아)은 현실 너머에 있다고 말이죠. 플라톤에 따르면 이데아는 눈에 보이지 않으며 오로지 이성을 통해서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완벽한 인간은 현실에는 없으며 오로지 이성을 통해 상상해낼 수 있을 뿐인 거죠.  이데아론을 이해했다면 플라톤이 예술을 비난한 이유를 아는 건 이제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시를 비롯한 예술은 이데아를 알게 해주기는커녕 그림자에 불과한 현실을 다시 모방할 뿐이라는 게 플라톤의 생각이었습니다. 플라톤 : 답답하긴. 가령 장인이 침대를 만든다 하세. 먼저 뭐가 필요하지? 무턱대고 톱과 망치를 휘두르면 침대가 만들어질까? 아리스 : 아니죠. 먼저 설계도가 있어야죠. 플라톤 : 그렇지. 장인의 머리속 설계도를 침대의 이데아라 부르기로 하세. 장인은 이 설계도에 따라 평생 수백, 수천 개의 침대를 만들어낼 걸세. 물론 침대들은 모두 이데아의 모방이겠지?  아리스 : 예. 그것도 물질이라는 불순물이 섞인 불완전한……. 플라톤 : 자, 이제 어떤 환쟁이가 붓과 물감으로 이 침대를 그린다고 하세. 그건 뭘하는 걸까?  아리스 : 당연히 침대를 모방하는 거죠.  플라톤 : 그렇지. 그나마 또 한번 불완전하게 말일세. 결국 예술이란 가상의 가상, 그림자의 그림자란 얘기 아닌가? 이렇게 예술은 진리의 세계에서 두 단계나 떨어져 있는 거라네. 알겠나? (진중권 지음, 『미학 오디세이 1』 중에서) 예술은 현실을 모방한 것이다. 그런데 현실이란 이데아의 그림자에 불과한 것이므로 결국 예술은 그림자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게 된다. 이것이 플라톤의 생각입니다. 예술이 진리를 알려 주기는커녕 오히려 진리(이데아)로부터 멀어지게 만든다고 여긴 것도 이 때문입니다. 그는 예술이 인간에게 줄 수 있는 것이란 고작 즐거움에 취해 진리를 망각하는 삶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모두가 예술에 취해 있다면 어떻게 되겠어요. 플라톤은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philosopher·철학자)으로서 아테네 시민들이 예술이 제공하는 즐거움과 향락에 취해 진리를 추구하는 일에 게을러지면 큰일이라고 걱정했습니다. 그가 시인을 추방해야 한다는 과격한 주장을 하게 된 이유입니다.  “만약에 자네가 서정시에든 서사시에서든 즐겁게 하는 시가를 받아들인다면, 자네 나라에서는 법과 모두가 언제나 최선의 것으로 여기는 이성 대신에 즐거움과 괴로움이 왕 노릇을 하게 될 걸세. (…) 시가 그와 같은 성질의 것이기에, 우리가 그때 이 나라에서 시를 추방한 것은 합당했다는 데 대한 변론이 이것으로써 된 것으로 하세나. 우리의 논의가 그렇게 결론을 내렸으니까 말일세.” (플라톤 지음, 박종현 옮김, 『국가』 중에서)    물론 시대적 맥락도 있습니다. 본래 아테네에서 교육은 오랫동안 서사시와 비극 등 문학이 담당했습니다. 그러다 플라톤 시대에 ‘철학’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교육 방식이 등장하게 되었죠. 즉, 문학이라는 이전의 교육방식과 철학이라는 새로운 교육방식이 충돌하던 때, 플라톤은 철학의 입장에서 문학을 비판했던 것입니다. 
1085    C급 詩? B급 詩? A급 詩?... 댓글:  조회:3966  추천:0  2016-02-11
시인은 왜 있는가 인간의 삶 속에는 희로애락(喜怒哀樂)이 있기 때문에 시인은 인류의 역사가 생긴 이래 존재해 오면서 시인들이 쓰는 시는 사람들의 애환(哀歡)을 간절하게 노래해 왔던 것입니다. 다만, 근래에 이르러 특히, 우리나라의 '시'에 있어서 마치 대중적이고 쉬운 시어를 사용하면 'B급', 'C급' 시가 되고 고급적이고 난해한 시어를 사용하면 'A급' 시가 되는 것으로 호도하여 먹물들끼리나 주고받는 투의 언어의 유희로 시를 의도적으로 '엘리트화'하고 있는 것은 창작의 세계에 다양한 형태의 실험이 있어야 하는 당위성으로 보기에는 무리한 면이 있으며 시가 대중 앞에 존재해야 할 이유의 상궤(常軌)에서 크게 벗어난 현상으로 보고 싶습니다.   플라톤이 시인을 혹평했다는 말이 있는데,--- 플라톤(그리스의 철학자/BC 427 ~ BC 347)이 시인을 혹평한 것은 사실입니다. 플라톤은 그의 저서 '국가론(Poliiteiā) 제10권'에서 '시인 추방론'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엄밀히 말하면 교육적인 측면을 배제한 시와 시인의 추방을 언급한 것으로 전적으로 시와 시인의 존재를 부정한 것이 아니고 '시'라는 영역이 '이상 국가'의 건설을 위해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를 규정하면서 '시'가 사람들을 미혹하고 이상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는 요소들을 갖고 있다며 그것에 대해 신랄하게 지적하고 있는데, 이러한 플라톤의 관점에 대해 "진실을 현현(顯現)하는 데 있어 모방과 이미지의 활용, 진실에의 접근에 있어 간격이 존재하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는 반론도 힘을 얻고 있습니다.
1084    詩의 벼랑길위에서 만나는 시인들 - 신석초 댓글:  조회:5777  추천:0  2016-02-10
  시인 이육사(1904~1944)가 남긴 묵란도(墨蘭圖) 원본(그림).   육사는 생전 2점의 난초 그림을 남겼는데 이번에 공개된 그림은 육필 시고집인 ‘이육사시고’(李陸史詩稿)의 표지에 실렸던 것이다. 가로 33.8㎝, 세로 24.2㎝의 그림에는 ‘풀이 무성하여 싱싱하게 푸르니 가히 경탄할 만큼 훌륭한 지경’이란 뜻의 ‘依依可佩’(의의가패)라는 묵글씨 제목이 적혀 있다. 이 작품은 이육사가 둘도 없는 친구인 신석초(1909~1975)에게 준 것으로 1974년 육사의 미발표 유고인 ‘바다의 마음’과 함께 잡지 ‘나라사랑’ 16집에 사진이 실리면서 공개됐다. -------------------------------- 시인 신석초(申石艸, 1909년~1976년)선생님 본명은 응식(應植). 본관은 고령(高靈). 긍우(肯雨)의 아들이며, 충남 서천 출생입니다. 다음의 내용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 생애 및 활동사항 향리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한학을 공부하다가 상경하여 1925년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신병으로 중퇴하였다. 이 무렵부터 문학에 뜻을 두었다. 1931년 일본으로 건너가, 호세이대학[法政大學] 철학과에 입학, 본격적으로 사회주의사상의 영향을 받아 카프(KAPF :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의 맹원으로 활약하였다.   이 무렵 프랑스문학 특히 발레리에 크게 심취하였으며, 1935년에는 『신조선(新朝鮮)』 편집일을 맡아보았고, 1948년 한국문학가협회 중앙위원을 지내기도 하였다. 1954년 한국일보에 입사하여 1957년에는 논설위원 겸 문화부장에 취임하였다. 그 뒤 예술원회원(1960), 한국시인협회 회장(1965), 한국문인협회 시분과위원장(1965∼1966) 등을 역임하였다. 1961년 서라벌예술대학에서 강의를 하기도 하였다.   그의 문단 활동은 1931년 신유인(申唯仁)이라는 이름으로 『중앙일보』에 「문학창작의 고정화(固定化)에 항(抗)하여」를 발표하면서부터 비롯되었다. 이 논문은 볼셰비키화한 카프의 창작방법론의 강요에 항의하는 내용으로서, 카프의 창작방법론에 대한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자신의 가정환경이나 발레리의 작품 「텍스트씨」를 읽은 감동 등으로 사상적 고민을 계속하다가 마침내 박영희(朴英熙)의 전향선언과 함께 1933년 탈퇴원을 제출하고, 이듬해 카프의 해산과 함께 관계를 끓었다. 1935년 무렵부터 이육사(李陸史)와 알게 되어 막역한 지기(知己)가 되었고, 서정주(徐廷柱)·김광균(金光均)·윤곤강(尹崑崗) 등과 함께 1937년 ‘자오선(子午線)’ 동인으로 참가하면서부터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전개하였다.   