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 청사 뒷동산에는 알락달락한 꽃송이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그윽한 향기를 풍기고 있었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발로 부리를 싹싹 다시다가도 짹짹 노래하면서 꽃향기 풍기는 봄날의 맑은 아침을 알렸다.
청춘의 정열로 가득한 교정에서는 숱한 대학생들이 아침 달리기도 하고 태극권도 하고 철봉도 하면서 신체단련을 하고 있었다.
덕돌은 대학에 온 후 이전에 상지민에게서 배운 일어를 토대로 해 이른 아침 식전이면 일어학습에 열을 올렸다. 그는 엉뚱하게도 개혁개방의 바람을 타고 일본으로 유학을 갈 푸른 꿈을 꾸고 있었다.
(큰 일을 하려면 일본쯤에 유학을 가야 해. 주은래는 일본에 유학해 공부하고서도 그 먼 프랑스에까지 유학가지 않았는가? 나도 유학을 해서 세상 견식을 넓혀 인류를 위해 엉뚱한 일을 해야지.)
그런 웅대한 포부를 품고 덕돌은 항상 일찍이 일어나 일어책을 쥐고 뒷동산으로 뛰어가 중얼중얼 일어문장을 암송했다.
대학에 온 후 덕돌은 처음에는 집에서처럼 아침 식전이면 꼭 달리기를 연습했고 밤이면 정치학부의 학생답지 않게 교실에서 두툼한 소설책을 읽었다.
대학에 오니 도서실에 조선과 중국의 명소설뿐만 아니라 세계 명작가의 명작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어 빌어내다 마음껏 볼 수 있어 얼마나 좋은지 몰랐다. 소설을 읽노라면 어찌나 재미있는지 어떤 때에는 새벽 한시가 넘었는데도 침실의 불을 끄지 않고 계속 읽었다. 이튿날 공부 때문에 어떤 때에는 아쉬운 대로 소설을 놓고 잤다. 어떤 때에는 소설책을 들고 공원 나무 숲속에 들어가 읽다가 소낙비가 쏟아져 벽돌공장 피장을 말리는 초막 아래에 들어가 소설을 읽은 적도 있었다.
“아, 어쩜 이렇게 형상적으로 썼을까?”
덕돌은 리기영의 3부작 장편소설 “두만강”이나 장편소설 “고향”과 “땅”을 보면서 연신 감탄했다.
그는 전문 필기장을 갖춰 놓고 형상적으로 된 구절은 베껴두고 암송할 지경이었다.
조선의 작가 천세봉의 장편소설 “석개울의 새 봄”은 언어가 어찌나 세련되고 묘사가 형상적인지 숱한 명구를 필기장에 베껴 넣었다.
연애소설이 큰일이야. 덕돌은 짜릿한 소설을 연애소설을 보면서 간혹 별스레 설레이고 아랫배가 짜릿해 날 때도 있었다. 사춘기의 소년처럼 예쁜 처녀와 황홀한 연애도 해보고 싶어졌다. 허나 또 중학교 시절처럼 연애편지 썼다가 혼날까봐 억지로 참았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지. 황차 대학교에선 연애를 하지 못한다고 학생 기율을 정해 놓지 않았는가!”
덕돌은 이렇게 중얼거리며 도리머리를 흔들면서 책을 읽으려고 애썼다.
그는 저녁 9시 쯤이면 교실에서 소설책을 읽다가 숙사에 내려와 1미터도 넘는 검을 들고 남의 눈을 피해 뒷동산 소나무 숲속에 가서 검술과 무술을 연마했다.
그런 덕돌이건만 동창 형님과 누나들이 오해할 때도 있었다.
한번은 초여름에 학교에서 전교 장거리 릴레이경기를 할 때다. 반장 허운호는 학부 학생회 주석을 하다나니 남녀선수 10명을 뽑아야 하는데 남자선수 둘이나 모자랐다. 한 침실에 있으면서도 입학초기인지라 덕돌이 달리기를 하지 못 하는가 아예 눈길도 돌리지 않았다. 그러다 정 사람이 없으니까 마지못해 덕돌을 보고 헛일 삼아 달리기를 하지 않겠는가고 물었다.
덕돌은 다른 동창들이 얼마나 달리는지 몰라 “내 될까?”하고 반문했다.
“어쩌겠니? 사람이 없는데 네라도 달려야지.”
운호는 덕돌에게 별로 희망을 걸지 않았다.
그런데 일부 여동창생들은 뒤에서 “덕돌이 때문에 이번 경기에서 우리 학부가 질건 뻔해.”라고 하는가 하면
“뚱뚱보 어떻게 달린다고?”라고 했고
지어 “허 반장은 눈이 멀었소. 아무리 사람이 없어도 덕돌을 선수로 뽑다니?”라고 하기까지 했다.
압력을 받은 허운호는 덕돌의 달리기실력을 떠보려고 들었다.
어느 날 식전에 덕돌을 불러내 함께 달렸다. 허운호는 앞에서 달리고 덕돌은 뒤에서 달렸다. 허운호는 점점 가속을 하며 드문드문 덕돌이 따라 오는가 되돌아보군 했다. 덕돌은 놀랍게도 자기가 아무리 빨리 달려도 계속 뒤따라 달려오지 않겠는가. 숨이 차 헐떡거리는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마지막에 최고속도로 달려 보았다. 덕돌은 그때 속도를 내 운호 앞으로 박질러 나가더니 100미터나 떨어뜨려 놓았다.
운호는 깜짝 놀랐다.
“너 정말 잘 달리는구나. 여자애들이 뭘 안다고 널 헐뜯어?”
경기를 하는 날이 돌아왔다.
허운호가 영솔한 학부의 제일 처음 선수가 9명 선수가운데서 여섯번째로 들어왔다. 덕돌이 차례가 될 때는 꼴찌로 들어왔다.
릴레이봉을 받아 쥔 덕돌은 처음에는 바람을 맞받아 천천히 달리면서 호흡을 조절했다.
여학생들 속에서는 시끌벅적거렸다.
“에이고, 저렇게 굼뜨게 달려서야 어쩌니?”
“우린 꼴찌야! 꼴찌!”
허나 덕돌은 50여 미터 달려 나가더니 속도를 가하기 시작했다. 그는 점점 속도를 내면서 하나, 둘 따라 잡았다. 그는 순풍을 타고 되돌아오면서 달릴 때는 속도를 더 내 셋이나 따라 잡았다. 마지막에 종점을 앞두고 그는 숱한 여학생들에게 본때를 보이려고 최고속도를 냈다. 쏜살같이 달리며 앞에 선 선수를 따라 잡았다.
그제야 여학생들은 환성을 올렸다.
“야, 저 실한게 잘도 달린다야.”
“진짜 선수야, 선수!”
“그러게 사람은 지내봐야 알아.”
“글쎄. 일곱이나 따라잡다니.”
그 후부터 운동대회를 하면 덕돌이 첫손 꼽히었다. 수류탄던지기나 표창던지기나 장거리달리기는 모두 덕돌의 항목이었다.
한번은 전 교 육상대회에서 키가 한뼘씩이나 더 큰 꺽다리선수 무리 속에 작달막한 덕돌이 나섰다. 딱 마치 오리 무리 속의 햇병아리 같았다.
꺽다리선수들은 덕돌한테 업신여기는 눈길을 보냈다. 그들은 수류탄을 축구장 중간선 부근에까지 뿌렸다.
덕돌이 차례가 되었다. 정치학부 학생들은 덕돌이 진다고 인정하고 아예 기대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글쎄 덕돌이 뿌린 수류탄이 씽 날아가더니 축구장 중간선을 넘어가 탕 떨어졌다. 결과 57미터로 나왔다.
운동장에서 환성이 터졌다.
“야, 진짜 박격포다. 박격포!”
허나 덕돌은 대학에 와서 운동선수로 될 것이 아니라 하나라도 책을 더 많이 읽어야 한다고 인정했다. 요즘 들어 유학바람이 불어 덕돌도 일본유학을 목표로 정하고 일어공부에 열중했다.
그가 한창 소나무 숲에서 일어를 암송할 때다.
느닷없이 노래를 연습하는 발성소리가 소나무 숲과 꽃송이 숲 속에서 귀를 때리며 울려 퍼졌다.
아~아~아아~ 아~아~아~아
뒤이어 금방울 은방울 굴리는 듯한 청아한 노래 소리가 들려왔다.
도라지 도라지 도라지
심심산천의 백도라지
에헤이야 데이야 에헤이야
한두 뿌리만 캐 내여
대바구니에 찬 백도라지
덕돌은 아무리 귀를 틀어막고 일어를 암송하려고 해도 꾀꼴새 소리 같은 간드러진 노래 소리에 도저히 암송할 수 없었다.
