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문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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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    중한일《론어비림조성서화대전》한국에서 댓글:  조회:5347  추천:4  2014-04-29
중한일《론어비림조성서화대전》한국에서 [ 길림신문 박문희] 발표시간: 2014-04-28 서울 우이동에서 향항 탕원가내외가 기증한 공자동상 제막식도 론어비림조성서화대전 대회장. 중국(향항 대만 포함), 한국 일본의 서화 작가 수백명이 참가한 한국국제서화교류사상 최대규모의 서화전이 한국에서 성대히 열렸다. 한국상지학원과 한국비림원에서 주관하고 한국문화체육관광부와 주한중국대사관에서 후원한 이 《론어비림조성서화대전(論語碑林書畵大展)》은 16부터 20일까지 5일간 서울 인사동 한국미술관과 노암갤러리에서 동시에 열렸다. 그간 공자동상제막식도 서울 강북구 우이동에서 치러졌다. 대한민국 김영삼전대통령, 이수성전국무총리, 중국재한교민협회총회 한성호총회장, 중국당대문화우공으로 불리는 중국한원비림창시인 리공도선생 등 인사들이 축사를 보내왔다. 이번 서화대전에서는 중국, 한국과 일본의 서예미술작가 350명이 참가해 다양한 서화작품을 선보였다. 특히 중국 경필서법가협회 장화경주석 등 중국 내지 북경, 길림, 흑룡강, 운남, 하남 등 성, 시와 향항특별구 및 대만성의 서예작가 497명이 론어경구(警句)작품을 대거 출품해 한층 더 관심을 자아냈다. 론어비림조성서화대전 서예작품전시장 일각. 이번 대전은 론어비림박물관 및 론어대학원대학교 설립에 힘을 싣기 위해 마련됐다. 앞서 중국(대만 포함), 한국, 일본의 석학들과 예술가들은 21세기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 사고의 구현과 인류정신사의 보배인 론어를 현대에 되살리고 리기주의와 배금사상을 배척하자는 취지에서, 후학들에게 론어의 정신과 학문을 체계적으로 전할 공간으로 비림박물관과 론어대학원대학교를 설립하자는데 뜻을 모았다. 본 서화대전 발기자의 한사람인 한국비림원(리사장 허유)에 따르면 론어비림박물관과 론어대학원대학교는 한국상지학원 설립자인 김문기원로가 기증하는 10만㎡ 부지에 조성될것이라 한다. 이에 따라 이번 전시회는 론어배움터 마련이라는 동아시아 학계 및 예술계의 오랜 바람이 이뤄지는 출발점이 될것으로 전망되고있다. 공자동상제막식은 4월19일 오전 김문기원로의 소유지인 서울 강북구 우이동 234-2번지에서 치러졌다. 공자동상은 향항공교(孔敎)학원의 탕은가(湯恩佳)원장이 기증했으며 탕원장내외가 이날 제막식에 참석했다. 서울 강북구 우이동 234-2번지에 세워진 공자동상. 중•한수교 이전부터 중국과 각종 교류를 통해 비림문화의 력사성을 깊이 인식했던 한국비림원 허유리사장은 《중국 하남성 한원비림 등 중국의 비림문화에 크게 영향받아 한국에서의 론어비림박물관 건립계획을 추진하게 됐다》면서 《론어비림에는 공자상을 사표(師表)로 모시고 론어를 돌에 새겨 전시하고 각종 행사장, 교육관, 수련관을 마련할 계획》이며 《론어비림이 완공되면 종교단체와 문화예술계와 협력하여 국내외 각종 행사를 유치하고 각국과 문화, 학술교류 등을 추진하겠다》고 표시했다. 허유 리사장은 또 《이미 세계적인 론어비림 성지(聖地) 건립을 위해 한•중•일 전각자 1,000여명이 성지조성에 참여할 준비를 갖추고 있다》고 밝혔다. 허유리사장과 오랜 친구인 중국경필서법협회 장경화주석은 《2013년 1월 18일 중국 북경에서 허유관장을 만나 공자동상은 향항공교학원 탕은가원장이 기증하셨으니 중국경필서협에서 론어를 작품화하여 주시면 한국에 론어비림과 론어대학을 설립하겠다는 허유선생의 말을 듣고 리사회에서 결정한 뒤 전국 유명서예가 497인에게 부탁, 2013년 9월에 완성하여 허유관장한테 증품하였다》고 이번 대회에 참가하게 된 경위를 소개했다. 허유 리사장은 현재 한국비림박물관장에 서예가와 력사가를 겸하고 중국의 한원(翰園) 비림 고문, 중국 상지(尙志)비림 명예관장, 중국 중원공자학회 명예회장 등 비림문화 관련직외 세계문자 평화공원 추진위, 세계성경비림박물관 건립위, 공자론어박물관 건립위 리사장으로 보다 큰 꿈을 꾸고있는것으로 알려졌다.
101    오덕장로주의 전설 리동춘 댓글:  조회:5554  추천:4  2014-04-28
  태동하는 꿈   사람의 마음속에 항상 자리하는 꿈, 말하자면 집착이라 할 정도로 사람을 빨아들이는 아이템이나 목표가 그 사람에게 가장 좋은 꿈의 씨앗이라고 한다.   2005년 50세의 리동춘이 연변진출을 결심했을때 그의 가슴에서는 20대의 젊은이에 못지않은 꿈이 태동하고있었다. 그 꿈은 무엇이였을가?   연길시에서 약 60리 떨어져있는 산간계곡 의란향 련화동의 400헥타르 개활지에 한국의 한 기독교단체와 중국의 한 공산당원이 이끌어가는 조선족민간단체가 협력하여 생태과학의 시대를 선도하는 미래지향의 생태공동체사회를 조성해간다는 꿈이였다. 깊숙한 산속에 펼쳐갈 꿈속의 그림에는 록색산업단지, 생태민속촌이 있었고 생태주택과 별장단지, 로인시대에 대비한 실버타운이 있었으며 초대형 산중호수와 수상공원, 그리고 자연동물 서식지도 있었다.   아라비안나이트같은 허황한 공상인가? 하지만 사고하기를 즐기는 머리 하나와 젊은 패기와 미래로 향한 꿈 하나로 1997년 해체위기에 놓인 조선족촌들을 통합하여 조선족 신도시“백두산타운”을 일떠세움으로써 일약 중국 조선족사회의 밝은 별로 떠올랐던 이가 바로 당시 제9기 전국인대대표로 활약하던 흑룡강성 해림시 백두산그룹의 회장 리동춘이였음을 상기하면 이런 의문은 다소나마 풀릴것이였다.   당년, 북경주재 우리 민족의 엘리트들이 펼치는 강력한 유세에 못이겨 민족의 소임을 다하고자 친인척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창설한 백두산그룹을 젊은이들에게 맡기고 결연히 고향을 떠나 혈혈단신 북경에 려장을 풀었던 리동춘.   동북삼성과 북경 사이를 누비며 조선족농촌지도자 한국연수를 수차례 조직하고 농촌진흥을 위한 전국범위의 심포지움도 개최하는 등 조선족 농촌의 후계지도자 양성에 땀동이를 쏟으면서도 한편으론 자신이 땅우에 굳건히 발을 붙이고 서있는것이 아니라 뜬구름우에 둥둥 실려가는듯한 석연치 못한 느낌에 남몰래 고민하고있던 차 리동춘은 뜻하지 않던 일로 인생의 중대한 전환기를 맞게 된다.   연변진출로 인생의 궤적을 바꾸다   때인즉 한국두레공동체 김진홍목사가 당시 연길시정부로부터 심산유곡의 땅 400헥타르를 임대하여 추진하던 개발프로젝트가 연변 현지에 파견된 실무진의 불찰로 난항을 겪던중, 때마침 언론을 통해 리동춘의 사적을 접한 김목사가 리동춘을 비롯한 중국조선족사회에 땅을 기부해주는 방법으로 이 난국을 수습해볼 료량으로 리동춘에게 사업요청을 해왔던것이다.   “연변으로 들어가서 함께 사업을 해보심이 어떨가요?”   결국 리동춘은 김진홍목사로부터 모든 개발권한을 위임받고 우선 100헥타르의 땅을 인수받아 2005년 그 깊은 산속에다 “연변민들레생태산업연구유한회사”를 설립하고 개발사업에 본격 착수하게 되는데 비록 기획중의 프로젝트가 남들 보기에 너무 거창했던건 사실이지만 실제 첫 합작사업으로 택한 품목은 지극히 현실적인 전통된장 생산이였던것이다.   그 품목선택의 리면에는 혹 리동춘의 햇내기적 기억이 깔려있었을지도 모른다.   1955년 흑룡강성 해림시 한 농사군 집안 7남매중 셋째로 태여난 리동춘은 “문화대혁명”이 한창이던 소학교시절 갑자기 알지 못할 원인으로 페결핵과 결핵성 륵막염에다 또 한쪽 다리가 쫄아붙는 이상한 병까지 덮쳐 다들 그를 얼마 못살고 죽는다고 했었다.   페결핵은 전염이 되는 병이라 그는 메주덩이를 가득 달아맨 두 간벽사이의 어두운 골방에 자기를 가두어넣고 진동하는 메주냄새와 씨름하며 어머니가 만들어준 메주가루를 일년 넘게 먹으며 버텼었다. 그러던 어느날 갑자기 삶의 의욕이 생겨나면서 그는 스스로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을 시작한다. 문제의 다리를 어린 동생들더러 꽁꽁 묶어 단단히 붙잡게 한다음 자체로 수십방의 쑥뜸을 뜨면서 이를 앙다물고 일어서는 연습에 매달린다. 두다리를 와들와들 떨면서라도 기적적으로 자리를 차고 일어설수 있게 되자 그는 한술 더 떠 겨릅대같이 마른 다리로 아버지가 신던 무거운 구식군용구두를 끌고 비칠거리며 매일 한시간씩 마을둘레를 철벅거리군 했다.   이렇게 하기를 일년 여, 그는 마침내 건강을 회복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에 이른다. 특유의 인내력과 위기극복의 지도력으로 스물한살에 공청단 서기를 하고 서른살에는 신합촌의 당총지서기로 되여 촌기업 백두산그룹을 일떠세운다.   혼신을 던져 일하는 그의 의지를 떠보기라도 하듯 위기가 또 한번 그를 시험대에 올린다. 40대 초반 몸속 위장에 종양 다섯개가 생겨서 대수술을 받게 되는데, 그러나 민간처방대로 날된장을 밥먹듯 먹으면서 위장을 씻어준덕에 종당에는 무리없이 이승에 남겨진다. 두번에 걸쳐 살아남은 일을 떠올리기만 하면 그는 된장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저도 모르게 가득 차오른다고 한다.   오뉴월에 된서리야 내리든 말든   한데 오뉴월에 된서리라더니 김진홍목사가 리동춘사장을 협조하라고 현지에 파견한 일군이 리동춘이 비 기독교인이라는 리유 하나로 협조는커녕 오히려 김진홍 목사와 리동춘이 제정하여 추진중인 사업에 사사건건 반대하고 훼방을 놓을 줄이야.   된장합작공장건물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마당대문을 닫아걸고 들어가지 못하게 저지하는가 하면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경찰에 신고하고 쩍하면 연길시와 자치주정부에 찾아다니면서 리동춘이 저들의 기업전체를 빼앗으려 한다고 고발하는 통에 리동춘은 수년간 파출소로부터 공안국 안전국 당기률검사위 등에 불려 다니며 조사를 받은 일이 얼마였는지 모른다.   설상가상으로 김진홍목사가 리동춘에게 기부한 100헥타르의 땅도 기부전에 이미 다른 사람에게 팔려버린터였다. 공장도 땅도 없어져 아주 거지신세가 된것이다. 불행중 다행이랄가 김진홍목사는 동료들 앞에서 “리동춘은 우리가 필요해서 모셔온 분인데 그를 이런 곤경에 처하게 하여 너무도 안타깝다”면서 림시공장을 짓고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도록 한화 2,000만원을 지원해주어 그나마 엉덩이를 들여놓고 된장생산은 할수 있게 됐다.   그야말로 힘든 나날의 연속이였다. 그러나 암만 역경에 처해도 굴할줄 모르는 리동춘은 끈질긴 성미와 함께 위기를 기회로 전환시키는 능력을 가진 사나이였다.   “합작이 안되면 우리 단독으로라도 하자! 크게 할수 없으면 작게라도 하자!”   이렇게 긍정적인 마음과 끈기있는 도전정신으로 기운을 추스르며 자그마한 집에서 된장 개발과 생산을 견지하는데, 고마웁게도 민들레마을 전통된장을 알아주는 연변소비자들로부터 주문이 꽤 자주 들어오는 편이였다. 회사의 녀직원을 시켜 뻐스를 타고 집집이 배달을 다니게 하면서 얼마 안되는 수입으로 연명을 해오던 일을 리동춘은 가끔 옛말처럼 외우군 한다.   된장의“오덕”문화, 우리 조선족은 된장을 많이 닮아있다   어려운 와중에도 해마다 전통된장축제를 치르면서 관련연구를 지속해오는 가운데 “장인합일 오덕문화(酱人合一五德文化)”의 리념을 확고히 수립하게 되며 아울러 그는 개량된장이 아닌 전통된장문화를 끝까지 지켜내기로 작심한다.   그의“오덕문화론”에 따르면, 된장은 령성(靈性)이 스며있는 식품인데 그 령성인즉 “5덕”이라는 것, 요컨대 다른 음식속에 섞여도 자기의 맛을 잃지 않는 화이부동 본성고수(和而不同 本性固守)의 단심(丹心)문화, 다른 음식과 잘 조화하면서 자기 맛을 내는 구동존이 관후포용(求同存異 寬厚包容)의 화심(和心)문화, 매운맛을 부드럽게 해주는 렬성순화 화목공존(烈性淳化 和睦共存)의 선심(善心)문화, 기름기와 비린내를 제거하는 거성제유 렴결봉공(驅腥除油 廉潔奉公)의 불심(佛心)문화, 오래 두어도 변질하지 않고 오히려 더 좋은 기능으로 승화하는 항구불변 송백지조(恒久不變 松柏志操)의 항심(恒心)문화! 이것이란다.   이 “오덕”은 우리 중국조선족의 특성과 너무 많이 닮아있다고 한다.“우리 조선족은 150년이나 중국속에서 다른 민족과 어울리면서 살아왔지만 종래로 자기의 문화를 잃은적이 없습니다! ”이런 “오덕”이 있기에 우리 조선족은 자기의 전통문화를 지키며 중국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민족으로 꿋꿋이 살아올수 있었다는 것이다!   아이템은 오아시스, 장로주 일거에 국가급브랜드로   “된장문화”에 대한 확고한 신념과 생태된장 개발의 큰 꿈이 있었기에 2008년의 “연변생태문화예술협회”의 창설과 그 이듬해 “민들레표”전통된장 무형문화재의 출원 등록이 비로소 가능했음은 그 누구라도 짐작할수 있을터이다. 전통된장의 성, 자치주“무형문화재”등록은 기실 된장술의 탄생을 예고한 전주곡이였다.   한차례 국제학술세미나에 참석하였던 조선의 한 과학자가 우리민족의 음식중에서 두가지 식품이 오래 두어도 영원히 변질하지 않고 오히려 더 좋은 맛과 기능을 만들어내는데 그것이 바로 발효식품인 전통된장과 술이며 이 두가지를 결합시키면 세계적 브랜드창출도 가능할 것이라는 아이디어를 내놨다.   순간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기분이 된 리동춘은 “바로 이거야!”하며 두 손벽을 짝!소리나게 마주쳤다. 연구 실험 생산 성공의 연결고리는 이음새가 탄탄하고 얼음에 박밀듯 거침이 없었다.“오덕(悟德)”장로주 발명특허를 출원한게 어제같은데 어느새 시중 소비자들 속에서 폭발적 인기를 누리면서 판매량을 10만 상자에 훌쩍 끌어올리고 두만강지역 국제투자무역박람회에서 국내외 여러 회사와 무려 3000만원에 달하는 판매계약까지 체결했으니 리동춘 자신마저 혀가 내둘릴 지경이였다.   2012년 5월 국가급간행물《중국브랜드》잡지사와 민들레의 전략합작파트너관계가 이루어지고 "오덕표"장로주는 일약 국가급브랜드로 승격했다. 이 소식에 접한 상해로마방(上海老磨坊) 그룹의 보스 오가빈은 즉시 불원천리하고 연길로 날아왔다. 공장과 기지를 며칠동안 깐깐히 돌아보면서 오가빈은 거대한 중국의 수천년 술양조력사를 바꾼 이가 어찌하여 중국의 동북변강 오지에서 나올수밖에 없었는지 심사숙고해보지 않을수가 없었다 한다.   어쨌거나 장로주에 대한 그들의 칭송은 한결같았다. 술과 된장의 융합, 이는 수천년 양주리념의 돌파이고 술에 영양가를 부여한것 역시 수천년 양주공예의 돌파라는 것. 술을 마시면서도 숙취의 고통을 받지 않고 오히려 영양을 흡취할수 있음은 그 자체가 일대기적이라는 것.“오덕표”장로주의 출현으로 중국의 무숙취 배갈생산의 새 기원이 펼쳐졌다는 것.     무지개 같은 전설이나 진배없어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헷갈릴 때도 있었던 리동춘이였다.   이어지는 된장꿈   된장술과 민들레술, 블루베리(蓝莓)술 등 계렬영양형“장로주”개발에 이어 연변의 지방특산물들인 사과배와 복분자로 사과배된장술, 복분자된장술 등 계렬상품도 개발해 출시한 리동춘은 올해의 된장축제행사는 여러 형제민족이 공동히 참여하는 “민속전통주축제”로 한다는 발상이다.   사과배된장술, 도라지된장술, 더덕된장술, 홍경천된장술...어느 술이든 된장과 만나면 기이한 변화가 일어난다니, 얼마나 신기한가...동북아의 “노란 자위”황금의 삼각주인 연변땅에 꿈씨를 심고 싶다는 리동춘, 이제 록음이 우거진 연변대지에 보다 시원한 미래가 펼쳐지려나보다.※   2014년 제1기   【李东春相关文章】 http://www.zoglo.net/blog/read/piaowenxi/64059/0/80 http://www.zoglo.net/blog/read/piaowenxi/64106/0/40 http://www.zoglo.net/blog/read/piaowenxi/64127/0/0 http://www.zoglo.net/blog/read/piaowenxi/93635/0/0  http://www.zoglo.net/blog/read/piaowenxi/202732/0/0    
100    《생명은 타지 않으면 썩는다》 댓글:  조회:5823  추천:19  2014-02-08
《생명은 타지 않으면 썩는다》 ―문학평론가 최삼룡선생을 만나다       서재의 풍경   일전 최삼룡평론가 댁으로 찾아갔던 필자는 방들을 둘러보며 혀를 내둘렀었다. 서재 한칸은 물론 세벽이 책으로 차넘쳤고 큰 객실 한쪽 벽은 서가로 되였으며 화장실로 들어가는 공간 역시 서가로 돼있었다. 그뿐이 아니였다. 서재에 다 들이지 못한 책들은 아직 창고에 박스채로 그냥 쌓여있었다. 그에게 있어서 책이 곧 재부다.   서재. 벽을 빙 둘러싸고 방바닥으로부터 천정까지 촘촘히 꽂혀있는 책들, 서재와 객실 창문 가까이에 놓여있는 두대의 컴퓨터 그리고 테이블과 문턱 혹은 구들 복판에 무질서(?)하게 쌓여있는 잡지와 신문과 글의 초고를 타자한 종이들, 원고지 갈피갈피에 정성껏 가위질하여 풀로 붙인 옛 자료들과 가쯘하게 묶은 옛 자료 복사본들―《싹트는 大地》,《滿洲詩人集》,《滿洲朝鮮詩人輯》,《滿洲朝鮮文藝選》,《北鄕》,《半島史話와 樂土滿洲》, 《颱風》,《北陸의 敍情》등등, 그중 복사해온 《滿鮮日報(만선일보)》복사본은 아예 통째로 쌓여있다. 최삼룡선생의 서재는 말그대로 서산문해(書山文海)다.   지금 최삼룡선생의 서재에는 사전류만 해도 100여종, 중국의 여느 도서관이나 문학가들에게서 찾아볼수 없는 귀중한 사전들도 있다. 뿐만 아니라 중국 조선족의 대표적인 작가, 시인들 례컨대 김학철이면 김학철, 조룡남이면 조룡남, 그들의 대표작품집을 포함해 거의 없는것이 없다.   현장평론가, 문학사가   연변사회과학원 문학예술연구소 소장 겸《문학과 예술》주필로 재직할 당시 최삼룡선생은 조선족문단에서 왕성한 정력으로 현장평론가로서의 평론활동에 종사했다. 특히 작가들로부터 탈고하는 원고를 놓고 평론해달라는 청탁이 자주 온다. 고 김성휘시인이 일찍 1980년대에 1만 5000행이 되는 장편서사시 《사랑이 무엇이길래》를 투고전에 보내왔을 때에도, 고 김운룡소설가가 100만자에 달하는 장편소설《광야의 아리랑》을 투고전에 보내왔을 때에도 최선생은 작품을 읽은후 자기의 견해를 솔직하게 밝혀 수정건의를 했고 평론도 써서 책과 함께 발표했다.   문학평론에 있어 그는 다산작가이다. 금년(2013년)에 들어와서도 《장백산》 잡지에 3편, 《도라지》 잡지에 4편,《연변문학》 잡지에 2편,《송화강》 잡지에 3편,《예술세계》잡지에 1편, 《길림신문》에 1편의 평론을 게재했고 그 외 여러가지 학술모임에서 발표했거나 이미 편집부에 교부되여 발표를 대기중인 평문, 론문이 4~5편 된다.   “평론이란 워낙 시끄러운 일로 욕먹기를 밥먹듯 한다”고 최선생은 말한다. 개중에는 “청탁평론”이나 “어용평론”이 많아서 평론가로서의 이미지가 초라할뿐만 아니라 “평가를 높게 하나 낮게 하나 잘하나 못하나 덮어놓고 욕”이라는것이다. 그리고 “사람이 워낙 좀 부실”하여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기 생각만 하는 축”이여서 뒤에서 그 누가 잡아 죽이려 해도 그는 “남이야 뭐라든 항상 솔직한 마음으로 사람이나 작품을 객관적으로 평가하려고 애를 쓴다”고 자평한다. 례를 들어 2012년 자치주성립 60주년 기념으로 제작된 대형 련속드라마 《장백산기슭의 나의 집(長白山下我的家)》이 한창 방송중에 있을 때 한 신문사에서 평론을 해달라는 간청이 와서 일주일 밤을 새우면서 써냈다. 그 평론은 간담회에서 발표되고 신문에도 게재되고 또 한어로 번역되여 나가기도 하였다. 그런데 반향이 별로였다. 정부에서 거금을 들여 제작했다는 프로그램에 부동한 견해를 가진 사람이 적지 않은데다 글자체가 “청탁평론”이여서 말썽이 있으리라는것은 이미 예상했던 바였다. 하지만 작품을 함부로 비판할수도 없는 상황이고 또한 문제점을 제출하여도 통과될리 만무하거나 무작정 삭제가 불가피한 현실이라 최선생은 그저 허허 웃으면서 사는것이 이러할진저 하고 말았다.   