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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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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3    詩작법 휘호호.. 댓글:  조회:4300  추천:0  2016-01-09
2. 시어와 기법 1) 반어(反語) : 표현된 것과 표현의 의도가 상반된 진술 방식. 따라서 반어적 표현에는 '말한 것'과 '의미한 것' 사이의 긴장, 대조 혹은 갈등이 담겨 있다. * 긴장 : 시에서 대립되는 요소의 충돌 및 공존에서 오는 관계, 또는 여기에서 느끼는 독자의 정서적 충격   예)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 님을 보내야 하는 극한 슬픔을 반어적으로 표현하였다.   2) 역설(力說) : 겉으로 보면 명백히 모순되고 이치에 닿지 않는 듯한 표현 속에 어떤 진실을 담고 있는 진술 방식이다.   예)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얐습니다. - 떠나간 임이 언젠가는 다시 돌아오리라는 희망을 역설적으로 표현하였다.   3) 풍자(諷刺) : 웃음을 자아내는 가운데 날카로운 비판 의식을 감추어 두는 기법. 주로 인간의 악덕과 어리석음, 사회 부조리를 비판하려는 목적으로 쓰인다.   예) 냇가의 해오라비 므스 일 셔잇는다 무심한 져 고기를 여어(엿보아) 므삼 하려는다 두어라 한 물에 잇거니 니저신들 엇더리 →겉으로 보기에는 한가로운 이의 고기잡이 정도로 생각할 수 있으나 실은 조선 왕조의 고질적인 당파 싸움을 꼬집은 풍자시다.   4) 언어 유희(言語遊戱) : 다른 의미를 암시하기 위한 말이나, 동음 이의어를 해학적으로 사용하는 것. 즉 말이나 문자를 소재로 한 말장난을 뜻한다.   예) 치정(癡情) 같은 정치가 상식이 병인 양하여 ∼ 현금이 실현하는 현실 앞에서 다달은 낭떠러지 →음절 도치에 의한 언어 유희로 재미와 함께 긴장감을 준다.   예)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 감을 자랑마라. 일도 창해하면 도라오기 어려오니, 명월이 만공산 하니 쉬어간들 엇더리. → 동음 이의어에 의한 언어 유희. '벽계수'는 푸른 시냇물이란 뜻이자 당시 종실의 한 사람의 이름이고, '명월'은 밝을 달이자 황진이의 기명이다.     3. 시의 표현   (1) 비유(比喩, metaphor)    ① 비유란 말하고자 하는 사물이나 의미를 다른 사물에 빗대어서 표현하는 방법이다.      ② 비유에는 표현하고자 하는 것(원관념)과 비유하는 사물(보조 관념)의 상관 관계가 성립된다. 즉 원관념과 보조 관념 사이에 유추가 이루어질 수 있는 유사성이 있어야 한다.      ③ 대개의 경우 비유는 표현의 구체성, 직접성, 선명성을 높이는 수단이 되며, 일상어에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시에서 특히 많이 쓰인다.     □ 비유의 종류   ㈀ 직유(直喩) : 원관념과 보조 관념을 '∼처럼', '∼같은', '∼인듯'과 같은 말로 직접 연결시키는 표현 기법→ 유사성     ㈁ 은유(隱喩) : 원관념과 보조 관념을 'A=B' 또는 'A=B 이다'로 연결하는 방법→동일성     ㈂ 대유(代喩) : 어떤 사물을 다른 사물로 나타내는 표현법    - 환유(換喩) : 사물의 속성 특징으로 그 사물을 대표함.    - 제유(提喩) : 사물의 일부분으로 그 사물 전체를 대표함.    - 풍유(諷喩) : 원관념을 숨기고 보조 관념만으로 뒤에 숨겨진 본래의 의미를 암시하는 방법.    - 의인(擬人) : 인간이 아닌 사물이나 관념에 인격을 부여해서 인간적인 요소를 지니게 하는 표현법.       (2) 상징(象徵, Symbol)    ① 어느 대상이 다른 대상을 표시하거나, 본래의 고요한 의미 외에 다른 의미를 나타내는 표현 기법.     ② 상징은 의미의 암시성과 다의성을 지닌다.     ③ 비유에서는 원관념:보조 관념=1:1의 유추적 관계를 보이지만 상징에서는 1:다수의 다의적 관계이다.      □ 상징의 종류    - 관습적 상징(고정적 사회적 제도적 상징) 일정한 세월을 두고 사회적 관습에 의해 공인되고 널리 보편화된 상징   십자가 → 기독교, 비둘기 → 평화      - 개인적 상징(창조적 문화적 상징) 관습적 상징을 시인의 독창적 의미로 변용시켜 문화적 효과를 얻는 상징   윤동주의『십자가』에서 십자가의 의미→윤동주 자신의 희생 정신을 나타냄.      ※ 기타 상징의 종류. 1. 자연적 상징 : 자연물이 인간에게 주는 보편적 의미의 상징  - 해→희망, 밤→절망   2. 우의적 상징 : 풍자적 우희적 통로로 상징하는 것  - 빼앗긴 들→일제 치하의 조국   3. 기호적 상징 : 약속에 의해 정해진 것  - 숫자, 문자, 부호, 신호   4. 원형적 상징 : 시대와 공간에 관계없이 신화 이후에 문화에 빈번하게 되풀이 되어 나타나는 상징  - 날개에서의 『방』→단군 신화에 나오는 『동굴』의 원형 상징. ---------------------------------------     12. 돌파 / 김경미                   --------------------------------------------------- 13. 나는야 세컨드 1 / 김경미                                              ---------------------------------------------------------     14. 나는야 세컨드 2 / 김경미                            
922    詩작법 둥기당... 댓글:  조회:5758  추천:0  2016-01-09
(3) 문예 사조에 따른 갈래    ① 낭만시(浪漫詩) : 전통에 대한 반발, 자기 혁신, 자연에 대한 애착, 개인의 자유로운 정서를 중요시한 시. 영국의 워즈워스가 대표적 시인이다.      ② 상징시(象徵詩) : 언어가 지닌 모호성, 상징성, 음악성에 깊은 관심을 보인 시로 난해한 시를 낳게 됨. 이 세상의 사물을 아름다운 관념 세계의 희미한 그림자에 불과한 것으로 보고, 상징을 통하여 관념 세계의 본질적 미를 파악하려는 시이다. 프랑스의 보들레르의 공감각적 표현과 의미의 배제, 말라르메,베를렌의 음악성에 의한 암시, 랭보의 암시성이 강한 내재율 등이 이러한 성향을 보이는 시이다.      ③ 주지시(主知詩) : 냉철한 지성을 바탕으로 해서 씌어진 시.       T.S.엘리어트가 대표적 시인이다.      ④ 초현실시(超現實詩) : 인간의 내면 세계를 중시하여 자동 기술법을 바탕으로 씌어진 시.       이상의『오감도』등이 이에 속한다.       (4) 작품 경향에 따른 갈래    ① 순수시(純粹詩) : 개인의 주관적 정서나 언어의 아름다움에 집착한 시.      우리나라『시문학파』의 시들이 이에 속한다.      ② 경향시(목적시) : 특정한 이념이나 목적을 뚜렷이 나타낸 시.      우리나라 경향파,프로문학파의 시들이 이에 속한다.       (5) 주제의 내용에 따른 갈래    ① 주정시(主情詩) : 인간의 감정이나 정서를 주된 내용으로 한 시    ② 주지시(主知詩) : 인간의 지적인 면을 주된 내용으로 한 시    ③ 주의시(主意詩) : 인간의 의지적인 측면을 주된 내용으로 한 시     (6) 시대에 따른 갈래    ① 창가(唱歌) : 1896년 독립 신문에 처음 나타난 시형식    ② 신체시(新體詩) : 1908∼1919년 사이에 지어졌던 시    ③ 자유시(自由詩) : 1919년 이후에 지어진 시      □ 시의 언어   (1) 시어의 개념 시의 언어는 시에서 사용되는 언어로 일상어이면서도 일상어 속에 용해 될 수 없는 풍부하고 다양한 정서적 의미와 독자성을 갖는 언어다.     (2) 언어의 두 가지 측면    ① 지시적 의미[외연, 사전적 의미, 개념 표시]      사전에 정의된 대로의 말의 일반적 의미, 즉 사회적으로 공인된 비개인적 의미이며 모든 사람에게 같은 뜻으로 파악되는 언어로, 이는 객관적 논술이나 설명에 쓰인다.      ② 함축적 의미[내포, 정서 환기]      지시적 의미를 구체적인 문맥 속에서 확대, 심화시킨 언어가 지닌 다의적, 암시적, 상징적인 의미로 독자의 감각적 정서적 반응을 불러 일으키는 글(문학, 광고 등)에 쓰인다.     (3) 시어의 특성    ① 시어는 함축적 의미를 지닌다.    ② 시어는 운율을 지닌다.    ③ 시어는 압축 생략되어야 한다.    ④ 시어는 심상, 어조 등의 형성을 중시 한다.    ⑤ 시어는 도치, 반복, 점층 등의 방법에 의하여 긴장과 대립의 구조를 갖는다.    ⑥ 시어는 자기 목적성을 지닌다.    ⑦시적 허용 : 시적 효과를 위하여 어법 어휘 등에 대해 파격이 허용이 된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테요. 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 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으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 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김영랑     낙엽은 해마다 땅에 쌓였다. 수목의 고향은 하늘   박두진     이러한 시어의 특질을 구체적으로 찾아보면 '모란'은 그 외연적 의미가 단순한 꽃 이름이라기 보다는 함축적이고 내포적인 '희망', '보람', '이상'을 상징하는 화려함의 역설적인 '슬픔'이라는 내포의미로 쓰이고 있다. '모란'을 통해서 잃어버린 설움에 잠기는 삶을, 영랑 자신의 삶의 노래, 즉 정신적 굴절이 창조되어 있다. 이렇게 '모란'은 정서적 분위기를 수반하면서 내포적이고 함축적이다.   또 '수목의 고향은 하늘'도 단순한 사전적 의미의 지시적 언어기능으로 이해하기 보다는 환정적 언어기능에 의해서 이해될 때만이 감동의 전달을 받게 된다.   "수목의 고향은 하늘 / 낙엽은 해마다 땅에 쌓였다." 는 외연적 의미상은 시가 사실 자체가 아니고 시는 창조라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시가 사실의 세계가 아님을 이 시에서 만나게 된 것은 '수목'이 '인간'을, '고향'이 '마음(정신)이 향하는 곳'(에덴)을, '낙엽'이 '인간의 육체'를 상상해 낼 수 있게 된다.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우리다.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우리다.   가시는 걸음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고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   김소월     이 시는 소월의『진달래꽃』의 전문인데, 여기에 씌어져 있는 시어를 보면 그 단어와 작문법이 보통 일상어라든지 과학어와는 판이하게 다름을 보게 된다. 그리고, 시어는 산문문학의 언어와도 또 다른 특성을 지니고 있어, 우선 그 언어만 가지고도 시문학의 특징을 얘기할 수 있는 것이다.     겨울 하늘은 어떤 불가사의한 깊이에로 사라져 가고 있는 듯 없는 듯 무한은 무성하던 잎과 열매를 떨어뜨리고 무화과 나무를 나체로 서게 하였는데 그 예민한 가지 끝에 닿을 듯 닿을 듯하는 것이 시일까. 언어는 말을 잃고 잠자는 순간 무한은 미소하며 오는데 무성하던 잎과 열매는 역사의 사건으로 떨어져 나가고 그 예민한 가지 끝에 명멸하는 그것이 시일까.   김춘수   김춘수의 시는 대체적으로 존재의 문제를 탐구하는 관념적인 면이 많지만, 그러나 이『나목과 시』에서 보듯이 그렇게 난해한 편은 아니다. 무화과의 예민한 가지 끝에 명멸하는 무한 그것이 곧 시가 아니겠느냐는 시인의 직감과 영원을 바라보는 투시력이 잘 나타나 있고, 언어가 풍기는 철학적인 무드와 존재에 대한 성찰이 엿보인다.     해바라기 밭으로 가려오. 해바라기 밭 해바라기들 새에 서서 나도 해바라기가 되려오.   황금사자 나루 방만한 왕후의 몸매로 진종일 짝소리 없이   삼복의 염천을 노리고 서서 눈부시어 요요히 호접도 못오는 백서! 한점 회의도 감상도 용납치 않는 그 불정스런 의지의 바다의 한 분신이 되려오.   해바라기 밭으로 가려오 해바라기 밭으로 가서 해바라기가 되어 섰으려오.   유치환   위에 든 시는 의지를 노래한 생명파 시인 청마의 작품이다. 여기에 나타난 언어는 결코 정서적이거나 미화된 언어가 아니고, 오히려 거칠고 관념적이다. 그러나, '해바라기'로 대표되어진 꼿꼿하고 굽힐줄 모르는 의지의 세계가 구체적으로 형상화되어 있어,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언어의 내포성이 살아 있음을 본다. -----------------------------------------------------------   11. 풀 / 김수영   풀 / 김수영                                         
921    詩작법 닐리리... 댓글:  조회:4907  추천:0  2016-01-09
□ 운 율 1. 운율의 개념 소리의 일정한 규칙적 질서. 운과 율로 구분된다.   1) 운 : 동일하거나 유사한 자음이나 모음의 규칙적 반복    → 두운ㆍ요운ㆍ각운 등 한시의 압운법   예) 물구슬의 봄 새벽 아득한 길 하늘이며 들 사이에 넓은 숲 젖은 향기 불긋한 잎 위의 길 실그물의 바람 비쳐 젖은 숲 여기서 각은은 길과 숲이다.   2) 율 : 음의 고저ㆍ장단ㆍ강약 등의 주기적 반복     → 영시의 강약률, 한시의 성조율   * 한국 시가의 율격 기준은 시간적 등장성에 기초한 음보율이 중심을 이룬다.     2. 운율의 요소    1) 동일 음운의 반복   (1) 자음 반복         예) 갈래 갈래 갈린 길/ 길이라도 → 'ㄱ'의 반복         얄리 얄리 얄아셩 얄라리 얄랴 → 'ㄹ'의 반복         푸름 속에 펄럭이는 피깃발의 외침 < 박두진, 3월1일의 하늘> → 'ㅍ'의 반복     (2) 모음 반복         예) 영변에 약산 진달래꼿 'ㅕ,ㅏ'의 반복         오늘 하루 고요히 봄길 위에         → 'ㅗ'의 반복    2) 동일 음절의 반복         예) 일편단심 굳은 마을/ 일부종사 뜻이오니         일개 형벌 치옵신들/ 일 년이 다 못 가서/ 일각인들 변하리까?          → 일종의 두운    3) 일정한 음절 수의 반복   음수율이라고 하는 것으로 한시(5언, 7언), 우리의 시조ㆍ가사ㆍ창가의 3ㆍ4조,   4ㆍ4조, 7ㆍ5조 등이 이에 속하나, 우리 시의 경우 음보율에 대한 설명이 바람직하다.   예) 산 너머/ 남촌에는/ 누가 살길래,// 해마다/ 봄 바람이/ 남으로 오네.//        4) 일정한 음보의 반복    ※ 음보율 : 소리의 반복과 시간의 등장성에 근거한 운율 날좀 보소/ 날좀 보소/ 날좀 보소// 동지 섣달/ 꽃 본 듯이/ 날좀 보소// 아리 아리랑/ 쓰리 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고개로/ 날/ 넘겨 주소.//     예) 3음보 : 고려 속요, 민요. 격동감, 서민적   시조ㆍ가사ㆍ민요ㆍ안정감, 귀족적     5) 통사 구조의 반복 예) 우리들의 조국은 우리들의 조국 우리들의 겨레는 우리들의 겨레 (박두진의 '3월 1일의 하늘')   살어리 살어리랏다(a), 청산에 살어리랏다(a). 멀위랑 다래랑 먹고(b) 청산에 살어리랏다(a)   나는 왕이로소이다(a). 나는 왕이로소이다.(a) 어머님의 가장 어여쁜 아들(b), 나는 왕이로소이다.(a)     3. 운율의 종류   1) 외형률 : 반복의 양식이 겉으로 드러난 운율   (1) 압운 : 한시, 영시 등의 두운, 요운, 각운   (2) 음수율 : 3·4조 또는 4·4조 7·5조 등   (3) 음성률 : 소리의 고저, 장단, 강약 등의 주기적 반복   2) 내재율 : 의미와 융합되어 내밀하게 흐르는 정서적, 개정적 운율       □ 시의 갈래     (1) 형식에 따른 갈래    ① 정형시(定型試) : 한시나 시조처럼 일정한 운율적 형식의 제약을 받는 시. 외형률을 주축으로 한다.동양의 정형시는 보통 음수율·음위율·압운(押韻)·음성률(음의 고저장단)에 의해 형성된다.   우리 나라의 경우에는 자수율에 의해서 지배되거나 음보율을 지닌 정형시다. 이런 정형시는 각 나라마다 제 나름대로의 언어적 특성이나 양식에 따라 고유한 형식을 갖는 것이 특성이다.   일본의 단가(短歌)는 5.7.5.7.7의 5구 31음의 자수율을 이루고 중국의 시는 절구(絶句)·율시(律詩)·배율(排律) 등의 제약을 받으며 정형시를 이룬다. (서양의 소네트, 근체의 한시, 우리나라의 향가나 시조 등이 해당된다.)      ② 자유시(自由詩) : 정형시가 지닌 형식적 제약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형식의 시. 행과 연의 구별이 있고 내재율을 가진 시로 현대시의 주류를 이룬다.(19세기 중엽, 미국의 윌트 휘트먼이 관습에서 탈피한 시를 써서 그 아람다움과 힘을 과시한 이래, 프랑스 상징주의 시와 함께 보편화되었다.   자유시는 오늘날 우리가 쓰고 있는 모든 현대시의 형태를 말한다. 정형시가 지니는 리듬의 형식을 벗어난 연상률(聯想律)에 뿌리를 둔 시라 할 수 있다.    자유시의 시원을 그리이스나 로마의 산문예술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현대에서는 19세기에 일어난 시의 한 형태로 그 의미를 주고 있다.   19세기의 휘트먼Walt Whitman에서 시작하여, 프랑스의 보들레르 등의 상징주의 시인들에게서 전파되었고, 영국의 홉킨즈의 스프렁 리듬Sprung rhythm을 20세기 자유시의 효시로 보고 있다. 우리나라에서의 자유시는 최남선(崔南善)의 신체시 「해(海)에게서 소년(少年)에게」(1908년) 이후로 보고 있다. 그러나 최근에는 주요한(朱耀翰)의 「불놀이」를 그 형식이나 작품의 문학성으로 보아 자유시의 효시로 삼고 있다.      ③ 산문시(散文詩) : 최근에 나타난 형태이고, 자유시보다 형식상 더 자유로워진 시로서 외형상 산문과 다름 없는 시. 내재율을 지니며 연과 행의 구별은 없다. 조지훈의『봉황수』, 정지용의『백록담』등이 이에 속한다.(프랑스 상징주의 시인들, 보들레르, 랭보, 말라르케 등에 의해 장르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2) 내용에 따른 갈래    ① 서정시(抒情詩) : 개인의 주관적 정서를 표현한 시. 주관시라고도 함. 좁은 의미에서의 서정시란 순수한 감정 체험을 나타내는 것으로 되어 있다. 언어의 의미 전달기능보다는 읽는 이들에게 감동을 주는 순수시와 깊은 관련이 있다. 고대에서는 서사시나 극시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서정시는 하나의 독립된 장르로 확립되어 있지 않았으나 근대에 와서 포우나 보들레르, 말라르메, 발레리 등으로 이어져 오면서 하나의 장르를 형성했다.   서정시는 개인적인 체험에 의해서 씌어진다. 개인적인 체험이란 말을 바꿔 말하면 주관적임을 뜻한다. 시인의 눈을 통하여 관찰되는 사물, 시인의 영감에 의하여 감지되는 순간적인 감정이나 생각들이 하나의 모티브가 되어 나타나는 것이 서정시이다.   워즈워드는 그의 『서정시집(抒情詩集)』의 서문에서 '모든 좋은 시는 강한 감정의 자연발생적 표현이다'라고 했다. 감정의 중요성이 시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가를 잘 말해 주는 말이다.      ② 서사시(敍事詩) : 일정한 사건을 서술하는 장편의 서사적 구조의 시. 객관시라고도 함. 유명한 서사시로는 서양의 호머(Homer)의『일리아드』와『오딧세이』등이 있고, 우리나라의 경우 김동환의『국경의 밤』등이 있다. 신들이나 영웅들의 일화를 운문체로 장중하고 웅대하게 서술한 장시(長詩)를 서사시라고 한다.   서정시가 주관적인 데 반해 서사시는 객관적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서사시를 일컬어 희곡적 성질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희곡보다 그 영역이 넓고, 많은 사건을 구성할 수 있으며, 시간상으로는 과거에 속하는 일이나 사건을 다루는 것이 서사시이다. 서사시는 원시적 서사시(primitive epic)와 문학적 서사시(literary epic)로 나누어지기도 한다.   - 원시적 서사시는 민족 서사시, 영웅적 서사시란 말로, 문학적 서사시는 창작적 서사시, 예술적 서사시라 일컫기도 한다. 원시적 서사시는 대개 영웅들의 일화나 전설이 구전되어 오다가 마지막에 하나의 서사시 형태로 굳어 버린 것이 많다. 거의가 민족 집단적인 배경 아래서 만들어졌으므로 작자 미상이 많다. 그 대표적인 것이 호머Homer의 『일리아드』와 『오딧세이』라 하겠다.   이들 서사시는 오래도록 전승되어 오던 신화 속에 나오는 영웅들의 이야기를 모은 것이지, 호머의 작품이라고 보기에는 창작적 독창성이 없다는 게 평론가들의 이야기이다. 중세의 서사시 『니벨룽겐의 노래Das Nibelungen Lied』 『롤랑의 노래LaChanson de Rolund』도 같은 성격의 것이다.   반면 문학적 서사시는 작가가 분명하고, 같은 영웅들의 생애를 읊었다 할지라도 예술 의식이 뚜렷하고 창작성이 깃든 것이라고 하겠다. 밀턴의 『실락원Paradise lost』, 단테의 『신곡Pivina Commedia』, 베르길리우스의 『아에네이스Aeneis』등이 그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서사시의 형성은 12, 13세기에 되었다. 오세문(吳世文)의 『역대가(歷代歌)』, 이규보(李奎報)의 『동명왕(東明王)』, 이승휴(李承休)의 『제왕운기(帝王韻記)』가 모두 이 시대에 창작된 것이다.      ③ 극시(劇詩) : 운문으로 표현된 희곡 형태의 시. 세익스피어의 희곡은 대부분 극시로 씌어졌다. 극시는 서정시·서사시와 더불어 시의 3대 장르의 하나이다. 극시란 사전적 의미로 보면 극의 형식을 따오거나 극적인 수법을 사용하여 만든 시이다. 그러므로 극시는 희곡과 밀접한 관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극시는 무대에서 상연해서 극적 효과를 나타낼 수 있는 것과 그렇지 못하고 글로서 읽기에 적합한 것이 있다.   전자는 시극poetic drama이라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에 비해 글로서 읽기에 적당한 극시를 일명 Closet drama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대개 너무나 정교한 시적 요소가 강해서 무대에서 상연하기에 곤란한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에 와서는 시극이나 극시를 같은 뜻으로 쓰고 있다. 또 우리들에게 극시보다 시극이란 말이 더 자주 쓰이고 친근하다.   극시의 연원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는 극시를 비극·희극·희비극으로 나누고 있다. 그렇다면 고대에 운문으로 쓴 극들이 다 극시라고 할 수 있다. 셰익스피어를 시인이라고 부른 것도 그가 운문으로 희곡을 썼기 때문이다. 문학이 운문과 산문으로 갈라지고, 근대에 와서는 산문 위주의 문학이 됨에 따라 극시도 희곡이란 이름으로 바꿔지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의 시극 운동은 「시극동인회(詩劇同人會)」로부터 시작된다. 1963년에 만들어진 동인 단체로서 박용구(朴容九)·고원(高遠)·장호(章湖)·최재복(崔載福)·김정옥(金正鈺)·홍윤숙(洪允淑) 등이 그 중심이 되었다. 이 단체는 시극의 연구 및 창작 공연을 목적으로 삼고 제1회 공연은 장호의 『바다가 없는 항구』를, 그 밖에 무용시나 무대시 등을 다양하게 선보이기도 했다.   -============================ 8. 마음의 그림자 / 최하림       ============================================ 9. 시베리아 판화(版畵) 1 / 최하림   시베리아 판화(版畵) 1 / 최하림      ====================================  
920    詩작법 옹헤야... 댓글:  조회:4467  추천:0  2016-01-09
□ 자음운과 모음운   - 자음운(子音韻) : 시에서 어떤 부분에 같거나 비슷한 종류의 자음들이 많이 쓰이는 현상을 말한다.   예) '앞 강물 뒷 강물/ 흐르는 물은/ 흘러도 연달아 흐릅디다려.'     (김소월, '가는길'. 'ㄹ'음의 많은 사용)     - 모음운(母音韻) : 같거나 비슷한 종류의 모음들을 어떤 부분에 많이 씀으로써 형성되는 운을 말한다.   예) 나 두 야 간다. / 나의 이 젊은 나이를 / 눈물로야 보낼 거냐. / 나 두 야 가련다.     (박용철, '떠나가는 배'. '나'와 '야'의 반복)      □ 운율의 창조 방법   운율은 결국 동일한 자질(속성)의 소리가 반복적으로 배치될 때 형성된다.   우리 시문학에서 운율을 창조하는 방법에는    ① 음보의 반복    ② 음절 수의 반복    ③ 음운·음절·낱말의 반복    ④ 통사 구조의 반복    ⑤ 시행·연의 반복    ⑥ 음성 상징어의 반복 등이 있다.    1) 음보의 반복에 의한 운율 형성    음보란 호흡 단위로 구분되는 운율의 덩어리를 말하는데, 이 음보의 단위가 모여 행(行)을 이루게 된다.    우리 시가는 주로 3음보와 4음보를 중심으로 한 음보 단위의 반복적 구조를 지니고 있는 경우가 많다.      ① 고려가요 의 경우         가시리 / 가시리 / 잇고 // 바리고 / 가시리 / 잇고 ⇒ ( 3 )음보      ② 가사 의 경우         紅塵에 / 뭇친 분네 / 이내 生涯 / 엇더한고 //         녯사람 / 風流를 / 미찰가 /못 미찰가 ⇒ ( 4 )음보 율격      ③ 김소월의 의 경우         나 보기가 / 역겨워 / 가실 때에는 //         죽어도 / 아니 눈물 / 흘리오리다 ⇒ ( 3 )음보 율격    2) 음절 수의 반복에 의한 운율 형성    고전 시가에서 3·4조 또는 4·4조(시조와 가사)의 음수율을 확인할 수 있다.    고려 속요에서는 3·3·2조의 음수율이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현대시에서는 7·5조의 음수율이 부분적으로 유형화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현재는 우리 시가는 음수율보다는 음보율의 개념으로 파악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① 정철의 의 경우         江湖애 / 病이 깁퍼 // 竹林에 / 누엇더니 ⇒ (3·4)조      ② 고려속요 의 경우         살어리 / 살어리 / 랏다 // 청산에 / 살어리 / 랏다 ⇒ (3·3·2)조      ③ 김동환의 의 경우         산 너머 / 남촌에는 / 누가 살길래 //해마다 / 봄바람이 / 남으로 오네 ⇒ (7·5)조    3) 동일 음운, 동일 음절, 동일 낱말의 반복에 의한 운율 형성    반복되는 위치에 따라 두운, 요운, 각운으로 구분된다.    그러나 우리 시문학에서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동일한 종결 어미를 선택하여 각운의 효과를 보여 주는 경우가 있고,    드물게 두운이 나타나기도 한다.      ① 동일 음운의 반복       좁은 들길에 들장미 열매 붉어 ⇒ 첫음절 종성에서 ('ㄹ'의 반복)      ② 동일 음절의 반복       산은 / 구강산 / 보랏빛 석산 ⇒ ('산'의 반복)      ③ 동일 낱말의 반복       거울속에는소리가 없소 ……//         거울속에도내게귀가있소……//거울속의나는왼손잡이오……//       거울때문에나는거울속의나를만져보지를못하는구료마는……       ⇒ ('거울'이라는 낱말의 반복)    4) 동일 통사 구조의 반복에 의한 운율의 형성    동일한 문장 구조를 반복 배치함으로써 운율적 인상과 의미의 강조 효과를 동시에 노리는 방법이다.      ① 별 하나에 추억과 / 별 하나에 사랑과 / 별 하나에 쓸쓸함과 /       별 하나에 동경과 / 별 하나에 시와 /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윤동주, 에서      ② 해야 / 솟아라       해야 / 솟아라       말갛게 / 씻은 얼굴       고운 / 해야 / 솟아라         박두진, 에서    5) 동일 시행이나 연의 반복에 의한 운율의 형성    동일한 내용의 시행을 반복하거나 동일 내용의 연을 반복하므로써 주제를 강조하는 한편 운율의 효과를 얻을 수 있다.      ①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 정지용, 에서    ⇒ 동일한 시행이 전 5연의 매 연마다 반복된다.      ② 구름에 달 가듯이 / 가는 나그네 ― 박목월, 에서    ⇒ 동일한 연이 2연과 5연에 반복된다.   6) 음성 상징어의 반복에 의한 운율의 형성    우리말에 발달되어 있는 음성 상징어의 활용을 통해서도 운율을 창조할 수 있다.      ① 층암 절벽상의 폭포수는 콸콸, 수정렴 드리운 듯 이 골 물이 수루루루룩, 저 골 물이 솰솰.   에서      ② 금잔디 사이 할미꽃도 피었고, 삐이 삐이 배 뱃종! 뱃종! 멧새들도 우는데       박두진, 에서 -----------------------------------------   7. 빗속으로 / 최하림 빗속으로 / 최하림                      
919    詩작법 지화쟈... 댓글:  조회:3907  추천:0  2016-01-09
시 창작 기초이론 - 3      (2) 내재적 운율(內在律) : 주관적인 성질의 운율이라고 할 수 있음.      - 자유시나 산문시에서 느끼는 내재율   내 마음의 어딘듯 한 편에 끝없는 江물이 흐르네. 돋쳐오르는 아침 날빛이 빤질한 은결을 도오네 가슴엔듯 눈엔듯 또 필줄엔듯 마음이 도론도론 숨어 있는곳 내 마음의 어딘듯 한 편에 끝없는 江물이 흐르네.     이 시에서 시인의 내면적 호흡은 외면적으로 형식화한 것으로 의미를 낳게 하는 음의 연속임을 알 수 있다. 그러한 음은 음악성을 보인 언어 음색미에서 오는 운 글자나 구, 행의 길이에서 오는 율을 형성한다. 또, 현대시의 내재율은 의미율을 형성하여 의미구조의 움직임, 상징, 암시 등 정서의 움직임 등에 의해 결정된다. 그것은 내용 단락을 형성한다. 이런 점에서 현대시는 '우주현상과 인간생활의 생성과정을 강약, 명암, 생장, 소멸의 리듬으로 환원한 것이다.'   바람도 없는 공중에 垂直의 波紋을 내며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은 누구의 발자취입니까. 지리한 장마끝에 서풍에 몰려가는 무서은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하늘은 누구의 얼굴입니까. 꽃도 없는 깊은 나무에 푸른 이끼를 거처서 옛 塔 위의 고요한 하늘을 스치는 알 수 없는 향기는 누구의 입김입니까. 근원은 알지도 못할 곳에서 나서 돌뿌리를 울리고 가늘게 흐르는 작은 시내는 구비구비 누구의 노래입니까. 연꽃같은 발꿈치로 가이 없는 바다를 밟고 옥 같은 손으로 끝없는 하늘을 만지면서 떨어지는 해를 곱게 단장하는 저녁놀은 누구의 詩입니까.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그칠줄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   한용운     형식상 내용단락을 구분지울 수 있는 6연으로 이루어진 전연 자유시이다. 그러나, 이 시처럼 현대시는 시의 운율을 시의 내면기조 속에 내재율화하게 된다.   가난이야 한낱 襤褸에 지나지 않는다. 저 눈부신 햇빛 속에 갈매빛의 등성이를 드러내고 서 있는 여름 山 같은 우리들의 타고난 살결 타고난 마음씨까지야 다 가릴 수 있으랴. 靑山이 그 무릎 아래 芝蘭을 기르듯 우리는 우리 새끼들을 기를 수밖엔 없다. 목숨이 가다가다 농울쳐 휘어드는 午後의 때가 오거든 內外들이여 그대들도 더러는 앉고 더러는 차라리 그 곁에 누워라 지어미는 지애비를 물끄러미 우러러보고 지애비는 지어미의 이마라도 짚어라. 어느 가시덤풀 쑥굴헝에 놓일지라도 우리는 늘 玉돌같이 호젓이 묻혔다고 생각할 일이요 靑苔라도 자욱이 끼일 일인 것이다.   서정주     위에 인용한 시는 우리도 무등산을 닮아 어려움에 굽히지 말고 생명을 지켜 가자는 뛰어난 작품인데, 이 시에는 외형상 리듬이 없는 것 같지만 속살로 흐르는 시인 특유의 맥동과 호흡이 살아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이 곧 자유시에서 필요로 하는 내재율(internal rhythm)인 것이다. 客睡何曾着 秋天不肯明   入簾殘月影 高枕遠江聲   計拙無依食 途窮仗友生   老妻書數紙 應悉未歸情     杜甫   오언율시인 위의 시에서 시인은 偶數句 末尾字인 명, 성, 생, 정을 압운하고 있다. 절구에서는 물론 2행과 4행의 말미에 압운하게 된다.   살아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나와 우리들의 죽음보다도 더한 냉혹하고 절실한 回想과 體驗일지도 모른다.   살아 있는 것이 있다면 여러 차례의 殺戮에 복종한 生命보다도 더한 復讐와 孤獨을 아는 苦惱와 抵抗일지도 모른다.   박인환     박인환의 시에는 현대를 살아가는 인테리의 외로운 육성이 있다. 따라서 시의 리듬도 꾸밈이 없는 소박한 외침으로 되어 있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   산꿩이 알을 품고 뻐꾹이 제철에 울건만   마음은 제고향 지니지 않고 머언 港口로 떠도는 구름.   오늘도 메끝에 홀로 오르니 흰점 꽃이 인정스레 웃고   어린 시절에 불던 풀피리 소리 아니나고 메마른 입술에 쓰디 쓰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하늘만이 높푸르구나.   정지용     자유시 중에서도 김소월을 위시하여 김영랑이라든지 자연파 시인들은 음악적인 리듬을 중시하는 시를 많이 남기고 있다. 여기 인용한 정지용의 『고향』이란 시는 각련이 2행으로 구성되었고 3, 3, 4의 리듬이 변형을 이루면서 음악적인 효과를 나타낸다. 정지용은『백록담』과 같은 산문시를 많이 쓰고 즉물적인 감각을 노래한 시인이지만, 또 한편『고향』과 같은 전통적 서정을 잘 나타내었다.   내 마음 속 우리님의 고운 눈섭을 즈믄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 하늘에다 옮기어 심어 놨더니 동지 섣달 나르는 매서운 새가 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네   서정주     4 4 5의 리듬에 5행시 (혹은 7 5 조 리듬의 변형)   ------------------------------------------- 6. 레바논 감정 / 최정례   레바논 감정 / 최정례                              
918    詩작법 절씨구... 댓글:  조회:4111  추천:0  2016-01-09
  □ 시의 요소      (1) 구성 요소     ① 음악적 요소 : 시의 운율[음성, 리듬(rhythm)]→ 순수시에서 중시     ② 회화적 요소 : 시의 심상[이미지(image)]→ 주지시, 회화시에서 중시     ③ 의미적 요소 : 시의 사상과 정서→ 관념시, 철학시에서 중시     ④ 분위기와 느낌의 요소 : 어조[말투]    ※ 시는 언어 예술이므로 위의 네 가지 요소가 조화를 이루어 표현되어야 훌륭한 시라고 할 수 있다.      (2) 내용 요소     ① 주제(主題) : 시에 담긴 중심 사상     ② 제재(題材) : 가장 중심되는 소재     ③ 소재(素材) : 시의 내용을 이루는 중요한 재료     ④ 이미지(心象) : 시를 읽거나 들을때, 마음 속에 떠오르는 감각적 인상      (3) 형식 요소     ① 시어(詩語) : 시인의 사상 감정을 표출한 함축적 의미의 언어     ② 시행(詩行) : 시어들이 모여 이루어진 한 줄     ③ 연(聯) : 몇개의 시행이 모여 이루어진 의미와 이미지의 결합 단위     ④ 운율 : 시를 읽을 때 느낄 수 있는 소리의 가락    □ 시의 운율   1) 운 율의 정의   (1) 운(韻) : 같거나 비슷한 음이 규칙적으로 시행이나 연의 일정한 위치에서 반복되는 것이다.     (2) 율격(律格) : 수량적, 기계적으로 반복되는 소리의 양식이다.    ① 음절 율격 : 시의 행을 구성하는 말이 일정한 음절의 수에 따라 선택, 정돈된 것이다.                   남유럽계의 시와 일본 시가 여기에 해당한다.    ② 소리값 율격 : 각 음절의 고저 장단을 변화 있게 조직한 단위들로 이루어진 것이다.    ③ 강세 율격 : 시행이 일정 수의 강세를 담고 있는 율격이다.    ④ 강세 음절 율격 : 강세와 음절의 수를 모두 일정하게 한 율격이다. 운율의 개념   시에 있어서의 소리의 효과에 관한 일체의 현상을 총칭하여 운율이라 한다. 운율은 리듬보다는 좀 넓은 개념이다.   운율은 '운(韻)'과 '율(律)'의 합성어로서, '운'은 특정한 위치에 동일한 음운이 반복되는 현상을 가리키고, '율'은 동일한 소리 덩어리가 일정하게 반복되는 현상을 가리킨다. 즉 '운'은 같은 소리, 또는 비슷한 소리의 반복을, '율'은 소리의 고저, 장단, 강약 등의 주기성을 기리키는 개념이다.   우리 시가의 음악성은 대부분 운보다는 율의 요소에 의해 이루어진다. 운율은 소리의 반복 현상과 관계가 깊다.       2) 운율의 구성 요소    (1) 동음 반복 : 특정 음운이 반복하여 나타나면서 운율을 이룸을 말한다.     ① 어두 반복(語頭反復) : '바다 벼랑의 벚꽃놀이'     ② 모음 반복(母音反復) : '서로 도와 꿈 동산'     ③ 자음 반복(子音反復) : '웃음 웃는 사슴의 음률'      (2) 음수 반복 : 일정한 음절 수가 운율 효과를 가져온다. 그대가 바람으로 생겨났으면 (7 5) 달 돋는 개여울의 빈 들 속에서 (7 5) 내 옷의 앞자락을 불기나 하지 (7 5)        (3) 의성어(擬聲語), 의태어(擬態語) : 어떤 음이 감각적 반응을 일으켜       표현 가치를 지니면서 음성 상징적 기능을 하는 것이다.   살살이 퍼져 내린 곧은 선이 스스로 돌아 곡선을 이루는 곳 열 두 폭 기인 치마가 사르르 물결을 친다.       (4) 통사 구조 : 구절 또는 행을 이루는 통사 구조가 같을 경우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5) 주제와 의미 : 시인이 작품에서 나타내고자 하는 감동과 사연 등에 의해 운율이 형성된다.   기름진 냉이꽃 향기로운 언덕, 여기 푸른 잔디밭에 누워서, 철이야, 너는, 너는 늴늴늴 가락 맞춰 풀피리나 불고, 나는, 나는 두둥실 두둥실 붕새춤 추며, 막새와 돌이와 복술이랑 함께, 우리, 우리, 옛날을, 옛날을 뒹굴어 보자.     위의 요소들은 한 편의 시에서 독립적으로 가능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 구조와 주제를 향하여 상보적(相補的)인 관계에 놓인다. 물론, 특정 요소가 강하게 드러날 수는 있다.    3) 운율의 효과    (1) 소리의 규칙적 질서에 의하여 쾌감을 주고, 인상을 깊게 해 준다.      (2) 평상시의 말에 대한 우리의 습관적인 무감각에서 우리를 일깨우며,       한편 일정한 요소의 반복에 의해 우리의 의식 상태를 가라앉게 하기도 한다.      (3) 한편의 글이 생경한 말의 한 토막이 아니라 재정리된 것,       즉 예술이라는 각성을 일으켜 시와 생활을 구분하게 한다.      (4) 작품의 주제와 연결되면서 독특한 어조를 이룬다. 운율의 효과 소리의 반복은 인간의 감정을 효과적으로 표현하는 한 방법이 된다. 시위 군중이 구호를 외칠 때, 또는 목사가 기도를 하거나 승려가 염불을 할 때 소리의 반복 현상을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은 소리의 반복이 듣는 사람에게 상당한 심리적 효과를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시의 운율 역시 소리의 규칙적 반복을 바탕으로 성립되는 것으로 그 규칙성은 인간에게 안정감과 미적 쾌감을 가져다 줄 수 있다. 어머니가 불러 주는 자장가의 규칙적 반복성 속에서 어린아이가 잠드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시의 운율은 독자에게 미적 쾌감을 가져다 줄 수 있으며, 시적 인상을 더욱 깊게 할뿐만 아니라 독특한 어조의 형성에 기여하기도 한다.      4) 운율의 종류    (1) 외형적 운율(外形律) : 객관적 성질의 운율이라고도 함.                             형식, 문체, 형태 등의 측면으로 노출된 운율임.       ① 음위율(音位律) : 압운(押韻), 일정한 위치에 운을 일치 시키는 것.      ㉠ 두운(頭韻) : 각 시행의 머리 운을 일치시키는 방법      ㉡ 요운(腰韻) : 각 시행의 가운데 운을 일치시키는 방법      ㉢ 각운(脚韻) : 각 시행의 마지막 운을 일치시키는 방법       ② 음성률(音聲律) : 음성의 강약 고저 장단 음질 등에 의해서 규칙적 반복의 리듬을 형성 하는것     ※ 음성률은 액센트가 있는 언어(알파벳), 평 상 거 입(平上去入)등의 고저를        가진 언어(중국어)에서 가능하다. 한국어 에서는 어려움.       ③ 음수율(音數律) : 일정한 음수 단위를 규칙적으로 반복함으로 말미암아 생기는 운율.        우리 시에서는 '3·4조, 4·4조, 3·3·2조, 3·3·4조, 7·5조' 등의 음수율이 나타난다.        그러나 기본 음수율이 그대로 지켜지는 경우보다 그것을 근간으로 한 변조의 형태를 보이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불안정한 음절 본위의 음수율보다 호흡 단위의 음보율을 우리 시 운율의 근간으로 인식하자는 주장이 널리 확산되었다.      ④ 음보율(音步律) : 규칙적인 리듬에서의 최소 단위. - 음보란 음절 및 각 음절이 지니는 속성이 실현되면서 이루어지는 운율의 한 덩어리를 말함.   이 음보가 모여 율격의 기본 단위라고 할 수 있는 행(行)을 이루며, 이 행에 의한 음보의 규칙적 배열 형식을 음보격(音步格)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의 시가는 크게 3음보율과 4음보율로 나뉘며 어린 아이들의 동요와 같은 형태에서는 2음보율이 나타나기도 한다.   - 3음보율은 고려 속요와 경기체가에서, - 4음보율은 시조와 가사에서 대표적으로 나타나며, - 판소리 창에서도 4음보 율격을 확인할 수 있다. - 고전 시가의 3음보율은 현대시에서 김소월, 김억, 김동환 등에 의해   민요조의 율격으로 계승되었다.    ※ 평시조는 각 장 4음보로, 전체 12음보임.     행여나  다칠세라  너를 안고  줄 고르면 (제1음보) (제2음보)  (제3음보)  (제4음보)      ⑤ 반복과 병렬(竝列)     ㉠ 반복 : 같은 단어나 구절이나 행을 되풀이 하여 운율을 형성하는 것     ㉡ 병렬 : 속성이 비슷하거나 상대적인 행 또는 절들을 대비시키는 것      ⑥ 성유법 시자법과 활음조     ㉠ 성유법(聲喩法) 시자법(示姿法) : 의성어, 의태어 등을 이용한 방법     ㉡ 활음조(滑音調) : 목청이 울려지면서 나오는 부드러운 소리를 이용한 방법 → 유포니(euphony)현상, 반대는 카코포니(cacophony)현상임. ---------------------------------------------------------------------------   5.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 / 김선우                    
917    詩작법 얼씨구... 댓글:  조회:4323  추천:0  2016-01-09
시 창작 기초 이론     1. 시의 정의 시의 어원 같은 것은 우리가 쉽게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시란 무엇인가'라는 정의를 내리기는 그렇게 쉽지 않다.   엘리어트의 '시에 대한 정의의 역사는 오류의 역사'라는 말이 이를 잘 대변해 준다. 이 말은 시대에 따라서, 시인에 따라서, 시의 종류에 따라서 시를 보는 안목이 모두 다름을 말해 준다. 그러므로 지극히 상식적인 시에 대한 정의를 내릴 수밖에 없다.   "시는 인간의 사상과 정서를 운율적인 언어로 압축하여 표현한 언어 예술이다"(운문 문학) "시란 인간의 사상과 정서를 유기적 구조를 지닌 운율적 언어로 형상화한 운문문학의 한 갈래이다."   1) 동양의 시관 동양 일원에서 공통적으로 쓰이는 '詩'라는 한자의 구조를 보면 '言'과 '寺'의 합자(合字)임을 알 수 있다. '言'은 모호한 소리인 '음(音)'이나 말을 나타내는 '담(談)'이 아닌 '분명하고 음조가 고른 말'을 뜻한다.   '寺'는 '持'와 '志'의 뜻을 가지고 있다. '持'란 손을 움직여 일하는 것을 말하며 '志'는 '우리의 마음이 어떤 대상을 향해서 곧게 나감'을 일컫는다.   그러므로 시라는 말 속에는 '손을 움직여 일한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어서 동양의 시에도 서구와 같은 창작이나 행동의 뜻이 담긴 동일성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 詩三百 一言而蔽之曰思無邪(시 3백 수는 한마디로 생각함에 사악함이 없는 것이다.)→孔子   (2) 詩言志(시는 뜻을 말로 나타낸 것)→書經      ※ 동양적 시관의 본질     - 흔히 '사무사(思無邪)'를 교훈적인 입장의 표명으로 보고, 동양 시관의 본질을       여기에 한정시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공자가 편찬한 시경이 서정시로만 이루어져 있는 점이라든지,       주희가 시를 '좋은 소리와 마디가 있는 말에 의한 성정의 자연스런 발로'라고       본 점을 고려할 때, 서정적인 면이 결코 부차적인 사항이 아님을 알 수 있다.     2) 서양의 시관   (1) 시는 운율적 언어에 의한 모방이다.→Aristoteles   (2) 시는 힘찬 감정이 자유롭게 분출된 것이다.→ W. Wordsworth   (3) 시는 체험이다.→ R.M.Rilke   (4) 시는 미의 운율적 창조이다.→ E.A.Poe   (5) 시는 감정의 표출이 아니라 감정으로부터의 도피이고,       개성의 표현이 아니라 개성으로부터의 도피이다.→ T.S.Eliot   (6) 좋은 시는 내포와 외연의 가장 먼 양극에서 의미를 통일한 것이다.→ Allen Tate   (7) 시는 영원한 진실속에 표현된 삶의 이미지이다.→ P.B.Shelly   (8) 시는 기본적으로 인생에 대한 비평이다.→ Matthew Arnold      ※ 서양 시관의 변화 과정      - 아리스토넬레스의 시에 대한 정의는 희곡과 서사시를 염두에 둔 이야기 문학이었다.        이러한 모방론의 전통은 18세기까지 이어져, 서정시를 시문학 전체에 있어서        하급의 장르로 생각했었다.      - 19세기 이후 표현론이 대두하면서 비로소 시가 시인이 도달한 놀라운        정신세계를 보여줌으로써, 독자를 황홀하게 하고,        깊이 감동시키며, 심오한 즐거움을 준다는 주장을 하게 되었다.   3) 현대의 시관    ※ 일반적으로, 고양된 시인의 정서에 의해 독자에게 감흥을 줌으로써       사람의 윤리 의식의 밑바탕을 튼튼히 해 준다는 표현론적 효용론에 선다.    ※ 시를 시인의 내부에 있는 본질과 연결시켜, 구체적인 작품보다       어떤 정신이나 성질로 보는 태도가 있다.       □ 시의 정의 자신의 정신생활이나 자연, 사회의 여러 현상에서 느낀 감동 및 생각을 운율을 지닌 간결한 언어로 나타낸 문학 형태.   한국어로 보통 시라고 할 때에는 그 형식적 측면을 주로 가리켜 문학의 한 장르로서의 시작품(詩作品:poem)을 말할 경우와, 그 작품이 주는 예술적 감동의 내실(內實)이라고 할 수 있는 시정(詩情) 내지 시적 요소(詩的要素:poetry)를 말할 경우가 있다.   전자는 일정한 형식에 의하여 통합된 언어의 울림·리듬·하모니 등의 음악적 요소와 언어에 의한 이미지·시각(視覺) 등 회화적 요소에 의해 독자의 감각이나 감정에 호소하고 또는 상상력을 자극하여 깊은 감명을 던져 주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문학작품의 일종으로, 거기에서는 언어의 정동적(情動的)인 기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언어의 배열과 구성(構成)이 요구된다.   후자에 관해서는 시작품뿐만 아니라 소설·희곡 등의 문학작품으로부터 미술·음악·영화·건축 등의 예술작품, 더 넓혀서 자연이나 인사(人事)·사회현상 속까지 그 존재를 인정하는 일이 가능하다.   시는 크게 서정시(敍情詩)·서사시(敍事詩)·극시(劇詩)의 세 가지로 구별한다.   서정시는 개인의 내적 감정을 토로하는 것으로 근대시의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영어의 lyric poem이나 프랑스어의 po럐e lyrique는 본시 lyre(七絃琴)에 맞추어 노래 불렀던 데서 온 호칭이다.   서사시(epic poem)는 민족·국가의 역사나 영웅의 사적(事蹟)과 사건을 따라가며 소설적으로 기술하는 것인데 그리스의 《일리아스》 《오디세이아》, 프랑스의 《롤랑의 노래》 등이 이에 해당한다. 극시(dramatic poem)는 극형식을 취한 운문(韻文) 내지 운문에 의한 극을 말하는데 셰익스피어, 코르네유, 라신, 괴테 등의 희곡이 이에 해당한다.   시에는 그 밖에 흔히 행(行)을 나눠서 쓰는 시와 대조되는 것으로 산문의 형식을 취하면서 그 속에 시적 감명(詩的感銘)을 담은 산문시(prose poem)가 있는데 보들레르의 《파리의 우울》, 로트레아몽의 《마르도롤의 노래》, 투르게네프의 《산문시》 등이 유명하다. 또 정해진 규칙에 따라 시어를 배열·구성하는 정형시(定型詩)가 있는가 하면 그와 같은 형식적인 규칙을 무시하는 자유시가 있으며 또한 그 내용에 따라 생활시(生活詩)·사상시(思想詩)·연애시(戀愛詩)·종교시(宗敎詩)·풍자시(諷刺詩)·전쟁시(戰爭詩) 등의 호칭도 쓰여지고 있다.       □ 시의 특성    (1) 시는 대표적인 언어 예술이다.    (2) 시에는 운율이 있다.    (3) 시는 사상과 정서를 표현한 창작 문학이다.    (4) 시는 압축된 형식미를 갖추고 있다.    (5) 시에서는 심상(image)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6) 시는 시인의 은밀한 독백으로 '엿듣는 문학'이다.    (7) 시는 작품의 문맥에 의해 그 의미가 파악되는, 언어의 내포적 기능에 의존한다.    (8) 시는 심상, 비유, 상징 등에 형상화된다.    (9) 시는 정서를 환기시키기 위해 언어의 음악성을 활용한다.     ※ 시의 특성 : 함축성, 암시성, 음악성, 사상성, 정서성, 긴밀성, 집약성, 주관성, 회화성(영상성)       □ 시와 산문의 차이점 시와 산문과의 차이를 말할 때의 시란, 일정한 울림·리듬·하모니를 가진 운문(韻文)을 말하는데 구체적으로는 시작품을 성립시키는 각 시구(詩句)를 가리킨다.   프랑스 시인 발레리는 시와 산문과의 차이를 말함에 있어서 전자를 무용(舞踊)에, 후자를 보행(步行)에 비유하고, 산문은 보행과 같이 명확한 하나의 대상을 가지고 어떤 대상을 향한 한 행위로서 그 대상에 도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데 반해, 시는 무용과 같이 그것도 행위의 한 체계이기는 하지만 도리어 그 행위 자체를 궁극적인 목적으로 한다고 말하였다.   즉 시는 무용과 같이 어딘가를 목표로 하여 가는 것이 아니라 굳이 말한다면 하나의 황홀한 상태, 생명의 충일감(充溢感)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다만 보행과 무용의 공통점은 그때 쓰이는 것이 육체(肉體)라는 점인데, 이것을 시와 산문에 적용시켜 보면 양자는 다같이 언어(言語)를 사용한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즉 시에 쓰이는 언어, 시적 언어(詩的言語)는 산문에 쓰이는 언어가 이른바 의미기호(意味記號)로서의 언어, 전달을 첫째 목표로 하고 있는 실용적인 언어인 데 비해, 독자 속에 있는 어떤 감동 상태를 불러일으키기 위해 쓰이는 언어, 즉 감화적·정동적인 기능을 달성하기 위한 언어인 것이다.   물론 현실적으로 우리가 대하고 있는 시에 쓰이는 언어는 반드시 의미 전달의 기능을 완전히 배제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시적 언어의 본질은 그런 데에 있으며 이런 사고(思考)를 밀고 나갈 때 소위 순수시의 개념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시는 어떤 경로를 거쳐 발생하며 또 발전해 왔을까. 어린이가 내적 감정(內的感情)의 솟아오름을 육체적으로 나타내려 할 때, 표정과 함께 몸까지 떨며 그리고 거의 무의식적으로 노래를 입속으로 흥얼거리는 수가 있다.   미개인(未開人)에게 있어서도 이와 같아서 희로애락의 감정은 춤이나 소박한 노래라는 형태로 나타나는데 오늘날의 춤의 기원과 더불어 시의 기원을 거기서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이런 단계에서 한걸음 나아가 생산 노동에 수반하여 그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집단적으로 불리어진 노동가요(勞動歌謠)나 언어의 초자연적(超自然的)인 힘을 믿는 고대 신앙과 결부되어 욕망이나 기대의 실현을 바라는 주문(呪文)으로서의 기도가(祈禱歌)의 단계를 지나 그 자체로서 양식을 완성하려는 자각이 생김으로써 문학으로서의 시가 탄생되는 것이다.   이 과정은 또한 고대 사람들이 포획물(捕獲物)인 동물을 한 마리라도 더 잡기를 기원하며 그린 동굴벽화(洞窟壁畵)에서 오늘날의 미술이 탄생한 과정과도 걸 맞는 것이다.   동시에 시의 이와 같은 발생의 역사는 오늘날의 시의 본질적 성격까지도 얼마만큼 규정하고 있고, 훌륭한 시는 인간의 일상생활에 있어서 각성된 의식 깊숙한 곳에 숨어 있는, 사회적으로 억압된 충동이나 소망을 표면에 끌어내어 일종의 심리적 억압에서 해방시키는 작용이 인정된다. 반복이나 압운(押韻)·직유(直喩)·암유(暗喩)·우유(寓喩) 등, 소위 시의 기법(技法)도 독자의 의식세계를 흔들어, 잠자고 있는 기억이나 소망을 불러 깨우기 위한 수단이라고 해도 좋다. -------------------------------------------------- 4. 낮에는 햇빛이 낯설다 / 이원           낮에는 햇빛이 낯설다 이 원 몸 낮에는 햇빛이 낯설고 밤에는 불빛이 낯설다 낮에는 햇빛을 잘 게구겨 쓰레기통에 버린다 밤에는 불빛을 베란다 밖으로 퍼낸 다 무턱대고 꾸역꾸역 삼켜버리는 날도 있다 그림자 가죽만 벗겨낼 수도 있고 수박처럼 쪼갤 수도 있고 아예 몸과 접속하는 코드를 잡아뺄 수도 있다 영혼 하늘 속에 책이 펄쳐져 있다 여러 날 오른쪽 페이지의 끝이 접 혀져 있다 여러 번 읽었다고 믿고 있지만 처음부터 누군가가 대신 읽어주었을 수도 있다 손과 발 또는 심장 수도꼭지를 틀자 비명이 우르르 쏟아진다 비명 속에서 천천히 길이 씻긴다               출생 : 1968년 경기도 화성 학력 : 서울예전 문예창작과 졸업, 동국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석사 등단 : 1992년『세계의 문학』가을호『시간과 비닐 봉지』外 3편 수상 : 현대시학 작품상(2002), 현대시 작품상(2005) 시집 :『그들이 지구를 지배했을 때』(문학과지성사, 1996) 『야후!의 강물에 천 개의 달이 뜬다』(문학과지성사, 2001) 『세상에서 가장 가벼운 오토바이』(문학과지성사, 2007)       이원 시인은 1968년 경기도 화성에서 출생하여 서울에서 자랐으며, 서울예술전문대학 문예창작과를 졸업 후 1992년 계간「세계의 문학」에「시간과 비닐 봉지」외 3편을 발표하면서 등단하였다.   이 시인은 인터넷으로 대변되는 디지털 문화 속에 잠식해버린 현대인의 삶에 제기되는 존재에 관한 질문을 강렬하고 날카로운 언어로 쉴 새 없이 쏟아낸다. 그녀의 시적 상상력은 자연에 대한 것을 철저히 거부하고, 인공적인 산물에만 끈질기게 연결되어 있다. 인간도 예외는 아니어서 결국 사이보그에 까지 이르고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를 산출한다.   또한, 현대인들이 뿌리 내리고 살아가는 전자사막 속의 사람 냄새와 근원을 향해 치닫는 사물들의 질주, 그리고 그것이 지나가면서 길게 드리우는 삶의 그림자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게 해준다. 지상의 텅 빈 공간에서 존재의 의미를 물으면서 시작했던 시인의 시는 달리고 질주하며 허공까지 닿았다가 다시 지상으로 되돌아오고 있다.      
916    詩작법 찌찌찌... 댓글:  조회:5288  추천:0  2016-01-09
1. 시의 개념과 특성   (1) 시의 개념 인간의 사상과 정서를 함축적이고 운율적인 언어로 형상화한 문학의 한 갈래   (2) 시의 특성 1) 절제 된 언어와 압축된 형태로 표현 된다 2) 내면화 된 세계의 주관적이고 은밀한 토로(吐露)이다. 3) 언어가 지니는 소리(운율)를 많이 활용한다. 4) 시적 자아(서정적 자아)라는 대리인에 의해 전달된다.   (3) 시의 구성 요소 1) 의미적 요소(생각) : 시어에 담겨있는 뜻→주제 2) 음악적 요소(소리) : 반복되는 소리의 질서에 의해 창출되는 운율 감→운율 3) 회화적 요소(심상) : 대상의 묘사나 비유에 의해 떠오르는 구체적인 모습→형상 4) 정서적 요소(감정) : 시어에 의해 환기되는 심리 및 독특한 의미 세계를 구축한다.     2. 시의 언어     (1) 시어의 특성 1) 시는 언어예술이다 : 시는 언어의 의미와 소리의 융합으로 이루어진 언어 예술이다. 2) 외연적(外延的) 의미와 내포적(內包的) 의미 ☞ 외연적 의미 : 언어의 과학적 쓰임. 사전적이고 직접적이며 객관적인 의미 ⇒ 지시적 의미 ☞ 내포적 의미 : 언어의 정서적 쓰임. 암시적이고 간접적이며 주관적인 의미 ⇒ 함축적 의미 3) 사이비 진술 : 과학적 진실이나 상식에 어긋나면서도 시적 진실을 표현하는 진술방식 ☞ 사람이 술을 먹는다. (과학적 진술)     ▶ 술이 사람을 먹는다. (사이비 진술) 4) 시적자유 : 문법 파괴, 신조어 구사, 고어·사투리 사용 등 규범 문법의 제약에서 벗어난 표현 5) 다의성(多意性) : 하나의 시어가 서로 다른 의미로 해석되는 상태로 모호성 또는 애매성 이라    고도 하며, 이는 시어의 함축적 기능에 연유한다. ☞ 산(山)에/산(山)에/피는 꽃은/저만치 혼자서 피어있네. (김소월, '산유화')   (2) 시어와 기법 1) 반어(反語) : 표현된 것과 표현의 의도가 상반된 진술 방식. 따라서 반어적 표현에는 '말한     것'과 '의미한 것' 사이의 긴장, 대조, 혹은 갈등이 담겨있다. ☞ 긴장(tension) : 시에서 대립되는 요소의 충돌 및 공존에서 오는 관계. 또는 여기에서 느끼는     독자의 정서적 충격     ▶ 나 보기가 역겨워/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김소월, '진달래꽃')        → 님을 보내야 하는 극한 슬픔을 반어적으로 표현하였다. 2) 역설(逆說) : 겉으로 보면 명백히 모순되고, 이치에 닿지 않는 뜻한 표현 속에 어떤 진실을     담고 있는 진술 방식이다. ☞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한용운, '님의 침묵')     ▶ 떠나간 님이 언젠가는 다시 돌아오리라는 희망을 역설적으로 표현 3) 풍자(諷刺) : 웃음을 자아내는 가운데 날카로운 비판 의식을 감추어 두는 기법. 주로 인간의     악덕과 어리석음. 사회 부조리를 비판하려는 목적으로 쓰인다. ☞ 냇가의 해오라비 므스 일 셔잇는다     무심(無心)한 져 고기를 여어(엿보아) 므슴 하려는다.     두어라 한 물에 잇거니 니저신들 엇더리. (신흠의 시조)     ▶ 겉으로 보기에는 한가로운 이의 고기잡이 정도로 생각할 수 있으나, 실은 조선 왕조의         고질적인 당파 싸움을 꼬집은 풍자시이다. 4) 언어유희(言語遊戱) : 다른 의미를 암시하기 위한 말이나, 동음이의어(同音異議語)를 해학적     으로 사용하는 것. 즉, 말이나 문자를 소재로 한 말장난을 뜻한다. ☞ 치정(痴情)같은 정치가 상식이 병인 양하여∼현금이 실현하는 현실 앞에서 다달은 낭떠러지     ▶ 음절 도치에 의한 언어유희로 재미와 함께 긴장감을 준다. ☞ 청산리 벽계수(碧溪水)야 수이 감을 자랑마라.     일도(一到) 창해(滄海)하면 도라오기 어려오니,     명월(明月)이 만공산(滿空山)하니 쉬어간들 엇더리. (황진이 시조)     ▶ 동음이의어에 의한 언어유희. '벽계수'는 푸른 시냇물이란 뜻이자, 당시 종실의 한         사람의 이름이고, '명월'은 밝은 달이자 황진이의 기명(妓名)이다.     3. 이미지   (1) 이미지의 개념 감각 기관에 의해 떠오르는 대상에 대한 영상이나 대상을 감각적으로 인식하도록 자극하는 말이다. 즉 감각을 재현(再現)하는 감각적인 표현을 일컫는다. 심상(心象)·형상(形象)이라고도 한다. ☞ 그는 용감하게 싸웠다. (추상적 의미) ⇒ 그는 성난 사자처럼 싸웠다. (이미지)   (2) 이미지의 기능 1) 의미를 전달하는 기능을 갖는다. ☞ 김수영의 '풀'이란 시에서 '풀'은 단순한 식물로서의 '풀'이 아닌 저항적인 인간, 민중의     상징으로 볼 수 있다. 이처럼 이미지는 의미를 함축적으로 표현해 준다. 2) 대상을 구체적이고 생생하게 표현한다. ☞ "그 녀석 눈이 참 곱군."과 같은 개념적 서술보다는 "그 녀석 눈이 샛별 같아."와 같이 구체적     으로 비유함으로써 눈의 빛남을 생생하게 느끼게 한다. 3) 보통의 언어로써 풀이하기 어려운 마음의 상태를 효과적으로 나타낸다. ☞ 김동명의 이란 시에서는 '나'의 마음을 '호수'라는 비유적 이미지를 통해 나타내고     있다. '그대'가 노를 저어 올 수도 있고, '나'는 '그대'의 뱃전에 부서질 수 있는 '나'의     내면상태가 효과적으로 드러난다.   (3) 이미지의 표현 방법 1) 묘사적 심상 : 대상을 묘사를 통해 제시되는 심상 ☞ 송홧가루 날리는/외딴 봉우리.//윤사월 해 길다/꾀꼬리 울면//산지기 외딴 집/눈 먼 처녀사     //문설주에 귀 대이고/엿듣고 있다. (박목월. '윤사월')     ▶ 한 폭의 그림을 떠올릴 수 있도록 외딴 봉우리를 묘사하고 있다. 2) 비유적 심상 : 대상을 매개물에 비겨서 표현하는 심상 ☞ 이는 먼/해와 달의 속삭임/비밀한 울음    (박두진, '꽃')     ▶ 꽃을 '속삭임', '울음'에 비유하고 있다.     (4) 이미지의 갈래 1) 시각적 이미지 : 색채, 움직임을 제시한 이미지 ☞ 지나가던 구름이 하나 새빨간 노을에 젖어 있었다 (김광균, '외인촌') 2) 청각적 이미지 : 소리, 음성, 음향 등을 제시한 이미지 ☞ 접동/접동/아우래비 접동 (김소월 '접동새') 3) 후각적 이미지 : 냄새, 향기 등을 제시한 이미지 ☞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이육사 '광야') 4) 미각적 이미지 : 음식의 맛, 맛을 보는 행위 등을 제시한 이미지 ☞ 집집 끼니마다 봄을 씹고 사는 마을 (김상옥, '사향') 5) 촉각적 이미지 : 만짐에 의한 것으로 차가움과 뜨거움, 피부결 등으로 세분됨 ☞ 젊은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 (김종길, '성탄제') 6) 공감각(共感覺) 이미지 : 하나의 감각이 다른 감각으로 전이(轉移)되는 것 ☞ 분수처럼 흩어지는 푸른 종소리 → 청각(종소리)의 시각화(푸른) (김광균 '와사등)     4. 비유와 상징   (1) 개념 비유란 어떤 사물이나 관념을 그것과 유사한 다른 사물이나 관념과 연결시켜, 표현하고자 하는 내용을 보다 생동감 있고 효과적으로 제시하는 방법이다.  비유는 두 사물의 유사점에 근거하여 (유추관계), 원관념과 보조관념과의 결합으로 이루어진다.   (2) 종류 1) 직유(直喩 ) : '∼같은, ∼처럼' 등을 사용하여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에 다른 대상을 직접 연결하여 표현하는 방법 ☞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풀 아래 웃음 짓는 샘물같이 (김영랑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 같이') 2) 은유(隱喩) : 'A는 B이다'식으로 원관념과 보조 관념을 연결하는 표현 방법 ☞ 내 마음은 호수요, 그대 노 저오 오오. (김동명 '내 마음')     ▶ 사은유(死隱喩) : 처음 비유되었을 때는 참신했지만 오랜 세월동안에 그 참신성을 잃은 것,        → 인생은 일장춘몽, 심금(心琴)을 울리다. 십자가를 지다. 3) 의인화 : 인간이 아닌 것을 인간처럼 생각하여 표현하는 방법 ☞ 소낙비를 그리는 너는 정열의 여인/나는 샘물을 길어 네 발등에 붓는다. (김동명 '파초') 4) 제유(提喩) : 어떤 사물의 일부분으로 전체를 대표하는 방법 ☞ 괭이로 파고/호미론 김을 매지요 (괭이, 호미⇒ 농사일 전체) 5) 환유(換喩) : 어떤 사물을 그와 관련 있는 다른 사물로 바꾸어 표현하거나, 그 성질로 사물을    표현하는 방법 ☞ 관이 향기로운 너는/무척 높은 족속이었나 보다. (관⇒뿔) (노천명 '사슴')     ▶ 제유와 환유를 통틀어 대유라 한다.   (3) 상징(象徵) 1) 개념 o 상징은 어떤 구체적 사물이 또 다른 영역의 의미를 암시하거나 환기시켜 주는 것을 뜻한다. o 원관념과 보조 관념의 관계에서 보면, 원관념은 배제되고 보조 관념이 독립되어 함축적 의미와    암시적 기능을 갖는다. 2) 종류 ① 개인적 상징 : 시인 자신이 어떤 한 작품이나 또는 여러 작품에서 특수한 의미로 즐겨 사용     하는 상징. 의미의 폭이 넓고 암시적임. ☞ 아, 아버지가 눈 속을 헤치고 따오신/그 붉은 산수유 열매 (김종길 '성탄제')     ▶ '붉은 산수유 열매'는 아버지의 사랑 ☞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서정주 '국화 옆에서')     ▶ 국화(꽃)'는 시련을 겪은 뒤에 얻어진 원숙미 ② 관습적 상징 : 관례적이고 공공성을 띠어 타인과 공유할 수 있는 보편적 상징 ☞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처럼/십자가(十字架)가 허락된다면 (윤동주 '십자가')     ▶ '십자가(十字架)'는 예수의 희생으로 인해 '속죄양의 의식'이란 공공성을 띤다.       5. 운율(韻律)   (1) 운율 (소리의 일정한 규칙적 질서, 운(韻)과 율(律)로 구분된다.) 1) 운(韻) : 동일하거나 유사한 자음이나 모음의 규칙적 반복⇒두운·요운·각운 등, 한시의 압운법 ☞ 물 구슬의 봄 새벽 아득한 길, 하늘이며 들 사이에 넓은 숲, 젖은 향기 불긋한 잎 위의 길 2) 율(律) : 음의 고저, 장단, 강약 등의 주기적 반복⇒영시의 강약 율, 한시의 성조 율 ☞ 한국 시가의 율격 기준은 시간적 등장성(等長性)에 기초한 음보 율(音步律)이 중심을 이룬다.   (2) 운율의 요소 1) 동일 음운의 반복 ① 자음 반복 ☞ 갈래갈래 갈린 길/길이라도 (김소월 '길')⇒'ㄱ'의 반복 ☞ 얄리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 (청산별곡)⇒'ㄹ'의 반복 ☞ 푸름 속에 펄럭이는 피깃발의 외침 (박두진 '3월 1일의 하늘')⇒'ㅍ'의 반복 ② 모음 반복 ☞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 (김소월 '진달래꽃')⇒'ㅕ, ㅏ'의 반복 ☞ 오늘 하루 고요히 고운 봄길 위에 (김영랑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ㅗ'의 반복 2) 동일 음절의 반복 ☞ 일편단심(一片丹心) 굳은 마음/일부종사(一夫從事) 뜻이오니     일개 형벌 치옵신들/일 년인 다 못 가서/일각인들 변하리까? (춘향전)     ▶일종의 두운(頭韻) 3) 일정한 음절수의 반복     음수율이라고 하는 것으로 한시(5언, 7언), 우리의 시조, 가사, 창가의 3·4조, 4·4조, 7·5조 등     이 이에 속하나, 우리 시의 경우 음보 율에 의한 설명이 바람직하다. ☞ 산 너머/남촌에는/누가 살길래,//     해마다/봄바람이/남으로 오네.// (김동환 '산너머 남촌에는') 4) 일정한 음보의 반복 ☞     ▶ 날좀 보소/날좀 보소/날좀 보소//         동지 섣달/꽃 본 듯이/날좀 보소//         아리 아리랑/쓰리 쓰리랑/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고개로/날/넘겨 주소.// (민요 '밀양 아리랑') ☞     ▶ 데 가는/뎌 각시/본 듯도/한뎌이고,//         天텬上샹/白백玉옥京경을 엇디하야/離니別별하고//         해 다 뎌/져믄 날의/눌을 보라/가시는고// (정철 '속미인곡') ☞ 음보율 : 소리의 반복과 시간의 등장성(等長性)에 근거한 운율     ▶ 3음보 : 고려 속요, 민요. ⇒ 격동감, 서민적.     ▶ 4음보 : 시조, 가사, 민요. ⇒ 안정감, 귀족적. 5) 통사 구조의 반복 ☞ 우리들의 조국은 우리들의 조국     우리들의 겨레는 우리들의 겨레 (박두진 '3월 1일의 하늘')     ▶ 주어(관형어+체언)+서술어(관형어+체언) ☞ 살어리 살어리랏다, 청산에 살어리랏다.     멀위랑 다래랑 먹고 청산에 살어리랏다. (청산별곡) ☞ 나는 왕이로소이다. 나는 왕이로소이다.     어머님의 가장 어여쁜 아들, 나는 왕이로소이다. (홍사용 '나는 왕이로소이다')   (3) 운율의 종류 1) 외형률 : 반복의 양식이 겉으로 드러난 운율 ① 압운(押韻) : 한시, 영시 등의 두운, 요운, 각운 ② 음수율 : 3(4)·4조, 7·5조 등 ③ 음성률 : 소리의 고저, 장단, 강약 등의 주기적 반복 ☞ 정형시와 외형률 : 외형률이 관습화되었을 때 정형시라 한다. 7·5조 3음보의 시는 개인이     창조한 외형률로 관습화되지 않았으므로 자유시로 본다. 따라서 정형시는 외형률을 가지고     있으나 외형률을 가진 것이 곧 정형시는 아니다. 2) 내재율 : 의미와 융화되어 내밀하게 흐르는 정서적·개성적 운율       6. 어조   (1) 어조의 본질 1) 어조(語調, tone)란 시의 제재나 독자에 대한 서정적 자아의 태도, 곧 개성적인 목소리의     성향을 말한다. 2) 사람마다 음성, 억양, 강세, 음색 등에 의한 어조가 다른 것처럼, 시에 나타나는 작가의      태도 역시 다른 것이다.   (2) 서정적 자아 1) 시 속에 나타난 목소리의 주인공을 '서정적 자아'라고 한다. 2) 시에 나타나는 목소리의 주인공은 '탈(persona)'로서, 시인과는 구별된다. 시인의 제 2의 자아,      허구적인 자아인 것이다. 3)  시인은 서정적 자아를 설정하여 세계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표명한다. ☞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뜰에는 반짝이는 금모래 빛.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김소월 '엄마야 누나야')      ▶ 서정적 자아: 어린이, 시인: 성인 남성   (3) 정서적 거리 1) 서정적자아가 시적대상에 대하여 느끼는 감정과 정서의 미적 거리를 '정서적 거리'라고 말한다. 2) 대상에 대하여 주관적인 감정을 적극적으로 드러냈는가, 대상과 객관적인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가, 또는 반감을 가지고 있는가에 따라, 정서적 거리가 가까운 거리, 균제·절제된 거리,     먼 거리로 나뉜다. ① 가까운 거리 ☞ 행여나 다칠세라/ 너를 안고 줄 고르면//     떨리는 열 손가락/ 마디마디 에인 사랑//     손닿자 애절히 우는/ 서러운 내 가얏고여. (정완영 '조국')     ▶ 가얏고'에 서정적 자아의 감정을 이입함으로써 정서적 거리가 가깝다 ② 균제·절제된 거리 ☞ 어두운 방 안엔/ 바알간 숯불이 피고,//     외로이 늙으신 할머니가     애처로이 잦아드는 어린 목숨을 지키고 계시었다. (김종길 '성탄제')     ▶ 유년 시절을 담담하게 서술하고 있다. ③ 먼 거리 ☞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박목월 '나그네')     ▶ 서정적 자아가 숨어 객관적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   (4) 어조의 양상 o 서정적 자아와 제재와 독자의 관계에 나타나는 어조는 세 가지 양상을 띤다. 1) 화자인 '나'를 지향하는 경우 ☞ 산산히 부서진 이름이여!/ 허공 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김소월 '초혼')    ▶ 화자는 '나'이고 청자가 숨어있는 경우. 영탄, 감탄의 어조를 띠며 독백 적 서정성을 주조로        한다. 서정시에 알맞다. 2) 청자인 '너'를 지향하는 경우 ☞ 복사꽃이 피었다고 일러라. 살구꽃도 피었다고 일러라. 너이 오오래 정드리고 살다 간 집,    함부로 함부로 짓밟힌 울타리에, 앵도꽃도 오얏꽃도 피었다고 일러라. 낮이면 벌 떼와 나비가    날고, 밤이면 소쩍새가 울더라고 일러라. (박두진 '어서 너는 오너라')    ▶ 화자는 숨고 청자인 '너'만 드러난 경우. 명령, 권고, 요청, 갈망, 호소의 어조를 띠며,        청자에 대한 소망이 주조를 이룬다. 참여시, 목적시에 알맞다. 3) 3인칭 '그'를 지향하는 경우 ☞ 아하, 무사히 건넜을까./ 이 한밤에 남편은    두만강을 탈 없이 건넜을까.    저리 국경 강안을 경비하는/ 회투 쓴 검은 순사가    왔다 갔다/ 오르며 내리며 분주히 하는데    발각도 안 되고 무사히 건넜을까?   (김동환 '국경의 밤')    ▶ 화자와 청자가 숨고 3인칭 '그(남편)'를 지향하는 경우. 정보전달에 적합한 사실적·객관적        어조를 띤다. 서사시에 알맞다. 4) 어조의 유형 ① 형식상 : 독백체, 담화체, 대화체 ② 내용상 : 고백조, 애원조, 기도조, 찬양조, 분개조, 여성적, 남성적, 풍자적, 해학적, 냉소적 등   (5) 어조의 기능 1) 어조와 분위기 : 시의 어조는 시의 느낌, 분위기(정조)를 창조한다. ☞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 풀 아래 웃음 짓는 샘물같이    내 마음 고요히 고운 봄길 위에/ 오늘 하루 하늘을 우러르고 싶다    ▶ 여성적이며 부드러운 어조로 순수하고 맑은 시적 분위기를 조성하여 삶의 감성적인        앙양(昻揚)에 대한 소망을 노래하고 있다. 2) 어조와 주제 : 시의 어조는 시의 주제와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 (김현승 '가을의 기도')    ▶ 명상적인 기도조의 어조는 경건한 삶에 대한 염원을 노래하는 주제를 효과적으로 나타낸다.   (6) 말소리와 어조 o 말소리와 어조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 유음(流音)의 반복이 아늑하고 은근한 분위기를 조성한다   든지, 거센소리와 된소리가 딱딱하고 답답한 느낌을 준다든지, 양성 모음의 결합이 밝고 작은   느낌을, 음성 모음의 결합이 어둡고 큰 느낌을 준다든지 하는 것이 그 예이다. ☞ 양지밭 과수원에 꿀벌이 잉잉거릴 때,    나와 함께 고 새빨간 능금을 또옥 똑 따지 않으렵니까  -------------------------------------------------------------- 3. 희망은 카프카의 K처럼 / 장석주         희망은 카프카의 K처럼 / 장석주   장석주 시인은 1954년 1월 8일 충남 논산시 출생으로 1975년 월간 신인상으로 등단하였고, 1979년 조선일보 에 시가, 같은해 동아일보 에 문학평론이 당선되었으며,  2002년 조선일보 이달의 책 선정위원, 2003년 MBC 행복한 책 읽기 자문위원으로 활동하였고, 2010년 계간 에서 주관하는 제1회 질마재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시집으로는 , , , , 등 다수의 시집을 발간하였으며,  장 시인은 '청하'출판사를 설집 운영하던 중 서정윤 시집 는 출판 흥행에 성공하였으나,   마광수 소설 와 관련하여 출판사 등록이 취소되었다.       '희망은 카프카의 K처럼'은 장석주 시선집 에 재수록된 작품으로 희망이 언제 우리에게 찾아오는가에 대하여 시인이 체험을 통하여 노래하고 있다. "희망은 절망이 깊어 더 이상 절망할 필요가 없을 때 / 온다" '희망'이라는 단어는 첫행 첫머리에만 등장하고 나머지는 절망적 상황에 대한 이미지를 형상화하여 희망을 노래하고 있다.  
