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문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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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헌신정신이 낳은 빛나는 업적 댓글:  조회:4412  추천:83  2008-03-25
  헌신정신이 낳은 빛나는 업적   --연변피부병예방퇴치원 의무일군들에 대한 이야기   박문희   동무들이 노력에 박차를 가하면서 본세기말까지 우리 나라 에서의 문둥병의 기본적소멸을 위해 힘쓰기를 바랍니다.                                                                                    -----조자양       문둥병!   지지리 2,500여년이란 긴긴 세월 자자히 악명을 남겼던 문둥병은 인젠 그 위풍을 아주 꺾고 각일각 최후소멸기에 들어서고있다.   우리 성을 보면 1952년부터 환자 도합 1,071명을 발견하였는데 치료를 거쳐 이미 그 대부분이 완치되고 지금 남아 치료받고있는 환자가 근근 28명뿐이다.   지난 1월 31일,중국의 첫 문둥절에 즈음하여 룡정현 투도구진에서 소집된 우리 성 경축모임에서 1990년 전에 우리 성에서는 문둥병을 기본상 소멸할 수 있다고 일치하게 인정하였다.   [사진설명] 사업하고있는 원장 진오영. 35년래 연변피부병예방퇴치원은 최초의 7명 일군에 수술칼 몇 자루밖에 없던 작은 병원으로부터 80명 종업원에 비교적 구전한 의료시설을 갖춘 큰 병원으로 발전하였다.   문둥병 소멸!   문둥병소멸사에서 이는 두말할 것 없이 큰 경사이다. 이 거창한 사업에서 세운 문둥병예방퇴치일군들과 방역일군들의 위훈을 세상 사람들은 잊지 않을 것이다.   ( 1 ) 1952년 12월 15일, 연길현 투도구역에 갓 내린 웬 젊은이가 울부짖는 서북풍과 씨름하며 골안으로 통한 오솔길을 부지런히 걷고있었다. 성정부의 결정에 따라 이곳 산골안에 세워진 문둥병환자료양소로 걸음을 재우치고 있는 것이였다. 그가 바로 지금 이 병원의 원장으로 사업하고있는 진오영이였는데 그때 그의 나이 겨우 스무살이였다.   며칠전 전근령을 받아쥔 그는 흠칫 놀랐었다. 그도 그럴 것이 갓 성립 위생학교를 마치고 성인민병원에 배치된 지 몇 달 안되는 자기한테 말만 들어도 질겁을 할 문동병과 씨름하라는 전근령이 떨어질 줄은 애초에 생각지도 못했던 그였으니 말이다. 두려움이 앞설 것은 당연한 일이였다. 문둥이를 보지는 못했어도 항간에서 들리는 말에 의하면 문둥병에만 걸리면 눈, 귀, 코며 팔이며 다리며 다 썩어떨어진다고 하지 않는가? 그래서 옛날에는 문둥이를 발견만 하면 불태워 죽였다고 하지 않는가!   가느냐, 마느냐? 진오영의 머릿속에서 벌어진 사상투쟁은 치렬했다.   나중에 이 나젊은 공청단원은 마침내 자기를 호되게 꾸짖기 시작했다.   “비겁쟁이! 너의 몇몇 동창생들을 봐라, 그들은 조선전쟁터에 나가 목숨마저 바치고 있다. 헌데 너는?”   가야 한다. 당이 가리키는 곳으로 가야 한다! 이것이 그의 마지막 결론이였다. 구태현 농촌에서 자라나 당의 덕분에 의학공부를 한 그는 당의 명령을 거역하고 싶잖았던 것이다.   어머니가 울면서 말했다.   “너 그리로 갔다가 문둥병에 옮으면 어쩌려고 그러냐? 일생을 망칠려구 그러느냐, 응? 성병원에 남지 못하겠거든 이 에미와 함께 집에서 농사나 짓자. 거기론 못 간다!”   “어머니, 전 꼭 주의할 거예요. 시름 놓으세요!”   눈굽을 자꾸 찍는 어머니를 장밤 설복하고 결연히 이 길을 떠나온 그였다.   그가 배낭을 끌러놓은 이곳은 전등도 못 들어온 곳인데 밤이면 승냥이 따위가 자주 출몰하였었다. 여기서 그는 첫패의 환자 셋을 맞았다. 그들은 모두 중환자들이여서 얼굴이 무섭게 변형된 데다가 몸의 여러 부위가 심하게 썩고 있었다.   환자를 접한 진오영은 온 몸에 소름이 쪽 끼쳤다. 이게 어디 사람이란 말인가! 그는 당금이라도 이 자리를 뜨고싶었다.   그러나 첫패의 일군 7명중 의사란 오로지 그 한사람 뿐! 황차 환자를 치료하는것은 의사의 천직인데 고통에 모대기는 환자를 내버리고 어찌 뺑소니를 칠 수 있단 말인가!   그는 마음을 모질게 도슬러먹었다. 격리복을 입고 장화를 신고 천이 어께까지 내리드리운 모자를 쓰고 고무수갑을 끼고 두툼한 마스크를 끼고 방풍안경까지 썼다. 흡사 반세균전차림새였다. 그때엔 아직 문둥병 치료약이 나오지 않았는지라 치료라야 림시 구급이나 하는 정도였다. 구급을 끝내고 나오면 밖에서 대기하고있던, 전문 그의 방역을 맡은 방역원이 분사기로 그의 일신에 소독약을 들씌우군 했다.   환자들과 자주 접촉하는 가운데서 진오영은 차츰 그들의 기막힌 신세를 알게 되었다.   낡은 사회에서 문둥병환자들은 생존권리마저 박탈당했었다. 부모형제처자--친인들마저 무고한 환자를 집에서 쫓아내는 판이니 그들더러 어찌 살아나가란 말인가!   류춘성이란 환자는 자기가 문둥병에 걸렸다는 것이 발각되여 사회의 무자비한 버림을 받을가봐 병으로 오그라붙은 손가락을 식칼로 찍어버리고 피눈물 겨운 류랑생활을 시작했다. 낮이면 거리를 떠돌며 문전걸식하였고 밤이면 뉘집 풀더미속에 기여들어가 새우잠을 잤다. 영원한 안락처를 찾아 송화강에 몸을 던진 적도 있었다. 선량한 사람들이 그를 강기슭에 끌어냈었다. 정부에서 그를 찾아내여 이 병원에 보내오자 그는 자기에게 구원의 손길을 뻗쳐준 공산당과 인민정부에 감지덕지했다.   문둥병환자들에 대한 감정은 하루하루 깊어만 갔다. 그는 문둥병환자들을 친인처럼 대해주면서 자기의 모든 정열을 깡그리 그들에게 쏟아붓기 시작했다. 리론학습과 의료실천을 거쳐 그는 문둥병이 이전에 듣고 생각했던 것처럼 그렇게 무서운 병도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 2 )   환자들이 늘어나기 시작하자 상급에서는 리극근, 박성관 등 의무일군들을 륙속 병원에 파견해왔다. 그들 가운데는 자각적인 용사들도 적지 않았다.   연변의학원 61년도 졸업생 최일범은 “죽기를 겁낸다면 병사가 되어 무엇하며 환자를 겁낸다면 의사가 되어 무엇하랴”--이런 정신의 소유자였다. 그는 결연히 자기의 지망에“문둥병원”이라고 똑똑히 써넣었다.   의료일군들이 환자를 회진하고있다. 다년래 그들은 근 800명 문둥병환자들의 병을 떼여 우리 성에서의 문둥병소멸을 위해 중대한 기여를 하였다. 현재 치료를 받고있는 환자는 모두 28명인데 그중 17명은 자기 집에서 치료를 접수하고있다. 의료일군들은 정기적으로 그들에게 약을 문전 송달해 주고 신체검사도 해주고있다.   이를 안 친척들과 벗들은 그의 심정을 도시 리해하지를 못했다.   “넌 대학생이자 당당한 반주석인데 왜 갈 곳 없어 그런델 가?너 오유나 범한 게 아니냐?”   “거기 가면 너두 문둥병 환자가 된다. 가지 말라!”   “......”   하지만 그는 의연히 자기의 심장이 가리키는 대로 이불짐을 싸가지고 이 병원에 왔다. 화룡현 현장으로 있던 그의 장인이 일자리를 구해주겠으니 그더러 돌아오라고 하였지만 그는 먹은 마음을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   토개간부의 후대로 자라난 리금덕은 연변위생학교 의사반 단지부서기였다.1964년 여름 졸업분배가 시작되자 그는 학교 당조직에 선뜻이 신청서를 내고 감옥보다도 더 무섭다는 이곳으로 의젓이 찾아왔다.   1965년 8월, 연변위생학교 호사반 공부를 마친 김금자는 문둥병원에 올 것을 탄원해 나섰다. 18세 나어린 처녀의 거동은 전교를 진동했다. 왜 안 그러랴. 당시 의학전업 졸업생들에게는 분배되여 가기를 제일 꺼리는 곳이 세곳 있었는데 그곳인즉 정신병원, 결핵병원, 문둥병원이였다. 그 가운데서도 문둥병원은 더욱 못갈 곳으로 치부되고있었다. 하여 적지 않은 학생들은 꽃다운 처녀의 앞날을 위해 애석해했다.   이 병원에 온후 그는 한때 마음이 뒤흔들려 남몰래 눈물도 흘렸었다. 일손을 잡아 한달만에 훈춘에 있는 집으로 갔다가 집식구들의 살틀한 말 한마디 못 듣고 포위공격만 받았다. 언니네 집으로 찾아갔더니 아예 집으로 들여놓지조차 않았다. 아, 그때 애어린 그녀의 가슴은 얼마나 쓰리고 아팠던가!   ......   그들은 모두다 사회의 무서운 압력을 이겨나온 강자들이였다.   사회의 각종압력이 닥쳐올 때마다 우리의 문둥병의료일군들은 얼마나 웨치고싶어 했던가! “문둥병환자들에게 인도주이를 베풀라! 전 사회가 문둥병 환자들을 동정하라! 문둥병의료일군들을 존중하라!”고.   현대의학실천은 문둥병은 예방할 수도 퇴치할 수도 있어 두려울 것 없다는 것을 충분한 사실로 똑똑히 증명하였다. 문둥병은 불치지증이 아니다. 치료를 거친 문둥병환자는 문둥병전염능력을 상실한다. 98%이상의 건강한 사람들은 다 문둥병에 대한 자연면역능력을 갖고있다. 2%에 속하는 사람일지라도 이 병에 쉽사리 전염되는 것이 아니다. 해방 이래 전국적으로 약 50만명의 문둥병환자들이 발견되였는데 치료를 거쳐 이미 대부분이 나았다. 초기 환자는 치료를 거쳐 후유증마저 남기지 않을수 있다. 이 병원에서 치료받은 많은 환자들은 병을 뗀 후 가정을 이루고 아이까지 낳아 무사히 기르고있다. 전국의 수많은 문둥병예방퇴치일군 가운데 수십년래 문둥병에 전염된 사람이 하나도 나지지 않았다......   사실이 이처럼 명백하였지만 낡은 사회가 남겨놓은 편견은 여전히 그처럼 완고히 사회상에서 살아숨쉬고 있었다.   사람들은 문둥병환자들에 대해 공포를 느끼고 그들을 기시하고있었을 뿐만 아니라 문둥병환자들에 대한 공포와 기시를 억울하게도 문둥병의 소멸을 위하여 헌신적으로 일하고 있는 일군들에게까지 전가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사회적편견이란 문둥병자체보다도 더 질기고 무서운 것이였다.   우리의 문둥병예방퇴치일군들은 이 모든 것을 웅숭깊은 가슴속에 깊숙이 파묻어두고 묵묵히 묵묵히 환자들에 대한 인도주의 직책을 드팀없이 수행해나가고있다.   ( 3 )   자기의 병이 문둥병이라는 것을 아는 환자들은 대체로 문둥병원을 찾는 실례가 매우 드물었다. 현대의학에 대한 털끝만치의 료해도 없는 그들은 병원에 대해서는 공포감을 가지면서 자신을 한사코 류리방황, 가정파산, 종신페질의 구렁텅이에로 밀어넣고있었다.   그들을 재난속에서 구원하려면, 그들로 인한 문둥병의 전파만연을 통제하려면 더 말할 것도 없이 이 부분의 환자들을 찾아내여 치료해야만 하였다.   1973년도부터 이 병원에서는 전 성 범위내에서 문둥병 보편조사를 벌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복잡하고도 간고한 사업이였다. 19만 평방키로메터 땅덩어리우의 2,000여만 인구속에서 수효가 극히 적고 고도로 분산된 문둥병환자들을 모조리 찾아낸다는 것은 실로 수풀속에서 바늘 찾듯, 백사장에서 깨알 줏듯 아름찬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리극근, 박성관, 최일범, 리금덕 등 수십명 예방퇴치 일군들은 기와 패를 나누어 각 지구에 내려가 당지 방역기구의 배합밑에 골간 강습반을 꾸리고 군중을 발동하면서 넓은 평야구릉으로부터 깊은 심산궁곡에 이르기까지 샅샅이 참빗질해나가기 시작했다.   지금 당총지서기이며 당시 병원예방퇴치과에서 주임사업을 하고있던 리금덕은 구태현 농촌에서 “참빗질”하던 중 영성탄광구역의 한 구차한 집에서 문둥병 후기환자 하나를 발견하였다. 환자는 스물셋에 나는 젊은 청년이였는데 그는 쬐꼬만 뙤창 하나를 낸 네댓 평방메터짜리 차겁고 어둑침침한 고방에 쓸쓸히 갇혀있었다. 알아보니 그의 부모들은 전등도, 까래도 없는 감방같은 고방에 병든 아들을 5년 동안이나 가두어 왔었다!   왜 병원에 보내지 않는가고 물으니 그의 부모들은 공포에 떨며 “약도 안 드는 죽을병인데 거저 집에서 편히 죽게 놔 두시우!”하고 애걸하는 것이였다.   환자도 덴겁한 눈을 해가지고“병원엔 안 가겠어요. 죽어도 제집에서 편히 죽겠어요!”하고 연신 빌었다.   분명, 그는 세상과 격리된 이 음침한 고방에서 남몰래 조용히 죽기를 기다리고있었다.   분명, 그들은 문둥병을 불치의 병으로 확신하고 있었으며 문둥병원을 환자를 참혹히 학대하는 감옥보다도 더 무서운 곳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차마 눈뜨고 볼수없는 이 정경은 문둥병환자를 한사람도 빠짐없이 찾아내고야 말리라는 리금덕의 결심을 더욱더 굳혀주었다.   [사진설명]이 병원에는 지금 치료를 받고있는 환자 11명, 병은 나았지만 갈 곳이 없어 계속 남아있는 환자 70명이 있다. 그들은 모두다 의료호리일군들의 살틀한 보살핌은 받고있다. 사진은 환자의 머리를 빗겨주는 호사 유채금과 호사장 김금자(오른쪽).   그는 로고를 무릅쓰고 원정을 시작했다. 하루에 사오십리길 걷는 것 쯤은 문앞마당 지나는 것으로 치부했다. 이르는 곳마다에서 선전을 하고 군중을 발동했다. 선전효과를 높이고자 늘 환자네 집에서 먹고자고 했다. 여름엔 길가의 초저녁 모기무리에 얼굴을 뜯기기가 일쑤였고 겨울엔 초라한 농가집 랭돌방에서 외투 쓰고 쪽잠자기가 일쑤였다. 환자가 조사일군이 온다는 낌새를 채고 도망질을 칠 때면 한 벌 할 걸음을 세번 네번 해야 했다. 제공받은 정보가 틀려서 수십리 걸음이 허탕으로 돌아갈 때도 많았다. 하지만 그의 드팀없는 목표는 아흔아홉번 허탕치는 건 별문제여도 환자 한사람을 놓쳐선 절대 안 된다는 것이였다.   이처럼 천신만고를 다하면서 이 병원의 일군들은 전 성 47개현, 시에서 도합 500여명의 문둥병 환자를 찾아냈다. 500명! 극히 평범한 이 수자에는 그들이 우리 성 에서의 문둥병의 전파만연을 방지하기 위해 엮은 비범한 이야기들이 수없이 많이 깃들어있는 것이다!   ( 4 )   환자수가 급격히 불어감에 따라 의사, 호사들의 사업량도 크게 늘어났다.   급한 환자가 들이닥칠 때면 진오영과 그의 동료들은 늘 격리복도 입지 못한채 환자구급에 서두르군 했다.   수술환자가 수혈이 수요되면 그들은 서슴없이 자기들의 피를 뽑아 환자에게 바쳤다. 새로운 약종을 찾아 문둥병 치료효과를 높이고자 진오영, 최일범 등 동지들은 주야분전하여 , , 등 주사액을 만들어냈다. 환자의 안전을 위하여 그들은 만들어낸 약들을 우선 자기들의 몸에 실험해보군 했다. 어느 한차례의 시험에서 진오영은 중독되여 몇 달 동안 입원치료까지 받았었다.   어느 날 의사 박성관이 급보를 받고 천방지축 병실로 뛰여가 보니 환자 황옥란이 후두수종으로 호흡이 막혀 거의 죽어가고있었다. 후두수술을 해본 적 없는 그였지만 당금 죽어가는 환자를 두고 유예할 겨를도 없었었다. 그는 주저없이 수술칼을 집어들었다. 목을 어이고 기관지를 쨌다. 불현듯 막힌 구멍이 터지면서 그의 얼굴에 피가래를 쫙 들씌워 놓았다. 처음 하는 수술을 무사히 끝낸 뒤에도 그는 도저히 시름이 놓이지 않아 환자 곁을 꼬박 일주일간 떠나지 않았다.   의사 최일범은 대동란 기간에도 시종 일터를 고수하면서 문둥병 치료와 연구사업에 전심하였다. 70년대 중기부터 그는 문둥병 의약정보들을 애써 수집하면서 선후로 , 등 약들을 치료에 도입하고 수년간씩 림상관찰을 진행하여 치료효률을 크게 높이였다. 80년대에 들어와서 세계위생조직에서 련합화학치료방법을 제창하자 그는 또 동료들과 함께 환자들에게 을 8개월간 들이댔는데 역시 리상적인 효과를 거두었다.   환자들에 대한 호리사업도 간거했다. 김금자, 유채금, 방분옥 등 호사들은 각종 수술후의 처치작업을 정성껏 하는 외 일상적인 생활호리까지 착실히 하면서 환자들을 빈틈없이 보살폈다.   한번은 왕청에서 종류형 문둥병환자를 보내왔다. 집에서 쫓겨나 거지질을 했던 이 녀성환자를 보니 썩은 삼검불 같은 머리엔 이가 우글거렸고 옷을 벗기니 이가 막 덩이져 떨어졌다. 기가 막혔다. 금자는 동정의 눈물을 머금고 그 환자의 몸을 깨끗이 씻어주고 옷을 갈아입힌 다음 머리도 손수 깎아주고 이도 말끔히 잡아주었다. 사람대접을 생전 처음 받아보는 그 환자는 거저 감격의 눈물만 하염없이 쏟을 뿐이였다.   한번은 온 몸이 진창이 된 중병환자가 들어왔다. 금자는 매일 환자에게 약을 갈아주고 몸을 씻어주고 옷을 갈아입히고 대소변을 받아냈다. 손톱, 발톱을 깎아주는 것마저 잊지 않았다. 이렇게 꼬박 석달 동안 환자를 호리해주었다. 림종시에 환자는 눈귀를 적시며 가느다란 소리로, 그러나 분명 이렇게 말하였다.   “전 죽어도 선생님을 잊지 못하겠어요!”   ......   아, 진오영을 비롯한 우리의 문둥병예방퇴치일군들의 헌신적 처사에서 문둥병환자들이 받아않은 감동은 실로 아름차리만치 컸다!   * * * * * *   지난 35년간 성위, 성정부와 연변주위, 주정부에서는 줄곧 이 병원에 관심을 돌려왔다.   당과 정부에서는 문둥병 예방퇴치사업에서 대공을 세운 위훈자들에게 응분의 영예를 안겨주었다. 이 병원은 여러 차례 성, 주의 선진단위로 표창 받았고 이 병원의 수십명 일군들도 각급 선진개인의 영예를 받아안았다. 그중 원장 진오영, 진찰부 주임 최일범 등은 전국모범의 영광을 안아왔다.   진오영원장은 기자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에게는 1990년 전에 문둥병을 기본상 소멸할 신심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 병원에서는 이미 변화된 형세에 좇아서 우리의 사업중심을 문둥병에 대한 예방퇴치로부터 피부병에 대한 예방퇴치에로 옮길 준비를 하고있습니다. 앞으로 우리는 세계적 수수께끼로 되고있는 에이즈병에 대해서도 연구하려 합니다. 문둥병을 대처할 때와 같은 헌신정신으로 말입니다!”   헌신정신! 천신만고로 사업의 승리를 바꾸어온 이들은 헌신정신의 함의를 가장 잘 안다. 그들이 인류의 건강과 무병장수를 위하여 새로운 전투구상을 무르익힐 때 그 리면에 안받침되여 있는 것도 다름 아닌 헌신정신이리라!   [길림신문] 1988.3.1   ​
61    [칼럼시리즈]《단군신화》의 발상지 문제 댓글:  조회:4957  추천:90  2008-03-13
     우리 민족은 어디서 왔는가?(6) 《단군신화》의 발상지 문제 《단군신화》를 보면 460여자 되는 짧은 글속에 수천년간에 걸친 아름찬 력사내용을 압축해 담고있다. 환웅의 삼위태백 강림, 단군의 탄생, 조선국 창설, 백악산아사달 천도, 장당경 은둔...하다면 환웅이 내렸다는 삼위 태백은 진실일가, 허구일가? 아니면 태백의 수식어에 불과한 것일가? 진실이라면 그 위치는? 《尚書·舜典》에 “三危”란 지명이 追記된 이래 력대의 문헌기록과 후세 사람들의 연구자료를 보면 “고삼위”의 존재는 확실하며 위치도 서북지역임이 분명하다. 北魏의 酈道元 등은 “삼위산은 돈황현 남쪽에 있다”(《水經注》)고, 唐의 리태 등은 “삼위산은 沙州(돈황)의 동남쪽으로 30리 떨어진 곳에 있다”(《括地志》)고,《한서》,《후한서》,《상서정의》,《상서법》,《태평어람》등은 “三危가 감숙과 청해성 경내에 있다"고 기술했고 동한시기 마융의 《상서주》와《한서·공안국전》, 唐나라 공영달의《尚書正義》등 史籍은 “三危”가 서부지역에 있다고 기록했다. 그중 “대삼위”, “대돈황”설과 최신판《辭海》력사지리 분책에 올린 감숙성 롱서현(隴西縣) 서북부 지역설 등이 상대적으로 설득력을 얻고있다. 봉우리가 세개 있는 산을 삼위산이라고 한다는 설을 망라해 다양한 견해들이 나타난것은 옛날의 방위측정이나 거리 계산방법 등에 변화가 많고 분명치 못한 점이 있어 그 구체적인 위치 확인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크게 보아 삼위산이 서북지역에 있는건 틀림없지만, 구체적 위치에 대해서는 현재 각종 설이 병존상태이며 최종 결론은 아직 없다. 《단군신화》연구의 경우, “삼위”의 구체적 위치보다는 우선 “삼위”가 “태백”의 수식어인가? 아니면 중국 고전에 나오는 “삼위산”인가? 그것도 아니면 묘향산이나 한반도의 다른 산을 가리키는 것인가? 이것부터 갈라야 한다. 구체 위치문제는 그 다음의 일이다. “삼위산”의 위치를 어디로 보느냐, 이는 실상《단군신화》의 발상지가 한반도 안이냐 동북지역이냐 서북지역이냐 한마디로 이런 문제이므로 그것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우리 력사에 대한 일부 해석은 영향을 받지 않을수 없다. 한반도로 보는것과 서북쪽으로 보는것, 이 량자가 가져다 주는 결과가 같을수는 없는것이다. 례를 들어 보자. 삼위태백을 묘향산에 비정한다면 단군조선의 력사는 조선 본토로부터 주변국(중국 대륙, 시베리야, 일본 등)으로 부단히 확장해 나간 력사로 해석될수 있다. 사실 이런 시각에 의해 기술된 력사론저들이 여러 권 있는데, 그 가운데는 력사상의 한반도를 세계의 중심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단군신화》의 삼위를 중국 서북부지역의 삼위산에 비정한다 할 때 상황은 완전히 달라진다. 중국 대륙을 횡단하는 대이동의 선상에서 우리 선인들의 력사를 고찰해야만 하는것이다. 바로 이런 리유 때문에 삼위에 대한 연구는 결과를 볼 때까지 계속할 수밖에 없다. 이 작업이 중요하고 또 여전히 진행형인것만금 문헌자료와 고고학성과에 대한 면밀한 주의를 필요로 하며 “확인가능성”에 대해 경연시하거나 의도적으로 차단하는 일은 없어야 할것이다. 먼저 우리 민족과 관련시켜 삼위를 연구한 중남민족대 남방소수민족연구중심의 연구원 楊萬娟의 말을 들어본다-- 양만연은 三危의 위치문제에 대해 “한국 학자들 중에는 백악산설과 감숙 돈황 남부 삼위산설이 있고 삼위태백을 통털어 조선 평안북도의 묘향산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며 중국 학자들 중에는 돈황 부근 삼위산설 등 네가지가 있다”면서 그 자신은 “川甘 접경지역의 민강, 민산 일대설에 동감한다”고 했다. 양만연의 이런 주장은 조선민족은 동이족에서 나온 민족으로서 蚩尤, 三苗와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삼묘족이 거주했던 삼위와도 깊은 련계가 있을 것이라는 판단에서 나온 것이다. 아래에 한국학자들의 견해를 알아본다-- 한국 효성녀대 박은용교수는 중국 淸나라 乾隆 28년(1763년)에 편찬된 지리서 《欽定西域同文志》에서《단군신화》의 태백산 위치를 규명할 수 있는 “三危” 관련 기록을 발견하여 공개했는데《흠정서역동문지》4권(卷之四) “天山南北路山名”에 적힌 삼위에 대한 설명은 “古天山東盡境(山海經)三危山西三百五十裏曰天山…(一統志)天山一名白山 自哈密東北境綿亙而西…” 등으로, 三危山의 위치와 삼위산이 곧 天山이며 이를 白山이라고도 한다고 “산해경”과《大明一統志》등의 고서를 인용해 설명하고 있다. 《흠정서역동문지》는 박교수가 30년 전 일본 도꾜대 객원교수 시절 우여곡절 끝에 입수한 지리서로 漢字와 만주어, 몽골어, 아라비아어, 타밀어, 서장문자 등으로 된 희귀본이며 “삼위”에 대한 기록을 남긴 현존 유일의 고서라 한다. 그는 또 “우리 학계가 현재 민족의 기원신화에 나오는 ‘삼위’란 글자가 ‘태백’을 수식하는 관용어인지 별도의 지명인지에 대한 학술적인 규명도 못하고 있는 실정”이라며 “天山 일대의 위글족 등과 우리 민족은 인종적, 언어풍속학적으로 류사점도 많아 력사, 언어, 문화인류 학계의 연구가 뒤따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박은용교수가 제시한 자료는 민족의 유래를 중국의 西域으로 확대시키면서 신강위글족자치구에서 한반도에 이르는 민족의 동진을 뒷받침하고 있다는 점에서 한국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모으기도 했다. 한국 상고사학회 회장 율곤 이중재선생은 2002년 3월 “下視三危太白 三危山名 非今外興安嶺也 叉非今文化九月山也 乃今支那甘肅界燉煌縣所在地三危山也 本黎苗祖盤古初降之地 是也” 등 삼위의 위치와 관련된 옛기록이 있는 력사희귀본《神市開天經》을 입수, 공개해 력사학계의 관심을 끌었다. 이중재선생은 저서《한민족사》에서 이 자료를 포함한 대량의 자료를 근거로 삼위산이《삼국유사》에서 말한 “태백산” 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동북아 전체를 놓고 삼위산이 중국의 서북지역에 한곳 밖에 없는 이상《삼국유사》가 환웅에 대한 기록에서 삼위산을 언급한 것은 함부로 넘겨 버릴수 없는 사안이며 앞으로 우리 민족의 근원을 찾는 일과 무관하지 않을 것으로 본다”고 했다. 조선의 유명한 학자 리지린의 말을 들어본다-- 리지린은 저서《고조선연구》에서 삼위산의 위치에 대한《尙書》舜典·禹貢의 기술과 고힐강(顧頡剛) 등 중국학자들의 고증자료를 대량 인용, 분석한 뒤 “삼위산이 정확히 어느 위치에 있는지는 아직 딱히 말할수 없”지만 “현 중국 서북방의 산인 것만은 틀림없다”면서 “단군신화에 ‘삼위산’이 관련되여 있는 사실은 주목해야 할 문제로 남는다”고 했다. 리지린은 “《단군신화》에 어찌하여 삼위산이 관계되여 있을가?” 하는 문제와 관련해서 다음과 같은 견해를 내놓았다. “《古記》의 편찬자들이 三危를 고대 중국의 유명한 산임을 모르고 썼다고 보기는 곤난하다. 기원전 1세기 초 樂浪사람들이《서경》을 통달했다는 것이 확증되니 고조선인들이 ‘삼위’가《서경》에 보이는 山名임을 알았을것이 명백하다. 그렇다면《고기》의 편찬자들이 어찌하여 그 먼 곳에 있는 산 이름을 단군신화와 결부시켰는가? 이것을《고기》편자들의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 사상의 표현이라고 지적할 근거는 없다. 그들은 단군을 고조선의 창건자로 인정한 것이며 결코 그가 한족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였다. 단 고조선족의 선조가 삼위산과 관련되고 있었다는 것을《고기》편찬자들이 인정했다고 볼수 있다. ” 《동국여지승람》의 저자가 삼위 태백을 황해도 구월산으로 인정한데 대해서와《삼국유사》에서 태백산을 묘향산이라고 쓰고있는데 대해 리지린은 “삼위라는 지명을 우리 나라 지리 문헌들에서 찾아볼수 없음”을 리유로 들면서 “이러한 설”은 “후세 사람들의 부회에 불과한 것”이며 “(묘향산을) 고조선 국가 형성시의 명칭이라고는 도저히 볼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또 “일본의 어떤 史家”가 “삼위산을 알타이산으로 비정”한데 대해서는 “일본 사가의 설은 부정확하기는 하나 삼위산을 대체로 알타이산과 련계되는 현 중국 서북방의 산으로 비정한것은 틀림없다.”고 지적하고 있다. (리지린:《고조선연구》P119~122. 조선과학원출판사, 1963년.) 그러나 우리 민족의 학자들 중《단군신화》의 탄생과 관련해서 삼위를 해석할 때 이상의 관점들과 다르게 풀이하는 사례도 있다. 례컨대《단군신화》에 나오는 삼위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는 견해가 그것이다.《단군신화》원문을 번역할 때 아예 三危를 빼놓고 太伯만 넣어가지고 해석하거나 심지어 “下視三危太伯”을 “가장 큰 산들을 내려다 보니” 등으로 번역하는 것은 바로 이런 관점의 소산이다. 이것은 우리의 조상들이 아득히 먼 서쪽 땅에서 이동해 왔다는 것에 대한 몰리해, 혹은 우리 민족 “본토발생설”을 유일한 출발점으로 삼음으로 해서 초래된 필연적 결과라고 볼수 있다.   만약 “본토발생설”을 연구의 유일한 출발점으로 삼는다면 허다한 의문이 설명불가능한 문제로 남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아프리카에서 탄생한 현생인류가 중앙아시아를 거쳐 동아시아에 들어왔다는 관점으로 문제를 본다면 우리 민족 조상들의 서부로부터의 동진은 절대로 리해불능의 이상한 일이 아니다. 중앙아시아에서 한반도로 이어진 환인, 환웅과 단군의 존재는 아프리카주에서 발생한 천손집단의 북상 동진을 의미하는 신화적 표현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며, 천산산맥을 지나온 선인들이 하서주랑을 거쳐 남하, 渭水와 황하를 따라 동으로 산동지역에 이르렀다고 할 때《단군신화》에 나오는 “三危”는 당연히 거쳐야 하는 지역으로까지 인식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력사연구의 시야는 오래동안 한반도 주변을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다가 근년래 조금씩 원 울타리를 벗어나 타 지역으로 확대되기 시작했다.  현재 문헌 및 고고자료의 새로운 발굴과 연구가 진척됨에 따라 우리 력사 탐구시야의 폭은 한반도와 길림성 지역으로부터 료동, 료서, 내몽골, 산동, 하북, 강소, 산서, 섬서 등지로 무한정 확대되고 있는 추세이다. 앞에서 말했지만《단군신화》는 460여자의 짧은 글속에 수천년 간에 걸친 력사내용을 압축해 기록했는데, 환웅이 삼위 태백에 내리자마자 “평양성”에 “조선국”을 세웠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 수천년 간《단군신화》에 언급된 력사는 적어도 몇 개의 단계로 나누어 전개됐다고 보는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렇찮아도《단군신화》를 시대적 변화를 계기적으로 반영한 것으로 리해한 견해들이 있다. 례를 들면《단군신화》를 4단계의 력사적 발전단계가 압축된 것으로 보는 견해, 말하자면 무리사회 단계인 환인시대, 부락사회 단계인 환웅시대, 부락련맹체사회 단계인 환웅과 웅녀의 결혼시대, 국가사회 단계인 단군시대로 보아 한민족의 력사적 체험, 즉 인류사회의 보편적 발전과정을 그대로 담고 있는 것으로 보는 견해가 그중의 하나이고, 또, 4단계가 아니라  3단계가 압축돼 있다고 보는 견해도 있는데 그것인즉 최초의 단순한 씨족토템사회 단계, 그후 “군사 민주주의 단계”로 이행하는 시기에 “군사수장”으로서의 단군이 등장하는 단계, 계급국가형성 후 “고조선 국왕”으로서의 단군이 등장하는 단계로 보는 견해이다. (《한국사사전》: “단군신화에 관한 여러가지 학설들” 참조) 이러한 견해는 물론 보다 철저한 검증이 요구되겠지만 그래도 일정한 타당성이 있으며 적어도 우리에게 흥미로운 의문과 계발을 준다. 이 3단계 혹은 4단계의 거창한 력사창조활동이 구경 어떠한 범위에서 벌어졌을가? 우리 민족 발생발전의 시발점이 절대 한반도나 그 북쪽의 한 모퉁이였을 수는 없다. 중국 서북지역으로부터 중원을 거쳐 산동, 동북과 한반도에 이르기까지의 민족 선인들의 족적이 그것을 증명한다. 그게 무얼가? 우리 민족의 선인들은 삼위지역과 동진연도에 대관절 어떠한 족적들을 남겼을가? (계속)
