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문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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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을 감동시킨 화교 한성호박사
2007년 09월 29일 12시 40분  조회:5022  추천:63  작성자: 박문희



한국인을 감동시킨 화교 한성호박사


[길림신문 박문희 기자] 2006-03-09

 

           한성호박사가 이룩한 업적은 국외인사들로부터 극히 높은 찬양을 받았으며

           그는 대단한 중국인으로, 중국의 기인으로 불리였다.

                                     一한성호박사 업적비 비문에서

 

한국 화교계에 한국 제13기 대통령 노태우로부터 《아주 대단한 중국인》이라는 평가를 받은 분이 있다. 이 분의 사무실 벽에 걸려있는 사진액틀에는 호금도, 리붕, 주용기, 리서환 등 중국의 중앙 지도자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 있는가 하면 한국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등 대통령 그리고 총리와 여러 정당의 총재들과 함께 찍은 사진뿐만 아니라 젊었을 때 장개석과 함께 찍은 사진도 있다. 그의 업적은 《대한민국현대인물지》에도 올라있다.

이분이 과연 누굴가?

한국 력대 대통령의 어의(御醫)로 불리는 애국화교 한성호(79세)박사이다. 현재 대한민국 신동화한의원 원장, 《한화천지》잡지사 회장, 한국유교협회 고문, 한중우호협회 고문, 한국 화교달마불교 회장, 한국 수석인 (壽石人)총련합회 수석부회장, 중국전국화교련합총회 고문 등 10여가지 사회직을 일신에 떠메고 애국위업의 수행에 혼신을 쏟고있는 한박사, 그는 한국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하다.
 

악몽처럼 불행했던 과거

한성호박사의 본적은 산동성 게현(莒縣))이다.1909년 그의 부모와 몇몇 삼촌은 게현 북부의 한 작은 마을로부터 길림성 장백현의 압록강반에 피난해와 자리를 잡았는데 뜻밖에도 거기서 사금광을 발견하고 사금을 일어 큰돈을 벌기 시작, 십수년후에는 당지에서 소문난 부자로 되였다.

한성호는 1927년 8월 28일 생으로 원명은 한조선(韓早先)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했던 그는 12살에 소학교를 마친 뒤 바로 림강고등학교에 입학했고 16살에는 또 길림국립사범대 시험에 합격하여 장백현 력사상 최초의 대학생으로 되였다. 대학에서 공부할 때 일본경찰에 까닭없이 잡혀가 얻어터지고 갇히웠던 관계로 그는 왜놈들이라 하면 이를 갈았다. 1945년 대학 3학년을 다닐 때 일본경찰에 끌려가 깊은 산속에서 모진 고역을 치르며 하마트면 왜놈의 총칼에 찔려 죽을번한 일도 있었다.

1945년 일제가 투항을 하자 일본이 관할하던 길림사대도 문을 닫아 갓 3학년을 마친 한조선은 귀향하여 중학교 어문을 가르쳤다. 1947년 동북에서는 지주를 타도하고 땅을 나누는 토지개혁운동을 벌였는데 한조선은 국민당특무, 반혁명폭동의 조직자로 잘못 락인이 찍혀 사형판결을 받았고 그의 셋째, 다섯째, 일곱째 삼촌은 맞아죽었으며 어머니는 한을 품고 자살했다. 아버지와 형님도 행방불명이 되였다. 그는 처형되기전 공안국에 있던 동창생의 구원으로 산속으로 도망치다 뒤에서 날아오는 총탄에 다친채로 심산속에서 50여일간 전전하며 말못할 역경을 다 치렀다. 그러다가 한국으로 도망할수밖에 없게 되었다.
 

국민당에 환멸을 느껴 정치를 포기

서울에서 그는 한국주재 대만대사관의 시험에 응해 교무(僑務)비서로 발탁됐다.

서울에 온 한성호는 국민당에 가입하며 아울러 국민당 중통(中統)특무조직에도 참가한다. 조선전쟁기간에 공을 세워 선후로 장개석과 장경국의 단독접견을 받았으며 아울러 표창도 받았다. 26세에 벌써 추천을 받아 《 양명산혁명실천연구원》에 들어가 학습을 하게 되며 거기서 장개석의 강연을 직접 듣는 기회도 갖게 된다.