915    좋은 詩를 쓰는 비법 댓글:  조회:4395  추천:0  2016-01-09
ㅇ 좋은 시를 쓰려면 - 많이 읽고 많이 생각해서 써야 한다.  - 적어진 글을 소리내어 읽으면서 문맥의 흐름을 다듬는다.  - 우연한 기회에 스치는 영감을 메모해 두었다가  적당한 시어로 옷입히기를 한다.  - 메모하는 습관을 가진다.  - 추상과 구상을 적당하게 배분한다.  - 직유보다는 은유에 치중해서 글을 쓴다.  - 일상화된 언어보다는 자기만의 독특한 언어를 만든다.  - 독자의 몫을 배려한다.  - 이미지 중복을 피한다.  - 즉흥적으로 시 쓰기 연습을 한다.  ㅇ 수식어는 극약이다. 수식어를 비유법으로 정리함이 절대 필요하다.  ㅇ 감춤과 드러냄이 절묘하게 짜여져야 글이 산다.  사랑이라면 사랑의 내용은 드러내 적지만 사랑이란 말은  감추어야 한다.  ㅇ 글의 말미는 명사형이나 종결의미로 끝내라.  단정적, 확정적으로 끝내지 말라. 차라리 의문으로 끝내는 것이  더 효과를 가져온다.  ㅇ 호흡을 너무 길게 잡지 않도록 소리내어 읽어보고,  단락이 너무 길어 무슨 소리인지 잘 모를 때에는  2-3행 어딘가서 끊어 줘야한다. 가능하면 3행 정도에서  단락을 짓는 것이 호흡에 적당하다.  ㅇ 좋은 시행은 적시 적소에 종결의미와 명사형으로 막아줘야 한다.  ㅇ ㅂ으로 종결지으면 답답하고  ㄴ 으로 끝나면 차단하는 의미를  ㄹ 로 마무리되면 벗어나는 이미지를 준다.  ㅍ 으로 결론 나면 답답함이 앞선다.  ※ 참고로 이름은 차단없이 터져 나가도록 지어야 한다.  ㅇ 하늘 안의 붉은 얼굴 : 안의 ㄴ과 붉은의 ㄹㄱ에는  받침이 들어가 있어 읽기도 힘들고 리듬도 깨어진다.  ㅇ 글을 적을 때 비유를 앞세우지 말라. 글에서는  1차적 의미가 더 중요하다.  1차적으로 현실을 묘사하고 2차적으로 비유법을  사용해 부연해야한다.  비유법이 첫머리에 나오면 재미가 없다.  진실성이 결여되어 있다  ㅇ 주격  ...은 : 따로따로 느낌  ...이 : 곁에서 함께 하는, 연관성 있는 표현  !?,. : 표현에 해당  ※ 말은 아끼되 조사 사용은 정확하게 사용해야 한다.  ㅇ 시작, 전환, 상승, 결구로 시를 전개해 나간다.  ㅇ 단락의 종결의미를 모두 명사형으로 나열하면 변화의 맛이 없다.  ㅇ 글을 적을 때 사실묘사에 의존할 경우 혼자만의  감동, 작가만이 감동하는 글이 되므로 다른 사람들이  동의하지 않는다.  즉 시적화자의 메시지가 없다.  ㅇ 한 단락 내에서 나열로 적어 나갈 때는 두 행이 이질적인  이미지를 주도록 적어나가야 이미지가 산다.  시쓰기 참고사항(2)  ㅇ 시 쓰기에서 정형에 너무 지우치면 깊이가 없고,  변화가 없어 단조로움을 준다.  ㅇ 어머니는 내용물을 토한 헝겊자루처럼 무너졌다 : 무너지는  의미로 적어야 하는데 너무 설명적이다.  가급적 처럼이라는 비유는 아껴야 한다.  ㅇ 벽이란 절망의 의미를 주기 때문에 제목으로서는  낱말사용이 합당하지 않다  ㅇ 시를 적을 때는 대상을 이미지로 감추었다 풀어주고  감추었다 풀어주고 그러면서 감추어 진 것을 다른 이미지로  나타내면 극적 이미지 효과를 줄수 있다.  이미지 개발, 동원이 약하면 좋은 시가 되지 못한다.  ㅇ 한자는 가급적 사용하지 마라, 막히는 듯한 의미로  독자에게 다가갈 수 있다.  시의 전개는 막힘이 없이 진행으로 풀어 나가야 한다.  ㅇ 구체적 시어가 많이 동원되면 단어의 맛이 어설퍼진다.  ㅇ 회색이란 단어는 가급적 시에서 피해야 한다.  의미만으로 볼 때도 이것도 저것도 아닌 것을 회색이라 한다.  ㅇ 시행, 호흡조절이 완벽할 때는 산문시로 자신 있게 적을 수 있다.  이미지와 이미지가 긴장감을 주어야 한다.  먼저 행 같이, 시를 적어 두고 산문시로 적어야 한다.  ㅇ 사물을 묘사할 때 너무 사실적으로, 상세하게 나타내 주면  독자에 대한 배려 결여로 글 맛이 없고 긴장감이 떨어진다.  ㅇ 가급적 작가자신, 즉 '나'는 글에서 감추어야 한다.  작가뿐만 아니라 독자도 작가가 될 수 있도록 이끌어 나가야 한다.  ㅇ 낙엽과 사라지는 초라한 모습 : 낙엽은 마지막, 쓸쓸하고  초라함을 나타내기 때문에 너무 당연한 표현이다.  감추기를 해야한다. 낙엽의 이미지 묘사로  쓸쓸함을 느끼게 해야 한다.  ㅇ 시인은 정신병적인 아픔이 있어야 아픈 만큼 깊이 있는 글을  적을 수 있다.  ㅇ 글 적기를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은 독자를 의식하지 않고  글을 적게 된다. 이는 자기 독백에 불과하다.  자기속에 흩어져 있는 거품, 안개, 잡생각, 즉 쉽게 표현하면  경험, 추억 등을 쏟아내 멀리 버리고 참된 고민, 엉뚱한 상상,  낯선 사고를 글로 적을 때 진정한 글적기 시작이 될 수 있다.  내가 낯설면 독자도 낯설게 생각하고 호기심을 갖는다.  ㅇ 시에 있어서는 주석도 시(詩)다. 각주는 본문에 얘기되고  있는 것에 대한 근거 밝히기로, 지방에 나오는 지명 등은  각주를 달 수 있다.  ㅇ 습작초기 : 모든 것을 나 중심으로 적는다.  쓰는 순간에 나는 없고 그 상황에 맞게 충실히 적는다.  나라는 생각을 버려야 시간 산다.(김소월)  ㅇ 멀리보는 만큼이나 내 속을 자세히 들여다보는 노력도  시 쓰기에 서는 필요하다.  즉 내면에서 흘러나오는 불안의 목소리도 글로 표현해 내야 한다.  ㅇ 시와 언어에 있어  - 언어에 경제성을 최대한 살리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 언어의 질감이 생기면 중복을 이용해도 된다.  즉 나에게 어울리는 언어의 질감을 찾아야 한다.  - 꼭 수식어를 사용해야 좋은 글이 되는 것은 아니다.  구상만으로도 리듬을 타면 좋은 글이 될 수 있다.  ㅇ 리듬  - 리듬은 반복이다.  - 시는 만들어지는 순간 죽는 것이다.  - 시는 뭉쳐졌다 사라진다.  - 시는 뼈가 없으면 무너지고 리듬이 없으면 맛이 없다.  ㅇ 모든 배설은 아래로 해야 자연스러운데 구토를 한다는 것은  부자연스럽고 무엇인가 낯설기 때문에 구토가 난다.(이승훈 교수)  - 반드시 건전한 사고가 시를 만드는 것은 아니다.  비합리적이면서도 합리성을 가질 때 시가 적혀진다.  ㅇ 시는 순수해야 한다는 관념을 버려야 발전할 수 있다.  자기 내면의 결벽증을 깨뜨릴 필요가 있다.  ㅇ 읽기는 쓰기다. 좋은 글은 읽다 보면 멈춤이 생긴다.  ㅇ 시 쓰기는 부분을 회생시켜 전체를 살리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 시점이 중요하다.  ㅇ 시는 상승시키고 독자들을 정신 없이 몰아 부쳐야 산다.  숨쉴 틈도 없이 긴장감을 주면서....  *** 시쓰기 참고사항 3편에 이어짐***  *출처 : 목비향님 홈  시쓰기 참고사항(3)  ㅇ 익히 알고있는 사실, 진실 등 관념의 표현은 절대 금물,  다만 극적반전을 가할 때는 예외도 있다.  ㅇ 한자는 독자들로 하여금 리듬을 깨게 하고  상상의 폭을 좁게 하기 때문에 가능한 한 사용을 자제해야 한다.  작가 50%, 독자 50%의 상상력이 합해 진정한 작품의 자리  메김을 할 수 있다.  ㅇ 시는 추상으로 적지말고 구체적으로 이미지화 해서 적어나가야 한다.  ㅇ 고향을 어머니로 표현하는 것은 죽은 의미이다.  시로서 설명하지 말고 표현해 주는 노력이 필요하다.  ㅇ 시를 시(詩)처럼 적으면 시가 되지 않는다.  그 상황 그대로를 표현해야 한다. 예를 들면 어머니를 만나면  만남 그 상황을 묘사해야지 어머니, 모든 사람의 어머니를  추상적으로 나타내면 글이 살지 않는다 즉 어머니 전체를 보지말고  어느 한 부분만 나타내라.  ㅇ 닮게 표현하면 죽은 비유라 할 수 있다(이근배시인).  최근에는 다르게 나타내는 비유를 사용해야 한다.  예를 들면 에서 처럼으로 묘사하지 말고  아름다움 자체를 비유로 나타내야 한다.  ㅇ 시 쓰기에 있어 상식을 뛰어넘는 시를 쉽게 쓰지 않고  자기 나름대로의 사항을 더듬어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해야 한다.  전자의 경우 풀어놓은 언어들이 조화되지 못하고  모래알처럼 흩어져 통일성을 갖지 못하는 아쉬움을 낳을  우려가 있다.  ㅇ 문학(文學)이란 사고(思考)의 천착(穿鑿)이다.  천착이란 구멍을 뚫는 다는 의미로 생각을 뚫어야 함을 의미한다.  ㅇ 무릇 모름지기 시인이란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말로  글을 적어서는 되지 않는다. 낯설게, 전혀 엉뚱하게, 그러면서도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글을 지어야 한다.  ㅇ 처음 시 쓰기를 시작하면 대부분 설명적 나열을 많이 사용하는데  시는 과정이 아니고 순간의 느낌을 포착해서 새로운 시어로  표현하는 것이다.  ㅇ 제목에서 너무 분명한 얘기를 해 주면 본문 내용이  재미가 없어진다. 내용을 읽고 입맛을 다시며 제목을 생각할 수  있도록 해야한다.  ****시쓰기 참고사항 4편에 이어집니다.  *출처 : 목비향님 홈  시쓰기 참고사항(4)  ㅇ 짧은 글일수록 절정이 커야한다.  즉 선명한 인상을 줄 수 있도록 묘사해서 강한 인상을  주도록 해야 한다.  ㅇ 화자의 생각에 독자들이 동감하고 따라 올 수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만세소리를 표현할 때는 독자가 만세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비유해서 나타내야 한다.  ㅇ 공인 즉 세상이 다 아는 사람에 대해서는 존칭을 생략하고  이름만 적는 것이 통례이다.  즉 선생이라 쓰지 않아도 결례가 되지 않으며 존칭을 사용하면  깔끔치 못한 인상을 준다.  ㅇ 친숙해 보이던 것이 낯설게 보일 때 시가 된다.(이승훈 교수)  ㅇ 창조에서는 광기가 사라지면 안된다.  광기 때문에 시는 쓰지만 지배당해서는 안된다.  ㅇ 시는 영혼, 정신을 노래해야 하는데 최근 한국에서는  몸에 대한 시를 많이 쓴다.  ㅇ 시는 아름답게 쓰려 하지 말라.(이승훈 교수)  ㅇ 문학은 병들고 가난하고 외로운 사람이 한다.  과정을 직접 체험하지 않으면 내면의 깊이 있는 바탕글을  찾아내기 어렵다.  ㅇ 시란 문법속에 내가 들어가는 것이다.  ㅇ 웃을 수 있는 사람에게 더 큰 슬픔이 있을 수 있다.  ㅇ 촉각에서 후각으로 오려면 뭔가 깔아주는 것이 있어야 한다.  ㅇ 추상은 가능한 구상, 구체화해서 이미지화 해야 한다.  *출처 : 목비향님 홈  시쓰기 참고사항(5)  ㅇ 상상의 폭은 가감하게 치고 나가야 한다.  ㅇ 시를 쓸 때 의미를 찾지 말라. 시란 존재하는 것이다.  ㅇ 시는 사물과 말걸기에서 시작된다.  그러다 사물과 몸 바꾸기가 된다.  알고 싶은 사항이 있으면 스스로에게 물어서 깨달아라.  ㅇ 선사는 깨우치면 그만이지만 시인은 깨우침을 언어로 나타내야 한다.  ㅇ 달은 여성, 잉태를  해는 남성을  바다는 여성, 모성적 이미지를 나타낸다.  관념화 된 기존 이미지를 타파, 뒤집는 것이 시 쓰기다.  예를 들면 "파도의 사내"  ㅇ 은유가 너무 많으면 어렵다. 은유대신 의인법, 직유로 풀어주고  정서, 느낌으로 올 수 있게 조여주고....  ㅇ 하늘과 강은 푸르다는 유사어로 해석된다.  ㅇ 제목을 정할 때는 가능하면 엉뚱하게 선택해 보자.  ㅇ 막연한 단어의 사용은 자제해야 한다.  즉 구체적으로 표현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의미  예를 들면 표정이라 적기보다는 얼굴, 눈빛 등으로  구체화 시켜야 내용의 의미전달이 확실해 진다.  또한 생이나 삶 같은 단어 역시 구체적으로 적어야 한다.  어떤 삶 어떤 생인지.  ㅇ 시창작의 지름길은 따로 없다.  많이 적고 많이 읽고 많이 수정해 나가야 하는 것이다.  중견작가 신동엽 시인에게 한 고등학생이 어떻게 하면  시를 잘 지을 수 있냐고 물었을 때 "열심히 읽고,  써보는 수밖에 없지"라고 말하시면서  "그 방법을 알게 되거던 내게도 가르쳐 다오"라는 말을  덧붙였다고 하는 얘기가 있다.(임영조교수)  ㅇ 시는 감정으로 쓰지 말고 이성으로 써야 한다.  ㅇ 주석은 가능하면 간단하게 달아야 한다.  ㅇ 시를 적을 때는 일상적인 진술식 나열이 아닌 시어를 사용해서  긴장감을 주도록 전개시켜 나가야 한다.  ㅇ 당당하게 나와 비교해서 나타내고 사실대로 느낌을 표현하고  상징으로 바꾸어서 써야 한다.  ㅇ 한자로 적어서 그 뜻을 보충 생각해야 하는 것은 가급적  한자 사용을 자제해야 한다. 예를 들면 "생"은 생활,  탄생, 생명 등으로 다시 유추해서 생각해야 한다.  ㅇ 시는 갈길이 바쁘다. 그러므로 가급적 간단하게 축약해서  나타내야 하고 이미지를 사용 압축해서 표현해야 한다.  예를 들면 코끼리를 냉장고에 집어넣으려면 전체를  넣을 수는 없지 않은가? 코끼리 코만 잘 묘사해도 냉장고 속  코끼리를 나타낼 수 있다.  ㅇ 대화를 인용할 때는 누구와 누구의 대화인지 알 수 있게  표현해야 한다.  ㅇ 시는 모두 창조물이어야 한다.  관념화된 비유는 죽은 비유로 사용을 자제해야 한다.  *** 시쓰기참고사항6편에 이어집니다.  *출처 : 목비향님 홈  시쓰기 참고사항(6)  ㅇ 글을 읽다가 좋은 시어가 나오면 메모해 두는 습관이 필요하다.  시간이 나면 다시 읽고 비슷한 시어로 흉내내기 연습을 하는 것도  좋은 시어를 찾는 방법이 될 수 있다.  ㅇ 좋은 시를 짓기 위해서는  경험, 지식, 추억 등에 의존해서 적는 것은 금물이다.  왜냐하면 그런 경험, 추억은 누구나 가질 수 있기 때문에...  처음 글 적기를 할 때는 장황하게 나열 식 추억담을  적는 경우가 많다. 이 경우 유리잔에 담은 맥주 거품 같은  추억을 빨리 걷어내야 한다. 적어보고, 수정하고 또 적어보고...  열심히 적다보면 더 이상 적을 수 없게 되는 상황이 오게 되고  그때부터 방황을 하게 된다. 더러는 1-2개월 길게는 6개월에서  1년까지 가는 경우도 있다.  이 경우를 지나면 유리잔에 담긴 진짜 맥주처럼 주옥같은  맛난 글을 지을 수 있다.(선배 시인의 추억담)  ㅇ 시를 지을 때는 자기 굴레에서 벗어냐야 한다.  자기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면 실패하게 되는 데  가정주부는 가정을 소재로 한 글에서,  선생님은 학교의 굴레에서, 간호사는 병원에서...  벗어난 낯선 글 쓰기를 해야 발전이 있다.  물론 어느 수준에 오르게 되면 자연적 다시 자기 굴레로  들어가 전문적인 시 쓰기, 즉 남들이 흉내도 못내는  참 좋은 글을 적을 수 있게 된다.  ㅇ 시 속에 인물을 등장시키려면 구체적인 묘사가 필요하다.  ㅇ 글의 말미(마지막행)는 설명이 아닌 치고 올라가는 기법을  사용해야 글이 살고 맛이 난다.  ㅇ 시의 첫줄은 전체를 이끌어 가는 생명이다.  따라서 첫줄을 긴장감 있게 이끌어 가야한다.  단어 하나가 시 전체를 살릴 수도, 오염시켜 버릴 수도 있다.  ㅇ 시를 아름다운 말로만 나타내려 하지 말아야 한다.  한 자, 한 단어, 한 줄에 의미를 부여하여 신중하게  쓰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ㅇ 제목을 지어놓고 스스로 점수를 매겨 볼 필요가 있다.  포장마차 하나라도 함부로 이름을 붙이지 않는다.  시의 세계도 넓게 보면 상업경영으로 해석할 수 있다.  시집이 발간되어 서점에 나가면 독자들은 제목으로  책을 선택하고, 선택된 책도 펼쳤을 때 마음에 드는  제목이 있어야 읽어보게 된다.  한달에 출간되는 시집들이 100여권이나 된다니...  ㅇ 제목도 재미가 있어야 한다. 지명이나 고유명사가 아니라면  단순하게 명사형으로 적지말고 설명적으로 적어야 재미가 있고  독자들에게 오랫동안 여운을 주게 된다.  ㅇ 가상체험을 소재로 한 글보다는 직접 체험에 의한  글을 적어야 한다.  가상으로 적은 글은 직접 체험한 독자를 설득시킬 수 없으며  내용 또한 허구, 추상에 가깝게 될 우려가 있다.  또한 소문이나 들은 얘기를 유추나 추상해서 쓰지 마라.  자칫 잘못하면 독자가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일 수 있다.  ㅇ 햇볕은 열도(熱度)를, 햇빛은 광도(光度)를 나타낸다.  바꾸어 적게 되면 문맥의 흐름이 막히게 된다.  ㅇ 글 내용 전개에 있어 강조, 감추기 등을 위해 순리에 맞지 않은  흐름으로 적을 때는 반드시 이유, 상황이 이해 되도록 풀어서  적어줘야 한다.  이 경우는 어렵게 적는다는 의미와는 전혀 다르다.  *****  시쓰기 참고사항 7로 연결 됩니다.  *출처: 목비향님 홈  시쓰기 참고사항(7)  ㅇ 새로운 시어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억지로, 막무가내로 짜집기 식으로 말  만들기를 하지 마라.  ㅇ 글은 우연히 적어진다.  하지만 결코 쉽게 적어지지는 않는다.  쉽지 않고 생각대로 잘 되지 않는 어려운 맛에 사람들은  글쓰기를 한다.  맛과 묘미가 어려움 자체에 있기 때문이다.  우연히 적어지는 경우를 예로 들어 보면  지하철을 타기 위해 계단을 내려가는데 갑자기  계단이 없어지거나 거꾸로 계단을 올라가고 있다거나  뭔가 갑자기 낯선 경우가 일어난다.  그 때 그 낯선상태를 시어를 이용해 나타내야 한다.  또 다른 예를 들어 보면 교직에 계시는 분의 경우  수업시간에 학생들이 사랑스럽고 예쁘고 가르침에  가슴 뿌듯한 보람을 느끼고...  이 경우는 절대 시를 적을 수 없다.  그 기분 그대로를 글로 나타내는 것은 누구나 다 가능하다.  다만 시인이라면 낯설게 봐야한다.  즉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데 우연히 바라보니  내 자신이 학생들 틈에 앉아 수업을 듣고 있다던지...  ㅇ 글을 지어 나갈 때 시대상황을 알 수 있게 구체화  시켜 주는 노력도 필요하다.  예를 들면 인터넷이란 낱말을 사용한다면 최근임을 알 수 있다.  ㅇ 사물에도 계절을 나타내는 의미가 있다.  예를 들어 접동새, 즉 두견새는 봄을 나타내며  진달래와 어울리는 이미지화 되어 있다.  계절을 나타내려면 그 계절만 나타나는 특징적인 것을  찾아서 나타내야 한다.  ㅇ 글을 쓸 때는 나만 천재라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내가 알 고 있는 것은 독자도 알 수 있다.  또한 설명으로 묘사해 주지 말아야 한다.  ㅇ 자목련은 잎과 함께 피어나고 백목련은 꽃이 먼저 피어난다.  철쭉과 진달래도 같다.  하지만 무릇 시를 쓰기 위해서는 백목련에서 한복입은 여인을,  자목련에서는 드레스 입은 신부를 볼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  ㅇ 시를 지을 때는 메시지 전달에 주력하지 마라.  이미지화에 주력하라. 과거와 달리 지금은 이미지화가  더 높은 호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또한 묘사에 치중해서 글을 쓰도록 하라.  이미지가 좋으면 독자가 따라온다.  ㅇ 경쾌한 선율.. 이와같은 표현은 죽은 이미지다.  즉 시인이 아닌 일반인도 이런 말을  일상에서 사용하기 때문에...  ㅇ 사물을 묘사 할 때는 입체적으로 풀어 나가라.  그래야 독자가 호기심을 갖고 따라 들어온다.  예를 들면 봄은 고양이를 사색하게 한다라고  표현하면 금새 독자들이 식상해 한다. 해서 차라리  고양이 눈속에서 봄이 온다 라던지 봄은 고양이 눈  속으로 들어 간다라던지 입체적으로 나타내는 편히 훨씬 더  글 맛이 좋다.  ㅇ 사물의 형태보다는 행동을 묘사해야 한다.  예를 들면(산수유 피고 매화가 향긋한)이라는  표현보다는 산수유가 어떻게 피고 매화향기는 어떤 짓을  하다는 그 행동을 이미지화 해야 한다.  **********  시쓰기 참고사항 8으로 이어집니다.  *출처 : 목비향님 홈  시쓰기 참고사항(8) - 목비향님 홈에서 옮김  ㅇ 좋은 시쓰기 비법  - 시의 첫 줄은 신이 준다.  - 바늘 가는데 실이 가게 적지 말라.  시는 바늘 가는데 뱀이 와야 한다.  즉 붙어 다니는 말을 버리고 장난을 쳐야 한다.  - 닭 잡아먹고 오리발 내밀어라.  - 꼬리가 길면 밟힌다.  ㅇ 섣불리 아는 지식은 시에 인용하지 말라.  사전을 찾고, 직접가서 보고...  어려운 한문은 가급적 피해야 한다.  특히 제목을 한문으로 사용하려면 정확해야 한다.  보충 설명이 없도록...  ㅇ 시 쓰기는 연설문처럼 적어서는 안된다  또한 사실을 사실대로 적지 않는 것도 좋은 글을 얻는 방법이다.  예를 들면 죽은 사람을 산사람 같이 나타내면 글 맛이 훨씬 좋다.  하지만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전개가 동반되어야 한다.  ㅇ 축시는 절대 과거형으로 풀어 나가지 마라.  미래형을 택해야 새로운 글, 살아 있는 글이 된다.  ㅇ 같은 말을 자꾸 다르게 바꾸어 나가는 노력이 필요하다.  특정한 대상에 자꾸 다른 이미지를 대입시켜 나가면  잘 어울리는 이미지가 나타나게 된다.  **********  제가 글을 보고 의견을 제시 한 부분이나  다른 분들이 의견을 제시 한 부분을 메모해 둔 곳입니다.  용어 사용 등에 도움이 될 듯 합니다.    ㅇ 미련한 손놀림 : 미련한 상태를 묘사한 설명으로 피해야 할 기법  ㅇ 꿈이 잠긴 마을 : 꿈이란 말이 너무 막연하고 추상적이다.  어떤 꿈인지 구체적으로 묘사할 필요가 있다  ㅇ 못해서 : 자동사,  않 는 : 타동사  ㅇ 평화, 슬픔, 행복 : 구체화 시켜야 할 단어들이다.  이와 같은 추상적인 시어를 나열하면 야무진 시맛이 나지 않는다.  글이란 감탄, 독자가 맞아! 하고 무릎을 치는 소리가 들리도록  적어야 하며 가슴으로 듣도록 써야한다.  ㅇ 한에 떨었다 : 한은 한자이므로 가능하면 한자를 사용하지 말고  구체적인 이미지로 써내야 한다.  ㅇ 그리움, 서러움, 사랑.. : 이런 추상적인 말은 자제해야 시가  감칠맛 나고 살아난다.  ㅇ 불씨, 씨앗 : 어떤 불씨인지, 어떤 씨앗인지 구체적인 설명이  필요하다.  ㅇ 제목 : 꿈이 잠긴 마을  → 제목에 뒷 내용이 미리 알 수 있게 정하는 것은 무게없는 글이  되므로 가급적 피해야 한다.  ㅇ 물안개 수놓다 : 어떻게 수놓았는지 구체화가 필요하다.  ㅇ 이명의 아픔, 칠흑의 밤, 봄의 소리, 새의 날개  명사 뒤에 의는 구태의연한 표현, 설명적 표현으로 버려야 한다.  ㅇ 오래된 흔적 : 흔적이 어떤 흔적인지 구체화시킬 필요가 있다.  ㅇ 환장하게 미쳐 가는 : 환장과 미쳐는 중복, 같은 의미로 피해야 한다  - 빨간 피, 앉전뱅이 채송화, 따사로운 볕, 먼 태고적, 더 넓은  창공, 불평속 투정, 목이타는 갈증, 획획 요동을, 별빛이 반짝,  보글보글 끓는.....  ㅇ 행복이 시간을 자꾸만 먹는다 : 행복, 시간은 둘 다 추상이다.  ㅇ 강물에서, 강가에서 : 전자는 물 속이고 후자는 물 밖을 나타낸다.  ㅇ 한 낮의 풀벌레 : 풀벌레가 어떤 벌레인지, 어떻게 우는지  구체적으로 알 수 있게 나타내야 한다.  ㅇ 굶주린 들개 떼처럼 : 상투적이고 너무 쉬운 표현이다.  처럼의 비유는 가급적 피해야 한다  ㅇ 어느새, 어느 듯 : 신문에서 사용하는 표현들, 시에서는  절대 금해야 할 표현들이다.  ㅇ 뭉클한 내리사랑 : 내리사랑이 무슨 사랑인지 구체적으로  표현하라  ㅇ 재빨리 낙엽 속으로 숨는 다람쥐 : 재빨리는 동작을 나타낸 설명  ㅇ 까치는 두 발 딛고 서서 : 너무 당연한 사실, 까치는 두발이다.  ㅇ 몇 년의 기다림을 깨고 난 매미 : 시에서는 정확하게 표현해야 한다.  매미가 몇 년만에 깨어나는가?  7년 혹은 8년으로 정확하게 적어야 한다.  ㅇ 거리의 악사는 노래를 부른다 : 실제 거리의 악사가 있는지,  현재 적합한 표현인지를 미리 감안, 계산하고 글을 풀어 나가야 한다  ㅇ 뼈를 분지르는 소리 : 분지르다는 내가 분지르는 것이고  부르지다는 부르짐을 당하는 의미다  ㅇ 기쁘게 : 시에는 자제하는 표현이다. 기쁜 자체,  즉 어떻게 얼마만큼 기쁜지를 이미지로 나타내야 한다.  ㅇ 내사랑의 시를 : 나의 어떤 사랑인지 구체적으로 적데,  사랑이란 말없이 풀어 나가야 한다.  ㅇ 소낙비....늦가을 : 소낙비와 늦가을은 계절적으로 맞지 않는다.  ㅇ 비가 와서 쓸쓸하다 : 시간적 공간적 배경을 구체화 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낮인지, 저녁인지, 무교동인지, 덕수궁인지...  화자가 구체적인 사람이면 구체적인 시가 나오게된다.  ㅇ 먼 태고적, 더 넓은 창공 : 멀다와 태고적, 넓다와 창공은 같은  의미. 중복으로 봐야한다.  ㅇ 청맥 보리알에서 청맥은 푸른 보리라 볼 수 있다.  무녀로 신내림 받고 싶어에서 신내림 받으면 무녀가 되기  때문에 무녀가 되고 싶어나 신내림 받고 싶어로 해야한다.  시 한 편  --------------------------------   2. 가라피의 밤 / 이상국       ※ 가라피 : 강원도 양양군 서면에 있는 산골마을로 가래나무가 많은 산골마을이다.       이상국 시인은 1946년 9월 27일 강원도 양양에서 태어나 1976년 신인상(겨울추상화)으로 등단하였으며, 첫시집「동해별곡」간행 후,「내일로 가는 소」(1989),「우리는 읍으로 간다」(1992),「어느 농사꾼의 별에서」(2005) 등을 출간하였고 백석문학상, 민족예술상 , 유심작품상 등을 수상했다.   이 시인은 젊은 시절에는 장사도 하고 재건학교 등에서 직업소년을 가르쳤고 농협에 입사하여 25년간 근무하다가 퇴직한 다음 백담사 만해마을에서 일하다가 현재는 자유기고가로 활동하면서 기획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이 작품은 그의 다섯 번째 시집「어느 농사꾼의 별에서」 1부에 수록된 작품으로 우리나라 최고의 청정지역인 가라피 마을의 밤을 시인 특유의 깊은 성찰을 통하여 고백하듯 어둠을 노래하고, 현대 산업화된 환경 파괴적 문명을 역설적으로 비판하며 시인 스스로 어둠 속을 날아다니는 반딧불이로 승화되었다.  
914    詩는 언어에 옷을 입히는 행위 댓글:  조회:4357  추천:0  2016-01-09
나호열  시인들은 쉬운 시를 쓰려고 노력합니다. 독자들 또한 어려운 시를 선호하  지 않는 것은 분명합니다. 名詩라 일컬어지는 많은 시들, 베스트 셀러가  되는 시집들의 대부분은 낭송하기에 알맞은 가락과 누구나 쉽게 해독할  수 있는 언어로 짜여져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 연유로 시  인되기를 희망하는 사람들은 "쉬운 시"의 매력에서 좀처럼 빠져 나오기  가 힘듭니다. 그러나 이 " 쉬운 시"의 명제는 결코 쉽게 넘어갈 수 없는  생각거리를 파생시키고 있다는 점을 알아두어야 합니다.  인구에 회자되는 소월의 "진달래 꽃"이나 윤동주의 "별 헤는 밤" 천상병  의 "귀천"이나 한용운의 "님의 침묵"은 우선 독자들의 일차적인 정서를  충족시켜 줍니다. 일차적인 정서라고 함은 우선 시에 나타난 의미가 독자  들의 감성 내용과 일치된다는 점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恨"이라든지 "사  랑"이라든지 하는 단순한 관념이 시에 표상되므로서 문학 예술의 두 기능  인 "배설"과 "정화" 또는 "교훈의 전달"이라는 목표에 부합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여지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위에 열거된 시들은 결코 그러한 일차적 해석에 머무르지 않고  다양한 의미의 확장을 가져올 수 있는 중층 구조를 내포하고 있음을 이해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 말은 발화자인 시인의 의도와 독자가 체험한  내용이 일치되거나 독자가 직접 체험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이와 유사  한 추체험의 형식으로 전이되는 것 이상의 영역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  입니다.  우리는 "님의 침묵"에서의 "님"이 한 개인의 사랑의 대상이면서 그 이상  의 존재 의미로 확대할 수 있으며 확대된 상태에서의 시의 구조 또한 그  논리성을 유지할 수 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합니다. 시는 분명히 로고스  의 세계가 아닌 파토스의 세계에서 진행되므로 시인의 상상력은 비논리적  인 직관에 연유함은 틀림 없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인 언술과 달리 시라  는 틀에 얹힌 언술은 질서정연한 상상력의 통로를 가지고 있음으로 해서  내용과 형식의 조화라는 큰 틀에 자리잡게 되는 것입니다. " 님의 침  묵"은 하나의 연시로 해석해도 무리가 없으며 불교적 세계관의 인식 배경  을 놓고 읽어도 그 다양한 의미는 결코 훼손되지 않습니다.  시는 일반적인 진술과는 달리 언어에 옷을 입히는 행위입니다. 시인이 겪  어낸 삶에서 우러나는 시의 향기는 어떤 경우에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쉬운 시"는 그러므로 삶을 벼려내는 시인의 정신이 현실과 부딪치면서  일으키는 섬광과도 같은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한 편의 시에는 고스란  히 시인이 가지고 있는 삶의 태도가 담겨져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외면상으로 평이한 구조와 평범한 진술의 형식을 갖추고 있  으면서 시가 함의하는 의미의 내포가 큰 시야말로 진정한 "쉬운 시"의 반  열에 오른다는 것은 자명합니다.  시 한 편을 읽어보도록 합시다.  꿈꾸듯 편지를 쓴다①  이민 간 친구에게  짝사랑했던 그에게  가슴 저리도록 그리운 어머니에게②  요란한 자명종 소리에 아침은 깨고③  남편의 성으로 바뀌어버린 그녀에게  가을의 전설이 되어버린 브래드 피트에게  인명구조견이 되어서라도 찾아낼 것만 같았던 어머니에게④  세 통의 편지를  한 통만 부친 채⑤  이 시는 습작기에 있는 분의 라는 시입니다. 이 시는 매  우 잘 짜여진 구조와 명료한 메시지가 도드라지면서 쉽게 읽혀지는 시입  니다. ①과③, ②와④처럼 대구법을 사용하여 그리움의 대상을 점층적으  로 묘사하면서 시간의 흐름을 암시하는 기법은 예사로워 보이지 않습니  다. 숨가쁘게 돌아가는 하루 중에 밤은 안식 뿐만 아니라 꿈 꿀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며, 시간인 셈이지요, 그러나 그리움의 대상에게로 향하는  날갯짓은 인위적인 자명종 소리에 깨이는 아침과도 같이 무엇엔가 끌려가  는 현대인의 고독한 심상을 잘 드러내 보이고 있다는 점입니다. ⑤에서  와 같이 마음 속에 써 내려간 편지는 부치지 못하는 무위의 행위로 그쳐  버리고만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조금 더 꼼꼼하게 살펴 보기로 합시다. ②에서의 친구, 그. 어머니는 현  실적으로 나에게서 떠나버린 존재들입니다. ②는 내게 인식된 대상들의  상태를 말해주고 있는데 ④에서는 부재의 상태를 명료하게 하는 구체적  인 인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즉 "이민 간 친구"는 이민을 감으로 해  서 "남편의 성으로 이름이 바뀐" 상태이며, 짝사랑의 대상인 그는 영  화 "가을의 전설" 에 나오는 영화배우 브래드 피트처럼 가까이 다가설  수 없는 존재이며 "그리운 어머니"는 내가 인명구조견이 되어서라도 찾아  야할 대상으로 변화된 듯이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②의 진술에  서 ④의 내용을 함축하고 있다는 점을 유의해서 본다면 ②에서 ④로진행  되는 필연적 구조가 생성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②와④  는 "A는 B이다"로 지칭되는 은유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그 A와 B의 의  미망이 유사한 관념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가을의 전설"  같은 막연한, 즉 가을이라는 심상과 전설, 이라는 심상의 결합에 있어서  의 적합하지 않은 유추가 시의 멋을 증가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감소  시키는 역할을 한다는 점이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 이 시에서 드러나는 중요한 맹점은,- 이 점은 많은 시인 지망생  여러분이 시적 진실과 사실의 관계를 혼돈하는데서 발생하는 문제인데-  시에 있어서의 순수성을 시의 내용과 사실과의 일치에서 찾는다는 점일  것입니다. 이 시의 작자는 실제로 세 통의 편지를 쓰고 그 중 한 통의 편  지를 실제로 부쳤는지 모릅니다. 부쳐진 한 통의 편지는 누구에게 보낸  것일까 하고 글을 읽는 사람들로 하여금 궁금증을 갖게 하는 것도 아주  재미있는 시의 트릭이 될 수도 있겠지만, 한 통의 편지를 부쳤다는 사실  로 인하여 이 시가 가지고 있는 일상의 고립감이나 허무감은 반감되어 버  리고 말았다는 점입니다. 결국 한 통의편지도 부치지 못했다든가, 부치  긴 했는데 그 편지들이 수신인 불명으로 되돌아 왔다든가 하는 결말을 보  여주었다면 더욱 큰 감동을 전달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닌지요.  이 시는 한 편의 시가 결코 많은 내용을 담아야 한다는 집착에서 벗어나  있다는 점에서는 좋은 작품일 수 있으나 누구나 일상적으로 느끼는 것 이  상의 의미를 모색 할 수 없다는 점에서 시인의 현실인식의 한계를 드러내  는 작품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창호지에 우러나는 저 복숭아 꽃빛같이  아무 생각없이  창호지에 우러나는 저 복숭아 꽃빛만 같이  사랑은 꼭 그만큼에서  그 빛깔만 같이  - 장석남의   이 시는 아주 평이한 어휘와 단순한 어조로 아주 쉽게 읽혀질 것 같이 보  이는 시이지만 이 시의 올바른 감상을 위해서는 몇 단계의 유추의 단계  를 지나가야 하는 시입니다. 현대시의 조류에 있어서 시에서의 주제와 소  재의 분류 같은 의도적인 시 해석의 도구를 배제하는 경향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 시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주제와 소재를 찾아보기로 합시  다. 이 시의 주제는? 사랑입니다. 그렇다면 소재는 무엇일까요? 복숭아  꽃? 뻐꾸기 소리? 그렇습니다. 이 시의 모티브는 뻐꾸기 소리입니다. 시  인은 뻐꾸기 소리를 듣습니다. 어느 산에서 우는 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  는 뻐꾸기 소리는 사랑의 실체이기도 하면서 사라의 메시지이기도 합니  다. 뻐꾸기 소리는 어느덧 창호지에 복숭아 꽃빛으로 물듭니다. 시인은  창호지 문 안쪽에서 차단된 저 쪽 세계의 메시지를 분홍 복숭아 꽃빛으  로, 그림자로 바라볼 수밖에 없습니다.  뻐꾸기 소리 - 창호지 안에서 듣는 나 - 나에게서 발화되는 뻐꾸기 소리  의 관념 - 복숭아 꽃빛 - 그림자로 어리는 창호지를 바라보는 나와 같은  의식의 흐름과 공간의 이동을 보여주면서 사랑을 뻐구기 소리로 뻐구기  소리는 복숭아 꽃빛으로 변화시키는 상상의 질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시인은 "사랑"이라는 관념을 소리로 빛깔로 치환시키면서 자신이 생각하  는 사랑의 관념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일반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상식  으로부터 빗겨 서 있는 시인의 태도는 독자들에게 자신의 메시지를 강요  하지 않으면서 사유의 깊이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와 같은 감상 방식은 이 시를 읽어내는 많은 통로 중에 하나에 불  과할 것입니다. 만일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이 다른 방식의 시 읽기를 주장  하신다면 바로 그 순간에 이 시는 좋은 시로 평가될 수 있는 덕목 하나  를 갖추고 있는 셈이 될 것입니다.  茶道는 보통 사람들이 일상생활에서 즐기기에는 번거로운 절차가 필요니  다. 한 잔의 녹차를 마시는 방법 중에 하나는 인스턴트 녹차를 마시면 될  것입니다. 끓는 물에 봉지 하나만 넣으면 쉽게 우리는 차를 즐길 수 있  습니다. 차를 마신다는 행위에 있어서는 다도를 배우고 절차를 따르고,  다기를 준비하는 등의 번거로움은 불필요할 것입니다. 그러나 다기를 씻  고 배열하고, 물을 적당한 온도로 끓이고 우려내는 행위를 거듭하면서 마  시는 차에는 형언할 수 없는 향기가 베어있게 마련입니다.  "쉬운 시" 는 눈으로 쉽게 읽히고 가슴에 금방 와 닿는 시가 아닙니다.  시의 내용이 독자에게 쉽게 동의를 구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우려낼수록 깊은 향을 풍기는 차 처럼 오래 가슴에 담아두고 되  내이면서 새로운 의미를 재생산시키는 시를 많은 시인들은쓰고 싶어합니  다      ---------------------------------------- 1. 감꽃 / 김준태                 감꽃                              김 준 태   어릴 적엔 떨어지는 감꽃을 셌지 전쟁 통엔 죽은 병사들의 머리를 세고 지금은 엄지에 침 발라 돈을 세지 그런데 먼 훗날엔 무엇을 셀까 몰라     김준태 시집 중에서             김준태 시인의 감꽃은 4줄로된 짧은 시로 시인의 삶이 그대로 녹아 있다. 시적 진술은 '세다'라는 동사의 시간 흐름을(과거-현재-미래) 통하여 묘사되어 있다. 1~2행은 과거(셌지-대과거, 세고-과거), 3행은 현재(세지), 4행은 미래(셀까)의 상황이다. 1행의 셌지와 2행의 세고는 어법에는 어색한 문장으로 산문적인 표현은 아래와 같다.     어릴적엔 떨어지는 감꽃을 셌었고(대과거)     전쟁통엔 죽은 병사들의 머리를 셌지(과거)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적 호흡을 감안한다면 시인의 시적 표현이 한층 더 리듬이 살아 있고 선명한 이미지를 제시하고 있다. 1행은 감꽃으로 대표되는 서정 어린 순박한 동심의 세계를, 2행은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극한 전쟁(사회생활)이라는 상황을, 3행은 현실적 삶에 묶여서 돈을 세고 있는 시인의 삶의 모습을, 4행은 미래의 내 모습을 걱정하는 근심스러운 마음으로 고백한다. 한줄에 수십년을 뛰어넘는 시인의 깊이와 내공이 느껴지는 시이다  
913    詩습작자들을 위한 提言 댓글:  조회:4123  추천:0  2016-01-09
시창작 과정의 절차와 단계 ―습작자들을 위한 몇 가지 提言1)   이은봉         1. 머리말: 시적 형상의 핵심 요소로서의 이미지         시를 가리켜 흔히 상상의 산물이라고 한다. 상상은 이미지를 단위로 하는 사유의 한 형식이다. 물론 이 때의 이미지는 시적 밀도를 높이기 위해 늘 정서나 이야기 등의 요소와 함께 하기 마련이다. 그렇다고는 하더라도 이미지가 시의 형상을 이루는 가장 중요한 자질 가운데 하나라는 것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미지를 내포로 한다는 점에서는 공상도 상상과 크게 다르지 않다. 공상 역시 이미지를 자질로 하는 사유의 한 형식, 즉 정신의 한 형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상상과 공상의 차이는 이미지의 내포 여부와는 무관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미지를 내포로 한다는 점에서는 무의식의 구체적인 발현 형태인 꿈도 마찬가지이다. 상상과 공상이 변별되는 점은 그것이 현실의 경험에 뿌리를 내리고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데 있다. 상상은 현실의 경험에 기반하고 있는 데 비해 공상은 그렇지 않다는 뜻이다. 시적 인식의 방식은 당연히 현실의 경험과 관련한 상상에 기반하기 마련이다. 삶의 실제와 무관한 공상은 시적 인식의 내포가 되지 못하는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다. 그렇다고는 하더라도 모든 시가 공상과 무관한 채 창작된다고 할 수는 없다. 때로는 공상 역시 시의 형상을 이루는 중요한 인식의 한 방법으로 존재한다는 뜻이다. 공상의 영역은 본질적으로 환상의 영역과 겹쳐질 수밖에 없다. 공상과 환상이 공히 현실의 경험과 무관한 이미지 사유이기 때문이다. 실제로는 환상적 이미지를 기초로 하는 시도 적잖게 발견되고 있다. 그것이 제대로 심미적 감동을 수반하는지는 미지수이지만 말이다. 환상적 이미지는 특히 동시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결국 비현실적 이미지를 기초로 하는 시들 역시 소홀히 취급할 수 없다는 뜻이 된다. 최근에 들어서는 현대시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의 하나로 공상과 환상 역시 우리 시의 중요한 인식 방식이 되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을 충분히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아직까지 시적 인식의 기초는 상상에 중심을 두고 있다고 해야 옳을 듯싶다. 기본적으로 시적 인식은 시인의 체험적 현실, 즉 경험적 사실에 기반하고 있거니와, 이 때의 시적 인식이 상상과 결코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상상의 언어가 이미지의 언어를 기초로 한다는 것은 앞에서도 이미 말한 바 있다. 이미지의 언어가 시적 형상을 구성하는 가장 핵심적인 요소라고 하는 것도 실제로는 이에서 연유한다. 습작자가 유독 이미지의 언어에 집착하는 것도 대부분은 이와 무관하지 않다. 요컨대 이미지의 언어야말로 이야기․정서의 언어와 함께 시적 형상을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자질 중의 하나라는 것이다. 시의 언어는 본래 형상을 추구하는 데 그 특징이 있다. 형상은 항용 학술의 언어가 개념을 추구하는 하는 것과 대비되어 논의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필자는 이미 여러 차례 시적 형상을 이루는 주요 자질이 이미지, 이야기, 정서라고 강조해온 바 있다.2) 물론 ‘이야기’는 창작의 실제에서 작품의 제재나 대상을 이루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이야기’는 시의 기법이나 방법의 차원에서 논의되기 어려울 수밖에 없다. 이미지나 정서와는 달리 ‘이야기’는 창작의 절차와 단계를 논의하는 자리에서는 거론하기에 적당치 않다는  뜻이다. 이들 각각의 형상의 자질은 기본적으로 유의미한 의식지향을 내포한다. 형상 자체가 그렇듯이 형상의 주요 자질인 이들 이미지, 이야기, 정서 역시 그 나름의 유의미한 의식지향을 갖는다는 얘기이다. 물론 이 때의 의식지향은 형상의 자질들이 거느리고 있는 의미, 다시 말해 작품 속에 담겨 있는 진실(진리)를 목표로 한다. 구체적인 시작품 속에서 이미지, 이야기, 정서는 언제나 상호 침투하기 마련이다. 이미지는 정서와 이야기의 산출에, 정서는 이미지와 이야기의 산출에, 이야기는 이미지와 정서의 산출에 상호 관여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이미지, 이야기, 정서는 언제나 상호 적층되는 가운데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항용 이들 중 어느 하나가 전경화되거나 후경화되어 드러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기존의 시가 정서 중심의 작품(낭만주의 시), 이야기 중심의 작품(리얼리즘 시), 이미지 중심의 작품(이미지즘 시) 등으로 나누어지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따라서 시를 가리켜 형상의 언어라는 것은 상상의 언어라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3) 상상의 내포를 이루고 있는 이미지가 언제나 정서나 이야기 등과 함께 하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 일단은 먼저 상상 혹은 형상의 가장 중요한 자질 중의 하나인 이미지를 앞세워 시창작의 절차와 단계를 논의하려고 하는 것도 실제로는 이에서 기인한다. 물론 그러한 다음에는 정서를 산출하는 요소들과 더불어 시창작의 절차와 단계를 논의하게 될 것이지만 말이다.   2. 시창작 과정의 절차와 단계   1) 묘사와 형상어   일차적으로 이미지는 묘사로부터 발생한다. 묘사는 축자적인 언술체계를 따르는 이미지의 생산방식을 가리킨다. 이미지를 산출하는 가장 원초적인, 그리고 가장 근원적인 방식이 묘사라고 할 수 있다. 시쓰기의 능력과 관련하여 가장 먼저 묘사의 능력을 평가의 대상으로 삼는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렇다. 뛰어난 묘사력을 지니지 않고서는 제대로 된 시인으로 성장하기 어렵다. 묘사는 대상에 대한 시인의 절제된 감정을 바탕으로 한다. 들뜬 감정이 앞설 경우 대상에 대한 제대로 된 묘사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처럼 묘사는 시인의 객관적인 정신을 토대로 하여 이루어지기 마련이다. 주관이 배제된 객관적인 대상이 하나의 화폭으로 현현될 때 묘사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대상과의 심미적인 거리를 확보할 수 있는 이지적인 인식능력을 전제로 하는 것이 묘사라고 할 수 있다. 이미지를 생산하기 위한 묘사로서의 언술의 방식은 일단 어휘의 차원에서부터 출발된다.4) 상대적으로 이미지의 밀도가 높은 어휘는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관념어나 추상어라기보다는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구상어나 구체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물질어나 사물어가 상대적으로 이미지의 밀도가 높다는 것인데, 본래 이들 어휘는 나날의 일상 속에, 생활 속에 존재하기 마련이다. 표준어나 문화어보다는 방언이나 토착어, 인공어나 학술어보다는 자연어나 생활어 등이 묘사로서의 이미지의 생산에 좀더 실질적으로 기여를 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와 무관하지 않다. 외국어나 외래어보다 고유어나 토착어가 묘사로서의 이미지의 밀도가 높은 것도 마찬가지의 이유에서이다. 많은 습작자들이 시창작에 끌려 들어가게 되는 계기는 무엇보다 시가 심미적인 언어를 바탕으로 하기 있기 때문이다. 시의 언어가 지니고 있는 독특하고 강력한 심미적 정서의 충격이 그들로 하여금 단순한 독자의 차원에 머물지 않고 창작의 길로 나서게 한다는 뜻이다. 이들이 일상의 구체적인 삶으로부터 심미적 충격을 경험했을 때 그에 합당한 심미적 언어, 즉 시의 언어를 찾아 나서게 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따라서 습작자들이 가장 먼저 집착하는 것은 시의 어휘, 다시 말해 형상어라고 할 수 있다. 맨 처음 시창작의 세계로 들어오는 사람들에게는 심미적 형상어가 주는 매력만큼 독특한 것은 없다. 선택된 형상어들이 평면적으로 배열되는 가운데 축자적으로 태어나는 것이 정작의 묘사적 이미지라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형상어의 평면적 선택과 배열의 과정에 자연스럽게 축조되는 것이 실제의 묘사적 이미지라는 뜻이다. 어휘에 집착하는 단계를 거치게 되면 자연스럽게 묘사에 빠져들게 되는 것이 보통이다. 묘사에 빠져든다고 했지만 실제에 있어서 묘사의 능력은 심미적 글쓰기의 가장 원초적이고도 근원적인 능력이라고 해야 마땅하다. 따라서 묘사의 능력은 시창작의 절차와 단계의 차원으로부터 조금쯤 비켜 서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묘사 역시 어휘의 선택과 배열의 과정에 구체화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시의 이미지와 관련하여 선택되고 배열되는 낱낱의 어휘 그 자체가 더없이 중요한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이기도 하다. 물론 이 때의 시의 어휘, 즉 형상어가 단지 외적인 이미지만을 거느리는 것은 아니다. 습작자들이 자신의 심적 에너지를 다양한 내적 형상어, 즉 독특하고 유별난 부사나 형용사, 명사 등으로 표현하는 경우도 상당하기 때문이다. 사실 습작자들이 이처럼 내외적 이미지를 지니고 있는 독특하고 유별난 어휘에 집착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대부분의 습작자들이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시라는 것이 심미적 언어의식의 산물임을 자각하게 되고, 나아가 제대로 된 시인으로 성숙해 가게 된다는 점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이번 ꡔ살아있는 시ꡕ 제4집의 여러 작품들에서도 내외적 이미지를 함유하고 있는 독특하고 유별난 어휘에 집착하고 있는 예는 적잖이 발견되고 있다. 이처럼 어휘에 집착하는 차원에 머물러 있다는 것은 ꡔ살아있는 시ꡕ의 동인들의 경우 이제 막 습작과정의 초입에 들어서 있는 사람들이 적잖다는 증표이기도 하다.   ①  거센 파도에 휩쓸려 올라온 조가비들이     늦가을 여린 햇볕을 쪼이며     ―곽송순, 「10월, 변산 해수욕장에서」 부분   ②  해 뜨는 바위     꽃 속의 心本이 살갑게     미소짓는다    ―이근보, 「心本」 부분   ③  간짓대에 낫을 달아     감이나 따 볼거나     ―김영찬, 「변산」 부분   ④  무슨 사연     하도 많아     ―이수남, 「별들의 노래」 부분   ⑤  길섶 한쪽     새초롬이 앉아 있던 수줍은 진달래   ―김광자, 「오후의 산책」 부분   ①의 시에서는 우선 창작자가 ‘조가비’라는 어휘에 집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가 조개라는 일상의 평범한 어휘 대신 굳이 ‘조가비’라는 좀더 예쁘고 아름다운 어휘를 선택하고 있다는 점이 이를 증명해준다. ②의 시에서 가장 주목이 되는 어휘는 ‘心本’이라는 한자어이다. 각주까지 달아 출전을 밝히고 있지만 정작 창작자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것은 ‘心本’이라는 어휘 그 자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물론 이에는 ‘心本’이라는 어휘가 ‘마음의 근본’이라는 의미를 갖는다는 것도 상당한 작용을 했을 것이다. ③의 시에서 창작자가 집착하고 있는 어휘는 ‘간짓대’라고 할 수 있다. 생활의 습속이 바뀌어 이제는 효용가치 자체가 소멸되어 버린 ‘간짓대’라는 말이 불러일으키는 이미지는 그 자체만으로도 충만한 심미적 정서를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④의 시에서는 창작자가 ‘하도’라는 일상적 부사어에 깊이 경도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정상적 어법으로 보면 구문상 ‘그리’ 정도의 부사어가 와야 마땅할 것으로 파악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작자는 어휘 자체가 갖는 어쩔 수 없는 매력 때문에 굳이 여기서 ‘하도’라는 말을 고집하고 있는 것이다. ⑤의 시에 드러나 있는 ‘새초롬이’와 같은 부사도 어휘 자체가 갖는 매력 때문에 선택된 것으로 이해된다. 모음들이 어울려 드러나는 ‘새초롬이’나 ‘함초롬이’ 등과 같은 어휘가 지니고 있는 화음상의 즐거움에 대해서는 새삼스럽게 여기서 강조를 할 필요가 없다. 시창작의 과정에 들어서면 누구나 다 이러한 절차와 단계를 거치게 된다. ꡔ살아있는 시ꡕ의 동인들의 경우 아직도 몇몇 사람들은 이러한 정도의 차원에 머물러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들 모두 자신의 정서를 극대화하기 위해 억지로 조어를 만드는 단계는 벗어나 있는 것이 분명하다. 이제 막 시창작의 세계로 들어온 사람들은 대부분 ‘어설픈’이란 말을 줄여 ‘설픈’이라고 쓴다든지, ‘서글픈’이라는 말을 줄여 ‘글픈’이라고 쓰는 등의 조어에 집착하는 단계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물론 조어를 만드는 단계에 이르러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시어에 내재해 있는 심미의식을 깨닫고 있다고 평가를 할 수 있기는 하다. 적어도 그는 심미적 언어의식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 시라는 사실만은 터득하고 있다는 뜻이 되는데, 그렇다면 이 때의 창작자 역시 이미 시의 영역에 들어온 것만은 확실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2) 비유와 이미지   이처럼 형상적 어휘, 즉 묘사적 이미지를 낳는 어휘에 집착하는 단계를 지나게 되면 대부분의 습작자들은 이들 어휘를 결합해 비유적 이미지를 만드는 단계에 이르게 된다. 기본적으로 모든 비유는 원관념과 보조관념을 곁고 트는 가운데 독특하고 새로운 이미지를 만드는 언술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생각하면 비유는 결국 곁고 트는 일종의 언어관계, 즉 언어체계라고 보아야 마땅하다. 본래 비유체계는 원관념과 보조관념이 문면에 드러나든 드러나지 않든 각각의 어휘들이 지니고 있는 내포를 충돌시켜 새로운 이미지를 만드는 언술관계의 형식라고 이해해야 한다는 뜻이다. 물론 그것은 상징이나 알레고리, 나아가 환유나 제유처럼 원관념은 숨어 있고 보조관념만 문면에 드러나는 경우라고 하더라도 마찬가지이다. 시창작 역시 하나의 생산 행위라는 점에서 보면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것만큼 의미 있고 중요한 일은 없다. 심지어는 작품의 문면에 하나 이상의 새로운 이미지가 표현되어 있을 때 비로소 새로운 시로 취급되어야 한다는 주장조차 있을 정도이다. 따라서 새로운 시를 쓰고자 하는 습작자가 우선 새로운 이미지의 창조, 즉 새로운 비유체계의 창조에 깊이 몰두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비유체계에 의해 탄생되는 새로운 이미지만으로 시가 완성되는 것은 물론 아니지만 말이다. 어휘의 결합을 통해 비유를 만들고, 나아가 새로운 이미지를 만드는 일에 집착하고 있는 것은 ꡔ살아있는 시ꡕ 동인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습작자로서는 삼빡하고 신선한 이미지를 창조해내는 것만큼 즐겁고 유쾌한 일은 없다고 할 것이다.   ① 곰소항에 와서    파랑을 키우고 있는    내 안의 갈등 몇 마리     ―남석희, 「곰소항에 와서」 부분   ②  내 안의 사랑이     터질 듯한 심장 박동 소리를 내며     열꽃을 피운다     ―전경란, 「설악 단풍」 부분   ③  바람의 검에 절단 당한     선홍빛 엽신 하나     내 가슴에 비수로 꽂히던 날     ―남석희, 「편지」 부분   ④  얇아졌다 두꺼워졌다 하는 그의 몸 위     병 뚜껑처럼 얹혀진 머리에 히끗히끗 세월이 바래지고 있다     ―이종숙, 「하모니카 부는 남자」 부분   ⑤  잠자리 은박지처럼     사락이는 꽃이파리     ―남석희, 「함박눈」 부분   ⑥  강물은 솜사탕처럼 녹아드는 눈꽃을     말없이 혀끝으로 받아먹고     ―나명호, 「풍경」 부분   ⑦  바킹 닳아진 수도꼭지처럼     턱 끝에서 똑똑 떨어지는 땀방울을     ―김광덕, 「수도 검침원」 부분   ⑧  연안부두 어시장     고무함지에 즐비하게 담긴 바다     ―박승미, 「1999년 8월 18일 인천」 부분   ⑨  나는 너에게     한 장의 편지이고 싶다     ―최승자, 「당신은 나를 더 좋은 여자가 되고 싶게 하는……」 부분   ⑩ 희망으로 부풀어오른 봉선화 꽃씨를     환하게 엄마의 가슴에 터트려 본다.    ―박창복, 「달빛 아래서」 부분   ⑪ 한길가에 개나리가 피었네     차로 달리니     개나리는     줄줄이 강강수월래     ―안효순, 「개나리」 부분   주지하다시피 비유체계는 미지의 것을 기지의 것으로 대치하는 가운데 인식의 영역을 넓혀 가는 언어작용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모든 비유체계는 원관념을 보조관념으로 전이시키는 가운데 의미의 범주를 새롭게 확장시켜 가는 언술구조의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이때 비교․대조되는 두 관념은 기본적으로 유사성을 지니면서도 차별성을 지닌다. 시의 긴장감은 아무래도 비유체계의 원관념과 보조관념이 만드는 유사성보다는 차별성에 기반하여 형성되기 마련이다. 따라서 원관념과 보조관념의 차별성으로부터 비롯되는 이미지야말로 시의 참신성을 산출하는 주요한 근거라고 할 수 있다. 비유체계를 이루고 있는 두 언어의 내포가 상호 유사성에 못지 않게 차이성도 고려되지 않으면 안 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과도하게 유사한 언어의 내포를 매개로 하여 비유체계를 만들 때 좀처럼 상투성을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①의 시에서는 “내 안의 갈등”이라는 관념이 “몇 마리” 생선이라는 이미지로 전이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갈등’이라는 추상이 ‘생선’이라는 이미지로 구체화됨으로써 의미의 영역이 확장되고 있는 예이다. ②의 시에서는 “내 안의 사랑이”라는 추상이 “심장 박동 소리”라는 이미지로 구체화되고 있다. 이 역시 ‘사랑’이라는 추상이 ‘심장 박동 소리’로 물질화됨으로써 그 내포가 생생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③의 시는 좀더 복잡한 비유체계를 지니고 있는 작품이다. 우선은 원관념인 “바람”이 보조관념인 “검”으로 의미가 전이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언술구조에 의해 뜻밖에도 ‘바람’의 의미가 칼의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시에서는 엽신의 이미지가 비수의 이미지로 옮겨가는 것도 확인할 수 있다. ④의 시에서 드러나 있는 비유체계는 매개어를 갖는 직유이지만 그로부터 비롯되는 이미지는 자못 신선해 보인다. “머리”의 이미지가 전혀 엉뚱한 “병 뚜껑”이라는 이미지로 치환되는 가운데 좀더 생생한 의미망을 산출하기 때문이다. ⑤의 시에는 병치은유에 이어지는 직유의 비유체계가 드러나 있어 좀더 관심을 끈다. “잠자리”의 이미지가 곧바로 “은박지”의 이미지로 병치, 전이되는가 하면 “꽃이파리”의 이미지로 그 의미망이 확산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 이 모든 이미지들이 함박눈이라는 원관념의 보조관념으로 드러나 있음도 알 수 있다. ⑥의 시에서는 “눈꽃”의 의미가 매개어를 바탕으로 “솜사탕”의 의미로 전이되고 있다는 점에서 직유로서의 언술구조가 드러나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두 어휘의 내포가 이루는 관계는 다소 익숙해 보이기는 하지만 “강물”의 이미지를 배경으로 하는 의인관적 세계관이 표출되어 있어 형상을 좀더 구체화시키기도 한다. 직유로서의 비유체계가 드러나 있는 것은 ⑦의 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인용된 구절에서는 “턱 끝”의 이미지가 “수도꼭지”의 이미지로 전이되면서 좀더 생생한 땀방울의 의미망을 만들고 있다. 일종의 환유적 수사법이 쓰이고 있는 ⑧의 시는 “고무함지에 즐비하게 담긴 바다”의 이미지가 좀더 관심을 끈다. 이 구절에서 ‘바다’는 ‘생선’의 알레고리로서 구절 전체의 의미망을 두루 신선하게 만들고 있다. 따라서 이 구절에 드러나 있는 환유는 직유나 은유보다는 좀더 진전된 비유체계라고 할 수 있다. ⑨의 시는 가장 일반적인 은유가 사용되어 있는 예이다. ‘나’라는 추상이 곧바로 ‘편지’라는 구상으로 의미의 전환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좀더 복잡한 구조를 지니고 있기는 하지만 ⑩의 시 역시 은유가 겉으로 드러난 예이다. “봉선화 꽃씨”이라는 구체가 이내 “희망”이라는 관념으로 대치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들 두 언어의 내포가 이루는 관계는 매우 설득력 있는 긴장감을 보여준다. 은유를 이루는 두 언어의 내포가 충돌하면서 만드는 긴장감은 ⑪의 시에서도 자못 폭넓은 상상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개나리”의 의미망이 다소간은 낯설게 받아들여지는 “강강수월래”의 의미망으로 참신하게 전이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 작품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ꡔ살아있는 시ꡕ 제4집에 실려 있는 작품들에는 자못 독특하고 신선한 비유와, 그에 따른 이미지들이 충만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 비유체계에서 비롯되는 생생한 이미지들만으로 완미한 형상의 작품이 태어나는 것은 아니다. 이들 비유에서 생성되는 참신한 이미지는 단지 시적 형상의 전체를 이루는 아주 작은 부분일 따름이다. 따라서 이제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시적 형상을 산출시키는 그밖의 여러 세목들이다.   3) 어조와 화법   어휘의 선택과, 그에 따른 비유체계에서 기인하는 이미지의 생산 방식을 자각하고 있는 습작자들은 대부분 시적 언술구조의 특성과 관련하여 좀더 진전된 또 하나의 집착을 보여주게 된다. 어휘들의 곁고 트는 관계에서 비롯되는 이미지의 생산에 집착하는 단계에 이어 도달하게 되는 또 하나의 단계는 독특하고 개성 있는 정서적 결을 획득하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정서는 이미지에 의해 생성되기도 하지만 어조와 리듬에 생성되는 것이 보통이다. 특히 어조의 미학은 시의 정서적 아우라, 즉 심미적 분위기를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이다. 개성 있는 어조의 미학을 살릴 수 있는 지름길은 무엇보다 화법과 종결어미에 집착하는 일이다. 습작자들이 화법과 종결어미에 경도되는 중요한 이유는 그것의 응용을 통해 자기 나름의 섬세한 정서적 울림, 즉 심미적 아우라를 창조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가 언어예술인 한 이들 습작자가 화법과 종결어미의 활용을 통해 자신의 심미의식을 극대화하는 일은 매우 바람직한 일이다. 이는 곧 창작과정에서 문장의 멋과 맛에 집착하는 일이기도 하다. 한국어 문장은 대부분 ‘-다’, ‘-네’, ‘-라’, ‘-까’, ‘-요’, ‘-지’, ‘-아’, ‘-어’, ‘-유’, ‘이’ 등으로 종결어미가 오는 것이 보통이다. 물론 이에 주목하여 개성 있는 시적 정서, 곧 심미적 아우라를 극대화하려는 노력 역시 훌륭한 시인으로 성장해 가는 한 과정임에 분명하다. 이러한 일 또한 습작자라면 누구나 다 거쳐야 할 절차이고 단계라는 뜻이다. 자신의 심미의식을 시문장의 차원에서 고려하고 있는 것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오히려 이는 습작자들의 역량이 훨씬 성숙해져 가고 있다는 증거라고 보아야 옳다. 하지만 이번의 ꡔ살아있는 시ꡕ 제4집에 실려 있는 시들 가운데 이러한 단계에 도달해 있는 예는 그다지 많지 않다. 아마도 이는 대부분의 습작자들이 자신의 심미의식을 비유체계를 매개로 하는 새로운 이미지를 창출하는 단계에서 멈춰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물론 ꡔ살아있는 시ꡕ의 모든 동인들이 다 그러한 단계를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아니다. 몇몇 습작자들의 경우에는 이미 화법과 어조가 이루는 심미적 경지를 충분히 터득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기도 한다.   ①  혹시 알아?     우리도 맑은 바닷물에     한 몇 년 절였다가 볕에 널면     저렇게 하얀 염화(鹽花)로 피어날지.     ―최향남, 「바다꽃」 부분   ②  부끄러웠어     난 누굴 위해 온전히 모든 걸 포기한 적이 있었는지?     어두워진 하늘엔     하얀 깨꽃, 별이 되어 반짝이고 있었어.     ―송영애, 「깨꽃이 진 자리에」 부분   ③  헛간 앞의 참새 떼     후루룩 빨랫줄로 옮겨 앉아 조잘대면     쌀 한 줌 뿌려 주시며     “옛다 먹어라 그만 앙알거리고”     하시던     ―김연근, 「참새소리」 부분   위의 시들에는 직접화법과 함께 하는 일상적 어조가 매우 다양하게 변주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시문장의 종결어미도 일상의 평범한 ‘-다’형 구조를 피해 각각의 맛과 멋을 살려내고 있다. 물론 이는 직접화법에 따른 어조의 맛과 멋을 한껏 살려내려는 노력의 일환이라고 해야 마땅하다. 어찌 보면 희곡의 전유물인 대화(독백적 대화를 포함하여)의 기법을 십분 수용하고 있는 예라고도 할 수 있는데, 기본적으로 이는 현장감을 살리려는 심미적 노력의 하나라고 생각된다. 이들 시의 경우에는 어투와 목소리가 함유하는 심미의식까지 섬세하게 고려되어 있는 셈이다. 언어예술로서의 시에 대한 이해의 정도가 그만큼 심화되어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①의 시는 심미의식을 높이기 위해 자기다짐의 독백의 어조를 끌어들이고 있는 예이다. 적어도 이 구절에 표현되어 있는 창작자의 의도만은 충분히 시의 경지에 이르러 있다고 할 수 있다. ②의 시는 깊이 있는 자기반성의 목소리를 취하고 있는 예이다. 이 구절만으로 보면 수사도 화려해 상당한 정도로 새로운 형상이 이루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③의 시는 구문의 중간에 생동감 넘치는 직접화법이 활용되어 있는 예이다. 일상의 생활에서 흔히 경험하는 어머니의 목소리를 구체적으로 활용함으로써 형상의 밀도를 높이고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들 시처럼 독특한 효과를 갖는 심미적 어조는 시의 문장이 지니고 있는 남다른 화법과 종결어미를 통해 구체화되고 있다. 따라서 화법과 종결어미에 집착한다는 것은 시문장 자체에 대해 집착한다는 뜻이 된다. 결국 이는 화법과 종결어미에 집착하는 단계를 지나게 되면 시의 문장에 경도되는 단계에 이르게 된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시의 문장에 집착한다는 것은 시의 문체에 집착한다는 것으로 받아들여도 좋다. 시의 문장이 지니고 있는 개별적 특성이 각각의 작품이 지니고 있는 개별적 문체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소설과 마찬가지로 시도 역시 주제나 의미보다는 문체가 만드는 정서적 특징에 의해 변별적 자질이 발생한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각각의 시로 하여금 고유의 개성적 가치를 지니도록 하는데 가장 우선적으로 작용하는 것이 다름 아닌 문체라는 뜻이다. 따라서 창작자가 문체에 대한 섬세한 배려까지 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게 되면 각각의 시 전체가 지니고 있는 맛과 멋을 십분 살릴 수 있는 경지에 이르러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시의 문장이나 문체에 집착하는 단계를 극복하지 않고서는 다음의 경지로 넘어가지 못한다. 시의 문장 역시 문장 일반의 특성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면 이 단계에서 정작 습작자들이 경도되는 것은 조사나 어미, 접속사나 대명사 등의 문법소를 세련되고 이름답게 처리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새삼스러운 얘기이지만 이들 허사는 그것 자체만으로는 명확한 의미나 이미지를 갖지 않는다. 단지 의미나 이미지의 향방을 지시하는 역할을 하는 데서 이들 허사의 기능은 그친다. 하지만 이들 허사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고서는 개성 있는 문장을 쓰기가, 곧 개성 있는 문체를 갖기가 매우 어렵다. 우리말의 가락과 리듬에서 비롯되는 시의 감칠맛이라는 것이 실제로는 이들 허사, 즉 접속사나 대명사나, 조사나 어미의 세련된 운용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이들 허사 중에서 접속사가 앞의 문장과 뒤의 문장을 논리적으로 연결시키는 기능을 하고, 조사나 어미가 앞의 단어와 뒤의 단어를 문법적으로 연결시키는 기능을 한다는 것은 두루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대명사가 代置와 강조의 기능을 한다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이들 허사는 시의 언술구조를 좀더 문법적으로, 논리적으로, 추상적으로 만드는 데 기여한다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형상성을 낮추는 것이, 곧 이미지 사유를 약화시키는 것이 이들 문법소(논리소)로서의 언어자질이라는 뜻이다. 많은 시인들이 자신의 작품에서 논리소로서의 이들 언어자질을 되도록 생략하려고 하는 것도 다름 아닌 이 때문이다. 따라서 허사를 어떻게 운용하느냐에 따라 시의 정서와 분위기는 크게 달라질 수밖에 없다. 이들 허사의 운용에 의해 이른바 시에서의 감정가치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이 결정된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4) 행과 연, 형상의 구조   화법과 어조의 실제인 문장과 문체에 대해서 집착하는 단계를 지나게 되면 대부분의 습작자들은 시의 행과 연에 대해 집착하는 단계에 이르게 된다. 시에서 行과 聯은 기본적으로 호흡과 리듬, 이미지와 의미의 단위로서 개별 시의 정서적 특징을 산출하는 기본적인 기제라고 할 수 있다. 일단 행과 연은 이들 언어 뭉치가 다름 아닌 시라는 사실 자체를 증명해 주는 약속으로 기능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상의 언어 습관, 즉 줄글에 파격을 가해, 곧 줄글을 낯설게 만들어 그것이 다름 아닌 시라는 언술구조임을 드러내주는 근거로 작용하는 것이 행과 연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시의 행 처리나 연 처리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는 것은 어느덧 시의 심미적인 형식이나 구조에 대한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는 것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우선 행은 4음보 리듬이나 3음보 리듬을 기본 단위로 하는 가운데 가락을 밀고 당기고, 끊고 맺고, 꺾고 젖히는 등의 작용을 한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행은 시의 울림이 지니는 맛과 멋을 만드는 핵심 요인으로 작용한다. 행에 대해 집착하는 것이 시의 리듬은 물론이거니와 심미적 형식과 구조에 대해 집착한다는 뜻이 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들 단계에 이르게 되면 마침내 행의 처리에 따라 형성되는 시의 문자들 자체가 이루는 추상적 도형 역시 시의 심미적 형상과 무관하지 않다는 점까지 깨닫게 된다. 이른바 구체시가 지니고 있는 심미의식까지 받아들이는 단계로 나아간다는 얘기이다. 리듬이 행의 기본 단위라고 하지만 이 때의 행은 낯설게 하기를 통해 새롭게 개성적으로 조형된 것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연은 가독성 등 시각적 효과를 산출한다는 점에서 습작자들에게 일단 주목이 된다. 뿐만 아니라 연의 비율과 안배가 시의 심미적 형식과 구조를 낳는 매우 중요한 자질이라는 점 또한 습작자들의 관심을 끈다. 연이 있을 때와 없을 때 발생되는 심미적 효과에 대한 고민에 빠져 있다는 것은 그만큼 습작자가 시라는 언어예술에 대한 감각이 향상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물론 연이 꼭 필요한 시도 있을 수 있고, 그렇지 않은 시도 있을 수도 있다. 월령체 민요처럼 통일된 언술 체계를 반복해 가며 시상을 전개하는 부연과 나열의 시의 경우에는 연의 구분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러나 하나의 초점을 중심으로 이미지나 정서가 수렴되고 집합되는 응축과 압축의 시의 경우에는 연이 꼭 필요한 것도 아니다. 이러한 시의 경우에는 연을 나누는 것이 오히려 언어의 긴밀성과 정밀성을 저해하기 쉽기 때문이다. 행과 연이 지니고 있는 심미적 특징에 대한 고민을 충분히 겪은 습작자라면 그들 스스로도 이제는 대강 시의 형식이나 구조가 익숙해지는 것을 느끼게 된다. 점차 시가 몸에 배게 된다는 것인데, 그들의 경우 이럴 때일수록 시의 형식이나 구조가 갖는 상투성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는 노력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매 편의 시가 그 자체로 완결된 자기 형식, 자기 구조를 만들어 간다는 점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쯤 되면 창작자들은 무엇보다 먼저 자신의 작품 자체와의 관계에서 미적 거리를 취할 수 있게 된다. 그럴 때 비로소 작품의 초점을 중심으로 전체 형상을 객관적으로 조감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단계에 이르게 되면 창작자들은 실제의 경험적 정서를 덜어내기도 하고 덧붙이기도 하면서, 나아가 그것을 객관적 사물에 의탁하기도 하면서 시적 형상 전체의 리듬과 가락을 밀고 당기고, 꺾고 젖히고, 맺고 끊는 등 읽는 맛과 멋을 살리기 위해 총체적인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물론 지금까지의 이러한 노력만으로 한 편의 시가 완미한 형상을 갖는 것은 아니다. 이들 각각의 단계에서의 모든 작업이 실제로는 세부의 충실성을 기하기 위한 다양한 노력 중의 일부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의 각각의 단계를 거치게 되면 작품의 내부에 존재해 있는 초점을 중심으로 전체의 형상을 완성할 수 있는 능력을 갖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해 가는 것이 보통이다. 요컨대 이제는 형상의 총체성을 치밀하게 運算해낼 수 있는 능력을 기르는 단계에 도달하게 된다는 것이다. 작품 전체의 형상이 완미성을 이루기 이해서는 창작자가 무엇보다 고도로 집중된 균형과 조화의 능력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이 때의 집중은 창작되고 있는 작품에 대한 미적 거리를 포함한 객관적이고 관조적 마음의 압축적이고 응축적인 작용을 뜻한다. 영감에 들떠 초고를 써내려 갈 때와는 다른, 그야말로 건축 설계사를 능가하는 치밀한 지성의 작용에 의한 총체적인 운산과 계산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구조적으로 완벽한 시라는 언어의 건축물을 세울 수 없기 때문이다. 말할 것도 없이 이 단계는 습작자가 도달하는 최후의 경지라고 할 수 있다. 전체의 형상이 완미해지는 과정에 각 부분의 이미지들이 어떻게 수렴되고 집합되는가를 아주 꼼꼼하게 묻고 대답하는 것이 이 단계에서 습작자가 해야 할 일이다. 따라서 시를 구성하는 어휘들 하나하나가 작용하는 힘의 역학에 대한 끈질기고도 세밀한 계산과 운산을 해낼 수 있는 사람만이 이 단계에 이르게 된다고 할 수 있다. 제대로 이 단계에 도달한 창자자라면 흔히 허사라고 일컬어지는 접속사나 지시어, 조사나 어미 등 형상소나 의미소와는 관계없는 문법소 일반에 대해서까지도 정밀한 감각을 온몸으로 터득하게 된다. 이들 허사를 자유자재로 부리지 못하고서는 시어들의 질서가 이루는 윤기와 활기를 원하는 대로 구사할 수 없다는 것을 창작자 자신이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지에 이른 창작자는 마침내 한글 24 자모 하나하나에 대한 색깔과 향기, 미감과 음감, 그리고 촉기까지도 섬세하게 감별할 수 있게 된다. 섬세하고 개성 있는 언어의 감별사가 되지 않고서는 제대로 된 시인으로 성장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3. 맺음말: 時空間의 미적 거리와 퇴고의 중요성   앞에서 줄곧 논의해온 이런저런 절차와 단계의 작업이 매번 시간의 순차에 따라 따로따로 개별 분산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편의상 이렇게 나누어 기술하기는 했지만 실제로는 이 모든 절차와 단계가 창작의 과정에 한꺼번에, 그리고 동시다발적으로 이루어진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적어도 초고 형태로서의 창작품 자체는 그야말로 한순간에, 문득 별안간 갑자기 퍼뜩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시를 가리켜 흔히 영감의 산물이라고 하는 것도, ‘순간의 거울’이라고 하는 것도 다름 아닌 이에서 기인한다. 시적 인식의 방법론적 특징으로 흔히 ‘직관’을 드는 것도 물론 이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이렇게 씌어진 작품이 곧바로 완미한 형상을 갖는 것은 아니다. 창작 자체에 몰두해 있다 보면 본래 작품 전체와의 미적 거리가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 법이다. 시공간의 미적 거리를 갖는 가운데 퇴고를 거듭해야 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언어 예술로서의 시창작 과정에 제작의 속성이 없지 않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처럼 시창작 과정에도 기술의 속성이 없지 않은 만큼 창작자 모두에게 오랜 습작과 수련이 요구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그렇다고는 하더라도 정작 시가 완미한 형상을 획득하는 것은 생각처럼 쉽지 않다. 일급 시인의 작품이라고 할지라도 때로는 선택되는 소재와 주제 자체만으로 심미적 수준이 결정되는 예가 상당하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창작의 과정에 소재와 주제, 대상과 세계관의 선택이 더없이 중요하게 취급되는 것도 실제로는 이 때문이다. 너무나 당연한 얘기지만 작품의 수준이 창작자의 손기술만으로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시대와 사회, 역사와 계급 등 외적 배경도 매우 중요한 변수로 작용하지만 좋은 시는 본래 창작자의 지혜의 깊이, 그리고 영혼의 울림과 함께 하는 법이라는 점을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물론 이번의 ꡔ살아있는 시ꡕ 제4집에도 이러한 뜻에서의 탄탄하게 완성된 작품이 아주 없지는 않다. 흠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는 좋은 시의 반열에 올라 있는 작품도 적잖다는 얘기이다. 조정임의 「저녁, 목탁소리」 「세연정」 「내 안으로 우주가」, 정영숙의 「눈」, 유상덕의 「맛」, 조영자의 「연필 한 자루」, 박승미의 「낡은 선창」, 이종숙의 「이제는 분주해야겠습니다」, 박미숙의 「매화농원」, 김진호의 「고운 님」 등의 시가 그 구체적인 예이다. 결점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일정한 정도까지는 충분히 완성되어 있는 것이 이들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위에 예를 든 작품 중에서 좀더 눈에 띄는 것은 조정임의 시라고 생각된다. 그의 시들은 젊은 시인들의 좋은 시가 보여주는 심미적 호흡과 거의 맞닿아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정임의 시는 정연하게 이미지를 배치할 줄 알고 있다는 점에서, 나아가 삶의 깊이를 융숭하게 담아낼 줄 알고 있다는 점에서 상대적으로 좀더 우월한 역량을 보여준다. 그의 좋은 시 한편을 감상하며 글을 맺는다.(ꡔ시를 사랑하는 사람들ꡕ 2003년 1, 2월호)   처음에는 작은 변화를 주고 싶어 하얗고 얇은 커튼의 한 쪽 귀를 살짝 꽃무늬 핀으로 말아 올렸더니 좀 멋스러워 보였다. 새벽이면 아침이 그 사이로 먼저 삐죽이 들어서기 시작하면서 느낌이 어제와 사뭇 달랐다. 커튼을 젖히지 않고도 몸만 낮추면 바람이 비를 어떻게 부르는지 바라볼 수 있었다. 밖이 궁금해 전보다 더 자주 내다보았다 어둠 속에서 등불을 켜면 그 사이로 밝아진 방이 먼저 새어 나갔다.   어느새 내 마음 한 쪽도 살짝 들어 올려졌다. 서서히 넓혀진 틈새로 맨 먼저 미운 당신을, 고운 당신을 내 안에 끌어 들여 작은 우주를 만들었다. 우주가 이렇게 가볍게 들어 올려질 줄을 전에는 생각해 보지 않았다. 내 안으로 우주가 다 들어오고도 빈터가 남을 줄은 정녕 몰랐다.    
