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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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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3    [안녕?- 아침 詩 한송이]- 미친 약속 댓글:  조회:4314  추천:0  2016-03-10
미친 약속                          / 문정희(1947~) 창밖 감나무에게 변하지 말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다, 풋열매가 붉고 물렁한 살덩이가 되더니 오늘은 야생조의 부리에 송두리째 내주고 있다 아낌없이 흔들리고 아낌없이 내던진다 그런데 나는 너무 무리한 약속을 하고 온 것 같다 그때 사랑에 빠져 절대 변하지 않겠다는 미친 약속을 해버렸다 (중략...) 감나무에게 변하지 말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다 (부분. 『카르마의 바다』 . 문예중앙. 2012) 사랑에 빠져 당신은 절대 변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해버린 사람이다. 사랑에 빠져 당신은 이 시처럼 ‘미친 약속’을 해버린 자이다. 해질 무렵 놀이터의 비어 있는 그네에게 당신은 조용히 가본 사람이다. 빈 그네를 밀어주며 ‘너는 절대 떨어지지 않을거야’라고 말해버린 사람이다. 이제 사랑 때문에 변하지 말자는 말보다, 사랑 때문에 변하고야 말았다는 누군가의 고백에 더 뜨거워지는 사람이다. 다시는 변하지 않겠다는 누군가의 다짐처럼 쓸쓸한 것이 있겠는가? 감나무도 잔정이 많아 이파리에게 기울었고, 잔정이 많아 감나무도 수만 번 머리 위의 하늘 때문에 흔들렸다. 잔정이 많아 그 사람은 얼마나 많은 ‘미친 약속’을 해버린 사람인가. 그때 당신과 내가 몰래 훔치고 싶었던 세상이 한 뼘 있어서, 우리는 변해야만 했다. 그게 거짓인줄 알면서, 세상이 우리를 다 속여버리기 전에, 몇 개는 미친 약속을 하고 싶었는지도.   /시평 김경주 시인
1162    <노을> 시모음 댓글:  조회:5176  추천:0  2016-03-10
  +== 노을== 누군가 삶을 마감하는가 보다 하늘에는 붉은 꽃이 가득하다 열심히 살다가 마지막을 불태우는 목숨 흰 날개의 천사가 손잡고 올라가는 영혼이 있나보다 유난히 찬란한 노을이다. (서정윤·시인, 1957-) +== 노을 == 저녁노을 붉은 하늘 누군가 할퀸 자국 하느님 나라에도 얼굴 붉힐 일 있는지요? 슬픈 일 속상한 일 하 그리 많은지요? 나 사는 세상엔 답답한 일 많고 많기에 … (나태주·시인, 1945-) +== 저녁 노을== 비 맞아 떨어진 벚나무 단풍. 책 속에 고이고이 끼워 두었지만 나 몰래 빠져나간 그 고운 빛깔. 누이야, 저 하늘에 걸려 있구나! (손광세·아동문학가, 1945-) +== 석양== 바닷가 횟집 유리창 너머 하루의 노동을 마친 태양이 키 작은 소나무 가지에 걸터앉아 잠시 쉬고 있다 그 모습을 본 한 사람이 '솔광이다!' 큰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좌중은 박장대소가 터졌다 더는 늙지 말자고 '이대로!'를 외치며 부딪치는 술잔 몇 순배 돈 후 다시 쳐다본 그 자리 키 작은 소나무도 벌겋게 취해 있었다 바닷물도 눈자위가 볼그족족했다 (허형만·시인, 1945-) +== 노을== 해는 온종일 스스로의 열로 온 하늘을 핏빛으로 물들여 놓고 스스로 그 속으로 스스로를 묻어간다 아, 외롭다는 건 노을처럼 황홀한 게 아닌가. (조병화·시인, 1921-2003) +== 노을== 나이를 먹는다는 건 나를 곱게 물들이는 일 세월과 함께 그윽하게 익어가는 일 동그마니 다듬어진 시간의 조약돌 뜨겁게 굴려보는 일 모지라진 꿈들 잉걸로 엮어 꽃씨 불씨 타오르도록 나를 온통 피우는 일 (최윤경·시인) * 잉걸=불잉걸 : 불이 이글이글하게 핀 숯덩이 +== 노을 빛 기도 == 고개를 넘어가는 노을 빛은 빛의 가난을 용서합니다. 용서하기 힘든 용서를 무욕의 손으로 씻어냅니다. 노을 빛은 천천히 그러나 초연한 저 켠의 나래들을 뒷걸음질로 반추하며 비움의 철칙으로 화답하고 있습니다. 노을 앞에서는 증오의 활시위도 꺾어집니다. 가장 강한 자의 오만도 용서합니다. 핍박과 배반의 수레를 쉬게 합니다. 노을은 잿빛 하늘이 아닙니다. 평화의 하늘입니다. 노을은 괴로움의 하늘이 아닙니다. 행복의 하늘입니다. 이제는 나 자신을 위해서 오해를 거두어야합니다. 그대를 용서하지 않으면 나 자신으로부터 나를 가둡니다. 그대는 나의 스승입니다. 나를 깨우쳐 주었음이니 그대에게 갚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죄로부터의 사슬을 풀어내는 작은 기도말입니다. (이양우·시인, 1941-) +== 노을== 보내고 난 비인 자리 그냥 수직으로 떨어지는 심장 한 편 투명한 유리잔 거기 그대로 비치는 첫이슬 빨갛게 익은 능금나무 밭 잔잔한 저녁 강물 하늘에는 누가 술을 빚는지 가득히 고이는 담백한 액체 아아, 보내고 나서 혼자서 드는 한 잔의 술. (홍해리·시인, 1942-) +== 노을 == 바이올린을 켜십시오 나의 창가에서 타오르던 오늘 상기된 볼 붉은 빛 속에 가만히 감추고 사랑의 세레나데를 연주해 주십시오 아름다운 노래를 불러 주십시오 곧 다가올 달빛 함께 가벼운 춤 출 수 있게 고운 선율로 복숭아 빛 그대 볼 감싸 안게 다가오십시오 떠나버린 한낮의 뜨거움을 새악시 외씨버선처럼 조심스레 산등성이에 걸어 놓고 또다시 돌아올 아스라한 새벽 빛 맞으러 길 떠날 수 있게 사뿐한 사랑으로 그대 내게 오십시오 (전은영·시인) +==노을 == 어둠끼리 살 부딪쳐 돋아나는 이 세상 불빛은 어디서 오나 쓰러질 듯 쓰러질 듯 서해 바다 가득한 노을을 끌고 돌아오는 줄포항 목선 그물 속 살아서 퍼득거리는 화약냄새 (나호열·시인, 1953-) +== 황혼== 온종일 건너온 고해를 피안의 테두리 안으로 밀어 넣는 이승과 저승이 만나는 곳 수평선 위에 바닷새 한 마리 불타고 있다 하루의 제물을 바치고 있다 (조옥동·시인, 충남 부여 출생) +== 황혼이 질 무렵== 석양을 보면 떠나고 싶다 이름 석 자 내 이름은 벗어버리고 의자에 앉았으면 앉았던 그 모습으로 언덕 위에 섰으면 서 있던 그 모습대로 바람이 불어오면 나부끼던 머리카락 그대로 두고 항상 꿈보다 더 깊은 꿈속에서 나를 부르던 아, 이토록 지독한 향수! 걸어가면 계속하여 걸어가면 닿을 것 같은 보이지 않는 그곳이 있어 아, 이토록 지독한 향수! (홍수희·시인) +== 황혼까지 아름다운 사랑 == 젊은 날의 사랑도 아름답지만 황혼까지 아름다운 사랑이라면 얼마나 멋이 있습니까 아침에 동녘 하늘을 붉게 물들이며 떠오르는 태양의 빛깔도 소리치고 싶도록 멋이 있지만 저녁에 서녘 하늘을 붉게 물들이는 노을지는 태양의 빛깔도 가슴에 품고만 싶습니다 인생의 황혼도 더 붉게 붉게 타올라야 합니다 마지막 숨을 몰아쉬기까지 오랜 세월 하나가 되어 황혼까지 동행하는 사랑이 얼마나 아름다운 사랑입니까. (용혜원·목사 시인, 1952-)
1161    詩作初心 - 시의 제목 잘 선별하기 댓글:  조회:5267  추천:0  2016-03-10
시를 쉽게 쓰는 요령 - 김영남 6. 제목을 효과적으로 잘 붙이는 요령 시의 제목을 제대로 붙일 줄 알려면 그 기법을 알아야 합니다. 실제로 제목을 어떻게 붙이느냐에 따라 한 편의 시가 성립하기도 하고 안 하기도 하고, 또 독자들이 이 시를 읽을 것인가 말 것인가 고민하게 하는 것도 바로 이 제목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지 않나 싶습니다. 그러나 주변에 이 문제에 관하여 체계적으로 연구해 그동안 시 창작에 응용한 사람이 의외로 없다는 게 필자의 판단이었습니다. 하여 이 문제에 관한 한 필자가 문단에서 맨 처음으로 의견을 제시하는 사람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그러면, 같은 제목을 붙이더라도 어떻게 하면 효과적인 제목이 되고, 보다 생산적인 제목이 될 수 있을까? 필자가 그 방법을 개발해서 그동안 작품에 실제로 구사한 경험을 바탕으로 효과적인 제목 붙이는 법, 세 가지를 소개할까 합니다. * 첫 번째 방법은, 화장실에 관한 내용으로 시를 써 놓고 제목을 로 붙이는 경우입니다. 이 방법은 현재 가장 보편적으로 활용하고 있고 많은 사람들이 쓰고 있는 방법입니다. 더욱이 시 뿐만 아니라, 소설, 논문, 일반 문서에까지 광범위하게 활용하고 있는 제일 고전적인 방법입니다. 그러나 시에 있어서는 이걸 제대로 써야지 그렇지 않으면 시의 역기능으로 작용해 여러가지 측면에서 문제가 발생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많은 시들이 제목을 로 해놓고 화장실에 대한 내용으로 시를 쓰거나, 해놓고 서울역에 관하여 온갖 수사와 기교를 동원해 시를 쓰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독자들은 화장실과 서울역에 대한 정보를 이미 많이 갖고 있어서(어쩌면 필자보다 더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는지도 모름) 그 시를 쓴 사람과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그저 그렇고 그런 내용의 화장실과 서울역에 관한 시는 읽으려 하지 않고 쉽게 외면하지 않나 싶습니다. 작자는 정말 열심히 최고로 좋은 시를 썼다고 여기고 있을지 모르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 작자 혼자만의 생각이 아닌가 합니다. 하여, 화장실에 관한 내용으로 시를 쓰고 제목을 로 붙여 효과적인 제목이 되려면, 다음의 요건에 해당되어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즉 그 화장실이 우리가 전에 거의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특별한 모습의 화장실이거나, 아니면 그 화장실에 특별한 사연이 있거나 새롭게 의미가 창조된 화장실이어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다시 말해서 독자들에게 새로운 정보를 제공하는 내용이어야 그 시를 읽어줄 이유가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런 유형의 시로 성공한 작품들을 한번 예로 몇 들어볼까요? 김춘수의 , 김수영의 . 곽재구의 등을 한번 봅시다. 내가 불러줄 때 내게로 와 핀 꽃을 본적이 있습니까? 바람보다 먼저 눕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는 풀을 본적이 있습니까, 사평역이란 시를 보기 전에 사평역이란 말을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만약 사평역을 목포역이라고 제목을 붙였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 때도 이 시의 감동이 사평역만큼 올까요? 하여, 화장실에 관한 내용으로 시를 쓰고 제목을 로 붙여 효과적인 제목이 되려면 위와 같이 우리가 전에 거의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특별한 화장실이거나, 아니면 그 화장실에 특별한 사연이 있거나 새로운 의미가 창조된 화장실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독자들에게 새로운 정보를 제공할 수 있을 때 효과적인 제목이 될 수 있다는 겁니다. * 두 번째 방법은, 시 내용 중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센텐스, 키 센텐스를 제목으로 올리되 전체 내용을 아우를 수 있도록 약간 변용해서 붙이는 방법입니다. 이 방법은 필자가 즐겨 사용했던 방법으로 필자의 시집 정동진역을 읽어보면 금세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필자가 이 방법을 개발하게 된 배경은 평소 광고 카피와 신문 기사의 헤드라인을 유심히 살피는 데서부터 출발했습니다. 즉 기사와 광고 카피의 헤드라인이란 시로 여기면 제목에 해당하는데 이걸 잘 뽑느냐 잘 못 뽑느냐에 따라 그 기사 또는 광고의 첫 인상 뿐만 아니라 여운까지 전혀 다르다는 데에 착안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헤드라인이 그 카피, 기사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내용이다라는 것도 주목하게 된 것입니다. 이걸 시에 한번 적용해봤더니 제대로 맞아떨어지더군요. 이때 붙이는 제목의 형식은 서술형이 되기 쉽고, 내용은 시 전체를 장악할 수 있도록 약간 변용해야 되지 않나 싶습니다. * 세 번째 방법은 시 내용중 가장 근간이 되는 내용의 속성을 가진 전혀 엉뚱한 것으로 제목을 붙이는 방법입니다. 위의 내용으로 설명을 하자면 화장실 내용으로 시를 쭉 써놓고 제목을 으로 붙이는 경우입니다. 그러면 시의 내용과 제목을 연관지어 설명하자면 "김영남은 화장실이다" 라는 시를 쓴 거가 되는 거죠.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어떤 글을 아름다운 여자에 대해서 그럴싸하게 묘사 해놓고 제목을 으로 붙이는 경우입니다. 만약 아름다운 여자에 대해 쭉 묘사해 놓고 제목을 로 붙인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러면 이 글이 아름다운 여자를 설명하고 묘사한 글이지 어떻게 시가 되겠습니까? 그러나 제목을 이라고 붙인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 순간 메타포가 형성되어 시로 떠오르지 않습니까? 이와 같이 제목을 어떻게 붙이느냐에 따라 시가 되고 안 되고 까지 하게 됩니다. 이 방법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만한 시를 하나 소개하고 지면상 한계로 인해 강의를 마칠까 합니다. 소개하는 시는 98년(?) 현대문학 신인작품상 당선작이고 아주 하찮은 여울을 하나 묘사해 놓고 제목을 엉뚱하게 붙여 성공한 시입니다. 만약 이 시 제목을 < XXX 여울>.로 붙였을 경우 시가 될 수 있는지도 한번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사춘기/ 강순 여울에는 밀어,꼬치동자개,버들매치,버들치,배가사리,감돌고기,가는돌고기,점몰개,참마자,송사리,갈문망둑,눈 동자개,연준모치,버들개,모래주사,새미,누치,흰수마자,납자루,열목어,꺽저기,수수미구리지,금강모치, 돌상어,왜매치,꺽지,쌀미구리,점줄종개,돌마자,둑중개,왕종개,버들가지,꾸구리,모샘치,어름치,돌고기, 부안종개,자가시리 등이 살았다. 나는 가끔 물살이 빠른 그곳에 발을 담근다. ===================================================================== 292. 미안하다 / 정호승 미안하다 정 호 승 길이 끝나는 곳에 산이 있었다 산이 끝나는 곳에 길이 있었다 다시 길이 끝나는 곳에 산이 있었다 산이 끝나는 곳에 네가 있었다 무릎과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고 울고 있었다 미안하다 너를 사랑해서 미안하다 정호승 시집 중에서 --------------------------------------------- 293. 모른다 / 정호승 모른다 정 호 승 사람들은 사랑이 끝난 뒤에도 사랑을 모른다 사랑이 다 끝난 뒤에도 끝난 줄을 모른다 창 밖에 내리던 누더기눈도 내리다 지치면 숨을 죽이고 새들도 지치면 돌아갈 줄 아는데 사람들은 누더기가 되어서도 돌아갈 줄 모른다 정호승 시집 중에서
1160    詩作初心 - 시는 두겹으로 그림을 그려라 댓글:  조회:5845  추천:0  2016-03-09
시를 쉽게 쓰는 요령 - 김영남 5. 시를 쉽게 잘 쓰려면 2중 구조에 눈을 떠라. * 이중구조란 글자 그대로 두 가지 그림을 거느리는 구조를 말합니다. 예를 들자면 현실의 나와 의식 속의 나, 현재의 나와 과거ㆍ미래ㆍ 또는 추억 속의 나, 현실의 나와 거울 속의 나, 현실의 나와 그림 속의 나…등 이런 관계를 말합니다. 이런 관계의 시를 가장 선명하게 제일먼저 제시한 시인이 바로 시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상 시인은 주로 거울을 매개체로 해서 현실의 나와 의식 속의 나를 잘 조응했었습니다. 사실 이중구조 이치만 잘 이해하고 소화한 사람이면 이런 유형의 시가 쓰기도 쉽고 참 재미있다라는 걸 금세 느낄 수 있을 겁니다. 남들은 난해하고 쓰기 어렵다고 하는데... 그 로직은 의외로 쉽지 않나 생각합니다. 현실의 나와 거울 속의 나와 대화를 계속 나누면서 온갖 장난과 행동을 다 해보는 겁니다. "현실의 나와 거울 속의 나"로 예를 들면 < 내가 눈빛을 시퍼렇게 뽑으니까/ 거울 속의 녀석도 눈빛을 시퍼렇게 뽑는다./ 내가 쫓아가니까 그 녀석은 도망간다. 화장실로 숨는다/ 내가 다시 돌아서니깐 녀석은 다시 기어 나온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와 행동을 이 둘에만 초점을 맞추어 전개해 나가면 시적 공간이 나와 거울 속의 나로 한정되기 때문에 그 이미지가 아주 선명하게 되고 이야기도 풀어나가기가 한결 쉽게 됩니다. 제 시집 '정동진역'에 실려있는 라는 시도 참고로 한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상상의 시작도 이런 데에서부터 시작하고, 고정관념을 벗어나 사고의 자유로움을 쉽게 느낄 수 있는 것도 바로 이런 데에부터 시작하지 않나 싶습니다. 기본적으로 이런 마인드를 갖고 이상, 김기림, 김수영, 오규원 등 이런 시인들의 시를 한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시가 참 재미있다는 걸 금세 느낄 수 있을 겁니다. * 소재의 이중구조 위에서 예를 든 이중구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소재의 이중구조라는 것이 있는데 이걸 한번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즉 어떤 오브제를 갖다놓고 그 소재와 나와의 관계 둘로 보고 시를 써 나가는 것입니다. 필자가 생각하기에 이때 시를 끌어내는 방식이 세 가지가 있지 않나 싶습니다. 첫째는 내가 아예 그 소재가 되어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고, 둘째는 거꾸로 그 소재가 나로 되어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고, 셋째는 그 소재와 내가 서로 마주보고서 떨어져 앉아 대화를 나누며 생각하는 방법입니다 이라는 소재를 가지고 예를 한번 들어볼까요? * 첫 번째 방법은 이렇습니다. < 나는 엉덩이에 찌그러진 상호를 붙였지만/ 발로 차면 크게 소리를 지른다/ 밟으면 시커먼 침을 뱉을 수도 있고/ 잘 돌봐주면 난 그대 책상을 꾸미는 꽃병이 될 수도…> 이런 식으로 내가 깡통이 되어 깡통의 속성을 가지고 계속 생각하고 행동한 다음에 제목을 으로 붙이는 경우입니다. 이때 유의할 점은 본문 내용에 절대 '깡통'이라는 단어가 들어가면 안 됩니다. '깡통'이란 말이 들어가면 깡통이란 단어를 보는 순간 내가 깡통이라는 환상이 갑자기 확 깨져버립니다. 이것만 잘 소화해도 현상문예 예선을 거뜬히 통과할 수 있을 정도로 시가 감각적이 되지 않나 싶습니다. *두 번째 방법은 거꾸로 깡통이 내가 되어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 이 깡통은 목소리가 크고/ 속에 든 것은 아무 것도 없고/ 하루종일 거리에서 빈둥거리며 놀고/ …그리하여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깡통/ 가끔 앞집 아저씨의 발에 채여/ 아프다고 소리치는 깡통……> 이렇게 깡통이 내가 되어 생각하고 행동한 다음에 제목을 으로 붙이는 경우입니다. 이때는 또 반대로 '나의' 라는 말이나 '나'라는 단어가 들어가면 절대 안 됩니다. 마찬가지로 이런 단어를 보는 순간 환상이 확 깨져버립니다. * 세 번째 방법은 지면상 설명이 좀 길어질 것 같아 다음 기회로 미루고 첫 번째 방법에 충실한 시 한편을 소개하고 게시판 시 감상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첫 번째 방법만 잘 활용해도 눈에 확 나는 좋은 시를 금세 쓸 수 있지 않나 싶습니다. 수박/ 윤문자 나는 성질이 둥글둥글하다는 소리를 자주 듣는다 허리가 없는 나는 그래도 줄무늬 비단 옷만 골라 입는다 마음속은 언제나 뜨겁고 붉은 속살은 달콤하지만 책임져 주지 않는 사람에게는 절대로 배꼽을 보여주지 않는다 목말라 하는 사람을 보면 가슴이 아파 견딜 수가 없다 겉모양하고는 다르게 관능적이다 나를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면 오장육부를 다 빼 주고도 살 속에 뼛속에 묻어 두었던 보석까지 내 놓는다 ============================================================================= 290. 새벽편지 / 정호승 새벽편지 정 호 승 죽음보다 괴로운 것은 그리움이었다 사랑도 운명이라고 용기도 운명이라고 홀로 남아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고 오늘도 내 가엾은 발자국 소리는 네 창가에 머물다 돌아가고 별들도 강물 위에 몸을 던졌다 정호승 시집 중에서 ----------------------------------------------------------------- 291. 눈부처 / 정호승 눈부처 정 호 승 내 그대 그리운 눈부처* 되리 그대 눈동자 푸른 하늘가 잎새들 지고 산새들 잠든 그대 눈동자 들길 밖으로 내 그대 일평생 눈부처 되리 그대는 이 세상 그 누구도 곁에도 있지 못하고 오늘도 마음의 길을 걸으며 슬퍼하노니 그대 눈동자 어두운 골목 바람이 불고 저녁별 뜰 때 내 그대 일평생 눈부처 되리 * 눈부처 : 눈동자에 비치어 나타난 사람의 형상, 瞳人. 정호승 시집 중에서
1159    詩作初心 - 시는 20행이하로... 댓글:  조회:7125  추천:1  2016-03-09
시를 쉽게 쓰는 요령 - 김영남 4. 시의 길이는 20행 정도가 적당하다 초보자 시절에 시의 퇴고와 관련하여 자주 고민하는 것이 연을 어떻게 나눌 것인가? 시의 길이는 어느 정도로 할 것인가입니다. 여기에는 내용에 따라 전개하는 형식에 따라 각각 다르겠지만 행갈이를 정상적으로 한다고 할 때 시의 길이는 대체적으로 20행 정도를 목표로 하고, 시의 연은 의미가 달라지는 부분에서 연을 구분하는 게 가장 바람직하지 않나 싶습니 다. 우리가 시를 읽을 때 통상적으로 20행이 넘어 시가 길어지면 우선 시각적으로도 질리게 되고,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그 시를 읽고 싶은 마음이 싹 달아나게 됩니다. 시가 길어질 땐 길어지는 특별한 사유가 있어야 합니다. 우선 그 시가 아주 재미있다든지, 아니면 호흡이 길어도 독자들이 지루함을 못 느끼도록 하는 특별한 기교와 내용이 있든지 해야 합니다. 이젠 독자들도 영악해서 별로 의미 없고 특별한 내용도 없으면서 작자만의 생각으로 길게 쓴 시는 두 번 다시 읽지 않는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시가 문학의 어느 분야보다도 언어의 함축성과 경제성을 추구하는 예술이라는 걸 생각하면 금세 이해가 가리라 여깁니다. 그러나 요즘 시 잡지에 발표되는 시들을 보면 필자가 말하는 내용과 너무나 다르다는 걸 느낄 겁니다. 좋은 시란 적당한 길이에 음악성과 함축성을 겸비하고 이미지가 선명한 시가 좋은 시입니다. 하여, 초보자 시절에는 상상은 끝없이 해놓고 나중에 작품을 다듬어 퇴고할 때 이 정도의 길이로 지향하는 게 바람직할 겁니다. 연을 나눌 때에는 대체적으로 의미가 달라질 때 나누게 됩니다. 그러니까 상상의 내용이 건너 뛸 때. 변칙도 있습니다만 초보자 시절에는 여하튼 기본에 충실하는 게 발전이 빠릅니다. 그리고 1, 2, 3 등으로 구분하는 것은 내용이 거의 연작시 수준이거나, 연을 구분하기에는 보폭이 너무 클 때 통상 사용하는 것으로 초보자 시절에는 가능한 한 사용하지 않는 게 바람직합니다.   ======================================================================================= 288. 이별노래 / 정호승 이별노래 정 호 승 떠나는 그대 조그만 더 늦게 떠나준다면 그대 떠난 뒤에도 내 그대를 사랑하기에 아직 늦지 않으리 그대 떠나는 곳 내 먼저 떠나가서 나는 그대 뒷모습에 깔리는 노을이 되리니 옷깃을 여미고 어둠 속에서 사람의 집들이 어두워지면 내 그대 위해 노래하는 별이 되리니 떠나는 그대 조금만 더 늦게 떠나준다면 그대 떠난 뒤에도 내 그대를 사랑하기에 아직 늦지 않으리 정호승 시집 중에서 이별노래 작시 : 정호승 작곡 : 최종혁 노래 : 이동원 떠나는 그대 조금만 더 늦게 떠나준다면 그대 떠난 뒤에도 내 그대를 사랑하기에 아직 늦지 않으리. 그대 떠나는 곳 내 먼저 떠나가서 나는, 그대 뒷 모습에 깔리는 노을이 되리니. 옷깃을 여미고 어둠 속에서 사람의 집들이 어두워지면 내, 그대 위해 노래하는 별이 되리니. 떠나는 그대 조금만 더 늦게 떠나준다면 그대 떠난 뒤에도 내 그대를 사랑하기에 아직 늦지 않으리 -------------------------------------------------------------------------- 289. 우리가 어느 별에서 / 정호승 우리가 어느 별에서 정 호 승 우리가 어느 별에서 만났기에 이토록 서로 그리워하느냐 우리가 어느 별에서 그리워하였기에 이토록 서로 사랑하고 있느냐 사랑이 가난한 사람들이 등불을 들고 거리에 나가 풀은 시들고 꽃은 지는데 우리가 어느 별에서 헤어졌기에 이토록 서로 별빛마다 빛나느냐 우리가 어느 별에서 잠들었기에 이토록 새벽을 흔들어 깨우느냐 해 뜨기 전에 가장 추워하는 그대를 위하여 저문 바닷가에 홀로 사람의 모닥불을 피우는 그대를 위하여 나는 오늘밤 어느 별에서 떠나기 위하여 머물고 있느냐 어느 별의 새벽길을 걷기 위하여 마음의 칼날 아래 떨고 있느냐 정호승 시집 중에서
1158    <개> 시모음 댓글:  조회:4588  추천:0  2016-03-08
+ 개 짖는 소리 개 짖는 소리 들으면 누가 고갯마을 찾아오는지 알 수 있다 동네사람인지 외지사람인지 굵은 빗줄기 재 넘어 오고 있는지 개 짖는 소리의 파장으로 금방 가늠할 수 있다 꼬리 흔드는 개를 보면 마을 손님 어디쯤 돌아가는지 알 수 있다 청도원인지 먹감나무집인지 동구나무 그늘 빠져나가고 있는지 먼 발소리 듣고 개는 꼬리로 신호를 보낸다 개 짖는 소리에 귀 쫑그리는 고개티사람들 땅바닥에 납작 엎드리고 산다 (장하빈·시인, 1957-) + 개에게서 배우다 개가 사람을 키운다 목숨 같은 밥 때 맞춰 주질 않고 갈 곳 많은데 진종일 묶어 두고 몸 한 번 깨끗이 닦아주지 않으면서 실수해 밥그릇이라도 엎으면 이때라는 듯 눌러 온 속마음 죄다 드러내 욕질 발길질 질질대는 주인더러 사는 게 그리 고달프냐 나라고 이해 못하겠냐며 세상 다 품을 눈빛 실어 보낸다 뼈 부수는 송곳니 잘 감추고 함부로 발톱 내밀지 않고 사랑 받을 생각 없이 제자리 지키며 뭉텡이 외로움 푸르르 털어내 차가운 골방도 포근하게 만드는 걔, 워리가 죽는 날까지 한 사람만 사랑하려면 배고픔도 쓸쓸함도 삭이며 사는 거라고 사람을 가르친다 나, 개를 키우며 배운다 (박하현·시인) + 응시 사슬에 매인 루키를 한없이 바라보고 있다. 불쌍한 밥그릇 옆에 하염없이 목줄이 매여 묶여 있는 루키 ----루키야, 너는 왜 개로 태어났니? 하늘이 비치는 순한 눈동자를 들어 루키는 하염없이 나를 바라보고 있다. 흰 옷 입고 걸어가던 어머니처럼 인자하게 한번 더 나를 바라보는 루키. ----그런데, 너는 왜 사람으로 태어났니? 루키와 나. 그렇게. (김승희·시인, 1952-) + 개가 바라보는 세상 내가 바라보는 세상은 일 미터 이내 내가 바라보는 세상은 오직 세 가지 색깔 대지에 코를 박고 잠들 때 감싸주는 푸른 공기와 낯선 자를 공격할 때 덮쳐오는 까만 어둠 일용할 양식을 들고 오는 아줌마의 흰 앞치마 그 밖의 색깔은 내겐 필요없다 콧등을 어루만지는 다섯 살 배기의 서툰 애정이나 술 취해 귀가할 때만 반기는 주인아저씨의 세상 냄새 함께 집을 지키는 주인아줌마의 외로운 잔소리 코만 들이대면 모든 변덕이 냄새로 감지된다 나는 변방에 머무는 아웃사이더 사람들 세계로부터 소외된 방관자 하느님조차 나와 눈빛을 맞추지 않지만 아무도 키를 낮춰 나와 소통하지 않지만 게릴라처럼 달겨드는 천둥, 번개의 말씀이나 낮은 대지로부터 구름 밖 하늘의 말씀까지 나의 예언은 정확하다 열린 맨홀을 돌아나가라고 경고하는 것도 낯선 이의 통행을 먼저 차단하는 것도 골목의 하루를 점검하며 이웃 파수꾼과 교신하는 것도 모두 나의 하루치 몫 냄새나는 사람들의 하루를 지켜내는 나의 몫 나는 오늘도 경비를 선다 외로워 싸움을 거는 사람들 향해 불을 켜도 어둠을 쫓지 못하는 세상을 향해 (김금용·시인, 서울 출생) + 개 망둥이를 낚으려고 노을 첨벙거리다가 돌아오는 길 어둠 속에서도 개는 내 수상함을 간파하고 나를 겁주며 짖는다 내가 여기 더 오래 살았어 네가 더 수상해 나는 최선을 다해 개를 무시하다 시끄러워 걸음 멈추고 개와 눈싸움을 한다 사십여 년 산 눈빛으로 초저녁 어둠도 못 뚫고 똥개 하나 제압 못하니 짖어라 나도 내가 수상타 서녘 하늘에 낚싯바늘 같은 달 떠 있고 풀 꿰미에 꿴 망둥이 댓 마리 푸덕거린다 (함민복·시인, 1962-) + 네 발로 걷는 스승 네 발로 걷는 스승이라는 冊이 있었다 거기, 악보를 볼 줄 알고 산수를 하고 천리안을 가진 개들이 있었다 인간이 개의 입장에서 본 이야기였는데 둘 사이에 對話도 가능하다는 것, 물론 나도 개를 사랑하지만, (내 누이는 장애견이나 유기견을 거두고 있지만, 그 중 '자비' 녀석은 忌日까지 기념하지만, 한겨울 뒷산에서 학대와 기아로 凍死 직전에 구출된 '기쁨'이는 다시 얻은 이름 그대로 재활에 성공한 케이스지만,) 오늘 나는 보았다 출가한 것이 분명한 어느 집 개인지 도심의 횡단보도를 단정히 건너는 준법的인 모습을 진화한 개들은 과연 그럴 수 있다 개들이 얼마나 세상을 알려고 하는지 차에 태워보면 안다 슬픈 가축의 歷史, 초롱하기도 하고 그윽한 그 눈이 선량하다 (최병무·시인, 1950-) + 개 서라면 서고 앉으라면 앉았다 가라면 가고 오라면 왔다 쫓으라면 쫓고 물라면 물었다 나이가 들어 기운이 빠지자 주인은 개를 개장수한테 팔았다 그리고 그는 살과 뼈가 따로 추려져 탐욕스러운 사람들의 식탁에 올랐다 주인도 끔찍이도 사랑하던 제 개의 고기를 먹으며 자못 흡족했다 그 개는 죽어서 헐값의 가죽밖에 남긴 것이 없다 가죽보다 더 값진 교훈을 남겼다는 거짓과 함께. (신경림·시인, 1936-) + 유기견(遺棄犬) 하늘이 보시기에 개를 버리는 일이 사람을 버리는 일인 줄 모르고 사람들은 함부로 개를 버린다 땅이 보시기에 개를 버리는 일이 어머니를 버리는 일인 줄 모르고 사람들은 대모산 정상까지 개를 데리고 올라가 혼자 내려온다 산이 보시기에도 개를 버리는 일이 전생을 버리는 일인 줄 모르고 나무가 보시기에도 개를 버리는 일이 내생을 버리는 일인 줄 모르고 사람들은 거리에 개만 혼자 내려놓고 이사를 가버린다 개를 버리고 나서부터 사람들은 사람을 보고 자꾸 개처럼 컹컹 짖는다 개는 주인을 만나려고 떠돌아다니는 나무가 되어 이리저리 바람에 흔들리다가 바람에 떠도는 비닐봉지가 되어 이리저리 거리를 떠돌다가 마음이 가난해진다 마음이 가난한 개는 울지 않는다 천국이 그의 것이다 (정호승·시인, 1950-) + 어떤 죽음 털이 짧고 갈색인 애완견이 며칠 전부터 모든 음식을 거부한다 가능하면 혼자 있으려고 한다 천성인 듯 사람을 잘 따르고 언제나 경쾌하던 개가 좋아하던 고기나 치즈를 줘도 제 발 위에 올려놓은 턱을 꿈쩍도 않았다 다만 주인의 마음을 안다는 듯 젖은 눈망울을 한번 껌벅이고 스르르 눈꺼풀을 닫는다 15년 함께 한 주인이 가까이 오는 것도 거부하고 혼자 현관 앞으로 가 대문을 향해 엎드린다 왜 그런지는 알 수 없지만 개와 나 사이가 참 적막했다 다음날 아침에 보니 그 자세로 죽어 있었다 저만 갈 수밖에 없는 길이었다 (이성이·시인) + 엘레지 말복날 개를 잡아 동네 술추렴을 했다 가마솥에 발가벗은 개를 넣고 땀 뻘뻘 흘리면서 장작불을 지폈다 참이슬 두 상자를 다 비우면서 밭농사 망쳐놓은 하늘을 욕했다 술이 거나해졌을 때 아랫집 김씨가 나에게 말했다 -이건 오씨가 먹어요, 엘레지요 엉겁결에 길쭉하게 생긴 고기를 받았다 엘레지라니? 농부들이 웬 비가(悲歌)를 다 알지? -엘레지 몰라요? 개자지 몰라요? 30년 동안 국어선생 월급 받아먹고도 '엘레지'라는 우리말을 모르고 있었다니! 그날 밤 꿈에서 나는 개가 되었다 가마솥에서 익는 나의 엘레지를 보았다 (오탁번·시인, 1943-) + 돈 워리 비 해피 1. 워리는 덩치가 산만한 황구였죠 우리집 대문에 줄을 매서 키웠는데 지 꼴을 생각 못하고 아무나 보고 반갑다고 꼬리치며 달려드는 통에 동네 아줌마와 애들, 여럿 넘어갔습니다 이 피멍 좀봐, 아까징끼 값 내놔 그래서 나한테 엄청 맞았지만 우리 워리, 꼬리만 흔들며 그 매, 몸으로 다 받아냈습니다 한번은 장염에 걸려 누렇고 물큰한 똥을 지 몸만큼 쏟아냈지요 아버지는 약값과 고기 값을 한번에 벌었습니다 학교에서 돌아와 보니 한성여고 수위를 하는 주인집 아저씨, 수육을 산처럼 쌓아놓고 금강야차처럼 우적우적 씹고 있었습니다 평생을 씹을 듯했습니다 2. 누나는 복실이를 해피라고 불렀습니다 해피야, 너는 워리처럼 되지 마 세 달만에 동생을 쥐약에 넘겨주었으니 우리 해피 두 배로 행복해야 옳았지요 하지만 어느 날 동네 아저씨들, 장작 몇 개 집어들고는 해피를 뒷산으로 데려갔습니다 왈왈 짖으며 용감한 우리 해피, 뒷산을 타넘어 내게로 도망왔지요 찾아온 아저씨들, 나일론 끈을 내게 건네며 말했습니다 해피가 네 말을 잘 들으니 이 끈을 목에 걸어주지 않겠니? 착한 나, 내게 꼬리치는 착한 해피 목에 줄을 걸어줬지요 지금도 내 손모가지는 팔뚝에 얌전히 붙어있습니다 내가 여덟 살, 해피가 두 살 때 얘기입니다 (권혁웅·문학평론가 시인, 1967-)
1157    [안녕?- 아침 詩 한송이]ㅡ 봄소동 댓글:  조회:4179  추천:0  2016-03-08
봄소동                   /고명 ​ ​ ​어느 봄날 동무가 없어 심심하던 강아지 고양이를 만났다 야! 반갑다 (꼬리 ↑) 마음 반짝반짝 마주 달려가는 강아지 고양이 (꼬리↓) 아니, 저 녀석이 나만 보면 올리나? 내리나? 으르릉 야옹야옹 왕왕멍멍으르르릉 (↑↓↑↓)