60    《단군신화》의 신빙성문제 댓글:  조회:5191  추천:82  2008-03-12
 우리 민족은 어디서 왔는가?(5)《단군신화》의 신빙성문제 앞에서 아프리카주에서 탄생한 현생인류가 어떻게 수만년전부터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아 북상동진하여 동방의 나라들에 널리 퍼졌는가를 간단히 살펴보았다. 이제 이 동방의 땅에서 우리 민족의 선인들이 어디다 첫짐(짐이 별로 없었을것이라고도 생각되지만)을 풀어놓았는가로부터 시작해서 그 동진로선을 좀 더 구체적으로 토론하고자 하는데, 이 문제를 푸는 첫 단서는 당연히 우리 민족의 건국신화인《단군신화》밖에 없을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를 풀려면 우선 신화전설의 력사신빙성문제가 반드시 풀려야 한다. 신화나 전설이 허황하다 하여 믿지 않으면《단군신화》를 암만 토론해봤자 결과가 없을것이기 때문이다. 신화전설의 력사적가치 문제 염제, 황제, 치우, 소호, 태호가 신화인물이며 서왕모, 마고, 노아, 셈이 신화인물이다. 그들이 과연 실재했던 력사인물들인가? 그들에 대한 전설속에 력사적 요소가 깃들어 있는가 없는가? 중국의 학자들은 염황치, 소호태호, 서왕모 등은 실재한 구체적 인물의 이름이 아니라 씨족의 이름이라고 보고있다. 그러나 그들을 력사와는 무관한 신적존재, 또는 완전히 조작된 허상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다. 례컨대 少昊(일명 少皞)에 대해서 袁珂는 조신(鳥神)으로 보고있으며 何新은 太陽神으로 보고있다. 그러나 더욱 많은 학자들은 李白鳳의 다음과 같은 말에 찬동하고있다. “초보적인 탐구에 의하면 황제, 태호, 소호와 같은 고대의 씨족은 실제로 존재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태호와 소호가 동이족의 대표인물임은 모두가 인정하는 바이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의 이름이 아니고 부족의 성이다.”(리백봉:《東夷雜考》, P9. 齊魯書社, 1981年.) 그러니 소전, 축융, 염제, 황제, 치우, 태호, 소호 등 “신화인물”들은 모두 실재했던것이며, 그러나 그것은 구체적인 력사인물의 전칭인것이 아니라 부락집단의 “세습성 칭호”(李學勤主編:《中國古代文明起源》, P83. 上海科學技術文獻出版社, 2007年4月, 第1版)라는 것이다. 이런 신화적 인물들은 대부분 나이가 백살 이상, 지어 수백살, 천살이 넘기도 한다. 례컨대 “단군신화”의 단군은 년세가 1,908세이며 통치경력만 해도 1500년이다. 중국 신화에 나오는 西王母는 중국 서방의 玉山이라는 산에 살며 疫病神의 단속을 임무로 하는 신비적이고 기품이 높은 怪獸같은 녀신인데 黃帝, 堯舜, 大禹, 周나라의 穆王, 지어 《漢武帝內傳》에 의하면 漢나라의 武帝와도 교왕이 있었다는 인물이다. 일대 文史大師인 顧頡剛은《穆天子傳》을 론할 때 “서왕모는 가능하게 일개 국가일수 있다”(李曉偉:《破解西王母之謎》,《雪蓮》2004年第1期)고까지 말한적이 있다. 중국 력대명인들로부터 상고시대에 실재한 인물로 평가받은 이 녀신의 년세는 자그만치 3000살이다. 그런데 3000살 정도면 아주 새파랗게 젊은 셈이다. 중국과 한국의 전설에 내용은 다르지만 다 麻姑란 녀신이 등장하는데, 중국의 마고전설은 “상전벽해(滄海桑田)”와 “마고헌수(麻姑獻壽)”로 유명하다. 이른 바 “상전벽해”란 마고가 동해가 뽕밭으로 된것을 세번 보았다고 해서 생긴 말인데 신기하기 짝이 없는것은 오늘 第四紀學, 古地理學, 考古學 등 학과의 연구성과에 따르면 최근 10만년 사이에 중국의 동부지역은 확실히 桑田碧海의 거대한 변천을 세차례 겪었다는 사실이다. 이른 바 “麻姑獻壽”란 마고가 곤유산(昆崳山)에서 修煉得道한 뒤 三月 초사흗날 天桃복숭아를 따다가 西王母에게 生辰禮物로 드렸다는 이야기이고 그녀의 유적은 江西, 安徽, 山東, 四川, 湖南 등지에 널리 퍼져있다고 하는데 이야기 내용을 봐서는 옛날 과수재배의 시조나 음식조리의 능수 정도로 되여 보인다. 그녀의 나이는 적게 잡아도 10만살은 넘는다. 한국 신화에서 창세신이라고도 할수 있는 麻姑城의 녀왕 麻姑氏는 아마 10만살도 넘을 것이다. 물론 마고의 전설과 같은 신화에 력사적 진실이 어느 정도 반영되여 있을가는 별도의 연구가 수요되는 문제다.  서왕모의 경우 그의 초시공적 존재를 어떻게 보아야 할가? 앞에 언급됐던 이른 바 “세습성 칭호”란 말을 상기할 때 아마 진실한 정황은 이럴것이다. 력대로 서왕모의 人選은 여러번 갈렸는데 서왕모국의 존재와 서왕모녀왕의 尊號만은 바뀌지 않고 줄창 그대로 보존돼 내려왔을 것이다. 그것은 오늘의 판첸라마나 달레라마의 “活佛還生”과 똑같은 리치일것이다. 서장 라마교(불교)의 “活佛還生”제도는 明淸 兩代에 이르러 서장 전래불교 각파의 습속으로 형성되였는데 이 제도는 ‘활불’로 여겨지는 지도자가 入寂(사망)한 뒤 그의 ‘환생자’로 인정되는 어린이를 후계자로 삼는 서장불교의 전통이다. 지난 1989년 서장 불교 판첸라마 10세의 입적후 판첸라마 11세(16)가 즉위했다. “活佛還生”제도의 리론적 의거인즉 불교 교의와 신학가운데 있는 “佛有三身”說과 “靈魂不滅”說이다. 三身이란 三世를 일컫는 말로서 과거, 현재와 미래세상은 모두 최고의 부처가 主宰하는데 그 주재하의 모든 생령은 六道의 輪回중에서 시작도 끝도 없이 순환한다는것이다. 우리는 서장 활불과 서왕모의 사례에 대한 고찰을 통해 활불환생제도를 옛날 일부 특정 신화인물들의 현상과 련계지을수 있으며 서기 13세기에 탄생한 “活佛還生”제도도 “서왕모현상” 등에서 유래한것으로 추정할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서왕모가 한 개인의 명칭이 아니며 그 집단의 "세습성 칭호"라고 볼수 있다. 따라서 황제 이래 력대의 몇몇 제왕이 서왕모를 만나봤다는 전설이 믿음성이 없다고 단언할수 없는것이다. 조기문화의 상징성표기로서의 상고적신화는 매개 민족의 력사문화원천의 하나이다. 그중에는 민족의 철학, 예술, 종교, 풍속습관 나아가 모든 가치체계의 기원이 내재해있다. 이런 의미에서 신화는 상고적 인류경험의 일종이라 볼수 있을것이다. 물론 신화자체가 正史는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력사사실을 반영하고 있다는것은 또 다음과 같은 사실에서 기인한다. 상고 시대 매우 오랜 세월 인류는 서로간에 말을 쓰면서도 문자가 없어 당시에 발생한 많은 중대한 사건을 기록해 둘수 없었다. 당시 사람들은 문자는 가지고 있지 못했지만 말과 노래로 서로간에 의사를 주고받을수 있었기에 부족내의 교류에 별로 어려움은 느끼지 않았다. 부족집단 내에는 이야기를 잘하는 사람이 늘 있기 마련이였다. 본 부족집단과 다른 부족집단 간에 지반을 빼앗는 전쟁이 발생하면 그 가운데 생긴 일들이 경험자 혹은 목격자를 통해 전해지군 했는데 이야기군들은 그런 전설을 수집해서 완정한 이야기로 엮어서 마을 사람들에게 들려주군 했다. 이런 이야기들은 모두 실재인물과 실제 발생한 사실을 엮은 것이였는데 인물들은 오랜 세월 전해지는 과정에 갈수록 신비한 인물로 비쳐져 나중에는 완전히 신으로 둔갑하군 했다. 신화에서 흔히 보게 되는것은 사실에 대한 과장수법이다. 례컨대 사서에는 상고시대 염제집단과 치우집단간의 전쟁, 염제집단과 황제집단간의 전쟁, 염황련합군과 치우집단 간의 전쟁을 마치 현대전쟁 지어 미래 세계의 전쟁처럼 묘사하고 있는데 필자가 보건대 그때의 전쟁은 극상해야 농기구, 몽둥이, 돌멩이 혹은 활이나 창 같은 무기(불도 리용 가능)를 동원한 전쟁이며 지어 빈주먹의 육박전이였을수도 있다. 왜냐 하면 夏왕조 이전의 신석기 시대에는 기병이나 戰車 따위가 있었을리 없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은 농경민이나 유목민들로서 먼 훗날 칭키스칸의 형상처럼 일거에 수백리 지어 수천리를 주름잡는 그런 장거리추격의 전쟁형태는 상상키 어려운 것이다. 최초의 충돌은 아마 서북부로부터 먼저 남방의 일부 지역과 중원땅에 이동해 와 농경문화를 창출한 씨족의 한 부락과 그 후에 역시 삶터를 개척하며 들어온 유목민 씨족집단 간에 생겼을수 있다. 원래는 後進 유목민들이 몰고 들어온 소나 양이 정착농경민들이 가꾸는 밭에 마구 들어가 곡식을 해침으로 해서 초래된 분쟁(곡식밭을 침범한 유목민들의 소나 양을 때려 죽였거나 잡아 먹었다든지 하는)이였지만 결국 선진 부락과 후진 부족 간의 싸움으로 번져져버린 것인데, 그 싸움이 다른 복합적 사태와 서로 작용하면서 점차 걷잡을수 없이 두 씨족집단간의 대형 싸움으로 번진 것이다. 유명한 阪泉之戰과 涿鹿之戰을 바로 그 대표적인 례로 꼽을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판천대전은 원시사회가 노예사회에로 이행하는 시기의 한차례 치렬한 충돌일수 있으며 탁록대전은 炎黃 二帝를 대표로 한 華夏부족과  蚩尤를 대표로 한 東夷부족의 각자의 문화를 대외로 확장발전시키는 행정에 행해진 맹렬한 부딪침일수 있다. 이는 염황이 련합하여 천하대권을 쟁탈하고 異己세력을 몰아낸 력사사실의 반영이기도 하다. 戰後에 염황련합세력은 蚩尤(東夷)의 문화성과를 흡수하여 화하문화를 공동히 발전시켰다. 탁록지전에서 치우는 비록 염황련합세력에 졌지만 그러나 그가 대표한 동이족이 소멸된것은 아니였다. 동이족의 일부는 중원의 화하족에 흡수되고 일부는 남으로 내려가 蠻夷의 여러 민족으로 거듭났으며 일부는 북상하여 東北夷(濊, 貊과 夫餘 등이 이에 속한다)로 되였고 일부는 한반도로 건너가 정착했다.  그런 전쟁의 발동은 “씨족부락의 안정된 생산과 삶의 평화를 찾자면 대방을 굴복시켜 복속시키거나 소멸해치우거나 쫓아버려야 한다”는 씨족수령들의 공통된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결국 그것은 령토확장 전쟁으로 발전하였다. 전쟁에서 산생한 포로가 노예로 전락한 경우도 있다. 사유재산의 산생과 더불어 계급모순이 생기고 통치자계급이 피통치자를 제멋대로 유린하자 영웅이 나타나 통치계급을 견제했다. 지금은 다른 나라의 땅을 반치만 밀고나가도 온 세계가 규탄하지만 그때 제왕들은 다른 나라 땅을 많이 침략해서 제 땅으로 만들면 절세의 통일공신과 영웅위인으로 영명을 길이 남겼다. 그럴수 밖에 없었던 것은 자그마한 땅에 나라가 너무 많은데다 관리가 엉망이여서 누군가 강대한 인물이 나타나서 전쟁방법으로 통일을 하지 않으면 세상이 혼란스러워서 백성들의 원성이 대단히 높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때는 지금처럼 국제법 같은 것이나 세상사무를 관리하는 유엔식의 국제기구도 없었고 누구나 지반을 일정하게 차지하면 왕으로 자처할수 있는 세상이였다. 그때 싸움에서 진 자는 이긴 자들, 그리고 후세의 정통 계승자(통치자)들과 어용 사가들에 의해 아주 惡神으로 부각되군 했는데 여기에는 의도적으로 오도된 문제가 많다. 오늘 炎, 黃, 蚩의 蚩尤에 대한 재평가가 거론되는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시간이 수백년 수천년 흘러가면서 여러 제왕이나 영웅인물들의 사적이 한 사람에게 집중되는 일도 매우 흔히 볼수 있다. 력대 위인과 거인들의 거창하고 방대한 이야기를 일일이 기억해서 전하기가 심히 어려웠고 청중들도 되도록 알아듣기 쉽고 재미도 느끼게 해야 했으므로 이야기군들은 왕왕 무수한 여러 제왕이나 영웅인물들의 사적을 따로따로 상세히 엮을 필요가 없이 여러 사적을 한사람 몸에 집중시키기도 했던 것이다. 그들은 전문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을 업으로 먹고살았다. 산해경속의 신화나 삼황오제의 전설이나 단군신화도 모두 상술한 바와 같은 과정을 거쳐 구전되여 온 것을 후세 사람들이 수집 정리하여 기록한 것으로 아무런 력사사실의 바탕이 없이 마음대로 허구해낸것이 절대 아니다. 신화와 전설의 진실성문제와 관련하여 錢穆선생이 한 말이 유명하다. “여러 민족의 최초의 력사는 전부가 기억을 통해 전해져내려온 것이 아닐수 없다. 그중에 전설과 신화의 부분이 많지만 그러나 전설을 엄격히 배격해 버린다면 上古史연구는 운운할 여지도 없게 될것이다. ”(錢穆:《國史大綱》P8~9,商務印書館,1996年6月,第三版. 李學勤 主編:《中國古代文明起源》P53. 上海科學技術文獻出版社, 2007年4月) 사실 그렇다. 중국의 하왕조와 상왕조, 심지어 주왕조까지도 이전에는 전설로 취급했었지만 지금에 와서는 정사로 자리잡았다. 희랍신화에 나오는 크레타섬의 미노스 궁전을 봐도 원래는 그것에 대한 이야기를 아름다운 전설로만 여겼었으나 후에 영국인 아서 에반스가 전설에 근거하여 궁전의 진실한 유적을 찾아냈지 않았는가.  “전설에 의해 신화가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지만 신화로 해서 전설을 말살해서도 안된다. 후세에 사서가 친히 겪은 듯이 묘사한 기재들에 조작된 부분이 없을수 없지만 당시 전설과 여러 책에 단편적으로 씌여진 전설토막들에서 온 부분은 후세의 어느 한두 사람이나 한두 집단이 마음대로 위조할수 있는것이 아니다. 때문에 모종의 전설을 부정하려면 그런 전설과 상반되는 확실한 증거를 내놓아야 한다. 전설이 확실히 력사사실에 대한 위조라는 증거를 제시하지 않는다면 그 전설이 반드시 거짓이라고 속단해서는 안되는것이다.” (同上書) 한국의 학자들도 이 점을 분명히 하고있다. “개국신화를 그대로 왕조사인 것처럼 해석하는 것은 무리한 점이 많다. ” 그러나 “원래 신화는 역사적인 사실 바로 그 자체는 아니라 하더라도 그 속에 내재된 력사성을 중시하여야 하며 어떤 맥락에서든 신화의 의미는 풀려야 한다.” (李弼永: 《단군신화의 의미와 특징》) 매우 깊숙이 받아들여져야 할 중요한 관점인것 같다. 단군의 전설 산생시간에 대한 의혹 “어떤 맥락에서든 신화의 의미는 풀려야 한다”는 관점에 립각해서《단군신화》에 제기되는 몇가지 의문을 좀 더 구체적으로 풀어 보도록 하자. 오래 동안 고조선에 대한 연구는 문헌사료가 거의 없다는 기본적인 한계에다 민족주의 사학과 식민사관의 대립, 사료의 진위여부에 대한 재야사학자와 주류사학자의 인식차이, 민족정체성 고양을 목적으로 한 정치적 의도, 단군신화를 둘러싼 종교적 론쟁 등으로 혼란에 빠졌던것이 사실이였다. 그러다가 1993년 조선의 단군릉 발굴과 최근 청동기 유물의 새로운 발견이라는 고고학적 측면과 기타 일부 정치적 문제로 인해 고조선과 단군, 기자를 망라한 고조선에 대한 론의가 새롭게 일기도 했다. 하지만 원래부터 존재하던 일부 의문은 아직도 남아있으며 새삼 제기되기도 한다.《단군신화》의 산생시간에 대한 의혹이 그것이다. 례를 들면《三國遺事》,《帝王韻紀》등 단군신화가 수록된 사서들이 13세기에 들어와 만들어졌다는 점 때문에 일본학자들은 일찍부터 단군신화의 후대창작설을 제기해왔다. 중국인민대학의 林堅은 陳壽가 편찬한《三國志》의《魏志》와 北齊의 魏收가 편찬한《魏書》에 다 檀君朝鮮에 대한 기술이 없다는 점을 들면서  王建이 고려국을 세울 때 단군전설이 나타난걸 봐서 檀君신화는 왕건이 고려국을 세우기 위해 조성한 여론의 일부 내용에 불과한게 아니냐는 의혹을 내비쳤다. (林堅:《古朝鮮若幹問題》) 일각에서는 또 현존《위서》에 단군에 대한 기록이 없는데 대해서 뿐 아니라 정사인《삼국사기》에 단군에 대한 내용이 기록되여 있지 않은 점에 대해서도 회의하고있다. 이런 문제가 제기되면《단군신화》는 그 전설의 산생시간문제와 더불어 그것이 “고조선 건국과는 무관하게 고려나 혹은 다른 어느 왕조 통치자들에 의해 터무니없이 조작된 것이 아니냐”는 혐의를 받을 소지가 없지 않다. 그러나 이런 의혹은 다음과 같은 자료를 찾아보면 풀릴수 있으며 나아가 이 전설의 산생시간도 추정할수 있다. 오늘의《魏書》에 기록이 없다는 대목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관련자료를 찾아보면 이른 바의《魏書》는 오늘 볼수 있는 魏收(公元506年~公元572年)의《魏書》(北朝史書의 第一部)뿐이 아니고 여러 종이 있다. 西晉시기 陳壽가 쓴《三國志》가 나오기 전에 이미 魏나라와 吳나라의 력사를 기록한 사서가 나왔는데 王沈(?-266年)이 편찬한《魏書》와 陳壽와 한 시대 사람인 夏侯湛이 쓴 《魏書》등이 바로 그것이다. 《三國志》중의《魏書》는 주로 이런 史書들의 자료를 취한것이다. 그 외에도 隋나라 魏澹이 편찬한《魏書》와 唐나라 張太素의《後魏書》도 있다. 이런 《위서》들은 오늘 모두 전래되지 않고 있다. 책의 이름만 전해지고 내용이 失傳된 사서 등 典籍은 이루 헤아릴수 없이 많다. 王沈, 夏侯湛 등의 사서는 말말고라도 그 유명했던 魏收의 방대한 저서도《魏書》(기실 魏書도 傳, 紀, 志가 26권이 없어졌다)말고는 詩文集 70여권이 다 사라지고 없다. 이런 자료를 보면 일연이 魏書에서 인용했다는 기술은 분명 사실인 것이다. 그렇다면 一然이 구경 어느 魏書에서 단군신화 내용을 인용했을가? 우에 렬거한 자료중 後魏시기, 즉 拓跋魏 시기의 력사를 기록한《後魏書》등은 당연히《삼국유사》가 인용한 기록의 出自가 될수 없다. 왜냐하면《삼국유사》에서는《魏書》의 기록과《後魏書》의 기록을 분명히 구분하여 썼기 때문이다. 가능성이 가장 많은 것은 晉나라 때 王沈과 夏侯湛의 魏書중 어느 하나일 것이다. 이런 자료를 분석하면 우리는《삼국유사》에 인용된《위서》가《삼국지》이전의 魏書임이 분명하니 적어도 3세기 초에는 단군신화가 중국의 史書에 기록돼 있었음을 알수 있으며 그것이 신생 통치자들에 의해 허위조작된 망설이 아님을 알수 있다. 따라서 이 전설의 산생시간은 최소한 천년을 앞당길수 있다. 《단군전설》의 산생시간에 대해 우리는 조선사료에 기재된 여러 가지 단군전설에 대한 비교와 분석을 거쳐 진일보의 추정을 이끌어 낼수 있다. 이 문제에 대해 조선의 학자 리지린은《고조선 연구》에서 상당히 구체적인 견해를 내놓고 있다. 그는 “《魏書》의 단군전설의 자료가 혹시 曹魏때에 고구려에서 얻어간 것일지는 모르나 그렇다 하더라도 그 자료는 고구려 통치계급이 단군을 자기 계보와 직접 련결시키기 전 고구려의 지배하에 들어간 고조선 인민들 간에 있었던 구비전설이였거나 혹은 문헌자료에 근거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라면서 또 好太王碑文에 단군에 대해 언급되지 않은 사실과 곰을 단군의 토템으로 한 단군신화에 부여, 고구려시기 란생신화의 요소가 전혀 반영되여있지 않다는 점을 들어 단군의 전설이 부여국 건국 이전에 이미 있었다고 보았다. 리지린은 이어 “또한 단군신화는 고조선의 건국자가 조선인이며 殷人인 箕子의 선조도 아니고 위만의 선조도 아님을 명백히 말하고있으니 역시 기자전설이 조작되기 전이거나 또는 衛滿조선 이전에 발생한 것으로 추정할수 있다...《魏書》의 단군신화에 단군은 조선의 개국자이며 그 수도를 평양이나 王儉城이라 하지 않고 아사달이라 하였으니 이것(즉 아사달)은 분명히 王否나 準시대 고조선의 수도가 아님이 명백하다”면서 따라서 “《魏書》에 기록된 단군전설은 否, 準 시대 이전 즉 서기전 3세기 이전에 이미 존재했다고 추론할수 있을 것이다”라고 했다. 이로서《단군전설》의 산생시간은 또 크게 한발 앞당겨졌다. 단군전설이 서기전 3세기 이전에 이미 존재했고 그것이 또 어느날 아침에 갑자기 생겨날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할 때 그 전설의 최초의 형성시간은 당연히 훨씬 먼 옛날로 거슬러 올라갈수 있는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랜 세월 구전되여 왔거나 여러 옛 문헌들에 기록되여 온《단군신화》가 시종 최초 전설의 형성시기의 원 모양을 그대로 간직해 왔을수는 없다.《삼국유사》에 인용된《고기》의 단군신화 내용과《삼국유사》의 저자인 일연과 동시대인인 리승휴의《제왕운기》이후에 인용되고 있는 고기록들의 단군신화 내용이 차이를 보이고 있는 점이 단적으로 이 점을 말해주고 있다. 이런 신화들은 그것이 전해져  내려오는 와중에 후세의 통치계급과 그들의 御用史官들에 의해 수정되고 조작되기도 했으며 그들에게 불리하다 싶으면 지어 삭제되기도 했다. 일부 신화자료는 신빙성이 없다고 보아 일부 사가들이 정사에 올리지 않은 것도 있다. 삼국사기에《단군신화》가 오르지 않은것이 그 사례에 속한다. 때문에 여러 가지 신화와 전설을 자료로 세심한 연구를 해야 그 속에 숨어있는 력사의 진실을 복원해 낼수 있는것이다. “불교영향설”과 관련하여 《三國遺事》에 인용한《古記》는 첫머리에 “昔有桓因(謂帝釋也) 庶子桓雄 數意天下 貪求人世 父知子意 下視三危太伯 可以弘益人間 乃授天符印三個 遣往理之” 이라고 적고 있다. 이 記事는 단군의 조상에 대한 계보를 밝힌 것이다. 그런데 편찬자로서의 一然은 桓因 名下에 “謂帝釋也”라고 주를 달고 있다. 이에 대해 한국 민족문화연구원의 沈伯綱원장은 “一然은 그의 신분이 僧侶였으므로 佛經中에 釋提桓因이라는 용어가 나오는 것을 보고 그 영향을 받아 古記中의 桓因을 佛經의 帝釋으로 리해하였을 것”으로 보고 “그러나 一然의 이 해석은 객관적, 력사적 해석이 결여된 잘못된 해석이라고 본다”고 했다. 그 리유인즉 “檀君시대가 중국의 帝堯시대라면 桓因, 桓雄시대는 중국으로 말하면 顓頊,帝嚳의 시대인데...(그것은) 黃帝시대보다도 훨씬 후기이며 따라서 桓因과 桓雄을 실재 인물이 아닌 도리천(忉利天)의 주재신을 가리키는 帝釋으로 본다는 것은 당시의 주변 력사 상황을 제대로 고려하지 않은 지나치게 승려로서의 주관적, 종교적 견해가 개입된 해석이라고 보여지기 때문”이라는것이다. 그러면서 심원장은 桓因과 桓雄이란 이름에 나타나는 桓은 예로부터 桓水, 桓氏 등 물 이름이나 혹은 姓氏로 씌여지기도 하고 또는 烏桓國과 같이 나라를 가리키는 의미로도 씌여졌다는 의미에서 桓族이라는 씨족을 가리키는 씨족명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보았다. 그 리유는 무엇인가? 심백강은 “春秋시대 宋나라 大夫였던 환추(桓魋)가 바로 桓族이였고 그는 바로 宋桓公의 후예였는데 春秋시대까지만 해도 桓族이 존재했었다는 사실과 특히 春秋시대 宋나라는 東夷의 先民이 세웠던 殷의 후예로서 동이족과는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그렇다면 우리가 桓因, 桓雄의 桓族과 春秋시대 宋桓公, 桓魋의 桓族을 서로 련계선상에서 생각하는 일이 전혀 불가능하다고만 말할수 없다”고 상당히 계발적인 견해를 내놓고 있다. 그러면서 그는 桓자를 韓國의 크고 밝다는 韓자와도 련계시키고 있다.  《삼국유사》에 인용된 古記는 또 “雄率徒三千 降於太伯山頂(卽太伯今妙香山)神壇樹下 謂之神市 是謂桓雄天王也”(환웅은 그 무리 3천 명을 거느리고 太伯山 꼭대기[지금의 묘향산]의 神壇樹 밑에 내려와서 이곳을 神市라 불렀다. 이 분을 환웅 天王이라 한다. )라고 기록했는데 편찬자 일연은 여기서 태백산을 묘향산에 비정하고있다. 이에 대해서 심백강은 “환웅이 ‘太伯山꼭대기 神壇樹 아래에 내려 왔다’고 한것은  桓雄이 자기 아버지 桓因이 다스리던 옛 고장을 떠나 새로운 고장으로 이동하여 와서 살았음을 말한 것”이라면서 “여기서 말하는 太伯山은 중국대륙의 고조선 발상지에 있었던 산을 가리킨 것인데 이 山을 一然이 북한(조선)에 있는 妙香山으로 주해한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한편 조선의 리지린선생은 “觀佛三昧海經”등 佛典자료의 “旃檀妙香” 관련 기록을 통해 전단(旃檀)이란 나무가 불교에서 신성한 수목으로 인정되여 있음을 볼수 있다”는 것을 근거로 “太伯山頂(卽 太伯 今 妙香山) 神壇樹下”라는 표현에 대해 “불교사상으로 꾸며졌다고 보는것이 타당할 것이다”라고 피력했다. 불경자료를 보면 “전단묘향(旃檀妙香)”이란 표현이 확실히 자주 쓰이고 있는데, 례컨대《禮佛懺悔》“五十三佛”에 “전단목가루를 약에 섞어 중생을 치료한다. 묘향(신묘한 향기)이 고루 풍기면 모두의 심신이 안정을 찾고 맑아질수 있다(旃檀翻與藥 能除衆病 妙香普熏 衆生離垢淸淨)”라든가 “부처 신상의 팔만사천 모공에서 단향목의 묘향이 흘러나와 피안을 고루 적신다(佛身八萬四千毛孔 皆出旃檀妙香 普熏法界)”라는 글귀가 보이고《法華經》卷十九《法師功德品》에는《法華經》을 랑독하는 자는 鼻根功德의 증서를 얻어 天香, 旃檀, 沈水 등의 여러 가지 妙香을 맡아 분별할줄 알게 된다고 한것 등이 그것이다. 이로서 리지린선생은 승려로서의 일연이 불교사상의 지배하에 “神壇樹”란 낱말을 신화속에 집어넣은 것으로 리해하고 있는것 같다. 리지린선생의 말대로 일연이 불교사상의 영향을 받은 것은 확실해 보인다. 그러나 필자는 原典에 없었던 “신단수”란 낱말을 일연이 자의로 집어넣었다고는 보지 않는다. 단《古記》에 전하는 “神檀樹”를 旃檀樹로 리해하고 거기에 불교에서 旃檀과 늘 함께 하는 妙香을 조선의 妙香山과 련계시킴으로써 결국 태백산을 묘향산에 비정하게 된것이라고 본다. (계속) 
59    국화꽃 옆에서/미당 서정주 댓글:  조회:4176  추천:87  2008-01-19
  국화꽃 옆에서                미당  서정주   한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58    연변전통된장과 “귀향아리랑” 댓글:  조회:6704  추천:116  2008-01-10