당대 조선족문학 현장평론에서 뿐만 아니라 민간문학연구에서도 최삼룡선생은 괄목할만한 성과를 쌓았다. 1990년 8월 일본 오사카정법대학에서 개최한 국제학술회에서 발표한《재래설화변이고》로부터 1991년 고려대학 민족무화연구소에서 발표한 《백두산 설화의 의미》, 《송화강》잡지에 1년 련재한 《신민요연구》, 그리고 《구경전(狗耕田)형 민담의 비교연구》,《방리득보(放鯉得寶)형 민담연구》, 금년 8월 황구연연구회에서 발표한 론문 《황구연의 민담에서 사랑과 결혼》등 20여만자가 된다. 그는 “민간문학에 대한 연구는 우리 민족의 원초적인 의식과 신앙들이 깔려있어 참 재미있었다”고 말한다.   최선생은 중국조선족문학사 연구에서도 큰 성과를 거두었다. 중국조선족의 첫 문학사로 조성일, 권철 주필의 《중국조선족문학사》가 1990년에 중국과 한국에서 각기 출판되였는데 이 책에서 최삼룡선생은 1966년부터 1986년까지 20년간의 중국 조선족문학사 부분을 집필했다. 퇴직후 21세기 들어 오상순 주필의 《중국조선족문학사》(2005년 출판)에서는 해방후의 시문학과 산문문학의 집필을 담당하였고 북경대학 조선문학연구소에서 편찬한《중국조선족문학사》(2004년 출판)에서는 중국 조선족 시문학사, 산문문학사 부분을 맡았다. 현재 최선생은 《중국조선족문학지도》라고 제목한 자기의 문학사를 집필중이다.   해방전 자료 발굴, 정리   1999년 4월 정년퇴직한 최삼룡선생은 주요한 정력과 시간을 해방전 조선족 문학자료의 발굴과 연구에 바치고있는데 그가 여기에 발을 들여놓은것은 정년후 연변인민출판사에서 출판하는 《20세기 중국조선족 문학자료 전집》편찬진에 참가하여서부터이다.   그가 처음 편찬을 맡은 책은 친일문학권이였다. 최선생은 자기의 서재와 연변대학도서관을 뒤집듯이 들추어가며 2002년 책을 편찬해내고야 말았는데 사회적반향이 괜찮았다.   이 책의 출판은 최선생이 해방전 조선족문학연구에 보다 깊이 개입하게 된 계기로 작용했다. 그해 여름 한국정신문화원에서 열린 국제학술회의에 참가한 기회에 그는 꼬박 9일간 연세대 귀중도서관과 국회도선관에 들어가 자료발굴작업을 했다. 거기서 최선생은 친일문학자료를 많이 찾아냈을뿐아니라 해방전 만주조선인 문학작품도 숱해 접했다. 특히 시와 수필이 거의 손을 대지 않은 상태임에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원래 권철교수 등은 컴퓨터작업이 없을 때라 육필작업만 가능했음으로 대표적인 작가들의 대표작외에 대부분 자료들을 베껴낼수가 없었던것이다.   최삼룡선생은 남들이 다 수확한 텅 빈 들에서 홀로 재료를 발굴하는 자기의 작업을 "이삭줍기"로 표현했다. 그런데 이런 "이삭줍기"는 말이 헐치 결코 쉬운 일이 아니였다. 스스로 경비를 팔아 려관을 잡고 교통비를 해결하고 도서관에 들어가 문을 닫을 때까지 작업을 하곤 했는데 어떤 날에는 복사료만 해도 한화로 10만원 나갔었다. 2002년부터 2012년까지 이렇게  하기를 5~6차례, 그래도 리상규선생 같은 한국의 고마운 이들이 숙박료도 대주고 자가용으로 도서관문전까지 데려다주군 하여서 경제적으로 큰 무리가 없었다면서 항상 그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간직하고있다고 한다.   한국 도서관들에 보관되여 있는 신문, 잡지가 이미 낡았고 복사해온 글자들이 선명하지 않은데다가 전부 우리 글과 한자(正字 즉 번체자)가 혼용된 자료라 정리시 여러 모로 품이 많이 들었지만 최삼룡선생은 자료를 인용할 때 문헌의 가치에 손색이 갈세라 한자와 철자법과 띄여쓰기를 드팀없이 원본에 따랐다. 때로는 글자 하나를 복원하는데 하루가 걸렸고 시 한수를 복원하는데 사흘씩 걸렸다. 그래도 복원을 못하면 출판에 교부할 때 부득불 ◯이란 기호를 대용하는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이삭줍기”에 기초하여 2003년 《세월에 묻힌 겨레의 기억》이라는 총제목밑에 《강경애와 간도》등 글을 《연변문학》에 1년간 12기에 거쳐 련재하였으며 2005년에는 《문학과 예술》잡지에 《문학기행》이라는 표제로 6편 련재하였다. 그리고 연변대학 조선(한국)어문학연구소와 연변인민출판사에서 간행한 해방전문학총서에 《현대시집성》,《항일문학》,《해방전민요》《종합산문(상, 하)》등 9권을 륙속 출판하였다.   2006년 3월 한국의 대통령직속 《친일반민족행위규명위원회》에서 최삼룡선생에게 만주조선인친일문학연구에 대한 정식요청이 왔다. 결과 반년간의 품을 들여 집필한 론문《재만조선인친일문학연구》가 유관자료집에 게재되였고 이 론문은 후에 한국민족문제연구소로부터 “참고도서”로 삼았다는 감사의 말씀을 전해받았다. 이 론문 집필중 자연스럽게 묶어진《만주조선인친일문학작품집》은 2008년 보고사에 의해 출판되였고 2009년에는 한국문화체육부의 《2009년 대한민국우수학술도서》로 선정됐다.   2010년 한국 보고사에서 또 최삼룡, 허경진 편찬《만주기행문》을 펴냈다. 이 책의 편찬에 동참한 한국 연세대 허경진교수는 이 책의 머리글에서 최삼룡선생을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문학대계 30권을 편찬하면서 연변의 학자 여러분을 알게 되였는데 그 가운데 가장 열정적인 학자가 바로 최삼룡선생이였다. 그분은《조국조선민족문학대계》30권가운데 5권을 책임 편찬하였는데 대부분 본인이 여러해동안 수집해온 자료를 바탕으로 편찬하였다. 나는 중국조선민족문학학술대회를 5년째 주관했는데 해마다 그분의 열정적인 발표와 토론을 들으면서 함께 책을 쓰고싶은 생각이 들었다. 조선민족문학에 대한 뜨거운 사랑과 해박한 지식, 방대한 자료 그리고 컴퓨터를 련상케하는 기억력이 부러웠다.”(최삼룡, 허경진 편찬 《만주기행문》보고사 2010년 5월 제1판 머리말에서)   2012년 민족출판사에서 최삼룡이 편찬한 《해방전아동문학(상, 하)》을 출간하였으며 이제 《해방전기행문》, 《해방전평론집》등 6권이 2013년 년내에 륙속 출간된다고 한다.   최선생은 암만 둘러봐도 20세기 우리의 문학을 수집, 정리하는 일은 자신들 세대 문인들이 해야 할 일이란다. 그래서 최선생은 계속 해방전 조선족문학에 관심을 두면서 수필집《만주조선문예선(滿洲朝鮮文藝選)》, 장편기행문 《백두산행기(白頭山行記)》, 력사문헌 《강북일기(江北日記)》,《간도개척사(間島開拓史)》 등 중국조선족력사문화와 관계되는 희귀본도서를 수집하느라 숱한 시간과 정력, 재력을 소모하였단다. 여러가지 여건의 미비로 이 책들의 출판은 아직 묘연(渺然)하지만 그는 볕을 볼날이 어느때든 반드시 있으리라고 확신한다.   문학과 인생   20세기 우리 중국조선족문학 수집, 연구, 편찬 작업을 지대한 흥취와 열정을 갖고 열심히 했고 그속에서 자기가 몰랐던 지난 시기 우리문화 공부도 많이 했다고 말하는 최선생은 그 과정을 일컬어 문학과 인생을 함께 향수하는 과정이였다고 갈파한다.   말썽 많은 해방전 만주조선인 친일문학을 연구하면서 최삼룡선생은 세월의 먼지속에 깊숙히 파묻힌 재료를 적잖이 발굴했다. 이를테면 박팔양과 김영팔의 친일행적이 그 생동한 례로 된다. 박팔양은 만주에 건너온 다음 어용신문사에서 부장으로 일했으며 만주협회총부 리사로도 있었는데 이는 해방전 만주 조선인의 정치직무에서 최고의 직위였다. 그리고 친일작품도 썼다. 김영팔은 만주에 온 다음 신경방송국에서 아나운서로 있었고 협화회 문화부 부장으로 있기도 했으며 통화협화회에 임직하기도 했다. 그는 만주건국 10주년 기념으로 일본 욱일훈장을 수여받고 연길공원에 동상까지 세웠던 친일 주구 김동한을 기념하는 장막연극 《김동한》대본을 창작하고 공연에서 연출 겸 배우를 맡기도 했다. 그런데 이 반동연극의 작자가 바로 김영팔이라는것을 다른 누구도 아닌 최선생이 밝혀냈다. 그리고 1941년에 《만선일보》 는 만주 조선문인들에게《大東亞戰爭과 文人들의 覺悟》라는 제목의 글을 쓸것을 강요하였는데 당시 이에 호응하여 만주 조선문인들이 쓴 같은 제목의 글 11편을 최삼룡선생은 모조리 발굴해냈다.   최삼룡선생은 이러한 재료의 발굴 연구 편찬과정은 참으로 문학과 인생의 참맛을 고루 맛보는 과정이였으며 그런 의미에서 자신은 문학과 인생을 덤으로 누린 행운아라고 한다.   김학철문학 연구   “김학철선생의 문학은 중국 조선족문학의 정상이다.《격정시대》를 비롯해 그의 장, 중, 단편소설들은 20세기 우리 중국 조선족문학의 최고봉이며 그의 잡문, 수필, 회상기, 전기 등은 우리 중국 조선족 산문문학을 형태적으로 정착시키는데 절대적인 작용을 했다. 특히 그의 문학의 비판리성은 중국 조선족뿐만 아니라 20세기 중국 전체 지식인들을 견주어 봐도 높이 평가받을만 하다.” 김학철선생에 대한 최삼룡선생의 평가이다.   이미 김학철문학에 대한 글을 15만자 이상 발표했지만 아직 하지 못한 말이 너무 많고 갈라야 할 시비가 너무 많아 잠시 중단했다고 한다. 이제 가장 민감한 부분에 대한 집필에 손을 대야 하겠는데, 원래 생각했던 것보다 엄청 큰 어려움이 예상된다고 한다.   “《김학철론》으로 평론가로서의 내 인생의 마침표를 찍고싶다. 그러기에 잘 쓰고싶고 따라서 지금 함부로 쓰지를 못하고있다.”   “생명은 타지 않으면 썩는다.” 평론가 최선생의 좌우명이다. 오늘도 최삼룡선생은 고래희를 훨씬 넘긴 년세임에도 지칠줄 모르고 매일 10여시간씩 컴퓨터앞에서 꾸준히 작업해나가고 있다.   2013년 제6기  
99    사진시대 촬영공부론 댓글:  조회:6912  추천:25  2013-01-26
사진시대 촬영공부론   오늘 이 세상의 모든 현상이 문자로 표현되기에 앞서 먼저 사진과 같은 이미지로 표현되고있다고 한다면 지나친 과장일가? 지난 20세기를 활자의 시대였다고 한다면 오늘 우리가 살고있는 21세기를 단연 사진의 시대라고 할수 있을것이다. 모든 영상물도 기실 사진의 연장에 다름 아니다. 카메라의 세대교체도 그 속도가 절대 컴퓨터에 못지않다. 디지털카메라의 폭발적인 확산으로 원래 사진기자나 사진예술가의 전유물이였던 사진촬영은 오늘 대중생활의 일부, 놀이의 하나로 되였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촬영전문가들의 역할이 박탈당한것은 아니다. 금년봄 어느 촬영동호회의 일원으로 되어 촬영을 배우면서 절실히 느낀것이 이점이다. 선경대의 가을단풍이며 “9.3”명절의 연길야경이며 맹령사과절의 풍년무며 봄물먹은 평강벌이며 백년부락의 재봉어머니며를 만나며 카메라로 한폭한폭의 사진을 담아내는 가운데 나는 전문기술을 소유한 전문촬영가들의 지도와 인도가 얼마나 필요한지를 새삼 통감하게 되였다.   그들은 리론과 실천경험을 겸비했을 뿐 아니라 그것을 보류없이 타인에게 전수한다. 다년간 연변땅을 메주밟듯 해온 그들은 동호회원들의 촬영실기를 위해 시기, 날씨와 안전 등을 고려한 려정을 짜느라 로심초사하며 새로운 행선지를 개척하기 위해 사전답사를 떠나기도 한다. 동호회의 빈번한 활동에 빠짐없이 참가하지는 못하지만 나는 항상 그들의 로고에 감사의 마음을 금치 못한다.   동호회와 함께 하는 시간이 나에겐 참으로 소중하다. 함께하는 행정에 즐거움이 가득할뿐 아니라 촬영을 필한 뒤에도 그 즐거움이 그냥 이어지니 말이다. 사진을 편집하고 저장하고 발표하고 교류하는 것 모두가 즐거움의 연장 그 자체다.   고백해야 할 사항이 있다. 나의 촬영경력이 꽤나 길어 적으만치 30여년이라는 것. “갈매기(海鷗)”표 카메라로 시작한 나의 촬영은 그 초기 사진인화지로 직접 사진을 씻어서 발표할수 있었을만큼 조금은 “전업적”이였던 적도 있었고 신문에 적지 않은 량의 보도사진을  발표해왔던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촬영입문의 초보자”라고 자인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내가 금년들어 사진배우기를 새로 시작하기 직전까지 디지털카메라의 “수동모드”를 전혀 쓸 줄 몰랐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수동모드”를 모른다는것은 내가 그때까지 “전자동모드”로 사진을 찍어왔다는 것인데, 그것은 카메라셔터를 누를 줄만 알면 나머지는 모두 기계가 알아서 해준다는 의미다. 우수한 사진에는 사상이 살아숨쉰다고 하는데 기계가 사진에 사상을 불어넣는 작업을 할 수가 있겠는가? 나절로도 이건 아니다 싶어 큰 마음먹고 좀 자신을 개변시켜볼 양으로 “전자동은 너무 그렇고 반자동을 좀...”라고 했다.   이때 한 전문가 친구가 권고의 말 한마디를 했다. “실패를 미리 많이 맛보더라도 처음부터 완전수동에 집착하라. 그것이 빠른 길이다.”   “완전수동모드(M)”로 찍은 첫 몇장의 사진이 모조리 캄캄칠야 아니면 새하얀 백지가 되여나왔다. 나의 촬영지식이 완전 “제로상태”임이 백일하에 드러나버린것이다. 그렇게 나의 “초짜의 입문공부”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캄캄칠야”와 “백지”의 원인을 찾아내는 작업은 뜻밖에도 지극히 간단했다. 빛을 너무 적게 주면 사진이 백지가 되고 빛을 너무 많이 주면 새까맣게 되는것이다. 그러니까 빛을 너무 많이 주었으면 덜어내서 적게 주면 된다는 얘기다. 알고보면 너무나도 간단한데 우리는 흔히 입문의 그 문턱을 넘기를 거부한다. 조리개 값과 셔터 속도, iso 감광도, 그리고 해상도...몇개 안되는 개념의 문턱을 그토록 넘기 어려워한다는 말이다. 포토샵공부 역시 그렇다.    사진을 배워 뭘 하냐? 가끔 만나는 물음. 아주 단순하지만 록록치는 않은 물음이다. 나의 경우 보통 “취미로 하는거야”라고 짤막히 대답하지만, 평소 촬영을 재미로 하는 일이라고 생각해왔던 나인지라 “재미가 없다면 내가 왜 이딴짓을 하겠어? 재직때는 하고 싶어도 못했거든.” 이러기도 하지만, 취미가 과연 전부인가 하는 의혹을 가질 때도 있다.   그러면 생각이 점점 깊어진다. “취미로 촬영을 한다.” 그래. 취미로 하는 수가 있지. “배운다는건 항상 즐거운 일이잖아?” 그래, 컴 앞에서 해방되여 야외로 나가고 사람들과 만나고 건강을 챙기고 스트레스도 풀고 모르는것을 배워익힌다는 모종의 획득감.    그러나 그것이 목적 그 자체일가? 젓가락질이 재미있어서 료리를 먹는다? 삽질이 재미나서 과일나무를 떠다 옮긴다? 분명 석연치 않은 구석이다. 그럼 낚시질은? 많은 낚시군들의 낚시질은 그 취미가 잡아올린 고기를 료리해 먹는데 있지 않고 고기를 낚아올리는 그 순간의 자극의 짜릿함에 있다고들 하는데.   그러나 낚시질과 촬영은 성격이 판판 다른 활동일터이다. 낚시는 생계 혹은 쾌감획득을 목적으로 생명을 가진 수중동물을 “사기적수법”으로 유혹해서 잡아올리는 행위인 반면에 촬영, 례컨대 예술촬영은 순간순간의 빛으로 예술이미지를 그려내는 창조적 예술활동이라고 할수있겠다. 그래서 촬영을 “찰나의 미학”이라고도 하며 사진은 “붓대신 빛으로 그리는 그림”이라고도 한다. 자치주창립 60주년을 기념하여 연길에서는 부르하통강반에서 꽃불축제를 벌렸었다. 하늘에 불꽃을 쏘아올려 만든, 순간에 폭발했다 순간에 사라지는 아름다운 화폭을 그 순간 빛의 원리로 사진속에 잡아넣어 영구화시키는 촬영자들의 창작, 그것은 참으로 고상한 예술창조행위라 하겠다. 그런 우수한 사진들을 그저 취미로, 사진 찍기를 좋아하니까 찍은 사진이라고 할수 있을가? “취미론”, 어찌 보면 그것은 자신을 취미란 작은 울타리에 가두어넣는 “생각의 조각”일수도 있다. 그런 “생각의 조각”은 촬영활동을 예술창조의 행위로 승화시키고자 하는 노력의 목표설정에 반기를 들도록 유혹할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취미론”으로부터의 탈출을 꾀하면 더 넓은 공간이 보일수도 있을것이다.   예술창작의 동기가 없이 놀음으로 하는 촬영은 단순 취미에 귀결시켜도 무방하겠으나 창작을 목적으로 한 촬영활동은 그렇지 않다고 봐야겠다. 모종의 사상을 사진을 통하여 표달하려는 작가, 암만 아마추어작가라 해도 이런 목표의 설정은 가능할것이며 그것은 의미있는 작업일터이다. 사상이 있는 사진, 아마 이것이 우리가 추구해야 할 좋은 사진이 아닐가? 이런 의미에서는 창작사상의 깊이를 벼리는 작업이 필수일 것이다.   자신의 삶의 근저에서 괴여나온 생동한 사상을 순간의 빛에 고착된 피사체이미지를 통해 표현하는 사진, 그런 사진을 만들어내려는 노력이 많이 시도돼야 할것이라고 생각한다. 현대사진의 특정경향을 따르면서 새로운 표현양식을 보여주는 광고 등 사진작품들이 시각적 충격을 주는 경우가 많다. 그런 작품들은 보는 이들의 감성을 깊이 자극하고 시선을 오래동안 잡아두는 힘을 가지고있는 경우가 허다하지만 전통적인 사진 표현양식의 매력이 아주 색바래버린 것은 결코 아니다. 물론 디지털기술과 사진의 만남으로 사진을 비롯한 시각예술의 령역이 무한대로 확장된 오늘 시각예술에 대한 우리의 감수성도 가급적 다양해져야 할것이다.   2012년 제6기
98    민족은 문화의 개념이지 혈통의 개념이 아니다 댓글:  조회:10029  추천:33  2011-11-12
  민족은 문화의 개념이지 혈통의 개념이 아니다     “민족은 문화의 개념이지 혈통의 개념이 아니다.” 이는 시인 남영전의 유명한 명제이다. 이 말은 민족이 혈통과 무관하다는 것이 아니라 민족이 혈통으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컨대 같은 민족이라 해서 혈통이 반드시 다 같은 것이 아니고 또 민족이 다르다 해서 혈통이 반드시 다른 건 아니라는 것이다. 고로 남영전은 이렇게 말한다. 민간에서 말하다시피 500년 전 우리는 다 한집식구다. 500년 전에 한집 식구가 아니라 해도 수 천 년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는 긍정코 한집 식구다.   중화의 56개 형제민족은 아주 오랜 옛날부터 이 땅위에서 살아오면서 광활하고 부요한 땅을 함께 개척해왔다. 夏, 商, 周에서 秦汉에 이르기까지 한족의 선민 화족과 하족이 황하유역을 개발할 때 여러 소수민족의 선민들도 동시에 주변의 광대한 지역을 개발하였다. 동북만 보아도 우리 조선민족의 선민들인 부여, 고구려, 몽골민족의 선민들인 동호, 다다, 만족의 선민들인 숙신, 읍루 등 부족집단들은 모두 통일된 다민족국가의 건립에 거대한 공헌을 하였다.   지난 날 우리는 민족을 담론할 때 흔히 혈통에 대해 거론하기를 즐겨했다. 한 민족의 성원들은 왕왕 본 민족의 몸에서 흐르는 피는 같은 것이며 아울러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것을 믿어마지않았다. 하지만 실상 민족이란 “실제로 같은 혈통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렇다는 ‘믿음’을 공유하는 사람들의 집합”(한국 고려대학 정호영 교수:《민족공동체의 형성과 변화: 역사적, 이론적 접근》)인 것이다. 엄격한 과학적 의의에서 말하면 우리나라 현존 민족이나 역사상 존재했던 소유의 민족은 그 혈통이 아주 순수한 것이 아니었으며 모두다 정도부동하게 부동한 혈통이 서로 섞이는 과정을 겪어왔었다. 조선민족도 예외가 아니었다. 한국 건국대의 신룡복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조선민족은 35개 이상의 부동한 씨족, 부족이 융합과정을 거쳐 형성된 것이다.   상고사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우리는 씨족은 혈연관계를 유대로 결성된 인간군체이고 부락은 혈연관계를 토대로 구성된 씨족군체이며 부락연맹은 혈연관계를 매개로 공동이익을 위해 형성된 여러 개의 부락임을 알 수 있다. 그러니까 씨족, 부락, 부락연맹은 혈연관계를 특징으로 하고 있고, 민족은 혈연관계를 초월해서 역사淵源, 생산방식, 언어, 문화 풍속습관 및 심리적동질감 등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같은 혈통의 사람들도 기나 긴 역사 시기 복잡한 이동과정을 거치면서 하나의 민족으로만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개의 민족으로 거듭날 수 있으며 같은 도리로 원래 서로 다른 지역에서 살던 부동한 혈통의 사람들도 여러 가지 원인으로 한 지역에 몰리고 장기간 함께 생활함으로 해서 한 민족으로 융합될 수 있는 것이다. 위에서 말한 역사연원, 생산방식, 언어, 문화 풍속습관 및 심리적동질감 이런 것은 다 문화적 개념이다. 