1156    "나는 단어를 찾는다" -폴란드 시인 쉼보르스카 댓글:  조회:3925  추천:0  2016-03-07
    노벨문학상 수상 소감 연설에서 비스와바 쉼보르스카는 이렇게 말했다. “단어 하나하나가 모두 의미를 갖는 시어의 세계에서는 그 어느 것 하나도 평범하거나 일상적이지 않습니다. 그 어떤 바위도, 그리고 그 위를 유유히 흘러가는 그 어떤 구름도. 그 어떤 날도. 그리고 그 뒤에 찾아오는 그 어떤 밤도. 아니 그 누구의 것도 아닌 이 세상의 모든 존재도. 이것이야말로 시인들은 언제 어디서든 할 일이 많다는, 그런 의미가 아닐는지요.” 나는 단어를 찾는다. 비스와바 쉼보르스카(1923~2012), 그를 한마디로 표현할 단어를 찾는다. 어느 것도 충분하지 못하다. 가장 요긴한 말은 쓸데없고, 가장 뜨거운 말은 너무 미지근하다. 1945년 ‘나는 단어를 찾는다’로 데뷔한 폴란드 시인은 그 시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가장 용감한 말은 비겁하고/ 가장 경멸적인 말은 여전히 성스럽다/ 가장 잔인한 말은 너무나 동정적이고/ 가장 적대적인 말은 너무나 약하다// 그 말은 화산 같아야 한다/ 격동하고, 솟구치고, 힘차게 쏟아져 내려야 한다”. 노벨문학상(1996년) 수상 때 “모차르트의 음악같이 잘 다듬어진 구조에, 베토벤의 음악처럼 냉철한 사유 속에서 뜨겁게 폭발하는 그 무엇을 겸비했다”(스웨덴 한림원 노벨문학상 수상자 발표 연설문 중)는 찬사를 받자 “진정한 시인이라면 ‘나는 모르겠어’를 되풀이해야 한다”고 되뇌었던 시인의 유고시집 ‘충분하다’가 번역 출간됐다. 한국어판에는 생전 펴낸 마지막 시집 ‘여기’에 실린 시가 더해졌다. 쉼보르스카가 눈을 감기 전 완성한 시는 13편이다. 고민과 첨삭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긴 미완성 시 원고가 또 6편 있었다. 이를 합치고 동료이자 편집자인 리샤르드 크리니츠키의 편집후기를 붙인 ‘충분하다’가 나오자 폴란드 언론들은 ‘유고시집’ 대신 ‘신간시집’이라는 말로 그에게 애정을 표시했다. ‘충분하다’의 시어들은 초창기만큼이나 꾸밈없고 명징하다. 문장은 가볍고 투명한데도 묵직한 힘으로 존재의 본질을, 생의 이면을, 문명의 폐단을 떠올리게 한다. “다른 곳은 어떤지 잘 모르겠어/ 하지만 여기 지구에서는 모든 것이 꽤나 풍요로워/ 여기서 사람들은 의자와 슬픔을 제조하지// (…)여기서 무지(無知)는 과로로 뻗어버렸어. 끊임없이 뭔가를 계산하고, 비교하고, 측정하면서/ 결론과 근본적 원리를 추출해내느라.”(‘여기’ 중) 일상을 읊다 불쑥 폭력, 전쟁 등의 테마를 눈 앞에 가져와 뇌를 식히는 문장도 여전하다. 1993년 ‘끝과 시작’이후 쉼보르스카가 이런 주제를 시 속에 언급한 일은 드물다고 한다. 그는 사슬에 묶인 채 무기력하게 누워 있는 개의 모습에서 인간을 향한 억압을, 거리에 남은 시위의 흔적을 보며 폴란드 사회의 현 주소를 본다. “무더운 여름날, 개집, 그리고 사슬에 묶인 개 한 마리/ 불과 몇 발자국 건너, 물이 가득 담긴 바가지가 놓여 있다/ 하지만 사슬이 너무 짧아 도저히 닿질 못한다/ 이 그림에 한 가지 항목을 덧붙여보자/ 훨씬 더 길지만/ 육안으로는 보기 힘든 우리의 사슬, 덕분에 우리는 자유롭게 서로를 지나칠 수 있다.”(‘사슬’전문) ‘두 번은 없다’며 유한성 앞에 겸허했던 그는 죽음 앞에서도 초연하고 담담하다. “어쨌든 나는 돌아가야만 한다/ 내 시의 유일한 자양분은 그리움/ 그리워하려면 멀리 있어야 하므로” (미완성 원고 부분) 있는 힘을 다해 단어를, 문장을 갈구해 온 그가 택한 마지막 시어는 소소하지만 더할 나위 없이 충분했다. 김혜영기자  
1155    [동시야 놀자]- 지각 대장 싸움 대장 댓글:  조회:4311  추천:0  2016-03-07
   
1154    [동시야 놀자]- 쫑마리 댓글:  조회:3901  추천:0  2016-03-07
원앙새 새끼들이 막 둥지를 떠나 물로 가려 하고 있다. 날이 새기 전 새벽녘, 뱀이랑 족제비가 일어나기 전에 온 식구가 얼른 느티나무 속 둥지에서 뛰어내려 냇물로 가야 한다.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 일곱 마리 새끼가 모두 뛰어내렸는데 막내 원앙이만 꾸물대고 오지 않는다. “싸기싸기 내려오니라.” 엄마 원앙이는 자꾸 꾸무럭거리면 떼놓고 간다고 막내에게 겁을 준다. “엄마두 인제 몰러. 오든지 말든지 맘대루 햐.” 엄마 원앙이가 기다리다 못해 최후통첩을 하고 언니 오빠들을 데리고 앞장서자 드디어 막내 원앙이도 풀쩍 뛰어내린다. “엄마 같이 가. 하냥 가자니께.” 하면서. 이소, 떠날 리(離) 둥지 소(巢). 보금자리를 뜻하는 소(巢) 글자는 나무 위에 둥지가 있고 그 위에 새가 세 마리 들어앉아 있는 모양새다. 송진권 시인의 ‘이소’는 새끼 원앙이들이 다 자라 둥지를 떠나는 순간을 아름답게 포착했다. 부모의 보호를 받으며 평화롭게 살던 둥지에서 넓은 세상으로 훌쩍 건너가는 순간이다. 막내를 재촉하는 엄마의 충청도 사투리가 맛깔스럽고, 원앙이들의 행렬이 한 폭의 그림처럼 머릿속에 그려진다. 때가 되면 사람도 둥지를 떠나 홀로 서기를 해야 하는데, 요즘 젊은이들은 둥지를 못 떠나고 맴돈다. 둥지에 머물기엔 너무 커버렸지만 둥지 밖에 알맞은 거처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둥지를 나와서도 경계에서 장기간 대기 상태로 있으면서 기약 없는 시도만을 되풀이하는 청춘도 있다. 둥지를 떠나 자기 몫의 한 생을 지내고 나서 지친 몸을 쉬러 안온한 보금자리로 귀소(歸巢)하려 할 때도 막막해진다. /김이구 문학평론가  
1153    [동시야 놀자]- 오줌싸개 지도 댓글:  조회:4382  추천:0  2016-03-07
세탁기가 없던 시절, 아이가 요에 오줌을 싸면 어떻게 했을까. 요를 말리려면 빨랫줄에 널고 바지랑대로 빨랫줄이 처지지 않게 튼튼히 받쳐놓아야 했다. 요에 오줌 얼룩이 생긴 것을 보면 사람들은 ‘지도를 그렸다’고 놀리곤 했는데, 이 시는 오줌싸개 동생을 보고 그와 같이 놀리는 내용이다. 그런데 어머니와 아버지가 모두 부재한 상황이다. 엄마가 가 계신 ‘별나라’는 꿈에나 가볼 수 있고, 아빠는 멀리 만주로 돈 벌러 갔다. 표면으로는 오줌을 잘 싸는 동생을 재미가 나서 놀리고 있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있어야 할 것이 모두 없는 상황에 처해 있다. 윤동주 시인은 스무살 전후에 시를 쓰기 시작하면서 동시도 함께 썼다. 간도 용정에서 발간되던 ‘가톨릭 소년’지에 1936, 37년에 여러 차례 동시를 발표하기도 했다. ‘오줌싸개 지도’도 그 중의 한 편이다. 그는 만주 명동촌에서 태어나 1938년 고종사촌 송몽규와 함께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할 때까지 주로 만주에서 성장하고 학교를 다녔다. 그런데 “돈 벌러 간 아빠 계신/만주 땅”이라는 표현을 보면 화자인 아이의 자리는 만주가 아니다. 만주에 살았지만 시인의 의식이 뿌리내리고 있는 곳은 고국 땅임을 짐작할 수 있다. “동주를 보고 울었습니다. 몽규를 보고 울었습니다. 가슴이 먹먹해서 입술을 다문 채 소리없이 눈물만 연신 흘렸습니다. 영화가 끝났는데 가슴이 저려서 한동안 멍하니 앉아서 울었습니다.” 동시를 쓰는 분이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이다. 삼일절에 나도 가족과 함께 이준익 감독의 영화 ‘동주’를 보았다. 시를 쓴 해맑은 청년 동주와 그 시대 젊은이들이 헤쳐간 삶이 흑백 화면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김수환 추기경은 생전에 윤동주의 ‘서시’를 다 외지 못했다고 한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그 구절이 너무 와 닿기 때문에. 막 출간된 김응교의 ‘처럼―시로 만나는 윤동주’와 지난해 나온 안소영의 ‘시인 동주’를 펼쳐도 윤동주의 시와 삶 속으로 깊이 들어갈 수 있다. /김이구 문학평론가  
1152    [동시야 놀자]- 아름다운 국수 댓글:  조회:4500  추천:0  2016-03-07
싱크대 서랍 속에 누워 있는 ‘미끈한 발레리나’는 무얼까? 얼핏 짐작이 가지 않는다. “발레 슈즈도 신지 않은/보얀 맨발”을 한 이것을 한 묶음 집어서, “톡톡 키를 맞추고/물 끓는 냄비에 넣”는다고 했다. 조금 짐작이 간다. “둥근 치마가/꽃처럼 펼쳐진다”에서는 발레리나가 빙글빙글 회전하자 치마가 확 펼쳐지는 모습이 그려지며, 냄비에 마른 국수를 넣을 때 확 펼쳐지는 모습과 겹쳐진다. 국수가 한바탕 보글보글 끓은 뒤 체에 받쳐 찬물에 건져냈을 때, 그 모습은 “새초롬”하고 “매끄럼”하고 “말끄럼”하다. 새초롬! 매끄럼! 말끄럼! 그 아름다운 발레리나를 차마 먹을 수 있을까! 요즘엔 사라진 표현이 ‘국수 언제 먹느냐?’는 질문이다. 장가 언제 갈 건가, 시집 언제 갈 건가를 묻는 것이었다. 예전에는 잔칫집의 중심 음식이 국수였다. 지금은 결혼식 때 자기 집이 아닌 외부 식당에서 뷔페로 온갖 종류의 음식을 내는 게 대세다. 그러나 예전같이 소박하면서도 왁자한 정취는 맛보기 어렵다. 국수 면발을 뽑아 바깥에 길게 늘어뜨려 걸어놓고 말리는 국숫집 풍경도 찾아보기 어렵다. 파스타나 쌀국수 등 다양한 종류의 국수를 즐길 수 있는 국수의 세계화 시대가 되었다. 그래서 ‘옛날 짜장’처럼 ‘옛날 국수’라고 메뉴를 써놓은 음식점도 눈에 띈다. 백석을 비롯해 많은 시인들이 국수의 맛과 정취를 노래했는데, 이상교의 ‘아름다운 국수’는 싱크대 서랍 속 국수의 모습에서 보얗고 미끈한 발레리나를 봤다. 아마 우리 집 싱크대나 찬장 속 어디에도 미끈한 발레리나가 냄비 속에서의 한바탕 공연을 기다리며 잠자고 있을 듯하다. /김이구 문학평론가  
1151    [동시야 놀자]- 까만 밤 댓글:  조회:4418  추천:1  2016-03-07
동시 해설;- ‘칠흑 같은 밤’이라 하면 어떤 밤일까? 요즘은 칠흑(漆黑)이 뭔지 몰라 아주 깜깜한 밤이 연상되지 않을 것이다. 심지어 ‘칠흙’으로 쓰는 사람도 있으니까. 빛의 삼원색은 합하면 합할수록 흰빛에 가까워지지만, 색의 삼원색은 그와 반대로 합하면 합할수록 어두워진다. 빨강, 노랑, 파랑 색이 “폭 껴안아/ 검정이 되”는 것이다. 껴안지 않고 따로 놀아서는 검정이 되지 못한다. 밤이 사라진 시대다. 도시고 시골이고 자동차의 헤드라이트와 가게의 조명과 전광판, 텔레비전의 번득임이 밤을 지배한다. 달빛을 몰아내고 별빛을 몰아낸다. 스마트폰의 빛이 너와 나의 얼굴을 비춘다. 사람들은 일부러 깜깜한 밤을 찾아 나서고, 깜깜한 밤을 유영하는 반딧불이를 만나러 멀리 떠나야 한다. 깜깜한 밤은 그리움의 다른 이름이다. 달빛도 별빛도 불빛도 없는 칠흑 같은 밤의 고요 속에서 아이는, 동심은 “무엇, 무엇, 무엇이/ 꼬옥/ 껴안고 있을까?” 의문을 품는다. 의문이라기보다 꼬옥 껴안고 있는 존재에 둘러싸여 있음을 느끼고 있다. 세상만물, 삼라만상이 침잠하는 평화의 시간이다. 그 시간에 대한 염원이다. 껴안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다. 껴안으면 되니까. 빨강, 노랑, 파랑은 목적어가 아니고 주어이다. 내가 껴안고 네가 껴안고 그가 껴안고, 서로 포옥 껴안아 깜깜해지면 된다. 내전으로 매일 수천 명의 난민이 국경을 넘고 성지순례 참사로 천 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바람 잘 날 없는 지구. 껴안으면 깜깜해지노니, 낮의 시간이 아니라 깜깜한 밤의 시간이 와야겠다.   김이구 문학평론가      
1150    [동시야 놀자]- 봉숭아 댓글:  조회:4410  추천:0  2016-03-07
  이안 시인의 ‘봉숭아 편지’를 읽으니 어렸을 적 고향집 마당가에 하얗게, 붉게 피었던 봉숭아가 생각난다. 그 시절 봉숭아, 채송화, 맨드라미는 집집마다 마당가나 장독대 옆 작은 뜰에서 흔하게 볼 수 있었다. 바쁜 농사철에 잡풀 속에서도 환하게 피고 지고 하며 농사꾼의 마음에 여유와 다사로움을 안겨주던 꽃이다. 가을철이면 파랗던 봉숭아 씨주머니가 누래지면서 탱탱하게 여물어, 엄지와 검지로 살짝 누르면 툭 터진다. 씨주머니가 바짝 오그라들고 작은 씨앗들이 툭 튀어나와 손바닥에 모일 때의 그 감촉이 너무 좋아서 나는 자꾸 씨주머니를 터뜨렸었다. 시인은 전주 한옥마을에 갔다가 봉숭아 씨를 받아 온다. 그 씨를 잘 간직하고 있다가 봄에 화단에 심었다. 봉숭아는 햇볕 받고 비바람 맞으며 무럭무럭 자라 여름에 색색깔로 꽃을 피운다. 아하, 전주에서 충주로 이사 왔으니 전주의 벌과 나비에게 소식을 전하려는 것이구나. 봉숭아는 “여름내 하양 분홍 빨강/편지지 꺼내” 편지를 쓰고 또 쓴다. 꽃이 피고 벌과 나비를 부르는 것이 자연의 순리이지만, 시인의 눈은 전에 살던 곳에서 꽃을 찾아왔던 벌과 나비 친구들에게 봉숭아가 전하는 애틋한 마음을 본다. 야들아, 봉투에 쓴 주소를 보고 그리로 한번 와 줬으먼 좋겄다잉. 자기가 살았던 전주 사투리로 썼다. 그런데 어쩐다? 편지를 누가 전하지? 시인은 우체부가 되어 편지를 전하러 간다. “손톱에 받아쓴 봉숭아 편지”는 봉숭아 꽃잎을 따서 손톱에 얹고 싸매주어 분홍물을 들인 거다. 아하, 지난가을에 만났던 전주 친구가 보고 싶어 다시 가는구나. 편지를 받은 전주 친구는 벌과 나비 소식을 갖고 봉숭아를 보러 올 테고. 유붕자원방래(有朋自遠方來), 아름다운 우정이로고. 곱디고운 핑계로고. 입춘 지나며 하늘을 보니 햇살에 부쩍 생기가 돈다. 고향에 가서, 시골에 가서 부모님의 손도 잡아보고 친구를 만나 꽃씨 같은 마음 한톨 건네야겠다. / 김이구 문학평론가  
1149    [안녕?- 아침 詩 두송이]- 들깨를 터는 저녁 / 뜨개질 댓글:  조회:4637  추천:0  2016-03-07
들깨를 터는 저녁 - 이윤학(1965~ ) 구장네 아줌마 둘이서 머리끄덩이를 잡고 들깨를 턴 포장에서 뒹굴었다 서로의 어깨를 잡고 흐느껴 울었다 누레진 들깨 토매를 털었듯이 서로의 어깨를 두드렸다 뒷산의 멧비둘기가 시원하게 속을 긁었다 벌써부터 구장의 프라이드 베타가 산모롱이에 정차해 있었다 아줌마 둘이서 바람을 등지고 들깨를 까부르는 소리 키로 쏟아졌다 티끌 하나 없이 흡혈하는 하늘 들깨를 턴 냄새가 스며들었다 머리끄덩이를 잡고 싸우던 아줌마들이 “서로의 어깨를 잡고 흐느껴” 우는 풍경은 우리에게 바흐친 스타일의 ‘민중적 웃음’을 유발시킨다. 싸움의 귀결을 잘 알고 있는 “구장”은 그것을 벌써부터 보고도 부러 개입하지 않는다. 이들은 모두 싸움→울음→노동의 사이클에 익숙하다. 짧은 시간에 함께 싸우고, 울고, 다시 협업을 하는 공동체는 이제 찾아보기 힘든 풍경이 되었다. 서로를 바닥까지 알지 않고는 불가능한 모습 아닌가. ‘들깨를 터는 저녁’은 그리하여 궁핍하지만 아늑하고도 그리운 서사(敍事)를 떠올리게 한다. ========================================= 뜨개질             / 송찬호   기사 이미지 보기 아가야, 우선 식탁을 짜고 둥글고 하얀 접시를 짜고 멀리서 떠도는 너희 아버지의 모자와 모자 위의 구름을 짜고 그리고 아버지의 닳고 닳은 구두를 짜고 아가야, 네게는 무엇을 짜줄까 그래, 네가 갖고 싶은 것 그 무언가를 담을 수 있도록 커다랗게 너의 몸을 짜주마 시집 《붉은 눈, 동백》(문학과지성사) 中 마음이 가난한 겨울에 가장 따듯한 목소리는 어머니의 목소리 같아요. 시인은 어머니의 목소리를 빌려 우리에게 사랑의 세계를 들려주는 것 같네요. 식탁과 접시, 아버지의 모자와 구름, 닳고 닳은 구두를 짜고, 아가 너에게는 커다란 몸을 짜주겠다고 하면서 차가운 이 겨울의 아침에 온기와 품을 나누어 주는 것 같네요. 아주 먼 옛날 우린 모두 아가였을 텐데, 시간이 오늘 이토록 커다란 몸을 짜놓았으니 신비한 우주군요. 어른이 된 우린 갖고 싶은 어떤 좋은 것을 커다란 몸에 담고 살고 싶었을까요. 김민율 시인         김민율 시인
1148    {안녕? - 아침 詩 한송이} - 白石 詩 댓글:  조회:5662  추천:0  2016-03-06
산숙(山宿) - 백석(1912~96) 여인숙이라도 국수집이다 모밀가루포대가 그득하니 쌓인 웃간은 들믄들믄 더웁기도 하다 나는 낡은 국수분틀과 그즈런히 나가 누어서 구석에 데굴데굴하는 목침(木枕)들을 베여보며     이 산(山)골에 들어와서 이 목침들에 새까마니 때를 올리고 간 사람들을 생각한다 그 사람들의 얼굴과 생업(生業)과 마음들을 생각해 본다 ///시평;- 북방의 어느 산중에 있는 여인숙을 그려보라. “들믄들믄” “그즈런히” 북방의 사투리들이 두런거리는 이 여인숙은 국수집을 겸하고 있다. 시인은 국수분틀 옆에 “나가 누어서” 그 방을 스쳐간 사람들을 생각한다. “목침들에 새까마니 때를 올리고 간 사람들”은 지금쯤 어느 그늘을 유랑하고 있을까. 아무런 논평도 해석도 없는 이 그림은 조촐해서 정겹고 국수 국물처럼 따뜻하다. 수많은 “얼굴”과 “생업”의 유랑인들이 거쳐 간 산속의 여인숙. 거기서 국수 한 그릇 먹고 그즈런히 눕고 싶지 않은가. 오민석·시인·단국대 영문학과 교수    
1147    詩作初心 - 좋은 시를 모방하되 자기 색갈 만들기 댓글:  조회:8186  추천:0  2016-03-06
      시를 쉽게 쓰는 요령 - 김영남 3. 초보자의 시 습작 방법 초보자 시절에는 시 창작 방법을 아무리 들어도 시작하려면 정작 막막하기 이를 데 없는 건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필자의 경험을 토대로 좀 더 구체적인 방법, 두 가지를 추천할까 합니다. * 좋은 시를 모방해 보라. * 첫째로 왕 초보 시절에는 기성 시인의 작품 중 구조적으로 잘 짜여진 작품을 갖다놓고 그 작품 구조에 맞추어 자기 생각을 끼워보는 연습을 먼저 해보라고 권장하고 싶습니다. 즉 그 시를 한번 모방해보라는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고 했습니다. 사실 어느 시인이 누구의 영향을 받았다는 건 좋게 말해서 영향이지, 액면 그대로 표현하면 그 사람을 모방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나 싶습니다. 그래서 모든 창작은 모방에서부터 출발한다는 극단적인 표현까지 가능한지 모르겠습니다. 실제로 미술학도 지망생에게 제일먼저 시키는 것이 석고데생, 즉 모사연습이고 외국어를 습득하는데 어떤 이론, 문법공부보다도 말을 실제로 따라 해보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는 것을 음미해보면 금세 이해가 갈 겁니다. 그리고 우리나라가 이렇게 급속도로 선진대열에 올라 설 수 있었다는 것도 외국, 특히 인접 일본의 앞선 기술, 문화, 제도 등을 그대로 모방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우리나라의 색깔과 독자성이 문제이지만… 하여, 왕초보 시절에는 구조적으로(기,승,전,결) 잘 짜여진 작품이나, 독특한 표현이 많이 들어있는 작품을 갖다놓고 자기 생각을 끼워보는 연습을 많이 해보기 바랍니다. 내용과 감각을 모방하라는 것이 아니라, 구조와 전개방법과 표현기술을 따라서 해보라는 뜻입니다. 이걸 능수능란하게 하다보면 나중에 자기도 모르게 표현을 뒤틀어보고 싶고 독특하게 펼치고 싶어져 자기 색깔이 선명하게 나오는 걸 보게 될 것입니다. * 시의 소재를 찾는 방법 * 둘째로는 자기가 생각하기에 어느 정도 감각은 있는데 될만한 시의 소재를 못 찾아 시를 제대로 쓸 수 없는 사람은 잡지를 많이 보라고 권장하고 싶습니다. 특히 여성지, 패선 잡지, 디자인 잡지, 건축잡지, 미술잡지 등 사진과 그림이 많이 담긴 잡지를. 시란 기본적으로 심상, 이미지 즉 언어로 그림을 그리는 것이니까 그림이 많은 잡지를 넘기다보면 언뜻 시로 표현하고 싶은 소재가 스치게 됩니다. 잡지를 깊게 읽지 말고 눈요기식으로 넘기고 광고 카피도 눈여겨보기 바랍니다. 문득 힌트를 얻게 됩니다. 광고쟁이들도 시를 많이 읽고 쓴다는 걸 참고해 가면서 말입니다. 이때 얻은 힌트를 가지고 감상평 (1),(2)를 참고해서 상상을 펼쳐보기 바랍니다. 나중에 또 언급하겠지만 제목에 신경을 쓰지 말고 문득 얻은 힌트, 그 소재를 가지고 상상을 해 다듬어 보기 바랍니다. 상상을 자꾸 새롭게 하고 고치다가 보면 처음 의도했던 내용과 전혀 다른 내용의 시가 탄생하거든요. 그래서 제목을 맨 나중에 붙이는 겁니다. 이상을 참고해서 초보자 시절에는 가능한 한 이미지 즉 글로 그림을 그리는 연습을 많이 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나 싶습니다. 이걸 잘하다 보면 나중에 의미있는 말, 표현, 자기철학 등도 요령있게 양념치듯 넣는 기술을 알게 됩니다. 여하튼 처음에는 거창한 자기의 말, 주장을 하려하지 말고 힘을 완전히 뺀 상태에서 감각과 상상으로 접근해 그림을 그리는 연습을 많이 해보기 바랍니다. 방 그 방은 창을 통해 안이 훤히 드러난다. 연둣빛 레이스 커튼을 드리웠고 널린 브래지어가 한결같이 희망표이다. 고개를 들면 갤럭시 손목시계, 악어가죽 핸드백이 한눈에 확 들어온다. 바닥은 아담하고 천장은 유난히 높고 알록달록한 박달나무 숲속 같은 분위기가 달려오는 방. 저렇게 꾸미는 데는 몇 년이 걸렸을까. 그 방에 닿으려면 창동역에서 도봉산 쪽으로 날아가는 화살표를 두 번 따라가야 하고 909국 다이얼을 돌려야 한다.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것만큼 그 방 밖도 늘 매혹적이고 불안하다. 항상 불이 켜져 있는 것은 아니지만 불이 꺼져 있으면 그 방 밖은 가을이고 수상하다. 그리고 낙엽이 뒹굴고 바람이 불면 그 방은 사정없이 흔들린다. 방은 흔들릴 때가 아름답다. 흔들릴 때마다 굳게 잠긴 자물통이 침묵의 장식처럼 중심을 잡아주지만 한 발짝 뒤로 물러나서 돌아다보면 그 방은 다시 불이 켜진다. 참으로 이상한 방. 한번 쓱 들어가 맘껏 뒹굴어보고 싶은 방. 브래지어가 창인 그녀. ============================================================================ 286. 슬픔이 기쁨에게 / 정호승 슬픔이 기쁨에게 정 호 승 나는 이제 너에게도 슬픔을 주겠다. 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을 주겠다. 겨울밤 거리에서 귤 몇 개 놓고 살아온 추위와 떨고 있는 할머니에게 귤값을 깎으면서 기뻐하던 너를 위하여 나는 슬픔의 평등한 얼굴을 보여주겠다. 내가 어둠 속에서 너를 부를 때 단 한번도 평등하게 웃어주질 않은 가마니에 덮인 동사자가 다시 얼어죽을 때 가마니 한 장조차 덮어주지 않은 무관심한 너의 사랑을 위해 흘릴 줄 모르는 너의 눈물을 위해 나는 이제 너에게도 기다림을 주겠다. 이 세상에 내리던 함박눈을 멈추겠다. 보리밭에 내리던 봄눈들을 데리고 추워 떠는 사람들의 슬픔에게 다녀와서 눈 그친 눈길을 너와 함께 걷겠다. 슬픔의 힘에 대한 이야길 하며 기다림의 슬픔까지 걸어가겠다. 정호승 시집 중에서 정호승 연보 1950년 1월 3일 경남 하동 출생(본관 : 동래). 초등학교 1학년 때 대구로 이사. 대구 계성중학교 1968년 대륜고등학교 졸업. 전국고교문예 현상모집에서 이라는 평론 당선. 경희대학교 국문학과 입학. 197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동시 당선. 김요섭 선생에 의하여 에 시 추천 1973년 대한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동인지 시작. 1976년 경희대학교 국문학과 졸업. 숭실고등학교 교사. 동인지 시작. 1979년 첫 시집 간행. 198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소설 간행. 시집 간행. 1985년 경희대학교 대학원 국문학 석사. 1987년 시집 간행. 1989년 제3회 소월시문학상 수상 1990년 시집 간행. 1991년 시선집 간행. 1997년 시집 간행. 제10회 동서문학상 수상. 1998년 시집 간행. 1999년 시집 간행. 2000년 제12회 정지용문학상 수상. 현대문학북스 대표. 2001년 제11회 편운문학상 수상. 2002년 시집 간행. 제15회 경희문학상 수상. 2003년 시선집 간행. 2004년 시집 간행. 2006년 제9회 가톨릭문학상 수상. 2007년 시집 간행. 2009년 제4회 지리산문학상 수상. 2010년 시집 간행. 2011년 제19회 공초문학상 수상. --------------------------------------------------------------------- 287. 맹인 부부 가수 / 정호승 맹인 부부 가수 정 호 승 눈 내려 어두워서 길을 잃었네 갈 길은 멀고 길을 잃었네 눈사람도 없는 겨울밤 이 거리를 찾아오는 사람 없어 노래 부르니 눈 맞으며 세상 밖을 돌아가는 사람들뿐 등에 업은 아기의 울음소리를 달래며 갈 길은 먼데 함박눈은 내리는데 사랑할 수 없는 것을 사랑하기 위하여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을 용서하기 위하여 눈사람을 기다리며 노랠 부르네 세상 모든 기다림의 노랠 부르네 눈 맞으며 어둠 속을 떨며 가는 사람들을 노래가 길이 되어 앞질러가고 돌아올 길 없는 눈길 앞질러가고 아름다움이 이 세상을 건질 때까지 절망에서 즐거움이 찾아올 때까지 함박눈은 내리는데 갈 길은 먼데 무관심을 사랑하는 노랠 부르며 눈사람을 기다리는 노랠 부르며 이 겨울 밤거리의 눈사람이 되었네 봄이 와도 녹지 않을 눈사람이 되었네 정호승 시집 중에서  
1146    詩에서 상상은 허구, 가공이다... 댓글:  조회:5312  추천:0  2016-03-04
시를 쉽게 쓰는 요령 - 김영남 2. 구체적으로 상상하는 방법 초보자 시절에 일단 상상하는 요령을 알게 되면 어떤 소재를 고를 것인가를 고민하게 됩니다. 상상력이 일정 수준에 달한 사람은 어떤 소재를 갖다놓더라도 즉각 상상력을 기발하게 발휘할 수 있습니다만 초보자 시절에는 막막하기 이를 데 없죠. 그래서 초기에는 상상할 수 있는 내용이 많이 담긴 소재, 언어들을 고르는 법을 알아야 합니다. 우선 공간이 존재하는 소재들을 고르는 게 상상하기 쉽습니다. 구체적이지 않고 평면적이고 추상적인 소재들은 수준급의 상상력 소유자가 아니면 상상의 단서를 잡기가 여간 쉽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사랑, 미움, 과거, 미래, 종이... 등 이런 소재들로 시를 쓴다고 해봅시다. 그냥 숨이 콱 막힐 겁니다. 그러나 공간이 있는 것들 문, 벽, 창, 천장, 집....등 이걸로 상상을 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상상이 한결 쉬울 겁니다. 이건 상상이란 기본적으로 이미지, 즉 머리 속에 그림을 그려보는 것이고 그 그림은 공간이 있는 것이 평면적인 것보다 훨씬 그리기 쉽고 선명하기 때문입니다. * 구체적인 소재로 상상하라. 예를 한번 들어 봅시다. 을 가지고 상상한다면 현실의 문 (사립문, 철문, 미닫이문, 파란 문, 빨간 문…), 추억의 문, 사랑의 문, 지식의 문...등 상상을 자유롭게 펼칠 수 있는 공간이 존재하지 않습니까? 가령 그 추억의 문 하나로만 상상을 해보더라도 그 추억의 문에 문고리를 달아보고, 자물통도 달아보고, 발로 한 번 뻥 차보고, 파란 페인트, 아니 빨간 페인트도 칠해보고 온갖 상상을 다 해볼 수 있잖아요? * 또 이란 소재로 한번 해 볼까요? 처럼 의미적 공간 말고, 이번에는 실제적 공간으로 , 즉 어느 초가집을 한번 그려본다고 해 봅시다. 두 눈 딱 감고 어릴 적에 보았던 초가집 하나를 머리 속에 담고 < 그 집에 들어가려면 싸립문을 밀어야 하고/ 문 왼쪽에는 나팔꽃 화단/오른 쪽에는 토끼장이 딸린 닭장/ 거기에는 줄을 잡고 변을 보는 화장실이 있다/……뒤란에는 대나무 숲이 있고/ 앞마당에는 삽살개 한 마리/…… 신발을 벗고 방문을 열면/ 펜티 차림의 한 어린이가/ 만화책을 보고 있다> 이렇게 묘사해 놓고 제목을 으로 붙인다고 해 보세요. 정말 김영남의 어린 시절 집을 그린 훌륭한 시가 되지 않습니까? * 상상은 허구이고 가공이다 여기서 유의할 점은 초가집을 그리는데 자기가 실제적으로 본 초가집을 그린다고 생각하면 안 되요. 상상이 당장 막혀요. 상상은 기본적으로 허구이고 가공입니다. 즉 그 초가집을 그리는데 도움이 될만한 것들을 기억 속에서 모두 불러와 한번 그럴싸하게 둘러대는 겁니다. 즉 상상 속에서 초가집을 새롭게 창조하는 거죠. 이게 바로 참신한 그림이요, 참신한 이미지요, 참신한 시가 되는 겁니다. 이상에서 언급한 내용을 다시 정리하면 초보자 시절에는 가능한한 공간이 존재하는 소재들을 골라 상상을 해 시를 써보도록 하고, 상상은 체험, 허구, 가공까지 드나들어야 한다는 내용입니다. 따라서 시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허구, 가공까지 동원해 새롭게 창조하는 것이라는 걸 유념합시다. ======================================================================== 참고로,--- 여기에 올리는 글들은, 후에라도 잊지 않고 다시 기억 할 수 있도록 하는 공유장치가 필요하다고 생각되어서 올립니다. 그리고 올리는 글들 중 혹 중복되는 경우가 있을수 있는데  그때면 한번 더 복습하는 셈치고 특히 이 점에 관하여 량해해줍시사ㅠ. ----------------------------------------------------------- 285. 생일 / 장석남 생일 장 석 남 달이 마당 밖 잣나무숲을 지날 즈음 흰 돌멩이 하나 들어다가 툇마루 위에 올려두면 어느새 노래가 되어 꽃밭 속으로 어른어른 밀려나갔다 그믐밤이 되어서는 캄캄한 꽃밭 속에서 반딧불이 두엇씩 살아 나왔다 무슨 일일까 생각하다가 그만두었다 흰 돌멩이 하나 들어다가 갓 풀린 개울물에 넣어둔다 귀도 하나는 그 곁에 벗어둔다 장석남 시집 중에서
1145    {안녕?- 아침 詩 두송이} - 나무들의 목소리 댓글:  조회:4642  추천:0  2016-03-04
어쩌면 우리는 수줍지만 힘센 나무들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무들도 새처럼 날아가고 싶습니다. 그러나 대지에 붙들려 있습니다. 나무들도 높은 목소리로 밤마다 노래를 부릅니다. 그러나 하늘의 달처럼 대지에서 풀려나 높이 떠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늘 옛사랑에 붙들린 가슴처럼 어떤 체념과 갈망 사이에서 괴로워하면서 삶의 창살을 흔들어 댑니다. 나무들이 푸른 가지로 자유롭게 하늘의 끝까지 뻗어나간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봐요. 나무는 한 곳에 붙박인 채 몸을 뒤트는 힘으로 봄마다 1㎝씩 자라고 숲은 조금씩 넓어집니다. 밀란 쿤데라는 이런 시를 쓴 적이 있어요. “시인이 된다는 것은/끝까지 가보는 것을 의미하지//행동의 끝까지/희망의 끝까지/열정의 끝까지/절망의 끝까지”(‘시인이 된다는 것은’) 오늘로 저는 연재를 마무리합니다. 아, 끝까지 가보기 전인데, 몸에 살짝 탈이 났습니다. 하지만 여러분과의 아침은 늘 행복했어요. 서운한 마음으로 베알뤼의 시를 읽으며 깨닫습니다. 수줍으나 힘센 나무들은 끝까지 가보려고 천천히 자라난다는 것을요. 또 제 곁에는 다른 나무가 있다는 것도요. 그런 한 그루 나무를 닮은 시인, 수줍으나 힘센 시인님이 여러분들 곁을 찾아갈 겁니다. 여러분의 아침을 시로 열며 시의 숲을 한 뼘씩 넓혀가 주실 거예요. 시의 아름다움이 이 세상의 끝에 닿을 때까지 우리 모두 나무처럼 튼튼하기로 해요! /진은영 시인ㆍ한국상담대학원대학 교수 ==================================================== 쓸모없는 이야기                                                                        / 진은영 종이 펜 질문들 쓸모없는 거룩함 쓸모없는 부끄러움 푸른 앵두 바람이 부는데 그림액자 속의 큰 배 흰 돛 너에 대한 감정 빈집 유리창을 데우는 햇빛 자비로운 기계 아무도 오지 않는 무덤가에 미칠 듯 향기로운 장미덩굴 가시들 아무도 펼치지 않는 양피지 책 여공들의 파업 기사 밤과 낮 서로 다른 두 밤 네가 깊이 잠든 사이의 입맞춤 푸른 앵두 자본론 죽은 향나무숲에 내리는 비 너의 두 귀 ///(시평) ‘바통’ 아시지요? -------  (1) @!@"바통(프랑스어) [체육] 이어달리기 경주에서, 앞선 주자가 다음 주자에게 넘겨주는 작은 막대기. (례); 이어달리기 경기에서 바통을 떨어뜨려 우리 팀이 꼴등을 했다.   류의어 계주봉 (繼走棒) , 배턴 (baton) (2) 권한이나 의무, 역할 따위를 다음 사람에게 넘겨주거나 앞사람으로부터 받는 것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 어렸을 적 운동회에서 건네 받았던 흰 바통이 떠올랐는데, 그때의 느낌이 여전히 생생하다는 것이 신기한 아침이에요. 달려오는 친구를 보고 있었지요. 조금 전 친구의 바통은 저의 바통이 되었지요. 처음 잡아본 바통은 아주 가벼웠어요.   달리기는 생각할 틈이 없었어요. 바통을 떨어뜨리지 말아야지 하다 보니 저의 바통은 또 다른 친구의 바통이 되어 있었어요. 바통의 쓸모는 무엇일까요? 어떤 것에 쓸모라고 이름 붙여줄 수 있을까요? 종이에서 너의 두 귀까지, 이 목록에 시인은 ‘쓸모없는 이야기’라는 제목을 달았어요. 제목과는 달리 읽을수록 촉감과 소리와 침묵과 색과 향기로 풍성해져요. 한 행 한 행은 독립적이면서도 서로 서로 영향을 주고 있어요. 종이와 펜이 만나야 질문이 생겨나요. 거룩함과 부끄러움은 푸른 앵두처럼 동일한 곳에서 발생하는 것들이죠. 이렇게 이어지게 읽어도 자연스럽죠. 크기와는 무관하게, 함께 있으면서 서로를 함부로 지우지 않는 풍경처럼요. 그럼에도 세상의 기준에서 본다면 이 목록들은 여전히 쓸모없는 것들이죠. 그렇다면 죽은 향나무숲에 비는 왜 내릴까요? 우리는 바로 불필요한 질문임을 알아차리죠. 자주 잊어서 그렇지 우리는 이미 알고 있어요. 쓸모없는, 더 정확하게는 쓸모없어 보이는 움직임이 없다면, 서로 다른 두 밤에서 오늘이 생겨나지 않는다는 것을. 미칠 듯 향기로운 장미덩굴마저 없으면 진짜 무덤이 되어버린다는 것을 말이죠. 장미도 이 시간이 어렵기는 마찬가지여서 가시가 함께 견뎌주고 있어요. 시인은 우리에게 이렇게 이야기해주고 싶은 걸 거예요. 쓸모가 있으면 쓸모는 사라져요. 쓸모에 닿지 않아 쓸모의 간절함은 계속돼요. 쓸모부터 생각하면 두 귀는 열려 있어도 닫혀 있는 거예요. 햇빛이 나타나기 좋은 곳은 빈집이에요. 쓸모없는 목록을 만들어나가요. 쓸모에 함몰되지 않을 거예요. 시인의 이 목록을 바통으로 받을게요. 꼭 어릴 적 그 기분입니다. 꽃 한 송이처럼 눈 한 송이처럼 시를 읽어 주세요. 꽃도 눈도 붙잡을 수 없어 아름다워요. 쓸모없어 깨끗해요. 시도 닮은 얼굴을 갖고 있어요.    