912    詩공부하지 않고서는 말할것 없다... 댓글:  조회:4600  추천:1  2016-01-09
詩 쓰는 사람이 착한 이유  - "칸트 미학"을 바탕으로                             윤성택  1. 들어가는 글  詩 쓰는 사람이 착한 이유는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을 칸트의 미학에서 찾고자 한다. 물론 내가 詩를 쓰는 문청文靑이기에 갖고자 하는 답은 아니다. 이 시대가 갖고 있는 어두운 면들을 살펴볼 때 詩를 쓰는 사람이라도 착한 사람이었음 하는 바램 때문일지도 모른다. 정확히 말해 이 시대의 詩人들에 대한 나의 희망일지도 모른다. 칸트는 "판단력 비판"에서 미학을 다룬다. "자연의 목적론"이라 하기도 하고 "유기체철학"이라고 하기도 하는 그의 철학세계를 접하다 보면 한 가지 답에 도달하게 된다. 도덕적 감수성이 선행되어야 진정으로 미를 감상할 수 있다라는 것이다. 이 말의 이면에는 詩 쓰는 사람이 착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내포하고 있다. 칸트가 말한대로 자연미와 도덕성에 관련지어 알아보기로 하자.  2. 몸 글  예전에 나는 수원 근교에 있는 광교산에 간 적이 있었다. 나는 산 정상에 올라 가뿐 숨을 내쉬며 산의 아름다움에 취해 한동안 멍하니 산 아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詩를 썼었다.  빈몸으로 나를 초대하는 나무들이 있다  걷다 보면 산은 돌아누우며 어느새  좁은 샛길을 열어 보인다  턱 끝까지 숨이 차올라  오르는 것이 산 앞에 조금 더 겸손해 질 즈음  바람은 나뭇가지를 빗질하며  눈부신 햇살을 쏟아 놓는다  좁은 길 하나 사이로 서로 뿌리를 잇대고  가지를 잇댄 나무들  사랑하라 사랑하라  고개를 끄덕이며 귀엣말로 속삭이는 것 같다  언제나 갑갑한 넥타이에 매여  꽉찬 만원버스에 섞여  이정표도 없이  지금껏 얼마나 흘러 왔던가  세상 살아가며  한 해 한 해 나이테를 생각하며  봄산에 올라간다 묵묵히 겨울을 이겨낸  나무들의 수화를 배우러 간다  층계를 밟아 오르며 나를 짓눌렀던  삶의 무게 떨쳐 버리고 싶을 때,  하늘을 나누어 이고  서로 넉넉히 몸 맞대다 보면 알 수 있을까  저 아래 도시에서 키웠던 허물 많은 것들  얼마나 어리석었는가를  얼마나 슬퍼지는가를  가리울 것 없는 이른 봄산에 올라서면,  나의 황량한 정신에 초록 물을  들이고 싶다.  ― 이른 봄산을 오르다, 윤성택  물론 나는 진정한 詩人이 못된다. 그래서 끊임없이 진정한 詩人이 되고 싶어한다. 그 간절한 바램처럼 자연 속에서는 노래가 있다. 들판에는 풀잎과 동물들이 부르는 노래가 널려 있으며, 하늘에는 별과 바람이 부르는 대자연의 합창이 메아리친다. 진정한 詩人은 그 소리를 주의 깊게 듣고 공감한다. 자연에 대한 아름다움의 관찰은 그 사람에 대한 정신의 깊이와 섬세함을 엿볼 수 있게 한다. 또한 이러한 아름다움을 통해서 도시의 세속적인 소음을 극복하려는 충동을 가지게 된다. 그 아름다움을 고찰 할 수 있는 예술가 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진정한 詩人이라고 생각한다.  어린 눈발들이, 다른 데도 아니고  강물 속으로 뛰어내리는 것이  그리하여 형체도 없이 녹아 사라지는 것이  강은,  안타까웠던 것이다  그래서 눈발이 물 위에 닿기 전에  몸을 바꿔 흐르려고  이리저리 자꾸 뒤척였는데  그때마다 세찬 강물소리가 났던 것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계속 철없이 눈은 내려,  강은,  어젯밤부터  눈을 제 몸으로 받으려고  강의 가장자리부터 살얼음을 깔기 시작한 것이었다.  ― 겨울 강가에서, 안도현  칸트는 도덕성이 자연에 의해서 투사되는 것이 아름다움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자연의 목적론은 법칙에 의해 설명되지 않는 자연의 유기적 질서와 근원을 탐구한다는 이론을 보인다. 이러한 노력은 취미 능력과 많은 상관관계를 가진다. 칸트의 취미능력은 바움가르텐으로부터 쉴러에게 이어지는 계보를 형성한다. 미적인 것에 대한 즉각적인 반성적 판단력이 취미 능력이다. 이것은 인간에게는 누구나 선천적으로 미를 판단하는 능력을 가졌음을 인정하고 거기서 보편적인 도덕성을 계발시켜야 하는데, 그러한 원리를 밝혀내는 것이야말로 취미비판이라고 말한다. 잠깐 더 자세히 들어가자면, "이것이 아름답다!"라고 말할 때 거기서 드러나는 미적 판단의 분석을 칸트는 성질, 양, 관계, 양태의 네 가지로 분석을 했었다.  어쨌든 칸트는 미적 형식이 갖고 있는 특성은 목적 없는 한 목적성으로서 유기적 통일적인 질서구조가 있음을 말한다. 그래서 진정 자연의 아름다움은 예술미의 모범성이 된다. 인간이 도덕적인 심성을 가지고 있을 때 자연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그 자연이 마치 누군가 창조한 예술작품처럼 보일 때 아름답게 느낀다는 것이다. 도대체 이 기막힌 자연을 창조한 사람이 누구냐라는 자연의 기술 앞에서 창조주에게 겸허함과 경외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누가 쓴 편지일까?  거미가 소인을 찍고  능금나무가 저렇게 예쁜 우표를 붙인.  ― 가을 하늘, 김영남  칸트가 말하듯 자연이 인간에게 주는 암호를 해독하는 임무를 지닌 사람은 이렇듯 예술가이다. 또한 칸트는 "천재는 자연의 총아이다"라고 말한다. 자연을 해독하는 상상력의 중요성을 보이는 것인데 여기서 이러한 천재는 천성이며, 교육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고 칸트는 지적한다. 그래서 일까. 詩人은 고민한다. 자연 앞에서 해독되어지는 많은 것들이 천재가 아님으로 드러나는 일말의 불안감!  그는 그때  구름의 가장 부드러운 부분을 뚫고  터져 흐르는 상처, 따가운 햇살 같은 상처를  아름다움이라고 해독했다  아름다움의 가장 처절한 結晶  단단한 바위 속의 어둠을 깨기 위해  천년을 기다려서 터지는 샘물  차가우면서 때로는 따사롭게 느껴지는 그것을  그는 눈물이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이 땅의 도처에 살아 움직이는  눈물의 내력을 모른다  눈물의 가장 단단한 부분과 부드러운 부분이  어떻게 만나서 어둠 속에 함께 녹아 흐르는지  알지 못한다  내 주위의 싱싱한 풀들이며 바위며 샘물들  그가 이 땅에 풀어놓은 온갖 언표들을  나는 쉽게 해독할 수가 없다  무지한 내 생각과 의지와는 상관없이  오늘도 이 땅의 책들 위엔 이상한 꽃이 피고  이상한 열매가 맺히고 이상한 향기들이  춤을 추고 있다  누군가 나를 읽고 있다  ― 이상한 독서 (2, 3연), 박남희  결국 칸트는 진정한 예술은 자연처럼 보이는 예술이라고 말한다. 천재의 자연적인 능력은 미적인 정신과 맞닿아 있고, 이러한 미적 정신은 상상력과 지성의 자유로운 놀이에서 볼 수 있다. 바로 여기서 인간의 선천적인 내부의 것을 감성화시키는 것이야말로 미적 이념이다. 그러므로 칸트는 쉴러가 말한 미적 직감 능력처럼 천재는 미적 이념을 표현해 낼 수 있다고 본 것이다.  퓨즈가 나간 숲은 깜깜하다. 나무 꼭대기 새집조차 어둡다. 길이란 길은 모두 지워지고 온전한 것이 있다면 푸르던 기억에 항거하는 단단한 그리움이다.  한계절 사랑의 불 환하게 밝혔던 나무들, 열매들, 그리고 새들, 그 사랑의 흔적을 罪라고 말해서는 안된다. 물론 그냥 상처다. 이 겨울의 어둠 아니 한줄기 빛을 참고, 그래 빛이야말로 얼마나 많은 것들에게 상처가 되었나. 눈부신, 찬란한, 아름다운 따위의 형용사와 눈이 맞아 저지른 빛의 횡포, 가지마다 넘치는 축복인 양 위선의 잎새 덕지덕지 달아주며 오늘의 상처를 마련했었다. 누구라도 헛발 자주 내딛고 나뒹굴던 시절, 쌈짓돈마냥 숨겨둔 사랑의 잎새 하나만 있어도 가슴은 이리 훗훗한 그리움이다.  어딘가에 한 뭉치 퓨즈가 분명 있을 것이다. 계절과 계절의 끈을 잇고 명치 끝을 꾸욱 누르면 혼곤한 잠의 머리 절레절레 흔들며 숲은 그날처럼 홀연히 일어날 것이다. 때문에 새들은 이 겨울 떠나지 않고 하늘 받들어 빈 숲을 지키고 있다.  - 퓨즈가 나간 숲, 한혜영  칸트 식으로 말하자면, 생명을 창조하는 것처럼 예술가는 예술작품을 남긴다. 예술작품은 곧 삶을 해석하는 것이며 그리고 매우 독창적이다. 여기서는 모방이 있을 수 없다. 오로지 유일한 작품인 것이다.  미학에는 두 가지 방법론이 있다. 하나는 "인식으로서의 예술"인데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인식과 행위로서의 통합으로 이어져 근대 미학으로 감성적 인식의 최초였던 바움가르텐, 영국의 경험론이었던 칸트, 그리고 현대의 분석미학, 현상학적 미학을 등을 꼽을 수 있다. 다른 하나는 "행위로서의 미학"예술로서 쉴러, 헤겔, 신막스주의의 미학으로 들을 수 있다. 이러한 미학을 살펴볼 때 칸트의 미학은 단연, 도덕적 감수성이 선행되어야 진정으로 미를 감상할 수 있다는 결론을 생각하게 만든다.  예술작품이란 무엇인가. 그 아름다움의 탐구에서 헤겔은 미적가상이라고 말했고 칸트는 미적 이념의 표현이다라고 말했다. 그러한 인상적이면서 경험적인 바탕을 둔 칸트 미학은 숭고미에 중점을 둔다. 도덕적으로 접근하여 마치 거대한 성당에 들어갔을 때 거기서 느끼는 경외감, 즉 종교적 신성미 등을 그는 중요시했다고 본다.  고드름 기둥  층층이 얼어붙은  층암절벽에  소나무 한 그루  눈을 이고 서서  희망과 절망의 수십 년 세월  안간힘으로 뻗어간 뿌리의 용틀임과  뿌리가 엉키는 자리에 터잡은  어린 진달래의  녹두만한 꽃눈을  바람 타고 나는  기러기 소리 들으며 시리게 바라보네.  - 세한도, 최두석  결국 칸트는 예술미와 자연미의 비중을 생각했을 때 자연미 쪽에 좀더 비중을 두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3. 나오는 글  음악의 성인이라 불리우는 악성 베토벤이 존경하는 철학자는 칸트였다. 그의 생전에 음악 악보에는 칸트의 실천이성 이론이 빽빽하게 적혀 있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칸트의 미학적인 측면에서 볼 때 왜 많은 사람들이 그의 미학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는가.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도덕적 감수성이 선행되어야 진정으로 미를 감상할 수 있다라는 것이다. 그 바탕은 참으로 詩人이 선할 수밖에 없는 타당한 근거를 제시해 준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선천적으로 미를 판단하는 능력이 있으며, 자연에 대한 아름다움은 그것을 바라보는 인간의 도덕적 심성에서 우러난다는 절대절명의 명제에서 알 수 있는 것이다.  세상이 아름답지 못하다라고 아우성치면서 위장된 절망과 죽음을 외치는 무리들, 아니면 미증유의 행복을 가져다주었다고 외치면서 이 시대와 야합하여 살아가는 불나방 같은 무리들. 그 진흙탕 속에서 시를 일구어 내는 진정한 시인을 그리워 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것인가. 동양의 예로볼 때 공자는 공자어록에서 "시를 공부하지 않고서는 말할 게 없다"라는 말을 남기고 있다. 시를 배움이 곧 말배움임을 뜻하면서 시가 말의 모든 것을 갖추고 있음을 시사하는 말이다. 하물며 이 어두운 세상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것인지 다시 한 번 들여다보게 만드는 좋은 예이다.  나는 솔직히 칸트의 미학을 공부하면서, 간절한 소망 하나를 품을 수 있게 되었다. 이 시대의 시인은 분명 착해야 되는 것이며, 자연이 인간에게 주는 암호를 해독하는 그 작업이야말로 진정으로 가치 있는 시인의 길이라고 믿고 싶은 것이다.  - ■ 참고문헌  칸트 미학 이론/ D.W 크로포드/ 김문환 옮김/ 서굉사/ 1995  칸트와 미학/ 한국칸트학회/ 민음사/ 1997  동양과 서양 두 지평선의 융합 (149-246쪽 동서철학의 비교, 유가와 칸트)/ 이광세/ 길/ 1998  그리운 여우/ 안도현/ 창비시선163 (8쪽, 겨울 강가에서)/ 1997  정동진 역/ 김영남/ 민음의 시87 (90쪽, 가을 하늘)/ 1998  97 신춘문예당선시집/ 문학세계사(111쪽, 박남희, 이상한 독서)/ 1997  96 신춘문예당선시집/ 문학세계사(153쪽, 한혜영, 퓨즈가 나간 숲)/ 1996  사람들 사이에 꽃이 필 때/ 최두석/ 문학과지성 시인선 207 (16쪽, 세한도)/ 1997  시란 무엇인가/ 유종호/ 민음사(11쪽, 주체적 독자를 위하여)/ 1995  
911    詩쓰기 그리기... 댓글:  조회:3855  추천:0  2016-01-09
그리려는 시쓰기                            강사/윤석산  지난 시간에는 에 대해 알아봤으니, 이번 시간에는 에 대해 함께 알아보기로 할까요? 미국의 신비평가 랜섬(J. C. Ransom)의 분류에 의하면, 말하려는 시는 관념시(platonic poetry), 그리려는 시는 에 해당합니다.  그리려는 시 쓰기에 앞장 선 사람들로는 흄(T. E. Hulme), 파운드(E. Pound), 로우엘(A, Lowel), 두우리틀(H. Doolittle), 알딩턴(R. Aldington) 등이 주축이 된 이미지스트들을 꼽을 수 있습니다. 고등 교육이 보편화되고, 독자들의 의식 수준이 시인들과 비슷해짐에 따라 더 이상 시인의 하소연이나 설교를 들으려하지 않는다는 걸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세계문학사를 살펴보면 그리려는 시는 이들이 처음 쓴 게 아닙니다. 한자문화권에서는 일찍부터 이런 시를 써왔습니다. 중국의 한문은 상형성(象形性)이 강하고 우리말과 일본어는 감각어가 발달했기 때문입니다. 이 운동을 주도해온 파운드가 중국의 당시(唐詩)와 일본의 와까(和歌) 하이꾸(俳句) 등을 번역하여 이미지즘 운동의 전범으로 삼은 것도 이 때문입니다.  그것은 향가나 우리의 한시를 살펴보아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구름을) 열치매  나타난 달이  흰구름 쫓아 떠가는 것 아니냐  새파란 냇가에  기랑의 모습이 있어라  이로부터 냇가 조약돌에  낭이 지니시던  마음의 끝을 좇고 싶어라  아으, 잣가지 높아  서리를 모를 화반(화랑장)이여  -충담사, [찬기파랑가(讚耆婆郞歌)] 전문  ⓑ비 그친 강나루 긴 언덕에 풀빛만 날로 푸르러가는데(雨歇長堤草色多)  남포로 님 보내는 슬픈 노래만 허공 가득 떠도네(送君南浦動悲歌)  해마다 이별의 눈물을 보태 푸른 물결 넘실대는데(別淚年年添綠派)  대동강 물 언제 말라 임 만나거 갈꼬(大洞江水何時盡)  - 정지상(鄭知常), [송인(送人)]  이미지를 강화시킨 작품만 골랐기 때문에 그렇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다면, 우리말과 인구어를 비교해봐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영어에 다는 낱말은 "red"과 "reddish" 두 개밖에 없지만, 우리말에는 "붉다"·"불그스름하다"·"볼그스름하다"·"발그스름하다"·"불긋불긋하다"·"빨긋빨긋하다"·"뿔긋뿔긋하다"·"빨갛다"·"시뻘겋다"·"새빨갛다"·"검붉다"·"불그죽죽하다" 등 이루 다 열거할 수가 없습니다.  이와 같이 는 무엇을 그리려 하느냐에 따라 다시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시인의 외부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대상을 그리려는 유형이고, 다른 하나는 시인의 내부에서 일렁이는 정서, 무의식, 상상의 결과 등을 그리려는 유형입니다. 그리고, 무엇을 그리려 하느냐에 따라 시를 쓰는 방법도 달라집니다.  그러면 먼저 시인의 외부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대상을 그리는 방법부터 살펴보기로 할까요?  외부의 대상을 그리려면 먼저 언어의 속성을 파악해야 한다.  외부에 존재하는 대상을 그리려 할 때 우선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시인은 자기가 거론하는 사물의 모습을 떠올리며 쓰고 있지만, 독자들은 시인이 말한 것의 의미만 받아들이고 사물의 모습을 떠올리지 못하기가 일쑤라는 점입니다. 언어는 사물에 부여한 자의적 명칭으로서, 아래처럼 , 은 직접적인 관계이지만, 은 간접적인 관계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Language)독서의 출발 → (Object)  그러므로, 시인이 말한 대로 독자가 받아들이도록 만들기 위해서는 와 의 관계를 강화시키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언어에 따라 사물의 모습을 환기(喚起))시키는 정도가 다르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가령 어떤 시인이 시를 쓸 때, "꽃이 피었다"라고 썼다고 합시다. 그 시인은 그 꽃이 "개나리"인지 "장미"인지 알고 씁니다. 그리고 어디에 어떻게 피었는지도 알고 씁니다. 그러나, 그 꽃을 목격하지 않은 독자들은 무슨 꽃인지, 어디에 어떻게 피었는디 모릅니다. 그러므로, 먼저 "장미"라든지 "개나리"라고 좀 더 구체적으로 "의미의 레벨(meaning level)"을 높혀 써야 합니다.  하지만 이와 같이 종(種)을 이야기하는 정도에서 그 꽃의 모습을 떠올리기를 바라는 것은 무리입니다. 같은 장미라고 해도 조세핀도 있고, 에스메랄드도 있고, 빨간 장미도 있고, 노란 장미도 있고, 빨간 색도 새빨간 색도 있고, 불그스름한 색도 있고, 볼그스름한 색도 있고…. 그리고, 언제 어디에 어떻게 피었느냐에 따라서 달리보입니다. 그러므로, 되도록 문장을 이루는 각 성분의 의미 등급을 높혀서 표현해야 합니다. 한번 제가 단계별로 높이며 표현해 볼까요?  ①꽃이 피었다. ②장미가 피었다. ③에스메랄다가 피었다. ④붉은 에스메랄다가 피었다. ⑤발그스름한 에스메랄다가 피었다. ⑥발그스름한 에스메랄다가 반쯤 봉오리를 열었다. ⑦뜨락 한구석, 에스메랄다가 반쯤 봉오리를 열었다. ⑧눈부신 햇살이 쏟아지는 뜨락 한구석 발그스름한 에스메랄다가 반쯤 봉오리를 열었다. ⑨눈부신 햇살이 쏟아지는 뜨락 한구석 발그스름한 에스메랄다가 반쯤 봉오리를 연 채 하늘하늘 흔들리고 있다. ⑩눈부신 햇살이 쏟아지는 뜨락 한구석 발그스름한 에스메랄다가 반쯤 봉오리를 연 채 하늘하늘 흔들리면서 아찔한 향기를 흩뿌리고 있다.  어떼요? , 그리고, 서술부를 처럼 구체화하니까 직접 보고 있는 느낌이 들지요?  이런 능력은 글을 쓰기 위하여 기본적으로 갖춰야 할 능력에 속합니다. 그리고 타고나는 게 아닙니다. 빨리 말하지 말고, 차츰차츰 의미를 좁혀가며 말하면 누구나 가능합니다. 그리고 문장의 각 성분을 구체화하여 전체 길이가 길어지면 적당한 길이로 잘라 다른 문장으로 만들면 됩니다.  이와 같이 이미지화를 할 때는 두 가지 유의할 점이 있습니다. 첫째로 대상을 정적(靜的)으로 그리기보다 동적(動的)으로 그리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시각적인 것만 그리지 말고, 청각, 후각, 촉각, 미각 같은 것들까지 포함하여 공감각적(共感覺的)으로 그리는 것이 효과적입니다. 그것은 앞의 예 가운데 정지태(靜止態)로 그린 ⑧ 이전의 것들과 동태(動態)로 그린 ⑨, 그리고 시각에 후각을 첨가시킨 ⑩을 비교해보면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인식 활동은 단일한 자극보다 총체적인 자극을 받았을 때 보다 활발하게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910    ...해답일뿐, 정답은 아닙니다... 댓글:  조회:4262  추천:0  2016-01-09
시의 여행을 떠나면서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많은 대상과 현상을 만납니다. 이런 대상과 현상의 모든 것을 세계라고 합니다. 이 세계에서 우리 는 무엇인가를 보고, 느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을 표현하고 싶은 욕구를 가집니다.  그럼, 대상과 현상에서 느끼고 생각한 것을 어떻게 한 편의 시로 표현해야 하는 걸까요? 이런 막연한 질문에 시인도 독자도 당 황하는 때가 많습니다. 예술이라는 이름의 것들은 그것에 접근하는 방법이 다양하고, 그 방법을 구체화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 다.  기존 시인들의 작품을 수없이 읽고, 외우고, 자기의 작품을 끊임없이 쓰고, 지우다 보면 표현 방법이 저절로 터득된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길은 너무 멀고, 그것은 지도 없이 세계여행을 떠나는 행위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나, 나 름대로 시를 쓰고, 지우고, 다시 쓰면서 느끼고, 생각한 것을 정리하여 옮겨 보기로 했습니다. 더 정확히 말한다면, 부끄럽지만 나의 시작 과정을 밝힌 것입니다. 그러나 이 글은 나의 해답일 뿐, 정답은 아닙니다. 그것은 살아가는 방법이 다르듯이 시를 쓰 는 방법이 사람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글에서 인용한 모든 시는 나의 시 중에서 가려 뽑았습니다. 나의 시작 과정을 밝히는 글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습 니다. 인용한 시들은 나의 삶 속에서 캐낸 평범한 이야기들을 소재로 하여 우리가 사용하는 일상적인 언어를 도구로 한 것들입 니다. 살아오는 동안, 가슴에 남은 이야기들을 시로 바꾸어 보았다고 하는 것이 옳은 말일지 모릅니다.  평범한 것이 아름답고, 쉬운 것이 옳다는 말을 나는 좋아합니다. 시는 쉬워져야 합니다.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가 아니라 누 구나 쉽게 부를 수 있는 노래가 되어야 합니다. 달나라나 별나라의 신기한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들의 삶 속의 이야기가 드러나 야 됩니다. 이 글은 시를 전문으로 쓰는 시인들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시에 대해 호기심을 가진 사람들의 길 잡이가 되는 것입니다. 시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 자신들의 삶 이야기를 시로 바꾸어 보는 연습을 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책의 제목을 '자, 떠납시다, 시의 여행을'이라고 하였습니다. 시를 쓰는 과정을 함께 가 보자는 생각에서 정한 것입니다. 평범한 마음으로 평범한 대상들을 가슴에 담아 시로 바꾸어 보자는 것입니다.  '자, 떠납시다, 시의 여행을'.  여행 준비  시의 여행을 떠나기 위해서는 시에 대한 이론을 조금은 익혀야 합니다. 이것이 여행 준비. 이 장에서는 시의 개념, 표현 방법, 대상인식 등에 관한 것을 살펴보기로 합시다.  1. 시의 개념  예술은 어떤 대상(사물과 현상)에 대한 인식을 아름답게 표현하?것을 말합니다. 그 중, 언어를 도구로 하는 것이 문학, 문학 중에서 운율을 강조하는 것이 운문, 운문의 대표적인 형태가 시입니다. 다시 정리하여 보면, 시는 대상에 대한 인식을 운율 있 는 언어로 아름답게 표현한 문학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대상은 시의 소재, 즉 글감을 말합니다. 당신이 살아가면서 만나는 어떤 대상이 당신에게 감흥을 주었다면, 그것이 시 의 소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럼, 다음 시를 읽으면서 시의 여행을 준비해 봅시다.  하루에 한 번쯤은 혼자 걸어라.  세상 이야기들 그대로 놓아 두고  세상 밖으로 걸어 나와라.  말이 되지 말고, 소가 되어  나에게 속삭이며 혼자 걸어라.  괴로움이 나를 따라 오거든  내가 나에게 술도 한잔 받아 주고  나를 다독이며 혼자 걸어라.  나무도 만나고, 바람도 만나면  마음은 어느 사이 푸른 들판  잊었던 꽃들이 피어나고  고향 내음새 되살아나  내 가슴을 울리는 나의 콧노래  하루에 한번쯤은  이렇게 나를 만나며 살아가거라.  - 하루에 한 번쯤은-  시는 외로움과 그리움을 먹고사는 것, 혼자가 되어 한 번 걸어 보십시오. 발은 걸으라고 조물주가 만들어 준 것.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남이 아니라 당신 자신과 함께 걸어 보십시오. 가슴에 엉켰던 것이 녹아 내리고, 스쳐 지나가던 것들이 새롭게 눈을 떠 당신의 친구가 될 것입니다. 멀리 보이던 것들이 가까이 보이고, 가까이 보이던 것들이 멀리 보이게 됩니다. 그러면 당신은 거 울이 될 수 있습니다. 만나는 모든 것들을 가슴속에 그대로 담을 수가 있습니다. 어떤 대상과도 말없는 말로 가슴을 열 수가 있 습니다.  풀과 나무에게 다정한 말을 건네 보십시오. 들판의 풍경들을 가슴 속에 그려 보십시오. 하늘을 향해 외쳐 보십시오. 당신 자신 과 해가 지도록 얘기를 나누어 보십시오. 거기에 상상의 세계가 있습니다. 아무도 흉내 낼 수 없는 당신만의 세계가 있습니다. 진실이 있습니다. 거기에서 당신은 당신만의 자유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이러는 동안, 당신에게 감흥을 준 모든 사물과 현상, 즉 대상이 시의 소재입니다.  인식은 대상에 대한 당신의 느낌과 생각을 말합니다. 이것이 시의 바탕이 됩니다. 그리고 시에서의 언어를 시어라고 하는데, 이 시어들의 어울림이 운율입니다.  그렇다면 아름다움이란 무엇을 말하는 걸까요? 그것은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감동은 우리의 가슴에 크 나큰 즐거움을 주는 것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크나큰 즐거움일 수도 있고, 잔잔한 미소를 자아내는 기쁨일 수도 있 습니다. 우리의 가슴을 울리는 슬픔일 수 있고, 눈가에 맺히는 몇 방울의 눈물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울부짖게 하는 함성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것이 우리에게 감동을 줄까요? 그것은 진실한 것입니다. 진실이란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 속에서 우러나는 사랑, 미움, 아 픔, 기쁨, 슬픔을 거짓없이 드러내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런 삶 속에서 빚어지는 고독, 그리움, 방황, 울분 등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것을 말합니다.  왜, 우리는 진실을 표현하려 하는 걸까요? 말을 바꿔 보면, 왜, 우리는 밤을 새워 시를 쓰는 것일까요? 그리고 우리는 왜, 시를 읽는 걸까요?  시를 쓰는 이유는 표현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며, 시를 읽는 이유는 자신의 감동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것입니다.  표현과 감동의 결과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정신적 즐거움과 영혼의 정화입니다. 우리들의 삶을 맑고, 밝고, 풍요롭게 하는 것 을 말합니다.  시에서의 웃음은 기쁨을 밝히는 것, 울음은 슬픔을 걸러 내는 것, 외침은 분노를 털어 내는 것. 결국, 웃음도, 울음도, 외침도 마 음을 정화시키는 정신적 배설작용입니다.  좋은 시를 읽으면 마음이 맑아지고, 좋은 그림을 보면 마음이 고요해 지고, 좋은 음악을 들으면 마음이 그윽해 진다고 말합니 다. 결국 모든 예술은 우리의 삶을 정화시키기 위한 것들입니다.  시를 쓰는 일은 삶의 목적이 아닙니다. 시는 삶을 위한 하나의 방편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시는 삶의 충분 조건 일 뿐이지, 필요 조건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삶을 위해 시가 필요한 것이지, 시를 위해 삶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남에게 보여 주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닙니다.  돌에다 이름을 새기기 위해  사는 것이 정말 아닙니다.  삶의 목적은 삶  죽어 금이 되는 것이 아니라  살아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 삶. 3 -  우리는 지나치게 목적을 중시하고, 과정을 경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삶은 어떤 목적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살아가는 모든 과정, 그 자체입니다. 삶이 다른 목적을 가질 때, 그 삶은 진실성을 상실하게 됩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시를 포함한 모든 예술은 우리가 이루어야 할 목적이 아니라, 삶을 엮어 가는 수단으로써의 가치를 가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진실이 우리에게 감동을 줄까요? 아닙니다. 그 진실을 실감나게 표현했을 때, 우리는 감동을 받습니다.  2. 표현 방법  표현 방법은 어떤 대상에 대해 인식한 내용을 드러내는 방법으로, 묘사와 진술로 나눌 수 있습니다. 묘사는 대상의 현상이나 성 질, 인상을 감각적으로 그려내는 것을 말하고, 진술은 그것들을 묘사하지 않고, 직접 상대방에게 들려주듯 드러내는 것을 말합 니다. 시는 이 두 방법이 알맞게 어우러져 그 모습을 드러내야 됩니다.  묘사의 종류에는 서경적 묘사, 심상적 묘사, 서사적 묘사로 나눌 수 있고, 진술은 독백적 진술, 권유적 진술, 해석적 진술로 나 눌 수 있습니다.  서경적 묘사는 보고, 느낀 것을 직접 그려내는 묘사이고, 심상적 묘사는 마음 속에 떠오르는 풍경을 그려내는 것이고, 서사적 묘사는 사건이나 현상을 시간의 연속을 통해 그려내는 것입니다.  독백적 진술은 인식 주체의 독백, 고백, 반성, 회고, 기원 등을 진술하는 것이며, 권유적 진술은 동조, 참여, 각성을 청하는 인식 의 주체의 주장을 내세운 진술이며, 해석적 진술은 대상에 대한 인식 주체의 이해, 해석, 비판, 판단을 드러낸 진술입니다. 너무 말이 많아 미안합니다. 시를 쓰는 일은 나누는 작업이 아니라 모으는 작업인데 말입니다. 그러나 묘사와 진술의 종류를 아 는 것은 시의 틀을 짜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에 설명했습니다.  시에서의 묘사와 진술은 시적 자아에 의해 드러납니다. 시적 자아란 시 속에서의 인식 주체를 말합니다. 인식 주체는 1인칭인 '나'입니다. 소설에 빗대어 본다면 서술자와 같은 존재입니다. 시에서 주인공일 수도 있고, 대상에 대한 관찰자일 수도 있고, 대 상에 대한 전지적 제삼자일 수도 있습니다.  햇빛 부스러지는 아침  금낭화 속에서 기어 나오는  일곱 점박이 무당벌레  하, 요놈이, 어젯밤  산을 그렇게 울리었구나.  -산 29 -  1연이 묘사이고, 2연이 진술입니다. 1연은 한 폭의 그림을 떠오르게 하고, 2연은 당신의 느낌과 생각을 시적 자아를 통해 상대 방에게 들려주듯 드러낸 것입니다. 그렇다고 묘사와 진술을 선명하게 구분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구분하는 것은 묘 사가 중심이 되었는가, 진술이 중심이 되었는가를 판단하는 것뿐입니다.  * 만나는 대상에서 느끼는 것을 가슴속에 그려봅시다. 만나는 대상에 대해 생각한 것을 가슴에 대고 속삭여 봅시다. 이 때, 느 끼고 생각하는 것을 대상 인식이라고 합니다. 인식한 대상을 그려보는 것이 묘사의 시작이고, 인식한 대상에 대해 속삭여 보는 것이 진술의 시작입니다.  구태여 길게 묘사하고, 길게 진술할 필요가 없습니다. 한 줄의 문장이 오히려 좋을 때도 있습니다. 이것이 대상을 본 후, 곧 바 로 느끼고, 곧 바로 생각하는 직관, 대상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보는 방법입니다. 이것이 바로 대상인식의 첫걸음입니다.     
909    詩작법 구구구... 댓글:  조회:3812  추천:0  2016-01-09
'자, 떠납시다, 시의 여행을''  제2강  3. 대상 인식  대상인식은 대상에 대한 당신의 느낌과 생각을 말합니다. 묘사와 진술에 앞서, 우리는 먼저 대상을 인식하는 방법을 먼저 익혀 야 합니다. 그것은 대상을 인식한 후에야 묘사와 진술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대상인식은 언어를 매개로 하여 이루어집니다. 언어로 느끼고 생각하면서, 또 다른 언어를 만들어낸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 면, 인식한 내용을 묘사와 진술이라는 표현 방법으로 드러내야 한다는 말입니다.  대상 인식은 그대로 보기, 빗대어 보기, 상상하여 보기 등의 3단계로 이루어집니다. 그대로 보기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 는 것을 말하고, 빗대어 보기는 그대로 본 것을 다른 대상에 빗대어 보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상상하여 보기는 그대로 보기 나 빗대어 보기를 바탕으로 하여 새로운 사건이나 상황을 미루어 짐작해 보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인식한 것이 묘사와 진술 에 의해 표현되는 것입니다.  ① 호숫가에 연꽃이 피었습니다.  이것이 그대로 보기입니다. 대상을 보고, 느끼고 생각한 것을 아무 꾸밈없이 옮겨 본 것입니다. 다음은 빗대어 보기. 빗대어 보 기의 열쇠는 질문.  연꽃이 무엇같이 피었습니까? 아니면, 연꽃이 무엇처럼 피었습니까?  ② 호숫가에 연꽃이 부처님 오신 날의 줄등처럼 피었습니다.  글의 소재인 대상을 다른 대상에 빗대어 본 것입니다. 즉 '연꽃'이 무리를 지어 핀 것을 '줄등'에 빗대어 본 것입니다. 다음은 상 상하여 보기. 대상을 빗대어 놓으면 상상의 세계가 펼쳐집니다. 상상하여 보기의 열쇠도 질문. '왜? 어떻게?' 등의 여러 가지 질 문이 있습니다.  이것은 정답이 아닙니다. 해답일 뿐입니다. 상황에 따라 질문이 달라질 수 있고, 질문도, 답도 시인에 따라 다양해 질 수밖에 없 기 때문입니다.  왜, 그렇게 피었습니까? 어떻게 피었습니까?  여기에서 '왜'는 이유, '어떻게'는 상황을 말합니다.  ③ 호숫가에 연꽃이 당신이 오시는 길 밝으라고, 부처님 오신 날의 줄등처럼 여기 저기 피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연꽃은 보다 구체적인 모습으로 다가와 우리의 가슴속에 피어나 불을 밝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상상하기입니다. 여기까지가 대상인식입니다. 이 인식된 내용을 조금만 다듬으면, 시가 될 수 있습니다.  호숫가에 연꽃이 피었습니다.  당신이 오시는 길 밝으라고  부처님 오시는 날의 줄등처럼  온 동네를 환하게 밝혀 놓고  여름이 다 가도록 피었습니다.  1행은 그대로 보기, 3행은 빗대어 보기, 2행, 4행, 5행은 상상하여 보기입니다. 상상하여 보기 중, 2행은 '왜', 4행과 5행은 '어떻 게'에 해당합니다.  대상인식 과정을 나무에 비유한다면 그대로 보기는 씨앗, 빗대어 보기는 싹과 잎, 상상하여 보기는 꽃, 완성된 시?열매입니 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대상에 대한 감흥입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것이라 해도 당신이 감흥을 받지 않았다면, 그대로 보기나 빗대 어 보기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감흥은 순간적이며 직관적입니다. 순간적이며 직관적이라는 것은 어떤 대상을 만났을 때, 곧바로 느끼거나 생각한다는 말입니 다. 그리고 감흥은 그대로 보기와 빗대어 보기 단계에서 이루어집니다. 씨가 싹이 되는 순간에 이루어진다는 말입니다.  아무리 좋은 씨앗도 햇볕과 공기와 습도가 알맞게 어우러지지 않으면 싹을 틔울 수 없습니다. 이것들이 알맞게 어우러지는 순 간에 감흥이 이루어집니다.  햇볕과 공기와 습도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대상을 볼 수 있는 당신만의 눈을 가지게 하는 경험입니다. 이때의 눈 을 심미안이라고 합니다.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는 마음의 눈 말입니다. 그래서 같은 대상을 보고 쓴 시가 시인에 따라 서로 달라지는 것입니다.  어떻게 심미안을 기를 수 있을까요? 그것은 쉬운 것은 아니지만 대상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됩니다. 질문을 가지고 대상에 접근 하면 그것들이 많은 이야기를 해 줄 것입니다. 그 이야기들이 쌓여 경험이 되고, 이 경험이 대상을 보는 당신만의 눈을 새롭게 해 줍니다. 이 눈이 당신만의 심미안입니다.  예를 하나 더 들어보겠습니다.  당신은 지금, 들판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들판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파랗게 물들어 가고 있습니다.  여기까지가 그대로 보기. 주어진 상황을 인식하여 간단하게 옮겨 본 것입니다.  '파랗게 물들어 가는 들판'이 무엇과 같습니까?  이렇게 질문하는 것이 빗대어 보는 방법이라고 했지요?  '한 장의 파란 화선지'  다음은 상상하여 보기입니다.  * 사람은 이 세상에 태어나 분별력이 생기면서부터 만나는 대상에 대해 호기심을 가집니다. 이 호기심이 상상의 시작입니다. 이 호기심은 만나는 대상에 대한 많은 의문을 낳습니다.  의심이 아닙니다. 의심은 죄악을 낳지만, 의문은 우리를 새로운 세계로 인도해 줍니다. 머리 속에 물음표가 들어가면 의심이 되 지만, 가슴속에 들어가면 의문이 됩니다. 그 의문에 대한 답이 상상입니다. 그 의문이 꼬리를 물면 우리가 발견하지 못했던 새 로운 세계가 나타납니다.  상상하여 보기 방법은 질문을 통한 상상하기와 경험을 되살려 상상하기가 있습니다. 질문을 통한 상상하기는 대상에 대한 질문 을 통해 얻은 답을 바탕으로 하여 상상의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고, 경험을 되살려 상상하기는 인식한 대상에 경험 속의 상황이 나 사물을 결합하여 상상의 세계를 재구성하는 것입니다.  이번에는 질문을 통한 상상하기를 해 봅시다.  '들판이 화선지라면, 당신은 그것으로 무엇을 하겠습니까?'  '그림을 그린다.'  '그림을 그리려면 당신은 무엇이 되어야 합니까?'  '붓.'  당신은 붓이 되었습니다. 붓이 되었으면, 그림을 그려야 되겠지요?  '붓으로 무엇을 그리겠습니까?'  '고향.'  이것이 질문을 통한 상상하기. 그런데 모든 질문과 답은 당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경험은 사람에 따라 다릅니다. 똑같은 해를 보고 살면서도 햇빛을 받고 사는 사람이 있고, 햇볕을 쬐고 사는 사람이 있고, 햇살 을 맞고 사는 사람이 있듯이 경험은 그에게 주어진 조건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질문과 답도 이 경험에 따라 달라져서 상상의 세계도 시인에 따라 다르게 펼쳐집니다.  이젠 인식한 내용을 정리하여 줄거리를 엮어 봅시다. 줄거리를 엮을 때, 서경문, 서사문, 기행문, 반성문, 고백문, 회고문, 기도 문, 서간문, 권유문, 광고문, 설명문, 논설문 등등의 틀을 빌리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떤 글의 형식을 빌리든, 소설의 구성 3요소인 '인물, 사건, 배경'을 참고로 하여 정리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 3요소에 그대로 맞추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러나 나름대로의 줄거리를 만들어야 시의 틀을 만들 수 있습니다. 우선, 소설의 구 성 3요소인 인물, 사건, 배경을 바탕으로 하여 짧은 이야기를 엮어 봅시다.  여기에서 인물이란 행동의 주체인 나, 시적 자아가 될 수도 있고, 어떤 사물이나 대상이 될 수도 있습니다. 배경은 시 속에 주어 진 시대적, 시간적, 공간적, 심리적 상황을 말합니다. 그리고 사건은 시적 자아나 행동의 주체가 되는 사물이나 대상의 느낌, 생 각, 행동, 태도가 될 수 있습니다. 이 세 요소를 파악할 수 있다면, 우리는 시의 틀을 쉽게 짤 수 있습니다. 시를 감상할 때도 마 찬가지입니다. 시에 나타난 인물, 사건, 배경을 알아낼 수 있다면 감상이 쉬어진다는 말입니다.  위의 인식한 내용을 간추려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정리는 묘사와 진술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정리 과정에서도 퇴 고는 이루어져야 합니다.  들판이 한 장의 파란 화선지와 같은데, 나는 붓이 되어 거기에 고향을 그리고 싶다.  인물은 '나', 배경은 '들판', 사건은 '고향을 그리고 싶다'로 보면 됩니다. 이것을 다시 한 번 정리해 봅시다.  ①들판은 한 장의 파란 화선지  ②나는 붓이 되어 고향을 그리고 싶다.  다듬어 봅시다.  ① 들판은 한 장의 파란 화선지  시어에 변화를 주어 다시 정리해 봅시다.  들판은 파랗게 번져 오는 화선지 한 장  형용사 '파란'을 '파랗게 번져 오는'으로 고쳐 생동감을 주었습니다. 시구가 길어지면 행을 나누는 것이 좋겠지요?  들판은 파랗게 번져오는  한 장의 화선지  ②나는 붓이 되어 고향을 그리고 싶다.  이것도 생동감이 있게 바꿔 봅시다. 생동감을 주기 위해서는 형용사 '그리고 싶다'를 동사의 현재형 '그린다'로 바꾸면 됩니다. 이것도 행을 나누어 정리해 봅시다.  나, 붓이 되어  고향을 그린다.  모으면 하나의 짧은 시가 됩니다.  들판은 파랗게 번져오는  한 장의 화선지  나, 붓이 되어  고향을 그린다.  시행의 균형이 맞지 않은 것 같지요? 그것은 1연 1행의 글자수가 다른 행에 비해 많기 때문입니다. 말을 바꾸어 보면, 1행은 3 음보, 2행은 2음보의 운율로 이루어져 균형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1행을 줄여야겠지요? 무엇을 줄일까요? '들판'이 란 시어를 줄이는 것이 좋겠지요? 대신 제목은 '들판'이라고 하면 그 의미가 그대로 살아 남습니다.  들판  파랗게 번져오는  화선지 한 장  나, 붓이 되어  고향을 그린다.  1연은 대상을 다른 사물에 빗대어 본 서경적 묘사이고, 2연은 당신의 마음을 고백한 독백적 진술입니다.  * 하나 더 상상해 봅시다. 앞에서는 질문을 통한 방법으로 상상의 세계를 펼쳐 보았습니다. 이젠 경험을 되살리는 방법으로 펼 쳐 봅시다. 경험을 되살려 상상하기는 그대로 본 것이나 빗대어 본 것에 당신의 경험 속의 이야기나 풍경, 또는 소재 등을 결합 하여 줄거리를 엮어 보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경험이란 당신의 체험일 수도 있고, 책에서 읽은 것일 수도 있고, 남에게 들은 것일 수도 있고, 당신의 가슴속에 남아 있는 한 폭의 그림이나 이야기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두 방법이 완전히 독립적으로 쓰인다는 말은 아닙니다. 두 방법은 상호보완적입니다. 질문을 통한 상상하기도 경험 을 되살려 상상하기와 마찬가지로 경험을 바탕으로 한 질문에 의해 전개되기 때문입니다.  * 당신의 귀여운 꼬마가 그림에 그리고 있습니다. 하얀 종이 위에 풍경이 조금씩 채워지고 있습니다. 하늘과 해가 그려지고, 산 이 그려지고, 나무가 그려졌습니다. 이젠 그 그림에 색칠을 시작했습니다.  이것을 바탕으로 하여 상상의 날개를 펴 봅시다. 시적 자아는 아빠. 당신이 귀여운 꼬마의 아빠가 되어 보는 겁니다.  당신이 지금, 보고 있는 대상은 '꼬마가 색칠하는 그림'. 이것에 당신의 경험을 결합해 봅시다.  눈을 감아 봅시다. 눈을 감는다는 것은 경험한 것을 떠올린다는 말. 그대로 본 대상 속에 지난 날의 이야기나 풍경, 소재를 옮겨 온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경험을 되살려 상상하기.  눈을 감았습니까? 그럼, 어린 날의 언덕에 앉아 들판을 바라보십시오. 무엇이 보입니까? 논, 밭, 언덕, 나무, 날고 있는 새들이 보이지요. 그 중에 무엇을 불러오겠습니까? 새.  됐습니다. 그 중 한 마리만 불러와 '꼬마가 색칠하는 그림' 속으로 날려 보십시오.  정리해 봅시다.  꼬마가 색칠하는 그림 속으로 새 한 마리가 날고 있다.  여기까지가 경험을 되살려 상상하기. 이제 중심 소재가 된 '새'를 구체화해 봅시다. 구체화도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질문을 해 봅시다.  새는 어떤 새일까요?  학.  어떤 학입니까?  종이학.  종이학은 누가 접었습니까?  아내.  '새'를 '아내가 접어놓은 학'으로 구체화하였지요? 정리해 봅시다.  꼬마가 색칠하는 그림 속으로 아내가 접어놓은 학이 날고 있다.  행을 나누어 정리해 봅시다.  꼬마가 색칠하는  그림 속으로  아내가 접어놓은  학이 날고 있구나.  그런데 무엇인가 빠진 것 같아 허전하지요? 그것은 한 폭의 그림을 그렸을 뿐, 당신의 마음을 나타내는 구절이 없기 때문입니 다. 시어에는 음악성. 회화성, 의미성이 함께 드러나야 좋은 시가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시어의 3요소라고 합니다. 음악성은 운율, 회화성은 심상(이미지), 의미성은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생각, 곧 주제를 말합니다. 이 시는 의미성이 약하다는 말입니다. 다시 한 번 생각에 잠겨야겠지요? 이것이 퇴고입니다. 시어를 고르고, 운율을 맞추고. 이미지의 적절성을 검토하고, 주제가 잘 드러났는가를 되새겨 보는 것입니다.  모든 열쇠는 질문이라 했습니다. 꼬마는 지금 색칠을 하고 있지요? 그림을 다 그렸습니까, 그리지 못했습니까? 시를 읽어보면, 아직도 다 그리지 못했지요? 아직도 색칠을 하고 있으니까. 그렇다면, '아직도 다 그리지 않았는데'를 첨가하여 당신의 안타까 운 마음을 드러내면 어떨까요?  꼬마가 색칠하는  그림 속으로  아내가 접어놓은  학이 날고 있구나.  아직도 다  그리지 않았는데.  1연은 마음으로 한 폭의 그림을 그린 심상적 묘사, 2연은 안타까운 마음을 고백한 독백적 진술입니다.  이처럼 상상의 세계는 당신의 마음에 따라 얼마든지 변할 수 있습니다. 제목은 '들판'이라고 해도 좋고 '풍경'이라고 해도 좋겠 지요? 생각해 보니, '풍경'이 어울릴 것 같군요. 아이가 그림을 그리고 있으니까.  * 꼬마의 '그림'은 '희망'입니다. 자기 앞에 펼쳐진 세계를 아름답게 그려보고 싶은 마음입니다. 아내가 '접어놓은 학'은 '동 경'입니다. 현실을 벗어나고 싶은, 언제나 한 발 앞서 가는 마음이지요. 그러나 아이의 삶만이 아름다운 것은 아닙니다. 학을 접 을 수 있는 아내의 마음도 아름답고, 그것을 지켜보는 당신의 마음도 역시 아름답습니다.  이러한 삶들이 어우러지는 곳이 바로 우리가 숨쉬는 세상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삶 속에서의 아름다움을 당신이 발견해 내는 것입니다. 발명이 아닙니다. 이미 조물주가 마련해 준 것을 찾아내는 것일 뿐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수많은 마음들이 빚어 놓은 상상의 세계에서 울고, 웃고, 슬퍼하고, 아파하고 있는 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 는, 이 아픈 세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처럼 상상을 필요로 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 대상 인식이 시작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단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단계에서 시상이 엮어지고, 묘사와 진술, 즉 표현 방법 이 결정되고, 어느 정도의 형상화가 이루어지며, 시적 자아의 위치와 태도, 어조가 결정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대상에 대한 인식(느낌과 생각)이 시의 전체분위기를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대상인식은 시의 주춧돌이고, 시의 나침반이라 고 할 수 있습니다.  대상 인식, 즉 그대로 보기, 빗대어 보기, 상상하여 보기 중, 우리가 가장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빗대어 보기입니다. 빗대어 보기는 나무의 잎처럼 무성하고, 다양하여 상상하여 보기에 가장 큰 영향을 주고, 시를 형상화하는 방법을 알게 하여 주기 때문 입니다.  자세한 것은 뒷장에 싣겠습니다. 당신의 필요에 따라 읽으셔도 좋고, 읽지 않아도 좋습니다. 그것은 지나친 이론은 시를 쓰는데 오히려 장애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이 이론에서 벗어나야 시다운 시를 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법이 자유를 구속 하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있어야 하는 것처럼, 시에 대한 이론도 시의 자유를 위해 있어야 합니다.   
908    詩人되기 힘들다, 詩쓰기는 더더욱 힘들다... 댓글:  조회:4349  추천:0  2016-01-09
유창섭        시에 있어서 압축이란 무엇인가?     “詩 쓰기보다 詩人 되기가 힘들고, 詩人 되기보다 詩 쓰기가 더 힘들다.”라고 말합니다.  “시를 쓰기 시작할 때에는 시인이 되는 것이 힘들고, 시인이 되어서는 시 쓰기가 더 힘들다”는 말이니 둘 다 모두 힘들다는 이야기이겠지요.시를 쓰는 데 있어서 시인들은 흔히 시에서는 [압축]을 통하여 시적 감동을 증폭시켜야 한다고 말하곤 합니다만 사실 그것이 말처럼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압축]이란 고뇌의 산물입니다. 시를 쓰는 데에 고뇌를 해야 한다고 하니까 "글자(단어)만 고뇌"를 하고 정작 "고뇌하여야 할 시인은 고뇌하지 않는 것"을 봅니다. 고뇌하지 않고 쓰여진 시는 시인의 양심과 자만과의 타협에서 나온 산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시를 쓰는데 압축의 기법을 써야 한다고 말하는데 그것은 시에 꼭 필요한 문장, 즉 [간결]하고 [시적인 언어]로 시를 쓰라는 말인데 대부분의 사람은 이것을 잘못 인식하여 어휘의 수를 줄이는 데만 신경을 쓰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하여 간결함만 추구하고 시적인 언어로 쓰라는 말의 뜻은 놓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요즘의 기성 시인들조차 그러한 경향에 빠져 있는 것 같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시인이므로 자기가 쓰는 것은 모두 시가 된다는 착각에 빠져 있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잘못된 생각입니다. 산문처럼 쓴 글을 적당히 [행 가름] 하여 놓고 그것을 시라고 생각하는 일도 많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중간에 빼더라도 좋을 설명 몇 줄을 빼내고는 압축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감히 말하건대 그것은 압축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 적당히 타협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한 시적 경향은 컴퓨터에 의존하는 N 세대의 경우 더욱 심화되는 것 같습니다. 매우 즉흥적이고 산문적이고 표피적인 언어의 유희를 즐기고 있는 것 같은 인상을 받고 있는 것은 내가 고루한 세대의 사람이기 때문일까요?  그러나, 내 시대의 마지막 사람이 되는 한이 있더라도 나는 나의 [시론]을 정리해 놓아야 한다는 의무감 같은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고답적인 시론이라는 비난을 받는다 하더라도 그것을 기꺼이 감수할 작정입니다.  인간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모방창조]의 산물입니다. 그러므로 시도 그러한 맥락에서 이해한다면 과거의 시론은 어떠했는지, 현재의 경향은 어떻게 흘러가는지 하는 것을 비교하고 좋은 것은 취하고 버릴 것은 버리면서 새로운 창조의 세계로 들어가야 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 그렇다면 본격적으로 [압축]의 문제를 생각해 보기로 합시다. 예를 하나 들어서 설명하는 것이 좋겠군요.     바람을 보았는가   아무도 없는 길섶에서 흔들리는 무성한 잡초더미 위에서 흔적없이 사라지는   바람을 보았는가    이 시는 “사랑”이라는 시 입니다.  매우 짧은 短詩입니다만 사랑의 모습을 간결하게 정리하여 보여 주는 시 입니다. 사랑이 존재한다는 것을 누구나 인정하고 있지만 사랑은 만질 수도 볼 수도 없는 존재인 것이고, 사랑 또한 존재하지 않게 되는 순간 역시 그 모습이 어떠한 지를 ‘바람’이라는 시적 상관물로 대체 시켜 표현함으로써 사랑이 어떤 것인지 생각게 해주려고 하고 있습니다.  또 다른 시의 예를 들어 살펴 보기로 하겠습니다.     지난 밤 내 꿈의 상류上流 어디쯤에서 범람하였나   빗밑 한결 가벼운 오늘 아침 강江 기슭 한켠에   저리도 민망스레 돌아 앉은, 가냘퍼 더 하이얀 목덜미   오! 백합白合아 언제 어디에서 만난 뜻 밖의 이별이었나   인적人跡 드문 이 강江, 저 물길 거슬러 오르다 보면   화초花草담 넘보며 남몰래 사모思慕했던 규중시인閨中詩人은 너의 어느 전생前生이었나    이 시는 김준환 시인의 [해후]라는 시로서 “백합”이라는 시적 상징물인 꽃을 통하여 아름다운 오랜만의 우연한 만남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연한 만남이 단순한 시적 상관물인 백합꽃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쉽게 간파할 수 있습니다.  이 시에서 시인은 자신의 내면에 들어앉아 있던 아름다운 기억의 한 부분을 찾아내고, 놀랍게도 차분하게 이제까지의 삶을 관조하며 그 만남을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보시는 바와 같이 이 시에서 우리는 어디에도 군더더기가 될 만한 표현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장황하게 만남의 사연이나 그간의 그리움이나, 자신이 살아오는 동안에 잊지 못하고 있었던 사모의 정을 늘어놓고 있지 않습니다.  ‘지난 밤/내 꿈의 상류上流/어디쯤에서 범람하였나’ 라는 표현으로 자신의 모든 추억의 한 모서리 어디엔가 숨겨져 있던 꿈에도 보고 싶었던 아름다운 기억을 찾아내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압축]입니다. 그리움이나 사모의 정을 설명하지 않고도 시인은 그 속에 그러한 자신의 뜻을 감추어 놓고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지요.  여기에서 이 시를 해설하고자 하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압축]이라는 말을 하게 될 때 자칫 언어의 수를 줄인다거나 토씨를 줄여나가는 것쯤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압축]이란  절제된 언어로 시의 이미지를 간결하고 아름답게 가꾸어 노래하여 그 속에서 다양한 시적 정서가 교차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시적 감동을 증폭시켜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모든 글에서 볼 수 없는 아주 특별한 장치가 시에는 숨어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앞에서 언급한 두 시에서, 시에 필요한 압축이 어떠한 감동을 주게 되는지 살펴 보았습니다. 누군가 이야기합니다.  “그렇다면 진정 당신은 그러한 시를 쓰고 있는가?” 하고.   나의 대답은 “나 자신도 그렇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다만, 내 자신도 노력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성공적인지 아닌지 아직은 알 수 없습니다.  “좋은 시는 독자가 평가한다”고 믿고 있으니까요.      3. 詩 속에 나타나는 문장 부호의 기능    우리는 시 읽기나, 시 쓰기에 있어서 시 속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문장의 부호, 예를 들면 쉼표[,] 마침표[.] 등의 기능적 역할에 대해 크게 주의를 하지 않고 있음을 발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우리가 어릴 때부터 받아온 교육의 영향으로 일반적인 글이나 문서에서 사용하고 있는 문장의 부호에 거의 무의식적으로 길들여져 있습니다.  “쉼표”는 글이 길어지거나 의미가 분명하지 않은 경우에 혼동을 일으키지 않도록 사용하는 것으로 알고 있으며, “마침표”는 글이 끝났음을 의미하는 단순한 부호로서 인식하고 있고, 또 “말없음표”는 소설이나 다른 문장에서 침묵의 표현 또는 생략의 의미로 쓰는 일에 길들여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이유로 사람들은 어떤 법률적인 문제에 부딪히기 전에는 그러한 문장의 부호에 대한 의미 파악에 등한히 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습니다.  시 읽기에 있어서도 예외는 아닙니다. 시 쓰기에 있어서도 시인들은 그러한 문제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지 않습니다.  사실 시 쓰기에 있어서 문장부호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글을 쓰지 않는다면 시 읽기에서 그 의미를 이해하려는 일이 무의미한 일일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언어의 연금술사이며, 기호학적 의미의 언어를 파괴하여 새로운 언어로 재창조하여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시인詩人들”이 그러한 문제를 소홀히 생각한다는 것은 매우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거니와 “시가 감추면서 드러내는 형식의 글”이라는 말에 동의한다면 앞에서 말한 문장부호에 대하여 시인이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여기서는 우리가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으며 의미의 전환이나, 가타의 다른 목적으로 많이 사용하는  “마침표”와 “쉼표”에 대해서만 알아보기로 하겠습니다.  다른 문장 부호는 특별히 일반적인 문장에서 사용하여 그 문장부호의 기능이 주는 의미와 다를 바 없이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가장 쉽게 습관적으로 만나는 “마침표”에 대하여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시인은 시를 쓰면서 시의 행이 끝날 때마다 마침표를 찍고 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물론 습관적으로 마침표를 찍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지만, 언어의 조탁미를 생각하고 글을 쓴 많은 시인 중에도 행의 끝에 마침표를 찍은 시와 찍지 않은 시가 있습니다.  신석정, 이육사, 노천명, 김기림, 정지용, 서정주 시인 등의 경우에도 마침표가 있는 시와 없는 시가 구분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왠 일일까요? 실수일까요?  아닙니다. 그렇게 쓴 충분한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정지용 시인은 주로 산문시에서 시의 중간에 끝나는 행에서도 마침표를 생략하고 있습니다. 그 시의 맨 마지막 행이 끝나는 곳에서만 마침표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충분히 의도적인 시적 장치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말을 가장 아름답게 가꾸고 그 아름다운 말을 시로 써온 정지용 시인은 그러한 마침표를 쓰는 데에도 철저히 의도적이었다는 느낌을 줍니다.  시의 행마다 철저하게 마침표를 찍는 김기림 시인도 시집詩集에는 마침표가 없는 시로 채워져 있습니다. 시집詩集에 실려있는 시 중에 마침표가 없는 김기림 시인의 시를 한 편 읽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봄]   四月은 겨으른 표범처럼 인제사 잠이 깼다 눈이 부시다 가려웁다 소름친다 등을 살린다 주축거린다 성큼 겨울을 뛰어 넘는다    겨울 동안 깊이 잠들어 있던 봄을 게으른 표범으로 내세워 그 아름다운 봄이 성큼 다가오는 모습을 그리고 있는 시 입니다. 움츠렸던 봄이 잠을 깨어 온 천지에 봄이 가득 밀려오는 모습을 표범의 몸동작으로 바꾸어 놓고 있는데, 그 동작이 하나하나 따로 일어난다기 보다는 연속적으로 또는 한 두 가지가 겹쳐져서 일어나는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 마침표를 생략하여 그 동작들을 오버.랩(over-lap)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그 동작 하나마다 마침표를 찍었다면 그 동작은 하나씩 분절되어 하나씩 하나씩 개별적으로 일어나는 모습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표가 있었다면 그 동작만으로 의미는 축소되어 호흡이 빠르게 시의 행이 읽어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침표를 없앰으로 해서 시의 행간의 호흡은 길어지고, 그 의미가 앞과 뒤로 연결되는 형상을 보여줌과 동시에, 시의 행간에 걸려있는 봄날의 정서를 느끼게 하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시의 정서적 의도를 표현하는 데에는 문장의 부호 하나도 허술하게 다루어서는 아니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번에는 쉼표의 기능적 의미 확장에 대하여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쉼표의 경우에도 현대시의 초기 시인들은 쉼표를 상당히 많이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쉼표가 그 행의 중간에 의미의 중단을 의미함과 동시에, 글을 읽는 데에 호흡을 고르는 역할을 중시하던 국어의 맞춤법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근자에는 단어의 어미 변화가 쉼표의 기능을 충분히 하고 있으므로 우리말에서는 쉼표의 사용을 하지 않아도 의미전달 체계에 문제가 없다는 국어학자들의 주장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詩에 있어서 쉼표의 역할은 좀 더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시의 행 가름이 있기 때문에 쉼표가 있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만 쉼표가 있는 경우와 없는 경우의 시적 정서의 전달은 현저히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이번에는 정지용 시인의 쉼표가 주는 의미가 현저히 다른 시 한 편을 읽어 보겠습니다.   [촉불과 손]   고요히 그싯는 손씨로 방안 하나 차는 불빛!   별안간 꽃다발에 안긴듯이 올뺌이처럼 일어나 큰눈을 뜨다.   그대의 붉은 손이 바위틈에 물을 따오다, 신양山羊의 젓을 옮기다, 간소簡素한 채소菜蔬를 기르다, 오묘한 가지에 장미薔薇가 피듯이 그대 손에 초밤불이 낳도다.    위의 시는 연인이 성냥불을 켜서 촛불을 켜는 순간의 아름다움을 하나의 눈뜸처럼 그려내고 있는 정감이 따뜻하기 그지없는 시입니다. 물론 여기에서 등장하는 그대가 연인으로 볼 것이냐 아니면 시인에게 새로운 깨달음을 가져다 준 다른 제삼자로서 힘을 가진 사람이냐 아니냐 하는 것은 좀 더 다른 문제이므로 그것을 빼고 단순한 연인으로 해석하여 볼 경우로 한정하고 시 읽기를 하여 보도록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제3연을 살펴 보면 “그대의 붉은 손이” 물을 따오다, 젓을 옮기다, 채소를 기르다, 로 연결되어 세 가지의 일에 손이 역할 하는 것으로 연속적인 의미를 부여하여 손에 촛불이 장미처럼 태어나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때 각각의 쉼표는 의미를 한정시키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호흡을 빠르게 진전시켜 불이 켜지는 순간의 모습이 영사기에 필름이 돌아가며 움직이는 모습을 만들어 내듯이 보여주고 있는 것이지요.  만약 쉼표가 없다면 어떻게 읽히게 될까요?앞의 마침표에서 보는 것과 비슷한 현상이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의미가 두 가지 또는 세 가지가 함께 어울려서 의미를 다르게 만들어 갈 것입니다. 그리고 시적 긴장감을 불러 일으켜 그 시의 의미를 음미하며 읽도록 시간을 길게 잡아 주게 될 것입니다. 위의 세 가지 동작뿐만 아니라 아래에서 묘사하고 있는 장미가 꽃피는 모습에 이르기까지 유기적으로 엮어 효과를 내게 될 것입니다.그렇다면, 이 경우 어느 쪽이 더 나은 표현이 될까요? 그것은 시인의 몫입니다.  아마도 그 세 가지의 일을 영화처럼 보이도록 장치하고 싶은 시인의 마음이 위의 본문처럼 쓰도록 만들었을 것입니다.좀 더 다른 깨달음의 시나, 관조의 시에서는 그러한 경우 쉼표를 사용하지 않는다면 더 많은 의미의 확장이 가능해 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상에서 “마침표”와 “쉼표”에 대하여 살펴 보았습니다만, 이 외에도 행 가름에서도 의미 변화가 시적 변화를 주고 있으므로 뒤이어서 이를 보완하여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시인은 그가 가지고 있는 언어를 새로운 이미지로 변용하여 시를 쓰게 됩니다. 적어도 시인은 그 시에 사용되는 문장 부호 하나에도 애정을 가지고 시 쓰기를 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시인의 “시의 세계”가 넓어지고 보다 많은 정서를 그 속에 담아내게 될 수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4. 행 가름을 통한 시적 의미의 변조 또는 의도적 강조 ---    시를 쓰는 시인들은 자신의 시를 독자가 읽게 될 때, 그 반응하는 정서적 질서에 대한 배려를 하게 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 한 예로 행 가름을 하는 경우에 “하나의 구절이나 언어”를 앞과 뒤에 오는 행의 행간에 걸쳐 놓는 수법을 쓰는 경우를 예로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아주 미묘한 의미들이 서로 충돌하며 그 속내를 상승시키거나 그 의미증폭을 일으키도록 교묘히 배열하여 놓는 방법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물론 문장 속에서의 문장 부호의 활용이나 문장 속의 조사 사용의 의도적 배열로 그 의미나 이미지를 바꾸어 내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여기에서 말하는 “하나의 구절이나 언어”들은 그 의미 전달 효과가 의도적이면서도 직접적이라는 점에서 조금 다르게 구별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교를 통해서 시인들은 그 속에 감추어둔 시적 정서의 뒷공간에 새로운 상상력의 공간을 만들어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의미를 변조시키거나 증폭시키는 기능을 수행하게 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그 예가 되는 시를 인용하여 그 의미변조와 강화 현상을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말   말은 뛰고 싶어 한다 우리를 탈출하여 밖으로 나온 고삐 풀린 말은 제 마음대로 뛰고 싶어 한다 갇혀 있던 시간을 뛰어 넘어 자유로워지고 싶어서 풀린 말은 장애물을 뛰어 넘는다 위험을 무릅쓰고 달려 나가 제 몸 살피지 않고 달리는 고삐 풀린 말, 옆을 보지 못하게 눈을 가리고 달리도록 길들여진 말, 그런 말들이 내 안에서 자라고 있다 고삐 풀려 제 멋대로 달리고 싶은 말이 가끔 튀어 나간다 그 말에 채어 상처를 입는 사람들 앞에서 그 말이 내 안에서 키우던 말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지만, 아니, 아니, 사실은 그 말이 숨었다가 나도 몰래 탈출한 것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이미 그 말은 잡아올 수가 없다 바람처럼 발자국도 없이 사라졌으므로, 내 안에 사는 말은 언제나 내 말을 잘 듣는 것이 아니라 불쑥, 경계를 뛰어넘어 홀로 방황한다 그렇게 자라는 말은 새끼를 기르고 길들여진 말과 길 안 들여진 말은 서로를 길들여지게 또는 길들여지지 않게 제 편에 끌어 들여 길 들이려고 한다        위의 시는 말이라는 단어를 말(=말씀)의 의미와 달리는 말(=승마용 말)의 의미를 교차 연결 시켜 그 의미를 변화시키고 있는 시 입니다. 그 속에서 또 하나의 의도적인 행 가름이나 어휘 배열을 통해서 새로운 의미를 창조하거나 그 의미를 강화하려는 의도를 엿볼 수 있습니다.   ‘제 마음대로 뛰고 싶어 한다 갇혀 있던 / 시간을 뛰어 넘어 자유로워지고 싶어서”에서는 ‘갇혀 있던 (곳에서) 제 마음대로 뛰고 싶어 한다’는 의미와 ‘갇혀 있던 시간을 뛰어 넘어 자유로워지고’라는 의미의 문장으로 읽혀져서 “갇혀 있다는 의미가 강조되어 그 전체의 이미지에 영향을 주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또, “가끔 튀어 나간다 그 말에 채어/상처를 입는 사람들 앞에서”라는 행에서는 ‘그 말에 채어 가끔 튀어 나간다’는 문장과 ‘그 말에 채어 상처를 입는 사람들 앞에서’라는 문장으로 분화하여 의미가 강화되고 있으며, 다시 “이미 그 말은 잡아올 수가 없다 바람처럼/ 발자국도 없이 사라졌으므로,”라는 행에서도 ‘바람처럼’이라는 어휘를 매개로 의미 강화가 시도되고 있음을 눈치챌 수 있는 것입니다.  다음에 읽게 되는 “오래된 의자”에서는 그 의미전환이나 강화를 시도하는 많은 시도가 읽혀 지고 있습니다. 일일이 나열하기 어려울 만큼 여러 행에서 그러한 의도가 나타나고 있으므로 하나하나 그 의미를 설명하기보다는 그 중심이 되는 이중장치의 어휘들 밑에 밑줄을 그어 그 단어들이 앞으로 또는 뒤로 연결되면서 의미가 강화되거나 전환되는 현상을 살펴 보겠습니다.     오래된 의자 /강문숙   묵은 의자를 들어낸다 간혹 삐그덕거리며 불만을 터뜨리던 의자는  덩치보다 무겁게 끌려 나온다. 삐죽이  솟아오른 못들이 버팅기고 있던 시간들을 놓아준다 그 방의 일부였던 의자는, 수많은 기억들과  자신을 누르던 시간의 무게 때문에  결코 가벼울 수가 없다   넓은 잎으로 창문을 가리던 나무가  흔들리는 제 그림자를 말아 올린다. 적막이  슬쩍 발 걸어 햇살을 넘어뜨리고 지나가는  이런 저녁, 오래된 의자는 기억한다 어린 주인이 가방을 내려놓으며, 딸깍  흐린 전등을 켜는 소리  끌고 왔던 하루가 아! 하고 내뱉는 신음소리  실체도 알 수 없는 쓸쓸함으로  밥을 먹고 잠자던 시절, 등받이에 걸쳐진  무거운 외투처럼 밤새 쌓이던 그 고요를 기억한다 한 아이가 자라서 어른이 될 때까지  수천 번 앉았다가 일어선, 수천 번  등받이 외투가 걸쳐졌던 책상 앞의 의자 아궁이에서 불탄다. 사소함으로 기억되어질 뿐  형체도 없이 재가 되는 저 오래된 의자 재로 만든 의자의 날들 속에  아직 어린 주인도 함께 불타고 있다.    예를 들면 “적막이 흔들리는 제 그림자를 말아 올린다.” “ 적막이 슬쩍 발 걸어 햇살을 넘어뜨리고 지나가는”의 두 가지 형태의 강화된 또는 변형된 이미지에 의해 다른 중심정서에 영향을 주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시적 기교는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하나의 도구로서 시적 의미를 변화시키려는 시인의 의도를 나타내기 위해 이용될 수 있는 기교의 하나로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시인은 자신의 시적 의도에 맞게 자연스러운 형태로 이러한 기교를 부려 그 의미를 강화시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적 기교란 어디까지나 중심정서를 드러내는 보조적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5. 조사의 생략과 상상력의 확장    전에도 이야기한 바 있습니다만, 요즘 다른 사람들의 글을 읽으면서 더욱 자주 느끼는 것은 시를 쓰는 분들이 모두 하나같이 조사의 활용에 대해 무관심하다는 것입니다. 각 행에서 다른 행으로 넘어갈 때, 적절한 조사의 생략은 글 속에 담긴 의미를 여러 갈래로 확장시켜 줄 수도 있는 것인데 조사를 고정함으로써 의미의 확장이나 전환의 효과를 얻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무조건 조사를 생략하여 시적 정서의 혼란을 초래하도록 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조사의 생략법이 시를 쓴 시인이 의도대로 정서적 감동을 이끌어 내게 하는 효과가 있는 경우도 있음을 생각하면 조사를 잘 활용하는 기술은 신선한 표현기교 못지않게 효과적인 표현법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적절한 행에서의 조사 생략은 독자의 시적 상상력을 자극하고, 시에 담고 있는 시적 의미 이상으로 상상력을 확장시켜 그 시의 감동을 증폭시켜 나가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별 밭 찾아 떠도는 풀벌레의 층층이 쌓여 가는 외침을 듣는다. ……………     호수의 수면 위로 반짝거리던 햇살이 밤 하늘의 별들로 총총이 뜨는 날, ……………    위의 두 개의 글은 습작기에 있는 “시인을 꿈꾸는 사람들”의 작품입니다. 이 글을 살펴보며 조사의 사용과 그 뜻의 움직임을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가을 밤]을 살펴 보면 “별밭 찾아 떠도는 풀벌레의”라는 구절의 “의”라는 조사를 생각해 보도록 할까요?  “의”라는 조사가 있을 경우 이 구절은 글을 쓴 화자話者가 멀리 떨어져서 가을 밤을 보고 있는 모습으로 의미를 한정시키게 됩니다.  그러나 “의”라는 조사가 없다면 화자가 바로 “풀벌레”로 형상화되어 그 가을밤 속에 들어앉아 “층층이 쌓여가는 외침을 듣는” 모습으로 읽혀지게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또 “풀벌레들이 층층히 쌓여가는 (가을밤의) 외침을 듣는” 형태로 비약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때의 독자들은 매우 다른 감상에 빠져들 것이 분명합니다. 바로 이러한 경우에 의미의 확장이나 의미의 전환이 일어나, 그 다음에 오는 글의 내용에 따라 정서적으로 다른 반응을 하게 될 것이기 때문에 조사의 생략 여부는 시의 정서적 감동을 증폭시키거나 또는 조절하는 역할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음에는 [기다림]이라는 시에서 나타나고 있는 조사를 생략하여 그 의미를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호수의 수면 위(로)  반짝거리던 햇살(이)  밤 하늘의 별들(로) 총총히 뜨는 날,   위의 글에서 (괄호)안의 조사를 두고 읽는 경우와 생략하고 읽는 경우에는 어떤 차이가 생기게 될까요? 본문대로 조사를 두고 읽는다면 “호수의 수면 위에서 반짝거리던 햇살이 밤 하늘의 별이 되어 총총히 뜨는 날”로 의미가 고정될 것입니다.  그러나 ( )안의 조사를 지우고 읽는다면 앞의 경우와 같이 “호수의 수면 위에서 (낮에) 반짝거리던 햇살이 밤 하늘의 별이 되어 총총히 뜨는 날”로 읽히기도 하고, “호수의 수면 위에 (낮에는) 반짝거리던 햇살, 밤에는 별들이 (호수의 수면 위에) 총총히 뜨는 날”로 읽히기도 할 것입니다.  이 때에도 마찬가지로 조사가 생략된 경우에는 의미의 전환과 확장이 이루어 질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조사가 생략된 경우, 이와 같은 글 읽기 이 외에도 복잡한 감성의 결과에 따라 다른 형태로 이 시가 읽혀질 가능성이 있다는 것도 생각해 두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모든 시에서 조사를 생략하면 그러한 효과가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조사를 반드시 넣어 그 뜻을 분명히 해 주어야 할 경우도 있을 것이고, 조사에 의해 이미지(심상)의 전환이 제한되도록 할 필요가 있는 경우도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시인은 자신의 시에 그러한 의도에 맞는 표현 방법을 선택해야 할 것이며, 지나치게 많은 조사를 써서 행간의 연결을 꾀하다 보면 불필요하게 시의 긴강감이 떨어지고 시가 사설적인 모습으로 변모할 수도 있다는 점을 이해하여야 할 것입니다    
907    詩작법에서 詩를 많이 읽어라 댓글:  조회:3971  추천:0  2016-01-09
詩를 많이 읽어 보자 시를 많이 읽어야 합니다. 그러나 단순한 독자로서의 시읽기가 아니라 시에의 올바른 접근을 위한 정독(精讀)을 말합니다. 하루에 몇 권의 시집을 독파하는 것이 아니라, 시 속에 무르녹은 의미와 시어에 유의하면서 음미해보는 것이 시와의 만남을 더욱 가깝게 해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시 읽기에서 다음 몇 가지 사항을 유의하면 효과가 나타나지 않을까요.           ① 시를 정독하라 시는 의미의 전덜이 아니라, 시 속에 함축된 의미의 암시나 상징. 그리고 의미의 변용을 통해서 정서적, 감각적인 미적 감동을 이해해야 합니다. 한 시인의 시를 통해서 시인의 미적 감동을 간접적으로 체험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어떤 독서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책을 읽고 간접적인 체험으로 지식과 인격을 느끼면서 배워야 합니다. 그리하여 자기의 의식으로 지식을 넓혀나가는데 밑거름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정독은 시를 이해하는데는 가장 효과적이며 적절한 방법입니다.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 의미 속에 감춰진 함축적 의미의 발견이나, 시인이 표현하고자 하는 의지는 무엇인가를 이해함으로써 우리는 감명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② 감명을 받았거나 감동을 준 부분은 다시 읽고 재해석을 해보라   시집 한 권을 읽다보면(시집 한 권에는 60~70편의 시가 수록됨) 그 중에 유독 몇 편은 친근감이 가고 감동을 받는 시가 있게 마련입니다. 이런 일은 내가 직접 쓴 것 같은 것이거나 내가 간직한 시적 상상력, 또는 체험 속에 곰삭은 어떤 의지가 유사하게 나타나는 경우입니다.   이 유사성은 시와의 친숙한 정감을 불러 일으켜서 시인이 그런 체험을 어떤 방법으로 해서 시창작을 성공시키고 있느냐하는 관심입니다. 이러한 관심은 시가 마치 스스로 쓴 듯이 뜯어보고 분석해보며 음미하는 일이 계속되면 스스로 자신이 시작과정을 재구성해 본 것과 같이 느껴지게 될 것입니다.   이때 자신의 상상력이나 사물을 보는 시각, 그리고 표현하는 방법 등이 부족함을 절감하면서도 이렇게 쓰는 것이 감동을 주는 시라는 것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이는 바로 나도 시를 쓸 수 있겠구나하는 잠재력이 이미 발산되고 있다는 사릴에 놀랄 것입니다. ③ 마음에 새겨지는 시의 행(行)이나 연(聯)은 그냥 음미로 그칠 것이 아니라, 노트에 옮겨 써보는 일도 중요하다.   물론 외워버리면 더욱 좋겠지만 이때 옮겨 적는 과정에서 문득 새로운 무엇을 발견할 수도 있게 됩니다. 이렇게 옮겨 적는 일이 많아지면 자신이 생각했던 시어(詩語)들을 동원하여 바꾸어 본다든지, 몇 마디를 생략해 본다든지, 또는 새로운 이미지(image)를 첨가해주는 일 등은 시창작 연습의 지름길이 될 것입니다.   한편 이런 것들이 모작(模作)이건, 창작(創作)이건 간에 시 쓰는 행위가 될 것이며 이 행위야말로 바로 시 쓰기의 경험으로 연결되는 시적체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마음에 들지 않거나 이해되지 않는 시편들도 그냥 던져버릴 것이 아니라, 이해를 위한 꾸준한 노력이 항상 필요합니다. 어떤 형태의 해석이든 자신의 의식으로 접근하고 자신의 방식으로 이해하는 인내가 따라야 합니다. 1-3. 모든 것들에 대한 많은 사유(思惟)가 필요하다. 시는 어쩌면 많은 사유에서 탄생되는지도 모릅니다. 많이 생각하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 곧 사유하고 사색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다양한 상상력이 동반하게 됩니다. 조그마한 일상생활에서부터 차원 높은 우주관에 이르기까지 인생을 살아가면서 모든 사람은 사유 없이는 살아갈 수가 없는 일입니다. 이러한 사유 속에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하는 인생관이 있으며 일생동안 기필코 성취되어야 할 목표인 꿈과 희망도 있습니다. 시 쓰기에서 많은 사유가 필요한 점도 시인의 정서와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많이 사유한다는 것은 많은 상상력을 빚어낸다는 뜻입니다. 이 상상력도 진실된 인생의 고민이 담겨져야 합니다. 상상은 결국 나 자신의 정서와 밀접한 관계에 놓입니다. 정서는 모든 사상(事象)에 부딪혀을 때 일어나는 다양한 감정을 말합니다.   심리적으로는 자극이 되는 대상에서 강하게 일어나는 감정으로서 또는 신체적인 변화가 뚜렸한 것으로서 일정한 상태로 지속되다가 끝나거나 다른 정신상태로 옮겨가는 의식의 과정을 말합니다. 인간이 느낄 수 있는 희노애락(喜怒哀樂)과 애오욕(愛惡慾)의 칠정(七情)이 우리의 오관(五官-눈, 귀, 코, 혀, 피부. 우리 몸에서 감각을 일으키는 다섯 개의 기관)을 통하여 경험하는 정신적인 산물이 됩니다. 이러한 정서의 올바른 비축을 위한 사유는 창조적인 상상력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이르테면 '겨울나무'를 응시하면서 시적인 사유로 발전하려면 그 추운 겨울을 인내하면서 새봄의 루르름을 꿈꾸는 희망으로 바꾸어보는 사유, 즉 인간이 처해 있는 현실과 미래의 유추로 연관짓는 사유가 필요하게 됩니다. 여기에서 잠시 조병화 시인의 말을 들어 봅시다. 나는 지금까지 나의 내면의 고독과 싸워 왔다. 그 생(生), 애(愛), 사(死) 그 존재와 생존, 그 순수허무와 그 순수고독과 싸워 왔다. 항거와 슨응, 그걸 살아오고 있는거다. 그게 나의 시이며 시론이며 존재 양상인 거다. 인간은 누구나 한정된 자기 수명을 살다 가는 거다. 그 한정된 시간을 견디고 살다간, 또 다른 세계로 이사를 가야하는 거다. 죽음이 바로 그것이다. 그 죽음이 어떻게 사느냐하는 것이 나의 테마이며 나의 작업인 거다 때문에 나는 문학이니, 예술이니 하는 것을 먼저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나는 나를 철학하기 위해서 오로지 사색해 왔을 뿐이다. 나를 세우기 위한 철학, 그 발견과 창작의 철학 속에서 시를 배회했고 시의 이치를 찾았고 그것으로써 시를 써 왔다. 이와같이 어떤 사물이건 관념이건 간에 모든 것들에게 생명력을 부여하고 의미를 찾아보는 사유, 이러한 사유야말로 시를 쓰기 위한 사유가 아닐까 싶다    
906    만약 詩 한줄이라도 에너지가 있다면... 댓글:  조회:3505  추천:0  2016-01-09
'첫 생각'을 놓치지 말라  * 손을 계속 움직이라. 방금 쓴 글을 읽기 위해 손을 멈추지 말라. 그렇게 되면 지금 쓰는 글을 조절하려고 머뭇거리게 된다.  * 편집하려 들지 말라. 설사 쓸 의도가 없는 글을 쓰고 있더라도 그대로 밀고 나가라.  * 철자법이나 구두점 등 문법에 얽매이지 말라. 여백을 남기고 종이에 그려진 줄에 맞출려고 애쓸 필요 없다.  * 마음을 통제하지 말라. 마음 가는대로 내버려 두어라.  * 생각하려 들지 말라. 논리적 사고는 버려라.  * 더 깊은 핏줄로 자꾸 파고들라. 두려움이나 벌거벗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도 무조건 더 깊이 뛰어들라. 거기에 바로 에너지가 있다.  멈추지 말고 계속 써라  자기 내면의 목소리를 믿는 것을 배운 다음 글을 쓰게 되면 그 글에 힘이 실리게 된다. 자신의 깊은 자아를 믿게 되면, 이제 그곳에는 글쓰기를 회피하려는 목소리가 설 자리는 자연스럽게 없어진다. 나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졸작을 쓸 권리가 있다. 지금 당신의 마음이 달려가는 곳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든지 그대로 적어 내려가라. 제발 어떤 기준에 의해 글을 조절하지는 말라.  습작을 위한 이야깃거리를 묶어 보자  1. 방 창문을 뚫고 들어오는 빛의 성질에 대해 써 보자. 10분, 15분, 30분, 시간을 정해 놓고 멈추지 말고 계속 적어가라.  2. '기억이 난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해 보자. 아주 작고 사소한 기억이라도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모두 적어본다. 그러다가 중요한 기억이나 선명한 기억이 떠오르면 바로 그것을 구체적으로 적어 내려간다. 만약 막히면 '기억이 난다'라는 첫 구절로 다시 돌아가 계속 적어보라.  3. 긍정적인 것이든 부정적인 것이든 아주 강력한 감정을 불러일으킨 것을 하나 골라서 아주 사랑하는 것처럼 적어보라. 다음에는 같은 것을 두고 싫어하는 시각으로 새롭게 써보라. 그런 다음 이번에는 완전히 중립적인 관점에서 새롭게 글을 써보라.  4. 한 가지 색만을 생각하며 15분 동안 산책해 보자. 산책하는 동안 주변의 자연과 사물에서 그 색을 발견할 수 있는지 주의 깊게 관찰하자. 그리고 이제 노트를 펼치고 15분 동안 적어보라.  5. 오늘 아침 당신의 모습을 적어 보라. 아침 식사로 뭘 먹었는지, 잠에서 깨어날 때 기분이 어땠는지, 버스 정류장까지 걸어가는 길에 무엇을 보았는지 등등 가능한 구체적으로 서술하라.  6. 당신이 진정으로 아끼고 사랑하는 장소를 시각화시켜 보자. 그곳은 주로 어떤 색으로 채워져 있는가? 무슨 소리가 들려오는가? 또 어떤 냄새가 나는가?  7. '떠남'에 대해 써보자. 내용은 어떤 것이라도 상관이 없으며 단지 당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접근하는 것이 중요하다.  8. 당신의 어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기억할 수 있는 최초의 기억은 무엇인가?  9. 당신이 사랑했던 사람들은 누구였는가?  10. 당신이 몸담고 있는 도시에 대해 써보라.   11. 당신의 할아버지, 할머니에 대해 묘사해 보라.  12. 다음과 같은 것들에 대해 적어 보라. 모호하고 추상적인 표현은 금물이다. 실제로 있는 그대로 적어라. 솔직하고 상세하게 접근해야 한다.(수영하기, 하늘에 떠있는 별, 당신이 경험했던 가장 무서웠던 일, 초록빛으로 기억되는 장소, 性에 대한 의식이 생기게 된 동기 혹은 최초의 성 경험, 신의 존재나 자연의 위대함을 깨달았던 개인적 체험, 당신의 인생을 바꾼 책이나 문구, 육체가 가진 한계와 인내, 당신이 스승으로 섬기는 인물)  13. 시집 한 권을 꺼낸다. 아무 데나 책장을 열고, 마음에 드는 한 줄을 골라 적은 다음, 거기서부터 계속 이어서 글을 써보자. 쓰다가 막히면 첫 줄을 다시 적은 다음 새로 이어서 쓴다. 다시 쓰는 글은 좀전에 썼던 글과 완전히 방향이 다른 새로운 시각으로 써본다.  14. 당신이 동물이 되었다고 상상해보라. 당신은 어떤 동물인가?  *나태함과의 싸움  텅 빈 노트 또한 에고가 끊임없이 싸우고 있음을 보여주는 또 다른 모습이다. 당신 속에서 싸움을 원하는 마음이 있다면 싸우도록 내버려 두라. 말할 때는 오로지 말 속으로 들어가라. 걸을 때는 걷는 그 자체가 되어라. 죽을 때는 죽음이 되어라. 밑도 끝도 없는 죄의식과 회피, 무력감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쓸데없는 시간 낭비다.  *편집자의 목소리를 무시하라  만약 당신이 열심히 창조적 목소리를 내려는데 편집자가 성가시게 달라붙는 느낌이 들어 작업을 진행시키기 힘들다면 편집자 입에서 나올 법한 소리를 한번 적어보라. 편집자를 정확히 알면 알수록 편집자를 무시해 버리기도 한결 수월해진다.  *바로 당신 앞에 있는 것에서부터 출발하라  만일 내가 겁을 낸다면, 내가 쓰는 글도 왜곡되어 진실이 무엇인지 밝히지 못하게 된다. 작가는 작품을 쓸 때 모든 것을 항상 처음 대하는 기분으로 바라볼 줄 알아야 한다. 당신 앞에 있는 것이 무엇이든지 바로 거기서부터 출발하라.  내면의 잠재능력에 가 닿아라  자신의 목소리를 스스로 믿을 수 있게 되었을 때, 그 목소리가 이끄는 곳으로 곧장 나가라. 시의 온기에서는 발을 떼고 시에 '대하여' 말하는 데만 열을 올리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자.  시인과 시는 다르다  우리가 쓰는 글은 순간이 만들어낸 작품이다. 내가 만들어낸 시는 그 시를 쓰고 있을 때의 내 생각, 내 손, 나를 둘러싼 공간과 내가 느낀 감정들일 뿐이다. 당신은 좋은 시를 쓰고, 그 시에서 떠나라. 시에 들어가 있는 단어는 당신이 아니다. 당신 몸을 빌어 밖으로 표출되었던 '위대한 순간'이다.  논리를 뛰어넘어 모든 것을 수용하라  우리 마음은 모든 것을 게걸스럽게 먹어치울 정도로 수용적이어야 한다. 개미 한 마리와 코끼리 한 마리 안에서 공통된 다른 하나를 볼 수 있는 폭넓고 열린 시각을 가져야 하며 그것을 거리낌없이 표현할 수 있는 용기를 지녀야 한다. 우리 모두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은유는 이러한 진실을 반영한 것이기에 종교적이다.  글쓰기는 맥도날드 햄버거가 아니다  글을 쓸 때 모든 것을 풀어주라. 글쓰기는 자신의 에고를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대로 연출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하나의 인간 존재임을 드러내보이는 것이다. 바보가 되어 시작하라. 고통에 울부짖는 짐승처럼 볼썽사나운 모습으로 시작하라.  *강박증의 힘을 이용하라  작가란 종국에는 자신의 강박증을 쓰게 되어있다. 당신을 가장 괴롭히는 강박증에는 힘이 있다. 그 힘을 거부하지 말고 이용하라. 창작에 대한 강박증은 무언가 가치있는 길을 찾아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 술을 마시는 것은 문제와 정면으로 맞서는 것이 아닌 일종의 회피이고 게으름이다.  *그들의 이름을 불러주라  우리의 삶 모든 순간순간이 귀하다. 이것을 알리는 일이 바로 작가가 해야 할 일이다. 한 모금의 물, 식탁에 묻어있는 커피 얼룩에 대해서까지 '그래!'하고 긍정적으로 답할 수 있어야 한다. 세부묘사는 우리가 만나는 세상 모든 것들, 모든 순간들에 이름을 붙여주고 그 이름을 불러주고 기억하는 것과 같다.  *케이크를 구우려면  당신 마음에서 나오는 열과 에너지를 첨가하라. 강에 대해 쓰고 있다면 그 강에 온몸을 적시라. 글이 글을 쓰도록 하라. 당신은 사라진다. 에너지를 분산시키지 말라. 열을 가하다 중단한다면 그것은 죽도 밥도 되지 않는다.  *글쓰기는 듣기에서 시작된다  만약 당신이 사물의 이치를 잡아낼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시를 쓰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얻은 것이다. 좋은 작가가 되려면 기본적으로 다음 세 가지가 필요하다. 많이 읽고, 열심히 들어주고, 많이 써보는 것이다. 그리고 너무 많이 생각하지는 말아야 한다.  *파리와 결혼하지 말라  문학의 책임은 사람들을 깨어있게 하고, 현재에 충실하게 하고, 살아 숨쉬도록 하는 것이다. 글을 쓸 때는 마음 속에 무수한 길들이 열리는 법이다. 하지만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들판으로 달려가서는 안 된다. 파리의 존재를 인식하고, 더 나아가 원한다면 파리를 사랑할 수도 있겠지만, 파리와 결혼하지는 말라는 것이다.  *글쓰기는 사랑을 얻기 위한 도구가 아니다  자신이 글 쓰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자기 체면을 올리고 다른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기 위한 방편이나 도구로 이용하는 사람이 있다. 누군가 자신의 재능에 대해, 작품에 대해 보내는 칭찬에 기대 살아가는 한 그 작가는 다른 이들의 비평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보다는 우리의 근원적인 원조자에 대해 아는 편이 작품성을 높이는 데 훨씬 도움이 된다.  *당신의 깊은 꿈은 무엇인가?  소망들을 글로 적는 것은 우리 인식의 한가운데에 그 소망을 각인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꿈은 우리가 삶 속으로 관통해 들어가게 만드는 하나의 방법이다.  *때론 문장 구조에서 자유로울 필요가 있다  우리의 사고 방식은 문장 구조에 맞추어져 있고 사물을 보는 관점도 그 안에서 제한된다. 당신이 결국에는 인간이 만든 언어 체계 속으로 돌아가겠지만, 당신과 이 세상을 이루고 지탱하며 관통하고 아우르는 그 근원적인 큰 흐름을 알고 있어야 한다.  *말하지 말고 보여달라  독자들에게 당신의 감정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 속에서 생생하게 살아있는 감정의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자신의 작가라는 사실을 잊고 비판적인 편집자 행세를 할 필요는 없다.  *그냥 꽃이 아니라 그 꽃의 이름을 불러주라  사물의 이름을 불러주어 그 사물의 존엄성을 지켜주라. 사물의 이름을 알고 있을 때, 우리는 근원에 훨씬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꽃' 대신 '제라늄'을 말할 때 당신은 현재 속으로 더 깊게 뚫고 들어가게 된다.  *평범과 비범  우리는 세부묘사를 대단하지 않게 여기거나 개미나 파리같은 것에만 사용하는 것으로 잘못 알고 있다. 우리는 모든 것이 이미 평범함과 비범함을 가지고 있음을 놓쳐서는 안 된다. 세부묘사와 우주는 서로를 변화시켜 준다.  *이야기 친구를 만들라  작가는 모든 소문과 지나가는 이야기를 귀담아 들을 책임이 있다. 작가는 어떤 사건에 대해 그냥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보여주기'를 원한다.  *작가들은 위대한 애인이다  우리는 앞서 있었던 모든 작가들의 짐을 나르고 있다. 작가들은 다른 작가들과 사랑에 빠진다. 다른 사람이 쓴 글을 사랑하게 되는 능력이 당신 안에 있는 능력을 흔들어 깨운다. 그들도 훌륭하고 나도 훌륭하다. 예술가는 외롭고 고통받는 존재라는 생각 같은 것은 떨쳐버려라.  *동물적인 감각으로  고양이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으면서 동시에 모든 감각을 동원해서 보고, 듣고, 냄새를 맡는다. 길을 잃어버릴까 하는 두려움이 바로 항상 길을 잃어버리는 이유인 것이다. 언어가 배꼽에서부터 올라오는 것을 느끼라. 머리를 위 속으로 끌어내리고 소화시키라. 정맥에서부터 곧장 펜을 통해 종이 위에 토해 놓게 만들라. 제일 좋은 글은 당신의 안에 들어있는 모든 것이 실린 글이다.  8자기 마음을 믿어라  자신의 마음을 믿고 자신의 사고 속에 똑바로 서 있는 훈련이 따라야 한다. 자신의 만들어낸 질문에는 스스로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종이 위에 안개를 옮겨 놓지 말라.  *변덕스러운 마음을 길들이는 법  글을 쓰려고 할 때마다 이 작업보다 훨씬 재미있는 일들이 백 가지도 넘게 나를 유혹하는 것을 항상 느낀다. 마음은 항상 일과 집중력에 대해 저항하려 든다. '오, 그건 그냥 게으름일 뿐입니다. 어서 가서 일하세요.' 많은 사람들이 있는 곳이 오히려 당신을 혼자가 될 수 있게 해준다.  *성, 그 거창한 주제에 대하여  우리는 먼저 긴장을 풀어야 한다. 화제에 대한 사전적 정의가 아니라, 당신과 그 화제와의 관계를 발견하라. '에로티시즘'이라는 단어를 다루기가 벅차다면, 이렇게 해보라. * 무엇이 당신 몸을 뜨겁게 만드는가?  * 성과 관련된 과일 이름을 아는대로 모두 적어보라.  * 당신이 사랑에 빠졌을 때 먹는 음식은 무엇인가?  * 당신의 신체 중에서 가장 성적인 곳은 어디인가?  * 당신이 맨 처음 성애를 느꼈던 기억은?  *글쓰기의 심장 속으로 들어가라  그렇다. 그냥 쓰라. '그래! 좋아!'라고 외치고, 정신을 흔들어 깨우라. 살아 있으라. 쓰라. 그냥 쓰라. 그냥 쓰기만 하라. 우리가 글쓰기의 심장 안에 있다면 장소 따위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앞으로, 더 멀리  당신이 끝까지 도달했다고 생각하고 멈추었던 곳에서 조금 더 멀리 나갔을 때 제어할 수 없는 아주 강한 감정과 만나게 될 것이다. 나는 최고의 글을 쓰고 있을 때 가슴이 미어지는 것을 느낀다. 충분히 자신을 밀고 나갔고 철저하게 에고가 깨졌다고 느낄 때조차도 조금 더 앞으로 밀고 나가라.  *인생에 대한 연민  우리에게 두려움이 중요한 이유는 자신의 꿈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이 두려움을 극복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무지와 암흑의 장소에서 출발한 글쓰기가 결국에는 우리를 깨우치게 할 것이다.  8나는 왜 글을 쓰는가?  사물은 그냥 있는 것이다. 당신이 글을 쓰기 원한다는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하라. 그러니 계속 쓰라. '나는 왜 글을 쓰는가?' 또는 '나는 왜 글을 쓰고 싶어하는가?'라고 묻되, 깊이 생각하지는 말라.  *작가로서 살아남는 길  작가로서는 강하고 용감하지만 한 인간으로 돌아오면 한없이 무기력하다. 세상에 대한 우리의 위대한 사랑과 생활인으로서 우리 등에 달라붙은 불명예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종이에는 멋진 시를 적지만 자기의 삶에는 침을 뱉거나, 자동차를 저주하거나, 고속도로를 이용하는 사람들을 매도하지 말라. 책상에서 시를 치우고 부엌으로 돌아가라.  8자신이 쓴 글을 완전히 떠나보내라  자기가 만들어낸 작품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한다. 즉흥 글쓰기 창구는 바로 이러한 위대한 전사가 될 수 있는 기회이다. 자신이 쓴 글을 완전히 떠나보내는 것, 그럴 수 있을 때 작가로서 완전하게 설 수 있다.  *방랑을 위해 들판으로 나가라  한번쯤은 입에 거품을 물 정도로 분별력을 놓아버린 천치가 되고 낯선 들판을 헤매는 방랑자가 되기를. 당신이 말을 겁내는 사람이라면, 말 한 마리를 사서 말과 친구가 되어라. 스스로에게 방황할 수 있는 큰 공간을 허용하라.  *시간이 작가를 만드는 것은 아니다  글을 쓰기 위해 자리에 앉을 때는 목숨 전체를 기꺼이 그 글 속에 집어넣어야 한다. 말하지 않으면 병이 날 것 같을 때까지 기다리라. 법에 얽매이기보다는 살아있는 존재를 향해 친구가 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심장 전체로 글을 쓰라. 종이에서부터 걸어나와 우리의 인생 전체로 들어가는 것이다.  *더 이상 갈 곳이 없을 때  예정되어진 운명이 글쓰기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할 때, 이제는 더 이상 도망갈 곳이 없게 된다. 중요한 것은 수많은 전술의 변화와 상관없이 무슨 일이 있어도 글쓰기와의 관계를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외로움을 이용하라  익숙해서가 아니라 그 속에 서 있을 수 있는 법을 배우기 위해 고독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당신의 글이 또 다른 외로운 영혼에게 닿을 수 있도록 손을 뻗으라.  **더 큰 자유를 위해 집으로 돌아가라  당신이 내면 깊이 들어가면 갈수록 당신은 당신으로 된다. 당신이 집에 가는 이유는, 더 큰 자유를 얻기 위해서다. 뿌리로 돌아가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그 뿌리에 고착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의 뿌리가 묻힌 곳에서 발견되는 고통을 견디기 싫어서 그것을 외면하는 가장 쉬운 방법으로 도망치려 한다. 단 한 사람과 접촉하고 교제하면서도 인간 전체에 대한 연민을 배울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독자에게 당신 심장 더 깊은 속으로 들어오는 기회를 만들어 주라.  **사무라이가 되어 글을 쓰라  만약 그 시에 한 줄이라도 에너지가 있다면, 그 한 줄만 빼고 나머지는 모두 잘라버려도 좋다. 우리의 글이 계속 타들어가 환한 빛을 내는 지점이 결국 하나의 시와 산문이 된다. 미적지근한 글은 사람을 잠들게 만든다.  **다시 읽기와 고쳐 쓰기  산만한 정신을 뚫고 지속적으로 글쓰기를 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훈련이다. 지금 이 순간 마음에 떠오르지 않는 것은 무엇이든지 잘라버릴 수 있는 용기를 지닌 전사, 사무라이가 되어야 한다       
905    詩에 뭐라고 제목을 붙일가... 댓글:  조회:4252  추천:0  2016-01-09
시의 제목에 관하여 (강인한)  아내가 시집올 때 자기 사진을 챙겨 가져왔다. 친구들과 학창 시절에 찍은 사진, 직장 생활을 할 때의 사진, 혼자 멋을 부리고 찍은 독사진… 사진과 함께 그 시절의 추억도 같이 묻어 있을 것이었다. 유치원 다닐 때 찍었다는 다섯 살 때의 흑백사진을 본다. 너른 마당 한가운데 작은 의자를 놓고 거기 치마 저고리를 입은 단발머리 계집애가 앉아 있다. 아마 검정 통치마에 흰 저고리일 것이다. 정면의 햇빛이 눈부신 듯 찡그린 얼굴은 동그랗다. 마치 우리 막내딸의 어린 시절 모습을 보는 것 같다.  그 마당을 나는 알 것 같기도 하다. 변소 가는 마당 한 구석에는 벽오동나무도 한 그루 서 있고. 어렸을 때부터 결혼할 무렵까지 아내는 죽 그 집에 살았었다. 꽤 커다란 기와집이었다. 어쩌면 또래의 동무들과 함께 마당에서 공기놀이도 하였을 법하였다.  다섯 살 난  단발머리 계집애가  동무랑 공깃돌을 굴리는데  벽오동나무 넓은  그림자가 내려와  아이의 등을 간질이다가  낮잠을 슬슬 덮어주었다  삼학년 아이들의 모의수학능력시험 감독을 하는 중에 문득 이런 이미지가 떠올랐다. 여분의 답안지 뒷장에 그것을 적었다. 시의 영감이 떠오르는 건 세상이 가장 고요한 어느 한 순간이다. 길을 걸을 때, 버스를 타고 창밖에 무심히 눈길을 주고 있을 때, 혹은 이른 아침의 화장실에 앉아 있을 때. 그리고 숨소리 하나도 잡힐 듯 조용한 시험 시간의 교실에서의 어느 한 순간.  집에 돌아와서 저녁에 그 시구를 꺼내 놓고, 거기에 벽오동나무를 배치해 보고 공깃돌 부딪는 소리도 넣어 보았다. 계절은 가을이 벽오동나무와 어울릴 거라고 생각하였다. 그렇게 해서 다음과 같은 시로 완성되었다. 썩 마음에 흡족한 시는 아니지만 더 이상 손대기가 싫었다.  측간 가는 길을 비켜서 주춤  키 큰 벽오동나무가  굽어보고 있었다  다섯 살 난  단발머리 계집애가  동무랑 공깃돌을 굴리는데  하늘엔 옥돌 부딪는 소리  푸른 가을  벽오동 넓은 이파리  그림자가 내려와  아이의 등을 간질이다가  낮잠을 슬슬 덮어주었다  아내는 요즘  어릴 적 벽오동나무보다  굵은 허리로  짧은 가을 볕 낮잠이 달다  이 시에 뭐라고 제목을 붙일까. 참 난감하였다. '아내'라고 하지니 너무 싱거워지는 것 같았다. '세월'이라는 제목도 떠올랐다. 그것도 별로 내키는 제목이 아니었다. '아내의 가을'이 괜찮을 성싶었다. 그 제목으로 홈페이지에 시를 올렸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찜찜한 기분이었다. 제목이 차라리 맨 아래에 붙는다면 그럴싸하겠지만.  첫 연부터 셋째 연까지는 아내의 유년기이고, 넷째 연에 와서 아내의 현재로 반전을 이루는 데 이 시의 묘미가 있다고 나는 생각하였다. 그런데 제목부터 '아내의 가을'이라고 하면 독자들은 처음부터 그 다섯 살 난 계집애를 아내의 어린 시절로 금방 눈치챌 것 아니겠는가. '아내의 가을'은 시상의 반전이 주는 즐거움을 싹 가시게 하는 제목이었다.  '후문(後聞)'이라는 제목이 문득 떠올랐다. 감춰진 반전도 쉬 드러나지 않고 무난한 듯 보였다. 하지만 역시 딱 들어맞는 제목은 아닌 것 같았다. '벽오동나무가 있는 풍경', '낮잠' 등 이런저런 말들을 뒤슬러보다가 결국 '벽오동나무 후문(後聞)'을 생각했고, 조사 '의'를 끼워 넣어서 '벽오동나무의 후문(後聞)'으로 시의 제목을 고쳤다. 그리고 고친 제목을 홈페이지에 수정하여 올렸다. 별것도 아닌 시인데 제목 때문에 무던히 애를 먹은 시가 이 시 '벽오동나무의 후문(後聞)'이다.  수필이나 소설에 제목을 붙이기가 시보다 쉽다고 하면 수필가나 소설가로부터 욕을 먹을까. 시 아닌 산문에서는 단순한 소재를 제목으로 정할 수도 있고, 주제와 관련시켜 상징적인 제목도 붙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우편배달은 두 번 벨 울린다'라는 미스터리 소설이 있었다. 소설의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어보아도 우편배달부는 그림자도 얼씬하지 않는다. 소설의 내용과는 아무 상관없이 좀 '별난' 제목이라고 생각해서 작가 제임스 케인은 그렇게 제목을 붙였다고 한다. 이게 영화로 만들어졌는데 잭 니콜슨이 주연을 맡고 나온다. 우리 나라에 수입된 그 영화가 상영되면서 당시엔 외설스런 장면이 문제가 되어 집배원들이 그 영화의 제목을 고쳐달라고 항의를 하였다. 급기야 '포스트맨은 벨을 두 번 울린다'로 영화 제목이 바뀌었다.  제목이 없는 시도 있을까. 김영랑의 사행시(四行詩)들은 숫자로 번호만 매겨져 있지 별도의 제목이 없다. 따지고 보면 '사행시 1, 2, 3…'이 제목일 수도 있겠다.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는 사행시의 앞 구절을 편의상 제목인 양 붙여놓은 것일 뿐이다.  그와 같이 시의 제목을 그 시의 첫 구절을 따다가 쓰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그런 제목은 대체로 무난한 것이지 썩 좋은 제목은 아닐 것이다. 연작시의 제목 아래에 번호만 매겨진 시들도 종종 본다. 그게 수십 편이 되면 앞에 나온 시들보다 뒤쪽의 시들은 본래의 연작시 제목이 지녔던 주제와 동떨어질 수가 있다. 연작시가 아니라도 똑같은 제목을 여러 편에 붙여도 무방할 것이다. 이브 본느푸아의 시집을 보면 '돌'이라는 같은 제목의 각각 다른 시가 여러 편 들어 있는 걸 확인해 볼 수 있다. 제목이 먼저 주어지고 시를 쓰는 백일장과 마찬가지로 시보다 먼저 제목이 쓰여질 때도 있다. 습작 시절에 연습으로 나도 그런 시를 많이 써 본 경험이 있다.     