덕돌은 일어책을 쥐고 노래 소리를 피해 소나무숲 속으로 달려 멀리 떠나갔다. 그래도 노래 소리가 어찌나 맑은 고음인지 근본 일어공부를 할 수 없었다. 부득불 덕돌은 일어책을 놓고 사람들의 눈을 피해 권술을 연습했다. 발길질과 주먹질이 동작이 어찌나 빠르고 변화가 많은지 땀이 목을 적실 지경이었다.
“야 멋있게 춤을 춘다.”
덕돌이 머리를 돌리고 보니 웬 열일여덟 살 돼 보이는 처녀애가 보랏빛 라이라크 꽃 무덤 속에 서 있지 않겠는가.
덕돌은 무술을 그만 연습하고 책을 쥐고 자리를 떠나려고 했다. 중학교 때 은숙에게 편지를 썼다가 혼난 적이 있은 후부터 여자애들과 가까이 하지 않았다. 자칫 여자애들의 함정에 빠지거나 감정을 억제하지 못해 대학공부에 영향을 줄까봐 서였다.
어떻게 애나게 입학한 대학인데 여자애로 인해 퇴학을 맞겠는가?
“대학생, 나에게 그 멋진 춤을 배워주지 않겠소?”
덕돌은 그 당돌한 소리에 몸이 오싹해났다.
“이건 춤이 아니야. 여자애들이 무술을 배워 뭘 해?”
덕돌은 일어책을 쥐고 라이라크 꽃송이 속에 서있는 여자애를 피뜩 쳐다보았다. 한 미터 육십도 넘는 훤칠한 키에 꽤나 예쁘게 생긴 처녀애였다.
“그래 뭔가요?”
어쩐지 덕돌은 걸음이 늦어졌다.
“무술이다!”
덕돌은 황급히 떠나가 버렸다.
이튿날 아침 식전에는 덕돌은 그 처녀애를 만났던 라이라크 숲속으로 들어가지 않고 다른 곳에서 일어공부를 했다. 그런데 또 온 뒷동산을 울리면서 그 처녀애의 노래 소리가 울려 퍼지지 않겠는가!
“아니, 정말 저 계집애 성가신데. 어디 공부를 하겠니?”
덕돌은 일어책으로 머리를 툭툭 치면서 발을 땅땅 굴렀다.
“쫓아버려야지.”
덕돌은 노래연습을 하는 목소리가 울리는 라이라크 숲속으로 스적스적 다가갔다. 그 여자애가 한창 한손을 가슴에 얹고 한손으로 라이라크 가지를 쥐고 서서 목을 빼들고 노래연습을 하는 것이었다.
“야, 여기서 노래를 부르지 말라!”
“별, 내 여기서 노래연습을 하는데 무슨 상관인가요?”
눈을 곱게 흘기며 폭폭 쏘는듯한 모습이 퍽 매력적이었다.
“여기서 노래연습을 하니 일어가 머리에 들어가지 않는다.”
그러자 그 처녀애는 몸을 탈며 입이 뾰로통해 종알거렸다.
“별, 레닌은 장마당에서 다 책을 읽었다는데 노래 소리에 공부를 하지 못해요?”
덕돌은 그 예쁜 모습에 욕하려던 말을 다 잊었다. 우유 빛 얼굴, 버들잎 같은 눈썹, 어글어글한 눈, 오똑한 코와 진한 립스틱의 작은 입술은 그야말로 예뻤다.
한참 후에야 덕돌은 “너 여기서 노래 부르면 숱한 대학생들이 정신이 분산돼 공부하지 못해.”라고 대충 욕이라고 했다.
“오빠, 내 노래 그렇게 듣기 싫어요? 그럼 난 끝장인데.”
“끝장이라니? 무슨 말이냐?”
그 처녀애는 몸을 탈더니 어깨를 들먹이었다.
“난 예술학원에 가서 성악가수로 돼야겠는데 대학생오빠마저 듣기 싫다니 합격하지 못할 거 뻔하지 않은가요?”
순간 덕돌은 그 처녀애가 불쌍했다.
덕돌의 매서운 눈길이 느슨히 풀린 것을 본 처녀애는 당돌한 요구를 들이댔다.
"오빠, 날 좀 도와줄 수 없어요?”
“뭘 어떻게 돕는다고 그래?”
그 처녀애는 더 가까이 다가섰다.
“혹시 예술학원에랑가무 단에랑 면목 아는 사람이 없어요? 좀 뒷문거래라도 해서 예술학원에 갔으면 좋겠는데.”
덕돌은 그날 일어공부는 한 줄도 하지 못하고 그녀자애와 청년들의 이상과 전도에 대해 담론했다. 덕돌의 얘기를 듣고 영자라고 부르는 그 처녀애는 눈앞이 환해지는 것 같았고 덕돌은 이상이 있고 포부가 큰 대학생이라는 것을 느꼈다.
그 후부터 영자는 남몰래 덕돌을 묻어다니면서 이것저것 못하는 말이 없었다.
덕돌은 중학교 때 여자애들의 손 한번 쥐어보지도 못하고 혼난 적이 있어 영자와 멀리 하려고 했다. 허나 어쩐지 그러면 그럴수록 저도 몰래 뒷동산에 올라가 노래연습을 하는 영자를 만나고 싶고 싱숭생숭해났다. 어쩐지 영자에게 매료된 나머지 그녀를 도와 유명한 가수로 만들고 싶었다.
덕돌은 궁리 끝에 마을에 하향했던 송선 아줌마가 떠올랐다.
“옳지. 송선 아줌마를 찾아가야지. 듣는 말에 의하면 송선 아줌마는 가무단 단장으로 됐다던데. 그 아줌마를 찾아가면 영자 하나쯤은 예술학원에 붙여주지 못하겠는가!”
사실, 송선은 정성해 서기의 처남댁이라는 인연으로 해 남편과 안해가 모두 “현행반혁명”, “보황파”, “민족반역자”라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지역 반란파 두목인 황종연과 그 졸개 이일룡에게 갖은 능욕을 다 당했다. 지어 이일룡은 송선의 탄력 있는 몸이 탐나 이른바 죄를 심문하는 척 하면서 젖꼭지랑 쇠줄로 매 문 고리에 달아매 놓고 당기거나 고추 물을 입과 코 구멍에 부어 넣으면서 고문들 들이대다 못해 나중에는 옷을 쫄딱 벗기고 윤간까지 했다. 그러고도 모자라 송선에게 숱한 옷을 넣은 옷궤를 지워 길거리를 돌아다니면서 투쟁했다.
반란파들의 피해를 받아 송선은 심심산골에 자리 잡은 함흥대대에 와서 난생처음 소수레를 몰고 낟알까지 실어드리면서 별의별 개고생을 다 했다. 또 흥수와 황종연의 갖은 기시와 능욕을 이겨내면서 죽지 못해 살았다. 그때 양말까지 목에 걸고 숱한 사람들 앞에 허리를 굽히고 투쟁 받던 일로 해 그녀는 지금도 악몽을 꾸다가도 화들짝 놀라 일어나 몸서리를 칠 지경이었다.
허나 “4인무리”가 타도돼 천지개벽이 일어난 후에야 송선과 남편은 시내에 돌아와 한 집에서 살 수 있게 됐던 것이다. 남편 최죽남은 영어 교원이었는데 정성해 서기의 처남이라는 이유로 터무니없이 “민족반역자”, “매국역적”, “보황파”, “현행반혁명분자” 별의별 억울한 모자를 다 쓰고 13년 동안이나 감옥에 갇혀 모진 고생을 다했던 것이다. 상급에서는 황종연과 이일룡 일당을 일거에 제거하고 그들에 의해 억울한 모자를 썼던 공안과 문화 계통의 숱한 억울한 간부들을 해방시켰던 것이다. 정책 락실을 받아 최죽남은 영어와 일어 교수로 교단에 오르게 됐고 송선은 문공단 단장으로 중용됐다.
어느 날 오후, 덕돌은 송영자를 데리고 송선 아줌마네 문공단 사무실로 찾아갔다.
가무단 연습실마다 피아노연주에 맞춰 노래를 연습하거나 무용실에서는 아름다운 멜로디에 맞춰 무용수들이 춤을 연습하고 있었다.
복도에서 여기저기 기웃거리다가 덕돌은 단장실을 찾아내 노크했다.
“들어오세요.”
덕돌을 보자 송선은 자리에서 일어나 마주나오면서 반겨 맞았다.
“와, 멋지다, 김 대장네 대학생아들이 왔구나.”