「호접(胡蝶)」·「무녀의 춤」을 『자오선』 1호에 발표하였고, 이어 1939년『시학(詩學)』지에 「파초(芭蕉)」(1호)·「가야금(伽倻琴)」(2호)·「묘(墓)」(4호) 등을 발표하였다. 『문장(文章)』과 『인문평론(人文評論)』이 폐간되자 침묵을 지킴으로써 친일 문학에 동조하기를 거부하였으며, 광복과 더불어 1946년 제1시집 『석초시집(石艸詩集)』을 간행하였다. 이어 1959년에는 제2시집 『바라춤』, 1970년 제3시집 『폭풍의 노래』, 1974년 제4집 『처용(處容)은 말한다』와 제5시집 『수유동운(水踰洞韻)』을 간행하였다. 그는 대체로 엄격한 구성과 고전적 심미성을 추구하는 작품 세계를 전개하여왔는데, 이러한 작품 세계는 발레리와 노장사상 사이에서 발견되는 공통점을 바탕으로 구축되고 있다. 즉, 사고의 조직성을 추구한 발레리(Valery,P.A.)의 엄밀성과 명석성을 형태적인 바탕으로 삼고, 여기에 노장사상의 출세간적 달관(出世間的達觀)의 경지를 담아 보려는 시도로 이해할 수 있다. 대체로, 과작에 속하는 그의 작품 가운데 45연 427행으로 된 장시 「바라춤」이 그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이 시는 이승의 내적 갈등을 다룬 작품으로서 동양정신과 서구시적 요소의 이중적인 구조를 잘 보여주고 있다.   - 상훈과 추모 1969년 예술원상을 수상하였다.  신석초의 시세계를 살펴보면, 카프의식과는 극단적으로 상치되는 의식세계를 만나게 된다.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그는 프랑스 상징주의, 그리고 발레리의 순수시 운동과 이백, 두보, 나아가 노장사상의 영향을 받은 시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제1시집 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사라지는 불’의 세계, 즉 허무의 세계이다. 대체로 그가 가을 황혼, 붉은 바위, 단풍을 주로 노래한 것은 이런 문맥에서 이해될 수 있다. 이것이 제2시집 에 이르면 허무주의적 세계관이 장시 을 통하여 새로운 시적 질서를 획득한다. 이 시의 리듬은 고시조의 운율을 원용한 것으로 발레리의 순수에 대한 경도가 마침내 동양정신과 만나면서 새로운 질서를 추구하고 있다. 이때 동양정신은 노장사상을 의미하지만, 형식적인 측면에서 향가·여요·시조의 리듬을 답습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제3시집 에 나타나는 두드러진 특성은 불의 이미지로, 그것은 일상의 세계에 스며있는 한결 누그러진 불이다. 그러나 제4시집 에서 이러한 일상성 지향은 마침내 은거의 형식으로 고착된다. 즉, 상상력의 어떤 변증법적 울림이 없는 정신의 고요만이 나타나는 세계라 할 수 있다. 그가 영향받은 서구 순수시론이나 노장사상이란 현실적 요소를 배제하거나, 그러한 요소가 함축하는 삶의 공리성을 전적으로 고화시키려는 정신의 모험이다. 따라서 그의 시세계는 이러한 정신의 모험을 기본율로 한다. 대체로 과작에 속하는 그의 작품 가운데에서 45연 427행으로 된 장시 은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고 있는데, 이 시는 이승의 내적 갈등을 다룬 작품으로서 동양 정신과 서구시적 요소의 이중적인 구조를 잘 보여주고 있다. ------------------신석초 시모음--------------------------------   검무낭 신석초   검무낭(劒舞娘)   꽃송아리 달아 전립(戰笠), 검은 머리 위에 비뚜름히 숙여뜨리고   늘어진 버들가지…… 긴 치마, 쾌자, 곁들여 입고 은장도, 두 손에 갈라 들고   건드러지게 돌아가는 몸매, 꿈결에 흔들려서 쾌자, 반쯤 흩날리고   자알 잘 흔드는 장도 공연히 죽을 둥도 모르는 매력의 잎만 떠돌게 하누나.   석초시집, 을유문화사, 1946           고풍 신석초   고풍(古風)   분홍색 회장저고리 남끝동 자주 고름 긴 치맛자락 살며시 치켜들고   멋들어진 화관 몽두리 황금 용잠 고와라   은은한 장지 그리메 새 치장하고 다소곳이 아침 난간에 서다.   처용은 말한다, 조광출판사, 1974           광릉에서 신석초   광릉(光陵)에서   시월달에 광릉엘 오니 단풍이 흐드러지게 피어 환한 꽃밭 속이데 빨간 단풍잎 한 잎을 따서 구름에 띄워 보았네.   다시 광릉에 오니 단풍은 바람과 함께 지데. 상강(霜降)에 쌓인 가랑잎 밟으며 오솔길 걷는 멋을 내가 처음 알았네.   폭풍의 노래, 문예사, 1970           궁시 신석초   궁시(弓矢)   반달 같은 활 시위를 당겨 한 번 힘껏 쏘으면 휘영청 하늘에 가이없이 뵈지 않는 물결이 이느니,   오오, 활이여! 네, 나는 황금의 아리따운 살로써 내가 가진 사념의 묘망한 구름을 쏘게 하여라.   화살이 가서 찌르는 그 과녁을 남은 몰라라, 아무도 그 비밀한 곳을 몰라라.   그래도 바람이 가는 이 사이, 빠르고 빛난 움직임이 잠들기 쉬운 내 몸을, 깨워도 있으리.   석초시집, 을유문화사, 1946           규녀 신석초   규녀(閨女)   네가 비밀한 장막 드리우고, 꽃과 같은 규방 속에서 내 여인이여! 너는 네 가슴에다 무슨 허무의 심사를 그리는가?   깊고, 그윽하고 범할 수 없는 무구한 사원 속으로 너는 지니리라, 영원의 달, 푸른 모이와 스란 속에 네 아리따운 열매를…….   오오, 규녀(閨女)! 감추인 옥석(玉石)! 후원에 핀 난꽃 한 떨기여! 네 숨음은 탄하기 어려워라.   네 몸은 익어 타는 듯하여도 네 혼은 깊은 뜰 안에 있어 지샘이 가져오는 숲들을 헤매게 하누나.   석초시집, 을유문화사, 1946           금사자 신석초   금사자(金獅子)   금사자야 금빛 바람이 인다 해바라기가 피었다.   하늘 아래 둘도 없는 너의 황금 갈기 휘황한 너의 허리   주홍색 아가리를 딱딱 벌리고 조금은 슬픈 듯한 동굴 같은 눈을 하고   맹수 중에 왕중왕(王中王).   꽃 펴 만발한 싸리밭에 불붙은 태양의 먹이   네 발로 움켜잡고 망나니로 뒹군다 땅 위에.   고려 천년 화사한 날에 해바라기가 피었다. 금빛 노을이 뜬다.   폭풍의 노래, 문예사, 1970           낙엽의 장 신석초   낙엽(落葉)의 장(章)   □ 1   서릿바람이 산뜰을 휩쓴다. 낙엽이 낙화처럼 흩날린다. 낙엽이 산뜰을 덮는다.   나뭇가지 사이로 파란 하늘이 터져 온다 산뜰이 갑자기 너그러워진다.   붉은 노을이 산정의 푸른 기와 위에 번득인다. 뜰 아래 단풍이 홀로 곱게 곱게 불탄다.   □ 2   낙엽이 가득한 산뜰에 주인이 홀로 거닌다 머릿속의 사념이 푸른 바다 물결처럼 출렁인다   머리 위에 흰구름이 돈다. 산사의 종소리가 운다. (종소리는 가깝고 차게 떨어진다)   주인은 말없이 국화꽃을 들여다본다 국화빛이 유난히 푸르다.   바라춤, 통문관, 1959           낙와의 부 신석초   낙와(落瓦)의 부(賦)   가을 황혼에, 쓸쓸한 폐허를 걸어서 나는 혼자 헤매이도다. ―무한히 열린 창공에 물들어서.   슬픈 국화꽃 태양 아래(나는 천상의 술을 마시고) 꽃잎같이 흩어져 구르는 푸른 파편들을 밟고 가도다.   서녘 바람은 마른 나뭇가지에 깃들이는 작은 새들을 고독히 하고.   어느덧 달은 이슬에 젖어, 내 발밑에 비명하는 깨진 보석을 비추이도다.   오오, 눈앞에 흩어진 낙엽들이여, 영화의 무덤 위에 불가항력의 조각들이여!   멸망하기 쉬운 시간은 물과 같이 흐르고,   어디선 애끊는 적(笛)소리 저 멀리 들려오도다.   석초시집, 을유문화사, 1946           돌팔매 신석초   돌팔매&   바다에 끝없는 물결 위으로 내, 돌팔매질을 하다 허무에 쏘는 화살 셈치고서.   돌알은 잠깐 물연기를 일고 금빛으로 빛나다 그만 자취도 없이 사라지다.   오오 바다여! 내 화살을 어디서 감추어 버렸나.   바다에 끝 없는 물결은, 그냥, 까마득할 뿐…….   석초시집, 을유문화사, 1946           매혹 1 신석초   매혹(魅惑) 1   바람이런가 숨결이런가 내 마음 천길 물 속처럼 잠잠한데 내 안의 구석진 기슭에 훌쩍이는 이 갈대는 무엇인가   노을이런가 달빛이런가 내 안의 먼 여울 속 물살져 쏟아지는 이 보석 조각들은 또 무엇인가   잠 못 이루는 하늘의 호수 속으로 가만히 부르는 소리 한 마리 백조가 날아와 깃드는   꿈결처럼 젖어드는 고운 꽃이파리 애끊는 여울에 구슬의 떨림이 이처럼 사무치는구나.   