904    그러나, 누구나 좋은 詩를 쓰는것은 아니다... 댓글:  조회:4330  추천:1  2016-01-09
좋은 시를 어떻게 쓸 것인가   최동호 시를 쓰는 사람은 누구나 좋은 시를 쓰고 싶어한다. 그러나, 누구나 좋은 시를 쓰는 것은 아니다.  왜 그러할까. 일부 사람들은 말한다. 좋은 시는 특별한 재능을 가진 사람만이 쓰는 것이라고. 그러나, 나는 이런 과장된 주장에 반대한다. 좋은 시는 누구나 쓸 수 있다. 자신의 잘못을 고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렇다면 말할 것이다. 그게 그 말이 아니냐, 자신의 잘못을 고친다는 것이 바로 특별하다는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그렇지 않다. 시를 쓰려는 사람들 중의 상당수는  어떤 환상을 강하게 가지고 있다는 것이 필자의 경험이다. 다른 사람의 비판이나 지적을 좀처럼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그들의 마음속에는 자기도 모르는 자기탐닉적 주관성이 완강하게 자리잡고 있는 경우가 많다.  물론 천재의 시가 있다. 김소월이나 정지용과 같은 경우가 그 예일 것이다. 그러나, 김소월은 물론  정지용의 경우에도 단어 하나 시 한 줄의 첨삭 과정을 살펴보면 그들 또한 누구보다 치밀하게 초고를 가다듬었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교단에서 창작 지망생을 많이 접하는 나의 경우 수많은 학생들에게 그들의 장단점을 지적해 주었는데, 그들 중의 어떤 이는 몇 마디 언급을 발판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무리 지적해 주어도 절대로 자기 주장을 고치지 않아 별다른 진척을 이루지 못한 사람도 있었다. 남들의 모든 지적을 수용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지적만 듣고 있을 필요도 없다. 그러나 제 3자의 지적을 심각하게 음미하여 자신의 약점을 발견하고 이를 수정하는 사람이 좋은 시를 쓰게 된다고 말해 주고 싶다.  좋은 시를 쓰려고 하는 사람에게 두루뭉수리한 지적이나 모호한 칭찬은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직접적이고 신랄한 지적일수록 도움되는 바 크다.  2. 모호함과 명료성  시적 감성이나 표현은 명료해야 한다. 모호함은 금물이다. 물론 감정의 엉킴이 복잡하여 때로는 뿌옇게 복합된 심정 상황도 있을 수 있겠지만, 그것을 표현하는 언어는 명료한 것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독자들에게 그런 심정을 적확하게 전달하기 위해서는 시적 감정을 모호하게 드러내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음에 인용된 [눈 오는 날은]은 모호한 표현들로 인해 시적 감정이 적절히 정제되었다고 말하기 어렵다.  눈오는 날은  내리는 눈발 사이 북녘  소식 같은 것 섞여서 온다  새벽녘  시베리아 바이칼호반쯤 휩쓸던  기마민족들 말발굽소리 무수히 지나가고  희뿌옇게 동녘이 처음 열릴 때  하늘에서 내리는 글발, 희끗희끗 단군 한배님의  긴 수염 눈발 사이 휘날리고  환상의 새 한 마리 천년을 거슬러 올라  송화강 언덕을 치닫고  고구려의 위업 삭지 않는  요동벌판 모습 솜처럼 피어오르는  눈오는 날은  별 피듯 송곳송곳 지울 수 없는 생각  한숨에 묻어나는 입김처럼 지워버리고 싶은 생각들  내리는 눈발 사이 주체할 수 없는  설움에 떨고 있는 나를 본다  - [눈오는 날은]  전체적으로 보아 시의 구성이 무엇인가에 대한 작자의 감각은 살아 있다. 기·승·전·결의 형식을 그 나름으로 갖추어 시상을 전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이런 전개가 판에 박힌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시상의 균형과 안정감을 갖게 한다는 점에 이러한 구성은 커다란 장점이다. 이 시의 전환은 제 4연에 있는데, 여기서 지나치게 무겁고 어색한 느낌을 받는다. 앞의 시행이 이를 뒷받침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제 1연의 '소식 같은 것', 제 2연 '시베리아 바이칼호반쯤', '말발굽소리 무수히' 등에서 '같은 것', '호반쯤', '무수히' 등이 모호하게 돌출되어 있다는 것이다. 제 3연의 '글발'과 '눈발'도 작자로서는 고심한 결과였을 터이나 제 4연의 시상을 설득력 있게 끌어오기에는 역부족이다. 물론 이 어색함을 지우기 위해 작자는 '환상의 새'를 날려 올리지만, 그 새가 천 년을 거슬러 올라갈 시적 필연성이 독자에게 쉽게 다가오지 않는다. 천 년을 거슬러 오르지 못하니 '고구려의 위업'은 더욱 추상적으로 느껴진다. 제 4연 마지막 행 '요동벌판 모습 솜처럼 피어오르는'은 이미지를 실감나게 살려 보고자 했다고 판단되는 것이기는 하지만, 마음을 가라앉히고 생각해 보아도 구체적 이미지가 떠오르지 않는다.  마지막 제 5연의 '주체할 수 없는 설움에 떨고 있는 나'에서 화자가 너무 표면에 나서서 설움에 떨고 있다고 판단된다. 설명적이고 불필요하다. 꼭 하고 싶은 말이 그것이라면 더욱 감추거나 다른 이미지를 빌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뒤틀림은 이미 제 5연 제 2행의 '별 피듯 송곳송곳 지울 수 없는 생각'과 제 3행의 '한숨에 묻어나는 입김처럼 지워 버리고 싶은 생각들'의 엇갈림에서 이미 예견된 일이다. 제 3행의 진술은 그 나름으로 통용될 수 있지만, 제 2행의 경우 무슨 말인지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다. '송곳송곳'이란 어휘가 이 문맥에서 생경하게 드러남으로 인해 더욱 그러하다. 이 시를 다 읽고 난 독자가 왜 눈 오는 날 이렇게 주체할 수 없는 설움에 떨어야 하는지 선뜻 공감할 수 없다는 것이 이 시의 약점이다. 표현하고자 하는 시적 감정은 강렬한 것이지만, 그 강렬함이 선명한 이미지로 인식되지 않기 때문이다. 끝으로 아쉬운 시행 하나를 더 지적하자면 '기마민족들 말발굽소리 무수히 지나가고'에서 작자는 구체적으로 표현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이 시를 읽은 사람 쪽에서 보자면 구체적으로 각인된 무엇이 떠오르지 않는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무수히'라는 시어가 막연하게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이 '무수히'는 '고구려의 위업'과 '주체할 수 없는 설움'의 동기가 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역사성을 갖게 하는 시적 긴장 없이 평범하고 느슨하게 사용된 까닭에 시가 전체적으로 생명감과 탄력이 느껴지기보다는 모호하고 막연하다는 느낌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이다.  3. 명료함과 추상성  명료한 시는 우리에게 산뜻한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군더더기나 잡박함이 제거되었다는 점에서 그 명료함은 일단 호감을 갖게 만든다. 그러나, 명료하게 쓰여진 시에서 삶의 깊이가 발견되지 않을 때 우리는 그 시적 사고의 단순성에 실망하기도 한다. 명료성은 복잡한 시적 감정이 여과되고 정련된 결과물일 때 독자들로부터 시적 공감력을 갖는다. 다음에 인용된 [유리창에 비, 그리고]는 간단하고 명료한 진술로 독자들에게 가깝게 다가온다. 물론 작자가 하고 싶은 시적 전언은 결코 단순한 것은 아니다. 그는 우주의 섭리는 물론 태초의 생명의 탄생까지 시적 상상을 확대하고자 한다.  유리창에 빗줄기가 부딪친다  잿빛 하늘의 방사다  무차별 난사되는 수정 알들  투명한 정자가 되어  자궁 속으로 들어간다  물과 흙의 슬픈 정사  저 어두운 땅속 깊숙이  끝없이 사라지고 생겨나는  우주의 섭리가 천둥처럼 울리고  어둠은 이제  더 이상 어둠만이 아니다  태초에 생명은 그렇게 얻어졌느니  - [유리창에 비, 그리고]  유리창에 떨어지는 빗줄기를 바라보며 성적 이미지를 떠올림은 물론 그 아득한 시원으로까지 상상의 진폭을 확장시켜 보고자 한 것이 이 시에서 작자가 시도한 시적 의도이다. 많은 사람들이 접하는 일상에서 우주의 섭리와 생명의 창조까지 연상한다는 점에서 그의 시적 발상은 결코 범박한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단락이 연결되는 제 2연과 제 4연을 한 행으로 처리했다는 점에서 간결 명료하게 시행을 마무리하려는 노력이 깃들어 있음도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다. 그럼에도 전체적으로 보아 어딘가 이 시가 추상 관념에 의해 만들어진 듯한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수정의 알들이 투명한 정자가 되어 자궁 속으로 들어간다는 시적 전개는 크게 문제되지 않는다. 그러나 제 1연 4-5행의 진술들이 시적 리얼리티를 제대로 얻고 있는가 반문해 볼 필요가 있다. '투명한 정자'가 '자궁 속으로' 들어가는 과정에서 작자의 시적 상상력의 변증법이 지나치게 도식적이라는 것이다.  빗줄기가 유리창에 떨어져 투명한 정자가 되고 이것이 흙 속으로 떨어져 들어가 물과 흙이 뒤섞이고, 새로운 생명이 탄생된다는 것이 전체적인 구도이다. 그러나 이 구도는 사물에 대한 정밀한 관찰이나 사물의 생명력에 대한 깊은 통찰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미리 설정한 자신의 선입관을 그대로 반영하여 쓴 것이라고 지적할 수 있다. 작자 자신은 우리에게 이것이 얼마나 자연스러운가라고 반문할지 모른다. 제 3연과 4연의 시적 논리가 어둠은 이제 어둠만이 아니라 생명이다라고 요약되는 것 또한 그러한 진술의 연장선에 있음을 뜻한다. 물과 흙의 뒤섞임이 어둠 속에서 이루어지고 그 어둠이 생명의 탄생을 가능케 한다는 것은 하나의 논리이지 시적 통찰에 의한 구체적 깨달음이 아니기 때문에 위의 시는 크게 공감을 주지 못한다. '우주의 섭리가 천둥처럼 울리고'에서도 산문적, 개념적 진술은 있어도 시적 공감을 유발하는 구체성이 드러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꼬집어 말하자면, 제 1연에서 '무차별 난사되는 수정 알들'이란 표현이, 마구 쏟아지는 빗줄기가 유리창에 부딪치는 정경을 사실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라고 일차적으로 말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그야말로 '무차별 난사' 이상의 표현일 수 없다는 것이다. 정말 이 시의 작자가 사정없이 쏟아지는 빗줄기를 주의 깊게 바라보았다면 '무차별 난사'가 아닌 그 나름의 다른 표현을 찾았을 것이며, '우주의 섭리'가 어둠 속에서 빗방울을 머금어 어떻게 생명으로 탄생되는가를 좀더 구체적으로 표현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시의 명료한 진술들은 유리창에 쏟아지는 빗줄기를 방안에서 바라보며 떠올린 이런 저런 상념들의 스케치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서도 봄부터 우는 소쩍새의 울음과 먹구름 속에서 우는 천둥소리가 있고, 무서리가 내리는 가을 새벽이 있는 것이 아닐까. 어둠에서 탄생하는 생명 현상에 동참하는 시적 상상력 없이 사물과 거리를 두면서 현상을 외곽에서 묘사하는 시적 진술은 시적 호소력을 갖지 못한다. 손에 흙을 묻히지 않은 깨끗한 손으로 노동의 어려움을 말하는 것과 같은 모순을 느끼게 하기 때문이다. 물론 시인의 손은 노동에 짓이겨지지 않았을지라도 시인의 펜촉은 노동으로 뭉그러져 있어야 참된 땀냄새가 밴 시가 쓰여진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지적하자면 '우주의 섭리'와 같이 크나큰 뜻을 머금고 있는 어휘들은 그 무게를 감당할 수 있는 시적 문맥이 아니라면 가급적 피하는 것이 좋다는 것을 말해 두고 싶다. 커다란 것보다는 사소한 것에서, 관념적인 것보다는 구체적인 것에서 우리는 시적 감동을 받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또한, 짧은 시에 태초에 이루어졌던 생명의 탄생과 같은 거창한 주제를 범박한 언어로 다루어서는 좋은 시가 탄생하기 어렵다는 것도 아울러 지적해 두고 싶다.  4. 새로움과 옛스러움  세상살이 변화가 격해질수록 옛 것은 빨리 사라져 간다. 옛 것을 돌이켜 새로운 것을 배운다는 격언은 이제 그 효용성을 상실해 가고 있는 것 같다. 모두가 새로운 것을 추구하고 새로움에만 집착하는 것이 최근 사람들의 심적 동향이다.'새 것 콤플렉스'라는 말이 유행할 만큼 20세기 한국은 새로운 것을 추구했고, 그 결과 20세기 말에는 경제적 도약을 성취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일까. 우리가 재빨리 버리고자 했던 것들 속에 사실은 오늘의 경제적 기적을 이루게 하는 문화적 코드가 숨겨져 있었던 것은 아닐까라고 반문해 볼 시점에도 이른 것이다.  이런 생각은 물론 과거로 돌아가자든가 과거의 것이 좋다는 폐쇄적 보수주의에 의한 것은 아니다. 우리가 진정 새로워지려면 과거로부터 우리의 문화적·정신적 뿌리로부터 새로움이 터져나와야 한다는 것을 되새겨 보자는 것이다.  과거의 것이 과거 그 자체로 되풀이될 때 그것은 새로움을 추동하기보다는 과거의 속박이 될 것이요, 새로움이 새로움 그 자체일 뿐일 때 그것은 알맹이 없는 새 껍데기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음미해야 한다는 것이다.  좋은 시를 쓰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새로움을 추구한다. 그 소재가 옛스러운 것이든 새로운 것이든. 옛스러움을 간직하면서도 새로운 시를 쓰고 싶은 시인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옛스러움을 살리기 위해서 오히려 옛스러움의 고착성을 버려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가진 사람들에게 [귀향]은 좋은 본보기가 된다.  사람들은 이토록 슬픈 눈이 내리면  시골집의 난로와 따뜻한 아랫목을 이야기한다.  토끼몰이나 눈썰매 타던 일을 자랑하며 마음속에 고향의 난로를  다시 피우는 것이다.  쌓인 눈을 털어 내고  낡은 문을 열면 어머니가 반가이 맞아 주신다고,  옛날 나의 집 사립문은 늘 열려 있었다.  눈 내리는 날은  저 쌓인 눈을 밟고 반가이 가족이름을 부르며  누군가 와 주기를 얼마나 목메었던가?  몇 마리 까치가 울고  매서운 바람이 늙은 소나무 위로 넘어가면  눈 내리는 나의 하루는 그리움으로 저물어  땟국물 절은 이불 속으로 야윈 몸을 숨긴다.  - [귀향]  위의 시를 읽고 있으면, 이 시가 초고속통신망이 세계를 감싸고 있는 오늘날에 쓰여진 것이라고 말하기 어렵다는 느낌을 받는다. 먼 옛날 전설의 고향 시대의 추억 한 토막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위의 시는 우리에게 익숙하고 편안함을 느끼게 한다. 과거는 모두 아름답다는 회고적 성향 때문일까. 또는 현실에 패배하고 과거로 복귀하려는 퇴행적 사고 때문일까.  어떻든 이런 소재를 가지고도 위의 시가 가진 정태적 복고 취향이 아닌 시골 풍경을 어떻게 살려내는가가 우리들의 관심사이다. 우선 두드러지게 보이는 것은 위의 시의 작자가 독자에게 심정적 호소를 매우 직접적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제 1 연의 '이토록 슬픈 눈', 제 2연의 '얼마나 목메었던가', 제 3연의 '그리움으로 저물어' 등등은 왜 그래야 하는지에 대한 동기나 이유보다는 당연히 모두 그럴 것이라는 주관적 판단에 의해 서술된 것들이다.  그러나, 과거에도 그러했지만 특히 오늘의 독자들은 왜 '이토록 슬픈 눈'이 내리는지 동의할 수 없다고 말할 것이다. 혼자만의 슬픔이라면 모르지만, 시란 읽는 이로 하여금 그 슬픔을 공감하도록 할 때 하나의 작품으로 성립하는 것이기 때문에, 나만의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슬픔으로 인식될 때 슬픔은 그 슬픔으로서의 가치를 갖는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작자는 분위기 조성을 위해 시의 서두에서 '고향의 난로'를 피워 놓았다. 시골집의 사립문은 늘 열려 있다고, 누군가로부터 이름 불리워지기를 바라는 사람으로서 저물어 가는 하루 동안 누군가를 기다리는 그리움을 이 시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시에서 말하고 있는 그리움은 그러므로 작자는 '목메이게 기다리고 있다'고 말하고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 자신을 위한 서술일 뿐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시에서 말하고자 하는 인간적인 것에 대한 그리움 자체가 문제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그 그리움을 말하고 표현하는 방법의 상투성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좀더 개성적이기 위해서는 '쌓인 눈', '낡은 문', '매서운 바람', '늙은 소나무' 등의 관형어구들 또한 검토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다시 한 번 따져 읽어보면, 누구나 감지할 것이다. 이러한 관형적 표현들에서 우리는 새로움보다는 고착된 과거의 정서를 느끼는 동시에 작자가 말하고자 하는 기다림 또한 진부한 기다림으로 느끼게 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땟국물 절은 이불'에서 작자는 조금 고심했을 것이다.  삶의 땀냄새가 전면에 드러나는 것이 좋을지 나쁠지 선뜻 판단하기 어려웠을 것이라 여겨진다.  오히려, 나에게 말하라면 이런 표현들이 좀더 적극적이고 생동감 있게 살아나야 된다고 지적하고 싶다. 누군가를 소리내어 부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 부름을 기다리며 하루종일 그리움으로 자신을 야위게 한다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좀더 분명히 말해 두고 싶은 것은, 이러한 소재나 그 속에 담긴 그리움 그 자체는 그것대로 오늘날에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지만, 그것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하는 것은 작자의 고심과 처리 능력에 따라 새로움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컴퓨터를 두들기고, 인터넷을 사용하는 것만으로 새로워지는 것은 아니다. 시골집을 떠올리고 고향 난로와 더불어 그리움을 말한다는 그 자체만으로 낡은 것도 아니다. 선배 시인들이 많이 다루었을 법한 소재를 자기 발전이 없이 그들의 상당수가 사용한 어법 그대로를 되풀이하는 것으로 인해 옛스러움의 품격을 살려내지 못하고, 퇴행적 상투성으로 마무리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것은 크게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귀향]에서 읽을 수 있는 기다림을 간직한 작자에게 우리는 인간적 신뢰를 보낼 수 있다. 그러나, 좀더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그 신뢰가 농촌 공동체 시대에 통용되었던 인간적 유대감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과연 이 시의 작자에게 어머니와 가족이 없다면 어떠할까. 아마도 그것이 새로운 시대 우리들의 시적 화두가 될 것이다.  5. 시 쓰기의 괴로움과 즐거움  위에서 우리는 가급적 비판적 시각에서 몇 가지 예를 검토해 보았다. 위의 시를 썼던 분들에게는 아마도 지나친 것이 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들만큼 시적 감정을 정돈하고 마무리한다는 것 또한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조금이라도 시를 써 본 사람들의 시 쓰기에 대한 반응은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시 쓰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는 재능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양자는 서로 분리할 수 없는 말이 아닐까. 아마도 잘 쓰지 못한다는 것에 대한 변명을 후자 쪽에 포함시켜 말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 경우가 많다. 이 때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간단하다. 재능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절대적인 연습량이 문제이다. 불면의 밤들을 보내지 않고, 남을 흉내내어 한 두 번 시도하다 안되면 잘 안 된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시 쓰기가 출세의 수단이 되거나 돈벌이의 방법이 된다면 어렵다는 말은 사라질 것이다. 그것은 생존의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많은 시간을 들여 전념한다 하더라도 쉽게 좋은 시가 쓰여지는 것은 아니다. 때때로 방황과 좌절에 빠지기도 할 것이며, 때로는 스스로 흥분하여 환호작약하기도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 쓰기는 그것이 어떤 세속적 보상과 관련이 없다는 점에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금방 보상이 주어지는 일이라면 누구나 쉽게 매달릴 것이지만, 동시에 또한 싫증나기도 쉬울 것이다. 세속적 보상도 없고, 뜻대로 잘 되지도 않지만, 끝내 해보고 싶다는 의욕이 자신의 마음속에서 우러나 시 쓰기에 자기 생존을 건다면, 그는 분명히 좋은 시를 쓰게 될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칭찬보다는 웬만한 비판과 질책에도 끄덕도 하지 않는 강한 의지가 발동할 때 그 사람의 시 쓰기는 제대로의 길로 나아갈 것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903    현대詩史에 수많은 활구(活句)를 낳다... 댓글:  조회:4652  추천:0  2016-01-09
  • 서정주 ‘冬天(동천)’             내 마음 속 우리님의 고은 눈썹을  즈믄 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  하늘에다 옮기어 심어 놨더니  동지 섣달 나르는 매서운 새가  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네    -----------------------------------------------------------------------       겨울 밤하늘을 올려 본다. 얼음에 맨살이 달라붙듯 차갑고 이빨은 시리다. 문득 궁금해진다. 미당(未堂) 서정주 시인은 왜 한천(寒天)에 사랑의 일과 사랑의 언약과 사랑의 얼굴을 심어 두었을까. 손바닥으로 쓸어보아도 온기라고는 하나 없는 그곳에 왜 하필 사랑을 심어 두었을까. 매서운 새조차 ‘비끼어 가’는 사랑의 결기를 심어 두었을까.  생심(生心)에 대해 문득 생각해본다. 처음으로 마음이 생겨나는 순간을 생각해본다. 무구한 처음을, 손이 타지 않아서 때가 묻지 않은 처음을. 부패와 작파가 없는 처음을. 신성한 처음을. 미당이 한천을 염두에 둔 것은 처음의 사랑과 처음의 연민과 처음의 대비와 처음의 그 생심이 지속되기를 바랐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심어 놨’다고 한 까닭도 생심 때문이 아니었을까. 심는다는 것은 생육(生育)한다는 것 아닌가. 여리디 여린 것, 겨우 자리 잡은 것, 막 숨결을 얻은 것, 젖니 같은 것 이런 것이 말하자면 처음이요, 생양해야 할 것들 아닌가. 미당은 초승달이 점점 충만한 빛으로 나아가듯 처음의 사랑 또한 지속되고 원만해지기를 기도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미당의 시에는 생명 없는 것을 생장시키는 독특한 영기(靈氣)가 서려 있다. 그는 시 ‘첫사랑의 詩’에서 ‘초등학교 3학년때 / 나는 열두살이었는데요. / 우리 이쁜 여선생님을 / 너무나 좋아해서요. / 손톱도 그분같이 늘 깨끗이 깎고, / 공부도 첫째를 노려서 하고, / 그러면서 산에가선 산돌을 줏어다가 / 국화밭에 놓아 두곤 / 날마다 물을 주어 길렀어요.’라고 하지 않았던가. 산돌을 주워 와서 물을 주어 길렀듯이 이 시에서도 미당은 ‘고은 눈썹’을 생장시키는 재기를 보여준다.  미당의 시에는 유계(幽界)가 있다. 그는 ‘무슨 꽃으로 문지르는 가슴이기에 나는 이리도 살고 싶은가’라며 황홀을 노래했지만 그는 우주의 생명을 수류(水流)와 같은 것으로 보았다. 흘러가되 윤회하는 것으로 보았다. 이 운행에서 그는 목숨 받은 이들의 만나고 헤어지는 일을 노래했다. 목숨 없는 것에는 목숨의 숨결을 불어 넣었다. 미당의 시의 최심(最深)은 삶 너머의 이승 이전의 유계를 돌보는 시심에 있다. 이 광대한 요량으로 그는 현대시사에 수많은 활구(活句)를 낳았다.  (문태준·시인)       
902    詩는 몇개의 징검돌로 건너가는 것... 댓글:  조회:3909  추천:0  2016-01-09
묵화(墨畵) /  김종삼    물먹는 소 목덜미에  할머니 손이 얹혀졌다.  이 하루도  함께 지났다고,  서로 발잔등이 부었다고,  서로 적막하다고,  (1969년)  김종삼(1921~1984) 시인의 시는 짧다. 짧고 군살이 없다. 그의 시는 여백을 충분히 사용해 언어가 잔상을 갖도록 배려했다. 그리고 아주 담담하다. 언어를 우겨넣거나 막무가내로 끌고 다닌 흔적이 없다. 사물과 세계를 대면하되 사물과 세계의 목소리를 나직하게 들려준다. 그의 시를 읽고 있으면 물안개가 막 걷히는 새벽 못을 보고 있는 듯하다. 그의 시를 읽고 있으면 작은 여울에 누군가가 정성스레 놓아 둔 몇 개의 징검돌을 보고 있는 것 같다.  ‘묵화(墨畵)’의 목소리도 자분자분하다. 하루의 노동을 끝내고 막 돌아와 쌀 씻은 쌀뜨물을 먹고 있는 소를 보여준다. 그의 시선은 소의 목덜미에 가 있다. 하루 종일 써레나 쟁기를 끌었을, 멍에가 얹혀 있었을 그 목덜미를 보여준다. 목덜미에는 굳은살이 박였을 것이다. 그리곤 소의 목덜미와 할머니의 손을 교차시킨다. 할머니도 노동을 마치고 돌아와 소와 함께 날이 저무는 저녁을 맞고 있다. 할머니는 겹주름처럼 고랑이 나 있는 밭에 쪼그려 앉아 풀을 뽑고 돌을 캐내고 종일 호미질을 했을 것이다. 시인의 시선은 소와 할머니의 부은 발잔등으로 옮아간다. 부은 발잔등을 보여줄 뿐이지만, 우리는 소와 할머니의 하루가 얼마나 고단했을지 짐작할 수 있다.  시인이 눈여겨본 대목은 소와 할머니의 관계일 것이다. 소는 할머니를, 할머니는 소를 마주하고 있다. 이 둘 사이에 조용하고 평화롭고 안쓰러운 대화와 유대가 오가고 있다. 낮의 소란과 밤의 정적이 합수(合水)하는 성스러운 시간에 마치 삶이란 본래 비곤하고 외롭고 쓸쓸한 것이라는 듯 소와 할머니는 잠시 멈춰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 그리하여 이 둘의 ‘서로 돌봄’은 훈훈하면서도 슬프다. (우리는 얼마나 이 ‘쓸쓸한 돌봄’을 자주 잊고 사는가) 이 시를 다 읽고 나면 우리는 얼굴 가득 흐뭇하게 피어나던 웃음이 천천히 묽어지는 감정의 변화를 겪게 된다. 본래 삶이란 웃음과 슬픔으로 꿰맨 두 겹의 옷감이라는 듯.  김종삼 시인은 등산모를 곧잘 썼고 파이프 담배를 자주 물었고 술을 좋아했고 고전음악을 즐겨 들었다. 그에게 삶은 ‘방대한 / 공해 속을 걷는’ 일처럼 여겨졌다. 그는 ‘하늘나라 다가올 때마다 /맑은 물가 다가올 때마다 /라산스카 /나 지은 죄 많아 /죽어서도 /영혼이 /없으리’라며 인간의 원죄를, 불구의 영혼을 아프게 노래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순하고 명랑하고 맘 좋고 인정이 있는’ 사람들과 세상을 좋아하고 동경했다. 그의 시는 말이 적었지만 정직했다. 언어의 낭비가 많고 외화(外華)에 골몰하는 시대를 살수록 언어를 지극히 아껴 쓴, 먹그림같이 실박하게 살다 간 김종삼 시인이 그립다.  (문태준·시인)     
901    詩에서 어떻게 표현할것인가 댓글:  조회:4430  추천:0  2016-01-09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글/ 시인 이향아 좋은 글이란 한 마디로 말해서 정확한 문장으로 쓴 글이다. 정확한 문장이라야 전달이 순조롭고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전달을 염두에 두지 않은 표현은 없다.  정확한 문장은 수식이 현란하고 아름답기 이전에 우선 문법에 맞아야 한다. 최근 특히 라디오 방송을 듣고  있노라면 방송에 초청 받은 출연자는 말할 것도 없고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사람 역시 문법이나 어법에 어긋나는 말을 자주 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그 예는 다양하며 요인 또한 각색이지만 다음과 같이 몇 가지 원리만 선별하 여 설명하려고 한다. 가) 정확한 문장이 명문이다 (1) 형용사에는 진행형이 없다 동사는 사물의 동작과 작용을 나타내는 품사이므로 물론 진행형이 있다. 가고 있다, 울고 있다, 먹고 있다, 읽고 있다, 오고 있다, 등이 매우 자연스럽다는 것이 그것을 증명한다. 그러나 형용사의 진행형, 깨끗하고 있다, 꽃이 아름답고 있다, 교실이 조용하고 있다, 수돗물이 맑고 있다, 날이  흐리고 있다, 사는데, 일하는데, 노래부르는데, 소리지르는데 등은 있지만 외롭는데, 한가하는데, 화려하는데 등은  성립될 수 없다.만일 진행의 형태를 취하고 싶으면 ´꽃이 차츰 아름다워지고 있다´ ´교실이 조용해지려고 한다´ ´수돗물이 차츰 맑아지고 있다´ ´날이 흐려지고 있다´와 같이 보조 동사를 사용하여 동사의 형태로 바꾼 다음에야  가능하다.  (2) 형용사에는 의도형과 목적형이 없다 동사에는 의도형도 있고 목적형도 있다. 극복하려고 한다, 이기려고 한다, 참으려고 한다는 각각 동사의 의도형이다.  그리고 먹으러 가다, 보러 가다, 진압하러 오다, 꺾으러 갑시다등은 동사의 목적형이다.  그러나 형용사의 의도형 빠르려고 한다, 푸르려고 한다, 투명하려고 한다, 깊으려고 한다, 미련하려고 한다나 목적형  기쁘러, 행복하러, 고요하러, 재미있으러 등은 성립될 수 없다. (3) 형용사에는 명령형이 없다 가거라. 오너라. 먹어라, 싸워라. 뛰어라. 넣어라등은 동사의 명령형이다. 그러나 형용사의 명령형 높아라, 낮아라,  고와라, 빨라라, 짧아라, 늦어라, 등은 명령형이 아니다. 가끔 ´고와라´(아, 장미꽃이 고와라), ´아름다워라´(청춘은  아름다워라) 등이 쓰이는데 이는 명령형이 아니라 감탄형이다.  나) 간결한 문장이 좋은 문장이다. 문장에 쓰인 어휘가 많으면 자칫 어휘의 병목현상을 일으킬 수 있다. 긴 문장은 전달이 늦고 정확도가 떨어지며 혼돈을 야기한다. 물론 문체에는 필자의 성격에 따라서 만연체도 있고  간결체도 있지만 만연체로서 정연한 이론을 전개하려면 그만한 실력이 밑받침되어야 가능하다. 같은 주장을 할 때도  만연체로 이끌면 호흡이 길어서 느긋하기는 하지만 주장의 강도가 약해질 수밖에 없다. 조세희의 은 극도로 축약한 문장으로 쓰였다. 작가의 사상과 정서가 예리하고 단호하게  나타난 것은 그의 짧은 문장형식에서도 적지 않은 힘을 입었다고 하겠다.  다) 과장이 없는 문장 과장하는 것은 부족한 상태보다 오히려 못하다. 사실에 부합되는 표현이 가장 좋겠으나 그렇지 못할 때는 차라리  모자라는 것이 낫다. 필자가 미처 표현하지 못한 부분은 행간의 의미를 파악하는 독자의 몫으로 남기 때문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상상의 공간과 여운의 그늘을 드리울 수도 있는 것이다. 과장된 표현은 그 진실성까지 의심받게 된다. 그것은 거짓말을 했을 때 포장하기 위하여 늘어놓는 장광설과 유사한  인상을 준다. 많은 수식을 한 문장은 분별없이 꾸민 여자의 복장처럼 품위가 없다.  라) 정확한 어휘의 활용 몇 개의 어휘를 알고 있는가하는 것은 각 개인의 문화수준을 증명하며, 그 나라의 국어사전에 몇 개의 단어가 수록되어  있는가하는 것은 그 나라의 문화수준을 설명한다. 각 개인의 직업과 지식과 생활양식이 그 사람의 어휘 수효를 결정한다.  사람들에게는 특별한 언어 습관이 있을 수도 있는데 그 습관은 대화에서나 문장 표현에서 적잖은 장애물이 된다. 특히  현대에 이르러 부정의 표현들이 많아졌다. 부정할 때나 써야 할 어휘들을 긍정의 문장에서 쓰는 것은 수정하지 않으면  안될 중요한 항목이다.  (1) ´너무´라는 말은 부정의 뜻을 전할 때 적합하다 ´너무´라는 말은 ´지나치게´, ´도를 넘어서´라는 부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요즘은 그 말이 긍정적인 말로  쓰이고 있어서 아주 어색하다. ´참 좋아요´라고 해야 할 것을 ´너무 좋아요´라고 하고 ´아주 맛이 있어요´나 ´참 맛이  있어요´를 ´너무 맛있어요´라고 한다. 해도 너무 한다, 산이 너무 높다(높아서 오를 수가 없다), 너무 지쳐 있다, 너무 냉정하다 등은 맞는 말이다. 그러나  너무 좋다, 너무 예쁘다, 너무 맛있다, 너무 기쁘다, 너무 잘 한다, 너무 사랑한다는 표현은 성립될 수 없다. (2) ´전혀´라는 말도 부정의 뜻을 전한다 전혀는 전혀 모른다, 전혀 엉뚱하다. 사실과 전혀 다르다. 전혀 딴판이다 등 부정의 말에 쓰인다. 그러나 ´전혀 새로운´ 이라는 말이 어떤 상품의 광고 문구로 쓰이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지금까지의 방법과는 전혀 다른´이라고 해야  한다. ´정말이어요. 나는 전혀 생각지 못한 일입니다.´, ´안면이 전혀 없는 사람이에요.´, ´전혀 반갑지 않은 소식이군요.´  이렇게 써야 옳다.  광고문은 신선한 충격을 주려는 광고문으로서의 특성을 발휘하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지만 일반적인 문장에서는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  (3) ´조차´라는 말 또한 부정의 뜻이다 ´너조차로 나를 몰라주느냐´, ´ABC조차 모르는 사람이 무얼 안다고 까불어?´ 라고 할 때 ´조차´라는 말은 ´그것까지도´ 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그 말 뒤에 부정의 뜻을 가진 말이 온다. 그러나 ´몽고말조차 잘 하는 사람입니다´라고 하면 매우 우습게 들린다. ´히말라야산조차도 정복한 사람입니다´라는  말도 어딘가 어색하다. ´히말라야산까지도 정복한 사람입니다´ ´몽고말까지도 잘 하는 사람입니다´라고 해야 옳다.  바) 원거리 표현법 (1) 이유 없는 간접화법 근래 생긴 화법 가운데 특이한 것은 공연히 따옴표를 삽입한 형태의 말을 한다는 것이다.  ´A가 B보다 좋다고 볼 수 있지´, ´스페인을 이겼으니 독일도 가능하다고 볼 수 있어´라고 해도 무방한 것을 ´A가 B보다  좋다´라고 볼 수 있지. ´스페인을 이겼으니 독일도 가능하다´라고 볼 수 있어´라고 멀게 표현한다. 따옴표를 삽입했다고  해서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외국말도 아닌 국어인데 공연히 멀리 표현하면 외국어를 해석한 문장을 읽는 것처럼 어색 하다.  (2) ´개인적으로´라는 말  개인적인 입장을 발표하는 자리에서 공연히 ´개인적´으로 라는 말을 넣는다. 이 꽃을 좋아하십니까?라고 물었을 때 좋아한다. 싫어한다 견해만 밝히면 된다. 그런데 ´예, 개인적으로 매우 좋아합니다´ 라고 말한다. 일대 일의 인터뷰에서는 말할 것도 없이 상대방의 개인적인 견해나 취향을 묻는다. 근래 쓸데없이 ´개인적으 로´라는 말을 많이 붙이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세상에는 다양한 생각들이 있겠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내 개인적인 생각(혹은 감정)이니 아무리 이상한 말을 하더라도  당신은 토를 달 필요가 없다는 말인가? (3) ´---인 줄 알고 있어요´ 용법 확실하고 당연한 사실을 불확실한 것처럼 한 발자국 물러서서 ´그런 것으로 알고 있어요´라고 어정쩡하게 대답한다. "K고등학교를 나오셨군요. 몇 회 졸업이십니까?" "예 2회인 줄로 알고 있습니다만." 이것은 비정상적인 대답이다. 자신이 몇 회 졸업생인지 알 수 없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차라리 ´아마 2회일 것입니다. ´라고 말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  (4) ´같아요´ 용법 좋은 것 같아요, 더 예쁜 것 같아요, 제일 맛있는 것 같아요, 기분이 나쁜 것 같아요 이상은 모두 자신의 감정을 표현한 말들이다. 그러나 자신의 감정이 분명하지 않고 모호해 보이는 것은 말미의 ´같아요´ 때문이다. 자기의 느낌에도 자신이 없는가? 왜 ´같아요´라는 추측의 형용사를 쓰는가?  이와 비슷한 것으로 ´저와 같은 경우에는´이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내 경우에 한정된 것일 뿐이라는 의미를 강하게  시사한다. ´--인 줄 알고 있어요´, ´개인적으로´, ´---인 것 같아요´, ´저와 같은 경우에는´ 들은 직접 표현하기를 꺼리는  데서 오는 화법이다. 왜들 망설이는가? ´맛이 있는 것 같아요´의 ´같아요 용법´, ´개인적으로 떡을 잘 먹습니다´와 같은 ´개인적으로 용법´ 그리고 ´그런 줄로 알고 있어요´의 ´알고 있어요 용법´들은 모두 책임을 모면하려는 어법이다.  이는 근거리를 두고 일부러 우회하여 머뭇거리는 표현으로 원거리 표현이라 명명하고 싶다.   
900    詩에서 새로운 화제 찾기 댓글:  조회:4107  추천:0  2016-01-09
새로운 화제 찾기 그러나, 어떤 때는 아무리 생각해도 시로 쓸 화제가 떠오르지 않을 경우가 있습니다. 특히 원고 청탁을 수락하고, 써둔 것이 없는데 부득부득 마감 기일이 다가올 때는 피가 마릅니다. 하지만 쓸 싶은 게 없어서 그런 게 아닙니다. 우리의 두뇌는 마치 컴퓨터가 기억의 용량을 줄이기 위해 압축(壓縮)하여 저장하듯, 누구나 많은 밤을 지새워 고민했던 문제들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일단 시간이 흐르면 유사한 것들끼리 분류하고, 구체적인 사실을 생략하여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쓰고 싶은 화제를 찾아내려면 기억하는 과정에서 고정관념화(固定觀念化)된 것들을 풀어내야 합니다. 이와 같은 고정관념화된 것들을 풀어내는 방법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알아보고, 실제로 연습해봅시다. ■ 윤리적 기준 덮어두기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자면 먼저 윤리적 기준에 따라 부적합하다고 덮어둔 화제를 다시 한번 생각 해보는 것이 좋습니다. 윤리적 기준은 우리의 많은 생각과 욕망을 부도덕한 것으로 간주하면서 그 자체의 모습을 볼 수 없도록 만들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런 화제를 다룰 경우 자칫하면 독자로부터 비난을 받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진실한 이야기라면, 실제로 행동으로 옮기는 문제는 좀 더 생각해보되, 덮어둬서는 안 됩니다. 제 경우를 예로 들어볼까요? 저는 젊은 시절 내내 인간의 행동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것은 사랑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리고 그런 작품들을 써왔습니다. 그러다가 중년으로 접어들면서, ‘우리의 사랑은 정말로 참다운 사랑인가’라는 의문이 떠오르고 ‘그런 사랑은 존재하지 않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또 몇 년 전부터는 ‘선(善)이 오히려 패배하기 쉽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그런 생각을 하니까 가슴이 싸아 해지면서 슬프대요. 그러나 암만 생각해도 그런 것 같아서 그걸 테마로 삼아 작품을 쓰려고 했습니다. 시인의 의무는 관습과 위선에 가려진 인간이 본성을 발견하여 제시하는 것이고, 그러자면 자신이나 타인에게 정직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더럭 겁이 나더군요. 그리고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는다면 ‘왜 결혼했는가’라는 아내를 비롯한 무수한 독자들이 항의가 떠오르대요. ‘사랑’이니 ‘선’이니 하는 것들에 대한 윤리성은 인류가 수천 년간 지켜온 종교 같은 것이라서 이를 훼손하려는 사람에게는 모든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보복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좀더 생각해 보면 우리가 누군가를 정말로 사랑하는 것은 순간   순간일 뿐, 자기를 위해 살면서 너는 나를 사랑해야 한다고 요구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또 악한 자들은 악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서로 결집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누군가 선을 옹호하고 실현해주기 기다리면서 자신은 꼼짝하지 않아 온 게 인류의 역사입니다. 그리고 악한 자들은 자기의 악을 가리기 위해 선이니 문화니 하고 위장해 왔습니다. 몇 년 전 중국의 만리장성과 천안문 광장과 자금성을 가본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지난해에는 유럽일대의 박물관들을 구경했습니다. 대부분의 박물관들은 대충 보려고 해도 일주일은 걸리겠더군요.  그런데 그 그 박물관들은 뭐로 채워진지 아십니까? 이집트, 바빌론, 터키, 그리스 등지의 성곽까지 뜯어 모아온 것들로 채워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빼앗긴 자의 피와 눈물과 죽음은 보지 않고 그 엄청난 전시물의 외형에 압도되어 약탈자를 문화 대국이라고 찬탄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당신은 결혼 생활을 지속하고, 선하게 살려고 노력하느냐고 요? 왜 남이 알까 두려운 짓을 되풀이하면서, 반성하고, 선을 논하고, 그렇게 살려고 노력하느냐구요? 네에. 아직 완성하지 못한 사랑과 선을 완성하기 위해서입니다. 선하지는 못해도 선하려는 노력조차 포기하면 더 이상 인간이 아니고, 인간으로 태어났기에 자아를 인간으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노력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테마를 바꿔 우리가 꿈꾸는 사랑은 존재하지 않는다며 절대 사랑을 테마로 삼은 연작시(連作詩)들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어떻게 썼는가 한 번 인용해 보라구요? 네에. 곧 인용할 테니 조금만 기다리세요. 이와 같이 윤리적 기준을 접어두면 아주 진지하고도 새로운 생각들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위선과 제도에 가려진 역사의 참 모습과 인간다운 인간의 얼굴을 발견하여 형상화하면 불휴의 명작(名作)이 되는 겁니다.  예컨대 우리 소설사(小說史)에서 백미로 꼽는 「홍길동전(洪吉童傳)」만 해도 그렇습니다. 신분 세습제(世襲制)의 세상에 노비의 뱃속에서 태어난 사람이 호형호부(呼兄呼父)하지 못하는 게 한이 되어 반역했다는 이야기는 당대 윤리적 기준으로는 용서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허균(許均)은 노비도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형을 형이라고 부르고 싶어한다는 발견을 작품으로 썼고, 그래서 그 작품은 한때 금서(禁書) 목록에 올라갔지만 오늘의 관점에서 보면 아주 당연한 이야기로 들리는 겁니다. 또 늙은 학자가 어린 소녀를 유혹한 괴테의 「파우스트」, 아무 대책 없는 주부에게 가출을 부추기는 입센의 「인형(人形)의 집」, 자기가 무슨 정의의 사도라고 고리대금 노파를 살해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 햇살이 눈부셔서 살인했다는 카뮈의 「이방인」도 마찬가지입니다. 햇살이 눈부셔서 살인했다는 것은 어느 시대의 윤리적 기준으로 재도 용납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근본적으로 부조리(不條理)한 존재이고, 그래서 논리나 윤리적 기준에 맞지 않는 행동도 할 수 있다는 인간의 어느 일면을 드러낸 작품이기에 명작으로 꼽히는 것입니다. ■ 관점 바꿔 생각하기 그러나 윤리적 기준을 덮어두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윤리적이어야 한다는 교육을 받아왔고, 그래서 그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무의식이 ‘야, 벌받아, 벌받아!’ 하고 가로막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에서 벗어나려면 관점을 바꿔봐야 합니다.  우리가 얼마나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는가를 확인하기 위해한 한 가지만 질문해 볼까요? 두 점 사이 최단(最短)의 거리는 뭡니까? 직선이라고요? 좋습니다. 그럼 하나 더 질문해보겠습니다. 은 얼맙니까? 이라고요? 그럼 힌트를 드리지요. 서울에서 뉴욕까지 비행기를 타고 갈 때 비행의 궤적(軌跡)은 직선입니까, 곡선입니까? 그리고, 2진법에서 은 얼마입니까?  그렇습니다. 둥근 지구 위에서 살고, 일년 단위는 12진법, 하루와 절후(節侯) 단위는 24진법, 일주일 단위는 7진법, 한 달 단위는 30진법을 사용하면서 유크리이트 평면기하학(平面幾何學)과 10진법만 고집하는 게 우리 인간입니다.  이와 같은 고정관념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모든 것들을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관점을 바꿔 생각해보는 것이 좋습니다. ①그일이 벌어진 시간과 공간을 바꿔 생각해보기 ②내 입장과 남의 입장을 바꿔 생각해보기 ③서로 다른 것은 동정화(同定化)하고 같은 것은 분리하여 생각해보기 ④사소한 것은 확대(擴大)하고, 중대한 것은 축소(縮小)하여 생각해보기   ⑤생명체는 무생명체로, 무생명체는 생명체로 바꿔 생각해보기 다시 말해 과거는 오늘의 시점에서, 오늘은 과거의 시점에서 생각해보는 겁니다. 그리고 내 일은 네 입장에서, 네 일은 내 입장에서, 전혀 다른 것은 하나로 합치고, 같은 것은 분리하고, ‘뜨락에 낙엽이 지는 소리로 천하에 가을이 오는 걸 알 수 있다’식으로 사소한 것은 확대해 보고, 죽고 사는 일 같이 심각한 문제는 인생을 뜨락의 낙엽 위에 내린 서리쯤으로 바꿔 생각해 보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허균의 「홍길동전」을 오늘날의 관점으로 바꿔 생각해보면 결코 이상하거나 대단한 제재가 아닙니다. 그 시대에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게 대단하고, 그런 작품을 썼기에 오늘날 적서차별이 없는 사회가 된 것입니다.  왜 자꾸 소설의 예만 드느냐구요? 그럼 시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우리는 시를 쓸 때 흔히 아름다운 여인을 장미로 비유합니다. 그러나 결코 이 아닙니다. 그런데 시인의 눈에는 그렇게 보이기에 그렇게 바꾸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은 사람이고, 꽃은 꽃이라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기만 하면 아름다운 여인의 손등에서 화득화득 피어나는 장미꽃도 보고, 음악소리도 듣고, 천천히 그녀의 계단을 내려갈 수도 있습니다.  저는 사람들이 왜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이렇게 재미있는 시 쓰기를 하지 않는지  이상해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 연상하고 중간 단계 자르기 윤리적 기준을 풀어헤치고,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면 우리의 상상력은 아주 슬슬 풀리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아직도 안 풀린 분이 있다면 어느 하나를 실마리로 삼아 을 하고 그렇게 연상한 것들의 중간 단계를 잘라보십시오. 그야말로 신기한 마법의 나라가 열리기 시작합니다. 이를 위해 우선 연상하는 방법부터 알아보기로 합시다. ①연접(延接) 연상 : 분필을 보면 선생님을 떠올리고, 바다를 보면 비키니 수영복을 떠올리는 것처럼 연결된 것을 떠올리는 방식. ②유사(類似) 연상 : 한라산을 보면 백두산을 떠올리고, 축구공을 보면 배구공을 떠올리는 것처럼 비슷한 것을 떠올리는 방식. ③대비(對比) 연상 : 검은콤을 보면 흰콩을 생각하고, 훌쭉한 아이를 보면 뚱뚱한 아이를 떠올리는 것처럼 서로 다른 것을 떠올리는 방식. ④자유(自由) 연상 : 어떤 법칙에도 얽매이지 않고 떠올리는 방식. 이 가운데 자유 연상이 가장 새로운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미국인들이 즐겨 먹는 를 만들어낸 경우만 해도 그렇습니다. 이 수프를 만든 캠블사(社)에서는 신제품을 개발하기 위해 직원들을 불러모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개발 책임자가 사전(辭典)에서 임의로 ‘손잡이’라는 단어를 골라 제시했다고 합니다. 왜 수프와 관계없는 ‘손잡이’라는 단어를 제시했느냐구요? 그렇게 엉뚱한 것에서 출발해야 기발한 결과가 나오니까요.  그러자 한 직원이 ‘도구’를 떠올리고, 또 다른 직원이 그 도구에서 ‘포크’를 떠올리고, 그러다가 누군가 ‘포크로 먹는 수프는 어떨까’하고 농담하자, 또 다른 직원이 ‘채소와 고기를 듬뿍 넣은 수프’라고 해서 포크가 없으면 먹기 힘든 청키 수프가 탄생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자유 연상도 연상과정을 다 표현하면 낡은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원숭이 똥구멍 빨개(①)→빨간 건 사과(②)→사과는 맛있어(③)→맛있는 건 사탕(④)→사탕은 둥굴어(⑤)→둥근 건 지구(6)…’라는 식으로 연상을 되풀이하고, ‘원숭이 똥구멍은 맛있어’나, ‘원숭이 똥구멍은 지구’라고 처음과 끝을 연결하고, 그걸 집중적으로 묘사하면서 독자들이 유추할 수 있는 실마리를 마련해주면 아주 새로운 것이 됩니다. 하지만, 이렇게 연결의 실마리를 발견할 수 없을 때는 새롭기는 하지만 말장난으로 떨어지고 맙니다.  그래서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 콜리지(S. Coleridge)는 상상력의 유형을 과 으로 나누고, 시를 쓸 때는 을 이용하라고 권유합니다. 그가 말하는 제1 상상력은 어떤 사물을 접할 때 자동적으로 떠오르는 상상력을 말합니다. 그리고 제2 상상력은 서로 다른 것에 대해 상상한 결과를 이성의 힘으로 통합하면서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각기 다른 것을 상상하고 그걸 하나로 합치는 방식이 가장 좋다는 겁니다. 자아, 그럼 콜리지가 권유한 방법대로 작품 한 편을 써보기로 할까요? 제가 지금 독일에서 쓴 이 원고를 다시 다듬는 서재 창문 너머로는 제주도의 푸른 바다가 쫘악 열려 있으니 ‘바다’에서 출발하기로 합시다. 바다가 파랗군요. 파도가 남실거리는 게 꼭 목장(牧場)의 목초들이 흔들리는 것 같습니다. 어떼요? 여러분들도 이 정도는 연상할 수 있겠지요?  그럼, ‘목장’하니까 뭐가 떠오릅니까? 저는 하이얀 말(馬)이 떠오르네요. 한 마리 말이 되어 달리고 싶어집니다. 어느 덧 네 굽을 놓고 짓달리고 있습니다. 바람이 불 때마다 하이얀 풀꽃들이 눕네요. 제 발굽에서는 풀꽃과 싱그러운 흙냄새가 진동합니다.  이렇게 연결하면서 정서적인 언어로 표현하면 한편의 시가 탄생됩니다. 그럼 연결하면서 좀더 섬세하게 표현해볼까요?   오후 2시   바다는 푸른 목장   바람이 불 때마다 하이얀 풀꽃들이 줄지어 눕고   나는 한 마리 망아지가 되어 짓달린다.   내 네 발굽에서는 오후 두 시의 바람과 풀꽃과 흙냄새가 진동한다. 어떻습니까? 재미있지요? 아직 부족하다고요? 그럼 다시 연상을 되풀이하여 중간 부분을 자르고, 너무 낯설어 독자들이 잘 이해하지 못할 것   같으면 그 앞 단계에서 합쳐보세요. 아주 재미난 시가 될 겁니다. ■ 인과 관계 비틀기와 풍경 바꾸기  우리가 새롭게 느끼는 것은 그것이 새롭다기보다 그걸 그렇게 받아들이기 때문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받아들이는 것은 대상을 낯설게 만들었을 때입니다. 그러므로 새로운 내용을 찾는 것도 중요하지만 독자들이 유의해서 받아들이도록 낯설게 만드는 방식을 찾는 것도 중요합니다. 예컨대, 부부간의 대화만 해도 그렇습니다. 결혼 전에는 상대방의 눈빛만 달라져도 무슨 일이냐고 묻습니다. 그러나, 결혼을 하고, 세월이 흐르면, 힘들다고 하소연해도 그냥 스쳐 듣기가 일수입니다. 함께 사는 동안 그런 소리를 너무 자주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을 바라보며 하이얗게 웃는다던가, 한 1분쯤 움직이지 않고 서 있는 방식을 택하는 게 현명할 겁니다.  러시아 형식주의자(形式主義者)들은 시를 쓸 때 이와 같은 를 하라고 권합니다. 낯설게 비틀어 말하면 독자들이 ‘어, 이게 무슨 소리야?’하고 유의해서 읽고, 그렇게 읽음으로서 시인이 말하려 의도를 생각해보고, 그래서 시인이 말하려는 장면을 떠올리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이런 방식은 작품을 이루는 모든 요소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화제를 고르는 단계이니, 앞 뒤 모티프의 관계를 단절시키고 배경을 낯설게 만드는 방법만 알아보기로 합시다. 다음 작품은 앞 뒤 모티프(motif)들의 인과관계를 단절시켜 낯설게 만든 예에 속합니다.   남자와 여자의   아랫도리가 젖어 있습니다.   밤에 보는 오갈피나무,   오갈피나무의 아랫도리가 젖어 있습니다.   맨발로 바다를 밟고 간 사람은    새가 되었다고 합니다.   발바닥만 젖어 있었다고 합니다.                          - 김춘수, 「눈물」에서 이 작품은 , , 라는 세 개의 모티프로 이뤄져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서로 아무런 인과관계가 없이 병치된 상태입니다. 그로 인해 독자들은 자기 나름대로 의미를 만들어내기 위해 이들을 연결시키려고 상상력을 발휘합니다. 그러니까, 이 방법은 독자의 상상력을 빌려 새롭게 만들려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방법을 사용하면 새로워진다는 것은 아래처럼 인과관계를 마련해준 것과 비교해보면 금방 드러납니다. (밤에 사랑하는) 남자와 여자의/아랫도리가 젖어 있(었)다./밤에 (사랑하다가 창문 너머로)보는 오갈피나무,/(그) 오갈피나무의 아랫도리(도 서로 사랑하는 자기들처럼) 젖어 있(었)다./(누군가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하는 그 사람의 영혼의 바다를 건너는 것)/맨발로 바다를 밟고 간 사람은/새(처럼)가 되었다고 한다./(새처럼 가벼워)발바닥만 젖어 있었다.  원작에 추가한 것은 ‘있다’를 ‘있었다’로 고치고, ‘처럼’을 삽입한 다음 ‘사랑하다가’와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영혼의 바다를 건너가는 것’뿐입니다. 하지만 이런 말들을 삽입해도 우리는 같은 의미로 받아들입니다. 우리는 남의 말을 빠롤(Parol)로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랑그(Langue)로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고치고 나니까 원작에 비해 아주 친숙한 것으로 바뀌고 말아버렸습니다. 그것은 삽입한 말들로 인하여 인과관계가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독자가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길 바라는 사람은 군데군데 인과관계를 잘라 낯설게 만드는 방법을 사용하는 것이 좋습니다. 여러분들은 제가 자꾸 ‘독자, 독자’하니까 섭섭하지요? 저도 처음에는 그랬습니다. 나는 시인이다, 독자들은 내가 이야기하는 대로 들어야 한다는 식이었습니다. 하지만, 문학은 담화입니다. 그리고 담화는 청자를 전제로 탄생됩니다. 그리고 문학사회의 소비자는 독자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내 작품을 읽지 않으면 아무리 써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무조건 비위를 맞추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렇게 하면 독자들이 오히려 건방져져 ‘히이, 그 정도는 나도 알아!’하고 읽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간혹 시치미를 뚝 떼고 ‘너 이거 알아?’하는 식으로 아주 어렵게 만들고, 그들이 당혹스러워하면 다시 쉽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낯설게 만들기도 마찬가지입니다. 건방떠는 독자들을 길들이기 위한 방법입니다. 자아, 그럼 배경으로 낯설게 만드는 방법을 알아볼까요? 배경은 작중 인물이나 화제와 마찬가지로 의미를 만들어내는 요소 가운데 하나라서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과 다른 모습으로 바꾸면 대상을 아주 새롭게 만듭니다. 우선 다음 문장들을 읽고 비교해보기로 합시다. ○차가운 가을비가 내린다.  →비가 내린다/내 마음 들판 한 구석/엇슥엇슥 엇베인 마른 수수대궁 밑으로/차가운 가을비가 내린다 ○네 웃음은 참 아름답다 →네가 웃는다/네 웃음 속/이름 모를 풀꽃들이 피어 하늘하늘 손짓한다. 어떼요? ‘어? 내 마음 들판에 비가 내리다니, 이게 무슨 소리야?’하며 읽고 싶어지지 않습니까?  그래요. 이렇게 조금만 낯설게 만들어도 상대가 내 이야기에 귀 기울이기 마련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네 웃음 속에는 이름 모를 풀꽃들이 피어 하늘하늘 손짓하는 거 같애’라고 해보세요? ‘정말?’하고 아주 환하게 웃을 겁니다. 여러분들은 아주 재미난 화제들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다만 그것들이 고정관념에 묶이어 있을 뿐입니다. 자아, 그럼 고정관념에 묶인 것들을 하나 하나 풀고 그 가운데 어느 하나를 골라 작품으로 써봅시다.        