리상, 재능과 사업심이 있는 20여세의 열혈청년으로 국민당의 중점 양성대상이 된데다 장씨부자의 단독접견까지 받았으니 그의 미래엔 희망이 충만되여 있는 셈이였다. 그도 당연히 국민당에 충성을 다했다. 그러나 그의 가슴속엔 남아의 호연정기가 굳게 자리잡고있었으니 탐오부패에 푹 젖은 대만 외교관원들의 현실과 한국 화교조직들 내부의 조국과 중화민족의 얼굴에 먹칠하는 갖가지 추악상들을 목격한 그는 민족대의를 위해 용감히 떨쳐나서서 그들과 투쟁하지 않을수 없었다.

교무비서를 하면서 서울안 차이나타운에서 화교조직들이 아편관, 도박장, 기생집을 경영하며 중국인의 얼굴에 똥칠을 하는것을 본 한성호는 《대사관 총령사》 숙몽공에게 교풍(僑風)촉진위원회를 설립할것을 즉시 건의했고 동의를 받은후 즉시 백여명의 행동조를 무어 기생집,도박장을 들부시고 화교사회내의 악세력들에 용감히 도전했다. 물론 이에 매국장사군들의 미움깨도 많이 사고 처처에서 무서운 보복도 당했지만 그는 추호도 굴복하지 않았다.

아편관이나 도박장을 들부신 한성호의 행동은 그나저나 대만 대사관의 통일행동으로 되였던 까닭에 일정한 보호를 받을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자기의 기자신분 을 빌어 대만외교관의 부정부패행위를 사정없이 파헤치고 까발리는데 대해서는 대만대사관은 그냥 내버려두지 않았고 무시로 타격과 보복을 감행했다. 특히 서울의 13명 화교수령들이 대만과 한국정보기구에 한성호를 《국민당내부에 기여들어온 공산당특무》라고 련명보고를 올려 무함하면서 그를 처리할것을 요구하였을 때 그는 관료기구내의 험악상과 국민당 관원의 부패상에 대한 혐오와 더불어 화교사무에 환멸감을 느낀 나머지 정치를 포기하고 교육에 종사키로 작심, 분연히 서울을 떠나 군산시에서 한 화교학교의 교장을 맡는 과단성을 보여주기도 했다.

후에 한성호는 또 바다처럼 깊은 중의리론에 매혹되여 의학을 전공하기 시작했다. 그의 총명재질과 지독하게 끈질긴 성격은 의학전공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됐다. 서울에 있을 때 벌써 경희대에서 한의(즉 중의)를 전공했었던 그는 송곳처럼 중의학리론을 파고 들어 마침내 미국 캘리포니아주대학으로부터 박사학위까지 수여받았고 드디여 한국 전역에 소문 놓는 어의(御醫)로까지 된것이다.
 

한국 전역을 들썽케 한 중의

1960년 한성호는 군산시를 고별하고 광주에 가 중의진료소를 꾸렸다. 한성호는 중의약제로 한 페결핵 말기환자를 치료해 병을 떼는데 성공했다. 하여 대번에 이름을 날리게 되였는데 그의 문전은 매일 병보러 온 사람들로 북적이군 했다.

1970년 친구의 협조요청으로 서울에 돌아와 신문을 꾸린 한성호는 대만대사관의 모해로 가산을 탕진하고 곤경에 빠졌다. 이때 한 한국인 친구가 구원의 손길을 뻗쳐와 그를 한국의 중국연구소한방의학학술연구원 원장, 서울특별시재향군 인회 지정 한의원 원장 등 직에 초빙하여 그의 생활고를 풀어주었을 뿐더러 그가 중의학연구에 종사하는데 량호한 일터환경을 마련해주었다.

그후 그의 의술이 갈수록 고명해지자 한국의 박정희, 김종필 등 대통령, 총리를 비롯해 군,정 고위급 요인들이 병보러 자주 드나들었고 그중 노태우,김영삼 등 많 은 인사들도 친구로 사귀게 되였다. 그가 친구를 항시 진심으로 대하면서 언제나 의리를 중히 여기고 사리를 도모하지 않았기때문에 한국벗들은 그를 한결같이 존중했다.