연변전통된장과 “귀향아리랑”   “연변민들레” 리동춘리사장의 연변사랑행진곡     돌아가노라 돌아가노라 이 아들이 돌아가노라 고향산천 부모처자 그리워서 령을 넘어 돌아가노라 --《귀향아리랑》(리동춘, 허동규 작사, 허동규 작곡)에서     “연변민들레마을”  힘찬 스타트   작년 12월 15일, 대련의 수출대리회사를 통해 이 해의 마감차 “민들레와 순창두레 마을”표 전통된장을 한국행 화물선에 실어보낸 연변민들레생태산업연구유한회사 리동춘 리사장(52)은 어쩌다가 즐거이 쇠게 될 새해 설을 떠올리며 금시 마음이 개운해졌다. 그도 그럴것이 연변을 조선족전통된장의 세계적생산류통중심으로 부상시킬 구상을 안고  3년 전 연변에 진출한 리동춘은 각고의 준비끝에 2006년 9월 초순 연변된장의 첫수출을 시도했다가 실패, 이어 작년 5월과 7월에도 역시 검사의 고비를 넘기지 못해 크게 좌절했으니  그런 상황에서 설명절인들 가슴에 얹힌 그 무거운 고뇌를 털어버릴수가 있었겠는가.  그래도 좋은 날은 찾아오게 마련인가보다. 작년 9월 드디여 수출에 성공했다. 그것은 “전통된장의 현대화생산조건은 유일하게 연변만 가지고있다”는 리동춘의 확고한 신념 덕분이였다. 꿈을 이루기 위해 하루도 거르지 않고 고집스레 애써온 결과였다.   상품이 번번이 퇴짜를 맞았던것은 다른 원인이 아니였다. 전통생산방식에서 필시 나타나는 불미스런 세균 아플라톡신이 기준치를 넘는것이 문제였다. 북경대학생명 과학원의 저명한 전문가, 교수를 모셔왔다. 여러 가지 방안을 동원한 십수차례의 실험 끝에 고안해낸 새로운 발효공법으로 끝끝내 골머리 아픈 문제를 풀어냈다.   그것이 첫실패로부터 딱 1년만인 작년 9월 22일의 첫성공으로 이어졌다. 그때 내보낸 제품은 한국식품약품안전청의 정밀검사를 거쳐 공식 통관, 뒤미처 합작업체로부터 최고급품질로 인정받았다.   지난해 12월까지 세차례에 걸쳐 순조롭게 수출된 19톤의 원조전통된장은 한국시장 류통과정에 좋은 평판을 받았다. 이를 토대로 리동춘은 한국의 전통장류 브랜드기업 “순창진미식품주식회사”와 전통장류생산의 최적청정지인 “연변두레마을”과의 “3자합작”을 이끌어내고 따라서 “민들레와 순창두레마을”이란 통일브랜드로 매월 100톤 수출계약의 체결을 최종 성사시켰다.   꿈을 현실로 바꾸는 첫 걸음을 힘있게 내디딘것이다.   격변의 시대 “민들레고개”      민들레! 아름다운 세상을 지향하여 지구촌 방방곡곡에 민들레홀씨들이 흩날려가 갖은 시련과 수난의 발자취를 남기고 새로운 공동체로 정착하면서 글로벌시대 창조적민족으로 거듭나는 우리 민족!   개혁개방 이후 산업화 봄바람을 타고 조선족들이 돈벌이를 위해 도시로 또는 한국으로 빠져 나가면서부터 조선족 마을들은 해체의 일로를 걷기 시작했다. 하지만 흑룡강성 해림시 신합촌은 여느 촌과는 달랐다. 다른 촌의 학교들은 하나 둘 문을 닫아걸었지만 신합촌의 학교는 오히려 학생수가 늘었다. 젊은 사람들이 도시로, 한국으로 떠나가는 현실에서 신합촌에는 역으로 젊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었다.   이곳을 변화시킨 주인공이 바로 오늘 “민들레마을”의 리동춘이다. 그는 조선족기업의 신화로 불리는 “백두산그룹”을 창설하여 큰 성공을 거뒀다. 하지만 그가 백두산기업을 만든건 그 자신의 성공만을 위해서가 아니였다. 그는 기업에서 나는 리익금을 고스란히 조선족을 위해 재투자했다. 이렇게 만들어진것이 신합촌 신도시 즉 “백두산타운”이다. 신합촌은 흑룡강성 조선족촌 중의 제1촌으로 떠올라 흑룡강성 당위서기가 점을 잡고 경험을 탐구하는 모델촌으로 되였다. 유명해진 리동춘은 제 9기 전국인대 대표를 지내기도 했다.   그러나 사업이 한창 잘나가고 있는 이때 북경에 있는 우리 민족의 엘리트들이 유명짜한 해림시 백두산타운으로 수차 드나들면서 강력한 “유세”를 펼친 끝에 매여끌다싶이 리동춘을 북경으로 모셔들인다. 애지중지 가꿔온 기업을 젊은이들에게 맡기고 북경에 들어간 리동춘은 “중국조선족코리안닷컴” 을 세우고 중국 조선족의 우수한 젊은이들을 발견해서 키우는 “미래양성”사업에 동참하고 “중국조선족발전을 위한 심포지움”의 집행위원장도 력임, 몇 년간 동북 3성 조선족 새농촌건설 관련 학술세미나를 수차례 벌려왔다. 그 행정에 조선족사회의 발전은 말로만이 아니라 문화와 경제를 잇는 실제행동이 무엇보다 중요함을 통감하고 결연히 연변진출을 결심한다.   “외딴 섬”으로의  “귀향아리랑”   산 좋고 물 맑고 공기 청신한 연변의 깊은 산중에 “연변민들레전통장류단지”가 조성되고 있다. 길가에 우뚝 솟은 1메터 직경에 6메터 높이의 통나무간판이 름름하다. 꼭대기에 앉아있는 전통장독이 살아있는 간판처럼 손 흔들어 길손을 맞이하는듯 싶다.   인적기 드문 초시작 단계의 작업현장이라 아직은 고즈넉하고 한산하기까지 하다. 전기도 들어가지 않은 야산기슭에 황토벽과 통나무구조로 된 한옥 한 채, 그리고 몇백개의 장독대가 고작 눈에 뜨이는 실물 전체이다.   하지만 바로 이곳에서 현대기업의 경영론리로는 도저히 해득할수 없는 거창한 일들을 리동춘을 비롯한 “민들레마을” 사람들이 만들어가고 있는것이다. 그것도 한국기업 진출 십수년에 300만 딸라를 집어넣고도 여봐라 할만한 항목을 개발해내지 못해 아직 그냥 대기상태인 이 “외딴 섬”에서 그는 대관절 무슨 수로 생태산업이라든가 농가기업육성 이라든가 세계최대 조선민족전통장류단지 조성이라든가 문화와 산업의 융합이라든가 하는 “거창한 꿈”을 이룬다고 하는것일가?   아래 이 몇 년간 리동춘네의 행적을 간단히 살펴보기로 하자.   -2004년, 연변 최초의 “록색경제문화학술세미나” 개최 -2005년 5월 8일, 서울 “귀향아리랑문화예술절”에 이어 “제1회 귀향절”, 연변최초 “생태가요창작발표대회” 개최, 12월, “연변민들레생태산업연구유한회사” 설립 -2006년 8월, “민들레생태연수원” 개원, “제2회 연변민들레생태문화예술절(귀향절)”개최, 중국조선족발전연구회와 조선족문인사회 최초의 “토템문화현상학술세미나” 공동개최 -2007년 8월, “제3회 연변민들레생태문화예술절” 행사 개최. 중국조선족발전연구회, 연변일보, 길림신문, 료녕신문, 연변《생활안내》의 공동주최로 생태소설, 시, 수필, 가요, 미술, 촬영작품현상공모 및 시상식, “제1회 세계연변민들레전통된장축제와 생태쌀, 생태꿀축제” 치름. 중국, 한국, 일본 등 각계 인사 1,000여명 참여, 500여명 현장 참석   기자: 왜 기업을 설립해놓고 기업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어보이는 문화행사만 벌리는가? 실속 없이 명예만 추구하는것이 아닌가? 리동춘: 경제란 인간활동의 산물인만큼 경제에 앞서 인간이 우선이다. 기업제품의 존재는 시장배육의 전제하에서만 가능하다. 문화인재가 많은 연변은 인재의 보고(寶庫)로 되기에 손색이 없다. 문화인들과의 련대로 시장을 개척할수 없겠는가? 이런 생각으로 일반 통념을 깨는 역발상에 토대한 문화적 투자에 성의를 넣은것이다.   기자: “민들레”가 추구하는 것은 무엇인가? 리동춘: 생태인간, 생태기업, 생태제품이다. 21세기는 생명산업의 시대이자 인류의 건강을 최우선으로 하는 시대이기 때문에 건강기능식품의 시장예비가 무진장할것으로 판단된다. 우리 민족의 명맥을 이어왔고 앞으로도 없어서는 안될 전통발효식품과 무공해 생태농산물을 기능성제품으로 업그레이드시켜 인류건강증진에 이바지하려는 것이다.   기자: 훌륭한 발상이고 계획이라 생각되지만 리상주의적 색채가 짙은것 같은데? 리동춘: 현실을 무시하면 안 된다. 그러나 지나치게 “현실”에 집착하면 다른 기업들과의 무한경쟁속에 깊이 빠지게 된다. 10년, 20년을 내다보고 거기까지 가는데 현실과의 접합점이 어디인가 그 과제를 잘 풀어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그 과제는 우리 삶의 밑바닥에 있다고 본다. 남들이 다 회피하지만 꼭 해야 할 과제인 농촌경제와 전통산업에서 풀어가자는 것이다. 우리민족이 조상 대대로 이어오던 우수한 전통문화, 전통산업을 살려가면서 문화와 산업 발전이라는 “두마리 토끼”를 동시에 노리자는 것이다.   생태산업 공동체  “전통된장련합국”   리동춘은 연변전통장류 생산공급시스템의 량성순환체제를 구축하고 그것을 세계인의 식품으로 승화시키기 위한 마케팅전략으로 "된장련합국"을 창설하련다는 괴짜구상을 내놓았다.   기자: “된장련합국”? 참으로 기발하고 거창한 착상이다. 그런데 왜 하필 된장인가? 리동춘: 된장의 물리적 기능은 더 설명하지 않아도 그것을 먹고 살아온 사람들이 더 잘 알고 있다. 단지 강조하고싶은 것은 된장문화다. 우리 민족의 문화는 된장문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된장에는 아주 깊이 있는 령성(靈性)문화가 있는데 그것을 5덕(五德)이라 한다. 즉 단심, 화심, 항심, 선심, 불심이다.   기자: 금시초문이다. 무슨 뜻인가? 리동춘: 단심(丹心)은 일편단심, 다른 음식속에 섞여도 자기의 맛을 잃지 않는다는 뜻이고  화심(和心)은 다른 음시과 잘 조화하면서 자기 맛을 낸다는 것이다. 항심(恒心)은 오래 두어도 변질하지 않고 오히려 더 좋은 기능으로 승화한다는 뜻이고 선심(善心)이란 매운맛을 부드럽게 해준다는 의미, 불심(佛心)은 기름기와 비린내를 제거해 주는 소박하고 아름다운 령적기능을 가지고있다는 의미이다. 우리 민족의 특성과 비슷하지 않은가? 인간이 갖추어야할 문화라 생각한다.   된장은 우리민족의 명맥을 이어오면서 민족과 운명을 함께 해온 가장 기본적인 기초식품이다. 전통된장은 식품이면서도 항암, 고혈압 억제, 간기능 강화, 해독, 소화 등 작용과 당뇨병, 비만증, 심장병, 뇌출혈 등 질병 예방치료기능까지 겸비하여 이미 과학적으로 약식동원(藥食同源)제품으로 인정받고 있다.   이렇게 우수한 제품임에도 불구하고 세계적으로 아직까지 100% 콩을 원료로, 아무런 화학첨가제도 쓰지 않고 순수 전통된장을 제품화한 기업은 조사에서 발견하지 않았다고 한다. 왜냐하면 정통적(正統的) 된장제조방법은 가정집에서 메주를 빚어 발효시킨 후 장독에 담아 최소 6개월 이상 발효, 숙성시키는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전통된장의 기업에서 그 과정을 거치면 리윤을 내기는커녕 오히려 밑지기 십상이란다. 지금 있다면 배양종균을 밀가루 등 기타 곡물에 넣어 만든 개량된장이 있는데 이런 된장은 영양가와 기능면에서 정통된장과 비교가 안될만큼 큰 차이가 난다는것이다.   리동춘이 연변된장을 선택한 리유는 지극히 간단했다. 아직 세계적으로 전통된장을 생산하는 기업이 없는데 반해 우리 민족은 집집마다 생산기술을 가지고 있다는것, 말하자면 수많은 농가를 기업화시키는 최적의 여건이 오직 연변조선족자치주에만 주어져있다는 것이다.   물론 애로사항이 없는것이 아니다. 하나는 집집마다 다른 장맛을 한가지 맛으로 통일시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무공해식품으로 수출의 길을 여는것이다. 이 두가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는 장장 3년의 시간을 준비해왔으며 수많은 학비와 비용을 지불하였다.   수출을 거듭 시도해서 네번째만에 성공시킨 리동춘은 향후 매월 100톤(물론 2~3년 후엔 100톤만이 아니다)이란 수출의 길을 열어놨다.   리동춘의 "된장련합국"창설구상은 바로 이 과정에 싹이 터서 무르익은 것이다.   이 구상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있다. 본 지역에서 무상으로 공장, 집터와 농경지 일부를 제공하고 요구표준에 따라 만든 제품 전체를 수매하는 조건으로 80호 좌우의 농가기업을 육성하는 동시에 한국, 조선, 미국, 일본 등 우리 민족이 많이 살고있는 나라와 지역의 기업을 유치하거나 회원기업으로 받아들여 세계적 네트워크를 형성, 21세기적 생태기업리념의 산업공동체를 만들어간다. 또한 수익금의 최저 3% 이상을 “생태문화경제산업발전기금”으로 기부키로 확정, 또 민족을 사랑하는 NGO(엔지오, 국제비정부기구)단체들과도 널리 교류하면서 전통산업으로 민족의 발전을 돕는것을 목표로 내걸었다.   실제로 이 구상은 계획단계를 넘어 이미 실시에 들어갔다. 전화문의가 빗발치는 가운데 10여개 기업이 이미 동참을 선언했고 그 기업들에 줄을 다는 숱한 농가들도 앞이 보이는 희망에 즐거운 비명을 지르고 있는 상황이다.   만질듯이 다가온 “된장아리랑”   기자: 세간에서 연변에 대해 좋지 않은 평가도 있다. 특히 연변에서 기업을 한다는것은 호박 쓰고 돼지우리에 뛰여드는 격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는가? 연변을 선택한 다른 리유가 있다면? 리동춘: 연변사람은 밖에 나가서 취직을 할 때도 자기가 연변사람이라는 것을 말하기 두려워한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러나 똑같은 피가 흐르는 아리랑민족으로서 사람들이 나쁜것이 아니며 더욱이 누구의 탓으로 생각할수 없다. 단지 지역마다 문화적인 차이는 있다고 봐야 한다. 우리 민족은 왕은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서로가 잘 어울리는 우수한 공동체문화가 있다. 강자 앞에 머리 숙일줄 모르고 약자는 베풀어 주는, 모두가 왕이 되는 그런 문화특성이 짙은 민족이다. 특히 연변지역은 전통집거구역으로서 그 뿌리가 더 깊다고 생각한다. 외지 사람들을 잘 인정해주지 않는 연변의 인정세태를 직접체험으로 맛본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하지만 나는 연변사람들을 사랑한다. 우리가 멀지 않아 혼연일체를 이루게 될것임은 틀림 없다. 연변은 때묻지 않은 전통문화와 전통기술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곳이다. 민족전통산업과 문화산업을 발굴하고 계승발전시킬수 있는 큰 예비를 가지고있는 곳이라 생각한다. 이것이 내가 연변을 선택하게 된 원인중의 하나다.   기자: 연변발전에 대한 새로운 관점이 있다면? 리동춘: 21세기 미래지향적인 새로운 문화의 창달이 중요하다. 이런 의미에서 연변조선족자치주를 생태자치주로 건설한다는 정부의 취지가 매우 좋다고 생각한다. 단, 이것이 공무원사회에서 부르짖는 구호에만 그치지 말고 정부와 서민 사이에서 역할하는 민간단체의 육성에 무게를 실어 고향살리기, 민족살리기, 연변살리기, 자연살리기, 환경살리기에 자발적으로 나서는 “귀향아리랑”들의 힘을 최대한 활용하는 정책제정이 필요하겠다.   기자: 전통장류단지조성이 연변에 주는 의미는? 리동춘: 일을 금방 실행해나가는 시점에서 결론을 말하기는 어렵지만 꿈만큼은 뚜렷하다. 우리가 매일 접하는 전통된장의 본연의 가치를 극대화하여 민족식품의 위용을 세상에 떨쳐보자는 것, 농가기업의 신개념 기업리론을 현실화시켜 “3농문제” 해결에 참고가 될만한 경험을 더듬어 내고 아이디어경제(策劃經濟)의 모델을 만들어 농민들에게 적은 돈이나 지어 빈손으로도, 그리고 같은 제품의 생산자들과 사활적인 경쟁을 벌리지 않고 오히려 단합하면서 함께 창업할수 있다는 신념을 심어주자는 것, 연변민들레생태문화 예술절을 특색짙은 생태문화브랜드로 키움과 아울러 국내(한족지역 망라)와 국외에 널리 된장문화를 홍보하며 이로써 연변을 명실공히 “세계속의 최대전통장류집산지”로 부상시키 자는것이다. 금년 제4기 이벤트는 씨름, 그네, 널뛰기 등 전통체육항목을 포괄한 대회로 치를 계획도 짜놓았고 생태가요응모는 이미 시작했다.     리동춘은 이렇게 말한다. 총명한 사람들이 한결같이 앞만 보고 나갈 때 좀 바보스럽게 되돌아가는 것도 기회로 될수 있다. 지금 세계 500강 기업시대는 지나가고 500대 기업시대가 시작되였다. 500강은 경제실력으로만 평가하는데 반해 500대는 환경개선 등 시회기여도를 종합평가한다. 멀리 내다보는 안목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요컨대 “민들레”의 경영리념은 “엔지오정신”에 립각한 리타적 경영이다.    취재수첩을 접으며   오십대 사나이의 가슴속에서 굽이쳐흐르는 “귀향아리랑”노래, 아리랑 고개넘어 연변의 심산벽곡에서 “된장아리랑” 새노래 창작에 여념이 없는 리동춘! 그의 웅숭깊은 눈길에서 우리는 세계최대된장집산지로 떠오르는 연변을 본다.   //길림신문/박문희   【李东春相关文章】 http://www.zoglo.net/blog/read/piaowenxi/64059/0/80 http://www.zoglo.net/blog/read/piaowenxi/64106/0/40 http://www.zoglo.net/blog/read/piaowenxi/64127/0/0 http://www.zoglo.net/blog/read/piaowenxi/93635/0/0  http://www.zoglo.net/blog/read/piaowenxi/202732/0/0  
57    [칼럼시리즈] ➀ 토템과 신화 댓글:  조회:5766  추천:107  2008-01-04
 [칼럼시리즈]우리 민족은 어디서 왔는가?(4)    ➀ 토템과 신화   얼마 전 토템과 신화 문제를 가지고 중국과 한국의 사이버공간이 조금은 시끌벅적했다. 지난해 10월 31일 한국 梨花女大 중문과의 정재서(鄭在書)교수가 론문《중국신화속의 한국신화》를 발표한것이 “사건”의 발단이 됐다.   정교수는 론문에서  “산해경중 염제, 치우, 과보, 풍백 등 동이계 신들이 고구려 고분 벽화에 출현함을 확인함으로써 우리는 잃어버린 한국신화에 한발 접근할수 있는 근거를 확보하게 됐다”며 “공간적 차원에서 중국신화는 한 민족, 한 국가의 신화라고 할수 없으며 중국신화는 사실상 아시아의 다양한 신화를 뭉뚱그린 ‘동양신화’다”1)라고 주장했다.   이 론문 발표에 앞서 정재서교수는 《한국신화의 원형을 찾아서》란 글에서 “우리 민족은 지금의 한반도에서만이 아니라 드넓은 대륙을 무대로 살아온만큼 진정한 한국신화의 원형을 확보하기 위해 우리는 빈약한 국내 문헌자료에 구애되지 말고 자료분석의 시야를 중국의 다양한 신화자료에까지 확대할 필요가 있다”라는 의론을 편적도 있다.   그의 론문이 공개되자 중국의 일부 매체들은 당일로 “정재수가 한국의 신화가 중국신화의 형성에 영향을 끼쳤다고 주장한다”고 발표하여 중국 네티즌들의 강한 반발을 유발, 정교수를 비꼬는 글들이 넷사이트에 빗발쳤다. 이에 대해 정재수교수는 중국언론의 “왜곡보도”로 중국네티즌들이 그의 론문내용을 오해하고 있음에 깊은 유감을 표시했다.   공교롭게도 작년 7월 중국사회과학원 연구원, 중국신화학회 회장 엽서헌(葉舒憲)이 새책 《곰토템—중국 선조신화의 뿌리를 찾아서》를 발표, “황제집단곰토템설”을 펴면서 “곰토템은 동북아지역의 공동한 현상”이라며 나아가 “단군신화는 황제족과 한민족의 연결고리”이며 “(단군신화에 나타나는) 곰토템 신앙과 신화의 기술내용은 황제-화하(華夏)민족을 조선-한민족의 상고시대 문화기억과 연결시켜 주는 공동의 끈”2)이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그의 책이 나온지 4개월 만에 한국의 매체가 “단군신화의뿌리가 황제집단의 곰토템이라는 주장이 중국 연구기관의 한 신화학자에 의해 제기됐다”며  葉舒憲의 주장은 “단군조선을 부정하고 단군신화를 ‘한(漢)문화의 영향을 받은 중국문화의 반응’으로 폄하하고 신화, 전설시대를 역사로 편입시키려는 의도”라고 매도했다. 그러자 한국의 네티즌들도 엽서헌의 주장에 강렬히 반발했다.   이에 대해 중국의 일부 매체는 한국이 중국의 조상신화연구를 공격하고 있다고 받아쳤다.   그럼 정재서와 엽서헌의 학술주장이 과연 중국과 한국의 일부 네티즌들의 강한 반발을 살만큼 잘못된 것인가? 그들의 론문과 저서를 들여다 보면 저자들의 의도와 저서의 실질적인 내용이 매체들에 의해 상당정도 오해 혹은 왜곡되고 있으며 설사 각자의 견해표달에 일부 토론해야 할 점이 있다손 치더라도 그들의 주장에 뚜렷이 드러난 중요한 공통점에 대해서는 매체들이 완전히 간과하고 있음을 금방 알수 있다.   공통점이란 무엇인가? 신화연구의 시야를 자국내에만 국한시키지 않고 국외, 나아가 동북아, 유러시아까지 넓히고 있다는 점, 또는 그것을 주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의 말을 그대로 인용하면, 정재서교수는 “한국신화연구도 한반도 혹은 국내 자료에 국한하지 않고 아시아적 범주에서 다양하고 풍부하게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고 밝히고 있으며 엽서헌도 “곰토템은 유라시아대륙 및 북아메라카 전사시기 종교신앙의 공동한 주제의 하나”임을 강조하고 있다. 우리는 그들의 글에서 대방 민족과 국가에 대한 비하나 불존중의 의도를 찾아볼수 없으며 오히려 서로간의 련결고리를 찾으려는 뜻깊은 노력을 감지할수 있다.   기실 현재 두나라와 민족과 민족간에 아직 불신감과 일부 감정의 장벽이 놓여있는 상황에서 그들의 련결고리를 찾으려는 노력은 매우 귀중한것이라고 봐야 한다.   일이 이쯤 벌어진 이상 우리는 이 토템과 신화문제를 그저 간단히 지나칠수만은 없다. 여기서 토템과 신화를 동시에 제기하는 것은 이 량자를 떼여놓고 말할수 없기 때문이다. 토템과 신화의 관계에 대해 가장 명확하게 천명한 사람으로는 아마 프랑스의 사회학파 창시자 E. 뒤르켐(涂尔干)을 짚을수 있을것 같다.    뒤르켐에 따르면 토템이란 바로 부족 각계통의 표징이자 사회의 상징물이다. 토템의 神聖性은 토템동물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고 원시인류의 자연에 대한 무지와 위구심에서 비롯된 것도 아니며 그것은 개체에 대한 사회의 초월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사회는 성스럽고도 신비한 힘이다. 토템에 관한 이야기자 바로 신에 대한 이야기 즉 신화인데, 결국 그것은 사회에 대한 서술에 다름 아니다.3)   물론 뒤르켐의 견해와 다른 견해도 있다. 토템문화 연구는 1791년에 시작되여 지금까지 200년 남짓한 력사를 가지고 있지만 여러 학자들이 근거로 삼은 자료가 다르고 연구의 각도가 같지 않으므로 각자가 얻어낸 결론에 차이가 생기는것은 조금치도 이상할것 없다. 토템문화가 발생한 시간이 아득히 먼 옛날인데다가 사회의 발전에 따라 토템도 많이 변화하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뒤르켐의 론술에 대한 다음과 같은 리해에 커다란 흥취를 갖는다.   “사회의 상징물로서의 토템은 피부와 눈으로 느낄수 있는 형상으로 씨족군체내의 동질감을 제시하여 군체의 응집력을 강화하고 공동한 문화혈맥을 이어가며 공동한 문화기억을 보존하는 역할을 감당한다. 따라서 토템동물(조상)의 사적을 서사화(敍事化)한 신화는 사회문화기억을 유지하는 사회적기능을 가짐으로써 부족군체가 세세대대로 전하는 공동한 신앙으로 승화되는것이다.” 4)   신화는 허황한 것이라서 믿을수 없다는 과거의 생각은 오늘 많이 바뀌여 있다. 이전에는 하왕조와 상왕조까지도 신화시대로 취급되였었는데 그런 견해는 언녕 뒤집히고 지금은 염제, 황제, 치우 지어 그 전의 인물들도 실재인물(여러 사람의 사적을 한 사람에게 집중시키는 사례를 포함해서)로 보는 경우가 많다. 신화가 아주 허망한 이야기가 아니고 력사사실을 상당 정도 반영하고 있다는 것은 고고학발견으로도 많이 증명된 터이다.   그러나 필자가 여기에서 관심이 쏠리게 되는것은 단순히 우리 민족 조상들의 토템이나 신화 그 자체에 대해서만이 아니다. 그것을 오늘날 부득이 련계시켜 보지 않으면 안되는 중국과 한반도, 그리고 우리 민족 자체의 현실문제와 련계시켜 생각해 봄으로써 오래 동안 우리를 곤혹케 해온 일부 문제의 실마리를 풀어보자는 것이다. 토템과 신화에 대한 진일보의 연구가 문제해결의 실마리로 될수 있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상고시대 우리 민족 선인들의 행적을 추적함에 있어서 우리는 토템과 자주 만나지 않을수 없으며 그것이 때론 추적의 관건적 고리로도 된다. 토템에 대해 여기서 장황한 해석은 면하고 필요시에만 구체문제와 결부해서 토론하려 하며 단 근래에 자주 거론된 토템의 품종에 대해 간단히 언급하기로 한다. 실상 한국의 연구교수들이 토템의 범위는 대체로 그려 놓았으므로 우리의 인식에 별 무리는 없다.    례컨대 한국 梨花女大의 허흥식교수는 “한국 고대신화의 토템은 범, 곰, 사슴, 고니 등 야생동물 뿐 아니라 해와 달과 북극성 등 천체를 내포한 천신이 있고 말과 소, 돼지 등 가축과 산천과 바위와 고목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생물과 무생물이 포함되였다. 이 가운데서 맹수인 곰과 범은 불교에 의해서도 소멸되지 않은 대표적인 토템이고 그 가운데서 범은 곰보다 실제로 우세한 토템이였을 가능성이 크다.”5)고 하였고,   죽계선생은 《한국신화의 체계화방안 연구》란 글에서 “마을을 지켜줄수 있다고 믿어서 숭배하는 부락신의 형태는 매우 다양한 모습으로 존재하는데 산, 바위, 연못 등의 자연물이나 나무, 바위, 뱀, 호랑이, 두꺼비 등의 동식물이 있는가 하면 상상의 동물에서부터 산신령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한 양상의 존재로 나타난다. 이러한 부락신화들은 신계에 있는 존재이기는 하지만 하늘신이거나 강림한 신이 아닌 토템적인 성향을 지닌 신이라고 할수 있다”고 하였다.   송기정교수는 “또한 의자왕 20년(660년)에 땅속에서 거북이 나와 그 등을 보니 ‘백제는 둥근 달과 같고 신라는 초승달과 같다’고 씌여 있었는데 이것은 곧 ‘백제는 망하고 신라는 흥한다는 뜻으로 그 해에 라당(羅唐)련합군에 의하여 백제는 멸망하였다’는 《삼국사기(三國史記)》중 《백제본기(百濟本紀)》의 거북점기록을 볼 때 거북토템의 존재도 예상해 볼수 있다”6)고 하였다.   삼족오를 우리 민족의 토템으로 보는 견해가 많은데 여러 사서의 기재로 미루어보아 그것이 우리 민족만의 토템인것 같지는 않다. 기실 집안의 고구려 고분벽화나 한국의 씨름무덤, 쌍영총, 천왕지신총 등 고구려시대 고분벽화에 많이 그려져 있는 삼족오(三足烏)를 고대 동아시아 지역에서 공동히 태양의 신으로 널리 숭배한 전설의 새라는 견해도 많다. 삼족오라는 말이 처음 등장한 것은 전한시대 때의 것으로 추정되는《춘추원명포(春秋元命苞)》라는 책이며 《산해경》에도 “태양가운데 까마귀가 있으니 세발달린 까마귀이다(日中有烏謂三足烏也)”`  `라는 기록이 있다. 기원전 4,000년경의 앙소문화 유적지의 토기에서 처음으로 삼족오가 발견된 뒤 감숙성의 제가문화 유적지에서도 발견되였으며 료녕성 조양지구 원태자 벽화묘에도 삼족오문양이 있다. 삼족오가 중국의 신화가 만들어낸 산물임은 틀림없다. 그러나 고구려의 삼족오는 그 형태가 중국과는 달리  단순한 까마귀라기보다는 봉황의 모습과 합쳐진 것 같이 독자적으로 진화한 모습을 보이고있다.   이제 고대 여러 민족(이 가운데는 아직 분명치는 않지만 우리 민족의 선인들도 섞여있을 것으로 본다)의 토템을 간략해서 살펴보면, 하족(夏族)의 토템으로는 돌, 곰, 물고기, 룡 등 다수가 있고 화족(華族)의 토템으로는 꽃, 상족(商族)의 토템으로는 현조(玄鳥) 등 새인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주족(周族)은 룡, 새, 거북, 기린, 개, 곰, 자라, 벼, 호랑이 등, 진족(秦族)은 현조(玄鳥), 초족(楚族)은 곰, 자라, 양, 봉황, 물고기, 룡, 호랑이 등을 토템으로 했다. 북방의 고대민족중 흥안령 서쪽에서 바이칼호에 이르는 지역의 유목민들은 곰, 사슴, 개, 이리, 뱀과 새 등을 토템으로 숭배하였고 선비족의 토템은 일반적으로 사슴이라고 알려져있으며 거란인의 토템은 청우(靑牛)와 백마, 돌궐족계의 토템은 암이리, 흰매, 수리, 사냥매, 새매, 산양, 청응(靑鷹), 눈(雪), 사자, 수락타 등이 있으며 고대 강인(羌人)토템으로는 양, 호랑이, 모우, 백마, 삼랑(參狼), 원숭이 등이 있고 남방의 고대민족중 월인(越人)들은 주로 새와 뱀을 토템으로 삼았다 하며 남만(南蠻)민족은 주로 개를 숭배하였고 야랑인(夜郞人)들은 대나무, 파인(巴人)은 호랑이, 남조인(南詔人)들은 호랑이를 숭배하였다 한다.   이런 토템들이 거개가 신화를 산생했으며 그중에는 오늘까지 전해져 내려오는 신화들도 많다. 《산해경》에 기록되여 전해진 신화만도 그 수가 적지 않은것이다.   고대부족들에게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토템신앙현상을 통해 우리는 각 부족 토템물의 상이(相異)함과는 무관하게 여러 부족 모두는 부동한 지역에서 역시 같거나 다른 동물 혹은 기타 자연물을 토템으로 삼으며 비슷한 방식으로 삶을 살았었구나 하는 느낌을 강하게 받게 된다.   하지만 보다 더 관심을 가지게 되는것은 두말할것없이 우리의 직계 조상과는 다른 부족이 우리의 조상과 동일한 토템을 가지고있는 경우이다. 특히 대표적인, 혹은 중요한 토템이 동일할 때에는 더욱 그러하다. 우리 민족의 대표적 토템으로는 아마 곰과 새를 들수 있을 것이다. 새를 대표적토템의 하나로 보는것은 새를 토템으로 한 蚩尤, 少昊가 우리 민족이 속하는 동이족의 수령이라는 견해에서 비롯된다.   지금 현실적으로 제기되는 문제는 중국의 사학계에서 炎帝, 黃帝, 蚩尤를 중화민족의 3조(三祖)로 취급하고 있고 우리 민족의 상당수 학자들도 염제, 치우를 우리 민족의 조상으로 간주하고있다는것이다. 그리고 엽서헌씨는 유웅씨 황제의 영향이 심어준 상고적 기억이 동아시아의 가장 완벽한 곰토템신화인 단군신화를 산생시켰을수 있음을 암시하고있다. 그러나 이로 해서 지나치게 민감한 반응을 보일 필요는 없다. 이에 대한 역발상적 해석이 가능하기때문이다.   이와 같은 상황은 분명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커다란 의문을 던져주고있다--   “炎, 黃, 蚩는 우리에게 도대체 무엇인가? ”   (계속) --------------------------------------- 1) 한국 梨花女大 정재서,《중국신화속의 한국신화》, 한국 비교민속학회《한국신화의 정체성을 밝힌다》학술대회 발표,  2007, 11, 1 2) 葉舒憲:《熊圖騰-中國祖先神話探源》, 上海文艺出版总社,  2007, 8 3) 刘宗迪:《图腾、族群和神话─涂尔干图腾理论述评》,《民族文学研究》,2006年第4期 4) 同上 5) 한국학중앙연구원 허흥식,《단군신화와 동아시아 민족신화의 토템에서 범의 위상》, 만주학회 제11차 학술대회 발표 론문집, 2005년 9월 6) 한국 리화녀대 송기정,《신화의 상상력과 문화-한국문화속 동양신화》  