송선은 다 큰 덕돌을 어린애처럼 포옹해 주며 머리를 손으로 쓰다듬어주었다.
“얘야, 내 함흥대대에 내려갔을 때 너네 아버지 관심을 얼마나 받았다고 그러니?”
그녀는 옆에 여학생이 서 있는 것을 보고 “어서 앉아라. 이 학생은 누구냐?”라고 하며 덕돌에게 물었다.
덕돌은 제꺽 “내 이모사촌 여동생이오.”라고 하며 영자를 되돌아보며
“어서 인사해라. 가무단 김단장이다.”라고 하며 인사를 시켰다.
영자는 허리를 굽혔다 펴며 생글 웃으면서 “김단장님, 안녕하십니까?”라고 했다.
송선은 영자의 아래 위를 훑어보더니 “덕돌아, 너 여동생 정말 예쁘구나. 무용수를 했으면 좋겠다.”라고 했다.
덕돌은 제꺽 임기응변했다.
“김단장님, 그러잖아도 그 일로 해 찾아왔습니다. 얘를 어떻게 예술학원에 입학시킬 수 없겠습니까? 좀 도와주십시오.”
송선은 영자의 아래 위를 재차 훑어보았다.
“글쎄 무용이라면 도와줄 수 있겠는데.. 이 학생은 뭘 지향하오?”
영자는 혀를 홀랑 내밀었다가 인차 입안에 숨기더니 대답했다.
“가수를 지향해요.”
“음, 그래? 노래를 불러보오.”
송선은 송영자가 부르는 간드러진 도라지를 들으면서 흥이 나서 몸을 흐느적거렸다.
송영자가 맑은 목청으로 부르는 노래가 끝나자 박수를 쳤다.
“참 훌륭한 가수감이구먼. 예술학원에 추천해보지.”
송영자는 너무 기뻐 송선과 덕돌을 번갈아보면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 후부터 영자는 송선의 소개로 한 사영 예술학원의 유명한 가수 출신 성악교수 허송철을 모시고 노래공부를 하게 됐다. 또 송선의 제의에 따라 송선의 직접적인 가르침 밑에 무용도 학습했다. 어떤 때 송선이 가무단을 이끌고 외지로 공연을 나가면 대신 송선이 소개해준 무용 강사 마용봉에게서 무용의 기초동작부터 배웠다.
송영자는 덕돌에게 한없이 감사했다. 영자는 눈앞이 환해졌다. 전도가 창창해졌다. 당장 가수나 무용수가 되는 꿈을 꿔 보기도 했다. 덕돌은 자기의 미약한 힘이나마 한 여자애의 전도를 개척하는데 도움을 준 것만 같아 가슴이 뿌듯해났다.
어느 날, 덕돌은 해옥 아재네 아들 문일의 대학시험복습제강을 얻어다 주려고 찾아갔다.
헌데 널판장자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자물쇠가 잠겨 있었다. 별수 없어 덕돌은 “전쟁과 평화”란 소설을 보면서 기다렸다.
그때 자전거 방울소리 울리더니 웬 30대 사내가 오더니 덕돌을 보고 “누굴 찾소?”라고 물었다.
덕돌은 찾아온 사연을 말했다.
"최의사 언제 오겠소. 우리 집에 들어가 기다리오."
덕돌은 그 사내를 따라 윗집에 들어갔다. 윗방에서 파란 게 내복을 입은 예쁜 쌍까풀 처녀애가 밥상에 마주 앉아 공부를 하고 있었다.
그녀는 덕돌을 쌍까풀눈으로 쳐다보다 살며시 내리깔며 책을 내려다보는 것이었다.
사내는 “최 의사네 어떻게 되는 친척이오?”하고 물었다.
“5촌 아재입니다.”
“고향은 어디요?”
“진수해입니다.”
그러자 처녀애는 덕돌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으면서 책장을 번지는 것이었다.
“그래 대학복습을 하오? 어째 복습제강을 가지고 다니오?”
“아니, 난 대학생입니다. 문일한테 복습제강을 주자고 얻었습니다.”
“오, 그래?”
그녀도 덕돌이 대학생이란 말에 머리를 들고 맑은 눈길을 보냈다. 그때 그녀의 보름달 같은 얼굴은 아주 예뻤다.
송영자의 걀죽한 얼굴보다 보름달 같은 동그스름한 얼굴이 짧은 쌍태 머리와 어울려 옛날 전통조선족 여인을 보는 상 싶게 예뻤다.
“내 여동생이오. 후에 봉선의 대학입학복습도 배워주오.”
덕돌은 황망히 번대머리오빠게에 “예…”라고 하며 처녀애를 흘금 건너다보았다.
봉선은 함박꽃처럼 쌍겹눈으로 덕돌을 보며 생글방글 웃었다.
“배워주세요. 어떻게 복습했으면 좋겠는지 통 모르겠소.”
“글쎄 후에 시간이 나지면 오후쯤에 다시 찾아올게.”
덕돌은 시간도 퍼그나 흐른 것 같아 황망히 그 집에서 나왔다.
(그 처녀애가 참 예쁘구나.)
그날 덕돌은 문일한테 복습제강을 건네주고 집으로 돌아오면서도 봉선이란 처녀애가 눈앞에 삼삼거렸다.
며칠 후 오후에 덕돌은 저도 몰래 작문을 한편 지어가지고 봉선을 찾아갔다.
봉선은 책을 내려다보다가 아주 반갑게 맞아주었다.
“오, 문일의 형님이 왔구먼. 신용이 있구먼요.”
덕돌은 정성들여 쓴 작문을 내놓았다.
“잘 쓰지 못했는데 참고하오.”
봉선은 작문을 쭉 내리 읽어보았다.
“야, 정말 글을 잘 쓰는구먼요. 난 언제 이렇게 글을 쓸까?”
“자꾸 써보면 되오.”
봉선은 작문지로 발갛게 상기된 얼굴을 가리며 덕돌을 보고 “부타가기오. 잘 배워주오.”라고 했다.
봉선은 식탁에서 사탕을 자그마한 대바구니에 담아 가져왔다.
“문일의 형님이라는 걸 보면 오빠라고 불러야 되잖겠어요?”
“아니, 난 이제 21세 밖에 안 되오.”
“어마나. 이걸 어쩌나 .내보다 한 살 지하구먼요.”
“그럼 내가 누나라고 불러야 하오?”
“아니, 아니, 나이와 무슨 관계예요?”
봉선이 서운함을 금치 못하며 하는 말에 덕돌도 돌려댔다.
“그래, 나이 지하라도 봉선의 대학입시복습을 가르칠만 한지?”
“80년대 대학생, 얼마나 멋져요?”
봉선은 덕돌의 왼쪽 가슴에 단 대학 마크를 경모의 눈길로 쳐다보면서 한숨을 호 내쉬었다.
“저도 복습을 잘해 대학에 붙으면 되지.”
“언제 붙겠어요? 공부가 통 머리에 들어가지 않아요.”
그날 덕돌과 봉선은 대학복습에서 작문으로부터 이상과 전도 등에 대해 해 넘어갈 때까지 이야기를 나누고 나서 갈라지기 아쉬워하면서 갈라졌다.
“작문을 한편 써놓소. 후에 내 와서 읽어보고 또 가르쳐 줄게.”
“그래요. 써보지. 대학생 앞에서 손이 떨려 어디 쓰겠소?”
“잘 쓰리라고 믿소.”
“가정교사한테 한 턱 내야겠소.”
후에 덕돌은 시간을 내서 저녁에 봉선을 찾아갔다.
봉선은 아주 반겨 맞았다.
“오빠는 어데 갔소?”
“자리를 피했소.”
그런데 옆에는 봉선의 여자 친구 하나 앉아 있었다. 그리하여 덕돌은 점잖게 앉아 봉선이 또박또박 쓴 작문을 읽고 줄을 쪽쪽 그으면서 수개해주었다.
그러고 나서 작문을 잘 지으려면 평소에 인상 깊은 일들로 일기를 써야 한다고 했다.
봉선은 실용적인 물음을 제기했다.
“대학시험에 제목을 떠나지 않자면 어떻게 하면 좋아요? 숱한 작문을 써보면서 준비했는데 그 제목이 나오지 않으면 대사인데요.”
덕돌은 제꺽 대답해주었다.
“준비한 작문과 제목이 다르게 나오면 우선 그 제목과 맞는 내용의 작문을 골라 써야 하오. 다른 방법은 내용을 봐서 제목에 맞게 서두와 결말을 제목과 비슷한 말로 바꿔 둘러맞춰 써넣어야 하오.”
“오, 그래. 그런 방법을 쓰면 되겠어. 얼마나 근심했는지 몰라요. 대학생선생이 있긴 있어야 되겠다.”
