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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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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3    詩는 아름다운 우리 말의 보물창고 댓글:  조회:4946  추천:0  2016-01-08
시를 잘 쓰기 위한 10가지 방법/ 이승하   미주한국문인협회 회원 여러분! 그리고 오늘 이 자리에 모이신, 문학을 좋아하는 많은 애독자 여러분! 저는 오늘 여러분의 모국 대한민국의 많은 시인을 대표하여 이 자리에 섰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시인입니다. 이 자리에는 저처럼 시를 쓰면서 이 이승에서의 삶을 꾸려가는 분들이 많이 와 계신 것으로 압니다. 지금 여러분의 소망은 무엇입니까? 저의 가장 큰 소망은 지금까지 썼던 그 어떤 시보다 더 좋은 시를 쓰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렇지 않습니까? 단 한 편이라도 길이 남을 명시를 쓰고 싶은 소망 때문에 낮에는 전전긍긍하고 밤에는 전전반측하지 않습니까.    이 자리에 와서 여러분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해드리는 것이 시를 쓰고 계신 여러분께 실질적인 도움이 될까 여러 날 고민을 했습니다.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좋은 시를 쓰기 위한 방법 10가지 전수입니다. 제가 1984년에 등단한 이후 지금까지 7권의 시집을 내면서, 또 1992년부터 대학 강단에 서서 학생들에게 시작법을 가르치면서 익힌 노하우를 전해 드리는 것으로 강연을 대신할까 합니다. 거창한 강연이 아니라 아주 소박한 내용이어서 실망스러울 수도 있겠지만 여러분과 함께 시를 감상하면서, 좋은 시를 쓰기 위한 방안을 모색해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제가 인용하는 시는 졸저 {백 년 후에 읽고 싶은 백 편의 시}(시와시학사)에서 다루었던 것을 대상으로 했습니다. 즉, 그 책을 통해 했던 말을 중심으로 강연을 해볼까 합니다.    1. 시는 우리말의 보물창고이다   여러분과 함께 감상해볼 첫 번째의 시는 김진완이란 젊은 시인의 등단작인 [기찬 딸]입니다. 칙칙폭폭 칙칙폭폭 소리를 내며 증기기관차가 달리던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니 꽤나 옛날 일이겠지요. 시적 화자의 외할머니가 딸을, 즉 자신의 어머니를 분만하는데, 바로 그 장소가 달리는 기차 속이었습니다.    다혜자는 엄마 이름. 귀가 얼어 톡 건들면 쨍그랑 깨져버릴 듯 그 추운 겨울 어데로 왜 갔던고는 담 기회에 하고, 엄마를 가져 싸아한 진통이 시작된 엄마의 엄마가 꼬옥 배를 감싸쥔 곳은 기차 안. 놀란 외할아버지 뚤레뚤레 돌아보니 졸음 겨운 눈, 붉은 코, 갈라터진 입술들뿐이었는데 글쎄 그게, 엄마 뱃속에서 물구나무를 한번 서자,   으왁!   눈 휘둥그런 아낙들이 서둘러 겉치마를 벗어 막을 치자 남정네들 기차 배창시 안에서 기차보다도 빨리 '뜨신 물 뜨신 물' 달리기 시작하고 기적소린지 엄마의 엄마 힘쓰는 소린지 딱 기가 막힌 외할아버지 다리는 후들거리기 시작인데요, 아낙들 생침을 연신 바르는 입술로 '조금만, 조금만 더어' 애가 말라 쥐어트는 목소리의 막간으로 남정네들도 끙차, 생똥을 싸는데 남사시럽고 아프고 춥고 떨리는 거기서 엄마 에라 나도 몰라 으왕! 터지는 울음일 수밖에요.     박수 박수 "욕 봤데이." 외할아버지가 태우신 담배꽁초 수북한 통로에 벙거지가 천정을 향해 입 딱 벌리고 다믄 얼마라도 보태 미역 한 줄거리 해 먹이자, 엄마를 받은 두꺼비상 예편네가 피도 덜 닦은 손으로 치마를 걷자 너도나도 산모보다 더 경황없고 어찌할 바 모르고 고개만 연신 주억였던 건 객지라고 주눅든 외할아버지 짠한 마음이었음에랴 두말하면 숨가쁘겠구요. 암튼 그리하야 엄마의 이름 석 자는 여러 사람들의 은혜를 입어 태어났다고 즉석에서 지어진 것이라.   多惠子.   성원에 보답코자    하는 마음은 맘에만 가득할 뿐      빌린 돈 이자에 치여   만성두통에 시달리는   나의 엄마 다혜자씨는요,   칙칙폭폭 칙칙폭폭 끓어오르는 부아를 소주 한잔으로 다스릴 줄도 알아 "암만 그렇다 캐도 문디, 베라묵을 것. 몸만 건강하모 희망은 있다."    여장부지요   기찬,   기―차― 안 딸이거든요.                            ―김진완, [기찬 딸] 전문   승객이라고는 "졸음 겨운 눈, 붉은 코, 갈라터진 입술"을 가진 농투성이들뿐이지만 이들은 낯선 아주머니의 차내 분만에 한마음으로 동참합니다. 아낙들은 겉치마를 벗어 막을 치고, 남정네들은 뜨신 물을 구해오고, "벙거지"는 미역 살 돈을 내놓고, 두꺼비상 여편네는 산파 노릇을 해 무사히 한 생명은 "으왕!" 울음을 터뜨리며 탄생합니다. 이런 여러 사람의 은혜로 태어났다 하여 엄마 이름이 다혜자가 되었다는 것이지요. 마지막 3연이 보여주는 여성적, 혹은 모성적인 건강함은 가슴 훈훈한 감동을 전하기에 모자람이 없습니다. 또한 꽤 긴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는 1연과 3연 사이에 위치한 "으왁!"이란 의성어가 환기하는 생명 탄생의 고통과 경이로움, "기찬"과 "기―차― 안"이라는 비슷한 음을 이용한 유머 센스 등은 이 시를 명작의 반열에 올리는 데 합심하여 공헌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 이 시의 가장 큰 매력은 산전수전 다 겪으며 살아오신 어머니가 소주 한잔 마시고 내뱉는 말, "암만 그렇다 캐도 문디, 베라묵을 것. 몸만 건강하모 희망은 있다."에 있습니다. 참 한국적인 말이라고 할까요, 서민적인 말이라고 할까요. 어머니의 힘, 아니 한국 아줌마의 힘을 나타내는 그 말이 사투리가 아니라 표준말도 되어 있다면 이 시의 맛은 반 이상 줄어들 것입니다. 저는 이 시를 읽으면 시야말로 사투리와 순우리말의 보물창고라는 생각을 합니다. 소월과 영랑이, 백석과 정지용이 왜 위대한 시인인가 하면 한국적인 정서를 한국적인 어투와 어조, 사투리와 순우리말로 표현해내는 능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시의 가장 기본이 되는 질료인 언어를 구사할 때, 사투리와 순우리말이 지금은 쓰지도 않는 낡은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내가 잘 찾아내어 시에 활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이역만리에서 모국어를 구사하는 문화의 파수꾼이며 창고지기입니다. 언어 학대가 시인의 특권인 양 언어를 못살게 구는 시인들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왜 미국에서 살면서 모국어로 시를 쓰고 있습니까? 몸은 비록 미국에 있지만 시인인 이상 모국어를 잘 갈고 닦는 언어의 세공사임을 명심하기 바랍니다.    2. 시는 특이한 체험의 산물이다   김광림이란 시인이 있지요. 1929년생이시니 올해 연세가 일흔여섯입니다. 함경남도 원상 출생이신 시인은 이른바 이산가족의 일원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 가운데 남북분단의 아픔을 남보다 뼈저리게 느끼고 계신 분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오랜만에 찾아온 친구와 대화를 나누는 식으로 시가 전개되는데, 시인이 겪었던 일이 어떤 영감이나 상상력, 혹은 비유와 상징의 도움 없이 그야말로 곧이곧대로 이야기되고 있습니다.      혈압 때문에 술을 끊어야겠다고 결심한 중학 동창은   마지막 대작을 위해 일부러 나를 찾았단다   반세기가 넘어도 상기 '야' '자'로 통하는 사이가   마냥 즐겁기만 하다.   한때는 혀가 굳어져 제대로 말도 못했다며   다시 굳어지기 전에 꼭 해야겠다고   느닷없이 들고 나온 한마디   ----야, 너 집 떠날 때 아버지한테 얘기했니?   국회 청문회인들 이보다 더 가슴에 맺힐까   간신히 기어드는 목소리로   ----아니   라고 대꾸하긴 했지만   금방 가슴속의 응어리가 터질 것만 같다.   ----이 자슥아! 너 아버지가 누이동생을 앞세워 우리 집에 찾아오셨단 말야   너 어디 갔느냐고 물으시길래 나도 놀랐지 무슨 말씀이냐고 되물었지만……   ……'제 에미도 동생들도 다 모른다니 이놈이 대체 어디로 사라졌단 말야'   걱정이 태산 같으시더라.   하긴 그래   어머니는 자식이 잘 되는 일이라면   무슨 짓인들 말렸을까   남행열차를 탄 내게 마냥 손을 흔들어쌌던   누이의 모습이 지금도 삼삼한데   아버지의 노여움에   모두가 모른다고 잡아뗀 모양이다.   ----야 이 자슥아 정신차려   올해 부모님 춘추 어떻게 되시니   기세가 등등해진 녀석은    취기까지 가세하여 사뭇 심문조다.   ----그래 아버지가 나를 스물하나에 어머니가 열아홉에 두셨으니까 여든여덟에 여든여섯이 되셨을 거야.   그만 울먹이는 소리가 돼버렸는지   '야' '자' 하던 친구가   ----내가 괜한 소리 했나보다   ----아냐 잘했어   내 따귀 실컷 갈겨주지 않을래   이승에선 다시 못 뵈올 부모님 생각에   기어이 울음보를 터뜨리고 싶어   상기된 얼굴을 들이대자   이번엔 '야' '자'가   잘못 눈물단지 건드렸나 싶었던지   시무룩한 목소리로   ----아무래도 내가 괜한 소리 했나보다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고 있는 것을   어쩌랴.                            ―김광림, [괜한 소리] 전문   제목 '괜한 소리'는 혈압 때문에 술을 끊어야겠다고 결심하고 마지막 대작을 위해 찾아온 중학 동창의 입에서 나온 두 가지 질문인 동시에, 시인 스스로 자신의 대답을 '괜한 소리'로 규정한 자탄의 목소리이기도 합니다. 동창생 노인은 마지막 대작이겠다, 술을 마신 김에 평소에 물어보고 싶었던 것이 있어 두 가지 질문을 던집니다. 그러자 늙은 시인 친구는 울먹이는 소리로 대답하고, 급기야 울음보를 터뜨릴 듯 상기된 얼굴이 됩니다. 그러자 노인은 "아무래도 내가 괜한 소리 했나보다"라고 시무룩한 목소리로 혼잣말처럼 중얼거려 시의 제목이 '괜한 소리'가 된 것이겠지요.    두 가지 질문은 읽으면 읽을수록 가슴을 치고, 쓰리게 하고, 결국은 뜨겁게 달아오르게 해 눈시울까지 뜨거워집니다. 수백만 이산가족의 아픔이 응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 물음은 "야, 너 집 떠날 때 아버지한테 얘기했니?"입니다. 청년 김광림은 아버지한테 탈향(脫鄕)의 이유를, 이향(離鄕)의 전말을 말씀드리지 않고서 남행 열차에 몸을 실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종적을 감춘 아들의 소식을 알아보고자 딸을 앞세워 아들 친구의 집을 찾아 나섭니다. 시인인들 그리 멀지 않은 어느 날 귀향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기에 말씀드리지 않았지, 그것이 영원한 생이별의 순간임을 알았더라면 작별의 인사도 고하지 않고 떠나왔겠습니까. "걱정이 태산 같으시더라." 이 한 행 속에는 아버지의 정이 소복이 담겨 있는 정도가 아니라 흘러 넘치고 있습니다. 흘러 넘치는 그 부정(父情)이 독자의 가슴을 아프게 합니다.    두 번째 질문은 "야 이 자슥아 정신차려/올해 부모님 춘추 어떻게 되시니"입니다. 마지막 대작을 위해 찾아온 친구는 일신의 안전을 위해, 혹은 시를 쓰겠다고 아버지한테 말씀도 안 드리고 고향을 떠난 시인 친구를 공박하며, 살아 계시면 올해 연세가 어떻게 되시냐고 묻습니다. 시인은 "그래 아버지가 나를 스물하나에 어머니가 열아홉에 두셨으니까 여든여덟에 여든여섯이 되셨을 거야"라고 대답합니다. 이 대답 속에는 살아 계실 확률보다는 돌아가셨을 확률이 훨씬 더 높다는 암시가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앞쪽에서 "국회 청문회인들 이보다 더 가슴에 맺힐까"라고 자탄했던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뒤에 가서는 "내 따귀 실컷 갈겨주지 않을래"라고 자학하게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 시는 별다른 시적 기교를 동원하지 않고서 자신이 직접 경험했던 것을 솔직히 털어놓아 깊은 감동을 준 경우입니다. 여러분들이 지금껏 살아오면서 보고 듣고 느낀 것 가운데 가슴아픈 경험이 있으면 솔직하게 고백해보십시오. 수치심을 동반한 기억도 좋습니다. 그 체험이 소소한 것이건 대단한 것이건 체험은 여러분이 갖고 있는 가장 중요한 문학적 자산입니다.    3. 시는 나의 치부를 드러내는 행위이다   이산가족으로서의 뼈아픈 체험도 시가 될 수 있지만 늙어가면서 느낀 쑥스러운 체험도 시가 될 수 있습니다. 김광림의 시에는 민족사가 담겨 있지만 박남수의 시에는 일상사가 담겨 있습니다. 시인 박남수는 미국에 이민을 와 작품활동을 하다 돌아가신 분이라 여러분 중에 교분을 나눈 분도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팬티 끈이 늘어나   입을 수가 없다. 불편하다.   내 손으로 끈을 갈 재간이 없다.   제 딸더러도 끈을    갈아 달라기가 거북하다.   불편하다. 이제까지   불편을 도맡았던 아내가   죽었다. 아내는    요 몇 해 동안, 나더러   설거지도 하라 하고, 집 앞   길을 쓸라고도 하였다.   말하자면 미리 연습을 시키는   것이었다. 그런데 성가시게 그러는 줄만   여기고 있었다. 빨래를 하고는   나더러 짜달라고 하였다.   꽃에 물을 주고, 나중에는   반찬도 만들어보고   국도 끓여보라고 했다.   그러나 반찬도 국도   만들어보지는 못하였다.   아내는 벌써 앞을   내다보고 있었다. 팬티   끈이 늘어나 불편할 것도   불편하면서도 끙끙대고 있을   남편의 고충도.                             ―박남수, [훈련] 전문   시인의 아내는 자신이 남편보다 먼저 세상을 뜰 것을 예감하고서 홀아비가 될 남편을 위해 혼자 살아가는 법을 가르쳤던가 봅니다. 그런데 교육이 제대로 이뤄지기도 전에 아내를 눈을 감았습니다. 이 작품은 흡사 일기를 시행으로 나눈 듯 시적 기교는 없지만 읽는 이의 가슴을 치게 하는 바가 있습니다. 박남수 시인의 젊은 날의 시 가운데 [아침 이미지]라는 것이 있습니다. "금으로 타는 태양의 즐거운 울림" 같은 눈부신 감각을 보여준 시를 저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런 그는 노년에 들어서서 아주 솔직하게, 자기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자기의 부끄러운 과거지사는 어떻게든 숨기려고 합니다. 하지만 차마 말할 수 없었던 것을 말함으로써 잔잔한 감동을 주는 시를 쓸 수 있습니다.    4. 시는 인간에 대한 연민의 정을 담아야 한다   저는 성선설이나 성악설 중 어느 한쪽을 지지하지는 않습니다만 인간이 갖고 있는 가장 순수한 본성은 나한테 잘못을 한 타인을 용서해주고 싶은 마음, 타인의 불행을 보고 측은함을 느끼는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넓게 말해 사랑이지요. 여러분은 신문을 읽으면서 혀를 차는 경우가 종종 있지요? 혀를 차는 데서 끝나서는 안 되고 그 마음이 시를 쓰는 마음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타인의 불행에 오불관언하는 마음은 시인의 마음이 아닙니다. 다음에 감상해볼 시는 '95년 1월, 빚 때문에 영랑호에 와 자살한 한 가족을 위하여'라는 부제가 붙어 있습니다. 이곳 미국에서도 일가족 동반 자살의 뉴스가 전해지는 때가 있습니까? 한국에서는 해마다 정말 자주 듣는 뉴스가 바로 이것입니다. 일가족이 자살을 시도한 결과 누구는 죽고 누구는 살아났지만 살아난 사람도 중태란 소식, 부도를 막지 못한 중소기업의 사장이 가족을 먼저 죽이고 자살했다는 소식, 또 어른은 살아나고 아이들이 죽었으니 이건 동반자살을 아니라 비속살해라는 등등. 자, 시를 읽어봅시다.    그 해 겨울 영랑호 속으로   빚에 쫓겨온 서른세 살의 남자가   그의 아내와 두 아이의 손을 잡고 들어가던 날   미시령을 넘어온 장엄한 눈보라가    네 켤레의 신발을 이내 묻어주었다   고니나 청둥오리들은   겨우내 하늘 어디선가 결 고운 물무늬를 물고 와서는   뒤뚱거리며 내렸으며   때로 조용한 별빛을 흔들며   부채를 청산한 가족들의 웃음소리가   인근 모래기*까지 들리고는 했다   얼음꽃을 물고   수천 마리 새떼들이 길 떠나는 밤으로   젊은 내외는 먼 화진포까지 따라나갔고   마당가 외등 아래서   물고기와 장난치던 아이들은 오래도록 손을 흔들었다   그러나 애들이 얼마나 추웠을까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나의 뺨을 적신다   그래도 저녁마다   울산바위가 물 속의 집 뜨락에   오래 가는 놀빛을 떨어뜨리고 가거나   산 그림자 속 화암사 중들이   일부러 기웃거리다가 늦게 돌아가기 때문에   영랑호는 문을 닫지 않는 날이 많다   그런 날은 물 속의 집이 너무 환하게 들여다보였다   * 모래기는 영랑호 주변에 있는 마을 이름.                            ―이상국, [물 속의 집] 전문   어린아이들이야 자살에 자발적으로 동참했을 리 없고, 부모가(흔히 아버지가) 자식을 일단 살해한 뒤에 자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시인은 누구로부터 들었는지 밝혀놓지 않았는데, 1995년 1월에 서른세 살의 남자가 빚 때문에 고민하다 그의 아내와 두 자식의 손을 잡고 영랑호 속으로 뛰어들어 자살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전해듣습니다. 손에 손을 잡고 함께 뛰어들었으니 그야말로 '동반' 자살입니다. 타인의 죽음이므로 시인은 1연에서 이 사실을 담담히 독자에게 들려줍니다. 담담히? 아니, 그렇지 않습니다. 제4행 "미시령을 넘어온 장엄한 눈보라"에 이르면 시인의 안타까워하는 얼굴이 확, 다가옵니다. 그 겨울의 눈보라는 영랑호를 눈앞에 둔 한 가족을 얼마나 떨게 했을까요. 이 비정한 세상에 남편 없이 팽개쳐질 두 새끼의 목숨까지 거둘 결심을 한 젊은 가장의 굳어 있는 얼굴까지 확, 다가옵니다. 인간에 대한 안타까운 연민의 정은 시인으로 하여금 제2연을 쓰게 합니다. 시인은 자살의 현장인, 네 사람의 목숨을 삼키고도 여전히 고요한 영랑호에 고리와 청둥오리들을 보내 조문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상상합니다.   때로 조용한 별빛을 흔들며   부채를 청산한 가족들의 웃음소리가   인근 모래기까지 들리고는 했다   즉, 이제는 이 지상에 존재하지 않는 그 가족을 시를 통해서나마 한 번 부활시키고 싶었던 것입니다. 물 속에다 집을 만들어서 말입니다. 한때는 단란했을 그들, 죽음으로까지 몰고 간 빚이 없었던 그 가족의 지난날을 생각하니 하느님이 다 무심하다고 생각되고, 그래서 시인은 하느님이 되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상국은 시를 구상하는 동안, 초고를 쓰는 동안, 퇴고하는 동안, 신이 되었습니다. 시밖에 쓸 수 없는, 언어의 창조주가 말입니다.   미국에서도 폭탄 테러로 어린아이를 포함한 사람들이 떼죽음을 당한 적이 몇 번 있었지요. 이런 소식을 접하고 시인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저 인간에 대한 연민의 정을 어쩌지 못해 시 한 편을 써보는 것입니다. 이상국 시인은 자신의 무력감이 서글퍼 제3연을 썼을 것입니다. 제3연의 마지막 행에서는 시인 자신이 느닷없이 등장해 울고 있습니다. 죽은 가족이 시인이 아는 사람들이라 비보를 접하고서 울었는지, 눈물을 글썽거렸는지, 혹은 신문 기사를 보고서 울고 싶었는지, 뭐 그런 것은 하등 중요하지 않습니다. 혹자가 이 시를 평하면서 센티멘털리즘이니 감상 과잉이니 하며 비판하는 것도 시인은 개의치 않기로 한 듯합니다. 그는 다만 자신이 그 가족을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행위인 시작 행위를 하되, 인간에 대한 연민의 정을 이렇게 "지금도 눈물이 나의 뺨을 적신다"는 말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대개 일가족 동반 자살 소식을 접하면 아이들을 살해한 부모의 비정함에 분노하게 됩니다. 정 죽고 싶으면 자기네들이나 죽지 왜 애들을 죽여, 어떻게 자기 자식을 죽일 수 있을까 하고 개탄한 뒤, 욕을 몇 마디 덧붙이고는 남의 일이기에 곧 잊어버립니다. 그런데 이상국 시인은 젊은 부부가, 혹은 젊은 가장이 오죽했으면 그런 식으로 생을 마감했으랴 하는 생각에 이어진 연민의 정을 억누를 수 없어 물 속에다 집을 지어주고, 물 속의 집 뜨락에 놀빛을 떨어뜨리고 가게끔 하고, 화암사 중들에게까지 부탁하여 목탁을 치게 합니다. 인간에 대한 연민의 정이 없이 우리가 어찌 문학을 한다고 운위할 수 있겠습니까.    5. 시는 유머 감각의 산물이다   이상국의 시가 너무 비감하여 우리 모두를 숙연케 합니다. 이번에는 유쾌한 시를 한 편 감상해봅시다. 미학에서는 아름다움을 크게 여섯 가지로 나누고 있는데 비장미, 숭고미, 순정미, 우아미 외에 골계미가 있고, 또 하나 미와 반대개념이면서 미의 일종인 추(the ugly)가 있습니다. 우리 시는 너무 점잖고 엄숙한 경향이 있습니다. 언중유골이라고,  엄숙한 가운데서도 농담을 할 줄 알고, 농담을 하는 중에도 뜻을 새길 수 있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여러분도 시를 읽다가 미소를 짓거나 씩 웃는 경우가 있었습니까?   팔순을 넘기신 우리 할머니 경주이씨와 칠순이 가까운 큰고모부는 의좋은 오누이 모습으로 도란도란 옛날 이야기 나누시네. 때는 봄날, 햇살은 까르르 까르르 간지러운 웃음으로 방바닥 위로 환하게 퍼져나가고 백발 장모가 권하는 일배 일배에 취한 눈멀고 귀먹어  가는 사위는 아주 오랜 옛날도 어제처럼 가까워 흥이 나네. 기억하시는교 빙모님요 막내 처제 낳고 제가 가물치 한 마리 사 가지고 찾아갔지요. 하모 김서방 그 달이 윤삼월 참으로 큰 가물치였제. 마흔 고개 힘겹게 넘어 출산한 장모 문안 가던 젊은 서른 사위, 가물치 한 마리 짚으로 꿰어들고 경남 양산군 하북면 삼감리로 걸어가는 키 큰 고모부 모습 나도 보이네. 산후조리하고 있던 할머니의 민망한 마음 보이네. 갓난애기 처제를 본 우리 큰고모부 선한 눈가 웃음도 보이네. 金粉으로 부서지는 두 분의 옛날 이야기 곁에 버릇없이 누운 나는 살아보지도 못한 저 먼 세월 어슬렁어슬렁 거슬러 올라가는 귀 큰 당나귀, 금줄 친 사립문 밖에서 百年 손님 맏사위 멋쩍게 맞으며 新羅瓦當의 웃는 얼굴로 웃는 할아버지 젊은 웃음소리 듣네. 아직도 살아 푸드득거리는 가물치 소리 생생히 들려오네.                            정일근, [흑백사진―가물치] 전문                                이 시는 상황 설정부터 웃음이 나옵니다. "마흔 고개 힘겹게 넘어 출산한 장모 문안 가던 젊은 서른 사위"의 이야기이니까요. 이 이야기를 풀어놓는 촉매제가 바로 가물치입니다. 장모가 마흔이 넘어 처제를 낳았으니 본인은 백년 손님인 맏사위 보기가 민망하고, 장인은 사위 맞기가 멋쩍기 이를 데 없습니다. 사위는 그래도 나 몰라라 할 수 없어 엄청나게 큰 가물치 한 마리를 사 들고 처갓집에 갑니다. 이 얼마나 우스꽝스런 상황입니까. 그런데 시인의 재능은 이러한 상황을 보여주는 데 있지 않습니다. 모든 등장인물을 아름다운 금빛으로 도금하는 언어의 연금술에 있습니다. "햇살은 까르르 까르르 간지러운 웃음으로 방바닥 위로 퍼져나가고", "新羅瓦當의 얼굴로 웃는 할아버지 젊은 웃음소리" 같은 표현도 그렇거니와, 화자의 팔순을 넘기신 할머니가 칠순이 가까운 큰고모부에게 술을 계속 권하면서 나누는 대화가 더없이 정겨워 독자는 감동하게 됩니다. 시 한 편에 사람 사이에 오갈 수 있는 따듯한 정감을 이렇게 듬뿍 담을 수 있다니, 아니 흘러 넘치게 할 수 있다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닙니까.   6. 시는 새로운 요소가 있어야 한다   아무리 그럴듯한 소재와 주제일지라도 표현 방법이 너무 진부하면 시의 맛이 사라져버립니다. 시를 쓸 때는 어느 정도의 실험정신이 시를 맛깔스럽게 하는 양념이 될 수 있습니다. 한 번 읽어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한 편의 시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난 그날을 어떻게 정의 내려야 할지 모르겠다. 그래서 처음 시도로 글자 그대로 해석해보기로 한다.   그―①그윽한 ②그믐달 ③그림자   날―①날카로운 첫 키스(님의 침묵) ②날강도 ③날짐승   통합적으로 그윽한 면도날로 정의해보기로 하자. 그런데 나의 알 수 없는 우울증은 조금 더 강도를 높인다. 다음 단계로 그날의 사건과 정황을 그려보기로 한다. 이 단계에서 경계해야 할 점은 육신이 제거된 영혼의 교만함이 고개를 쳐든다는 점이다. 냉정함을 잃지 말라고 충고하면서 두 번째 시도로 들어간다.      정말이지, 그날 자네가 불시에 가한 엄청난 테러가 떠오른다. 정말 어찌 하라는 건지, 나 부끄러움 넘어선 견디기 힘든 굴욕감에 별들도 차가운 눈빛으로 가슴 깊이 얼음 송곳  밀어 넣는다. 바람에 상처받기 쉬운 겨울나무는 땅의 마지막 수액 한 방울도 빨아올려 단단한 겨울에 완강히 저항한다. 그런 잠 못 들기 몇 날인가, 핏발 서린 눈에선 자꾸 마른 눈물 흘러, 말라비틀어진 흔적이 영혼 깊숙이 각인된다. 그러면 육신은 무엇이며 영혼은 또 무엇인가, 영혼의 기막힌 알리바이는 여기서 끝나지 않고 끊이지 않는 우울증으로 육신을 계속 괴롭힌다. 더 나아가 내 몸 구석구석 굴욕의 상처들이 바람에 제 존재를 알리는 풀잎처럼 우우, 일시에 일어나 실개울로 흘러 비굴한 시 쓰기를 관통하여 뜨거운 태양이 그대의 오만함을 녹여줄 회복기의 봄을 고대하도록 한다. 이쯤 되면 영혼의 교만함이 육체의 단순성을 비웃듯 또다시 고개를 쳐들고 나는 또다시 이 우울증의 원인 치료를 위해 그날이라는 글자 분석에 몰입한다. (ㄱ⇒무엇인가 어긋남, ㅡ⇒동물의 울음, 나⇒egoistic, ㄹ⇒물 흐르듯이;너무 랭보的이어서 나의 우울증은 더욱 심화된다)                            ―강성철, [그날] 전문    시인이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이해하기가 상당히 어렵지요? [그날]이란 제목을 보고 '그 어느 날'이라고 생각한 저의 기대지평은 초장에 여지없이 무너집니다. 시인은 '그날'을 달리 생각해보고자 '그'를 ①그윽한 ②그믐달 ③그림자로, '날'을 ①날카로운 첫 키스(님의 침묵) ②날강도 ③날짐승으로 해석해본 뒤, 통합하여 '그윽한 면도날'로 정의해봅니다. '그'는 ①번을 선택했으나 '날'은 세 개 중 마땅한 것이 없어 면도날을 연상한 것입니다. ①번 '날카로운 첫 키스([님의 침묵])'에서 날카롭기 짝이 없는 면도날을 연상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윽한 면도날이라니요. 여기서 독자는 시인의 장난에 우롱 당했다는 당혹스런 느낌과 시인의 계산을 못 따라잡았다는 허탈한 감정을 한꺼번에 느낄 수 있습니다. 이게 무슨 장난이냐고 못마땅하게 생각할 수도 있고요.    제2연에 접어들어서도 강성철은 계속 독자에게 미지의 덫을 놓습니다. "그날 자네가 불시에 가한 엄청난 테러"는 면도날을 휘둘러대는 상황이었던가 봅니다. 불시에 가한 자네의 행동에 나는 괴롭고 서러워 마지막 수액 한 방울도 빨아올려 겨울에 저항하는 겨울나무처럼 잠 못 드는 나날을 보냅니다. 고통과 설움은 "끊이지 않는 우울증으로 육신을 계속 괴롭힌다"는 2연 중반 끝 부분까지 이어집니다. 이런 뒤엉킴의 실마리는 아마도 이 구절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러면 육신은 무엇이며 영혼은 또 무엇인가.   시인이 신의 존재를 믿는 종교인이라면 영혼의 불멸 또한 믿어 의심치 않겠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육신'과 '영혼'의 관계는 평생 동안 뇌리에서 지울 수 없는 화두와 같은 것일 수 있습니다. 설사 종교인이 아니더라도 영혼의 불멸을 믿지 않을 수 없게 하는 일은 이 현실사회에서도 얼마나 자주 벌어지고 있습니까. 죽음의 문턱에까지 갔다가 온 사람이 죽어 누워 있는 자신의 모습을 봤다고 하는 경우도 있지요. 이제 대충 짐작이 가지 않습니까? 육신을 계속 괴롭히는 영혼의 병이 나의 큰 문제인 것입니다. 타인에 의해 늘 상처받는 내 영혼의 병인 우울증이 문제인 것입니다.   시인은 "굴욕의 상처들"과 "비굴한 시 쓰기", "그대의 오만함"과 "영혼의 교만함" 등 온갖 자극적인 언어를 동원하면서 굴욕과 비굴, 영혼의 교만함에서 벗어나기를, 고통과 설움이 끝나기를, 그 무엇보다 우울증이 완치되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습니다. 제2연 끝 부분에 이르러 '그날'이란 글자의 분석에 몰입했던 이유가 밝혀집니다.    나는 또다시 이 우울증의 원인 치료를 위해 그날이라는 글자 분석에 몰입한다.   불면증 환자가 잠을 청하기 위해 숫자를 백, 아흔아홉, 아흔여덟, 아흔일곱…… 하면서 밤이 깊도록 세고 있듯이 강성철은, 아니 [그날]의 시적 화자는 우울증에서 벗어나고자 '그날'이라는 글자를 분석하는 데 날이 새는 줄도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울증 환자의 글자 분석의 결과는 어찌 되었을까요.   (ㄱ⇒무엇인가 어긋남, ㅡ⇒동물의 울음, 나⇒egoistic, ㄹ⇒물 흐르듯이;너무 랭보的이어서 나의 우울증은 더욱 심화된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렇게 애를 썼건만 화자의 우울증이 회복되기는커녕 더욱 심화되고 말았다니까요. 이 거대한 정신병동에서 살아가는 현대인의 자화상이 이 괄호 속에 압축되어 있습니다. 너와 나의 관계는 늘 어긋나기만 하고, 인간은 하나님이 숨은 세계에서 승냥이처럼 울 수밖에 없는 존재이며, 나와 타인은 다들 지독한 에고이스트들이고, 나의 우울증은 심화되기만 합니다. 읽고 곧바로 이해되지 않는 시, 여러 번 되풀이해 읽는 동안 뜻이 풀리는 이런 시가 오히려 매력적인 시일 수 있습니다. 1980년대에 한국 시단을 풍미했던 이른바 해체시라는 것에 대해서도 따뜻한 애정의 시선을 갖고 읽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암호 풀기나 미로 찾기 같은 시 읽기이지만 그 속에 오묘한 진리가 들어 있거든요.    7. 시는 인간의 생로병사를 노래한다    인간을 포함한 뭇 생명체의 동일한 운명은 태어난 이상 마땅히 죽는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생로병사는 동서고금의 문학작품에 나타난 가장 보편적인 소재요 주제입니다. 제게 소설작법을 가르쳐주신 김동리 선생님은 "소설로 쓸 만한 소재가 없어 고민하는 학생은 '죽음'을 갖고 써보게. 우리에게 죽음만큼 친숙한 것은 없으니까."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사실 텔레비전 뉴스나 조간신문에 누군가의 '죽음'이 보도하지 않는 날이 있던가요? 그리고 우리 모두는 하루를 살면서 하루를 죽이는, 즉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다는 점에서 운명공동체인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작품을 쓰다가 소재나 주제가 고갈되었다고 여겨지면 누군가의 죽음을 갖고 시를 써보십시오. 죽음이 아니면 탄생과 늙음과 질병 가운데 하나를 택해 써보셔도 좋겠습니다.    묘비들 사이로   아이가 달려온다   기억의 저편으로 아득히 건너간 생애들이   몇 줄 글자로 남아   무릎 키 세우고 있는 사이      네 살배기 아이가 무어라 소리치며   저쪽에서 뛰어 온다   Beloved Wife and Mother 1939-1980   이국 땅에서의 크고 작은 기쁨   설레임과 회한의 날들   꿈결같이 아득히 사라지고   조국 하늘 아래 한 여인의 평생은   한 줄 이국 글자 묘비명으로 남았는데   한 명의 딸과 의학박사란 칭호만이   한 남자의 사십 년 생애가 남긴 모든 것이어서   의·학·박·사   이름 위에 새겨놓은 네 글자   살아남은 자의 애달픈 마음   그 옆의 묘비는 전하는데   내가 지상에 남기고 싶은    단 하나의 풍경처럼   줄지어 선 비석들 넘어   딸아이가 온다   팔랑팔랑    꿈속 나비 같다                            ―김기중, [공원 묘지에서] 전문   김기중은 외국의 한 공원 묘지에서 한국인의 이름을 발견하고서 사뭇 처연한 심사에 사로잡혀 이 시를 썼을 것입니다. 시에 나타난 가족사는 이렇습니다. 한 남자가 40년을 살아 지상에 남겨놓은 것은 한 명의 딸과 의학박사란 호칭이 전부였습니다. 즉, 의학박사의 신분으로 외국의 묘지에 묻혔으니 한 남자의 그리 길지 않은 생애에 공부가 차지한 세월이 거의 대부분이었을 것입니다. 조국의 하늘 아래 남아 있던 아내의 '평생'이 남편의 묘비에 한 줄 이름으로 남게 되었을 뿐이니 그 감회가 착잡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바로 그 착잡한 감회가 마지막 연에 담겨 있습니다.   딸아이는 아마도 성묘하러 온, 죽은 이의 자식이겠지요. 줄지어 선 비석들, 즉 수많은 주검을 뛰어넘으며 가장 최근에 죽은 이의 한 점 혈육이 꿈속 나비같이 팔랑팔랑 옵니다. 사서 중 하나인 {장자}에는 장주가 꿈속에서 본 나비의 고사가 나옵니다. 장주가 꿈에서 호랑나비가 된 꿈을 꾼 것인지 호랑나비가 장주가 된 꿈을 꾼 것인지 알 수 없는 노릇이라는, '물화(物化)'를 설명하는 고사가 생각납니다. 사람의 생이란 일장춘몽이며 남가일몽이란 말이 거짓이 아닙니다. 생에 아무리 집착한들 저승사자의 방문을 막을 길은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언젠가는 죽게 되는 것이며, 지금 죽어가고 있는 것일 뿐일까요? 예술은, 시는 우리 목숨을 부활할 수 있게 합니다. 여러분과 저의 사후에 우리가 써놓은 시를 읽고 누군가 감동을 한다면 우리는 그 독자의 마음속에서 부활한 것입니다. 그래서 시는 영원 회귀를 꿈꾸는 것입니다.    8. 시는 문명비판을 지향한다   20세기를 풍미했던 가장 강력한 시적 사조는 모더니즘이었습니다. 모더니즘이 표방하고 있는 정신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문명비판입니다. 영화는 기술적인 면이 강하기 때문에 문명과 친화가 잘 이뤄지는데 문학은 이상하게도 문명하고는 좀처럼 어울리지를 않습니다. 오늘날 우리 일상생활에 깊숙이 들어와 정보를 제공하고 의사소통을 가능케 하며 오락의 기능을 다하는 컴퓨터를 갖고 쓴 시가 있습니다. 어언 10년 전 일이 되었는데, 러시아의 한 해커가 인터넷을 통해 시티뱅크에 침투해 1천만 달러를 훔쳐간 적이 있습니다. 이제는 컴퓨터를 잘 다루면 복면을 하고 은행털이 강도로 나서지 않아도 됩니다. 미국의 10대 해커들이 뉴저지 공군기지의 한 연구소에 침투한 일이 발생, 미국 사회를 경악케 하기도 했고, 1997년 초에는 호주와 에스토니아의 해커들이 3만 통이 넘는 전자 메일을 쏟아 부어 버지니아 랭글리 공군기지의 컴퓨터 네트워크가 마비된 적도 있습니다. 이처럼 정보 전달이라는 약과 함께 시스템 파괴라는 병을 주는 것이 컴퓨터입니다. 컴퓨터가 사람의 머리와 손발을 대신하여 정보사회의 중요한 전달자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의학계에서는 '테크노 의존증' 혹은 '컴퓨터 중독증'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문명병이 등장하여 급속히 확산되는 중이라고 우려를 표하고 있습니다. 의사들은 기기 자체에서 나오는 전자파도 문제이지만 컴퓨터를 너무 오래 사용하는 바람에 시력장애·경근완 질환(목·어깨·팔에 통증이 오는 병)·두통·소화불량 등의 신체장애는 물론 대인기피증·광장공포증·우울증 같은 정신질환이 컴퓨터를 많이 다루는 현대인들을 위협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런 상황이니 컴퓨터를 소재로 한 시를 젊은 시인들이 쓰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들 대다수는 사실 눈만 뜨면 컴퓨터를 켜고, 컴퓨터를 꺼야 잠자리에 들지 않습니까.    아르바이트를 해서라도 이 기억력 나쁜   고물 PC를 새 걸로 바꾸기로 결심.   언젠가 PC 카탈로그에서 보았던    삼성 알라딘을 사리라 마음먹는다   내 글이 안 되는 건 순전히    도구가 용산 조립품 286AT이기 때문이라   밤마다 기도하며 써 보았지만   고매해야 할 내 시들은 언제나 날림 조립식인 걸   알라딘을 사야지!   그의 자판을 요술 램프처럼 살살 만져 주면   나만의 유능한 종이 나타나   내 명령어들을 충실히 실행할 것이다   넘치는 하드 용량,   풍만한 그의 언어는   이 미궁에서 나의 탈출을 도우리라   사실 이 느림보 286AT에도 요정이 있다   언젠가 치약으로 열심히 PC 본체를 닦다가   난 보고 말았다   디스크 드라이브에서 하품을 켜며 기어 나오는   발이 안 보일 만큼 작은 바퀴벌레 새끼를,   나를 비웃으며 다시 제 집인 양 기어 들어가는   그 자식을 향해 재빨리 플로피 디스크를    몇 번이나 쑤셔 넣었다 뺐다 하며   압살을 노렸지만 디스크만 에러났던 기억.   가끔 모니터 속의 내 글 위로   그 바퀴들이 지나가지는 않을까,   그는 너무 두렵다   내가 잠든 사이 테트리스를 즐기고   어쩌면 이전에 헥사를 지우고,   가끔씩 바이러스를 먹이는 것도   그 요괴임에 난 짙은 혐의를 두었다   베네치아 워드게임에서   '바퀴벌레'란 단어가 내려와 나를 덮칠 때,   난 확신하였다   나의 체제는 이미 위협받고 있었다   놈은 밤마다 용량 작은 하드를 기웃거리며   내 글을 비웃을 거 아닌가?   무슨 시가 이래, 하면서도   내가 방심한 사이 내 연애시를 도용해   행여 또래 암컷들을 사귀지는 않았을까?   그리고 나의 신성한 작업실에서……   온갖 상스런 상상들이 아!   또 잡종의 새끼를 쳐서 손잡고 다니겠지   아, 나의 약한 정신은 이미 도굴되었고……   이제라도 늦지 않았다                            ―김창진, [알라딘을 사야 한다] 전문   컴퓨터는 우리의 친구이자 원수이고 상관이자 부하입니다. 컴퓨터를 소재로 한 이 시를 유심히 읽으면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가 어떤 시대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요술 램프를 문지르면 '유능한 종'이 나타나 소원을 들어주는 {천일야화} 속 유명한 이야기의 그 유능한 종이 알라딘이죠. 이 시에서는 삼성전자에서 만든 신형 컴퓨터의 제품명이 알라딘이므로 알라딘은 중의법으로 쓰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시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신형과 구형의 차이가 아닙니다. "디스크 드라이브에서 하품을 켜며 기어 나오는/발이 안 보일 만큼 작은 바퀴벌레 새끼들"에 대한 이해가 이 시를 이해하는 요체가 됩니다. 요정·바퀴벌레·요괴는 같은 존재의 다른 이름입니다. 그놈들은 시인이 잠든 사이 테트리스를 즐기고, 가끔씩 바이러스를 먹이고, 내 연애시를 도용해 암컷들을 사귀고, 나의 약한 정신을 도굴하는 존재입니다. 여기서의 바퀴벌레는 인간에게 해악을 준다고 알려져 있는 발 빠른 곤충인 그 바퀴벌레가 아닙니다. 컴퓨터 바이러스를 만들어 하드디스크 드라이브에 들어 있는 정보를 파괴하고, 제 마음대로 침입해 남의 정보를 빼 가는 자는 얼굴을 알 수 없는 익명의 존재입니다. "또 잡종의 새끼를 쳐서 손잡고 다니겠지"라는 구절로 보아 그들은 증식까지 하는 모양입니다. 그런 연후에 시인의 약한 정신은 이미 도굴되었지만, "이제라도 늦지 않았다"고 힘주어 결론짓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타인을 향해서는 경고를 주고, 스스로는 각성하자고 다짐해본 것입니다. 인류의 공적(公敵)으로 등장해 암약하는 해커와 바이러스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를 저는 이 시를 통해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런 뜻에서 이 시는 문명비판시이며 일종의 현실풍자시입니다.    9. 시는 독자 감동을 지향한다   근년에 들어 저는 광고 문구 속에 '고객 감동'이라는 말이 들어 있는 것을 몇 번이나 보고 들었습니다. 광고인들도 이제는 광고주가 만든 제품에 새로운 기능이 첨가되어 있으니 쓰던 것을 버리고 우리 제품으로 바꿔 쓰라고 강요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소비자들의 욕구를 충분히 만족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있음을 강조하지요. 향상된 기능으로 당신들을 감동시킬 만큼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고 자랑을 합니다. 그런데 시가 지향하는 최고의 미덕이야말로 감동이 아니겠습니까. 격렬한 감동이든 잔잔한 감동이든 시를 읽으며 느낀 감동은 우리의 뇌리를 좀처럼 떠나지 않습니다.   아버지 따라가 묵정밭을 맨 적 있습니다. 쇠비름풀 여뀌 바랭이서껀 이런 저런 잡초들 수없이 뽑아 던졌습니다. 검붉은 맨살의 흙이 드러나면서 밭뙈기 한 두락이 새로 나는 것 볼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 일평생 마침내 논 서른 마지기 이루고, 그러나 송충이 같은 자식들, 그 푸르게 일렁이던 논들 다 갉아먹어 버리고 빈 들 노을 아래 서 있던……   아버지, 일흔 중반 넘어서면서 망령드셨습니다. 처음에는 세상사 관심거리가 하나 둘 줄어들더니, 마을이나 집안 대소사는 물론 식솔들의 잦은 불상사에 대해서도 영 남의 일이 되어갔습니다. 그리고 나서 아버지, 사람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나중에는 당신의 자식들, 심지어는 늘 곁에서 수발 드는 어머니 보고도 당신 누구요, 우리 집사람 못 봤소, 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다음 아버지, 이미 다 닳아 치우고 없는 농토, 그 논에 물꼬 보러 간다며 나섰습니다. 없는 소, 없는 일꾼들을 부렸습니다. 품안의 새끼들을 어르고 입안의 혀 같은 당신의 아내와 자주 두런거렸습니다. 그러기를 십여 년, 어느 날 아버지, 검불같이 남아 있던 당신의 육신까지도 뽑아 던졌습니다. 그렇게 돌아가신……   아버지, 비로소 아버지의 풀 뽑기가 마저 끝났습니다. 번듯하게 눕는 아버지의 땅, 그곳으로 드는 아버지, 아버지, 보였습니다.                            ―문인수, [풀뽑기] 전문   아버지를 따라가 묵정밭을 맸던 어린 날의 추억에서부터 시는 전개됩니다. 쇠비름풀·여뀌·바랭이 같은 잡초들을 수없이 뽑아 던져야 밭뙈기 한 두락이 새로 태어나는데, 아버지는 평생을 바쳐 논 서른 마지기를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송충이 같은 자식들이 푸르게 일렁이던 논들 다 갉아먹고 기진맥진한 아버지는 노을녘에 서서 빈 들만 바라보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슬픈 초상은 빈 들, 즉 당신의 피땀으로 일구었건만 "이미 다 닳아 치우고 없는 농토"가 된 들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으로만 그려지지 않습니다. 삶의 비애는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아버지는 일흔도 중반이 넘어 노인성 치매를 앓는 환자가 되셨는데, 증세가 나날이 심해져 자기 아내도 못 알아볼 지경에 이릅니다. 망령은 들었어도 아버지는 소몰이며 땅을 일구는 일에 인이 박인 농투성이였습니다. 가지고 있는 논도 없는데 물꼬 보러 간다며 나서고, 없는 소, 없는 일꾼들을 부리는 망령을 보입니다. 그러기를 십여 년, 그간 가족의 녹아 내린 애간장이 어떤 색깔을 띠고 있는가를 상상하기란 어렵지 않습니다. 윤회를 믿는 불가에서는 전생의 원수들이 모여 가족을 이룬다는 말을 하지 않습니까. 내가 아버지라고 부르는 이가 나를 아들로 보아주지 않는 슬픔, 죽음을 목전에 두고 헛소리를 하는 아버지를 마냥 바라보고 있어야만 하는 슬픔이 목젖을 차고 오릅니다. 이 슬픔은 은유나 상징 같은 시적 기교를 허락하지 않습니다. 문인수는 그저 뭉툭한 필묵으로(평이한 필체로) 아버지의 초상화를 스케치하고 있을 뿐입니다. 잡초를 수없이 뽑아 던졌던 아버지는 검불같이 남아 있던 당신의 육신을 끝내는 뽑아서 땅에 던집니다.     아버지, 비로소 아버지의 풀 뽑기가 마저 끝났습니다. 번듯하게 눕는 아버지의 땅, 그곳으로 드는 아버지, 아버지, 보였습니다.   눈물을 감추고 있어 오히려 눈물겨운 마지막 연입니다. 한평생 풀 뽑는 일을 멈추지 않으셨던 아버지가 자신의 몸을 마지막으로 땅에서 뽑아 반듯하게 관에 드러누움으로써 생애가 완성되었습니다. 뽑혀진 풀이 흙의 일부가 되듯이 인간의 육신도 흙의 일부가 됩니다. 문인수는 아버지의 초상을 이 시에 그려놓은 것일 테지만, 저는 땅을 파며 한 생을 살다 땅으로 들어가 마감하는 이 땅의 수많은 아버지의 모습을 [풀 뽑기]라는 한 편의 시를 통해서 봅니다. 아버지의 풀 뽑기도 개간을 위한 창조 행위였고, 아들의 [풀 뽑기]도 '시'를 이룬 창조 행위였으니 그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시인은 이 시에서 눈물을 애써 감추고 있지만, 뭇 독자의 심금은 그것 때문에 울려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비장미를 미의 하나로 취급해온 것일 테지요.    영화며 컴퓨터 게임 등 재미있는 것이 무궁무진하게 많아진 오늘날 시의 기능, 시의 역할은 무엇일까요. 기상천외한 실험과 발명 및 파괴로 과학적 언어로밖에 대화할 줄 모르는 우리의 인식지평을 넓혀주는 것이 첫째 역할일 것입니다. 그러나 정보의 홍수 속에서 먹고사는 문제에 부대끼느라 무뎌진 우리의 가슴에 서정의 물살을 와 닿게 해 잠시나마 감동하게 하는 것, 그 기능도 결코 무시해서는 안 될 일입니다. 서정의 물살이 워낙 약해 비록 눈물을 글썽이지는 않더라도, 이 세상에는 감동하거나 감격할 일이 너무 적지 않습니까. 감동적인 시는 이렇듯 우리의 눈시울을 적시게 하는 슬픔의 힘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10. 시는 상상력의 산물이라는 점에서는 거짓말이다   1997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의 제목은 '정동진역'입니다. 가운뎃부분에 "해안선을 잡아놓고 끓이는 라면집과/파도를 의자에 앉혀놓고/잔을 주고받기 좋은 소주집이 있다"는 아주 재미있는 표현이 보이는 시입니다.    겨울이 다른 곳보다 일찍 도착하는 바닷가   그 마을에 가면   정동진이라는 억새꽃 같은 간이역이 있다.   계절마다 쓸쓸한 꽃들과 벤치를 내려놓고   가끔 두 칸 열차 가득   조개껍질이 되어버린 몸들을 싣고 떠나는 역.   여기에는 혼자 뒹굴기에 좋은 모래사장이 있고,   해안선을 잡아놓고 끓이는 라면집과   파도를 의자에 앉혀놓고   잔을 주고받기 좋은 소주집이 있다.   그리고 밤이 되면    외로운 방들 위에 영롱한 불빛을 다는   아름다운 천장도 볼 수 있다.   강릉에서 20분, 7번 국도를 따라가면   바닷바람에 철로 쪽으로 휘어진 소나무 한 그루와   푸른 깃발로 열차를 세우는 역사(驛舍),   같은 그녀를 만날 수 있다.                             김영남, [정동진역] 전문   김영남은 등단작의 제목을 그대로 첫 시집의 제목으로 삼았는데, 그 첫 시집의 해설을 제가 썼기에 이 시의 생산 과정을 본인한테 들을 수 있었습니다. '모래시계'이던가요, 텔레비전 드라마의 촬영 장소가 됨으로써 세상에 알려진 정동진역은, 1996년까지만 해도 해돋이 관광 명소가 아니었습니다. 그곳 경치가 제법 괜찮다는 것 정도가 몇몇 사람에게 알려져 있었지요. 어느 신문기자가 누군가로부터 정동진역 풍광이 좋다는 말을 듣고 직접 갔다와서는 '알려지지 않은 곳, 그러나 가볼 만한 곳'이라며 그곳을 소개하는 기사를 썼습니다. 김영남은 그 기사를 읽고 일필휘지하여 이 시를 썼습니다. 물론 가본 적이 없었지요. 신문기사 한 쪼가리도 유심히 읽는 관찰력이 그에게 시인이란 타이틀을 붙여주었습니다. {죄와 벌} {테스} {여자의 일생} 등 세계명작 가운데 짧은 신문기사를 읽고, 그것을 갖고 쓴 것이 아주 많습니다. 시도 소설과 마찬가지로 관찰하고 기록하기입니다. 텔레비전 드라마든 영화든 관찰의 안테나를 세우고 유심히 보면 거기서 시의 제재가 나옵니다. 친구의 이야기든 소설 속 주인공의 이야기든 유심히 들으면 거기서 시의 제재가 나옵니다. 모든 사물과 모든 생명체가 시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시는 열려 있는 총체입니다. 시는 그 어떤 인접예술과도 교배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거짓말을 능수능란하게 하되 시적 진실을 표방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시인이 정동진역에 전혀 가본 적이 없으면서 이런 시를 썼다고 하여 우리는 시인을 비난할 수 없습니다. 앞에서는 저는 시가 시인 자신의 체험의 산물이라는 말씀을 드렸는데 한편으로는 이렇게 신문기사를 읽은 간접체험에다가 상상력을 보태어도 얼마든지 재미있는 혹은 훌륭한 시를 쓸 수 있음을 말씀드립니다. 안 보고도 본 척, 안 겪고도 겪은 척, 모르고도 아는 척하는 사람이 또한 시인입니다. 시인은 신문기사를 보고도, 책을 읽고도, 영화를 보고도 시를 쓸 수 있습니다, 간접적으로 체험한 것을 직접 체험한 양 둘러칠 수 있는 능력이 시인됨의 기본 능력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오늘 이 자리에 시인의 자격으로 왔으니까 마지막으로 제 시를 한 편 낭송해 드릴까 합니다.    볼품없이 누워 계신 아버지   차갑고 반응이 없는 손   눈은 응시하지 않는다   입은 말하지 않는다   오줌의 배출을 대신해주는 도뇨관(導尿管)과   코에서부터 늘어져 있는   음식 튜브를 떼어버린다면?      항문과 그 부근을   물휴지로 닦은 뒤   더러워진 기저귀 속에 넣어 곱게 접어   침대 밑 쓰레기통에 버린다   더럽지 않다 더럽지 않다고 다짐하며   한쪽 다리를 젖히자   눈앞에 확 드러나는   아버지의 치모와 성기      물수건으로 아버지의 몸을 닦기 시작한다   엉덩이를, 사타구니를, 허벅지를 닦는다   간호사의 찡그린 얼굴을 떠올리며   팔에다 힘을 준다   손등에 스치는 성기의 끄트머리   진저리를 치며 동작을 멈춘다   잠시, 주름져 늘어져 있는 그것을 본다   내 목숨이 여기서 출발하였으니   이제는 아버지의 성기를 노래하고 싶다   활화산의 힘으로 발기하여   세상에 씨를 뿌린 뭇 남성의 상징을   이제는 내가 노래해야겠다   우리는 모두 이것의 힘으로부터 왔다   지금은 주름져 축 늘어져 있는   아무런 반응이 없는 하나의 물건      나는 물수건을 다시 짜 와서   아버지의 마른 하체를 닦기 시작한다.                            ―졸시, [아버지의 성기를 노래하고 싶다] 전문   솔직히 말씀드려 이 시는 완벽한 거짓말입니다. 제 아버님은 이날 이때껏 입원이라는 것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허리가 많이 안 좋으십니다만 올해도 고향에서 밭농사를 짓고 계신 분입니다. 그런데 이 시를 읽은 많은 독자가 대부분 실제상황인 줄 알고 제게 물어왔습니다. 부친을 간병하느라 고생이 많았겠다는 위로의 말을 들을 때마다 곤혹스럽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했던 기억이 납니다. 이 시는 재미교포 2세인 루이스 최가 쓴 {생명일기}(김유진 옮김, 김영사 간행)라는 간병기를 보고 제 체험인 양 가져와서 쓴 것입니다. 물론 아버지의 성기 운운하는 대목은 그 책에 나오지 않습니다. 식물인간의 상태가 된 어른을 간병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여실히 기록되어 있는 그 책을 보고 만약 제 아버지가 저런 상태가 되었다면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상상해보면서 한 편의 시를 썼던 것입니다. 이 시가 시적 진실을 추구하는지 어떤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책을 통한 간접체험을 직접체험으로 슬쩍 바꿈으로써 시를 쓸 수 있었습니다. 한 인간의 체험에는 한계가 있는 법인데, 간접체험과 상상력은 그 한계를 무한정 확장해 줍니다.    자, 그럼 이것으로써 제 강연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지금까지 제 얘기를 경청해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열 가지 방법론에 입각하여 전개한 제 얘기가 여러분의 시작활동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면 좋겠습니다. 여러분 모두 좋은 작품 쓰시길 기원합니다. 고맙습니다.      
882    관념어와 상투어는 詩를 죽인다... 댓글:  조회:4792  추천:1  2016-01-08
  시를 죽이는 관념어, 상투어     관념어 - 손으로 만질 수도 눈으로 볼 수도 없는 개념을 가리키는 말 상투어 - 남들이 하도 많이 사용을 해서 이제는 시적 언어로써의 순결성을 상실한, 이른바 非 處女的 詩語     갈등 갈망 갈증 감사 감정 개성 격정 결실 고독 고백 고별 고통 고해 공간 공허 관념 관망 광명 광휘 군림 굴욕 귀가 귀향 긍정 기도 기억 기원 긴장 낭만 내공 내면 도취 독백 독선 동심 명멸 모욕 문명 미명 반역 반추 배반 번뇌 본연 부재 부정 부활 분노 불면 비분 비원 삭막 산화 상실 상징 생명 소유 순정 시간 신뢰 심판 아집 아첨 암담 암흑 애련 애수 애정 애증 양식 여운 역류 연소 열애 열정 영겁 영광 영원 영혼 예감 예지 오만 오욕 오한 오해 욕망 용서 운명 원망 원시 위선 위안 위협 의식 의지 이국 이념 이별 이역 인생 인식 인연 일상 임종 잉태 자비 자유 자학 잔영 저주 전설 절망 절정 정신 정의 존재 존중 종교 증오 진실 질서 질식 질투 차별 참혹 처절 청춘 추억 축복 침묵 쾌락 탄생 태만 태초 퇴화 패망 편견 폐허 평화 품격 풍자 피폐 필연 해석 행복 향수 허락 허세 허위 현실 혼령 혼령 화려 화해 환송 황폐 회상 회억 회의 회한 후회 휴식 희망   상투성과 싸우는 자는 관념어와 싸우는 자이기도 하다. 시의 나라에서 관념어는 죽은 말이다. 말의 주검에서는 삶이 나올 수 없다. 시는 몸을, 육질을 더듬고 탐하는 일이지, 추상세계를 고공비행하는 일이 아니다. 죽은 언어는 죽은 인식을 낳고, 진부한 말은 진부한 생각을 만든다. ‘애수’(유치환)도 ‘애증’(박인환)도 ‘견고한 고독’(김현승)도 시의 세계에선 사어다. “시간의 무덤에서 하얗게 풍화된 죽은 말들이다.” 그러므로 지은이는 말한다. “진정한 사랑은 개념으로 말하는 순간 지겨워진다. 당신의 습작노트를 수색해 관념어를 색출하라. 그것을 발견하는 즉시 체포하여 처단하라. 암세포와 같은 관념어를 죽이지 않으면 시가 병들어 죽는다.”  - 안도현     다음의 동시를 살펴보며 관념어와 상투어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달이 밝아서 연잎 위에  청개구리 “퐁당” 달 따러 가네. ――――― 박용열, 『달밤』 도봉산 오르는 길에  쉼표 하나, 까치집 하나 도봉산 오르는 길에  느낌표 하나, 까치 한 가족 오르고 내리는 길  발걸음을 어디서 멈춰야 하느냐. 내려오는 도봉산 길에  물음표 하나, 까까중 하나 ――――― 김문기, 『도봉산 오르는 길에』 위 동시들에서는 관념어나 상투어를 지적할 수 있을까요? 굳이 의문점을 찾아본다면, 『달밤』에서 ‘달이 밝아서’가 상투어일가? 『도봉산 오르는 길에』에서 ‘물음표 하나’ 등이 관념어일까? 그러나 이들 詩語는 시적 흐름의 개연성에 바탕을 둔, 더 이상 구체어나 참신한 시어를 찾아낼 필요가 없는 것들입니다. 말하자면, ‘달이 밝아서’가 정답이지 ‘달이 무척 밝아서’ ‘달이 거울 같아서’라는 식의 구체어를 찾아낼 필요도 없고 더 이상의 수식이나 기교가 필요치 않은 것입니다. 그리고 ‘쉼표 하나’ ‘느낌표 하나’ ‘물음표 하나’ 역시 각 연에서의 묘사가 지극히 구체적이고 무리 없이 읽히고 있기에 관념어라는 지적을 피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반면, 다음의 습작품을 보겠습니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  채송화 마음이  화단 맨 끝에 옹글송글 ――――― 직자 미상, 『채송화』 겨울 동안 움츠렸던  언어들이  하나 둘 피어난다. 봄의 문턱에서  삼백 예순 다섯 날  두 손 모아 ――――― 직자 미상, 『목련』 위 습작품에서 우리는 ‘채송화 마음’과 ‘언어들’이 관념어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음에 주목해야 합니다. 개략적이고 포괄적이고 추상적인 詩語들인 것입니다. 그로 인해 실제적으로 어떤 이미지나 의미를 보여주려는지, 애매모호해졌습니다. 채송화 마음 …………? 언어들 ………………? 시적 대상에 대한 어떤 특별한 인식이 작자의 머리 속에서만 맴돌고 있지, 그것을 실제적이고도 효과적으로, 더 나아가 미적 차원으로 전달해 주려는 노력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위 두 습작품에서 ‘작은 것이 아름답다.‘와 ‘봄의 문턱에서’ 등은 상투어에 속합니다. 지금까지 어디서 익히 접해본, 남들이 너무 자주 사용해온 詩語들 아닙니까? 작은 것이 아름답다. ………… (어느 시에서?) 봄의 문턱에서 ………………… (어느 유행가에서?) 좋은 동시를 창작하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고 즉흥적 감상만을 쉽게 기술하려다 보니 남들이 이미 숱하게 써먹은 구절이나 차용했다는 것이고 이는 지극히 바람직하지 못한 태도입니다. 엄마의 사랑은 하나님 같아.  아기를 재우고도  마음이 졸여  젖병을 들고서 지켜보지요. ――――― 습작품, 『엄마의 사랑』 위 습작품에서 ‘엄마의 사랑’과 ‘하나님’은 관념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종교 문제를 떠나, 시적 표현으로써 너무 추상적이고 너무 큰 사상성을 띠고 있질 않습니까? 말하자면, 관념어로 인해 너무나 많은 해석이 가능하고 그만큼 詩想이 혼란스럽다는 뜻입니다. 가을이 왔다.  낙엽 하나  둘  셋  떨어져  거리를 쏘다니고 있다. ――――― 습작품, 『가을날』 위 습작품에서 ‘가을이 왔다.’와 ‘낙엽 하나 둘 셋 /떨어져’는 상투어의 범주에 속합니다. 너무 흔한 표현으로써 이미 동시의 시어로 사용할 가치가 퇴색된 낱말들입니다. 그럼 이제부터는 관념어와 상투어를 가려내고 배제시키는 노력을 해보겠습니다. 상당한 노력을 요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시적 대상에 대한 면밀한 관찰과 그 관찰에서 얻어진 이미지나 의미에 좀 더 참신하고 적절한 시어를 부여해 주는 일입니다. 햇살은 연못을 사랑합니다. 그 사랑으로 피어난 연꽃 한 솔이  이윽고  보답이라도 하듯  하늘을 향해 활짝 웃고 있습니다. ――――― 습작품, 『연못을 보며』 중에서 위 습작품에서는 ‘사랑’이 관념어입니다. 포괄적이고 추상적인 개념으로써, 그것(사랑)이 어떤 것인지 명료하게 와 닿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관념어를 눈에 보이듯 선명한 상황으로 고쳐주어야 합니다. 햇살이 연못에 내려앉아  반짝반짝 노래합니다. 이윽고  연꽃 한 송이  하늘을 향해 고맙다며  반짝반짝 노래합니다. ――――― 고쳐 쓴 작품, 『연못을 보며』 이렇게 고쳐보았습니다. ‘사랑’이라는 관념을 ‘연못에 내려앉아 반짝반짝 노래하는’ 회화적 이미지로 바꿔놓은 것입니다. 그 때문에 연못의 풍경이 선명하게 보이질 않습니까? 자동차들이  시커먼 연기를 내뿜으며  무섭게 내달리는 큰길 가  보도블럭 사이를  헤집어  노랗게 꽃 피우는  내 옛날의 민들레야. ――――― 습작품, 『민들레』 도시의 거리에도, 숱한 사람들이 바쁘게 오고가는 그 발 아래에도, 민들레 꽃씨가 떨어져 곱게 꽃 피울 때가 있습니다. 얼마나 반갑겠습니까? 그러나 적어도 문학적 양식으로 그 반가움을 담아낼 때엔 엄격한 창작 논리가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우선적으로 상투어를 배제해야 합니다. 사실 자동차들은, 시커먼 연기를 내뿜으며 무섭게 내달리는 이런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는데, 그러나 위 습작품에선 그것을 그대로 묘사해 버리는 미숙함을 드러냈습니다. 적어도 동시에서는 그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이미지를 그냥 그대로 구사해서는 안 됩니다. 남들이 다 알고 있는 묘사 아닌가요? 시시할 뿐입니다. 그러기에 자기 나름의 참신하고 독창적 시어를 구사해야 좋은 동시로 평가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럼 위 습작품에서 그 상투어를 배제해 보겠습니다. 자동차들이 숱하게 지나가도  다시 와 너를 짓밟아도 오, 너의 보금자리. 민들레 씨앗 떨어져  다시 보는, 노란 꽃등  내 어린 날을 밝혀주는구나. ――――― 고쳐 쓴 작품, 『민들레』 이렇게 상투어를 배제하고 좀 더 가다듬으니 한결 산뜻하게 느껴질 것입니다. 원 작품과 고쳐 쓴 작품의 차이가 ‘커다란 차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곧 문학작품에서 상투어의 폐해가 얼마나 심각한가를 역설적으로 증명하는 셈입니다. 지금까지 관념어와 상투어의 실체에 대해 살펴보았거니와 계속 수련을 쌓아 그것을 극복해 나가기 바랍니다.        
881    詩짓기에서 자기나름의 펌프질을 해라... 댓글:  조회:4195  추천:0  2016-01-08
  고영민///                시작방법|                // 1. 자기의 핵심역량을 찾아라!   - 누구나 가장 잘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걸 찾으면 됩니다. 남을 따라하면 절대 최선을 다해도 최고가 될 수 없습니다. 내가 가장 잘 하는, 잘 쓸 수 있는 것이 뭔지를 찾아야 합니다. 자기와 맞는 글쓰기를 찾으세요! 거북이와 토끼가 경주를 합니다. 산에서 경주를 하면 백이면 백, 토끼가 이깁니다. 거북이가 이기는 방법은 바다에서 경주를 하는 것입니다. 내가 토끼인지, 거북이인지 먼저 판단을 해야 합니다. 바다로 갈지 산으로 갈지 판단해야 합니다. 내가 잘 할 수 있는 글쓰기를 하세요! 그걸 찾는 것이 우선입니다.     앵두 / 고영민   그녀가 스쿠터를 타고 왔네 빨간 화이바를 쓰고 왔네   그녀의 스쿠터 소리는 부릉부릉 조르는 것 같고, 투정을 부리는 것 같고 흙먼지를일구는 저 길을 쒱, 하고 가로질러왔네 가랑이를 오므리고 발판에 단화를 신은 두 발을 가지런히 올려놓고 허리를 곧추세우고, 기린의 귀처럼 붙어 있는 백미러로 지나는 풍경을 멀리 훔쳐보며 간간, 브레끼를 밟으며   그녀가 풀 많은 내 마당에 스쿠터를 타고 왔네 둥글고 빨간 화이바를 쓰고 왔네     2. 차별화 해라   - 에서 자신의 핵심역량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자신이 토끼인지, 거북이인지 먼저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하여, 내가 거북이라고 판단을 해서 바다로 갔습니다. 그런데 바다에 갔더니 나 말고도 날고 기는 거북이들이 수두룩 한 것입니다.   그럴때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저 역시 바다에 갔더니, 나와 비슷한 함민복 거북이, 이정록 거북이, 손택수 거북이, 문태준 거북이들이 먼저 장악을 하고 있더군요. 이 상황에서 필요한 것은 바로 차별화입니다. 이들이 갖고 있지 않은 것을 가지고 글쓰기의 승부를 거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그 차별화의 전략으로 위트, 해악, 쉽게 쓰기, 12남매의 가족사 등을 가지고 승부를 걸었습니다. 이것이 내가 그들과 차별화 될 수 있는 방법이었습니다.   여러분이 토끼라고 판단을 했다면 토끼가 있는 곳을 한번 가볼까요? 그곳엔 이미 황병승 토끼, 김행숙 토끼, 김민정 토끼, 강정 토끼 등이 이미 토끼 마을을 장악했군요! 당신이 만약 조금 늦게 토끼 마을에 갔다면 어떻게 차별화 시킬 예정입니까? 산토끼 토끼야~ 어디를 가느냐? 깡총깡총 뛰면서 어디를 가느냐? 자~ 당신을 차별화 하시기 바랍니다!!   똥구멍으로 시를 읽다 - 고영민   겨울산을 오르다 갑자기 똥이 마려워 배낭 속 휴지를 찾으니 없다 휴지가 될만한 종이라곤 들고 온 신작시집 한권이 전부 다른 계절 같으면 잎새가 지천의 휴지이련만 그런 궁여지책도 이 계절의 산은 허락치 않는다 할 수 없이 들려 온 시집의 낱장을 무례하게도 찢는다 무릎까지 바지를 내리고 산중턱에 걸터앉아 그분의 시를 정성껏 읽는다 읽은 시를 천천히 손아귀로 구긴다 구기고, 구기고, 구긴다 이 낱장의 종이가 한 시인을 버리고, 한권 시집을 버리고, 자신이 시였음을 버리고 머물던 자신의 페이지마저 버려 온전히 한 장 휴지일 때까지 무참히 구기고, 구기고, 구긴다 펼쳐보니 나를 훑고 지나가도 아프지 않을 만큼 결이 부들부들해져 있다 한 장 종이가 내 밑을 천천히 지나간다 아, 부드럽게 읽힌다 다시 반으로 접어 읽고, 또다시 반으로 접어 읽는다      계란 한판 - 고영민   대낮, 골방에 쳐박혀 시를 쓰다가 문 밖 확성기 소리를 엿듣는다 계란 …(짧은 침묵) 계란 한 판 …(긴 침묵) 계란 한 판이, 삼처너언계란 …(침묵)…계란 한 판 이게 전부인데, 여백의 미가 장난이 아니다 계란, 한 번 치고 침묵하는 동안 듣는 이에게 쫑긋, 귀를 세우게 한다 다시 계란 한 판, 또 침묵 아주 무뚝뚝하게 계란 한 판이 삼천 원 이라 말하자마자 동시에 계란, 하고 친다 듣고 있으니 내공이 만만치 않다 귀를 잡아당긴다 저 소리, 마르고 닳도록 외치다 인이 박혀 생긴 생계의 운율 계란 한 판의 리듬 쓰던 시를 내려놓고 덜컥, 삼천 원을 들고 나선다.     3. 경험을 써라! 가장 절실한 것을 써라! 줄거리(서사)를 만들어라!(공광규 시인의 시 작법과 동일)에서 한가지를 더 추가하면 '드라마틱'을 만들어라!     좋은 시에는 분명 드라마틱이 있다. 드라마틱을 만들기 위해서는 3미를 창출해야 한다. 3미란 바로 흥미, 의미, 재미이다. 드라마틱은 경험이고, 진실함이고, 줄거리를 갖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속에 독자의 관심을 끌 수 있는 흥미, 그리고 그 안에 의미를 집어넣을 수 있는 능력, 그리고 재미를 주는 것이다. 하지만 너무 흥미를 추구하면 소재주의에 빠진다 너무 의미만을 추구하면 잠언에 빠진다. 너무 재미만을 추구하면 꽁트가 된다. 이 상태를 얼마나 적절하게 간을 맞출 수 있는가가 시인의 관건이다.   시를 잘 쓰는 사람은 대체로 간을 잘 맞춘다. 당신이 만약 음식 솜씨가 없고 간을 잘 못 맞춘다면 시쓰기를 일찍 포기하는 것이 좋다^^ 우리 딸이 귓속말로 하는 말 “엄마가 끓인 라면보다 아빠가 끓인 라면이 훨씬 맛있어요!” 결국 시도 간을 맞추는 것이다. 얼마나 면발을 꼬들꼬들하게 할 것인지!, 냄비에 물을 얼마만큼 넣을 것인지! 불의 세기를 얼마만큼으로 조절할 것인지!!   퍼진 글을 내 놓는 것은 퍼진 라면을 독자에에 먹으라고 내놓은 라면가게 주인처럼 무책임한 것이다.   공손한 손 - 고영민   추운 겨울 어느날 점심을 먹으러 식당에 들어갔다 사람들이 앉아 밥을 기다리고 있었다 밥이 나오자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밥뚜껑 위에 한결같이 공손히 손부터 올려놓았다     너와 동침을 한다 - 고영민   시외버스를 탄다 운주사행 표를 들고 자리를 찾으니 한 여자 내 옆자리에 다소곳이 앉아 슬며시 다리를 비킨다 창문은 계속 풍경만을 버릴 뿐 말 한마디 붙이지 않고 순간 여자가 불상처럼 잠들어 나도 그녀의 이불 속에 입정한다 아, 너였구나 문득 내 어깨에 얹혀지는 머리 여자는 내 어깨 위 열반인 양 들고 삼천의 인연이었을 이 옷깃의 여자 등받이를 적당히 눕혀 외간 남자와 나란히 잠이 들었다 잠든 사이, 이불은 계속 울음을 틀어막지만 한 계집아이가 붉은 이불 속에서 기어나오고 미륵의 사내아이가 기어나오고 기어나오고, 날은 저물어 버스는 오체투지로 들녘을 넘고 고개 능선을 지나 마을마다 돌 하나를 올려놓는다 그녀와 하룻밤 천불천탑을 쌓고 와불을 일으켜 세울 즈음 누군가 어깨를 흔들어 깨운다 어쩌나, 첫닭이 운다 그러나 아, 진정 용화세계가 너였구나 헝클어진 머리와 옷매무새를 다시 추스르며 와불은 스스로 일어난다 성급히 차문 밖으로 나오니, 일주문 안으로 사라지는 여자 천천히 불상 속으로 들어가 천년을 그 자리에 누워 있다       4. 끊임없이 펌프질을 해라     펌프질을 안하고 반나절만 그냥 놔두면 펌프속의 물은 다시 땅속으로 잦아든다. 그럴 땐 한바가지 마중물을 붓고 다시 열심히 펌프질을 해야 한다. 처음엔 탁한 물이 나오다가 나중에 차고 맑은 물이 나오기 시작 한다.   시도 마찬가지이다. 펌프질을 안하면 뻔한 내용의 글을 쓰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시상이 떠오르면 계속 파고 들어가야 한다.   일전에 시창작 강의를 한번 한 적이 있다. 5팀으로 나뉘어 학생들을 대상으로 게임을 해보았다. “당신에게 소포가 배달되었습니다. 도장을 찍지 않으면 배달된 소포를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도장은 있고 인주가 없네요! 인주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을 3분 동안 최대한 써보시기 바랍니다”   3분 동안 대략 각 팀마다 30개 정도 인주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을 써냈다. 하여, 각 팀마다 처음 생각한 것 5가지를 불러보라고 했다. 대답은 거의 비슷했다. 물감, 피, 흙, 봉숭아꽃, 김칫국물....뭐 이런 식이었다.   그럼 제일 끝에 나온 5가지를 불러보라고 했다. 대답이 가관이었다. 상상을 초월하는 대답들이 나왔다.   제가 드리고 싶은 것은 바로 처음 생각한 5가지는 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내가 생각한 것을 남도 똑같이 생각한다는 것이다. 뻔한 시가 된다는 말이다. 결국 시가 되는 것은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상상을 초월하는 가장 밑의 것을 끄집어 낼 때 가능한 것이다. 펌프질을 하면 처음엔 흙탕물이 나온다. 하지만 계속 펌프질을 하면 차고 맑은 물이 나온 것과 동일하다. 상투성을 벗는 것이 시에서는 무엇보다 중요하다.     꽃눈이 번져 - 고영민   잠이 오지 않을 때면 누군가 이 시간, 눈 빠알갛게 나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자꾸만 나를 흔들어 깨운다는 생각이 든다 당신을 만나기 위해 눈 부비고 일어나 차분히 옷 챙겨 입고 나도 잠깐, 어제의 그대에게 멀리 다니러간다는 생각이 든다 다녀올 동안의 설렘으로 잠 못 이루고 소식을 가져올 나를 위해 돌을 괸 채 뭉툭한 내가 나를 한없이 기다려준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다 순간, 비 쏟아지는 소리 깜박 잠이 들 때면 밤은 더 어둡고 깊어져 당신이 그제서야 무른 나를 순순히 놓아줬다는 생각이 든다 당신도 지극한 잠속에 고이어 자박자박 숨어든다는 생각이 든다 그대에게 다녀간 내가 사뭇 간소하게 한 소식을 들고 와 눈 씻고 가만히 몸을 누이는 이 어두워 환한 밤에는     5. 쓰고, 또 쓰고, 또 써라! 그 외에 어떤 방법이 없다.     나는 시인이 되는 게 꿈이 아니었고 소설가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그런데 생각지도 않게 시인이 되어 버렸다. 생각지도 않게 시인이 되어버렸을 때 나는 시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는 청맹과니였다. 어떤 것이 좋은 시인지도 어떤 것이 좋지 않은 시인지도 구분할 줄 모르는 상태였다.   한마디로 나는 공짜로, 눈먼 잉어가 걸린 격으로 시인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너무 무섭고 떨렸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미친 듯이 쓰는 방법 밖에 없었다. 나는 새벽에 일어나 시가 될만한 것이 있을까 일어나 돌아다니기도 했다. 그 사연을 소개한다. 지금 여기에 들어와 이 글을 읽는 모든 분은 당시의 나 보다 훨씬 시에 대해서 많이 알고 경험이 있으리라 본다. 그래서 용기를 갖고 자신에게 도전을 해보길 권한다. 누구나 가장 잘 쓸 수 있는 자기 만의 핵심역량을 갖고 있다. 그걸 찾아 쓰고, 또 쓰고 또 쓰길 바란다. 시가 당신에게 넙죽 절을 하며 찾아 올 것이다. 자신을 믿어라! 불안해도 믿어라!       “안녕하세요? 문학사상사입니다.” “축하합니다.”   봄날 오후 화장실에 가서 끙, 누런 뱀 한 마리를 풀어주고 자리에 앉자마자 핸드폰으로 이런 연락이 왔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이제 드디어 10년 가까이 써온 나의 소설이 대한민국 문단에 인정을 받게 되는구나, 순간 생각했다. 그렇잖아도 바로 전년, 나는 모 신춘문예 최종심과 의 소설 부문 본심에서 고배를 받아든 선례가 있었던지라 수화기에서 들려오는 그 축하합니다, 라는 목소리에서 전해지는 감회라는 것은 더더욱 남다를 수 밖에 없었다. 나는 그래도 혹시, 하는 생각에 전화를 준 문학사상사의 여직원 분에게 이렇게 물었다.  “소설입니까? 시입니까?”  그러자 답변이 걸작이었다.  “소설도 내셨어요?”   전화기를 내려놓은 다음 나는 기쁨보다는 시에 당선되었다는 당혹스러움에 어찌할 바를 몰라 그해, 먼저 등단한 친구 윤에게 전화를 했다. 그는 이건 정말 쾌거가 아닐 수 없다며, 학교 동기들의 인터넷 카페에 이렇게 대문짝만하게 글을 올려놓았다.   “고영민 문학사상 신인상 당선(소설 아님. 진짜 시 부문이라고 함)”    이렇게 하여 나는 과 인연을 맺고 소설가가 아닌 시인이 되어 버렸다. 마치 뭘 어떻게 첫날밤을 치러야 할지 모르는 꼬마 신랑을 신방에 밀어 넣고 불을 꺼버린 그런 형국과 다를 바가 없었다. 학교에도 소문이 퍼져 한동안 나를 가르치신 교수님들 사이에서 웃지 못 할 한 사건으로 회자되기도 했다고 들었다. 아닌 게 아니라, 몇 달 후 길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소설 지도교수님으로부터 다짜고짜 “너 도대체, 뭐 하는 놈이야, 임마”라며 드잡이에 꾸지람(?)까지 들어야 했다.     2002년 6월 은 나의 인생에 그렇게 일대 변혁을 불러일으킨 장본인이었다. 당시 나는 단편소설 2편과 시 12편을 문학사상사에 보냈다. 대학시절 소설과 시로 전공이 나눠지기 전까지 잠깐 끄적거려 보았던 시가 10년이 넘은 2002년 3월쯤 느닷없이 나에게 다시 찾아와 나는 아무 생각 없이 그걸 꼼꼼히 받아 적었고 소설 2편과 함께 동봉하기에 이르렀다.     “파블로 네루다가 시가 어느 날 길을 가는 자신을 불렀다고 말했듯이 나에게도 그런 시간이 찾아왔다. 그건 목소리도 아니었고 말도 아니었고 침묵도 아니었다. 그냥 어느 길거리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였다. 세상의 모든 것이 잘 보이고, 나를 들어 올리고 통과하곤 했다. 그게 시라고 일러주었다”     당시 당선 소감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그 후, 나는 미친놈처럼 습작에 매달렸다. 시가 될 만한 것이라면 연주창 앓는 놈 갓끈이라도 핥아줄 듯 무작정 덤벼들었다. 남들처럼 습작 기간이 많았던 것도 아니고, 시가 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공짜 시인이 된지라 내가 나한테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은 나무에 타이어를 매달아놓고 야구방망이질을 하듯 끝없이 써내는 일뿐이었다. 변변한 청탁 한번 제대로 받아보지도 못한 채 1년이 지나자 나는 여하튼 볼품없는 것들이지만 300편이 넘는 습작시를 써낼 수 있었다. 2년이 지나자 500편이 넘는 습작시가 나에게 남겨졌다. 그러자 조금씩 “아, 이게 야구구나! 이게 시구나!”라고 스스로에게 조금씩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내 스윙이 조금씩 보이는 것 같았고, 날아오는 공도 조금씩 커 보이고, 몸 쪽으로 오는 공은 당겨 치고, 바깥쪽으로 빠지는 공은 툭, 밀어 치는 방법도 조금씩 터득이 되는 듯 했다. (후략)   깻대를 베는 시간 - 고영민   깻대는 이슬이 걷히기 전에 베는 법 잘 벼린 낫으로 비스듬히 스윽, 당겨 베는 법이라고 당신은 말했네 무정한 생각이 일기 전 밤이 다 가시기전, 명백한 낮빛이 다 오기 전 조금 애처롭게 슬픔의 자리를 옮겨놓듯 천천히 베는 법이라고 말했네   아침밥을 먹기 전의 시간 곤한 숨소리가 남아있어 세상이 아직은 순정해져 있을 때 쓸쓸하게 낫에 베이는 깻대여 하지만 이슬은 사라지고 마는 것 깻대를 베는 것은 어쩜 내 안에 와 있는 당신을 가르는 것과 같아서 가만히 와서 가만히 가는 것을 일부러 가르는 것과 같아서 터지는 슬픔 같은 것이어서   깻대는 마음 축축하게 베는 것이라고 당신은 말했네 이 밭에 첫 모를 옮길 때를 생각하며 그늘 속에 잠든 당신을 탁탁탁 두드려 털 때를 생각하며 싸락싸락 깨알이 바닥에 쏟아질 때를 생각하며 덜 아프게 덜 아프게 베는 법이라고 말했네   아침 햇살이 큰 수레를 끌고 와 비로소 한 계절 가만히 저물다간 것들을 옮겨 싣고 깻대를 베는 것은 여기 있는 나와 저만큼의 당신 같은 것이어서 베인 깻대를 묶어 밭가에 세워두는 일은 이슬이 걷히기 전, 꼭 그 때에 해야 하는 것이라 당신은 간곡히 말하고   6. 대상을 새롭게 의미부여하라.     기존에 부여된 의미를 새로운 눈으로 접근하는 것이 좋다. 나쁜 것을 좋은 쪽으로, 좋은 쪽을 나쁜 쪽으로, 아름다운 것을 추한 것으로, 추한 것을 아름다운 것으로, 숭고한 것을 천박한 것으로, 금기시되는 것을 일상적인 것으로, 일상적인 것을 금기시 하는 것으로.....   이러면서 시가 새롭게 환기될 수 있다.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다고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추한 것을 추하다고 말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당연한 것을 당연하지 않은 것으로, 당연하지 않은 것을 당연한 것으로 의미부여 하라. 그곳에 바로 시가 있다.       즐거운 소음 - 고영민   아래층에서 못을 박는지 건물 전체가 울린다. 그 거대한 건물에 틈 하나를 만들기 위해 건물 모두가 제 자리를 내준다. 그 틈, 못에 거울 하나가 내걸린다면 봐라, 조금씩, 아주 조금씩만 양보하면 사람 하나 들어가는 것은 일도 아니다. 저 한밤중의 소음을 나는 웃으면서 참는다.      7. 시를 쓰는 것은 집을 짓는 것과 같다.     시를 쓰는 것은 집 짓는 것과 같다. 누구나 집을 지을 수 있다. 하물며 개미도 집을 짓고, 까치도 집을 짓고, 벌레도 집을 짓는다. 사람이야 말하여 무엇하겠는가? 당연히 집을 잘 짓는다. 이 말은 누구나 시를 쓸 수 있다는 말이다. 문제는 집을 짓는 순서를 모를 뿐이다.   집을 짓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먼저 기둥을 세우는 것이다. 그리고 시에서 기둥은 바로 줄거리이다. 처음부터 고대광실을 지으려고 하지 말고 먼저 기둥부터 세워라. 기둥만 세우면 반은 집을 지은 것이다. 기둥만 세우면 비닐만 올려도 집이 되고, 양철만 올려도 집이 되고, 짚을 얹혀 놓아도 집이 된다. 먼저 기둥을 세워라. 기둥은 줄거리이다. 자기가 접한 대상에 줄거리를 만드는 것이다.     예를 들면, 어제 트럭에 소나무 두 그루가 실려 가는 장면을 보았다. 자, 그럼 이걸 가지고 줄거리를 만들어 보자. “뽑혀 실려 가는 나무 두 그루를 보니, 살던 집을 버리고 이사를 가는 가난한 내외 같다. 어디로 옮겨질지 불안하다. 잔 뿌리들은 어린 새끼들 같다. 트럭에는 살던 낡은 가재도구도 있다. 늦은 저녁 옮긴 자리에서 두 소나무는 가재도구를 정리하고 늦은 저녁밥을 짓는다. 두 내외(소나무)가 어둑한 집에서 밥을 먹는다.”   그대로 쓰면 된다.     이사   고속도로 밀리는 찻길, 옆 차선에 커다란 소나무 두 그루가 트럭에 실려간다 짐칸에 웅크리고 있는 가난한 내외 같다 잔뿌리들은 잘리고 먼저 살던 곳의 흙을 동그랗게 함께 떼어 얼기설기 새끼줄로 묶여 있다 흙이 말라 있다 저 흙도, 잘린 뿌리도 저 나무의 낡은 살림도구다 어디로 옮겨 심어질까 근근 어느 곳에 뿌리를 내릴까 가재도구를 정리하고 어디에서 늦은 저녁밥을 지어 먹을까       일단 이렇게 기둥을 세워놓고, 그 다음엔 창문도 달고, 침실도 만들고, 부엌도 만들고 문고리도 달면 된다. 많은 사람들이 시 쓰기에 대해서 어려운 하는 것은 기둥도 세우지 않고 처음부터 큰 집을 지으려고 욕심을 부리기 때문이다. 기둥 서까래도 올리지 않고 인테리어까지 하면서 집을 지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먼저 기둥을 세워라. 커튼을 달고, 도배를 하고, 장식장을 놓은 것은 그 다음의 문제다. 시쓰기를 하기 위해서는 먼저 내 맘대로 줄거리(기둥)부터 만들어 놓아라.     또 하나 얘기를 만들어볼까?   오늘 아침 출근하려고 보니, 아파트 앞 화단에 분꽃 씨가 까맣게 여물고 있었다. 여름내 화사하게 피었던 분꽃이 지고 까맣게 씨앗에 매달려 있다. 저 까만 씨를 이빨로 깨물면 그 속에 하얀 분가루가 나올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저 씨앗속에 얼굴에 분을 바르고 있는 어머니가 있다고 얘기를 만들어본다. 어머니가 저 까만 씨앗속에서 친척 결혼식이 있어 얼굴에 분칠을 하고 있다. 여름내 밭에서 검게 그을린 얼굴. 아무리 분칠을 해도 분이 먹지 않는 얼굴, 희어지지 않는 얼굴, 그래도 연신 어머니는 코끝과 이마 볼에 톡톡톡 분을 두드리고 있다. 그대로 쓰면 된다.    분꽃   여름내 활짝 피었던 꽃이 가을이 되자 까만 씨앗으로 여물고 있다. 씨앗을 털어 이빨로 깨무니, 하얀 분가루가 나온다. 분칠을 하는 까만 어머니가 나온다. 어머니는 친척 결혼식이 있어 거울 앞에서 검게 그을린 얼굴에 연신 분칠을 한다 아무리 분칠을 해도 희어지지 않는다       일단 이렇게 써놓고 도배도 하고, 장식장도 놓고, 문고리도 달고, 창문도 달고, 장판도 깔고, 액자도 걸고 하면 된다. 참 쉽지 않은가?       8. 시를 쓸 때는 門을 어떻게 낼 것인지 고민해라     시도 집을 지을 때와 같이 문을 어떻게 낼 것인지 고민을 해야 한다. 독자들이 들어갈 수 있는 문을 어떻게 낼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대문을 얼마나 크게 낼 것인지, 쪽문을 몇 개를 달 것인지.   요즘 시는 문이 너무 작다. 하여 독자들이 쉽게 그 집에 들어갈 수 없게 만든다. 집이 아니라 일종의 감옥 같은 시들이 많다. 들어가도 나올 수도 없다. 시가 아니라 미로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너무 문을 많이 내는 것도 문제다. 이런 시는 속이 훤히 들여다보여 너무 적나라하고 필요이상의 바람이 들이쳐 집의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없게 만든다.   시는 집이라고 했다. 집은 안에서 밖을 내다보는 풍경이다. 그러면서 밖이 안과 적절하게 내통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바로 드나들 수 있도록 해야한다. 시에는 안방의 역할을 하는 부분, 대청마루의 역할을 하는 부분, 부엌, 헛간의 역할, 마당의 역할을 하는 부분이 필요하다. 이는 적절하게 시의 문을 닫아놓느냐 열어놓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시를 쓸 때는 문을 어떻게 낼 것인지? 얼마의 크기로 낼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숨의 기원 - 고영민   1.   이불 밖으로 나온 딸아이의 다리를 슬며시 이불 속으로 넣어줍니다. 아이는 슬며시 눈을 떠 나를 한번 쳐다보고는 다시 잠이 듭니다     저렇게 보는 것은 보는 것이 아닙니다   기억할 수 없습니다,   잠결입니다     잠은 다시 딸아이의 눈을 감기고 가슴을 부풀려 숨을 고르고 세월을 만듭니다 숨소리는 영혼이 나갔다가 갈 곳이 없어 다시 제 집을 찾아오는 아득한 소리입니다 날숨은 어제 같고 들숨은 오늘 같습니다     2.   팔을 뻗어 딸아이가 제 어미의 옷섶에 손을 찔러 넣습니다 아내가 잠결에 슬몃 눈을 뜨고는 벽에 기댄 채 무릎을 안고 있는 나에게 왜, 안자고 있어? 라고 물어보고는 다시 잠이 듭니다     저렇게 묻는 것도 묻는 것이 아닙니다   기억할 수 없습니다,   잠결입니다     우리가 손을 내밀어 무언가를 가만히 그러쥘 때 얼마나 많은 시간들이 그 안에 웅크리고 있을까요 무언가를 가만히 쥐고 싶어 부러 빈손을 한번 움켜쥐는 밤입니다 나는 등으로 전해오는 냉기와 이불 밖으로 잠깐 삐져나왔던 딸아이의 한쪽 다리와 작은 손에 쥐어진 아내의 따듯한 유방을 생각합니다   3.   딸아이도, 아내도 숨이 깊어집니다 일순 겹치기도 하고 어긋나기도 합니다 아이의 숨은 짧고 아내의 숨은 더 멀리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발품입니다     이제 앞강으로 물을 거슬러 오르는 물고기들이 차갑게 알을 슬어놓고는 한 生을 전해주려 떠내려 올 시간입니다 방안은 온통 숨소리뿐입니다 나는 딸과 아내의 숨소리 사이로, 내 숨소리를 유심히 들여다봅니다     어디를 갔다 오는 곡절입니까,   기척입니까       9. 가장 쉬운 시쓰기는 자기 얘기(추억, 기억)를 쓰면 된다. 이 안에 진솔함이 있다. 그리고 자기만의 얘기는 남과 가장 차별화되는 얘기이기도 하다. 멀리서 시를 찾지 말고 자기안에서, 일상에서 찾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과수원 - 고영민       내가 하는 일은 농약이 바닥에 가라앉지 않도록 하루 종일 약통을 저어주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중간에서 호스를 당겨주는 어머니의 도움으로 1만평 과수원의 사과나무 한 그루 한 그루 빠짐없이 농약을 쳤는데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햇빛에 앉아 막대기로 커다란 농약 통을 젓는 것이 여간 지루하고 심심한 일이 아니어서 나는 그 긴 막대기로 약통 안에 영어 스펠링도 쓰고, 씨발이라고도 쓰고, 보지라고도 쓰고, 막대기를 빠르게 휘저어 회오리를 만들기도 하고, 내가 좋아하는 양인순의 이름도 썼다가 지우기도 하고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한나절 사과나무에 약을 친 아버지가 물큰 농약냄새를 풍기며 내게 걸어와 마스크를 벗으며 하시는 말이, 너 하루 종일 약통에다 뭐라 썼는지 내 다 안다! 라며 내 머리통을 어루만지며 웃으시는데     내가 저은 약통의 농약이 어머니가 당기던 길고 긴 호스를 타고 흘러 아버지가 들고 있는 분무기 노즐을 빠져나올 때 ~발씨발씨발, ~지보지보지 이렇게 나왔던 걸까, 아버지랑 어머니는 농약에 취해 회똘회똘 집으로 향하고 나는 국광처럼, 홍옥처럼, 아오리, 부사처럼 얼굴이 자꾸만 빨개졌다       10. 대상의 고유한 특성을 잡아라.     한 대상의 고유한 특징을 잡아 의미를 확장시켜 전혀 다른 대상으로 만들어라. 아래 시에서 갈대를 개꼬랑지로, 머루를 유두로 만들 듯.   갈대가 흔들리는 것이 개꼬랑지가 사람을 반겨 흔들리는 것 같고, 머루는 애를 낳은 여자의 유두와 같지 않은가? 분홍빛 처녀의 유두와 달리, 검은 유두엔 일종의 한과 서글픔이 있다.   이처럼 전혀 다른 대상으로 의미를 확장했으면 그걸 가지고 나만의 기억을 가지고 이야기를 풀어라. 그러면 원 대상은 굳이 내가 상징을 부여하지 않아도 저절로 상징성을 갖게 된다.     갈대 - 고영민   어머니가 개밥을 들고 나오면 마당의 개들이 일제히 꼬리를 치기 시작했다 살랑살랑살랑   고개를 처박고 텁텁텁, 다투어 밥을 먹는 짐승의 소리가 마른 뿌리 쪽에서 들렸다 빈 그릇을 핥는 소리도 들려왔다   이 마른 들판 한가운데 서서 얼마나 허기졌다는 것인가, 나는   저 한가득 피어있는 흰 꼬리들은 뚝뚝, 침을 흘리며 무에 반가워 아무 든 것 없는 나에게 꼬리를 흔드는가 앞가슴을 떠밀며, 펄쩍 달려드는가      머루 - 고영민   새끼를 두 번 지우고 유두가 검어졌대지 유두가 검은 년은 남자 복이 없다는데, 봐라, 네 년도 나처럼 남자 복은 글렀네   넝쿨에 기대 앉아 눈 감고 생각하건대 한때 네 눈(目)이 생기던 그 곳을 머루라 하고, 아예, 캄캄한 네 이름을 머루라 하고   너도 나처럼 유두가 검고, 머루는 익고, 너는 새끼를 두 번 지우고 유두가 검어졌대지   11. 시를 받아낼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시는 쓴다, 가 아니라 받아낸다, 는 말을 많이 한다. 시는 늘 온다. 길을 가다가도 오고, 잠결에도 오고, 밥을 먹을 때도 온다. 하지만 받아낼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시는 오다가도 사라진다. 그렇기에 마음과 손이 하나가 될 수 있도록 항상 준비를 해야 한다. 예를 들면 야구에서 투수가 직구를 던지고 싶은 마음으로 공을 던졌는데, 평소에 연습을 하지 않으면 자꾸만 엉뚱한 방향으로 공이 가는 것과 매한가지이다. 생각과 손이 따로 노는 것이다. 시를 쓰는 경우도 똑같다. 내가 어떤 대상을 보고 쓰려고 했는데도 처음 생각한 것과 달리 이상하게 써지는 경우가 있을 것이다. 평소에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볼 컨트롤이 되지 않는다. 계속 공을 던지는 연습을 통해 내가 직구를 던져야지 생각하면 손이 직구를 던질 수 있게, 커브를 던져야지 생각하면 손이 커브를, 슬라이더를 포크볼을 던질 수 있게끔 몸과 마음이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정말 좋은 시상이 떠올라도 공이 엉뚱한 곳으로 던져지듯 제대로 써낼 수가 없다. 포수가 새를 발견했다고 치자. 꿩을 잡기 위해서는 항상 총알이 장전이 되어 있어야 한다. 꿩은 어디에서 튀어나올지 모른다. 꿩을 발견하고, 어, 꿩이네! 생각하고 주머니에서 총알을 꺼내 장전하고 방아쇠를 당기려고 하면 그 사이 꿩은 시야에서 사라지게 마련이다. 꿩을 발견하면 바로 겨냥해서 떨어뜨려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을 시적인 상태로 먼저 만들어 놓아야 한다.         나는 시를 쓴다기보다는 받아낸다는 생각에 대한 아주 구체적인 확신을 갖고 있다. 나는 시를 수신하는 일종의 안테나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를 받아낼 수 있는 최적의 상태를 만드느냐, 만들지 못하느냐에 따라 시를 쓰느냐, 쓰지 못하느냐가 결정된다. 마치 라디오나 TV의 수신 안테나의 주파수가 맞으면 음악이 들리거나 영상이 보이고, 주파수가 맞지 않으면 “칙칙”거리고 영상이 보이지 않은 것과 매한가지이다.   나는 우주의 어떤 영혼이 나를 택해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있다고 믿는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그 안테나, 즉 수신자의 역할을 하지 못한다면 그 영혼은 나한테 머물 필요성을 잃고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찾아갈 것이라고 믿는다. 하여 나는, 나를 찾아온 고귀한 영혼들을 잘 모셔야 하며, 그 방법은 내 의식의 집을 소중히 다루고 망가뜨리지 않는 것이다.   나는 가끔씩 어떤 영혼들로 인해 자신이 충만해 있는 것을 느낀다. 그 상태가 되면 시가 써지고, 그렇지 않으면 시가 써지지 않는다. 너무도 정확한 거래가 아닐 수 없다. 내가 어떤 거짓과 타락으로 마음이 망가져 시가 써지지 않을 때면 나는 몇날 며칠 반성을 하며, 시혼을 다시 부른다.     저녁에 이야기하는 것들 - 고영민   이 저녁엔 사랑도 事物이다 나는 비로소 울 준비가 되어 있다 천천히 어둠 속으로 들어가는 늙은 나무를 보았느냐, 서 있는 그대로 온전히 한 그루의 저녁이다   떨어진 눈물을 주을 수 없듯 떨어지는 잎을 주을 수 없어 오백년을 살고도 나무는 기럭아비 걸음으로 다시 걸어와 저녁 뿌리 속에 한 해를 기약한다 오래 산다는 것은 사랑이 길어진다는 걸까 고통이 길어진다는 걸까 잎은 푸르고, 해마다 추억은 붉을 뿐   아주 느리게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저 나무의 집 주인은 한 달 새 가는귀가 먹었다 옹이처럼 소리를 알아먹지 못하는 나이테 속에도 한때 우물처럼 맑은 청년이 살았을 터이니, 오늘 밤도 소리를 잊으려 이른 잠을 청하고 자다 말고 일어나 앉아 첨벙, 몇 번이고 제 목소리를 토닥여 재울 것이다   잠깐, 나무 뒤로 누군가의 발이 보였다가 사라진다 나무를 따라와 이 저녁의 깊은 뿌리 속에 반듯이 눕는 것은 분명 또 다른 너이거나 나, 재차 뭔가를 확인하려는 듯 혼자 사는 저 나무의 집 주인은 낮은 토방에 앉아 아직도 시선이 집요하다   날이 조금 더 어두워지자 누군가는 듣고, 누군가는 영영 들을 수 없게 나무속에서 참았던 울음소리가 비어져 나온다     주말연속극 - 고영민       팔순의 어머니 아버지 두 분만 사시는 고향집에 내려가니 그동안 그럭저럭 나오던 TV가 칙칙거리며 나오지 않는다. 늙은 어머니는 텔레비전 앞에 앉아 있고 늙은 아버지는 대문간을 지키고 젊은 나는 세워놓은 안테나를 동서남북 돌려보다 신통치 않아 아예, 통째로 뽑아들고 감나무 옆, 뒤란 시누대밭, 장독대 뒤 곁으로 왔다갔다한다.   내가 대문간의 늙은 아버지한테 잘 나와요? 라고 물으면 늙은 아버지는 대문 앞에 서 있다가 할멈, 잘 나와? 라고 묻고 늙은 어머니가 아까보담 더 안 나와요, 하면 늙은 아버지가 다시 말을 받아 아까보담 더 안 나온다, 하고 젊은 나한테 외친다.   나는 또 자리를 옮겨 잘 나와요? 하고 묻고 늙은 아버지는 늙은 어머니에게 똑같이 재우쳐 묻고 늙은 어머니는 늙은 아버지에게 대답하고 늙은 아버지는 젊은 나에게 대답한다.   젊은 나는 반나절 팥죽땀을 쏟으며 그 기다란 안테나를 들고 뒤뚱거린다. 세 사람이 연신 묻고, 묻고 대답하고, 대답한다. 늙은 아버지가 대문간을 지키고 있기가 따분한지 담배 한 개비를 피워물며 쭈그리고 앉아 대강 나오면 그냥 저냥 보제, 하던 차 굴뚝 옆에 자리를 잡아 안테나를 돌리니 방안에서 아이구야 겁나게 잘 나온다, 라는 늙은 어머니의 목소리가 늙은 아버지를 통하지 않더라도 내 귀까지 선명하다. 돌아가지 않게 단단히 비끄러맨다. 방 안에 들어와 채널을 돌려보니 7번, 9번, 11번 다 화면이 선명하다.   저녁 늦게 서울에 올라와 마누라, 자식새끼랑 주말연속극을 본다. 늙은 아버지도 늙은 어머니도 시골집에서 주말연속극을 본다. 참, 오랜만에 늙은 아버지, 늙은 어머니, 젊은 자식놈이 안테나가 맞아 저무는 주말 저녁, 함께 연속극을 본다. 가슴 뭉클하고 선명한 주말연속극.   12. 시쓰기는 남자가 여자 꼬시는 것, 여자가 남자 꼬시는 것과 같다     글쓰기는 남자가 여자 꼬시는 것, 여자가 남자 꼬시는 것과 같다. 다들 누군가를 좋아하여 꼬시기도 하고 꼬심을 당하기도 했을 것이다.   애인(詩)을 만들려면 먼저 좋아하는 이상형을 찾아야 한다. 이상형은 찾았으면 어떻게 해야할까? 먼저 그리워해야한다. 자기 전에도 떠올려보고, 밥을 먹다가도 빙그레 웃으면 떠올리고 길을 걷다가도 떠올려야 한다. 하지만 그리워만 한다고 애인이 만들어지지는 않는다. 그 다음엔 조금씩 접촉을 해야 한다. 그가 나타나는 시간을 알아내고, 어느 길로 가는지를 알아내고, 우연을 가장한 채 만나기도 하고, 밤늦도록 문 앞에서 기다리기도 하고, 일부러 어깨를 부딪치기도 해야 한다. 한번 두 번, 접촉하면서 안면도 서로 트고, 인사도 나눠야 한다. 그 다음은 상대도 나를 좋아할 수 있도록 자신을 예쁘게 단장해라.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좋아할 수 있도록 예쁘게 화장도 하고 옷장을 뒤져 좋은 옷을 골라 입기도 해라. 그러면 상대도 나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할 것이다. 상대가 나에게 관심을 보이면 그 다음엔 조금씩 유혹을 해라. 먹을 것도 갖다 주고, 선물공세도 하고, 당신의 마음을 공개적으로 표현하라. 그다음 적당한 때를 골라 사랑한다고 열렬히 고백하라. 몸도 주고 마음도 줘라. 서로 옷을 벗고 불 끄고 뜨겁게 하나가 되라. 그러면 생명이 탄생한다. 그 생명이 詩다. 세상에 공짜로 얻어지는 아무 것도 없다. 하나 되는 공식이라는 것이 있다. 어떻게 하면 하는가 되는가? 하나 되는 공식은 다음과 같다. “관심- 정성-신뢰-사랑- 하나” 즉 관심을 가지면 보이지 않던 것이 하나 둘 보이기 시작한다. 그 보이는 것에 정성을 드리면 신뢰가 생기고 신뢰가 생기면 서로 사랑하게 되고 서로 사랑하게 되면 하나가 된다. 하나가 되면 생명이 탄생한다. 남녀 관계도 글쓰기도 마찬가지이다. 관심도 갖지 않고 정성도 드리지 않고, 신뢰도 생기지 않은 상태에서, 사랑도 나누지 않은 상태에서 글과 하나가 될 수 없으며 시가 탄생하지 않는다. 글쓰기는 남자가 여자 꼬시는 것, 여자가 남자 꼬시는 것과 같다. 사랑 후에 애가 생기는 것과 같다.   네 입속에 혀를 밀어넣듯 - 고영민   그동안 저 가지를 지그시 물고 있던 것은 모과의 입이었을까   네 입속에 혀를 밀어넣듯 나무는 저 노랗고 둥근 입속에 무엇을 집어넣었을까 부드러운 혀였을까 입김이었을까   가진 것 없이 매달린 내가 너에게 오래오래 가닿는 길은 축축하고 무른 땅에 떨어져 박히는 것 네 입속에 혀를 밀어넣듯   거부해도 네 입속에 혀를 밀어넣듯 다시 혀를 밀어넣듯   13. 스파링 파트너를 만들어라!     혼자 거울 앞에서 쉐도우 복싱을 하듯 혼자서 시를 쓰면 쉽게 늘지 않는다. 권투선수가 맞으면서 크듯 시 쓰기도 어느 시기까지는 맞아야 큰다. 맞아야 주먹이 보이기 시작한다. 시를 쓰기 위해서는 권투와 마찬가지로 괜찮은 스파링 파트너를 선택해야 한다. 혼자 거울 앞에서 폼 잡고, 자기 폼에 취해 권투를 하다보면 실전에 올라가 몰매를 당하고, KO패를 당하기 십상이다. 자기 폼과 자기 주먹에 대한 객관화를 위해서는 반드시 스파링파트너가 필요하다. 자기 폼이 개폼인지, 똥폼인지, 아니면 진짜 제대로 된 폼인지 스스로 느끼고 확인해야 한다. 그렇기 위해서는 칭찬도 좋지만 아프게 때려주는 사람이 필요하다.   그런 후 어느 정도 자기 폼이 잡히고, 상대의 주먹도 보이고, 실전능력이 쌓이면 그때 정말 고독하게 자기를 상대로, 거울을 보면서, 자기 그림자를 보면서 쉐도우 복싱을 해야 한다.  등단 초, 나 같은 경우엔 같은 해에 신춘문예로 등단한 친구가 있어 매일 1~2편씩의 시를 써서 메일로 주고받곤 했다. 서로가 서로에게 참으로 가혹했다. 아마 그 친구가 없었다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서로 시를 주고받는 일은 없다. 그냥 지면에 소개되면 어떻더라! 한마디 정도뿐이다. 그와 나는 2년 넘게 서로를 위해 실전과 같은 스파링 파트너의 역할을 했다. 그게 큰 엄청난 도움이 됐다고 말하고 싶다.     해감 - 고영민       민물에 담가놓은 모시조개처럼 눈을 감고 있었다 몇 번을 소리쳐 부르자 당신은 간신히 한쪽 눈을 떠보였다 눈꺼풀 사이 짠 물빛이 돌았다 마지막으로 당신은 나를 제 몸속에 새겨 넣겠다는 듯 오랫동안 쳐다보았다 그르렁, 그르렁 입가로 한 움큼의 모래가 토해졌다. 간조선(干潮線)을 지나 들어가는 당신의 흐린 물빛을 따라 축축한 한 생애가 패각의 안쪽에 헐겁게 담겨져 있었다 짠물을 걸러내며 당신은 물무늬 진 사구를 온몸으로 기고, 몸을 잊으려 한쪽 눈을 마저 닫자 날이 서서히 저물기 시작했다 울컥, 울컥, 검은 모래가 걷잡을 수 없이 토해졌다 나는 당신의 손을 움켜쥔 채 더 깊은 물밑까지 따라 들어갔다 여윈 갈빗대에서 해조음이 들려왔다 그리고 어느 순간, 이제 오지 마라! 따라오지 말라고 이놈아! 라는 당신의 불호령을 들었다 두꺼운 껍질 밖으로 나는 움찔, 한순간 떠밀려 나왔다 패각을 움켜쥔 채 꼭 사나흘만 더 묵고 싶다던 당신의 늙은 아내가 밀려나왔다 마지막으로 당신은 제 몸 밖으로 검은 해변을 푸륵푸륵, 싸놓았다 시끄럽던 한 생애가 말갛게 비워지고 있었다     14. 링에 올라가라. 계속 경기를 해야 한다.     축구선수나 야구선수가 경기에 나가지 못하면 경기감각이 떨어진다. 아무리 프리미어리그에 있다하더라도 벤치멤버로 있으면 그 선수를 대표로 뽑지 않는다. 가장 중요한 것은 계속적으로 경기에 나가 경기감각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운동선수가 한 달을 쉬면 숨을 끌어올리는데 최소 6개월에서 1년이 걸린다고 한다. 시 쓰기도 마찬가지이다. 쉬면 쉴수록 경기감각이 떨어진다. 1시간을 뛰던 선수가 10분을 뛰고 헉헉거리게 된다. 선수는 무조건 경기장에 나가야 한다. 축구선수라면 K리그가 없으면, N리그라도 나가야 하고, N리그가 없으면 동네 조기축구회에 나가서라도 공을 차야 한다. 공을 차고, 뛰고, 몸을 부딪치고, 골을 넣을 때 비로소 그는 축구선수가 되는 것이다. 선수는 그라운드에서 얘기하는 자이다. 마찬가지로 시인도 지면이 어떻든 간에 지속적으로 발표지면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지면 속에서 다른 시인들과 함께 놓여 있을 때 자기 시가 어느 수준인지 확연하게 보이기 시작한다. 아! 내 실력이 이 정도구나! 아! 다른 시인들의 실력이 이 정도였구나! 더 분발하고 더 열심히 해야겠다. 생각을 하게 된다. 이런 생각 자체가 경기감각이다.   혼자 달리기를 하다가 여럿이 출발선상에서 총소리를 듣고 달릴 때 진짜 자기의 헉헉거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고 가슴이 터질 것 같은 통증을 느끼게 된다. 권투 선수라면 링 밖에서 후두웤을 할 것이 아니라 링 위에 올라가라! 링이 없으면 새끼줄이라도 묶어놓고 권투장갑이 없으면 주먹에 수건이라도 감고 시합을 해라. 축구선수라면 그라운드에 나가 뛰어라! 그라운드가 없으면 애들을 모아놓고 초등학교 운동장에 나가서라도 공을 차라. 시를 쓰는 사람이라면 떨지말고 어디든, 어디든, 자꾸, 자꾸 발표를 해라! 그래야 경기감각이 생긴다. 정 발표할 곳이 없으면 블로그를 만들어 자기 시를 올려라. 그 블로그가 경기장이 된다. 그리고 그곳에 자기 시를 올려놓는 순간 그 시는 객관화되기 시작하며, 나로부터 분리되어 그 시를 객관적인 눈으로 보게 된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자기 시의 문제점들이 서서히 보이기 시작한다. 이는 관객이 아무도 없는 곳에서 혼자 연극을 하는 것과 관객을 앞에 놓고 연극을 하는 것과 같은 경우다. 자기 시가 관객들 앞에서 당당히 자기 목소리를 내고, 자기 동작을 내는지 볼 수 있을 것이며, 아니면 배우가 부실하여 말문이 자꾸만 막히고, 대사를 까먹고 다리가 후들거려 식은 땀을 흘리는지 스스로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선수는 죽을 때까지 그라운드에 있어야 한다. 그게 선수다! 시쓰는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용접- 고영민   당신과 나는 외따로 떨어져 있다 맞대는 당신의 뼈와 나의 뼈를 붙일까 성기와 성기를 붙일까   그러면 하나가 될까 너의 살을 녹여 나에게 붙일까 나의 살을 녹여 너에게 붙일까 얼굴에 철가면을 쓰고 몰래 남의 살을 훔쳐다가 푸른 토치불꽃을 치어다보며 얼른 당신과 나를 붙일까 신음소리를 붙일까 하하하, 웃음소리를 붙일까 아이 하나를 쑹덩 낳아 잠든 사이 그 아이를 녹여 이음새에 붙일까 살만큼 사신 팔순의 노모를 홀려 두 눈 딱 감고 이음새에 붙일까 冬至와 夏至의 긴 밤낮을 붙일까 그 하늘을 돛단배처럼 날던 반딧불과 하루살이와 잠자리와 비와 눈 해와 달을 붙일까, 우뢰를 붙일까 불시에 찾아오던 침묵, 초조와 불안의 두꺼운 상판을 붙일까 그러면 얼싸안고 하나가 될까 이 튀는 불똥에 눈은 까맣게 죽고 나는 끝내 무엇을 녹일까 당신과 나, 영영 붙을까   15. 자기를 믿고, 자기를 사랑하라     두서없이 썼는데, 이 글이 마지막이 될 듯합니다. 같잖은 글이지만 나름 조금이나마 제가 갖고 있는 것을 나누고자 마음을 내보았습니다.   자기의 시작법이나 시론, 문학관과 많이 다른 부분도 있으리라 봅니다. 가져갈 부분은 적당히 취하시고, 전혀 가져갈 것이 없다고 보시면 그냥 무시하고 다 버리면 됩니다.   마지막으로 드리고 싶은 말은 자기를 믿고, 자기를 사랑하세요!     시 쓰기는 자기를 정말 사랑하는데서 비롯된다. 먼저 자신을 믿어라!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해라. 나는 누구보다 뛰어나다. 감수성이 예민하다. 아직 때를 만나지 않았을 뿐이다. 나에게는 시적인 무한 광맥이 있다. 나는 지금도 잘 쓰지만 앞으로 세상을 놀래킬 멋진 시를 써낼 것이다.   이러한 자기 확신이 필요하다. 세상은 생각하는 대로 된다. 겉마음과 속마음을 일치시켜라. 속에서 “너는 안돼! 너는 안돼!” 이런 소리가 들리면 다시 자신에게 사랑과 믿음을 줘라. 내 몸과 마음이 열려야 그때부터 뭔가가 들어오기 시작한다. 너는 잘 쓸 수 있다고. 너는 멋진 시인이 될 수 있다고 말해라! 힘들고 좌절감이 올수록, 눈물이 나올수록 자신에게 그렇게 말해라. 그러면 분명 멋진 시를 쓸 수 있다! 고 나는 믿습니다.     “페루 인디언들은 바다에 나가 고기를 잡기 전 낚싯대와 대화를 한다. 너는 바다에 나가면 고기를 많이 잡게 될 거야. 이 말을 통해 그 낚싯대는 고기를 잘 잡는 낚싯대가 된다. 남태평양 어느 섬의 원주민들은 나무를 쓰러뜨리기 위해 이런 방법을 쓴다. 그들이 쓰는 무기는 날이 선 톱이 아니라 아우성이다. 모든 주민들이 쓰러뜨릴 나무 주위에 둘러서서 3일 밤낮 나무를 향해 고함을 쳐댄다. 그러면 나무속에 깃들어 있던 혼이 빠져나가면서 나무가 쿵, 하고 쓰러진다.”   푸른 고치   시골집에서 박스에 찰옥수수를 담아 소포로 보내왔다 포장이 단정하다 옥수수를 내려다보니 옥수수는 단단히 스스로를 포장하고 있다 몇 겹 포장지에 겹 싸여 있다 포장지를 벗기니 그 안, 다칠까 또, 실뭉치가 가득하다 자신이 얼마나 귀하여 옥수수는 이토록 스스로를 꼭 감싸 안았을까 나는 나를 이만큼 사랑하지 못했다     허밍, 허밍 - 고영민   해질녘 저 밭은 무엇인가 해질녘 저 흐릿한 논길은 해질녘 밭둑을 돌아 학교에서 돌아오는 거미 같은 저 애들은 무엇인가   긴 수숫대 매양 슬픈 뜸부기 울음   해질녘 통통통 경운기의 짐칸에 실려 가는 저 텅 빈 아낙들은 무엇인가 헛기침을 하며 걸어오는 저 굽은 불빛은 무엇인가   해질녘 주섬주섬 젖은 수저를 놓는 손(手) 수레국화 옆에서 흙 묻은 발목을 문지르는 저 고단함은 해질녘 내 이름 석 자를 적어온 이 느닷없는 통곡은 무엇인가   해질녘, 해질녘엔 세상 어떤 것도 대답이 없고 죽은 사람은 모두 나의 남편이고 아내이고 해질녘엔 그저 멀리 들려오는 웃는 소리, 우는 소리   허밍, 허밍     고영민 시인   1968년 충남 서산출생 중앙대학교 문창과 졸업 2002년 으로 등단 2005년 시집   실천문학사 2009년 창비
880    詩의 初心 닦기 댓글:  조회:4337  추천:0  2016-01-08
시의 초심 닦기 (1)                        / 위선환 (시인) 1) 한 작품에 많은 사연을 담지 말것. 한 편의 시가 전달하는 메시지는, 정서든 이미지든 하나여야 하고, 다른 모티프들은 그것이 뿜는 자장(磁場) 안에 들어 있어야 한다. 이때 시는 통일성을 얻는다.  2) 비유와 상징을 아낄 것. 비유는 아낄 수 있는 데까지 아껴야 오롯한 품위을 갖는다. 상징은 시인이 조립하는 것이 아니라 시의 숨결에서 우러나오는 것이어야 한다.  3) 긴 시를 경계할 것. 시의 참된 맛은 행간에 있다. 행간에는 침묵의 언어와 정서의 긴장이 깃들여 있다. 긴 시는 행간을 매립하는 위험을 안고 있다.  4) 시상을 풀어가는 수단으로써, 분명하게 몸으로 감촉할 수 있는 것들을 사용할 것. 불투명한 관념이나 감정을 시 비슷한 문법으로 채색하는 일이 없도록 주의할 것  5) 정서의 결을 잘 다듬을 것. 몇 번의 침전과정을 거친 그리움이라면 슬픔 따위가 개운하게 세척된 상태라야 한다. 물기가 없이 잘 마른 상태라면 더욱 좋다.  6) 구문이 거추장스러운 것, 관형구나 부사구가 무거운 것은 금기다. 줄기가 가지를 지탱하기 어렵다. 관형어나 부사어가 상쾌하게 오려진 문장은 조촐하고 산뜻하다.  7) 시로 삶의 각성이나 잠언적인 의도를 노출시키지 말것. 시는 철학이 아니라 미학이다.  [시안] 2002년 봄호에 실린 글을 축약해둔다. 시를 쓰면서 자칫 지나치기 쉬운 일들을 찬찬하게 지적해주었다. 두고 읽을만 하다.  다음은
879    詩는 인류가 남긴 최고의 문화예술 댓글:  조회:4156  추천:0  2016-01-08
열두 편의 시와 일곱 가지 이야기                                       /공광규 시는 인류가 남긴 최고의 문화예술입니다. 공자는 역대의 시를 모은 으로 제자들을 가르쳤으며, 중국의 옛 사람 원매는 시를 읽으면 인생이 아름다워진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인지 시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이런 질문을 많이 합니다. “어떻게 하면 시를 쓸 수 있는 겁니까?” 그러나 이런 질문에 꼭 맞는 대답은 없습니다.  시는 뭐다! 라고 정의하기 어려운 것처럼 시를 쓰는 특별한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여러 시인이 시를 써오며 공감하고 동의해온 몇 가지 공통점과 시인 개인이 오랫동안 시를 써오면서 굳어진 습관이 있을 뿐입니다. 작업방식: 괴테는 64년간 ‘파우스트’에 매달림/ 발자크는 매일 밤 수도사 옷을 입고 촛불을 켜놓고 여섯 시간 이상 작업을 시작해서 작업이 끝날 때까지 60잔의 커피를 마시며 글을 씀/ ‘보봐리 부인’을 쓴 프로베르는 적확한 단어를 찾기 위해 3일 동안 방바닥에서 골머리를 앓음/ 톨킨은 ‘반지의 제왕’을 18년 걸려 완성/ 조르쥬 상드는 줄담배를 피워가며 나흘 만에 장편 ‘악마의 늪’ 탈고// 생활방식: 아리스토텔레스는 요란한 복장으로 학교를 배회하거나 변덕스럽고 사치를 즐기는 최초의 정신 나간 스승/ 러시아 대문호 톨스토이는 하루아침에 방탕한 생활에서 벗어나 윤리성을 설파하고 다니는 기이한 성인/마르셀 푸루스트는 거의 침대에만 누워 지냄/ 프랑스 추리소설의 대가 조르쥬 심농은 영감을 얻기 위해 1만여 명의 여성과 성교(미하엘 코르트, ‘광기에 관한 잡학사전’ 을유문화사, 2009) 제임스 조이스 는 단 하루를 쓰는데 8년이 걸림. 마가렛 미첼 집필을 위한 자료수집 20년 걸림. 정약용은 을 51년에 마치고, 신작은 를 완성하는데 27년이나 걸렸다고 함 그래서 제 시집 (실천문학사, 2004)과 (실천문학사, 2008)를 내면서 정리된 제 개인의 시 창작이야기를 해보고자 합니다.   첫째, 경험을 옮긴다.  저의 시 쓰기 시작은 경험을 공책에 옮기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모든 상상력은 경험에서 발아합니다. 경험은 직접 몸으로 겪은 사건이나 감정은 물론 남의 경험을 훔치는 독서와 대화, 시중에 떠도는 이야기를 듣는 것도 해당합니다. 시인이 자기 경험을 시로 옮겨 놓으면, 독자는 그것을 읽고 시인과 경험을 연대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정서적으로 감응을 하게 되는 겁니다.  천 가지 경험이 하나의 아이디어를 낸다는 말이 있습니다. 경험을 많이 하기 위해서는 바빠야 됩니다. 생각만하면 도사가 되니, 경험과 생각이 조화되도록 해야 합니다. 다음 아마추어 문예공모전 심사평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시가 자기 삶의 경험에서 양성된 정서의 압축된 표현이라고 한다면, 거기에는 당연히 직업에 따른 독특한 분위기가 배어 있으리라 기대할 수 있다. 그러나 막상 투고된 시들을 읽어 보니, 직무와 연관된 발상이나 생활의 직접적 투영이라 여겨지는 작품들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오히려 직장생활 바깥에서 이루어지는 종교적 체험이라든가 복잡한 도시생활과 대비되는 농촌적 경험, 또는 자연풍경 속에서의 순화된 감정세계 등이 시의 주조를 이루고 있다.”(염무웅, 2009년 금융인문화제 시부문 심사평)     이처럼 대부분 초보자들은 시를 자기 경험을 옮기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굉장히 높고 고고한 곳에 시의 제재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죠. 자기 경험을 반영하고 확장한 개성 있는 시를 보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당연히 생동감도 없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대로 시는 언어를 가지고 인생을 모방하는 예술입니다. 시는 인생의 ‘경험’을 모방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꼭 그렇지는 않지만, 인생의 사건을 모방하면 산문이 되고, 인생의 감정을 모방하면 시가 된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모방은 다른 말로 재현과 반영입니다.  혼자 사는 할머니와 실패한 예술가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었이겠습니까? 바로 ‘영감’이란 작자인데, 이 영감은 그냥 오는 게 아닙니다. 노력을 해야 영감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에디슨은 99%의 노력과 1%의 영감이라고 했는지 모릅니다.  아무튼 좋은 시를 쓰려면 여행과 독서 등 다양한 경험을 갖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모든 일을 경험할 수는 없으므로 남의 경험을 훔치는 독서를 해야 하는데, 다른 예술에서도 독서 경험은 영감을 불러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시인 릴케는 조각가 로댕의 비서였습니다. 릴케의 기록에 의하면 로댕은 주머니가 항상 불룩했다고 합니다. 물론 조각을 하기 위한 연장이었겠지? 아닙니다. 단테의 『신곡』이라는 책이었다고 합니다. 로댕은 독서경험을 통해서 얻은 영감으로 이라는 위대한 조각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이처럼 모든 예술 창작을 위해서는 다양한 독서 경험이 중요한 것입니다. 창작뿐이 아니고 과학이나 정치도 독서경험은 중요합니다. 모든 분야의 성공적인 사람들은 책 읽기에서 시작해 글쓰기로 끝냈습니다. 빌게이츠는 어려서 자기 동네 도서관 책을 몽땅 읽었다고 합니다. 동네도서관 출신인 빌게이츠의 창의력은 바로 독서경험에서 나온 것입니다.  제가 직접 술을 마시는 경험 중에 창작동기가 발아하여 시를 창작한 구체적인 사례가 「소주병」입니다. 이 시는 대천해수욕장 포장마차에서 조개구이를 안주로 소주를 마시다가 착상한 것입니다. 여러분도 오늘 저녁 술집에 가시면 빈 소주병을 입에 대고 힘껏 불어보세요. 그러면 붕붕하고 우는 소리가 날 것입니다.  이 경험을 아버지의 울음소리로 연결시킨 것입니다. 청소년이라면 소주병을 콜라병이나 사이다병으로 바꾸어 패러디(모방적 창작)해도 재미가 있을 것입니다. 술병은 잔에다 자기를 계속 따라주면서 속을 비워간다 빈 병은 아무렇게나 버려져  길거리나 쓰레기장에서 굴러다닌다 바람이 세게 불던 밤 나는 문 밖에서 아버지가 흐느끼는 소리를 들었다 나가보니 마루 끝에 쪼그려 앉은 빈 소주병이었다. - 「소주병」 전문 계속 따라주기만 하고 버려지는 소주병을 아버지의 삶에 비유한 것입니다. 소주는 국민의 술이자 민중의 술입니다. 또 아버지는 누구입니까? 가족을 위해 돈을 더 벌고, 큰집에 살고, 자식들을 잘 키우려고 무진 애를 쓰다가 늙어서 버려지는 결핍과 실패의 산물입니다. 자신의 아버지를 떠올려보십시오. 사회적 지위나 빈부와 상관없이 아버지의 인생은 대부분 결핍의 인생입니다.   저희 아버지는 많은 다른 아버지들처럼 가족의 생계를 위해 애썼습니다. 평생 도시와 광산으로 떠돌고 농촌에 정착해서는 아침저녁으로 일만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말년에는 결국 폐암에 걸려 마루 끝에 쪼그려 앉아 가래침을 뱉어내다가 돌아가셨습니다.  제 자신의 소주 마시기 체험, 자주 술에 취하여 실패한 인생을 한탄하시던 아버지와 병든 아버지의 말년 기억을 교직시켜 한편의 시를 만들게 된 것입니다. 독자들은 시를 읽고 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경험 속으로 빠질 것이고, 비슷한 경험의 연대를 통하여 공감을 일으킬 것입니다.  아래 시는 남양주 수종사 여행 경험을 시로 쓴 것입니다. 수종사 여행 경험이 없었다면 이 시를 쓰지 못했을 겁니다. 그리고 아래 시가 성공한 것은 여행정보를 거의 없애고 개인의 감정을 외물인 수종사 풍경에 의탁하였기 때문입니다. 양수강이 봄물을 퍼 올려 온 산이 파랗게 출렁일 때 강에서 올라온 물고기가 처마 끝에 매달려 참선을 시작했다 햇볕에 날아간 살과 뼈 눈과 비에 얇아진 몸 바람이 와서 마른 몸을 때릴 때 몸이 부서지는 맑은 소리 -「수종사 풍경」 전문 둘째, 이야기를 꾸며낸다. 그러나 시는 실제 경험을 옮기는 것만으로 되는 게 아닙니다. 실제 경험으로만 시를 쓴다면 일생동안 몇 편뿐이 쓰지 못할 겁니다. 여러분은 백일장이나 청탁을 받고 막상 시를 쓰려면 더 이상 시를 쓸게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미 많은 시인들이 시를 다 써버린 것 같기 때문입니다. 이는 시인이 자신의 경험에서 상상력을 발전시켜 이야기를 꾸며낼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인은 단순히 운문의 창조자가 아니라 이야기나 구성을 창조하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시인의 기능은 일어난 일이 아니라 일어날 수 있는 일을 기술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시인은 자신의 온갖 경험을 섞고 흔들어 이야기를 만들어 낼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경험의 횟수와는 상관없는 문제입니다.  연애 시를 많이 썼다고 연애를 많이 한 시인은 아닌 것입니다. 사람의 경험이란 생각보다 그렇게 다양하거나 일관되거나 극적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경험만으로 시를 쓰겠다는 사람은 시를 평생 몇 편 쓰고 말겠다는 것과 같습니다. 시 역시 다른 문예 양식과 마찬가지로 허구적 진실입니다. 시는 실제 경험한 사건으로만 쓰는 것이 아니라 경험에서 발아시킨 상상력으로 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느 서양 사람의 말인데, 상상력은 신이 붙여놓은 것을 띄어놓고 신이 띄어 놓은 것을 붙여놓는 힘이라고 합니다. 상상력이 있는 인간만이 신과 맞장을 뜰 수 있을 것입니다. 상상력은 인간의 가장 위대한 힘인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문자, 도시, 법률, 교육 등 모든 제도는 상상력이 만든 것입니다.   저의 「별국」은 몇 개의 어머니와 함께 했던 경험과 기억을 상상력으로 바느질하여 한 편의 시로 조직한 것입니다. 가난한 어머니는 항상 멀덕국을 끓이셨다 학교에서 돌아온 나를 손님처럼 마루에 앉히시고 흰 사기그릇이 앉아 있는 밥상을 조심조심 들고 부엌에서 나오셨다 국물 속에 떠 있는 별들 어떤 때는 숟가락에 달이 건져 올라와 배가 불렀다 숟가락과 별이 부딪히는 맑은 국그릇 소리가 가슴을 울렸는지 어머니의 눈에서 별빛 사리가 쏟아졌다. - 「별국」 전문  위 시는 2006년 수능 모의고사 지문으로 출제된 이후 참고서에 계속 등장하고 있습니다.  시에는 몇 개의 심상이 나타납니다. 제 시의 기법적 계보는 정지용으로부터 시작합니다. 24살에 들어간 대학 1학년 문학개론 시간에 정지용의 시 「유리창」을 배우는 순간, 이렇게 시를 쓰면 되겠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 전에 선배들을 따라다니며 시를 쓰고 낭송회를 여러 번 해보았지만 시를 어떻게 써야 하는지 도대체 감이 잡히지 않았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다가 정지용의 시를 만나면서 시의 원리를 깨우친 것입니다. 그래서 제 시는 지금까지도 심상 중심입니다. ‘별국’ ‘별빛 사리’는 심상을 통해 창조한 어휘입니다. 충청도의 사투리인 ‘멀덕국’은 시어로 제도권에 진입시킨 사례입니다.  시인은 어휘의 창조자입니다. 셰익스피어가 창조한 어휘는 지금 영어를 세계 제일의 공용어로 만드는 발판이 되었습니다. 셰익스피어가 만들어낸 단어 양은 영문학상 최고이며, 그가 새로 만든 단어는 세는 방법에 따라 2,076개라는 주장도 있고, 6,700개라는 주장도 있다고 합니다. 세익스피어 당시에 영어단어가 15만개였고, 그가 사용한 단어가 2만개였으니 그는 자기가 사용한 단어의 10%를 만들어 사용한 것입니다.(폴 존슨, , 황금가지, 2009. 100쪽 참조)     다음 시는 실제로 광화문에서 완행버스를 잘못 타는 바람에 경험한 것을 이야기로 만든 사례입니다. 상가의 간판 이름 가운데 몇 개를 제외하고는 이야기가 되게 직접 만든 것입니다. 오랜만에 광화문에서  일산 가는 완행버스를 탔다  넓고 빠른 길로  몇 군데 정거장을 거쳐 직행하는 버스를 보내고  완행버스를 탔다  이곳저곳 좁은 길을 거쳐  사람이 자주 타고 내리는 완행버스를 타고 가며  남원추어탕집 앞도 지나고  파주옥 앞도 지나고  전주비빔밥집 앞도 지나고  스캔들 양주집 간판과  희망맥주집 앞을 지났다  고등학교 앞에서는 탱글탱글한 학생들이  기분 좋게 담뿍 타는 걸 보고 잠깐 졸았다  그러는 사이 버스는 뉴욕제과를 지나서  파리양잠점 앞에서  천국부동산을 향해 가고 있었다  천국을 빼고는  이미 내가 다 여행 삼아 다녀본 곳이다  완행버스를 타고 가며  남원, 파주, 전주, 파리, 뉴욕을  다시 한 번 다녀온 것만 같다  고등학교도 다시 다녀보고  스캔들도 다시 일으켜보고  희망을 시원한 맥주처럼 마시고 온 것 같다  직행버스를 타고 갈 수 없는 곳을  느릿느릿한 완행버스로 다녀왔다. - 「완행버스로 다녀왔다」 전문 셋째, 솔직하게 표현한다. 시는 자기 안에 있는 감정을 밖으로 꺼내 종이 위에 옮기는 작업입니다. 일기를 쓰면서 청소년기의 혼돈을 극복하고, 연애편지를 쓰면서 사랑하는 떨리는 마음을 가다듬는 것처럼 시도 다른 글쓰기와 같이 자기 치유 효과가 있습니다. 더구나 시는 감정을 진솔하게 토로하고 아름다운 표현을 높이 사는 문장이어서 대중들이 가장 선호하는 문학양식입니다.  시는 자기 삶을 솔직히 직시하게 합니다. 자기 삶을 솔직히 털어놓아 자기 치유의 효과를 거두는 것입니다. 시는 고해성사소입니다. 교회의 권위는 고해성사 제도 때문에 유지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논어』의 사무사는 시를 대할 때 정직하라, 솔직하라는 말입니다. 창작자나 독자, 편집자 모두 이러한 마음을 가질 필요가 있다는 공자의 문학관입니다. 어쩌면 시인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본래의 마음을 대리하여 적는 대필자입니다. 사람은 본래 사악하고 착하고 슬프고 기뻐하는 존재일 것입니다. 시기하고 질투하며 그리워하고 미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람입니다.  인간의 본성과 관련하여 덧붙이자면, 종교 경전에서는 간음하지 말라고 하지만, 이는 역설적으로 사람은 원래 간음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원래 술 먹고 술 취하고 싶어 하는 존재이며, 사람을 미워하고 미운 사람을 죽이고 싶어 하는 존재입니다. 종교는 인간이 원래 이러한 존재임을 인정하고, 이를 규제하기 위해 경전에 계율로 정하여 금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의 원래 마음을 시인이 대신 표현하여 주면, 독자들은 시를 읽고 공감하며 즐거움을 느끼게 됩니다. 시인은 자신을 감추고 위장하고 싶어하는 사람의 마음을 대신하여 솔직히 드러내주는 존재인 것입니다. 이러한 사례가 「폭설」입니다.  술집과 노래방을 거친 늦은 귀가길 나는 불경하게도 이웃집 여자가 보고 싶다 그래도 이런 나를 하느님은 사랑하시는지 내 발자국을 따라오시며 자꾸 자꾸 폭설로 지워 주신다. - 「폭설」 전문 이 시를 읽은 사람들의 반응은 가지가지입니다. 어느 분은 제가 이웃집 여자와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놀리기도 합니다. 혹시 이 시가 인터넷에 떠다니면서 이웃집 남편이 찾아오지 않았느냐고 묻기도 합니다. 어느 분은 제가 아내와의 사이가 여전히 좋지 않은 것 같다고 안도하기도 합니다. 자기 부부관계가 안 좋은 것을 저에게 뒤집어씌우는 것입니다.  이럴 때 저는 시인이란 존재가 남의 죄를 덮어쓰고 대신 죽은 예수와 같은 존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합니다. 어느 분은 자신의 속마음을 썼다고 탄복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시와 시인의 실제 삶에 대하여 오해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롤랑 바르트라는 사람은 작품에서 작가를 죽여야 진정한 의미에서 독자가 탄생한다고 하였습니다. 저자는 오로지 글쓰기를 배합하고 조립하는 조작자, 또는 남의 글을 인용하고 베끼는 필사자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이미 공자가 말한 “기술할 뿐이지 창조하지 않는다”는 ‘술이부작’입니다.  그러니 작품을 읽을 때는 저자를 철저히 배제하고 읽어야 진정한 독자가 된다는 말입니다. 작품에서 작가를 몰아내고, 작품속의 이야기가 나의 이야기로 느껴질 때 감동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 이 시는 바로 나의 이야기고 감정이야!” 하고 말이죠.        위 시의 내용은 실제 이웃집 여자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허구헌 날 술집에 있다가 밤늦게 귀가하니 이웃집 여자와는 엘리베이터에서도 마주쳐본 적이 없습니다. 이 시는 사무실 동료들과 자주 술집에서 노닥거리다 노래방을 들러서 집에 오는 대한민국 보편적 중년 남자의 불량한 삶을 고백한 것입니다. 이웃집 여자는 불량한 욕망과 삶의 태도에 대한 비유일 뿐입니다.  현재 대한민국의 많은 남자들의 저녁 문화는 대개 술집에서 술집으로 전전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술을 잘 먹고 많이 마시는 놈이 남자답고 쫀쫀하지 않고 인간적인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술 잘 먹는 놈이 출세한다는 신화가 여전합니다. 이건 좋건 나쁘건 어엿한 문화, 관습이어서 혼자 극복하기가 여간 어려운 게 사실입니다.       아래 시는 자신의 생각과 다르게 살아가는 중년의 위선적 행실을 고백한 것입니다. 대나무는 세월이 갈수록 속을 더 크게 비워가고 오래된 느티나무는 나이를 먹을수록 몸을 썩히며 텅텅 비워간다 혼자 남은 시골 흙집도 텅 비어 있다가 머지않아 쓰러질 것이다   도심에 사는 나는 나이를 먹으면서도 머리에 글자를 구겨 박으려고 애쓴다 살림집 평수를 늘리려고 안간힘을 쓰고 친구를 얻으려고 술집을 전전하고 거시기를 한 번 더 해보려고 정력식품을 찾는다   대나무를 느티나무를 시골집을 사랑한다는 내가 늘 생각하거나 하는 짓이 이렇다 사는 것이 거짓말이다 거짓말인 줄 내가 다 알면서도 이렇게 살고 있다 나를 얼른 패 죽여야 한다.  - 「거짓말」 전문 넷째, 고전과 선배에게 배운다. 체 게바라(1928~1967), 아르헨티나 귀족가문에서 태어나 의대를 졸업하고 세상을 바꾸기 위해 의사의 길을 포기한 뒤 쿠바혁명에 참여한 그는 혁명가이자 전장에서 시를 쓰는 시인이었습니다. 전장에서 전사한 그의 유품에는 지도와 두 권의 일기, 그리고 공책 한 권이 들어있었는데, 그가 좋아했던 네루다 등 4명의 69편의 시가 빼곡히 적혀있었다고 합니다.(, 실천문학사, 2009)  이렇게 시인은 생사를 넘나드는 전장에서조차 선배의 시를 베끼고 분석하면서 죽는 순간까지 시를 썼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의 배낭 속에는 언제나 괴테, 보들레르, 도스토예프스키, 네루다, 마르크스, 프로이트, 레닌 등의 책들이 떠나질 안았다고 합니다. 이런걸 보면 가사와 육아, 생계를 이유로 시 읽기와 쓰기를 게을리 하는 것은 모두 핑계일 것입니다.   앞에 시에서 대나무가 나와서 한마디 부언하자면, 대나무는 4년 동안 죽순 키의 상태로 멈춰있다고 합니다. 그렇게 키가 정지하여 있는 동안 대나무는 뿌리를 깊고 넓게 확보한다고 합니다. 대나무의 4년은, 우리의 대학 4년과 마찬가지로 고전과 선배를 공부하는 시기라고 보면 됩니다.  실력이 느는 것 같지 않더라도 매일 잠깐이라도 규칙적으로 끊임없이 고전과 선배를 공부해야 합니다. 어떤 이유로든 공부를 쉬면 후퇴를 합니다. 이러한 흐름을 유지하는 것이 몰입이고, 그래야 시 쓰기에 성공을 할 수 있을 겁니다. 하여튼 시를 오래 잘 쓰려면 고전과 선배들의 시를 열심히 공부해야 합니다.  어떤 예술이든 고전과 선배의 작품을 모방하면서 배운다고 보면 됩니다. 모방론적 관점입니다. 앞에서도 언급을 했지만, 공자는 자신의 글이 고전과 선배가 이루어 놓은 것을 진술한 것이지 창작한 것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공자는 또 ‘온고지신’을 강조하였습니다. 옛 것을 따뜻하게 품어서 새로운 것을 창조한다는 것입니다. 남녀가 따뜻하게 품어야 아이를 ‘창작’할 수 있는 것처럼.  창작자는 자신이 시의 방향을 잘 잡아 가고 있는 지, 고전과 선배의 시를 통해서 자꾸 확인해야 합니다. 구약성서에 천하에 새로운 것이란 없다고 하였습니다. 내가 만들고자 하는 것은 이미 자연 속에 존재하며 누군가가 이미 만들어 놓았다는 것입니다. 창작 행위는 창조가 아니라 재활용이라는 것입니다. 규범이 되는 고전과 선배의 시를 공부하지 않으면 시 쓰기에 금방 바닥을 드러낼 것입니다.  추사 김정희는 “가슴속에 만 권의 책이 들어 있어야 그것이 흘러넘쳐서 그림과 글씨가 된다.”고 하였습니다. 바로 서권기 문자향(書卷氣 文字香)인 것입니다. 책을 많이 읽고 교양을 쌓으면 몸에서 책의 기운이 풍기고 문자의 향기가 난다는 뜻입니다.  겨울 아침에 쌓인 마당의 흰 눈을 본 적이 있을 겁니다. 흰 눈과 지식은 모르는 사이에 쌓인다고 합니다. 고전과 선배의 시에 관심을 갖고 읽어가다 보면 온 몸에 쌓인 지식이 흘러내려 공책 행간을 글씨들이 구불구불 기어 다니며 시를 쓸 것입니다. 아내를 들어 올리는데 마른 풀단처럼 가볍다 수컷인 내가 여기저기 사냥터로 끌고 다녔고 새끼 두 마리가 몸을 찢고 나와 꿰맨 적이 있다 먹이를 구하다가 지치고 병든 컹컹 우는 암사자를 업고 병원으로 뛰는데 누가 속을 파먹었는지 헌 가죽부대처럼 가볍다. - 「아내」 전문 위 시는 브레히트를 공부하여 얻는 것입니다. 여성이 육체적으로 가장 힘든 시기는 출산과 육아기입니다. 시 「아내」는 제 아내가 육아기에 실제로 아파서 병원으로 옮기느라 업었던 체험을 시로 형상한 것입니다. 부부를 밀림의 사자로, 밥벌어먹고 살아야 하는 경쟁 현실을 밀림으로 비유한 시입니다. 그러나 독일 브레히트의 「나의 어머니」라는 시를 읽지 않았으면 이 시를 생각해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브레히트가 1920년에 쓴 「나의 어머니」는 다음과 같습니다.  “그녀가 죽었을 때, 사람들은 그녀를 땅 속에 묻었다./ 꽃이 자라고 나비가 그 위로 날아갔다./ 체중이 가벼운 그녀는 땅을 거의 누르지도 않았다./ 그녀가 이처럼 가볍게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었을까!” 짧은 이 시의 ‘가볍다’나 ‘고통’이라는 어휘가 병든 아내의 가볍고 고통스러워하는 상황을 만나면서 시를 만들게 된 것입니다.  ‘가죽부대’라는 말 역시 불경을 뒤지다가 만난 어휘입니다. 아마 황지우의 시에도 몸을 가죽부대에 비유한 대목이 나왔던 것을 기억합니다. 앞의 시 역시 김삿갓의 시를 읽어서 쓴 것입니다. 여행 중 어느 집에서 밥을 얻어먹다가 가난한 주인이 밥풀이 둥둥 뜨는 묽은 죽을 내오며 미안해하자, 김삿갓은 밥그릇에 비치는 청산을 좋아한다고 한 데서 얻는 착상입니다. 그러나 “책을 읽되, 책에 얽매이지 말고, 밖으로 나가 영혼의 자유를 찾아라!” 라고 한 앙드레지드의 말을 명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고전과 선배의 시를 읽되 거기에 매일 필요는 없습니다.    여담입니다만, 갈수록 제 시에 ‘아내’가 많이 등장하는 것 같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아내에 대한 아부가 늘어간다는 말입니다. 나이가 들면서 필요한 다섯 가지가 있는데, 남자와 여자가 다르다고 합니다. 여자는 딸, 돈, 건강, 친구, 찜질방이 필요하지만 남자는 마누라, 아내, 애들엄마, 집사람, 와이프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아래 시는 친구와 대화중에 죽음에 대하여 물은 기자의 질문에 “더 이상 모차르트의 아름다운 음악을 들을 수 없게 되는 것”이라고 말한 아인슈타인의 말, 그리고 “글라디올라스의 섹스” 등으로 아내의 몸을 비유한 앙드레 브르통의 시 「자유로운 결합」에 나오는 수사법에서 많은 부분 착상하였습니다. 이렇게 여성의 수다를 사랑하는 남자라면 평생 사랑을 받다 양노원이 아닌 여자의 품에서 죽을 것입니다.       나는 이 바람이 어디서 오는지 알죠 바람을 보내는 사람이 누군지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소리가 뭐야?”라고 물었을 때  “당신 수다야”라고 대답했던 사람이죠 아침 햇살 살결과 이른 봄 체온 백자엉덩이와 옥잠화 성교 줄장미 생리하혈과 석양의 붉은 볼 물봉선 입술과 대지의 살 냄새를 가진 사람이죠 나는 이 바람이 어디서 오는지 알죠 바람을 보내는 사람이 누군지 “죽음이 뭐야?”라고 물었을 때 간결하게 “당신을 못 보는 것이지”라고 대답했던 사람이죠 나는 바람이 어디서 오는지 알죠 바람을 보내는 사람이 누군지 말밤나무 몸통과 말밤 눈망울 말밤나무 손가락을 가진 사람이죠. - 「말밤나무 아래서」 전문 다섯째, 재미있게 만든다. 시든 소설이든 결국은 재미있는 글이 오래 살아남게 됩니다. 동양의 제일서인 『논어』처럼, 우리 민족 제일서인 『삼국유사』처럼, 장자의 우화처럼, 이솝의 우화처럼, 불서와 성서의 이야기처럼 재미가 있어야 독자들이 오랜 관심을 갖고 사랑하게 됩니다. 그래서 시를 재미있게 만들어낼 줄 알아야 합니다.  지금 볼 수 있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은 비극론인데, 정설은 아니지만 희극론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당시 최고 권력자인 교황을 비롯한 성직자들이 희극론을 없앴다는 거죠. 왜냐고요? 민중들이 즐거워하면 신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게 되고, 그러면 성직자들의 권위와 직장이 없어지니까요.  그전에는 인간을 단순한 신앙인으로만 봤는데, 단테 같은 작가 무리들이 인간을 신앙인이자 시민으로 글을 써대면서 종교와 성직자의 권위가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문인이면서 현실 정치가이자 사상가였던 단테는 종교 권력의 미움을 사는 바람에 피렌체에서 영구 추방되었다고 합니다. 정치적 추방인 거죠.     하여튼 재미는 권위 있는 집단이나 개인들이 가장 무서워하고 싫어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재미가 있으면 권위에 굴복하지 않거든요. 특히 평등을 싫어하는 가부장제 권위의 사회에서는 얼굴에 웃음을 띠면 좀 시시한 인간으로 취급되었습니다. 왜 실실거리느냐고 혼나기도 하고요. 한때는 웃음이 폭력의 대상이 되었죠. 최근의 독일의 푸라이부르크대학 헬가 코스트호프 교수 연구결과 남성이 여성보다 농담을 많이 하는 이유는 권력과시의 공격적인 행동 때문이라고 합니다. 지위가 낮은 사람이 웃기면 위험하다는 것입니다.(Focus, 2009.8.25) 맘에 안 드는 이야기지만 웃음이 권력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상상하게 합니다. 시 「무량사 한 채」는 재미있게 구성한 시의 사례입니다.  오랜만에 아내를 안으려는데 “나 얼마만큼 사랑해!”라고 묻습니다 마른 명태처럼 늙어가는 아내가 신혼 첫날처럼 얘기하는 것이 어처구니없어 나도 어처구니없게 그냥 “무량한 만큼!”이라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무량이라니! 그날 이후 뼈와 살로 지은 낡은 무량사 한 채 주방에서 요리하고 화장실서 청소하고 거실에서 티비를 봅니다 내가 술 먹고 늦게 들어온 날은 목탁처럼 큰소리를 치다가도 아이들이 공부 잘하고 들어온 날은 맑은 풍경소리를 냅니다 나름대로 침대 위가 훈훈한 밤에는 대웅전 꽃살문 스치는 바람소리를 냅니다. - 「무량사 한 채」 전문 위 시는 실제 아내와 실제 있었던 대화를 진술한 것이 아닙니다. 여러 가지 경험을 재미있게 구성한 이야기입니다. 무량사(부여군 외산면 소재)라는 고향 부근에 있는 절을 여러 번째 가던 중 창작동기가 확 발화하여 쓴 것입니다. 필자가 술을 먹거나 아이들 공부 문제로 아내가 잔소리하는 것은 집안에서 흔히 부딪히는 일입니다. 대웅전 꽃살문은 조계사회보에서 사진으로 본 것을 시 쓰는 과정에서 떠올린 것입니다.  꽃살문 스치는 바람소리는 무엇을 비유한 것인지 상상이 갈 겁니다. 필자는 이 구절을 생각해 내고 사람들이 이 시를 읽으면서 살짝 웃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아래 시 「걸림돌」 역시 시중에 떠도는 우스갯소리를 가져다가 재미있게 구성한 것입니다. 이 시를 본 독자들은 대부분 재미있다고 평가하였습니다.  잘 아는 스님께 행자하나를 들이라 했더니 지옥 하나를 더 두는 거라며 마다하신다 석가도 자신의 자식이 수행에 장애가 된다며 아들 이름을 아예 '장애'라고 짓지 않았던가 우리 어머니는 또 어떻게 말씀하셨나 인생이 안 풀려 술 취한 아버지와 싸울 때 마다 "자식이 원수여! 원수여!" 소리치지 않으셨던가 밖에 애인을 두고 바람을 피우는 것도 중소기업 하나 경영하는 것만큼이나 어렵다고 한다 누구를 들이고 둔다는 것이 그럴 것 같다 오늘 저녁에 덜 돼먹은 후배 놈 하나가 처자식이 걸림돌이라고 푸념하며 돌아갔다 나는 "못난 놈! 못난 놈!" 훈계하며 술을 사주었다 걸림돌은 세상에 걸쳐 사는 좋은 핑계거리일 것이다 걸림돌이 없다면 인생의 안주도 추억도 빈약하고 나도 이미 저 아래로 떠내려가고 말았을 것이다. - 「걸림돌」 전문 저 역시 걸림돌이 없었다면 세상을 제멋대로 살다가 스스로 망가져서 인생을 조기에 마쳤을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시를 핑계로 술집과 카페에 들락거리느라 지금 형편없는 몰골을 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예수는 인생의 걸림돌인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저희 어머니는 걸림돌이자 원수였던 필자와 동생들을 사랑한 결과 손자도 보시고 좋은 병원에서 치료를 받으시다 돌아가셨습니다. 무자식이 상팔자라는 말, 이거 사실이 아닐 것입니다. 이 시를 읽은 사람들 가운데, 애인을 두는 것이 중소기업 운영하는 것만큼 어렵다는 시중에 떠도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실제로 이 이야기는 청주에서 시를 공부하는 오십대 중반 여성분이 수업 중에 한 우스갯소리를 제가 도둑질 한 것입니다. 떠도는 우스갯소리도 시를 쓰겠다는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들으면 재미있는 시를 구성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역시 시는 일상에서 창조한다는 원리도 여기에 들어 있는 것입니다.  여섯째, 현실 문제를 건드린다. 요즘 시가 지겹다고 합니다. 시에 현실감과 생동감이 없어서입니다. 시의 내용이 뜬구름 잡는 이야기이고, 표현이 늙은이 거시기처럼 축축 늘어진다면 얼마나 지겹겠습니까? 유몽인은 시는 사상과 감정을 표현하는 것인데, 시어를 아무리 잘 다듬어도 정작 사상적 내용과 그 지향성(志)이 결여되면 시를 알아보는 사람이 이를 취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시는 시속을 일깨우는데 의의가 있는 것이지 풍물이나 경치만 읊는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수십 년간 조선시대 문단을 장악했던 서거정은 여행과 현실에서 배우지 않은 문장은 곧 낡고 썩기 쉽다고 하였습니다. 문장은 기백이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이랍니다. 요즘 시들이 기백이 없고 횡설수설에다 난잡 난해 불통인 것은 시가 현실과 접촉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은 사회, 정치, 경제, 역사적 현실에 던져진 존재입니다. 시인 자신이 학생, 주부, 회사원이면서도 자기 존재와 무관한 시를 써대니, 이는 시를 잘 못 가르치고 배워서 그렇습니다. 아마추어 문예공모전 심사평에 실린 글을 보기로 합시다. “흔히들 ‘문학’하면 비현실적이고 일상생활에서 일탈한 환상적인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잘못된 문학교육의 영향 탓이다. 문학은 환상적인 것도 있지만 극히 평범한 보통사람들의 기쁨과 슬픔과 분노와 고뇌를 그린 것도 포함한다. 왜 이런 따분한 말을 하느냐 하면, 산문 부분 응모자들이 너무 규격화된 소재가 많은 대신 정작 기대했던 은행 안에서 전개되는, 혹은 될법한 온갖 재미있는 소재들은 드물다는 걸 지적하고 싶어서다. 가장 많은 소재가 가족(특히 어머니와 아버지), 그 다음이 여행기, 산행 등등이다. 마치 은행 생활 이야기를 고의로 피하는 듯하다. 그 안에서 얼마나 많은 일들이 벌어지는데 그런 문학적인 소재의 황금창고를 외면한 채 다른 화두를 열심히 찾는 게 안타깝다. 물론 은행이야기만 하라는 뜻이 아니라 세상을 살아가는 땀 냄새가 스민 글이 진정한 문학이라는 것이다. 특히 산문을 읽노라면 은행원들은 세상과 담벽을 쌓고 업무가 끝나면 등산이나 여행만 다니는 것 같다. 시야를 넓혀 보통사람들의 다양한 생각을 담아보기 바란다.”(임헌영, 2009년 금융인문화제 산문부문 심사평)         바로 현실의 자기경험이 시 소재의 ‘황금창고’인 것입니다. 그런데 문학교육의 잘못으로 대부분 황금창고를 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시인은 현실 상황에 놓인 자기의 존재를 살피는 것에서부터 시 쓰기를 시작해야 자신의 이야기이니 잘 쓸 수 있고, 그래야 현실감과 생동감 있는 시를 쓸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의 존재, 즉 여성시인은 성차별 속에 사는 여성의 문제, 주부시인은 가사와 육아 등에 대한 전담 문제, 교사시인은 교권에 대한 시비, 회사원 시인은 임금이나 고용 등 노동권, 문학청년은 실업이나 등록금(과거 소 1마리에서 현재 8마리 팔아야 대학졸업)로부터 시를 시작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현실감과 생동감 있는 시를 쓰기 위해서는 현실에 관심을 가지고 상상력을 발휘해야 합니다. 올바른 지식인(물론 시인이라고 다 올바른 지식인은 아니지만)이라면 도대체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우리 인간을 살기 어렵게 하는 사회의 문제가 무엇인지 밝히고 따져야 합니다. 때로는 몇몇 혁명가처럼 사회를 바꾸기 위한 행동과 용기도 필요로 합니다.  아래 시 「얼굴반찬」은 핵가족화 세태를 비판한 시입니다.   옛날 밥상머리에는 할아버지 할머니 얼굴이 있었고 어머니 아버지 얼굴과 형과 동생과 누나의 얼굴이 맛있게 놓여있었습니다 가끔 이웃집 아저씨와 아주머니 먼 친척들이 와서 밥상머리에 간식처럼 앉아있었습니다 어떤 때는 외지에 나가 사는 고모와 삼촌이 외식처럼 앉아있기도 했습니다 이런 얼굴들이 풀잎 반찬과 잘 어울렸습니다 그러나 지금 내 새벽 밥상머리에는 고기반찬이 가득한 늦은 저녁 밥상머리에는 아들도 딸도 아내도 없습니다 모두 밥을 사료처럼 퍼 넣고 직장으로 학교로 동창회로 나간 것입니다 밥상머리에 얼굴반찬이 없으니 인생에 재미라는 영양가가 없습니다. - 「얼굴반찬」 전문 돈과 경쟁으로 요약되는 자본주의는 핵가족화를 넘어 가족의 해체를 낳고 있습니다. 기러기아빠, 갈매기아빠 문제. ‘나홀로 지방에…위기의 주말아빠’ “한국경제의 심장인 지방의 산업단지에 갈수록 홀아비들이 늘고 있다. 자녀 교육 때문에 홀로 지방에 머무는 이른바 ‘갈매기아빠’의 증가는 가정해체와 시업생산성 저하의 원인이 되는 동시에 사회기반의 붕괴라는 잠재적 위험을 안고 있는 시한폭탄이라는 지적이 많다.” “퇴근하면 갈 곳이 없어요. 불꺼진 빈방에 열쇠로 문 따고 들어가는 것이 가금은 끔찍하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혼자 있다 보니까 잠도 잘 안와요. 그래서 술이 친구가 된 셈이죠.”(당진군 송악 유흥가가 밀집한 선술집에서 만난 3년차 갈매기) “취재 중 만난 갈매기 아빠들은 10중 8,9는 자녀 교육 문제 때문이라고 말했다.” “대부분 갈매기아빠들은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가면 특별한 것을 하지 않아도 가족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음식을 함께 먹는 것 자체에서 행복을 느낀다.’고 말했다.”(노컷뉴스 2009.7.27) ‘남편 딴짓 할까, 숙소 불신검문’ ‘아내는 불륜 의심에 서울에서 지방까지 단속 원정길/ 자녀교육 때문에 시작했는데 비행청소년 된 사례도’ “애들 학원 데려다주고 그 길로 경부고속도로를 타곤 했죠. 술집 마담과 섬씽이 있는 것을 알아채고 난 다음부터 불시에 검문을 하는 거죠. 남편 옆에서 두세 시간 있다가 다시 서울로 올라오더라도 그렇게 해야 마음을 놓을 수 있어서…” “어떤 경우는 몇 달에 한 번씩 집에 들어가게 돼요. 그러면 남편이라는 나의 존재가 일상 속에서 잊히는 거죠. 친구 만나러 간다거나 취미생활을 한다거나… 그렇게 되면 서로 무관심해지는 거죠.” “지금은 정상이더라도 이런 비정상적인 가정을 이어가다보면 비정상적인 삶이 정상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 이미 가족과 가정을 잃은 갈매기들의 경고의 울음소리다.”(2009.7.28 노컷뉴스)       여럿이 모여 밥 먹을 기회도 없고, 그래서 가족끼리 부딪히며 사는 재미도 없습니다. 가장 한 사람만 벌어도 온 가족이 먹고 살도록 적정한 임금과 사회보장을 해주는 사회라면 가족이 뿔뿔이 흩어져 살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전 가족이 흩어져 돈벌이를 하느라 정신없고 허덕이고 있습니다. 학생들은 입시 경쟁에 몰려 어려서부터 사설학원에 돈을 퍼주러 다닙니다. 우리나라 청소년들의 일부일 공부시간은 49.43시간, 경제협력개발기구 평균 33.92 시간보다 15시간이나 많다고 합니다. 그러나 학업성취도는 별 차이가 없다고 합니다. 핀란드는 평일 학습시간이 4시간 22분으로 우리나라 8시간 55분보다 절반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수학점수는 544점(한국 542점)으로 2점 높다고 합니다.(헤럴드경제, 2009.8.6)    그러니 집안에 식구들이 모일 기회가 적고, 그러니 인생에 재미가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인생 최고의 문제는 바로 사는 재미입니다. 사는 재미가 있어야 인생이 행복합니다. 사는 재미가 있느냐 없느냐가 성공적인 인생이냐 아니냐의 관건일 것입니다.  공자는 아는 것 보다 좋아하는 것이 낫고, 좋아하는 것보다 즐기는 것이 낫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인생도 그렇고 시를 대하는 태도도 그럴 것입니다. 시를 아는 것보다 좋아하는 것, 좋아하는 것보다 즐기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모두 그런 건 아니지만, 대개 여유가 있을수록 가족 수가 많고 화목하며, 가난할수록 가족 수가 적고 불화합니다. 더하여 아주 가난하거나 수입이 적은 사람은 결혼을 못하거나 결혼을 하였더라도 이혼을 하여 독신으로 늙어죽는 게 우리 사회의 현실입니다. 이런 사회에서는 성 소외자가 많기 때문에 성폭력도 더 많이 일어납니다. 특히 가정을 구성하지 못하고 혼자 사는 남자가 자살을 많이 한다고 합니다. 이러한 핵가족화의 결과는 식탁(밥상머리)에서 전승되는 전통문화와 가족공동체의 정신을 단절시킵니다. 민족도 국가도 정체성을 잃어버릴 것이 뻔합니다. 우리나라가 중국이나 일본보다 더 영어화, 미국화가 되었다는 사실을 잘 아실겁니다. 식탁문화가 없으니 아이들도 말씨부터 싸가지가 없어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여러분의 생각과 달리 우리나라 청소년은 부모에게 가장 오랫동안 붙어사는 캥거루이면서도 부모 부양의식 ‘부모를 모시겠다’ 응답; 영국 66%, 미국 64%, 프랑스 51%, 한국 35%. (한국일보, 2009.3.30)  이 서양보다 훨씬 낮습니다. 물론 부모를 모시는 것이 최선은 아니겠지만, 서양보다 효와 수신제가를 강조하는 동양 전통문화가 있는데도 이런 결과가 나타난 것을 보면 뭔가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얼굴반찬 운동’을 하여야 하고, 그러기 위해 ‘식탁권’을 회복해야 합니다. “아이들은 책을 읽을 때보다 10배 가까운 어휘를 가족과 식사를 하면서 배운다.”(하버드대 연구결과) “가족과 식사 횟수는 흡연 경험률, 음주 및 마약 경험률과 반비례한다.(컬럼비아대학 연구결과) 수많은 연구 결과는 가족과의 식사가 단순한 배만 채우는 자리가 아님을 입증하고 있다. 현대의 정주영가는 새벽 5시 가족식사 시간에 경영수업을 했으며, 정치 명가 케네디가는 지도자의 자질을 식탁에서 익혔다.(한겨레, 2009.7.25 sbs 스페셜 안내글 )    지금은 식탁을 지배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합니다. 지금 우리 식탁은 재벌과 외국자본이 전부 차지하고 있습니다. 건강한 식탁은 건강한 가정과 건강한 사회, 건강한 국가, 건강한 세계인을 만드는 기초입니다.  가정에서 식탁 지키기는 매우 정치적인 실천입니다. 정치는 대단한 게 아닙니다. 일상을 행복하게 하는 것, 그런 의미에서 부드럽고 생활밀착적인 세심한 여성들도 정치에 관심을 갖고 각종 의회 등 회의구조에 진출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공자는 효도를 하고 집안일을 잘 하고 자기 직무를 잘 하는 것 자체가 정치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식탁을 잘 지키고, 집안 살림을 잘 하는 것도 정치적인 일입니다. 때때로 멀쩡한 보도블록을 갈아 업고, 토목공사를 잘하는 사람에게가 아니라 일상생활을 개선할 수 있는 사람에게 표를 주는, 선거를 잘 하는 것이 정치활동인 것입니다. 양극화, 빈곤층 증가, 중산층 감소, 실업률 상승, 과열 학교 경쟁은 가정에서 대화를 단절시킵니다. 식탁 주변으로 식구들을 모으지 못합니다. 결국 가족과 공동체 중시, 인간중심의 경제 등을 할 때 식탁에서 ‘얼굴반찬’을 먹을 수 있을 것입니다.  생태적이고 환경 친화적인 건강한 식탁을 지키려면 유통혁명이 필요합니다. 이건 굉장한 어려운 혁명이면서 그만큼 중요합니다. 식료품점은 물론 학교급식 등 식품유통을 통해 식단마저 재벌이 차지하고 있고, 다국적 자본인 외국계 식음료점이 난립하고 있습니다.  확인이 더 필요하지만, 한우에 먹이는 사료인 옥수수는 99%가 외국회사(카킬이 전 세계 옥수수 장악)로부터 수입하는 것이며, 이마트, 삼성홈프러스, 현대백화점, 롯데백화점 등 재벌기업형 유통업체가 지역상권까지 싹쓸이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익이 지역과 지역 사람, 노동자에게 돌아가지는 않습니다. 거기에 벌리는 돈은 지역에 기여하지 못하고 있고, 고용된 사람들의 노동조건도 형편없습니다. 대전에서는 대기업의 화물을 운송하는 유통노동자가 운송료 30원 때문에 자살한 사건을 아실 겁니다. 당연히 중소 지역상권이 무너지자 청주에서는 지역상인들이 들고 일어났고, 인천에서는 슈퍼 상인들이 단결하여 기업형 상점의 싹쓸이를 제재하여 줄 것을 호소하였습니다. 서점과 꽃집들도 대응을 하겠다고 합니다.        미국에 본점을 두고 있는 스타벅스 자본은 점포를 월가, 런던, 서울 순서로 많이 두고 있는데, 스타벅스 점포가 많이 들어가 있는 나라일수록 금융위기가 심각하다는 연구가 발표되기도 하였습니다. 스타벅스 상점 미국 맨해튼에만 200여 곳, 영국 런던 256곳, 한국 수도권 209곳, 스페인 마드리드 48곳, 아랍에미레이트 두바이 48곳, 덴마크 2곳, 네덜란드 3곳, 이탈리아 스웨덴 핀란드 노르웨이 0 곳. (한겨레 2008.10.22)  그만큼 우리나라에 잦은 야근과 격무에 시달리고 카페인 음료를 마시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아래 시는 이러한 우리나라 노동자의 슬픈 일상을 형상화한 것입니다.    “당신, 창의력이 너무 늙었어!” 사장의 반말을 뒤로하고 뒷굽이 닳은 구두가 퇴근한다 살이 부러진 우산에서 쏟아지는 빗물이 슬픔의 나이를 참으라고 참아야 한다고 처진 어깨를 적시며 다독거린다 낡은 넥타이를 움켜쥔 비바람이 술집에서 술집으로 굴욕을 끌고 다니는 빗물이 들이치는 포장마차 안 술에 젖은 몸이 악보 없이 흐느낀다. -「몸관악기」 전문 위 시는 젊어서는 마구 부려먹다가, 임금이 높아지는 나이가 되면 노동자를 몰아내는 우리나라 자본의 행태를 서정화 하여 폭로한 것입니다. 물론 수익을 목표로 하는 자본가에게 도덕성을 기대한다는 것은 바보짓입니다. 자본주의는 인간을 부를 창출하는 수단, 상품으로만 봅니다.  그래서 국가의 적절한 조정과 규제와 감독이 필요하지만, 국가권력을 자본가들이 쥐락펴락하기 때문에 효과적인 규제와 감독이 어렵습니다. 그래서 모든 단계의 선거를 잘 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의 자기존재 배반의 선거를 합니다.       지금 우리나라 사람들, 술집에서나 어디서나 노후를 걱정하지 않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저임금과 고용불안에다 사회복지가 엉망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대기업의 평균 근속연수는 11.2년(2009.4)에 불과합니다. 국내 대기업들의 직원 평균 근속년수는 11.2년이며, 5년 전보다 1.3년 늘어난 것으로 집계됐다. 취업포털 커리어(www.career.co.kr)가 금융감독원에 사업보고서를 제출한 기업 중 매출액 기준 상위 100대 국내 기업의 ‘2008년 평균 근속년수’를 분석한 결과, 이들 직원들의 근속년수는 평균 11.2년으로 조사됐다. 기업별로 살펴보면 ‘KT’가 19.8년으로 평균 근속년수가 가장 길었고, 다음으로 ▲ 포스코 19.1년 ▲ KT&G 18.9년 ▲ 현대중공업 18.3년 ▲ 여천NCC 18.2년 ▲ 국민은행 17.4년 ▲ IBK기업은행 17.2년 ▲ 한국전력공사 16.7년 ▲ 한국외환은행 16.5년 ▲ 현대자동차 16.0년 순이었다. 남성직원들의 평균 근속년수가 높은 기업은 ▲ KT 20.2년 ▲ IBK기업은행 19.3년 ▲ 포스코 19.1년 ▲ 국민은행 18.7년 ▲ 현대중공업 18.7년 순으로 집계됐다. 반면, 여성직원들의 평균 근속년수가 가장 높은 기업은 ‘KT&G’가 20.3년으로 조사됐다. 이어 ▲ KT 17.6년 ▲ 대우조선해양 15.6년 ▲ 국민은행 13.9년 ▲ IBK기업은행 12.6년 순이었다.(2009.3.12) 월급쟁이가 되어서는 도대체 인생 전체를 안정적으로 설계하기가 불가능한 사회이고, 평생 노동시간도 엄청 깁니다. ‘한국男, 퇴직 후 11년 더 노동’ ‘OECD 국가중 최고- 실질은퇴, 71.2세… 노후 연금 부족 때문’ OECD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 남성의 공식은퇴 연령은 60세이지만, 실제로 노동시장에서 완전히 퇴장하는 실질은퇴연령은 71.2세였다.… 반면 대다수 서구 선진복지국가 국민은 오히려 실질은퇴연령이 공식은퇴연령보다 낮아, 일찌감치 생계를 위한 노동에서 손을 떼는 것으로 나타났다.… 우리나라 국민의 퇴직 후 노동기간이 지나치게 긴 이유는 노후 생계유지에 필요한 연금 액수가 충분하지 않아 정년 이후에도 노동시장에 오래 머물기 때문으로 풀이했다. OECD 평균 실질은퇴연령 63.5세. (노컷뉴스, 2009.7.27) 그러나 기업들은 대개 회사 정문 앞에 ‘직원을 가족같이’라는 위선적 구호를 걸어놓고 있습니다.  근속년수는 그렇다 치고 우리나라 노동자들의 노동시간은 경제협력개발기구 가입 30개 국 가운데 세계 1위입니다.(년간 2,316시간. 회원국 평균은 1,787시간. 국민일보 2009.4.23) 그러면서도 직장인의 70%가 “난 근로빈곤층”이라고 느끼고 있습니다.  근로빈곤층이라고 느끼는 이유는 월급으로 생활비를 감당하기가 빠듯해서 퇴직시 생계곤란 부채감당이 어려워서 고용불안으로 들고 있습니다. 이들은 근로빈곤층이 생기는 원인을 부익부 빈익빈을 유도하는 사회적 구조(47.1%), 높은 생활비(46.3%), 불안정한 고용형태(40.5%)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Am7 2009.8.6)  자살율도 세계 1위입니다.(10만 명당 45.2명-남 32명, 여13.2명, 회원국 평균 24명. 국민일보 2009.4.23). 국민의 대부분인 임금노동자들과 임금노동자에서 일찍 떨어져 나온 영세자영업자들이 살기가 아주 어렵고 좋지 않은 사회라는 것을 말해주는 사례입니다. 국민의 사회적 심리적 현실은 이러한데, 이런 현실을 만들어내는 자본과 권력에 아부하고 스피커노릇을 하며 연명하는 사이비언론, 사회가 어려워도 양심 있는 발언 한번 안하는 문약한 책상물림의 학자와 시인들이 꾸려가는 난해 난잡 불통인 문예지가 문단을 장악하고 있습니다.  난잡 난해 불통의 문학은 현실을 헷갈리게 하고 몽롱하게 하고 지워버립니다. 그래서 이런 문학은 거품입니다. 거품은 곧 사라집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거품인지 아닌지는 여러분이 거기서 나오는 시, 소설 등 문예물을 읽어보면 됩니다. 어느 정도 시를 공부한 사람이 읽어도 도대체 무슨 얘기인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거품을 따라다녀서는 평생 올바른 시를 쓸 수 없으며, 자기 존재를 배반하고 정체성이 없는 시만 쓰다가 일생을 마칠 것입니다. 자기 삶과 존재와 무관한 언론과 문예지를 선호하는 것은 자기 삶을 배반하는 행위입니다. 이들 언론과 문예지 기득권자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사회, 정치, 경제적 상상력의 시들입니다. 현실에 놓인 인간 실상을 똑바로 보는 것을 두려워하는 시입니다.  교육과 의료, 주택, 청년, 여성, 실업문제 등등 이런 것들이 시를 통해 폭로될수록 자신들이 모시는 기득권에게는 불리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현실을 무관심과 왜곡을 통해 협조하는 문인에게 상을 주면서 호의를 보내고 매수를 합니다.  죽은 문학을 하고 싶으면 이들 언론과 문예지, 학자와 시인들에게 아부하면 됩니다. 삼류문인은 나이 먹어서 늦게 문학공부를 하고,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는 문예지로 등단을 하고, 지방에 거주하고, 문학상을 못 받는 작가가 아닙니다. 인간을 괴롭히는 자본과 권력에 아부하고 그들이 주는 상을 명예처럼 받는 작가인 것입니다.   일곱째, 알아먹게 쓴다. 요즈음 시들은 횡설수설하고 난잡 난해해서 도저히 읽기가 불편합니다. 소통 불가인 불통문학입니다. 요즈음 시만 그렇겠습니까? 옛날에도 그런 시들이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전부 거품처럼 사라졌을 겁니다. 독자와 소통하는 시를 써야한다는 말입니다. 언어는 인류 최고의 발명품이라고 합니다. 언어를 발명한 이유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소통을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필자는 초고를 쓰고 나서 무슨 얘기인지 전달이 잘 될 때까지 고치고 고칩니다. 형상이 선명해질 때까지 퇴고를 반복하는 것입니다. 『논어』에 나오는 절차탁마의 원칙을 고수하는 것입니다. 절차탁마는 옥으로 그릇을 만들 때, 옥을 자르고 쓸고 쪼고 가는 것과 같이 정성을 들인다는 말입니다. 자신에 대한 극기와 시에 대한 극진이 필요합니다. 제 시가 쉽다는 얘기를 많이 하는 데, 이러한 절차탁마의 원칙을 가지고 쓰기 때문입니다.  물론 문자나 말로 자신의 마음과 진리를 남에게 정확히 전달하기는 불가능합니다. 이미 원효는 진리의 전달을 정확하게 할 수 없는 언어의 한계에 대하여 고민했습니다. 그래서 기유라는 말을 썼습니다. 요즘의 비유입니다. 자신의 어떤 감정을, 이를테면 사랑하는 감정을 언어로 표현해 보십시오. 정확한 표현이 어려울 겁니다. 그래서 시인들이 표현을 놓고 괴로워하는 것입니다. 스님이 평생 공부하여 깨달았다는 진리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는 언어로 밖에 표현하지 못했던 심정을 시인만이 이해할 것입니다.   시는 의도의 전달입니다. 함축을 통한 의도의 전달인 것입니다. 고려 이제현은 시를 마음먹은 것을 표현하는 지향의 발현이라고 했고, 무의미시를 주창했던 김춘수조차 시는 관념, 정서, 욕망 등을 함축성 있게, 음영이 짙게, 미묘하게 실감을 가지도록 전달하는데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시를 아무리 뜯어보아도 시가 무슨 내용인지 모르겠는 것은 독자의 잘못이 아니라 창작자의 미숙에서 오는 것입니다. 특히 시 공부를 잘못하여 시를 쓰기 위한 시를 쓸 경우에 내용 전달이 안 됩니다. 물론 시는 자기규정이 없어서, 일방적으로 시인만 아는 불통을 전제로 쓰는 시가 있기도 하겠지만 저는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은 소위 유명하다는 시인, 유명 출판사에서 나온 시를 읽으면서 도저히 해독을 못하는 경우가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시인이 시를 잘못 배우거나 잘못 쓴데서 오는 것이니 염려하지 않아도 됩니다. 소비자, 감상자인 여러분의 잘못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불량품을 만든 창작자의 잘못입니다. 어떤 책이든 읽기 어려운 것은 작가가 충분히 정성을 들이지 않아서입니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크루그먼은 “나 역시 명망 높은 경제학자로서 아무나 읽지 못하는 어려운 글을 쓸 수 있는 능력은 충분하다.”고 하여 대중이 알아먹는 쉬운 글쓰기를 중요시하였습니다. 시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변에 횡설수설과 난해 난잡 불통하는 시를 인정하고 독려하고 양산하는 평론가와 학자와 문예잡지들이 있습니다. 당장 이러한 허망한 것들을 용기 있게 쓰레기통에 던져버리기 바랍니다. 그리고 쉽고 아름다운 시를 찾아 읽고 쓸 것을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끝.        