수유동운(水踰洞韻), 조광출판사, 1974           매혹 2 신석초   매혹(魅惑) 2   내 내부의 저문 늪가에 황금빛 노을은 내리고   잔잔한 노을 속에 꿈결에 다가오는 고운 꽃이파리   잡으면 바스러져 허망한 꿈의 여울로 사라져 없어지리   아아 나는 너의 매력에 이끌려 몸을 떨고 안간힘을 쓰며   너의 잿빛 무덤 위에 쓰러져 나는 죽는다.   수유동운(水踰洞韻), 조광출판사, 1974           멸하지 않는 것 신석초   멸(滅)하지 않는 것   황홀하게도, 은밀하게도 내 가슴에 정열이 타고 남은 적막한 잿무덤 위에, 예지와 수많은 그리메로써 꾸며진 이 회색의 무덤 위에 페닉스! 오오, 너는 되살아서 불과 같은 나래를 펴고 죽은 줄만 여긴 네 부리에 매혹의 힘은 다시 살아나서 나를 물고, 나를 쪼으고 연애보다도 오히려 단 오뇌로 나를 또, 이끌어 가누나.   석초시집, 을유문화사, 1946           무녀의 춤 신석초   무녀(巫女)의 춤   공작 깃 패랭이 제껴 쓰고 무녀야 미칠 듯 너는 춤을 추다   도홍선(桃紅扇) 활짝 피어 붉은 입술 가리고 웃고 돌아지는 보석 같은 그 눈매   쩔레쩔레 흔드는 신(神) 솟은 몸 저도 남도 모르는 귀매(鬼魅)를 부르는데   헐은 옷 떨치어 낙화로 흩날리고 징소리 쟁쟁 바람집에 모이더라.   석초시집, 을유문화사, 1946           밀도를 준다 신석초   밀도(蜜桃)를 준다   익어터지려는 이 밀도(蜜桃) 열매! 오―랜 열망이 와서 어린 상아(嫦娥)의 두렷한 반에 놓아서 네 아담한 웃음에 주거니,   그래도 제 몸 숨김일레 엷은 비단의 잔털로 싸아서 유방의 붉은 은밀한 끝이 애써, 지난날의 근심을 깨우려나.   오오, 아나한 여인이여! 매혹으로써만 감춘 단 이슬로 반쯤, 벌어져서 꽃잎과도 같은 네 입술을 물들게 하여라.   있는 듯, 마는 듯 이 과육(果肉)의 이슬이 사라지는 동안 붉어서 굳은 황금 씨알이 네가 가진 영혼의 밀우를 꿈꾸게 하노나.   석초시집, 을유문화사, 1946           바라춤 신석초   바라춤   환락은 모두 아침 이슬과도 같이 덧없어라. ―싯타르타   언제나 내 더럽히지 않을 티없는 꽃잎으로 살아 여러 했건만 내 가슴의 그윽한 수풀 속에 솟아오르는 구슬픈 샘물을 어이할까나.   청산 깊은 절에 울어 끊인 종소리는 하마 이슷하여이다. 경경히 밝은 달은 빈 절을 덧없이 비추이고 뒤안 이슷한 꽃가지에 잠 못 이루는 두견조차 저리 슬피 우는다. 아아, 어이하리. 내 홀로, 다만 내 홀로 지닐 즐거운 무상한 열반을 나는 꿈꾸었노라. 그러나 나도 모르는 어지러운 티끌이 내 맘의 맑은 거울을 흐레노라.   몸은 설워라. 허물 많은 사바의 몸이여. 현세의 어지러운 번뇌가 장승처럼 내 몸을 물고 오오, 형체, 이 아리따움과 내 보석 수풀 속에 비밀한 뱀이 꿈어리는 형역의 끝없는 갈림길이여. 구름으로 잔잔히 흐르는 시냇물 소리 지는 꽃잎도 띄워 둥둥 떠나려가겄다 부서지는 주옥의 여울이여. 너울너울 흘러서 창해에 미치기 전에야 끊일 줄이 있으리. 저절로 흘러가는 널조차 부러워라.   접동새, 우는 접동새야. 네 우지 말아라. 무슨 원한이 그다지 골수에 사무치길래 밤중만 빈 달에 피나게 울어 남의 애를 끊느니.   이화(梨花) 흰 달 아래 밤도 이미 삼경인 제 승방에 홀로 누워 잠을 이루지 못하나니 시름도 병인 양하여 내 못 잊어 하노라.   아아, 속세의 어지러운 진루(塵累)여. 허울 좋은 체념이여 팔계(八戒) 게송이 모두 다 허사런가 숙명이 낳은 매혹의 과실이여. 묻혀진 백옥의 살결 속에 묻혀진 백옥의 살결 속에 내 꿈꾸는 혼의 슬픈 심연이 있어라. 다디 단 꽃잎의 이슬 걷잡을 수 없이 흐르는 애끓는 여울이여 길어도 길어도 끊이지 않는 가슴 속의 샘물이여.   눈물이 꿰어진 진주 다래라면 눔비니 밝은 구슬성도 이루지 안 했으랴. 눈물이 꿰어진 진주 다래라면 수미 높은 뫼도 아니 이뤘으랴. 눈물이 흘러 이내 흔적이 없으니 내 그를 애달퍼하노라.   아아, 헛되어라 울음은 연약한 속임이여. 수유에 빛나는 거짓의 보석이여. 내가 호숫가에 쓸쓸히 설레는 갈대런가 덧없는 바람 달에 속절없이 이끌리는 값싼 시름의 찌꺼기여.   적멸이 이리도 애닯고나. 부질없는 일체관념(一切觀念)이여. 영생의 깊은 수기(授記)가 하마 허무하여이다. 관념은 모두 멸하기 쉽고 잠든 숲속에 세월이 흐르노라. 어지러운 윤회의 눈부신 여울 위에 변하여 가는 구름 연기 시간이 남긴 사원 속에 낡은 다비만 어리나니 세월이 하 그리 바쁜 줄은 모르되 멎는 줄을 몰라라.   덧없이 여는 매살한 손이여. 창 밖에 피인 복사꽃도 바람 없이 지느니 하물며 풍상을 여는 사람의 몸이야 시름한들 어이리 오오, 변하기 쉬운 꽃여울이여. 내 아리따운 계곡에 흐느껴 우는 소리 내 몸 잔잔한 흐름 위에 홀연히 여는 전이(轉移)의 물결 위에 내 끝내 지는 꽃잎으로 허무히 흘러 여는다.   다만 참된 건 고뇌하는 현유(現有)의 육신뿐인가. 순간에 있는 너 삶의 빛깔로 벅차 흐르는 내 몸뚱어리   순수한 욕구로 불타오르는 꽃송아리 황홀히 타는 구슬의 꽃술 속에 망령된 시름하는 나비들은 금빛으로 날아 빗발처럼 쏟아지느니   깊은 산 유리 속에 홀로 선 내 모습이 하마 청산의 허재비 같으니다.   장근 동산이 날 에워 한 조각 여는 구름모양 저 영을 넘지 못하는다 내 안에 내 안 내 누리 안에 무닐 수 없는 장벽이 있도소이다. 아아 애절한 구속의 모래문이여.   넓은 천지간에 속세를 등져 깊이 숙여 쓴 고깔 밑에 고이 접은 네 아미 죄스럼과 부끄러움을 가려 그늘진 푸르른 정의(淨衣) 남몰래 앓는 백합을 어리는 빈 산 칡 달은 하마 휘엿하여이다. 야삼경 호젓한 다락에 들리느니 물소리만 요란한데 사람은 없고 홀로 타는 촛불 옆에 풀어지는 깃 장삼에 장한이 너울져 춤추는 부나비처럼 끝도 없는 단꿈을 나는 좇니노이다.   아아, 고독은 죄스러운 사념의 뱀을 낳는가 내 맘 그윽히 떠오르는 마아야 남몰래 떠오르는 꿈결 같은 마아야의 손길. ………….   천만 겹 두른 산에 어리고 서린 두렁칡이 밋밋한 오리나무를 친친 감아 얽으러져 제멋대로 살어 연다. 사람도 저처럼 어러져, 멋대로 살어 열까 바람도 그리움도 천만 없소이다. 나는…… 절로 피인 꽃이니다. 만개한 꽃의 매력으로 부풀어오른 몸뚱어리 오오, 순수한 장미의 덩어리여. 바람으로 솟은 둥실한 도리(桃李)의 메여   팔상(八相)에 이끌리는 무릇 재앙의 씨여 오오, 끊기 어려운 삼계(三界)의 질긴 연(緣)이여 내가 오히려 사갈나의 꿈숲을 얼 없이 헤매느니 광풍에 지부친 뱃사공처럼 물 아래 세 가닥 모래 깊은 웅뎅이를 보지 못하는다.   `보리살타' 오오, `보리살타' 나무 여래보살 나무 관세음보살 나무 지장보살   중생을 건지신 높은 덕에 청정한 크신 법에 내 몸을 바침이 내 평생의 원이니다.   시방 너른 하늘 아래 시방 너른 하늘 아래 내 몸이 한낱 피여지는 꽃이니다. 첩첩한 구름산에 남몰래 살어지이다. 살어지이다. 그러나 오오 그러나 사바를 꿈꾸는 나여. 마(魔)에 이끌리는 나여. 오오, `마라' 네, `마라' 오뇌의 이리여. 바람 속에 달리는 들짐승이여   네가 만약 장송에 깃들인 학 두루미라면 구름 잠긴 영(嶺)에 흰 날이 흐르는 제 구천 높이 솟아 훨훨 날아도 여지 않았으랴 내가 적막한 기와 우리 속에 차디찬 금빛 소상 앞에 엎더져 몸부림하는 시름의 포로가 되어 감은 치의(緇衣) 속에 솟아오르는 오뇌의 불길이 꽃바리에 타는 향연 같도소이다.   오경 밤 기운 절에 헤매는 바람결에 그윽히 우는 풍경 소리 상방 닫힌 들창에 꽃가지 흔들려 춤을 추고 창 밖 구름 뜰에 학도 졸아 밤이 더욱 깊으메라. 쓸쓸한 빈 방안에 홀로 일어 앉아 남몰래 가사 장삼을 벗도소이다. 벗어서 버린 가사 장삼이 방바닥에 흐트러져 푸른 못 속에 뜬 연꽃 같으니다.   누우면 잠이 오며 앉으면 이 시름이 사라지랴 이제 누운들 어느 잠이 하마 오리 어지런 시름 숲에 누워 앉아 홀로 밤을 새우나니 서역 먼 길은 꿈 속에도 차노메라. 겁겁(劫劫)에 싸인 골은 안개조차 어두메라. 극락이 어디메뇨 가는 길도 모르메라.   오오, 스님. 바라문(門)의 높으신 몸이여. 금석같이 밝으신 맘이여. 하해같이 넓으신 품이여. 백합같이 유하신 팔이여. 날 어려지이다 어려지이다 이 밤 어려 자는 목숨이 하마 절실하여이다 가뭇없는 속세의 티끌로 나는 가느이다 `사바세계' `일체고액'을 넋에 지고 여느이다. 스님 오오, 모진 이 창생을 안아지이다.   