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문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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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신화》의 신빙성문제
2008년 03월 12일 14시 17분  조회:5193  추천:82  작성자: 박문희

 
우리 민족은 어디서 왔는가?(5)

《단군신화》의 신빙성문제


앞에서 아프리카주에서 탄생한 현생인류가 어떻게 수만년전부터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아 북상동진하여 동방의 나라들에 널리 퍼졌는가를 간단히 살펴보았다. 이제 이 동방의 땅에서 우리 민족의 선인들이 어디다 첫짐(짐이 별로 없었을것이라고도 생각되지만)을 풀어놓았는가로부터 시작해서 그 동진로선을 좀 더 구체적으로 토론하고자 하는데, 이 문제를 푸는 첫 단서는 당연히 우리 민족의 건국신화인《단군신화》밖에 없을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를 풀려면 우선 신화전설의 력사신빙성문제가 반드시 풀려야 한다. 신화나 전설이 허황하다 하여 믿지 않으면《단군신화》를 암만 토론해봤자 결과가 없을것이기 때문이다.


신화전설의 력사적가치 문제


염제, 황제, 치우, 소호, 태호가 신화인물이며 서왕모, 마고, 노아, 셈이 신화인물이다. 그들이 과연 실재했던 력사인물들인가? 그들에 대한 전설속에 력사적 요소가 깃들어 있는가 없는가?


중국의 학자들은 염황치, 소호태호, 서왕모 등은 실재한 구체적 인물의 이름이 아니라 씨족의 이름이라고 보고있다. 그러나 그들을 력사와는 무관한 신적존재, 또는 완전히 조작된 허상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다. 례컨대 少昊(일명 少皞)에 대해서 袁珂는 조신(鳥神)으로 보고있으며 何新은 太陽神으로 보고있다. 그러나 더욱 많은 학자들은 李白鳳의 다음과 같은 말에 찬동하고있다.


“초보적인 탐구에 의하면 황제, 태호, 소호와 같은 고대의 씨족은 실제로 존재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태호와 소호가 동이족의 대표인물임은 모두가 인정하는 바이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의 이름이 아니고 부족의 성이다.”(리백봉:《東夷雜考》, P9. 齊魯書社, 1981年.)


그러니 소전, 축융, 염제, 황제, 치우, 태호, 소호 등 “신화인물”들은 모두 실재했던것이며, 그러나 그것은 구체적인 력사인물의 전칭인것이 아니라 부락집단의 “세습성 칭호”(李學勤主編:《中國古代文明起源》, P83. 上海科學技術文獻出版社, 2007年4月, 第1版)라는 것이다.


이런 신화적 인물들은 대부분 나이가 백살 이상, 지어 수백살, 천살이 넘기도 한다. 례컨대 “단군신화”의 단군은 년세가 1,908세이며 통치경력만 해도 1500년이다. 중국 신화에 나오는 西王母는 중국 서방의 玉山이라는 산에 살며 疫病神의 단속을 임무로 하는 신비적이고 기품이 높은 怪獸같은 녀신인데 黃帝, 堯舜, 大禹, 周나라의 穆王, 지어 《漢武帝內傳》에 의하면 漢나라의 武帝와도 교왕이 있었다는 인물이다. 일대 文史大師인 顧頡剛은《穆天子傳》을 론할 때 “서왕모는 가능하게 일개 국가일수 있다”(李曉偉:《破解西王母之謎》,《雪蓮》2004年第1期)고까지 말한적이 있다. 중국 력대명인들로부터 상고시대에 실재한 인물로 평가받은 이 녀신의 년세는 자그만치 3000살이다.