이처럼 수많은 혈통집단이 부동한 민족으로 형성되는 데는 문화적 요소가 작용하는 것이지 혈통자체가 결정적 작용을 하는 것이 아니다.   남영전은《토템문화와 조화세계》라는 논문에서 자신의 시조 南敏에 대해 말한바 있다. 남민은 당 왕조 때의 凤阳府 汝南사람으로서 당나라 천보 14년(서기 755년)에 按廉使의 사신 신분으로 일본에 건너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태풍을 만나 신라국에 표착, 그곳에 자리 잡게 되었는데 남씨가족의 시조로 되었다. 그의 이와 같은 예는 기실 보기 드문 것이 아니다.   조선민족과 漢민족은 같은 성씨를 다수 쓰고 있는데, 설사 김씨, 리씨, 최씨 등 짜장 조선민족 성씨로 보여지는 성씨도 더러 중원이나 그 주변 지역에서 들어간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박씨는 그야말로 조선민족의 원색적인 성씨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오늘의 하북, 료녕 등 성에 박씨가 수천 명 살고 있는데 그들의 민족성분은 조선족이 아닌 한족이나 만족이다. 그들은 모두 청나라 때 조선이민의 후예들이다. 중화민족의 구성원으로서 우리나라 있는 여러 민족은 “네 속에 내가 있고 내속에 네가 있는 관계”인 것이다.    민족과 혈통에 대해서 기실 우리의 옛 성현들은 명확한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유가의 “华夷之辩”에서도 볼 수 있다시피 공자는 춘추를 지어 이르되 “이적 입중국 하면 칙 중국지요 중국 입이적하면 칙 이적지 하니라(夷狄入中國,則中國之,中國入夷狄,則夷狄之)”라고 했다. 말하자면 동이나 북적 같은 중원주변의 민족이 중원지역에 들어와 화족이나 하족의 문화습속을 따르면 그들은 바로 화하족으로 되는 것이고 반대로 중원의 화족이나 하족이 주변지역에 들어가 그들의 문화습속을 익히게 되면 그들은 동이나 북적으로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동이족이냐 화하족이냐는 혈통에 따라 갈라지는 게 아니고 문화적인 구별에 의해 나뉜다는 것이다.   공자의 이 말은 그른데 없다. 여러 민족은 다 자신의 독특한 문화를 갖고 있다. 문화의 구별이 없으면 민족의 구분도 없는 것이다. 56개 민족은 56가지 문화를 의미한다. 그러나 문화의 다름이 곧 문명의 충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56개 문화는 상부상조하는 그런 관계인바 서로 보완하고 어울리면서 함께 빛을 내는 중화민족의 찬란한 대 문화를 형성한 것이다. 그것은 마치 56가지 색다른 꽃이 서로 아름다움을 다투면서 웅장하고 눈부신 연기를 펼치는 것과도 같다. 같은 종의 꽃이 저 앞산에 만개해도 기가 막히게 아름답겠지만 수십 종의 꽃들이 무덕무덕 저 동산에 만발한 모습도 과시 장관일 것이 아닌가!   새 중국이 탄생한 이래 56개 민족으로 구성된 중화민족은 민족대단합의 깃발을 추켜들고 일심동체로 사회주의건설과 개혁개방사업을 추진하였으며 드높은 자부심으로 장려한 역사를 창조했다.   중화민족이 거대한 응집력을 과시할 수 있은 것은 중국공산당이란 이 견강한 영도핵심이 있었기 때문이며 올바른 민족정책과 중국특색의 사회주의제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 중화민족의 분복이자 자랑이다. 우리는 이를 소중히 여겨 손상이 가지 않게 해야 할 것이다.   “한족이 소수민족과 떨어질 수 없고 소수민족이 한족과 떨어질 수 없으며 여러 소수민족도 서로 떨어질 수 없다.” 오늘 날 이 이념은 이미 여러 민족인민의 마음속에 깊이 각인되어있으며 따라서 단결 분투하여 번영과 발전을 이룩하는 것은 이미 여러 민족인민의 공동한 추구로 되었다. 이는 중화민족이 자강불식의 정신으로 부단히 전진하는데 있어서의 힘의 원천이기도 하다.   “민족은 혈통으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문화로 구분된다. 혈통으로 말하면 각 민족은 모두 형제다.” 남영전의 이 말은 참으로 쇳소리 나는 지론이다.   (2011년 7월 8일, 길림성문련, 성작가협회, 성사회과학원과 길림일   보그룹에서 공동개최한 남영전토템시연구토론회석상에서 한 발언) 【原 文】   民族是文化概念,而不是血统概念   朴文熙     诗人南永前有一句著名的命题叫“民族是文化概念,而不是血统概念”。这并不是说民族与血统无关,而是说民族不是以血统来区分的。比如朝鲜族,整个民族血统却未必都一样;再说我国56个兄弟民族,其血统也未必就不一样。所以南永前说:民间有个说法,500年前咱们是一家。如果500年前不是一家,再往回上溯几千年我们肯定是一家。   我们中华56个兄弟民族从遥远的古代起就劳动、生息、繁衍在我们祖国的土地上, 共同开发广阔、富饶的土地。从夏、商、周至秦汉时期,当汉族的先民华夏族开发黄河流域的时候,各少数民族的先民也同时开发了周围的广大地区。单说在东北,我们朝鲜族的祖先夫余、高句丽,蒙古族的先民东胡、鞑靼,满族的先民肃慎、挹娄等部族集团都为统一的多民族国家的建立作出了巨大的贡献。   通常人们讲民族的时候,都喜欢提到血统,过去,一个民族的每一个成员往往确信本民族成员身上都流着同样的血,而且都坚信“血浓于水”。其实,民族并不是具有同一血统的人群,而是“确信”他们具有同一血统的人群。从严格的科学意义上而言,我国现代的以及在历史上曾经存在过的所有民族,其血统都不是纯而又纯的,都曾经历过不同类型的融合。就拿朝鲜族来说,据韩国建国大学申福龙教授的研究,朝鲜民族是以35个以上不同氏族、部族融合而成的。   查一下上古史, 我们便可知道氏族是以血缘关系为纽带而结成的人们的共同体;部落是以血缘关系为基础而构成的氏族群体;部落联盟是以血缘关系为中介,为了共同的利益而形成的多个部落的联合体。就是说, 氏族、部落、部落联盟以血缘关系为特征, 而民族则超越血缘关系, 以历史渊源、生产方式、语言、文化、风俗习惯以及心理认同等为特征。虽是一个血统的人群,如经过相当长的历史时期复杂的移动过程,也就可以演化出多个民族;同理,原本在不同地域生活的不同血统的人群,因种种原因走到一起,在共同地域长期共同生活,那也就可以融合成一个民族。   南永前在一篇叫做《图腾文化与和谐世界》的论文里谈到自己的祖先,说他的始祖南敏就是唐朝凤阳府汝南人,唐天宝十四年(公元755年)以按廉使的使臣身份去日本返回途中遇上了台风飘泊到当时的新罗国定居,成为南氏家族的始祖。像他这样的例子其实并非罕见。朝汉两族姓氏多有相同,即使是金、李、崔等看起来十分地道的朝鲜族姓氏,其中的若干支也是来自汉族。朴氏当属是朝鲜族的原生姓氏,但如今河北、辽宁等省就有几千名朴氏分别是汉族和满族,而他们都是清朝时期朝鲜移民的后代。作为中华民族的成员,我国各民族是你中有我,我中有你的关系, 论血统是无法分得清楚的, 而且也没有必要分清楚的。   其实对于民族与血统这个问题,我们的古圣贤早已有了明确的认识。看儒家的“华夷之辩”,孔子老人家便作春秋曰:“夷狄入中国,则中国之,中国入夷狄,则夷狄之”,也就是说,夷狄到了中原地区,习用了华夏文化习俗,他们就成了华夏族,而中原华夏族如果进入了边远地区,习用了夷狄的文化习俗,他们就成为了夷狄,是夷狄还是华夏不在于血统,而在于所习用的文化,就是说华夷之辩不是血统上的区别而是文化上的差异。   孔夫子说的一点都没有错,各民族都有自己独特的文化。56个民族就意味着56种文化。然而,文化的不同,并不意味着文明的冲突。56个文化相辅相成、相得益彰、相映成趣,好似56个花朵争奇斗艳绽放异彩,形成了一个中华民族灿烂的大文化,这就大大胜过一花独放。   新中国诞生以来,由56个民族构成的中华民族始终展现出巨大的向心力、凝聚力,展现出无比的自信心、自豪感。多年来,各族人民高举民族大团结的伟大旗帜,和衷共济、和睦相处、和谐发展,携手推进社会主义建设和改革开放事业,谱写了中华民族自强不息、团结奋进的壮丽史诗。   中华民族之所以能够展现出如此巨大的向心力、凝聚力,这正是因为有了中国共产党这一坚强领导核心以及她所制定的光辉民族政策, 加上无比优越的中国特色社会主义制度。这是我们中华民族特有的福分,足以让我们引以为自豪,我们必须万分的珍视她,维护她。   今天,“汉族离不开少数民族、少数民族离不开汉族、各少数民族之间也相互离不开”的理念已经成为各族人民的自觉行动,共同团结奋斗、共同繁荣发展的主题已经成为各族人民的共同追求。这是中华民族自强不息、不断前进的力量源泉。   南永前“民族是以文化区分的,而不是以血统区分的,论血统各民族都是兄弟”这一句,真真切切、掷地有声。   (2011年7月8日在吉林省文联、省作协、省社科院和吉林日报报业集团联合主办的南永前图腾诗研讨会上的发言)
97    된장술의 탄생과 그 산고 댓글:  조회:10795  추천:28  2011-11-09
된장술의 탄생과 그 산고   --연변민들레마을과 연변두레마을 분쟁사건 조사실기     1. 술의 력사를 바꾼 오덕장로주   요즘 연변의 깊은 산골짜기에서 태여난 된장술이 항간에 급속히 퍼지면서 크게 화제거리다.  된장이 갖고있는 영양물질과 질병을 치료하고 예방할수 있는 기능들이 분명 된장술속에 녹아 들어가 출시 시작부터 소비자들의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고 술생산허가부문인 길림성기술감독국의 현장검사와 엄격한 검측을 거쳐 생산되고있으니말이다.   하다면 수천년 양주사상 콩에서 술을 걸러낸 전례가 워낙 없는데, 그래 연변민들레마을 리동춘회장을 비롯한 된장술 양조자 제씨들이 짜장 술의 수천년력사를 바꾸었다는 말인가? 이에 화답이라도 하듯 지난 6월 중국조선족과학기술자협회의 주최하에 연변조선족자치주 사상 최초로 열린 “전통된장과 된장술의 영양학적 가치 발굴을 위한 학술세미나”에서는 전문가들이 이구동성으로 장로주의 탄생을 양주업계의 획기적인 혁명으로 일컫고 그 영양학적가치를 높이 평가하였으니 이는 필경 일대 경사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흔히 좋은 결과가 쉽게 얻어지는것이 아니듯이 된장술 역시 잉태하여 고고성을 터칠 때까지 모진 산고를 동반했었다.   2. 한국목사와 중국기업인의 악수        연변민들레마을과 된장술의 탄생을 알아보자면 우선 그들의 오늘이 있도록 조건을 제공하여준 "연변두레마을"을 말하지 않을수 없다.   연변두레마을은 1997년, 한국 경기도 구리시 두레교회의 김진홍목사가 연변조선족자치주 연길시 의란진 련화촌에 투자하여 설립한 한국독자 기업이다. 김진홍목사는 일찍 60년대 살길이 꽉 막힌 사회최하층 걸식자들을 이끌고 남양만이라는 곳에 새마을 생존터를 마련해주었던 전기적 인물이다. 그후 그는 이러한 공동체운동을 펼쳐나가기 위하여 한국 지리산자락에 "두레공동체운동본부"를 설립하고 세계 여러나라에 공동체운동정신을 고양, 전파하는 사회적기업체들을 만들어 나갔었다.   당시 연변의 후한 투자유치정책으로 김진홍목사는 연길시 의란진 련화촌의 400헥타르(120 만 평)의 대지와 전체 마을을 50년의 기한으로 임대하게 되였다. 그러나 연변두레마을의 경영체제는 완벽한 기업경영시스템이 아닌 교회식 경영시스템, 말하자면 현장에 책임자를 파견한 뒤 경영보고만 듣고 결책하는 식의 원격조종 관리체계여서 실행초기부터 예상외의 문제점들을 많이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현장에 파견된 총경리가 교회식으로 일군들에게 새벽기도를 강요하는가 하면 탈북자를 수용하는 등 중국정책에 위배하는 일들을 골라가면서 저지르다보니 자연 지방 관련 당국의 주의를 불러일으키게 되였고 나중에는 책임자가 추방당하는 처벌까지 받게 되였다. 설상가상으로 보상금을 받고 련화촌을 떠났던 원주민들이 연변두레마을에 란입하여 소동을 부리는 바람에 마을경영에 큰 차질이 빚어질수밖에 없었다. 이에 김진홍목사앞에 시급하게 나선 특급과제는 신도들의 헌금으로 세운 연변두레마을을 어떻게 기사회생시키느냐였다. 김진홍목사가 해결책을 찾지 못해 밤잠도 설치던 그때 마침 리동춘씨가 등장했다.   리동춘은 흑룡강성 태생으로 개혁개방후 조선족농촌인구의 도시 및 해외진출로 농촌마을이 공동화되고 집체경제가 무너져나가는 형편에서 분산된 조선족농촌마을을 병합하여 집중촌을 건설함으로써 조선족농촌 재조합발전의 시대를 연 인물이였다. 언론보도를 통해 리동춘의 사적을 접한 김진홍은 연변두레마을을 운영함에 있어서도 반드시 리동춘과 같은 원견, 능력과 지도력을 가진 현지인이 필요하다는 점을 절실히 느끼고 즉시 한국두레공동체운동본부의 동북아본부장인 임진철씨를 파견하여 리동춘과 접촉하도록 하였다.   당시 북경에서 기업을 경영하고 있던 리동춘은 임진철교수가 일개 한국인으로써 조선족 농촌사회 해체위기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데 대하여 경이롭게 생각하면서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뒤미처 2003년 1월 9일, 북경중앙대학 황유복교수를 대회장으로 모시고 그를 위시한 조선족사회지성인과 농촌간부들, 그리고 한국의 농업계인사들이 함께 하는 중국 최초의 조선족농촌발전 국제학술회의를 열어 큰 성황을 이루었다.   그번 대회를 계기로 리동춘은 새로운 인생전환점을 맞이하게 되였다. 아울러 김진홍목사와 그의 동지들은 리동춘을 신임한 나머지 아예 리동춘을 권유하여 북경의 개인 사업체를 버리고 함께 연변두레마을을 건설하자고 거듭 제안해왔다. 그들의 끈질기고 진정어린 요청과 후한 투자조건, 그리고 자기가 추진하는 뜻과 비슷한 공동체운동의 비전에 마음이 동한 리동춘씨는 마침내 두레마을 건설에의 동참을 결의하게 되였다.   김진홍목사는 리동춘을 대표로하는 중국조선족발전기금회준비위원회(가칭)에 연변두레마을의 땅 100헥타르를 무상기증하기로 결정하고 2005년 5월 12일 한국 국회의사당 소회의실에서 기증식을 성대하게 치렀으며 정착에 필요한 상당한 투자와 지원약속도 하였다. 드디여 리동춘은 당년 12월 15일 독자적으로 연변민들레생태산업연구유한회사를 설립하였다.   3. 좋은 만남 좌절의 시작   김진홍목사와 리동춘씨의 첫 합작사업은 신심과 열정이 충만한 가운데 시작됐다.   연변두레마을, 민들레마을과 한국순창진미식품주식회사 등 3자가 연변두레마을 기성의 된장공장을 합작운영키로 하고 민들레마을과 한국순창진미회사에 공장 전체를 인계했다. 매년 500톤 이상 전통장류 생산수출계약도 체결했다.   김진홍목사는 리동춘씨를 연변두레마을의 공동개발위원장으로 임명하고 연변두레마을 개발사업의 모든 업무를 위임한 동시에 리동춘씨와 공동으로 연변조선족자치주정부에 근 만자에 달하는 연변두레마을개발계획서와 신청서를 상정하였다. 당시 자치주정부 란승관 부주장은 드높은 관심을 가지고 친히 신청서에 지시사항을 달아서 연길시정부에 이첩하였으며 드디여 연길시 강백준부시장이 도시건설계획국에 사업검토를 지시하고 나아가 개발도면을 전면적으로 제정하기에 이르렀다.   한창 사업이 무르익어 가던중, 2006년 2월 연변두레마을에 갑작스런 인사변동이 생겼다. 당시 연변두레마을의 총경리로 사업하던 정병석씨를 대체하여 현임 박상돈씨가 총경리로 부임돼온것이였다.   박상돈씨는 부임하자 된장공장의 합작을 부정하고 나섰다. 불문곡직하고 자기의 부하직원(한국인)을 시켜 합작공장의 열쇄를 파쇄하고 합작측의 직원들이 들어가지 못하게 길을 막았다. 이 일을 알게 된 한국두레공동체운동본부는 박상돈씨를 파견할 때 업무교대가 잘 이루어지지 않아서 그렇다고 해명하면서 곧 해결해줄 것이니 합작측더러 참고 기다리라고 양해를 구하였다.   그러나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박상돈씨는 합작공장을 빼앗아내고서는 오히려 합작측이 계약내용을 리행하지 않았다고 거꾸로 바가지를 들씌우면서 리동춘씨를 “외국기업을 통째로 삼키려는 날강도”라고 비난하기 시작했다. 그로 인해 양측은 심각한 대치상태에 처하게 되였으며 그것은 또 무시로 충돌로 이어졌다. 와중에 경찰의 조사를 수차례 거치기도 하였다. 합작측은 문제가 없으면서도 번번이 조사를 당하는 고초를 겪어야 했다. 경찰측은 민사사건이니 아예 법으로 해결하라고 밀어부쳤다. 결과 합작업무는 정지되고 따라서 수출계약리행은 불가능해졌으며 그로 해서 빚어진 손실은 해가 바뀔수록 계산하기조차 어렵게 될 것이였다. 김진홍목사가 개척한 합작사업이 박상돈부부의 불가사의한 소행으로 인해 철저한 파산의 기로에 놓이게 된것이다.   합작계약에 연변두레마을은 40%의 주식을 가지고 있어서 그들은 실무능력이 없어도 합작만 성사시켜나간다면 50년이란 긴 시간에 거대리익을 창출할수 있는것이다. 그런데 뭣이 불편하고 불만스러워서 이 합작을 박살내지못해 안달을 떤단 말인가?   4. 갈등의 주범--신앙과 문화의 차이     박상돈씨 부임 한달후 그의 부인인 임명자장로가 한국두레교회의 파견을 받고 선교사의 이름으로 연변두레마을에 나타났다. 그는 연변두레마을 교육원장이란 명의를 걸고 민들레마을의 사업에까지 사사건건 참견하기 시작했다.   봄을 맞아 민들레마을에서는 구덩이를 파고 마을어구에 장승조각상을 해 세우기 시작했다. 임명자장로는 장승세우는 일은 미신활동이라고 하면서 그것을 세우지 못하게 방해하고 나섰다. 기독교문화에서는 장승문화를 용납할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는 기독교인들이 많이 드나드는 곳이기에 길섶에 장승을 만들어 세우면 안된다는 것이였다.   리동춘씨는 생태산업발전과 결부하여 토템문화를 연구하는 학술세미나를 조직한바 있다. 임명자장로는 이것도 미신활동이라고 하면서 반대해나섰다. 리유는 학술회의 주제가 "토템문화가 인류에게 주는 계시"라는데 이거야말로 황당하다는것이다. 인류에게 계시를 줄수 있는 이는 오로지 하느님뿐인데 토템문화가 인류에게 계시를 준다고 하니 말이 되느냐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문화와 리념의 차이, 신앙의 차이로 량자간 모순의 곬은 갈수록 깊어지기 시작했다.   5. 조작된 음해사건들   1) 기증한 토지가 사기극으로 리동춘씨가 기증받은 땅을 다루려고 하니 100헥타르중 70헥타르는 연변두레마을의 전임 총경리가 김진홍목사 몰래 한국기독교장로인 신씨라는 사람에게 이미 사용권을 팔아넘긴 땅이였다. 김진홍목사가 그것을 모르고 리동춘에게 기증했으니 결국 그 땅의 새 “임자”가 나타나 김진홍목사와 리동춘은 부득이 법정소송에 말려들어 패소하게 되였다. 리동춘씨가 중급법원에 상소할것을 요구했으나 박상돈씨는 상소를 거부하다가 두레본부의 핍박에 의해 서류만 제출하고 비용은 지불하지 않아 상소인이 오히려 피상소인으로 전락되여 다시 한번 패소하는 랑패를 보게 되였다.   2) 모든 투자금약속이 백지화 리동춘씨와 함께 추진하는 연변두레마을 개발계획은 실현될수 없는 공상에 불과하다고 하면서 심지어 자기의 지휘본부까지 눈에 넣지 않고 적대모순으로 끌고 가면서 공개적으로 반대하는 등 현장협조가 이루어지지 않으므로 모든 사업과 투자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토지 임대 14년이 지난 오늘에 이르러서도 연변두레마을의 땅은 여전히 페허상태에 처해있다.   3) 상급 김진홍목사도 막무가내 한국두레본부에서는 2008년6월 공문을 내려 된장공장을 민들레마을에 넘겨주라고 지시했으나 한사코 불복했다. 이에 김진홍목사가 직접 현장에 행차하여 민들레마을의 일군들을 만나 대화를 나누면서 지나간 불미스런 일은 서로가 잊어버리고 다시 시작하자고, 저녁중으로 박상돈씨부부와 잘 상의하여 해결할터니 기대하라고 새삼스레 약속까지 하였다. 그러나 그 역시 박상돈부부를 설득시키지 못하고 약속을 어긴 채 귀국해버렸다.   김진홍목사는 귀국후 동료들 앞에서 “리동춘은 우리가 필요하여서 초청해온 분이니 죄가 없다. 그를 이런 곤경에 처하게 하여 너무도 안타깝다”면서 림시공장을 짓고 어려움을 극복해나가도록 한화 2,000만원을 지원하기에 이르렀다.   4) 순창회사직원 경상해 사건 합작자인 한국순창진미식품주식회사에서 시비를 따지러 연변두레마을을 찾아왔다. 순창은 한국고추장의 대표브랜드이다. 순창회사는 연변두레마을에서 된장의 원료를 생산하여 수입하고자 합작에 동참했던 것이다. 그런데 멀쩡한 기업이 생산을 시작도 못한채 두레본부의 조처만 기다리는 판이였다.   그러나 무한정 참고 기다릴수만은 없는 순창진미회사는 2008년 12월말 드디여 연변두레마을에 와서 문제를 걸고 들었다. 합작공장을 가동하기 위해 치열한 몸싸움을 벌리기까지 하였다. 와중에 순창측 파견을 받고 온 직원이 연변두레마을 마당에서 오토바이를 타고 들이닥친 5~6명 괴한들에게 구타당하여 팔뼈가 부러지는 경난을 치르게 되였다.   5) 민들레마을 전기선 절단사건 2009년 11월, 박상돈씨는 민들레마을에서 전기세를 일년동안 내지 않았다는 리유로 엄동설한 자기의 부하직원을 시켜 고압선에 올라가서 연변두레마을로부터 민들레마을로 이어온 전기선을 끊도록 사촉하였다. 