가사 어러메어 가사를 어러메어 바라를 치며 춤을 출까나 가사 어러메어 가사를 어러메어 헐은 가슴에 축 늘어진 장삼에 공천풍월(空泉風月)을 안아 누워 괴론 이 밤을 고이 새우고저 괴론 이 밤을 고이 새우고저 지루한 한평생을 짧게 살어여지이다. 수유에 지는 꿈이 소중하여이다. 다디 단 잊음이 영역으로 이끌어 가는 육신의 발원이여 게으름에 길길이 풀어지는 보석 다래여 천길 구름샘에 폭포가 쏟아져 내리노이다.   아아, 나는 미쳤는가 나는 짐승이 되었는가 마라의 짐승이 되었는가. 속세에 내린 탐란한 암사슴이 되었는가. 제가 제 몸을 얽는 관능의 오랏줄이여. 아스리 나는 미쳤어라. 유혹을 버리리라. 나는 거룩한 얼을 잃었어라. 형산(荊山) 묻힌 백옥같이 청정한 예지의 과일을 나는 잃었어라.   환락은 아침 이슬과도 같이 덧없느니, 오오, 미친 상념이여, 허망한 감각이여. 물결이 왔다 철렁 달아난 빈 모래펄이여. 흐트러진 젖가슴에 회한의 바람이 휘돌아 불어 내 안이 텅 빈 동굴 같으니다. 꽃 지는 산 다락에 울어예는 귀촉도 영정한 저 소리만 어지러운 물소리에 적녁히 굴러 잠자지 못하는 사람의 깊은 속을 울리노라.   열치매 부엿한 둥근 달이 꽃구름에 어려 둥실 날은 추녀 위에 나직히도 걸렸어라 깊고 높고 푸른 산이 날 에워 네 골은 비어 죽은 듯 고요하여이다. 접동새. 우는 저 두견아. 어느 구름 속에 네가 울어 짧은 밤을 새우는다. 두견아. 네가 어이 남의 애를 끊느니. 쿵쿵 흐르는 물소리도 네 울음에 겨워 목이 메이노라.   물가에 내려 이슷한 수풀 속에 내 벗은 꽃 같은 몸을 씻노이다. 공산 잠긴 칡 달이 물 위에 떠 금빛으로 흐르메라 휘미진 여울에 빠져 흔들리는 내 고운 모습 여울에 잠근 하얀 진주 다래여. 물거울에 흐트러졌다 다시 형체를 짓는 보석의 더미여. 네가 물같이 흐르지 못하여 빠진 달처럼 구름 샘에 머무느니.   모양에 갇힌 포말의 뫼여. 내가 이 맑은 경(境)에 와 죄업의 티끌을 씻노라 적막은 푸른 너울처럼 감돌고 부풋한 아리따운 형태의 반영에 고혹하는 비밀의 힘은 살아나노나. 아아, 몸과 영혼은 영원히 배반하는 모순의 짝이런가 씻어도 씻어도 흐려지는 관념 형태여.   물아. 흐르는 물아. 철철 흐르는 물아. 풀어진 네 몸은 행복도 하여라 응고되지 않는 네 형체 번뇌도 시름도 없으리. 천 가닥 흩어지는 구슬 골짜기 네가 풀어져 흘러 산 밖으로 여는다 언제나 새로운 근원 흐려지지 않는 순수한 샘이여.   뎅!…… 새벽 종이 우노라 밤이 이내 지새련다 뎅! 뎅! 종이 우노라 종소리 굴러 물소리에 흔드노메라 소쇄한 유리 속에 넌즛 선 나 고독한 나여. 여명은 참으로 모든 형체를 드러내고 물체와 영상을 나뉘노라 보랏빛 수풀 위에 흐려지는 달 그리메 창천이 부엿이 밝아 낙락한 푸른 봉우리가 이곳 가까이 다가서노나.   청산아 네 거룩도 하여라. 구름에 솟은 바위도 자라나는 나무도 어둠에서 되살아나 불멸의 빛을 던지노라. 네가 날 위해 날 위해 언제나 있어 주렴 그러나 부세(浮世)를 그리는 나 내 몸에 소용돌이치는 숙명의 부르짖음이여. 아아(峨峨)히 솟은 푸른 봉에 밝아 오는 숲 바다 밀밀한 나무가 금빛 나우리를 흔들고 지금 아침 태양은 장미꽃으로 벌어지노라. 가지 끝에 자던 새들 잠 깨어 생생히 우지진다.   둥, 둥, 북이 우노라. 두리둥둥, 아침 법고가 우노라. 천수 다라니 염불 소리 가사 장삼에 염주를 목에 걸고 아침 재를 올리느이다 아아. 우상에 절하는 어리석은 무리 서글픈 위선자여. 거지의 청신녀(淸信女)여. 꿈도 시름도 비명으로 사라지리 시간은 혼미에서 깨어나느니 아침 빛깔이 화려하게 불타 자잘한 삶의 소리 일어나노라.   북 소리 염불 소리 염불 소리 물 소리 물 소리 바라 소리 바라 소리 물 소리 물 소리 흘러 종소리도 흔드노메라.   일만봉 구름 속에 울어예는 산울림 미풍은 참으로 내 젖가슴을 틔우고 첩첩한 산허리에 장미의 숲을 건느노라. 네, 늘어진 장삼에 소매를 떨쳐 그윽한 저 절을 내린다 무위한 슬픈 계곡을 나는 내린다…….   * 이 시편은 1968년 11월 우리나라 신시 60년을 축하하는 `시인 만세' 잔치에서 임성남 씨가 안무한 춤과 함께 낭송되었다.   석초시집, 을유문화사, 1946           바람 부는 숲 신석초   바람 부는 숲   바람이 내 뒤안 수풀을 흔들고 그윽한 심연의 유리가 바다 물결처럼 울어 온다.   몸뚱이는 차다. 아아 거친 이 설레임에 나는 내 안에 흔들리는 갈대를 보노라.   눈 쌓인 산 찌어질 듯한 하늘 아래 떨어지는 깊은 절 종소리 오오, 지새는 창살이여.   내가 질서도 없는 이 부산한 수풀에 누워 내일의 미지의 길목을 헤이노니   바람도 떠 가는 달도 흐르는 별도 해어진 옷도 다만 지나는 시간을 말할 뿐.   오오. 불어 제쳐라. 바람. 내 몸에 걸친 남루가 홀짝 벗겨질 때까지.   바라춤, 통문관, 1959           백운대 신석초   백운대(白雲臺)&   지난 가을날 단풍잎 지던 자리에 쌓이던 고운 것들은 다 갔어라.   화사한 꽃무덤에 모이던 눈 흘림들은 다 갔어라.   이제는 돌아와 서릿발 선 가지 서풍을 향해 눈산을 대해 앉았으니 백발삼천장(白髮三千丈)이 헛말이 아니어라.   폭풍의 노래, 문예사, 1970           뱀 신석초   뱀&   뱀은 빛나는 황금의 너울을 쓰고 미풍에 나부끼는 꽃밭으로 흐느적거리다   뱀은 비늘의 은밀한 간살마다 구름장 떠도는 근심스러운 피 빛깔을 흘레다   오오 붉은 양귀비꽃 옆에 마성(魔性)의 한 덩어리여 네 누운 매무새 느므림은 곁할 수가 없어라   애매한 가지 침의(寢衣)로 두른 질탕한 허리 푸른 띠 흐르는 요염한 꾀 많은 꿈트리   미궁으로 얽는 꿈의 또아리 속에서 넋은 불타는 위태한 탄력을 싸다   몸은 구슬픈 구렁이의 타―ㄹ 거짓하는 그물의 심연으로 꿈은 꺼지려든   몸은 슬픈데 넋은 어지러이 빛난 넌출을 감아서 지혜 놀음하는 저자로 헤매다.   뱀은 꿈어리는 수수께끼의 넌출 저자에 서린 불꽃 혀 둘러 총명한 `아이들'을 꼬이다   꼬여라, 그늘의 사자(使者). 붉은 꽃술 속에서 신은 와서 취하고 신 없는 하늘로 비틀거리다   누리 없는 꿈 둘레 없는 누림 신은 네 하늘에 오색 영롱한 무지개를 그리다.   빛과 그리메와 매혹의 영구한 모이로 뱀은 서린 자리에 슬픈 전설을 남기면서―   석초시집, 을유문화사, 1946           불국사탑 1 신석초   불국사탑(佛國寺塔) 1   불국사 깊은 뜰에 사람은 없고 탑만 홀로 서 있노라.   구슬같이 꽃같이 씻은 거울과도 같이   불국사 너븐 뜰에 사람은 가고 탑만 절로 빛나노라   눈부신 고운 형태 한 점 속된 티끌도 쓸었에라   돌을 깎아서 보물로 만드는 사람의 조화를 신(神)도 아지 못하리라   저 임아 천고 원한을 말치 말아. 사람은 가도 탑은 남아 영구히 빛나노라.   바라춤, 통문관, 1959           불춤 신석초   불춤   동트는 숲 속에서 보랏빛 우라노스*의 고요 속에서 페닉스*는 불타는 보석의 나래를 펴고 날아오른다. 하늘로 솟아오른다. 한 잎의 불꽃으로. 찬란하게 벗은 몸뚱어리가 황금가지로 늘어지고 눈부신 백합꽃 수낭이로 뻗어 꽃으로 되어 화살로 되어 봉화로 되어 타오른다. 삼십삼천*의 울려퍼지는 종소리 삼십삼천 욕계 구만리로 웅웅거리는 종소리 성처녀의 신비로운 두 팔이 붉은 명정을 휘날리고 욕망의 갈기를 발기발기 찢으며 바람 속 꽃잎으로 부서져 여울에 져서 무수한 꽃잎이 흘러가듯 머나먼 물굽이로 흘러 하늘 밖에 나래 치고 샛바람 속에 나래가 무리지고 꽃무등 서고 도약한다. 한 떨기 어여쁜 장미꽃 송아리로 받쳐 이어 솟아오른다. 솟아오른다. 불구슬로 불꽃으로 오, 불멸하는 것, 눈부신 살 광명의 구두사(九頭蛇)여. 번쩍이는 성(性)의 오, 번개, 프로메테우스의 누나여. 너의 번개로 내 내부의 우주는 술렁이고 너의 놀라운 날음으로 내 나비의 혼은 되살아난다. 창조의 희망이 네 부리에서 시끄럽게 짖어대고 생각하는 이파리는 모두 날개를 펴 꽃 핀 하늘로 올라가는구나. 너는 빛나는 선회를 하며 황금빛 네 손가락이 꿈꾸는 기슭에까지 나의 숨결을 이끌어간다. 작열하라. 타라. 불타올라라. 헤스티어*의 긴 머리채 휘황한 비단실 타래가 뭉게뭉게 뭉게구름으로 뒤틀어 내리다가 다시 아슬한 꽃봉오리로 솟아오른다. 하늘은 타 버리는 혼 속에서 전신을 다해 창백한 빛깔을 외치는구나. 나는 너의 금강석의 회오리바람 속에서 미래의 연기를 마시려 한다. 불타라. 타라. 타라.   * 우라노스: 광대한 우주 공간. ** 페닉스: 이집트 신화에 나오는 신비로운 새로서 아라비아사막 중에 서식하는데 500년 또는 1,500년 만에 신단 위에 날아와 스스로 불에 타 죽고 다시 그 재 속에서 새끼 새가 되어 재생한다 함. 