56    인류조상의 개척사적 이동 댓글:  조회:8547  추천:105  2007-12-25
우리 민족은 어디서 왔는가(3)   인류조상의 개척사적 이동   여러가지 사례를 통해 우리는 우리 조상들이 걸어온 족적을 더듬어 올라가면서 시야를 보다 광활한 지역에로 확대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하지 않을수 없다. 그런데 유전인자검사에 의한 과학자들의 현생인류기원연구의 결과는 이 문제의 풀이에 결정적 단서를 제공해주고있다.   인류기원연구프로젝트 총지휘인 스펜서·웰즈(미국)의 저서《인류전사(人類前史)》(東方出版社2006年版)가 바로 그 장려한 개척사적 려정을 묘사한 인류의 유전인자보고서이다. 간단히 사람의 남자한테만 유전되는 Y 유전자의 타입을 연구하여 인류가 어떻게 전세계로 퍼졌는지를 밝혀낸 성과서인것이다.   이 책에서 스펜서·웰즈는 현생인류의 기원문제에 대해 아주 선명한 견해를 제기했다. 그는 우리 민족이 약 4만년 전 중앙아시아에서 동쪽으로 이동해와 형성된것으로 최첨단 DNA 분석결과를 통해 밝히고있다. 아프리카에서 발원한 현생인류가 중앙아시아 일대에 옮겨와 살다가 3~4만년 전에 갈라진 원주민 가운데 서북쪽으로 이동한 일파가 유라시아인종이 됐고 동으로 몽골을 지나간 일파는 중국 북부, 한국 등에 퍼졌으며 또 한 일파는 남쪽으로 해서 중국 남부과 동남아로 퍼졌다는것이다.   그에 따르면 오늘날 세계 각지에 살고있는 모든 사람은 하나의 공동한 조상을 갖고있는데 바로 6만년전 아프리카주에 살던 한 남자라는것이다. 5만년 전 장시간에 걸쳐 가물과 기황이 계속되면서 그들중 한무리가 고향을 떠나 모험적이동을 시작, 수만년에 걸쳐 사람이 살만한 지구우의 거의 모든 곳을 차지한다. 현재 지구상 모든 사람들은 지역에 따라 문화, 체형, 생김새, 피부색이 커다란 차이를 보이지만 그러나 과학연구결과가 표명하다싶이 85%의 유전인자변이는 전반 인류가 공유하고 있는것이며 그외 약 8%만이 인종획분의 의거로 될수 있다는것이다. 말하자면 서로 다른 인종의 차별은 8%에 그칠 뿐이라는것이다. 인류는 공동한 생물속성을 가지고 있으며 인종에는 우렬의 구분이 없다는것이다. 종족주의자들의 종족기시는 리유가 없다는 단적인 증거를 제시한 셈이다. 유전자연구의 결과로 말미암아 인류의 기원연구에 부정적 영향을 장기간 끼쳐왔던 “혈형론”과 “인종결정론”의 대부분의 오유를 극복하게 되였다.   스펜서·웰즈는 여러 나라 과학자들과 합동연구를 진행한 결과 오늘의 세계인류는 모두 아프리카에서 왔으며 중국에 살았던 藍田人, 元謀人, 北京人은 모두 아프리카에서 출발한 현생인류가 도착하기전에 멸종됐음을 밝혀냈다.   유전학자들에 의하면 인류의 이동은 한번에 실시된것이 아니라 여러 차례에 걸쳐 지속적으로 실시돼왔다. 스펜서·웰즈의 저서와 중국의 중국의 유전학자 金力교수의 연구팀, 한국 단국대학의 김욱교수 연구팀, 일본 돗토리대 의학부 이노우에 다카오 교수팀 등 많은 과학자들의 연구결과에 따라 중국과 한국에 이르기까지에 관계되는 인류의 이동로선을 다음과 같이 귀납분석해보았다.   아담 남성 유전자로부터 M168 코드를 포함한 남성 유전자를 가진 그룹이 약 4만 5000년전에 아프리카에서 형성되였다. 이들은 인도 서부까지 이동했는데 그중의 한 계통인 M89그룹으로부터 약 4만년 전에 M9그룹이 생겨났고 M9그룹은 약 3만 5000년 전 중앙아시아의 한갈래 통로를 따라 이동, 천산과 알타이산맥 일대에 이르러 거기서 M175그룹을 낳는다.   M175은 다시 동아시아의 세 방향으로 퍼지는데 한갈래는 동으로 이동하여 동북땅에서 자리를 잡고 그중 일부는 한반도에까지 들어간다. 다른 한갈래는 남방으로 이동하는 과정에  M122그룹을 생성하는데 이 그룹은 장강 근처에서 벼농사를 하던 중국인집단의 일부로 알려져 있다.   M122그룹은 한국인집단에서도 비교적 높은 빈도(약 30%)를 보이는데 이 계통이 해안선을 따라 한반도내로 이주했다고 볼수 있다.   M122에서 한족의 염색체계통은 주로 O3, O3e과 O3e1 이 세가지 류형으로 나타나는데 이들은 중국 남부에서 동북부 방향으로 전파되였다. O3은 남아시아 군체와 묘족들에게서도 나타나지만 O3e1만은 한족이 단독으로 갖고있다. 이 류형이 원시한인(즉 화하족)으로 황토고원(섬감녕지역)에서 발생하여 일부는 적인(翟人)부족을 형성하고 일부는 중원방향으로 이동한다.   연구결과로 보아 유전적으로 한국인은 북방한족과 가장 가깝고 다음으로 일본, 몽골, 남방 한족 순으로 가깝다는것이 한국 김욱교수의 견해다. 카톨릭대학의 한훈교수가 한국인과 여러 민족을 대상으로 항원을 검사한 결과 한국인들은 일본인, 비르마인, 인도 동북부의 소수민족, 운남성 주민, 화북 한족, 동북에 거주하는 주민들과 가장 가까운 것으로 실험결과가 확인되였다.   M175와 그 하위그룹 M122 계통의 분포는 동아시아 여러 민족이 한줄기에서 뻗어나와 친연관계가 기실 매우 가깝다는것을 말해주는것이다.   이상의 자료를 보면 한국 교양국사연구회의 1994년 개정신판 <이야기 한국사>의 다음과 같은 서술의 성립이 가능한것이다.   “원래 동이족의 거주지는 중국 서북부 섬서성 기산(岐山)의 서쪽지방이라고 전하고있다. 그러나 말을 타고 주변의 여러 나라를 습격하는 북방계 유목민족의 압력을 받아 동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하여 섬서성 한성현으로 옮겼다가 다시 지금의 북경지방인 하북성 고안현을 거쳐 한갈래는 산동반도쪽으로 내려가 회하(淮河)이남까지 널리 퍼져 살기 시작했다. 이른 바의 구이나 우이(嵎夷), 래이(萊夷), 회이(淮夷) 및 서이(徐夷)가 바로 그들이다.” (17~18쪽)   몇년전에 나온 한국 최양현희의 <초중고 학습자료>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있다.   “동이족은 중국 북서지역에서부터, 한 갈래는 만주 남동부와 한반도로, 다른 한 갈래는 하북, 산동 방면으로 이동하였으며 산동 방면의 동이는 은대(殷代)로부터 漢族과 끊임없는 접촉과 투쟁을 벌였고 周代에는 회하 류역까지 진출하여 대련합세력을 이룬것 같다. 그러나 이 지역 동이족은 秦始皇의 통일정책에 따라 한족에게 점차 동화, 정복되거나 쫓겨난 것으로 보인다. 이들 동이족은 한(韓), 예맥족으로 일컬어졌고 몇 차례 민족이동을 계속하면서 중국 동북지방, 한반도 등지에 우수한 청동기문화를 이룩하였다.”   그외 한국 경희대 최진교수는 맥족의 무덤군이 중국내몽골 남동부지역에서 발견됐다는 1997년 3월 26일 신화통신을 인용하면서 맥족은 고조선시대의 어느때인가는 분명하지 않지만 아마도 기원전 10세기 내지 기원전 7세기 전후에 서역으로부터 이동해온 후기 이민이였을것으로 보고있다. (<다시 쓰는 한일고대사> 제26쪽)   여기서 우리는 한국의 력사학계에서 수년전부터 이미 동이족이 본토에서 발생한것이 아니라 서쪽에서부터 동으로 이동하여온 부족임에 주의를 돌렸음을 알수 있다.   이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추리가 가능할것이다.   우리의 선인들은 아프리카주에서 출발하여 중아아시아에서 머무른 뒤 일부는 북으로 올라가 유러시아민족을 형성하고 그 외 일부는 또 두갈래로 나뉘는데 한갈래는 동으로 흘러 천산일대와 몽골지역을 경유, 동북지역에 이르며 한갈래는 중국서북부로부터 남하하여 남방민족(남방계)을 구성한다. 남하하는 행정에 한 갈래는 따로 떨어져나와 섬서성을 거쳐 황하 하류에 이르는데 그들이 바로 우이, 래이, 회이 및 서이이다. 동북지구에 이른 한갈래는 예족과 맥족을 형성하며 한갈래는 한반도로 들어가고 또 다른 한 갈래는 해안선을 따라 황하하류방향으로 이동한다. 서북에서 남하하여 남방계를 구성한 민족(벼농사를 맨처음 시작한 민족으로 남방계 한족도 포함함)중 일부는 농경문화의 발전으로 인구폭발이 생기자 해안선을 따라 동부 연해지역으로 이동, 일부는 벼농사기술을 가지고 한반도로 들어가고 일부는 九夷族을 형성하는데 그들이 서에서 온 嵎夷 등 부족과 동북에서 내려온 부족들과 함께 후에 동이족으로 불린다. 그러나 그들이 단지 우리 민족의 선인들인것만은 아니다. 한족의 선인이기도 하다. 한줄기로부터 뻗어나왔고 또 그들이 화하족의 중요한 래원으로 되였기 때문이다.   현재 현생인류 아프리카주기원설이 서방이나 다른 나라에서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고있는 반면 우리나라 고고학계의 일부 권위인사들이 아직 부동한 주장을 펼치고 있다. 물론 인류의 이동로선 도감프로젝트가 지금 한창 실시중이므로 이미 최후 결론이 난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지금까지 이미 확실하게 증명된 실험결과만으로도 현생인류 아프리카주기원설을 뒤엎을만한 증거를 제시하기는 아마 어려울것으로 보인다.   만약 우리 최초의 조상이 짜장 아프리카주에서 온것이 맞다면 그들의 새로운 삶을 위한 모험의 행군이 결국 오늘의 우리를 있게 해준 것이다.    (계속)  
55    두가지 의문으로부터 떠올리는 생각 댓글:  조회:9520  추천:101  2007-12-24
  우리 민족은 어디서 왔는가(2)                            두가지 의문으로부터 떠올리는 생각 우리 민족은 어디서 왔을가 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두가지 의문이 머리속에 항상 있었다. 한가지는 우리 민족은 몽골인과 별로 가까이에서 아기자기하게 지내지도 않으면서 그들에 대해 감정상 동질감을 많이 가지고있는것 같고 중국의 한족들과는 한데 어울려 살거나 혹은 가까이에서 접촉이 매우 잦으면서도 이질감을 느끼거나 심지어 거부감을 느끼며 사는 경우가 많은데 이것은 무슨 까닭일가? 하는 것이였다. 력사상 우리 민족이 중국 고대의 한나라나 당나라 등 력대왕조들과 빚었던 갈등이 아직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은것일가? 그렇다면 몽골인정권인 원나라에 근 백년간 통치받았던 력사는 어떻게 해석할가? 이것이 안 통한다면 “우리는 몽골계”라는 혈통사상이 작용한것일가? 이것일수 있겠다고 생각된다. 흔히 우리는 몽골인과 한 계통이며 심지어 고대몽골인의 후예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말 그렇다고 해도 우리 글에 한자어가 60퍼센트 이상 들어있으며 력사상 두 나라가 서로 비비며 살아온 력사가 엄청 긴데도, 불행한 과거가 물론  있었지만 친화적 관계의 지속시간도 훨씬 더 길었음에도, 심지어 두 민족이 같은 성씨를 많이 쓰고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민족은 무엇때문에 한족과 별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는것일가? 우리 민족은 과연 중국의 한족과 혈연적 관계가 없는것일가? 이상이 한가지 의문이였고, 다른 하나는 얽히고 설킨 우리 민족과 중국 나아가 이웃 나라 여러 민족까지의 력사를 서로 떼여놓고 고립적으로 생각할수 있을가? 하는 문제였다. 두번째 생각은 다음과 같은 몇가지 사례에서 비롯된다. 20세기 초 현대考古學이 건립된 이래 중국의 학자들은 왕조중심이란 전통사학의 영향을 받아 줄곧 중원의 한족사를 중국 력사(전사시기의 력사를 포함해서)의 정사로 여겨 왔었다. 그러나 1979년 료녕성 서부의 시라무렌강 류역에서 기원전 4천년 경부터 꽃핀 홍산문화가 발견되면서 이런 사학사상은 크게 흔들리게 되였다. 그러나 그 영향이 아주 없어진것은 아니였다. 오르도스청동기(기원전4200년~기원전3500년 사이)의 기원문제에 대해서도 학자들은 중원전래설을 고집하고있었다. 일찍 1980년에 중국의 학자 夏宿白선생이 吉林大學에 와서 “考古學發見으로부터 본 中西文化交流”란 제목으로 강의를 할 때 오르도스에서 발견된 청동단검이 중국에 훨씬 앞서 中亞와 西亞에 있었다고 발표했었음에도 이에 주의를 돌리는 학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이 지역에서 발굴된 椭方口의 北方系구리솥이나 호랑이 모양의 금장신구나 모두 황토고원과 상간하 구간에서만 발견되였을 뿐 내지에서 전래됐다는 증거는 하나도 발견되지 않았으며 진나라에서 전래됐다고 여겨온 이른 바 “진식검(秦式剑)”도 언녕 문제가 되여 이름을 “적식검(狄式剑)”으로 바꿔야 한다는 주장까지 제기됐다. 하여 마침내 중원전래설은 부정되고 현재는 “북방장성지대(北方長城地帶)발생설”과 “서부전래설”이 병존하고있는 상황이다. 4000 여년 전 감숙성 중부지역에서 발생한 찬란한 제가문화(齊家文化)에 대해서도 학자들은 “중원영향설”을 주장하다가 여기서 출토된 중국최초의 금기명, 구리장신구와 청동조각품들이 중아시아와 남시베리아의 동류제품들과 모양이 기본상 일치하다는것이 밝혀지자 “제가문화를 서부와 련계시켜볼수 있다”는 정도로 태도를 표시했다. 그런데 재미나는것은 여기서 출토된 도기이다. 여기서 출토된 문물중 새를 새겨넣은 도기그릇이 가장 많았는데 거기에 삼족오(三足烏)도 들어있었다는 것이다. 이것뿐이 아니다. 2006년 10월 30일 중앙TV는 《초원의 석인(石人)--초원대통로의 독특한 풍경》이란 제목으로 몽골고원에서 우리나라 신강의 천산, 알타이산 지역을 가로질러 중아시아복지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의 처처에 배포되여있는 각이한 조형의 석조인간상과 고분(墓葬)에 대해 보도했다. 그 해설사의 한단락을 아래에 옮긴다. 고분의 형태에 대한 연구로부터 보면 알타이산맥 아래의 무수한 석조고분은 겉보기엔  그저 아무렇게나 쌓아놓는 돌무지 같지만 실은 돌로 된 디딜방아(石碓)를 둘러싼 동심원(同心圓) 형태를 이루고있으며 둘레의 원형과 중심의 디딜방아는 방사형의 선으로 련결되여있다. 이것은 멀리 길림성 장백산 일대의 고구려왕릉과 거의 꼭같은 형태이다. 다르다면 석질(石質)과 디딜방아의 색갈이 다를뿐이다. 이외 동이족의 원시문화에서 보여주는 암각화가 동북, 내몽골, 신강, 광서지역, 러시아의 레나강 일대에서도 발견되였다는 연구론문도 있다. 그리고 집안의 고구려 벽화가 보여주는 종교 및 문화 요소들도 서역 나아가 중앙아시아와 련계시킬수 있다. 하늘을 떠받치는  우주력사의 생김새 전체에도 서역인의 모습이 그대로 비쳐지고있다. 하다면 홍산문화를 대표로 하는 동북원시문화, 河洛文化를 대표로 한 中原원시文化, 良渚文化를 대표로 하는 東南原始文化와 甘肅, 靑海, 寧夏, 新疆에 널리 분포된 제가문화를 대표로 하는 西北原始文化간에 무슨 관련되는 점이 없을가? 중국의 여러 지역에서 발견되는 巖刻畵는 서로 어떤 관계를  가지고있을가? 서북지역에 나타난 三足烏가 길림성 집안과 한국의 씨름무덤, 쌍영총, 천왕지신총 등 고구려의 고분벽화에 많이 그려져 있는 삼족오와 무슨 관련이 없을가? 그리고 알타이산맥 아래의 무수한 석조고분은 부여국이나 고구려왕국과 깊은 내적 관련이 있는것은 아닐가? 여러 가지 현상을 모종의 련계속에서 고찰한다면 혹시 진실의 실마리를 찾아낼수 있지 않을가? 이와 같은 사례를 통해 우리는 우리 조상들이 걸어온 족적을 더듬어 올라가면서 시야를 보다 광활한 지역에로 확대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하지 않을수 없다. 일정한 여건이 마련된 경우 모종 사실, 신화, 고전기록과 추론 등에 근거한 새로운 가설의 제기도 가능할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을수 없는것이다. (계속)
54    [칼럼시리즈] 우리 민족은 어디서 왔는가?(1) 댓글:  조회:5149  추천:127  2007-12-18
                                      들어가는 말   최근에 남영전의 “토템문화론”에 대한 토론이 진전됨에 따라 “우리 민족은 어디서 왔는가?” 가 주요한 문제의 하나로 거론되고 있다. 우리가 평소 범상하게 여기는 것과는 달리 이 문제는 확실히 의론할 가치가 있어 보인다. 그것이 우리 민족의 진로탐구(례컨대 우리 민족과 타민족간의 관계 확인과 태도, 방향 설정문제 등)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것은 근년에 과학적가설과 최신기술수단에 의한 과학연구결과로 현생인류의 아프리카주기원설이 다수 과학자들의 인정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현생인류다원발생설(혹은 우리 민족 본토발생설)주장이 다시 제기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른 바의 “정설론”이 이한 주장을 받쳐주고 있다. 그러나 필자가 보건대 정설은 없다. 굳이 정설이라는 게 있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상대적일 뿐이다. 구구히 례를 들 필요는 없지만 사회와 과학기술 각 분야가 발전을 거듭함에 따라 이른 바의 “定說”이 깨지고 만 사례는 기수부지다. 우리 민족이 東夷에서 왔다는 견해는 필자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것으로 문제가 끝난 것은 아니며 중요하고 복잡한 문제는 그 다음에 있다. 바로 여기서 무수한 리론들이 심하게 부딪치는 것이다. 이를테면 우리 민족이 동이에서 왔으면 동이는 어디서 왔는가? 동이의 대표적 토템으로 곰과 새가 있는데 이 량자는 서로 무슨 관계인가? 이런 문제들 중에는 견해가 완전히 상반되는 것도 있고 지어 전혀 연구되지 않은 부분도 있다. 서래설, 본토설, 동이설 문제 외에도 夏商周문제, 商 민족과 우리 민족 간의 관계, 이와 관련해서 귀복(龜卜)의 비밀문제, 단군신화에 대한 해석 문제, 우리 민족의 토템과 현실의 련계성 문제, 민족의 개념 문제, 우리 민족의 혈통문제, 민족의 융합, 혹은 동화문제, 中朝(韓)日 관계문제, 漢族과 우리 민족 성씨의 관계문제 등 수두룩한데 그중 일부는 알것 같으면서도 자세히 따져보면 알 수 없는 것들이고 심지어 잘못 알고 있는 부분도 결코 적지 않을 것으로 본다. 어느 하나 정설이라고 딱 부러지게 말할만한 것이 없다. 더구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변화와 발견으로 가득 차있는 시대이며 무수한 리론과 주장이 공존하는 시대이며 서로 상대방의 주장에서 합리한 부분을 수용하면서 간단없이 접근을 시도해야 하는 시대이다. 과거에 존재한 적이 있었던 것처럼 한가지 주장이 다른 한가지 주장을 異端邪說로 몰아부쳐 단매에, 혹은 짜고들어 무자비하게 족치던 시대는 이미 지나간지 한참 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는 이런 력사적 교훈에 대해 충분한 주의를 돌리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따라서 무슨 문제를 가지고 서로간에 대화를 해도 견해 차이를 좁히는 결과를 도출해내기가 과연 힘들며 서로 물과 기름처럼 어울리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설탕과 우유의 결합처럼 생산적이고 친화적인 분위기를 창출하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다. 토론에 림하는 진지한 태도가 십분 중요함은 바로 이에서 기인되는 것이다. 실제 토론현장을 봐도 그렇다. 일부 론자들은 토론에 림할 때 유물론자로 자처하면서도 유물론자답지 않게 토론상대가 제기한 모든 핵심문제들에 대해서 철저히 외면하는 반면 이미 거론된 문제를 이상한 각도에서 끄집어 내여 부각시킴으로써 사람들의 시각을 흐리우려는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비겁한 태도가 문제의 해결에 도움이 없을 것은 물론이고 결과적으로도 초라해지는 건 그 자신일 뿐이다. 그러나 어느 날 생각을 조금이라도 바꾼다 할 때 안팎의 사정도 확 바뀔 수 있음은 두말할 여지도 없다. 오늘부터 필자는 우에 언급한 몇가지 문제를 중심으로 개인의 견해를 시리즈형식으로 피력하고자 한다. 이 일을 먼 앞날로 미루기보다는 지금 의론하는 것이 나 자신의 혼돈스러운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서라도 바람직하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토론을 통해 서로 간에 생각의 차이를 좁힐 수 있으며 그것은 어디까지나 유익무해하리라는 것, 이것이 나의 소신이다. 생각을 되도록 자유롭게 표달하고자 특별히 선후순서를 합리하게 짜느라 신경을 쓰지 않고 필자 자신의 생각이 흐르는 대로 글을 올릴가 한다. 물론 이런 생각이 반드시 맞으리라는 보장은 있을 수 없다. 재료의 국한성은 말 말고라도 사고방식이나 사고방향에도 문제가 수시로 생길 수 있는 까닭이다. 때문에 모든 비평을 환영한다. 특히 중심문제에서 사실과 리치에 어긋나는 경우 매몰차게 꼬집거나 적당히 풍자하는 것도 기꺼이 접수할 것이다. 비평문장은 물론 도리에 의한 설득이 우선이다. 하지만 글의 생동성을 기해서도 대방의 인격이나 자신의 품위에 손상주지 않는 한 적절한 타매와 알맞는 풍자수법도 경우에 따라서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을 아주 정상적인 표현으로, 지어 그것을 상대를 높여주는 표현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나아가 독자들도 그것에서 미적감수를 받고 회심의 미소를 지을 수 있는,  니전투구(泥田鬪狗)식이 아닌 그런 생동하는 비평이 솔직히 매우 그립다. 목적은 단 하나다. 영양가가 있는 토론을 통해 불분명한 문제를 좀더 분명히 하고 그 행정에 사상문화의 수준도 어느 정도 제고할수 없겠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의 문단에 정상적인 비평문화의 풍토가 정착되길 진심으로 기대한다. 2007년 12월 18일 장춘에서
53    "암"자랑과 "영웅"소위 댓글:  조회:4529  추천:70  2007-12-06
                   "암"자랑과 "영웅"소위"그치들은 별별 천한 노릇을 다 해가면서 벌긴 잘 벌어들이지만 그저 모을 줄만 알았지 어디 쓸줄이야 아나? 우리네야 벌줄은 잘 몰라두 쓰는데 들어가선 절대 그치들처럼 쬐쬐하게 노는 법이 없지. 빚을 석짐 짊어져두 우선 먹구 쓰는게 영웅이야 영웅..."  모종 탄식끝의 자기 풍자인지 아니면 진짜 굳어진 일종 "세계관"인지 말만 들어봐선 알바 없어 "영웅타령" 부르는 이의 얼굴표정을 자세히 연구해 보았더니 그 말은 결코 무슨 자기풍자가 아니라 조금도 가식이 없는 자랑담이였다.   느닷없이 쏘련 작가 죠친꼬의 작품에 있는 대화 줄거리가 생각났다.   "...뭐라오? 내 병은 신염이요!" 하고 자기의 병이 대단한 듯이 떠드는 아무개의 말에 제2 아무개가 도고히 면박을 주었다. "신염? 흥! 신염이 뭐가 대단하오? 내 병은 암이란 말요. 암! 알겠소?!" "암이면 단가? 암이래두 무슨 암인가 봐야지. 어떤 암은 사실 아무렇지도 않단 말이요. 칼로썩둑 베여버리면 씻은 듯이 나으니까. 뻐기긴, 주제 넘게!" 이런 수모를 받아 본적 없는 제2 아무개는 부아통이 치민 나머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가지고 발끈했다. "뭐뭐? 썩둑하면 아무렇지도 않다구? 이 사람이 어디서 같잖은 소릴 듣고 와서 아는척 하는겐가? 아주 멀쩡한 량반이 그따위 신염이 다 큰 병이라구 예 와서 우쭐하다니? 내 원 쓰거워서! "   아아...병집을 자랑거리로 삼는 일만치 불행한 일은 없을 것이다. 리지적으로 살펴보면 "암"이든 "신염"이든 다 큰 자랑감은 못된다. 이른 바 "우리네"의 "모을 줄은 몰라도 쓸줄만은 잘 안다"는 것이 과연 자랑거리로 되겠는가? "빚더미"는 자꾸 높아져도 생기는 족족 모조리 써버리는 것이 과연 "영웅"소위겠는가? 아직도 알거지가 “빈하중농대표”로 되는 세월인줄 아는가? 또 이른 바 "그치들"은 "자금을 모을 줄 아는 것"이 죄가 되여 야유를 받고 비난을 받아야 하겠는가?   얼마전 중한 량국을 뛰여다니며 조선족동포들을 위해 로심초사하고있는 재한동포회장단의 한 회장이 들려주는 말 가운데 우리 조선족 친구들의 “병자랑” 비슷한 얘기가 몇건 있어서 기분이 자못 찝찝했었다. 마누라(혹은 남편)가 한국에 나가 뼈빠지게 일해 번 돈을 가지고 다른 녀자(남자)를 차고다니다가 상심, 혹은 절망한 마누라(남편)에게 리혼을 당하고도 영웅(녀걸)이나 된듯 큰소리(야무진 소리)를 빵빵 치고 다닌다는것 쯤은 나 역시 한두번만 들어온 얘기가 아니여서 “영웅시대” 인간세태의 다채로움을 다시 한번 통감하지 않을수 없었다. 자연 배신을 당한 쪽에 측은해지는 마음과 동정심이 가게 되면서 혹여 이런 불행한 가정들이 “구조조정”이라도 되면 세상이 훨씬 밝아질려나? 하는 망연한 상상을 굴려보게도 되는것이였다. 그러나 이런 고질들이 가정들의 재조직에 저절로 치유될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의문부를 크게 달지 않을수 없다.   몹쓸 “병집”을 무슨 보물단지인줄로 착각하고 “영웅(녀걸)”然 하는 작태를 언제면 다시 듣고보지 않게 될가. 너무 들을수 없어 그런 옛말을 듣고싶어지기까지 하는 세월이 왔으면 좋겠다.