봉선은 어린애처럼 기뻐했다.
봉선은 친구한테 뭐라고 귀속말을 하더니 “내 오늘 감사해 대접을 해야겠소.”라고 하며 덕돌을 보고 가자고 했다.
덕돌은 술이나 한잔 얻어먹겠다고 어깨가 으쓱해 따라나섰다.
쌍태머리를 뒤로 넘기며 사뿐사뿐 걸어가는 봉선의 뒤를 따라가며 물었다.
“어째 친구는 데리고 가지 않소?”
“음, 옆에 사람 두고 어찌 상대접을 하겠소?”
“?”
덕돌은 의문스러워 하면서 뒤따라갔다.
봉선은 달빛이 깔린 소학교 마당으로 들어갔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더니 덕돌 앞에 마주 섰다.
“대학생이노라고 날 업신여길 테요?”
밤중에 홍두깨라더니 봉선은 불쑥 이런 말을 꺼냈다.
“아니, 무슨 말이오? 난 아무 틀도 차린 게 없는데. 오해하지 마오.”
봉선은 덕돌의 손을 잡고 조용히 속삭였다.
“내가 만약 덕돌을 좋아한다면 어쩌겠소?”
덕돌은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서며 손을 풀어냈다.
“이러지 마오. 난 한창 대학공부를 하는 학생이란 말이오. 학교 규정에 대학생은 연애를 하지 못한다고 했소.”
“어우, 천진한 어린애 같다. 속은 엉큼하면서도.”
“무슨 소리요? 난 그저 제 오빠 부탁대로 절 도와줄 뿐이오.”
“거짓말, 눈길이 날 좋아한다는 걸 말하던데요.”
봉선은 뜨거운 입김이 얼굴에 풍길 지경으로 가까이 다가서 똑바로 쳐다보았다. 달빛을 빌어서도 그 또렷한 쌍까풀눈에 은근한 정이 담뿍 담겨 반짝이는 것이 보일 지경이었다.
“이러지 마오. 전 내보다 한 살 이상이오.”
“나이가 그렇게 대단해요? 애정에 나이가 무슨 대사인가요?”
“아, 이러지 마오.”
“전 남자요? 왜 이렇게 졸장부처럼 놀아요? 저를 본 후부터 대학복습이 머리에 들어가지 않는단 말이오.”
덕돌은 다가드는 봉선을 밀어냈다.
“그럼 다시 오지 않을게.”
봉선은 돌아서며 어깨를 들먹였다.
“남자들이란 이렇단 말이야. 정인군자 상을 하다가도 책임지지 않고 달아날 궁리부터 한단 말이야. 흑, 흑, 흑.”
덕돌도 필경은 사내인지라 그런 봉선을 위로하지 않고 쥐구멍을 찾아 달아날 수는 없었다.
“봉선이, 나를 양해하오. 저나 내나 전도를 개척할 때가 아니오. 복습을 잘해 대학에 붙소. 그때 다시 보기요. 지금은 이런 일로 해 전도를 그르칠 순 없소. 나도 대학공부를 해야 하고.”
그쯤 해서 덕돌은 그날 저녁에 몸에 열이 올라 울고불고 하는 봉선을 집에 보냈다. 침실에 돌아와서도 봉선이가 꽤나 부담스러웠다.
(예쁘긴 예쁜데. 대학생도 아니고 나이도 한 살 위란 말이야.)
온 저녁 아무 책도 보지 못하고 눈앞에 삼삼거리는 봉선을 두고 궁리하다가 저도 몰래 잠이 들어버렸다.
후에 덕돌은 봉선을 찾지 않고 대신 문일을 찾아가 작문지도를 해주고 풀기 어려워하는 수학문제를 함께 풀기도 했다. 기말복습도 힘겨운 것이 있었지만 봉선을 괜히 책임지지 못하겠으면서도 들뜨게 해 대학입학시험복습에 영향을 줄까봐 두려웠던 것이다.
(봉선이, 제발 정신을 집중해 복습을 잘해 대학에 입학하오.)
그것이 봉손에 대한 덕돌의 충심으로 되는 축원이었다.
7.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
눈보라가 쌩쌩 휘몰아치는 어느 일요일 날 아침, 덕돌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스케이트를 타러 대학교 빙장으로 올라가려고 했다.
매화꽃이 핀듯이 눈꽃이 매달린 나무들이 둘러선 빙장에서 덕돌과 영화가 스케이트를 탄다고 하면 쌍제비가 쌍쌍이 나래치는 것 같다고 혀를 끌끌 찰 지경이었다. 한 살 위인 영화의 탄력적인 몸매는 뒤에서 따라가며 스케이트를 타는 덕돌의 마음을 싱숭생숭하게 만들었다.
“얘, 함흥대대에서 편지가 왔다.”
덕돌이 스케이트를 둘러메고 침실 문을 열고 나가려고 할 때 반장 허운호가 편지 한통을 건네주었다.
덕돌이 받아보니 넷째누나 은자한테서 온 편지였다.
“어쩌다 편지를 다 보내왔어?”
넷째누나는 덕돌이 어려서부터 따르던 누나였다. 어려서 다른 누나는 몰라도 넷째누나만은 부모에게 쫓겨난 것을 계속 “넷째누나 없어 재미없다.”라고 떼질 쓰며 불러들이던 덕돌이였다. 털모자도 없어 항상 넷째누나가 하학할 때면 복도에 나와서 머리에 수건을 꽁꽁 동여주군 했다. 덕돌이 대학교에 입학한 후 넷째누나와 매형 허학순은 학교 숙사에까지 찾아와서 생일을 축하해주었다. 그때 큰 매형도 한 달 로임 54원에서 15원을 가지고 몇 번이고 숙사에까지 찾아와 축하해주었다.
그런데 편지를 읽어보니 깜짝 놀랄 사연이 담겨 있었다.
“…시삼촌과 시고모가 시아버지 생일에 왔었다. 그들은 내가 결혼한 지 5년이나 됐는데 애를 낳지 못한다고 양천 허 씨 가문의 대를 끊는다고 나를 욕하고 때렸다. 나는 지금 시삼촌에게 쫓기어 다니던 악몽을 꾸면서 자다가도 놀라 화닥닥 깨나 일어나곤 한다. 난 지금 이혼할 예산인데 네가 와서 시비를 갈라 달라. 난 시집갈 때 가져간 옷궤에 입던 옷을 수레에 싣고 본 가집에 와 있다. 내 무슨 죄를 졌다고 이런 봉변을 당했는지 모르겠다…”
“누가 감히 누나를 때려?!”
덕돌은 스케이트를 숙사에 팽개치고 그 길로 시퍼런 검을 빼들고 곧추 함흥대대로 뛰어갔다.
눈보라 치는 날이어서 칼바람이 언 얼굴을 갉아 가는 것 같았다. 허나 덕돌은 분김에 추운 줄도 모르고 달음박질했다. 거의 40 리를 닫다가도 몇 발자국 걷고 걷다가도 달려갔다.
(매형은 뭘 하는가? 여편네도 보호하지 못하다니. 흥! 머저리야!)
넷째누나가 아래 마을 계수동에 있는 허학순한테 시집 갈 때에도 덕돌은 상빈으로 갔었다. 허씨 집에 가서 상대접을 받았다. 허씨 일가에는 사내대장부 같은 싸움꾼과 씨름꾼들이 여럿이 있어 덕돌은 사돈이란 인맥으로 기반을 든든히 닦을 수 있었다.
한번은 학순의 조카 허민선이 진수해 영화관 앞에서 숱한 한족사내들에게 맞아 대고 있었다.
덕돌이 달려가 보니 한위신의 형 한위광이 주먹질을 하고 있었다. 옆에서 구경하던 조선족 청년들은 민선이 맞는 것을 보면서도 누구도 감히 나서 말리지 못했다.
“형님, 때리지 마오!”
그때 덕돌이 나서 한위광의 팔을 잡으면서 말렸다.
덕돌을 피뜩 돌아보던 한위광은 휘두르던 주먹을 내렸다.
“아는 새끼야? 꽤나 우쭐거린다. 좀 버릇을 가르쳐주자고 그래.”
“형님, 친척 형님이오. 때리지 마오.”
한위광은 민선을 쏘아보며 “덕돌의 낯을 봐서 놔둔다. 다신 진수해에 와서 우쭐거리지 마라.”라고 했다.
그제야 한다하는 싸움꾼이자 씨름꾼인 민선을 비롯한 허씨 일가는 덕돌이 진수해 시내에서도 한다하는 싸움꾼과 휩쓸려 다닌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됐다.