불사조. ** 삼십삼천: 불교의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의 삼십삼천(三十三天). ** 헤스티어: 화로(火爐)의 신.   폭풍의 노래, 문예사, 1970           비취단장 신석초   비취단장(翡翠斷章)   너 자신을 알라.―소크라테스   슬프다, 바람 숲에 구르는 옛날의 옥석(玉石)이여 비취, 보석인 너 노리개인 너여 아마도 내 영원히 잊지 않을 너만의 자랑스러운 영화를 꿈꾸었으련만 뜬 세상에 어지러운 오뇌를 안고 거칠은 쑥대 구렁을 내가 헤매느니 적막한 깊은 뜰을 비추이는 푸른 달빛조차 어이 흐려 있는다.   푸른 기왓장 흐트러진 내 옛 뜰에 무정한 꽃만 피어 지고 쓸쓸한 파멸 속에 너는 굴러서 창백한 때의 안개 속으로 사라지는 볕살을 헤인다.   아아, 이슷한 오경 밤에 그므레 타는 촛불 옆에 홀로 누워 잠 못 이루는 여인의 희고 나릿한 백설 같은 목덜미 숱한 머리쪽은 풀어져 물결치는 베개 위에 찬 달 그리메 애달픈 꽃잎을 그려라.   비취. 오오, 비취. 빛나는 옥석(玉石)이여 내 전신(轉身)의 절 안에 산란한 시간의 발자취 다비의 낡은 흔적이 어릴 제 너는 매혹하는 꽃 같은 손길에 이끌리어 그지없는 애무 속에도 오히려 불멸하는 빛을 던진다.   나는 꿈꾸는 몸뚱이를 안고 소슬한 대숲 바람결에 솟아오르는 허무한 욕구를 사르면서 혼자서 헐린 뜰을 내리려 한다 저곳엔 시들어지는 고운 난꽃 한 떨기 또, 저곳엔 깨끗한 댓돌 위에 꿈결같이 떠오르는 영원한 처녀의 자태……   어쩔까나 나의 난심을 내 어지러운 갈레는 마음을 비취. 내가 옛 동산을 가고 또 오는 내 몸 고달픈 시름의 넌출을 인간의 얼크러진 갈림길로 알고서 고독한 푸른 옥에 몸을 떨며 슬픈 리라의 가락을 탈까나   비취. 오오, 비취. 티없는 네 본래의 빛깔이야 부러워라 저, 심산 푸른 시냇가에 흩어지는 부엿한 안개 떠돌아서 창천은 흐득이는 여명의 거울을 거누나 아아, 오뇌를 알은 나 영겁을 찾는 나 비밀한 유리 속에 떠서 흔들리는 나여. 너를 불러라. 빛과 흠절의 수풀 위에 찬 보석이여. 나여. 정신이여 멸하지 않는 네 밝음의 깊은 근원을 찾아라…….   석초시집, 을유문화사, 1946           삼각산 밑에서 신석초   삼각산(三角山) 밑에서   이 산 밑에 와 있네. 내, 흰 구름송이나 보며 이곳에 있네.   꽃이나 술이나에 묻히어 살던 도연명(陶淵明)이 아니어라.   어느 땅엔들 가난이야 없으랴만 마음의 가난은 더욱 고달파라.   눈 깨면 환히 열리는 산 눈 어리는 삼각산 기슭 너의 자락에 내 그리움과 아쉬움을 담으리.   소스라쳐 깬 하늘 같은 것 출렁이는 바다 물결 같은 것 깊고 또 높은 것이여.   이 산밑에 와 있네. 내, 흰 구름송이나 보며 이곳에 있네.   폭풍의 노래, 문예사, 1970           상아의 홀 신석초   상아의 홀(笏)   이 홍옥의 잔등이 어쩌면 상아의 홀이러라. 매혹하는 대리석 한 조각 너의 벗은 등허리로 환한 반달이 떠오른다.   처용은 말한다, 조광출판사, 1974           서사 신석초   서사(序詞)   묻히리란다. 청산에 묻히리란다. 청산이야 변할 리 없어라. 내 몸 언제나 꺾이지 않을 무구한 꽃이언만 깊은 절 속에 덧없이 시들어지느니 생각하면 갈가리 찢어지는 내 맘 설워 어찌하리라.   묻히리란다. 청산에 묻히리란다. 나는 혼자이로라. 찔레에 얽어진 숲 사이로 표범이 불러 에우고 재올리 바라 소리 빈 산을 울려 쩡쩡 우는 산울림과 밤이면 달 피해 우는 두견이 없으면 나는 혼자이로다.   숨으리, 잠긴 뜰 안에 숨으리란다. 숨어서 보살(菩薩)이 아니 스ㅣ이련만 공산나월(空山蘿月)은 알았으리라. 괼 데도 필 데도 없이 나는 우노니라. 혼자서 우노니라. 아아, 적막한 누리 속에 내 홀로 여는 맘을 어찌하리라.   낮이란 구름산에 자고 일어 우니노라. 밤이란 깊고 깊은 지대방에 잠 못 이뤄 하노라. 감으면 꿈결같이 떠오르는 마아야*의 그리메 가슴 속에 솟아오르는 오뇌의 불길이 꽃바리에 타는 향연(香烟) 같도소이다.   아아, 오경 밤 깊은 절은 하마 이슷하여이다. 달 밝은 구름 창에 이운 복사꽃이 소리 없이 지느니 사람도 늙어서 저처럼 이우는가 꿈 같은 사바(娑婆) 세월이 덧도 없으니이다.   천만 겹 두른 산에 들리나니 물소리 어지러운 시름의 여울 속에 보살도 와서 어릴 거꾸러진 유혹의 진주를 남하 보리라 푸여오른 꽃잎의 심연 속에 다디 단 이슬이 듣도소이다.   시름도 성체도 부질없는 우상이니다. 팔계(八戒) 쇠성이 모두 다 성이 가시니다. 시왕전(十王展)에 드린 원은 봄눈처럼 사라지니이다. 가사 어러 메어, 가사 어러 메어 바라를 치며 춤을 출까나.   가사 어러 메어 가사 어러 메어 헐은 가슴에 축 늘어진 장삼에 공천풍월(空泉風月)을 안고 뉘어 괴론 이 밤을 고이 새우고저. 괴론 이 밤을 고이 새우고저.   몸아. 맨몸아. 푸른 내 몸아. 마(魔)의 수풀을 가노라. 단꿈은 끝없이 즐김을 좇아 꽃잎 저 흐르는 여울을 가노라 바다로 여는 강물을 뉘라 그지리오. 어느 뉘라 그지리오.   불타는 바다 위에, 불타는 바다 위에, 난 던져진 쪽달일레라. 사갈나* 너른 들에 버려진 꽃가질레라. 이슷한 사라의 장삼 속에 꿈어리는 몸이 부엿한 물 같으니다. 아스리 나는 미쳤에라. 나는 짐승이 되었에라. 마라*의 짐승이 되었에라. 내 혼과 몸의 씨앗을 쪼갤 빛날 장검을 나는 잃었는가. 숙명의 우리 안에 날 지닐 오롯한 자랑을 나는 잃었는가.   묻히리란다. 청산에 묻히리란다. 청산이야 변할 리 없어라. 나는 절로 질 꽃이어라. 지새워 듣는 법고 소리 이제야 난 굳세게 살리라. 날 이끄을 흰 백합의 손도 바람도 아무것도 내 몸을 꺾을 리 없어라.   * 마아야: 범어로 환영(幻影)을 말함. ** 사갈나: 범어로 인생고해(人生苦海)를 말함. ** 마라: 범어로 마왕을 이름(마라는 그의 딸을 시켜 춤을 추게 하여 싯타르타를 유혹하려 하였다).   바라춤, 통문관, 1959           선녀 비천 신석초   선녀(仙女) 비천(飛天)   그대는 천상으로 날아가며 구름 속에 하늘한 꽃이파리 누가 그대를 하늘의 나비로 그려 적(笛) 불며 깊은 푸름 속으로 날아가게 하였던가 먼 우리 조상들 아득한 고려인들의 신비로운 솜씨가 이곳에 있다 주황색 옷자락을 펄렁거리며 선연히 검은 눈썹이여 금세 피어난 한련화 선녀 애무당 꽃 같은 님의 얼굴이여.   수유동운(水踰洞韻), 조광출판사, 1974           시름하는 꽃가지 신석초   시름하는 꽃가지   으스름 달밤에 시름하는 꽃가지 네 마라의 아리따운 여인이여. 너는 바람부는 갈대의 어지러운 저잣거리에서 보석의 기이한 연단(煉丹)을 만들도다.   네 몸은 빈 들에 핀 홍도화 가지 같도다. 네 머리는 은횃대에 앉은 공작새 같고 네 얼굴은 반쯤 벌어진 연꽃봉오리 같도다. 그러나 남그윽한 진주의 동산에 장난하는 뱀이 숨어 있도다.   오오, 어여쁜 짐승이여. 너는 표피(豹皮)를 깔은 밤바다에다 다디 단 술을 퍼붓고 홍옥을 물린 고운 입술은 남 호리는 웃음이 사뭇 터져나오도다.   그러나 너는 도망하기를 좋아하노라 굴레 벗은 망아지처럼…… 잡기 어려운 가시덤불로 이슷한 찔레꽃 숲 속으로   아아, 풍설이 싸움처럼 설레는 밤 호수에, 단장하는 쪽배를 띄고 원앙이 날은 비단 자리에서 너는 먼 시름의 뫼를 파도다.   으스름 달밤에 시름하는 꽃가지 배반하기 쉬운 하늘의 숨결을 교역하는 어지러운 저잣거리에서 너는 수많은 금강석을 울리며 슬픈 갈대의 피리를 불도다.   바라춤, 통문관, 1959           신라고도부 신석초   신라고도부(新羅古都賦)   □ 1   멀리 달려온 구름 벌판 밭틀에 구르는 낡은 기왓장 십팔만 호 옛 서울은 가뭇없는 꿈일레라.   소슬한 가을 바람 호젓한 길가에 묻힌 신라 왕궁의 화초와 삼한(三韓) 의관들.   저녁 안개 서린 아리나리강 찬 마을에 먼 개 짖는 소리 들리고   무덱무덱 섬처럼 떠오는 고대 왕릉에 소리개 날아 떠돌아 우니노라…….   □ 2   서라벌 옛 도읍 가을 으스름 푸른 연기 자욱한 미추왕릉에 솔바람 차다.   멀리 돌아가는 동해 구름 구름엔 어린 삼천리 신라 천년 꽃구름도 꿈에 들어 스미노라.   적막한 요석궁반에 지나는 나그네 푸른 옷깃에 낙엽이 지노라.   아아, 인사(人事)는 변하여 그지없어라. 벽해 상전이 되어 옛것이 가고 오지 않으니…….   바라춤, 통문관, 1959           심추 신석초   심추(深秋)   손 대면 꽃물 들 듯한 나뭇잎들.   