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58. 빨간 장미꽃 함정
련인절날 밤, 불야성을 이룬 시내에는 오색령롱한 전등불빛이 반짝이고 시내 중심에 자리잡은 시대광장은 쌍쌍이 빨간 장미꽃을 들고 오손도손 이야기하며 산보하는 련인들로 들끓었다.
어느날 연화가 새물거리면서 성호를 찾아왔다.
성호는 호리호리하고 탄력있는 연화의 몸매와 새물거리는 얼굴을 보고 조금 시름이 놓였다.
“리선생님, 랭면을 사줄래요?”
“그러지.”
성호는 흔쾌히 대답하고 연화와 함께 택시를 잡아타고 랭면집으로 달려갔다.
랭면집에서 청춘 남녀가 명태와 조개살 안주에 시원한 맥주를 마시는 기분이 아주 상쾌했다.
그들은 랭면을 한사발씩 먹은 후 랭면집에서 나왔다.
조용한 골목에 들어서자 연화가 성호의 팔을 살짝 끼였다.
“누가 보면 어쩌오?”
“뭐래요? 련인절인데 련인인가 하겠죠.”
“안해 보면 어쩌오?”
“뭐래요? 사모님, 아니, 정희 선생도 리해하겠죠.”
연화는 대수로와하지도 않고 성호의 팔을 끼고 부근의 다방으로 들어갔다.
희미한 전등불빛 아래 연화는 성호와 마주 앉아 커피를 홀짝 마시더니 앵두입을 조용히 열었다.
“선생님, 실련당한 후 선생님이 친구로 돼줬기에 다시 삶의 용기를 얻었어요. 한편 이왕지사도 자꾸 영화필림처럼 떠올라 저를 괴롭히는군요.”
“에이, 싹 잊어버리고 새로운 출발을 하오.”
연화는 두손으로 성호의 손을 꽉 잡고 울컥했다.
“동창생, 그 배신자는 잊은지 오래죠. 제일 처음 저의 정조를 짓밟은 그 색마가 내 마음을 이렇게까지 괴롭힐줄은 생각지도 못했어요.”
“또 련인이 있었소?”
“예.”
연화는 머리를 숙이면서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한참 후에 천천히 머리를 든 연화는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더니 조용히 앵두입을 열었다.
“선생님은 집에 기여든 살인악마를 나포하고 많이 놀랐겠는데요. 위로할 대신 제 이왕지사를 얘기해 미안해요.”
“괜찮아.”
성호가 바라보니 연화의 어두운 실련의 눈동자에서는 생기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연화는 다방에서 흘러가는 정적을 조용히 깨우면서 눈물겨운 이왕지사를 얘기하기 시작했다.
“그날도 련인절날 밤이죠. 제가 모교 예술학원 무용실 강당에서 춤을 추고 숙사로 돌아갈 때였어요. 난데 없는 꺽다리가 다가와 치근거렸어요…”
누가 묻지도 않았는데 자기는 미술학부에 다니는 영호라고 소개하고나서 너스레를 떨었다.
“야- 정말 이쁘고 매력적이구만. 우리 알고 지내면 어떻소?”
“시끄러워요. 피해요.”
연화는 꺽다리를 피해 숙사 쪽으로 걸었다.
꺽다리는 뒤따라오면서 “너무너무 예뻐서 수채화를 그려주고 싶은데.”라고 했다.
처녀들이란 춰주는 말 한마디에도 가슴이 울렁일 때도 있었다.
“아니, 영호라던가요? 기장밥이라도 해달라는 건가요?”
연화는 쌍까풀눈을 곱게 흘기였다.
점심인데도 영호는 식당에 갈 대신 연화한테 딱 달라붙어서 모델을 서달라고 비난사정했다.
순식간에 당한 일이지만 연화는 한 학원 영호의 말을 들어주었다.
(모델이 돼주고 수채화 한장 받는 건 수지 맞는 거야.)
영호는 정말 숙사에 가서 미술도구를 가지고 오더니 그녀를 데리고 자기 집에 설치된 화실로 들어갔다.
영호는 연화를 벽 쪽에 놓인 빨간 비단으로 감싼 의자에 앉으라고 하고 붓에 색물감을 툭툭 찍어 수채화를 쓱쓱 그리기 시작했다.