1144    詩는 그 어디까지나 상상의 산물 댓글:  조회:4851  추천:0  2016-03-04
시를 쉽게 쓰는 요령 - 김영남 1. 상상하는 법을 익혀라 초보자들이 시를 쓸 때 제일먼저 봉착하는 것이 어떻게 시를 써야하며, 또한 어떻게 쓰는 게 시적 표현이 되는 것일까 하는 점입니다. 필자도 초보자 시절 이러한 문제에 부딪혀 이를 극복하는 데에 거의 10년이 걸렸습니다. 그 동안 무수한 시행착오를 거듭했던 거죠. * 시에 대한 고정관념을 버려라 필자가 이와 같이 시행착오를 거듭했던 이유는 시란 '자기가 경험했고, 보고 느낀 것을 아름답게 표현하는 게 시다' 라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런 생각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좋은 시를 힘들이지 않고, 개성적으로, 재미있게 쓰는 데에는 이게 바로 함정이라는 걸 나중에야 깨닫게 된 거죠. 경험과 느낌은 모든 사람들 대부분이 비슷합니다. 그러나 상상은 천차만별이죠. * 시를 힘들이지 않고 개성적으로 잘 쓰려면, 상상으로 써야 한다. 상상으로 써야 발전이 빠르고 좋은 시를 계속 양산할 수 있습니다. 즉 시란 자기가 쓰고자 하는 소재를 두 눈 딱 감고 상상해서 쓰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고 단순하게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특히 초보자 시절에는. 보고, 느낀 걸 쓰는 게 시다라는 고정관념에 빠지니깐 시를 한 줄도 제대로 전개하지 못하고 전전긍긍하게 되는 겁니다. 즉 보고 느낀 것이 다 떨어지면 그때부터 허둥대기 시작하는 거죠. 기껏 돌파구를 마련한다는 게 자기 주변 친구, 부모, 어린 시절 이야기 등을 둘러대는 정도. 그리곤 스스로 훌륭한 시를 썼다고 자기도취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이 시가 되면 얼마나 다행이겠습니까만 99%가 그렇고 그런 이야기, 누구나 다 보고 느끼는 형편없는 넋두리, 서사, 풍경 나열이 되기가 일쑤죠. 지금까지 이런 방식으로 시를 써왔다면 이 순간부터 기존 쓰는 방식을 잠시 접어두고 필자가 안내한 대로 석 달만 같이 공부해 보도록 합시다. 글이 달라지는 걸 본인 스스로 느낄 수 있을 겁니다. 우선 상상하는 것부터 배우도록 합시다. 그러면 어떻게 상상할 것인가? * 우선 상상할 소재, 즉 상상할 대상을 구체적인 것 하나를 고르라. 자신이 있는 곳이 지금 사무실이라고 하면 주변에 있는 꽃병, 벽, 창, 하늘, 노을 등이 있을 겁니다. 이중 어느 하나를 골라 봅시다. 필자가 먼저 어떻게 상상하는지 그 방법의 예를 한번 들어보겠습니다. 로 한번 해볼까요? 기존 방식대로 이란 소재로 시를 한번 시를 써 보라고 하면 대다수가 노을을 쳐다보며 < 피 빛 노을이 아름답구나/ 나는 저 노을 아래로 걸어간다/ 친구와 함께……> 대다수가 아마 이런 식으로 글을 시작하지 않았겠나 여깁니다. 그러나 이건 느낌을 적은 것이고 상상한 게 아닙니다. * 상상을 이렇게 해보자 * 만약 자신이 현재 애로틱한 감정상태에 있다면 을 바라보며, 또는 을 머리 속에 담고서 이렇게 눈부신 상상을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 한 여자가 옷을 벗고 있다/ 그녀가 옷을 벗으니까 눈부셔 눈물이 날 지경이다/ 나도 저렇게 발가벗고 그 곁으로 가고 싶다/ 아니다, 그녀를 데리고 여관으로 가고 싶다/ 가서 같이 포도주 한 잔을 건넨 다음 껴안고 뒹굴고 싶다……> 이렇게 노을을 발가벗고 있어서 눈부신 여자로 여기고 계속 상상해 가는 겁니다. 이땐 순서를 생각하지 말고 앞 상상의 핵심어를 가지고 다음 상상을 유치하든 품위 있든 따지지 말고 계속 해보는 겁니다. 그리고 이걸 나중에 논리적으로 순서를 다시 잡아 정리, 수정해 가면서 다듬는 겁니다. 그러고 나서 제목을 로 붙여본다고 생각해 보세요. 정말 근사한 한 편의 시가 탄생할 것 같잖아요? * 이번에는 을 보고 자신의 어린 시절이 생각났다고 한다면 빨간 노을을 머리 속에 담고서 이렇게 상상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 아이들이 모닥불을 피고 있다/ 그 모닥불은 연기가 없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저 불에 나는/ 고구마를 구어 먹고 싶다/ 제일 잘 익은 것을 꺼내/ 이웃 동네 창수에게 건네주고 싶다/……난 저 모닥불에 오줌을 갈겨 피식 소리가 나게 끄고 싶다……> 이렇게 을 로 여기고 모닥불과 관련된 온갖 경험, 추억, 익살스런 행동, 우tm꽝스런 생각, 이야기들을 계속 꺼내가면서 상상을 하는 겁니다. 이때 유의할 점은 을 로 치환했으면 을 멀리 떠나서 상상을 하면 안됩니다. 모닥불과 관련이 있는 내용으로 상상을 펼쳐야지 그렇지 않으면 시의 초점이 흐려지고, 내용이 난해해지게 됩니다. * 다른 소재들로 상상하는 것도 위와 같은 방식으로 하면 됩니다. 더 다양하고 구체적인 방법, 다듬는 법, 순서를 잡는 법, 제목을 붙이는 법....등등은 그때그때 하나씩 계속 예를 들기로 하고 오늘은 상상하는 요령만 익혀두기로 합시다. 시를 쉽게 쓰는 가장 기본적인 방법은 상상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는 걸 다시 한번 강조하며 게시판에 올라온 시를 한번 감상해 보도록 합시다. * 처음 시작할 땐 뭐든지 막막합니다. 그래서 참고가 될만한 시를 첨부하오니 , , 이란 낱말 하나를 가지고 어떻게 끈덕지게 물고 늘어져 상상력을 발휘하였는지를 유심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밑에 관하여 나는 위보다는 밑을 사랑한다. 밑이 큰 나무, 밑이 큰 그릇, 밑이 큰 여자…… 그 탄탄한 밑동을 사랑한다. 위가 높다고 해서 반드시 밑동도 다 넓은 것은 아니지만 참나무처럼 튼튼한 사람, 그 사람 밑을 내려가보면 넓은 뿌리가 바닥을 악착같이 끌어안고 있다. 밑을 잘 다지고 가꾸는 사람들…… 우리도 밑을 논밭처럼 잘 일궈야 똑바로 설 수 있다. 가로수처럼 확실한 밑을 믿고 대로를 당당하게 걸을 수 있다. 거리에서 명물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밑이 구린 것들, 밑이 썩은 것들은 내일로 얼굴을 내밀 수 없고 옆 사람에게도 가지를 칠 수 없다. 나는 밑을 사랑한다. 밑이 넓은 말, 밑이 넓은 행동, 밑이 넓은 일…… 그 근본을 사랑한다. 근본이 없어도 근본을 이루려는 아랫도리를 사랑한다. 아름다운 모퉁이에 관하여 모퉁이가 아름다운 건물을 보면 사람도 모름지기 모퉁이가 아름다워야 아름다운 입체물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향기로운 내부를 가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모퉁이가 둥근 말, 모퉁이가 귀여운 사랑 이들에게는 한결같이 모난 부분을 둥그렇게 구부린 흔적이 바라보는 사람을 황홀하게 한다. 나는 이 아름다운 옆구리를 한번 돌아가보면서 모퉁이란 함부로 다루어서는 안 될 건물의 중요한 한 분야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내부까지 품위 있게 해주는 의식의 요긴한 한 얼굴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모퉁이를 가꾸는 사람들... 경제학적으로 검토하면 비효율적 투자이겠지만 모두가 모퉁이를 가꾸지 않는다면 우리들은 또 어디를 돌아가보고 살아야 하나? 향기로운 넓이와 높이를 가진 입체물들을 어디에서 찾아야 하나? 벽 가려보고 드러내봐도 내 앞뒤 골목은 온통 벽이로구나. 한 발로 뻥 찼을 땐 여지없이 되튕기며 발을 온몸으로 받아내는 벽. 야, 벽에도 이단 옆차기가 있고, 돌려차기가 있구나. 속이 훤히 드러난 유리벽이 있고, 보초를 세워야 하는 철조망 벽이 있구나. 그러면 벽에도 나이가 있고 학벌이 있고 지위가 있다는 것인데, 맘에 안 든 벽을 마구 감옥에 잡아넣는다면 누가 경쟁을 하나? 벽 없이도 세상을 이룰 수 있나? 우리들 마지막 버팀목이 벽이라면 벽 없이도 희망은 존재할까? 벽을 쌓으려면 스폰지를 넣거나 변경이 용이하도록 조립형으로 설계해야 하리라. 그러지 않으면 아무리 견고하게 구축하더라도 잦은 발길질과 교묘한 철거 전략에 살아남기 어려우리라. 벽은 융통성 있게 존재해야 하리라. 지금 나의 말에 동조하지 않는 사람들이 사는 마을로 한 사나이가 망치를 들고 힘차게 걸어가고 있다. ================================================================================= 283. 멧새 앉았다 날아간 나뭇가지같이 / 장석남 멧새 앉았다 날아간 나뭇가지같이 장 석 남 내 작은 열예닐곱 고등학생 시절 처음으로 이제 겨우 막 첫 꽃 피는 오이넝쿨만한 여학생에게 마음의 닷 마지기 땅을 빼앗기어 허둥거리며 다닌 적이 있었다. 어쩌다 말도 없이 그앨 만나면 내 안에 작대기로 버티어놓은 허공이 바르르르르 떨리곤 하였는데 서른 넘어 이곳 한적한, 한적한 곳에 와서 그래도는 차분해진 시선을 한 올씩 가다듬고 있는데 눈길 곁으로 포르르르 멧새가 날았다. 이마 위로, 외따로 뻗은 멧새가 앉았다 간 저, 흔들리는 나뭇가지가, 차마 아주 멈추기는 싫어 끝내는 자기 속으로 불러들여 속으로 흔들리는 저것이 그때의 내 마음은 아니었을까. 외따로 뻗어서 가늘디가늘은, 지금도 여전히 가늘게는 흔들리어 가끔 만나지는 가슴 밝은 여자들에게는 한없이 휘어지고 싶은 저 저 저 저 심사가 여전히 내 마음은 아닐까. 아주 꺾어지진 않을 만큼만 바람아, 이 위에 앉아라 앉아라. 어디까지 가는 바람이냐. 영혼은 저 멧새 앉았다 날아간 나뭇가지같이 가늘게 떨어서 바람아 어여 이 위에 앉아라. 앉아라. 장석남 시집 중에서 장석남(張錫南) 약력 1965년 8월 3일 인천(덕적도)에서 태어나서 그곳에서 자람. 제물포 고등학교 졸업. 서울예술전문대학 문예창작학과 졸업. 인하대학교 대학원 국문학과 박사과정 수료. 1987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시 가 당선되어 등단. 1991년 시집 간행. 1992년 제11회 김수영문학상 수상. 1995년 시집 간행. 이 시집으로 대산창작기금 수혜. 1998년 시집 긴행. 1999년 제44회 현대문학상 수상. 2001년 시집 간행. 2005년 시집 간행. 2010년 시집 간행. 제10회 미당문학상 수상. 2011년 시집 간행. 2012년 제23회 김달진문학상 수상. 현재 한양여자대학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 --------------------------------------------------------------- 284. 가난을 모시고 / 장석남 가난을 모시고 장 석 남 오늘 나는 가난해야겠다 그러나 가난이 어디 있기나 한가 그저 황혼의 전봇대 그림자가 길고 길 뿐 사납던 이웃집 개도 오늘 하루는 얌전했을 뿐 우연히 생겨난 담 밑 아주까리가 성년이 되니 열매를 맺었다 실하다고 말하진 못하겠다 어디 또 그런 데 가서 그 아들 손주가 되겠다 거짓마저도 용서할 맑고 호젓한 가계(家系) 오늘도 드물고 드문 가난을 모신, 때 까만 메밀껍질 베개의 서걱임 수(壽)와 복(福)의 서걱임 장석남 시집 중에서  
1143    [아침 詩 두수] - 황지우 시 두수 댓글:  조회:4762  추천:0  2016-03-03
1. 황지우 꼬박 밤을 지샌 자만이 새벽을 볼 수 있다. 보라, 저 황홀한 지평선을 ! 우리의 새 날이다. 만세, 나는 너다. 만세, 만세 너는 나다. 우리는 全體다. 성냥개비로 이은 별자리도 다 탔다. 풀빛, 시집 中에서 ​ ​ 503. 황지우 새벽은 밤을 꼬박 지샌 자에게만 온다. 낙타야, 모래박힌 눈으로 동트는 地平線을 보아라. 바람에 떠밀려 새 날이 온다. 일어나 또 가자. 사막은 뱃속에서 또 꾸르륵거리는구나. 지금 나에게는 칼도 經도 없다. 經이 길을 가르쳐 주진 않는다. 길은, 가면 뒤에 있다. 단 한 걸음도 생략할 수 없는 걸음으로 그러나 너와 나는 九萬里 靑天으로 걸어가고 있다. 나는 너니까. 우리는 自己야. 우리 마음의 地圖 속의 별자리가 여기까지 오게 한거야. 풀빛, 시집 中에서 ​ ///같음이 '공감'이라면, 다름은 '소통'이다. ​'나는 너' 이기 위해서는 나는 너와는 다른 존재이지만('우리는 자기'), 너와 ​그리 다르지 않다('우리는 전체')는 인식이 공존해야 한다. 공감이 없는 소통은 메아리이고, 소통이 없는 공감은 감옥이다.​
1142    산문시가 산문이 아니다라 詩이다 댓글:  조회:4924  추천:0  2016-03-03
산문시가 산문이 아니라 시인 이유 강 인 한 산문시는 시입니다. 산문 형태를 취했을 뿐 본디 시가 지니고 있는 운율, 함축성, 센스, 이미지, 모호성, 알레고리 등의 요소를 두루 갖춘 산문 형태라면 그것은 시입니다. 산문시입니다. 산문시를 읽는 건 매우 신중하고 치밀하게 읽어봐야 하지요. 그래서 그 산문 형태를 대하자마자 빽빽한 그 형태에 질려서 공연히 어렵겠구나, 하고 곤란을 느끼게 되지요. 약삭빠른 얼치기 시인들이 그러한 점을 노려 시도 아닌 산문을 써서 시(산문시)라고 위장하여 발표하는 경우가 곧잘 눈에 띕니다. 이를테면 하수가 고수인 척 겉모습만 흉내를 내는 것이지요. 대략 어설픈 자기 시의 실력을 감추기 위해 산문시라고 포장해 봤자 잘 뜯어보면 금세 들통이 나게 마련입니다. 다음의 산문시는 이번 겨울호 계간지에 발표된 작품입니다. 퍽 재미있는 산문시입니다. 일견 산문인 것처럼 보이지만 새겨 읽어볼수록 시의 맛이 새록새록 우러나는 빼어난 시입니다. 나비를 밀어내며 나비가 날아간다 나비는 잘 접힌다 또 금방 펴진다 나비가 될까 나비가 될 수 있을까 나비를 밀어내며 나비를 깜빡인다 나비는 몸이 가볍다 생각이 가볍다 마음먹은 대로 날아가는 적이 드물다 줄인형처럼 공중에 매달려 나비에게서 달아난다 나비에게로 돌아온다 나비를 밀어내며 나비를 닮아간다 옥타브를 벗어나는 나비 따라 부르기 어려운 나비 나비를 밀어내며 나비를 넘어선다 높아지는 나비 어머나 비가 온다 어머나 비가 간다 나비가 버리고 간 나비 나비가 채우는 나비 줄인형처럼 꽃밭 속에 나비를 담근다 나비가 될까 나비가 될 수 있을까 나비를 밀어내며 나비가 발생한다 나비를 서성이며 나비가 날아간다 —심언주, 「나비가 쓰고 남은 나비」(《시로여는세상》2015, 겨울호) 이 산문시를 일반적인 자유시 형태로 바꿔서 읽어보도록 합니다. 행을 가르고 기왕이면 연도 구분해 볼까요. 이걸 읽어보면 위의 산문시가 바탕이 시였음을 확실히 알게 될 것입니다. 나비를 밀어내며 나비가 날아간다 나비는 잘 접힌다 또 금방 펴진다 나비가 될까 나비가 될 수 있을까 나비를 밀어내며 나비를 깜빡인다 나비는 몸이 가볍다 생각이 가볍다 마음먹은 대로 날아가는 적이 드물다 줄인형처럼 공중에 매달려 나비에게서 달아난다 나비에게로 돌아온다 나비를 밀어내며 나비를 닮아간다 옥타브를 벗어나는 나비 따라 부르기 어려운 나비 나비를 밀어내며 나비를 넘어선다 높아지는 나비 어머나 비가 온다 어머나 비가 간다 나비가 버리고 간 나비 나비가 채우는 나비 줄인형처럼 꽃밭 속에 나비를 담근다 나비가 될까 나비가 될 수 있을까 나비를 밀어내며 나비가 발생한다 나비를 서성이며 나비가 날아간다 이와는 반대로 서정적인 산문이 시가 될까, 그냥 산문일까 잘 생각해 보기로 합니다. 결론을 말하자면 산문은 산문일 뿐입니다. 다음의 글을 읽어봅니다. 널리 알려진 이효석의 소설 「메밀꽃 필 무렵」에서도 마치 아름다운 시에 나옴직한 비유나 감각적 이미지가 가장 빛나는 부분입니다. 길은 지금 긴 산허리에 걸려 있다. 밤중을 지난 무렵인지 죽은듯이 고요한 속에서 짐승 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들리며, 콩포기와 옥수수 잎새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젖었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붉은 대궁이 향기같이 애잔하고 나귀들의 걸음도 시원하다. 길이 좁은 까닭에 세 사람은 나귀를 타고 외줄로 늘어섰다. 방울소리가 시원스럽게 딸랑딸랑 메밀밭게로 흘러간다. 이것을 자유시 형태로 다음과 같이 바꿔봅니다. 요즘 유행하는 시들처럼 마침표도 빼고 행과 연을 구분하여 변형시킨 다음의 글이 비록 시인 것처럼 보일는지 모르지만 본질은 변하지 않고 그냥 산문입니다. 이러한 산문을 시라고 쓰는 시인들이 적잖이 있는 게 오늘의 우리 시단입니다. 길은 지금 긴 산허리에 걸려 있다 밤중을 지난 무렵인지 죽은듯이 고요한 속에서 짐승 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들리며 콩포기와 옥수수 잎새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젖었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붉은 대궁이 향기같이 애잔하고 나귀들의 걸음도 시원하다 길이 좁은 까닭에 세 사람은 나귀를 타고 외줄로 늘어섰다 방울소리가 시원스럽게 딸랑딸랑 메밀밭게로 흘러간다 시 아닌 산문이 그럼 어떤 글인지 '국어국문학자료사전'에서 간단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산문형식으로 엮어지는 소설 · 수필 · 일기문 · 기행문 등은 산문정신에서 기초한다. 이것은 인생과 직결되어 있으며 운율이나 조형미에 의거하지 않고 인생의 진실을 이야기하고 어디까지나 내용 자체의 전달로 독자에게 감명을 주는 것이다. 따라서 작자가 걸어온 인생의 체험에서 비롯되는 현실의 묘사나 서술에 그 예술성이 보존된다. 특히 산문정신을 작가정신의 요체(要諦)로서 시정신과 대립시켜 제창하는 까닭은 소설의 리얼리티가 시나 운문과는 별도로 그 문예성을 보유하고 있음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그럼 문제를 하나 제시해 보겠습니다. 다음 글은 산문일까요, 산문시일까요? 용은 날개가 없지만 난다. 개천은 용의 홈타운이고, 개천이 용에게 무슨 짓을 하는지는 모르지만 날개도 없이 날게하는 힘은 개천에 있다. 개천은 뿌리치고 가버린 용이 섭섭하다? 사무치게 그립다? 에이, 개천은 아무 생각이 없어, 개천은 그냥 그 자리에서 뒤척이고 있을 뿐이야. 갑자기 벌컥 화를 내는 사람이 있다. 용은 벌컥 화를 낼 자격이 있다는 듯 입에서 불을 뿜는다. 역린을 건드리지 마, 이런 말도 있다. 그러나 범상한 우리 같은 자들이야 용의 어디쯤에 거꾸로 난 비늘이 박혀 있는지 도대체 알 수가 있나. 신촌에 있는 장례식장 가려고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햇빛 너무 강렬해 싫다. 버스 한대 놓치고, 그다음 버스 안 온다, 안 오네, 안 오네…… 세상이 날 홀대해도 용서하고 공평무사한 맘으로 대하자. 내가 왜 이런 생각을? 문득 제 말에 울컥, 자기연민? 세상이 언제 너를 홀대했니? 그냥 네 길을 가, 세상은 원래 공정하지도 무사하지도 않아, 뭔가를 바라지 마, 개떡에 개떡을 얹어주더라도 개떡은 원래 개떡끼리 끈적여야 하니까 넘겨버려, 그래? 그것 때문이었어? 다행히 선글라스가 울컥을 가려준다 히히. 참새, 쥐, 모기, 벼룩 이런 것들은 4대 해악이라고 다 없애야 한다고 그들은 믿었단다. 그래서 참새를 몽땅 잡아들이기로 했다지? 수억마리의 참새를 잡아 좋아하고 잔치했더니, 다음 해 온 세상의 해충이 창궐하여 다시 그들의 세상이 되었다고 하지 않니, 그냥 그 자리에서 뒤척이고 있어, 영원히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린다 해도 넌 벌컥 화를 낼 자격은 없어, 그래도 개천은 용의 홈타운, 그건 그래도 괜찮은 꿈 아니었니? —최정례, 「개천은 용의 홈타운」 글을 쓴 이는 이것을 과감하게 '시'라고 내놓고 있지만 엄격한 기준을 적용해서 판단하건대 어디까지나 이 글은 치기만만한 산문일 뿐입니다. 아무리 높은 거액의 상금을 받았을지라도 그게 내 눈에는 기지와 해학을 앞세운 산문에 지나지 않아 보입니다. 산문정신에 충실한, 산문치고는 센스가 있는 수필이라 하겠습니다. (요즘 수필 쓰는 이들 가운데에는 5매 안팎의 짧은 수필 쓰는 경향도 있다고 들었습니다.)저런 수필을 모아놓은 책은 그러므로 수필집으로 대우하는 게 정당할 것입니다. 시인이 '시'라고 생각하고 써서 발표한 글이 모두 시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건 시인이 자기 양심을 기만한 것이며, 독자 위에 군림하는 오만입니다. (*)
1141    산문과 산문시의 차이 알아보기 댓글:  조회:5066  추천:0  2016-03-03
산문과 산문시의 차이는 무엇인가 산문시(散文詩) 현대시를 외형률의 유무와 행의 표기 형태를 기준으로 따져 보면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가) 운문형식이며 행 구분이 있는 시 나) 산문형식이며 행 구분이 있는 시 다) 운문형식이며 행 구분이 없는 시 라) 산문형식이며 행 구분이 없는 시 가)와 다)는 운율적인 요소 곧 율격이나 압운 같은 외형률을 지닌 시이고 나)와 라)는 그런 외형률을 갖추지 못한 것이다. 가)는 우리가 흔히 만나는 일반적인 자유시다. 나)는 문체로 볼 때 산문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행 구분이 되어 있다. 김수영(金洙暎)의 「만용에게」라든지 서정주(徐廷柱)의 후기 기행시 같은 작품들이 이에 해당한다. 다)는 운율을 지닌 작품이지만 산문처럼 행 구분이 되어 있지 않는 경우다. 「장미·4」등 박두진(朴斗鎭)의 초기 작품들에서 쉽게 그 예를 찾아볼 수 있다. 라)는 운율도 없으면서 행 구분도 되어 있지 않은 것으로 이상(李箱)의 「지비(紙碑)」같은 작품이 이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가)와 나)를 분행자유시(分行自由詩), 다)와 라)를 비분행자유시(非分行自由詩)라고 구분해 명명키로 한다. 산문시는 바로 이 비분행자유시의 다른 이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산문시는 자유시의 하위 개념이다. 운율의 유무 등 그 내적 구조로 따져 본다면 나)가 다)보다 더 산문성을 지니고 있을 수도 있지만, 산문시를 분별하는 기준을 내적 특성으로 잡는다는 것은 여간 곤혹스런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산문성과 비산문성의 한계를 따지는 일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산문시는 그 외형적인 형태를 기준으로 규정하는 수밖에 없다. 일반적으로 '산문시는 분행 의식이 없이 산문처럼 잇대어 쓴 자유시'라고 정의한다. 한용운(韓龍雲)의 자유시들은 행이 산문처럼 길지만 산문시의 범주에서 제외된다. 왜냐하면 한용운의 시는 분행 의식이 뚜렷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한용운의 시처럼 그렇게 행이 긴 시들을 장행시(長行詩)라고 달리 부르고자 한다. 그런데 분행 의식을 기준으로 산문시를 규정해 놓고 보아도 역시 문제는 없지 않다. 라)의 산문시와 산문(짧은 길이의)을 어떻게 구분하느냐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즉 산문시와 산문의 한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 그것이 산문이 아닌 시로 불릴 수 있는 변별성은 무엇인가. 산문시와 산문의 차이를 논하는 것은 결국 시(詩)와 비시(非詩)를 따지는 것과 궤를 같이 한다. 나는 바람직한 시란 '시정신이 시적 장치를 통해 표현된 글'이라고 정의한 바 있다. 그러면 시정신이란 무엇이며 시적 장치는 어떤 것인가가 또한 문제로 제기되지 않을 수 없다. 무릇 모든 글은 작자의 소망한 바의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시 또한 예외는 아니다. 그런데 시 속에 담긴 시인의 소망은 보통인의 일상적인 것과는 다르다고 본다. 훌륭한 시작품들 속에 서려 있는 시인의 소망은 세속적인 것이 아니라 격이 높은 것이다. 말하자면 승화된 소망이라고 할 수 있는데 나는 이를 시정신이라고 부른다. 시정신은 진(眞), 선(善), 미(美), 염결(廉潔), 지조(志操)를 소중히 생각하는 초연한 선비정신과 뿌리를 같이하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시가 되도록 표현하는 기법 곧 시적 장치 역시 단순한 것이 아니어서 이를 몇 가지로 요약해서 제시하기란 여간 곤란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굳이 지적을 해 보자면, 감춤[상징(象徵), 우의(寓意), 전이(轉移), persona(가화자)], 불림[과장(誇張), 역설(逆說), 비유(比喩)] 그리고 꾸밈[(운율(韻律), 대우(對偶), 아어(雅語)] 등의 장치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이들을 한마디로 '엄살'이라는 말로 집약해서 표현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시는 시인의 승화된 소망(시정신)이 엄살스럽게 표현된 짧은 글이라고 정의할 수 있으리라. 산문시도 그것이 바람직한 시가 되기 위해서는 시정신이 시적 장치를 통해 표현된 글이어야만 한다. 伐木丁丁(벌목정정) 이랬거니 아람도리 큰솔이 베허짐즉도 하이 골이 울어 맹아리 소리 찌르릉 돌아옴즉도 하이 다람쥐도 좇지 않고 묏새도 울지 않어 깊은산 고요가 차라리 뼈를 저리우는데 눈과 밤이 조히보담 희고녀! 달도 보름을 기달려 흰 뜻은 한밤 이골을 걸음이랸다? 웃절 중이 여섯판에 여섯 번 지고 웃고 올라간 뒤 조찰히 늙은 사나히의 남긴 내음새를 줏는다? 시름은 바람도 일지 않는 고요에 심히 흔들리우노니 오오 견듸랸다 차고 兀然(올연)히 슬픔도 꿈도 없이 長壽山(장수산) 속 겨울 한밤내ㅡ ―정지용(鄭芝溶) 「장수산(長壽山)·1」전문 「장수산·1」에 담긴 정지용의 소망은 무엇인가. 무구적요(無垢寂寥)한 자연 속에 들어 세속적인 시름을 씻어 버리고 청정한 마음을 되찾고자 하는 것이리라. 그러니 이 작품에 담긴 시정신은 '친자연(親自然) 구평정(求平靜)'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일상적인 욕망을 넘어선 승화된 정신이라고 아니 할 수 없다. 또한 이 작품에서의 주된 시적 장치는 대구의 조화로운 구조라고 할 수 있다. 맨 앞의 '∼하이'로 종결되는 두 문장이 대우의 관계에 있고, 짐승인 '다람쥐'와 새인 '묏새'의 관계가 또한 그러하며, '달'과 '중'을 서술하는 두 문장 역시 그러하다. 또한 의도적인 의고체(擬古體)의 구사로 우아하고 장중한 맛을 살리고 있다. 「장수산·1」은 일반적인 산문과는 달리 시정신과 그런 대로 시적 장치를 지닌, 시의 자격을 갖춘 글이라고 할 만하다. 산문시는 운율을 거부한 시로 잘못 생각해서는 곤란하다. 산문시도 율격이나 압운 등을 얼마든지 담을 수 있고, 그런 외형률이 아니더라도 내재율에 실려 표현되는 것이 이상적이다. 여타의 시적 장치들 역시 산문시 속에 어떻게 적절히 구사되느냐에 따라 그 글을 시의 반열에 올려놓기고 하고 그렇지 못하기도 한다. 산문시는 외형상 산문의 형태를 지니고 있을 뿐이지 결코 시에 미달한 글이어서는 곤란하다.―『엄살의 시학』(태학사)
1140    산문시와 산문을 구별해보자 댓글:  조회:4599  추천:0  2016-03-03
산문시와 산문의 구별 나호열 신부는 초록 저고리 다홍치마로 겨우 귀밑머리만 풀리운 채 신랑하고 첫날밤을 아직 앉아 있었는데, 신랑이 그만 오줌이 급해져서 냉큼 일어나 달려가는 바람에 옷자락이 문 돌쩌귀에 걸렸습니다. 그것을 신랑은 생각이 또 급해서 제 신부가 음탕해서 그 새를 못 참아서 뒤에서 손으로 잡아 다리는 거라고, 그렇게만 알곤 뒤도 안돌아보고 나가 버렸습니다. 문 돌쩌귀에 걸린 옷자락이 찢어진 채로 오줌누곤 못 쓰겠다며 달아나 버렸습니다. 그러고 나서 사십 년인가 오십 년이 지나간 뒤에 뜻밖에 딴 볼 일이 생겨 이 신부네 집 옆을 지나가다가 그래도 잠시 궁금해서 신부방 문을 열고 들여다보니 신부는 귀밑머리만 풀린 첫날 밤 모양 그대로 초록 저고리 다홍치마로 아직도 고스란히 앉아 있었습니다. 안스러운 생각이 들어 그 어깨를 가서 어루만지니 그때서야 매운 재가 되어 폭삭 내려 앉아 버렸습니다. 초록 재와 다홍 재로 내려앉아 버렸습니다. - 서정주의 新婦 나는 맨발로 계단을 오른다. 붉은 닭들이 몰려온다. 그렇게 고이는 시간의 연기 꿈의 힘 때문에 나는 다시 내려온다. 내려오면 난파하는 귀 하나가 맴돌고 맴돌다 죽는다. 그래서 다시 계단을 오른다 계단. 위의 안개, 하얀 식물의 등불, 나는 무서워 곧장 또 뛰어 내려온다. 내 정신의 폐가 바람 속에 맴돌고 맴돌다 죽으면 또 죽은 기억이 맨발로 계단을 오른다. 아아 더럽다 오르지 못하고 곧장 올라간 것처럼 생각하면서 굴러 떨어지는 내 두개골은 아마 내일 아침엔 다시 맨발로 계단을 오르지 못할 것이다. - 이승훈, 권태 이승훈 교수는 다음과 같이 정리 합니다. 1. 사고의 단위가 산문은 문장이고 시의 경우에는 행 line이다. (시에는 리듬감이 있다) 2. 산문은 객관적 정보 전달과 실용적 가치에 우선을 두지만 시는 심리적 반응을 요구한다. 3. 산문은 사고의 단위가 연대기적이며 시는 연상적 기법을 따른다. 4. 산문에는 리듬이 없지만 시는 리듬감을 가지고 있다. 5. 산문은 의미의 확산을 시는 압축을 생명으로 한다. 시에서 요구되는 형식에 대한 개념이 아직도 부족하다면 몇 가지 예를 더 들어 보겠습니다. ① 지난 여름 폭우가 쓸고 지나간 산골짜기 계곡에 ② 허옇게 뿌리를 드러낸 몇 그루 나무들이 ③ 바람 속에서 실뿌리들이 필사적으로 흙을 찾아 ④ 몸을 기대고 있다. ⑤ 검은 흙이 실뿌리의 손을 가만히 잡아주고 있다. ⑥ 위태롭지만 아, 따스한 저 손길! -김성춘, 노래.1 ① 그 여자가 걸어오고 있다. ② 머리에는 커다란 짐을 이고 ③ 이쪽으로 이쪽으로 ④ 천천히 천천히 아다지오로 천천히 ⑤ 구월의 햇볕이 ⑥ 그 여자를 짓누른다. ⑦ 그러나 그여자는 멈추지 않는다. ⑧ 이윽고 나를 지나친다. ⑨ 나는 뒤를 돌아본다. ⑩ 그 여자는 아직도 느린 걸음처럼 걷고 있다. ⑪ 나는 다시 뒤를 돌아본다. ⑫ 길게 나 있는 그 여자의 발자국 ⑬ 다시 뒤를 돌아보는 짧은 순간 ⑭ 그 여자의 머리에서 커다란 짐이 내려온다. ⑮ 그 여자가 사라진다. ⑮-1 그의 이름은 슬픔이다. 홍영철,그의 이름은 슬픔 ① 나무들이 울창한 생각 끝에 어두워진다 ② 김 서린 거울을 닦듯 나는 손으로 ③ 나뭇가지를 걷으며 나아간다 ④ 깊이 들어갈수록 숲은 등을 내보이며 ⑤ 멀어지기만 한다 저 너머에 ⑥ 내가 길을 잃고서야 닿을 수 있는 ⑦ 집이라도 한 채 숨어 있다는 말인가 ⑧ 문 열면 바다로 통하는 ⑨ 집을 저 숲은 품에 안고 성큼 ⑩ 성큼 앞서 가는 것인가 마른 잎이 ⑪ 힘 다한 바람을 슬며시 ⑫ 내려놓는다 길 잃은 마음이 ⑬ 숲에 들어 더 깊은 숲을 본다 강윤후, 깊은 숲 1. 시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을 재구성함으로서 새로운 심상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2. 시의 형식은 시인에 의해서 자유롭게 만들어지는 것이지 정형화된 법칙은 없다 3. 시에서 압축이 의미하는 것은 연상과 상상력의 확대와 관련이 있다.    