이 기간 경제발전과 더불어 한국의 생활리념에 많은 변화들이 생겼다. 병을 치유하고 체질을 증강시키는 중의의 목적을 나날이 높아지는 백성들의 생활수준에 접목시키기고자 한성호는 식품료법연구에 몰입하여 중의리론으로 맛나는 음식과 병치료에 효과적인 중의약방을 과학적으로 결합시킨 식품료법을 부단히 더듬어냈으며 3년동안 연구에 잠심한 결실로 1974년에 이르러 120여만자에 달하는 의학전문저서를 탈고했다. 《식물편》,《동물편》,《미용편》,《조미료편》,《식품치료편》등으로 나뉘는 이 대하의학서의 이름은 《식품비방》이라고 달았다.

책이 방금 탈고되자 이를 발견한 옛친구인 《조선일보》 주필 선우훈은 이 책의 가치를 대뜸 보아내고 즉시 신문에 련재하기로 결정했다. 1974년 5월 23일 《조선일보》에 한성호의 《식품비방(食品秘方)》 첫기가 실렸다. 상상외로 독자들의 반향은 대단히 강렬했다.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면서 신문의 발행량은 놀라운 직상승을 기록했는데 불과 며칠도 안되는 사이에 신문은 70여만부로부터 120만부로 치달아올랐다. 《식품비방》련재는 1년 반동안 지속되여 한국 신문간행물 련재의 기록을 쇄신했다.

《식품비방》은 당연히 책으로도 출판됐는데 당시 인구 4000여만명밖에 안되는 한국에서 이 책은 한해동안에 50만책이나 팔려나갔다. 그가 출연한 TV강좌도 마찬가지로 무수한 관중을 끌었다. 이에 그치지 않고 그는 또 한국 한의학자들과 합작하여 13권에 달하는 《한방의료대전집》도 펴냈다.

중국의학을 세상에 널리 알리고 빛내는데 그가 한 기여는 거대하다.
 

노태우대통령의 중한수교밀사

1987년 한성호의 친구 노태우가 한국대통령에 부임했다. 노태후는 대통령으로 된후 닷새만에 한성호를 단독 접견하고 대통령밀사의 신분으로 비밀리에 중국정부와 접촉하여 한중수교를 위해 물밑작업을 맡아해줄것을 위탁했다.

하여 근 40년이란 국민당 당령을 가지고있는 한성호는 중한우의와 조국의 장래를 위해 선뜻이 친선밀사로 나서서 비밀리에 중국 정부관원들을 만나 수교를 위한 물밑작업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를 알게 된 대만당국은 가만있을리 없었다. 한국주재 대만 대사관과 일부 대만독립을 지지하는 화교 두목들을 내세워 한성호를 공격하고 보복을 감행하게 했다. 대만 대사관의 한 령사는 공산당에 가문이 망하고도 공산당을 도와 일하다니? 집안의 원쑤를 갚지 않으면 효성을 다하지 않은것이요, 국민당에는 충성심을 잃은것이라면서 문죄하려 들었다.

도발앞에서 한성호는 이렇게 대꾸했다.나는 중화민족을 위해 일하지 어느 당파를 위해 일하지 않는다.효에는 크고 작은 구분이 엄존한다.부모님에 행하는 효는 작은 효이고 민족에 행하는 효야말로 큰 효이다. 내가 중한수교를 위해 일하는것은 민족에 가장 큰 충과 효를 행하는것이다.가정의 비극은 력사가 조성한것이고 전쟁이 조성한것이다. 그래 내가 나의 조국을 위해 일하는것이 죄란 말이냐?

한성호박사의 주선하에 1988년 5월 중순 한국정부는 중국 산동, 료녕과 북경을 방문하도록 대우재단의 김우중회장을 단장으로, 김복동장군, 한성호박사를 고문으로 한 15인 경제방문단을 중국에 파견하여 량국간 외교방문의 서막을 열어젖혔다. 그해 8월 산동국제상회의 리유회장이 인솔하는 산동경제방문단이 중국의 첫 정부측대표로 서울을 답방하여 중한수교의 첫걸음을 완성했고 이로써 중한 정식수교의 기반을 마련했다.

1992년 중한수교 전야에 노발대발한 대만당국은 한국주재 중국대사관 관사를 팔아버릴 음모를 꾸몄다. 이 소식을 들은 한성호는 중국대사관의 모든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엄정성명을 발표,세계 각지의 애국적 화인 화교들에게 한결같이 단합하여 대만당국의 매국행실을 제지시키고 중국대사관의 재산을 보호하라고 호소했다. 수많은 애국화교들의 노력으로 대만당국의 음모는 파산을 선고했고 가치가 10여억딸라에 달하는 재산은 마침내 허실없이 조국의 품안에 돌아오게 되였다.