백설 같이 하얀 얼굴, 복스러운 복숭아이마에 초생달 같은 눈섭, 정기도는 까만 쌍까풀눈, 오똑한 코 아래 빨간 앵두입술, 가느다랗고 야들야들한 목, 어깨우로 넘실넘실 파도쳐내린 커피색머리, 예술적체형미가 다분한 호리호리하고 탄력있는 몸매… 턱을 고이고 앉아 추억 속에 잠긴 듯한 미인을 그리면서 너무 아름다와 감탄이 자꾸 났다.
“실로 예쁘오. 진짜 선녀 같소.”
“어마나!”
연화는 얼굴을 감싸쥐고 머리를 숙였다.
한식경 역사질 끝에 영호의 붓끝에서 진짜 예쁜 연화의 초상화가 완성됐다.
“자! 보오.”
연화는 황급히 의자에서 일어나 이쪽으로 와서 수채화를 들여다보았다. 진짜 살아 움직이는 자기 같았다. 아니, 자기보다 더 예쁜 순진한 처녀의 모습이였다.
“현물보다 더 예쁜 처녀를 그렸구만요.”
“아니요. 어찌나 이쁜지 퍽 쉽게 잘 그려진 거 같소.”
영호는 점잖고도 겸손하게 인사를 받았다.
“어마나, 어떻게 고마운 인사를 드릴가요?”
연화가 두손을 맞잡고 인사하며 몸둘바를 몰라했다.
영호는 정색해 “천만에. 후에도 멎진 그림을 그려줄테니까. 부르면 나올만 하오?” 하고 물었다.
연화는 부끄러운지 몸을 배배 탈며 눈을 살풋이 내리감으며 궁리하다가 가볍게 머리를 끄덕였다.
그때부터 연화는 영호가 부르기만 하면 밤중에라도 화실로 나갔다.
그녀는 영호의 거슴츠레한 실눈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뛰여난 미술기량을 탄복했다. 차차 지내보면서 훤칠한 체격과 사내대장부답게 돈을 쓰고 푹푹 쥐여주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그녀는 점차 영호와 함께 있으면 즐거워났다.
련인절날 밤에도 영호는 빨간 장미꽃을 한묶음이나 연화한테 안겨주고 부동한 각도로 사진을 찰칵찰칵 찍어주었다. 이어 그들은 노래방에 가서 밤이 가는줄도 모르고 경쾌한 음악 속에서 서로의 마음을 주고 받으면서 붙안고 춤 추고 또 추었다.
새벽이 거의 되여 영호는 꽃가게에 가서 빨간 장미꽃 한송이에 새하얀 백합꽃 한송이, 울금향 네송이를 사가지고 연화와 함께 조용한 다방으로 들어갔다.
“그때 영호와 함께 갔던 다방이 바로 이 다방인데요. 바로 이 자리에 선생님과 마주 앉은 것처럼 마주 앉았죠.”
그때 영호는 실눈을 크게 뜨면서 꽃묶음을 연화 앞에 내밀었다.
“티없이 맑고 깨끗한 내 마음이 담긴 이 꽃을 받아주오.”
“아까 레이저광장에서 받았는데요.”
“그 꽃은 이미 얼고 시들었잖소. 꽃은 신선해야 아름답고 향기로운 법이요. 이 걸 꽃병에 꽂아두고 오래오래 향기를 맡아보오.”
연화는 그 말뜻을 깊이 생각해보지도 않고 꽃묶음을 받아 오똑한 코를 대고 그윽한 향기를 맡았다. 그 매력적인 장면에 매혹된 영호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야- 꽃향기를 맡는 연화의 이쁜 모습! 오늘 밤에라도 붓이 있으면 수채화를 그려주고 싶구나.”
“어마나, 화가인가 했더니 세상의 고운 말은 다 골라 하는 말박사네요. 호호호.”
연화는 쌍까풀눈을 곱게 흘기면서 깔깔깔 웃었다.
그날 밤, 연화는 영호가 미술학부를 이미 졸업하고 간판광고회사를 경영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였다.
“우리 선생도 간판광고회사에 다니는데요.”
“누구요?”
영호는 저으기 놀라했다.
“성호 선생이라고 알아요?”
“오- 알구말구.”