878    아마추어 詩人들 고쳐야 할 시작법 댓글:  조회:4903  추천:0  2016-01-08
시창작 초기에 나타나는 고쳐야 할 표현들                                             ///도종환  Ⅰ. 피상적 인식에서 벗어나야 한다  아이들이 그림 그리는 모습을 살펴보면 재미있는 현상을 발견할 때가 있다. 화폭에 산, 나무, 들, 꽃, 하늘, 사람의 밑그림을 연필로 그려놓고 나무는 고동색, 나뭇잎은 초록색, 하늘은 푸른색 이런 식으로 화폭에만 시선을 고정시킨 채 색칠을 해나간다. 아이들 머릿속에는 이미 선험적으로 얼굴은 살색, 머리는 까만 색, 땅은 황토색으로 칠하면 된다는 생각이 들어 있는 경우가 있다.  앞에 있는 나뭇잎 색깔이나 하늘의 변화하는 빛깔을 잘 관찰하면서 그리는 아이는 별로 없다. 그렇게 그려놓은 그림들은 그래서 늘 그게 그것 같고 새롭지 않다. 나무둥치에 고동색을 가득 칠해 놓은 아이에게 고동색 크레용을 들고 가 나무에 직접 대보게 하며 “어때 색깔이 같니?”하고 가르치는 선생님을 본 적이 있다.  사물의 모습을 직접 보고 자세히 관찰하며 피상적인 인식에서 벗어나게 하는 일 이것은 아마 예술 창작에 있어 가장 기본적인 것인지도 모른다.  추억을 실은 버스가 나의 마지막 종착역에 서자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환호소리가 귓전에 들렸다. 서쪽하늘 가까이에서 실려오는 바다 내음 맡으며 황금벌판 풍요로움에 홀쭉한 고향길을 말없이 걷는다. 어린 시절이 벌판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속삭였던 숱한 언약들이 다시 귓전에 들려온다. 살아오면서 버려진 덧없는 것들이었지만 그때처럼 가슴 설레이여 눈망울 적시었고 마음은 이미 바다와 들판 작은 마을 소박한 집들에 백지장처럼 깔려버렸다.  하얗게 깔린 백지장 위로 그리운 사연들이 써져 내려가고 낯설지 않은 이름들이 내 마음 호수에 돌을 던질 때마다 잔잔한 갈등을 일으킨다……  세월이 어느덧 흘러 밉던 얼굴마저 그리워져 모질게 내쫒았던 당신에게 다시 돌아온 것은 이곳이 나의 비둘기가 둥지를 틀고 파랑새가 날개짓하던 곳이었기 때문이다.  ―-‘애착’  이 시는 고향에 다시 돌아오면서 느낀 생각들을 쓴 시이다. 그런데 고향에 대한 그의 인식은 어떠한가. ‘황금벌판 풍요로움~’그는 고향벌판을 바라보며 황금 벌판이라고 말한다. 대단히 피상적이다. 오늘날 농촌의 실제 모습이 어떤가 하는 구체적 인식이 결여되어 있고 농촌의 모습을 이야기할 때면 으레 묘사하던 상투적인 관용어구를 그대로 따라 쓰고 있다. 이런 대상에 대한 피상적 인식의 흔적은 이 작품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작은 마을 소박한 집들~’이런 표현도 마찬가지이고 고향을 ‘비둘기가 둥지를 틀고 파랑새가 날개짓 하던 곳’이라고 묘사한 부분도 마찬가지이다.  Ⅱ. 상투성에서 벗어나야 한다  위의 시 ‘애착’에서 보는 것처럼 삶, 또는 대상에 대한 피상적 인식은 자연히 상투적인 표현으로 이어지게 된다. ‘내 마음호수에 돌을 던질 때마다~’이런 구절 역시 그렇다. 마음을 호수에 비유하는 표현, 그 호수에 돌을 던진다는 표현 등은 너무 흔하게 쓰여온 표현이며 전혀 새로운 느낌을 주지 못한다.  눈부신 밤거리  달빛 한 가닥 들어설 틈도 없다.  휘황한 불빛 속엔  검은 하늘 향해 벌린 하얀 살뿐이다.  아무 것이든 빨아들이는 불가사리 식욕  붉은 웃음은 잿빛 거리를 휘돌아 하늘에 퍼지고  현란히 부서지는 물결 속에  검은 세계는 찬란히 부상한다.  달이 떨어져 나무에 걸려 있다.  ―‘밤거리’  이 시에 나오는 ‘붉은 웃음’ ‘잿빛 거리’ ‘검은 세계’ ‘하얀 살’등의 표현은 각각의 색깔이 갖고 있는 고정적인 이미지를 상투적으로 답습하면서 쓰고 있다. 밤거리의 풍경을 그리고 있지만 어딘가 답답하다. 답답한 풍경을 통해 무엇인가를 이야기하려고 하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잘 잡히지 않는다.  키스를 하고 돌아서자 밤이 깊었다  지구 위의 모든 입술들은 잠이 들었다  적막한 나의 키스는 이제 어디로 가야 할 것인가  정호승의 시인의 ‘키스에 대한 책임’이라는 시이다. 입맞춤을 하고 돌아서는 깊은 밤, 너는 눈물을 흘리는데 나의 키스 나의 사랑은 이제 어디로 가야할 것인가를 생각하며 적막해지는 심정을 ‘적막해지는 나의 키스’라고 표현했다. 신선하지 않는가.  첫 키스의 느낌을 각자 한 번 시로 표현해 보자. 어떻게 표현할까. 첫 키스의 느낌을 수식하는 말을 만들어 보자고 하면 ‘황홀한’ ‘달콤한’ ‘갑작스런’ ‘아련한’ ‘부끄러운’ ‘잊지 못 할’ ‘지워버리고 싶은’ ‘감미로운’ ‘떨리던’ 등등의 말이 쏟아져 나온다. 이런 표현들 중에 참신한 표현은 무엇일까. 잘 찾아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한용운시인은 어떻게 표현했는가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이라고 표현하지 않았는가. 지금부터 70여 년 전 그런 참신한 말로 표현했다. 날카로운 이란 형용사는 키스라는 말이 주는 느낌과는 잘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말이다. 광물질적인 속성, 금속성 이런 이미지를 주는 말이다. 그러나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이 말이 결합하면서 ‘갑작스런’ ‘충격적인’ ‘강하게 다가온’ ‘찌르듯이 내게 온’ 이 모든 느낌이 함께 들어 있는 다양한 의미 공간을 열어 놓은 것이다. 이런 신선한 언어의 만남을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은 ‘낯설게 하기’라고 한다.  다음의 시를 보자  세상에 모든 아내들은  한 꽃에 꽃잎 같은 가족을 둘러 앉혀 놓고  지글지글 고깃근이라도 구울 때  소위 오르가즘이란 걸 느낀다는데  노릇노릇 구워지는 삼겹살  그것은 마치 중생대의 지층처럼  슬픔과 기쁨의 갖가지 화석을 층층히 켜켜로 머금고  낯뜨거운 오르가즘에 몸부림친다  그 환상적인 미각을 한 점 뜨겁게 음미할 새도 없이  식구들은 배불리 식사를 끝내고  삼겹살을 구워 먹은 뒤 폐허 같은 밥상은  ……………  헐거운 행주질 한 번으로도 절대 깨끗해지질 않는다  하얀 손등에 사막의 수맥 같은 파란 심줄을 세우고  힘주어 밥상을 닦는 아내의 마음속엔  수레국화 꽃다발 사방으로 흩어지고  ―‘돼지’중에서  식탁에 둘러앉은 가족의 모습을 무어라고 표현하고 있는가.‘한 꽃에 꽃잎 같은 가족’ 그렇게 표현했다. 비유가 신선하다. 돼지고기의 삼겹살을 보며 떠올린 ‘중생대의 지층’ 그리고 ‘층층히 켜켜로 머금은 슬픔과 기쁨의 갖가지 화석’이런 비유들은 이 시를 쓴 사람만이 본 독특하고 새로운 시적 발견이다. 지글지글 구워지는 돼지고기와 오르가즘을 연상시킨 비유에 이르기까지 이 시는 전혀 상투적인 데를 찾을 수 없다. 그래서 시가 새로운 느낌을 준다.  Ⅲ.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제대로 드러나 보여야 한다  사람들은 돌아오고 흐느끼는 소리는 없었다  아무도 앓는 소리 듣지 못하고  나도 어딘가로부터 돌아왔다  피는 물위를 기름처럼 흐르고  사람들은 원심분리기 속에서  제 무게 만큼의 속도로 흩어져 간다  새록새록 피어오르는 유방들이  다가올 봄을 대비해  욕망을 충족시키고  수많은 옷가지들이 거리를 휩쓸고  지나가면 어느새 나는  벌거벗은 병정이 되어  거리를 간다  속이지 말라고 사람들은 외치고  그래도 나는 속인다  나는 속이는 행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으므로  내가 죄를 벗어나는 길은  죄를 잊는 길밖에 없다  나의 원죄는 이토록 망각 앞에 무력하다  또한 그것은 종이 위에서 다소간의  위안을 찾기도 하지만  여전히 노란색 가로등에 뿌리는  외로운 빗줄기 옆에 있다  하염없이 달리는 차창가에  정면으로 달려오는 운명 앞에 있다  ―‘갑자기 그러나 천천히’  이 시속의 시적 화자는 지금 죄 때문에 괴로워한다. 죄를 짓고도 그것을 솔직하게 털어놓지 못하고 속이고 있어야 하는 괴로움에 마치 벌거벗은 병정이 되어 거리를 가고 있는 듯한 부끄러움에 쌓여 있다.  시적 화자가 그토록 괴로워하는 것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우리는 물론 알 수 없다. 그러나 문제는 이 시를 쓴 사람이 이 시를 통해서 결국 무엇을 말하려 하고 있는지가 불명확한 데 있다.  1연 3행 ‘나도 어딘가로부터 돌아 왔다’는 것은 어디일까. 끝까지 읽어보아도 그곳이 어디인지는 나와 있지 않다. 2연에 와서 죄 때문에 그토록 괴로워한다는 이야기가 길게 전개된다. 그런데 18~19행 ‘그것은 종이 위에서 다소간의/위안을 찾기도’ 한다고 말한다 무슨 위안을 찾는다는 것일까. 그리고 21행 ‘외로운 빗줄기 옆에 있다’와 23행 ‘정면으로 달려오는 운명 앞에 있다’고 했는데 무엇이 그 앞에 있다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죄에 관한 이야기가 마무리되는 끝 구절이기도한 18행부터 23행까지는 역시 모호한 채로 던져져 있다. 2연 1행부터 7행까지는 이 시속의 시적 자아가 서 있는 공간적 배경을 나타내는 것들인데 죄의식을 느끼게 된 원인과 어떤 연관을 갖는다든가 아니면 상징적인 구실을 한다든가 하지 못하고 산만하게 나열되어 있을 뿐이다. 전체적으로 주제를 향한 응집력도 부족할뿐더러 ‘유방’ ‘병정’ ‘종이’ ‘운명’ 등의 시어들이 이해되지 않는 채 자꾸만 걸린다. 거기다 제목 ‘갑자기 그러나 천천히’는 시 전체 내용과 어떤 연관을 갖는 것인지 역시 알 수 없다. 또 다음과 같은 시를 한 편 더 보자.  이름보다 먼저 그대 귀를 찾았을  죽도록 사랑한다는 말이  더한 부름으로 버거웠던지  유령처럼 스르르  가버렸다  ― ‘겨 드 랑 이 에 각 개 표 로 손 을 끼 워 넣 는 건 그 어 느 한 쪽 의 필 요 만 은 아 니 다  이 시의 시적 자아는 죽도록 사랑한다는 말이 버거워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 버린 빈 공간에 서 있다. 이 시의 제목대로 ‘겨드랑이에 각개표로 손을 끼워 넣는 것은’ 어느 한 쪽의 필요에서가 아니듯 서로 따뜻한 온기가 필요해 사랑했을 텐데 그냥 황망히 떠나 버린 것을 못내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는 심정이 나타나 있다. 그런데 제목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도 내용의 한 부분으로 들어가야 할 것 같고 거기에다 원래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더 해서 한 편의 시로 자기 감정을 제대로 형상화하려는 노력이 더 있어야 할 것 같다. ‘겨드랑이~’로 시작되는 긴 제목이 새롭다는 느낌을 주기보다는 제목도 내용도 다 미완성으로 끝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우리는 시를 쓰면서 내가 지금 이 시를 통해 무슨 이야기를 표현하려고 하고 있는가 하고 되물어 보아야 한다. 다음 시는 어떤가 함께 읽어보자.  돌담은……,  아닙니다.  어릴 땐 가지런한 층층에 끄덕머리 하다가, 흔들고 다시, 여물게 손가락질 하나 둘 헤다가, 마침내 올라서서 이쪽과 저쪽 세상 가운데를 걸으며 조심스레 팔저울도 했지요.  하지만 이젠 아닙니다. 저는 이미 많이 자라서 한여름 놀던 그 그늘, 한 겨울 고인 볕뉘와 속살거림, 모두 까닭 없었어요. 때로 생각이야 나지요. 가을이었어요 누군가 싸리비 하나 꺽어들고선 저 산 너머로 가라며 저를 자꾸 내쫒았어요. 가라면 간다며 그 길로 돌담 등지는데, 때깔 곱게 물든 단풍 숲 사이 바알간 노을이 깃들더니 이내 두 눈 가뭇가뭇 멀게 했어요.  그 후론 여기 이 바깥 세상에 쭉 살았지요. 어떤 날은 취해 밤낮을 바꾸고 또 어떤 날엔 싸우다 승리, 패배, 승리 패배 패배했어요, 삭신 다 닳은 세월 속절 없지만 아파서 제겐 더 살뜰한 기억이지요.  다만 잊을 수 없는 건  그 낮은 돌담. 웃자란 키로 들여다봅니다.  안팎으로 그늘과 속살거림 거느린 것이며, 자라지 못하는 속엣 것들 고즈넉이 품은 모양이며, 누군가 또 싸리비 꺾어 괜찮다고, 가라고, 사는 건 그렇게 등지는 거라며 저를 쫓아내는 것까지도 두고 올 적 그대로지만, 삶이란, 예전에 그랬듯, 홱 떠나는 것은 아니더군요.  ……안됐거든요.  저물 무렵  그 모든 게 노을 함께 지면  참 안돼 보이거든요.  이제 와서 저는  슬퍼할 밖에요.  ―‘돌담’  많은 쉼표와 현실에서 과거로 과거에서 현실로 들락거리는 구성은 자칫 혼란스럽게 비쳐질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다. 그 속에도 정연한 내적 질서가 있다. 돌담이라는 소재를 통해서 유년기와 성장기, 세월의 이쪽과 저쪽을 넘나들면서 아름답고 아프던 어린 시절을 추억한다. 떠나기 싫던 우리들 근원적 삶의 터전과 그 터전을 떠나와 끊임없는 싸움을 되풀이하며 성장 해야하는 현실의 경계에 돌담이 있다. ‘괜찮다고, 가라고, 사는 건 그렇게 등지는’ 것이라고 말하는 주제를 내포한 구절도 자연스럽게 시속에 녹아 있고 우리 모두가 체험한 통과의례의 상징으로 ‘돌담’이 제 구실을 한다. 그러면서도 자꾸 되돌아 보여지는 유년시절에 대한 그리움을 담은 ‘성장시’로 손색이 없다. 전통적인 기법으로 표현하든 새로운 기법으로 그려내든 문제는 한 편의 시를 통해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제대로 나타나 있느냐 그렇지 못하냐에 있는 것이다.  Ⅳ. 관념성 불필요한 난해성에서 벗어나야 한다  나는 간다  무한한 공간 속으로  닫혀 있는 창을 열고  雨의 장막을 넘어  나는 간다  영원한 침묵 속으로  저자 거리의 소음을 뒤로 하고  검은 숲 오솔길을 걸어  나는 간다  절대의 고독 속으로  닫혀 있는 창 너머로  누구와도 아닌 홀로서  순수 이전으로 돌아간다.  ― ‘순수 이전으로’  a--a'--a"형식으로 쓰여진 이 시는 ‘나는 간다, 어디 어디로.’ 의 기본 골격을 갖고 있다. 그리고 시적 화자인 내가 가는 곳은 ‘무한한 공간’ ‘영원한 침묵’ ‘절대의 고독’속이다. 그곳을 작자는 순수 이전의 곳이라고 한다. 순수 이전의 곳 그러니까 지금 순수한 곳보다 훨씬 더 깨끗하고 때묻지 않은 그 어떤 곳으로 간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러나 그 순수 이전의 곳이라는 무한한 공간, 영원한 침묵, 절대의 고독 등은 대단히 관념적이다. 雨의 장막도 마찬가지다. ‘닫혀 있는 창을 열고’ ‘저자거리의 소음을 뒤로하고’ ‘누구와도 아닌 홀로서’ 가는 길이라면 죽음의 세계가 아닌가 싶다. 그렇다면 죽음의 세계는 절대 순수의 세계일까. 문제는 이 시의 시어들이 육화 되지 않은 관념성에 빠져 있다는데 있다.  미지에의 두려움에 망설이며  되돌아 갈 수 있는 줄 알았던 이 길이  그러나  길은 앞으로만 뚫려 있고  등뒤엔 이미 수렁  나의 사색은 병약했으며  암흑에 가두었고  고통일 뿐이던 젊음  삶과의 치열한 투쟁  그러나 자신의 밀실을 벗어나지 못한 채  묶여 있던 감각 굳어 있는 뼈마디  나는 그것이 어둠인 줄도 몰랐었다.  ―‘봄’중에서  나약하던 자기의 밀실을 깨치고 나오는 어느 봄날의 기억에 대해 쓴 시이다. 이런 자각과 깨달음을 통해 역사를 알게 되었고 쓰러짐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이 시의 뒷부분에 이어진다. 그러나 어딘지 미더웁지 못한 데가 있다. 바로 지금 이 시에서 보는 것과 같은 육화 되지 않은 언어들 때문이다. ‘사색’ ‘병약’ ‘암흑’ ‘투쟁’ ‘밀실’ ‘감각’ 등의 관념적인 시어들은 삶으로 한 덩어리가 되어 있다는 느낌보다는 삶과 언어가 따로따로 겉돌고 있다는 느낌이 들게 한다.  Ⅴ. 나약한 감상으로 떨어지지 않아야 한다  시를 쓰는데 가장 중요하게 작용하는 요소로 정서를 빼놓을 수 없다. 정서란 어떤 사물을 대하면서 일어나는 감정의 변화를 말한다.  러스킨은 사랑, 존경, 찬탄, 기쁨의 4가지와 미움, 분노, 공포, 슬픔의 4가지를 합쳐 8대 정서라 했다. 사람의 감정 중에 희, 로, 애, 락, 애, 오, 욕이 모두 시가 될 수 있고 근본적으로는 지, 정, 의(知.情.意)가 모두 시심의 밑바탕이 된다. 그 중에서 ‘정’이 정서가 되겠는데 문제는 이런 감정 중 사랑 또는 이별 슬픔 외로움 등의 감정만이 시의 중요한 정서인 것처럼 편협하게 생각하는 태도이다.  문득 헤어져야 할 때를 생각해 보면  오늘의 이 기쁨이  영원할 것 같지만은 않다.  헤어짐을 전제로 하지 않은 만남이란 없고  만남 자체도  헤어짐이 있음으로써 의미 있는 것이 아닐까  너의 그림자가 사라져 가는  버스 뒤꽁지의 창문을 쳐다보면  또다시 쓸쓸해지는 어깨를 움찔하며  내일의 만남을 기약해 간다  어쩌다 이대로 헤어진다고 해도  다시 만날 것을 믿으며  어색하지만 반가운 너의 얼굴을  원 없이 쳐다볼 수는 있겠지  ―‘사랑 그리고 그만큼의 아픔’중에서  오늘은 갑자기  내가 너를 그리워한다는 사실 자체가  우울한 슬픔으로 다가온다  서글픔은 고동색 절망으로 흐르고  나란 존재는 정말 무엇일까 하는 생각만  그곳에 가득하다  네게 사랑한다고 말한 적은 없다  그리고 좋아한다고 고백한 적도 없다  그저 내 곁에만 있어 주면 좋았는데  오늘은  네가 곁에 있어도 허전하기만 하다  ―‘서정시가 흐르는 화폭’  위의 시 ‘사랑 그리고~’는 만남의 기쁨과 헤어짐에 대한 불안함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원 없이 쳐다보고픈 마음을 담은 시다. 두 번째 시 ‘서정시가~’는 그리워하는 마음의 복잡함. 그 심리적 고통에 대해 쓰고 있다. 그런데 그리움을 우울한 슬픔으로 표현한 곳이라든지 서글픔을 고동색 절망이라고 표현한 부분 등은 앞에서 이야기한 삶 또는 사랑에 대한 피상적 인식의 결과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고동색 절망은 도대체 어떤 것일까. 그것은 고동색과 관련이 있는 주관적 경험의 표현일 뿐 객관적인 공감을 얻지 못한다. 이렇게 되니까 5행의 ‘나란 존재는 정말 무엇일까’하는 철학적 질문도 전혀 철학적으로 들리지 않는다. 감상적인 자문으로 들릴 뿐이다.  게다가 ‘오늘은/네가 곁에 있어도 허전하기만 하다’라든가 ‘헤어짐을 전제로 하지 않은 만남이란 없고’ ‘다시 만날 것을 믿으며’ 등은 류시화, 서정윤, 한용운의 시에서 많이 접했던 구절 같은 느낌이 든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문제는 서정 또는 정서에 대한 심적 반응이 나약한 감상으로 떨어지지 않을까 하는 우려이다.  윈체스터는 문학의 정서적 효과에 대한 영원한 가치 평가의 항목으로 다음 다섯 가지를 들고 있다. 첫째 정서의 공정 혹은 타당, 둘째 정서의 활기 혹은 힘, 셋째 정서의 계속 혹은 안정, 네째 정서의 범위 혹은 변화, 정서의 등급 혹은 성질이 그것이다. 쉽게 말하면 그럴만한 이유가 느껴지느냐, 생생한 생동감으로 살아 있느냐, 믿을만한 힘이 느껴지느냐, 얼마만한 변화를 줄 수 있는 정서이냐, 정서다운 고상함이 있느냐 하는 기준으로 평가한다는 것이다.  그대 휘어지게 선 겨울 언 땅 서릿발로 동동거립니다  손을 내밀면 차가운 대기 속에서도 따스하게 전해오는 당신의 맥박  늘 푸른 서향나무로 차 오릅니다.  가늘게 실눈을 뜬 겨울햇살로 당신을 보면 당신은 언제나 쓸쓸한 쪽으로  눈을 주며 내게로 가만히 건너오십니다.  가슴 속 그윽한 강물들 거느리고  강물 위에 드리운 산그늘로 내 온몸을 담고 계신 당신  눈동자 속 엷게 비치는 눈물로 흔들립니다.  그대가 담고 있는 당신은 어느 적 당신의 사람이었기에  오늘은 이토록 당신의 말들을 잃게 합니까  당신의 그대에게 건너가야 할 처녀의 말들 저 눈발로 떠돌고 있는 산천  당신 금이 간 서릿발로 서러웁습니다.  ―‘갈대 3’  작품 후반부의 그대와 당신의 혼용으로 인한 약간의 혼란스러움은 있지만 자아 속의 초자아 또는 사랑하는 대상의 내부에 자리하고 있는 그가 사랑하는 또 다른 사랑의 모습이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대체로 이 시의 정서는 잔잔하면서도 믿을만하게 느껴진다. 쓸쓸함과 서러움의 정조를 과장하거나 엄살 떨지 않고 담담하게 그려가고 있는 잔잔한 서정의 울림이 있다.  Ⅵ. 추상적인 표현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이런 놈끼리  저런 놈끼리  요런 놈끼리  끼리끼리 모여 사는 세상  작은 괄호로 묶고  큰 괄호로 묶고  묶고 묶다 보면 결국은 하나  하나라는 것을  이런 놈도  저런 놈도  요런 놈도  알고 있을까?  ―‘하나로 살기’  시는 내가 느끼고 생각한 것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데 그치지 않고 구체적으로 형상화할 때 더 생동감이 있다. 이른바 객관적 상관물을 빌어 생생하게 그려갈 때 느낌이 더 살아난다. 이 시는 끼리끼리 집단 이기주의로 모여 살지 말고 하나되어 살아야 한다는 심정을 표현하려 한 시다.만약에 다음과 같이 고친다면 어떤 느낌이 들까 비교해 보자  모래알은 모래알끼리  조약돌은 조약돌끼리  버려진 돌들은 버려진 돌끼리  끼리끼리 모여 사는 세상  개울가에서 만나고  여울로 가다가 만나고  골짝을 넘는 구비구비에서 만나는  결국은 하나라는 것을  모래알도  조약돌도  버려진 돌들도  알고 있을까  조금은 더 생동감이 있을 것이다. 막연하거나 추상적이지 않고 구체적인 내용을 가질 때 시는 더 살아 있는 느낌이 든다.‘들에는 이름 없는 숱한 꽃들이 피어 있고 이름을 알 수 없는 나무들이 빽빽히 숲을 이루었다’라는 식의 표현보다는 꽃 이름 나무이름 새 이름이 적재 적소에 살아 있도록 표현한다면 시의 내용은 그만큼 더 풍부해질 것이다. 다만 진부한 느낌이 들거나 설명적이지 않도록 하는 세심한 주의도 있어야 한다. 자칫하면 상상력의 공간이 그만큼 줄어 들 수도 있고 시의 중요한 장점 중의 하나인 다의적 해석의 공간이 그만큼 좁아 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Ⅶ. 사실에 맞게 표현해야 한다  시를 쓰다 보면 욕심이 나게 마련이다. 더 잘 표현하고 싶고 더 적절한 비유를 만들어 보고 싶고 새롭고 신선한 느낌이 들도록 하기 위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많은 부분을 상상에 의존하게 된다. 그런데 그렇게 새로운 것을 찾아가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전혀 사실과 다르게 표현해 놓는 경우가 있다.  성장이라는 단어의 배를 갈라 내장을 뒤져볼까  그 속 어딘 가엔 분명 숱한 만남과 헤어짐을 주선하는  장기라도 있을까  만남 우혈관과 헤어짐의 좌혈관의 혈액이 감미로운  리듬에 따라 춤을 추다가 혹  장애라도 일으켜 좌충우돌로 뒤범벅되진 않을까  ―‘자라기 위한 수술 준비’  이 시는 우리가 성장하면서 겪는 고통의 원인이 우리 내부에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데서 착안하여 성장과정과 관련한 정신적인 개념들을 육체의 일부분과 결합해보는 기발한 착상으로 전개되고 있다. 그런데 우리 몸에 좌심방 우심실 이런 이름은 있어도 좌혈관 우혈관은 없다. 상상력의 자유로운 전개는 얼마든지 좋지만 부정확하거나 논리적 모순에 빠지는 일이 없도록 주의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그런 한 부분의 오류가 시 전체의 결정적인 결함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앞에서 살펴 본 시 중에 이런 부분도 마찬가지다  피는 물위를 기름처럼 흐르고  사람들은 원심분리기 속에서  제 무게만큼의 속도로 흩어져 간다  피는 물위를 정말 기름처럼 흐를까 물과 기름은 서로 겉돌지만 피와 물은 그렇지 않다. 얼마든지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시지만 사실에 맞지 않게 표현해서는 안될 것이다.     
877    詩를 찾아가는 아홉 갈개 道 댓글:  조회:4296  추천:0  2016-01-08
시를 찾아가는 아홉 갈래 길  새로운 이미지 찾아내기  흔히 사람들은 시 창작을 전문적이며 특별한 훈련이나 지식이 필요하고 천성적으로 타고난 재능이 있어야 되는 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또 시라는 것은 우리가 사는 현실 세계와는 동떨어져 있어서 평범한 생활인의 경험이나 생각으로는 범접할 수 없다고 아예 담을 쌓아 버린 분도 있습니다. 이것은 모두 학교에서의 문학 교육이 잘못된 탓입니다.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대부분의 시들이 비일상적인 것인 데다 그것을 획일적으로 밑줄을 그어가며 배웠으니 시를 골치 아픈 존재로 여길만도 합니다. 그러나 시가 생성된 배경이나 본래의 기능은 오히려 골치 아픈 것을 해소하는 방식이었습니다.  또 갈수록 일상적인 소재와 평이한 화법을 구사하며 발전해 오고 있습니다. 우리가 기쁠 때나 슬플 때 노래를 흥얼거리듯이 눈물과 함성과 탄식을 토하듯이 시 역시 인간의 마음속에서 수시로 일어나는 희로애락을 담고 해소하는 기능을 합니다. 다른 감정 표현과 다른 점이 있다면 발산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새로운 세계를 창조한다는 것입니다. 노래를 예로 들면 자신이 창조한 가락을 흥얼거리는 것이지요. 여러분도 아마 무의식적으로 그런 즉흥곡을 콧노래로 흥얼거렸던 경험이 있을 줄 압니다. 그것처럼 시를 쓸 수 있는 마음도 이미 모든 사람이 갖고 있습니다. 다만 그것을 아직 발견해 내지 못한 것이지요. 시는 특별한 것이 아니라 느낌입니다. 우리는 매 순간마다 수많은 느낌에 휩싸여 살고 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상쾌하다는 느낌, 잠을 좀 더 자고 싶다는 느낌, 물이 차갑다는 느낌, 이빨이 시리다는 느낌, 음식이 짜다는 느낌… 또 밖으로 나가면, 바람이 시원하다는 느낌, 하늘이 푸르다는 느낌, 누군가 보고 싶다는 느낌… 그뿐 아니라 잠든 시간에도 우리는 꿈을 꾸며 어떤 느낌들에 계속 사로잡혀 있습니다. 시를 쓰기 위한 첫 단계는 우선 이런 느낌들을 그냥 흘려 버리지 말고 마음속으로 되새겨 보라는 것입니다. 바람이 시원하다는 느낌이 들면 속으로 ‘바람이 시원하다’고 한 번 중얼거려 보십시오. 그러면 짧은 느낌으로 그냥 흘려 버렸을 때보다 바람의 시원함을 몇 곱절 더 강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다음 단계는, ‘바람이 시원하다’는 느낌은 누구나 갖는 것이니까 바람이 어떻게 시원한지를 느껴 보기 바랍니다. ‘막혔던 가슴속 응어리를 뚫어 주듯이 시원하다’ ‘바람에 실려 그리운 사람의 향기가 전해져 오는 것 같다’ … 이와 같은 방식으로 순간 순간의 느낌을 반추하는 습관을 가진다면 여러분은 다른 사람보다 몇 곱절 더 풍부한 인생을 사는 것이 됩니다. 이렇게 계속하다 보면 느낌의 양이나 질이 점차 향상되는 것을 실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눈앞에 보이는 모든 사물과 현상들 모두에게 어떤 느낌을 가지려고 노력해 보십시오. 대문 앞의 쓰레기통을 보며 ‘너는 매일 그렇게 음식을 먹어도 살이 찌지 않는구나.’ 라든지, 이리저리 뒹구는 휴지 조각을 보며 ‘너는 아직도 이렇게 배회하고 있구나.’ 하는 느낌을 부여해 보는 것입니다. 이런 과정에서 여러분은 저도 모르게, 우주 삼라만상과 대화하고 그것들에게 새로운 가치와 생명을 부여하는 시인이 되어 있을 것입니다. 남과 다른 글쓰기 문학지망생들을 만나면 예외없이 어떻게 하면 글을 잘 쓸 수 있느냐는 질문을 받습니다. 기성문인들은 뭔가 자기 나름대로 글을 잘 쓰는 비법이 있다고 여기는 모양입니다. 글 쓰는 일이 무에서 유를 창조해내는 막연한 작업이기는 하지만 거기에 비법이 존재하지는 않습니다. 세상 모든 일처럼 정도가 있을 뿐이지요. 그 정도라는 것은 여러분도 다 알다시피 읽고 생각하고 쓰는 것입니다. 사람에 따라 그런 과정에서 자신만의 내밀한 요령을 터득하는 수도 있지만 그것은 아주 미세한 경험과 깨달음들의 결과이기 때문에 남에게 뭐라고 설명할 수 있는 성질이 못됩니다.  대학마다 문학에 관한 전공학과가 설치되어 있고 시중에는 많은 문예창작 지침서들이 나와 있지만 그런 것들이 정작 자기 글을 쓰는데 도움을 주지 못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글쓰기는 정해진 공식이나 이론에 대입시킨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글쓰기는 자신만의 독특한 시행착오를 통해 얻어지는 필연과 우연의 만남입니다. 여기에 글쓰기의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처음에는 그저 우직하게 우리가 다 알고 있는 3多의 과정을 좇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어떻게 하면 글을 잘 쓸 수 있는가’하는 문학지망생들의 질문이 ‘어떻게 하면 글을 남과 다르게 쓸 수 있는가’ 하는 질문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봄이 오면 산과 들에 온갖 꽃들이 피어납니다. 아름답습니다. 그 꽃을 보고 글을 쓴다고 합시다. 여러분 중의 대부분은 꽃의 아름다움에 감탄하여 그 아름다움을 글로 표현하고 싶어 할 것입니다.  그러나 꽃의 아름다움은 문학이라는 형식이 존재하고부터 수많은 문장가들이 온갖 미사여구로 찬탄한 것이어서 여간해서는 그 수준을 뛰어넘을 수 없을 것입니다. 또 꽃이 아름답다는 발견은 이미 일반화된 사실이어서 새롭지도 않습니다. 다른 이와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고 바른 방식으로 쓰는 것이 관건이 되는 것입니다. ‘꽃이 기지개를 켠다’든지 ‘꽃이 하늘로 가고 있다’든지……  이렇게 남과 다르게 쓰려면 남과 다르게 볼 줄 알아야 하는데 그것이 어렵지 않느냐고 물으실 것입니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불가능한 일도 아닙니다. 글쓰기가 단순히 좋은 말로 매끈한 문장을 만드는 일이 아니라는 것만 깨달으시면 가능합니다. 처음에는 어색하겠지만 세계를 보는 자기 시각을 가지려고 노력해 보십시오.  남과 다르게 본다는 것은 남과 다르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이미 여러분은 남과 다르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다른 정도가 남과 비교해 판이하게 다를 때도 있고 거의 차이를 느끼지 못할만큼 미세할 때도 있지만 분명 여러분은 이 지구상의 모든 인간들과 비교해 다릅니다.  이 세상에 똑같은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아무리 닮은 일란성 쌍둥이라도 다른 부분이 있기 마련이지요. 생김새도 그렇지만 생각이 각기 다른 것은 성장한 환경과 그동안의 체험이 각기 다르기 때문입니다.  삶의 과정에서 생성된 이런 독특한 체험들을 우리가 쓰려고 하는 대상에 투영하면 그것만으로도 이미 자신만의 글, 남과 다른 글쓰기가 가능해 집니다. 자신이 어떤 체험공간을 가지고 있느냐를 잘 판별해서 자신이 쓰고자 하는 글에 적극적으로 반영해보도록 하십시오. 그것이 또 하나의 절대적 가치를 지닌 새로운 시인의 요건입니다. 무엇부터 써야 할까 평소에 줄곧 독서를 해온 분들은 누구나 자기 글을 한 번 써 보고 싶은 욕구를 가집니다. 그런 욕구를 부추기는 동기는 대략 몇 가지로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첫번째는 나도 이런 멋진 글을 한 번 써보고 싶다는 막연한 기대감이고, 두번째는 내가 쓰면 이보다는 더 잘 쓸 것이라는 자만심이고 세번째는 이런 이야기도 글이 되는 걸 보면 내 인생도 충분히 글이 되겠구나 하는 자신감입니다.  그러나 이런 동기를 가졌다 해도 대부분은 시작도 해 보지 않고 포기하는 수가 많습니다. 첫번째 경우는 기대감이 열등감으로 바뀌어서 그렇고, 두번째 경우는 욕심과 의욕만 앞서 자신의 능력을 과대평가한 나머지 스스로의 한계에 부딪쳐서 그렇고, 세번째 경우는 게으르거나 용기가 없어서 그렇게 됩니다.  그래도 이 중에서는 마지막 경우가 가장 성실하게 글쓰기를 해 나갈 수 있는 여지를 갖고 있습니다. 앞의 두 경우는 막연한 동경이나 지나친 자만심 때문에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는 제동 장치가 없는 자동차가 되기 쉽습니다. 저는 출판 일을 오래 해 온 탓에 그런 유형의 분들을 더러 만났습니다. 대부분 자기 글에 대한 맹신을 갖고 있어서 책으로 출판하기만 하면 곧 베스트셀러가 될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단순한 열정이나 치기로 글쓰기를 시작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남의 글을 읽으며 우리는 오만해지기도 하고 위축되기도 하지만 엄밀히 말해 문학작품은 절대적인 평가가 불가능합니다. 어떤 이에게는 눈물을 쏟게 하는 감동일 수 있지만 또 다른 이에게는 유치한 신파로 다가올 수 있습니다. 모든 독자를 감동시키는 글이란 그만큼 어려운 것이지요.  그렇지만 최대치는 항상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이야기를 진솔하게 풀어놓는 것입니다. 우리가 읽고 감동을 받은 글들은 주제나 소재가 유별나서가 아니라 대체로 자신의 세계를 솔직하고 적나라하게 드러냈기 때문에 깊은 울림을 준 것들입니다. 부끄럽고 추한 부분, 인간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치미는 미세한 감정의 변화까지도 숨김없이 보여주기 때문에 독자는 흥미와 감동을 느끼는 것입니다.  글이 아주 먼 나라의 이야기이거나 원대하고 초월적인 세계를 쓰는 것이 아니라 대수롭지 않은 자기 이야기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염두에 두시기 바랍니다. 나에게 있어 내 경험은 진부하고 의미가 없는 것이지만 타인에게는 그것이 새로운 충격과 간접 경험의 단서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나에게는 부끄럽고 자존심 상하는 생각들이지만 타인에게는 남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즐거움을 주는 것입니다.  글감을 먼 곳에서 찾지 말고 자기 주변에서부터 찾아보십시오. 빨래하고 설거지한 일, 친구를 만나고 시장을 한바퀴 돌아보면서 느낀 것, 남을 증오하고 시기한 것, 그런 것들을 우선 하나도 놓치지 말고 단 한 두 줄이라도 좋으니 적어보십시오. 형식은 일기나 편지가 되어도 좋고 문장 구조를 갖추지 않은 메모가 되어도 좋습니다.  지금부터 꼭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어디에 있더라도 필기구를 늘 가지고 다니는 것입니다. 가능하다면 필기구는 꿈속에라도 가지고 들어가야 합니다.  어떤 세계관을 가질 것인가  글쓰기는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글로 옮기는 작업입니다. 아무리 풍부한 지식과 아름다운 언어들을 알고 있다 해도 창조적인 생각이나 느낌이 없는 사람은 문학적인 글을 쓸 수 없습니다. 논리적이고 실용적인 글을 쓸 수 있을 뿐이지요.  그러므로 글을 잘 쓸 수 있느냐 없느냐는 높은 학식과 많은 경험이 좌우하는 것이 아니라 시시각각 자신의 내부에서 저도 모르게 뭉실뭉실 피어오르는 어떤 생각과 느낌들이 많고 적으냐에 따라 좌우됩니다.  글쓰는 재주가 있는 사람들을 살펴보면 좀 비정상적이다 싶을 정도로 잡념이 많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 때문에 멍청해 보이기도 하고 건망증이 심하다는 놀림을 받기도 합니다. 여러분 중에 그런 증세를 가진 분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글을 잘 쓸 수 있는 가능성이므로 용기를 가지시기 바랍니다.  또 어줍잖은 연속극이나 신문기사 한 줄에도 쉽게 눈시울을 적시는 분이 있는데 그런 분들도 용기를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자신이 남보다 뜨거운 가슴을 갖고 있다는 확실한 증거이며 그만큼 이 세계를 절실하게 느끼고 받아들인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한때 컴퓨터가 시를 쓸 수 있다고 해서 화제가 된 적이 있습니다.  ‘사랑’이라는 주제로 시를 쓰라고 지시하면 미리 입력된 사랑과 관련된 여러 단어들을 불러들여서 컴퓨터가 조합하는 방식입니다. 이렇게 하면 사람보다 훨씬 완벽하게 ‘사랑’과 관련된 언어들을 시의 형식으로 조합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유와 느낌이 결여된 공산품의 가치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한 것입니다. 거기에는 혼이 깃들어 있지 않습니다.  길에 아무렇게나 놓여 사람들의 발길에 채이는 돌멩이가 있다고 합시다. 보통 사람들은 이 돌멩이를 아무 생각 없이 지나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귀찮은 존재로 여기기도 할 것이고 기껏 관심을 갖는다고 해 봐야 주어다가 어디 써먹을 데가 없을까를 생각할 것입니다. 자기 중심, 더 나아가 인간 중심으로 그 돌멩이를 보기 때문에 이런 결과가 생긴 것입니다.  만약 돌멩이를 중심으로 생각하면 어떤 결과가 일어날까요. 무심코 자기를 걷어차는 사람들의 발길이 있기도 할 것이고 흙과 풀이 있는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기도 할 것입니다. 또 대굴대굴 굴러서 자기 짝을 찾아갈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점점 돌멩이의 시각으로 생각을 확대해 나간다면 하찮게 보이는 돌멩이 하나를 통해 이 세계 전체를 이야기할 수도 있습니다.  이와 같이 삼라만상의 모든 물질들에게 생명을 부여하면 엄청나게 신비하고 새로운 상상의 세계가 열리는 것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생명과 무생물, 어떤 현상까지를 포함해 세계 전체를 내가 지닌 자아와 동등하게 보는 시각은 글쓰기를 위해서도 필요하지만 자연과 더불어 사는 풍요로운 삶을 위해서도 꼭 필요합니다. 요즘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는 환경문제라는 것도 다 인간중심의 사고방식이 빚어낸 무서운 결과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이런 범신론적 세계관이 마음만 먹는다고 금방 생겨나는 것은 아닙니다. 대상을 향한 열린 시각, 치우침 없는 균형 감각, 부분을 보더라도 전체 속에서의 관계를 조망하는 태도, 그리고 무엇보다 세계를 향한 무조건적인 사랑이 선행되어야 가능한 일입니다. 어휘 문장 구성의 기본기  늦은 나이에 글쓰기를 시작하는 분들일수록 조급하게 서두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축적된 자기 이야기가 태산같이 쌓여있다보니 그것들을 단번에 그럴듯한 작품으로 만들어 보고 싶은 욕심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설이나 시 창작으로 바로 들어가는 경우를 흔히 보는데 십중팔구는 뚜렷한 결과를 얻지 못하고 자포자기하게 됩니다.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 늦을수록 돌아가라는 말을 가슴에 새겨야 할 것입니다.  글쓰기는 이야기거리가 두둑하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음식을 만들기 위해 아무리 좋은 재료가 준비되었다고 해도 그것을 버무리고 조리할 줄 모르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지요. 음식의 맛이 손끝에서 나온다는 말처럼 글쓰기도 글감을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성패가 달려 있습니다.  우선 제가 권해드리고 싶은 방법은 간단한 산문 형식의 글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운문부터 시작하는 것은 축약과 비약의 요소에 먼저 길들여질 우려가 있으므로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그림을 그리기 전에 데생을 충분히 해두는 것과 마찬가지로 산문을 통해 기본적인 어휘력과 문장력, 구성력을 터득하는 것이지요. 이것은 모든 문학 장르의 기본이 되는 요소입니다.  수필과 소설 같은 산문 장르는 말할 것도 없지만 시나 극본 같은 장르 역시 어휘력과 문장력, 구성력이 바탕이 되어있어야 좋은 작품을 쓸 수 있습니다. 이런 기본기가 충분히 습득되지 않은 채 시를 쓰면 생경하고 난해한 시가 되기 쉽고 거칠고 짜임새 없는 극본이 되기 쉽습니다.  어휘력은 단어를 풍부하게 알고 그것을 적재적소에 배치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합니다. 우리나라 말은 워낙 그 표현이 풍부해서 한 가지 뜻 안에 여러 가지 단어군들이 있습니다. 이런 다양한 어휘들을 충분히 자기 것으로 소화하고 있어야 하며 또 같은 종류의 말이라도 전체 문맥의 흐름과 분위기에 맞게 잘 골라 쓸 줄 알아야 합니다.  이를테면 ‘쓸쓸하다’고 해야 할 자리에 ‘고독하다’고 하면 의미의 단절과 과장을 불러오는 경우가 생기는 것이지요. 한 문장 속에 스며들어 빛을 발하는 가장 적절한 어휘는 단 하나 뿐입니다. 가장 적절한 말을 골라서 쓸 줄 아는 능력이 어휘력인 것이지요. 어떤 분들은 이 어휘력 배양을 위해 국어사전을 외기도 하는데 문학에 있어서의 어휘는 문장 속에 융화되어 있어야 제 가치를 발휘하는 것이므로 뛰어난 작품을 많이 읽는 것이 어휘력 향상의 가장 바람직한 방법입니다. 그래서 그 말들이 자신의 무의식 속에 육화되도록 해야 합니다. 문장력은 어휘력이 바탕이 되고 남의 좋은 글을 많이 읽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습득됩니다. 좋은 문장은 필요없는 군더더기가 없고 읽기에 편하도록 적절한 호흡을 가진 것입니다. 너무 긴 문장이 장황하게 계속되면 문맥의 의미가 불투명해지고, 너무 짧은 문장이 반복되면 단조로운 느낌을 주게 됩니다. 탄력있는 문장은 사랑의 줄다리기를 하듯이 길고 짧은 문장이 적당하게 섞이면서 이어져야 합니다.  구성력은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배치하는 능력입니다. 글을 기승전결로 배치하는 것은 너무 흔한 방식이므로 때에 따라 결말을 먼저 제시하거나 절정 부분을 글머리에 내세우는 등 여러 가지 구성의 변화를 시도해보는 것이 좋습니다.  시와 산문은 어떻게 다른가 형식적인 면으로 보면 산문은 긴 줄글로 되어 있고 운문은 짧고 리듬이 있으며 행과 연을 나눕니다. 담는 내용에 있어서도 산문이 일관된 흐름을 갖춘 이야기 구조를 가진다면 운문은 주관적인 감정을 드러낸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서사와 서정의 차이라고 합니다. 물론 운문에도 서사적인 요소를 도입할 수 있고 산문에도 서정적인 문체를 구사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시 소설이 문학의 양대 산맥으로 정착한 오늘날에는 시는 서정적인 특성을, 소설은 서사적인 특성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쪽으로 발전해 가고 있습니다. 습작기에는 이런 시와 산문의 차이를 정확히 인식하여 자신의 감성이 어느 장르에 적합한지를 빨리 간파하는 것이 좋습니다. 흔히들, 시는 춤에, 산문은 도보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도보는 일정한 보폭으로 정해진 목적지를 향해 한 결음씩 나아가는 것이지만 춤은 아무런 형식의 구애 없이 자유롭게 움직이는 것입니다. 느리고 빠르기가 예상할 수 없을 정도로 변화가 심하며 공중을 향해 훌쩍 솟구치기도 하고 쓰러지며 뒹굴기도 합니다. 춤은 일정한 방향을 염두에 두지 않으므로 제자리걸음이나 뒷걸음질이 되기도 합니다. 이런 춤과 도보의 차이점을 시와 산문에 대입하여 생각해 보면 어렴풋이나마 그 특성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런 형식적인 차이는 시 정신과 산문 정신의 차이에서 나오는 결과들입니다. 시 정신이 주관적인 진실을 추구한다면 산문 정신은 객관적인 진실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주관적인 진실은 말 그대로 자기 자신에게만 진실인 것이고 객관적인 진실은 누구나 합의할 수 있는 진실입니다. ‘만년필 속에 잉크가 들어 있다’고 쓰면 객관적인 진실을 드러낸 것이지만 ‘만년필 속에 옛사랑의 추억이 있다’고 쓰면 주관적인 진실을 드러낸 것이 됩니다. 만년필에서 옛사랑의 추억을 읽는 것은 자신만의 비밀스러운 인식이 발동한 것이므로 모든 사람이 공유하는 인식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서사적인 바탕이 없이 서정적인 요소를 무리하게 도입한 산문은 생경하고 황당한 서술이 되고 마는 것이며, 반대로 서정적인 바탕이 없이 서사적인 요소를 도입한 시는 감칠 맛이 전혀 없는 상식 수준의 뻔한 이야기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아무리 행과 연을 나누어 형식을 갖추어도 이것은 시가 될 수 없습니다. 시 정신과 산문 정신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가지지 못한 예를 초보자들의 작품에서 흔히 발견합니다. 저는 이것을 나무와 꽃에 비유하고 싶습니다. 한 그루의 나무가 뿌리에서 몸통이 자라고 거기서 가지와 잎이 뻗어 가는데 여기까지는 나무 본연의 모습과 색깔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누가 보아도 뿌리와 몸통과 가지와 잎이 하나의 계통으로 일관된 연관성을 갖고 뻗어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합니다.  그런데 그 나무가 가끔 피워 내는 꽃은 그렇지 않습니다. 저 나무에서 어떻게 저런 꽃이 피워났을까 싶을 정도로 형태와 색깔과 질감이 판이하게 다릅니다. 빨강 노랑 하양의 색색으로 보드랍기 그지없는 꽃망울을 터트립니다. 앞의 과정이 산문의 세계라면 뒤의 과정이 시의 세계일 것입니다. 시의 언어를 찾아 흔히 시를 언어 예술이라고 합니다. 시적인 체험과 느낌을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니까요. 최근에는 실험적인 시의 한 양상으로 사진 그림 악보 등이 시의 한 요소가 되기도 합니다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문자가 주가 된 상황을 보조하는 차원이지 그 차제가 주 표현방식이 되지는 않습니다. 앞으로 시가 어떤 모습으로 변화해 갈지 모르지만 언어를 주 표현수단으로 한다는 점에는 변함이 없을 것입니다.  자신의 감정과 사상을 제한된 언어를 통해 표현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색깔이나 소리도 없고 움직임이나 형상도 없는 말들을 조합해서 이 세계의 복잡다단한 결들을 드러내는 일은 너무 막연하고 난감하게만 느껴집니다. 초보자들이 시에 접근하기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춤과 노래와 그림처럼 언어에도 희로애락이 있고 색깔과 소리, 형상과 움직임이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는 시 한 편을 읽고 환희와 격정과 비애를 느끼며 어떤 소리와 색채와 움직임을 감지합니다. 때로는 색채와 소리로 형상화된 예술보다 더 큰 진폭으로 그런 것들을 느끼기도 합니다. 또 더 나아가 우리의 모든 감각을 총체적으로 건드려 주는데 시가 효과적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기도 합니다.  인간의 모든 감각을 언어를 통해 총체적으로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은 시의 장점이며 매력이겠지만 처음 시를 쓰려는 분들에게는 대단한 부담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시어를 캐내고 다듬는 일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것을 보게 됩니다. 언어가 곧 시의 재료인 만큼 멋진 말들을 많이 알고 있는 것이 시 쓰기의 지름길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더러는 국어사전이나 남의 작품 속에 있는 좋은 말들을 밑줄을 쳐가며 외우는 분들도 보았습니다.  그러나 말만 번드레한 사람이 남에게 오히려 거부감을 주는 것처럼 자신의 진심이 실리지 않은 언어는 남을 감동시킬 수 없습니다. 문학에서의 언어는 곧 자신의 세계관입니다. 그래서 저는 자신이 가진 현재의 언어 밑천만을 가지고 시 쓰기를 시도하라고 권합니다. 시 쓰는 데는 많은 말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이미 여러 분 속에 녹아 있는 언어만을 가지고도 충분히 시 쓰기가 가능합니다.  개인이 가진 언어군은 그 사람이 나고 자란 환경, 접촉한 사람들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전라도에서 자란 사람과 경상도에서 자란 사람, 산골이나 바닷가에서 자란 사람과 도시에서 자란 사람의 언어군은 분명히 다릅니다. 이렇게 어떤 상황에 반응하고 갈등하면서 형성된 것이 그 사람의 언어 습관입니다. 이것은 의도적으로 학습된 것이 아닌 오랜 시간 서서히 스며들어 자연스럽게 축적된 것들입니다.  그 언어들만 가지고도 일상 생활의 의사소통에 아무 문제가 없듯이 시를 쓰는데도 그것만으로 충분합니다. 시를 쓰는데 사용되는 별도의 언어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자신의 몸 속에 육화된 언어야말로 남이 흉내낼 수 없는 자신만의 개성적인 언어이며 자신의 세계관을 드러내는 가장 적절한 시의 언어인 것입니다.  단풍나무가 되는 나 너 보고 싶은 마음 눌러죽여야겠다고/가을 산 중턱에서 찬비를 맞네/ 오도가도 못하고 주저앉지도 못하고/ 너하고 나 사이에 속수무책 내리는/ 빗소리 몸으로 받고 서 있는 동안/ 이것 봐, 이것 봐 몸이 벌겋게 달아오르네/단풍나무 혼자서 온몸 벌겋게 달아오르네 안도현 시인의 ‘단풍나무 한 그루’라는 시입니다. 온 산이 붉게 물든 이 늦가을에 무척 어울리는 아름다운 시입니다. 가을은 그리운 누군가가 절실하게 더 그리워지는 계절입니다. 곧 퇴락의 겨울을 맞게 될 것이므로 지금 만나지 않으면 영영 만나지 못할 것 같은 조바심이 드는 것이지요. 시 쓰기에 앞서 남이 쓴 좋은 시를 많이 읽어 보는 것이 꼭 필요한데 이는 남의 좋은 부분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일이며 시의 발상에서완성까지의 구체적인 방법을 익히는 공부가 됩니다. 남의 시를 읽다가 자기 마음에 와 닿는 작품을 만나면 그 시인의 시집을 구해서 꼼꼼히 읽는 게 좋습니다. 자신이 공감한 시를 쓴 시인은 자신의 체질이나 성향에 맞는 시를 쓰고 있다는 이야기가 되므로 그만큼 배울 점이 많습니다. 문학의 스승은 이렇게 자연스럽게 만나집니다.  그렇게 선택된 시를 읽을 때는 그 시를 쓸 당시의 시인의 마음이 되어서 읽어보십시오. 그 시인이 처한 환경 조건이나 심정을 유추하며 한 행 한 행 같이 시를 써 나가는 기분으로 읽는 것이지요. 위의 시 같은 경우는 가을비가 오는 날 단풍나무 아래 서 보는 것입니다. 추적추적 내리는 가을비, 온통 몸이 달아 벌겋게 된 단풍잎, 그 사이에서 알절부절 못하고 찬비를 맞고 있는 나… 목석이 아니라면 누구나 처연한 심정이 될 것입니다. 처연한 심정이 되면 모든 것이 간절해지는 법이고 그러면 누군가가 못견디게 그리워질 것입니다.  여기까지의 수순은 감정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도달할 수 있는 과정입니다. 그러나 그 정황들을 어떤 식으로 엮어 구체적으로 드러낼 것인가를 생각하면 그만 막연해집니다. 이제 그 한 해답을 안도현 시인에게서 얻어 봅시다. 우선 가을산 찬비와 나의 관계를 엮는 고리로 시인은 ‘너 보고 싶은 마음을 눌러 죽’이는 지독한 그리움의 감정을 설정해 놓았습니다. 이것은 사실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우연히 아무도 없는 가을산에서 찬비를 맞고 있은 자신에게 무엇인가 의미를 부여하는 과정에서 이런 발상이 떠올랐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감정이 의도적이라고 해도 그런 발상을 거쳐 그런 마음을 먹은 시인은 더욱 처연한 심정이 됩니다. 빗소리만 들리는 고적한 산중턱, 그리운 마음을 억누르고 있는 나. 이 정황은 비장한 정적이며 폭발 직전의 절정과도 같은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이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이 ‘너 보고 싶은 마음 눌러 죽’이려고 비를 맞으며 서 있는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에 가능해진 일입니다. 그 하나의 발상이 가을산과 빗소리의 분위기를 시적인 정황으로 창조해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 단풍나무와 나의 관계는 어떻게 엮어가고 있습니까. ‘너 하고 나 사이에 속수무책 내리는/ 빗소리 몸으로 받고 서 있는 동안/ 이것 봐, 몸이 벌겋게 달아오르네’에서 드러나듯이 보고 싶은 마음을 더 이상 어쩌지 못해 몸이 벌겋게 달아올랐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시인의 비장한 인내와 비 오는 가을산의 정적이 드디어 단풍으로 폭발하고 만 것입니다. 시적 대상과 시 쓰는 자아가 동일시되는 서정시의 전형적인 방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안개속에 묻힌 나를 찾아  어느새 일 년의 마지막 달을 앞두고 있습니다. 이때쯤이면 늘 쏜살같이 지나가는 시간의 속도와 티끌만큼 남은 시간의 유한함에 몸을 떨게 됩니다. 한 장만 달랑 남아 있는 달력을 보며 괜스레 마음이 바빠지고 다 이루지 못한 일 때문에 아쉬움이 남는 달이기도 합니다. 정말 시간은 흐르는 물과 같아서 잠시도 멈추거나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습니다.  문학은 이런 세계의 유한함에 대항하는 방식이 아닐까 싶습니다. 유한한 시간을 인정해 버리고 거기에 무방비로 던져진 상태의 인간은 무력해지거나 즉물적인 쾌락을 추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일 세상의 종말이 올지라도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말이 있지만 그게 말처럼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종말을 앞두고도 나무 한 그루를 심을 수 있는 사람은 내가 끝나더라도 세상은 끝나지 않는다는 믿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러나 대개의 사람들은 자신이 끝나면 세상도 끝나는 것으로 압니다.  문학은 이를테면 그런 현세적인 가치체계에 문제를 제기하는 방식입니다. 자기만의 것에 골몰한 사람들에게 다른 사람의 인생과 사고방식에 관심을 갖도록 하는 것, 우리와 함께 공존하고 있는 삼라만상에 눈을 돌리도록 하는 것, 유한한 것이라고 믿는 인간의 시간을 무한한 순환의 수레바퀴로 돌려놓는 작업이 곧 문학이 추구하는 일입니다. 자기 살기도 바쁜 세상에 남의 인생까지를 참견해야 하는 문학은 그래서 고통스럽고 복잡다단할 수 밖에 없습니다.  강의 물을 따라가며 안개가 일었다/ 안개를 따라가며 강이 사라졌다 강의/ 물 밖으로 오래 전에 나온/ 돌들까지 안개를 따라 사라졌다/ 돌밭을 지나 초지를 지나 둑에까지 올라온 안개가 망초를 지우더니/ 곧 나의 하체를 지웠다/ 하체 없는 나의 상체가/ 허공에 떠 있었다/ 나는 이미 나의 지워진 두 손으로/ 지워진 하체를 툭툭 쳤다/ 지상에서 보이지 않는 존재가/ 강변에서 툭툭 소리를 냈다. 위의 시는 오규원 시인의 「안개」라는 시입니다. 여기서 우선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안개가 나를 가린다’가 아니라 ‘안개가 나를 지운다’고 말한 점입니다. 나 위주로 판단하면 안개는 분명히 나의 시야를 가리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여기서의 ‘나’는 강과 돌, 초지와 둑, 망초같은 것들과 동격입니다. 그런 사물들과 함께 내 육체도 안개에 의해 서서히 지워지고 있습니다. 나의 의식은 내 몸을 강둑에 버려둔 채 팔짱을 끼고 그 모든 것을 바라보고 있는 중입니다. 이렇게 자기자신까지도 객관화시켜 전체의 맥락 속에 놓을 수 있어야 참다운 글쓰기가 가능해집니다.  여기서의 안개는 무심히 우리 앞을 스쳐 지나가는 시간일 수도 있고 우리의 존재를 지배하는 외부적인 힘이나 나태한 관습, 고정관념 따위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대로 두면 안개에 가려 길을 잃을 수 밖에 없습니다. 이때 위기 상황을 인식한 내가, 내 존재의 여부를 확인해 보기 위해 하체를 손으로 툭툭 쳐 보는 것입니다.  문학은 이렇게 끝없이 자기 존재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작업이기도 합니다. 형체없는 안개가 자기 몸을 잠식해 들어오는 것까지도 감지할 수 있는 예민한 촉수로 무감각해진 자기 존재의 하체를 한 번 툭툭 건드려보시기 바랍니다.   
876    詩와 아름다운 우리 말의 숨결 댓글:  조회:4788  추천:0  2016-01-08
시와 우리말의 숨결 / 오탁번                      //  글을 쓰는 사람들은 흔히 그 입을 통해서 말하면 듣기 나름으로 얘기가 다르게 느껴질 수가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갖고 있습니다. 또 진정으로 예술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기가 행하고 있는 예술 행위, 지향하는 예술 세계가 이 세상에 존재한 적이 없었고 앞으로도 다시는 없는 가장 희소하고 희귀한 최고의 가치 속에 자리잡았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예술가들이각자 갖는 확신은 대체적으로 착각이나 오해 속에서 빚어지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저는 이것을 퍽 다행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소위 인류 역사가 시작된 이래 남아있는 고전 작품을 남긴 위대한 시인 작가 예술가들이 수만 수백만 명이 되면, 학생이나 청소년들이 세계 명작을 찾아 읽다가 다 읽지도 못하고 생을 마감하는 비극적인 사태가 일어날지도 모릅니다. 예술가란 착각 속에 자기가 지향하는 것이 최고라고 생각하는 확신 즉 착각, 스스로의 오해 속에 살기 때문에예술은 여러 가지 변화무쌍하고 포복절도할 결과가 빚어지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윤동주라는 시인의 경우를 살펴봅시다. 그 나이 또래의 다른 사람들은 징용에 붙잡혀 간다든가 만주 벌판에서 독립운동이나 빨치산 노릇을 해야 했습니다. 용케 그것을 면했다 해도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일본 순사한테 따귀를 맞아가면서 소작인이나 머슴으로 살고 세금도 내면서 살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윤동주는 선조가 선각자이면서 기독교 신자로 뼈대 있는 집안에 태어났기 때문에 연희전문을 졸업하고 일본 유학까지 갈 수 있었습니다. 빨치산의 혁신 또는 좌파사상의 입장에서 본다면 일제가 마련해 놓은 교육기관에 가서 유학을 했으니까 떳떳하지 못한 면도 많을 것입니다.  예슬의 가치와 삶의 고저장단은 늘 불일치한다 그런데 윤동주는 살아서 자기가 시인이었던 적도 없던 사람이 공책에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라는제목까지 정해놓고 순서대로 시를 써놓은 채로 죽은 것은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습니다. 그러니까 살아서는 시인의 영예를 누린 적이 없었던 사람이 죽은 뒤에 가장 위대한 시인 중의 하나가 되었습니다. 윤동주가 살았던 당시에는 잡지들도 많았습니다. 그런 매체들을 통해 활발한 작품 활동을 했던, 당대의 개념으로 보았을 때 장안에서 이름을 날렸을뿐더러 생전에 여러 권의 시집을 낸 사람들 가운데에는 오늘날 변변한 시인의 반열에 들지조차 못한 이들도 수두룩합니다. 시인이라고 자처한 적도 없는 윤동주는 시인으로 죽음을 넘어 지금까지 살고, 시인이랍시고 나대고 다니고 신여성과 연애도 하면서 개화적이고 현대적인 생활을 하던 대부분의 시인들은 오늘날 존재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게 되어 버렸습니다. 시인의 가치라든가 예술가의 가치가 삶의 가치나 삶의 고저장단하고는 늘 불일치하고, 그렇기 때문에 문학에 의미가 있고 재미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얼마 전 미당 서정주 시인이 세상을 떠나니까 그를 두고 여러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저는 제 입장을정하기 전에 이런 일들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윤동주는 그 당시에 독립운동에 몸을 던진 적이 없는 스물 너댓 살 된 일본 유학생이었습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미국 하버드대나 영국 옥스퍼드대의 유학생보다 더 희소하고 존귀한 가치 속에 있던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아주 창피하게 자기의 부끄러움도 모르고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고 노래했습니다. 그가 그렇게 노래할 때 동시대의 젊은이들은 어떻게 살아가야 했습니까. 윤봉길 의사 같은 이는 폭탄을 던져서 자기의 몸과 나라의 독립을 맞바꾸고자 하는 판인데, 바람이 부니까 잎새가 흔들리는 것을 보고 아픔을 느끼고 괴로움을 느꼈다는 고백을 했다는 것은 그 나이에도 맞지 않는 아주 창피스러운 고백입니다. 그런데도 문학은 자기가 세상을 바라보는 부끄러움이나 창피함을 고백함으로써 존재 가치를 드러낸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문학의 가치와 삶의 가치는 일치하지 않는 것이라고 봅니다.  저는 오랫동안 학교에서 시와 소설을 강의하면서도 학생들에게 "지금까지 이십 몇 년을 살아오면서자신의 가슴 깊은 곳에 남아 있는 가장 창피스러운 경험을 떠올려 보아라"고 권하곤 합니다. 모름지기 사람들은 아무한테도 말 못했지만 자기 자신만은 잘 압니다. 자기는 까먹었지만 꿈속에서도 나타날 정도로 창피했던 것이 상상의 세계로 나타나는 수도 있습니다. 어떨 때는 기말시험에 다섯 문제 중 한 문제를 다음과 같이 냅니다. 즉 '살아오면서 가장 치욕스러웠던 체험을 2백자 원고지 두세장 분량으로 써라. 만일 그 답을 쓰면서 유치원이나 초등 학교 때 수영장에 가서 오줌이 마려운데, 화장실에 가지 않고 그 안에서 소변을 봤다는 정도가 창피하다고 쓰면 문학을 할 생각을 말아라.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그보다 훨씬 창피하고 누구에게도 말 못하는 고민이 있을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을 보면 처음부터 끝까지가 말 못할 창피스러운 고백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그와 마찬가지로 윤동주는 그 나이에, 우리가 자연인의 입장에서 보면 지탄받아 마땅한 사람입니다. 그때 남달리 유복하게만 지냈다고 보여지는 유학생이, 동시대의 젊은이들은 독립 운동하다 총 맞아 죽고 징용을 가서 강제 노역을 하는 현실에서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고, 자기가 살아온 인격이 부정될지도 모르는 위험을 무릅쓰고 부끄러운 고백을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그것이 문학으로 살아남는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일제 35년사를 공부할 때 윤봉길, 안중근처럼 훌륭한 이들이 남긴 작품들이 서예 예술이나 또는 시로서 평가받는 것은 아닙니다. 그분들의 치열한 삶에 담긴 주제나 의지, 투혼은 굉장한 것이지만, 반면에 윤동주처럼 비겁하고 부끄러운 고백을 한 사람이 시에서는 존중이 된다는 말입니다. 윤동주의 짤막한 시들이 해방이 되고 나서야 겨우 빛을 보았지만, 오늘의 시점에서 보면 그때에 만주 벌판에서 왜군을 천 명을 무찌른 장군의 승전보보다도 더 우리의 정서를 일깨워주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듯 문학은 부끄러움을 고백한 자체가 굉장히 의미가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부끄러움을 고백한 자체에 큰 의미와 감동이 서정주 시인이 돌아가신 다음 여러 가지의 얘기가 있습니다만, 여러분들이 문학 작품을 대한다든가또 어떤 시인 작가를 평가할 때는 언제나 기본적으로 음악은 소리, 그림은 빛깔, 문학은 말로 되는 것이니까, 그 말의 쓰임새, 말이 가지고 있는 함축적인 뜻을 자꾸 생각하면서 읽어야 되지 않은가 생각합니다. 그래서 미당 서정주 시인의 일제 시대의 행적이나 그 후의 어떤 것은 다른 사람에게 비판받고 비난받아서 마땅한 요소가 다분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자연인 서정주, 유권자 서정주, 어디에 살고 주민등록번호가 몇 번인 서정주를 평가하는 자료 쪽이어야지 그것이 문학적으로까지 넘어오지 않아야 된다고 봅니다. 윤동주를 가리켜 다른 사람들은 독립운동을 하고 다니는데 유학간 놈 친일파 아니냐고 하면 할 말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우리 나라에는 남아 있을 사람이 없습니다. 요즘 우리 나라를 들여다보면 아주 우스워질 때가 많습니다. 흔히 정권을 담당하고 있는 사람들이 보수적이고 야당이 혁신적이어야 사회가 유지된다고들 하는데 거꾸로 된 것 같습니다. 국가보안법을 뜯어고치자고 나서는 사람들은 현재의 여당 쪽이고, 고치면 안 된다고 주장하는 쪽은 야당 쪽인데 꼭 이게 꼭 입장이 뒤바뀐 것 같습니다.  모든 사회를 유지하고 있는 것은 보수 세력이고 그것을 개선해 나가고자 애쓰는 쪽은 혁신 세력이 됩니다. 그러다가 혁신세력이 정권을 잡으면 자연스레 입장이 뒤바뀌게 되지요. 예를 들어 우리가 젊을 때는 부모한테 반항을 하다가, 자기가 가정을 이루고 자식을 키우게 되면 9시 전에 들어와라, 아침 일찍 일어나라, 용돈을 아껴서 쓰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인류 사회가 이렇게 되는 것인데 우리는 거꾸로 되는 것 같습니다.  저는 창씨개명도 하지 않은 집의 자손입니다. 우리 할아버지는 옛날 시골분으로 아주 엄격하시고 일본 순사의 따귀를 때려서 야단을 치시던 분입니다. 그렇다고 독립운동을 한 분은 아닙니다. 그 당시에 우리가 다 그런 식으로 하면 해방이 되었을 때 다 죽었다거나 다 어디로 갔으면 만세 부를 사람이 없는 겁니다. 민족의 개념은 복합적이고 지속적인 개념이기 때문에 그걸 참고 묵묵히 견디면서 결혼해서 자식을 낳고 굴욕을 참는 것이 민족이 유지되어 오는 개념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시는 우리말을 새롭게 닦아 반절거리는 보석처럼 나는 소설도 쓰고 시도 쓰는 사람인데 최근에는 시를 아주 열심히 쓰고 있습니다. 젊었을 때는 타고난 재능이나 그때 반짝 떠오르는 생각을 가지고 시를 썼습니다. 아무개가 시를 이 정도 쓴다는 자부심도 있었고 시인은 누구나 자기 것이 전무후무한 최고의 가치를 가졌다고 착각을 하듯이 이 정도면 그 전에도 쓴 사람이 없고 앞으로도 백 년 안에 쓰는 사람이 없으리라는 착각도 하고 했습니다.  우리말 즉 남한 쪽의 언어에는 영어나 외래어가 섞여 있는데, 북한 쪽은 언어 정책을 아주 잘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공부를 하다 고전작품을 보면 순수 우리말인데 굉장히 좋고 아름다운 말인데 사람들이 쓰지 않아서 숨결이 끊어진 말들이 많습니다. 이것을 두고 병아리를 키우다가 죽어버렸으면버리지, 죽은 걸 닭장에 넣는다고 암탉이 되느냐는 식의 비유를 하면 안 됩니다. 비록 잘 쓰이지 않는 말이지만 시인이나 작가 눈에 띄어서 좋은 보석으로 바뀔 때가 있습니다. 오랫동안 쓰지 않고 벽장 속에 넣어 두었다가 다시 그걸 닦으면 새로 살아나는 것처럼 언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이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시인이 시어를 찾아내기라는 것은 녹슨 동전을 젖은 모래로 부비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몇년도 한국은행 10원짜리 글자가 나타납니다. 그걸 부비지 않으면 돈이 아닌 단순한 쇳조각에 불과합니다. 그런 것을 자꾸 닦아내는 것이 시인의 역할이라고 합니다. 이쯤에서 저의 졸작 한편을 소개하지요.  비 내릴 생각 영 않는  게으른 하느님이  소나무 위에서 낮잠을 주무시는 동안  쥐눈이콩만한 어린 어린 수박이  세로줄 선명하게 앙글앙글 보채고  뙤약볕 감자도 옥수수도  얄랑얄랑 잎사귀를 흔든다  내 마음의 금반지 하나  금빛 솔잎에 이냥 걸어두고  고추씨만한 그대의 사랑 너무 매워서  낮곁 내내 손톱여물이나 써는 동안  하느님이 하늘로 올라가면서  재채기라도 하셨나  실비 뿌리다가 이내 그친다  -[실비] 전문  이 시는 이번 7월호 {현대문학}에 발표된 것입니다. 나는 시골에서 컸지만 집에서 수박농사를 짓지는 않았습니다. 최근에 시골을 왔다갔다하면서 조그만 텃밭에 수박을 몇 포기 심었는데 수박이 크는 걸 보니까 아주 신기했습니다. 수박이 꽃이 피었다가 떨어지니까 수박이 달려 있는데 땅콩보다 더 작았는데 커지는 것입니다. 아주 신기하고 우스운 것은 그렇게 조그만 놈도 제가 수박이라고 S자 모양으로 세로줄이 그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작은 것이 물을 주니까 금방 자라서 느낌이 와닿았습니다. 어릴 때 집에서 수박농사를 많이 지어본 분들은 당연하니까 시의 소재가 안 되지만 나는 모르니까 모티브가 된 것입니다. 시인의 시선은 어릴 때로 돌아가는 겁니다.  저의 연치쯤 되면 용감무쌍하고 타고난 천부적인 재능으로 하는 것은 젊은 시인들에게 맡기고, 우리말이 가지고 있는 소위 숭늉 맛 같은 것을 찾아서 내가 쓰는 글 속에서 살려내는 게 중요한 할 일 중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옛날의 우리의 할머니들이 추석 때 송편을 빚고 나서 찔 때, 손녀를 등에 업고서 광주리를 들고 야산에 올라가서 솔잎을 땁니다. 솔잎을 딸 때 솔잎이 햇빛을 받아서 왕성하게 활동할 때 솔잎을 따면 소나무가 아프니까 해가 뉘엿뉘엿 질 때, 소나무가 첫잠이 들었을 때 살살 땁니다. 옛날 선조들은 솔잎을 딸 때 소나무의 아픔까지도 생각하고 살살 땄다는 말은 할머니가 힘이 없이 광주리에 따서 갖다주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민족의 슬기롭고 좋은 마음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을에 감나무 가지가 힘겹위 기울도록 열린 감을 따다가 상수리에 몇 개는 까치밥으로 남겨둡니다. 그건 사실 장대 끝이 짧아서 못 따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석을 하면 겨울에 까치나 까마귀가 와서 먹습니다. 그것도 참 현명한 것이 모조리 다 따버리면 까치가 배가 고파서 죽고 봄이 되면 해충을 못 잡아먹습니다. 옛날에 밭을 갈 때 몇 개가 땅에 떨어진 것을 며느리가 다 주우면 시어머니나 시아버지가 야단을 칩니다. 왜 그런가 하면 물론 짐승도 먹으라는 것이지만 그 동네에 못사는 사람들이 이삭을 줍는 것입니다.  탐스러운 감을 남겨두는 까치밥의 지혜를 어떤 대학생이 얘기하기를, 자기 할아버지 산소에 가는 길에는 은행나무 한 그루가 있는데도 은행이 다닥다닥 열린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동네에서 암 은행나무가 있는데 그 앞에 강물이 흐릅니다.강물에 그림자가 비치니까 암 은행나무가 그림자를 보고 숫은행나무로 착각을 해서 여자가 상상 임신을 하듯이 바로 앞에는 숫은행나무가 없지만, 바람이 부는 윗마을에서 뭐가 통하니까 열리는데 이것을 시적으로 해석을 하고 삽니다. 그게 재미나고 은행이 다닥다닥 열리니까 번성한 자손을 바라는 조상의 마음 같기도 합니다. 또 은행나무는 혹독한 빙하기에서도 살아남은 나무입니다. 빙하기 때 웬만한 나무는 다 죽었는데 중국에서 살아남아 세계적으로 다 퍼져 있습니다. 그만큼 나이가 굉장히 많은 나무가 은행나무입니다.  다음에 읽어드릴 작품은 저의 미발표작입니다.  첫돌 아기가  - 엄마엄마 아빠아빠  말 배우듯  봄이 되면 꽃들도  - 가갸거겨 오요우유  한글을 하나하나 배우면서  예쁜 눈망울을 뜨는 것일까?  내가 사는 삼호 아파트 개나리는  봄이 온 지도 모르고  겨울잠에 그냥 빠져있는데  개나리 아파트 담장에는  샛노란 개나리가 활짝 피었다  개나리 지고 진달래 필 무렵  개나리 아파트의 진달래는  꽃피울 생각 영 않지만  진달래 아파트 어린이 놀이터의  진달래는  활짝 볼우물 짓고 있다  첫돌 아기가  - 맘마맘마 지지지지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은  세상의 아름다움을 배우듯  봄이 되면 꽃들도  - 개나리개나리 진달래진달래  아파트 이름 하나하나 읽으면서  봄소식 전해주는 것일까?  -[봄소식]  이 시는 시계를 보면서 발상을 얻은 작품입니다. 시계 하면 언뜻 소재로 연결이 되지 않는데, 왜 시계가 동그랗느냐 하는 데서 모티브를 잡았습니다. 어느 날 개나리 아파트를 지나가는데, 우리 집 앞에는 피지 않았던 개나리가 활짝 피었더군요. 그 순간 '개나리 아파트'라 했으니 개나리가 많이 피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진달래 아파트 앞을 지나가는데, 거기에는 진달래가 활짝 피고 다른 아파트에는 피지 않았더군요. 문득 봄소식은 아파트에 붙은 이름 따라 오지 않나 하는 발상을 했습니다. 그런 아이들과 같은 발상을 시로 옮겼습니다.  제가 서른이나 마흔 살이었더라면 이런 시를 쓸 수 없을 겁니다. 새롭게, 어린 아이 같은 마음이 이 시를 낳게 한 것 같습니다. 짓궂고 호기심이 많은 기분을 회복한 게 이 시를 낳은 원동력이라고 봅니다. 물이 아주 잔잔하면 조금만 모래 하나에도 파문이 일 듯이 욕심을 버릴 때 그동안 보지 못한 것을 보게 되지요. 그런 느낌에서 쓴 시에 [애기똥풀]이 있습니다.  기저귀 빨래 하는 젖이 불은 엄마에게 애기의 똥은 똥이 아니었다. 애기의 숨이 새록새록 잠든 사랑이었다. 새끼 붕어들도 도랑 물풀 사이에서 욜랑욜랑 헤덤볐다.  1만 달러 소득을 뽐내던 시절 애기의 예쁜 똥은 엄마의 눈길 한 번 못받고 1회용 기저귀에 싸여 쓰레기통에 던져졌다. 재활용도 안 되는 쓰레기가 되어 멀리멀리 엄마품을 떠나갔다.  이제 IMF 바람이 불어 다시 천 기저귀를 쓴단다. 봄 여름 아직 멀었지만 집집마다 눈부시게 흰 기저귀에는 애기똥풀 빛 동글동글한 애기똥이 담뿍담뿍 피어나겠다.  -[애기똥풀] 전문  만해 한용운의 시에는 어느 한 군데에도 '대한 독립 만세' 따위의 구절은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 민족의 정서를 더 잘 반영하고 있습니다. 저로서는 그게 바로 시라고 봅니다. 20년대의 프로문학에서 보듯이 당시대인은 문학을 잘못 해석하기 쉽습니다. 당시에는 프로문학에 동조하지 않은 작가들은 발을 못 붙였지요. 그런데 오늘날 김소월, 이육사, 윤동주, 정지용이 형형이 살아있는 데 비해 프로문학 계열에서 남아 있는 작품이 있습니까. 저는 이 시에서 쓰레기통에 버려지는 1회용 기저귀와애기똥풀을 대비시켰습니다. 궁핍한 시대를 맞아 우리는 눈앞의 일에 급급하기 쉽지만, 멀리 보는 눈을 갖게 해주는 것이 시라고 생각합니다.  이상으로 저의 시와 문학에 대한 생각의 일단을 말씀드렸습니다. 궁금한 점이나 저의 모자라는 점을 질문을 통해 채워 주시기 바랍니다.  문; 20대나 30대나 자기에 맞는 나이가 있습니다. 시를 쓰다 보면, 어린애와 같은 마음으로 쓰라고 했는데 직업적으로 쓰는 사람은 아니고 쓰고 싶기는 합니다. 무위도에 가서 보름달을 보고 다른 곳에 가서 보름달을 보면서 생각을 했는데 내가 쓰고 나서도 너무 어린애처럼 사삭스럽게 쓰지 않았나 하고, 내 자신이 나이가 몇 살인데 부끄럽거나 창피할 건 없는데 다른 사람들이 욕이나 하지 않을까 망설여집니다. 그런 것도 물리치고 써야 되는데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시고 그래도 어린애 마음으로 써야 되는지 말씀해주십시오.  답; 때묻지 않은 어린이가 봤을 때 무엇이었을까. 그쪽으로 돌아가자는 말입니다. 애답다고 욕하지 않을까 하는 것 때문에 어른스럽게 써야 된다는 것은, 오히려 그 반대가 좋고 느껴지는 대로 써야되는데, 그것이 어떤 비유라든가 우리가 알게 모르게 아까 얘기한대로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라는 것이 참 좋다라고 보면 우리가 말을 배우기 전에 시가 뭔지도 몰랐을 때 잎새가 흔들릴 때 막연한 게 산재되어 있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미당 선생의 글을 보니까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아버지가 일을 나가고 난 다음 마당에 뙤약볕이 비치면 지나가는 사람도 없고 옥수수밭은 저 멀리 보이고 가끔 황소 우는 소리만 '움메' 하고 들리면 어린 나이에 굉장히 공포스러웠다고 합니다. [연애 미학 서설]은 어른 입장에서 쓴 시인데 '무지개도 뛰어넘을 만한 힘센 황소가 녈비에 황금빛 털이 간지럽겠다.' 무지개도 뛰어넘을 힘센 황소라는 표현은 가당찮은데 나에게는 좋은 걸로 와 닿았습니다. 아이처럼 쓰면 누가 뭐라고 하지 않을까 하는 것 때문에 주저하지 말고 오히려 더 아이처럼 이라는 게 초등 학교 국어책에 있는 표현처럼 쓴다는 게 아니고 아무도 생각해 보지 않았을 때 내가 뭘 생각했을까 하는 얘기를 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상의 시는 띄어쓰기도 없고 쉼표도 없는데 이상의 시를 다 읽었다고 하면 잘못 읽은 것입니다. 읽다가 숨이 막혀서 못 읽어야 합니다.  꾸밈없고 살아 있는 언어를 찾아  문; 선생님 시 중에 '연애 미학 서설'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언제 쓰셨으며 이 시 전체에 대한 얘기를 듣고 싶습니다.  자가운전하는 예쁜 여자가  내가 달리는 차선으로  얌체같이 끼어들기하고는  차창 밖으로 흔드는 하얀 손을 보면  무 베어먹듯 그냥 한 입 물고 싶다  눈 마주치면 눈흘레나 하고 싶다  뒤에서 들이박을 생각 아예 말고  살가운 접촉사고나 내고 싶다  - 지금쯤 고향의 억새밭 물녘에서는  무지개도 뛰어넘을만한 힘센 황소가  녈비에 황금빛 털이 간지럽겠다  밤길에 잽싸게 끼어들기하고는  점멸등 깜박이며 달아나는 차를 보면  반딧불이가 반딧반딧 짝을 찾는 것 같다  나도 한 마리 반딧불이가 되어  하늬바람에 공중제비하고 싶다  홰친홰친하는 낚시대 펴고  동동거리는 형광찌 불빛따라  얄미운 붕어 한 마리 잡고 싶다  - 지금쯤 고향 집 지붕에는  하양 박꽃이 환하게 피어  은하수까지 다 물들이겠다  [연애 미학 서설] 전문입니다만, 이 시는 2년반 전에 써서 어느 시 전문지에 발표한 것입니다. 눈흘레라고 하면 개가 흘레붙었다고 하는데 눈흘레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성추행이나 성폭행하고는 다를겁니다. 눈으로 하는 행위, 녈비는 지나가는 비, 홰친홰친하다는 우리의 사전에는 없고 북한 쪽의소설을 읽다보니까 이런 표현이 나옵니다.  시는 잠자리나 나비와 같은 것입니다. 잠자리를 야구방망이로 잡으면 어떻게 됩니까? 잡긴 잡았는데 잠자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포충망으로 잡아야 됩니다. 문학을 제대로 문학으로 보지를 않고 문학에 담긴 주제 따위로만 보려고 듭니다. 윤동주 시를 저항문학으로만 보면 맛이 사라지고 없는 것과 똑같은 이치지요. 이런 저의 생각이 담긴 졸시 한편을 더 읽어 드리면서 이 말을 마치겠습니다.  민박집 천장에서 쥐 달리는 소리 들리면  참말 오랜만에 동갑내기 만난 것 같다  쥐불놀이 하다가 눈썹 태우고  시래기죽 먹고 잠든 겨울밤  쥐불연기에 수염을 그슬린 쥐들이  눈썹 태운 나와 더 놀고 싶다는 듯  쥐오줌자국 난 천장을 밤새 달렸다  씨옥수수 갉아먹던 새앙쥐들도  이불 속까지 기어들어와  내 어린 발가락을 자꾸 깨물었다  고드름이 제 무게에 툭툭 떨어지는  아침이 밝아오면  일곱 문 반 내 고무신에  봉숭아씨처럼 예쁜  쥐똥만 남겨놓고 숨어버렸다  쥐 달리는 민박집 천장 아래 누우면  옛 동갑내기의 발자국소리 들린다  -[쥐에 관한 명상]  이 시는 강화도 낚시를 갔을 때 민박집에서 고기는 잘 안 집히고 소주를 먹고 누워 있으니까 쥐가 다다닥거리고 도망을 가더군요. 그전 같으면 비위생적이라고 했을 텐데 오랜만에 쥐소리를 들으니까 옛날 정겨운 느낌이 들었습니다. 저로서는 '쥐똥'을 '봉숭아 씨'로 볼 수 있는 눈이 곧 시인의 눈이 아닌가 합니다. 모두 꾸밈없는 눈으로 사물을 바라보시기를 권하면이 제 말을 마칩니다. ◈     
875    詩는 사슴 따라 놀고, 칡범 따라 놀아야... 댓글:  조회:4250  추천:0  2016-01-08
    1.시적 진술과 설명       시적 진술이란 시적 묘사와 더불어 시적 언술의 특징을 드러내는 큰 두 갈래 중의 하나로 구분하는 것인데 외형상 드러난 모양으로는 독백이다.그러나 이 독백은 의미있는 깨달음을 바닥에 깔고 있어 정서적 호소력이 큰 표현이다.         A)배꽃가지 반쯤 가리고 달이 가네.       경주군 내동면 혹은 외동면 佛國寺 터를 잡은 그 언저리로       배꽃가지 반쯤 가리고 달이 가네.       -박목월「달」       B) 해야 솟아라.해야 솟아라.말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산 너머 산 너머서 어둠을 살라먹고, 산 너머서 밤새도록 어둠을 살라먹고, 이글이글 애띤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달밤이 싫여, 달밤이 싫여, 눈물 같은 골짜기에 달밤이 싫여, 아무도 없는 뜰에 달밤이 싫여 ……       해야, 고운 해야 늬가 오면 늬가사 오면, 나는 나는 청산이 좋아라.훨훨훨 깃을 치는 청산이 좋아라.청산이 있으면 홀로래도 좋아라.       사슴을 따라, 사슴을 따라, 양지로 양지로 사슴을 따라, 사슴을 만나면 사슴과 놀고,       칡범을 따라 칡범을 따라 칡범을 만나면 칡범과 놀고……       해야 고운 해야, 해야 솟아라 꿈이 아니래도 너를 만나면, 꽃도 새도 짐승도 한자리 앉아, 워어이 워어이 모두 불러 한자리 앉아 애띠고 고운 날을 누려보리라.       -박두진 「해」       A)와 B)는 시적 묘사와 시적 진술이 보여주는 전형적인 차이이다.시적 묘사는 근본적으로 언어를 회화적으로 가시화하고 시적 진술은 독백의 양상으로 가청화하지만 시적 진술은 시각적 인식과 맞닿아 있는 묘사와는 달리 청각을 통한 설득과 깊은 관련을 지니고 있다.         2.진술의 특성       A) 門을암만잡아다녀도안열리는것은안에生活이모자라는까닭이다.       -이상,「家庭」       B) 누구한테 머리를 숙일까 사람이 아닌 평범한 것에 많이는 아니고 조금 벼를 터는 마당에서 바람도 안 부는데 옥수수 잎이 흔들리듯 그렇게 조금       -김수영「꽃잎․1」         시적 묘사가 가시적,제시적,감각적이라면 시적 진술은 가청적,고백적,해석적이다.A)에서 내가 문을 열수 없는 까닭은 문고리가 잠겨 열리지 않는 것이 아니라 생활고에 의한 두려움때문이다.즉 ‘암만잡아다녀도’는 ‘잡아당기기조차 두려운’의 반어적 표현인 것이다.B)는 다분히 자조적인 말투로 표현이 평이하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적 진실의 파장은 그와 다르다.화자가 머리를 숙이는 대상은 ‘사람이 아닌 평범한 것’이다.그만큼 고개숙일 대상이 없다는 말이다는 자각과 통탄이다. 이 가청적,고백적,해석적인 시적 진술은 관찰을 통한 감지라기보다 관조를 통한 감지쪽이다.         3.진술의 종류       시적 진술은 스스로가 시적 대상이 되어 반성하고 기원하는 독백적 진술,자기의 주장을 불특정 개인 또는 다수에게 적극동조를 요청하는 권유적 진술,일정한 시적 대상에 대한 시인 나름의 해석과 비판의 형태의 해석적 진술로 나뉜다.       4.넋두리와 독백적 진술       진술형의 작품 가운데 흔히 발견되는 유형 중의 하나는 넋두리 형태의 표현이다.독백적 진술을 잘못 이해한, 자기 감정의 적나라한 표현이 그것이다.시인은 시를 감정을 발산하는 장소로 착각하면 안 된다.또한 자각과 반성으로 점철된 새로운 깨달음이 있어야한다.         5.피상적 주장과 권유적 진술       권유적 진술에 실패하는 주된 원인은 자신의 주장을 성급하게 남 앞에 내보이고 싶은 과시욕에 있다. 주어진 문제를 탐구하기보다 주어진 문제를 이용하여 자기를 앞세우고 싶은 욕망의 결과이다. 치열한 탐구가 선행되어야 하고 그 세계를 단순한 주장이 아닌 깨달음으로 보여주어야 한다. 진술형의 시는 장식적 수사를 많이 동원하여 청중을 설득하려는 연설문이나, 자극적 수사를 펼쳐 청중을 유인하려는 선전문과는 다르다. 시는 어디까지나 절제된 언어로 된 세계이다. 시가 비유와 상징을 적극적으로 차용하는 것도 절제된 언어로 세계를 인식하려는 양식상의 미덕을 기초로 하고 있는 탓이다.       6.자기 중신적 사고와 해석적 진술       해석적 진술은 시적 대상에 대한 시인 나름의 해석과 비판이 있어야한다.앞에서 본 김현승의 「눈물」에서와 같이 독자적이고 새로운 해석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자기 중심적 사고만을 담은 시가 될 수 밖에 없다.따라서 깊은 공허한 상념을 시적 공간으로 이룩하기 위해 깊은 반성이 필요할 것이다.       7.진술과 묘사의 어울림       진술형의 시에도 묘사가 사용된다. 시적 진술을 이끌어나가는 과정에 서경적 요소나 서사적 요소가 필요할 때나 또는 대상을 구체화하여 들려주고 싶을 때는 묘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시적 진술의 구조와 시점       시적 묘사의 구조는 대체로 두 가지 요인에 의해 결정된다. 1.시적 묘사는 대상에 대한 관찰을 축으로 하고 있으므로 관찰의 시각이 일차적으로 작품의 구조를 결정한다. 2.관찰하는 대상이 어떤 성질의 것이냐에 따라 구조가 달라진다. 그러나 시적 진술은 관찰이 작품의 축이 아니라 해명이 작품의 축이다.그 해명이 어떠한 형태이든 자성이라는 깨달음을 핵으로 갖고 있다. 그 깨달음은 가시적이고 감각적인 형태의 어떤 것이 아니라 관념적인 형태의 어떤 것이다. 보여줄 수 있기보다 들려줄 수 있는 어떤 것이다. 시적 진술은 들려주고 싶은 것을 어떤 형태로 말하고 있는가에 따라 그 구조가 결정된다.진술은 자성과 해명의 직접적 표현이므로 그 시점은 의식이 흐르는 방향에 따라 결정된다.       1. 독백적 진술       독백적 진술의 구조를 살펴보면 회고적 시점과 기원적 시점의 두 가지 시점이 발결된다. 회고적 시점은 과거를 통한 현재의 반성 형태를 띠고 있고 기원적 시점은 과거와 현재의 반성을 토대로 한 미래의 삶에 대한 희구의 형태를 띠고 있다.       a.회고적 시점       실제로 모든 시는 독백의 성질을 지니고 있다.시라는 문학 양식이 시인의 체험 그 자체를 형식화한 것이기 때문이다.이러한 체험적 사실의 예시적 진술은 줄일 수가 없다.줄이면 시적 내용 자체가 없어진다.       b.기원적 시점       희구, 소망은 과거와 현재라는 시간 속의 삶에 대한 반성을 그 밑바닥에 깔고 있기는 하지만, 반성에 그 진술의 초점이 모아져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젠가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희망하는 기원에 초점이 모아져 있다. 회고적 독백이든 기원적 독백이든, 시 속의 독백은 시적 내용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방법적 차용이다. 그러므로 그 방법적 차용은 엄격할수록 좋다.       2. 권유적 진술       권유적 진술은 진술자가 자신의 주장을 남에게 설득하는 내용을 갖는다. 그러므로 그 구조는 진술자로서는 이미 깨달은 사실이지만 다른 사람이 모르고 있거나 알면서도 무시한다는 전제를 그 밑바닥에 깔고 있는 형태이다. 권유적 진술에는 관행적 형태의 권유와 비관행적 형태의 권유가 있다.       a. 관행적 시점       관행적 형태의 권유로는 어떤 단체나 행사의 기념시가 전형적인 보기이다. 이러한 특징을 지닌 관행적 형태의 권유는 일정한 단체나 행사가 지향하는 이상이나 목적을 염두에 둔 권유이다.그러므로 진술자의 주장은 단체나 행사가 지향하는 이상과 합치되는 방향에서 전개된다.하지만 그런만큼 관행적 형태의 권유에는 한계가 있다.       b. 비관행적 시점       비관행적 형태의 권유는 아무런 구속이 없는 자유로운 주장이 가능하다. 고은의 「화살」(이하 A)과 강은교의 「가을의 書」(이하 B)를 보면 A의 경우 구어체를 B의 경우 문어체의 권유적 진술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구어체의 권유는 그 특질상 항상 웅변투의 반복되는 시구와 리듬을 갖는다.그런 반면 문어체의 B의 경우는 섬세하게 듣거나 읽어야 한다.이 작품은 상당 부분이 심상을 주관적으로 묘사한 묘사 시구를 차용하고 있는 셈이다.       3. 해석적 진술       해석적 진술은 시적 대상에 대한 나름의 이해와 비판을 토로하는 형태이다. 시적 대상에 대한 감각적 인식을 가시적으로 제시하는 것(가시화)이 아니라 직접 토로하는 것(가청화)이라는 점에서 묘사와 구분되고, 심정적 토로가 아닌 일정한 시적 대상에 대한 해석의 토로라는 점에서 스스로가 대상이 되어 자기 반성을 진술하는 독백적 진술과 구분되며, 또 대상에 대한 나름의 이해와 비판을 들려준다는 점에서 자기의 주장을 제3자에게 관철시키려 하는 권유적 진술과 구분된다.       a. 관조적 시점         관조적 시점의 해석은 대상에 대한 이해를 지향하고, 풍자적인 시점의 해석은 대상에 대한 논평을 지향한다. 관조적 해석은 그 양상은 다양하지만, 일반적으로 존재와 의미의 탐구를 통한 세계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이해를 보여 준다. 문제는 해석적 진술이 얼마나 우리의 공감과 감동을 얻어낼 수 있느냐이다. '서정시는 어떤 진술도 당장 진리가 되는 그런 영역이다'라는 말처럼 과학적 진리와는 다르게 하나의 정답 위에 세워져 있는 논리가 아니라, 증명할 수는 없지만 공감할 수 있는 우리의 정서를 그 바탕으로 발해지는 언술이기 때문에 우리의 공감을 얻지 못할 때, 그 진술은 힘을 잃는다.         b. 풍자적 시점       풍자적인 시점의 해석적 진술은 일종의 시적 논평이다. 관조적인 형태가 비판보다 대상에 대한 의미론적 또는 존재론적 탐구를 통한 세계의 이해에 적극적인 태도를 보여준다면, 풍자적인 형태는 대상 그 자체에 대한 탐구보다 그것에 대한 '인간의 태도'에 보다 관심이 있다. 그러므로 풍자적인 형태의 진술은 보다 사회적이고, 또 윤리적인 해석을 주로 한다.      
874    시짓기는 퇴고작업의 연속... 댓글:  조회:4044  추천:0  2016-01-08
  현대시작법 정리 -시의 구조와 행,연|♤ 시창작법         1.시의 행과 연           시의 구조는 행과 연을 나눠볼 수 있다. 행은 단어, 구, 절 또는 그것들의 연합으로 구성되고, 연은 하나의 행 또는 행의 연합으로 구성된다. 김춘수는 시의 행과 연이 이루워지는 이유를 세가지로 들고 있는데, 리듬의 단락, 의미의 단락, 이미지의 단락이 그것이다.       그 길에 아지랑이가 피듯 태양이 타듯 제비가 날 듯 길을 따라 물이 흐르듯 그렇게 그렇게       天然히       울타리 밖에도 花草를 심는 마을이 있다 오래오래 殘光이 부신 마을이 있다 밤이면 더 많이 별이 뜨는 마을이 있다       박용래,「울타리 밖」       이 시에 '天然히'가 한 연으로 놓여있는데 그만큼의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작품 속의 '天然히'는 앞과 뒤에 있는 각 연과 맞먹는 이미지의 중량을 작가가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2. 시의 형태와 행·연       시를 형태상으로 구분하면 정형시, 자유시, 산문시로 나누어진다. 이 중 정형시는 자유시나 산문시와 달리 형태가 우선하므로 그 형태로부터 작가가 자유로울 수 없다. 우리가 시조에서 보았듯 정형시는 틀이 우선하므로 행과 연은 그 틀을 벗어날 수가 없다. 그런 만큼 틀이 우선하고 작가의 의도는 그 다음이다. 정형시의 행과 연은 그 틀에 따라 결정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루만지듯 당신 숨결 이마에 다사하면       내 사랑은 아지랑이 春三月 아지랑이       장다리 노오란 터밭에       나비 나비 나비 나비     이영도, 「아지랑이」       이 작품은 정형시의 현대적인 모습으로 현대시조의 모습을 갖고 있다. 회화적인 형태로 시행의 리듬을 시조의 음수율에 기대기 보다, 음수율을 뒤로 숨기고 시각적으로 행을 배열하여 회화적 리듬을 살리고 있다. 이와는 달리 자유시는 틀에 우선하지 않는다. 행과 연은 작가의 의도에 맡겨져 있다. 자유시에서 우리가 리듬을 느끼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유사한 어구나 어절을 사용 때문인데, 리듬이란 반드시 정형의 틀에서만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3. 리듬과 행·연       Ⅰ. 외국 시와 우리 시의 정형율       정형시의 리듬은 압운과 율격을 기본으로 한다. 압운은 영시나 한시에서 볼 수 있는 바처럼 시행의 시작, 끝, 중간에 유사한 소리를 는 음절을 반복시키는 것이다. 그 반복은 단순한 소리의 반복이 아니라 엄격한 체계를 가진 소리의 반복이란 점에 유의해야하는데 우리의 언어는 첨가어로 음절 의식이 약해서 소리의 반복이 음수 또는 음보 단위로 형성된다. 그러니까 우리의 정형시에서는 압운 형태의 구조를 주장하기 어려운 것이다.       Ⅱ. 자유시의 리듬       자유시에서 리듬을 창조하는 데는 크게 세 가지의 방법이 있는데, 그 첫째가 전통적인 시의 율격을 적절하게 변형시켜 운용하는 방법이다.       별똥 떠러진 곳,     마음에 두었다     다음날 가보려,     벼르다 벼르다     인젠 다 자랐오       정지용,「별똥」       이 시를 2음보로 읽으면 우리의 전통 시가의 율격을 금방 느낄 수 있다. 2음보로 된 한 행을 각각 한 연으로 놓고 있어, 한 행 한 행에 여운이 감도는 효과를 느낄 수 있다 자유시에서 리듬을 살리는 둘째 방법은 전통적인 시가, 무가, 민요 등의 양식 또는 그 어투를 적절히 차용하는 것이다. 셋째는 동일한 형태소, 낱말, 이미지, 어절, 통사 및 그 형식의 반복이다.       4. 이미지와 행·연       Ⅰ. 이미지의 개념       문학적 용어로서 이미지는 대개 3가지의 의미로 사용된다. 첫째, 넓은 의미로 시나 그 밖의 문학 작품에서 축어적 묘사나 암시 또는 직유, 은유에 사용되는 보조관념들로 언급된 감각적 지각의 모든 대상과 특성들을 의미한다. 둘째, 좁은 의미로 시각적 대상이나 장면의 묘사만을 의미한다. 셋째, 비유의 보조관념들을 의미한다.       Ⅱ. 이미지의 강조와 행·연       나무마다 하나씩 마음을 걸어두고 노을을 받으며 드러눕는 그림자 돌아갈 것이 없는 빈 몸이다. 뒷산은 뒷산은 내 몸이다.     신달자,「뒷산」       이 작품은 감각적 특성보다 그림자→빈 몸→내 몸이라는 의미를 따라가다보니, 감각적 특성은 시행 속에 숨고, 의미의 단락을 분명히 하는 보다 논리화된 시행을 이룬 것이다.       Ⅲ. 이미지의 종류와 행·연       시에서의 이미지는 언어발달의 단계에 따라 정신적 이미지, 비유적 이미지, 상징적 이미지로 나누기도 하고, 관념에 봉사하느냐 아니하느냐에 따라 서술적 이미지와 비유적 이미지로 나누기도 한다. 정신적 이미지는 시각, 청각, 촉각, 미각, 후각 등의 감각기관에 의해 이루지는 현상으로 두 개 이상의 다른 감각이 합해진 형태는 공감각이라 한다. 비유적 이미지는 비유의 보조관념, 상징적 이미지는 상징적 표현 그 자체가 이미지가 된다. 시의 행과 연은 이미지의 종류에 따라 달라지기보다, 첫째는 개별적 이미지 또는 이미지의 단락에 주어지는 작가의 강조에 따라 다르고, 둘째는 회화적 구성에 따라 달라진다.       Ⅳ.회화적 구성과 행·연       회화적 리듬은 그 특성상 시각적 형태로 강조된다. 시각적 형태를 드러내는 대체로 세 가지 방법이 사용되고 있다. 사실적 구성과 기하학적 구성, 그리고 기성품을 모방한 구성이 그것이다. 사실적 구성은 한 편의 시가 한 폭의 풍경화가 되도록 언어를 구사하는 방법이다. 언술형태로 보자면 묘사에 의존하게 되는 것이다. 기하학적 구성은 시행을 적극적으로 시각화하는 형태이다. 사실적 구성이 언어의 표현 방법에서 찾아진다면 기하학적 구성은 시행 그 자체의 배열에서 찾아진다. 기성품을 모방한 구성의 한 예로는 오규원의 시 「프란츠 카프카」에서의 식단표 형식을 빌어온 것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5. 의미와 행·연       Ⅰ. 의미와 양태         시에서의 의미란 시 속에 묘사되어 있는 것 또는 진술되어 있는 것을 말한다. 묘사라 하더라도 서경적, 서사적, 심상적인 작품 구조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 있기도 하고, 그것들은 또 축어적으로 표현되어 있기도 하고 비유적으로 표현되어 있기도 한 만큼 그 의미의 가시적 양태는 다양하다. 진술 역시 독백적, 권유적, 해석적으로 드러나 있기도 하며, 서로 섞여 있기도 하다.         Ⅱ. 의미와 연의 기능         정형의 시행을 가진 형태가 아닌 모든 시에서는 연은 작가의 의도에 맡겨져 있다.       가느다란 갈비뼈가 가만히 만져지는 한 마리 참새의 여윈 가슴과 같다 햇볕이 오히려 춥다 마지막 술 한사발이 조금씩 조금씩 엎질러지고 있다       정진규,「봄이 올 무렵」       이 작품은 이미지 도는 의미의 단락을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산문적으로 엮고 있다. 그 의도 속에는 단락별의 이미지라든지 의미보다 그것들이 어울려서 얻어지는 전체적인 정서의 질량을 중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Ⅲ. 의미와 전형적 형태의 행·연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는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 집에 갇혔네     기형도, 「빈 집」       이 작품에서 보듯, 각 연은 시행의 다수와 관계없이 의식의 이동 단위로 연이 나누어져 있다. 그러니까, '사랑'을 잃었다는 지각(1연)→'잘 있거라'라고 인사하고 싶은 것들(2연)→'내 사랑'을 본 것(3연)→ 이런 의식의 편차와 단속(단절과 이어짐)이 연으로 구체화되어 있는 것이다.       Ⅳ. 양행 걸침과 행·연       양행 걸침이란 일상적 구문의 형태가 시행에서 의도적으로 분절되어 두 행에 걸치는 것을 두고 일컫는다. 즉 일상적인 구문과 시행의 구문이 동일하지만 행의 배열이 달라지는 것이다.       Ⅴ. 의미의 강조의 해체       김춘수는 산문시의 형태는 정서나 감각을 강조하기보다 의미의 논리적 연결이 요구되는 쪽에서 흔히 사용할 수 있는 시행의 배열 방법이라는 말을 했다. 그러나 어떤 특정한 시가 논리적 연결을 요구하고 있건 서사적 연결을 요구하고 있건, 또는 전체적 이미지를 강조하고 있건간에, 시행을 산문의 형태를 취한다는 것은 개별적인 리듬이나 이미지보다 전체적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Ⅵ. 일상적 표현 양식의 변용       시인이 편지, 일기, 메모 등의 일상적인 표현 양식의 틀을 빌리는 것은 독자에게 익숙한 그 틀이 시인이 의도하는 바의 내용, 그러니까 의미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는데 적절하다는 판단 때문이다. 회화적 리듬을 살리기 위해 기성품의 틀을 빌리는 것과 유사하다.       10. 의도적 의미와 실제       1.작품과 의미 Ⅰ. 작품 속의 세 가지 의미       작품 속에는 작가가 의도한 의미가 있기 마련이다. 의도와 작품은 계획과 실제의 관계이므로 같을 순 없다. 습작기의 많은 사람들의 작품에 나타나는 불투명성은 의도와 실제의 괴리가 어떻게, 어디에서 발생하는가를 모르기 때문이다. 의도와 실제의 괴리 현상은 궁극적으로는 물론 시에 관한 이해부족에서 일어난다. 또한 인식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미분화적 사고의 흔적이고, 해석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미분화적 사고의 흔적이고, 해석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한 작품 속에 내재해 있는 의도적 의미, 실제적 의미, 해석적 의미를 구분해 생각해보지 못한 결과 이고, 표현의 측면에서 본다면 시적 언술의 특성을 이해하지 못했거나 살리지 못한 결과이다.       Ⅱ. 전체적 불명확성과 인도     Ⅲ. 부분적인 불명확성과 의도     습작기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감정을 솔직히 표현하기만 하면 된다는 식으로 시적 표현을 이해하고 있으며 다소 애매한 것은 당연한 하다고 여기기도 한다. 그러니까 각종의 비유과 수사법에서 발생하는 애매성은 그것의 암시성, 다의성에 근거하지만, 자의적이고 자기 중심적 언어사용은 비유의 성립을 방해하고 의미 전달을 불가능하게 하고 있다는 점을 이해하고 잇지 못한 것이다. 시적표현은 그 장르적 특성, 즉 쉽게 말해 자신의 느낌을 짧은 문장 속에 구체화해야 하므로 한 언어가 가지고 있는 외연과 내포의 크기와 넓이, 문자적 의미와 비유적 의미의 연관 관계, 비유와 수사의 한계를 바르게 파악하고 사용해야 한다.       Ⅳ. 의도와 다른 세계       작자의 의도와 전체적으로 또는 부분적으로 달라지거나 불투명해지는 경우와는 달리, 작자의 의도와는 다르지만 작품으로서는 그 자체가 살아 있는 예도 있다.       Ⅴ. 해석의 가능성과 표현의 방만성         작품의 의도적 의미와 실제적 의미, 해석적 의미는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해석의 가능성 때문이지 표현의 방만한 자의성 때문은 아니다. 그러므로 작자는 의도하는 바의 의미와 표현된 의미 사이에 있을 수 있는 각가지 상이점과 문제점을 언제나 깊이 의식해야 한다.       2. 의도와 시작 과정     Ⅰ. 의도와 작품과의 거리     Ⅱ. 퇴고의 과정과 실제     한 사람의 시인이 한 편의 작품을 완성하는 과정은 개개인의 기질에 따라 다르고, 또 개개의 작품에 따라 다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초고에 해당하는 원고로부터 거의 모두가 얼마간의 퇴고작업을 거친다      
873    시짓기는 初心으로... 댓글:  조회:4506  추천:0  2016-01-08
初心으로 돌아가는 시작법/   - 생활의 발견 -                                              이 문재       를 발표하신 님은 '시인의 눈'을 가지고 있습니다. 시인의 눈이란 무엇입니까. 남들이 못 보는 것, 안 보는 것을 보는 눈이겠지요. 시인의 눈을 '바깥의 눈'이라고 부르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한 걸음 비켜서서, 또는 한 걸음 앞서거나 뒤쳐져서 보는 눈, 그것이 시인의 눈입니다. 를 함께 읽어보지요.       버스 창문 밖으로 내민 하이얀 그녀의 손 뒤뜰에 널어놓은 손수건 마냥 오늘도 바람에 나부낀다     꽉 물고 놓지 못하는 그리움       난해한 시어가 없습니다. 특별한 비유도 없습니다. 하지만 그리움의 깊이가 가슴속으로 환하게 스며듭니다. 시 속에서 그녀는 버스를 타고 떠나는데, 창문 밖으로 하얀 손을 흔듭니다. 이 손은 곧 손수건으로 변주됩니다. 애인의 손=하얀 손수건=이별. 이 같은 은유와 상상력의 전개는 너무 흔해서 자칫 상투적 표현으로 전락할 지경입니다. 하지만 시인은 빨래집게를 동원하며 상투성에서 벗어납니다. 시의 화자는 빨래집게를 의인화(자기화)하며 애인의 손을 '꽉 물고 놓지' 않고 있습니다. 이것이 시의 위력이자 매력입니다. 시 쓰는 이의 심리 상태를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물의 이미지와 만나게 해주는 것, 그리하여 '나'는 물론이고 '나'에게 비유된 대상까지 새롭게 태어나게 하는 것! 은유는 지배나 억압의 관계가 아닙니다. 은유는 공존, 상생의 관계입니다.        