연 사과 같은 태양의 눈부시게 쏟아지는 금가루 천산(千山)에 가을은 짙어 가고.   폭풍의 노래, 문예사, 1970           어느 날의 꿈 신석초   어느 날의 꿈   그대가 내 옛 마을에 오고 내가 큼직한 용마름이 보이는 내 옛 집으로 그대를 맞아들였네   집안은 온통 잔칫날처럼 사람은 백결 치듯하고 넓은 뜰에는 꽃이 환히 피어 있었네   이른 아침나절에 그대가 잠든 당(堂)앞 호숫가에서 내가 작은 마상이를 씻고 있었네.   그대를 깨워 일으키려는 내 막내놈을 제지하고 그대로 하여금 늦잠을 자게 하였네.   그대가 잠든 당(堂)앞 호숫가에서 밑바닥이 환히 들여다보이는 맑은 호수 물에서   내 손이 뒤척이는 작은 거룻배에 깨끗한 모래알이 담겼다가 살레살레 씻겨 나갔네.   수유동운(水踰洞韻), 조광출판사, 1974           여명 신석초   여명(黎明)   밤은 지새노라. 긴 한 밤 차운 어둠으로 밤은 가노라. 장미인 양 피어지는 나의 옷자락이 잠든 희미한 네 영혼을 안고 내 손은 아리따운 백합으로 어리어 오만한 네 이마를 어루만진다 오오, 광명의 아들 프로메테우스여. 잠을 깰 때가 왔노라 일어나렴아 어지러운 슬픈 모이와 무료(無聊)와 한 많은 구속의 자리에서 프로메테우스 네 몸을 일으켜 저어 드높은 산맥을 내리라.   너는 네 육체로 돌아왔노라. 너는 자유를 얻었노라. 비약하지 않으면 안 되리. 빠른 동작과 불타는 의식으로 네 무상(無上)한 영역을 잡아라.   프로메테우스여. 네 팔과 다리를 내밀라. 크고 보드러운 수목과 소생하는 아침의 황량한 안개 낀 광야로 너의 영광과 너의 꿈꾼 비밀하고도 새로운 가지가지 이상 건축을 세우기 위하여.   어느덧 밝음을 고하는 나팔 소리 날카롭게 빈 창공을 건네노라 잿빛 구름 떠도는 골짜기에 희학(戱謔)하는 천사의 무리들 저마다 나래를 펴고 지저귀는 새들 어지럽게도 그를 시새노라 이럴 때 무리로 벌어지는 나의 꽃잎이 내오(內奧)한 벗은 우주를 낳는다.   우주는 나의 산산한 주옥 속에 숨김 없이 형체를 드러내고 기세를 찾은 모든 생물의 무리들의 떠들며 움직이는 발소리 수많은 금강석이 쏟아지는 소리 속에 그 속에 갖은 관념의 물결은 치노라.   아아. 바람이 불려는도다. 프로메테우스여. 달리어가거라. 저어 수풀 저어 부산한 물결 속으로 저어 섬과 섬 어지러운 저자 황금빛 표피(豹皮)가 드날리는 속으로 그래 널 그 속에 숨이게 하여라.   `프로메테우스'― 나는 일어나노라. 멸망으로부터 오랜 오뇌로부터 나는 되살아났노라 나는 부신 눈으로 세계를 보노라 아아. 무슨 숙명의 장난에 나는 이끌렸던가? 나는 내 몸에 얽힌 사슬을 풀고 내 사지를 길게 뻗어 보노라 난 이제야 나로 돌아왔노라   난 본디 불이로라 오오, 황취(荒鷲)여 나는 모든 것을 태우려 하노라 모든 것을 불사르려 하노라. 눈물과 영탄을 버리리 하잘것없는 이 관념 형태를 두들겨 부숴라 나는 자유로운 몸으로 지새는 나의 영토를 내리려 한다.   바라춤, 통문관, 1959           연꽃 신석초   연(蓮)꽃   내가 옛 동산을 거니다니 깊은 못 속에, 푸른 이끼 끼어 어리고 붉은 연꽃은 피어나서 아나한 송아리를 들었에라.   붉게 피어난 연꽃이여! 네가 꿈꾸는 네안[涅槃]이 어디런가 저리도 밝고 빛난 꽃섬들이 욕망하는 입술과도 같이, 모두 진주의 포말로 젖어 있지 않은가   또 깊은 거울엔, 고요가 깃들고 고요에 잠든 엽주(葉舟)는 저마다 홍보석을 실어서, 옛날 왕녀가 버린 황금 첩지를 생각케 하누나.   오오, 내 뉘야 오렴아! 우리 님프가 숨은 이 뜰을 나려 연잎 위에, 오래고 향그러운 아침 이슬을 길으리…….   석초시집, 을유문화사, 1946           유파리노스 송가 신석초   유파리노스 송가(頌歌)   들어라, 바다 한녘에 울려 퍼지는 이 유파리노스*의 노래를 불꽃 튀기며 대리석 부서지는 소리 화사한 꽃밭 일구는 쇠갈퀴의 고함 소리 기둥은 밋밋한 백합꽃 대궁으로 일어선다.   눈부신 빛깔의 쌓임으로 층층이 솟아오르는 고층건물 놀라운 힘이 기하학으로 새 바벨탑을 세워 올린다 저곳엔 삼대처럼 공장이 늘어서고 또 저곳엔 꽃처럼 구름처럼 누대(樓臺)가 솟아오른다 오오 유파리노스의 머리 좋은 솜씨, 하늘을 깁는 손이어 유파리노스여 너의 손길에서 눈부신 칠보(七寶)의 숲은 떠오르고 너의 머리에서 반짝이는 뭇 별자리가 돋아난다. 네 가슴팍은 메트로폴리스의 찬란한 원천이다   네 도시는 장미꽃 천엽 속 같구나 비단 그물과 금고리가 서로 꼬리를 물고 물구나무 서는 뱀의 황금팔찌를 받들어 올린다 묵은 성 둘레로 너는 하늘 닫는 금발 화관을 둘러 씌우고 유리의 산 해무리 지는 골짜기로 무지개 선 안개문으로 석류 항아리의 진주 조개의 은빛 벌통들이 포개져 올라간다   하늘은 온통 뒤덮인 바다 금속 돛배가 구름 늪을 누비며 바다는 아틀라스의 이마와 발끝을 둘러 뭍마다 쏜살 같은 가르마를 뻗어 놓는구나 구름녘과 보석의 섬으로 술 취한 디오니소스의 상선들이 떠 흔들리노라.   아테네에서 로마에서 칼타고에서 무화과와 올리브의 향내 떠도는 이오니아의 섬에서 블론디의 벗은 살갗으로 물드는 플로리다의 해안에서 또는 거대한 유방이 솟아오르는 해지는 대륙에서 해뜨는 동양의 뭇 항구에서 물결은 쳐 밀려온다. 바다는 밝고 세계는 하나다 일어서라, 콤파스 유파리노스의 다락이어 너의 무게는 휘청거리는 메뚜기의 긴 다리로 떠받쳐진다   프로메테우스 너는 보는가 아슬한 이 기적의 매스[堆積]를 겹겹이 쌓아 오르는 바다 비늘 빛나는 이 노적을 인간의 호사스러운 손장난을 너는 보는가.   `프로메테우스' 나는 가지가지 망령들과 싸워야 한다 변덕스러운 파충류의 음탕한 활과 저 보석을 물린 섬과 무성한 금속성 갈잎들과 나의 섬을 물어뜯는 물결과 회오리바람과 나는 싸워야 한다 음산하고 안이한 것들은 모두 가라 너의 완성을 위하여 너의 영광을 위하여 나는 순수한 것 위에 너를 놓는다 나는 영혼으로부터 나타난다 오오 지고한 예술가 유파리노스여   너는 나의 혼의 불꽃에서 시작한다 바람 부는 도끼, 바퀴를 깎는 대목*이어 너의 제일 빛나는 연장은 너를 아는 일이다 네 자신을 돌아보라 너의 천재 너의 반짝이는 섬광 너의 기묘한 앵무 언어는 소멸하기 쉬운 물거품이다 나는 너의 안개를 거부한다 그러나 유파리노스여, 네가 파괴하고 또 건설하는 동안 찬란한 이 순간을 찬양하라   너의 창조 새로운 변화를 이 다채로운 꽃의 형성을 구가하라.   * 유파리노스: 그리스의 무명 건축가. 발레리의 『유파리노스』 대화편이 있음. ** 바퀴를 깎는 대목: 『장자(莊子)』에 나옴.   현대문학, 1969. 1           이상곡 신석초   이상곡(履霜曲)   온 산 붉은 나뭇잎 세월도 늙어 찬란한 익음으로 물들어 꽃 같은 노을이 내리는 나뭇잎.   나뭇잎 이리도 찬란한 골짜기에 서릿바람은 불어 와서 쓸쓸한 석양 물 기슭에 갈꽃 허연 물 은실머리를 흔드누나.   어디서 자지러지게도 고운 것이 찾아와서 날 나뭇잎 지는 오솔길로 이끌어냄이어. 흰 달빛 아래 서릿발 서걱이며 밟고 지내감이어.   세월이 늙는 조용한 이 산속에 내 한 가닥 구름으로나 한 잎 나뭇잎으로나 있으려 했더니만   어디서 남몰래 서릿바람은 불어 와서 내 가슴을 뒤설레고 가는 것이어. 뒤설레고 가는 것이어.   폭풍의 노래, 문예사, 1970           적 신석초   적(笛)   슬프다, 찬 달이여. 연기 낀 서라벌의 옛 하늘로 헛되이 네 먼 꿈을 보내는가.   아스라한 날과 달이 흘러가고 또 와도 네 인간의 어지러운 풍파를 그치지는 못할넨가.   어느 초월한 악공이 있어 널 부러 홍량(弘亮)한 소리를 내어 창해에 담뿍 어린 구름을 깨끗이 쓸지는 못하는가.   멸한 나라 옛 빈 터전에 남은 찬 달과 연기 오오, 애달픈 침묵의 적(笛)이여.   바라춤, 통문관, 1959           종 신석초   종(鍾)   나라이 망하면 종도 우지 않던가   네가 한갓 지나는 손의 시름을 이끄는 기인한 보물이 되었을 뿐 꿍하고 네가 울면 신라 산천 사백 주가 한데 엎드려 대응도 하였으리   나라이 망하면 종도 우지 않던가. 오오, 묵묵한 종이여   가을날 단청이 떨어지는 옛 정(亭) 소슬 추녀에 구름이 돈다.   울어라. 종 울어 보렴. 네가 큰소리를 내어 또 한 번 천리를 뒤흔들어 보렴…….   바라춤, 통문관, 1959           주렴 신석초   주렴(珠簾)   주렴 드리우라   주렴 밖에   쨍쨍한 햇빛이 저리 눈에 부시니   소슬한 꽃 추녀 육간(六間) 대청에   분홍색 깨끼저고리   남 갑사치마에 비취 옥을 꽂은 가인(佳人)   주렴 드리우라   벌거벗은 몸뚱어리 벌거벗은 몸뚱어리 벌거벗은 몸뚱어리   이제는 아마존 여족(女族)들의 방패*만큼한 한 올 덮개도 기릴 줄이 없다만   주렴 드리우라   주렴 밖에   쨍쨍한 햇빛이   저리 눈에 부시니……   * 아마존 여족(女族)들의 방패: 밀튼의 실락원에 나오는 말.   