이로하여 민들레회사 직원들과 그곳에서 생활하는 농호들이 근 반개월간 전기가 끊기여 밥도 제대로 끓여먹지 못한채 추위에 떨면서 지냈다. “기독교인들은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준다던데 이 사람들 기독교인 맞는가?” 하는 원성이 빗발쳤다.   사실 연변두레마을의 박상돈씨는 리동춘과 한국 김진홍목사댁에서 열린 두레공동체운동본부 회의에 참가하여 민들레마을에 농사보상금을 지불하겠다는 지불각서를 쓴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상돈씨는 보상금지불은 고사하고 그 돈에서 전기세를 계산하자는 제안도 받아 들이지 않고 전기선을 끊은것이였다.   6) 인권유린과 중상해 사건 2010년 민들레마을에서 된장술이 개발되여 술공장을 한창 신축하고 있는데 박상돈씨가 수도물을 끊었다. 수도물은 연변두레마을의 동의를 거쳐서 그곳 우물에서 이어온 것이였다. 지역주민들이 박상돈을 찾아가서 왜 물을 끊느냐고 따지자 박상돈은 리동춘과 모순이 있어서 끊었다고 공개적으로 선전포고를 하고 나섰다.   이에 분개한 민들레마을 일군들이 저녁에 박상돈씨가 승용차를 몰고 들어가는 길을 막아나서 그와 시비를 따지자고 하였다. 갑자기 승용차의 뒤문이 열리더니 박상돈의 부하직원인 왕반장이 뛰여내리면서 쇠사슬을 휘두르고 벽돌장을 뿌려서 민들레마을의 직원 한사람의 머리에 타박상을 입혔다. 연길병원에 긴급호송해가 진단한 결과 피가 머리속으로 떨어져 두번의 수술을 받았다. 감정결과 중상해로 왕반장은 응징을 받기도 하였다.   6. 이상한 소송과 명징한 판결   2011년 초, 연길시법원으로부터 리동춘한테 두가지 소환장이 날아왔다. 연변두레마을의 법인대표인 김진홍목사가 민들레마을의 리동춘을 법에 고소했다는 것이다. 내용인즉 하나는 김진홍목사가 불찰로 중국의 법을 어기고 리동춘에게 땅을 기증하였으니 그 잘못을 법원에서 인정해달라, 따라서 잘못 기증한 땅을 되찾아달라, 한마디로 리동춘을 두레마을 지반에서 몰아내달라는 것이였다. 다음 하나는 김진홍목사가 임명한 공동개발위원장의 권한으로 연변두레마을에 투자유치를 한것이 잘못되였으니 역시 투자유치항목을 취소시키고 관련 투자자를 몰아내달라는 것이였다.   그러나 법정 판결은 무정했다. 결국 두가지 소송은 연변조선족자치주 중급법원으로까지 상소되여 끌고 나갔다. 결과 리동춘씨의 최종 승소로 판결이 났다. 리동춘씨는 본 소송사건의 전후시말과 동기부여를 보면 이 소송은 분명 박상돈씨가 조작한 것이지 김진홍목사의 소행일수 없다고 단정하고있다.   7. 생태문화예술절과 오덕문화절 그리고 된장술의 탄생       연변두레와 문화와 리념상 지긋지긋하게 충돌해온 민들레마을은 산출이라곤 거의 없는 경영환경속에서 장장 6~7년이란 시간을 지탱해왔다. 연변두레마을은 한국선교회로부터 달마다 봉급과 경비가 조달되지만 민들레마을은 고립무원한 독불장군에 불과하였다. 불행중 다행으로 민들레마을 전통된장을 알아주는 연변소비자들의 주문이 자주 들어와 회사여직원이 들가방에 된장을 담아들고 뻐스를 타고 집집이 배달을 다니면서 연명해왔던 일을 떠올리며 리동춘은 자못 감개무량해했다.   역경속에서도 연변생태문화예술절과 전통된장오덕문화절, 민족의 대표술인 된장술을 배태했다. 이미 7회를 이어온 생태문화예술절과 된장오덕문화절은 새로운 문화를 선도하는 의미에서 연변조선족자치주의 문화지성인들이 인정하는 축제로 되였다.   회사의 설립취지대로 연변에 세계 최대의 민족전통발효식품산업단지를 일으켜 세우려는 민들레마을의 꿈을 간단없이 숙성시켜왔다. 이 꿈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참아넘길수있었다.제품을 만들지 못하게 하면 거꾸로 제품의 시장을 미리 먼저 개척하는데로 방향을 돌리면서 제품개발을 멈추지 않았는데 이렇게 개발된 민들레마을의 전통된장생산공법은 이미 2009년 길림성급무형문화재로 등록된 상황이다.   이러한 결실이 밑거름이 되여 2008년 8월 사단법인 연변생태문화예술협회까지 설립되였다. 리동춘회장은 “해마다 치르는 축제에 연변두레마을로부터 기증받은 땅의 나머지 30헥타르 토지임대료가 보탬이 되였고 김진홍목사 역시 행사때마다 축사와 함께 대표단을 파견하여 동참해주었으니 감사한 마음은 항상 간직하고있다”고 밝혔다.   맺는 말   중국공민으로서 중국 땅에서 왜 외국인에게 그토록 기시를 받으면서도 참고 있었는가 하는 물음에 리동춘씨는 “얼핏 보기에 이 사건은 밥그릇 빼앗기 싸움처럼 보이지만 실은 서로 다른 목적의 문화를 주장하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우선 서로간 문화에 대한 리해와 소통이 없이는 갈등의 해소를 기대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연변라지오텔레비죤신문 부간 2011-11-7 제43호   【李东春相关文章】 http://www.zoglo.net/blog/read/piaowenxi/64059/0/80 http://www.zoglo.net/blog/read/piaowenxi/64106/0/40 http://www.zoglo.net/blog/read/piaowenxi/64127/0/0 http://www.zoglo.net/blog/read/piaowenxi/93635/0/0  http://www.zoglo.net/blog/read/piaowenxi/202732/0/0  
96    가을의 노래 댓글:  조회:5236  추천:10  2011-10-26
  [시끄러우시면 Esc를 누르시고]     가을의 노래     하늘이 아득히 높아지고 만물이 진한 화장을 했는데 작은 고기 노는 호수위에 물오리 몇 마리 도동실 떴네요   산정 가는 등반길에 낙엽이 뒹굴어도 눈맛 당기는 풍요로움을 지울 수는 없네요   물고기는 푸덕이고 낟알은 영글었는데 금방망이 더운 빛을 번뜩이며 고귀함을 자랑하고 조롱박은 넌출아래 미동도 없이  어느 결에 고즈넉함을 만끽하네요   머금은 교태로 넋 앗아가던 봄꽃은 기억 한 자락에 새록새록 한데 저기 다가온 가을꽃들 보소 어느새 추파를 던지느라 분주들 하네요   호숫가의 백일홍 반갑다고 손짓하는 중에 코스모스 들국화 화사하고 밥 짓는 냄새 구수한 툇마루 아래 다리아도 제법 호함지네요 겸손한 꽃맺이는 어느새 새 생명 잉태를 준비하네요   갈숲은 춤을 추고 단풍은 타오릅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처럼 활활 타는 산불처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지를 아니하고 그냥 빠--알갛게 마음까지 물들입니다   한없이 너그러운 자연의 품 엄마 젖가슴처럼 포근하네요 그냥 그 속에 심신이 묻혀 살고 싶네요 자연의 은총에 감사하며 천고의 단풍을 읊조리며   이제 단풍이 다하여 질 때가 되면 소슬한 추풍이 따스한 눈꽃을 모셔오겠죠 따스한 눈송이 왕림하시어 단풍을 덮으면 단풍은 달콤한 꿈속에 깊이깊이 빠져 들겠죠   꿈은 꿈대로 그리움을 간직하고 바람은 바람대로 만고의 광야를 질주하겠죠   녹여줄듯 평화로운 황혼의 노을 속에서 가을은 스스로 여유로운 행보에 채찍을 가합니다   2006.10.13   
95    스티브 잡스의 “공개유언” 댓글:  조회:11822  추천:25  2011-10-08
   전 세계에 아이폰 광풍을 몰고 온 IT 혁명가 스티브 잡스[史蒂夫·乔布斯]가 이 세상을 하직했 다. 참으로 아까운 사람이 너무나도 일찍 떠나버렸다.    세상을 바꾼 거인 잡스, 평범하지 않은 인생을 살고자 했으면서도 평소 사생활 노출을 꺼려왔던 애플 CEO 잡스, 그의 유언으로 장례식은 몇몇 사람만 참석한 가운데 비공개로 열렸지만,이 지구위에 그를 추모하는 사람은 아마 그 누구보다도 많으리라 .   2005년 미 스탠퍼드대 졸업식에서 한 스티브 잡스의 연설문은 스티브 잡스가 어떤 사람인지 이해하기 위해서 반드시 읽어봐야 할 텍스트다. 잡스는 졸업생들 앞에서 자신의 불우했던 성장과정, 창업과 좌절 등 속 깊은 얘기들을 풀어놓았다. 특히 암 투병이라는 절망의 나락에서 건진 삶에 대한 깨달음은 큰 울림을 전해준다.   “늘 갈망해라, 우직하게!” “타인의 견해가 당신 내면의 진정한 목소리를 삼키지 못하게 하라.” “남의 인생을 사느라 인생을 허비하지 말라” 이와 같은 당시 잡스의 충고는 결과적으로 전 세계 젊은이들에게 남긴 마지막“공개 유언”이 된 셈이다.     아래는 잡스의 스탠퍼드대 연설문 가운데 세 번째 부분이다 --- ................... 세 번째 이야기는 죽음에 관한 것입니다.   17세 때 이런 경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하루하루를 인생의 마지막 날처럼 산다면 당신은 옳은 삶을 살 것이다.”   이 글에 감명 받은 나는 그 후 33년간 매일 아침 거울을 보며 자신에게 묻곤 했습니다.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면 지금 하려고 하는 일을 할 것인가?”   “아니오” 라는 답이 계속 나온다면 다른 것을 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곧 죽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명심하는 게 인생의 고비마다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데 큰 도움을 줍니다.    외부의 기대, 자부심, 수치와 실패에 대한 두려움 등은 죽음 앞에서 모두 떨어져 나가고 오직 진실로 중요한 것들만이 남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생각하는 것은 무엇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최고의 방법입니다.   여러분들은 아무것도 잃을 것이 없기에 자기 내면의 목소리를 따라야 합니다.   나는 1년 전쯤 암 진단을 받았습니다. 아침 7시30분에 검사를 받았는데, 이미 췌장에 종양이 있었습니다. 그 전까지는 췌장이 뭔지도 몰랐습니다. 의사들은 고칠 수 없는 암이기 때문에 길어야 3개월에서 6개월 생존할 거라고 말했습니다. 주치의는 집에 돌아가 신변정리를 하라고 했습니다. 죽음을 준비하라는 뜻이었습니다.   하루 종일 불치병 판정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날 저녁 위를 거쳐 장까지 내시경을 넣어서 암세포를 채취해 조직검사를 받았습니다.   나는 마취상태였는데 나중에 아내가 말하길, 현미경으로 세포를 분석한 결과 치료 가능한 아주 희귀한 췌장암으로 밝혀지자 의사들도 기뻐서 함성을 질렀다고 합니다. 나는 수술을 받았고, 지금은 괜찮습니다. 그때만큼 내가 죽음에 가까이 가 본 적은 없습니다. 앞으로도 수십 년간은 그렇게 가까이 가고 싶지 않습니다. 아무도 죽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천국에 가고 싶다는 사람들조차도 그곳에 가기 위해 죽고 싶어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죽음은 우리 모두의 숙명입니다. 누구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래야만 합니다. 죽음은 삶이 만든 최고의 발명품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인생을 변화시킵니다. 그리고 새로운 것이 헌 것을 대체할 수 있도록 만들어줍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새로움’이란 자리에 서 있습니다. 그러나 머지않아 여러분들도 새로운 세대에게 그 자리를 물려줄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낭비하지 마십시오.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대로 살아야 한다는 도그마에 얽매이지 마십시오. 다른 사람들의 견해가 여러분 내면의 진정한 목소리를 삼키지 못하게 하십시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마음과 직관을 따르는 용기를 가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과 직관은 당신이 정말로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나머지 것들은 부차적인 것입니다.
94    조선 양대특구 공동개발의 감동 댓글:  조회:7020  추천:40  2011-06-10
  조선 황금평•라선 양대특구 공동개발의 감동   김정일 위원장 중국방문 후 중조 간 대규모 경제협력이 바로 가동됐다.  조선 황금평•라선 양대 특구 중조공동개발 및 공동관리대상 착공식이 8일과 9일에 연일 진행되었다. 라선개발 1차 착공대상으로 라진항-원정도로개건, 아태라선세멘트공장과 라선시-길림성고효율농업시범구 착공식, 라진항을 통한 중국국내화물중계수송출항식도 줄줄이 이어졌다. 학수고대하던 일이 어느새 우리 앞에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조선의 '공동개발계획요강'에 따르면 황금평(위화도도 포함)특구는 상업센터와 정보산업, 관광문화산업, 현대시설농업, 가공업 등을 중점 육성하고 라선특구에는 물류, 첨단기술, 목재가공, 선박수리 등을 주 업종으로 하는 10개의 공업단지를 키운다는 구상이다. 이로써 양국국경을 기준으로 북은 라선, 남은 황금평이 명실공히 중조경제협력의 거점으로 우뚝 서게 됐다.   양대 특구 공동관리를 위해 중조양국이 지난해 설립한 특구개발합작연합지도위원회는 이미 ‘정부가 이끌고 기업이 주역이 되며 시장의 원리로 운영하고 상호이익을 추구한다’는 협력의 4대원칙에 합의했고 아울러 양측은 각자의 장점을 충분히 활용해 양대 경제특구를 중조간 경협의 모범사례이자 세계 각국이 경협을 할수있는 공간으로 육성하자고 약속했다고 한다. 심천의 개발과 비견되는 가속이 붙기를 기대할 수 있는 대목이다.   무엇보다 조선에서 홍콩의 다국적 투자회사인 新恒基그룹의 高敬德 이사장을 특구의 행정장관으로 임명하여 협력개발을 주도하도록 조치(중국정부도 동의했다고 함)한 점은 다국적 회사를 통한 해외자본도입을 암시하는 것으로, 우리로 하여금 금후 조선경제가 개혁개방에로 이어질 수도 있겠구나 하는 희망을 가지게 한다.     중국으로 말하면 조선 양대 경제특구의 공동개발은 동북진흥전략과도 직접적으로 연계되어있다. 라선특구 개발의 본격화로 이제 두만강지역개발프로젝트의 실시가 황금기를 맞게되어 이제 개발의 중심에 선 연변의 발 빠른 움직임이 예상되는 시점이다.   양대 특구에 대한 중조 양국의 본격적 협력개발은 동북아개발의 기폭제라고 보아도 될 것이다. 주변국들이 동북아개발에 열성을 보인지가 오래다. 러시아는 이미 극동지구 대 개발 프로젝트에 착수하였으며 한국도 기실 동해전략을 실시하고 있고 일본 역시 자국의 서해기슭에 중심항구건설을 진행중이다. 목전 일본, 한국, 러시아 등 나라의 근 50개 기업이 이미 훈춘에 와 자리 잡았다.   이런 와중에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는 것은 개성공단을 축으로 하는 남북경협이 아쉽게도 현재 중단상태이며, 이와 같은 교착상태가 언제가야 풀릴는지 한 치도 내다볼 수 없다는 점이다. 남북이 하루속히 대결국면을 화합의 장으로 바꾸어 이한 역사적 개발사업에서 주역으로 함께 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93    “김정일 중국방문” 소감 댓글:  조회:9465  추천:68  2011-05-27
  “김정일 중국방문” 소감 김정일 조선 국방위원장이 지난 20일에서 26일까지 중국의 목단강, 장춘, 양주, 남경, 북경 지역을 참관했다. 7일 동안 이동한 거리가 무려 6천여 킬로미터라고 하니 70세의 노인으로서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1994년 집정해서 지금까지 이루어진 중국방문이 모두 7차례 정도라고 하는데, 그중 최근 일년간 이례적이게도 이번까지 무려 세 번째이니 생각되는 바가 적지 않다.   김위원장이 이번에 만나서 회담을 가진 중국 지도자도 호금도 주석 및 온가보 총리를 비롯,  중공 정치국 상무위원 9명중 외국 순방 중인 오방국을 제외한 8명이니 기실 전부라 해도 되는 것이고, 김위원장의 중국방문 수행자도 조선노동당 비서인 김기남, 최태복, 강석주 내각부총리, 장성택 국방위 부위원장 등 고위급이 대거 들어있어 예사롭지 않음을 가히 짐작케 한다. 실제 그의 방문행보가 시종 경제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음을 감안하면 조선의 개혁개방의 미래에 대해서도 추측해볼만하다.   “중국의 개혁개방정책이 정확하며 과학발전노선이 생명력이 있다. 조선인민은 이로 인해 고무를 받는다.” 중국의 기업체 등을 시찰하면서 발표했다는 김위원장의 언론도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김정일 위원장이 나라의 경제곤경에 대해 뼈를 깎는 고민을 하지 않았을 수는 없다. 그 고심의 흔적이 바로 지난 일년간 이루어진 파격적인 3차례의 빈번한 중국방문이 아닐까?   조선에 대한 중국의 경제지원은 주지의 사실이다. 물론 지원은 필수적이지만, 그러나 외부 지원이 조선의 강성대국건설의 근본도로일 수는 없는 것이다.   필경 자국의 시장개혁이 필수인데, 마음먹고 하면 바로 될 것 같은 그것의 실시가 왜 그토록 어려울까? 이것을 항상 문제로 짚지만, 그것에 대해 이해해주어야 할 부분이 있다고 본다. 우선 조선은 국제사회로부터 아직 정권의 안전을 보장받지 못한 상태다. 이런 상황에서 시장의 개혁개방조치는 국가통제 시스템을 약화시켜 정권의 안전을 위협할 수도 있기 때문, 조선특유의 딜레마인 것이다.    한편 우리는 조선의 오늘 상황이 조선이 자초한 문제만은 아니며, 역사가 남긴 냉전시대 유산이기도 함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이번 방문이 혹시 김정일 위원장이 시장개방을 최종 결심하고 나선 행동이 아닐까 생각된다. 참 기대가 되는 일이다. 정말 그렇다면 나는 김 위원장의 결심이 중조관계의 획기적 발전은 물론, 북남관계, 나아가 아시아의 장래에 획기적 기여가 될 것으로 본다. 중조 간, 북남 간, 나아가 조선과 국제간 경제협력이 봇물 터지듯 쏟아질 날이 크게 기대된다.   이를 받쳐주는 또 하나의 중대한 고무적 사안이 있으니 바로 한국 이명박 대통령의 최근 발표다.   이 대통령은 최근 "우리 남북은 서로 대화하고 보다 미래 지향적이고 발전적으로 나가야 한다"면서 "남과 북, 우리는 한민족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했다. 그러면서 북에 대한 지원은 북이 남에 의존하게 만드는 것이 아닌 북의 자립을 도와주는 형태가 될 것임을 밝히고 "우리는 한민족이기 때문에 진정한 애정을 가지고 이북주민들이 정말 자립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게 우리 정부의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 대통령은 또 "많은 분들이 (조선이) 중국에 너무 의존하지 않느냐 걱정하지만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조선지도자가 중국에) 자주 가야 한다. 자주 봐야 한다. 배워야 한다"며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중국을 자주 왕래하는 것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이 대통령은 조선과의 대화, 특히 경제-문화적 소통도 강조하면서 "너무 오래 떨어져 있으면 말도 달라진다"는 점을 강조했다고 한다. 참 감동 없이는 들을 수 없는 말이다.   우리 조상의 나라 조선이 하루빨리 개혁개방을 해서 한국처럼 세계의 앞자리를 다투는 나라가 됐으면 좋겠다. 그리고 남북이 한집이 되는 그날을 내 눈으로 직접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 날이 너무 멀지는 않을 거라고 믿고 싶다.