그런데 3000살 정도면 아주 새파랗게 젊은 셈이다. 중국과 한국의 전설에 내용은 다르지만 다 麻姑란 녀신이 등장하는데, 중국의 마고전설은 “상전벽해(滄海桑田)”와 “마고헌수(麻姑獻壽)”로 유명하다. 이른 바 “상전벽해”란 마고가 동해가 뽕밭으로 된것을 세번 보았다고 해서 생긴 말인데 신기하기 짝이 없는것은 오늘 第四紀學, 古地理學, 考古學 등 학과의 연구성과에 따르면 최근 10만년 사이에 중국의 동부지역은 확실히 桑田碧海의 거대한 변천을 세차례 겪었다는 사실이다. 이른 바 “麻姑獻壽”란 마고가 곤유산(昆崳山)에서 修煉得道한 뒤 三月 초사흗날 天桃복숭아를 따다가 西王母에게 生辰禮物로 드렸다는 이야기이고 그녀의 유적은 江西, 安徽, 山東, 四川, 湖南 등지에 널리 퍼져있다고 하는데 이야기 내용을 봐서는 옛날 과수재배의 시조나 음식조리의 능수 정도로 되여 보인다. 그녀의 나이는 적게 잡아도 10만살은 넘는다. 한국 신화에서 창세신이라고도 할수 있는 麻姑城의 녀왕 麻姑氏는 아마 10만살도 넘을 것이다.


물론 마고의 전설과 같은 신화에 력사적 진실이 어느 정도 반영되여 있을가는 별도의 연구가 수요되는 문제다. 


서왕모의 경우 그의 초시공적 존재를 어떻게 보아야 할가? 앞에 언급됐던 이른 바 “세습성 칭호”란 말을 상기할 때 아마 진실한 정황은 이럴것이다. 력대로 서왕모의 人選은 여러번 갈렸는데 서왕모국의 존재와 서왕모녀왕의 尊號만은 바뀌지 않고 줄창 그대로 보존돼 내려왔을 것이다. 그것은 오늘의 판첸라마나 달레라마의 “活佛還生”과 똑같은 리치일것이다.


서장 라마교(불교)의 “活佛還生”제도는 明淸 兩代에 이르러 서장 전래불교 각파의 습속으로 형성되였는데 이 제도는 ‘활불’로 여겨지는 지도자가 入寂(사망)한 뒤 그의 ‘환생자’로 인정되는 어린이를 후계자로 삼는 서장불교의 전통이다. 지난 1989년 서장 불교 판첸라마 10세의 입적후 판첸라마 11세(16)가 즉위했다. “活佛還生”제도의 리론적 의거인즉 불교 교의와 신학가운데 있는 “佛有三身”說과 “靈魂不滅”說이다. 三身이란 三世를 일컫는 말로서 과거, 현재와 미래세상은 모두 최고의 부처가 主宰하는데 그 주재하의 모든 생령은 六道의 輪回중에서 시작도 끝도 없이 순환한다는것이다.


우리는 서장 활불과 서왕모의 사례에 대한 고찰을 통해 활불환생제도를 옛날 일부 특정 신화인물들의 현상과 련계지을수 있으며 서기 13세기에 탄생한 “活佛還生”제도도 “서왕모현상” 등에서 유래한것으로 추정할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서왕모가 한 개인의 명칭이 아니며 그 집단의 "세습성 칭호"라고 볼수 있다. 따라서 황제 이래 력대의 몇몇 제왕이 서왕모를 만나봤다는 전설이 믿음성이 없다고 단언할수 없는것이다.


조기문화의 상징성표기로서의 상고적신화는 매개 민족의 력사문화원천의 하나이다. 그중에는 민족의 철학, 예술, 종교, 풍속습관 나아가 모든 가치체계의 기원이 내재해있다. 이런 의미에서 신화는 상고적 인류경험의 일종이라 볼수 있을것이다. 물론 신화자체가 正史는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력사사실을 반영하고 있다는것은 또 다음과 같은 사실에서 기인한다.