1139    "시의 본질" 이라는 거울앞에 서보자 댓글:  조회:4512  추천:0  2016-03-03
시의 본질을 다시 생각해 보며     강 인 한           시는 전달에 앞서 표현돼야 한다. 시는 예술에 속하되 언어를 재료로 쓰는 특수성을 생각할 때 언어적 측면이 고려된 예술이 아니면 안 된다. 시는 언어로 표현된 자체가 예술일 수 있으면 족하며 그것이 전달을 우선시해야 하는 것이라면 예술에서 궤도를 이탈하여 프로파간다로 나아가기 쉽다. 시는 다른 문학 양식들에 비하여 짧고 함축적이며 음악성을 띠는 특징을 가진다. 에드거 앨런 포는 "시란 미(美)의 운율적인 창조이다"라고 말했고, 매슈 아널드는 "시는 인생의 비평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시에 대한 정의가 지금도 적용돼야 한다는 게 내 견해이다. 요즘 들어 우리 시에 이상하게도 산문시가 많이 나타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이 현상은 ‘이상한’ 경향이지 결코 정상적인 현상이 아니라고 본다. 산문시라 해도 시로서 지녀야 할 기본적인 필요조건은 갖춰야만 시가 될 것이다. 산문시라는 가면 뒤에 숨어서 단지 짧은 단편적인 사유를 풀어 쓰거나 근사한 에피소드를 산문으로 쓰고서는 시라고 내밀어서는 곤란할 것이다. 시적 긴장도 없고, 참신하고 감각적인 이미지의 배려도 없고, 음악적인 유희와 함축의 의미를 추구하는 즐거움이 배제된 산문— 단순히 짧기만 한 글이어서는 시가 아니다. 다음의 예를 읽어보자.     당신은 지구에서 가장 친절한 사람의 목소리를 갖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 말을 들었던 사람이 오래 전 죽은 것은 온전히 당신의 불행이다. 매일매일 당신은 무릎 아래에서 올라오는 동생들의 저녁을 돌보고 어머니의 길고 긴 목을 닦아주었다. 오랫동안 배를 타다가 육지로 돌아온 거친 사내들은 당신의 생밤 같은 얼굴을 만지고 싶어 했다. 당신은 그 중 한 사내의 힘줄을 아무도 몰래 끊고 싶었다. 숲 쪽으로 세 번, 바다 쪽으로 두 번 울었던 여름, 당신은 정갈하게 애인과 헤어졌다. 피로 쓴 편지를 주고받은 적 없었으나, 심장에 그어진 파문 때문에 당신은 오랫동안 잠들지 못했다. 당신은 애인의 허리가 가르쳐준 굴욕을, 손톱을 베어내며 조금씩 떠올렸다. 하얀 종아리를 가진 애인을 죽이지 못한 것이 후회됐다. 달도 뜨지 않은 밤이 깊어, 마당에 매어둔 자전거들이 말처럼 휭휭 울었다. 당신은 관대한 사람들의 생애가 종종 실패하는 것을 목격했다. 별과 비와 시, 눈을 감아도 너무나 잘 보이는 것들만이 문제였다. 어머니의 배꼽을 베고 눈을 감은 아버지의 싱거운 모험을 생각하기도 했다. 동생들은 더디 자랐고 당신은 오랫동안 당신에 머물렀다.     이 글은 2인칭인 ‘당신’을 중심으로 서술된 글이다. 서사의 골격을 갖추고 있으나 간간이 서정적인 문채(文彩)를 가미한 인상적인 산문이다. 아마도 이 글은 어떤 소설의 개요로 쓴 게 아닌가 싶다. 다시 말하면 압축된 서사이다. 그 압축된 문장들에서 시가 지니는 함축성을 찾아볼 수 있을까. “숲 쪽으로 세 번, 바다 쪽으로 두 번 울었던 여름, 당신은 정갈하게 애인과 헤어졌다”는 문장에서 요리조리 시적인 함축성을 궁리해 보기란 도저히 불가능하다. 그것은 필자 마음 속 깊이 감춰진 특별한 사연일 것이므로 독자가 그것을 귀신같이 헤아린다는 건 말도 안 된다. 단편소설이 장편소설의 한 부분을 떼어낸 것이어서는 안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소설의 압축된 개요에 살짝 위장(僞裝)된 서정을 가미한 것이 시일 수는 없다. 그런데 왜 요즘 이러한 산문시가 횡행하는 것일까. 그것은 행갈이가 있는 자유시 형태로 쓰면 너무도 쉽게 자신의 미흡한 시적 역량이 모두 드러나기 때문일 것이다. 약간 길고 독해하기 곤란한 산문 형태 뒤에 숨어서 자신의 진면목이 쉽게 드러나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으로 인해서 그들은 산문시라는 가면 뒤에 숨기를 좋아하는 것으로 보인다. 상당히 진보적인 시인들 가운데 예술의 표현 방식이 보수적이며 전통적인 것은 무조건 진부하다고 물리쳐버리고 새로운 것만이 최선의 표현 양식이라고 판단하는 경향이 많다. 21세기에 들어선 지도 십 년 세월이 넘은 오늘에 와서도 구태의연하게 김소월 류의 감상적인 영탄이나 청록파 시인들의 서정을 답습하는 건 미상불 시대착오적인 꼴불견일 것이다. 하지만 새것이라 하면 좋은 것만 있는 것일까. 이른바 아방가르드만 지고지선이며 무등(無等)한 최고 예술일 것인가. 모든 전위는 비록 치명적 결함을 내포할지라도 오로지 전위이기 때문에 추앙받는 예술로서 충분한 것인가. 마르셀 뒤샹(1887~1968)은 프랑스의 다다이즘 또는 초현실주의 작품으로 잘 알려진 예술가다. 그가 남자 화장실의 소변기를 미술관의 바닥에 내려놓고 「샘」이라는 명제를 부여했을 때 그의 혁명적인 고안에 감탄하고 보편적인 예술의 권위주의에 반기를 든 그의 정신을 높이 평가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아방가르드란 이런 것이라고. 그러나 다시 한 번 진지하게 생각해 보자. 저기에 예술가로서의 고민과 참담한 노력과 수없는 좌절 끝에 이루어진 빛나는 예술로서의 독창성이 있는가. 또 생각해 보자. 벌거벗고 거리에 나선 임금님에게 모든 이들이 머리 조아리고 참으로 아름다운 의상을 입었노라고 칭송하여 마지않는 것과 저것이 다르면 얼마나 다른가. 그럴싸한 이론으로 치장하고 얼버무린 사기(詐欺)를 대단한 예술이라고 떠받드는 건 한갓 코미디일 뿐이다. 저 「샘」이라는 고상한 명제를 떼어내고 화장실이건 아무 벽에나 갖다가 걸어보라. 저 소변기가 호강스런 자리를 떠났을 때 그것은 단순한 소변기의 본질을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전위적인 해체주의 시가 한참 떠들썩할 때였다. 신문의 짤막한 광고기사를 편집하여 황지우 시인이 다음과 같은 시를 발표하였는데 그것은 가슴이 저리도록 공감할 만한 시였다. 바로 광주민중항쟁 기간 동안 사라진 실종자들의 사연을 다룬 시였다.     김종수 80년 5월 이후 가출/ 소식 두절 11월 3일 입대 영장 나왔음/ 귀가 요 아는 분 연락 바람 누나/ 829-1551// 이광필 광필아 모든 것을 묻지 않겠다/ 돌아와서 이야기하자/ 어머니가 위독하시다// 조순혜 21세 아버지가/ 기다리니 집으로 속히 돌아오라/ 내가 잘못했다// 나는 쭈그리고 앉아/ 똥을 눈다 —황지우,「심인」     그런데 이렇게 편집되고 약간 시적인 의도를 가지고 손질된 기사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기사문 전체를 인용하여 ‘시’라고 내놓는 경우는 어떠한가. 진취적인 아방가르드의 구현으로서 손색이 없다 하겠으나 과연 다음과 같은 글이 시집 아닌 곳에 수록되어 읽힐 때 본질적으로 시일 것인가.     경찰은 그들을 적으로 생각하였다. 20일 오전 5시 30분, 한강로 일대 5차선 도로의 교통이 전면 통제되었다. 경찰 병력 20개 중대 1600명과 서울지방경찰청 소속 대테러 담당 경찰특공대 49명, 그리고 살수차 4대가 배치되었다. 경찰은 처음부터 철거민을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한강로 2가 재개발 지역의 철거 예정 5층 상가 건물 옥상에 컨테이너 박스 등으로 망루를 설치하고 농성중인 세입자 철거민 50여명도 경찰을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대신 최후의 자위책으로 화염병과 염산병 그리고 시너 60여통을 옥상에 확보했다. 6시 5분, 경찰이 건물 1층으로 진입을 시도하자 곧바로 화염병이 투척되었다. 6시 10분, 살수차가 건물 옥상을 향해 거센 물대포를 쏘았다. 경찰은 쥐처럼 물에 흠뻑 젖은 시민을 중요 범죄자나 테러범으로 생각하는 듯했다. 6시 45분, 경찰특공대원 13명이 기중기로 끌어올려진 컨테이너를 타고 옥상에 투입되었다. 이때 컨테이너가 망루에 거세게 부딪쳤고 철거민들이 던진 화염병이 물대포를 갈랐다. 7시 10분, 망루에서 첫 화재가 발생했다. 7시 20분, 특공대원 10명이 추가로 옥상에 투입되었다. 7시 26분, 특공대원들이 망루 1단에 진입하자 농성자들이 위층으로 올라가 격렬히 저항했고 이때 내부에서 벌건 불길이 새어나오기 시작했으며 큰 폭발음과 함께 망루 전체가 화염에 휩싸였다. 물대포로 인해 옥상 바닥엔 발목까지 빠질 정도로 물이 흥건했고 그 위를 가벼운 시너가 떠다니고 있었다. 이때 불길 속에서 뛰쳐나온 농성자 3, 4명이 연기를 피해 옥상 난간에 매달려 살려달라고 외쳤으나 아무도 그들을 돌아보지 않았다. 그들은 결국 매트리스도 없는 차가운 길바닥 위로 떨어졌다. 이날의 투입 작전은 경찰 한명을 포함, 여섯 구의 숯처럼 까맣게 탄 시신을 망루 안에 남긴 채 끝났으나 애초에 경찰은 철거민을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았으며 철거민 또한 그들을 전혀 자신의 경찰로 여기지 않았다.     민주주의의 시대에 발붙이고 사는 힘없는 서민들이라면 누구나 가슴 떨리는 공분을 느끼기에 충분한 이런 글이 보편적인 시가 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예술적 고안이나 손질 같은 가공이 더 필요하다. 그나마 무시해버리고 이런 산문, 아니 기사문을 시라고 발표하는 것은 시인으로서의 능력 부족을 높은 시정신의 추구라는 것을 핑계 삼아 호도(糊塗)하거나 시인으로서의 직무를 유기한 것에 다름 아닐 것이다. 예술적인 아이디어, 예술가로서의 진정성, 그 자체는 충분히 시의 고귀한 원석이긴 하되 아직 시라는 보석은 아니다. 시는 전달에 앞서 표현되어야 하는 예술이다. 시가 지니는 요소 가운데 미적 구조를 지향하는 모호성(ambiguity)이라는 게 있다. 그것도 일정한 논리를 바탕으로 하고 온전한 문장의 토대 위에 구현되는 모호성이라야만 올바를 것이다.     한 욕조에 든 것처럼 비린 그늘 쏟아졌다 먹먹하게 헐떡이는 너의 아가미가 밀려들어오면 바다, 그 물비늘들이 끝내 나를 눈멀게 했다 엎질러진 그림자를 황급히 주워담으며 자꾸만 늑골 어디쯤이 흥건했는데 아아 네 속에 들어 이제는 반만 처녀인 나를 어쩌면 좋을까 눈부신 모습 뒤로 습한 그늘을 숨기는 습관은 너에게 배운 것이어서 감당하지 못할 살만 골라 사랑했던가 수맥의 흐름 속으로 콸콸 흐르고 싶은 내가 또 네가 아찔했다 고단한 뿌리를 움찔거리는 너, 그 속에서 소용돌이치는 치명(致命) —이혜미, 「측백 그늘」부분     관능적인 이미지와 이미지의 연결, 그 이미지들이 이루어 내는 아름다운 리듬은 사람인지 물고기인지 모호한 ‘너’라는 존재와 네 속에 든 ‘나’라는 존재의 사랑에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다. 이와 같이 모호성은 하나의 미적 구조를 지향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호성이 단지 독자의 이해를 방해하고 혼란시키기 위해서 구사되는 건 대단히 불순한 저의에 지나지 않을 터이다.     장식된 옷을 입은 조상보다 벌거벗은 조상에 대한 생각을 더 많이 해야 했던/ 틀림없이 인종의 부엌에 대한 나의 존경이 자명했거든./ 그해의 아동보호시설은 계절에 이끌려 요절 밖을 기어 나왔거든,/ 거울 속을 지느러미로 헤엄치는 미끄러운 감격에 놀라며/ 이 개화는 암술이 꽂힐 때마다 지평선을 끊고 평등의 악취를 오지 않는 빛에 비춰봐야 했거든.     문장은커녕 한 마디 말도 안 되는 이런 글을 줄줄이 엮어서 시라고 우기는 데에 이르러 우리는 기가 막혀서 할 말을 잃는다. 단지 모호성만을 발생시키기 위한 난해함, 비문의 남용, 비논리적 전개 등, 또는 신들린 무당의 난삽한 주절거림과 이런 글이 어떻게 다를 것인가. 온갖 교언영색(巧言令色)으로 이런 글에 바치는 어떠한 헌사도 ‘시의 본질’이라는 거울 앞에 서게 된다면 감히 얼굴을 쳐들지 못할 것이다.    
1138    독자가 없으면 詩는 존재할수 있다... 없다... 댓글:  조회:4877  추천:0  2016-03-03
지향해야 할 시, 내일의 시 십 년 넘게 나는 카페〈푸른 시의 방〉 좋은 시 읽기 코너에 날마다 잡지나 시집에서 좋은 시를 두세 편씩 소개하고 있다. 그런데 시 한 편을 다 타이핑하고서도 곰곰 되새겨보다가 못내 지워버리는 경우가 더러 있다. 눈에 든 티처럼, 목에 가시처럼 좋았던 전체의 기분을 홱 바꿔버리는 것. 아래에 최근에 겪은 몇 가지를 들어본다. ① 후배에게 전화가 왔다/ 바람 드는 곳에서 술이나 마시자고 ② 창문엔 내내 비悲가 내린다 ③ 씻어내며 골라내는 동안 생략되어지는 시간들 ④ 나는 어머니와 씹한 적도 있다 우리가 평소의 사적인 대화에선 “후배에게 전화가 왔다”를 “후배에게서 전화가 왔다” 로 이해하는 데 큰 문제가 없다고 느낀다. 하지만 ‘시’라고 하는 공적인 고급의 문장에서 ①처럼 쓰는 건 삼가야 할 것이다. 문어에서 ‘-에게’란 조사는 분명 ‘to’의 개념이기 때문이다. ②에서 ‘비悲’라는 표기는 비와 슬픔을 한꺼번에 표현하려는 의도인 것 같다. 하지만 한자를 이용한 말장난이 요즘 광고에 하도 많이 나와서 식상하지 않던가. ③에선 중복 피동의 표현이 거슬린다. ‘생략되는’으로도 충분한 것을 어색한 번역문체로 쓰는 건 좋지 않다. ④를 쓴 시인에게 과감한 표현을 썼다고 하기엔 거부감이 심하다. 신화에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있긴 하다. 근친상간의 표현을 육두문자로 직핍하는 건 내 상식으론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이 한 문장 때문에 「비밀」이란 좋았던 시를 손에서 놓고 같은 시인의 다른 시를 택한 건 무척 안타까웠다. 기왕에 우리 시인들이 자칫 틀리기 쉬운 ‘갖는다’와 ‘딛으며’라는 표기에 대해서도 말하고 싶다. 준말은 음절수를 생략하는 언어의 경제에서 나왔음을 상기해야 한다. 가지다의 준말은 ‘갖다’, 디디다의 준말은 ‘딛다’이다. ‘가진다, 디딘다’로 충분한데 ‘갖는다, 딛는다’로 쓰는 건 음절이 줄어든 게 아니기에 ‘가진다’로, 디디며‘로 써야 바른 표기이다. 현대시 백 년. 특히 최근의 우리 시는 놀랄 만큼 다양한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 바람직한 진화도 있지만 선두에 선 소수의 아방가르드 선수들이 범한 오류조차 후배 지망생들이 무비판적으로 답습하는 경우가 요즘 극심하게 드러나고 있다. 절세의 미인 서시(西施)가 위장병이 있어서 이따금 미간을 찡그리고 다닐 때, 궁녀들은 ‘아 저렇게 미간을 찡그려야 미인의 아름다운 표정이 되는구나’ 생각하고 너도나도 궁 안에서 찡그리고 다녔다고 한다. 효빈(效顰)의 고사다. 선배 시인이 저지른 실험의 실패, 혹은 실수마저 따르고자 하는 효빈의 행위는 웃음거리가 될 수밖에 없다. 또한 이해하기 쉬운 시를 회피하여 굳이 난해한 시를 쓰기 위한 요령부득 혹은 언어도단의 수사를 구사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최근 내 보기에는 송찬호의 「울부짖는 서정」, 신용목의 「호수 공원」, 안희연의 「기타는 총, 노래는 총알」, 조인호의 「철가면」같은 시들이 신인 지망생들의 본보기로서 부족함이 없으며 우리 시의 내일을 지향하는 지표가 되리라 생각한다. 올해 삼사십대 세 명의 심사위원이 〈창비신인시인상〉 심사를 마치고 쓴 심사평 저 한 마디에 나도 뜨거운 지지의 박수를 보낸다. “독자가 없으면 시는 존재할 수 없다.” (2015.9. 10. 원고 50 매) —《시인수첩》 2015년 겨울호 --------------------------------------------------------------------------------------------------------- 겨울의 할례 / 김산 죽어가는 사람은 죽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듯. 죽음을 각오했기에 죽음 따위는 애써 두렵지 않다는 듯. 산다는 것과 죽는 것의 경계가 무용한 임계점이라는 듯. 죽음 너머와 죽음 넘어 사이에서 아직도 구원을 찾지 못하는 듯. 죽음이라는 관념과 주검이라는 구체 사이에서 이 한여름의 겨울은 도무지 덥고 습하다는 듯. 매실 밭에서 우리의 교주가 신발을 가지런하게 벗고 죽었습니다. 저의 하찮은 몸을 마지막까지 구더기에게 긍휼하게 나눠주신 그는 구도자셨지요. 귀갑테 안경도 없이 두꺼운 바이블도 없이 적막하게 썩어 문드러졌습니다. 죽음을 저녁 풀숲에 던져두자 주검이 새벽 풀숲을 방언으로 간증하셨다지요. 개미와 날파리 떼가 몰려들어 고개를 숙였고 산짐승 몇이 죽음의 내장을 육개장처럼 씹으며 그의 발인을 묵묵히 지켰습니다. 매실들이 밤별처럼 무럭무럭 자라 반딧불이와 함께 도란도란 합창을 했답니다. 성나게 발기했던 말씀들을 추운 바람이 건드렸지만 도무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죽음이 벌떡 일어나 주검을 재빠르게 수습하고 푸하하하 웃으며 전속력으로 달릴 것 같았지만. 죽음을 내려다보는 또 다른 죽음 앞에서 그의 뼈는 털썩 주저앉기를 반복했습니다. 살아도 산 게 아닌 죽음은 모든 것을 체념한 듯 울상을 짓고 죽은 척 눈을 감고 있었습니다. 매실주를 마시면 달달한 죽음의 향이 온몸에 사르르르 퍼집니다. 밤별과 반딧불이와 추운 바람이 이 한여름을 겨울로 내몰고 있습니다. (미안하지만) 나는 오래 전에 죽은 귀신입니다. 몹시 춥고 배가 고파 잠이 오지 않습니다. —웹진『시인광장』 2014년 8월호 울부짖는 서정 / 송찬호 한밤중 그들이 들이닥쳐 울부짖는 서정을 끌고 밤안개 술렁이는 벌판으로 갔다 그들은 다짜고짜 그에게 시의 구덩이를 파라고 했다 멀리서 사나운 개들이 퉁구스어로 짖어대는 국경의 밤이었다 전에도 그는 국경을 넘다 밀입국자로 잡힌 적 있었다 처형을 기다리며 흰 바람벽에 세워져 있는 걸 보고 이게 서정의 끝이라 생각했는데 용케도 그는 아직 살아 있었다 이번에는 아예 파묻어버리려는 것 같았다 나무 속에서도 벽 너머에서도 감자자루 속에서도 죽지 않고 이곳으로 넘어와 끊임없이 초록으로 중얼거리니까 —《22세기시인》2015년 여름호 호수공원 / 신용목 네 머리를 떠난 네 생각이 여기 호수에 잠겨 있다 부러진 칼처럼, 헤엄치고 있다 꼭 누군가의 몸을 지나온 칼처럼, 빨갛다 헤엄쳐도 씻기지 않는다 물 밖에는 사람들이, 손잡이만 남은 칼을 귀에다 대고 무슨 말인가 하고 있다 손잡이만 남은 칼 앞에서 웃고 있다, 찍어대도 피가 나지 않는다 너는 잉어의 눈알을 파먹고 온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인생은 가끔 그런 순간을 과거에 갖다 놓는다 살아 있는 느낌 살아 있는 느낌, 그것이 너무 싫다고 말했다 지느러미를 연기처럼 풀어 놓고 석양은, 알 수 없는 깊이에서 보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밤이라는 국경을 거슬러 헤엄치면 꿈나라에 닿겠지 그래서 묻는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잠이 들고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꿈을 꾸면 그 나라는 도대체 얼마나 크단 말인가? 모든 칼들이 손잡이만 남아 있는 나라, 돌아오는 집 앞 정육점에도 칼은 있다 거기 돼지를 지나간 생각이 걸려 있다 아직도 타고 있는 석양처럼 환해서, 한 덩어리 베어와 물에 담가 두었다 —《문장웹진》2015년 9월호 기타는 총, 노래는 총알 / 안희연 염색공은 골몰한다 흑백으로 이루어진 세계에 어떤 색을 입힐 것인가 고심의 고심을 거듭하던 그가 얼결에 페인트 통을 엎질렀을 때 우리는 태어났다 우리는 그의 아름다운 실수 돌이킬 수 없는 얼룩들 당신이 갓 태어난 아이를 보며 알 수 없는 두려움을 느끼거나 툭하면 허물어지는 성벽을 가진 것은 그 때문 내정된 실패의 세계 속에 우리는 있다 플라스틱 병정들처럼 하루치의 슬픔을 배당받고 걷고 또 걸어 제자리로 돌아온다 우리는 그의 기억 저편으로 사라진 풀리지 않는 숙제 아무도 내일을 믿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에겐 노래할 입이 있고 문을 그릴 수 있는 손이 있다 부끄러움이 만드는 길을 따라 서로를 물들이며 갈 수 있다 절벽이라고 한다면 갇혀 있다 언덕이라고 했기에 흐르는 것 먼 훗날 염색공은 우리를 떠올릴 것이다 우연히 그의 머릿속 전구가 켜지는 순간 그는 휴지통을 뒤적여 오래된 실패를 꺼낼 것이다 스스로 번져가던 무늬들 빛을 머금은 노래를 ——— * 기타는 총, 노래는 총알 : 빅토르 하라 —《포지션》2015년 봄호 =================================================================== 281. 채석강에서 / 박명용 채석강에서 박 명 용 四書三經이 차곡차곡 쌓여 있다 가까이 다가간다 곰팡이 냄새가 푸른 바다처럼 싱싱하다 조심스럽게 다가서자 ‘위험하니 접근하지 마시오’ 팻말이 앞을 가로막는다 아, 그렇지 내 어릴 적 사랑방 높이 쌓인 글귀 단 한 줄도 풀지 못하고 돌아서다가 와락 무너뜨려 출입금지 당한 일 지금까지 해제된 적 없지 않은가 이끼 덮어쓴 까마득한 절벽의 古書 앞에서 고개도 들지 못하고 부끄럽게 돌아서고 만 채석강 박 명 용 시집 중에서 박명용 연보 1940년 충북 영동 출생. 건국대학교 및 홍익대학교 대학원 졸업. 문학박사 1976년 지에 한성기 시인의 추천으로 등단. 1985년 제2회 동포문학상 수상. 1992년 평론집 간행. 1996년 평론집 간행. 1997년 시집 간행. 1998년 시집 간행. 2000년 평론집 간행. 2008년 4월 27일(향년 68세) 폐암으로 작고. 홍익문학상, 한국문학상 등 수상, 대전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 282. 모순의 뿌리 / 박명용 모순의 뿌리 박 명 용 돌산 비탈길 소나무 뿌리가 앙상하게 드러나 있다 거친 등산화에 얼마나 밟히고 채였는지 살 한 점 없는 뼈 햇살에 따갑게 반짝이고 마디마다 옹크린 옹이 차돌보다 더 단단한 사리가 되었다 세상 발길에 시달리 때마다 이를 악물고 전신으로 버텨 투명한 혈관이기를 짙푸른 몸이기를 아니, 험한 행로의 든든한 버팀목이기를 굳게굳게 다짐했는가 수많은 상처 내보이면서 비명 한 번 지르지 않고 몸부림도 치지 않고 무엇인들 못 견디랴 돌 틈서리에 힘 있게 박혀 있다 밟힐 때마다 불쑥불쑥 일어서는 뜨거운 모순의 뿌리 박 명 용 시집 중에서
1137    밀핵시(密核詩)란? 댓글:  조회:4891  추천:0  2016-03-02
밀핵시의 정점을 향한 기나긴 여정 이 승 하 성찬경 시인이 아홉 번째로 펴내는 시집(시선집 제외)의 제목은 ‘해’이지만 시집의 제목 밑에 적혀 있는 타이틀에 그 무엇보다 먼저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성찬경일자시집’―마침내 밀핵시론(密核詩論)의 완결판이 2009년도 다 저문 지금 이 시점에 나오게 된 것을 까마득한 후학의 한 사람으로서 경외심을 갖고 축하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 최초의 일자일행시 「해」가 발표된 것은 1992년 여름호 『현대시사상』이므로 17년 만의 결실인 듯하지만 우리말에 대한 실험 공법이 『화형둔주곡』(1966)에서부터 시작된 것을 감안한다면 근 45년 만에 시인은 한국시문학사에 하나의 획을 긋는 작업을 이제 막 끝낸 것이다. 시인의 밀핵시론을 설명하기에 앞서 표제시 「해」에 대한 소감부터 밝히고 싶다. 시의 전문은 없고 제목 ‘해’가 전부다. 제목 아래 본문은 없지만 각주가 하나 오른쪽 하단에 붙어 있다. ‘해’라는 한 글자로 된 순우리말에 대한 시인 자신의 생각을 설명하고 있는 이 부분이 시의 본문을 대신하고 있다. 두말할 것도 없이 사람이 경험할 수 있는 세계에서 단연 왕좌를 차지하는 것이 해다. 세상에 해보다 더 크고 밝고 고마운 것은 없다. 지구상의 모든 생명을 키우는 물리적인 원동력이 바로 저 해임에랴. 이 해를 가리키는 순우리말 ‘해’는 해의 모든 것을 다 담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해’의 자음 ‘ㅎ’은 밝음과 높음과 신성함을 표상으로 울린다. ‘하늘’의 자음도 ‘ㅎ’이 아닌가. ‘해’의 모음 ‘ㅐ’는 이를테면 莊重함의 親密化다. ‘아비’ ‘아기’를 ‘애비’ ‘애기’라 할 때 느끼는 감정이 그것이다. 따라서 우리말 ‘해’는 저 고마운 해가 동시에 우리와 친하기도 하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 시는 한 개 글자로 된 제목과 텅 비어 있는 본문 자리와 친절한 각주가 모여서 ‘해’라는 하나의 세계를 이루고 있다. 중국 문화권 내에서 반(半)식민지의 삶을 살아왔지만 우리 조상은 太陽이라는 낱말을 쓰지 않고 ‘해’라고 썼다. 이 해로부터 파생된 낱말로는 해님, 햇살, 햇빛, 햇볕, 햇무리, 해넘이, 해돋이, 해거름…….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시인이 생각하건대 자음 ‘ㅎ’과 모음 ‘ㅐ’가 아무 뜻 없이 모인 것이 아니다. 그 낱말의 형성 과정을 살펴보는 동안 시인은 사물과 언어를 연결할 줄 아는 우리 조상의 삶의 지혜와 탁월한 언어 감각을 발견해냈던 것이다. 두 번째 시 「달」을 보자. ‘ㄹ’과 ‘外光派’에 대한 설명은 그야말로 설명문에 가깝지만 그 밑의 각주를 보라. 이 밤도 나는 달빛 받으며 너무 눈이 부셨던 낮의 狂亂을 엷고 결고운 恨의 무늬로 變容시키리라. 사랑의 상처에 어스름 香油를 바르리라. 달 둘레 멀리 퍼지는 보랏빛 憂愁로 나의 詩情을 포근히 덮으리라. 세 개의 문장으로 이뤄진 눈부시게 아름다운 시가 아닌가. ‘달’이라는 우리말 낱말에 대한 설명을 넘어서서 시인은 짧은 산문시 한 편을 덧대어 일자일행시를 마무리하고 있다. 세 번째 시 「별」도 마찬가지다. 제목만 홀로 빛나는 듯하지만 별은 둘레에 여백도 있고 광휘도 거느린다. 별은 저 홀로 빛나는 듯하지만 수많은 인간이 수많은 별을 보면서 눈물짓고 한숨짓는다. “이 시 「별」은 동시에 시(문학)이자 그림(미술)이다. 문학과 미술 두 예술의 융합으로 볼 수도 있고 새 예술의 반투명적 장르로 보아도 상관없다.”고 하면서 설명을 하다가 성찬경 시인은 시를 쓴다. 그렇지. 그렇지. 별아. 별아. 서북쪽 어두운 밤하늘에 외롭게, 그러나 맑고 밝은 빛으로 반짝이는 별아. 그만이나 하니까 네가 내 별이자 詩 별이지. 뭇 사람의 理想 별이지. 허무 별이지. 기쁨 별이지. 슬픔 별이지. 별아. 별아. 서북쪽 어두운 밤하늘에 외롭게…… 이 시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 원처럼 영원한 순환과 반짝임이 있을 뿐이다. 별아, 별아…… 별을 노래한 수많은 시인의 작품 가운데 그중 빛나는 시를 3편만 꼽으라면 윤동주의 「별 헤는 밤」과 조지훈의 「승무」와 성찬경의 「별」을 꼽고 싶다. 각주의 마지막 부분을 시로 쓴 이 눈부신 전환 앞에서 나는 말문을 잃어버린다. 제일 앞에 놓인 3편의 시를 일단 감상해보았으니 일자시집을 펴낸 시인의 시론을 살펴보기로 한다. 시론의 골자는 앞서 말한 밀핵시론이다. 밀핵시란 무엇인가. 시가 담을 수 있는 의미의 밀도를 최대한도로 높여서 써보자는 것이다. 물리학에서 밀도란 단위 체적에 대한 질량의 크기를 말한다. 바위처럼 크고 무겁다고 밀도가 나가는 것이 아니라 부피는 작은데 무거워야 밀도가 나가는 것이다. 오늘날 이 땅에서 보기가 아주 어려워진 시가 짧은 시이다. 운문이라 일컬어졌던 시는 간결미와 압축미를 생명으로 했는데 이제는 시가 신문의 사설보다 길고 논문보다 딱딱하고 철학서보다 어렵다. 문예지나 시집에서 한 페이지 넘어가는 시가 자주 보이고, 수다의 시, 달변의 시, 횡설수설의 시가 대세를 이룬 느낌도 든다. 말의 홍수에 시가 떠밀려가 흔적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고 해야 할까. 시인은 언젠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시의 규모, 크기, 길이에 비해서 많은 의미를 담도록 해야 한다. 말하자면 ‘의미의 다이아몬드’ ‘의미의 라듐’ 같은 시가 ‘밀핵시’이며 나는 평생 이런 시를 추구해왔다.(2005.5) 다이아몬드는 한자로는 金剛石이라고 하는데, 보석 중의 보석으로서 현재까지 알려진 자연산 물질 중에서 경도가 가장 높다. 라듐은 자연 상태로는 존재하지 않지만 방사능을 띤 가장 무거운 원소라고 한다. 지극히 작지만 그 작은 물질 안에 엄청난 의미가 내장된 시를 쓰기 위해 시인이 고안해낸 시의 형태가 바로 일자일행시다. 밀핵시의 종착지점 바로 앞에서 나온 일자일행시는 그냥 한 순간의 아이디어로 ‘발명한 시’가 아니다. 일자일행시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험난한 과정이 있었는지를 알려면 2005년에 나온 시집 『논 위를 달리는 두 대의 그림자 버스』를 읽어보아야 한다. 제4부에는 12편의 시가 실려 있다. 일자시에 이르는 긴 과정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게끔 하는, 다시 말해 일자시까지의 진화 내용을 알게 하는 대표적인 시를 한 편씩 실어놓았다. 이 가운데 「一字一行詩」를 보자. 가. 와. 봐. 해. 둬. (……) 짜. 껴. 퍼. 대. 떠. 시작노트 要素詩 내가 더러 시도해 보는 의 일종으로서, 일자일행의 형태다. 행이 모두 순우리말의 동사이며, 단화된 명령형이다. ‘가’는 ‘가라’의 뜻이고 ‘와’는 ‘오라’의 뜻이다. 이리하여 각 행의 뜻을 한ₐ가’표시해 보면, 往, 來, 見, 行, 藏, 掘, 書, 寢, 展, 夢, 射, 縛, 擊, 立, 置, 消, 照, 剝, 與, 除, 始, 取, 測, 織, 揷, 汲, 接, 去, 이렇게 될 것이다. 군더더기를 뺀 순우리말이 갖는 간결한 아름다움과 힘을 음미해 주었으면 한다. ―「一字一行詩」 부분 이 시는 28행의 순우리말 동사와 요소시에 대한 시작노트가 합쳐져 이뤄진 것이다. 우리 조상은 ‘往’이라는 한자가 있었지만 ‘가’, ‘간다’, ‘가지’, ‘가세’, ‘가봐’, ‘가야지’ ‘갈 걸’ 등으로 써왔다. ‘縛’이라는 어려운 한자를 쓰지 않고 ‘매’라고 썼다. 양반들이야 ‘擊’이라는 17획으로 된 글자를 썼지만 민중은 ‘ㅊ’과 ‘ㅕ’ 단 두 음절을 합쳐 ‘쳐’라고 말했다. 글자의 발음과 뜻도 비슷하다. ‘격’이라는 글자의 발음과 ‘쳐’라는 글자의 발음을 놓고 볼 때 우리네 정서상 ‘쳐’가 훨씬 원래의 뜻에 가깝고 친숙하게 느껴진다. ‘寢’보다는 ‘자’가, ‘立’보다는 ‘서’가 우리의 삶 속에, 말 속에, 머릿속에 들어와 있는 글자였다. 시인은 「활짝」이란 시에서 31개의 부사에 대한 탐색을 시도하는데, 부사를 하나하나 들여다보니 “순우리말 부사는 가차없고 정력적이며, 어딘지 모르게 익살스럽기도 하다”는 결론에 이른다. 다양한 실험을 거듭한 끝에 시인은 마침내 「똥」이라는 시를 얻는다. 1999년 『시안』 겨울호에 발표된 이 시는 가히 한국 시사에 일어난 혁명이었다. 제목이 있고 본문이 없는 시, 각주가 본문을 대신한 시. ((……) 굵고 긴 똥자루 하나가 (사윗감으로 최고다) 뚝 떨어진다. 똥은 땅과 울림의 맥이 통한다.) 본문은 어디로 가고 없고 각주만 붙어 있는 이 희한한 시를 읽고 처음에는 뒤통수를 한 대 맞은 듯한, 정신이 멍한 상태가 되었다. 조금 시간을 갖고 생각해보니 “굵고 긴 똥자루”처럼 생긴 똥은 잘생긴 사윗감 같다는 뜻, 하하, 포복절도할 내용이 아닌가. 2000년 1월호 『현대문학』 시 격월평 난에 나는 아래와 같이 평을 썼다. 처음 읽었을 때의 나처럼 어리둥절해 하고 있을 독자들에게 내가 느낀 바를 설명해 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누군가 똥을 눈다. 그 똥은 염소 똥처럼 동글동글하지도 않고 돼지 똥처럼 질퍽하지도 않다. 굵고 길어 흡사 자루처럼 생긴 똥이 땅에 뚝 떨어져서 땅과 ‘울림의 맥’이 통한다. 딴딴하지도 묽지도 않은 똥 한 덩어리가 땅에 떨어질 때 나는 소리를 시인은 이렇게 맥이 통한다는 의미심장한 말로 표현한 것이다. 참으로 재미있는 비유는 괄호 속에 나오는 또 하나의 괄호 속 글자, 바로 사윗감으로 최고라는 일종의 경탄이다. 똥의 모양이 아주 그럴듯해 사윗감으로 쳐도 최고라는 뜻으로 쓴 것이겠지만 뭐든지 잘 먹고 잘 소화하여 잘 배설하는 일에 대한 시인의 바람이 이 괄호 속 괄호에는 또한 들어 있다. 똥을 제목으로 쓰고서 본문 제시를 하지 않은 것을 두고 똥을 공(空)으로 보거나 우주로 보거나 생명체 최후(혹은 사후)의 모습으로 보거나 그것은 독자의 자유일 것이다. 된똥도 물똥도 아닌, 굵고 길게 잘생긴 똥에 대한 은근한 ‘기림’이 유쾌하였다. 변비와 설사의 시대, 똥만 잘 싸도 살맛나는 세상이 아닐 것인가. 시집 『논 위를 달리는 두 대의 그림자 버스』의 제일 마지막 앞의 시가 「똥」이고 마지막 시는 「흙」인데 「흙」은 각주마저 사라지고 없다. 시인이 추구하는 마지막 단계의 밀핵시 혹은 절대시가 바로 한 글자가 시의 제목이자 본문인 시, 각주조차도 없앤 시의 형태이다. 지금까지 시인이 써온 갖가지 시 가운데서도 가장 밀도가 높은, ‘초강력 밀도’의 시가 바로 일자시다. 이번에 내는 시집에는 이런 일자시가 25편이다. 한 글자 제목에 본문도 각주도 없는 완전무결한 일자시는 그럼 아무것도 없는 ‘空’의 시인가. 물론 그렇게 볼 수도 있겠지만 「꿀」은 정말 꿀이고 「칸」은 정말 칸이다. 「신」은 신어야 제가 태어난 바의 소임을 다할 수 있고, 「징」은 지잉― 하고 울리지 않는가. 「얼」은 얼이며 「알」은 알인데 무슨 딴 말이 필요할까. 바로 이런 생각이 낳은 시집 후반부의 25편 시 앞에서 나는 넋을 놓는다. 생각의 절대치를 지향하는 이런 시가 번뜩 떠오른 아이디어의 산물이 아님을 앞에서 말하였다. 최초의 일자일행시 「해」의 발표를 시작 시점으로 잡더라도 장장 17년이다. 그저 신기한 것을 노려서 한 것이라면, 세간의 이목을 끌려고 한 것이라면 별다른 반응이 없던 지난 세월의 어느 지점에서 일자일행시 쓰기는 중단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시인은 징과 끌만으로 바위산을 뚫어 굴을 만드는 석공의 자세로 일자일행시 쓰기 작업에 몰두해왔다. 참으로 외롭고 괴로운 작업이었으리라. 시인은 언젠가 강연장에서 시는 음악성과 회화성과 의미를 다 살리는 ‘멀티 플레잉’ 전술로 쓰되 무엇보다 의미의 예술이어야 한다는 말을 하였다. 언뜻 보아서는 작지만 ‘모끈한’(‘무거운’의 충청도 사투리) 시를 써야 한다는 말도 잊혀지지 않는다. 시인의 작업을 좀 더 이해하기 위해 다른 시를 한 편 보자. 「활」의 각주가 또 한 편의 시다. 활. 만삭이 된 여인의 배처럼 긴장한 시위. 퓽 소리와 함께 운명을 겨눈 화살을 떠난다. 팽팽한 현을 비비는 것도 활이다. 천상의 소리가 붙들려 영혼의 심부에 꽂히면 영혼은 흐느낀다. 공알․음핵․클리토리스. 이 작은 뇌관도 활의 원리다. 기쁨이 너무 고여 더는 견딜 수 없어 터지면 절정의 오뇌가 오로라처럼 너훌거리며 하늘을 간다. 활. 한자는 표의문자라서 弓이라고 쓰지만 우리는 ‘활’이라고 발음하면서 그 발음 속에 갖가지 의미를 담는다. 그런데 시인은 글자 풀이에 멈추지 않고 상상력을 한껏 발휘한다. “천상의 소리가 붙들려 영혼의 심부에 꽂히면 영혼은 흐느낀다”는 것인데, 시인은 여성 성기의 음핵(영어로는 ‘클리트리스’이고 순우리말로는 ‘공알’이다)조차도 활의 원리로 이해하였다. “기쁨이 너무 고여 더는 견딜 수 없어 터지면 절정의 오뇌가 오로라처럼 너훌거리며 하늘을 간다”고 하면서, 바로 그것을 나타낸 낱말이 ‘활’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시의 각주가 각주의 역할을 넘어서 시 바로 그 자체가 된다. 일자일행시 가운데 국어사전에 나오지 않는 낱말이 있어 눈길을 끈다. 「몬」인데 각주를 보자. ‘몬’ 한 글자가 시의 제목이자 내용이다. 글자 하나가 시의 전부다. 따라서 ‘몬’ 한 글자에서 시를 전부 읽어야 한다. 이러한 一字詩를 나는 ‘절대시’라 부르고 있다. ‘몬’은 ‘物’의 뜻을 갖는 古語다. ‘物’은 현대 일본어에서 ‘모노’인데. ‘몬’과 ‘모노’의 語源이 같을 것이라는 것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몬’이 우리말에서 사라진 것도 애석한 일 중의 하나다. 불쌍한 몬. 몬! 역시 詩다. 몬! 마르셀 뒤샹! 고어 ‘몬’은 ‘物’이란 뜻을 가지므로 일본어 ‘모노’와 어원이 같을 것이라고 짐작해본 뒤에 시인은 ‘몬’이 우리말에서 사라진 것을 애석해한다. “몬! 역시 詩다.”라고 한 뒤에 “몬! 마르셀 뒤샹!”이라고 외친 이유가 무엇일까? 뒤샹(Marcel Duchamp)은 1917년에 남성용 소변기를 ‘샘 Foundation’이란 제목으로 뉴욕 독립미술가전에 출품한 괴짜였다. 그의 작품은 논란에 휩싸였고 평단의 집중포화를 받았지만 한참 뒤에 이 소변기는, 아니 「샘」은 하나의 작품으로 인정을 받았다. 작자 자신도 현대 미술계에 지대한 영향을 준 화가이자 조각가이자 설치미술가로 인정을 받았다. 뒤샹이 수십 년 동안 인정을 못 받았던 것처럼 성찬경 시인이 공력을 기울여 쓰고 있는 각주가 붙은 일자일행시 및 각주조차 사라져버린 일자시가 시인의 당대에는 인정받지 못할 수도 있을 것이다. ‘불쌍한 몬! 불쌍한 뒤샹! 불쌍한 일자시!’ 하고 시인은 외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 낱말에 쓰인 받침이 지닌 생명력을 다룬 시도 있다. 우리말 중에서 빛을 나타내는 말에는 영락없이 ‘ㄹ’이 들어 있다. ‘불’이 그렇고 ‘별’이 그렇다. ‘밝다’도 그렇다. 그러고 보니 우리말뿐만 아니라 서양말의 경우도 그렇다. ‘light’가 그렇고 ‘illumination’도 그렇다. 필경 깊은 원리가 숨어 있어서 그렇데 되는 것이며 결코 우연이 아니니라. ―「달」 부분 감각으로 경험할 수 있는 것 중에서 빛보다 더 오묘하고 신비한 것은 없다. 詩의 時空이 빛을 받아 온통 흴 뿐. 밝은 시다. ‘빛’의 받침이 ‘ㅊ’이니 과연 찰떡처럼 차진 생명력이다. 빛과 생명이 무관하지 않다는 뜻이 되겠다. ―「빛」 부분 받침에 어떤 것이 붙느냐에 따라 그 글자의 힘과 뜻, 역할과 품격이 달라진다고 시인은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런 시는 순우리말 낱말의 특징에 대한 연구이면서 그 낱말의 유래와 의미에 대한 연구를 겸한 것으로 보인다. 시의 가장 기본이 되는 질료가 낱말이기에 시인은 그림으로 치면 물감 그 자체의 색깔부터 연구하고자 이런 시를 써나간 것이 아닐까. 성찬경의 일자시는 어찌 보면 시에 대한 시이면서 시 자체를 반성하는 시, 다시 말해 메타시라고 볼 수 있다. 오늘날 이 땅의 몇몇 시인은 문법을 무시하고 신조어를 만들어내는 것을 우리말의 영토를 넓히는 행위라면서 사랑삼아 말하고 있다. 20~30대 일부 시인의 시를 보면 기발한 표현도 보이지만 개인적인 엄살에 지나지 않는 넋두리 같은 시인데 지금 우리 시단에서는 누구의 제재도 받지 않고서 유행하고 있다. 시인은 이런 것들이 너무 안타까워 일자시를 썼던 것이 아닐까. 오늘날 많은 시인이 아닌 게 아니라 운문이 아닌 산문을 무미건조하게, 혹은 비논리적으로 써놓고서 시라고 주장하고 있다. 낱말의 뜻을 모르고 쓴 시어가 넘쳐나고 있고 문장이 안 되는 글이 시의 문맥 안에서 난무하고 있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1920~30년대의 한용운과 정지용과 이상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들은 언어의 연금술사인 동시에 사상과 철학을 넘어선 밀핵시의 선구자들이었다. 문학적 전통을 완전히 무시하고 말이 안 되는 문장을 만들어 시를 죽이고 있는 시인들을 향해 성찬경 시인은 일자시를 통해 준열히 꾸짖는다. 아니, 낱말을 오용하고 말의 질서를 부정함으로써 낱말도 죽이고 시도 죽이는 행위를 하고 있는 시인들을 향해 시의 수류탄을 던진다. 쾅! 정신들 차려라. 시인의 제9시집이 되는 『해』가 종착역이 아니라 새로운 출발을 위한 신호탄이 될 것임을 알기에, 앞으로의 행보가 더욱 궁금해진다. “금을 하나 긋는다. 그 금을 경계로 해서 구별과 관계가 동시에 생긴다. 금에 목숨을 싣는 작업을 하는 이가 예술가다.”(「금」)라고 시인은 말한다. 이런 예술가로 시인이 예로 든 이가 추사와 피카소다. 나도 성찬경 시인처럼 금을 하나 긋고, 금에 목숨을 실어야 하거늘! 성찬경 시인의 연세가 나는 궁금하지 않다. 한창 나이이면서도 늙수그레한 시를 쓰는 시인들이 많은 이 ‘겉늙음’의 시대에 성찬경 시인은 언어의 실험실을 밝혀놓고 밤새워 시를 쓰고 있다. 노익장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세상의 이치를 다 깨달은 듯이 도사연한 시를 쓰면서 그에 걸맞는 대접을 받으려는 대가의 자세를 일찌감치 버리고 日新又日新, 우리말의 값어치를 헤아리면서 언어의 광석을 갈고 닦아 보석으로 만들고자 하는 시인의 작업이 이 시집에서 끝나지 않을 것임을 나는 믿는다. 왜? 그는 등단 이후 지금까지 줄기차게 새로운 영토로 나아간 현재진행형의 시인이었고 앞으로도 그러할 터이니. ----------------------------------   1. [ 가을 바다 ]   달빛 내린 해변에서 당신 업고 한 십리 쯤 걸어 보고 푸른 바다 가고 싶다.   (문장으로 치면 불과 한 문장에 지나지 않고, 각 행이 4 글자로만 되어 있습니다.)     2. [ 영혼 ]   우주에 있다.     3. [ 세월 ]   겨울 산 오르면 여름 바다 그립다.     4. [ 소라 ]   너는 사랑을 담은 그릇이었구나.     5. [ 성(性) ]   성(性) 은 성(城)이다.   (※ 타고난 인간의 성은 흙으로 성을 쌓는 것과 같지요.)     6. [ 이별 ]   너는 눈물이었구나.   (눈물이라는 낱말 대신에 슬픔이라고 바꾸는 것을 어떨른지.....)     7. [ 서시 ]   사랑은 그리움을 가지고 살아간다.     8. [ 인생 ]   내 삶 여름 장마 같구나.   (이번 여름 장마가 우리 모두의 삶 같지 않은가요 ~?!)     9. [ 고향 ]   어머니 얼굴.   (어머니 얼굴이 급작스레 떠오르고, 그 품이 더욱 더 그리워져서 더 깊이 파고 들고 싶어지는군요.......)  