영호는 대뜸 불쾌해하는 눈치.
“우린 광고라이벌이지.”
“그래요?”
순간 연화는 혀를 홀랑 내밀었다.
“그때 저는 다신 영호 앞에서 다시 리선생님 말을 꺼내지 말아야겠구나 했지요.”
연화는 성호의 눈치를 할끔 훔쳐보며 뒤말을 이었다.
“그때 영호는 나를 처음 보는 순간 무슨 호수에 나타난 백학 같다는지, 숲 속에 피여난 빨간 장미꽃 같다는지 하면서 잔뜩 춰올렸지요…”
영호는 격동되여 연화의 야드르르한 손을 꽉 잡고 야망을 토로했다.
“연화, 나는 연화라는 빨간 장미꽃을 아름답게 그려 온 세상에 널리 장랑하고 싶소. 어떻소? 그때면 연화는 단번에 명도델로 뜰게요. 우리 잘 합작해보기요.”
연화는 고무풍선처럼 하늘에 둥둥 뜬 기분이였다. 그녀는 머리를 끄덕이면서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럼 얼마나 좋겠어요.”
“연화는 미래의 명모델이요.”
연화는 영호의 손아귀에서 손을 빼면서 “한가지 부탁하자요.”라고 했다.
“뭘? 백가지라도 부탁하오. 다 들어줄게.”
“절대 간판광고에 내지는 마세요.”
“왜?”
“성호선생이 좋아하지 않아요.”
그 말에 영호는 대뜸 상을 징그리며 가슴츠레한 실눈으로 연화를 째려보았다.
“왜?”
“리선생님이 광고모델을 서달라고 해도 전 창피하다고 서주지 않았는데요.”
“오- 알만하오.”
그제야 영호의 찡그렸던 얼굴근육이 느슨히 풀리면서 실눈도 좀 트이였다.
그는 커피잔을 들어 마시면서 실눈으로 황홀한 꿈 속에 잠겨 있는 연화의 표정변화를 찬찬히 살폈다.
어느덧 봄기운이 완연하여 산과 들에는 향기로운 꽃들이 울긋불긋 피여 아름다움을 뽐내며 향기를 풍기고 있었다. 처녀총각들의 가슴도 봄꿈으로 탱탱 부풀어올랐다.
봄을 맞아 연화의 예쁜 얼굴에는 청춘의 홍조가 발갛게 어리였다.
영호의 초청을 받은 그녀는 곱게 치장한 후 택시에 앉아 공원으로 달려갔다.
공원의 잔디밭에서는 봄풀의 싱그러운 냄새가 그윽하였다. 연화는 노란 저고리에 빨간 치마를 입고 신선한 꽃 몇송이를 들고 푸른 잔디밭에 앉았다. 지나가던 구경군들이 장미꽃 같은 연화의 그 예쁜 모습에 도취돼 걸음을 멈추고 오래도록 떠날줄 몰랐다. 실로 하늘에서 선녀가 내린 듯하였다.
그날 영호는 연화에게 많은 사진을 찍어주었다.
영호는 사진을 찍을 때 연화가 입었던 대여섯벌이나 되는 한복을 몽땅 주고서도 모델비도 두툼하게 주었다.
“소비자가 아니고 뭐요? 학잡비에 보태 쓰오.”
연화는 영호가 얼마나 고마운지 몰랐다.
며칠 후 뜻밖에 시내 번화한 거리에 장미꽃같이 어여쁜 연화의 사진을 배경으로 한 간판광고가 줄느런히 내걸렸다. 행인들은 연화의 아름다운 모습에 시선이 끌려 발길을 멈추고 광고내용까지 내리보았다. 광고효과는 놀랍게도 좋았다.
“오- 그때 난 간판광고를 보고 놀랍고도 불쾌했소. 우리 회사에 와서 광고모델을 서달라고 해도 사양하더니. 원, 참 불쾌했지. 돈이나 많이 줬겠구나고 추측도 했댔소.”
“미안해요. 선생님.”
연화는 성호의 손을 잡으면서 머리를 숙였다.
“그때 난 영호를 찾아가 화를 냈죠. ‘왜 신용을 지키지 않았는가’, ‘왜 동의도 거치지 않고 간판광고를 내 걸었는가?’고 말이예요.”