상고 시대 매우 오랜 세월 인류는 서로간에 말을 쓰면서도 문자가 없어 당시에 발생한 많은 중대한 사건을 기록해 둘수 없었다. 당시 사람들은 문자는 가지고 있지 못했지만 말과 노래로 서로간에 의사를 주고받을수 있었기에 부족내의 교류에 별로 어려움은 느끼지 않았다. 부족집단 내에는 이야기를 잘하는 사람이 늘 있기 마련이였다. 본 부족집단과 다른 부족집단 간에 지반을 빼앗는 전쟁이 발생하면 그 가운데 생긴 일들이 경험자 혹은 목격자를 통해 전해지군 했는데 이야기군들은 그런 전설을 수집해서 완정한 이야기로 엮어서 마을 사람들에게 들려주군 했다. 이런 이야기들은 모두 실재인물과 실제 발생한 사실을 엮은 것이였는데 인물들은 오랜 세월 전해지는 과정에 갈수록 신비한 인물로 비쳐져 나중에는 완전히 신으로 둔갑하군 했다.


신화에서 흔히 보게 되는것은 사실에 대한 과장수법이다. 례컨대 사서에는 상고시대 염제집단과 치우집단간의 전쟁, 염제집단과 황제집단간의 전쟁, 염황련합군과 치우집단 간의 전쟁을 마치 현대전쟁 지어 미래 세계의 전쟁처럼 묘사하고 있는데 필자가 보건대 그때의 전쟁은 극상해야 농기구, 몽둥이, 돌멩이 혹은 활이나 창 같은 무기(불도 리용 가능)를 동원한 전쟁이며 지어 빈주먹의 육박전이였을수도 있다. 왜냐 하면 夏왕조 이전의 신석기 시대에는 기병이나 戰車 따위가 있었을리 없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은 농경민이나 유목민들로서 먼 훗날 칭키스칸의 형상처럼 일거에 수백리 지어 수천리를 주름잡는 그런 장거리추격의 전쟁형태는 상상키 어려운 것이다.


최초의 충돌은 아마 서북부로부터 먼저 남방의 일부 지역과 중원땅에 이동해 와 농경문화를 창출한 씨족의 한 부락과 그 후에 역시 삶터를 개척하며 들어온 유목민 씨족집단 간에 생겼을수 있다. 원래는 後進 유목민들이 몰고 들어온 소나 양이 정착농경민들이 가꾸는 밭에 마구 들어가 곡식을 해침으로 해서 초래된 분쟁(곡식밭을 침범한 유목민들의 소나 양을 때려 죽였거나 잡아 먹었다든지 하는)이였지만 결국 선진 부락과 후진 부족 간의 싸움으로 번져져버린 것인데, 그 싸움이 다른 복합적 사태와 서로 작용하면서 점차 걷잡을수 없이 두 씨족집단간의 대형 싸움으로 번진 것이다. 유명한 阪泉之戰과 涿鹿之戰을 바로 그 대표적인 례로 꼽을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판천대전은 원시사회가 노예사회에로 이행하는 시기의 한차례 치렬한 충돌일수 있으며 탁록대전은 炎黃 二帝를 대표로 한 華夏부족과  蚩尤를 대표로 한 東夷부족의 각자의 문화를 대외로 확장발전시키는 행정에 행해진 맹렬한 부딪침일수 있다. 이는 염황이 련합하여 천하대권을 쟁탈하고 異己세력을 몰아낸 력사사실의 반영이기도 하다. 戰後에 염황련합세력은 蚩尤(東夷)의 문화성과를 흡수하여 화하문화를 공동히 발전시켰다. 탁록지전에서 치우는 비록 염황련합세력에 졌지만 그러나 그가 대표한 동이족이 소멸된것은 아니였다. 동이족의 일부는 중원의 화하족에 흡수되고 일부는 남으로 내려가 蠻夷의 여러 민족으로 거듭났으며 일부는 북상하여 東北夷(濊, 貊과 夫餘 등이 이에 속한다)로 되였고 일부는 한반도로 건너가 정착했다. 