폭풍의 노래, 문예사, 1970           처용 무가 신석초   처용(處容) 무가(巫歌)   꽃으로도 고운 모란꽃으로 열두 대문에 환히 핀 함박꽃으로 오너라   봉황음(鳳凰吟)으로 삼진작(三眞勺)으로 북전(北殿)으로 보허자(步虛子) 학연화대(鶴蓮花台) 영산회상(靈山會相)으로 계면(界面) 돌음으로 만두삽화(滿頭揷花) 칠보홍의(七寶紅衣) 오방(五方)처용(處容)   신라 밝은 날에   나후라*의 인고의 하늘 밤 들어 달빛이 적(寂)하여라 저며 논 보릇 같은 살갗이 역신(疫神)의 손에 문드러지던 때 내 가슴에 석류알이 쏟아졌나니   들깨지 마라 이 꽃새벽의 꿈의 꽃잎으로부터 환장할 누릴 꿈의 버금의 둘레   구름 갠 바닷가에 일곱 마리 용의 오색 찬란한 비늘이 번뜩인다 해가 뜬다   네 참아라 꽃아 도리(桃李)야 휘젓지 마라 역신이야 처용 탈만 보면 줄행랑이어라   천리를 가리러, 만리를 가리러, 속거천리(速去千里)하라 산이여 내여 길 열어라 나무아미타불   억만 세계 겁겁의 구슬의 광망으로 땅아 비추어 오라   길 밝혀라 처용아 열두 나라 지은 이들 장락태평(長樂太平)하랐다.   * 나후라: 범어로 인욕(忍辱)의 뜻을 가짐. 원뜻은 구요성(九曜星) 가운데 여덟째 별로서 식신(蝕神)이라고도 일컬음.   현대문학, 1969. 4           처용은 말한다 신석초   처용(處容)은 말한다   □ 1   바람아, 휘젓는 정자나무에 뭇 잎이 다 지겄다 성긴 수풀 속에 수런거리는 가랑잎 소리 소슬한 삿가지 흔드는 소리 휘영청 밝은 달은 천지를 뒤덮는데   깊은 설레임이 나를 되살려 놓노라 아아 밤이 나에게 형체를 주고 슬픈 탈 모습에 떠오르는 영혼의 그윽한 부르짖음…….   어찌할까나 무슨 운명의 여신이 나로 하여금 이렇게도 육체에까지 이끌리게 하는가 무슨 목숨의 꽃 한 이파리가 나로 하여금 이다지도 기찬 형용으로 되살아나게 하는가   저 그리운 연못은 거친 갈대 우거져서 떠도는 바람결에도 몸을 떨며 체읍을 한다 굽이 많은 바다다운 푸른 물 거울은 나의 뜰이었어라 밤 들어 노니다가 들어와 자리에 보니 가랄이 넷이어라   그리운 그대, 꽃 같은 그대 끌어안은 두 팔 안에 꿀처럼 달고 비단처럼 고웁던 그대, 내가 그대를 떠날 때 어리석은 미련을 남기지 않았어라 꽃물진 그대 살갗이 외람한 역신의 손에 이끌릴 때 나는 너그러운 바다 같은 눈매와 점잖은 맵시로 싱그러운 노래를 부르며 나의 뜰을 내렸노라 나의 뜰, 우리만의 즐거운 그 뜰을   아아 이 무슨 가면이 무슨 공허한 탈인가 아름다운 것은 멸하여 가고 잊기 어려운 회한의 찌꺼기만 천추에 남는구나 그르친 용의 아들이어 처용(處容) 도(道)도 예절도 어떤 관념 규제도 내 맘을 편안히 하지는 못한다 지금 빈 달빛을 안고 폐허에 서성이는 나 오오 우스꽝스런 제웅이어.   □ 2   모든 것은 흘러가 없어지는가 시간의 여울로 어지러운 잊음의 숲이어 변모한 서라벌이어 빈 절 무너진 성 둘레 멸하고 또 멸하지 않는 대리석의 빛나는 소상들이어 구름 다락과 비단의 거리는 어디 있는가 사랑하며 노닐던 나의 황금 장소는 바이 없고 지금 황량한 갈대밭에 바람 달이 설렌다   나의 범절과 나의 몸짓은 다시없는 보물을 잃게 했어라 나는 우활(迂闊)하였어라 나는 빈 꿈 여울에서 크낙한 술을 마셨어라 그대는 나를 떠나고 나는 나의 체념의 갈밭을 그지없이 헤맨다 나의 달관은 스스로 나를 버리게 했구나 지금 뉘우친들 무엇하리 홀로 메어지는 슬픔을 안고 여기 서성이노니 하늘과 땅이 나에게 모멸하는 눈살을 던지는 듯 나무는 깔깔대고 돌들은 허허 웃는다   바람에 부서지는 산란한 물 보라 이슥한 물거울에 비칠 그림자도 나는 갖지 못하였어라 우수수 듣는 나뭇잎이 낙화(落花)처럼 내려 찬 늪을 덮을 뿐…….   아아, 나는 유령이 되었는가 형체만 남은 형체도 안 보이는 유명의 그림자여 못내 나는 슬픈 유령이 되고 말았는가 이젠 사랑도 그리움도 없어라 이젠 의젓한 풍채도 높은 긍지도 없어졌어라   머리 그득히 꽃 꽂아 밝은 모양에 수삼(袖衫) 드리워 늘씬한 몸매에 애인 상견하여 윤나는 눈에 산상(山相) 이슥한 긴 눈썹에 홍도화같이 붉은 입술에 백옥같이 흰 이빨에 칠보(七寶) 늘이어 수굿한 어깨에 지혜 가득하여 풍만한 가슴에 그리움도 아름다움도 이젠 모두 소용이 없어라   무녀(巫女), 네가 성화같이 날 불러 외었은들 무엇하리 요사스런 미치광이어 밤 신명의 의붓딸이어 너의 헐은 옷에 펄렁이는 쾌자 자락이랑 징소리에 흔드는 붉은 둥치랑 외잡한 네 몸뚱어리의 뒤흔드는 물결은 나를 완구로 만들었을 뿐 너의 수다스런 언어의 주술도 거만하고 실속 없는 나의 화상을 남겼을 뿐 휘황한 궁궐도 춤추던 깁 장삼도 나의 서글픈 풍류에 지나지 않는다   무녀(巫女) 지혜 많은 사생녀여 숱하고 오랜 어두운 밤 밤의 목마름이 너로 하여금 을씨년스런 신화를 지어내게 했구나 신들린 너의 사지, 사시남기처럼 떨리는 손길로 너는 무슨 광명의 불꽃을 가져왔는가 네 기특한 슬기도 이젠 쓸모가 없어졌어라 아무도 네 말에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고 아무도 네 얼굴을 믿지 않는다 나의 태양의 잠든 가지는 재난과 안개에 뒤덮여 희미한 전설의 내음으로 떠돈다.   □ 3   저기엔 내가 불던 옥적(玉笛)이 굴러 있어라 허무히 빈 갈대가 되어 써늘한 다락 속에 여인이 버린 패물 조각과 쓸쓸히 지는 나뭇잎과 함께 일찍이는 네 짙푸른 목청이 하늘가에 가 서렸더니 사랑하다 밀리는 흐느낌도 저녁 노을도 밤바람 소리도 바다 물결도 모두 멎었더니 지금은 잠잠한 가락도 없이 무위한 옥가지 되어 어둡고 이끼 낀 섬돌 위에 버려졌구나 바다는 뒤설레어 상기 멎지 않고 바람은 부르짖고 물결은 솟아올라 언덕을 물어뜯는다   눈이 부시게 쏟아지는 저 금속의 별빛 소리는 내 것이 아니어라 차고 현란한 위조 보석 금강석이 부서지는 불야성은 은하의 별 구름다워라 사월 초파일 황룡사에 높이 현 연등불도 무색하구나 그러나 여기엔 정신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일찍이 너그럽고도 큰 고래등 같은 기와집이 섰던 곳에 값싼 모형 건물들이 서서 그 속에 어지러운 장기판이 벌어진다 `황무지'의 허술한 들창가에 간음하는 소리 들린다.   춥다 춥다 내 품 안에 들어오너라 저며 논 보릇다운 몸뚱어리, 오오 드러난 살갗들이어 아내도 처녀도 없어라 뒤섞인 소란한 수풀 속에 풀어지는 자락은 나라 땅을 가른 장벽만치나 저를 가리지 못하는구나 갈대는 어질머리처럼 흐트러져 은빛 물결을 흔들고 여기 흐므진 성황굿이 열렸는데 야만스러운 인수(人獸)의 다리 얽히어 숨도 헐떡거리며 안간힘을 쓴다   열반이 번져 온 마을에 노을이 타는 이 언덕에 꽃 타는 이 언덕에 언제 머루나무의 새잎이 돋아날 건가 밤 밤 밤 기어오르는 뱀의 혓바닥과 환장할 한바다의 물결이 넘실거리는 움직임과 전신의 혼이 녹아내리는 마디마디는 열병신(熱病神)에게야 횟갓이어라   바다는 뒤엎질고 물결은 일어난다 바람아 인다 동해 바다 아홉 개의 머리의 용이 솟구쳐 올라 천지를 뒤흔드는데 성난 물결을 잠재울 태평의 가락이 없구나.   오오, 처용(處容) 너는 보는가 변화의 격한 물이랑을 눈부신 세월은 그 위를 지나가고 너에겐 이제 아무 할 일이 없구나 너는 너로 돌아가야 하리 네 자신의 위치로 태양처럼 고독한 너의 장소로 지혜의 뜰, 표범 가죽이 드날리는 그 속으로 동이 튼다   아침 해가 비늘진 물결 너머로 굼실거리는 용의 허리 너머로 솟아오른다 황금빛 부챗살을 펴고 바람꽃을 헤치며 아득한 푸름의 맞단 곳으로 붉게 불타는 찬란한 구슬 늪이 이글이글 뒤끓고 진동을 하며 보라색 안개의 가리마 위로 징 같은 태양이 솟아오른다. 오오. 광명의 나래짓이어…….   현대문학, 1964. 5           천마도 신석초   천마도(天馬圖)   천마야, 달려가거라 동해의 하늘로 한 조각 마른 자작나무 껍질의 하늘로 오색 인동(忍冬) 무늬의 하늘로 먼 구름으로 먼 아미타불의 하늘로   거기엔 무엇이 있을까나 거기엔 밝음이 있었을까나 삼국의 풍운의 그 구름의 성을 뚫고 나갈 무슨 찬란한 말씀이라도 있었을까나.   한국문학, 1974. 