92    지구촌 재앙의 메시지 댓글:  조회:8072  추천:60  2011-05-12
  지구촌 재앙의 메시지   5월 12일은 문천 대지진 발생 3주년이 되는 날이다. 2008년 5월 12일 8.0 규모의 지진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었던 사천성이 전국 여러 민족형제의 지원과 일본, 한국 등 국제사회의 원조에 힘입어 3년간의 복구 끝에 지진피해가 가장 심했던 문천현과 북천현을 사천관광의 새로운 명소로 바꿔놓고 경제도 크게 부상시키는 기적을 이뤄냈지만 그날의 악몽은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쉽게 가셔지지 않는다.   정말 명실상부한 대재난의 시대이다. 2004년 12월 14개 국 25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동남아 쓰나미, 미국 남동부를 덮친 2005년 8월의 허리케인 카트리나...   금년 3월 일본 동북부지역을 강타한 규모 9.0의 강진과 쓰나미, 쓰나미에 이은 핵 원전 방사능유출의 재앙은 무지개 같은 환상을 현실의 삶속에 그대로 구현시켜주는 눈부신 현대과학도 인류에 복만 가져다주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었다.   상상력을 최대한 구사해 만든 재난영화에서나 볼 수 있을 줄 알았던 인류사상 미증유의 대형 참사들이 지구촌의 현실에 꼭 같이 발생하여 사람들을 깜짝깜짝 놀라게 하는 것이다. 인류사상 전례 없는 대형 참사라 함은 재난 발생시간이 인류사회가 미개시대를 넘어 선지도 까마득하게 오래인, 문명이 고도로 발달한 현시대라는데 기인한다.   천재성 재난참사만 해도 진저리치는데, 인재성 재난도 비일비재하여 인류를 괴롭히고 있다. 갈수록 참혹해지는, 그 끝이 어디인지 보이지 않는 세계자연에너지 쟁탈을 위한 전쟁, 세계패권확보를 위한 전쟁, 종교파쟁이 부른 세 불리기 전쟁, 테러와 반테러의 전쟁...이 세상은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다.   하지만 자연과 인위의 재앙 앞에서 인간이란 얼마나 무력하고 보잘것없는 존재인가를 통감하면서도 인류는 결코 미래에로 향한 발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지구촌 대재난은 과연 피할 수 없는 것인가? 가슴 저미는 재난의 순간순간을 떠올리며, 아름다운 지구의 안정과 더불어 인류의 행운을 빈다.   [길림신문]2011-05-10
91    탈북시인 장진성씨의 “담략” 댓글:  조회:10023  추천:77  2011-04-25
  탈북시인 장진성씨의 “담략” 2011년 04월 21일 어느 분인가의 “탈북시인 장진성이 6일 동안 본 중국 강연이 재미있으니 시청해 보세요”라는 요청(왜서 이런 요청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다)에 호기심이 동해 http://www.chogabje.com/board/view.asp?C_IDX=38087&C_CC=AZ를 방문했더니 4월18일 오후 서울 중구 충정로 1가 문화일보홀에서 ‘제168회 趙甲濟 기자의 現代史 강좌’가 개최됐다는 조갑제닷컴의 “최신정보”였다. 일면식도 없지만 내가 상당히 존중하는 조갑제선생의 강좌내용을 보니 사뭇 고개가 끄덕여지는 부분이 많았다. 한데 정작 나의 흥미를 유발했던 장진성 脫北시인의 ‘6일 동안 본 중국’이란 제목의 강연내용을 보고서는 비교적 어리둥절해졌다. --- “중국에 있는 동안 느낀 것은 公安(공안)의 권위주의였습니다. 국가가 국민을 지배한다는 그들의 통치철학을 공안을 통해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길을 물어봐도 잘 가르쳐 주지 않습니다. 일반 주민들에게도 권위주의가 드러납니다. 밥을 먹을 때 접시를 높이 쌓는 것, 호화로운 집에서 살려고 하는 것 등 스스로를 과시하려고 합니다. 한편으론 체제에서 살아남기 위한 그들만의 방식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장시인은 중국사회에 배려문화가 없다는 것에 놀랐다고 했다. 그는 그 이유를 네 가지로 분석했다. ▲ 인구가 너무 많고 ▲ 1가구 1자녀 정책 ▲ 소수민족이 섞여 있다는 것 ▲ 文化(문화)대혁명 때문이라고 했다. 특히 文化대혁명 때 많은 사람들이 연좌제 형식으로 숙청돼 서로간의 소통이 부족한 것도 하나의 요인이라고 보았다. 그는 중국 국가경제를 두가지로 분석했는데 하나는 글로벌경제, 다른 하나는 위조경제라고 했다. 중국이 가짜상품을 생산하는 것에 대해 장시인은“중국 사람들의 시장경제에 대한 인식은‘기업보다 공민이 우선’이라는 것이다. 위조경제를 오히려 장려하고 있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그는 중국을‘인류 근현대 100년의 進化(진화)과정이 그대로 살아 숨쉬는 곳’이라고 표현했다. 가장 낙후된 모습과 가장 선진화 된 모습이 공존한다는 의미이다. 장 시인은 “중국에 머무는 6일 동안 대한민국의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다”고 말했다. 참 재미있는 뉴스이다. “장시인은 중국사회에 배려문화가 없다는 것에 놀랐다고 했다”고 했는데, 나는 오히려 탈북시인 장진성씨의 “담략”에 상당히 놀랐다. 6년이나 16년도 아니고 단 6일 중국에 머물었던 기간 이런 중대한 결론을 얻어내고 그것을 한국청중들에게 강연까지 했다니...... 그런데 경탄한 나머지 한가지 의혹, 한가지 우려와 한가지 건의가 있다 --- 한가지 의혹: “중국에 있는 동안 느낀 것은 공안의 권위주의였습니다.” 탈북시인 장진성씨가 혹시 중국에 6일간 머물면서 시종 신변의 불안감을 떨쳐버리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그랬다면 왜 불안했을까? 한가지 우려: “중국에 머무는 6일 동안 대한민국의 자부심...” 어쩐지 중국비하로 한국청중에 아부하려는 무슨 냄새가 풍기는데, 그런데 그게 진짜 먹힐까? 한가지 건의: “중국이 위조경제를 장려하고 있는 실정...” 이런 이상한 사실들을 만들어내느라 고생하지 말고 남북간, 그리고 이웃간의 화합과 협력을 위해 다소나마 기여하기를 기대한다.
90    젠장, 이런 식으로 꽃을 사나 / [한국]이진명 댓글:  조회:6522  추천:56  2011-04-05
[시끄러우면 Esc를 누르시고]           젠장, 이런 식으로 꽃을 사나  ■이진명[한국]   우이동 삼각산 도선사 입구 귀퉁이 뻘건 플라스틱 동이에 몇 다발 꽃을 놓고 파는 데가 있다 산 오르려고 배낭에 도시락까지 싸오긴 했지만 오늘은 산도 싫다 예닐곱 시간씩 잘도 걷는 나지만 종점에서 예까지 삼십 분은 걸어왔으니 오늘 운동은 됐다 그만두자 산이라고 언제나 산인 것도 아니지 젠장 오늘은 산도 싫구나 산이 날 좋아한 것도 아니니 도선사나 한 바퀴 돌고 그냥 내려가자 그런 심보로 도선사 한 바퀴 돌고 내려왔는데 꽃 파는 데를 막 지나쳤는데 바닥에 지질러앉아 있던 꽃 파는 아줌마도 어디 갔는데 꽃, 꽃, 꽃이로구나 꽃이란 이름은 얼마나 꽃에 맞는 이름인가 꽃이란 이름 아니면 어떻게 꽃을 꽃이라 부를 수 있었겠는가 별안간 꽃이 사고 싶다 꽃을 안 사면 무엇을 산단 말인가 별안간 꽃이 사고 싶은 것, 그것이 꽃 아니겠는가 몸 돌려 꽃 파는 데로 다시 가 아줌마 아줌마 하며 꽃을 불렀다 흰 소국 노란 소국 자주 소국 흰 소국을 샀다 별 뜻은 없다 흰 소국이 지저분히 널린 집 안을 당겨줄 것 같았달까 집 안은 무슨, 지저분히 널린 엉터리 자기자신이나 좀 당기고 싶었겠지 당기긴 무슨, 맘이 맘이 아닌 이즈음의 자신이나 좀 위로코 싶었겠지. 자가 위로 잘났네, 자가 위로, 개살구에 뼉다귀 그리고 위로란 남이 해주는 게 아니냐, 어쨌든 흰색은 모든 색을 살려주는 색이라니까 살아보자고 색을 산 건 아니니까 색 갖고 힘쓰진 말자 그런데, 이 꽃 파는 데는 절 들어갈 때 사갖고 들어가 부처님 앞에 올리라고 꽃 팔고 있는 데 아닌가 부처님 앞엔 얼씬도 안 하고 내려와서 맘 같지도 않은 맘에게 안기려고 꽃을 다 산다고라 웃을 일, 하긴 부처님은 항상 빙그레 웃고 계시더라 부처님, 다 보이시죠, 꽃 사는 이 미물의 속 그렇지만 다른 것도 아니고 꽃이잖아요 부처님도 예뻐서 늘 무릎 앞에 놓고 계시는 그 꽃이요 헤헤, 오늘은 나한테 그 꽃을 내어주었다 생각하세요 맘이 맘이 아닌 중생을 한 번 쓰다듬어주었다 생각하세요 부처님, 나 주신 꽃 들고 내려갑니다 젠장, 이런 식으로 꽃을 사다니, 덜 떨어진 꼭지여 비리구나 측은쿠나 비리구나 멀구나
89    영화 <황해>에 대하여 나도 몇마디 댓글:  조회:8778  추천:102  2011-03-19
  영화 <황해>에 대하여 나도 몇마디 조글로포럼 홈페이지 톱자리에 한국 영화평론가 이안씨의 <타자화된 조선족, 이탈리아계 마피아 묘사하듯>이 석달이 넘도록 그냥 걸려서 “문근영에서 '살인자'로…나는 황해가 불편하다”고 토로한다. 며칠전에야 나홍진감독의 영화 <황해>와 그의 데뷔작 <추격자>를 보았다. 아마 상당수 논자들은 <황해>를 단지 일확천금의 상업성효과만 꾀한, 또한 그것을 위해 조선족을 이용하고, 따라서 사람을 불안해지게 하거나 분노를 느끼게 할수밖에 없는, 그런 무책임한 영화로만 보는것 같다. 그러나 내가 본 <황해>는 그게 아니다. 엇갈리는 평가 이 영화에 대해 다양한 평가들이 있다. 조선족들중 이 영화에 대해 부정적으로 보는 경향이 있는데, 조선족의 현실을 엄중히 왜곡하고 조선족이미지를 엄중히 해쳤다는 견해가 그것이다. 이런 견해에는 “조선족 범죄집단”과 “조선족”을 동등한 개념으로 취급하는 페단이 있다. 그외 이 영화는 단지 영화일뿐이므로 너무 현실에 가져다 맞추는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견해도 있다.  한국인들의 반향을 보면 대체로 복잡하게 얽힌 영화의 스토리와 인물관계의 이해에 신경을 많이 쓰는 모습이 역력하다. 그러면서 나름대로 영화의 의미도 잘 풀어내고 있는데, 영화를 재미와 자극으로 보면서 거기서 뭔가 계발도 얻는 이런 감상법에 대해 나는 긍정적으로 본다. 영화평론가들의 시각은 물론 조금 깊다. 영화가 내포한 의미에 대해서, 이안은 이 영화를 통해 보는 “조선족들에게 뿌려진 폭력의 근원은 아주 분명하다...병에 걸려들게 한건 한국사회다”라는 심각한 논점을 펴내기도 하지만, 웬일인지 “폭력에 의한 ‘떼죽음의 배경’이 고작 ‘치정문제’”라며 “칼깨나 쓰는 작자들을 줄줄이 거느렸으면서 굳이 연변까지 가서 목돈들여 살인청부할 대상을 찾는다는것은 너무 부도덕하거니와 설득력도 없”고 “그렇다고 인간본성에 대한 성찰이나 반성을 이끌어내지도 못한다”면서 논리의 전개를 접어버린다. 상업성영화를 두고 혹평이 아닌가 싶다.  장르문제 이안씨는 나아가 영화평에서 “불과 5년전만 하더라도 <댄서의 순정>에서 자본의 힘에 팔려와 공권력의 감시를 받으면서도 꿈과 사랑을 이루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우리사회가 잃어버린 가치를 돌이켜보게하는 애처롭고 사랑스러운 소녀의 모습”이었던 “조선족의 이미지”는 이제 <황해>를 통해 “소름끼치게 무시무시한 살인자무리”로 바뀌었다면서 역시 “조선족 범죄집단”과 “조선족전체”를 구별하기를 거부한다. 영화의 장르를 말해야 한다. 장르면에서 <댄서의 순정>은 사랑주제의 영화이고 <황해>는 범죄영화에 속한다. 두 영화를 억지로 연계시키는것은 이치에 맞지도 않거니와 여론을 이상하게 오도할수 있다.  영화 <황해>는 장르로 말하면 범죄영화로 분류되는 비극과 스릴러사이 영화라고 볼수있다. 범죄영화의 하위분류로 범죄드라마영화, 범죄미스테리영화, 범죄스릴러영화, 범죄코미디영화 등 여러가지가 있지만 이 영화는 주로 범죄스릴러영화의 범주에 속하며, 그러나 상당히 잘 짜인 드라마요소와 미스테리요소도 가지고있다. 범죄문제를 취급한 스릴러영화를 사랑영화 찍듯 찍을수는 없는것이다. 이 영화에 나오는 조선족, 그리고 “조선족 비하”문제 영화 <황해>의 이야기는 조선족중심으로 전개된다. 우선 주인공 김구남을 비롯해 사건에 조선족이 많이 등장한다. 예컨대, 조폭두목 면정학과 그의 패거리들, 한국 조폭두목 김태원의 운전수에 고용된 2명, HK은행 김정환과장에 이용된 몇명, 그외에도 가리봉동의 이른바의 “불체자”들 등이다. 이 영화에서 나오는 조선족은 범법의 성격과 정도가 부동하지만 “불체자”들을 망라해서 대부분 범법자들이다. 조선족이 다수 등장하기에 “조선족 범죄집단”과 “조선족전체”를 동등한 개념으로 취급하는 경향이 생기기 쉽다. 그러나 이 두가지는 반드시 철저히 갈라보아야 할 개념이다. 안 그러면 실제로 조선족전체를 범죄집단으로 인정하는 것으로 되기때문이다. 조선족조폭의 잔인성에 대한 묘사를 조선족에 대한 비하로 보는것은 무리다. 조폭은 한국에서나 중국에서나 다 사회음지의 독버섯같은 존재로서 현실에서의 그들의 잔인성이 결코 영화에서 표현되는 잔인성에 떨어진다고 볼수 없다. 영화에서 아무런 저항수단도 없는 불쌍한 “불체자”들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휘두르던 한국조폭은 조선족조폭만 만나면 쩔쩔매는 비겁한 무리로 둔갑한다. 이에 반해 조선족조폭은 잔혹은 할지라도 항상 당당하게 그려지고있는데, 흥미로운 부분이다. 실제 이 영화에서 비하한것은 한국의 공권력이다. 비하라는 낱말을 조폭무리에 가져다 붙일수는 없다. 조폭무리에는 폭로만이 어울릴뿐이다.  “흥행에 성공한 영화”, 상업효과만 노렸나? 범죄영화로 분류되는 비극과 스릴러 사이 영화로서의 이 영화가 상업효과를 노린것은 두말할것 없다. 데뷔작 <추격자>와 그를 이은 영화 <황해>는 모두 강자극적수법을 구사해 흥행에 성공했다. 그럼에도 나는 이 영화가 책임감을 가지고 사회문제를 진실하게 다뤘다고 본다. 중한양국의 범죄문제를 다루면서 특히 한국과 중국조선족 조폭사회가 결탁해 저지르는 대표적 범죄사건의 연관성을 극명하게 보여줬기때문이다. 그 진실은 예술의 진실에만 그치는것이 아니고, 한국사회와 조선족사회의 어두운면에 대한 고발로 이어지고있다. 이 영화에서 보면 청부살인사건의 단초제공자는 피살자와 형제관계이던 한국 조폭두목 김태원과 은행직원 김정환과장이고 중국의 조선족조폭두목 면정학은 돈을 위해, 김구남이는 면정학에 이용된, 사랑하는 아내를 찾아오기 위해 살인청부를 받고 한국행을 한 범행자이다. “조선족들에게 뿌려진 폭력의 근원은 아주 분명하다...병에 걸려들게 한건 한국사회다”라는 이안평론가의 말을 새삼 되새겨보게하는 구도이다. “실화”에 근거 나홍진감독은 영화에 나오는 조선족의 범죄는 모두 금세기 초에 발생한 “실화”에 근거했다고 매스컴에 전한다. 나감독의 말을 믿지 말아야 할 이유는 없다. 사건발생 당시에서 여러 해 지난 2011년 오늘현재와는 거리감이 있을수 있지만, 실제로 중한수교후 조선족의 이민붐이 일면서 점차 불거진 각종 모순이 보다 치열해지는 양상을 보인 시점이 바로 그 시기다.   한국 악덕고용주의 만행을 도화선으로 조선족 6인이 한국인을 포함한 선원 11인을 무자비하게 죽여 바다에 던진, 세상을 경악케 한 “페스카마호선상살인사건”, 사업알선의 명의로 농민위주의 18만 가난한 조선족을 사기쳐 그들을 죽음의 나락에로 밀어넣었던 “한국초청사기사건” 등으로 조선족의 반한감정을 비롯해 중한 동족간 갈등이 극에 달했던 시기도 바로 그때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갈등이 조선족일부에서 표현된 반한감정의 소산이었던것은 아니다. 중한조폭의 결탁범행도 양국 동족간 갈등을 부추긴 요소로 작용했기때문이다. 조폭문제 한국진출붐이 일기전 중국 동북3성에서 조폭집단이 이미 활동하고있었다. 2003년 3월 20일자 한국 “시사저널”은 “한·중 조폭, 손잡고 날뛴다”는 제하의 뉴스에서 “국내에 밀입국한 조선족 조직폭력단이 한국 조직폭력단과 손잡고 마약·밀수·살인청부 등 각종 이권에 개입하면서 범죄세계에서 한·중국경이 사라지고 있다”고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1990년대 중반, 그러니 중한수교후 몇년 안되어 중국경내에서 활동하던 조폭들이 하나 둘 한국에 진출해 곳곳에서 뿌리를 내리면서 한국내 조폭세력과 각종 연계를 맺었는데, 그들은 한국내 조선족 밀집거주지역인 서울 가리봉동 조선족타운과 안산 원곡동·원산동에 자리한 조선족타운을 근거지로 평소에는 조선족을 상대로 금품갈취를 일삼는 등 범죄를 저지르다가, 한국인이 의뢰해오는 청부폭력을 수행하고 뒷돈을 받기도 한다는것이다. 당시 서울 가리봉동, 대림동, 가산동, 봉천동, 신림동 일대와 경기도 안산시에도 생겨난 조선족타운에 자리잡은 조선족조폭은 중국조선족사회에서 10여개 파벌을 형성하며 활동해 왔던 이들이며, 잔인함으로 악명이 자자했다고 한다. 서울 가리봉동 일대는 연변의 용정 등 지역을 무대로 활동하던 일명 “뱀파”, “호박파”, “승리파” 조직이 장악했으며 안산시의 조선족타운은 흑룡강성과 상해 출신 두 분파의 주된 활동무대라는것이다. 중국내 한국행사기행각을 살펴보면 연수생초청사기, 친지방문초청사기 및 유학생명의의 초청사기, 위장결혼사기, 한국방취제를 빙자한 사기행각이 다년간 살판쳐왔는데, 그 이면의 진실은 한국조폭과 조선족조폭의 결탁이었던것이다. 한국경찰은 “한국내 조폭과 조선족조폭은 줄곧 조선족불법송출에 깊숙이 개입해왔다”면서 “한국에서 범죄를 저지르고 중국으로 도피한 조폭출신들이 현지 조선족조폭과 손잡고 서류를 위조해 대규모 초청사기를 벌인다”고 했다. 한국경찰은 “한국인 범죄조직이 불법체류자라는 약점을 구실로 조선족을 악용하는 사례가 많다”고 했다. 조선족을 상대로 고리대부업, 인신매매, 성매매나 살인폭행 등 청부업무를 맡겨왔는데, 그 원인은 조선족이 범행을 저질러도 지문감식이 불가능한데다, 중국으로 돌아가거나 종적을 감추면 “완전범죄”가 가능하다고 보기 때문이라는것이다. 한국사회와 중국사회의 음지에 기생하는 독버섯같은 조폭사회의 존재는 회의의 여지도 없는 현실이며 따라서 우리는 <황해>의 스토리가 현실과는 무관한 허구가 아님을 알수 있다. “영화의 본질은 조선족에 대한 애정” 나홍진감독은 <황해>시사회에서 중국조선족 비하논란에 대해 “다소 과격하게 비쳐지는 부분이 있겠지만 이 영화의 본질은 조선족에 대한 애정”이라고 했다. 영화를 본뒤 나는 이 말의 진정성을 실감할수 있었다. 그 “애정”은 주로 두가지 형태로 표현되는데, 하나는 주인공 김구남에 대한 감정이입을 통해 표현되고, 다른 하나는 돈을 벌기 위해 한국행을 선택한 조선족의 불행한 처지에 대한 삽입적묘사를 통해 표현되고있다.  주인공 김구남을 통해--- 이 영화의 주인공 김구남은 어머니를 모시고 아내와 어린 딸을 둔, 평범한 택시운전수이다. 힘도, 돈도, 빽도 없는 그는 이 사회의 소외계층에 속한 인물이다. 사회의 관심에서 소외된 사람들은 흔히 범죄의 어두운 구석에 노출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사회의 관심과 사랑이 이 계층에 특별히 기울여져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영화가 부각한 김구남은 우선 시종 아내를 사랑한 남편이며, 그가 살인청부를 맡은것도 애오라지 잃어버린 가정을 되찾기 위해서다. 이 영화는 스릴러영화이지만, 어찌보면 아내를 사랑한 남편이 사랑을 찾아 떠난 피눈물의 사랑영화라고 봐도 틀리지 않는다. 한국에 돈벌러 간 아내는 기별이 없다. 소식이 없으면 무조건 다른 남자와 눈맞아 돌아간게라는 여론이 돌고 어머니도 며느리를 갈보라고 욕하며 면가도 아내에 대해 모욕적언사를 던지지만, 그리고 아내가 다른 남자와 몸섞는 환각에도 여러번 빠지지만, 이 모든것은 아내를 찾아와야겠다는 그의 결심만 더욱 굳혀줄뿐이다. 살인피의자로 경찰에 쫓기면서 비참한 자신의 신세에 혼자 서럽게 우는 구남, 자신이 실제 살인자는 아니지만 살인청부를 했다는것에 죄책감을 느끼는 구남, 자신을 살인범죄의 심연속에 몰아넣고 목적을 달성하자 자신을 “토사구팽”하려드는 조폭두목 면정학에 이를 갈며 절규하는 구남, 피튕기는 사투끝에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구남이 피를 너무 많이 흘렸던 관계로 귀국선에서 “아내”의 유골함을 껴안은채 고달픈 인생을 마감하고 차디찬 황해바다에 던져지는 광경을 지켜보면서 관중들은 솟구치는 동정심을 금치 못한다.   한편 주인공 김구남은 죄인임을 떠나서 “영웅”으로 부각된다. 종종 서로 겹치는 다양한 하위장르를 거느리고있는 스릴러영화는 일반적으로 빠른 전개, 빈발하는 액션, 재능있는 영웅이 대결하는 강력한 악당을 갖게 되는데, 김구남의 상대는 공권력의 경찰에 강력한 조폭무리까지 가세한다. 면정학과의 피비린 대결에서 도끼를 들고 까맣게 달려드는 조폭무리를 따돌릴뿐만아니라 근 100명 되는 한국경찰의 삼엄한 포위까지 유유히 뚫고나온다. 거의 불사신에 가깝다. 한국경찰은 영화에서 더 이상 무능할수 없는 “밥통”들로 그려지고있다. 철통같은 버스안 뒷자리에 앉은 구남도 놓치고 마는데, 경황망조한 경찰이 땅바닥에 납작 엎드려 구남에게 총겨누던 손을 덜덜 떨다가 동료경관을 쏘아죽이고는 대성통곡하는 장면, 신랄한 풍자를 넘어 매도수준이다. 나감독의 데뷔작 <추격자>에 나오는 경찰들도 어처구니없기는 마찬가지다. 나홍진감독은 "살인자들이 활개치고 살인이 일어나게 방치한 사회에 대한 분노때문에 <추격자>를 쓰게 됐다"고 밝혔다. 하다면 <황해>를 만들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돈을 벌기 위해 한국행을 선택한 조선족의 불우처지에 대한 묘사를 통해-- 주인공을 조선족으로 내세운 영화답게, 이 영화에서는 처처에서 한국에 진출한 조선족들의 불우한 처지에 대한 묘사를 접할 수 있다. 가리봉동 “불체자”들이 한국조폭들에게 이유없이 당하는 처참한 장면, 구남이 양꼬치집에서 "괜히 사고치면 바로 쫓겨나니 그냥 돈이나 벌다가라"고 귀띔받는 장면, 수산물유통업자에 의해 조선족여성이 토막살해 당했다는 뉴스보도, 구남이 아내의 사체확인과정에 자기가 의뢰한 흥신소 직원에게 사기를 당하는 모습...등에 대한 묘사를 통해 우리는 같은 동포사회의 일원으로 한국에 가서도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고 차별과 멸시를 받으며 범죄에 노출되어 고달프게 살아가는 조선족들의 현실에 대한 안타까운 감독의 시선을 느낄수 있다. 맺는 말 오늘 세상은 금전이 모든것을 지배하는 풍조에 깊이 물들어있다. 돈때문에 웃고울고 돈때문에 서로 속이고 이용하며 돈때문에 살인도 저지른다. 한국사회와 중국조선족사회가 서로 얽힌 거의 전부의 범죄사건에서 “금전”은 마귀와도 같은 존재라 할수 있다. 그것은 항상 여자, 지위, 권력과도 연관되는데, 영화 <황해>속의 “여자”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피비린 사투를 금전과 권력, 지위를 둘러싸고 벌어진 악성사건으로 바꾸어도 조금도 안될것 없다. 영화 속의 “여자”는 상징물일뿐이다. 우리 대부분 사람들이 지금 살아가고 있는 세계와 조폭들의 세계는 분명 다른 세계이다. 때문에 우리는 평소에 그 세계의 존재감을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기실 조폭세계는 결코 우리와 완전히 단절되어 있는 세계가 아니며 그 세계의 어두운 그림자는 연수생초청사기, 친지방문초청사기 및 유학생명의의 초청사기, 위장결혼사기, 한국방취제를 빙자한 사기행각 등 한국행사기행각에서도 드러나듯이 늘 우리 주변에 드리워져있는것이다. 그것의 존재는 결코 선량한 사람들의 의사에 의해 좌우되지 않는다. 그 그림자가 드리운 처처에서 우리의 형제자매들이 비일비재로 유린당하고 있지만, 우리는 그것에 너무도 무감각하다. 기실 두려운것은 어두운 그림자 자체보다도 그것에 대한 우리의 심각한 불감증이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영화 <황해>가 우리에게 경종을 울려주었다고 보는것이다.