그런 전쟁의 발동은 “씨족부락의 안정된 생산과 삶의 평화를 찾자면 대방을 굴복시켜 복속시키거나 소멸해치우거나 쫓아버려야 한다”는 씨족수령들의 공통된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결국 그것은 령토확장 전쟁으로 발전하였다. 전쟁에서 산생한 포로가 노예로 전락한 경우도 있다. 사유재산의 산생과 더불어 계급모순이 생기고 통치자계급이 피통치자를 제멋대로 유린하자 영웅이 나타나 통치계급을 견제했다. 지금은 다른 나라의 땅을 반치만 밀고나가도 온 세계가 규탄하지만 그때 제왕들은 다른 나라 땅을 많이 침략해서 제 땅으로 만들면 절세의 통일공신과 영웅위인으로 영명을 길이 남겼다.


그럴수 밖에 없었던 것은 자그마한 땅에 나라가 너무 많은데다 관리가 엉망이여서 누군가 강대한 인물이 나타나서 전쟁방법으로 통일을 하지 않으면 세상이 혼란스러워서 백성들의 원성이 대단히 높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때는 지금처럼 국제법 같은 것이나 세상사무를 관리하는 유엔식의 국제기구도 없었고 누구나 지반을 일정하게 차지하면 왕으로 자처할수 있는 세상이였다. 그때 싸움에서 진 자는 이긴 자들, 그리고 후세의 정통 계승자(통치자)들과 어용 사가들에 의해 아주 惡神으로 부각되군 했는데 여기에는 의도적으로 오도된 문제가 많다. 오늘 炎, 黃, 蚩의 蚩尤에 대한 재평가가 거론되는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시간이 수백년 수천년 흘러가면서 여러 제왕이나 영웅인물들의 사적이 한 사람에게 집중되는 일도 매우 흔히 볼수 있다. 력대 위인과 거인들의 거창하고 방대한 이야기를 일일이 기억해서 전하기가 심히 어려웠고 청중들도 되도록 알아듣기 쉽고 재미도 느끼게 해야 했으므로 이야기군들은 왕왕 무수한 여러 제왕이나 영웅인물들의 사적을 따로따로 상세히 엮을 필요가 없이 여러 사적을 한사람 몸에 집중시키기도 했던 것이다. 그들은 전문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을 업으로 먹고살았다.


산해경속의 신화나 삼황오제의 전설이나 단군신화도 모두 상술한 바와 같은 과정을 거쳐 구전되여 온 것을 후세 사람들이 수집 정리하여 기록한 것으로 아무런 력사사실의 바탕이 없이 마음대로 허구해낸것이 절대 아니다.


신화와 전설의 진실성문제와 관련하여 錢穆선생이 한 말이 유명하다. “여러 민족의 최초의 력사는 전부가 기억을 통해 전해져내려온 것이 아닐수 없다. 그중에 전설과 신화의 부분이 많지만 그러나 전설을 엄격히 배격해 버린다면 上古史연구는 운운할 여지도 없게 될것이다. ”(錢穆:《國史大綱》P8~9,商務印書館,1996年6月,第三版. 李學勤 主編:《中國古代文明起源》P53. 上海科學技術文獻出版社, 2007年4月)


사실 그렇다. 중국의 하왕조와 상왕조, 심지어 주왕조까지도 이전에는 전설로 취급했었지만 지금에 와서는 정사로 자리잡았다. 희랍신화에 나오는 크레타섬의 미노스 궁전을 봐도 원래는 그것에 대한 이야기를 아름다운 전설로만 여겼었으나 후에 영국인 아서 에반스가 전설에 근거하여 궁전의 진실한 유적을 찾아냈지 않았는가.