1136    [아침 詩 한수] - 내가 뜯는 이 빵 댓글:  조회:4385  추천:0  2016-03-02
내가 뜯는 이 빵은           (영국) 딜런 토머스 내가 뜯는 이 빵은 한때는 귀리였다. 이 포도주는 이국의 나무에서 그 열매 속에 뛰어들었다. 낮에는 사람이, 밤에는 바람이 곡식을 넘어뜨리고, 포도의 기쁨을 깨뜨렸다. 한때 이 포도주 안에서는 여름의 피가 덩굴을 치장한 살 속으로 파고들었다. 한때 이 빵 속에서는 귀리가 바람결에 즐거웠었다. 사람이 태양을 부수고, 바람을 끌어내렸다. 그대가 뜯는 이 살은, 당신의 혈관에서 혼탁하게 변하는 이 피는 관능의 뿌리와 수액에서 태어난 귀리였고 포도였다 당신은 내 포도주를 마시고, 내 빵을 씹는다.
1135    눈물보다 독한 술은 없다... 있다... 댓글:  조회:4202  추천:0  2016-03-02
선술집에서 강만수 창 밖으로 늦도록 비가 내리고 있다. 양철 원탁을 가운데 두고 시큼한 홍어회 한 접시를 앞에 놓은 채 날 숨을 들이키듯 잔을 비우면 식탁 밑으로 빈 소주병과 프라스틱 막걸리통은 바닥에 넘어진채로 굴러 까칠한 얼굴과 무거운 침묵. 땀방울에 젖은 몸은 슬픔을 부비며 고개 숙이고 낯설은 세상살이에 하! 많이 아파 입안 가득 담은 욕설처럼 어깨를 들먹이면 열에 들떠 더러는 자리를 뜨고, 몇몇 사람들은 남아 훌쩍이듯 속 맘을 나눈다. 굶주린 들꽃같이 떼지어 몰려들던 오랜 욕망과 기억할 수 없는 상처. 부담없이, 훌훌 일어나 휘적휘적 어디 어디에 다 썩어 이제 다시 움직일 수 없게 된 난잡한 변명처럼 푸른 물, 흙 묻은 얼굴. 눈과 귀를 씻으며 찾아 헤매었던 아! 그대, 이제는 따뜻한 집을 짓고 싶다.   숭어회 한 접시 안도현 눈이 오면, 애인 없이도 싸드락싸드락 걸어갔다 오고 싶은 곳 눈발이 어깨를 치다가 등짝을 두드릴 때 오래된 책표지 같은 群山, 거기 어두운 도선장 부근 눈보라 속에 발갛게 몸 달군 포장마차 한 마리 그 더운 몸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거라 갑자기, 내 안경은 흐려지겠지만 마음은 백열 전구처럼 환하게 눈을 뜰 테니까 세상은 혁명을 해도 나는 찬 소주 한 병에다 숭어회 한 접시를 주문하는 거라 밤바다가, 뒤척이며, 자꾸 내 옆에 앉고 싶어하면 나는 그날 밤바다의 애인이 될 수도 있을 거라 이미 양쪽 볼이 불콰해진 바다야, 너도 한 잔 할래? 너도 나처럼 좀 빈둥거리고 싶은 게로구나 강도 바다도 경계가 없어지는 밤 속수무책, 밀물이 내 옆구리를 적실 때 왜 혼자 왔냐고, 조근조근 따지듯이 숭어회를 썰며 말을 걸어오는 주인아줌마, 그 굵고 붉은 손목을 오래 물끄러미 바라보는 거라 나 혼자 오뎅 국물 속 무처럼 뜨거워져 수백 번 엎치락뒤치락 뒤집혀 보는 거라 소주 최영철 나는 어느새 이슬처럼 차고 뜨거운 쟝르에 있다. 소주는 차고 뜨거운 것만 아니다 격정의 시간을 건너온 고요한 이력이 있다. 지금 웅덩이 안으로 조금씩 흘러들어가 차고 뜨거운 것을 감싼다. 어디 불같은 바람만으로 되는 것이냐고 함부로 내지를 토악질로 여기가지 보려고 차가운 것을 버리고, 뜨거운 것을 버렸다. 물방울 하나 남아 속살 환희 비친다. 소주는 차고, 뜨거운 것만은 아니다. 불순의 시간을 견딘 폐허같은 주름이 있다. 오래 곰삭아 쉽게 불그레진 청춘이 남은 저를 다 마셔달라고 기다린다. 아름다운 폐인 한명희 미쳐도 어쩜 이렇게 지저분하게 미쳤을까 소주물에 넣고 헹구어 주고 싶다 쓸쓸한 눈빛 하나만 남기고 모두 소독해 주고 싶다 그래도 남아 있을 네 눈물기 귤 껍데기 같은 네 곁에 누워 살보시라도 해 줄까 해는 지는데 집에 가기가 싫어...... 오늘의 병 박정만 어제도 세 병 반의 술을 비웠다. 비우고 비워도 마음은 비워지지 않았다 병만 깊어 가고 늘어 가는 병을 바라보며 깊어 가는 병을 생각했다 봄꿈처럼 허망한 일에 꿈을 걸고 다시 봄이 오리라고 기다리는 일처럼 부질없는 일은 없다고 생각했다 일초에 천번도 넘는 죽음을 그리워하며, 그리워하며, 그리워하며, 그래도 기다릴 것이 남아 있는 법이라고 퀭한 눈에 힘을 주고 술잔을 기울이면서 백번도 넘게 길을 떠났다. 길은 실타래처럼 수없이 헝클어지고 그래도 풀리지 않는 실마리를 찾아 오늘도 세 병 반의 술을 기울였다. 기울이면 기울일수록 내가 먼저 기울어지고 석 달째 세 병 반씩 곡기는 끊고 곡기를 끊은 것이 아니라 위장이 반란을 일으킨다 나를 일으키기 위하여 나를 살해하는 것이라고 다짐하면서 술기운으로 사랑과 시를 생각하는 것도 좆이거나 물이라고 생각하면서 하나씩 사랑과 시를 버리기 시작했다 아이들도 아내도 친구도 버리기 시작했다 얼마 남지 않은 목숨도 버리기 시작했다 모든 것을 다 버리기 모든 것을 다 버리기..... 포장마차 이건청 소주에 젖은 자정, 꽃도 잎도 없이 앙상한 장미밭 철조망 길로 푸슬 푸슬 첫눈이 내렸다. 毒氣에 잡힌 시인아, 미친 시인아, 잠도 자렴, 꿈도 꾸렴 흩날리는 말, 말, 말들이 환청으로 스치고 있었다. 아, 첫눈이었던가 포장마차 되어 웅크린 날들, 다져진 푸른 파와, 붉은 고추와 연탄 불과 석쇠와, 석쇠 위에서 연기를 피워올리며 익던 딜런 토머스와 스티븐 스펜더 신구문화사 판 세계전후문제시집 르네 샤아르…… 그런 날들은 지쳐 시들어 버렸거나 너무 먼 곳에 기가 꺾여 서 있다. 그리고 그리로 고속화 도로가 났다. 그 때 그 포장마차들의 자리로 정체된 차량들의 행렬이 늘어서 깜빡이를 깜빡이고 있고 찾아도 찾아도 흔적조차 없다. 2차던가 3차였던가 상의를 벗어든 채 귀가하던 포장마차 같은 청년 하나, 거기 살며 남편이며 애비였던 사내 하나, 먼 곳에 웅크리고 있다. 다만, 쓰레기 수거를 위해 내놓은 소주병과, 일회용 컵과 볼펜, 크레디트 카드 사용 전표와 쉰네 살 된 시를 담은 비닐봉투들만 수상하게, 의심스럽게 쌓여 있다.   잔없이 건네지는 술 류시화 세상의 어떤 술에도 나는 더 이상 취하지 않는다 당신이 부어 준 그 술에 나는 이미 취해 있기에 취객 이윤택   난 말이야. 이렇게 술을 마시면서 백 살까지 살고 싶었어 술에 반쯤 절어서 기분 좋게 죽고 싶었어 봄에는 아지랑이 속에서 나도 아지랑이 되어 흥얼거리고 여름에는 뜨거운 자갈돌에 알몸으로 퍼질고 누워 독한 중국 술을 빨고 가을에는 단풍을 안주로 삼고 겨울에는 메주로 익고 싶었어 내 관절 마디마디 술이 가득 고여서 흐르는 시간 속에 형체도 없이 스며들어 가는 액체로 영혼 저편으로 흘러가고 싶었어 그런데, 틀렸어, 다 틀렸다 이 세상이 날 술 마시게 하지 못했어 십 년을 긴장하고 살다 보니까 아무리 술을 마셔도 취하지 않아 두 눈 똑바로 뜨고 살아야 한다 하길래 그렇게 십년을 보내고 나니 내 관절 마디마디가 굳어져서 당취 술을 받지 않아 그래서 난 지금 복날 털 빠진 개로 이렇게 드러누웠어 소주가 되려고 추억에 대한 경멸 기형도 손님이 돌아가자 그는 마침내 혼자가 되었다 어슴푸레한 겨울 저녁, 집 밖을 찬바람이 떠다닌다 유리창의 얼음을 뜯어내다 말고, 사내는 주저앉는다 아아, 오늘은 유쾌한 하루였다, 자신의 나지막한 탄식에 사내는 걷잡을 수 없이 불쾌해진다, 저 성가신 고양이 그는 불을 켜기 위해 방안을 가로질러야 한다 나무토막 같은 팔을 쳐들면서 사내는, 방이 너무 크다 왜냐하면, 하고 중얼거린다, 나에게도 추억거리는 많다 아무도 내가 살아온 내용에 간섭하면 안 된다 몇 장의 사진을 들여다보던 사내가 한숨을 쉰다 이건 여인숙과 다를 바가 없구나, 모자라도 뒤집어쓸까 어쩌다가 이봐, 책임질 밤과 대낮들이 아직 얼마인가 사내는 머리를 끄덕인다, 가스 레인지는 차갑게 식어 있다 그렇다, 이런 밤은 저 게으른 사내에게 너무 가혹하다 내가 차라리 늙은이였다면! 그는 사진첩을 내동댕이친다 추억은 이상하게 중단된다, 그의 커다란 슬리퍼가 벗겨진다 손아귀에서 몸부림치는 작은 고양이, 날카로운 이빨 사이로 독한 술을 쏟아붓는, 저 헐떡이는, 사내 포도주 한용운   가을 바람과 아침 볕에 마치맞게 익은 향기로운 포도를 따서 술을 빚었습니다 그 술 고이는 향기는 가을 하늘을 물들입니다 님이여 그 술을 연잎잔에 가득히 부어서 님에게 드리겠습니다 님이여 떨리는 손을 거쳐서 타오르는 입술을 축이셔요 님이여 그 술은 한 밤을 지나면 눈물이 됩니다 아아 한 밤을 지나면 포도주가 눈물이 되지마는 또 한 밤을 지나면 나의 눈물이 다른 포도주가 됩니다 오오 님이여  
1134    詩의 천하루밤 댓글:  조회:4359  추천:0  2016-03-02
** 시는 숨결이며 모든 지식의 보다 훌륭한 정수이다. 그것은 모든 과학의 표정 속에 있는 감동된 표현이다.(영국의 시인, 워즈워드) ** 시인은 세계의 마음이다.(독일의 시인, 아이헨도르프) ** 시는 인정받지 못한 세계의 입법자다. (영국의 시인, 셀리) ** 요즈음의 시인들은 잉크에다 물을 많이 섞는다.(독일의 시인, 괴테) ** 시는 역사보다 더 철학적이고 근엄하며 더 중요한 무엇이다. 역사가 말해 주는 것은 독특한 것들이지만, 시가 말해 주는 것은 보편적인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 ** 잘 선택된 시선집은 보다 흔한 정신 질환의 약을 만드는 완전한 약국이며, 치료에서와 같이 예방에도 사용될 수 있다.(영국의 시인, R.그레이브스) ** 시인은 어둠 속에 앉아 외로움을 달래기 위하여 아름다운 소리로 노래부르는 나이팅게일이다. (영국의 시인, 셀리) ** 시란 지상에 서식하면서 공중을 날고 싶어하는 수서 동물의 일기다.(미국의 시인, 샌드버그) ** 시인은 있지만 좋은 시는 없다.( 독일의 시인, 하이네) ** 내게 있어서 시는 목적이 아니라 정열이다. ( 미국의 시인, E.A. 포우) ** 시는 모든 예술의 장녀이며 대부분의 예술의 어버이다.(영국의 극작가, W.콩그리브) ** 자유로운 시인의 가슴은 방랑 생활을 좋아한다.(독일의 시인, F. 실레겔) ** 시의 목적은 진리와 도덕을 노래하는 것이 아니다. 시는 단지 시를 위한 표현이다. ( 프랑스의 시인, 보들레르) ** 시는 마치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모래와 같은 것이다.( 독일의 시인, 릴케) ** 문명이 진보함에 따라 시는 거의 필연적으로 쇠퇴한다.( 영국의 역사가, 머콜리) ** 운문 없는 시구는 혼 없는 육체이다.(영국의 작가, 스위프트) ** 진짜 비극 시인은 동시에 또 진짜 희극 작가이다.(그리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 ** 이 굶주린 세대에 시인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독일의 시인, 휠덜린) ** 모든 시는 문장이다. 그것을 판독해야 한다.(독일의 시인, 콕토) ** 나의 시는 단 한 가지 이유 때문에 나의 도움이 된다. 즉, 그것은 어둠 속에서 어떤 빛으로 달했다는 나 자신의 투쟁의 기록이다.(미국의 시인, 딜런 토머스) ** 시란 감정의 해방이 아니라 감정으로부터의 탈출이며, 인격의 표현이 아니라 인격으로부터의 탈출이다.( 영국의 시인, T.S.엘리어트) ** 시인이기 전에 나는 인간이다. 사람은 누구나 한 가지 사명을 갖고 있다. ( 프랑스의 작가, 로맹롤랑)  
1133    詩作初心 - 독자 없는 시대를 독자 있는 시대로... 댓글:  조회:4672  추천:0  2016-03-02
독자 없는 시대에 ‘불통’이 미덕인가 —우리 시의 오늘과 내일 강 인 한 1. 시의 바다에 입만 떠있는 진풍경 어언간 우리 시가 오늘 이 지경에 이르렀다. 민물에서 자란 장어인지 바닷물에서 자란 장어인지 아무튼 그렇게 모호한 지경에서 자랐고 바다와 민물을 넘나든다는 풍천장어는 맛이나 좋지만 시인이냐 독자냐를 구분하기 모호한 오늘의 우리 시는 슬프고 한심할 따름이다. 시인 이만 명의 시대라는 풍문이 떠돈다. 하지만 독자는 다 어디 가고 독자 없는 시인만 남았는가. 눈과 귀가 사라지고 우리 현대시의 바다에는 온통 입만 무수히 떠있는 진풍경이 펼쳐지고 있다. 서점의 시집 코너에 꽂힌 창비시선, 문학과지성 시인선, 문학동네 시인선, 민음의 시집들 서가엔 책등의 시집 제목, 시인 이름을 꼼꼼히 살펴봐야 한다. 책 표지를 드러내어 좌판에 진열한 곳에 몇 종의 시집들이 있다. 아마도 독자들이 비교적 많이 찾는 시집들인가 보다. 시와 그림을 곁들인 도종환 시화선집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1판 28쇄 2판 9쇄(2015.1.16), 이해인 시집 『필 때도 질 때도 동백꽃처럼』1판 8쇄, 그리고 필사해야 할 사랑시라는 게 요즘 유행하는 대세의 시집인 듯. 김용택의 『꼭 한번 필사하고 싶은 시 101편』6쇄. 그런데 필사를 권하는 이 시집들을 보면 왼쪽은 인쇄된 시, 오른쪽은 백지 페이지로 독자가 왼쪽의 시를 필사하도록 된 책이다. 이정하, 용혜원, 고두현의 필사용 시집들이 그런 종류이다. 박준 시집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는 12쇄. 신현림 편저 『딸아 외로울 때는 시를 읽으렴』은 51쇄, 정호승 시선집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초판 12쇄 개정판 17쇄 신개정판 4쇄(2015. 5. 18), 그런 가운데 결코 말랑말랑하거나 닭살 돋는 시가 아닌데 기형도 시집 『입 속의 검은 잎』은 초판 24쇄 재판 55쇄(2015. 8. 5). 짧은 시편 185편을 묶은 고은 시집 『순간의 꽃』이 28쇄, 류시화 잠언시집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은 무려 111쇄(2015. 7. 24)다. 요컨대 독자들이 즐겨 찾는 시라는 게 입속에 넣고 씹을 만한 껌 같은 종류의 잠언시나 사랑시, 그리고 비교적 널리 알려진 시들이 많았고 기형도 시집은 예외처럼 보인다. 아마도 문학 지망생들이 꾸준히 찾는 시집인 듯한데 의외로 신예 박준의 시집이 도종환, 김용택, 정호승과 함께 대중들의 눈길을 끄는 건 부드러운 어조의 쉽게 읽히는 소박함 때문일 것이다. 그와 함께 황인찬의 『희지의 세계』가 이십일 만에 2쇄를 내놓고 있는 건 약간 기이한 현상으로 보인다. 요즘 유행의 한 가지 주목할 만한 대목은 필사를 유도함으로써 나도 시인이라는 착각을 부추긴다는 점일 듯하다. 단순히 시 쓰는 사람이 시인이라는 폭넓은 개념으로 볼 때 시인이 이만 명, 삼만 명이면 어떠랴. 다만 독자 없는 시인들이라는 점이 서글플 뿐. 서점 좌판에 깔린 저 시집들이 호사를 누리는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일반 시집들은 십여 년 전 초판 1쇄를 1천부 찍었다는데 요즘은 기껏 5백부를 찍는다고 한다. 시집은 그렇다 치고 문제는 누가 시를 읽는가이다. 월간 시 전문지나 계간지의 시를 읽는 순수 독자는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작품을 발표한 시인 자신들이 읽거나, 자기가 아는 주변 시인의 작품만 대충 훑어보면 그만이다. 시 쓰는 사람은 2만 명 시대인데 시 읽는 독자는 5백 명쯤. 그러므로 요즘 발표되는 시를 거의 아무도 읽지 않고, 그저 자기의 시만 쓰는 시인이 대다수라고 생각하면 과히 틀리지 않을 것이다. 한때 시집의 판매 부수가 30만을 넘는 베스트셀러가 나오던 시절, 그때의 시 독자층과 지금을 비교한다면 극과 극의 차이가 실감된다. 예전의 시 독자를 형성하던 보편적인 교양인들은 오늘 몽땅 책이 아니라 스마트폰 등 영상매체에 빠져 있다. 오늘의 시 독자 계층을 파고들면 시 전문 독자(시력 20년 이상의 시인들)를 제외하고는 미미할 정도이다. 신춘문예의 계절도 한참 지난 올해 하반기의 신인문학상 현황을 보면 의외로 시인 지망생의 탄탄한 계층이 형성돼 있음을 느낄 수 있다. 5월말에 응모를 마감한 『창작과 비평』신인상 시 부문에 751명, 6월 20일에 마감한『문학동네』에 748명, 8월말 마감『중앙일보』신인문학상에는 710명이 각각 응모하고 있다. 그렇다. 실은 7백 명을 상회하는 이 숫자가 우리나라 독서계의 진정한 시 독자일 것이다. 이들이 예의 주시하는 기성시인들의 작품은 어떤 것이겠는가. 당연히 5년 미만의 앞서 등단한 신인들의 작품 또는 요즘 문제작으로 회자되는 시들의 방향에 오래 시선이 머물 것이다. 짐작건대 다음과 같은 시들이 지망생들의 롤 모델이 되었으리라. 비밀을 하나 말해줄게 새를 쪼개면 흉터가 된다 오래 전 하나의 흉터가 폭발했을 때 너는 흘러나왔다 비밀을 감추기 위해 눌러쓴 모자처럼 얼굴의 한 쪽이 흘러내리면 너의 흉터를 보여줘 얼굴을 뒤집어서 모자로 씌워줄게 모자를 쪼개면 구석과 구석으로 분열한다 구석을 뒤집어쓰면 불 꺼진 예배당 들어가면 자꾸 속죄할 일이 생겼다 새를 쪼개고 나오면 멀리서, 빛 —여성민, 「새와 모자」뒷부분 이 털실은 부드럽다. 이 폭설은 따뜻하다. 이 털실은 누가 던졌기에 아무도 사용하지 않습니다. 이 털실로 뭐 할까 물고기는 물고기를 멈추지 않고 돌아다닙니다. 끌고가고 끌려가고 이 털실은 돌아다닙니다. 앞으로 갔다가 뒤로 갑니다. 이 선반 위에는 아무것도 올려놓지 않습니다. 이 폭설은 소원을 이룬다. 폭설 속에는 아무것도 없다. 털실 안에는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다. 털실은 앞으로 갔다가 뒤로 갑니다. 아무 형체도 짓지 않습니다. 이 털실은 집어 올릴 수 없습니다. 이 볕은 풀린다. 이 털실은 풀린다. 끝없이 풀리기만 한다. 이 털실은 화해하지 않는다. 그 속으로 들어가지는 않고 털실 뭉치를 달고 다닌다. —이수명, 「털실 따라 하기」전문 시를 전체적으로 보지 못하고 형식에만 집착하는 버릇이 있는 신인 지망생들의 작품을 여기에서 직접 들춰보긴 어려우므로 4천여 편의 예심을 마친『중앙일보』기사(2015.9.4)를 읽어본다. 손택수 씨는 대뜸 “태양이 너무 눈부셔 그 너머를 볼 수 없는 상태와 같은 작품이 많았다”고 말했다. 이미지를 촘촘하게 배치해 화려한 느낌을 주지만 그런 경향이 지나쳐 정작 읽고 나면 어떤 내용이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 작품들을 그렇게 평한 것이다. 강동호 씨는 세련된 스타일이 대세로 느껴질 만큼 내용보다 기량이 승한 작품이 흔하다는 설명이다. 강 씨는 “특히 40대 이상 나이 든 사람들의 응모작 가운데도 모던한 느낌의 작품이 많았다.”고 했다. 대학 등에서 시를 가르치는 시 선생들이 주로 젊은 느낌의 모던한 시를 가르친 결과다. 그래서 위기에 몰린 건 전통 서정시다. 소수, 타자처럼 느껴진다고 했다. 강 씨는 “형식적 새로움을 추구하는 데서 오는 피로감은 없는지 반성이 필요하다.”고 진단했다. 2. 난해한 ‘불통’은 시의 미덕인가 나에겐 계절마다 만나는 친구가 몇 있다. 지난달 우리나라 카피라이터 원조로 손꼽히는 그 친구와 나눈 이야기. 내가 전문 시 잡지로 『현대시학』『현대시』가 있다고 말했더니 그는 대뜸 "시인들이 '현대'를 좋아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나? 옛날에도 『현대문학』이 있었지만." 하고 묻는다. 친구에게도 나에게도 『현대문학』은 진작 사라진 문예지였다. 양모 씨가 발행인 겸 편집인이 된 이후 ‘전통과 권위’를 자랑하는 그 보수적인 종합 문예지의 존재감은 사라져버린 지 오래다. 그래 맞다. 없어진 잡지 중에 『현대-』를 붙인『현대시세계』『현대시사상』도 있었다. 현대…. 모더니즘, 모더니티, 모던. 시를 쓰는 입장에서 살아가는 당대(현대)에 관심을 두지 않으면 금세 일선에서 뒤처질 거라는 무의식적인 강박증이 저 『현대-』의 제호에서 느껴진다. 지금도 시와 우호적이긴 하지만 요즘 시인들의 시가 지나치게 ‘모던’해서 아예 냉정하게 등 돌린 저 카피라이터의 따끔한 지적은 새겨볼 만하다. 전통 서정시가 위기에 몰렸다는 문화부 기자의 말이 괜한 소리가 아니다. 어떤 평론가는 한 번 읽어서 금방 이해되는 시는 더 이상 읽을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고, 마치 쉽게 이해되는 시를 쓰는 시인은 저급한 시를 쓰는 양 매도하려 들기도 한다. 그러니까 시에선 난해한 ‘불통’(조연호,「우주 에세이」같은 경우)이 지고지선의 미덕이고, 쉽게 이해되는 ‘소통’(고영민, 「송편」같은 경우)은 최고의 악덕이란 말인가. 엄마라는 단어는 문어적입니다. 엄마로 만든 개를 바다에 짖게 하고 싶습니다. 시장에선 한 푼이라도 깎으려고 사람인 걸 포기하기도 합니다. 엄마가 낮술에 취해서 난간이 죄다 위험합니다. 거기 머무는 구름 종류가 많지 않아서도 슬픕니다. 소년소녀를 모두 말과 마부에게 맡겨두면 공전주기는 자전주기 아래 반쯤 가라앉습니다. 하루의 절반쯤에서 1년이 지납니다. 약은 모두 섹스 후의 슬픈 알갱이입니다. 숲은 숲에 대항하지 않는 사람에게 뱉은 침이기도 합니다. —조연호, 「우주 에세이」부분 올해 한가위엔 아버지가 없고 아버지가 빚은 기름한 송편도 이 세상에 없고 쪄내면 푸른 솔잎이 붙어 있던 뜨끈한 반달 송편 하나 선산엔 아버지를 넣고 빚은 커다란 흙 송편 하나 그리고 나에게는 예쁜 딸이 둘 —고영민, 「송편」부분 일선, 곧 아방가르드에서 뒤처지지 않고자 하는 일부 신인들의 몸부림은 정말 눈 뜨고 볼 수 없을 지경이다. 빽빽한 산문시로 쓰는 건 기본이고 문체도 반말과 경어를 뒤섞어서 혼란을 유도하며 활자의 글씨도 비스듬한 사체, 때로는 진하고 굵은 글씨, 더 나아가 글자 허리에 삭제 표시의 줄까지 두르기도 한다. 이러한 시각적 형태뿐만 아니라 내용면에서도 SF 콩트라고 하면 좋을 산문(김현의 시)이거나, 연극의 한 장면 같은 짤막한 서사적 산문(박상수의 시)을 시라고 모아서 시집을 낸 경우도 본다. 아무리 전위적인 현대라고 해도 무조건 분량이 짧은 글, 상상력으로 빚은 단편적인 허구에 모두 ‘시’라는 헐값의 딱지를 붙여줌이 과연 온당한지 의문이다. 3. 산문은 산문일 뿐, 산문시가 아니다 오래 전 유안진 시인이 발표한 수필 「지란지교를 꿈꾸며」를 적당히 문장마다 토막 내어 자유시 형태로 늘어놓고 그걸 시라고 우기는 한심한 이들이 있음을 인터넷에서 많이 본다. 저녁을 먹고 나면 허물없이 찾아가 차 한잔을 마시고 싶다고 말할 수 있는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 입은 옷을 갈아입지 않고 김치 냄새가 좀 나더라도 흉보지 않을 친구가 우리 집 가까이에 살았으면 좋겠다. (중략) 그러다가 어느 날이 홀연히 오더라도 축복처럼, 웨딩드레스처럼, 수의를 입게 되리라. 같은 날 또는 다른 날이라도… 세월이 흐르거든 묻힌 자리에서 더 고운 품종의 지란이 돋아 피어, 맑고 높은 향기로 다시 만나지리라. —유안진, 수필「지란지교를 꿈꾸며」를 자유시처럼 변형시킨 예 산문을 이와 같이 자유시 형태로 변형시킨다고 해서 산문의 본질이 사라져버리고 하루아침에 시가 되는 건 아니다. 「지란지교를 꿈꾸며」가 유안진 시인의 대표시가 아니었느냐고 반문하는 신진 시인도 있다. 요즘 저런 식의 산문을 시랍시고 발표하는 시인이 적지 않다. 이렇게 산문을 자유시 형태로 눈속임하려 드는 것을 일컬어 ‘장르의 경계를 허무는 가상한 노력’이라고 상찬해야 할까. 시와 산문은 엄연히 다른 장르이다. 엄격한 기준으로 말한다면 올해의 미당문학상을 수상한 최정례의「개천은 용의 홈타운」은 치기만만한 산문일 뿐이다. 아무리 높은 거액의 상금을 받을지라도 그게 내 눈에는 기지와 해학을 앞세운 산문에 지나지 않아 보인다. 행여 저러한 산문을 태산백두의 산문시로 떠받들어 공부하는 지망생들이 있다면 정말 잘하는 짓이라고 문예창작과 교수 시인들은 칭찬해줄 수 있겠는가. 요즘 들어 시의 긴장감이나 서정의 풀기가 마른 이성복이 화장실에서 십 년도 넘은 기념 타월을 보고 쓴 시「소멸에 대하여 1」은 행의 구분을 없애고 마침표를 문장 끝마다 찍어서 죽 붙여놓아 보라. 다음에서 보듯 그것은 시라기보다 차라리 산문에 더 가까운 글이다. 거실 화장실 수건은 늘 아내가 갈아두는데 그중에는 근래 직장에서 받은 입생로랑이나 란세티 같은 외국물 먹은 것들도 있지만 1983 년 상주구계서원 중수 기념수건이나 (그때 아버지는 도포에 유건 쓰고 가셨을 거다.) 1987년 강서구 청소년위원회 기념수건도 있다(당시 장인어른은 강서구청 총무국장이었다.). 근래 받은 수건들이야 올이 도톰하고 기품 있는 태깔도 여전하지만, 씨실과 날실만 남은 예전 수건들은 오래 빨아 입은 내의처럼 속이 비친다. 하지만 수건! 그거 정말 무시 못할 것이더라. 1999년, 당뇨에 고혈압으로 장인어른 일 년을 못 끌다 돌아가시고, 2005년 우리 아버지도 골절상으로 삭아 가시다가 입안이 피투성이가 되어 돌아가셨어도, 그분들이 받아온 낡은 수건들은 앞으로도 몇 년이나 세면대 거울 옆에 내걸릴 것이고, 언젠가 우리 세상 떠난 다음날 냄새나는 이부자리와 속옷가지랑 둘둘 말아 쓰레기장 헌옷함에 뭉쳐 넣을 것이니 수건 그거 맨 정신으로는 무시 못할 것이더라. 어느 날 아침 변기에 앉아 바라보면, 억지로 찢어발기거나 불태우지 않으면 사라지지도 않을 옛날 수건 하나가 이제나 저제나 우리 숨 끊어질 날을 지켜보기 위해 저러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성복, 시「소멸에 대하여 1」을 산문 형태로 변형시킨 예 최정례의 「개천은 용의 홈타운」은 산문치고는 센스가 있는 산문이라 할 것이다. 산문시라면 그보다는 김산의 「겨울의 할례」가 빼어난 산문시로서 좋은 본보기가 될 것이다. 그리고 이준규의 다음 작품을 통하여 산문시 좋아하는 시인들은 다시 한 번 산문시가 어떠해야 할 것인지 근본을 짚어보는 게 좋겠다. 복도는 복도다, 복도에는 어떤 것들이 흐른다, 나는 복도에서 무언가 망설였다, 창을 열면서, 너를 사랑했다, 창을 닫으면서, 너를 사랑했다, 복도는 망설이는 곳이다, 우주처럼, 복도는 우선 복도다, 복도는 하나의 지평을 가지며, 복도는 두 개의 지평을 가지며, 복도는 세 개의 지평을 가진다, 복도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 복도에 신문이 떨어질 때, 복도에 아이들이 뛰어갈 때, 복도에 세탁부가 지나갈 때, 복도에 손님이 지나갈 때, 복도는 여전히 복도다, 복도는 우울하다, 복도는 조금 휘어 있다, 복도는 정확한 직선이 아니다, 복도는 조금 미쳐 있다, 조금 미치고 있는 내가 바라보는 복도는 조금 미친 복도다, 복도는 깨끗하지 않다, 복도에서 벗어나야 한다, 복도에서 벗어나 문을 열고 마루로 진입해야 한다, 나는 복도에 문득 서 있었다, 복도의 다른 끝에 당신이 있었다, 내가 있었다, 복도는 너를 사랑한다, 사랑하는 복도, 우리의 시. —이준규, 「복도」부분 ========================================================================== 280. 세탁소에서 / 이상국 세탁소에서 이 상 국 아끼던 골덴 재킷의 소매가 너무 닳았다 털이 빠지고 오래되긴 했으나 사실은 내가 왼손잡이어서 그렇다 다른 데는 다 멀쩡한데 하며 세탁소 여자는 뜨악하게 수선한들 별로 돈이 안된다는 표정이다 왼손이 불편하긴 하지만 사실 나는 내가 왼손잡이여서 누구에게 해를 끼친 적이 없다 다만 노무현 전 대통령이 부엉이바위에서 뛰어내렸을 때 불쌍해서 눈이 붓도록 울거나 언젠가 평양 만경대 갔다가 흰 저고리 검정 치마 안내원에게 악수를 청하고는 누가 봤을까봐 아직도 꺼림칙해하는 정도다 그러나 요즘은 자식이 취직을 하거나 군대에 가게 되면 그 애비가 어느 손을 주로 쓰는지도 알아본다고 해서 나는 할 수 없이 좌우를 다 잘라달라고 했다 소매가 불구처럼 댕공했지만 아무도 눈여겨볼 것 같지는 않았다 이상국 시집 중에서 ----------------------------------------------------------- 281. 채석강에서 / 박명용 채석강에서 박 명 용 四書三經이 차곡차곡 쌓여 있다 가까이 다가간다 곰팡이 냄새가 푸른 바다처럼 싱싱하다 조심스럽게 다가서자 ‘위험하니 접근하지 마시오’ 팻말이 앞을 가로막는다 아, 그렇지 내 어릴 적 사랑방 높이 쌓인 글귀 단 한 줄도 풀지 못하고 돌아서다가 와락 무너뜨려 출입금지 당한 일 지금까지 해제된 적 없지 않은가 이끼 덮어쓴 까마득한 절벽의 古書 앞에서 고개도 들지 못하고 부끄럽게 돌아서고 만 채석강 박 명 용 시집 중에서
1132    詩作初心 - 詩를 읽는다는것은... 댓글:  조회:4657  추천:0  2016-03-01
결핍을 넘어선 충만 - 고은 신작시 다섯 편- 김응교 (시인, 숙명여대 교수) 시를 읽는다는 것은 즐거운 충만(充滿)이다. 한국전쟁의 비극을 거쳐 1958년 첫시「폐결핵」로 대표되는 초기시에서 시인 고은은 ‘나’에 대한 허무주의적 존재 탐구를 보여준다. 전태일 사건을 만나고 발화되는 1970년대 중기시에는 『조국의 별』(1983)으로 대표되는 현실참여시를 보여준다. 많은 시인들이 ‘현실과 지금’을 외면하고 자연과 과거로 휘귀하던 2000년대에, 그는 현실과 지금을 직시하면서도 ‘우주적 상상력’을 보여주었다(金應敎,「詩魂無限のエネルギー、高銀」『韓國現代詩の魅惑』、新幹社、2007). 이제 신작시 다섯 편을 설레며 대한다. 고은 시에는 어떤 매혹이 있을까? 봄비에 눈썹 젖는데 아흔 찰나가 한 생각이라면 한 순간이 스무 생각 아니랴 어쩌나 어쩌나 옷깃 여며 누구에게는 살다가 말 세상이고 누구에게는 다 살고 갈 세상인데 어쩌나 늦가을비에 그대 어스름 가슴 젖는데 - 「옷깃」전문 더이상 우연한 만남이란 없다. 계획하며 만나고 계산하며 헤어진다. 우리가 옷깃 여미며 살짝 느끼던 우연한 순간은 사라졌다. 이 시에서 “아흔 찰나가 한 생각이라면 / 한 순간이 스무 생각”이라니, 달아나기만 하는 우연의 시간을 잡을 수 없어 시인은 “어쩌나 /어쩌나” 하며 한탄한다. 그 순간들은 누구는 “살다가 말” 만족하지 못할 삶을 산다. 또 누구는 “다 살고 갈” 만족스러운 삶을 영위한다. 누구나 이 세상 ‘너머’에 죽음으로 향한다. 시인은 “늦가을비에 그대 어스름 가슴 젖는데”라고 하지만, “젖는데”라고 쓰는 그 찰라는 이미 과거가 되어 버린다. 무섭게 흘러가는 시간 앞에 시인은 어쩌나, 어쩌나, 한탄한다. 고은 시인도, 어쩌나, 하며 평생 그의 몽상을 스쳐가는 시를 잡지 못해 안타까울 것이다. 늘 시에 잠겨 있는 그의 목울대에는 막 넘치려는 이야기들이 있다. ‘울 밑에 선 봉선화야’를 애닲게 부르는 처녀가 있었지요 1949년 여름 끄트머리던가 가을 끄트머리던가 1등품 가마니 잘 짜며 가마니 바디 오르내릴 때마다 긴 가마니 바늘 잘도 질러 드리며 흰구름 뒤인듯 보슬비인듯 서럽고 그리운 노래 부르는 건너마을 새터 처녀가 있었지요 - 「울타리」에서 산다는 것, 인생을 산다는 것은 어떤 불쾌한 긴장들과 부딪치는 것이다. 목이 마를 수도 있고, 기분 나쁠 수도 이고, 어떤 불쾌한 긴장에 부딪치는 것이다. 게다가 풍찬노숙의 한국현대사에서 “죽고 / 태어나며” 산다는 것은 뭘까? 고은의 탐색은 여기서 시작된다. 여기서 고은은 “괜스레 깨달은 바” 우리라는 것은 “우리 밥상”, 우리 방이라는 것은 “울타리를 뜻”한다 한다. 두 편의 시는 모두 ‘관계’에 대한 시다. 우리는 끊임없이 타자와 ‘관계’를 맺지만 무한한 결핍을 겪는다. 그 결핍을 “생은 젖먹이적부터 진작 쓰디쓰구료”(「울타리」)라고 시인은 쓴다. 이쯤에서 우리는 미세한 공감을 공유한다. 고은 신작시에는 결핍의 나라인 영원한 자궁(子宮)으로 향하는 숲길이 숨어있다. 일단 그 안으로 들어가면 무한(無限) 매혹에 빠진다. 여기에 삶과 시에 대한 관조가 있다. 더 읽어 보자. 저 말인가요 저는 저는 방금 다 먹고 난 밥이야요 듬직히 밥통이야요 조곤조곤히 내려오는 동안 구리는 똥이야요 이 경황에도 똥창에 달라붙는 숙변 같은 오사육시럴 시 두엇이야요 내일 아침에나 그것 두엇 종의 하나 배고프려고 배고프다 배부르려고 몇만 년 역대의 내일에도 싸질러야 할 서정시야요 - 「밥으로부터」전문 천한 것에 의미를 구축하는 눈길은 고은 시의 한 특징이다. “내 집 밖에 온통 / 내 스승이다 // 말똥 선생님 / 소똥 선생님 // 어린아이 주근깨 선생님”(『순간의 꽃』), “강과 바다 오가며 / 사는 것들 / 너희들이 진짜 공부꾼이다 / 뱀장어야 / 참게야”(「순간의 꽃」)라 했던 시인은 이번에는 배설물에 숭고미를 부여한다. “방금 먹고 난 밥”이 되기까지, 햇살 받고 자라며 또 추수 탈곡되고 잘 씻겨 익어 밥상에 놓아지며, 또 뱃속에 들어가 온갖 과정을 거친다. “이 경황에도 / 똥창에 달라붙는 숙변 같은 / 오사육시럴 시 두엇”이 된다. 오사육시럴은 ‘오사육시(誤死戮屍)’ 곧 “잘못 죽어 육시까지 당한다”는 저주를 빌려, 시(詩)가 신비화되는 것을 막는다. 참 진실은 말로 표현되지 않는다. 진실이 거주하는 언어적 구조물을 구축하려면 뻔해서는 안 된다. 똥은 거름이 된다고 썼다면 시가 아니다. 그것은 숨겨져 있거나 암시되어 있거나 건너 뛰어야 한다. 고은은 고은답게 암시하거나 은닉하지 않고, “싸질러” 진실을 보여준다. 이때 “싸질러야 할 서정시”는 배설물이 아니다. 오사육시랄 하지만, 오사육시랄 하기에 경전(經典)이다. 눈치 빠른 독자라면 세 편의 신작시에 은닉된 죽음충동을 보았을 것이다. 이제 시인은 직설적으로 죽음을 논한다. 엊그제 추기경 선종이라 이런 꿈인가 엊그제 길 건너 문씨네 초상 나서 이런 꿈인가 간밤 꿈속 내가 저승사자한테 내둘려 시난고난하다가 슬슬 죽어가는데 후배 서넛 아무개 아무개 아무개 아무개가 안돼요 안돼요 하고 소리치더군 임종 허세 갖추어서리 이것 별난 것 아니네 다 하는 것이네 다 술 먹듯이 하는 것이네 라고 제법 의젓하게시리 뻥을 놔도 아무개가 또 소리치더군 안돼요 거기 가지 마시고 2차 갑시다 3차 갑시다 딸꾹! 꿈 깨고 나서 좀 무안하더군 - 「임종게 한 놈」전문 이 시는 가장 형이상학적인 문제 중에 하나인 죽음을 다루고 있다. 제목이 느닷없이 ‘임종게 한 놈’이다. ‘임종게’란 무엇일까? 고승들이 입적할 때 수행을 통해 얻은 깨달음을 후인들에게 전하는 마지막 말이나 글을 임종게(臨終偈)라 한다. 그 성스러운 임종게를 시인은 ‘한 놈’으로 희화화시킨다. 그리고 추기경 선종(善終, 사람이 선하게 죽는 것)인지 문씨네 초상을 보고 와서 그는 꿈을 꾼다. “간밤 꿈속”이란 한 행에서 시적 전환이 이루어진다. 꿈은 소원성취(wunscherfulling)이기도 하다. 저승사자가 ‘나’를 데려가려고 하는데, 느닷없이 다수의 “아무개”가 나타나 죽지 말라 한다. 죽음이란 “별난 것 아니네. 다 하는 것이네”라며 제법 의젓하게 말하는 ‘나’에게 ‘아무개’가 소리친다. “안돼요 / 거기 가지 마시고 / 2차 갑시다 / 3차 갑시다”라고 쓴다. 2차, 3차라는 단어에서, 독자는 미소 지으며 다시 한번 전복(顚覆)된다. 『쾌락원칙을 넘어서』(1920)에서 프로이트는 ‘넘어서’ 무엇이 있는가를 썼다. 쾌락원칙을 ‘넘어서’에는 반복강박이 있고, 그 반복강박의 근원에는 영원한 평안을 희구하는 ‘죽음충동’이 있다고 한다. 고은은 그 ‘넘어서’에 술집 가는 풍경을 놓는다. 한번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반복’된다. 이 시를 읽는 누구나 시 속으로 들어가 갸륵한 “아무개”가 되어, 죽음을 ‘넘어’ 까짓껏 “갑시다”라고 무람없이 말할 수 있다. 이렇게 죽음이라는 염려(sorge)는 시 한편에서 삽시에 술집을 향하는 즐거운 풍경으로 바뀐다. 환타지든, 허구든, 환상이든, 저 헛것들은 죽음과 염려에 빠진 우리를 구원한다. 속박과 아집을 ‘넘어서’ 매혹에 들어서는 순간, 환타지는 발생한다. 죽음이 이렇게 즐거운 일이라면 매일 임종게를 쓸 일이다. 이제 환타지[魅惑]의 집에 거주하려면 먼저 ‘나’를 비워야 한다. 하루 반나절 만이라도 모든 집들이 빈 집으로 아무 대답 없이 남아 있고 싶네요 (......) 비닐 칸막이 짜장면 집에서 나와 오직 마라도 파도소리로 어버이도 자손도 여의고 눈감았다 뜨네요 눈감았다 뜨네요 단 하루만이라도 누구의 수평선이고 싶네요 - 「마라도」에서 ‘나’ 안에 너무도 많은 것들이 들어와 있다. 그것은 트라우마일 때도 있고, 복잡한 관계일 때도 있다. 그래서 “하루만이라도 / 미움 모르고 / 사랑 모르고 / 하루만이라도 / 세상의 허접쓰레기들 / 내 주린 오장육부에 담지 않고” 살고 싶다 한다. 복잡한 관계의 타자들은 ‘내 안의 타자’로 들어앉는다. 그리고 ‘나’의 무의식에 또아리틀고 박혀 해소되지 않는다. 이때 우리는 그것을 ‘억압’(repression)이라 한다. 이 억압에서 탈출하려면, 먼저 “어둠 속”의 고독에 처해야 하며, ‘빈’(空) 상태로 돌아가야 한다. “오직 마라도 파도소리로 / 어버이도 / 자손도 여의고(일찍 사별하고-인용자) / 눈감았다 뜨네요 / 눈감았다 뜨네요”라는 표현처럼, 우리도 이승을 ‘비우고’ 뜬다. 생을 몇 번이고 탕진해본 이가 탕진했는데도 무한한 무언가를 얻었던 고독한 순간에 대한 그리움이 ‘빈’이라는 기표에 숨어있다. 그 그리움이 ‘빈’ 몸, ‘빈’ 집, 멀리 떨어진 ‘빈’ 섬 마라도이다. 빈 집으로 빈 몸으로 수평선이 되고 싶다는 ‘마라도’는 영원한 자궁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꿈의 섬이며, 비었기에 무한으로 채워진 충만이기도 하다. 다섯 편의 시에는 어떤 닮음이 있다. 첫째, 모두 겉보기엔 쉽게 쓴 거 같지만 한번 읽어서는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두세 번 읽어야, 비로소 ‘사유의 간극’ 사이에서 상상력이 융기(隆起)한다. 여기에 고은 시의 매혹이 있다. 고은 시는 다시 읽어야 한다. 시 형태로 봐서는 너무도 대중적이면서도, 다시 읽어 생각하면 치열하게 전복된 언어가 은닉되어 있다. 둘째, 다섯 편의 시에는 ‘반복’(repetition)이 나온다. “우리”,“아무개”라는 명사의 반복, “갑시다”, “싶네요”, “오소서”, “뜨네요”라는 동사의 반복, 낭독하기 쉬운 리듬이 반복되고 있다. 이 반복은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환타지의 물결을 형성한다. 반복 깊숙이 ‘강박(强迫)’이 숨어 있다. 시인이 겪었던 무수한 트라우마가 무의식에 숨어 있지 못하고 반복해서 튀어나오는 것이다. 그 강박은 긍정적인 요소로 반복되고 있으며, 우리는 그 반복과 함께 일탈(逸脫)의 환타지를 체험한다. 셋째, 우리는 다섯 편을 통해 환타지의 순례를 체험한다. 영화에서 장롱으로 들어가야 새로운 나니아 세계를 만나듯, 애니메이션에서 동굴로 들어가야 ‘너머’의 환상세계를 만나듯, 우리는 엄마의 자궁에 있을 때 가장 편안했던 모성회귀본능의 편안함을 상상한다. 회귀하여 죽어가는 연어가 단순히 죽으려는 회귀가 아니라, 생명을 탄생시키려고 회귀하는 것처럼, 고은은 죽음을 우리 안에서 회감(回感)시킨다. 어두운 죽음을 거쳐 오히려 영원한 평안을 향유하는 세계를 고은은 「임종게 한 놈」에서 간단히 그려낸다. 그 회감의 환타지로 가려면 ‘빈’ 고독을 거쳐야 한다(「마라도」). 생과 사를 무람없이 오가는 즐거운 환타지의 넓이에서 우리는 확장된다. 이렇게 우리는 고은 시 다섯 편과 함께 영원한 자궁으로 가는 순례를 체험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결핍을 넘어선 우리는 충만(充滿)을 향유한다. ================================================================================ 277. 옥상의 가을 / 이상국 옥상의 가을 이 상 국 옥상에 올라가 메밀 베갯속을 널었다 나의 잠들이 좋아라 하고 햇빛 속으로 달아난다 우리나라 붉은 메밀대궁에는 흙의 피가 들어 있다 피는 따뜻하다 여기서는 가을이 더 잘 보이고 나는 늘 높은 데가 좋다 세상의 모든 옥상은 아이들처럼 거미처럼 몰래 혼자서 놀기 좋은 곳이다 이런 걸 누가 알기나 하는지 어머니 같았으면 벌써 달밤에 깨를 터는 가을이다 이상국 시집 중에서 ---------------------------------------------------- 278. 열반 / 이상국 열반 불탄 낙산사 범종에 대하여 이 상 국 그도 힘들었던 것이다 천년이나 제 몸을 때리고 하늘과 땅 사이를 오가느라 지쳤던 것이다 날마다 제 몸을 비우던 공양도 이제는 더 퍼낼 게 없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날 마침내 집에 불을 지르고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이상국 시집 중에서  