52    이쑤시개, 금속사수세미와 의우사람 댓글:  조회:4567  추천:66  2007-11-15
 이쑤시개, 금속사수세미와 의우사람 “높은 산은 한줌의 흙도 싫다하지 않으므로 비로소 높아질수 있고 넓은 바다는 한방울의 물도 마다하지 않으므로 비로소 깊어질수 있다. (山不辭土,故能成其高;海不辭水,故能成其深)”는 말이 있다. 절강의 의우사람들에게 꼭 들어맞는 말이다.   절강의 의우라면 우리에게 생소한 이름이 아니다. 유엔과 세계은행이 공인하는 세계 최대의 소상품시장으로 떠오른 의우는 우리의 생활과도 밀착된지 오래다. 그러나 밥먹고 의우산(産) 이쑤시개로 이를 쑤시면서도 입안이 편안한 느낌외 다른 감수는 별로 없는것이 바로 우리들이다.   의우는 어떤 곳인가? 자연부원이 없고 공업토대도 없고 외자의 추동력이 없어 정책적 혜택도 받지 못하던 그런 고장이다. 이러한 곳에서 학력도 졸업증도 없는 농민들이 어떻게 세계최대의 소상품시장을 일으켜 세웠을가? 몇전이나 몇리, 지어 1리어치도 안되는 작은 돈도 작다 아니하고 부지런히 번것이 비결이라면 비결이겠다.   중원연필유한공사 종원 리사장은 젖산음료도매로 장사를 시작한 사람이다. 음료도매를 하다가 60만원을 밑지고 나앉은 그는 빚을 갚기 위해 장인이 꾸리는 연필공장에 들어가 일했다. 근데 나무 한그루를 연필로 만들자면 300여개 공정을 거치게 되는데 연필 한대의 리윤은 5리도 안된다. 연필을 팔아 어느 천년에 빚을 다 갚는단 말인가? 거의 절망에 빠진 종원에게 장인은 이런 충고를 했다. “티끌모아 태산이라 하잖는가? 한술에 배를 불릴 생각은 아예 말게.”   종원은 장인에게서 기계 석대를 빌려다 10여 평방메터짜리 앉히고 밤에는 연필을 만들고 낮에는 시장에 내다 팔았다. 1년후 그는 은행에서 대부금 3만원을 내다가 연필속대를 장치해 쓰는 신식연필을 만들었다. 한 대에 남보다 1전 5리씩 값을 낮게 불렀더니 하루에 10여 만대나 팔려나갔다. 1998년 7월 인도네시아의 상인이 종원의 연필을 욕심내서 한꺼번에 660상자를 주문했다. 행운이란 천신만고끝에 어느날 갑자기 찾아오는것인가? 지금 종원은 한해에 수억대의 연필을 생산하여 수백만원의 리익금을 올리고 있는데 제품은 세계각지에 팔려나간다. 종원은 지금도 장인어른의 당초의 충고에 감사한다.   의우사람들은 거의 모두가 종원과 같은 전기적인 창업경력을 가지고있다. 황리군이란 사람은 금속사로 만든 수세미(“금속구-金屬球”라 이르는 이 수세미를 조선족 아낙네들도 즐겨 쓰고있다)를 생산해 하나에 몇십전씩 받고 팔았는데 지금 국내 거의 모든 가정에서 쓰이고있는건 말말고 세계 20여개 나라에 나가서도 불티나게 팔리고있다.   이쑤시개 100개에 리윤이 얼마나 날가? 1전이 난다. 의우 사람들은 매일 이쑤시개 몇십톤(이쑤시개 수십억개)을 만들어 일당 수만원의 수익을 올린다. 가느다란 비닐흡관 한개의 리윤은 0.5리로 2000개를 팔아야 2원 번다. 이런 흡관을 가지고 의우사람들은 온 세상을 다 “흡인”해 버렸다. 현재 의우시 20개 비닐흡관 생산업체의 세계시장점유률은 60%라 한다.   의우사람들은 소상품을 전국, 전 세계의 상인들에게 팔아넘기고 있을뿐만 아니라 그중 적지 않은 사람들은 직접 세계시장에 진출하고있다. 2006년1월 한국에서 “서울의우상품시티”를 개장한 유한평이 그중의 한사람이다. 한국 최대의 중국투자기업인 “서울의우상품시티”는 작년 6월 경 매상고를 매일 80만원 정도 올리다가 년말에는 일약 250만원까지 올렸는데 거의 한해가 다 돼가는 지금은 모르긴 해도 이 수자를 훨씬 초월했을것으로 짐작된다.    세계 최대의 소상품시장으로 떠오른 의우이니만큼 외국자본에 대한 흡인력도 그만큼 클수밖에 없다. 의우에 진출한 외국업체중에서도 한국기업이 신예군으로 맹활약중이다. 의우에 정착한 한국인을 2000명으로 헤아리고 있는데 국제무역시티의 한상관(韓商館)에만도 한국상가 근 백개가 성업중이라 한다.     푼돈을 벌어 큰 재부를 만드는 의우사람들의 정신을 잘 배워야겠다는 생각이다.  //길림신문
51    별 보러 너는 간다! 댓글:  조회:5132  추천:82  2007-10-31
  별 보러 너는 간다!  --아름다운 상아에게   별세계!  거미줄처럼 얼기설기 얽힌  은빛 찬연하고  금빛 휘황한 길의 세계를 건너  칠백색 령롱한 별들이  하나처럼 어울려  눈부시게 반짝이는데  그것들 개개가  손에 잡힐듯 또렷하고  놓으면 사라질듯 아리숭하며  은하수처럼 몽롱하기도 하고  안드로메다 대성운처럼  아찔하게 묘연하기도 하다.  개개의 별들 그것들은  꽃구름인양 황홀하고  무지개인양 야릇하며  보름달인양 시원하고  신기루인양 신비하다.  폭발하는 별세계!   별세계의 폭발은  거룩하고 아름답다.  그 경상  홰불처럼 숭고하고  꽃불처럼 장관이다.  그 장관속에  너의 그윽한 눈길이 비쳐 있고  너의 아름다운 꿈이 묻혀 있다.  별무리! 그것은   너의 희망 너의 사랑  너의 힘 너의 꿈이다.  각성과 리겔은 너의 파란 꿈이요  씨리우스성과 카노프스성은 너의 노란꿈이요  아트크라스성과 알데바란성은 너의 보라빛꿈이요  베렐게우스성과 안타레스성은 너의 빨간 꿈이다.  별세계--그곳은   태공과 더불어 무한하며  해양과 더불어 웅숭깊다.  그속으로 너는 간다.  거미줄처럼 얼기설기 얽힌  길의 세계를 톺으며--  너는 힘겨웁게 하지만 즐거이  아니--  즐거웁기에 힘들어도  별을 바라고 너는 간다.  카페오피아 성좌와 에리다누스 성좌는  너의 시발점이요  케페우스 성좌와 어부 성좌는  너의 중간역이다.  개개의 별들은 모두다 거대한 자석이다.  자성없는 별은 별이 아니다.  너는 철광석 혹은 철강이다.  별의 유혹에 심장이 뛰지 아니하는 자는  철광석이 아니요 철강은 더욱 아니다.  하여 너는 간다.  칠백색 령롱한 별의 세계에로--  몽롱하고 신비하고 야릇하고 묘연한  그러나  황홀하고 거룩하고 또렷하고 아름다운  별의 세계에로--  별보러   너는 간다!   
50    어미오리, 민족정신 그리고… 댓글:  조회:4707  추천:86  2007-10-17
       어미오리, 민족정신 그리고… 한국작가 강준희선생의 작품집에서 기행문 <옥스나드 가는 길>을 읽고 감동을 받았다. 강선생은 그 글에서 미국 려행차 로스안젤스에서 옥스나드로 가는 길에 겪은 일을 썼다.  그 사연인즉 이러했다. 로스안젤스에서 출발해서 한 40분 가량 달렸을 때 앞서 가던 차들이 일제히 멈춰서는 통에 영문도 모른 채 차를 세웠다. 멈춰선 차량의 행렬은 순식간에 끝이 안 보일 정도로 되였다. 궁금해서 리유나 알아볼 요량으로 아득히 보이는 맨 앞으로 스적스적 걸어가 보았더니 이게 웬 일이냐? 첫 차가 멈춰선 바로 그 앞에 오리 한떼가 꽥꽥거리며 뒤뚱뒤뚱 길을 건너고있었던것이다. 오리는 모두 여섯마리였는데 다섯마리는 새끼였고 한 마리는 어미인듯 했다. 어미는 새끼들이 다치기라도 할가봐 몸이 부쩍 달아 연신 길건너쪽으로 새끼들을 몰았지만 철부지들은 들은체도 않고 오던 길을 다시 가고 가던 길을 다시 오고 하며 말썽을 부리고있었다. 놀라고 불안해서 표정이 사색이 된 어미오리(적어도 저자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고 한다)는 뭐라고 꽥꽥거리며 새끼고집불통들을 한마리씩 길 건너로 물어다놓기 시작했는데 7, 8분 좋이 걸려서 다섯마리 새끼를 물어나르는데 성공했다. 경적소리도 말소리도 없이 조용한 가운데 그 진귀한 광경을 웃음띈 얼굴로 지켜보던 수백명 사람들이 “오! 오!” 하고 감탄사를 터뜨리며 박수를 쳤다.  이 장면을 보면서 저자는 어쩐지 자꾸 눈물이 나더라고 했다. 이 글을 읽으며 필자도 괜시리 코마루가 시큰해났다. 어미오리한테 감동되였던것만이 아니였다. 한갓 미물에 불과한 오리에 대한 미국인들의 자세에서 대수롭지 않게 보아서는 결코 안될 위대한 정신을 느낌과 아울러 우리 자신을 돌아보지 않을수 없었기때문이였다. 그들과 비교할 때 우리 자신이 어딘가 초라하고 작아보이는것이였다. 우리 중국에서 이런 일이 생겼다면 사태가 어떻게 돌아갈가를 가정해 보자. 과연 미국인과 같은 평화롭고 감동적인 장면이 출연될수 있었을가? 재미나는 볼거리가 생겼다고 차를 세워놓고 구경하는 사람들이 물론 있을테지만 이거 오리 몇마리 뭐 볼게 있다구 숱한 차를 막아놓고 야단들이야? 경적을 빵빵 요란스레 울리며 그놈들 아주 깔아뭉개구 가지 뭣들하고있어? 입에 담지 못할 욕지거리를 퍼부으며 야단법석을 떨었을수도 있었을게다. 오리와 관련된 재미나는 이야기는 중국에도 있다. 그 이야기는 명나라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국운이 다한 원나라의 뒤를 이어 주원장이 세운  명나라와 장사성이 이끄는 오나라가 세력 다툼을 벌릴 때였다. 하루는 주원장이 양자강하류에 있는 강소성에서 장사성의 부대를 격파하기 위한 전략을 세웠다. 그는 겨우 말 한마리만 통과할 정도로 좁은 협곡으로 진격명령을 내렸다. 병사들이 장사성의 부대를 치기 위해 좁은 협곡을 지나는데 좁은 협곡길 복판에 오리 한마리가 버들잎을 입에 물고 알을 품고있는것이 보였다. 주원장은 어미오리가 전쟁터  한복판인 줄도 모르고 알을 품었을거라 생각하니 도저히 진격을 계속할수 없었다. 그는 병사들의 행진을 멈추게 한뒤 오리가  알을 품고 스스로 물러날 때까지 수십일을 그 자리에서 기다렸다. 전쟁을 늦추게 한 버들잎을 문 오리는 당시 주원장이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데 큰  힘이 되였다. 작은 미물마져 사랑한 그의 자비심이 장사성의 병사들 사이에 퍼져 주원장에게로 끊임없이 항복해온것이다. 결국 주원장은 이렇다 할 전투도 없이 전쟁에서 승리했다. 참, 미물인 오리를 대하는 태도에서 우리는 일개 인간의 마음, 나아가 일개 민족의 정신을 본다. 
49    친화적 “노크정신”의 승리 댓글:  조회:4724  추천:89  2007-10-12
                                                            친화적 “노크정신”의 승리   프랑스에 어른들도 좋아한다는 동화 이야기가 있다. 어느 왕국에서 마녀의 성에 들어가는 사람에게 그 나라 공주를 주겠다고 선포했다. 여러 왕자가 마녀의 성에 들어가겠다고 나섰다. 첫번째 왕자는 말뚝으로 성문을 부시려 했다. 그러나 실패한다. 두번째 왕자는 더 큰 말뚝을 동원하지만 소용없다. 세번째 왕자는 대포를 동원하고, 네번째 왕자는 사다리를 이용하며, 다섯번째 왕자는 불화살로 공략을 시도하나 죄다 실패한다. 그런데 공격장면을 유심히 지켜보던 한 청년은 우선 무기를 버린다. 그리고 성문께로 다가가 노크를 하며 “들어가도 될가요?” 하고 묻는다. 그러자 굳게 닫힌 성문이 열리고 마녀가 나와 그를 맞아들인다. “성에 들어오기 위해 허락을 구한 사람은 당신이 처음이군요. 환영합니다.”   앞의 다섯 왕자의 참패는 무력만이 성문을 열어제낄수 있다는 고정관념이 빚어낸 필연적악과다. 그러나 마지막 그 청년은 다르다. 치밀한 관찰과 사고, 분석을 통해 무력공격만이 능사가 아님을 간파하고 “노크전술”을 펴내여 성공한다.   고정관념에 대한 열린 사고의 승리를 보여준다. 생각을 바꾸면 길이 보인다는 설도 이러한 상황을 두고 한 말일것이다. 생각을 바꾸면 상황반전이 완전히 가능해지는것이다.   남북의 7년전 정상회담과 이번 제2차 정상회담을 지켜보면서 많이 감동했었다.   나라가 발전하자면 조화로운 사회 환경구축이 필수적이다. 세계가 안정과 번영을 실현하려면 역시 나라들 간의 조화적인 관계수립이 필요하다. 본 지역과 타 지역, 본 민족과 타 민족, 부동한 국적의 동족간도 마찬가지다.   무슨 세(勢)로보다는 마음의 교류가 절실히 필요하다. 국제관계나 학술문제 등의 토론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사이비주장도 여러 사람이 그게 정말 맞는 주장입니다요 하고 맞장구를 쳐주면 그 주장의 조정시간만 지체시킬 뿐 아무런 도움도 안되며 결국 맞장구쟁이의 계산된 얄팍한 내속만 내비쳐지게 될 따름이다. 수령님들이나 거물급 인물들이 그릇된 주장을 펼치는 경우 그 파괴력은 우리 초민들에 비길바가 아니다. 물론 잠시겠지만 력사적 안목으로 수년, 지어 수십년 수백년도 잠시라고 볼수 있다 할때 그 손실을 과소평가할수만은 없다. 그러나 수령님들이나 거물급 인물들이 그 누가 뭐라든 민족의 대의와 인류의 큰 리익에 부응해서 정확한 결책을 하고 행동한다 할때 력사를 앞으로 미는 그 힘 역시 대단한것이다.   오늘날 과학기술은 눈부신 발전을 보이고있지만 인류의 불행은 계속되고있고 세상은 태평치를 못하다. 농경사회에 있어서 사람과 자연, 사람과 사람 관계가 그래도 친화적이였던데 반해 공업사회에 들어와서는 그 관계가 갈수록 소원해지고있으며 반목과 갈등이 우심하다. 물론 그것이 비관적이기만 한것이 아니다. 단 인간의 자유를 확대하기 위한 마당에 그 문제가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로 우리 앞에 일층 두드러지게 드러났을뿐이다. 력사의 바퀴가 거꾸로 굴러갈수는 없으며 오늘 우리는 이 세상이 분명 좋은 방향으로 가고있음도 기쁘게 보고있다.   중국고전에 “례의의 적용은 친화를 귀중히 여긴다. 선왕은 친화를 미덕이라 가르쳤다(禮之用,和爲貴,先王之道斯爲美)”고 했다. 동진(東晋)때 시인 도잠은 《形影神贈答詩》에서 “천지간의 거대한 변화속에서 보잘것 없는 일로 크게 기뻐하거나 전전긍긍할것 없도다. 해야 할 일이면 반드시 할것이요 개인의 득실을 옴니암니 캐여선 무엇하리. (縱浪大化中,不喜亦不懼. 應盡便須盡,無復獨多慮)”라고 했다. 얼마전에 중국 서안에서 열린 국제도덕경론단에서는 중국문화의 정수는 “화목(和諧)”이라고 지적했다.  노크로 성문을 열어제낀 청년의 “노크정신”이 특히 고양돼야 할 오늘이다.
48    소비자의 푸념과 창업기회 댓글:  조회:4069  추천:54  2007-10-09
소비자의 푸념과 창업기회 장사를 하는 이들 치고 장사가 잘된다는 사람을 요즘 못 봤다.   사실 시장에 나가 봐도 20여년전과는 비교가 안 되게 지금은 그 어데나 꽉 넘치는게 상품인데 뭐 있어야 할건 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니, 없어야 할것도 있는게 요즘 세상이다. 그 어떤 제품이나 양식으로부터 기능에 이르기까지 소비자들의 구미에 맞춰 품종이 지극히 다양한데 이런 상품의 망망대해에서 고객들에게  결여되는 부분을 찾아 장사를 한다는것이 어찌 쉬울수가 있겠는가?    그러나 그렇다 해서 시장에 정말 기회가 아주 사라진것일가?  소비자들의 모든 수요가  그럼 확실하게 해결되고  만족이 되였을가? 만족이 되였다면 대관절 어느정도로?  이렇게 바투 문제를  제기한다면 그 누구도 나서서 딱 부러지게 이젠 기회는 없다라고 말할 사람은  분명 없을것이다. 실상 시장이나 상품에 대하여 우리는 소비자들로부터 불평,  불만족이나 푸념의 소리도 자주 들을수 있기 때문이다. 불만스럽다는것은 곧 만족이 안된다는 것인데, 그것은 그 부분의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무엇인가 새로운것을 개발해내야 함을 의미하는것이다. 물론 이곳에 없는것을 다른 곳에서 가져다 공급하는것도 역시 개발의 한 측면이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고객들의 불만이나 푸념소리가 창업아이템을 깨우는  신호로도 될것이라는 얘기다.   고객은 천차만별인데다가 변화무상한 존재여서 생산자는 영원히 소비자의 모든 구미와 기호를 철저히 맞추어내는 재간이 없다. 음식업을 례로 들면 지금  다수 음식업체의 경기가 그닥 좋지 못한데 원인인즉 그런 식당들이 고객들의 간단없이 변화하고있는 수요에 만족을 주지 못하고있기 때문이다.  고객들은 조용하고 깨끗한 곳(혹은 품위 있는 곳)에서 값싸고 맛좋은 음식(혹은 비싸도 먹어본적 없는 맛좋은 음식)을 먹을수 있기를  희망하는데 식당의 음식은 값이나 맛이나 서비스나 다 맘에  안든다. 푸념은 약과고 당연히 불만족도 생길수밖에 없다.   하이얼회사에 훌륭한 사례가 하나 있다. 사천 성도에 고구마가 많이 나는데 고구마철이 되면 이곳 농민들은 그것을 대부분 날것대로 파는 외 일부는 물에 깨끗이 씻어가지고 고구마깡 따위를 만들어 팔아 짭짤한 수입을 보았다. 일일이 고구마를 손으로 씻자니 품이 너무 들어 어느 량반이 고구마를  하이얼표 세탁기에 넣어 씻어봤다. 그런데 고구마에 붙어있던 흙과 잡물질들이  배수관과 세탁기 틈사리에 끼우고  막혀 세탁기가 쩍하면 고장이 났다. 하여 하이얼세탁기에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였다. 이쯤 말하면 듣는 이는 “뭐라? 세탁기에 고구마가 잘 씻어 안진다고 불만? 그 친구 머리가 돈게 아니야?” 하고 그 농민을 나무랄수도 있다. 그러나 하이얼의 서비스일군의 반응은 어떤가?  자기의 책임을 회피하지 않고 그 농민고객을 도와 흙이 잘 빠지도록 배수관을 굵은것으로 바꿔주었다. 하이얼회사의 총재는 한술을 더 떴다. 그는 농민들의 불만과 푸념에서 큰 계발을 받고 연구원 4인으로 전문 연구개발팀을 묶어 수개월내에 고무마도 씻을수 있는 세탁기를  개발해내는데 성공했다. 얼마 안돼 신상품을 대량 생산해서 시장에 내놓았는데 내놓자바람으로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한다.   소비자가 불만족스러워 푸념을 늘어놓는 그런 틈사리에 창업기회가 도사리고 있음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소비자들의 시기시기에 따른 부동한 욕구와 푸념의 기미를 먼저 알아차리는 안목이 창업을  꿈꾸는  젊은이들에게는 십분 필요하다. 모종 미해결의 욕구를 제때에포착하고 그런 문제에 보다 빨리 접근하여 절실하게 해결한다면 필시 상업기회를 선점하여 효과적으로 상응한 리익을 창출할수 있을것이다.//길림신문
47    [창업칼럼]색갈중시와 고객배려정신 댓글:  조회:3950  추천:70  2007-10-05
색갈중시와 고객배려정신 미국의 한 레스토랑은 번화가에 위치한데다가 아주 좋은 장식에 음식도 아주 잘 만들었고 서비스질도 상당히 높았는데 웬일인지 오픈한 뒤 손님이 잘 들지 않았다. 사장이 암만 생각해 봤지만 그 원인을 알수 없었던 모양, 스미스라고 부르는 한 교수를 모셔다 조언을 받으려 했다.  교수는 현장관찰을 자세히 하고 나서 레스토랑의 벽이며 식탁이며 마루청이며를 모두 불색으로 칠한것이 문제가 되는것 같다고 했다.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투우를 보신적 있나요? 소는 천성적으로 온화한 동물인데 왜 투우장에 들어만 가면 미친듯이 투우사를 덮칠가요? 시뻘건 망토를 휘저어 소를 불안해지게 하고 격노시켰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 말을 들은 사장은 “아 그런 일이였구나”하고 무릎을 탁 치면서 즉시 영업을 중지하고 “벽색갈을 담록색으로 고치면 좋겠다”는 교수의 건의대로 벽색갈을 바꾼 외 스스로 한수 더 떠 식탁과 마루까지 담록색으로 칠했다. 그러나 그렇게 해놓은 결과 전혀 뜻밖의 새로운 문제가 생겼다. 인젠 이전과 정반대로 손님들은 찾아드는데 문제는 그들이 식사를 긑내고 나서도 떠날념을 하지 않아 레스토랑의 리용률이 크게 영향받았던것이다.  사장이 다시 스미스교수를 찾았더니 교수님 왈, “아하 참 나원, 내가 벽색갈만 고치라고 했지 언제 식탁이며 마루며를 다 고치라 했습니까?” 그래서 교수의 말대로 식탁 등을 다시 불색으로 고쳐놨더니 과연 손님들이 식사후 너무 오래 머무는 현상이 없어지고 장사가 그냥 흥성해졌다고 한다.  또 이런 이야기도 있다. 일본 도꾜의 한 커피숍 주인이 30여명 친구를 불러다 놓고 네가지 부동한 색갈(커피색, 빨간색, 파란색, 노란색)의 잔으로 꼭같은 커피를 4잔씩 맛보게 했다. 결과 꼭같은 커피에 대한 평판이 저마끔 달랐다. 커피색잔의 커피에 대해서는 3분의 2의 친구가 “맛이 너무 진하다”고 했고 파란잔의 커피에 대해서는 대부분이 “너무 진하지도 연하지도 않고 딱 좋다”고 했고 빨간잔의 커피에 대해서는 열에 아홉이 “너무 진하다”고 했다. 그 후 이 커피숍에서는 커피잔을 몽땅 빨간걸로 바꾸어 놓았는데 이 한 조치로 하여 주인은 커피원료를 절약했을 뿐만 아니라 손님들에게 각별히 좋은 인상을 남겼고 아울러 아주 좋은 판매실적을 올렸다 한다.   이러고 보면 색갈의 작용이란 참 묘한데가 있는것 같다. 그리고 장사를 잘하려면 아마 색갈에 대한 손님들의 느낌에 대해서도 잘 연구할 필요가 있나보다.  그 어떤 영업점에 가든 문전에서부터 우선 눈에 띄이는것이 아마 색갈일것이다. 그 색갈부터 뭔가 불쾌감 혹은 불안감 같은것을 안겨준다면 고객은 추호의 주춤거림도  없이 그곳을 지나쳐 다음 영업점을 찾는 경우가 대부분일것이다. 편안하고 기분 좋은 느낌을 주는 실내장식의 색갈이 있음은 항상 손님에게 만족감을 시사하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어쩐지 불편한 느낌을 주는 색상의 장식도 분명 흔히 보는 풍경으로 때론 손님의 기분을 잡치게도 한다. 뭐 의식적으로 각별한 시선을 집중하는것은 아닐테지만 복무원 제복의 색갈과 양식 역시 손님을 불편하게 굴거나 즐겁게 하는 상당히 중요한 요소로 작용할수 있을것이다.  색갈중시는 고객에 대한 주인의 세심한 배려를 반영한다 하겠다. 커피잔이나 종이냅킨이나제복의 색갈같은것에도 “고객만족”에 립각해서 일일이 신경을 쓰는 세심함을 보인다면, 그런 세심함은 필시 냄새(이를테면 화장실냄새)중시, 얼굴빛(이를테면 복무원의 따뜻한 미소봉사)중시...와 같은 면에서도 행해질것이며 결과 얻는것도 고객들에게 선물하는 배려만큼 혹은 배려에 비교가 안될만큼 훨씬 더 풍성할것이라고 믿는다.   //길림신문 
46    불치병의 영원한 도전자 -- 남정 댓글:  조회:4142  추천:75  2007-10-03
불치병의 영원한 도전자 -- 남정 [ 길림신문 박문희 기자] ]  2006-08-19 남정(南征)프로필 현직: 장춘중의약대학 제1부속병원 주임의사, 박사생도사, 중의연구소 소장. 겸직: 중화중의약학회 리사 및 내과분회 상무위원, 소갈병전문위원회 부주임위원, 국가신약 심사위원, 길림성중의학회 부리사장, 장춘시중의학회 리사장, 중의로년병전문위원회 주임위원, 길림성정부 자문고문. 길림성 과기청, 교육청과 위생청 과기선진개인,  장춘시민족단결모범. 길림영재. 길림성명중의, 장춘시명의. 국무원특별수당금 향수.  신약발명가,  난치병전문가, 의학저술가로 의학계에서도 정평이 나 있는 60여세의 중년사나이, 민간에 《난치병을 떼려거든 장춘중의약대학의 남정의사를 찾아가라》는 말이 퍼질  정도로 명성 짜한 남정. 중의학교수, 중의과학연구와 림상진료에 종사해온 40년간 남정은 중풍, 간염, 당뇨병, 심장병 등 현대의학이 채 정복하지 못한 령역에서 나름대로의 중의학적방법론으로 공략전을 벌이면서 중의중약을 고양발전시키는데 크게 이바지했다.   타는  열망으로 웅지 펼치며 남정은 1942년 1월,  길림성 룡정시의 한 평범한 철도로동자 가정에서 맏아들로 태여났다. 부모가 모두  장기간 외지 사업에 투신하였던 까닭에 남정은 두살 먹던 해부터 줄곧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손끝에서 자랐다.  소년 남정은 총명한데다 승벽심이 강해 소학교 때는 한학년 월급을 했고 초중 졸업때는 전현 1등의  성적으로 고중에 붙었다. 당시 온 연변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했던 명중의 리자준은 할아버지와 아주 가까운 친구였는데 두 로인은 시간만 나면 서로 만나  이야기꽃을 피우군 했다.  남정은 그  로중의 할아버지를 몹시 따랐다.  손목을 쥐여보면  환자들의 병을 척척  알아내는것이 신기하기만 했던것이다. 로중의의아들 리석렬  역시 명중의였는데 남정은 방학만 되면 아버지벌 되는  리석렬에게 매일 붙어있다 싶이 했다. 리자준 로중의와  그의 아들에게서 받은 영향으로 남정은 어릴적에 벌써 중의에 대한 동경심이 움트기 시작했고  17세 때는 마침내 우수한 성적으로 꿈의  전당 장춘중의약대학에 들어가게 된다. 그 당시  중의필수의 한어공부를 별반 하지 못했던 애젊은 남정은  학생시절 중의학을 확실하게 전공하겠다는 열망을 불태우며 뼈를 깎는 각고의 노력으로 천서나 갑골문 읽기와 다를바 없는 난해한 고한어를 송곳처럼 파고들며 전국적으로 유명한 교수들인 임계학, 류관군, 류백령 등 교수들을 직접 찾아 직접적인 가르침도  받는다. 내로라 하는  한족 학생들까지 제치고  최우수의 성적으로 학교에 남은 남정은 부속병원에서 림상실천을 하면서선배들에게서 배운것의 효과를 일일이 검증하여 그들의 귀중한 지식을 아주 자기의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노력을멈추지 않는다. 웅지의 날개를 펼치려 할 즈음 느닷없이  대동란이 덮쳤다. 열혈남아 남정은 날개가 꺾였지만 꿈만은 접지 않았다. 남들이 허송세월을 할 때도 얻기 힘든 의학서적과 중의고서를 백방으로 구해다 구구절절 따져가며 탐독했고 맨발의사수첩마저 빠뜨리지 않고 연구했다.   천리고토에서 《개암꽃》 발견 공은 쌓은데로  간다고 동란이 끝난 뒤 남정은 중풍치료에서 재빨리  두각을 내밀기 시작한다.   1980년 그는 국가의  공략과제인《중풍고위증의 예방 및 치료》의 분과책임자로 발탁된다. 연변사람들은 술을 좋아해 중풍발생률과 사망률이 높았다. 중풍치료의 묘방을 찾겠다고 언녕부터  별러온 남정은 분과책임자로 발탁되자 바로 고향  연변으로 직행했다. 룡정, 화룡 등 조선족이 많이 살고있는 지역을 누비며 중풍발생정황을 료해하는 한편 민간처방과  료법에 대해서도 알아보았다. 한국동양의학회에서 전문 남정을 초청, 남정의 특강을 청취했다. 특강이 끝난 뒤 세계동양의학회 회장이며 한국한의학회 명예회장인 배원식(93세, 가운데 분) 등 한국  한의계 원로와 함께 중한 중의학교류문제를 담론하다.(2005년) 로인들과 무릎을 마주하고 한담식 조사를  벌이던중 어느 분인가 개암꽃이 민간에서 간병치료에 쓰이고있다는 얘기를 들려주었다. 개암꽃이 간염에 좋다?   분명 중요한 단서였다. 남정은 그 길로 연변도서관에 찾아가 문헌조사에 착수했다.  《길림중초약지》와 《연변약지》를 뒤져보았더니 화룡  일대의 사람들이 간경화복수에 《진화(榛花,개암꽃)》를 내복외용(內服外用)해본 결과 일정한 치료효과를 보았다는 내용이스치듯 두어줄 기재되여 있었다. 이 초약이 민간에서는 오랜 시일에 거쳐 사용돼 왔을 터이지만 그 많은 중의들의 공식약방에는  진화란 약재가 오른적이 없었다.  보기에도 희한치 않은 개암꽃에 어느 의학자도 눈을 팔지 않았던것이다.  그것이 아무리 귀중한  잠재적 약용가치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발견할수 있는 혜안과 그것의 예비를 확인해 보고자 하는 강한 의욕이 없다면 손안에 주어넣은 보석도 무심히 버릴수 있는것이다.  화룡현위를 찾아 6개 소학교의 학생을 동원, 2000여킬로그람의 《진화》를 채집했다. 한 킬로그람에 23전씩 약 500원을 주고《진화》를 사왔는데 돌아와 해볕에 말리니 700킬로그람이 되였다. 이 약재는 신약개발에 중요한 원재료로 되였다.  《진화》를 리용한 급성 및 만성 독성에 대한 약리실험과 공예 및 제형에 대한 점진적인 동물약학실험을 통해 이 약재가 간을 양하고 만성 B형간염의 양성을 음성으로 전환시킬수 있을뿐만 아니라 혈당도 낮출수 있음을  확인했다.  중초약재사에 있어서의 자못  중대한 발견이였다. 《진화》는 결국  남정의 일생을  동반하며 《복방진화서간캡슐》,  《소갈안캡슐》 등 국가신약의 발명에 주역으로 등장한다.   난치병과 씨름하며 신약을 개발 1988년 6월,초청교수로 일본 도꾜의 도호대학에서 과학연구를 하고있던 남정에게로 메이지대학 동향회주석인 나까다선생이 찾아왔다. 일본 전역에서 유명하다는 의사를 다 보였지만 효험을 보지 못한 이 뇨독증 환자는 중국에서 온  남정이 난치병치료에 능하다는 소문을 듣고 최후 일말의 희망을 안고 찾아온것이다. 병세를 깐깐히묻고난 남정은 즉시 청열해독,  방향화습 및 보신장양 등 료법을 병용한 변증치료를 들이댔다. 한달 후 검사해 보니 뇨소질,  이산화탄소 접합력, 이노신 등 제반지표가 전부 정상으로 회복되여 있었다. 두달도 채 안돼 환자는 기적적으로 건강을 되찾았다. 이 일은 일본 의학계를 들썽해 놓았다.  