 “전설에 의해 신화가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지만 신화로 해서 전설을 말살해서도 안된다. 후세에 사서가 친히 겪은 듯이 묘사한 기재들에 조작된 부분이 없을수 없지만 당시 전설과 여러 책에 단편적으로 씌여진 전설토막들에서 온 부분은 후세의 어느 한두 사람이나 한두 집단이 마음대로 위조할수 있는것이 아니다. 때문에 모종의 전설을 부정하려면 그런 전설과 상반되는 확실한 증거를 내놓아야 한다. 전설이 확실히 력사사실에 대한 위조라는 증거를 제시하지 않는다면 그 전설이 반드시 거짓이라고 속단해서는 안되는것이다.” (同上書)


한국의 학자들도 이 점을 분명히 하고있다. “개국신화를 그대로 왕조사인 것처럼 해석하는 것은 무리한 점이 많다. ” 그러나 “원래 신화는 역사적인 사실 바로 그 자체는 아니라 하더라도 그 속에 내재된 력사성을 중시하여야 하며 어떤 맥락에서든 신화의 의미는 풀려야 한다.” (李弼永: 《단군신화의 의미와 특징》)


매우 깊숙이 받아들여져야 할 중요한 관점인것 같다.



단군의 전설 산생시간에 대한 의혹


“어떤 맥락에서든 신화의 의미는 풀려야 한다”는 관점에 립각해서《단군신화》에 제기되는 몇가지 의문을 좀 더 구체적으로 풀어 보도록 하자.


오래 동안 고조선에 대한 연구는 문헌사료가 거의 없다는 기본적인 한계에다 민족주의 사학과 식민사관의 대립, 사료의 진위여부에 대한 재야사학자와 주류사학자의 인식차이, 민족정체성 고양을 목적으로 한 정치적 의도, 단군신화를 둘러싼 종교적 론쟁 등으로 혼란에 빠졌던것이 사실이였다. 그러다가 1993년 조선의 단군릉 발굴과 최근 청동기 유물의 새로운 발견이라는 고고학적 측면과 기타 일부 정치적 문제로 인해 고조선과 단군, 기자를 망라한 고조선에 대한 론의가 새롭게 일기도 했다. 하지만 원래부터 존재하던 일부 의문은 아직도 남아있으며 새삼 제기되기도 한다.《단군신화》의 산생시간에 대한 의혹이 그것이다.


례를 들면《三國遺事》,《帝王韻紀》등 단군신화가 수록된 사서들이 13세기에 들어와 만들어졌다는 점 때문에 일본학자들은 일찍부터 단군신화의 후대창작설을 제기해왔다.


중국인민대학의 林堅은 陳壽가 편찬한《三國志》의《魏志》와 北齊의 魏收가 편찬한《魏書》에 다 檀君朝鮮에 대한 기술이 없다는 점을 들면서  王建이 고려국을 세울 때 단군전설이 나타난걸 봐서 檀君신화는 왕건이 고려국을 세우기 위해 조성한 여론의 일부 내용에 불과한게 아니냐는 의혹을 내비쳤다. (林堅:《古朝鮮若幹問題》)


일각에서는 또 현존《위서》에 단군에 대한 기록이 없는데 대해서 뿐 아니라 정사인《삼국사기》에 단군에 대한 내용이 기록되여 있지 않은 점에 대해서도 회의하고있다.


이런 문제가 제기되면《단군신화》는 그 전설의 산생시간문제와 더불어 그것이 “고조선 건국과는 무관하게 고려나 혹은 다른 어느 왕조 통치자들에 의해 터무니없이 조작된 것이 아니냐”는 혐의를 받을 소지가 없지 않다.


그러나 이런 의혹은 다음과 같은 자료를 찾아보면 풀릴수 있으며 나아가 이 전설의 산생시간도 추정할수 있다.


오늘의《魏書》에 기록이 없다는 대목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관련자료를 찾아보면 이른 바의《魏書》는 오늘 볼수 있는 魏收(公元506年~公元572年)의《魏書》(北朝史書의 第一部)뿐이 아니고 여러 종이 있다.