1131    詩作初心 - 한편의 시를 탈고하기 위하여... 댓글:  조회:5560  추천:0  2016-03-01
상상의 재미가 있는 시 문학은 언어로 표현된 허구의 예술입니다. 시도 그 속의 작은 갈래이므로 허구의 예술인 것이지요. 그 허구를 위하여 특히 오늘의 현대시는 조형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그것을 위하여 참신한 비유를 통한 ‘낯설게 하기’ 수법을 사용합니다. ‘낯설게 하기’란 친숙하거나 인습화된 사물이나 관념을 특수화하고 낯설게 함으로써 전혀 새로운 느낌을 갖도록 표현하는 방법. 러시아 형식주의의 문학적 수법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한 예로, 지하철과 관련된 시를 찾아보니 “나는 보았다/ 밥벌레들이 순대 속으로 기어들어가는 것을”이라고 쓴 최영미의 「지하철에서 1」도 있고 에즈라 파운드의 유명한 「지하철 정거장에서」도 있습니다. “군중 속에서 유령처럼 나타나는 이 얼굴들/ 까맣게 젖은 나뭇가지 위의 꽃잎들.” 흔한 풍경이건만 얼마나 산뜻한 감각의 이미지들인지 모릅니다. 2012년 《문학동네》신인상으로 당선된 시 한 편을 더 살펴보기로 합니다. 뾰족한 악몽을 밀어내고 담장에 오르는 새벽 나는 내가 비좁다 창을 열면 내 안으로 눈이 내리고 붉은 새가 걷는다 붉은 새가 떼로 날아오르면 검게 찢어지는 하늘이 칼들이 쏟아져내리고 아버지가 보인다 취한 손으로 가족들 발톱을 뽑아내는 모두가 찌르고 모두가 찔리고 모두가 떠나지 않고 이곳에 서 있다 내 안으로만 쌓이는 눈 창이 열리면 나는 나를 뚫는다 새가 새를 뚫는다 —남지은,「넝쿨장미」전문 이 작품에 대한 비평적 해설은 당선작을 뽑은 심사위원 중 한 사람인 평론가 신형철의 글(《문학동네》신인상 시 부문 심사평)로 편의상 대신하겠습니다. “뾰족한 악몽을 밀어내고/ 담장에 오르는 새벽” 「넝쿨장미」의 도입부다. 이것은 일차적으로는 제 몸 안에서 밖으로 가시(“뾰족한 악몽”)를 “밀어내고” 담장을 타고 오르는 넝쿨장미의 모습을 재현한 것이겠지만, 어느 날 새벽에 악몽에서 깨어난 화자가 그 악몽의 잔영과 힘겹게 싸우는 모습 또한 떠올리게 한다. 다시 잠이 들면 악몽이 이어질 것 같은데, 이대로 눈뜬 채 아침이 오기를 기다리는 것은 너무 외로운 일이다. 그렇게 그의 안에는 너무 많은 악몽이 있기 때문에 그는 “나는 내가 너무 비좁다”라고 느낀다. 비좁기 때문에, 그 너무 많은 악몽들은 가시가 되어 밖으로 돋아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비좁다는 느낌이 그를 답답하게 만들고, 그 답답함이, 자다 깬 새벽에 창문을 열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창을 열면/ 내 안으로 눈이 내리고// 붉은 새가 걷는다 붉은 새가// 떼로 날아오르면/ 검게 찢어지는 하늘이” 창을 열면 무엇이 보이는가. 다시 말해, ‘창 안의 나’와 ‘창밖의 세상’ 중에서 어느 쪽의 힘이 더 강한가. 전자의 힘이 강하면 창을 열어도 결국 ‘나 자신’이 보일 것이다. 표현 욕구가 재현 욕구를 이겼다는 뜻이다. 그의 불우한 내면이 세상을 다 빨아들인다. 그러니 눈은 “내 안으로” 내릴 수밖에 없다. 역시나 내면의 대체물일 “붉은 새”는 불길하게도 날지 못하고 걷는다. 행여 떼로 날아오르면 하늘이 검게 찢어진다. 이 ‘붉음’과 ‘검음’은 이 시의 소재가 되고 있는 장미의 ‘검붉음’을 나눠 반영하면서 후반부의 분위기를 이끈다. 이어 이 시는 그의 악몽이 가족의 현재와 관련이 있음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칼들이 쏟아져내리고/ 아버지가 보인다// 취한 손으로 가족들 발톱을/ 뽑아내는// 모두가 찌르고 모두가 찔리고/ 모두가 떠나지 않고 이곳에 서 있다” 가족이라는 숨은 상처가 화자의 내면을 점령하는 순간, ‘내리는 눈’도 ‘쏟아져내리는 칼’로 전환되었을 것이다. 아마도 이 가족의 문제는 ‘취한 아버지’와 관련돼 있는 것 같다. 그 아버지는 가족들을 고통스럽고 무기력하게 만들고 있을 것이다. 아버지가 가족들의 발톱을 뽑는 모습이 그렇게 읽게 한다. 가시들이 서로 뒤엉켜 있는 넝쿨장미는, 이렇게, 서로 찌르거나 찔리면서도 서로를 떠날 수 없는 가족의 모습으로 유려하게 전환된다. 그리고 이시의 마지막은 이렇다. “내 안으로만 쌓이는 눈/ 창이 열리면// 나는 나를 뚫는다/ 새가 새를 뚫는다” 마지막 두 줄은 ‘나’의 가시가 ‘나’를 찌르는 장면을 떠올리게 하는데, 여기에서, 지금과 같은 상황이 절대로 변할 수 없다는 것을 예감하는 자의 체념적 절망감을 읽어내야 할지, 아니면 고통스럽고 무기력한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그 가족의 구성원이기도 한 ‘나’ 자신의 자기 극복이 필요하다는 결단의 몸짓을 읽어내야 할지 쉽게 선택하지 못하겠다. 그러나 어느 쪽으로 읽건 이 결말이 만들어내는 매력적인 모호함의 공간은 여전히 넓다. ‘상상의 재미가 있는 시’는 오늘의 현대시 중 가장 많은 영역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몇 편의 좋은 예를 더 들어보면 함기석의 「뽈랑공원」, 윤성택의 「후회의 방식」, 조인호의 「철가면」등을 말할 수 있습니다. 특히 「후회의 방식」은 시간의 흐름을 역전시킨 독특한 시상의 전개가 아주 재미있습니다. 앞서 나온 ‘매력적인 모호함’이라는 것. 이 모호성(ambiguity)이라는 시의 속성을 잘못 이해한 젊은 시인들이 곧잘 빠지는 함정에 특별히 유념해야 합니다. 젊은 시인들이 좋아하는 소위 전위적인 시, 아방가르드의 유령에 홀려서는 안 됩니다. 미의식을 포함하지 않은 모호성, 비논리 자체만을 즐기는 어불성설, 중언부언, 요령부득의 모호성 등은 경계하고 또 경계해야 합니다. 혈관을 찾던 약한 팔뚝 빛 딸기를 고른다 색연필을 핥고 나서부터 무심(無心)이 도졌던 중학(中學)의 미술은 오직 기쁘게 얼굴들을 흠집 냈다. 무도병(舞蹈病)이 되어 한 겹씩 얇게 소동들은 떠오를 것이다 나를 낳고 싫증이 났던 엄마의 무렵, 날짜변경선을 지나며 싸고 있는 애벌레를 상대했다, 조용히 들여다본 엄마의 까만 것을 —「가내 판정」부분, 《현대시학》2012년 8월호 날개 안쪽, 퍼덕이던 뼈를 만져본다 허공의 통증이다. 창밖, 꽃들의 방위가 쓸쓸해 길은 길로 걸어와 침묵한다. 안다는 것 과 알고 있다는 주저가 어느 순간 난간이 되고 위악적인 꽃말들이 난 간을 걷는다. 꽃을 물어 나르는 새들의 위장을 탐했던 바람, 귀먹은 바 람을 불러들여 헛구역질을 연습하면 풀냄새가 입안 가득 돌고 손이 검 은 얼룩에 기척이라는 장기가 생긴다. —「통증의 연대기」부분, 《현대시》2012년 2월호 우선 「가내 판정」은 제목부터 알 수 없는 묘한 말입니다. 잘 참고 읽어봐도 이게 무슨 말인가, 알아내기 어렵습니다. “무심(無心)이 도졌던 중학(中學)의 미술”은 얼굴들에 흠집을 내고…. "엄마의 무렵, 조용히 들여다본 엄마의 까만 것" -아마 시인 자신도 이런 구절들을 분명하게 독자들에게 이해시키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모르고 나도 모를 소리라고나 할까, 이런 것을 시라고 내밀기엔 낯가죽이 한참 두꺼워야 할 것입니다. 이건 어렵게 쓴 시나 잘못 쓴 시도 아니고 아예 시가 아닙니다. 말하자면 ‘가짜 시’입니다. 「통증의 연대기」도 역시 독자를 현혹시키려는 말장난으로 된 시입니다. 무언가 의미 있는 게 있을 것 같은 착각만 유발할 뿐 알맹이가 하나도 없는 시입니다. 이러한 시들에 굳이 이름을 붙인다면, 시인 혼자 중얼거리는 ‘자폐시’ 혹은 ‘가짜 시’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시 쓰기를 40년 50 년씩 해 온 중견 이상의 시인들이 아무리 읽어도 알 수 없는 시가 있을까요? 그런 건 사기입니다. ‘난해시’란 나같이 시력(詩歷)이 많은 시인들, 혹은 소수의 시인들이라도 꼼꼼히 읽어서 충분히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는 「넝쿨장미」같은 시를 이릅니다. 저것들은 눈속임의 ‘가짜 시’, 잘 해야 ‘자폐시’일 뿐입니다. 아름다움이 있는 시 누가 뭐래도 문학은 예술입니다. 예술을 말할 때 가장 먼저 꼽는 게 문학입니다. 문학에서도 맨 앞에 내세우는 것은 시입니다. 그러므로 시가 예술임은 누구나 아는 상식입니다. 예술이 추구하는 게 무엇입니까? 바로 아름다움이지요. 미(美)를 추구하는 까닭에 시가 지니는 미 역시 숭고미, 우아미, 비장미, 골계미를 떠나서 말하기 어렵겠습니다. 고기잡이를 직업으로서가 아니라 한가로운 풍류로 즐김을 노래한 고산 윤선도의 「어부사시사」에는 우아미(優雅美)가 있고, 죽은 누이를 그리며 슬픔을 참고 내세에서 만날 것을 기약하는 월명사의 「제망매가」에서 드러나는 것은 숭고미(崇高美)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모가지를 드리우고 조용히 피를 흘리겠노라고 말하는 윤동주의 시 「십자가」에 깃든 비장미(悲壯美), “얼굴을 선캡과 마스크로 무장한 채/ 구십 도 각도로 팔을 뻗으며 다가오는 아낙들을 보”는 것부터 시작하여 풍자, 해학으로 독자를 즐겁게 하는 권혁웅의 시 「도봉근린공원」은 골계미(滑稽美)를 띠고 있습니다. 검고 푸른 달밤, 관능적인 여인의 춤이 그치고 그녀가 헤롯왕에게서 상으로 받기를 바란 그것을 쟁반에 담아 가지고 나옵니다. 푸른 달빛 아래 빛나는 은쟁반, 그 위에 검붉은 피를 흘리는 사람의 머리. 영국의 작가 오스카 와일드는 이 소름끼치도록 무섭고 아름다운, 바로 이 장면을 위해서 희곡 「살로메」를 썼다고 합니다. 그건 유미주의 혹은 탐미주의 내지는 예술지상주의라고도 부르는 문예사조입니다. 미적 가치를 가장 높은 가치로 보고 모든 것을 미적 견지에서 평가하는 태도나 세계관 곧 예술을 위한 예술, 더 나아가 악마주의로까지 길을 열어나가는 것 자체가 순수예술의 존재 그 자체일는지도 모릅니다. 다리를 벌리고 앉은 의자 아래 졸고 있는 죽은 고양이 옆에 남자의 펄럭이는 신문 속에 펼쳐진 해변 위에 파란 태양 너머 일요일의 장례식에 진혼곡을 부르는 수녀의 구두 사이로 달려가는 쥐를 탄 우울한 구름의 손목에서 흐르는 핏방울이 떨어져 내린 시인의 안경이 바라보는 불타오르는 문장들이 잠든 한 줌 재가 뿌려진 창밖의 검은 밤 속 —강성은, 「아름다운 계단」부분 너를 껴안고 잠든 밤이 있었지, 창밖에는 밤새도록 눈이 내려 그 하얀 돛배를 타고 밤의 아주 먼 곳으로 나아가면 내 청춘의 격렬비열도에 닿곤 했지, 산뚱반도가 보이는 그곳에서 너와 나는 한 잎의 불멸, 두 잎의 불면, 세 잎의 사랑과 네 잎의 입맞춤으로 살았지, 사랑을 잃어버린 자들의 스산한 벌판에선 밤새 겨울밤이 말달리는 소리, 위구르, 위구르 들려오는데 아무도 침범하지 못한 내 작은 나라의 봉창을 열면 그때까지도 처마 끝 고드름에 매달 려 있는 몇 방울의 음악들, 아직 아침은 멀고 대낮과 저녁은 더욱 더 먼데 누군가 파뿌리 같은 눈발을 사락사락 썰며 조용히 쌀을 씻어 안치는 새벽, 내 청춘의 격렬비열도엔 아직도 음악 같은 눈 이 내리지 —박정대, 「음악들」전문 연쇄법을 구사한 시「아름다운 계단」에서는 기괴한 가운데 느껴지는 미의식이 있습니다. 오스카 와일드나 에드거 앨런 포에게서 풍기는 약간 그로테스크한 미의식입니다. 그리고「음악들」에서는 부드럽고 달콤한 말맛의 음악성을 곁들여 판타지 같은 이미지의 연속이 아름답게 펼쳐지고 있지요. 이와 같은 시 자체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은 ‘너도 모르고 나도 모르는’ 모호한 말도 아닌 혼잣말의 안개 속에 종적을 감추는 비열한 시들보다 차라리 열 배 백 배 낫습니다. 지금까지 나는 좋은 시의 갈래를 감동이 있는 시, 상상의 재미가 있는 시, 아름다움이 있는 시로 나누어 보았는데 이는 내가 혼자 생각해 본 분류에 지나지 않습니다. 유명한 학자들의 빛나는 이론에 도움 받은 바도 없이 지금까지 50년 가까이 딴에는 열심히 시를 써오며 내 몸으로 터득한 어설픈 시론에 불과합니다. 한 편의 시가 저런 요소들을 두루 섞어서 나타날 수도 있겠고, 전혀 다른 모습의 시도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시 한 편을 탈고하고 나서 이 세 가지 기준에 맞춰 자기 스스로 점검해 보는 것도 그다지 무익한 일은 아닐 것입니다. (*) =========================================================================== 275. 오늘은 일찍 집에 가자 / 이상국 오늘은 일찍 집에 가자 이 상 국 오늘은 일찍 집에 가자 부엌에서 밥이 잦고 찌개가 끓는 동안 헐렁한 옷을 입고 아이들과 뒹굴며 장난을 치자 나는 벌 서듯 너무 밖으로만 돌았다 어떤 날은 일찍 돌아가는 게 세상에 지는 것 같아서 길에서 어두워지기를 기다렸고 또 어떤 날은 상처를 감추거나 눈물자국을 안 보이려고 온몸에 어둠을 바르고 돌아가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는 일찍 돌아가자 골목길 감나무에게 수고한다고 아는 체를 하고 언제나 바쁜 슈퍼집 아저씨에게도 이사 온 사람처럼 인사를 하자 오늘은 일찍 돌아가서 아내가 부엌에서 소금으로 간을 맞추듯 어둠이 세상 골고루 스며들면 불을 있는 대로 켜놓고 숟가락을 부딪치며 저녁을 먹자 이상국 시집 중에서 -------------------------------------------------- 276. 어둠과 놀다 / 이상국 어둠과 놀다 이 상 국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골목길에서 누가 덥석 손목을 잡아끈다 새로 온 저녁이었다 자기네 집에서 쉬었다 가라는 거였다 집에서 아내가 아이들이 기다린다고 했지만 이런 날이 날마다 있는 건 아니라며 한사코 잡아끌었다 나는 새우깡 한봉지와 소주를 받아가지고 학교마당 나무 아래 저녁의 집에서 한 시간이나 놀았다 그리고 그가 데리고 가라는 새로 온 어둠의 손을 잡고 노래를 부르며 돌아왔다 이상국 시집 중에서
1130    [아침 詩 한수] - 어떤 평화 댓글:  조회:4977  추천:0  2016-02-29
인생의 연륜을 켜켜이 쌓아오신 아버지가 버스 정류장에서 따뜻한 볕을 쬐고 있습니다. 대학이 우골탑(牛骨塔)이란 소리를 듣던 시절은 지났지만 자식을 위해 한평생 희생하신 아버지를 보면 아들은 언제나 죄인일 수밖에 없습니다. 고향 집 달력엔 막내아들의 마지막 등록금 부치는 날이 적혀 있었겠지요. 집안 대소사를 모두 마치고 잠깐의 휴식을 즐기는 모습은 평화 그 자체입니다. 박상익 기자 dirn@hankyung.com        
1129    詩作初心 - 좋은 詩 없다... 있다... 댓글:  조회:4566  추천:0  2016-02-26
감동 • 상상 • 아름다움 —좋은 시의 몇 가지 유형 강 인 한 디지털 시대에 들어서서 문학의 위기 내지 시의 위기가 도래하였다고들 합니다. 확실히 문학, 그 중에서도 시가 차지하는 입지가 갈수록 좁아지고 있는 것은 서점에 가보면 실감할 수 있습니다. 시집 코너가 예전에 비해서 훨씬 줄어든 게 눈에 보입니다. 물론 시집이 예전보다 더 안 팔리고 일반 독자들이 외면하고 있는 게 현실이지만 시를 쓰고자 하는 이들의 열정은 오히려 더욱 활활 불붙는 것 같습니다. 시의 독자보다 시인이 더 많다, 이게 지금 우리 시단의 이상한 현실입니다. 시도 예전보다 훨씬 많이 창작되고 그만큼 많이 발표되고 있습니다. 어찌 보면 요즈음의 시단과 그 주변을 살펴볼 때 1920년대의 동인지시대와는 또 다른 동인지 시대가 우리 앞에 펼쳐지고 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처음 출발할 때부터 ‘편집동인’ 체제로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는 종합 문예 계간지들—창작과비평, 문학과 사회, 문학동네, 실천문학 등. 뜻이 맞는 동인들의 잡지로 출발한 것들이었습니다. 솔직히 대형서점에서 찾아볼 수 없지만 꾸준히 발행되고 있는 유명 무명의 계간지들이 따지고 보면 동호인들이 서로 힘이 돼주고 밀어주어서 명맥을 유지하는 동인지에 다름 아닙니다. 하도 많은 잡지가 발간되고 거기에 시도 그만큼 발표되고 보니 가지각색의 시들이 다양한 목소리를 내며 꽃을 피우고 있습니다. 또한 그 가운데에는 세계적 수준의 우수한 작품도 있는가 하면 골방에서 혼자 지껄이는 수준의 독백이나 비밀일기 같은 작품도 있습니다. 좋은 시도 있고, 평범한 보통의 시도 있고, 저급한 시도 있습니다. 난해한 시가 있는가 하면 이해하기 쉬운 시도 있습니다. 독자에게 편안하게 다가가고자 하는 시가 있는가 하면 어떻게든지 독자가 읽어내는 것을 방해하려는 불편한 시도 있습니다. 이해하기 어렵거나 쉬운 정도를 떠나 아예 떡장수 엄마를 잡아먹은 늑대가 문틈으로 내미는 털투성이 앞발처럼 시도 아닌 것을 시라고 내놓는, 가짜 시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가관인 것은 그런 가짜 시에 그럴싸한 상도 주고 등 두드려주는 희한한 정경도 벌어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제 시의 독자는 단순한 독자의 자리에 만족하지는 않습니다. 나는 시인이면서 독자임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오늘의 우리나라 시 독자는 단순히 시를 피동적으로 읽는 데 그치지 않고 능동적으로 시 창작에도 활발하게 참여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연히 알게 된 인터넷으로 나는 2002년 3월 '다음(daum)' 사이트에 카페 하나를 개설했습니다. 카페 , 여기에 나는 하루에 한 편 혹은 이틀에 한 편, 내 눈으로 본 좋은 시를 ‘좋은 시 읽기’라는 코너에 올리기 시작했습니다. 이용악, 백석, 정지용 등 우리 현대시의 태동기부터 연대순으로 시인 한 사람에 한 편씩 대표시를 올리는 일은 1980년대까지 진행하였고, 그 이후는 잡지나 시집에서 순서 없이 좋은 시를 찾아 올리게 됐습니다. 요즘 그 ‘좋은 시 읽기’는 4350 편을 돌파하고 있으며 어떤 경우에는 두세 편을 한꺼번에 올리기도 했으므로 지금까지 실은 7천여 편 혹은 그 이상의 ‘좋은 시’를 올린 셈이라 하겠습니다. 시 전문잡지 한 권에서 적게는 두 편 많게는 다섯 편, 그리고 시집 한 권에서 적게는 두 편 많게는 다섯 편 정도를 찾아 올리고 있습니다. 기증 받은 시집 한 권에서 한 편도 못 올릴 때도 있습니다. 그런 분들에게는 퍽 미안하게 생각하면서도 내가 꾸리는 ‘좋은 시 읽기’ 코너는 정말 누가 봐도 공정하게 작품을 선별하고 있음에 존재 의의가 있다고 자부합니다. 내 나름대로 오늘의 시 중에서 ‘좋은 시’로 꼽는 건 대체로 크게 세 가지로 나눠 볼 수 있는데 그건 첫째 감동이 있는 시, 둘째 상상의 재미가 있는 시, 셋째 아름다움이 있는 시입니다. 시인 또는 평론가에 따라 좋은 시의 분류는 더 자세히 나눌 수도 있겠지만 나는 좋은 시를 나누는 기준을 그렇게 정해 본 것입니다. 한 편의 시를 쓰고 나서도 나는 가끔 이런 물음을 스스로에게 던집니다. 내가 방금 쓴 이 시는 감동이 있는 시인가? 그게 아니면 상상의 재미가 있는 시인가? 그도 아니면 아름다움이 있는 시인가? 감동이 있는 시 시의 내용은 정서입니다. 아기자기한 줄거리를 지닌 서사가 아닙니다. 도덕적 교훈이나 철학적 인생의 깨달음도 아닙니다. 우리 삶의 한 장면에서 우연히 부딪혀 우러나는 정서, 그뿐입니다. 시가 말하는 이야기란 사실 시시한 얘기입니다. 사별한 가족들을 생각하니 서글프다, 아름다운 계절의 풍경을 대하고 기분이 상쾌하다, 사랑하는 사람을 못 만나니 섭섭하다, 이런 따위 지극히 사소한 정서에 지나지 않습니다. 억울하고 비통한 일을 당했을 때 자기 심정을 토로할 뿐, 어떤 방식으로 앙갚음을 해야 한다고 꼬드기지도 않습니다. 나는 정서를 노래하되 그 시의 울림이 큰 시를 ‘감동이 있는 시’라고 부릅니다. 이런 시의 장점은 시인과 독자 사이에 원활한 소통이 이루어지는 것일 테고, 또한 메시지가 강한 점에서 말한다면 다른 무엇보다 주제가 선명하다고 할 것입니다. 그 해 겨울 영랑호 속으로 빚에 쫓겨온 서른세 살의 남자가 그의 아내와 두 아이의 손을 잡고 들어가던 날 미시령을 넘어온 장엄한 눈보라가 네 켤레의 신발을 이내 묻어주었다 고니나 청둥오리들은 겨우내 하늘 어디선가 결 고운 물무늬를 물고 와서는 뒤뚱거리며 내렸으며 때로 조용한 별빛을 흔들며 부채를 청산한 가족들의 웃음소리가 인근 모래기*까지 들리고는 했다 얼음꽃을 물고 수천 마리 새떼들이 길 떠나는 밤으로 젊은 내외는 먼 화진포까지 따라나갔고 마당가 외등 아래서 물고기와 장난치던 아이들은 오래도록 손을 흔들었다 그러나 애들이 얼마나 추웠을까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나의 뺨을 적신다 그래도 저녁마다 울산바위가 물속의 집 뜨락에 오래 가는 놀빛을 떨어뜨리고 가거나 산 그림자 속 화암사 중들이 일부러 기웃거리다가 늦게 돌아가기 때문에 영랑호는 문을 닫지 않는 날이 많다 그런 날은 물속의 집이 너무 환하게 들여다보였다 * 모래기는 영랑호 주변에 있는 마을 이름. ―이상국, 「물속의 집」전문 “―95년 1월 빚 때문에 영랑호에 와 자살한 한 가족을 위하여”라는 부제를 달고 이 시는 《현대시학》1996년 2월호에 발표되었습니다. 생활고를 견디다 못해 일가족 네 식구가 겨울 영랑호에 투신한 동반자살. 아마 신문기사에서 시인은 그 슬픈 소식을 접했겠지요. 죽어서도 젊은 내외는 돈을 벌기 위해 새떼들을 좇아 “먼 화진포까지 따라나갔고” 부모를 배웅하며 “물고기와 장난치던 아이들은 오래도록 손을 흔들었다”고 합니다. 이중섭의 천진스런 그림 같은 그 정경이 떠올려지면서 마침내 시인은 자기감정을 감추지 못하여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나의 뺨을 적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감동’을 보여주는 시를 찾아보자면 백석의 「여승」, 김종삼의 「민간인」등을 볼 수 있습니다. 대체로 감동이 있는 시를 지향하는 작품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은 시적 긴장의 이완으로 말미암은 산문화 경향일 것입니다. 그런 유형의 시들은 행 구분을 무시하고 모두 다 산문처럼 줄줄이 이어 붙여보면 금방 시의 허술함이 드러나기 십상입니다. 자기는 시라고 썼는데 짤막한 수필이거나 철학적인 짧은 산문일 경우가 많습니다. 거실 화장실 수건은 늘 아내가 갈아두는데 그중에는 근래 직장에서 받은 입생로랑이나 란세티 같은 외국물 먹은 것들도 있지만 1983 년 상주구계서원 중수 기념수건이나 (그때 아버지는 도포에 유건 쓰고 가셨을 거다) 1987년 강서구 청소년위원회 기념수건도 있다 (당시 장인어른은 강서구청 총무국장이었다) 근래 받은 수건들이야 올이 도톰하고 기품있는 태깔도 여전하지만, 씨실과 날실만 남은 예전 수건들은 오래 빨아 입은 내의처럼 속이 비친다 하지만 수건! 그거 정말 무시 못할 것이더라 1999년, 당뇨에 고혈압으로 장인어른 일년을 못 끌다 돌아가시고, 2005년 우리 아버지도 골절상으로 삭아 가시다가 입안이 피투성이가 되어 돌아가셨어도 , 그분들이 받아온 낡은 수건들은 앞으로도 몇 년이나 세면대 거울 옆에 내걸릴 것이고, 언젠가 우리 세상 떠난 다음날 냄새나는 이부자리와 속옷가지랑 둘둘 말아 쓰레기장 헌옷함에 뭉쳐 넣을 것이니 수건 그거 맨 정신으로는 무시 못할 것이더라 어느 날 아침 변기에 앉아 바라보면, 억지로 찢어발기거나 불태우지 않으면 사라지지도 않을 옛날 수건 하나가 이제나 저제나 우리 숨 끊어질 날을 지켜보기 위해 저러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소멸에 대하여 1」 이 시의 시인은 젊은 시절 한때 패기에 찬 시를 발표하여 일찍이 문명(文名)을 날렸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 회갑을 지나고 나서 갑자기 조로 현상이 왔는지 이렇게 포에지가 묽은 시를 어엿한 대가의 시인 양 내놓고 있습니다.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이 시(?)를 행갈이 한 것을 그냥 다 붙여보면 이게 시라기보다 산문 쪽에 훨씬 가까운 글임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시적 긴장감이 없는 시를 쓸 바에야 차라리 침묵하는 편이 훨씬 낫습니다. ================================================================================== 273. 감자떡 / 이상국 감자떡 이 상 국 하지가 지나면 성한 감자는 장에 나가고 다치고 못난 것들은 독에 들어가 가을까지 몸을 썩혔다 헌 옷 벗듯 껍질을 벗고 물에 수십번 육신을 씻고 나서야 그들은 분보다 더 고운 가루가 되는데 이를테면 그것은 흙의 영혼 같은 것인데 강선리 늙은 형수님은 아직도 시어머니 제삿날 그걸로 떡을 쪄서 우리를 먹이신다 이상국 시집 중에서 ----------------------------------------------- 274. 있는 힘을 다해 / 이상국 있는 힘을 다해 이 상 국 해가 지는데 왜가리 한마리 물속을 들여다보고 있다 저녁 자시러 나온 것 같은데 그 우아한 목을 길게 빼고 아주 오래 숨을 죽였다가 가끔 있는 힘을 다해 물속에 머릴 처박는 걸 보면 사는 게 다 쉬운 일이 아닌 모양이다 이상국 시집 중에서
1128    詩作初心 - "詩의 본질"이라는 거울앞에서ㅡ 댓글:  조회:4594  추천:0  2016-02-26
시의 본질을 다시 생각해 보며 강 인 한 시는 전달에 앞서 표현돼야 한다. 시는 예술에 속하되 언어를 재료로 쓰는 특수성을 생각할 때 언어적 측면이 고려된 예술이 아니면 안 된다. 시는 언어로 표현된 자체가 예술일 수 있으면 족하며 그것이 전달을 우선시해야 하는 것이라면 예술에서 궤도를 이탈하여 프로파간다로 나아가기 쉽다. 시는 다른 문학 양식들에 비하여 짧고 함축적이며 음악성을 띠는 특징을 가진다. 에드거 앨런 포는 "시란 미(美)의 운율적인 창조이다"라고 말했고, 매슈 아널드는 "시는 인생의 비평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시에 대한 정의가 지금도 적용돼야 한다는 게 내 견해이다. 요즘 들어 우리 시에 이상하게도 산문시가 많이 나타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이 현상은 ‘이상한’ 경향이지 결코 정상적인 현상이 아니라고 본다. 산문시라 해도 시로서 지녀야 할 기본적인 필요조건은 갖춰야만 시가 될 것이다. 산문시라는 가면 뒤에 숨어서 단지 짧은 단편적인 사유를 풀어 쓰거나 근사한 에피소드를 산문으로 쓰고서는 시라고 내밀어서는 곤란할 것이다. 시적 긴장도 없고, 참신하고 감각적인 이미지의 배려도 없고, 음악적인 유희와 함축의 의미를 추구하는 즐거움이 배제된 산문— 단순히 짧기만 한 글이어서는 시가 아니다. 다음의 예를 읽어보자. 당신은 지구에서 가장 친절한 사람의 목소리를 갖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 말을 들었던 사람이 오래 전 죽은 것은 온전히 당신의 불행이다. 매일매일 당신은 무릎 아래에서 올라오는 동생들의 저녁을 돌보고 어머니의 길고 긴 목을 닦아주었다. 오랫동안 배를 타다가 육지로 돌아온 거친 사내들은 당신의 생밤 같은 얼굴을 만지고 싶어 했다. 당신은 그 중 한 사내의 힘줄을 아무도 몰래 끊고 싶었다. 숲 쪽으로 세 번, 바다 쪽으로 두 번 울었던 여름, 당신은 정갈하게 애인과 헤어졌다. 피로 쓴 편지를 주고받은 적 없었으나, 심장에 그어진 파문 때문에 당신은 오랫동안 잠들지 못했다. 당신은 애인의 허리가 가르쳐준 굴욕을, 손톱을 베어내며 조금씩 떠올렸다. 하얀 종아리를 가진 애인을 죽이지 못한 것이 후회됐다. 달도 뜨지 않은 밤이 깊어, 마당에 매어둔 자전거들이 말처럼 휭휭 울었다. 당신은 관대한 사람들의 생애가 종종 실패하는 것을 목격했다. 별과 비와 시, 눈을 감아도 너무나 잘 보이는 것들만이 문제였다. 어머니의 배꼽을 베고 눈을 감은 아버지의 싱거운 모험을 생각하기도 했다. 동생들은 더디 자랐고 당신은 오랫동안 당신에 머물렀다. 이 글은 2인칭인 ‘당신’을 중심으로 서술된 글이다. 서사의 골격을 갖추고 있으나 간간이 서정적인 문채(文彩)를 가미한 인상적인 산문이다. 아마도 이 글은 어떤 소설의 개요로 쓴 게 아닌가 싶다. 다시 말하면 압축된 서사이다. 그 압축된 문장들에서 시가 지니는 함축성을 찾아볼 수 있을까. “숲 쪽으로 세 번, 바다 쪽으로 두 번 울었던 여름, 당신은 정갈하게 애인과 헤어졌다”는 문장에서 요리조리 시적인 함축성을 궁리해 보기란 도저히 불가능하다. 그것은 필자 마음 속 깊이 감춰진 특별한 사연일 것이므로 독자가 그것을 귀신같이 헤아린다는 건 말도 안 된다. 단편소설이 장편소설의 한 부분을 떼어낸 것이어서는 안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소설의 압축된 개요에 살짝 위장(僞裝)된 서정을 가미한 것이 시일 수는 없다. 그런데 왜 요즘 이러한 산문시가 횡행하는 것일까. 그것은 행갈이가 있는 자유시 형태로 쓰면 너무도 쉽게 자신의 미흡한 시적 역량이 모두 드러나기 때문일 것이다. 약간 길고 독해하기 곤란한 산문 형태 뒤에 숨어서 자신의 진면목이 쉽게 드러나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으로 인해서 그들은 산문시라는 가면 뒤에 숨기를 좋아하는 것으로 보인다. 상당히 진보적인 시인들 가운데 예술의 표현 방식이 보수적이며 전통적인 것은 무조건 진부하다고 물리쳐버리고 새로운 것만이 최선의 표현 양식이라고 판단하는 경향이 많다. 21세기에 들어선 지도 십 년 세월이 넘은 오늘에 와서도 구태의연하게 김소월 류의 감상적인 영탄이나 청록파 시인들의 서정을 답습하는 건 미상불 시대착오적인 꼴불견일 것이다. 하지만 새것이라 하면 좋은 것만 있는 것일까. 이른바 아방가르드만 지고지선이며 무등(無等)한 최고 예술일 것인가. 모든 전위는 비록 치명적 결함을 내포할지라도 오로지 전위이기 때문에 추앙받는 예술로서 충분한 것인가. 마르셀 뒤샹(1887~1968)은 프랑스의 다다이즘 또는 초현실주의 작품으로 잘 알려진 예술가다. 그가 남자 화장실의 소변기를 미술관의 바닥에 내려놓고 「샘」이라는 명제를 부여했을 때 그의 혁명적인 고안에 감탄하고 보편적인 예술의 권위주의에 반기를 든 그의 정신을 높이 평가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아방가르드란 이런 것이라고. 그러나 다시 한 번 진지하게 생각해 보자. 저기에 예술가로서의 고민과 참담한 노력과 수없는 좌절 끝에 이루어진 빛나는 예술로서의 독창성이 있는가. 또 생각해 보자. 벌거벗고 거리에 나선 임금님에게 모든 이들이 머리 조아리고 참으로 아름다운 의상을 입었노라고 칭송하여 마지않는 것과 저것이 다르면 얼마나 다른가. 그럴싸한 이론으로 치장하고 얼버무린 사기(詐欺)를 대단한 예술이라고 떠받드는 건 한갓 코미디일 뿐이다. 저 「샘」이라는 고상한 명제를 떼어내고 화장실이건 아무 벽에나 갖다가 걸어보라. 저 소변기가 호강스런 자리를 떠났을 때 그것은 단순한 소변기의 본질을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전위적인 해체주의 시가 한참 떠들썩할 때였다. 신문의 짤막한 광고기사를 편집하여 황지우 시인이 다음과 같은 시를 발표하였는데 그것은 가슴이 저리도록 공감할 만한 시였다. 바로 광주민중항쟁 기간 동안 사라진 실종자들의 사연을 다룬 시였다. 김종수 80년 5월 이후 가출/ 소식 두절 11월 3일 입대 영장 나왔음/ 귀가 요 아는 분 연락 바람 누나/ 829-1551// 이광필 광필아 모든 것을 묻지 않겠다/ 돌아와서 이야기하자/ 어머니가 위독하시다// 조순혜 21세 아버지가/ 기다리니 집으로 속히 돌아오라/ 내가 잘못했다// 나는 쭈그리고 앉아/ 똥을 눈다 —황지우,「심인」 그런데 이렇게 편집되고 약간 시적인 의도를 가지고 손질된 기사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기사문 전체를 인용하여 ‘시’라고 내놓는 경우는 어떠한가. 