1993년 2월 19일 오전 10시, 서울시정 강당에서 한국의 수백명 관원들이 장엄하고도 성대한 의식을 가지고 한국사회를 위해 중대한 공헌을 한 외국인 한성호박사에게 국민훈장을 수여했다.
 

중국의 화장실 혁명을 일으킨 로인

2000년 양력설 전야 산동성정부에서 조직한 《태산신천년축전》활동에 참가한 한성호박사는 태산절정에 올라 화장실을 찾았다가 상상도 못할 장면을 목격하고 경악을 했다.세계적으로 유명한 이 관광구내의 변소란 똥오줌이 넘쳐나 악취를 풍기고 변소내에 간막이가 없어 서로가 치부도 가리지 못하는 기막힌 형국이였던것이다. 민족자존심을 크게 다친 한박사는 분통을 터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즉시 수만자를 일필휘지하여 유람구의 기막히고 치떨리는 위생상황을 일일이 렬거하고 무책임한 정부 관원들을 통절히 꾸짖었다.

《태산은 중국의 성산이자 세계의 명산이며 중국을 빛내는 국보이기도 하다.헌데 어쩜 아름다운 국보를 이렇게 더럽힐수 있단 말인가?! 가석하기 짝이 없고 분노로 치떨린다.산우에 분변이 사태를 이룸은 산아래 더러운 관료가 있음이요, 금 그릇을 들고 더러운 돈 버니 아름다움과 깨끗함이 어이 있을소냐? 나라의 체면은 어디에 팽개치고 리익 챙기기에만 급급하냐? 민간기풍우매락후는 부정부패 탓이로다. 나라와 민족의 얼굴에 똥칠을 하니 비관과 분노를 금할길 바이 없다!…》

그는 반월간 잡지《한화천지》2000년 제4기에 글을 발표한 뒤 이 글이 실린 잡지 수권을 산동의 일부 관원들에게 부쳐보내고 하회를 기다렸다.

2000년3월,한성호박사의 《한화천지》잡지를 받아보고 크게 놀란 태안시당위 막진규서기는 바늘방석에 앉은 사람처럼 안절부절 못했다.잘못을 저지른 아이가 아버지에게 호된 꾸지람을 받았을 때의 심정이였다.시위서기로서 그는 자기에게 밀어버릴수 없는 책임이 있음을 느꼈다. 한박사의 호된 비판이 천만 지당하다.태산은 조국의 자랑이자 얼굴이다. 조국의 얼굴을 깎아내리는 일이 있어선 절대로 안된다.

그는 잡지를 놓기 바쁘게 실태조사에 착수했고 회의를 열어 각방의 의견을 청취했으며 전문가들을 불러 조치를 강구했다.

얼마 후 서울에 있는 한성호박사는 산동 태산시 막진규서기가 보내온 편지를 받았다. 편지에는 태산유람구위생에 대한 한박사의 비판에 감사를 드린다는 내용과 함께 태안시 변소개조 계획이 소개되여있었다.

편지를 접한 한박사는 기쁜 나머지 만감이 교차했다.국민당을 삼사십년간 욕했어도 국민당은 나의 말을 단 한번이라도 귀담아 들었는가?듣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보복과 타격만을 일삼지 않았던가? 그러나 뜻밖에도 일당 독재를 한다고 비난을 받고있는 공산당이 인민의 비판을 허심히 접수하고 꾸짖는자의 애국성의를 존중해주다니, 짜장 감개무량하도다!

2000년5월,태안시에서는 전례없는 변소혁명을 일으켰다. 태산풍경구 및 시 구역의 2216개 변소에 대한 개조작업이 전면 개시됐다.

일개 정부가 변소를 제1호 공사로 삼기는 태안시는 물론 중국력사에서도 처음 있는 일이였다.쉬운 일이 아니였다. 2억5000만원이나 수요되는 건설비용은 중지를 모아 변소를 경매하거나 청부 주는 방법으로 해결했다.모든 변소를 깨끗하고도 보기 좋게 수건하면서도 태산의 자연경개를 파괴하지 않고 귀중한 지하수자원도 오염시키는 일이 없게 하고자 설계부문에서도 머리를 쥐여 짰다.