872    좋은 詩의 조건 - 10가지 댓글:  조회:5696  추천:0  2016-01-08
    /-박남희     1. 함축성이 있고 입체적인 시를 써라     시와 산문이 다른 점은 시가 지니고 있는 함축성 때문이다. 시는 평면적인 글을 의미전환 시키거나 이미지화해서 그 속에 새로운 의미를 갖게 해준다. 시에서 다양한 수사법(은유, 상징, 역설, 알레고리, 아이러니 등)을 사용하는 것도 평면적인 글을 입체적이고 함축적인 글로 만들려는 노력인 것이다. 그러므로 시인은 어떤 대상을 바라볼 때 그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않고 인간이나 사회의 어떤 현상과 연결시켜서 바라보고, 그것을 새롭게 인식하고 재해석해내려는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우리가 시를 쓸 때 세계 속에서 자아를 발견하고(동화-assimilation) 자아 속에서 세계를 발견하려는 것(투사-projection)도 이러한 노력의 일환인 것이다. 동화는 세계(사물)를 자신의 내면으로 끌어들여 동일화시키는 것을 말하고, 이를 다른 말로 세계의 자아화라고 말한다. 이에 반해 투사는 자아의 감정을 세계(사물)에 이입시켜서 자아를 세계와 동일화시키는 것을 말하며, 이를 요약해서 자아의 세계화라고 말한다. 동화는 대상을 주관적으로 바라보고 주관적으로 해석하는 방법이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자아에 중점이 주어지는데 반해, 투사는 이와 반대로 자아를 대상에 상상적으로 감정이입 시켜서 자아와 세계가 일체감을 갖도록 하는 방법으로 세계(사물)에 중점이 주어진다는 점이 다르다. 자아와 세계를 동일화하려는 것은 서정시의 가장 본질적인 성격이다. (예시:박남희/투사-최문자)       나는 가끔 주머니를 어머니로 읽는다 -박남희       어머니를 뒤지니 동전 몇 개가 나온다 오래된 먼지도 나오고 시간을 측량할 수 없는 체온의 흔적과 오래 씹다가 다시 싸둔 눅눅한 껌도 나온다   어쩌다, 오래 전 구석에 처박혀 있던 어머니를 뒤지면 달도 나오고 별도 나온다 옛날이야기가 줄줄이 끌려나온다   심심할 때 어머니를 훌러덩 뒤집어보면 온갖 잡동사니 사랑을 한꺼번에 다 토해낸다   뒤집힌 어머니의 안쪽이 뜯어져 저녁 햇빛에 너덜너덜 환하게 웃고있다       팽이 -최문자     세상이 꽁꽁 얼어붙었습니다 하나님, 팽이 치러 나오세요 무명 타래 엮은 줄로 나를 챙챙 감았다가 얼음판 위에 휙 내던지고, 괜찮아요 심장을 퍽퍽 갈기세요 죽었다가도 일어설게요 뺨을 맞고 하얘진 얼굴로 아무 기둥도 없이 서 있는 이게, 선 줄 알면 다시 쓰러지는 이게 제 사랑입니다 하나님       2.관점과 표현이 새로워야 한다- 다르게 보기와 낯설게 하기     좋은 시는 시인이 대상을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보고 그것을 얼마나 신선하고 새로운 언어로 표현하는가에 따라서 결정된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미 너무나도 낯익은 것들에 길들여져 있어서 낯익은 것들을 새롭게 바라보지 못하고 기계적이고 관습적으로 바라보는 경우가 많다. 시인은 이처럼 관습적이고 기계적인 것들을 일깨워서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어 재창조해내는 자이다. 시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요소 중의 하나인 상상력이나 창의력은 대상을 다른 사람과 다르게 바라보고 이것을 자신의 표현법으로 낯설고 새롭게 표현해 내는데서 생겨난다. 이처럼 시를 새로운 관점에서 새로운 표현법으로 창작하기 위해서는 우선 고정관념을 없애야 한다. 우리 주변에는 무수한 사람과 사물들이 존재하는데, 이들은 하나같이 고정된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시인은 이러한 주체나 대상이 지니고 있는 고정관념을 없애고 자유로운 상상력이나 사유(생각)를 통해서 그것들을 새롭게 바라보고 재해석해서 새롭게 표현을 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 시문학사를 더듬어 볼 때, 실험시나 해체시가 반복적이고 주기적으로 등장하게 되는 것도 시적 ‘새로움’에 대한 시인의 열망이 반영된 결과인 것이다. 우리가 고정관념의 틀에서 빠져나오려면 우리의 정신과 생각을 자유롭게 풀어주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우선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분열된 몽고의 부족을 결집하여 중국과 유럽을 정복한 징기스칸이 만약에 유목민의 후예가 아니었다면 아마도 그런 큰 역사는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유목을 뜻하는 노마드(nomad/nomade)는 들뢰즈가 그의 저서 『차이와 반복』(1968)에서 노마드의 세계를 '시각이 돌아다니는 세계'로 묘사하면서 현대 철학의 한 개념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러한 유목의 개념은 현대에 이르러서 어떤 특정한 가치와 삶의 방식에 얽매이지 않으면서 끊임없이 자기를 부정하고 새로운 자아를 찾아가는 창조적인 행위를 일컫는 말로 정착되면서 새로운 문화적 트랜드로 떠오르게 된다. 이러한 노마드적인 정신은 시를 쓸 때도 필요하다. 좋은 시를 쓰려면 기존에 가지고 있던 고정관념을 부수고 자아와 사물의 고정적인 이미지를 지워버리고 그 위에 새로운 상상력을 펼칠 수 있어야 한다. 새로운 상상력은 자유로운 정신에서 나오고, 이것이야말로 새롭고 좋은 시의 원천이 된다.(예시: 조말선의 /이원의 )     둥근 발작 -조말선     사과 묘목을 심기 전에 굵은 철사 줄과 말뚝으로 분위기를 장악하십시오 흰 사과 꽃이 흩날리는 자유와 억압의 이중구조 안에서 신경증적인 열매가 맺힐 것입니다 곁가지가 뻗으면 반드시 철사 줄에 동여매세요 자기성향이 굳어지기 전에 굴종을 주입하세요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성장억제입니다 원예가의 눈높이 이상은 금물입니다 나를 닮도록 강요하세요 나무에서 인간으로 퇴화시키세요 안된다, 안된다, 안된다 부정하세요 단단한 돌처럼 사과가 주렁주렁 열릴 것입니다 하지마, 하지마, 하지마 억누르세요 뺨이 벌겋게 달아오를 것입니다 극심한 감정교차는 빛깔을 결정합니다 폭염에는 모차르트를 우기에는 쇼스타코비치를 권합니다 한 가지 감상이 깊어지지 않도록 경계하세요 나른한 태양, 출중한 달빛, 잎을 들까부는 미풍 양질의 폭식은 품질을 저하시키는 원인입니다 위로 뻗을 때마다 쾅쾅 말뚝을 박으세요 열매가 풍성할수록 꽁꽁 철사 줄에 동여매세요 자유와 억압의 이중구조 안에서 둥근 발작을 유도하세요     거리에서 -이원     내 몸의 사방에 플러그가 빠져나와 있다 탯줄같은 그 플러그들을 매단 채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온다 비린 공기가 플러그 끝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곳곳에서 사람들이 몸 밖에 플러그를 덜렁거리며 걸어간다 세계와의 불화가 에너지인 사람들 사이로 공기를 덧입은 돌들이 둥둥 떠다닌다   ---------     '집안이 나쁘다고 말하지마라. 나는 아홉살때 아버지를 잃고 마을에서 쫓겨났다.     가난하다고 말하지 마라. 나는 들쥐를 잡아먹으며 연명했고 목숨을 건 전쟁이 내 직업이고 내 일이었다.     작은 나라에서 태어났다고 탓하지마라. 그림자 말고는 친구도 없고 병사로는 10만명 백성이 어린애 노인까지 합쳐도 200만도 되지 않았다.     배운 것 없다고, 힘이 없다고 탓하지 마라. 나는 내 이름도 쓸 줄 몰랐으나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이면서 현명해지는 법을 배웠다.     너무 막막하다고 그래서 포기 해야겠다고 말하지 마라. 나는 목에 칼을 쓰고도 탈출했고 뺨에 화살을 맞고 죽었다 살아나기도했다.     적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안에 있다. 나는 내게 거추장스러운 것은 깡그리 쓸어 버렸다.     나를 극복하자, 나는 징기스칸이 되었다.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고 살아 남는 자가 강한자다.'         3.현실의 구체성과 진정성에 토대를 두고 상상의 나래를 펼치라     좋은 시는 우선 허황되지가 않다. 집도 토대가 튼튼해야 좋은 집이 될 수 있듯이, 시도 체험의 구체성이나 진정성 위에 서 있어야 감동을 줄 수 있다. 관념이나 허황된 상상만으로는 좋은 시가 될 수 없다. 관념도 시의 소재가 될 수는 있으나 그것을 객관적인 상관물로 사물화하지 못하면 독해가 불가능한 난해시나 주관적이고 피상적인 시 밖에 되지 못한다. 그러므로 아무리 기발한 상상력이 나타나 있는 시라 할지라도 현실과의 연관성이 아주 없거나 너무 희박해서는 곤란하다. 요즘 젊은 시인들의 시 가운데 객관적으로 독해가 불가능한 시가 종종 보이는 것은 이러한 부분에 대한 통찰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너무 체험이나 기억에 의존한 시를 쓰는 것도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좋은 시는 체험과 기억과 상상력이 조화를 이루면서 우리의 경험이나 감동의 영역을 무한히 확장시켜줄 수 있는 시이다. 우리가 시를 읽고 공감하게 되는 것은 시의 내용이나 주제가 현실과 일정한 소통의 통로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시적 표현이나 상상력, 시적 사유 등이 현실과 연결되어있으면서도 현실에 매몰되어 있거나 잠들어 있는 부분을 일깨워줄 수 있는 새로운 감각을 지니고 있는 시가 좋은 시이다. 우리가 좋은 시를 읽으면서 우리 안에 잠들어있던 생각이나 상상력이 새로운 충격으로 되살아나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되는 것도 좋은 시 속에 들어있는 신선한 감각의 힘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예시: 허수경의 /문정희의 /문인수의 )     땡볕 -허수경      소나무는 제 사투리로 말하고 콩밭 콩꽃 제 사투리로 흔드는 대궁이 김 매는 울 엄니 무슨 사투리로 일하나 김 매는 울 올케 사투리로 몸을 터는 흙덩이     울 엄니 지고 가는 소쿠리에 출렁 출렁 사투리 넌출 울 올케 사투리 정갈함이란 갈천 조약돌 이빨 같아야       물 만드는 여자 -문정희     딸아, 아무 데나 서서 오줌을 누지 말아라 푸른 나무 아래 앉아서 가만가만 누어라 아름다운 네 몸 속의 강물이 따스한 리듬을 타고 흙 속에 스미는 소리에 귀 기울여 보아라 그 소리에 세상의 풀들이 무성히 자라고 네가 대지의 어머니가 되어가는 소리를 때때로 편견처럼 완강한 바위에다 오줌을 갈겨 주고 싶을 때도 있겠지만 그럴 때일수록 제의를 치르듯 조용히 치마를 걷어올리고 보름달 탐스러운 네 하초를 대지에다 살짝 대어라 그리고는 쉬이 쉬이 네 몸 속의 강물이 따스한 리듬을 타고 흙 속에 스밀 때 비로소 너와 대지가 한 몸이 되는 소리를 들어보아라 푸른 생명들이 환호하는 소리를 들어보아라 내 귀한 여자야       간통 -문인수     이녁의 허리가 갈수록 부실했다. 소문의 꼬리는 길었다. 검은 윤기가 흘렀다. 선무당네는 삼단 같은 머리채를 곱게 빗어 쪽지고 동백기름을 바르고 다녔다. 언제나 발끝 쪽으로 눈 내리깔고 다녔다. 어느 날 이녁은 또 샐 녘에사 들어왔다. 입은 채로 떨어지더니 코를 골았다. 소리 죽여 일어나 밖으로 나가 봤다. 댓돌 위엔 검정 고무신이 아무렇게나 엎어졌고, 달빛에 달빛가루 같은 흰내의 모래가 흥건히 쏟아져 있었다. 내친김에 허둥지둥 선무당네로 달려갔다. 방올음산 꼭대기에 걸린 달도 허둥지둥 따라왔다. 해묵은 싸릿대 삽짝을 지긋이 밀었다. 두어 번 낮게 요령 소리가 났다. 뛰는 가슴 쓸어 내리며 마당으로 들어섰다. 댓돌 위엔 반 듯 누운 옥색 고무신, 고무신 속을 들여다봤다. 아니나 다를까 달빛에, 달빛가루 같은 흰내의 모래가 오지게도 들었구나. 내 서방을 다 마셨구나. 남의 농사 망칠 년이! 방문 벌컥 열고 년의 머리끄댕이를 잡아챘다. 동네방네 몰고 다녔다. 소문의 꼬리가 잡혔다. 한 줌 달빛이었다       4.전체적인 통일성과 내용과 형식의 조화에 유념하라     시를 쓰다보면 처음과 끝의 발상이나 주제가 다르고 형식적인 통일성도 없이 산만하게 시가 써지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과오는 초보자일수록 더욱 자주 범하게 되는데, 그것은 아직도 자신만의 시작법을 터득하지 못하고 시에 대한 막연한 개념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좋은 시는 처음 읽을 때는 어렵게 느껴질지라도 꼼꼼히 읽어보면 낯선 표현 속에서 일정한 시적 문맥과 흐름을 찾을 수 있게 해준다. 이런 시들은 시 속에 텐션(긴장)이 들어있어서 시를 읽는 맛이 새로운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중적 구조를 지닌 다층시와 독해 불가능한 난해시를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전체적인 통일성이 결여되고 내용과 형식의 불균형을 이루고 있는 시는 난해시라기보다는 미숙한 시라고 보아야 한다. 그리고 시를 쓴 자신도 설명 불가능한 난해시도 역시 시적 숙련도가 덜된 시에 포함된다. 요즘의 젊은 시인들의 시가 난해시나 환상시, 해체시의 포즈를 취하면서 지극히 주관적인 난해시로 빠져들고 있는 것은 경계해야 할 일이다. 요즘은 정보화 시대에 접어들면서 모든 지식들이 인터넷으로 공유할 수 있는 네트워크의 성격이 강화되고 있다. 이런 시대에 유독 시만이 소통불가능을 고집하고 있는 것은 시대에 맞지 않는다. 좋은 시는 익숙함과 새로움, 경험과 상상력, 자유로움과 질서, 모호성과 선명성, 자아와 세계가 서로 소통하면서 조화를 이루고 있는 시이다.(예시:배한봉의 /이덕규의 /유홍준의 )     아름다운 수작 -배한봉     봄비 그치자 햇살이 더 환하다 씀바귀 꽃잎 위에서 무당벌레 한 마리 슬금슬금 수작을 건다 둥글고 검은 무늬의 빨간 비단옷 이 멋쟁이 신사를 믿어도 될까 간짓간짓 꽃대 흔드는 저 촌색시 초록 치맛자락에 촉촉한 미풍 한 소절 싸안는 거 본다 그때, 맺힌 물방울 하나가 떨어졌던가 잠시 꽃술이 떨렸던가 나 태어나기 전부터 수억 겁 싱싱한 사랑으로 살아왔을 생명들의 아름다운 수작 나는 오늘 그 햇살 그물에 걸려 황홀하게 까무러치는 세상 하나 본다       풍향계 -이덕규     꼬리지느러미가 푸르르 떨린다 그가 열심히 헤엄쳐가는 쪽으로 지상의 모든 시선이 집중되고 있다 그러나, 그 꼬리 뒤로 빛의 속도보다 더 빠르게 더 멀리 사라져가는 초고속 후폭풍後爆風의 뒤통수가 보인다 그 배후가 궁금하다       흉터 속의 새 -유홍준     새의 부리만한 흉터가 내 허벅지에 있다 열다섯 살 저녁 때 새가 날아와서 갇혔다     꺼내 줄까 새야 꺼내 줄까 새야     혼자가 되면 나는 흉터를 긁는다 허벅지에 갇힌 새가, 꿈틀거린다       5.장식적인 수사를 피하고 명징한 이미지와 행간의 미학에 유념하라     시만큼 언어적 수사에 민감한 장르도 찾아보기 힘들다. 시에서 언어적 수사는 옷과 같다. 옷을 어떻게 입느냐에 따라서 사람이 달라보이듯이, 시 또한 수사적 표현에 따라 느낌이나 의미가 달라지는 경우가 많이 있다. 하지만 화려한 옷이 모든 사람의 몸에 맞는 것이 아니듯이 불필요한 장식적인 수사법이 때로는 그 시를 망칠 때가 있다. 시에서는 화려한 수사법보다는 오히려 명징한 이미지가 더 중요하다. 시에서 명징한 이미지는 그 시의 구심점이 되어서 단순한 주제를 중의적으로 전경화 시켜준다. 대부분의 좋은 시에는 명징한 중심 이미지가 존재한다. 좋은 시는 그러한 중심 이미지를 구심점으로 체험과 상상력을 짜임새 있게 조화시키고 확장시켜나간다. 이미지는 시인이 자신의 생각을 직접적으로 설명하려는 것을 간접화시켜서 보여줌으로써 설명에 갇히기 쉬운 상상력을 무한히 확장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이와 함께 우리가 유념해야 할 사항은 시의 행간과 행간 사이의 긴장감을 유지하라는 것이다. 산문적 진술은 화자가 대부분의 상황을 직접 진술하기 때문에 행간과 행간 사이의 긴장감이 없다. 하지만 시는 생략과 침묵과 낯설게 하기를 통해서 행간과 행간 사이의 긴장감을 높인다. 이러한 시적 긴장감은 시적 화자가 아직 말하지 않은 것들이 행간 사이에 무수히 숨어있다는 것을 의미해준다. 고급 독자는 시인이 설명하지 않고 행간 사이에 감추어놓은 새로운 의미를 찾아내는 과정을 통해서 시의 묘미를 느낀다. 압축과 생략이 시가 지니고 있는 중요한 덕목 중에 하나로 꼽히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예시: 함민복의 / 정현종의 /류인서의 )     섬 -함민복       물울타리를 둘렀다     울타리가 가장 낮다     울타리가 모두 길이다         섬 -정현종       사람들 사이에 섬이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꽃 먼저 와서 -류인서     횡단보도 신호들이 파란불로 바뀔 동안 도둑고양이 한 마리 어슬렁어슬렁 도로를 질러갈 동안 나 잠시 한눈팔 동안,     꽃 먼저 피고 말았다     쥐똥나무 울타리에는 개나리꽃이 탱자나무에는 살구꽃이 민들레 톱니진 잎겨드랑이에는 오랑캐꽃이 하얗게 붉게 샛노랗게, 뒤죽박죽 앞뒤 없이 꽃피고 말았다     이 환한 봄날,     세상천지 난만하게 꽃들이 먼저 와서, 피고 말았다       6.계산된 논리보다는 자유로운 연상(상상력)을 활용하라     시의 길은 쭉 뻗은 고속도로나 아스팔트길 같은 것이 아니다. 시의 길은 오히려 꾸불꾸불한 시골길이나 출렁이는 물길과 흡사하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한눈에 빤히 보이거나 쉽게 측량되지 않는다. 현대화된 길은 이미 계획된 설계도에 의해서 만들어진 길이지만 시골길이나 물길은 만들어진 길이 아니라 자연 그대로의 길이다. 시의 길 역시 자연에 가까운 길이다. 그렇기 때문에 좋은 시는 친자연적이다. 우리는 종종 이미 계획된 논리를 바탕으로 시를 쓰려고 할 때가 있다. 하지만 이렇게 씌어진 시는 너무 논리적이어서 풍부한 상상력이 끼어들 여지를 주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내용이 빤한 알레고리 시에 머물거나, 머리로 쓴 작위적인 시가 되는 경우가 많이 있다. 논리적인 시는 새로움과 놀라움이 없다. 물길은 늘 요동하면서 수시로 변화무쌍한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우리의 마음도 물길과 같다. 인간의 마음을 논리적으로 표현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어쩌면 마음은 물길보다도 더 알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천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마음속은 모른다는 속담은 시사해주는 바가 크다. 그러므로 시를 쓸 때는 계산된 논리를 버리고 시상을 자유로운 연상에 맡겨야 한다. 우리의 마음과 자연 속에는 무한한 상상력이 숨어있다. 시를 쓰는 작업은 이러한 숨어있는 상상력을 캐내어 자아와 타자 사이의 동질성을 발견하고 이를 중심적인 주제나 이미지로 응집시켜나가는 것이다. 상상력이 깊고 넓은 시는 바다와 같은 심호함이 있다. 작은 냇물은 가뭄에 말라서 없어지지만 바다는 죽지 않는다. 바다 속에는 무수한 생명체들이 살고 있다.(예시: 박현수의 /문태준의 /이대흠의 )     시작법을 위한 기도 -박현수     저희에게 한 번도 성대를 거친 적이 없는 발성법을 주옵시며 나날이 낯선 마을에 당도한 바람의 눈으로 세상에 서게 하소서 의도대로 시가 이루어지지 않도록 하옵시며 상상력의 홀씨가 생을 가득 떠돌게 하소서 회고는 노쇠의 증좌임을 믿사오니 사물에서 과거를 연상하지 않게 하옵시며 밤벌레처럼 유년을 파먹으며 생을 허비하지 않게 하소서 거짓 희망으로 시를 끝내지 않게 하옵시며 삶이란 글자 속에 시가 이미 겹쳐 있듯이 영원토록 살갗처럼 시를 입게 하소서       거리 -문태준       오늘 풀뱀이 배를 스쳐 여린 풀잎을 눕힌 자리같이 거위가 울며 울며 우리로 되돌아가는 저 저녁의 깊이와 같이 거위를 따라 걷다 문득 뒤돌아볼 때 내가 좀 전에 서 있었던 곳까지 한 계절 전 눈보라 올 때 한 채의 상여가 산 밑까지 밀고 간 들길같이 그보다 더 오래 전, 죽은 지 사흘 된 숙부의 종아리가 장맛비처럼 아직 물렁물렁할 때 누구도 나에게 말해주지 않았던 거리 距離       이동식 화장실에서 -이대흠       사각의 공간에 구더기들은 활자처럼 꼬물거린다 화장실은 작고 촘촘한 글씨로 가득 찬 불경 같다 살아 꿈틀대는 말씀들을 나는 본다.       7.어떤 것을 위한 도구인 시 보다는 스스로가 존재인 시를 쓰라     이 땅에 존재하는 것들은 무수히 많다. 그것들은 자신만의 모습과 자신만의 존재 이유를 가지고 있다. 세상에 똑같은 것은 하나도 없다. 그들은 생물이건 무생물이건, 식물이건 동물이건 간에 자신만의 존재방식이 있다. 세상에 있는 것들이 신의 피조물이라면 시는 시인이 창조해낸 새로운 언어적 피조물이다. 이는 1930년대 박용철로부터 현대에 이르고 있는 유기체시론의 맥락에서 시를 바라보는 것과 동일한 것이지만, 에이브람스가 말한 문학의 효용론과 존재론의 범주에서도 설명이 가능하다. 효용론의 관점에서 보면 시는 어떤 이념이나 사상을 전달하기 위한 교훈적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정치적 격동기나 시대적 전형기와 같은 불안정한 상황 속의 시들은 교훈적인 포즈를 취하고 있는 경우가 많이 있다. 그리고 종교시와 연시(연애시), 행사시 등도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파악된다. 이런 시들은 시 자체의 존재성보다는 어떤 것을 위한 도구로 시가 사용되기 때문에 문학적인 차원에서 보면 비본질적인 성격이 강하게 드러난다. 그리고 이런 시들은 시대적 상황이나 시간적 흐름에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어서 일시적이고 한정적인 경우가 많다. 따라서 문학의 영속성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시 자체만으로도 아름다움을 지닌 존재론적인 시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하지만 여기서의 존재론적인 시란 어떤 관념이나 생각도 배제하고 오직 시 자체의 존재성만 추구한 김춘수류의 무의미시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시는 의미하면서도 존재할 수 있다. 다만 그 의미하는 바가 문학 외적인 목적성에 치우친 시는 순수한 의미의 존재론적인 시라고 말할 수 없다. 문학은 종교나 철학이 아니다. 물론 문학 속에도 종교나 철학이 들어있지만 어디까지나 그것들은 부수적인 요소일 뿐이다. 문학은 문학성이 주가 되어야 한다. 문학의 본령은 아름다움과 새로움에 있다. 그런데 문학에서의 아름다움은 형태적 아름다움이라기보다는 언어적 아름다움이다. 시인은 시 속에 창조된 새로운 언어적 공간을 통해서 시적인 전율을 느낀다. 그러므로 시인이 시에서 느끼는 아름다움은 낯선 아름다움이다. 현대시의 낯선 아름다움은 감각으로 느끼기 보다는 직관으로 느끼는 경우가 더 많다. 어떤 사물을 바라보고 그 사물을 통해서 새로운 시적 공간을 유추해내는 직관의 힘이야말로 좋은 시를 쓰기 위한 중요한 덕목이다.(예시:매클리시의 / 임영조의 /신경림의 )     시학-매클리시     시는 감촉할 수 있고 묵묵해야 한다 구형의 사과처럼 무언(無言)이어야 한다 엄지손가락에 닿는 낡은 훈장처럼 조용해야 한다 이끼 자란 창턱의 소맷자락에 붙은 돌처럼 시는 말이 없어야 한다 새들의 비약처럼 시는 시시각각 움직이지 않아야 한다 마치 달이 떠오를 때처럼 마치 달이 어둠에 얽힌 나뭇가지를 하나씩 하나씩 놓아주듯이 겨울 잎사귀에 가린 달처럼 기억을 하나하나 일깨우며 마음에서 떠나야 한다 시는 시시각각 움직이지 않아야 한다 마치 달이 떠오를 때처럼 시는 비등해야 하며 진실을 나타내지 않는다 슬픔의 모든 역사를 표현함에 텅 빈 문간과 단풍잎 하나 사랑엔 기운 풀과 바다 위의 등대불들 시는 의미해선 안 되며 존재해야 한다   (부분인용)       갈대는 배후가 없다 -임영조       청량한 가을볕에 피를 말린다 소슬한 바람으로 살을 말린다     비천한 습지에 뿌리를 박고 푸른 날을 세우고 가슴 설레던 고뇌와 욕정과 분노에 떨던 젊은 날의 속된 꿈을 말린다 비로소 철이 들어 禪門에 들듯 젖은 몸을 말리고 속을 비운다     말리면 말린 만큼 편하고 비우면 비운 만큼 선명해지는 홀가분한 존재의 가벼움 성성한 백발이 더욱 빛나는 저 꼿꼿한 老後여!     갈대는 갈대가 배경일 뿐 배후가 없다, 다만 끼리끼리 시린 몸을 기댄 채 집단으로 항거하다 따로따로 흩어질 反骨의 同志가 있을 뿐 갈대는 갈 데도 없다     그리하여 이 가을 볕으로 바람으로 피를 말린다 몸을 말린다 홀가분한 존재의 탈속을 위해.       갈대 -신경림       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 그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       8.남의 것을 모방하지 말고 자연을 잘 활용하라     자연은 생명의 터전이고 원천이다. 모든 것은 자연 속에서 순환하고 생멸한다. 그러면서 자연 속에 있는 것들은 서로 닮고 싶어 하는 본능이 있다. 자연의 여러 사물들이 둥근 것이나, 부서져서 다른 것이 되기를 좋아하는 것이나, 아름답고 싶어 하는 것이나, 소통하고 싶어 하는 것은 그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본능이다. 인간 역시 마찬가지이다. 인간의 몸에도 둥근 것이 있고 부서지기 쉬운 것이 있고 아름다움이 있으며, 누군가와 소통하고 싶은 욕망이 있다. 이처럼 인간도 자연의 일부로서 자연과 닮아있다. 우리가 시를 쓸 때에 자연을 등장시키는 것은 본질적으로 자연과의 친연성(親緣性) 때문이다. 인간이 자연을 떠나서 살 수 없듯이 시 역시 자연을 떠나서는 존재하기 어렵다. 특히 시는 비유적 언어를 생명으로 하고 있는 장르이기 때문에 비유의 원천인 자연을 배제하고는 시를 쓸 수 없다. 그러므로 자연이야말로 무궁무진한 상상력의 근원이며 시적 소재의 보고이다. 시를 쓰는 초보자들이 종종 남의 시를 모방하고 싶어 하는 것은, 자연 속에 들어있는 무궁무진한 말의 광맥을 미처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연을 보면 인간이 보인다. 이와 반대로 인간을 보면 자연이 보인다. 자연을 통해서 인간을 보든, 그 반대이든 그것은 시인의 몫이다. 남의 것을 모방하는 것은 표절이지만, 자연을 모방하는 것은 창조이다.(예시:강은교의 /박재삼의 / 김지하의 )       아주 오래된 이야기 -강은교       무엇인가가 창문을 똑똑 두드린다. 놀라서 소리나는 쪽을 바라본다.     빗방울 하나가 서 있다가 쪼르르륵 떨어져 내린다.     우리는 언제나 두드리고 싶은 것이 있다. 그것이 창이든, 어둠이든 또는 별이든.     울음이 타는 가을강 -박재삼     마음도 한자리 못 앉아 있는 마음일 때 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를 가을 햇볕으로나 동무삼아 따라가면, 어느새 등성이에 이르러 눈물나고나.     제삿날 큰집에 모이는 불빛도 불빛이지만 해질녘 울음이 타는 가을강을 보것네.     저것 봐, 저것 봐, 네보담도 내보담도 그 기쁜 첫사랑 산골 물소리가 사라지고 그 다음 사랑끝에 생긴 울음까지 녹아나고, 이제는 미칠 일 하나로 바다에 다와 가는, 소리 죽은 가을강을 처음 보것네.       중심의 괴로움 -김지하     봄에 가만 보니 꽃대가 흔들린다     흙밑으로부터 밀고 올라오던 치열한 중심의 힘     꽃피어 퍼지려 사방으로 흩어지려     괴롭다 흔들린다     나도 흔들린다     내일 시골 가 가 비우리라 피우리라       9.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볼 수 있는 발견의 눈을 길러라     시인은 보이는 것뿐만 아니라 남이 보지 못하는 것까지 보아내는 자이다. 그것은 시인이 창조적인 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창조적인 눈으로 세상을 보면 일상적이고 관습적인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것들까지 보인다. 이런 것을 어떤 시인은 발견의 눈이라고 하기도 하고 직관의 눈이나 마음의 눈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표현은 각자 다 다르지만 시인은 남이 볼 수 없는 것들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이 말처럼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다.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볼 수 있는 눈은 대상을 새롭게 바라볼 뿐만 아니라 대상 속에 숨어있는 것들까지 꿰뚫어 볼 수 있는 직관력에서 생겨난다. 그러므로 시인은 끊임없이 대상을 새롭게 바라보고 그 속에 숨어있는 것들을 찾아내어 새로운 언어로 재창조해 내는 작업을 해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재창조 과정에서 주의할 점은 대상을 바라보는 창조의 눈과 언어가 일체화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대상을 새롭게 보았더라도 그것을 언어로 표현해내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시인의 상상력은 한 개체의 내면뿐만 아니라 광활한 우주까지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다. 시인은 이러한 상상력을 순간의 언어로 일체화시켜서 표현해내는 자이다. 이렇듯 시를 쓰는 행위는 사진 찍기와는 달라서 시를 쓰는 과정에서 창조적 상상력이 발현되기 때문에 눈으로 볼 수 없는 관념이나 생각까지도 구체적인 이미지나 묘사를 통해서 생생하게 보여줄 수 있는 것이다. 시인이 순간적인 발견이나 깨달음을 통해서 얻게 되는 시상(詩想)은 기독교에서 신의 임재를 나타내는 에피파니(epiphany), 즉 현현’(顯現)개념과 서로 상통하는 바가 있다. 에피파니는 겉으로 보이는 현상의 옷을 벗고 사물의 본질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발견의 시학에 맥락이 닿아있다. 시인이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은 시학적 의미의 에피파니를 통해서 가능해진다. 시인이 사물 속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발견해 내는 것은, 다른 관점에서 보면 시의 신이 열린 시인의 마음 문을 통해서 사물 속에 숨어있던 것들을 보여주는 것이 된다. 이렇듯 시는 이미 사물 속에 숨어있던 것이 시인의 언어적 에피파니를 통해서 구조화되어 나타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예시:유안진의 /위선환의 /문인수의 )       만나면서 못 만나는 -유안진     꽃은 소리 없이 피고 바람은 모습 없이 불어도 당연하게 여기면서 소리 안에 갇힐 수 없는 음성이 소리로 안 들린다고 모습 안에 갇힐 수 없는 모습이 모습으로 안 보인다고 없다고 한다     별이기도 눈물이기도 한잔의 생수이기도 하는 온갖 모습인 줄 몰라, 언제 어디서나 마주치면서도 알아보지 못한다     풀벌레 소리이기도 아기 옹아리 소리이기도 하는 온갖 소리인 줄 몰 라, 언제 어디서나 들려오는데도 알아듣지 못한다     하루살이가 내일을 모르고, 메뚜기가 내년을 몰라도, 내일과 내년이 있는 줄은 알면서     모습은 귀로 들으려 하고 소리는 눈으로 만나려다가 늘 어긋나고 만다     아무리 마주쳐도 알아차리지 못한다 신神을 닮았어도 모품(模品)은 이렇다       지평선 -위선환       삽시간이었다 한 사람이 긴 팔을 내려 덥석 내 발목을 움켜쥐더니 거꾸로 치켜들고는 털털 털었다 부러진 뼈토막들이며 해묵은 살점과 주름살들이며 울컥 되넘어오는 욕지기까지를 깡그리 내쏟았다 센 털 몇 올과 차고 작은 눈물 한 방울도 마저 털고 나서는 그나마 남은 가죽을 맨바닥에 펼쳐 깔더니 쿵! 키 높은 탑신을 들어다 눌러놓았다 그렇게 판판해지고 이렇게 깔려 있는데 뿐인가 하늘이 살몸을 포개고는 한없이 깊숙하게 눌러대는 지경이다 (탑 뿌리에 잘못 걸렸던 하늘의 가랑이를 그 사람이 시침 떼고 함께 눌러둔 것) 잔뜩 힘쓰며 깔려 죽는 노릇이지만 이건, 죽을 만큼 황홀한 장엄(莊嚴)이 아닌가 사지에서 구름이 피고 이마 맡에서 별이 뜬다       달북 -문인수     저 만월, 만개한 침묵이다. 소리가 나지 않는 먼 어머니, 그리고 아무런 내용도 적혀있지 않지만 고금의 베스트셀러 아닐까 덩어리째 유정한 말씀이다. 만면 환하게 젖어 통하는 달. 북이어서 그 변두리가 한없이 번지는데 괴로워하라, 비수 댄 듯 암흑의 밑이 투둑, 타개져 천천히 붉게 머리 내밀 때까지 억눌러라, 오래 걸려 낳아놓은 대답이 두둥실 만월이다.       10.개성적인 문체와 자신만의 상상력으로 시를 쓰라     흔히 문체라고 하면 소설의 문체를 떠올리지만 시에서도 엄연히 문체가 존재한다. 전통적인 7․5조의 운율을 보여주는 김소월의 시나, 평북 방언을 중심으로 정감어린 산문시적 회고체의 시형을 보여주는 백석의 시는 물론, 서정적 울림이 큰 반복적인 운율을 바탕으로 체험적 진정성의 세계를 보여주는 문태준이나, 주로 개인적인 의식 세계를 분열적이고 도착적인 어법으로 유니크하게 보여주는 황병승에 이르기까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시인들은 그들 나름의 문체가 있다. 하지만 이처럼 다양한 시의 문체들을 유형화시켜서 종류별로 나누기란 쉽지 않다. 왜냐하면 문체는 언어적 산물이면서 동시에 의식과 무의식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특히 시의 문체는 산문의 문체와는 달리 시 문맥의 일차적인 의미에 기여하기보다는 그 뒤에 숨어있는 의미나 상상력을 다층적이고 창조적으로 도출해내는데 기여한다. 그렇기 때문에 시의 문체는 시인의 어법이나 운율만으로는 그 윤곽이 쉽게 잡히지 않는다. 시의 문체는 상상력과 결합해서 새로운 시적 공간을 창출해내는데 기여한다. 그것이 서정적 공간인지, 아니면 분열적이거나 해체적 공간인지, 환상적 공간인지, 현실적 공간인지는 시인의 문체와 상상력의 유기적 결합의 양상에 따라 달라진다. 시의 문체는 시인 자신이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일정한 윤곽을 드러낸다. 하지만 시인의 문체는 한 가지로 고정되어서는 안된다. 옥타비오 파스는 『활과 리라』에서 “스타일(문체)은 모든 창조적 의도의 출발점”이지만 “시인이 스타일을 획득하면 시인이기를 그만두고 문학적 인공물을 세우는 자로 변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는 어떤 시인의 스타일이 관습화되면 더 이상 그것은 톡특한 스타일이 될 수 없다는 경계의 말로 들린다. 그렇기 때문에 시인은 자신의 문체를 고집하기보다는 끊임없이 새로운 표현과 상상력을 통해 새로운 시세계를 창조해내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 이때 우리가 유의할 점은 개성과 보편성의 균형을 유지하는 일이다. 지나치게 시적 개성을 강조하다보면 보편성이 약해져서 자칫 난해 시에 빠질 우려가 있고, 반대로 보편성에 치우치다보면 통속성과 대중성에 영합하는 몰개성적인 시가 되기 쉽다. 시적 언어는 산문적 언어의 한계를 뛰어넘는 곳에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시는 산문이 도달할 수 없는 곳에서 별처럼 빛난다. 그곳은 시인 각자의 상상적 공간이다. 산문이 낮의 공간에 적합한 것이라면 시는 밤의 공간에 더 어울린다. 밤은 그 속에 무궁무진한 빛을 숨기고 있다. 밤하늘에 별이 아름다운 것은 그 주위에 어둠이 있기 때문이다.(예시:문태준의 /황병승의 )     묽다 -문태준       새가 전선 위에 앉아 있다 한 마리가 외롭고 움직임이 없다 어두워지고 있다 샘물이 들판에서 하늘로 검은 샘물이 흘러들어가고 있다 논에 못물이 들어가듯 흘러들어가 차고 어두운 물이 미지근하고 환한 물을 밀어내고 있다 물이 물을 섞이면서 아주 더디게 밀고 있다 더 어두워지고 있다 환하고 어두운 것 차고 미지근한 것 그 경계는 바깥보다 안에 있어 뒤섞이고 허물어지고 밀고 밀렸다는 것은 한참 후에나 알 수 있다 그러나 기다릴 수 없도록 너무 늦지는 않아 벌써 새가 묽다       사산(死産)된 두 마음 -황병승     땅속에 거꾸로 처박힌 광대처럼 열 두 살, 사탕을 너무 먹어서 두 발은 계속 허공을 걷는다     시간은 좀도둑처럼 죽어가고 딸꾹 딸꾹 조금씩 죽어가고 참새들은 그것을 재밌어 한다     서른 여섯 살의 악마가 다가와 열두 살의 나를 지목할 때까지 (딸꾹거리며)     검은 칼을 든 악마가 열두 살의 내 목을 내리칠 때까지 (딸꾹, 딸꾹거리며)     살았는지 죽었는지 모를 이 땅속의 자식아!     흙 속에 처박힌 열두 살,     귓속의 매미는 잠들지 못한다.  
871    시적 상상력을 구사하는 방법 댓글:  조회:5821  추천:0  2016-01-08
시적 상상력을 구사하는 방법 / 문정연 1. 발견, 그 새로운 눈 발견이란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발명과는 달리 고작해야 이미 존재하는 것을 찾아내는 것이다 수 많은 삶의 편린(대상)들 속에서 시가 될 수 있는 특정한 편린(대상)들을 찾아내는 것이다 사실 발견적 상상력은 소재를 새로운 눈으로 보는 것이다 한편의 문학작품을 읽을 때 독자들은 前理解을 갖기 마련이다 전이해는 작품을 이해하는데 필수적인 요소이다 전이해란 일종의 선입견으로 , 동시대의 삶의 상황과, 시와 시인에 대한 기대 그리고 언어지식, 자신의 인생관 등등이 얼크러져있는 인식의 배경이다 한 편의 시를 읽을 대 그 시에 대한 전이해가 중요한 해석의 수단이 된다 그러나 전이해가 그대로 이해가 되지는 않는다 작품 속의 구체적인 사실들의 의미를 전이해를 통하여 해명하지만, 그 부분들의 의미는 다시 전체의 의미를 변환시킨다 그러므로 독자가 가지고 있는 전이해(상식)에 아무런 변화를 요구할 수 없는 시는 새로움이 없는 시다 설령 시인에겐 아무리 절실한 체험일지라도 보편성을 가질 수 없는 체험과 상투성을 벗어나지 못하는 체험은 진실한 체험이 될 수 없다 시인의 체험은 늘 독자의 기대보다 조금은 앞서서 독자의 전이해에 변화를 줌과 동시에 독자들의 창조적 상상력이 참여할 수 있는 공간을 허락하여야 한다 이상 고재종선생님의 강의록을 요략해 본다 오늘 아침 저는 평소와 다름없이 전철을 타고 출근을 했습니다 매일보는 문구이며 평범하여 크게 부각되지 않았는데, 발견이라는 시적상상력을 발휘해 본 결과, 문구 '비상시에는 승무원의 안내에 따라 의자아래 핸들을 돌리면 수동으로 문을 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승무원은 늘 부재중입니다 전철 승무원은 앞만 보고 갑니다 저의 간단한 상상력입니다 늘 승무원의 지시를 받으라하지만 막상 급할 때 승무원(선도자, 윗사람)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들은 앞에서 달려가기만 할 뿐이다 즉 발견은 우리의 일상에서 알고있지만 느끼지 못하던 것들을 발견하여 시에 인용하는 것입니다 그런 발견의 눈을 갖기위해서는 늘 시인의 눈을 갖어야합니다 보통사람과는 다르게 생각하고 인용하는 힘을 키울줄 알아야할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는 힘 또한 관찰의 힘입니다 2. 떨어지는 병똥별을 보며 소원을 빌면 그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속설이 있다 정말 그럴까 별이 떨어지는 그 짧은 순간에 소원을 빌기 위해서는 그 바램을 언제라도 가슴에 담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갑작스런 유성의 낙하 앞에서 간절하게 그 바램을 간구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 와의 사랑이 이루어지길' 언제라도 기원할 수 있는 그 갈망, 그 열망이야말로 희망을 현실로 바꾸는 원동력이다 그 갈망이 있을 때에야 늘 범속한 사물과 일상 속에서도 생의 의미를 들여다보고 관찰해낼 수 있는 것이다 관찰만 예리하게 잘 하여도 시의 절만은 이룬 셈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관찰은 시적 묘사에 있어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묘사가 없는 시가 있을 수없듯이 관찰이 없는 묘사 또한 있을 수 없다 방법 1의 발견이나 관찰은 묘사에 의해 주로 표현된다 묘사란 객관화된 표현 방식으로 보아야할 것이다 그러므로 시에서 주관적 토로인 진술보다는 묘사를 많이 사용하여야만 독자의 공감대를 형성하게 될 것이다 또한 관찰이란 발견보다는 더 긴 시간을 요구한다 즉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이 금방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예전에 함께 시를 쓰던 문우가 개에 대해 시를 쓰려고, 황소만한 개의 뒤를 하루종일 쫓아다녔다고 한다 개의 습관, 생리 등 개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되었는데, 그것은 개에 대한 깊은 관찰에서 나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자신이 어떤 소재를 통하여 시를 쓰려할 때, 오랫동안 관찰한 다음에 시를 쓰면 훨씬 깊이가 묻어나오는 작품을 쓸 수 있을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가졌던 관심 만큼 우리는 시의 소재를 관찰하고 들여다 보아야할 것이다 나비 (오규원) 작약꽃이 한창인 아파트 단지의 화단을 나비 한 마리가 날고 있다 어린 후박나무를 지나 향나무를 지나 목단을 넘고 화단 가장자리의 쥐똥나무를 넘어 밖으로 가더니 다시 속으로 들어와 한창인 작약꽃을 빙글빙글 돌더니 아무 것도 없는 허공을 혼자 훌쩍 날아올라 넘더니 비칠대는 온 몸의 균형을 바로잡고 날아넘는 허공을 뒤돌아본다 뒤돌아보며 몸을 부풀린다 아마 시인은 아파트 베란다에서 나비 한 마리를 발견하고 나비를 오래 관찰하였을 것이다 위의 시는 순전히 관찰만으로 막막한 아파트 단지의 생명성과 존재의 비의를 환하게 드러내주는 시이다 3. 연상, 사랑에 관한 단상 사랑은 시와 흡사하다 사랑이 시와 흡사한 것은 양자가 모두 논리의 대척점에 서 있다는 사실이다 이 남자가 누구의 남자인가는 아랑곳없이 마음의 길이 언제나 그에게 향하고, 그에게 맞닿아 있듯, 남들이 보기에는 하잘 것 없는 왜소한 존재임에도 바닥 모를 깊이로 몰두한 채 시의 길도 달리고 있는 것이다 콩깍지가 씌어도 몇 겹으로 덧씌웠는지 알 수 없을만치 혼미한 가운데 연인들과 시는 앞다투어 마음의 길을 달리고 있는 것이다 오직 자신만의 관점으로 세계를 보는 완벽한 주관성, 자신의 세계를 방기할 정도로 타자에 몰두하는 전적인 몰아, 그 어떤 언어로도 자신을 드러낼 수 없다는 절망과 모색 등이야말로 시와 사랑의 교차점이다 이들 특성은 견고한 세계의 질서를 모두 자신의 열망 안으로 끌어들이며, 외적 대상 자체로부터 사유를 시작하는 바탕을 이루며, 직접적인 제시 대신 함축적인 은폐를 기도하게 만든다 그리고 이 모든 독특한 갈망들을 연상은 너끈히 감당한다 연상이야말로 의미를 은폐하고 세계를 내부로 끓어들이는 유효한 방법이며 모든 세계를 한 곳으로 끌어모으는 힘인 것이다 사랑에 빠진 여자는 모든 존재하는 대상들을 그 남자와 연결하기를 마다하지 않는 것이다 연상기법을 사랑에 비유한 것은 적절해 보인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랑하는 사람을 다른 어떤 것에 자꾸 연상하여 생각하는 힘을 준다 그래서 시인들은 감성이 풍부해지기 위해서는 연애를 하라하는 것도 그 이유이다 감성이 풍요로워지면서 시인은 연상의 반복을 하게끔 되고 그것은 시상을 연결하게 해 주는 힘이 된다 4. 투사, 삶의 본질에로의 날카로운 진입 시적 대상이 있다 그 대상을 바라보는 서정적 주체가 있다 주체는 반드시 주체의 관점을 통하여 대상을 바라본다 그 관점은 지극히 주관적이다 그럼에도 그 주관은 삶의 본질을 날카롭게 가로지르는 주관이자, 어떤 객관적인 언술로도 감당할 수 없는 진실을 향해 비약하는 주관이다 그 주관은 일체의 과정을 과감하게 생략함으로써 획득된 것이며 순간적으로 지각된 느낌을 명징하게 드러냄으로서 이루어진 것이다 따라서 그 어떤 논증적인 결론에 뒤지지 않는 심정적인 깨우침을 안겨준다 그리고 독자는 이 당연한 주관성을 엿봄으로써 공감을 느끼거나 부적절함에 대한 반감을 토로함으로써 시적 상상력에 개입한다 무엇보다 이 내밀하고 주관적인 관점이 우리에게 건네는 공감이야말로 시의 아름다움이 갖는 본질적인 표딱지인 것이다 여기에서 이 주관을 가능케 하는 힘을 투사라고 한다. 이 투사는 또 직관력을 절대로 필요로 한다. * 투사라함은 시적대상에 시인의 삶이 용해되어 그 본질을 날카롭게 드러내는 것이라고 본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시를 쓸 때 사물의 겉면만을 보고 쓴다면 깊이 있는 시를 쓸 수 없을 것이다 시인의 연륜이나 삶을 바라보는 자세가 함께 동화되어 신선한 의미로 다가오는 것이 투사일 것이다 墨畵 김 종 삼 물 먹는 소 목덜미에 할머니 손이 얹혀졌다 이 하루도 함께 지났다고, 서로 발잔등이 부었다고, 서로 적막하다고, 自尊 화창한 가을날 벌판 끝에 밝고 환한 나무 한 그루 우뚝 솟아 있다 모든 새들이 그곳에서 난다 시 묵화는 회화적이다 이는 첫 행과 두 번째 행을 통해 누구의 눈에라도 확연히 그 풍경을 지각할 수 있다 저물무렵 아마도 깡마른 손임에 분명한 할머니 손이 물억고 있는 소의 목덜미를 어루만지고 있는 외딴집 울타리 속의 풍경. 제목이 묵화이듯이 어떤 묵화를 바라보고 썼거나, 거꾸로 풍경과 人事의 여러 자잘한 가지를 생략해버리고 고단위의 긴장과 절제의 방법으로 여백과 농담의 미가 충만한 묵화의 세계를 지향앴거나 상관없다 이 시는 묘사적 풍경에서 멈추지 않는다 3행으로 넘어가면서 직바로 본질로 진입해 가는 시인의 날카로운 주관적 투사, 즉 진술 곧 " 이 하루도/함께 지났다고/서로 발잔등이 부었다고/서로 적막하다고" 말해버림으로 무먹는 소목덜미에 할머니 손이 얹혀지는 단순하고도 객관적인 풍경이 소와 할머니 사이에 지극한 교감으로 바뀌고, 또 단순하고 객관적인 풍경이 생의 비애, 존재가 맞닥뜨린 생에 대한 자각과 그에 반응하는 섬세한 존재의 울림을 고스란히 확인케 함으로써 우리를 천박하고 저열한 우리의 그저 놓여있는 일상을 새롭게 충전하는 것이다. 시 자존도 이 점에선 시 묵화에 한 점도 뒤지지 않은 시이다 오히려 묵화가 3행부터의 투사적 진술이 우리를 깨우치긴 하지만 존재와 풍경이 감추고 있는 아득한 비의를 약간은 깨버린듯한 인상을 주는 데 비해 자존은 그렇지 않다 이 시에서도 너무나 확연한 그림 하나를 볼 수 있다 화창한 가을날이면 하늘은 높고 햇살은 순금빛으로 쏟아지고 대기는 맑다 못해 푸르른 날일 것이다 그런 날 벌판 끝에 그 햇살을 받고 나무는 역시 황금빛으로 빛나는 은행나무도 좋겠고 투명한 갈색으로 빛나는 느티나무도 좋겠다 얼마나 밝고 환할 것인가 그것이 우쑥 솟아있다 황금나무다 세계수다 은행나무라면 땅에서 하늘로 팔 벌린 상태일 것이고 느티나무라면 둥그렇게 마을을 감싸는 모습일 것이다 은행나무나 느티나무나 모두 지상과 하늘을 매개하는 영매이다 어쨋든 그것은 얼마나 신비롭고 아늑하고 정정하고 성성하고 밝고 환할 것인가 여기까지는 객관적 풍경의 언어적 그림이다 이에 덧붙여 연을 나눈 마지막 한 줄이 투사적 진술을 감행한다 /모든 새들이 그곳에서 난다/라고 객관적 사실은 모든 새들은 그곳에서 날 수도 있고 날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밝고 환한 나무에서 새가 날지 않고 어디서 날겠는가 새는 자유 순수 평화 등 모든 것을 상징한다 그 새는 인간의 비상의 꿈을 하늘로 치솟음을으로 상징해 준다 그러나 들판의 새는 대개 옆으로 난다 여기 밝고 환한 나무에서 나는 새도 그 나무에서 솟는 새이기도 해야 하지만 그 나무를 가로질러 나는 새이기도 해야한다 그래야 나무의 수직과 새의 수평이 이루어지는 것을 상상치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 시는 이런 모든 췌사를 불필요하게 만든다 풍경에 대한 언어의 선연한 그림과 이에 날카로운 투사적 상상력을 보탬으로 존재의 비의를 한층 더 깊게 만드는, 말을 침묵에 가깝게 줄임으로 되레 수 많은 말을 가능케 하는 시의 진경이 여기에 펼쳐져 있는 것이다 5. 유추, 빗대어 말하기 시란 다른 질서 안에서 존재하는 사물을 자신의 질서로 바라보는 것이다. 시는 타자를 자신의 질서 안에 재편할 뿐 아니라 타자의 질서를 자신의 존재가 뿌리내리고 있는 본질적 의미를 역설적으로 깨닫기도 하는 것이다 이러한 타자를 통해 자신을 들여다보는, 혹은 자신의 질서 안으로 타자를 끌어들이는 시적 관계 양상을 유추라고 명명할 수 있다 유추는 두 대상을 나란히 마주 세움으로써 시작된다. 물론 그 한편에는 항상 인간의 삶이 있다. 이솝우화에 등장하는 여우는 여우가 아니라 사람이다 오웰의 소설 /동물농장/에 등장하는 나폴레옹이라는 시커먼 돼지 역시 탐욕스러운 인간의 상징적 대체물이다 이 두 상징이 얼마나 엄밀히 조응하는 가에 따라 유추의 효과는 그 빛을 발한다 일반적으로 유추를 통해 획득되는 시적인식은 계몽적이거나 풍자적인 형태로 드러난다 유추의 대상을 통해 삶이 무엇인지 배우라고 말하고 싶거나, 삶이 얼마나 비루한 것인지 잔뜩 조롱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유추가 삶 전체를 통해 무차별적으로 열려 있지만은 않다 시가 문제삼는 삶은 특정한 삶이지 포괄적이고 일반적인 추사으로서의 삶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가 어떠한 삶을 풍자하거나 외경스러워하는지를 무엇보다 명료하게 인식해야 한다 오징어 3 최 승 호 그 오징어 부부는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부둥켜안고 서로 목을 조르는 버 릇이 있다 이 짧은 시의 대상은 오징어부부이다 그 오징어 부부는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이 남 다르다 '부둥켜 안고 목을 조르는 버룻'은 결코 사랑의 자연스러운 방식이라볼 수 없기 때문이다 사실 이 표현은 오징어의 여러 개의 긴발의 형상에서 취한 상상력인데, 그러나 이러한 부부는 그 오징어부부만이 아니라는 현실 때문에 표현의 성공을 이루는 것이다 우리 주변에는 이런 류의 사랑은 많다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정작은 숨이 턱에 닿을 때까지 목을 조르고 있지는 않았던가 교묘하게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구속하고 억압하고, 풍부한 인간적 감성을 마모시키지나 않았던가 결국 그 오징어 부부는 우리들 사랑의 본질을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은 욕망으로 뒤덮인 인간이며 그 사랑의 방식은 우리들이 하용 지니고 있던 버릇이었던 것이다 근래에는 이렇게 다른 사물에 빗대어 말하기, 즉 시를 쓰는 유형이 많이 줄어들었다고 봅니다 예전에 억압적인 시대에 많이 쓰던 기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상황이 아닐지라도 무언가를 통렬하게 이야기하고 싶을 때, 유추의 상상력은 커다란 깃발이 될 것이다 6. 전복, 뒤집어보기 꿰뚫어보기 전복 또한 상상력의 일종이다 현상을 통하여 현상의 이면에 숨죽이며 떨고있는 본질을 드러내는 힘, 그것이 꿰뚫어보는 상상력이며 뒤집어보는 상상력이며, 일체의 허위를 전복하는 상상력인 것이다 북어 최 승 호 밤의 식료품가게 케케묵은 먼지 속에 죽어서 하루 더 손때 묻고 터무니없이 하루 더 기다리는 북어들. 북어들의 일 개 분대가 나란히 꼬챙이에 꿰어져 있었다. 나는 죽음이 꿰뚫은 대가리를 말한 셈이다 한 쾌의 혀가 자갈처럼 죄다 딱딱했다. 나는 말의 변비증을 앓은 사람들과 무덤 속의 벙어리를 말한 셈이다. 말라붙고 짜부러진 눈, 북어들의 빳빳한 지느러미. 막대기 같은 생각 빛나지 않는 막대기 같은 사람들이 가슴에 싱싱한 지느러미를 달고 헤엄쳐 갈 데 없는 사람들이 불쌍하다고 생각한는 순간, 느닷없이 북어들이 커다랗게 입을 열고 거봐, 너도 북어지 너도 북어지 너도 북어지 귀가 먹먹하도록 부르짖고 있었다. 이 시는 참 재미있는 시이다 식료품가게 꼬챙이에 꿰어진 채 널부러져 있는 북어를 직접 들여다보고 있는 듯이 형상화하고 있다. 더욱 세밀한 묘사가 계속 이어지다가 '가슴속에 싱싱한 지느러미'를 꿈꾸는 가운데 교묘하게 북어가 사름으로 대체되어 있다 헤엄쳐 가기를 원하는 것은 북어가 아니라 사람인 것이다 그 순간 느닷없이 커다란 입을 벌린 북어들이 큰소리로 '너도 북어지'라고 귀를 먹먹하도록 계속 부르짖는 눈부신 전복으로 시를 끝맺고 있나.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말라 찌부러진 요즈음의 우리들 자신인 것이다 뒤틀린 현실을 전복하고자할 때, 전복적 상상력은 비판적 세계인식을 드러내는 유효한 무기가 된다 따라서 이것은 앞의 발견적 상상력과 함께 리얼리스트들의 중심적 상상력을 형성한다 7. 종합, 상상력의 유대 지금까지 살펴보았던 시적 상상력의 개진 방식들은 사실 추상화되어 있다. 한 편의 시는 모름지기 단 하나의 주독적인 상상력으로만 이루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섬세한 발견과 관찰, 날카롭게 대상의 본질을 길어 올리는 투사와 유추, 분리된 것을 결합하는 연상과 현실을 부정의 눈으로 확인하는 전복의 상상력들은 사실 한 편의 시에 긴밀하게 습합되고 용해된 채, 하나의 시적 세계를 튼실하게 엮어 나가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편의상 이런 분리는 상상력의 실체를 더욱 선명하게 들여다보기 위한 장치라는 점에서 놓칠 수 없는 이점들을 갖는다 더욱이 상상력들은 동일한 깊이로 시적 세계를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주독적인 상상력이 전면에 배치된 채 여타의 상상력들은 후경에서 마치 삼각형의 꼭지점을 위한 밑변과 옆변을 형성하는 것처럼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시들을 보면 이러한 결합의 양상은 더 선명하게 드러날 것이다.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 황지우 - 映畵가 시작하기 전에 우리는 일제히 일어나 애국가를 경청한다 삼천리 화려 강산의 을숙도에서 일정한 群을 이루며 갈대숲을 이륙하는 흰 새떼들이 자기들끼리 끼룩거리면서 자기들끼리 낄낄대면서 일열 이열 삼열 횡대로 자기들의 세상을 이 세상에서 떼어 메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간다 우리도 우리끼리 낄낄대면서 깔죽대면서 우리의 대열을 이루며 한 세상 떼어 메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갔으면 하는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로 각각 자기 자리에 앉는다 주저앉는다 이시에서는 다채로운 상상력이 사용되어 있다. 무엇보다도 이 시의 모티브로 존재하는 것은 현실에서의 겸험이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이 시를 쓴 80년 대는 영화가 시작되기에 앞서 줄곡 애국가를틀어주었다 어쩌면 김남주의 말대로 세금고지서와 징병통지서 밖에 가져다주지 않는 조국에 대한 애정을 강요하기라도 하는 듯 틀어주던 애국가였다 그런데 이 일상적 경험은 사실 발견적 상상력에 속한다 영화 속의 한 화면을 그대로 시적 경험으로 수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이 시의 중심적 시상에는 이 발견에 대한, 시적 인식으로서의 투사가 중핵을 이루고 있다.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날아오르는 새들이 '어디론가 날아간다'는 객관적 사실을 '세상을 뜨는구나'라는 주관적인 인식으로 슬그머니 환치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명백히 주관적인 의식의 투영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왜 이런 투사가 가능하며 이는 과연 공감을 자아내는가? 이 시가 1981년에 발표되었음을 생각해 보라 광주항쟁을 겪었고, 군사독재가 한층 더 강화되고 있던 그 때, 시인을 비롯한 깨어있는모두가 시의 이면에 그 아픔의 흔적과 고통을 가지고 있었다 그 고통 안에서 심지어는 그 고통의 현실과 무관한 새들조차 이 한반도의 남쪽을 벗어나고자 할 것이라 생각하였던 것이다 "끼룩거리면서" "낄낄대면서"로 투사된 채, 이런한 웃음 역시 남겨두고 떠나는 세상에 대한 빈정거림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한없는 모멸을 남긴 채 새들이 "자기들의 세상을/이 세상에서 떼어 매고" 앞 화면에서 비추었던 조용한 아침의 나라를 뜨는 것이다 그런데 이 투사는 시의 후반부에서 짝을 이루는 유추로 정교하게 반복된다 우리 역시 낄낄대면서, 깔쭉되면서, 다시 말해 빈정거리면서, 야유를 퍼부으면서 썩어빠진 세상을 떠나 깨어있는 우리들끼리라도 "우리들의 대열을 이루며" " 이 세상 밖"의 "어디론가 날아갔으면" 하는 것이다 그러나 새들은 날아 갈 수 있으나 우리들은 날아가지 못한다 그 부푼 꿈이 애국가가 끝나자 "각기 자기 자리에 앉는다" 그냥 앉는 것이 아니라 어쩌지 못해 채 주저앉는다 영화관의 자리에 주저앉는 것이 아니라 광주에, 현대사의 고통의 심부에, 썩은 세상에 주저 앉는 것이다 한마디로 의식에서의 꿈이 애국가가 끝나는 현실로 돌아오면서 그만 전복이 되는 것이다 전복적 상상력인 것이다 뜬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결코 낄낄거리거나 깔쭉대지 못한 채 고통과 누물로 우리들 스스로의 문제를 해결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이 한편의 시에는 발견과 투사, 유추와 전복이 다채롭게 융화되어 있다. 지금까지 시적 상상력을 구사하는 몇 가지 방법들에 대하여 간략한 설명을 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미천하여 상상력을 중첩시키거나 확대하는 데, 어려움이 많으므로 하나, 둘의 상상력만으로 시작업을 해보시기 바란다 시가 체험과 상상력의 결합이라할 때, 사실 상상력은 무한 공간이다 무한대로 그 상상력을 지펴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무의 뿌리가 되는 실체(체험)를 바탕으로 하기에 그 상상력의 한계는 좁아질 수 밖에 없다 점점 확대해나가는 것이 시인의 길일 것이다 ==========================================================================================   82. 알 수 없어요 / 한용운                        83. 나룻배와 행인 / 한용운                        
870    알기 쉬운 현대시 작법 1 댓글:  조회:4926  추천:0  2016-01-08
알기 쉬운 현대시 작법 -시적 의미를 함축한다는 것 / 이승훈 시는 일정한 거리에 오면 행갈이를 하고 신문은 행갈이 없이 계속 진행하는 형태로 되어 있다.  다음은 행갈이의 보기.  손발이 시린 날은  일기를 쓴다  무릎까지 시려오면  편지를 쓴다  부치지 못할 기인 사연을  이 시를 산문으로 표기하면 이렇다.  "손발이 시린 날은 일기를 쓴다.  그리고 무릎까지 시려오면 부치지 못할 기인 편지를 쓴다.  " 그러나 시인은 이렇게 표기하지 않고 왜 행을 갈아가며 표기했을까?  이유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리듬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이런 리듬이 함축하는 의미 때문이다.  " 손발이 시린 날은 / 일기를 쓴다"는 시행을 읽는 경우 무엇이 다른가?  전자의 경우 우리는 중간에서 쉬지 않고 비슷한 속도로 리듬 없이 계속 읽어 나간다.  예컨데 "손발이 / 시린 날은 / 일기를 / 쓴다"처럼 중간에서 쉬고  동시에 이런 휴지에 의해 우리는 "손발이"와 일기를"을 강조하게 된다.  이 두 부분, 특히 "손"과 "일"에 강세가 놓인다.  한편 이런 읽기는 산문과 다른 의미를 전달한다.  산문의 경우 의미는 "손발이 시린 날", 그러니까 추운 날은 일기을 쓴다는 사실,  곧 하나의 정보뿐이지만 시의 경우 "손발이 시린 날"은 독립적인 의미를 띠면서 다음 행과 연결된다.  따라서 이 시행은 단순히 부사구의 기능, 말하자면 "일기를 쓴다"는 중심 문장에 종속되는 게 아니라  2연의 "무릎까지 시려 오면"과 대립되고,  따라서 추위라는 단순한 의미를 넘어 시린 손발과 일기의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그렇지 않은가?  손발이 시린 시간에 어떻게 일기를 쓴다는 말인가?  물론 쓸 수는 있다.  그러나 손발이 시리면 따뜻하게 녹여야지 무슨 일기인가?  그러므로 이런 표현은 아이러니이고 이런 표현이 시적 효과를 준다.  요컨대 행갈이 때문에 "시린 손발"은 추위에 대한 감각, 삶의 추위, 가난, 고독을 의미하고  "일기" 역시 자기 성찰, 자기 고백, 지기와의 만남 같은 여러 의미를 함축한다.  이런 의미는 가슴이 시린 밤이면 시를 찾아 나서고(3연), 등만 보이는 사람을  보이는 사람을 부르고(4연) 마침내 자신을 유월에도 녹지 않는 서리꽃으로 인식하는(5연) 전체 시와 관계된다.  중요한 것은 리듬 때문에 행갈이를 하고 이런 행갈이가 독특한 시적 의미를 함축한다는 것.  그렇다면 리듬rhythm이란 무엇인가?  리듬이란 흔히 율동 혹은 운율로 번역한다.  그러나 좀더 세분하면 첫째로 율동이라는 일반적 개념,  둘째로 운율이라는 문학적 개념,  셋째로 음의 강약을 나타내는 박자라는 음악적 개념,  나는 다른 책에서 리듬을 광의 율동 개념과 협의으의 운율 개념으로 나누어 살핀 바 있다.  율동이란 주기적인 반복 운동이고 운율이란 시의 경우 소리에 의한 주기적 반복 운동을 뜻한다.  따라서 광의의 개념인 율동은 시를 포함하여 일제의 우주현상, 자연현상, 생명현상에 두루 나타난다.  율동은 좀더 부연하면 상이한 요소들이 재현하는 주기적 반복 현상을 말한다.  우주의 경우 일출 / 일몰의 반복, 자연의 경우 바다는 썰물 / 밀물의 반복,  생명의 경우 인간의 호흡이 그렇다.  내쉼/ 들이쉼의 반복이 삶이고 이런 반복이 머추면 인간은 죽는다.  그러므로 산다는 것은 숨쉬기이고 숨쉬기는 호흡이 암시하듯이  숨을 내쉬고 들이쉬는 일을 반복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이런 호흡은 숨결을 거느리고 그것은 숨쉬는, 호흡하는 속도나 높낮이를 뜻한다.  요컨대 호흡과 숨결은 생명의 본질이고 시, 음악, 회화의 리듬도 비스한 의미르 띤다.  시의 고향이 리듬이고 리듬이 숨결이라는 것은 이런 사정을 전제로 한다.  시의 경우 리듬은 크게 정형시와 자유시로 나누어 살필 필요가 있다.  정형시는 말 그대로 리듬이 일정한 형식을 소유하고, 자유시는 그런 형식에서 자유롭다.  정형시의 리듬은 율격meter과 각운rhyme이 대표적이고  자우시의 경우도 작운은 존재하고우리 시의 울격은 흔히 음수율, 음보율,로 나타난다  자유시의 리듬은 정형시의 울격이나 일상어의 억양를 변형시킨 경우와  리드의 단위로 이런 소리 요소를 포기하고 형태소,  낱말, 어귀, 이미지, 어절, 통사 및 그 형식의 반복에 의해 성취되는 경우가 있다.  말하자면 리듬의 단위를 소리에 두는 경우와 소리가 아닌 문법적 요소에 두는 경우이다.  전자를 전통적 리듬이라고 한다면 후자는 현대적 리듬이라고 할 수 있다.  전자에는 김소월, 박목월, 등이 후자에는 이상, 김수영 등이 포함되고,  나는 자유시의 리듬이 보여주는 이런 양상을 다른 책에서 살핀 바가 있기 때문에  이 글에서는 다른 문제들을 살피기로 한다  그리고 이런 리듬, 곧 형태소, 낱말, 어구, 어절, 이미지, 통사 형식의 반복에 대해서는 내가  에 이미 발표한 에서도 말한 바 있다.  물론 그때는 리듬이 아니라 시적 효과를 강조했지만 아무튼 반복이 문제이다.  글쓰기도 반복이고 히쓰기도 반복이고 사랑도 반복이고 식사도 반복이고 감기도 반복이고 우울도 반복이다.  반복이 삶이고 삶은 호흡이고 숨휘기이고 이 호흡과 숨결이 강조되면 리듬이 된다.  먼저 어절의 반복에 의한 리듬의 보기.  나는  쿠바 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만져보고 싶었고  모든 것을  느끼고 싶었고  그리고  모든 것을  알고 싶었다  _ 체게바라,(이산하 엮음)  어절의 반복이란 내용이 아니라 형식의 반복을 말하고,  이 시의 경우 '모든 것을 /만져보고 싶었고' 라는 형식이 반복된다.  내용의 반복이 아니라 ' -고 싶었고'라는 형식이 반복된다.  이 시의 내용은 아르헨티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의과 대학을 졸업하고  쿠바로 건너가 카스트로와의만남을 계기로 게릴라 혁명 투쟁에 임한 게바라의 쿠바에 대한  애정, 물론 형식이 아니라 내용이 반복되는경우도 있다. 다음은 문장의 내용이 반복되는 경우.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요  --운동주,   시인은 동일한 문장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를 여덟 번 반복하고  한 행을 비운 다음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요'라는 문장으로 시를 완성한다.  완성인가?  다시 생각하면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요'라는 문장은 '슬플 것이다'가 아니기 때문에  침묵을 내포하는 진술 형식에 가깝고,  그러므로 앞에서 반복된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에 대한 아이러니의 효과가 강조된다.  물론 이런 형식은 리듬과 함께 8복이라는 내용을 전제로 한다.  이승훈   ==================================================================   84. 모란이 피기까지는 / 김영랑                      모란이 피기까지는 원작       김영랑 연보   1903년 1월 16일 전남 강진읍 남성리(탑골) 221에서 김종호의 장남의로 출생.             본명은 윤식(允植), 아호는 영랑(永郞)   1909년 강진보통학교 입학 1915년 졸업   1916년 15세의 김해 김씨와 결혼, 상경하여 기독교 청년회관에서 영어를 배움. 1917년 휘문의숙(徽文義塾 = 휘문고) 입학. 부인 사망.   1919년 3·1운동 직후 휘문의숙 중퇴, 강진에서 3·1운동을 모의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            대구형무소에서 6개월간 옥고.   1920년 도일 아오야마학원(靑山學院) 중학부 편입.            혁명가 박열, 박용철 등과 친교.   1922년 아오야마학원 영문과 입학.   1923년 광동 대지진으로 학업중단 귀국. 개성 호수돈(여고) 출신의 김귀련과 결혼.  1930년 박용철 주재로 정지용, 이하윤, 정인보 등과 동인으로 참가.   1935년 박용철의 후원으로 간행.    1945년 강진에서 대한독립촉성국민회 결성, 강진대한청년단장 역임, 우익 운동 주도.   1949년 공보처 출판국장 취임, 6개월만에 사임.             10월 간행(중앙문화협회).               1950년 한국 전쟁 때 서울에 은신하다가, 9월 27일 복부에 포탄 파편을 맞고 9월 29일 사망.   1954년 11월 망우리에 이장.   김영랑이 출간한 두 권의 시집 중 에는 시의 제목이 없고 일련번호만 있고, 의 차례에만 그가 직접 시 제목을 붙여 놓았다. 이 때문에 제목이 없는 작품은 통상 시의 본문 첫 대목에서 제목을 따온 경우가 많이 있다.  ===========================================================================   85.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 / 김영랑                              이 시는 '내 마음 고요히 고운 봄길 위에'로 발표하였다가, 에서 '돌담에 속색이는 햇발'로 수정.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 원본             
869    알기 쉬운 현대시 작법 2 댓글:  조회:6057  추천:0  2016-01-08
알기 쉬운 현대시 작법 -자유시에도 운이 있다. / 이승훈 앞에서도 말했지만 정형시뿐만 아니라 자유시의 경우도 각운rhyme에 의해 시의 음악성이 강조된다.  각운은 흔히 낱말의 동일한 위치에서 동일한 소리가 반복되는 현상,  한국어의 낱말은 일반적으로 초성, 중성, 종성으로 되어 있고,  따라서 각운은 초성이 반복되면 두운alliteration, 중성이 반복되면 요운internal rhyme,  종성이 반복되면 말운rhyme이 된다.  각운이란 말은 운율을 맞춘다는 의미와 머리, 허리, 다리에서 다리가 되는 운,  곧 말운이라는 의미가 있다. 따라서 각운은 광의로 두운, 요운, 말운을 포함하고 협의로는 말운에 해당한다.  물론 각운은 낱말과 낱말 사이에도 적용되고 시행과 시행 사이에도 적용된다.  다음은 낱말과 시행 양자에 걸쳐 두운이 나타나는 경우.  말리지 못할 만치 몸부림치며  마치 천리 만리나 가고도 싶은  맘이라고나 하려볼까  - 김소월   먼저 낱말의 경우 1행에는 "말리지 / 못할 / 만치 / 몸부림치며"에서 알 수 있듯이  네 낱말의 머리에 "ㅁ"이 반복되는 두운 현상이 나타난다.  "만치"를 독립된 낱말로 읽지 않는 경우 1행은 "못할 만치 / 몸부림치며"가 되고 이 때는 "못할 / 몸부림"의 두운 현상 "-만치 / -림치며"의 요운 현상이 나타난다. 그런가 하면 1행의 첫소리, 2행의 첫소리, 3행의 첫소리는 모두 ㅁ으로 시작되는 두운 효과를 준다.  문제는 말운이고, 정형시의 경우도 우리시에는 말운 현상은 없고 운 대신 형태소나 낱말이 반복된다.  윤동주의 대표작 가 아름답고 감동을 주는 것은 무슨 사상의 깊이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음악성 때문이고,  그것도 두운과 요운 현상 때문이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중략)......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먼저 "하늘을 우러러"가 문제이다. "하늘을 우러러"란 무슨 뜻인가?  정확하게 표기하면 "하늘을 쳐다보며"이거나 "하늘을 공경하며"이다.  그러나 시인은 "하늘을 우러러"라고 표현한다.  "쳐다보며". "공경하며"가 아니라 "우러러"라고 표기한 것은 무엇보다 요운의 효과 때문이다.  "하늘을 / 우러러"의 경우 "-ㄹ-/ -ㄹ-"이 반복되므로써 요운 현상이 나타나고.  따라서 "하늘을 쳐다보며"나 "하늘을 공경하며"가 단순한 의미 전달을 목표로 한다면  이런 표기는 미적 효과를 목표로 하고 시가 예술일 수 있는 것은 이런 미적 책략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한 점"도 문제이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이라고 말하지는 않고 "  결코 부끄럼이 없기를" 혹은 "죽어도 부끄러움이 없기를" 이라고 말한다.  혹시 일부에서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하는 식으로 말하는 이가 있다면  그것은 "서시"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도대체 우리말에는 시간을 알리는 경우나 점에 대해 말하는 경우가 아니면 "한 점"이라는 말은 잘 쓰지 않는다.  그것도 한 점 부끄러움이라니?  그렇다면 두 점 부끄러움도 있고 세 점 부끄러움도 있단 말인가?  이런 표기는 앞에 나온 "하늘"과 관계되는 바.  두 낱말 모두 첫 소리가 ㅎ으로 되어 있고 따라서 두운 효과가 있다.  요운 현상은 2행 "부끄럼이 없기를"에도 나타난다.  "-ㄲ-/-ㄱ-"의 반복이 그렇다. ㄲ과 ㄱ은 다르지만 이 시행이 경우 비슷한 소리가 나기 때문이다.  마지막 행이 아름다운 것 역시 "-밤-/-별-/-바람-"의 요운 현상 때문이다.  결국 윤동주의 는 사상이 아니라 소리 효과, 음악성,  그것도 섬세한 운의 효과가 감동을 주고 그의 시가 명시인 것은 이런 예술성 때문이다.  우리시에는 정형시든 자유시든 말운 현상이 없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각 시행의 끝이 비슷한 혹은 같은 소리로 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  말운은 아니지만 각 시행의 끝에 비슷한 혹은 같은 소리가 음으로써 미적 효과를 낳는 경우는 많다.  엄격하게 정의하면 앞에서도 말했지만 각운rhyme은 각 시행의 끝소리가 같은 소리로 조직되는 것이고,  따라서 협의로는 말운을 뜻한다.  그러므로 두운 역시 각 시행의 첫 소리가 같은 소리로 조직되는 것을 말한다.  그런 점에서 위에 인용한 두 편의 시 가운데 김소월의 시가 두운 현상에 적합하고  윤동주의 경우는 변형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요운 현상 역시 각 시행 중간에 같은 소리가 나오는 경우이고  한 시행 속에 나오는 경우는 요운의 변형,  혹은 자음조화consonance나 모음조화assonance로 읽는 것이 일반적 현상이다.  말하자면 "팔리지 못할 만치 몸부림치며"는 자음조화,  "마치 천리 만리나"는 모음조화로 읽을 수 있다.  우리시의 경우 각 시행이 끝이 같은 소리가 오는 이른바 말운 현상은 없지만 비슷한 소리(?)가 오는 경우는 있다.  내 마음의 어딘 듯 한 편에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돋쳐 오르는 아침 날빛이 뻔질한  은결을 돋우네  가슴엔듯 눈엔 듯 또 핏줄엔듯  마음이 도른도른 숨어 있는 곳  내 마음의 어딘 듯 한 편에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김영랑,   말운의 정확한 보기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이 시의 미적 효과는 각 시행의 끝에 비슷한 소리가 오기 때문이다.  1행, 3행, 7행은 "끝없는 / 뻔질한 / 끝없는"의 ㄴ소리가 반복되고  2행, 4행, 8행은 "-네 / -네"의 같은 모음이 반복되고  5행, 6행,은 "듯 / 곳"의 ㅅ소리가 반복된다.  그러나 이런 소리의 반복은 말운 현상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시의 경우 각 소리들은 각 낱말의 종성에 위치하는 소리가 아니라  낱말이거나 어미 활용에 속하고(끝없는, 흐르네,인 듯)  굳이 종성에 위치하는 소리를 찾자면 "곳"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같은 ㅅ소리를 반복하는 경우가 있다 하더라도 이 소리는 운이 아니라  "곳"이라는 낱말의 반복이기 때문에 말운이 아니다.  여컨대 우리시의 경우 말운이 아니라 같은 어미나 낱말이 반복되고 이런 반복이 미적 효과를 준다.    ========================================================================   86.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 김영랑                 이 시는 '동백잎에 빛나는 마음'으로 발표하였다가,   에서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로 수정함. 현재 발표된 자료에는 대부분 2행의 '아침˘ 날˘ 빛이' 라고 표기되어 있어나,  '아침˘ 날빛이'이 바르게 적은 것이다.     ※ 날빛 : ‘햇빛을 받아서 나는, 또는 온 세상의 빛'이라는 뜻이다.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원문             87. 오-매 단풍 들것네 / 김영랑                           이 시는 '누이의마음아 나를보아라'로 발표하였다가, 에서는 '오-매 단풍 들것네'로 수정함.       오-매 단풍 들것네 원문          
868    알기 쉬운 현대시 작법 3 댓글:  조회:5581  추천:0  2016-01-08
알기 쉬운 현대시작법  -상징과 이미지의 변주 / 이승훈 1. 은유냐 상징이냐  직유가 발전하면 은유가 되고 은유는 서로 다른 범주에 있는 두 사물을  동일시하는 기법이라고 말한바 있다.  직유가 상사성을 토대로 두 사물을 비교한다면  은유는 비 상사성을 토대로 비유하고, 그런 점에서  전자에 비해 신비한 느낌을 준다. 말하자면 시적 호소력이 크다.  그러나 두 기법 모두 두 사물을 비교하고 비교되는 두 사물이 시에 나타난다는  점에서는 비슷하다. 예컨대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사랑 빈집에 갇혔네  ㅡㅡ기형도,(빈집)  같은 시행에서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는 직유의 형식으로  되어있다. 말하자면 ‘나는 장님처럼’은 직유이고 따라서 이런 형식은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는 행위’를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이 시행을 예컨대 ‘나 장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라고 쓴다면  은유가 되고, 직유의 형식에서 비교조사‘ㅡ처럼’을 생략하면 은유가 된다는 말은 이런 의미에서이다. 그러나‘ 나는 장님처럼’이라는 말과  나는 장님’이라는 말은 두 사물을 비교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그 내용은 매우 다르다 전자가 문을 잠그는 행위를 구체적으로 설명하지만  후자는 그런 설명보다 ‘나’와‘장님’의 동일시가 강조되고 따라서 이때  '나’는 ‘장님’이면서 ‘장님’이 아닌 이상한 특성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기형도는 장님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만일 이렇게 쓴다면 그는 장님이고 장님이 아니다. 그리고 은유의 형식으로 시를 쓴다면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가 아닌 다른 내용이 나오는게 좋다  한편 ‘가엾은 내 사랑 빈 집에 갇혔네’의 경우 ‘빈 집’의 이미지는 이 시행만 놓고 보면 무엇을 비유하는지 알 수 없고 따라서  취의 tenor 와 매재 vehicle 의 관계가 시행에 드러나지 않고 취의가 생략된 형식이 된다. 직유나 은유 에서는 취의와 매재의 관계가 드러나지만  이런 이미지의 경우에는 취의가 생략되고 매재만 드러난다.  이런 이미지를 상징 이라고 부른다. 그런 점에서 상징은 은유가 발전한 형식이고 그 의미는 하나가 아니고 분명치 않고 모호하다.  간단히 도식으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직유] t : v = 1 : 1 (나는 장님처럼)  [은유] t : v = 1 : 1 (나는 장님)  [상징] t : v = ? : 1 (빈 집)  ‘빈집’ 은 무엇인가를 의미하지만 이 시행만 놓고 보면  그 내용,취의 하고자 하는 말을 알 수 없다. 그렇치 않은가?  ‘가엾은 내 사랑 빈 집에 갇혔네’ 라는 시행만 놓고 보면  이 ‘빈 집’이 무엇을 의미 하는지 분명치 않고 다만 전체 시를 찬찬히 읽을때  그 의미가 드러난다.이‘빈 집’이 무엇을 상징한다는 것은  (상징象徵은 영어로 symbol이고 그리스어로 뜻하는 명사 symbolon 에서오고  이 명사는 짜 맞춘다는 뜻의 동사 symballein 과 관계가 있다.  좀더 자세한 것은 이승훈, 시작법, 탑 출판사,1988,201면 참고바람),  그러니까 다른 무엇과 짜 맞추어져야 한다는 것은, 말하자면  이 이미지가 어떤 관념을 지시한다는 것은 이 ‘빈 집’이 말 그대로  우리가 흔히 말하는 그런 ‘빈 집’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가엾은 내 사랑’ 을 의인법으로 읽어  ‘가엾은 내 애인’이 갇혔다고 할 수도 있지만 사랑이든 애인이든  ‘빈 집’에 갇혔다는 말은 이상한 소리이기 때문이다.  특히 사랑의 경우가 그렇다.  사랑이 어떻게 빈 집에 갇힐수 있는가?  요컨대 은유와 비교하면 상징은 비유되는 두 사물 가운데  취의가 생략되는 형식이고 또한 이미지와 관념의 관계로 치환하면  [은유] 이미지 : 관념 = 1 : 1 (장님은 나)  [상징] 이미지 : 관념 = 1 : 다 (빈 집은 무엇?)  와 같다. 이미지와 관념의 관계가 ‘1 ; 다’ 라고할 때 다는 다라는 것이 아니라 아직도 모자란다는 뜻이고 말하자면 상징의 의미는 아무리 퍼내고 쏟아 붓고  계속 의미를 부여해도 모자란다는 뜻이고 그러므로 다多는 다이고 다가 아니다.  그런가하면 또한 다는 다da이다. 이 다는 디자인 dasein,현존재라는 의미의  디자인의 접두사이고 현재 존재하는 나, 지금 여기있는 나의 의미를 강조한다.  현 존재는 존재 sein 와 현da이 결합된 존재이고 그러므로 여기da가 중요하다.  여기는 어디인가? 프로이트는 18개월짜리 손자가 혼자 노는 것을 관찰하며  그 아이가 오/아를 반복 하는것에 주의한 바 있다.  엄마가 없는 빈 방에서 아이는 혼자 실패 놀이를 하고 실패가 멀리가면 ‘오’ ,  실패가 돌아오면‘아’ 라고 소리친다, ‘오’는fort(저기),‘아’는 da(여기)  라고 해석한 것은 프로이트이다. (프로이트,“쾌락 원칙을 넘어서”).  나는 나를 멀리 던지고 그 나는 다시 돌아온다. 나를 던질 때 나는 돌아온다.  무슨 말인가?그러나 나는 떠나고 돌아오고 다시 떠나고 돌아온다.  요컨대 반복이 있을 뿐이고 이 반복, 죽고 싶은 마음이 칼을 찾는다.  칼은 날이 접혀서 펴지지 않으니 날을 노호하는 초조가 절벽에 끊어지려 한다’(이상,“침몰”).  나는 지금 시작법 (그것도 알기 쉬운?)에 대해 글을 쓰는지  1 ; 다’에 나오는 다에 대한 잡념에 시달리는지 잡념을 즐기는지  나도 모르겠다. 아마 다ㅡ 콤플렉스가 아니면 다ㅡ 강박증 인가보다.  요컨대 현재는 없기 때문에 현 존재의 다da는 그런 無,  불교식으로는 空 을 지향한다. 그렇다면 이 무,공의 의미는 무엇인가?  모두는 무엇이고 많다는 것은 무엇이고 다 da는 무엇인가?  지난밤에는 밤새도록 비가오고 어두운 새벽 빗소리에 놀라 잠이 깼다.  갑자기 무섭고 서럽고 불안한 생각이 들어 작은방, 지금 이글을 쓰는방,  옛날에 딸애가 공부하던 방으로 와서 전등을 켜고 앉아 담배를 피우고 돌아가  다시 잠이 든 이런 행위는 무엇을 상징 하는가?  2.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다시 요약하면 상징은 하나의 낱말, 어구, 이미지가  복잡한 추상적 관념을 암시하지만 그 의미는 전체 시를 전제로 알수 있다는 것.  말하자면 그 낱말이 나오는 시행에서는 생략된다는 것.  따라서 생각하기 나름이겠지만 상징은 은유보다 고급이고  한편 은유보다 난해한 기법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이런 기법이 나오고  이런 기법, 말하자면 상징이 추구하는 것은 무엇인가?  시에서 상징을 강조한 것은 19세기 말 상징주의 시인들이고  그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이 보들레르 이다. 그는‘교감’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자연은 하나의 신전神殿, 거기 살아 있는 기둥은  이따금 어렴풋한 말소리 내고  인간이 거기 상징의 숲을 지나면  숲은 정다운 눈으로 그를 지켜본다.  밤처럼 그리고 빛처럼 아득한  어둡고 그윽한 통합 속에  긴 메아리 멀리서 어울리듯  향기와 빛깔과 소리가 상통 한다.  ㅡ 보들레르,[교감](정기수역)  ‘교감’ correspodence 은 ‘만물 조웅’ 으로도 번역된다.  자연은 인간이 모르는 가운데 저희들끼리 무엇인가를 주고 받는다는뜻.  이 시에서 보들레르가 강조하는 것은 자연에 대한 새로운 인식,  인간과 자연의 관계, 자연이 주고받는 것들이다. 낭만주의자들의 경우  자연의 시인의 정서를 환기하는 수단에 지나지 않치만 여기서는 ‘  신의 궁전’으로 노래된다. 신의 궁전 이기 때문에  자연은 이 세상을 초월하는 이상의 세계,  혹은 그런 세계로 갈 수 있는 수단이 되고 그런 점에서 자연은 신, 초월자, 절대자의 목소리를 상징하는 ‘상징의 숲’이 된다.  시인은 이런 숲의 목소리를 듣는자 이고, 그 목소리는 만물 조웅, 곧  '향기와 빛깔과 소리’가 서로 주고받는, 상통하는 것을 들을때 알 수 있다.  만물 조웅은 향기(후각), 빛깔(시각), 소리(청각), 가 서로 통합 하는 것  이라는 점에서 이른바 감각의 교감이고, 교감의 세계가 된다.  물론, 현대시를 쓰는, 혹은 쓰고자하는 분들은  반드시 이런 상징의 미학에 구애될 필요는 없다. 그  러나 최소한 상징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 이라는 말이 있듯이 그 역사적 문맥에 대한 지식이 요구된다.  요컨대 상징을 강조하는 시들은 이 시가 암시 하듯이  관념을 전제로 사물을 보는 게 아니라  감각에 의해 사물을 보고 그 감각이 환기하는 혹은 암시하는 여러 관념들을,  자신도 모르는 그런 관념들을 이미지로 전달해야 한다.  앞에서 인용한 기형도의 경우 ‘빈 집’은 상징적 이미지 이고 그는 살아가면서 ‘빈 집’ 을보고 혹은 감각적으로 체험하고 그 체험의 내용을 시로 노래한다.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는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 집에 갇혔네  ㅡ 기 형도,[빈 집]  그가 쓰는 것은 ‘사랑을 잃은 마음’이고  따라서 ‘빈 집’ 은 이런 마음을 상징 한다.  상징적 이미지는 시에서 반복되는 수도 있고 이 시처럼 변주되는 수도 있다.  이 시의 경우 ‘빈 집’ 은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는 나’,  그리고‘가엾은 내 사랑 빈 집에 갇혔네’로 변주된다. 한편 이런 마음,  그러니까 ‘빈 집’이 상징하는 것들은 ‘짧았던 밤들’, 창밖을 떠돌던 안개들’,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 ‘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 ‘더 이상 내것이 아닌 열망들’로 변주된다.  이런 변주는 상징적 이미지가 보여주는 난해성을 극복하기 위한 시적 책략이고  따라서 상징을 강조하는 시인들은 하나의 상징적 이미지를 선택하면  그 이미지를 시에서 여러번 반복하거나 다양하게 변주 시켜야 된다.  일반적으로 이렇게 한 시인이 개인적으로 체험하고 혹은 상상력에 의해  창조한 이미지를 개인적인 상징 이라고 부른다.  상징에는 크게 세 가지 유형이 있는바  첫째는 개인적 상징, 둘째는 인습적 상징, 셋째는 원형적 상징이다 (좀더 자세하 것은 이승훈, 시론, 고려원, 1979, ‘상징의 유형’, 206ㅡ211면 참고바람).  개인적 상징은 사물에 대한 시인의 개인적 감각을 중심으로 그 내면성 혹은 상상의 세계를 강조하고, 이때는 그 의미가 모호할 수 있기 때문에 반드시 구조에 의해  혹은 시 전체의 문맥에 의해의미를 암시해야 한다. 인습적 상징과  원형적 상징에 대해서는 뒤에 가서 다루기로 한다. 개인적 상징을 중심으로  특히 그 상징적 이미지를 변주 하면서  한편의 시를 완성하는 시들을 좀더 살피기로 하자.  결국 그것은 제 몸 치근대는 바람 때문일 거야 큰 송아지만한 사  냥개 절뚝절뚝 저녁 어스름 이끌고 날 찾아왔지 큰 채와 사랑채  이음새 헛간에서 주먹밥을 나누어 먹던 한철을 잊을 수 없네 헛간 고  요에 상처 아물고 주먹밥의 유순柔順에 길들여졌다 할지라도 어느 날  훌쩍 사냥개 사라지고 텅 빈 고요만 비에 젖어 슬펐네  ㅡ 강 현국,[가난한 시절4]  이 시에서 ‘사냥개’는 ‘가난한 시절’을 상징한다.  그러나 '사냥개‘ 라는 이미지에는 단순히 먹이를 사냥하는 동물 이라는  의미만 있는 게 아니라 공포, 사냥이 암시하는 야수성, 짐승이 짐승을 잡는  아이러니 등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 그러므로 강현국이 노래하는 가난은  단순히 배가 고프다는, 굶주린다는 의미가 아니고 또한 이 시에서 그는  사냥개가 ’절뚝절뚝 어스름 이끌고 나를 찾아 온다‘고 노래함으로써  그것이 병든 가난, 어스름이 표상하는 무력감을 동반하는 가난을 상징한다.  그리고 그는 현재 ’컹 컹 컹 밀려오는 저녁놀‘을 본다/듣는다.  그 가난은 밀려오며 무너진다. 말하자면 아직도 그를 지배하는 것은  옛날의 가난이다. 그는 지금도 저녁놀에서 사냥개 울음소리를 듣기 때문이다.  석탄을 적재한 무개화차들이 굴러가는 철길 너머에 저탄장이 있다. 거대한 재의  무덤, 바람에 석탄 가루들이 일어난다. 그것은 흩어진다. 그것은 바람에 불려간다.  검은 바람, 펄럭이는 검은 작업복, 탄부들이 움직이고 있다  ㅡ최 승호[재]  이 시의 경우‘재’는 석탄 가루를 표상하고 그것이 재라는 점에서  죽음을 상징한다. 모든 살아있는 것들은 불타고 나면 재가 된다.  그러나 이재, 죽음은 이 시에서 일어나고 흩어지고 불려간다.  물론 바람을 매개로 하지만 재의 이미지는 이런 변주에 으해 죽음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낳고 개인적 상징의 한 개를 초월한다.  재라는 이미지가 이렇게 변주 됨 으로써 그 상징적 의미가 분명해지기 때문이다.  요컨대 이 시에서 ‘재’는 죽음을 상징 하지만 그 죽음은 바람에 의해 일어나고  흩어지고 불려간다. 결국 재는 바람과 동일시된다.  바람 속에 죽음이 있고 죽음 속에 바람이 있다.  쾌락으로 가는  길목에 털이 있다. 궁창이 열리고  땅이 혼돈을 멈추었을때, 가장 나중에 만들어진 인간을  가장 나중에 완성 시킨건, 아무래도 털이다. 당신이 떠나고  세상에서 가장 싼값으로  인생을 구겨버리고 싶을 때, 낡은 침대나  주전자 옆에서, 꼼지락거리는  털.  ㅡ 원 구식,[털]  이 시의 지배적 이미지는 ‘털’ 이지만 그 이미는 분명치 않고,  따라서 상징이 된다. 무엇을 상징 하는가? 이 ‘털’은 ‘쾌락으로 가는 길목’에 있다는 점에서 쾌락과 관계되고, 따라서 머리털이나 수염이 아니라  음모를 의미하고, 시인은‘당신이 떠난’ 방에서 낡은 침대와 주전자 옆에 떨어진 음모를 본다. 이 털은 육체에서 떨어진 것이므로 털로서의 기능이 없고,  따라서 죽음을 표상 하지만 이 시에서는 꼼지락거린다. 살아있다.  그리고 이 털은 대지의 풀에 비유된다. 말하자면 풀은 ‘땅의털’ 이다.  도대체 정사가 끝나고 ‘당신이 떠난 다음’ 낡은 침대에 떨어진 털을 보는 것도  이상하고 이 털이 살아 꼼지락거린다고 노래하는것도 이상하고 풀을 땅의 털이라고 노래하는 것도 이상하다. 그러나 모든 진리는 이렇게 이상한데 있고  이상한 것이 진리이다. 상식, 기준, 표준이 깨질때 진리가 태어나기 때문이다.  털은 육체를 보호한다는 의미가 있고, 머리털은 신체 정상에서 자란다는 점에서  정신적 힘을 상징한다. 그렇다면 음모는 생식, 성행위를 돕는다는 의미가 있지만 이 털은 그런 의미를 벗어난다.  그러나 이 털은 죽은 것이 아니라 생명을 상징한다. 죽은털이 살아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는 모두 상징적 이미지의 변주를 통해 변주와 함께 변주를 먹고 태어난다.  3.인습적 상징을 이용하라  이상에서 나는 상징의 세 유형 가운데 이른바 개인적 상징에 대해 말했다.  다음은 이른바 인습적 상징. 말 그대로 이런 상징은 이미지와 관념의 관계가  내적 필연성(개인적 상징)이 아니라 오직 인습, 습관, 사회적 약속에 의존한다.  따라서 이런 상징은 일정한 역사적 사회적 특성을 소유한다. 말하자면 한 시대나 한 사회에서만 공유하는 상징이다. 예컨대 십자가는 기독교 정신을 상징하고  비둘기는 평화를 상징하고 태극기는 조국을 상징한다. 그러나 이런 상징은  보편성을 띠는 것이 아니다. 십자가는 기독교인들의 진리이고, 비둘기는  구약의 문맥에서 평화이고, 태극기는 한국인들의(그것도 남한만의) 조국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미국인들은 태극기를 보고 조국을 생각하지 않는다.  시대적 역사적 제약이 있기는 하지만 이런 상징은 인습적으로 습관적으로  사용되기 때문에 난해하지 않고, 난해하지 않기 때문에 알기는 쉽지만  한편 시적 깊이가 사라진다. 오늘 이 시대에 비둘기가 평화를 상징 한다고,  비둘기를 보면서 평화롭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별로없고, 그런 생각은  과거의 인습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치 않은가? 내가 사는 아파트 약방 앞 보도 블럭에는 언제나 비둘기들이 모여있다. 놀고있나 하고 가까이 다가가보면  평화롭게 놀고있는 것이 아니라 모이를 찾느라고 정신이 없다.  너희들이나 우리나 모두 먹고 살기가 이렇게 어렵구나. 이런 비둘기들은  평화가 아니라 먹고 살기위한 고통, 싸움, 전쟁을 상징 한다. 물론 생각하기  나름이겠지만 유념할 것은 이런 인습적 상징을 사용하는 경우 그 상징적 의미를  시의 문맥에 의해 변형 시키고 변주해서 새로운 의미를 보여 주라는 것.  다음은 비둘기라는 이미지를 인습적 의미로 사용하되 변주시킨 보기이다.  비둘기들이 걷고있는 이 고요한 지붕은  반짝거린다, 소나무 사이, 무덤 사이에서  여기 공정한 ‘정오’ 가 불로서 구성 한다  바다를, 언제나 다시 시작하는 바다를!  산들의 고요를 오래 관조하는  오 사색이 받는 보상이여!  ㅡ발레리,[해변의 묘지](민희식, 이재호 역)  시의 표제가 ‘해변의 묘지’ 로 되어있기 때문에‘이 고요한 지붕’은 ‘바다’를 비유한다. 그렇다면 ‘비둘기들’은 바다를 걷고 있는 비둘기로 읽을수 있지만  바다에는 비둘기가 아니라( 물론 조금 미친 비둘기들은 바다에 떠 있을수도 있다. 김기림의{바다와 나비}에는 조금 미친 나비가 바다에 떠있음) 갈매기가  많고 따라서 이 비둘기들은 바다위에 떠있는 ‘고기잡이 배들의 하얀 돛대’를  비유한다. 그런 점에서 이 시행은 이중 구조로 되어있다. 하나는 지붕/ 비둘기가  바다/ 하얀 돛대를 비유 한다는 것. 다른 하나는 고요한 지붕을 비둘기가 걷고있다는 것. 그러므로 이 시행이 주는 시적 효과는 이런 이중 구조가 산출하고  그것은 고요한 지붕(바다)에 하얀 돛대가 비둘기처럼 평화롭게 떠있다는  독특한 의미를 낳는다. 물론 여기서 비둘기의 이미지는 평화라는 인습적 의미를  유지한다. 그러나 이 비둘기는 비둘기 이면서 동시에 하얀 돛대이기 때문에  이중적 의미를 암시한다. 요컨대 비둘기의 평화는 하얀 돛대의 평화가 된다.  이 시의 전경은 소나무 사이, 무덤 사이에서 바다가 반짝이는 풍경이고 후경은  하얀 돛대로 나타난다. 그러나 인습적 상징은 그 의미를 이렇게 변형하지 않고  그대로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다음은 그 보기.  쫒아오든 햇빛인데  지금 교회당 꼭대기  십자가에 걸려 있습니다.  첨탑이 저렇게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수 있었을까요.  ㅡ 윤 동주.[십자가]  4. 원형적 상징  인습적 상징이 시대적 사회적 제약을 받고 그 의미가 사회적 인습에 의존 한다면  이와는 달리 이런 시대적 사회적 제약을 초월하고 상징(이미지)과 관념의 관계가 보편성을 띠는 것이 있다. 이른바 보편적 상징 혹은 원형적 상징 원형 archetype 은 으뜸가는 이미지, 원초적 이미지라는 뜻으로 시인들, 화가들이  수많은 이미지들을 생산 하지만 결국은 몇 가지 원형으로 환원 된다는 점에서  모든 이미지들의 바탕 이라고 부를 수 있다. 융에 의하면 이런 이미지는  사회와 역사를 초월하는 인간의 보편적 무의식이 생산하고 그런 점에서  집단 무의식의 산물이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이미지(상징)는 개인 무의식  그것도 성적 욕망이 생산 하지만 그의 제자인 융에 의하면 집단 무의식이 생산하고 이런 보편적 상징은 옛날부터 현재까지 인류에게 무의식적으로 계승되는  이미지이다. 그것은 인간이기 때문에 소유하는 인간적 꿈, 소망, 원망을 암시한다. 이런 소망은 지금도 계속된다. 예컨대 이 세계는 물, 불, 바람, 흙의 원형으로  되어 있다거나 자연은 계절적으로 순환하기 때문에 인간도 다시 태어난다는  재생 원형 등이 있고, 재생 원형은 결국 우리 인간들이 옛날이나 지금이나  죽고 싶지 않다는 것, 이른바 불사不死,영원에의 꿈을 상징한다. 그런가 하면  지상의 삶을 초월해서 하늘, 천상의 세계에 닿고 싶은 소망도 있고,  이런 소망은 흔히 계단, 산, 나무, 탑의 이미지로 구현된다. 예컨대 이런 꿈은  꿈을 아느냐 네게 물으면  플라 타너스  너의 머리는 어느덧 파아란 하늘에 젖어있다.  너는 사모할 줄 모르나  플라 타너스  너는 네게 있는 것으로 그늘을 늘인다.  ㅡ김 현승,[플라 타너스]  같은 시에서 읽을 수 있다. 이 시의 중심적 이미지는 ‘플라 타너스’ 이고  여기서 이 나무는 단순히 가로수를 의미 하는 게 아니라 ‘너의 머리는 어느덧  파아란 하늘에 젖어있다’는 시행이 암시하듯이 하늘과 닿은 나무, 이른바 초월을 상징하고, 이런 초월은 지상으로부터 벗어나 신의 세계에 닿고싶은 인간의 꿈을  암시한다. 그러므로 시의 후반에는 ‘나는 너와 함께 신이 아니다’는 시행이  나오고, 이런 시행을 전제로 할때 인간의 꿈이 나무의 꿈이고 이꿈은  신의 세계에 닿고 싶은 인간의 보편적 소망을 의미한다. 한편 인간 에게는 탄생,  창조, 재생에의 꿈이 있고, 이런 꿈은 계절적으로는 봄, 하루의 수준에서는  새벽의 이미지로 나타난다.  그해 겨울이 지나고 여름이 시작되어도  봄은 오지 않았다 복숭아나무는  채 꽃 피기 전에 작은 열매를 맺고  불임의 살구나무는 시들어 갔다  소년들의 성기에는 까닭 없이 고름이 흐르고  의사들은 아프리카 까지 이민을 떠났다 우리는  ㅡ 이 성복,[1959년]  이 시의 경우‘봄’은 오지 않고, 그것도 여름이 되어도 오지않는다.  그렇다면 이런 봄은 자연으로서의 봄이면서 동시에 이런 의미를 초월하고 따라서  관념으로서의 봄이고(‘지금은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이상화)이런 봄이 암시하는 것은 새로운 삶, 신생, 창조, 계몽 등이다. 말하자면 죽음을 상징하는  겨울’과 대비되는 삶이다. 그러나 이 시에서는 그런 삶, 새로운 삶의 창조가  불가능 하다는 것을 노래한다.  5.상징이냐 알레고리냐  상징과 알레고리가 비슷한 느낌을 주는 것은 이 두 기법모두 이미지를 보여줄뿐  직접 진술하지 않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취의가 생략되고 매재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징과 알레고리는 다르고, 이 차이가 중요하다. 알레고리allegory 는 흔히 우유㝢兪, 우화偶話, 로 번역되고allegory는 그리스어로  ‘다른것’을 뜻하는 allos 와 ‘말하다’를 뜻하는 agoreuein 이 결합된 말이다. 따라서 알레고리는 어떤말 혹은 이미지가 그것이 아닌 다른 것을 의미 한다는  뜻이고, 우화가 암시하듯이 이런 말하기는 상징과 다른 몇가지 특성을 보여준다.  첫째로 상징이 사물이나 이미지에서 출발해서 관념에 이른다면 알레고리는  거꾸로 관념에서 출발해서 이미지에 이르는 과정을 밟는다.  둘째로 상징의 경우 이미지와 관념의 관계가  1 : 다 로 나타 난다면 알레고리의 경우엔 1 : 1 로 나타나며 시간적  계기성을 띠고 그런점에서 연속성을 띤다.  셋째로 상징의 의미는 모호 하지만 알레고리의 경우엔 분명하고 교훈적이고,  넷째로 알레고리는 이 교훈적인 것과 관계가 있지만 실화성을 띤다는 것이다  ( 좀더 자세한 것은 이승훈, 시작법, 탑 출판사.1988, 201-206면 참고바람).  다음은 알레고리에 의한시.  그는 들어왔다.  그는 앉았다.  그는 빨강 머리의 이 열병은 바라보지도 않는다.  성냥불이 켜지자  그는 떠났다.  ㅡ 아폴리네르,[시](오 증자 역)  ‘그’는 시를 의미하고, 따라서 이 시는 시스기에 대한 시이며, 시쓰기  혹은 시상이 전개되는 과정을 시간적 순서에 따라 노래한다.  그러나 머릿속에 떠오른, 혹은 환각으로 나타난 시가 성냥불을 켜자  사라지고 말았다는 것. 다음과 같은 시도 알레고리의 기법에 의존한다.  태양신이라고 불리우던 루이14세는  그의 통치 말기에  종종 구멍 난 의자에 앉곤 했다  지독히 어둡던 어느 날 밤  태양신은 자리에서 일어나  의자에 가 앉더니  사라지고 말았다.  ㅡ 프레베르,[일식](오 증자 역)  루이 14세를 풍자한 시로 일종의 교훈이 있고, 설화성도 있고,  이미지가 시간적으로 발전한다.   ============================================================   88. 부모 / 김소월                                  김소월 부모 원작 부모   낙엽이 우수수 떨어질 때, 겨울의 기나긴 밤, 어머님하고 둘이 앉아 옛이야기 들어라.   나는 어쩌면 생겨나와 이 이야기 듣는가? 묻지도 말아라, 내일 날에 내가 부모 되어서 알아보랴?       김소월 연보  1902년 9월 7일 평북 구성군 서산면 왕인동 외가에서 父 金性壽와 母 張景淑의 장남 출생(金氏문중의 종손)                (본명 : 김정식, 필명 : 소월)                    ※ 조부가 대지주였고 광산업도 하여 집안이 부유했으며 유교적 가풍이 있었음.  1904년 (2세) 정주와 곽산 사이의 철도를 부설하던 일본인 목도꾼에게 폭행을 당한 부친이 정신이상 증세를 일으킴.  1907년 (5세) 조부가 독서당을 개설하고 훈장을 초빙하여 한문 공부 시작.  1909년 (7세) 공주 김씨 문중에서 세운 남산소학교에 입학.                   서춘 선생의 문학수업을 받고 동네 친구인 오순을 만나 이성에 눈뜸.  1915년 (13세) 남산소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4월 오산중학에 입학.                     교장 이승훈, 교사 조만식의 영향으로 민족의식을 키움.                     스승 안서 김억을 만나 본격적인 문학 수업 시작.  1916년 (14세) 조부의 뜻에 의해 홍실단과 결혼. 오순과의 이별로 심리적 갈등을 겪음.  1920년 (18세) 안서의 지도로 창작에 매진하고 『창조』에 '낭인의 봄, 그리워, 춘강' 등을 발표하여 문단 등단.  1922년 (20세) 배재고보 5학년에 편입  1923(년 21세) 3월 교지 『배제』에 '길손, 달밤, 점동새' 등을 발표.                      배재고보 졸업 후 일본 유학길에 오름. 10월 관동대지진으로 귀국.                     (조부의 반대로 다시 일본 유학은 가지 못함)  1924년(22세) 귀향해서 조부의 광산일을 도움.                    영변 여행을 다녀와서 김동인, 김찬영, 임장화 등과 함께 『영대』동인이 됨.  1925년 (23세) 시집『진달래꽃』(매문사) 상재. 시론 「시혼」을 『개벽』(5호)에 발표.  1926년 (24세) 마음속의 연인이던 오순의 죽음으로 충격받음. 시작에서 거의 손을 떼고 방탕한 생활을 함.                      7월 평안북도 구성군에 동아일보 구성지국 개설, 지국장 역임. 1927년 (25세) 3월 동아일보 지국 폐쇄. '팔베개 노래' 발표.                    나도향의 요절로 충격을 받고 자살충동을 느낌. 술로 지새는 날이 많아짐. 고리대금업에 손댐.  1929년 (27세) '조선 시가협회' 회원 가입                     이 협회는 이광수, 주요한, 김억 등 10명으로 구성, 저속한 가요의 가사 혁신을 위하여 조직 됨.  1932년 (30세) 독립운동가 배찬경의 망명자금을 대주고 일경의 감시를 받음. 만주행을 꿈꿨으나 실패함.  1934년 (32세) 8월 '제이,엠,에쓰', '돈타령" 등 발표.                     9월 21일 추석 전날밤에 김억에게 절망적임 편지를 씀.                     12월23일 장에서 아편을 사가지고 와 음독함. 다음날 아침 8시경 시체로 발견됨.                      평북 구성군 서산면 평지동 터진고개에 안장됐다가 후에 서산면 평지동 왕릉산으로 이장.  1935년 김억이 『신동아』 2월호에 「김소월시행장」발표  1939년 김억 선의 『소월시집』이 박문서관에서 간행됨.  1956년 완본 『소월시집』이 정음사에서 간행됨.  1961년 김영삼씨가 『소월정전』을 성문각에서 간행함.  1968년 3월에 한국일보사 주관으로 서울 남산에 소월시비가 건립됨.  1970년 숙모 계희영이 『소월선집』과 『내가 기른 소월』을 장문각에서 간행함.  ==========================================================================   89. 못 잊어 / 김소월                                  김소월 못 잊어 원작          못 잊어     못 잊어 생각이 나겠지요, 그런대로 한세상 지내시구려, 사노라면 잊힐 날 있으리다.   못 잊어 생각이 나겠지요, 그런대로 세월만 가라시구려, 못 잊어도 더러는 잊히오리다.   그러나 또 한끝 이렇지요, '그리워 살뜰히 못 잊는데, 어쩌면 생각이 떠지나요?'         
故천상병+=목순옥 부부 찻집 "귀천"문닫아:   "나하늘로  돌아가리라/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날,/가서, 아름다웠다라고 말하리라,,,, 천상병 시인의 詩 "귀천"의 마지막 연이다,이번주 트위터 세상에는 이 시가 자주 등장했다 천시인의,부인  목순옥씨가운영하던, 서울종로구 인사동의 전통찻집 ,"귀천",이 2010년 8월 목씨의 타계로 ,문을  닫는다는 소식 때문이었다,,,,,,,, 트위터,이용자들은의 글에는 안타까움이 가득 묻어났다 중고등학교시절,대학교시절까지도 찾아갓던,,인사동의 귀천이 없어진다 마지막,기억은 목 사모님이 시킨 차를 세번을 더 마시라고,더 타줬을 때인대"" 천상병 시인의 찻집 귀천이 문을 닫는다고 하네요,,아름다운 이세상 소풍 끝내시고 두 분이 함께 찻잔을 기울리고 있으려나,,,,,, 천상병 시인의 자취가 깃든 찻집 ::귀천:::이 문을 닫았읍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세벽 빛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잡고,,,,,, 귀천의 추억도 귀천하네요:::;이세상 소풍 끝네고 아름다웟다고 말해주려고 가셨나봐요 천상병=+목옥순님의 인사동찻집,,,귀천"""이 문 닫는다는소식,,두분이 하늘나라에서 예뿐 찻집을 차렸기 때문인가보다////// 문화유산,으로 지켰으면 하는 마음을 밝히는 이들도 있었다;;;;;;;;?????? 외국에는 문인이 왔던 빠의 의자도 기념품으로 해서  관광상품화하던데요 아쉽군요;;''''누군가 재력가가 인수해 주었으면좋겠는데 아쉬워요 이럴땐 부자들은  다  어디 갔는지''' 출판업계에선 독서의계절;;이 깊어지면서 트위터를 활용한 이벤트가 활기를 띠고 있네요////// - 목옥순 여사 1935년 경상북도 상주에서 출생 고등학교 2 학년때 오빠 친구이자 순수 시인인 천상병을 만나 1972년 김동리 선생님의 주례로 결혼 1993년 천상병이 하늘나라로 돌아갈때가지 평생을 뒷바라지 하며 살았다 1985년부터 인사동에서 전통찻집 귀천을 운영 천상병 시인이 별세한 뒤 2008년 천상병기념사업회를 만들어 고인을 추모 2010년 8월 26일 7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 *천상병시인의 부인 목옥순 여사의 인터뷰.    그리움은 입으로 토해내는 것이다. 아무리 견디려 해도 참을 수 없다. 구토처럼 틀어막은 입을 비집고 나오는 것, 그게 바로 그리움이다. 기자는 어느 시인의 늙은 아내로부터 그 사실을 배웠다. 칠순이 지난 아내는 여전히 남편을 이야기했다. “그 사람은 술을 무척 좋아했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고왔다. 늦은 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성우의 목소리는 사람을 취하게 하는 마력(魔力)이 있다. 나이 든 아내의 목소리가 그랬다. “어린 아이 같은 그 사람은 누구에게나 큰 소리로 말했죠. ‘난 내 마누라가 좋다!’ 그게 그렇게 듣기 좋았어요.” 아내는 서울 종로구 인사동에서 작은 카페를 운영한다. 카페엔 남편의 사진과 그가 남긴 글들이 널려 있다. “그 사람의 글이 너무 좋아서….” 아내는 수줍게 남편의 글 솜씨를 자랑했다. “그 사람을 기억하는 이들이 자주 찾아와요.” 아내는 다시 남편 이야기를 꺼냈다. 그리고 긴 시간 동안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그녀의 남편은 이 세상에 없다. 그는 이미 하늘로 돌아갔다. 이른바 귀천(歸天). 떠난 남편의 이름은 천상병, 남겨진 아내의 이름은 목순옥이다. 그녀의 나이는 72세다. ▲ 귀천의 작가, 천상병과 그의 아내, 목순옥. 젊은 시절 단란한 한 순간을 카메라에 담았다. 사진=김영관, 영상=한용호. ◆ 남편 천상병, 아내 목순옥 천상병은 소풍을 마치고 하늘로 돌아간 시인으로 기억된다. 병과 가난에 시달리면서도 해맑은 동심과 웃음을 잃지 않은 사람. 그의 대표작, 귀천은 그런 천상병을 잘 설명하고 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 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 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나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천상병은 1930년 일본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소년은 일본과 한국을 오가며 자랐다. 아버지의 잦은 사업실패 덕분이다. 소년은 몸이 약한 대신 감수성이 예민했다. 마산중학교 재학 시절, 국어교사는 시인 김춘수였다. 스승은 소년의 재능을 눈여겨봤다. 1년간 혹독한 습작의 시간을 보냈다. 1950년, 소년은 스승과 유치환 시인의 추천으로 등단했다. 문학잡지가 청소년의 마음을 사로잡던 시절. 중학생이던 소년은 전국구 스타가 됐다. 그리고 전쟁이 터졌다. ▲ 목순옥(72) 여사는 남편 천상병에게 15년째 편지를 보내고 있다. 그동안 쓴 편지는 50여통. 그녀는 편지를 모아 연말쯤 '하늘에 띄우는 편지'라는 제목의 책을 발간할 계획이다. 사진=김영관, 영상=한용호. 1951년, 부산으로 옮겨진 서울대학교 상과대학에 입학했다. 전쟁은 감수성 여린 소년에게 현실을 바라보는 눈을 선물했다. 대학에서는 평론가로 유명했다. ‘나는 거부하고 저항할 것이다’라는 다소 과격한 제목의 평론은 지금도 회자(膾炙)되는 유명한 글이다. 아내는 기억한다. “시 쓸 때와 평론할 때, 남편은 전혀 다른 사람이었어요. 아주 독하게 평론을 했답니다. 그의 매를 맞지 않으면 유명한 문인이 아니란 말이 나돌았어요. 때문에 은근히 남편의 평론에 오르내리길 바라는 분들이 많았죠.” 대학을 졸업하면서 한국은행에 입사할 기회가 주어졌다. 하지만 그는 거부했다. “시인은 배가 고파야지.” 그는 홀연히 대학을 떠났다. 그 시절, 아내는 고등학교 1학년 학생이었다. 아내의 오빠가 시인의 친구다. 가끔 커피숍에서 만나는 시인은 그녀의 우상이었다. “그 시절엔 문인들이 함께 어울렸어요. 오빠 덕분에 시인을 만났어요. 당시엔 큰 소리로 잘 떠드는 분이셨죠. 가끔 술집에도 따라갔는데 시인은 제 자리에 술잔이라도 올려지면 당장 치웠답니다. ‘미스(Miss) 목은 술 마시면 안돼.’ 이러면서 말이죠.” 1967년, 시인에게 큰 시련이 닥쳤다. 동베를린간첩단 사건에 연루된 것. 대학동기에게 술값을 빌린 게 간첩으로 몰린 이유였다. 중앙정보부에서 전기고문을 세 번 받은 뒤 풀려났다. 시인은 몸이 극도로 쇠약해졌다. 잦은 폭음도 그의 건강을 해쳤다. 부산 형님 댁에 내려갔다 1년 만에 돌아왔다. 서울에 도착한 천상병은 그 길로 친구의 동생을 찾아갔다. “얼굴이 까맣게 변했더라구요. 커피숍에서 문학 이야길 하다 내일 보자며 헤어졌어요. 그런데 사라지신 거예요.” 그날 시인은 길에 쓰러졌다. 술에 취해서였다. 서울시립정신병원에 실려갔다. 천재 시인이 행려병자로 바뀐 것이다. 목순옥을 비롯해 시인의 친구들이 그를 찾았다. 허사였다. 그들은 울면서 친구의 유고 시집 ‘새’를 발간했다. 그의 죽음은 신문에도 실렸다. 병원장이 놀라서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천상병은 살아있습니다.” 목순옥은 매일 병문안을 갔다. 그녀의 뒷바라지 덕분에 시인의 몸무게는 40㎏에서 60㎏으로 불었다. 병원장이 말했다. “저 사람이 글을 쓰고 못쓰고는 당신에게 달렸습니다. 두 분이 결혼하면 어떨까요?”   ◆ 남편의 재능을 사랑한 아내 둘은 부부가 됐다. “그냥 돌봐드려야겠다는 마음이 들더라구요. 깊이 들어가면 그게 사랑이겠죠?” 가진 것은 병과 가난 뿐인 남자. 그런 이를 사랑한 아내는 말했다. “나이가 드니까 잔소리가 늘었답니다. 지하철을 타고 가다 꼭 껴안은 젊은 남녀를 보면 잔소리를 합니다. ‘너무 붙어있지 마라. 빨리 뜨거워지면 금새 식는다.’ 서로 툭툭 치는 젊은 남녀를 봐도 지나치질 못해요. ‘서로 배려해야지. 함부로 대하면 안된다.’ 나이가 드니까 그런 것이겠죠?” 시인과의 결혼 생활은 힘들었다. 그래도 아내는 좋았다. 특히 시인의 아내만 즐길 수 있는 특권에 마냥 기꺼워했다. “시인이 정말 아이 같았어요. 가끔 집에 들어오면 다 써놓은 시를 베게 옆에 가지런히 놓고 잠든 척 했답니다. 저는 가장 먼저 시인의 글을 읽는 사람이 된 것이죠. 좋았냐구요? 그야 물론 너무 좋았죠.” 그녀의 남편 자랑은 이어졌다. “시인은 가만히 앉아 있다 제목을 정하면 한달음에 시를 썼어요. 단 한번도 다시 고치는 걸 보지 못했어요. 정제된 단어가 속에서 쏟아져 나오는 거죠. 그럼 시를 툭 보이면서 자랑했답니다. ‘이것 봐라, 아내야.’ 천재였던 거죠.” 그럼, 남자 천상병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천재 천상병을 사랑한 것 아닌가. “그랬을 지도 모르죠. 하지만 모든 걸 제게 의지하는 시인이 계셔서 행복했습니다. 사랑이란 가슴에 담아두기도 하고, 상대방을 이해하기도 하고, 내가 줌으로써 기뻐해야 하는 것 아닐까요?” 그녀는 시인에게 동생이고, 친구이고, 애인이고, 아내이고 동시에 스승이며 어머니였다. 하긴 그것이 사랑이다. ▲ 천상병의 아내, 목순옥(72) 여사는 아직도 남편을 그리워한다. 서울 인사동의 작은 카페 귀천에서 아내는 남편의 호흡을 맡고 있다. 사진=김영관, 영상=한용호. ◆ 남편의 유산(遺産) 천상병은 1988년부터 만성간경화증으로 고생했다. 친구가 의사로 재직하던 춘천의료원에 입원했다. 그래도 시인은 여전히 유쾌했다. “배가 산처럼 불러서 병원에 갔어요. 복수(服水)가 찬 것이죠. 일반인이라면 죽음을 앞두고 많이 두려웠을 거예요. 병원에 도착하니 친구인 정원석 선생님이 야단을 치시더군요. ‘야, 이 놈아. 배가 왜 이리 불렀냐?’ 시인이 대뜸 받아쳤어요. ‘내가 말이다. 임신을 했다, 임신을 했어.’ 그만큼 낙천적이었어요. 덕분에 많이 웃었죠.” 병원에서 아침을 먹이고 서울로 돌아와 카페 문을 열었다. 일이 마치면 다시 춘천으로 향했다. “춘천으로 가는 길이 참 예뻤답니다. 차 안에서 매일 기도했어요. 5년만 더 살게 해주세요. 딱 5년만.” 시인은 거짓말처럼 병을 털고 일어났다. 그리고 5년 뒤. 다시 거짓말처럼 세상을 떠났다. “이른 봄이었어요. 방금 헤어져서 카페 문을 열고 물을 끓이고 있는데. 병원에 실려갔다는 전화를 받았죠. 마음이 덜컥 하더군요. 매일 춘천으로 갈 때, 5년이 아니라 10년을 살게 해달라고 빌 것을….” 시인의 나이 63세였다. 남편이 떠난 지 15년. 아내는 추억을 먹고 산다. 매년 의정부, 산청 등지에선 천상병을 기리는 문학제가 열린다. 시비(詩碑)도 세워졌다. 작은 카페엔 여전히 남편의 친구와 팬들이 찾아온다. 아내는 남편의 기념관을 세우고 억울하게 고문을 받은 간첩사건의 진실을 찾는데 여생을 보낼 예정이다. 그녀에게 의지했던 남편은 세상을 등지고도 아내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모양이다. “제게 남겨진 일, 모두 마무리하고 저도 떠나야죠. 하늘에서 다시 만나면 큰 소리를 칠 거예요. 제가 다 처리하고 왔다고 말이죠.”   남편의 그리움은 시가 됐다. 아내의 그리움은 이제 별이 되려 한다. 그들 부부가 서로를 그리워함은 여느 청춘의 사랑에 못지 않다. 문득 남편의 은사인 김춘수의 ‘구름과 장미’가 떠올랐다. 그의 시를 마지막으로 소개하는 것은 그런 까닭이다. 저마다 사람은 임을 가졌으나 임은 구름과 장미되어 오는 것 눈 뜨면 물 위에 구름을 담아 보곤 밤엔 뜰 장미와 마주앉아 울었노니 참으로 뉘가 보았으랴? 하염없는 날일수록 하늘만 하였지만 임은 구름과 장미되어 오는 것 *천상병시인과 목옥순 여사의 이야기.     한 평생 변함이 없는 사랑 ―시인 천상병과 아내 목순옥   천상병(千祥柄, 1930~1993) 천상병은 흔히 기인으로 불리었다. 1952년 『문예』에 시 추천이 완료된 후 “시인이면 그만이지 학력이 무슨 소용이냐”며 서울대 상대 4학년 2학기 등록을 하지 않고 그만둔 것부터가 기이한 행동이었다. 천상의 기쁨과 지상의 아픔을 노래한 시인 천상병이 술독에 빠진 것은 50년대 초반이다. 문인들과 어울려 늘 술에 취해 살았지만, 1967년 동백림사건으로 체포되어 고문당하기 이전까지그는 평필(評筆)을 휘두른 문학평론가이기도 했다. 술로 인한 웃지 못할 일화 중의 하나. 소설가 모씨의 안방에 있던 향수병을 양주병으로 알고 마셔 한동안 입에서 향수 냄새를 풍기며 다닌 것도 유명하지만 박재삼 시인이 살던 단칸방에서의 방뇨사건이 압권이다. 어느 날 대취한 박재삼과 천상병 두 시인은 어깨동무를 하고 박재삼의 집으로 간다. 재삼은 부인과 아이들을 한쪽 벽으로 밀치고 잠이 들었다. 부부가 소나기 오는 소리에 잠을 깨보니 천상병이 방에다 엄청난 양의 소변을 보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고선 다시 드러누워 태평스럽게 잠을 자는 것이 아닌가. 박재삼은 그 사건 후 몇 차례 이사를 했지만 부인과의 약속 때문에 천상병에게는 집을 가르쳐주지 않았다고 한다. 천상병 시인과 목순옥 여사 천상병. 그는 수많은 일화를 남긴 기인이었고 뛰어난 시인이었다. 시를 즐겨 읽지 않는 사람일지라도 시인 천상병의 이름은 한 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또한 인사동에 가본 사람이라면 ‘귀천’이라는 이름의 찻집을 보았을 것이다. 천상병 시인의 시 제목을 딴 찻집에는 시인이 살아 있을 때나 작고한 지 많은 시간이 지난 지금이나 시인의 아내 목순옥 여사가 변함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서울에서 매일 수십 쌍이 결혼식을 올리지만 그날의 결혼식만큼 큰 박수가 울려퍼진 적이 없었다고 한다. 두 사람이 결혼을 한 것은 1972년 5월 14일이었다. 마흔세 살 노총각과 서른여섯 살 노처녀가 결혼했으니 그 당시로서는 드문 일임에 틀림없었다. 하지만 장안의 화제가 되었던 이유는 그 결혼이 너무나 값진 사랑의 승리였기 때문이다. 시인은 1967년 6월 25일, 동백림사건에 연루되어 중앙정보부 안가에 끌려가 6개월 동안 세 차례의 전기고문 등 숱한 고문을 받고 폐인이 되다시피 한다. 동백림사건이란 독일 유학생 몇 사람이 베를린에 사는 동포의 주선으로 동베를린에 구경 간 것이 빌미가 되어 엄청난 간첩단 사건으로 비화한 사건이다. 작곡가 윤이상과 화가 이응로 등 유럽 거주 예술가들을 포함하여 수많은 사람이 체포되어 고문을 당했고, 유기형에 처해졌다. 천상병 시인의 혐의는 동백림사건의 핵심 인물이자 서울대 상대의 동기동창인 강빈구가 간첩인 것을 알고서도 신고하지 않고 그를 협박하여 돈을 뜯어냈다는 말도 안 되는 것이었다. 6개월 동안 갇혀 있으면서 전기고문 등 온갖 고문을 다 당한 끝에 집행유예를 받고 풀려난 천상병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1971년이었다. 고문의 후유증과 음주생활에서 오는 영양실조로 거리에서 쓰러진 그를 발견한 사람은 경찰이었다. 자신을 시인 천상병이라 말하면서도 시를 한 줄도 못 외는 것이 경찰로서는 너무 이상했다. 대소변조차 가리지 못하는 그를 경찰은 행려병자로 간주하여 서울시립정신병원에 입원시켰다. 천상병은 넋이 반쯤 나간 상태로 병원에서 몇 달 동안 있게 된다. 민영, 성춘복, 송영택 등의 친구가 행방불명된 시인을 찾다가 포기하고 돈을 모아 유고시집을 내준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다행히도 그 병원의 김종해 박사가 유고시집이 나왔다는 신문기사를 보고 그 천상병이 자신이 돌보는 환자임을 알고는 친구들에게 연락해주어 병실 문을 나설 수 있었다. 목순옥의 오빠 목순복은 천상병의 친구였다. 목순옥이 여고 2학년 때, 오빠의 소개로 명동의 갈채다방에서 천상병을 처음 만나게 된다. 천상병은 그때도 좀 이상한 사람이었다. 경북 상주에서 올라온 친구의 동생 앞에서 천상병은 콧구멍을 후비며 앉아 있다가 우스운 이야기가 나오면 다방이 떠나갈 듯이 웃곤 했다. 두 사람은 곧 오빠와 동생 사이가 되어 스스럼없이 지내게 된다. 그 무렵 천상병은 시인에게 대학 졸업장이 무슨 필요가 있냐며 서울대 상대를 중퇴하고 이 집 저 집을 떠돌아다니며 얻어먹고 지내고 있었다. 목순복은 친구의 재주를 아껴 시인의 술값을 수시로 갚아주곤 했다. 세월은 흘러 시인은 고문의 후유증을 술과 담배로 달래며 살아간다. 직업이 없었으므로 술값, 담뱃값 등을 주변 사람들이 대주고 있었다. 그러니 몸과 마음이 모두 황폐해져 서울시립정신병원에 1년여 동안 입원까지 하게 되었던 것이다. 목순옥은 병원에 있는 천상병을 헌신적으로 돌봐주며 병이 깊은 시인을 위해 남은 생을 바치기로 결심한다. ‘천 선생님은 내가 아니면 안 된다. 천 선생님이 편안한 마음으로 살아가시려면 내가 저분 곁에 있어야만 한다. 내가 곁에 없으면 천 선생님도 안정을 잃지만 나 역시도 저분을 등지고서 마음 편하게 살아갈 수는 없을 것 같다.’ 1972년 말에 시인은 퇴원을 했고 녹음이 푸르른 5월 14일, 김동리 선생의 주례로 천상병은 목순옥을 평생의 반려자로 맞이한다. 아니, 목순옥이 천상병을 위해 평생 간호사 역할을 하리라고 결심한다. 그때부터 목순옥 여사는 어린아이의 정신연령을 갖고 사는 남편을 위해 팔과 다리의 역할을 한다. 시인이 급성 간경화증으로 춘천의료원에 입원했을 때는 5개월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춘천과 서울을 오르내리며 간병을 했다. 그때뿐만이 아니라 1999년 4월 28일에 남편과 사별할 때까지 목순옥 여사는 시 쓰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남편을 정성을 다하여 섬긴다. 매일 아침 세수는 물론이거니와 손발톱도 깎아주고 목욕도 시키는 등 목순옥은 아내이자 어머니의 역할까지 하며 헌신적으로 천상병을 도왔다. 또한 찻집 ‘귀천’을 운영하며 가계까지 책임져야만 했다. 이처럼 목순옥은 27년 동안 한결같이 오직 한 사람을 위해 사랑을 쏟아부었다. 천상병 시인의 중기와 후기의 시는, 자신을 지극 정성으로 돌봐준 아내가 없었더라면 결코 쓰지 못했을 것이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 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 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 전문 삶의 소풍을 끝내고 하늘로 올라가 삶이 아름다웠다고 말하는, 심금을 울리는 천상병의 시는 목순옥의 이타적인 사랑에 대한 아름다운 화답가(和答歌)이다.        