899    詩에서 어떤 어법으로 말할가 댓글:  조회:4038  추천:0  2016-01-09
어떤 어법으로 말할까 1. 환유적으로 말하기 우리는 흔히 시는 으로만 말해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근대 이전까지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으로 쓰여진 시가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독자들도 이런 시가 이해하기 쉬워 선호합니다. 따라서 시의 전통적인 어법은 환유적 어법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 장에서는 환유적 어법의 유형과 기능, 이 어법으로 시를 쓰는 방법에 대해 알아보기로 합시다. 1) 환유의 기능과 유형 야콥슨(R. Jakobson)은 어법의 유형을 어떤 이야기가 로 이어질 때 연접(延接)된 방향으로 옮기는 방법과 어느 한 모티프를 골라 선택적(選擇的)으로 옮기는 방법으로 나눕니다. 그리고 전자는 으로, 그리고 나 라는 식으로 옮기는 후자는 으로 분류하고, 환유적 어법은 산문의 어법이며, 비유적 어법은 시의 어법이라고 주장합니다 1). 그리고 현대시론의 대부분은 그의 주장을 따라 비유적 어법만이 시의 어법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근대 이전까지 쓰여진 작품들을 살펴보면 오히려 환유적 어법으로 쓰인 것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예컨대 한자 문화권에서 시의 경전으로 꼽아온
898    詩의 서정적줄거리 만들기 댓글:  조회:4927  추천:0  2016-01-09
서정적 줄거리 만들기   이와 같이 환유적 어법이 여러 가지 장점을 지니는 것은 시인이나 자신의 대리자(agent)를 등장시켜 자기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직접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시를 쓰려면 먼저 그런 이야기를 할 화자와 그가 등장할 배경, 말하는 태도를 미리 결정해야 합니다.  우선 화자부터 차례대로 알아보기로 합시다. ■ 화자의 설정 화자는 단지 시인을 대신해 작품 속에서 이야기하는 존재에 그치는 게 아닙니다. 그 작품을 이루는 모든 요소들이 그를 중심으로 조직되기 때문에 화제에 어울리는 인물로 설정했느냐 여부가 곧 그 작품의 성패를 결정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화자에는 어떤 유형이 있으며, 각 유형의 화자는 어떤 기능을 지니고 있는가를 알아봐야 합니다. 우선 화자와 시인과의 관계에 따라서는 와 로 나눌 수 있습니다. 전자는 시인 자신이 작품 속에 직접 등장하는 화자를 말하고 후자는 화제에 따라 시인이 꾸며낸 화자를 말합니다. 하지만 완전한 자전적 화자도 허구적 화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일기(日記)나 소설을 쓸 때에 비교해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일기는 사실대로 쓴다고 생각하지만 자기가 한 일 가운데 중요한 것만 골라 쓰고, 그 당시에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으면서도 그랬던 것처럼 꾸며 씁니다. 반대로 소설은 전체를 꾸며 쓴다고 생각하지만 애인과 떠나기로 정하는 여행지는 대학생 때 가본 곳이고, 둘이 앉아 한 잔하는 곳은 직장 동료들과 드나들던 술집 풍경을 조금 바꾼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자전적이냐 허구적이냐는 기준은 실제 시인과 얼마나 닮았느냐에 따라 나눈 상대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시인 자신의 생각이나 정서를 이야기하려고 할 때는 자전적 화자를 택하고, 비현실적인 상상이나 현실적으로 논의하기 어려운 화제를 이야기하려 할 때는 허구적 화자를 채택하는 것이 좋습니다. 전자는 김윤성이나 오탁번의 작품을 통해 살펴봤으니 허구적 화자의 예만 살펴보기로 합시다. 새벽 세시 반 몰래 샤갈의 방문을 연다 그때  벽에 걸린 램프를 잡는  바람의 흰 손이 반쯤 내 눈을 가리고 반쯤 내 눈을 가린 손가락 사이로 보이는 고양이의  한쪽 눈 속에 기울어지는 수평선 일렁이는 등대 불빛 기울어지는 술병 속에 떨어지는 암보라의 꽃잎 샤갈의 머리맡 재떨이 언저리로 모여든 어두운 바다에 떠내려온 한 알의 레몬을 건져내는  내 손이  심한 해일에 밀려난다. - 김여정(金汝貞), 「레몬․1」에서 이 작품에서 화자는 ‘새벽 세시 반/몰래 샤갈의 몰래 샤갈의 방문’을 열고 들어갑니다. 그런데, ‘바람의 흰 손’이 내 눈을 가리고, ‘어두운 바다’에서 떠내려온 ‘레몬’을 건지려고 하다가 ‘심한 해일’에 ‘손’이 밀려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작품의 화자는 시인 자신이 아니라 시인의 무의식 속에 담긴 그 무엇을 표현하기 위해 허구적으로 창조한 화자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자전적인 화자를 등장시키면 독자들은 그게 시인이든 아니든 시인으로 받아들이고 공감하기가 쉽습니다. 반면에 시인이 자신의 인격을 걸고 말하는 형식이기 때문에 화제의 폭이 그만큼 제한됩니다. 반대로 허구적 화자를 택하면    ⓐ님은 주무시고 나는  그의 벼갯모에  하이옇게 수놓여 날으는 한 마리의 학이다. 그의 꿈 속으 붉은 보석들은  그의 꿈 속의 바다 속으로 하나하나 떠러져 내리어 가라앉고 볼수록 넓은 벌의 물빛을 물끄러미 드려다 보며 고개 수그리고 박은 듯이 홀로 서서 긴 한숨을 짓느냐. 왜 이다지! - 「님은 주무시고」에서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파뿌리 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 주 서 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 하였으나 … … 흙으로 바람벽 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까만 에미의 아들. 갑오년(甲午年)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 하는  외할아버지의 숱 많은 머리털과 그 크다란 눈이 나는 닮았다 한다.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八割)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가도 부끄럽기만 하더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罪人)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天痴)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 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 - 「자화상(自畵像)」에서 특별한 분석을 가하지 않아도 ⓐ는 여성화자를 선택하고, ⓑ는 남성화자를 택했다는 건 알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는 개인적인 사랑을 다루는 반면에, ⓑ는 일제(日帝) 시대의 가난한 서민 계층의 문제, 다시 말해 공적․사회적 화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또 ⓐ는 님에게 말을 걸고 싶지만 차마 말을 걸지 못하고 ‘벼갯모’를 나는 ‘학’으로 비유하면서 수동적인 자세를 취하는 반면에, ⓑ는 세상 사람들이 비웃어도 ‘뉘우치지’ 않겠다는 능동적이고 저항적인 자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어법과 어휘와 리듬의 선택도 화자의 성에 따라 달리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남성화자를 채택한 작품에서는 직설적인 어법을 택하고, 어휘도 일상적이고 의미 중심으로 사용하는 반면에, 여성화자를 택한 작품은 은유적이고 장식적이며, 겉으로 하는 말과 속으로 하는 말이 다른 아이러니의 어법을 택하고, 어휘도 ‘하이옇게’, ‘수놓은’, ‘학’, ‘보석’과 같은 장식적이고 감각적인 어휘들을 택하고 있습니다. 리듬과 행과 연의 배치도 마찬가지입니다. 남성화자를 택한 작품은 자유분방한 성격이 살아나도록 각 행의 길이가 불규칙한 자유율을 택하고, 여성화자를 택한 작품은 각 행을 짧고 가지런하게 잡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작품의 의미적 국면에서부터 조직적 국면까지 화자의 성에 따라 달라지는 것은 시인이 시 속에 등장하는 인물의 입장에서 썼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서정적 줄거리가 완성된 다음에는 화자의 성과 연령과 신분에 맞도록 전 조직을 재조정해야 합니다. ■ 배경의 설정 이렇게 화자를 결정한 다음에는 그를 ․에 등장시켜야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합니다. 시간과 공간은 존재를 구성하는 요소 가운데 하나일 뿐만 아니라, 등장 인물의 성격(character)을 만들어내고, 이야기의 전개 방향을 암시하는 기능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옛날 옛적 깊은 산 속에 나이 많은 처녀가 살았다’로 시작되는 이야기가 있다고 합시다. 이 때, ‘옛날 옛적’이라는 불특정한 시간은 어느 시대나 존재하는 보편적 이야기임을 암시합니다. 그리고 ‘깊은 산 속’이라는 공간은 ‘나이 많은 처녀’와 결합하여 결혼하고 싶지만 주변에 마땅한 총각이 없음을 암시합니다. 그로 인해 독자들은 ‘아, 이 이야기가 결혼에 관한 이야기구나’ 하고 계속 읽을 것인가 그만둘 것인가를 결정합니다. 뿐만 아니라 배경은 작중 인물의 가치관이나 심리 상태를 은유하고, 그 인물의 욕망을 조장하거나 억제하는 역할을 합니다. 이런 기능은 다음 작품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밤비가 내리네 어둠을 흔들며 조용히 내리네 그리움이 늘어선 언덕에 마른 수수잎 소리가 들리네 아련한 파도 소리 고향집 울타리에 철석이는데 낮닭 우는 소리도 가슴에 차오르네. - 차한수(車漢洙), 「손․47 : 고향」 전문 이 작품에서 화자는 상상적으로 귀향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조용조용 내리는 ‘밤비’가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촉발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조용히 내리는 비나 눈, 곱게 번지는 노을, 어둠 등은 언제나 사람을 감상적으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이 작품에서 밤비가 이런 역할을 한다는 것은 배경을 대낮이나 폭풍우 치는 밤으로 바꿔보면 짐작할 수 있을 겁니다. 아마 대낮으로 바꾸면 화자가 할 일 없는 사람처럼 보일 것이고, 비오는 밤으로 바꾸면 고향으로 떠날 엄두를 내지 못할 것입니다. 배경의 유형은 과 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중성적 배경은 작중 인물이 등장하는 무대 구실만 하는 배경을 말하고, 기능적 배경은 위 작품처럼 인물의 심리 상태를 은유하거나 어떤 행위를 조장하고 억제하는 배경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시를 쓸 때는 반드시 기능적 배경이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기능적 배경을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채택한 화제의 내용이 어떤 것인가를 따져봐야 합니다. 화제가 초현실적인 것일 때는 배경을 구성하는 사물에게 초능력을 부여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나무들이 말을 한다든지, 하늘과 땅을 마음대로 오고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적인 화제에 초현실적인 배경을 결합시키면 물활론(物活論)을 믿지 않는 현대인들에게는 동화처럼 보여 사실감(reality)입니다. 일상적인 화제를 택할 때는 그 주제에 관계없는 것들은 모두 삭제해야 합니다. 그리고 풍경을 통해서도 말해야 합니다. 다음 작품은 화자 자신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작중 풍경만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는 강 왼쪽에 있다. 하늘은 푸르고 햇살은 눈부시고 나는 강 오른쪽에 있다. 햇살은 푸르고 하늘은 눈부시고 그의 오른발이 강물 속에 있다. 눈부신 햇살이 건너오고  나의 왼발이 강물 속에 있다. 왼발을 보며 그가 웃는다. 물결은 떨리는 그의 웃음을 밀어오고. 나의 왼발은 떨리는 그의 시선을 비끼며 마구 달아난다. 빠알갛게 물드는 나의 왼발이 떨리어 온다. 오른발을 향하여 내가 웃는다. 그냥 그렇게 강물은 흘러간다. 나의 왼발과 그의 오른발은 흘러간다. 오른발을 느끼며 내가 운다. 하늘은 푸르고 햇살은 눈부시고 왼발을 느끼며 그가 운다. -현희(玄姬), 「강 왼쪽 강 오른 쪽」에서  우리는 날씨가 너무 좋은 날이면 인생이 덧없이 흘러간다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이 세상 어딘가에는 멋있는 일이 있을 텐데 나는 지금 무얼 하나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이 시인도 그런 생각을 강물을 통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작품의 배경이 된 그 강가에는 줄지어 선 미루나무들도 있을 테고, 간혹 까치들이 날아와 깍깍거릴 수도 있고, 뒤쪽으로는 조그만 마을이 다소곳이 엎드려 있을 테고, 강물에서 물고기들이 퍼득거리며 뛰어오를 텐데, 이런 것들을 모두 삭제하고, 눈부시게 푸르른 ‘햇살’과 ‘하늘’만 그리고, ‘강물’이 흘러간다는 사실을 반복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날씨에 비해 자신이 너무 쓸쓸하다는 것을 암시하기 위해서입니다.  이와 같이 일상적인 화제의 배경은 테마를 부각시키는 데 필요한 것들만 고르고, 그를 통해 화자의 심정을 은유할 수 있도록 조직해야 합니다. 반면에 특수한 순간의 심리적인 상황을 다루려 할 경우에 배경은 화자가 그렇게 행동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게 보이도록 조직해야 합니다.  다음 작품은 이런 점을 아주 잘 고려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방엔 천개의 의자와 천개의 들판과 천개의 벼락과 기쁨과 천개의 태양이 있습니다 당신의 방엘 가려면 바람을 타고 가야 합니다 나는 죽을 때까지 아마 당신의 방엔 갈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나는 바람을 타고 날아가는 새는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 이승훈(李昇薰), 「당신의 방」 이 작품의 화제는 ‘당신’으로 표상되는 연인 또는 절대자에게 도달할 수 없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방에는 ‘천개의 의자’와 ‘들판’과 ‘벼락과 기쁨’과 ‘태양’이 있고, ‘바람을 타고’ 날아가야만 갈 수 있다는 겁니다. 이와 같이 비일상적인 배경을 제시한 것은 독자들에게 화자가 처한 상황이나 정서 상태가 정상적이 아니며, 또한 ‘당신’ 역시 일상적인 당신이 아님을 유의하여 읽으라고 요구하기 위해서입니다.  이와 같이 배경을 화제에 맞춰 구성하려면 그 배경을 이루는 시간과 공간의 원형적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원형에 대한 이론은 매우 복잡하니 좀 더 간한다게 요약해 드릴까요? ⅰ)하루의 주기 ○ 빛의 시간 - 이성이 지배하는 시간, 남성적 성격, 노동,  ○ 어둠의 시간 - 감성이 지배하는 시간, 여성적 성격, 휴식 ○ 경계의 시간 - 이성과 감성이 교차되는 시간, 중간적 성격, 준비 ⅱ)계절 ○ 봄 : 감성의 계절, 여성적 성격, 순진, 화사, 희망-청년기 ○여름 : 이성의 계절, 남성적 성격, 정열, 낭만, 노동-장년기 ○가을 : 감성의 계절, 여성적 성격, 성숙, 고뇌, 우울-노년기 ○겨울 : 이성의 계절, 남성적 성격, 정지, 좌절, 엄숙, 절망-죽음 ⅲ)공간 ○열린 공간 : 남성적 성격,  ○닫힌 공간 : 여성적 성격 ○경계의 공간 : 양성적 성격 프라이(N. Frye)의 설명에 의하면, 이와 같이 계절과 하루의 주기와 공간에 의해 환기되는 정서가 다른 것은 원시시대부터 인류가 살아오는 동안에 자연 현상에 대해 은유적으로 해석해온 것이 축적되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어둠의 시간을 여성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낮 동안의 활동을 중지하고 자기 생활을 되돌아보는 과정에서 ‘비극적 리비도(tragic libido)’가 활동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화제에 따라 화자를 선택한 다음에는 시간과 공간을 설정하되, 실제로 작품을 쓸 때 다 표현하지 않더라도 화자의 성 신분 연령 심리 상태에 따라 계절과 하루 가운데 어느 때로 할 것인가, 그리고 어떤 공간에 내세울 것인가, 그 공간 안에는 어떤 것들을 등장시킬 것인가를 면밀히 설계한 다음 쓰기 시작해야 합니다. 자아, 문제 하나 낼까요? 우울한 사랑의 이야기를 작품으로 쓰려고 합니다. 어떤 화자를 어떤 시간과 공간 속에 등장시켜야 할까요? 그리고, 계절은 언제로 잡고, 날씨는 어떤 날로 잡는 게 좋으시겠습니까? ■ 거리와 어조 설정 이렇게 화자와 배경이 결정되면 그에 따라 화자의 와 를 결정해야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심리적 거리란 대상에 대한 화자의 태도를 말합니다. 그 유형으로는 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거리는 앞에서 살펴본 초점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거리와 어조는 화자의 인생관 내지 세계관, 화제나 청자에 대한 생각에 의하여 결정되므로 화자의 성, 연령, 신분 및 화제와 청자의 관계를 따져봐야 합니다. 이 가운데 성에 따른 것만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ⅰ) 화자의 태도와 거리 : 남성화자는 대상과의 관계를 초월하여 옳고 그름을 따지면서 이성적(理性的)・능동적(能動的)으로 대처하고, 여성화자는 대상과의 관계를 중시하면서 감성적(感性的)・수동적(受動的)으로 대처하는 것으로 설정합니다. 따라서 남성화자는 에서 여성화자는 로 설정해야 합니다. ⅱ) 어조와 문체 : 남성화자는 기능적이고 소박한 어휘를 택해 자유분방하거나 장중한 어조로, 여성화자는 섬세한 어휘를 택하여 정제되어 있으면서도 가변적인 어조로 이야기해야 합니다. 이와 같은 권유에 섭섭해하는 여성 독자들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남성편에 서서 이야기하는 게 아닙니다. 프로이트나 융 같은 분석심리학자들의 주장과, 그들의 견해가 너무 남성중심이라며 비판한 길리건(C. Gilligan)을 비롯한 여성심리학자들의 견해를 종합해서 만든 겁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볼까요? 길리건의 주장에 의하면, 남성은 대상과 자신의 관계에서 독립하여 에 의해 행동하고, 여성은 관계를 중시하면서 에 의해 행동한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여성이 확실히 남을 아끼고 배려할 줄 압니다. 그리고 길리건이 이런 주장을 한 것은 새로운 시대에는 매사를 따지기를 좋아하여 이 세상을 분쟁의 도가니로 몰아넣는 남성들보다 여성이 훨씬 훌륭하다는 걸 이야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시비를 잘 따지는 사람과 관계를 중시하는 사람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옳고 그름은 자기와의 관계를 초월하여 판단하고 행동하는 거지요? 그리고 그런 것을 잘 따진다는 것은 이성적이라고 할 수 있지요? 또 스스로 따지려 덤빈다는 것은 능동적임을 의미하지요? 그렇습니다. 분석심리학이나 여성심리학의 결론은 달라도 같은 심리를 다른 관점에서 해석한 것에 불과합니다. 물론 이와 같은 여성과 남성의 차이는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요. 하지만 문학작품의 인물은 특정인의 개별적인 성격을 겨냥하는 게 아니라, 우리 관념 속에 숨어 있는 보편적 인간상을 겨냥하는 것으로서, 설혹 고정관념에 불과하다고 해도 그에 가까워질수록 리얼리티가 강화됩니다. 더욱이 특별한 성격을 설명할 장치가 없는 시에서는 보편적인 성격을 겨냥할 수밖에 없습니다. 둘째로, 고려해야 할 것은 화자가 시적 대상과 청자를 어떻게 인식하며, 누가 우위(優位)이고, 담화의 장(場)에 청자와 함께 있느냐 여부입니다. 이 문제는 다음 작품을 읽고 확인해보기로 할까요? 저 재를 넘어가는 저녁 해의 엷은 광선들이 섭섭해 합니다. 어머니 아직 촛불을 켜지 마세요. 그리고 나의 명상의 새새끼들이  지금도 저 푸른 하늘에서 날고 있지 않습니까? 이윽고 하늘이 능금처럼 붉어질 때, 그 새새끼들은 어둠과 함께 돌아온답니다. 언덕에서는 우리의 어린 양들이 녹색 침대에 누워서 남은 햇볕을 즐기느라고 돌아오지 않고 조용한 호수 위에는 이제야 저녁 안개가 자욱이 내려오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머니 아직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 늙은 산의 고요히 명상하는 얼굴이 멀어가지 않고 머언 숲에서는 밤이 끌고 오는 그 검은 치맛자락이 발길에 스치는 발자국 소리도 들려오지 않습니다.  -신석정(辛夕汀), 「님의 침묵」에서 이 작품의 지향성은 청자지향형입니다. 그리고 화자는 사춘기로 접어드는 소년이고, 청자는 어머니이고, 화제의 내용은 어머니에게 아직 해가 지지 않았으니 촛불을 켜지 말아달라는 부탁입니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 화자의 발언은 몇 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첫째로는 자연물을 가까운 거리를 취하면서 인격체로 본다는 점이며, 그러면서도 ‘촛불’을 켜지 말라는 부탁에 나름대로 이유를 대며 논리적으로 말하고, 또한 매우 섬세하고 감성적인 어조로 말하고 있다는 점입이니다. 예컨대, 첫머리의 촛불을 켜지 말라는 부탁만 해도 그렇습니다. 아직 어둡지 않으니 켜지 말라는 게 아니라 지는 해가 ‘섭섭해’할 것이라고 배려하고 있습니다. 또 그냥 저녁 해라고 말하는 게 아니라 ‘저 재를 넘어가는 엷은 광선들’이라고 섬세하게 수식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모든 사물들을 물활적으로 보는 것은 화자가 아직 어린 소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름대로 논리를 세워 말하는 것은 어리긴 하지만 남성으로 설정했기 때문입니다. 또 이 작품은 적어도 두 행 이내에서 문장을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존대법을 구사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문장을 짧게 조직하는 것은 부탁하려는 의도가 분명하게 드러나도록 만들기 위해서이고, 존대법을 구사한 것은 청자인 어머니가 자기보다 상위이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화자가 청자보다 하위일 때는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서 애원․청원․부탁의 어조로 말합니다. 그리고 직접 말하기 어려운 화제일 때는 반어법이나 역설을 구사합니다. 이와 반대로 상위일 때에는 비교적 먼 거리를 취하면서 명령․금지․야유․비판의 어조와 직접 어법을 구사하고, 평어체를 택합니다. 비판의 어법에 대해서는 다음 장인 ‘엇갈려 말하기’에서 말씀드릴 예정이니 이렇게 줄거리를 세운 것을 환유적 어법을 이용하여 시로 쓰는 방법에 대해 알아보기로 합시다.    
897    자아,- 씁시다... 詩자악!... 댓글:  조회:4879  추천:0  2016-01-09
환유적으로 시쓰기 / 윤석산   자아 이제 서정적 줄거리를 완성했으니 환유적 어법으로 시를 써보기로 할까요? 지금 쓰자면 ‘나중에 쓰지요’라고 말할 테니까 저랑 함께 써보기로 합시다. 어떤 것을 쓸까요? 앞에서 시인이 직접 나서서 이야기하는 1인칭 화제로 쓴 경우는 예문을 통해 확인했으니  3인칭 화제로 써보는 건 어떻겠어요?  대답이 없으니 제 경우를 예로 들겠습니다. 어느 날 글을 쓰다가 피곤해 차를 몰고 해안도로에 있는 카페에 갔습니다. 커피를 시켜놓고 창 밖으로 펼쳐지는 바다 풍경을 보면서 피로를 풀고 있는데 옆자리에 앉은 커플 가운데 한 사람이 ‘자기 말 속에는 또 다른 말이 있는 것 같아’라고 하더군요. 순간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대요. 그래서 곰곰이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 ‘말 속’에 말이 있다면 ‘말 밖’에도 말이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안’과 ‘밖’이 있다면 말은 입체적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공간이라면 사람도 살고, 도시도 있고, 빌딩도 있고, 구멍가게도 있고, 그 구멍가게 안에는 사탕항아리도 있을 테고, 그 아래에는 지하실도 있을 수 있고, 밤마다 고양이가 계단에 올라와 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더군요. 그러다가 언어철학(言語哲學)을 공부하느라고 읽은 책들의 구절들이 떠오르대요. 그러니까, ‘언어는 이데올로기’라든지, ‘언어는 존재다’라든지, ‘존재에 이르는 통로’라는 말들입니다. 그리고 ‘이데올로기는 폭력을 낳는다’는 말도 떠오르대요. 평소 이 지구상의 모든 전쟁은 이데올로기 때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런 말이 떠오른 모양입니다. 그러더니 다시 언어가 존재라면 화살로도 만들 수 있고, 고래로도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이 들대요. 그 때 아마 바다 저편에 여객선이 지나가고, 그 여객선을 고래의 모습으로 바꿔봤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종업원에게 종이를 달라고 해 다음과 같이 메모하기 시작했습니다. ①글을 쓰다가 피곤해서 해안도로 드라이브를 하고 카페에서 차를 마심 ②옆자리의 젊은 커플이 ‘당신 말 속에는 또 다른 말이 있다’고 말함. ③순간 말 속에 말이 있다면 언어는 입체적 공간이고 사물이며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음. ④그리고 또 언어는 이데올로기라는 생각이 떠올랐음 - 이 세상의 모든 분쟁은 언어로부터 시작됨… 뭐, 이런 식으로 시의 줄거리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집에 와서 어떻게 쓸까 곰곰이 생각하다가 3인칭 지향형으로 쓰기로 했습니다. 물론 어느 지향형으로도 쓸 수 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유형을 택한 것은 언어에 대한 제 느낌이나 말 속에는 말이 들어 있으니 말할 때 상대에게 오해받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교훈보다 언어 그 자체의 속성을 드러내고 싶어서입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화제 지향형은 자기감정을 자제하면서 객관적으로 말하기에 적합한 유형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는 줄거리를 검토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가운데에서 제일 먼저 제외한 것은 ①번이었습니다. 이 모티프는 과정을 나타내는 로서, 이들을 그냥 놔둘 때는 서사적 산문이 되기 때문입니다. ‘동적  모티프’가 뭐냐구요? 이 용어는 러시아 형식주의자인 토마쉐프스키(B. Tomaševski)가 쓴 것으로서, 그는 이야기를 이루는 최소 단위인 모티프의 유형을 , , , 로 나눕니다. 그리고 고정 모티프는 이야기를 전개하는데 빼놓을 수 없는 단위로서 탄생이나 죽음 같은 것을 이야기하는 단위를 말하고, 동적 모티프는 ‘뛰었다’든지 ‘결혼했다’와 같이 정황(情況)의 변화를 알리는 단위를 말합니다.  그리고 자유 모티프는 사랑하는 사람을 찾아갈 때 날씨가 화창했다든지 음악을 들으며 갔다는 식으로 생략해도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않는 단위를 말하고, 정적 모티프는 ‘그녀는 아름답다’와 같이 묘사하는 단위를 말합니다. 하지만 완전히 동적 모티프를 배제하면 화자가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가를 짐작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가능한 축소하고, 자유 모티프와 정적 모티프를 이야기할 때 포함시키는 것이 좋습니다. 흔히 시를 평할 때 ‘서사성이 강하다’든지 ‘산문적’이라는 소리를 듣는 작품들은 이들을 그냥 놔두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들을 다 뺀 다음 줄거리에 따라 쓰기 시작했지요. 그런데, 쭉 쓰다가 보니까 주제가 잘 드러나지 않대요. 그리고 어떤 곳은 너무 장황하고, 설명으로 흐르는 곳이 생기데요.  그래서 주제에 해당하는 ‘말 속에는 말이 있다’와 ‘말 밖에도 말이 있다’라는 구절을 적당히 바꾸면서 각 연마다 배치했지요. 그리고 줄줄이 이어지는 곳을 잘라 연(聯)을 바꾸면서 자른 빈 틈에서 독자들이 상상하도록 만들어 작품으로 완성했습니다.  한번 보실래요? 말 속에는 말이 있고 말 밖에는 말이 있다. 말과 말 사이에는 빌딩이 있고  빌딩과 빌딩 사이에는 구멍가게가 있고 구멍가게 한 가운데에는 꿈을 담은 사탕 항아리가 있고 그 뒤 쪽 지하실 계단 아래에는 빨간 장화를 신은 고양이가 있고 그 고양이는 밤마다 층계 위에 올라와 밤새도록 운다. 말과 말 사이에는  바람이 불 때마다 흔들리는 숲이 있고 발랑발랑 뒤집히는 물푸레나무 이파리들 뒤엔 명털 뽀얀 소녀들이 있고 깔깔대는 그 소녀들 웃음은 화살이 되어  산등성이를 달리는 사슴 정갱이를 꺼꾸러뜨린다. 그러나  지상의 말과 말 사이에는 또 다른 말이 있고 또 다른 말 내부에는 눈부신 이데올로기가 있고  이데올로기는 도시 상공에서 펄럭이는 깃발이 되고 펄럭이는 깃발은 저를 위해 다른 말들을 공격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은 간혹 전쟁터에서 혼자 죽는다. 말과 말 사이에는  쓸쓸히 비가 내리는 바다가 있고 비 내리는 바다에는 죽은 고래 한 마리가 있고 그 고래는 밤마다 제 짝을 찾아 울며 지구 저쪽으로 떠나고  그래서 지상의 우리 사랑은 언제나 슬프다.         -필자, 「지상의 말과 말 사이에는」 어때요? 재밌지요? 환유적으로 시 쓰는 방법을 정리해드릴 테니 여러분들도 앞에서 만든 줄거리를 가지고 작품 한편을 완성해보세요. □ 환유적으로 시 쓰기 순서 ① 화제가 떠오르면 자유연상(自由聯想)을 하면서 시상을 풍부하게 만든다. ② 시상을 검토하면서 지향성을 결정한다. ③ 시적 인물과 배경, 어조 등을 결정한다. ④ 줄거리를 검토하면서 고정모티프와 동적 모티프를 제거하거나 자유모티프와 정적 모티프에 포함시키면서 이야기를 만든다.  ⑤ 주제에 해당하는 모티프를 군데군데 배치하여 주제를 강화하고, 모티프 단위로 연을 구성하면서 작품을 완성한다. 동적 모티프를 어떻게 약화시키느냐구요? 아, 그에 대한 설명을 빠뜨렸군요.  흔히 시의 제재로 택한 화제에 과거의 이야기를 오버랩(overlap)하거나 몽타주(montage)하는 방법을 쓰지요. 다시 예를 들어볼까요? 어떤 사람이 쓸쓸해서 하루 종일 방황하고 아래와 같은 시적 줄거리를 만들었다고 합시다. ① 그녀가 떠난다게 해서 항구로 갔다. ② 하루 종일 밀려오는 파도 소리와 갈매기의 울음을 들으며 방황했지만 여전히 쓸쓸했다.  ③ 해가 지고, 어두워져 집으로 돌아오는 길 포장마치에서 소주를 마셨지만, 여전히 쓸쓸했다. 만일 이 이야기를 차례대로 쓴다면 틀림없이 ‘산문적’이라든지 ‘서사적’이라는 평을 들을 겁니다.  그러므로, 아래와 같이 마지막 모티프인 포장마차에서 술 마시는 장면에 그녀가 떠나는 장면을 비롯하여 바다에서 보고 느낀 것들을 겹쳐 놔야 합니다. 차가운 소주잔 아래 항구로 가는 사내가 보인다. 파도는 밀려오고, 갈매기는 울고 차가운 소주잔 아래 바바리코트 깃을 여미며 돌아서는 여인이 보인다. 여객선은 부우부우 고동을 울리며 항구를 빠져나가고 차가운 소주잔 아래 늦가을 저녁 혼자 술마시는 사내가 보인다. 술잔 밑으로 저녁 해가 지고, 포장마차 비닐 포장이 펄럭이고… 뭐, 이런 식으로 겹쳐 놓거나 비유하면 지나간 일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자아, 그럼 써봅시다. 나중에 쓰겠다구요? 한 마디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자기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사람들은 그럴 능력이 없거나 운이 없어 그런 게 아닙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길러야 할 기초적인 능력을 내일 하지 모레하지 미루고, 그렇게 미룬 것들이 누적되어 그렇게 된 겁니다. 이 강의가 끝나기 전에 시인이 되고 싶은 분들은 어서 쓰기 시작하세요. 자아, 씁시다. 시자악!      
896    詩의 정의는 없다... 댓글:  조회:4851  추천:0  2016-01-09
시창작 이론.1 -글/신배섭 1.시와 시의 언어 시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은 쉽지 않다. 지금까지 시에 대한 수많은 정의가 내려졌으나 완벽한 정의는 나오지 않았다. 원래 시의 정의는 나올 수도 없다. 그렇게 되어 버리면 다양성이라는 관점에서 시는 이미 의미가 없는 것이요 발전이란 것도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시대에 따라 시에 대한 생각이 달라질 뿐만 아니라 시 자체도 변모하기 때문이다. 편의상 시는 마음 속에서 이루어진 뜻을 말로 나타낸 것이라는 정의에서 출발해 보자. '시언지(詩言志)'라는 이 정의는 동양의 전통적인 시관(詩觀)으로 오랫동안 통용되어 왔다. 먼저 뜻을 보자. 문학을 정의할 때 '가치 있는 체험을 내용으로 한다'고 하니, 시에서의 뜻도 이와 같다고 할 수 있다. 표현하지 않고는 못배길 절실한 그 무엇 이 여기서의 뜻이라고 하겠다. 이번에는 뜻을 전달하는 '말'에 주목해 보자. 문학이 언어 예술이므로 시에서의 말도 제재(題材)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시의 경우에 있어서 언어는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그런가 하면 시의 형태도 소설이나 희곡과는 다르다. 짧고 압축되어 있다. 그러나 짧고 압축된 형태의 문학이면 모두 시라고 할 수는 없다. 절제(節制)된 언어 의 질서가 어떤 원리에 의해 이루어지고 또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알아야만 한다.이처럼 시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해명해야 할 과제가 많이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시에 대한 부당한 선입견을 버리는 것이 좋다. 시는 아름다워야만 한다든가, 고상한 세계를 노래 해야만 한다든가, 시는 일상 생활에서는 쓸모가 없다든가 하는 잘못된 생각을 버리는 것이 시에 대한 정의(定義)를 내리는 것보다 더 중요할 수 있다. 시의 언어란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와는 어떻게 다른가에 대해 알아보자. 언어를 매개로 하는 문학 중에서도 가장 언어에 민감한 갈래가 시이다. 시인은 자신의 체험·정서·사상 등을 제한된 형식과 언어 속에 담 아내야 하기 때문에, 시어(詩語)의 선택에 각별한 노력을 해야만 한다.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사용하는 언어는 역사적·사회적으로 형성된 관습적 의미로 통용되고 있다. 즉 언어는 어떤 특 정 대상을 지시하는 기호(記號)로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정확한 의사 전달을 위해서는 언어의 이와 같은 기능은 필수적이다. 이처럼 지시적 기능(指示的機能)을 가진 언어의 의미를 외연적(外延的) 의미라고 부른다. 그러나 시어로 채택된 언어는 외연적 의미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시어는 관습적인 때가 벗겨진, 보다 신선하고 새로 운 의미의 언어이어야만 한다. 고향(故鄕)은 늘 가난하게 돌아오는 그로하여 좋다. 지닌 것 없이 혼자 걸어가는 들길의 의미(意味) 백지(白紙)에다 한 가닥 선(線)을 그어 보라. 백지(白紙)에 가득 차는 선(線)의 의미(意味) 아, 내가 모르는 것을 내가 모르는 그 절망(絶望)을 비로소 무엇인가 깨닫는 심정이 왜 이처럼 가볍고 서글픈가. 편히 쉰다는 것 누워서 높이 울어 흡족한 꽃 그늘 ― 그 무한한 안정(安定)에 싸여. 들길을 간다. (이형기, '들길') 이 시에는 들길을 걸어가는 시적 화자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그러나 시를 읽어 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그가 삶에 지쳐 귀향(歸鄕)길에 오른 가난하고 외로운 사람이라는 것, 고향이란 그 누구에게나 안식과 평화를 베풀어 주는 따뜻한 공간이라는 사실을 점차 알게 된다. 따라서, 시의 제목인 '들길'은 바로 고향으로 가는 길이다. 여기에는 물론 삶에 실패하여 빈손으로 고향을 찾아가 는 화자의 궁핍한 심정이 암시적으로 형상화되어 있다. 그러나 시인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화자의 가난한 귀 향에 관한 것만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물질적으로 가난했지만, 오히려 그로 인해 자기를 성찰(省察)함으로 써 얻게 된 정신의 충만함이다. 역설적이지만 그는 가난했으므로 참다운 고향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세속적인 만족과 쾌락 이란 덧없고 허망하다는 것, 참된 삶이란 욕망을 채우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을 비우는 데 있다는 것 을 깨닫게 된다. 이상의 설명은, 물론 시인이 시를 통해 표현하고자 하는 전체 의미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 나 그 전체의 의미를 해명하기 위해 좀더 긴 글을 쓴다 하더라도 그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시를 설명 혹은 분석하는 일은 일상적인 언어 행위인데 반해, 시 그 자체는 일상어를 초월한 시의 언어 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인은 일상어로서는 표현이 불가능한 이 시적인 진실, 즉 궁핍한 귀향자가 들길을 가며 깨달은 생(生)의 진실을 한 마디로 '백지(白紙)에다 한 가닥 / 선(線)을 그어 보라. / 백지(白紙)에 가득 차는 / 선(線)의 의미(意味)'라고 말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시인이 창조한 언어, 즉 시의 언어라 할 수 있다. 다음을 보자 살던 성북동 비둘기만이 번지가 없어졌다. 본래 성북동 산에 번지가 새로 생기면서 새벽부터 돌 깨는 산울림에 떨다가 가슴에 금이 갔다. 그래도 성북동 비둘기는 하느님의 광장 같은 새파란 아침 하늘에 성북동 주민에게 축복의 메시지나 전하듯 성북동 하늘을 한 바퀴 휘돈다. (김광섭, '성북동 비둘기') 성북동은 서울에 있는 한 지역의 구체적인 지명이다. 번지란 땅을 인위적으로 나누고 번호를 부여한 것이다. 그런데 1행에서 성북동 산에 번지가 새로 생겼다는 것은 원래 자연이었던 곳에 인간의 주택지가 인위적으로 조성 되었다는 뜻이다. 2행에서는 자연인 그 산에 살던 비둘기만 보금자리를 잃었다고 했다. 1행과 2행은 문명과 자연의 대립 구조(對立構造) 로 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1행의 번지는 문명을, 2행의 번지는 자연적 삶의 터전을 뜻하게 된다. 이처럼 시어는 언어 의 지시적 의미에서 출발하여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되는데, 이를 함축적(含蓄的), 또는 내포적(內包的) 의미라고 한다. 지시적이고 객관적인 외연적 의미에서 암시적(暗示的)이고 주관적인 내포적 의미로 확대되어 가면서 시어는 하나 이 상의 의미를 갖기도 한다. 그리고 시어가 하나의 의미로 포착되지 않고 다양한 의미로 해석될 수 있을 때 오히려 시의 의미와 가치를 풍부하게 하는 경우도 있다. 산(山)에 산(山)에 피는 꽃은 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네 (김소월, '산유화(山有花)'의 2연) 이 시에서 '저만치'의 뜻은 무엇일까? 우선 어떤 거리를 지시함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구체적으로 몇 미터라고 해석 될 수는 없다. 전체적 문맥으로 보아 꽃이 저기, 저 쪽에서 피어 있다는 의미에서 거리를 뜻한다고 볼 수 있다. 이 경우 '저만치'는 시인이 꽃과의 사이에서 느끼는 심정적(心情的) 거리감으로 해석되어도 좋다. 그런가 하면 '저만 치'는 '저렇게' 또는 '저와 같이'로 어떤 상태나 정황(情況)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즉 산에서 피는 꽃은 저렇게 외로이 피어 있다고 해석하는 것이다. 그런데 '저만치'를 거리의 의미로 해석하는 것과, 상태나 정황으로 해석하는 것이 서로 모순되지 않고 오히려 상승 작용을 일으켜 결과적으로 '저만치'의 의미가 더욱 풍부해지게 되었다. 이처럼 한 단어 또는 한 문장 구조 속에 두 개 이상의 의미가 들어 있는 경우를 일러 언어의 다의 성(多義性), 또는 모호성(模糊性)이라 한다. 이것은 문학, 특히 시가 누릴 수 있는 특권이기도 하다. 2.시와 서정 시의 중요한 특성 가운데 하나는 서정성(抒情性)이다.전통적인 시에서부터 오늘날의 실험시에 이르기까지, 작품마다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시는 산문(散文)과 달리 어느 정도 서정성을 지니고 있다. 서정성이란 대상을 의미나 개념으로 파악하지 않고 감정이나 느낌으로 이해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인데, 그것은 음악 의 세계와 매우 유사하다. 음악에서는 직접적이거나 분명한 의미, 혹은 개념의 전달이 없다. 다만, 소리의 변화가 주는 감각적인 분위 기와 느낌이 어떤 감정을 유발시키고, 청자(聽者)는 자신의 주관을 통해 그 의미를 상상할 따름이다. 시의 경우도 이와 비슷하다. 음악이 소리를 통하여 어떤 대상을 이해한다면, 시는 소리가 포함된 언어를 통해 대상을 이해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감정적인 요소이다. 산문은 대상을 객관적으로 바라보 지만, 시는 주관적 혹은 감정적으로 느끼는 언어인 것이다. 나아가 시에서는 대상과 주관이 아예 하나로 융합되거나 결합된다.때로 인간에게는 감정적 (感情的)인 의미가 이지적(理智的)인 의미보다 더 중요한 경우도 많다. 이에 따라, 언어를 이지적인 의미를 지향하 는 것과 감정적인 의미를 지향하는 것의 두 가지로 나누기도 한다. 전자를 산문의 언어, 후자를 시의 언어라고 부른다. 산문의 언어가 중시하는 것은 이지적인 의미, 즉 외연적(外延的) 인 의미이며, 시의 언어가 중시하는 것은 감정적인 의미, 즉 내포적(內包的) 의미이다. 붉은 해는 서산(西山) 마루에 걸리었다. 사슴의 무리도 슬피 운다. 떨어져 나가 앉은 산(山) 위에서 나는 그대의 이름을 부르노라. 서름에 겹도록 부르노라. 서름에 겹도록 부르노라. 부르는 소리는 비껴 가지만 하늘과 땅 사이가 너무 넓구나. 선 채로 이 자리에 돌이 되어도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김소월, '초혼(招魂)'에서) 이 시에서 '선 채로 이 자리에 돌이 되어도'는 무슨 뜻일까? 먼저, '돌'의 의미를 해석할 수 있어야 한다. 시의 전체적 인 문맥으로 볼 때, 여기서의 '돌'은 '바위의 조각으로 모래보다 큰 것'이라는 사전적 의미, 즉 일상에서 사용하는 의 미로 쓰인 것이 아니라, '돌'이 가진 한 부분의 속성만을 확대하여 '붙박이로 자리를 지키는 존재'라는 내포적 의미로 쓰였음을 알 수 있다.이는 곧 님에 대한 시적 화자의 변치 않는 사랑이 형상화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시에서 시인이 관심을 가진 것은 어떤 사실을 객관적으로 표현하거나 전달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에서 연유 된 자신의 슬프고 허무한 감정 그 자체의 형상화(形象化)이다. 이처럼 감정의 표현은 문학, 특히 시가 누릴 수 있는 특 권이기도 하다. 3. 이미지와 수사 시어의 생명은 객관적 의미가 아니라 오히려 함축적인 의미에 있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시는 논리적 분석의 대 상만은 아니다.문학 일반이 그렇듯 시는 독자에게 정서적 반응을 불러 일으키고, 독자는 이를 통해 시적 체험(詩的體驗) 을 하게 된다. 따라서 시인은 자신이 절실하게 느꼈던 체험이나 감각을 생동감 있게 독자에게 전달하기 위해서 제재인 언어를 통해 그것을 감각화(感覺化)해야한다. 이것이 바로 이미지다. 그러니까 이미지는 감정이나 사상이 감각과 통일되어 나타난 것이다.독자들은 누구나 여러 가지 감각 기관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이미지를 통한 환기(喚起)가 가능한 것이다. 예컨대 '분수처럼 흩어지는 푸 른 종소리'라고 했을 때 '소리'라는 청각과 '푸른'이라는 시각의 두 이미지가 합쳐져 있다. 이것을 공감각(共感覺)적 이미지라고도 하는데, 보이지 않고 들리기만 하는 종소리를 보이는 대상으로 바꾸어 놓고 있다. 특히 시각적 이미지는 시의 회화성(繪畵性) 획득에 크게 기여한다. 제삿날 큰집에 모이는 불빛도 불빛이지만 해질녘 울음이 타는 가을 강을 보것네. 저것 봐 네보담도 내보담도 그 기쁜 첫사랑 산골 물 소리가 사라지고 그 다음 사랑 끝에 생긴 울음까지 녹아나고 이제는 미칠 일 하나로 바다에 다 와 가는 소리 죽은 가을 강을 처음 보것네. (박재삼, '울음이 타는 가을 강'에서) 이 시의 주된 정서는 '설움'이다. 그러나 그 정서는 '서럽다'는 직접적인 진술보다는 '제삿날 큰 집의 불빛', ' 해질녘 가을 강', '사랑 끝 울음', '소리 죽은 가을 강' 등의 이미지들이 모여 만들어 낸 정서다.특히, 공감각적(共感覺的) 표현인 '울음이 타 는 가을 강'에서 '울음(청각)'과 '타는(시각)'이 만나, '설움'의 정서는 한층 선명해지고, 동시에 심화되고 있다. 이처럼 직설적, 추상적인 어법을 피하고 감각적인 표현을 지향할 때, 시는 보다 참신하고 풍요로운 예술적 형상화 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시인은 새로운 의미, 새로운 이미지를 얻기 위해 비유의 방법을 동원한다. 비유의 방법이 가능한 것은 사물과 사물 사이에 유사점이존재하기 때문이다. 시인은 전혀 닮아 보이지 않는 두 사물 사이에서도 공통점을 찾아 내기도 한다. 이 공통점을 시인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표현하는데, 그 방식에 따라 직유(直喩)·은유(隱喩)·의인(擬人)·제유(提喩)· 환유법(換喩法)등의 비유법이 성립하게 된다. 스스로의 생명을 키워 그 생명을 다 하기 위하여 빛 있는 곳으로 가지를 늘여 잎을 펴고 빛을 모아 꽃을 피우듯이 추운 이 겨울날 나는 나의 빛을 찬아 모아 스스로의 생명을 덥히고 그 생명을 늘여 환한 그 내일을 열어 가리. (조병화, '난(蘭)') 이 시에서 '빛'은 시 전편에 반복되어 나타남으로써 시인 자신의 어떤 관념을 내포한다는 점에서 상징적 차원에 있다. 이 시의 화자인 '나'는 단순히 '빛을 찾아 모으는 사람'이 아니라 '이상을 추구하는 사람'으로 귀결된다. 따라서, 보조 관념인 '빛' 은 자연스럽게 원관념인 '이상, 희망, 혹은 이념' 등의 의미를 획득하고 있다. 이처럼 상징이란 가시(可視)의 세계, 곧 물질 세계가 연상의 힘에 의하여 시인의 관념인 불가시(不可視)의 세계, 곧 정신 세계를 드러내는 표현 양식이다 4. 운율과 시짓기 서정시의 본질은 언어의 유기적(有機的) 조직을 통해 의미와 음악의 통일을 이루어내는 데 있다. 이 때 시의 음악성, 곧 가락(리듬)을가리켜 운율이라고 한다. 음악이 시간 예술이며, 음의 고저장단(高低長短)이 규칙적으로 반복되듯이 운율 역시 운율 요소들의 규칙적 반복으로 이루어진다. 물론 이 규칙적 반복은 기계적 반복이 아니라 일정한 의미를 지닌 조화로운 형식이다. 운율이 조화로운 질서임을 구체적 예를 통해 알아보자. 괴나리 / 봇짐을 / 짊어지고 // 아리랑 / 고개로 / 넘어간다 // 아버지 / 어머니 / 어서오소 // 북간도 / 벌판이 / 좋다더라 // ('신아리랑'에서) 이 민요는 3마디가 1행을 이루고 있고, 이러한 행이 반복되어 1연을 이루고 있다. 1마디를 1걸음으로 치면 3걸음이 1행을 이룬다. 이걸음은 소리의 걸음이기 때문에 음보(音步, foot)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위의 민요는 3음보 가락으로 되어 있다.우리 나라의 시는 대부분 3음보와 4음보의 가락으로 되어 있다. 민요와 현대시에는 3음보와 4음보가 두루 쓰이고, 고려 가요에는 3음보가 많으며, 시조(時調)와 가사(歌辭)는 모두 4음보로 되어 있다. 다시 위의 민요를 보면 1음보의 글자 수가 3자와 4자로 되어 있다. 즉, 3·3·4 // 3·3·4 // 의 규칙적 반복인 것이다. 그러면서3·3·3으로 하지 않고 3·3·4로 변화를 주면서도 뒤의 글자수가 한 자가 많은 4자여서 전체적인 안정감을 주고 있다. 이처럼 운율은 규칙적 반복과 변화가 조화를 이루면서 질서를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추강(秋江)에 / 밤이 드니∨물결이 / 차노뫼라 // 낙시 / 드리치니∨고기 아니 / 무노ㅁ라 // 무심(無心)한 / 달빗만 싯고∨빈 배 저어 / 오노라 // (월산대군(月山大君) 이 평시조는 4음보로 된 1행이 3번 반복되어 있다. 그러나 글자 수조차 고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3·4·3·4 // 2·4·4·4 // 3·5·4·3으로 3·4를 중심으로 가감(加減)되고 있다. 평시조는 4음보의 규칙적 반복이 외형적으로 틀이 잡혀 있는 시이므로 정형시(定型詩)에 속한다. 그리고 운율이 겉으로 드러나 있으므로 외재율(外在律)에 속한다. 해야 / 솟아라. // 해야 / 솟아라. /// 말갛게 / 씻은 얼굴 // 고운 해야 / 솟아라./ 산 너머 / 산 너머서 // 어둠을 / 살라먹고, /// 산 너머서 / 밤새도록 // 어둠을 / 살라먹고, /// 이글이글 / 앳된 얼굴 // 고운 해야 / 솟아라 (박두진, '해'에서) 이 시는 겉으로 보기에는 산문(散文)처럼 되어 있다. 그러나 위와 같은 호흡 단위로 율독(律讀)하면 4음보의 가락 으로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운율이 겉으로 틀 지어져 있지 않고 자유로운 형태 속에 내포되어 있으므로 자유시라 하고, 그 운율은 내재율(內在律)이라 한다. 시의 운율에는 음수율(音數律), 음위율(音位律), 음성률(音聲律)등도 있다. 음수율은 글자수의 정형성을 말하는데 우리 나라 시의 기본적인 음수율은 주로 3·4조나 4·4조로 되어 있다는 것이 정설(定說)이다. 음위율은 압운법(押韻法) 을 말하는 것으로, 한시(漢詩)에서 그 대표적인 예를 볼 수 있다. 음성률은 음의 고저 강약(高低强弱)에 의존하는 것이다. 운율의 요소로는 이 외에 음성 상징(音聲象徵), 의성어(擬聲語), 반복과 병렬등이 있으며, 행·연 등의 시의 형태도 운율과 관계가 있다. 음성 상징은 음색(音色)과 음상(音相)을 이용한다. 예컨대 발자국 소리를 '자박자박'이라고 표현하는 경우와 '저벅저벅'으로 하는 경우의 음성 상징은 서로 같지 않다. 전자처럼 양모음(陽母音)을 쓸 경우 밝 고 경쾌한 느낌을 주지만, 음모음(陰母音)을 쓸 경우 어둡고 둔중(鈍重)한 느낌을 준다. 또 ㄴ·ㄹ·ㅁ·ㅇ과 같은 자음과, 모음과 모음 사이에 발음되는 ㅂ·ㄷ·ㅈ의 음도 즐겁고 부드러운 느낌을 준다. 김영랑 의 시 구절'보드레한 에메랄드 얇게 흐르는'과 같은 것이 그 좋은 예이다. 의성어는 소리를 모방한 것으로, 실감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예컨대 "-삐이 뱃종 뱃종! / 하는 놈도 있고박두진의 '사슴'에서와 같은 것이다. 반복의 경우는 앞의 박두진의 '해' 에서 잘 볼 수 있으며 병렬은 한시의 대구(對句)에서 잘 나타나 있다. 시를 공부하면서 흔히 문제가 되는 것은, 시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 및 분석과 창작하는 일의 선후 관계이다. 시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나 분석은 이론의 문제일 터이고 창작은 직접 써 보는 일이 되는 셈인데, 무엇을 먼저 공부해야 옳은가 하는 문제는 당연한 물음이 될 수도 있지만 사실은 무척 중요하다. 몇 편의 시를 창작 혹은 분석해 보고 기쁨을 얻게 되면 대부분은 시를 많이 아는 양 우쭐거려 보기도 하고 마치 시인이 된 양 자찬에 빠지기도 한다. 물론 시를 모른다는 것이 아니며, 시인이 아니라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시에 대해서 조금 알고 있다고 생각될 때가 시를 가장 모를 때라고 한다면 오히려 옳은 말일 것이다. 조금 알고 있음에 만족하고 그치는 경우, 그 편협한 지식으로 말미암아 시의 세계를 그릇되게 인식하고 심지어 시의 본 질까지도 왜곡시킬지도 모른다는우려 때문이다. 문자 언어를 매개체로 하는 예술인 경우에 꼭 필요한 말로, '이해할 수 없으면 쓰지도 못 하고, 쓸 수 없으면 이해할 수도 없다.'는 말이 있다. 이는 이론과 실제의 조화가 그만큼 중요하 다는 말이다. 그러나 본격적인 글 공부를 위해서는 '이해하지 못 하면 쓸 수 없다'는 말 쪽에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것이 시 짓기를 위한경우라면 더욱 그렇다. 분석하고 이해하는 과정을 밟다 보면 짓기를 사사롭게 시도하지 않으며, 지으 면서 그 과정 속에서 얻은 것을조심스럽게 적용하려 할 것이다. 이에 널리 알려진 시를 분석하는 요령을 네 가지 차원 에서 알아 보고자 한다. 5. 제목에 관심을 가져라 제목을 사람으로 말하면 그 사람의 얼굴이다. 얼굴을 보면 그 사람의 삶의 모습을 어느 정도는 간파할 수 있다. 마찬 가지로 제목을 보면 그 시의 내용을 짐작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제목이 '무제'인 경우를 접하게 되면 독자들은 당황하기 마련이다. 말 그대로 제목 '題'이 없다 '無'는 의미일텐데, 제목이 없다고 말하면서 그것을 제목으로 선택한 의도가 무엇일까를 고민해야 한다. 역설적 의미를 담은 것일 수도 있겠고, 내용 자체가 제목이 없는 것에 대한 내용일 수도 있겠다. 그것 도 아니라면 제목으로 삼을 만한 것이 없었다거나 그저 무성의한 제목 붙이기에 다름 아닐 수도 있겠다. 이렇게 다양한 내용을 암시할 수 있다는 것은 풍부하게 정서를 환기시킬 수 있지 않겠나 하겠지만 그만큼 애매할 수도 있다는 점에문제가 있다. 제목부터 애매한 시는 결국 애매한 시로 끝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내용 없는 시가 어디 있겠는가? 파도에 휩쓸려도 산꼭대기에서 떨어져도 돌멩이가 되리라. 새싹이 돋아나고 태양이 다시 떠오르 듯 이제 웅덩이 속에서 헤엄치는 물고기가 되리라. 기적 소리를 멀리하고 떠나가는 열차의 바퀴에 치어 가늘게 떨고 있는 손가락의 기억을 잊을 수 있는 하얀 새가 되리라. (고교생 작품, '무제') 위에 제시된 시는 제목 '무제'와 무슨 연관이 있는지 알 수 없을 뿐더러 세 가지의 되고 싶은 존재가 연결 고리없 이 흩어진 채 끝맺고있기 때문에 차라리 '무제'라는 제목을 붙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그러나 제목은 시가 갖고 있는 내용을 어떤방식으로든지 암시해 주어야 한다. 제목도 시의 일부이다. 유치환의 '깃발'은 이를 잘 드러내준다.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海原)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 순정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의 푯대 끝에 애수(哀愁)는 백로(白鷺)처럼 날개를 펴다 아! 누구인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닯은 마음을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유치환, '깃발') 시의 본문에서는 '이것은'으로 제목 '깃발'을 지시해 놓고 '소리 없는 아우성', '노스탤지어의 손수건', '순정', '애수(哀愁)', '슬프고도애닯은 마음'이라고 은유되어 있다. 제목을 뺀 본문에는 '깃발'이라는 시어를 찾아볼 수가 없다. 여기에서 제목 '깃발'이 언급되지 않았다면 위에 열거된 비유의 원관념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은 매우 어렵다. 저 재를 넘어가는 저녁해의 엷은 광선들이 섭섭해 합니다. 어머니, 이직 촛불을 켜지 말으셔요. 그리고 나의 작은 명상의 새 새끼들이 지금도 저 푸른 하늘에서 날고 있지 않습니까? 이윽고 하늘이 능금처럼 붉어질 때 그 새 새끼들은 어둠과 함께 돌아온다 합니다 (신석정. '아직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 제1연) 해야 솟아라. 해야 솟아라. 말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산 너머 산너머서 어둠을 살라 먹고, 이글이글 애띤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달밤이 싫어, 달밤이 싫어, 눈물 같은 골짜기에 달밤이 싫어, 아무도 없는 뜰에 달밤이 나는 싫어…… (박두진, '해' 제 1, 2연) 이 시들은 제목은 다르지만 같은 내용을 형상화한 시라고 할 수 있다. 제목이 '해'인 만큼 '해야 솟아라'는 표현은 광명의 세계를추구하는 내용일 테고, '아직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 역시 촛불을 켜야 할 어둠의 시간 을 거절한다는 의미로 이해한다면 같은 내용을 암시하는 제목이다. 6. 시어의 이미지를 활용하라 한 편의 시가 완성되기 위해서는 상상력, 표현 기법, 율격, 어조, 이미지 등 다양한 요소들이 종합적으로 작용하 지만 그 중에서도이미지는 시가 압축을 생명으로 삼는 문학이면서도 구체성을 잃지 않게 해 주는 중요한 역할을 해 준다는 데 의미가 있다. 시어(詩語)란 시에만 쓰이는 특별한 언어가 아니라, 일상적 언어가 시 작품의 재료로 선택될 때 이를 일컫는 말이다. 그러나 시어와일상적 언어는 다른 점이 있다. 일상적 언어는 언어 기호가 의미하는 내용이 사전적 의미로 국한되지만 시어는 언어 기호가 갖는자체의 의미 뿐만 아니라 이를 통해 연상되는 내용까지를 포함하는 보다 폭넓은 의미이다. 흔히 말하는 직유니 은유니 상징이니 하는 표현 기법은 시어가 일상어와 다르다는 점을 보여주는 한 예가 된다. 앞에 서 언급한 '해'의경우 '해'를 통해 연상되는 이미지는 밝음, 정열, 희망 등이다. '어둠을 살라 먹고 ∼ 해야 솟아라'를 반복하는 것은 어둠의 세계에서벗어나 밝은 세계로 향하고 싶은 간절한 소망일 것은 당연하다. 유치환의 '일월(日月) '을 보면 나의 가는 곳 어디나 백일(白日)이 없을 소냐 (유치환, '일월(日月)' 제 1연) 제목부터 '해와 달'로 설정되면서, 제 1연에서는 '내가 가는 곳 어디인들 밝은 대낮이 없을 소냐(있을 것이다)'하여 '밝은 세상'이오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을 읊었다. 같은 시인의 다른 작품을 보자.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 아예 애련(愛憐)에 물들지 않고 희로(喜怒)에 움직이지 않고 비와 바람에 깎이는 대로 (중략) 꿈꾸어도 노래하지 않고 두 쪽으로 깨뜨려져도 소리하지 않는 바위가 되리라. (유치환, '바위') 이 작품은 '바위'가 되겠다는 굳은 의지를 보여 주고 있다. 물론 죽은 뒤에 산에 있는 바윗 덩어리로 환생하겠 다는 의미는 아니다.바위가 가지고 있는 단단하면서도 불감부동(不感不動)의 이미지를 지닌 그 속성을 닮겠다는 의지의 표출이다. ' 해', '바위'는 두 작품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시어들이다. 어떤 작품이든지 핵심 시어는 있게 마련이다. 이것이 대개는 작품의제재(題材)가 되는데 이 제재에 대한 이미지를 통하여 내용 분석을 시도하면 70% 정도는 작가가 작품에서 드러내고자 하는 바를 읽어낼 수 있다. 그러나 시의 흐름이 어떤 방향이냐에 따라 시어의 이미 지는 사뭇 달라지기도 한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생사(生死 춘산(春山)에 눈 녹일 바람 어제 불고 간 데 없다. 그 바람 불어야 이 언덕 파릇파릇 새싹 돋아 두 작품의 '바람'은 어떠한가. 전자는 '잎새를 흔들리게 하는 바람'으로 나를 괴롭게 할 정도라면 외부적 시련의 이미지로 적당하다. 그러나 후자는 눈을 녹이고 새싹을 돋게 만드는 '바람'이니 생명력을 불어 넣어주는 '바람'이 아닌가. 이와같이 같은 시어라도 시적상황에 따라 다른 의미로 쓰일 수 있다는 점은 시어로서 선택된 일상어의 흥미로운 여행이다. ' 밤(夜)'은 어둠의 속성으로 부정적 현실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오붓한 공간을 제시해주는 포근한 이미지를 보여 주기도 한다. '눈(雪)'은 추위와 관련되는 속성으로 고통, 시련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사랑의 매개체나 그리움의 대 상이 되기도 한다. 이러한 이미지를 일러 일반적 이미지 혹은 보편적 이미지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보편성을 떠난 이미지를 창출하 는 것은 새로운시도라는 점에서 높이 평가되기도 하는 만큼 많은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다. 7. 시어 선택과 작가 의도 파악하기 시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또 한 가지가 있다면 시를 통하여 작가의 마음을 읽어내는 일이다.작가의 의도를 독자가 알아차린다는것은 작가에게 있어서도 기쁜 일이다. 그러면 작가의 마음을 읽어내기 위한 방법은 무엇일까? 그것은 뭐니뭐니 해도 시가 무엇을 어떻게 표현해 내려고 했는가 하는 점을찾아내는 일이다. 여기에서 '무엇'은 시가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對象)'일 것이며, '어떻게'는 '표현 기법'일 것이다. 그러니까작가가 어떤 대상을 표현하는데, 어떤 언어를 사용하여 이를 대치(代置)시키고 있으며, 대신한 그 나름대로의 표현 기법에 의하여어떠한 의미로 환기되고 있는가 하는 점을 알아차리는 일이 시를 이해하는 지름길이라는 말이다. 작가의 창작 의도에 대한 깊이에 대하여 이해하려는 나의 눈높이를 맞추고 그 지점에서 대상과 다듬어진 시구(詩句) 를 바라보는 것과똑같은 원리이다. 이에 대한 쉬운 이해는 다음에서 찾아볼 수 있다. 어제도 하로밤 나그네 집에 가마귀 가왁가왁 울며 새었소. (김소월, '길' 제 1연) '갈 길을 잃은 나그네의 비애(悲哀)'를 주제로 한 김소월 시 '길'의 첫 연이다. 여기에서 시의 전체적 분위기를 압도하는 시어는'가마귀'이다. '가마귀'를 통해서만이 자신의 모진 신세나 어두운 이미지를 드러낼 수 있다고 판단한 작가의 선택이었을 것이다. 만약선택된 시어가 '가마귀'가 아니고 '참새'였다면 이 시는 어떤 모습일까? 어제도 하로밤 나그네 집에 참새 짹짹 울며 새었소. 이와 같은 모습일 텐데, 분위기는 너무나 달라진다. 작가 자신의 길 잃은 나그네로서의 모습을 형상화시키기에는 뭔가 잘못 되었다는느낌일 뿐이다. '참새'가 아니고 '까치', '종달새' 등의 다른 새였다 해도 '가마귀'가 드러내는 분위기만큼의 정서는 표현해내지 못 할것이다. 즉 어두운 분위기를 위해서는 가장 잘 선택된 시어라고 여겨진다. 박목월의 시 '청노루'를 보자. 머언 산 청운사 낡은 기와집 산은 자하산 봄눈 녹으면 느릅나무 속잎 피어나는 열두 굽이를 청노루 맑은 눈에 도는 구름 이 시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살펴 보아야 할 핵심 소재(제재)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청노루'다. 시의 유기적 구성을 위해 동원된 시어가 모두 자연물이라면 그 중에는 유일하게 동물로 선택된 '청노루'가 있다 작가는 거기에 이 시의 초점을 맞추었을 것이 뻔하다. 작가의 깊은 마음을 이러한 식으로 헤아렸다면 '청노루'라는 제재를 가운데 두고 해석해야 함은 당연한 일이 되는 것이다.그런데 우리에게 의심스러운 것은 청(靑), 즉 푸른 색깔의 노루가 있느냐 하는 점이다. 노루는 송아지처럼 누런 색깔일 뿐이다. 그럼 이 시를 '황노루 / 맑은 눈에 // 도는 / 구름'이라고 시어를 바꾸어 보면 어떻게 될까? 놀랍게도 이 시가 주는 이미지는 신선함이아니라 칙칙함이다. 이렇게 되면 작가가 드러내고자 한 신선한 봄, 아름다운 봄의 이미 지는 본래의 의도와 벗어나게 되는 실패작으로 전락하고 만다. 그래서 작가는 실재(實在)하지도 않는 '청노루' 라는 시어를 의도적으로 선택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점을 우리는 이해하여야 한다. 시어의 선택면에서 ' 청노루'와는 조금 다른 경우이긴 하지만 '개나리'라는 시를 한번 읽어보자. 샛노란 얼굴빛으로 앙증스런 눈웃음으로 너의 가여린 몸짓은 이 봄날을 위해 고스란히 탄생되었고…… 티없이 맑은 하늘을 우러러 대지의 언 가슴을 녹이는 너의 기도는 무언의 고독으로 떨고 있구나 오늘쯤 나는 너를 만나러 가는 한 마리의 나비가 되고 싶다 개나리 화관을 머리에 이고 개나리 목걸이를 목에다 걸고 개나리 반지를 손가락에 끼고 나풀나풀 날개짓으로 너를 만나고 싶다 노오란 꽃잎이 먼저 스러져야만 연두빛 잎사귀가 트이는 너의 엇갈린 슬픈 사연을 듣고 싶다 나의 빈 가슴 하나 가득 너를 부비고 온통 싱그러운 마음으로 돌아오고 싶다. (김영실, '개나리'(주부 백일장 시부문 장원작)) 이 시는 '청노루'에서처럼 작가의 의도적 시어 선택이 흔적으로 남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개나리'에서도 '청노루'를 해석하는 방법은 똑같이 통할 것 같다. 즉 시 전체를 통하여 가장 특징적인 시어를 찾는다면 그것은 바로 '나비'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개나리'를 제대로 관찰하기 위해서는 사람의 눈길보다도 '나비'의 시선이 더욱 정확하고 예리할 것이라는 것을 작가는 일찍부터 알고있었음직하다. 그리하여 '오늘쯤 나는 / 너를 만나러 가는 / 한 마리의 나비가 되고 싶었던 것이며, '노오란 꽃망울이 먼저 스러져야만/ 연두빛 잎사귀가 트이는' 개나리의 '엇갈린 슬픈 사연을' 들을 수 있을 만큼의 정확한 관찰이 가능했던 것이다. 더욱이 작가는 여섯 연으로 이루어진 '개나리'전 편을 통하여 3연에만 단 한 번의 '나비'를 등장시키고 있어 핵심 시어의 절제면에서도 무척이나 돋보인다. 8. 서정적 자아의 위치 확인하기 시나 소설이 자서전이나 수필 등의 글과 다른 이유로는 서술자의 실체 문제를 들 수 있다. 자서전이나 수필 같은 글의 경우 서술자인 '나'는 곧 작가이다. 그러나 시나 소설의 경우 서술자는 곧 작가라는 등식을 곧이 곧대로 믿어버리면 크나 큰 오류를 범할 수도 있다. 소설 작품에서 한 작가가 서술자로 하여금 성행위를 하는 표현을 거침없이 써 내려갔다고 가정할 경우, 서술자는 곧 작가라는 인식에 사로잡혀 있게 되면 그 작가의 가정(家庭)은 곧바로 파멸의 길을 걷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시도 마찬가지다. 작품의 내용이 이성(異性)과 이별한 뒤에 오는 사무치는 그리움을 표현했다고 해서 그것이 꼭 작가의 경험일 수는없는 것이다. 물론 작가의 경험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음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작가의 경험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것이지만 적어도 작가를, 서술자와 일치한다는 등식 위에서 인식하는 것은 작가 혹은 독자들이 피해야 할 기본적 예절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나 소설은 수필이나 자서전과 다른 장르가 되는 것이며 시에서는 서술자를 서정적 자아 (시적 화자 또는 시적 자아)소설에서는 작중 화자라고 일반적으로 부르는 것이다. 소설에서의 시점(視點 - 1인칭, 3인칭)이 시에도 있다면 의아해할 지도 모르겠다. 1인칭과 3인칭의 차이는 서술자의 위치가 작품 속에 있는가 작품 밖에 있는가에 있다. 그러니까 시의 경우 서정적 자아인 '나'가 작품 속에 있는가 작품 밖에 있는가 하는 점이 소설로 말하면 1인칭 시점 혹은 3인칭 시점이 되는 셈이다.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 영변(寧邊)에 약산(藥山)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 가시는 걸음 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 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김소월, '진달래꽃')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북방(北方)으로 휩쓸려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高原) 서릿발 칼날진 그 위에 서다. 어디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감아 생각해 볼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이육사, '절정(絶頂)')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 리 술 익은 마을마다 타는 저녁 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박목월, '나그네') 김소월의 '진달래꽃'은 서정적 자아인 '나'가 작품 속에 있으며(소설로 말하자면 1인칭 시점), 이육사의 '절정(絶頂)'은 '나'가 드러나 있지는 않지만 생략된 경우로서 역시 같은 경우에 속한다. 박목월의 '나그네'에는 '나'가 작품 밖에 위치하고 있어 소설로 말하자면 3인칭 시점에 해당한다. 뒤에서도 언급하겠지만, 같은 내용도 서정적 자아의 위치를 바꾸어 보면서 창작을 시도해 보면 느낌은 사뭇 달라진다. 작품의 내용이 서정적 자아와 밀착되어 있는 '진달래꽃', '절정(絶頂)'을 읽을 때에 독자는 자신의 위치와 서정적 자아를 동일시하게됨으로써 작품 속에 푹 빠지게 되는 경우를 종종 경험하게 된다. 반대로 '나그네'의 경우는 작품의 내용을 자기 자신의 것이 아니라 제 삼자의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마치 독자가, 독자로부터 멀리떨어진 위치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감상하는 느낌을 받게 된다. 전자의 경우는 자신의 일을 서술하는 입장이기 때문에 감정이 위주가 된 주정적(主情的)작품이 많은 편이며, 후자의 경우는 제삼자의 입장에서 작품의 내용에 간섭할 수 없는 입장이기 때문에 서정적 자아의 감정을 노출 시키기 어려운 문제가 많아 지성이 위주가 된 주지적(主知的)작품이 많은 편이다. 9. 좋아하는 시부터 관심 갖기 누구나 좋은(잘 된) 시를 쓰고 싶어 한다. 좋은 시를 쓰겠다 하면서 한 편의 시도 쓰지 못 한 채 좋은 시만을 기다리는 이가 있다면 그에게 좋은 시는 평생 그림의 떡일 뿐이며 습작시 한 편도 제대로 구경할 수 없는 초라한 시인에 머물고 말 것이다. 물론 이러한 부류에 속하는 사람은 대개 시에 대하여 관심이 지대한 편이며, 실의에 빠져 있는 경우라 해도 좋은 시에 대한 열망 하나만으로 이를 거뜬히 극복해낼 줄 아는 굳은 의지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어찌 보면 문학이라는 말 자체만으로도 거기에서 큰 기쁨을 얻고 있는 사람들같이 여겨져서 왈가왈부할 것도 아닌 것 같으나 노력(습작)하지 않고 좋은 결과(작품)를 기대하는 것은 실상 불가능하다고 보아야 한다.이 세상의 모든 훌륭한 작품들은, 부단한 습작에서 얻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이룩된 것들이다. 우선은 부족한 모습에서부터 시작하는 처음이 열려야 한다. 쓰는 것보다는 읽고 음미하는 즐거움이 선행되어야 한다. 다른 사람의 많은 작품들을 읽고 음미하는 일은 표절(남의 글을 그대로 모방함) 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아니라 표절하는 잘못을 막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다. 그런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애송시 하나 정도를 간직하고 산다. 나는 과연 어떤 내용의 시를 좋아 하는가? 이것을 알아보는 일은 시쓰기의 초보 단계에서 꼭 필요하다. 모든 일에 선후 관계가 있듯이 시 쓰기에도 선후 관계는 있을 테니까 말이다. 자칫 순서를 그르치게 되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의 틀에 구속 되어 헤어나지 못하고 무조건 좋고 나쁨으로만 시 작품을 평가하려 하는 문제가 생기는 법이다. 예시한 작품들을 보자. [가] 나의 가는 곳 어디나 백일(白日)이 없을 소냐 머언 미개(未開)적 유풍(遺風)을 그대로 성신(星辰)과 더불어 잠자고 비와 바람을 더불어 근심하고 나의 생명과 생명에 속한 것을 열애(熱愛)하되 삼가 애련(愛憐)에 빠지지 않음은 - 그는 치욕(恥辱)임일레라. 나의 원수와 원수에게 아첨하는 자에겐 가장 옳은 증오(憎惡)를 예비하였나니. 마지막 우러른 태양이 두 동공(瞳孔)에 해바라기처럼 박힌 채로 내 어느 불의(不意)에 짐승처럼 무찔리기로 오오, 나의 세상의 거룩한 일월(日月)에 또한 무슨 회한(悔恨)인들 남길쏘냐 (유치환, '일월(日月)') 나의 지식이 독한 회의(懷疑)를 구하지 못하고 내 또한 삶의 애증(愛憎)을 다 짐지지지 못하여 병든 나무처럼 생명이 부대낄 때 저 머나먼 아라비아의 사막으로 나는 가자. 거기는 한 번 뜬 백일(白日)이 불사신같이 작열하고 일체가 모래 속에 사멸한 영겁의 허적(虛寂)에 오직 알라의 신(神)만이 밤마다 고민하고 방황하는 열사(熱砂)의 끝. 그 열렬한 고독 가운데 옷자락을 나부끼고 호올로 서면 운명처럼 반드시 '나'와 대면(對面)케 될지니 하여 '나'란, 나의 생명이란 그 원시의 본연(本然)한 자태를 다시 배우지 못하거든 차라리 나는 어느 사구(砂丘)에 회한없는 백골을 쪼이리라. (유치환, '생명(生命)의 서(書)')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북방(北方)으로 휩쓸려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高原) 서릿발 칼날진 그 위에 서다. 어디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감아 생각해 볼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이육사, '절정(絶頂)') 고향에 돌아온 날 밤에 내 백골(白骨)이 따라와 한 방에 누웠다. 어둔 방은 우주로 통하고 하늘에선가 소리처럼 바람이 불어 온다. 어둠 속에 곱게 풍화작용하는 백골을 들여다보며 눈물 짓는 것이 내가 우는 것이냐? 백골이 우는 것이냐? 아름다운 혼이 우는 것이냐? 지조 높은 개는 밤을 새워 어둠을 짖는다. 어둠을 짖는 개는 나를 쫒는 것일 게다. 가자 가자 쫒기우는 사람처럼 가자 백골 몰래 아름다운 또 다른 고향에 가자. (윤동주, '또 다른 고향(故鄕)') [나]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허공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불러도 주인없는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심중(心中)에 남아 있는 말 한 마디는 끝끝내 마저 하지 못하였구나.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붉은 해는 서산 마루에 걸리었다. 사슴의 무리도 슬피운다. 떨어져 나가 앉은 산 위에서 나는 그대의 이름을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부르는 소리는 비껴가지만 하늘과 땅 사이가 너무 넓구나. 선 채로 이 자리에 돌이 되어도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김소월, '초혼(招魂)') 기다림은 만남을 목적으로 하지 않아도 좋다. 가슴이 아프면 아픈 채로 바람이 불면 고개를 높이 쳐들면서, 날 리는 아득한 미소. 어디엔가 있을 나의 한 쪽을 위해 헤매이던 숱한 방황의 날들. 태어나면서 이미 누군가가 정해졌었다면 이제는 그를 만나고 싶다. (서정윤, '홀로 서기' 중 1, 2연) 외눈박이 물고기처럼 살고 싶다 외눈박이 물고기처럼 사랑하고 싶다 두눈박이 물고기처럼 세상을 살기 위해 평생을 두 마리가 함께 붙어 다녔다는 외눈박이 물고기 비목처럼 사랑하고 싶다 우리에게 시간은 충분했다 그러나 우리는 그만큼 사랑하지 않았을 뿐 외눈박이 물고기처럼 그렇게 살고 싶다 혼자 있으면 그 혼자 있음이 금방 들켜 버리는 외눈박이 물고기 비목처럼 목숨을 다해 사랑하고 싶다 (류시화, '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야 난 적은 길을 걸어서 참어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黃金)의 꽃같이 굳고 빛나든 옛 맹서(盟誓)는 차디찬 티끌이 되야서, 한숨의 미풍(微風)에 날어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追憶)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 놓고, 뒷걸음쳐서 사러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떠날 것을 미리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源泉)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욺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 하얐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沈默)을 휩싸고 돕니다. (한용운, '님의 침묵(沈默)') 위에 제시된 작품들 가운데 내가 좋아하는 작품은 어떤 것인가? 아마도 대개는 [나]에 속한 작품일 것이다. 실제로 한 조사에서밝혀진 바에 의하면 [나]의 작품들이, 우리 나라 사람들이 애송하는 시 스무 편 안에 모두 속해 있다.이유는 여러 가지로 분석되는 바, 우선 [가]에 예시된 작품들은 강렬하면서도 의지적인 성격이 짙어, 시라고 하면 부드러운 인상으로 생각해 왔던 일반적 통념에서 벗어나 있다는 생각이 작용했을 것이다. 또한 시를 공유(共有)하는 것으로보다는 소유(所有)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독자들의 일반적인 생각이어서, [가]가 주로 시대 상황을 문제 삼고 있음은 사회적 차원의 것이지 개인적 차원의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같은 맥락에서 한 가지 더 짚어 보면 개인적 차원의 시는 주로 서정성이 짙게 나타나지만 사회적 차원의 시는 참여성이 두드러져, 일반 독자는 가슴 깊이 와 닿는 심금을 울려 주는 소위 서정시를 좋아하기 때문일 것으로 분석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와 같이 서정성을 다룬 시를 애송하는(혹은 애독하는) 독자들은 [가]처럼 범위가 사회적 차원으로 확대되어 있는 시에 대하여 무조건 배척하려 한다는 점이다. 참여적 성격이 강하다 보면 기교가 다소 떨어질 수 있다는 단점이 없지는 않으나 사고 깊이나 기교면에서 나름대로 충분히 가치가 인정되는 작품도 많다. 이는 반대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참여적 성격이 짙은 사회적 문제를 다룬 작품을 좋아하는 독자는 [나]와 같은 시는 여리다,비겁하다는 등의 비난을 서슴지 않는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창작을 위해 접근을 시도하는 것이니만큼 어떠한 내용을 가지고 습작에 임하면 좋을까를 고민하기로 하자. 정도(正道)가 있을 수는 없다. 창작도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니 내가 좋아하는 내용을 선택해서 시도해야 한다. 다만 어디 어디에 써 먹어야겠다는 효율성을 앞세우다보면 문학으로서의 시에 관심을 갖기보다 사회 문제에 치중하게 되어 사소한 언어 하나에도 애착을갖고 고민하는 다소곳한 자세 를 잃을까 우려할 뿐이다. 10. 초보 단계에서 시쓰기 시 쓰기를 처음 시도할 때는 먼저 형식과 내용에 신경을 쓰게 된다.형식면에서 가장 쉬운 방법이 있다면 정해진 틀을 그려 놓고 그 속에 내용을 끼워 넣는 것도 하나의 요령일 수 있겠다. 난 그날이 오면 내 팔과 내 얼굴은 밝은 웃음을 지으며 하나씩 치장을 합니다. 난 그날이 오면 사랑의 햇살을 받으며 조금씩 하얗게 피어납니다. 하얀 아이들의 웃음을 벗삼아 뭉개구름을 따라 그렇게 피어납니다. 난 그날이 오면 사랑의 햇살을 받으며 초록색 내 팔을 뻗습니다. 저 공허한 하늘에 태양을 따라 초록색 옷을 입습니다. 그날이 오면…… (고교생 작품, '목련') 친구야! 흰 눈이 소리 없이 내리는 하얀 겨울날 너에게 이 글을 띄운다. 지금 창 밖을 보면 아직 겨울이고 봄은 오지 않았는데 이 하얀 겨울은 너무나도 빨리 가려하는구나. 친구야! 온통 초록이던 내 마음이 오늘 아침에는 하얀빛으로 변했단다. 온 세상이 하얀 겨울로 변했듯이 말이야. 저 눈 속에서 너와 단 둘이 누워 눈물을 우리 품에 모두 안아보고 싶구나. 친구야! 왠지 하얀 겨울날은 슬퍼진다. 네가 내 곁에 없는 탓일까. 나에게 네가 없는 차가운 겨울은 모든 생명체가 깨어나지 않은 봄과 같구나. 친구야! 이 하얀 겨울이 다 가기 전 우리 기차를 타고 긴 여행을 떠나자. 서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젊음을 얘기하며 누구도 들을 수 없는 작은 목소리로 우리들의 사랑을 속삭이며 긴 여행을 떠나자꾸나! (고교생 작품, '하얀 겨울날 친구에게') '목련'은 '난 그날이 오면 ∼'과 '∼ 합니다.'