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설게 하기의 아름다움
천양희 (시인)
저는 평소에 시는 언어로 짓는 사원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시(詩)라는 말의 한자어는 말씀 '언(言)'과 절 '사(寺)'자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왜 절 사자를 거기에다 붙였을까요. 다 아시는 대로 절은 용맹정진하는 구도자들의 수행장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시를 쓰는 사람들도 구도자의 정신과 자세로 시를 쓰라는 뜻에서 '시(詩)'자가 만들어졌다고 생각됩니다.
내가 언어로 사원을 짓기 시작한 것은 1965년 이화여대 3학년 때로, 박두진 선생님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을 통해서 등단을 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등단 통로가 두 군데밖에 없었습니다. 신춘문예 당선과 {현대문학}지 추천 통과밖에 없었는데, 현대문학이 유일한 문예지였습니다. 올해로 내가 시인의 길을 걸어온 지가 35년이 됩니다. 시의 나이가 35세가 되는 셈이지요. 그런데 그 동안 걸어온 삶의 길이나 시의 길이 너무 꾸불텅해서 내 자신을 바꾸는 데도 20여 년이 걸렸습니다.
이 나이쯤에는 앞서간 여러 사람을 생각해 보게 됩니다. 예수도 석가도 이 나이쯤에 삶의 절정에 다다랐지요. 예수는 33세에 인류를 구원했고, 소월(素月)도 영랑(永郞)도 파울 첼란도 실비아 플라스도 요절했지만 불멸의 시를 남겼습니다. 그런데 나는 지금도 컴퓨터를 하지 못해서 원고지로 글을 쓰는데, 원고지 앞에 앉으면 사각의 모서리가 절벽같이 느껴집니다.
그래서 내가 그 절벽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여러분이 제게 왜 시를 쓰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잘 살기 위해서 시를 쓴다"고 분명하게 대답할 수 있습니다. 또 누군가 시가 밥 먹여주냐고 물으면, 나는 "시가 내 정신의 밥이다"라고 분명히 얘기할 수 있습니다.
쌀로 된 이밥은 우리 배를 부르게 하지만, 시는 우리의 정신을 살찌우는 밥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한 편의 시를 가슴에 넣고 하루를 너끈히 살아가는 사람도 있고, 한 편의 좋은 시가 가슴 속을 따뜻하게 해서 평생을 거기에 기대면서 풍요롭게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느끼는지 모르겠지만 한 끼의 밥은 굶을 수 있어도, 정신의 허기는 사람을 황폐하게 만듭니다. 시가 밥의 길로 이어지지 않는다고 해도 시로써 배부른 사람이 분명히 있습니다.
시인이 되려고 마음먹은 사람들이 돈도 밥도 안 된다고 주저하고 두려워한다면, 이런 사람들은 아예 다른 길로 가야지 시인이 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피나는 노력 없이, 오랜 습작 기간 없이 시인이 되려 하고 좋은 시를 쓰겠다는 생각은 좋지 않은 생각입니다.
니체는 일찍이 '좋은 글은 피의 여로를 거쳐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피로 쓴 글만이 진실하다고 얘기했고, 불멸의 명작을 남긴 플로베르는 글쓰기의 어려움을 가리켜, '내 심장과 두뇌를 짜서 그걸 고갈시키는 과정이다'라고 갈파했습니다.
그만큼 작품 쓰기가 어렵다는 걸 나타내는 말입니다. 또 그는 '한 마디의 말을 찾기 위해서 나는 하루 종일 내 머리를 쥐어짰다'라고도 토로했습니다. 오늘날 활동 중인 시인들이나 시인 지망생들조차도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이 두 사람이 얘기한 것은 그만큼 시인 정신이 치열해야 한다는 것을 대변해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 자신에게 반문해 봅니다. 너는 과연 피의 여로를 거쳤느냐? 너의 심장과 두뇌를 짜서 토로하는 과정을 거쳤느냐? 그렇게 반문하면 어떤 때는 말문이 콱 막혀 버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나는 내 나름대로 수많은 밤을 정말 피 흘리는 것처럼 지샌 적도 많고 수많은 파지를 버렸습니다. 수많은 파지를 버린다는 게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한 편의 시를 만나기 위해서 몇 달이 걸리기도 하고, 몇 년이 걸리기도 합니다. 몇 년 걸린 나의 시 중에 [직소포에 들다]가 있습니다. [직소포에 들다]는 13년 만에 완성된 시입니다.
[마음의 수수밭]은 8년 만에 얻어졌습니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면서 얻어지는 시가 있는가 하면, 어머니를 생각하며 쓴 [그믐달]이라는 시는 30분 만에 썼습니다. 왜 그랬는가 하면 포도가 익어서 향기가 나듯이 어머니가 늘 내 가슴속에 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나온 겁니다. 그런 게 흔하지는 않고 단 한 편밖에 없습니다.
나는 낯선 곳에 여행을 갔다가 오면 금방 시를 쓰지를 못합니다. 그때그때 메모해 두었다가 다시 한번 그곳에 찾아가서 그때 내가 왔던 심정과 지금 내가 여기 서있을 때의 심정이 어떤가 내 자신을 닦달해 봅니다. 너는 이걸로 올라가서 시를 쓸 수 있겠는가. 그래서 거기서 느낌을 메모해 두었다가 와서 겨우 시를 완성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과작(寡作)인지 모르지만, 과작이라고 해서 나쁜 것도 아니고 다작(多作)이라고 해서 반드시 좋은 것도 아니라고 봅니다. 무슨 시를 몇 편이나 쓰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쓰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 지하철 계단에서 번개 같은 시상을 매만지며
나는 메모지를 꼭 넣고 다닙니다. 그때그때 생각이 떠오르면 장소를 생각하지 않고 멈춰 서서 그 생각이 떠날까봐 메모를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눈총을 받은 적도 많습니다. 지하철 계단을 올라갈 때 사람들이 올라가는데 무슨 생각이 팍 떠오르는 겁니다. 생각이 떠날까봐 딱 멈춰 서 있는데, 뒤에 올라오는 사람들이 가지를 못하고 짜증을 내는 겁니다. 그래서 미안하다고 고개를 숙이는 찰나에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한번은 지하철을 기다리는데 내 차례가 되었습니다.