866    시인 천상병 옛집, 생면부지 오지澳地마을로 이사하기까지... 댓글:  조회:5508  추천:0  2016-01-07
▲ 고(故) 천상병 시인의 옛집 충남 태안군 안면도 시골 마을에서 농사를 짓고 있는 모종인(56), 이숙경(47)부부가 천 시인이 마지막 생을 마감할 때까지 살던 의정부 옛집을 재개발로 인해 철거될 위기에 처하자 시골 오지마을로 옮겨왔다. ⓒ 정대희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날, 가서, 말하리라 아름다웠더라고..." 고(故) 천상병 시인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라도 그의 대표적인 시 '귀천'의 일부분인 이 문장을 한 번쯤 들어보지 못한 이는 없을 것이다. '문단의 마지막 순수시인' 또는 '문단의 마지막 기인(奇人)'이라 불리는 고(故) 천상병 시인. 그가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을 끝내는 날까지 살다간 옛집은 어떻게 되었을까? 충남 태안군 안면읍 대야도. 시골마을에서도 오지로 불리는 이곳에 고(故) 천상병 시인의 옛집이 서해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작은 동산위에 자리 잡고 있다. 일본 효고현 히메지시에서 출생해 마산에서 학창시절을 보내고 삶의 둥지를 의정부에 틀었던 시인의 옛집이 아무런 연고도 없는 왜 이런 오지에 들어서 있을까? 고인의 옛집을 옮겨왔다는 모종인(56), 이숙경(47)부부를 만나보았다. 카페 '귀천'이 맺여 준 인연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며 펜션을 운영하고 있는 모종인, 이숙경 부부. 겉보기도 여느 시골사람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던 이들 부부가 고인의 옛집을 옮겨오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모종인씨는 '사명감을 느꼈다'는 말을 시작으로 사연을 풀어놓았다. 모씨는 대학 시절 디자인을 전공하고 졸업 후 고향인 충남 안면도로 귀향해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고 한다. 허나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면서도 문화, 예술에 대한 관심과 애정은 쉽게 사그러들지 않았다. 오히려 그가 주기적으로 서울 인사동을 찾게 만들었다. 천 시인과의 인연은 이때 비로소 시작됐다. 젊은 시절부터 평소 천 시인의 시를 좋아한 모 씨는 주변 동료들이 마련해준 천 시인과 그의 부인 목순옥 부부가 운영하는 카페 '귀천'을 찾게 됐고, 그 후 서울에 갈 때면 어김없이 인사동 카페에 들러 이들 부부와 차를 마시고 대화를 나누면서 친분이 두터워졌다. 이렇게 시작된 인연은 천 시인이 고인이 된 후에도 이어졌다. 모씨는 아직도 한 달에 두세 번 이제는 목순옥 여사(작고)가 홀로 카페를 운영하고 있지만 여전히 인사동 '귀천' 카페를 찾고 있다. ▲ 고인의 책상 천상병 시인이 사용했던 책상. 그의 부인 목순옥 여사가 모종인씨에게 기증했다. ⓒ 정대희   재개발에 떠밀려 사라질 위기 처했던 고(故) 천상병 시인의 옛집 천 시인의 옛집이 철거된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접하게 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5년 전 여름. 그날도 여느 때와 같이 목 여사와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전화통화를 하던 날이었다. 모씨는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며 이렇게 설명했다. "서로 안부를 물으며 대화를 나누던 중 흘러가듯 목 여사가 생전에 천 시인 살던 옛집이 안타깝게도 재개발로 인해 철거되게 됐다고 소식을 전해주더군요. 그 말이 밤이 되도록 머릿속을 떠나지 않은 거예요." 긴 대화중에 나눴던 짧은 몇 마디지만 모씨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던 천 시인의 옛집 철거 소식은 결국 시골 오지마을에 천 시인의 옛집이 새둥지를 틀게 한 결정적인 원인이 된다. "당시 목 여사는 천 시인과 살던 집이 낡아 바로 옆집으로 이사를 한 상태였다. 전 국민에게 사랑받으며, 수십 년 동안 사람들의 입을 통해 자주 읽히는 문학작품을 펴낸 유명시인의 옛집이 재개발로 인해 세워질 아파트에 의해 헌신짝 같이 내팽겨 치워진다고 생각하니 피가 끓었다. 문득 '아~내가 책임져야겠구나' 라는 사명감을 느꼈다."  옛집 옮기기 위해 펜션 포기해 모씨는 결심이 서자 바로 의정부 천 시인의 옛집을 찾아 집 주인을 만나 2004년 당시 집값 120만원을 주고 구입한 후 철거해 지붕과 문틀 등 부자재를 가져와 복원했다. 천 시인의 옛집을 복원하기 위해 모씨는 펜션을 포기했다. 목 여사로부터 철거소식을 접하기 전, 모씨는 비교적 규모가 큰 펜션을 운영하기 위해 공사를 이어가고 있었다.   "펜션을 짓기 위해 허가 받은 토지가 있었다. 지금 운영하고 있는 것보다 좀 더 큰 규모로 펜션을 운영하려고 했는데, 천 시인의 옛집 철거 소식을 듣고 포기했다. 사실 생각보다 비용이 많이 들어 고민도 많이 했는데, 숙경씨가 오히려 용기를 주고 힘을 보태줘서 무사히 옮길 수 있었다." 아직도 연애할 때처럼 아내의 이름을 부르는 모씨는 천 시인의 옛집을 복원하기까지 아내의 역할이 상당했다고 한다. "숙경씨가 펜션짓는 사람한테 밥은 안해줘도 (옛집) 복원하는 사람들한테는 밥도 해주고 간식거리도 챙겨주는 등 신경을 많이 써줬다." 천 시인의 옛집이 복원되자 목 여사가 천 시인이 남기고 간 유품이라며 70여점의 그림, 사진 등을 기증했다. 또, 다른 문화․ 예술인도 모씨의 선행을 듣고 자신들의 작품을 기증하겠다는 소식이 뒤를 이었다. 결국 모씨는 당초 펜션을 지을 부지에 천 시인의 옛집을 옮기고 바로 옆에 문학관을 건립하는 등 작은 문화․예술 공간을 마련하게 됐다. ▲ '귀천'과 '안면송' 옛집의 방 한켠 벽에 걸려져 있는 천상병 시인의 대표적인 시 '귀천'. 태안군에서 자생하는 안면송 그림과 함께 액자로 만들어 있었다. ⓒ 정대희   옛 집 옮긴 후, '오해와 감동' 엇갈려... 허나 모씨는 생각지도 않던 고민거리가 생겼다. 천 시인의 옛집을 복원하고 나자 주변에서 "펜션장사를 위해 천 시인의 옛집을 옮겨와 이를 이용한다"는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사실 지금도 이런 소문에 맘이 아프고 가끔씩 고민도 하고 있다. 냉소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은 광고효과를 위해서가 아니면 누가 펜션 지을 토지에 아무런 연관도 없는 사람의 집을 옮겨 놓겠냐는 것이다. 당연히 주위에서 생각하기는 펜션 지어 여름철 찾아오는 관광객으로부터 수익을 얻는 것이 마땅한 일이지요." 그렇다면, 이들 부부가 5년째 옛집을 관리하고 있는 이유는 뭘까?  그건 바로 고인이 된 천상병 시인을 사랑하고 그를 찾는 사람들 때문이다. 모 씨는 아직도 생생하게 그 장면을 기억하고 있다며 감동적인 일화를 얘기해줬다. "몇 해 전 일겁니다. 하루는 천 시인 옛집에 내려갔는데 아주 오래된 구형 프라이드 한 대가 주차돼 있더군요. 너무 낡은 것지요. 누가 왔나? 하고 조심히 주변을 살펴보니 한 가족으로 보이는 아빠와 엄마 아이들 두 명이 눈에 띄더군요. 근데 떠나는 순간까지 그 가족에게 아는 체 할 수가 없었어요.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았거든요. 그 장면은 마치 영화속 한 장면 같았어요. 아빠와 아이들은 의자에 앉아있고 그들의 앞에서 엄마가 시낭독을 하는 아름다운 광경이었지요. 한참을 그 광경을 바라보면서 눈물이 흐를 뻔한 것을 간신히 참았어요."... "또 한번은 청주 어느 시골에서 택시를 타고 온 분이었는데, 택시비만 무려 26만원을 들여서 찾아왔다는 거예요. 그냥 천 시인의 옛집이 보고 싶어서...그래서 이렇게 초라해서 어떻게 하냐고 되물으니...그 분이 원래 이렇게 초라했잖아요. 만약 화려했다면 실망했을 거예요라고 하더군요. 이렇게 애정을 갖고 찾아오는 사람들 때문에 힘이 납니다. 이젠 오해하는 사람들에게도 이렇게 대답합니다. ㅡ'아무런 연고가 없기 때문에 이곳에 왔다고..." 그렇다면, 모씨가 기억하는 천상병 시인은 어떤 모습일까? 그는 "참 막걸리를 좋아하셨던 분이예요. 그리고 참 순박한 사람이었지요. 매일 '천원만 주게 막걸리 사먹게'라는 말을 많이 했어요. 그게 다 예요..."라고 말했다. 끝으로 앞으로 계획이 있냐고 묻자 "농사지어 번 돈으로 기념비를 세워 개관식을 하는 것이 꿈이다. 또한, 지금처럼 우리부부가 잘 관리해 나갈 수 있도록 응원해 주길 바란다. 허나 만약 정말 의미 있는 장소에 뜻 있는 분들이 이주를 희망한다면 언제든지 내줄 의향은 있다."고 말했다.   ▲ 모종인, 이숙경 부부 천상병 시인의 옛집을 지키고 있는 모종인, 이숙경 부부. "농사해 번 돈으로 비석을 세우는 날 개관식을 할 것이라고 한다." ⓒ 정대희   천상병 옛집은 현재 안면도에서 5대째 농사를 짓는 모종인씨가 평소 천상병 시인과 가깝게 지내던중 의정부 수락산 자락에 있는 옛집이 재개발로 인하여 철거된다는 소식을 목순옥여사에게 전해듣고 천상병 시인의 또다른 인연을 만들고자 안면도에 이전 복원하였다​ ​ ​ ​ ​귀천 ​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며는 ​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세상 소풍 끝내는날 가서,아름다왔더라고 말하리라​...... ​ ​ ​ ​대야도 해안을 따라 가다보면 만나는 시인의 섬 그곳에는 시인 천상병 옛집이 있습니다​ ​ ​ ​ 외롭고 쓸쓸하게 느껴지는 바닷가옆 그윽한 송림사이로 솔향은 은은하게..... 지금 비라도 내린다면 더욱 더 애절하게 다가올것만 ​ 같네요~ ​ ​ ​ ​오롯히 걸어보는 길에서 야트막한 오솔길을 오르면 청상병 옛집을 만나네요~~​ ​ ​ ​ ​시인 천상병 옛집 ​ 한눈에 들어오는 단아한 옛집 참,...수수하다,.. 단초로운 집한채 그리고 세월이 느껴지는 장독대 누군가가 심어놓아 예쁘게 피어난 꽃들​ ​ ​ ​ 시인 천상병 고택 ​ 단아한 집을 보니 고택보다는 옛집이 더 어울릴것 같습니다​ ​ ​ ​ 스레트 지붕과 회색의 콘크리트 벽면 한적한 시골길에서 만난 그런 평범한 집 같네요... 요새 시골에도 이런 작은집 보기 힘들죠! ​ ​ ​ ​ ​대문도 없이 지나가는 여행객이 이정표를 보고 가끔씩 들리기도 하지만 드라이브라면 그냥 지나치고 맙니다.... ​ ​ ​ ​아래에는 시인의 작은 갤러리가 있습니다 ​ ​ ​ ​ ​ ​부뚜막에는 작은 양은냄비와 큰 솥이 걸려있고,... 옛집을 통해 보지만 시인 천상병님의 수락산 기슭의 옛집도 이런 모습이였겠죠 ​ ​ ​ ​ 작은 창문이 열리면서 반갑게 맞아줄것 같은데 쓸쓸함이 느껴지는 공간입니다,... 인적이 없어서 더욱,...​ ​ ​삐그닥 소리를 내며 방문을 열고 잠시 시인의 흔적을 엿보려합니다 ​ ​ ​ ​ ​아주 작은방 ​ ​ ​ ​귀천 ​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며는 ​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세상 소풍 끝내는날 가서,아름다왔더라고 말하리라​...... ​ ​ ​ ​작은 창문,... 창문을 열면 송림사이로 낙수물 소리와 시원한 바람이 들어오겠죠 작은 창문사이로 따스한 햇살도,...​ ​ ​ ​ ​낮은 구조이지만 다락으로 연결된 사다리도 보입니다 ​ ​ ​ ​작은 책장 ​ ​ ​ ​그리고 시인의 흔적들 ​ 책을 보시고 이렇게 앉아 시도 쓰시고 하셨겠어요~~​ ​   ​ ​한낮의 별빛을 너는 보느냐 ​ 천상병​ ​ ​   ​ ​ 시인 천상병     ​ ​ ​방문을 열고 마당에서 시인이 주로 생활하신 그곳을 담아봅니다   ​ ​ ​이렇게 내려모면 안면도 대야도의 바다 풍경이 맞아주고 갯벌의 바람을 타고 송림사이로 스며들겠어요​ ​ ​ ​ ​아래 작은 갤러리에서 바라본 옛집 ​ ​ ​ ​쓸쓸한 이곳에 연이 찾아왔네요,... 그래서 조금은 외롭지 않다는...​ ​ ​ ​ ​ ​ ​천상병 ​ 1930년 1월29일 출생 시인겸 평론가 문단가 마지막 순수시인 문단의 마지막 기인으로 불렸으며,우주의 근원 죽음과 피안 인생의 비통한 현실등을 압축한 시를 씀 서울대 상대4년 중퇴하였으며 ​ ​ 마산중 5년때 담임 김춘수시인에 의해 '강물'로 등단후 1967년 윤이상등과 함께 동백림 사건에 연류되어 옥고를 치른후 생사를 몰라 1971년 가을 신봉승을 비롯한 문우들이 유고시집 '새'를 출간하기도 하였다. ​ ​ 고문옥고등의 휴유증으로 자식없이 지병인 강병변으로 1993년 4월28일에 별세하였으며 부인 문순옥여사도 2010년 8월26일 세상을 떠났는데 ​ ​ 목순옥은 1935년 상주출생으로 오빠 목순복시인의 친구인 천상병시인을 만나 1972년 5월14일 김동리선생의 주례로 결혼하였다 이후 1985년부터 인사동에 '귀천'카페를 운영하며 천상병시인의 곁을 지켰으며 ​ ​ 천상병시인의 작고후 지금껏 남편의 추모사업을 벌여 왔었다 시집 '주막에서' '요놈 요놈 요 이쁜놈'등과 산문집 '괜찬다 괜찮다 다 괜찮다​' 그림동화 '나는 할아버지다 요놈들아' 등이 있다 ​ [출처] [안면도 가볼만한곳] 시인의 섬 대야도 천상병시인의 옛집|작성자 푸른솔  
865    시인 김소월과 그 사랑의 궤적 댓글:  조회:7760  추천:0  2016-01-07
1924년 민족시인 김소월은 오랜 방황 끝에 고향 연변으로 돌아와 조부가 경영하는 광산일을 돌보면서 소일을 하고 있었다. 오랫만의 귀향이었지만 그동안의 실의와 좌절이 컸던 탓인지 마음의 안정을 찾기 힘들었다. 그래서 울적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여행도 하고 영변에 머물면서 마음을 안정시키고 있었다.  이 무렵 김소월은 설움과 애한(哀恨)의 민요적 정서가 깃든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를 비롯하여 ‘못잊어 생각나겠지요(제목은 思欲絶)’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등을 발표 하였고, 김동인(金東仁)·김찬영(金贊永)·임장화(林長和) 등과 ‘영대(靈臺)’ 동인으로 활동하여 자연과 인간의 영원한 거리를 보여준 ‘산유화(山有花)’를 비롯하여 ‘밭고랑’ ‘생(生)과 사(死)’ 등을 발표하였다. 김소월이 영변에 머물고 있을 때, 우연히 한 기녀를 만나게 된다. 이 기녀는 어릴 때 정신병을 앓던 아버지가 집을 나가 편모슬하에서 자랐다. 열 세살이 되었을 때 어머니는 개가할 밑천을 장만하려고 자식을 전라도 행상에게 팔았다.  전라도 행상에게 팔린 신세가 된 기녀는 이리저리 팔도를 떠돌게 된다. 팔도를 떠돌다 급기야는 남으로 홍콩, 북으로 따이렌, 텐진에 이르게 되었다. 기구한 운명이었다. 멀리 외국으로 떠돌다 어떻게 해서 평북 영변땅에 오게 됐고, 민족 시인 김소월을 만났던 것이다. 이 기녀가 바로 진주가 고향인 채란이다. 당시 진주는 관기 제도의 폐지로 교방도 따라 폐지되었고, 진주기녀들은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직업형태로 바꾸기 위해 기생 조합을 조직했다. 이 기생조합이 다시 권번(券番)으로 바뀌어 교방의 전통을 이어오고 있었다. 채란은 진주 권번에서 정식 가무를 익힌 기녀는 아닌 듯하다. 손님을 따라 떠도는 들병이(삼패기생)였다고 짐작된다. 13세때 전라도 행상에게 팔려 팔도를 떠돌면서 ‘뿌리없는 몸’으로 이리저리 팔려다니다가 춤과 노래를 익힌 것으로 짐작된다. 어린 나이에 고향을 떠나 홍콩, 중국 등지를 떠돌다 조선에 돌아와 고향과 천리나 떨어진 영변 땅에 도착한 채란은 고향 생각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멀리 남쪽 고향 진주땅을 바라보며 처연한 목소리로 노래 한 곡조를 부른다. 첫날에 길동무 만나기 쉬운가 가다가 만나서 길동무 되지요 날글다 말아라 家長님만 님이랴 오다 가다 만나도 정붓들면 님이지. 花紋席 돗자리 놋燭臺 그늘엔 七十年 苦樂을 다짐 둔 팔베개. 드나는 곁방의 미닫이 소리라 우리는 하룻밤 빌어얻은 발베개. 朝鮮의 강산아 네가 그리 좁더냐. 三千里 西道를 끝까지 왔노라. 三千里 西道를 내가 여기 왜 왔나 西浦의 사공님 날 실어다 주었소. 집 뒷山 솔밭에 버섯 따던 동무야 어느 뉘집 家門에 시집가서 사느냐. 嶺南의 晉州는 자라난 내故鄕 父母없는 故鄕이라우. 오늘은 하룻밤 단잠의 팔베개 來日은 相思의 거문고 베개라. 첫닭아 꼬꾸요 목놓지 말아라 품속에 있던 님 길차비 차릴라. 두루두루 살펴도 金剛 斷髮令 고갯길도 없는 몸 나는 어찌 하라우. 嶺南의 晋州는 자라난 내 故鄕 돌아갈 故鄕은 우리 님의 팔베개 진주기녀 채란이 고향을 생각하며 처연히 불렀던 ‘팔베개 노래’이다. 이때 김소월은 문득 담을 사이에 두고 골목길 저편에서 들려오는 슬프고 절절한 노래를 듣는다. 그리고 그 노래를 듣고 채록하여 ‘팔베개의 노래조(調)’라는 민요시를 지었다. 지금 전하는 것은 김소월의 시 밖에 없으므로 채란이 불렀던 노래는 정확이 알 수는 없으나 김소월의 시와 대동소이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화여대 이인화 교수는 “‘팔베개 노래’가 김소월의 붓에 의해 표현되었다 함은 온당한 말이 아닐지 모른다. 왜냐하면 김소월은 그의 창작 노트에서 이 팔베개 노래는 채란이가 부르던 노래니 내가 영변을 떠날 때를 빌어 채란에게 부탁하여 그녀의 손으로 직접 기록하여 가지고 돌아왔음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말은 액면 그대로 믿을 수 없다. ‘팔베개 노래’ 역시 김소월의 다른 창작시들과 마찬가지로 발표지면마다 개작과 첨삭을 거듭하여 내용이 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시‘팔베개 노래’의 원작에 해당하는 노래를 기생 채란이 불렀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일 것이다.”라고 해 팔베개의 노래가 채란이 불렀던 노래임을 강조하고 있다. 채란은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면서 한편으로는 반겨줄 사람도 없는 고향을 그리워 하고 있다. “집 뒷山 솔밭에/버섯 따던 동무야/어느 뉘집 家門에/시집가서 사느냐.//嶺南의 晉州는/자라난 내故鄕/父母없는/故鄕이라우.” 평범한 부모를 만나 고향에서 평범한 사내에게 시집가서 행복하게 살고 싶은 채란의 바람이 노래속에 녹아 있다.  하지만 현실은 어쩔 수 없었다. “嶺南의 晋州는/ 자라난 내 故鄕/돌아갈 故鄕은/우리 님의 팔베개” 고향이 있지만 돌아갈 수 없고, 오직 자신을 따뜻하게 해 줄수 있는 님의 팔베게만이 채란의 안식처가 될 수밖에 없었다. 진주 기녀 채란은 교방의 기녀도, 권번의 기녀도 아니다. 이리저리 떠도는 들병이 기녀에 불과하다. 하지만 천리땅 영변에서 그가 태어난 고향을 그리면서 부른 노래 곡조가 민족의 대시인이라고 불리는 김소월의 마음에 메아리 져서 아름다운 민요시로 재탄생이 되었다는 사실은 진주 기녀들의 또 다른 멋의 표현이 아닐까 생각을 해 본다.  ------------------------------------------- ...일본 도쿄 상대를 다니다 1923년 관동대지진의 참상을 겪고 도망치다시피 돌아와 술과 여자, 아편으로 점철하는 삶을 사는 소월, 그리고 영변의 어느 색주가의 떠돌이 기생 채란. 두 사람의 이야기는 1924년 진달래꽃 필 무렵으로부터 시작한다. 어디 한 곳 머무르지 못하고 떠돌 수밖에 없는 두 사람의 이야기는 서로의 팔베개에 의지하고 싶지만 사랑조차 하룻밤이면 무너져 내릴 것이기에 안타깝기만 하다... -------------------------------------------------------------------------- 김소월의 팔베개 노래調(조)  _     이러구러 제 돌이 왔구나. 지난 甲子(갑자)년 가을이러라. 내가 일찍이 일이 있어 영변읍에 갔을 때 내 성벽에 맞추어 성내 치고도 어떤 외따른 집을 찾아 묵고 있으려니 그곳에 한낱 친지도 없는지라, 할 수 없이 밤이면 秋夜長(추야장) 나그네방 찬자리에 갇히어 마주 보나니 잦는 듯한 등불이 그물러질까 겁나고, 하느니 생각은 근심되어 이리 뒤적 저리 뒤적 잠 못들어 할 제, 그 쓸쓸한 정경이 실로 견디어 지내기 어려웠을 레라. 다만 때때로 시멋없이 그늘진 뜰가를 혼자 두루 거닐고는 할 뿐이었노라.  그렇게 지나기를 며칠에 하루는 때도 짙어가는 초밤, 어둑한 네거리 잠자는 집들은 人氣(인기)가 끊였고 初生(초생)의 갈구리 달 재 넘어 걸렸으매 다만 이따금씩 지나는 한 두 사람의 발자취 소리가 고요한 골목길 시커먼 밤빛을 드둘출 뿐이러니 문득 隔墻(격장)에 가만히 부르는 노래 노래 淸怨悽絶(청원처절)하여 사뭇 오는 찬 서리 밤빛을 재촉하는 듯, 고요히 귀를 기울이매 그 歌詞(가사)됨이 새롭고도 질박함은 이른 봄의 지새는 새벽 적막한 床頭(상두)의 그늘진 화병에 芬芬(분분)하는 홍매꽃 한 가지일시 분명하고 律調(율조)의 高低(고저)와 斷續(단속)에 따르는 풍부한 풍정은 마치 泉石(천석)의 우멍구멍한 산길을 허방지방 오르내리는 듯한 감이 바이없지 않은지라, 꽤 사정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윽한 눈물에 옷깃 젖음을 깨닫지 못하게 하였을레라.  이윽고 그 한 밤은 더더구나 빨리도 자취없이 잃어진 그 노래의 여운이 외로운 베갯머리 귀밑을 울리는 듯하여 본래부터 꿈 많은 선잠도 슬픔에 지치도록 밤이 밝아 먼동이 훤하게 눈터 올 때에야 비로소 고달픈 내 눈을 잠시 붙였었노라.  두어 열흘 동안에 그 노래 주인과 熟眠(숙면)을 이루니 금년으로 하면 스물 하나. 당년에 갓 수물, 몸은 기생이었을레라.  하루는 그 妓女(기녀) 저녁에 찾아와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로 밤 보내던 끝에 말이 자기 신세에 미치매 잠깐 낯을 붉히고 하는 말이, 내 고향은 晋州(진주)요, 아버지는 정신 없는 사람 되어 간 곳을 모르고, 그러노라니 제 나이가 열 세 살에 어머니가 제 몸을 어떤 湖南行商(호남행상)에게 팔아 당신의 후살이 밑천을 삼으니 그로부터 뿌리 없는 한 몸이 靑樓(청루)에 零落(영락)하여 東漂西泊(동표서박)할 제 얼울 없는 종적이 남으로 門司(문사), 香港(향항)이며, 북으로 大連(대련), 天津(천진)에 花朝月夕(화조월석)의 눈물 궂은 생애가 예까지 구을러 온 지도 이미 반 년 가까이 되었노라 하며 하던 말끝을 미처 거듭지 못하고 걷잡지 못할 설움에 엎드러져 느껴가며 울었을러니. 이 마치 길이 자 한 치 날카로운 칼로 사나이 몸에 아홉 굽이 굵은 심장을 끊고 찌르는 애달픈 뜬 세상일의 한가지 본보기라고 할런가. 있다가 이윽고 밤이 깊어 돌아갈 즈음에 다시 이르되 妓名(기명)은 채란이라 하였더니라. 이 ‘팔베개 노래’調(조)는 채란이가 부르던 노래니 내가 영변을 떠날 臨時(임시)하여 빌어 그이 親手(친수)로서 기록하여 가지고 돌아왔음이라. 무슨 내가 이 노래를 가져 감히 諸大方家(제대방가)의 시적 안목을 욕되게 하고자 함도 아닐진댄 하물며 이맛 鄭聲魏音(정성위음)의 현란스러움으로써 예술의 神嚴(신엄)한 궁전에야 하마 그 문전에 첫 걸음을 건들어 놓아 보고자 하는 僭濫(참람)의 의사를 어찌 바늘끝만큼인들 염두에 둘 리 있으리오마는 역시 이 노래 야비한 세속의 浮輕(부경)의 일단을 稱道(칭도)함에 지나지 못한다는 비난에 마출지라도 나 또한 구태여 그에 대한 遁辭(둔사)도 하지 아니 하려니와, 그 이상 무엇이든지 사양없이 받으려 하나니, 다만 지금도 매양 내 잠 아니오는 긴 밤에와 나 홀로 거닐으는 감도는 들길에서 가만히 이 노래를 읊으면 스스로 금치 못할 가련한 느낌이 있음을 취하였을 뿐이라, 이에 그래도 내어 버리랴 버리지 못하고 이 노래를 세상에 전하노니 지금 이 자리에 그 옛날 일을 다시 한 번 끌어내어 생각하지 아니치 못하여 하노라.  이상의 글은 김소월의 것이다.  (읽어나가다 보면 잘 모를 수 있는 어휘에 대해 약간의 설명을 붙일 필요가 있어 보인다.  시멋없다: 때와 장소에 어울리는 멋이 없다. 隔墻(격장): 담 넘어, 淸怨悽絶(청원처절): 사무친 원망이 처절하다는 뜻, 斷續(단속): 끊어짐과 이어짐, 우멍구멍: 이리저리 터져있는 모습, 허방지방: 허겁지겁, 바이없다: 전혀 없다, 후살이: 여자가 再嫁(재가)해서 사는 것, 동표서박: 동으로 서로 떠돌아다님, 門司(문사): 중국의 샤먼, 香港(향항): 홍콩, 花朝月夕(화조월석): 아침에 피는 꽃과 저녁에 뜨는 달, 덧없는 기생의 삶을 일컬음, 諸大方家(제대방가): 각 방면의 여러 大家(대가), 鄭聲魏音(정성위음): 춘추 시대 정나라와 위나라의 음악이란 뜻으로서 지나치게 음란한 음악을 일컫는 말, 僭濫(참람): 격이나 분수에 맞지 않음, 浮輕(부경): 가볍고 경박함.)   김소월이 남긴 시중에 ‘팔베개 노래’라는 제목의 시가 있는데 이는 그가 지은 것이 아니라 우연히 만나 잠시 정을 맺었던 어느 기생의 노래가락이었음을 이 글은 밝히고 있다.  먼저 ‘팔베개 노래’라는 시부터 감상해보자.  첫날에 길 동무  만나기 쉬운가 가다가 만나서  길 동무 되지요. 날 끓다 말아라 家長(가장)님만 임이랴 오다가다 만나도 정 붙이면 임이지. 花紋席(화문석) 돗자리 녹燭臺(촉대) 그늘엔 칠십 년 고락을  다짐 둔 팔베개. 드나는 곁방의  미닫이 소리라 우리는 하룻밤  빌어 얻은 팔베개. 조선의 강산아 네가 그리 좁더냐 삼천리 서도를  끝까지 왔노라. 삼천리 서도를  내가 여기 왜 왔나 南浦(남포)의 사공님 날 실어다 주었소. 집 뒷산 솔밭에 버섯 따던 동무야 어느 뉘집 가문에 시집가서 사느냐. 嶺南(영남)의 진주는  자라난 내 고향 부모 없는  고향이라우. 오늘은 하룻밤 단잠의 팔베개 내일은 想思(상사)의 거문고 베개라. 첫닭아 꼬꾸요 목 놓지 말아라 품 속에 있던 임 길 차비 차릴라. 두루두루 살펴도 金剛(금강) 斷髮嶺(단발령) 고갯길도 없는 몸 나는 어찌하라우. 영남 진주는  내 태어난 고향 돌아갈 고향은 우리 임의 팔베개. (이 시 역시 약간의 어휘 설명이 필요하다.  끓다: 물이 끓고 식듯 변덕부림, 녹燭臺(촉대): 놋쇠로 만든 촛대, 斷髮嶺(단발령): 마의태자가 속세를 버리고 금강산으로 들어갈 당시 머리를 잘랐다는 고개.)  --------------------------------------------------- 호호당의 감상:  정처 없이 이리저리, 중국의 홍콩에서부터 요동반도의 대련에까지 팔려 다니면서 오늘은 이 남자 내일은 저 남자 품에 안겨야 하고 그로서 잠시 정을 붙였다 떼었다 해야 하는 기생 채란의 서글픈 심경을 나타내고 있는 시.  그래도 비교적 마음에 맞는 남자를 만나면 잠시라도 정을 붙이고 싶은 心思(심사)가 보인다, 누구는 팔자가 좋아 칠십 년 고락을 팔베개 베고서 기약할 수 있건만 스스로는 사람 분주하게 드나드는 곁방에서 잠시 만난 남자와 하룻밤 팔베개를 한다는 처지. 조선의 삼천리 강산을 좁다 하고 떠도는 것은 내 마음이 아니라, 남포의 뱃사공이 실어다 주었기 때문이라 변명해야 하는 심사가 참 그렇다.  마의태자야 금강산 경내에 들어서면서 세속의 미련을 떨치고자 머리를 잘랐다고 하지만, 그나마 나은 편, 스스로는 갈 곳이 정해져 있지도 않은 떠도는 몸이다.  어릴 적 같이 놀던 친구는 어느 집에 시집가서 잘 살고 있으려니 하는 마음, 그래도 스스로 역시 언젠가는 내 임을 만나서 팔베개 한 번 편히 베어보리라 하는 일말의 기대를 버리지 않고 살아가는 어린 기생의 마음이 이 팔베개 노래라 하겠다.  1902 년생인 김소월이 기생 채란을 만난 것이 1924 갑자년이니 그의 나이 만 스물 둘이었고 채란의 나이 만 열 아홉에 만났음을 알 수 있다.  만나게 된 경위에 대해 풀어나가는 소월의 문장은 이제 겨우 이십 대 초반임에도 불구하고 가히 大家(대가)의 격조를 보이고 있다는 생각이다. 중국 시문학의 情調(정조)를 충실이 이어받는 한편 우리 가락 고유의 정서 역시 지극히 잘 살려내고 있다. 흔히 김소월의 문학을 ‘恨(한)의 情調(정조)’라고 풀이하는데 이는 지나치게 소월의 문학을 좁게 평가하는 결과에 그친다는 생각이다. 김소월의 시는 쉽고 단순해보여서 그렇지, 그가 보여준 시의 律格(율격)은 그 이후 만해 한용운이나 해방 이후 미당 서정주로 이어지는 우리 시문학에 있어 그들보다 한결 더 높은 경지를 달리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 문학 중에서 20 세기를 통틀어서 이 ‘팔베개 노래調(조)’보다 더 아름답고 격조 높으며 심금을 울리는 산문을 나는 대해 본 적이 없다는 생각을 한다. 우리말의 고유한 리듬과 박자, 호흡의 斷續(단속)을 이처럼 구성지게 표현하고 있는 현대 산문을 그 어디에서 찾아볼 수 있을까 싶다.  김소월의 시는 세월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 높은 평가를 받게 되리라 확신한다.  이에 눈으로 읽기 보다는 조용하게라도 소리를 내어 읽어보시길 권하는 마음이다. 두 어번 낭독해보면 그 정서와 맛을 능히 알 수 있을 것이다.       ...몇 해 만에 선생님의 수적(手跡)을 뵈오니 감개 무량하옵니다. 그 후에 보내 주신 책 『망우초(忘憂草)』는 근심을 잊어 버리란 망우초이옵니까? 잊어 버리라는 망우초이옵니까? 잊자하는 망우초이옵니까? 저의 생각 같아서는, 이 마음 둘 데 없어 잊자 하니 망우초라고 불렀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옵니다. 저 구성(龜城) 와서 명년이면 10년이올시다. 10년도 이럭저럭 짧은 세월이란 모양이외다. 산촌에 와서 10년 있는 동안에 산천은 별로 변함이 없이 뵈여도, 인사(人事)는 아주 글러진 듯하옵니다.   (…중략…)   요전 호(號) 에 이러한 절귀가 있어서   生也一片浮雲起[생야일편부운기] 死也一片浮雲滅[사야일편부운멸] 浮雲自體本無質[부운자체본무질] 生死去如亦如是[생사거여역여시]   라 하였아옵니다. 저 지금 이렇게 생각하옵니다. 초조하지 말자고, 초조하지 말자고,   (…중략…)   자고이래(自古以來)로 중추명월(仲秋明月)을 일컬어 왔읍니다. 오늘밤 창 밖에 달빛(月色) 옛소설에 어느 여자 다리(橋) 난간에 기대여 있어, 흐느껴 울며 또 죽음의 유혹에 박행한 신세를 소스라지게도 울던 그 달빛, 그 월색(月色), 월색이 백주(白晝)와 지지 않게 밝사옵니다. *이 편지는 1934년 번역작품집 [망우초]가 간행된 이후,  김소월이 스승인 김억에게 전해진 편지입니다. *이 편지는 [素月[소월]의 追憶[추억]](김억) 중에 인용돼 있음.   한성도서주식회사에서 발행된 1934년 번역시집 [망우초] 소월 문광부 복원초상(문화관광부에서 복원한 소월의 초상) [김소월 시선집](1955년 북한에서 출판된 소월시선집의 표지) [망우초](호화판 역시집, 1943.8.1, 김억의 역시집)   [출처] 안서 김억 선생님에게(시인 김소월이 스승 김억에게 쓴 편지)|작성자 독서캠페인 미쳐야만 보이는 것들 ― 구자룡 컬렉션 의 경우         Ⅰ 무엇엔가 미친다는 것      1992년 어느 날. 월북작가인 이태준의 작품을 텍스트로 박사학위 논문을 준비하느라 작가의 고향인 철원을 헤매고 청계천 헌책방을 뒤질 때의 일이다.    북한의 한 고철수집소에서 이태준을 만났다. 사진으로만 봤던 얼굴 그대로였다. ‘상허 선생이 아니십니까’하는 인사에 빙긋이 웃으며 내 손을 잡은 그의 얼굴은 90 노인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의 소설을 연구하며 궁금했던 점을 몇 가지를 물었지만 그는 아무 말도 없이 연신 담배만 피워댔다. 그리고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던가……. 일하러 가야 한다며 일어서는 그가 다시 내 손을 잡았다. 그의 손을 잡은 내 손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잠에서 깼다. 꿈이었다. 꿈속에서 상허 이태준 선생을 만난 것이다.    마침, 한국전쟁 직후 남로당의 몰락과 함께 비판을 받은 상허 이태준이 숙청되어 함경도 어디론가 파쇄공으로 쫓겨갔다는, 어느 탈북자의 증언을 잡지에서 읽은 직후였다. 그렇기에 꿈속에서 고철수집소에 있는 그를 만났을 것이다. 연구를 하다 보니 그의 사진을 봤고, 그런 이미지가 꿈속에 그대로 나타났으리라.    동료 연구자들과 한담 중에 그런 이야기를 했더니 모두들 나를 ‘이태준에 미쳤다’고 했다. 맞다. 그때 분명 미쳤었다. 이태준이라는 작가에 미쳐 있었다. 미쳐 있으니 꿈속에 그가 나타나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그렇게 미친 덕에 이듬해 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을 수 있었다.      20여 년 전에 내가 경험한 ‘미친’ 모습을 이번에 다시 만났다. ‘구자룡 컬렉션 김정식 시인 80주기 추모집’이란 부제가 붙은, 이라는 책이 바로 그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책은 시인 김소월 그리고 그의 시에 미치지 않고서는 결코 만들어내지 못할 자료집이다. 내가 이태준에 미친 3년의 결과가 박사학위 논문이었는 데에 비해, 구자룡 시인의 60년 미친 결과는 어떠하겠는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문학을 알고 그리고 김소월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Ⅱ 시인 구자룡과 김소월 컬렉션      의 엮은이, 즉 김소월 컬렉터인 구자룡이 누구인가.    일찍이 정한모의 추천으로 등단한 그는 중·교교 국어교사로 30년을 재직하면서 시집 를 비롯한 25권의 시집과 여섯 권의 수필집, 동화 혹은 문학연구서 십여 권을 집필했고 일흔이 넘은 요즘도 여전히 왕성한 활동을 하는 시인이다. 20여 년 전, 국어교사로 재직할 당시 부천 지역의 여러 문인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오늘날의 ‘복사골문학회’를 만든 장본인이자, 부천의 문학 그리고 문화예술 분야 여러 모임에서 중추적 역할을 하고 있는, 경기도 특히 부천시에서는 자타가 공인하는 ‘부천 문학의 대부’이다. 부천이 고향은 아니지만 그만큼 부천을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이 있을까.    그는 부천이 자랑하는 시인 수주 변영로를 기념하는 여러 사업을 주도하고 있는가 하면, 잡지 창간호 수집부터 시작하여 그간 장서 5만여 권을 모아 ‘부천문학도서관’까지 운영하고 있다.    그런 그가 김소월 컬렉션을 출간했다. ‘컬렉션’이란 부제가 말해주듯 이 책은 연구서나 작품집이 아니라 말 그대로 김소월과 관련된 온갖 자료를 모아 소개하는 책이다. ​ 사진1 - 구자룡 컬렉션, 김정식 시인 80주기 추모집 표지      책의 머리글에서 구 시인은 김소월과의 인연을 소개하고 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숙제를 하기 위해 김소월의 작품인지도 모르고 베껴간 일, 그런 그를 오히려 칭찬하고 격려해 준 담임 선생, 대학시절 1학년생의 개인 시화전에 ‘죽은 김소월이 돌아온 것 같다’는 혹평을 해 준 영문학 교수, 그 후 우연히 접하게 된 소월의 후손에 관한 잡지 기사 등이 바로 구 시인을 김소월에게 연결시켜 준 필연 같은 사건들이었단다.    그렇게 시작한 소월 시집 모으기가 단순한 시집만이 아니라, 소월 시를 수록한 학교 교재들로 넓혀졌고, 나아가 소월이란 이름 혹은 소월의 시 한 구절이 등장하는 온갖 물품으로까지 확대되었다. 시집, 소설집, 문예지, 잡지, 초중고 교과서, 대학교재, 신문, 음반, 영화포스터, 행사 현수막, 하다못해 소월 시 한 구절이 적힌 우산에 이르기까지……    381쪽에 이르는 이 자료집을 보고 있노라면 이태준을 연구하며 ‘미쳤다’는 소리를 듣던 필자의 경우는 참으로 하찮은 것으로 생각된다. 그만큼 구 시인은 김소월에 미쳤다고 할 수 있다. 미치지 않고서야 이 많은, 다양한 자료들을 어찌 구하겠는가.      구 시인이 대상으로 삼은 김소월이 누구인지를 설명하는 것은 사족이 될 것이다. 그만큼 정상적인 학교교육을 받은 한국인이라면 김소월을 모르는 이는 없다. 지금 이 시각에도 대학 연구실에서는 그의 생애와 시 작품을 연구하고 있다. 그러나 그와 관련된 자료들이 제대로 모아져 있을까. 그렇지 않다.    그렇기에 학술적으로 김소월과 그의 시를 연구하는 학자의 눈에는 뜨이지 않을, 단순히 취미로 책을 모으는 수집가의 안목으로는 도저히 알아낼 수 없는 자료의 오류까지…… 두꺼운 안경 넘어 그의 눈은 놓치지 않았다. 아무리 김소월이란 시인을 알고 그의 시를 달달 외운다한들 고서점을 뒤지며 어찌 책 속에 숨어 있는, 두꺼운 책 어느 한 쪽에 수록된 그의 이름과 시를 찾아낸단 말인가.    더구나 구 시인은 아날로그 세대이다. 그렇기에 인터넷의 검색 기능을 사용할 줄 모른다. 오로지 발로 찾아낸 것들이다. 그러니 미치지 않고서는 결코 볼 수 없는 것들이지만 미쳤기에, 미쳐도 단단히 미쳤기에 그의 눈이 찾아낸 것이리라.     Ⅲ 의 구성      이제 자료집 안으로 들어가 보자.    본격적인 자료를 제시하기 전에 우선 구 시인은 자료집의 첫머리에 김소월의 뿌리를 밝힌다. 바로 소월의 족보이다.         사진2 - 김소월 가계도      에 따르면 김소월은 곽산파의 19대 손이다. 김소월 자료집을 묶으며 이런 뿌리를 먼저 제시하는 구 시인의 의도가 참 멋지다. 어느 날 툭, 하고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 엄연히 한국인으로서 뿌리가 있는, 역사적 실존 인물임을 말하는 것이리라. 참으로 진지한 접근이다.    다음으로 서울 남산에 있는 소월시비 사진을 제시한 후, 소월이 스승 김억에게 보냈다는 친필 편지를 수록하고, 2012년에 관광문화예술 관련 학부 명칭을 으로 바꾼 배재대학교의 홈페이지 사진을 소개해 놓았다.    네 점의 자료 사진 배열만으로도 자료를 대하는 구 시인의 자세가 보인다. 과거를 기반으로 현재를 설명하고 이를 발판으로 삼아 내일을 설계하려는 것이 아니겠는가.   1. 전체 4부와 부록으로 구성된 에는, 자료목록에 따르면 1,210 점의 김소월 관련 자료가 사진으로 묶여 있다. 말이 1,210 점이지 그 이면에 숨어 있는 것들까지 하나하나 다 포함한다면 1,500여 점이 훌쩍 넘을 것이다.      자료집의 제1부 ‘산에는 꽃 피네 꽃이 피네’에는 1925년부터 2014년까지 간행된 의 이본(異本)과 시감상집, 연구서, 산문집 등 총 600 종의 자료가 수록되어 있다. 김소월이란 시인의 이름 혹은 그의 시 제목이 책 제목이 된 것들이다. 따라서 그간 간행된 김소월 시집의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다.    그런데 처음에 제시한 자료가 김소월의 첫 작품, 흔히 말하는 데뷔작이 아니다. 그렇다고 첫 시집도 아니다. 듣도보도 못한 시 한 편이 실려 있다.         사진3 ― 박귀송 작         김소월추도시(金素月追悼詩)   내 오래간만에 조선에 와 불현 듯 그대의 죽음을 듣다.― 그대 나를 모르고, 내 그대를 아다. 아아 그러나 내 그대의 얼골을 모르노라.   아아 三十年前, 이 땅에 봄빛이와서 그대 꽃동산에 뚜렷이 태여낫엇고 아아 三十年後, 이땅에 가을이와서 그대 落葉우에 외로히 돌아갓도다.   영원히 그대는 가다. 아아 그러나, ―그대 오히려 世上에 잇어 이나라의 를 듣고, 을 보고, 아름다운 이나라의 색이 될진저.   내 그대를 못잊어, 고요히 그대의 詩를 읊어보다.   ​    1935년 1월 27일자 에 실린 이 시는, 평양 출신의 일본 유학생으로만 알려진 박귀송의 작품이다. 그런데 이제까지 김소월 작가론이나 작품론 어느 글에서도 소개된 적이 없는 작품이다. 문예미학적 가치를 차치하고라도 우선 당시 소월을 추모한 시가 있었다는 것 자체가 놀랍다. 게다가 소월시 연구자들에게도 생소한, 이런 시를 발굴해 낸 구 시인의 꼼꼼함에 박수를 보내게 된다.    사실 이 시 한 편만으로도, 아니 사진 한 장만으로도 문예지의 한 꼭지를 장식할 기사이다. 여기에 구 시인이 알고 있을 설명이 붙는다면 학계에 ‘새로운 자료 발굴’을 알리는 깜짝 놀랄 글이 될 수도 있다. 그런데 구 시인은 그런 허명을 구하지 않는다. 그저 묵묵히 자료를 발굴하고 수집하여 이렇게 조용히 한데 묶어 세상에 내놓는 것이다. ​    이어 시집 의 초판, 신문에 실린 시집 광고, 영인본으로만 볼 수 있다는 1925년판 , 시집 와 잡지의 광고, 1939년판 등 해방 전에 출간된 김소월의 시집들이 연대순으로 소개된다. 또한 김소월의 시 작품이 수록된 여러 시집, 예컨대 1926년의 , 1936년의 , 1938년의 …… 등이 그것들이다. 눈길을 끄는 것은 해방 후 처음으로 김소월의 시가 수록된 교과서이다.   사진4 ― 김소월의 시가 처음으로 수록된 교과서. 1948년      1948년 1월 20일 조선교학도서에서 발행한 중학교 1학년 국어교과서 가 바로 그것이다. 이 교과서에 김소월의 시 가 수록되어 있단다.      이 1부에는 재미있는 자료도 있다. 1950년 2월 1일에 숭문사에서 을 발간하는데,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이듬해인 1951년에도 이 시집을 계속 간행했다.          사진5 ― 1951년 3월 5일에 발간된 숭문사 판      전쟁 중에 발간된 의 판권에는 ‘군검열필(軍檢閱畢)’이란 글이 인쇄되어 있다. 바로 전쟁 중이었기에 군이 출판물까지 검열을 했다는 증거 자료가 된다.    더욱 흥미를 끄는 것은 이 시집은 후에 또 출간을 하면서 판권의 인쇄와 발행일이 잘못 인쇄되었다는 사실이다. 즉 인쇄일은 4284년 11월 19일(필자 주 - 檀紀이다)인데 발행일은 4287년 11월 21일로 인쇄되어 있는 것이다. 정확한 발행연도가 4284년인지 아니면 4287년인지는 모르나(필자 생각에는 4287년-1954년이 맞을 것 같다. 왜냐하면 4284년이 정확한 것이라면 서기 1951년 11월이고 이 때에는 위의 자료와 마찬가지로 ‘군검열필’이 있어야 한다.) 이런 오자 탈자까지 이 자료집은 보여주고 있다. 이와 유사한 것이 1955년에 발행한 정음사판 인데 여기에는 발행연도 1955년에서 5 글자 하나가 빠진 채 195년 인쇄한 것으로 표기되어 있다.    계속해서 1부에서는 시집 제목과 판권내용이 일치하지 않는 시집, 소월의 아들 판권인지가 붙은 시집에 이어 정비석의 소설 책 표지가 소개된다. ​ 사진6 ― 정비석의 소설 가 연재되었던 잡지 의 표지(우)와 소설 표지(좌)      1950년대 후반 대중적 사랑을 많이 받고 있던 소설가 정비석은 으로부터 연재소설 집필을 부탁받는데 마침 새로 출간된 김소월의 시집을 받은 때였단다. 소설의 소재를 찾던 그는 소월의 시 를 읽고는 대학교수와 여학생 제자 둘의 삼각관계를 생각해 내고, 그들이 서로 주고받았던 연애편지에 소월의 시를 여러 차례 인용한다. 연재소설은 독자들에게 큰 반향을 불러왔고, 이 소설은 단행본으로 출간됨과 동시에 영화화까지 기획되었단다. 당시의 사회 통념과 맞물려 교수와 제자의 불륜이 소재가 된 이 소설은 영화로 만들어지기까지 여러 난관에 부딪혔지만, 결국 1957년에 영화로 만들어져 많은 관객을 불러왔다고 한다. ​    여기에 수록된 소월시집 자료들을 보면 1950년대부터 70년대에 이르는 우리 출판계의 사정까지 알아낼 수 있다. 잘 팔리는 책이라면 동일한 내용임에도 표지만 바꾸거나 아니면 시집 제목만 바꾸어 재출판하는 경우가 여러 차례 목격된다. 게다가 문을 닫게 된 출판사가 시집의 판형을 넘겨 제목과 내용 그리고 판형까지 동일한 시집이 출판사 이름만 바뀌어 출간된 예도 있다.   사진7 ― 1966년 혜명출판사에서 발행한 동일한 내용에 다른 제목의 시집      그만큼 당대 독서대중들에게 김소월이란 시인이 팔렸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사실은 그만큼 우리 출판계가 열악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것은 소월시집의 99%가 저자 혹은 판권자의 인지도 없는 무단복제품이라는 사실이 증명해 준다.   2. 자료집의 2부 첫머리에서 구 시인은 이렇게 토로한다.      어느 책인들 김소월의 작품과 이야기가 없을까마는 그래도 책 속에 숨어있는 소월을 찾아내기는 그리 쉽지 않다. 한 권의 시집 분량을 묶을 만한 편 수가 숨어있는 경우도 있는가 하면, 달랑 한 편이 숨어 있는 경우도 있다. 열 편이든 한 편이든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책 속에 담긴 소월의 시는 우리 마음속에 반짝이는 금모래빛이다. 지금도 인터넷에서는 하루가 멀다하고 소월시를 찾는 사람들이 많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래서 구 시인은 2부의 소제목을 ‘뜰에는 반짝이는 금모래 빛’이라 했는지 모른다. 2부에는 독서대중들이 쉽게 만날 수 있는 책 속에 숨어 있는 김소월의 시와 소월의 시세계를 풀어낸 글이 수록된 200여 점의 자료가 실려있다.    1950년 정음사에서 출간한 , 1952년 향음사에서 출간한 부터 시작하여 6, 7, 8, 90년대를 거쳐 2014년에 출간된 까지의 여러 시집과 시 감상 해설서에 연구서들. 그것뿐이 아니다. 1984년부터 1992년에 이르기까지 소명여중 학생들이 자필로 베낀 소월시가 포함된 작은 시집들까지 자료로 묶여 있다.    이들 자료들을 보고 있노라면 2부 첫머리에 제시한 구 시인의 말이 떠오른다. 이렇게 많은 책들 속에서 어떻게 소월의 시 혹은 소월의 시를 해설한 글들을 다 찾아냈을까, 하는 의구심이다. 물론 책의 목차를 보면 수록된 시와 글의 제목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구 시인이 찾아낸 자료들은 단순히 목차에 나오는 소월만이 아니다. 긴 해설의 어느 부분에 인용된 소월의 시까지 찾아냈다. 그러니 ‘열 편이든 한 편이든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구 시인이 찾아낸 책 속에 담긴 소월의 시는 바로 ‘우리 마음속에 반짝이는 금모래빛’이라 당당하게 말하는 것이다.      2부 첫장에 이런 자료가 수록되어 있다.    사진8 ― 1959년 출간된 잡지 표지      1959년 7월 국제문화사에서 창간한 잡지 의 표지 사진이다. 우선 ‘진달래’가 눈에 들어와 김소월의 시 제목을 사용했기에 김소월 자료로 분류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잡지의 내용을 보면 김동리와 박목월의 글이 수록되어 있는데 바로 그 글에서 소월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란다. 잡지 창간호를 수집한 구 시인이 아니라면 찾아내기 힘든 김소월 자료일 것이다.    2부에서 소개하고 있는 자료들은 대부분이 이런 것들이다. 시 한 편, 시 한 구절 혹은 소월시의 어휘 몇 개가 포함되어 있는 글을 찾아내 그 책의 표지를 소개하고 있다. ​    그런 자료들 중 압권은 박목월의 짧은 글이다.      1958년 1월 20일 범조사에서 출간한 박목월 감상집 에는 ‘생활(生活)의 시상(詩想)’이란 묶음이 있는데, 여기에 란 박목월의 짧은 글이 실려 있다.   素月의 詩   素月의 詩는 눈물겨웁다. 그러나, 素月은 눈물겨운 人間이 아니었으리라. 冷酷한 人間 안에 번지는 눈물, 그것만이 눈물겨운 것이기 때문에.      이 글의 경우, 이 글이 수록된 묶음이나 책의 제목 어디에도 ‘소월’을 찾을 수 없다. 그럼에도 구 시인은 이런 자료를 찾아 소개한다. 더구나 이제껏 소월을 소재로 한 어느 글에서도 소개되지 않은, 구 시인이 발굴한 자료이다. 이런 자료들은 또 어떠한가.   사진9 ― 대입예비고사 수험서와 각 대학 입시 문제      1969년 선명문화사에서 출간된 대학입학 예비고사 수험서 이다. 이 책 28쪽에 기출문제로 61년 서울대, 63년 연대, 64, 69년 이화여대에서 출제한 문제들을 소개하고 있다. 물론 소월 시와 관련한 국어문제들이다.    이는 국어교사 출신이 아니었다면 쉽게 생각지 못할 소월시 자료이다. 사실 구 시인이 수집한 중·교교 국어과목 학습용 소월시 문제들은 이것만이 아니다. 예비고사, 본고사, 학력고사, 수학능력시험까지 혹은 어느 중·고교의 중간·기말고사에 이르기까지 소월시와 관련된 문제들은 보이는 대로 모아온 구 시인이다.   3. 자료집의 3부는 ‘그립다 말을 할까 하니 그리워’란 부제를 달고 초중고 교과서, 대학교재, 문학지에 수록된 소월시와 소월시 감상 또는 해설과 평론, 그리고 소월문학상, 소월청소년문학상, 소월 청소년 시화전 수상 작품집을 수록하고 있다.    3부 첫머리에서 구 시인은 한탄을 하고 있다. ‘대학수능 시험에 나오지 않는다고 김소월을 모르는 이 시대의 아이들을 보면 현기증이 나는 이유는 무엇일까?’하고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것이다.   사진10, 11 ― 소월시를 수록하고 있는 중고교 교과서(위)와 대학 교재(아래)      그렇다. 대학입학시험이 종합적 사고력을 판단하겠다는 수학능력시험으로 바뀌면서 중고교 국어 혹은 문학 교과서에 소월의 시가 수록되는 횟수가 점차 줄더니 7차교육과정 이후 수시로 개편되면서는 이제 더욱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그러니 요즘 아이들은 소월을 모르고 자란다.    물론 소월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는 법은 없다. 그러나 한국의 현대문학을 논하는 자리 특히 현대시를 설명하며 어찌 소월을 빼고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렇게 중요한 문학사, 현대시사에서 차지하는 위치가 확고한 시인을 모른다? 결국 문화자본이 부족한 사람이 되고 마는 것이다.   4. 자료집의 4부는 ‘당신은 무슨 일로 그리합니까’란 부제를 달고 있다. 여기에는 문학 외에 영화, 연극, 음악, 미술, 가요, 가곡, 시낭송 등 각종 행사에 나타난 소월의 문학세계와 그 밖의 삶의 자료들을 소개하고 있다.   사진12 ― 소월시를 소재로 한 각종 영화 포스터들      눈에 들어오는 것이 영화 포스터이다. 김소월의 전기를 바탕으로 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소월이 쓴 소설을 각색한 것도 아니다. 그저 소월의 시 한 편, 아니 시 한 구절이 이야기를 만들어 내고 그것이 다시 영화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만큼 소월의 시는 우리 문화 깊이 깃들어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1957, 1962, 1964년에 제작되어 개봉한 영화의 포스터를 어디서 구했을까. 그 시절부터 영화 포스터를 모은 것도 아니다. 더 놀라운 것은 중국에서 있었다는 ‘김소월 시 낭송회’ 현수막과 사진까지 소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구 시인의 활동 범위가 이제 국제적이다.    그런가 하면, 언론에 보도된 소월 관련 기사, 광고 문구에 사용된 소월시의 한 구절, 이발소에 걸린 그림, 소월관련 행사의 현수막, 소월시 구절이 인쇄된 책갈피, LP판, 녹음테이프, 씨디 자켓 등 그 종류 또한 다양하다. 참 시시하고 소소한 것들이지만 김소월과 다 연결되는 물품들이다.    이런 자료들을 보고 있노라면 우리 문화가 아니라 우리 생활 깊숙이 들어와 있는 김소월을 만나게 된다. 평소에 모르고 그냥 지나쳤던 것을, 새삼 ‘아, 그랬구나!’하고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5. 자료집의 부록으로는 수록한 모든 자료 그리고 책의 발간과는 별도로 11월 14일 부천시청역 전시실에 전시할 자료 총 목록을 조목조목, 시시콜콜 정리해 제시하고 있다. 목록만으로는 정확하게 1,210점. 그러나 앞에서 말했듯이 그 이면에는 더 많은 자료들이 목록 없이 전시될 것이다. 예를 들어 예비고사나 학력고사 시절 출제된 입시문제나 문제집의 자료들은 그 양에 비해 자료집에 사진 한 장만 소개되어 있다. 그러니 사진으로 소개하지 않은 자료들이 얼마나 많겠는가. 실로 놀라울 뿐이다.      사실 그간 김소월과 소월시를 텍스트로 하는 연구논문, 연구서 등은 수없이 출간되었다. 그러나 이 은 앞에서도 밝혔듯이 시론이나 해설서가 아니다. 오로지 김소월과 소월시와 관련된 자료들을 제시할 뿐이다. 따라서 서지학적으로는 김소월과 소월시와 관련한 최초의 자료집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커다란 의미를 담고 있는 이 자료집을 보며 아쉬운 것이 한 가지 있다. 소월과 관련된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종심(從心)의 구 시인이 마치 지학(志學)의 소년처럼 해맑아진 얼굴로 침을 튀겨가며 흥을 돋우며 해주던 설명이 없다는 점이다. 자료의 소개만 간단하게 제시되어 있고, 그 이면에 들어 있을, 구 시인이 들려주던 재미있는 이야기는 생략된 것이다. 구 시인을 알고 있고, 그와 소월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던 사람이라면 ‘아, 이게 그 자료구나!’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런 설명 없이 제시된 사진자료만으로는 자료를 수집하며 느꼈을 구 시인의 재미를 그리고 흥분을 독자는 알 수가 없다.    다행인 것은 2014년 11월 14일부터 7호선 전철 부천시청역 갤러리에서 구자룡 컬렉션 가 열리며 자료 1000여 점이 전시된단다. 그리고 2차 작업으로 내년쯤에 이 자료들을 자세하게 설명하는 해설서를 준비하고 있단다. 그렇게만 된다면 어렵게 수집한 귀한 자료들이 더 빛을 발할 것이리라 기대한다. ​ Ⅳ 미쳐야만 보이는 것들      ‘구자룡 컬렉션 김정식 시인 80주기 추모집’인, 을 덮으며 문득 눈에 뜨인 것이 있었다. 바로 판권에 붙어 있는 인지이다.   사진13 ― 의 판권표시. 사진은 100번째 책이다.      판권을 나타내는 인지로 엮은이의 도장에 일련번호가 붙어 있다. 내용인 즉, 500부 한정판으로 출판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한 권 한 권의 책에 일련번호를 넣어 소장가치를 높이고자 했단다.    엮은이 구자룡 시인의 의도가 참 반갑다. 김소월과 소월시를 좋아한 것을 넘어 그렇게 모은 자료를 묶은 자료집까지도 귀하게 여기는 구 시인의 마음일 것이다. 이런 책, 이런 자료집 한 권쯤 소유하고픈 욕망이 생기지 않을까.      어느 고전음악 평론가가 이런 말을 했다.      고전음악을 처음 듣는 사람들은 대부분 베토벤에 매료된다. 그러다가 어느 정도 귀가 뚫리면 베토벤은 시시해진다. 좀 더 심오하고 오묘한 곡들을 찾아 들으면서는 정말이지 베토벤의 교향곡은 유행가 가락쯤으로 여긴다. 그러나 헨델, 하이든, 슈베르트, 쇼팽, 차이코프스키, 브라암스……를 듣다가 결국에는 다시 베토벤을 들으며 ‘맞아. 이게 클래식이야.’라 외친다. 클래식 - 그 처음과 끝은 베토벤이다.      그만큼 베토벤의 위대함을 역설한 말이지만 그의 말에서 베토벤 대신 김소월의 이름을 넣어 한국의 현대시를 설명할 수 있다. 문학 소년소녀 시절, 떨어지는 낙엽에 가슴 아파하고, 부는 바람에도 가슴 설레던 시절, 김소월을 읽으며 문학을 접하고 시인을 꿈꾼다. 그렇게 시작한 문학은 좀 더 어려운 작품, 심오한 뜻이 담긴 시를 찾게 만든다. 이상(李箱)의 난해한 시를 읽으며 김소월을 폄하하고, 정지용, 김기림, 서정주, 김춘수……의 시를 읽다가 결국 다시 김소월로 돌아온다. 한국의 현대시 - 그 처음과 끝은 김소월이라 할 수 있다.      그런 김소월과 관련된 자료들을 우리는 얼마나 체계적이고 종합적으로 모아두고 후손들에게 보여주고 들려주고 있을까. 어느 도서관에서 어느 기념관에서 구자룡 컬렉션 만한 소월 관련 자료를 갖추고 있을까.    알다시피 구자룡은 문학연구가가 아니다. 서지학자는 더더구나 아니다. 그런데 시인 구자룡이 어느 도서관 어느 기념관에서도 하지 못한 자료들을 모아두었다. 오로지 김소월과의 인연만으로, 김소월이 좋아, 소월시가 좋아 시작한 자료수집은 문학연구가나 서지학자의 영역을 훌쩍 넘어 ‘김소월학’이라 해도 좋을 체계적인 자료집 발간으로까지 이어졌다. 이러한 일은 미치지 않고는 결코 이루어낼 수 없는 작업이다.      그렇기에 필자는 시인 구자룡은 미쳤다고 단언하는 것이다.    분명 시인 구자룡은 미쳤다.    김소월이란 시인에 미쳤고, 소월시에 미쳤다.    미쳐도 참 단단히 미쳤다.    그런데, 그렇게 김소월에 미친 그의 모습이 참 아름답지 않은가.♣      死의 유혹… 스승 김억에게 유서 “三水甲山 내 왜 왓노”  문학은 문자에 의한 언어적 집적물 이전에 인간학의 또 다른 영역이다. 그래서 문학사는 우리와 똑같은 피와 살을 가진 사람들의 자취이기도 하다. 그 자취는 풍문이나 이설로 떠돌게 마련이어서 결정 불가능한 경우가 허다하다. 이제 시시비비를 가릴 주체가 사라지고 없는 게 아쉽지만 바로 그렇기에 여전히 논쟁적이다. 한 몸으로 두 세기를 살아가는 실감의 처지에서 20세기 한국문학사의 논쟁적인 풍경 속으로 들어가 본다. 한국현대시사의 터주 시인 소월(素月) 김정식(金廷湜·1902∼1934)의 사인(死因)은 국내 연구자들 사이에서 자살과 병사(病死)로 갈려 있다. 소월은 평북 구성군 서산면 평지동 자택에서 1934년 12월 24일 오전 숨을 거뒀다. 당시 언론들은 소월 사망소식을 앞다퉈 전한다.   “방현(方峴)-일찍이 ‘진달래꽃’이라는 시집을 발행하여 우리 시단에 이채를 나타내든 재질이 비상 튼 청년 시인 소월 김정식씨는 그동안 침묵으로 일관하던 바 지난 24일 아침에 뇌일혈로 급작히 별세하여 유족들의 애통하는 모양은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눈물을 금치 못하게 하였다.”(1934년 12월 27일자 조선일보) 3일 뒤인 12월 30일자로 ‘민요시인 소월 김정식 돌연 별세’(조선중앙일보), ‘민요시인 김소월 별세 33세를 일기(一期)로’(동아일보) 등이 이어지고 있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소월의 오산학교 은사인 안서 김억(1895∼1950?)은 1935년 1월 22∼26일에 걸쳐 조선중앙일보에 ‘요절한 박행(薄倖)시인 김소월에 대한 추억’이라는 글을 기고한다. “언제든지 素月(소월)이의 생사에 對(대)하야 이야기하든 것을 생각하면 그의 夭折(요절)은 楮多病(저다병)의 그것이라기보다도 夭折(요절)을 意味(의미)하는 무슨 전조가 아니엇든가 하는 생각도 업지 아니하외다.”  이를 근거로 문학평론가 김윤식은 1987년 ‘저다병’을 각기병(脚氣病)이라고 해석했다. ‘저다(楮多)’라는 병명이 일종의 수족병(手足病)을 일컫는 우리말 ‘저다’에서 왔으며 수족병이란 요샛말로 팔다리가 퉁퉁 붓는 일종의 각기병 증세로, 심하면 죽음에 이를 수 있다고 보았다.   김억이 저다병을 거론한 연유는 알 수 없지만 그는 4년 후 다시 이렇게 썼다. “소월의 가냘핀 몸집이 水土(수토)쎄인 龜城(구성) 땅에 와서는 제법 몸이 나서 만년에는 뚱뚱하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소월이 가늘고 야위어야 할 사람이 뚱뚱해진 것은 뇌일혈을 부르려고 한 때문인 듯싶습니다. (중략) 소월의 묘는 구성 남시에 있는데 가까운 곽산 본 고향으로 옮겨온 뒤에 돌비라도 해 세운다고 미망인은 언젠가 서울 와서 쓸쓸히 이야기하고 갔읍니다.”(1939년 6월 ‘여성’ 39호)   소월의 사인을 둘러싼 논쟁에 다시 불을 지핀 이는 소월의 3남 정호(1932∼2004)씨이다. 6·25 전쟁 당시 인민군으로 참전했다가 붙잡혀 거제도포로수용소에서 반공 포로로 석방된 뒤 국군으로 복무했던 그의 존재는 1981년 정부가 소월에게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하는 과정에서 노출됐다.  그는 이후 진행된 강연회와 인터뷰를 통해 이렇게 털어놓는다. “아버님 소월의 최후는 1934년 12월 23일 저녁때의 일이었는데 그날 저녁에도 집에 돌아오시어 주무시려 하다가 고단하게 잠에 취한 어머님의 입에 은단 같은 것을 넣어주는 것을 잠결에 귀찮은 듯 내뱉었다고 한다. 한참 주무시던 어머님이 잠결에 아버님의 몹시 괴로워하시는 신음소리를 들으시고 잠이 깨어 아버님을 흔들어 보고 불러보았으나 숨소리가 이상해서 곧 불을 켜고 자세히 아버님의 주위를 살펴보니 무엇인가 밤톨만큼의 무슨 덩어리 하나가 아버님의 머리맡에 떨어져 있어 주워보니 항상 잡수시던 은단이 아니고 한 덩어리의 아편인 것을 알 수 있었다.”  정호씨는 소월 사망 당시 두 살이었으니 이 증언은 정호씨의 동생을 임신하고 있던 만삭의 어머니로부터 전해들은 이야기일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소월의 아편음독설이 유포된다.  또 다른 가설은 북한의 주간 ‘문학신문’ 1966년 5월 10일∼7월 1일에 걸쳐 12회 연재된 ‘소월의 고향을 찾아서’가 재야서지학자 김종욱씨에 의해 발굴돼 2004년 ‘문학사상’에 전재되면서 불거졌다. 연재물은 ‘문학신문’ 김영희 기자가 소월의 고향인 평북 정주군 곽산면 남단동과 그가 숨을 거둔 구성군 서산면 평지동 일대를 돌며 현지 취재한 내용이다. “1934년 구성군 경찰서의 호출을 받았다. 경찰서에서 돌아온 시인은 이런 말을 아내에게 남겼다. ‘참, 이런 수모를 다 겪으면서 살아 무엇해. 차라리 죽는 게 낫지. 그렇지 않으면 만주로 가야하겠는데…. 여보, 당신은 아이들을 데리고 살겠소? 다음날 아침이었다. 부인 홍단실은 의외의 변에 억이 막혔다. 시인은 고개를 뒤로 젖히고 이미 숨을 거두었다. 부인은 시인의 베개 밑에서 흰 종이를 발견하였다. 그날 밤 시인은 약을 마시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다.”   소월 서거 32주기를 맞아 기획된 이 탐방기를 끝으로 소월은 북한에서 “패배적 감상주의에 젖어 현실을 극복할 실천적 방법론을 제시하지 못한 사상적인 제약성을 가진 시인”으로 평가 절하된다. 이는 1967년 주체사상 강화기와 때를 같이한 것이다. 이와 관련, 1995년 귀순한 북한 작가 장모(54)씨가 북한의 소월 평가와 관련해 남긴 증언이 흥미롭다. “1967년 당중앙위원회 4기 15차 전원회의 이후 김소월은 다산 정약용이나 연암 박지원 등의 사상·저서와 함께 봉건유교사상으로 낙인찍혀 연구대상에서 아예 배제됐습니다. 그때 당 선전분야에서는 수정주의와 부르주아 사상과 함께 봉건 유교사상에 물든 작가와 작품들에 대한 대규모 색출작업이 벌어졌습니다.”   장씨는 이어 “내가 북한 중앙방송 재직 시절 김소월의 조카와 한 사무실에서 근무한 적이 있다”며 “이름은 김정품(당시 나이 53세쯤으로 추정)”이라고 밝혔다. 항렬을 따져볼 때 김소월과 같은 ‘廷(정)’자 항렬이어서 착오가 있는 듯하지만 증언은 비교적 구체적이었다. “그 친구 고향이 정주 곽산이었습니다. 그에 따르면 67년 소월이 숙청당했을 때 그의 묘소 앞의 시비는 ‘초당파’들에 의해 깨진 뒤 뽑혀나갔다고 들었습니다. 그는 소월의 사인에 대해서도 자살이라고 못 박았는데, 그의 증언에 따르면 소월은 ‘복어알 안주’를 먹고 자살했습니다.”  또 다른 단서는 편지이다. 소월은 1934년 가을, 김억에게 편지 한 통을 띄운다. “저는 술이나 한 35배 마신 후이면 말을 아니하면 말지 어쨋든 맘나는 양(樣)으로 하겟다 생각이옵니다. 자고이래로 중추명월을 일컬어왓사옵니다. 오늘밤 창밧게 달빗, 월색(月色), 옛날 소설 여자 다리난간에 기대여서서 흐득흐득 울며 사의 유혹에 박덕한 신세를 구슬프게도 울든 그 달빛 그 월색이 백서(白書)와 지지안케 밝사옵니다. 오늘이 열사훗날 저는 한 십년만에 선조의 무덤을 차저 명일 고향 곽산으로 뵈오려 가려 하옵니다.”  편지는 일종의 유서였다. 훗날 소월의 숙모 계희영은 당시 상황을 ‘소월 선집’(장문각·1970)에서 이렇게 증언한다. “해마다 추석이 되어도 십년간 한번도 오지 않았던 소월이었는데, 이번에는 곽산을 찾아와서 일일이 뒷산에 다니며 무덤의 떼가 잘 자라는지 돌보았고 허술한 무덤은 잘 다듬어 떼를 입혔다. 이러한 소월을 보고 동네 사람들은 ‘왜 저러고 다니지?’ 했을 뿐이었다. 소월은 마지막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고향에 와서 하직인사를 했던 것이었으나 아무도 알지 못하였다.”   이러한 정황으로 볼 때 소월은 자신의 죽음에 대해 어느 정도 결단을 내려둔 상태였을 가능성이 크다. 소월 슬하의 자식은 북한에 남은 3남 1녀 외에 1남 1녀가 더 있었지만 큰딸 구생(龜生)은 6·25 피란 중에 병사했고, 아들 정호씨도 세상을 떠났으니 그의 최후를 아는 이 또한 남아 있지 않다.  ◎ 소월은 누구  1902년 평북 구성 태생. 1915년 오산학교 입학. 1916년 구성군 평지면 출신 홍단실과 결혼. 1920년 ‘창조’ 5호에 시 발표. 1921년 배재고보 5학년 편입. 1923년 일본 도쿄상업대 입학. 같은 해 9월 관동대지진으로 귀국. 이후 광산업 실패와 신문사 지국 경영 실패로 빈곤에 시달림. 1934년 사망. 대표 작품은 ‘엄마야 누나야’ ‘진달래꽃’ ‘산유화’ 등. 1981년 금관 문화훈장 추서.  ◇자문교수(가나다순)= 유성호(한양대) 이상숙(가천대) 최동호(고려대·한국비평문학회장)  정철훈 문학전문기자  =========================================   부모  金素月      ​     김소월 초상화 ​    부모                   김 소 월      낙엽이 우수수 떨어질 때    겨울의 기나긴 밤    어머님하고 둘이서 앉아    옛 이야기 들어라.      나는 어쩌면 생겨나와    이 이야기 듣는가?    묻지도 말아라, 내일 날에    내가 부모 되어서 알아보리라.   대중가요로 널리 알려진 작품이다. 가곡으로 불려지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기도 하다. 미당처럼 ‘아비는 종이였다’가 아니라 소월의 아비는 간질병을 앓고 있었다. 아버지는 중년 후부터 그 병을 앓았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소월의 증조부가 간질병을 앓았다 한다. 간질병 환자는 보통 때는 아무렇지 않으나 발작하게 되면 게거품을 뿜으며 몸이 비틀리는 무서운 병이다. 소월의 아버지 김면도(金冕道)씨는 아버지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 했다. 나는 어쩌면 태어나와 이 이야기 듣는가. 그런 시절이었다. 소월의 침울한 성격을 아버지로부터 받았다면 애수에 찬 부드러운 성품은 어머니로부터 이어받은 것이리라. ​ 소월의 외갓집은 비교적 잘 사는 집안이었다. 소월의 어머니는 남편의 병을 고치려고 별의별 약을 다 썼었다. 그러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소월은 어렸지만 집안의 불운을 예감하고 있었다. 소월의 어머니 박씨 부인은 마지막으로 어느 날 이웃 마을로 무당을 찾아갔다. 소문난 무당이었다. ‘우리 영감 간질은 이녀 손에 달렸소......’ ‘염려 없다니까요, 걱정을 놔요...... 귀신만 쫓으면 다 돼요’ 큰 무당은 자신만만했다. 소월의 어머니는 일꾼이 지고 온 쌀과 어물을 무당의 집 마루에 벗어놓았다. 며칠을 두고 무당은 굿을 했다. 그러나 간질병이 낫을 리가 없었다. 재물만 탕진한 것이다. 천치가 태어나는 집안에서 천재가 태어나는 것을 드물게 본다. 소월이야말로 그런 예의 하나일 것이다. 겨울밤에 어머니와 나눈 긴 이야기, 그것은 옛이야기였다. 소월이 시달렸던 어린 시절은 묻지 않아도 알만하다. 그는 성인이 되어서 더욱 뼈저리게 느꼈으리라. ​ 한국민이 가장 사랑했던 시인 김소월은 아직 문학관이 없다. 이건 나라의 수치다. 살아있는 시인들이 문학관을 세우고 있으니 한국 문단은 무언가 잘못되어가고 있는 것 같다. 소월의 문학관은 언제 세워질 것인가. 평론가 조연현은 라고 평했다. 평론가 김현은 고 했고 유종호는 고 했으며 김용직은 라고 평했다. ​ 김소월 시인은 아직도 사진이 없다. 그의 이력에 나오는 얼굴은 초상화다. 1990년 당시 문화부가 김소월을 9월의 문화인물로 정했다. 당시 문화부 장관 이어령이 ​ 김소월 연구가 서지학자 김종옥(당시 72) 씨를 불렀다. 김종옥 씨의 증언에 의하면 이어령 장관이 김종옥 씨를 불러 김소월의 초상화를 그려보자고 해 경남 거제 출신의 옥문성 화백과 당시 김소월의 아들 김정호와 김정호의 아들 김영돈을 불러 얼굴을 참작해서 그린 것이 오늘의 김소월 초상화가 된 것이다. 북한에는 김소월 사진이 있을 것이나 수집할 수 없는 것이 너무 아쉽다. 김소월의 손녀 김은숙씨가 아산에서 식당 일을 하며 산다고 한다. 손자 김영돈은 부천에서 살지만 언론에 일체 나타나기를 거부한다고 한다. 김소월의 시집을 팔아 치부한 출판사들. 그들은 양심마저 팔아버렸던가. 새삼 소월이 그리워지는 가을... ​ [출처] 부모|작성자 솔봉   김소월, 그의 아들, 그리고 손녀    詩人의눈물 진달래꽃, 엄마야 누나야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 교과서에, 대중가요에 누구나 하나쯤은 외우는 "아버지 작은 기념관 하나라도" 南으로 온 시인의 아들은 가난과 싸우다 쓸쓸히 꿈 못 이루고 하늘로 "아… 할아버지, 아버지" 시인의 손녀도 의지할 곳 없이 '가리비 팍팍 뿌리옵소서' 피자 회사에서 받은 단어 사용료 몇푼이 할아버지가 준 유일한 유산 진달래꽃, 엄마야 누나야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 교과서에서만, 노래로만 작은 기념관 하나 없는   ▲ 먼 훗날 당신이 찾으시면/ 그때의 내 말이 잊었노라/ 당신이 속으로 나무라면/ 무척 그리다가 잊었노라/ 그래도 당신이 나무라면/ 믿기지 않아서 잊었노라/ 오늘도 어제도 아니 잊고/먼 훗날 그때에 잊었노라. (김소월‘먼 후일’) 서울 행당동 소월공원에 있는 김소월의 흉상. 소월의 오른쪽 뺨에 비둘기가 흘린 분비물이 눈물처럼 남아 있다. / 채승우 기자  #진달래 꽃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드리우리다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 아름따다 가실 길에 뿌리우리다.   나는 소월(素月)이다 나는 노래했다. 봄에는 고향 평북 정주의 야산에 흐드러진 '진달래꽃'을, 낙엽 떨어지는 겨울 밤엔 어머니와의 대화를 '부모'로 읊었다. 내 시(詩) 주머니는 말 그대로 '화수분'이었다. 조국은 아름다웠지만 시대는 엄혹(嚴酷)했다. 내 나이 두살 때 나귀에 먹을 것 실어오던 아버지는 일본인 철도노동자에게 맞아 정신을 놓고 말았다. 여덟살 때 겪은 국망(國亡)은 내 육신(肉身)이 스러질 때까지 회복되지 않았다. 곽산 남산보통학교 나와 조만식(曺晩植) 선생이 교장으로 계신 오산중에 입학해선 3·1운동에 참가했다가 한동안 일경(日警)을 피해 도피생활을 해야 했다. 어느 불행한 시인이 말했던가, 우울(憂鬱)은 시를 꽃피우는 자양분이라고. 오산중 교사였던 스승 김억(金億)의 추천으로 나는 1920년 동인지 '창조' 5호에 첫 시를 냈다. 그 후 5년간 154편을 썼다. 내 생애 가장 화려했던 시기는 1922년이었을 것이다. 그 한 해에만 '먼 후일' 등 30편을 썼던 것이다. 생(生)의 화려한 날은 짧다. 1927년 동아일보 평북 구성(龜城)지국 경영에 실패한 뒤 난 술독에 빠져 지냈다. 1934년 12월 27일 이승과 하직했을 때 조선일보는 '청년 민요시인 소월 김정식 별세'라는 기사로 내 죽음을 알렸다. '진달래꽃이라는 시집을 발행해 시단에 이채를 나타내이던, 재질이 비상튼 청년시인 김정식씨가 침묵으로 일관하던바 뇌일혈로 급작스레 별세해 유족들의 애통하는 모양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눈물을 금치 못하게 하였다.' 나는 세상에 아들 넷과 딸 둘을 남겼다. 그들의 소식이 북한의 주간 '문학신문'에 연재된 탐방기(探訪記)-'소월의 고향을 찾아서'에 전해진 바 있다. 2004년 '문학사상'에 소개된 글은 1966년 5월 10일부터 7월 20일 사이 쓴 것이다. 탐방기에 따르면 장남 준호(俊鎬)는 고향 정주 곽산에서 목수를 하고 있다고 한다. 둘째 아들 은호(殷鎬)는 평북 경공업총국의 상급지도원이라고 한다. 유복자였던 넷째아들 낙호(洛鎬)는 평양의 설계연구기관의 연구사라고 한다. 딸 구원(龜元)을 비롯해 영실, 정옥, 영철 등 손자들은 고향 인근 문장리에 산다고 했다. 이 글엔 내 호 '소월'이 고향 마을, 일명 진달래봉으로 불리는 소산(素山) 위에 걸린 달에서 유래했다는 주민들의 증언도 나오고 있다. 북한에서 난 처음엔 민족주의·애국주의 시인으로 추앙됐다. 그러더니 1967년에는 돌연 봉건·유교 사상주의자라는 낙인이 찍히고 말았다. 시대별로 변한 북한의 나에 대한 평가를 남에 있는 평론가 권영민은 이렇게 기록하였다. "조국의 아름다운 자연을 풍부한 시흥(詩興)과 고운 리듬과 절제있는 표현으로 사실주의적으로 노래했지만 그의 문학활동은 민족해방투쟁으로 연결되지 못했고 3·1운동 이후의 시대적 변천에 따라오지 못했다."(조선문학사·1956년) "소월의 시가에 떠도는 애수(哀愁)는 잃어진 것에 대한 비애로서 극히 낭만적인 색조를 띠게 된 것이 사실이다. 사실주의적 시인인 김소월은 제한된 한계에서나마 당시 현실을 반영하지 않을 수 없었다."(해방전 조선문학·1958년) "소월의 세계관은 협애해 현실에 혁명적으로 침투하지 못했고 그의 시 문학이 구현하는 애국주의, 인민성, 생활전망성도 그만큼 제한적이어서 비판적 사실주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했다."(조선문학사·1964년·주체사상이 등장한 뒤) "깊은 비애의 정서를 노래함으로써 1920년대 시단에서 민요풍의 시를 개척하고 발전시켰지만 노동계급의 계급적 이념과 인민적 입장에서 출발하지 못해 1920년대의 시대적 높이에 이르지 못했다."(조선문학사·2000년 발간본) #부모 낙엽이 우수수 떨어질 때 겨울의 기나긴 밤, 어머님하고 둘이 앉아 옛 이야기 들어라. 나는 어쩌면 생겨나와 이 이야기 듣는가? 묻지도 말아라, 내일 날에 내가 부모되어서 알아보랴?   ▲ 서울 정동 배재학당 역사박물관이 소장중인‘진달래꽃’초 판본(1925). 이준헌 객원기자  나는 시인의 아들이다 소월의 삼남(三男) 정호는 소월이 세상을 떠나기 두 해 전인 1932년 태어났다. 위로 두 형과 두 누나가 있었고 나중에 유복자(遺腹子) 남동생이 있었다. 18세 때 6·25가 터졌다. 그에게 어머니(홍단실·洪丹實)가 이리 권유했다. "너만이라도 남으로 가라…." 전쟁 때 그 길은 인민군이 되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전쟁에 뛰어든 지 얼마 되지 않아 시인의 아들은 포로로 붙잡혔다. 인천형무소, 부산과 거제포로수용소를 거쳐 그는 반공(反共)포로로 풀려났다. 그는 그 후 국군에 자진 입대해 1955년 제대했다. 군 복무를 마쳤지만 갈 곳은 없었다. 철도청에 근무하던 친척의 주선으로 교통부에 임시직으로 취직했다. 월급이 쌀 한 가마니였지만 그때 그는 평생의 반려자를 만날 수 있었다. 결혼은 했지만 시인의 아들은 반년이 채 안 돼 결혼반지까지 팔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됐다. 곤궁한 처지에 빠진 그는 1958년 동아일보의 기자에게 자신이 '소월의 친자(親子)'임을 알렸다. 그래도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홍익회에서 4년을 일한 뒤 나와 레코드 외판원을 할 때 미당(未堂) 서정주(徐廷柱)를 찾아가 도움을 청해봤다. 미당은 그리 사는 소월의 아들을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미당은 정호의 딱한 사정을 월탄 박종화, 시인 구상에게 전했다. 그들은 "소월의 하나뿐인 아들이 남에서 외판일 하는 걸 북이 알면 얼마나 악선전하겠느냐"며 당시 국회의장 이효상(李孝祥)에게 추천서를 써줬다. 그 덕에 정호는 국회에 취직했다. 하지만 가혹한 운명은 그를 풀어주지 않았다. 8년간 열심히 일했지만 이번엔 아내의 신부전증이 악화된 것이다. 치료비 마련을 위해 남편이 택할 길은 몇푼 안 되는 퇴직금에 기대는 것뿐이었다. 시인의 아들은 그런 상황에서도 한 가지 소박한 꿈을 이루기 위해 평생을 고민했다. 서울 남산에 있는 것을 비롯해 소월 시비(詩碑)가 전국에만 13개나 되고 남산에 '소월로'라는 길이 만들어졌으며 1986년엔 문학상도 제정됐지만 정작 아버지의 문학을 기릴 조촐한 기념관 하나 없는 현실을 아들은 안타까워했다. 한때 라이온스클럽 회장을 지낸 이가 10억원을 모으기도 했지만 허사였다. 그이가 지병으로 쓰러지자 기탁금이 전부 반환된 것이다. 8년 전 소월 탄생 100주년 되던 해 각 예술단체가 떠들썩한 심포지엄을 열고 시 낭송회를 가졌다. 그렇지만 그것뿐이었다. 누구도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의 아버지에게 관심을 갖지 않았다. 시인의 아들은 4년 전 아버지 품으로 돌아갔다. 그가 못다 이룬 이승의 꿈은 다시 이승에 남은 아들과 딸에게로 이어졌다. #초혼(招魂)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어! 허공중에 헤어진 이름이어! 불러도 주인없는 이름이어!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어! 심중에 남아있는 말 한 마디는 끝끝내 마자 하지 못하였구나. 사랑하던 그 사람이어! 사랑하던 그 사람이어! 붉은 해는 서산 마루에 걸리었다. 사슴의 무리도 슬피 운다. 떨어져나가 앉은 산 우에서 나는 그대의 이름을 부르노라.   ▲ 소월의 손녀 김은숙은 식당 일을 하고 있다. / 문갑식 기자 나는 시인의 손녀다 2002년과 2007년, 소월은 한국 현대시 100년 사상 최고의 시인으로 꼽혔다. 전문지 '시인세계'가 창간호를 냈을 때와 한국시인협회 조사 결과였다. 당시 두 단체의 설문에 국내의 내로라하는 시인과 평론가들이 대부분 참가했다. 2008년엔 KBS가 같은 질문을 던졌다. 시민 1만8298명이 답했는데 거기서도 '진달래꽃'이 애송시(愛誦詩) 1위였다. 그 뒤가 윤동주(尹東柱)의 '서시'(序詩)와 '별 헤는 밤', 김춘수(金春洙)의 '꽃', 천상병(千祥炳)의 '귀천'이었다. 김정호씨 사후, 소월의 혈육은 딸 김은숙(50)과 아들 김영돈(48)뿐이다. 아들은 인천시 부평에 사나 언론 접촉을 달가워하지 않는다고 한다. 충남 아산에 사는 김은숙은 시인에 대한 국민의 사랑을 말하자 "소용없는 얘기"라고 했다. ―서울에서 어떻게 충청도로 왔습니까. "흘러흘러 왔어요. 남편이 무역회사, 운수업을 했었습니다. 사정이 어려워졌을 때 아는 분이 이곳에 땅이 있다길래…." ―어린 시절 가정 형편이 그리 어려웠나요. "아버지와 어머니는 결혼 후 이사를 스무 번도 넘게 했대요. 생활은 늘 어려웠고 의지할 곳이라곤 없는 힘든 삶이었어요. 나중에 봉천동에서 독채 전세를 얻긴 했지만요." ―그런 부모가 원망스러웠습니까. "아버진 정이 그리웠는지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대단했어요. 지금 와 생각해 보면 부모님이 저희들에겐 잘해주셨어요. 형편이 안 됐을 텐데 번듯한 옷도 사주셨고요. 본인들은 어려워도 자식들에겐 뭔가 해주고 싶어서 그랬던 것 같아요. 제 동생은 이런 얘기하는 걸 굉장히 싫어해요. 이상한 소문이 사실처럼 알려지는 것도 싫어하고." ―이상한 소문이 뭡니까. "기자들이 '미당 선생님의 도움을 받았다'는 식의 기사를 많이 썼어요. 학교 다닐 때 육성회비 정도 받았을 뿐인데, 자꾸 과장된 기사가 나니 동생이 화를 냈어요. '왜 자꾸 구질구질한 내용이 나가게 하느냐'고요. 저흰 미당 선생님이나 구상 선생님을 명절 때 찾아뵌 정도인데. 미당 선생님은 제 결혼식 때 주례를 서주셨어요." ―할아버지가 남긴 작품의 저작권이 있지 않나요. "그건 이미 시효가 다 지나 소용없는 거고. 할아버지 때문에 돈 받아본 적은 딱 한 번 있어요. '미스터 피자'라는 회사에서 영화배우 문근영이 출연해 '가리비 팍팍 뿌리옵소서' 뭐 이런 광고를 했을 땝니다." ―가리비를 팍팍? "그 회사 사장님이 할아버지 시를 좋아하신대요. 그래서 단어 사용료조로…." ―숙모라는 분이 소월의 모든 인세를 챙겨갔기 때문에 정작 소월의 가족들이 고생했다는 이야기도 있던데요. "그 부분은…. 다 지나간 일인데요, 뭘." ―작고한 김정호 선생은 할아버지(소월)에 대해 무슨 말을 했습니까. "평생 소원이 자그마한 할아버지 기념관 하나 짓는 거였어요. 뜻을 이루진 못했지만요. 북에 있는 형제들도 만나고 싶어했어요. 소문으론 꽤 괜찮게 산다고 하는데 웬일인지 이산가족 상봉신청을 냈는데도 이뤄지지 않았어요. 탈북자들에게 물어보니 쉽게 만날 수도 있다는데, 반공포로여서 불허(不許)한다는 말도 있고, 하여간 아버지에겐 그게 한(恨)이 됐을 겁니다. 전 아니지만 아버진 예술 방면에 재주가 특별했어요." ―무슨…. "아코디언 연주, 그림, 서예, 글쓰기 등 못하는 게 없었어요. 언젠가 할아버지 육필(肉筆) 원고가 나왔다고 해서 봤는데 아버지 필체와 너무 닮아 깜짝 놀란 기억이 납니다." ―김 선생 묘소는 근처인가요. "아버진 연세 드셔서 성당에 나갔어요. 지금 모신 곳은 경기도 김포의 납골당이고, 어머니 묘소는 아산시 송악면에 있어요. 그 옆에 아버지 묏자리도 마련해 놨었는데…. 앞으로 합장해드려야죠. 그 생각만 하면 속이 상해요." ―소월의 가족이란 사실이 부담이 됩니까. "학교 다닐 때는 스트레스였지요. 소월의 손녀라는 이야기가 도니 글을 쓸 때마다 무척 신경이 쓰였어요. 아마 그런 게 없었다면 꽤 잘 썼다는 이야길 들었을 텐데 할아버지를 연상하고 보면 평범하기 짝이 없게 보였겠지요." #왕십리 비가 온다 오누나 올지라도 한 닷새 왔으면 좋지. 여드레 스무날엔 온다고 하고 초하루 삭망이면 간다고 했지 가도가도 왕십리 오네. 웬걸, 저 새야 올랴거든 왕십리 건너가서 울어나다고, 비 맞아 나른해서 벌새가 운다. 천안에 삼거리 실버들도 촉촉이 젖어서 늘어졌다네. 비가 와도 한 닷새 왔으면 좋지 구름도 산마루에 걸리어 운다. 중학교 1학년 신입생에게 나눠주는 국어 교과서는 모두 23종 92권이다. 이들 교과서에 가장 많이 실린 것도 그의 '엄마야 누나야' '진달래꽃'이었다. 모두 19회다. 2위가 허균(許筠)의 '홍길동전', 3위가 박완서의 글이었다. 대중가요 가수들 역시 그를 사랑했다. '진달래꽃'(마야) '개여울'(정미조) '부모'(유주용) '산유화'(송민도) '예전에 미처 몰랐어요'(라스트포인트) '나는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활주로) '못 잊어'(장은숙) '초혼'(이은하) 등이다. ―소월의 자손인 걸 감추고 싶습니까. "그런 건 아니지만 아무 소용도 없으니까요. 아버지도 할아버지 기념관 한번 마련해보겠다고 이북5도민회다 뭐다 하며 평생 이리저리 뛰어다녔지만 소용이 없었거든요. 저희들도 마찬가지고." ―왜 기념관이 마련되지 못했다고 생각합니까. "아무래도 저희가 북에서 왔기 때문이 아닐까 해요. 남쪽에 터전이 있으면 동료나 제자들이 그래도 뭔가를 해주잖아요." ―국민들의 관심이 없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나요. "관심이 없던 건 아니에요. 오래전에 아버지와 어머니 스토리가 라디오 드라마로 방송된 적이 있어요. '절망은 없다'는 제목이었는데 굉장히 동정심을 유발시키는 내용이었어요. 그때 많은 분들이 편지도 보내오고 어머니 관절염 치료제니 금침 같은 것도 보내주셨어요. 하지만 그것뿐이었어요. 기자들도 수없이 찾아왔지만 그것도 그때뿐이었고요." ―최근까지의 언론보도를 보면 아산에서 가든을 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 '송일정'이라고 닭백숙·닭볶음탕·보신탕·붕어찜 같은 걸 팔던 집이었어요. 아버지 돌아가시던 해에 접었습니다." ―영업이 안 됐나요. "처음엔 괜찮게 됐지요. 개고기 맛이 좋기로 주변에선 꽤 소문이 났거든요. '소월의 손녀가 하는 집'이라는 소문이 나면서 인근에 있는 학교 선생님들이 많이 오셨어요. 특히 국어 선생님들이요. 그런데 와서 보곤 전부 아무것도 없구나 하고 서운해했습니다." ―아무것도 없다는 게 무슨 뜻입니까. "1981년 전두환(全斗煥) 정부 때 금관문화훈장을 받았습니다. 그 훈장증과 '김 선생'이란 분이 1977년 고물상에서 할아버지 육필 원고를 발견했는데 복사본을 받아 식당에 걸어놓았지요. 저희는 할아버지의 흔적이라 생각했지만 번듯한 문학관 있는 다른 시인들과 비교해 보면 초라해 보였을 겁니다." ―소월의 육필원고에 대해선 '진본(眞本)이다 아니다' 하는 설이 많습니다. "할아버지가 동아일보 지국장 하시던 시절에 쓴 것이라고 들었습니다. 실제로 보니 예전에 신문사에서 쓰던 원고지에 쓴 글이었어요. 낙서 비슷한 것도 있었고. 이어령 선생님이 해석도 해주셨는걸요." ―그걸 왜 소월의 자손이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저희가 그걸 구입할 사정이 됐으면 구입했을 텐데, 그럴 형편이 아니어서….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송일정 접고 나서 훈장증과 훈장 2개, 육필원고 사본(寫本)은 모두 동생에게 줬어요." ―그럼 진짜 원고는 지금 어디 있습니까. "김 선생님이 가지고 계신 줄로만 알지요. 연락은 자주 못 하지만요." ―그런데 하필이면 왜 보신탕집을…. "충청도에 왔을 때 빈땅에서 개를 길렀거든요. 많을 때는 700~800마리를 키웠습니다. 제 가든은 규모가 컸어요. 테이블이 14개에 방도 2개 있었거든요." ―'송일정'을 접은 진짜 이유는 뭔가요. "남의 빚보증을 잘못해줘서…. 아쉬운 게 있어요. 전 송일정이 잘됐으면 그 한쪽에 자그마한 할아버지 기념관 하나 짓는 게 소원이었어요. 그걸 이루지 못했으니. 송일정을 그만둔 뒤에는 아산 시내에서 조그맣게 삼겹살집을 하다가 그것도 3년 전에 그만뒀습니다." ―그럼 지금은? "남의 식당 일 돕고 있어요. 남들에겐 '알바'라고 말하지만 그냥." ―자제는. "고3된 아들 하나 있어요. (혹시 문학적 재능이 있느냐고 묻자) 아니에요, 그 아이는 이공계입니다." #산 산새도 오리나무 우에서 운다. 산새는 왜 우노, 시메산골 영(嶺) 넘어갈라고 그래서 울지. 눈은 나리네, 와서 덮이네. 오늘도 하룻길 칠팔십리 돌아서서 육십리는 가기도 했소. 불귀(不歸), 불귀, 다시 불귀. 삼수갑산에 다시 불귀 사나이 속이라 잊으련만, 십오년 정분을 못잊겠네 미스터리-소월의 얼굴  소월 초상화는 1990년 제작됐다. 당시 문화부가 소월을 '9월의 문화인물'로 정해 한국역사인물화연구회에 초상화 제작을 의뢰했다. 지금까지 소월의 유일한 진영으로 알려진 이 그림은 여러 인물을 합성한 것인데 소재가 불분명하다. 소월의 진영(眞影)은 1934년 동아일보 게재 사진+남으로 내려온 셋째 아들 김정호(2006년 사망)+그의 손자 김영돈(48)의 사진을 참조해 만든 것이다. 포털 사이트 '한국학' 카테고리에 실려 있는데 그 다음이 해괴하다. 현재 문관부는 "누가 그렸는지 모른다"고 답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자료창고인 '왕실도서관 장서각 디지털 아카이브'에도 이 자료가 없다. 소월 연구가인 서지학자 김종욱(72)씨에게 연락하자 당시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1990년 당시 이어령(李御寧) 장관이 나를 불러 옥문성 화백과 소월 초상화를 만들어보자고 해 셋이 연구해 그렸다"는 것이다. 옥 화백(67)은 경남 거제 출신이라고 한다.  국민들이 애송하는 시인은 얼굴조차 미상(未詳)인 것이다. \\\\\\\\\\\\\\\\\\\\\\\\\\\\\\\\ "온 국민이 할아버지의 시를 외우지만 정작 기념관 하나 없는 게 현실입니다"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으로 시작하는 김소월의 시 '진달래 꽃'. 온 국민이 자다 깨서도 읖조릴 정도로 입에 붙은 '진달래 꽃'의 시인 김소월의 자손은 현재 어떻게 살고 있을까? 김소월에겐 4남 2녀의 자손이 있지만 이중 한국에 살고 있는 이는 3남 김정호씨뿐이다. 나머지 가족은 북한에 있는 것. 힘든 생활고에 시달리며 살아온 김소월의 가족들은 현재 김소월을 위한 기념관 하나 없는 현실에 가슴 아파하고 있다. 민족 시인 김소월, 제대로 된 기념관 하나 없다! 김소월의 손녀인 김은숙씨를 만나러 가는 길. 여름이 한창이라는 걸 확인시켜주듯 전국의 국토는 잘 깔린 초록색 융단도 같았다. 충남 온양 송악 저수지 부근에 있는 '송일정'이라는 식당을 지나치는 순간,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고 읊조리는 여가수의 노랫소리가 발길을 잡았다. 김소월의 손녀 김은숙씨(45)는 뜨락에 앉아 먼 산을 바라보며 세월을 음미하는 듯 보였다. 첫 대면에서도 그녀가 김소월의 손녀라는 걸 알아볼 수 있었다. 사진으로만 보아온 김소월의 초상화와 많이 닮았기 때문이다. "다들 그런 말을 하면서 뚫어지게 쳐다볼 때가 많아요. 책 속의 할아버지를 만나볼 수 있다는 생각에 불쑥 찾아오는 학생들도 많구요. 하지만 할아버지 초상화는 제 아버지와 동생 사진을 합성해서 만든 컴퓨터 작품이에요. 아버지조차도 할아버지의 얼굴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니 확인할 길이 없죠. 이 소나무 아래 앉으면 마음이 편안해요. 그래서 '이곳에 자그마한 기념관을 만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곤 해요. 예전에 한번 시도하다가 주춤했어요. 금전적인 문제도 있었지만 외지인이라서…."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깊은 생각에 빠지면 묻지도 않는 말이 술술 나오는 것. 그녀가 소월의 기념관에 대해 혼잣말을 한다. 그녀가 연고지 없는 충남에서 정착하게 된 건 힘겹게 살아온 과거와 연결돼 있다. 김은숙씨는 평범하지 못한 삶을 살았다고 한다. 태어날 때부터 그녀의 이름 앞에는 '김소월의 손녀'라는 이름표가 붙었다. 그녀는 한창 예민하던 사춘기 시절, 얼굴도 보지 못한 할아버지의 명성 때문에 무척 시달렸다. 학교뿐 아니라 온 동네에서 그녀는 친구들과 선생님의 입에 오르내리는 유명인사였다. 사람들은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에 관심을 보였다. 특히 학교에서 국어 시간만 되면 두렵기까지 했다. 독후감이나 시를 발표해야 할 때, 그녀는 어김없이 지목되기 때문이다. "학업 성적이 뛰어나지 못했어요. 그래서 자신감도 없었죠. 하지만 모든 생활은 모범적이어야 했어요. '소월의 손녀딸'이라는 꼬리표가 늘 따라다녔기 때문이죠. 아버진 제게 조금의 흐트러짐도 용서하지 않으셨어요." 그녀의 아버지인 김정호씨는(72) 현재 김포에 있는 아들 부부, 두 손자와 살고 있다. 김은숙씨를 만나기 전, 취재진은 김정호씨를 만나기 위해 몇 차례 전화통화를 시도했다. 하지만 그는 언론에 노출되는 걸 무척 꺼려하는 눈치였다. 말로는 '건강상에 문제가 생겨서 거동이 불편하다'고 했다. 김소월 추모사업에 관련된 일이라면 적극적으로 나선다던 소문과는 달리 무척 소극적인 자세였다. 그에게 자세한 사연을 들을 수는 없었지만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추모사업이 몇 차례 진행되다가 번번이 결실을 맺지 못하자 의기소침해진 눈치라고 한다. 게다가 김소월 시인의 유작을 소유한 한 수집가를 우연히 만나났는데, 1억원을 달라는 제안에 난감했다고. "아버지께서는 할아버지의 유작을 갖고 싶어하셨지만 우리에게 1억원이 어딨어요. 그저 돈 없는 신세를 한탄할 뿐이었죠. 결국 복사본만 챙길 수 있었어요.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죠." 김은숙씨는 할아버지와 아버지 그리고 자신에게까지 내려온 세월을 이야기하며 눈물을 글썽였다. 단 한 번도 만난 적은 없지만 아버지에게 늘상 들어온 탓에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눈으로 만난 듯 생생하다. 평생 '소월'이란 두 글자, 꼬리표처럼 따라다닌다! 김소월은 부인 홍실단과의 사이에 4남 2녀를 두었다. 그중 3남 김정호씨(72)만이 남한에 생존해 있다. 그는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였기에 소월에 얽힌 직접적인 추억은 거의 없는 편이다. 그러나 어머니 홍 여사로부터 가끔씩 아버지에 대한 얘기를 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딸인 김은숙씨에게 자주 들려주곤 했다고. "아버지가 동아일보 지국장이셨을 때만 해도 집안 형편은 괜찮았어요. 아버지는 까다로워 보이긴 해도 당신 어머니한테만큼은 극진했어요. 두 분이 반주 삼아 술도 잘 하셨어요. 원래 할머니 존함이 홍상일인데, 할아버지께서 '여자 이름으로 안 좋다'며 '실단'으로 바꾸셨대요." 김정호씨는 1932년, 소월이 서른 살일 때 태어났다. 그는 세 살때 아버지를 여의고 19세 되던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인민군으로 참전했다. 그후 반공 포로로 남한에 잔류하다 국군에 자원 입대했다. 훈련소에서 휴전을 맞은 그는 3년간 군복무를 마치고 1955년 만기 제대를 했다. 연고가 없던 김정호씨는 당시 철도청에서 근무하던 먼 친척 뻘 되는 고모부의 주선으로 교통부 자재부서의 임시직으로 첫 직장을 가졌다. 월급은 쌀 한가마니. 3년간 근무하던 그곳에서 평생의 반려자를 만났다. '운명'처럼 만난 그녀와 결혼을 했지만 생활은 나아지지 않았다. 결혼한 지 반 년이 채 안 돼 친척들이 마련해준 결혼반지까지 팔아 생계를 유지해야 할 정도였다. 사글셋방에서 근근히 사는 김정호씨의 처지를 안타깝게 여긴 친척의 도움으로 그는 지난 58년 동아일보 기자를 만나 자신이 소월의 친자식임을 밝혔다. 김정호씨, 생전에 북한에 있는 가족 만나는 것이 소원! 시인 이명수씨는 지난 97년 김소월 자손들과 처음 만났다. 천안에 살고 있는 한 고등학교 선생의 제보를 받고 나서였다. 평소 김소월의 시를 흠모하던 그는 한걸음에 김정호씨와 연락을 취했고 그의 어려운 사연을 듣고는 지금은 작고한 시인 서정주 선생을 찾아가 '소월의 아들을 찾았다'고 알렸다. "미당(서정주의 시호) 선생이 소월의 자손을 위해 신경을 많이 쓰셨더라구요. 살기 힘들다며 찾아온 소월의 아들을 보고는 무척 반가워하셨어요. 정호씨도 얼마나 살기가 힘들었으면 미당 선생을 찾아갔겠어요. 레코드 외판원 등을 하며 어렵게 살림을 꾸려가는 정호씨의 형편을 알고는 미당 선생이 가슴 아파했죠. 그리고는 추천서를 써주셨어요." 당시 미당은 예술원 회장직을 맡고 있는 월탄 박종화, 시인 구상과 함께 추천서를 만들어 이효상 국회의장에게 전달했다. 덕분에 김정호씨는 지난 67년 8월, 국회의사당 총무부서로 발령을 받아 새로운 직장을 갖게 됐다. 이명수 시인은 김소월의 후손만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하다고 한다. 그는 "소월의 문학작품을 연구하며 학위를 받은 지식인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도 정작 소월의 기념사업회 하나 없으니 말이 됩니까? 생가를 복원하고 건축물을 짓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그의 작품을 다시 숨쉬게 하는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념사업회가 꼭 있어야죠." 당시 사회적으로 영향력 있는 문인들의 도움으로 반듯한 직장을 갖게 된 김정호씨는 8년 동안 성실하게 근무했다. 그러나 아내의 신부전증이 악화되자 엄청난 치료비를 마련하기 위해 회사에 사직서를 냈다. 아내를 위해서는 목돈이 필요했는데 그에게 목돈을 마련할 수 있는 방법은 오로지 퇴직금을 받는 것뿐이었기 때문이다. 그후 그는 홍익회에서 근무하다 정년퇴직을 했다. 딸 은숙씨 그때를 회상한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결혼 후 이사를 스무 번도 넘게 했어요. 생활은 늘 어려웠고 의지할 곳이라곤 없는 힘든 삶이었죠. 아버지는 정이 그리웠는지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대단했어요. 타고난 성품이 순하세요. 그래서 손해 보는 일도 많죠. 아버지는 특히 예술 방면으로 재능이 있으세요. 아코디언 연주, 그림, 서예, 글쓰기 등 못하는 게 없어요. 제가 어렸을 때는 자주 기타 치며 노래를 불러주기도 하셨어요. 생활이 여유 있었다면 예술계로 진출하셨어도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지금도 일기를 쓰시는걸요. 언젠가 할아버지 필체를 보고 깜짝 놀랐어요. 아버지 필체와 너무 똑같거든요." 김정호씨의 고단한 삶은 어느새 일흔을 넘겼다. 지금 그가 가장 바라는 건 북한에 있는 가족들을 만나는 것이다. 죽기 전에 자북에 남겨진 형제와 자손들을 만나고 싶단다. 김소월은 지난 81년 금관문화훈장을 받았다. 그것은 북한에서도 화제가 되었다. 덕분에 신문을 통해 북한에 있는 가족들의 소식을 전해 들을 수 있었다. 김정호씨의 둘째 형 은호씨는 중공업청의 간부로, 동생인 낙호씨는 설계기사로 살고 있다는 것. 김정호씨는 4년 전, 가족들을 찾기 위해 신청서를 제출했으나 만나지 못하고 있다. 가족을 만나고 싶어하는 고령의 아버지를 볼 때면 김은숙씨의 마음도 아파온다고. "아버지 생전에 북한에 있는 가족들을 만나게 해드려야 하는데 제가 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답답해요. 아버지는 자꾸 늙어가시는데… 이러다가 소원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가시면 어쩌나하는 생각이 들 때면 마음이 아프고 눈물이 나요." 김정호씨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아는 김은숙씨는 어렸을 때 아버지가 읖조리는 '진달래꽃'을 들으며 얼굴도 모르는 할아버지와 북한에 있는 친척들을 생각했다고 한다. '칼보다 강한 것이 펜'이라고 했다. 김소월의 시는 우리나라 국민의 정서를 대변하는 대표적인 시다. 그러나 한 민족의 정서를 대변하는 시인은 마음속에만 있을 뿐 현실에선 흔적조차 없다. 마음속에 있는 것을 현실화시키는 것, 이것이 비단 가족의 일이기만 하겠는가. 글 / 강수정 기자 사진 / 이명수(시인)·지호영 \\\\\\\\\\\\\\\\\ 2015년 12월26일은 김소월 시집 초간본 '진달래꽃' 출간 90년을 맞는 날이다. 얼마 전 필자는 충남 아산에서 배터리 도매상을 하는 소월의 손녀 김은숙씨를 만났다. 문학 연구 목적으로 갔으나, 그 만남이 오래 마음에 남았다... 소월은 시집 단 한 권으로 한국에서 가장 많은 사랑을 받는 시인,  초판이 문화재로 등록된 시인, 전국에 시비(詩碑)가 20여 개나 세워진 시인, 서울 남산에 길 이름도 가진 시인, 이본 시집이 600종류나 되는 시인이다. 그러나 살아 있는 작가들도 하나씩 갖곤 하는 문학관이나 기념관 하나 없는 시인이기도 하다. 손녀는 이게 못내 한으로 남은 듯하다. 친손녀라는 이유로 많은 사람이 이용하려고만 할 뿐, 정작 소월 문학관의 문짝 하나 만들어주지 못하는데 관심이 무슨 소용 있으랴. 그녀는 북한에 남아 있을지 모를 할아버지 자료들을 모으려 여러 번 시도했다. 문제는 돈이었다. 사비(私費)로 충당하기에는 턱없이 많이 필요했다. 친필 육서도 가족이 아닌 남이 가지고 있다. 얼마 전 경매에서 초간본 시집 '진달래꽃'이 1억3500만원에 낙찰됐다. 그녀가 할아버지를 앞세워 돈벌이하지 않는 이유는 하나다. "할아버지께 한 점 얼룩, 하나의 누라도 남겨서는 안 된다는 생각 때문"이란다. 어디 하나 주눅 든 구석 없이 당당한 50대 여인은 영락없이 소월의 손녀였다. 초판본 시집 '진달래꽃' 출간 이후, 이본 시집이 200만 권 팔렸다고 한다. 소월의 시가 노래로 만들어진 것도 한두 편이 아니다. 무려 300곡에 이른다. 요즘도 각종 매체에서 설문을 통해 한국인의 애송시와 사랑하는 시인을 발표하는데 늘 소월이 1등이다. 시집이 사람들 손에서 떠난 지 오래라지만 소월 시집은 지금도 독자들이 찾는다. 그뿐이랴, 대부분 시인의 시가 교과서에 실렸다가 사라져도 소월 시는 남아 있다. '국민 시인'으로 문학사에 길이 남은 이런 인물을 기리는 건물 하나 짓지 않는 대한민국이 안타까울 뿐이다... \\\\\\\\\\\\\\\\\\\\\\\\\\\\\\    소월 탄생 1백주년 맞아 돌아본 ‘소월의 아들’ 김정호씨 가족의 근황  “미당과의 각별한 인연, 북쪽 가족에 대한 그리움, 그 동안 겪은 고생… 이제야 말합니다” 우리 민족의 애환을 서정적인 민요조 운율에 담아낸 시들로 당대는 물론 지금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사랑을 받고 있는 ‘국민 시인’ 김소월. 탄생 1백주년을 맞이하여 그의 문학세계를 기리는 행사들이 열리는 가운데, 남한 내 소월의 유일한 유족에 관심이 모이고 있다.  3남 김정호씨와 자녀들을 만나 그동안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우리나라 시인 평론가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으로 꼽은 김소월. 소리 내어 읽기 좋은 가락 위에 평이한 언어로 깊은 시상을 드러내는 소월의 시는 일제 강점기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널리 사랑을 받고 있다. 그러나 평북 출생으로 남한에 이렇다 할 연고지가 없는 소월은 다른 문인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기념사업회나 단체가 없어 안타까움을 더한다. 남산에 소월의 이름을 딴 ‘소월로’와 ‘시비’ 정도가 그를 기리는 상징물 정도일까. 이는 소월과 마찬가지로 올해 탄생 1백주년을 맞이하는 정지용 시인의 경우와 퍽 대조가 된다. 정지용 시인은 고향인 충북 옥천의 자치단체가 나서서 대대적으로 문학예술제 등 기념사업을 준비하고 있는 것. 이런 상태에서 남한에서 유일하게 생존해 있는 소월의 아들과 손자들의 근황을 전하는 건 뜻 깊은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소월의 유족들은 의외로 취재를 반기질 않았다. 그간 ‘미당이 소월의 후손을 먹여 살렸다’ ‘어렵게 생계를 꾸려가고 있다’는 등의 과장된 보도에 마음이 상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정확한 기사’를 약속하고서야 그들을 만날 수 있었다. 김소월은 부인 홍실단과의 사이에 4남 2녀를 두었는데, 그중 3남 김정호씨(70)만이 남한에 생존해 있다. 현재 김씨는 부평에서 아들 영돈씨(41·대건정보기술 대표)와 며느리 이진옥씨(36), 그리고 규형(10), 도형(7) 두 손자와 함께 살고 있으며, 딸 은숙씨(43)는 충남 온양 송악 저수지 부근에서 ‘송일정’이라는 음식점을 경영하며 아들 하나를 두고 살고 있다고 했다. 기자는 아들 정호씨와 그의 가족들을 만나, 그동안의 생활에 대해 자세하게 들을 수 있었다. “아버지는 제 나이 세살 때 돌아가셨어요. 제 위로 구생, 구원이라는 누님이 두 분 계셨고, 큰형님 준호, 둘째형님 은호, 그리고 유복자로 태어난 동생 낙호와 제가 있었지요. 어머니는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저와 동생 손을 이끌고 본가로 들어갔지요. 아주 억척스러운 분이셨어요.” 정호씨가 19세 되던 해 6·25전쟁이 터졌고 인민군으로 남하한 그는 참전한 지 얼마 안돼 포로가 되고 말았다. 이후 인천 형무소, 부산, 거제도 포로 수용소를 거쳐 반공포로로 남한에 남게 되었다. 석방 후에는 전남 등지를 떠돌아다녔다. 당시는 그의 말마따나 “낮에는 대한민국 밤에는 인민공화국으로 바뀌던” 극심한 좌우대립의 시기. 남하한 지 2년 후에 그는 국군에 자원 입대했다. 55년 만기제대한 정호씨는 혈혈단신으로 연고지 없는 서울땅에서 첫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보직은 교통부 자재부서의 임시직. 3년여 이곳에서 근무하면서 평생의 반려자가 될 여인을 만나 결혼한다. 그리고 58년경 사글셋방에서 근근이 살고 있는 정호씨를 안타깝게 여긴 외가 쪽 친척의 말에 따라 당시 동아일보 사회부 박현태 기자를 만나 처음으로 자신이 ‘소월의 친자’임을 밝혔다.   19세에 인민군으로 내려왔다가 혈혈단신 남쪽에 남아 고생 많이 해   “이북 5도도민회, 직장 할 것 없이 다각도로 확인하더군요. 그래서 맞다는 걸 확인한 후 기사가 나갔지요. 그랬더니 문인들과 출판사 분들이 저를 찾아오고 그랬습니다.” 당시는 저작권이나 인세가 제도적으로 잘 보장되던 시기가 아니었기 때문에 정음사와 같은 출판사에서는 소정의 ‘사례금’을 전달하며 ‘소월의 아들’에게 미안함을 전할 뿐이었다. 당시 기억 나는 일화 중에 하나는 소월의 시 ‘엄마야 누나야’를 노래로 만든 작곡가가 그를 찾아왔던 일이다. “아버지의 시는 노래로도 많이 만들어졌잖아요. 전 아버지의 시중에서도 ‘부모’를 가장 좋아해요. ‘낙엽이 우수수~’ 하는 거 있잖아요. 노래 부를 자리가 있으면 항상 그걸 부르지요.” 그후 재단법인 홍익회에서 4년을 근무하다가 그만두고, 나와 얻은 직업은 레코드 외판원. 성문사에서 발매하는 라는 레코드판을 방문 판매하러 다녔다. “나름대로 열심히 해도 외판일이라는 게 크게 돈이 되지는 않잖 아요. 그러던 중 평소 안면이 있던 미당 서정주 선생님이 이 일을 아시고, 마음 아파하시면서 추천서를 써주셨어요.”        당시 미당은 “소월의 단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남쪽에서 외판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북한이 안다면 얼마나 악선전에 이용하겠느냐”면서, 당시 예술원 회장직을 맡고 있는 월탄 박종화, 시인 구상과 함께 추천서를 만들어 이효상 국회의장에게 전달했다고 한다. 석달 후 정호씨는 국회의사당 총무부서로 발령을 받았다. 8년 가까이 성실하게 근무했으나 아내의 신부전증이 악화되자, 치료비 마련을 위해 퇴직금이 필요했고 그로 인해 직장을 그만뒀다. 그 후 홍익회로 다시 재취업, 정년퇴직을 하기까지 그곳에서 근무를 했다고 한다. 결혼 후 스무번도 넘게 이사를 다닐 만큼 고통스러웠던 나날들이었다. 딸 은숙씨는 그때에 대해 이렇게 회상한다.   “혈혈단신이셨으니 의지할 곳도 없고 얼마나 힘드셨겠어요. 하지만 너무 성품이 맑으세요. 아기 같은 분이에요. 누굴 짓밟고 올라가거나 하는 건 꿈에도 못 꿀 양반이세요. 그래서 아마 손해도 더 많이 보셨을 거예요. 아버지는 아코디언, 그림, 서예, 글… 뭐든지 잘하세요. 젊어서 고생만 안 하셨다면 나름대로 그쪽 분야로 나가셨을 텐데, 속상해요. 아버진 지금도 일기를 쓰고 계시거든요? 아버지 필체를 볼 때마다 전 깜짝 놀라요. 할아버지 육필과 너무 유사해서 말이지요.” 식당 곳곳에 김소월이 남긴 육필 원고를 액자로 만들어 진열해둔 은숙씨가 글씨를 손으로 가리켜 보이며 말했다.   신부전증으로 아픈 아내를 성심껏 간호했던 성품 따스한 소월의 아들   정호씨는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었기에 소월에 얽힌 직접적인 추억은 거의 없는 편이다. 그러나 어머니 홍여사로부터 가끔씩 아버지에 대한 얘기를 들었다고 한다. “우리 아버진 당시 동아일보 지국장이셨잖아요? 남 보기엔 깐깐해보이는 양반이었다는데, 어머니에게는 안 그랬대요. 아주 잘하셨죠. 두 분이 반주 삼아 술도 잘 하셨고요. 원래 어머니 존함이 홍상일인데, 여자이름으로 안 좋다고 ‘실단’으로 지은 게 아버지세요. 가끔 시를 보고 다른 여자가 있을 거라 추측하는 사람도 있다는데 다른 여자는 없었어요.” 아내 사랑이 지극했다는 소월을 닮아설까. 정호씨 역시 아내 사랑이 끔찍했다고 자식들은 입을 모은다. 며느리 이씨의 경험담. “아버님이 몸이 아프신 어머님께 하시는 행동이 그렇게 극진할 수가 없었어요. 짜증내는 거 다 받아주시고, 잡숫고 싶다는 거 어떻게든 구해서 가져다주시고요. 어머님 씻겨드리는 거나, 밤새 주물러주시는 건 모두 아버님 몫이었지요. 그래서 하루는 제가 여쭈었어요. ‘아버님은 어떻게 그렇게 어머님을 위하실 수 있어요?’ 그러자 아버님이 그러시더군요. ‘나는 결혼할 당시에 이 사람을 평생 사랑하기로 서약했는데 그 약속을 못 지켜서야 되겠느냐’고요.” 정호씨의 아내는 순천향병원에서 혈액 투척만 무려 8년을 받다가 3년 전에 세상을 떠났다. 딸 은숙씨도 “부부간에 금슬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어요. 아버진 지금도 가끔 엄마 꿈을 꾸신다고 하더군요”라며 부모님 사이가 각별했음을 전했다. 영광스럽기 때문에 더욱 무겁게 다가오는 이름 ‘김소월’. 남한의 혈육에게 그 이름은 자랑스러움과 동시에 부담감을 느끼게 한 이름이었다. “소월의 자식이라는 게 영광스럽지만, 마냥 좋을 수만은 없어요. 제가 아버지 뒤를 잇고 있는 것도 아니고…. 친구들 모임이나 술자리에 가도 늘 처신에 신경써야 했죠. 선친을 욕되게 할 수는 없으니까요. 요즘도 친구들과 여행이라도 가면, 친구들이 꼭 ‘김소월 시인의 아들’ 운운하는 그런 쓸데없는 말을 해요. 그럴 때마다 친구들을 막 나무랐어요. 왜 그런 소릴 하냐고.”        ‘소월의 아들’을 각별히 챙겼던 미당과의 가슴 훈훈한 인연     정호씨의 얘기를 듣고 있던 아들 영돈씨도 말을 거들었다. “저 역시 자랑스러운 마음이 왜 없겠어요. 저도 원래 문학을 하고 싶어했어요. 그러나 할아버지라는 넘어설 수 없는 벽이 있다는 걸 느낀 다음 그냥 포기했어요. 그만큼 후손에겐 어려움이 있어요.” 어려서부터 무슨 기념일만 되면 카메라를 들고 막무가내로 몰려오는 취재진들에게 시달렸다는 영돈씨는 “아직 어린 아들들은 증조 할아버지가 위대한 시인이라니까 그저 좋아만 해요. 하지만 전 자식들이 있으니까 이제 더 신경이 써져요. 특히 과장 보도된 기사를 보면 화가 나고요”라고 말했다. 과장되게 보도된 내용 중 하나는 미당 서정주와의 인연. 물론 미당이 ‘소월의 아들’인 정호씨를 각별하게 챙겼고, 또 그 자식들인 영돈, 은숙씨를 예뻐한 것은 사실이라고 한다. 그러나 은숙씨의 고등학교 학비를 전액 지원했다거나, 마치 ‘소월 일가’를 먹여 살린 것처럼 보도된 건 지나치다는 것. “망둥어 낚시를 같이 다니기도 하고, 명절이면 세배 가고 그랬지요. 우리 아들을 보면 늘 할아버지를 쏙 뺐다고 입버릇처럼 그러셨고요. 딸이 결혼할 땐 주례도 서주셨지요. 그런데 어느 해인가 수해를 입었을 때, 힘 내라고 쌀 한 가마니 보내주신 적이 있는데, 그게 마치 먹여 살린 것처럼 부풀려진 겁니다.” 정호씨의 회고다. 미당이 주례를 섰던 딸 은숙씨는 미당이 세상을 떠나기 두 해 전에 남편 김원배씨와 함께 찾아간 일을 떠올렸다. “고기를 잔뜩 준비해갔는데 고기는 안 먹는다고 하시더군요. 당시엔 죽만 드셨나 봐요. 그래서 산나물을 보냈는데, ‘이렇게 많이는 못 먹으니 자네들이 먹게’ 하시더군요.” 정호씨는 우리나이로 일흔하나. 시간이 흐를수록 그리운 건 북의 가족들일 수밖에 없다. 81년 10월 김소월 시인에게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될 당시, 신문을 통해 가족들 소식을 간신히 알 수 있었다. 동생 낙호는 설계기사로 둘째형 은호는 중공업청 간부로 있다고 하는데, 그후 동정은 전혀 모른다. 그동안 수차 남북이산가족 상봉이 이뤄졌음에도 아직 만나지 못하고 있다고. “2년 전 방북 신청서를 작성했는데 여태 안되네요. 우리 고향이 곽산면 남단동인데, 그 밤나무 숲이 눈에 선해요. 보고 싶지요, 정말….”   변변한 소월 기념사업 하나 없는 게 안타까워   소월의 유족들이 가장 안타까워하는 건 소월이 ‘국민시인’으로 추앙받으면서도 이름을 단 조촐한 문학관 하나 없다는 점이다. 비록 북쪽 출신 문인이라 자료가 적고, 기념사업이라는 게 워낙 돈이 들지만 말이다. 정호씨는 뜻 있는 독지가나 국가가 나서주지 않는 한 영영 요원한 일이 아닐까 걱정스러워했다. “10년 전에 정길복 선생이라고, 라이온스 클럽 회장을 하셨던 분이 소월 기념사업을 하겠다고 나섰어요. 그 분이 정계, 문학계 열심히 뛰어다니며 약 10억원을 기탁금으로 모으셨거든요. 그런데 덜컥 지병으로 쓰러지시면서 사업이 무산됐어요. 인계자가 나와주질 않아 기탁금은 전부 반환했고, 결국 유야무야 되어버렸어요. 돌이켜보면 마음만 아프지요.” 올해는 소월이 탄생 1백주년을 맞은 해. 민족문학작가회의에서는 9월 26, 27일 탄생 1백주년을 맞은 김소월, 정지용, 나도향, 주요섭, 채만식 등 6인의 문학세계를 기리는 심포지엄을 연다. 또한 9월27일 시인들의 시와 산문 낭송 대회가 열리는 ‘명동 문학카페’ 행사에 6인의 유가족을 초청한 상태다. 중요한 건 이런 행사가 ‘반짝 행사’로 끝날게 아니라 지속적인 관심과 정성으로 유지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것이 ‘소월의 아들’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평생을 어렵게 살아온 정호씨와 그의 가족들에게 우리가 보여줄 수 있는 작은 정성이 아닐까.   (끝)           그때 그 뉴스ㅡ   소월(素月) 시인 그 아들 김정호씨  "아버지는 어머니와 대작하며 고독을 달랬어요" / 김두호   [인터뷰 365] 한국을 대표하는 민족시인 소월 김정식(1902~1934)의 유일한 혈육인 아들 김정식씨를 인터뷰한 때는 1981년 11월 이맘 때 였다. 정부에서 소월시인에게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하면서 서울에 아들이 살고 있다는 사실이 처음으로 알려졌다. 당시 김정식 씨는 서울 봉천동 달동네의 전셋집에서 살며 용산에 있는 기업체의 경비원으로 제직중인 가난한 서민이었다.그가 기자를 만날 때 쉰살이 었으니 건강하게 살아 계셨다면 77세가 되지만, 몇해 전 작고하셨다고 전해진다.   학교 공부를 시작해서 시(詩)라는 장르를 접하게 되면 처음 만나는 시인이 의 시인 소월이다. 등 우리민족 고유와 언어의 정서를 민요적 운율로 노래처럼 담아낸 소월의 서정시는 한국인이면 누구나 학생시절에 가장 많이 애송한 시들이다. '소월'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동경심으로 가슴이 설레는 것인데 까막득한 시대의 인물로 생각했던 소월시인의 유일한 혈육이 서울에 있다는 소식은 신기한 느낌까지 들게했다.  김정호씨는 성품이 조용하고 온화해 보였다. 아버지를 이야기 한는 동안 시종 표정이나 감정의 동요없이 차분하게 묻는말에 대답만을 해 주었다.   소월선생의 아드님이 서울에 살고 계시다니 다들 의아해했습니다. 알고 있는 사람이 별로 없었거든요. 아버지가 누구라고 소문 낼 틈도없이 먹고 살기에 바빴어요. 그래도 알고 계시는 분들이 있어서 어려울 때 도와주셨어요.   어떤 분들인데요?  아주 힘들게 살 때 내가 누구의 아들인줄 아시게 된 서정주, 구상, 박종화 선생님들이 이효상 국회의장께 부탁을 해서 일자리를 주선해 주셨지요, 국회 경비실에 취직이 되어 11년 동안은  그럭저럭 살았지만 아내가 결핵성 관절염으로 쓰러져 퇴직금을 타려고 그만 두었어요.   고생이 많으셨군요. 건축 공사장 노동도 하고 연탄배달도 하고 무슨일이든 다 했어요. 도둑질하고 남을 속이는 것 빼고는 안해 본 일이 없었지요.   소월시인의 몇째 아드님이신가요? 다른 가족분은 어디 사세요? 내가 4남 2녀중 끝에서 둘째입니다 .모두 전쟁 때 내가 집을 떠나면서 혜어졌고 6.25전 남쪽으로 온 누이가 천안에서 사셨으나 별세하고 이곳 남쪽에는 이제 혼자뿐입니다.   언제 서울로 오셨습니까? 전쟁이 날 때 내 나이 19살이었지요. 여름에 인민군에 입대해 그 해 10월 평안남도 양덕에서 유엔군에 귀순하면서 혈혈단신이 되었고 그 후 서울에서 살게되었어요. 젊을 때는 국군에 복무하기 위해 혈서지원까지 하고 지리산 공비 토벌군에서도 활동했어요.   북쪽 고향에는 아직도 다른 가족들이 살고있겠군요 알수는 없는 일이지만 아마도 형제가 많아서 살고 있을 겁니다.   어릴 때 이야기를 듣고 싶군요 아버지가 살던 본가는 평북 정주군 곽산면 남단동이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아버지의 외갓집 이웃동네가 되는 나의 외가이며, 아버지의 처가 동네인 구성군 서산면 평지동으로 이사를 해서 나는 그곳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님은 당신의 외가인 서산면 왕인동에서 출생해 본가인 남단동에서 자라셨지요. 아버지는 내 나이 세 살 때 별세하셨으니 내 어릴 때 아버지의 기억은 어머니를 통해서 들은것들이 전부입니다. 돌아가시기로 작정한 아버지가 곽산에 있는 조상어른들의 산소를 찾아 제례를 올리고 떠나셨다고들 하지만 돌아가실 때의 이야기를 어머니는 자식들에게 들려주지는 않았지요. (소월시인은 서울에서 머물다가 고향으로 돌아가 조상의 무덤을 둘러 본 뒤 시장에서 사온 다량의 아편을 술에 타 마시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것으로 전해진다)   소월시인은 가족을 몹시 사랑했다는 이야기, 부부 금술이 남달랐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가 14 때 맞아들인 어머니는 미녀는 아니지만 아버지가 무척 사랑했습니다. 어머니(남양 홍씨) 가 한 살 연상이었는데 심성이 깊고 너그럽기가 바다같은 분이셨습니다.  6남매를 낳고 돌보는 동안 아버지는 서울과 동경으로 유학생활과 작품활동을 하시며 집을 비웠지만 조금도 불만없이 자식들과 어른을 뒷바라지 하시며 사셨어요. 한동안 고향 곽산에 사실 때는 어머니에게 술을 권하고 가르쳐 대작을 하시며 말벗으로 삼아 외로움을 푸셨다고 해요.   아버지 고향 곽산은 정말 진달래가 흐드러지게 피는 고장이었다지요? 맞습니다. 봄이 오면 산이 온통 붉게 물들었어요. 그곳 능한산 남쪽 줄기 끝에 남산이 있고 그 남산봉 냉정골에는 이름없는 폭포가 있습니다. 사시장철 주옥같은 물길이 사송강으로 흘러 흘러 갔지요. 서해 바다도 멀지 않고 정주로 이어지는 철로변 산기슭은 모두 진달래가 곱게 물드는 산골이었지요. 아버지는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시기 전 까지 그곳에서 보냈습니다.   아름다운 산천에 묻혀 성장했고 사랑하는 가족도 있었던 아버지가 왜 서른둘 젊은 나이에 세상을 저버리셨는지 궁금합니다. 생존기가 우리 민족의 수난기이긴 했지만 남긴 시마다 또 애절한 정서를 많이 느끼게 됩니다. 우리 할아버지(소월의 부친 김성도)가 금을 캐는 광산도 하고 토지도 많은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셨으나 철도 공사를 하던 일본인에게 뭇매를 맞고 정신이상자가 되면서 집안이 슬프게 변했습니다. 아버지가 어릴 때 였으니 성장하면서 성격이 좀 어두웠던것 같아요. 할머니 이야기를 들어보면 아버지는 자랄 때 부터 친구가 별로 없었고 산 위에 있던 학교에서 돌아 올 때도 다른 학생들이 모두 나온 후 가장 마지막에 홀로서 내려왔다고 해요.   소월시인은 그 자신의 가정환경도 우울했지만 시대적으로 더욱 암울할 수 밖에 없었던것이 그가 오산학교를 거쳐 배재고보를 졸업하고 시작활동을 하던 말년은 일제에 의해 모국어가 말살되는 수난기였다. 3.1운동으로 오산학교가 문을 닫았지만 그 곳에서 은사인 김 억을 만나 시를 쓰기 시작은 소월은 1920년대 부터 지를 통해 시를 발표하기 시작했고 1925년에 시집 을 간행했다. 배제고보를 졸업하고 1923년에는 동경대 상과대 전문부에 입학했으나  그 해 관동대지진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해 고향과 서울을 오가며 80여편의 시를 남겼다. 그가 고향 곽산으로 돌아가 사망한지 5년 후 스승 김 억에 의해 가 발간되기도 했다. 그는 생전에 가족이 있고 꿈을 키우던 고향 산천을 좋아해 자주 낙향했다. 1924년 조부의 광산일을 돕기도 했고 1926년 구성군에서 동아일보 지국을 운영한 시기도 있었다.   지금 가족분은 어떻게 되세요? 28세 때 결혼한 아내(염경자  / 당시 45세)와 스므 살 스물 두 살된 딸이 있습니다. 살고 있는 집도 봉천동 친구의 집이지만 아이들이 다 자라서 사는데 큰 걱정은 없어요.   아버지를 대신해 훈장을 받으신 소감은 어떠세요? 어릴 때 우리 고향 동네에 살며 아버지를 잘 알고 계시는 분이 소식을 듣고 찾아와 너무 반가웠습니다. 그 분이 정자나무 밑에서 장기를 두시는 아버지 모습을 보며 자랐다고 하더군요. 그냥 그립지요. 아버지의 얼굴은 기억이 않나지만.... 살아 계신다면 일흔 아홉인데 갈 수만 있다면 당연히 산소앞에 가져가 올려 드려야지요. 그냥 고향생각 밖에 나는게 없네요. 어머니 모습이 가슴을 아프게 하고...   ...    