西晉시기 陳壽가 쓴《三國志》가 나오기 전에 이미 魏나라와 吳나라의 력사를 기록한 사서가 나왔는데 王沈(?-266年)이 편찬한《魏書》와 陳壽와 한 시대 사람인 夏侯湛이 쓴 《魏書》등이 바로 그것이다. 《三國志》중의《魏書》는 주로 이런 史書들의 자료를 취한것이다. 그 외에도 隋나라 魏澹이 편찬한《魏書》와 唐나라 張太素의《後魏書》도 있다. 이런 《위서》들은 오늘 모두 전래되지 않고 있다. 책의 이름만 전해지고 내용이 失傳된 사서 등 典籍은 이루 헤아릴수 없이 많다. 王沈, 夏侯湛 등의 사서는 말말고라도 그 유명했던 魏收의 방대한 저서도《魏書》(기실 魏書도 傳, 紀, 志가 26권이 없어졌다)말고는 詩文集 70여권이 다 사라지고 없다. 이런 자료를 보면 일연이 魏書에서 인용했다는 기술은 분명 사실인 것이다.


그렇다면 一然이 구경 어느 魏書에서 단군신화 내용을 인용했을가? 우에 렬거한 자료중 後魏시기, 즉 拓跋魏 시기의 력사를 기록한《後魏書》등은 당연히《삼국유사》가 인용한 기록의 出自가 될수 없다. 왜냐하면《삼국유사》에서는《魏書》의 기록과《後魏書》의 기록을 분명히 구분하여 썼기 때문이다. 가능성이 가장 많은 것은 晉나라 때 王沈과 夏侯湛의 魏書중 어느 하나일 것이다.


이런 자료를 분석하면 우리는《삼국유사》에 인용된《위서》가《삼국지》이전의 魏書임이 분명하니 적어도 3세기 초에는 단군신화가 중국의 史書에 기록돼 있었음을 알수 있으며 그것이 신생 통치자들에 의해 허위조작된 망설이 아님을 알수 있다. 따라서 이 전설의 산생시간은 최소한 천년을 앞당길수 있다.


《단군전설》의 산생시간에 대해 우리는 조선사료에 기재된 여러 가지 단군전설에 대한 비교와 분석을 거쳐 진일보의 추정을 이끌어 낼수 있다. 이 문제에 대해 조선의 학자 리지린은《고조선 연구》에서 상당히 구체적인 견해를 내놓고 있다. 그는 “《魏書》의 단군전설의 자료가 혹시 曹魏때에 고구려에서 얻어간 것일지는 모르나 그렇다 하더라도 그 자료는 고구려 통치계급이 단군을 자기 계보와 직접 련결시키기 전 고구려의 지배하에 들어간 고조선 인민들 간에 있었던 구비전설이였거나 혹은 문헌자료에 근거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라면서 또 好太王碑文에 단군에 대해 언급되지 않은 사실과 곰을 단군의 토템으로 한 단군신화에 부여, 고구려시기 란생신화의 요소가 전혀 반영되여있지 않다는 점을 들어 단군의 전설이 부여국 건국 이전에 이미 있었다고 보았다. 리지린은 이어 “또한 단군신화는 고조선의 건국자가 조선인이며 殷人인 箕子의 선조도 아니고 위만의 선조도 아님을 명백히 말하고있으니 역시 기자전설이 조작되기 전이거나 또는 衛滿조선 이전에 발생한 것으로 추정할수 있다...《魏書》의 단군신화에 단군은 조선의 개국자이며 그 수도를 평양이나 王儉城이라 하지 않고 아사달이라 하였으니 이것(즉 아사달)은 분명히 王否나 準시대 고조선의 수도가 아님이 명백하다”면서 따라서 “《魏書》에 기록된 단군전설은 否, 準 시대 이전 즉 서기전 3세기 이전에 이미 존재했다고 추론할수 있을 것이다”라고 했다.