“허송근이 감히 내 누나를 때려?!”
덕돌은 생각할수록 부아통이 터졌다.
“개산툰진에서 교원질을 한다는 사람이 조카며느리한테 손을 대? 네놈이 주먹이 얼마나 세기에 여자한테 손을 대?”
덕돌은 당장 개산툰으로 달려가 단매에 허송근을 때려눕히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웠다.
그가 씩씩거리며 달리다다니 어느 결에 계수동에 이르렀다.
(나는 대학생이기에 절대 허씨네처럼 손을 대지 않겠다. 먼저 법률이란 무기로 넷째누나의 한을 풀어드리고 재산문제도 해결해야지.)
그는 울컥 치미는 밸을 꾹 참으면서 검을 집 울타리 바자 밑에 세워놓고 매형네 문을 꽝꽝 두드렸다.
“누구요?”
“내오!”
덕돌은 집문을 뚝 떼고 성큼 들어가 갖출 예의를 다 갖추고 점잖게 구들에 올라섰다.
학순과 부모들은 로지심 같은 덕돌이 들어서자 질겁해 어정쩡해 서있었다.
“모두 서서 뭘 하오? 지나가던 나그네 왔는데 술상이나 내놓소.”
학순은 황급히 서둘러 식탁을 들춰 술상을 챙겨놓았다.
덕돌은 올방자를 치고 앉아 학순을 보고 “술을 붓소.”라고 했다.
학순이 술을 붓는데 술병이 덜덜 술잔을 쪼았다.
“허. 이 사람, 술병이 부셔져 유리가루 술잔에 들어가겠소.”
덕돌은 아예 큰 사발에 술을 쿨럭쿨럭 부어 단모금에 60도짜리 술을 밑굽을 내고 밥상에 탕 메쳤다.
“말해라! 이 새끼야. 삼촌과 함께 여편네를 때려 쫓아내고서도 발편잠을 자?!”
학순은 무릎을 꿇고 빌었다.
“처남, 내 때린 게 아니다. 삼촌이 때렸다.”
“그래, 당신은 제 여편네도 보호하지 못하는가? 삼촌을 말리지 못해? 그래 네 삼촌 허송근이 그렇게 주먹이 세니?! 내 어디 그 놈부터 한번 봐야겠구나!”
사돈영감이 뭐라고 끼어드는 것을 덕돌은 눈을 부라리면서 쏘아부쳤다.
“개 소릴 작작 쳐! 너희들, 내 누나를 감히 때리고 쫓아내? 애를 낳지 못한 게 우리 누나 혼자 탓인가?”
덕돌은 학순을 쏘아보았다.
“너 고자 때문이지.”
그래도 학순은 죄를 지었기에 아무 대꾸도 못했다.
“내 마음이 독하게 변하기 전에 똑똑히 서둘러라. 울 누나 나가면서 가지지 못한 재산과 치료비로 500원을 당장 내놔! 어디 주먹맛을 보겠는가? 아니면 누나 피 값을 물 거야?!”
학순은 불길이 이글거리는 덕돌의 눈길을 감히 쳐다보지도 못하고 온몸을 사시나무 떨듯 부들부들 떨었다.
덕돌은 혹 참지 못해 주먹이라도 휘둘러 실수할까봐 훌쩍 일어나 자리를 떴다.
집으로 올라와 보니 넷째누나 은자는 마구 덕돌을 붙들고 원통해 울었다.
그에게서 들으니 시삼촌 허송근과 시고모는 음력설을 쇠러 와서 은자가 애를 낳지 못한다고 하면서 몰아주었다. 은자가 한마디 대꾸도 하지 않고 자리를 뜨자 그자들은 시동생 집에까지 쫓아와 때렸다.
은자는 바지마저 마구 벗긴 채 내복바람에 비명을 지르며 한마을에서 시집온 황인숙의 집에까지 달아났다. 허송근은 황인숙이네 집에까지 쫓아왔다. 황인숙은 은자를 고방으로 해 뒤문으로 빠져 달아나게 했다.
허송근이 고방에까지 쫓아 들어오자 은자는 뒤울안으로 해 황급히 개굴 안에 들어가 숨었다.
짐승 같은 허송근은 개굴에 들어간 은자를 찾아내 계속 때리며 “개굴에 들어가 숨어? 넌 개다.”라고 하며 온 동네 떠나가게 고함쳤다.
황인숙과 남편 그리고 동네 사람들이 모여들어 말려서야 은자는 마수에서 벗어 나게 됐다. 그녀는 그 길로 은자는 맨발 바람으로 본 가집에 달아났던 것이다.
이 얼마나 천인공노할 일인가?
덕돌은 그 말을 듣자 분이 치밀어 씩씩거렸다.
그때 상순은 덕돌을 보고 눅잦혔다.
“너도 이젠 대학생이 아니냐? 철없이 주먹으로 일을 그르치지 말고 법으로 해결해야 한다. 지금 우리 쪽에서 피해자인데 자칫 주먹을 휘두르면 피고로 될 수도 있다.”
“알았습니다. 내 먼저 법으로 해결하겠습니다.”
이튿날 상순은 덕돌과 은자를 데리고 법원으로 찾아갔다. 신소접대실의 법관은 덕돌이 쓴 신고서를 읽어보고 은자의 사건제보까지 듣고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허허허. 가내 말다툼이구먼. 이혼했으면 됐지. 이제 법놀음을 해서 뭘 하오?”
덕돌은 화가 나 언성을 높였다.
“아니, 아녀자가 시삼촌에게 맞았는데 그래 법원에서 아무 처리도 안 합니까?”
그러자 법관은 안경알 밑으로 덕돌을 건너다보면서 사무상을 똑똑 두드리더니 말했다.
“치안사건은 공안국에서 처리하지. 법원에서 처리하지 않소. 만약 형사사건이면 우리 법원에서 접수하오.”
“그럼 이혼 재산분쟁 같은 민사사건도 법원에서 해결하지 않습니까?”
“이혼재산분쟁 같은 건 집에 돌아가 자체로 해결하오.”
“아니, 인민법원에서 백성들이 억울하게 얻어맞은 사건도 접수하지 않으면 뭘 합니까?”
그러자 법관은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보오. 오늘 찾아온 신고자만 해도 20여명이나 되는데 그런 작은 사건을 다 접수하다나면 법원에 법관이 학교의 교원만큼 많아도 다 처리하지 못하오. 정 억울하면 공안국에 가보시오.”
말을 마치자 그 법관은 아래 사람을 접대했다.
상순과 덕돌은 속에 내려가지 않았지만 별 수 없이 법원에서 나왔다.
법원 문어귀 부근의 자그마한 식당에서 정심을 대충 먹으면서 덕돌은 울분이 터져 견딜 수 없었다. 허나 꾹 참고 집으로 돌아오는 수밖에 없었다.
그는 귀로에 들어서면서 법원 대문에 걸어놓은 “인민법원”이란 커다란 간판을 쳐다보았다.
(흥! 무슨 인민법원?)
덕돌은 불만이 가득해 집으로 돌아오면서 물었다.
“아버지, 공안국에 제기하면 어떻습니까?”
그런데 뜻밖에도 상순은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소송놀음을 그만두자.”
그 말에 놀랐다.
“한뉘 빚을 지고 살아도 시비에 지고 살지 못한다던 분이 무슨 말씀입니까? 어찌 소송을 그만 둡니까?”
그러자 상순은 한숨을 후 내쉬었다.
“옛날부터 소송놀음에 집안이 망한다는 말이 있다. 소송에 이기자고 소를 팔고 땅을 팔고 나중에 집까지 다 팔아 망한 사람이 한두 사람이냐? 넌 아직 세상을 잘 모른다.”
상순은 옛날 지학사와 소송을 하던 일을 말하면서 법원 소송이 힘든 말을 했다. 그러나 천진한 덕돌은 자기 고집을 세웠다.
“건 해방전 얘깁니다. 해방전 일본 놈의 세상에서도 아버진 지주한테 배상시켰는데. 황차 지금 사회주의 나라 법원은 아주 청백하지 않습니까?”
“옛날이나 지금이나 법관은 최고무상의 권력이 있다. 문화대혁명을 거치면서 사법부문이 혼란해져 그 틈에 일부 법관들은 권력을 빌어 사리를 도모하려고 한다. 뭔가 검은 돈이나 술이라도 얻어먹어야 일을 본다더라.”
“얼마나 주면 될까?”
“그만 둬라. 법관들을 매수하는 사람도 청백하지 못한 거야. 도리 있는데 왜 먹여서 일 처리를 하겠냐? 안되면 그만두지. 물론 김창남 국장한테 말하면 허송근이나 학순 쯤은 혼낼 수도 있다. 허나 우린 절대 법대로 하지 뒷문거래는 하지 말아야 한다.”