를 반복해서 구사하는 방식이다. 여기서 '그날'은 '목련이 필 봄날'이며, 네 번씩이나 반복 구사함으로써 '그날'이 오기를 간절히 바라는 심정을 토로하고 있다. 게다가 '∼ 합니다.'의 내용에 '치장하고 → 꽃으로 피어나고 → 초록색 옷을 입는' 시간성을 가미시키면서 기교를 부리고 있다. '하얀 겨울날 친구에게'는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을 빌어서 친구와 같이 우정을 다지는 시간을 가졌으면 하는 마음을 표현하고 있는데, '친구야!'를 반복 해서 부르는 틀 속에 서정적 자아의 다정한 목소리를 담아내고 있다.그러나 틀을 설정해 놓고 내용을 틀 속에 억지로 가두는 이와 같은 방식은 작가는 작가대로 제한된 내용을 형상화할 수밖에 없으며, 독자는 또한 독자대로 이해의 폭을 좁힐 수밖에 없다. 시 쓰기의 초보 단계에서는 이와 같은 형식에다 다양한 내용을 담아봄으로써, 정갈한 맛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마치 등에 진 짐꾸러미가 제멋대로 놀지 않고 착 달라붙은 안착감을 갖게 해 줄 것이며, 완결성이라는 측면에서는 단아(端雅)한 맛을 느끼게 해 줄 것이다. 한마디로 스스로가 자기의 작품을 두고 잘 썼다고 칭찬하기까지 하는 경우가 생기기도 한다. 신석정의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는 이에 대한 적절한 예가 된다. 어머니 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깊은 삼림 지대를 끼고 돌면 고요한 호수에 흰 물새 날고 좁은 들길에 들장미 열매 붉어. 멀리 노루새끼 마음놓고 뛰어 다니는 아무도 살지 않는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그 나라에 가실 때에는 부디 잊지 마셔요. 나와 같이 그 나라에 가서 비둘기를 키웁시다. 어머니 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산비탈 넌지시 타고 내려오면 양지밭에 흰 염소 한가히 풀 뜯고 길 솟는 옥수수밭에 해는 저물어 저물어. 먼 바다 물 소리 구슬피 들려 오는 아무도 살지 않는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어머니, 부디 잊지 마셔요. 그 때 우리는 어린 양을 몰고 돌아옵시다. 어머니 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오월 하늘에 비둘기 멀리 날고 오늘처럼 촐촐히 비가 내리면 꿩 소리도 유난히 한가롭게 들리리다. 서리가마귀 높이 날아 산국화 더욱 곱고 노란 은행잎이 한들한들 푸른 하늘에 날 리는 가을이면 어머니, 그 먼 나라에서 양지밭 과수원에 꿀벌이 잉잉거릴 때 나와 함께 그 새빨간 능금을 또옥 똑 따지 않으렵니까? 신석정 '어머니,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이 시는 아홉 개의 연이지만 '어머니 / 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를 반드시 앞에 배치하고 있는 세 단락의 구성을 보이고 있다. 또 각 단락의 마지막 부분에는 '∼ 합시다.'의 청유 형식을 취하고 있어 공통적이다.(세 번째 단락 마지막의 '∼ 하지 않으렵니까?'를 청유형으로 고치면 '∼ 합시다.'가 된다). 첫째 부분은 '비둘기를 키웁시다.'로 끝나고, 둘째 부분은 '어린 양을 몰고 돌아옵시다.'로 끝나고, 셋째 부분은 '그 새빨간 능금을 또옥 똑 따지 않으렵니까?'로 끝난다. '비둘기 - 어린 양 - 새빨간 능금' 사이의 필연적인 인과 관계는 없어 보인다.그러나 이들이 상징하는 바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비둘기가 평화라면 어린 양은 순수이고 새빨간 능금은 풍성한 수확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들 사이의 연관된 의미를 찾자면, 평화와 순수 속에서만 풍유로운 삶이 보장된다는 뜻이 되겠다. 그리하여 작가는 평화와 순수가 부정되는 세계에서 평화롭고 순수하고 풍요로운 세계, 즉 '먼 나라'를 동경하고 있는 셈이다. 읽기도 쉽고 구조도 쉽게 파악되는 이와 같은 시에 '비둘기 - 어린 양 - 새빨간 능금'과 같이 깊은 의미망을 형성하는 기교를 첨가하게 되면 시의 맛은 한층 더해진다. 11. 무엇을 어떻게 쓸 것인가 '무엇'은 '주제'와 통하는 말이고, '어떻게'는 '표현'의 문제이다.이에 대한 선후 관계의 정답은 없다. 독자와 만나는 것은 과정이 아니라 결과(완성품)이기 때문이다. 하나의 작품이 이루어지는 과정을 습작기 청년의 시작 노트를 통해 인용해 본다. 어느 날 나는 다리 위를 걷다가 난간 틈바구니에 쌓인 흙먼지에 싹을 틔운 풀을 보았다. 그 때 나는 그 풀을 보고 예사롭게 넘길 수 없었다. 신비스러움, 놀라움, 끈질긴 생명력에서 오는 강인함, 애처로움 등 만감이 교차하여 한참을 서서 상념(想念)에 잠기고 있었다. 하나의 사실에서 오는 느낌을 감회의 목소리로 옯겨 보고 싶었다. 흙이 있는 곳이라면 풀은 어디서든 싹을 틔우고 있었구나. 얼마든지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사실이지만 왠지 나에게는 남다른 경험일 수밖에 없었다. 공교롭게도 무력해져 있던 나의 모습과 만난 풀이라는 점이 나에겐 특별한 경험이었고, 화초를 가꾸는 화분에 불 청객처럼 솟아난 잡초라든가 게다가 운동장 한 가운데 혹은 계단 구석 등에서 자기 영역을 넓혀가는 풀들은 수 없이 보아왔지만 다리 난간 흙먼지 쌓인 곳에 뿌리를 내린 한 포기의 풀은 처음 보았기 때 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 특별한 경험을 나만의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이 한 구절의 경험과 함께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무기력한 자신의 모습으로 그 풀 한포기를 보는 순간 나는 적어도 두 가지의 생각을 떠올리게 되었다. 한 없이 초라해지는 나에 대한 발견과 오히려 강하게 일어서려는 의지. 그리하여 이 두 가지의 생각을 가지고 나는 고민하기 시작했다. 곰곰히 따져보았다. 그랬더니 목소리(어조(語調):시 작품에 나타나는 서정적 자아의 목소리)만 다를 뿐 결과는 같을 것이라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다. 보잘 것 없는 풀 한 포 기도 발 디딜 수 있는 곳이라면 저렇게 강인한 생명력을 보여주는데, 나는 그보다도 못한 존재가 아닌 가 하면서 초라한 자신을 못마땅해하는 것은 그렇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의 표현일 것이고, 나도 강하게 일어서야지 하는 것도 무기력함에서 벗어났으면 하는 마음으로 결국은 같은 내용이라는 생각 말이다. 다만 앞엣 것보다 뒤엣 것의 목소리가 강하게 드러나게 될 뿐.결과가 같다면 이 둘을 모두 포괄할 수 있는 표현은 없을까하고 나는 생각해 보았다. 마침 나는, 내가 흐르는 강물을 가로지르는 다리 위에 서 있음을 알게 되었고 동시에 하늘과 다리와 다리 위에 서 있는 나를 통째로 안고 흘러가는 강물을 보았다. 거기에 내가 있었다. 흙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서든 싹을 틔우고 있었구나 다리 난간 위에서 나는 못 볼 것들을 보고 말았다 하늘과 다리와 다리 위에 기대어 뿌리 내린 풀과 나를 업고 흐르는 강물 떠오른 생각들을 여기까지 옯겨 놓고 보니, '못 볼 것을 보고 말았다'에 나는 무척이나 흥미를 갖게 되었다. 다리 위 위험한 곳에 싹을 틔우고 있는 풀을 보고 '못 볼 것'이라고 하게 되었는지 아니면 이런 모습을 담고 흘러가는 강물을 보고 '못 볼 것'이라고 하게 되었는지. 이 애매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나는 이 애매한 표현을 살리고 싶었다. 애매한 만큼 다양한 의미 해석이 가능할 수도 있겠다는 기대 때문 이었다. 더욱이 3, 4행에서 불쑥 튀어 나온 '못 볼 것들'은 독자들에게도 충격일 수밖에 없다. 무슨 '못 볼 것들을' 보았다고 하는지 자못 궁금해질 것이며, 이러한 궁금증으로부터 이 시는 본격적인 해석이 이루어 진다는 점에서이다. '못 볼 것들을 보고 말았다'를 중심으로 간단히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못 볼 것'은 '다리 난간 위에 싹을 틔운 풀'이다. 그것이 '나'에게는 왜 '보아서는 안 될 것'이었을까? 나와는 대조적인 모습이었기 때문이리라. 그리하여 나는 더욱 초라한 '나'를 발견하게 된다. 둘째로 '못 볼 것'은 '하늘, 다리, 풀, 나를 비추고 흐르는 강물'이다. 왜 '보아서는 안 될 것'이었을까? 앞에서 초라해진 '나'가 나의 눈에 비친 모든 존재(조화, 갈등, 고뇌하는 나까지 포함한 모든 것)를 넉넉 히 안고 유유히 흘러가는 강물을 본 순간 나도 강물처럼 넉넉한 존재로 거듭나겠다는 깨달음을 4∼7행에 서 얻게 되는 구조이다. 어느 정도 완결된 맛도 있고 해서 나는 나름대로 만족해 하고 있었다. 한 가지 걸리는 점이 있었다면 2행의 '∼ 있었구나'와 4행의 '∼ 말았다'가 어쩐지 일관성이 없어 보였다. 둘 다 영탄조가 아니면 서술형으로 하고 싶었다. 그런데 2행이 감탄하는 형식을 취하게 되면 흙먼지 쌓인 곳에 피어난 풀을 바라보는 신비로움이 나만의 것이 되어버려 자극의 폭을 제한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작자는 나름대로 다양하게 생각할 수 있는 폭을 마련하고 싶었다. 비춰진 모습을 그대로 제시하게 되면 정서를 환기하는 자극의 폭이 넓어지겠기에 말이다. 결국 '∼ 있었다'로 바꾸기로 했다. 흙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서든 싹을 틔우고 있었다 다리 난간 위에서 나는 못 볼 것들을 보고 말았다 하늘과 다리와 다리 위에 기대어 뿌리 내린 풀과 나를 업고 흐르는 강물 흥미로운 시작(詩作) 노트이다(간략한 부분 메모를 첨가 서술하였음). 아마도 위 작품을 완성하고 나서 스스로는 기쁨의 시간을 보냈을 것이 틀림 없다. 시작 노트에서 엿보이듯이 한 구절 한 구절 고민한 끝에 완성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시를 쓰는 기쁨이며, 그 기쁨은 실의에 빠져 있을 때에 작용하기도 하 는 것이어서 삶의 활력소가 되어 나타나기도 한다. 문제가 되는 부분의 골자는 '나도 강물처럼 넉넉한 존 재로 거듭나겠다는 깨달음'까지 미치지 못하였는데도 스스로는 꿈보다 해몽이 좋은 쪽으로 자의적 판단을 내리고 있다는 점이다. 작가의 의도가 독자 쪽과 많이 빗나가고 있다는 말이다. 해석에 있어서 비약이 너무 심하지 않았나 한다. 그러나 서정적 자아의 감정을 절제하여 정서적 자극의 폭을 확대시키고 있는 점은 공 감이 될 수도 있겠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음 주제인 '서정적 자아와 대상과의 거리'에 자세히 언급하기로 한다. 적어도 어떤 방식을 통해 시적 형상화가 이루어지는가에 대해서는 위에서 알아 보았다. 작가마다 과정이 사뭇 다르게 나타나는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12. 서정적 자아와 대상과의 거리 시 작품 속에서 '서정적 자아와 대상과의 거리'가 독자들에게 주는 감동의 폭은 참으로 다양하다. 서정적 자아와 대상과의 벌어진 틈을 '정서적 자극의 폭'이라고 하는데, 이것이 독자들의 반응을어떻게 다양하게 보여주는가는 다음의 예를 통하여 알아 보자. [가] 예쁜 새 [나] 비에 젖은 새 '[가] 예쁜 새'에서 대상은 '새'이다. 이 '새'가 예쁘다고 말하는 이는 물론 서정적 자아이다. '[나] 비에 젖 은 새'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대상은 '새'이며, 이 '새'가 비에 젖었다고 말하는 이는 서정적 자아이다. '새' 라는 대상이 밝혀지고 서정적 자아가 밝혀졌으면, 이제는 '새'와 '서정적 자아'의 거리가 [가]와 [나]에서 어떻게 달라지는가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 여기서 말하는 거리라 함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가시적 (可視的)인 거리가 아니라, 감정이 얼마나 개입되어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전자를 '거리가 가깝다', 후자를 '거리가 멀다'로 부르게 되는 추상적인 거리를 말한다. 이렇게 볼 때, [가]와 [나]에 나타난, 대상과 서정적 자아의 거리는 확연히 구별된다. 즉 [가]는 '새'를 서정적 자아가 직접 '예쁘다'고 말하는 경우이고, [나]는 '새'가 '비에 젖어 있는 상태'를 서정적 자아가 객관적으로 표현하고 있을 뿐인 경우이다. 다시 말해 서 [가]는 서정적 자아의 '새'에 대한 '예쁜' 감정이 잘 드러나 있고, [나]는 서정적 자아가 자기의 감정을 절제한 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비에 젖어 있다'고 말할 뿐이다. 그러니까 서정적 자아와 대상과의 거 리가 [가]는 밀착되어 있고, [나]는 느슨한 셈이 된다. 그러면 이같은 점이 시를 다듬거나 독자가 읽게 되는 경우와 어떤 관계가 있다는 것인가? 물론 큰 차이가 있다. 이러한 점을 살펴보기 위해 대상과 서정적 자아와 독자와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도식화 하였다. 작가 ------- 작 품 ------- 독자 서정적 자아 --새 위의 도식에서 수평적 측면은 서정적 자아와 대상과의 거리를 나타내는데, 이것이 작품으로 이루어질 때 독자는 바로 이 작품을 읽게 된다는 말이다. 앞에서 말한 '정서적 자극의 폭'은 여기에 적용되어야 할 것 같다. '서정적 자아'와 '새'의 거리가 가까운 [가]의 경우 이를 감상하게 되는 독자의 위치와, 반대의 경우인 [나]에서 나타나는 독자의 위치는 다르다. 즉[가]는 서정적 자아와 대상과의 거리가 너무도 가까 운 이유 때문에 이미 작가가 '새'를 '예쁘다'고 규정지은 것밖에는 더 이상의 정서를 환기할 수 없는 결과 를 낳는다. 반면 [나]를 보자. '서정적 자아'가 '새'를 '비에 젖었다'고 표현했는데, 이 시를 감상하는 독자는 서정적 자아와 대상의 거리가 [가]보다 많이 벌어져 있는 틈으로 여유있게 위치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독자는 ' 비에 젖은' '새'라는 객관적 표현을 받아들이는 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비에 젖었기' 때문에 '초라하다', '불쌍하다' 혹은 '애처롭다' 등 동정심 내지는 '고독', '슬픔'의 다양한 감정을 불러 일으킬 수 있게 된다.다 시 말해서 독자에게 정서에 대한 환기를 충분히 시킴으로써 자유로운 감정 적용의 기회를 제공해 주게 된다. 이러한 결과로 미루어 본다면 시에도 '나만의 시'가 있는가 하면 '독자와 함께 하는 시'도 있을 수 있겠구나 하는 점을 발견하게 된다. 이는 [가]와 같은 '나만의 시'가 좋다든가 [나]와 같은 '독자와 함께 하는 시'가 좋다는 식의 규정을 위함이 아니다. 상황에 알맞는 시적 표현이어야만 좋은 시가 될 수 있다는 것일 뿐이다. 13. 일상적 시각으로부터의 탈피 문학의 생명이 신선함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과거를 답습한다거나 모방의 차원에 그친 문학 작품 이 있다면 그것은 벌써 문학 작품으로서의 가치를 상실한 것이라고 보면 틀림없는 말이다. 그래서 작가들은 늘 신선한 눈을 갖기 위한 고민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주변의 사물에서부터 심오한 철학에 까지 다방변에 걸쳐 예사로운 눈으로 그것들을 대하지 않는다. 뛰어난 관찰력, 상상력, 추리력 등이 발동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바로 문학이 신선한 창조이게 하는 생명력이다. 모든 예술 작품이 다 그러하지만 시는 정교한 언어 예술 인 까닭에 더욱 그러하다. 게다가 언어 생활이 인간적인 삶의 기본이라는 측면을 덧붙인다면 더더욱 말할 나위 가 없는 것이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문학의 생명은 관찰력, 상상력, 추리력이다. 이 중에서도 가장 기본적인 것은 관찰력이다. '사소한 사물이나 현상도 그냥 내버려 두지 말라. 거기에 기기묘묘한 착상이 있고 원리가 있고 언어가 있다.'는 이 말은 시인의 기본 정신이다. 즉 말을 확대 해석해 보면, 요는 관찰하라는 말이 되는 것이며, 이 관찰하라는 말은 일상적인 시각에 머무르지 말고 거기에서 벗어난 시선으로 사물을 바라보라는 말이 될 것이다. 일찍이 러시아의 형식주의 작가 쉬클로프스 키의 '낯설게 하기'란 개념은 일상적인 시각의 파괴란 의미에 다름 아닐 것이다. 육교 위로 한 무리의 사람들이 지나간다 주먹을 불끈 쥐고 노래를 부르며 누군가 그들을 군중이라 불렀다 (중략) 아주 쬐그만 안개꽃들이 다발로 떠내려 가는 것이 먼 강에 보이는구나 때때로 시너를 끼얹고 사랑하라 사랑하라 뛰어내리지만 그러나 그것으로 그 뿐 주위는 다시 적막에 젖고 아들아 작은 가지 끝에서 너는 언제나 홀로 시드는구나 환한 대낮에 한 묶음으로 묶여서 (고영조, '안개꽃'중에서.('시와 문학' 가을호)) 위의 시는 '안개꽃'을 소재로 하고 있다. 우리들의 일상적인 시각에서 '안개꽃'은 순결, 순수 혹은 순결한 사랑, 순수한 사랑 등의 이미지이다. 그래서 일상적인 방식대로의 시라면 이와 같은 내용이게 마련이다. 마침 그런 일이 있었다. 시 공부에 열을 올리던 친구들 앞에 안개꽃이 가득한 꽃병을 올려 놓고, 안개꽃을 소재로하여 시를 지어 보라고 했더니 50명 중 45명의 친구들이 순결하고 깨끗하고 순수한 사랑의 이미지를 풍기는 시 작품을 제출한 적이 있었다. 그러니까 대부분의 친구들이 일상적 사고 방식에만 머물러 있었지 새로운 시각에는 별로 눈을 돌리지 못했다는 얘기이다. 고영조의 '안개꽃'은 새로운 눈을 갖게 해 준다. '안개꽃'을 노래하면서도 단순히 그 서경적인 묘사나 혹은 아름 다움의 한탄으로 나아가지 않고 그 내면에 숨겨진 존재론적 의미 탐색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 시는 기본적으로 사물 탐구를 통해 인간 존재 의미를 드러내고자 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시인은 여기에 머무르지 않고 나아가 그것을 사회적인 의미로 확산시킨다. 다시 말해 '안개꽃'에 반영된 죽음의 의미는 사회적인 것으로 전환되는 것이다. 이 시가 애초부터 사회 의식에 바탕을 두고 씌어졌다는 것은 도입부에서 암시되고 있다. '육교 위로 / 한 무리의 사람들이 지나간다 / 주먹을 불끈 쥐고 / 노래를 부르며 / 누군가 그들을 군중이라 불렀다'라는 첫 5행이 그것이다. 그리고 독자들은 이 도입부를 읽으면서 이미 시의 제목으로 제시된 '안개꽃'과 '데모하는 군중'이라는 두 사물의 의미론적 등가성(等價性)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는 가령 에즈라 파운드의 저 유명한 '지하철 역에서' 군중을 비에 젖은 봉숭아 꽃잎으로 비유했던 사실과 유사한 상상력을 보여준다. 안개꽃은 장미나 백합처럼 개체로 피어나는 꽃이 아니라 무리지어 피는 꽃이라는 점에서 군중적 이미지에 훨씬 가깝다. 동시에 안개 역시 우리가 살아온 미망에 빠졌던 시대의 사회 생활을 환기시켜 주는 데 적절한 이미 지라 할 수 있다. 시인은 거리에 짓밟힌 한 묶음의 시든 안개꽃다발을 통해서 지난 시대 독재와 항거하다가 죽어간 우리의 젊은 넋들을 상상하게 된다. 그러한 관점에서 이 시는 우리 사회의 아픔을 사물 탐구의 형식으로 서술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월미도는 뿌연 바다로 막혀 있다. 월미도는 노을진 바다로 막혀 있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바다'하면 '확 트이는 느낌 / 가슴을 열어 놓은 느낌 / 시원함 / 나아감'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가슴이 답답할 땐 바다를 찾고, 바다로부터 신선한 마음을 담아오는 습관도 생기게 되었다. 따라서 우리는 그저 '바다는 트여 있다'고 말한다. 이렇게 한 구절을 옮겨놓고 보면, 시는 답답한 내 마음을 털어 놓는 그릇이 되고 만다. 하지만 그런 일상성보다 신선한 맛을 느껴보고 싶을 때, '월미도는 / 뿌연 바다로 막혀 있다. 월미도는 노을진 바다로 막혀 있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바다'하면 '확 트이는 느낌 / 가슴을 열어 놓은 느낌 / 시원함 / 나아감'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가슴이 답답할 땐 바다를 찾고, 바다로부터 신선한 마음을 담아오는 습관도 생기게 되었다. 따라서 우리는 그저 '바다는 트여 있다'고 말한다. 이렇게 한 구절을 옮겨놓고 보면, 시는 답답한 내 마음을 털어 놓는 그릇이 되고 만다. 하지만 그런 일상성보다 신선한 맛을 느껴보고 싶을 때, '월미도는 / 뿌연 바다로 막혀 있다 '로 바꾸어 보자. 그러면 서정적 자아는 월미도 땅 위에서 바다를 바라보는 입장이 아니라 바다 쪽에서 월미도 땅을 바라보는 입장이 되어 버린다.바다에 있는 존재가 되었으니까 자신을 한 척의 배의 입장으로 설정해도 색다른 느낌은 충분 하리라고 본다. 적어도 뭍에 대한 그리움 정도의 내용을 형상화할 수도 있겠으니 말이다. 문제는 사물을 바라보되 틀에 박힌 시선으로 바라보지 말고 다양한 측면에서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895    詩는 여러 문학쟝르 中 가장 핵심 쟝르 댓글:  조회:4285  추천:0  2016-01-09
詩創作 이론. 글/신배섭 1) 시 읽기와 쓰기 ① 운문(韻文)으로서의 시 시는 문학의 여러 장르 중에 가장 핵심이 되는 장르이다. 문학이 언어에 의해 완성된다는 사실에서 볼 때,  시가 언어의 본질에 가장 가까운 차원에서 다뤄지기 때문이다. 산문 문학이라고 하는 소설의 경우 언어는 작가가 구성한 허구적인 세계를 짓는데 필요한 재료로서의 역할을  주로 담당한다면 시에서는 언어 자체가 형식이요, 내용이며 표현의 역할을 해내기 때문이다. 고로 시에 동원된  언어는 그 언어를 일상적으로 쓰는 언중(言衆)이 가장 아끼고 즐겨 쓰는 어휘들이며, 표현법에서도 가장 친밀감 을 주거나 영향을 줄 수 있는 어법을 쓰게 되는 것이다. 시는 산문의 상대 개념으로 운문(韻文)이라고 부른다. 운문, 즉 시는 음악이 한 소절씩 마디로 끊고 화음을 유도 해 발전해가듯 표면상의 시구가 주는 의미와 그 속에 담긴 각종 비유나 상징, 이미저리 따위들을 동시에 이끌고  발전해 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많은 소설가들이 습작기엔 시짓기를 병행했음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운문은 모든 글쓰기의 기본이 된다. 즉,  다듬고 고치며, 정확하고 깊은 의미를 드러내는 데는 시를 짓고 퇴고할 때의 연습이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산문으로서의 소설과 운문으로서 시라는 맥락에서 각각의 개념이 정리될 수 있다. 시는 많은 어휘 중에 해당작품에 적절한 어휘를 선택해야 한다. 이는 언어를 최대한 절제하는 대신 함축과 온갖 수사적 표현이 요구된다. 시 한편의 전체적인 분위기도 어휘 하나하나가 크게 좌우하기 때문이다. 시는 노래 가락 으로서의 의의도 있다. 그래서 작게는 어휘 하나하나의 음조가 영향을 주기도 한다. 언어로써 써진다는 사실, 언어의 본질을 깨우치며 다양한 성질을 갈고 다듬는 작업인 것이다.         ② 읽고 모방하기 시를 짓는다는 것은 일차로 남의 작품을 모방하는 단계에서부터 출발한다. 자신이 읽고 어떤 점에서 좋다고 생각 되는 작품, 내지 몇 권의 시집을 열심히 읽어야 한다. 그리고 좋게 느끼는 점들이 무엇인지, 어디에 있는지, 즉 시의  전체 분위기, 시의 내용, 특정 어휘나 구절에 대한 표현법 등을 분석해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시인 A의 시집을  읽으며 습작을 할 때, 자신도 모르게 A의 아류화되는 경향을 스스로 발견할 수 있을 만큼 빠지는 것이 좋다. 그다음  B의 시집을 읽을 때는 B의 아류에 가깝게 스는 집중력이 필요하다. 이같은 과정을 몇 차례 넘기면 신통하게도 어느 누구의 아류도 아닌 자기만의 특유한 개성으로 독립하게 마련이다.  시인은 어휘 하나하나에 대한 인식에서부터 사물을 대하는 심성이나 경험세계, 문화의 향수등 모든 인간 조건에서  상이하기 때문에 모방이나 아류화란 있을 수 없다. 의도적으로 모방하기 전에는 말이다. 비교문학에서 지적하는 것을 보면 인간의 두뇌는 어떤 종족이던 어느 시대이건 상관없이 비슷한 상상혁과 추리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유사한 작품이 나올 수 있다고 한다. 인간이 지어낸 신화 등을 보면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시 짓기에서도 좋은 시를 많이 읽으며 습작할 때 그 시의 장점들을 내 것으로 소화해 낼 수 있다는 뜻이다.  이는 마치 피아니스트를 꿈꾸는 자라면 연습하는 곡을 사전에 명인(名人)이 연주한 것을 비교 감상하여 피아노곡의  진수를 깨우치면서 자기 연습이 이루어질 때만 빠른 발전이 가능한 것과 같은 이치인 것이다. ③ 쓰고 보여주기 스스로 시라고 지어 본 것은 누구에겐가 보여주어야 한다. 보여주지 않고 수백편을 지어본들 그것은 시가 되기는  어렵다. 시가 제대로 되었는지 안 되었는지 자기 스스로는 분별력이 약하기 때문이다. 설령 분별해 낸다고 생각하더 라도 객관성이 부족하다. 국화 한송이 평탄한 오솔길로 곱게 단장한 처녀가 연분홍 곱게 물들이네. 사랑따라 제비오고 남아따라 가오리오 뾰족한 입술엔 한없는 사랑이 깃들어라. 가슴에 담뿍 안고 온 쓸쓸히 죽어가는 침실엔 전기가 왔노라. 이 작품은 한 사업가 Y씨가 군대생활 중에 써놓은 작품 중의 한편이다. 그는 시골에서 떠나와 서울에서 대학생 활을 했고, 이어 군에 입대하여, 고향을 그리며 또 군대생활이란 특수 사회에서 느끼게 되는 향수병에 젖어 있을  때의 작품이라고 했다. Y씨가 필자에게 가져온 원고 뭉치는 대학노트 두 권에, 군대용 화장지에 쓴 원고 두 뭉치 등 한 보따리에 가까운  것이었다. 사업에도 성공했고 연륜에 맞춰 젊은 시절에 쓴 시들을 정리하여 한 권의 문집을 내겠다는 포부였다. 위에 인용한 시는 작가가 이 시를 쓰게 된 동기, 즉 시로 쓸 당시의 심정을 인지(認知)하기에는 충분하다. 즉,  '어떤 심정에서 썼구나'하는 정황 정도만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시는 우선 맞춤법이 안 맞고(제시된 예문에서 교정을 보았음), 구문도 원활하지 않다. 첫 연 3행이 의미 가 통하지 않는다. 1행인 "국화 한송이"를 별개의 구문으로 처리하던지, 아니면 2행에서 처리되어야만 3행의 독립 된 내용으로 전개될 수 있었을 것이다. 여기에서는 "국화 한송이"와 "처녀"가 동격으로 들어온다. 국화를 처녀에  비유한 것으로 보아도 구문 전개상 모순이 있다. 또 둘째연의 제2행에서 느닷없이 "남아따라 가오리오"라고 표현한 것은 시상의 전개상 큰 무리이다. "뾰족한 입술에 "의 표현은 국화꽃의 꽃잎을 사실에 가깝게 표현한 듯하나 너무 진부한 표현이 되고 말았다. 셋째 연에서도 1행은 무엇을 '알고' 왔는지가 명확히 드러나지 않는다. 마지막 행에선 "침실엔 전기가 왔노라"라고  했다. 시 전체의 분위기를 깨어버리는 대목이다. 이 시를 연별로 내용을 뜯어보면 1연은 들국화를 처녀의 모습으로 비유하고, 2연에서는 그 처녀에 대한 그리움을  추억이라는 흘러간 시간에 얹어 놓았다. 3연에서 그리움의 추억을 현실로 자각하는 것으로 맺었다. 위의 Y씨의 작품을 다음과 같이 개작(改作)해 보았다. 가능한 한 원작자의 심경이 되어 보고, 나타난 구성과 전개 에 충실하게 고쳐 본 것이다. 들국화 한송이 오솔길에 발돋움하고 밤이 가듯 밝은 아침에 편다 발길 멈추는 고운 처녀의 손끝에 물드는 연분홍빛 아픔 사랑의 빛깔이 이런건가 사나이의 그리움이 저렇게 피어있는 고 오솔길따라 十里를 가며 내 그리움 구비치는 사연 가슴에 한 아름 피어나는 들국화 언제 보아도 너는 내 사랑, 내 그리움 시인이 자신의 작품을 쓸 때보다 남의 작품을 퇴고하거나 완전히 개작을 할 경우, 이것이 더욱 시간이 많이 걸리고 힘이 든다. 결과도 좋은 작품이 되기는 어렵다. 그러니까 작품을 쓴다는 것은 작자의 특유한 감각과 발상에 의해서만  구상되고 완성시킬 수 있는 고유한 것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2) 형식과 기법 ① 형식 시짓기에서 형식에 구애받을 필요는 없다. 큰 줄기로 보아 짧은 서정시인지 서사시인지, 근자에 유행하는 장시,  연작시, 산문시 등 어떤 것을 쓰든지 그것은 작가가 주제나 소재에 대한 접근 의도에 따라 결정될 것이기 때문이다. 작은 가지로 볼 때 시 한편 한편이 모두 그 작품만의 고유하고 유일한 형식을 갖추고 있다고 본다. 지구에 태어나는  인간이 유일한 존재인 것처럼, 완성된 시 한편도 그것만의 고유하며 유일한 형식을 지니게 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한 시인이 동일한 제목, 또 동일한 주제로 비슷한 길이의 서정시를 또 한편 썼다고 하자. 그것도 엄연히 내용상  형식에 차이가 있음을 지적하게 된다.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것은 시의 무한한 형식적인 실험이 가능하다는 뜻도 담겨 있다. 한시(漢詩)나 영시(英詩)의 경우, 자유시일지라도 글자수나, 운(韻)등을 제각기 갖추어야하는 그 나름의 법칙이  있지만 우리 시의 경우, 외형상 그같은 제약이 없다. 자유시에서 외형상의 형식으로 쉽게 구별되는 것은 연(聯)의 구분에서 찾을 수 있다. 연 구분이 없이 전연(全聯) 으로 된 것도 있다. 한 연을 몇 행으로 마무리 지었는가에 따라 형태상의 특징을 보여주기도 한다. 김소월(金素月)의 7·5조의 시들은 시조의 정형성을 잘 살려내 자유시이다. 정형성의 제한을 극복, 오히려 현대시 로서 우리말의 멋을 잘 살려낸 것이다.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우리다 ─김소월, 「진달래꽃」부분 이 시에서 7·5조가 제1, 제2행으로 나누어진 것과 제3행에서 묶인 것은 이 시에 대한 작자의 기법에 해당한다.  작자는 형태상의 변화를 생각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무엇을 강조하기 위해서, 또 내재율로서 호흡을 강조하기  위해서, 또 내재율로서, 호흡의 장단이나 활음에 따른 성조(聲調) 등을 감안할 수도 있는 것이다. 작자가 무엇에 역점을 두고 지었는가에 대한 평가는 감상하는 자의 몫이다. 소위 모더니즘을 표방했던 이상(李箱)의 「烏瞰圖(오감도)」는 현대시란 이름으로 시를 짓던 한국문단에 독특한  개성의 시를 제시했다. 발상에서 표현에 이르기까지 대담한 변화를 시도한 것이다. 시의 내용에서도 그 줄거리나 주제를 파악하는데 의견이 분분했고, 오늘에까지도 비평가들의 연구대상에 올라있는  것이다. 특히 이상이 일련의 시에서 시도한 띄어쓰기를 무시하고 붙여쓰기나 산문화한 구문이 연속으로 네모꼴의  형태 속에 채워 넣은 「꽃나무」같은 시가 있는가 하면 아라비아 숫자를 거꾸로 표시하거나 구문의 순서를 뒤에서 부터 읽어야하는 것도 있다. 위의 김소월이나 이상이 시도했던 형식에 대한 시도는 한국 현대시의 형식성에 대한 어떤 고정관념을 깨고 무한한  실험의식을 추구함으로써 오늘에까지 크게 영향을 미치며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② 기법 시짓기의 기법은 언어의 수사학적 활용에 해당한다. 이는 무쇠를 용광로에 넣었다가 새로이 기능적 역할을 해낼  수 있는 형태로 주조(鑄造)해 내는 것처럼 시인은 어떤 수사학을 동원해 시적 의도를 완성시킬 수 있는가에 심혈 을 기울인다. 도예가가 흙을 빚어 작품을 완성해내듯이 시인은 언어를 빚어 작품을 완성시킨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모든 문학작품이 언어매체에 의해 완성되기 때문에 문장마다, 시구마다 ① 문법적인 요건 ② 논리적인 요건을 전제 로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 문법적인 요건이란 우리 글의 문법에 맞는 규칙을 지키는 일이다. 이 경우 시인들이 문법 규칙을 일부 벗어나고  관용적인 활용, 또는 의도적인 변형을 일삼는 경우가 있으나 초심자에겐 절대로 경계할 일이다. 논리적 요건이란 사람의 감정과 사상, 지향 의지 따위를 이치에 맞고 합리적으로 체계화할 수 있는 것을 뜻한다.  이 경우 외형적이고 과학적인 논리보다는 심리적인 논리 전개가 공감을 줄 수 있는 것에 유의할 수 있어야 한다. 시의 기법에서 수사학적 훈련이 필요하다는 것은 I. A. 리챠즈가 지적한 대로 현대시를 분석, 감상, 비평하는 데는  수사학적 방법에 대한 역(逆)추적에 해당한다는 데서 의의를 찾아볼 수 있다. 즉, 시에 드러나는 에스프리를 분석하고  이미저리의 원형을 해부하는 것이다. 시의 시상이나 역사 혹은 사회성과의 관계도 분별해 낼 수 있어야 한다. 시의  시상이나 역사 혹은 사회성과의 관계도 분별해 낼 수 있어야 한다. 시의 내면에 흐르는 심리적 의도와 작품마다  적용되는 고유의 수법에까지 수사학적 차원의 분석, 감식하는 과정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점이 그러하다. 시짓기에서 시인의 반의무적이리 만큼 빈번히 활용되는 비유법 몇 가지를 예문을 들어 설명한다. ㉠직유(simile) 하나의 사물을 그 의미나 성질을 다른 사물로 설명, 인지시키는 방법이다. 즉, 두 가지 사물을 비교하여 형용하는  수사법이다. 두 가지 사물을 대비하여 견주어 보는 것이 아니라 무엇과 무엇을 '―같다', '―처럼', '듯(이)', '마냥', '인양'등을  사용하여 동등하게 관계지우는 역할을 한다. 표현코자 하는 주(主) 사물을 그와 유사한 사물에 직결시켜 주된  사물을 강조하거나 그 개념을 선명히 하며 나아가서 증의(增義)의 효과도 얻을 수 있다. 단순한 방법으로 단순하고 일시적인 효과를 낼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속된 표현이 될 가능성이 짙기 때문에 항상  참신한 것을, 선택하지 않으면 안된다. 가령 '보름달 같은 얼굴'이니 '갈대와 같은 여자의 마음'이니 하는 직유가  시에 쓰였다면 이것은 진부한 표현이 되고 만다. 아릿다운 그아미(娥媚) 높게 흔들리우며 그石속 〈같은〉입술 죽음을 입 맞추었네. ─번영로, 「논개(論介)」부분 파도가 산맥의 발목을 놓치고 썰물을 따라간다. 보아란 듯이, 상수리묵 〈같은〉뻘밭으로 간다. ─이향아, 「파도와 산맥」부분 「논개」의 〈같은〉은 석류 속이 붉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기에 직유로서의 효과가 직감으로 들어온다.  「파도와 산맥」의 〈같은〉은 '상수리 묵'에 대한 외형상의 개념이 없을 경우 읽는 이는 애매해진다. 그러나  읽는 이는 비유된 '뻘 밭'에서 '상수리 묵'의 모습을 연상하고 유추할 수 있는 감상 능력을 주게 된다. 「논개」에서는 색깔로써 변용시키고 있고 「파도와 산맥」에선 형태로써 변용시키고 있다. 직유에서는 이 외에도  소리, 향기, 관념 등을 자주 연결시킨다. 이처럼 직유는 '같은', '처럼'등의 관계사로 이뤄지는 것이다. ㉡ 은유(metaphor) 은유란 비유법 중에서 가장 고도의 상상력을 요구하는 것이다. 특히 문학의 테두리에서는 절대적이다. 그래서  은유 자체가 여러 가지 비유법을 총괄하는 의의를 지니기도 한다. 어반(W. M. Urban)은 「언어와 사실성」에서 언어의 발달 과정을 다음과 같이 나눈다. 첫째 모방적(疑聲)이거나,  모사적 단계, 둘째 유추적인 단계, 셋째 상징적 단계가 그것이다. 제1단계는 단순한 서술에 해당하고 제2단계는  직유의 비유가 성립된다. 언어의 비유적 기능이 드러난다. 다음 제3단계에 오면 은유로써 복잡한, 그래서 다양하게  상징성을 구현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른다. 상징적 단계가 가장 고도의 비유법이라 함은 직유가 A=B, 혹은 A≒B의 표현이 된다면 은유는 'A는 B이다'로 나타낸 다. A≒B를 직유, (A=B는 은유로 표시하기도 함) =나 ≒의 표시는 같거나 유사한 상태로 이끌지만 'A는 B이다'라고  할 때 A가 본질적으로 바뀌어 B에 접근하므로써 A도 아니고 B도 아닌 새로운 본질을 드러내게 된다. 그러므로 은유 는 주관적이고 직관적인 판단으로 모든 사물이나 관념에 대한 유사성과, 상상력을 폭 넓게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의미 심장하고 개성적이며 신선감을 주는 표현이 가능해진다. 남성은 늑대 여성은 여우 이는 속성, 개성 따위를 짐승에 비유한 것으로 가장 보편적인 예가 된다. 일찍이 우화에서 보여 주었던 것으로 사람의  인격과 인간성을 은유화한 것이다. 내 마음은 촛불이요 ─김동명,「내마음은」부분 네 슬픔이 오 비누거품이구나 ─안수환, 「廣德山·3」부분 이같은 시구가 있다면 이는 불가시적인 관념을 시각적으로 불 수 있게 은유화한 것이다. 사물의 본질, 관성, 개념  따위를 유사하거나 같은 의미로 결부시키게 된다. 사람이 아니올씨다. 짐승이 아니올씨다. 하늘과 땅과 그 사이에 잘못 돋아 난 버섯이 올씨다. 버섯이 올씨다. ─한하운,「나」부분 이 작품은 나환자였던 시인 한하운(韓何雲)이 자학적이리만큼 자신의 천형을 저주하는 대목이다. 이 시는 시의 내용 전부가 제목 「나」를 은유화하고 있다. 내 인생은 마비된 희망속의 잠 보이지 않는 것을 향해 열려 있는 일찍이 빛났던 두 눈동자 귀는 쓰레기 통 입은 함정 ─정현종,「납속의 희망」부분 상징보다는 우화성(寓話性)을 취한 은유이다. 제목은 작자가 생각하는 관념이나 상상의 은유이다. "마비된  희망"과 "일찌기 빛났던"의 문맥으로 보아 "납속의 희망"이란 기대하는 어떤 희망이 아니라 이미 의욕이 끊긴  좌절된 체험적 인식을 뜻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처럼 모든 은유는 유사성과 동일성을 文面에 드러나는 내용 과 그 속의 뜻하는 바를 나타내는 '겉과 속'의 관계인 것이다. ㉢ 의성·의태 原始語의 일차적 기능은 의성어나 의태어에서 비롯했을 가능성이 짙다. 짐승이나 새들의 소리를 흉내내어 감정을  나타내고 의사 소통의 구실로 삼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현대시에 와서도 이 의성어(onomatopoeia)나 의태어(mimesis)의 활용은 과거의 노래하는 시로 불리우던 시대와  마찬가지로 詩語로서 혹은 시의 기법으로 매우 유용한 위치를 차지한다. ──삐이 뱃쫑! 뱃쫑 하는 놈도 있고 ──호을 호로롯 하고 우는 놈도 있고 ──찌이잇 잴잴잴! 하는 놈도 있고 온통 산새들이 야단이었습니다. ─박두진, 「사슴」부분 바다, 바다, 바다, 바다, 無窮動 바다, 차츰 그 바다에 가까이 가서야 목청이 열렸다. 아아, 아아, 아아, 아아, 마치 처음으로 질러보는 음성인양, 진정 「아아」라는 母音이 있기에 구원이 되는 셈. ─박희진, 「바다」부분 "삐이 뱃쫑" "호을 호로롯" "찌이잇 잴잴잴" 등은 直喩的이다. 여러 가지 새들의 소리를 직접 흉내낸 것으로  낱말로서의 의미는 완전 배재되어 있다. 오직 소리만이 존재한다. 즉, voice가 아닌 sound의 상징인 것이다.  반면 박희진의 「바다」는 바다에서 들을 수 있는 소리를 간접적으로 擬聲化시킨 것이다. 즉, 실제의 소리가  아닌 관념상의 의미로 대치시킨 것이다. 작자의 恣意的인 음성기호로서 '바다'가 쓰였다. 이는 이센손(Jon Eisenson) 이 그의 「The paychology of speech」의 개념으로 든 ㉠口頭表現(oral symbol) ㉡ 몸짓(gesture visible word)  중에서 ㉠에 해당하다. ① 텨-얼썩, 텨-얼썩, 턱, 쏴……아 ─최남선, 「해에게서 소년에게」 부분 ② 바다, 바다, 바다, 바다, ─박희진, 「바다」 부분 ③ 옥쪼록 빠쪼록 조래 조래…… 옥쪼록 빠쪼록 조래 조래…… ─신석정,「Nostalgia」 부분 결국 ②는 '바다;의 뜻이 아닌 바다의 소리를 은유로 쓴 것인데, 반복되는 리듬感으로 파도소리를 연상하게 한다.  소리뿐만이 아닌 의태적인 이미지도 동시에 제시된다. 이 역시 바다를 간접적으로 연상되게 한다. "아아, 아아, 아아, 아아,"의 경우도 실제로는 작자의 감탄사를 바다소리로 의성화시킨 간접적인 은유이며 상징이다. ③은 강남으로 돌아갈 제비들의 망향가로 들린다는 의성어로 나타낸 것이다. 심리적으로 향수를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흰 옷자락 아슴아슴 사라지는 저녁달 썩은 초가 지붕에 하얗게 일어서 ─박목월, 「박꽃」 부분 얇은 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조지훈, 「僧舞」 부분 방점부분 "아슴아슴"과 "나빌레라"는 모두 간접적인 의태어들이다. 어둠 속으로 걸어가는 사람의 옷자락이 어떻게 보이는가를 "아슴아슴"하다는 형용태로 나타냈고 '나빌레라'는  춤추는 모습을 동작태로 나타낸 것이다. 의성어나 의태어는 단순히 소리를 모방하고 몸짓을 흉내내는 것만이 아니라 직유나 은유의 수법으로 시 속에  끌여들인 것을 볼 수 있다. 말라르메(Mallarme)가 "시는 아이디어로 쓰는 것이 아니라 말로 쓴다"고 언어의  외형적 기능──모음조화, 자음의 결합, 韻, 리듬, 율격등──에 詩的 성취욕을 보였었다. 즉, 內容語(content word) 에 대한 고의적 의미 부여를 경계한 것이다. 이에 앞서 소위 순수시(pure poetry)라는 것도 언어의 내용보다는 "음악 처럼 직감적이며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세계"를 추구한 사실도 유의해야 한다. 청각적 자극이나 시각적 자극에 관심을  두어 의성어나 의태어의 시적 활용 가치가 많아진 것이다. ㉣ 기타 위에 소개한 몇 가지 비유법 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 ① 안으로 아슴한 설은 눈섭들을 하고 한그루 풀, 한덩이 돌, -유치환, 「역투(逆投)」 부분 ② 산에는 꽃피네 꽃이 피네 -김소월,「山有花」 부분 ③ 불러도 주인없는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김소월, 「초혼」 부분 ④ 낙엽끼리 누워 산다 낙엽끼리 모여 산다 -조병호, 「낙엽끼리 모여산다」 부분 ①은 압운법으로 볼 때 두운(頭韻)을 취한 것이요 ②는 각운(脚韻)을 취했다. '한 그루', '한 덩이'의 '한'이나, '꽃피네', '피네'의 '∼피네' 등을 압운법에 맞춘 것이라고 한다. 이들은 외형률의 압축을 보여 주기도 하지만  우리말 고유의 내적 운율미도 동시에 품고 있는 것이다. 시에서는 반복의 대구(對句), 대위(對位) 혹은 점층적 인 기법에 의해 시의 형태미와 내적 운율미를 동시에 얻을 수 있는 것이다. ③은 "이름이여!"를 절마다 반복함 으로써 호소력을 강화시킨다. ④는 두운을 염두에 두기도 했지만 절의 반복에 간결하고 깡마른 낙엽의 이미지 를 드러낸다. ① 뛰노는 바다 앞엔 날개를 펴고 검은 구름 앞엔 태양을 부르라. ② 달이 지면 아무도 없는 뜰은 외로워 달이 뜨면 피리 소리 향그런 풀 밭. ①은 글귀가 서로 맞서서 같은 정조(情調)의 반복으로 대구를 이룬다. 아름다운 조화미를 창조하는 대구법이다.  ②는 서로 반대되는 정취의 세계가 서로 대조되어 흥겨운 時의 맛을 돋군다. 이것은, 말할 것도 없이 「明暗」 의 대조에 의하여 들의 정취를 나타내는 대조법이다. 대구법은 두 가지 사실, 현상 혹은 이미지를 함계 연결시켜  나타낸다. 여기에서 문법적인 대구나 대조보다도 내적인 정조(情操)를 정리하고, 합리적으로 종합하는 효과를  얻을 수 있다. 내 귀는 소라껍질 바다의 소리에 귀를 기울입니다 -쟝·콕토, 「귀」 "귀"가 "소라껍질"로 과장 비유되었으나 조금도 과장된 뉘앙스를 풍기지 않는다. 귀의 형상을 바닷가에 뒹구는  소라껍질로서 대신해 끝없이 펼쳐지는 바다, 그 바다에서 가까이 들리는 파도소리와 멀리 수평선 쪽에서도 무언 가 들린다고 인식되는 순간을 느끼게 된다. 여기서 한없이 펼쳐지는 시적 상상력이 발동하게 되는 것이다. 당신의 너털웃음은 진정 쌀가마가 되고 진정 진정 돼지 뒷다리가 되고, 당신의 너털웃음은 여러 가지로 민족이 되는 꽃나무 앞에서 예이쌍 계집이란 금테를 둘른 계집이건. 자가용에 무거운 몸을 실은 계집이건 앞치마를 둘른 계집이건, 유듀분면이건. 바람과 꽃과 달과 에리지 그리고 E. A. 포우의 이야기를 들려 달라는 계집이건, 그리고. -전영경, 「인생이란 무엇인가 묻든 주책없는 靑年」 부분 역설적인 전개이다. 이 시는 6·25직후 좌절하고 찌든 사람들의 감성을 수평적으로 시화한 것이다. 무지하고 천박한  언어들을 엮어서 사람들의 심중에 흐르는 고결함, 절실함, 진실함의 본질을 역설적으로 추출해 낸 것이다. 당시의  시민의식이 어느 수준에 머물러 있었는가를 보여 주기도 한다. 역설법(Pradox)은 역어법, 반어법 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번역되어 쓰고 있다. 이는 사상이나 감정을 정면으로 대응시키지 않고 반대로 말하는 수법이다. 희롱조가 되고, 준엄히 잘라하는 투가  되기도 한다. 그 내면에 있는 진실을 강조하게 된다. 인간의 감정이나 사상 또는 세태의 미뇨한 것들을 진실되게 강조하는 기법이다. 3) 제목과 내용 시를 감상할 때 형식과 내용을 구별해 보는 것은 아니다. 이는 마치 동전의 '앞과 뒤'와 같이 특유한 의의를  지닌다. 즉, 분별해 볼 때는 감상할 때의 유기적이며 종합적인 요건이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시를 짓기 위해서는 시가 될 수 있는 소재나 대상이 있어야 된다. 무엇에서 시를 짓고 싶은 충동을 일으키는가는  매우 중요하다. ㉠ 배가 고플 때 음식을 보면 음식의 특유한 냄새가 나고 먹고 싶은 충동이 강하게 온다. ㉡ 주위가 산만하거나  머리에 복잡한 생각이 있을 때 조용한 음악을 들으면 마음이 편안하고 침착해질 때가 있다. ㉢ 갑자기 어려운 처지에 빠진 이웃을 보면 도와주고 싶은 생각이 난다. ㉣ '나'가 친구들과 의견이 맞지 않아 다투고 헤어졌다. 이와 같은 사실들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은 생리적인 욕구요 ㉡은 정적이며 정신적인 욕구 이다. 또 ㉢은 인간의 윤리, 도덕적인 심성이 발동하는 대목이다. ㉣은 나와 타자간에 일어나는 갈등이며 이는  소외에까지 이른다. 이처럼 인간의 감성과 이성에 일어나는 모든 현상, 사물에 대한 분별력, 가치관의 차이, 체험하고 경험한 세계에  따른 미적 인식세계 등이 모두 시의 소재가 되고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러니까 인간이 느끼고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이 시문학의 내용이 될 수 있다. 문제는 이런 내용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에 시인의 역량이 작용하게 된다. ① 제목 시의 제목에서부터 문제가 될 때가 있다. 시의 제목이 작품에 미치는 영향은 매우 크다. 과거엔 마땅한 제목을 붙이지 못해 그냥 무제(無題)라고 쓰는  경우도 많았다. 시의 제목은 작품이 완성된 다음에다는 수도 있고 먼저 제목이 결정된 다음에 작품을 완성시키는 경우도 있다.  한 편의 시가 완성되기까지는 다양한 차원에서 동기 유발이 이뤄진다. 단순히 낱말 하나가 강렬하게 다가옴으로 써 작품을 쓰게 되는 예도 있다. 또 사물에 대한 명칭, 즉 꽃의 이름이나 지명(地名), 사람의 이름 기타 등을 그대로  제목으로 쓰는 경우가 많다. 일반적인 예상을 뒤집는 제목도 가끔 대할 수 있는데 정진규의 「몸時」와 조태일이 「식칼論」의 표제화 동기화 의도를 보자. 등나무 덩쿨은 덩쿨 끝의 끝자리에서 매일 아침 문을 열고 있었다 첫 번째 햇살에 입술을 대고 있었다 그렇게 뻗어 가고 있었다 여름 내내 씩씩했다. 맨발이란 생각이 들었다 길이 열리는 속도와 맨발이 뛰는 속도가 똑같았다 쫓아가 는 게 아니었다 만들고 있었다 그 길 위에 나를 의탁했다 그는 나를 등에 업고서도 속도에 변화가 없었다. 나를 그로  만들어 버렸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집에 당도했다 혼자서도 잘 다녀왔다고 이제 다 컸다고 어머니께서 칭찬하셨다. 이 비밀을 나는 아직도 어머 니께 말씀드리지 못했다 -정진규, 「몸時·83―등나무」 전문 ·작가의 표제화 동기 나는 왜 이토록 「몸時」라는 말에 매달려왔는가. 스스로 지은 말의 감옥에 갇혀왔는가, 기회 있을 때마다 고백해  오긴 했지만, '몸'은 가시적인 육신이면서 불가시적인 또 하나의 육신이라고 믿고 있다. 그것은 그릇이 아니다. 그것  자체이다. 시간 속의 우리 존재와 영원 속의 우리 존재를 함께 지니고 있는 실체를 나는 '몸'이란 말로 만나고 있다.  시는 바로 몸이다. 그렇게 그것은 늘 내게 다가오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멀다. 나는 소년시절부터 영성적인 것으로서의 詩性과 육신적인 것으로서의 散文性 사이에서 상처투 성이가 되어 여기까지 흘러왔는데, 이 '몸'이라는 말이 내게 다가오면서부터 그것이 나의 그간의 상처들을 열심히  핥아주고 있음을 황홀하게 실감하고 있을 따름이다. 이 시는 애초에 「몸時」라는 제목으로 번호를 붙이다가 뒤에 소제목을 달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몸時」 가 이 시의 제목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또한 정진규의 일련의 산문시에 대한 보기로도 주의깊게 읽어둘 필요가 있다. 왜 나는 너희를 아슬아슬한 재치로나마 쉽게 못 사랑하고, 너희가 꺼리며 침까지도 빠리 뱉는 내 몸뚱아리까지도 아슬아슬 재치로나마 쉽게 못 사랑하고, 도둑의 그림자가 도둑의 그림자를 사알짝 덮치듯, 그렇게 나마 못 만나고, 너희들이 피하는 내 땅과 내가 피하는 너희들의 땅은 한번도 당당히 못 만나는가. 땅속 깊이 침묵으로 살아서 뼉다귀가 뼉다귀를 부르는 저 목마른 음성처럼, 땅속 깊이 아우성으로 흐르는 저 눈물 같은 물줄기가 물줄기를 만나는 끈기처럼. 만나지 못하고 왜 사랑하지 못하는가, 내 홀로 여기 서서 뜨드득 뜨드득 이빨 갈 듯이 내 정신만을 가는가. 내 외로운 살결을 살결끼리 붙여서 시간을 가는가, 아아 칼을 가는가. -조태일, 「식칼론⑤」 전문 ·작가의 표제화 동기 일반적으로 시의 주제를 압축하여 상징화하거나 시의 제재를 그대로 제목화하는 경우가 많다. 「식칼論」이란 제목은 얼핏 생소하고 비시적(非時的) 상상혁을 유발할 수도 있으나 주제를 압축하다보니  이같은 제목이 되었다. 연작시 「식칼論」은 당시 정치 사회상과 무관하지 않다. 예컨대 3선 개헌, 유신체제로의 전환의 조짐이 구체적 으로 일어나는데 대한 단호한 대응의지가 암시되어 있는 것이다. 필자는 어느 가정에서나 구비하고 있는 식칼을 제목화함으로써 강성(强性)의 이미지를 부각시키려 했었다.  식칼은 어머님이 매일같이 식탁에 오를 음식을 만드는데 없어서는 안될 도구이다. 그런 점에서는 전쟁터에서 쓰거나, 사람을 죽일 때 쓰는 무시무시하게 느껴지는 살인검이 아니라 모성(母性)을  연상시키는 부엌의 식칼로 대비코자 함이었다. 이것은 정서적인 여름보다 논리적 대응으로서의 제목이 된 셈이다. 한편 의외성을 주어 삭막한 느낌을 주는 제목이 될 때 독자에게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리라는 욕심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② 내용 이순신 장군을 내용으로 한 서사시를 몇 시인이 썼다고 하자. 시인 A는 이순신 장군을 무공(武功)에 빛나는 인물로  그렸는가 하면 시인 B는 무공보다는 문신(文臣)으로서의 업적에 초점을 맞추어 된다. 이 경우 한 사람의 인간 됨됨이나 역사적인 업적 등에 대한 인식이 시인이 따라 달라진 경우이다. 이처럼 한 가지 사실 을 시인이 어떻게 보는가에 따라 그 시각이 달라질 수 있다. 모든 분야에서 각기 다른 관점, 인식, 윤리관, 미의식이  드러나게 된다. 봄이 왔다. 들에 새로 풀이 돋고 꽃이 핀다. 이때 어떤 시인은 겨우 내 죽어있던 풀고 꽃의 뿌리나 씨앗이 흙 속에 살아  있다가 살아나는 것, 즉 생명의 끈질김, 신비성 내지 존엄성에 이르는 것에 감탄하며 시를 짓게 된다. 또 한 시인은 먼  들판을 배경으로 길가에 핀 꽃 한송이의 아름다움, 며칠 안가서 시들어버릴 짧은 유한성에 대한 아쉬움을 노래하게  된다. 또 한 시인은 그 꽃에서 잊어버렸던 대한 아쉬움을 노래하게 된다. 또 한 시인은 그 꽃에서 잊어버렸던 한 추억  속의 소녀의 모습이 떠오를 수 있다. 이처럼 하나의 현상을 보면서 시인은 각기 다른 것을 떠올린다. 또 때에 따라서, 장소에 따라서 떠오르는 생각이 달 라질 수도 있다. 이러한 여러가지 가능성 중에서 어떤 것이 격렬하게 부각되는 가는 시인의 의식 작용에 따라 그때 그때 달라질 수 있다. 무엇이든지 시의 소재가 되고 내용이 될 수 있다고 하나, 그것이 어떻게 표현되는 가에 따라 시가 되고 안되는  분수령이 된다. 많은 시인이나 시비평가들은 시에는 시인의 眞·善·美의 정신이 담긴 것이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이 진·선·미는 사람에  따라 시대에 따라 그 가치 기준이 바뀔 수도 있다. 시의 내용적인 차원에서 그 표현법을 대별해 보자. ⓐ 주정적 내용 ① 감각적인 것 ② 정서적인 것 ③ 정조(情操)적인 것 ⓑ 주지적 내용 ① 기지적인 것 ② 지혜적인 것 ③ 예지적인 것 ⓒ주의적(注意的) 내용 ① 주제적 ② 줄거리 중심 ③ 평면적 진술 주정적인 시는 19세기 낭만주의 시에서 그 주된 흐름을 볼 수 있다. 시적 기교보다는 직설적이요, 정서의 원형적  요소가 바로 드러나는 특징이 있다. 찾아온 손님의 다감한 눈빛으로 방을 훈훈히 하는 한 장의 편지 그것이 이룬 하늘에서 살짝 隱密히 내린듯 빈 책상 위에 이미, 뜻 있는 이 밝음은 써 보낸 사람의 마음의 그것 초롱을 벗어난 새의 自由가 되어 나를 부르러 온 아아, 나의 知友여 피봉의 글씨 귀를 기울이며 이 밝음의 가상이를 곱게 편지를 뜯는다. -이수익, 「편지」전문 주지적인 시들은 고도의 수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세상의 지식을 어느 정도 꿰뚫어 볼 수 있어야 감상이 가능할  경우가 있다. 주지시에 동원되는 표현들은 고도의 기지와 예지가 따라야 한다. 시를 짓는 이도 직관적인 에스프리 에 능할 수 있어야 한다. 그 헐벗은 비행장 옆 낡은 예레미야 병원 가까이 스물 아홉살의 强한 그대가 죽어 있었지. 쟝. 바띠스트. 클라망스 스토브조차 꺼진 다락방안 추운 氷壁밑에서 검은 으로 뎃상한 그대 어둔 얼굴을 보고 있으면 킬리만자로의 눈속에 묻혀 있는 표범 이마. 빛나는 대리석 토르소의 흰 손이 떠오르지. 지금 낡은 예레미야 병원 가까이의 지붕에도 눈은 내리고 겨울이 빈 나무허리를 쓸며 있는 때. 캄캄한 안개 속 침몰하여 가는 내 은 이제 고달픈 닻을 내리어 정박하고서 축축히 꿈의 이슬에 잠자는 인 것을, 짙은 밤 부둣가 한 모퉁이로 내 아무렇게나 혼자서 떠나보네. -이가림, 「빙하기」 부분 종일 바람에 귀를 갈고 있는 풀잎. 기은 늘 두려운 이마를 열고 우리들은 멈춘 자리에 다시 멈추게 한다. 막막하고 어지럽지만 그러나 고개를 넘으면 전신이 우는 들. 그들이 기는 한 사내의 와 죽음을 지나 먼 길의 귀 속으로 한 사람씩 떨며 들어가는 영원히 집이 없는 사람들. 바람이 분다, 살아 봐야 겠다. -오규원,「순례의 서·1」 부분 주의적 시는 단독으로 성립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떼어내서 볼 때 주제, 줄거리, 또 이들을 평면적으로 정리함 으로써 읽는 이로 하여금 쉽게 그 내용 파악을 가능하게 한다. 그리고 표현상의 특별한 기교를 염두에 두지 않을  경우가 많다.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은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 날이 이 목숨이 끊어지기 전에 와 주기만 하향이면 나는 밤하늘에 날으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의 인경을 머리로 드리받아 울리오리다. 두개골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주슨 한이 날으오리까. 그 날이 와서, 오오 그 날이 와서 육조(六曹)앞 넓은 길을 울며 뛰며 뒹굴어도 그래도 넘치는 기쁨에 가슴이 미어질 듯하거든 드는 칼로 이 몸의 가죽이라도 벗겨서 커다란 북을 만들어 들쳐 메고는 여러분의 행렬에 앞장을 서오리다. 우렁찬 그 소리를 한 번이라도 듣기만 하면 그 자리에 거꾸러져도 눈을 감겠소이다. -심훈,「그날이 오면」 전문 위에서 본대로 주정적, 주지적, 주의적이라는 것은 실제 작품마다 세가지 요소가 모두 합쳐져서 완성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4) 창작의 실례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서정주, 「국화 옆에서」 전문 ·작가의 창작 동기 하나의 시상이라는 것은 한 순간에만 의거하는 것은 아니올시다. 또 모든 과거의 상념들과 전연 무관하게 단독 으로 우연히 성립될 수 있는것도 아니올시다. 「국화 옆에서」를 예로 들어 말씀드리더라도 여기에는 네 개의 이미지가 중첩되어 있습니다만, 이것들은  그 하나도 한 순간에 우발적으로 투영된 것에만 의거한 것은 아닙니다. 4연 중 맨 첫연의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봄부터 소쩍새는/그렇게 울었나보다"의 ---한송이의 피어  있는 국화꽃의 색채와 향기의 배후에 봄부터 첫가을까지 계속되었던 저 소쩍새의 울음의 음향을 참여시킨 이미 지는 물론 색채와 음향을 조화시켜 볼려는 표현적의도에 의해서 결정을 보게 된 건 사실입니다 만은 이 한 개의  국화를 중심으로 하는 이미지가 고정되기까지에는 그 전에 이와 비슷한 많은 상념이 내 속에 이루어지고 연멸하고  다시 이루어지면서 은연중에 지속되어 왔었던 거을 나는 기억합니다. 그 중에 몇 가지를 예로 들어 말씀드리면, "저 우리 이전의 무수한 인체가 하여 부식해서 흙속에 동화된 그 골육은  거름이 되어 온갖 풀꽃들을 기르고, 그 액체는 수증기로 승화하여 구름이 되었다가 다시 비가 되어 우리 위에 퍼부 었다가 다시 승화하였다가 한다"는 상념이라든지, "한개의 사람의 음성에는---그것이 청하건 탁하건 절실하면 절실 할수록 거기에는 반드시 저 먼 의 음향이 포함되리라"는 상념이라든지 "저 많은 길거리의 젊은 소녀들은 한 우리  애인의 분화된 갱생이라"는 환상이라든지---이런 것들입니다. 이러한 여러 가지 상념들은 언뜻보기엔 「국화 옆에서」의 첫 연의 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것 같기도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저 '인체 윤회'의 상념이나, 저''의 환각등은 --요컨대 이러한 상념과 환각의 거듭 중복된 습성은  한송이의 국화꽃을 앞에 대할 때, "이것은 저 많은 소쩍새들이 봄부터 가을까지 계속해 운 결과러니"하는 동질의 을  능히 불러일으킬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또한 제2연의 내용이 되는 국호개발의 한 원인으로서 여름의  천둥소리들을 끌어올 수도 있는 때문입니다. 그러나 앞에 쓴 '인체 윤회'나 ''이나 '愛人부활'의 상념 등이 「국화 옆에서」 의 1·2연의 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처럼 이 '천둥과 국화'나 '소쩍새와 국화'에 관한 상념의 습성은 여기에서만 해소해 버리는 일이 없이 내 인생의 다음 체험에 반드시 그 그림자를 던지게 될 것임은 물론입니다.  그거야 하여튼 다음의 제3연은 이 모든 젊은철의 흥분과 모든 감정 소비를 겪고 인제는 한 개의 잔잔한 우물이나 호수와  같이 이 잡혀서 거울 앞에 앉어있는 한 여인의 美의 영상이 내게 마련되기까지에는 이와 유사한 많은 격렬하고 잔잔한  여인의 영상들이 내게 미리부터 있었을 것임은 물론입니다. 새로 자라오르는 보리밭 위에 뜬 달빛과 같은 애절한 여인의  영상도 있을수 있습니다. 오월의 아카시아 숲을 보고 그 향기를 맡는 것 같은 신선한 여인의 영상도 있을 수 있습니다.  또는 저 에집트의 여왕 크레오파트라와 같이 오만하고 요염한 여인, 또는 산악고 같이 든든하고 건실하고 관대히 아름다 워 우리가 그 무릎 아래 가서 포근히 쉬어보고 싶은 여인, 또는 성모마리아와같이 다수굿하고 맑고 성스러운 여인 또는  저 와 같이 스스로도 멋지고 또 고차원의 온갖 멋을 이해할 수 있는 여인 ---이 밖에도 여러 가지 성질의 여러 가지 형태 의 여러 가지 여인의 미의 영상이 우리의 속에 계속해서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그러한 모든 여인의 미의 영상의 체 험 역시 그 중복됨을 따라 우리에게 여인들의 미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가져옴은 사실입니다.  좀 쑥스러운 이야기를 하고 있는 형편이 이 되었습니다만은, 내가 에 '소복하고 거울 앞에 우두커니 홀로 앉아있는 의 여인 '의 모습을 보았다면, "흥! 저 아주머니는 핼쓱한게 밉상이야. 얼이 빠졌어!" 하고 비웃었음에 틀림없었을 것이지만, 인제  이만한 여인의 미를 새로 이해하게 된 것도 앞에 쓴바와 같은 것들의 많은 되풀이, 되풀이의 결과임은 물론입니다. 그래서 내가 어느 해 새로 이해한 이 정일한 사십대 여인 속에 잠재해 있다가, 一九四七년 가을 어느 해 어스름때 문득 내 눈이 내 정원의 한그루의 국화꽃에 머물게 되자, 그 이 내 속에서 비로소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국화는 물론 내가 어려서부터 많이 보아온 꽃이고, 가끔 꺾어서 책상 위에다 꽂아 놓기도 했고, 또 '아름답다'고 말해본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이때처럼, 절실하게 가깝고, 그립고, 알 수 있고, 까닭없이 기쁘게 느껴진 적은 그 전엔 없었 습니다. '이것을 시로 쓰리라' 작정하고 책상머리에 와서 앉아, 내가 맨저 기록해 놓은 것은 제3연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써 놓고, 몇 시간을 누었다 앉었다 하는 동안 제1연과 제2연의 이미지가 저절로 모여 들었습니다. 이것은 마치 내 게 있어서는 오랫동안 어느 구석에 잊어버렸다가 앞서 찾아내서 쓰게 되는 낯익은 내 옛날의 소지품을 상용하는 것과 같 은 감개였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연만은 좀처럼 표현이 되지 않아, 새벽까지 누었다 앉았다 하다가 그만 자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이것은 며칠 동안을 그대로 있다가, 어느 날 새벽 눈이 띄어서 처음으로 마련되었습니다. 밖에선 무서리가 오는 듯한 늦 가을의 상당히 싸늘한 새벽이었는데 '내가 안 자고 혼자 깨어있다'는 호젓한 생각 끝에 밖에서 서리를 맞고 있을 그 놈을  생각하자, 그것은 용이히 맺어졌습니다. 그러나 이 만은 그 뒤에도 많은 문구상의 수정을 오랫동안 계속했던 것을 말해 둡 니다. 이상과 같이 나는 내 미진한 작품 「국화옆에서」의 13행의 문자를 기록했었습니다. 요컨대 나는 인생이란 되도록  오래 체험하고 살 가치가 있는 것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을 따름입니다.      
894    詩짓기에서 수사법 댓글:  조회:4636  추천:0  2016-01-09
글의 표현 방법(수사법)의 갈래 (1) 비유하기   1) 정의 :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을 어떤 대상에 빗대어 표현하는 수사법( A : B)   2) 종류 : 은유법, 직유법, 대유법, 풍유법, 활유법, 의인법, 의성법, 의태법, 중의법 등   ◆ 은유법 : "A는 B이다"는 식으로 빗대어 표현하는 방법 ⇒  내 마음은 고요한 물결 ⇒  낙엽은 폴란드 망명 정부의 지폐   ◆ 직유법 : "A는 B같다"는 식으로 빗대어 표현하는 방법 ⇒  내 마음은 별과 같이 ⇒ 새악시 볼에 떠오는 부끄럼같이 >   ◆ 대유법 : 어떤 대상에서 연상되는 일부분으로 전체를 나타내는 방법 ⇒  인간은 빵만으로 살 수 없다. ⇒  펜은 칼보다 강하다.   ◆ 풍유법 : 속담이나 격언으로 상황을 빗대어 표현하는 방법 ⇒  아니 땐 굴뚝에 연기날까? (모든 결과에는 원인이 있기 마련이라는 말을 하고 싶을 때) ⇒ 숭어가 뛰니까 망둥이도 뛴다. (제 처지도 생각하지 않고 저보다 나은 사람을 모방하는 사람을 비꼬고 싶을 때)   ◆ 활유법 : 무생물을 생물처럼 표현하는 방법 ⇒ 바다는 고요히 잠자고 있다. ⇒ 으르렁거리던 파도를 속으로 삼킨 채.   ◆ 의인법 : 어떤 무생물이나 생물을 사람에 빗대어 표현하는 방법 ⇒ 산을 넘어 어둠이 휘청휘청 걸어오고 있다. ⇒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춤만 추고 가네   ◆ 의성법 : 소리를 본떠서 표현하는 방법 ⇒ 삐이 삐이 배, 뱃종! 뱃종! 멧새들도 우는데 ⇒ 보리 피리 불며 / 봄 언덕 / 고향 그리워 / 피-ㄹ 뉠리리.   ◆ 의태법 : 모습을 본떠서 표현하는 방법 ⇒ 훨훨훨 깃을 치는 청산이 좋아라. ⇒ 물방아간 옆 대추나무 밑에서 자근자근 빨간 댕기를 씹으며,   ◆ 중의법 : 말 하나가 둘 이상의 뜻을 나타내는 표현 방법 ⇒ 청산리(靑山裏) 벽계수(碧溪水)야 수이 감을 자랑 마라 ⇒ 수양산(首陽山) 바라보며 이제(夷齊)를 한하노라     (2) 강조하기 1) 정의 : 느낌이나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사용하는 수사법 2) 종류 : 반복법, 과장법, 열거법, 점층법과 점강법, 대조법, 비교법, 연쇄법, 억양법 등   ◆ 반복법 : 같은 단어나 구절이나 문장을 반복하는 방법 ⇒ 해야 솟아라. 해야 솟아라. 말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 임은 물같이 까딱 않는데 /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 과장법 : 큰 것을 작게, 작은 것을 크게, 적은 것을 많게, 많은 것을 적게 표현하는 방법 ⇒  내가 놓친 붕어는 정말 내 키만 했었어. ⇒  이제는 아득한 산꼭대기에 겨우 싸래기만큼이나 햇볕이 남아 있었다.   ◆ 열거법 : 어떤 상황이나 대상을 하나하나 나열하는 방법 ⇒ 울창한 송림이 이어지면서 싸리나무, 아카시아, 청미래덩굴 따위가 섞여 있고, ⇒  봄에 피는 꽃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진달래, 개나리, 벚꽃, 민들레, 라일락, ……     ◆ 점층법 : 작은 것에서 큰 것으로, 적은 것에서 많은 것으로 쭉 배열하는 방법 ⇒ 그는 명성을 얻어 갔다. 처음에는 마을, 다음엔 지방, 그리고 전국으로, 결국 세계에까지. ⇒ 노랗던 싹이 연두빛으로 변하나 했더니, 벌써 초록 에서 진한 초록으로 바뀌고 있다.     ◆ 점강법 : 점층법의 반대 ⇒ 첫날엔 오십 리, 다음 날엔 사십 리, 삼십 리, 점점 줄어지다가는, 하루씩 어느 마을에고 들어가 쉬었다. ⇒  나무에 단풍이 몇 잎 안 남았다. 그저께는 열 잎, 어제는 두 잎, 오늘은 한 잎, 내일쯤엔 다 지겠지.   ◆ 대조법 : 서로 반대되는 사실을 놓아 그 의미를 강조하는 표현 방법 ⇒ 중국의 담장은 폐쇄적이지만, 일본의 담장은 개방적이다. ⇒  나는 당신을 삼백 예순 다섯 날 사랑했으나, 당신은 나를 단 하루도 사랑하지 않았다.   ◆ 비교법 : 서로 정도가 다른 어떤 두 대상을 비교하여 어느 하나를 강조하는 표현 방법 ⇒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도 깊고 ⇒ 끈적끈적하게 사나이의 손에 묻었던 피가 놀빛보다 더 진하게 우러난다.   ◆ 연쇄법 : 앞 구절의 끝 부분을 다음 구절의 머리에서 다시 되풀이하 는 표현 방법 ⇒ 원숭이 엉덩이는 빨개. 빨간 것은 사과. 사과는 맛있어. 맛있으면 바나나. ……. ⇒  닭아, 닭아, 우지 마라. 네가 울면 날이 새고, 날이 새면 나 죽는다.   ◆ 억양법 : 먼저 치켜 올려 주고 다음에 꺾어 누르거나, 그 반대로 표현하는 방법 ⇒ 넌 얼굴은 예쁜데, 마음씨가 엉망이야. ⇒ 그는 문제투성이지만, 의리는 있어.     (3) 변화주기   1) 정의 : 문장에 새로운 느낌을 주거나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서 평범한 문장에 변화를 주는 수사법   2) 종류 : 반어법, 역설법, 도치법, 대구법, 설의법, 문답법, 영탄법, 인용법, 생략법, 돈호법, 현재법 등   ◆ 반어법 : 나타내고자 하는 의미와 반대되게 표현하는 방법 ⇒  아이고, 이 얄미운 놈. 어떻게 이렇게 잘 생겼을까? ⇒ 그래, 자꾸 떠들어라. 그래야 착하지.   ◆ 역설법 : 언뜻 보기에는 모순되는 말이지만, 곰곰히 생각하면 말이 되도록 표현하는 방법 ⇒ 저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 나는 또 당신 곁은 떠나지만 / 그래서 영원히 당신을 떠날 수 없습니다.     ◆ 도치법 : 정상적인 문장 성분의 배열 순서를 바꾸어 놓아 변화를 주는 표현 방법 ⇒  어둠 속에서도 불빛 속에서도 변치 않는 / 사랑을 배웠다 너로해서 ⇒ 당신은 무슨 일로 / 그리합니까? / 홀로이 개여울에 주저앉아서   ◆ 대구법 : 문장의 기본적인 구조를 반복하는 수사법 ⇒ 진리는 반드시 따르는 자가 있고, 정의는 반드시 이루는 날이 있다. ⇒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   ◆ 설의법 : 분명한 결론을 의문의 형식으로 만들어 그 결론을 강조하는 수사법 ⇒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 인간의 행위 중에서 낙엽을 밟는 것만큼 서정적인 행위가 또 있을까?     ◆ 문답법 : 독자들을 화제 속으로 끌어 들이고자 자신이 독자에게 묻고 스스로 대답하는 표현 방법 ⇒ 자욱한 야기(夜氣) 속에 별들이 떠 있는가? 아니다. 점점이 명멸 (明滅)하는 어화다. ==  학생이란 무엇이냐? 미래의 무기를 준비하는 사람이다.   ◆ 영탄법 : 감탄의 형식으로 변화를 주어 자신의 생각이나 느낌을 강조하는 표현 방법 ⇒  춘설에도 으스름 달밤! ⇒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   ◆ 인용법 : 다른 사람의 말을 끌고 들어오는 표현 방법 ⇒  남들이 이르기를 "임 그리워 피나게 운다"고 한다. ⇒ 그는 내일 바그다드로 가겠다고 말했다.   ◆ 생략법 : 내용 파악이 되기 때문이거나 여운을 주기 위해서 문장 에서 일부를 빼는 방법 ⇒ "학, 학 나무를, 학 나무를 ……." ⇒ 분분한 낙화…….   ◆ 돈호법 : 어떤 대상을 불러 주의를 끄는 방법 ⇒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  거짓이여, 너는 내 나라를 죽인 원수로구나   ◆ 현재법 : 과거의 일을 현장감을 주기 위해 현재 시제로 표현하는 방법 ⇒  산기슭에는 억새꽃이 허옇게 피어 있다. ⇒ 갑자기 왼쪽 겨드랑이에서 얼음장 같은 시원한 바람이 느껴진다.  
893    詩의 술잔속에는 바다가 출렁출렁... 댓글:  조회:4507  추천:0  2016-01-09
'자, 떠납시다, 시의 여행을''   표현기교  이 장에서는 비유, 상징, 반어, 역설에 대하여 설명하겠습니다. 1. 비유  비유는 어떤 사물이나 의미를 다른 사물이나 의미에 빗대어 보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을 제1장에서 빗대어 보기라고 했지요? 이 때, 본래의 사물이나 의미를 원관념, 빗대어 본 다른 사물이나 의미를 보조관념이라고 합니다. 이 빗대어 보기는 시 전체, 시어나 시구에 영향을 주어 시의 의미를 새롭게 해 줍니다.    * 직유  혼자 걸어 보십시오. 수많은 대상들이 당신을 스쳐갈 것입니다. 그것들 중당신의 마음을 잡는 사물들을 다른 사물에 빗대어 보십시오. 마음 속의 생각을 눈에 띄는 사물에 빗대어 봅시다. 이것이 직유의 시작입니다.    할아버지 같은 은행나무, 은행나무 같은 할아버지. 엉겅퀴꽃처럼 피어나는 아픔, 아픔처럼 피어나는 엉겅퀴꽃, 추억처럼 밝아오는 등꽃, 등꽃처럼 밝아오는 추억, 폭포처럼 울고 있는 여인, 여인처럼 울고 있는 폭포. 이런 식으로 당신의 경험과 상상력에 의지하여 빗대어 보십시오.   이것이 직유입니다. 직유는 어떤 대상과 다른 대상을 연결어 '∼같이, ∼처럼, ∼인 양'으로 결합하는 비유입니다. 이 때, 어떤 대상을 원관념, 다른 대상을 보조 관념이라고 합니다. 직유의 기본 틀은 'A는 B와 같다.'입니다. A는 원관념, B는 보조관념. 이 틀에 비유하려는 대상을 대입시켜 보는 것이 직유 연습입니다. 이것을 '∼같이, ∼처럼, ∼인 양' 등으로 바꾸어 시어로 사용하면 됩니다.  그런데 비유의 두 관념은 차이성 속의 유사성을 가져야 됩니다. '차이성 속의 유사성'이란 서로 다른 두 관념사이의 비슷한 성질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할아버지 같은 은행나무'에서 '할아버지'와 '은행나무'는 전혀 다른 대상입니다. 이것이 두 대상의 차이성입니다. 그러나 할아버지의 '늙음'과 은행나무의 '해묵음'은 두 대상의 공통적 성질입니다. 이것이 두 대상의 유사성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대상들을 비교, 대조시키는 습관이 있습니다. 비교는 유사점을 찾는 것이고, 대조는 차이점을 찾는 것입니다. 이 유사점을 찾는 행위가 직유의 시작이고, 차이점을 찾는 것이 대조의 시작입니다. 그런데 직유는 모든 비유의 기본이 되기 때문에 잘 익혀 두는 것이 좋습니다.  이제 간단한 직유 연습을 해 봅시다.  * 바람이 불어옵니다. 새떼들이 몰려다닙니다.    바람이 무엇처럼 불어옵니까?   아니면,   무엇과 같이 불어옵니까?  그것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먼저 알아야 하는 것은 바람의 속성.  묻습니다.  바람은 어떤 속성을 가졌습니까?  몰려다니는 속성.  이때, 바람의 속성을 발견하는 것은 시인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이것을 심미안이라고 합니다. 대상의 특성을 발견하는 마음의 눈.  그렇다면, 지금 바람처럼 몰려다니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렇게 묻는 것이 유사성을 가진 대상을 찾는 방법입니다. 새떼지요? 다시 물어 봅시다.  몰려다니는 바람이 무엇처럼 몰려다닙니까?  새떼처럼. 정리해 보면 원관념은 '바람', 보조관념은 '새떼'입니다.    몰려다니는 바람이 몰려다니는 새떼처럼 불어온다.  원관념과 보조관념의 유사성은 '몰려다니는'.  이때, 두 관념의 유사성을 생략해야 시는 함축성을 가집니다. 유사점을 생략해 봅시다. 그래야 시의 함축미가 살아나니까. 함축미란 시어가 가지고 있는 드러나지 않은 의미를 말합니다.  생략할 때는 원관념과 보조관념의 두 유사점을 다 생략하는 경우와 그 중 하나만 생략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만을 생략하는 경우에는 원관념의 유사점을 생략하는 것이 좋습니다. '몰려다니는 바람이 새떼처럼 불어온다.'보다 '바람이 몰려다니는 새떼처럼 불어온다.'라고 하는 것이 미학적으로 어울린다는 말입니다. 여기에서는 둘을 다 생략해도 무리가 없을 것 같습니다.      바람이 새떼처럼 불어온다.  이것을 다음과 같이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새떼처럼 몰려오는 바람  * 농부들은 땅을 파고 삽니다.  땅을 파고 사는 농부는 무엇처럼 땅을 파고 삽니까?  두더지처럼.   생각해 봅시다. 여기서는 '땅을 판다'를 유사성으로 선택하여 보조관념을 찾았습니다. 원관념은 '농부', 보조관념은 '두더지'입니다. 정리해 봅시다.     땅을 파고 사는 농부들이 두더지처럼 땅을 파고 삽니다.   유사점을 생략해야겠지요? 여기서는 원관념의 유사점을 생략하고 보조관념의 유사점을 남겨야겠지요? 그렇지 않으면,  시어의 의미가 애매해 지니까. '농부들이 두더지처럼 산다.'라고 두 관념을 다 생략하면 '두더지처럼'이 나타내는 의미가'땅 속에 산다는 말인가, 땅을 파고 산다는 말인지' 애매해진다는 말입니다. 정리하여 옮겨 봅시다.  농부들이 두더지처럼 땅을 파고 삽니다.  변화를 시켜 봅시다.  두더지처럼 땅을 파고 사는 농부  * 어머니는 시골에서 농사를 짓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어머니의 이마에 주름살이 깊어 갑니다.  어머니의 주름살은 무엇과 같이 깊어갑니까?  '주름살'의 속성을 파악해야겠지요? '주름살은 피부에 깊이 파인 잔금'. 이것과 유사한 것을 찾아봅시다.  밭고랑.  정리해 보면  어머니의 주름살이 밭고랑같이 깊어 간다.  변화시키면  밭고랑 같은 어머니의 주름살.   * 풍년이 드는 것이 농부의 꿈.   이 농부의 꿈을 무엇에 빗대어 볼 수 있을까요?   꿈은 가슴속에 펼쳐지는 아름다운 것. 아름다운 것이니까, '꽃'이 어떨까요?  꽃이라면 어떤 꽃이 농부의 꿈과 같을까요?  농부와 가장 가까이 있으면서도 농부의 바람(풍년)과 연관성이 있는 꽃은 무엇일까요? 이렇게 유사점을 찾아가면 답이 찾아집니다. 무슨 꽃입니까? 벼꽃이 좋겠지요? 정리해 봅시다.  농부의 꿈은 벼꽃과 같다.  변화시키면  벼꽃 같은 농부의 꿈   좀더 한 걸음 나아가 직유를 연습해 봅시다.  * 아이들과 잔디밭에서 풀을 뽑고 있는데, 한 아이가 당신에게 물었습니다. '어떻게 생긴 것이 잔디이고, 어떻게 생긴 것이 잡초래요?'  대답해 보십시오, 아이가 알기 쉽게 빗대어서. '잔디'와 '잡초'가 원관념입니다.  (     )처럼 생긴 것이 잔디이고  (     )처럼 생긴 것이 잡초다.  빈곳을 채워 보십시오, 잔디와 잡초를, 아이와 당신을 비교, 대조하면서. 잔디는 가치 있는 것, 잡초는 가치가 없는 것을 가리키겠죠? 다음을 봅시다.  너희처럼 생긴 것이 잔디이고  나처럼 생긴 것이 잡초라고  농담 삼아 얼버무려 대답했지만  손끝에 묻어 오는 풀 냄새처럼  자꾸만 짙어 오는 의문  나는 잔디일까. 잡초일까.   - '풀을 뽑다가'에서 -  형식상으로는 '잔디'와 '잡초'가 원관념, '너'와 '나'가 보조 관념입니다. 그러나 내용상으로 보면 원관념이 '너'와 '나'로 보조관념이 '잔디'와 '잡초'로 바뀝니다. 정리해 보면, '너는 잔디처럼 생겼고, 나는 잡초처럼 생겼다.'    * 수박을 반쪽으로 잘랐습니다. 아주 잘 익었습니다. '빨갛게 익은 수박 속의 까만 씨앗'이 눈에 박혀 옵니다.  이 '까만 씨앗'이 무엇과 같습니까? 무엇처럼 생겼습니까? 빗대어 봅시다. 이젠 '수박 속의 까만 씨앗'을 보조 관념으로 하여 원관념을 생각해 봅시다.  (     )은 빨갛게 익어 가는 수박 속의 까만 씨앗과 같다.  이럴 때는 눈을 감아야 합니다. 그리고 떠올려 보십시오. 추억 속에서, 꿈속에서, 당신의 가슴속에서 찾아보십시오.  '빨갛게 익어 가는 수박 속의 까만 씨앗'을 보고 당신은 무엇을 연상하겠습니까? '활활 타오르는 사랑의 불꽃 속에서 까맣게 타고 싶은 마음'을 연상할 수 있겠지요? 이 '까맣게 타고 싶은 마음'을 무엇이라고 합니까? '그리움'이라고 해도 되겠지요? 이제 원관념은 '그리움'. 보조 관념은 '수박 속의 까만 씨앗'입니다. 정리해 봅시다.  그리움은 빨갛게 익어 가는 수박 속의 까만 씨앗과 같다.  이것을 당신의 뜻대로 변화시키면 좋은 시어가 될 수 있습니다. 뜻대로 변화시킨다는 말은 '∼같이, ∼처럼, ∼인 양'으로 바꾸어 문맥에 맞게 사용하는 것을 말합니다.  다음 시를 읽어봅시다.  당신의 술잔 속에는 바다가 있어요.  언제나 넘치면서  언제나 목이 마른 당신이 있어요.  빨갛게 익어 가는 수박 속의 씨앗처럼  까맣게 타고 싶은 그리움 하나  무턱대고 바람만 부르고 있어요.  자꾸만 밀려오는 당신의 바다에  목선을 띄우고 싶은 당신이 있어요.       - 섬. 12 -  그리움과 수박 속의 씨앗과의 유사성을 생각해 보십시오.    다음을 봅시다.  조금씩 지워져서  (  ①  )처럼 누운 산  나도 (  ②  ) 되어  살며시 스며드니  주책없는 달빛이  소쩍새 깨운다.     - 산. 24 -  (    )을 채워 봅시다. ①, ②에는 같은 시어가 들어가야 합니다. 차창 밖에 보이는 저녁 무렵의 산의 풍경입니다. 날은 점점 어두워 가고 있습니다. 어떤 시어가 알맞을까요? 해가 진 후의 산을 본 사람은 (    )을 채울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다 지워지고 형체만 남는 산은 (     )처럼 누웠습니까? 아니면 (      )과 같이 누웠습니까? 그림자처럼, 아니면 그림자같이. 그렇다면, (    )를 채워 한 번 읽어 보십시오. 정확히 따진다면, 1연의 2행은 직유법, 2연의 1행은 직유를 응용한 은유법이 쓰였습니다.  
892    우리 모두 詩와 함께 웃어 버립시다... 댓글:  조회:3977  추천:0  2016-01-09
자, 떠납시다, 시의 여행을''            * 저 놈이 미우면  당신은 저기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는 저놈이 밉습니다. 뺨이라도 한 대 갈겨 주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럴 수가 없습니다. 저 놈은 당신의 직장 어르신. 당신보다 힘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돌아서서 저놈이 들리지 않게 욕을 하고 웃어 버릴 수밖에. 아무리 생각해도 그 수밖에 없지요? 먹고살아야 하니까.  그래도 미우면 어떡하겠습니까? 한 번 더 욕을 해야겠지요. 삶은 쌓인 것을 이렇게 털어 내며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까?    우연히 떠오른 당신의 생각을 당신이 당신에게 속삭여 본 것입니다. 큰 소리로 말하면, 저기 앉아 담배 피우는 놈이 들으면 되려 뺨을 맞을 테니까?    친구에게 당부하는 형식으로 아니면 당신 자신에게 당부하는 형식으로 시상을 정리해 봅시다. 이것이 권유적 진술. 표현 방법은 당신 자신이 선택해야 합니다.  저놈이 미우면 돌아서서 저놈에게 들리지 않게 욕 한 번 하고 웃어 버려. 그래도 저놈이 미우면 다시 한 번 더 욕을 하고 웃어 버려. 삶은 쌓인 것을 이렇게 털어 내며 살아가는 것이여.  다시 다듬어 봅시다. 다듬는 과정을 여러 번 반복하면 반복할수록 좋은 시가 될 수 있습니다.  ①저놈이 미우면 돌아서서 욕 한 번 하고 웃어 버려. ②그래도 미우면 다시 한 번 더 욕을 하고 웃어 버려. ③삶은 이렇게 쌓인 것을 털어 내며 살아가는 것이여. ①을 2행으로 1연, ②를 2행으로 2연, ③을 2행으로 3연으로 하여 구성해 봅시다.  저놈이 미우면 돌아서서  욕 한 번 하고 웃어 버려  그래도 미우면 다시 한 번 더  욕을 하고 웃어 버려  삶은 이렇게 쌓인 것을 털어 내며   살아가는 것이여  1연  저놈이 미우면 돌아서서  욕 한 번 하고 웃어 버려  마지막 행 '웃어 버려'를 구체화하여 '씩 웃어 버려.'로  저놈이 미우면 돌아서서  욕 한 번 하고 씩 웃어 버려.  2연  그래도 미우면 다시 한 번 더  욕을 하고 웃어 버려.  1행, '그래도 미우면 다시 한 번 더'를 어조의 변화를 주기 위해 '그래도 미우면 다시 더 한 번'으로 바꾸면 어떨까요?  2행은 앞 연에서 사용했으니까 동어반복을 피하기 위해 생략합시다.  그래도 미우면 다시 더 한 번  3연  삶은 이렇게 쌓인 것을 털어 내며   살아가는 것이여  '삶'이라는 말과 '살아가는'이라는 말이 겹치니까 '삶'을 생략하고, '쌓인 것을'도 생략해도 의미가 통하므로 '이렇게 털어 내며'로. '살아가는 것이여.'는 정감을 주기 위해 '살아가는 겨.'로 바꿔 봅시다.  이렇게 털어 내며 살아가는 겨.  모아 봅시다  저놈이 미우면 돌아서서  욕 한 번 하고 씩 웃어 버려.    그래도 미우면 다시 한 번 더  이렇게 털어 내며 살아가는 겨.     시는 행과 연을 골라 시의 균형을 맞추어야 합니다. 짧은 시는 더욱 그렇습니다. 시는 읽는 것만이 아니고, 보는 것이기도 합니다. 행과 연을 골라 봅시다.  저놈이 미우면   돌아서서  욕 한 번 하고   씩 웃어 버려.    그래도 미우면   다시 한 번 더  이렇게 털어 내며   살아가는 겨.     우리 함께 웃어 버립시다. 세상을 웃고, 저놈을 웃고, 이놈을 웃고, 나를 웃고, 시를 웃어 버립시다. 그리고 나서 털어 버립시다. 그놈을 너무 미워하면 당신 자신이 미워지니까.    