이로서《단군전설》의 산생시간은 또 크게 한발 앞당겨졌다. 단군전설이 서기전 3세기 이전에 이미 존재했고 그것이 또 어느날 아침에 갑자기 생겨날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할 때 그 전설의 최초의 형성시간은 당연히 훨씬 먼 옛날로 거슬러 올라갈수 있는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랜 세월 구전되여 왔거나 여러 옛 문헌들에 기록되여 온《단군신화》가 시종 최초 전설의 형성시기의 원 모양을 그대로 간직해 왔을수는 없다.《삼국유사》에 인용된《고기》의 단군신화 내용과《삼국유사》의 저자인 일연과 동시대인인 리승휴의《제왕운기》이후에 인용되고 있는 고기록들의 단군신화 내용이 차이를 보이고 있는 점이 단적으로 이 점을 말해주고 있다. 이런 신화들은 그것이 전해져  내려오는 와중에 후세의 통치계급과 그들의 御用史官들에 의해 수정되고 조작되기도 했으며 그들에게 불리하다 싶으면 지어 삭제되기도 했다. 일부 신화자료는 신빙성이 없다고 보아 일부 사가들이 정사에 올리지 않은 것도 있다. 삼국사기에《단군신화》가 오르지 않은것이 그 사례에 속한다. 때문에 여러 가지 신화와 전설을 자료로 세심한 연구를 해야 그 속에 숨어있는 력사의 진실을 복원해 낼수 있는것이다.



“불교영향설”과 관련하여


《三國遺事》에 인용한《古記》는 첫머리에 “昔有桓因(謂帝釋也) 庶子桓雄 數意天下 貪求人世 父知子意 下視三危太伯 可以弘益人間 乃授天符印三個 遣往理之” 이라고 적고 있다. 이 記事는 단군의 조상에 대한 계보를 밝힌 것이다. 그런데 편찬자로서의 一然은 桓因 名下에 “謂帝釋也”라고 주를 달고 있다. 이에 대해 한국 민족문화연구원의 沈伯綱원장은 “一然은 그의 신분이 僧侶였으므로 佛經中에 釋提桓因이라는 용어가 나오는 것을 보고 그 영향을 받아 古記中의 桓因을 佛經의 帝釋으로 리해하였을 것”으로 보고 “그러나 一然의 이 해석은 객관적, 력사적 해석이 결여된 잘못된 해석이라고 본다”고 했다. 그 리유인즉 “檀君시대가 중국의 帝堯시대라면 桓因, 桓雄시대는 중국으로 말하면 顓頊,帝嚳의 시대인데...(그것은) 黃帝시대보다도 훨씬 후기이며 따라서 桓因과 桓雄을 실재 인물이 아닌 도리천(忉利天)의 주재신을 가리키는 帝釋으로 본다는 것은 당시의 주변 력사 상황을 제대로 고려하지 않은 지나치게 승려로서의 주관적, 종교적 견해가 개입된 해석이라고 보여지기 때문”이라는것이다.


그러면서 심원장은 桓因과 桓雄이란 이름에 나타나는 桓은 예로부터 桓水, 桓氏 등 물 이름이나 혹은 姓氏로 씌여지기도 하고 또는 烏桓國과 같이 나라를 가리키는 의미로도 씌여졌다는 의미에서 桓族이라는 씨족을 가리키는 씨족명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보았다.


그 리유는 무엇인가? 심백강은 “春秋시대 宋나라 大夫였던 환추(桓魋)가 바로 桓族이였고 그는 바로 宋桓公의 후예였는데 春秋시대까지만 해도 桓族이 존재했었다는 사실과 특히 春秋시대 宋나라는 東夷의 先民이 세웠던 殷의 후예로서 동이족과는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그렇다면 우리가 桓因, 桓雄의 桓族과 春秋시대 宋桓公, 桓魋의 桓族을 서로 련계선상에서 생각하는 일이 전혀 불가능하다고만 말할수 없다”고 상당히 계발적인 견해를 내놓고 있다. 그러면서 그는 桓자를 韓國의 크고 밝다는 韓자와도 련계시키고 있다. 