88    한국비림박물관, 금석문의 숲을 가다 댓글:  조회:8083  추천:47  2010-11-15
중한 문화교류의 공신, 대한민국 문화예술신 지식인, 한국비림박물관 관장 허유선생 탐방 한국비림박물관, 금석문의 숲을 가다   [길림신문 박문희기자] 2010-11-15   창포(蒼浦) 허유선생 프로필   ■허유(許由), 1946년 충남 공주시 출생. 동국대 행정대학원 지역개발과, 할빈공대 한어과 수료. 문화예술신지식인, 서예가(아호:蒼浦). ▲1973년-1976년 서울 광화문과 강북구에 《해강서예학원》과 《창포서예학원》설립. ▲1977년까지 서울시장상, 서도대전 특선, 동아일보 사장상, 한국미술대전 은상 등 수상, 1978년 국전에 서예작 출품해 입선. ▲1989년 한국인 최초로 무순에서 오복광씨와 공동으로 서예전시회 개최, 1991년 9월 할빈시에서 개인전시회 개최, 1998년 5월 세계미술대전 개최, 2002년 5월 11일 한국비림원 개관, 설립후 해마다 세계서예미술대전 개최. ▲2003년 문화예술부분 《신지식인》(행정자치부 장관 인증)으로. ▲2006년 6월 중국한원비림과 《세계비림협회준비위원회》공동발기. ■한국비림박물관 서화대전운영위원장, 해강서예학원 원장, 창포서도회(蒼浦書陶會) 회장, 중국한원비림(翰園碑林) 고문, 중국 상지비림(尙志碑林)명예박물관장, 중국중원공자학회 명예회장, 한국고서연구회 부회장, 세계비림협회 한국대표, 극동사회문화연구원 원장, 고운최치원선생국제교류사업회 국제교류위원 등 력임   ---------------------------- 지난 10월 23일 충북 보은군 수한면 동정리에 위치한 한국비림박물관에서는 개관 8주년을 맞으며 한중작가와 한국 각계 인사 1000여명이 모인 가운데 《한중서화전》 행사를 융숭하게 치렀다. 비림박물관의 초청으로 중국 길림, 하남, 북경 등지 박물관, 서협, 미협의 서예미술가 등 60인이 행사에 참석했는데 기자도 그중 일원으로 함께 했다. 그날 동정리 옛 동정초등학교 자리라는 곳에 이르러 대문현판에 《藝文館(예문관)》이란 김영삼 전 대통령의 친필휘호가 새겨져있는 붉은 솟을대문 입구에 들어서니 널다란 정원에 도렬하듯 세워진 비석들이 시야에 안겨왔다. 부지 8450㎡되는 정원 전체와 건평 1333㎡ 규모의 건물 외관에 비석이 숲을 이룬 이곳이 바로 창포(蒼浦) 허유관장이 사재를 다 털어가며 일으켜세운 한국최초의 비림박물관이라 한다.   시공을 뛰여넘는 력사명인들과의 만남   중국비림박물관 정원 일각. 한중 석경전문가들이 제작한 비석들이 숲을 이룬 이곳에는 김생, 최치원, 강감찬, 한석봉, 안평대군, 이항복, 김정희 등 한국 삼국시대부터 조선말기까지 서예가나 유명 인사들의 유묵과 중국 상나라 갑골문 및 왕희지, 안진경, 소식 등의 필체를 담은 석경 500여점을 포함하여 금석학의 정수를 보여주는 량국 고전작가들의 작품 1000여점이 비석에 담겨 문화유산으로 보존, 전시되고있는데다 미술서예대전 등으로 기증받은 수상작들로부터 이승만, 박정희,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예작품, 히딩크감독의 싸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기록물을 제작해 보존하고 있고 그외에도 3000여점의 실물이 전시된 산호․ 패류관과 미술관, 공예관도 갖추고있어 그야말로 력사문화박물관을 방불케 했다. 력대 대학자들과의 시공을 뛰여넘는 만남때문인지 선인의 사상이 깃든 비문은 무거운 느낌을 주기도 했지만 좀 여유를 갖고 비석들 사이를 둘러보면 정갈한 느낌을 주는 예서와 부드러운 해서, 흐르는듯 이어지는 초서, 파격과 개성미를 보여주는 추사체(秋史體) 등 서체에서 최고서예작품의 묘미도 만끽할수 있었다. 대문에 들어서자 오른켠 바로 앞에 우리의 시선을 확 잡아끄는 구조물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중국 한원비림(翰園碑林)의 창시자 리공도(李公濤)선생(1927~)의 동상이였다. 동상의 기록문에는 리공도선생이 한국비림박물관을 물심량면으로 도운 공을 기리기 위해 동상을 박물관에 세운다는 허유관장의 비문이 새겨져있었다. 아직 세상에 건재한 한 외국인의 흉상을 어찌하여 여기다 세우게 되였을가? 그 사연을 알자면 우선 이 글의 주인공 허유관장부터 만나봐야겠다.   중한문화의 접목에 향한 격조높은 정감과 의지   중국한원비림의 창시인 리공도선생의 흉상.  허유선생은 1946년 충남 공주시 반포면 원봉리에서 한학자인 고(故) 허연선생의 3남매중 막내로 태여나 연기군에서 초등학교와 성남 중, 고등학교를 거쳐 동국대 행정대학원에서 지역개발과을 수료했다. 선친의 영향으로 5살때 천자문을 깨우쳤고 300여수의 한시를 암기했을 정도로 한학에 뛰여났던 그는 이미 1973년도 27세때 서울 광화문에 《해강서예학원》을 설립했고 그로부터 3년후에는 강북구에 《창포서예학원》을 설립하면서 한국의 서예진흥을 위해 앞장서 왔다고 한다. 그는 서울시장상, 서도대전 특선, 동아일보 사장상, 한국미술대전 은상을 수상하고 1978년 국전에 출품해 입선될 정도로 서예에 조예가 깊었다. 국전에 입선됐던 바로 그해 문공부 기획관리실장을 지내던 박종국씨의 소개로 서봉 김사달선생의 문하생으로 들어가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서예를 하게 됐는데 이러던중 서울 88올림픽에 참석했던 중국조선족들의 소개로 심양의 오복광선생을 만나게 된다. 그것이 인연이 되여 중국과의 교분이 시작되는데 마침내 그 발걸음을 멈춰세울수 없을 정도로 지금까지 그 연분을 줄기차게 이어오고있다는것이다. 1989년 한국인 최초로 중국 료녕성 무순시에서 오복광선생과 공동으로 서예전시회를 개최했고 1991년에는 할빈공대 한어과에 입학하여 한국류학생 제1호가 됐는데 그해 9월 할빈공대 양사근교장의 주선으로 중국과 아직 국교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향항을 경유해 작품 40여점으로 할빈시에서 개인전시회를 개최했다고 하니 중한 문화의 접목에 향한 그의 의지가 돋보이는 대목이 아니랄수 없다. 당시 한국 창포서도회(蒼浦書陶會) 회장으로 있던 허유선생은 중국작가들과 교류하는 과정에 중국에 유명짜한 한원비림(中國翰園碑林)을 일떠세운 하남성 리공도선생의 사적을 접하게 되는데 소시적부터 서예를 좋아했다는 리공도선생이 10여년간 많은 고난을 겪으면서 조손 3대의 전 재산을 쏟아붓고 각계 각층의 지원을 받으면서 력대 7개 왕조가 흥망성쇠를 겪었던 천년고도 개봉시에 세계 최대의 민영비림을 일떠세웠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었을 때 허선생이 받은 충격은 여간 컸던것이 아니였다. 하여 허유선생은 1992년 8월 중한 수교가 이루어질 그무렵 숙연한 마음으로 자신이 다년간 소중히 소장해온 서예정품들을 리공도선생에게 우편으로 기증한다. 그 작품들은 전달된 즉시 전부 비석에 새겨져 비림의 일부분으로 되였다고 한다.   사명감의 호소: “한국에도 비림원을!”   한국비림박물관 외곽 일별.  이듬해인 1993년,중국한원비림을 대외에 개방하자 허유선생은 드디여 한원비림을 방문, 리공도선생과 처음으로 대면한다. 리공도선생의 창업사를 경청하고 산수 수려한 자연속에 현대의 비석과 송조의 비석, 황제의 비석, 그림비석, 국제비석 등 3700여점의 다양한 서예와 조각의 문화재들이 장장 3km에 걸쳐 펼쳐져있는 한원비림을 답사하면서 뜨거운 가슴을 가진 개인의 힘이 얼마나 큰 위력을 발휘할수 있는가를 거듭 확인한 허유선생은 특히 리공도선생이 한원비원 건설을 시작할 때 석비에 새겨세우고 드팀없이 실천해왔다는 《가훈(家訓)》을 읽고 감동과 함께 마음속 깊은 곳에 모종의 사명감이 굽이쳐오른다- 《…(한원비원)건설자금은 전용으로 투하하되 누구든 생활용으로 인출 못하며 그 어떤 난관이 있어도 대를 이어 건설을 견지한다. 비림이 완성되면 나라에 무상으로 바친다. 비림에 리익금이 생긴다 해도 리씨가문에서는 자자손손 한푼도 챙겨서는 안된다...》 이 《가훈》을 통해 한원비림의 바탕에 깔린 저력을 터득한 허유선생의 뇌리에는 《한국에 비림원을 세워야겠다》는 생각이 고집스레 자리잡는다. 허유선생은 한원비림에 이어 섬서성 서안비림 등 중국 처처의 비림문화를 고찰하면서 넓고 심오한 중국전통문화에 대해 새로운 리해를 가지게 된다. 돌이켜보면 진왕조 이전부터 시작된 중국의 문화유물로서의 비림문화는 진시황이 전국을 순방할 때 석각으로 력사를 기록했던것을 발단으로 후세에 크게 성행하면서 점차 중국인들의 사상적근간을 이루게 된것이다. 중국에서 가장 오래되고 유명한 서안비림의 시작은 당나라말 오대시기인 900년전 일로 현재 중국에서 가장 많은 정품서예의 석비를 보존하고있는데 그것이 5000년 력사를 한눈에 볼수 있게 조성됐다는 점에서 허유는 그것을 한국의 비림문화와 즉각 련계시켜 생각해보지 않을수 없었다. 실상 중국의 문화영향을 많이 받은 한국에 비석문화가 없는것이 결코 아니다. 한국에서 흔히 만나는 무덤가의 비석이나 절에서 보는 탑비, 문화유적지 곳곳에 세워진 각종 비석은 분명 비림문화와 맥을 같이 하는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고차원의 비림문화로 집결승화되지 못한채 아직 분산상태에 머물러있다. 대한민국의 후손들도 이러한 력사적 작품들을 한곳에서 감상하고 배울수 있게 해야 하지 않겠는가? 허유선생은 뼈를 깎는 고통을 감내하면서라도 몸소 이 일을 실천하기로 작심한다.   뼈 깎는 고통을 각오하고 설립준비에 돌입    1997년 중공중앙정치국 상무위원, 중앙서기처 서기 겸 중앙당교 교장 호금도가 한국을 방문했을때“협화만방(協和萬邦)”이라고 쓴 족자를 선물로 증정하고있는 허유선생.   우여곡절을 겪으며 문화관광부에 한국비림원 설립허가를 신청해 1997년 6월 5일 정식으로 사단법인 인가(문화관광부 허가번호 444호)를 받아낸 그는 그 즉시로 설립전 준비작업에 돌입한다. 1997년 8월 6일, 허유선생은 14인 방문단을 이끌고 재차 한원비림을 방문, 리공도선생을 명예총재로 초빙하며 이듬해 3월에는 리공도선생으로부터 비림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경청하고 동시에 한원비림과 자매결연을 함으로써 한원비림으로부터 많은 자료도 확보한다. 1998년 5월, 허유는 서울에서 세계미술대전을 개최하고 대회에 한원비림 창설인 리공도선생을 초청했다. 성대한 개막식에서 리공도선생은 《필묵은 천추의 력사를 기록하고 묘필은 만리강산을 그리노라(翰墨書千秋靑史,妙筆繪萬裏江山)》라는 제사를 대회 현수막에 올리고 각국 대표들의 추대로 미국, 일본,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화란 등 12개 나라와 지구를 대표하여 연설, 중한 량국 인민의 우의와 량국간 예술교류를 위해 유익한 기여를 하련다는 강한 의지를 피력한다. 비림, 한국 전 대통령 김영삼의 관심사로 허유선생이 한국비림원 건설준비로 로심초사하고있을 때 그에게 큰 힘을 실어주는 계기가 마련됐으니 바로 그의 지속적인 유력홍보활동으로 리공도선생의 영향이 한국에서 날로 커져 김영삼대통령의 관심까지 끌게 된 그것이였다. 김대통령은 중국방문기회에 개봉시에 몸소 찾아가 이 전기적 인물을 만나보려고 했다. 2000년 5월,허유선생은 김영삼대통령의 방문사항을 의논코자 리공도선생를 만나 김영삼 전 대통령이 한원비림을 위해 쓴 “東方文化藝術寶庫”, “松柏長靑”과 “良心” 등 3폭의 족자를 전달했다. 리공도선생은 크게 기뻐하며 그 휘호를 전부 비석에 새겼다. 2000년 6월 16일, 김영삼대통령 내외를 비롯한 일행 18인이 한원비림을 방문했다. 김영삼대통령은 흥미진진하게 비림을 참관하면서 한원비림은 《과연 천하제일”이고 리공도선생은 《손색없는 세계문화명인》이라고 평가했다. 리공도선생은 《무괴(無愧)”라는 족자를 김영삼대통령에게, 또 《매향(梅香)”이라는 족자를 김영삼의 부인 손명순녀사에게 증정했다. 김대통령은 즉석에서 《호연정기(浩然正氣)》,《중국모범가정(中國模範家庭)”이라는 두폭의 글을 써서 리공도선생에게 답례했다. 이처럼 허유선생의 서예전으로부터 시작된 문화교류는 점차 량국 정부간의 우호교류를 이끌어내는 결실을 낳게 된다. 그해 12월 1일, 김영삼대통령이 부산에서 서도전(書道展)을 개최하고 대회에 리공도선생을 특별 초청했는데 당시 리공도선생은 심장수술로 다녀가지 못하고 대신 파견된 맏아들 효천과 둘째아들 효평이 방문기간 보은군 김종철군수에게 유구한 력사를 가진 옛 도시 개봉의 빛나는 력사와 현대건설의 성과를 소개하여 김종철군수의 지대한 흥취를 자아낸다. 결국 김종철군수가 보은군과 개봉시간에 우호도시관계를 맺을것을 제안, 개봉시지도부에서는 그 제안을 쾌히 수락하고 김종철군수를 개봉시에 초청하게 되며 드디여 쌍방은 협의를 거쳐 정식으로 우호도시를 결성, 중한간 문화교류와 무역왕래에 길을 틔워놓게 된다.    한국비림원 국제서화전 전람관 일별.   비림건설과 국내외 지성들의 합류 사재를 전부 털어가며 한국 최초의 비림원을 만들려는 허유선생의 진정에 감동된 많은 사람들이 물심량면으로 비림원건설을 지원해 나섰다. 한국 청주문화방송 최정준총무국장 , 농수산물주식회사 양승인회장의 천거로 충북 보은군 수한면 동정리에 50무에 달하는 현 자리를 마련하게 되였고 청주시의회 서병각의원이 충청북도중소기업지원센터 박재식본부장 및 제자를 인솔하여 개봉시 한원비림을 방문한 후 허유선생을 여러 모로 힘껏 지원해나선다. 하여 원 학교건물과 정원을 비림으로 개조하는 작업이 마침내 막을 올리게 된다. 허관장은 전국 국립박물관과 기념관 등을 발뿌리 닳게 뛰여다니며 수백점의 전시품 탁본과 복제품을 수집했다. 와중에 한국박물관협회 김종규명예회장 등 유지인사들의 전폭적인 지원은 그에게 큰 힘이 되여주었다. 허관장은 명품을 모으는 한편 질좋은 석재마련에도 혼신을 다하며 전국각지에서 우수한 석공을 물색, 그들에 의뢰해 력대서예작품을 돌에 새겼다. 리공도선생도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2002년 3월 한원비림에서는 서예조각정품 55점과 잘 가공한 석재 50점을 컨테이너로 한국비림원에 무상으로 보내주며 또 석경제작에 전문기술을 갖고있는 주소종 등 기술자 3명까지 보내여 비석에 글을 새기는 일을 돕게 한다. 그들은 석달동안에 110여점의 조각과업을 원만히 수행함으로써 한국비림원건립에 크게 일조했다. 한국비림원에 깊은 애정을 갖고 물심량면으로 도와나선 리공도선생의 정과 공을 허유는 마음으로 보답하고싶었다. 그래서 특별히 정을 담아 제작해 세운것이 바로 앞에서 소개한 리공도선생의 흉상이다. 이 사실은 한중 량국은 물론 다른 나라들에도 미담으로 전해졌다.   한국비림박물관 개관 8년       한국비림박물관 개관 8주년 기념행사.  천신만고끝에 비림원은 2002년 5월 11일 정식 개관했다. 산수 좋은 보은군에 마침내 력대의 문화정품을 통해 나라의 력사와 문화를 한눈에 읽을수 있는 한국의 첫 비림원이 탄생한것이다. 그때로부터 해마다 기념행사로 개최해온 《국제서화대전”은 중한 및 국제 문화교류의 장으로 자리매김하여 많은 공적을 쌓았다. 2006년 6월, 개관 4주년 기념행사때에는 행사차로 한국을 방문한 한원비림 리공도선생, 할빈시서예가협회 주석 홍철군선생, 상지시비림박물관 하수령관장 일행과 공동으로 《세계비림협회준비위원회》를 발족하고 적절한 시기에 《세계비림협회》를 정식 설립하기로 결의했다. 허관장은 《개관 8년여에 이곳에 참관을 다녀간 사람은 연인수로 100만명을 웃돈다》면서 《시작 당시 돌에 글자를 새겨 박물관을 만든다니 미쳤다는 말을 많이 들었는데 지금 비림은 한국에서 빼놓을수 없는 명물로 변했다》고 했다. 비림원 설립후 허관장은 중국한원비림 고문, 중국 상지(尙志)비림박물관 명예관장, 중국중원공자학회 명예회장, 한국고서연구회 부회장, 극동사회문화연구원 원장, 세계비림협회준비위원회 한국대표 등을 력임하면서 한국, 중국, 일본, 몽골, 로씨야, 미국 등의 석학들과 함께 한 《국제학술교류》를 비롯해 매년 개최되는 《국제서화대전》, 각국 지자체 간의 자매결연, 각국 교육기관과의 교류 등 정치, 경제, 사회, 교육, 문화, 예술 분야를 망라하는 국제교류에 앞장서왔으며 또 사설박물관의 립장을 넘어 한국의 문화외교사절로서의 역할을 수행해왔다. 이런 공적으로 말미암아 오늘 허유원장은 한국에서 추사체(秋史體)로 상징되는 한말 글씨의 명인 김정희, 1919년 3·1 운동시 민족대표 33인중의 1인인 오세창, 금석문과 한학 령역에서 당대 한국의 최고인자인 임창순선생으로 이어지는 금석문의 맥을 이어 한국비림박물관을 설립한 금석문(金石文)의 중시조로 불리고있다.   허유관장 왈: “아직 갓 시작일뿐, 앞으로 항상 함께 하자”   중국상지비림과 돈독한 우호관계를 맺고  행사일정이 발빠르게 돌아가는 틈사리에 허관장은 기자에게 창업사와 함께 사업진척현황과 향후 목표에 대해서도 들려주었다. 허유관장은 《후손들의 정신문화함양을 위해 여러 해전부터 성경비림, 공자론어비림, 불경비림 등 세계인을 아우를수 있는 정신문화의 성지를 비림으로 형성하고싶었는데 여건이 마련되는대로 지난해부터 이 작업을 이미 시작했다》고 했다. 그 일환으로 현재 권오실선생과 이현종선생을 비롯한 국전작가 133인의 성경필사는 이미 완료된 상태이며 중국한원비림에서 현재 이 필사본을 1914개의 돌판에 새기고있다고 한다. 금번 8주년 기념행사에 참가한 이수성 전 한국국무총리는 대회에 드린 축사에서 《한국의 민간문화외교사절로서의 역할을 다해온 허관장의 예술혼과 민족혼은 참으로 존경스럽고 자랑스럽다》고 치하하고 《한중 우의가 비림원을 통하여 굳건히 자리매김하길 바란다》고 했다. 중국측 대표 백산시미술가협회 주련덕주석과 하남성 하남박물원 전기부원장은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우리 량국 문화인, 경제인들이 서로에 유익한 민간외교를 할수 있는것은 허유관장이 20여년 긴 세월동안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 구축한 토대가 있었기때문》이라면서 《한사람 선각자의 노력이 얼마나 소중한것인가를 극명하게 보여주어 우리 모두를 떠밀어준다》고 했다. 이런 평가에 직면하여 허유관장은 《아직 갓 시작일뿐이니 앞으로 항상 함께 하자》는 한마디 말로 향후 할일이 태산처럼 쌓여있음을 시사한다.