태안의 변소혁명은 석달간의 분전끝에 승리적으로 완성을 고했다.태안은 깨끗해졌고 더욱 아름다워졌다. 2천여개 변소는 기적처럼 일률로 수세식으로 모습을 바꾸었는데 세수대, 세면대, 건수기, 통풍기가 구전하고 바닥에는 몽땅 자기타일을 깔았다.

태안의 공중변소혁명은 전국적으로 지대한 반향을 자아내여 중국공동변소개조의 서막을 열어놓았다.
 

《반독촉통》의 대기를 첫사람으로 떠메고

리등휘가 대만 총통의 자리에 올라 앉은 후 한성호박사는 예리한 정치적안광으로 대만독립을 굼꾸는 리등휘의 본질을 보아내고 맨 첫 사람으로 대만독립론을 비판하는 글을 발표하였으며 이를 발단으로 대만독립반대투쟁을 전개, 조국의 평화적통일을 위해 간단없는 노력을 경주해 왔다.

중한수교 후 대만 당국과 한국의 관계는 비록 대사급으로부터 대표부급으로 떨어졌지만 대만대표부의 정부관원은 중국대사관 인원보다 훨신 많았으며 장기간 형성된 관성에 의해 대만대표부는 여전히 화교사회를 통제 관리하고있었다. 대만 당국은 수만명에 달하는 화교를 잃지 않기 위해 그들에게 후원금을 아낌 없이 퍼부었고 화교사회의 다수성원도 얼빤한 정신으로 그들을 따라가고 있었다. 결과 대만독립을 반대하는 한성호 등 두뇌가 명석한 로화교들 몇몇은 오히려 여러 면으로부터 달려드는 타격과 보복을 당하기 일쑤였다. 중국대사관에서도 한국에 《반독촉통(反獨促統)》조직을 세우려고 여러 모로 노력했지만 줄곧 그렇다 할 결과를 보지 못하고있었다.

2002년 새해맞이초대연이 있은 후의 어느 날 대사관의 리빈대사가 한성호박사를 례방, 중한수교에 력사적 기여를 한 한박사에게 이번에는 《반독촉통》조직 결성에 힘을 실어줄것을 희망했다. 한성호박사는 이에 선뜻이 응해나섰다. 《이것은 중화민족의 대사입니다.분렬을 반대하고 통일을 촉진하는것은 우리 모든 중국인들의 책임이기도 합니다. 대사님, 시름 놓으십시오. 한달내로 이런 조직을 만들겠습니다.》

이미 76세 고령인 한성호박사는 불타는 애국충정을 안고 바로 그 이튿날부터 반독립조직 결성을 위한 작업에 몰입했다.

2002년 2월 14일,한박사의 발기하에 애국교민조직 《서울중국교민협회》가 설립됐다.이날 한박사는 특수한 감정을 안고 중화인민공화국 5성붉은기를 손수 회장에 걸었다. 이것은 한국화교사회에서 사상 처음으로 올린 5성붉은기였다.

그로부터 며칠 뒤인 2002년 2월 23일,한국 화교사회의 력사에서 처음으로 《반독촉통》을 취지로 내세운 단체 《한화중국평화통일촉진련합총회》가 역시 한성호박사의 발기하에 고고성을 터쳤다.

한성호박사는 특유의 대지대용(大智大勇)과 비범한 조직력,그리고 불같이 뜨거운 애국지성으로 짧디짧은 10여일 동안에 두개의 큰 화교조직을 설립함으로써 중국의 평화적통일사에 빛나는 한페지를 기록한것이다.
 

맺는 말

한박사한테는 세속에 물젖지 않는 오기가 있고 강권에 휘여들지 않는 절개가 있다.

그는 개인의 은혜와 원한보다는 조국과 민족의 대의를 중히 여기는 열렬한 애국자이다.

 

인민대회당에서 중공중앙 호금도총서기와 중화전국귀국화교련합회(략칭 전국교련)

림조추주석(오른쪽)의 친절한 접견을 받고있는 애국화교 한성호박사

노태우가 대통령에 취임한지 닷새후인1988년 3월 1일 대통령부에서 노태우부부와 기념사진을 남기다.

1993년 2월 대통령을 대표하여 한성호박사에게 국민훈장을 수여하고있는 한국 서울시 리상배시장(왼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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