《삼국유사》에 인용된 古記는 또 “雄率徒三千 降於太伯山頂(卽太伯今妙香山)神壇樹下 謂之神市 是謂桓雄天王也”(환웅은 그 무리 3천 명을 거느리고 太伯山 꼭대기[지금의 묘향산]의 神壇樹 밑에 내려와서 이곳을 神市라 불렀다. 이 분을 환웅 天王이라 한다. )라고 기록했는데 편찬자 일연은 여기서 태백산을 묘향산에 비정하고있다.


이에 대해서 심백강은 “환웅이 ‘太伯山꼭대기 神壇樹 아래에 내려 왔다’고 한것은  桓雄이 자기 아버지 桓因이 다스리던 옛 고장을 떠나 새로운 고장으로 이동하여 와서 살았음을 말한 것”이라면서 “여기서 말하는 太伯山은 중국대륙의 고조선 발상지에 있었던 산을 가리킨 것인데 이 山을 一然이 북한(조선)에 있는 妙香山으로 주해한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한편 조선의 리지린선생은 “觀佛三昧海經”등 佛典자료의 “旃檀妙香” 관련 기록을 통해 전단(旃檀)이란 나무가 불교에서 신성한 수목으로 인정되여 있음을 볼수 있다”는 것을 근거로 “太伯山頂(卽 太伯 今 妙香山) 神壇樹下”라는 표현에 대해 “불교사상으로 꾸며졌다고 보는것이 타당할 것이다”라고 피력했다. 불경자료를 보면 “전단묘향(旃檀妙香)”이란 표현이 확실히 자주 쓰이고 있는데, 례컨대《禮佛懺悔》“五十三佛”에 “전단목가루를 약에 섞어 중생을 치료한다. 묘향(신묘한 향기)이 고루 풍기면 모두의 심신이 안정을 찾고 맑아질수 있다(旃檀翻與藥 能除衆病 妙香普熏 衆生離垢淸淨)”라든가 “부처 신상의 팔만사천 모공에서 단향목의 묘향이 흘러나와 피안을 고루 적신다(佛身八萬四千毛孔 皆出旃檀妙香 普熏法界)”라는 글귀가 보이고《法華經》卷十九《法師功德品》에는《法華經》을 랑독하는 자는 鼻根功德의 증서를 얻어 天香, 旃檀, 沈水 등의 여러 가지 妙香을 맡아 분별할줄 알게 된다고 한것 등이 그것이다. 이로서 리지린선생은 승려로서의 일연이 불교사상의 지배하에 “神壇樹”란 낱말을 신화속에 집어넣은 것으로 리해하고 있는것 같다.


리지린선생의 말대로 일연이 불교사상의 영향을 받은 것은 확실해 보인다. 그러나 필자는 原典에 없었던 “신단수”란 낱말을 일연이 자의로 집어넣었다고는 보지 않는다. 단《古記》에 전하는 “神檀樹”를 旃檀樹로 리해하고 거기에 불교에서 旃檀과 늘 함께 하는 妙香을 조선의 妙香山과 련계시킴으로써 결국 태백산을 묘향산에 비정하게 된것이라고 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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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 2 ]

2   작성자 : 길손
날자:2008-03-12 15:13:25
박문희님처럼 여지를 두면서 얘기하는것도 좋을것 같네요.잘 읽었습니다.
1   작성자 : 바가지
날자:2008-03-12 14:43:00
너무 거창한 내용을 너무 쉽게 이야기하십니다. "아마", "것 같다"의 설정 뒤의 결론은 믿기 어렵습니다. 위의 발상은 좋으신데, 어느 한 부분만 치중해서 쓰셨더라면 무게가 더 있었을 것 같습니다. 한꺼번에 지구 전체를 들썽거리게 하는 제목이여서... 제목만 봐도 아름차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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