891    그녀만은 없었습니다... 댓글:  조회:4238  추천:0  2016-01-09
자, 떠납시다, 시의 여행을''            * 코스모스  온 들판에 코스모스가 가득 피어있습니다. 당신은 무작정 걷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녀가 없었습니다. 꽃들은 자꾸만 피어나는데 그녀가 없었습니다. 바람은 자꾸만 불어오는데 그녀가 없었습니다.  코스모스가 피어 있는 모습을 본 당신의 생각을 흐르는 대로 짧게 옮긴 것입니다. 생각의 흐름이 시적이지요? 시 쓰기에 마음을 모으다 보면 생각이 저절로 시적으로 흐르는 때가 있습니다.      인식된 내용을 그대로 옮겨도 좋습니다.  ①온 들판에 코스모스가 피어있습니다. ②그래서 나는 무작정 걷고 싶었습니다. ③그런데 그녀가 없습니다. ④꽃들은 자꾸만 피어나는데 그녀가 없었습니다. ⑤바람은 자꾸만 불어오고 꽃들은 자꾸만 흩어지는데 그녀가 없었습니다.    ①과 ②를 1연, ③과 ④를 2연, ⑤를 3연으로 하여 고백적 진술로 구성해 봅시다.     온 들판에 코스모스가 피어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무작정 걷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녀가 없습니다.   꽃들은 자꾸만 피어나는데   그녀가 없었습니다.  바람은 자꾸만 불어오고   꽃들은 자꾸만 흩어지는데   그녀가 없었습니다.  1연  온 들판에 코스모스가 피어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무작정 걷고 싶었습니다.  1행을 다듬어 봅시다. '온 들판'을 '온통'으로 고치면 어떨까요? 꽃은 들판에 있는 거니까. 시의 제목을 '코스모스'로 한다면 '코스모스'도 생략해도 좋겠지요. 그리고 꽃이 가득 피어 있는 곳은 '꽃밭'이라고 하지요? 정리해 봅시다. 애인에게 고백하는 진술로 다정하게. '온통 꽃밭이었지'.   2행의 '그래서'는 생략. 접속어는 어쩔 수 없는 때를 제외하고 생략하는 것이 좋습니다. 서술어를 1행과 어울리게 고쳐야겠지요?  온통 꽃밭이었지.  나는 무작정 걷고 싶었다.  2연  그런데 그녀가 없습니다.   꽃들은 자꾸만 피어나는데   그녀가 없었습니다.  여기에서 서정적 자아는 '나'. 1행의 '그녀'는 당신의 고백을 듣는 2인칭 '너'로 바꾸면 좋겠지요? 어조도 1행에 맞추어야겠지요? 그렇다면, '그런데 네가 없더라'.   2행의 '꽃'을 의인화하여 보면, '꽃들'은 사람들의 '웃음소리'에 빗댈 수 있겠지요? 그렇다면, '꽃들은 자꾸만 피어나는데'는 '웃음소리는 자꾸만 들려오는데'로 바꾸어야겠지요?.   3행에서도 '그녀'는 '네'. 역시 서술어도 앞의 어조에 맞춰 고백적으로 바꿔야겠지요? 그렇다면, '네가 없더라'  그런데 네가 없더라.  웃음소리는 자꾸만 들려오는데   네가 없더라.  행들간에 균형이 맞지 않지요? 3행이 다른 행들과 균형이 맞지 않습니다. 균형을 맞추려면 3행에 시어를 첨가해야겠지요? 시어를 첨가할 때는 앞의 내용을 바탕으로 하여 시어를 찾아야 합니다. '웃음소리는 자꾸만 들려오는데/ 네가 없더라.' 에서 '네'는 애인이겠지요?  지금 당신의 마음은 어떻습니까? 안타까운 마음으로 애인을 찾고 있지요? 그렇다면, '애인을 찾고자 하는 안타까운 마음'을 나타내는 시어 '아무리 찾아도'를 덧붙여 봅시다. 정리하면, '아무리 찾아도 네가 없더라'.  그런데 네가 없더라.  웃음소리는 자꾸만 들려오는데  아무리 찾아도 네가 없더라.    3연  바람은 자꾸만 불어오고   꽃들은 자꾸만 흩어지는데   그녀가 없었습니다.  1행은 그대로. 2행은 앞 연을 참고로 하면 '꽃'을 '웃음소리'로 바꾸었으니까, '웃음소리는 자꾸만 흩어지는데'의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흩어지는데'를 반복하면 더욱 좋겠지요? 정리하면, '웃음소리는 자꾸만 흩어지는데 흩어지는데'. 한 행이 너무 길지요? 그렇다면 행을 둘로 나누면 됩니다.   3행도 1연, 2연에서 사용한 시구 '네가 없더라'로 빠꿔 강조하기 위해 반복해 봅시다. '네가 없더라. 네가 없더라'  바람은 자꾸만 불어오고  웃음소리는 자꾸만   흩어지는데 흩어지는데  네가 없더라. 네가 없더라.     모아 봅시다.  온통 꽃밭이었지.  나는 무작정 걷고 싶었다.  그런데 네가 없더라.   웃음소리는 자꾸만 들려오는데  아무리 찾아도 네가 없더라.  바람은 자꾸만 불어오고  웃음소리는 자꾸만   흩어지는데 흩어지는데  네가 없더라. 네가 없더라.  끝없이 걸으십시오. 꽃밭처럼 번져오는 그리움을 안고. 당신의 애인을 만날 수 있을 테니까.    
890    아름다움이란 모든 것 몫, 몫, 몫... 댓글:  조회:3956  추천:0  2016-01-09
'자, 떠납시다, 시의 여행을''            * 느릅나무  어느 봄날, 당신의 친구가 느릅나무 한 그루를 선물했습니다. 당신은 그것을 화분에 심었습니다. 분재를 만들고 싶어서였습니다.   가위를 가지고 이리 저리 가지를 쳤습니다. 그런데 느릅나무가 영락없이 당신을 닮아간다고 친구들이 말했습니다.   가위를 놓고 서서 느릅나무를 봤습니다. 가지만 앙상하게 남아 있는 모습이 거울에 비쳐보는 당신 모습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입장을 바꿔 느릅나무가 당신을 보면 어떤 모습일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서글프고 부끄러웠습니다.  다시 당신이 되어 느릅나무를 봤습니다. 상처 난 줄기에서 돋아나는 새싹들이 안타까웠습니다. 꿈 많던 어린 시절의 당신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슬펐습니다.   이젠 나무도 당신도 슬프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느릅나무를 산에 옮겨 심어야겠지요? 그래서 당신은 느릅나무를 산에 옮겨 심었습니다.  이젠 느릅나무에게 한 마디쯤 당부를 해야겠지요? 그래서 당신을 닮지 말고 네 모습 그대로 살라고 말했습니다.  인식된 내용의 줄거리를 정리하면 됩니다.  ①친구에게 느릅나무 한 그루를 얻어다가 화분에 심었습니다. ②분재를 만들고 싶어서였습니다. ③가지를 이리 저리 쳤습니다. ④친구들이 앙상한 나를 닮아간다고들 말했습니다. ⑤그래서 느릅나무가 나를 보면 어떤 모습일까 생각했습니다. ⑥다시 내가 되어 느릅나무를 봤습니다. ⑦돋아나는 새싹들이 안타까웠습니다. ⑧꿈 많던 어린 시절의 나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슬펐습니다. ⑨그래서 느릅나무를 산에 옮겨 심었습니다. ⑩그리고 당부했습니다. ⑪나를 닮지 말고 네 모습 그대로 살아가라고.       ①을 1연, ②를 2연, ③과 ④를 3연, ⑤와 ⑥을 4연, ⑦과 ⑧을 5연, ⑨,⑩,⑪을 6연으로 하여 구성해 봅시다.  느릅나무 한 그루를 얻어다가  화분에 심었습니다.  분재를 만들고 싶어서였습니다.  가지를 이리 저리 치다 보니  앙상한 나를 닮아간다고들 말했습니다.  느릅나무가 나를 보면 어떨까 생각했습니다.  다시 내가 되어 느릅나무를 생각했습니다.  돋아나는 새싹들이 안타까웠습니다.  꿈 많던 어린 시절의   나를 보는 것 같아 슬펐습니다.  느릅나무를 산에 옮겨 심었습니다.  그리고 나를 닮지 말고 네 모습   그대로 살라고 당부했습니다.  1연  친구에게 느릅나무 한 그루를 얻어다가  화분에 심었습니다.    1행을 2행과의 균형을 맞추고 운율을 고르기 위해서 '친구에게'를 생략합시다.  느릅나무 한 그루를 얻어다가  화분에 심었습니다.  2연  분재를 만들고 싶어서였습니다.  '분재'를 구체화하여 봅시다. 분재는 화분에 나무를 고목처럼 기르는 것. 고목 중, 무엇처럼 기르고 싶습니까? '고향의 정자나무처럼'. 정자나무는 누구를 닮았습니까? '외할아버지'. 이것을 문맥에 맞게 다듬어 정리해 봅시다.  외할아버지를 닮은   정자나무처럼 기르고 싶었습니다.     3연  가지를 이리 저리 치다 보니  앙상한 나를 닮아간다고들 말했습니다.  1행의 문맥을 골라 '이리 저리 가지를 치다 보니'로 바꿀 수 있겠지요? 그래야 어감이 부드러워집니다. 2행의 '앙상한'을 구체화하면 '뼈만 남은'으로 바꿀 수 있겠지요?  이리 저리 가지를 치다 보니  뼈만 남은 나를 닮아 간다고들 말했습니다.  4연  느릅나무가 나를 보면 어떨까 생각했습니다.  다시 내가 되어 느릅나무를 생각했습니다.  1행을 간결하게 '느릅나무가 되어 나를 봤습니다.' 2행도 1행과 균형을 맞춰 '다시 내가 되어 느릅나무를 봤습니다.'  느릅나무가 되어 나를 봤습니다.  다시 내가 되어 느릅나무를 봤습니다.  5연  돋아나는 새싹들이 안타까웠습니다.  꿈 많던 어린 시절의   나를 보는 것 같아 슬펐습니다.  1행과 2행을 구체화해 봅시다. 지금 당신은 꿈 많던 어린 시절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새싹들'은 무엇처럼 돋아납니까? '추억처럼'. 바꾸어 보면, '추억처럼 돋아나는 새싹들'   그 '새싹들'이 당신을 안타깝게 하지요? 왜, 그렇습니까? 상처가 난 가지에서 돋아나니까 그렇지요? 말을 바꾸면 아픔 속에서 돋아나니까. 그렇다면 어떤 새싹들입니까? '아픈 새싹들'   모아 보면, '추억처럼 돋아나는 아픈 새싹들'  1, 2행이 이렇게 한 행으로 정리되었지요? 형상화하다 보면 시가 전혀 다르게 바뀌는 수가 많습니다. 3행은 그대로 두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추억처럼 돋아나는 아픈 새싹들  나를 보는 것 같아 슬펐습니다.     6연    느릅나무를 산에 옮겨 심었습니다.  나를 닮지 말고 네 모습   그대로 살라고 당부했습니다.  1행은 그대로 두어도 좋을 것 같습니다. 2행의 '나를 닮지 말고'를 '내가 되지 말고'로 고치면 어떨까요? 그렇다면 '네 모습'은 '네가 되어'가 되어야겠지요? 정리하면, '내가 되지 말고 네가 되어'  3행, '그대로 살라고 당부했습니다'에서 '그대로'를 구체화하여 봅시다. 구체화의 기본은 다른 대상에 빗대어 보는 것. 무엇처럼 살라고 당부하겠습니까? '고향처럼'. 바꾸어 보면, '고향처럼 살라고 당부했습니다'가 되겠지요?    느릅나무를 산에 옮겨 심었습니다.  내가 되지 말고 네가 되어  고향처럼 살라고 당부했습니다.  모아 봅시다.  느릅나무 한 그루를 얻어다가  화분에 심었습니다.  외할아버지를 닮은  정자나무처럼 기르고 싶었습니다.  이리 저리 가지를 치다 보니  뼈만 남은 나를 닮아 간다고 말했습니다.  느릅나무가 되어 나를 봤습니다.  다시 내가 되어 느릅나무를 봤습니다.  추억처럼 돋아나는 아픈 새싹들  나를 보는 것 같아 슬펐습니다.  느릅나무를 산에 옮겨 심었습니다.  내가 되지 말고 네가 되어  고향처럼 살라고 당부했습니다.  쉽게 쓰여졌습니다. 이것은 대상 인식하기 과정에서 당신의 생각이 쉽게 정리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위해 중요한 것은 대상에 감흥을 느끼면 이야기를 엮어 보는 것입니다.  아름다움이란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가 제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 그래서 풀은 풀처럼, 나무는 나무처럼, 사람은 사람처럼 제 노래 제가 부르는 것이 아닐까요?  
889    뭇 벗님들의 하늘이 늘 함께 푸르기만을... 댓글:  조회:4204  추천:0  2016-01-09
박석구 시작법 연재   '자, 떠납시다, 시의 여행을''            * 종이학      당신의 아내는 날마다 학을 접습니다. 그래서 큰 병 안에는 날마다 수많은 학들이 쌓여 갑니다.     '아내는 왜, 학을 접는 걸까요?'  당신의 의문이 고개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당신은 오랜 생각 끝에 짧은 이야기 하나를 꾸며 봤습니다.    "어느 날, 잠에서 깨어 보니, 아내가 접어놓은 학들이 하늘을 날고 있습니다.  수많은 학들이 어둠 속에서 하늘을 날고 있습니다.  나는 나의 가슴에 대고 물어 보았습니다.  '아내는 왜, 날마다 학을 접는 것일까?'  '학은 얼마나 많은 밤을 저렇게 난 것일까?'   그래서 아내의 얼굴을 쳐다봤습니다.   피곤한 잠을 자고 있는 모습을 보니 가슴속을 아프게 파고드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미안함과 부끄러움이었습니다.  나를 위해 자기를 버리는 아내의 삶에 대한 양심의 가책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아내가 학을 접는 까닭을 알았습니다.  내가 나만의 하늘을 날고 싶듯이 아내도 아내만의 하늘을 날고 싶어서 그럴 거라고."  이것은 종이학을 보고 상상한 이야기입니다.   ① 어느 날 잠에서 깨어나 보니, 아내가 접어놓은 학이 하늘을 날고 있었습니다 ② 수많은 학들이 어둠 속에서 하늘을 날고 있었습니다. ③ 아내는 왜, 날마다 학을 접는 것일까요? ④ 학은 얼마나 많은 밤을 난 것일까요? ⑤ 아내의 얼굴을 쳐다보았습니다. ⑥ 피곤하게 자고 있는 아내를 보니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⑦ 아내도 자신만의 하늘을 날고 싶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①을 1연, ②를 2연, ③과④를 3연, ⑤와 ⑥을 4연, ⑦을 5연으로 구성해 봅시다.  연은 생각의 변화, 또는 사건의 변화, 시간의 변화, 장소의 변화 등에 따라 당신의 뜻대로 구분하 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성하기에서도 퇴고가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어느 날 잠에서 깨어나 보니  아내가 접어놓은   학들이 하늘을 난다.  수많은 학들이  어둠을 속에서 하늘을 난다.  아내는 왜, 날마다  학을 접는 것일까.  얼마나 많은 밤을   학은 난 것일까.  피곤하게 잠이 든 아내를 보니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아내도 아내만의 하늘을   날고 싶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연  어느 날 잠에서 깨어나 보니  아내가 접어놓은   학들이 하늘을 난다.  1행의 '잠'은 어떤 잠일까요? 포근한 잠, 피곤한 잠, 시린 잠 중 어떤 잠입니까? '시린 잠'이 어울리겠지요?   당신은 그 '시린 잠 속'에서 어떻게 나왔습니까? '깨어나'를 문맥에 맞게 고치자는 것입니다. 다시 묻습니다. 시린 잠 속에서 어떻게 나왔습니다. 쫓겨 나왔겠지요? 언제나 쫓기듯 사는 시린 삶이니까. 바꿔 보면, '시린 잠 속에 쫓겨 나와'.   '보니'를 구체화하여 '눈을 떠보니'로 바꾸면 좋겠지요?            시린 잠 속에서 쫓겨 나와  눈을 떠보니  아내가 접어놓은   학들이 하늘을 난다.    2연  수많은 학들이  어둠을 속에서 하늘을 난다.    1행의 '수많은 학'이라는 시어는 구체화가 되지 않았습니다. 구체화하기 위해서는 숫자를 제시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수많은'이라는 시어를 구체화하기가 좋은 숫자는 무엇일까요 천마리 만 마리나'라고 하면 되겠지요? 이런 때는 정확한 숫자를 제시하면 정감이 감소됩니다.    '학'은 1연에도 나오고 '천 마리나 만 마리나'라는 시어에 그 의미가 나타나 있으니까  동어반복을 피하기 위해 생략합시다.   2행에서 '어둠 속에서' 학은 '어둠'을 어떻게 하며 날고 있을까요? 여기에서는 '어둠'은 부정적 현실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둠을 헤치며 하늘을 난다'로 바꿀 수 없을까요?  천 마리 만 마리나  어둠을 헤치며 하늘을 난다    3연  아내는 왜, 날마다  학을 접는 것일까.  얼마나 많은 밤을   학은 난 것일까.    1행의 '날마다'를 '날이면 날마다'로 반복해 의미를 강조시켜 봅시다. 나머지는 그대로 두어도 좋겠지요?    아내는 왜, 날이면 날마다  학을 접는 것일까.  얼마나 많은 밤을  학은 난 것일까.    4연  피곤하게 잠이 든 아내를 보니  미안한 마음이 든다.    1행의 '피곤하게 잠이 든 아내를 보니'에서 당신은 아내의 어디를 봤습니다? '얼굴'을 봤겠지요?   어떤 맘으로 봤습니까? 미안한 마음으로 아내 몰래 아내를 보았지요? '미안한 마음으로 아내 몰래 아내를 보는 것'은 결국 훔쳐보는 것이지요? 정리해 봅시다.  '피곤하게 잠이 든 아내의 얼굴을 훔쳐보노라면'.   한 행이 너무 긴 것 같지요? 이런 경우에는 시어를 생략하는 방법과 행을 나누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런데 1차적인 것은 시어를 생략하는 것. 우선 '피곤하게'를 생략해 보면 어떨까요? 그렇다면'잠이 든 아내의 얼굴을 훔쳐보노라면'이 되겠지요? 그래도 긴 것 같지요? 이젠 두 행으로 나누어 봅시다.  잠이 든 아내의 얼굴을  훔쳐보노라면  미안한 마음이 든다.  3행의 '미안한 마음이 든다.'에서 '미안한 마음'은 어째서 가지게 됐습니까? 가난한 살림에 시달리게 해서 그렇겠지요? 당신만의 일을 위해 아내의 희생을 요구해서 그렇겠지요? 그렇다면 당신은 지금, 마음이 괴롭겠지요? 이 모든 것은 당신의 잘못이라는 생각이 들겠지요? 이것을 '자책'이라 합니다.   이 '자책'을 구체화하면 어떻게 될까요? 자책은 '내가 나를 꾸짖는 것'. 이것을 구체화하면 '내가 나를 물어뜯는다'로 변화를 주어  봅시다. 그렇다면, '나를 물어뜯는 나'로 바꿀 수 있겠지요?       잠이 든 아내의 얼굴을   훔쳐보노라면  나를 물어뜯는 나  4연  아내도 아내만의 하늘을   날고 싶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시에서의 주인공은 '나'인 당신입니다. 아내는 '당신'이 되겠지요? 아내에게 속삭이듯 당신의 생각을 말해 보십시오. 될 수 있는 대로 줄여서 말하는 것이 좋습니다. 시의 생명은 압축에 있는 지도 모르니까.  당신도 당신만의   하늘을 날고 싶겠지.  이제 하나로 모아 읽어봅시다.  시린 잠 속에서 쫓겨   나와 눈을 떠보니  아내가 접어놓은   학들이 하늘을 난다.  천 마리나 만 마리나   어둠을 헤치며 하늘을 난다.  아내는 왜, 날이면 날마다  학을 접는 것일까.  얼마나 많은 밤을   학은 난 것일까.  잠이 든 아내의 얼굴을   훔쳐보노라면  나를 물어뜯는 나.  당신도 당신만의   하늘을 날고 싶겠지.  퇴고할 것이 있으면 퇴고해 봅시다. 삶과 마찬가지로 시도 언제나 미완성품입니다. 발표한 후에도 맘에 들지 않으면 고쳐야 합니다. 우리의 삶이 끝나는 날까지.   사람들은 저마다의 하늘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기만의 하늘을 고집하는데 있습니다. 우리 함께 손을 모아 빌어 봅시다. 당신의 하늘과 내 하늘이 언제나 함께 푸르기를…….    
888    詩의 旅行을 떠나며... 댓글:  조회:4122  추천:0  2016-01-09
박석구 시작법 연재   '자, 떠납시다, 시의 여행을''   시의 여행을 떠나면서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많은 대상과 현상을 만납니다. 이런 대상과 현상의 모든 것을 세계라고 합니다. 이 세계에서 우리는 무엇인가를 보고, 느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을 표현하고 싶은 욕구를 가집니다.  그럼, 대상과 현상에서 느끼고 생각한 것을 어떻게 한 편의 시로 표현해야 하는 걸까요? 이런 막연한 질문에 시인도 독자도 당황하는 때가 많습니다. 예술이라는 이름의 것들은 그것에 접근하는 방법이 다양하고, 그 방법을 구체화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기존 시인들의 작품을 수없이 읽고, 외우고, 자기의 작품을 끊임없이 쓰고, 지우다 보면 표현 방법이 저절로 터득된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길은 너무 멀고, 그것은 지도 없이 세계여행을 떠나는 행위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나, 나름대로 시를 쓰고, 지우고, 다시 쓰면서 느끼고, 생각한 것을 정리하여 옮겨 보기로 했습니다. 더 정확히 말한다면, 부끄럽지만 나의 시작 과정을 밝힌 것입니다. 그러나 이 글은 나의 해답일 뿐, 정답은 아닙니다. 그것은 살아가는 방법이 다르듯이 시를 쓰는 방법이 사람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글에서 인용한 모든 시는 나의 시 중에서 가려 뽑았습니다. 나의 시작 과정을 밝히는 글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습니다. 인용한 시들은 나의 삶 속에서 캐낸 평범한 이야기들을 소재로 하여 우리가 사용하는 일상적인 언어를 도구로 한 것들입니다. 살아오는 동안, 가슴에 남은 이야기들을 시로 바꾸어 보았다고 하는 것이 옳은 말일지 모릅니다.          평범한 것이 아름답고, 쉬운 것이 옳다는 말을 나는 좋아합니다. 시는 쉬워져야 합니다.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가 아니라 누구나 쉽게 부를 수 있는 노래가 되어야 합니다. 달나라나 별나라의 신기한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들의 삶 속의 이야기가 드러나야 됩니다.   이 글은 시를 전문으로 쓰는 시인들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시에 대해 호기심을 가진 사람들의 길잡이가 되는 것입니다. 시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 자신들의 삶 이야기를 시로 바꾸어 보는 연습을 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책의 제목을 '자, 떠납시다, 시의 여행을'이라고 하였습니다. 시를 쓰는 과정을 함께 가 보자는 생각에서 정한 것입니다. 평범한 마음으로 평범한 대상들을 가슴에 담아 시로 바꾸어 보자는 것입니다.    '자, 떠납시다, 시의 여행을'.   여행 준비  시의 여행을 떠나기 위해서는 시에 대한 이론을 조금은 익혀야 합니다. 이것이 여행 준비. 이 장에서는 시의 개념, 표현 방법, 대상인식 등에 관한 것을 살펴보기로 합시다.     1. 시의 개념  예술은 어떤 대상(사물과 현상)에 대한 인식을 아름답게 표현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 중, 언어를 도구로 하는 것이 문학, 문학 중에서 운율을 강조하는 것이 운문, 운문의 대표적인 형태가 시입니다. 다시 정리하여 보면, 시는 대상에 대한 인식을 운율 있는 언어로 아름답게 표현한 문학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대상은 시의 소재, 즉 글감을 말합니다. 당신이 살아가면서 만나는 어떤 대상이 당신에게 감흥을 주었다면, 그것이 시의 소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럼, 다음 시를 읽으면서 시의 여행을 준비해 봅시다.    하루에 한 번쯤은 혼자 걸어라.  세상 이야기들 그대로 놓아 두고  세상 밖으로 걸어 나와라.  말이 되지 말고, 소가 되어  나에게 속삭이며 혼자 걸어라.  괴로움이 나를 따라 오거든  내가 나에게 술도 한잔 받아 주고  나를 다독이며 혼자 걸어라.  나무도 만나고, 바람도 만나면  마음은 어느 사이 푸른 들판  잊었던 꽃들이 피어나고  고향 내음새 되살아나  내 가슴을 울리는 나의 콧노래  하루에 한번쯤은  이렇게 나를 만나며 살아가거라.    - 하루에 한 번쯤은-    시는 외로움과 그리움을 먹고사는 것, 혼자가 되어 한 번 걸어 보십시오. 발은 걸으라고 조물주가 만들어 준 것.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남이 아니라 당신 자신과 함께 걸어 보십시오. 가슴에 엉켰던 것이 녹아 내리고, 스쳐 지나가던 것들이 새롭게 눈을 떠 당신의 친구가 될 것입니다. 멀리 보이던 것들이 가까이 보이고, 가까이 보이던 것들이 멀리 보이게 됩니다. 그러면 당신은 거울이 될 수 있습니다. 만나는 모든 것들을 가슴속에 그대로 담을 수가 있습니다. 어떤 대상과도 말없는 말로 가슴을 열 수가 있습니다.    풀과 나무에게 다정한 말을 건네 보십시오. 들판의 풍경들을 가슴 속에 그려 보십시오. 하늘을 향해 외쳐 보십시오. 당신 자신과 해가 지도록 얘기를 나누어 보십시오. 거기에 상상의 세계가 있습니다. 아무도 흉내 낼 수 없는 당신만의 세계가 있습니다. 진실이 있습니다. 거기에서 당신은 당신만의 자유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이러는 동안, 당신에게 감흥을 준 모든 사물과 현상, 즉 대상이 시의 소재입니다.    인식은 대상에 대한 당신의 느낌과 생각을 말합니다. 이것이 시의 바탕이 됩니다.  그리고 시에서의 언어를 시어라고 하는데, 이 시어들의 어울림이 운율입니다.  그렇다면 아름다움이란 무엇을 말하는 걸까요? 그것은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감동은 우리의 가슴에 크나큰 즐거움을 주는 것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크나큰 즐거움일 수도 있고, 잔잔한 미소를 자아내는 기쁨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가슴을 울리는 슬픔일 수 있고, 눈가에 맺히는 몇 방울의 눈물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울부짖게 하는 함성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것이 우리에게 감동을 줄까요? 그것은 진실한 것입니다. 진실이란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 속에서 우러나는 사랑, 미움, 아픔, 기쁨, 슬픔을 거짓없이 드러내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런 삶 속에서 빚어지는 고독, 그리움, 방황, 울분 등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것을 말합니다.    왜, 우리는 진실을 표현하려 하는 걸까요? 말을 바꿔 보면, 왜, 우리는 밤을 새워 시를 쓰는 것일까요? 그리고 우리는 왜, 시를 읽는 걸까요?  시를 쓰는 이유는 표현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며, 시를 읽는 이유는 자신의 감동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것입니다.    표현과 감동의 결과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정신적 즐거움과 영혼의 정화입니다. 우리들의 삶을 맑고, 밝고, 풍요롭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시에서의 웃음은 기쁨을 밝히는 것, 울음은 슬픔을 걸러 내는 것, 외침은 분노를 털어 내는 것. 결국, 웃음도, 울음도, 외침도 마음을 정화시키는 정신적 배설작용입니다.  좋은 시를 읽으면 마음이 맑아지고, 좋은 그림을 보면 마음이 고요해 지고, 좋은 음악을 들으면 마음이 그윽해 진다고 말합니다. 결국 모든 예술은 우리의 삶을 정화시키기 위한 것들입니다.    시를 쓰는 일은 삶의 목적이 아닙니다. 시는 삶을 위한 하나의 방편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시는 삶의 충분 조건일 뿐이지, 필요 조건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삶을 위해 시가 필요한 것이지, 시를 위해 삶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남에게 보여 주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닙니다.  돌에다 이름을 새기기 위해  사는 것이 정말 아닙니다.  삶의 목적은 삶    죽어 금이 되는 것이 아니라  살아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 삶. 3 -  우리는 지나치게 목적을 중시하고, 과정을 경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삶은 어떤 목적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살아가는 모든 과정, 그 자체입니다. 삶이 다른 목적을 가질 때, 그 삶은 진실성을 상실하게 됩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시를 포함한 모든 예술은 우리가 이루어야 할 목적이 아니라, 삶을 엮어 가는 수단으로써의 가치를 가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진실이 우리에게 감동을 줄까요? 아닙니다. 그 진실을 실감나게 표현했을 때, 우리는 감동을 받습니다. 2. 표현 방법  표현 방법은 어떤 대상에 대해 인식한 내용을 드러내는 방법으로, 묘사와 진술로 나눌 수 있습니다. 묘사는 대상의 현상이나 성질, 인상을 감각적으로 그려내는 것을 말하고, 진술은 그것들을 묘사하지 않고, 직접 상대방에게 들려주듯 드러내는 것을 말합니다. 시는 이 두 방법이 알맞게 어우러져 그 모습을 드러내야 됩니다.    묘사의 종류에는 서경적 묘사, 심상적 묘사, 서사적 묘사로 나눌 수 있고, 진술은 독백적 진술, 권유적 진술, 해석적 진술로 나눌 수 있습니다.  서경적 묘사는 보고, 느낀 것을 직접 그려내는 묘사이고, 심상적 묘사는 마음 속에 떠오르는 풍경을 그려내는 것이고, 서사적 묘사는 사건이나 현상을 시간의 연속을 통해 그려내는 것입니다.  독백적 진술은 인식 주체의 독백, 고백, 반성, 회고, 기원 등을 진술하는 것이며, 권유적 진술은 동조, 참여, 각성을 청하는 인식의 주체의 주장을 내세운 진술이며, 해석적 진술은 대상에 대한 인식 주체의 이해, 해석, 비판, 판단을 드러낸 진술입니다.  너무 말이 많아 미안합니다. 시를 쓰는 일은 나누는 작업이 아니라 모으는 작업인데 말입니다. 그러나 묘사와 진술의 종류를 아는 것은 시의 틀을 짜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에 설명했습니다.  시에서의 묘사와 진술은 시적 자아에 의해 드러납니다. 시적 자아란 시 속에서의 인식 주체를 말합니다. 인식 주체는 1인칭인 '나'입니다. 소설에 빗대어 본다면 서술자와 같은 존재입니다. 시에서 주인공일 수도 있고, 대상에 대한 관찰자일 수도 있고, 대상에 대한 전지적 제삼자일 수도 있습니다.    햇빛 부스러지는 아침  금낭화 속에서 기어 나오는  일곱 점박이 무당벌레  하, 요놈이, 어젯밤  산을 그렇게 울리었구나.       -산 29 -   1연이 묘사이고, 2연이 진술입니다. 1연은 한 폭의 그림을 떠오르게 하고, 2연은 당신의 느낌과 생각을 시적 자아를 통해 상대방에게 들려주듯 드러낸 것입니다. 그렇다고 묘사와 진술을 선명하게 구분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구분하는 것은 묘사가 중심이 되었는가, 진술이 중심이 되었는가를 판단하는 것뿐입니다.    * 만나는 대상에서 느끼는 것을 가슴속에 그려봅시다. 만나는 대상에 대해 생각한 것을 가슴에 대고 속삭여 봅시다. 이 때, 느끼고 생각하는 것을 대상 인식이라고 합니다. 인식한 대상을 그려보는 것이 묘사의 시작이고, 인식한 대상에 대해 속삭여 보는 것이 진술의 시작입니다.  구태여 길게 묘사하고, 길게 진술할 필요가 없습니다. 한 줄의 문장이 오히려 좋을 때도 있습니다. 이것이 대상을 본 후, 곧 바로 느끼고, 곧 바로 생각하는 직관, 대상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보는 방법입니다. 이것이 바로 대상인식의 첫걸음입니다.
887    詩적 발견, 그 새로운 눈 댓글:  조회:4486  추천:0  2016-01-09
시적 상상력을 구사하는 몇 가지 방법   시인 · 고재종 범속한 사물과 일상 속에서 생의 의미를 들여다보고자 갈망하는 이들이야말로 시인이다. 그들은 이 겨울 산야에서도 상고대며  설화며 인동초며 동백꽃 등 갖가지 꽃들이 風光 속에서 눈부시게 명멸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가만히 시를 기원한다. 세상의 외진  한 귀퉁이를 여리게나마 밝히는 등불 같은 시도 기원한다. 그것들은 시인의 삶의 절절한 체험 속에서만 탄생한다. 그러나 아무 리 절절한 삶의 체험이라도 그것이 상상력을 통한 시적 체험으로 올라서지 않는 한 우리는 그러한 시들에서 삶의 의미와 꿈은커 녕 일상의 지루한 설명만 듣게 되는 것이다. 우선 다음 상상력의 기본을 잘 구사한 시 두 편을 보자.  재로 지어진 옷 - 나희덕  흰나비가 소매도 걷지 않고  봄비를 건너간다  비를 맞으며 맞지 않으며  그 고요한 날갯짓 속에는  보이지 않는 격렬함이 깃들어 있어  날개를 둘러싼 고운 가루가  천 배나 무거운 빗방울을 튕겨내고 있는 것이다  모든 날개는 몸을 태우고 남은 재이니  제 마음 몇 배의 돌덩이를 굴려 올리면서도  걸음이 가볍고 가벼운 저 사람  슬픔을 물리치는 힘 고요해  봄비 건너는 나비처럼 고요해  비를 건너가면서 마른 발자국을 남기는  그는 남몰래 가졌을까  옷 한 벌, 흰 재로 지어진  흰 재로 지어진 옷 한 벌을 남몰래 가진 사람은 비를 건너가면서도 마른 발자국을 남긴다. 소매도 걷지 않고 봄비를 건너가는  나비의 고요한 날갯짓 속에는 사실 얼마나 격렬한 삶의 욕망이 있겠는가. 그럼에도 날개를 둘러싼 고운 가루가 천배나 무거운  빗방울을 퉁겨내면서 비를 맞으며 비를 맞지 않으며 가는 나비! 그 나비는 제 마음 몇 배의 돌을 굴리면서도 걸음이 가볍고가벼운  사람과 같다. 봄비 건너는 나비처럼 무거운 슬픔을 물리치는 힘도 고요히 간직한 사람이다. 한데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모든  날개는 몸을 태우고 남은 재인 것처럼 그 사람도 이미 흰 재로 지어진 옷 한 벌을 남몰래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는 결국 재 혹은 흰 재인데, 이건 삶의 허무나 혹은 어떤 큰 지혜를 가르키는 바, 그런 걸 소유한 사람은 역시 남보다 몇 배 의 무거운 돌멩이를 굴리면서도 나비처럼 고요하고 가볍게 한 세상을 건널 수 있지 않겠는가. 참으로 빗속의 나비날개와 흰 재와  그것을 무욕의 사람과 연결시키는 상상력이 놀라울 뿐이다.  채와 북 사이, 동백 진다 - 문인수  지리산 앉고  섬진강은 참 긴 소리다.  저녁노을 시뻘건 것 물에 씻고 나서  저 달, 소리북 하나도 중천 높이 걸린다.  산이 무겁게, 발원의 사내가 다시 어둑어둑  고쳐 눌러앉는다.  이 미친 향기의 북채는 어디 숨어 춤추나  매화 폭발 자욱한 그 아래를 봐라  뚝, 뚝, 뚝 듣는 동백의 대가리들.  선혈의 천둥  난타가 지나간다.  이 시는 강가에서 북을 치며 판소리가락을 내뽑는 사람의 모습을 일단 표현한 것인데, 그 소리꾼은 지리산으로, 북은 중천의 보름 달로, 터져 나오는 노래는 섬진강 긴 자락으로, 그 노래의 한은 시뻘건 저녁놀로, 북채는 폭발하는 매화 향기로, 그리고 선혈의 난 타는 뚝뚝뚝 듣는 동백의 대가리로 상상을 한 시로 가히 우주적이다. 상상력의 전범을 보여준 시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 모두 상상력을 잘 구사할 수 있게 하는 몇 가지 시적 전략을 생각해 보자.  1. 발견, 그 새로운 눈  발견이란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발명과 달리 고작해야 이미 존재하는 것을 찾아내는 것이다. 수많은 삶의 편린들 속에서 시가  될 수 있는 특정한 편린들을 찾아내는 것이다. 뒤샹이란 화가가 있다. 그는 한 전시회에서 수세식 변기를 그대로 전시장으로 옮겨  놓고는 그것을 이라고 이름 붙였다.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이 작품을 두고 사람들은 숱한 입방아를 찧었다. 더러는 예술 을 모독한 것이라고, 어찌 변기를 이 신성한 예술 전시의 공간으로 끌어들였느냐면서 당장 철거하라고 발광을 했다. 더러는 천재 적인 예술가의 등장으로 예술의 영역이 한없이 확장될 것이라고 조심스런 전망을 내리기도 했다. 더러는 예술과 예술이 아닌 것은  결코 선을 긋듯이 명확한 것이 아니며, 다만 예술이란 제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면 모든 것이 예술임을 피력하기도 했을 것이 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다음 시를 보자.  (1) 숙자는 남편이 야속해 - 황지우  길중은 밤늦게 돌아온 숙자  에게 핀잔을 주는데, 숙자는  하루종일 고생한 수고도 몰  라주는 남편이 야속해 화가  났다. 혜옥은 조카 창연이  은미를 따르는 것을 보고 명  섭과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이모는 명섭과  은미의 초라한 생활이 안쓰  러워…  어느 날 나는 친구집엘 놀러  갔는데 친구는 없고 친구 누  나가 낮잠을 자고 있었다. 친  구 누나의 벌어진 가랑이를  보자 나는 자지가 꼴렸다. 그  래서 나는…  (2) 掌篇 - 김종삼  작년 1월 7일  나는 형 종문이가 위독하다는 전달을 받았다  추운 새벽이었다  골목길을 내려가고 있었다  허술한 차림의 사람이 다가왔다  한미병원을 찾는다고 했다  그 병원에서 두 딸아이가 죽었다고 했다  부여에서 왔다고 한다  연탄가스 중독이라고 한다  나이는 스물둘, 열아홉  함께 가며 주고받은 몇 마디였다  시체실 불이 켜져 있었다  관리실에서 성명들을 확인하였다  어서 들어가보라고 한즉  조금 있다가 본다고 하였다  시 (1)은 (하오 9시 45분)라는 부제가 달려있는데 말할 것도 없이 이 시의 전반부는 신문의 TV프로  안내에 있는 프로그램 소개문이다. 그리고 후반부는 공중변소 등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저질 낙서이다. 시인은 이 두 가지 글을  빌려와 나열해놓았을 뿐 시인 자신의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두 종류의 글이 어떤 시적 연관을 지니고 있는 것 도 아니다. 그러면 이 시의 의미는 무엇인가? 시인은 앞의 글과 뒤의 글이 같다는 것을 말함으로써 결국 저질연속극을 신랄하 게 야유하고 있다.  그런데 이 시의 소재 자체는 우리가 흔히 일상에서 체험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발견적 상상력이라는 엄격한 시선이 이 시를  관장하고 있고, 또한 그 밑에 시대상황 혹은 시대정신에 대한 주제의식이 치열하게 깔려 있어 시로서 성공한 것이다. 사실 이  시는 어떤 의미에서 시의 폭력이다. 시인과 독자가 맺은 약속의 공간을 과감하게 일탈해버린 시라고 할 수도 있다. 이에 대한  면책은 오로지 시적 진실로서만 가능하다.  시 (2)는 매우 드라이한 시이다. 형 종문에 대한 병문안을 가다가 추운 새벽 골목길에서 만난 허술한 차림의 사람을 만나 병원 까지 가다가 들은 이야기를 시적 주체의 그 어떠한 반응도 생략한 채 간략하게 기록했을 뿐인 시이다. 그러나 그 시적 내용은  천둥벼락이라도 쳐서 무너져 내릴 듯한 것이다. 꽃다운 나이에 공장에 다니다가 연탄가스에 중독되어 죽은 두 딸을 찾아가는  아버지의 마음을 무엇으로 표현할 것인가. 그 내용의 참담함을 시적 주체가 아무리 긴절한 언어로 표현한다 해도 미치지 못할  것임을 시인은 잘 알기에 오히려 간략한 사실기록 형식을 취했을 것이다. 더구나 끝의 두 행, 곧 “어서 들어가보라고 한즉/ 조금 있다가 본다고 하였다”라는 함축적인 표현을 통해 그 아비의 끝없이 무너져 내리는 마음을 잘 드러내고 있는데 어쩌면  이 시는 바로 위 두 행 때문에 성공을 거두고 있는 것이다. 어쨌거나 이 시도 흔히 겪을 수 있는 일상의 체험을 시로 옮긴 것인 데 바로 시의 끝 두 행의 예리한 발견을 통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것이다.  사실 발견적 상상력은 소재를 새로운 눈으로 보는 것이다. 한편의 문학작품을 읽을 때 독자들은 일정한 前理解을 갖게 마련이다.  전이해는 작품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요소이다. 전이해란 일종의 선입견으로, 동시대의 삶의 상황과, 시와 시인에 대한 기대  그리고 언어지식, 자신의 인생관 등등이 얼크러져 있는 인식의 배경이다. 한편의 시를 읽을 때 그 시에 대한 전이해가 중요한 해 석의 수단이 된다. 그러나 전이해가 그대로 이해가 되지는 않는다. 작품 속의 구체적 사실들의 의미를 전이해를 통하여 해명하지 만, 그 부분들은 다시 이해의 틀을 수정한다. 즉, 전체의 의미는 부분들의 의미를 밝혀주지만 그 부분들의 의미는 다시 전체의  의미를 변환시킨다. 그러므로 독자가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전이해에 아무런 변화를 요구할 수 없는 시는 새로움이 없는 시다.  2. 관찰, 갈망으로 들여다보기  떨어지는 별똥별을 보며 소원을 빌면 그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속설이 있다. 정말 그럴까. 별이 떨어지는 그 짧은 순간에 소원을  빌기 위해서는 그 바람을 언제라도 가슴에 담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갑작스런 유성의 낙하 앞에서 간절하게 그 바람을 간구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와의 사랑이 이루어지길’ 언제라도 기원할 수 있는 그 갈망, 그 열망이야말로 희망을 현실로 바꾸 는 원동력이다. 그 갈망이 있을 때에야 늘 범속한 사물과 일상 속에서도 생의 의미를 들여다보고 관찰해낼 수 있는 것이다.  (4) 공터 - 최승호  아마 무너뜨릴 수 없는 고요가 .  공터를 지배하는 왕일 것이다  빈 듯하면서도 공터는  늘 무엇인가로 가득 차 있다  공터에 자는 바람, 붐비는 바람,  때때로 바람은  솜털에 쌓인 풀씨들을 던져  공터에 꽃을 피운다  그들의 늙고 시듦에 .  공터는 말이 없다 .  있는 흙을 베풀어주고  그들이 지나가는 것을 무심히 바라볼 뿐.  밝은 날  공터를 지나가는 도마뱀  스쳐가는 새가 발자국을 남긴다 해도  그렇게 오래 가지는 않을 것이다  하늘의 빗방울 자리를 바꾸는 모래알들,  공터는 흔적을 지우고 있다  아마 흔적을 남기지 않는 고요가  공터를 지배하는 왕일 것이다  (5) 둑 - 김춘수  봄이 와 범부채꽃이 핀다.  그 언저리 조금씩 그늘이 깔린다.  알리지 말라,  어떤 새가 귀가 없다.  바람은 눈치도 멀었다. 되돌아와서  한번 다시 흔들어 준다.  범부채꽃이 만든  (아무도 못 달래는)  돌아앉은 오목한 그늘 한 뼘.  점점점 땅을 우빈다.  시 (4)의 대상은 ‘공터’이다. 아무도 없는 여름 한낮 그 공터의 한쪽 귀퉁이에 앉아 시인은 적요와 적멸이 아니라, 동그란 세모와 도 같은 역설적인 텅 빈 충만을 지켜보고 있다. 고요의 지배 아래 공터에는 “자는 바람, 붐비는 바람” 풀씨들을 던져 꽃을 피우는 바람으로 가득 차 있다. 또 거기에는 밝은 날 지나가는 도마뱀과 스쳐가는 새발자국과 빗방울과 그 빗방울에 자리를 바꾸는 모래 들이 있다. 그러나 공터는 이 존재하는 것의 고통스런 생로병사에 왈가왈부하지 않는다. 그저 흙을 베풀고 “무심히 바라볼 뿐”이 다. 그리고 이 공터에는 어떤 흔적조차 오래가지 않는다. 그 흔적은 “하늘의 빗방울에 자리를 바꾸는 모래알들”로 지워져 버리기  때문이다. 고요 아닌 그 어떤 것도 공터를 지배하지 못하고 고요만이 왕인 것이다.  이 시에 내재된 기본적인 상상력은 유추이다. 하나의 대상을 구축함으로써 넌지시 다른, 정작 말하고자 하는 또 다른 대상을 환기 시키는 상상력 말이다. 그렇다면 이 시 곧 공터를, 고요가 지배하는 공터를 통해 시인이 건네고자 하는 진짜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공터라는 대상의 즉물적인 세계가 아니라 인간적인 세계임은 물론이다. 그렇다면 인간적인 세계는 어떠한 세계인가? 구체 적인 단서는 ‘늙고 시듦’에서 찾을 수 있다. 그것은 생로병사의 인생의 四苦를 의미한다. 더욱이 이 시 전체 흐름이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는 이항대립을 넘어서 있다는 점에서 현저히 불교적인 사상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텅 빈 충만’이라는 역설 적인 세계인식이 도처에서 드러나며, 따라서 이 시에서 유추해낼 수 있는 인간적 세계는 우리들이 살아가는 세상살이인 것이다.  이 세상살이를 한 차원 높은 ‘빗방울’을 내리는 하늘의 관점으로 들여다보면, 지독히 분주하게 움직이는 이 세상에서 삶의 진정한  주인이란 오히려 적요와 적멸뿐이라는 것이다. 色卽是空이라는 인식이 견고하게 버티고 있는 것이다. 그러하거늘 ‘흔적을 남긴다’ 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겠는가? 그 삶의 흔적인 생의 자취란 잠깐 남기는 도마뱀, 스쳐가는 새의 발자국이자 조만간 작은 모래알로  지워져버릴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시에서 유추적 상상력보다 더욱 선명한 이미지로 드러나는 것은 관찰로서의 상상력이다. 그 관찰은 보이지 않는 ‘고요 ’를 보게 할뿐만 아니라 ‘붐비는 바람, 잠드는 바람’도 보게 한다. 무엇보다도 “하늘의 빗방울에 자리를 바꾸는 모래알들”이란 관찰 은 얼마나 정교하고 놀라운가. 그 미세한 움직임조차 또렷이 형상화함으로써 시인은 이 세계의 놀라운 추이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시 (5)에서는 시적 주체가 사라진다. 시적 대상에 반응하는 시적 주체의 마음이나 감정이나 생각이 전혀 없다. 그리고 오로지 이  시에는 눈, 관찰의 눈, 투명한 관찰의 눈만이 존재한다. 어쩌면 이 관찰의 투명한 눈 속에 시적 주체가 들어가 있다. 우리의 모든  서정시에 공식처럼 얘기되는 주관성을 극복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봄이 오는 날 시인은 둑에 피는 범부채 꽃을 본다. 그러나 그가 강조하는 그 언저리에 깔리는 그늘이다. 이 그늘은 존재의 비애를 표상한다. 그러기에 이른 봄 속의 해질  무렵이고, 새도 귀가 없는 새이고, 바람도 눈치없는 바람이다. 이 바람이 흔드는 것은 범부채꽃이 아니라 그늘이고, 땅을 후비는  그늘 한 뼘이다. 이 그늘 한 뼘이 세상이고 그의 내면이라면 결국 모든 존재는 비애의 존재이고 그 비애는 시시각각으로 점점점  더 우리를 후빈다.  다음 시에서 관찰의 힘이 얼마나 큰가를 살펴보라.  작약꽃이 한창인 아파트 단지의  화단을 나비 한 마리가 날고 있다  어린 후박나무를 지나 향나무를  지나 목단을 넘고 화단 가장자리의  쥐똥나무를 넘어 밖으로 가더니  다시 속으로 들어와  한창인 작약꽃을 빙글빙글 돌더니  아무 것도 없는 허공을  혼자 훌쩍 날아올라 넘더니  비칠대는 온몸의 균형을 바로잡고  날아넘은 허공을 뒤돌아본다  뒤돌아보며 몸을 부풀린다  ―(6)오규원의 「나비」  관찰만 예리하게 잘 하여도 시의 절반은 이룬 셈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관찰은 시적 묘사에 있어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묘사가 없는 시가 있을 수 없듯이 관찰이 없는 묘사 또한 있을 수 없다. 위의 시는 순전히 관찰만으로 막 막한 아파트 단지의 생명성과 존재의 비의를 환하게 드러내주는 수일한 시이다.  3. 연상, 사랑에 관한 단상  사랑은 시와 흡사하다. 사랑이 시와 흡사한 것은 양자가 모두 논리의 대척점에 서 있다는 사실이다. 이 남자가 누구의 남자인가는  아랑곳없이 마음의 길이 언제나 그에게 향하고, 그에게 맞닿아 있듯, 남들이 보기에는 하잘 것 없는 왜소한 존재임에도 바닥 모를  깊이로 몰두한 채 시의 길도 달리고 있는 것이다. 콩깍지가 씌어도 몇 겹으로 덧씌웠는지 알 수 없을 만치 혼미한 가운데 연인들과  시는 앞 다투어 마음의 길을 달리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사랑에 빠졌을 때, 이 주체할 수 없는, 나 아닌 또 다른 존재를 향한 갈망 또한 시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시 역시 다른 존재 를 향한 짙은 그리움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시는 망망한 밤하늘의 한 점 불빛이다. 반짝반짝 또 다른 살아 있는 정신에게 보 내는 간절한 신호인 것이다. 사람들 사이에 가로놓인 섬을 넘어서서 마침내 따수운 손길을 부여잡고자 하는 갈망에 찬 몸짓이  시인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 곤혹스러운, 무어라고 규정할 수 없는, 예전엔 느껴 본 적도 없던 이 독특한 감정이야말로 시와 다르지 않다.  무어라고 딱히 명명할 수 없는, 망명하는 순간 이미 그것이 아닌 다른 것으로 변질되어 버리는 느낌, 사랑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표현한 순간 그저 범속한 사랑이 되어버리는 절망감, 공동변소와도 같은 그런 통속적인 ‘사랑’이라는 단어로는 결코 자신만의  설렘과 두근거림을 표현할 수 없다는 안타까움. 사랑이라는 범속한 단어 그 근처에서 기미라도 알아차리게 만드는 단어를 결코  사용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자신만의 고유한 사랑을 전해줄 언어를 모색하는 지난한 과정, 이것이 시쓰기의 심부에 닿아있는  작업인 것이다.  오직 자신만의 관점으로 세계를 보는 완벽한 주관성, 자신의 세계를 방기할 정도로 타자에 몰두하는 전적인 沒我. 그 어떤 언어 로도 자신을 드러낼 수 없다는 절망과 모색 등이야말로 시와 사랑의 교차지점이다. 이들 특성은 견고한 세계의 질서를 모두 자신 의 열망 안으로 끌어들이며, 외적 대상 자체로부터 사유를 시작하는 바탕을 이루며, 직접적인 제시 대신 함축적인 은폐를 기도하 게 만든다. 그리고 이 모든 독특한 갈망들을 연상은 너끈히 감당한다. 연상이야말로 의미를 은폐하고 세계를 자신의 내부로 끌어 들이는 유효한 방법이며 모든 세계를 한 곳으로 끌어 모으는 힘인 것이다. 사랑에 빠진 여자는 모든 존재하는 대상들을 그 남자와 연결하기를 마다하지 않는 것이다.  (7) 산수유 - 정진규  수유리라고는 하지만 도봉산이 바로 咫尺이라고는 하지만 서울 한복판인데 이거 정말 놀라운 일이다 정보가 매우 정확하다  훌륭하다 어디서 날아온 것일까 벌떼들, 꿀벌떼들, 우리집 뜨락에 어제오늘 가득하다 잔치잔치 벌였다 한 그루 활짝 핀, 그래,  滿開의 산수 유, 노오란 꽃숭어리들에 꽃숭어리들마다에 노랗게 취해! 진종일 환하다 나도 하루종일 집에 있었다 두근거렸다  잉잉거렸다 이건 노동이랄 수만은 없다 꽃이다! 열려 있는 것을 마다할 것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 건 세상 어디에도 없다 그럴  까닭이 있겠는가 사전을 뒤적거려 보니 꿀벌들은 꿀을 찾아 11킬로미터 이상 往復한다고 했다 그래, 왕복이다 나의 사랑도 일찍이  그렇게 길 없는 길을 찾아 왕복했던가 너를 드나들었던가 그래, 무 엇이든 왕복일 수 있어야지 사랑을 하면 그런 특수망을 갖게  되지 光케이블을 갖게 되지 그건 아직도 유효해! 한 가닥 염장 미역으로 새까맣게 웅크려 있던 사랑아, 다시 노오랗 게 사랑을  採蜜하고 싶은 사람아, 그건 아직도 유효해!  꿀벌떼들이 찾아온다. 서울 한복판에 벌떼들이 뜨락의 만개한 산수유를 찾아온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얼마나 정보가 정확하 기에 아파트숲과 소음과 시멘트와 먼지 속을 뚫고 꿀벌들이 찾아왔을까. 그 꿀벌 떼들의 꽃숭어리 잔치에 시인도 하루종일 두근 거리고 잉잉거리고 노랗게 취한다. 그걸 지켜보다가 시인은 결국 사전을 뒤적인 끝에 ‘왕복’이라는 단어를 찾아낸다. 산수유와  벌떼들, 그 둘을 하나로 이어주는 단어, 왕복! “그래, 왕복이다” 우리들의 사랑도 왕복인 것이다. 길 없는 길을 찾아 왕복하는  것이다. 그런 사랑을 하게 되면 자연히 사람도 특수 통신망인 광케이블을 갖게 되어서 네 속을 드나드는 것이다. 특수 통신망  광케이블이라는, 시에는, 더구나 사랑시에는 너무나 비시적인 언어로 충분한 낯설게 하기를 감행하면서 시를 고양시켜 나간다.  이 시의 절정은 ‘염장 미역’이란 비유다. 자신의 내면에 빼빼 마르고 까맣게 졸아든 채로 웅크려 있는 염장 미역 같은 사랑이 사랑 의 물을 만나면 바가지 가득 부풀다가, 마침내 바호밥나무처럼 무성하게 자라 어린 왕자의 별을 휘감게 되는 것이다. 산수유 꽃숭 어리와 벌떼들로부터 연상해낸 사랑은 마지막 행에 이르러 ‘노오랗게 사랑을 채밀하고 싶은 사람아’라는 호소력 있는 호명으로  모든 대상을 하나로 결합하며 시적 화자 자신을 명료하게 드러내고, 다분히 김수영을 연상시키는 “아직도 유효해!”의 ‘!’로 시를  끝맺고 있다. 더더욱 이 시가 감동적인 것인 시적 화자의 나이가 60살 가까이 된, 이젠 사랑보다는 생을 관조해야될 나이에 이런  연상을 할 수 있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허망함처럼 “아직도 유효해!”라고 외치는 그 사랑도 필경 허무로 끝날지 모르 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다. 사랑은 그만큼 생을 맹목적이게 만들기도 하는 것이다.  (8) 明鏡 - 박형준  강나루 가에는 커다란 버드나무가 자라고 있었다  나는 소매에서 책을 꺼내 읽었다  여인들이 버드나무 밑에서 울고 있었다  여인들은 잎이 무성한 버드나무를 꺾었다  배에 올라탄 남정네들에게  버드나무 가지를 둥글게 구부려 정표로 주었다  배가 떠날 시간이었다  내려서 뒤돌아보지 말고 걸어야 했다  책갈피에 버드나무 잎이 끼여 있었다  저녁 무렵 잠깐 잠이 든 사이였다  꿈속에서 한 권의 책을 손에 쥐고 있었다  꿈속에서 해가 지고 있었다  그 책은 이승에서 내가 평생 써야 할 시였다  이 슬프면서 아름다운 우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저녁 무렵 잠깐 잠든 사이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도 해가 질  무렵이었다. 꿈속에서 한권의 책을 손에 쥐고 읽고 있었다. 그런 그 앞에선 버드나무 아래서 여인들이 울고 있고, 배가 막 떠나려  하고 있고, 배에 올라탄 남정네들에게 여인들은 사랑의 정표로 버드나무 가지를 둥글게 구부려 주고, 그 버드나무잎이 그의 책갈 피에도 끼여 있지만, 배에서 내려서도 뒤돌아보지 말고 걸어야만 하는 슬픔이다. 어쩌면 인생은 덧없는 꿈이라는 상투적인 것을  얘기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아니다. 여기서 배는 인생이고, 그 인생 속에서 우리는 사랑과 이별을 할 수밖에 없고, 그중 이별은  강을 건너는 행위 곧 이승과 저승으로 나뉠 수밖에 없는 상태인 것이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의 눈물을 뒤로하고 오연하게 앞으 로 나아감으로 성취될 수 있는 그 무엇이 시라고 말하는, 저승까지 가져갈 것이 시라면, 뒤집어서 이승에서도 평생 써야할 시는  그 책갈피에 낀 버드나무잎같이 생생한 사랑과 이별의 변주인 시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는 꿈속에서 본 이별의 광경을 통해 시인이 끝내 써야할 시가 무엇인가를 조용히 연상케 하는 시인 것이다. 이제 다음 시를  보자.  먼저 그대가 땅 끝에 가자 했다/ 가면, 저녁은 더 어둔 저녁을 기다리고/ 바다는 인조 견 잘 다려놓은 것으로 넓으리라고/ 거기,  늦은 항구 찾는 선박 두엇 있어/ 지나간 불륜 처럼 인조견을 가늘게 찢으리라고/ 땅끝까지 그대, 그래서인지 내려가자 하였다//  그대는 여기가 땅끝이라 한다, 저녁놀빛/ 물려놓는 바다의 남녘은 은도금 두꺼운/ 수면 위로 왼 갖 소리들을 또르르 또르르/  굴러다니게 한다, 발 아래 뱃소리 가르릉거리고/ 앞섬들 따 끔따끔 불을 켜대고, 이름 부르듯/ 먼 데 이름을 부르듯 뒷산숲 뻐꾸 기 운다/ 그대 옆의 나는 이 저녁의 끄트막이 망연하고/ 또 자실해진다, 그래, 모든 것이 이 땅의 끝/ 벼랑에 서처럼 단순한 투신 이라면야…// 나는 이마를 돌려 동쪽 하늘이나 바라다보는데/ 실루엣 을 단단하게 잠근 그대는 이 땅 끝에 와서/ 어떤 맨처음을  궁리하는가 보다, 참 그러고 보니/ 그대는 아직 어려서, 마구 젊기만 해서/ 이렇게 후욱 비린내나는 끝의 비루를/ 속 수한 것들의  무책을 모르겠구나/ 모르겠는 것이겠구나 ―(9)이문재의 「해남길, 저녁」  이문재의 시는 적어도 가식이 없다. 자신이 직면한 고통에 솔직하게 대면하고 있다. 그는 사랑의 끝이 땅끝과 마찬가지로 벼랑의  투신처럼 자명하기를 바란다. 망연자실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러나 삶이란 얼마나 너절한 것인지. 인연이란 얼마나 질긴  것인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직 어린 그대가 끝의 비루를 알지 못하는 것이 그나마 다행 인 것이다. 땅끝에서 손쉽게 건져 올린 사랑의 끝을 생각하는 이 시는 풍부한 묘사와 함께 한자 성어를 적절하게 분리시킴으로써  자신의 내면을 풍자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그 드러냄은 미화될 여지조차 있다. 그러나 그것은 미화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저  그렇고 그런 불륜일 따름이기 때문이다. 지독한 사랑의 끝은 비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름다움이 아니라 그것이 존재이유가  되어 버릴 때도 불륜이 비루일 수 있는가.  4. 투사, 삶의 본질에로의 날카로운 진입  시적 대상이 있다. 그 대상을 바라보는 서정적 주체가 있다. 주체는 반드시 주체의 관점을 통해서 대상을 바라본다. 그 관점은  지극히 주관적이다. 그럼에도 그 주관은 삶의 본질을 날카롭게 가로지르는 주관이자, 어떤 객관적인 언술로도 감당할 수 없는  진실을 향해 비약하는 주관이다. 그 주관은 일체의 과정을 과감하게 생략함으로써 획득된 것이며 순간적으로 지각된 느낌을 명 징하게 드러냄으로서 이루어진 것이다. 다라서 그 어떤 논증적인 결론에 뒤지지 않는 심정적인 깨우침을 안겨준다. 그리고 독 자는 이 당연한 주관성을 엿봄으로써 공감을 느끼거나 부적절함에 대한 반감을 토로함으로써 시적 상상력에 개입한다. 무엇보다  이 내밀하고 주관적인 관점이 우리에게 건네는 공감이야말로 시의 아름다움이 갖는 본질적인 표딱지인 것이다. 여기에서 이 주관 을 가능케 하는 힘을 투사라고 한다. 이 투사는 또 직관력을 절대로 필요로 한다.  (10) 墨畵 - 김종삼  물먹는 소 목덜미에  할머니 손이 얹혀졌다  이 하루도  함께 지났다고,  서로 발잔등이 부었다고,  서로 적막하다고,  (11) 自尊 - 이시영  화창한 가을날  벌판 끝에 밝고 환한 나무 한 그루  우뚝 솟아 있다  모든 새들이 그곳에서 난다  시 (10)은 회화적이다. 이는 첫 행과 두 번째 행을 통해 누구의 눈에라도 확연히 그 풍경을 지각할 수 있다. 저물 무렵, 아마도  깡마른 손임에 분명한 할머니 손이 물먹고 있는 소의 목덜미를 어루만지고 있는 외딴집 울타리 속의 풍경. 제목이 묵화이듯이  어떤 묵화를 바라보고 썼거나, 거꾸로 풍경과 人事의 여러 자잘한 가지를 생략해버리고 고단위의 긴장과 절제의 방법으로 여백과  농담의 미가 충만한 묵화의 세계를 지향했거나 상관없다. 이 시는 묘사적 풍경에서 멈추지 않는다. 3행으로 넘어가면서 직바로  본질로 진입해 가는 시인의 날카로운 주관적 투사, 곧 “이 하루도/ 함께 지났다고,/ 서로 발잔등이 부었다고,/ 서로 적막하다고 ,” 말해버림으로 물먹는 소목덜미에 할머니 손이 얹혀지는 단순하고도 객관적인 풍경이 소와 할머니 사이에 지극한 교감으로 바 뀌고, 또 단순하고 객관적인 풍경이 생의 비애, 존재의 고통의 면모를 선명하게 부각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투사로서의 상 상력은 한 존재가 맞닥뜨린 생에 대한 자각과 그에 반응하는 섬세한 존재의 울림을 고스란히 확인케 함으로써 우리를 천박하고  저열한 우리의 그저 놓여진 일상을 새롭게 충전하는 것이다.  시 (11)도 이 점에선 시 (10)에 한 점도 뒤지지 않는 시이다. 오히려 시 (10)이 3행부터의 투사적 진술이 우리를 깨우치긴 하지만  존재와 풍경이 감추고 있는 아득한 비의를 약간은 깨버린 듯한 인상을 주는 데 비해 시 (11)은 그렇지 않다. 이 시에서도 너무도  확연한 그림 하나를 볼 수 있다. 화창한 가을날이면 하늘은 높고 햇살은 순금빛으로 쏟아지고 대기는 맑다 못해 푸르른 날일 것이 다. 그런 날 벌판 끝에 그 햇살을 받고 나무는 역시 황금빛으로 빛나는 은행나무도 좋겠고 투명한 갈색으로 빛나는 느티나무도  좋겠다. 얼마나 밝고 환할 것인가. 그것이 우뚝 솟아 있다. 황금나무다. 세계수다. 은행나무라면 땅에서 하늘로 팔 벌린 상태일  것이고 느티나무라면 둥그렇게 마을을 감싸는 모습일 것이다. 은행나무나 느티나무나 모두 지상과 하늘을 매개하는 영매이다.  어쨌든 그것은 얼마나 신비롭고 아늑하고 정정하고 성성하고 밝고 환할 것인가. 여기까지는 객관적 풍경의 언어적 그림이다. 이 에 덧붙여 연을 달리한 마지막 한 줄이 투사적 진술을 감행한다. “모든 새들이 그곳에서 난다”라고. 객관적 사실은 모든 새들은  그곳에서 날 수도 있고 날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밝고 환한 나무에서 새가 날지 않고 어디서 날겠는가. 새는 자유, 순수,  평화 등 모든 것을 상징한다. 그 새는 인간의 비상의 꿈을 하늘로 치솟음으로 상징해준다. 그러나 들판의 새는 대개 옆으로 난다.  여기 밝고 환한 나무에서 나는 새도 그 나무에서 솟는 새이기도 해야 하지만 그 나무를 가로질러 나는 새이기도 해야 한다. 그래야  나무의 수직과 새의 수평이 이루어지는 것을 상상치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 시는 이런 모든 췌사를 불필요하게 만든다.  풍경에 대한 언어의 선연한 그림과 이에 날카로운 투사적 상상력을 보탬으로 존재의 비의를 한층 더 깊게 만드는, 말을 침묵에  가깝게 줄임으로 되레 수많은 말을 가능케 하는 시의 진경이 여기에 펼쳐져 있는 것이다.  (12) 어린 게의 죽음 - 김광규  어미를 따라 잡힌  어린 게 한 마리  큰 게들이 새끼줄에 묶여  거품을 뿜으며 헛발질할 때  게장수의 구럭을 빠져나와  옆으로 옆으로 아스팔트를 기어간다  개펄에서 숨바꼭질하던 시절  바다의 자유는 어디 있을까  눈을 세워 사방을 두리번거리다  달려오는 군용 트럭에 깔려  길바닥에 터져 죽는다  먼지 속에 썩어가는 어린 게의 시체  아무도 보지 않는 찬란한 빛  (13) 직관 - 고재종  간밤 뒤란에서  뚝 뚜욱 대 부러지는 소리 나더니  오늘 새벽, 큰 눈 얹혀  팽팽히 휘어진 참대 참대 참대숲 본다  그중 한그루 톡, 건들며 참새 한 마리 치솟자  일순 푸른 대 패앵, 튕겨져오르며 눈 털어낸 뒤  그 우듬지 바르르바르르 떨리는  저 창공의 깊숙한 적막이여  사랑엔, 눈빛 한번의 부딪침으로도  만리장성 쌓는 경우가 종종 있다  김광규의 시는 밑바닥에 깔린 첨예한 시대의식을 감지할 수 있다면, 그의 투사적 직관력이 시에 얼마나 큰 힘을 부여하고 있는 가를 수일하게 짐작할 수 있다. 투사력이라 해도 좋고 직관력이라 해도 좋은 이 상상력은 무릇 시인치고 누구나 갖고 있는 것이 지만 이걸 얼마나 잘 갈고 닦느냐에 따라 좋은 시를 쓸 수 있는가 없는가 판가름이 난다. 필자의 「직관」이라는 시도 함께 살펴 보기 바란다.  5. 유추, 빗대어 말하기  시란 다른 질서 안에서 존재하는 사물을 자신의 질서로 바라보는 것이다. 시는 타자를 자신의 질서 안에 재편할 뿐만 아니라,  타자의 질서를 통해 자신의 존재가 뿌리내리고 있는 본질적 의미를 역설적으로 깨닫기도 하는 것이다. 이러한 타자를 통해 자 신을 들여다보는, 혹은 자신의 질서 안으로 타자를 끌어들이는 시적 관계 양상을 유추라고 명명할 수 있다.  유추는 두 대상을 나란히 마주 세움으로써 시작된다. 물론 그 한편에는 항상 인간의 삶이 있다. 이솝우화에 등장하는 여우는 여 우가 아니라 사람이다. 오웰의 소설 「동물농장」에 등장하는 나폴레옹이라는 시커먼 돼지 역시 탐욕스런 인간의 상징적 대체 물이다. 이 두 상징이 얼마나 엄밀히 조응하는가에 따라 유추의 효과는 그 빛을 발한다.  일반적으로 유추를 통해 획득되는 시적 인식은 계몽적이거나 풍자적인 형태로 드러난다. 유추의 대상을 통해 삶이 무엇인지를  배우라고 말하고 싶거나, 삶이 얼마나 비루한 것인지 잔뜩 조롱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유추가 삶 전체를 통해 무차별적으로  열려 있지만은 않다. 시가 문제 삼는 삶은 특정한 삶이지 포괄적이고 일반적인 추상으로서의 삶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가  어떠한 삶을 풍자하거나 외경스러워하는지를 무엇보다 명료하게 인식해야 한다.  (14) 느티나무 여자 - 안도현  평생 동안 쌔빠지게 땅에 머리를 처박고 사느라  자기 자신을 한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가을날, 잎을 떨어뜨리는 곳까지가  삶의 면적인 줄 아는  저 느티나무  두 팔과 두 다리로 허공을 헤집다가  자기 자신을 다 써버렸다  그래도 햇빛이며 바람이며 새들이 놀다 갈 시간은  아직 충분히 남아 있다고, 괜찮다고,  애써 성성한 가지와 잎사귀를 흔들어 보이는  허리가 가슴둘레보다 굵으며  관광버스 타고 내장산 한 번 다녀오지 않은  저 다소곳한 늙은 여자  저 늙은 여자도  딱 한 번 뒤집혀 보고 싶을 때가 있었나 보다  땅에 박힌 머리채를 송두리째 들어올린 뒤에,  최대한 길게 다리를 쭉 뻗고 누운 다음,  아랫도리를 내주고 싶을 때가 있었나 보다  그걸 간밤의 태풍 탓이라고 쉽게 말하는 것은  인생을 절반도 모르는 자의  서툴고 한심한 표현일 뿐  (15) 오징어 3 - 최승호  그 오징어 부부는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부둥켜안고 서로 목을 조르는 버 릇이 있다  시 (14)는 태풍이 지나간 뒤 쓰러진 느티나무의 모습에서 모든 유혹을 물리친 채 온갖 고생을 다하며 열심히 살아온 농촌여성의  내면에 깃든 광포한 욕망을 읽어내는 시인의 눈길이 예사롭지 않다. “가을 날, 잎을 떨어뜨리는 곳까지가/ 삶의 면적인 줄 아는/  저 느티나무” 같은 구절은 얼마나 의미심장한가. 또 스러진 느티나무를 여자에 비유하며 “최대한 길게 다리를 쭉 뻗고 누운 다음,/  아랫도리를 내주고 싶을 때가 있었나 보다”처럼 표현한 구절은 얼마나 짓궂은 유머를 담고 있는가.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걸 간밤 의 태풍 탓이라고 쉽게 말하는 것은/ 인생을 절반도 모르는 자의/ 서툴고 한심한 표현일 뿐”이라고 한 대목에서 이 시인의 경우 바른 성실함이 물씬 묻어난다. 비유가 극명하게 드러난 시이지만 사실 비유조차도 유추적 상상력을 통한 삶의 진실을 드러내는  방법인 것이다.  시 (15)는 3행으로 이루어진 시다. 이 짧은 시의 대상은 ‘오징어 부부’이다. 그 오징어 부부는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이 남다르다. ‘부둥켜안고 목을 조르는 버릇’은 결코 사랑의 자연스런 방식이라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사실 이 표현은 오징어의 여러 개의  긴 발의 형상에서 취한 상상력인데, 그러나 이러한 부부는 그 오징어 부부만이 아니라는 현실 때문에 표현의 성공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우리 주변에도 이런 류의 사랑은 많다.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정작은 숨이 턱에 닿을 때까지 목을 조르고 있지는 않았던가.  교묘하게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구속하고 억압하고, 풍부한 인간적 감성을 마모시키지나 않았던가. 결국 그 오징어 부부는 우리 들 사랑의 본질을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은 욕망으로 뒤덮인 인간이며 그 사랑의 방식은 우리들이 항용 지니고 있던 버릇이었던  것이다.  안도현과 최승호의 시는 모두 인간적인 세계가 아닌 자연의 세계 혹은 우화의 세계를 이야기하고 있다. 한데 이런 유추는 현실과 의 접촉면이 현저히 차단된 채 자연 세계의 환멸과 동경만을 가능케 할뿐이다. 어떻게 한 편의 우화를 통해 삶의 현실성을 획득할 수 있겠는가. 고작해야 즉자적인 찬탄과 모멸이라는 양극단의 감정적 대응만이 가능할 뿐이다.  (16) 개밥풀 - 이동순  아닌 밤중에 일어나/ 실눈을 뜨고 논귀에 킁킁거리며/ 맴도는 개밥풀/ 떠도는 발끝을 물밑에 닿으려 하나/ 미풍에도 저희끼리  밀고 밀리며/ 논귀에서 맴도는 개밥풀/ 방게 물 장군들이 지나가도/ 결코 스크럼을 푸는 일없이/ 오히려 그들의 등을 타고 앉아 / 휘파 람 불며 불며 저어가노나/ 볏짚 사이로 빠지는 열기/ 음력 사월 무논의 개밥풀의 함성/ 논의 수확을 위하여/ 우리는 우리 의 몸을 함부로 버리며/ 우리의 자유를 소중히 간직하 더니/ 어느날 큰비는 우리를 뿔뿔이 흩어놓았다/ 개밥풀은 이리저리 전복 되어/ 도처에서 그의 잎파랑이를 햇살에 널리우고/ 더러는 장강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어디서나 휘몰 리고 부딪치며 부서지는 / 개밥풀 개밥풀 장마 끝에 개밥풀/ 자욱한 볏짚에 가려 하늘은 보이지 않고/ 논바닥을 파헤쳐도 우리에겐 그림자가 없다/ 추풍 이 우는 달밤이면/ 우리 는 숨죽이고 있다/ 옷깃으로 눈물을 찍어내며/ 귀뚜라미 방울새의 비비는 바람/ 그 속 에서 우리는 숨죽 이고 있다/ 씨앗이 굵어도 개밥풀은 개밥풀/ 너희들 봄의 번성을 위하 여/ 우리는 겨울 논바닥에 말라붙는다  이 시 또한 다르지 않다. 이 시의 화자는 분리되어 있다. 전반부는 관찰자의 시선으로 개밥풀이란 수생식물의 생태를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후반부에 들면 관찰자의 관찰에 응답이라도 하듯, 개밥풀 자신의 목소리로 한 떼의 여리고 작은 이파리들의 헌신을  노래한다. 여름에서 가을로, 다시 겨울로 이어지는 계절의 변화 안에서 그들이 어떻게 몸을 부리며, 마침내 어떻게, 그리고 왜  논바닥에 말라붙는지를 노래한다. 물론 이 개밥풀을 통해 드러내고자 하는 유추의 원형질은 민중이다. 김수영의 풀보다 더욱  미천하고 더욱 낮은 대상에까지 천착하여 형상화함으로 이 땅을 살아가는 이름 없는 무지렁이 민중들과 그들 민중의 삶 구석 구석에 연결된 자그마한 살아 잇는 모든 것이 얼마나 견고하게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들은 단지 헌신과 희생의  속성만이 연결될 뿐만 아니라 자잘한 생태적 순환들까지도 완벽하게 일체가 됨으로써 자연의 순환 안에서 살아가는 모든 존재 들의 긴밀한 유대와 삶의 동일성을 여지없이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자연으로부터 삶의 지혜를 배운다’는 말이 있다. 이 간명한 명제야말로 시적 상상력을 튼실하게 받치고 있는 또 다른 한 축인 것이다. 느티나무, 오징어, 개밥풀 등 이 모든 세상을 구성하는 존재들로부터 이 세상을 구성하는 다만 또 다른 하나의 존재에 불과한 인간들이 삶의 철학과 방법을 배운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위의 명제를 ‘존재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삶을 배운다’라고 수정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6. 전복, 뒤집어보기 꿰뚫어보기  헤겔은 ‘이성적인 것이 현실적인 것이며, 현실적인 것이 이성적인 것이다’라는 아리송한 말을 『법철학』에서 한 적이 있다.  하지만 이 말은 헤겔의 상속인들이 좌파와 유파로 갈리게 되는 헤겔 사유에 내재한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마르크스를 비롯한  좌파들은 이 말의 앞부분에 방점을 찍고, 우파들은 이 말의 뒷부분에 방점을 찍는다. ‘이성적인 것이 현실적인 것’이란 곧 인간 의 사유가 언제라도 현실로 전화될 수 있다는 것으로 철학의 실천적 의미를 극대화한 주장이다. 이성적 사유는 단순한 관념이  아니라, 이론적 실천으로 전화될 수 있다는 이 주장은 마르크스의 이론을 단순히 이론이 아닌 실천으로 이끌어내는 강력한 동기 가 되었다. 반면에 ‘현실적인 것이 이성적인 것’이란 명제는 현실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그 자체로 이성적 사유의 결론이라는  주장으로 현실을 정당화할 논거를 마련해주고 있다. 실제 헤겔은 반동적인 독일의 정치적 현실을 이상화함으로써 진보의 반대 편에 서고, 그 결과 한동안 파산선고를 받은 채 사상사의 변경에 서 있어야 했다.  그러나 잠깐이라도 눈여겨보면, 헤겔의 보수적 선회는 문제가 있음을 알 수 있다. 현실적인 것, 곧 존재하는 것이 이성적 사유의  결과일 수 없음은 명확하다. 현실은 오히려 지극히 비이성적인 탐욕의 결과이거나, 반이성적인 폭력으로 은폐된 허위이기 때문이 다. 그러나 일상적 삶에 파묻혀 사는 우리는 안타깝게도 이 허위와 위선에 더 이상 분노하지 못한다. 그 분노가 우리의 현실적  삶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현명하게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한때는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하리라’는 잠언에 몸을 떨 지만 오히려 지금에 와서는 ‘진리가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리라’는 자각에 몸을 비켜 세우는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다르다. 시인은 진리가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리라는 것을 번연히 알면서도 그 고통에 기꺼이 온몸을 바치는 사람 들이다. 비록 그 진리가 영원히 자유와는 무관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온몸으로 예감하면서도 시인은 단호하게 거부하고 저항한다.  그리하여 시인은 존재하는 것으로부터 존재해야 할 것들을 즉각적으로 이끌어내며 또 표출한다. 그 표출이 불러일으킬 고통이  실핏줄 구석구석을 터질 듯이 메워 갈지라도 기꺼이 그 고통 아래에 목을 늘어뜨린다. 이 또한 상상력의 일종이다. 현상을 통해  현상의 이면에 숨죽이며 떨고 있는 본질을 드러내는 사유의 힘, 그것이 꿰뚫어보는 상상력이며 뒤집어보는 상상력이며, 일체의  허위를 전복하는 상상력인 것이다.  (17) 받들어 꽃 - 곽재구  국군의 날 행사가 끝나고  아이들이 아파트 입구에 모여  전쟁놀이를 한다  장난감 비행기 전차 항공모함  아이들은 저희들 나이보다 많은 수의  장난감 무기들을 횡대로 늘어놓고  에잇 기관총 받아라 수류탄 받아라  무서운 줄 모르고  서로가 침략자가 되어 전쟁놀이를 한다  한참 그렇게 바라보고 서 있으니  아뿔사 힘이 센 304호 아이가  303호실 아이의 탱크를 짓누르고  짓눌린 303호실 아이가 기관총을 들고  부동자세로 받들어 총을 한다  아이들 전쟁의 클라이막스가  받들어 총에 있음을 아이들은 알지 못한다  떠들면서 따라오는 아이들에게  아이스크림과 학용품 한아름을 골라주며  아무 것도 모르는 아이들 앞에서  나는 얘기했다  이름답고 힘있는 것은 총이 아니란다  아름답고 소중한 것은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세상과 별과  나무와 바람과 새 그리고  우리들 사이에서 늘 피어나는  한 송이 꽃과 같은 것이란다  아파트 화단에서 피어난 과꽃  한 송이 꺾어들며 나는 조용히 얘기했다  그리고 그 꽃을 향하여  낮고 튼튼한 목소리로  받들어 꽃하고 경례를 했다  받들어 꽃 받들어 꽃 받들어 꽃  시키지도 않은 아이들의 경례소리가  과꽃이 지는 아파트 단지를 쩌렁쩌렁 흔들었다  (18) 北魚 - 최승호  밤의 식료품 가게  케케묵은 먼지 속에  죽어서 하루 더 손때 묻고  터무니없이 하루 더 기다리는  북어들.  북어들의 일 개 분대가  나란히 꼬챙이에 꿰어져 있었다.  나는 죽음이 꿰뚫은 대가리를 말한 셈이다.  한 쾌의 혀가  자갈처럼 죄다 딱딱했다.  나는 말의 변비증을 앓는 사람들과  무덤 속의 벙어리를 말한 셈이다.  말라붙고 짜부라진 눈,  북어들의 빳빳한 지느러미.  막대기 같은 생각  빛나지 않는 막대기 같은 사람들이  가슴에 싱싱한 지느러미를 달고  헤엄쳐 갈 데 없는 사람들이  불쌍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느닷없이  북어들이 커다랗게 입을 열고  거봐, 너도 북어지 너도 북어지 너도 북어지  귀가 먹먹하도록 부르짖고 있었다.  시 (17)은 전복적 상상력의 면모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그는 집으로 돌아오는 중 아파트 어귀에서 전쟁놀이를 하고 있는 아이 들과 마주친다. 아이들은 우리가 항용 마주치는 아이들이 그러하듯 시끌벅적하게 서로 한껏 총질을 해대며 ‘죽어, 죽어!’를 외치고  있었을 터이다. 그것이 현실이다. 이 현실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섬뜩하고 짠하다. 