진취적인 아방가르드의 구현으로서 손색이 없다 하겠으나 과연 다음과 같은 글이 시집 아닌 곳에 수록되어 읽힐 때 본질적으로 시일 것인가. 경찰은 그들을 적으로 생각하였다. 20일 오전 5시 30분, 한강로 일대 5차선 도로의 교통이 전면 통제되었다. 경찰 병력 20개 중대 1600명과 서울지방경찰청 소속 대테러 담당 경찰특공대 49명, 그리고 살수차 4대가 배치되었다. 경찰은 처음부터 철거민을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한강로 2가 재개발 지역의 철거 예정 5층 상가 건물 옥상에 컨테이너 박스 등으로 망루를 설치하고 농성중인 세입자 철거민 50여명도 경찰을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대신 최후의 자위책으로 화염병과 염산병 그리고 시너 60여통을 옥상에 확보했다. 6시 5분, 경찰이 건물 1층으로 진입을 시도하자 곧바로 화염병이 투척되었다. 6시 10분, 살수차가 건물 옥상을 향해 거센 물대포를 쏘았다. 경찰은 쥐처럼 물에 흠뻑 젖은 시민을 중요 범죄자나 테러범으로 생각하는 듯했다. 6시 45분, 경찰특공대원 13명이 기중기로 끌어올려진 컨테이너를 타고 옥상에 투입되었다. 이때 컨테이너가 망루에 거세게 부딪쳤고 철거민들이 던진 화염병이 물대포를 갈랐다. 7시 10분, 망루에서 첫 화재가 발생했다. 7시 20분, 특공대원 10명이 추가로 옥상에 투입되었다. 7시 26분, 특공대원들이 망루 1단에 진입하자 농성자들이 위층으로 올라가 격렬히 저항했고 이때 내부에서 벌건 불길이 새어나오기 시작했으며 큰 폭발음과 함께 망루 전체가 화염에 휩싸였다. 물대포로 인해 옥상 바닥엔 발목까지 빠질 정도로 물이 흥건했고 그 위를 가벼운 시너가 떠다니고 있었다. 이때 불길 속에서 뛰쳐나온 농성자 3, 4명이 연기를 피해 옥상 난간에 매달려 살려달라고 외쳤으나 아무도 그들을 돌아보지 않았다. 그들은 결국 매트리스도 없는 차가운 길바닥 위로 떨어졌다. 이날의 투입 작전은 경찰 한명을 포함, 여섯 구의 숯처럼 까맣게 탄 시신을 망루 안에 남긴 채 끝났으나 애초에 경찰은 철거민을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았으며 철거민 또한 그들을 전혀 자신의 경찰로 여기지 않았다. 민주주의의 시대에 발붙이고 사는 힘없는 서민들이라면 누구나 가슴 떨리는 공분을 느끼기에 충분한 이런 글이 보편적인 시가 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예술적 고안이나 손질 같은 가공이 더 필요하다. 그나마 무시해버리고 이런 산문, 아니 기사문을 시라고 발표하는 것은 시인으로서의 능력 부족을 높은 시정신의 추구라는 것을 핑계 삼아 호도(糊塗)하거나 시인으로서의 직무를 유기한 것에 다름 아닐 것이다. 예술적인 아이디어, 예술가로서의 진정성, 그 자체는 충분히 시의 고귀한 원석이긴 하되 아직 시라는 보석은 아니다. 시는 전달에 앞서 표현되어야 하는 예술이다. 시가 지니는 요소 가운데 미적 구조를 지향하는 모호성(ambiguity)이라는 게 있다. 그것도 일정한 논리를 바탕으로 하고 온전한 문장의 토대 위에 구현되는 모호성이라야만 올바를 것이다. 한 욕조에 든 것처럼 비린 그늘 쏟아졌다 먹먹하게 헐떡이는 너의 아가미가 밀려들어오면 바다, 그 물비늘들이 끝내 나를 눈멀게 했다 엎질러진 그림자를 황급히 주워담으며 자꾸만 늑골 어디쯤이 흥건했는데 아아 네 속에 들어 이제는 반만 처녀인 나를 어쩌면 좋을까 눈부신 모습 뒤로 습한 그늘을 숨기는 습관은 너에게 배운 것이어서 감당하지 못할 살만 골라 사랑했던가 수맥의 흐름 속으로 콸콸 흐르고 싶은 내가 또 네가 아찔했다 고단한 뿌리를 움찔거리는 너, 그 속에서 소용돌이치는 치명(致命) —이혜미, 「측백 그늘」부분 관능적인 이미지와 이미지의 연결, 그 이미지들이 이루어 내는 아름다운 리듬은 사람인지 물고기인지 모호한 ‘너’라는 존재와 네 속에 든 ‘나’라는 존재의 사랑에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다. 이와 같이 모호성은 하나의 미적 구조를 지향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호성이 단지 독자의 이해를 방해하고 혼란시키기 위해서 구사되는 건 대단히 불순한 저의에 지나지 않을 터이다. 장식된 옷을 입은 조상보다 벌거벗은 조상에 대한 생각을 더 많이 해야 했던/ 틀림없이 인종의 부엌에 대한 나의 존경이 자명했거든./ 그해의 아동보호시설은 계절에 이끌려 요절 밖을 기어 나왔거든,/ 거울 속을 지느러미로 헤엄치는 미끄러운 감격에 놀라며/ 이 개화는 암술이 꽂힐 때마다 지평선을 끊고 평등의 악취를 오지 않는 빛에 비춰봐야 했거든. 문장은커녕 한 마디 말도 안 되는 이런 글을 줄줄이 엮어서 시라고 우기는 데에 이르러 우리는 기가 막혀서 할 말을 잃는다. 단지 모호성만을 발생시키기 위한 난해함, 비문의 남용, 비논리적 전개 등, 또는 신들린 무당의 난삽한 주절거림과 이런 글이 어떻게 다를 것인가. 온갖 교언영색(巧言令色)으로 이런 글에 바치는 어떠한 헌사도 ‘시의 본질’이라는 거울 앞에 서게 된다면 감히 얼굴을 쳐들지 못할 것이다. ======================================================================== 271. 국수가 먹고 싶다 / 이상국 국수가 먹고 싶다 이 상 국 국수가 먹고 싶다 사는 일은 밥처럼 물리지 않는 것이라지만 때로는 허름한 식당에서 어머니 같은 여자가 끓여주는 국수가 먹고 싶다 삶의 모서리에 마음을 다치고 길거리에 나서면 고향 장거리 길로 소 팔고 돌아오듯 뒷모습이 허전한 사람들과 국수가 먹고 싶다 세상은 큰 잔칫집 같아도 어느 곳에선가 늘 울고 싶은 사람들이 있어 마을의 문들은 닫히고 어둠이 허기 같은 저녁 눈물자국 때문에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사람들과 따뜻한 국수가 먹고 싶다 이상국 시집 중에서 ---------------------------------------------------------- 272. 진부령 / 이상국 진부령 이 상 국 내 스무살 저 지랄 같은 새벽, 아버지 소 판 돈 몰래 들고 서울 가는 디젤버스 기름 냄새에 개처럼 헐떡이며 넘던 영. 그 큰 소 다 털어먹고 추석명절 달그늘만 믿고 돌아오던 날 먼지 낀 차창을 손바닥으로 문지르며 면목없는 얼굴을 비춰보다가 고개말량 이르면 눈물나던 영. 이상국 시집 중에서
1127    [아침 詩 두수] - 늙은 꽃 / 기적 댓글:  조회:4518  추천:0  2016-02-26
늙은 꽃                      - 문정희(1947~) 어느 땅에 늙은 꽃이 있으랴 꽃의 생애는 순간이다 아름다움이 무엇인가를 아는 종족의 자존심으로 꽃은 어떤 색으로 피든 필 때 다 써 버린다 황홀한 이 규칙을 어긴 꽃은 아직 한 송이도 없다 피 속에 주름과 장수의 유전자가 없는   꽃이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더욱 오묘하다 분별 대신 향기라니 꽃은 한 번 필 때 모든 것을 다 써버림으로써 “순간”의 생애를 산다. 그것은 순간에 완벽을 이룬다. 순식간에 만개하고 멈춰버리는 삶은 늙을 틈이 없다. 그러니 “어느 땅에 늙은 꽃이 있으랴”. 이 “황홀한 규칙”은 시간을 초월해 있다. 시간의 계산이 개입할 수 없는 이 생애. 그것은 너무나 짧고도 완벽하기 때문에 “분별”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오직 “향기”뿐. ================================== 기적                    이영광(1965~) 중학생이 된 조카가 교과서를 들고와서 이건 뭐고 저건 뭐냐고 묻는다 대답을 못하겠다 살아보니 나 같은 건 한없이 정신이 박약해지고 사람을 멀리하고, 죽어가는 짐승처럼 사납더라 꿈은 사라지고 믿지 않고, 아무 몸이나 안을 수 있더라 -중략- 조카여, 진심을 말하자면, 네가 자빠지고 엎어지고 무르팍이 깨지면서도 꿋꿋이 교과서 속을 걸어가서 끝내 기적이 되었으면 한다 졸업같은 거 하지 말았으면 한다 (부분. 『나무는 간다』. 창작과 비평사. 2013) 이 시는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 일어나는 세상, 있어야 할 일이 없는 세상에 대한 슬픔을 은유적으로 적어가고 있습니다. 중학생 조카가 어른이 만든 교과서에서 세상을 배워서 진실된 세상을 만나는 일은 기적과 같은 일이 될지도 모른다는 마음은 현실에 대한 어두운 인식이 담겨 있습니다. 시인 자신이 교과서를 졸업하고도 꿈은 ‘사라지고, 믿지 않고 아무 몸이나 안을 수 있더라’라고 고백하는 부분에서는 어른이 된 우리의 마음 한쪽 구석도 함께 쓸쓸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어린 시절 싱크대 밑으로 들어가 버린 잃어버린 로봇의 팔 한쪽은 어디로 간 것일까요? 부모님의 작은 도둑질을 처음 훔쳐보던 날의 경험은 누구에게 고백해야 하는 것일까요? 혼자서 빈방에 누워 있는데 문득 오래전 비 오는 밤, 이사하던 날, 빈집에 두고 온 화분이 나무가 되고 자라서 지금까지도 어른이 된 나를 찾아 멀리서 걸어오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일어나 문을 열어두고 싶은 날이 있습니다. 그런 마음의 결들이 시가 되려면 얼마나 많은 기적이 필요한 걸까요? 기적이 마음이 먼저 일어나야 하는 일이라면 우리는 정말 기적적으로 살아왔으니까요.   김경주 시인  
1126    [아침 詩 한수] - 가벼운 농담 댓글:  조회:4569  추천:0  2016-02-25
가벼운 농담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봄날이면 좋겠어 뻐꾸기 울어대는 산골이면 좋겠어 마루가 있는 외딴집이면 좋겠어 명지바람 부는 마당에는 앵두화 속절없이 벙글고 따스한 햇살 홑청처럼 깔린 마루에는 돌쩌귀처럼 맞댄 아랫도리 열불 나고 뻐꾸기 소리인지 곰팡이 슨 목울대에서 울리는 소리인지 모를 신음소리에 놀라 장독대 옆 누렁이 멀뚱멀뚱 쳐다보고 그대로 마루에 벌렁 누워 아지랑이 몽롱한 한나절 늘어지게 낮잠 자면 좋겠어 그렇게 가벼운 농담처럼 사흘만                        /(김동준·시인)
1125    민족시인들을 찾아서... 댓글:  조회:5201  추천:0  2016-02-25
나라를 사랑한 민족시인을 찾아서 사랑하면 시인이 된다는 말이 있다. 사랑에 빠지면 못 보던 것이 보이고, 안 들리던 것이 들리고, 못 맡던 냄새를 맡게 된다. 같은 아픔도 오감(五感)으로 느끼게 되는 것이 시인의 숙명이다. 나라를 사랑한 시인들도 그랬다. 일제강점기 민족적 울분의 때에 시인들은 누구보다 민족적 아픔을 더욱 뼈저리게 느꼈다. 오는 3월 1일은 일본의 식민통치에 항거해 전 세계에 민족의 자주독립을 선언하고, 온 민족이 총궐기해 평화적 시위를 벌인 날이다. 일제강점기 민족적 고난의 시기를 지나며 많은 기성 문인들이 변절해버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족의 아픔을 노래하고 시를 써내려간 시인들이 있다. 누군가는 글을 소극적 저항이라고 폄하하지만 문인들에게 있어 ‘글’은 가장 적극적인 표현 방법이자 민족 해방을 향한 뜨거운 열망의 표출이었다. 일제가 우리 민족의 말과 글을 말살하기 위해 문인들을 말할 수 없이 박해했던 시대적 상황을 들여다보면 더욱 그렇다. 본지는 3.1절을 맞아 나라를 잃은 슬픔을 시로 승화시키고, 기독교 세계관으로 민족 해방의 열망을 표출했던 기독교 시인들의 삶을 조명해보고자 한다. ▲ 윤동주 유고시집 에 수록된 서시의 육필원고.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 ‘윤동주’ 지난 2월 16일은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이라고 불리는 청년 윤동주의 서거 71주기였다. 최근 윤동주 시인의 삶을 다룬 영화 ‘동주’가 개봉했는데 규모가 작은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높은 흥행률을 보이고 있어 윤동주를 향한 많은 사람들의 애정을 엿볼 수 있다. ▲ 윤동주 시인(1917~1945). 윤동주의 시는 가혹한 시대적 현실에 대한 고뇌와 처절한 몸부림을 그만의 투명하고 순수한 영혼의 목소리로 담아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서시’는 일제 탄압에 신음하던 시민들의 마음을 가장 잘 대변한 시로, 당시는 물론 지금까지 널리 애송되고 있다. 윤동주의 시는 결코 어렵거나 난해하지 않다. 그는 비참한 민족의 현실을 직시하면서도 시인으로써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의 연약함을 부끄러워했고, 그러한 처절한 마음을 시로 표현했다. 그렇기에 그는 ‘부끄러움의 미학’이라는 독특한 개념을 확립했다. 윤동주 시인의 시는 크게 두 가지 사상에 기초해 있는데 하나는 우리 민족에 주어진 시련을 극복하기 위한 민족주의며, 다른 하나는 기독교 사상이다. 서시, 참회록, 십자가 등을 비롯한 많은 그의 시 배경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숭고한 사랑과 희생정신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특히 ‘십자가’는 속죄양 의식을 바탕으로, 자신의 희생을 통해서라도 민족을 구원하고 싶다는 시인의 간절한 열망을 느낄 수 있는 시다. 일제의 식민정책이 한층 강화되고 내선일체(內鮮一體)를 내세우며 창씨개명을 강요해 더욱 암울했던 1941년에 창작된 시로 그 의미가 있다. 연희전문학교 시절, 고종사촌인 송몽규와 함께 일본 유학길에 오른 윤동주는 1943년 항일운동 혐의로 수감돼 29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해방을 불과 몇 달 앞둔 1945년 2월 16일이었다. 그 후 3년 뒤, 정음사에서 윤동주의 작품 30편을 모아 유고시집인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간행하게 된다. 시대의 아픔을 노래한 젊은 시인은 별이 바람에 스치듯 사라지고 말았지만, 일제의 억압 속에서도 사랑과 용서 그리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노래한 그의 주옥같은 시들은 오늘까지 많은 사람들의 가슴 속에서 살아 숨 쉬고 있다. 윤동주의 시가 일제강점기 내적 성찰이라는 소극적 저항에만 머물러 있었다는 것에는 평가가 엇갈린다. 김응교 교수(숙명여대)는 “윤동주 시는 자기성찰에 머물지 않고 나아가 사회를 변혁하는 데에 이르고 있다”며, “철저한 자기성찰로부터 출발해 궁극적으로 ‘죽어가는 모든 것을 사랑하는’ 적극적 자세를 제시했다”고 평가했다. #청록파 시인 혜산(兮山) ‘박두진’ “하나님이여, 내게 만일 조그만치라도 시를 쓸 소질을 주셨거든 이 길을 걸어감이 내 명예와 만족만을 위하는 것이 되지 말게 하시고, 오직 당신에게 영광을 돌리는 일로써 유일한 목적을 삼고 그렇게 영광을 돌릴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 박두진 시인(1913~1998). 박두진의 문학적 틀은 바로 생명력 있는 자연이었다. 그리고 자연에 대한 감각적인 기쁨을 기독교적 신앙과 결부시킴으로써, 자연과 인간의 존재 의미를 추구하는 시를 썼다. 그의 기독교 세계관은 대부분의 시에서 단호하고 직설적으로 드러난다. 그는 자연을 노래하는 것도 신의 영광을 위해 써야했고, 인류는 궁극적으로 신의 사랑의 섭리 아래 하나로 완성된다는 것을 표현하려고 했다. 18세에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된 박두진은 죽을 때까지 청교도적인 신앙인의 모범이 되었으며, 이를 시로 형상화하기 위한 노력에 몸부림 쳤다. 특히 그의 시는 ‘자연·인간·신’이라는 세 가지 주제로, 자연은 인간에게 새 생명을 불어넣어주는 일종의 ‘메시아’적 상징이자, 이상적 존재로 표현했다. 그렇기에 단순히 자연과 세계를 묘사하는 것을 넘어서 살아계신 창조주 하나님을 느끼고, 하나님이 친히 창조한 살아있는 생명체로 보고, 재창조했다. 또 ‘믿음·소망·사랑’의 성격적 정신을 그의 작품 세계에 함축해 담았으며, 예수그리스도의 행적과 함께 우리 민족의 수난사를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발견하기 위해 애썼다. 박두진은 일제 강점기와 해방, 6·25전쟁과 독재정권 등의 역사적 격변기를 거치며 지성과 양심의 목소리를 잃지 않은 지사적 면모를 보였다. 박두진, 조지훈, 박목월 시인이 공동간행한 (1946)의 시들은 대부분 일제 말기에 씌어졌다. 청 록파 시인이라고 불리는 이들은 인간의 염원과 가치를 성취하기 위한 공통된 소재로 ‘자연’을 활용했으며, 빼앗긴 땅과 자연을 복원시켜 그 속에서 파괴된 우리의 역사와 전통을 찾고자 했다. 일제 말 국어말살정책이 극에 달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말로 된 의 발간은 일제의 굴욕을 극복하려는 불굴의 의지의 표출이라고 볼 수 있다. 특히 박두진은 기독교적 생명 사상에 입각해 자연과의 친화를 노래했는데, 초기 시는 현실의 고통을 참고 메시아가 올 것을 믿고 기다리는 자의 환희를 힘 있게 표현했다. 그 메시아는 8.15광복과 함께 도래하며 ‘해’로 표상된다. 시집 는 한국시사상 유래 없이 맑고 희망적인 노래로 가득 차 있다. 환희의 감정을 절제하지 않고 발신하는 특유의 유장한 산문시의 리듬은 풍요로운 자연의 이미지와 독창적인 상징어들과 어울려 건강하고 활력에 넘치는 세계를 보여준다. 시기적으로 박두진의 시 세계는 해방과 6.25를 분기점으로, 민족의 구원에 대한 소명 의식이 사회 현실에 대한 비판으로 전환됐으며, 기독교적 종말관이나 신앙적 갈구는 후기에 두드러졌다. 그는 1937년 ‘문장’지에 ‘묘지송’ ‘향현’을 발표한 이래 60여 년간 활동하며 한국현대문학사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다. #사람을 사랑하고 생명을 존중한 시인, ‘김현승’ 시인 박두진은 김현승의 문학사적 의의에 대해, “가장 고도한 정신을 가장 순수한 정신으로, 가장 순순한 정신을 가장 인간적인 것에 둔 김현승 시인은 기독교적 시 정신에 바탕한 현대시의 서정성을 획득하고 구축한 지대한 업적을 남겼다”고 밝힌 바 있다. ▲ 김현승 시인(1913~1975). ‘가을의 기도’로 익히 알려진 김현승 시인은 사람을 사랑하고 생명을 존중하는 시를 썼으며,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다양한 의미를 함축하거나 내면화한 시들을 써내려갔다. 한일합병 직후 목사의 아들로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기독교를 소재로 하거나 내면화한 시들을 써내려갔다. 그의 성품은 늘 의로움을 추구하며 자신에게 엄격했고, 불의와 타협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진다. 1936년 숭실학교에서 교사생활을 하던 그는 1937년 일본의 신사참배를 거부해 투옥되기도 했다. 일제강점기 말에는 양심상 도저히 시를 쓸 수 없다며 붓을 꺾고 절필했으며, 광복 후 1949년 다시 작품을 발표했다. 그의 시는 초기에는 자연의 예찬을 통한 낭만주의적 서정시의 경향을 띠었다. 대표적인 시가 ‘가을의 기도’로, 가을의 계절감을 그리며 경건한 삶의 가치를 노래한 시다. 8·15 광복 후에는 인간의 내면세계를 추구하는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경건한 삶의 가치를 추구했으며, 말기에는 고독과 구원 등 인간의 본질을 노래하게 된다. 이 시기 대표적인 시는 ‘눈물’로서 어린 아들을 잃고, 그 슬픔을 기독교 신앙으로 극복한 내용을 담았다. 현상적 삶에 대한 그의 관심이 청교도적 윤리관 속에서 발전됐다면, 그의 존재 성찰의 문제 역시 기독교적 초월의식과 깊은 관련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윤동주 시모음/////////////////////////////     서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 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별 헤는 밤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헬 듯합니다. 가슴 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 마디씩 불러 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 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 경, 옥, .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아기 어머니가 된 계집애들의 .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잠',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스라이 멀듯이.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에 계십니다.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 위에 내 이름자를 써 보고, 흙으로 덮어 버리었습니다.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거외다.     자화상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그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유언 후어-ㄴ한 방에 유언은 소리 없는 입놀림. 바다에 진주 캐러 갔다는 아들 해녀와 사랑을 속삭인다는 맏아들 이밤에사 돌아오나 내다봐라.... 평생 외롭든 아버지의 운명 감기우는 눈에 슬픔이 어린다 외딴집에 개가 짖고 휘양찬 달이 문살에 흐르는 밤.     참회록 파란 녹이 낀 구리거울 속에 내 얼골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王朝)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懺悔)의 글을 한줄에 줄이자 ---- 만 24년 1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 왔든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줄의 참회록을 써야한다 ---- 그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든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 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隕石)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온다.     쉽게 씌어진 시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天命)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 볼까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주신 학비 봉투를 받아 대학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 들으러 간다. 생각해 보면 어린때 동무를 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沈澱)하는 것일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곰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위로 거미란 놈이 흉한 심보로 병원 뒤뜰 난간과 꽃밭 사이 사람 발이 잘 닿지 않는 곳에 그물을 쳐 놓았다. 옥외 요양을 받는 젊은 사나이가 누워서 쳐다보기 바르게--- 나비가 한 마리 꽃밭에 날아들다 그물에 걸리었다. 노오란 날개를 파득거려도 나비는 자꾸 감기우기만 한다. 거미가 쏜살같이 가더니 끝없는 끝없는 실을 뽑아 나비의 온 몸을 감아 버린다. 사나이는 긴 한숨을 쉬었다. 나이보다 무수한 고생 끝에 떼를 잃고 병을 얻은 이 사나이를 위로할 말이 --- 거미줄을 헝클어 버리는 것밖에 위로의 말이 없었다.     팔복(八福) -마태복음 5장 3~12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오.     새벽이 올 때까지 다들 죽어 가는 사람들에게 검은 옷을 입히시요. 다들 살아 가는 사람들에게 흰 옷을 입히시요. 그리고 한 침대에 가지런히 잠을 재우시요. 다들 울거들랑 젖을 먹이시요. 이제 새벽이 오면 나팔 소리 들려올 게외다.     바람이 불어 바람이 어디로부터 불어 와 어디로 불려 가는 것일까 바람이 부는데 내 괴로움에는 이유가 없다. 내 괴로움에는 이유가 없을까 단 한 여자를 사랑한 일도 없다. 시대를 슬퍼한 일도 없다. 바람이 자꾸 부는데 내 발이 반석 위에 섰다. 강물이 자꾸 흐르는데 내 발이 언덕 위에 섰다.     봄 봄이 혈관 속에 시내처럼 흘러 돌, 돌, 시내 가차운 언덕에 개나리, 진달래, 노오란 배추꽃 삼동(三冬)을 참아온 나는 풀포기처럼 피어난다. 즐거운 종달새야 어느 이랑에서나 즐거웁게 솟쳐라. 푸르른 하늘은 아른아른 높기도 한데......     병원 살구나무 그늘로 얼굴을 가리고 병원 뒤뜰에 누워 젊은 여자가 흰옷 아래로 하얀 다리를 드러내 놓고 일광욕을 한다. 한 나절이 기울도록 가슴을 앓는다는 이 여자를 찾아오는 이, 나비 한 마리도 없다. 슬프지도 않은 살구나무 가지에는 바람조차 없다. 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곳에 찾아왔다. 그러나 나의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을 모른다. 나한테는 병이 없다고 한다. 이 지나친 피로, 나는 성내서는 안 된다.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깃을 여미고 화단에서 금잔화 한 포기를 가슴에 꽂고 병원 안으로 사라진다. 나는 그 여자의 건강이 --- 아니 내 건강도 속히 회복되기를 바라며 그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 본다.     가슴 1 소리 없는 북 답답하면 주먹으로 뚜다려 보오. 그래 봐도 후... 가아는 한숨보다 못하오. 가슴 2 불꺼진 화덕을 안고 도는 겨울 밤은 깊었다. 재만 남은 가슴이 문풍지 소리에 떤다.     간판 없는 거리 정거장 플랫폼에 나렸을 때 아무도 없어 다들 손님들뿐 손님 같은 사람들뿐 집집마다 간판이 없어 집 찾을 근심이 없어 빨갛게 파랗게 불 붙는 문자(文字)도 없이 모퉁이마다 자애로운 헌 와사등(瓦斯燈)에 불을 혀놓고 손목을 잡으면 다들 어진사람들 다들 어진사람들 봄, 여름, 가을, 겨울 순서로 돌아들고.     간(肝) 바닷가 햇빛 바른 바위 우에 습한 간(肝)을 펴서 말리우자 코카사쓰 산중에서 도망해 온 토끼처럼 둘러리를 빙빙 돌며 간을 지키자 내가 오래 기르든 여윈 독수리야! 와서 뜯어 먹어라 시름없이 너는 살지고 나는 여위어야지, 그러나 거북이야! 다시는 용궁의 유혹에 안 떨어진다. 프로메테우스, 불쌍한 프로메테우스 불 도적한 죄로 목에 맷돌을 달고 끝없이 침전하는 프로메테우스.     *개 눈 위에서 개가 꽃을 그리며 뛰오 *나무 나무가 춤을 추면 바람이 불고 나무가 잠잠하면 바람도 자오     거리에서 달밤의 거리 광풍이 휘날리는 북국의 거리 도시의 진주 전등 밑을 헤엄치는 조그만 인어, 나 달과 전등에 피쳐 한몸에 두셋의 그림자 커졌다 작아졌다. 괴롬의 거리 재색빛 밤거리를 걷고 있는 이 마음 선풍이 일고 있네 외로우면서도 한 갈피 두 갈피 피어나는 마음의 그림자 푸른 공상이 높아졌다 낮아졌다.     거짓부리 똑 똑 똑 문 좀 열어주세요 하루밤 자고 갑시다. 밤은 깊고 날은 추운데 거 누굴까? 문 열어주고 보니 검둥이의 꼬리가 거짓부리한걸. 꼬기요 꼬기요 달걀 낳았다. 간난아 어서 집어 가거라 간난이 뛰어가 보니 달걀은 무슨 달걀 고놈의 암탉이 대낮에 새빨간 거짓부리한걸.     고추밭 할머니는 바구니를 들고 밭머리에서 어정거리고 손가락 너어는 아이는 할머니 뒤만 따른다. 시들은 잎새 속에서 고 빠알간 살을 드러내 놓고 고추는 방년(방년)된 아가씬 양 땍볕에 자꼬 익어 간다.     고향집 헌 짚신짝 끄을고 나 여기 왜 왔노 두만강을 건너서 쓸쓸한 이 땅에 남쪽 하늘 저 밑에 따뜻한 내 고향 내 어머니 계신 곳 그리운 고향집     공상 공상... 내 마음의 탑 나는 말없이 이 탑을 쌓고 있다. 명예와 허영의 천공에다 무너질 줄 모르고 한 층 두 층 높이 쌓는다. 무한한 나의 공상 그것은 내 마음의 바다 나는 두 팔을 펼쳐서 나의 바다에서 자유로이 혜엄친다. 황금 지욕(知慾)의 수평선을 향하여.     귀뜨라미와 나와 귀뜨라미와 나와 잔디밭에서 이야기했다. 귀뜰귀뜰 귀뜰귀뜰 아무에게도 아르켜주지 말고 우리 둘만 알자고 약속했다. 귀뜰귀뜰 귀뜰귀뜰 귀뜨라미와 나와 달밝은 밤에 이야기했다.     그 여자 함께 핀 꽃에 처음 익은 능금은 먼저 떨어졌읍니다. 오날도 가을 바람은 그냥 붑니다. 길가에 떨어진 붉은 능금은 지나는 손님이 집어 갔읍니다.     기왓장 내외 비오는 날 저녁에 기왓장 내외 잃어버린 외아들 생각나선지 꼬부라진 잔등을 어루만지며 쭈룩쭈룩 구슬피 울음 웁니다. 대궐 지붕 위에서 기왓장 내외 아름답든 옛날이 그리워선지 주름잡힌 얼굴을 어루만지며 물끄러미 하늘만 쳐다봅니다.     길 잃어버렸읍니다. 무얼 어디다 잃었는지 몰라 두 손이 주머니를 더듬어 길에 나아갑니다. 돌과 돌과 돌이 끝없이 연달아 길은 돌담을 끼고 갑니다. 담은 쇠문을 굳게 닫아 길 우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길은 아침에서 저녁으로 저녁에서 아침으로 통했읍니다. 돌담을 더듬어 눈물짓다 쳐다보면 하늘은 부끄럽게 푸릅니다. 풀 한포기 없는 이 길을 걷는 것은 담 저쪽에 내가 남아 있는 까닭이고 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꿈은 깨어지고 잠은 눈을 떴다. 그윽한 유무(幽霧)에서. 노래하는 종달이 도망쳐 날아나고 지난날 봄타령하든 금잔디밭은 아니다. 탑은 무너졌다 붉은 마음의 탑이... 손톱으로 새긴 대리석탑이... 하로저녁 폭풍에 여지없이도 오오 황폐의 쑥밭 눈물과 목메임이여! 꿈은 깨어졌다. 탑은 무너졌다.     남쪽 하늘 제비는 두 나래를 가지었다. 시산한 가을날..... 어머니의 젖가슴이 그리운서리 나리는 저녁..... 어린 영(靈)은 쪽나래의 향수를 타고 남쪽 하늘에 떠돌 뿐.....     내일은 없다 내일 내일 하기에 물었더니 밤을 자고 동틀 때 내일이라고 새날을 찾던 나는 잠을 자고 돌보니 그때는 내일이 아니라 오늘이더라 무리여! 동무여! 내일은 없나니 ......     눈 1 처마 밑에 시래기 다래미 바삭바삭 추워요. 길바닥에 말똥 동그램이 달랑달랑 얼어요. 눈 2 지난밤에 눈이 소오복이 왔네 지붕이랑 길이랑 밭이랑 추워한다고 덮어주는 이불인가봐 그러기에 추운 겨울에만 나리지     눈 감고 간다 태양을 사모하는 아이들아 별을 사랑하는 아이들아 밤이 어두웠는데 눈 감고 가거라. 가진바 씨앗을 뿌리면서 가거라. 발뿌리에 돌이 채이거든 감었든 눈을 와짝 떠라.     눈 오는 지도 순이(順伊)가 떠난다는 아침에 말 못할 마음으로 함박눈이 나려, 슬픈 것처럼 창 밖에 아득히 깔린 지도 우에 덮인다. 방안을 돌아다보아야 아무도 없다. 벽과 천정이 하얗다. 방안에까지 눈이 나리는 것일까, 정말 너는 잃어버린 역사처럼 홀홀히 가는 것이냐, 떠나기 전에 일러둘 말이 있든 것을 편지를 써서도 네가 가는 곳을 몰라 어느 거리, 어느 마을, 어느 지붕밑, 너는 내 마음속에만 남아 있는 것이냐, 네 쪼고만 발자욱을 눈이 자꼬 나려 덮여 따라갈 수도 없다. 눈이 녹으면 남은 발자욱 자리마다 꽃이 피리니 꽃 사이로 발자욱을 찾어 나서면 년 열두달 하냥 내 마음에도 눈이 나리리라.     달 같이 연륜이 자라듯이 달이 자라는 고요한 밤에 달같이 외로운 사랑이 가슴 하나 뻐근히 연륜처럼 피어 나간다.     *닭 1 .....닭은 나래가 커도 왜 날잖나요 .....아마 두엄 파기에 홀 잊었나봐. *닭 2 한간 계사(鷄舍) 그 너머 창공이 깃들어 자유의 향토를 잊은 닭들이 시들은 생활을 주잘대고 생산의 고로를 부르짖었다. 음산한 계사에서 쏠려 나온 외래종 레구홍, 학원에서 새무리가 밀려 나오는 3월의 맑은 오후도 있다. 닭들은 녹아드는 두엄을 파기에 아담한 두 다리가 분주하고 굶주렸든 주두리가 바즈런하다. 두 눈이 붉게 여므도록.....     돌아와 보는 밤 세상으로부터 돌아오듯이 이제 내 좁은 방에 돌아와 불을 끄옵니다. 불을 켜두는 것은 너무나 피로롭은 일이옵니다. 그것은 낮의 연장이옵기에 ..... 이제 창을 열어 공기를 바꾸어 들여야 할 텐데 밖을 가만히 내다보아야 방안과 같이 어두워 꼭 세상 같은데 비를 맞고 오든 길이 그대로 비속에 젖어 있사옵니다. 하루의 울분을 씻을 바 없어 가만히 눈을 감으면 마음속으로 흐르는 소리, 이제 사상이 능금처럼 저절로 익어 가옵니다.     둘다 바다도 푸르고 하늘도 푸르고 바다도 끝없고 하늘도 끝없고 바다에 돌 던지고 하늘에 침 뱉고 바다는 벙글 하늘은 잠잠.     또 다른 고향 고향에 돌아온 날 밤에 내 백골(白骨)이 따라와 한방에 누웠다. 어둔 방은 우주로 통하고 하늘에선가 소리처럼 바람이 불어 온다. 어둠 속에 곱게 풍화작용 (風化作用)하는 백골을 들여다보며 눈물짓는 것이 내가 우는 것이냐 백골이 우는 것이냐 아름다운 혼이 우는 것이냐 지조 높은 개는 밤을 새워 어둠을 짖는다. 어둠을 짖는 개는 나를 쫓는 것일 게다. 가자 가자 쫓기우는 사람처럼 가자 백골 몰래 아름다운 또 다른 고향에 가자.     또 태초의 아침 하얗게 눈이 덮이었고 전신주가 잉잉 울어 하나님 말씀이 들려 온다. 무슨 계시(啓示)일까. 빨리 봄이오면 죄를 짓고 눈이 밝어 이브가 해산하는 수고를 다하면 무화가 잎사귀로 부끄런 데를 가리고 나는 이마에 땀을 흘려야겠다.       만돌이 만돌이가 학교에서 돌아오다가 전보대 있는 데서 돌짜기 다섯 개를 주웠읍니다. 전보대를 겨누고 돌 첫개를 뿌렸읍니다. .....딱..... 두개째 뿌렸읍니다. .....아뿔사..... 세 개째 뿌렸읍니다. .....딱..... 네 개째 뿌렸읍니다. .....아뿔사..... 다섯 개째 뿌렸읍니다. .....딱..... 다섯 개에 세 개...... 그만하면 되었다. 내일 시험 다섯 문제에 세 문제만 하면-- 손꼽아 구구를 하여봐도 허양 육십 점이다. 볼 거 있나 공차러 가자. 그 이튿날 만돌이는 꼼짝 못하고 선생님한테 흰 종이를 바쳤을까요 그렇잖으면 정말 육십 점을 받았을까요   명 상 가츨가츨한 머리칼은 오막살이 처마끝 쉬파람에 콧마루가 서운한 양 간질키오. 들창같은 눈은 가볍게 닫혀 이밤에 연정은 어둠처럼 골골히 스며드오.   모란봉에서 앙당한 소나무 가지에 훈훈한 바람의 날개가 스치고 얼음 섞인 대동강물에 한나절 햇발이 미끌어지다. 허물어진 성터에서 철모르는 여아들이 저도 모를 이국말로 재잘대며 뜀을 뛰고 난데없는 자동차가 밉다.   