87    된장술, 들어본적 있습니까 댓글:  조회:7538  추천:61  2010-07-05
  된장술, 들어본적 있습니까 연변민들레 리동춘회장,“술의 역사 다시 쓰련다”   "된장술"이란 낱말을 들어본 적 있는가? 보도듣도 못한 된장술이 태어났으니 바로 연변민들레생태 산업연구유한회사의 최신양조제품 "장로주(醬露酒)"이다. 과연 된장으로 술을 빚어낼 수 있을까? 의문을 풀고자 이 회사의 리동춘회장을 찾았다.   전통된장의 심오한 "오덕문화   “된장처럼 살아라!” 스스로에게 "강요"하는 리동춘의 좌우명.   그에 따르면 전통된장이야말로 신이 인간에 내린 최고의 선물이란다. 하긴 긴 설명이 필요 없이 인터넷 검색창에 들어가서 “전통된장”을 클릭하면 바로 답이 나온다. 전통된장이 지니고 있는 풍부한 영양가와 질병을 치료하고 예방할 수 있는 기능은 이 세상 그 어느 식품도 비교할 바가 아니라는 것.    리동춘은 전통된장 속에 "오덕문화(五德文化)"가 살아 숨 쉰다고 한다. 그가 말하는 전통된장의 “오덕”이란 단심(丹心), 화심(和心), 항심(恒心), 선심(善心), 불심(佛心)을 말한다. 그가 일컫는 된장의 “오덕문화”를 풀이하면--   丹心이란 “화이부동(和而不同)”으로서 다른 음식물과 화합을 잘하면서도 자기 맛을 잃어버리지 않고 뚜렷하게 나타내는 것이고 和心이란 “구동존이(求同存異)”로서 자기 맛을 지키는 동시에 다른 음식물의 맛도 살려주는 것이며 恒心이란 “항구불변(恒久不變)”으로 오랜 시간을 거쳐도 변질하지 않고 오히려 맛과 기능을 배로 증식시키는 것이고 善心이란 “동화열성(同化烈性)”으로 된장국에 매운 고추를 넣으면 그 매운맛을 순화시켜주는 것이며 佛心이란 “구성제유(驅腥除油)”를 의미하니 물고기의 비린맛과 육류의 기름기를 제거하는 기능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우수한 전통제품이 오히려 이른 바의 현대과학수단에 의해 변형되고 기형적으로 만들어진 개량된장에 의해 대체되면서 쇠망의 위기를 맞고 있으니 이를 통탄하여 리동춘씨는 생태문화를 선도하고 민족전통산업의 정수를 이어나가기 위한 취지로 련 5년간 해마다 "세계연변전통된장축제"와 "생태문화예술제"를 개최해왔다. 5회째 수많은 연변문화인들이 응모작으로 신곡가요 근 4천여 편, 그 외에도 많은 소설, 수필, 시 작품과 미술, 촬영 작품을 창출하면서 새로운 문화현상을 배태하고 있다. 금년 8월 "전통된장오덕문화축제"개최도 준비 중에 있다.   된장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한 과학자의 아이디어   문화가 살아숨쉬는 전통발효식품을 세계인의 식단에 올려놓아야 한다는 것이 리동춘의 지론이다. 이 목표과제를 스스로 안고 전통식품의 세계화 시장을 고안하여 부단하게 페스티벌을 개최해온 그다. 뚜렷한 목표는 좋은 아이디어를 창출하는데 기폭제로 작용했다.     페스티벌에 참석한 연변의 한 지성인이 된장술 아이디어를 제공했다. 그 지성인이 연변에서 개최된 한차례의 국제학술세미나에 참석하였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한 로 과학자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는 것이다.   조선에서 온 로 과학자는 우리민족의 음식 중에서 두가지 식품이 오래 두어도 영원히 변질하지 않고 오히려 더 좋은 맛과 기능을 만들어내는데 그것이 바로 발효식품인 전통된장과 술이라는 것. 이 두 가지 제품을 결합시켜 새로운 제품을 만들어낸다면 과히 세계적인 제품이 될 것이지만 애석하게도 자신은 아직 구상에 그칠 뿐이니 전통식품의 오리지널(原型)이 살아있는 연변에서 한번 해보는 게 좋지 않겠냐는 것이다.   아이디어 하나로 개발에 착수, 실험에 실험을 거듭한 결과 오늘의 장로주(醬露酒)가 태어날 수 있었다. 술의 수천 년 역사를 바꾸는 작업이 이제 시작되고 있다면 지나친 속단일까?   해장국기능과 나노기술의 도입--술의 역사를 바꾸는 작업   자고이래 술에 콩발효성분(된장)과 그 발효공법을 활용하여 술을 숙성시킨 사례는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발효된 콩에는 아미노산과 같은 인체에 필수적인 단백질영양소가 있으며 인체에 유익한 수많은 미생물이 있다. 과학적으로 권장하는 술의 섭취량은 극히 미소하다. 과음하면 건강에 해롭고 인체 내에서 숙취현상을 일으킨다는 것은 기본상식이다. 그러나 된장술은 마시는 순간부터 위와 장에 단백질 영양가를 제공하게 되므로 위장이 윤활해지면서 위장과 간이 보호를 받게 된다고 한다.   조선민족은 술을 비교적 많이 섭취하는 민족이다. 이튿날까지 풀리지 않는 숙취현상을 된장국으로 해소시켜왔다. 해장국의 기능이 고스란히 된장술 속에 녹아있다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다음, 나노기술(納米技術)로 술의 물 분자 클러스터(群)를 최소화시켜 충분히 희석된 체내의 알코올이 수분과 함께 빠른 시간 내에 체외로 배출되게 함으로써 숙취해소에 도움을 주게 된다고 한다.     과식은 불여불식이라 하지만 막기 어려운 것이 인간의 과음 욕이다. 술로 인해 얻는 병이 과연 적은가? 문제해소의 유효처방이 된장술이라 감히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된장술 양조기술은 이미 발명특허 출원 중에 있다"고 하는 리동춘회장은 "하지만 이 기술은 나 개인의 발명이 아니므로 앞으로 아이디어를 제공한 분들, 그리고 무 숙취 건강주를 제조하여 인류건강에 기여할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과 더불어 이 기술을 공유하고 개발할 것"이라고 밝힌다.                                                                     *     *     * 일찍 흑룡강성 해림시 서부에 조선족신도시를 건설하여 농촌경제공동체발전에 크게 기여한 리동춘, 5년 전 민족의 문화와 전통산업의 정수가 고스란히 보존돼있는 중국 최대의 조선족 전통집거지 연변에 각별한 애정을 갖고 이 땅에서 전통발효식품을 세계인의 식단에 올리기 위한 개발 작업에 혼신을 쏟아 불철주야 뛰어온 리동춘.   7월 5일부터 8일까지 나흘간 개최되는 이번 "심양한국주--글로벌 한상대회"에 "길림성무형문화재"로 등록된 전통된장과 그 계열제품, 새 상품 장로주(된장술)도 올린 리동춘회장은 이번 대회가 자신이 끔찍이도 애지중지하는 최신작을 세상에 널리 알리는 계기라면서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한다. [관련보도] [길림신문 박문희기자] 2010-07-06 【李东春相关文章】 http://www.zoglo.net/blog/read/piaowenxi/64059/0/80 http://www.zoglo.net/blog/read/piaowenxi/64106/0/40 http://www.zoglo.net/blog/read/piaowenxi/64127/0/0 http://www.zoglo.net/blog/read/piaowenxi/93635/0/0  http://www.zoglo.net/blog/read/piaowenxi/202732/0/0  
86    아름다운 발 댓글:  조회:9074  추천:98  2010-03-01
아름다운 발   한국 피겨 스케이팅 사상 처음으로 동계 올림픽 금메달을 목에 건 피겨 스케이팅 선수 김연아(金姸兒, 1990년 9월 5일 출생)가 뭇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가운데 그의 발 사진이 인터넷에 뜨면서 감동을 자아내고 있다.   김연아의 상처투성인 발을 보여준 사진--       그의 발을 보는 순간 몇 년 전 한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주장 박지성(朴智星, 1981년 2월 25일 생)의 발사진을 보고 충격 받았던 기억이 되살아나 인터넷 검색을 하여 그 사진을 찾아냈다. 그 발 사진은 지금 보아도 충격 그 자체였다.   상처투성이인 박지성의 발등, 굳은살이 박인 발가락 등이 자세히 나와 있어 박지성선수의 노력과 고통의 흔적을 알 수 있다. 갈라진 발톱과 가장자리를 따라 딱딱하게 뭉쳐있는 굳은살, 수많은 상처.     위 이미지를 본 네티즌들은 “여기저기 굳은살로 가득한 발이지만, 가장 아름다운 발이다”고 말한다.   박지성을 검색하는 중 또 하나의 발을 알게 되었으니 바로 한국의 발레리나 강수진(1967년 4월 24일 생)의 발이었다. 그녀는 현재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의 수석발레리나.   그 세련되고 아름다운 미소를 가진, 세계 각국의 내로라하는 발레리노들도 그녀의 파트너가 되기를 열망한다는, 발레리나 강수진의 발!   작가 고은은 어느 글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처음 이 사진을 보았을 때 심장이 어찌나 격렬히 뛰는지 한동안 두 손으로 심장을 지그시 누르고 있었답니다. 하마터면 또 눈물을 툭툭 떨굴뻔 하였지요. 감동이란...이런 것이로구나. 예수가 어느 창녀의 발에 입 맞추었듯, 저도 그녀의 발등에 입맞추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발레리나 강수진의 발 마치 신을 마주 한 듯, 경이로운 감격에 휩싸였던 것 그녀의 발은, 그녀의 성공이 결코 하루아침에 이뤄진 신데렐라의 유리구두가 아님을 보여줍니다. 하루 열아홉 시간씩...1년에 천여 켤레의 토슈즈가 닳아 떨어지도록...말짱하던 발이 저 지경이 되도록...그야말로 노력한 만큼 얻어낸 마땅한 결과일 뿐입니다. 그녀의 발을 한참 들여다 보고...저를 들여다봅니다. 너는 무엇을...대체 얼마나...했느냐...그녀의 발이 저를 나무랍니다. 인정합니다. 엄살만 심했습니다. 욕심만 많았습니다. 반성하고 있습니다.”   정말 눈물과 감동 없이는 볼 수 없는 발들이다. 그들의 발 사진을 보면서 가슴 아파하며 감동한 나머지 눈물을 흘린 이들이 절대 소수가 아니며 그 발들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한 이들도 많다.   세상을 주름잡는 성공의 주역들이지만 그들의 언행은 한결같이 평범하다. 2009년 4월 의 “한국에서 가장 성공한 사람”조사에서 박지성은 김대중·김영삼 전 대통령 등을 따돌리고 5위에 올랐다. 하지만 항상 그렇듯이 박지성의 입은 어눌하고 태도는 투박했다. 인터뷰에서 그가 한 말을 요약하면 “팀이 우승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 “팀이 우승해 기쁘다”는 것이다.   2007년 5월 초인가 조선일보 강천석 주필이 김연아 선수를 찾았다.   강천석: 김연아양, 반갑습니다. 먼저 지난 3월 세계 피겨스케이팅 대회에서 동메달 받은 것을 축하해요. 누구나 금메달이 탐나기 마련인데 “동메달이 더 좋다”고 한 수상소감이 유별나던데….   김연아: 한 번 출전으로 금메달을 땄다면 앞으로 계속 누군가에게 쫓길 것만 같아서요. 아직 어리니까 쫓기는 것보다 쫓아가는 게 마음이 더 편해요. 한꺼번에 많이 올라가는 것보다는 조금씩 올라가는 게 좋잖아요. 처음부터 1등을 하면 언론의 눈길에서 더 큰 부담을 느끼게 될 거고요. 강천석: 여자 피겨스케이팅 랭킹 세계 10위 안에 일본인이 5명이나 있다고 들었어요. 한국인으로는 김연아 선수가 유일한데, 혹시 쓸쓸하지 않나요. 함께 연습하고 경쟁할 동료가 있으면 도움이 될 텐데.   김연아: 저는 누군가를 이기려고 경기에 참가하는 것이 아니라 제 자신을 완성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해요. 제가 잘하면 좋은 점수를 받고 못하면 나쁜 점수를 받는 것이니까, 결국 제 자신과의 싸움이죠. 그러니 동료가 있으면 더 좋겠지만, 없다고 해서 허전하지는 않아요.   발레리나 강수진의 말을 들어 본다---   “아침에 눈을 뜨면 늘 어딘가가 아프고, 아프지 않은 날은 ‘내가 연습을 게을리 했구나’하고 반성하게 돼요.   “저는 발레를 하면서 경쟁자를 생각한 적도 어떤 목표를 가져본 적도 사실 없습니다. 모든 작품, 모든 동작, 모든 연습에 그저 최선을 다했을 뿐이예요.   “전 발레의 테크닉은 두 번째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서 지지 않는 인내심을 기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발레리나의 길은 아픔을 일상으로 껴안아야 하고 개인의 사사로운 욕망과는 거리를 두어야 하는 고단하고 외로운 길입니다. 그 길을 견디게 하는 것은 발레에 대한, 예술에 대한 사랑입니다.   “저는 살면서 단 한 번도 다른 삶을 동경해본 적이 없습니다. 발레에 인생을 바쳤고, 지금까지 최선을 다해 발레를 해왔고, 그래서 내 삶에 후회는 없습니다.”   그녀는 또 이렇게 말한다--   “발레는 다른 예술들 보다 활동할 수 있는 시간이 짧다. 죽을 때까지 하기 힘들다. 그래서 연습은 필수다. 나는 3시간만 자고 연습에 몰두 했다. 새벽 5시에 일어나서 연습했고, 밤12시가 넘어도 연습실로 늘 향했다. 시간은 사람이 만든 개념 아닌가. 시간을 안 보면 시간 가는지도 모르겠더라. 나는 한번 쉬면 회복기가 더 길어진다는 것을 발견했다. 부상당했을 때도 연습은 계속 되었다.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한이 아니면 계속 연습실로 향했다. 나는 우리 발레단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사람이지만 가장 오랫동안 깨어있는 사람이다. 물론, 부상 때문에 팔이나 다리를 들어 올리지 못하거나 구부리지 못할 때도 있었다. 그러나 막상 무대에 서서 흥분하면 내 몸의 아드레날린이 활성화 되었고 몸의 움직임이 달라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기에 게으른 사람은 무엇인가 하기 어렵다는 말을 하고 싶다. ‘나는 저 사람보다 부족하다’라는 사실에서 계속 벗어나지 못하면 안 된다. 하면 할수록 발전할 수 있다. 물론 재능도 중요하다. 그러나 재능보다 중요한 것은 연습이다. 같은 동작도 계속 해서 연습하면 다른 의미를 읽을 수도 있다.   “나는 발레를 다른 사람들 보다 늦게 시작했다. 말 그대로 늦둥이인 셈이다. 요즘은 발레단에서 군무에서 바로 주역으로 올라가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군무에서 하프솔로, 솔로, 마돈나의 단계를 다 거쳤다. 즉, 주연이 되는데 7년이나 걸린 것이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내가 늦었기에 감사하다. 요즘은 솔로가 되어도 못하면 다시 군무로 내려가는 경우도 있다. 나는 늦게 발레를 시작했지만 차근차근 밟아 갔기에 다시 내려가는 일이 없었다.”  
85    호랑이 해에 호랑이의 생존을 말한다 댓글:  조회:5000  추천:49  2010-02-16
  호랑이 해에 호랑이의 생존을 말한다 박문희   경인년 첫날 아침 호랑이 얘기를 한다. 우리의 조상들과 후세 사람들은 내내 호랑이를 수호신으로 모시면서 호랑이의 보호를 받으려 했는가 하면 호랑이 정신을 배워서 만방에 위용을 떨치려고 기를 써왔다. 하지만 자고이래 생물사슬에서 최정상급 패자로만 계셨던 신격존재의 호랑이가 오늘처럼 애절한 동정의 대상이 돼버린 적은 일찌기 없었다. 우리가 애정을 갖는 동북호랑이 총 수량은 현재 500마리에도 못 미치는 정도, 우리 나라 경내에는 고작 20마리밖에 없다고 한다. 그중 훈춘지역에 다행히 5~6마리 있어서 재작년 국내로서는 유일하게  《동북호랑이의 고향》으로 명명되기도 했다. 소시적 기억에는 산골 어디를 가나 호랑이가 없다는 마을이 없었는데 지금은 어쩌다 중국 《동북호랑이의 고향》 훈춘에서 호랑이가 배가 너무 고파서 마을에 내려와 소를 잡아먹었다는 소식을 가끔 신문의 요란스런 보도를 통해서 즐겁게 접할뿐이다. 농민의 소를 잡아먹었는데도 즐거워지는것은 수년전 제정된《길림성중점보호륙생야생동물로 인한 인신재산피해 손해보상방법》에 의해 피해자가 성, 시(현) 급재정에서 각각 50%씩 보상을 받을수 있기 때문이다. 국제야생생물보호학회(WCS)등 국제조직의 지원도 이루어진다고 한다. 호랑이를 잡으면 옛날에는 영웅호걸로 떠받들렸으나 오늘은 큰 경을 치른다. 작년에 운남의 농민 몇몇이 호랑이 한마리를 잡아먹고 옥살이는 물론 48만원 배상까지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포살도 포살이지만 문제는 호랑이의 생존기반과 먹이래원이 대책없이 줄어드는것이다. 호랑이 한마리가 자그만치 100평방킬로메터의 령지를 독차지하고 그 안에 득실거리는 메돼지, 사슴, 노루와 같은 짐승을 생각만 나면 골라먹을수 있어야 제격일텐데 그게 안되니 말이다. 길림성에서 야생동물 포획금지조치를 취한 10여년래 토끼, 메돼지, 꽃사슴도 조금씩 늘고있고 동북호랑이도 몇마리 늘었다고는 하나 그래도  대책이 모자라 보인다. 현행 《손해보상방법》에서 한술 더 떠 보상외에 묵직한 상금을 내여 먹음직한 소를 호랑이에게 기꺼이 바칠수 있도록 장려하는 정책도 만들어졌으면 좀 좋을가? 호랑이의 씩씩한 기상이 인간과 자연에 차넘치기를 기원해본다. [길림신문] 2010-02-14
84    조선 대지에 변혁의 난류 일렁인다 댓글:  조회:5870  추천:50  2010-01-15