보도매체들은 뒤질세라 소식을 대문짝만하게 실어 중의학의 신기한 효력을 높이 찬양했다. 국내의 많은 중증환자들도 먼 길을 마다 않고 찾아왔다. 2004년 북경의 한 유명병원에서 치료받던 52 세의 뇨독증말기환자가 치료에 효험을 보지 못하게 되자 장춘에 와 남정을 찾았는데 2년간의 치료끝에 뇨단백, 뇨혈과 뇨소질이 깨끗이 사라지고 간기능과 신장기능이 완전히 회복되여 얼마전부터는 회사에 정상출근을 시작했다. 인류건강의 대적 불치병, 난치병, 의난병은 남정의 종신 공략목표였다. 중풍, 심장병, 간장질환, 소갈병과 같이 서양의학도 근치묘방을 찾지 못한 난치병에 대한 남정의 공방전은 30여년간 간단없이 지속돼 왔다. 중의명으로 《소갈병》이라 불리는 당뇨병은 당대 인류의 건강과 생명을 위협하는 세계 3대 고질병의 하나로서 그 사망률은 암과 심뇌혈관병에 이어 세번째로 높다. 당뇨병환자는 1985년부터  국내외적으로 급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례컨대 지난 세기  80년대  발병률은 0.68%에 불과했는데 90년대 들어 발병률은 3.21%로 4배도 넘게 늘어났다.  60세 이상의 년령층은  더욱 엄중해서 발병률이  4~6%에  달했다. 그중 이미 당뇨병에 걸렸음에도 그런줄 모르고있는 사람이 26%였다.  당뇨병을 4년이상 앓고 혈당이 15.6mmol/L 이상 되는 환자는 합병증이  오기 십상이였는데 그 사망률은 46%로 근 절반이나 되였다. 당뇨병합병증의 원흉은 당격화종말산물(AGEs)이라는 화학물질인데 미국,  영국 등 나라와 국내의 권위들은 장기적인 연구를 거쳐 이미 AGEs는 분해할수 없다는 결론까지 내린 상태였다. 서의들은  중의중약으로는 당뇨병, 신병, 단백뇨의 근치가 불가능하다고 단언했다. 그러나 서의에 의한 치료효과 역시 리상적이 못됐는데 오히려 부작용이 크고  합병증발생률이 높았다. 20여년전부터 소갈병에 대한 림상치료실험과 약리병리연구를  병행해온 남정은 서의권위자들의 단언에 커다란 의문부를  달고 소갈병(消渴病)연구를 계속했다.  의학고전까지 깊이 파고 들면서 이 이른바의 불치병치료약방을 찾아 어려운 항행을  했다. 그러던 중 송나라때의《성제총록》에서《지황생강전환》이란 약방을 발견하고 거기에 혈당을 낮추는《진화》를 넣어 새로운 당뇨병치료약 《소갈안(消渴安)》을 발명해 내며 이어 한술 더 떠 당뇨병신병치료 신약인 《소갈안》2호도 개발해낸다. 이 두가지 약방으로 당뇨병, 당뇨병합병증과 당뇨병신병에 대해 4000여례의 변증치료를 진행했는데 고무적이게도 결과는 매우 성공적이였다. 1997년 7월, 제1회전국중의소갈병학술세미나에서 발표한 론문에서  남정은 간장을 돕고 혈당을 낮추는 《진화》의 약리작용에 대해 분석하고 나서 《AGEs는 분해할수 있다》는 파격적인 견해를 제기했다. 그의 론문은 전문가들속에서 커다란 진동을 일으켰으며 높은 평가를 받았다. 회의가 끝날 무렵 미국, 일본과 한국의 대표들은 다투어 자기들 나라에 가서 강의를 해달라고 남정을 요청했다. 박사, 석사생들과 함께 난치병퇴치에 대한 남정의 집념은 소갈병에서만 표현된게 아니였다. 중풍료법에 대해서도 림상치료에 결부시켜 고전문헌연구를 계속하던 중 청나라 왕청임(王淸任)의  《의림개착》에서 계발을 받고 원 약방에 사향을 넣어 리상적치료효과를 본 경험을 토대로 반복적인 연구와 실험을 거친 끝에 선후로 《사향항전환(麝香抗栓丸)》과  《사향항전캡슐》을 만들어 내는데 성공하며 나아가 세계 2대 류행병의 하나인 B형간염치료에 대한 연구실험도 효률적으로 진행하여 치료효과가 서약비교팀보다 퍽 월등한 《진화간녕(榛花肝寧)》과 《복방진화서간캡슐(腹方榛花舒肝膠囊)》을 련이어 개발해 낸다. 이처럼 남정은 《사향항전캡슐》,《복방진화서간캡슐》, 《소갈안캡슐》, 《서신령캡슐》, 《양위녕캡슐》등 5종 국가급 신약을 비롯해 당뇨병심병, 당뇨병뇌병, 당뇨병간병, 당뇨병안병, 당뇨병족병(足病) 등을 치료하는 《준자호》,《건자호》약물 도합 20여종을 개발해내여 해마다 나라를 위해 리윤 2000만원 이상을 창출했다. 한가지 신약이 시장에 나오자면 연구시간만 15년 이상 걸린다. 많은 신약 연구들이 사소하게 생각해 루락시킨 작은 연구과정때문에 마지막 단계에서 약으로 완성되지 못한  경우가 허다하다. 하다면 남정이 개발한 20여종의 신약에는 얼마만한 로고가 깃들어 있을것인가?   교수와 과학연구 열매 호함져 남정은 교수사업에서도 자신의 튼실한 림상실천경험과 과학연구성과를 토대로 본과생, 박사 석사 연구생을 책임감 있게 지도해 왔다. 1979년부터《중의내과학》과《신약의 연구개발》이 두개 전공학과의 강의를 책임져 온 남정은 1985년부터 석사연구생  지도를 맡아 지금까지 이미 외국 류학생 3명을 망라한 20여명 연구생을 키워냈다. 길림성에서 맨 첫 사람(조선족으로는 전국에서 첫 사람)으로 중의박사생도사로 된 그는 현재 박사생 9명과 석사생 30여명을 거느리고 당뇨병의 원리와 예방퇴치에 대한 전문연구도 하고있다. 남정의 저서와 론문 편찬집필성과도  심히 풍성하다. 국내에서《당뇨병신병연구》,《당뇨병중서의종합진료》등 저서 20여부 (그중 국가급 우수도서상 1 부) 를 출판하고 10여부 저서의 책임편집을 맡았으며 성급이상 잡지에 론문 100여편을 발표,그중 8편은 국가급 우수론문상을, 8편은 성급우수론문상을 받았다. 한국에서 출판한 저서도 묵직하다. 400년전의 《동의보감》 한글번역본 (감수), 총 7권에 300만자에 달하는 《중의학총서》(주필)와 700만자에 달하는 《한.중.영 중의사전》(주필)을 펴냈는데 그중 내용이 방대한 《한.중. 영 중의사전》은 유네스코에서 제정한 《서태평양아세아도서》 금상을 수상했다. 그외 구쏘련, 미국, 일본, 한국, 말레이시아 등 나라에 가 초청교수 신분으로 강의를 하거나 국제학술세미나에 참석하여 10여편의 론문을 발표, 중의중약을 세계에 전파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   *   *  남정은 《최근들어 중의학은 서양의학으로 치료가 쉽지 않은 난치병에서 성과를  거두는 경우가 잇따르고있다》면서 《중약을 보약쯤으로만  생각한다면 큰 착각이다》라고  토파한다. 현재 심화중인 당뇨신장병, 심장병,간장병,  뇌질환, 눈병과 말초신경염 등 질환에  대한 연구에서 그는 림상치료와 과학실험을 드팀없이 앞세우면서 환자를 고통속에서 구조하고 중화의학을 만방에 빛내기 위해 혼신을 다하고 있다.  
45    [칼럼]행군대렬속의 핸드폰 벨소리 댓글:  조회:4216  추천:59  2007-10-02
행군대렬속의 핸드폰 벨소리 박문희  2004년 여름, 중, 일, 한 3국 청소년으로 구성된 초원탐험하계학교(夏令營)이벤트가 내몽골에서 개최됐었다.  찌더운 날씨에 매일 30킬로메터 "행군"을 해야 하는 전반 려정은 십분 간거했다.   10여 킬로메터 행군했을 때 대렬속 한곳에서 핸드폰 벨소리가 울리더니 그 소리는 전염이나 된듯 확산되여 삽시에 대렬 처처에서 벨소리가 요란했다. 알고 본즉 모두가 중국애들이 부모한테 행군의 괴로움을 하소연하는 전화였다.  이런 고생은 죽기보다 못하다느니 이럴줄 알았더면 안 올걸 그랬다느니 불평이 많았다.   이와 선명한 대조를 이루는것은 일본 소년들의 표현이였다. 일본애들은 야외 생존조건하에서 부딪칠수 있는 극한(極限)상황에 대처할 만단의 준비로 다들 등에 중국애들보다 훨씬 큰 행낭을 짊어지고 있었지만 그들은 힘들다는 말 한마디 입밖에 내지 않았다.   모두를 놀래웠던것은 당지 수행일군들이 기중 작고 여윈 애를 도와 짐을 들어주려 했을 때 그애한테 즉각 퇴짜를 맞았다는 사실이다.  그 일본 꼬마는 이런 때 남의 방조를 받는것을 치욕으로 간주하고 있는것이였다. 이벤트를 마감 지을 무렵 일본과 한국의 아이들은 내몽골의 독특한 민족문화와 풍부한 관광자원에 대해 몹시 부러워하면서 극구 찬양해 마지 않았다. "정말 대단해요.  우리가 살고있는 땅이 엄청 넓다는걸 진짜 첨 알게 되였다구요. 지구가 크다는걸 우린 여태 책에서만 읽었지 직접 눈으로 본적은 없었거든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중국애들은 그런데는 흥취가 전혀 없는것 같았다.  그들의 머리속에 뱅뱅 돌고있는것은 오로지 빨리 집으로 돌아갔으면 하는 일념뿐이였다.     2년 전에 보도되여 대토론을 인기했던 사실이다. 국제망신이라느니 중국애들이 일본애들만 못하다느니 이런 평들이 마구 쏟아져 나왔다.  물론 이 한 차례의 활동을 가지고 이처럼 중국 아이들 전반에 대해 분별없이 혹평을 하는건 바람직하지 않다.  그러나 이 일을 거울로 삼아 우리가 자성해 봐야 할 필요는 분명 있다.   상기 일본 아이의 표현에서 우리는 어려움을 견디여 내는 그 애의 강한 의지가 결코 하루한시에 형성된것이 아님을 알수 있다.  아울러 우리는 그 소년의 뒤에 자식을 익애(溺愛) 하지 않고 커서 완전 자립을 할수 있도록 생활능력을 키워주는 부모가 있음을 미루어 확인할수 있다.   한편 핸드폰의 벨소리가 울리는,  --중국애들이 부모한테 하소연전화를 치는 장면에서 우리는 어린것을 짐을 지워 먼길에 내놓고 가슴 아파하는 부모들을 떠올리게 됨과 동시에 부모가 자기의 사랑하는 자식들을 본의 아니게 해치고 있지는 않는지 하는 의구심이 드는것을 떨쳐 버릴수 없다. 우리는 아마 자식에 대한 보호와 과잉보호,  기대와 과잉기대,  관리와 자유방임 사이에서 우왕좌왕하면서 자식사랑에 상당정도 눈이 멀어 있는것 같다.   무엇이 자식에 대한 참사랑일가? 자녀를 온실속의 화초처럼 키우는게 참사랑일가?  아이가 하자는대로 다 들어주는것이 참사랑일가? 자녀들에게 일도 좀 가르치고 고생도 좀 시키면서 어려서부터 조금씩 자립적인 품질과 독립적 생활능력을 키워주는것이 참사랑일가?  어느것이 깊은 사랑일가?   익애로 표현되는 과잉보호(過剩保護)는 아이를 심신이 허약하고 자립심이 없으며 비사교적이고 집단생활에 적응하기 어렵게 만든다.  과잉보호의 리면에는 체면과 욕심으로 인한 부모의 과잉기대와 지나친 간섭(주로 공부에 대한 강요)이 다분히 깔려 있는것 같다.  돈도 달라는대로 쥐여주는 자유방임, 정말 고쳐야 할 사랑방법이다.   실상 자녀들에게 스스로 성장하려는 충동과 성장하는 힘을 가지고 있지 않는게 아니다.문제는 부모가 아이의 그런 정당한 의욕을 믿어주고 북돋아주며 하려는 일에 필요한 요청을 받아 줄 대신 그런 의욕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고 아이를 공부에만 가두어 두는데 있다.  그것이 최고사랑이라고 믿는데 있다.   핸드폰의 벨소리! 그것이 우리에게 천둥처럼 들려 시시로 경종이 됐으면!   길림신문/2006.7.13    
44    한국인을 감동시킨 화교 한성호박사 댓글:  조회:5019  추천:63  2007-09-29
한국인을 감동시킨 화교 한성호박사 [길림신문 박문희 기자] 2006-03-09              한성호박사가 이룩한 업적은 국외인사들로부터 극히 높은 찬양을 받았으며            그는 대단한 중국인으로, 중국의 기인으로 불리였다.                                      一한성호박사 업적비 비문에서   한국 화교계에 한국 제13기 대통령 노태우로부터 《아주 대단한 중국인》이라는 평가를 받은 분이 있다. 이 분의 사무실 벽에 걸려있는 사진액틀에는 호금도, 리붕, 주용기, 리서환 등 중국의 중앙 지도자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 있는가 하면 한국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등 대통령 그리고 총리와 여러 정당의 총재들과 함께 찍은 사진뿐만 아니라 젊었을 때 장개석과 함께 찍은 사진도 있다. 그의 업적은 《대한민국현대인물지》에도 올라있다. 이분이 과연 누굴가? 한국 력대 대통령의 어의(御醫)로 불리는 애국화교 한성호(79세)박사이다. 현재 대한민국 신동화한의원 원장, 《한화천지》잡지사 회장, 한국유교협회 고문, 한중우호협회 고문, 한국 화교달마불교 회장, 한국 수석인 (壽石人)총련합회 수석부회장, 중국전국화교련합총회 고문 등 10여가지 사회직을 일신에 떠메고 애국위업의 수행에 혼신을 쏟고있는 한박사, 그는 한국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하다.   악몽처럼 불행했던 과거 한성호박사의 본적은 산동성 게현(莒縣))이다.1909년 그의 부모와 몇몇 삼촌은 게현 북부의 한 작은 마을로부터 길림성 장백현의 압록강반에 피난해와 자리를 잡았는데 뜻밖에도 거기서 사금광을 발견하고 사금을 일어 큰돈을 벌기 시작, 십수년후에는 당지에서 소문난 부자로 되였다. 한성호는 1927년 8월 28일 생으로 원명은 한조선(韓早先)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했던 그는 12살에 소학교를 마친 뒤 바로 림강고등학교에 입학했고 16살에는 또 길림국립사범대 시험에 합격하여 장백현 력사상 최초의 대학생으로 되였다. 대학에서 공부할 때 일본경찰에 까닭없이 잡혀가 얻어터지고 갇히웠던 관계로 그는 왜놈들이라 하면 이를 갈았다. 1945년 대학 3학년을 다닐 때 일본경찰에 끌려가 깊은 산속에서 모진 고역을 치르며 하마트면 왜놈의 총칼에 찔려 죽을번한 일도 있었다. 1945년 일제가 투항을 하자 일본이 관할하던 길림사대도 문을 닫아 갓 3학년을 마친 한조선은 귀향하여 중학교 어문을 가르쳤다. 1947년 동북에서는 지주를 타도하고 땅을 나누는 토지개혁운동을 벌였는데 한조선은 국민당특무, 반혁명폭동의 조직자로 잘못 락인이 찍혀 사형판결을 받았고 그의 셋째, 다섯째, 일곱째 삼촌은 맞아죽었으며 어머니는 한을 품고 자살했다. 아버지와 형님도 행방불명이 되였다. 그는 처형되기전 공안국에 있던 동창생의 구원으로 산속으로 도망치다 뒤에서 날아오는 총탄에 다친채로 심산속에서 50여일간 전전하며 말못할 역경을 다 치렀다. 그러다가 한국으로 도망할수밖에 없게 되었다.   국민당에 환멸을 느껴 정치를 포기 서울에서 그는 한국주재 대만대사관의 시험에 응해 교무(僑務)비서로 발탁됐다. 서울에 온 한성호는 국민당에 가입하며 아울러 국민당 중통(中統)특무조직에도 참가한다. 조선전쟁기간에 공을 세워 선후로 장개석과 장경국의 단독접견을 받았으며 아울러 표창도 받았다. 26세에 벌써 추천을 받아 《 양명산혁명실천연구원》에 들어가 학습을 하게 되며 거기서 장개석의 강연을 직접 듣는 기회도 갖게 된다. 리상, 재능과 사업심이 있는 20여세의 열혈청년으로 국민당의 중점 양성대상이 된데다 장씨부자의 단독접견까지 받았으니 그의 미래엔 희망이 충만되여 있는 셈이였다. 그도 당연히 국민당에 충성을 다했다. 그러나 그의 가슴속엔 남아의 호연정기가 굳게 자리잡고있었으니 탐오부패에 푹 젖은 대만 외교관원들의 현실과 한국 화교조직들 내부의 조국과 중화민족의 얼굴에 먹칠하는 갖가지 추악상들을 목격한 그는 민족대의를 위해 용감히 떨쳐나서서 그들과 투쟁하지 않을수 없었다. 교무비서를 하면서 서울안 차이나타운에서 화교조직들이 아편관, 도박장, 기생집을 경영하며 중국인의 얼굴에 똥칠을 하는것을 본 한성호는 《대사관 총령사》 숙몽공에게 교풍(僑風)촉진위원회를 설립할것을 즉시 건의했고 동의를 받은후 즉시 백여명의 행동조를 무어 기생집,도박장을 들부시고 화교사회내의 악세력들에 용감히 도전했다. 물론 이에 매국장사군들의 미움깨도 많이 사고 처처에서 무서운 보복도 당했지만 그는 추호도 굴복하지 않았다. 아편관이나 도박장을 들부신 한성호의 행동은 그나저나 대만 대사관의 통일행동으로 되였던 까닭에 일정한 보호를 받을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자기의 기자신분 을 빌어 대만외교관의 부정부패행위를 사정없이 파헤치고 까발리는데 대해서는 대만대사관은 그냥 내버려두지 않았고 무시로 타격과 보복을 감행했다. 특히 서울의 13명 화교수령들이 대만과 한국정보기구에 한성호를 《국민당내부에 기여들어온 공산당특무》라고 련명보고를 올려 무함하면서 그를 처리할것을 요구하였을 때 그는 관료기구내의 험악상과 국민당 관원의 부패상에 대한 혐오와 더불어 화교사무에 환멸감을 느낀 나머지 정치를 포기하고 교육에 종사키로 작심, 분연히 서울을 떠나 군산시에서 한 화교학교의 교장을 맡는 과단성을 보여주기도 했다. 후에 한성호는 또 바다처럼 깊은 중의리론에 매혹되여 의학을 전공하기 시작했다. 그의 총명재질과 지독하게 끈질긴 성격은 의학전공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됐다. 서울에 있을 때 벌써 경희대에서 한의(즉 중의)를 전공했었던 그는 송곳처럼 중의학리론을 파고 들어 마침내 미국 캘리포니아주대학으로부터 박사학위까지 수여받았고 드디여 한국 전역에 소문 놓는 어의(御醫)로까지 된것이다.   한국 전역을 들썽케 한 중의 1960년 한성호는 군산시를 고별하고 광주에 가 중의진료소를 꾸렸다. 한성호는 중의약제로 한 페결핵 말기환자를 치료해 병을 떼는데 성공했다. 하여 대번에 이름을 날리게 되였는데 그의 문전은 매일 병보러 온 사람들로 북적이군 했다. 1970년 친구의 협조요청으로 서울에 돌아와 신문을 꾸린 한성호는 대만대사관의 모해로 가산을 탕진하고 곤경에 빠졌다. 이때 한 한국인 친구가 구원의 손길을 뻗쳐와 그를 한국의 중국연구소한방의학학술연구원 원장, 서울특별시재향군 인회 지정 한의원 원장 등 직에 초빙하여 그의 생활고를 풀어주었을 뿐더러 그가 중의학연구에 종사하는데 량호한 일터환경을 마련해주었다. 그후 그의 의술이 갈수록 고명해지자 한국의 박정희, 김종필 등 대통령, 총리를 비롯해 군,정 고위급 요인들이 병보러 자주 드나들었고 그중 노태우,김영삼 등 많 은 인사들도 친구로 사귀게 되였다. 그가 친구를 항시 진심으로 대하면서 언제나 의리를 중히 여기고 사리를 도모하지 않았기때문에 한국벗들은 그를 한결같이 존중했다. 이 기간 경제발전과 더불어 한국의 생활리념에 많은 변화들이 생겼다. 병을 치유하고 체질을 증강시키는 중의의 목적을 나날이 높아지는 백성들의 생활수준에 접목시키기고자 한성호는 식품료법연구에 몰입하여 중의리론으로 맛나는 음식과 병치료에 효과적인 중의약방을 과학적으로 결합시킨 식품료법을 부단히 더듬어냈으며 3년동안 연구에 잠심한 결실로 1974년에 이르러 120여만자에 달하는 의학전문저서를 탈고했다. 《식물편》,《동물편》,《미용편》,《조미료편》,《식품치료편》등으로 나뉘는 이 대하의학서의 이름은 《식품비방》이라고 달았다. 책이 방금 탈고되자 이를 발견한 옛친구인 《조선일보》 주필 선우훈은 이 책의 가치를 대뜸 보아내고 즉시 신문에 련재하기로 결정했다. 1974년 5월 23일 《조선일보》에 한성호의 《식품비방(食品秘方)》 첫기가 실렸다. 상상외로 독자들의 반향은 대단히 강렬했다.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면서 신문의 발행량은 놀라운 직상승을 기록했는데 불과 며칠도 안되는 사이에 신문은 70여만부로부터 120만부로 치달아올랐다. 《식품비방》련재는 1년 반동안 지속되여 한국 신문간행물 련재의 기록을 쇄신했다. 《식품비방》은 당연히 책으로도 출판됐는데 당시 인구 4000여만명밖에 안되는 한국에서 이 책은 한해동안에 50만책이나 팔려나갔다. 그가 출연한 TV강좌도 마찬가지로 무수한 관중을 끌었다. 이에 그치지 않고 그는 또 한국 한의학자들과 합작하여 13권에 달하는 《한방의료대전집》도 펴냈다. 중국의학을 세상에 널리 알리고 빛내는데 그가 한 기여는 거대하다.   노태우대통령의 중한수교밀사 1987년 한성호의 친구 노태우가 한국대통령에 부임했다. 노태후는 대통령으로 된후 닷새만에 한성호를 단독 접견하고 대통령밀사의 신분으로 비밀리에 중국정부와 접촉하여 한중수교를 위해 물밑작업을 맡아해줄것을 위탁했다. 하여 근 40년이란 국민당 당령을 가지고있는 한성호는 중한우의와 조국의 장래를 위해 선뜻이 친선밀사로 나서서 비밀리에 중국 정부관원들을 만나 수교를 위한 물밑작업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를 알게 된 대만당국은 가만있을리 없었다. 한국주재 대만 대사관과 일부 대만독립을 지지하는 화교 두목들을 내세워 한성호를 공격하고 보복을 감행하게 했다. 대만 대사관의 한 령사는 공산당에 가문이 망하고도 공산당을 도와 일하다니? 집안의 원쑤를 갚지 않으면 효성을 다하지 않은것이요, 국민당에는 충성심을 잃은것이라면서 문죄하려 들었다. 도발앞에서 한성호는 이렇게 대꾸했다.나는 중화민족을 위해 일하지 어느 당파를 위해 일하지 않는다.효에는 크고 작은 구분이 엄존한다.부모님에 행하는 효는 작은 효이고 민족에 행하는 효야말로 큰 효이다. 내가 중한수교를 위해 일하는것은 민족에 가장 큰 충과 효를 행하는것이다.가정의 비극은 력사가 조성한것이고 전쟁이 조성한것이다. 그래 내가 나의 조국을 위해 일하는것이 죄란 말이냐? 한성호박사의 주선하에 1988년 5월 중순 한국정부는 중국 산동, 료녕과 북경을 방문하도록 대우재단의 김우중회장을 단장으로, 김복동장군, 한성호박사를 고문으로 한 15인 경제방문단을 중국에 파견하여 량국간 외교방문의 서막을 열어젖혔다. 그해 8월 산동국제상회의 리유회장이 인솔하는 산동경제방문단이 중국의 첫 정부측대표로 서울을 답방하여 중한수교의 첫걸음을 완성했고 이로써 중한 정식수교의 기반을 마련했다. 1992년 중한수교 전야에 노발대발한 대만당국은 한국주재 중국대사관 관사를 팔아버릴 음모를 꾸몄다. 이 소식을 들은 한성호는 중국대사관의 모든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엄정성명을 발표,세계 각지의 애국적 화인 화교들에게 한결같이 단합하여 대만당국의 매국행실을 제지시키고 중국대사관의 재산을 보호하라고 호소했다. 수많은 애국화교들의 노력으로 대만당국의 음모는 파산을 선고했고 가치가 10여억딸라에 달하는 재산은 마침내 허실없이 조국의 품안에 돌아오게 되였다. 1993년 2월 19일 오전 10시, 서울시정 강당에서 한국의 수백명 관원들이 장엄하고도 성대한 의식을 가지고 한국사회를 위해 중대한 공헌을 한 외국인 한성호박사에게 국민훈장을 수여했다.   중국의 화장실 혁명을 일으킨 로인 2000년 양력설 전야 산동성정부에서 조직한 《태산신천년축전》활동에 참가한 한성호박사는 태산절정에 올라 화장실을 찾았다가 상상도 못할 장면을 목격하고 경악을 했다.세계적으로 유명한 이 관광구내의 변소란 똥오줌이 넘쳐나 악취를 풍기고 변소내에 간막이가 없어 서로가 치부도 가리지 못하는 기막힌 형국이였던것이다. 민족자존심을 크게 다친 한박사는 분통을 터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즉시 수만자를 일필휘지하여 유람구의 기막히고 치떨리는 위생상황을 일일이 렬거하고 무책임한 정부 관원들을 통절히 꾸짖었다. 《태산은 중국의 성산이자 세계의 명산이며 중국을 빛내는 국보이기도 하다.헌데 어쩜 아름다운 국보를 이렇게 더럽힐수 있단 말인가?! 가석하기 짝이 없고 분노로 치떨린다.산우에 분변이 사태를 이룸은 산아래 더러운 관료가 있음이요, 금 그릇을 들고 더러운 돈 버니 아름다움과 깨끗함이 어이 있을소냐? 나라의 체면은 어디에 팽개치고 리익 챙기기에만 급급하냐? 민간기풍우매락후는 부정부패 탓이로다. 나라와 민족의 얼굴에 똥칠을 하니 비관과 분노를 금할길 바이 없다!…》 그는 반월간 잡지《한화천지》2000년 제4기에 글을 발표한 뒤 이 글이 실린 잡지 수권을 산동의 일부 관원들에게 부쳐보내고 하회를 기다렸다. 2000년3월,한성호박사의 《한화천지》잡지를 받아보고 크게 놀란 태안시당위 막진규서기는 바늘방석에 앉은 사람처럼 안절부절 못했다.잘못을 저지른 아이가 아버지에게 호된 꾸지람을 받았을 때의 심정이였다.시위서기로서 그는 자기에게 밀어버릴수 없는 책임이 있음을 느꼈다. 한박사의 호된 비판이 천만 지당하다.태산은 조국의 자랑이자 얼굴이다. 조국의 얼굴을 깎아내리는 일이 있어선 절대로 안된다. 그는 잡지를 놓기 바쁘게 실태조사에 착수했고 회의를 열어 각방의 의견을 청취했으며 전문가들을 불러 조치를 강구했다. 얼마 후 서울에 있는 한성호박사는 산동 태산시 막진규서기가 보내온 편지를 받았다. 편지에는 태산유람구위생에 대한 한박사의 비판에 감사를 드린다는 내용과 함께 태안시 변소개조 계획이 소개되여있었다. 편지를 접한 한박사는 기쁜 나머지 만감이 교차했다.국민당을 삼사십년간 욕했어도 국민당은 나의 말을 단 한번이라도 귀담아 들었는가?듣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보복과 타격만을 일삼지 않았던가? 그러나 뜻밖에도 일당 독재를 한다고 비난을 받고있는 공산당이 인민의 비판을 허심히 접수하고 꾸짖는자의 애국성의를 존중해주다니, 짜장 감개무량하도다! 2000년5월,태안시에서는 전례없는 변소혁명을 일으켰다. 태산풍경구 및 시 구역의 2216개 변소에 대한 개조작업이 전면 개시됐다. 일개 정부가 변소를 제1호 공사로 삼기는 태안시는 물론 중국력사에서도 처음 있는 일이였다.쉬운 일이 아니였다. 2억5000만원이나 수요되는 건설비용은 중지를 모아 변소를 경매하거나 청부 주는 방법으로 해결했다.모든 변소를 깨끗하고도 보기 좋게 수건하면서도 태산의 자연경개를 파괴하지 않고 귀중한 지하수자원도 오염시키는 일이 없게 하고자 설계부문에서도 머리를 쥐여 짰다. 태안의 변소혁명은 석달간의 분전끝에 승리적으로 완성을 고했다.태안은 깨끗해졌고 더욱 아름다워졌다. 2천여개 변소는 기적처럼 일률로 수세식으로 모습을 바꾸었는데 세수대, 세면대, 건수기, 통풍기가 구전하고 바닥에는 몽땅 자기타일을 깔았다. 태안의 공중변소혁명은 전국적으로 지대한 반향을 자아내여 중국공동변소개조의 서막을 열어놓았다.   《반독촉통》의 대기를 첫사람으로 떠메고 리등휘가 대만 총통의 자리에 올라 앉은 후 한성호박사는 예리한 정치적안광으로 대만독립을 굼꾸는 리등휘의 본질을 보아내고 맨 첫 사람으로 대만독립론을 비판하는 글을 발표하였으며 이를 발단으로 대만독립반대투쟁을 전개, 조국의 평화적통일을 위해 간단없는 노력을 경주해 왔다. 중한수교 후 대만 당국과 한국의 관계는 비록 대사급으로부터 대표부급으로 떨어졌지만 대만대표부의 정부관원은 중국대사관 인원보다 훨신 많았으며 장기간 형성된 관성에 의해 대만대표부는 여전히 화교사회를 통제 관리하고있었다. 대만 당국은 수만명에 달하는 화교를 잃지 않기 위해 그들에게 후원금을 아낌 없이 퍼부었고 화교사회의 다수성원도 얼빤한 정신으로 그들을 따라가고 있었다. 결과 대만독립을 반대하는 한성호 등 두뇌가 명석한 로화교들 몇몇은 오히려 여러 면으로부터 달려드는 타격과 보복을 당하기 일쑤였다. 중국대사관에서도 한국에 《반독촉통(反獨促統)》조직을 세우려고 여러 모로 노력했지만 줄곧 그렇다 할 결과를 보지 못하고있었다. 2002년 새해맞이초대연이 있은 후의 어느 날 대사관의 리빈대사가 한성호박사를 례방, 중한수교에 력사적 기여를 한 한박사에게 이번에는 《반독촉통》조직 결성에 힘을 실어줄것을 희망했다. 한성호박사는 이에 선뜻이 응해나섰다. 《이것은 중화민족의 대사입니다.분렬을 반대하고 통일을 촉진하는것은 우리 모든 중국인들의 책임이기도 합니다. 대사님, 시름 놓으십시오. 한달내로 이런 조직을 만들겠습니다.》 이미 76세 고령인 한성호박사는 불타는 애국충정을 안고 바로 그 이튿날부터 반독립조직 결성을 위한 작업에 몰입했다. 2002년 2월 14일,한박사의 발기하에 애국교민조직 《서울중국교민협회》가 설립됐다.이날 한박사는 특수한 감정을 안고 중화인민공화국 5성붉은기를 손수 회장에 걸었다. 이것은 한국화교사회에서 사상 처음으로 올린 5성붉은기였다. 그로부터 며칠 뒤인 2002년 2월 23일,한국 화교사회의 력사에서 처음으로 《반독촉통》을 취지로 내세운 단체 《한화중국평화통일촉진련합총회》가 역시 한성호박사의 발기하에 고고성을 터쳤다. 한성호박사는 특유의 대지대용(大智大勇)과 비범한 조직력,그리고 불같이 뜨거운 애국지성으로 짧디짧은 10여일 동안에 두개의 큰 화교조직을 설립함으로써 중국의 평화적통일사에 빛나는 한페지를 기록한것이다.   맺는 말 한박사한테는 세속에 물젖지 않는 오기가 있고 강권에 휘여들지 않는 절개가 있다. 그는 개인의 은혜와 원한보다는 조국과 민족의 대의를 중히 여기는 열렬한 애국자이다.   인민대회당에서 중공중앙 호금도총서기와 중화전국귀국화교련합회(략칭 전국교련) 림조추주석(오른쪽)의 친절한 접견을 받고있는 애국화교 한성호박사 노태우가 대통령에 취임한지 닷새후인1988년 3월 1일 대통령부에서 노태우부부와 기념사진을 남기다. 1993년 2월 대통령을 대표하여 한성호박사에게 국민훈장을 수여하고있는 한국 서울시 리상배시장(왼쪽).