덕돌은 아버지 성격을 알고 있어 더 말하지 않고 집에 돌아와 맥이 풀려 한잠 푹 잤다.
허나 자고 일어나 곰곰이 다시 생각해봐도 속으로 이 송사에 질수 없다고 생각했다.
양미간을 찌프리고 궁리하던 덕돌은 계수동에 가서 기사 취재를 하는 것처럼 여동창생 황인숙과 그녀의 남편 그리고 마을의 목격자들을 일일이 찾아 허송근이 은자를 때린 사실을 기록한 후 증명인 란에 서명하게 했다.
이튿날 아침 일찍 일어나 또 법원을 찾아가 들이밀었다.
마을 사람들의 두툼한 증명서들을 보더니 법관은 그제야 “ 이 사건은 영향이 아주 크구먼.”라고 하며 신고용지를 두개 주었다.
덕돌은 뜻밖에 일이 돼나가자 아주 기뻤다.
그는 그날 저녁으로 집에 돌아와 신고서를 썼다.
“…허송근은 교원으로서 조카며느리를 온 동네를 쫓아다니면서 때렸다. 그 죄는 형사죄로 다스려야 하겠지만 교원이기에 스스로 반성하도록 하며 민사책임만 신고한다…”
보름 후에 허송근에게서 답변서가 왔다.
그는 답변서에 자기 잘못을 뉘우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은자가 재물에 눈이 어두워 소송했다면서 한치의 양보도 하지 않겠다고 떠벌였다.
“이놈 새끼, 주먹맛을 봐야겠는가?”
덕돌은 잉잉 우는 주먹을 손바닥에 대고 탕탕 쳤다.
법원에서는 처리를 기다리라고 하는데다가 덕돌은 기말시험복습을 해야겠기에 법원의 처리를 믿고 기다리기로 하고 학교로 돌아갔다.
방학이 돼 집으로 돌아오면서도 법원에서 합당하게 처리했으리라고 믿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은자가 법원에서 소송을 철회했다고 했다.
“아니, 그 소송을 어떻게 고생해 법원에서 접수하게 했는데 아무런 처리도 받지 못하고 철회한단 말이오?”
덕돌은 집구들에 엉덩이를 붙이지 않고 그 자리로 법원으로 씽 달려갔다.
담당 법관은 덕돌을 보자 따지고들었다.
법관은 철면피하게도 이렇게 말했다.
“당사자 김은자가 그간 법원에 와서 소송을 철회하겠다고 해서 철회했소. 동무가 동생이겠구먼. 은자 동무는 동생이 어려서 세상물정을 모르고 소송을 자꾸 하자고 해서 억지로 했는데 철회하겠다고 했소.”
법관은 말을 마치자 회의 있다면서 자리를 피했다.
“넷째누나가 이럴 수가있는가?”
덕돌은 주먹을 쥐고 집으로 향했다. 그런데 부르하통하 물이 녹아서 집채 같은 얼음장이 세찬 물결에 떠내려가고 있었다. 신을 벗고 찬 얼음물에 들어서 건너다가 허벅다리를 치는 강물은 더 건널 수 없었다. 그때 집구들장만한 얼음이 떠 내려오는 것을 보고 제꺽 뛰어 올랐다. 그는 얼음위에 선채 떠내려 오는 나뭇가지를 주어 삿대처럼 짚어 밀면서 간신히 사품 치면서 흐르는 깊은 강물을 건너갔다.
그제야 덕돌은 한숨을 후 내쉬었다.
(에참, 아버지 말처럼 송사 길이 이렇게 험난할 줄은 몰랐구나.)
집에 들어서자마자 덕돌은 부모에게 법관에게서 들은 말을 하고나서 은자에게 따지고 들었다.
“누나 소송을 철회했소?”
그러자 은자는 이실직고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쩌겠니? 담당법관이 이러더라. ‘소송놀음을 하면 원수로 돼 보복이 두렵지 않은가? 몇백원으로 해 원수를 맺을 게 없잖은가? 하루 부부 백일 은정이라고 하루 밤에도 만리장성을 쌓는다고 하지 않소? 필경 5년이나 산 부부지간에 원수를 맺어 무슨 좋은 일이 있겠소? 소송을 철회하오.’ 이래더라. 그래서 철회했다.”
“누나가 어쩜 이렇게 할 수 있소? 야, 정말, 내 어떻게 천신만고 끝에 얻은 소송권을 내하고 토론도 하지 않고 포기한단 말이오? 어쩜 누난 시켜준 서방질도 못하오.”
덕돌은 억이 막혀 더 말이 나가지 않았다. 울분을 참으려 해도 참을 수 없었다.
상순은 분통이 터져 씩씩거리는 덕돌의 손을 잡고 말렸다.
“얘야, 어떤 때에는 양보하고 지는 것이 이기는 거야. 법에서 해결해 주지 않는 것을 어떻게 하겠니?”
“그래 당하고 만단 말입니까? 그 허씨들이 우리 김씨 가문을 어떻게 보고 누나를 짓밟는단 말이오?”
덕돌은 집을 나서자 그 길로 공안국에서 일하는 이모부 강운룡을 찾아갔다.
강운룡은 “4인무리”가 꺼꾸러진 후 반란파 두목 김용만이 공안국 국장자리로부터 감옥에 옮겨가고 김창남 국장이 국장으로 승진한 후 다시 김창남 국장의 부름을 받고 공안국에 와서 형사정찰과 과장으로 임명됐던 것이다.
한번은 시내 한 기계공장 사무실에 화재가 났다. 강운룡 과장은 수사 일꾼들을 이끌고 사건현지에 가서 세밀한 수사를 벌렸다. 그러나 수사 일꾼들은 아무런 단서도 잡지 못했다. 그때 강운룡은 물이 괴죄죄한 잿더미로 된 공장 사무실자리에 웬 축구공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저건 무슨 공이오?”
공장 사무실 주임과 물어보니 “화재가 나기 전날에 우리 공장 직원의 애가 공을 차다가 우리 사무실 유리창문을 깨버렸습니다. 그래서 그 애의 공을 배상 대신 빼앗아 둔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강운룡은 피뜩 가능하게 그 애가 자기 공을 빼앗았다고 악감을 먹고 불을 지르지 않았겠는가는 추측이 들었다. 과연 그 애를 데려다 심문했는데 강운룡 과장의 예측과 맞아 떨어졌다. 그리하여 한차례 방화사건을 신속하게 해명했다.
한번은 화룡시 복동진의 한 살인악마가 자동차를 빼앗아 타고 도주해 동불공사 사수대대에 잠입했다. 그때도 강운룡은 총지휘부의 제1선 정찰을 책임지고 직접 살인악마가 숨은 집 구새목에 가서 적정을 살피고 제1선 정보를 총지휘부에 보고했다. 그리고 처음에는 마을의 정치대장과 끌끌한 민병을 들여보내 떡을 치는 척, 트럼프를 노는 척 하다가 살인악마를 나포하려는 나포방안을 작성해 총지휘부에 교부했다. 그 작전방안대로 했지만 정치대장이 손이 떨려 떡메로 살인악마의 대가리를 치지 못했다. 그때 강운룡은 과단하게 제일 먼저 집안에 덮쳐들어가 살인악마를 깔고 들어앉아 목을 눌렀다. 살인악마가 호주머니에 손을 넣어 권총을 꺼내려는 순간 그는 무릎으로 살인악마의 대가리에 강타를 안기며 그 놈의 오른 손을 꽉 눌렀다. 그때 뒤따라 들어간 수사 일꾼들과 함께 살인악마를 제압하고 호주머니의 권총도 빼앗아내고 수갑을 철컥 채웠던 것이다. 하여 그는 2등공을 세우고 상금 200원을 탔던 것이다.
어려서부터 반도체부속품이랑 시계랑 사러 다니면서 덕돌은 이모부 강운룡을 하늘을 떠인 사내대장부로 존경하고 따랐다. 집안에 송사가 생기자 덕돌은 이모부를 찾아가 가르침을 받고 싶었다.
덕돌이 찾아가자 키 넘는 동생 강호가 경찰복차림으로 군례를 척 붙이며 인사했다.
“형님! 경례!”
여동생 향화도 반겨 맞았다.
“오빠!”
향화는 제법 처녀티가 났다. 1미터 65나 되는 호리호리한 체격에 정말 예뻤다.
이모는 조카가 오자 뜨끈뜨끈한 돼지고기장국을 끓이기에 이마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내밴 채 여념이 없었다.
“아재, 강호는 경복을 입었구먼. 축하하오.”