2           천지 신석초   천지(天池)   밝아 오라 너의 높은 연화(蓮花)로부터 하늘로 솟아오른 너의 크낙한 심연으로부터 신룡(神龍)이 살아 굼실거리고 오색 영롱한 벽으로 천둥 번개를 하며 진동하는 하늘의 정수리로부터 그 높은 심장으로부터 일월은 천지 개벽을 하고 천도화(天桃花)를 피우고 태초에 하나의 무리의 조상을 낳았나니.   수유동운(水踰洞韻), 조광출판사, 1974           추호 신석초   추호(秋湖)   무심코 휘저은 한 물결이 일만 물결로 번져 간다 아늑하고 은밀한 이 호수에 한 마리 백조도 와 목욕 감지 않은 이슥한 이 물가에 잠자는 내 아내의 눈썹 여울 속 하늘에 뜬 흰구름도 아무 말이 없어라.   처용은 말한다, 조광출판사, 1974           춤추는 여신 신석초   춤추는 여신(女神)   달은 잠들고 그윽한 한숨지는 밤 동산으로 꽃 같은 여신이 내려오다.   매혹하는 꽃송아리 꾸며 논 보석의 수풀 속에 꿈결같이 움직이는 벗은 몸이 바람에 흔들리는 물을 그리면서   금강석에 묻힌 호수 위에 모호한 장미빛 안개 떠돌아서 여신은 매력의 술을 마시고   제 그림자에 명정하는 아리따운 새와도 같이 시름하는 여울로 비틀거리어 허공의 한 끝을 헤매다   머리는 칠보의 병을 기울여 공작이 어여쁜 연꽃봉오리를 찍고 홍옥을 물린 고운 입술은 탄식하는 꽃잎의 달고도 괴로운 숨결을 어둠 속으로 남몰래 흐트러 놓다.   아아, 넋 끊는 적(笛) 소리 들리고 청춘에 늘어진 기인 버들가지 소백한 보드러운 팔을 서리어 대리석으로 깎은 허리에 애무하는 고운 기반을 끄르다.   이럴 때 시간은 내밀한 우주를 이루고 침묵은 다디 단 권태의 술을 빚다.   어느덧 빛과 그림자 얼크러진 순수한 진주의 바다 떠올라서 범주(帆舟)는 푸른 물 거울을 건너고 지상(至上)의 나래 오오, 뜬구름 쪽은   석초시집, 을유문화사, 1946           파초 신석초   파초(芭蕉)&   황혼의 쇠잔한 노을이 소리 없이 뜰 위에 내리고 파초가 드린 기인 소매 나부껴 잠깐 옛날의 근심을 돋우노나.   속절없이 저무는 이 사이 방황하는 바람은 불어 와서 황금빛 나는 네 가지에다 한숨 모여, 비단의 띠를 흘려라.   한숨 쉬는 묵은 파초(芭蕉) 잎이여! 너는 아는가! ―현세와, 내 머언 인연이 짓는 어지러운 심사를 파멸하고, 또 존재하는 것…… 나는 있다, 이 고귀한 것의 옆에 오오, 퍼덕이는 옛날의 명정이여!   석초시집, 을유문화사, 1946           폭풍의 노래 신석초   폭풍(暴風)의 노래   바람이 분다. 바람아 잠 깬 바다를 건너 네 몰려오라. 너의 숨결은 내 아침 하늘에 안개와 광명의 티끌을 가져온다. 금은으로 두른 아레스*의 옷자락이 나를 빛내고 또 나를 흐린다.   프로메테우스여. 내― 바다를 쏘는 황금 화살이 구름 벽을 뚫고 너의 심연으로 쏟아지는구나. 바람에 뒤설레는 물결의 눈보라 밝음을 낳는 아침 한때는 이렇게 혼란을 가져오는가.   저기 번득이는 여명의 부채살 속에 구름과 갈대 흔들리는 곳에 바빌론*의 저자가 움직인다. 불멸하는 묵은 제왕의 도시가 잠 깨어 물결을 치노라. 성은 뒤끓고 원주(圓柱)는 수런거린다 복도에 웅성대는 군집(群集)의 소리.   바다는 고민하는 아틀라스*의 머리 위에서 진동을 한다. 바위로 부서지는 물결의 물보라가 하늘 꼭대기까지 솟아오르는구나. 유락의 천사. 하얀 비둘기들은 놀래어 미지의 숲으로 날아 흐트러지고 적멸을 깨뜰고 일어선 팡세의 군사들이 구름에 모여 기치 창검을 든다. 오오, 프로메테우스. 황량한 나의 뜰에 구르는 부서진 주춧돌과 어수선한 벌집들.   바람아 불라. 씰라*의 숨결이여. 불어 오라. 역사를 꾸미던 숱한 꽃잎들이 낙엽처럼 날아 기슭 없는 바다를 덮는다. 갑작스러운 물결의 소용돌이로 바위는 포효하고 하늘은 찌푸려지고 갈대는 떤다. 잡초는 우거진 묵은 거리론 놀란 곤충들이 기노라 아아, 먼지가 이노라.   광명을 찾는 무리들이여. 대지에 자줏빛 하늘문이 열릴 제 내가 쏘는 불의 화살 나의 빛깔의 충격에 사로잡힌 뭇 새들, 자유의 새들이여. 서로 배반하는 오오, 시천(十千)의 생각의 자식들이여. 이 큼직한 불집 속에 와 헤매라 나의 장미빛 화살에 몸을 던져 살을 찢기우고 피를 흘리게 하라. 내가 갖가지 환상의 숲에 펼쳐 놓은 매듭 많은 비밀한 그물을 너희들은 보지 못한다. 프로메테우스. 어쩔까나, 이 혼돈과 어지러운 풍파를. 너의 지혜의 보고를 활짝 열어 노렴.   문명의 선구자여. 어둠을 밝힌 자여. 그러나 장난꾸러기 창조자여. 너는 지금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하려 하는가 폭풍이 부는 거리에서 이 티끌의 도가니 속에서 프로메테우스여, 너는 무슨 능력으로 너의 완결무결한 낙원을 이룩하려는가. 너의 다시 없는 국가를?   `프로메테우스' 나는 움직인다. 나는 행동을 하려 한다. 바람 속에 뛰어들겠노라. 거칠고 캄캄한 것은 나의 영역이 아니어라 나의 몸은 밝다 무엇을 주저하리 프로메테우스여. 달리어가라. 내 몸은 빠른 아킬레우스* 내 혓바닥은 순수한 불꽃이어라 나는 지혜 많은 칼타고*의 범과 같도다 나는 약진한다. 나는 나의 이상을 빨리 실현하려 한다   그러나 조바심하는 가슴이여 내 내부의 깊은 뒤설렘이여 (정신은 질서 없이는 지속되지 않느니) 오오. 독수리여. 제우스의 사자여 나의 간을 갉아먹는 악독한 새여 너는 이제 나에게서 떠나야 한다.   너의 날카로운 부리로 쪼은 내 몸의 흉터 얼마나 포악한 너의 박해가 나에게 이다지도 큰 시련을 주었던가 나는 안다. 내가 준 불의 어지러운 결과를 나는 비틀거린다. 나는 다시 일어선다. 나는 파괴된 것을 건설해야 하리 나는 언제나 높고 빛나는 영원한 피라미드를 원한다.   * 아레스: 그리스 신화의 군신(軍神). ** 바빌론: 서쪽 아시아에 있던 고대왕국 바빌로니아의 서울. 한때 인류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었다. ** 아틀라스: 어깨로 하늘을 떠받고 있는 거인. 지도의 신. ** 씰라: 호머의 오딧세이에서 오디세우스가 난파하여 떠돌아 다닐 때 지나던 험한 물목을 말함. ** 아킬레우스: 트로이 전쟁의 용장임. ** 칼타고: B.C 9세기께 페니키아인들에 의하여 건설되었던 최대 도시.   폭풍의 노래, 문예사, 1970           풍우 신석초   풍우(風雨)   봄도 반 넘어 깊은 산방에 내 홀로 잠을 깨어 누웠나니   베개 위에 듣는 비바람 소리는 뒤안 꽃숲을 다 흔들어 놓는다.   꽃이 피면 왜 이리 비바람은 많은가   세월이 하마 덧없어 뒤흔들며 가느니.   바라춤, 통문관, 1959           함령지곡 신석초   함령지곡(咸寧之曲)   홍포(紅袍) 금사(金絲)띠 흑사모(黑紗帽)로 피리 가야금 적대 비껴 들고 무고(舞鼓) 앞에 앉다 적적한 고궁 뜰에 강화 화문석이 차구나 조용히 울려 퍼지는 함녕지곡 옛 가락은 구름인 양.   그날 번화했던 뜨락에 빈 자락 깔린 위에 새삼 그윽히 우조(羽調)가 흐른다.   처용은 말한다, 조광출판사, 1974           호접 신석초   호접(蝴蝶)&   호접(蝴蝶)이여! 언제나 네가 꽃을 탐내어 붉어 탈 듯한 꽃동산을 헤매느니   주검도 잊고 향내에 독주에 취하여 꽃잎 위에 네 넋의 정열이 끝나려 함이   붉으나 쉬이 시들어질 꽃잎의 헛됨을 네가 안다 하여도   꿈결 같은 즐거움 사라질 이슬 위에 취함은, 네 삶의 광휘일러라.   자오선, 1937           화장 신석초   화장(化粧)   다만 불멸의 소리 있을 뿐. ―발레리   날마다, 날마다 고적한 거울을 대하여 내 모양을 꾸미는 내 심사를, 그대는 알아요?   내가, 내 꾸밈으로써 구태여 그대의 욕구를 끄을려 함은 아니언만   그래도, 난 내 모양 꾸미는 그 일에만 팔려, 날마다 거울을 대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을…….   바라춤, 통문관, 1959           흐려진 달 신석초   흐려진 달   하룻밤, 내가 달을 좇아서 이름도 모를 먼 바닷가 모래 위에다 장미꽃으로 비밀의 성을 쌓고 있더니   밤이 깊도록 내가 모래성에서 다디 단 술에 취하여 있을 때, 문득 구름이 몰려와서 내 달을 흐레다.   아아, 내 꿈이 덧없음이런가 바다의 신이 나를 시기하였음이런가 심연으로 달은 빠지다.   달이여, 너는 어디로 갔는가 나는 헤매다, 나는 보다 물결쳐 움직이는 바다의 그 큰 모양을…….   석초시집, 을유문화사, 19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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