43    '권위적 해석'과 관련하여 곰아지 선생과 상론함/박문희 댓글:  조회:4279  추천:61  2007-09-17
  <권위적 해석>과 관련하여 곰아지 선생과 상론함   박문희   곰아지선생의 토론성의에 고마움을 표한다. 그러면서 나의 생각을 아래와 같이 적는다.   곰아지선생은 <조선민족의 뿌리에 대한 권위적 해석>에서 “고고학적 발견과  문헌적인 기록으로부터 ‘단군의 중국 감숙 돈황 기원설’이나 ‘중국 신강 천산 산맥 기원설’은 아무런 력사․ 문헌적인 근거가 없는 일부 호사자들의 낭설임을 말해주고 있다”면서  “三危”라는 지명을 “중국문화나 불교의  강력한 영향을 받은 후에 기록된 『삼국유사』중의 기록을 액면대로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아무렇게나 해석될”수 있다는 우려를 표시했다. 그런데 필자의 소견에 중국학자들의 최근 연구성과들을 보면 이 문제를 그렇게 간단히 볼 일만은 아닌것 같다.   곰아지선생이 『한국민족문화백과대사전』에서 발취하여 제시한 문장중 “중국 동북부의 민족으로서 肅愼 ․ 朝鮮 ․ 韓 ․ 濊 ․ 貊 ․ 東夷 등이 주나라 초기부터 중국문헌에 나타나는데, 이것이 바로 우리 민족을 가리키는 것이다” 란 기술은 내가 보기엔 과학적이 못된다. 례컨대 東夷가 우리 민족과 일정한 관계가 있는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중국고전이 제시하는 허다한 자료를 보면 그 속의 부족들이 매우 복잡한 양상을 띄고있으며 그것을 통털어 우리 민족을 가리킨다기엔 문헌적인 기록이 받쳐주지 못하는 부분이 너무 많다.   우리 민족의 력사연구에서 문제로 되는것은 자체의 문헌자료가 턱없이 부족한것이다. 제일 오랜 자료래야 단군신화를 담고있는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정도다. <세종실록>에도 <古朝鮮秘詞>, <朝代記>, <三聖密記>, <三聖記>와 같은 한국史書들이 거명되고 있어 조선조때까지만 해도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이외에 상고사를 밝혀줄 기록들이 많이 남아있었을것으로 보이지만 왜란으로 다 분실되고 지금은 거의 없는 형편이다.   결국 지금 우리는 자기의 력사를 잃어버리고 만 형국이 되고말았다.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를 전혀 모르고있는것이다. 지금까지의 고고학적 발견으로도 아직 이 주요한 문제를 확실하게 설명하지 못하고있는게 현재 실정이다.   부득이 신화로부터 뿌리를 찾지 않을수가 없는데 이게 쉬운 일만은 아니다. 력사가 아닌 신화로만 취급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갈수록 많은 증거가 신화의 진실성을 절대 무시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증명하고있다. 문제는 신화가 너무 간략하게 씌여져 많은 문제를 오리무중에 빠뜨리고있다는것이다. 이제 연구의 길을 넓히는 방법은 중국고전을 리용하는것 밖에 없을것 같다.   중국의 고전총서 <四庫全書>는 청나라 乾隆때 천여명의 학자를 동원, 10년에 걸쳐 편찬한 무려 7만 9000여권에 달하는 동양 최대의 방대한 史書다. 그 중에는 東夷사료를 망라해 우리 민족의 뿌리를 찾을수 있는 자료가 반드시 있을것이라는 느낌이다. 그런데 이 일에 대한 중시가 아직 따라가지 못하고있지 않는가 하는 부질없는 생각이 간혹 생길때가 있다.   물론 한국의 학자들이 이 작업에 손을 댄것만은 사실이다. 그런데 그들의 일부 연구에서 “내것은 물론 내것이요 네것도 역시 내것”이란 태도는 좀 지나친것 같다. “동이가 바로 고조선이다”라는 견해가 바로 그것이다. 더구나 “중국인으로만 알았던 요순과 공자, 백이, 숙제, 강태공, 맹자, 묵자도 알고보니 우리 민족의 선인”이라는 견해는 바로 “동이족이 바로 우리 민족”이라는 견해에서 비롯된것이다. 방대한 고전을 련계속에서 보지 않고 고립적으로 연구하면 연구가 필시 기로에 빠지게 될것이다.   중국고전과 현대 중국의 무수한 연구론문을 거침없이 읽을수 있는 한국학자가 너무 적은것도 문제로 될수 있다.   최근 중남민족대 남방소수민족연구중심의 연구원 楊萬娟이 2005년 1월에 발표한 론문 <韓國文化與中國楚文化近源初探>에 각별한 흥취를 가지게 되였는데 상당히 중요한 연구가치가 있어보인다. 이 글을 보면 우리 민족이 어디서부터 떠나서 오늘에 이르렀는가 하는 과정을 영화처럼 생동하게 보는것 같다.   楊萬娟의 연구에 따르면 중국 초나라의 羅國과 盧國은 한국의 新羅, 辰韓과 밀접한 력사적 淵源관계가 있다. 한국 삼한시기의 진한(辰韓)과 변한(弁韓) 주민은 진나라에 의해 멸망한 초나라에서 건너간 초나라 유민 羅씨족와 盧씨족이다. 그들은 모두 묘족의 후예(시조는 蚩尤)로서 방사(方士) 한종(韓終)을 따라 한국으로 건너간것이다. 단군신화는 신라가 한반도를 통일한 후에 생겨난것인데 한종이 가능하게 신화에 나오는 환웅의 원형일수 있다는게 그의 견해다. 신라는 한자를 익숙히 구사하는 우세를 빌어 건국신화를 창조, 기록했으며 신화속에 초나라문화의 색채를 부여했다는것이다. 초나라와 한국 문화의 관계에 대해 楊萬娟은 전부 고전을 인용하여 설명을 했는데 신빙성이 있다고 본다. 초나라의 대 시인 굴원이 <楚辭>에서 “三危” , “風伯”, “雨師” 등 용어를 사용했다는 례를 비롯하여 楊萬娟은 신빙성이 있는 례를 매우 많이 들고있다.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기원전 7세기에 중국 한강 중류의 초나라복지에 묘씨부족의 두개 작은 나라 羅國과 盧國이 있었다. 두 나라는 다 묘씨부족이였지만 갈래는 달랐다. 羅氏族은 중원에서 왔고 盧氏族은 岷山과 岷水 일대에서 왔다. 그런데 민산과 민수 일대가 바로 감숙성 남부와 사천성의 린접부에 위치한 古三危지역이다.   秦漢시기와 그 이전의 戰國시대에 方術(신선, 도사의 술법)에 능하고 천문지리와 의술, 그리고 농업과 항해 등 지식도 숙달한 方士들이 제왕의 신임을 몹시 받았다고 한다. 가장 유명한 방사로 徐福을 꼽는데 그는 진시황의 령에 의해 선약을 구하러 바다로 나갔다가 나중에 일본으로 건너갔다고 하며 그와 동시대 사람인 韓終은 선약을 캤지만 임금이 복용하려 하지 않아 자기가 그 선약을 먹고 신선이 되였다 한다. 바로 이 한종이 초나라가 망한 후 8년에 羅氏와 虜氏 등 楚나라의 나라 잃은 씨족 삼천을 거느리고 기원전 215년 바다를 건너 한반도의 동남부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중국의 문자가 한국으로 들어간 시기는 대략 전국시기와 한나라 초기인 기원전 2세기로 잡고있는데 이는 한종이 한국으로 건너간 시간과 기본상 일치하다.   신라가 한반도를 통일하고 평양을 망라한 대동강 이남지구를 차지한 후 원유의 부락수령 이야기를 토대로 새로운 통치자에게 유리한 건국전설을 보태여 단군신화를 창조한것이다. 이로부터 추론하면 韓終이 단군신화에 기술된 환웅의 원형일 가능성이 매우 많다. 사서에 한종은 이미 수련을 거쳐 신선이 되였다고 기재되였으니 후세 사람들은 완전히 그를 천신으로 떠받들수 있는것이다.   三危와 太白의 위치문제에서 楊萬娟은 자기의 견해를 내놓고있다. 三危에 대해 한국학자들중에는 白岳山설과 감숙 敦煌남부 三危山說이 있고 三危太白을 통털어 조선평안북도의 묘향산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중국학자들의 견해도 각각인데 돈황 부근 三危山說, 감숙 天水(오늘의 천수시)부근 鳥鼠山說, 陝甘川三省접경 가릉강부근설, 川甘접경 岷江, 岷山 一帶說 네가지가 있는데, 楊萬娟은 가릉강부근설, 岷江, 岷山 一帶說이 비교적 합리하다고 보고있다. 太白에 대해서는 장백산과 묘향산 두가지 설이 있으나 楊萬娟은 두가지를 다 부정하고 강원도와 경상도 접경의 태백산을 짚고있다. 음미해볼만한 자료가 있다. 《魏书·志第七·地形二下》에 따르면 중국 漢江(즉 漢水)의 발원지인 감숙의 天水는 東漢시기 永平17년에 漢陽郡으로 개칭한적이 있는데 조선시대에 한국 漢江 끝부분의 서울도 명칭이 漢陽이였다는 점이다.   중국 한강의 발원지에 “태백”과 “삼위”가 자리잡고 있다는 점, 초나라의 盧氏族이 “삼위”출신이라는 점 등 적지 않은 자료들이 우리의 흥미를 끌기에 충분하다. 중국문자를 통달하고 연박한 지식을 가지고있는 韓終方士가 령솔한 盧씨족과 羅씨족의 한개 지류(삼천)가 바다를 건너 한반도에 진입, 드디여 新羅가 辰韓을 토대로 나라를 세우고 따라서 신라문화는 한국문화의 주류를 형성했음이 모든 력사문헌자료를 통해 증명된다면 우리는 우리의 뿌리를 찾았다고 할수 있지 않겠는가?    그런데 문제는 이런것을 중한간의 학술교류를 통해 한국학자들이 분명 알고있으면서도 왜 함구무언인가 하는것이다. 이것은 여기에 한국학자들의 자존심문제가 걸려있기 때문이 아닐가고 생각한다. 만약 “자존심”이 과연 문제로 되였다면 이것은 우리가 자기의 뿌리를 찾는 시간을 지체시킬 뿐이지 아무런 도움도 없을 줄 안다.   마지막으로 만약 楊萬娟의 연구가 진일보의 고증을 거쳐 진실성이 확인된다면(이는 물론 나의 가설이다) 뒤미처 다음과 같은 문제가 제기될것이다. 우리의 조상의 한 지류가 三危의 三苗부족에서 왔는데 그 선인은 가능하게 蚩尤일수도(가능하게 아닐수도 있고) 있다. 그런데 치우는 어디에서 왔는가? 이렇게 거슬러올라가다보면 약 6~7만년전(혹은 그 이전) 현대인류의 공동조상인 아프리카 동남부의 최초의 아담과 이브를 만날수도 있지 않을가 하는것이다.   그러면 그전에는 원시인류가 없었는가? 있었다. 고고학발굴이 그것을 증명한다. 그러나 그들은 마지막 빙하기(제4 빙하기)에 다 얼어죽고 굶어죽었거나 다른 알지 못할 원인으로 멸종됐다. 아프리카에서도 킬리만자로산과 케냐산 등의 6천메터 좌우되는 고산에 빙하가 형성되였고 지금도 채 녹지 않은것도 있긴 하지만 그래도 아프리카의 동남부는 적도위치여서 현대인류의 조상들이 살아남을수 있었겠다고 사료된다. 그들이 서와 북으로, 혹은 얼어붙은 바다를 거쳐 호주로 서서히 이동, 수만년에 걸쳐 각 대륙으로 퍼진것이 아닐가 싶다.   나는 인류학자나 고고학자나 력사학자도 아니므로 우리 민족의 연원을 망라한 상기의 모든 “엉뚱한 궁리”들이 완전히 빗나간 생각일수도 있으니 그냥 공개발표가 아닌 수필이나 잡문정도로 여기고  서로 부담없이 의견을 교환했으면 한다. 아울러 엄중한 문제가 있다고 해도 너그럽게 량해하기를 바란다. 9월 16일 장춘에서                                      *     *     *     *   아래 우리 민족의 뿌리를 찾는데 관계되는 연구자료를 공유하고 서로의 리해를 돕고자 楊萬娟의 론문 <韩国文化与中国楚文化近源初探> 全文을 아래에 참고로 옮긴다--     韩国文化与中国楚文化近源初探                     中南民族大学学报,2005.1   作者:杨万娟 中南民族大学南方少数民族研究中心 研究员  (本文引用大量中韩文献史料试图说明:韩国古辰韩和弁韩居民来自被秦灭国的楚国,和楚国的罗氏、卢氏一样均为苗裔,罗、卢氏族是跟随着方士韩终到的韩国。檀君神话是在新罗统一朝鲜半岛后出现的,韩终可能就是檀君神话中桓雄的原形。新罗以熟练使用汉字的优势,创造并记录下来了开国神话,神话中融进了中国楚文化的色彩。辰韩和新罗的历史将会为我们提供极好的楚史研究新线索。)     今年(估计是2004年,转载者注)6月中旬笔者到韩国江陵参加国际亚细亚民俗学会第7次学术会议,并应邀和乌丙安先生、陶立璠先生等中国学者一道参观考察了江陵端午祭。主会场设在江陵市政大厅,市政府门前不远处的一块巨石上刻着“第一江陵”几个大字,在端午祭场“第一江陵”这几个字也随处可见。问其故,韩国学者告知是历史悠久之意。笔者来自中国湖北,从而引发了中国江陵与韩国江陵之间有无联系的兴趣。回国后翻阅大量有关文献,一条令人震惊的线索越来越清晰地浮现出来,即:韩国文化主流与中国楚文化休戚相关。     一、韩国地名与楚国地名的相似之处     按照史学界通行的说法,在公元前的古朝鲜时期,半岛北部先后出现檀君朝鲜、箕子朝鲜和卫满朝鲜3个王朝,南半部则有马韩、辰韩、弃韩(合称三韩)等部族国家。公元前后(~676年),半岛进入新罗、高句丽、百济三国鼎立时期,史称三国时代。公元7世纪,新罗(676~935年)灭高句丽、百济两国,统一了半岛。公元10世纪新罗王朝衰微,高丽王朝(918~1392年)取而代之。后李氏朝鲜(1392~1910年)又取代高丽。1910年日本吞并朝鲜,李氏朝鲜亡。1945年日本战败,朝鲜独立。1948年大韩民国成立,建都汉城;同年朝鲜民主主义共和国成立,建都平壤。     在韩国,除江陵外,还有丹阳、襄阳、汉阳(今汉城)、汉江、洞庭湖等地名。     韩国江陵在三国时代称“阿瑟罗”,高丽时代称“东原京”,在李氏朝鲜时代改称“江陵大都护府”,也称“江陵府”,历史的确不短,距今已600多年。与此同时,1397年新罗的翼岭县改为“襄阳府”,后为“襄阳郡”,江陵郡和襄阳郡均属江原道。韩国的首都汉城在高丽时代(1308年)称为“汉阳府”,差不多同期,新罗的赤山县改为了“丹阳郡”,[1]洞庭湖位于江原道通川郡,是江原道最大的自然湖,另有因太白山而名的太白市,三韩时曾属于辰韩的悉直国领域,于102年编进新罗。[2]从时间上看,韩国的江陵、丹阳、襄阳、汉阳、汉江、洞庭等地名和两千多年前就存在的楚国地名好象没有什么可比性,但我看了石泉先生近期出版的《古代荆楚地理新探·续集》一书,很受启发,认为它们之间有着某种联系。     石泉先生用了60年的时间研究古代荆楚地理,考证出齐梁以前楚国古郢都江陵并不是在定论了一千多年的长江中游,而是在汉水(又名汉江)中游的湖北宜城。[3]古郢都江陵的地望问题是楚国历史地理的核心,牵一发而动全身,江陵的移位意味着楚国其他地名都需要重新定位,这是一个非常艰辛的论证过程,好在越来越多的考古资料证实这一观点的正确,也有越来越多的学者开始认同。     按照石泉先生的地理新论:楚国的政治文化中心在汉江中游的襄宜平原,中心地带为江陵(宜城)、襄阳。古洞庭也在汉江中游,今湖北钟祥市西北境。丹阳这一地名更是具有代表性,丹阳是周末、春秋早期楚国发源地,也是楚早期的都城,楚国在不断地发展壮大中多次迁徙,但丹阳这个地名始终伴随在楚人左右,给后人留下许多的疑惑,有关丹阳地望的研究众说纷纭,张正明先生列举丹阳城址,有二论十四说之多,大体在荆山、秭归、枝江、当阳、当涂、丹淅等地。[4]在这里我采用张正明先生等学者的说法,即古丹阳在今河南淅川县境,丹、淅二水会流附近。[5]丹阳随楚人不断转移,但初期丹阳在丹江的中下游是大多数学者的共识。丹江是汉江上游的重要支流,汉阳是汉江下游著名的古城。这就是说楚人建国初期在汉江上游的丹阳,发展成熟时期则在汉江中游的江陵、襄阳、洞庭湖(今钟祥)一带。另外追寻中国汉江的源头,可以看到汉江的主要源头在陕西秦岭的太白山下,尽头则在下游的汉阳。     再看看韩国几个地名的分布情况:属于忠清北道的丹阳在汉江的上游,汉阳(今汉城)在汉江的下游,属于江原道的江陵和襄阳均在汉江上游不远处,洞庭湖也在江原道,最重要的是韩国汉江发源于江原道和庆尚北道连接处的太白山下,几乎和楚国地名新论同出一辙,不由得令人遐想。     二、韩国开国神话中的楚文化遗迹    檀君是韩国和朝鲜共同的开国始祖,在韩国和朝鲜人民心目中占有至高无上的地位。正如韩国学者所说:“檀君神话是我们民族创造的最根本之神话,其中包含着韩民族超越的宇宙观、人学观、历史观、宗教观、国家观、伦理观之象征。” 。[6]在此,笔者不揣冒昧,试图给世界学者们提供一个研究韩国古代史全新的思路。     檀君建国的传说,也是最古老的韩国族源图腾神话。最早见于《古记》(失传)和《魏书》等,后收于13世纪末的高丽僧人一然编写的《三国遗事》中,原文如下:     “晋有桓因(谓帝释也)庶子桓雄,数意天下,贪求人世,父知子意,下视三危太伯,可以弘益人间,乃授天符印三个,遣往理之,雄率徒三千降于太伯山顶(即太伯今妙香山)神檀树下,谓之神市,是谓桓雄天王也,将风伯雨师云师,而主谷主命主病主刑主善恶,凡主人间三百六十余事,在世理化。时有一熊一虎同穴而居,常祈神雄,愿化为人。时神遗灵艾一炷,蒜二十枚,曰:尔辈食之,不见日光百日,便得人形。熊虎得而食之忌三七日,熊得女身,虎不能忌,而不得人身,熊女者无与为婚,故每于檀树下,咒愿有孕,雄乃假化而婚之,孕生子,号曰壇君王俭。”[7]     与此相似的故事还记载在韩国古籍《三国史记》、《帝王韻记》、《燃藜室记叙》、《东国通鉴》、《眉叟记言》、《高丽史·地理志》、《世宗实录·地理志》等书中。     在《三国史记》中,天神之子叫桓熊,桓熊和熊女所生之子叫檀君,“太伯山”为太白山,檀君后在平壤建立了国家,名为古朝鲜。     其他史籍中的檀君神话也有一些变异,但主体不变。中国学者认为檀君神话反映了古人敬天思想和先民的一支曾把作为熊图腾。[8]韩国历史学家分析:“桓雄”是指移居太白山的一带的天神崇拜部落,熊女则指以熊为图腾崇拜的土著部落。桓雄和熊女联姻生檀君,檀君成为朝鲜的始祖指的是移居来的天神崇拜部落和以熊为图腾崇拜的土著部落联合,组成了新的部落。[9]我比较赞同的观点是:所谓熊、虎相处于一个洞穴,可能反映了以熊和虎为图腾的氏族或部落的关系。熊女与桓雄成婚而虎未能变成人,是指两个血缘相近的氏族在合并为一个部落的过程中所产生的地位变化。以熊为图腾的氏族取得了主导地位,而部落的酋长则来自这个氏族。[10]     楚国人的图腾崇拜中国学者们历来也是说法各异,但不少学者认为楚人的图腾是熊。楚人是黄帝之后,黄帝血缘体内就有以熊和罴为图腾的氏族部落,又因楚人姓芈氏熊,在鬻熊之后,历代有三十多位国君以熊为姓,《史记·楚世家》云:“周文王之时,季连之苗裔曰鬻熊……其子曰熊丽,熊丽生熊狂,熊狂生熊绎。”其最早居地又以熊命名,如“有熊”、“熊山”、“穴熊”等。罗香林先生在《中夏系统中之百越》一文中说:“楚人首领,世世冠以熊字,似熊为在楚人原所氏,亦即以熊为图腾祖遗影”。可见楚人是以熊为图腾崇拜的部落之一。     关于“三危”、“太白”所指,韩国学者的解释不尽相同,有的说“三危太白”共指朝鲜平安道境内的妙香山;有的“三危”不论,说“太白”既妙香山;有的说三危指白岳山;另一说,“三危”指甘肃敦煌南部,“太白”指长白山。中国学者对古三危的地望说法也不一致,一说是今甘肃敦隍附近的三危山;二说是甘肃天水附近的鸟鼠山;三说在今陕甘川三省交界嘉陵江附近;四说在川甘交界岷江、岷山一带。后两种说法地理位置比较接近。《诗地理考》曰:“羌本姜姓,三苗之后,居三危,今叠、宕、松诸州皆羌地。”叠山:甘肃南部,与岷山相接;宕:今甘南宕昌,与岷江相近。我在几种三危地望探讨中择其一种,选择古三危在川甘交界处,岷江、岷山一带,这里距离陕西秦岭太白山只有几百公里,没有甘肃敦煌三危那么遥远,便于上古时期视野并不容易非常开阔的天神“下视三危太白”。我认为檀君神话中的“三危”是指中国古三危,“太白”应该指江原道和庆尚道交界处的太白山,而不是韩国古籍中记载的妙香山。     中国史籍中有关三危记载最多的是公元前二千多年尧舜将三苗逐放到三危。《史记·五帝本纪》云:“迁三苗于三危,以变西戎。”《尚书·尧典》说舜“窜三苗于三危”。《地道记》曰:“鸟鼠同穴西有三危山,三苗所处是也。”等等,总之,三危曾是三苗的一支部落所在地。因为荆楚腹地在上古时曾属三苗地,楚国史研究的学者们在楚苗同源观点上是一致的。许多学者考证认为蚩尤是三苗最早的先民,最早的史籍《山海经·大荒北经》中记载:“蚩尤作兵伐黄帝,黄帝使应龙攻之冀州之野。应龙畜水,蚩尤请风伯雨师以从,大风雨”。《韩非子·十过》曾云:“昔者黄帝合鬼神于泰山之上……蚩尤居前,风伯进扫,雨师洒道。”可见苗祖蚩尤和“风伯”、“雨师”关系密切。在中国湖南、贵州,一支操东部方言的苗族今仍以熊为族称,自称为“仡熊”、“果熊”、“果雄”,各地的苗族都有关于蚩尤的古歌传说,将蚩尤视为始祖。     楚国大诗人屈原在《离骚》中也自称是“帝高阳之苗裔”。在楚辞中屈原提到了“三危”和“风伯”、“雨师”、“雷公”(也称“云中君”、既“云师”)。[11]《九叹·远游》云:“ 驰六龙於三危兮,朝西灵於九滨。…… 鞭风伯使先驱兮,囚灵玄於虞渊。……左雨师使径侍兮,右雷公以为卫。” 请注意楚辞中的天神是驾御六龙车到三危的,而韩国的《三国遗事》中引〈古记〉云:“天帝降于訖升骨城乘五龙车。立都称王。”天帝也是乘龙车降于人间的。楚辞中的“风伯”、“雨师”、“雷公”(云师)和檀君神话中的“风伯”、“雨师”、“云师”一样,都是天神可以左右、可以驱使的对象。风伯、雨师、云师协助桓雄主理人间三百六十余事,已经具有了开国性质,到了檀君时代原始部落国家形成。     在檀君神话中天神授予桓雄三个天符印,中韩都有学者认为这天符印是巫师做法的法器。史学诸书记载,在中国古代巫风一度盛行,而以春秋战国时期的楚苗为甚,甚至巫史不分,史俗并载。范文澜先生在《中国通史》中说:黄炎族掌文化的人叫做史,苗黎族掌文化的人叫做巫。《汉书·地理志》云:“楚人信巫鬼,重淫祀”。学者认为楚人的始祖鬻熊还有屈原就是楚国的大巫,开创一代文风的《楚辞》也多取材于楚地之巫鬼风俗。现在苗族地区仍有几千巫师,他们做法时使用面饰、摇铃、木鼓、芭茅杆、弓箭、刀、剑等法器和鬼神进行沟通。[12]而在朝鲜半岛,较为普遍的说法认为:古代巫俗现象最早产生于“檀君时代”,甚至认为最初建国的檀君本人就是巫人。[13]     神话里天神之子桓雄给熊和虎“灵艾一炷,蒜二十枚”让它们变人形,这在楚俗里也有反映。端午时挂艾草、蒜头以僻邪驱瘴,是历史远久的楚国风俗,至今也还存在。成书于公元六世纪的《荆楚岁时记》,其作者宗懔出身并长期生活在原楚郢都江陵,他忠实地记载了古代楚人生活图景。书云:“五月五日……采艾以为人,悬门户上,以禳毒气。按:宗测字文度,尝以五月五日鸡未鸣时采艾,见似人处,揽而取之,用灸有验。” 按语说测字先生曾在鸡鸣以前去采摘艾草,看见有象人形的,就采摘下来,用艾炙治病很有效。这里记录的艾草有的具有人形,是否和神话中吃了灵艾容易变成人有关系呢?测字先生应该是巫师,古时巫医是相通的,所以艾也用来治病。在中国古老的艾灸法中艾炷和大蒜是主要的药物,疗法之一是将蒜头切成片或捣成蒜汁,放于压痛点上,然后用火点燃艾炷施灸,其方法沿用至今。段宝林先生认为母熊在桓熊天王的指点下用艾、蒜等灵异植物,并百日不见阳光,才能变人,这已有着巫术做法的的幻变意识。[14]     如果读者根据上述史料分析判断,开始认可檀君神话中确实存在浓厚的楚文化痕迹,接下来会出现巨大的疑问:檀君神话在韩国和朝鲜无论是民间口头流传、史籍记载还是考古资料都证明檀君存在了四、五千年,(史籍记载檀君在公元前2333年开国;历史学界发掘平壤市江东邑的檀君陵,证明檀君的遗骨是距今5,011年前的。)