시인 이상, 화가 김환기, 그리고 변동림과 김향안|       시인 이상과 화가 김환기의 아내였던 수필가 김향안(본명 변동림) 여사가 2004년 2월 29일 88세로 뉴욕 자택에서 눈을 감았다. 장례식은 지난 3일 아들 김화영씨등 친지 3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고, 김여사의 유해는 뉴욕 근교 김환기화백의 묘소옆에 묻혔다. 경기고녀와 이화여전 영문과 출신인 김여사는 1936년 18세 문학소녀시절에 오빠인 화가 구본웅(1906~1953)의 친구였던 천재시인 이상(1910~1937)을 만나 짧은 결혼생활을 거쳐 다음해 사별했다.   구본웅은 김향안의 오빠가 아니라, 김향안(본명 변동림)의 이복언니 변동숙의 의붓아들이다 수화 김환기(1913~1974)와는 1944년 결혼후 56년 파리를 거쳐 60년대 이후 말년까지 뉴욕에 체류했다. 그는 파리 체류시절 미술 평론을 공부했으며, 김화백의 20주기인 94년 김환기전기‘사람은 가고 예술은 남다’를 펴냈고, 95년엔 수필집 ‘카페와 참종이’를 출간했다. 임종을 지켰던 첫 남편 이상에 대해 김여사는 86년 ‘문학사상’에‘재능있는 시인과 문학소녀의 만남’이었다며 , ‘그는 가장 천재적인 황홀한 일생을 마쳤다. 그가 살다간 27년은 천재가 완성되어 소멸되는 충분한 시간이다… 천재는 또 미완성이다’라고 밝힌 바 있다. 한편 일본 시인의 소개로 처음 만난 김화백은 당시 서울대 미대, 홍익대 미대교수였으며, 결혼후 두사람은 파리와 뉴욕에서 줄곧 이국생활을 했다. 74년 김화백이 뉴욕서 임종한 뒤에도 김여사는 그와 살던 뉴욕 아파트에 30년간 거주하며 1년에 한 두차례 서울을 찾았다. 김화백 사후 그의 유작과 유품을 관리해온 김여사는 지난 92년 11월 서울 종로구 부암동에 환기미술관을 건립, 기획전및 출판 세미나등의 사업을 펼쳐왔다. 90년대 환기미술관 관장직을 맡았던 미술평론가 오광수씨는 “고인은 남편인 수화의 작품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기리기 위한 집념과 일념이 남달랐다”며 회고했다. 환기미술관은 유화 300여점과 데생 500여점을 소장하고 있으며, 최근 ‘1965~68, 산월과 문자그림전’을 열고 있다.     이상, 김환기의 뮤즈 김향안. 김향안-변동림-과 이상, 김환기의 이야기를 작품으로 만나고 싶다.   김환기와 김향안의 결혼식     김향안과 조르주 상드 / 맹난자        나는 수필가 김향안을 수화(樹話) 김환기 화백의 아내요, 파리에서 미술을 공부하며 주로 파리를 소재로 글을 쓴 수필가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이상(李箱)의 아내였던 변동림이라니.    두번째 각혈을 하게 된 이상은 1936년 여름, 변동림과 돈암동 흥천사에서 혼인했다. 생활은 궁핍했고 몸은 극도로 허약해진 상태에서 그는 도약을 위한 탈출로 일본행을 결심했다.     궂은 비가 축축히 내리는 플랫폼에서 결혼한 지 반년도 못된 어린 신부와 동생,그리고 몇 사람의 친구가 지켜보는 가운데  헙수룩한 가방을 들고 그는 기차에 올랐다. 6개월 뒤,이상은 고국 땅 미아리 공동묘지로 와서 묻혔다. 그의 아내가 일본에 달려가 임종을 지켜보았다.    화장된 남편의 유해를 안고 돌아온 변동림을 나는 남달리 기억하고 있었다. 그 뒤 필명 김향안으로 수필을 계속 써왔고 8년 뒤인 1944년 김환기와 결혼했다. 소르본느대학 및 에콜 드 루브르에서 미술사와 미술평론을 공부했고 김환기 그림의 지평을 전 세계로 넓힌 ‘김환기 미술’의 완성자이기도 했다. 천재 시인의 어린 아내로,그리고 천재 화가의 반려자로서 예술적 영감을 그들에게 전해 준 우리 예술계의 뮤즈였다.     이에 또 한 사람의 *뮤즈*가 떠오른다. 시인 알프레드 뮈세와 음악가 쇼팽을 사랑한 조르주 상드. 일찍이 자유 연애를 구가하며 문필가로 이름을 날린 이 남장 여인, 조르주 상드는 연하의 이 두 남성을 극진히 사랑하고 돌보았다. 상드와 사랑에 빠진 동안 쇼팽의 창작의 샘은 넘쳐흘렀다.     뮈세도 의욕적으로 글을 썼다. 하건만 그녀에게 버림받은 뒤 쇼팽의 건강은 급격히 나빠졌고 음악의 샘도 말라 버렸다.  뮈세도 상드와의 어긋난 사랑으로 무절제한 퇴폐에 빠져 비참한 생애를 마감했다.    몇 해 전, 공교롭게도 나는 뮈세와 쇼팽의 동상이 마주 바라다 보이는 페르 라셰즈 무덤 안에 서 있었다. 쇼팽의 죽은 나이는 39세. 뮈세는 44세였다. 상드와의 파국은 이 천재 예술가들의 심신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김향안 여사는 1992년 서울 종로구 부암동에 환기미술관을 건립하면서 마루 한쪽 한쪽에까지 환기 그림의 느낌과 결을 맞추느라고 애썼다는 일화는 우리를 감동스럽게 하고 있다. 88세의 천수를 누리다가 3월 3일 뉴욕 근교에 있는 김환기 화백의 무덤 옆으로 돌아간 김향안 여사. 30여년 만에 만난 수화와 다시는 이별 없는 ‘수향(樹鄕)산방’에서 영생의 복을 누리시기를 빈다.     _ 맹난자 / 수필가,  2004년   수화 김환기(樹話 金煥基 1913. 2. 27 ~ 1974. 7 25)  '어디서 무엇이 되어다시 만나랴' 1970, 136x172, Oil on cotton   저렇게 많은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 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리   김광섭(이산 怡山 金光燮 1905.9.22 ~1977)  * 출전 : 겨울날(1975년)   김향안 여사          (왼쪽부터  이상, 박태원, 김소운)       내가 그다지 사랑하는 그대여 내 한평생 차마 그대를 잊을 수 없소이다. 내 차례에 못 옷 사랑인 줄 알면서도 나 혼자 꾸준히 생각하리라. 자 , 그러면 내내 어여쁘소서.   -李箱 '이런시' 중, 금홍에게 보낸 편지- ================================ 이상(李箱)의 삶을 찾아서   큰아버지 집에서 양자 생활  이상은 한일합방이 되던 해 가을 서울 사직동에서 이발소를 경영하던 아버지와 일자무학의 고아 출신인 어머니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명은 김해경. 생가의 위치에 대하여는 알려진 바 없으나 궁내부 활판소에 근무하다 활판 기계에 손가락을 잘린 뒤 차렸다는 아버지의 이발소는 운영이 신통치 않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상은 두 살 때부터 부모와 떨어져 살아야 했다. 가정 형편이 어려운 데다가 큰아버지에게 대이을 아들이 없어 통인동 154번지의 큰아버지 집으로 옮겨 살았던 것이다. 총독부의 기술 관리였던 큰아버지 집에서의 생활은 윤택했지만 고종 때 증조부가 정3품 벼슬을 지낸 강릉 김씨 문중의 증손이 된 사실은 이상에게 적잖은 갈등을 안겨 준 듯하다. "나는왜드디어나와나의아버지와나의아버지의아버지와나의아버지와아버지의아버지노릇을한꺼번에하면서살아야하는것이냐"( 제2호) 이상이 스물세 살 때까지 살았던 통인동 본가는 그가 에서 "10대조의 고성"이라고 한 것처럼 꽤나 큰 한옥이었던 모양이다. 본채에 행랑채와 사랑채까지 딸린 300여 평의 넓은 집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집의 옛모습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광화문에서 사직터널 쪽으로 꺾어 300미터쯤 가다 보면 길 왼편에 상업은행 지점이 있다. 은행 왼편 골목길로 20미터쯤 들어간 곳의 오른편이 바로 이상이 이십일 년 간 살았던 통인동 154번지다. 이 집은 현재 십여 개의 필지로 분할되어 여러 채의 한옥들이 들어서 있고 길가 쪽으로는 인쇄소, 책 대여방, 열쇠 가게 등이 영업중이다. 이들 가게는 물론이고 골목안 복덕방에서도 이 일대가 일세를 풍미했던 천재 시인 이상의 옛 집터였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었다. '제비' 다방 : 의 무대  각혈을 할 정도로 병세가 악화된 이상은 총독부 기사직을 그만두고 황해도 백천 온천으로 요양을 떠난다. 그러나 이 곳 술집에서 기생 금홍을 만난 이상은 청진동 조선광무소 1층을 사글세로 얻어 '제비' 다방을 차리고 금홍을 마담으로 앉혔다. 다방 뒷골목에 금홍과 살림까지 차려 훗날 그의 대표작이 된 의 무대를 만들었다. 1934년 조선중앙일보에 발표한 는 이상을 일약 스타로 만들었다. '미친 수작' '정신병자의 잡문' 등의 혹평과 비난 때문에 연재는 중단되었지만 열화 같은 찬반 양론이 일었고 '구인회' 가입 후에도 꾸준히 작품을 발표했다. 하지만 '제비' 다방은 경영난으로 폐업하여야 했고 인사동의 카페 '쓰루(학)' 광교다리 근처의 다방 '69'와 명동의 '무기(맥)'를 잇달아 개업했으나 모두 실패했다. 그런 와중에도 이상은 1936년 이화여전 출신인 여류문인 변동림(이상이 죽은 뒤 수화 김환기의 부인이 된 김향안 여사)과 결혼, 새로운 인생을 맞는 듯했으나 건강 악화와 어려운 경제적 여건 등 국내에서의 암담한 현실을 뒤로 하고 혼자 동경으로 떠난다. 이듬해 2월 죽음 직전의 혼곤한 상태에서 불령선인(不逞鮮人)으로 일경에 체포된 이상은 신병 악화로 한 달여 만에 석방되어 동경제대 부속병원에서 부인 변동림과 마지막 해후를 했다. 1937년 4월 17일 "레몬 향기를 맡고 싶소."라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는데, 그의 유골은 서울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보다 한 이십 일 정도 먼저 타계한 소설가 김유정과 함께 합동 영결식이 치러지고 미아리 공동묘지에 매장되었다. 만 이십육 년 칠 개월의 삶이었다. "날개를 펴지 못한 천재 시인" 이상을 기념하는 문학비가 송파구 방이동 보성고 교정에 세워져 있다. 보성고 동문들과 부인 변동림 여사가 1990년 5월 건립한 이 문학비는 이상의 천재성과 파격성을 강조하기 위해 추상 조각으로 만들었으며 문학비 앞에 이상의 얼굴 그림과 연보, 대표시 를 새긴 시비를 따로 마련했다.     글꼴조정 공유하기 북마크     [ 2016년 01월 05일 10시 48분 ]     스리랑카에서 지금까지 발견된 블루스타 사파이어(蓝星宝石) 가운데 세계 최대인 1404.49캐럿의 블루스타 사파이어가 발견, 이 사파이어는 최소 1억 달러(1188억원) 이상의 가치가 있는 것으로 추정, 익명의 소유주는 이 사파이어가 경매에 붙여질 경우 최고 1억7500만 달러(약 2079억원)에 낙찰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 이 보석을 블루스타 사파이어라고 부르게 된것은 중심부에 나타나는 독특한 문양 때문, '보석의 도시'로 불리는 스리랑카 남부 라트나푸라에서 채굴, 이 사파이어에는 '아담의 별'(The Star of Adam)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아담이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 후 스리랑카에 도착해 '아담의 정상'(Adam's Peak)에서 살았다는 무슬림들의 믿음에 따른것. - ‘천재 시인’ 이상(李箱)에 빠지다  1954년 3학년을 마치고 경제사정으로 더 이상 학교를 다닐 수 없게 되자, 특히 고시공부를 해서 판검사가 되겠다는 꿈이 좌절되자 그는 자살을 생각할 정도로 깊은 절망에 빠지게 됐다. 흔히 이런 절망적 상황에서 안식처로 찾는 곳이 문학이다. 하기야 중학시절의 꿈이 문학가이기도 했었다. 사실 그가 판검사가 되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피난길에 목격한 젊은 죽음들에 대한 분노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즉 그의 성정 본바탕에서 판검사를 지향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성정 자체가 그런 인물이 못된다. 생전에 그가 그런 점을 글로 고백한 바도 있다.  “한많은 피난살이 속에서 그런 울분과 충격도 낡은 앨범처럼 퇴색해 가고, ‘땃벌떼’다 정치파동이다 휴전회담이다로 어수선한 세월이 흘렀다. 폐허에서 하루의 삶에 쫓기던 나는 판․검사가 돼서 떵떵거리고 살아야겠다는 엉뚱한 꿈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내 판검사의 꿈은 민․형법 총론․각론 8권을 송두리째 암기하자마자 파김치가 되고 말았다. 지칠 대로 지쳐서 나는 시집과 소설책을 들었고, 세기말적 절망감 속에서 이상(李箱)의 작품과 친해졌다. 중학시절의 꿈이 하기야 문학자였으니까, 오랜 방황 끝에 ‘탕자(蕩子) 돌아오다’가 된 셈이었다”  -- (‘제2의 매국, 반민법 폐기’, , 1987년 봄호)  이상(李箱)과 그는 여러 가지 면에서 흡사한 점이 많다. 대중과 잘 어울리는 성격이라기보다는 상대적으로 ‘나홀로형’에 가까운 점이 그렇고, 예술가적 기질 또한 그렇다. 건축기사 출신으로 선전(鮮展)에도 여러 번 입상한 적이 있는 이상은 미술학도였고, 종국은 방송사 주최 기타연주대회에서 2등상을 받을 정도로 음악에 출중한 소질이 있었다.    경성고공 시절의 이상 또 두 사람의 천재적 기질, 비 인문계 출신(이상은 경성고공(高工) 건축과, 종국은 경성농고 수의축산과)도 그렇거니와 두 사람의 ‘사랑 역정’도 비슷했다면 비슷했다고 할 수 있다. 심지어 암울했던 시대상황까지도 한 몫을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그런지 그는 이상에 쉽게 빠져들었고, 또 이상 연구에 큰 족적을 남겼다. 그 무엇인가에 빠져서, 그 대상이 사람이든 아니면 연구가 됐든, 나름의 성과를 냈다면 그건 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고 또 높이 평가돼야할 것이다. 이상에 빠져든 과정을 그의 기록으로 직접 보자.  “퇴폐와 절망의 심연에서 허위적 거리고 있을 때 눈에 띈 것이 ‘이상 선집(李箱選集)’이었다. 그런데 읽어보니 그게 어쩌면 그렇게 내 처지와 심정을 그대로 옮겨 놓았는지, 나는 그만 홀딱 반해버리고 말았다. “박제(剝製)가 되어 버린 천재를 아시오?” 이상의 작품 ‘날개’에 나오는 첫 구절이다. 민법총칙 5백 페이지를 한 달 이내에 외어버린 천재(?)가 밥과 잠자리 걱정 때문에 꼼짝을 못하고 있으니, 나야말로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가 아닌가? 이상의 사후 20년이 되어 가던 그 때까지 그에 대해서는 본격 연구가 없었다.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 이상을 발굴해서 ‘날개’를 달아준다? 스스로 천재라고 믿었던 나 자신 하나도 살리지 못해 고시를 포기한 녀석이 남의 천재를 살려낼 생각을 했던 것이다”  -- (‘술과 바꾼 법률책’ 중에서) 그가 ‘이상 연구’에서 남긴 족적은 뒤에 다시 거론키로 하고 당시 그의 집안사정을 잠시 살펴보자. (전 3권)을 만들 당시 그는 도봉리 집에서 작업을 하고 있었다. 여유로운 상황에서의 ‘글쓰기’가 아니라 돈이 없어 대학등록을 할 수 없는 처지에서 일종의 ‘도피적 글쓰기’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 시기가 그로선 심적, 물적 가장 고통스런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차라리 농고를 다닐 때는 그만두거나 아니면 대학갈 때 만회할 기회가 있었다.  경성사범을 그만둘 때는 하고 싶은 음악을 할 수 있다는 대안이 있었다. 또 경찰관 생활은 본가와 큰집 모두에서 갈등을 겪고 있을 때 일시적 피난처로는 그만한 데가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20대 후반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직장도, 사랑도, 결혼도 해야될 나이에 그는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늘어난 건 짜증과 괴팍한 성격의 폭발이었다. 그 못지않게 가족들도 그 때문에 힘이 들었다. 그리고 만만한 건 여동생들이었다.  “천재는 광인(狂人)에 가깝다는 말처럼 오빠는 광인에 가까웠다. 정말 아무 것도 아닌 일에도 불같이 화를 내곤 했다. 학교를 휴학하고 도봉동 집으로 내려와 ‘이상전집’을 쓸 무렵에 그랬다. 오빠의 글 쓰는 스타일은 참으로 그때로선 이해하기 힘들었다. 식구들이 잠을 자는 밤이면 글을 썼는데 시끄럽다고 해서 숨도 크게 쉬지 못했다. 잠자다가 화장실에 가려면 그 문소리조차 내지 못하도록 했다. 그리고는 남들이 깨어나 생활하는 낮 시간이면 잠을 잤다. 밥먹을 때 나는 숟가락 소리조차 시끄럽다며 소리를 질러댔다. 당시 군대에서 만들어준 집이 넓기는 했으나 칸막이가 따로 없는 한 공간에서 살다보니 우리 자매들과 어머니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봄부터 가을까지 우리 식구들은 밭에 나가 일을 했는데 오빠는 코앞에 있는 재떨이나 성냥도 순화야! 순화야! 소리를 지르며 갖다 달라고 해서 멀리 갈 수도 없었다. 그 때 우리 땅에 주둔해 있던 군인들이 부르는 오빠의 별명은 ‘네로’, ‘왕초’였다. 어쩌다 오빠가 출판사에 볼일이 있어 서울을 가는 날이면 우리들에겐 해방의 날이었다” (순화 증언)    둘째여동생 순화 막내 경화도 유사한 증언을 했다.  “예술가 기질이 있었던 오빠는 다른 오빠들에 비해 불규칙적인 생활을 많이 했다. 어머니가 공부하라면 되레 만화를 보면서 어머니 속을 썪이기도 했다. 그리고는 만화 보는 것도 공부라고 둘러댔다. 그 때 어머니는 오빠 별명을 ‘털팩이’라고 했는데 불만투성이의 거친 행동을 두고 하는 말이다. 오빠는 물그릇이란 물그릇은 전부 걷어차고 다녔다. 젊은 시절 무슨 불만이 그리도 많았는지 모르겠다”  이런 불만의 세월 속에서도 그는 이상 연구의 금자탑이랄 수 있는 세 권을 내놓았다. “원고를 탈고했다는 것은 쓴 것이 아니라 낳은 것이며, 그것도 임신중독증이 극심한 난산이었다”는 순화의 표현은 조금도 과장이 아니다. 정식으로 평단(評壇)에 등단한 신분도 아닌, 27세의 대학생이 거의 황무지나 다름없던 분야를 개척한 것은 우리 문학사에서 평가받아 마땅한 일이다.  그 무렵부터 그와 교류가 있었던 시인 고은(1933년생, 73세)은 발간에 큰 의미를 부여했다. “그 당시 ‘이상전집’이라는 것은 오늘날 우리가 이상을 생각하는 거 하고 전혀 다릅니다. 이거는 무에서 유를 만들어 낸 것이죠. 자료를 다 뒤져서 만들었습니다. 식민지 36년 동안 그 작가가 어느 작가였든 간에 그것은(자료 등) 망실돼 있는 상태였는데 그걸 임 선생님께서 만들어서 이상전집으로 내신 것입니다” (, 민족문제연구소, 2006 3월호)  - ‘무’에서 ‘유’를 창조한   그에 이어 등을 출간한 문학평론가 김윤식(1936년생, 70세, 전 서울대 국문과 교수) 교수는 더 각별한 의미를 부여했다. 8월초 전화인터뷰에서 김 교수는 “임 선생의 문학분야 업적을 들라면 을 펴낸 것도 중요하지만 세 권을 묶어낸 것도 절대 과소평가돼선 안 된다. 그 당시 그런 작업을 할 여건이 전혀 돼 있지 않았다. 그런데 임 선생께서 곳곳을 다니며 자료를 모으고, 심지어 이상이 일본서 보낸 편지까지 유가족들에게 입수해 전집으로 묶어낸 것은 대단한 성과라고 할 수 있다. 임 선생은 이상 연구의 기초를 다진 분으로, 이상 연구의 첫 자리에 앉을 자격이 있는 분이다” 라고 말했다.  시인이자, 언론인 출신으로 생전에 종국과 친교가 두터웠던 인태성(1933년생, 주간 역임, 경기도 수원 거주)은 “이상은 요절했다. (* 1910년에 태어나 1937년에 만 27세로 사망했으니 요절이라면 요절이다) 짧은 생애에 많은 작품을 남겼지만 그의 사후 이를 제대로 챙기는 사람이 없어 작품들이 이곳저곳에 산재해 있었다. 작품 수나 장르별로 어떤 것이 있었는지도 전혀 집계돼 있지 않았다. 물론 그 때까지 이상 개인문집이 나온 것도 없었다. 기껏해야 해방 후 김기림이 펴낸, 200쪽 분량의 (백양당, 1949)이 고작이었다. 그러던 것을 임 선생이 도시락 싸서 전국의 도서관을 돌면서 이상 작품을 발굴해 엮어낸 것이 세 권이다. 임 선생이 청춘을 바친 역작이다” (* 참고로 에는 이상의 문학작품 가운데 소설 3편, 시 22편, 수필 6편이 실려 있다)  이미 그 당시만 해도 김기림의 은 절판이 돼 입수하기가 쉽지 않았던 모양이다. 종국에게 이 책을 구해준 사람이 바로 인태성이었다. 인태성은 그가 을 엮을 때 도움을 주기도 했다고 시인 박희진은 증언했다. 이에 대해 인태성은 “도서관에 따라가서 이상의 시 몇 편을 베껴준 게 전부”라고 겸손해 했다.  편찬 과정이 어땠는지 당사자인 종국 본인의 얘기를 들어보자. 그는 “대학시절에 나는 을 3권으로 엮어서 펴낸 일이 있다. ‘이상론’을 쓰려고 작품을 모으다 보니 웬만큼 수집이 된 것 같아서 전집으로 엮었던 것인데, 그건 좀 어렵다면 어려운 과정이었다. 작품연보 하나가 안 갖춰진 상태에서의 수집은 별 수 없이 신문, 잡지를 하나하나 뒤지는 일로부터 시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도서관에서 20년 전의 간행물들을 뽑아내면, 책 위에는 먼지가 석 자는 몰라도 1밀리미터는 충분히 쌓여 있었다. 그런 출판물을 한 장 한 장 뒤지는 지어(紙魚, 좀벌레) 생활 1년에 은 햇빛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시시했던 날의 시시한 이야기’, , 우촌이종익추모문집간행위원회 편, 1992)고 회상했다.    종국이 펴낸 (전3권) 초판본 그럼 여기서 그동안 ‘이상 연구’의 성과에 대해 잠시 알아보고 넘어 가자. 아래 내용은 지난 1995년 문학사상사에서 네 권으로 펴낸 가운데 제4권 ‘연구논문 모음집’의 서문에서 김윤식 교수가 ‘을 엮으면서’라는 제목으로 쓴 것을 요약한 것임을 미리 밝혀둔다.  우리 문학사에서 이상 문학만큼 난해한 것은 별로 없다. 1930년대의 김기림의 작품평에서부터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약 2백여 편의 연구논문이 씌어졌고, 앞으로 씌어질 것임에 틀림없거니와, 그렇다고 이상 문학의 해석이 끝나는 것은 아닐 터이다. 이상 문학에 관한 본격적인 논의는 그가 이국땅에서 숨져간 1937년을 전후로 시작되었다. 이상추도회(1937. 5. 15)에서 행한 평론가 최재서의 은 그의 유명한 와 더불어 이 방면의 고전으로 군림하고 있다. 이후 나온 논문들을 연대별로 살펴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1930년대엔 추도문을 포함해 13편이 나왔다. 1940년대, 이른 바 해방공간에서는 단 3편만 보인다. 6.25 이후 한동안 씌어진 논문은 모두 24편이었다. 앞 세대에 비해 놀랄만한 증가세를 보였다. 6.25 전쟁의 포화 속에서 젊은 평론가들이 발견한 것은 다름아닌 이상 문학이었다. 서울대에서는 이어령이 에 ‘이상론’을, 고려대에서는 임종국이 에 ‘이상 연구’를 선보였다. 또 임시수도 부산에서는 고석규가 역설로서의 이상론을 펼쳤다. 절망을 체험한 세대에게 이상은 친형과 흡사한 존재였다.  1960년대엔 55편이 나왔다. 전 대에 비해 거의 두 배로 늘어난 셈이다. 이 세대의 특징은 김구용의 과 김현의 로 대표시킬 수 있다. 1950년대와는 달리 1960년대는 어느 정도 거리감을 두고 이상 문학을 바라볼 수 있었다고 하겠다. 1970년대에는 1960년대의 두 배에 육박하는 103편의 논문이 발표됐다. 이 시대의 특징은 오생근의 , 김용운의 , 오광수의 등으로 대표된다. 이는 이상의 문학이 미시적 분석을 통해 수학, 미술, 건축, 그리고 정신분석 등으로 확산되었음을 웅변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1980년대 들어서는 그동안 나온 이상 문학 연구물 전체에 대한 반성이 시작됐다. 즉 새로운 범주를 개척하기 보다는 그동안 논의된 영역을 한층 더 심화시키는 형태로 나타났다고 할 수 있다. 조두영의 , 김윤식의 , 이승훈의 , 한상규의 등으로, 이는 각 분야별의 심화연구라고 할 수 있다. 김윤식의 글에는 1990년대는 다루지 않았다. 이 책이 95년에 나온 것이고 보면 아직 마무리할 때가 되지 못한 것이다.  그러던 차에 나는 다행스럽게도 1990년대 이상 연구의 성과를 잘 정리한 논문을 한 편 발견했다. 필자는 김주현 경북대 국문과 교수. 김주현은 제6집(안동어문학회, 2001. 11)에 ‘1990년대 이상 연구의 성과와 그 한계’라는 제목의 논문을 실었는데 빈 공간을 메우기에는 안성맞춤의 논문인 셈이다. 이 글은 앞서 김윤식의 글과는 또 조금의 차이가 있다. 김윤식의 글이 연대별 특징에 주안점을 뒀다면 김주현의 논문에는 시기별 대표적 연구자들을 언급하고 있다는 점이 나로선 고마운 점이다. 아래 내용은 김주현의 논문 가운데 일부를 요약, 발췌했음을 밝혀둔다.  이상에 대한 연구물은 한국의 근대 문인 그 누구보다도 많다. 193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의 이상 연구는 짧은 단평에서부터 학위논문까지 포함해 1,000편에 이르고 있다. 그 가운데서 3분의 1이 넘는 340여 편이 1990년대에 나왔다. 학위논문 만으로만 보면 1990년대까지 전체 220여 편 가운데 절반에 해당하는 100편이 1990년대에 나온 셈이다.  1990년대에 나온 논문 중 이상 단독 논문은 석사논문이 48편, 박사논문이 9편이다. 김주현은 1990년대 들어 이상 연구가 넘쳐난 원인을 두고 ‘연구자 양산’을 들고 있다. 1980년대 초 대학입학 증원이 늘자 이것이 대학원 증원으로 이어졌고, 뒤이어 80년대 중반부터 석사학위 논문으로, 다시 90년대엔 박사학위 논문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일단 외적 상황이 좋아졌다는 얘기다.  - 뒤이은 ‘이상 연구’의 성과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연구자들이 이상 연구로 몰려들었을까? 김주현의 분석은 이렇다. 우리 근대문학사가 겨우 1세기 정도로 일천한 데다 생존 작가들에 대해서는 연구 자체가 금기시 되다보니 아무래도 ‘죽은 자’를 찾게 되었다는 것. ‘주례 비평’ 무성한 한국적 풍토를 감안하면 설득력이 있는 분석이라고 본다.  특히 이상은 시, 소설, 심지어 수필까지 다양한 장르에서 작품을 남겨 건축, 회화 분야의 연구자들까지도 가세하게 됐고. 그러면 이상의 매력은 과연 이것 뿐인가? 김주현은 다시 자문자답한다. 더 있단다. 시대적, 사회적 요인도 크게 작용했다고 한다. 이상은 본격적인 근대문학 연구가 진행될 때마다 중요한 소재로 부각돼 왔다.  한편 이상 문학의 본격적인 연구는 1950년대 중반부터 시작되는데, 당시 들어온 실존주의 개념이나 정신분석학적 잣대들이 그의 문학을 해석하거나 재단하는데 중요한 도구가 된다. 여기에 임종국의 발간이 이상 연구의 기폭제로 작용하기도 했다. 자료의 희귀성보다는 일반성이 연구를 추동케 하는 힘이 되기 때문이다. (* 임종국이 펴낸 도 마찬가지 경우다. 그 책에 등장한 희귀한 자료-사실은 모두 일제시대 신문, 잡지 등에 실려 있는 것들이지만-보다는 그런 자료들이 일반에 알려지고 후속 연구를 추동해 냈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이상 연구자로 1950년대에는 임종국 이어령 고석규, 1960년대에는 송기숙 송민호 여영택 이보영 정명환, 1970년대에는 고은 구연식 김용운 원명수 정귀영, 1980년대에는 김윤식 이승훈 등을 꼽을 수 있다.  1990년대 이상 연구의 성과를 진단하는 건 그리 간단치가 않다. 다양하고도 다원적인 접근이 이뤄진 때문이다. 1950~80년대의 이상 문학 연구의 특징은 실존주의 및 형식주의의 세례를 받았다면 1990년대의 연구는 이전 연구의 보완 및 확대, 그리고 새로운 방법론의 개척이라는 데 의미가 있다. 다시 말해 정신분석학적 연구도 프로이트에서 벗어나 크리스테바, 라캉, 들뢰즈나 가타리의 논의들이 집중 수용되었다.  그리고 작품의 기법이나 내적 형식의 탐구도 모더니즘 또는 포스트모더니즘의 본질적인 문제들과 관련하여 논의되었다. 그러나 보니 물량적으로도 급속히 늘어나 1990년대 이상에 관한 비평, 학술논문, 저서 등이 무려 240여 편에 이르고 있다. 말하자면 대부분의 현대문학 연구자들이 이상을 한 번씩은 손대고 지나갔다는 얘기인 셈이다. 심지어 개별 작품에 대한 석사학위 논문만도 14편이나 된다. ‘날개’(7편), ‘오감도’(4편), 그리고 ‘주자회시’ ‘12월 12일’, ‘종생기’ 각 1편씩이다.  하나 부기해 둘 것은, 김주현은 금년 2월 네 번째의 ‘이상문학전집’(전3권)을 펴낸 바 있다. 맨 처음 임종국의 ‘이상전집’(태성사, 1956), 두 번째 이어령의 ‘이상전집’(갑인출판사, 1977~78), 세 번째 문학사상사판(이승훈, 김윤식) ‘이상문학전집’(문학사상사, 1989~93), 그리고 이번에 김주현이 펴낸 것이 네 번째다. 그는 6년여의 작업 끝에 이를 묶어냈는데 그간 나온 연구 성과 가운데 오류 등을 모두 교정했다고 한다.  한 예로 이상의 유서처럼 읽히는 대표작 ‘종생기(終生記)’에서 이상 연구자들을 곤혹스럽게 했던 마지막 대목 “만이십육세와 삼십개월을 맞이하는 이상선생님이여! 허수아비여!”의 ‘삼십개월’이 ‘삼개월’의 오식이며, 그래야만 이상의 나이와 작품 탈고 시기가 맞아떨어진다는 것이다. 그는 “원전 확정이 먼저 이뤼진 뒤 전집이 발간돼야 함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는 그 반대로 이뤄져 전집의 오류가 연구의 오류로 이어졌다”며 “이번 작업은 그 악순환을 바로잡기 위한 시도”라고 말했다. ( 2006. 2. 8 기사 참조)    인으로 활동하던 당시의 이상 - 이상을 닮은 임종국의 자화상  이상(李箱), 불과 27세에 생을 마감한 천재시인 이상. 종국은 과연 그를 어떤 시선으로 바라 봤을까? 앞에서 김윤식은 1950년대 절망을 경험한 세대에게 이상은 ‘친형과 흡사한 존재’라고 했다. 인태성은 종국이 “처음엔 (이상이) 자기의 취향에 맞다며 관심을 보이더니 어느 순간 푹 빠져 들더라”고 기억했다. 종국 자신이 쓴 글을 보면, 김기림의 ‘이상선집’을 읽고서 “(고시공부에) 지칠 대로 지쳐서 나는 시집과 소설책을 들었고, 세기말적 절망감 속에서 이상(李箱)의 작품과 친해졌다”(‘제2의 매국, 반민법 폐기’) “그게(이상선집) 어쩌면 그렇게 내 처지와 심정을 그대로 옮겨 놓았는지 나는 그만 홀딱 반해버리고 말았다”(‘술과 바꾼 법률책’)고 자백(?)한 바 있다.  앞에서 이상이 종국과 흡사한 점이 여럿 있다고 언급한 바 있다. 괴팍한 성격, 예술적 재능, 천재 끼 등등. 종국은 어쩌면 이상을 통해 자신의 자화상을 봤는지도 모른다. 그가 쓴 ‘인간 이상’론(論)을 몇 살펴보자.  종국은 1955년 12월 제1집에 처음으로 ‘이상론-근대적 자아의 절망과 항거’를 선보였다. (* 그와는 친구였던 시인 인태성은 에 실린 그의 ‘이상시론’이라는 짤막한 평론을 보고 문과생도 아닌데 글을 잘 썼다는 생각을 하고는 그를 찾아가서 만났다고 했다. 혹 그가 에 실린 ‘이상론’을 착각한 것인지, 아니면 별도로 에 ‘이상시론’이라는 것을 실었는지는 정확치 않다. 한편 위의 ‘이상론’은 다시 별도의 독립된 형식으로 수정, 개작돼 제3권에 ‘이상 연구’라는 제목으로 실렸다. 그리고 다시 1989년 문학사상사에서 펴낸 4권(김윤식 편저)에도 그대로 재록됐다) 초창기 평론이어서 그런지 ‘이상론’은 거칠고 감정이 너무 노골적이다. 과도한 찬사도 더러 눈에 거슬린다. 이는 어쩌면 당시 불행했던 자신의 모습을 투영시켜 위로받고자 함이었는지도 모른다.  특히 이상이 도쿄에서 사망 4개월 전, 1937년 정월에 보낸 ‘마지막 편지’ 전문을 인용하고는 ‘듸폴도 상징도 아무 것도 없다. 이 얼마나 비장한 고백의 서한문이냐!’며 감탄조를 남발하는 형국이다. 글 첫 부분에서 이상의 도쿄행을 다루면서 언급한 이상의 인상비평이 눈길을 끈다. (* ‘이상론-근대적 자아의 절망과 항거’는 1962년에 출간된 (안동림 편, 동서출판사)이라는 단행본에 ‘고독한 반항아 이상’이라는 제목으로 개제돼 실린 바 있다)  “총독부 회계과로 또 건축과로, 고공(高工, 경성고공)을 졸업하고 얻은 관청 지위를 바로 팽개치고 시와 음악과 그림을 샀다는 서툴은 흥정꾼 이상(李箱). 혹 ‘이형!’ 하고 부르는 사람이 있으면 파안대소 하면서 ‘네, 좋습니다. 이상은 이형(李兄)과 통할 수 있습니다. 이상은 괴상하고도 통하니까요’ 하더라는 김해경(金海卿)이라는 으젓한 본명의 소유자, 유화(油畵)도 하고 도안도 만들고 ‘하계(河戒)’라는 화명(畵名)으로 삽화도 그려보았다는 사나이, ‘69’-씩스․나인이라는 그런 온당(穩當)치 못한 문구를 시침 뚝 따고 다방 옥호(屋號)로 사용하던 장난꾸럭이, ‘제비’와 카페 ‘つる’(쓰루, 鶴)와 ‘69’에 실패하고도 여전히 굴(屈)치 않고 명치정(明治町)에다 다방 ‘むぎ’(무기, 맥)를 내더라는 불굴의 ‘야인(野人)’-동해(童骸)-이런 이상(李箱)…”  그러나 이런 인상비평은 후술하는 본문과 견주면 호사스럽게 느껴진다. 종국은 이상의 도쿄행이 비극의 씨앗이 된, 즉 이상이 도쿄로 건너간(1936년 가을) 뒤 불과 7~8개월 만에 사망(1937. 4. 17)한 것을 두고 못내 한탄했다. 특히 이상이 도쿄에서 희망은커녕 실망과 절망에 빠진 나머지 깊은 ‘회한’을 한 것을 못내 안타까워했다. 이상 자신이 그런 회한을 ‘마지막 편지’에서 언급하고 있다.  “도저히 ‘커피’ 한잔으로 해결할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과거를 돌아보니 회한(悔恨) 뿐입니다. 저는 제 자신을 속여 왔나 봅니다. 정직하게 살아 왓거니-하던 제 생활이 지금 와보니 비겁한 회피의 생활이었나 봅니다. 정직하게 살겠습니다. 고독과 싸우면서 오직 그것만을 생각하며 있습니다. 오늘은 음력으로 제야(除夜)입니다…”  ‘반성’을 넘어 ‘자학’으로까지 비쳐지는 그런 이상의 상황을 지켜보는 종국의 평가, 또는 해석은 이렇다.  “과연 할 수 없는 이런 문제들이 풀렸다면, 상(箱)의 예술은 그 혼돈과 무질서를 지양하고 그가 실험한 수법과 더불어 완성적 경지에 도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새로운 시대를 창조하던 혹은 창조한 작가로써 우리 앞에 커다랗게 ‘크로우즈 엎’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요절(夭折)하였다. 본명 김해경 이외에 이상이라는 이상한 이름이 있고, 공교롭게도 책상 위에는 몇 권 재미없는 책이 있었고, 그리고 일기에 적힌 볓 줄의 소위 불온하다는 글귀로 해서 침략에 눈이 뒤집힌 일제의 주구에게 혐의를 입고 서신전(西神田)경찰서 유치장 신세를 지게 된 것입니다…”  특히 그는 이 글에서 이상을 두고 ‘조난(遭難)한 세대의 혈서를 써놓은 시인’ ‘20세기의 김삿갓’ ‘인간의 무지와 불성실이 빚어낸 절망과 비극을 초극하려던 예지와 성실의 사도(使徒)’ 등 극찬에 가까운 박수를 아끼지 않는다. 또 이상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달, 까마귀, 자두, 십자가 등의 ‘비화(悲話)’를 언급하면서 이상 해석의 극치를 달린다.  이를테면, ‘오감도(烏瞰圖) 시(詩) 제7호’에 등장하는 달(月)을 두고 ‘달은 자신의 그림자조차 가지지 못한 지상 최대의 고독자’라며 은근히 이상을 연상시키는가 하면, ‘오감도(烏瞰圖)’에 등장하는 까마귀는 ‘암흑을 상징하는 시커먼 몸둥아리’라며 ‘상(箱)은 울어주는 이조차 없던 세기의 종말을 향하여 안타까이 몸부림 치며 피를 토하던 한 마리의 처참한 까마귀였을 지도 모른다’고 했다.  특히 글 말미에서는 이들(달 까마귀 십자가, 심지어 이상까지)은 ‘확실히 모두 건강하달 수 없다’고 전제하고는 그러나 이들의 존재가치를 역설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는 대미에서 “확실히 상(箱)의 예술은 불행한 세대가 올 때마다 그를 위안하고 자극하고 그럼으로써 인류와 더불어 길이 남을 것”이라고 끝을 맺었다.  반면 지난 79년에 에서 펴낸 단행본 에 기고한 글은 내용이나 문투가 판이하게 다르다. 이상의 일대기 식으로 쓰여진 이글에서는 감정적 표현이 철저히 자제되었다. 물론 평론 형식이 아니라 사전식 글쓰기라는 점도 있겠지만 ‘이상론’을 처음 발표(1955년)한지 14년이란 세월이 흘러 이상에 대한 감정이 다소 진정된 결과인지도 모르겠다. 눈에 띄는 대목은 “(이상의) 작품들은 모두 생전에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했다.  이상의 작품이 비교적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사후 20년이 지난 1956년경 부터다. 주로 신인층에 의해서 활기 있게 논의되기 시작한 그의 작품은 그동안 참 많은 화제를 일으켰고, 앞으로도 많은 화제를 이어갈 것처럼 보인다”고 쓴 부분이다. 자신의 이상연구에 대해 자화자찬 격이긴 하나 사실과 다른 내용은 없다. ‘1956년’, ‘신인층’ 등은 모두 자신 등(이어령 등 포함)을 지칭한 것이다. 어쩌면 종국은 이 글을 쓰고 처음으로 ‘기쁨의 눈물’을 흘렸을지도 모른다.  - '이상 연구'와 스승 조지훈의 격려  이제 그러면 그가 ‘난산’ 끝에 낳은 옥동자 을 살펴볼 차례다. 총 3권으로 구성돼 있다. 제1권은 창작집, 제2권은 시집, 제3권은 수필집. 각 권 소책자(4×6판) 크기이며, 정가는 900원(제2권은 800원), 모두 300쪽 안팎의 분량이다. (* 나는 이 평전을 준비하면서 혹시나 싶어 인터넷 고서점을 뒤졌더니 운좋게 마침 소장하고 있는 곳을 찾아 9만원에 세 권을 손에 넣었다)  각 권 모두 두 장씩 이상과 관련 사진과 필적이 실려 있는데, 대개는 이상의 자당 박세창(朴世昌)씨로부터 입수한 것이다. 다만 이상이 일본으로 건너가기 직전 서울 흥천사(興天寺)에서 찍은, 웃는 얼굴사진은 친구 윤태영(尹泰榮)씨로부터 입수한 것이다.  제1권에는 이상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날개’ ‘종생기’ 등 10편이 실려 있다. 말미에 부록으로 ‘사신록(私信錄)’이 첨부돼 있다. ‘사신록’에는 모두 아홉 통의 편지가 실려 있다. 이 가운데 ‘ K형(兄)’ 앞으로 보낸 것이 7통, ‘K대형(大兄)’이 1통, ‘H형(兄)’이 1통,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아우 김운경에게 보낸 것이 1통이다. 1937년 2월 8일자로 아우에게 보낸 편지(엽서)는 아우의 취직소식을 듣고 기뻐하면서 늙으신 부모님을 잘 봉양해 달라는 부탁을 담은 내용이다. 이 편지는 결국 그가 고국에 보낸 마지막 편지가 되고 말았다.  이밖에도 제1권에는 조용만의 ‘서(序)’, 즉 서문과 편자인 종국이 간행사 격으로 쓴 ‘ 간행에 제(際)하여’가 실려 있다. 간행사는 이상의 19주기에 맞춰 1956년 4월 17일자로 돼 있는데, 모두 9개 항목으로 정리해 실었다. 전문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 이 전집에 수록된 작품들은 출판을 목적으로 수집된 것은 아니다. 오직 학구(學究)를 위한 연구자료이었을 뿐이다. 할 생각이다.  ―, 출판 준비는 제(諸)작품이 최초로 발표되었던 지면(誌面)을 그 원전으로 하고, 후일 다시 전재된 것은 간혹 참고하였다.  ―, 작품 배열은 주로 연보를 표준하였다. 그러나 반드시 그에 의존한 것은 아니다.  ―, 철자법과 띄어쓰기는 원작자의 개성을 훼상(毁傷)치 않는 한도 내에서 현행의 그것으로 수정하였다.  ―, 원전에 있어서 인쇄상의 오식(誤植)임이 명백한 곳은 세심한 고증 밑에서 정정하였다. 그렇게 인정할 수 없는 것은 오자를 오자로서 살려야 했다.  ―, 종래의 전재된 작품- 등 기타-에서 허다한 미스가 발견될 때 편자는 극히 불쾌하였다. 이 점 ‘미스의 전무(全無)’를 위하여 주의를 특히 거듭했으니 대과(大過)는 없으리라 자부하겠다.  ―, 독자 제현의 참고를 위하여 권말에 ‘이상 약력’, ‘작품연보’, ‘관계문헌일람’, ‘이상 연구’ 등을 수록했다.  ―, 누락된 작품, 미발표 유고 등이 발견되면 적절한 방법으로 증보하겠다. 이 점 독자 제현의 교시(敎示)와 협조를 재삼 간청한다.  ―, 끝으로, 본서의 출판을 위하여 많이 수고하여 주신 조용만(趙容萬), 조지훈(趙芝薰), 양(兩) 선생님, 유정(柳呈)씨, 동인(同人) 인태성(印泰星), 이황(李榥) 양형(兩兄), 그리고 김규동(金奎東)씨, 윤호중(尹鎬重)씨의 여러분들에게 삼가 고마움을 인사드린다.  을 엮어낸 목적, 편찬과정, 교열사항, 참고내용 등 세세한 부분까지 상세한 설명을 곁들이고 있어 더 이상의 첨언은 사족이 될 지경이다. 여기 수록된 작품들은 출판 목적이 아니라 ‘오직 학구(學究)를 위한 연구자료’ 목적으로 수집했으며, ‘인세는 유족과 상의하여 적의(適宜) 선용(善用)할 생각’이라는 대목에서 그의 순수성을 엿볼 수 있다. 당시 그는 경제적으로 대단히 어려워 돈 한 푼이 아쉬운 시절이었다. 말미에 거명된 인물 가운데 ‘유정(柳呈)씨’는 2권에 따르면, 일문(日文) 시 번역을 도와준 것으로 나와 있다.  출간은 조지훈(1920~1968)의 조언과 격려가 큰 힘이 됐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종국은 조지훈이 정치학과 교수는 아니었지만 그를 따르고 존경했었다. 그의 말년 5년여를 곁에서 시봉(侍奉)한 김대기(1955년생, 51세, 경북 포항 거주)는 “이상 연구는 조지훈 선생의 권유로 시작한 것으로 알고 있으며, 임 선생님은 생전에 조지훈 선생을 거의 유일한 스승으로 모셨다”고 증언했다.  그런데 의아스러운 것은 그런데 이 책의 ‘서문’을 조지훈이 아닌, 조용만이 썼다는 점이다. 당시 조지훈은 고려대 국문과, 조용만은 영문과 교수였다. 통상 남이 써주는 책 서문은 저자나 편자 등 그 책을 펴낸 사람들의 노고를 치하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조용만의 서문은 출간의 의의 같은 것 대신 이상에게 집중 초점을 맞추고 있다. 특히 이상의 괴팍하고 몰상식적인 행동에 대해서도 아주 호의적이고, 또 이해하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서문 가운데 그런 내용의 일부를 옮겨보면,  “그의 시나 소설이 모든 재래의 법칙과 규구(規矩)를 무시한 것은 이같은 법칙과 규구가 준수하기에는 너무나 우습고 용열하기 때문이다. 우습고 용열하다기 보다는, 그같은 법칙과 규구를 준수하는 것은 그의 현란복잡하고, 고도로 선회(旋回)하는 뇌수(腦髓)의 일부만을 움지기게 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의 예지와 감수성과 상상력을, 그의 뇌수에 충만되어 있는 극한의 모든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하기 위하여서는, 부득이 또는 저절로 그의 작품은 그같은 형식을 취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 위에서 서문을 조지훈이 아닌, 조용만이 쓴 것을 두고 의아하다고 했는데 여기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우선 조용만은 이상, 김기림, 이태준, 정지용 등과 함께 ‘구인회(九人會)’ 동인이어서 이상에 대한 관심과 이해가 깊었다. 종국의 후배 박노준은 “이상 연구는 조지훈보다는 조용만의 영향이 더 클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두 사람 역시 사제간처럼 지냈다고 박노준은 덧붙였다. 그러나 종국은 후일 에서 조용만은 물론 대학에서 직접 강의를 들었던 ‘은사’ 유진오 총장마저도 가차없이 한 장(章)씩 잡아 비판의 칼날을 들이댔다. 그 당시 종국과 조용만과의 사이에 있었던 일화 한 토막은 ‘친일문학론’ 편에서 다시 쓰기로 하고 여기선 언급만 해둔다)  ======================================================== 內科   ━━自家用福音書━━ ━━惑은 엘리엘리 라마싸박다니━━   하이얀天使(이鬚髥난天使는규핏드의祖父님이시다. 鬚髥이全然(?)나지않은天使하고흔히結婚하기도한다.) 나의骨片은2떠-즈(ㄴ). 그하나하나에노크하여본다. 그속에서는海綿에젖은더운물이끓고있다.하이얀天使의펜네임은聖피-타-라고. 고무의電線(똑똑똑똑버글버글)열쇠구멍으로盜聽. (發信) 유다야사람의임금님 주무시나요? (返信) 찌-따찌-따따찌-찌-(1) 찌-따찌-따따찌-찌-(2) 찌-따찌-따따찌-찌-(3) 흰뺑끼로칠한十字架에서내가점점키가커진다.聖피-타-군이나에게세번式이나아알지못한다고그런다. 瞬間닭이활개를친다······ 어엌 크 더운물을 엎질러서야 큰일날노릇━━   ‘내과內科’     이 시의 제목이 ‘내과內科’인 이유는 13인의 보통 아해들의 육신에 무엇이 들어있는가를 알아보자는 의도다. 비록 자아를 깨닫지 못한 채, 세상을 살아가는 그들-우리와 동일하게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육신 안에는 과연 무엇이 있을 것인가?     눈치가 빠른 독자라면 이미 그 답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것은 바로 신성神性, 누구나 수행하여 깨달음을 얻으면 신이 될 수 있는 가능성, 그 신성이 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자가용복음서━━ ━━혹은 엘리엘리 라마싸박다니━━’     이 두 줄은 기독교의 성경을 희롱하는 부분이다. ‘자가용복음서’라는 말은 기독교도들이 신주단지처럼 여기는 성경이란 것이 픽션, 그들의 입맛에 맞게 마음대로 꾸며진 복음서라는 것이다. 이 구절은 주로 신약성경의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관한 부분을 말하고 있는데, 전술한대로 오감도烏瞰圖의 ‘흥행물천사興行物天使’에 나온 것이며 이미 졸저 ⌜에코우⌟에서 해설한 바 있다.     ‘혹은 엘리엘리 라마싸박다니’     잘 알다시피 ‘엘리엘리 라마싸박다니’는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고, 로마 병사의 창에 옆구리를 찔려 죽을 때 마지막으로 남긴 말로 성경에 기록된 것인데, 그 의미는 대략 ‘주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는 의미로 기록되어있다.     하지만 보통의 인간인 그가 보기에는 이것은 참으로 웃음을 참기 어려운 말이라며 희롱하고 있는 부분인데, ‘혹은’이라는 시어가 그것을 말하고 있다. 윗줄에 나오는 ‘자가용복음서’와 같은 뜻이라는 말이기 때문이다.     왜 그는 이런 표현을 하였을까?     그것은 이미 그가 죽음을 목표로 한 단식斷食을 ‘남모르게’ 실행實行하는 중이었다는 반증反證으로, 지극히 평범한 인간인 그도 자아수행의 일환으로 개체유지본능인 육신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남모르게’ 단식을 행하는 중인데, 신으로 추앙 받는 예수가 하잘 것 없는 육신의 죽음에 이르러 그토록 나약한 말을 성경이란 책에 활자화 시켜, 보란듯이 온 세상에 드러내어 널리 홍보하는 자체가 참으로 어이없다는 것이니, ‘흥행물천사興行物天使’에서 보듯이 ‘참새와같이수척한’한 모습의 예수가 참으로 가소롭다는 의미가 담겨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신으로 추앙되는 기독교의 예수는 보통 사람인 그를 따라오려면 아직 멀었다는 자신감이 담겨있는 부분으로, 보통 인간인 그보다 못한 주제에 신神이라 칭하며 교언영색巧言令色으로 13인의 아해들을 현혹하여 사기 치는 기독교의 신 예수... 그리하여 사람들에게서 깨달음을 얻기 위한 자아수행의 유일한 기회인 그들의 시간마저 철저히 빼앗아버리는 기독교... 그것은 종교가 아닌 사기집단詐欺集團이라는 의미로, 이것이 바로 그가 기독교라는 종교를 그토록 혐오하는 이유인 것이다.     순수한 정신을 가진 아가씨가 기독교의 유혹誘惑에 빠져 자아를 깨달을 수 있는 아까운 인생을 고스란히 낭비하고 동물적인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 ⌜에코우⌟에서 해설한 ‘흥행물천사興行物天使’의 줄거리이며, 그러한 밑바닥 인생의 여자가 다행스럽게도 그를 만나 귀중한 자아를 찾는데 성공한다는 줄거리가 바로 ‘광녀狂女의고백告白’인 것이다.     ‘하이얀천사(이수염난천사는규핏드의조부님이시다. 수염이전연(?)나지않은천사하고흔히결혼하기도한다.)’     텍스트에는 괄호 부분이 ‘하이얀천사’ 바로 옆 같은 행行에 괄호 없이 작은 글씨로 석줄로 기록되어 있다. 나의 컴퓨터 실력이 부족하여 괄호로 대신하였음을 이해하시기 바란다.     ‘하이얀천사’는 기독교의 신 여호와를 의미하는데, 그는 ‘수염난천사’로 규정하고 있다. 무슨 뜻인가?     여호와는 신神이 아니라 육신의 사람이란 뜻으로 기독교는 거짓이라는 것이다. ‘규핏드’, 알다시피 하얀 날개를 가진 오동통한 귀여운 아이의 형상으로 사람들에게 사랑에 눈멀게 하는 신... 사람들로 하여금 종족보존의 의무를 충실하게 수행하도록 꼬드기는 신神... 그리고 ‘조부님’은 할아버님 즉, 그 ‘규핏드’를 만들어 내고 할아버지가 손자를 데리고 놀듯이 마음대로 ‘규핏드’를 조종하는 사람이다.     ‘수염이전연(?)나지않은천사’는 여성女性으로 여기서는 성모 마리아를 의미하며, ‘결혼하기도한다.’는 ‘필요하면 결혼한다.’, 혹은 ‘성욕이 생기면 여자와 관계를 가진다.’는 뉴앙스가 짙은 부분인데, 성경에 성모 마리아가 성령으로 예수를 잉태하였다는 내용을 희롱하는 부분이며, 이 부분은 기독교의 신인 여호와마저도, 그는 이미 버려버린 종족유지본능인 섹스에 대한 욕심도 채 버리지 못한 한심한 존재로 여기는 부분이다.     ‘흔히’라는 시어로 보아 ‘아담’이라는 남자를 낳았을 때에도 그랬을 것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아마 그는 이렇게 중얼거렸을 것이다.     ‘풋... 보통 사람인 나보다 못한 찌질한 존재들을 신이라 여기다니, 한심하기는, 쯧쯧...’     이 부분에서도 그는 기독교를 신랄하게 비하시키고 있는데, ‘전연(?)’의 물음표 부분이 그것이다. 이 물음표의 의미는 성경에 예수가 동정녀 성모 마리아에게서 태어났다고 쓰여 있는데, 마리아가 동정녀였다는 기록 자체를 의심하는 것이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나 천주교에서 이 대목을 읽는다면 심히 놀랄만한 일이나, 공학도였던 그는 처녀생식에 의한 잉태 자체를 인정할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오늘날에 있어서는 극히 상식적인 사실이며 종교적인 사람이라 하더라도 충분히 의심해볼만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오히려 의심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이 부분은 개체유지본능에 미련을 채 버리지 못한 예수와 종족유지본능을 아직 버리지 못한 여호와를 예로 들어 기독교의 사기성과 유치함을 드러내고 있는 부분에 다름 아닌 것이다.     ‘나의골편은2떠-즈(ㄴ).’     짐작하다시피 이 구절은 성경의 창조설을 간단하게 부인하는 것으로, 기독교의 경전인 성경은 애초부터 픽션, 거짓이라는 뜻이다. 여호와가 아담의 짝 이브를 창조할 때 아담이 잠든 사이 갈비뼈 하나를 빼내어 만들었다는 내용을 희롱하는 부분인데, 하나를 뺐다면 2떠-즌(ㄴ)-1이 되어야 할 것이나 그렇지 않고 2떠-즌(ㄴ)이니 확실하고도 틀림없는 거짓말이란 뜻이다.     ‘그하나하나에노크하여본다.’     21세기인 지금도 폐에 물이 찼는지의 여부는 갈비뼈를 두드려보면 알 수 있어, 갈비뼈에 대한 ‘노크’는 내과內科 의사들이 자주 사용하는 방법으로 알고 있다. ‘시제4호詩第四號’의 책임의사인 그도 자신의 갈비뼈에 노크를 한다.     무슨 까닭으로 하나하나에 노크를 한 것인가?     기독교의 신이라는 예수도 못한 일-모든 것을 스스로 포기한 채 굶어 죽는 것을 목표로 하는 단식을 하는-을 하고 있는 그의 육신의 내부는 과연 어떤 특별한 것이 있는 것인가를 검증하기 위한 것으로, 자아를 모르는 보통의 13인의 아해들과는 다른 특별한 내부 구조나 장기臟器가 혹여 자신의 몸 안에 있기 때문인가를 알아보기 위함이다.     ‘그속에서는해면에젖은더운물이끓고있다.’     ‘해면’은 구멍이 숭숭 뚫린 뼈, 보통 사람들의 육신을 의미하며 ‘더운물’은 피, 그러므로 ‘해면에젖은더운물’은 뼈에 흐르는 피, 육신에 흐르는 피, 그러므로 이 행은 ‘특별한 것이 속에 있는 줄 알았더니, 그런 것은 없고 깨달음을 얻어 기독교의 신보다 월등한 존재가 된 그도 그저 보통의 13인의 아해들과 똑같은 사람이더라...’라는 내용이다.     달리 말하면 보통 사람인 나도 수행하여 깨달음을 얻으면 기독교의 신神인 예수보다 나아지는데, 그러한 가능성을 지닌 13인의 아해들에게서 기독교는 후안무치하게 혹세무민惑世誣民하여 그들의 고귀한 기회를 빼앗지 말아다오... 라는 뜻이 담겨있다. 바로 ‘시제5호詩第五號’에 나오는 ‘익은불서翼殷不逝 목불대도目不大道’와 한 자, 한 획도 틀림없이 동일한 부분이다.     이 부분을 달리 해석할 수도 있는데, ‘해면海綿’을 자아로, ‘더운 물’을 육신으로 볼 수도 있다. ‘더운 물’에 젖은 해면은 살아있는 육신에 스민 자아이며, 더운 물이 빠져나가면 육신에서 해방된 자아로 보아, 보통 사람들의 육신에는 그들이 느끼지 못하더라도 자아가 스며들어 숨 쉬고 있다는 표현으로 볼 수도 있다.     ‘하이얀천사의펜네임은성피-타-라고.’     ‘하이얀천사’는 이미 말한 대로 기독교의 신 여호와이며, ‘펜네임’은 스스로를 감추고 세상에 내세우는 자신의 아바타... 그런데 왜 하필이면 성 聖베드로가 여호와의 아바타인가? 그 이유는 다음에 밝혀진다.     ‘고무의전선(똑똑똑똑버글버글)열쇠구멍으로도청. (발신) 유다야사람의임금님 주무시나요? (반신) 찌-따찌-따따찌-찌-(1) 찌-따찌-따따찌-찌-(2) 찌-따찌-따따찌-찌-(3)’     ‘고무의전선(똑똑똑똑버글버글)’의 표현은 누구든 고무호스를 귀에 대보면 알 것이다. 평소에는 느끼지 못하던 소리들이 들려오는 것이다. 세상의 소리들이 소음騷音으로 확대되어 ‘똑똑똑똑버글버글’ 들리는 것인데, 이 구절은 기도교가 13인의 아해들이 사는 세상에 널리 확산되었음을 나타내는 부분으로 기독교는 세상을 시끄럽게 만드는 집단이란 뜻이 숨겨져 있다.     앞에서 말한 ‘흥행물천사興行物天使’에서 여호와의 직업이 거리의 음악사였던 것과 일맥상통하고 있는데, 기독교가 세상을 시끄럽게 만든다는 대목도 관련된 사람들에게는 심히 언짢아할 수 있는 대목이나, 많은 희생자를 냈던 십자군 전쟁이나 우스꽝스럽기만 한 마녀사냥을 생각하면 마음 놓고 반박하기도 어려운 일로 보인다.     또한 이 구절을 기독교에서 말하는 ‘천국天國’을 나타내는 것으로도 볼 수 있는데, 기독교의 天國천국은 온갖 소음으로 가득 찬, 지극히 시끄러운 곳이란 뜻이니, 두 가지 모두 가능한 해석이나, ‘베드로’나 ‘열쇠’가 등장하는 것으로 보면 후자의 해석이 나아 보인다.     ‘열쇠구멍으로도청.’의 ‘열쇠’는 성 베드로를 여호와의 아바타로 내세운 것을 감안하여 성 베드로가 가졌다는 천국의 열쇠로 보아야 하겠다. ‘열쇠구멍’은 현실에서 기독교가 감추고 싶어 하는 은밀한 부분-‘흥행물천사興行物天使’에서 이미 상세하게 살펴본 그들의 사기성詐欺性-을 드러내는 것을 암시하기도 한다.     그 열쇠 구멍에 고무호스를 꽂고 그가 도청을 하는 것이다. 그랬더니 아래와 같은 내용이 들리더라는 것이다.     ‘ (발신) 유다야사람의임금님 주무시나요? (반신) 찌-따찌-따따찌-찌-(1) 찌-따찌-따따찌-찌-(2) 찌-따찌-따따찌-찌-(3)’     발신發信은 누가 보낸 것이라고 해도 관계가 없다. 여호와는 어떤 존재인지 궁금한 사람이면 누구나 가능한 질문이나, 잠을 자느냐고 물어보는 것은 여호와가 잠이 필요 없는 신이 아니라, 육신을 가진 사람인가를 묻는 것이므로, 이것 역시 기독교도들이 들으면 마음이 심히 언짢아질 질문이다.     이 질문은 지극히 기독교를 증오하는 그가 발신했다고 생각하자. 그랬더니 답신이 되돌아온다.     ‘찌-따찌-따따찌-찌-’ 세 번의 동일한 답신이다. 무슨 뜻일까? 궁금해서 인터넷을 뒤져 모르스 부호를 알아봤다. 그것을 여기에 싣지는 않겠다. 궁금하신 분들은 ‘체조’를 배우는 마음으로 스스로 알아보시기 바란다. ‘찌-’는 모르스 부호의 ‘-’를, ‘따’는 ‘•’로 생각하면 된다.     ‘찌-따찌-따따찌-찌-(1) 찌-따찌-따따찌-찌-(2) 찌-따찌-따따찌-찌-(3)’를 풀어보면 ‘(1)얌(2)얌(3)얌’이라는 뜻이다. 무슨 뜻인가? 두 말할 필요 없이 무엇인가를 먹는 소리다. 여호와는 신이 아니라 육신의 인간이라는 의미인데, 1, 2, 3 세 번을 반복한 것은 그가 보기에 여호와는 항상 무엇인가를 먹고 있는, 지극히 탐욕스러운 존재라는 것이다.     ‘흰뺑끼로칠한십자가에서내가점점키가커진다.성피-타-군이나에게세번식이나아알지못한다고그런다. 순간닭이활개를친다······’     이 부분은 그의 기독교에 대한 희롱이 극에 달하는 부분이다. 그가 살던 1920, 30년대에는 교회의 십자가를 하얀 페인트로 칠했던 모양이다. 이미 ⌜에코우⌟에서 해설한 오감도烏瞰圖의 ‘이인二人···1···’, ‘이인二人···2···’에서 보았듯이, 그의 생각에 기독교는 마피아의 대명사인 알 카포네가 운영하는 사업체라는 것인데, 문제는 ‘뺑끼’라는 시어로 이것은 ‘페인트’의 속어俗語로 볼 수 있으니, 한마디로 말해 십자가는 속물이란 뜻이다.     ‘내가점점키가커진다.’는 그의 존재가 십자가보다 더 커진다는 것으로, 그가 기독교의 신인 여호와보다 한 수 위라는 것을 뜻한다.     ‘성피-타-군이나에게세번식이나아알지못한다고그런다. 순간닭이활개를친다······’     이 부분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신약 성경에 나오는 예수가 체포되는 장면을 가져와 그의 자존심을 한껏 드높이고 있다.     ‘성피-타-군’의 ‘군’이라니... 기독교도들의 눈에서 번쩍하고 불꽃이 튈법한 대목이나, 무교인 나는 웬일인지 웃음이 터져 나오는 것을 참을 수 없다. 김군, 이군, 최군... ‘성피-타-군’, ‘성피-타-군’이라... 기독교를 아예 납죽 깔아뭉개는 장면이다.     이 부분은 재미있는 삼단논법三段論法을 포함하고 있는 부분으로, 이미 앞에서 성 베드로를 여호와의 분신인 아바타라 말하였고, 베드로는 예수를 신, 주(主)라 부르므로, 베드로가 그를 부인하였다는 것은 적어도 그는 기독교의 신인 여호와가 신, 주(主)로 부를 수 있는 위치에 도달해 있다는 사실을 숨겨놓은 부분이라 하겠다. 참으로 대단한 자부심이 아닐 수 없다.     ‘ 어엌 크 더운물을 엎질러서야 큰일날노릇━━’     마지막까지도 예수를 비웃고 있는 대목이다. ‘더운물’이 상징하는 것은 피, 그러므로 ‘더운물을 엎질러서야’는 ‘피를 흘려서야’라는 뜻으로,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려 죽을 때, 로마 병사가 옆구리를 창으로 찔러 피를 흘렸다는 대목을 가져온 것이다.     ‘큰일날노릇━━’은 예수의 죽음을 예로 들어 기독교를 희롱하는 부분인데, ‘엘리엘리 라마싸박다니’ 즉, 죽음에 임박하여 ‘주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는 말을 하는 것은 신神으로 추앙받는 존재가 하기에는 참으로 ‘큰일’날 정도로 창피한 것이라는 의미다. 육신의 죽음을 두려워하는 신神이라니... 예수가 만약 진정한 신이었다면 그런 말을 해서는 참으로 큰일 날 노릇 아니겠는가.     이미 보았듯이 그는 이 ‘내과內科’에서 기독교는 사기詐欺, 속임수라고 말한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神인 여호와나 예수라는 존재는 보통 사람들과 다름없는 인간인데도 불구하고 그들을 신격화시켜, 오감도烏瞰圖의 ‘시제5호詩第五號’, ‘이인二人···1···’, ‘이인二人···2···’, ‘흥행물천사興行物天使’에서 해설하였듯이, 사람들을 현혹시키며 대代를 이어 사람들에게 기생寄生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그의 많은 작품에서 기독교를 파멸시키고, 그 자신을 기독교의 신보다 월등하게 생각하고 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번 언급하였지만, 양식 있는 기독교도라면, 그의 주장이 100% 틀리다는 반박은 하기 어려울 것으로 생각한다. -------------------------------------------- -----------------------------아랫 문장 계속 잇기 @@===   수필·기타 혈서삼태(血書三態)(신여성, 1934. 6) 산책의 가을(신동아, 1934. 10) 문학을 버리고 문화를 상상할 수 없다(조선중앙일보, 1935. 1. 5) 배의 역사(신아동, 1935. 2) 산촌여정(山村餘情)(매일신보, 1935. 9. 27~10. 11) 나의 애송시(중앙, 1936. 1) 서망율도(西望栗島)(조광, 1936. 3) 편집후기(시와 소설, 1936. 3) 조춘점묘(早春點描)(매일신보, 1936. 3. 3~26) 여상4제(女像四題)(여성, 1936. 4) 내가 좋아하는 화초와 내 집의 화초(조광, 1936. 5) 약수(藥水)(중앙, 1936. 7) EPIGRAM(여성, 1936. 8) 동생 옥희 보아라(중앙, 1936. 9) 아름다운 조선말(중앙, 1936. 9) 행복(여성, 1936. 10) 가을 탐승처(探勝處)(조광, 1936. 10) 추등잡필(秋燈雜筆)(매일신보, 1936. 10. 14~28) 19세기식(34문학, 1937. 4) 권태(조선일보, 1937. 5. 4~11) 슬픈 이야기(조광, 1937. 6) 오감도 작자의 말(조광, 1937. 6) 문학과 정치(사해공론, 1938. 7) 병상 이후(청색지, 1939. 5) 동경(東京)(문장, 1939. 5) 서신(2~10)(이상전집, 1956) 얼마 안 되는 변해(현대문학, 1960. 11) 무제(1)(현대문학, 1960. 11) 이 아이들에게 장남감을 주라(현대문학, 1960. 12) 모색(현대문학, 1960. 12) 무제(2)(현대문학, 1960. 12) 어리석은 석반(현대문학, 1961. 1) 첫번째 방랑(문학사상, 1976. 7) 공포의 기록(문학사상, 1986. 10) 공포의 성채(문학사상, 1986. 10) 야색(문학사상, 1986. 10)   [1] 자두의 옛말. [2] 아들을 낳지 못해서 남편에게 구박받으며 지내던 스트레스를 이상에게 플었고 이상을 입양한지 얼마 안되어 자신에게도 아들이 태어나자 이상을 대놓고 무시하는 경향을 보였다고 한다. 이 때부터 이상은 여성을 혐오하는 경향이 생겼다고 한다. 그가 기누코, 금홍, 변동림과 권순옥 등 수많은 여성과 염문을 뿌렸을 뿐 아니라, '꾀꼬리동산'이라는 유사 스와핑을 통해 선구자적 모습을 보였던 것도 이때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을 듯 하다. [3] 이상이 죽기 직전 연거푸 남긴 3편의 문학작품 중에는 '산호 채찍을 잃어버렸다'란 구절이 있는데, 총독부 소속 건축기사로 일단 출세한 후에는 맥이 풀린 듯 모든 것을 놓아버렸다는 그의 인생을 반영한 표현인 듯하다. [4] 말년에 이상이 도쿄에서 김기림에게 쓴 편지에 "암만해도 나는 19세기와 20세기 틈바구니에 끼여 졸도하려 드는 무뢰한인 모양이요. 완전히 20세기 사람이 되기에는 내 혈관에는 너무도 많은 19세기의 엄숙한 도덕성의 피가 위협하듯이 흐르고 있소그려" 라고 쓰기도 하였다." [5] 새로 부임한 일본인 상사와의 마찰로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는데 폐결핵 증상이 나타나자 곧바로 회사를 그만 두었다고 한다. [6] 금홍과의 만남과 헤어짐을 이야기 한 '봉별기(逢別記)'라는 단편을 적기도 했다. 이 단편이 마음에 들거든 인디밴드 '가을방학'의 '속아도 꿈결'이라는 노래를 한 번 들어보도록 하자. [7] 보면 알겠지만 다른 지방에서 기생으로 일하는 금홍의 필연적인 NTR(...)을 안타까워하는 내용이다. 결국 서울에 다방을 차리고 금홍을 불러 마담자리에 앉혔지만 현실은... [8] 나중에 김유정이 병사할때 유언으로 닭이 먹고싶다고 하자 이상은 사방으로 닭을 구하려 다녔지만 돈이 없어서 사질 못했다.(...) 그리고 김유정이 죽은뒤 18일후, 이상도 죽게 된다. [9] 그런데 69다방에 있어서는 이런 이야기가 있다. 간판까지 걸고 개업날까지 받아놨는데 아는 사람들은 킬킬대면서, 혹은 민망해하면서 지나가다가 그 중 한 사람이 경찰에 신고를 때려서 영업허가가 취소됐는데, 이상은"에라이 볍진들아 그걸 누가 말해줘야 알았냨ㅋㅋㅋㅋㅋ"하고 고소해했다는 이야기. [10] 이미 전에 동경에 가본적이 있던 변동림과 구본웅은 이상의 동경행을 결사반대했기 때문에 새벽열차를 타고 몰래 동경으로 갔다고 한다. [11] 이게 별다른 혐의가 있던 것도 아니고 그냥 산발하고 꾀죄죄한 폐인의 모습으로 다녀서 그랬다고 한다 참고로 이상은 곱슬머리에다가 서양인 처럼 수염이 목까지 자라는 체질이었다. [12] 당시 이상을 담당했던 일본인 의사가 "어쩌면 젊은 사람을 이렇게까지 되도록 버려두었을까? 폐가 형체도 없으니..." 라고 말했다는 기록이 있다 참고로 이상은 엄청난 골초였다. 하루에 담배를 50개피 피는것을 자신의 일과라고 표현했을 정도 [13] 실물은 국립현대미술관 소장이며 이따금 근현대미술과 관련한 전시에서 볼 수 있다. 그리 크지 않은 그림이지만 당시의 다른 그림들과는 다르게 음울하면서 묘한 색기가 보는 이의 발걸음을 멈추게한다. 일각에서는 이 그림을 두고 이상과 구본웅의 동성애적 관계를 암시한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14] 이건 말도 안 되는 소리인게 이상은 정상적인 소설도 썼던 사람이다. 아무 계산 없이 썼다고 볼 수 없다. 아무 의미없이 휘갈겨 썼다기엔 그의 소설과 시가 서로 맞닿아 내통하는 부분은 언제나 차분했던 것이다. [15] 이상이 살던 일제 강점기 당시 조선의 지식인들이 대부분 서양의 가치관을 배우기도 급급한 상황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그의 천재성을 엿볼 수 있다. 다들 "근대성"을 배우는 걸음마 단계에 그것에 대한 통찰을 끝내고 포스트모더니즘 단계에 들어간 것이니... [16] 해석이 가능한지 불가능한지 자체가 대학원급 떡밥 [17] 2003년도 수능이었다. [18] 사실 당황하지 말고 침착하게 잘 읽어보면 풀만한 문제다. 보기가 뻔하기 때문. [19] 답은 1번 보기 '이 시가 당시 현대시의 주된 흐름을 반영하고 있다는 비평 자료를 찾아볼 필요가 있겠어' 이다. 사실 보기로 제시된 이상의 시는 볼 필요도 없다(...) 1~5번 보기에서 적절하지 않은 것을 고르라고 했으니 그 중 가장 튀는 것(다른 지문과 비교하였을 때 오류가 있는 것)을 찾는 편법으로 풀 수 있다. 특히 3번 보기에선 독자들이 시인을 '미쳤다'고 표현했다 하였고, 5번 보기에선 편집진의 압력으로 연재가 중단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2번 보기에선 기존의 언어체계를 불신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아주 상식선에서 생각했을 때 이 보기중 적어도 2개가 맞다면(5지선다형 문제니까 답은 1개이니 다른 4개는 맞는 설명이라는 소리가 아닌가?) 이 시가 그 당시 현대시의 주류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지 않은가? 굳이 헷갈린다면 3번 보기와 헷갈릴 수도 있는데(베베꼬고 의미불명의 표현법을 사용한 작품이 보통 당대에 인기가 있고 주류가 되었던 경우는 파블로 피카소정도를 제외하면 거의 없지만 '그럴 수도 있다는 가정' 하에서) 그 때 이 시를 보면 된다. 이런 내용도 없어뵈는 이상한 시가 나왔을 때 일반 독자들에게 '미쳤다'는 평가를 받지 않았다면 그게 더 이상하다.적어도 학생들은 '이런 문제가 나오다니 미쳤다!' 고 생각했을 지도 모른다. [20] 홀수형은 43번 문제로 출제되었지만 짝수형에서는 일찌감치 나왔다. [21] 심지어는 작가를 때려죽이겠다는 투고까지 있었다고 한다. [22] 1934년 9월 1일 창간된 순문예 동인지. 회원 중에 황순원도 있었다. 모더니즘과 초현실주의를 추구했던 동인. 창간멤버(신백수·이시우·정현웅·조풍연) 인 조풍연, 정현웅을 제외하면 모더니즘과 초현실주의를 추구했다고 한다. 참고로 시인들의 동인지였기 때문에 시인으로 문단에 데뷔했던 황순원 도 여기에서는 시를 썼다. 말하자면 황순원의 아들 황동규가 시인이라고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다. 하긴 황순원이 본격적으로 소설에 관심을 두기 시작한 것은 37년 이후부터였으니... 참고로 삼사문학파 동인들이 대부분 어린 시절부터 신식 문물을 접하며 거기에 익숙해져 있던 것과 달리 이상은 백부로부터 유학과 한문교육을 받으며 성장했기 때문에 문학에 관심이 있다는 공통점 이외에는 서로 기본적인 사고의 방식부터 맞지 않았고 이에 대해 답답해하던 이상은 서구의 사상을 완전히 이해하고 싶다는 생각이 강해져 도쿄행을 하게 된다. 이상의 시에 나타나는 분열적인 분위기가 서구화, 현대화된 사상과 생활을 염원하였으나 이를 100%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신의 유교적, 전통적인 가치관의 충돌에서 비롯되는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23] 그런데 국문학자들과 심지어 수학계통 교수들까지 연구에 참여하여(..) 대부분의 시는 해석된 상태다 [24] 원래 이상이 처음 시를 발표했을 시기에는 일본어로 시를 썼었고 일본어는 띄어쓰기 자체가 없기에 일본어 원문을 한글로 번역하여 발표할 때도 띄어쓰기를 하지 않았다는 추측이 있다. 이상이 쓴 일어시들은 띄어쓰기를 안하는 표현법 자체보다는 수학기호나 외국어 등을 사용하여 초현실적인 분위기를 표현한 시가 대부분이기도 하고 [25] 일제치하의 지식인이 가지는 고뇌를 표현했다는 해석도 있다. [26] 이와 관련된 대표적인 작품으론 且8氏의出發이 있다. 학자들은 처음엔 이 시를 且8의 모양만 보고 성적 시라고 생각했으나, 알고보니 且8이란 且八로 具(구)의 파자였다. 이 시는 그의 절친한 친구였던 화가 구본웅의 성공을 기리기 위한 시였다. [27] 물론 '비교적.' 전혀 없지는 않다 [28] 여러 작품들에 나타나는 경제적 무능력에 대한 한탄이 그에 대한 반증이라고 본다. [29] 이상의 대다수 시를 성적인 의미가 담겨진 시라고 해석하였다. [30] 작품 뿐 아니라 그 자신의 생애마저 이상을 따라한다. 결국 이상이 죽은 병원에서 독약을 마시고 사망 [31] 이전에는 이상이 조선일보에 연재한 오감도(烏瞰圖)와 같은 제목이라고 알려졌었지만, 연구를 통해 조감도(鳥瞰圖)가 맞다고 확인됐다. 제목만으로는 사실상 오감도의 전신. [32] 연작시로 조감도라는 표제로 두 편의 시가 발표되었다. [33] 이것도 연작시다. [34] 이것도 연작시인데, 건축무한육면각체의 항목에도 나와있는 것처럼, 보통 「AU MAGASIN DE NOUVEAUTES」이 건축무한육면각체라는 제목으로 불린다. [35] 이상이 발표한 최초의 한글시. 이전에 발표한 시들은 모두 일본어로 씌어진 시이다. 가톨닉靑年 [36] 원래는 「一九三三, 六, 一」이다. [37] 연작시다. [38] 여기서부터 사후 발표된 시들 [39] 생전에 제목을 붙이지 않은 유고시다. [40] 위와 마찬가지로 생전에 제목을 붙이지 않았다. [41] 연작시다. [42] 이상의 유일한 장편소설. [43] 혹자는 동해, 날개, 봉별기를 순서대로 금홍과의 동거 이전, 동거 당시, 동거 이후를 그려낸 결혼 3부작이라 칭한다. [44] 이상이 쓴 유일한 동화. 김해경이라는 이름으로 발표했다. 그런데 이야기가 너무 토속적이라 김해경이라는 동명이인의 작품이 이상의 작품으로 둔갑했다는 주장도 있다. 그리고 완벽한 창작이 아닌 일본 작품 패러디라는 주장도 있다. [45] 이상이 1937년 4월 17일 사망하였으므로, 여기서부터 이상 사후에 발표된 작품들이다. [46] 이전까지 이 문서에선 종생기가 이상 생   1. 이름에 대한 유래  본명은 김해경(金海卿). 시인이자 소설가이자 건축가. 한때는 찻집 운영 등도 했다. 1910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보성고보를 거쳐 경성고등공업학교(서울대학교 공과대학의 전신 중 하나) 건축과를 졸업 후 조선총독부에서 건축기수가 되었다. '이상' 이라는 필명은 건축기사로 활동하던 당시 한 인부가 김해경을 '긴상(김씨)'라고 불러야 할 것을 김 씨와 이 씨를 헷갈려 실수로 '이상'이라고 불렀던 것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널리 퍼져 있지만, 친구 구본웅이 선물로 준 오얏[1]나무(李: 오얏나무 리)로 만들어진 화구상자(箱: 상자 상)를 받고 친구의 호의에 보답하기 위해서 이상이라는 필명을 정하게 되었다는 설도 나와 있다. 전자는 이상의 여동생과, 아내였던 변동림이 했던 증언이지만 후자는 보성고보 시절 직접 디자인한 졸업 앨범에 이상이라고 서명한 것이 발견되어 아무래도 후자가 맞는 듯 하다.   edit 2. 생애    edit 2.1. 유년 시절  그림에 재주가 있어서 어렸을 때는 길바닥에 버려져있던 목단 열 끗을 똑같이 그려내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고도 하고, 자 없이도 직선을 긋는 재주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어려운 집안 사정으로 거의 태어나자 마자 몰락한 양반인 백부의 집으로 입양되어 유교적인 가치관과 한문교육을 받으며 생활했는데 그 때 그의 계모 때문에 상당히 무서운 시절을 보냈다.[2] 계모 뿐만 아니라, 백부 또한 어린 김해경을 친아들로 대하지 않고 영특한 머리로 가문을 일으킬 인재로만 생각하여 항상 엄격한 모습으로만 대했기 때문에 이상은 백부의 지나친 기대에 멍들 대로 멍든 채 자라야만 했다.[3] 이러한 성장배경 탓에 이상은 현대화된 도시인의 삶을 살았지만 남존여비, 가부장적인 관념 등 보수적인 가치관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4] 아래에 다시 서술하겠지만 도쿄로 유학을 간 것도 서구화된 도쿄의 지식과 사상을 머리에 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도쿄에 온 직후 도쿄에 실망하여 김기림에게 보낸 편지에서 "어디를 가도 구미가 당기는 것이 없소그려! 꼴사납게도 표피적인 서구적 악습의 말하자면 그나마도 그저 분자식이 겨우 수입되어서 진짜 행세를 하는 꼴이란 참 구역질이 날 일이요 나는 참 동경이 이따위 비속 그것과 같은 물건인 줄은 몰랐소. 그래도 뭣이 있겠거니 했더니 과연 속 빈 강정 그것이요." 도쿄를 비판하였다.   edit 2.2. 문학가 이상  1931년 7월 '이상(異狀)한 가역반응' 이라는 첫 시집을 냈다. '이상한 가역반응', '파편의 경치', 'BOITEUX·BOITEUSE', '공복' 등을 냈으며 그 후 8월 일어로 쓴 시인 '조감도(鳥瞰圖)' 와 '삼차각설계도'를 조선과 건축에 발표했다. 이 해에 서양화가 구본웅과 교제하기 시작했으며, 백부가 죽고 이상은 친가로 돌아오게 된다. 친부는 사고로 손가락을 잃은 가난한 전직 이발사였는데 양반이라는 자존심이 강했던 백부의 집에서 자란 이상은 가난하고 배운 것 없는 친부가족에게 적응하지 못하고 방황하였다. 이상은 이 당시 자신의 모습을 라는 수필에서 묘사하고 있다.  다음해 '비구(比久)'라는 가명으로 소설 '지도의 암실', 시 '건축무한 육면각체'를 내고 그 다음해인 1933년에 심한 각혈증세로 건축기사 일을 그만둔다.[5]   edit 2.3. 금홍이  요양 갔던 온천에서 기생 '금홍'과 알게 되어 동거하기 시작한다. 이상의 소설 '날개'는 금홍과의 동거 생활에서 얻은 체험들을 바탕으로 쓴 소설로,[6] 주인공(이상 자신)은 자신의 방에만 틀어박혀 아내(금홍을 뜻한다. 중간에 나오는 '연심이'는 금홍의 실제 이름이라고 한다. 또한 소설과 같이 실제로도 금홍에게 맞고 지냈다고 한다...)가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르는 채 무능력하게 늘어져 있는 사람으로 묘사된다. 그럼에도 금홍을 퍽 사랑했는지 '이런시'에서 금홍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런시 - 이상 역사를하노라고 땅을파다가 커다란돌을하나 끄집어내어놓고보니 도무지어디서인가 본듯한생각이들게 모양이생겼는데 목도들이 그것을메고나가더니 어디다갖다버리고온모양이길래 쫓아나가보니 위험하기짝이없는큰길가더라. 그날밤 한소나기하였으니 필시그돌이깨끗이씻겼을터인데 그이튿날가보니까 변괴로다 간데온데없더라. 어떤돌이와서 그돌을업어갔을까 나는참이런처량한생각에서 아래와같은작문을지었도다. '내가 그다지 사랑하던 그대여 내한평생에 차마 그대를 잊을수없소이다. 내차례에 못올사랑인줄은 알면서도 나혼자는 꾸준히생각하리다. 자그러면 내내어여쁘소서.' 어떤돌이 내얼굴을 물끄러미 치어다보는것만같아서 이런시는 그만찢어버리고싶더라. [7] 1934년 구인회에 들어 명사들과 교제하기 시작했으며 박태원의 신문소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 '하융(河戎)' 이라는 가명으로 삽화를 그리기도 한다. 구인회에서 같은 병을 앓고있던 소설가 김유정과 특히 친하게 지냈으며, 동반자살을 권유하기도 했다.[8] 1933년부터는 차례로 종로1가에 다방 , 인사동에 카페 , 종로 1가에 다방 을 개업하여 돈을 벌려 했으나 대차게 말아먹게 된다.[9] 경영에 있어서는 천재가 아니었던 듯. 오죽했으면 어떻게 해야 돈을 벌 수 있냐고 하소연했을 정도. 결국 그 사이 금홍은 도망가고 가족들은 빈민촌으로 이사가게 된다. 1936년 전부터 알고 지내던 변동림과 결혼한다.(변동림 역시 이상의 소설에 '임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edit 2.4. 일본 유학과 사망에 이르기 까지  1937년 도쿄의 서구화된 문물에 익숙해지기 위해, 힘을 내기 위해 무작정 도쿄로 여행을 떠났으나, (이상이 도쿄로 떠나기 직전 도쿄에서 유학생활을 하고 있었던 김기림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 속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문학은 그만 두겠지요 라고 적기도 하였다.) [10] 이내 도쿄에 실망하고 서울로 돌아가려 한다. 하지만 서울로 가는 여비도 떨어지고 폐결핵의 악화와 새 출발의 발판기점으로 삼으려고 했던 동경에 대한 환멸감으로 인한 자괴감에 우울증이 걸린 이상은 햇빛도 들지않는 싸구려 방을 얻어 홀로 은거해버리고 그 직후 동경에서 불령선인(사상불온혐의)으로 체포되었다.[11] 그러나 심한 병(폐병) 때문에 병보석으로 한달만에 석방된 후 동경제국대학 부속병원에서 사망했다.[12] 이상의 부고를 듣고 급히 도쿄로 온 변동림이 그의 유해를 화장, 미아리 공동묘지에 묻었으나 돌보는 이가 없다가 한국전쟁 후 미아리 공동묘지가 사라지며 유실되었다.    edit 3. 이상의 사람들  이상의 아내 변동림은 이상 사후 '김향안' 이라는 가명으로 서양화가 김환기와 결혼했으며, 활발한 문학활동을 했다. 김환기 사후에는 사비로 서울 종로구 부암동에 환기미술관을 설립했는데, 사설 기념관으로는 국내 최초이다. 이상의 자취를 정리하는 데에도 많은 도움이 됐었다. 변동림은 2004년 사망했다. 이상의 대표작으로는 흔히 '건축무한육면각체' 라고 알려진 시로, 이 시를 주제로 소설, 영화도 나왔다. 사실 건축무한육면각체는 시집의 제목이며 해당 시의 진짜 제목은 'AU MAGASIN DE NOUVEAUTES('새로운 가게에서', 프랑스어다)'   edit 3.1. 구본웅과의 우정  사족으로,그 당시 화가 구본웅과 같이 다니는 것을 그린 만평에서는 옷 잘입는 멋쟁이 '스타일리스트'로 평가했다. 지금봐도 옷 맵시나 헤어스타일도 꽤 멋있는 편이다. 다만 당시 사람들이 창백한 피부의 퀭한 남자가 꼽추와 함께 다니는 모습을 보고 서커스단이 들어왔나 착각한 적도 있다... 구본웅은 '친구의 초상'이란 제목으로 이상의 초상화를 그렸다.  친구의 초상, 캔버스에 유채 65 x 53cm, 1935년[13] 민음사에서 출간한 이상 단편소설 전집의 표지가 이 그림이다. 그의 임종시 유언은 "레몬 향기가 맡고 싶소"라고 알려져 있었으나, 후일 이상의 아내였던 변동림이 "멜론이 먹고 싶다"였다고 술회하였다. 다음은 이상의 마지막 모습을 회고한 변동림의 글이다.  “나는 철없이 천필옥에 멜론을 사러 나갔다. 안 나갔으면 상은 몇 마디 더 낱말을 중얼거렸을지도 모르는데. 멜론을 들고 와 깎아서 대접했지만 상은 받아넘기지 못했다. 향취가 좋다고 미소 짓는 듯 표정이 한 번 더 움직였을 뿐 눈은 감겨진 채로. 나는 다시 손을 잡고 가끔 눈을 크게 뜨는 것을 지켜보고 오랫동안 앉아 있었다.”(김향안 에세이 ‘월하의 마음’ 중) 그의 생가는 종로구 통인동에 있다. 현재는 보통의 가게로 쓰이고 있으며, 근처 골목에 이상 생가가 있음을 알리는 작은 비가 하나 있다. 뱀발로 대표 시들이 너무 해괴한지라 "그냥 이거 아무 의미없이 휘갈겨 쓰고 사람들이 고민하는 모습을 즐기는 변태인 것이 아니냐?"라는 소리도 있는데... 진실은 저 너머에[14]. 이 말이 맞다면 이상은 김춘수보다 먼저 무의미시를 썼다는 말이 된다. 흠좀무. 혹자는 거울처럼 앞과 뒤가 구조적이든 의미로든 상통하거나 대비되는 경향이 있다고 하는데 알아서들 생각하자.   edit 4. 예술적 재능  건축과 출신이라 그런지 자신이 경영한 다방을 직접 디자인했다고 한다. 심지어 당시 월간 잡지였던 '조선과 건축' 표지 공모전에선 1등과 3등을 동시에 차지했다. 반대로 이과를 전공했으면서도 고대 물리학 등 계산적이고 자연 파괴적인 서양의 가치관[15]들에 대해서 상당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는데, 아래의 시가 이를 잘 보여준다. 林檎一個ガ墜チタ。地球ハ壞レル程迄痛ンダ。 最後。 最早如何ナル精神モ發芽シナイ。 능금 한 알이 추락하였다. 지구는 부서질 정도만큼 상했다. 최후. 이미 여하한 정신도 발아하지 아니한다. - 이상,     아무튼 요약하자면 굴곡있는 인생의 요절한 시인으로 국문과목에 한해 난해시를 써서 학자들에게는 과중한 업무와, 학생들은 난해한 문제와 씨름하게 만든 장본인 중 하나(이른바 국어천왕). 이 사람의 난해한 글과, 자전적인 소설을 읽어보면 자칭 천재가 아니냐는 소리가 나오고, 그가 남긴 글을 보면 스스로 천재라는데 상당한 집착을 가졌음을 알 수 있기에 자칭 천재다. 하지만 일반적인 개그 캐릭터와 달리 이상이 남긴 글과 디자인들은 진정한 천재의 유물이다. 딱히 못 믿겠거든 차라리 그가 1년동안 담당한 '조선과 건축' 표지 디자인을 봐라. 지금 봐도 현대적인 디자인을 볼 수 있다. 다만 이상 본인은 자신이 다방면에서 천재라고 생각했지만, 실제로 대중과 전문가들 다 인정하는 것은 건축 디자인 재능이다.    edit 5. 한국문학사 최종보스 수능출제 되다  수능시험으로 인해 다급한 고3들의 입장에서는, 불행인지 다행인지 이 사람의 작품은 거의 무시해도 상관없다는 게 정설. 예외적으로 소설인 날개(이미 한번 나왔다)와 수필 '권태', 시 중에서는 거울정도가 그나마 이해할만한 레벨이고, 오감도나 건축무한육면각체같은 물건이 진지하게 수능에 나오기라도 하는 날에는 그 후폭풍이 어마어마하기 때문에 절대로 이 사람의 작품은 수능에는 못 나올 것이다. 아니 일단 상당수의 시가 해석이 무의미하기 때문에 낼 수가 없다….[16] …라고 모두들 안심하고 있던 21세기의 어느 겨울날[17],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  Op (심지어 숫자가 좌우반전이라서 이미지로 인용할 수 밖에 없다.) 2003년 수능 언어영역에서 만점달성을 가로막는 최종보스로서 등장한 것! [18][19] 자신의 수능날, 입술이 바짝 마르도록 긴장한 채 1교시 언어영역을 달리고 있는데 듣기평가 끝나자마자 이런 문제가 갑툭튀[20]했다고 상상해보자. 이건 미친 짓이야, 난 여기서 나가겠어. 참고로 문제에서 말하는 '윗글'은 '예술의 본질은 무엇인가' 하는 내용이다(…). 이후 2006년 수능에 수필 '조춘점묘'가 등장했지만그나마 상식적인 글이라 문제가 쉬웠고, 2009년 7월 교육청 모의고사에서는 오감도 4호가 다시 한 번 등장했다! 다만 듣기평가 문항이었기에 해설을 들려줄 수 있었고 그 해설을 토대로 문제를 냈다고. 천잰데? 그리고 2014년 수능 국어영역에서 A,B형 공통문항으로 수필 '권태'가 마지막 지문으로 출제되었다.   edit 6. 평가    edit 6.1. 문학적 평가  그의 대표작인 '오감도'가 신문에 게재되었을 때, 독자들이 반발이 매우 거셌다고 하는데[21], 반면에 문학계에서는 커다란 이슈로 떠오른 듯하다. 이후 이상의 문체를 따라하는 학파가 생겼는데, 그것이 바로 삼사문학파[22]. 그러나 삼사문학파는 이상의 신드롬을 이어가지 못하고 이상의 부록 현상으로 끝나버렸다. 의지를 완전히 무시한 자동기술법, 전문용어와 외국어, 그리고 숫자 및 기호의 남발, 전혀 말이 통하지 않는 이상한 문장,[23] 기존의 언어체계를 무시하는 기법 등, 모더니즘에 입각한 아방가르드 문학의 대표적인 인물로, 이상의 시는 아직까지도 '최신식' 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 다만 그는 기존의 문법을 파괴하기 위해 시에서 띄어쓰기를 전혀하지 않는 ‘다다’ 기법을 사용했으나, 알파벳, 불어, 독어와 달리 음절단위의 문장으로 구성된 한글은 다다이즘 기법에 한계가 있었으므로 실험단계에서 그치고 말았다.[24] 다만 이상은 짧은 시간동안 2000여편이 넘는 작품을 남겼기 때문에 자동기술법을 사용하기에는 작업시간이 너무나 짧았다는 주장도 있다. 밝혀지지 않은 모종의 제작 '공식'이 있다고 추정되기도 한다.   edit 6.2. 엇갈리는 찬반양론  이상이 쓴 시에 대해서는 찬반양론이 거세지만 그가 쓴 수필을 보면 이상이 가진 글에 대한 재능을 엿볼 수 있다. 예를 들어 과 라는 직품에는 현대화되고 서구화된 일상에 익숙해진 도시인이 서구의 문물이 들어오기전의 전통적인 자국의 모습을 간직한 시골에서의 일상에 적응을 못하고 권태에 빠진 모습을 뛰어나게 묘사하였고 수능에도 나온 는 쉴 틈 없이 꽉막힌 답답한 현대인의 일상을 콘크리트로 사방이 둘러쌓여 어디로 가든 같은 모습을 한 빌딩에 비유하면서 그 빌딩의 소유자는 보험회사라는 거대한 집단이라는 점을 들어 개인이 무엇인가를 소유하는 주체가 되지 못하는 부조리한 현대인의 삶을 비판하였다.[25] 이상의 수필들은 작가에 대하여 모른채 단순히 글 자체로만 감상하면 마치 '산업화가 한참 진행되었던 60년대말이나 70년대 작가가 쓴 글로 보인다. 그래서 글의 지은이가 이상이라는 사실을 알자 깜놀하는 사람들도 많다. 특히 국문학 전공자들이 더 그렇다고 한다. 다만 이는 이상의 한계로 보이기도 한다. 일본이 '민족문화말살정책'이라는 극악한 정책을 펼치자 문인들은 일제의 한글 금지법 등의 정책에 항의하기 위하여 절필을 했거나 글에 몰래 일제를 규탄하는 내용을 집어넣었던 시기에 이상은 다른 문인들에 비해 식민지의 지식인이라는 것에 크나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는 해석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특히 이상에 대한 이러한 해석은 박정희의 유신독재 시절에 가장 극에 달했다. 고은의 이상평전이 대표적인 예  그의 글에 대한 해석이 지금도 계속 시도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항을 겪고 있는 부분이 많다는 것은 그의 비상함을 짐작할 수 있게 하는 증거.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사람인지라, 이상 본인의 삶이나 글을 쓰던 당시의 이상의 상황 등을 파악하고 읽는다면, 악명에 비해서 너무나도 간단히 해석되는 작품들을 볼 수 있을 것이다.[26] 의외로 도깨비를 주제로 한「황소와 도깨비」라는 어린이용 동화를 쓴 적이 있다. 이상이 쓴 유일한 동화 작품. 그러나 이상이 쓰지 않았다는 설도 있다.    edit 7. 대중매체의 이상    1995년도 한국영화인 '금홍아 금홍아'에선 단명연기의 본좌 김갑수가 이상, 구본웅은 가수 김수철이 연기했다. 포스터의 인상과 광고때문에 에로물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현실은 시궁창을 처절하게 보여주는 이상 전기 영화이다. 금홍이로 나온 이지은의 발연기만 눈을 감으면 나름 괜찮은 작품으로 평은 좋았지만 흥행은 실패했던 영화이다. 물론 저 정도 에로물도 안 나온다 어쨌든 젊은 시절의 김갑수를 볼 수 있는 작품이니 케이블채널에서 방영하면 한번 봐두자. 근데 캐스팅이 에러인게 이상이 금홍이를 알게된게 1933년이었으니 1910년생인 이상은 당시 24살(만으로는 23살)이었다. 윗 표지의 김갑수의 얼굴이 24살의 얼굴인가?? 건축무한육면각체가 뜻하는것이 바로 백화점인데 1937년 동경으로 간 이상이 현대식 백화점을 구경하고 느낀바를 담아낸 시인데 이 시가 부산롯데백화점 지하1층 롯데호텔로 가는 통로에 벽면을 장식하고 있다.번쩍거리는 백화점의 디스플레이와 어울려 사뭇 괜찮은 조화를 이루고 있다.이 백화점 점장의 문학적 소양을 알수있는 부분으로 부산 사시는 분들은 지나가다 유심히 보시길  2013년 11월28일 mbc드라마 페스티벌 '이상 그 이상,역시 이상이 나온다. 이상을 중심으로 그의 전 총독부 동료의 살인사건에 휘말린 이상의 내용이 전개되는 내용으로 이상 역에 조승우 구본웅에 정경호 이상을 사모한 여인에 박하선이 캐스팅 되어 화려한 캐스팅을 자랑한다. 참고: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edit 8. 여담  여담이지만, 이상이 죽기 전 당시 서양화가 길진섭이 이상의 데드 마스크를 떴다는 소문이 있다. 하지만 길진섭이 1948년 월북해버려 그 진위는 불투명하다. 김연수의 장편소설 "꾿빠이 이상"도 그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첫 시집을 낸 1931년부터 건축일을 그만둔 1933년까지의 행적이 비교적 불분명한 상태다.[27] 대부분 이 때 백부의 사망 후 친부모를 부양하게 되면서 경제적 부담에 시달리며 심한 스트레스[28]를 받았을 것으로 추측하나 확실히 알 수는 없다. 이것을 소재로 한 것이 건축무한육면각체의 비밀이라는 영화지만... 소재는 너무나 좋았지만 망했어요 마광수 교수가 가장 싫어하는 시인. 그의 생애를 다룬 평전으로는 고은이 쓴 "이상 평전"이 있는데, 어느정도 난해한 문장으로 숨기고 있지만 이상에 대해 꽤나 비하적이고 악의적인 시각으로 쓰여져있다. 심하면 중상모략적인 부분까지 보이기 때문에[29] 이상에 대해 중립적인 시각을 유지하고 싶다면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면서 보자. 옹호하는 측에선 고은이 이 평전을 쓸때만 해도 군사정권등의 독재체제하에서 세월아 네월아 놀면서 순수문학을 주장하는 부류를 어용 작가보다 더 미워하는게 일반화되었던 시절이었다. 일종의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이나 민중문학이 아닌 작품은 불쏘시개로 간주하던 시절, 그러니 일제하에서 기괴한 장르를 소개한 이상은 천하의 개쌍놈으로 묘사될수 밖에 없었다고 주장한다. 물론 이러한 주장이 변명이 될 수는 없다. 정부나 사회적 분위기 때문에, 원치 않음에도 불구하고 해당 인물의 명예를 훼손하면서까지 그 인물의 평전을 쓰고 싶은 사람이 세상에 누가 있을까? 또 이러한 시각 때문에 50년대 실존주의를 한국 문학에 도입한 오상원이나 서정적인 자연 이야기로 호평을 받은 오영수 모두 문단에서는 배척을 받았던 것이고, SF 등의 장르문학 역시 한국에서는 이단시되었던게 그 영향인만큼 잘했다고 볼 순 없는 일이다. 괜히 대체역사소설 장르를 한국에 소개한 복거일이 자신의 상당히 좌파적인 시각과 독재체제에 대한 비난을 비명을 찾아서에 넣은게 아니다. 여담으로, 위의 평전에서 저자가 서문에 '비슷한 케이스인 해외의 랭보는 80살까지 그의 시를 파는 노학자도 있는데 이상은 그런 경우가 없다. 젊은 시절 이상에 빠져들어도 나이를 먹을수록 그 시절은 청년기의 유치한 기억으로 남게 된다.' 라고 적었는데, 그에 반발해선지 김연수는 그의 소설 '꾿빠이, 이상'에서 죽을 때까지 이상의 시를 연구하며 그의 삶을 쫓아가는[30] 일흔 살 아마추어 이상연구가를 등장시킨다(...). 명백한 디스.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이 기사에서는 내일 모래면 칠순이 되는 경제학자가 이상 시인의 작품의 수수께끼를 풀었다고 소개하고 있다. 공교롭게도 김연수와 김학은 교수는 이상과 마찬가지로 문과와 이과를 통섭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런 점에서 이상과 동질감을 느끼는 듯. 안티들이 하나 같이 문과 출신인 건 기분 탓 시인을 기려 이상문학상이라는 문학상을 매년 수여한다.  이상의 친필 연애편지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짝사랑의 아픔은 대작가도 별 수 없었던 듯. edit 9. 작품 목록  괄호 안은 발표지와 발표연월일이다. 문학과지성사에서 나온 이상 단편선 날개에 수록되어 있는 것을 참고하였다. 시 이상한가역반응(조선과 건축, 1931. 7) 파편의 경치(조선과 건축, 1931. 7) ▽의 유희(조선과 건축, 1931. 7) 수염(조선과 건축, 1931. 7) BOITEUX·BOITEUSE(조선과 건축, 1931. 7) 공복(空腹)(조선과 건축, 1931. 7) 조감도(鳥瞰圖)[31][32](조선과 건축, 1931. 8) 삼차각설계도[33](조선과 건축, 1931. 10) 건축무한육면각체[34](조선과 건축, 1932. 7) 꽃나무(가톨릭청년[35], 1933. 7) 이런 시(가톨릭청년, 1933. 7) 1933. 6. 1[36](가톨릭청년 1933. 7) 거울(가톨릭청년 1933. 10) 보통기념(월간매신 134. 6) 오감도(烏瞰圖)(조선중앙일보, 1934. 7. 24~8. 8) ㆍ소ㆍ영ㆍ위ㆍ제ㆍ(素榮爲題)(중앙, 1934. 9) 정식(가톨릭청년, 1935. 4) 지비(紙碑)(조선중앙일보, 1935. 9. 15) 지비-어디갔는지모르는안해(중앙, 1936. 1) 역단(易斷)(가톨릭청년, 1936. 2) 가외가전(街外街傳)(시와 소설, 1936. 3) 명경(明鏡)(여성, 1936. 5) 위독[37](조선일보, 1936. 10. 4~9) I WED A TOY BRIDE(34문학, 1936. 10) 파첩(破帖)(자오선, 1937. 11)[38] 무제[39](맥, 1938. 10) 무제[40](맥, 1939. 2) 실락원[41](조광, 1939. 2) 최저낙원(조선문학, 1939. 5) 청령(젓빛구름, 1940) 한개의밤(젓빛구름, 1940) 척각(隻脚)(이상전집, 1956) 거리(이상전집, 1956) 수인이만든소정원(이상전집, 1956) 육친의장(이상전집, 1956) 내과(이상전집, 1956) 골편에관한무제(이상전집, 1956) 가구(街衢)의추위(이상전집, 1956) 아침(이상전집, 1956) 최후(이상전집, 1956) 유고(현대문학, 1960. 11) 무제(현대문학, 1960. 11) 1931년(현대문학, 1960. 11) 구두(현대문학, 1961. 1) 습작 쇼윈도 수점(현대문학, 1961. 2) 회한의 장(현대문학, 1966. 7) 애야(哀夜)(현대문학, 1966. 7) 무제(현대문학, 1966. 7) 황(현대문학, 1966. 7) 단장(斷章)(문학사상, 1976. 6) 황의 기(1976. 7) 작품 제3번(1976. 7) 여전준일(與田準一)(1976. 7) 월원등일랑(月原橙一郞)(1976. 7) 각혈의 아침(1976. 7) 단상(斷想)(1986. 10)   소설 12월 12일[42](조선, 1930. 2.~12) 지도의 암실(조선, 1932. 3) 휴업과 사정(조선, 1932. 4) 지팡이 역사(轢死)(월간매신, 1934. 8) 지주회시(중앙, 1936. 6) 날개(조광, 1936. 9) 봉별기(여성, 1936. 12) 동해(童骸)[43](조광, 1937. 2) 황소와 도깨비(매일신보, 1937. 3.5~9)[44] 공포의 기록(매일신보, 1937. 4. 25~5. 15)[45] 종생기(조광, 1937. 5) 5월호에 발표된 것이다.">[46] 환시기(청색지, 1938. 6) 실화(失火)(문장, 1937. 3) 단발(조선문학, 1937. 4) 김유정(청색지, 1939. 5) 불행한 계승(문학사상 1976. 7) ==================== 한국 최초의 다방이 남대문역에 위치했던 기사텐인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 최초의 다방은 1909년 11월1일 남대문역에 개업한 ‘기사텐(喫茶店 끽다점, 다방을3년 ‘이견(후타미)’으로 이 사파이어는 최소 1억 달러(1188억원) 이상의 가치가 있는 것으로 추정되며 익명의 소유주는 이 사파이어가 경매에 붙여질 경우 최고 1억7500만 달러(약 2079억원)에 낙찰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스리랑카의 보석시장 규모가 연간 1억300만 달러 규모인 점에 비춰보면 이 사파이어 하나만으로도 연간 보석 거래 전체 규모를 능가하는 것이다. 블루스타 사파이어는 중심부에 나타나는 독특한 문양 때문에 이 같은 이름으로 불리게 됐다. 현 소유주는 "이 사파이어를 보자마자 세계 최대의 블루스타 사파이어라는 생각이 들었고 곧바로 구매를 결정했다”고 전했다. 그는 이 사파이어를 얼마에 구입했는지는 극비사항이라고 말했다.    '보석의 도시'로 불리는 스리랑카 남부 라트나푸라에서 채굴된 것으로 전해진 이 사파이어에는 '아담의 별'(The Star of Adam)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아담이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 후 스리랑카에 도착해 '아담의 정상'(Adam's Peak)에서 살았다는 무슬림들의 믿음에 따른 것이다.에게 보내는 편지'|작성자 세르반  
    청마 유치환과 정운 이영도의 러브스토리    - 행복(幸福) / 유치환 -   사랑했으므로 행복하였네라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 보다 행복하느니라.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 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행길을 향한 문으로 숱한 사람들이 제각기 한 가지씩 생각에 족한 얼굴로 와선 총총히 우표를 사고 전보지를 받고 먼 고향으로 또는 그리운 사람께로 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사연들을 보내나니.   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 더욱 더 의지 삼고 피어 흥클어진 인정의 꽃밭에서 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 한 방울 연련한 진홍빛 양귀비꽃인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청마(靑馬)는 국어 교과서에 실린 '깃발'이란 시를 통해서 알게되었다. 그가 교장으로 있던 학교의 국어수업을 참관한 후 담당 국어교사를 불러 "내 시가 그렇게 어려워요"라고 물었다는 에피소드가 전해오고 있다.   '이것은 소리없는 아우성'으로 시작하는 시 은 난해했다. 해설이 필요한 시다. 시 은 언제 읽어도 가슴에 짠하게 전달이 된다. 이는 연가(戀歌)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누구나 살면서 한번쯤은 남몰래 누군가를 사랑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이 시에 공감을 하게 된다.   시조시인 정운 이영도(李永道, 1916~1976)   1940년대말~50년대말 통영에서 10여 년간 머물렀고, 50년 대 말에 부산으로 옮겨와서 67년 초까지 부산에서 생활했다.   청마가 세상을 세상을 떠나자 부산에서 서울로 옮겨 살았고 뇌출혈로 삶을 마감했다. 청초한 아름다움과 남다른 기품을 지닌 여인상이었다.      우선 간결한 표현이 맘에 든다. 자신의 정감을 다스리며 인생을 관조하는 세계를 보여주었다.   은 청마 유치환이 정운(丁芸) 이영도에게 보낸 시이다. 청마와 정운이 처음 만난 것은 통영여중 교사시절이었다. 경북 청도가 고향인 정운은 21세의 젊은 나이에 남편과 사별하고 당시 딸 하나를 둔 29살 과부였다. 당시 통영으로 시집 온 그녀의 언니집에 머물러있었던 것이 두 사람이 만나는 계기가 되었다.   문재와 미모를 갖춘 정운은 처음 수예점을 운영하다 해방되던 해 가을 통영여중 가사교사로 부임했다. 청마는 만주로 떠돌다 해방이 되자 고향에 돌아와 통영여중 국어교사가 되었다. 청마는 정운보다 아홉살이 많은 38살의 유부남이었다. 정운은 워낙 재색이 뛰어나고 행실이 조신했기에 누구도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고 한다.     반도 끝자락의 작은 도시 통영은 예향(藝鄕)이다. 유치환, 박경리, 김춘수, 윤이상, 전혁림, 이중섭 등 수많은 예술인이 나고 자라고 활동한 곳이다. 통영의 골목골목에는 예인들의 수많은 사연이 깃들어 이야기가 흘러넘친다.   시에 나오는 청마거리의 통영 중앙동 우체국이다. 빨간 우체통 옆에 시비가 있다. 청마의 첫눈에 정운은 깊은 물그림자로 자리잡기 시작했고, 교무실에서 하루에도 몇 번씩 정운의 얼굴을 보며 감정을 추스리기가 쉽지 않았다.   퇴근 후에도 수예점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던 정운을 보기 위해 청마는 수예점이 보이는 우체국 창가에서 연서를 쓰기 시작했다. 이미 결혼한 청마와 홀로 된 정운은 닿지 않는 인연이 안타까워 연서로 그리움을 달랬다. 누군가에게 연서를 보낼 수 있고 또한 받을 수 있다는 건 행복한 일이다.   청마는 1947년부터 한국전쟁이 일어나기까지 하루가 멀다하고 3년 동안 편지를 쓰고 시를 써댔다. 시 은 '뭍같이 까딱 않는' 정운에게 바친 사랑의 절창였다.     정운이 운영한 수예점과 그의 언니가 운영하던 약방 '박애당'은 우체국에서 바로 보이는 옷가게 '시선집중'터다. 청마의 집필장인 영산장과 청마의 부인 권재순 여사가 운영하던 문화유치원(2000년 폐원)이 있던 충무교회는 우체국에서 세병관 방향으로 불과 50m 거리에 위치해 있다.      - 그리움 / 유치환 -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임은 뭍같이 까딱 않는데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날 어쩌란 말이냐     정운은 유교적인 전통적 규범을 깨뜨릴 수 없기에 마음의 빗장을 굳게 걸어 잠그고 청마의 사랑이 들어설 틈을 주지 않았다. 그러나 날마다 배달되는 편지와 사랑의 시편들에 마침내 바위같이 까딱 않던 정운의 마음도 서서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들의 정신적 사랑은 시작됐으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였기에 이들의 만남은 거북하고 안타깝기만 했다.    은 정운의 첫 시조집 청저집(靑苧集)'에 실렸던 작품이다. 청마와의 연정을 한창 싹틔우고 있을 무렵의 심경을 토로한 것이다.     - 무제Ⅰ/ 이영도 -   오면 민망하고 아니 오면 서글프고 행여나 그 음성 귀 기우려 기다리며 때로는 종일을 두고 바라기도 하니라 정작 마주 앉으면 말은 도로 없어지고 서로 야윈 가슴 먼 창(窓)만 바라다가 그대로 일어서 가면 하염없이 보내니라         청마가 60살이 되던 1967년 부산에서 불의의 교통사고로 명을 달리한 후에야 이들의 사랑도 끝이나고 러브스토리가 세상에 알려졌다. 1947년 이후 20년 동안 청마가 정운에게 뛰운 연서는 모두 5000여 통이였다. 사모의 정을 담은 편지를 거의 매일 보낸 셈이다. 정운은 그 편지를 꼬박꼬박 보관해 두었다. 그 중 200통을 추려 라는 제목의 서간집을 단행본으로 엮었다.   청마 사후 정운은 이란 시를 통해 그녀의 애뜻한 마음을 표현했다. 사랑은 미완성을 통해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다. 그래서 영원히 사리로 남는 것이다.        - 탑(塔) / 이영도 -     너는 저만치 가고 나는 여기 섰는데 손 한 번 흔들지 못하고 돌아선 하늘과 땅 애모는 사리로 맺혀 푸른 돌로 굳어라     정운은 청마의 시 세계를 넓혀 주었고, 정운에게 청마는 외로움과 고난을 이겨나갈 수 있도록 받쳐주는 정신적 지주였다. 보는 관점에 따라서는 불륜이라고 지탄할 수도 있겠지만, '사랑'은 예술인에게 영원한 테마다.이들의 사랑은 서로의 시를 시들지 않게 해준 자양분이 되었다.   청마 유치환(1908~1967) 8남매 가운데 둘째 아들로 통영에서 태어났으며, 극작가 치진(致眞)은 그의 형이다. 23세인 1931년 문예 월간에 시를 발표 하면서 문단에 등단했으나 문학청년과 어울려 술만 마셔 그의 아내는 신학공부를 권유하였으나 시작에만 전념했다.   평양으로 이주해 사진관을 경영하기도 하였으나 통영 협성상업학교 교사를 시작으로 교육자의 길을 걷는다. 일제의 검속 대상에 몰리면서 잠시 만주로 나갔다가 1945년 37세 되던해 통영으로 돌아와서 부인은 유치원을 경영하고 윤이상.김춘수와 통영문화협회를 조직하고 통영여자 중학교에서 교편을 잡는다   1954년 경상남도 안의중학교 교장에 취임했고, 같은 해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이 되었다. 한국시인협회 초대 회장을 비롯해 경주고·경주여중·대구여고·부산여상 교장을 지냈다.   살아 생전 청마는 교가도 많이 지었다. 통영초등 통영고 통영여고 둔덕중 대구여고와 부산고 동래고 등. 시비가 국내 시인 중 가장 많다. 경주 불국사, 부산 에덴 공원, 통영 남망공원 등에 시비가 세워졌다. 그의 시에 일관되게 나타나는 특징은 허무와 애수이며, 이 허무와 애수는 단순히 감상적이지 않고 이념과 의지를 내포한다.         - 유치환으로부터 이영도 여사에게   사랑하는 정향! 바람은 그칠 생각 없이 나의 밖에서 울고만 있습니다. 나의 방 창문들을 와서 흔들곤 합니다. 어쩌면 어두운 저 나무가, 바람이,   나의 마음 같기도 하고 유리창을 와서 흔드는 이가 정향, 당신인가도 싶습니다.   당신의 마음이리다. 주께 애통히 간구하는 당신의 마음이 저렇게 정작 내게까지 와서는 들리는 것일 것입니다.   나의 귀한 정향, 안타까운 정향! 당신이 어찌하여 이 세상에 있습니까?   나와 같은 세상에 있게 됩니까? 울지 않는 하느님의 마련이십니까? 정향! 고독하게도 입을 여민 정향! 종시 들리지 않습니까?   마음으로 마음으로 우시면서   귀로 들으시지 않으려고 눈 감고 계십니까? 내가 미련합니까? 미련하다 우십니까? 지척 같으면서도 만리길입니까? 끝내 만리길의 세상입니까?   정향! 차라리 아버지께서 당신을 사랑하는 이 죄값으로 사망에의 길로 불러 주셨으면 합니다. 예 당신과는 생각마저도 잡을 길 없는 세상으로               ================================================================================= ◆ 만주벌판을 기차로     2010년 5월5일 동랑· 청마기념사업회에서는 거제시문화체육과의 협조을 받아 청마유치환 선생의 흔적을 찾아서 북만주 기행을 하게 되었다. 동랑· 청마기념사업회 회원, 거제문인협회회원, 그리고 청마선생의 따님이신 인전, 춘비(80), 자연(79), 그리고 외손녀가 동행을  하여 매우 의미 깊은 문학기행이 되었다.   문학기행을 떠나는 회원들도 청마선생의 북만주생활을 더듬어 볼 기대에 큰 의미를 두고 있었지만 청마선생의 세 따님은 벌써 60년도 더 지나버린 아버님과의 추억이 서려있는 북만주를 찾는다는 생각에 얼굴 가득 회한이 서려있었다.  특히 세따님들은 아직도 기억속에 가물가물 살아나는 추억의 북만주를 한번쯤은 찾아가서 그 옛날 아버님과 같이 거닐었던 하얼핀 거리를 걸어보고 싶었고, 암울한 시대에 태어나 어쩔수 없이 조국을 등지고 떠나와 살아야했던 그 아픔의 현장을 꼭 한 번 찾고 싶은 맘을 한 시도 버릴 수 없었다고 한다.   필자는 이 여행을 하면서 청마 유치환 시인을 거론하면 언제나 함께 등장하는 이영도 시인 보다는 수면위로 떠오른 적이 없지만 청마선생님을 훌륭한 사랑 시인으로 세상에 태어나게 한 권재순 여사에 대한 뒷 이야기를 조명하고 싶은 마음에 여행 기간 내내 세따님과 외손녀와 함께 유치환시인과 그리고 권재순여사의 이야기를 나누며 귀한 시간을 가졌다.   연길공항에서 마중나온 사람들의 접대를 받고 윤동주 생가를 참배하고, 박경리의 '토지' 배경이 되었던 회령시가 보이는 삼합에 도착했을 때에도 세따님은 말없이 복사꽃 진달래꽃이 흐드러지게 핀 숲을 바라보며 환하게 웃으시기만 했다. 그리고 두만강을 하염없이 바라보기도 하면서 연셍-ㅔ 어울리지 않을 만큼 곱고 단아한 모습을 보이며 내 속내를 훤히 알고 있는 것처럼 말을 건넬 여유를 주지 않으셨다. 여행도중 거리를 걸을 때면 의도적으로 세다님의 곁에서 걷거나, 혹시 버스속에서 자리가 나면 얼른 옆 자리에 동석을 하긴 했지만 이야기를 나누지 못한 채 일행은 흑룡강성 성도로 향하는 하얼핀 기차를 타게 되었다.   4인1실의 침대칸 기차에 세따님과 외손녀가 함께 취침으을 하게 되었고 우리는 바로 곁에 있는 칸을 이용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야간 기차는 아무리 달려도 4시간을 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밤을 하얗게 새며 10시간도 넘게 하얼핀을 향하여 달리는 기차는 어둠에 밀려서 북만주의 어디쯤을 헤매고 있는지를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긴 밤을 보낸 후 드디어 광활한만주 대지를 깨우는 황홀한 태양 한 줄기가 창틈으로 기어들기 시작했고 밤새워 숨도쉬지 않고 잠을 자던 대륙의 주인공들이 아아듣지 못하는 중국말로 수런거리자 우리 일행도 깨어나기 시작했다. 참 넓은 대륙이다. 어디를 보아도 끝이 없는 대지에서 태양은 어디 숨었다 일어났는지 넓은 대지에 골고루 햇살을 뿌려주고 있었다.   그때 세 따님의 방문이 열렸다. 필자는 얼른 그 방으로 들어가 문안인사를 드렸다. 여든이 넘는 그 나이에 어울리지 않을 만큼 단아한 체격에 언제 세수를 하였는지 예쁘게 화장한 세 따님의 얼굴엔 무어라 말할 수 없는 기대감과 호기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세따님 모두 하얼핀이 청마선생님의 시 '극락사'가 있고, 청마선생님이 거닐었던 공원이 있으며 청마선생님의 흔적이 서려있는 곳이어서 아침 기분을 이렇게 홤하게 한 모양이다. 차가 도착하기 전 필자는 정식으로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꺼내기 시작했다.   ◆ 나의 아버지 유치환   하얼핀에 도착하려면 1시간은 족히 남았다는 가이드의 이야기를 듣고 필자가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정식으로 취재하고 싶다는 청탁을 드리자 쾌히 승낙을 하시고 동승한 문협 사무국장의 동영상 촬영을 하는 가운데 세 따님은 아버지와의 추억을 반추하기 시작했다.   청마선생님은 부인인 권재순여사와 1살 차이로 같은 유치원을 다녔으며 같은 교회의 주일학교 친구였다고 한다. 청마선생님은 그 당시 청마선생님보다 더 인텔리이신 권재순여사를 흠모하여 권재순여사에게 구애편지을 많이도 보냈다고 한다. 권재순여사는 그런 편지들을 안타깝게도 6·25로 인하여 간수하지 못했고 청마는 권재순여사와 결혼을 하여 세따님을 낳으셨다고 한다. 세따님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다투는 모습을 한번도 본 적이 없다고 하면서 아버님의 온화하고 다정다감한 모습을 지금까지도 머리속에서 떠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런 다정다감한 성격탓에 항상 아버지 곁에는 사람들이 많았으며 특히 여자들이 끊이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할 때엔 입가에 웃음을 보이셨다. 이렇게 사람들을 좋아하다보니 아버지는 사람 사이에서 벗어나지 못하셨으나 가정에서는 정말 좋은 아버지로 기억되고 있다고 했다.   아버지 유치환선생님은 일제치하의 어려움 때문에 늘 가슴 아파했으며 문인으로서의 올곧게 살아가는 삶에 어려움을 느끼셨다고 한다. 하루는 학교에서 일본 이름으로 개명을 하라는 통지를 받고 세따님도 아버지께 예쁜 일본 이름으로 바꾸어 줄 것을 청했다고 한다. 그때 아버지는 일본 이름은 아름답지 못하다고 하며 끝끝내 인전, 춘비, 자연이라는 이름을 고수하였다고 했다.   이처럼 아버지의 문학활동과 개인생활이 일본의 간섭으로 인하여 어려움을 겪게 되자 청마선생님은 형이신 유치진 선생님께 자신의 거처에 대하여 의논을 하였다고 한다. 이 시절에 청마선생님의 형이신 유치진 선생님의 부인이 대한제국의 귀족집 따님이라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 재물로 유치진 선생님은 북만주에 넓은 들판을 구입하고 있었는데 동생인 청마를 불러 정말 대한민국 생활이 어렵다면 자신을 알고 괴롭히는 일본 사람이 없는 북만주로 와서 북만주의 농사관리를 해 주고 문학 활동을 하면 어떻겠느냐는 형의 의견에 따라 청마선생님의 북만주 생확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만주에서 청마선생님은 유치진 형의 농사일을 관리하고 있었는데, 그때 만주에 거주하고 있는 조선독들의 눈이 되고 길을 열어주며 조선족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는데 그 일이 오인되어 아버지가 일본의 일을 봐 준 것으로 아는 사람도 있는 것 같다는 씁쓰레한 친일에 대한 이야기를 잠깐 비치기도 했다.   아버지가 북만주로 떠난 후 맏달 인전씨도 아버지를 찾아 만주로 가게 되고 11살의 나이로 3학년에 편입되었고 뒤이어 모든 가족의 북만주행이 이루어져 동생 둘도 만주의 소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는데, 그때 만주에서의 생활을 평생 잊지 못하는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다. 아버지는 가신진에서 가끔 하얼핀으로 갸셨는데 그때 만주에서의 생활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4학년 3학년 2학년인 세 딸을 데리고 공원으로 나들이를 가던 때였다고 기억하고 있다. 이렇게 나들이를 갈 때면 세 딸이 햇살에 타지 않도록 언제나 모자를 꼭 씌운 후 나들이를 하셨던 기억이 잊혀지지 않는다고 했다. 또한 하얼핀 거리를 걸을때에는 그 당시만 해도 우크라이나 풍이 흐르는 가게의 쇼윈도에 물방울 무늬가 참으로 아름다웠던 원피스가 걸려있던 모습이 지금도 수채화처럼 하나하나 그리워진다고 했다. 이런 기억들을 붙들고 회원들과 북만주 현지주민들이 가신진, 연수현을 쥐졌지만 그 때 청마선생님과 가족들이 살았던 방앗간이 있었다던 장소는 불타버려서 그 터를 찾을 수 없어 함께한 모든 일행들이 아쉬움을 금할 길 없었다. 이렇게 세 따님들은 아버니데 대한 기억을 너무나 아름답게 간직하고 있었다.   ◆ 사랑하는 어머님 권재순여사     권재순여사는 통영  출신으로 지금의 중앙대학교 보육학과의 전신인 조양보육과를 나와 신여성으로서 유아교육계에 몸을 담고  진명유치원보모로 열심히 교사의 길을 가고 있었다고 한다. 그 당시 권재순 여사는 청년 유치환보다 훨씬 인텔리급에 속한 신여성으로서 통영의 유수한 젊은이들로부터 지극한 사랑을 받아온 아가씨였다고 한다. 청년 유치환은 이런 아가씨를 사모하여 통영의 젊은이들이 모를 사람이 없을만큼 권재순여사를 향한 대단한 구애작전을 했다고 한다. 권재순여사의 사랑을 얻기 위해 수많은 편지를 보내왔고, 권재순은 내 여자라고 대자보에 실을 정도로 권재순여사를 향한 사랑이 짙었다고 한다.   청년유치환선생님의 이와 같은 노력으로 1928년 통영을 떠들썩하게 한 신 학문을 공부한 두 젊은이가 하는 결혼을 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결혼을 한 후 어머니는 문화유치원을 경영하며 청마의 뒷바라지를 위해 남모르는 노력을 하신 분이라고 딸들은 입을 모아 이야기했다. 뿐만 아니라, 당시 통영의 이름 있는 여러 여류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신여성으로 한산일보에 훌륭한 교육가로 소개되고 있다.   어머니 권여사는 아버지보다 훨씬 돈도 많이 벌어서 평생 아버지의 뒷바라지를 해 주신분이며, 어머니의 그런 경제적 뒷바라지 덕분에 대부분의 문인들이 힘들고 어려운 생활을 해 왔지만 아버지는 생활의 궁핍함을 모른 채 문인으로서의 길을 걸을 수 있었으며 아무도 모르게 어려운 문인들의 술값과 담배값을 뒷바라지 해 왔다고 한다.   셋째 따님의 이야기에 의하면 아버진 꽃과 물을 찾아 이사를 하셨다고 한다. 그래서 아버진 어머니가 아니었으면 어디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바람 따라 그름ㄸ라 떠돌아 다니는 김삿갓 같은 시인이 되었을 것이라고 늘 회고하셨다고 한다. 이런 아버지를 어머니 권여사는 말없이 뒷바라지에 최선을 다하였닥 한다. 아버지가 통영에서 생활하실때, 어머니께서는 세 딸들에게 아버지가 글을 쓰고 계실 땐 발바닥을 마루에 모두 놓고 걸어서는 안 된다고 하셨단다. 늘 까치발로 아버지가 글을 쓰시는 주변을 고양이처럼 살금살금 소리나지 않게 걸어가게 주의를 주었다고 한다. 이렇게 걸어가다 마주친 아버지의 눈빛이 지금도 기억난다고 했다.   그러나 권여사가 진정 바랐던 남편상은 시인이 아니라 신학을 공부하여 목회의 길을 가기를 원했다고 한다. 그런 이유로 평양신학교 입학을 3일 앞둔 날 잠시 서울을 갔다 오겠다고 집을 나간 유치환은 돌아오지 않아 끝내 신학대학을 다니지 못한 것에 늘 안타까와 했다고 한다. 권여사의 이런 바람에도 불구하고 남편 유치환은 신학을 접어둔 채 시인으로 거듭났고, 권여사는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평생을 교회의 반주자로 일하며 남편을 주님의 전으로 붙들어 주려고 했지만 끝내 남편에게 전도를 하지 못한 것에 죄스러워했다고 한다.   또한 권여사는 일제시절의 교육과정 중 좋은 점을 잘 받아드려서 자신의 삶을 기독정신에 입각하여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살아오셨다고 한다. 새벽에 일어나면 화장하지 않은 모습을 절대 보이지 않았으며, 언제나 반듯한 모습으로 남편과 자녀 앞에 서 있어 어린 딸들은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이 다 저렇게 반듯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줄 알았다고 했다.   만주 가신진에서 생활할 땐 하얼핀으로 출장을 간 남편이 돌아오지 않으면 식사를 하지 않고 세 딸을 데리고 일몰의 지평선에서 아버지를 기다렸던 고운 어머니의 모습을 보면서 자라왔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남편이 글을 쓸 땐 절대 방해하지 않았고 세 딸에게도 아버지를 방해하면 안된다며 글 쓰는 남편을 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였다고 한다.   유치환선생님은 언제나 누구에게나 좋은 느낌을 주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 좋은 유치환 선생님 주변엔 늘 스스로가 연인이라고 자처하는 여성들이 서성거리고 있었다고 하는데 이런 가운데 이영도 시인이 나타나면서 어머니는 마음의 병을 많이 앓으셨다고 한다.   처음엔 어머니 권여사도 남편 없이 혼자의 몸으로 딸 한 명을 데리고 살고 있는 이영도시인에 대해 여동생처럼 잘 대해 주었고 이렇게 잘 지내던 사이에 어느새 유치환과 이영도시인은 세기에 남을 편지의 주인이 되게 되었다. 세 자매의 이야기에 의하면 절대 아버지가 먼저 편지를 보낸 것이 아니라 이영도시인이 먼저 아버지께 편지를 보내왔으며, 그 편지를 계속 불태웠다고 말했다.  보통의 여인들은 이런 경우에 누구라도 붙들고 하소연으로 가슴에 쌓인 화풀이를 하면서 스스로를 채워나간다. 그러나 권여사를 더욱 힘들게 한 것은 남편 유치환이 예사의 인물이 아니었기에 아무나 붙들고 무슨 말이든지 쏟아놓지 못한 아픔이 더욱 컸을 것이다. 그런 인내로 인고의 세월을 보내는 아내를 유치환선생님의 모를 리가 없었다.  세따님의 이야기에 의하면 이런 어머니를 두고 유치환은 열녀비를 세워줘야겠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고 했다. 청마 유치환선생님이 아내 권재순여사를 사랑하는 글은 그가 남긴 '병처'에서 만날 수 있다.   病妻 아픈가 물으면 가늘게 미소하고 아프면 가만히 눈감는 아내 --- 한떨기 들꽃이 피었다 시들고 지고 한 사람이 살고 병들고 또한 죽어 가다 이 앞에서는 전 宇宙를 다 하야도 더욱 무력한가 내 드디어 그대 앓음을 나누지 못하나니 가만이 눈감고 아내여 이 덧없이 무상한 골육에 엉기인 有情의 거미줄을 觀念하며 遙遙한 太虛가운데 오직 고독한 홀몸을 응시하고 보지 못할 천상의 아득한 星芒을 지키며 蕭條(소조)히 地底를 구우는 무색 음풍을 듣는가 하여 애련의 야읜 손을 내밀어 인연의 어린 새 새끼들을 애석하는가   아아 그대는 일찌기 나의 청춘을 정열한 한 떨기 아담한 꽃 나의 가난한 인생에 다만 한 포기 쉬일 愛憎의 푸른 나무러니   아아 가을이런가 추풍은 蕭條(소조)히 그대 위를 스쳐 부는가   그대 만약 죽으면--- 이 생각만으로 가슴은 슬픔에 즘생 같다 그러나 이는 오직 철없는 애정의 짜증이러니 진실로 엄숙한 사실 앞에는 그대는 바람같이 사라지고 내 또한 바람처럼 외로이 남으리니 아아 이 지극히 가까웁고도 머언 자여   내 그대 앓음을 함께 하지 못함을 안타까워하고, 나의 청춘을 정열한 한 떨기 아담한 꽃으로 담아두고, 나의 가난한 인생에 애증의 푸른 나무로 살아온 당신을 잊지 않겠다고 노래하고 있다. 조강지처와의 사랑은 그런 것이다. 아무리 오랜 동안 떨어져 있어도, 아무리 미운 짓 많이 하여도, 세월 넘기며 가정을 찾지 않아도 조강지처의 사랑은 그런 것이다. 모든 것 다 묻어두고 열두 폭 치맛자락으로 덮어두고 보듬고 나가는 그런 사랑이 조강지처의 사랑인 것이다. 이런 사랑의 보이지 않는 끈을 유치환도, 권재순 여사도 함께 잡고 살아온 것이다.   권재순여사의 인품과 덕망은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지만 가장 아픈 부분을 보면 아버지 유치환선생님이 작고하신 후 이영도시인이 유치환이 보낸 편지를 모아 '사랑했으므로 행복하였네라'의 시집을 내게 되었을 때라고 말했다. 이 때 가족 모두는 이영도시인의 글이 아니라 아버지의 글인데 이영도시인이 유치환선생님의 가족 동의도 없이 시집을 출판하고 한권 모두를 자신의 소유로 하여 가족들 간에 소송을 해야겠다는 의논이 돌았다고 한다. 그때도 권여사가 유치환선생님을 위하여 소송문제를 절대 허용하지 않아서 모든 유족들이 참고 그 책의 출간을 묵인해 주었다고 한다.   유치환선생님의 편지는 누가 누구에게 쓴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글은 모두 청마선생님이 탄생시킨 아름다운 한 편의 시였음을 인정하면서 우리는 청마선생님이 남긴 '그리움'과 '행복'속에서 모든 이들은 어떤 설명도 필요 없는 독자만의 감동에 휘몰아치는 사랑을 느끼면 되는 것이다.   시인 청마유치환과 이영도의 플라토닉사랑은 속도와 감흥에 민감한 이 시대의 젊은이들에게는 20여년에 걸친 그 사랑이 전설과 같을 것이다. 사랑은 미완성을 통해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다. 이 시를 읊을 때마다 그 애절하고도 아름다운 사랑의 고백이 눈물겹다. 그러나 그 두 사람의 이야기 보다 이런 이렇게 아름다운 시가 세상에 나오기까지 남편을 향한 참으로 아름다운 마음을 가진 한 여인이 지아비를 지성으로 섬기며 그 모든 어려움을 열두폭 치마로 둘둘 감아 덮어주고 막아준 가슴아픈 부인의 사랑이 있었기 때문임을 우리는 알아야 할 것이다.     이영도를 향한 유치환의 플라토닉한 사랑도 아름답고, 이영도의 유치환에 대한 그리움도 참으로 아름답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에서 그 모든 아픔을 견디며 남편을 사랑한 권재순여사의 지고지순한 참 사랑이 있었기에 유치환은 이시대의 사랑시인으로 남아 도 도 우리의 가슴속에 이렇게 흐르고 있는 것이 아닐까? =================================================================     시인 청마 유치환(1908~1967)의 연서는 절절하다. '…내가 당신의 안으로 육신마저 들어가고 당신이 내 안으로 들어와 버려도 시원치 않을 안타까움!'   절대적 사랑이었다. '오직 하나 당신의 가슴에 안겨 마지막 숨을 거두고 싶은 욕망!'    최애(最愛)였고, 익애(溺愛)였다. '…당신의 고운 사진을 보고…거기다 얼굴을 문질렀는지 모릅니다….' 내면의 절규도 터져 나온다. '운! 죽으리까? 죽어버리리까?'    유치환이 시조시인 정운 이영도(1916~1976)에게 보낸 사랑편지는 이랬다. 청마가 그녀를 처음 만난 건 1946년. 그는 해방되는 해 통영여중 교사로 부임한다. 이영도는 그곳에서 수예와 가사를 가르치고 있었다.   청마는 서른여덟, 정운은 스물아홉의 나이. 이때부터 '푸른 말'의 울음소리는 '정운'이었다. 둘은 기혼자와 미망인의 몸이었다. 이 넘지 못할 강의 가교는 편지였다. 20년 세월, 5천 통으로 이어진 길고 긴 다리였다.    다리 놓기는 마냥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청마는 애걸 조였다. '편지를 쓰지 말라는 당신의 말씀을 잊은 것은 아닙니다. …이렇게 종이를 대해서나마 당신을 불러 보지 못한다면 어디서 이 애틋한 그리움을 풀겠습니까.' 이영도에게 청마의 연문은 설렘이자 괴로움이었다. 통영은 자신의 남편이 저세상으로 간 도시였다. 주위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청마의 여성 편력도 나타난다. '…내가 몇 번의 연애를 가져 본 것은 사실입니다….' 딴 연인이 있음을 비치는 대목도 있다. '설령 지금 내가 어떤 여성과 탐애에 빠져 있다 하더라도….'  청마에게 이 고백들은 장치로 작용한다. 정운을 우뚝 세우기 위한. '정운! 당신은 내게 세상에 흔한 그러한 애인이 아닙니다….' 이래서 시인의 사랑은 다른가.  편지는 1967년 청마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계속된다. 이별인사도 없었다. 편지의 전제는 '떨어져 있음'이다. 끝내 육체는 한 공간에 있지 못한 거다. 정신적 사랑이었다. 이영도는 이 편지들을 장롱 서랍 깊이 묻어두려고 작심했다가 마음을 바꾼다. 그녀는 유치환이 작고한 그해 편지집을 펴낸다. 청마의 것만을 모은 '사랑했으므로 행복하였네라'였다. 이런 일화가 있다. 이 책이 큰 인기를 얻자 청마를 이용해 책을 팔아먹는다는 비난이 쏟아진다. 이영도는 이에 '다른 여자들이 먼저 낼지 몰라서'라고 대답했단다. 청마의 명예와 그와의 사랑을 보호하기 위한 사전 조치였다. 이 예상은 맞았을까.     사랑의 파도를 이으며 띄워 보낸 청마의 육성 이준영 기자 /   1967년 청마 유치환의 갑작스러운 타계는 한국 문단에 충격적인 일이었다. 신문·잡지들이 그에 따른 일화를 앞다퉈 보도했다. 유치환과 이영도(정운)의 사랑 편지 얘기도 있었다. 정운은 편지 공개를 완강히 거부했다. 연서는 내밀하게 둘만이 나눈 영혼의 교류. 남에게 보여 줄 일이 아니었다.    그녀가 이 마음을 바꾼 계기는 여성지였다. 이 잡지들이 청마의 편지들을 하나둘씩 싣는다. 다른 여인들이 보관하고 있었던 거였다. 여 제자들이 내놓은 편지도 꽤 있었다. 정운은 이 상황을 더 두고 볼 수 없었다. 청마와 여러 여성에 얽힌 잡다한 소문을 잠재울 생각이었다. 서간집 '사랑했으므로 행복하였네라'는 이렇게 탄생한다.    이 책은 출판되자마자 베스트셀러가 된다. 비난도 뒤따랐다. 청마를 이용해 책을 팔아먹는 게 아니냐는. 정운의 해명은 이랬다. "다른 여성들이 낼지 몰라 서둘러 낸 것"이라고. 청마의 가장 소중한 정신적 사랑은 바로 자신이었던 것이다.   얼마 후 또 다른 청마 편지집이 세상에 나온다(1970년). 이영도의 예상대로였다. 제목은 '청마와 사색의 그림자들'. 펴낸 이는 반희정이었다. 청마가 '청하'라는 아호를 지어 준 여인이었다. 여기엔 (1958년부터)5년여간 그녀와 청마 사이에 오간 편지 100여 통이 담겨 있었다. 편지만 실린 정운의 서한집과 형식이 달랐다. 청하는 편지 중간마다 자신의 소회와 일상을 차근차근 적었다.  청하가 청마를 처음 만난 건 1958년 11월. 유치환의 그때 나이 50세. 이 여인은 30대 후반의 전쟁미망인이었다. 그녀가 먼저 청마에게 편지를 띄운다. 자신이 속한 문학모임에 한번 와 달라는 초빙 서한이었다.  '사랑한 나의 당신! 마침내 나는 이렇게 자백할 수밖에 없군요!' 청마는 그녀와 만난 지 몇 달 만에 이런 편지를 보낸다. 이영도와 시기가 겹친다. 그는 정운에게 보낸 편지에서 '어떤 여성과의 탐애'를 언급한 적이 있다. 그 주인공이 혹시 반희정이었을까. 간호사였던 청하는 청마가 곤궁에 처했을 때 많은 도움을 줬다. 그가 직장에 사표를 내고 신경통으로 기동도 제대로 못 하던 때였다.  반희정은 청마와 정운의 관계를 친구를 통해 알게 된다. 글에서 떨림이 느껴진다. 청하는 청마의 부인이 안고 있는 깊은 상처도 읽는다. 그녀와 만나 하룻밤을 같이하면서였다. 정신적 사랑, 그것이 몸을 바치고도 '영혼의 순결'을 지켰다는 주장과 어떻게 다른 걸까. 밤을 하얗게 새우며 나눈 두 여인의 길고 긴 대화를 상상해 본다.  ===============================================   청마가 교류한 여류시인 청마문학회 회장이며 시인인 문덕수 홍익대 명예교수(1928~ 경남 함안출신)는 [청마 유치환 평전-시문학사刊]을 내었는데 “청마는 생명의 소중함을 지상의 가치로 생각했고 그의 문학관은 매우 인생론적”이라고 하였다. 또한  靑馬 유치환(1908~1967)이 시조시인 이영도(李永道, 정운 丁芸, 1916~1976)와 20년간 주고 받은 5000여통 편지는 詩를 매개로 한 순수한 사랑이었다고 주장한다.   청마는 어려서 주일학교에서 만난 후배 여학생 즉 장차 부인이 될 권재순에게 편지를 나누었고 그가 20세인 1928년에 신식으로 결혼식을 올렸다. 그때 꽃을 들고 있던 소년이 나중에 "꽃"이라는 시로 유명한 김춘수 시인(1922~2004)으로 당시 6세였다.   청마가 37세인 1945.10월부터 1948.3월까지 통영여중에서 교사로 근무할 때 여류 시조시인 이영도는 29세였으며 21세에 남편을 여의고 딸 하나를 가진 가사교사로 같이 근무하였고 그들은 1946년에는 문학동인 죽순(竹筍)에서도 같이 활동했다. 청마가 남긴 글을 보면 순수한 사랑이던 아니던 간에 생각이 다를 수 있겠다고 여겨지나 내용은 상당히 애뜻하였던 듯하다. 이영도는 청마와 주고받은 편지중에 청마의 편지 200여통을 ‘사랑했으므로 행복하였네라’(1967)는 책에 실었으며 이책은 그 해의 베스트 셀러였다,   시인이며 반희정(潘姬靜) (청마가 지어준 이름으로 청하(靑霞))이라는 여성과도 1958.11월부터 1963.7월까지 이런 순수한 편지를 주고 받았다. 반희정과의 편지도 ‘청마와 사색의 그림자들’(1970)이라는 책 속에 들어 있다.   문덕수는 “서한집을 면밀하게 살펴보았지만, 남녀의 개인적·사적 밀담(密談)은 어느 구석에서도 발견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또한 청마는 여느 시인처럼 시만 쓴 것이 아니라 신, 자연, 죽음, 생명 등의 형이상학적 문제에 대한 사색의 영역을 직관적으로 넓혀 나갔던 것이다. 청마에 대하여 시인 김춘수는 , “청마는 예술가로서의 시인은 아니다. 사상가·경세가로서의 시인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청마는 ‘意志의 시인, 虛無(Nihilism)의 시인, 生命派의 대가(大家)’ 같은 다양한 호칭으로 불려지고 있다. 그러나 청마는 어느 시인보다도 ‘자연’과 ‘사랑’을 많이 노래하였고 특히 그의 사랑은 유달리 힘차고 따스하고 갚은 것이었다. 그리고 사랑과 행복의 두가지 등식속에서 가장 고매하고 진정한 존재양식을 찾아낸 시인은 그렇게 흔하지 않다. 즉 ‘행복’에서 ‘사랑하는 사람이 존재해 있고, 사랑하였으므로 설사 마지막 인사가 될지어정, 진정 행복하였다’라고 노래하였다.    -첫 邂逅- 靑馬 柳致環 선생님을 처음 만난 것은 1958년 11월 어느 날이었다. 그 무렵, 나는 B읍의 어느 교회 일을 돌보면서 교사와 전도사로 일하고 있었다. 두 오누이의 어머니로서, 전쟁 미망인으로서 온갖 世波에 시달리고 갖은 傷處의 흔적들을 지닌 채 나는 다만, 그리스도 앞에 나의 전부를 바친 몸으로 잔득 도사리며 살아가고 있었다. ....살아가노라면 사람은 제가끔 타인이 알지 못하는 은밀한 어떤 것을 간직하는 때가 있습니다.... 이 은밀한 것들은 살아가는 데 있어서 때때로 짐스러운 것이 되기도 하지만 이때금씩은 스스로만의 세계에 잠길 수 있는 유일한 상념의 장이 되기도 합니다. ... 50년대말과 60년대의 초기에는 이 나라가 커다란 시련을 겪고 있지 않았습니까. 이 시련의 시기를 똑바로 들여다 보면서 누구보다 올바르게 살아 보려고 진심으로 저항한 청마 그분의 증언 그것이었습니다....   - 반희정의 편저 [청마와 사색의 그림자들] 중에서   =======================================   [구활의 풍류산하] 청마의 우체국 연인 통영에 간다. 그곳은 아름다운 곳이다. 그래서 동양의 나폴리라 부른다. 등산로를 따라 미륵산 정상으로 올라가면 통영이 품고 있는 섬들이 훤하게 내려다보인다. 태양이 중천에 떠있는 빛 밝은 날의 바다색깔은 너무 맑고 푸르다. 이곳에 올 때마다 작은 방 하나 얻어 한두 달쯤 살고 싶어진다. 통영은 예향(藝鄕)이다. 많은 예술가들이 배출된 곳이다. 연극인 유치진, 시인 유치환, 시인 김상옥, 소설가 김용익, 음악가 윤이상, 소설가 박경리, 시인 김춘수, 화가 김용주, 화가 전혁림, 음악가 정윤주, 나전칠기 명장 김봉룡 등 손가락으로 꼽을 수 없을 만큼 많다. 고향은 이곳이 아니지만 통영에서 몇 년 머물며 작품을 남긴 예술가도 더러 있다. 이중섭은 부산 시대와 서귀포 시대를 청산하고 이곳에서 2년간 머물렀다. 그때 ‘흰소’ ‘황소’ ‘달과 까마귀’ ‘부부’ ‘가족’ 등을 그렸다. 또 시인 백석은 이곳에서 애틋한 연애 시 몇 편 남긴 것이 지금까지 통영의 자랑거리로 꼽히고 있다. 오늘은 청마문학관을 거쳐 동피랑 벽화마을에 들렀다가 전혁림 미술관에 가서 독학으로 일가를 이룬 화가의 그림세계를 살펴보려 한다. 이 프로그램은 관광공사 산하 대경문화발전연구회(회장 강인호 계명대 교수)가 기획한, 외국인 유학생들에게 우리 문화를 알리는 팸 투어이다. 청마의 시는 교과서에 실린 ‘깃발’부터 읽었지만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왜냐하면 선배들로부터 시인의 생애 중에 있었던 사소한 연애담을 너무 많이 들은 데다 그의 시가 연정 쪽으로 많이 기울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하기야 시의 주제가 ‘사랑’ 아니면 맛이 없는 것이지만 타인의 연애에는 괜히 재를 뿌리고 싶은 나의 비뚤어진 심사가 다분히 작용했으리라. 그래서 이번 통영 길엔 청마의 내면을 꼼꼼히 챙겨 보리라 마음먹었다. 청마가 평생의 연인이었던 정운 이영도 시인을 만난 것은 38세 때인 1945년이었다. 통영여중의 국어 교사와 가사 교사로 만난 둘은 첫눈에 빠져들어 서로 애욕의 늪에서 헤어나질 못했다. 청마는 부인이 마련해 준 작업실인 영산장에서 애달픈 편지를 써서 중앙동 우체국으로 걸어나가 연인에게 부쳤다. 죽을 때까지 5천 통이 넘었다. 청마는 유부남이었고 이영도는 딸 하나를 두고 홀로 사는 여인이었다. 둘 다 가슴만 타고 마음만 부글거렸지 현실의 벽은 너무 높아 넘지를 못했다. 매일 편지를 부치러 가는 청마는 우체국 부근에서 부업으로 수예점을 열고 있던 이영도를 유리창을 통해 물끄러미 바라만 볼 뿐 주위의 이목이 두려워 만나지 못했다. 맛있는 과일을 눈앞에 두고 한 입 깨물어 먹지 못하는 아이의 마음이나 무엇이 다르랴. 그래서 쓴 시는 ‘그리움’ 같은 것이다.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임은 물같이 까딱 않는데 /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날 어쩌란 말이냐”. 인도의 금욕주의자 간디도 그가 죽을 때까지 사랑한 여인이 있었다.영국 해군 제독의 딸인 미라라는 여성이었다. 간디가 56세 때 33세인 미라가 찾아와 문하생이 된다. 간디가 미라에게 보낸 애절한 편지 350통이 공개되긴 했지만 그들 둘 사이에 육체관계는 없었다니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그것 자체가 의문이다. 간디가 그러하듯 청마의 연애에도 육체가 개입되었는지 아닌지는 아무도 모른다. 5천 통의 연애편지를 쓴 청마가 밋밋한 영혼에다 대고 “날 어쩌란 말이냐”고 매일매일 고함을 지르며 우체통 구멍에 불이 나도록 편지를 밀어 넣었을까. 저승 가서 하나님을 만나면 그것부터 물어봐야겠다. 청마가 숨지기 얼마 전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 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라는 ‘행복’이란 절창의 시를 썼다. 그는 60세 때인 1967년 부산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이영도는 청마에게 받은 편지로 사후 한 달 뒤 ‘사랑하였으므로 행복하였네라’란 서간집을 펴냈다. 그녀는 ‘돈벌이 속’이란 비난이 쏟아지자, “내가 서간집을 내지 않으면 다른 여자가 먼저 낼지 모르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 말은 사실이었다. 3년 뒤, 반희정이란 여인이 1958년부터 1963년까지 5년 동안 청마로부터 받은 편지로 ‘청마와 사색의 그림자들’이란 책을 펴냈다. 진짜 낚시꾼은 낚싯대 하나로 고기를 낚는다. 구성지게 비가 내리는 날 청마문학관을 나서며 청마의 낚싯대 숫자를 세어 보았다. 하나 둘(엇둘) 하나 둘(엇둘). ///수필가           이영도 : 시조시인. 호는 정운(丁芸).  경상북도 청도(淸道) 출생. 시조 시인 이호우(李鎬雨)의 여동생이다. 1945년 [죽순]동인으로 활동하며 등단함. 민족 정서를 바탕으로 잊혀가는 고유의 가락을 시조에서 찾고자 노력하였으며, 간결한 표현으로 자신의 정감을 다스리며 인생을 관조하는 세계를 보여줌. 시집으로는 《청저집》(1954), 《비가 오고 바람이 붑니다.》(1968) 등 정운(이영도)는 재색을 고루 갖춘 규수로 출가하여 딸 하나를 낳고 홀로 되어 해방되던 해 가을 통영여중 가사 교사로 부임했다. 해방이 되자 고향에 돌아와 통영여중 국어교사가 된 청마의 첫눈에 정운은 깊은 물그림자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일제하의 방황과 고독으로 지쳐 돌아온 남보다 피가 뜨거운 서른 여덟 살의 청마는 스물 아홉의 청상 정운을 만나면서 걷잡을 수 없는 사랑의 불길이 치솟았다.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임은 뭍같이 까딱 않는데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날 어쩌란 말이냐   통영 앞 바다에서 바위를 때리고 있는 청마의 시 '그리움'은 뭍같이 까딱 않는 정운에게 바친 사랑의 절규였다.  유교적 가풍의 전통적 규범을 깨뜨릴 수 없는 정운 이기에 마음의 빗장을 굳게 걸고 청마의 사랑이 들어설 틈을 주지 않았다.  청마는 하루가 멀다하고 3년 동안 편지를 쓰고 시를 써댔다.  날마다 배달되는 편지와 청마의 사랑 시편들에 마침내 빙산처럼 까딱 않던 정운의 마음이 녹기 시작했으니 청마가 정운에게 보낸 편지들은 모두 그대로 시였다.   내가 언제 그대를 사랑한다던?  그러나 얼굴을 부벼들고만 싶은 알뜰함이  아아 병인양 오슬오슬 드는지고 덧없는 목숨이여  소망일랑 아예 갖지 않으매  요지경 같이 요지경 같이  높게 낮게 불타는 나의 -노래여, 뉘우침이여  나의 구원인 정향! 절망인 정향!  나의 영혼의 전부가 당신에게만 있는 나의 정향!  오늘 이 날이 나의 낙명(落命)의 날이 된달지라도 아깝지 않을 정향 -   끝이 보이지 않던 유치환의 사랑은 갑작스런 죽음으로 끝이 났다. 1967년 2월 13일 저녁, 부산에서 교통사고로 붓을 영영 놓게 된 것이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 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이렇게 고운 보배를 나는 가지고 사는 것이다  마지막 내가 죽는 날은 이 보배를 밝혀 남기리라 - 유치환 -   통영 여자중학교 교사로 함께 근무하면서 알게 된 이영도 그녀는 일찍이 결혼하여 21살 젊은 나이에 남편과 사별하고 당시 딸 하나를 기르고 있었다 청마는 1947년 부터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편지를 보냈다.  그러기를 3년, 마침내 이영도의 마음도 움직여 이들의 플라토닉한 사랑은 시작됐으나  청마가 기혼자여서 이들의 만남은 거북하고 안타깝기만 했다.  청마는 1967년 2월 교통사고로 사망할 때까지 하루도 빠지지 않고  20년 동안 편지를 계속 보냈고 이영도는 그 편지를 꼬박꼬박 보관해 두었다.  그러나 6·25전쟁 이전 것은 전쟁때 불타 버리고 청마가 사망했을 때 남은 편지는 5,000여 통이었다. 당시 이 이들의 '아프고도 애틋한 관계'를  {사랑했으므로 나는 행복하였네라〉라는 제목으로 실은 것이 계기가 되어  청마의 편지 5,000여 통 중 200통을 추려 단행본으로 엮었다.   이 청마의 사랑 편지가 책으로 나오자 그날로 서점들의 주문이 밀어 닥쳤고  베스트셀러가 되어 무명 중앙 출판출사는 대번에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마땅히 인세는 청마의 유족에게 돌아 가야 할 것이나  정운은 시전문지'현대시학'에 '작품상'기금으로 기탁 운영해 오다 끝을 맺지 못하고  1976년 3월 6일 예순의 나이로 갑자기 세상을 뜬다. . 탑(塔) 詩/ 이영도   너는 저만치 가고  나는 여기 섰는데  손 한 번 흔들지 못하고  돌아선 하늘과 땅  애모는 사리로 맺혀  푸른 돌로 굳어라   시인 청마 유치환과 이영도의 20여년에 걸친 플라토닉사랑은 이 시대의 젊은이들에게는 전설과 같을 것이다.  사랑은 미완성을 통해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다.  이 시를 읊을 때마다 그 애절하고도 아름다운 사랑의 고백이 눈물겹다   불장난이 아닌 충실한 사랑을 짙게 물들여 그의 장년기를 수놓는 제2의 청춘 가로 채웠던 그는 외로운 사랑을 했으며 죽음도 그 안에서 너그러운 사랑 속에 안길 수 있었다.  바로 의 행복한 연가로 폭을 넓히고 무르익었다. 영원한 것, 平常無事의 터득 속에서 익힌, 온화한 자애의 소근거림을 펼쳐 보이고 있다. 교육자이기도 한 그는 같은 학교에서 만난 이영도를 정신적으로 무척 좋아하였다....  이미 처 자식이 있는 상태였던 그는 그녀를 좋아하게 되었고 그가 부산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하기 전까지 그녀에게 200통의 편지를 쓰기도 하였다.   이영도 정운 선생이 1976년 예순의 나이로 타계한 뒤 무남독녀 박진아씨가 유품을 정리하니 미리 써둔 유서가 나왔고 유서에는 딸에게 사위에게 외손에게 부탁하는 말이 들어 있었다. 거기에는 죽음을 알릴 사람의 이름과 화장해 달라는 말, 그리고 장례비에 써달라는 상당한 액수의 돈이 함께 들어 있었다. 남에게 신세지기를 꺼리고 신세를 지면 갚으려고 하는 분이었기에 당신의 죽음 역시 비록 딸이지만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하였던 모양이다. 근검절약으로 일생을 부지런히 살았던 그녀는 택시를 타는 일이 거의 없고, 값비싼 음식을 사먹는 일이 없고 물건을 쌌던 포장 노끈까지도 잘 간수했다가 재활용하고 원고지 뒷면의 활용은 물론 편지를 쓰다가도 틀린 곳은 다시 종이를 덧붙여 썼다. 철 지난 달력의 아름다운 그림들은 잘 손질하여 화장실 부엌 같은 곳에 진열하기도 했다. 자신의 삶을 이렇게 근검 절약하면서도 남을 위한 배려는 돈독하였다. 후배 문인의 딱한 사정을 접하면 언제나 먼저 나서 도우고자 하였다. 냉기 속에서 청춘의 타오르는 불꽃을 오로지 시조로써 달래야 했던 정운 선생.   '오면 민망하고 아니 오면 서글프고 행여나 그 음성 귀 기우려 기다리며 때로는 종일을 두고 바라기도 하니라 정작 마주 앉으면 말은 도로 없어지고 서로 야윈 가슴 먼 窓만 바라다가 그대로 일어서 가면 하염없이 보내니라'   이것은 첫 시조집 '청저집(靑苧集)'(54년)에 실렸던 작품('무제Ⅰ')으로, 경남 통영시에서 당시 교편을 잡고 있던 정운 선생이 청마 유치환과의 연정을 한창 싹틔우고 있을 무렵의 심경을 토로한 작품이다.   정운 선생은 1940년 대말~50년 대말 통영에서 10여 년간 머물렀고, 50년 대 말에 부산으로 옮겨와서 67년 초까지 부산에서 생활했다. 일찍이 혼자가 되어 오직 시를 쓰는 일과 딸 하나를 키우는 일에 전념하면서 어느 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던 이영도는 그 당시의 많은 남성 문우들로부터 선망을 받고 있었다. 이영도가 혼자의 몸으로, 그렇게 꿋꿋하게 그의 시와 딸을 지키면서 살 수 있었던 것은 청마 유치환과의 애정에 크게 힘입었던 것이다.  그들의 사랑은 이영도로 하여금 외로움과 여러 가지 고난을 이겨나갈 수 있도록 받쳐 주는 든든한 정신적 지주가 되었으며 청마를 향한 그리움은 그의 시를 시들지 않게 해준 충분한 자양이 되었다. 사랑하는 정향!  바람은 그칠 생각 없이 나의 밖에서 울고만 있습니다.  나의 방 창문들을 와서 흔들곤 합니다.  어쩌면 어두운 저 나무가, 바람이, 나의 마음 같기도 하고  유리창을 와서 흔드는 이가 정향, 당신인가도 싶습니다.  당신의 마음이리다.  주께 애통히 간구하는 당신의 마음이 저렇게 정작 내게까지 와서는 들리는 것일 것입니다. 나의 귀한 정향, 안타까운 정향!  당신이 어찌하여 이 세상에 있습니까?  나와 같은 세상에 있게 됩니까?  울지 않는 하느님의 마련이십니까?  정향! 고독하게도 입을 여민 정향!  종시 들리지 않습니까?  마음으로 마음으로 우시면서 귀로 들으시지 않으려고 눈감고 계십니까?  내가 미련합니까?  미련하다 우십니까?  지척 같으면서도 만리 길입니까?  끝내 만리 길의 세상입니까? 정향!  차라리 아버지께서 당신을 사랑하는 이 죄 값으로 사망의 길로 불러 주셨으면 합니다.  아예 당신과는 생각마저도 잡을 길 없는 세상으로 -유치환으로부터 이영도 여사에게-     여기 지고지순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정운 이영도의 시조를 적어 본다.  황혼에 서서 - 이 영도 산(山)이여, 목메인 듯  지긋이 숨죽이고 바다를 굽어보는  먼 침묵(沈默)은 어쩌지 못할 너 목숨의  아픈 견딤이랴 너는 가고  애모(愛慕)는 바다처럼 저무는데 그 달래입 같은  물결 같은 내 소리 세월(歲月)은 덧이 없어도  한결 같은 나의 정(情) 진달래 - 이영도   눈이 부시네 저기 난만(爛漫)히 멧등마다, 그 날 스러져 간 젊음 같은 꽃사태가,   맺혔던 한(恨)이 터지듯 여울여울 붉었네. 그렇듯 너희는 지고 욕처럼 남은 목숨,   지친 가슴 위엔 하늘이 무거운데, 연연(戀戀)히 꿈도 설워라, 물이 드는 이 산하(山河).   이 시조는, 산에 난만히 피어 있는 진달래로 부터 4·19 혁명 때 희생당한 젊은이들의 넋을 떠올리며 그들에 대한 추모와 자기 회한의 정을 읊은 작품이다. 선생의 무덤은 경북 청도군 내호 마을 선영 아래 오빠인 이호우 선생 곁에 있다. 정운 선생이 배출한 제자는 그리 많지 않지만 다들 괄목할만한 시인으로 성장하였다. 에필로그 ; 유치환과 이영도의 사랑을 떠올리며 - 김남식 이루지 못할 사랑인 줄 알면서도 20년 간 지켜간 그네들의 사랑은 불륜이라 치부하기엔 진정한 사랑과 고통이 있었기 때문으로 흔히 나의 이야기는 '로맨스'고, 남의 이야기는 '불륜'이라지만, 이 두분의 사랑은 불륜이라 이름하기엔 너무 아름답다. 청마가 유부남이고 자신은 딸을 둔 미망인이라는 이유로 마음의 문을 열지 않았지만  청마는 3년 동안 혼자서 변함없는 사랑을 보였다. 흔히 이별의 가장 많은 원인은 자존심 때문이기에 진정한 사랑엔 자존심이 살아있지 않음을 혼자서라도 변함없는 사랑을 보여 주는 청마가 곁에 있는 이영도 시인이 부러웠다.  과연 청마 외에 이런 남자가 있을까라는 생각도 해 보면 이영도의 가슴 아픔이 저려 온다.  싫어서가 아닌데..사랑을 받아들일 수 없는 그 마음을 그 누가 알까요?  한편으론 행복하고 한편으론 아팠을 그 마음 변함없는 사랑에 어쩜 유치환 보다 더 울었을 이영도 사랑 한다고 할 만큼 아팠을 이영도 사랑하지만 그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아픔이 얼마나 크게 아팠을까요.  그리고 바로 건너편 2층 집에 그토록 사랑 할 여인이 곁에 있었으니  어쩜 유치환은 행복하기만 했을까? 이영도가 있었기에 바위처럼 꿋꿋하기만 했던 청마도 애련의 글을 쓸 수가 있었다.  