아이들의 노는 방식이 섬뜩하고, 왜 아이들이  이렇게 놀고 있을까 하는 원인에 대한 탐구는 분단된 내 조국의 아픈 상채기 하나를 만지는 듯해 서글프다. 그러나 그저 그렇겠거 니, 어른들이 그렇게들 살고 있으니 아이들이라고 무어 다를 것이 있겠어 하고 외면해버릴 우리와 달리 시인은 이 현실을 인정하 지 못한다. 그는 아이들을 아파트가 쩌렁쩌렁 울리도록 ‘받들어 총’이 아니라 ‘받들어 꽃’이라고, 죽음의 놀이가 아니라 작은 생명 에 대한 지극한 외경의 의식을 행하기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폭력에 대한 굴종 대신 생명에의 축복으로 아이들 놀이가 바꾸어 져야 한다는 것을 부드럽게 주장한 것이다. 주변에 널려 있는 수많은 왜곡과 은폐의 더께를 걷어내고, 그 자리에 빛나는 삶의 진정 성을 일구어 가는 것, 그것이야말로 전복적 상상력의 탁월한 기능이다.  시 (18)은 참 재미있는 시이다. 식료품가게 꼬챙이에 꿰어진 채 널브러져 있는 북어를 직접 들여다보고 있는 듯이 형상화하고 있 다. 더욱 세밀한 묘사가 계속 이어지다가 ‘가슴속에 싱싱한 지느러미’를 꿈꾸는 가운데 교묘하게 북어가 사람으로 대체되어 있다.  헤엄쳐 가기를 원하는 것은 북어가 아니라 사람인 것이다. 그 순간 느닷없이 커다란 입을 벌린 북어들이 큰소리로 ‘너도 북어지! 라고 귀가 먹먹하도록 계속 부르짖는 눈부신 전복으로 시를 끝맺고 있다.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말라 찌부러진 요즈음의  우리들 자신인 것이다.  (19) 銀山鐵壁 -오세영  까치 한 마리  미루나무 높은 가지 끝에 앉아  새파랗게 얼어붙은 겨울하늘을  엿보고 있다.  銀山鐵壁.  어떻게 깨뜨리고 오를 것인가.  문 열어라, 하늘아.  바위도 벼락맞아 깨진 틈새에서만  난초 꽃대궁을 밀어 올린다  문 열어라, 하늘아.  은산철벽이다. 은산철벽이라 함은 禪家에서 禪僧들이 화두를 참구하는 데서 오는 막막함이다. 온 산이 온통 흰 눈으로 덮이고  얼음으로 짜 올려져 철벽을 이룬 상태인 바, 세상의 分別智 정도로는 도대체 그걸 깨뜨릴 수 없다. 한마디로 백색 절망의 상황인  것이다. 이런 상황 속의 까치 한 마리, 곧 선승은 홀로 미루나무 높은 가지 끝에 앉아 있다. 백천간두에 처해있는 것이다. 한 발만  까딱 잘못 재겨 디뎌도 수천 수만 리 허공으로 추락해버릴 그 자리. 그 한계상황을 박차고 하늘로 치솟아 올라야 하는데, 그 하늘 조차 새파랗게 얼어붙어 있다. 은산철벽을 먼저 깨트려야 되는데, 그래야 그나마 새파랗게 얼어붙은 하늘로 오를 생각을 해볼 수  있는데, 상황은 여전히 암담하다. 전후좌우를 헤아려보고, 차가운 이성과 불같은 감정을 동원해보고, 피투성이의 몸부림을 해봐도 눈에 보이고 귀로 열리는 것은 추호도 없다.  안 된다. 안 된다. 그렇다면 에라이 모르겠다. “문 열어라, 하늘아,” 호통칠 수밖에 없다. 분별지 같은 걸로 어림없는 세계. 직관력  아니고는 어림짐작할 수도 없는 세계. 결국 선승으로서는 일대 전쟁을 감행할 수밖에 없이 하늘하고 상대를 하는 것이다. 이모저 모 따질 것 없이 곧바로 하늘하고 맞붙어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하늘이 문을 여는가.  결국 “바위도 벼락 맞아 깨진 틈새에서만/ 난초 꽃대궁을 밀어 올린다.”라는 깨달음에 이른다. 은산철벽 속 어떠한 고통이라도 감 수하고 이를 극복하는 데서만 비로소 난초 꽃, 곧 삶의 극적인 진실이 열리는 것이다. 그것도 “문열어라, 하늘아”라고 다시 한번  호통치는 그 용기로 인해서다. 사람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도 막다른 골목에 몰리는 고통에 처했을 때 마지막 뚝심으로 돌아서 서 그 몰아대는 자를 악착같이 물어버리는 대전복이 청천벽력처럼 일순간에 일어나는 것이다.  진실의 근원이라고 여겨지는 하늘에다 대고도 호통칠 수 있는 자만이 얻을 수 있는 깨달음. 그러기에 시형식도 여러 진술이나  묘사를 생략하고 간명한 막대기 같은 언명만 필요하다. 이런저런 군더더기 없이 팽팽한 긴장과 절제의 언어만이 필요한 것이다.  어쩌면 불립문자의 세계를 말하기 때문에 여타의 모든 말들은 언어도단이 될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뒤틀린 현실을 전복하고자 할 때 전복적 상상력은 비판적 세계인식을 드러내는 유효한 무기가 된다. 따라서 이것은 앞의 발견적  상상력과 함께 리얼리스트들의 중심적인 상상력을 형성한다.  7. 종합, 상상력의 유대  지금까지 살펴보았던 시적 상상력의 개진 방식들은 사실 추상화되어 있다. 한 편의 시는 모름지기 단 하나의 주도적인 상상력으 로만 이루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섬세한 발견과 관찰, 날카롭게 대상의 본질을 길어 올리는 투사와 유추, 분리된 것을 결합하 는 연상과 현실을 부정의 눈으로 확인하는 전복의 상상력들은 사실 한 편의 시에 긴밀하게 습합되고 용해된 채, 하나의 시적 세계 를 튼실하게 엮어 나가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편의상 이런 분리는 상상력의 실체를 더욱 선명하게 들여다보기 위한 장치라는  점에서 놓칠 수 없는 이점들을 갖는다. 더욱이 상상력들은 동일한 깊이로 시적 세계를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주도적인 상상력이  전면에 배치된 채 여타의 상상력들은 후경에서 마치 삼각형의 꼭지점을 위한 밑변과 옆변을 형성하는 것처럼 이루어져 있기 때문 이다. 구체적인 시들을 보면 이러한 결합의양상은 더 선명하게 드러날 것이다.  (20)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 황지우  映畵가 시작하기 전에 우리는  일제히 일어나 애국가를 경청한다  삼천리 화려 강산의  을숙도에서 일정한 群을 이루며  갈대숲을 이륙하는 흰 새떼들이  자기들끼리 끼룩거리면서  자기들끼리 낄낄대면서  일렬 이열 삼렬 횡대로 자기들의 세상을  이 세상에서 떼어 매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간다  우리도 우리들끼리  낄낄대면서  깔쭉대면서  우리의 대열을 이루며  한 세상 떼어 매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갔으면  하는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로  각각 자기 자리에 앉는다  주저앉는다  이 시에는 다채로운 상상력이 사용되어 있다. 무엇보다도 이 시의 모티브로 존재하는 것은 현실에서의 경험이다. 지금은 없어졌 지만 이 시를 쓴 80년대는 영화가 시작되기에 앞서 줄곧 애국가를 틀어주었다. 어쩌면 김남주의 말대로 세금고지서와 징병통지 서 밖에 가져다 주지 않는 조국에 대한 애정을 강요하기라도 하는 듯 틀어주던 애국가였다. 그런데 이 일상적 경험은 사실 발견 적 상상력에 속한다. 영화 속의 한 화면을 그대로 시적 경험으로 수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이 시의 중심적인 시상에는 이 발견에 대한, 시적 인식으로서의 투사가 중핵을 이루고 있다.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 나”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날아오르는 새들이 ‘어디론가 날아간다’는 객관적 사실을 ‘세상을 뜨는구나’라는 주관적인 인식 으로 슬그머니 환치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명백히 주관적인 의식의 투영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왜 이런 투사가 가능하며 이는  과연 충분한 공감을 자아내는가? 이 시가 1981년에 발표되었음을 생각해 보라. 광주항쟁을 겪었고, 군사독재가 한층 더 강화되고  있던 그때, 시인을 비롯한 깨어있는 모두가 시의 이면에 그 아픔의 흔적과 고통을 가지고 있었다. 그 고통 안에서 심지어 그 고통 의 현실과 무관한 새들조차 이 한반도의 남쪽을 벗어나고자 할 것이라 생각하였던 것이다. “끼룩거리면서” “낄낄대면서”로 투사 된 채. 이러한 웃음 역시 남겨 두고 떠나는 세상에 대한 빈정거림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한없는 모멸을 남긴 채 새들이  “자기들의 세상을/ 이 세상에서 떼어 매고” 앞 화면에서 비추었던 조용한 아침의 나라를 뜨는 것이다. 그런데 이 투사는 시의  후반부에서 짝을 이루는 유추로 정교하게 반복된다. 우리 역시 낄낄대면서, 깔쭉대면서, 다시 말해 빈정거리면서, 야유를 퍼부으면서 썩어빠진 세상을 떠나 깨어있는 우리들끼리라도 “우리들의 대열을 이루며” “이 세상 밖”의 “어디론가 날아갔으면” 하는 것이다.  그러나 새들은 날아갈 수 있으나 우리들은 날아가지 못한다. 그 부푼 꿈이 애국가가 끝나자 “각기 자기 자리에 앉는다.” 그냥 앉는 것이 아니라 어쩌지 못한 채 주저앉는다. 영화관의 자리에 주저앉는 것이 아니라 광주에, 현대사의 고통의 심부에, 썩은 세상에  주저앉는 것이다. 한마디로 의식에서의 꿈이 애국가가 끝나는 현실로 돌아오면서 그만 전복이 되는 것이다. 전복적 상상력인 것 이다. 뜬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결코 낄낄거리거나 깔쭉대지 못한 채 고통과 눈물로 우리들 스스로의 문제를 해결해 야 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이 한편의 시에는 발견과 투사, 유추와 전복이 다채롭게 융합되어 있다. 이제 다음의 시를 보라.  (21) 성모성월․1 - 이성복  그날 꽃들은 부끄러운 가슴과 눈물겨운 뿌리를 쓰다듬으며 피어오르고 봄은 달아나는 애 인처럼 꽃 속에 묻혀 자꾸 죽고 싶어했다  봄은 아랫도리를 가리지 않은 아이처럼 길가에 방뇨했고 후후, 뜨거운 입김을 뿜으며 음료수 가게로 달려갔다 아름다운 오월 건조 한 고기 압의 땅에서 우리는 자꾸 죽고 싶었다 그날 사마리아 여인들과 함께 미사를 볼 때 버드나 무 꽃가루가 창을 넘어 들어왔고  우리는 자꾸 죽고 싶었다, 죽을 생각은 없이 천주의 어린 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여…늙은 양들의 기도는 간절했고 우리는 자 꾸 죽고 싶었다 흰 나룻배보다 긴 꽃잎 속에 몸을 감고, 눈부시고 목메어 고개 흔들며 아무도 밟지 않은 땅을 가고 싶었다 아름다 운 오월 버드나무 꽃가루가 눈을 덮을 때 미사는 끝났고 붉은 제 단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사랑의 어머니,  당신의 이름을 힘겹게 부를 때마다  임종의 괴로움을 홀로 누리시는 어머니,  불러주소서  그 눈짓, 그 음성으로  죄의 한 아이를…  이 시는 ‘성모성월’이란 제목을 달고 있다. 아마도 시의 내용으로 볼 때 성모성월은 5월일 터이다. 5월은 우리에게, 적어도 80년 5월을 깨어있는 정신으로 대면해야 했던 이들 모두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로 존재한다. 이는 현대사의 질곡일 뿐만 아니라 개인 의 상처로도 남아 있는 것이다. 이 시는 그 상처를 어루만지고자 하는 시적 대응이다.  시는 크게 두 부분으로 어우러져 있다. 앞의 길게 이어지는 진술과 뒤의 기도문의 형식을 빈 간구로. 그런데 진술은 이성복 특유의  자유로운 연상을 주축으로 이루어져 있다. 더욱이 그 연상 안에서 이루어지는 다양한 수사들은 특정한 상상력의 유형으로 묶어두 기에는 지나치게 분방하다. 예컨대 첫 번째 문장의 ‘봄’과 ‘꽃들’은 유추의 틀 안에서 이후에 연결되는 ‘우리는’과 동류의 ‘사람들’로  읽어야 한다. 그리고 이들은 공통적으로 ‘죽고 싶었다’는 고통에 찬 정서의 토로로 묶여 있다. 따라서 유추일 뿐만 아니라 시적화자 의 정서를 통해 모든 대상을 전일적으로 인식하는 투사 역시 개재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투사는 “붉은 제단에서 식은땀이 흘 렀다”는 묘사로 완결된다. ‘죽고 싶다’는 자괴감이 고스란히 신의 제단에도 전달되었고, 그 전달은 계시를 내리는 대신 고통의 몸짓 을 나누어 가짐으로써 절망적으로 표출되고 있는 것이다.  이에 이어지는 기도는 산문적인 진술 전체에 가름하는 집약적인 제시일 뿐만 아니라 산문적인 진술의 진전이기도 하다. 고통에 찬  기도에 스스로의 괴로움으로 화답하는 ‘사랑의 어머니’는 인간과 신의 세계를 간구와 긍휼의 세계로 서로 연결하며, 죄로부터의 구 원을 단서를 열어 보이고 있는 것이다. “불러주소서”란 소명에의 간구야말로 단순한 죄씻음에 그치지 않고, 참담한 시대에도 의연 히 자신을 세울 수 있는 자존을 향한 갈구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데 이 후반부의 기도문은 특정한 상상력으로 명명하기 힘들만큼 내면의 심경이 그대로 제시되어 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역시 현실을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새로운 모색에 전율하는 전복의  상상력이 존재하는 것만은 분명하다.  (22) 昇天 - 이수익  내 목소리가  저 물소리의 벽을 깨고 나아가  하늘로 힘껏 솟구쳐 올라야만 한다     
886    詩는 묘사로 시작해서 진술로 끝나다... 댓글:  조회:4669  추천:0  2016-01-09
시의 묘사와 진술 / 손진은(시인,경주대 문창과 교수) 1.정의  ‘시는 묘사로 시작해서 진술로 끝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묘사와 진술은 중요한 개념이다. 묘사와 진술은 시를 구성하는 방식, 혹은 시의 언술 형식과 관련된 말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시적 언술의 특성과 구조 모두를 일컫는 말이다. 그러므로 모든 시는 묘사 혹은 진술로 풀어나갈 수가 있으며, 이들 안에 화자, 비유, 리듬, 어조 등의 모든 하위 시적 언술의 요소들이 들어 있다. 예를 들어 다음의 시를 살펴보자.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기슭에다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  - 천상병, 「歸天」  전체가 진술(고백적 진술)로 이루어진 이 시는 비유(은유: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리듬(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등 전체구조), 화자(드러난 화자:나), 행 구성(각연의 반복) 등의 시적 언술의 요소로 구성되어 있는 것을 우리는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묘사와 진술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크게 ‘관찰을 통한 구상화’와 ‘관조를 통한 해명’으로 그 특성이 드러난다고 말할 수 있다. 즉 대상을 정서적 등가물을 동원하여 그림으로써 가시화하는 언술형식이 묘사라면, 느낌 또는 깨달음 자체를 고백적 선언적으로 가청화하는 것이 진술이다.  더 자세히 말하면, 묘사는 사물이나 현상이 지닌 성질, 인상을 감각적으로 표현하는 언술형식이다. 시는 사물이나 현상에 대한 느낌을 직접 제시하는, 즉 감정이나 설명을 배제하고 대상의 지배적인 인상을 구체적으로(이미지로) 표현하는 양식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묘사는 시의 가장 기본이 되는 자질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필연적으로 묘사에 대한 인식 부족이 비시적 표현의 근간이 된다.  또 진술은 작가가 심리를 객관적으로 묘사하려 하지 않고 직접 토로하는 형식이다. 이는 주로 깨달음의 형태로 제시된다.  정리하면, 시적 묘사는 근본적으로 언어를 회화적인 방향으로 가시화하고, 시적 진술은 가청화한다. 묘사가 관찰을 통한 제시라면, 진술은 관조를 통한 감지이다.  (*묘사:시각적인 인식.가시적 제시적 감각적  *진술:가청화를 통한 설득과 깊은 관련. 가청적 고백적 해석적 경향)  그러나 상식적인 이야기지만 시를 드러내는 방식이 그렇다고 하더라도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언제나 사물 또는 세계를 바라보는 깊이, 사물에 대한 통찰력이다. 즉 기계적이고 일상적인 우리들 삶에 파묻혀 있는 세계를 관찰하고 관조하여 그것을 언어로 드러내는 일이다.  2.묘사  1)종류  묘사는 크게 설명적 묘사와 암시적 묘사로 나눌 수 있다. 전자는 일정한 대상에 대한 정보를 전달하는 데만 목적을 둔 묘사이고, 후자는 대상에 대한 지배적인 인상의 묘사를 통하여 뒤에 숨겨진 삶이나 정황을 암시하는 묘사이다. 시가 주로 사용하는 것은 물론 암시적 묘사이다.  엄격히 구분되는 것은 아니지만 암시적 묘사도 작가의 심리가 투영되고 있는가 아닌가에 따라 객관적 묘사와 주관적 묘사로 나뉘어진다. 객관적 묘사는 시인이 선택한 한 국면을 통해 현장성 혹은 사실성으로 말하고자 하는 점을 제시하는 형식이고, 주관적 묘사는 심리적, 혹은 감각적 대상파악을 위주로 하는 형식이다.  그러나 모든 작품이 전적으로 객관적이거나 주관적인 형태를 보여주지는 않으며 복합적인 형태로 제시되는 것이 사실이다. 다만 작가가 현장과 사실을 바탕으로 하여 표현할 때는 객관적 묘사가 적극적으로 요구되고, 심리적 또는 감각적 대상 파악이 기조를 이룰 때는 주관적 묘사가 요구된다고 보는 것이 좋다.  물먹는 소 목덜미에  할머니 손이 얹혀졌다.  이 하루도  함께 지났다고,  서로 발잔등이 부었다고,  서로 적막하다고,  - 김종삼, 「墨畵」  處暑 지나고  저녁에 가랑비가 내린다.  泰山木 커다란 나뭇잎이 젖는다.  멀리 갔다가 혼자서 돌아오는  메아리처럼  한 번 멎었다가 가랑비는  한밤에 또 내린다.  泰山木 커다란 나뭇잎이  새로 한 번 젖는다.  새벽녘에는 할 수 없이  귀뚜라미 무릎도 젖는다.  - 김춘수, 「處暑 지나고」  전자가 객관적 묘사를, 후자가 주관적 묘사를 위주로 한 시이다. 그러면서도 두 작품 모두 관찰의 섬세성과 그것을 언어로 가시화하는 능력이 놀라울 정도이다. 「墨畵」는 언어로 빚어낸 한폭의 그림이다. 실제로 시인이 본 광경(혹은 동양화의 한 풍경)을 그린 점에서 객관적 묘사에 속하지만, 힘겹게 하루를 넘긴, 발등이 부은 할머니가 같은 처지에 있는 소잔등에 손을 얹고 있는 세계는 그야말로 삶의 적막과 따스한 사랑이 느껴지게 하면서 성스러운 분위기마저 자아낸다.  “할머니 손이 얹혀졌다.”의 절제된 표현을 한번 보라. 제목이 「墨畵」로 되어 있는 이유를 우리는 비로소 알게 된다. 그야말로 묘사형의 시는 “절제된 감정과 언어가 빚어내는 가시화된 이미지를 생명으로 한다.”는 점을 상기시키는 시이다.  「處暑 지나고」가 주관적 묘사임을 명시하는 구절은 “멀리 갔다가 혼자서 돌아오는/메아리처럼/한 번 멎었다가 가랑비는/한밤에 또 내린다.” “새벽녘에는 할 수 없이/귀뚜라미 무릎도 젖는다.”는 구절이다. 메아리처럼 그렇게 한번 멎었다가 내리는 가랑비는 시인의 눈이 아니고서는 찾아볼 수 없는 세계이다. 특히 그 가랑비에 젖는 ‘귀뚜라미의 무릎’은 시인의 주관적 심리적 세계이다.  2)객관적 묘사를 주관적 묘사로 바꾸기  좋은 묘사는 주관적 묘사와 객관적 묘사가 어울려야 하며, 새로운 미적 공간을 우리에게 보여주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객관적 묘사로 만들어진 시적 구상물(미완성의 작품)을 주관적 묘사로 바꿈으로써 시의 심미성과 깊이를 획득할 수 있는 것이다. 다음과 같은 정도의 감각에 도달한 시가 있다고 하자.  연습 1)  싸리울 밖 지는 해가 있었다.  보리 바심 끝마당  허드렛군이 모여  허드렛불을 지르고 있었다.  푸슷푸슷 튀는 연기 속에  지는 해가 있었다.  뻐꾸기 소리  징소리  도리깨 꼭지에 지는 해가 또 하나 있었다  - 「點描」  보리 타작 끝마당의 풍경을 그린 객관적 묘사의 시이지만 이 작품의 아름다움은 하나의 해가 다른 현상 속에 다른 모습으로 있는 모습을 보여 줌으로써,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전혀 새로운 경험을 우리에게 제시하는 데 있다. 그런데 우리는 주관적 묘사를 넣어 이 시를 시적 구조와 질서에 따라 새롭게 구성함으로써 훨씬 더 깊이가 있는 작품으로 만들 수가 있다. 개인이 도달한 감각의 깊이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심상세계는 전혀 새롭게 바뀔 수 있는 것이다.  *주관적 묘사 넣어 시 완성하기:  *이미지와 단순한 수사와의 비교  1)허드레로 우는 뻐꾸기 소리:이미지(이른 저녁 보리타작을 마무리할 무렵에 드문드문 우는, 쓸쓸히 들리는 뻐꾸기 소리.) 2)뒷산에서 우는 뻐꾸기 소리:사실적 표현  3)눈물 흘리며 우는 뻐꾸기 소리;감상적 표현  4)눈을 굴리며 입을 동그랗게 하고 우는 뻐꾸기 소리:설명적 표현  연습 2)기형도 「엄마 걱정」  연습 3)주관적 묘사 작품 읽기  읽던 편지 마저 읽던 사이/무릎 아래에까지 와 있는 봄/내일이나 모레쯤 바라보려고 미루었던 산에/발진디푸스처럼 돋아나는 아지랑이들/양은솥 뚜껑처럼 바글거리며 올라오는 새 움들, 새싹들/서귀 해안쯤에서나 따뜻한 커피 한 잔 하고 있는가 했더니/어느새 쫓아와 섬돌을 갉아대는 햇살들  - 이기철, 「봄소식」  연습 4)객관적 묘사 문제점 지적하기.  1.전철 안에서/누군가 잠이 들었다//아무도 그를 깨우지 않았다/눈을 뜨면 그는 종점에서 허둥댔다/처음엔 늦게 집으로 향하고/어느 날은 아무렇게나 잠이 들었다//나는 집으로 향할 때마다/깡통을 찼다 - 「집으로 가는 길」  2.비듬낀/중년남자 몇이서/꾸려가는 복덕방//그 앞도로에는/“공사중 출입금지”라는/표지판 붙어 있고,/그 사이를 비집고/질퍽한 진흙을/묻히며 들어가는/사람들//삼원색으로/썬팅된 출입문/곁에 세워둔 자전거/바퀴에도/세상때처럼 진흙이 묻어 있고,//깃발처럼 창가에 걸려 있는/매매, 전세 시세표/다세대/단독/아파트……//그 맨 마지막 줄에/빨간색으로 써 있는/사글세방 시세표/누군가의 손에/잡혀져서/말없이 삭제되고 있다 -  「복덕방 풍경」  3)묘사의 구조와 시점  ①구조와 시점의 문제  묘사는 해석보다는 현시를 축으로 하는 언술 형식이므로 형상화된 모든 대상의 세계는 언제나 회화성을 공통점으로 갖고 있다. 이 회화성을 대상의 특성에 따라 분류해보면 서경, 심상, 서사의 구조로 드러나게 된다. 이를 우리는 각각 서경적 구조, 심상적 구조, 서사적 구조라 부를 수 있다.  서경적 구조는 언어로 그려진 풍경화의 형태라 말할 수 있고, 심상적 구조는 말 그대로 심리적이고 비가시적인 공간을 묘사하는 형태이며(이 점에서 당연히 주관적 묘사이다), 서사적 구조는 이야기의 묘사로 제시된 형태를 가리킨다.  아울러 이 묘사의 구조는 일반적으로 화자의 위치(관찰자의 각도)에 따라 고정시점, 이동시점, 회전시점, 영상조립시점으로 구축된다. 고정시점은 눈을 고정해 놓고 관찰한 대상을 하나의 시적 공간 안에 구조화 하는 시점, 이동시점은 시점이 이동하면서 (경험적) 사실을 재구성하는 시점, 회전시점은 한 곳에서 일정한 공간을 보고 있으나 집중되지 않고 눈에 닿는 대로 언어화하는 형태, 영상조립시점은 과거의 경험 사실을 마음에 떠올리면서, 의식 속에 자리잡고 있는 영상을 현재시점에서 재구성한 풍경을 가지는 시점을 말한다. 위 서경적, 심상적, 서사적 구조마다 고정, 이동, 회전, 영상조립시점을 각각 가진다.  푸른 불 시그낼처럼 어리는/거기 조그마한 역이 있다//빈 대합실에는/의지할 의자 하나없고/이따금/급행열차가 어지럽게 경적을 울리며/지나간다//눈이 오고/비가 오고……//아득한 선로 위에/없는 듯 있는 듯/거기 조그마한 역처럼 내가 있다 - 한성기, 「역」  *과거의 경험 사실 위에 현재 겹쳐지는 심상을 함께 서경화한 공간. 마음 속에 떠오르는 풍경.  ②서경적(敍景的) 구조와 시점  ③심상적 구조와 시점  예)가.과수원에서 사과 한 알/뚝 떨어진다.(객관적 묘사)  나. 과수원에서 썩은 시간처럼 사과 한 알/뚝 떨어진다.(객관적 묘사에 비유적 수사(인식) )  다.영혼의 뜰에서 사과 한 알/뚝 떨어진다(심상적 구조)  내 마음의 어딘 듯 한편에 끝없는/강물이 흐르네/돋쳐 오르는 아침 날빛이 빤질한/은결을 도도네/가슴엔 듯 눈엔 듯 핏줄엔듯/마음이 도른도른 숨어 있는 곳/내 마음의 어딘 듯 한편에 끝없는/강물이 흐르네 -김영랑,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내 마음의 어딘 듯 한편”이라는 심리적 공간에 시각이 고정되어 있다.(심상적 고정시점).  강물:실재하는 강물이 아니라 마음 속에서 느끼는 강물 같은 것. 즉 마음 속에서 도도는 은결로 반짝이며 흐르는 어떤 정서를 실재하는 강물처럼 형상화 해서 묘사한 것.  ③.서사적 구조와 시점  시 속의 서사는 어디까지나 서사 구조의 시적 수용이라는 형태로 드러난다. 즉 사실적인 또는 극적인 인식을 강조하기 위하여 사건 및 상황이 있는 국면을 기술적으로 수용한 것이다. 여기서는 이 중 개괄묘사와 세밀묘사만 살펴 보기로 한다.  예 1)조선총독부가 있을 때/청계천변 十錢均一床밥집 문턱엔/거지 소녀가 거지 장님 어버이를/이끌고 와 서 있었다/주인영감이 소리를 질렀으나/태연하였다/어린 소녀는 어버이의 생일이라고/10전짜리 두 개를 보였다. - 김종삼, 「掌篇․2」  예 2)그는 아버지의 다리를 잡고 개새끼 건방진 자식 하며/비틀거리며 아버지의 샤쓰를 찢어발기고 아버지는 주먹을/휘둘러 그의 얼굴을 내리쳤지만 나는 보고만 있었다/그는 또 눈알을 부라리며 이 씨발놈아 비겁한 놈아 하며/아버지의 팔을 꺾었고 아버지는 겨우 그의 모가지를/문밖으로 밀쳐냈다 나는 보고만 있었다  그는 신발 신은 채/마루로 다시 기어 올라 술병을 치켜들고 아버지를 내리/찍으려 할 때 어머니와 큰누나와 작은 누나의 비명,/나는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의 땀냄새와 술냄새를 맡으며/그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소리 질렀다 죽여버릴 테야/法도 모르는 놈 나는 개처럼 울부짖었다 죽여버릴 테야/별은 안 보이고 갸웃이 열린 문틈으로 사람들의 얼굴이/라일락꽃처럼 반짝였다 나는 또 한번 소리 질렀다/이 동네는 法도 없는 동네냐 法도 없어 法도 그러나/나의 팔은 죄 짓기 싫어 가볍게 떨었다 근처 市場에서/바람이 비린내를 몰아왔다 門 열어 두어라 되돌아올/때까지 톡, 톡, 물듣는 소리를 지우며 아버지는 말했다. - 이성복, 「어떤 싸움의 기록」  3.진술  1)종류  진술을 설명하기 위해 다음 시를 먼저 인용한다.  복사꽃 피고, 복사 꽃 지고, 뱀이 눈 뜨고, 초록 제비 묻혀 오는 하늬바람 위에 혼령 있는/하늘이여. 피가 잘 돌아……아무 病 없으면/가시내야. 슬픈 일좀, 슬픈 일좀 있어야겠다. - 서정주,「봄」  외형상 드러나는 모양으로는 독백이다. 그러나 이 독백은 의미 있는 깨달음을 바닥에 깔고 있어 정서적으로 큰 호소력을 발휘한다. 특히 “피가 잘 돌아……아무 病 없으면/가시내야. 슬픈 일좀, 슬픈 일좀 있어야겠다.”는 설명하고자 하는 의지가 없는 독특한 독백의 양상으로 가청화된다. 이 시는 역설의 구조로 되어 있는데,  ‘피가 잘 돌고 아무 병 없’는 봄날이면 당연히 기쁜 일이 좀 있을 법한데, 기쁜 일이 있기는커녕 슬픈 일조차 없는 날의 절망을 깨달음의 형식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문학예술에서 진술이라는 말은 가)선언적 성격의 언술이나, 나)주제, 기본적 사상, 작가의 의도를 명백하고 생생하게 드러내 주는 작품의 어떤 부분․국면, 다)예술의 언술 자체의 특성을 포괄적으로 지적할 때 사용한다.  시적 진술은 독백적 진술, 권유적 진술, 해석적 진술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독백적 진술은 스스로가 시적 대상이 되어 반성하고 기원하는 형태(진술하는 주체 중심의 회고와 반성과 기원이 주), 권유적 진술은 자기의 주장을 불특정 개인 또는 다수에게 적극 동조를 요청하는 형태(타인에게 반성을 촉구하는 주장 중심이 언술), 해석적 진술은 일정한 시적 대상에 대한 시인 나름의 해석과 비판의 형태(객체 중심의 탐구와 비판)를 각각 그 특징으로 한다.  어떻든 진술은 작가의 깨달음을 토로하는 형태로 내성적(內省的) 자각의 성격을 갖는다. 묘사형의 작품보다는 주관적인 성격에 속하는 해석적 오류(넋두리와 같은)를 범할 수 있다. 즉 진술은 우리들의 정서 밑바닥에 잠겨 있는 상투적인 의미 체계에 새로운 충격을 줄 수 있는 깨달음을 동반하는 표현이어야 한다.  2)진술의 형태 및 시점  진술은 해명이 작품의 축이다. 그 해명이 독백의 형태를 하고 있거나, 권유의 형태나 해석의 형태를 하고 있거나 간에 어떻든 이 모두는 자성(自省)이라는 깨달음을 핵으로 갖고 있다. 그러므로 진술은 들려주고 싶은 것을 어떤 형태로 말하고 있는가에 따라 그 구조가 결정된다. 진술은 의식이 흐르는 방향에 따라 시점이 결정된다.  즉, 독백적 진술에는 회고적 시점(과거를 통한 반성형태:김명인「동두천」등), 기원적 시점(과거와 현재의 반성을 토대로 한 미래의 삶에 대한 희구 형태:김현승「가을의 기도」, 유치환「바위」)이,  권유적 진술에는 관행적 시점(어떤 단체나 행사의 기념시), 비관행적 시점(아무런 구속이 없는 자유로운 주장:민중시에 많음, 고은 「화살」, 강은교 「가을의 書」)이, 해석적 진술에는 관조적 시점(제일 많이 쓰임. 격언이나 금언, 잠언처럼 체험에서 우러난 단 한 줄의 시구 속에 숨은 뜻을 담는 방식. 대상에 대한 의미론적 또는 존재론적 탐구를 통한 세계의 이해에 적극적인 태도. 정현종「섬」, 정희성「저문 강에 삽을 씻고」), 풍자적 시점(대상에 대한 인간의 대토에 관심, 사회적이고 윤리적인 해석을 주로. 김광규「묘비명」, )이 각각 쓰인다.  예 1)고백적 진술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그리운 사람을 그리워 하자.  - 서정주, 「푸르른 날」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아예 애린에 물들지 않고/喜怒에 움직이지 않고/비와 바람에 깎이는 대로/억년 비정의 함묵에/안으로만 안으로만 채찍질하여/드디어는 생명도 망각하고/흐르는 구름./머언 遠雷/꿈 꾸어도 노래하지 않고/두 쪽으로 깨뜨려져도/소리하지 않는 바위가 되리라  - 유치환, 「바위」  그래 너는 아메리카로 갔어야 했다/국어로는 아름다운 나라 미국 네 모습이 주눅들리 없는 合衆國이고/우리들은 제 상처에도 아플 줄 모르는 단일 민족/이 피가름 억센 단군의 한 핏줄 바보 같이/가시 같이 어째서 너는 남아 우리들의 상처를/함부로 쑤시느냐 몸을 팔면서/침을 뱉느냐 더러운 그리움으로/배고픔 많다던 동두천 그런 둘레나 아직도 맴도느냐/혼혈아야 내가 국어를 가르쳤던 아이야  - 김명인, 「동두천 4」  예 2)권유적 진술  눈은 살아 있다/떨어진 눈은 살아 있다/마당 위에 떨어진 눈은 살아 있다//  기침을 하자/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눈 위에 대고 기침을 하자/눈더러 보라고 마음놓고 마음놓고/기침을 하자//눈은 살아 있다/죽음을 잊어버린 영혼과 육체를 위하여/눈은 새벽이 지나도록 살아 있다//기침을 하자/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눈을 바라보며/밤새도록 고인 가슴의 가래라도/마음껏 뱉자 - 김수영, 「눈」  *눈:순결한 생명체. *기침: 살아 있음을 주장하는 소리. 참된 삶을 회복하자.  허공이 소리친다/허공을 뚫고/온몸으로 가자/점 캄캄한 대낮 과녁이 달려온다/이윽고 과녁이 피 뿜으며 쓰러질 때/단 한 번/우리 모두 화살로 피를 흘리자/돌아오지 말자/돌아오지 말자/오 조국의 화살이여 전사여 영령이여  - 고은, 「화살」  *피 뿜으며 스러져야 할 캄캄한 대낮과 과녁이 달려오고 있다는 진술자의 인식의 단호함을 보라. 민중시의 힘이 보이는 시!  예 3)해석적 진술  가난이야 한낱 남루에 지나지 않는다 - 서정주, 「무등을 보며」  더러는/옥토에 떨어지는 작은 생명이고저……//흠도 티도/금가지 않는/나의 전체는 오직 이뿐!//  - 김현승, 「눈물」  한 줄의 詩는커녕/단 한 권의 소설도 읽은 바 없이/그는 한 평생을 행복하게 살며/많은 돈을 벌었고/높은 자리에 올라/이처럼 훌륭한 비석을 남겼다/그리고 어느 유명한 문인이/그를 기리는 묘비명을 여기에 썼다/비록 이 세상에 잿더미가 된다 해도/불의 뜨거움 굳굳이 견디며/ 이 묘비는 살아 남아/귀중한 史料가 될 것이니/역사는 도대체 무엇을 기록하며/詩人은 어디에 무덤을 남길 것이냐  - 김광규, 「墓碑銘」  죽음은 버스를 타러 가다가/걷기가 귀찮아서 택시를 탔다//  나는 할 일이 많아/죽음은 쉽게/택시를 탄 이유를 찾았다//  죽음은 일을 하다가 일보다/우선 한 잔 하기로 했다//  생각해 보기 전에 우선 한 잔 하고/한 잔 하다가 취하면/내일 생각해 보기로 했다//  내가 무슨 충신이라고/죽음은 쉽게/내일 생각해 보기로 한 이유를 찾았다//  술을 한잔 하다가 죽음은/내일 생각해 보기로 한 것도/귀찮아서/내일 생각해 보기로 한 생각도/그만 두기로 했다//  술이 약간 된 죽음은/집에 와서 TV를 켜놓고/내일은 주말여행을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건강이 제일이지-/죽음은 자기 말에 긍정의 듯으로/고개를 두어 번 끄덕이고는/그래, 신문에도 그렇게 났었지/하고 중얼거렸다  - 오규권, 「이 시대의 죽음 또는 우화」  4. 진술과 묘사의 어울림  진술형의 시에도 묘사가 사용된다. 시적 진술을 이끌어나가는 과정에 서경적 요소나 서사적 요소, 심상적 요소가 필요할 때나, 대상을 구체화하여 들려주고 싶을 때 묘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엄밀히 말해서 진술이나 묘사만으로 이루어진 시는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묘사형의 문장에 진술을 섞어 쓰는 연습을 하는 것이 가장 도움이 된다.  연습 1) 묘사와 진술로 된 작품 읽기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그믐처럼 몇은 졸고/몇은 감기에 쿨럭이고/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한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산다는 것이 때론/한 두릅의 굴비 한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모두들 알고 있었다  - 곽재구, 「사평역에서」  연습 2)허수경, 「탈상」  연습 2)묘사와 진술 넣어서 시 만들기         
885    詩야,- 너 어디서 오느냐... 댓글:  조회:5177  추천:0  2016-01-08
시는 어디서 오는가?   ― 시적 발상 / 장옥관    시창작 과정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즉 원천적 단계과 의미화 단계, 형상화 단계. 원천적 단계는 선천적, 후천적 차원으로 나눌 수 있겠는데 시창작 교육에서 다룰 수 있는 부분은 교육에 의해 계발될 수 있는 후천적 차원. 후천적 차원은 독서와 체험, 사색의 세 범주에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의미화 단계를 다른 말로 하면 시적 인식이라고 할 수 있다. 알맹이(관념/사상, 감정 따위)가 있어야 시를 쓸 수 있지 않겠는가. 허긴 알맹이 없는 시가 시중에 많이 나돌고 있다. 시가 그럴듯한 말로 아름답게 치장하거나, 설익은 관념을 그대로 노출하거나, 넋두리, 푸념에 가까운 질펀한 감정의 잔치가 아니라는 사실을 우선 깨달아야 한다. 여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시적 인식의 개념을 명료하게 가져야 한다.    마지막으로 형상화 단계는 시적 인식을 언어표현을 통해 실현화하는 방법을 일컫는다. 어쩌면 형상화 단계가 시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시를 빚는 솜씨를 가졌다 하더라도 시적 인식이 없거나 잘못되면 빈 수수깡이 되고 만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시적 인식의 핵심은 감수성, 관찰, 상상력이 핵심이다.    우선 감수성에 대해 살펴보자. 시를 쓰고 싶은 의욕을 가지게 되는 것은 인상적인 느낌(즉 아름다운 자연, 극적 사건, 감동적인 순간 등에서 갖게 되는 심리적 충격)에서 시작된다. 문제는 이런 충격이 자주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러나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들은 대수로운 사건에서도 이런 충격을 자주 받게 된다. 감수성은 천성적이라고 할 수 있으나 훈련에 의해서도 길러질 수 있다.    1. 감수성 기르는 방법    감수성은 말 그대로 느끼는 능력. 느낌은 감각적 경험을 통해 우리의 정신 속으로 들어온다. 감수성을 기르는 방법은 느낌을 강화하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일상생활 속에서 다가오는 수많은 느낌을 그냥 흘려보내지 않고 그것을 붙잡아야 한다. ‘햇살이 눈부시다’라는 느낌을 갖는 순간, 한번 중얼거려본다. 그러면 햇빛의 찬란함이 더욱 강하게 느껴질 것이다. 그 다음 햇살이 어떻게 환한지 느껴본다. ‘햇살 속에 유리종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찌푸린 미간 때문에 눈썹이 다 없어질 것 같네’처럼 그 순간의 느낌을 되풀이해 느껴본다. 이처럼 느낌을 강화하게 되면 감각의 깊이가 생기고 남들보다 더 예민한 감수성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가. 시각을 통한 대상 파악    광명에도 초박의 암흑이 발려있는 것 같다.    전깃불 환한 실내에서 다시    탁상용 전등을 켜야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럴 때 분명 한 꺼풀 얇게 날아가는 휘발성분 같은 것    책이나 손등, 백지 위에서 일어나는    광속의 투명한 박피현상을 볼 수 있다.    사랑한다,는 말이 때로 한 순간 살짝 벗겨내는    그대 이마의 그늘 같은 것    그런 아픔이 있다, 오래 함께 한 행복이여.  - 문인수,    나. 청각을 통한 대상 파악    말이 되지 않는다. 손아귀에 꽉 꽉 꽉 구겨 쥔 에이 포 용지를 냅다 방구석으로 던졌다. 어, 처박힌 종이 뭉치에서 웬 관절 펴는 소리가 난다. 뿌드드드 드드 부풀어오르다, 부풀어오르다, 이내 잠잠해 진다.  종이도 죽는구나    그러나 입 콱 틀어 막힌 그 마음의 밑바닥에 얼마나 오래 눌어붙어 붙어먹었으면, 그리고 그 무거운 암흑의 産道를 얼마나 힘껏 빠져 나왔으면 그토록 환하게  뼈 부러지게 기뻤을까  누가, 날 구겨 한 번 멀리 던져다오  - 문인수,    다. 후각을 통한 대상 파악    사연인즉 이렇다 외출에서 돌아와 책상 앞에 앉는 순간, 오물을 뒤집어 쓴 돼지 한 마리가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는 것이다 잠시 한눈을 파는 동안 돼지들이 등비급수로 늘어나더니만 작은 사무실을 차지해 버렸고 아예 두개골 속으로 들어와 골치를 들쑤시는 것이다 견디다 못해 마침내 소굴을 찾아 나서니 이런! 물 대접에 담아 놓은 감자가 바로 범인이었던 것  싹이 난 감자 몇 알, 물 대접에 담아 볕 좋은 창가에 놓아두고 나갔다 온 참이다 움켜쥔 주먹처럼 단단하던 감자는 흐물흐물 허물어지고 바야흐로 흰 거품이 버글버글 끓어오르고 있었다 그 부신 빛깔이라니― 무지개가 선 것처럼 공기 알갱이들이 뽀얗게 커튼을 치고 있었다 소름이 돋았다 티 한 점 없이 완벽한 악취, 쓰레기통에도 넣을 수 없어 수돗간에 내다두었다  돼지들이 사라지고 난 뒤 무심코 나가본 하수구 어이쿠! 그리마, 노린재, 괄태충, 쇠파리 온 동네 날것 물것들이 죄 모여 꼬물꼬물, 꿈틀꿈틀, 붕붕붕…… 한바탕 잔치판을 벌이고 있었던 것 그예 감자는 쭈글쭈글 갈색 피부만 남았고, 지독한 향기 흰 젖이 되어 여린 목숨들 거두고 있었다 쭈그러든 자궁― 거무죽죽 검버섯의 할머니가 그 자리에 누워 계셨던 것이다  장옥관,    라. 근육감각을 통한 대상 파악    모시 반바지를 걸쳐 입은 금은방 김씨가 도로 위로 호스질을 하고 있다./아지랑이가 김씨의 장딴지를 거웃처럼 감아 오르며 일렁인다./호스의 괄약근을 밀어내며 투둑 투둑 흩뿌려지는 幻의 알약들/아 아 숨이 막혀, 미칠 것만 같아/뻐끔뻐끔 아스팔트가 더운 입김을 토하며 몸을 뒤튼다./장딴지를 감아 올린 거웃이 빳빳하게 일어서며 일제히 용두질을 시작한다./한바탕 대로와 아지랑이의 질펀한 정사가 치러진다./금은방 김씨가 잠시 호스질을 멈추고 이마에 손을 가져가 짚는다./아 아 정말 살인적이군, 살인적이야/금은방 안, 정오를 가리키는 뻐꾸기 시계의 추가 축 늘어져 있다.  - 김지혜, 부분    라. 공감각을 통한 대상 파악    1    흥덕왕릉*의 숲에는 비밀이 있다 섭씨 19도, 서풍과 함께 듣는 솔방울 소리, 부재를 위해 텅 빈 공간이 부푸는 한낮, 밤이 아니라도 등불이 하나 둘 차례차례 켜지는 느낌, 일만 그루 소나무가 손 뻗어 나를 만지도록 정지하는 것, 일만 그루의 소나무에 매달리는 섬모 운동, 내게 필요한 것은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우는 울음이다    2    비밀이 탄로난 이유가 갑자기 휘몰아닥친 장대비 때문만은 아니다 내가 왕국을 베고 눕고자했다 왕이 누리던 고요 외에 십삼층 석탑 같은 왕의 비애를 열어 보고자 했다 어떤 기미도 없이 절규의 힘으로 빗방울이 관 뚜껑 닫는 소리를 듣는다 내가 알아야 할 것은 집으로 가는 길이 아니라 비를 오게 하는 왕국의 슬픔이다  * 경북 경주시 안강읍 인근의 신라 흥덕왕릉. 흥덕왕은 죽은 장화부인을 못 잊어 내내 독신으로 살았다.  - 송재학,    기타 미각, 촉각, 기관을 통한 대상 파악은 생략.    2. 관찰하는 방법    일상의 범상한 눈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예리한 관찰이 필요하다. 순간순간 변하는 햇빛에 의해 몸을 바꾸는 사물, 계절의 변화에 반응하는 나무의 섬세한 변화를 놓치지 않는 정확하고 날카로운 눈을 가져야 한다. 여기서 새로운 발견이 가능하다. 애정과 관심을 가지고 집중적으로 마음의 눈을 열어야 한다. 사물들이 항복을 할 때까지, 즉 작은 세계 속에 들어있는 의미를 찾아야 한다. (예 : 달개비 떼 앞에 쭈그리고 앉아/꽃 하나하나를 들여다 본다/이 세상 어느 코끼리 이보다도 하얗고/이쁘게 끝이 살짝 말린 수술/둘이 상아처럼 뻗쳐 있다. - 황동규,
884    詩人을 만드는 9가지 비망록 댓글:  조회:4975  추천:0  2016-01-08
시인을 만드는 9개의 비망록                                                         정일근 시인   1. 슬픔이 시인을 만든다     나를 시인으로 만든 것은 ‘슬픔’이었다. 그 슬픔에 힘입어 처음 “시인이 돼야겠다”는 꿈을 가진 것은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그 전 해 4월, 벚꽃의 도시 진해에서 나는 ‘아비 없는 자식’이 되었다. 아버지가 없는 빈자리에 제일 먼저 슬픔이 찾아왔다. 아버지의 생몰 연대는 길 위에서 끝이 났다. 그 날 아버지는 당신의 오토바이에 어머니를 태워 마산에 있는 친척 댁에 다녀오시는 길이었는데, 길 위에서 택시가 아버지의 생을 덮치고 뺑소니쳐 버렸다. 의식불명이 되어 안방으로 돌아오신 아버지는 고통스럽게 숨을 쉬고 계셨지만, 군의관이었던 아버지 친구는 단호하게 사망진단을 내렸다. 사인은 뇌진탕. 마산에서 진해로 출발하며 아버지는 자신의 헬멧을 어머니에게 씌어주셨다. 그 헬멧으로 아버지와 어머니의 운명은 바뀌었다. 두 분 다 허공으로 솟구쳤다 도로 위로 내동댕이쳐졌지만 아버지의 헬멧이 어머니를 구했다. 그것이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베푼 마지막 사랑이었다. 아버지의 부재만이 나를 슬프게 만든 것이 아니었다. 아버지가 떠난 자리에 가난도 찾아왔다. ‘갚으러 오는 사람 보다 빚 받으러 오는 사람이 많아’ 아버지의 재산은 소위 ‘빚잔치’로 순식간에 사라졌다.TV도 사라지고 집도 사라지고 할아버지의 논과 밭도 사라졌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다니는 고모는 남루한 일곱 평 반 홉의 양철지붕 아래로 숨어들었고, 어머니는 연탄 부뚜막에 나와 여동생을 재우며 밤늦게까지 술을 팔았다. 친구들이 TV를 보는 시간 나는 술을 날랐다. 친구들이 고급 양장의 동화책을 읽던 시간 나는 안주를 날랐다. 우리 반 고 계집애가 피아노를 치던 시간 나는 손님들이 술자리에서 부르던 이미자, 배 호, 나훈아의 슬픈 유행가나 군인들의 군가를 배웠다. 아버지가 없다는 슬픔이 나를 눈물 많은 아이로 만들었고, 그 눈물이 나를 세상에 대해 조숙하게 처신하게 만들었다.그 시절 내가 친구들보다 뛰어난 것은 도박과 교과서에 나오는 시나 시조 외우기였다. 두 장의 화투 ‘끗발’로 승자로 가리는 도박으로 친구들의 돈을 따면 만화방에 하루종일 처박혀 있거나 중국집에서 자장면이나 군만두를 사먹기도 했다. 그리고 나는 시나 시조를 잘 외운다는 이유 하나로 담임 선생님에 의해 문예반으로 보내졌다. 문예반 지도 선생님은 나에게 시조를 가르쳤다. 뜻밖에도 경남도 대회에 참가할 진해시 대표를 뽑는 백일장에서 나는 장원을 했다. ‘산’이란 제목이었다. 고백하자면, 초등학교 5학년 때 나는 개근상 외에 처음 “상”이라는 것을 받은 것이다. 어려운 형편에 월부로 안데르센 동화전집까지 사주시며 기뻐하시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며 나는 시인이 되고 싶었다. 시인이 되어 서른 초반에 홀로 되어 남매를 키우는 슬픈 어머니의 삶을 기쁘게 해드리고 싶었다.  나는 오랫동안 아버지를 미워했다. 아버지의 부재로 우리 가족이 해체됐기 때문이었다. 나는 아버지가 내 시 속에 등장하는 것을 금기했다. 아버지는 그 때 내 손등에 났던 사마귀처럼 감추고 싶은 상처였다. 시인이 되어서도 그 상처가 시의 소재가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도 아버지가 되고, 아버지의 나이가 되어서 내 시가 아버지에게서 나온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미워한 것은 아버지가 아니라, 너무 일찍 길 위에서 끝나버린 아버지의 생이었다. 나는 시로써 아버지와 화해를 시도하며 “아버지의 달걀 속에서 내가 태어나고/내 달걀 속에서 아버지가 태어난다”고 썼다. 아버지란 큰 슬픔이 나를 시인으로 만들었다.       2. 사랑도 시인을 만든다    그대, 4월의 진해를 기억하는가. 눈이 귀한 남쪽의 부동항 진해는 4월이면 눈이 내렸다. 그 작은 도시의 인구수와 비슷한 벚나무들은 따뜻한 겨울을 보내고 4월이 오면 일시에 꽃을 피우고 바람이 불면 꽃잎을 눈처럼 뿌려주었다. 꽃이 피어서 질 때까지, 그 기간 동안 ‘군항제’란 잔치가 열렸다. 그랬다. 그것은 축제라는 현대성을 띤 이름보다 잔치였다. 내가 5학년 1학기까지 다녔던 도천초등학교 주변에 만들어 진 벚나무 숲. 어른들이 ‘사쿠라 마찌’라 부르던 그 곳이 벚꽃 잔치의 장이었다.  잔치의 하객은 후줄근한 양복에 중절모를 쓴 남자들과 한복과 고무신을 신은 여자들. 그들은 장구와 꽹과리로도 최신 유행가의 가락을 맞추고 잔치의 끝은 언제나 술과 노래였다. 그리고 잔치가 끝나면 그 파장 위로 자주 봄비가 내렸다. 세상은 빠르게 변했다. 새로운 봄이 찾아올 때마다 도시의 증가하는 인구처럼 늘어나는 벚나무들은 더욱 화사한 설국을 만들고 잔치는 축제로 변했다. 분수탑 로터리에서 해군 군악대 연주와 의장대의 시범이 열리고 그 모습에 넋을 놓고 있는 사이 축제의 밤이 찾아와 도심의 벚나무에 걸린 축등에 불이 켜지고, 밤하늘에는 현란한 폭죽이 터졌다. 흑백TV도 귀했던 시절, 4월이면 밤하늘에 상영되는 총천연색의 불꽃놀이를 보면서 유년을 보냈다는 것은 축복이었다. 또 하나 잊을 수 없는 생의 축복. 그 4월에 나는 첫사랑을 했다. 중3이 되었다. 나는 ‘눈물이 많던 아이’에서 ‘시를 쓰는 소년’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아버지를 잃은 나는 사람들이 꽃이 피는 축제의 기쁨만 알 뿐, 꽃이 지는 축제 뒤의 슬픔은 알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축제의 즐거움 보다 축제가 끝난 뒤의 비 내리는 파장을 좋아했다.  축제의 항구도시를 찾아 밀물처럼 몰려온 사람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며 만들어 놓는 또 다른 바다에서 나는 작고 외로운 섬이 되어 홀로 있는 것을 좋아했다. 바람에, 혹은 비에 떨어진 꽃잎을 밟으며 슬픔의 시를 쓰는 소년으로 변해버려, 문예반 선생님은 나이보다 조숙한 눈물의 시를 쓰는 나를 안타깝게 바라보시곤 했다. 내가 다니던 중학, 진해남중은 바다가 보이는 산중턱에 자리한 하얀 건물이었다. 나는 교실에서 바다를 볼 수 있는 것이 좋았다. 남쪽으로 열린 창문을 통해 빛나던 푸른 바다와 작은 섬들. 무시로 찾아오던 건강한 소금 바람. 봄이면 운동장 아래 보리가 누렇게 익고, 가을이면 등교길이 되던 코스모스 꽃길. 그 시절 내가 한 첫사랑은 나에게 기쁨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었다. S.영문 이니셜로 호명할 수밖에 없는 그녀.그때까지 내 감정의 전부였던 슬픔을 비워내고 그 자리에 기쁨을 채워주었던 소녀. 우리는 4월, 벚나무 아래에서 처음 만났다. 진해역 옆 청산학원 앞에 서있던 벚나무였다.(불행하게도 그 나무는 지금은 베어지고 없다.) 친구의 소개로 만난 우리는 단숨에 가까워졌다 나는 시를 쓰듯 사랑의 편지를 보냈다. 그 동안 내가 썼던 어느 글보다 아름다운 글을 소녀의 주소로 보냈다. 그 편지들은 내 최초의 사랑시편들이었고 소녀는 최초며, 유일한 독자였다. 같은 도시에 살고 있었지만 멀리 떨어져 있었던 우리는 그 때 아름다운 약속 하나를 했다. 아침마다 라디오에서 알리는 7시 시보 소리에 맞춰 서로를 그리워하는 성냥불을 켜기로 했다. 성냥불을 밝히며 나는 그 사랑이 영원할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모든 첫사랑이 그러하듯 나의 첫사랑도 이별로 끝나버렸다. 기쁨이 자리했던 가슴에 다시 슬픔이 찾아왔다. 그러나 그 슬픔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셨을 때의 슬픔처럼 나를 눈물 많은 사람으로 만들지 않았다. 눈물대신 나는 시를 택했다. 사랑이, 첫사랑이 내 시를 더욱 튼튼하게 만들어 주었다.       3. 펜혹이 시인을 만든다     펜혹이란 말이 있다. 컴퓨터 세대에게는 생소한 말일 것이다. 펜이나 연필로 글을 쓰는 사람의 손에는 반듯이 펜혹이 남아 있다. 오래 글을 쓰다보면 펜을 받치는 가운데 손가락에 혹 같은 굳은 살이 박힌다. 그것이 펜혹이다. 펜혹은 글쓰기의 상처다. 그러나 그 상처는 시인을 만들어 주는 통과의례와 같다. 나는 펜혹이 없는 시인의 손은 신뢰하지 않는다. 펜혹은 시인에게만 남는 상처가 아니다. 무릇 필업을 사는 사람들은 펜혹의 두께가 문학과 정신의 두께를 말해 준다. 대학시절 나는 내 손에 생기는 그 굳은 살의 이름을 몰랐다. 단지 보기 싫고, 불편했을 뿐이다. 어느 날 스승을 뵈러갔다 놀라운 모습과 조우하고 말았다. 스승은 칼로 펜혹을 깎아내고 계셨다. 사면이 책으로 둘러싸인 스승의 방에는 작은 판 하나가 놓여져 있고 그 위에 2백자 원고지가 펼쳐져 있었다. 무더운 여름이었고, 스승은 그 때 ‘한국문학사’를 집필하고 계셨다. 푸른 칼날을 가진 연필깎이 칼로 가운데 손가락의 굳은 살을 베어내며 스승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평생 펜으로 글을 쓰다보니 장지에 펜혹이 생겼어. 자주 깎아내지 않으면 글을 쓸 수가 없어.”     스승의 글쓰기는 그 펜혹이 대변해주었으며 스승은 펜혹으로 글쓰기가 불편해지면 칼로 굳은살을 깎아내고 다시 글을 쓰셨다. 한 편의 논문이 완성되기까지, 한 권의 책이 만들어지기까지 스승은 얼마나 많은 당신의 살을 깎아내셨을까. 나는 두려움과 부끄러움이 동시에 느꼈다. 스승의 펜혹은 산과 같은 모습이었고, 내 펜혹은 흔적에 지나지 않았다. 스승의 펜혹은 나에게 가르쳐 주었다. 글쓰기는 자신의 살을 깎아내는 고통이며, 그 고통없이 글을 쓴다는 것은 부끄러움이라는 것을. 그 이후 펜혹은 내 습작시대의 화두였다. 나도 펜혹이 생기도록 시를 썼고, 펜혹을 깎아내며 시를 썼다. 진해시 여좌동 3가 844번지. ‘옛집 진해’에서 습작시대를 보냈다. 나는 대학생이었으며, 아내와 두 아이를 둔 가장이었다. 시대는 질곡의 80년대 초였다. 역사는 표류하고 있었고, 미래는 불투명하고 불안했다. 취하지 않는 밤이면 연습장 위에, 노트 위에 시를 적었다. 모나미 볼펜을 꼭 잡은 손가락에 펜혹이 자라고 새벽이면 머리 위에 파지가 무더기로 쌓였다. 그 시절 모든 문학도의 꿈이 그러했듯이 나도 신문사로부터 노란색 신춘문예 당선전보를 받고 싶었다. 그것이 삶의 유일한 목표였고 그 목표점에 도달하기 위한 글쓰기가 내 삶의 전부였다.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학년말 시험을 포기하고 원고지 위에 피 같은 시를 써 투고를 했다. 그리고 오래 동안 집에서 당선 전보를 배달해 줄 우체부의 오토바이 소리를 기다렸다. 우체부는 찾아오지 않았다. 새해 첫날이면 진해의 6개 중앙일간지 신문지국을 돌며 1월1일자 신문을 빠짐없이 구해 당선자 명단을 확인하며 절망했다. 그 당시 유행했던 대학생 현상문예에서 함께 활동했던 하재봉 안재찬(류시화) 안도현 등이 신춘문예를 통해 화려하게 시인으로 등단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더욱 절망했다. 그러나 나는 다시 시를 쓸 수밖에 없었다. 시를 쓰는 일이 나에게는 전부였다. 습작시대였던 대학시절, 나는 시만 썼다. 강의실에서도 고개 숙여 시를 썼으며 자면서도 시를 생각했다. 펜혹은 점점 커졌으며 그 상처를 자주 깎아냈다. 그리고 펜혹 덕분에 대학 4학년 겨울, 나는 신춘문예 당선 전화를 받았다. 문예창작과 첫 강의에서 나는 언제나 학생들에게 ‘책을 손으로 읽어라’고 가르친다. 펜으로 문학작품을 옮겨 적으며 손가락에 펜혹이 생기도록 문학에 최선을 다하라고 말한다. 컴퓨터 시대라해도 누구도 펜혹이라는 상처가 없이 시인을 꿈꿀 수 없기에.  4. 분노도 시인을 만든다     지난 91년 도서출판 빛남에서 묶은 내 두 번째 시집 ‘유배지에서 보내는 정약용의 편지’에 수록된 시편들 중에 이런 구절이 있다.     그 숨막히는 더위 고물 선풍기가 뿜어주는 더운 바람 앞에서 나는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적의로 괴로워했다 아무도 내 이름을 불러주지 않았다  미성숙의 벽에는 우울한 시대의 푸른 곰팡이가 피고  숨어서 김지하의 시들을 몰래 읽으며  늘 혁명 전야처럼 살고 싶었다   적의, 우울한 시대, 김지하, 혁명 전야, 그런 말들과 함께 나의 성년식이 시작됐다. 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담임선생님이 권유하셨던 K은행 입행 대신 대학진학을 선택했다. 가장인 어머니의 가계는 여전히 가난했지만 아들의 장래가 걱정되셨는지 대학진학을 허락하셨다. 대학에 입학하고 내가 맨 처음 눈을 뜬 것은 시와 역사의 현주소였다. 나는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교과서에 나오는 시들만이 시의 전부라고 알고 있었다. 문예부장까지 지냈던 상고시절 진해에서 마산까지 버스 통학길이 지루해 가끔 박인환의 시들을 외웠고, 내가 가지고 있던 시집은 김소월 시집과 백일장에서 부상으로 받은 윤동주 시집, 단 두 권뿐이었다. 대학에 입학해서 창작과비평사에서 나오던 시집들을 읽고 쇠망치로 머리를 때리는 같은 충격을 받았다. 세상에 이런 시도 있으며, 시는 이렇게도 쓰는구나. 나는 비로소 작은 우물 밖을 나온 개구리였다. 그 개구리에게 시의 세상은 참으로 넓고 험했다. 그리고 그 때까지 내가 받은 문학교육이 편협됐다는 사실을 알았으며, 그런 현실에 절망하기 시작했다. 판금된 김지하 시집 필사본을 숨어서 읽으며 내가 살고 있던 시대에 분노하기 시작했다. 눈을 떠보니 교과서의 문학교육만 편협된 것이 아니었다. 역사는 왜곡되고 있었다. 어린 시절 시월의 유신은 김유신과 같아서 삼국통일 되듯이 남북통일 되지요 라고 신나게 불렀던 유신의 실체는 남북통일을 막는 최대 장애였으며, 유신 시대는 그때도 계속되고 있었다.    진해에 있던 대통령 별장 덕에 어린 시절 대통령 행차 길에 나가 고사리 같은 환영의 손을 흔들며 좋아했던, 중절모를 쓴 박정희는 일본 육사출신의 독재자였다. 절망은 분노를 낳는다.그 분노 앞에서 나는 시와 역사에 복무할 것을 선서했다. 대학 1학년 나는 야학 선생이 되었다. 고등학교 과정이었다. 나보다도 나이가 많은, 대부분 현장 노동자였던 학생들을 가르치며 그들에게서 나는 더 많은 것을 배웠다. 대학 강의실보다 야학에서 배운 것이 더 많았다. 야학의 동료교사들 중에는 해군에 근무하는 학사석사장교들이 많았다. 그들에게서도 나는 많은 것을 배웠다. 문학평론가 정과리 형도 야학에서 만났다. 그는 대학원을 마치고 해군사관학교 교수로 군복무를 했는데 야학에 동참했다. 마산 양덕에 있던 그의 아파트 서재는 내 문학수업의 바다였다. 사면을 빼곡이 채운 그의 이론서들이 나를 가르쳤으며 그와 밤을 새워 마시던 술이 나를 성숙시켰다. 그 시절 나는 자주 분노했다. 그리고 분노는 혁명의 꿈으로 이어졌다. 혁명으로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 싶었다. 그러나 꿈은 꿈일 뿐, 내가 택할 수 있는 혁명의 방법은 시일 수밖에 없었다. 돌아보면 뒤틀린 현실과 바르게 흘러가지 않는 역사에 대한 분노가 시를 쓰게 만들었다. 시로써 현실에, 역사에 대해 혁명하고 싶었다. 야학 7년을 보내고 나는 야학일기 란 연작시로 당시 무크지였던 을 통해 분노의 시인이 되었다. 그러나 사랑이 없으면 분노도 없는 법.조국과 역사에 대한 사랑이 분노를 낳고 그 분노가 나를 시인으로 만들었다. 그대, 분노가 일면 터트려라. 분노도 시인을 만들기 때문이다.  5. 부끄러움이 시인을 만든다     습작시절 누구에게나 병이 생긴다. 이름하여 ‘신춘문예 병’. 그 시절을 보낸 사람들의 손에 아름다운 상처 ‘펜혹’이 생기듯, 이 병도 아름다운 병이다. 신춘문예. 굳이 말뜻을 풀이하자면 ‘새봄의 문학예술’이다. 그러나 신춘문예는 풀이하는 말이 아니라 그 자체로 뜻을 갖는 말이다. 문학을 지망하는 사람이라면 습작시절이라는 통과의례가 있고, 신춘문예는 그 통과의례 중 가장 치열한 과정의 다름 아니다. 그 치열함의 끝에 당도하는 사람만이 누리는 영광의 다름 아니다. 신춘문예 병은 신문사마다 1면에 신춘문예 현상공모 사고를 내는 11월초쯤 발병한다. 신춘문예라는 활자가 눈에 들어오는 순간 가슴이 뛴다. 혈관 속에서 문학의 피가 끓는 소리가 들린다. 문제는 그런 흥분된 상태가 응모 마감일 까지 계속된다는 것이다. 계절은 언제나 가을이 끝나가고 겨울이 서서히 찾아오는 때쯤이다. 심장과 피는 더워지지만 몸은 추워지고 등은 불안감으로 굽어진다. 말수도 줄어들고 침묵하는 시간이 길어진다. 가끔씩 왜 그렇게 긴 한숨이 터져 나오던지. 그 시절을 겪은 나의 대학성적표는 감추고 싶은 흉터와 같은 것이다. 그것은 신춘문예 병이 준 후유증이었다. 고백하자면 아슬아슬하게 낙제를 면한 점수다. 졸업학점이 1백60학점이었던 시절, 신춘문예 병 때문에 펑크난 학점을 맞춘다고 4학년 2학기에도 21학점을 신청해야만 했었다. 신춘문예의 마감과 학년말 시험기간은 늘 일치했다. 나는 그 두 길 앞에서 늘 미련도 없이 신춘문예의 길을 택했다. 친구들이 도서관에서 학년말 시험준비로 밤을 새울 때 나는 신춘문예 응모작품을 준비한다고 밤을 새웠다. 유신 시대, 군사독재 시대에서 학점을 얻기보다 신춘문예 당선시인 이란 이름을 얻고 싶었다. 언젠가 가지게 될 내 첫 시집의 약력에 신춘문예 당선이라는 빛나는 한 줄을 남기고 싶었다. 사범대학을 졸업하면 누구에게나 나오는 2급 정교사 자격증보다 먼저 시인이 되고 싶었다. 아직 그 시험답안지들이 남아있을까. 시험문제와는 무관한 글들만 써놓거나 백지로 제출했던 답안지들. 월영동 449번지, 나의 사랑 나의 대학. 사범대학으로 오르던 돌계단, 지칠 때마다 바라보던 푸른 합포만. 내 기억 속의 풍경들의 계절은 언제나 그 겨울이다. 사범대학 빈 강의실 한 구석에서 웅크리고 시를 쓰던 동면 직전의 곰 같았던 내 모습. 오지 않는 편지를 기다리며 우편함을 찾아가면 복도 쪽으로 눕던 긴 그림자. 환청처럼 갈가마귀 울음소리 들리던 시절.  더워졌던 피가 얼음처럼 차갑게 식는 기다림의 시간이 찾아오는 것도 신춘문예 병 후유증이다. 마감도 끝나고 시험도 끝나면 할 수 있는 일이란 낮에는 당선통지를 기다리는 일과 밤이면 술을 마시는 일 뿐이었다. 우체국에서 작품을 보내고 돌아와서부터 당선연락이 올 때까지의 그 막연한 기다림. 폭음과 함께 했던 확신과 장담은 시간이 지날수록 초조해지고 불안해지고 마침내 허탈해진다. 크리스마스 이브까지 당선 연락이 오지 않으면 더 이상 기다리지 말라는 동병상련 하는 도반들의 충고에도 혹시, 혹시 하며 기다리다 절망하다 받아보는 1월 1일자 신문. 그 신문에 실린 그 해 당선자들의 얼굴사진과 빛나는 작품들. 당선 시들을 읽은 뒤에는 지금까지의 기다림 보다 더 큰 부끄러움이 엄습했다. 그렇다. 그 부끄러움이 나를 성숙시켰다. 현재의 내 시가 어떤 자리쯤에 서있는지를 확인시켜주었던 부끄러움이 내 시의 뺨을 후려쳤다. 그리고 혹독한 추위의 겨울이 시작되고 뛰어난 그해 당선 시들을 읽으며 언젠가는 찾아올 내 문학의 봄인 신춘 을 기다렸던 것이다. 그대, 그런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고 문학을 꿈꾼다면 그 꿈은 욕심에 불과한 것이니, 다시는 신춘을 기다리지 마라.       6. 바람도 시인을 만든다     왜 그렇게 바람이 좋았는지 몰라. 열네 살 중학생이 걸어서 학교 가는 길이다. 보리밭 사이로 난 길을 걸어간다. 보리가 누렇게 익어 가는 오월이다.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와 소년의 이마를 짚는다. 바람의 손은 언제나 서늘하다. 소년은 멈추어 선다. 그때 소년은 보았다, 바람의 몸을. 무형인줄로만 알았던 바람이 보리밭 위로 달아나며 드러내는 몸의 흔적을. “저게 바람의 몸이구나”라는 깨달음. 그것은 세상의 비밀 하나에 눈 뜬 기쁨이었다. 그러한 세상의 비밀을 찾는 것이 시고,그 일은 내가 해야하는 일이다고 생각했다. 열네 살 중학생이 걸어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다. 시 오 리쯤 되는 길이다. 보리가 누렇게 익어 가는 오월이다. 다시 바람이 분다. 함께 돌아가는 친구들은 보지 못하는 바람의 몸을 나 혼자 지켜보며 소년은 바람이 되고 싶었다. 온 몸으로 부는 바람이 되고 싶었다. 그러나 바람이 나에게 절망이었던 시간이 있었다. 열네 살 중학생은 열일곱 살 고등학생이 되어 백일장에 참석한다. 백일장의 시제가 ‘바람’이다. 열일곱 살은 자신에 차 있다. 일찍 바람의 몸을 보았기에. 이윽고 심사가 끝나고 입상자 명단이 방으로 붙는다. 열일곱 살은 실망한다. 자신의 이름은 어디에도 없다. 장원자가 호명되어 단상으로 나간다. 뜻밖에도 기라성 같은 상급생들을 모두 제치고 동급생 여학생이 장원이다. 단발머리 그 여학생은 당당하게 서서 자신의 바람을 노래한다.  ‘바람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그 첫줄에 나는 몸이 얼어붙는 충격을 받았다. 동급생 계집아이가 어떻게 저런 표현을 쓸 수 있는 것일까. 충격은 부끄러움으로 이어졌다. 부끄러움은 또 절망을 낳았다. 내가 바람의 몸을 보았을 때 바람의 존재를 생각하는, 같은 나이의 여학생의 정신세계와 언어능력에 미치지 못하는 내 자신이 미워졌다. 백일장이 끝나고 열일곱 살은 호수 곁에 앉아 고민에 빠진다. 어떻게 하면 동급생 계집아이와 같은 시를 쓸 수 있을까. 답을 찾지는 못했지만 열일곱 살은 자신에게 결여돼 있는 것이 무엇인지는 아는 표정이다. 열네 살과 열일곱 살에 만난 바람은 분명 다른 바람이었다. 나는 어제 불던 바람이 오늘 다시 분다고 생각하지 않게 됐다. 바람은 매일 매일 새롭게 태어난다. 새로 태어나는 바람에게는 새로운 이름이 필요하다. 그것이 오늘의 시다. 그리고 나는 오늘 부는 바람이 내일도 불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내일은 내일의 바람이 분다. 그것이 내일의 시다. 처음 만난 시의 화두가 바람이었기 때문일까. 나는 일찍부터 풍병이 들었다. 한 곳에 머물지 못하는 바람 같은, 바람병이 들었다. 나는 내 사주팔자를 보지 않았지만 내 사주와 팔자에는 세찬 바람이 불고 있을 것이다. 바람이 불어 평생을 떠돌게 하는 역마살이 끼어 있을 것이다. 그런 바람들이 나를 시인으로 키웠다.  머무는 것은 바람이 아니다. 바람은 부는 것이다. 분다는 것은 움직임, 시는 그런 움직임이다. 시인은 바람이기 위해 늘 깨어있어야 한다. 고여있는 것들은 시인을 만들지 못한다. 바람이 불기에 살아야 한다고 노래한 시인도 있다. 나는 바람의 길을 걸어 여기까지 왔다. 오는 동안 많은 사랑도 있었고 눈물도 있었다. 나는 앞으로도 부는 바람의 길을 따라 바람처럼 불어갈 것이다. 그것은 거부할 수 없는 시인의 운명이다 언제나 나는 바람이고 싶다. 그대에게로만 부는 뜨거운 바람이고 싶은 것이다, 그대 나의 시여.       7. 길이 시인을 만든다     중학교 2학년 때 부산에서 진해까지 걸어온 적이 있다. 악동 친구들과 해운대 해수욕장에 놀러갔다가 집으로 돌아올 차비마저 다 유흥비(?)로 날려버렸기 때문이었다. 여름이었고, 우기였다. 우리는 해운대해수욕장에서 엄궁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엄궁에서 배를 타고 낙동강을 건너 명지로 가, 명지에서 다시 걸어 진해까지 갈 계획이었다. 친구 3명의 무사귀환을 책임져야 하는 내 주머니에는 1백20원이 숨어 있었다. 나는 그 돈으로 진해 인근인 웅천에서 버스를 탈 계획이었다. 다들 부모님에게 선생님과 함께 간다고 거짓말을 하고 떠난 여행이었기에 우리는 어디에도 구원을 요청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걸어가자. 무슨 중대한 결정이라도 내리듯 친구들에게 그렇게 선언하자 눈물이 핑 돌았다. 염소란 별명을 가진 친구도 찔끔거렸다. 그 때 내가 걸어가야 할 길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붉은 완행버스를 타고 떠나왔던 길. 그 먼길을 과연 걸어갈 수 있을까, 두려운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다른 길은 없었다. 믿는 것은 우리가 가진 A자형 군용 텐트, 알코올 버너, 라면 몇 봉지, 쌀 등과 열 다섯 살의 두 다리 뿐 이었다. 그래, 한 이틀 걸어가면 진해까지 갈 수 있을 거야. 가다가 어두워지면 길 위에서 자고 가지. 내가 앞장섰다. 결국 우리는 1박2일을 걸어서 진해로 돌아왔다. 내가 걸어본 최초의 장도였다. 그날 이후 나는 세상의 길에 대해 자신을 가졌다. 그리고 그 길을 걷고 난 후 내가 많이 성숙해졌다는 것도 느낄 수 있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는 진해에서 자전거를 타고 진주까지 갔다왔다. 그 높은 마진고개를 넘고, 더 높은 진동고개를 넘어 진주로 갔다. 친구의 친척집 작은 골방에서 새우잠을 자고, 내리는 비를 피해 다리 밑에서 밥을 먹었다. 역시 집으로 돌아오니 나는 성숙해져 있었다. 진해에서 마산까지 버스통학을 하던 고등학교 3년. 하교 길 자주 마진터널 검문소에서 내려 집까지 걸어왔다. 어둠의 산길,홀로 바스락거리는 낙엽을 밟으며 집으로 돌아오면 내 몸으로 스며든 길의 향기가 좋았다. 그 시절 우연히 목월 선생이 쓴 젊은 날의 비망록에서, 청년 박목월이 군용 모포 한 장만 들고 강원도에서 부산까지 걸어왔다는 글을 읽었다. 낮에는 해변에서 자고 밤에는 걸어서 동해의 길을 밟았다는 글을 읽고 전율했다. 나는 책을 읽다 일어서서 외쳤다. 떠나자. 길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그 길을 따라 떠나자. 그대, 길은 사람에게 사유의 시간을 가져다준다. 길을 걷는 사람은 누구나 혼자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여럿이, 함께 가는 길이라도 해도 어느 누구도 자신의 길을 걸어주지 않는다. 결국 길은 혼자 가는 길뿐이다. 혼자 가는 길이 사람을 성숙시켜 주고, 시를 깊어지게 만들어 준다.  길은 무엇보다도 그리움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준다. 가보지 않은 저쪽에 대한 그리움이 길을 만들었으니, 그리움이 없다면 길도 없었다. 길 위에서 혼자임을 아는 사람은 언제나 그리움의 따뜻함을 꿈꾼다. 그 따뜻함을 나는 서정이라 말하고 싶다. 홀로 길을 걸어보지 않은 사람은, 그 길 위에서 그리움을 꿈꾸지 않은 사람은 서정시인이라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길의 가장 큰 가르침은 고통이다. 그대, 길 위에서 혼자 맞는 저물 무렵과 일몰의 고통을 아는가. 타관을 지날 때 하나 둘씩 돋아나는 집들의 불빛들을 바라보며 떠나온 곳으로 등이 굽는 쓸쓸함. 아무도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지 않는 저녁이 찾아올 때 비로소 그리운 사람과 이름들. 저무는 길 위에서 고통을 느껴보지 않고서 사랑의 시를 쓸 수 없다. 등 배기는 길 위에서 고통의 칼날에 싹둑싹둑 잘리는 마디잠을 자보지 않은 사람 또한 시인이라 말할 수 없는 것이니, 그대 오늘 그 길 위에 서라.       8. 유행가도 시인을 만든다  내가 제일 처음 배운 유행가는 배호의 노래였다. 제목은 ‘누가 울어’. 그 때 나는 아버지가 없는 초등학교 4학년이었다. 어느 비오는 오후, 어머니가 흥얼거리는 그 슬픈 노래가 어린 나를 울렸다. 어머니 몰래 연습장에 노래가사를 적었다. 지금도 생생한 그 노래 1절은 다음과 같다. ‘소리 없이 흘러내리는 눈물 같은 이슬비 누가 울어 이 한밤 잊었던 추억인가 멀리 가버린 내 사랑은 돌아올 길 없는데 피가 맺히게 그 누가 울어 울어 검은 눈을 적시나.’ 그날 밤 나는 이불 속에서 어머니의 노래를 조용조용 불러보았다. 그리고 정말 ‘피가 맺히게’ 울었다. 어렸지만 노래에 담긴 홀어머니의 마음을 나는 알 수 있었다. 그 어린 시절 배호의 노래가 슬픔이 어떤 가락이며 어떤 색깔인지를 가르친 것이다. 어머니의 술집에는 유행가가 끊이지 않았다. 내 유행가 교실은 그 술자리였다. 막걸리 술 주전자를 나르며 나는 손님들의 유행가를 배웠다. 가게에서 일하던 형들의 유행가 책을 훔쳐 가사를 외웠고 장난감 아코디언으로 서툴게 멜로디를 쳐보기도 했다. 영화관에서 ‘미워도 다시 한 번’ ‘가슴 아프게’ 같은 영화를 보며 주제가를 배웠고, 쇼 공연에서 늘 제일 마지막에 출연하는 이미자의 노래를 함께 불렀다. 나는 세상의 슬픈 유행가가 내 마음을 그대로 옮겨 놓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유행가 가사 같은 시를 쓰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이미자의 “기러기 아빠”를 흉내낸 시를 적어 담임 선생님을 걱정시켜 드리기도 했다. 아버지가 우리에게 남겨주신 것은 가난뿐이었지만 나는 뜻밖에도 아버지가 남기신 글을 읽었다.    아버지는 달필이었다.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것 같은 고급노트에 아버지는 당신이 좋아하셨던 유행가 가사를 볼펜 글씨로 빽빽이 적어 놓으셨다. 나는 유품과 같은 아버지의 유행가 가사를 오랫동안 가슴에 담고 지우지 않았다. 30대에 세상을 떠나신 아버지도 노래를 좋아하셨다. 아버지가 좋아하신 노래는 가곡이나 명곡이 아니라 유행가였다. 아버지는 시골 할아버지 댁에서 축음기를 통해 노래를 듣기도 했고, 진공관 전축을 사서 노래를 자주 들으셨다. 무엇보다도 아버지는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나기 몇 십분 전에도 잠시 들른 아버지 친척 댁에서 전축을 틀어 놓고 누군가의 유행가를 열심히 들으셨다고 했다.    어머니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아버지의 유행가는 ‘갈대의 순정’뿐이다. ‘사나이 우는 마음을 그 누가 아랴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의 순정…’은 아버지의 지독한 애창곡이었다고 한다. 그런 유행가 만들어주는 60년대식 슬픔이 나에게 서정시를 쓰게 만들었고, 유행가는 내 서정의 자양분이 되었다. 나는 어느 자리에서 배호의 노래를 부를 줄 아는 시인과 부르지 못하는 시인은 구분되어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유행가를 딴따라라 한다. 나는 그 딴따라가 좋다. 흔히 대중적, 통속적이라는 감상이 시인에게는 따뜻한 자양분이 된다. 한국 시단에는 3배호가 있다. 대구의 서지월 시인이 서배호, 부산의 최영철 시인이 최배호, 울산의 나는 정배호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서배호는 배호와 똑같은 목소리로 노래를 하고, 최배호는 배호와 똑같은 모습으로 노래를 한다. 나는 그들의 노래를 들을 때마다 현재 우리 시단의 좋은 시인인 그들의 시가 유행가의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음치고 박치인 나는 폼만 배호다. 서배호, 최배호의 노래 뒤에는 앙코르가 있지만 내 노래는 앙코르가 없다. 그래도 나는 열심히 유행가를 부르고 듣는다. 유행가에서 시를 배웠기 때문이다.       9. 그 마지막엔 시만이 시인을 만든다    신문사는 새로 입사하는 수습기자에게 기사 작성법을 가르쳐주지 않는다. 종이밥을 먹던 신문기자 시절, 어느 누구도 나에게 기사 쓰는 법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 나이 들어 입사한 신문사라 후배를 선배로 모시고 경찰기자 생활이 시작됐다.1진은 서울 중부경찰서 기자실 소파에 앉아있고, 나는 남대문, 용산경찰서를 들개처럼 싸돌아다녔다. 내가 근무하는 신문사가 석간신문을 제작하고 있어 새벽같이 종합병원 영안실과 경찰서 형사계, 유치장을 돌고 1진에게 간밤의 사건과 사고를 전화로 보고한다. 그러면 1진은 뉴스가 될만한 것을 기사로 만들어 즉시 전화로 부르라고 한다.  교과서에서 배운 6하원칙을 적용하여 기사를 작성해 전화송고를 하면 욕설이 쏟아진다. 새벽부터 나이 어린 신문사 선배에게 듣는 욕은 사람을 참담하게 만들어준다. 남쪽에 두고 온 가족생각이 나고, 같이 욕설을 퍼붓고 때려치워 버리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다.1진의 지적은 정확했다. 내가 놓친 부분을 보지도 않고서 정확하게 찾아냈다. 부끄러움으로 얼굴이 달아오를 정도다   1진은 그렇게 욕설로 지적을 할 뿐 3개월의 그 지독한 수습기간에 신문기사를 어떻게 쓰라는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  문화부 기자 생활을 할 때의 일이다. 강원도 백담사에 유배돼 있던 전두환 전대통령이 법회를 연다고 해서 취재지원을 나간 적이 있었다. 경쟁사의 기자들과 함께 취재를 하고 나는 끙끙대며 2백자 원고지 5장 정도 분량의 스케치 기사를 작성해 팩스로 보냈다. 그런데 경쟁사 모 선배기자는 기사를 작성하지도 않고 메모만 보고, 그것도 전화기를 들고 짧은 시간에 25장 분량의 기사를 송고하는 것을 보고 나는 놀라고 말았다. 그리고 과연 나는 신문기자의 자질이 있는 가하는 절망에 빠지고 말았다. 다행히 내 그런 좌절을 안 한 선배가 ‘신문기자의 교과서는 신문이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그때서야 나는 신문을 통해 신문기사 쓰는 법을 새롭게 배우기 시작했다. 매일 매일 쏟아지는 신문을 펴놓고 좋은 기사는 옮겨 적어보고, 사건과 사고의 유형별로 좋은 기사들을 스크랩해 참고서를 만들었다. 신문 속에 내가 가고 싶었던 길이 숨어있었다. 시를 쓰는 일도 마찬가지다. 시 창작의 최고의 교과서는 시고, 시집이다. 그것도 좋은 시고 시집이어야 한다. 앞서 잠깐 언급한 적이 있지만, 나는 시인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좋은 시집을 권하고 무조건 필사할 것을 숙제로 내준다. 눈으로 읽는 리듬과 손으로 쓰며 배우는 리듬은 엄청난 차이가 있다. 나도 신춘문예 당선 전까지 참으로 많은 선배시인들의 시를 옮겨 쓰며 시 쓰는 법을 배웠다. 시인이 되려는 제일 마지막 관문은 선배들의 좋은 시와 시집이 나에게 시가 무엇이며, 시의 길이 어떤 것인지를 가르쳐 주는 것이었다. 내 친구 최영철 시인은 내 시집 발문에 나를 ‘타고난 시인’이라고 쓴 적이 있다. 너무 일찍 배운 슬픔으로 감성은 타고 났을지 몰라도 나 역시 ‘만들어진 시인’임을 고백한다. 손에 펜혹이 생기도록 좋은 시를 옮겨 적는 연습을 통해 시를 배웠다. 시인이 되는 교과서는 시인들의 시에 있고, 시집에 모여 있다. 시인은 시험을 통해 자격증을 받는 것이 아니다. 선배 시인들의 인정을 통해 시인이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주 멀리서 혹은 엉뚱한 곳에서 시인의 길을 찾는 사람들이 많은 현실이다. 나는 앞에서 많은 것들이 시인을 만들어 준다고 했다. 그런 것들 중 제일 마지막에 나를 시인으로 만들어 준 것은 시다. 시인이 된 다음에도 마찬가지였다. 후배라 할지라도 좋은 시를 발표하면 한 번 옮겨 적어보며 그 시의 비밀을 찾으려고 한다.    시인을 꿈꾸거나, 시인인 그대여. 시를 읽자. 시집을 읽자. 그것이 시인을 만들고, 시인의 깊이를 더욱 깊게 만들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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