“응, 그래. 걔는 교통경찰대대에 들어갔다.”
“음, 잘 됐구나.”
덕돌은 강호의 경모를 머리에 단정히 씌워주면서 어깨를 다독여주었다.
“잘해라.”
그는 장의자에 앉아 한손에 하나씩 강호와 향화의 손을 꼭 잡고 그간 그립던 얘기를 한바탕 나누었다.
정심에 이모부가 왔다.
덕돌은 이모부에게 사들고 간 술병을 들어 부어드리며 단도직입적으로 은자가 당한 일을 죽 말했다.
그러자 강운룡은 술잔을 들어 마시며 한참 궁리했다.
“가만 놔두지 말아야 해. 그런데 원래 소송놀음이 그리 쉽니? 담당법관이 가능하게 개산툰에 가서 답장을 받으면서 허송근이란 자와 뭔가 은밀히 단짝이 됐을 수 있다. 뻔히 은자가 억울하게 맞고 재산 한푼 가지지 못한 채 쫓기다 시피 나왔는데 조해도 시키지 않고 그게 뭐냐? 겁이 많은 아녀자에게 보복이 두렵지 않은가? 원수를 맺어 무엇이 좋겠는가? 겁을 먹여 소송을 철회한걸 봐라. 완전히 피고 허송근의 편을 들고 있잖니? 거기에 뭔가 감춰진 거래가 있었을 수 있다.”
“그럼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덕돌이 술을 또 한잔 부어 올리면서 묻자 강운룡은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그쯤 해 그만둬라. 담당법관이 그렇게 편을 드는데 이제 철회한 소송을 다시 하자면 상급 법원에 기소해야 된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상급법원에서 아래 법원에서 철회한 소송을 재 접수하지 않고 아래 법원에 보낸다. 법관끼리 서로 눈치를 보면서 돕고 보호하고 짜고 든단 말이다. 툭 까놓고 말해 관장에선 관리끼리 서로 보호한단 말이야.”
그 말을 듣고 덕돌은 “야, 아직도 세상이 온통 새까맣구먼. 문화대혁명이 끝난지도 이젠 몇햅니까.” 하고 감탄했다.
강운룡은 한숨을 후 내쉬더니 “너희들 대학생들은 세상을 너무 천진란만하게 밝게 보는구나.”라고 했다.
덕돌은 “‘4인무리’를 타도하고 반란파 두목 김용만과 황종연 일당을 처리했는데도 아직도 그렇습니까?”라고 의문을 제기했다.
“‘문화대혁명’ 바람에 법제풍기를 문란하게 만들어 그 여독이 한 동안 갈 거야. ‘문화대혁명’ 기간에 어디 법이 있었니? 죄도 없는 억울한 간부들을 마구 비판, 투쟁하고 투옥하고 총살까지 하지 않았니? 료녕성당위 선전부에서 간사로 일하던 장지신의 억울한 사건을 봐라. 문화대혁명기간에 장지신이 강청을 욕했다고 ‘4인무리’들은 장지신에게 갖은 혹형을 다가하다가 총살했지. 총살할 때 장지신이 구호를 부를 까봐 인후를 베 구멍을 낸 후 목수건을 둘러 가린 후 비밀사형장에 내다가 사형했지. 사형한 후 어쨌는지 아니? 사체를 기름 가마에 처넣어 부글부글 끓여 뼈를 건져내 의학원 사체해부실에 가져다 골격표본을 만들었단다. 후에 자녀들이 장지신의 뼈를 의학원에서 가져다 안장했단다.”
덕돌은 그 말에 몸서리를 쳤다.
“야, 정말 가혹한 정치가 범보다 무섭다더니 세상에 그런 잔혹한 일도 다 있답니까?”
이모부는 오후에 출근하면서 말렸다.
“법원에 절대 상소하지 말라. 쓸데없는 일이다. 성공가망이 없다. 학순인지 뭔지 하는 자를 직접 찾아가 도리를 따지고 이혼했으면 은자에게 재산을 얼마간 달라고 해보렴.”
덕돌은 그렇게 믿던 이모부에게서도 확답을 얻지 못하자 가슴이 갑갑해났다. 혹시 풍상고초를 다 겪은 아버지와 이모부의 말씀이 맞을 수도 있었다. 순간 법은 멀고 주먹이 가깝다는 말이 번개처럼 뇌리를 탁 쳤다.
“그래, 법률로 안 되는 판에 내 손으로 해결해보자.”
덕돌은 비장한 결심을 내렸다.
그는 우선 지혜와 글로 허씨 일가를 공격하기로 했다.
그는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필을 들어 이런 최후통첩을 써 허학순에게 부쳐 보냈다.
최후통첩!
허송근, 네깐 놈이 내 어진 누나를 온 마을 쫓아다니면서 때리고 빈털터리 알몸으로 쫓아내고서도 잘 될 것 같으냐? 학순, 너는 남편으로서 자기 아내도 보호하지 못하고 맞게 놔둔 멍청이야. 보름 안으로 내 누나 치료비 300원에 이혼한 후 재산 값으로 200원을 가져오라. 그러지 않는 날엔 너 일가를 가만 놔두지 않을 것이다. 온전히 살고 싶으면 알아서 처리해라. 보름 후에도 가져오지 않으면 나를 원망하지 마라.
굴뱀 덕돌
허송근이 있는 개산툰의 한 소학교 당지부와 현 교육국에는 허송근이 조카며느리를 때린 죄악을 폭로하고 당 기율에 근거해 처분할 것을 요구하는 편지를 써 부쳐 보냈다.
일주일이 됐는데도 학순은 누나한테 돈을 가져오지 않았다. 후에 덕돌이 계수동에 가서 알아보니 최후통첩을 받고 겁을 집어먹은 학순은 부모를 데리고 마을을 떠나 진수해 시내에 세집을 맡고 숨어 버렸다.
덕돌은 진수해에 가서 한족친구 고이림과 류운봉 등을 동원해 학순이 숨은 세집을 찾으려고 온 시내를 참빗으로 서캐 훑듯 했다.
당 날 저녁에 은자가 집에 데려다 기르던 향화를 단서로 끝내 학순이 숨은 세집을 찾아냈다.
그리하여 덕돌은 한족친구들을 데리고 학순의 세집으로 쳐들어갔다. 질겁한 학순은 엉덩방아를 찧은 채 일어나지도 못했다. 영감이 뭐라고 떠드는 것을 고이림이 훌 안방에 메쳐버렸다.
“학순아, 돈을 준비했는가? 고양이새끼처럼 시내에 숨으면 단가?”
학순은 벌벌 기면서 통사정 했다.
"돈이 마련되면 가져가겠다. 불시에 어디 그렇게 많은 돈이 있니? 집을 팔아도 500원 밖에 하지 않는데.”
“안 된다. 일주일 안에 돈을 가져오지 않으면 몰살당할 줄을 알아라. 우리 온 집안 식구들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잘못을 빌면서 누나한테 돈을 줘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죽을 줄 알아라.”
“불시에 어디 돈이 있어 그렇게 많이 주겠니? 천천히 벌어 줄게.”
“잔꾀를 작작 부려. 공사기업에 다니면서도 돈을 안내고 뻗칠 예산인가? 성의 있으면 꿔서라도 내야 해.”
학순은 아무리 꾀를 써도 안 되니 “돈을 줄게.”라고 했다.
“오늘 먼저 100원을 당장 내놔라. 데리고 온 친구들을 술대접해야겠다.”
학순은 우는 상을 하면서 궤짝에서 겨우 80원을 내놓았다.
“쳐라!”
덕돌의 호령이 떨어지자 고이림과 류운봉은 학순을 메주 밟듯 밟아줬다.
덕돌은 구들바닥에 널린 돈을 주어 가지고 가면서 을러멨다.
“개새끼, 허송근 새끼 감히 우리 누나를 쳐? 가만 놔두는가 봐라! 그 놈 새끼한테 일러라. 우리 개산툰에 언제든지 가서 피 값을 받아온다고.”
겁을 집어먹은 학순은 다 터져 피 흐르는 낯을 쓱쓱 닦으면서 죽는 소리를 했다.
덕돌은 5원을 꺼내고 나머지는 은자에게 주었다. 그날 저녁 덕돌은 류운봉과 고이림, 한위신을 데리고 식당에 가서 술상을 차려 한바탕 술을 마셨다.
며칠 후 학순은 질겁해 끝내 200원을 꿔 가지고 함흥대대 조개덕에 은자를 찾아왔다. 허나 은자가 일하러 밭으로 갔다고 하자 밭에까지 찾아가서 건네주었다.