이영도는 청마의 시 세계를 넓혀주었다.  3년만에 청마에게 마음을 연 이영도로 인하여 그들은 20년 동안 사랑을 키웠다.  인스턴트 사랑이 판치는 현대에서 분명 이들의 사랑은 가치가 있는 것으로  아마 유치환이 갑작스런 교통사고로 죽지만 않았다면 더 긴 세월을 사랑했을 것이다.   유치환에게 받은 편지를 한 통도 버리지 않고 모아 둔 이영도의 마음이 너무 예쁘다 훗날 어디에 쓰려고 그렇게 모으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거창하게 출판까지는 꿈꾸지 않았을것이다  유치환이 이영도를 사랑한 만큼 이영도는 유치환을 사랑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누군가에게 연서를 보낼 수 있고 또한 받을 수 있다는 건 행복한 일이다 세간에서 불륜이라기 보다는 참 아름다운 숭고한 사랑이라고 이름해 주는 그런 사랑을 나의 태도에 상관없이 변함없는 사랑을 보여줄 수 있는 그 사람을 만나고 싶다.             이영도(李永道. 1916-1976)는 누구인가. 그녀의 시 세계는 민족정서를 바탕으로 하여 잊혀져가는 고유의 우리 가락을 시조에서 재현하여 현대적으로 승화시키며 간결하고 섬세한 표현으로 여성의 맑고 경건한 마음, 기다림 등의 정서를 다스리며 관조적인 인생관을 보여준다.  ‘죽순’에 시조 ‘제야’로 등단하여 통영여중, 부산 남성여고, 마산의 성지여고, 부산여자 대학(현 신라대학)등에서 교편을 잡았고 부산 어린이 회관도 운영하였다. 한국 시조 시인 협회 부회장과 여류 문학인회 부회장을 맡기도 하였으며 편집위원 등을 지냈다. 시집으로는 , , 오라버니인 이호우와 공동시조집 등을 발간하고 수필집으로 , , , , 등 일곱권이 있으며 수필가로서의 명성도 크게 이루었다. 부산의 문화발전에 큰 기여를 한 이영도는 1966년에 수여하는 취지의 눌원 문화상(訥園文化賞)을 수상하였다.  청마 유치환이 교통사고로 사망한 후, 이영도는 20년간 이어지며 이영도에게 남긴 5000여통의 편지들 가운데 200통을 간추려 청마 서간집 를 발간하였다. 청마가 운명하자마자 연서를 상품화한다는 비난도 감수하며 이영도가 예의 서간집을 펴낸 것은 청마의 이미지 훼손을 막고 그를 진정으로 사랑한 이는 자신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2만5천부나 팔렸던 당시로서는 큰 반향을 일으킨 베스트셀러의 서간집이다. 그 수익금을 바탕으로 자신의 아호를 딴 정운 문학상(丁芸 文學賞)을 제정하여 재능 있는 시조 시인들을 지도하면서 문단에 등단시키며 시조시인을 양성하는 데에 큰 업적을 남긴 이영도다. 여성스럽고 아름답고 총명한 여인, 정갈한 몸가짐의 이영도,  이영도(1916-1976)는 경북 청도에서 아버지가 지방 군수인 좋은 집안의 3남 2녀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으며 시인 이호우의 누이이기도 하다. 한학자인 할아버지 이규현의 영향을 받아 천자문과 소학을 배우며 타고난 문학적 재능을 키웠다. 그러나 그녀의 총명과 곧은 성격은 오히려 조부모의 염려를 사서 객지로 유학을 가지 못하고 조부모가 운영하는 학당에서 공부를 했다. 이영도는 조부모의 뜻을 따라 1935년 20세에 대구의 부호와 결혼을 하였지만 그 이듬해인 1936년에 딸을 낳은 후 신혼의 꿈도 얼마가지 못하고 폐결핵으로 병약하던 남편을 수발하다 결국 1945년 8월, 29세에 남편과 사별을 하게 되었다.  이영도는 결혼하면서 덮어 두었던 시조 노트를 다시 꺼내 들었고 1945년 10월, 통영 여자 중학교 가사 선생님으로 부임하면서 또 한 번 생애의 커다란 전기를 맞게 된다.  바로 청마 유치환과의 숙명적인 만남이다. 마침 그 학교에는 유치환 외에도 시인 김춘수. 작곡가 윤이상, 화가 전혁림, 초정(草汀) 김상옥 시인 등 유능한 예술가들이 근무하고 있었다. 유치환 .... 농장을 경영하고 싶어 1940년 가족을 이끌고 떠났던 북만주. 어린 아들을 잃고 삽이 들어가지 않는 허허벌판의 광막한 언 땅에 묻으며 “암담한 진창에 갇힌 철벽같은 절망의 광야”인 북만주를 부인 권재순의 집요한 요구로 떠나와 해방직전인 1945년 6월 고향 땅 통영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통영 여중에 국어 교사가 된 것이다. 몇 달 후, 새로 부임한 가사교사 이영도! 어쩔 수 없는... 숙명처럼 그렇게 만난 두 사람이었다. 시조시인이기도한 이영도는 평생 한복을 입었던 청초한 아름다움과 남다른 기품을 지닌 여성이었다. 고독과 방황으로 북만주를 떠돌다 귀향해 통영여중 국어 교사가 된 38세의 기혼자인 청마는 새로 부임한 이영도의 '그 높고 외롭고 정(淨)함'에, 슬프도록 빛나고 청초한 모습에 온통 마음이 사로잡힌다. 청마의 일방적인 혼자 사랑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이룰 수 없는 인연이기에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던 힘들고 안타까운 세월, 20년이라는 격랑의 긴 세월동안 지속된 사랑은 서로의 문학 세계 속에 그대로 스며들어 깊은 울림의 아프고 아름다운 시들로 태어났다. 외길 사랑으로 외롭던 청마의 애타는 마음. 뭍같이 까딱 않는 정운에게 바친 절규 같은 그리움이다. 사랑하는 정향 !  바람은 그칠 생각 없이 나의 밖에서 울고만 있습니다. 나의 방 창문들은 와서 흔들곤 합니다. 어쩌면 어두운 저 나무가, 바람이,  나의 마음 같기도 하고 유리창을 와서 흔드는 이가 정향 ! 당신인가도 싶습니다. 당신의 마음이리다. 주께 애통히 간구하는 당신의 마음이 저렇게 정작 내게까지 와서는 드리는 것일 것입니다. 나의 귀한 정향 ! 당신이 어찌하여 이 세상에 있습니까 ? 나와 같은 세상에 있게 됩니까 ? 울지 않는 하나님의 미련이십니까 ? 정향 ! 고독하게도 입을 여민 정향! 종시 들리지 않습니까 ? 마음으로 마음으로 우시면서  귀로 들으시지 않으려고 눈감고 계십니까? 끝내 만리 길의 세상입니까? 정향 ! 차라리 아버지께서 당신을 사랑하는 이 죄 값으로  사망에의 길로 불러주셨으면 합니다. 아예 당신과는 생각마저도 잡을 길 없는 세상으로 -유치환으로부터 이영도 여사에게- ... 또 한편의 시 - 애절한 유치환의 절규 - 그리움  그리움,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 임은 물같이 까닥 않는데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 - 유치환 - =================================== 백철·이무영 등 文人들의 인간적 면모탄생 100주년 기념행사서 유족들이 직접 회고 한국작가회의ㆍ대산문화재단 주최로 9일 오후 서울 중구 문학의집ㆍ서울에서 열린 '탄생 100주년 문학인 기념 문학의 밤' 행사엔 유족들이 나와 탄생 100주년 문인들의 인간적 면모를 들려주는 자리가 마련됐다. 청마 유치환(1908~1967) 시인의 외손자 김기성(SBS 기자)씨는 "청마와 이영도 시인의 연애담이 워낙 유명하다보니 오해가 많은데, 할아버지 부부는 함께 살면서 큰소리 한 번 낸 적 없을 만큼 금슬이 좋으셨다"고 말했다. 특히 청마의 부인 권재순씨가 남편에게 기울인 정성이 지극했다고 증언했다. "어릴 적 할아버지 댁에 놀러 갔다가 펄펄 끓는 가마솥에 고양이가 있는 걸 보고 식겁했다. 청마가 말년에 관절염으로 고생했는데, 할머니가 고양이가 효험 있다는 얘길 어디서 듣고 요리하셨던 것이다." 이런 아내의 정성에 청마는 "죽으면 열녀문 세워줘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고 한다. 김씨는 청마가 고향 통영에서 교편을 잡았던 40, 50년대에 동향 출신 작곡가 윤이상씨와 맺은 깊은 교분에 대해서도 말했다. 당시 교직에 있던 윤씨는 중증 폐결핵에 살림도 궁핍한 상황이라, 청마가 "큰 딸(김씨의 모친)을 윤 선생에게 줄 것"이라고 하자 부인 권씨가 "다 죽게 생긴 사람한테 왜 딸을 주느냐"며 타박했다고. 김씨는 "한때 통영 지역 학교 교가 중엔 '유치환 작사ㆍ윤이상 작곡'이 많았는데, 아마 윤씨 생계를 도우려는 할아버지의 배려였을 것"이라고 말했다. 평론가이자 국문학자 백철(1908~1985)의 손녀 백지혜씨는 작년 별세한 할머니(최정숙씨)의 유품에서 찾은 할아버지 사진을 여럿 소개하며 고인을 추억했다. 84~85년 조부와 한집에 살았다는 백씨는 "할아버지 하면 2층 서재에서 책 읽고 글 쓰시던 모습이 먼저 떠오른다"며 "안 계실 땐 서재 가득한 책을 꺼내 도미노 놀이를 하곤 했다"고 말했다. 또 신의주 출신인 백철이 유실수가 많던 옛 고향집처럼 집을 꾸미려 마당에 나무를 많이 심었다는 것도 손녀의 회고. 조부처럼 국문학도(서울대 대학원 박사과정 수료)의 길을 걷고 있는 백씨는 평론가인 남편 곁에서 여러 문인들을 만났던 할머니의 회고담도 전했다. "할아버지와 친한 작가가 누구냐고 할머니께 여쭸더니 정비석, 임화를 꼽았다. 할머니는 소설가 김내성이 제일 잘 생겼다고도 하셨다. 이상은 어땠냐고 물었더니 '너무 신경질적이야'라고 대답하셨다." 백씨는 호방한 성품의 백철이 고서를 팔아 임화를 비롯한 친한 문인들의 술값을 대곤 했다는 말도 들었다고 했다. 소설가 이무영(1908~1960)에 관한 회고담은 부인 고일신(93)씨와 함께 이날 행사에 온 딸 미림씨가 전했다. 이씨는 "자상하고 따뜻했지만, 글 쓰시느라 늘 바빴던 아버지를 독차지하려 기회만 되면 아버지를 따라다녔다"며 "중학교 1학년 때 아버지가 백일장 심사 보는 데 따라갔더니 함께 심사 보던 모윤숙 시인이 '저 애는 왜 또 달고 나왔수'라고 핀잔을 주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어 "아버지는 오랜 구상 후에 속필로 작품을 써내려갔다"며 "자기 원고에 한 자라도 손대면 펄쩍 뛰셨지만, 어머니가 몇 자 고쳐 보여주면 '제법이야' 하며 웃으셨다"고 회고했다. 이훈성기자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텔지어의 손수건/…’(‘깃발’中) 한국에서 문학교육을 받은 사람이면 누구나 한두 소절을 가슴에 새기고 있는 시인 청마(靑馬). 원로시인이자 청마문학회 회장인 문덕수(文德守·76·1955년 청마추천으로 등단)씨가 처음으로 ‘청마 유치환 평전’(시문학사 刊)을 펴냈다. 평전 머리말에서 문덕수씨는“청마가 가신 지 어언 37년이 지났다”면서 “생명의 소중함을 지상의 가치로 생각했던 그의 문학관은 매우 인생론적”이라고 밝히고 있다. 버스 사고로 59세에 세상을 뜬 청마에 대해 통영출신의 시인 김춘수는 “청마는 예술가로서의 시인은 아니다. 사상가·경세가로서의 시인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청마는 ‘의지의 시인, 허무의 시인, 생명파의 대가(大家)’ 같은 다양한 호칭으로 불렸고, ‘대인군자’로 추앙하는 후학들이 적지 않았다. 평전의 첫 출발은 청마 출생지로부터 시작한다. 현재 ‘청마의 출생지가 어디냐’를 놓고 통영시와 인근 거제시는 작년 7월 서울고등법원에까지 올라가 손해배상(1억500만원) 공방을 벌이고 있는 상태다. 여기에는 호적부, 청마의 형이었던 유치진의 구술 기록, 문학작품 속에서 기술된 출생지 묘사, 청마가 주례를 서주었던 시인 허만하처럼 후학들의 연구와 추론 등 복잡한 실타래를 풀어 출생지가 통영임을 정확히 밝히고 있다. 청마는 작곡가 윤이상, 시인 김춘수 등과도 광복 직후 통영문화협회를 조직 오랫동안 진한 우정을 나누었다. 김춘수는 ‘통영읍’이란 시에서 ‘청마 유치환/ 행이불언(行而不言)이라/ 밤을 새워 말술을 푸되/ 산군처럼 그는 말이 없고/ 서느렇던 이마,/ …/ 그리고 윤이상,/ 각혈한 그의 핏자국이 한참까지/ 지워지지 않았다/…’라고 읊고 있다. 문덕수는 “대부분 행사는 아이디어 맨인 윤이상이 안(案)을 냈고, 회장인 청마는 묵묵히 따라주기만 했다”고 말했다. 또한 두 사람은 교가의 작사·작곡 콤비로도 유명했다(통영초교·통영충렬초교·통영여중·통영여고·부산고). 청마는 ‘지식인의 만년(萬年) 야당설(野黨說)’이라는 생각을 여러 곳에 남기고 있다. 자유당 때 경주고교 교장직에서 쫓겨난 그에게 4·19 직후 시인 김윤희가 찾아가 “선생님 좋으시겠네요. 민주당이 돌봐 주겠죠”라고 말했더니, “김양, 새 정권과 나와 무슨 상관이지? 지성인은 영원한 야당인 거야”라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청마는 여성들에게 편지를 많이 썼다. 시인 최계락은 5000통 정도로 추정하기도 했다. 그는 부인 권재순과도 오랫동안 연서를 주고받았고, 또 8세 연하의 동료 교사이자 시조시인이었던 이영도(1916∼1976)와 거의 20년 동안 편지를 교환했다. 또 문학지망생 반희정(潘姬靜), 강릉의 박명자(朴明子), 목포의 김정숙(金正淑) 시인과도 편지 연락이 있었다. 이영도와 주고받은 편지는 그 유명한 ‘사랑했으므로 행복하였네라’(1967)는 책으로 나왔고, 반희정과의 편지도 ‘청마와 사색의 그림자들’(1970)이라는 책 속에 들어 있다. 문덕수는 “서한집을 면밀하게 살펴보았지만, 남녀의 개인적·사적 밀담(密談)은 어느 구석에서도 발견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또한 청마는 여느 시인처럼 시만 쓴 것이 아니라 신, 자연, 죽음, 생명 등의 형이상학적 문제에 대한 사색의 영역을 직관적으로 넓혀 나갔다. 이런 청마에 대해 문덕수는 평전 마지막 문장을 통해 , “미당이 명장(名匠)이라면, 이런,-  청마는 거장(巨匠)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표현하고 있다.   내 오십의 부록/정숙자     편지는 내 징검다리 첫 돌이었다   어릴 적엔 동네 할머니들 대필로 편지를 썼고   고향 떠난 뒤로는 아버님께 용돈 부쳐드리며 "제 걱정 은 마세요" 편지를 썼다   매일 밤 내 동생 인자에게 편지를 썼고   두레에게도 편지를 썼다   시인이 되고부터는 책 보내온 문인들에게 편지를 썼고   마음 한구석 다쳤을 때는 구름에게 바람에게 편지를 썼다   돌아가신 어머니 그리울 때는 저승으로 편지를 썼고   조용한 산책로에선 풀잎에게 벌레에게 공기에게도 편지 를 썼다   셀 수 없이 많은 편지를 쓰며 나는 오늘까지 건너왔노라   희망이 꺾일 때마다 하느님께 편지를 썼고   춥고 외로울 때는 언젠가 묻어준 고양이 무덤 앞에서 우 울을 누르며 편지를 썼다   어찌어찌 발표된 몇 줄 시조차도 한 눈금만 들여다보면 모습을 바꾼 편지에 다름 아니다   편지는 내 초라한 삶을 세상으로 이어준 외나무다리, 혹은   맑고 따뜻한 돌다리였다   편지가 있어 내 하루하루는 식지 않았다   한 가닥 화려함 잃지 않았다   편집봉투 만들고, 편지지 접고, 우표를 붙일 때마다   시간과 나는 서로를 사랑하고 용서하고 또 믿었다   그리고 그 조그만 빛이 다음 번 징검돌이 되고는 했다      -「열매보다 강한 잎」, 천년의 시작, 2006년       편지하면 떠오르는 시인이 있습니다. 청마 유치환입니다. 청마는 여성들에게 많은 편지를 썼는데 1967년 교통사고로 홀연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그는 20 년간 한 여인(이영도)에게 사과상자 세 상자를 채울 만큼의 편지를 보냈다고 합니다. 또 문학지망생 반희정, 강릉의 박명자, 목포의 김정숙 시인과도 편지 연락이 있었다고 하는데 생전에 그가 쓴 편지는 5000통 정도로 추정이 된다고 합니다.   유치환의 시를 좋아하던 시기에 청마에 대한 책이 출간되었기에 사본 기억이 나서 찾아보았습니다. 그 때는 이영도에게 보낸 편지글인 줄 알고 있었는데 꺼내보니 반희정 편저 「내죽어 바위가 되리라」 입니다. 1980년 3월301일 초판 발행이고 책값은 2.200원 세로 쓰기로 되어있는데 반희정과의 편지가 ‘청마와 사색의 그림자들’(1970) 이 먼저 출간된 걸로 봐서 이 책은 제목을 바꾸어서 재출간된 모양입니다.   이 책에 보면은 반희정과 유치환이 만나는 계기는 반희정이 유치환에게 문학모임에 초청하는 편지를 보내면서 만남이 시작되는데 수락하는 답장에서 독실한 기독교도인 반희정에게 '반 선생님께서 미리 알아주셔야 될 일은 내가 예수장이 질색으로 싫어하는 것입니다. 그래 혹시 어떤 무례를 저지를지 저어되는 것입니다' 하면서 초청을 수락합니다.   당시 38살인 반희정은 14년이나 위인 청마의 첫 인상이 자기가 좋아하는 타이프가 아니었으며 어딘가 투박해 보이는 듯한 얼굴 모습과 걸걸하면서 여성적인 음성을 지니고 있었다 고 하는데 청마는 첫만남에서 자기가 여기 온 단 한 가지 이유는 반선생을 만나기 위해서 온 거라고 말을 합니다.   반희정을 만나고 돌아오자마자 청마는 편지를 보내기 시작하고 몇 번 편지를 보낸 후에 청하靑霞라는 아호도 지어줍니다. 청마가 이영도를 만난 것이 37세였다고 하니 반희정을 만난 것은 그로부터 15년 후가 됩니다. 청마는 부인 권재순과도 주일학교에서 만나 편지를 보내 사귀고 결혼을 했다고 하는데 그에게 있어 편지는 단순한 대화만이 아닌 듯 합니다.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기에 그 많은 편지를 끊임없이 썼을 것이고 어떤 고독감이나 허무함, 애련의 정서에서 나오는 극한 외로움 때문이 아니었나 싶기도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쉰이 넘어서도 쉬지 않고 계속 이어지는 정열적인 편지쓰기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청마를 두고 평자는 '의지의 시인' 이라고 하는데 청마는 스스로 이렇게 말을 했다고 합니다.   '한가지 말하고 싶은 것은 흔히들 나를 의지의 시인이라고 일컫는데 그것은 아예 틀린 판단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판단은 나의 작품상에 나타난 경향을 보고 말하는 것 같으나 작품상의 그러한 경향은 어디까지나 나의 본질이 의지적인 아닌 때문에 그것을 갈구하는 나머지의 허세에 불과한 것입니다.  사실 나같이 흔들리기 쉽고  꾸겨져 쓰러지기 쉬운 비의지적 나약한 心志의 인간은 드물 것입니다.'   의지의 시인이면서 아울러 비의지의 시인인 청마는 다분히 낭만성으로 편지의 산물인 고품격의 연시 「행복」을 남겼습니다. 시인이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일반인들의 연애편지에 널리 회자되고 있는 「행복」은 '-사랑하는 것은/사랑을 받느니 보다 행복하나니라' 시작이 되는데 반희정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시의 첫구절이 되는 글이 보입니다.   '나의 청하에게. 글 안 준다고 그렇게 짜증하셨는데, 오늘은 사진과 함께 받아보셨습니까? 청하는 세 번이나 글을 보냈는데 한 번밖에 안 보내니 밑진다고 이제는 안 쓰겠다고요, 그러면서도 글 주시니 당신 정말 고마워요. 그런데 진실로 애정에는 밑가는 일이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을 받은 이보다 주는 것이 얼마나 행복하니 말입니다. 나의 따뜻한 사랑 속에서 당신이 봄풀처럼 살게 할 것입니다.' 로 쭈욱 이어집니다.   그리고 대화속에서 청마는 '나는 노둔한 사람이요. 시를 쓰지만 요즘의 난해한 시들에 대해 실상 나 자신도 알 수가 없거든.....' 이라는 구절도 보입니다. 정확한 연대는 안 나와 있지만 50년대 후반기쯤인 걸로 봐서 현대 도시문명의 주지적, 감각적 기법으로 처리하는 후반기 모더니즘의 시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이제 편지를 우체국을 통해 보내는 사람은 거의 없어졌습니다만 이전 시대에는 펜팔이라는 것이 유행이었습니다. 연서를 보내놓고 답장이 없으면 받아보았는지 몹시 궁금하여 우체부가 지나는 시간을 기다리기도 했는데 지금은 메일이라는 편리한 우체통이 생겨서 제대로 편지가 갔는지 뿐만 아니라 몇 시에 읽어보았는지 알 수도 있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이 편리한 시대에 청마가 살아간다면 오천 통이 아니라 만 통을 넘게 쓰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도 해 봅니다.   임보 시인은 부제목을 로 붙이고 시를 지망하는 한 젊은이에게 보내는 서간체 형식의 '시창작 강좌'를 쓴 글도 있습니다만 편지를 쓴다는 것은 시를 쓰는 것이고 시를 쓴다는 것은 편지를 쓰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시의 구절처럼 '초라한 삶을 세상으로 이어준 외나무다리. 징검다리 같은 맑고 따뜻한 돌다리, 마음 한구석 다쳤을 때는 구름에게 바람에게 편지를' 쓰듯이 편지를 써보면 어떨까요. 부모 형제간에 보내는 안부도 친구간의 소식도 연인끼리의 연통도 편지보다 문자나 휴대폰이 먼저 대신 하는 요즘 급한 일이 아니라면 사색을 겸한 긴 편지를 써보는 것은 어떠실지. 만산홍엽 만추의 이 가을에...    2004년 5월 17일 오후 3시부터 경상대학교 남명학관에서 "청마의 시론"이라는 주제로 강연이 있었다. 홍익대학교 명예교수이신 문덕수(文德守, 1928.12.8~) 교수가 강의하였다.  올해가 77세라고 하셨다. 연로하심에도 최근 "청마 유치환 평전"이라는 책을 내셨다고 한다. 유치환(柳致環, 靑馬, 음력1908.7.14~양력1967.2.13)은 인생파, 생명파 시인으로 알려졌는데,  순수시를 주장했던 김춘수(金春洙, 1922.11.25~2004.11.29)와 대비된다.  극작가 유치진의 동생이다. 유치환은 한국전쟁에서 종군했던 유일한 문인이라고 한다. 그때 남긴 시들을 1951년 9월 "보병과 더불어"로 출간했다. 청마는 이승만의 3선개헌에 반대하였고 최초로 이승만 정권을 "이승만 정권"이라고  불러 주었다고 한다. 김춘수는 "꽃"이라는 시에서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라고 했는데 이승만 정권은 유치환에게 무엇으로 다가갔을까? 꽃인가? 여러가지 꽃이 있으니 그럴지도 모르겠다. (이름을 불러준다는 것은 그것에 대한 정보를 가지게 되었고 분류가 되었다는 것이고 그것의 가치 또는 의미를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물을 볼 때, 그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보는 것과 아무런 정보도 없이 보는 것은 다르다. 사전 지식이 없다면 보아도 볼 수가 없다. 이것은 불교적 깨달음과도 연결되는 것 같다. 깨달음을 얻기 전이나 후의 객관적인  세상은 변함이 없지만 그것을 보는 사람의 주관적인 세계는 다르게 보일 수도 있다.  벽암록(碧嚴錄)에서 "한 송이 꽃이 피니 세계가 일어난다(一花開 世界起)"라는 것도 꽃이  피는 것은 일상적인 사건이지만 그것을 인식하는 순간 지금까지의 세계와는 다른 새로운  세계를 보게 되는 것을 나타낸 것일 게다. 유홍준 교수의 문화유산답사기에도 "인간은 아는 만큼  느낄 뿐이며, 느낀 만큼 보인다"라고 했고 또 정조때 학자인 유한준(兪漢雋)의 말을 인용해서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 때에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라고  했는데 정보의 중요성을 잘 나타낸 말이다.) 청마는 1955년부터 경주고에서 교장으로 계셨는데 그때 교훈이  "큰 나의 밝힘"이었다고 한다. 이에 대한 설명은 이렇다.     "나란 나의 힘으로 생겨난 내가 아니다"     "나란 나만으로서 있을 수 있는 내가 아니다"     "나란 나만에 속하는 내가 아니다" 설명이 전부 "나는 ~가 아니다"라는 식의 부정문이다.  나(我)라는 존재는 수 많은 인연의 결합에 의해서 생겨났고(생성, genesis, 존재 원인),  다른 존재와 연결되어 있으며(존재양식, being, 현재 상태), 여러가지 맡겨진 역할을 하면서 살아간다(행함, role, 임무)는 말인 것 같다. 모든 사물은 홀로 있지 않고 다른 것과 관계를 맺으며 있게 된다. 그래서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기면 저것이 생긴다. 또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고 이것이 사라지면 저것도 사라진다. (此有故彼有 此生故彼生 此無故彼無 此滅故彼滅) 인간이 독립적으로 있다가 차차 사물과 관계를 맺어가는 것이 아니라  사물과 관계속에 태어나서 관계속에 있다는 것을 차차 깨달아 가는 과정이다. 사회화된다는 것도 관계를 알아간다는 것일 게다. 시조시인 이영도(李永道, 정운 丁芸, 1916.10.22~1976.3.5)와 20년간 주고 받은  5000여통의 편지는 남여상열지사가 아니라 시를 매개로 한 순수한 사랑이었다고  문덕수 교수는 주장한다.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우스개소리도  있는데 청마가 남긴 글을 보면 독자마다 판단이 다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불륜이던지 순수한 사랑이던지 청마의 마음은 상당히 애뜻하였던 듯 하다. 청마는 해방후 통영여중학교에서 국어교사로 근무했었는데(1945.10~1948.3) 여류시조시인 정운은 가사 교사로 같이 근무했었다고 한다.  1946년부터는 문학 동인 "죽순(竹筍)"에서도 같이 활동한다. 처음 만났을 때 청마는 37세였었고 정운은 29세로 21세에 남편을 여의고 딸 하나를  키우며 살고 있었다고 한다. 당시 청마는 부인 권재순 여사와 살고 있었는데도 다른 여자를 사랑하고 그에게 편지를 쓰고 시를 썼다. 내용과 형식으로 나눠보면, 내용은 순수했지만 형식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반희정이라는 여성과도 이런 순수한 편지를 주고 받았다고 한다. 재미있는 것은 권재순부인과 만나게 된 것도 편지였었다는 것이다. 어려서 주일학교에서 만난 후배 여학생에게 편지를 보내 사귀게 되었고 1928년(당시20세)에 결혼한다. 청마는 신식으로 결혼식을 올렸는데 그때 꽃을 들고 있던 소년이  나중에 "꽃"이라는 시로 유명한 김춘수 시인(당시6세)이라고 한다. 청마가 시를 쓰기 시작한 것도 그 후배 여학생에게 편지를 보내던 시기가 아닐까 한다. 이들은 슬하에 인전(仁全, 1929?~), 춘비(春妃, 1932?~), 자연(紫燕, 1935?~)를 두었다. 단테는 젬마와 결혼하였지만 어릴 때 알게 된 베아트리체는 영원한 연인으로  마음속에 간직하고 그녀에 대한 사랑의 시를 쓴다. 19세기 프랑스의 시인이자 비평가인 생뵈브는 유명한 소설가인 위고의 아내  아델 푸세와 연인관계를 유지했는데, 정신적 사랑이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위고는 심한 마음 고생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질문 시간에 인생파와 순수파의 시론이 서로 부족한 것이 있지 않냐는 질문에 문덕수 교수는 개인적으로 시의 내용보다 형식을 중시한다고 하셨다. 그렇지만, 시쓰기에서 경지에 오른다면 내용이니 형식이니 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을 거라고 하신다. 그러면서 서정주를 예로 드셨다.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보다"라고 할 때, 그것은 서정주의 소리가 아니라 소쩍새의 소리일거라고 하신다. 서정주의 "문둥이"라는 시도 시인이 문둥이의 소리를 내는 거라 하신다. 위대한 시인은 개인을 뛰어넘어 마음대로 다른 존재로 변하여 그의 마음을 느끼고 그의 소리를 그보다 더 잘 낼 수 있는 것 같다. ... =============================================================   “국회의원은 임기 4년이지만                     시인은 임기가 없어요” [우리동네 이사람] 영원한 소녀 반영교(반희정 조카) 시인         간밤엔  별무리 속에서  너를 보았고  오늘은  초췌한 풀꽃더미 속에서  또 너를 만났다.  나는 세월을 잊었고  그 잊음 속에서  記憶祭를 올렸는데  이 가을  스산한 바람에 묻어오는  네 목소리  목소리          이 시(詩)는 영원한 소녀 시인 반영교 (74) 시인의 첫 시집에 실린 記憶祭(기억제)라는 제목의 시다. 이 시를 읽으며 ‘어쩌면 시인은 첫사랑을 기억하며 지은 시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다.  시인을 아는 사람들은 올해 74세의 시인에게 왜 ‘소녀시인’이란 애칭이 붙어다니는지 안다. 자그마한 키에 희고 결 고운 피부를 가진 시인은 아직도 필자가 첫 사랑 운운하자 소녀처럼 볼을 붉힌다.  반 시인은 풍기가 고향으로 1991년 문학세계에 ‘귀향’ 외 4편의 시로 신인상을 받으면서 문단에 등단했다. 그리고 1995년 첫 시집 ‘하늘과 강’을 냈다.  “반영교 시인은 우리지역 여류시인 1호예요. 등단도 일찍 했고 내가 영주문협지부장 할 때 1995년이지 영주문협 주최로 풍기농협 2층에서 출판기념회를 했어요. 감수성도 풍부하고 할매지만 늘 소녀 같아, 소녀지 뭐”영주문협 박근칠 전 지부장의 말이다.  반 시인은 2007년 두 번째 시집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를 냈다. 시인은 시집에 이런 글을 실었다. “첫 시집을 낸지 10년 만에 두 번째 시집을 내놓자니 부끄럽다는 말밖에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나이가 되도록 시를 사랑할 수 있는 정열과 펜을 잡을 수 있는 건강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립니다.”  반 시인은 두 번째 시집의 시 중에서 ‘꿈’이 마음에 들어 다포(茶布)로 제작했다며 필자에게 한 장 선물한다. 반 시인은 증조부 대부터 ‘반부자’라는 이름으로 이 지방에서 회자되던 부유한 집안의 후예다. 그리고 조부 대부터 일찍이 기독교에 눈을 떠 교회를 짓고, 교회에 봉사하는 장로만도 십 여명을 배출한 기독교 집안 출신이다. 시인의 동생 중 한 분은 타 지역에서 교회 목사로 있고 시인은 풍기제일교회 권사이기도 하다.  “결혼 전 오계 초등학교와 단산 초등학교에서 교사생활을 했어요. 이동식 선생님이 오계초등학교 교감으로 계실 때 날 불러줬죠. 사범학교를 나온 것은 아니지만 그게 인연이 돼 결혼 전 5년간 교편을 잡았어요. 이동식 선생님과는 인연이 깊어요. 동생 장인이 되었거든요. 또 박근칠 선생이 단산 병산학교 교장으로 갔을 때 내가 쓴 일지가 있더라고 말씀하시더군요.”라는 반 시인에게 “선생님, 김남조 시인 닮았다는 얘기 듣지 않으세요?”하니 반색을 하며 “그래요. 권석창 시인도 그런 말을 하던데” 하며 얼굴을 붉힌다.  이동식 선생님과 박근칠 선생님은 아동문학가로 이동식 선생의 동시 ‘개나리 노란 배’, 박근칠 선생의 ‘가랑잎 편지’, ‘나 혼자’가 교과서에 실린 우리지역 대표 아동문학가로 반 시인과는 영주문인협회 회원으로 함께 활동하고 있다.  반 시인은 23세에 사촌 형부의 소개로 만난 박영기씨와 현재 반 시인이 다니는 풍기 제일교회에서 결혼식을 했다.  “5년 전에 먼저 간 남편은 나보다 5살 위예요. 당시 영주군청에 다녔었는데 성품이 곧고 강직한 양반이라 정권이 바뀌면서 공직생활을 그만 두고 나오는 바람에 내가 숱한 고생 했어요. 없는 살림에 4남매 키우느라 책 외판에 보험, 화장품 안 해본 일이 없어요. 보험 하니까. 생각나는데 한 번은 시누이가 부자 집을 소개시켜줬어요. 그 집 앞에 서니 입이 떡 벌어지는 거야. 집이 너무 크고 좋아서죠. 그런 날 보고 우리 시누가 이런 말을 했어요. ‘언니, 기죽을 것 없어. 이 집 주인은 퓌쉬킨이 뉘 집 개 이름인 줄 아는 사람이니까.’ 하던 말이 생각나네요.” 라며 웃으며 이야기한다.  반 시인은 “초등학교(풍기초등) 4학년 때 교내작문대회에서 특상을 받은 나를 보고 ‘너는 이 다음에 시인이 되거라’하시던 담임선생님의 말씀이 오늘의 내가 있지 않았나 싶네요.”라며 초등하교 6학년 때 받은 누렇게 퇴색된 상장과 졸업장을 보여준다.  ‘작문 1등 6학년 반영교. 단기 4283년 풍기공립국민학교장’이라고 한자 세로글로 쓰여 있다. 그리고 지난해 돌아가셨다는 반 시인의 어머니께서 쓰신 일기 같은 가정사 묶음을 보여주는데 그 문체가 예사롭지 않다. 반 시인의 문학적 소양은 어머니께 물려받은 게 분명해 보인다.  “권석창 시인에게 어머니 글을 보여줬더니 ‘문체가 한중록이나 조침문에 버금간다.’라고 칭찬해 줬어요.”라는 반 시인은 지난달 각별히 지낸 고모(반희정. 작고)에게 보낸 청마 유치환의 편지 120편을 거제에서 열린 청마문학제에 참석, 동랑 청마 사업회에 전달했다.  “청마는 고모에게 청하(靑霞)라는 아호를 지어주었어요. 그리고 고모에게 쓴 편지 중에는 ‘사랑을 받은 이보다 주는 것이 얼마나 행복하니 말입니다. 나의 따뜻한 사랑 속에서 당신이 봄풀처럼 살게 할 것입니다.’ 라고 쓴 것도 있어요.  청마의 유명한 연시 ‘행복’은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 보다 행복하나니라’로 시작이 되는데 고모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시의 첫 구절이 되는 글이 보입니다.”라고 말한다.  “지금이 제일 행복합니다. 나이가 들어서인지 그전 같이 많은 강의 요청은 없지만 심심치 않게 강의도 가고 애들 4남매 장성해서 사회인으로 저마다의 역할을 잘 하고 있고 아이들(손녀, 손자) 잘 자라고요. 자고나면 살아있다는 사실에 하나님께 감사드리죠. 지금이 얼마나 행복한지 몰라요. 시인은 임기도 없잖아요. 얼마나 좋아요. 국회의원도 4년 임기가 끝나는데 시인은 늘 시를 읽고 시를 쓸 수 있잖아요.” 책으로 가득한 시인의 집을 나서는데 청마의 시, ‘행복’이 머릿속에 맴돈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 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 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안경애 시민기자 =======================   정운(이영도)는 재색을 고루 갖춘 규수로 출가하여 딸 하나를 낳고 홀로 되어 해방되던 해 가을 통영여중 가사 교사로 부임했다.   해방이 되자 고향에 돌아와 통영여중 국어교사가 된 청마의 첫눈에 정운은 깊은 물그림자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일제하의 방황과 고독으로 지쳐 돌아온 남보다 피가 뜨거운 서른 여덟살의 청마는 스물아홉의 청상 정운을 만나면서 걷잡을 수 없는 사랑의 불길이 치솟았다.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임은 뭍같이 까딱않는데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날 어쩌란 말이냐"   통영 앞바다에서 바위를 때리고 있는 청마의 시 "그리움"은 "뭍같이 까딱않는" 정운에게 바친 사랑의 절규였다.   유교적 가풍의 전통적 규범을 깨뜨릴 수 없는 정운이기에 마음의 빗장을 굳게 걸고 청마의 사랑이 들어설 틈을 주지 않았다.   청마는 하루가 멀다하고 편지를 쓰고 시를 썼다. 날마다 배달되는 편지와 청마의 사랑 시편들에 마침내 빙산처럼 까딱않던 정운의 마음이 녹기 시작했다.   청마가 정운에게 보낸 편지들은 모두 그대로 시였다.   "내가 언제 그대를 사랑한다던? 그러나 얼굴을 부벼들고만 싶은 알뜰함이 아아 병인양 오슬오슬드는지고".   "덧없는 목숨이여 소망일랑 아예 갖지 않으매 요지경같이 요지경같이 높게 낮게 불타는 나의 노래여, 뉘우침이여".   "나의 구원인 정향! 절망인 정향! 나의 영혼의 전부가 당신에게만 있는 나의 정향! 오늘 이 날이 나의 낙명(落命)의 날이 된달지라도 아깝지 않을 정향 "   - 52년 6월2일 당신의 마(馬)   끝이 보이지 않던 유치환의 사랑은 갑작스런 죽음으로 끝이 났다. 1967년 2월 13일 저녁, 부산에서 교통사고로 붓을 영영 놓게 된 것이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 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이렇게 고운 보배를 나는 가지고 사는 것 이다 마지막 내가 죽는 날은 이 보배를 밝혀 남기리라 "   -유치환   통영여자중학교 교사로 함께 근무하면서 알게 된 이영도(일찍이 결혼했으나 21세의 젊은 나이에 남편과 사별하고 당시 딸 하나를 기르고 있었다)에게 청마는 1947년부터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편지를 보냈다.   그러기를 3년, 마침내 이영도의 마음도 움직여 이들의 플라토닉한 사랑은 시작됐으나 청마가 기혼자여서 이들의 만남은 거북하고 안타깝기만 했다.   청마는 1967년 2월 교통사고로 사망할 때까지 20년동안 편지를 계속 보냈고 이영도는 그 편지를 꼬박꼬박 보관해 두었다.   그러나 6·25전쟁 이전 것은 전쟁 때 불타 버리고 청마가 사망했을 때 남은 편지는 5,000여 통이었다.   이 이들의 "아프고도 애틋한 관계"를
862    <<왜 사냐건 / 웃지요>> - 月坡와 李白 댓글:  조회:5203  추천:0  2016-01-06
김상용 /     남南으로 창窓을 내겠소                     / 김상용     남으로 창을 내겠소  밭이 한참 갈이  괭이로 파고  호미론 풀을 매지요.  구름이 꼬인다 갈 리 있소.  새 노래는 공으로 들으랴오.  강냉이가 익걸랑  함께 와 자셔도 좋소.  왜 사냐건  웃지요     ▣ 작가소개 및 작품 감상           시인 김상용(金尙鎔.1902∼1951.6.20)       김상용 시인의 호는 월파(月坡)요, 경기도 연천(漣川)출생이다. 경성제일고보(現 京畿高)에 입학하였다가 2년 후, 보성고보(普成高普)로 전학하여 졸업하고 나서 일본 릿쿄(立敎)대학에서 영어영문학을 전공하였다. 1928년부터 해방되던 해까지 이화여전(梨花女專)교수로 봉직하였으며 해방 후 2년간(1948-49) 미국 보스턴 대학교에서 영문학을 공부하고 나서 시작(詩作)에 몰두하였으며 시집 의 작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1930년 을 비롯한 몇 편의 시를 동아일보에 발표하고 문학 활동을 시작했다. 해방 후, 영자신문 사의 주필(主筆)을 지내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부산 피난지에서 식중독(食中毒)으로 1951년에 생을 마감하였다. 김상용은 동양적(東洋的) 관조(觀照)와 자연귀의(自然歸依)의 목가적(牧歌的)인 서정세계(抒情世界)를 담담(淡淡)하게 작품에 그려낸 것이 특징이다.   이 시 '남으로 창을 내겠소'는 소박한 전원생활을 제재(題材)로 노래한 작품으로 자연 친화적(親和的)인 삶의 자세가 드러난, 우리나라 전원시(田園詩)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자연의 품으로 돌아가 흙과 더불어 살아가고 싶은 마음이 잘 드러나 있다. '남(南)쪽'이 주는 밝고 건강한 이미지와 함께 시적 화자의 삶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전원에서 안분지족(安分知足)하는 삶의 태도, 훈훈(薰薰)한 인정(人情), 달관(達觀)의 모습을 여실(如實)히 보여 주고 있다.     이 작품은 전원으로 돌아가 자연과 더불어 소박하게 살아가려는 화자의 삶의 자세가 잘 형상화된 작품이다. 자연과 인간이 하나가 되어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고 싶은 마음은 복잡한 도시 생활에 쫓기며 살아가는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일종의 모성회귀(母性回歸)의 본능(本能)과 같은 것이다.     그의 초기시(初期詩)에서 후기시(後期詩)로 갈수록 그의 시세계가 어떠한 변화를 겪고 어떤 양상(樣相)을 보였는가에 대한 비교문학적(比較文學的) 고찰(考察)은 우리에게 중요한 문제를 던져준다. 그것은 바로 전통(傳統)과 외래(外來)와의 만남이다. 월파의 시에서 그 형식(形式)과 내용(內容)에 대한 양면성(兩面性)의 문제는 주요한 시적 특색이 되고 있다.     그 초기시의 정형적(定型的) 율조(律調)에서 후기시의 주지적(主知的) 경향(傾向)에 이르기까지 정형률(定型律)의 형성요인(形成要因)과 시집『망향』에서 비롯되는 전원으로 향한 목가적(牧歌的) 정서(情緖)와 시적(詩的) 고뇌(苦惱)가 바로 그것이다.     라는 제목에서 '남(南)쪽'은 자연(自然)을 지향(志向)하는 방향(方向)이다. 여기에서 남향(南向)의 의미는 집안을 밝고 환하게 하겠다는 단순한 채광(採光)의 의미를 넘어서 드넓은 자연을 바라보며 살고 싶다는 뜻으로서 건강하고 낙천적인 삶을 추구하고자 하는 시인의 소망이기도 하다.   10행의 시가 3연으로 구성된 이 시는 시인의 욕심 없는 세계가 인생론적(人生論的)으로 잘 드러나고 있다. 고시조(古時調)에서 볼 수 있는 동양적인 은둔사상(隱遁思想)도 배어 있으며, 민요조(民謠調)의 소박(素朴)하고 친근(親近)한 가락에다 전원(田園)으로 돌아가서 모든 영화(榮華)와 야심(野心)을 버린 삶을 영위(營爲)하려는 태도를 접할 수 있다.     인 "한참갈이"는 무욕(無慾)과 안분지족(安分知足)의 심경(心境)을 나타내고 있으며 에서 '구름'은 '세속의 유혹'을 암시한다. 세속적(世俗的)인 부귀(富貴)와 명예(名譽)가 자신을 유혹(誘惑)한다 해도 단연(斷然)히 거부하고 새소리나 들으며 자연 속에 묻혀 살겠다는 뜻이 잘 드러나 있는 것이다.     에서 시인은 낙천적으로 자연을 즐기는 모습을 볼 수 있으며 이웃과 함께 떡을 떼고 싶어 하는 시인의 넉넉한 마음씨가 잘 드러나고 있다. 가 의미하는 바는 몇 가지로 해석이 가능할 것이다. '굳이 답할 필요가 없다'는 뜻일 수도 있고 '말로는 설명할 수는 없다'는 뜻일 수도 있으며 '그냥 스스로 만족하며 산다'는 뜻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 대목에서 시인은 자신의 전원생활에서 얻은 성찰(省察)과 달관(達觀)을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여기에서 의 표현은 중국문학사상(中國文學史上) 최고봉(最高峰)으로 일컬어지는 이백의 명시(名詩) 에 나오는 표현을 김상용이 빌려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백의 시 의 원문을 여기에 옮겨본다.     산중문답(山中問答) -이백(李白: 701-762)       問余何事棲碧山 나에게 어찌하여 푸른 산에 사는가 하고 물은즉 笑而不答心自閑웃고 대답하지 않으나 마음이 스스로 한가롭다     전체적으로 김상용의 시 "남으로 창을 내겠소"는 땅을 일구고 자연을 벗하며 인정미(人情味) 넘치는 삶의 여유(餘裕)와 관조(觀照)가 회화조(繪畵調)의 친근한 어조(語調)에 용해(溶解)되어 시적 분위기를 형성하고 있다. 특히, 삶의 의미를 묻는 질문에 '잔잔한 웃음'으로 답하는 모습은 삶에 대한 깊은 성찰(省察)에서 우러나오는 초월(超越)과 달관(達觀)의 경지를 함축적(含蓄的)으로 보여 주는 시적 표현의 백미(白眉)라 할 수 있다.   ======================================================                                    김상용   가을   달이 지고 귀또리 울음에 내 청춘(靑春)에 가을이 왔다.   망향, 문장사, 1939                                                김상용   괭이   넙적 무투룩한 쇳조각, 너 괭이야 괴로움을 네 희열(喜悅)로 꽃밭을 갈고, 물러와 너는 담 뒤에 숨었다.   이제 영화(榮華)의 시절(時節)이 이르러 봉오리마다 태양(太陽)이 빛나는 아침, 한 마디의 네 찬사(讚辭) 없어도, 외로운 행복(幸福)에 너는 호올로 눈물 지운다.   망향, 문장사, 1939                                            김상용   굴뚝 노래   맑은 하늘은 새 님이 오신 길! 사랑 같이 아침볕 밀물 짓고 에트나의 오만(傲慢)한 포­즈가 미웁도록 아름져 오르는 흑연(黑煙) 현대인(現代人)의 뜨거운 의욕(意欲)이로다.   자지라진 로맨스의 애무(愛撫)를 아직도 나래 밑에 그리워하는 자(者)여! 창백(蒼白)한 꿈의 신부(新婦)는 골방으로 보낼 때가 아니냐?   어깨를 뻗대고 노호(怒號)하는 기중기(起重機)의 팔대가 또 한 켜 지층(地層)을 물어 뜯었나니…… 히말라야의 추로(墜路)를 가로막은 암벽(岩壁)의 심장(心臟)을 화살한 장철(長鐵) 그 우에 `메'가 나려 승리(勝利)의 작열(灼熱)이 별보다 찬란하다.   동무야 네 위대(偉大)한 손가락이 하마 깡깡이의 낡은 줄이나 골라 쓰랴? 천공기(穿孔器)의 한창 야성적(野性的)인 풍악(風樂)을 우리 철강(鐵鋼) 우에 벌려 보자 오 우뢰(雨雷) 물결의 포효(咆哮) 지심(地心)이 끊고 창조(創造)의 환희(歡喜)! 마침내 넘치노니 너는 이 씸포니­의 다른 한 멜로디­로 흥분(興奮)된 호박(琥珀)빛 세포(細胞) 세포(細胞)의 화려(華麗)한 향연(饗宴)을 열지 않으려느냐?   망향, 문장사, 1939                                                김상용   기도(祈禱)   님의 품 그리워, 뻗으셨던 경건(敬虔)의 손길 거두어 가슴에 얹으심은 거룩히 잠그신 눈이 `모습'을 보신 때문입니다.   망향, 문장사, 1939                                                  김상용   나   나를 반겨함인가 하야 꽃송이에 입 맞추면 전율(戰慄)할 만치 그 촉감(觸感)은 싸늘해―   품에 있는 그대도 이해(理解) 저편에 있기로 `나'를 찾을까?   그러나 기억(記憶)과 망각(忘却)의 거리 명멸(明滅)하는 수(數)없는 `나'의 어느 `나'가 `나'뇨.   망향, 문장사, 1939                                   김상용   남(南)으로 창(窓)을 내겠소   남(南)으로 창(窓)을 내겠소 밭이 한참갈이 괭이로 파고 호미론 풀을 매지요   구름이 꼬인다 갈 리 있소 새 노래는 공으로 들으랴오 강냉이가 익걸랑 함께 와 자셔도 좋소   왜 사냐건 웃지요.   망향, 문장사, 1939                                    김상용   노래 잃은 뻐꾹새   나는 노래 잃은 뻐꾹새 봄이 어른거리건 사립을 닫치리라 냉혹(冷酷)한 무감(無感)을 굳이 기원(祈願)한 마음이 아니냐.   장미빛 구름은 내 무덤 쌀 붉은 깊이어니 이러해 나는 소라[靑螺]같이 서러워라.   `때'는 짖궂어 꿈 심겼던 터전을 황폐(黃廢)의 그늘로 덮고……   물 긷는 처녀(處女) 돌아간 황혼(黃昏)의 우물가에 쓸쓸히 빈 동이는 놓였다.   망향, 문장사, 1939                                      김상용   눈오는 아침   눈오는 아침은 가장 성(聖)스러운 기도(祈禱)의 때다.   순결(純潔)의 언덕 우 수묵(水墨)빛 가지가지의 이루어진 솜씨가 아름다워라.   연기는 새로 탄생(誕生)된 아기의 호흡(呼吸) 닭이 울어 영원(永遠)의 보금자리가 한층 더 따스하다.   망향, 문장사, 1939                                      김상용   마음의 조각 1   허공(虛空)이 스러질 나는 한 점의 무(無)로―   풀 밑 벌레 소리에, 생(生)과 사랑을 느끼기도 하나   물거품 하나 비웃을 힘이 없다.   오직 회의(懷疑)의 잔을 기울이며 야윈 지축(地軸)을 서러워하노라.   망향, 문장사, 1939                                        김상용   마음의 조각 2   임금 껍질만한 열정(熱情)이나 있느냐? `죽음'의 거리여!   썩은 진흙골에서 그래도 샘 찾는 몸이 될까   망향, 문장사, 1939                                       김상용   마음의 조각 3   고독을 밤새도록 잔질하고 난 밤, 새 아침이 눈물 속에 밝았다.   망향, 문장사, 1939                                        김상용   마음의 조각 4   달빛은 처녀의 규방으로 들거라. 내 넋은 암흑과 짝진 지도 오래거니―   망향, 문장사, 1939                                        김상용   마음의 조각 5   향수(鄕愁)조차 잊은 너를 또야 부르랴? 오늘부턴 혼자 가련다.   망향, 문장사, 1939                                      김상용   마음의 조각 6   오고 가고 나그네 일이오   그대완 잠시 동행이 되고.   망향, 문장사, 1939                                      김상용   마음의 조각 7   사랑은 완전(完全)을 기원(祈願)하는 맘으로 결함(缺陷)을 연민(憐憫)하는 향기(香氣)입니다.   망향, 문장사, 1939                                      김상용   마음의 조각 8   생(生)의 `길이'와 폭(幅)과 `무게' 녹아, 한낱 구슬이 된다면 붉은 `도가니'에 던지리다.   심장(心臟)의 피로 이루어진 한 구(句)의 시(詩)가 있나니―   `물'과 `하늘'과 `님'이 버리면 외로운 다람쥐처럼 이 보금자리에 쉬리로다.   망향, 문장사, 1939                                         김상용   물고기 하나   웅뎅이에 헤엄치는 물고기 하나 그는 호젓한 내 심사(心思)에 길렸다.   돌새, 너겁 밑을 갸웃거린들 지난밤 저 버린 달빛이 허무(虛無)로이 여직 비칠 리야 있겠니?   지금 너는 또 다른 웅뎅이로 길을 떠나노니 나그네 될 운명(運命)이 영원(永遠) 끝날 수 없는 까닭이냐   망향, 문장사, 1939                                             김상용   반딧불   너는 정밀(靜謐)의 등촉(燈燭) 신부(新婦) 없는 동방(洞房)에 잠그리라   부러워하는 이도 없을 너를 상징(象徵)해 왜 내 맘을 빚었던지   헛고대의 밤이 가면 설운 새 아침 가만히 네 불꽃은 꺼진다.   망향, 문장사, 1939                                      김상용   새벽 별을 잊고   새벽 별을 잊고 산국(山菊)의 `맑음'이 불러도 겨를 없이 길만을 가노라.   길! 아―먼 진흙 길   머리를 드니 가을 석양(夕陽)에 하늘은 저러히 멀다.   높은 가지의 하나 남은 잎새!   오래만에 본 그리운 본향(本鄕)아.   망향, 문장사, 1939                                            김상용   서글픈 꿈   뒤로 산(山) 숲이 둘리고 돌새에 샘 솟아 적은 내 되오.   들도 쉬고 잿빛 메뿌리의 꿈이 그대로 깊소.   폭포(瀑布)는 다음 골[谷]에 두어 안개냥 `정적(靜寂)'이 잠기고…… 나와 다람쥐 인(印)친 산길을 넝쿨이 아셨으니 나귀 끈 장꾼이 찾을 리 없소.   `적막(寂寞)' 함께 끝내 낡은 거문고의 줄이나 고르랴오.   긴 세월(歲月)에게 추억(追憶)마저 빼앗기면   풀잎 우는 아침 혼자 가겠소.   망향, 문장사, 1939                                             김상용   어미소   산성(山城)을 넘어 새벽 들이 온 길에 자욱자욱 새끼가 그리워 슬픈 또 하루의 네 날이 내[煙] 끼인 거리에 그므는도다.   바람 한숨 짓는 어느 뒷골목 네 수고는 서 푼에 팔리나니 눈물도 잊은 네 침묵(沈黙)의 인고(忍苦) 앞에 교만(驕慢)한 마음의 머리를 숙인다.   푸른 초원(草原)에 방만(放漫)하던 네 조상(祖上) 맘 놓고 마른 목 축이든 시절(時節)엔 굴레 없는 씩씩한 얼굴이 태초청류(太初淸流)에 비쵠 일도 있었거니……   망향, 문장사, 1939                                                김상용   추억(追憶)   걷는 수음(樹陰) 밖에 달빛이 흐르고,   물에 씻긴 수정(水晶)같이 내 애상(哀傷)이 호젓하다.   아―한 조각 구름처럼 무심(無心)하던들 그 저녁의 도성(濤聲)이 그리워 이 한밤을 걸어 새기야 했으랴?   망향, 문장사, 1939                                              김상용   태풍(颱風)   `죽음'의 밤을 어질르고 문(門)을 두드려 너는 나를 깨웠다.   어지러운 병마(兵馬)의 구치(驅馳) 창검(槍劍)의 맞부딪침, 폭발(爆發), 돌격(突擊)! 아―저 포효(咆哮)와 섬광(閃光)!   교란(攪亂)과 혼돈(混沌)의 주재(主宰)여 꺾이고 부서지고, 날리고 몰려와 안일(安逸)을 향락(享樂)하는 질서(秩序)는 깨진다.   새싹 자라날 터를 앗어 보수(保守)와 조애(阻碍)의 추명(醜名) 자취(自取)하든 어느 뫼의 썩은 등걸을 꺾고 온 길이냐.   풀뿌리, 나무잎, 뭇 오예(汚穢)로 덮인 어느 항만(港灣)을 비질하여 질식(窒息)에 숨지려든 물결을 일깨우고 온 길이냐.   어느 진흙 쌓인 구렁에 소낙비 쏟아 부어 중압(重壓)에 울든 단 샘을 웃겨 주고 온 길이냐.   파괴(破壞)의 폭군(暴君)! 그러나 세척(洗滌)과 갱신(更新)의 역군(役軍)아, 세차게 팔을 둘러 허접쓰레기의 퇴적(堆積)을 쓸어 가라.   상인(霜刃)으로 심장(心臟)을 헤쳐 사특, 오만(傲慢), 미온(微溫), 순준(巡逡) 에어 버리면 순진(純眞)과 결백(潔白)에 빛나는 넋이 구슬처럼 새 아침에 빛나기도 하려니……   망향, 문장사, 1939                                                 김상용   포구(浦口)   슬픔이 영원(永遠)해 사주(砂洲)에 물결은 깨어지고 묘막(杳漠)한 하늘 아래 고(告)할 곳 없는 여정(旅情)이 고달퍼라.   눈을 감으니 시각(視覺)이 끊이는 곳에 추억(追憶)이 더욱 가엾고……   깜박이는 두셋 등잔 아래엔 무슨 단란(團欒)의 실마리가 풀리는지……   별이 없어 더 서러운 포구(浦口)의 밤이 샌다.   망향, 문장사, 1939                                           김상용   한잔 물   목마름 채우려든 한잔 물을 땅 우에 엎질렀다.   너른 바다 수많은 파두(波頭)를 버리고 하필(何必) 내 잔에 담겼든 물.   어느 절벽 밑 깨어진 굽일런지― 어느 산모루 어렸던 구름의 조각인지― 어느 나무잎 우에 또 어느 꽃송이 우에 나려졌던 구슬인지― 이름 모를 골을 나리고 적고 큰 돌 사이를 지난 나머지 내 그릇을 거쳐 물은 제 길을 갔거니와……   허젓한 마음 그릇의 비임만을 남긴 아― 애달픈 추억(追憶)아!   망향, 문장사, 1939                                               김상용   향수(鄕愁)   인적(人跡) 끊긴 산(山) 속 돌을 베고 하늘을 보오.   구름이 가고, 있지도 않은 고향(故鄕)이 그립소.   망향, 문장사, 1939                                         김상용   황혼(黃昏)의 한강(漢江)   `고요함'을 자리인 양 편 `흐름' 위에 식은 심장(心臟) 같이 배 한 조각이 떴다.   아―긴 세월(歲月), 슬픔과 기쁨은 씻겨가고 예도 이젠 듯 하늘이 저기에 그믄다.   망향, 문장사, 1939         \\\\\\\\\\\\\\\\\\\\\\\\\\\\\\\\\\\\\\\\\\\\\\\\\\\\\\\\\\\\\\\\\\\\\\\\\\\\\\\\\\\\\\\\\\\\\\\   -♣ 물 흐르듯 살아가세요 ♣- "왜 사느냐?"고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고 굳이 따지지 마시게 사람 사는 길에~~ 무슨 법칙(法則)이 있는 것도 아니고, 삶의 무슨 공식(公式) 이라도 있다던가? "왜 사느냐? 물으면, 그냥 웃지요."하는 김상용의 시(詩) 생각나지 않는가? 푸른 하늘에 두둥실 떠있는 한 조각 흰구름 바람 부는 대로 떠밀려 가면서도 그 얼마나 여유롭고 아름답던가? 남의 것 빼앗고 싶어 탐내는 짓 아니 하고 남의 마음 아프게 아니하고 남의 눈에 슬픈 눈물 흐르게 하지 아니하며, 물 흐르듯,서로의 가슴에 정(情) 흐르게 하며 그냥 그렇게, 지금까지 살아왔듯이 살아가면 되는 것이라네~~ 부자(富者) 부러워하지 말게 알고 보니,그 사람은 그 사람대로 나 보다 더 많은 고민(苦悶)이 있고 근심 걱정 나 보다 열배 백배 더 많더군. 높은 자리 탐내지 말게~~ 먹어서는 아니 되는 그놈의 ‘돈’ 받아 먹고 쇠고랑 차는 꼴, 한 두 사람 본 것 아니지 않은가? 부자도 높은 자리도 알고 보니 가시 방석이요, 뜨거운 불구덩이 속(內)이요, 그 곳을 박차고 벗어나지 못하는 그네들이 오히려, 측은하고 가련한 사람들이더군. 가진 것 별로 없는 사람들이나 휘황찬란(輝煌燦爛)한 불 빛 아래 값비싼 술과 멋진 음악에 취해 흥청거리며 가진 것 많이 내세우는, 있는 사람들이나 하루 세끼~~ 먹고 자고 깨고 투덜거리고... 아웅다웅 다투며 살다가 늙고 병(病)들어 북망산(北邙山) 가는 것은 다 같더군... - 좋은 글 중에서 -
861    詩는 무력하기에 위대한것... 내가 詩가 된다는것... 댓글:  조회:4515  추천:0  2016-01-06
무엇인가가 그립고 무엇인가에 위로 받고 싶을 때 우리는 그 빈칸을 채워줄 무엇인가를 그리워한다. 그 빈칸은 당장 현실적인 경쟁력이 되어주지는 않지만 우리를 존재하게 해주는 그 어떤 것들이다. 사랑이나 우정, 아름다움과 감동이 그런 것들이다. 그리고 이런 것들의 중심에 ‘시(詩)’라는 것이 있다.  -  프롤로그 중에서 시를 통해서 말하고 듣는 법, 울고 웃는 법, 사랑하고 미워하는 법, 쓰러지고 일어나는 법을 모두 배웠다”고 말하는 시인 허연에게 시는 현실을 넘어선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시를 통해 삶을 배우고 익혔다’는 그 말을 자신의 삶을 통해서 시를 끌어낸 것이라 받아들여도 좋을 것이다. 그는 등단 이후 첫 시집 (1995)를 출간하고는 시 쓰기를 멈추었지만 십수 년이 지나서 (2012)를 들고 시의 세계로 돌아왔다. 시를 거부할 수 없다는 선언과 같았던 이 시집을 통해서 시인은 시와 분리될 수 없는 자신의 삶을 인정하게 된다. 그리고 곧 (2014)를 펴내면서 시인으로서의 행보를 이어간다. 세 권의 개인 시집뿐 아니라 다수의 책을 낸 그가 이번에 낸 은 국내외 시 100편을 엮은 것으로 필사집의 형태를 띤다. 이 중 스무 편은 자신의 시 중에서 기획 취지와 맞는 시를 함께 엮었다. 시인은 세상의 수많은 시 중에서도 인간의 여러 감정에 공명하는 시들을 꼽아 실었으며, 특히 리듬이 살아 있는 시를 선택했다. 또한, 시인이 신중하게 선정한 시들은 독자들에게 잠시 멈추어 생각하기를 요청하고, 또 위로가 되기를 기대한다. 허연 시인과 만난 자리는 이번 책에 대한 소개뿐만 아니라 그의 시 세계와 시와 관계된 여러 생각을 들을 수 있는 자리였다. 시인은 질서로 환원된 시의 언어보다는 자신의 삶과 경험과 감정을 충실히 표현하는 시의 언어에 천착하고 있으며, 생생하게 살아 있는 것보다 지나간 것에 더 관심을 두고 있다. 어쩌면 그가 이 책에 소개하는 100편의 시는 시인의 감성을 대변하는 것이자 그의 시가 지향하는 바와 일정 부분 공유되는 지점을 반영하는 것일 게다. "내 첫 시집은 반항 혹은 절규 같은 것이었다" Q 작가님께서는 대학 재학 시절 등단한 이후, 첫 시집 를 1995년에 출간하였습니다. 당시의 작가님은 지금과 비교해 어떻게 달랐나요? 첫 시집은 시집이 무엇인지, 문단이 무엇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낸 것이었어요. 세상과 화해하지 못한 한 청년이 세상과 대결한다는 심정으로 시를 썼어요. 그래서 시에 평화로움보다는 절규, 도전, 현실에 대한 분노가 많이 표현되었죠. 파랗고 뾰족하게 살아 있었고, 그즈음의 제 자화상이었어요. 그 시집을 내고는 직장에 들어가게 되어서 오랫동안 시를 쓰지 않았어요. 시를 쓰지 않아도 될 것 같았고, 또 시를 통해 유명해지거나 돈을 벌어야 한다고는 아예 생각하지 않았죠. 첫 시집은 반항 혹은 절규 같은 것이에요. 외톨이처럼 떨어져 나온 문제아의 공화국 같은 것이었죠. Q 이 시집이 나왔을 때 독특하다는 평가도 받았지만, 비판을 받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당시의 반응은 어떤 것이었나요? 시집이 나온 후에 왜 시의 후렴이나 제목이 영어냐는 비난을 받았어요. 시를 쓰는 순간 마음속에서 외쳤던 감상이나 느낌을 가장 적절하게 표현하는 방법이라고 여겨서 영어를 쓴 것이었는데, 사람들에게 엄청나게 욕을 먹었어요. 그리고 ‘아버지를 그렇게 욕을 하느냐’는 비판도 받았죠.  그 시기에 향토적인 정서를 담은 시가 많았어요. 저는 서울 토박이고, 서울 한복판에 살았기 때문에 미루나무도, 동구 밖도, 소를 모는 아버지도 보지 못했어요. 시인들이 그리워하는 것은 고향이거나 어머니였을 텐데, 제가 그리워할 수 있는 고향은 만원 버스이고, 아파트이니깐 그런 시를 쓰는 것은 당연했어요. 세월이 흘러서 그 시집이 2000년대에 젊은 시인들에게 회자되고 많이 읽혔다는 것을 알았어요. 90년대 도시적 감수성을 담은 시집이라 평가하더라고요. Q 이후 13년 만에 낸 두 번째 시집이 (2012)였죠. 오랫동안 시를 쓰지 않다가 다시 쓴 계기는 무엇인가요? 직장에서 일만 하다가 어느 날 깨달음이 오더라고요. 너무 일찍 시를 만났고 등단했지만, 제가 무슨 일을 하든 시를 통해 말하는 것, 웃는 것, 욕하는 것, 화내는 것을 배운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그래서 도망칠 수 없겠다 싶어서 다시 시를 쓰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출간했던 시집이 에요. 이 시집은 단적으로 ‘나 시를 다시 쓴다, 나 도망치지 않겠다, 나 돌아왔다’와 같은 선언 같은 시집이었어요. Q 시집 제목의 ‘나쁜 소년’은 작가님의 모습이 투영된 것이라 볼 수 있을까요? 출판사에서 ‘나쁜 소년이 서 있다’라는 시를 시집의 제목으로 하자고 제의했어요. 당신은 철들지 않은 어른 같은 데가 있다, 나이에 맞게 성숙한 모습보다 삐죽삐죽 튀어나온 게 있는 것 같다고 이야기했어요. 어쩌면 잘못 늙은 어른인데, 좋게 이야기하면 나쁜 소년일 거예요. 나이 먹으면서 제가 시정잡배라는 것을 깨달았고, 그 깨달음을 인정한 시집이었어요. 어린 시절부터 문학 하는 사람은 소위 자기가 천재일 수 있겠다, 우아하다, 특별하다는 생각으로 잘난 맛에 시를 쓰는 것인데, 알고 봤더니 결국은 시정잡배였구나, 그래서 시정잡배의 시를 쓴 것이죠. Q 2014년에 세 번째 개인 시집 를 출간하였습니다. ‘내가 원하는 천사’는 더욱 두드러지게 작가님의 어떤 바람이 표현된 제목이라 여겨집니다. 이 시집에 담고자 한 문제의식은 무엇이었나요? 만약 어떤 현실적인 용도나 쓰임새를 생각하면 저는 시를 쓰지 말아야 해요. 나아가 제가 더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시를 쓰면 안 됐던 거예요. 왜냐하면, 시를 쓰면 불행으로부터 도망치는 법을 배우지 못하게 되죠. 그 불행을 맞상대하면 지는 것은 저예요. 어떻게 불행을 이기겠어요? 정신이나 육체의 건강을 위해서나 세상이나 현실을 위해서도 시를 쓰면 안 되거든요. 그런데 쓸 수밖에 없는 사람이 됐으니까, 시는 저만의 병든 공화국인 거예요. 심지어 ‘누군가 내 시를 읽어주든 읽어주지 않든 중요하지 않다, 나는 시를 쓸 수밖에 없는 몸이 되었다’는 생각마저 했어요. 시에 무릎 꿇은 자의 고백, 시의 언어로 구성된 부족의 외로운 부족장이 된 심정으로 썼어요. ‘내가 원하는 천사’는 시에 지치고 눌리고, 시 없이는 못사는 삐딱해지고 나이 든 제가 생각하는 천사를 그린 거예요. 제가 생각하는 사랑, 제가 원하는 천사는 다른 누군가가 생각하는 것과 무조건 다를 수밖에 없다는 마음으로 시를 썼어요. Q 이번 출간한 시 모음집 은 ‘성찰의 시, 사랑의 시, 깨달음의 시, 위로의 시’로 챕터를 나누어 국내외 시인들의 시 80편을 소개하고, 마지막 챕터 ‘나에게 말해달라’에서 작가님의 시 20편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책은 어떤 기획을 담고 있나요? 요즘 필사집 형태로 시집이 발간되는데요, 시를 읽고 따라 쓸 수 있도록 한쪽 면에 시가 있고, 반대쪽은 비어 있어요. 이 시집도 그런 형태를 띠고 있고, 시들 사이에 제가 쓴 몇 편의 에세이가 들어있어요. 엄밀히 따지면 이 책은 제가 엮은 것이고, 이 책의 저자는 여러 명인데 그 중 저도 한 명이죠. 니체도 있고, 소동파도 있고, 백석도 있고요. 기본적으로는 제가 좋아하고 감흥을 느낀 시를 선택했고, 국가, 언어, 감정 등을 안배했어요. 특히 그리움, 절망, 희망 등 여러 감정을 아우를 수 있도록 나름대로 구성하는데 신경을 많이 썼어요. 그리고 번역된 지 오래된 외국 시는 사전에 의존해 연구하고, 전문가들의 의견을 듣고 다듬었어요.     "바쁜 삶에서 잠시 멈춰 순간을 사유할 수 있다면" Q 작가님께서 선택한 시 대부분이 읽기 어려운 시가 아닌 것 같아요. 시를 선택하는데 있어서 염두에 둔 기준이 있다면요? 시를 포함해서 제가 생각하는 좋은 글은 리듬이 담겨 있는 글이에요. 잘 기억되는 말이나 문장은 좋은 문장일 거예요. 좋은 문장에는 리듬이 있을 텐데, 그것을 호흡이라 말할 수 있어요. 좋은 문장은 막히지 않고 발 빠르게 읽을 수 있고, 나쁜 문장은 아무리 짧더라도 한 번에 읽을 수 없어요. 예를 들면 김소월의 시는 금방 외워지는데, 그의 시에 리듬이 많이 장착되어 있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현대 시로 넘어오면서 시는 리듬을 많이 잃어버렸고, 외국 시는 번역되면서 리듬을 잃어버렸죠. 시에서 드러나지 않는 것이 내재율인데, 철저하게 내재율이 갖춰진 시 위주로 골랐어요. 단어가 어렵더라도 호흡과 함께 흘러가면 쉽게 읽을 수 있어요. 외국 시를 고칠 때도 리듬을 고려해서 옮겼어요. 물론 지나치게 실험적인 시를 빼기는 했어요. 이 시들을 보고 독자들이 위로를 받았으면 했고, 새로운 고민을 던져 주고 싶지는 않았어요. Q 이 시들을 공통으로 묶어낼 만한 키워드는 무엇인가요?  책 전체를 관통하는 것을 문장으로 이야기한다면, ‘인간의 모든 감정을 100편의 시에 담았다’고 보면 돼요. 슬픔, 분노, 기쁨, 좌절, 희망, 그리움, 포기, 외로움, 긍정 등 인간의 모든 감정을 한 권의 책에 담으려고 했기 때문에 다양한 시를 골랐어요. Q 여러 시를 꼽으셨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작가님께서 좋아하는 시의 경향을 꼽는다면 어떤 것인가요? 개인적으로는 낭만적이고 표현주의적인 시를 좋아합니다. 우리는 배운 언어로만 표현하는데, 표현의 방식과 선택된 표현의 한계가 없는 것을 좋아해요. 물론 무조건 그런 시만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지만, 저도 그런 시를 썼고 좋아했어요. 이 책에서는 딜런 토머스의 ‘밤의 어둠 속으로 순순히 들어가지 말라’와 셰이머스 히니의 ‘땅파기’를 꼽을 수 있겠네요. Q 책의 마지막 챕터 ‘나에게 말해달라’는 작가님의 이전 시를 모아둔 것인데, 이 시들은 어떻게 추려졌나요? 제가 발표한 시 중에서 리듬이 느껴지고, 여러 감정을 담은 시를 골랐어요. 오래 시를 쓰다 보니 저의 시중에서 사람들이 좋아하는 시가 무엇인지 알게 돼요. 사람들이 많이 좋아해 주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독자들이 사랑해 준 ‘7월’이나 ‘나쁜 소년이 서 있다’ 등이 포함되어 있어요. Q 이 책을 독자들이 어떻게 받아들여 줬으면 좋겠어요? 바쁘게 살면서 잠시 멈춰 서서 감상에 빠지거나 순간을 사유할 수 있다면 괜찮은 것 같아요. 시는 감상에 빠지게 하는 힘이 있잖아요. 감상에도 빠져보고 가슴이 뭉클해져 보기도 하고, 콧날이 찡해져 보기도 하고, 바쁘게 살면서 느끼지 못했던 추억도 떠올리고, 하늘도 올려다보고, 몇 줄의 씨를 써보기도 했으면 좋겠어요. Q 책의 여는 부분에서 “생존의 반대편에 놓인 슬픔, 외로움, 그리움을 채우는 것이 사랑, 우정, 아름다움, 감동이며 그 중심에 시가 있다”고 하면서도, “시는 무력하기 때문에 위대하다”고 표현하였습니다. 이 무력함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요? 시가 현실 대응력을 가지고 무언가를 할 수 있었다면, 시는 지금 있지 않거나 변질되었거나 다른 것으로 발전했을 거예요. 시는 현실에 대해 직접 아무것도 하지 못했기 때문에 18세기에도 19세기에도 지금도 그 형식 그대로 남아 있는 것 같아요. 그렇게 변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변하지 않는 것에 대한 향수와 행복을 줘요. 국가, 나이, 성별 등에 상관없이 시는 모든 것을 초월하는 아름다움이 있고, 감성, 감흥, 낭만을 사람들에게 가르쳐주는 것 같아요. 그래서 시를 읽는 사람에게는 시만 한 친구가 없죠. 비용도 들지 않고, 짧고, 마음대로 해석할 여지가 있고, 결론을 내려주지 않는다는 측면에서 현실이 아닌 것에 감동하게 하는 힘을 주는 것이죠. "무언가를 만드는 일은 정직한 비명이다" Q “나는 시를 씀으로써 쓸려 내려간 것들을 노래하고 싶었고, 쓸려 내려간 것을 증거 하고 싶었다. 나는 오늘도 시가 내게 말을 걸어주길 기다린다”고 썼습니다. 작가님께 시란 자신을 증거하는 것이라 보이는데요, 자신의 실존적 측면이 부각된 것이라 볼 수 있을까요? 그렇게 보셔도 돼요. 내가 없으면 세상이 없잖아요. 내가 없으면 케이크를 먹는 나도, 이야기하는 나도, 지하도를 건너는 나도 없어요. 난 오늘 무엇인가, 지금 무엇인가, 왜 슬픈가 등에 집중하는 편이에요. 그리고 파릇파릇하게 생동감 넘치며 곁에 있는 것보다는 초라해져서 떠난 것을 많이 생각하는 편이에요. 사라진 것, 떠나간 것, 기운을 잃고 지층 속으로 걸어간 것, 그러다 보니 추억이야기도 많이 해요. 제 시가 약간 폭력적인 부분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하는데, 아마도 제가 질서 같은 것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일 거예요. 태어나고 먹고 살기 위해서 노동하는 것이 질서라면 그런 것은 지키면서 살아가지만, 사랑과 우정 등 나머지 삶에는 어떤 질서가 있다기보다는 만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해요. Q 지나간 것, 사라진 것에 대한 관심을 표하는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지나간 것은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죽어버린 것이거나 곁에 없는 것이에요. 지금 가질 수 없기 때문에 그리움을 품는 것이고 거기에 천착하는 것 같아요. 가깝게는 죽은 어머니, 어린 시절 학교 갈 때마다 봤던 나무, 복개 공사로 없어져 버린 하천 등이 있겠죠. 그리움이 무한대라 생각하게 된 계기가 있었어요. 언젠가 여행 가서 빙하의 단면을 본 적이 있는데, 그 안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기포의 형태로 공기가 있었어요. 그 안에 갇힌 공기는 수십 만 년 전의 공기로 그때 갇혀서 나오지 못한 것이죠. 내 주머니에 넣을 수 없고, 영원할 수 없고, 결국 사라지는 것을 그리워하며 인생은 흘러가고 사라진다는 것을 느꼈어요. 그래서 사라지는 것은 흔적을 남기는데 누군가는 그런 것을 그리워하죠. 그리움은 힘이 세다고 봐요. Q 속죄, 상처, 추억 등 자신의 실존을 강조하다 보면, 자기연민이나 자기애에 빠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요, 물론 그에 공감하거나 동의할 부분도 있지만, 한계가 있을 수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예술은 그게 누구든 간에 특정인이나 특정한 목적이나 주장에 복무해서는 안 된다 생각해요. 예술이나 창작은 그런 것은 아닌 것 같아요. 그러다 보니 저는 목적성을 갖기가 힘들어서 저한테 빠지는 것 같아요. 좋은 글을 쓰고 싶지만 제가 쓴 시가 무엇이 된다거나 유명해지거나 그것을 통해 돈을 벌고 싶거나 하지 않아요. 또 세상을 바꾸고 싶은 생각도 없어요. 저만의 공화국에 누군가 찾아와서 한 편이라도 읽고 어느 순간 분노든 허망이든 느낀다면 고마운 것이죠. 지나친 자기 연민이 저의 한계일 수 있지만 창작하는 사람의 예술 세계 혹은 개성은 사실 그 사람의 한계이기도 해요. 랭보의 문학세계는 랭보의 한계였고, 백석의 문학 세계는 백석의 한계였죠. 그러니까 허연의 문학세계는 허연의 한계이자 허연의 꼴이고 수준이에요. Q 작가님에게 세상의 어떤 모습을 시라는 예술로 표현한다는 것, 자신의 삶을 시로 기술한다는 것, 시를 쓴다는 행위는 무엇인가요? 한 사람이 그즈음에 쓴 한 편의 시는 그가 내지르는 비명이라 생각해요. 비명은 논리적이지도, 설명적이지도 않고, 설명하지 않아도 되고 설명할 필요가 없어요. 그 비명을 듣고 누군가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도 되고 그렇지 않을 수 있고요. 기쁨의 비명이든, 외로움의 비명이든, 아픔의 비명이든, 자기가 미워 지르는 비명이든 논리나 과학이 아닌 것 같고 오히려 주술에 가까워요. 예를 들면, 플라톤은 이성적인 이상 국가를 건설하고자 했는데 그의 국가 개념 틀 위에 현대사회가 만들어진 것 같아요. 그가 이성을 갖춘 공동체를 구성하고 그 안에 선이 넘치는 곳을 만들고자 했을 때, 예술을 어디에 넣을 것인가를 고민했어요. 혹세무민이고 주술가 같은 사람이 예언처럼 사람들을 홀리는 것 같았기 때문에 이성 국가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이 보았죠. 그래서 처음에는 테크네와 예술을 나누어서 포함하지 않았어요. 나중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새로운 이론을 개발해서 예술을 포함하게 돼요. 그들이 그 과정에서 고민했던 이유는 예술의 이중성 때문일 거예요. 예술은 공동체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거든요. 그런데 그 공동체가 바라는 것은 한 개인이 바라는 것은 아니에요. 개개인의 감수성이 모여서 평균점, 무게중심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저는 예술이든 창작이든 무언가를 만드는 일은 정직한 비명이라 생각해요.
백석은 함흥 영생여고보 영어교사로 일하던 1935년 6월,어느 날 친구의 결혼식 피로연에서 평생 구원(久遠)의 여인으로 남을 '란(蘭)'이라는 여인을 만나게 된다.  그녀는 당시 이화여고에 재학중이였는데, 백석은 그의 친구 신현중에게서 통영처녀 란( 蘭) 을 소개받게 된다. 그녀에게 마음을 뺏긴 백석은 통영을 오가며 구혼까지 하게 되는데 좋지 않은 소문과 가난한 배경으로 란의 어머니에 의해 거절당한다.   그런데 당시 다른 여자와 약혼 중이던 신현중이 파혼을 하고 뜻밖에 란과 결혼을 하게 된다.  결국 백석은 이 사건으로 인해 사랑하는 여인과 친구를 동시에 잃는다.  이러한 시인의 아픔은  1938년 4월에 쓴 시 「내가 생각하는 것은」에서 드러난다.  그렇것만 나는 하이얀 자리 위에서 마른 팔뚝의 샛파란 핏대를 바라보며 나는 가난한 아버지를 가진것과 내가 오래 그려오든 처녀가 시집을 간 것과 그렇게도 살틀하든 동무가 나를 버린 일을 생각한다 「내가 생각하는 것은」부분  즉 백석은 ‘내가 오래 그려오던 처녀가 시집을 간 것’과 ‘그렇게도 살뜰하던 동무가 나를 버린 일’을 생각한다고 말함으로써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실연과 배신의 아픔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이렇듯 란 (蘭) 은 백석에게 ‘사랑의 아픔’을 준 인물로 기록되어 있다. 둘의 사랑이 이루어 지지 않은 탓인지 란 (蘭) 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지만,  란으로 추정되는 여인을 노래하는 장면은 백석의 시 여러 곳에서 나온다. 특히「흰 바람벽이 있어」에서 그려졌다고 추정되는  란의 모습.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은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느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주앉어 대구국을 끓여 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느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굴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내 사랑하는 사람’이 ‘그의 지아비와 마주앉어 대구국을 끓여 놓고 저녁을 먹는’ 장면과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장면을 통해 이 시는 란을 추억하며 쓰인 시 이며, 그 여인의 일상을 고즈넉한 일상의 풍경에 올려놓음으로써 ‘란을 향한 사랑의 아픔을 극복한 증거의 시’ 라고 이야기 하고 있다. 백석의 박경련에 대한 애모는 짝사랑이었습니다.  임팩트있는 사랑 고백 따위는 없었습니다. 게다가 박경련과 끝내 결혼한 사람은  백석에게 박경련을 소개해줬으면서도, 백석의 어머니가 기생 출신이라고 흉보며, 박경련과의 결혼을 위해 자신의 약혼자까지 버렸던 친구이자 직장(조선일보) 동료 신현중이었습니다. 가난하게 자란 백석에 비해  상대적으로 넉넉한 집안의 아들 신현중은 박경련 어머니에게 '신랑감으로 차라리 나는 어떠냐'고 물었다고 합니다.  백석의 배신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겠지요. 아, 비련한 백석! (사진은 백석,박경련,결혼한 신현중과 박경련)   [출처] 백석의 영원한 여인 란 ( 蘭)|작성자 행복한 영혼           흰 바람벽이 있어 / 백석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촉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때글은 다 낡은 무명샤쯔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언 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은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늬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조 앉어 대구국을 끓여 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늬 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굴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어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 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쓰 잼과 도연명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 *때글다: 오래도록 땀과 때에 절다 *개포: 강이나 내에 바닷물이 드나드는 곳 *울력: 여러 사람이 힘을 합하여 하거나 이루는 일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백석의 시입니다. 온통 무채색이네요. 외로움이 잔뜩 묻은 낮음 목소리가 들립니다. 이 시에 나오는 님은 백석의 첫사랑이자 짝사랑했던 대상인 박경련이라는 여성입니다. 시인 백석의 청혼을 거절하고 결국 친구의 아내가 되어버린 여인이죠. 이 시에서 시인은 지아비와 그 사이에서 난 어린 것을 끼고 저녁을 먹는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을 흰 바람벽을 통해 그저 바라봅니다. 시인 백석이 이토록 가련한 존재였나, 한편으로 연민마저 들게 하는 시입니다. 시인이란 가장 외로운 자리에서 자신을 발견해야 하는 숙명적인 존재라는 걸 새삼 깨닫게 됩니다.     백석의 가슴에 난초(蘭)로 남은 여인, 박경련 '바다와 같이 당신을 사랑하고만 싶구려…'         통영에는 동백나무가 아름드리 서 있는 ‘충렬사’라는 낡은 사당이 있다. 이 사당에서 조금 안쪽으로 길을 걷다 보면 고즈넉한 기와집이 하나 보인다. 바로 명정동 396호 ‘박경련’의 집이다. 박경련의 다른 이름은 ‘란(蘭)’으로 백석의 열렬한 사랑을 받은 운명의 여인이었다.        ▲ 영생고보 영어교사 시절의 백석이다.   백석의 시 「동뇨부(童尿賦)」에서 시인은 자신의 유년기를 ‘봄철날 하루 종일 들에 나가 노곤하니 불장난을 하는 날이면 반드시 이부자리에 오줌을 싸곤…’했다고 표현한다. 백석은 1912년 평안북도 정주에서 ‘커다란 범 한 마리가 선산으로 들어오는 태몽’과 함께 태어났다. 이 소년은 오산고보(오산고등학교) 시절 문학에 관심을 갖게 되는데 1926년 백석이 3학년 때의 일이었다. 오산고보를 졸업한 백석은 1930년 1월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그 모와 아들」이라는 단편 소설로 화려하게 등단하고 일본유학 후 조선일보 기자생활을 시작했다. 백석은 당대의 천재 시인으로 명성이 높았으며 특히 1936년 발행된 시집 「사슴」은 품귀 현상이 일어날 만큼 큰 돌풍을 일으켰다.  ‘남쪽 바닷가 어떤 낡은 항구의 처녀 하나를 나는 좋아하였습니다. 머리가 깜앟고 눈이 크고 코가 높고 목이 패고 키가 호리낭창 하였습니다.’ 1936년 조선일보에 발표된 그의 수필 「편지」는 사랑에 빠진 24살 청년의 마음을 그대로 전하고 있다. 백석과 란이 처음 만난 것은 백석의 절친 허준의 결혼 축하 회식이었다. 책 「시인 백석1」은 백석이 란을 만나기 위해 이듬해 1월 다시 통영을 방문하는 모습을 생생히 서술하며 백석의 애틋한 마음을 담고 있다. “이화고녀(이화여자고등학교)에 다니는 란이 방학을 맞아 고향인 통영에 내려가자 백석은 그녀를 만나기 위해 한달음에 달려갔다. ‘만나러 간다. 조선일보 백석’이라는 전보와 함께 통영으로 달려가지만 란이 서울로 돌아가 버리는 바람에 둘의 만남은 이뤄지지 못했다.” 하지만 연이어 백석이 발표한 세 편의 「통영」은 통영의 모습을 서정적인 시어로 아름답게 표현하면서 한 여인에 대한 젊은 청년의 풋풋한 사랑을 보여준다. 그 해 12월, 백석은 란에게 청혼을 하겠다는 굳은 다짐으로 다시 통영을 방문한다. 하지만 란의 집안에서는 백석의 집이 가난하고 그의 어머니가 기생의 딸 혹은 무당 딸이라는 소문때문에 백석을 완강히 반대했다. 하지만 이보다 백석을 더 낙담시킨 것은 얼마 뒤 란이 신현중과 혼례를 올린다는 사실이었다. 당시 애국지사로 명망이 높았던 신현중은 백석과는 둘도 없는 친구였다. 서울과 통영을 오가며 딸에게 구혼하는 청년이 궁금했던 란의 어머니는 친오빠인 죽사 서상호에게 백석에 대해 알아봐 줄 것을 부탁했다고 한다. 서상호는 후배인 신현중에게 백석에 대해 물어보았고 신현중은 백석에 대한 것들을 상세히 말하며 앞서 말한 소문들로 ‘백석이 란의 신랑감으로 부적당하다’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하지만 이 순간 신현중은 스스로 “어르신, 제가 하면 어떻겠습니까?”라는 말과 함께 란의 신랑감이 될 것을 자처한다. 소문난 애국지사이자 후배이며 안정된 직장을 가진 신현중은 란의 신랑이 되고 한순간에 백석은 사랑하는 여인과 친구 모두를 잃게 된 것이다.   시 「내가 생각하는 것은」에서 백석은 ‘내가 오래 그려오든 처녀가 시집을 간 것과 그렇게도 살틀하든 동무가 나를 버린 일을 생각 한다’라고 말한다. 또 시 「흰 바람벽이 있어」에서는 사랑하는 여인이 그녀의 지아비와 마주앉아 식사하는 모습을 그리며 이루지 못한 사랑에 대한 애절함과 쓸쓸함을 담고 있다.  고형진 교수는 “‘사랑’은 문학뿐만 아니라 모든 이의 삶을 이끌어 나가는 원동력으로 백석의 경우 통영 출신의 ‘란’이란 여자에 대한 연정이 그의 시심 촉발과 시 세계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라고 평가했다. 또 백석이 남긴 여러 기행시와 연시 그리고 헤어진 이후 인생의 본질을 돌아보는 시들을 언급하며 “그의 시 중에 가장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흰 바람벽이 있어」도 그렇게 탄생한 시”라고 말했다. 백석의 시는 시적정조나 언어의 차원이 아닌 문학적 소재나 대상, 이야기까지 포괄하였을 때 ‘여성 지향적’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하지만 고 교수는 “한 시인의 시적 특징을 남성적인 것과 여성적인 것으로 구분하는 것 자체가 애매하며 대부분의 시인들은 좀처럼 그러한 이분법적인 틀 안에 들어가기 어렵다”라고 말했다. 다만 “우리 시의 가락과 정서가 일반적인 의미에서 여성적인 느낌과 분위기를 많이 풍기고 백석의 시도 전통 시에 닿아 있기 때문에 백석의 시에서 이러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고 덧붙였다.   이후 남한에서는 1948년 이라는 시를 끝으로 더 이상 백석의 작품이 발표되지 않았다. 백석이 고향인 평안북도 정주에서 분단을 맞았기 때문이다. 백석의 북한행적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윤동주, 정지용, 박목월 같은 보통의 문학인들이 아동 문학에서 일반 문학으로 건너가는 모습을 보이는 것에 비해, 백석은 일반 문학에서 아동 문학의 영역으로 이동하는 모습이 특이한 점이라고 할 수 있다.   시인 백석과 통영     이성모     1. 백석 시의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기행시라고 하는 데에 이의는 없을 듯하다. 곁제목을 붙여 놓은“남행시초” 4편과 “서행시초” 4편, “함주시초” 라는 제목 아래 엮은 시 5편은 물론이고 낱낱의 작품들 역시 이리저리 다니며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시로 담아낸 것이 많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이를 두고 김명인은 “정주(定住)가 없는 삶의 뼈저린 슬픔을 환기하면서, 역설적으로 소망스러운 삶에 대한 동경을 굴절시켜 보여 준다” (「매몰된 문학의 제자리 찾기」,『창작과 비평』1988년 봄호, 357쪽)고 말한다. 물론 「八院―서행시초3」과 같은 작품에서 “내지인 주재소장의 집에서 식모살이를 하는 계집아이”의 슬픔이 전민족적 비애와 맞닿아 있으며, 「북방에서」와「藻塘에서」등 일련의 작품에서 쓸쓸하지만 그지없는 순연함으로 살아가는 나와 나의 민족의 삶에 대한 인식에 이르고 있다는 점에서 이야기 될 수는 있겠다. 그러나 이는 백석 기행시의 특징이라기보다 백석 시의 전체를 관류하는 시적 정감이라는 점이 전제가 되어야 한다. 그에게 있어 길을 걷는 것은 자연의 풍광을 건너다보는 것이 아니라 제 나름의 풍물과 습속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며 그에 대한 표상은 스스로의 정체성에 대한 재구인 동시에 자신의 내면으로 되돌아가는 시의 상징으로 자리 잡는다. 아울러 전 생애에 걸친 백석의 기행시 전체를 하나의 텍스트로 묶어 읽어서는 안 되는 까닭은 초기 기행시편이라고 할 수 있는「통영」(『조광』, 1935.12), 「통영」(『조선일보』1936.1.23),「창원도―남행시초1」(『조선일보』1936.3.6),「통영―남행시초2」(『조선일보』1936.3.6),「고성가도―남행시초3」(『조선일보,1936.3.7),「삼천포―남행시초4」(『조선일보』1936.3.8)에 이르는 일련의 시들이 백석의 남다른 통영 나들이 사연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2. 시인 백석의 통영 나들이와 관련한 일들은 송준의 『시인 백석 일대기 1』(지나. 1994)와 박태일의「백석과 신현중, 그리고 경남문학」(『한국 근대문학의 실증과 방법』, 소명출판. 2004. 39쪽~60쪽)의 연구 성과물과 신현중「서울문단의 회상」(『영문』7집. 1949)을 통해 잘 알 수 있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1935년 봄, 신현중은 조선일보에 입사하게 되고, 그 곳에서 이미 입사하여 조선일보사에서 발행하는『조광』지의 편집 일을 맡고 있는 백석과 만난다. 2> 신현중은 자신의 여동생을 백석의 가장 친한 벗인 허준에게 맡긴다. 1935년 6월, 허준의 혼인 기념 축하모임에서 백석은 통영 출신 처녀인 박경련을 소개받는다. 박경련은 신현중의 누나인 신순정이 통영에서 교편을 잡을 때 제자이며, 신순정이 포천에서 교사 생활을 할 때, 이화고녀를 다니면서 옛 스승 댁을 드나들며 신현중과도 잘 아는 사이였다. 3> 축하모임에 이어 백석은 허준, 신현중과 더불어 통영으로의 첫걸음을 한다. 같은 해 12월『조광』지에 시「통영」을 발표한다. 백석의 나이 24세, 박경련의 나이 18세의 일이다. 4> “겨울방학이 지나고 서울 공부하는 학생들이 신학기 등교하러 갈 때니까 아마 정월 초순쯤 백석이와 나(신현중)는 통영을 들러서 이 진주로 왔다”(신현중의 앞글)로 미루어 1936년 1월 초순 백석은 두 번째 통영 걸음을 하였다. 그러나 박경련은 방학이 끝나 서울로 되올라가 만날 수 없었다. 1월 23일 『조선일보』지에 시「통영」을 발표한다. 5> “같은 해 2월 9일 무렵 다시 통영으로 여행을 한 느낌을 받았다”는 송준의 진술과 “4월에 함흥의 영생고보로 일자리를 옮기기 직전이라 마음을 정리할 겸, 홀로 박경련의 고향인 통영과 그 가까운 곳을 둘러볼 수 있었을 것”이라는 박태일의 연구 결과가 있다. 백석은 1936년 3월『조선일보』지에 ‘남행시초 1․2․3․4’의 딸린 제목아래 시「창원도」(3월 5일),「통영」(3월 6일),「고성가도」(3월 7일),「삼천포」(3월 8일)를 연작시로 발표한다. 4> 후일담으로 시인 백석은 1936년 가을 함흥에서 자야(子夜) 여사를 만나고 (이동순「백석, 내 가슴 속에 지워지지 않는 이름―자야 여사의 회고」), 1937년 4월 신현중은 박경련과 혼인한다. (송준의 앞의 책)         3. 백석은 1936년 2월 22일『조선일보』지에 ‘사내사외 신춘 단문 리레’라는 기획으로 쓰여진 서간형 수필「편지」를 발표한다. 전체 글의 이야기는 “나는 이제 이 긴긴 밤을 당신께 이 노란 슬픔의 이야기나 해서 보내도 좋겠습니까.”라고 하는 가운데 내가 사랑하는 이를 말하고 그이에게 “내 시골 육보름밤의 이야기”를 전하다가 이윽고 “(닭이 우나?) 아 닭이 웁니다. 나는 이만 이야기를 그치고 복밥을 기다리는 얼마 아닌 동안 신선과 고사리와 수선화와 병든 내 사람을 생각하겠습니다”로 글을 끝맺는다. 다음은 이 글에서 말하고 있는 내가 사랑하는 이에 대한 이야기이다.   “남쪽 바닷가 어떤 낡은 항구의 처녀 하나를 나는 좋아하였습니다. 머리가 까맣고 눈이 크고 코가 높고 목이 패고 키가 호리낭창 하였습니다. 그가 열 살이 못되어 젊디젊은 그 아버지는 가슴을 앓아 죽고 그는 아름다운 젊은 홀어머니와 둘이 동지섣달에도 눈이 오지 않는 따뜻한 이 낡은 항구의 크나큰 기와집에서 그늘진 풀같이 살아왔습니다. 어느 해 유월이 저물게 실비 오는 무더운 밤에 처음으로 그를 안 나는 여러 아름다운 것에 그를 견주어 보았습니다. 당신께서 좋아하시는 산새에도 해오라비에도 또 진달래에도 그리고 산호에도 ....그러나 나는 어리석어서 아름다움이 닮은 것을 골라낼 수 없었습니다. 총명한 내 친구가 그를 비겨서 수선이라고 하였습니다. 그제는 나도 기뻐서 그를 비겨 수선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한 나의 수선이 시들어 갑니다.그는 스물을 넘지 못하고 또 가슴의 병을 얻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이만하고, 나의 노란 슬픔이 더 떠오르지 않게 나는 당신의 보내주신 맑고 고운 수선화의 폭을 치워놓아야 하겠습니다.”   위에서 말하고 있는 “남쪽 바닷가 어떤 낡은 항구의 처녀”는 통영에서 나고 자란 박경련이다. 그녀의 아버지 박성숙은 박경련의 나이 15세 때인 32세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박태일, 앞의 책. 43쪽) ‘어느 해 유월’은 허준의 혼인 기념 축하모임에서 통영 출신 처녀인 박경련을 소개받은 1935년 6월이다. 총명한 내 친구가 그를 비겨서 ‘수선’이라고 함은 당시 어울리던 신현중의「서울 문단의 회상」에서 볼 수 있듯이 아름답고 청순한 여자를 비겨 “란(蘭)이라고 해 두자”(신현중의 앞의 글) 라는 친구들 간의 통칭이라고 여기면 되겠다. 이제 백석의 시「통영」3편을 발표순대로 읽는다.         4.   統 營   녯날엔 統制使가있었다는 낡은港口의처녀들에겐 녯날이가지않은 千姬라는이름이많다 미억오리같이말라서 굴껍지처럼말없시 사랑하다죽는다는   이千姬의하나를 나는어늬오랜客主집의 생선가시가있는 마루방에서맞났다 저문六月의 바다가에선조개도울을저녁 소라방등이붉으레한마당에 김냄새나는비가날였다   위의 시는 1935년 6월, 백석의 통영 나들이 첫걸음의 시적 체험이다. 위의 시에서 말하는 ‘천희’라는 이름이 통영 지역에서 많건 적건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다만 통영에서 느낀 처녀의 이미지는 “미역오리같이 말라서 굴껍지처럼 말없이 사랑하다 죽는” 것인데, 겉으로 시의 화자가 통영 처녀들에 대해 말하는 듯하지만 사실은 백석 자신의 애틋한 사랑 그 자체라고 하겠다. 말 못할 애틋함으로 그는 “천희의 하나”인 박경련을 만났고, 그때 “소라방등이 불그레한” 그윽함 속에 청신한 “김냄새 나는 비가 나렸다.” 아래의 시는 1936년 1월 초순, 백석의 통영 나들이 두 번째의 시적 체험이다. 박경련을 만나려 들렀으나, 그녀는 방학이 끝나 서울로 되올라간 즈음이어서 만날 수 없었던 백석의 울울하고 처연한 심회가 고스란히 시에 녹아있다.         統 營   舊馬山의 선창에선 좋아하는 사람이 울며 나리는 배에 올라서 오는 물길이 반날 갓 나는 고당은 갓갓기도 하다   바람 맛도 짭짤한 물맛도 짭짤한   전복에 해삼에 도미 가재미의 생선이 좋고 파래에 아개미에 호루기의 젓갈이 좋고   새벽녘의 거리엔 쾅쾅 북이 울고 밤새껏 바다에선 뿡뿡 배가 울고   자다가도 일어나 바다로 가고 싶은 곳이다   집집이 아이만한 피도 안 간 대구를 말리는 곳 황화장사 령감이 일본말을 잘도 하는 곳 처녀들은 모두 漁場主한테 시집을 가고 싶어한다는 곳 山너머로 가는 길 돌각담에 갸웃하는 처녀는 錦이라든 이 같고 내가 들은 馬山 客主집의 어린 딸은 蘭이라는 이 같고   蘭이라는 이는 明井골에 산다든데 明井골은 山을 넘어 冬栢나무 푸르른 甘露 같은 물이 솟는 明井샘이 있는 마을인데 샘터엔 오구작작 물을 긷는 처녀며 새악시들 가운데 내가 좋아하는 그이가 있을 것만 같고 내가 좋아하는 그이는 푸른 가지 붉게붉게 冬栢꽃 피는 철엔 타관 시집을 갈 것만 같은데 긴 토시 끼고 큰머리 얹고 오불고불 넘엣거리로 가는 女人은 平安道서 오신 듯한데 冬栢꽃 피는 철이 그 언제요   녯 장수 모신 낡은 사당의 돌층계에 주저앉어서 나는 이 저녁 울 듯 울 듯 閑山島 바다에 뱃사공이 되여가며 녕 낮은 집 담 낮은 집 마당만 높은 집에서 열나흘 달을 업고 손방아만 찧는 내 사람을 생각한다.           통영에 가기 위해 구마산 선창의 뱃길을 잡았다. “좋아하는 사람이 울며 나리는 배에 올라서오는 물길이 반날” 걸려 통영에 다다랐다. 그때 구마산 뱃머리에서 백석은 좋아하는 사람이 너무나 반가워 울며 내리는 것을 목도한 것인지, 혹은 그랬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의 토로이든지 간에 그는 통영에 들렀다. 남해안어업의 전진기지로서 통영의 활기찬 모습을 말하고 있으나, 정작 그의 눈길은 여성에게 가 있다. “산너머로 가는 길 돌각담에 갸웃하는 처녀”이거나 “내가 들은 마산 객주집의 어린 딸”이거나 청초한 모습을 떠올리면 통칭 그러한 이를 일컫던 “난”이라는 이가 그의 눈에 잡힌다. “난이라는 이는 명정골”에 산다. 말하자면 “박경련과 그 가족이 살고 있었던 집은 바로 명정골 396호”이다. (박태일, 앞의 책. 46쪽) 명정샘은 이순신 장군을 모신 충렬사 앞에 있는 샘인데 백석은 명정샘을 오가는 처녀들을 바라보며 온갖 생각에 잠긴다. “내가 좋아하는 그이가 있을 것만 같고”, “내가 좋아하는 그이는 푸른 가지 붉게붉게 동백꽃 피는 철엔 타관 시집을 갈 것만 같은” 설레임과 안타까움으로 가득하다. 충렬사 돌층계에 주저앉은 화자는 통영 바다를 바라보며 “이 저녁 울 듯 울 듯 한산도 바다에 뱃사공이 되는”처연함에 젖는다. 그는 “녕 낮은 집 담 낮은 집 마당만 높은 집에서” 혹여 그리운 사람이 찾아올까 집밖으로 눈길을 두고 있는 그곳에서 “열나흘 달을 업고 손방아만 찧는 내 사람을 생각한다.” 고 하지만 사실은 마음속에서 디딜방아를 찧으며 눈길을 바깥으로 두고만 있는 이는 백석 자신이다. 백석의 세 번째「통영」시는 전술한 바, 1936년 3월 초, ‘남행시초 1․2․3․4’ 의 딸린 제목 아래 쓰여진 연작시의 두 번째로 3월 6일 발표된다.         統 營 ― 남행시초․2   統營장 낫대들었다   갓 한닢 쓰고 건시 한접 사고 홍공단단기 한감 끊고 술 한병 받어 들고   화륜선 만져보려 선창 갔다   오다 가수내 들어가는 주막 앞에 문둥이 품바타령 듣다가   열이레 달이 올라서 나룻배 타고 판데목 지나간다 간다     위의 시가 두 번째 통영 걸음에 쓰여졌던 것을 3월초에 발표한 것인지, 혹은 이후에 다시 통영에 들러 쓴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남행시초 일련의 연작시에 드러난 계절을 볼 때,「창원도」는 “업데서 따스하니 손 녹히고 싶은” 겨울녘이며, 「고성가도」는 “진달래 개나리가 한참 퓌였구나”는 봄이며, 「삼천포」역시“귀밑이 재릿재릿하니 볕이 담복 따사로운” 봄날이다. 통영으로 가거나 혹은 나서거나 간에 그가 지나쳤을 길이며 곳이다.         어쨌건 위 시의 화자는 통영장으로 내리달려들어 “술 한 병 받어 들고 화륜선 만져보려 선창 갔다.” 술 한 병 받아들고 뱃고동 우렁차게 울리는 화륜선을 만져보고 싶을 만큼의 화자의 울울한 심사의 배경이 무엇인지 알 수는 없다. 오다가 “가수내 들어가는 주막 앞에 문둥이 품바타령을 듣다가”라고 하는데, 이 곳 역시 박경련이 살고 있을 명정골을 마주한 야마골 들머리인지 알 수 없다. 당시 야마골은 통영 화류계의 본산지이다. 울울한 심정에 가수네 있는 객주집에 들러 대취한 것인지 혹은 취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다만 이번에는 열이레 달이 올라서 “나룻배 타고” 통영의 운하가 뚫린 어름의 수로를 지나간다. 그냥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지나간다 간다.” 백석은 1936년 3월 남행시초 연작시를 발표하고 같은 해 “4월 초순 함흥에 있는 함흥영생고보의 영어 교사로 자리를 옮긴다.”(정효구,「백석의 삶과 문학」,『백석』문학세계사. 1996. 177쪽) “1936년 가을 함흥에서 스물여섯의 백석은 스물두살의 김자야 여사를 만나 자리가 파할 무렵 ‘오늘부터 당신은 이제 내 마누라요’라고 단정적으로 말한다.”(이동순 앞의 글, 앞의 책. 313쪽) “1936년 겨울방학이 되자 그 곳을 떠나 서울로 올라온 백석은 허준을 앞세워 통영의 박경련의 집으로 청혼을 넣으러 갔으나, 집안의 완강한 거부로 혼사의 뜻을 이루지 못한 채 돌아온다.” (박태일 앞의 책. 48쪽)         연작시 ‘남행시초․1’인「창원도」의 마지막 행 “떠꺼머리 총각은 정든 님 업고 오고 싶은 길이다”에 눈길이 가는 것도 박경련을 향한 백석의 이루지 못한 사랑의 안타까움이 떠올려지기 때문이다. 이래저래 통영은 백석에게 있어 그의 두 번째「통영」시에 나오는 것처럼 “바람 맛도 짭짤한 물맛도 짭짤한”, “남쪽 바닷가 어떤 낡은 항구”(「편지」)이다. 낡은 항구에 옛 그리움만 남아 일렁이고 있다.         백석(白石) 시인은 본명은;  백 기행(白 夔行) 필명이; 백석(白石, 白奭)   평안북도 정주에서 1912년 출생하여 1996년 북한에서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오산고보 졸업 후, 193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그 母의 아들]로  등단(登壇)하여,           조선일보의 후원으로 동경 아오야마 학원에서 영문학을 수학하고 귀국하여 1934년 조선일보 출판부에 입사하여 [여성]잡지 편집일을 한다. 1935년 [정주성]이란 詩를 조선일보에 발표하고 1936년 [사슴]이란 시집을 간행하여 혜성과 같이 등단하는 수려한 외모의 촉망받는 백석!     1935년 당시 시인이자 기자였던 백석은 친구의 결혼식장에서 동료(신현중)의 소개로 이화여고 학생이던 통영아가씨 (박경련, 18세, 蘭 이라 부름)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백석은 후일 그의 산문에 난의 모습을 이렇게 그린다.    남쪽 바닷가 어떤 낡은 항구의 처녀 하나를 나는 좋아하였습니다. 머리가 까맣고 눈이 크고 코가 높고 목이 패고 키가 호리낭창 하였습니다. -산문  중에서   蘭은  신현중 누나의 제자였던 터라 신현중과 잘 아는 사이였는데. 백석은 내친김에 신현중과 함께 친구의 통영 신행길을 따라 나섰다. 사랑하게 된 여인의 고향과 집을 보고 싶었던 것 일게다. 그때 쓴 시가 1935년 12월 에 발표된 이다.   옛날에 통제사가 있었다는 낡은 항구의 처녀들에겐 넷날이 가지 않은 천희라는 이름이 많다. 미역오리 같이 말라서 굴껍지처럼 말없이 사랑하다 죽는다는 이 천희의 하나를 나는 어늬 오랜 객주집의 생선가시가 있는 마루방에서 만났다. 저문 유월의 바닷가에선 조개도 울을 저녁 소라방등이 불그레한 마당에 김냄새 나는 비가 내렸다 -   이후 두 번 더 통영을 찾아가지만 운명의 장난인지 서로 엇갈려 못 만나게 되고 상실감에 빠진 백석은 충렬사 계단에 주저앉아 두 번째 시 를 남기게 되는데, 이 시는 자신이 통영을 다녀왔다는 증거처럼 근무하던 조선일보를 통해 발표하였다. 서울에서 공개구혼과도 같은 시를 읽었던 "난"은 얼마나 가슴이 뛰었을까!   구마산(舊馬山)의 선창에선 조아하는사람이 울며날이는배에 올라서오는 물길이반날 갓나는 고당은 갓갓기도 하다.   바람맛도 짭짤한 물맛도 짭짤한 전복에 해삼에 도미 가재미의 생선이 조코 파래에 아개미에 호루기의 젓갈이 좋고 새벽녘의 거리엔 쾅쾅 북이 울고 밤새ㅅ것 바다에선 뿡뿡 배가 울고   자다가도 일어나 바다로 가고 십흔곳이다.   집집이 아이만한 피도안간 대구를 말리는곳 황화장사 령감이 일본말을 잘도 하는곳 처녀들은 모두 어장주한테 시집을 가고 십어한다는 곳   산넘어로 가는길 돌각담에 갸웃하는 처녀는 금(錦)이라든이 갓고 내가들은 마산객주집의 어린딸은 난(蘭)이라는이  갓고   난(蘭)이라는이가 명정골에 산다는데 명정골은 산을넘어 동백나무 푸르른 감로가튼 물이솟는 명정샘이 잇는 마을인데 샘터엔 오구작작 물을깃는 처녀며 새악시들 가운데 내가조아하는 그이가 잇슬것만갓고 내가조아하는 그이는 푸른가지붉게붉게 동백꼿 피는철엔 타관시집을 갈것만가튼데 긴토시끼고 큰머리언고 오불고불 넘엣거리로가는 여인은 평안도서 오신듯한데 동백꼿피는철이 그언제요   녯 장수모신 날근사당의 돌층계에 주저안저서 나는 이저녁 웃듯울듯 한산도바다에 뱃사공이되여가며 녕나즌집 당나즌집 마당만노픈집에서 열나흘달을업고 손방아만찟는 내사람을생각한다.-   1936년 마침내 백석은 친구 신현중과 함께 또다시 통영을 방문하여 난의 어머니에게 난과 혼인할 뜻이 있음을 전한다.  난의 어머니는 서울에 사는 오빠를 만나 혼사문제를 상의하고 백석에 대해 알아봐 줄 것을 부탁한다. 당시 난은 외삼촌 집에서 돌봄을 받으며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난의 외삼촌은 아끼는 고향 후배인 신현중에게 백석에 대해 묻는데, 그때 신현중은 친구 백석의 비밀을 발설하고 만다.  그것은 백석의 어머니가 기생 출신이라는 소문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 때문에 그 둘의 혼사는 깨지고, 신현중은 자신이 난과 혼인할 뜻이 있음을 밝히고 단번에 승낙을 받는다.   이듬해 봄, 신현중과 난은 혼인을 한다.   청혼을 했으나 거절당하고, 절친한 친구에게 사랑하는 여인을 잃은 백석의 마음은 애간장이 녹았으리라. 자신을 배반한 절친, 연모하는 여인을 잃은 슬픔에,  너무도 애절했던 첫가랑을 잃은 백석은 이런 시를 남기고 한양을 떠나 함흥의 영생여고보에 영어 선생으로 가는데 여기서 두 번째 사랑인 자야(子夜)를 만나게된다.   그렇건만 나는 하이얀 자리 우에서 마른 팔뚝의 새파란 핏대를 바라보며 나는 가난한 아버지를 가진 것과 내가 오래 그려오든 처녀가 시집 간 것과 그렇게도 내가 살튼하든 동무가 나를 버린 일을 생각한다.- 백석의 시  중에서        김영한은 1916년 서울에서 태어나, 일찍 부친을 여의고 할머니와 홀어머니 슬하에서 성장했다. 가산이 파산하자 16세 때 조선 권번에 들어가 기생[진향 眞香]이 되었다.   그곳에서 조선 정악계(正樂界)의 대부였던 하규일 선생에게서 궁중무,창,시조등을 배운다. 문재(文才)를 타고난 김영한은 기생 생활 중에도 에 수필을 발표하며 인텔리 기생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다.     1935년 기생 진향의 능력을 높이샀던 조선어학회 회원 해관 신윤국 선생의 후원으로 일본 유학을 떠나 동경에서 공부하던 중 ,신윤국선생이 일제에 투옥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귀국한다.    당시 함흥 감옥에 갇힌 신윤국을 면회코저 했으나 면회가 원천 금지되었다는 말에 함흥에 눌러 앉는다.   그는 고민 끝에 함흥 권번에 들어가 기생이 되는데, 다시 권번에 들어가게 된 이유는 기생이 되면, 큰 연회에서 함흥 법조계 유력 인사들을 만나게 되고, 스승을 특별 면회라도 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 때문이었다고 한다.   진향은 끝내 스승 신현국을 면회하지는 못하였지만, 그곳에서 백석과 운명적으로 만나게 된다. 영생여고보 선생들의 회식 장소에서....     백석은 퇴근하면 으레 眞香의 하숙집으로 가 밤을 지새곤 하였다. 어는 날 백석은 진향이 사들고 온 을 뒤적이다가 이 백(이태백)의 詩 를 발견하고는  진향에게 子夜라는 아호를 지어준다. "자야오가" 는 장안(長安)에서 서역(西域)지방으로 오랑캐를 물리치러 나가는 낭군을 기다리는 여인 자야의 애절한 심정을 노래한 곡이다.  하늘이 맺어준 여인에게 子夜라는 아호를 붙여준 것은 자신에게 닥칠 운명을 알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아마도 당신은 두 사람의 처절한 숙명이 정해질 어떤 예감에서, 혹은 그 어떤 영감에서 이 子夜라는  이름을 지어주셨던 것은 아닐까 " 라고 김영한은 에서 이렇게 회상한다. 1939년 백석은 만주 신경으로 떠나는데, 이것이 영원한 이별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1953년 김영한은  중앙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한다. 1989년 백석에 대한 회고 기록인 1990년  1995년에는 을 펴냈으며 1997년 창작과비평사에 2억 원을 출연해 백석 문학상 을 제정케 하였다.   "백석을 안다면 내가 그이 부모 다음일 거야. 그의 하트(heart)를 아니까, 그런데 다 없어졌어요."   "내 탓입니다. 미스터 백은 자식도 낳고 결혼도 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총각이 기생과 결혼하면 남자 집안이 망하던 세월이야. 그래서 나는 당신 첩, 소실이 될래요.- 했지요.  거기서 실망한 거야.  '사랑을 버려도 괜찮아? 말 다한 사람이군.' 하면서 떠났어요."   "50년 만에 담배를 끊었는데 니코틴보다 더 그리운 사람이 그 사람이지요"   "종교에서는 사람이 죽어도 영혼이 살아있다는데, 난 영혼을 안 믿어요.  꿈에 그사람 늙은 모습은 안 나오고 60년 전 인생이 나와요. 38선이 터지면 기어서라도 가서 산소를 찾을 거예요."   1997년 미국 LA 고려사 (高麗寺)에서, 자매처럼 지내던 대도행 보살(가수 이상열 장모, 고려사 창건주)을 만난 김영한은 대도행 보살의 권유에 따라 평소 책에 감명 받았던  법정 스님에게 대원각을 시주할 뜻을 밝힌다.   법정 스님은 거절을 했고, 9년 간이나 [시주하겠다]. [못 받겠다] 하는 이해하기 어려운 실랑이 끝에 1997년12월14일  요정 대원각은 승보 사찰 송광사의 말사 인 [맑고 향기롭게 근본 도량 길상사(吉祥寺)]로 개원을 하게 되었다. 개원식에서 창건주 김영한은 법정 스님에게서 염주 한 벌과 길상화(吉祥華)라는 불명(佛名)을 받았다.   길상화 보살이 된 그녀는  죽기 전 날 길상사 길상헌에서 하룻 밤을 지낸 후, "나 죽으면 화장해서 눈이 많이 내리는 날 길상헌 뒤뜰에 뿌려 주시요" 라는 유언을 남기고,   1999년 11월14일 육신의 옷을 벗었다.  다비 후 그녀의 유골은 49재를 지내고 첫 눈이 온 도량을 순백으로 장엄하던 날 길상헌 뒤쪽 언덕바지에 뿌려졌다.   지금 길상사에는 자그마한 공덕비와 1937년 겨울에 백석이 쓴 의 최초의 원문이 새겨진 비석이 자리잡고 있다.   에필로그 ...   백석의 본명은; 夔(조심할 기) 行(다닐 행) 예술가의 독특한 특징이기도 한,  필이 꼽히면 쭈~욱 빠질듯한... 아무튼 그의 부모는 이런 백석에게 수신제가(修身齊家) 하기를 바라서  [조심해서 다니라]는 이름을 지었던 것일까? 아무튼, 기생 자야로 가볍게 알려진 김영한의 일생이 폄하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바람뿐...     사람 나이 아흔아홉 살을 ‘백수(白壽)’라고 부른다. 일백을 뜻하는 ‘백(百)’이 아니다. 여기에서 ‘一’ 한 획을 빼면 ‘白’ 자가 되는데, 그게 아흔아홉이라는 데서 비롯한 단어다. 2014년 봄, 백수의 노인을 뵈러 가는 길은 사뭇 떨렸다. 그동안 벼려오던 을 마무리할 무렵이었는데, 백석이 연모했던 아가씨 박경련과 인연 있는 분이 통영에 산다는 말을 듣고 찾아 나선 길이었다. 그분이 바로 제옥례 선생이다. 주소를 들고 찾아간 봉평동의 한 아파트 문은 어서 들어오라는 듯이 빼꼼 열려 있었다. 열두세 평쯤 될까. 주방은 말끔했고 벽에는 책들이 쌓여 있었다. 선생은 성모상을 모신 안방에 요를 펴고 누워 있다가 하얗게 센 머리를 가다듬으며 일어나셨다. 통영의 ‘한산신문’은 일찍부터 제옥례의 삶에 관심을 기울이고 지켜보면서 소상하게 선생을 소개해왔다. 제옥례 선생에게 ‘통영 문화예술계의 살아 있는 전설’이라는 수사를 얹어준 것도 이 신문이다. 제옥례 선생은 1915년생이다. 통영보통학교, 진주일신여고(현 진주여고), 경성사범학교(현 서울대 사범대학) 여자연습과를 졸업했다. 그녀의 꿈은 교사가 돼 식민지의 아이들에게 우리의 언어와 문학을 가르치는 것이었다. 그녀는 제주도로 교사 지원서를 냈다. 일본 북해도 농대를 다니던 연인이 졸업하고 돌아오면 제주에서 젊은 날을 함께 보내기로 약속했던 것이다. 그러나 애타게 기다리던 발령이 나지 않았고, 남자한테서 소식이 끊겼다. 20대의 신여성 제옥례는 절망했다. 그녀는 수녀가 되기로 결심하고 천주교에 자신을 맡겼다. 황해도의 천주교에서 운영하는 보통학교 교사가 되어 근무하다가 건강이 악화돼 5년 만에 통영으로 돌아왔다. 스물여덟 살 때였다. 고향으로 돌아온 그녀는 뜻밖에 또 한 번 생의 전환점을 맞이한다. 통영의 한 부잣집에서 중매가 들어온 것이다. ‘하동집’으로 부르던 박씨 집안의 부인은 슬하에 8남매를 두었는데 죽음을 목전에 두고 새어머니를 물색하고 있었다. 다행히 제옥례가 수녀 아닌 어머니로 살아가는 것을 천주교 쪽에서도 쾌히 동의해주었다. 그리하여 나이 서른에 하동집의 안주인이 되었고, 그 후로 두 자녀를 낳아 10남매를 잘 키웠다. 통영 명정동의 하동집은 박경리의 장편소설 의 배경이 되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제옥례 선생은 원주에 살던 박경리 선생을 찾아가 만난 적도 있었다. 그때 열한 살 아래 박경리 선생은 “언니, 언니”라고 부르며 따뜻하게 대접을 했다고 한다. 한옥기와집 4채가 ㅁ자로 짜인 하동집은 광복 직후 건국준비위원회 회의장으로 이용되었는가 하면 작곡가 윤이상, 화가 전혁림, 시인 유치환·김춘수와 같은 당대의 문화예술인들이 수시로 이 집 사랑채로 모여들었다. 김춘수의 동생은 나중에 하동집의 딸 하나와 혼인을 맺기도 했다. 지금 통영에 가면 통영 출신 문화예술인들 이외에 백석의 시가 담벼락에 적혀 있는 게 눈에 띈다. 충렬사 앞에는 백석의 시 ‘통영’을 시비에 새겨 세워두었다. 평안북도 정주 출신의 시인이 남쪽 바닷가 도시에서 그 이름이 자주 거론되는 것은 왜일까? 이루지 못한 연애이야기 때문이다. 백석은 그가 근무하던 조선일보 1936년 2월21일자 ‘편지’라는 수필을 통해 “남쪽 바닷가 어떤 낡은 항구의 처녀 하나를 나는 좋아하였습니다. 머리가 까맣고 눈이 크고 코가 높고 목이 패고 키가 호리낭창하였습니다”라며 통영 처녀 박경련에 대한 사랑을 고백한다. 실제로 백석은 통영을 세 차례나 방문하지만 구혼에 실패하고 만다. 게다가 절친한 직장동료였던 신현중은 백석이 짝사랑하던 박경련과 1937년 4월 전격적으로 결혼식을 올리게 된다. 그때 백석은 함흥의 영생고보에서 영어교사로 일하고 있다가 충격에 빠져 이런 시를 쓰기도 했다. “나는 하이얀 자리 위에서 마른 팔뚝의/ 새파란 핏대를 바라보며 나는 가난한 아버지를/ 가진 것과 내가 오래 그려오든 처녀가 시집을 간 것과/ 그렇게도 살뜰하던 동무가 나를 버린 일을 생각한다”   제옥례 선생은 낡은 사진첩에서 1930년대에 촬영한 사진 한 장을 꺼내 보여주었다. 박경련이 이화여고보를 다닐 때 통영에 내려와 하동집 딸들과 찍은 사진이었다. 폐결핵을 앓던 박경련은 꽤 멋진 코트를 입고 있었지만 얼굴은 병색이 완연했다. 박경련의 사촌오빠가 제옥례 선생의 남편인 박희영이었다. “남편은 신현중을 그리 신뢰하지 않았어요. 그 집에서 집을 지을 때 빌려준 건축자재가 있었는데 신현중이 끝내 갚지 않았지요. 친구가 좋아하던 여자를 중간에 가로챈 비겁한 사람이라고도 했어요.” 귀가 많이 어두운 제옥례 선생은 귓등에 손바닥을 갖다 대고 내 말을 들었다. 큰소리로 꼬치꼬치 묻는 내가 오히려 더 송구스러웠는데, 때로는 필담으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백석과 박경련이 결혼을 했더라면 제옥례 선생이 백석을 시매부(媤妹夫)로 불렀을지도 모르겠다는 부질없는 생각이 머리를 스쳐갔다. “신현중과 박경련은 금실이 좋았어요. 그런데 둘 사이에 자식이 없었어요.” 의외의 소득이었다. 백석은 1940년 초에 만주국의 수도가 있던 신징(지금의 장춘)으로 떠난다. 시시각각 죄여오는 징용의 공포를 피하기 위해서, 또 친일 부역 문인들의 행태를 더 이상 지켜보는 게 힘들어 선택한 일이었다. 만주에 머무는 동안에도 백석은 국내 문예지에 가끔 시를 발표했다. 1941년 4월 ‘문장’ 폐간호에 실린 절창 ‘흰 바람벽이 있어’는 국외자로 떠도는 한 영혼이 황폐한 현실을 어떻게 견디는지를 아름답게 보여주는 시다. 머나먼 만주 땅에서도 백석은 박경련을 완전하게 잊지 못했다. 백석은 시에서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느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지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주 앉아 대구국을 끓여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고 안타까워했다. 결혼한 두 사람 사이에 ‘어린것’이 생기지 않았다는 것을 만주의 백석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1972년 남편이 일찍 세상을 뜬 이후 제옥례 선생에게 또 시련이 닥쳐왔다. 가난해서 작은 식당을 열어 생계를 이어가기도 했고, 대건성당에 살다시피 하면서 각종 봉사활동에도 힘을 쏟았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수필을 쓰기 시작해 여러 권의 수필집도 출간했다. 통영에 수백년 전부터 전통적으로 내려오고 있는 통제사 음식을 복원하고 재현한 일에 앞장선 것도 선생이다.   통영 문화의 거점이었던 하동집 사랑채는 올해 ‘잊음’이라는 근사한 숙박공간으로 재탄생했다고 한다. 100세를 넘긴 제옥례 선생을 옛집 툇마루로 모시고 가서 큰절을 올리고 따뜻한 찻잔이라도 쥐여드리고 싶다. ///안도현 시인·우석대 교수 =====================================================   백석·유치환의 발자취를 따라서   낭만적인 강구안 골목 (통영=연합뉴스) 임동근 기자 =  시인들은 통영에서 가슴으로 울었다. 사모하는 여인 때문이었다. 강구안 골목과 주변, 통영중앙우체국에서는 인연이 닿지 않은 여인을 그리워하던 시인들의 자취를 발견할 수 있다. 강구안 골목 곳곳에는 백석의 시가 벽면에 걸려 있다. 평안도 정주 태생인 그의 시가 통영의 후미진 골목에 내걸린 이유는 무엇일까. 1935년 6월 당시 24세였던 시인은 친구 허준의 결혼식 축하 모임에서 동료 기자이자 친구인 신현중의 소개로 ‘난’(박경련)이라 불리던 꽃다운 여고생을 만나 한눈에 반했다. 곧 그는 친구들과 난의 고향인 통영으로 향했지만 만나지 못하고 뒤돌아서야 했다. 그는 ‘통영’이란 시에서 “미역오리 같이 말라서 굴껍지처럼 말없이 사랑하다 죽는다는”이라며 당시의 심사를 토로했다.     이듬해 1월 백석은 겨울방학을 맞아 고향으로 간 난을 만나려고 신현중을 졸라 다시 통영에 갔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서울로 올라간 뒤였다. 그는 다시 “샘터엔 오구작작 물을 깃는 처녀며 새악시들 가운데 내가 좋아하는 그이가 있을 것만 같고”(‘통영2’ 중)라고 노래했다. 운명의 장난인지 두 달 뒤에도 통영에 갔지만 역시 그녀를 만날 수는 없었다. 함흥에서 교편을 잡은 그는 겨울방학을 맞아 이번에는 허준을 앞세워 난의 집으로 아예 청혼을 하러 갔다. 하지만 난의 부모는 가난한 시인이자 교사인 백석을 박대하고 혼인을 반대했다. 백석의 어머니가 기생 출신이라는 소문을 친구 신현중이 귀띔한 것이 화근이었다. 결국 난은 4월에 신현중과 혼인을 하고 말았다. 백석은 ‘내가 생각하는 것은’을 통해 “새파란 핏대를 바라보며 나는/ 가난한 아버지를 가진 것”을 한탄했고 “내가 오래 그려오든 처녀가 시집을 간 것과/ 그렇게도 살틀하든 동무가 나를 버린 일을 생각한다″며 가슴으로 울었다. 강구안 골목에 걸린 백석의 시(통영=연합뉴스) 김주형 기자 = 강구안 골목 곳곳에는 백석의 시가 걸려 있다.    ◇ 낭만적인 강구안 골목길을 거닐며 강구안 항남동 골목길은 백석과 유치환, 이중섭, 전혁림 등 시인과 화가가 술잔을 기울였던 곳이다. 1980년대 후반 여객선터미널이 옮겨가면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지만 최근‘강구안 골목만들기 프로젝트’로 부활에 나서고 있다. 유서 깊은 골목에는 백석의 시가 걸려 있고, 다양한 조형물이 설치돼 있다. 프랑스 조형예술집단 ‘아트북콜렉티브’가 만든 윤이상의 가곡 ‘달무리’ 악보, 이중섭의 그림에서 튀어나온 은빛 물고기 등을 볼 수 있다. 백석의 시를 감상하며 좁은 골목길을 따라 발걸음을 옮기다 보면 오래되고 아기자기한 풍경이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이중섭의 이름을 내건 식당과 해산물 한식으로 유명한 ‘풍년식당’, 반백년이 다된 대장간과 전당포 등을 볼 수 있다. 대장간과 전당포(통영=연합뉴스) 김주형 기자 = 강구안 골목에는 대장간, 전당포 등 오래되고 아기자기한 곳이 많다.    ◇ 평생을 이어간 순수한 사랑 이야기 통영에서는 청마 유치환과 이영도의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그들이 처음 만난 것은 함께 근무한 통영여중에서였다. 당시 이영도는 일찍 남편을 여의고 딸 하나를 둔 29살 과부였고, 유치환은 그녀보다 아홉 살 많은 유부남이었다. 청마는 퇴근 후 수예점에서 시간을 보내던 그녀를 보려고 수예점이 눈에 들어오는 중앙동우체국 창가에서 편지를 썼다고 한다. 이때 쓴 시 가운데 한 편이 지금까지도 많은 이의 감성을 울리는‘행복’이다. 1967년 부산에서 불의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20년 동안 청마가 이영도에게 보낸 편지는 무려 5천여 통이나 된다고 한다. 이영도는 청마가 보낸 편지 중 200통을 골라 ‘사랑했으므로 나는 행복하였네라’라는 서간집을 펴내기도 했다. 정량동 언덕에 자리한 청마문학관에서는 유치환의 생애와 사랑 이야기를 엿보고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입구에는 1950년을 전후해 유치환, 윤이상, 전혁림, 김상옥, 정윤주, 김춘수 등 통영문화협회를 결성, 통영의 문화 르네상스를 이끌었던 인물들이 함께한 커다란 사진이 비치돼 있다. 스피커를 통해서는 그의 주옥같은 시가 흘러나와 가슴을 적신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유치환의 ‘행복’ 중) 청마문학관(통영=연합뉴스) 김주형 기자 = 청마문학관에서는 유치환의 생애와 사랑 이야기를 엿볼 수 있다.      =============================================== 분단에 갇힌 영혼, 시인 백석     김선호(현대사분과)     [사진 1]  아오야마 학원 영어사범학과 시절의 백석  도쿄 시부야에서 22살 무렵 찍은 사진이다.  지금도 보기 드문 미남이다.     키 185cm의 이 미소년은 안타깝게도 평안북도 정주 출신의 '시인'이다. 안타까운 이유는 그의 인생에 담겨있다. 의 시인, 백석이다.그렇게 유명한 시인이지만, 그의 집안과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게 없다. 그는 1912년 7월 1일 평북 정주군 갈산면 익성동에서 태어났다. 백석은 아버지가 37살에 얻은 첫아들이었다. 그 뒤로 2남 1녀가 태어났다.본명은 백기행(白夔行)이다. 백석의 고향, 정주는 문인의 고장이다. 이광수가 정주군 갈산면 익성동 출신이다. 김소월은 1902년 평북 구성군에서 태어났지만, 백일 후부터 정주군 곽산면 남서동에서 자랐다. 백석의 아버지는 백시박(白時璞)으로 사진사였다. 그는 사진 기술을 익혀 조선일보에서 사진 반장을 지냈다고 전해진다. 백석의 어머니는 이봉우(李鳳宇)다. 그녀는 서울 출신으로 백시박과 결혼해 정주로 왔다. 백시박과는 13살 차이다. 백석의 모친은 음식 솜씨가 아주 좋았다. 고당 조만식은 정주에 있는 오산학교 교장 시절 백석의 집에서 하숙을 했다. 아버지 백시박은 동향인 조선일보 사주 방응모와도 가까웠다고 한다. 그러나 돈을 버는 데는 재주가 없었던 듯하다.    백석은 1918년 평북 정주에 있던 오산 소학교에 입학한다. 1924년에 오산 고등 보통학교에 입학해 1929년에 졸업한다. 당시 오산학교 교사로는 이광수가 있었고,김억도 교사였다. 근대 미술사의 한 획을 그은 이중섭도 오산학교 출신이고, 인민군 초대사령관 최용건도 오산학교 출신이다. 그러나 백석은 집이 가난해 대학에 진학하지 못했다. 193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현상모집에 단편소설「그 모(母)와 아들」이 당선되면서 조선 문단에 등단한다. 백석의 소설은 조선일보 사주 방응모의 눈에 띄어 장학금을 받고 도쿄로 유학을 가게 된다. 아오야마(靑山) 학원 영어사범학과에 입학한 백석은 유학 시절 영어, 불어, 러시아어를 공부했다. 백석은 1934년 졸업해 귀국했다. 나타샤    유학 시절 교사 자격증을 취득했지만 백석의 첫 직장은 학교가 아닌 조선일보 출판부였다. 조선일보 장학금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1934년 조선일보에 입사해 잡지『여성』을 만들며 안톤 체홉의 작품을 번역해 신문에 싣기도 했다. 단편소설로 등단하고 번역가와 편집자로 활동하던 백석은 1935년 시「정주성」을 발표하며 시인으로 변신한다.  그리고 1936년 첫 시집『사슴』을 출간한다. 왜 그랬는지 백석은 이 시집을 100부만 찍었는데, 그의 시를 좋아한 윤동주는 시집을 못 구해 직접 필사해서 애송하고 다녔다 한다.  조선일보를 다니던 백석은 1935년 친구의 결혼식 피로연에 갔다가 신문사 동료인 신현중의 소개로 한 여학생을 만난다. 그녀는 이화여고를 다니던 박경련으로 백석은 첫눈에 사랑에 빠진다. 1912년생인 백석은 스물넷, 박경련은 열여덟이었다. 1936년 백석은 박경련을 만나러 두 번이나 통영에 내려간다. 그러나 번번이 만나지 못하고 올라온다. 이 시절「통영」이라는 시를 썼다. 다음 해인 1937년, 백석이 사모했던 첫사랑 박경련은 친구 신현중과 결혼한다. [사진 2]  함흥 영생고보 영어교사 시절의 백석  머리스타일과 양복 옷매무새에서 모던뽀이의 향기가 물씬 풍긴다.    백석은 더는 서울에 살기 싫었다. 그는 신문사를 그만두고 함흥 영생고보 교사채용에 응시해 함흥으로 간다. 그리고 두 번째 사랑이 그를 찾아온다. 백석은 어느 날 학교 회식에 참석했다가 옆에 앉은 여인을 보고 다시 사랑에 빠진다. 그녀가 '자야' 김영한이다. 김영한은 권번, 즉 기생출신이었다. 그러나 백석은 1937년 가을, 잠시 고향에 갔다가 부모님의 강권으로 맞선을 보고, 초례까지 치르게 된다. 허나 장가든지 사흘 만에 집을 나와 함흥으로 달려간다. 백석의 초례소식에 실망한 김영한은 그가 학교에 출근하는 걸 보고, 그길로 이불보따리를 싸서 서울로 내려온다. 1937년 말의 일이다.    1938년 봄, 백석은 서울에 있던 청진동에 있는 김영한을 찾아온다. 둘은 다시 만나 청진동에서 살림을 차리고 백석은 조선일보에 다시 들어간다. 그의 시「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에 나오는 "아내와 같이 살던 집"은 바로 이 청진동 집을 말한 것이다. 그러나 백석은 1939년 6월, 출장을 간다고 하고 집을 나가 고향에 갔다가 또 한 번 혼인을 한다. 집으로 돌아온 백석은 말이 없었으나, 김영한은 직감적으로 그 사실을 알았다. 그렇게, 백석은 섬세했으나 유약한 남자였다. 1939년 말, 백석은 김영한에게 만주로 떠나자고 얘기한다. 그러나 그녀가 확실히 대답하지 않자 혼자 신경으로 떠나버린다. 신경으로 간 백석은 그곳에서도 작품 활동을 계속했다. 그는 국내 문학지에「北方에서」등의 시를 발표하였고, 1940년 조광사에서 토마스 하디의 소설『테스』를 번역해 출간하였고, 러시아 소설을 번역하기도 했다.그도 사람인지라 먹고 살아야 했다. 백석은 만주에서 지인의 소개로 측량보조원과 측량서기를 했다. 일제 말기에는 안동(지금의 단동)의 세관에서 근무했다. 측량기를 들고 만주벌판에 서서 백석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사진 3]  백석의 첫사랑 박경련(오른쪽)  신현중과 결혼한 후 통영에 내려가서 살던 신혼 시절의 사진이다. [사진 4]  백석의 연인 김영한  그녀는 평생 결혼하지 않고 살았고, 말년에 불교에 귀의하였다. 그녀의 법명이 ‘길상화’라서 법정스님이 절 이름을 ‘길상사’라고 지었다.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자 백석은 중국 단동(丹東, 옛명 안동, 安東)에서 다리를 건너 신의주로 들어온다. 그는 신의주에서 잠시 머물다가 이내 고향인 정주로 갔다. 오랜만에 보는 부모님이었다. 그런데 1945년 9월 백석은 돌연 평양으로 간다. 그의 평양행은 오산학교 시절 스승인 조만식 때문이었다. 조만식은 백석의 부친, 백시박과 가까운 사이였다. 백석은 조만식의 요청으로 러시아통역비서를 맡는다. 1945년 10월 중순에 평양 일본 요정 '가센'에서 열린 김일성 환영만찬에도 조만식과 함께 참석해 통역했고, 소련군정과도 자주 접촉했다. 이 시기 백석의 행적을 증언해주는 이가 있다. 월남한 극작가 오영진이다. 오영진은 평양출신으로 경성제국대학 조선어문과를 졸업한 인물로, 일본에서 영화 조감독을 하기도 했다. 그는 해방 후 평양에 설립된 건국준비위원회 평남지부에 참여한다. 위원장은 조만식, 부위원장은 아버지인 오윤선이었다. 8월 27일 건준은 조선공산당 평남지구위원회와 통합해 ‘평남인민정치위원회’로 확대 개편된다. 오영진은 조만식의 비서였는데, 해방 직후 백석의 행적을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외사과장 백석은 본업인 시를 집어치우고 군사령부 손님을 접대하기에 바빴다. 최아립이라는 중노인(中老人)은 군사령부 직속 통역관으로 전출했으므로 노어를 해독하는 유일한 존재인 백석은 몸이 열이 있어도 모자랄 지경이었다.”(오영진『소군정하의 북한 - 하나의증언』, 중앙문화사, 1984, 83쪽)    여기서 주목할 점은 “외사과장”이란 직책이다. 소련군 본대가 평양에 들어온 날은 8월 26일이다. 오영진은 백석이 소련군사령부 손님을 접대했다고 기록하고 있으니, 백석은 평남인민정치위원회에서 외사과장을 맡았다고 볼 수 있다. 필자는 평남인민정치위원회의 간부명단을 확인해 보았으나, 위원 이하의 명단은 찾을 수 없었다. 위원장은 조만식, 부위원장은 오윤선과 현준혁이었고, 32명의 위원이 있었다. 인민정치위원회는 소련군사령부와 수시로 업무를 조율했다. 백석은 이곳에서 러시아어 통역과 외사과장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진 5] 당시 조만식은 머리에 종기가 나서 늘 머리띠를 하고 다녔다.  가운데는 소련군사령부의 정치군관 메끌레르 중좌고, 양 옆의 여인들은 평양권번 기생들이다.   고요한 돈    백석은 러시아어 통역을 하던 중, 1945년 12월 평양에서 결혼한다. 신부는 당시 스무 살이던 이윤희였다. 두 사람이 어떻게 만났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백석이 인민정치위원회 활동을 하면서 인연이 닿은 것 같다. 백석의 신혼집은 평양 대동강가에 있는 돌각담집이었다. 그러나 시인에게 정치는 독약이다. 조만식은 11월 3일 자신의 지지 세력을 결집해 조선민주당을 결성한다. 그러나 12월에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 ‘신탁통치문제’가 결정되자 강력한 반탁운동을 전개한다. 그는 소련군사령부의 회유를 거절해 1946년 1월부터 평양 고려호텔에 연금되었다. 조만식이 연금되자 백석은 비서를 그만두고 절필한다. 그는 시를 쓰는 대신 아동문학으로 전향한다. 그리고 외국문학을 번역하며 먹고 살았다고 한다.    1946년 이후 백석의 행적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최근 발견된 자료에 따르면,그는 1947년 12월 당시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 외국문학 분과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은 1946년 3월 평양에서 결성된 좌익 문예단체다.문예총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표방했던 카프 출신의 한설야가 위원장을 맡고 있었다. 문예총에는『두만강』의 소설가 이기영, 시인 임화, 평론가 김남천, 소설가 이태준도 가입해 활동했다. 그는 문예총 외국문학분과에 소속되어 번역활동을 했다. 백석은 이미 일제 말기에도 영국 소설과 러시아 소설을 번역한 적이 있다. 이 시절 백석이 번역한 작품이 미군이 북한에서 가져간 문서에 남아있다. 러시아 소설가 숄로호프가 쓴『고요한 돈』이라는 작품이다.『고요한 돈』은 사회주의 리얼리즘 소설의 대표작으로, 후에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이 작품 외에 백석의 번역 작품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이 작품은 1950년 2월 20일에 북한 교육성에서 출판되었다. 이 시기 백석은 교육성에 소속되어 있던 것 같다. 같은 시기에 출판된 다른 작가들의 작품은 대개 '국립인민출판사'나 '조쏘문화협회'에서 출판되었다. [사진 7]  미군 노획문서에서 발견된 백석의 번역 작품『고요한 돈』제2권   다른 작품들과 달리 우리의 교육부에 해당하는 ‘교육성’에서 출판하였다.   시인의 후반생...    시인은 북한에서 어떻게 살았을까? 백석은 외국문학작품을 번역하고, 아동문학작품을 쓰며, 그 원고료를 받아먹고 살았다. 그런데 백석은 1957년 북한에서 벌어진 아동문학 논쟁에 뛰어든다. 이 당시 백석은 조선작가동맹 중앙위원회 외국문학 번역 창작실에 있으면서 러시아 문학 작품을 번역하고 있었다. 백석은 순수 문학을 강조하며 계급적인 요소를 반대하다 비판을 받는다. 평양시 동대원 구역에 살던 그는 1959년 1월 양강도 삼수군 관평리의 협동조합으로 하방 된다. 그는 이곳에서 축산반에 배치되어 돼지와 염소를 키웠다. 삼수에 내려간 백석은 갑자기 창작 활동을 활발히 펼친다. 이 시기 백석의 시는 대부분 ...의 항일운동과 ...체제를 찬양하는 시였다. 대표적인 시로「사회주의 바다」,「강철장수」,「나루터」등이 있다. 더 이상 시를 쓸 수 없는 시대에 시인은 구호를 쓴다. ... 이때 원수님은 원쑤들에 대한 증오로 그 작으나 센 주먹 굳게 쥐여지시고 그 온 핏대 높게, 뜨겁게 뛰놀며 그 가슴속에 터지듯 불끈 맹세 하나 솟아 올랐단다 ‘빼앗긴 내 나라 다시 찾기 전에는 내 이 강을 다시 건너지 않으리라’ (백석,「나루터」)    이것도 잠시. 몇 편의 시를 발표하다 1962년 완전히 절필한다. 그해 북한 교육문화상 한설야가 좌천되었다. 한설야는 1947년 북조선인민위원회 교육국장이었다. 아마도 이때 조만식 계열로 찍혀 재능을 썩히고 있던 백석을 기용했던 것 같다. 한설야는 그 후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 위원장을 맡는다. 월북한 예술가 중 가장 대우받은 인물이 한설야인데, 이는 그가 우상화의 선봉장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1947년 북한 최초의 우상화 작품인『...장군 개선기』를 출판했다. 우상화 선봉장으로는 조선의용군 출신 김창만도 유명했다. 결국 둘 다 좌천되었다. 한설야 좌천 이후 백석은 삼수갑산을 빠져나오지 못했다. 글밖에 모르던 백석은 농사일을 제대로 못해 마을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그러나 백석은 하루에 한 사람을 열 번을 만나도 가슴에 손을 얹고 다정하게 인사를 나누고 지나갈 만큼 겸손하고 어진 성품의 소유자였다. 그래서 삼수군 사람 가운데 백석을 모르는 이가 없었다. 그는 삼수군 문화회관에서 청소년들에게 문학창작을 지도하며 살았다. 시인 백석은 끝내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삼수에서 사망한다. 1996년 1월7일, 향년 85세였다. 그는 슬하에 2남 1녀를 두었다. 한설야는 그 전에 지방으로 좌천되어 1976년 사망했다. [사진 8]  양강도 삼수군 협동농장에서 살던 말년의 백석   이 사진은 그의 아들이 보관했던 사진, 백석 왼쪽이 부인 이윤희, 뒤가 둘째 아들과 막내딸이다.  왼쪽 사진은 백석의 인민증(주민등록증)이다. 아들ㆍ딸을 낳아 키우며 85세까지 살았다.  ...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해방 후 서울에 있던 김영한은 제법 돈을 모았다. 그리고 전쟁 중이던 1951년 삼청동에 '대원각'이라는 요정을 구입한다. 당시에 정치협상은 국회가 아니라 요정에서 이루어졌다. 1972년 7ㆍ4남북공동성명 전 이후락 중앙정보부장과 박성철 부수상이 미국 측과 몰래 만난 곳도 종로구 익선동의 오진암이란 요정이었다. 그렇게 역사의 뒤편을 목격해온 김영한은 1980년대까지 수백억의 돈을 모은다. 그리고 이 대원각을 법정스님에게 기증한다. 지금의 삼청동 길상사다. 그녀는 1999년 11월 14일 사망했다. 백석의 부인 이윤희와 자식들은 아직도 삼수군에서 살고 있다.    신현중과 결혼한 박경련은 어떻게 됐을까? 박경련은 결혼 후 서울 가회동에 살았다. 가회동 시절 신현중은 백석을 가회동집으로 초대한 적이 있었다. 들어서는 백석은 어색해서 얼굴이 빨개졌고, 박경련은 자리를 피해 옆에 있던 외삼촌집으로 갔다. 그날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신현중은 조선일보에 사표를 낸다. 퇴직금을 받은 후 고향인 통영으로 내려간다. 부부는 충무공 사당이 있는 명정동에서 살았다.신현중은 원래 경성제국대학 출신의 엘리트다. 그는 경성제대 시절 반제동맹사건을 주도해 3년간 옥고를 치렀다. 그는 통영에 내려온 후 진주 여고와 통영 중학교 등에서 교직에 종사하며 평생 통영에서 살았다. 경성제대 출신으로 지방에 살면서 정치판에 나가지 않은 보기 드문 경우다. 그는 1993년 10월 13일 통영에서 사망한다. 박경련은 남편에 대한 사랑이 지극했다. 그녀는 통영에서 문학 활동을 했는데, 남편 사후 그를 사모하는 시를『늘빛문학』을 통해 절절이 전하곤 했다. 김광석이 가수는 부르는 노래처럼 산다고 했던가? 지금도 시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백석의 시는 이렇게 시작한다.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매이었다.” [그림 ]  1959년부터 1996년까지 백석이 38년 동안 살았던 북한 양강도(원래 함경남도) 삼수군 백두산이 있는 개마고원 끝으로, 국경 너머가 중국 장백현. 삼수군 주변은 ‘김형직군, 김정숙군, 김형권군, 보천군’ 등등. 한설야도 하방된 이후 양강도 낭림군의 협동조합에서 살았다.   =====================================================================================   나타샤를 찾아서 - 시인 백석과의 가상대담   백석의 처녀 시집 『사슴』이 발표되었던 1930년대는 일제 강점기 군국주의 파시즘의 수탈로 인해 경제, 사회, 정치, 문화 등 모든 면에서 어려움을 겪던 민족 수난의 시기였다. 당대의 문학사 역시 국민문학과 계급문학의 첨예한 대립에서 계급문학 쪽이 수세에 몰리던 시기로, 한쪽 눈을 감고 세상을 바라봐야 하는 외눈박이 시절의 탄생 시점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민족 현실의 구조적 모순 속에서도 1930년대 문학은 예술성과 모더니티를 확보하면서 다양한 꽃을 피웠다. ‘시문학’을 중심으로 순수문학의 꽃을 피웠고, 주지주의 문학이론의 전개를 바탕으로 모더니즘의 꽃을 피웠다. 그리고 민족어의 시적 심화와 기교적 탐색이라는 성과를 이뤄냈다. 그런 면에서 ‘구보씨가 경성을 거닐던’ 이 시기는 한국 현대문학 사상 전환기라는 의의를 가지면서 오늘날까지 많은 문학도들로부터 구애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만큼 숱한 유명 시인들이 나타나 화려한 작품세계와 많은 일화를 남겼다. 그러나 1930년대는 많은 유파 - 시문학파, 주지파, 생명파 등 - 의 등장으로 그 속에다 시인들을 구겨 넣는 분류의 오류를 범하면서 몇몇 시인들의 성과가 빛을 잃기도 했다.       백석이 그랬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어느 유파에도 끼워지지 않아 당대에 그리 주목을 받지 못한 불운한 시인이었다. 오늘날과 비교하면 격세지감이 느껴진다. 오늘날 그는 모더니즘을 자신만의 독특한 시풍으로 발전시켰다는 찬사를 받는가 하면, 토속적이고 향토적인 방언의 사용은 모국어 고수라는 측면에서 민족 주체성을 확보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1930년대 국가 상실이라는 시대적 상황과 맞물려 시집 『사슴』에 나타나는 향토적 이미지를 고향 상실과 접목시키면서 그의 고향의식에 대해 많은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 백석의 나이 일흔 중반일 무렵의 사진. 백석 연구가 송준 씨가 1999년 ...입수. 백석과 부인 이윤희, 두 자녀.   백석에 대한 관심은 작품세계 뿐만 아니라 일화에서 육필원고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이어지고 있다. 자야 여사의 회고록 『내 사랑 백석』 『백석, 내 가슴 속에 지워지지 않는 이름』으로 지고지순한 시인의 사랑이 화제가 되었다. 2001년에는 1995년 83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한 그의 말년 사진이 공개돼 관심을 모았고, 그해 9월에는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의 육필원고가 공개돼 화제를 모았다. 2003년 대입 수능에서는 그의 시 「고향」이 인용된 문제가 복수정답 파문으로 화제가 되면서 ‘수능 시인 백석’이란 별칭이 생겨나기도 했다. 이런 각별한 관심 속에서도 아직까지 백석은 분단과 주목받지 못한 반세기의 소외로 인해 많은 부분이 배일에 가려져 있다. 하여,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내”릴 날을 기다리는 이때에, 백석을 만나 그에 대한 궁금증을 하나, 하나 풀어본다.       오 선생님의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가 그리워지는 계절입니다. 처녀 시집 『사슴』 출간 이후 빼어난 시작에도 불구하고 당시 문단에서 홀대를 받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김기림과 박용철 정도가 호의적이었던 같고, 오장환, 임화, 김남천 등은 굳이 격하시켰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백 글쎄, 순수시와 모더니즘에 관심 있는 쪽에서는 향토적 정서에 후한 점수를 줬을 테고, 반면 임화나 김남천 등 카프계열에서는 당시 유행처럼 번지던 모던 현상의 한 지류로 보고서 호의적 입장을 취하기는 힘들었을 것일세. 1940년에 나온 최재서 선생의 시단평을 기억하는가? 그분의 말마따나 어느 유파에 넣고 평해야 좋을지 모르기 때문에 그러하지 않았을까 싶네.   오 요즘 학자들의 추측과 별 다르지 않군요. 하지만 이 시대에 와서 선생님에 대한 평가는 아주 큰 간극을 보이고 있습니다. 크게 세 가지 방향에서 높은 찬사가 이어지는 것 같습니다. 첫째, 리얼리즘 내지 민족문학의 관점에서 평안도 방언의 구사와 모국어 고수가 특별한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둘째로는 고전적 모더니즘의 잣대인데, 자신만의 독특한 시풍을 확장시켰다는 평가입니다. 마지막으로 어떤 특정 관점에 기대지 않고 새로운 방식을 모색했다는 평가도 있습니다.   백 반세기가 지난 이 시대에 북쪽도 아니고 이곳 남쪽에서 이런 후한 대접을 받고 보니, 만감이 교차하네, 그려. 특히 모더니즘을 자신만의 독창적이고 개성적인 시풍으로 발전시켰다고 평가를 해주니, 시인으로서 이만한 찬사가 어디 있을까 싶네. 하지만 토속적이고 향토적인 방언의 사용을 민족주체성의 확보로 높이 평가해 민족시인의 반열에 올려놓은 것은 본인 스스로에게 그 짐이 너무 무거워 보이네.   오 시집 『사슴』에 대한 평가는 크게 두 가지 관점으로 집약되는 것 같습니다. 첫째는 ‘고향’이란 이미지에 천착하여 자족적 공동체의 삶을 설화적이고 동화적으로 노래한 시세계에 주목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감각주의적 시세계에 주목하는 것입니다. 이중에서도 많은 연구가들이 첫 번째의 ‘고향’ 이미지에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여기서 아이 화자가 현재 시제로 고향의 풍속을 보여주는 시는 여성적 이미지, 특히 어머니의 이미지에 의해 지탱되고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입니다. 그런데 어머니가 등장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 어머니는 늘 아버지와 짝으로 등장하며, 많은 가족 혹은 가족에 준하는 인물들과 같이 등장한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 연구가는 선생님의 ‘고향’은 상상적 어머니이고, 그리움의 자체는 곧 결여의 형식이라고 말합니다.   백 설화적이고 동화적인 시세계는 내가 많은 관심을 가졌던 분야라네. 자네도 알고 있듯이 나는 북쪽에서 아동문학에 각별한 관심을 보여 『집게네 네 형제』란 동화시집을 출간하지 않았는가? 사실 해방과 분단의 격동기에서 나는 적극적인 현실참여보다는 소극적인 내면세계로 침전할 수밖에 없었네. 그런 면에서 민족시인이란 과대평가에 많은 부담을 가지는 것이라네. 고향 이미지가 상상적 어머니이고, 그리움의 결여라는 견해를 접하고는 남쪽에서 소개되고 있는 나의 작품들을 찬찬히 한 번 훑어보았네. 그중에서 어머니가 등장하는 작품은 아이 화자가 현재 시제로 고향의 풍속을 보여주는 초기 시밖에 없고, 어른 화자로 현재의 삶을 이야기하면서 어머니가 언급되는 작품은 「흰 바람벽이 있어」 한 편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네. 당대의 많은 시인들의 시가 고향을 노래하거나 고향 지향성을 드러내면서 그 고향 자체를 어머니의 이미지로 처리하는 방식을 많이 보였는데, 그런 관점에서 특이하게 받아들일 만했던 것 같네. 특히 아버지의 이미지가 강하게 드러나는 「고향」이란 시가 널리 알려지면서 그런 견해들이 어느 정도 힘을 받지 않았나 싶네.   오 『사슴』의 목차는 4부로 구성돼 있습니다. ①얼룩소새끼의 영각 ②돌덜구의 물 ③노루 ④국수당 너머. ‘얼룩소새끼의 영각’은 송아지가 암소를 찾는 황소의 울음소리를 그리워한다는 의미인데, 연구가들은 암소는 어머니의 세계를 가리키고, 황소는 바로 선생님 자신을 가리킨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즉 이 시편에 나오는 「고야」 「여우난골족」 「가즈랑집」 등의 시들은 아이 화자가 어머니의 세계가 그리워 그 세계를 목놓아 부르는 소리라고 할 수 있지요. 하지만 이 시들은 당대의 시인 오장환의 평처럼 갖은 사투리와 옛이야기 등 묵은 추억들이 아무런 질서 없이 곳간에 볏섬 쌓듯이 마구 섞여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엄마를 찾는 아이의 절규, 즉 ‘얼룩소새끼의 영각’이 없습니다. 엄마는 그저 고모, 할머니와 같은 가족 구성원의 일부분에 불가합니다. 적어도 ‘얼룩소새끼의 영각’이 되려면 가즈랑집 할머니에 대한 연민이 잘 드러난 「가즈랑집」 같은 시 한 편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백 그런 견해도 남쪽에서 소개되고 있는 나의 작품들로 살펴볼 때 충분히 가질 수 있다고 느끼네. 「넘언집 범같은 노큰마니」에서는 분명히 어머니가 서울서 왔다고 되어있는데, 「외가집」의 이미지에서는 ‘수원백씨 정주백촌’의 ‘여우난골족’의 모습이 그려지고 있으니 말이네. 어머니와 외가집의 간극은 충분히 의식적 조작으로 볼 만하다고 생각하네. 그리고 오장환이 비판한 시들은 무의식의 흐름에 충실한 태도를 취하고 있네. 어떻게 보면 전혀 연관성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밤을 공통무대로 하여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전개되어 있네. 자네도 알다시피 영문학도였던 나는 한때 『조이스와 애란문학』을 번역하지 않았던가? 제임스 조이스의 작품에서는 이야기의 내용이 주제에서 자주 벗어나 논리적이지 못하고, 또 어휘사용에 있어서도 실수가 많아 통상적인 용례를 많이 벗어나는데, 그런 의미에서 내가 그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란 가설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네.   오 선생님의 시들을 감상하다 보면 동정과 연민이 교차하는 관조적인 여성 이미지가 느껴집니다. 「정문촌」처럼 먼지가 켜켜이 앉아 낡고 흉물스럽고, 「흰 밤」의 수절과부의 죽음처럼 슬프고, 「여승」처럼 쓸쓸하고 서럽고, 「팔원」의 계집아이처럼 손잔등이 밭고랑처럼 터져 아프고, 그래서 눈물이 날 지경입니다. 그런데 한때 선생님의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를 두고 나타샤가 누구인지가 큰 관심으로 떠올랐습니다.   백 나타샤가 누구인지에 대한 진실은 그리 중요하지 않네. 시는 시로서 감상하면 그만 아닌가? 「통영」에서는 “소라방등이 불그레한 마당”과 “객주집의 생선가시가 있는 마루”와 “미역오리 같이 말라서 굴껍지처럼 말없이 사랑하다 죽는다는 千姬”의 이미지를 느끼면 그만이고,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에서는 “푹푹 눈이 내리는 겨울밤”과 “혼자 쓸쓸히 앉아 소주를 마시며 생각하는 나타샤”와 “흰당나귀 타고 산골로 들어가는 풍경”만 느끼고 감상하면 그만 아닌가?   오 좋은 말씀 잘 들었습니다. 역시 시인은 시로서 이해해야지요. 마지막으로 선생님의 유랑과 월북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   백 이 역시 작품으로 감상하면 그만이네. 「흰 바람벽이 있어」와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을 통해 ‘낙백한 영혼이 보이는 비관론의 절창’으로 보든, ‘체념수락의 수동적 세계관으로 후퇴’라고 보든, 유랑의 세월을 성찰의 모색으로 보는 것이 올바른 이해일 걸세. 