而楚国从在丹阳建国到被秦灭国的800年间,最长时段也只有3000年的历史,时间上仍然说不通。     毋庸置疑,韩国是一个历史非常悠久的国家和民族,分布在朝鲜半岛海岸地区的新石器时代贝冢遗址和内陆地区房屋遗址出土的历史文物,说明当地很早就有居民在此过着定居生活。我的看法是:古朝鲜时,在平壤一带就有长期统治半岛西北地区的部落首领,汉字出现以前韩国没有文字,所以有关他们的故事并没有被史籍记录下来。韩国的汉字传入时间大约在公元前2世纪,新罗统一半岛并占据整个大同江以南地区(包括平壤)之后,在原有部落首领故事的基础上,增添了对新的统治者有利的开国传说,创造出了檀君神话。    三、楚罗国、卢国与韩新罗、辰韩的渊源关系     在此先回顾一下楚国历史。     约公元前11世纪中期,季连之苗裔鬻熊被周王室授予“子”的封号,封于楚,居丹阳,以此开篇拓土。公元前706年,楚国征讨随国获胜后,熊通自称楚武王,成为天下诸侯中第一个自己称王的国君。随后几年里,熊通先后征服了罗国、卢国等周围小国,以扩疆土。楚文王继立,迁都于郢(今湖北宜城境内),打通了前往中原的道路。楚成王时,楚国的大国声威真正建立起来。到了庄王,他励精图治,终成霸业,楚国出现了经济繁荣、文化灿烂的鼎盛局面。庄王之后楚国开始走向衰微。公元前506年,吴、蔡、唐三国合兵攻楚,并陷落郢都,秦王发兵,秦楚联军击败吴军。休养生息后,公元前400年,楚悼王谋求富国强兵之道,开始变法,并取得了成效,此时,楚国兵强马壮,横归中原,初露称雄之势。威王后期,楚国成了七雄中唯一能与秦国抗衡的大国,进入了最鼎盛的时期。到怀王时楚国又开始走下坡路,公元前278年,秦军对楚国国都发起进攻,并很快占领了郢,楚国诗人屈原愤世投江,顷襄王东逃至今河南淮阳,建立新都陈郢。考烈王时,迁都寿郢(今安徽寿县)。后秦王政即位,开始统—全国的进程,公元前223年秦军大举伐楚,攻陷寿郢,绵延800年的楚国就此灭亡。     公元前7世纪,在汉江中游荆楚腹地有两个苗蛮小国,罗国(也称罗子国)和卢国(也称卢戎、卢子国)。对这两古国的具体方位历代学者有几种看法:或在湖北襄阳、或南漳或宜城。我倾向罗国在襄阳西南、南漳东北交界之处。[15]罗,熊姓,与楚有共同渊源,据《左传·桓公十二年》杜预注:“罗,熊姓国。”《世说新语·方正》注引《罗府君别传》曰:“罗,楚熊姓之后,启土罗国,遂氏姓焉。是则熊姓又似出芈姓也。” 公元前690年楚武王并吞罗国,子孙便由熊姓改为罗姓。国亡,以国名为姓,是周秦时代所惯行的通例。罗被楚灭后,楚王把罗国迁到枝江(古枝江在今宜城南境),成为楚国的附庸国,《汉书·地理志》有“楚文王徙罗子国自枝江居此”的记载,《水经注·江水》中有枝江为“故罗国”之记。尔后楚师扩境江南,再迁其罗国遗民至洞庭以南的长沙。秦汉时,罗人有的留居长沙,有的东迁豫章(今江西南昌),《广韵》云:“本自颛顼末裔,受封罗国。子孙以为氏,望出豫章、长沙。”《太平寰宇记》载,豫章郡五姓中就有熊、罗二姓。所以在中国的三国、南北朝时期,史书上记载的罗姓名人,多为襄阳、长沙、豫章三个地方的人。罗国和卢国同属苗蛮但来源却不相同,罗人和楚人一起来自中原,而卢戎则来自岷山、岷水之地。[16]      卢国(也称卢戎)的地理位置在今湖北襄阳县西,也有说在南漳东北,《后汉书·郡国志·南郡》中卢侯国条注引《襄阳耆旧传》说:“古卢戎也”。卢国和罗国距离非常相近,犹如唇齿相依。楚人入侵,唇寒齿亡,所以抵抗楚国的侵略,罗、卢两国一向是同仇敌忾的。历史上罗卢联军曾打败过楚国,《左传》、《后汉书》都记载公元前699年楚武王四十二年,屈瑕伐罗, 至罗境,遭到罗与卢戎两军夹击,楚师大败。卢国和罗国同时灭国后,一起被迁到枝江然后又迁到长沙。到长沙后,卢戎的一支往西到了的辰州,在辰溪和泸溪一带安营扎寨。《后汉书·马援列传》:“郦元注水经云:‘武陵有五溪,谓雄溪、樠溪、酉溪、潕溪、辰溪,悉是蛮夷所居,故谓五溪蛮’皆盘瓠之子孙也。土俗‘雄’作‘熊’,……在今辰州界”。五溪蛮为苗蛮,可见辰州有苗民。     这里探讨一下卢戎的始末,便于下面对韩国辰韩的分析。     卢戎,系炎帝姜姓戎族,源于卢水上游,故名卢戎。姜姓属古羌人亦称氐羌、羌戎。学者们考证卢水即今四川岷江。一般认为,从春秋战国至秦汉,氐羌人活动在西起陇西,东至略阳,南达岷山以北的地区,即今甘肃省东南、陕西省西南、四川省东北交界处,包括渭水、汉水、嘉陵江、岷江、涪江诸水源头。而这一带也正是古三危之地,正如《诗地理考》所云:“羌本姜姓,三苗之后,居三危”。三苗被迁到三危去之后,一部分融入了西戎,还有一些继续以苗存在。氐羌与西南土著部落不断融合,形成了的彝族、白族、纳西族、土家族等以虎为图腾崇拜的民族,这些民族在语言上均属藏缅语系、藏缅语族、彝语支。中国民族史学家林惠祥在《中国民族史》一书中说“鹿卢(古代彝族的称谓之一),即卢戎的对音。”彝族今仍自称罗罗、倮倮,彝语“罗罗”为老虎之意。而白族也保存了许多和虎有关的称谓,怒江沿岸许多白族人都自称是虎的子孙。[17]在湘、鄂西聚居的土家族,至今仍尊虎为祖。《中国古代及中世纪史地图》上,有苗氏出现在公元前11-前8世纪的西周王国的地图上,以“矛”的部落形式被标定在岷江及嘉陵江之间,我推断这些有苗氏就是来自三危的三苗,他们顺着离嘉陵江不远的汉水上游朝南迁徙,在公元前7世纪到达汉江中游,建立了卢国。这些逾越千年后从三危迁回到故地的苗裔,已经浓浓的融入了西戎氐羌的诸多习俗,他们和彝族、白族、土家族一样尊虎崇虎。巫瑞书先生考证,现今湘西辰水中游凤凰县苗族仍然存在客教白虎的信仰,[18]有部分湘西苗族自称为卢(苗语为deb longl),他们可能就是卢戎后裔。     辰韩,中国史书《三国志·魏书》和《后汉书·东夷列传》都有这样的记载: “辰韩者,古之辰国也,……辰韩耆老自言秦之亡人,避苦役,适韩国,马韩割东界地与之,其名国为郡,弓为弧、贼为寇,有似秦语,故或名之秦韩、有城栅屋室,土地肥美,宜五谷,知蚕桑,作缣布,乘驾牛车。始有六国,稍分为十二国。”李延寿《北史》列传第八十二中记录:“新罗者,其先本辰韩种也。地在高丽东南,居汉时乐浪地。辰韩亦曰秦韩。相传言秦世亡人避役来适,马韩割其东界居之,以秦人,故名之曰秦韩。其言语名物,有似中国人。”这些有关辰韩的史籍在韩国《三国遗事》等古籍中有转载:“〈后汉书〉云:辰韩耆老自言,秦之亡人來适韩国,马韩割东界地与之,相呼为徒,有似秦語,故或名之为秦韩。” 大量的历史资料说辰韩是秦朝时逃亡过来的中国人,对这一点中韩学者是一致认同的。《三国志·魏书》云:“弁辰亦十二国……弁辰韩合二十四国,大国四五千家,小国六七百家,总四五万户。其十二国属辰王。” 从中韩史籍中可见古朝鲜半岛东南部的三韩部落,马韩为原住民,辰韩、弁韩来自中国,弁韩臣属辰韩。     陈寿在《三国志·魏书》里忠实的记录了辰韩大大小小的部落国家,有许多是以卢为国名,如:速卢不斯国、咨离牟卢国、莫卢国、狗卢国、驷卢国、万卢国、捷卢国、牟卢卑离国等,甚至有的直接以楚为国名,如楚山涂卑离国、楚离国等。     在韩国史籍中,我找到了辰韩、弁韩是苗裔的记载,如《三国遗事》:“〈新旧唐书〉云。卞韩苗裔在乐浪之地。” 韩国野史《桓檀古记》等书籍中说倍达国 (韩国人自称为倍达民族) 是第14代蚩尤之后。根据《三圣记全》下篇〈神史历代记〉记载,“蚩尤即14世慈乌支桓雄,是中国和韩国军神的象征”,目前韩国保存有很多祭祀蚩尤的祠堂遗址。这就说明辰韩和弁韩和楚国的罗氏、卢氏一样均为苗裔,同样以蚩尤为始祖。韩国有学者也认为韩国和苗族的创世神话很相象,与其他民族的创世神话大不相同。[19]     韩国的新罗也称斯罗、斯卢,公元前57年古新罗建国,古新罗是由辰韩部落联盟中斯卢部落所建,在徐罗伐(庆州旧称)建都,统治地区先在朝鲜半岛东南部,直到公元三世纪,新罗仍只占据庆尚南北道东部和江原道一部分地区,地盘狭小。四世纪后,开始征服周围部落,成为半岛东南部的强国,继与百济、高句丽形成鼎足,互相争霸。新罗在唐朝的配合下,于660年灭百济,再于 668年灭高句丽。后唐朝试图占领百济、高句丽故地,新罗奋力反抗,在公元676年新罗首次统一了大同江以南的朝鲜半岛。新罗在统一后的两个多世纪内,出现和平、繁荣景象,农业、商业、手工业、艺术、教育、宗教等都得到蓬勃发展,这时是新罗文化的最盛时期,独具特色的新罗文化在统治者的倡导下广为传播,最终成为韩国主流文化之一。     以此而推论:辰韩和弁韩来自被秦灭国的楚国,是罗和卢戎之后,既有以熊为图腾的罗氏族,也有以虎为崇拜的卢氏族,这就是新罗为什么也称斯罗、斯卢之原因。罗、卢一起迁到了韩国,初期以虎为崇拜的卢氏族势力强大,于是国名以来自楚地辰州的卢氏族命名为辰韩。之后以熊为图腾罗氏族日益强大,在领土扩张中占了上风,国名更改为新罗国,这也许是和原在楚国的故罗国以示区别。了解了卢、罗关系的变化,我们就不难理解檀君神话中反映以熊和虎为图腾的氏族的关系,在部落合并过程中,最终以熊为图腾的罗氏族取得了主导地位,新罗之名由此而来。     往下的问题是,罗、卢怎样从中国而来?为什么两千年多来在中韩的史籍中都没有明确的记载?我的看法是:罗、卢氏族是跟随着一个名叫韩终的方士在公元前215年渡海到的韩国。  四、韩终其人及韩国罗、卢氏族    秦汉及以前的战国时代,方士得到帝王的青睐,他们不仅通晓方术,而且熟知天文地理、医术、农业及航海等知识。徐福作为方士中最著名的一个,为秦始皇入海求药,最后到达日本。与徐福同时代的方士,还有韩终、卢生、侯公等,他们也先后为秦始皇访求仙药,《史记·秦始皇本纪》记载,始皇“三十五年,侯生和卢生相与谋曰:‘始皇……贪于权势至如此,未可为求仙药’于是乃亡去”。而“韩众(终)去不报”。可见在始皇三十五年时,卢生、侯生、韩终等都已相继逃亡了。《汉书·郊祀志》云:“秦始皇初并天下,甘心于神仙之道,遣徐福、韩终之属多赍童男女人海,求神采药,因逃不还,天下怨恨。”这里把韩终和徐福连在一起,徐福之属到了日本,这是现在中日学者基本统一了的认识,韩终之属出海后到了哪里呢? 秦皇岛市徐福研究会原会长郭继汾先生认为韩终是到了朝鲜半岛东南部的辰韩国,他认为“辰(秦)韩这个名称也正是对它的创业者秦人韩终的纪念。”我同意这一说法。     查找韩终的有关史籍可见,韩终乃齐国方士,炼丹采药,修炼成仙。《后汉书·张衡列传》(第四十九)“韩谓齐仙人韩终也。为王采药,王不肯服,终自服之,遂得仙。”晋代葛洪所著《抱朴子内篇卷之四·金丹》“韩终丹法:漆蜜和丹煎之,服可延年久视,立日中无影”。《广弘名集卷第九》“服丹成金色者,……昔韩终服之。面作金色又佛身黄金色者。” 《抱朴子·内篇卷之十一·仙药》:     “韩终服菖蒲十三年身生毛。”不论韩终炼丹也好、服药也好、成仙也好,关键的问题在于,韩终修炼的地方是楚国境内的长沙。唐·司马承祯《洞天福地记》:记载:“第二十三洞真墟——在潭州长沙县,西岳真人韩终所治之处。”修炼成仙并非一日之工,必须长期呆在所治之处,可推想韩终在长沙时与罗氏、卢氏交往密切。在秦灭楚后8年,韩终带着罗氏、卢氏等楚国亡民有准备地逃离了秦国,渡海到了朝鲜半岛东南部。中外学者们认为,韩国的汉字传入时间大约在战国到汉初,[20]这和韩终之属到韩国的时间吻合。至于渡海路线我认为不会是在秦皇岛,尽管有明宪宗成化13年立的“秦皇求仙入海处”石碑,但不太符合迁徙规律。鉴于长江下游的安徽、江苏都有过丹阳地名出现,而且在东海普陀山至今有海礁被称做“新罗礁”,[21]我推测韩终所属是从长江口渡东海,经过济州岛到日本海西岸的朝鲜半岛东南部登岸,在庆州一带重建家园,以纪念韩终和卢氏原籍辰州的辰韩就此出现。     推论:韩终可能就是檀君神话中桓雄的原形,史籍中记载韩终已经修炼成仙,完全有可能被后人奉为天神,他带领以罗氏族、卢氏族为主的三千臣民,选择适合居住的太白山下落户(太白市一直属于辰韩、新罗的领地)。而神话中桓雄与熊女所生的檀君,应该是以熊为图腾的新罗首领。新罗率先统一了半岛,并以熟练使用汉字的优势,创造并记录下来了开国神话。     再来看看韩国罗氏、卢氏的宗谱。     韩国罗氏被分为罗州罗氏和锦城罗氏。韩国1982年版《罗州罗氏大同谱》卷一《姓原考》说,“罗氏为伯益后裔,世代在虞国为官,周代成王因大罗氏有功封罗国,为楚附庸,后被楚屈氏所灭,是为豫章罗氏”。关于锦城罗氏的姓氏,1987年版《锦城罗氏大同谱》卷一《姓原考》引辛卯科举人罗甫芳所记,说“罗氏本祝融氏后裔郧姓,春秋时周平王十二年封罗国。又传至九十世学公,国被吞并,止存一人。传至百零二世,珠公在汉初事高祖有功,封于豫章郡,是为豫章罗氏。” 韩国罗氏宗谱非常明确地记载着罗氏是“楚附庸罗国”、“祝融(楚人先祖)氏后裔”,由此可见,罗州罗氏和锦城罗氏同出一宗,都是楚国之地的罗国人。      韩国卢姓一直认为出自山东,但究其卢姓历史却不尽其然。卢戎,系姜姓戎族,在商代已发展为强大的部族,曾从周武王灭商,周封功臣姜族首领姜尚(即姜子牙)到营丘(山东临淄县)为齐侯,于是有一部分卢人也随着同族到山东建立了卢子国(今山东长清县西南)。《通志氏族略》、《新唐书宰相世系》和《元和姓篡》均如此记载:“姜姓济太之后也。齐文公之子高,高之孙溪,食采于卢,今济北卢县是也。因邑为氏。”因此山东长清是卢氏之主体。但是有另外一部分卢人辗转南迁到了湖北襄阳,也建立了卢子国。《风俗通义》云:“古芦子国,后有芦氏。芦子国(古芦戎地,春秋时庐子戢黎所在国)其后人以封国为姓。”这就是和罗氏一起迁到韩国的卢氏祖先。据 2000年6月19日的《淄博日报》报道:“韩国前总统卢泰愚山东寻根,说姜子牙是他的祖先。”从而在韩国引发了卢姓到山东寻根的热潮。笔者认为,韩国卢氏应是从楚国来的卢戎之后裔(也就是从古三危迁回的苗裔)。     最后再回味一下韩国地名的分布,我们可以看到和楚国一样的地名主要集中在韩国东部海岸的江原道,这里有江陵、襄阳、洞庭湖。江原道地理位置比较特殊,它三面环山,一面临海,太白山脉由北向南纵贯全道,形成了一个封闭的包围圈,使它与外界相对隔离,许多古风古俗得以完整的保存下来。江原道的中心江陵曾是濊貊族居住地,是濊国的都城,但辰韩的位置与江陵接壤,江陵很早就和辰韩有所交流,所以历史上曾叫阿瑟罗、何瑟罗。我推测有关楚国的地名在韩国出现,主要是依据江原道的巫师世代口头传承下来的罗、卢历史传说而命名,如罗国和卢国的原地在襄阳,灭国后一起迁到洞庭湖附近的长沙,而江陵则是楚国的都城,和楚发源地丹阳同样重要。我在江陵时得知,江原道的巫俗是韩国保留最多、最完整的地方,由巫师主持的巫祭在被世人关注的“端午祭”中,是重要内容之一,韩半岛南部巫俗带有许多楚苗巫俗的色彩。当今苗族是世界上保留族源古歌最多的民族之一,几乎所有的古歌都是巫师传唱下来的,这也是巫师在少数民族中威望很高的重要因素。     在研究罗国、卢国迁徙动向时,我真切感到,按照古代和近现代大多数学者的地名说法很多地方解释不了,而用石泉先生的楚地理新论却能够说通。比如辰州的位置,如果在湖南西部则无法说通史籍中辰州有包茅山的记载,包茅的产地一向认为在湖北中部荆山一带,而且湘西辰州与长沙距离甚远,不便于古时罗氏和卢氏结伴出海远行。楚国地理位置的变更是让人难以接受的地名变化。其实早在20世纪30年代钱穆先生就提出:先秦的湘、沅、澧诸水都在今湖北省境、分布于汉水流域一带,以后楚人南迁、地名随迁。[22]石泉先生继钱穆先生之后对此研究了几十年,认为长江中游地区的巨大变化集中发生在公元555~561年间,主要是一大批原在汉水中游两岸的古地名向南迁移到了长江中游两岸。[3]由于一千多年来地名的错乱,史籍中也有许多自相矛盾的地方,我寻找理论依据时,在众多的线头中择其主线,得益于韩国江原道的古地名和民俗现象,使主线研究越来越清晰。     我认为辰韩和新罗的历史将会为我们提供了极好的楚史研究新线索。      五 、古老的楚俗惊现韩国    楚国重要的习俗之一是用苞茅来进行缩酒。     荆楚盛产菁茅(也称之为苞茅),《禹贡》、《汉书·地理志》等就有“包匦菁茅”的记载。这种茅草盛产于荆山山麓南漳、保康、谷城一带。楚王在这一带立国之初,周天子让楚人上缴的贡品,就有这种廉价的茅草,主要用于缩酒祭祀。初期楚国国君地位不高,但在缩酒祭祀上却享有特权,这可能与楚地独产苞茅和楚人传统的掌天人相通的职责有关。所以菁茅或苞茅也被尊为灵茅。《史记·孝武本纪》说:“江淮间一茅三脊,以为神藉”。“三脊”, 有三条脊棱的茅草。“藉”,祭神时用的草垫子。《集解》引孟康语说:“所谓灵茅也。”    关于“缩酒”,杜预曾解释说:“包,裹束也。茅,菁茅也。束矛而灌之以酒为缩酒”。缩酒的“缩”字,本作“莤”。《说文解字》解释“莤”字为:“礼祭束茅加于裸圭,而灌[凶匕]酒,是为莤,象神歆之也”。“莤”字,上为茅,下为酒,恰是缩酒仪式的写照。[23]缩酒方法是用成束的灵茅来过滤酒中的糟粕,使之成为飨神的清酒。   “苞茅缩酒”是楚人最为重要的祭祀仪式,甚至可以成为引发战争的理由。《左传·僖公四年》记载,齐桓公纠合诸侯借伐蔡为名,南下攻楚。楚使质问:“君处北海,寡人南海,唯是风马牛不相及也,不虞君之涉吾地也。何故?”齐国的相国管仲在答复楚使时说:“尔贡苞茅不入,王祭不共,无以缩酒,寡人是征。”问罪的理由之一就是楚人不向周天子贡奉苞茅,周天子不能缩酒。《韩非子·外储说左上》也说:“楚之菁茅不贡于天子三年矣。”看来,周王室一直是依靠楚国进贡苞茅来进行祭祀的。     楚人主管缩酒祭祀,并对此亦极为重视,引以自豪。楚人姓芈,历代楚国国君都冠以“熊”字,“熊”在金文中写作“[今]酉]”,“[今/酉]”即“莤”。“莤”,像神饮酒;“[今/酉]”像人饮酒,是“莤”的人格化,“熊读入喻纽,[今/酉]读入影纽,古清浊不分,于声至近” 。[24][今/酉]、熊通假,后来一律把“[今/酉]”写作“熊”字了。[25]所以楚人姓芈氏熊,即以缩酒祭天(神)为氏。这在“天人合一”的氛围下,楚人进贡苞茅、主管缩酒祭祀,是极其荣尊的职责。     “苞茅缩酒”遗风今在湖北南漳的端公舞中有所表现,在湖北襄阳和湘鄂西的苗寨也有变异的缩酒遗俗存在。没有想到在韩国,笔者却看到了几乎和几千年前楚人祭祀完全一致的苞茅缩酒全过程。     那是一组笔者在韩国江陵参观考察端午祭时所得的图片资料。江陵端午祭是从农历的四月五日酿制神酒开始的,酿制神酒仪式在江陵旧官府“七事堂”由江陵市长主持,做祭酒的大米和酒曲是市民们捐献的,图片显示在准备做神酒的大米上,还有十小捆裹束整齐的菁茅与酒曲并放一起。在蒸煮发酵好了的米酒时,蒸锅上倒扣着一个大瓦缸,蒸煮完后,主持把菁茅铺垫在像葫芦瓢一样的容器里,用菁茅过滤掉酒糟,然后把酒浆装进大瓦缸,沾过灵茅的酒成为神酒。最后将神酒装进小土陶瓶子里,在瓶口系上一束茅草,以备用于祭奠山神、城隍等巫祝祭祀。[26]惟楚人独有的用苞茅缩酒祭祀神灵之俗,在韩国江陵原原本本的保存着,由此可见楚文化对韩国文化的深远影响。     同样在韩国端午祭的图片资料上,由巫师主持的龙船巫祭也让我为之振奋。在端午祭期间,用竹木纸布等材料扎成龙舟,龙舟上系上一条十多米长的白布,女巫拿着白布作摇船状并唱着神歌,“这是旨在端午祭期间入座祭堂之上的诸神乘坐龙船平安回归的送神巫祭。”祭祀完后,龙船和其他神位、神木、纸花、灯等端午祭的祭品送到大关岭火化烧祭,称为“还于巫祭”,还于意味着神灵上天。[26]    在楚国的神话与宗教中,人和神分别处在两个隔离的世界,人和神的沟通是由巫师来完成的,沟通人神是楚国巫师最基本的职能。屈原《九章·惜诵》云:“昔余梦登天兮,魂中道而无杭。”王逸注:“杭,渡也。一作航。”在楚人看来人间和天界的隔离正如河水两岸的隔离一样,需要有舟船航渡。魂舟可以载负人的灵魂升入天国。用魂舟为亡灵送驾引航、只能靠巫师,常人无法感知它的存在。     引魂升天的画像题材在楚国丧礼中是一项重要内容。湖南长沙楚墓出土的《人物龙凤帛画》中的女子站立在一“半弯月状物”上,有学者认为,这“半弯月状物”正是“代表灵魂所乘坐的舟船,应该称为‘魂舟’”。[27]根据画面分析,帛画表现的是女巫在引魂升天的主题,脚下的魂舟起着载负女巫灵魂升天的作用。另一幅长沙楚墓出土《人物御龙帛画》,图中绘一危冠长袍的男子,手持长剑立于龙舟之上,衣饰飘向右方,表示龙舟在迎风前进。类似这种引魂升天的画像在楚墓中有许多完整地保存下来,而韩国江陵传承至今的龙船巫祭简直就像鲜活的楚风楚俗。      韩国南部的还有不少习俗与楚俗相似,限于篇幅这里不一一列举。最近乌丙安先生送给我一本苑利所著《韩民族文化源流》,苑利先生认为韩文化的主体部分是中国南方的百越文化,这在众多的韩文化北来说中独树一帜,我也赞同韩文化的主体部分是中国南方文化,有百越文化的影响,但我认为受楚文化影响更直接一些。朝鲜古籍《东国岁时记》中就有韩国饮食习俗源于楚俗的记录:“望前煮赤小豆粥食之。按《荆楚岁时记》:‘州里风俗,正月望日祭门,先以柳枝插门,乃以豆粥插箸而祭之’。今俗说食,似沿与此。”苑利先生也认为韩半岛与荆楚饮食文化相似点很多,他说“韩民族与作为楚国主体民族的苗族似乎没有什么文化联系,但事实上,它们的文化在许多方面都很相似,这一点应引起我们的足够重视。” [28]      值得我们重视的不仅仅是韩国文化与楚文化的相似,而且在日本和台湾地区也有许多和荆楚相象的风俗,中日韩等世界各国都有学者认为东亚的稻作文化与中国南方民族有直接联系。韩国文化和楚文化的关系研究,可以开阔东亚文化同生共荣的研究思路,这对于东亚地区形成文化集合优势,扩大文化国际影响,开辟广阔的文化合作道路,具有极为深刻的意义。     注释    [1] 魏嵩山:三千里江山回顾——朝鲜王朝政区建置沿革[M]. 上海 : 上海人民出版社, 1997. 93-95.    [2] 顾铭学:朝鲜知识手册[M]. 沈阳 : 辽宁民族出版社, 1985, 50.    [3] 石泉:古代荆楚地理新探·续集[M]. 武汉: 武汉大学出版社. 2004 . 16, 17.    [4] 张正明:楚文化志[M]. 武汉: 湖北人民出版社 1988. 124.    [5] 张正明:楚文化史[M]. 上海: 上海人民出版社1987. 18.    [6] [韩国]李铉中:韩国上古思想与先秦儒家思想关系的易学考察[A].亚文·第二辑[C].北京:中国社会科学出版社.1997.27.    [7][高丽]一然:三国遗事·卷一·纪异第二·古朝鲜[M].瑞文文化社.1993.   [8] 牟元圭:韩国民俗文化的历史渊源及其特征 [A].韩国学论文集·第八辑[C]. 北京:民族出版社.2000.13.    [9] [韩国]金贞培:韩国民族文化的起源[M].汉城:高丽大学出版社.1973.    [10] 韦旭升:朝鲜文学史[M]. 北京:北京大学出版社.1986.5.    [11] 罗义群:苗族文化与屈赋[M].北京:中央民族大学出版社.1997.162.    [12] 李廷贵:苗族历史与文化[M]. 北京:中央民族大学出版社.1996.193.    [13] 乌丙安:朝鲜巫俗与满蒙巫俗比较研究[A].民俗研究1996.3期[C].    [14] 段宝林:中韩开国神话比较研究[A].东方民间文学比较研究[M].北京:北京大学出版社2003.20.   [15] 何浩:楚灭国研究[M]. 武汉:武汉出版社1989.154.    [16] 何光岳:楚国灭国考[M]. 上海:上海人民出版社1990.47.    [17] 张旭:大理白族史探索[M].昆明:云南人民出版社.1990.59.    [18] 巫瑞书:南方传统节日与楚文化[M]].武汉:湖北教育出版社.1999 .12.   [19] [韩国]金仁喜:韩·苗族创世神话中的巨人神话特[A].亚细亚民俗研究·第二集[M].北京:民族出版社.1999.193.    [20] 赵润济:韩国文学史[M]. 北京:社会科学文献出版社.1998 .2.    [21] 金健人:浙江与韩国的历史交往[A].韩国学论文集·第八辑[M].北京:民族出版社.2000.29.      [22] 钱穆:楚辞地名考[A].古史地理论丛[C]    [23] 张正明:楚文化史[M]]. 上海:上海人民出版社.1987.19.    [24] 商承祚:寿县新出土楚王鼎考释[A].国风·第4卷.第3期[C]    [25] 张正明:楚文化史[M]. 上海:上海人民出版社.1987.19页.    [26][韩国]江陵的无形文物[M].江陵市文化观光福祉局.2004.28,29,36,61.   [27] 萧兵:楚辞与神话[M].江苏古籍出版社.1987.15.    [28] 苑利:韩民族文化源流[M]. 北京:学苑出版社.2003.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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