  조선 대지에 변혁의 난류 일렁인다    장춘레오폴라 오장권리사장 조선방문고찰기   [길림신문 박문희] 2006-07-26   중국기업가 조선방문팀 천리마동상앞에서. 방문팀은 오장권을 비롯한 길림, 료녕, 산동 등지 기업의 리사장들로 구성됐다. 기업소 직원들의 컴퓨터 공부 평양의 미장원 평양슈퍼의 상품진렬대   조선과 표고버섯, 인삼재배, 자동차가스충전 등 합작항목을 추진중인 장춘레오폴라(勒奧普拉)유한회사 오장권리사장이 7월 상순 조선을 다녀왔다. 작년 10월 사업차 평양 아리랑축제까지 관람하고 돌아온 뒤 금년 7월 조선땅을 다시 밟은 오장권씨는 일년도 채 안되는 사이 조선전역에서 생긴 변화에 대해서 내심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고 기자에게 털어놓았다.   《조선에서 생기고있는 급변의 새 모습은 우리가 미처 상상할수도 없었던것이였다》고 오장권리사장은 말한다.   20년간 중국인민무장경찰부대 장춘소방지대에서 근무하면서 수십 차에 걸쳐 혁혁한 전공을 세웠고 참모장 중책까지 떠메왔던 오장권씨는 1998년에 퇴직한 뒤 장춘유풍원예기술유한회사와 장춘레오폴라공업무역유한회사를 련이어 세우고 올해에는 사회주의 새농촌건설추진을 목표로 길림신태양그룹(주비) 산하에 길림신태양생태농업개발유한회사를 새로 설립,국내외로 관련사업들을 추진중이다.   《작년초 평양시교 칠골협동농장에 남새시범재배를 시작했습니다. 그 일이 잘 되니 신심이 생겨서 이번에는 인삼과 표고버섯재배,자동차가스기화기와 같은 항목을 가지고 평양자유시장조사도 하고 관련회사고찰도 했어요. 련운항치신회사 오승길리사장, 청도성진회사 최가쟁(崔可崢) 리사장 등 네분도 동행을 했는데 한사람처럼 조선에 지금 획기적인 변천이 일어나고있다는 강렬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평양의 자유시장   《대동강변에 자리잡고있는 평양자유시장은 작년까지만 해도 조용했어요. 근데 이번에 가보니 중국의 대형시장을 짐쪄먹을만큼 많은 인파가 몰리고있었지 뭡니까.》   2층으로 된 이 대형종합시장이 정규화되기 시작한건 작년부터라 한다. 건평이 5000평방메터로 수도에 어울리는 규모, 모양과 깨끗함을 갖추었다. 그 큰 시장안에 장군들이 꽉 몰려 사람열기가 확확 느껴질 정도였다고 한다. 시장 개장시간은 여름에는 오후 1시부터 저녁 6시까지,일요일에는 아침 6시부터 12시까지 6시간,기타 계절에도 상황에 따라 개장시간을 적절히 조정한다고 했다.   거래되는 상품품목으로는 수산물, 특산물, 육류, 알류, 남새, 식품, 의류, 일용잡화, 문구류, 가전제품, 거의 없는것이 없었다.   작년에는 길가의 농부산물시장에서 물건값을 깎거니 붙이거니 하며 흥정하는 모습을 볼수 있었지만 대형 시장에서는 그런 모습을 볼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대형시장에서도 오손도손 왁자지껄 흥정하는 모습을 볼수 있었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여기서 거래되는 상품은 대부분 중국산,그외 일본산도 있었다.그러나 올해에는 농부산물 대부분이 자국산이였다. 과자사탕류도 원래 90%이상이 중국산이였는데 지금은 거의 다 자국산으로 바뀌였단다.   일본상품은 대부분 가전제품이였다. 일본과의 무역과 지원은 조선민족경제협력련합회와 국제홍십자회 등 부처의 비준하에 이루어진다.   중국상품은 주로 실내장식재료, 타일, 쏘파, 세탁기, 전기랭장고, 컴퓨터, 주방용품, 에어콘 등, 그중 의상류는 중국의 북방제품이 많고 내장용품은 남방에서 들여온 것이 대부분이였다. 포장도 거친 포장으로부터 점차 정교한 포장으로 탈바꿈하고있었다.   물가(RMB 1원이 조선돈 300원에 해당)를 보면 남새가 비싼 편이고(중국과 비슷함) 공산물이 싼 편이였다. 킬로그람당 양파는 350원, 버섯은 1000원, 팥은 650원, 입쌀은 700원, 수산물에서 고등어는 600원이였다. 참나무버섯(표고버섯)은 고려호텔에서는 300그람에 2000원으로 자유시장보다 비쌌다.   기자가 시장전망에 대해 관심을 보이자 오장권씨는 《평양자유시장의 규모가 꽤 컸지만 시민들의 수요에 비하면 아직 판부족》이라면서 《그래서 평양시정부에서는 향후 이와 같은 규모의 자유시장을 대폭 확장할 계획이더라》고 했다.   거리의 변화도 눈에 띄였는데 도로변에 소매점, 슈퍼마켓이 많이 늘어났단다. 음식점밖에 없던 평양시내에 지금은 카라오케와 같은 오락시설도 많이 늘었고 작년에 사우나시설 같은 종합봉사쎈터가 처음 나타나더니 올해에는 그 수가 많이 늘어나 고객들에게 많은 편리를 주고있다 한다.   《시장이 활성화되니까 시민생활에 일고있는 변화도 직감할수 있었는데 특히 의상의 변화가 인상적이였습니다.》   이전에는 사람들의 옷차림이 거개 국방색이나 검정색 등으로 짙은 색이였는데 지금 층집우에서 내려다 보면 알락달락하고 환한 색갈이 많이 눈에 띄여 눈맛 당기더라, 녀성들도 그전엔 흰적삼에 검정치마를 받쳐입는것이 통례였고 하이힐을 신고 무릎을 넘는 짧은 치마를 입고 다니는 녀성을 볼수 없었지만 지금은 거리에만 나서면 그런 옷차림이 눈에 띄고 옷의 색갈도 다양하고 밝아서 신선감을 주더라, 녀자들의 얼굴화장도 달라졌더라, 짙고 간단한 저질의 크림화장이 담담하고 고급스런 물화장으로 바뀌여 사람들에게 주는 느낌이 자연스럽고 우아하더라고 했다.   《지금 조선으로 가보면 금방 전에 없던 활력을 느낄수 있습니다.》   행인들이 배낭을 메고 다니는 모습은 조선특유의 풍경이다. 그러나 이 모습에도 이전과 다른 확연한 변화가 생겼다. 이전에는 배낭을 지고 다녀도 기운이 없어보이고 길가에 맥없이 앉아 쉬는 모습을 자주 볼수 있었지만 지금은 그런 모습을 아예 볼수 없고 모두의 얼굴에 활기가 넘치고 걸음걸이도 기운차고 씨엉씨엉했다. 말소리도 힘있고 얼굴표정도 밝았다.   외국인의 행동자유,자유행동을 통해 본 조선민간인   《지난번까지만 해도 외국인들은 외화상점에만 드나들수 있었습니다. 조선돈을 사용하는 시장에는 안내하지도 않았지요. 그것도 안내원이 규정한 로선에 따라 안내를 받아가며 제한된 곳만 볼수 있었는데 지금은 상황이 아주 달라져 가보고싶은 곳을 마음대로 드나들수 있어요. 안내원도 몸조심하라고 주의를 주는것 외에는 아무런 통제도 하지 않습니다.》   발길 가는대로 들려 본 호텔이나 식당 화장실에서도 변화가 느껴졌다. 검고 조야하던 화장지가 점점 희여지고 질바탕도 좋아지고있음이 감지되였다고 했다.   방문단 일행은 조선민간인들에게서 표현되는 높은 자질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 공공장소에서 떠들고 아무데나 쓰레기를 버리거나 가래침을 뱉는 현상을 볼수 없었고 손님을 대할 때 떽떽거리지도 비굴하지도 않았으며 언제나 품위를 지키고 례절스러웠다. 흑인종이나 백인종 외국인이 지나가도 대하는 태도가 매우 자연스러웠다.   《조선의 교통은 시민들의 높은 자질을 잘 보여주는 창구라 할수 있습니다. 조선도 중국처럼 우측통행을 하는데 규정을 어기고 좌측통행하는 사람을 한사람도 못봤어요. 외국인들이 제멋대로 좌측통행을 하면 매우 이상하게 생각하더군요.》   그들은 늦저녁 십자거리 혹은 지하통로에서 감시인이 전혀 없는 상황에서도 교통규칙을 위반하는 사람이 없다는데 주의를 돌렸다. 다니는 차량이 아주 적은데도 자동차 기사라면 규정을 위반하고 지름길을 택하는 법이 없고 거리가 퍽 멀더라도 꼭 지정한 곳에 가서 차머리를 돌린다. 동행자 5명중 한족은 최가쟁씨 한사람뿐. 오장권씨가 여러 차례 방문을 한 경험에 비추어 조선에는 그 어떠한 경우에도 교통위반자가 없다고 하니 최가쟁씨는 전혀 믿지를 않았다 한다. 사람이 많이 다니는 낮에는 철저한 교통규칙준수가 가능하지만 경찰이 없는 밤에는 위반자가 없을리 만무하다는것이다.   그럼 좋다 내기를 하자.   당신이 지면 어쩔래?   양주(한병에 125딸라) 한턱 쏘겠다. 그렇지만 당신이 지면 당신이 쏴야 해.   거야 물론이지, 그렇게 하자.   저녁 7시 사이 교통경찰이 없는 시간을 택해서 옹근 한시간동안 놓칠세라 눈을 밝혔는데 결과는 오장권씨가 이겼다. 경찰이나 감시하는 사람이 없는데도 길을 마구 건너는 사람이나 차량을 발견하지 못했던것이다. 지상으로 길을 가로 질러 가면 몹시 편할텐데도 자각적으로 지하통로를 리용해 길을 건는다. 교통위반자도 없거니와 거지도, 웃통을 벗어던진 사람도 보지 못했다. 결국 최가쟁씨가 감탄사를 련발하며 기꺼이 한턱 냈다. 그러면서 《우리가 이 정도 되자면 멀었어》라고 하더란다.   해외투자자에 대한 써비스   조선해외동포원호위원회 《정부 관련부처 일군들의 써비스의식에 괄목할만한 변화가 보여 투자지향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겨주었다》면서 오장권씨는 《해외동포원호위원회는 원래 경제분야의 일에는 관여치 않았는데 지금은 경제발전을 촉진하는데 있어서의 중요한 기구로 활약하고 있었다》고 례를 들어가며 알려주었다. 외국투자자에 후환해소조치도 대주고 유력한 정치적담보자로도 나서며 량국 기업인들을 이어주는 교량과 뉴대적 역할도 분담하고있다는것이다. 손실 안 보고 성사할수 있는 믿음직한 회사를 알선해주는가 하면 사전에 해당 기업을 조사해서 미팅도 시켜주고 전과(前過)가 있는 회사는 소개해 주지도 않거니와 경우에 따라서는 주의하도록 귀띰을 해주더라고 했다.   조선해외동포위원회에서는 해외투자인들을 조직하여 투자관련법 설명회도 열었다.   방문기간 평양법률사무소를 찾아간적이 있었다. 평양법률사무소 전직고문으로 있는 분이 오장권일행을 접대했는데 그분은 원래 대학교법률교수로 정부 고급법률고문을 맡고있었고 얼마전에 국가 파출기구인 이 사무소에 파견되여 와 대외법률써비스를 전담하고있었다.그분은 아주 높은 책임감으로 투자희망자들에게 주동적으로 투자정책을 설명하고 독자,합영,합작 경영은 어떻게 하는가? 정책면에서 중국과 차별이 있는 부분은 무엇인가? 등 의문을 제기하도록 하고 일일이 해석해주었다. 개성공단,금 강산관광지역,라진선봉 그리고 기타 지역 이를테면 평양에 투자한다면 어느 법에 따라야 하나?광산개발시에는 어느 법에 준하나? 그 외에도 부동산임대,경제타산서,대리활동,민사소송,중재대리,투자법,독자법,합영합작,기업합병 등 물어본 부분과 묻지 않은 부분에 대해서도 자세한 소개와 설명을 했고 상관자료도 제공해주었다.   과거의 손실을 미봉하도록 조선방문기간 오장권씨는 단동과 심양에서 온 조선족 기업가 두분을 만나 그간에 있었던 감동스러운 일들을 알게 되였다.사실은 이 두 기업가는 이전에 조선의 실정을 모르고 몇몇 회사와 합작건을 추진하다가 큰 손실을 본 일이 있었다. 최근 이 두분은 해외동포원호위원회에 당시 당했던 사실을 반영했다. 원호위원회에서는 이를 큰 일로 간주하고 적극 그들을 도와 나섰다.조선의 현행 정책에 의하면 금년 3월부터 석탄과 지철은 수출이 금지되여 있었다.그러나 상기 두 조선족이 과거에 당한 손실을 미봉하게 하고자 조선 정부에서는 특수조치를 대여 석탄과 지철을 수출입할수 있도록 특별비준을 함으로써 그들이 사업상 재기하는데 결정적인 조건을 지어주었던것이다.   이 이야기를 하면서 오장권씨는 《이 사실은 중조무역간에 드리워있던 어두운 그림자를 지우는데 있어서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고 부언했다.   조선 회사들의 컴퓨터 사용 보편화   조선 보건성 산하 《만년제약회사》와 《56무역회사》를 방문했을 때 오장권일행은 이 두 회사의 모든 부처에서 컴퓨터를 사용하고있음을 보고 《이 회사들은 국가에서 중점적으로 지원하는 회사니까》 이런 정도로 생각했었는데 여러 회사를 돌아보고 나서 이런 생각이 잘못됐다는것을 깊이 느꼈다.실은 어느 회사나 다 컴퓨터를 사용하고있었고 인터넷 사이트 사용도 아주 활발했던것이다.교육기초도 잘 돼 있었다. 공업분야만 봐도 인재구조가 비교적 합리했다.중등전문교육이 발달하여 실제 사업분야에 적응되는 전문인재가 풍부할 정도였다.이는 중국에서 대학이나 중등전문학교 졸업생이 많지만 전공이 맞는 전문인재가 극히 결여되는 실태와 선명한 대조를 이루고있었다.물, 록화 등 환경건설도 제대로 돼있었다.원래 개발이 안됐기에 오염이 없을수 있겠지 하고 생각했었는데 역시 외계의 이런 인식이 잘못된것임을 눈으로 확인했다.사실은 그게 아니고 원래 오염원관리가 엄격히 제도화되여있었으며 교육기초도 잘 다져져 있었다.   《여러가지 여건상 아직 시설은 안 되지만 환경건설이 잘 돼 있고 교육기초가 좋으니 고속발전이 완전히 가능하겠다는 강한 인상을 받았다》고 오장권씨는 말한다.   남포항 인천항 직항 뚫리는 통상로   《평양에서 출발, 황해북도 개성으로 가는 행정에 만년제약회사 사장의 소개로 많은 것을 알게 됐습니다.중조합작으로 생산된 제품이 직접 남으로 수송되고있다는것을 알고 몹시 흥분됐더랬어요.이런 일은 원래 상상도 못했었거든요.》   인삼과 표고버섯 생산기지를 만들기 위해 조선으로 간 오장권리사장은 워낙 조선에서 생산한 표고버섯을 중국에 실어온 후 다시 로선을 바꾸어 한국이나 기타 지역에 수출할 타산이였다. 그러나 이제 보니 그게 아니였다.   북남 해상통로가 이미 뚫려있어 남포항에서 인천항까지 전용화물선이 매주 1회씩 직항하고있었던것이다.이제 륙로만 뚫리면 개성에서 서울까지 한시간이면 수송이 이루어질것이라고 해외동포사업국의 한 관원이 소개했다 한다.   관련상사들이 북측에서는 《민경련(민족경제련맹)》을,남측에서는 《통일부》를 통해 등록을 하면 북남통상이 이루어지는데 북의 상품은 세금이 없이 남으로 통과할수 있다.삼팔선은 국경선이 아니고 《우리끼리》의 장사요, 무역이니 세금을 부과할 리유가 없다는것이다.남에서도 북의 제품을 국산으로 인정해주고있고 삼팔선을 국경으로 보지 않는다.   남포에서 물건을 선박에 실으면 하루도 안돼 인천항에서 부린다!   이제 륙로가 열리면 개성에서 실은 상품이 두시간 안짝에 서울에 대일수 있다!이 사실에서 오장권씨는 지대한 고무를 받지 아니할수 없었다고 감개를 터놓았다.   《6.15선언후 북에서는 남쪽을 비방하는 일, 욕하는 일이 완전히 근절됐다. 지금 가장 자주 접하게 되는 말은 란 낱말이다. 욕하는 말은 한마디도 못 들었다》는 오장권씨는 《우리끼리》란 낱말의 참뜻을 페부로 실감하고 가슴이 뭉클했다고 한다.   합작추진을 위한 고무적인 움직임   《외국자본 유치에서 투자지분책정이 중요한데 이 문제에서 지금 조선은 상당히 적극적인 자세를 보이고있다》고 오장권씨는 소개했다.그전에는 건물과 토지를 조선측 지분으로 삼고 자금은 전부 외국의것을 도입하려고 했는데 지금은 항목에 따라 조선에서도 현금투자를 같이 한다는것이다.현금투자를 각기 50%씩 하자고 주동적으로 나서는 경우가 푸술한데 이것은 작년까지만 해도 볼수 없던 일이라고 했다.   에너지사업 등 국가 근본 리익에 관계되는 중점항목은 정부에서 투자하도록 돼 있고 국외의 투자에 상당히 후한 정책적혜택을 베풀고 있다 한다. 이에 고무를 받고 오장권씨는 태양에너지발전,CM4기체발전, 자동차가스기화기 등 항목을 지금 조선측과 상담중이다.   《인삼재배,표고버섯재배 등 합작항목에서도 조선에서는 진실한 합작 자태와 행동을 보여주고있습니다. 례컨대 우리는 기계, 종자, 균종과 재배기술만 제공하면 되죠.이 외의 모든 물자 말하자면 토지, 표고버섯재배막 등은 전부 조선측에서 해결합니다.》   작년 4월 조선에서는 6개 농호를 단위로 한 농촌생산분조책임제를 실시,대풍작을 거두었다.올해도 풍작을 이룰것 같다고 한다.   지난해 오장권씨는 강반석녀사의 고향인 칠골협동농장의 실험포전 한정보에 무우,상추,배추,쑥갓 등 12종의 남새를 실험재배했는데 조선 칠골농장에서 제공한 토지조사서류에 따라 미생물비료를 도입하면서 기술재배를 한 결과 례년의 3.2배에 달하는 소출을 올렸다.   오장권씨는 조선과의 합작에 확실한 신념을 갖고있었다.그는 다음과 같이 인정하고있다. 조선에는 농약잔류물이란 개념이 근본 존재하지 않는다.황해북도의 상황을 보면 물이 좋고 오염이 없어 유기농업을 잘할수 있는 절호의 생태조건을 갖추었다고 볼수 있다.조선은 현재 시설농업이 락후한 상태에 있어 비닐하우스 및 기계시설과 미생물비료를 갖춘 재배기지가 엄청 부족, 이 면에 무한히 큰 사업예비를 가지고있다. 제조업은 지금 엄중한 전력부족으로 잠시 어려운 상태지만 인삼, 표고버섯 재배 등을 망라한 농업은 활성화가 완전히 가능하다.   투자희망자들에 대한 희망사항   취재를 마칠 무렵 오장권씨는 《일부 몰지각한 사람들이 중국의 인삼을 조선 개성에 실어다 개성인삼으로 둔갑시켜가지고 한국에 팔아넘기다 들통이 났는데 조선정부에서는 이를 엄격히 금지하고 있다》면서 조선족 대 조선투자 희망자들에게 《사기치는 사람을 각별히 조심하고 남을 사기하지도 말며 조선의 법률에 좇아 자기의 실정에 맞는 항목으로 정상적인 사업을 개척할것》을 권고하고싶다고 했다.   《조선이 대외로 문을 활짝 열고있는 시점에 조선족들이 자체 우세를 발휘하여 열심히 사업한다면 반드시 성공할수 있다》는것이 오장권씨의 소신이자 행동지침이다.
83    중국 “두만강지역개발프로젝트”와 다자간 국제협력 댓글:  조회:10213  추천:80  2009-12-30
중국 “두만강지역개발프로젝트”와 다자간 국제협력 박문희(중국 길림신문사 부 주필, 고급편집)   2009년 8월 30일 중국정부의 승인을 받은 이 지난 11월 18일 신화통신에 의해 그 전문이 공식 발표되면서 중국 국내는 물론, 국제사회의 깊은 관심도 유발하고 있다. 세계경제의 중심축이 아시아로 이동하고 있는 현 시점에서 이 새로운 프로젝트에 동북아 각국의 관심이 쏠리게 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구역면적이 7만3천 평방킬로미터(한국 면적의 약 73%)로 지린성의 39%를 차지하고 인구가 1090만으로 전 성의 40%를 차지하는 창춘시, 지린시 부분지역과 두만강 유역의 옌볜조선족자치주(즉 “長吉圖”지역) 개발 사업은 오는 2020년까지 이 지역을 동북아지역의 물류·공업 전진기지로 개발하는 중국의 국가적 전략 사업이다. 의 목표에 따르면 “창지투” 지역은 2012년까지 중국 두만강지역 국제합작에서 돌파적 진척을 가져와 동북지구경제발전의 새로운 성장극으로 부상하게 되며 2020년까지 중국 두만강지역 대외개방수준에서 획기적인 돌파를 이룩하여 지역 경제총량이 4배로 늘고 따라서 전국의 선진수준에 도달하게 된다.   두만강구역 국제합작개발프로젝트는 주변 국가와 국제사회의 공동참여하에 10수년의 건설을 거쳐 초보적인 성과를 거두었다.   중, 러 양국은 훈춘과 러시아 핫산의 도로와 항만을 일체화시키고 관세를 없앤 봉쇄형 관리구역 조성이 한창 진행 중이며 주변 각국도 두만강지역 국제 자유 무역구 건설에 호응하고 있다. 중국과 조선도 변경구역의 도로와 항구를 일체화시키고 수출가공 및 보세물류단지 건설을 본격화하고 있다. 중국-몽골 대통로 건설계획도 작성중이다. 자료에 의하면 목전 몽골국에서 조사 확인한 80여종의 광산자원가운데 석탄은 1520억 톤, 철은 20억 톤, 린은 2억 톤, 동은 800만 톤이라 한다. 수송력이 문제로 나서고 있는데 실제로 중국 국가철도부에서 현재 中蒙大通路 건설을 기획중이다.   옌볜에서는 변경개항지 훈춘시를 통해 중-러 항구, 중-조 항구 항목건설을 추진 중이며 조선과 접경하는 중국 측 구간인 훈춘-권하 도로(39km)는 이미 완공된 상태이며, 55만kw 발전 용량의 훈춘화력발전소 2단계 공사가 완료되었고 훈춘에서 출발하는 중-러 철도가 머지않아 개통되고 훈춘-도문고속도로도 명년에 완공되며 길림-훈춘 간 고속도로도 곧 국가사업으로 추진된다.   先導지역의 두만강 지역 국제자유무역지대 건설, 長吉圖 국제 내륙 항구 건설, 과학기술 창조지역 건설, 국제협력 산업지역 건설, 현대 물류지역 건설 등 8大 중점공정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중 국제협력 산업지역 건설을 보면 신형공업으로 자동차, 석유화학, 농산물가공, 광전자정보, 야금건자재, 장비제조, 바이오, 신소재 등 신형공업기지 건설이 포함되어 있고 생태여행지 건설은 장백산의 생태자원과 국경지역에 위치해 있는 여건우위를 기반으로 이 지역을 인간과 자연이 조화를 이루는 다국적 생태계 여행 및 人文여행, 그리고 특색 있는 휴가, 휴양의 생태지역으로 건설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최첨단 서비스업 집중지역 건설의 내용에는 금융보험, 서비스아웃소싱, 비즈니스展示, 문화創意 등 분야를 기반으로 동북지역 자본시장을 건설하고 동북아지향의 현대서비스업 시스템구축 등이 들어있으며 그 외 현대농업 모범지역 건설에는 토지의 집약적 경영과 적당한 규모경영, 그리고 농업의 전반적 기계화 실현 및 시설농업, 우수농업 창출 등 내용이 망라되어있다.   중국 정부는 특히 옌지시와 훈춘시 등 두만강 유역을 집중 개발한 뒤 조선의 나진항을 통한 동해 항로도 개척한다는 방침이다. 훈춘-나진-동해 항로를 이용하면 지린성과 헤이룽장성에서 생산되는 광물자원과 농산물, 공산품을 수송하는 물류비를 대폭 절감할 수 있다. 앞으로 10년 사이 “창지투” 지역에 엄청난 가시적 변화가 예상되는데, 지린성 전역, 그리고 동북지역과 내지의 상관 협력관련지역, 나아가 동북아 각국이 참여하는 이 중차대한 대사를 앞에 두고 중국은 한국, 일본 등 주변 중요국가들의 대거참여를 기대하고 있다.   과거 10여 년간의 두만강 개발 실천으로부터 보면 그 진척이 지지부진한 면이 많았는데 창구지역의 경제총량이 높지 못하고 체제와 메커니즘 혁신이 미흡한 것과 같은 제약적인 요인으로 국제적 지역합작개발을 효과적으로 이끌어낼 수 없었던 것이 그 원인으로 되었던것만큼 결국 이 지역 개발의 성공 여부는 지역적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으면서 자본력이 있는 한국과 일본의 적극적인 참여와 투자 여부에 크게 달려있다고 볼 수 있다. 말하자면 두만강지역개발은 동북지구 더 나아가 보다 넒은 범위에서 통일적으로 계획하고 상호 합작해야만 구역개발에 활력소를 불어넣고 실제적 효과를 기할 수 있는 것이다.   실제상 동북아 6국을 멤버로 한 두만강구역합작의 비교우위는 아주 뚜렷하다. 한국의 경우 경공업부문과 에너지부문에 투자하고, 조선과 중국 길림성의 노동력을 이용하면서 중국, 조선, 러시아, 몽골의 광물자원, 농산물을 활용할 수 있다. 조선은 나진·선봉지역을 동북아지역의 중계수송 기지로 개발하면서 한국, 중국, 일본기업의 투자를 유치할 수 있으며 중국 동북지역은 노동력, 중급기술을 제공하면서 한국과 일본에서 자본, 고급기술을 유입하고 조선, 러시아에서 자국 내에 부족한 에너지, 광물자원을 수입할 수 있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러시아 극동 오호츠크지역에서 생산된 수산물을 나진·선봉지역에서 가공하여 한국이나 일본으로 수출하는 것도 전망이 밝으며 나진·선봉 경제특구 개발에 진전이 보일 경우 이미 중국 옌볜지역에 투자하고 있는 한국기업들이 의류, 섬유, 목재 가공업, 제지, 식품가공업의 투자를 추진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한국과 일본의 투자로 경제특구의 인프라, 산업생산기반의 구축이 가속화되면 두만강 접경지역에서 중·조·러의 경제교류를 더욱 활성화시킬 수 있을 것이며 두만강 접경지역에서의 경제교류 활성화는 필시 현재 조선 개방을 전제로 논의되고 있는 동북아 철도 연결과 에너지 협력과 같은 다자간 국제 협력 사업을 크게 촉진하는 효과를 유발하게 될 것이다.   (한국 《시사뉴스》 2009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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