그리고 월북이 무슨 말인가? 아직까지 분단의 잣대를 들이대야겠는가? 평안도 정주 출신이라면 몰라도, 재북이란 표현도 합당하지 않는 것 같네. 어쨌든 이렇게 기억하고 찾아줘서 즐거운 시간이었네.   글 / 오명근_프리랜서 작가. 팩션소설 등        백석_시인. 1912년 평북 정주 출생. 본명 백기행. 오산중학과 일본 청산학원을 졸업하였다.        평북 방언을 사용하여 토속적인 세계를 그리면서도 모더니즘을 발전적으로 수용한 시들을        발표하여 개성적인 시세계를 구축하였다. 애초 1963년 전후하여 협동농장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최근 유족들에 의해 1995년에 사망했음이 밝혀졌다.      시인 백석 이야기   ...백석시인은 평안북도 정주 출생으로 일제시대 시인으로 활동한 인물이다. 일본 아오야마 학원 영문과를 졸업한 수재로서 준수한 외모와 당시 최고의 서정시인으로 뭇여인의 흠모를 한몸에 받았던 인물. 해방이 되면서 북에 남게 되자 남한에서는 좌경으로 볼리어 그의 존재가 희미해지고 북한에서는 공산치하에서 고생하다가 서글픈 말년을 맞았다 한다.    70년대 삼청각과 함께 한국 요정정치를 주름잡았던 대원각의 여주인 김영한여사가 평생을 기다리며 사랑했던 인물로 김영한 여사는 임종에 이르러 대원각을 법정스님에게 시주함으로써 오늘날 길상사가 되었다고..    일본 유학시절의 백석   인민증에 붙어있는 백석의 사진       백석 (白石, 1912년 7월 1일 ~ 1996년 1월). 한국의 시인. 평안북도 정주 출생이다. 일제강점기인 청년기에 문인으로서 활동하였다. 광복 이후에는 조만식 선생의 일을 도우면서 하필이면 북한에서 우익활동을 하는 바람에 문인 명단에서 이름이 삭제당하고, 1996년 타계하기까지 반평생을 영영 절필한 채로 보냈다. (남한은 남한대로 북한에 잔류했다는 이유만으로 그의 문학작품을 오랫동안 금서 취급했다.) 6.25 전쟁이 터지기 전에 남으로 내려올 기회는 있었을 텐데 그대로 북에서 잔류했던 이유는 알 수 없다. 카더라 통신에 의하면 첫번째 부인이 여기저기 연애질하고 다니던 백석을 증오하여 월남하면 가만히 두지 않겠다고 별렀기 때문이라 하는데... 그 밖의 다른 이야기는 후술. 어쨌든 59년 이후 그는 정말로 삼수갑산 중 삼수로 가서 평생을 살았다. 사실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와 네이버 인물 소개에 나온 그의 사진을 보면 정말 잘 생겼다. 게다가 키는 무려 185cm!!! 오오 백석 오오! 그에게 날아든 팬레터의 무게만 백석에 달했다는  이야기도 백석의 주위 사람들에 의해 전해진다. 통영을 아주 좋아했던 시인. 통영에 란이 살았기 때문이다. 또한 독일어, 영어, 러시아어에 능통하였던 어학의 천재라고 한다. 본명은 백기행(白夔行)이라 알려져있다. 기연(基衍)으로도 불렸다. 필명은 백석(白石, 白奭)인데 주로 白石으로 활동했다. 1912년 7월1일 평안북도 정주군 갈산면 익성동에서 부친 백시박 (白時璞)과 모친 이봉우(李鳳宇) 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오산(五山)중학과 일본 도쿄 아오야마(靑山)학원을 졸업하였다. 조선일보사 출판부에서 근무하였으며, 1936년 시집 《사슴》을 간행하여 문단에 데뷔하였다. 방언을 즐겨 쓰면서도 모더니즘을 발전적으로 수용한 시들을 발표하였다. 《통영(統營)》 《고향》 《북방(北方)에서》 《적막강산》 등 대표작은 토속적이고 향토색이 짙은 서정시들이다. 지방적·민속적인 것에 집중하여 특이한 경지를 개척하는 데 성공한 시인으로, 서북방언을 시에 넣기도 하고 서사를 시에 넣은 이야기시를 구사하기도 하였다. 또 그의 시에는 먹을 것들이 많이 등장하기로 유명한데, 백석의 시에 나오는 음식을 연구한 식품영양학과 논문이 있을 정도이다. 백석의 시 를 읽고 나서 국수가 땡겨서 동치미에 국수 말아먹었다는 사람도 있다(...). 8.15광복 후에는 고향에 머물렀다. 1963년을 전후하여 협동농장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연구에 의해 사망연도가 1996년임이 밝혀졌다.   대표적인 시는 , , , , , 이 있다. 대표작 중의 하나인 에서 나타샤가 누구인가에 대해 논란이 분분한 데 백석의 상대로 김진세(백석의 제자)의 누이, 란(蘭), 자야(子夜)라고 불렸던 기생 출신 김진향 씨가 있다. 본명이 김영한으로 진향은 기명(기생의 호칭). 자야 여사가 호기심에 함흥 시내 번화가로 나들이 갔다가 일본인이 경영하는 히라다 백화점 책방에서 문예춘추, 여원, 자야오가라는 책을 사가지고 와서 백석 시인에게 보였는데 그때 지어준 이름으로 자야는 백석시인과 김진향 여사 사이에만 통하는 애칭이 되었다. 여담으로 은 광복 후에 대원각이라는 큰 요정을 운영했는데, 말년에 법정 스님에게 요정 전체를 시주해서 지금은 길상사 라는 절로 바뀌어 있다.  당시 말 한 필이 오원 이었는데 백석의 시집 사슴이 이 원 정도였다고 한다. 100부 한정 판매를 하였는데 시인 윤동주는 이 책의 필사본을 항상 가지고 다녔다 한다. 백석의 시 '흰 바람벽이 있어'와 윤동주의 시 '별 헤는 밤' 을 살펴보면 윤동주가 백석을 얼마나 좋아 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흰 당나귀는 백석과 윤동주 모두 좋아하는 이미지인데 프랑시스 잠이 좋아하는 이미지라 한다. 두 작품을 한 번 비교해보자. 흰 바람벽이 있어 - 백석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촉(十五燭)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 던지고  때글은 낡은 무명 샷쯔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은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느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주앉어 대구국을 끓여 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느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굴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내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 하는 듯이 나를 울력 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 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스 쨈'과 '도연명'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 하듯이 별 헤는 밤 - 윤동주 季節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합니다.  가슴 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來日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靑春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 하나에 追憶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憧憬동경과  별 하나에 詩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 봅니다. 小學校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佩패, 鏡경, 玉옥 이런 異國少女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애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잠',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詩人시인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스라이 멀듯이.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北間島북간도에 계십니다.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 위에  내 이름자를 써 보고,  흙으로 덮어 버리었습니다.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게외다.     충렬사 계단에 주저앉아 울던 백석 밀실 정치의 요람이었던 요정 대원각을 시주받아 법정 스님이 세운 절이 서울의 길상사다. 시주자는 시인 백석(본명 백기행, 1912~1995)의 연인이었던 고(故) 김영한 여사다. 이 땅의 시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으로 꼽히는 백석 시인은 기생이었던 그녀를 만나자마자 사랑에 빠졌고 '자야'라는 애칭을 붙였다. 자야는 백석의 시 속 나타샤의 모델로 알려져 있다. 백석과 헤어진 뒤 그녀는 백석을 그리며 평생 홀로 살았다고 한다. 자야는 책 에서 "백석이 사귄 다섯 여자 가운데 진정으로 사랑했던 여인은 자야였고 자신 또한 백석에 대한 사랑을 평생 올곧게 간직했다"고 말한 바 있다. 기생이었던 자야는 1936년 회식장소에 나갔다가 백석 옆자리에 앉았다. 그녀에게 반한 백석은 "오늘부터 당신은 나의 영원한 마누라야. 죽기 전에 우리 사이에 이별은 없어요."라고 말했으며 이후 사랑에 빠졌다고 증언했다. 자야의 믿음처럼 백석이 가장 사랑한 여인은 그녀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그네는 백석의 시 속 나타샤란 여인이 자야만을 지칭하는 것은 아닐 것으로 생각한다. 시란 게 원래 그렇다. 자야도 나타샤고 자야 전에 사랑한 여인도 나타샤고 자야 후에 만난 여인도 나타샤다. 사랑하는 여인이면 누구나 나타샤다. 스물넷, 청년 백석이 사랑한 나타샤는 '난'이라는 소녀였다.    ▲ 백석이 "나룻배 타고 판데목 지나갈 때"도 떠 있었을 통영의 열이레 달. ⓒ이상희 구마산(舊馬山)의 선창에선 좋아하는 사람이 울며 나리는 배에 올라서 오는 물길이 반날 갓 나는 고당은 갓갓기도 하다  바람 맛도 짭짤한 물맛도 짭짤한  전북에 해삼에 도미 가재미의 생선이 좋고  파래에 아개미에 호루기의 젓갈이 좋고  새벽녘의 거리엔 쾅쾅 북이 울고  밤새껏 바다에서 뿡뿡 배가 울고  자다가도 일어나 바다로 가고 싶은 곳이다  집집이 아이만한 피도 안 간 대구를 말리는 곳  황화장사 령감이 일본말을 잘도 하는 곳  처녀들은 모두 어장주한테 시집을 가고 싶어 한다는 곳  산 너머로 가는 길 돌각담에 갸웃하는 처녀는 금이라는 이 같고  내가 들은 마산 객줏  집의 어린 딸은 난이라는 이 같고  난이라는 이는 명정 골에 산다던데  명정 골은 산을 넘어 동백나무 푸르른 감로 같은 물이 솟는 명정 샘이 있는 마을인데 샘터엔 오구작작 물을 긷는 처녀며 새악시들 가운데 내가 좋아하는 그이가 있을 것만 같고 내가 좋아하는 그이는 푸른 가지 붉게 붉게 동백꽃 피는 철엔 타관 시집을 갈 것만 같은데 긴 토시 끼고 큰머리 얹고 오불고불 넘엣거리로 가는 여인은 평안도서 오신 듯한데 동백꽃이 피는 철이 그 언제요  녯 장수 모신 낡은 사당의 돌층계에 주저앉아서 나는 이 저녁 울듯 울듯 한산도 바다에 뱃사공이 되어가며 녕 낮은 집 담 낮은 집 마당만 높은 집에서 열나흘 달을 업고 손방아만 찧는 내 사람을 생각한다 - 백석 시(詩)     이순신 장군 사당인 통영 충렬사 건너 쌈지공원에는 백석의 시비가 서 있다. 시비에 새겨진 시는 다. 저 머나먼 북쪽 땅 정주가 고향인 백석 시비가 남쪽 끝자락 통영에 서 있는 이유는 뭘까. 다 그 죽일 놈의 사랑 때문이다. 나그네는 이 비석에 새겨진 시 를 볼 때마다 윤도현의 노래 가 떠오른다. 가 아니라 로 읽으면 이해가 쉽다. 백석은 생애 참으로 많은 여인의 애간장을 태우고 다닌 사내였지만 통영의 여자 '난'에게는 도리어 큰 상처를 입었다.  통영 출신 천희 '난'을 향한 사랑      ▲ 백석이 주저앉아 울먹이며 시를 썼던 충렬사 계단.  는 서울 살던 백석이 난이란 여자를 만나러 통영까지 왔다가 못 만나고 그녀가 살던 집과 동네만 하릴없이 기웃거리다 충렬사 입구 돌계단에 쪼그려 앉아 서글픈 심사로 쓴 것이다. 백석은 '통영'이란 제목의 세 시편을 남겼다. 도 처음 발표 때는 제목이 '통영'이었다. 백석이 남쪽 끝 항구도시 통영에 대해 시를 세 편이나 남긴 것은 그만큼 그 여자 난에 대한 그리움이 컸기 때문이 아닐까.  당시 기자였던 백석은 1935년 절친한 친구 허준의 결혼식 축하모임에서 같은 신문사 동료인 신현중의 소개로 당시 이화고녀 학생이던 통영 여자 난(본명 박경련)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백석은 스물넷, 난은 열여덟 꽃다운 나이였다. 백석은 후일 그의 산문 에서 난의 모습을 이렇게 그린다. "남쪽 바닷가 어떤 낡은 항구의 처녀 하나를 나는 좋아하였습니다. 머리가 까맣고 눈이 크고 코가 높고 목이 패고 키가 호리낭창 하였습니다."  - 산문 中  난은 신현중 누나의 제자였던 터라 신현중과 잘 아는 사이였다. 백석은 내친김에 신현중과 함께 허준의 통영 신행길을 따라나섰다. 사랑하게 된 여인의 고향과 집을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때 쓴 시가 1935년 12월 에 발표된 이다.  녯날에 통제사가 있었다는 낡은 항구의 처녀들에겐 녯날이 가지 않은 천희라는 이름이 많다 미역오리 같이 말라서 굴껍지처럼 말없이 사랑하다 죽는다는  이 천희의 하나를 나는 어늬 오랜 객주집의 생선가시가 있는 마루방에서 만났다 저문 유월의 바닷가에선 조개도 울을 저녁 소라방등이 불그레한 마당에 김냄새 나는 비가 나렸다 - 1936년 1월 백석은 통영 출신의 천희 중 하나인 난을 만나기 위해 다시 통영을 방문한다. 통영에서는 아직도 처녀를 '천희' 혹은 '처니'라고 부른다. 하지만 통영 '천희' 난은 겨울방학이 끝나가자 서울로 상경해 버린 탓에 서로 길이 엇갈린다. 이때 상실감을 안고 쓴 시가 앞서 언급한 다. 백석은 3월에도 다시 통영을 방문하지만, 이때도 결국 난을 만나지 못한다. 대신 난의 외사촌 오빠 서병직에게 융숭한 대접을 받는다. 이때 쓴 시가 서병직에게 헌사한 다. "통영 장 낫대들었다  갓 한닢 쓰고 건시 한 접 사고 홍공단 댕기 한 감 끊고 술 한 병 받어들고 화륜선 만져보려 선창 갔다  오다 가수내 들어가는 주막 앞에  문둥이 품바타령 듣다가  열이레 달이 올라서  나룻배 타고 판데목 지나간다 간다. 서병직 씨에게"  - 전문  백석은 난을 만나지 못한 섭섭함을 술과 품바타령과 통영 시장 구경으로 달랬던가 보다. 또 한 번의 엇갈림, 하지만 사랑의 엇박자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사랑과 우정의 삼각 드라마  1936년 12월 백석은 친구 신현중과 함께 다시 통영을 방문해 난의 어머니에게 난과 혼인할 뜻이 있음을 전한다. 이때 상황은 2010년 통영시에서 발간한 에 세밀히 나와 있어 인용한다. "1937년 난의 어머니 서씨는 서울에 사는 오빠 서상호를 만나 난의 혼사문제를 상의하고 백석에 대해 알아봐 줄 것을 청한다. 서상호는 통영 출신의 독립운동가였고 해방 후 2대 국회의원을 지낸 통영의 유력자였다. 난은 외삼촌 서상호의 집에서 돌봄을 받으며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서상호는 아끼는 고향 후배 신현중에게 백석에 대해 묻는다. 그때 신현중은 숨겨주어야 할 친구 백석의 비밀을 발설하고 만다. 그것은 백석의 어머니가 기생 출신이라는 소문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 때문에 백석과 난의 혼사는 깨져버린다. 대신 그 자리에서 신현중은 서상호에게 자신이 난과 혼인할 뜻이 있음을 밝히고 단번에 승낙을 받는다. 1937년 4월 7일 신현중과 난은 혼인을 한다."  - 2010년 통영시 발간 에서 발췌 인용  백석은 믿는 도끼에 발등이 찍혔다. 백석 입장에서는 친구의 배신이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백석의 마음이 어떠했을까. 백석은 후일 여러 글에서 믿었던 친구에게 버림받은 아픔을 토로한다. 이 시도 그 중 하나다. "그렇건만 나는 하이얀 자리 위에서 마른 팔뚝의  새파란 핏대를 바라보며 나는 가난한 아버지를  가진 것과 내가 오래 그려 오던 처녀가 시집을 간 것과  그렇게 살뜰하던 동무가 나를 버린 일을 생각한다.  - 中  친구가 자신을 버린 것도 아픔이지만 그보다는 연모하는 여인을 잃은 슬픔이 더 크지 않았겠는가. 그 상실감이 백석의 여러 시와 산문을 통해 드러난다. 통영에 왔을 때 백석도 그 시원한 대구국을 먹었던 기억이 깊게 남았든 모양이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느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지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주 앉아 대구국을 끓여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 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 中  사랑이 깊으면 외로움도 깊어라! 충렬사 건너 백석의 시비 앞에서 나그네는 드라마보다 더 극적인 엇갈린 사랑과 우정의 드라마를 본다. 하긴 언제나 현실은 삶을 배신하기 일쑤다. 현실보다 더한 막장 드라마가 어디 있으랴. 사랑 앞에서는 국경이 없다지만 사랑 앞에서는 우정 또한 없다. 고금에 사랑 때문에 친구끼리 등을 돌리는 것은 흔한 일이다. 백석의 친구 신현중 또한 난이를 연모했으니 어찌 그만을 탓하랴. 친구는 사랑의 전쟁터에서 승리한 것뿐이다!  백석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사랑의 실패 덕분에 우리는 백석의 그 아름다운 시편들을 얻게 됐다. 난과의 사랑에 성공했다면 백석은 아마 통영에 정착해 살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면 시인이 아니라 혹 선원이나 선주가 되지는 않았을까. 우리는 빛나는 시인 한 사람을 잃을 뻔했다. 그러나 이런 상상이 정작 백석 자신에게는 아무런 위로가 되지 못할 것은 자명하다. 계관시인의 명성을 잃을지언정 연모하는 여인의 사랑을 얻고 싶은 것이 남자가 아닌가.    --------------------------------------------   서울 성북동 북악산 자락에 자리잡고 있는 길상사는 삼청각, 청운각과 함께 70년대 고급 요정이었던 대원각을 주인이었던 김영한이 송광사에 시주하여 사찰로 바뀐 곳이다. 1만여평의 이르는 넓은 부지위에 옛날 요정으로 사용하였던 건물들을 그대로 사용하고 최근에 일부 전각들을 신축하여 사찰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정원이 잘 가꾸어진 사찰경내에는 울창한 수목들로 가득차 있고, 북악산에서 흘러내려오는 작은 개울이 정원의 풍광을 더욱 빛내주고 있다.    길상사를 시주한 김영한은 월북시인 백석의 연인으로 알려진 기생으로 70년대 고급요정이었던 대원각(그때 당시 가격으로 6백50만에 구입, 시중할 때 시가 1천억대)을 운영했으며 만년에 법정의 무소유 철학에 감화를 받아서 수차례에 걸쳐 시주의사를 밝혔으나 법정이 거절하였다가 1997년에야 사찰로 바뀌었다고 한다. 법정이 만년을 보낸곳이기도 하며, 사찰경내에는 시자자인 김영한의 공덕비가 있다.   길상사는 요정으로 사용하던 건물들을 그대로 불전으로 사용하고 있기때문에 기존의 사찰과는 다른 건물구조와 공간배치를 하고 있다. 큰 홀로 사용했던 것으로 보이는 건물을 개조한 주불전인 극락전을 중심으로 최근에 신축한 지장전, 설법당, 크고 작은 별채들을 활용한 요사채들로 이루어져 있다. 원래 요정건물들이었던 크고 작은 요사채들은 도심속에서 어떻게 이런 공간을 찾을 수 있을까 생각이 들 정도로 풍광좋은 계곡에 마련한 조선시대 선비들의 별장같은 분위기를 주고 있다. 성북동 북악산자락에 자리잡고 있는 사찰인 길상사. 이 사찰은 70년대 고급 요정이었던 대원각이었던 곳으로 당시 건물들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기때문에 전통 사찰과는 다른 건물배치를 보이고 있다. "서울 도심속에 이런 공간이 있었구나!"라는 느낌을 첫눈에 받은 아름답고 넓은 정원으로 이루어진 공간이다. 고급주택들이 들어서 있는 성북동 주택가에 길상사는 자리잡고 있다. 길상사는 별도의 천왕문을 세우지 않고 옛 대원각 정문을 그대로 사찰 출입문으로 사용하고 있다. '삼각산 대원각'이라는 현판이 사찰 출입문에 걸려 있다. 사찰입구 왼쪽편에는 길상사로 바뀌면세운 지장전이 있다. 사찰에 들어서면 원래 큰홀로 사용했던 것으로 보이는 건물을 주불전인 극락전으로 바꾸어 사용하고 있다. 주불전인 극락전 건물. 화강석 석재로 축대를 높게 쌓고 그 위에 'ㄷ'자 형태의 건물이 들어서 있다. 사찰로 바뀌면선 문살등은 불전의 모습으로 바꾼것으로 보인다. 울창한 활엽수 수목들이 가득찬 길상사 경내 가을을 맞아서 길상사를 찾는 사람이 많아진것 같다.  길상사 범종각 북악산 자락에서 흘러 내려오는 개울가에 자리잡은 요사채 건물. 원래 요정 별채 건물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전통 한옥양식으로 지어진 건물이다. '길상헌'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 이 건물은 앞면 5칸 정도의 '-'자형 건물로 서울 도시한옥의 모습을 하고 있다. 길상헌 옆으로 흘러 내려오는 작은 개울을 이용하여 아기자기하게 정원을 꾸며놓고 있다. 계곡을 따라서 크고 작은 별채건물들이 들어서 있다. 어느 정도 규모를 갖추고 있는 요사채 건물 '적묵당'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 요사채 건물이다. 안쪽에 위치한 요사채 건물. 묵언수행중이라 문이 굳게 닫혀 있다. 양옥형태의 요사채 건물 개울 윗쪽으로 크고 작은 요사채 건물들이 많이 들어서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수행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길상사 뒷편 수목이 울창한 산책길 전망이 좋은 사찰 앞쪽에는 최근에 지은 것으로 보이는 큰 규모의 건물이 있다. '설법전'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 건물로 사찰을 찾은 신도들이 잠시 쉬거나 설법을 여는 사찰 강당 건물이다. 설법전 내부                                           ========================================== 시인 백석(白石) 이야기 시인 백석(白石)의 이야기를 몇 편의 시를 소개하면서 시작합니다. 시에 대한 제 감상은 따로 적지 않습니다. 백석의 시어와 배경 스스로 읽는 이의 가슴 속에서 저마다 공명을 불러일으킬 터이니까요. 백석에 대해서는 자야(子夜)와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를 중심으로 이야기하렵니다. 자야 김영한은 삼청각ㆍ청운각과 더불어 우리나라 3대 요정의 하나로 한 시절 뭇 정객들이 요정정치를 하였던 성북동 대원각의 주인이었습니다. 법정(法頂) 스님에게 1997년 당시 시가 1천여억 원이었던 그곳을 시주하여 지금은 길상사(吉祥寺)가 되었지요. 자, 그럼 시 감상부터 할까요. 여우난곬족 명절날 나는 엄매아배 따라 우리집 개는 나를 따라 진할머니 진할아버지 있는 큰집으로 가면 얼굴에 별자국이 솜솜 난 말수와 같이 눈도 껌벅거리는 하로에 베 한 필을 짠다는 벌 하나 건너 집엔 복숭아나무가 많은 新里 고무 고무의 딸 李女 작은李女 열여섯에 사십이 넘은 홀아비의 후처가 된 포족족하니 성이 잘나는 살빛이 매감탕 같은 입술과 젖꼭지는 더 까만 예수쟁이 마을 가까이 사는 土山 고무 고무의 딸 承女 아들 承동이 六十里라고 해서 파랗게 뵈이는 山을 넘어 있다는 해변에서 과부가 된 코끝이 빨간 언제나 흰옷이 정하든 말끝에 설게 눈물을 짤 때가 많은 큰골 고무 고무의 딸 洪女 아들 洪동이 작은 洪동이 배나무접을 잘하는 주정을 하면 토방돌을 뽑는 오리치를 잘 놓는 먼섬에 반디젓 담그려 가기를 좋아하는 삼춘 삼춘엄매 사춘누이 사춘동생들이 그득히들 할머니 할아버지가 있는 안간에들 모여서 방안에서는 새옷의 내음새가 나고 또 인절미 송구떡 콩가루차떡의 내음새도 나고 끼때의 두부와 콩나물과 뽂운 잔디와 고사리와 도야지비계는 모두 선득선득하니 찬 것들이다 저녁술을 놓은 아이들은 외양간섶 밭마당에 달린 배나무동산에서 쥐잡이를 하고 숨굴막질을 하고 꼬리잡이를 하고 가마 타고 시집가는 놀음 말 타고 장가가는 놀음을 하고 이렇게 밤이 어둡도록 북적하니 논다 밤이 깊어가는 집안엔 엄매는 엄매들끼리 아르간에서들 웃고 이야기하고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웃간 한 방을 잡고 조아질하고 쌈방이 굴리고 바리깨돌림하고 호박떼기하고 제비손이구손이하고 이렇게 화디의 사기방등에 심지를 멫번이나 돋구고 홍게닭이 멫번이나 울어서 졸음이 오면 아릇목싸움 자리싸움을 하며 히드득거리다 잠이 든다. 그래서는 문창에 텅납새의 그림자가 치는 아츰 시누이 동세들이 욱적하니 흥성거리는 부엌으론 샛문틈으로 장지문틈으로 무이징게국을 끓이는 맛있는 내음새가 올라오도록 잔다 여우난곬족 : 여우가 난 골 부근에 사는 일가 친척들 진할머니 진할아버지 : 아버지의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 매감탕 : 엿을 고아낸 솥을 가셔낸 물. 혹은 메주를 쑤어낸 솥에 남아 있는 진한 갈색의 물 토방돌 : 집채의 낙수 고랑 안쪽으로 돌려가며 놓은 돌. 섬돌 오리치 : 야생오리를 잡으려고 키를 끈 달린 막대기로 받쳐 물가에 세워 놓은 것 반디젓 : 밴댕이젓 숨굴막질 : 숨바꼭질 화디 : 등경(燈檠). 등경걸이.나무나 놋쇠 같은 것으로 촛대 비슷하게 만든 등잔을 얹어놓는 기구 홍게닭 : 새벽닭 텅납새 : 턴낪새. 처마의 안쪽 지붕이 도리에 얹힌 부분. 부고장 같은 것이 오면 방안에 들이기를 꺼려 이곳에 끼워놓는 풍속이 있었음 무이징게국 : 징거미(민물새우)에 무를 숭덩숭덩 썰러 넣고 끓인 국 백석과 자야의 운명적인 만남과 사랑과 헤어짐 우리나라 현역 시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으로 평가된 바 있는 백석(본명 백기행白夔行)은 1912년 평북 정주에서 태어났으며 같은 정주 출신 시인 김소월과 오산학교 선후배 사이로 10살 위 소월을 무척 따르고 선망하였습니다. 오산학교 졸업 후 일본 아오야마 학원(靑山學院)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귀국하여 1934년 조선일보에 입사해 잡지 의 편집을 맡았습니다. 1935년 8월 조선일보에 ‘정주성(定州城)’을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고, 1936년 서정시집 을 출간하면서 문단의 혜성으로 떠올랐는데, 한정판 100부 출간 탓에 당시 문학 지망생들에게 이 시집을 필사하는 것이 대유행이었으며, 윤동주도 이 시집을 필사해서 간직했었다고 합니다. ▶“한국 시가 낳은 가장 아름다운 시”(평론가 김현), “한국 사람만이 미득(味得)할 수 있는 최상의 시”(평론가 유종호). “난 나의 ‘시 스승’으로 먼저 백석 시인을 댄다”(시인 신경림) 등의 찬사가 잇는 백석은 한국 현대시사의 전설입니다. 조선일보를 퇴사하고 함흥 영생여고보에서 영어교사로 재직하던 백석은 1939년 홀연히 만주로 떠납니다. 호구를 위해 소작일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하다 일제의 패망과 더불어 귀국 길에 올라 잠시 신의주에서 거주하고는 고향 정주로 돌아옵니다. 분단 이후 월북작가로 분류되어 백석의 문학적 성과와 활동은 한국문학에서 매몰되고 세인에게는 한동안 완전히 잊힌 작가가 되고 맙니다. 그러다가 1988년 해금이 되자 백석 붐이 일어 ‘우리 문학의 북극성’이라는 찬사를 받습니다. 극악무도했던 유신시절 대학 때 시집 을 어렵게 복사하여 무슨 불온문서인 양 몰래 돌려 가며 읽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지금은 고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리고 수능시험에도 자주 출제될 정도니, 금석지감(今昔之感)! 백석과 자야 김영한과의 운명적인 만남은 조선일보 퇴직 후 함흥 영생여고보 영어교사로 재직하던 중에 이루어집니다. “나는 시인 백석과 1936년 가을 함흥에서 만났다. 그의 나이 스물여섯, 내가 스물둘이었다. 어느 우연한 자리였었는데, 그는 첫 대면인 나를 대뜸 자기 옆에 와서 앉으라고 했다. 그리곤 자기의 술잔을 꼭 나에게 건네었다. 속으로 나는 잔뜩 겁에 질려 있었지만, 그의 행동거지에는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자리가 파하고 헤어질 무렵, 그는 "오늘부터 당신은 이제 내 마누라요" 하고 단정적으로 말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의 의식은 거의 아득해지며 바닥 모를 심연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듯했다. 그것이 내 가슴 속에서 아직도 지워지지 않고 있는 애틋한 슬픔의 시작이었다.” ― 자야 여사의 회고  ▶100부 한정판으로 찍은 백석 시집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1936년 1월 20일 선광인쇄주식회사에서 낸 시집 표지에 ‘조선총독부 도서관장 서지인’이 뚜렷합니다. 은 2005년 계간 시인세계의 설문조사에서 한국 현대시 100년사 최고의 시집으로 꼽혔습니다. 백석이 ‘자야(子夜)’라 부른 김영한(金英韓)은 관철동 반가(班家)에서 태어났으나 가세가 몰락하자 조선 권번에 들어가 ‘진향(眞香)’이라는 기명을 받고 기생이 됩니다. 그러나 평범한 기생은 아니었습니다. 정악계의 대부인 금하 하일규 선생에게 궁중무와 여창가곡을 배우고, 파인 김동환의 추천으로 잡지 에 수필을 발표해 ‘문학기생’이라는 별칭도 듣습니다. 훗날 자야는 여창가곡을 복원하는 데 힘쓰면서 김진향이라는 기생 때 이름으로 (도서출판 예음, 1993)을 펴내기도 합니다. 이렇듯 국악계에서는 김진향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죠. 자야의 총명함은 조선어학회 회원이던 해관 신윤국 선생의 눈에 띄어 그의 주선으로 1935년 일본 유학을 떠납니다. 이듬해 해관이 함흥교도소에 투옥되자 유학을 포기하고 귀국 함흥으로 가지만 면회가 이루어지지 않자 실력자와 접촉하기 위해 다시 권번에 들어가 기생 옷을 입습니다. 그 때 마침 영생고보에 부임해 온 백석과 어느 연회자리에서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댄디보이 백석’과 ‘문학기생 진향’은 운명을 직감합니다. 백석은 퇴근하면 으레 진향의 하숙집으로 가 밤을 지샙니다. 어느 날 백석은 진향이 사 온 을 뒤적이다가 이백(李白)의 시 ‘자야오가(子夜吳歌)’를 발견하고는 그에게 ‘자야’라는 아호를 지어줍니다. ‘자야오가’는 장안(長安)에서 서역(西域)으로 수자리하러 간 낭군을 기다리는 여인 자야의 애절한 심정을 노래한 곡이죠. 하늘이 맺어준 여인에게 ‘자야’라는 이름을 지어준 것은 백석 자신이 두 사람의 운명을 알고 있었던 것이나 아닌지... ◀1937년 함흥 영생고보 교사 시절의 백석 “나의 이 깊은 외로움도 그때 백석이 이 ‘자야’란 호를 나에게 붙여주었을 때부터 이미 결정되고 마련된 운명이었던 것일까. 아니면 그는 아직도 그의 원정(遠征)이 끝나지 않아서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 자야 여사의 회고 함흥에서의 운명적 만남, 그리고 사랑, 이별과 해후의 반복, 사랑을 위한 현실 도피. 자야는 함흥에서 서울로 먼저 올라옵니다. 백석이 당시로는 최고의 직장인 고보 영어교사 자리를 그만두게 된 것도 자야 때문입니다. 백석은 조선축구학생연맹전 대표선수 인솔교사로 서울에 와서는 학생들은 여관에 투숙시켜 놓고 자신은 청진동 자야의 집에서 사랑을 불태웁니다. 인솔교사를 잃어버린 학생들은 모처럼 상경한 기분에 들떠 떼를 지어 유흥장으로 몰려다니다 학생 지도 합동 단속 교사에게 적발됩니다. 이 사실이 밝혀져 학교는 발칵 뒤집혔고 백석은 미련 없이 사표를 던지고 서울로 올라와 청진동에서 자야와 살림을 차립니다. 비슷한 시기에 이상(李箱)도 황해도 배천(白川)에서 만난 기생 금홍이와 함께 서울로 올라와 종로 우미관 뒤편에 살림을 차리고, 현재의 교보문고 뒤편 피맛길에서 훗날 ‘오감도’가 탄생하게 되는 제비 다방을 엽니다. 백석과 나는 앞서 말한 나의 청진동 집에서 살림을 차렸다. 함흥 시절은 그가 교사의 신분으로 남의 이목도 있고 했기에, 그가 나의 하숙으로 와서 함께 지내다 돌아가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이젠 아무데도 구애받지 않아서 좋았다. 마당 한 뼘 없는 작은 한옥이었지만 안방, 건넌방, 그리고 쪽마루에 딸린 작은 찬방(饌房)이 하나 있어서, 우리들에겐 그지없이 단란한 보금자리였다. 그의 시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에 나오는 ‘아내와 같이 살던 집’은 바로 이 청진동 집을 말한 것이다. 몇 해 전에 나는 친구와 이 집을 일부러 찾아가 보았는데, 뜻밖에도 그곳은 꼬리곰탕을 전문으로 한다는 식당으로 바뀌어져 있었다. 나는 식당 안방에 들어가 음식을 시켜놓고 옛 청진동 시절의 추억에 젖었던 적이 있다. ― 자야 여사의 회고 ◀조선 권번 기생 시절의 자야 김진향 두 사람의 사랑은 뜨거웠지만 시대 환경은 어렵고 차가웠습니다. 고향의 부모는 기생과 동거하는 아들을 못마땅하게 생각해 백석을 자야에게서 떼어놓을 심사로 결혼을 시키기로 합니다. 백석은 고향으로 내려가 부모가 정한 여자와 혼인을 올리지만 족두리를 풀어 내린 지 며칠 되지도 않은 새색시를 내버려두고 도망쳐 나와 자야의 품으로 돌아옵니다. 이런 식으로 강제 결혼을 하고 다시 도망치기를 두 차례. 자식으로서 부모에 대한 효심과 사랑하는 이와 함께 하고 싶은 열망 사이에서 괴로워하던 백석은 자야에게 만주 도피행을 설득하지만 자야는 거절합니다. 시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는 이때의 백석의 심경을 을은 작품입니다.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燒酒를 마신다 燒酒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쟈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출출이 : 뱁새 마가리 : 오막살이 1939년 백석은 홀연히 만주 신경으로 떠납니다. 자야에게 단 한마디의 그 어떤 기별도 남겨두지 않은 채… 그리고 그 길이 자야와의 영원한 이별이 되고 맙니다. 만주에서 백석은 여러 일에 종사하다가 해방 직전에는 이곳저곳을 전전하며 소작 일을 하는 등 몹시도 고달픈 생활을 합니다. 일제가 패망하자 귀국 신의주 변두리의 한 하숙방에서 잠시 묵게 되는데 이때에 시 한 수를 써서 서울의 친지에게 부칩니다. 이것이 남한에서 발표한 그의 마지막 시이자 오늘날 많은 시인들이 애송하는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南新義州 柳洞 朴時逢方)’이라는 유명한 시입니다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南新義州 柳洞 朴時逢方)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메이었다. 바로 날도 저물어서, 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오는데, 나는 어느 木手네 집 헌 삿을 깐, 한 방에 들어서 쥔을 붙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이 습내 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 같이 생각하며, 딜옹배기에 북덕불이라도 담겨 오면, 이것을 안고 손을 쬐며 재위에 뜻없이 글자를 쓰기도 하며, 또 문밖에 나가디두 않고 자리에 누어서, 머리에 손깍지벼개를 하고 굴기도 하면서,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쌔김질 하는 것이었다. 내 가슴이 꽉 메어올 적이며, 내 눈에 뜨거운 것이 핑 괴일 적이며, 또 내 스스로 화끈 낯이 붉도록 부끄러울 적이며, 나는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잠시 뒤에 나는 고개를 들어, 허연 문창을 바라보든가 또 눈을 떠서 높은 턴정을 쳐다보는 것인데, 이 때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 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려 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여 여러 날이 지나는 동안에, 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 외로운 생각만이 드는 때쯤 해서는, 더러 나줏손에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도 있는데,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 끼며, 무릎을 꿇어보며, 어니 먼 산 뒷옆에 바우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어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자야 여사의 회고. “만약에 내가 그때 만주로 함께 갔더라면 어찌 되었을까. 아마도 진작 그곳 생활이 지겨워진 나의 성화에 못 이겨 우리는 다시 서울로 돌아와 함께 살았을 것이다. 그를 만주에서 온갖 고생을 하게하고, 생활고에 시달리게 한 것도 나였고, 국토가 둘로 쪼개어져 그를 다시는 북에서 서울로 돌아올 수 없게 만든 것도 모두 내가 미욱했던 탓이다. (……) 이때가 해방 직전이었고, 이루 말할 수 없는 생활의 외로움과 고달픔은 그의 마지막 시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에 낱낱이 그렁그렁 박혀 있다. 깊은 밤에 그의 전집을 끌어안고 이 시를 혼자 목이 메어 읽어 가노라면 주체할 길 없이 솟구쳐 오는 뜨거운 눈물을 나는 참지 못한다. (……) 그와 헤어지고 어느덧 50년 세월이 흘러갔다. 시간이란 게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는다. 내가 이날 이때까지 온갖 곡절을 겪으며 살아온 것도 헤아려보면 모두가 백석에 대한 연민 때문이었고, 또 그를 향한 반발심이 물 끓듯 끓어 넘친 탓이 아닌가 한다. 그때 그를 따라 만주로 가지 않았던 실책으로 내가 그를 비운(悲運)에 빠뜨렸고, 나 또한 서럽게 살아왔다. 어찌 모든 것을 이대로 마감해 버릴 수 있단 말인가. (……) 나는 지금도 젊은 그 시절의 백석을 자주 꿈에서 본다. 그는 나의 방문을 열고 나가면서 아주 천연덕스럽게 "마누라! 나 나 잠깐 나갔다 오리다" 하고 말한다. 한참 뒤에 그는 다시 들어오면서 "여보! 나 다녀왔소!"라고 말한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가. 세월을 반백년이나 흘러 보내었는데도……” - 에서 백석은 월북한 적이 없었음에도 월북작가로 분류되어 그의 작품을 1987년까지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니 해방 후 고향 정주로 돌아가 정착한 백석은 월북작가가 아닌 재북작가인 셈이지요. 백석의 연인 자야는 1987년까지 세상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백석문학이 해금이 된 1987년 11월, 시인 이동순(李東洵. 영남대 교수)은 (창작과 비평사)을 펴냈는데 한 달 뒤 단정하고 기품 있는 음성의 할머니로부터 뜻밖의 전화를 받습니다. 이 할머니는 자신을 처녀 시절 백석과 뜨거운 사랑을 나눴던 사람이라고 소개합니다. 이동순은 곧장 서울로 올라와 자야 김영한 여사로부터 백석 시인과 관련된 한 많은 생애를 듣습니다. 자야 여사는 이동순에게 자신을 백석이 지어 준 이름 ‘자야’로 불러 달라고 부탁하고는 백석과 얽힌 지난날을 털어놓습니다. ▶젊었을 때의 자야 여사 이동순은 1차로 백석과 관련된 자야의 생애를 엮어서 에 ‘백석, 내 가슴 속에 지워지지 않는 이름’ 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발표하여 세상에 백석의 여인, 자야 여사의 존재가 알려집니다. 이 글이 나온 뒤에 어느 날 자야 여사에게 이동순은 백석과 보낸 3년간의 이야기를 써 보라고 권합니다. 자야는 백석과의 사랑의 세월에 대한 원고를 집필하는 과정에서 너무 무리를 해 두 번씩이나 병원에 입원하기도 했으나 평생을 사모한 사랑이기에 심혈을 기울여 1995년에 (문학동네)을 출간합니다, 이 책의 출간으로 미스터리로 남아 있던 백석의 삶이 비로소 복원된 것이지요. 생전의 자야 여사는 백석의 생일인 7월 1일이 되면 하루 동안 일체의 음식을 입에 대지 않았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연인 백석에 대한 그리움과 미안함을 그렇게라도 표현하고 싶었던 것이겠지요. 자야 여사에게는 백석의 시를 혼자 읽는 게 가장 큰 생의 기쁨이었다고 합니다. “백석의 시는 자신에게 있어 쓸쓸한 적막(寂寞)을 시들지 않게 하는 맑고 신선한 생명의 원천수였다.” 자야 여사는 1997년 창작과 비평사에 2억 원을 기부해 ‘백석문학상’을 제정하고, 이어 성북동 깊숙한 산자락에 있는 옛 대원각 7000여 평의 대지와 건물 40여 동 등 1천억 원 대의 재산을 법정 스님에게 시주하여 그의 법명 길상화(吉祥華)를 딴 길상사를 세웁니다. 이 일이 세인의 입에 오르내리자 자야 여사는 “없는 것을 만들어서 드려야 하는데, 있는 것을 내놓는 것이니 의미가 없다”는 말만 남기고 자신을 감추었습니다. 2000년 4월 길상사 경내에 세운 서울대 최종태 교수의 작품 관세음보살상. 성모상을 닮은 관세음보살상이라 하여 유명한데, 그 앞에 서면 자야 여사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백석과 자야, 그들의 사랑이야기를... 임종 열흘 전 문병 간 한 기자가 물었습니다. “그 사람 어디가 그렇게 좋았어요?” “천억이 그 사람 시 한 줄만 못해. 다시 태어나면 나도 시 쓸 거야.” 유언대로 자야 여사는 사후 화장되어 한겨울 눈이 하얗게 쌓인 길상사 마당에 뿌려졌습니다. 까치가 날아와 몹시 울었다고 합니다. 백석일까? 백석은 한동안 1963년경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2001년 뜻밖에도 이북에서 결혼한 두 번째 부인으로부터 가족사진과 함께 소식이 날아 들어와 그가 1995년 11월경 사망했음이 확인되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자야는 이 소식을 생전에 못 듣고 말았군요... 백석은 해방 후 민족주의 지도자 고당 조만식 선생의 비서를 지내면서 솔료호프의 을 번역하고 김일성종합대학에서 국문학을 강의했으며, 6ㆍ25 전쟁 중에는 중국에 머물다 휴전 후 귀국하여 협동농장의 현지 파견작가로 활동했다고 합니다.  ◀1980년대 만년의 백석. 두 번째 부인 리윤희씨, 둘째 아들 막내딸과 함께 찍은 가족사진. 자야 여사는 이 사진을 못 보고 타계했다.. ==================================================                            길상사 탐방기                 천재시인 백석과  대원각 여주인 김영한의 사랑이야기...                                                                                          옛 대원각 자리에 세워진 길상사 탐방기                            (북악스카이웨이,팔각정에서바라본 북한산)    모처럼 김영택화백님의 북한산 숙정문의 취재에 동참 하였다.... 골치아픈 일상사를 잠시 접고 잠깐 짬을 내어오후에 앞에 보이는 겔로퍼를 몰고 다녀왔다...    황사가 끼어 있는2월24일수요일2시경의 북악산의 전경은  우중충한 황사의 영향인지 시야가 확보되지 않았다...    팔각정 위의 전망대 망원경은 먼~ 발치의 서울 전경과 북한산을 바라 볼수있지만 숙정문은 청와대와 근접해 있어서 촬영이 금지 되고 있었다....     경비가 삼엄하고 취재 하기에는 너무 날씨가 흐려 나중에 취재 하기로 하고 삼청동으로 내려 오려다가 지나는 길에 길상사를 들르자는 나의 청에 김영택 화백님과 같이 들렀다.      (법고가 새롭게 만들어져있다..) 제3공화국시절 내노라 하는 요정이 많았지만 3대요정의 하나인  대원각은 80년대 들어서 회갑연이나 칠순잔치를 할라치면 상다리 휘어지게 한상 차림을 몇겹 얹어 어깨위에매고 손님을 맞이하던 유명한 요정이었다..      (새로 칠한 화려한 법고) 나도 회갑연이나 칠순잔치에 몇번 가 봤던 대원각은 그당시 기억엔 여름엔 계곡에서  많지 않지만 물이 흐르고 새소리가 들리는 경치가 좋은 곳이라 생각되었다... 그렇게 유명한 술과 음악과 여자가 어우러지는 화려한 요정이 어느날 갑자기 문을 닫는다..     (나무 기둥에 새겨진 용의 형상이 화려하다...) 대원각 소유자인 김영환보살이 '무소유'를 읽고.  법정스님께 대원각의 모든것을 시주 하려고 하였지만 무소유를 강조하시며 실천 하시는 법정스님의 뜻과는 거리가 멀었다      몇번의 간곡한 요청으로 법정스님은 길상사라는 절을 세워 마음의 도량을 세우신다.. 고 김영환 보살은 1932년 16세의 꽃다운 나이에 진향기생으로 시작하여 어느날 함흥 영생고보 영어교사인 백석과의 만남의 사랑으로 긴나긴 기다림을 가진다...      (방문 한 날에는 극락전 현판을 달고 있었다...) 그 하룻밤의 사랑은 백석,집안이 명문가의 집안이라  반대가 아주 심했다 자야는 백석집안의 반대로 인연을 이룰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헤어져 있으며 시인 백석을 기다리며 내사랑으로 간직하며 죽는날까지 천재시인 백석을 기린다.     (제 3공화국시절 고급 요정인 유명한 대원각 건물...) 하룻밤의 사랑으로 서로의 마음을 간직한체 백석은 고 김영환 보살에게 자야'(子夜)라는 아호를한지에 써서 편지와 함께 남기고 홀로 떠나간다...       백석과의 못다한 사랑을 간직한체 자야는 성북동 배밭골인 지금의 터에서 첨암정이라는 한식당을 운영한다.      수많은 정치인과 많은 단골의 구애를 뿌리치고 천재시인을 기다리며 대원각이라는 요정을 운영하다. 1997년12월14일싯가 1000여억원의  7000여평 넓은땅을 무 보시로 시주한다..     그당시 싯가 1000억여원에 이르는 많은 돈을 아무 조건없이  시주한다는 것은 그 당시 상상하기 힘든 결정 이었을 것이다.       자야는 살아 생전에도 백석을 기리며 시인을 위하여 '백석상'을  만들기도 하였던 진정한 예술의 가치를 아는 기생 이었다.      당나라 이태백의 시에서 따온 중국의 변방 전쟁터로  떠난 남편을 기다리는 여인이 등장하는 자야오가 (子夜五歌)라는 시에서 따 왔다는 자야는 길상사라는 절을 열때.법정스님으로 부터 길상화(吉祥華)라는 법명과 염주 하나를 받아든 사랑의 기다림을 간직한 자야.      1999년11월14일 그녀는 사랑의 그리움만 간직한채 길상헌에서 생을 마감 하였다. 죽기 전날 그녀는 목욕 재계하고 절에 참배하고 하룻밤을 길상헌에서 자고 생을 마감 하였다고 한다..      84살의 적지도,많지도 않은 생을 살다간 자야의 하룻밤의 심정은 어땟을까? 아마 첫사랑을 간직한 젊을적의 백석을 그리워하며 가진것없이 모든것을 희사한 무 보시를 한  기쁨으로 가볍게 이승을 훌훌 털고 생을 마감했으리라..      나는 이돌 앞에서 자야의 아름다운 사랑의 드라마가 펼쳐진  옛 대원각의 자리인 길상사에서 오후의 시간을 보냈다.     길상사에서의 오후 하루는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여행이 유명한 경치나 관광지나 보는것이 아니라 스토리가 있는 작지만 정감이 가는 곳이 좋다는 생각이 든다.       길상사를 떠나기 직전 화장실에 들어갔더니 넓고 정감이 가는 목재로 화장실을 만들어져 있었다 유리창이 시원하게 펼쳐져있는 하늘이 보이는 화장실. 화장실을 보는 일도 생리적인 것을 떠나 마음의 편함을 갖는다.             백석은 말년을 북한에서 힘들게 보냈다는 기사를 본 일이 있다. 체제에 맞는글을 쓸수가 없으니 번역을 주로 했다고 한다. 영어뿐만 아니라 러시아어에도능통했던것 같다. 우리가 잘 아는 러시아 시인 '푸쉬킨'이 쓴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말라' 라는 詩의 번역도 일본인이 쓴 걸로 되어있었으나 사실은 백석이 처음으로 번역을 했다는 기사를 본 일이있다.                                                                                                                                         김    진    식       길상사의 유래      ***우리나라 3대 요정중 하나였던 대원각의 주인이 법정스님께 시주한 사찰인 길상사            천재시인 백석과 대원각의 기생 김영한의 사랑이야기를 담고 있는 길상사 ***       제 3공화국 시절 삼청각 청운각과 함께 3대 요정이 었던 대원각, 대원각의 주인이었던 기생이 법정 스님께 시주하면서 사찰이된 길상사.   열여섯 나이에 기생된 김영한씨는 춤 노래 문학이 뛰어나 스승의 도움으로 일본으로 유학을 한 신여성으로, 스승이 감옥에 투옥되어 면회길에서 시인 백석을 만나 첫눈에 사랑을 하게 되었다. 시인 백석은 영어교사를 그만하고 둘은 3년의 사랑을 하지만...   부모는 기생과 동거하는 아들을 못마땅하게 생각해 강제로 떼어놓기 위해 결혼을 시키지만 ...  이런 식으로 강제 결혼을 하고 다시 도망치기를 세 차례 그때마다 김영한을 찾아오지만, 결국 남북이 분단되어 영원한 이별을 한다. 백석은 북한 재북작가로...    김영한은 대원각으로 많은 돈을 모았다.   이렇게 모은 평생 재산 중 현금 2억원은 '백석문화상'으로 기금하고...   대원각의 모든 전각과 땅은 법정스님께 시주하게 되었다.        1000억원이 넘는 재산이 아깝지 않느냐는 어느 기자의 질문에,      "1000억이 그 사람 시 한 줄만도 못해, 다시 태어나면 나도 시 쓸꺼야" 라고...       박정희 전 대통령시절 서울의 유명한 3대 요정이라면 삼청각 청운각 대운각을 손꼽을수 있다. 당시막강한 권력의 정치인들이 자주찾던 최고급 요정으로 숱한 여인들의 애환이, 당시 절대권력자들과 한때를 풍미했던 곳이기도한 대원각 요정.... 이곳의 안주인 김영한이라는 여주인이 있었다.   1997년 이곳안주인 김영한 여사는 당시 불교계에 연을맺고있던 법정스님에게 대원각을 시주하려는 뜻을 밝힌다. 7천여평의 대지에 40여동의 건물로이루어진 요정 대원각 ,당시시세로도 1000억이넘는 어마어마한 재산, 그러나 무소유를 말씀하시며 받지않으려는 법정스님, 결국,법정스님은 대원각을 대한불교 조계종 송광사 말사로 등록하여 '길상사' 라는 절로 다시 태어난다.     이날 법정스님은 김영한 할머니에게 길상화(吉祥華)라는 법명을 지어주고 108염주 한벌을 길상화 공덕주에게 걸어준다. 그리고 길상화의 이름을 따서 이절의 이름을 길상사(吉祥寺)라 정하게 되었다 한다.     그후 길상화는 길상사 경내를 산책하면서 "나죽으면 화장해 길상사 경내에 뿌려주시오" 유언을하고 이튿날인 11월14일 108염주를 목에건채 파란만장한 83세의 일기를 마친다.    그해 49재를 지내고 그의 유언대로 길상사 경내에 스님들이 그의 재를 뿌려주었다.   길상사는 천주교와도 연(緣)이 깊은데 개원법회때는 역시 고인이되신 김수환 추기경이 참석하기도 했으며, 2000년엔 천주교신자인 최종태씨가 성모마리아 상과 흡사한 형태의 관세음 보살상을 조각해 봉헌하여 경내에 안치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연유로 지금도 길상사 경내에 수녀님들과 천주교 신자모습을 종종 볼수 있다 역사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지만 이런 연유에서 많은 사람들이 즐겨찾는 사찰이가도 한다네요.   성모 마리아상과 닮은 관세음 보살상   (캐톨릭과 불교는 의식이 비슷한게 참 많은것 같습니다, 위의 관세음 보살상, 특이하고 참 예뻐요...)   김영한 할머니, 길상화와 시인 백석(白石)의 소설같은 휴먼 러브스토리.   서울에서 태어난 김영한은 집이 몰락하자 가난한 탓에 16살의 어린 나이에 몸이약한 신랑에게 팔려갔다. 우물가에서 빨래를하는사이에 남편은 그만 우물에 빠져 죽는다. 시어머니의 고된 시집살이에 끝내, 눈물을 머금고 집을 나온그녀는 가족을 먹여 살리기위해스스로 한성 기생 진향(眞香)으로 다시 태어난다 가무와 궁중무를배워 서울의 권번가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젊은시절 김영한과, 18세 기생 진향(眞香)   잡지에 수필을 발표할정도로 시와 글, 글씨, 그림에도 재능이 뛰어난 기생이었다. 스물 세살때 흥사단과 조선어학회에서 활동했던 스승 신윤국의 도움으로 일본 도쿄 유학을 떠나게 된다. 하지만 스승이 투옥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귀국해 함흥 감옥을 찾아가지만 면회를 거절 당한다.   그리하여 신지식 여성에서 다시 기생의 길을 택한그녀, 함흥기생이 되면 지역유지의 도움으로 스승의 모습을 볼수있으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이때 시인 백석과 운명적인 만남이 시작된다.   시인 白石.     천재시인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백석은 그녀를 위해   란 시를 썼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燒酒를 마신다   燒酒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김영한보다 네살더 많았던 시인 백석은 일본 유학을 마치고 함흥 영생여고 영어 교사로 있다가 우연히 만난 기생 김영한과의 첫만남에서 그녀의 손을 잡고 다짐한다.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때까지 이별은 없을것" 이라고 하지만 백석의 집안에서 아들이 기생에게 빠져있다는 소식을 듣고 서둘러다른여자와 결혼을 시키게된다.  그러나 결혼식날밤 집을 빠져나온 백석은 영한에게 달려와 만주로 달아나자고 설득하지만 그에게 걸림돌이될것같은 마음에 영한은 끝내거절하자 1939년에 혼자 만주로 떠난다. 이것이 이들두사람사이의 영원한 이별이 된것이다.   백석은 만주를 유랑한뒤 해방이 되어 다시 함흥으로 돌아왔지만, 이미 영한은 다시 서울로 돌아간뒤여서 만날수없었고 그것이 영원한 이별이 되었다.   이후 평생 백석을 그리워한 김영한은 1996년 2억원을들여 "백석 문화상"을 제정하고 같은해에 대원각을 시주하게 된다. 침묵의 집 맞은편에 무소유를 몸소 실천한 김영한 할머니의 공덕비가 세워져 있다.   길상화 공덕비   金英韓 여사의 일화   어느날 백석은 진향(김영한 기생이름)이 사들고 온 시집을 뒤적이다, 이백의 시 "자야오가(子夜吳歌)를 발견하고서는 그에게 자야(子夜)라는 아호를 지어준다. 자야오가는 장안에서 서역지방으로 오랑케를 물리치러나간 낭군을 기다리는여인, 자야의 애절한 심정을 노래한 시이다.   한때 고등학교 교과서에는 이백의 춘하추동 오언율시 중에서 가을편이 '장안달 밝은반에'로 소개된적있다. 이백외에도 중국의 여러 시인들이 자야가를 썼다.백석이 하늘이 맺어준 여인에게 '자야'라는 아호를 붙여준것은 자신에게 닥칠 운명을 알고 있었던것이 아닐까하는 생각도 든다.   김영한은 '내사랑 백석' 에서 이렇게 회상하고 있다. '아마도 당신은 두사람의 처절한 숙명이 정해질 어떤 예감에서 , 혹은 그 어떤 영감에서 이 '자야'라는 이름을 지어주셨던것은 아닐까.'   백석이 당시로서 최고의 직장인 고보영어교사 자리를 그만두게 된것도 자야 때문이었다. 이런일도 있었다. 백석은 조선축구학생연맹전 대표선수 인솔교사로 서울에 와서는 학생들만 여관에 투숙시켜놓고 자신은 정작 청진동 자야의 집에서 사랑을 불태웠다. 이사실이 밝혀져 함흥여고보는 발칵 뒤집어 졌고 이에 백석은 미련없이 자야의 옆에있기위해 사표를 던지지만 운명은 그의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   자야가 죽기전 젊은 기자가 김영한 여사에게 물었다. *.천억대 재산을 내놓고 후회하지 않으세요?" '무슨 후회?"   *.그사람생각을 언제 많이 하나요?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는데 때가 있나?'   *.천억을 내놨으니 만복을 받으셔야지요. "그게 무슨소용있어.."   *.다시태어난다면... 한국에서? 나..,한국에서 태어나기 싫어. 영국쯤에서 태어나서 文學할거야."   *.그사람 어디가 그렇게 좋았어요? "천억이 그사람 詩 한줄만도 못해" "다시 태어 난다면 나도 시를 쓸거야"    -- 평생 사랑한사람을 못잊어 다시 그사람의 뒤를 따르겠다는 여사의 일념이당시 여인상을 대변하는것 같다--     상사화     잎이지고나면 꽃이 핀다는 상사화, 두사람의 사랑이 잎과 꽃이 영원히 만날수없는 상사花 같은 사랑이었을까?   80평생을 보통사람들과는 다른 인생을 살다가신분, 1999년 12월어느날, KIST(한국과기대)에 김영한여사의 유언장한통이 전달되었다. 한국 과학기술 영재 양성에 써달라는 유언과 함께 100억원이 넘는 여사소유의 부동산을 기부하고는...     무소유의 고귀함을 몸소 실천하고 가신분... 기생 眞香. 金英韓 女史.....                 한국 시가 낳은 가장 아름다운 시  백석의 시는 국내 시문학사상은 말할 것도 없고 세계시문학 사상 가장 아름다운 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해방이 되기 전까지의 주옥같은 시 110여 편은 시인으로서 남길 수 있는 가장 뛰어난 시를 우리 국민들에게 선사를 해 주었다.  백석의 초기시들은 그대로 고향의 정취가 가득한 풍경호를 연상케하는 수준 높은 명시들로 이루어졌고 시집 사슴 이후의 시들에 해당하는 중기의 시들은 시인 백석의 성숙해져가는 서정적 자아가 펼치는 주옥같은 명음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더욱 놀라운 것은 중기시들을 지나서 백석의 후기시들이다. 만주시절을 중심으로 해방이 되기 전까지의 작품들은 한국시가 바라는 가장 바람직한 시편들로 이루어져 있다. 〈수박씨, 호박씨〉를 필두로 해서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까지의 시들이 그것이다. 친구를 노래한 〈허준〉이나 만주의 목욕탕을 묘사한 〈조당에서〉 그리고 〈두보나 이백같이〉와 〈북방에서〉 그리고 〈힌 바람벽이 있어〉나 심지어 남의 시집에 써준 서문격인 〈호박꽃초롱 서시〉는 백석이 위대한 시인이라는 것을 알리는 시금석이기도 했다.  백석의 아름다운 시 중의 하나인 〈나 취했노라〉는 친구인 노리다께 가쓰오에게 개인적으로 써 준 시였다. 술을 마시면서 둘의 우정이 변치 말자는 뜻에서 백석이 술에 취해 일본인 친구에게 일본말로 끄적거려 써준 시였다. 이 시를 받아본 일본의 시인 노리다께 가쓰오는 평생 백석의 시를 찬미하고 백석을 우러르는 백석의 열광적인 지지자가 되었다.  시 한편으로 일본의 시인을 감복케 한 백석. 그 결과 평생 백석을 흠모하는 시인이 된 노리다께 가쓰오. 국경을 초월한 우정이 지금도 빛나고 있는 것이다. 정녕 이것이 시인의 역량이 아닌가 한다. 이것이 시인 백석의 찬란한 면모가 아닌가 한다.  ================================================     짧은 사랑에 긴 이별   ㅡ시인 백석과 자야 여사와의 사랑               밤이 깊었습니다. 병실의 밤이 고즈넉합니다. 백석! 그대 이름을 또다시 불러봅니다. 세상은 저를 ‘백석의 애인 자야 여사’라고 부릅니다. 제 나이 어느덧 여든셋, 이번에는 걸어서 퇴원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깊어가는 이 밤에 그대와의 추억을 더듬어봅니다.     제가 그대를 처음 만난 것은 1936년 가을, 함경남도 함흥에서였지요. 그대는 시집 『사슴』을 낸 그해, 조선일보사 기자직을 그만두고 함흥시의 영생고보 영어교사로 와 있었습니다. 그대는 평북 정주군 갈산면 익성동에서 난 촌사람인데 2년여 서울 생활에 지쳐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영생고보에 있던 문학평론가 백철 씨가 같이 있자며 불렀고, 에라 머리나 식히자고 함흥으로 왔던 것이지요. 일본 청산학원 영문과를 우등으로 나온 실력에 서울서 시집을 낸 유명한 시인이라 영생고보에서 아주 인기 있는 선생님이었습니다.     저는 그때 스물두 살 꽃다운 나이였고 그대는 스물여섯 살이었습니다. 저는 서울 관철동에서 태어나 일찍 부친을 여의고 할머니와 홀어머니 슬하에서 성장했습니다. 금광을 한다는 친척에게 속아 집안이 망하자 1932년 조선권번에 들어가 기생이 되었습니다. 한국 정악계의 대부였던 금하 하규일 선생의 지도를 받아 여창 가곡과 궁중무 등 가무의 명인으로 성장했지요. 1935년 조선어학회 회원이던 신윤국 선생의 후원으로 일본에 가서 공부하던 중 신 선생이 함흥형무소에 투옥되자 저는 면회차 귀국하여 함흥에 잠시 머물러 있었습니다.     처음 만난 자리에서 저를 옆에 와서 앉으라고 한 그대는 술잔을 저한테만 권하면서 관심을 보였지요. 자리가 파하여 헤어지면서 “오늘부터 당신은 내 마누라요”라고 말했지만 그 말이 진심이라고 어찌 생각했겠습니까. 제가 사는 하숙집에 수시로 찾아와 만주에 가서 살자는 말을 불쑥 내뱉곤 하셨는데 그 말씀 또한 진심임을 그때는 알 도리가 없었습니다. 제 손목을 들여다보며 “어이구, 요런 손목을 하고 그 바람 찬 만주 땅을 어찌 가서 살겠나” 하셨지요.     저는 기생이었기에 그대의 ‘숨겨 놓은 애인’이 될 수는 있었을지언정 처는 될 수 없었습니다. 우리의 운명은 여기서 이미 결정이 나 있었던 게지요. 그대는 제가 선물한 『당시선집』에 나오는 이백의 「자야오가(子夜吳歌)」를 읽고 저를 ‘자야’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그때부터 저의 본명 김영한은 사라지고 그대의 자야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때 서울에서 사시던 그대의 부모님은 장가를 가라고 성화였지요. 쉰이 넘은 그대 어머니가 손자를 보고 싶다고 조바심을 냈지요. 한 집안의 장남이 객지를 떠도니까 가정을 꾸려 안정을 취하라고 친척들도 번갈아 가며 충고했습니다. 저 역시도 속마음은 그렇지 않았지만 좋은 배필을 만나야지, 기생 치마폭을 잡고 있으면 되겠느냐고 성혼을 부추기곤 했습니다.     그 다음해 그대는 집에 다녀왔는데, 혼례를 치른 뒤 사흘 만에 달아나듯이 집을 나와 함흥으로 온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대 곁을 떠날 때가 되었음을 알고 보따리를 싸서 서울로 왔습니다.     1937년 4월에는 그대에게 충격적인 일이 벌어졌습니다. 4월 7일에 그대가 마음에 두고 있었던 처녀 란(蘭)이 결혼을 해버린 것입니다. 그것도 그대와 가장 가까운 친구였던 신현중이란 분과. 저는 그저 애인 정도였고, 란이란 분과 결혼을 하기 원했던 것 같은데 무너진 사랑탑이 돼버린 것입니다.     다시 그 다음해, 그러니까 1938년 봄이었지요. 저는 청진동에 작은 집을 구해 기예를 닦고 있었는데 웬 아이가 쪽지를 들고 찾아왔습니다. ‘몇 달 만에 이렇게 찾아온 사람을 허물하지 마시고 나 있는 데로 속히 와 주시오.’     제일은행 부근 오뎅집에서 그대를 보는 순간, 모든 원망은 눈 녹듯이 사라지고 저는 평생 그대를 사랑하며 살아갈 운명임을 깨달았습니다. 밤차로 함흥으로 떠나는 그대를 배웅하면서 저는 그대의 아내가 누구이던지 간에 평생 사랑하리라 굳게 결심했습니다.     영생고보 축구부 지도교사였던 그대는 전선(全鮮) 고보 축구대회에 참가하려고 선수들을 인솔해 서울로 다시 왔습니다. 와서는 선수들을 돌보지 않고 일주일 내내 저한테만 와 있던 것이 문제가 되어 영생여고보로 전보발령이 납니다. 선수들이 유흥장에 간 것이 합동단속교사에게 적발된 것입니다. 몇 달 뒤 그대는 사표를 써 우편으로 부치고는 다시 서울 생활을 시작합니다. 『여성』지 편집을 하다가 조선일보사로 다시 들어갔지요.     그대는 저와 청진동에다 아예 살림을 차렸습니다. 마당 한 뼘 없는 작은 한옥이었지만 안방과 건넌방, 그리고 쪽마루가 딸린 작은 찬방으로 된 집은 우리의 단란한 보금자리였습니다. 그대의 시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에 나오는 “아내와 같이 살던 집”은 바로 이 집을 가리키는 것이지요. 넥타이를 하나 선물했더니 보는 사람마다 좋다고 하더라며 저녁 때 들어와서 몇 번이고 넥타이 잘 고른 제 안목을 칭찬해 주던 그대의 자상함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저는 제 생애에서 그때만큼 밥 짓는 것이 즐거웠던 적이 없습니다. 그대는 고기보다는 나물반찬을 좋아했지요.     그대의 첫 부인은 아마도 크게 낙심한 채 친정으로 갔을 것입니다. 저와의 살림살이를 알고 있던 그대 부모님은 아들의 마음을 바로잡고자 새장가를 들이기로 했습니다. 1939년 6월이었지요. 그대는 충청도 진천으로 출장을 다녀오겠다고 했습니다. 아, 그쪽 사람과 혼인을 하러 가는구나, 저는 짐작했습니다. 부모님 말씀에는 절대적으로 복종해 온 그대인지라 부모님의 간청을 뿌리칠 수 없었을 테지요. 보름이 넘게 아무 소식이 없자 저는 마음을 독하게 먹고는 짐을 싸 명륜동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두 달이 지난 어느 날이었습니다. 해가 뉘엿뉘엿 서산으로 넘어갈 시각에 집 뒤로 난 골목길에서 “자야-”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망설이다가 에라 얼굴이나 보고 완전히 헤어지자고 얘기해야지 하는 생각에 황급히 나가 보았습니다. 그대는 석양을 등지고 퀭한 얼굴로 서 있더군요. 저의 독한 마음은 또 눈 녹듯 스르르 사라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대는 새색시를 버려두고 또다시 저한테 달려온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남의 눈을 의식해야 하는 이런 사랑이 오래 지속될 수는 없었습니다.     그대는 모든 것 다 팽개치고 만주로 가서 숨어살고 싶었나 봅니다. 저한테 같이 가자고 몇 번 권했지만 저는 기생으로서의 제 생활이 있었기에 고개를 저었습니다. 그해 말, 그대는 만주의 신경으로 떠났습니다. 오랜 꿈을 이룬 것이겠지요. 그대의 역마살을 제 사랑이 부족하여 붙들지 못한 것이 천추의 한이 됩니다. 토마스 하디의 소설 『테스』를 번역하여 출간하고자 서울에 잠시 다녀간 것이 1940년이었고 그 이후 그대는 남쪽으로 발걸음을 하지 않았습니다. 만주 안동으로 옮겨 세관업무를 보기도 했다지만 함흥고보 제자가 찾아가 보니 중년의 초라한 모습이 되어 있었고 생활도 궁핍하게 보였다고 합니다.     38선에 철조망이 놓이고, 전쟁이 일어나고, 그대의 소식은 더 이상 들려오지 않게 됩니다. 저는 해방 후 요정 ‘대원각’을 인수했습니다. 장안 최고 요정의 명성을 이어갈 수 있었지만 허전한 마음을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 그대가 월북시인이 아니었음에도 월북시인으로 간주되어 시가 읽히지 못한 세월이 참으로 길었지요. 이동순 시인의 노력으로 그분의 첫 전집이 나온 것이 1987년, 이때부터 저도 할 일이 생겼습니다. 시인 백석의 명예를 회복시키는 일에 이제는 제가 나서야 하겠다고 결심을 했습니다.     요정은 불교계에 기증하였고 재산을 정리하여 2억원을 만들었습니다. 그 돈을 백석문학상의 제정에 써달라고 기탁했습니다. 그래서 백석문학기념사업 운영위원회가 만들어졌고, 백석문학상이 제정되었습니다.     백석 시인은 한낱 기생에 지나지 않는 저에게 남편으로서의 사랑을 베풀어 주셨고, 저는 그 은혜에 조금 보답했을 따름입니다.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자야 여사는 1999년에 작고하였다. 월북시인이 아니라 재북(在北)시인이었던 백석은 1945년 말 북한에서 재혼했으며, 슬하에 3남 2녀를 두었다. 1962년부터 1995년 사망할 때까지 33년 동안 붓을 꺾고 시인이 아닌 농민으로 살아간 백석― 남쪽의 자야 여사가 그렇게 자신을 그리워하고 있다는 것을 모른 채 살다 갔다는 것도 분단의 비극이 아닐 수 없다.     ㅡ『빠져들다』에서     여기의 김영한 여사는 언제 시인이 가장 보고싶냐는 기자의 말에 사랑하는 사람을 그리워 하는때가 따로있겠냐는 대답을 했고 대원각을 길상사로 봉헌할때 백억이 아깝지 않냐는 물음에 "백억도 백석시인의 시 한줄만 못하다 했다고 합니다.                             길상사 탐방기                 천재시인 백석과  대원각 여주인 김영한의 사랑이야기...                                                                                          옛 대원각 자리에 세워진 길상사 탐방기                            (북악스카이웨이,팔각정에서바라본 북한산)    모처럼 김영택화백님의 북한산 숙정문의 취재에 동참 하였다.... 골치아픈 일상사를 잠시 접고 잠깐 짬을 내어오후에 앞에 보이는 겔로퍼를 몰고 다녀왔다...    황사가 끼어 있는2월24일수요일2시경의 북악산의 전경은  우중충한 황사의 영향인지 시야가 확보되지 않았다...    팔각정 위의 전망대 망원경은 먼~ 발치의 서울 전경과 북한산을 바라 볼수있지만 숙정문은 청와대와 근접해 있어서 촬영이 금지 되고 있었다....     경비가 삼엄하고 취재 하기에는 너무 날씨가 흐려 나중에 취재 하기로 하고 삼청동으로 내려 오려다가 지나는 길에 길상사를 들르자는 나의 청에 김영택 화백님과 같이 들렀다.      (법고가 새롭게 만들어져있다..) 제3공화국시절 내노라 하는 요정이 많았지만 3대요정의 하나인  대원각은 80년대 들어서 회갑연이나 칠순잔치를 할라치면 상다리 휘어지게 한상 차림을 몇겹 얹어 어깨위에매고 손님을 맞이하던 유명한 요정이었다..      (새로 칠한 화려한 법고) 나도 회갑연이나 칠순잔치에 몇번 가 봤던 대원각은 그당시 기억엔 여름엔 계곡에서  많지 않지만 물이 흐르고 새소리가 들리는 경치가 좋은 곳이라 생각되었다... 그렇게 유명한 술과 음악과 여자가 어우러지는 화려한 요정이 어느날 갑자기 문을 닫는다..     (나무 기둥에 새겨진 용의 형상이 화려하다...) 대원각 소유자인 김영환보살이 '무소유'를 읽고.  법정스님께 대원각의 모든것을 시주 하려고 하였지만 무소유를 강조하시며 실천 하시는 법정스님의 뜻과는 거리가 멀었다      몇번의 간곡한 요청으로 법정스님은 길상사라는 절을 세워 마음의 도량을 세우신다.. 고 김영환 보살은 1932년 16세의 꽃다운 나이에 진향기생으로 시작하여 어느날 함흥 영생고보 영어교사인 백석과의 만남의 사랑으로 긴나긴 기다림을 가진다...      (방문 한 날에는 극락전 현판을 달고 있었다...) 그 하룻밤의 사랑은 백석,집안이 명문가의 집안이라  반대가 아주 심했다 자야는 백석집안의 반대로 인연을 이룰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헤어져 있으며 시인 백석을 기다리며 내사랑으로 간직하며 죽는날까지 천재시인 백석을 기린다.     (제 3공화국시절 고급 요정인 유명한 대원각 건물...) 하룻밤의 사랑으로 서로의 마음을 간직한체 백석은 고 김영환 보살에게 자야'(子夜)라는 아호를한지에 써서 편지와 함께 남기고 홀로 떠나간다...       백석과의 못다한 사랑을 간직한체 자야는 성북동 배밭골인 지금의 터에서 첨암정이라는 한식당을 운영한다.      수많은 정치인과 많은 단골의 구애를 뿌리치고 천재시인을 기다리며 대원각이라는 요정을 운영하다. 1997년12월14일싯가 1000여억원의  7000여평 넓은땅을 무 보시로 시주한다..     그당시 싯가 1000억여원에 이르는 많은 돈을 아무 조건없이  시주한다는 것은 그 당시 상상하기 힘든 결정 이었을 것이다.       자야는 살아 생전에도 백석을 기리며 시인을 위하여 '백석상'을  만들기도 하였던 진정한 예술의 가치를 아는 기생 이었다.      당나라 이태백의 시에서 따온 중국의 변방 전쟁터로  떠난 남편을 기다리는 여인이 등장하는 자야오가 (子夜五歌)라는 시에서 따 왔다는 자야는 길상사라는 절을 열때.법정스님으로 부터 길상화(吉祥華)라는 법명과 염주 하나를 받아든 사랑의 기다림을 간직한 자야.      1999년11월14일 그녀는 사랑의 그리움만 간직한채 길상헌에서 생을 마감 하였다. 죽기 전날 그녀는 목욕 재계하고 절에 참배하고 하룻밤을 길상헌에서 자고 생을 마감 하였다고 한다..      84살의 적지도,많지도 않은 생을 살다간 자야의 하룻밤의 심정은 어땟을까? 아마 첫사랑을 간직한 젊을적의 백석을 그리워하며 가진것없이 모든것을 희사한 무 보시를 한  기쁨으로 가볍게 이승을 훌훌 털고 생을 마감했으리라..      나는 이돌 앞에서 자야의 아름다운 사랑의 드라마가 펼쳐진  옛 대원각의 자리인 길상사에서 오후의 시간을 보냈다.     길상사에서의 오후 하루는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여행이 유명한 경치나 관광지나 보는것이 아니라 스토리가 있는 작지만 정감이 가는 곳이 좋다는 생각이 든다.       길상사를 떠나기 직전 화장실에 들어갔더니 넓고 정감이 가는 목재로 화장실을 만들어져 있었다 유리창이 시원하게 펼쳐져있는 하늘이 보이는 화장실. 화장실을 보는 일도 생리적인 것을 떠나 마음의 편함을 갖는다.             백석은 말년을 북한에서 힘들게 보냈다는 기사를 본 일이 있다. 체제에 맞는글을 쓸수가 없으니 번역을 주로 했다고 한다. 영어뿐만 아니라 러시아어에도능통했던것 같다. 우리가 잘 아는 러시아 시인 '푸쉬킨'이 쓴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말라' 라는 詩의 번역도 일본인이 쓴 걸로 되어있었으나 사실은 백석이 처음으로 번역을 했다는 기사를 본 일이있다.                                                                                                                                         김    진    식       길상사의 유래      ***우리나라 3대 요정중 하나였던 대원각의 주인이 법정스님께 시주한 사찰인 길상사            천재시인 백석과 대원각의 기생 김영한의 사랑이야기를 담고 있는 길상사 ***       제 3공화국 시절 삼청각 청운각과 함께 3대 요정이 었던 대원각, 대원각의 주인이었던 기생이 법정 스님께 시주하면서 사찰이된 길상사.   열여섯 나이에 기생된 김영한씨는 춤 노래 문학이 뛰어나 스승의 도움으로 일본으로 유학을 한 신여성으로, 스승이 감옥에 투옥되어 면회길에서 시인 백석을 만나 첫눈에 사랑을 하게 되었다. 시인 백석은 영어교사를 그만하고 둘은 3년의 사랑을 하지만...   부모는 기생과 동거하는 아들을 못마땅하게 생각해 강제로 떼어놓기 위해 결혼을 시키지만 ...  이런 식으로 강제 결혼을 하고 다시 도망치기를 세 차례 그때마다 김영한을 찾아오지만, 결국 남북이 분단되어 영원한 이별을 한다. 백석은 북한 재북작가로...    김영한은 대원각으로 많은 돈을 모았다.   이렇게 모은 평생 재산 중 현금 2억원은 '백석문화상'으로 기금하고...   대원각의 모든 전각과 땅은 법정스님께 시주하게 되었다.        1000억원이 넘는 재산이 아깝지 않느냐는 어느 기자의 질문에,      "1000억이 그 사람 시 한 줄만도 못해, 다시 태어나면 나도 시 쓸꺼야" 라고...         박정희 전 대통령시절 서울의 유명한 3대 요정이라면 삼청각 청운각 대운각을 손꼽을수 있다. 당시막강한 권력의 정치인들이 자주찾던 최고급 요정으로 숱한 여인들의 애환이, 당시 절대권력자들과 한때를 풍미했던 곳이기도한 대원각 요정.... 이곳의 안주인 김영한이라는 여주인이 있었다.   1997년 이곳안주인 김영한 여사는 당시 불교계에 연을맺고있던 법정스님에게 대원각을 시주하려는 뜻을 밝힌다. 7천여평의 대지에 40여동의 건물로이루어진 요정 대원각 ,당시시세로도 1000억이넘는 어마어마한 재산, 그러나 무소유를 말씀하시며 받지않으려는 법정스님, 결국,법정스님은 대원각을 대한불교 조계종 송광사 말사로 등록하여 '길상사' 라는 절로 다시 태어난다.     이날 법정스님은 김영한 할머니에게 길상화(吉祥華)라는 법명을 지어주고 108염주 한벌을 길상화 공덕주에게 걸어준다. 그리고 길상화의 이름을 따서 이절의 이름을 길상사(吉祥寺)라 정하게 되었다 한다.     그후 길상화는 길상사 경내를 산책하면서 "나죽으면 화장해 길상사 경내에 뿌려주시오" 유언을하고 이튿날인 11월14일 108염주를 목에건채 파란만장한 83세의 일기를 마친다.    그해 49재를 지내고 그의 유언대로 길상사 경내에 스님들이 그의 재를 뿌려주었다.   길상사는 천주교와도 연(緣)이 깊은데 개원법회때는 역시 고인이되신 김수환 추기경이 참석하기도 했으며, 2000년엔 천주교신자인 최종태씨가 성모마리아 상과 흡사한 형태의 관세음 보살상을 조각해 봉헌하여 경내에 안치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연유로 지금도 길상사 경내에 수녀님들과 천주교 신자모습을 종종 볼수 있다 역사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지만 이런 연유에서 많은 사람들이 즐겨찾는 사찰이가도 한다네요.   성모 마리아상과 닮은 관세음 보살상   (캐톨릭과 불교는 의식이 비슷한게 참 많은것 같습니다, 위의 관세음 보살상, 특이하고 참 예뻐요...)   김영한 할머니, 길상화와 시인 백석(白石)의 소설같은 휴먼 러브스토리.   서울에서 태어난 김영한은 집이 몰락하자 가난한 탓에 16살의 어린 나이에 몸이약한 신랑에게 팔려갔다. 우물가에서 빨래를하는사이에 남편은 그만 우물에 빠져 죽는다. 시어머니의 고된 시집살이에 끝내, 눈물을 머금고 집을 나온그녀는 가족을 먹여 살리기위해스스로 한성 기생 진향(眞香)으로 다시 태어난다 가무와 궁중무를배워 서울의 권번가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젊은시절 김영한과, 18세 기생 진향(眞香)   잡지에 수필을 발표할정도로 시와 글, 글씨, 그림에도 재능이 뛰어난 기생이었다. 스물 세살때 흥사단과 조선어학회에서 활동했던 스승 신윤국의 도움으로 일본 도쿄 유학을 떠나게 된다. 하지만 스승이 투옥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귀국해 함흥 감옥을 찾아가지만 면회를 거절 당한다.   그리하여 신지식 여성에서 다시 기생의 길을 택한그녀, 함흥기생이 되면 지역유지의 도움으로 스승의 모습을 볼수있으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이때 시인 백석과 운명적인 만남이 시작된다.   시인 白石.     천재시인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백석은 그녀를 위해   란 시를 썼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燒酒를 마신다   燒酒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김영한보다 네살더 많았던 시인 백석은 일본 유학을 마치고 함흥 영생여고 영어 교사로 있다가 우연히 만난 기생 김영한과의 첫만남에서 그녀의 손을 잡고 다짐한다.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때까지 이별은 없을것" 이라고 하지만 백석의 집안에서 아들이 기생에게 빠져있다는 소식을 듣고 서둘러다른여자와 결혼을 시키게된다.  그러나 결혼식날밤 집을 빠져나온 백석은 영한에게 달려와 만주로 달아나자고 설득하지만 그에게 걸림돌이될것같은 마음에 영한은 끝내거절하자 1939년에 혼자 만주로 떠난다. 이것이 이들두사람사이의 영원한 이별이 된것이다.   백석은 만주를 유랑한뒤 해방이 되어 다시 함흥으로 돌아왔지만, 이미 영한은 다시 서울로 돌아간뒤여서 만날수없었고 그것이 영원한 이별이 되었다.   이후 평생 백석을 그리워한 김영한은 1996년 2억원을들여 "백석 문화상"을 제정하고 같은해에 대원각을 시주하게 된다. 침묵의 집 맞은편에 무소유를 몸소 실천한 김영한 할머니의 공덕비가 세워져 있다.   길상화 공덕비   金英韓 여사의 일화   어느날 백석은 진향(김영한 기생이름)이 사들고 온 시집을 뒤적이다, 이백의 시 "자야오가(子夜吳歌)를 발견하고서는 그에게 자야(子夜)라는 아호를 지어준다. 자야오가는 장안에서 서역지방으로 오랑케를 물리치러나간 낭군을 기다리는여인, 자야의 애절한 심정을 노래한 시이다.   한때 고등학교 교과서에는 이백의 춘하추동 오언율시 중에서 가을편이 '장안달 밝은반에'로 소개된적있다. 이백외에도 중국의 여러 시인들이 자야가를 썼다.백석이 하늘이 맺어준 여인에게 '자야'라는 아호를 붙여준것은 자신에게 닥칠 운명을 알고 있었던것이 아닐까하는 생각도 든다.   김영한은 '내사랑 백석' 에서 이렇게 회상하고 있다. '아마도 당신은 두사람의 처절한 숙명이 정해질 어떤 예감에서 , 혹은 그 어떤 영감에서 이 '자야'라는 이름을 지어주셨던것은 아닐까.'   백석이 당시로서 최고의 직장인 고보영어교사 자리를 그만두게 된것도 자야 때문이었다. 이런일도 있었다. 백석은 조선축구학생연맹전 대표선수 인솔교사로 서울에 와서는 학생들만 여관에 투숙시켜놓고 자신은 정작 청진동 자야의 집에서 사랑을 불태웠다. 이사실이 밝혀져 함흥여고보는 발칵 뒤집어 졌고 이에 백석은 미련없이 자야의 옆에있기위해 사표를 던지지만 운명은 그의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   자야가 죽기전 젊은 기자가 김영한 여사에게 물었다. *.천억대 재산을 내놓고 후회하지 않으세요?" '무슨 후회?"   *.그사람생각을 언제 많이 하나요?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는데 때가 있나?'   *.천억을 내놨으니 만복을 받으셔야지요. "그게 무슨소용있어.."   *.다시태어난다면... 한국에서? 나..,한국에서 태어나기 싫어. 영국쯤에서 태어나서 文學할거야."   *.그사람 어디가 그렇게 좋았어요? "천억이 그사람 詩 한줄만도 못해" "다시 태어 난다면 나도 시를 쓸거야"    -- 평생 사랑한사람을 못잊어 다시 그사람의 뒤를 따르겠다는 여사의 일념이당시 여인상을 대변하는것 같다--     상사화     잎이지고나면 꽃이 핀다는 상사화, 두사람의 사랑이 잎과 꽃이 영원히 만날수없는 상사花 같은 사랑이었을까?   80평생을 보통사람들과는 다른 인생을 살다가신분, 1999년 12월어느날, KIST(한국과기대)에 김영한여사의 유언장한통이 전달되었다. 한국 과학기술 영재 양성에 써달라는 유언과 함께 100억원이 넘는 여사소유의 부동산을 기부하고는...     무소유의 고귀함을 몸소 실천하고 가신분... 기생 眞香. 金英韓 女史.....           [출 처]  시인 백석의 이야기 - 의정부 제일의 네일샵 이브스네일|작성자 이브스  
859    윤동주시인 선배와 그 후배 댓글:  조회:5110  추천:0  2016-01-05
“윤동주 선배가 나와 같은 의자에 앉아 공부했다니…”       야나기하라 야스코 대표가 윤동주 시인이 1942년 일본 릿쿄대학 재학 시절 공부했던 교실을 안내하고 있다.  시인 윤동주를 기리는 릿쿄의 모임 야나기하라 야스코 “여기가 윤동주가 실제 수업을 받았던 것으로 추정되는 교실입니다. 저도 이 교실을 사용한 적이 있지요.” 지난달 30일 오전, 도쿄 이케부쿠로에 자리한 릿쿄대학 캠퍼스는 하얀 눈에 뒤덮여 있었다. ‘시인 윤동주를 기념하는 릿쿄의 모임’(이하 릿쿄의 모임)을 이끌고 있는 야나기하라 야스코(68)가 1942년 윤 시인 재학 시절 그대로인 본관, 채플과 지금은 전시관이 된 도서관 등을 직접 안내했다.   73년 전 젊은 윤동주는 이곳에서 식민지 지식인이라는 부끄러움을 안은 채 “대학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를 들으러”(‘쉽게 씌여진 시’)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겼을 것이다. 야나기하라는 “그는 단순한 저항보다 더 깊은 보편적인 가치를 추구한 시인이었고, 인간으로서도 청아함을 갖추고 있었다. 그런 사람을 죽게 한 일본인으로서 속죄하는 마음”이라고 말했다.     90년 아들에게 한일 과거사 가르치다 윤 시인이 릿쿄대 선배란 사실 발견 “안타까운 죽음 충격…유학 흔적 추적” 릿쿄시절 하숙집 위치 찾아내기도   “저항 넘어 보편 가치 추구한 지성” 올해(2015) 70주기 맞아 유품 등 순회전시     릿쿄대학 사학과 64학번인 야나기하라가 윤동주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우연한 기회였다. 25년 전인 90년 초등학생 아들이 한국으로 야구 원정경기를 떠나게 됐다. 아들에게 한국이란 나라에 대한 역사를 설명하다 자신이 생각보다 한-일 과거사를 잘 모른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이를 계기로 지난 역사를 공부하던 그는 일본에 한국의 현대시를 소개해온 작가 이바라키 노리코(1926~2006)의 에세이에서 깜짝 놀랄 만한 구절을 발견하게 된다. 윤동주가 자신의 모교인 릿쿄대학에서 공부한 적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야나기하라는 “윤동주가 릿쿄의 선배로 나와 같은 의자에 앉아 수업을 들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니 도무지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겨우 20여년 전에 자신과 같은 대학에 다녔던 이가 “그렇게 이해할 수 없는 안타까운 죽음을 당했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이후 그는 “한국에선 조사하기 힘든 윤동주의 일본의 흔적을 조사하는 일”을 시작한다.   윤 시인은 42년 4월부터 10월까지 6개월 정도 이곳에 머물렀다. 이후 교토의 도시샤대학으로 편입한 그는 43년 7월 치안유지법 위반(독립운동 등의 혐의)으로 체포돼 복역 중이던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45년 2월16일 숨졌다.   야나기하라는 지난 20여년 동안 릿쿄 동창생이라는 ‘장점’을 활용해 옛날 대학신문을 찾거나 150여명의 동창생에게 편지를 보내는 방식으로 그동안 베일에 가려져 있던 윤동주의 일본 생활의 공백을 하나씩 메워가기 시작한다.   이 가운데 그가 확인한 가장 큰 성과는 윤동주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쉽게 씌여진 시’에서 “육첩방은 남의 나라”라고 표현했던 릿쿄 시절 하숙집의 위치를 ‘도쿄 신주쿠구 다카다노바바 1초메’로 특정한 것이다. 야나기하라는 윤동주와 함께 릿쿄대학에 다녔던 백인준(1920~99) 북한 조선문학예술총동맹 위원장이 89년 문익환 목사와 북한을 방문했던 작가 황석영에게 “윤동주와 같은 하숙에 있었다”는 증언을 남긴 사실에 착안해 그의 학적부 주소 등을 통해 하숙지의 위치를 특정해낼 수 있었다.   이런 사실을 알고 보니 윤동주가 ‘사랑스런 추억’에서 “봄은 다 가고 도쿄 교외 어느 조용한/ 하숙방에서/ (중략)/ 오늘도 기차는 몇번이나 무의미하게 지나간다”고 말했던 기차역은 현재의 제이아르(JR) 다카다노바바역으로 추정이 된다.   이미 70년 전에 숨진 타국의 시인을 기억하는 게 일본인들에겐 어떤 의미가 있을까. 야나기하라는 “현재 일본은 위험한 사회적인 상황에 놓여 있다. 물론 우리가 죽게 한 시인이지만, 그 가운데 윤동주가 살아온 방식과 그 시에 대해 우리가 배울 수 있는 부분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윤동주는 시대의 가치관에 미혹되지 않고 긴 시야에서 보편적인 가치를 끌어내왔다.   그는 키르케고르와 같은 실존철학을 열심히 공부했고 그래서인지 그가 70년 전에 쓴 시가 보편적인 힘을 갖고 지금까지 전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실제 릿쿄의 모임에서 매년 2월 말에 진행하는 윤동주 추도식에는 그의 시를 사랑하는 300~400여명의 일본인들이 모이고 있다.   올해는 윤동주가 비운의 죽음을 맞은 지 70돌이 되는 해다. 야나기하라는 이를 기념해 그의 흔적이 남아 있는 일본 도시들인 후쿠오카(5~9일), 교토(13~17일), 도쿄(21~15일) 등을 돌며 유품과 유고를 전시하는 행사를 준비 중이다. 이 행사는 윤동주의 조카인 윤인석(58) 성균관대 건축학과 교수가 2013년 2월 연세대에 기증한 윤동주의 유품의 복제본을 연세대에서 빌려 진행하는 것이다.   야나기하라는 “윤동주는 책에다 자신의 감상이나 구입처 등을 꼼꼼하게 적어 놓았다. 그런 낙서까지 꼼꼼하게 재현한 복제품이기 때문에 원본과 같은 느낌을 받을 수 있다. 특히 그는 정지용의 시집에는 ‘걸작’이라는 낙서를 남기기도 했다”고 말했다.   도쿄/글·사진 길윤형 특파원  ...릿쿄대학교에서의 흔적... ...짧은 6개월의 동경생활... ...... 여러분은 에 살고 계신가요?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6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 볼까,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 주신 학비 봉투를 받아 대학 노우트를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 들으러 간다. 생각해 보면 어린 때 동무들 하나, 둘, 죄다 잃어 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하는 것일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쓰여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6첩방은 남의 나라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858    詩人을 만드는 9가지 비망록 댓글:  조회:4014  추천:0  2016-01-05
시인을 만드는 9가지 비망록                                  _정일근       1. 슬픔이 시인을 만든다     나를 시인으로 만든 것은 ‘슬픔’이었다. 그 슬픔에 힘입어 처음 “시인이 돼야겠다”는 꿈을 가진 것은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그 전 해 4월, 벚꽃의 도시 진해에서 나는 ‘아비 없는 자식’이 되었다. 아버지가 없는 빈자리에 제일 먼저 슬픔이 찾아왔다.     아버지의 생몰 연대는 길 위에서 끝이 났다. 그 날 아버지는 당신의 오토바이에 어머니를 태워 마산에 있는 친척 댁에 다녀오시는 길이었는데, 길 위에서 택시가 아버지의 생을 덮치고 뺑소니쳐 버렸다.     의식불명이 되어 안방으로 돌아오신 아버지는 고통스럽게 숨을 쉬고 계셨지만, 군의관이었던 아버지 친구는 단호하게 사망진단을 내렸다. 사인은 뇌진탕. 마산에서 진해로 출발하며 아버지는 자신의 헬멧을 어머니에게 씌어주셨다. 그 헬멧으로 아버지와 어머니의 운명은 바뀌었다. 두 분 다 허공으로 솟구쳤다 도로 위로 내동댕이쳐졌지만 아버지의 헬멧이 어머니를 구했다. 그것이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베푼 마지막 사랑이었다.     아버지의 부재만이 나를 슬프게 만든 것이 아니었다. 아버지가 떠난 자리에 가난도 찾아왔다. ‘?갚으러 오는 사람 보다 빚 받으러 오는 사람이 많아’ 아버지의 재산은 소위 ‘빚잔치’로 순식간에 사라졌다. TV도 사라지고 집도 사라지고 할아버지의 논과 밭도 사라졌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다니는 고모는 남루한 일곱 평 반 홉의 양철지붕 아래로 숨어들었고, 어머니는 연탄 부뚜막에 나와 여동생을 재우며 밤늦게까지 술을 팔았다. 친구들이 TV를 보는 시간 나는 술을 날랐다. 친구들이 고급 양장의 동화책을 읽던 시간 나는 안주를 날랐다. 우리 반 고 계집애가 피아노를 치던 시간 나는 손님들이 술자리에서 부르던 이미자, 배 호, 나훈아의 슬픈 유행가나 군인들의 군가를 배웠다.     아버지가 없다는 슬픔이 나를 눈물 많은 아이로 만들었고, 그 눈물이 나를 세상에 대해 조숙하게 처신하게 만들었다.     그 시절 내가 친구들보다 뛰어난 것은 도박과 교과서에 나오는 시나 시조 외우기였다. 두 장의 화투 ‘끗발’로 승자로 가리는 도박으로 친구들의 돈을 따면 만화방에 하루종일 처박혀 있거나 중국집에서 자장면이나 군만두를 사먹기도 했다.     그리고 나는 시나 시조를 잘 외운다는 이유 하나로 담임 선생님에 의해 문예반으로 보내졌다. 문예반 지도 선생님은 나에게 시조를 가르쳤다.     뜻밖에도 경남도 대회에 참가할 진해시 대표를 뽑는 백일장에서 나는 장원을 했다. ‘산’이란 제목이었다. 고백하자면, 초등학교 5학년 때 나는 개근상 외에 처음 “상”이라는 것을 받은 것이다. 어려운 형편에 월부로 안데르센 동화전집까지 사주시며 기뻐하시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며 나는 시인이 되고 싶었다. 시인이 되어 서른 초반에 홀로 되어 남매를 키우는 슬픈 어머니의 삶을 기쁘게 해드리고 싶었다.     나는 오랫동안 아버지를 미워했다. 아버지의 부재로 우리 가족이 해체됐기 때문이었다. 나는 아버지가 내 시 속에 등장하는 것을 금기했다. 아버지는 그 때 내 손등에 났던 사마귀처럼 감추고 싶은 상처였다. 시인이 되어서도 그 상처가 시의 소재가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도 아버지가 되고, 아버지의 나이가 되어서 내 시가 아버지에게서 나온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미워한 것은 아버지가 아니라, 너무 일찍 길 위에서 끝나버린 아버지의 생이었다. 나는 시로써 아버지와 화해를 시도하며 “아버지의 달걀 속에서 내가 태어나고/내 달걀 속에서 아버지가 태어난다”고 썼다. 아버지란 큰 슬픔이 나를 시인으로 만들었다.     2. 사랑도 시인을 만든다     그대, 4월의 진해를 기억하는가. 눈이 귀한 남쪽의 부동항 진해는 4월이면 눈이 내렸다. 그 작은 도시의 인구수와 비슷한 벚나무들은 따뜻한 겨울을 보내고 4월이 오면 일시에 꽃을 피우고 바람이 불면 꽃잎을 눈처럼 뿌려주었다.     꽃이 피어서 질 때까지, 그 기간 동안 ‘군항제’란 잔치가 열렸다. 그랬다. 그것은 축제라는 현대성을 띤 이름보다 잔치였다.     내가 5학년 1학기까지 다녔던 도천초등학교 주변에 만들어 진 벚나무 숲. 어른들이 ‘사쿠라 마찌’라 부르던 그 곳이 벚꽃 잔치의 장이었다.     잔치의 하객은 후줄근한 양복에 중절모를 쓴 남자들과 한복과 고무신을 신은 여자들. 그들은 장구와 꽹과리로도 최신 유행가의 가락을 맞추고 잔치의 끝은 언제나 술과 노래였다. 그리고 잔치가 끝나면 그 파장 위로 자주 봄비가 내렸다.     세상은 빠르게 변했다. 새로운 봄이 찾아올 때마다 도시의 증가하는 인구처럼 늘어나는 벚나무들은 더욱 화사한 설국을 만들고 잔치는 축제로 변했다. 분수탑 로터리에서 해군 군악대 연주와 의장대의 시범이 열리고 그 모습에 넋을 놓고 있는 사이 축제의 밤이 찾아와 도심의 벚나무에 걸린 축등에 불이 켜지고, 밤하늘에는 현란한 폭죽이 터졌다.     흑백TV도 귀했던 시절, 4월이면 밤하늘에 상영되는 총천연색의 불꽃놀이를 보면서 유년을 보냈다는 것은 축복이었다. 또 하나 잊을 수 없는 생의 축복. 그 4월에 나는 첫사랑을 했다.     중3이 되었다. 나는 ‘눈물이 많던 아이’에서 ‘시를 쓰는 소년’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아버지를 잃은 나는 사람들이 꽃이 피는 축제의 기쁨만 알 뿐, 꽃이 지는 축제 뒤의 슬픔은 알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축제의 즐거움 보다 축제가 끝난 뒤의 비 내리는 파장을 좋아했다.     축제의 항구도시를 찾아 밀물처럼 몰려온 사람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며 만들어 놓는 또 다른 바다에서 나는 작고 외로운 섬이 되어 홀로 있는 것을 좋아했다.     바람에, 혹은 비에 떨어진 꽃잎을 밟으며 슬픔의 시를 쓰는 소년으로 변해버려, 문예반 선생님은 나이보다 조숙한 눈물의 시를 쓰는 나를 안타깝게 바라보시곤 했다.     내가 다니던 중학, 진해남중은 바다가 보이는 산중턱에 자리한 하얀 건물이었다. 나는 교실에서 바다를 볼 수 있는 것이 좋았다. 남쪽으로 열린 창문을 통해 빛나던 푸른 바다와 작은 섬들. 무시로 찾아오던 건강한 소금 바람. 봄이면 운동장 아래 보리가 누렇게 익고, 가을이면 등교길이 되던 코스모스 꽃길. 그 시절 내가 한 첫사랑은 나에게 기쁨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었다. S.영문 이니셜로 호명할 수밖에 없는 그녀. 그 때까지 내 감정의 전부였던 슬픔을 비워내고 그 자리에 기쁨을 채워주었던 소녀.     우리는 4월, 벚나무 아래에서 처음 만났다. 진해역 옆 청산학원 앞에 서있던 벚나무였다.(불행하게도 그 나무는 지금은 베어지고 없다.) 친구의 소개로 만난 우리는 단숨에 가까워졌다.     나는 시를 쓰듯 사랑의 편지를 보냈다. 그 동안 내가 썼던 어느 글보다 아름다운 글을 소녀의 주소로 보냈다. 그 편지들은 내 최초의 사랑시편들이었고 소녀는 최초며, 유일한 독자였다.     같은 도시에 살고 있었지만 멀리 떨어져 있었던 우리는 그 때 아름다운 약속 하나를 했다. 아침마다 라디오에서 알리는 7시 시보 소리에 맞춰 서로를 그리워하는 성냥불을 켜기로 했다. 성냥불을 밝히며 나는 그 사랑이 영원할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모든 첫사랑이 그러하듯 나의 첫사랑도 이별로 끝나버렸다. 기쁨이 자리했던 가슴에 다시 슬픔이 찾아왔다.     그러나 그 슬픔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셨을 때의 슬픔처럼 나를 눈물 많은 사람으로 만들지 않았다. 눈물대신 나는 시를 택했다. 사랑이, 첫사랑이 내 시를 더욱 튼튼하게 만들어 주었다.     3. 펜혹이 시인을 만든다     펜혹이란 말이 있다. 컴퓨터 세대에게는 생소한 말일 것이다.     펜이나 연필로 글을 쓰는 사람의 손에는 반듯이 펜혹이 남아 있다. 오래 글을 쓰다보면 펜을 받치는 가운데 손가락에 혹 같은 굳은 살이 박힌다. 그것이 펜혹이다.     펜혹은 글쓰기의 상처다. 그러나 그 상처는 시인을 만들어 주는 통과의례와 같다. 나는 펜혹이 없는 시인의 손은 신뢰하지 않는다. 펜혹은 시인에게만 남는 상처가 아니다. 무릇 필업을 사는 사람들은 펜혹의 두께가 문학과 정신의 두께를 말해 준다.     대학시절 나는 내 손에 생기는 그 굳은 살의 이름을 몰랐다. 단지 보기 싫고, 불편했을 뿐이다.     어느 날 스승을 뵈러갔다 놀라운 모습과 조우하고 말았다. 스승은 칼로 펜혹을 깎아내고 계셨다. 사면이 책으로 둘러싸인 스승의 방에는 작은 판 하나가 놓여져 있고 그 위에 2백자 원고지가 펼쳐져 있었다. 무더운 여름이었고, 스승은 그 때 ‘한국문학사’를 집필하고 계셨다.     푸른 칼날을 가진 연필깎이 칼로 가운데 손가락의 굳은 살을 베어내며 스승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평생 펜으로 글을 쓰다보니 장지에 펜혹이 생겼어. 자주 깎아내지 않으면 글을 쓸 수가 없어.”     스승의 글쓰기는 그 펜혹이 대변해주었으며 스승은 펜혹으로 글쓰기가 불편해지면 칼로 굳은살을 깎아내고 다시 글을 쓰셨다. 한 편의 논문이 완성되기까지, 한 권의 책이 만들어지기까지 스승은 얼마나 많은 당신의 살을 깎아내셨을까. 나는 두려움과 부끄러움이 동시에 느꼈다. 스승의 펜혹은 산과 같은 모습이었고, 내 펜혹은 흔적에 지나지 않았다. 스승의 펜혹은 나에게 가르쳐 주었다. 글쓰기는 자신의 살을 깎아내는 고통이며, 그 고통없이 글을 쓴다는 것은 부끄러움이라는 것을.     그 이후 펜혹은 내 습작시대의 화두였다. 나도 펜혹이 생기도록 시를 썼고, 펜혹을 깎아내며 시를 썼다.     진해시 여좌동 3가 844번지. ‘옛집 진해’에서 습작시대를 보냈다. 나는 대학생이었으며, 아내와 두 아이를 둔 가장이었다. 시대는 질곡의 80년대 초였다. 역사는 표류하고 있었고, 미래는 불투명하고 불안했다. 취하지 않는 밤이면 연습장 위에, 노트 위에 시를 적었다. 모나미 볼펜을 꼭 잡은 손가락에 펜혹이 자라고 새벽이면 머리 위에 파지가 무더기로 쌓였다.     그 시절 모든 문학도의 꿈이 그러했듯이 나도 신문사로부터 노란색 신춘문예 당선전보를 받고 싶었다. 그것이 삶의 유일한 목표였고 그 목표점에 도달하기 위한 글쓰기가 내 삶의 전부였다.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학년말 시험을 포기하고 원고지 위에 피 같은 시를 써 투고를 했다. 그리고 오래 동안 집에서 당선 전보를 배달해 줄 우체부의 오토바이 소리를 기다렸다. 우체부는 찾아오지 않았다. 새해 첫날이면 진해의 6개 중앙일간지 신문지국을 돌며 1월1일자 신문을 빠짐없이 구해 당선자 명단을 확인하며 절망했다. 그 당시 유행했던 대학생 현상문예에서 함께 활동했던 하재봉 안재찬(류시화) 안도현 등이 신춘문예를 통해 화려하게 시인으로 등단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더욱 절망했다.     그러나 나는 다시 시를 쓸 수밖에 없었다. 시를 쓰는 일이 나에게는 전부였다. 습작시대였던 대학시절, 나는 시만 썼다. 강의실에서도 고개 숙여 시를 썼으며 자면서도 시를 생각했다. 펜혹은 점점 커졌으며 그 상처를 자주 깎아냈다. 그리고 펜혹 덕분에 대학 4학년 겨울, 나는 신춘문예 당선 전화를 받았다.     문예창작과 첫 강의에서 나는 언제나 학생들에게 ‘책을 손으로 읽어라’고 가르친다. 펜으로 문학작품을 옮겨 적으며 손가락에 펜혹이 생기도록 문학에 최선을 다하라고 말한다. 컴퓨터 시대라해도 누구도 펜혹이라는 상처가 없이 시인을 꿈꿀 수 없기에.     4. 분노도 시인을 만든다     지난 91년 도서출판 빛남에서 묶은 내 두 번째 시집 ‘유배지에서 보내는 정약용의 편지’에 수록된 시편들 중에 이런 구절이 있다.     그 숨막히는 더위     고물 선풍기가 뿜어주는 더운 바람 앞에서     나는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적의로 괴로워했다     아무도 내 이름을 불러주지 않았다     미성숙의 벽에는 우울한 시대의 푸른 곰팡이가 피고     숨어서 김지하의 시들을 몰래 읽으며     늘 혁명 전야처럼 살고 싶었다     적의, 우울한 시대, 김지하, 혁명 전야,.그런 말들과 함께 나의 성년식이 시작됐다. 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담임선생님이 권유하셨던 K은행 입행 대신 대학진학을 선택했다. 가장인 어머니의 가계는 여전히 가난했지만 아들의 장래가 걱정되셨는지 대학진학을 허락하셨다.     대학에 입학하고 내가 맨 처음 눈을 뜬 것은 시와 역사의 현주소였다. 나는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교과서에 나오는 시들만이 시의 전부라고 알고 있었다. 문예부장까지 지냈던 상고시절 진해에서 마산까지 버스 통학길이 지루해 가끔 박인환의 시들을 외웠고, 내가 가지고 있던 시집은 김소월 시집과 백일장에서 부상으로 받은 윤동주 시집, 단 두 권뿐이었다. 대학에 입학해서 창작과비평사에서 나오던 시집들을 읽고 쇠망치로 머리를 때리는 같은 충격을 받았다. 세상에 이런 시도 있으며, 시는 이렇게도 쓰는구나. 나는 비로소 작은 우물 밖을 나온 개구리였다. 그 개구리에게 시의 세상은 참으로 넓고 험했다. 그리고 그 때까지 내가 받은 문학교육이 편협됐다는 사실을 알았으며, 그런 현실에 절망하기 시작했다. 판금된 김지하 시집 필사본을 숨어서 읽으며 내가 살고 있던 시대에 분노하기 시작했다.     눈을 떠보니 교과서의 문학교육만 편협된 것이 아니었다. 역사는 왜곡되고 있었다. 어린 시절 시월의 유신은 김유신과 같아서 삼국통일 되듯이 남북통일 되지요 라고 신나게 불렀던 유신의 실체는 남북통일을 막는 최대 장애였으며, 유신 시대는 그 때도 계속되고 있었다.  진해에 있던 대통령 별장 덕에 어린 시절 대통령 행차 길에 나가 고사리 같은 환영의 손을 흔들며 좋아했던, 중절모를 쓴 박정희는 일본 육사출신의 독재자였다. 절망은 분노를 낳는다.그 분노 앞에서 나는 시와 역사에 복무할 것을 선서했다.     대학 1학년 나는 야학 선생이 되었다. 고등학교 과정이었다. 나보다도 나이가 많은, 대부분 현장 노동자였던 학생들을 가르치며 그들에게서 나는 더 많은 것을 배웠다. 대학 강의실보다 야학에서 배운 것이 더 많았다. 야학의 동료교사들 중에는 해군에 근무하는 학사석사장교들이 많았다. 그들에게서도 나는 많은 것을 배웠다. 문학평론가 정과리 형도 야학에서 만났다. 그는 대학원을 마치고 해군사관학교 교수로 군복무를 했는데 야학에 동참했다. 마산 양덕에 있던 그의 아파트 서재는 내 문학수업의 바다였다. 사면을 빼곡이 채운 그의 이론서들이 나를 가르쳤으며 그와 밤을 새워 마시던 술이 나를 성숙시켰다.     그 시절 나는 자주 분노했다. 그리고 분노는 혁명의 꿈으로 이어졌다. 혁명으로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 싶었다. 그러나 꿈은 꿈일 뿐, 내가 택할 수 있는 혁명의 방법은 시일 수밖에 없었다.     돌아보면 뒤틀린 현실과 바르게 흘러가지 않는 역사에 대한 분노가 시를 쓰게 만들었다. 시로써 현실에, 역사에 대해 혁명하고 싶었다. 야학 7년을 보내고 나는 야학일기 란 연작시로 당시 무크지였던 을 통해 분노의 시인이 되었다.     그러나 사랑이 없으면 분노도 없는 법.조국과 역사에 대한 사랑이 분노를 낳고 그 분노가 나를 시인으로 만들었다. 그대, 분노가 일면 터트려라. 분노도 시인을 만들기 때문이다.     5. 부끄러움이 시인을 만든다     습작시절 누구에게나 병이 생긴다. 이름하여 ‘신춘문예 병’. 그 시절을 보낸 사람들의 손에 아름다운 상처 ‘펜혹’이 생기듯, 이 병도 아름다운 병이다.     신춘문예. 굳이 말뜻을 풀이하자면 ‘새봄의 문학예술’이다. 그러나 신춘문예는 풀이하는 말이 아니라 그 자체로 뜻을 갖는 말이다. 문학을 지망하는 사람이라면 습작시절이라는 통과의례가 있고, 신춘문예는 그 통과의례 중 가장 치열한 과정의 다름 아니다. 그 치열함의 끝에 당도하는 사람만이 누리는 영광의 다름 아니다.     신춘문예 병은 신문사마다 1면에 신춘문예 현상공모 사고를 내는 11월초쯤 발병한다. 신춘문예라는 활자가 눈에 들어오는 순간 가슴이 뛴다. 혈관 속에서 문학의 피가 끓는 소리가 들린다. 문제는 그런 흥분된 상태가 응모 마감일 까지 계속된다는 것이다.     계절은 언제나 가을이 끝나가고 겨울이 서서히 찾아오는 때쯤이다. 심장과 피는 더워지지만 몸은 추워지고 등은 불안감으로 굽어진다. 말수도 줄어들고 침묵하는 시간이 길어진다. 가끔씩 왜 그렇게 긴 한숨이 터져 나오던지.     그 시절을 겪은 나의 대학성적표는 감추고 싶은 흉터와 같은 것이다. 그것은 신춘문예 병이 준 후유증이었다. 고백하자면 아슬아슬하게 낙제를 면한 점수다. 졸업학점이 1백60학점이었던 시절, 신춘문예 병 때문에 펑크난 학점을 맞춘다고 4학년 2학기에도 21학점을 신청해야만 했었다.     신춘문예의 마감과 학년말 시험기간은 늘 일치했다. 나는 그 두 길 앞에서 늘 미련도 없이 신춘문예의 길을 택했다. 친구들이 도서관에서 학년말 시험준비로 밤을 새울 때 나는 신춘문예 응모작품을 준비한다고 밤을 새웠다. 유신 시대, 군사독재 시대에서 학점을 얻기보다 신춘문예 당선시인 이란 이름을 얻고 싶었다. 언젠가 가지게 될 내 첫 시집의 약력에 신춘문예 당선이라는 빛나는 한 줄을 남기고 싶었다. 사범대학을 졸업하면 누구에게나 나오는 2급 정교사 자격증보다 먼저 시인이 되고 싶었다.     아직 그 시험답안지들이 남아있을까. 시험문제와는 무관한 글들만 써놓거나 백지로 제출했던 답안지들. 월영동 449번지, 나의 사랑 나의 대학. 사범대학으로 오르던 돌계단, 지칠 때마다 바라보던 푸른 합포만. 내 기억 속의 풍경들의 계절은 언제나 그 겨울이다. 사범대학 빈 강의실 한 구석에서 웅크리고 시를 쓰던 동면 직전의 곰 같았던 내 모습. 오지 않는 편지를 기다리며 우편함을 찾아가면 복도 쪽으로 눕던 긴 그림자. 환청처럼 갈가마귀 울음소리 들리던 시절.     더워졌던 피가 얼음처럼 차갑게 식는 기다림의 시간이 찾아오는 것도 신춘문예 병 후유증이다. 마감도 끝나고 시험도 끝나면 할 수 있는 일이란 낮에는 당선통지를 기다리는 일과 밤이면 술을 마시는 일 뿐이었다.     우체국에서 작품을 보내고 돌아와서부터 당선연락이 올 때까지의 그 막연한 기다림. 폭음과 함께 했던 확신과 장담은 시간이 지날수록 초조해지고 불안해지고 마침내 허탈해진다. 크리스마스 이브까지 당선 연락이 오지 않으면 더 이상 기다리지 말라는 동병상련 하는 도반들의 충고에도 혹시, 혹시 하며 기다리다 절망하다 받아보는 1월 1일자 신문. 그 신문에 실린 그 해 당선자들의 얼굴사진과 빛나는 작품들. 당선 시들을 읽은 뒤에는 지금까지의 기다림 보다 더 큰 부끄러움이 엄습했다.     그렇다. 그 부끄러움이 나를 성숙시켰다. 현재의 내 시가 어떤 자리쯤에 서있는지를 확인시켜주었던 부끄러움이 내 시의 뺨을 후려쳤다. 그리고 혹독한 추위의 겨울이 시작되고 뛰어난 그해 당선 시들을 읽으며 언젠가는 찾아올 내 문학의 봄인 신춘 을 기다렸던 것이다.  그대, 그런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고 문학을 꿈꾼다면 그 꿈은 욕심에 불과한 것이니, 다시는 신춘을 기다리지 마라.     6. 바람도 시인을 만든다     왜 그렇게 바람이 좋았는지 몰라.     열네 살 중학생이 걸어서 학교 가는 길이다. 보리밭 사이로 난 길을 걸어간다. 보리가 누렇게 익어 가는 오월이다.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와 소년의 이마를 짚는다. 바람의 손은 언제나 서늘하다. 소년은 멈추어 선다.     그 때 소년은 보았다, 바람의 몸을. 무형인줄로만 알았던 바람이 보리밭 위로 달아나며 드러내는 몸의 흔적을. “저게 바람의 몸이구나”라는 깨달음. 그것은 세상의 비밀 하나에 눈 뜬 기쁨이었다. 그러한 세상의 비밀을 찾는 것이 시고,그 일은 내가 해야하는 일이다고 생각했다.     열네 살 중학생이 걸어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다. 시 오 리쯤 되는 길이다. 보리가 누렇게 익어 가는 오월이다. 다시 바람이 분다. 함께 돌아가는 친구들은 보지 못하는 바람의 몸을 나 혼자 지켜보며 소년은 바람이 되고 싶었다. 온 몸으로 부는 바람이 되고 싶었다.  그러나 바람이 나에게 절망이었던 시간이 있었다.     열네 살 중학생은 열일곱 살 고등학생이 되어 백일장에 참석한다. 백일장의 시제가 ‘바람’이다. 열일곱 살은 자신에 차 있다. 일찍 바람의 몸을 보았기에. 이윽고 심사가 끝나고 입상자 명단이 방으로 붙는다. 열일곱 살은 실망한다. 자신의 이름은 어디에도 없다.     장원자가 호명되어 단상으로 나간다. 뜻밖에도 기라성 같은 상급생들을 모두 제치고 동급생 여학생이 장원이다. 단발머리 그 여학생은 당당하게 서서 자신의 바람을 노래한다.     ‘바람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그 첫줄에 나는 몸이 얼어붙는 충격을 받았다. 동급생 계집아이가 어떻게 저런 표현을 쓸 수 있는 것일까. 충격은 부끄러움으로 이어졌다. 부끄러움은 또 절망을 낳았다.     내가 바람의 몸을 보았을 때 바람의 존재를 생각하는, 같은 나이의 여학생의 정신세계와 언어능력에 미치지 못하는 내 자신이 미워졌다.     백일장이 끝나고 열일곱 살은 호수 곁에 앉아 고민에 빠진다. 어떻게 하면 동급생 계집아이와 같은 시를 쓸 수 있을까. 답을 찾지는 못했지만 열일곱 살은 자신에게 결여돼 있는 것이 무엇인지는 아는 표정이다.     열네 살과 열일곱 살에 만난 바람은 분명 다른 바람이었다. 나는 어제 불던 바람이 오늘 다시 분다고 생각하지 않게 됐다. 바람은 매일 매일 새롭게 태어난다. 새로 태어나는 바람에게는 새로운 이름이 필요하다. 그것이 오늘의 시다. 그리고 나는 오늘 부는 바람이 내일도 불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내일은 내일의 바람이 분다. 그것이 내일의 시다.     처음 만난 시의 화두가 바람이었기 때문일까. 나는 일찍부터 풍병이 들었다. 한 곳에 머물지 못하는 바람 같은, 바람병이 들었다. 나는 내 사주팔자를 보지 않았지만 내 사주와 팔자에는 세찬 바람이 불고 있을 것이다. 바람이 불어 평생을 떠돌게 하는 역마살이 끼어 있을 것이다. 그런 바람들이 나를 시인으로 키웠다.     머무는 것은 바람이 아니다. 바람은 부는 것이다. 분다는 것은 움직임, 시는 그런 움직임이다. 시인은 바람이기 위해 늘 깨어있어야 한다. 고여있는 것들은 시인을 만들지 못한다. 바람이 불기에 살아야 한다고 노래한 시인도 있다.     나는 바람의 길을 걸어 여기까지 왔다. 오는 동안 많은 사랑도 있었고 눈물도 있었다. 나는 앞으로도 부는 바람의 길을 따라 바람처럼 불어갈 것이다. 그것은 거부할 수 없는 시인의 운명이다.     언제나 나는 바람이고 싶다. 그대에게로만 부는 뜨거운 바람이고 싶은 것이다, 그대 나의 시여.     7. 길이 시인을 만든다     중학교 2학년 때 부산에서 진해까지 걸어온 적이 있다. 악동 친구들과 해운대 해수욕장에 놀러갔다가 집으로 돌아올 차비마저 다 유흥비(?)로 날려버렸기 때문이었다. 여름이었고, 우기였다.     우리는 해운대해수욕장에서 엄궁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엄궁에서 배를 타고 낙동강을 건너 명지로 가, 명지에서 다시 걸어 진해까지 갈 계획이었다.     친구 3명의 무사귀환을 책임져야 하는 내 주머니에는 1백20원이 숨어 있었다. 나는 그 돈으로 진해 인근인 웅천에서 버스를 탈 계획이었다. 다들 부모님에게 선생님과 함께 간다고 거짓말을 하고 떠난 여행이었기에 우리는 어디에도 구원을 요청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걸어가자.     무슨 중대한 결정이라도 내리듯 친구들에게 그렇게 선언하자 눈물이 핑 돌았다. 염소란 별명을 가진 친구도 찔끔거렸다. 그 때 내가 걸어가야 할 길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붉은 완행버스를 타고 떠나왔던 길. 그 먼길을 과연 걸어갈 수 있을까, 두려운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다른 길은 없었다.     믿는 것은 우리가 가진 A자형 군용 텐트, 알코올 버너, 라면 몇 봉지, 쌀 등과 열 다섯 살의 두 다리 뿐 이었다. 그래, 한 이틀 걸어가면 진해까지 갈 수 있을 거야. 가다가 어두워지면 길 위에서 자고 가지. 내가 앞장섰다. 결국 우리는 1박2일을 걸어서 진해로 돌아왔다. 내가 걸어본 최초의 장도였다. 그날 이후 나는 세상의 길에 대해 자신을 가졌다. 그리고 그 길을 걷고 난 후 내가 많이 성숙해졌다는 것도 느낄 수 있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는 진해에서 자전거를 타고 진주까지 갔다왔다. 그 높은 마진고개를 넘고, 더 높은 진동고개를 넘어 진주로 갔다. 친구의 친척집 작은 골방에서 새우잠을 자고, 내리는 비를 피해 다리 밑에서 밥을 먹었다. 역시 집으로 돌아오니 나는 성숙해져 있었다.  진해에서 마산까지 버스통학을 하던 고등학교 3년. 하교 길 자주 마진터널 검문소에서 내려 집까지 걸어왔다. 어둠의 산길,홀로 바스락거리는 낙엽을 밟으며 집으로 돌아오면 내 몸으로 스며든 길의 향기가 좋았다.     그 시절 우연히 목월 선생이 쓴 젊은 날의 비망록에서, 청년 박목월이 군용 모포 한 장만 들고 강원도에서 부산까지 걸어왔다는 글을 읽었다. 낮에는 해변에서 자고 밤에는 걸어서 동해의 길을 밟았다는 글을 읽고 전율했다. 나는 책을 읽다 일어서서 외쳤다. 떠나자. 길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그 길을 따라 떠나자.     그대, 길은 사람에게 사유의 시간을 가져다준다. 길을 걷는 사람은 누구나 혼자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여럿이, 함께 가는 길이라도 해도 어느 누구도 자신의 길을 걸어주지 않는다. 결국 길은 혼자 가는 길뿐이다. 혼자 가는 길이 사람을 성숙시켜 주고, 시를 깊어지게 만들어 준다.     길은 무엇보다도 그리움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준다. 가보지 않은 저쪽에 대한 그리움이 길을 만들었으니, 그리움이 없다면 길도 없었다. 길 위에서 혼자임을 아는 사람은 언제나 그리움의 따뜻함을 꿈꾼다. 그 따뜻함을 나는 서정이라 말하고 싶다. 홀로 길을 걸어보지 않은 사람은, 그 길 위에서 그리움을 꿈꾸지 않은 사람은 서정시인이라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길의 가장 큰 가르침은 고통이다. 그대, 길 위에서 혼자 맞는 저물 무렵과 일몰의 고통을 아는가. 타관을 지날 때 하나 둘씩 돋아나는 집들의 불빛들을 바라보며 떠나온 곳으로 등이 굽는 쓸쓸함.     아무도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지 않는 저녁이 찾아올 때 비로소 그리운 사람과 이름들. 저무는 길 위에서 고통을 느껴보지 않고서 사랑의 시를 쓸 수 없다. 등 배기는 길 위에서 고통의 칼날에 싹둑싹둑 잘리는 마디잠을 자보지 않은 사람 또한 시인이라 말할 수 없는 것이니, 그대 오늘 그 길 위에 서라.    8. 유행가도 시인을 만든다     내가 제일 처음 배운 유행가는 배호의 노래였다. 제목은 ‘누가 울어’. 그 때 나는 아버지가 없는 초등학교 4학년이었다. 어느 비오는 오후, 어머니가 흥얼거리는 그 슬픈 노래가 어린 나를 울렸다. 어머니 몰래 연습장에 노래가사를 적었다. 지금도 생생한 그 노래 1절은 다음과 같다.     ‘소리 없이 흘러내리는 눈물 같은 이슬비 누가 울어 이 한밤 잊었던 추억인가 멀리 가버린 내 사랑은 돌아올 길 없는데 피가 맺히게 그 누가 울어 울어 검은 눈을 적시나.’  그날 밤 나는 이불 속에서 어머니의 노래를 조용조용 불러보았다. 그리고 정말 ‘피가 맺히게’ 울었다. 어렸지만 노래에 담긴 홀어머니의 마음을 나는 알 수 있었다.     그 어린 시절 배호의 노래가 슬픔이 어떤 가락이며 어떤 색깔인지를 가르친 것이다.     어머니의 술집에는 유행가가 끊이지 않았다. 내 유행가 교실은 그 술자리였다. 막걸리 술 주전자를 나르며 나는 손님들의 유행가를 배웠다.     가게에서 일하던 형들의 유행가 책을 훔쳐 가사를 외웠고 장난감 아코디언으로 서툴게 멜로디를 쳐보기도 했다. 영화관에서 ‘미워도 다시 한 번’ ‘가슴 아프게’ 같은 영화를 보며 주제가를 배웠고, 쇼 공연에서 늘 제일 마지막에 출연하는 이미자의 노래를 함께 불렀다.     나는 세상의 슬픈 유행가가 내 마음을 그대로 옮겨 놓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유행가 가사 같은 시를 쓰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이미자의 “기러기 아빠”를 흉내낸 시를 적어 담임 선생님을 걱정시켜 드리기도 했다.     아버지가 우리에게 남겨주신 것은 가난뿐이었지만 나는 뜻밖에도 아버지가 남기신 글을 읽었다.     아버지는 달필이었다.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것 같은 고급노트에 아버지는 당신이 좋아하셨던 유행가 가사를 볼펜 글씨로 빽빽이 적어 놓으셨다. 나는 유품과 같은 아버지의 유행가 가사를 오랫동안 가슴에 담고 지우지 않았다.     30대에 세상을 떠나신 아버지도 노래를 좋아하셨다. 아버지가 좋아하신 노래는 가곡이나 명곡이 아니라 유행가였다. 아버지는 시골 할아버지 댁에서 축음기를 통해 노래를 듣기도 했고, 진공관 전축을 사서 노래를 자주 들으셨다. 무엇보다도 아버지는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나기 몇 십분 전에도 잠시 들른 아버지 친척 댁에서 전축을 틀어 놓고 누군가의 유행가를 열심히 들으셨다고 했다.     어머니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아버지의 유행가는 ‘갈대의 순정’뿐이다. ‘사나이 우는 마음을 그 누가 아랴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의 순정…’은 아버지의 지독한 애창곡이었다고 한다. 그런 유행가 만들어주는 60년대식 슬픔이 나에게 서정시를 쓰게 만들었고, 유행가는 내 서정의 자양분이 되었다.     나는 어느 자리에서 배호의 노래를 부를 줄 아는 시인과 부르지 못하는 시인은 구분되어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유행가를 딴따라라 한다. 나는 그 딴따라가 좋다. 흔히 대중적, 통속적이라는 감상이 시인에게는 따뜻한 자양분이 된다.     한국 시단에는 3배호가 있다. 대구의 서지월 시인이 서배호, 부산의 최영철 시인이 최배호, 울산의 나는 정배호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서배호는 배호와 똑같은 목소리로 노래를 하고, 최배호는 배호와 똑같은 모습으로 노래를 한다. 나는 그들의 노래를 들을 때마다 현재 우리 시단의 좋은 시인인 그들의 시가 유행가의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음치고 박치인 나는 폼만 배호다. 서배호, 최배호의 노래 뒤에는 앙코르가 있지만 내 노래는 앙코르가 없다. 그래도 나는 열심히 유행가를 부르고 듣는다. 유행가에서 시를 배웠기 때문이다.    9. 그 마지막엔 시만이 시인을 만든다     신문사는 새로 입사하는 수습기자에게 기사 작성법을 가르쳐주지 않는다. 종이밥을 먹던 신문기자 시절, 어느 누구도 나에게 기사 쓰는 법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     나이 들어 입사한 신문사라 후배를 선배로 모시고 경찰기자 생활이 시작됐다.1진은 서울 중부경찰서 기자실 소파에 앉아있고, 나는 남대문, 용산경찰서를 들개처럼 싸돌아다녔다.     내가 근무하는 신문사가 석간신문을 제작하고 있어 새벽같이 종합병원 영안실과 경찰서 형사계, 유치장을 돌고 1진에게 간밤의 사건과 사고를 전화로 보고한다. 그러면 1진은 뉴스가 될만한 것을 기사로 만들어 즉시 전화로 부르라고 한다.     교과서에서 배운 6하원칙을 적용하여 기사를 작성해 전화송고를 하면 욕설이 쏟아진다. 새벽부터 나이 어린 신문사 선배에게 듣는 욕은 사람을 참담하게 만들어준다. 남쪽에 두고 온 가족생각이 나고, 같이 욕설을 퍼붓고 때려치워 버리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다.1진의 지적은 정확했다. 내가 놓친 부분을 보지도 않고서 정확하게 찾아냈다. 부끄러움으로 얼굴이 달아오를 정도다.     1진은 그렇게 욕설로 지적을 할 뿐 3개월의 그 지독한 수습기간에 신문기사를 어떻게 쓰라는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     문화부 기자 생활을 할 때의 일이다. 강원도 백담사에 유배돼 있던 전두환 전대통령이 법회를 연다고 해서 취재지원을 나간 적이 있었다. 경쟁사의 기자들과 함께 취재를 하고 나는 끙끙대며 2백자 원고지 5장 정도 분량의 스케치 기사를 작성해 팩스로 보냈다.     그런데 경쟁사 모 선배기자는 기사를 작성하지도 않고 메모만 보고, 그것도 전화기를 들고 짧은 시간에 25장 분량의 기사를 송고하는 것을 보고 나는 놀라고 말았다. 그리고 과연 나는 신문기자의 자질이 있는 가하는 절망에 빠지고 말았다.     다행히 내 그런 좌절을 안 한 선배가 ‘신문기자의 교과서는 신문이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그 때서야 나는 신문을 통해 신문기사 쓰는 법을 새롭게 배우기 시작했다. 매일 매일 쏟아지는 신문을 펴놓고 좋은 기사는 옮겨 적어보고, 사건과 사고의 유형별로 좋은 기사들을 스크랩해 참고서를 만들었다. 신문 속에 내가 가고 싶었던 길이 숨어있었다.     시를 쓰는 일도 마찬가지다. 시 창작의 최고의 교과서는 시고, 시집이다. 그것도 좋은 시고 시집이어야 한다.     앞서 잠깐 언급한 적이 있지만, 나는 시인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좋은 시집을 권하고 무조건 필사할 것을 숙제로 내준다. 눈으로 읽는 리듬과 손으로 쓰며 배우는 리듬은 엄청난 차이가 있다. 나도 신춘문예 당선 전까지 참으로 많은 선배시인들의 시를 옮겨 쓰며 시 쓰는 법을 배웠다. 시인이 되려는 제일 마지막 관문은 선배들의 좋은 시와 시집이 나에게 시가 무엇이며, 시의 길이 어떤 것인지를 가르쳐 주는 것이었다.     내 친구 최영철 시인은 내 시집 발문에 나를 ‘타고난 시인’이라고 쓴 적이 있다. 너무 일찍 배운 슬픔으로 감성은 타고 났을지 몰라도 나 역시 ‘만들어진 시인’임을 고백한다. 손에 펜혹이 생기도록 좋은 시를 옮겨 적는 연습을 통해 시를 배웠다.     시인이 되는 교과서는 시인들의 시에 있고, 시집에 모여 있다. 시인은 시험을 통해 자격증을 받는 것이 아니다. 선배 시인들의 인정을 통해 시인이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주 멀리서 혹은 엉뚱한 곳에서 시인의 길을 찾는 사람들이 많은 현실이다.     나는 앞에서 많은 것들이 시인을 만들어 준다고 했다. 그런 것들 중 제일 마지막에 나를 시인으로 만들어 준 것은 시다. 시인이 된 다음에도 마찬가지였다. 후배라 할지라도 좋은 시를 발표하면 한 번 옮겨 적어보며 그 시의 비밀을 찾으려고 한다.     시인을 꿈꾸거나, 시인인 그대여. 시를 읽자. 시집을 읽자. 그것이 시인을 만들고, 시인의 깊이를 더욱 깊게 만들어준다.   
857    그림은 읽는 것, 詩는 보는 것... 댓글:  조회:4118  추천:0  2016-01-05
              그림은 읽는 것이고 詩는 보는 것이다. 그림과 詩는 공감하는 세계인 영상으로써의 4차원에 들어 간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선이나 면으로써 혹은 어떤 것으로서  모양을 만든다 추상이거나 구상이거나 든지 어떤 형태로써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詩는 다만 글로써 나타낸다 분명한 것은 詩는 어떤 세계이든지 나타날 것들을 글이라는 매개체를 이용하여  보여준다       우리는 색으로나 형상으로나 분명하게 눈으로 보는 것이 그림이다 본다라고 하는 것은 어떤것인가 형태를 눈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아는 것이다 앎의 전개를 따라간다 앎이 위대한 것은 만들어 내는 것 즉 자신만의 창조인 것이다 그림을 보면서 느끼며 전개되는  메세지를 인식하는 그것을 우리는 읽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선과 색과 면을 주어진 조건에서 던지는 메세지를 보는 것 같으나 기실은 읽으면서 자신의 앎의 세계를 읽고 있음이다 그러므로 그림은 마음으로 읽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시는 어떠한가 한구절 한구절을 되새겨보면서 타자는 작가가 던지는 메세지를  머리속에 그리며 형상으로메세지를 구체화 시켜 형체있는 사물로 전환하여 인식하며 영상으로 보게된다 결코 눈으로 직접 보지는 않지만 분명 전개되는 풍경임을 마음으로 보는 것이다 그것이 인식이다 자신의 눈으로 읽고 있지만 눈앞에 펼쳐진 한폭의 그림을 보는 것이다 그것이 영상물로 이어지던 스틸로 있던, 분명 우리는 시를 읽고 있으면서 감정으로 느껴진 형상으로 나타난 차원의 세계에 머물고 있는 순간이다. 형상의 세계에 들어가서 분명 인식하며 보고 있는 것이다       그림과 시는 쟝르야 분명 다르지만 나타내고자 하는 것은 같다. 표현이 다를 뿐이다 감정을 글로서 나타내고 그림으로써 나타낸다 느끼는 것은 관객의 몫이지만 읽는다는 것이 보는 것이고 보는 것이 읽는다는 것이 된다.       우리는 다름의 세계에서 삶을 이어간다 너와 내가 다름을 인정한다면 평등함 뿐이다 똑 같을 물건에서 느끼는 감정은  크다 작다 좋다 싫다 의 시시비비가 생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너와 내가  서로 다름을 잠시 잊고 지내는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소통의 한 복판에서 단  한번도 벗어날 수 없다 서로 같지 않고 다르기 때문에 소통은 반드시 필요하다 다름의 이면에는 서로 통할 수 있는 같음이 있음을 우리의 무의식 속에 잠재 되어 있음을 알고 있지는 않는지. 보는 것이 곧 읽는 것이고 읽는 것이 곧 보는 것이라는 것을.       내가 너가 되고 너가 내가 된다는 간단한 이치를 너무나 가볍게 지나치지는 않는 것인지. 어쩌면 서로에게 이해를 구하는 것조차도 욕심이라 싶다. 그림과 시는 보는 이나 읽는 이의 제 각각의 세계에서 읽고 보는 것이다 소통에서도 다만 너와 내가 그러하다면 그것은 단지 너의 이야기일 뿐이고 당연히 나는 나의 이야기일 뿐이다. 서로 다를 뿐이다       그림으로 표현하는 것을  읽고 詩로서 표현하는 것을 보듯이 표현의 방법이 다르다 읽고 보는 타자가 느끼는 세계도 다르다 상대방에게 내 생각에 따라주기를 바라는 그런 어거지를 범하는 일을 우리는 일상에서 배제해야만 한다 잠시 잠간 보는 것이 곧 읽는 것이라고 읽는 것이 보는 것이라는 이치를 아는 그것! 그것의 세계! 그곳을  순간순간 들여다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856    저항의 시인 - 윤동주 댓글:  조회:4328  추천:0  2016-01-05
별의 시인 윤동주   이재훈 (시인, 현대시 부주간)       별의 시인 윤동주(尹東柱, 1917~1945). 그는 28세의 짧은 생을 살다갔으나 우리 시단에서 잊히지 않는 큰 별과 같은 시인이다.  시인은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해방을 보지 못하고 짧은 생을 마감했다. 살아 있는 동안에는 암울한 조국의 현실에 대해 늘 고민하는 지식인이었다. 또한 조국의 앞날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부끄러움 의식’을 시로 승화시킨 뛰어난 시인이었다. 윤동주는 살아 있는 동안 문학적 영화를 단 한 번도 누리지 못했다. 그는 사후(死後)에 대중에게 큰 사랑을 받았다. 윤동주는 1917년 북간도에서 출생했다. 그의 집안은 독실한 기독교 집안으로서 평생 기독교 신앙을 지키며 살았다. 1925년에 명동소학교에 입학하는데 이때 조선의 역사를 배우고 민족의식과 독립 사상을 깨우치게 된다. 이후 집이 용정으로 이주하여 은진중학교에 입학하고, 이 시절 교내 문예지를 발간하여 문예작품 등을 발표하는 활동을 했다. 1935년 평양으로 이주하여 숭실중학교로 편입하였으나 이듬해 숭실중학교가 신사참배 거부로 폐교되자 용정에 있는 광명학원으로 다시 편입했다. 이 당시 에 「병아리」 「빗자루」 등을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한다.  1938년에는 지금의 연세대학교인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하였다. 연희전문학교에서는 최현배 선생으로부터 조선어와 민족의식을, 이양하 선생으로부터 영시(英詩)를 배웠다. 1941년 연희전문 문과를 졸업하고, 같은 해 자선 시집 를 졸업 기념으로 출간하려다 실패했다. 이듬해엔 일본 동경으로 유학하여 릿쿄[立敎] 대학 영문과 입학하여, 도시샤[同志社] 대학 영문과로 옮겼다.  1943년 조국으로 귀향을 앞두고 독립운동 혐의로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2년형을 선고받고 규슈[九州] 후쿠오카[福岡]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945년 2월 16일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조국 해방을 6개월 남겨 놓고 옥사했다. 윤동주는 생전에 시집을 간행하지 못했다. 1948년이 되어서야 유작 31편을 실은 유고시집 (정음사)가 간행되었다. 이 시집은 친구 정병욱과 동생 윤일주에 의해 간행되었으며 시인 정지용이 서문을 썼다. 윤동주의 대표시는 아마도 일 것이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로 시작하는 전 국민의 애송시 는 국민의 뇌리와 마음 속에 깊이 각인되어 있을 것이다. 또한 대표작 등도 사랑을 많이 받는 시이다.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 전문 위의 시 은 윤동주의 내면의식을 잘 살펴볼 수 있는 시이다.  시에 등장하는 ‘우물’은 자신을 성찰하는 시적 대상이다. 이 우물은 아주 조용한 곳에 존재한다. 산모퉁이를 돌아야 하고 논가 외딴 곳에 위치해 있다. 우물은 자아를 생각하고 성찰하는 장소이다. 시인은 다른 시에서도 그렇듯 늘 자신을 성찰하고, 고백한다. 이 시에서도 마찬가지로 우물을 통해 자아를 성찰하고 자아의 내면을 고요히 응시한다. “한 사나이”는 시인의 모습과도 동일시된다. 즉 자신의 모습이 우물에 비췄을 때 미워졌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돌아가다 생각하니 다시 그 사나이가 가엾어지는 것이다. 사내는 아무런 변화없이 늘 그 자리에 있다.  시에서는 우물에 비친 사내의 모습이 미워졌다가, 가엾어졌다가, 다시 미워졌다가, 그리워진다. 미워졌지만 가엾어지는 연민이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당시의 암울한 현실 속에서 나약한 지식인의 초상이 그대로 시속에 드리워져 있다. 우물 속에는 아름다운 자연의 흐름이 그대로 존재한다. 즉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속에 사나이가 있고, 그 사나이는 추억처럼 존재한다.  우리는 윤동주의 시를 통해 자신을 스스로 바라보고, 성찰하는 법을 깨우치게 된다. 윤동주는 치열하게 자신을 성찰하며, 늘 부끄러움 의식으로 괴로워했던 지식인이다.  우리는 성찰이 부재한 현실 속에 살고 있다. 위정자들부터 성찰이 없고 부끄러움이 없다. 괴로워하지도 않고 늘 핑계하며, 숨기고 속여 쉽게 넘어가기만을 바란다. 많은 이들이 윤동주의 시를 읽으며 감동하고 환호하는 것은 성찰과 부끄러움 속에 담긴 진실함을 읽기 때문이다. 윤동주의 시가 더욱 각별하게 다가오는 날들이다. \\\\\\\\\\\\\\\\\\\\\\\\\\\\\\\\\\\\\   윤동주 육필원고 갖고 월남한 여동생  "당시엔 그렇게 중요한 것인지 몰랐죠"  [3.1절 특집] 유일한 혈육 윤혜원씨 인터뷰    윤여문(sydyoon) 기자           60여년의 세월이 흘러서 지금은 많이 잊힌 상태지만, 일본제국주의의 압정은 간교하고 잔혹했다. 모국어(한글)로 시를 썼다는 죄목으로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옥살이를 하다가 급기야 죽음까지 당한 윤동주 시인. 지난 2월 16일이 그의 62주기다.  그는 정확하게 27년 2개월 동안 살았다. 그것도 죽기 전 2년 동안 감옥에 갇혔으니, 지금 우리가 읽고 있는 윤동주의 시는 전부 25살 이전에 쓰인 시들이다. 그는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이고, 그가 쓴 는 가장 애송하는 시다.  남의 나라 땅 북간도에서 태어난 윤동주가 2살 되던 해(1919년), 일제에 항거하는 3·1만세운동이 삼천리 방방곡곡에서 일어났다. 당연히 북간도에서도 3·1만세운동에 참여했다.  윤동주의 형제 3남1녀 중에서 유일하게 생존한 윤혜원(84)씨가 20여 년 동안 시드니에 거주하고 있다. 3·1만세운동 88주년을 맞아, 여동생의 증언을 윤동주의 생애를 중심으로 3회에 걸쳐 들어본다.            ▲ 윤동주의 연희전문 졸업사진         시인들은 말한다. '시는 삶과 꿈을 가꾸는 언어의 집'이라고. 여기서 말하는 언어는 두 말할 나위 없이 시인의 모국어다.  그렇다. 시인은 모국어로 생각하고, 모국어로 시를 쓴다. 모국어와 함께 태어나서 한 세상을 살다가 죽는다. 시인에게 모국어는 '또 하나의 목숨'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그런데 모국어(한글)로 시를 쓰면 죄가 되던 시절이 있었다. 그 죄로 감옥에 가고, 급기야 죽음까지 당하는 어처구니없는 역사가 우리에게 있었다. 일본 유학 중에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2년 동안 감옥에 갇혔다가 옥사한 윤동주 시인도 그중의 한 사람이다. 지난주 2월 16일이 그의 62주기였다.  죽은 다음에 시인으로 불린 윤동주  1945년 2월, 조국의 광복을 불과 6개월 앞두고 조선 출신의 한 젊은이가 일본 후쿠오카 감옥의 차디찬 마룻바닥에서 뜻 모를 외마디소리를 지른 후에 숨을 거두었다. 윤동주 시인이었다. 정확하게 27년 2개월의 짧은 생애였다. 그리고 그는 영원히 늙지 않는 '청년 시인' 윤동주로 한국인의 가슴에 또렷이 각인되었다.  그러나 그가 생존할 당시엔 아무도 그를 시인이라고 불러주지 않았다. 입을 꼭 다문 고등학생 교복차림으로, 학사모를 쓴 대학생의 모습으로 남아있는 윤동주가 시인의 호칭을 얻은 것은 옥사하여 무덤에 묻히는 순간이었다.  어찌된 영문인지, 살아생전에 시인으로 등단한 적이 없는 그의 묘비에 '시인 윤동주지묘(詩人 尹東柱之墓)'라고 새겨진 것이다. 그의 할아버지 윤하현(1875-1948)이 "내 손자, 동주의 일생이야말로 진정한 시인의 삶이었다"고 평가하면서 그런 묘비를 만든 것이다.  이렇듯 윤동주 시인의 갑작스런 죽음과 비극적인 생애는 그의 고고한 시편들과 함께 윤동주를 순교자적인 이미지로 깊게 각인시켰다. 그가 시인으로 데뷔한 일도 없고 시집 한 권 남기지 않았지만 한국현대시 100년을 대표하는 시인 중의 한 명이 됐다. 또한 그의 시비가 한국, 중국, 일본 등지에 세워질 정도로 지난 수십 년 동안 한국에서 가장 널리 사랑받는 시인이 됐다.  윤동주 시인이 시집을 출간하려고 시도했던 적은 있다. 본격적인 유학생활이었던 연희전문 4년을 졸업한 윤동주는 졸업 기념으로 19편의 자작시를 묶어서 라는 제목의 시집을 내려 했다.  그러나 은사인 이양하 교수 등이 "아직은 시기상조"라고 말하자 자진해서 시집출간을 포기했다. 대신 원고지에 펜으로 써서 3부를 묶는 걸로 아쉬움을 달랬다. 바로 그 시 묶음의 서문 격으로 쓴 시가 오늘날 대한민국 최고의 애송시가 된 다.        ▲ 윤동주의 육필 원고            윤동주의 이미지는 왜 순결할까?  스치는 바람 한 줄기에도 괴로워했던 윤동주. 그의 순결한 이미지가 그가 죽은 지 6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유지될 수 있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몇 가지 있다. 그 첫 번째가 일본경찰에 체포될 당시까지 세상사에 물들지 않은 학생신분이었다는 점이다.  여기에다 윤동주 시인의 순절(殉節)한 이미지를 오랫동안 명토 박을 수 있는 또 하나의 이유는, 그의 유일한 혈육으로 남아있는 여동생 윤혜원(84, 시드니우리교회 권사)씨한테 있다.        ▲ 윤동주 시인의 유일한 혈육 윤혜원 할머니.      ⓒ 윤여문  북간도 룡정(龍井)에서 짧은 기간 초등학교 교사를 역임했던 윤혜원씨는 1948년 12월, 해방공간의 혼란스런 시기에 북간도에서 한국으로 내려오면서 고향집에 남아있던 윤동주 시인의 원고와 사진을 가져온 장본인이다.  거기엔 윤동주 시인의 초기와 중기의 작품들이 대부분 포함되고 있어서 위험을 무릅쓰고 시 원고를 가져온 윤혜원씨의 노력은 윤동주의 시세계가 더욱 풍성해지게 만드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동주오빠 방의 책꽂이에 꽂혀있던 대학노트 3권을 아버지의 권유로 가져왔는데, 그 당시엔 그 노트에 담긴 시들이 그렇게 중요한 것인지 몰랐다"고 윤씨는 회상한다.  그 대학노트에 담긴 윤동주의 걸작들이 윤동주 유고시집 의 1948년 초간본 31편에 들어있지 않은 시편들 대부분이다. 다시 말해서 현재 116편이 게재되어있는 증보판의 시편들 중 절반 이상이 윤혜원씨의 품에 안겨 월남했던 것이다.  이렇듯 큰일을 한 윤혜원씨는 그동안 언론과의 인터뷰를 적극적으로 피하면서 한평생을 살았다. "동주오빠는 나의 오빠이기도 하지만 그의 시를 사랑하고 그의 꼿꼿한 정신을 사랑하는 모든 이들의 형님이요 오빠이기 때문에 공연한 말들로 그의 '티 없는 초상'을 훼손시켜서는 안 된다"는 게 일관된 신념이기 때문이다.  그런 연유로 윤혜원씨는 동갑내기남편 오형범(84.시드니우리교회 장로,작고)씨와 함께 서울에서 부산-필리핀-호주 등으로 계속 남하했다. 그들이 피했던 대상은 언론뿐만 아니라 수많은 윤동주 연구가들도 포함된다. 1986년, 시드니에 정착해서 21년째 살고 있는 윤씨는 호주에서조차 은둔생활을 계속했다.  침통한 표정의 윤동주 "그 분이 글쎄..."        ▲ 은진중학 시절. 뒷줄 맨오른쪽이 윤동주, 가운데가 문익환 목사.         윤혜원씨는 1924년 생으로 동주오빠와는 일곱 살 터울이다. 윤혜원씨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오빠의 가장 어린 모습은 동주 오빠랑 문익환 오빠, 고종사촌인 송몽규 오빠 등이 외삼촌 김약연 목사가 시무하던 명동교회당의 맨 앞줄에 앉아서 예배를 드리는 모습이다. 다음은 윤혜원씨의 회고다.  나중에 할머니께서 해주신 말씀인데, 어머니의 건강이 나빠서 젖이 부족하자 같은 해에 출생한 동주 오빠와 문익환 오빠가 문익환 오빠의 어머니 김신묵 여사의 젖을 함께 먹으면서 자랐다고 한다.  나중에 은진중학교에 진학한 동주오빠는 뭐가 그리 바쁜지 얼굴을 보기가 힘들었다. 늦은 밤까지 등사용지에다 글을 써서 등사를 하던 모습도 기억난다. 오빠의 손가락엔 늘 등사잉크가 묻어 있었다.  이건 어머니로부터 전해들은 얘기인데, 동주오빠는 11살 때부터 이라는 어린이 잡지를 서울로부터 정기구독 했으며 명동소학교에서 이라는 등사판 학교잡지를 만들었다고 한다.  오빠의 단짝이었던 문익환 오빠는 광명학교 시절 명동교회의 유년주일학교 선생님이었다. 나는 그 당시 유년주일학교 학생이어서 문익환 오빠의 지도로 성경이야기도 듣고 찬송가도 배웠다.  또한 오빠가 아주 쓸쓸한 표정을 짓던 때가 기억난다. 오빠의 방에는 책이 상당히 많이 꽂혀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이광수의 소설 을 재미있게 읽은 내가 그분의 소식을 물어본 적이 있다.. 오빠가 갑자기 침통한 표정을 지으면서 "그분이 글쎄..."하면서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 교토 우지강에서 열린 윤동주(앞줄 왼쪽에서 두번째)의 송별회 사진. 사진속 도시샤대학 동창들은 윤동주를 꿈 많고 수줍음타는 청년으로 회고했다.            윤동주가 부른 마지막 노래는 '아리랑'  2006년 10월 어느 날, 기자는 윤혜원씨의 남편 오형범씨로부터 전화를 받는다. 그가 "윤동주 시인의 최후의 사진이 공개됐다. 한국에서 발간되는 9월호에 교토에 있는 도시샤대 재학시절에 찍은 윤동주 사진과 사진설명을 쓴 일본여성의 기고문이 함께 실렸다"고 전해주었다.  사진의 배경이 되는 우지강을 방문한 적이 있다는 오형범씨와 함께 기사를 읽어보니, 우지강의 아마가세 구름다리 앞에서 윤동주 시인이 도시샤대 영문과 동기생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 실려 있었다. 사진을 오랫동안 바라보던 윤혜원씨가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리랑이 오빠가 부른 마지막 노래일 것 같다. 그 후엔 체포되어 죽을 때까지 감옥에 있었으니..."라며 윤씨는 말을 잇지 못했다. 다음은 사진에 대해서 설명한 기타지마 마리코(83)의 글이다.  '사진은 1943년 초여름, 교토 우지강의 아마가세 구름다리 위에서 윤동주와 함께 도시샤대학에 다니던 남학생 일곱 명과 여학생 두 명이 담긴 기념사진이다. 그 중에 수줍은 듯 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남학생이 있다. 이 남학생이 한국에서는 누구나 다 알고 있는 그 유명한 윤동주 시인이다.  강변에서 식사를 한 후 바위에 걸터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노래 한 곡 불러주지 않겠어?'라는 급우의 부탁에 윤동주는 '아리랑'을 불렀다. 조금은 허스키한 목소리로.  애수를 띤 조용한 목소리가 강물 따라 흐르고, 모두들 조용히 듣고 있다가 노래가 끝나자 모두 박수를 쳤다. 윤동주가 주저하지도, 사양하지도 않고 노래를 불렀던 것은 급우 전원이 자신의 송별회에 참석해준 것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었을 것이다.'  윤동주는 이 기념사진을 찍은 후 약 한 달 뒤인 1943년 7월 14일, '치안유지법' 위반혐의로 일본경찰에 체포됐다. 한글로 시를 썼다는 죄목으로 2년 형을 받고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해방을 불과 6개월 앞둔 1945년 2월 16일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했다.  윤동주의 사망원인은 아직도 의문에 싸여 있다, 그해 같은 혐의로 같은 형무소에서 고종사촌형인 송몽규(교토제대 재학 중 윤동주와 비슷한 시점에 체포되어 1945년 3월 10일 사망)도 윤동주의 뒤를 따라 옥사했다.  죽기 직전 친척들에게 전한 송몽규의 증언에 의하면, 두 사람 모두 매일 정체를 알 수 없는 주사를 맞았다고 한다. 나중에 확인된 사실이지만 생체실험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윤동주의 유해는 북간도에서 달려온 아버지의 손에 의해 화장되었다. 유골함에 다 담지 못한 윤동주의 유해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한일해협에 뿌려졌다고 한다.        ▲ 윤동주의 고향 룡정에서의 장례식 장면.            옷깃을 여미게 만드는 윤동주의 시들  윤혜원씨에게 "오빠의 시 중에서 어떤 시를 제일 좋아하느냐?"고 물어보면 아무 망설임 없이 를 꼽는다. "나라를 잃은 젊은이의 깊은 고뇌와 성찰이 순수한 모국어로 담겼고, 거기에다 시인의 결연한 의지가 읽혀서 늘 숙연해진다"고 말한다.  윤씨는 이어서 "오빠가 시를 쓰면서 의도하는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적절한 시어를 골라 썼겠지만, 오빠와 함께 생활했던 내 기억으로는 오빠의 시와 삶은 정확하게 일치한다. 어떤 책에는 그걸 윤동주 시의 시적 자아와 현실의 자아가 일치한다고 썼더라. 맞는 말이다"면서 좀처럼 하지 않는 윤동주 시에 대한 소견을 밝히기도 했다.  한편 광명학교 시절, 윤동주 시인과 2년 동안 한 방에서 기거했던 김태균(전 경기대 교수, 현재 캐나다 거주)씨의 다음과 같은 언급도 윤혜원씨의 소견과 일맥상통한다.  "윤동주의 시 전반을 걸쳐서 볼 때 그는 '조선독립운동'이라는 죄명으로 죽었지만, 그의 시에는 이육사에게서 볼 수 있는 칼날 같은 투지라든가, 만해에게서 볼 수 있는 강철 같은 주의사상은 보이지 않는다. 윤동주의 시는 그것이 곧 그의 생활이고, 그리고 그것들의 바탕은 서정이다.  그러므로 그의 시에서는 무슨 사상이나 무슨 주의주장으로 설명할 수 있는 시는 보이지 않는다. 그의 시를 읽으면 사랑이 생기고, 눈물 나는 참회가 생기고, 그리고 가슴이 뭉클해지는 감동이 생긴다. 그의 시어는 대단히 평이하지만 그의 시심에 한 발짝 접근하면 우리는 옷깃을 여미게 된다."          