허나 덕돌은 불만이 가득해 피 값 300원 받으러 개산툰으로 홀몸으로 갔다. 원래 친구들을 데리고 갈까 하다가 그만뒀다. 주먹친구들은 자칫하면 사람을 쳐 병신이라도 만들까봐 그만두었다.
(내 혼자라도 그깐 놈을 처치 못해?)
덕돌은 기차를 타고 개산툰에 가서 이 학교 저 학교 찾아다니다가 둔덕 위 소학교에서 허송근을 찾아냈다.
그는 곧추 학교당지부 사무실을 찾아가 허송근의 죄악을 공소했다.
그러자 당지부 서기선생은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전번에 편지를 보내와서 허송근 선생의 잘못을 알고 당지부 생활회의에서 비평한 적이 있소. 오늘 재차 들어보니 사실이 똑 같구먼.”
“그저 비평만 해선 안 됩니다. 마땅히 우리 집안에 와서 허송근은 잘못을 사죄하고 피값으로 300원을 내놔야 합니다.”
소학교 서기는 안경 너머 혈기왕성한 덕돌을 보면서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법원에 민사소송을 해도 해결하지 못하는 것을 우리 학교에서 어떻게 받아내겠소?”
“로임에서 잘라내면 안되겠습니까?”
서기는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법원의 판결이 없이는 절대 그렇게 못하오. 누나가 몹시 맞았다니 안 됐소. 내 말해서 치료비로 얼마간 주라고 해보지.”
그 말에 덕돌은 조금 가슴이 열리는 것 같았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글쎄 덕돌은 당지부 서기 사무실에서 나오다가 복도에서 덩치가 수범처럼 큰 허송근과 딱 마주쳤다.
“네가 감히 내 누나를 업신여겨?!”
허송근은 보통 덩치인 덕돌을 업신보고 “애들이 뭘 안다고 여기 와서 떠드느냐?”하고 버럭 소리쳤다.
“뭐라고? 이 놈, 네가 다 교원이냐? 조카며느리를 때려 쫓아내? 치료비도 내지 않고 당나귀 떼를 써?”
“조용한데 가서 얘기하자.”
“어째 온 학교 사생들이 네 죄악을 알까봐 겁나냐?”
덕돌이 왁짝 떠들자 교실과 교무실에서 교원들이 문을 열더니 머리를 내밀고 구경했다.
“덕돌이, 여기 와서 어째 이러오?”
(누군가?)
덕돌이 머리를 돌려보니 소학교 5학년 때 스승 리은규 선생이었다.
그리하여 덕돌은 허송근을 놓아주고 스승과 인사한 후 자초지종을 이야기했다.
그러자 리은규 선생은 덕돌을 말렸다.
“복도에서 떠들면 영향이 나쁠뿐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오. 그래도 법으로 처리하오.”
덕돌은 곧이듣지 않았다.
“법으로 처리할 수 있으면 내 무슨 이러겠습니까? 저 허송근이 소동작을 해서 법관이 소송을 철회하게 만들었습니다.”
리응규는 시간이 돼 들어가고 허송근은 어디론가 피해가고 없었다.
덕돌은 한숨만 나갔다.
(네놈이 출근도 하지 않겠니?)
덕돌은 이번엔 만나기만 하면 끝장 볼 궁리를 하고 학교 대문을 막고 지켰다.
그때 사생들 속에서 허송근이 육중한 몸을 웅크리고 슬그머니 학교 대문을 빠져나가려고 했다.
“어디로 가는가?”
덕돌은 다짜고짜로 허송근에게 덮쳐들어 멱살을 틀어쥐었다.
“야, 저쪽으로 가서 얘기하자.”
그자는 사생들 앞인지라 창피를 당할까봐 죽는 상을 지으며 통사정을 했다.
“그래, 가자.”
덕돌은 학교 담 뒤에 끌고 가서 따졌다.
“오늘 내 누나 피 값을 받으러 왔다. 소송서에 쓴 대로 치료비 300원을 내놓아라.”
“네가 뭔데 300원을 내라고 하니?”
“뭐라고? 이 놈 새끼, 언감 개소리냐? 난 돈이 탐나 온 게 아니야. 네놈한테서 피 값을 받으러 왔다. 낼 테냐? 안 낼 테냐?”
허송근은 기세 사나운 덕돌을 보고 멱살을 틀어 잡힌 채 아무 말도 못하고 흔들리며 비명을 질렀다.
“이 목을 놔라. 학순한테서 280원이나 받았으면 됐지. 나와 왜 이래?”
“이 개새끼야, 사람 말이 잘 안 드는구나.”
덕돌은 불시에 틀어쥔 멱살을 콱 당기면서 머리를 뒤로 젖혔다가 헤딩을 안겼다.
떡!
모진 소리와 함께 허송근은 까무러칠 지경으로 휘청 하더니 면상이 장마당이 됐다.
떵! 떵! 떵!
네 번 헤딩을 안기자 허송근은 개목을 다는 소리를 치더니 보리자루처럼 나동그라졌다. 덕돌은 물앉은 허송근의 머리칼을 잡고 무릎으로 다 터진 면상을 짓쪼아 놓았다.
그때 리응규 선생이 달려와 말렸다.
“덕돌이, 이러지 말라. 내 허송근의 처와 말해 돈을 주게 할게.”
“미안합니다. 선생님한테까지 폐를 끼쳐.”
덕돌은 떠나가는 리응규 선생을 보내고 로지심처럼 식당에 가서 혼자 점심을 먹었다.
한참 후에 응규 선생이 돈 230원을 가져다주었다.
“요걸로 피 값이 됩니까?”
“너도 허송근을 때렸으니 엎음 갚음이 되지 않았니?”
그 말에 일리가 있었다. 응규 선생에게 감사를 드리고 차 시간이 돼 덕돌은 집으로 돌아왔다.
허나 학순을 놔둔 것이 속에 내려가지 않았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공사 운동대회를 하는 진수해중학교 중간 복도에서 학순을 딱 마주쳤다.
“야, 이 새끼야, 피 값도 안내고 살 거 같니?”
학순은 대낮에 갈범처럼 으르렁거리는 덕돌을 보자 “에이크” 하고 비명을 지르며 돌아서서 도망치려고 했다.
그때 덕돌은 쫓아가면서 고함쳤다.
"법은 멀고 주먹은 까깝다!”
그는 날아나가면서 발길로 달아나는 학순의 면상을 걷어찼다.
동시에 주먹이 휘감겨 날아 들어갔다.
“앗!”
고함소리와 함께 학순은 시멘트 바닥에 풀썩 꺼꾸러졌다.
마구 엎딘 그의 대갈 밑에서 피가 줄줄 흘러 시멘트 바닥을 뻘겋게 적셨다. 덕돌은 눈에 불이 일어 당장 때려잡을 상을 하고 고함치며 학순의 대가리를 발길로 마구 걷어차고 밟아놓고 복도를 빠져나갔다.
“서라! 사람을 치다니?!”
덕돌이 되돌아보니 안경을 건 늙은 경찰이 덕돌을 뒤쫓아 왔다.
덕돌은 도망치지 않고 순순히 그 경찰을 따라 파출소로 갔다. 파출소에서 덕돌은 자초지종을 죽 이야기했다.
그러자 경찰은 다음과 같은 "처리판결"을 내렸다.
“법으로 문제를 해결해야지. 대학생이란게 사람을 때려서야 되는가? 대학생인데 이후부터 손을 대지 말고 도리를 따져라. 치안위반죄로 벌금 20원을 하라."
“내 누나 맞았을 땐 왜 허학순을 벌금 시키지 않았습니까?"
"그때 고발했으면 우리 파출소에서 처분했을 거야."
"건데 내 한매 쳤다고 벌금시킵니까?”
“그래야 네가 이후에 사람을 치지 않지? ”
경찰은 마치 덕돌을 돌보기나 하는 것처럼 말하는 것이었다.
별 수 없었다.
집에 돌아온 덕돌은 이튿날 돼지새끼 한 마리를 시장에 가지고 가서 팔아 파출소에 냈다.
아버지와 알아보니 그 안경을 건 퉁퉁한 경찰이 바로 아버지의 수하 허영호 소장이라는 것이었다. 상순도 확실히 덕돌을 교양하기 위한 것이라고 인정했다.
한차례 송사는 이렇게 법보다 가까운 주먹으로 종말을 고했다.
덕돌은 세상이 너무 허무해 너털웃음만 쳤다.
“허허허. 원, 참, 법이 무른 이 놈 세상이 언제 밝아질까? 원, 더러워서 어떻게 살겠니? 하하하!”
그 너털웃음 소리에 길가 나무가지에 앉았던 참새들이 재잘거리며 날아나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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