뒤에 사람들이 서 있고 내가 타야 하는데 문득 시상이 떠올랐습니다. 눈총을 받는 게 차라리 낫지 싶어서, 옛날같이 연기처럼 날려보내지 않는다는 생각에 버티고 서 있다가 겨우 한 줄을 건졌습니다. 그럴 때의 희열이라는 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누가 미친 여자라고 해도 좋습니다. 자기가 정말 붙잡아야 된다는 것을 메모해 두지 않으면 다 사라집니다.
그렇게 해서 내가 메모한 노트가 지금 수십 권에 이릅니다. 그래서 그걸 보면서 나는 돈이 많은 부자가 아니라도 메모 부자구나 하고 생각합니다. 남들이 볼 때는 참 웃기는 여자라고 할지 몰라도 나는 참 행복할 때가 많습니다. 내가 시에 대해서 이렇게 순장을 바치거든요. 그 순정을 시가 알아주었던지 시가 나를 받아줬어요.
옛날에는 내가 시를 받아준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시가 나를 받아줘야지 한 편의 시를 만들 수 있습니다. 아, 이 시가 나를 받아주고 있으니까 시와 함께 살면서 어떤 걸 겪더라도 나는 그걸 고통이던 괴로움이던 행복한 괴로움과 행복한 고통으로 받아들이고, 시를 내 생업으로 삼는 게 팔자라면, 시를 팔자로 삼아 세상을 남들이 아무리 빨리 가도 나는 터벅터벅 낙타처럼 걸어가려고 합니다.
등단 18년 만인 1983년에 첫 시집을 냈습니다. 굉장히 늦게 낸 셈입니다. 그 동안 우여곡절을 거치는 동안 시 한편 한편이 너무 구원이고 나의 구명줄이었습니다. 남들이 볼 때는 감동이 없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때는 시 외에는 아무 것도 의미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시를 구원으로 삼고 계속 시를 썼는데, 두 번째 시집 낼 때까지 내가 그렇게 맹목적으로 사랑을 바쳤지만 짝사랑으로 그치고 마는구나 하는 괴로움 때문에 굉장히 힘들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내 마음에 딱 차지 않는 시들이라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처음으로 상재한 시집이 {신이 우리에게 묻는다면}입니다. 영국의 시인 셀리는 "신이 나에게 묻는다면 때때로 울었노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라고 했는데, 나도 그런 말밖에 할 수가 없었습니다. 자꾸 눈물만 나는 겁니다. 두 번째 시집은 {사람 그리운 도시}인데, 도시에 그렇게 사람이 많아도 사람이 그립다는 걸 느꼈습니다. 그래서 세 번째 시집 {하루치 희망}을 낼 때는 언어의 모순을 통해서 세상의 모순을 드러내는 전략을 써 보기로 했습니다.
세 번째 시집을 보면 언어유희, 동의어, 반복어 들이 참 많이 나옵니다. 그러면서 나는 세상에 대해서 발길질을 한번 한 거지요. 왜 말놀이를 많이 했느냐고 사람들이 할지 몰라도 내게는 타당성이 있습니다. 내가 사람들을 많이 만나지 않고 혼자서 갇혀 있을 때 무엇과 놀며 지냈습니까. 만화를 보겠습니까. 무슨 게임을 할 줄 알겠습니까. 나는 말로써 놀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말놀이를 그 책으로 끝내려고 했는데 다섯 번째 {오래 된 골목}에도 조금 들어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나의 외로움이 말놀이로도 다 메워지지를 않으니까 그칠 수가 없었습니다. 말놀이를 하고 동의어, 반복어를 씀으로써 내 의식의 전환기를 보냈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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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 성냥 / 김남조
성냥
김 남 조
성냥갑 속에서
너무 오래 불붙기를 기다리다
늙어버린 성냥개비들,
유황 바른 머리를
화약지에 확 그어
일순간의 맞불 한 번
그 환희로
화형도 겁 없이 환하게 환하게
몸 사루고 싶었음을
김남조 시집 <영혼과 가슴>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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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 그대 있음에 / 김남조




그대 있음에
김 남 조
그대의 근심이 있는 곳에
나를 불러 손잡게 하라
큰 기쁨과 조용한 갈망이
그대 있음에
나이 맘에 자라거늘
오, 그리움이여
그대 있음에 내가 있네
나를 불러 손잡게 해
그대의 사랑 문을 열 때
내가 있어 그 빛에 살게 해
사는 것의 외롭고 고단함
그대 있음에
사람의 뜻을 배우니
오, 그리움이여
그대 있음에 내가 있네
나를 불러 그 빛에 살게 해
<김남조 전집> 중에서
1964년 한국일보사가 새해맞이 기념으로 위촉하여 만들어진 것으로, 1964년 새해 아침에 한국일보사가 독자들에게 드리는 노래 선물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4분의 4박자, 바장조, 자유스러운 3부형식의 유절가곡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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