855    비움의 시인 - 김관식 댓글:  조회:4729  추천:0  2016-01-05
비움의 시인 김관식   이재훈 (시인, 현대시 부주간)     시인 김관식(金冠植, 1934~1970)은 충남 논산 출신의 대표적인 시인이다. 시인 김관식하면 그의 독특한 인생사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그는 심한 주벽과 기행으로 많은 일화와 화제를 낳았다. 1960년 ‘대한민국 김관식’이라는 명함 하나로 국회의원에 출마해 당시 거물 정치인이었던 장면(張勉)과 겨루었던 사건은 대표적인 일화 중의 하나다. 그 이후로 김관식의 별호는 ‘대한민국 김관식’이 되었다. 고은 시인은 김관식을 가리켜 ‘단군 이래의 한국 기인’이라 칭하기도 했다. 김관식의 부친 김낙희씨는 한약방을 운영했다. 1952년 강경상고를 졸업한 뒤 충남대학교에 입학했다가 고려대학교로 편입, 1953년 다시 동국대학교 농과대학으로 옮겼으나 중퇴했다. 김관식과 미당 서정주와의 인연 또한 화제였다. 당시 전주로 피난 가 있던 서정주를 직접 찾아가 인사드리고 문학에 순교하겠다고 열정을 불태웠다. 이러한 서정주와의 인연으로 1954년 서정주의 처제인 방옥례(方玉禮)와 혼인했다. 데뷔는 1955년 , , 등의 작품으로 을 통해 문단에 나왔다. 여주농고, 서울공고, 서울상고 등의 교사를 지냈으며 1958년 논설위원을 지내다 결국 사회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사직했다. 이 무렵부터 결핵과 위장병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기나긴 투병 생활에 접어들게 된다. 그는 투병 중에도 한문 실력을 발휘하여 을 번역하여 간행하였으며, 작품 활동도 쉬지 않았다. 김관식의 시비는 대전 보문산 공원, 강경상고 교정, 논산공설운동장 등 세 곳에 세워져 있다. 대표작으로 , , , 등이 있다. 시집으로는 (자유세계사, 1956), (창조사, 1952), (창작과비평사, 1976), 역서로 등이 있다.  김관식은 어려서부터 한학과 서예를 익히고 성리학과 동양학을 배웠다. 때문에 당시 한국 사회에서 실력있는 한학자였다. 의 서문 ‘동양인 선언’ 등의 글을 통해 그의 문학적 지향점이 어떤 지점에 있는지를 확연하게 표출한다. 김관식은 전국의 유명한 한학자들을 찾아 나서며 한학을 익혔다. 공주의 권중하(權重夏), 전주의 성리학 대가 최병심(崔秉心), 서예가 오세창(吳世昌), 육당 최남선과 위당 정인보 등을 찾아 사사했다. 당시 육당 최남선이 김관식을 수제자로 받아들이면서 김관식은 한학자로서의 천재성을 인정받는다. 귀를 씻고 세상 일 듣지 말꺼나 피에 젖은 아우성 고달픈 삶에, 가쁜 호흡을 지키기 위해 사나이는 모름지기 곡괭일 들고 여자여. 너는…… 세리(稅吏)도 배고파 오지 않는 곳. 낫거미 집을 짓는 바람벽에는 썩은 새끼에 시래기 두어 타래…… 가난 가난 가난 아니면 고생 고생 고생이렸다. (시름없이 튕겨 보는 가야금 줄에 청승맞게 울면서 흐느끼는 가락은) 단정학(丹頂鶴)은 야위어 천년을 산다. 성인(聖人)에의 지름길은 과욕의 길. 밭고랑에서 제 땀방울을 거둬들이는 부지런한 지나(支那)의 꾸리[苦力]와 같이 기나긴 세월을 두루미 목에 감고 견디어 보자. 가만히 내 화상(畵像)을 들여다본 즉 이렇게, 언구렁창에 내던져 괜찮은 건가. 요지경 같은 세상을 떠나 오늘도 나는, 누더기 한 벌에 바릿대 하나. 눈포래 윙윙 기승부리고 사람 자국이 놓인 일 없이 흰곰의 떼 아프게 소리쳐 우는, 저 천산(天山) 북로(北路)를 넘어가노나 - 전문 김관식은 가난과 10여 년 동안의 병마와 싸우다 간염으로 36세에 요절했다. 시인은 나라가 위급할 때 도와야 한다며 국회의원에 출마하지만 참패한다. 당시 1백표도 못 되는 득표를 얻고 남아 있던 재산인 과수원마저 처분한다. 그 후 자하문 밖 언덕의 홍은동 골짜기로 들어가 술로 나날을 보낸다. 하지만 그의 선비정신은 고독하고 타협없는 삶을 지탱해 주는 가장 큰 무기였다. 김관식의 시가 동양의 정신을 노래했다는 점에서 평가받지만, 실상 시인의 삶을 가까이에서 느낄 수 있는 시가 더 가슴에 와 닿는다. 위의 시 도 마찬가지다. 가난을 예찬하기는 쉽지 않다. 가난과 고생의 삶을 운명적으로 받아들이는 시인의 태도는 모든 것을 비우는 비움의 철학을 생각하게 한다. “귀를 씻고 세상 일 듣지 말”자는 얘기는 세상과 절연하자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시인과 한학자로서의 기품을 잃지 말자는 의미일 것이다. 시에서 ‘단정학’은 세간의 타협과 유혹에 굴하지 않는 꼿꼿한 선비의 정신을 생각하게 한다. 오로지 재화만이 능력이고 선(善)이라 추앙받는 현대문명사회에서 김관식의 가난 예찬은 기억할만한 깨우침을 우리에게 전해준다.
854    꽃(花)의 시인 - 김춘수 댓글:  조회:5331  추천:0  2016-01-05
꽃의 시인 김춘수 이재훈 (시인, 현대시 부주간)             꽃의 시인 김춘수(1922~2004). 일반적으로 ‘꽃’이라고 하면 예쁘고 아름다운 감성적 대상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김춘수에게 ‘꽃’은 이러한 의미가 아니다. 김춘수 시인이 말하는 꽃은 존재의 대상이다. 전국민에게 사랑받는 시 으로 인해 김춘수는 꽃의 시인이라고 말하지만, 실상 김춘수 시인은 한국 시단에 아주 독특한 시세계를 가진 시인이다. 그의 시세계는 ‘관념시’와 ‘무의미시’, 그리고 이 둘의 변증법적 지양을 거친 ‘의미’로 되돌아오는 과정을 거치며 진화해왔다. 그로 인해 시인의 문학적 역정은 언제나 문제적이었으며 또한 가장 독특한 경지에 있었다. 김춘수 시인은 1922년 경남 통영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시인은 유복한 가정환경과 개방적 사고를 가진 부친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전해진다. 특히 호주 선교사가 운영하는 유치원에서의 경험은 시인에게 이그조티즘(이국취향)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된다. 그 체험이 독특한 시적 세계관과 미적 관심에 대한 최초의 자각이다. 시인은 통영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서울의 경기중학에 입학한다. 이후 일본대학 시절 천황비판으로 옥살이를 한 경험도 있다. 그 사건으로 인해 대학에서 ‘불령선인(不逞鮮人)’으로 추방되어 퇴학당하고 한국으로 건너온다. 통영중학교와 마산고등학교 교사를 거쳐 1965년 경북대학교 교수, 1978년 영남대학교 문리대학 학장을 역임하였다. 특이한 이력은 1981년 제11대 전국구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활동한 것이다. 정치인으로서의 활동은 시인으로서의 삶과 너무나 다른 일이었다. 이후 작고하기 전까지 김춘수 시인은 정치활동 경험에 대해 많은 후회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1986년 한국시인협회 회장 등을 지냈으며, 시와 시론을 묶은 (현대문학)이 2004년 출간되었다. 김춘수 시인은 1948년에 첫 시집 이후 한국 시단에서 가장 독특하고 모던한 시의 경향을 보이게 된다. 1960년대에 들어서 새로운 시적 실험을 하게 된다. 그것은 우리가 김춘수 하면 대표적으로 떠오르는 ‘무의미시’이다. 대상과의 거리가 상실된다는 것. 대상을 지울 때에 대상의 구속으로부터 시인은 해방되고, 어떤 의미부여의 행위로부터도 해방된다. 그러나 무의미시가 가지고 있는 서술적 이미지의 세계에서 이미지는 의도하지 않아도 의미를 띄게 된다. 이 의미를 지우기 위해 탈이미지로 가게 된다. 탈이미지는 리듬만으로 시를 쓴다는 것인데 이것은 시인이 고백한대로 언어도단의 세계이다. 무의미시의 막다른 골목에서 시인은 다시 이전의 세계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시인은 다시 의미의 세계로 돌아오게 된다. 이 의미의 세계는 이전의 관념시와는 다른 변증법적 지양을 거친 세계이다. 이 관념시와 무의미시의 변증법적 지양을 통해 형성된 시집들이 후기의 , , 등이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 전문   김춘수의 시 은 전국민이 모두 아는 시인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비교적 초기작품이긴 하지만, 김춘수가 가진 존재의 의미를 마음 깊이 새기게 하는 시이다. 어떠한 대상이든지 불러주기 전에는 아무런 이름이 없다. 산의 이름 모를 들풀도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비로소 이름을 가진 존재로서 의미를 띄는 것이다. 그 의미가 바로 시에 말하는 ‘꽃’으로 상징할 수 있다. 이름이 불리워지지 않은 존재는 늘 불안하다. 그리고 너와 나 모두 무엇이 되고 싶은 열망과 소망이 있다. 어떤 의미로든지 타인과 이 세계에 이름을 남기고 싶은 간절함이 있다. 시에서는 그것을 가리켜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고 전한다. 현대 사회에서는 서로간의 존재에 대한 가치가 희박하다. 인터넷 공간과 블로그, 미니홈피, 트위터, 그외 소셜 네트워크의 시대. 디지털미디어 기기, 스마트폰 등으로 대화가 단절되고 타인에 대한 관심이 더욱 적어진다. 가상공간에서 포장된 나와 타인이 있을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김춘수의 을 읽고 있으면 타인을 가만히 불러보고 싶게 한다. 그리고 당신은 나에게 어떤 의미라고 속삭이고 싶게 한다. 찬바람이 분다. 외롭다고 인터넷과 스마트폰만 쳐다볼 게 아니라, 그동안 잊고 지냈던 지인들에게 전화라도 한 통 한다면 어떨까. 따스한 마음이 전해지지 않을까. 그동안 잊었던 내 존재가 그에게로 가서 새로운 존재로 남게 되지 않을까. 그렇다면 참 포근하고 훈훈한 날들이 될 것이다. =====================================================   의미와 무의미의 변증법을 찾아서                _ 김춘수 시인 시인을 찾아서  김춘수 이재훈             대여(大餘) 김춘수 선생은 지난 2004년 1월 (현대문학 刊)을 상재하셨다. 이 시선집은 1152쪽의 방대한 분량으로 그간 60여년 가까이 해오신 문학 활동을 총결산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또한 시선집에 그치지 않고 1, 2권을 연이어 냄으로써 김춘수 문학의 총체적인 정리를 하기에 이르렀다. 김춘수 선생은 40년대 후반부터 지금까지 한국 문학의 한 경지를 이룩한 시인이다. 관념시와 무의미시, 그리고 이 둘의 변증법적 지양을 거친 의미로 되돌아오기까지 선생의 문학적 역정은 언제나 가장 문제적이었으며 또한 독특한 경지에 스스로 계셨다. 특히 이번 전집 출간은 선생의 미발표작 뿐만 아니라 최근 발표작까지를 모두 담은 것이어서 그 의미는 각별하다. 2004년 3월 15일. 김춘수 선생을 찾아 뵙고 선생께서 그 동안 살아오신 삶과 문학을 육성으로 들었다.      김춘수 선생(1922~2004) (C)현대시 풍경     선생은 건강해 보였다. 성남시 분당구 까치마을의 한 아파트. 나는 몇 번 헤맨 후에야 선생의 집을 찾을 수 있었다. 다행히 약속 시간에는 늦지 않았다. 아파트 바깥의 풍경과는 다르게 선생의 집안 풍경은 한가로웠다. 마치 어느 한적한 시골마을의 별장에 온 듯한 느낌이었다. 거실에는 선풍기 모양의 회전하는 전기난로가 돌아가고 있었고 선생은 무릎 위에 담요를 올려놓고 앉아 계셨다. 우리가 들어가자 선생은 일어서서 반갑게 맞아주셨다. 선생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는 여전하였고, 오후의 햇살이 베란다와 거실의 경계에서 서성대고 있었다. 내가 등단을 하고 난 후 선생의 모습을 제일 처음 뵌 것은 어느 시상식장에서였다. 김춘수 선생이 저렇게 정정한 모습으로 내 앞에 있다는 게 신기하게 여겨질 정도였다. 내게 선생은 늘 교과서와 책들 속에서만 존재하는 신화였다. 그 큰 그늘 속에서 잠시뿐이지만 함께 숨쉬고 있다는 게 얼마나 큰 행운인가. 나는 선생에게 무슨 말을 던질 것인가. 그냥 편안한 옛이야기를 듣고 싶어졌다. 선생은 분당의 집에서 외손녀 두 명과 함께 지내고 있었다. 외손녀는 서울의 직장에 다니기 때문에 새벽에 나가 늦은 밤 귀가한다. 그래서 일주일에 한두 번 밖에 얼굴을 볼 수 없다고 했다. 낮에는 가정부가 와서 집안일을 돌봐주고 있었다. 동행한 원구식 주간은 곧이어 작년에 처음으로 치러졌던 얘기를 꺼냈다. 작년 임영조, 김강태 시인의 죽음으로 촉발된 통일 마라톤대회는 여러 가지 의미를 담고 있는 시단의 행사였다. 올해 행사 때에는 시단의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함께 모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말씀드리니 선생은 옳다고 반갑게 말씀하셨다. “문단도 정치하는 사람들처럼 갈라지지 말고 화합하고 어울렸으면 좋겠습니다. 경향이 다르다고 사람까지 갈라지면 안 되는 것 같습니다. 경향은 다 제 각각 다를 수 있는 거지요.”라고 말씀하시면서. 내가 인터뷰하러 간 날은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안이 가결된 지 3일째 되는 날이었다. 나는 신문을 통해, 탄핵과 관련해서 어떤 말씀을 하셨다는 얘기를 귀동냥으로 들을 터여서 그것부터 여쭈어 보았다.   김춘수:중앙일보에서 전화가 왔어요. 나는 앙케이트하는 것인 줄만 알았지 내 이름이 나오는지는 몰랐지요. 각계 원로를 대표해서 말하는 것이라고 크게 나왔습디다. 그런 줄 알았으면 내 생각도 가다듬고 신중히 말할 것을… 하지만서도 근본은 같으니까 뭐. 어느 쪽이 잘했는가 잘못했는가의 경중을 따질 수는 없다. 사태 자체가 불행한 일이다. 그런 조의 말을 했지요.   선생은 정치에 대해 특히 노무현 정부에 대해 몇 마디의 말씀을 더 하시려다가 이내 말문을 닫으셨다. 이런 인터뷰 자리에서까지 정치얘기를 하고 싶지 않으셨던 모양이다.   구름과 장미   연보를 보면, 선생의 유년에서부터 학창 시절은 크게 세 시기로 구분해서 볼 수 있다. 첫 번째는 통영에서의 유소년의 시기, 두 번째는 서울 경기중학의 시절과 일본대학의 시기, 마지막으로는 일본에서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기까지의 여정이다. 선생은 1922년 경남 통영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난다. 유복한 가정환경과 개방적 사고를 가진 부친 때문에 그 당시 유치원에 입학하게 되는데 그때 체험이 시인에게 각별하게 다가온다. 유년시절의 삶에서 선생에게 가장 기억나는 체험은 호주 선교사가 운영하는 유치원에서의 경험일 것이다. 그 체험이 독특한 시적 세계관과 미적 관심에 대한 최초의 자각이 아닐까 생각된다. 이미 시집 에서도 밝힌 바 있지만 다시 한번 자세하게 알고 싶어졌다.   김춘수:자각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그 무렵의 정서적인 체험이 오랫동안 잠재하고 있었던 거지요. 그러니까 영향이 큰 것으로 봐야지요. 간혹 그때 얘기가 내 시에도 나오거든. 그때 교회체험이라든가 선교사가 밖에서 앉아 있는 모습이 아직도 선합니다. 호주의 선교사가 경영하는 미션 계통의 유치원에 다녔다고 하는 것이 에그조티즘(exoticism, 이국정조-필자주)을 준 계기가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지나고 나니 큰 자극이 된 것 같아요. 선교사 아들 딸들의 파란 눈이 생각납니다. 유치원의 경계가 탱자나무 울타리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 탱자나무 틈으로 들여다보면 간혹 우리 또래의 서양 남매가 놀고 있는 모습이 보였지요. 눈이 파래서 저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을까 싶었습니다. 그쪽 세상은 이쪽과 다를 것 같았지요. 바람도 구름도 다를 것 같고. 그때 장미라는 꽃을 처음 봤어요. 그 남매가 작은 삽을 가지고 장미를 심는 장난을 하고 있어요. 그때 참, 이상한 꽃도 있구나 생각했지요. 모든 게 낯설었지요. 그때 호주라는 말을 들었는데 바람도 구름도 모두 호주에서 가져온 것 같았지요.   선생의 말로 미루어 보면 독특한 미의 관심을 알 수 있다. 통영은 천혜의 아름다운 자연을 대표하는 고장인데 선생이 체험하고 기억하는 것은 호주 선교사가 운영하는 유치원이다. 이것은 선생이 생래적으로 우리가 한국적 혹은 민족적이라고 부르는 여타의 미적 가치관과 차별됨을 말해준다. 선생의 첫 시집 는 이런 자각의 은유적 표현이다. 우리의 토속적인 생활환경에서 오는 정서와 이국적인 정서가 혼재되어 있는 것이다. ‘구름’은 유치원 담 바깥, 즉 생장 본거지로서의 통영이다. ‘장미’는 유치원 안쪽, 즉 그곳에는 바람도 구름도 다를 것 같은 관념의 세계이다. 장미에 대한 선생의 체험이 고스란히 시집의 표제로 쓰이고 있는 것이다. 선생은 통영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서울의 경기중학에 입학한다. 경기중학 시절에 대해 잘 몰랐는데 마침 선생은 뜻밖의 얘기를 해주었다.   김춘수:경기중학이 당시에는 5년제였습니다. 5학년 2학기 때 조금만 있으면 졸업이었는데 담임선생과 트러블이 있었지요. 이거 말하기가 참 쑥스러운데… 국민감정하고 연결된 것이지요. 그 당시엔 대부분이 일본 선생이었지요. 굉장히 역겨웠어요. 학교 가기 싫고… 그게 5학년 2학기 때 폭발한 거지요. 담임은 내가 그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겠지요. 선친께서도 많이 나무라셨습니다. 동경으로 가서 학교를 알아보는데 중학 4년만 수료하면 대학 예과에 갈 수 있었습니다. 고등학교는 따로 있었는데 그것은 제국대학에 가는 코스였습니다. 왜 제국대학 코스인 고등학교에 가지 않았느냐 하면. 식민지 학생이 일본의 고등학교에 가려면 모교 담임의 소견표가 필요합니다. 그 소견표가 사상적인 내용을 담는 것이었지요. 그게 첨부돼야 원서 제출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담임이 그걸 안 써주었어요. 중학을 마치고 가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시험시기도 놓치고, 내년이 된다고 해도 그걸 써주기는 만무하고. 그러다가 마침 소견표가 필요없는 대학에 가게 된 것이지요.   선생은 당시 담임선생과 민족적인 감정으로 문제가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선생은 이 대목에서 자세히 말하기에는 시간이 없으니 다음 기회에 하겠다고 하셨다. 선생이 일본대학에 처음 입학할 때에는 법학과를 지망했다. 그것으로 보면 당시에는 문학을 하고 싶은 절박함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선생은 이 당시에 릴케를 만나게 된다. 릴케와의 만남에 대해 (, 문학과 지성사, 1976)이라는 글에서 고백하고 있다. 그 글을 보면 일본에서 대학 입학하기 전 고서점에서 릴케를 만난다. 그때 만난 릴케의 시는   사랑은 어떻게 너에게로 왔던가 햇살이 빛나듯이 혹은 꽃눈보라처럼 왔던가 기도처럼 왔던가 ― 말하렴!   사랑이 커다랗게 날개를 접고 내 꽃피어 있는 영혼에 걸렸습니다.   와 같다. 선생은 릴케가 하나의 계시처럼 왔다고 했다. 이 만남으로 선생은 예술대학의 창작과를 선택하게 된다. 또 한번의 큰 만남은 해방 이후이다. 그때 릴케의 시와 를 다시 읽게 된다. 이후 선생의 초기시는 릴케에게 큰 영향을 받게 된다.      당시 김춘수 선생 분당 자택(2004) 역사허무주의자     일본대학 시절 천황비판으로 옥살이를 한 경험은 최근 일간지 기자들과 나눈 인터뷰를 통해 알 수 있었다. 그 사건으로 인해 대학에서 ‘불령선인(不逞鮮人)’으로 추방되어 퇴학당하고 한국으로 건너가게 된다. 선생에게는 기질적으로 독립운동이 맞지 않는다. 한 개인의 실존이 역사보다 더 중요하다는 게 선생의 생각이다. 이러한 생각들은 당시의 체험에 기인한 바가 크다. 특히 도쿄대 좌파 교수들과의 체험을 통해 이데올로기를 믿지 않게 되었다고 술회하고 있다. 당시의 상황에 대해 다시 물었다.   김춘수:한국 고학생들을 따라서 호기심에 갔지요. 나는 집에서 학비가 충분히 왔었기 때문에 일을 하러 갈 필요는 없었는데. 그 친구들 따라서 가와사키라는 부두에서 하역을 했습니다. 일하다가 휴식시간에 한국 고학생들이 자연스럽게 모이게 되었습니다. 그때 천황도 비방하고 총독정치를 비판을 하고 그랬지요. 우리끼리니까 우리말로 그렇게 한 거지요. 그런데 거기에 한국 스파이가 있었던 거라. 한국 사람인데 헌병대에 헌병보로 있으면서 한국 사람들을 감찰하는 스파이가 염탐하다 고발한 거지요. (역사관에 영향을 준 사건이었는지에 대한 질문이 이어짐) 그때는 몰랐는데 지나고 나니 간접적인 영향을 주었지요. 그게 뭐냐하면 이데올로기에 대한 불신이 생겼습니다. 철학이나 사상에 대한 불신이 생겼지요. 그 혐의로 붙들려가서 한 1년 정도 고생했는데, 학교도 퇴학당하고. 당시 같은 교도소에 인민전선파인 제국대학 교수가 있었습니다. 제국대학 교수라면 가장 영향력있는 교수들이었지요. 인민전선파인 좌파 경제학자 교수 중의 하나가 고등계에 붙들려 왔습니다. 하루는 그 교수와 함께 취조를 받게 되었지요. 그런데 그 교수를 취조하는 형사는 안보이고 내 담당 형사만 있었어요. 조금 있으니까 교수집에서 사식이 들어오데요. 김이 모락모락나는 갓 구은 빵이 들어왔지요. 그때는 모두 배급시대고 어려운 시대인데 특권계급 아니면 먹기 힘든 것이었습니다. 그때 저런 사람이 저런 빵을 먹고 있나도 좀 이상했고. 조금 있으니까 나를 취조하던 형사도 나가더라고요. 그래서 그 교수와 나와 둘만 남게 되었지요. 그때 나는 몇 개월 동안 너무 굶어서 피골이 상접했지요. 먹을 거 있으면 눈에 불이 켜지고 목구멍에서 손이 나오는 것 같았지요. 그런데 나는 자연히 그것을 나누어 줄줄 알았는데… 민중을 생각하는 지식인인데, 식민지 어린 학생이 있으면 자네도 하나 먹어라 응당 그럴 줄 알았는데… 그때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상하고 인격하고는 다른 것이구나. 사상은 믿을 게 못되는 구나. 내가 오히려 부끄러웠습니다. 봐서는 안 되는 것을 봤구나. 저런 사람을 존경해야 하는 것인데…   이 사건은 선생의 역사의식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질곡의 역사인 한국 정치현실과 일정 부분 거리를 두면서 예술지상주의의 문학관을 가지게 된 점과 실제 창작에 있어서도 깊은 내면 세계를 탐색하는 점은 이 사실과 연관이 있다. 선생은 이 후에도 5공 정권 때 전국구 의원을 한 적이 있었는데, 이것 또한 선생의 의지가 아니었다고 말하고 있었다. 선생은 당신이 정계생활을 한 것에 대해 지우고 싶은 기억이라고 하셨다. 타의에 의해 시작한 4년 여의 정계생활이 시인으로서의 자신에게는 상처였으며 문학적으로 여간한 손해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또한 길게 말하고 싶지 않은 기억이며 이제 말할 때도 되었는데 자전소설을 쓰게 되면 그때 자세하게 말할 생각이라고 하셨다. 당시의 상황에 대해서는 이유경 선생이 쓴 인터뷰집에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다.(이유경, , 월간조선사, 2002) 선생은 자신의 정계생황을 “처량한 몰골로 외톨이가 되어 앉은 것도 아니고 선 것도 아닌 엉거주춤한 자세로 어쩔 줄 모르고 보낸”것으로 말하고 있다. 나는 선생님께 역사라는 것은 능동적인 참여가 아니고 어떻게 보면 피해자라는 생각이 강하신 것 같다는 말로 질문을 시작하면서 선생님에게 역사란 어떤 의미입니까, 라는 질문을 드렸다. 선생은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김춘수:어떻게 보면 피해자가 아니고 실제로 큰 피해자이지요. 저는 한국의 역사라는 것 뿐만아니라 역사라는 것 자체에 대해서 회의적입니다. 나는 스스로 역사 허무주의자이다, 라는 말을 씁니다. 역사, 이데올로기, 폭력은 삼각관계에 놓여 있습니다. 역사라고 하는 것은 이데올로기입니다. 이데올로기는 결국 폭력입니다. 모든 역사가 그렇게 되었지요. 그 삼각관계가 성립될 수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역사나 이데올로기에 대한 내 나름대로의 인식이 생겼습니다. 역사라는 게 어디 있습니까. 이데올로기가 있고 폭력만 있을 뿐이다. 그러니까 역사를 아주 회의적으로 본 것이지요. 갑자기 학생 때 읽은 책이 하나 생각납니다. 러시아의 니콜라이 베르자예프의 책이지요. 그는 러시아 혁명 때 볼셰비키에 동조를 했지요. 그러다 불란서로 망명을 해서 쓴 책이 있었습니다. 이라고. 거기에 그런 말이 나옵니다. “지금까지는 역사가 인간을 심판했지만, 이제부터는 인간이 역사를 심판해야 한다.” 나는 그 말에 강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지금도 나는 그 말이 옳다고 봅니다. 역사라는 이름 때문에 개인이 얼마나 짓밟혔나요. 역사, 이러면 악 소리도 못하고 꼼짝 못하게 됩니다. 역사에 저항하면 죄인이 되니까요. 이때의 인간은 개인으로서의 인간이지요. 역사의 歷은 지나가는 것입니다. 지나가는 것은 과거 일이지요. 史는 기록입니다. 기록하는 사람도 史에 속하고요. 역사는 사실로서 있었던 것을 기록하는 것이지요. 사실은 객관적인 것이고 기록하는 것은 사람이지요. 사람이 기록한다는 것은 주관적이지요. 그런데 기록하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서 사실이 달라지지요. 그러니까 역사는 모순 개념입니다. 그러니 쉽게 말하면 역사는 없다, 이겁니다. 학교 교과서에나 있는 거지요. 어떤 사실의 단편들이 기록으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역사라고 하는 것은 강자의 역사입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교과서가 바뀝니다. 역사는 없고 강자, 힘센 사람이 그려 놓은 사실만 있을 뿐입니다.   의문 하나   한국전쟁 중 선생은 대표적인 모더니스트들의 모임인 동인에는 가담하지 않고 구상, 이정호, 김윤성 등과 함께 이라는 동인을 결성했다. 문학적 성격으로 본다면 선생은 모임에 있어야 한다. 은 문학적 성격이 다르다고 생각되는데 와는 어떤 관계였을까 궁금해졌다.   김춘수:후반기 동인 중에 조향은 나하고 해방 직후, 그러니까 1946년에 김수돈 시인과 함께 라고 하는 동인지를 냈습니다. 김수돈 시인은 정지용의 추천으로 지로 나온 시인이지요. 이 둘 다 마산에 살고 있었는데 나는 처가가 마산이라 자주 드나 들면서 동인이 된 것입니다. 그러다 50년 전쟁 때 부산 임시수도에서 조향하고 내가 만났지요. 그때 조향은 부산 동아대의 교수로 있었을 때고요. 조향이 동인을 같이 하자고 권유를 했습니다. 그런데 내가 조금 망설였습니다. 조향은 알지만 그 외의 사람들은 잘 모르는 사람들이어서 좀 불편했습니다. 그러다 나중에 생각해 보지요, 하고 살짝 빠져나갔습니다. 그 이후에 진주에서 설창수 시인이 하는 에 청마 유치환 선생과 함께 갔습니다. 그때 김윤성, 구상 시인 등과 어울리게 되었지요. 그때 우연히 말이 나와서 이라고 하는 걸 내게 되었지요. 그때 문학적인 경향이나 뜻이 같아서 한 것은 아니고, 한번 낸 것이지요. 1권 나오고 말았습니다.   김수영과 김춘수   선생은 김수영과 한 번도 대면한 적이 없다. 김수영이 죽기 얼마 전 서울에 볼 일이 있어 왔다가 종로의 한 여관에서 김수영에게 전화를 걸게 된다. 무슨 일이 있어서가 아니라 밤에 심심하여서 수첩을 뒤적이다가 전화번호가 나와서 걸어본 것이다. 김수영이 집에 있긴 했지만 술이 만취해서 도저히 전화를 받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통화도 못하고 다음 날 선생은 볼 일을 마치고 곧바로 내려가게 된다. 60년대 김수영이 참여의 길을 가게 되고 김춘수는 연작을 쓰면서 의식적인 트레이닝의 시작(詩作)을 하고 있었다. 이미지와 관념 사이, 무의식과 의식의 사이에서 끊임없는 사생과 추상을 거쳐 연작으로 이어지게 된다. 당시의 순수와 참여의 대립 구도에서 선생은 젊은 모더니스트들에게 큰 영향을 주는 순수시를 대표하는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김수영은 참여 진영의 대표적인 시인이다. 좀 가까이에서 살펴보면 김춘수와 김수영을 이런 거친 분류 속에 넣는 것은 무리이다. 그럼에도 당시 김수영이 참여로 갔기 때문에 그 반대 진영 쪽이라 할 수 있는 내면세계로 더 침잠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김춘수:그 말이 옳기는 옳은 말입니다. 저는 아까 말했다시피 이데올로기에 대한, 사상과 역사라는 것에 대한 회의가 생겼습니다. 지금도 이 역사허무주의자의 함정에서 빠져나오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현실에 부딪히면 현실에 대한 울분 같은 것도 또 있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같은 시도 썼지만 내 본래 의식은 역사허무주의였습니다. 역사나 현실의 문제에 대해 등을 돌리고 있었지요. 그런데 그때 김수영의 같은 작품을 보면서 내가 써보고 싶었던 것을 벌써 썼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종의 라이벌 의식, 질투가 생긴 거지요. 나보다 선수를 쳤구나, 하는 생각. 그래서 의식적으로 더 내면으로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선생님은 그 때 김수영을 가장 큰 라이벌로 생각하셨나요?)   김춘수:했지. 내가 그때 뿐만 아니라 내 생애에 시인으로서 라이벌 의식을 가진 시인은 그 사람뿐입니다. 미당 같은 시인도 있었지만, 나와는 시적 세계관이 너무 다르니까 그런 의식을 가질 필요는 없었지요.   의미에서 무의미, 다시 변증법적 지양을 거친 의미로   김춘수 선생은 40년대 후반 라는 동인지를 통해서 본격적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그러니까 통상적으로 시인의 길을 걷게 되는 신춘문예나 잡지의 등단 절차를 거치지 않고 작품활동을 시작한다. 선생의 술회에 따르면 40년대 후반 4~5년은 아류의 시절이었다고 말한다. 즉 선배 시인들의 시를 모범으로 트레이닝을 하던 시절이었다. 50년대에 들어서 선생은 자신의 시에 대한 자성을 하기 시작한다. 그러한 자성의 시가 바로 릴케와 실존주의 철학에 영향받은 꽃을 소재로 한 일련의 연작시이다. 소위 관념시라 부르는 김춘수의 시는 스스로 ‘플라토닉 포에트리’라고 부르고 있다. 60년대에 들어서 새로운 시적 실험을 하게 된다. 그것은 우리가 김춘수 하면 대표적으로 떠오르는 ‘무의미시’이다. 대상과의 거리가 상실된다는 것. 대상을 지울 때에 대상의 구속으로부터 시인은 해방되고, 어떤 의미부여의 행위로부터도 해방된다. 그러나 무의미시가 가지고 있는 서술적 이미지의 세계에서 이미지는 의도하지 않아도 의미를 띄게 된다. 이 의미를 지우기 위해 탈이미지로 가게 된다. 탈이미지는 리듬만으로 시를 쓴다는 것인데 이것은 시인이 고백한대로 언어도단의 세계이다. 이러한 무의미시의 변화 양상을 이승훈 선생은 , , 에서 보이는 서술적 이미지의 세계, 2부에서 드러나는 탈이미지의 세계, 즉 무의식의 세계로 전환되는, 이미지조차 마침내 소멸되는 시기, 그리고 이러한 되풀이로 인해 오로지 리듬만 남게 되는 시기(, , 연작)로 나누기도 한다. 무의미시의 막다른 골목에서 시인은 다시 이전의 세계로 돌아갈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시인은 다시 의미의 세계로 돌아오게 된다. 이 의미의 세계는 이전의 관념시와는 다른 변증법적 지양을 거친 세계이다. 이 관념시와 무의미시의 변증법적 지양을 통해 형성된 시집들이 , , 등이다. 이런 시편들이 나에게 된 내면 정황을 선생은 전집의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선적 세계에 들어섰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이상 시는 더 나갈 수 없게 되었다. 나의 무의미시는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게 되었다. 나는 여기서 또 의미의 세계로 발을 되돌를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러나 물론 무의미시 이전의 세계로 후퇴할 수는 없다.   무의미시로 대표되는 선생의 작품세계에서 실제로 일반 독자들에게 사랑받는 시는 무의미의 시편들이 아니다. 오히려 의미의 시, 그러니까 초기 관념시와 후기에 다시 의미로 되돌아온 시기이다. 아무래도 무의미시가 일반 독자들과 함께 호흡하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다. 선생에게 독자는 어떤 의미인가. 선생은 “내 시를 이해해 줄 수 있는 소수의 독자들을 염두해 두면서 쓴다”고 했다. 모든 예술이 그렇지 않은가. 어쩌면 선생의 무의미시도 하나의 과정인지 모른다. 무의미시는 어느 한 소실점으로 모일 수 있는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출구 같은 게 아닐까. 선생은 젊은 후학들에게 어떤 말씀을 하실까. 그간 많은 말씀을 하셨지만 이번에는 모더니즘 계열의 젊은 시인들을 위해 한 말씀 부탁드렸다. 큰 틀을 놓고 봤을 때 선생의 시세계를 이끌어갈 만한 시인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선생은 후학들이라면 어떤 연배를 두고 말해야 하는지 잠시 고심하셨다. 30, 40십대 젊은 후학들이라고 말씀드렸더니 천천히 말을 이으셨다.   김춘수:그동안 젊은 후학들이 우리 나이 때보다는 시를 이해하는 폭이 넓어진 것 같습니다. 그 사람들은 대학에서 어학력도 갖추고 일본을 통하지 않고도 원서를 읽을 수 있고 외국도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는 정보력이 있기 때문에 시를 이해할 수 있는 폭이 넓어졌습니다. 그런데 우선 내가 봐도 이해 안 되는 시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박상순, 송찬호 같은 시들입니다. 이들의 시는 과격 모더니즘에 속하죠. 전위성이 있는… 그런데 이 사람들의 전위는 이승훈이나 황지우의 전위와는 또 다릅니다. 이승훈은 존재론적이고 황지우는 사회성을 띄고 있습니다. 그런데 박상순이나 송찬호는 전혀 그런 게 없습니다. 이미지가 그려내는 환상세계만 있을 뿐입니다. 허무의 입장에서 본다면 앞의 두 사람에 비해 훨씬 허무적입니다. 의식상태가 그런 거 같습니다. 믿고 기대는 게 아무 것도 없다는 거지요. 철저한 비대상 세계, 말하고 싶은 대상이 없는 거지요. 환상세계가 이미지를 통해서만 펼쳐지고 있는데, 아무 의미없는 세계입니다. 그런데 그 허무를 언제까지 견뎌낼 수 있을까요. 허무는 견뎌내기 어렵습니다. 뭔가 기대는 게 있어야 됩니다. 사람이라고 하는 육체를 가진 이상, 허무를 이겨내지 못합니다. 허무는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 자유, 완전히 해방된 상태입니다. 그 자유를 견디지 못합니다. 내가 무의미시를 견디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계속 이런 시만 못씁니다. 의식이라고 하는 건 언어입니다. 언어와 의식은 이콜 아닙니까. 언어에서 해방된다고 하는 것은 모든 것에서 해방된다고 하는 건데 결국 언어에서 완전히 해방된다는 건 시를 못쓴다는 것입니다. 시를 못쓰거나 다른 상식적인 세계와 타협하거나가 되지요. 그러니까 상식적인 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를 찾는 데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시사는 굉장히 진일보했습니다. 시 자체를 극한으로까지 끌고 갔으니까요. 그러나 진일보라는 게 어느 한계에 가면 막다른 골목 아닙니까. 우리 시도 막다른 골목에 있습니다. 시가 없어지는 단계에까지 와있지요. 그리고 또 한 가지. 서정을 말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서정주의를 말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입니다. 시에 대한 자의식이 있어야 됩니다. 내 시를 비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왜 이런 시를 썼는가에 대한 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그냥 충동적으로 쓰고 마는 것은 아마추어가 하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그게 통했지요. 그러나 이제는 안됩니다. 내 하는 일에 대해서 어떤 예술가적 자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시는 자연발생적으로 나올 수가 있지만 그걸 의식하고 제어하는 이성이 있어야 합니다. 19세기 시대의 로맨티스트들처럼 자연발생적으로 부르짓는 시대는 이미 지났습니다. 우리 시는 대체로 단순해요. 소품이고, 입체성이 없고 논리도 없고 평면적이지요. 좋은 시들의 시가 대체로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볼륨이 있는 시, 논리전개도 입체적이고, 파라독스나 아이러니를 깔아놓은 입체적인 전개 등의 양적으로 무게가 있는 큰 시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릴케하고 엘리엇처럼 말이죠. 그런 큰 시인이 나와 주었으면 싶다는 생각입니다.   선생은 1시간 30여분 이상 이어진 인터뷰 시간 동안 뜨거운 열정으로 세심하게 하나씩 짚어주시며 말씀하셨다. 선생의 삶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모든 시간들이 문학적 열정으로 채워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선생에게 문학 이외의 것들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선생에게는 사회적 지위도 국가적 명예도 귀찮고 빨리 벗어나고 싶은 굴레였을 뿐이다. 선생은 지금도 공부하고 계신다. 끊임없는 자기 갱신과 반성과 회의야말로 오래도록 문학을 지속하는 힘이 아닌가. 선생은 당신이 앞으로 어떤 세계로 또 나아갈 지는 당신 자신도 모른다고 하셨다. 선생은 시 에서 “오지 않는 것이 오는 거다”라고 했다. 그렇지만 인간은 늘 기다린다. 그 기다림이 시를 쓰게 하는 건 아닐까. 이 비껴 서지 않는 역사 앞에서 선생은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참 오랜만에 멀리 통영의 생가에 눈 내리고 있는 모습을 보지만, 의식은 먼 끝 어디를 보고 있는 것일까. 시가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는 바로 그것일까.   강설降雪   역사는 비껴 서지 않는다. 절대로, 그러나 눈이 저만치 찢어지고 턱이 두툼한 (그 왜 있잖나?)   그는 오지 않는다. 오지 않는 것이 오는 거다. 그는, 기다림이 겨울에도 망개알을 익게 하고 익은 망개알을 땅에 떨어뜨린다. 또 한 번 일러주랴. 역사는 비껴서지 않는다. 절대로, 땅에 떨어진 망개알을 겨울에도 썩게 한다. 썩게 하여 엄마가 아기를 낳듯 그렇게 땅을 우비고 땅을 우비게 한다. 그는 온다고 지금도 오고 있다고, 오지 않는 것이 오고 있는 거라고,   바라보면 멀리 통영 내 생가가 눈을 맞고 있다. 내 눈에 참 오랜만에 보인다. 기왓장 우는 소리. _ ,     
853    문제의 시인 - 이상 댓글:  조회:4847  추천:0  2016-01-05
이상의 생애 어린 시절과 학창 시절 이상(李霜, 1910~1937)은 본명이 김해경(金海卿)으로, 한일 합방이 일어나던 해 서울 사직동에서 태어난다. 아버지는 구한말에 궁내부 활판소에서 일하다가 손가락 셋이 잘린 뒤 이발소를 운영하고 있었다. 이상은 가세가 급격하게 기울자 1914년(5세)에 백부의 양자로 들어간다. 그 때 백부는 총독부의 기술관이었는데, 자상한 백부와 달래 백모는 이상을 달갑지 않게 대했다고 한다. 이상은 백모가 무서워 “슬금슬금 문 밖으로 숨었”다고 한다. 이상은 1918년(9세)에 신명학교에 들어갔는데, 특히 지리와 미술에 소질을 보였다. 이후 화가 고희동이 미술 교사로 있던 보성고보에 다니면서 그림을 열심히 그려 교내 미술 전람회와 조선 미술 전람회에서 상을 받기도 한다. 보성고보에서 이헌구, 임화 등과 동기였으며, 1년 후배로는 김기림, 김환태가 있었다. 백부의 가세마저 기울자 고학을 해야 했던 이상은 1929년(20세)에 백부의 설득대로 경성고등공업학교에 들어간다. 이상이 건축 용어와 숫자, 기하학 기호 등을 시어로 차용한 것 등은 바로 이 고등공업 시절의 영향이다. 그런데 이미 이 시기부터 이상의 내면에서 현실 도피나 자살을 추구하는 병적인 심리가 나타난 듯한다. 이 무렵의 소설 , 과 시 등을 보면 그러한 이상 심리가 다량 발견된다. ‘이상’이라는 필명을 쓴 것도 경성고등공업 때부터였다. 조선총독부 건축기사로 근무하던 시절의 이상 문학 활동 이상의 시가 처음으로 활자화된 것은 1931년(22세)의 이다. 이후 1933년(24세)에는 가족과 합쳤다가 보름을 견디지 못하고 다시 나오고, 백부의 유산으로 ‘제비’ 다방을 개업하면서 온천 여행 중 만난 술집 여급 금홍을 불러 들여 마담으로 앉힌다. 두 사람은 곧 동거를 시작하는데, 이 때 금홍은 겨우 스물 두 살이었고 이상은 스물 네 살이었다. 소설 는 바로 금홍과의 동거 체험에서 건져낸 작품이다. 족두리를 쓰고 여성으로 분장한 이상(아랫줄 왼쪽에서 세 번째) 이태준, 박태원, 김기림 등과 어울리던 이상은 1934년 (25세) ‘구인회’에 가입하고, , , 같은 파격적인 실험적 작품들을 잇달아 내놓아 문제 작가로 떠올랐다. 그러나 다방 경영이 잘 되지 않아 ‘제비’는 1935년(26세) 문을 닫는다. 그리고 다시 인사동의 ‘카페 쓰루’, 종로 1가에 ‘69’, ‘무기’, ‘맥’ 같은 다방을 계속 열지만 번번이 실패하였다. 그러는 동안 금홍은 바람을 피우며 다시 술집에 나가더니, 결국 집을 나가 버리고 만다. 얼마 후 이상은 다시 여급 출신 권순옥과 사귀지만, 정인택이 그녀를 연모하는 것을 알고는 두 사람을 맺어 주기도 했다. 정인택과 권순옥은 1935년 바로 결혼한다. 이상과 박태원 이상은 이후 셋방을 전전하면서 방세를 못 내 쫓겨나기도 하고, 동생의 봉급으로 겨우 생계를 꾸려 나간다. 거듭된 다방 경영 실패, 쇠잔해진 몸, 연애의 후유증 등으로 고독을 느끼던 이상은 김유정에게 같이 자살하자는 제안까지 한다. 그러던 중 1935년(26세) 말, 화가 구본웅의 소개로 그의 아버지가 경영하던 ‘창문사’에서 일하기 시작하면서부터 형편이 조금 풀린다. 그리고 구본웅의 서모 소생인 변동림을 만나 얼마 후 결혼식을 올리고 을지로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하는데, 이때부터 이상은 무엇에 홀린 사람처럼 창작에 매달려 1935년(26세) , , , 1936년(26세) , , 등의 수십 편을 마구 쏟아낸다. 1936년(27세) 이상은 김기림과 함께 프랑스로 가겠다는 꿈을 안고 도쿄로 간다. 그곳에서 하숙집을 정해 놓고 , , 등을 써 내는데, 결핵이 계속 악화되어 프랑스 행은 무산된다. 그러던 중 1937년(28세) 2월 일본 경찰에 불령선인으로 검거되자 폐결핵이 급격하게 악화되어 병상에 눕는다. 아내 변동림이 이 소식을 듣고 급히 도쿄로 갔으나, 결국 4월 17일 28세의 일기로 요절하고 말았다. 그의 마지막 한 마디는 “멜론이 먹고 싶소…….”라는 말이었다. 이상의 문학 작품 이상의 시 1933년(24세) 발표한 작품으로, 이상이 즐겨 사용한 ‘거울’ 모티프를 중심으로 거울 밖의 나, 즉 현실 속의 자아와 거울 속의 나, 즉 내면의 자아 사이의 갈등, 다시 말해 자의식의 갈등을 드러낸 작품이다. 거울속에는소리가없소/ 저렇게조용한세상은참없을것이오// 거울속에도내게귀가있소/ 내말을못알아듣는딱한귀가두개나있소// 거울속의나는왼손잡이오/ 내악수를받을줄모르는-악수를모르는왼손잡이오// 거울때문에나는거울속의나를만져보지를못하구료마는/ 거울이아니었던들내가어찌거울속의나를만나보기라도했겠소// 나는지금거울을안가졌소마는거울속에는늘거울속의내가있소/ 잘은모르지만외로된사업에골몰할게요// 거울속의나는참나와는반대요마는/ 또꽤닮았소/ 나는거울속의나를근심하고진찰할수없으니퍽섭섭하오 은 ‘거울’이 대상을 거꾸로 비춘다는 점에 착안하여 거울 속의 ‘나’와 거울 밖의 ‘나’의 분열을 “거울속의나는왼손잡이오.”, “거울속의나는참나와는반대요마는”과 같이 감각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를 통해 이상은 거울 밖에 있는 현실적 자아와 거울 속에 있는 내면의 자아의 갈등, 즉 자의식의 갈등을 표현함과 동시에 자신의 의식과 무의식을 함께 생각해 봄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반성한다. 1934년(25세) «조선중앙일보»에 연재한 작품으로, 독자들로부터 업무가 마비될 정도의 항의를 받아 제15호를 끝으로 게재를 중단하고 만 시이다. 우리 현대 문학사 1백 년 동안 나온 작품 가운데 가장 문제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13인의 아해’에 대해서는 ‘최후의 만찬에 합석한 13인’, ‘위기에 당면한 인류’, ‘해체된 기아의 분신’, ‘이상 자신의 기호’, ‘인간 역사의 한계성’, ‘일제하의 13도’, ‘언어 도단의 세계’ 등 무수한 해석이 나왔지만, 그 어떤 해석도 ‘13인의 아해’의 상징성을 다 풀어내지 못했다. 中 ‘시제일호(詩第一號)’ 13인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오./ (길은막다른골목이적당하오.)// 제1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2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3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4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5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6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7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8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9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0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1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12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3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13인의아해는무서운아해와무서워하는아해와그렇게뿐이모였소./ (다른사정은없는것이차라리나았소.)// 그중에1인의아해가무서운아해라도좋소./ 그중에2인의아해가무서운아해라도좋소./ 그중에2인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좋소./ 그중에1인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좋소.// (길은뚫린골목이라도적당하오.)/ 13인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지아니하여도좋소. 한편 에는 여러 측면에서 ‘낯설게 하기’ 기법이 사용되었다. ‘조감도’의 ‘조(鳥)’를 ‘오(烏)’로 대치한 것부터가 그렇다, 불길함을 상징하는 까마귀가 조감도를 내려다보듯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시적 상황을 설정함으로써 애초에 시를 낯설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또한 ‘13’이라는 불길한 숫자, 그리고 ‘아이’를 낯설게 표현한 ‘아해’ 역시 낯섦을 조장하여 시 전반에 불안과 혼란을 일으키는 효과를 가져 온다. 1935년(26세)의 작품이다. 획일화된 근대 문명이 본격적으로 도래하던 1930년대에, 시대를 상징하는 백화점과 시계를 제재로 하여 그 성격을 비판하고 있는 시이다. 백화점은 근대에 새롭게 등장한 공간으로, 재래시장과 달리 직선과 사각형으로 가득 차 있는 곳이자 한 층 한 층 개성 없이 규격화되어 있는 공간이다. 이러한 백화점의 폐쇄성은 단조롭고 획일화된 문화를 직접적으로 상징한다. 또 ‘시계’는 쉼 없이 시간을 가리키지만 인간의 삶의 흐름을 재지는 못하는 근대 문명의 첨병이다. 화자는 이 백화점과 ‘시계’를 통해 근대 문명의 무의미함을 포착하고 있는 것이다. 一層(일층)우에있는二層(이층)우에있는三層(삼층)우에있는屋上庭園(옥상정원)에올라서南(남)쪽을보아도아무것도없고北(북)쪽을보아도아무것도없고해서屋上庭園(옥상정원)밑에있는三層(삼층)밑에있는二層(이층)밑에있는一層(일층)으로내려간즉東(동)쪽으로솟아오른太陽(태양)이西(서)쪽에떨어지고東(동)쪽으로솟아올라西(서)쪽에떨어지고東(동)쪽으로솟아올라西(서)쪽에떨어지고東(동)쪽으로솟아올라하늘한복판에와있기때문에時計(시계)를꺼내본즉서기는했으나時間(시간)은맞는것이지만時計(시계)는나보담도젊지않으냐하는것보담은나는時計(시계)보다는늙지아니하였다고아무리해도믿어지는것은필시그럴것임에틀림 없는고로나는時計(시계)를내동댕이쳐버리고말았다. 이상이 병으로 죽던 해인 1936년(27세)에 쓴 작품이다. 이 작품 역시 이상의 다른 시처럼 집의 모습을 낯설게 표현하고 띄어쓰기를 무시하고 있다. 일상적인 소재인 ‘가정’을 제재로 하며 ‘제웅’처럼 변해가는 자아의 무력감을 그려낸 시이다. ‘제웅’은 집 밖에 내다버리는 주술적 도구를 말한다. 흔히 집에 아픈 사람이나 살이 낀 사람이 있으면 제웅을 만들어 집 밖에 버리곤 했는데, 화자는 자신이 바로 그 ‘제웅’과 같다고 여기고 있다. 이상은 에서도 드러나듯 자신을 유교적 가족 이념에 희생된 존재로 간주하였는데, 이 작품에서도 자신을 제웅으로 여기는 이상의 자의식, 이른바 ‘제웅 의식’이 문학적으로 표출되어 있다. 문(門)을암만잡아다녀도안열리는것은안에생활이모자라는까닭이다.밤이사나운꾸지람으로나를조른다.나는우리집내문패(門牌)앞에서여간성가신게아니다.나는밤속에들어서서제웅처럼자꾸만감(減)해간다.식구(食口)야봉(封)한창호(窓戶)에더라도한구석터놓아다고내가수입(收入)되어들어가야하지않나.지붕에서서리가내리고뾰족한데는침(鍼)처럼월광(月光)이묻었다.우리집이앓나보다그러고누가힘에겨운도장을찍나보다.수명을헐어서전당잡히나보다.나는그냥문고리에쇠사슬늘어지듯이매어달렸다.문열려고안열리는문열려고. 이상의 소설 1936년(27세) 에 발표된 작품이다. 자동기술법과 의식의 흐름 기법을 사용하여 시공간의 전환을 무시함으로써 자폐적 심리 상태를 효과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결말 부분의 정오 사이렌 소리는 ‘나’의 내적 자아를 깨우는 역할을 하고 있다. ‘나’는 아내와 단둘이 사는 젊은 남자로, 지식인이지만 직업은 없다. 몸도 건강하지 않고 현실 감각도 없다. 아내의 방은 볕이 잘 들고 예쁘게 꾸며져 있지만, ‘나’의 방은 볕이 안 들어 음침하다. 그래서 ‘나’는 아내가 외출한 뒤 아내의 방에 가서 화장품 냄새를 맡거나 돋보기로 화장지를 태우면서 혼자 논다. 아내는 사내들에게 몸을 팔아 돈을 벌고, 그 돈으로 ‘나’에게 용돈을 준다. ‘나’는 돈을 쓰는 쾌감을 체감하고 싶어 나갔지만, 돈을 쓸 줄 모르는 데다 집 밖에서 행동하는 양식을 몰라 헤맨다. 그러나 곧 돈의 가치를 차츰 깨닫고, 늦게 오라고 종용하는 아내 덕에 밖에서 시간을 길게 보내며 세상에 적응해 나가기 시작한다. 아내는 자신이 매음을 할 때 ‘나’가 방에서 나오지 못하도록 수면제인 아달린을 먹이곤 했다. ‘나’는 그 약이 아스피린인 줄 알고 지냈는데, 어느 날 그것이 수면제라는 것을 알게 된다. 배신감을 느낀 ‘나’는 산으로 올라가 아내를 연구하지만, 거기서 자다 깨어난 다음에는 괜히 아내를 의심했다는 미안한 마음이 들어 아내에게 사죄하기 위해 집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나’가 집에 왔을 때 아내는 다른 사내와 매음을 하고 있었다. 그 장면을 본 ‘나’는 도망쳐 나와 거리를 쏘다니던 끝에 미스코시 백화점 옥상에 올라가 인생을 회상한다. 이때 정오의 사이렌이 울고, ‘나’는 날개를 달고 날아오르고 싶은 충동에 휩싸인다. 1937년(28세) 작품으로, 이상의 유작 중 하나이다. 와 같은 계열의 신심리주의 기법을 사용한 것으로, 화자의 잠재의식이 도처에 불쑥불쑥 표출된다. 그리하여 이 작품에서는 과거를 갖고 있으면서도 다른 남자와 관계를 맺는 ‘정희’를 사랑하는 주인공 ‘나’의 모습을 자학적으로 묘사함으로써 이상 자신의 어두운 개인사적 면모를 처절하게 드러내고 있다.  는 이상 스스로가 거부하려 했던 윤리관에 얽매여 충격 받고 괴로워하는 또 다른 이상의 모습이 주인공 ‘나’를 통해서 철저히 해부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때문에 더한 내면의 어둠과 감동을 자아낸다. 이 소설에서 특기할 점은, 화자인 ‘나’가 바로 이상 자신임을 굳이 숨기려 하지 않고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마지막 부분에서 ‘나’가 자기 인생과 죽음에 대하여 보이는 태도는, 자기 인생에 대한 자학과 그 극심한 자학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냉소의 극치를 보여 준다. 끊임없이 자신의 부정을 감추는 정희의 부정한 행실이, 그 자신에게 탄로 나자 ‘나’는 자가당착에 빠져 버린 것이다. 25세 11개월을 맞은 ‘홍안미소년(紅顔美少年)’인 ‘나’는 멋진 종생(終生)을 계획하고 유서를 써 내려간다. 열세 벌의 유서가 거의 완성되어 가는 어느 날 정희에게서 3월 3일 오후 2시 동소문 버스 정류장에서 만나자는 속달이 온다. 그날 ‘나’는 점잖게 한 30분쯤 늦게 그곳에 도착하여 정희와 흥천사로 동행한다. 어느 구석방에서 술을 마시면서 멋진 종생을 하려는 순간, 절연한 지 다섯 달이나 되었다던 S가 정희에게 보낸 속달이 정희의 스커트에서 떨어졌다. 그 편지에는 “정희를 하루라도 바삐 나 혼자만의 것으로 만들어 달라는 정희의 열렬한 말을 나는 잊어버리지는 않겠소. …오늘(3월 3일) 오후 여덟 시…그때 그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겠소.”라고 써 있었다. ‘나’가 눈을 다시 떴을 때 거기 정희는 없었다. S에게로 간 것이다. 이리하여 ‘나’의 종생은 끝났으되 ‘나’의 종생기는 끝나지 않는다.   거울의 시인 이상 이재훈 (시인, 현대시 부주간) 시인 이상(李箱, 본명 김해경, 1910~1937). 만 26년 7개월을 살다 요절한 천재 시인. 시인 이상의 이름 앞에는 늘 천재 시인이라는 수식어가 따라 다닌다. 이상의 시는 늘 가장 문제적이었으며, 지금 현재에도 가장 문제적이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또한 아방가르드, 초현실주의, 탈장르, 새로운 실험과 전위 미학 등의 말들이 등장할 때마다 가장 최전방에 서 있던 시인이다. 이미 한 세기 일찍 모든 문학적 실험들을 가장 개성적인 문학적 태도와 신념을 가지고 구현해 나간 시인이다. 2010년은 시인 이상이 탄생한 지 100주년 되는 해이다. 많은 문학 단체와 지자체와 예술 각 방면에서 이상을 추모하고 기리는 행사가 진행되고 있다. 교하아트센터에서는 이상 100주년을 기념하여, 이상이 문을 열어 가게를 시작했던 ‘제비다방’을 모티브로 한 작품전을 갖는다. 이상이 차렸던 ‘제비다방’은 2년여 만에 문을 닫아 실패한 사업이었다. 그러나 당시 김유정, 박태원 같은 문화 예술인들이 문우의 정을 나누고 문학과 예술을 논하던 장소였다. 그런 의미에서 제비다방은 유럽의 살롱과 같이 중요한 문학적 생산처였으며, 문인들의 작품 곳곳에 등장하는 상징적인 장소였다. 더불어 이상의 문학세계를 조명하는 학술대회가 연내 마련된다고 한다. 이상 100주기를 추모하는 학술행사나 출판 등도 활발하게 진행될 예정이다. 이미 출간된 이상 전집뿐 아니라 이상 관련 서적이 출간을 준비 중에 있다. 가수 조용남도 이상 시 해설서 를 최근 출간했다.  이상을 추모하고 기리는 행사는 외국에서도 진행되고 있다. 유럽과 한국의 예술가 20여명이 프랑스 파리와 서울에서 다양한 장르의 예술로 이상을 기리는 행사를 연다고 한다. 문화예술기획모임인 ‘랩 201’은 파리시의 후원으로 운영되는 복합문화공간 라 제네랄과 공동으로 ‘2010 파리/서울 이상-직선은 원을 살해하였는가’전을 개최한다고 밝혔다. 그만큼 이상은 시뿐만 아니라 소설, 건축가, 예술 곳곳에서도 후대에 큰 영향력을 끼친 문인이다.  이상의 삶은 괴팍하기로 소문나 있다. 평생 폐결핵을 앓았으며, 지독한 가난과 싸워야 했다. 이상은 이발업에 종사하던 부친을 이른 나이에 떠나 백부 밑에서 성장했다. 백부의 교육열에 힘입어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과를 입학하여, 수석으로 졸업하였다. 졸업 후에는 조선총독부 건축과 기수로 취직하였지만, 적응을 하지 못해 곧 그만두었다.  1931년 처녀시 , 등을 에 발표했고, 시 를 발표하면서 ‘이상(李箱)’이라는 필명을 처음으로 사용했다. 1934년 에서 본격적인 문학 활동을 시작하여 시 를 에 연재하였다. 그러나 이 연재시는 한국 문단을 통틀어 가장 문제적인 독자들의 반응을 불러 일으켰다. 이상은 이천 점의 작품 중에서 삼십 편을 고르느라 힘들었다고 토로했다. 하지만 독자들은 문법 파괴, 띄어쓰기 무시, 이해 불가능한 수사 등 한 번도 접해보지 못한 이상의 시에 당황했다. “무슨 미친놈의 잠꼬대냐”, “무슨 개수작이냐”, “당장 신문사로 가서 원고를 불사르자”, “작가를 죽여야 한다” 등의 격한 반응들이 쏟아졌다. 이상의 시를 연재하기로 한 작가 이태준은 항상 사직서를 품고 다녀야만 했다. 이태준의 후원에도 불구하고 는 30회 연재를 마저 채우지 못하고 15회로 끝나고 만다.  1937년에는 사상불온 혐의로 동경 니시칸다경찰서에 유치되었다가 병보석으로 출감한다. 그러나 지병인 폐병이 악화되어 향년 만 26년 7개월에 동경제대 부속병원에서 객사하였다. 유해는 화장하여, 경성으로 돌아왔으며, 같은 해에 숨진 김유정과 합동영결식을 하여 미아리 공동묘지에 안치되었으나, 후에 유실되었다. 이상의 대표적인 시는 역시 이지만, 이 시가 가지고 있는 난해함으로 인해 시의 유명세에 비해 독자들에게 두루 읽혀지지는 않았다. 대신 이상의 시 은 독자들에게 가장 많이 읽히는 시가 아닐까 한다. 거울속에는소리가없소 저렇게까지조용한세상은참없을것이오 거울속에도내게귀가있소 내말을못알아듣는딱한귀가두개나있소 거울속의나는왼손잡이오 내악수를받을줄모르는―악수를몰으는왼손잡이오 거울때문에나는거울속의나를만져보지를못하는구료마는 거울아니었던들내가어찌거울속의나를만나보기만이라도했겠소 나는지금거울을안가졌소마는거울속에는늘거울속의내가있소 잘은모르지만외로된사업에골몰할께요 거울속의나는참나와는반대요만은 또꽤닮았소 나는거울속의나를근심하고진찰할수없으니퍽섭섭하오 ― 이상, 전문 위의 시 은 식민지 시절 지식인의 고뇌를 초현실적인 기법과 무의식의 언어로 표출해내고 있는 시이다. 거울은 소리가 없으며, 거울 속에 비춰지는 나는 악수를 할 수 없는 이미지의 형상이다. 이러한 사실을 반복적으로 재확인하고, 그것을 인지함으로 인해 지식인으로서 느낄 수 있는 의식의 분열과 착란을 독자들에게 전달하고 있다. 이를 잘 표현하기 위해 시인은 의도적으로 띄어쓰기를 무시하고 있다. 이 시가 착란의 언어라고 하지만, 시의 구조를 볼 때 이성적으로 잘 질서화된 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시에서 보여주는 거울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읽는 독자에 따라 다르겠지만, 거울 속의 나와 현실의 나를 대비해서 보여줌으로 인해 분열된 자아를 재확인하게 된다. 이러한 거울이라는 연결매개체를 통해 자신의 본모습을 다시 한 번 성찰하게 된다. 이상의 성찰이 개성적인 까닭은 거울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개성적인 주체를 서로 반영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보편적인 감성과 보편적인 깨달음을 줄곧 받아왔다. 하지만 이상과 같이 전혀 낯설고, 다소 충격적인 자아의 모습을 발견하면서 또다른 자신을 반추하고 비춰보게 된다. 이것으로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것은 성찰을 넘어 미학적 체험의 즐거움에까지 이르게 되는 것이다. 한여름 이상의 시를 읽으며 ‘이상한 가역반응’을 느끼며, ‘무한건축육면각체’의 비밀들을 탐사하는 즐거운 시간을 보냈으면 한다.  _ 논산문화,
852    혼백의 시인 - 서정주 댓글:  조회:4543  추천:0  2016-01-05
혼(魂)의 시인 서정주   이재훈(시인)   2010년은 미당 서정주가 타계한 지 10년이 되는 해이다. 미당의 문학적 업적을 기리기 위해 후학들을 중심으로 미당기념사업회(회장 : 홍기삼)가 창립되었다. 미당기념사업회에서는 미당의 시를 낭송하는 월례 행사와 서울 관악구 남현동의 미당 자택을 복원하여 ‘미당 서정주의 집’으로 개관할 예정이라고 한다. 또한 미당의 고향인 전북 고창에서는 매년 미당문학제가 열리고 있으며, 4월부터 동백꽃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미당 서정주(1915~2000). 미당(未堂)은 한국 시사에서 가장 영예를 많이 받은 이름이다. 미당 서정주를 부르는 이름 또한 만만치 않다. 시의 정부(政府), 시의 귀신, 시의 학교, 시인 중의 시인, 한국 부족 언어의 주술사, 시선(詩仙) 등등. 미당 서정주는 시인으로서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찬사들을 받았다. 시인으로서의 찬사만큼이나 그의 시적 영향력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일찍부터 예술관련단체의 굵직굵직한 자리를 역임했으며, 신춘문예와 문예지를 통해 수많은 문인들을 배출해 냈다. 또한 서라벌예술대, 중앙대, 동국대 등에 재직하면서 수많은 제자들을 길러내었다. 그러나 그의 사후(死後), 과거 친일 행적과 독재정권과의 영합 때문에 명예롭지 못한 비판을 받아 왔다. 아직까지 미당의 평가에 대한 후학들의 입장은 논란 중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당 서정주가 가진 문학적 업적과 자산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근대 이후 우리의 시문학은 미당을 극복하기 위한 몸부림이었을 정도로 그는 한국문학에 큰 영향을 끼쳤다. 정념의 상징주의, 한국적 정한의 토속세계, 불교적 세계, 신화적 세계, 동서양을 넘나드는 역사의 시적 형상화 등등. 그가 도달하지 못한 시적 세계관은 없을 정도이며, 그가 닿고자하는 시적 지향점에서 뚜렷한 시적 완성품을 문학사에 제출하였다. 그 중에서도 은 전국민이 애송하는 미당의 대표작이다.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파뿌리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주 서 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하나만 먹고 싶다하였으나…… 흙으로 바람벽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까만 에미의 아들. 갑오년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하는 외할아버지의 숱 많은 머리털과  그 커다란 눈이 나는 닮었다 한다.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가도 부끄럽기만 하드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 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 찬란히 틔어오는 어느 아침에도 이마 위에 얹힌 시의 이슬에는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어 있어 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트린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 - 전문 시 은 언제 읽어도 우리의 가슴을 서늘하게 한다. 운명이란 어떤 것인가. 애비는 집으로 오지 않는다는 결핍의 운명. 부모의 연이 단절된 이유가 “종이었다”는 운명론적 감수성은 우리 민족 저변에 깔린 한(恨)을 잘 드러내준다.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라는 유명한 싯귀는 시련을 그대로 받아내고 참아내는 인고의 자화상을 보여준다. 또는 아버지 없는 운명이 가질 수 있는 가장 마지막 선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럼에도 시인은 “아무 것도 뉘우치지 않겠다”는 다짐을 한다. 운명에 구속되어 오히려 피해자인 자신이 죄책감을 느껴야만 하는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것이다.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살아온 삶일지라도 부끄러워하지는 않겠다는 각오도 서려 있다. 죄인과 천치를 읽고 가는 세상 사람들의 가치관에는 어떤 문제가 없는가. 시에서는 가장 밑바닥의 운명적 실체를 보여준다. 할머니는 너무 늙었고, 집안은 어머니가 풋살구 하나도 못 먹을 정도였으며, 흙으로 바람벽한 호롱불 밑에서 살 정도로 가난했다. 그 집안의 아들은 태어날 때부터 손톱이 까맣다. 자신은 그런 가족사에 편입되고 싶어하지 않았을 것이다. 언제나 부재했던 외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닮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을 가르친 것은 저 들판의 바람뿐이었으리라.  이 시는 현재의 관점에서 읽어도 감동적으로 다가온다. 지금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인간 이기주의, 날로 발달해가는 자본 문명, 이러한 모든 것들이 마치 문명인의 운명처럼 경쟁적으로 이루어진다. 결국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다. 그 당시와 달라진 건 없다. 가난의 대물림은 오히려 현재 더욱 가속화되고 있는 지경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악착같이 버텨내기 위해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사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다. 자화상은 자신의 모습을 비춘 형상이다. 지금 나의 모습은 어떠한가. 어떤 가치관으로 자신을 실패자라고 말할 수 있는가. 서정주의 시를 읽으며 다시 한 번 닥친 운명에 대해 뉘우치지 않는 각오를 해본다. 이 각오가 새로운 희망으로 변주되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_
851    永遠의 시인 - 구상 댓글:  조회:4441  추천:0  2016-01-05
영원(永遠)의 시인 구상   이재훈(시인)     한 해의 끝자락에 와있다. 해마다 연말이면 그동안 연락이 뜸했던 지인들이 생각나고, 한동안 자주 못만났던 동료들과 친구들이 생각난다. 문득 보고 싶은 사람들이 생기는 것은 한 해 동안 쉼없이 보내온 시간들에 대한 상념때문일 것이다. 무엇을 위해 지금껏 살아왔는가. 나는 지금 행복한가. 순결한 성찰의 시간은 바로 이런 순간이다. 돌아보며 느끼며 고개를 끄덕이며, 때론 다짐하며 한 해의 마지막 시간들을 보낸다. 이런 즈음이면 떠오르는 시가 있다. 바로 구상의 이다. 구상(具常, 1919년 9월 16일 ~ 2004년 5월 11일) 시인은 작고할 때까지 시와 인간적 품성이 늘 함께 존경받는 이 시대의 스승이었다. 프랑스 문인협회가 선정한 세계 200대 문인 중에 한 분으로 선정될 만큼 큰 시인이었으며 한국 시단에 큰 영향을 끼친 시인이었다. 구상 시인은 문학 분야뿐 아니라 종교계, 교육계에서도 큰 족적을 남겼다.  구상 시인의 삶은 그야말로 파란만장한 시간들 그 자체이며, 격변했던 한국 근대사를 온몸으로 통과한 삶이었다. 시인은 1919년 서울에서 태어났으나 네 살 때 원산으로 이주하여 유년시절을 보낸다. 시인의 부친이 독일계 신부들이 개설한 원산의 교구에서 교육사업을 하였던 것이다. 이후 원산 덕원 성베네딕도 수도원 부설 신학교 중등과를 수료하고 1941년 일본 니혼대학 전문부 종교과를 졸업한다. 귀국 후 해방이 되고 원산의 작가동맹에서 펴낸 시집 에 자신의 시를 실었으나, 1946년 응향필화사건에 연루되어 북조선 당국으로부터 반동적이라는 비판을 받고 월남했다. 이후 경북 왜관에 정착하여 20여년을 거주하다 서울 여의도에서 나머지 일생을 마감했다. 현재 경북 칠곡군에는 구상문학관이 설립되어 있다.  구상 시인은 평생 현실 정치와는 거리를 두고 오로지 문학과 종교활동에만 몰두하였다. 효성여자대학, 서강대학교, 서울대학교, 중앙대학교, 하와이대학 등에 재직하며 후학들을 가르쳤다. 시인은 이때에도 일체의 보직을 사양하였다고 한다. 서라벌 예술대학의 초대 학장과 국민대 총장 자리를 제의했을 때에도 사양했다고 전해진다. 시인에게 정치를 권유한 정치인들은 많았다. 처음 구상 시인에게 정계 입문을 권유한 사람은 해공 신익희 선생이었고 이후에도 장면 총리가 시인이 몸담고 있는 서강대로 찾아와서 간곡히 정계입문을 권유했다.그때마다 시인은 강원도와 제주도 등지에 숨어 정계입문을 간접적으로 거절했다. 구상 시인과 박정희 전 대통령과의 인간적 관계는 잘 알려진 것이다. 5 ․ 16 직후 박 대통령은 국가재건최고회의 상임고문으로 구상 시인을 내정해 놓고 시인을 설득했지만 끝내 박 대통령의 제의를 거절하였다. 생전에 구상 시인은 박 전 대통령을 관(官)에 나가 있다는이유로 ‘박 첨지’라고 불렀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구상 시인은 종교인, 문화예술인들과도 다방면으로 돈독한 친분이 있었다. 김수환 추기경, 화가 이중섭, 걸레스님 중광, 장애인 화가 김기창, 아동문학가 마해송 등과의 친분과 수많은 일화들도 우리들의 가슴을 따뜻하게 하는 일들이다. 오늘도 신비의 샘인 하루를 맞는다 이 하루는 저 강물의 한 방울이 어느 산골짝 옹달샘에 이어져 있고 아득한 푸른 바다에 이어져 있듯 과거와 미래와 현재가 하나다 이렇듯 나의 오늘은 영원 속에 이어져 바로 시방 나는 그 영원을 살고 있다 그래서 나는 죽고 나서부터가 아니라 오늘서부터 영원을 살아야 하고 영원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 마음이 가난한 삶을 살아야 한다  마음을 비운 삶을 살아야 한다  ― 「오늘」 전문 구상 시인은 독실한 카톨릭 신자였다. 시인이 작고한 날, 김수환 추기경이 직접 명동성당에서 그의 영결식을 집도하였으며, 수많은 종교인들이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그의 종교적 인식은 서구의 보편적인 기독교적 세계관에 동양적 세계관이 덧입혀진 통합적 인식이다. 그것은 시인이 일찍부터 신화와 유교, 불교, 노장사상 등의 사상을 섭렵해 왔기 때문이다. 기독교적 세계관의 바탕 위에 다양한 종교적, 철학적 인식이 덧입혀져 더 넓은 영역의 인식적 기반이 된 것이다. 시인은 “과거와 미래와 현재가 하나”라고 말한다. 즉 오래전 과거와 지금의 현실과 죽음 이후의 내세에 관해서 이를 단절의 시간이 아니라 통합의 시간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오늘의 삶에서 아등바등 발버둥치며 사는 시간들이 얼마나 부끄러운지 성찰하게 된다. 시인이 유언처럼 남긴 “영원이라는 것은 저승에 가서부터 시작되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오늘을 살고 있다는 것이 곧 영원 속의 한 과정”이라는 말은 위의 시를 잘 설명하고 있다.  구상 시인은 생전에 시를 쓸 때 기어(綺語)의 죄를 범하지 않아야 한다는 말을 자주 남겼다. 말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언령(言靈)이 있으므로 참된 말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교묘하게 꾸며 겉과 속이 다른, 진실이 없는 말을 결코 해서 안 된다는 것인데, 이 시대에 가슴 속에 깊이 새겨야 할 말이다.  
850    고독의 시인 - 김현승 댓글:  조회:5088  추천:0  2016-01-05
고독의 시인 김현승   이재훈(시인)   가을이다. 가을을 가리켜 흔히 천고마비의 계절, 혹은 고독의 계절이라고 한다. 산의 나무들은 형형색색의 옷으로 갈아입는다. 거리의 가로수들은 나뭇잎을 떨어뜨린다. 우리는 가을이 되면 쓸쓸해지고, 인생과 사랑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진다. 철학자는 아닐지라도 산책자쯤은 되는 것이다. 조락의 계절. 지는 낙엽은 소멸과 죽음이지만, 우리는 그 소멸의 광경을 지켜보며 아름다움을 느낀다. 이것이 바로 소멸의 미학이다. 자신이 지나온 삶을 추억하며 존재의 무상함을 느끼게 되는 계절. 가을이다. 가을엔 편지를 쓰고 싶고, 낙엽을 줍고 싶고, 그리워하고 싶고, 거리를 걷고 싶어진다. 그리고 고독해진다. 가을, 하면 떠오르는 시인은 바로 김현승이다. 가을과 고독의 시인으로 불렸던 다형(茶兄) 김현승(1913∼1975) 시인. 김현승은 유독 가을과 고독에 관한 시를 많이 남겼다. 또한 그 시들이 유독 독자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다. 대충 짚어 봐도 , , , , , , , , 등등. 김현승은 전남 광주에서 출생하여, 부친의 사역지를 따라 제주에서 잠시 성장하다가 7세 때부터 다시 광주로 이주해 성장했다. 부친 김창국(金昶國)은 개신교 목사인데 평양에서 신학을 공부한 지식인이었다. 이러한 혈연적 전통은 김현승의 시세계에 큰 영향을 미친다. 현재에도 김현승은 기독교적 상상력을 시적으로 승화한 가장 훌륭한 시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광주 소재 미션계 학교인 숭일학교 초등과를 졸업하고 숭실전문대학(숭실대학교)을 졸업했다. 대학 재학중이었던 1934년에 모교의 교수였던 양주동의 추천으로 를 통해 작품활동을 시작한다. 1951년 고향 광주에 있는 조선대학교 교수로 취임하였고, 한국전쟁 와중에서도 을 창간 자칫 단절될 뻔했던 광주 문학사의 맥을 이어주는 업적을 남기기도 했다. 조선대 재직 시절 지역을 근거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문병란, 이성부, 오규원, 문순태, 이근배, 김종해 등 40여 명을 에 추천하여 후진을 양성했다. 1960년 모교의 후신인 숭실대학교 교수로 취임하여 활발한 문학활동을 펼치다가  1975년 4월 숭실대학교 채플시간에 기도하다가 지병인 고혈압으로 쓰러져 타계했다. 최근에는 탄생 100주년 앞두고 그의 문학적 고향인 광주에서 그의 문학사적 족적과 시 정신을 재조명하는 움직임을 활발히 해나가고 있다. 제자들을 중심으로 다형 김현승 시인 기념사업회가 발족되어 다양한 문학사업들을 준비하고 있는 중이다. 김현승의 대표시는 아무래도 나 일 것이다.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로 이어지는 시 는 전국민의 애송시이다. 매년 가을이면 빠짐없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시이기도 하다. 하지만 김현승은 ‘고독의 시인’이라 일컬을 정도로 고독에 관한 시를 많이 남겼다. 그중 을 읽으며 ‘고독’의 찬란한 순간을 느껴보자. 껍질을 더 벗길 수도 없이 단단하게 마른 흰 얼굴 그늘에 빚지지 않고 어느 햇볕에도 기대지 않는 단 하나의 손발 모든 신들의 거대한 정의 앞엔 이 가느다란 창끝으로 거슬리고 생각하는 사람들 굶주려 돌아오면 이 마른 떡을 하룻밤 네 살과 같이 떼어주며 결정된 빛의 눈물 그 이슬과 사랑에도 녹슬지 않는 견고한 칼날 발 딛지 않는  피와 살 뜨거운 햇빛 오랜 시간의 회유에도 더 휘지 않는 마를 대로 마른 목관악기의 가을 그 높은 언덕에 떨어지는 굳은 열매 씁쓸한 자양 에 스며드는 에 스며드는 네 생명의 마지막 남은 맛 ― 전문 김현승의 고독 시리즈는 관념적인 부분이 있어 다소 어렵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가을에 이 시를 읽을 때는 가슴 한복판으로 시어들이 밀려들어올 때가 있다. 시의 모든 사물들은 고독을 향해 수렴되어 있다. 얼굴, 손발, 창끝, 떡, 칼날 등의 시어가 내 모습과 함께 중첩되고 이것은 다시 고독의 공간으로 수렴된다. 세파에 찌든 우리들의 모습은 “껍질을 더 벗길 수도 없이/ 단단하게 마른/ 흰 얼굴”과 다름 아니다. 그곳에서 가녀린 창끝을 의지해 살아가지만 굶주린 삶의 고난함은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고고한 영혼을 가진 인간이다. 고독한 시간들 속에서도, 영어(囹圄)와 같은 삶의 시간들 속에서도 고독한 영혼을 보듬어 안으면, “마른 떡을 하룻밤/ 네 살과 같이 떼어”줄 수 있는 것이다. 이것으로 무상한 삶의 내력들이 충만한 생명력을 가지게 될 수 있는 힘이 된다. 우리는 얼마나 우리의 삶을 자학하고 훼손해 왔는가. ‘생명의 마지막 남은 맛’을 느끼기 위해 우리의 영혼은 얼마나 노력했는가. 고독을 느끼는 가을의 시간. 고독을 통해 우리 영혼의 소중함을 단 하루만이라도 느낄 수 있다면, 이전에 느낄 수 없었던 충만한 시간들을 체험할 수 있지 않을까.    
849    저항의 시인 - 김수영 댓글:  조회:4634  추천:0  2016-01-05
저항의 시인 김수영       이재훈 _ 시인, 편집장           김수영의 대표적인 프로필 사진을 보면 시인은 흰 러닝셔츠 차림이다. 턱을 괴고 앉아 퀭한 눈으로 어딘가 먼 허공을 응시하고 있다. 눈에는 독기가 흐르는 듯 하지만 자세히 보면 어딘가 연민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 복합적인 감정을 광기라고 해야 할까. 김수영의 사진을 보면 격식과 형식을 차리지 않고 내면의 자유로운 영혼을 그대로 발산하는 듯한 인상을 받는다. 김수영(1921~1968). 그의 이름 석 자는 한국 현대시사에 가장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지난 2008년은 김수영이 불의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뜬 지 40주년이 되는 해였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김수영 40주기 추모사업회가 꾸려져 추모학술제가 개최되었으며, 40세 이하 젊은 시인 40명이 김수영에게 바치는 오마주 시집 를 발간하고, 기념 문학제를 열기도 했다. 올해 2009년에는 미발표작을 포함하여 354면의 이 발간되었다. 이처럼 김수영은 당대뿐 아니라 후대에까지도 가장 사랑받는 시인 중의 한 명이다. 이를 가리켜 최두석 시인(한신대)은 “해방 이후 활동한 시인 가운데 김수영만큼 주목을 받은 이는 아직까지 없다”고 말했다. 그만큼 김수영은 후대 연구자들이나 창작자들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시인 중 한 명이다. 김수영은 1921년 서울 종로에서 출생했다. 21세 되던 해에 선린상업고등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후 일본으로 공부를 하기 위해 건너간다. 이때 연극학교를 입학하게 되는데 이는 연극계에 큰 관심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일본에서 귀국하여 다시 만주로 가서는 조선 청년들과 연극을 무대에 올리기도 한다. 해방 이후 서울로 돌아와서는 연극에서 문학으로 전향한다. 가장 가까운 문우이자 애증의 친구인 박인환은 김수영의 삶에서 빠질 수 없는 인물이다. 박인환이 경영하는 고서점 ‘마리서사’에서 김기림, 김광균 등과 만나면서 50년대 문인들과 폭넓은 교유를 가지게 된다. 명동을 중심으로 한 한국의 50년대 문학사에서 김수영은 늘 가장 중심에 있었다. 30세가 되던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북한군 후퇴 시 징집되어 북으로 끌려간다. 이후 평남 개천에서 강제노동을 하다가 탈출, 국군 최선봉 부대를 만나 서울까지 갔으나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수용되어 가장 암울한 시기를 보낸다. 신시론 동인지 을 간행하여 50년대 전후모더니즘을 대표하는 동인으로 활동하였다. 1959년 첫 시집 을 춘조사에서 발간하였다. 이후 참여시 문학논쟁 등을 벌이며 한국 현대시의 가장 중심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1968년 6월 15일 밤. 마포에 있는 집으로 귀가하던 중 버스에 치어 머리를 다치고 의식을 잃은 채 적십자병원에서 응급치료를 받았으나 끝내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그의 사후 여러 권의 시선집이 발행되었고 1981년 민음사에서 이 발간되었다.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王宮 대신에 王宮의 음탕 대신에 五十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越南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二十원을 받으려 세번씩 네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하고 이제 내 앞에 情緖로 가로놓여있다 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 부산에 포로수용소의 第十四夜戰病院에 있을 때 정보원이 너어스들과 스폰지를 만들고 거즈를 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경찰이 되지 않는다고 남자가 뭐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고 놀린 일이 있었다 너어스들 옆에서   지금도 내가 반항하고 있는 것은 이 스폰지 만들기와 거즈 접고 있는 일과 조금도 다름없다 개의 울음소리를 듣고 그 비명에 지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놈의 투정에 진다 떨어지는 은행나무잎도 내가 밟고 가는 가시밭   아무래도 나는 비겨서있다 絶頂 위에는 서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서있다 그리고 조금쯤 옆에 서있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이발쟁이에게 땅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쟁이에게 구청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직원에게도 못하고 야경꾼에게 二十원 때문에 十원 때문에 一원 때문에 우습지 않으냐 一원 때문에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만큼 적으냐 정말 얼마큼 적으냐…… - 시 전문   김수영의 대표작으로는 늘 이나 , 등을 떠올리지만 가장 김수영다운 시는 위의 시가 아닐까 생각한다. 김수영답다는 게 뭘까. 자신의 옹졸함마저도 시적 공간 속에 들여놓고 자신의 윤리적 자아를 배반하는 언어들을 직설적으로 풀어내고 있다. 이 모습은 김수영만의 모습이 아니고, 바로 나의 모습이며 소시민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이다. 시인이 선각자나 투사의 이미지로 비춰지는 게 아니라, 설렁탕집에서의 옹졸함과 같은 솔직한 소시민으로 비춰진다. 그러한 삶을 살아가는 모래처럼 작은 존재 또한 시인의 일면이다. 이 시를 읽을 때마나 꼭 나 자신과 같아서 가슴이 서늘해지곤 한다. 김수영은 불온의 시인이며, 반시(反詩)의 시인이다. 또한 “시는 머리로 하는 것도 아니며, 가슴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바로 온몸을 밀고 나가는 것”이라는 유명한 전언을 남기기도 하였다. 그 전언을 통해 시는 형식과 내용 사이의 긴장을 통한 변증법적 유기체라는 점을 자각케 하기도 하였다. 김수영의 영혼은 늘 자유를 향한 갈급함에 목말라 있었으며, 기존의 관습과 타성을 부숴버리고 싶은 강렬한 욕망을 지니고 있었다. 김수영은 때로는 모더니스트로서, 때로는 현실의 가장 최첨단에 선 참여시인으로서의 역할을 올곧게 수행했다. 김수영이 모더니스트이건 참여시인이건간에 그 중심에는 항상 ‘저항’의 정신이 살아 있었다. 저항의 시인 김수영. 그를 떠올려 본다. 시국이 어수선하다. 만약 김수영이 이 시대에 살아 있더라면 어떻게 했을까를 곰곰이 생각해 본다.
848    순수의 시인 - 김종삼 댓글:  조회:4563  추천:0  2016-01-05
순수의 시인 김종삼       이재훈(시인)         우리 한국시에서 “가장 순도 높은 순수시”를 썼다고 평가받는 김종삼 시인(1921~1984). 언제나 말없이 점퍼 차림에 벙거지를 쓰고 술집에 홀로 앉아 술을 즐겼다는 김종삼. 그는 평생 직장다운 직장 한 번 가져본 적 없이 오로지 詩만 바라보며 가난하게 살았다. 김종삼은 사람들과 만나는 것을 꺼려했다. 도깨비, 괴짜 등으로 불리기도 했다. 대신 평생 음악과 술을 친구 삼아 고독의 시간을 즐겼다. 김종삼의 술과 음악에 대한 취향은 독특했다고 전해진다. 좀 과장되어 말한다면 그것은 마치 선인들의 수행과정과도 닮았다. 술은 독작(獨酌)이 원칙이었으며, 술을 마실 때에는 안주나 곡기를 전혀 먹지 않았다. 또한 한번 마셨다 하면 오로지 술만 열흘이고 보름이고 마시다 깨다를 반복했다. 술값이 생기면 소주를 사들고 홀로 어디 구석진 공간을 찾아 다녔다는 김종삼 시인. 그의 음악에 대한 사랑 또한 남다르다. 김종삼이 직장이라고 할 만한 일 가운데 가장 오랫동안 일한 곳이 바로 동아방송의 음악효과를 담당하는 일이었다. 아마 음악 효과의 일을 오랫동안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음악을 마음껏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김종삼은 한번 음악을 들었다 하면 한 곡을 하루 종일 또한 한두 달을 계속해서 들었다. 일종의 편집증 증세처럼 하나의 곡, 혹은 한 음악가를 만나면 고집스럽게 들었다. 김종삼의 증언에 따르면 10대 후반에는 베토벤을 좋아했고, 그 후에 바하와 모차르트를 좋아했으며 세자르 프랑크, 라벨, 드뷔시 같은 음악가를 좋아했다. 그 때문인지 김종삼의 시에는 음악을 소재로 하거나 음악을 들으며 집필했던 것이 분명한 시편들이 상당수 있다. 특히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음악가인 프랑크의 음악에 대한 애정을 여러 편의 시를 통해 형상화하기도 했다. 김종삼은 1921년 황해도 은율에서 태어났다. 그가 부모와 형제들과 함께 남한에 내려온 것은 해방 이후 1947년이었다. 형제들 중에는 친형인 김종문 시인도 있었다. 가장 가까운 친구였던 전봉래의 자살을 겪은 것은 한국전쟁 피란 때였다. 전봉래는 부산 남포동의 스타다방에서 바하를 들으면서 세코날을 복용하고 자살했다. 이후 김종삼은 서울의 가난한 단칸방에서 평생을 가난과 고독과 함께 살았다. 김종삼에게 술과 음악은 신산한 현실을 지탱할 수 있는 힘과 같은 것이었다. 또한 그의 시에는 종교적 맥락을 환기하는 다수의 시편들이 있다. 그에게 종교는 특정한 교리를 전파하는 역할이 아니라 인간의 근원을 말하고 싶은 순수의 욕망에서 발원한다. 알 수 없는 원죄의식과 인간으로서 그것을 극복하려는 의지가 동시에 내포되어 있다.   희미한 풍금 소리가 툭 툭 끊어지고 있었다   그동안 무엇을 하였느냐는 물음에 대해   다름아닌 인간을 찾아다니며 물 몇 통 길어다 준 일밖에 없다고   머나먼 광야의 한복판 얕은 하늘 밑으로 영롱한 날빛으로 하여금 따우에선 - 시 전문   김종삼의 대표작 중에서 「물통」은 미학적 언어의 특성을 보여줌과 동시에 김종삼의 의식세계를 잘 알 수 있는 시이다. 중요한 구절은 “그동안 무엇을 하였느냐”고 묻고 있는 절대자와 대답을 하는 시적 화자와의 말이다. 시에서 화자는 말하고 있다. “인간을 찾아다니며 물 몇 통 길어다 준 일밖에 없다”고. 화자의 답변은 자신의 일생을 요약할 수 있는 성찰과 회한의 말이다. “~밖에 없다”는 말의 이면에는 내 삶이 참으로 보잘 것 없음을 강조하여 말하고 있는 부분이다. 그러나 이 말의 의미를 뒤집어 생각하면 “물”이라는 존재의 근원을 따질 때 정작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은연중 전하고 있다. 물은 우리 인간에게 없어서는 안 될 꼭 필요한 물질이다. 물을 먹지 않고는 며칠을 버티지 못한다. 그런 의미에서 스스로 인간을 찾아다니며 물 몇 통을 길어다 주었다는 것은 생명의 원천을 제공해주었다는 말과도 상통한다. 김종삼이 사람들에게 전해줄 수 있는 생명의 원천은 바로 ‘詩’일 것이다. 시를 통해 근원과 본질을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스스로를 낮추어 말하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근원과 본질의 힘이 중요하다는 점을 상기시키고 있다. 이는 마지막 연에서 광야의 풍경이 영롱한 날빛으로 가득해지는 땅으로 변화되는 것을 통해 알 수 있다. 첫 연에서 음악적 효과를 주었으며, 마지막 연을 통해 정작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물 몇 통 길어다 준 일”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강조적으로 말하고 있다. 김종삼의 여러 대표작 중에 위의 시를 택한 이유는 우리 삶의 본질을 다시 바라보고 싶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는 생전에 문학적 영광의 자리에 단 한 번도 오른 적 없이 고독하게 살다간 시인이다. 그러나 그의 사후 많은 후배 문인들과 후학들은 그의 절창들을 다시 노래하고 되새겼다. 김종삼의 노래는 순수를 탐하는 가장 미학적인 언어의 결정체였으며, 그의 삶은 예술가의 전형을 보여주는 몇 안 되는 사례였다. 자연을 노래하지 않고, 스스로 난해한 길을 걸어갔지만 50년대 그 누구보다도 독특한 시의 숲길을 만든 김종삼. 그의 시와 삶에 축배를 들며 가슴을 쓸어내린다.  
847    생명의 시인 - 유치환 댓글:  조회:4621  추천:0  2016-01-05
의지와 생명의 시인 유치환       이재훈(시인)         2008년은 청마 유치환(1908~1967)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우리나라 시문학사에 큰 획을 그은 청마 유치환의 탄생 100주년을 맞이해, 청마의 고향인 경남 통영을 중심으로 다양한 기념행사가 열렸다. 유치환의 대표작인 시 「깃발」의 표제를 딴 ‘깃발 축제’가 개최되었고, 거제에서는 청마기념관이 들어섰다. 청마 유치환의 생가도 복원되었으며, 유치환이 지인들에게 수천통의 편지를 부쳤던 우체국 옛터에 흉상도 세워졌다.  유치환은 한국 시단에 굵직한 소나무 같은 존재이다. 일제 강점기, 대부분의 시인들이 여리고 섬세한 감수성을 아름다운 시어를 통해 드러낸 시편들을 발표하였다. 이른바 초창기 현대시는 여성적 어조를 바탕으로 한 감수성의 전통이 큰 맥을 이루었다. 이러한 시사적 측면에서 유치환은 단연 이채로운 존재였다. 선 굵은 남성적 어조에 거친 이미지와 관념적 시어를 가감없이 사용한 시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치환이 남성적 어조를 가졌다고 해서 그의 시가 마냥 거친 것만은 아니다. 유치환은 사랑편지를 무려 오천여 통이나 남긴 시인으로도 유명하다. 유치환의 작고 후, 시조시인 이영도에 의해 세상에 알려진 오천여 통의 편지는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유치환은 시조시인 이영도에 대한 연모의 정을 편지를 통해 전달했고, “사랑 하는 것은/사랑을 받느니 보다 행복하나니라”로 시작되는 「행복」과 같은 전국민의 사랑을 받는 연애시를 남기기도 했다. 유치환의 시에서 무엇보다 가장 유치환다운 시는 「생명의 서(書)」가 아닐까 한다. 「생명의 서」는 유치환의 대표적인 작품이며 「깃발」과 함께 독자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는 작품 중 하나이다.   나의 지식이 독한 회의를 구하지 못하고 내 또한 삶의 애증(愛憎)을 다 짐지지 못하여 병든 나무처럼 생명이 부대낄 때 저 머나먼 아라비아의 사막으로 나는 가자   거기는 한 번 뜬 백일(白日)이 불사신같이 작열하고 일체가 모래 속에 사멸한 영겁의 허적(虛寂)에 오직 아라―의 신만이 밤마다 고민하고 방황하는 열사(熱沙)의 끝   그 열렬한 고독 가운데 옷자락을 나부끼고 호올로 서면 운명처럼 반드시 ‘나’와 대면케 될지니 하여 ‘나’란 나의 생명이란 그 원시의 본연한 자태를 다시 배우지 못하거든 차라리 나는 어느 사구(沙丘)에 회한(悔恨) 없는 백골을 쪼이리라 ― 「생명의 서(書)」 전문   위의 시가 쓰여진 공간적 배경은 북만주이다. 1940년 되던 해에 유치환은 가족들을 이끌고 북만주로 이주한다. 유치환이 국내에서 일제의 핍박을 피해 달아난 곳이 바로 북만주이다.  유치환에게 있어 북만주에서의 생활은 중요한 체험이다. 유치환은 만주에서 농장의 관리인으로 일했다. 그 농장은 유치환의 형인 극작가 유치진의 처가에서 개간한 벌판이었다. 농장 관리인으로 비교적 일제의 억압에서 벗어나 생활하였다. 그러나 그는 곧 다른 고통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바로 황막한 벌판에서 조국을 위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죄책감과 끝없이 이어지는 고독과 절망적인 인식 때문이었다. 도피의 공간에서 그 모든 고통이 잊혀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도피한 자신의 모습에서 더 비참한 감정을 얻을 수 있다. 그래서 유치환은 그것을 극복하고자 했다. 그 극복의 공간이 바로 “아라비아의 사막”이다. 시에서 그리고 있는 “아라비아의 사막”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유토피아의 공간은 아니다. 그곳은 수행의 공간이며, 새로운 사유를 위해 다시 인고의 시간을 보내야 하는 공간이다.  시인은 북만주의 고통을 ‘의지’의 힘으로 다시 이겨내고자 했다. “나의 지식이 독한 회의를 구하지 못하”는 것은 인간의 이성으로는 더 이상 새로운 발견을 하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이성이 무너졌을 때 감정 또한 함께 무너진다. 그렇기에 매순간이 “병든 나무처럼 생명이 부대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순간을 극복하기 위해 만주벌판에서 “저 머나먼 아라비아의 사막”을 시인은 꿈꾸었던 것이다. 유치환은 삶의 의지를 통해 생명을 희구한 시인이다. 시인은 단독자로서 운명처럼 자신과 마주하고 싶다는 다짐을 한다. 그것은 현실의 어려움을 극복할 새로운 생명의 꿈틀거림을 의미한다. 시인은 늘 본질에 대한 탐구의 태도를 보여준다. “원시의 본연한 자태”를 다시 배워 새로운 ‘나’와 대면하고 싶은 게 시인의 생각이다. 그것을 하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어느 사구(沙丘)에 회한(悔恨) 없는 백골을 쪼이”겠다는 비장한 각오를 하고 있다.  나라 안팎의 모든 사회, 경제, 문화의 기반들이 어려운 환경에 놓여 있는 요즘이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마음이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마다, 유치환의 「생명의 서」를 읽는다. 이 시를 읽으면 어느새 마음에 강한 삶의 의지가 들어참을 느낄 수 있다. 어려울 때 힘이 되어주는 시만큼 더 값진 문학이 또 어디 있겠는가. 다시 한 번 시를 읽으며 마음을 다잡아 보는 겨울밤이다.
846    안개의 시인 - 기형도 댓글:  조회:4492  추천:0  2016-01-05
안개의 시인 기형도       이재훈(시인)         1989년 3월 7일 새벽. 서울 종로 파고다공원 근처의 한 심야 극장에서 한 남자가 숨진 채 발견되었다. 남자의 가방 속에는 시작메모로 채워진 푸른 노트, 외국에서 온 몇 통의 편지, 줄쳐 읽던 몇 권의 책과 소화제 알약이 들어 있었다. 사인은 뇌졸중. 그가 바로 시인 기형도였다. 그의 나이 만 29세. 기형도의 죽음을 두고 여러 가지 풍문이 떠돌았지만 모두 풍문에 지나지 않았다. 90년대에 들어서면서 기형도는 젊은 문청들에게 전설이 되었다. 기형도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우수에 찬 용모와 죽음의 그림자를 드리운 시편들이 젊은이들의 심장을 후벼 팠다. 기형도를 읽는 것은 시를 읽는 것뿐 아니라 90년대 이후 문화의 현상을 읽는 일이었다. 기형도를 가슴에 품고 다니는 젊은 대학생들은 세대적 공유의식을 가질 수 있었다. 좀 더 외연을 넓혀 말하자면 기형도는 동구권이 무너지고 이데올로기의 억압에서 벗어난 세대들의 상징적 코드였다. 90년대에 문학을 한 이들 중에서 기형도의 바이러스에 한번이라도 감염이 안된 자가 그 누가 있던가.(기형도 시집 은 지금까지 무려 61쇄가 인쇄됐다. 약 40여 만 부가 팔렸으며 현재에도 해마다 1만부씩 팔리고 있다.) 기형도는 1960년 경기도 옹진군 연평리에서 출생했다. 부친의 사업 실패 이후 경기도 시흥군 소하리에 정착했다. 유년 시절은 가난하고 외롭게 보냈다. 대중들에게 많이 알려진 등의 시편들은 당시 유년의 우울한 정서를 잘 보여주고 있다. 학창시절의 기형도는 조용하고 노래를 잘 부르는 학생이었다. 교내에서 합창단 활동을 하기도 했다.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하고, 교내 문학동아리인 ‘연세문학회’에 입회하여 본격적인 문학수업을 시작했다. 대학문학상인 박영준 문학상(소설부문)에 이 당선없는 가작으로 입선하였고, 가 대학문학상인 윤동주문학상 시부문에 당선되었다. 안양 근교에서 방위병으로 복무하면서 안양의 문학동인인 ‘수리’에 참여하고 동인지에 등을 발표하고 시작에 몰두하였다. 대부분의 초기작이 이 시기에 씌여졌다고 한다. 1984년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중앙일보사에 입사했다. 신문사에서 정치부, 문화부, 편집부 등에서 일했는데 주로 문화부에서 일했다. 1985년 신춘문예에 시 가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으며, 이후로 주로 젊은 문인들과 만나면서 문단 교유의 폭을 넓혔다. 그는 짧은 작품 활동기간에도 불구하고 정열적으로 작품활동을 한 시인이었다. 죽기 전까지 중앙일보 기자이면서 시인이었던 기형도는 성실한 젊은 문인이었으며 첫 시집을 준비 중에 있었다. 또한 당시 젊은 문학 그룹인 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가 죽은 후 1989년 5월에는 유고시집 이 출간되었다. 시집 제목은 평론가 김현이 정했다. 이후 여행 중에 대학노트에 기록한 산문을 모은 (1990), 미발표 시들과 소설들을 기존의 시들과 함께 묶은 (1999)이 출간되었다.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 기형도, 전문   기형도의 안개의 시인이다. 안개가 주는 막막함과 고통의 실체를 알 수 없는 생의 비애가 시 곳곳에 들어차 있다. 마치 안개 속을 걷듯 아무도 보이지 않는 길과 축축한 세계 속에서 저 혼자 고통을 짊어지고 걸어가는 시인의 보폭이 시 속에 선명하다. 우리 독자들은 누구나 기형도의 시가 전해주는 “안개의 주식”()을 갖고 있다. 그렇기에 그의 시에는 죽음과 절망, 불안과 허무의 이미지와 진술들이 빈번하게 등장한다. 당대 최고의 평론가로 일컬어지는 김현이 그의 시를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이라고 명명한 이유는 이러한 시적 분위기가 젊은 시인이 겪는 도시의 일상과 맞물려 시 속에서 형상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기형도의 시 속에서 불안과 죽음의 이미지가 넘실대는 것은 불우한 가족사와 도시 변두리에서 살았던 경제적 궁핍, 죽음에 대한 체험 등이 큰 영향을 주었다. 1975년 기형도는 바로 손위 누이가 불의의 사고로 죽는 일을 체험하며 시 쓰기를 시작했다고 전해진다. 시 은 기형도의 시 중에 독자들에게 가장 많은 사랑을 받는 시이다. 이 시는 기형도가 마치 죽음을 예견하기라도 한 듯한 느낌을 받는다. 그런 이유로 더없이 아프게 다가오는 시이다. 사랑을 잃고 시인은 무엇을 쓰는가. 시 속의 화자는 “잘 있거라”라고 이별의 말을 고한다. 무엇과 이별하는가. 짧았던 밤들과 창밖의 겨울안개들과 밤을 함께 한 촛불들과 흰 종이들. 그리고 자신의 눈물과 이제는 없어져버린 열망들과 모두 이별한다. 이별 후에 그가 하는 일은 장님처럼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는 일이다. 그 문 속에는 자신의 사랑이 있다. 빈집에 갇힌 것은 사랑이지만, 그 빈집을 통해 시인은 잃어버린 사랑을 가슴에 품고자 한 것이다. 우리는 늘상 가득찬 집에 살고 있다. 안개의 시인 기형도. 시인은 우울한 일상을 품고 도시의 안개를 헤치고 나와 빈집에 마주 섰다. 이별의 계절 가을. 이별은 버리는 게 아니라 가득했던 마음을 비우고, 그 빈집에 성숙한 사랑의 의미를 담는 그런 일이다.
845    허무의 시인 - 이형기 댓글:  조회:5212  추천:0  2016-01-05
       낙화(落花)                                          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할 때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않아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하여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헤어지자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하롱하롱 꽃잎이 지는 어느날 나의 사랑, 나의 결별 샘 터에 물 고인듯 성숙하는 내 영혼의 슬픈 눈         호 수                                                어길 수 없는 약속처럼  나는 너를 기다리고 있다. 나무와 같이 무성하던 청춘이 어느덧 잎 지는 이 호숫가에서 호수처럼 눈을 뜨고 밤을 새운다 이제 사랑은 나를 울리지 않는다. 조용히 우러르는 눈이 있을 뿐이다. 불고 가는 바람에도 불고 가는 바람같이 떨던 것이 이렇게 고요해질 수 있는 신비는 어디서 오는가. 참으로 기다림이란 이 차고 슬픈 호수같은 것을 단 하나 마음속에 지니는 일이다.         폭포                                                      그대 아는가 나의 등판을 어깨에서 허리까지 길게 내리친 시퍼런 칼자욱을 아는가. 질주하는 전율과 전율 끝에 단말마를 꿈꾸는 벼랑의 직립 그 위에 다시 벼랑은 솟는다. 그대 아는가  석탄기의 종말을  그 때 하늘 높이 날으던  한 마리 장수잠자리의 추락을. 나의 자랑은 자멸이다.  무수한 복안들이  그 무수한 수정체가 한꺼번에  박살나는 맹목의 눈보라 그대 아는가  나의 등판에 폭포처럼 쏟아지는 시퍼런 빛줄기 2억 년 묵은 이 칼자욱을 아는가.         그해 겨울의 눈                                   그해 겨울의 눈은 언제나 한밤 중 바다에 내렸다   희뿌옇게 한밤 중 어둠을 밝히듯 죽은 여름의 반딧벌레들이 일제히 싸늘한 불빛으로 어지럽게 흩날렸다   눈송이는 바다에 녹지 않았다 녹기 전에 또 다른 송이가 떨어졌다 사라짐과 나타남 나타남과 사라짐이 함께 돌아가는 무성 영화 시대의 환상의 필름   덧 없는 목숨을 혼신의 힘으로 확인하는 드라마 클라이막스 밖에 없는 화면들이 관객 없는 스크린을 가득 채웠다 언제나 한밤 중 바다에 내린 그해 겨울의 눈 그것은 꽃보다 화려한 낭비였다         랑겔한스 섬의 가문 날의 꿈                        나 어느새 예까지 왔노라. 가뭄이 든 랑겔한스 섬 거북 한 마리 엉금엉금 기는 갈라진 등판의 소금 꽃.   속을 리 없도다. 실은 만리장성으로 끌려가는 어느 짐꾼의 어깨에 허옇게 허옇게 번진 마른 버짐이니라.   오 박토여. 반쯤 피다 말고 시들어버린 메밀 농사와 쭉쭉 골이 패인 내 손톱 밑의 반달의 고사(枯死)여.   가면 가는 그만큼 길은 뒤에서 허물어지나니 한 걸음 뗄 때마다 낭떠러지 하나씩 거느리고 예까지 온 길 랑겔한스 섬,   꿈꾸는도다 까맣게 탄 하늘. 물도 불도 그 아래선 한줌 먼지 되어 풀석거리는 승천의 꿈 랑겔한스 섬의 가문 날의 꿈이니라.             ♠랑겔한스섬(랑게르한스섬Langerhans islets)             이자 내에 섬(島) 모양으로 산재하는 내분비선 조직으로 췌도(膵島)라고도 한다.             섬 모양으로 보이는 세포의 집단으로 1869년 독일의 병리학자 P.랑게르한스가             발견하여 "랑게르한스섬"이라 이름 붙인 것     길                                                           빈 들판이다 들판 가운데 길이 나 있다 가물가물 한 가닥 누군가 혼자 가고 있다 아 소실점! 어느새 길도 그도 없다 없는 그 저쪽은 낭떠러지 신의 함정 그리고 더 이상은 아무도 모르는 길이 나 있다 빈 들판에   그래도 또 누군가 가고 있다 역시 혼자다           나뭇잎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나뭇잎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한 세기 전의 해적선이 바다를 누빈다.  나뭇잎만큼 많은 돛을 달고  그 어떤 격랑도 지울 수 없는  벌레 먹은 항적(抗跡)  나뭇잎을 다시 들여다보면  나무가 뿌리채  그 밑바닥에 침몰해 있다.  파들파들 떨리는 단말마의  손짓  잎사귀들이           비 오는 날                                          오늘 이 나라에 가을이 오나보다. 노을도 갈앉는 저녁 하늘에 눈 먼 우화는 끝났다더라 한 색 보라로 칠을 하고 길 아닌 천리를 더듬어 가면... 푸른 꿈도 한나절 비를 맞으며 꽃잎 지거라 꽃잎 지거라 산 넘어 산 넘어서 네가 오듯 이 나라에 가을이 오나보다.       들길                                                          고향은 늘 가난하게 돌아오는 그로하여 좋다. 지닌 것 없이 혼자 걸어가는 들길의 의미... 백지에다 한 가닥 선을 그어 보아라 백지에 가득 차는 선의 의미... 아 내가 모르는 것을, 내가 모르는 그 절망을 비로소 무엇인가 깨닫는 심정이 왜 이처럼 가볍고 서글픈가. 편히 쉰다는 것 누워서 높이 울어 흡족한 꽃 그늘... 그 무한한 안정에 싸여 들길을 간다.         산                                                            산은 조용히 비에 젖고 있다. 밑도 끝도 없이 내리는 가을비  가을비 속에 진좌(鎭座)한 무게를 그 누구도 가늠하지 못한다. 표정은 뿌연 시야에 가리우고 다만 윤곽만을 드러낸 산  천 년 또는 그 이상의 세월이 오후 한때 가을비에 젖는다. 이 심연 같은 적막에 싸여  조는 둥 마는 둥 아마도 반쯤 눈을 감고 방심무한(放心無限) 비에 젖는 산  그 옛날의 격노(激怒)의 기억은 간 데 없다. 깎아지른 절벽도 앙상한 바위도 오직 한 가닥 완만한 곡선에 눌려 버린 채 어쩌면 눈물 어린 눈으로 보듯 가을비 속에 어룽진 윤곽 아 아 그러나 지울 수 없다.         코스모스                                                   언제나 트이고 싶은 마음에 하야니 꽃피는 코스모스였다. 돌아서며 돌아서며 연신 부딪치는 물결같은 그리움이었다. 송두리째-희망도 절망도 불타지 못한 육신 머리를 박고 쓰러진 코스모스는 귀뚜리 우는 섬돌가에 몸부림쳐 새겨진 이름이었다. 그러기에 더욱 흐느끼지 않는 설움 홀로 달래어 목이 가늘도록 참아내련다. 까마득한 하늘가에 내 가슴이 파랗게 부서지는 날 코스모스는 지리라.   허무의 시인 이형기     이재훈(시인)     지난 2008년 7월 12~13일 이틀 동안 이형기 시인의 고향인 경남 진주에서는 제1회 이형기문학제를 개최했다. 이형기 문학세미나, ‘불멸의 시인 이형기’라는 주제의 시극(詩劇) 공연, 청소년 시낭송 대회, 대금 산조, 허튼 춤 사위, 음유 시인의 축하공연 등 다채로운 행사로 이형기 시인을 추억했다. 이형기 시인에 대한 조명과 평가는 이제부터 새롭게 시작되고 있다. 경남 진주는 시인 이형기의 고향이자 문학의 원적지(原籍地)이다. 이형기는 진주농림학교 재학 시절 당시 16세의 나이로 제1회 개천예술제(1948년) 백일장에서 장원을 했다. 차상은 박재삼 시인. 백일장 심사위원은 유치환, 김상옥, 김춘수 등 한국 문단의 기라성 같은 시인이었다. 이 개천예술제는 현재까지도 계속해서 개최되고 있다. 이형기는 최연소 등단이라는 이색적인 타이틀도 가지고 있다. 1950년 17세의 나이로 지에 이 추천되어 등단한다. 추천위원은 초회에 문학평론가 조현연, 2회 추천에 미당 서정주, 3회 추천완료는 모윤숙 시인이 했다. 이 최연소 등단기록은 아직도 문단에서 깨지지 않고 있다. 이형기는 1941년 진주 요시노(吉野) 소학교 시절부터 소설 미치광이로 불리며 문학적 재질을 드러낸 시인이다. 동국대학교를 졸업한 뒤 언론사에 20여 년 간 몸담다가 동국대학교 국문과 교수를 지냈다. 시인 이형기(1933~2005)의 이름 앞에는 늘 ‘문학 청년’이라는 칭호가 붙는다. 영원한 문학청년 이형기. 그는 작고할 때까지 문학에 대한 열정과 천재의식을 놓치지 않은 대시인이었다. 초기의 전통적 자연 서정의 세계, 중기의 주지주의적인 날카로운 감성과 새로운 언어 미학의 세계, 후기의 생태학적 고발과 문명비판의 세계로 변화하며 끊임없이 자기갱신을 한 시인이다. 이형기의 시세계 전체를 통어하고 있는 세계는 바로 ‘허무’라고 할 수 있다. 이형기의 ‘허무’는 초기시에서 후기시로 갈수록 다른 방향으로 펼쳐진다. 초기시에서는 자연의 순환원리를 통해 인생의 무상함과 허무를 깨닫는 달관의 견지와 같은 입장을 취한다. 그러나 후기시로 갈수록 실존적 허무로 성격이 바뀐다.  이형기 하면 떠오르는 시가 바로 전 국민의 애송시인 이다.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 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 할 때,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않아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하여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헤어지자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하롱하롱 꽃잎이 지는 어느 날 나의 사랑, 나의 결별, 샘터에 물 고인 듯 성숙하는 내 영혼의 슬픈 눈. ― 전문 위의 시는 가야할 때를 깨닫지 못하고 자리를 지키고 있는 정치인들을 향한 경구로도 읽히고, 모주꾼이 술집에서 술값을 치르지 않기 위해 도망갈 때 읊는 유머로도 읽는다. 또한 존재의 조락(凋落)을 통해 죽음과 실존의 의미를 되새겨볼 수 있는 스펙트럼이 넓은 시이다. 에서 중요한 부분은 ‘결별’을 ‘축복’으로 인식하는 지점에 있다. 존재의 결별이 또다른 탄생의 미학을 낳는다는 창조적 인식이 시를 지배하고 있다. 는 이형기의 초기시가 가진 ‘허무’의 성격을 잘 드러내 주는 시이다.  진주시 신안동 공원에 있는 이형기의 ‘낙화’ 시비 ⓒ 이재훈   흔히들 이형기를 가리켜 ‘허무의 시인’이라고 한다. 이형기의 시적 세계관의 핵심은 ‘허무의식’에 있다. 그의 허무는 두 가지의 근거를 통해 발생되었다. 하나는 이형기가 경험한 근대적 자본주의와 문명체험이 허무의식을 갖게 하였다는 점이다. 이러한 체험을 통해 인간의 본성이 변화되어 가는 사회적 현상을 목도했으며 인간성 상실의 위기의식을 누구보다도 예민하게 반응했다. 또 하나의 근거는 스스로의 시적인 자각을 통해 이루어진 세계관이라는 점이다. 이형기는 끊임없이 자신의 시적 세계관을 회의하고 갱신하면서 몇 번의 시적실험을 거친 시인이다. 그러한 세계관의 변화는 다양한 독서체험과 시에 대한 갱신의 노력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다. 즉 이형기가 도달한 ‘허무’는 생성과 소멸의 끊임없는 과정의 변증법적인 인식이 새로운 지평을 열고 있는 시의식이다. 허무를 통해 새로운 창조적 세계를 꿈꾸는 허무의 시인 이형기. 그의 시가 “샘터에 물 고인 듯 성숙하는” 의미로 점점 깊이 와 닿는 계절이다.  _ , 가을호 : 
844    동시와 박목월 댓글:  조회:3985  추천:0  2016-01-05
                                 동시란 무엇인가?                                             박목월   연꽃은 해만 뜨면 부시시 깨지요. 연꽃은 연꽃은 세수를 안 해도 곱지요. 연꽃 ·윤석중   윤석중 선생은 우리 나라의 유명한 동요 시인이다. 이분은 30년 동안 동요와 동시만 쓰고 사신 분이다. 이 "연꽃"을 자세히 읽어 보면, 여러 가지 재미나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우선, 이 노래를 풀이해 보면, "연꽃은 해만 뜨면 부시시 깨지요"라는 구절은, "연꽃은 해만 뜨면 꽃송이가 살며시 벌어진다"는 뜻이다. 그리고, "연꽃은 연꽃은 세수를 안 해도 곱지요"라는 것은, "연꽃은 물로써 씻지도 않았는데, 그야말로 세수를 말끔히 한 것처럼 맑고 깨끗하게 곱다."는 뜻이다. 그래서, 이 노래를 쉽게 풀어 보면, "연꽃은 해만 뜨면 꽃송이가 펴나고, 물로써 씻은 듯이 아름답다"는 것에 지나지 않다. 이런 것은 누구나 다 느끼고 생각할 수 있는 아주 대수롭잖은 이야기다. 그런데도 왜 이 작품이 좋은 동시가 될까? 여러분은 스스로 의심스럽게 여기리라. 그러나, 만일 여러분이 그런 의심을 갖는다며는, 내가 몇 가지 질문을 해 보리라. 첫째 질문, 여러분은 연꽃이 해만 뜨며는 부시시 깨는, 그 "부시시 깬다"는 말을 아느냐? 둘째 질문, "세수를 안 해도 곱다"는 말과 "물로써 씻은 듯이 아름답다는 말이 어떻게 다른가? 셋째 질문, 첫째 줄에는 "연꽃은 해만 뜨면…" 이라 하고, 셋째 줄에는 "연꽃은 연꽃은, 세수를 안 해도…" 하고 연꽃을 두 번 거듭 부른 까닭은 무엇일까? 이 질문을 따로 간추려 보면,       (1) "부시시 깬다" 는 뜻이 뭐냐? (2) "세수를 안 해도 곱다" 는 뜻이 뭐냐? (3) "왜 첫 줄에는 "연꽃은" 해 놓고, 셋째줄에는 "연꽃은 연꽃은" 하고 거듭 썼을까?         여러분이 이 세 가지 질문을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이고 생각해 보라. 이 질문에 확실한 대답을 할 수 있어야 비로소 이 시가 왜 좋은 작품이라는 것을 짐작하게 되리라. 우리 나라에서 시인으로 유명하고, 더구나, 맑고 따뜻한 동시도 많이 쓰시는 장만영 선생의 작품 중에 "물방울"이라는 것이 있다.   소나기 지나가고 먼 하늘 동트듯 환해지자, 지붕 추녀를 타고 내려오는 빗물이 마당에 조그마한 여울을 만든다. 그러면 그 여울 위에는 수없이 많은 물방울이 생겨 흐르는 물을 따라 앞서거니 뒤서거니 경주하듯 떠내려 간다. 물방울은 우리의 귀여운 어린이. 물방울 ·장만영   소나기가 지나가고, 마당에 흐르는 물을 따라 경주하듯 떠내려가는 물방울들을 "우리의 어린이"라 했다. 초등학교 일학년생들이 교정에 모여 술래잡기도 하고, 뜀질도 하는 모습을 바라볼 때 느끼는 사랑스러운 마음을 물방울에서 느낀 것이다. 장 선생의 마음이 얼마나 맑고 아름다운가! 그 장 선생님이 쓰신 글에 이런 구절이 있다. "바위 틈으로 흐르는 샘물 같은, 조금도 흐리지 않는 마음만이 시를 낳는다. 《현대시 감상》에서 참으로 아름다운 말씀이다. 이 말 중에 두 가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있다. 첫째, "시를 쓴다" 혹은 "시가 된다" 하지 않고, 왜 "시를 낳는다" 했을까? "쓴다"는 것과 "낳는다"는 것이 어떻게 다를까? 만일 우리가 일기를 쓰려면, 그 날 겪은 일, 혹은 당한 일, 느낀 것을 찬찬히 사실대로 기록하면 된다. 그러나, 시는 일기를 쓰는 것과는 사뭇 다르다. 일기를 쓰듯, 어떤 사실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쓴다는 것은 깊이 느낀 것이 없더라도 사실을 사실대로 기록하면 된다. 그러나, 시는 사실을 기록하기보다 더 깊은 마음의 느낌을 표현하는 것이다. 이 깊은 느낌을 감동하라 한다. 그래서, 어느 시인은 시를 "마음의 음악"이라고 했다. 또한 불란서의 어느 시인은 시야말로 "감탄사에서 피어 난 것"이라고 말했다. "오오 하늘은 푸르다." "아아 아버지가 오시네!" 우리가 무엇에 깊은 느낌을 나타내는 "오오!"나 "아아"가 감탄사다.   모자야, 모자야, 오 모자는 저기 저 못에 걸려 잘 있다.   공아, 공아, 오 공은 누나 반짇고리 속에 잘 있다.   딱지야, 딱지야, 오 딱지는 내 호주머니 속에 잘 있다.   나 잔 동안 다 잘 있다. 다 잘 있다. 잠깰 때 ·윤석중   얼마나 여러분 마음을 용하고 묘하게 노래한 시이냐! 어린이의 하룻밤은 어른들의 하룻밤처럼 너절한 꿈으로 가득한 밤이 아니다.   이 세상에서 잠선녀만큼 얘기도 잘하고, 얘기를 많이 아는 분은 둘도 없습니다. 밤이 되면, 아기들이 얌전히 밥상 앞에 앉았거나, 또한 걸상에 앉았으면 잠선녀가 옵니다. 사쁜사쁜 층층계를 밟고 올라옵니다. 버선발로 올라오기 때문에 부시럭 소리도 없습니다. 그리고, 살푼 문을 열고… 아기들 눈에 밀크를 한 방울 똑 떨어뜨립니다. 참으로 한 방울 넣는데도 아기들은 껌벅껍벅 졸음이 와서 눈을 못 뜹니다. 그래서, 아기들은 잠선녀를 본 사람이 없습니다. 잠선녀는 아기들 등 뒤에 나타나, 머리 뒤통수에 후하고 가볍게 입김을 붑니다. 그러면, 아기들은 머리가 아리숭해지며, 졸음이 옵니다. 잠선녀는 아기들을 좋아하고 사랑합니다. 다만, 아기들이 떠들면 얘기를 들려 줄 수 없어서 조용히 누웠도록 재워 놓는 것입니다. 아기들이 잠이 들면 그 머리맡에 잠선녀는 앉습니다. 잠선녀는 아름다운 비단옷을 휘감고 있습니다. 그 빛깔은 무어라 형용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보면 빨갛기도 하고, 초록빛이 되고, 혹은 퍼렇게 보입니다. 잠선녀는 양손에 두 개의 우산을 들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그림이 그려져 있는 꽃우산은 마음씨가 착한 아기 머리맡에 펴 둡니다. 그러면, 그 아기는 밤새도록 재미나는 꿈을 꿉니다. 그러나, 다른 한 개는 그림 하나 안 그려졌는 새까만 우산입니다. 그것은 마음씨가 곱지 못한 아기들 머리맡에 펴 둡니다. 그러면, 그 아기는 꿈 한 가지 못 꾸고 새근새근 자기만 합니다. 올 르기애 ·안데르센   안데르센의 동화에서처럼 찬란한 꿈이 펴진 하룻밤이다. 이렇게 여러분이 꿈의 나라의 구석구석을 여행하고 돌아오는 동안 모자도 공도 하물며 딱지조차 제 자리에 가만히 있는 것이 신기하다. 이 시에는 그런 여러분의 한량없는 꿈이 어렸다. 그러나, 이 작품에는 "오오"의 느낌씨를 그냥 짜 넣었다. 이 "오오"나 "아아"의 감동을 역시 장만영 선생은 좀더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엄마, 나비 봐!" 장다리 꽃 노오랗게 핀 들밭으로 날아드는 한 마리의 나비를 보고도 어린이는 찬탄의 말을 던진다. 극히 짧은 이 한 마디의 말은 짧은 대로 하나의 시다. 왜냐 하면, 그는 벌써 자연을 올바르게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시를 이미 체득한 커다란 감동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찬탄이란 언제나 아름다운 것, 신기로운 것, 새로운 것, 그리고 최선의 것을 합하여 외치는 마음의 진실한 소리다. 《시작법》에서   여러분은 위의 글을 읽고, 시야말로 느낌, 깊은 감동에서 울어나는 것이라 함을 깨달았으리라. 그러나, 시를 빚게 하는 마음의 깊은 느낌(감동)이 이내 시가 되지 않는다. 그 느낌을 암탉이 알을 품듯, 마음에 두고 두고 간직하면, 그 감동이 시를 낳게 한다. 그러므로, 시는 짓는 것이나 쓰는 것이기보다 낳는다. 이것은 시를 쓰려는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말이다. 시야말로 감동이 낳게 하는 이 세상에서 가장 오묘한 말이다. 그럼, 여러분의 동무가 지은 두 편의 시를 어느 것이 좋은 작품인가 살펴 보기로 하자.   장독 뒤에 숨었길래 불러 봤지요. 닭의 볏을 닮아서 깜짝 속았지. 맨드라미꽃·유인자   땅 속엔 땅 속엔 누가 있나 봐. 손가락으로 쏘옥 올려미나 봐. 쏘옥 모란꽃 새싹이 나온다. 쏘옥 할미꽃 새싹이 나온다.   땅 속엔 땅 속엔 누가 있나 봐. 커다란 솥을 걸고 물을 끓이나 봐. 모락모락 아지랑이 김이 나온다. 땅 속엔 누가 있나 봐 ·국정교과서에서   첫째치는 "새벗" 잡지에 실린 광주 수창초등학교 3학년생이 지은 것, 다음 것은 6.25 전에 "소학생"이라는 잡지에 실린 현상모집에 일등으로 뽑힌 것. "맨드라미꽃"을 뽑은 선생이 다음과 같은 평을 했다. "맨드라미꽃"은 꼭 껴안고 깨물어 주고 싶게 귀여운 작품입니다. 선자는 몇 번이고 되풀이해 읽어 보았습니다. "장독 뒤에 숨었길래…" 첫 줄에 벌써 마음이 기뻐집니다. 과연 선생 말대로 "맨드라미꽃"이 닭의 볏 같아서 꼬꼬하고 불러보는 그 마음씨가 귀엽고, 비로소 깜박 속은 것을 깨닫는 그 사실이 미소를 자아내게 한다. 이렇게 적은 느낌 한 가닥일지라도 소홀히 여기지 않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그런 느낌은 그것으로서 그치고 만다. 자세히 보니, 닭의 볏이 아니고 맨드라미꽃이었군! 하고 돌아서면 잊어 버린다. "땅 속에 누가 있나 봐"는 그런 허술한 감동이 아니다. 새싹이 쏘옥쏘옥 나오고, 아지랑이가 모락모락 피는 봄날 들판에 "누구가 땅 속에 있나 보다" 여기는 그 누구를 하느님이라 생각해도 좋고, 여러분을 어머니가 낳으셨듯, 겨우내 새싹을 품안에 부등켜 안고 있다가 봄날이 되어 날이 따뜻할 무렵에 땅 위에 쏘옥 내미는 "새싹의 어머니"라 생각해도 좋다. 그분에 대한 감탄과 감사의 뜻이 깊이 스몄다. 더구나,   쏘옥 모란꽃 새싹이 나온다. 쏘옥 할미꽃 새싹이 나온다.   라는 구절의 "쏘옥"이라는 말에 얼마나 깊은 느낌이 스몄는 것이냐. 그래서, "맨드라미꽃"에서 보다 감동이 크고 넓다. 이것은 중요한 일이다. 참으로 감동이 크면 클수록 깊으면 깊을수록 좋은 시가 된다. 어느 외국 시인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시야말로 사랑이다." 라고, 큰 감동은 사랑에서 울어나는 것이며, 감동 속에 사랑이 깃들여 있다. 시는 마치 우리들이 언제나 잊을 수 없는 어머니나 아버지의 사랑과 같은 것이다. 시를 느낄 때마다 우리의 마음은 아름답고 맑은 것으로 포근히 싸안아 주는 듯한 느낌을 가진다. 시는 끊임없이 속삭인다. 시는 우리를 꿈꾸게 하고, 깊은 생각 속에 잠기게 한다. 그리고, 어머니가 어린 우리를 안으시고 맑고 청명한 아침 절에 뜰을 서성거리며 혹은 어두운 밤에 머리맡에서 불러주시던 자장가와 같은 것이다. 그 자장가야말로 우리가 처음으로 이 세상에서 듣게 된, 평생을 두고 잊지 못할 시다. 시작법 ·무로오   위에서 동시야말로 어린이의 맑고 아름다운 마음에 가장 깊은 느낌― 감동이 낳는 것이며, 또한 감동이 크면 클수록, 깊으면 깊을수록 좋은 시가 되고 사랑이 크면 클수록, 깊으면 깊을수록 감동이 깊고 크다는 것도 알았으리라. 그럼, 첫 대목에서 "연꽃"을 두고 물은, 세 가지 질문을 살펴 보자. 첫째 "연꽃은 해만 뜨면 부시시 깨지요."라는 첫 줄에서 "부시시 깨지요"가 무슨 뜻이냐? 물론, "해만 뜨면 연꽃송이가 벌어진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것을 왜 "부시시 깬다"고 표현했을까? 만일, 여러분에게 동생이 있다고 상상해 보라. 밤새 칭얼거리거나. 보채는 일이 없이 색색 잘 자고, 아침에 해가 뜨자, 눈만 쓱쓱 부비며 슬며시 일어나는 그 귀여웁고 착한 모습을 보게 되리라. 그 때, 그 "슬며시 깨서 일어나는 것"을, "부시시 깨지요"라고 표현한 것이다. 그러므로, "연꽃은 해만 뜨면 부시시 깨지요"라는 구절은, 그 귀엽고 착한 동생에게서만이 느낄 수 있는 사랑을 연꽃송이에서 느낀 것이다. 이 한 구절 속에 얼마나 "연꽃"을 지은 분의 넘치는 사랑이 깃들여 있는가. 그분에게는 "연꽃송이가 피는 것이 아니라, 귀엽고 착한 어린이가 해만 뜨면 슬며시 일어나듯 했다. "연꽃"이 좋은 시라는 까닭이 첫째 여기에 있다. 둘째, "연꽃은 연꽃은 세수를 안 해도 곱지요."라는 "세수를 안 해도 곱다"는 뜻이 뭐냐? 물론, "연꽃" 송이가 깨끗하게 아름답다는 뜻이다. 그것을 "세수를 안 해도 곱지요"라고 표현한 것에 어린이다운 느낌이 절실하다. 세수를 해야 비로소 얼굴이 참 예쁘다 하고, 아버지나 어머니의 칭찬을 받는 어린이만이 "세수를 안 해도 곱지요"라는 말의 그 놀랍게 고운 것을 짐작하게 되리라. 동시는 어린이 여러분의 시다. 그러므로, 이 "연꽃"에는 어린이의 생각과 느낌이 솔직히 나타나 있다. (아동들의 생활 감정이 여실하다) 시야말로, 자기가 느낀 대로 나타내는 것이다. 동시는 여러분의 시다. 여러분 마음에 느낀 것은, 어른들과 다르다. 다르면 다를수록 좋은 동시가 된다.   물아, 고마운 물아, 불을 꺼 주는 고마운 물아,   불아, 고마운 불아, 물을 데 주는 고마운 불아. 물과 불 ·윤석중   불을 꺼 주니 물은 고맙고, 물을 데 주니 불은 고맙다…. 이것을 어른들은 아주 싱거운 이야기라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어른들이 싱겁다고 여기는 것에 이처럼 깊은 고마움을 느끼는 것이야말로, 어린이다운 높은 감동의 세계가 있는 것이며, 이 동시가 동시로서의 값어치가 있다.   우리 아기 아장아장 걸음마를 배울 때 맨드라미 빨강비로 앞마당을 쓸어라. 걸음마 ·윤석중   이 작품에 대해서, 나는 어느 글에 "안마당에 무지개가 어리도록 신비스럽게 아름다운 시"라고 말했다. 어린 아기들이 정성껏 맨드라미 빨강비로 쓴 마당의 정결함이란 비할 데 없다. 그 정결한 마당에 첫걸음을 배우는 아기의 아장거리는 모습과 첨으로 검은 흙에 발자국을 남기는 첫발자국의 깊은 뜻과 인상이 어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아름다움도 "맨드라미 빨강비"라는 어린이만이 느낄 수 있는 한 마디 말에 있다. 여러분은 자기의 느낌을 올바르게 헤아려, 자기 생활에서 느껴지는 것을 잡아야 한다. 셋째, "연꽃은 해만 뜨면…"과 "연꽃은 연꽃은 세수를 안 해도…" 하고 어떻게 다르냐의 문제, 이것은 좀 여러분이 깨닫기 어려울 것이다. 연꽃은 보면 볼수록 더 아름다워 뵈고, 더욱 사랑스러운 마음이 높아지는 그 느낌과 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해만 뜨면 부시시 깨는구나 하고, 사랑스러운 마음으로써 "연꽃"을 보면 볼수록, 아아 참으로 "연꽃은 연꽃은" 세수를 안 해도 맑고 깨끗하게 예쁘구나! 여겨지는 연꽃에 대한 감탄이 차차로 세차고 높아지는 것을 나타낸 것이다. 엄마, 엄마 엄마, 어느 것이 더 어머니를 간절히 부르는 소리냐? "연꽃은"과 "연꽃은 연꽃은"도 마찬가지 이치다. 그러나, 시야말로, 우리의 느낌을 느낌으로서 나타내는 것이다. 그래서, 이 "연꽃"에서도 연꽃의 아름다움에 대한 놀라움과 사랑스러운 마음이 차차로 세차게 높아지는 것을 첫 줄에는 '연꽃은"하고, 다음에 "연꽃은"을 되풀이해서 나타내었다. 세 가지 질문의 대답이 끝났다. 동시야말로, 어린이 여러분만이 느낄 수 있고, 생각할 수 있는 그 맑고 아름다운 감동을 감동으로서, 느낌을 느낌으로서 나타내는 것이다.       왜 동시를 써야 하나?   아무도 오지 않는 교실 말끔히 닦은 칠판이 아침 햇살에 환하다. 책상도 걸상도 얌전히들 앉아 있다. 가방을 풀고 책에 넣고 나는 드르륵 유리창을 열었다. 바람이 시원스럽다. 아침교실 ·김미숙   서울 종로초등학교 6학년생이 지은 작품이다. 놀랍게 잘 지은 노래다. 아무도 오지 않는 아침 교실은 샛밝은 햇살만 쪽 펴졌는 이상한 신선함과 고요함이 깊은 산골짜기에 들어선 것 같다. 참으로 이 시에는 그 신선함과 고요가 어려서 밝고 맑다. 이 아침 교실의 신비스러운 고요함을 경험하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이랴. 여러분의 마음이 갈앉고 조용해진다. 아침교실의 신선하고 고요한 것을 체험한 탓으로 비로소 무엇을 깊이 찬찬히 생각할 힘을 얻고 기르게 된다. 더구나, 아침 햇살에 환한 칠판을 놀라운 눈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에 그 칠판에 쓰여질 선생님의 말씀이나 글씨가 마음 깊이 스미게 될 것이다. 또한, "책상도 걸상도 얌전히들 앉아 있다"는 구절에는 "다만 빈 책상과 걸상이 얌전히 앉아 있다"는 뜻만이 아니다. 그 걸상과 책상의 임자들의 모습도 하나하나 머리에 떠 올랐으리라. 이처럼 조용히 친구들을 생각해 보고, 비로소 그 친구를 올바르게 친구로서 깨닫게 되리라. 이 조용한 교실에서 참된 마음으로 친구를 생각해 보고, 비로소 "가방을 풀고 책을 넣고" 그 날 하루의 일을 시작한다. "가방을 풀어 책을 넣고"가 아니다. "가방을 풀고 책을 넣고"로써 이 학생이 자기의 행동 한 가지 한 가지를 깊이 살피고 생각하는 것을 보라. 그리고, 유리창을 드르륵 연다. 드르륵 하는 유리창 소리가 얼마나 신선했으랴. 그 날, 자기의 참된 마음의 하루를 향해서 여는 마음의 창문이요, 그 드르륵 소리다. 비로소 여러분은, 이시의 끝을 맺는 "바람이 시원스럽다"라는 말이 얼마나 엄청나게 깊은 느낌에서 울어나는 소리라 함을 알게 되리라. 왜 동시를 써야 하나, 혹은 우리가 왜 시를 깊이 감상해야 하나? 그것은 어려운 질문이 아니다. 여러분 마음 속에 스쳐가는 느낌이나 감동을 종이쪽에 기록함으로써 느낌을 넉넉하게 지닐 수 있고 또한 생각을 바르게, 참되게 기를 수 있다. 이 자기의 느낌이나 생각을 소홀히 하지 않음은 참으로 소중한 일이다. 늘 자기의 마음을 살피고, 느낌과 뜻과 생각을 뚜렷이 헤아려 아는 힘이야말로 우리로 하여금 참된 사람, 참된 생활을 이룰 수 있게 한다. 이것을 역시 장만영 선생은 좀 어려운 말이나 자기 완성이라 했다. 참된 사람이 된다는 뜻이다. 가을 밤 하늘에 떠 있는 밝은 달빛을 보고 아무런 감흥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란 처음부터 얘기가 되지 않는다. 예쁜 꽃을 보고도 그 냄새를 탐낼 줄 모르는, 이런 예외의 사람을 가지고 말할 것은 더욱 아니다. 인생의 희로애락은 누구나 다 느낄 수 있는 것인즉 이만한 정서 감정만 있다면 그 다음은 앞에서 말하였듯이 오직 노력만이 남을 따름이다. 작품의 우열은 별문제로, 우선 시를 쓸 수 있음은 자기 완성에의 노력 여하에 달렸다고 본다. 왜 자기 완성에의 노력이 필요한가? 모든 시는 그 작가의 올바른 마음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좋은 사람이라면 좋은 시를 쓸 것이요, 나쁜 사람이라면 나쁜 시를 쓸 것이다. 무서울만치 이것은 진리이다. 그리고, 진리는 영원한 것이기에 아무런 흐림이 없이 좋은 작품에 그대로 빚어 나오는 법이다. 시작법에서·장만영   여러분이 자기 마음(생각, 느낌, 뜻)의 움직임을 맑은 눈으로 자세히 살필 수 있게 되는 것이 시를 써야 하는, 시를 씀으로써 얻는 큰 보물이다. 그러나, 이 보물을 얻는 까닭은 우리가 자기의 생활을 좀더 깊고 넉넉하게 이루려 하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생할"이라는 말을 아느냐? 여러분이 아는 말 중에 가장 소중한 말의 하나다. 생활이란 놀고, 친구를 사귀고, 학교에 와서 공부를 하고, 사람들과 만나고, 헤어지는 것을 다 생활이라 한다. 더구나, 생각하고 뜻을 지니는 것을 정신 생활이라 한다.   삐익,빵. 덜컥덜푹, 덜컥덜푹, 덜컥덜푹. 새끼차가 골목안을 갑니다.   새끼차는 엄마 마중 가는 차 젖 먹고 싶은 사람 모두 타지요. 새끼차는 아빠 마중 가는 차 장난감 얻고픈 사람 모두 타지요.   삐익, 빵. 덜컥덜푹, 덜컥덜푹, 덜컥덜푹. 새끼차가 골목안을 갑니다. 새끼차 ·박노춘   골목 안에서 기차놀이한 일이다. 나들이 가신 엄마를 기다리면서 동무끼리 모여, 삐익, 빵. 하고 새끼로 줄을 한 새끼차가 달린다. 여러분의 소망이 가득한 하루가 엿보이는 노래다. 이렇게 뛰고 논 일을, 책상 앞에 마음을 모아 조용히 적어 보라. 얼마나 여러분 머리에 그 때의 놀음놀이가 확실히 떠오르며, 또 놀음놀이하면서 느꼈던 생각들이 새롭게 또록또록한가. 이 마음에 새롭게 느껴지는 생각들을 다시 살펴, 그 날 하루의 자기를 살필 수 있고, 자기와 남 사이에 넉넉한 사랑과 너그러운 마음을 지닐 것이다. 여러분의 교과서를 엮어주시는 홍웅선 선생은 "작문교실"이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작문이란 우리의 생활을 그대로 글로 나타내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매일 매일의 생활을 그대로 적은 것이 여러분의 작문입니다. 우리는 남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들 자신의 생활의 발전을 위하여, 우리들의 생활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것입니다. 작문교실에서·홍웅선   햇빛은 쨍쟁 모래알은 반짝 모래알로 떡해 놓고 조각돌로 소반지어 누나 엄마 모셔다가 맛있게도 나음나음   햇빛은 쨍쨍 모래알은 반짝 호미 들고 광이 메고 뻗어가는 메 캐어서 엄마 아빠 모셔다가 맛있게도 나음나음 햇빛은 쨍쨍 ·최옥란     소꼽장난 놀이다. 소꼽놀이할 때 저절로 어린이 여러분의 마음을 울려서 나오는 노래… 얼마나 아름답고 맑고 귀한 것이랴. 그 때 어린이 마음 속에 고이는 생각은 너무나 깨끗하기 때문에 30 년을 두고, 동요만 지으신 윤석중 선생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늙을수록 젊어지는 게 뭐냐?" "꼬추!" 이런 수수께끼가 있다. 라는 예를 들어, 늙을수록 젊어지는 것은 어린이의 그 귀한 마음을 지니는 것이라 했다. 그것을 시로써 기르면 오래오래 간직할 수 있다. 윤 선생은 말했다. 오래오래 살 수 있는 길은 나이를 많이 먹는 것이 아니고, 언제까지든지 어린이 마음을 잃지 않는 것이다. 《어깨동무》에서·윤석중   자주꽃 핀건 자주 감자, 파 보나마나 자주 감자   하얀꽃 핀건 하얀 감자, 파봐나마나 하얀 감자. 감자 ·권태응   자주빛 감자꽃에는 으레 자주빛 감자가 달렸고 하얀꽃이 폈는 감자는 하얀 감자가 열렸다는 뜻이다. 그러나, 단순하게 그 뜻만 있는 것이 아니다. 자주꽃이 쫑긋이 폈는 긴 감자줄기 아래는 어두운 흙덩이 속에 자주빛 감자 형제들이 조롱조롱 살고, 하얀꽃이 폈는 감자 줄기 아래 흙덩이 속에는 하얀 감자 열 두 형제가 오손도손 산다. 혹은 그 어두운 흙덩이 속에 사는 자주빛 감자 형제들이 줄기 위에 폈는 자주빛 감자 꽃송이를 통해서, 해님과 바람과 이슬과 별과 얘기를 하게 되고, 또한 햐얀 감자 형제들은 땅 위에 하얀 꽃을 피우게 해서, 하얀 감자 형제들끼리의 그 정다운 뜻과 사랑을 나타내는지 모른다. 그렇지 않으면 하얀 감자꽃도 땅 속에 사는 하얀 감자 형제들의 막내동생이나 맏형님인지도 모르리라…. 그래서 자주빛 감자꽃은 "파 보나마나" 자주빛 감자라는 것이다. 이 노래는 자기가 참으로 감자 농사를 지으면서, 못 생겼으나, 어딘지 모르게 귀염성이 있는 감자알 한 개마다, 혹은 감자 형제들이 오롱조롱 달렸는 감자 포기마다 친하고 사랑했기 때문에, 이루어진 것이다. 이것은 감자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참으로 자연에 대하여 가슴을 열고, 친하려는 뜻만 지니면 자연도 가슴을 열어젖히고, 그의 오묘한 온갖 모습을 보여주고, 뜻을 나타내 보인다. 우리가 시를 쓴다는 사실은, 우리를 에워싼 꽃송이와 바람과 돌과 흙덩이와 감자와 콩과 강아지와 당나귀와 쥐와 서로 이야기하고 속삭인다는 뜻이다. 어떻게 그들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고 그들과 속삭이느냐고.   새양쥐 새양쥐 왜 안 자고 나왔나 화롯불에 묻은 밤 줄까 하고 나왔지.   새양쥐 새양쥐 왜 저렇게 뿌연가 밤 한 톨이 탁 튀어 재를 홈빡 뒤썼지.   새양쥐 새양쥐 어따 머리 감았나 부엌으로 들어가 뜨물에다 감았지.   새양쥐 새양쥐 밤새도록 뭐했나 자는 아기 얼굴로 살살 기어 다녔지.   새양쥐 새양쥐 왜 또 벌써 나왔나 세수하나 안 하나 구경하러 나왔지. 새양쥐 ·윤석중   아기가 화롯불에 밤을 묻어두고, 우두커니 앉았으니 구석진 데 새양쥐란 놈이 그 또록한 눈을 요리조리 굴리며 쪼붓한 얼굴을 쏙 내밀었다. 참으로 쥐란 놈은 언제 보아도 늘 낯설은 얼굴을 하고 있다. 당나귀나 송아지는 언제 보아도 어디서 본 듯하고 친한데, 쥐란 놈하고는 마음을 턱 놓고 친할 수 없는 그런 얼굴이다. 그래서, 아기가 "새양쥐 새양쥐 왜 안 자고 나왔나?" 물어 보았더니, 새양쥐가 "화롯불에 묻은 밤 줄까 하고 나왔지." 염치도 없는 소리를 한다. 그래서, 아기와 새양쥐는 한참 정답게 얘기를 하다가 잠이 들었다. 그러나, 이튿날 아침 아기가 깨어 보니, 또 새양쥐가 얼굴을 쏙 내밀고 나타났다. (저게 왜 또 나왔어?) 아기는 놀라면서   "새양쥐 새양쥐 왜 또 벌써 나왔나?"   하고 물어보았더니 또 염치없는 대답을 한다. "세수하나 안 하나 구경하러 나왔지." 그래, 아기는 세수를 안 할 도리가 없다. 이 노래를 보면 알다시피 아기가 새양쥐와 버젓이 얘기를 하고 있다. 이 새양쥐와 말을 할 수 있고, 그들의 얘기를 들을 수 있는 것은 우리가 가슴에 지니는 사랑이다. 새양쥐를 사랑하지 않으면 그들의 말을 들을 수 없다. 이 말은 우리가 깊은 사랑을 지니면 지닐수록 자연과 동물의 온갖 모습에서 오묘한 이치를 깨달을 수 있다는 뜻이다. 또한 이 사랑만큼 우리를 참되고 아름다운 사람으로 이루게 하는 것은 없다. 왜 동시를 써야 하고, 감상해야 하는 까닭의 하나는 시를 쓰고 감상함으로써 이 귀한 사랑을 넉넉하게 기를 수 있기 때문이다.         노래하는 시·생각하는 시   아롱다롱 나비야 아롱다롱 꽃밭에 아풀나풀 오너라. 붉은꽃이 웃는다. 노랑꽃이 웃는다. 앞뜰위에 홀로핀 복사꽃이 웃는다. 너를보고 웃는다.   아롱다롱 나비야 아롱다롱 꽃위에 사쁜사쁜 앉아라. 송이송이 꽃속에 고이고이 잠들어 붉은꿈을 꾸어라. 노랑꿈을 꾸어라. 오색꿈을 꾸어라. 아롱다롱 나비야 ·목일신   글자를 4·3씩 꼭꼭 맞추었다. 이것을 4·3조라 한다. 목청을 돋구어 부르기 좋게 하기 위해서다. 우리 나라에서 옛날부터 내려오는 동요가 많다. "달아달아 밝은 달아"도 "새야새야 파랑새야"도 옛날 동요다. 그것은 글자가 네 개씩, 4·4조다. 그래서, 동요라는 것들에라도 나가서, 즐겁게 뛰며 부를 수 있는 노래이다. 노래이기 때문에 가락을 고르고, 다듬어야 한다. 그러므로, 글자를 4·3으로 꼭 맞추어 그 가락을 다듬고 골랐다. 그러나, 동시는 단정하게 가락을 다듬을 필요가 없다. 여러분 가슴에 이는 느낌을 따라, 그윽한 생각의 물결을 속삭이듯 나타내면 된다. 동시는 노래하기보다는 생각하고 조용히 속삭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불난 것은 활짝 펼친 공작의 꼬리 위에 피어난 한 송이 장미꽃 불·막스 짜곱 ·박용혁 옮김   "불이났네 불이났네" 하고 노래하지 않았다. "불난 것은…" 하고, 자기의 느낌을 살며시 폈다. 다시 말하면 느낌을 조용히 마음 속에 모아서, 천천히 생각하며, 살피며, 한 가닥씩 풀어 본 것이다. 그러므로, 동요는 가슴에 설레는 즐겁고, 슬픈 생각들을 노래로 뽑았다. 노래로 뽑았기 때문에 동시처럼 시 속에 담겼는 느낌이나 뜻이나 생각을 깊이 넉넉하게 담으려는 것이기보다 박자의 아름다움을 더욱 중히 여긴다. 어느 외국 시인은 동요와 동시를 다음과 같이 나누었다.     동 요 동 시   。 노래한 것 。 가락을 고르게 뽑아, 노래하기를 주로 한 것. 。 느낌이나 생각이 밖으로 나타난다. 。 박자의 아름다움 。 속삭인 것. 。 그윽한 감정의 가는 물결을 속삭이듯 나타낸 것. 。 안으로 생각하는 힘이 세다. 。 생각의 흐름이 그윽하게 펼쳐짐.       그러나, 여러분은 동요를 쓸까, 동시를 쓸까 망설일 필요는 없다. 다만, 자기의 느낌이나 생각을 찬찬히 올바르게 기록하려는 뜻에서 붓을 잡아야 한다. 그러나, 되도록 동요보다 동시를 써야 한다. 왜냐 하면, 동요는 가락이 4·4조, 3·4조, 7·5조로 잡혀 있기 때문에 참된 자기의 생각을 깊이 살펴서 담기보다는 곁으로 흘려 버리기 쉽다. 더구나, 여러분이 가락을 잡는다는 것은 어려운 노릇이다. 왜냐 하면, 잡혀진 가락(정형) 속에 새로운 느낌이나 생각을 담기가 가장 힘이 들고, 능란한 솜씨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책상 걸상을 죽 뒤로 밀어 놓고 먼지털이로 구석구석 먼지를 떨고 비로 박박 마루를 쓸고 물로 좍좍 걸레질을 하고   책상 걸상을 제 자리에 나란히 해 놓고 맑은 물을 길어다가 교탁과 교단을 다시 닦는다.   비뚜러 놓인 교탁을 바로 놓다가 나는 문득 선생님이 되어 보고 싶었다. "강웅구, 수고했소. 오늘 청소는 만점이요. 인제 집으로 돌아가도 좋소."   언제 와 계셨는지 교실 문 앞에 담임 선생님이 서 계셨다. 나는 부끄러워 어쩔 줄 모르다가 "선생님 청소를 다 했습니다."   선생님도 빙그레 웃으시며 "강웅구, 수고했소. 오늘 청소는 만점이요. 인제 집으로 돌아가도 좋소."   그리고 선생님은 교사실로 가신다.   복도를 쓸던 동무들과 유리를 닦던 동무들이 한꺼번에 "와아"하고 웃어 버렸다.   교사실로 가시던 선생님도 뒤돌아 보시며 다시 한번 빙그레 웃으시었다. 청소를 끝마치고 ·강소천   이 시를 읽어 보라. 붓을 잡은 마음이 얼마나 수월하고 겸손하냐. 이런 마음에서 여러분도 붓을 잡고, 자기의 생각과 느낌을 살펴서 시를 지어 보라. "청소를 끝마치고"에서는 그처럼 평범하고 수월하면서, 야단을 치시지 않고, 빙그에 웃으시며, 교사실로 가시는 인자하신 선생님의 모습이 우리의 가슴을 울리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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