무서운 시간 거 나를 부르는 것이 누구요 가랑잎 이파리 푸르러 나오는 그늘인데 나 아직 여기 호흡이 남아 있소. 한번도 손 들어 보지 못한 나를 손 들어 표할 하늘도 없는 나를 어디에 내 한 몸 둘 하늘이 있어 나를 부르는 것이오. 일을 마치고 내 죽는 날 아침에는 서럽지도 않은 가랑잎이 떨어질 텐데...... 나를 부르지 마오.   무얼 먹고 사나? 바닷가 사람 물고기 잡어먹고 살고 산골엣 사람 감자 구어먹고 살고 별나라 사람 무얼 먹고 사나.   십자가 쫓아오는 햇빛인데 지금 교회당 꼭대기 십자가에 걸리었습니다. 첨탑이 저렇게도 놓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종소리도 들려 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황혼이 바다가 되어 하루도 검푸른 물결에 흐느적 잠기고......잠기고...... 저--왼 검은 고기 떼가 물든 바다를 날아 횡단할꼬. 낙엽이 된 해초 해초마다 슬프기도 하오. 서창에 걸린 해말간 풍경화. 옷고름 너어는 고아(孤兒)의 설움. 이제 첫 항해하는 마음을 먹고 방바닥에 나뒹구오......뒹구오...... 황혼이 바다가 되어 오늘도 수많은 배가 나와 함께 이 물결에 잠겼을 게오.   소 년 여기저기서 단풍잎 같은 슬픈 가을이 뚝뚝 떨어진다. 단풍잎 떨어져 나온 자리마다 봄을 마련해 놓고 나뭇가지 위에 하늘이 펼쳐 있다. 가만히 하늘을 들여다보려면 눈썹에 파란 물감이 든다. 두 손으로 따뜻한 볼을 쓸어보면 손바닥에도 파란 물감이 묻어난다. 다시 손바닥을 들여다본다. 손금에는 맑은 강물이 흐르고, 맑은 강물이 흐르고, 강물 속에는 사랑처럼 슬픈 얼굴- 아름다운 순이의 얼굴이 어린다. 소년은 황홀히 눈을 감아본다. 그래도 맑은 강물은 흘러 사랑처럼 슬픈 얼굴- 아름다운 순이의 얼굴은 어린다.   삶과 죽음 삶은 오늘도 죽음의 서곡을 노래하였다. 이 노래가 언제나 끝나랴 세상 사람은 --- 뼈를 녹여 내는 듯한 삶의 노래에 춤을 춘다 사람들은 해가 넘어가기 전 이 노래 끝의 공포를 생각할 사이가 없었다. 하늘 복판에 알 새기듯이 이 노래를 부른 자가 누구뇨 그리고 소낙비 그친 뒤같이도 이 노래를 그친 자가 누구뇨 죽고 뼈만 남은 죽음의 승리자 위인들!   *슬픈 족속 흰 수건이 검은 머리를 두르고 흰 고무신이 거친 발에 걸리우다. 흰 저고리 처마가 슬픈 몸집을 가리고 흰 띠가 가는 허리를 질끈 동이다. *못 자는 밤 하나, 둘, 셋, 넷 ................ 밤은 많기도 하다.   蒼空창공 그 여름날 열정의 포플라는 오히려 창공의 푸른 젖가슴을 어루만지려 팔을 펼쳐 흔들거렸다. 끓는 태양 그늘 좁다란 지점에서 천막 같은 하늘 밑에서 떠들던 소나기 그리고 번개를, 춤추던 구름을 이끌고 南方남방으로 도망하고, 높다란 창공은 한 폭으로 가지 위에 퍼지고 둥근 달과 기러기를 불러왔다. 푸르던 어린 마음이 理想이상에 타고 그의 동경의 날 가을에 조락의 눈물을 비웃다. 시집 : 하늘과 바람과 별의 詩/미래사   트루게네프의 언덕 나는 고개길을 넘고 있었다...... 그때 세 소년거지가 나를 지나쳤다. 첫째 아니는 잔등에 바구니를 둘러메고, 바구니 속에는 사이다병, 간즈메통, 쇳조각, 헌 양말짝 등 폐물이 가득하였다. 둘째 아이도 그러하였다. 셋째 아이도 그러하였다. 텁수룩한 머리털, 시커면 얼굴에 눈물 고인 충혈된 눈, 색 잃어 푸르스럼한 입술, 너들너들한 남루, 찢겨진 맨발 아아 얼마나 무서운 가난이 이 어린 소년들을 삼키었느냐! 나는 측은한 마음이 움직이었다. 나는 호주머니를 뒤지었다. 두툼한 지갑, 시계, 손수건...... 있을 것은 죄다 있었다. 그러나 무턱대고 이것들을 내줄 용기는 없었다. 손으로 만지작만지작 거릴 뿐이었다. 다정스레 이야기나 하리라 하고 '얘들아' 불러보았다. 첫째 아이가 충혈된 눈으로 흘끔 돌아다볼 뿐이었다. 둘째 아이도 그러할 뿐이었다. 셋째 아니도 그러할 뿐이었다. 그리고는 너는 상관없다는 듯이 자기네끼리 소근소근 이야기하면서 고개를 넘어갔다. 언덕 우에는 아무도 없었다. 짙어가는 황혼이 밀려들 뿐   사랑스런 추억 봄이 오던 아침,서울 어느 쪼그만 정거장에서 희망과 사랑처럼 기차를 가다려, 나는 플랫포옴에 간신히 그림자를 떨어뜨리고, 담배를 피웠다. 내 그림자는 담배연기 그림자를 날리고, 비둘기 한 떼가 부끄러울 것도 없이 나래 속을 속, 속, 햇빛에 비춰 날았다. 기차는 아무 새로운 소식도 없이 나를 멀리 실어다 주어, 봄은 다 가고 ㅡ 東京 교외 어느 조용한 하숙방에서, 옛거리에 남은 나를 희망과 사랑처럼 그리워한다. 오늘도 기차는 몇 번이나 무의미하게 지나가고, 오늘도 나는 누구를 기다려 정거장 가차운 언덕에서 서성거릴게다. ㅡ 아아 젊음은 오래 거기 남아 있거라.   달갈이 연륜이 자라듯이 달이 자라는 고요한 밤에 달같이 외로운 사랑이 가슴 하나 뻐근히 연륜처럼 피어 나간다.   코스모스 청초한 코스모스는 오직 하나뿐인 나의 아가씨 달빛이 싸늘히 추운 밤이면 옛 소녀가 못 겨디게 그리워 코스모스 핀 정원으로 찾아간다. 코스모스는 귀또리 울음에도 수줍어지고 코스모스 앞에 선 나는 어렸을 적처럼 부끄러워지니 내 마음은 코스모스의 마음이요 코스모스는 내 마음이다   둘다 바다도 푸르고 하늘도 푸르고 바다도 끝없고 하늘도 끝없고 바다에 돌 던지고 하늘에 침 뱉고 바다는 벙글 하늘은 잠잠.   이별 눈이 오다 물이 되는 날 잿빛 하늘에 또 뿌연내, 그리고 크다란 기관차는 빼 ㅡ 액 ㅡ 울며, 조고만 가슴은 울렁거린다. 이별이 너무 재빠르다, 안타깝게도, 사랑하는 사람을, 일터에서 만나자 하고 ㅡ 더운 손의 맛과 구슬눈물이 마르기 전 기차는 꼬리를 산굽으로 돌렸다.   장미 병들어 장미 병들어 옮겨 놓을 이웃이 없도다. 달랑달랑 외로이 황마차(幌馬車) 태워 산에 보낼거나 뚜--- 구슬피 화륜선(火輪船) 태워 대양(大洋)에 보낼거나 프로팰러 소리 요란히 비행기 태워 성층권(成層圈)에 보낼거나 이것 저것 다 그만두고 자라가는 아들이 꿈을 깨기 전 이내 가슴에 묻어다오. 오후의 구장 늦은 봄 기다리던 토요일날 오후 세시 반의 경성행 열차는 석탄 연기를 자욱이 품기고 한몸을 끄을기에 강하던 공이 자력을 잃고 한모금의 물이 불붙는 목을 축이기에 넉넉하다. 젊은 가슴의 피 순환이 잦고 두 철각이 늘어진다. 검은 기차 연기와 함께 푸른 산이 아지랭이 저쪽으로 가라앉는다.   호주머니 넣을 것 없어 걱정이던 호주머니는, 겨울만 되면 주먹 두 개 갑북갑북.  
1124    詩作初心 - 詩의 출발은 사춘기, 고정관념 벗어나기 댓글:  조회:4778  추천:0  2016-02-24
새로운 시의 길을 찾아서         황지우   시의 출발은 항상 사춘기 감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시를 처음 썼던 때가 중학교 3학년 때 쯤으로 생각되는데, 어느 날 갑자기 어디론가 가버리고 싶고 괜히 누군가 보고 싶어지곤 했었습니다. 두근거리는 동경이라고 할까, 설렘이 있던 바로 그 자리가 시가 태어난 자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저 자신 대학에서 시작법을 가끔 가르치고 있습니다만, 시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한마디로 말하기 어렵다는 걸 느낀 적이 많습니다. 시에 대해서 일정한 이해나 믿음들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최소한 기본적인 약속 아래서 시 쓰기를 해야 할 텐데 딱히 '시는 이런 거다'라고 말하기는 참으로 힘듭니다.     제 경우에는 「일 포스티노」라는 영화를 보여 주는 것으로 끝나곤 합니다. 후줄근한 차림새의 우편 배달부 청년이 망명 생활 중인 대시인 네루다에게 자꾸 접근하면서 시가 뭔지 좀 가르쳐 달라고 하지요. 이 청년이 시를 필요로 하는 목적은 뻔해서, 시인 하면 떠올리는 것은 여자들한테 편지가 많이 온다라는 것입니다. 그는 베아트리체라는 아름다운 술집 종업원 아가씨에게 접근하기에 가장 손쉬운 수단으로써 시를 쓰고 싶어했고, 네루다를 계속 졸라댔지요. 거기서 네루다가 청년에게 알려준 시의 비밀 가운데 하나는 은유(隱喩)였습니다. 네루다는 시를 물으러 온 첫 순례자라고나 할까, 순진무구한 청년에게 '시는 은유다'라고 넌지시 일러줍니다.       어느 날 해변 가에서 수영을 즐기다 나온 네루다는 편지 한 통을 들고 찾아온 청년에게 지금 자기가 쓰고 있는 시를 읊어주죠. '바다는 일곱 개의 초록 혀이다/나는 바다다/나는 바다다/그 이름을 부르며 절벽을 내리친다' 이런 시를 읊어주니까 청년은 '말들이 어지럽다. 말들이 출렁이는 배처럼 어지럽다'라고 말하죠. 그러니까 네루다가 '그래, 그게 바로 메타포라는 거야'라고 일러줍니다. 말들이 흔들리는 배처럼 어지럽다. 말들이 반복되면서 출렁출렁거린다는 것을 흔들리는 배처럼 어지럽다고 말하는 게 은유라는 거죠.     은유의 눈부신 매혹 앞에서           모든 시가 은유로 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시는 저 장대한 교향곡, 어마어마하게 큰 대성당 따위의 건축물, 저 신나고 스피디하고 스펙터클한 영화, 극적이고 드라마틱한 매력을 지닌 연극… 이런 여러 장르의 예술에 비한다면 시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이른바 미디엄이란 측면에서 본다면, 시는 하얀 것은 종이요 검은 것은 글자일 뿐이죠. 다른 예술 장르들은 미디엄이 굉장히 크고 매체 자체가 주는 파워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직접적입니다. 시는 미디엄 자체가 언어 외에 아무 것도 없으므로 여러 예술 가운데 시는 가장 시시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언어라는 미디엄을 같이 공유하는 게 소설일 텐데, 시는 짧기도 하고 압축시켜야 하는 등 모든 예술 장르 가운데 어떤 면에서 가장 초라하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초라하고 시시한 시가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놀라운 힘, 눈부신 매혹을 자랑하는 것은 많은 시인들이 구사하고 있는 은유 덕분입니다. 은유의 가장 대표적인 예로 보들레르의 시들을 흔히 예를 듭니다. 보들레르는 「원수」라는 시에서 '내 청춘은 한갓 캄캄한 뇌우(雷雨)였을 뿐'이라고 노래했습니다. '내 청춘은 캄캄한 번개였다. 내 청춘은 캄캄한 날벼락이었다' 이 시가 언어로써 성립시키는 '청춘은 번개다'라는 은유를 피카소 같은 대화가라 할지라도 어떻게 그림으로 그릴 수 있겠습니까? 그 어느 위대한 작곡가라 하더라도 언어로써 딱 완성되는 청춘의 번개를 어떻게 음악으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어느 건축가가 청춘의 뇌우를 대리석을 얹어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바로 이 은유는 시의 가장 고유한 힘 가운데 하나입니다.           물론 모든 시의 한 구절 한 구절이 은유로 되어 있을 수 없습니다. 너무 멋진 표현들로만 되어 있으면 사람들은 금방 질리고 맙니다. 어떤 삶의 비밀을 알려 주는 내용이 배제된 채, 수사적으로만 은유를 사용할 때 그것은 공허해집니다. 삶의 비밀을 압축하면서 하나의 은유가 성립되었을 때 놀라운 힘을 발휘합니다. 이를테면 젊은 시절의 보들레르가 이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을 악이라고 표현한 현실 속에서, 금치산자로 알콜 중독자로 매도당하면서도 놓지 않았던 자신만의 지고한 이상을 모순어법적으로 이 더러운 현실 속에서 언어를 보석화시켜서 '내 청춘은 캄캄한 번개였다'라는 놀랄 만한 은유를 성립시켰을 때 시는 어떤 예술 장르하고도 비교할 수 없는 힘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제가 처음 시를 쓸 때에는 자전거를 끌고 대시인을 찾아다녔던 우편배달부와 같은 수준도 못 되었습니다. 연애편지를 잘 쓰기 위해서 쫓아다니다가 은유라는 것을 체감적으로 터득했지만, 시가 처음 찾아온 사춘기 무렵에 내가 생각했던 시란 지금 생각해도 유치무비한 것이었습니다. 김소월의 '초혼' 같은 수준이었습니다. 혹은 이발소 그림과 함께 '인내는 쓰나 그 열매는 달다' 또는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지 말라'라는 속된 경구 수준이었거나, 아니면 소월류의 직설적인 감상주의가 저를 사로잡았습니다.           나의 손위 형님이 자기가 쓸려고 사다둔 60년대 일기장이 있었어요. 그 일기장에는 매월 그 달에 어울리는 우편엽서 같은 풍경에 시들이 적혀 있었습니다. 11월이면 낙엽이 쌓여 있었고, 거기에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라는 시가 적혀 있는 걸 좋아서 외우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6월이었던가, 사슴이 멀리 있는 숲을 배경으로 릴케의 '고독'이라는 시가 실려 있었어요. 별것도 아니었는데 '고독 너의 희푸른 이마에 나를 눕히노니' 하는 부분을 읽는데, 왜 그랬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가슴이 무너져 내려 견딜 수 없게 하는 걸 경험했습니다. 아마 다른 많은 분들도 시를 읽으면서 얼마쯤 다르기는 하지만 저와 마찬가지의 경험들을 했을 겁니다. 자기도 모르게 가슴이 주저앉는, 길을 걸어가다가 무릎의 힘이 푹 빠지면서 자기도 모르게 주저앉아 버리는 느낌을 경험한 사람만이 시를 읽을 수 있고 시를 쓸 수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시를 쓰고 읽고 즐기기 위해서는 시에 대한 눈, 시의 눈이 가슴에 달려 있어야 합니다. 이게 주저앉아 버려야 합니다. 시를 향한 눈이 먼저 열려야 다른 사람의 시도 받아들일 수 있고, 그 감흥이 반복되면서 눈높이가 점점 올라가고 시적 수위가 높아질 때에 시를 쓸 수 있을 것입니다. 시가 나를 찾아와서, 시가 들어갈 가슴에 있는 경락이 열렸을 때 사람들은 흔히 낙서를 하기 시작합니다. 낙서를 하고 그 낙서가 떨어지는 글자로 끝나지 않고, 대개는 친구건 이성이건 누군가에게 편지, 혹은 일기를 쓰기 시작합니다. 모든 시의 출발은 이 일기장과 연애편지가 아닌가 합니다. 밑 모를 두려움과 함께 자기 자신이 항상 못마땅해 자책하는 심정이 되었을 때, 또는 마음이 밖으로 열려서 누군가가 보고 싶어질 때, 혹은 어떤 곳으로 훌쩍 가버리고 싶어질 때에 품는, 이른바 먼 곳에 대한 동경을 우리는 낭만성이라고 부릅니다. 모든 시의 출발점은 이 낭만성, 자기의 다른 것에 대한 그리움, 설렘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것은 제가 40이 넘고 전업작가로서 시집도 내고 하는 이 순간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것이고, 모든 시인들은 최초의 그 자리, 낭만성이라고 하는 불편한 공명통을 그대로 간직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한번은 백발이 성성한 정현종 선생님을 연세대에 가서 뵈었는데, 제가 약간은 속으로 비난하는 투로 '선생님, 선생질 재미있습니까?' 했더니 파안대소를 하시면서 '지금도 젊은 여제자를 보면 연애하고 싶어' 그러더라구요. 아! 저게 시인이구나 항상 어떤 동경을 갖고 살아가는 존재가 시인이구나 하는 감동을 맛보았습니다.         문예반 한답시고 고등학교 때부터 벌써 머리가 벗겨진 조숙한 친구 녀석과 같이 서로 불량배 흉내를 내면서 교복도 이상하게 입고 다녔던 적이 있습니다. 그 친구를 대학에서도 만났는데, 저보다 시적 수준이 높고 시 써놓은 것을 보면 진도가 훨씬 앞서 있었습니다. 녀석이 나로서는 처음 들어보는 김수영이라는 시인의 시를 노트에 써서 읽어 보라고 주었습니다. '왜 혁명에는 피의 냄새가 나는가'라는 시를 보여 주었는데, 당시 나는 '무슨 시가 이러냐? 이미지도 없고 시어도 아름답지 않고…' 하며 김수영의 시를 못 받아들였습니다. 그가 시인이었다는 것도 몰랐고 대학에 와서 접할 수 있었던 거의 유일한 문학지인 「현대문학」 등을 읽으면서 나도 금방 시인이 될 것 같았습니다.         아무튼 대학에 들어가서야 처음으로 김수영을 이해하게 됐습니다. 또 정현종의 시들을 만나면서 그 놀라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죠. 그 이전에 내가 시라고 생각했던 게 얼마나 유치한 한낱 감상주의의 똥물에 불과했는지, 얼마나 거짓되게 언어만을 이쁘게 다듬은, 마치 가성으로 입을 모으고 점잖게 노래 부르는 여학생 같은 시에만 길들여져 왔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시적 수위가 높아지는 것은 경멸에서 시작된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떤 일정한 시들에 대한 경멸 혹은, 그 동안 자기가 시라고 생각했던 것, 자기가 써놓았던 시들에 대한 혐오감 따위가 젊은 시절의 나를 얼마나 괴롭혔는지 모릅니다. 내가 써 놓았던 것들이 밤에는 위대한데 아침에는 형편없어지는 그게 정말 속상했습니다. 돌이켜보면 그 쓰라림이 진하면 진할수록 시의 눈높이가 올라가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물론 눈높이만 높다고 해서 좋은 시를 쓰는 것은 아닙니다. 눈높이는 높은데 시는 안 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눈을 높여야 한다는 것. 자신의 눈높이만큼 시를 쓸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렇게 하도록 노력해 보는 것, 그리고 낙차에 대해서 진실로 괴로워해 보는 것 그런 괴로움이 있어야 다른 사람의 좋은 시에 대해서 찬탄할 수도 있고, 이런 경멸과 찬탄이 반복되면 서 시적 인간으로 성숙되어 가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서구적 교양의 굴레를 벗어나           대학 시절의 저를 가장 괴롭혔던 것은 한국어로 된 시가 너무 시시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 외국 시들을 해석할 수 있는 수준이 되고, 외국 시들을 볼 때에 영어나 불어나 독일어로 되어 있는 시들은 너무 멋있는데, 왜 우리 조선말로 된 시들은 멋이 없을까 하는, 어쩔 수 없는 서구적 교양으로 무장된 그 당시 우리 세대들의 분위기를 조장했던 학교 교육 탓으로 문화적 사대주의에 깊게 침윤되어 있었습니다. 제가 감탄했던 것은 영시(英詩)든 불시(佛詩)든, 어떤 나라 시든 간에 그들의 시 자체에 자기 형식이 있다, 어떤 것이 시이기 위해서는 갖춰야 할 규제 장치가 있다, 그런 규제 장치 때문에 시를 쓰는 게 어렵겠지만 그렇기 때문에 규제 장치를 맞추고 시를 썼을 때의 성취감은 얼마나 클 것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처음에 시라고 생각할 때, 시와 시 아닌 것의 차이를 대체로 어디서 봅니까? 외적인 형식으로 볼 때 풀어쓰면 다 산문인데, 시라고 행갈이를 합니다. 우리나라 시에서 시인지 아닌지 구분하는 방법은 행을 끊거나 잇달아 쓰는 것입니다. 행갈이 했다고 해서 그게 다 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시도 아닌 것을 행갈이 해서 억지로 시인 체하는 것들이 적지 않습니다.         개인적으로 단테 신곡의 '세 번째 칸토(Canto)'를 참 좋아하는데 지옥의 문 입구는 신곡 전체가 3부로 되어 있죠. 지옥, 연옥, 천국 그리고 각 부가 33칸토로 되어 있습니다. 3부 33칸토, 각 연이 3행으로 되어 있습니다. 신곡을 지배하고 있는 숫자는 3입니다. 신곡 전체가 33 곱하기 3이니까 99칸토죠. 서시가 1칸토 더해져서 전체가 100칸토입니다. 이 숫자는 기독교적인 상징입니다. 삼위일체라고 하는 중세인들을 사로잡았던 종교적인 강박관념에서 연유한 거죠. 99에 하나 더해서 100, 100은 완전함을 상징합니다. 건축가가 설계도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시를 만드는 데 있어서 기본적인 원칙이 있다고 할까, 3행으로 되어 있는 각 연은 한 행이 11개의 음절로 되어 있습니다. 각 행의 마지막 단어들의 모음들이 전부 일치해 있습니다. 각 음절은 강약 강약 이런 강세에 의한 음악적인 박자감이 있습니다. 13세기 이탈리아 무연시의 형식인데, 14세기에서 셰익스피어 시대까지 소네트 형식과 함께 어떤 것이나 시이기 위한 음악적인 구조, 건축술적인 구조가 있습니다. 그래서 시인 되기가 굉장히 힘듭니다.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식으로 감정만 읊조려서는 안 됩니다. 언어를 그야말로 연금술사처럼 가공을 해야 됩니다. 제가 좋아하는 '세 번째 칸토(Canto terzo)' 지옥의 입구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Per me si va ne la città dolente,   per me si va ne l'eterno dolere,   per me si va tra perduta gente.         Giustizia mosse il mio alto fattore;       전부 'e'로 끝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음, 모음, 자음, 모음이 뚜렷이 구분되어, 이태리어 특유의 투명성이 반향처럼 울려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단순히 음향만이 아니라 여기에 깃들인 의미도 기가 막힌 걸 알 수 있습니다. '나를 거쳐서 슬픔에 잠긴 도시로 가거라/ 나를 거쳐서 영원한 괴로움 속으로 가거라/ 나를 거쳐서 사라져 버린 족속 곁으로 가거라'라고 지옥 입구에서 단테가 부르짖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지옥'은 그 당시 피렌체의 현실이고, '슬픔에 잠긴 도시', '영원한 괴로움' 등은 모두 피렌체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렇듯 자신을 억압하고, 견디기 힘든 현실을 두고 '자기를 통해서 가라'고 첫마디에서 부르짖고 있습니다. 이 '나를 통해서 현실로 가는' 강렬한 주관성은 곧 단테의 문학적 근대성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절절함과 음향적인 자기 질서가 보기 좋게 교직되어 있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셰익스피어 '소네트 145'-러브송에서도 마찬가지의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Those lips that Love's own hand did make   Breathed forth the sound that said 'I hate'   To me that languished for her sake;   But when she saw my woeful state,                     Straight in her heart did mercy come,           1행과 3행의 'make', 'sake'라는 단어로 각운을 맞추었습니다. 2행과 4행도 마찬가지입니다. 운(rhyme)이 잘 맞아 있고, 10음절을 한 행으로 12행을 만들고, 여기에 2행을 추가해서 14행시가 되어 있습니다. 이태리어와 영어는 전혀 다른 언어임에도 불구하고, 음향적인 질서를 지킨다는 점에서는 똑같습니다. 이런 점은 보들레르에게서도 그대로 지켜지고 있습니다.         저는 젊은 시절에 이런 외국 시들을 읽으면서 한국어로 시 쓰는 것에 대해서 깊은 컴플렉스에 잠긴 적이 있습니다. '우리말은 부착어여서, 우랄알타이어, 티벳어, 일본어까지 음절이 부착되면서 의미가 발생한다. 속어로는 굴절어라고 하는데 활용에 의해서 그런 차이에서 오는 게 아닐까. 소월 시에 들어 있는 7.5조 4.4조에는 이런 미터 개념의 가락은 있지만 그냥 가락만 직선적으로 지나갈 뿐이지, 행과 행 사이에 어떤 화성적인 기둥이랄까 음량의 부피가 없다. 우리 시는 평면적이고 가늘다. 나는 왜 이런 후진국에 태어났나' 따위의 정말 터무니없는 자책감을 가졌었습니다.           그러던 중 하루는 라면을 끓여 먹으려고 가스레인지를 켰는데 파란 불꽃들이 돋아났습니다. 그게 풀잎같이 보이더라구요. 파란 보랏빛 풀잎처럼 보여요. '불 속의 풀, 불 속에 피어오르는 풀' 하면서 주절주절거리다가 책상에 와서 그 구절을 하나 써놓고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에 불 속에 피어오르는 불, 풀 따위의 각운(脚韻)이랄까 하는 게 느껴졌어요. 이렇게 한번 써보면 어떨까 하고 앞 단어를 맞춰 봤습니다. 졸시 「메아리를 위한 각서(覺書)」를 그렇게 썼는데, '불 속에 피어오르는 푸르른/ 풀이어 그대 타오르듯' 하는 대목처럼 '불'하고 '풀'을 앞에다 뺐습니다. 술이란 단어가 금방 떠올라 불, 풀, 술, 술 처마신 몸과 넋에 제일 가까운 등 울, 물, 줄, 둘 첫 단어의 유음 현상을 의도적으로 뺐습니다. 불에서 둘에 이르기까지 소리가 메아리 되어 나가는 그런 의도라고 할까, '불 속에 피어오르는 푸르른/풀이어 그대 타오르듯/ 술 처마신 몸과 넋의 제일 가까운/울타리 밑으로 가장 머언/ 물소리 들릴락말락/ 줄넘기하는 쌍무지개/둘레에 한세상 걸려 있네' 라고 읊었습니다. 줄넘기하는 무지개의 이미지가 좋지 않습니까. 이걸 써놓고 그날 밤은 흥분해서 잠을 못 잤습니다. 아, 나는 천재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또 두려움이 왔습니다, 이건 한밤의 착각이 아닐까 하는.               다음날 봤는데 견딜 만해서 다시 정서해서 문학평론가 김현 선생님께 가지고 갔습니다. 나는 굉장하다고 말해줄 줄 알았는데 선생님은 재미있다고 하시면서 그냥 지나갔습니다. 그 뒤로 지금까지 제가 시를 발표한 지 20년이 넘습니다만, 그 어떤 평론가도 이 시에 대해 주목하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습니다. 두 번째 시집에 실린 「뱀풀」이라는 시에서는 음향적인 조건을 더 작위적으로 했어요. '열'자도 맞추고 두운, 각운을 다 맞춰 봤습니다. 역시 결과는 참담한 실패였습니다. 즉 어떤 평론가도 여기까지 의식이 안 와 있었습니다. 한 번도 거론된 적이 없습니다. '현단계 한국시에서 이 두 시는 실패했다. 우리말로 시를 쓸 때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행갈이로도 음향적인 장치로도 이미지로도 시가 되게 하는 절대적인 보존을 못해주는데, 시를 어떻게 쓸 것인가?' 하는 고민에 휩싸였습니다. 그러던 중 문득 '그래 내가 시를 쓰지 말자. 시를 쓰지 말고 시적인 것을 쓰자. 시적인 것을 찾아보자. 결국 어떤 텍스트를 얻은 문장을 시 되게 만드는 것은 그 안에 있는 어떤 시적인 것일 거다. 시적인 것은 뭐냐. 시적인 것은 모든 성공한 시 속에 들어 있다. 모든 시가 성공한 시인 것은 아니지만, 시적인 것은 성공한 시 안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를 아는 사람은 그 말을 압니다. 시라는 것은 도사들만 하는 건가 하는 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만, 저는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시는 시를 아는 사람만이 정확하게 알고 서로 소통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우리 안에 일어나고 있는 시와 관련된 여러 현상들 속에, 얼마만큼 시적인 것에 대한 정확한 커뮤니케이션이 있는가에 대해서는 회의적입니다. 이를테면 교보문고나 영풍문고 등에서 여고생들이 줄서 있는 시집들 속에는 사이비 시들이 대부분입니다. 시 비슷한 것을 우리가 시라고 생각하거나 제가 사춘기 때 시라고 생각했던 것 그것도 반드시 필요합니다. 눈높이는 올라가기 마련입니다. 저는 시적인 것의 추구를, 형태 파악을 통해 지금까지 시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어떤 반시(反詩)적인 것 가운데서 찾았는데, 시를 쓰는 전략만이 아니라 80년대의 고통스러웠던 권위주의 독재체제하에서 현실에 항의하고자 하는 메시지로서 형태를 비판하고 이상한 짓을 한동안 자행했었습니다. 대단히 파괴적이고 한국문학의 자폭에 이른 수준이죠. 그런데 자폭이라도 해서 우리 언어가 얹혀 있는 현실이 참으로 문제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습니다.   불교의 선(禪)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고       더 이상 나갈 길이 없는 모든 아방가르드(avant-garde; 전위)들의 운명이기도 하지요. 그러던 차에 어느 날 저는 『임제록(臨濟錄)』을 읽게 되었습니다. 임제 스님의 법어들은 뭔지 모르겠고 마음에 들어오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법어에 이르게 하는 착어들, 힌트들인 게송(偈頌)이 굉장히 시적으로 되어 있는데, 어느 구절에선가 골이 갈라져서 빛이 들어오는 것 같은 경험을 했습니다. 별것도 아닌 한문 두 구절이었는데, 번역하면 '비온 뒤 장강이 하얗게 하얗게 흐르도다'입니다. 그 구절을 접수했을 때, 중학교 때는 가슴이 주저앉았더라면 이번에는 정수리가 뽀개져 버리는 경험을 했습니다. '눈이 한 껍질 벗겨져서 열린다고, 시적인 것을 추구한다고 해 놓고도 뭐가 뭔지 알 수 없다고 했는데, 시적(詩的)인 것이 선적(禪的)인 것에 가까운 것이 아닌가, 그것은 우리말로 시 쓸 때 우리 안에서 시는 깨달음이 아닐까, 시적 인식이 어떤 것을 시적으로 만들어준 것이 아닐까'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한 방법으로 선적인 사고, 이것이 뜬금없이 우리 주변에 깔려 있는 시시한 일상들 속에, 시적인 것으로 순간순간 반짝거리면서 도사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선적인 눈으로 보면 그전에 별것도 아닌 것들이 어마어마해지고, 뭔가 도사리고 있고, 시적으로 보였다고 할까요. 그래서 시와 선이 비슷한 것인데, 단지 선은 언어를 불신하고, 불립문자를 으뜸으로 치지요. 그래도 화두선(話頭禪)은 언어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것처럼 시도 언어가 팽배해 있으면 시가 되지 않아요, 언어를 가능하면 줄여야 합니다. 언어를 현저히 결핍시키는 것이 시이죠. 말한 것과 말하지 않은 것의 밸런스가 시일 터인데, 시는 오히려 말하지 않은 것, 여백에서 숨겨 두었던 것, 여기가 시의 본질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말은 꼭 해야 할 것만 간신히 하는 것이 시이다, 언어의 결핍이되 역시 언어를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시와 선은 상당히 닮아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차이가 있다면 선은 언어라는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깨달음을 얻으면 사다리를 걷어차 버리지만, 시는 도의 경지까지 가버리면 끝나버리죠. 시는 도의 경지까지 가면 안 되고 그 근처에서 어른거리다가 다시 내려오고 하는 경계상의 떨림이 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것이 저의 담양 체류 시절, 「게눈 속의 연꽃」이라는 시집에 그런 저의 흔적들이 남게 되었습니다.     저는 선적인 것이 놓여 있는 성층권, 즉 정신의 성층권, 거의 산소가 희박해서 숨도 쉴 수 없는 너무 높은 곳에 올라갈 수 없었고 또 올라가고 싶지도 않았고, 그러다가 문득 거꾸로 추락해서 진흙 속에 처박혔다. 그래서 저는 어두운 선으로서 인간의 심층에 놓여 있는, 어두운 것에서 시적인 것을 발견할 수는 없을까 해서 이번에 나온 시집에는 선적인 깨들음을 많이 담고자 애썼습니다.   정신병자가 복도를 강으로 착각하고 건너지 못하듯, 모든 시적인 메타포의 원리는 착각입니다. 환자는 고통을 받겠지만, 멀쩡한 사람이 복도를 강으로 생각하면 시가 됩니다. 고통을 받기는 하지만, 정신 질환적인 내용 자체는 어떤 시적인 것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모든 정신질환자의 착란이 시인 것은 아니지만, 90년대의 이념이 상실되고 많은 사람들이 가슴아파하는 지나온 한 시대의 정신적 풍경을 그려보고자 했던 게 작년에 나왔던 시집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입니다. 아무튼 한국시는 고정관념에 묶여 있지 말고, 새로운 가능성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고 봅니다.         ———— 황지우 / 1952년 전남 해남 출생, 서울대 인문대 미학과 졸업. 1980년 「연혁(沿革)」이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입선하고 「대답 없는 날들을 위하여」 등을 『문학과지성』에 발표함으로써 등단. 시집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게 눈 속의 연꽃』『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나는 너다』『어느 날 나는 흐린 酒店에 앉아 있을 거다』등.                                (1999년 에서의 강연 원고)   ============================================================   268. 나도 그들처럼 / 백무산                         나도 그들처럼                                                                                              백 무 산   나는 바람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습니다 내가 계산이 되기 전에는   나는 비의 말을 새길 줄 알았습니다 내가 측량이 되기 전에는   나는 별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내가 해석이 되기 전에는   나는 대지의 말을 받아 적을 수 있었습니다 내가 부동산이 되기 전에는   나는 숲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습니다 내가 시계가 되기 전에는   이제 이들은 까닭 없이 심오해졌습니다 그들의 말은 난해하여 알아들을 수 없습니다   내가 측량된 다음 삶은 터무니없이 난해해졌습니다   내가 계산되기 전엔 바람의 이웃이었습니다 내가 해석되기 전엔 물과 별의 동무였습니다 그들과 말 놓고 살았습니다 나도 그들처럼 소용돌이였습니다     백무산 시집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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