그런데 영호는 실눈으로 연화를 가슴츠레 바라보며 그저 씨물씨물 웃을뿐이였다.
“미안하오. 불시에 간판광고를 내야겠는데 모델을 찍어놓은게 없어 그렇게 됐소. 다신 내지 않지.”
“이제 다시 내면 모든 건 끝이죠.”
“알았소, 알아. 예상치 못한 기적이 일어나면 그땐…”
영호는 뭔가 목구멍까지 올라왔던 말끝을 얼버무렸다.
진짜 기적이 일어났다. 텔레비죤방송국에서 연화를 패션전시회 모델로 초빙하겠다고 영호네 광고회사에 전화문의가 걸려왔다. 촬영가협회에서도 모델로 초빙하겠다고 련계전화번호를 알려달라고 했다.
소식을 들은 연화는 영호에 대한 반감보다 호감과 감사한 마음이 반죽돼 가슴이 벅차오르고 설레이기까지 했다.
연화는 텔레비죤방송국 스튜디오에 가서 며칠동안 모델훈련을 받았다.
며칠 후 그날이 닥쳐오고야 말았다. 연화는 시체옷을 갈아입고 섬광등이 번쩍이는 텔레비죤패션전시회 무대에 올라섰다. 그녀는 경쾌한 음악에 맞춰 사뿐사뿐 걸어나갔다. 그녀는 세계미스선발대회에 나선 미인처럼 아가씨들이 질투의 눈길을 보낼 지경이였다. 관중석에서 영호는 실눈으로 아름다운 연화를 눈박아 바라보며 닭알침을 꼴깍꼴깍 삼켰다.
패션전시회프로가 방송된 후 연화는 일약 명모델로 부상했다. 패션회사 사장은 두툼한 로임으로 그녀한테 패션모델초빙서를 내밀었다. 텔레비죤방송국 광고회사 총경리와 당시 국영간판광고회사의 총경리였던 리굉팔도 간판광고모델초빙서를 내밀었다.
연화는 모두 사양하고 자기를 모대에 올려준 영호의 광고모델만 했다. 심지어 영호가 새 미술착상이 있다면 언제 불러도 달려가서 모델을 서주군 하였다. 하여 그녀는 온 세상에 아름다운 모습을 더욱더 떨칠수 있게 되였다.
이젠 무더운 여름에도 긴팔적삼과 청바지를 입고 다니던 연화가 아니였다. 눈부시게 하얗고 오동통한 우유빛젖가슴을 반넘어 드러내고 촬영에 나서는가 하면 심지어 부래지어와 팬티차림으로 숱한 사람들이 여겨보는 수영장에서도 먼진 포즈를 취하고 촬영하게 했다.
어디 그뿐인가. 그녀는 영호를 따라 울울창창한 나무숲이 우거진 남산에 가서 늙은 아름드리비술나무 밑에서 팬티와 브래지어 차림새로 인체사진을 촬영한 적도 있었다.
그녀는 이젠 진짜 영호의 말처럼 자기 아름다운 모습을 온 세상에 자랑하는 명모델로 된듯 푸른 하늘에 둥둥 뜬 고무풍선처럼 들뜬 기분에 잠겨버렸다.
어느날, 영호한테서 전화가 왔다.
“연화, 내 화실에 오오.”
“예.”
연화는 영호가 부르기만 하면 택시를 타고 오라는 지점으로 달려갔다.
화실에 들어가 보니 판판 다른 세상에 들어선 것 같았다.
널다란 화실복판에 놓인 병풍 앞에 긴 렌쯔를 단 고급사진기가 서 있었고 벽에는 눈 뜨고 차마 볼 수 없는 미녀들의 라체화가 줄느런히 걸려 있었다.
실 한오리 걸치지 않고 침대 우에 모로 누워있는 처녀의 라체화, 강변에서 한쪽무릎을 약간 구부리고 물동이를 어깨우로 들어 하얀 몸에 물을 끼얹는 처녀의 라체화, 백설처럼 하얀 아름다운 몸매를 자랑하면서 쏘파에 엎드려있는 라체처녀… 미녀들의 라체화들은 살아 움직이는 처녀들과 흡사해 보기도 끔찍했다. 연화는 침대에 누워있는 처녀와 쏘파에 엎뎌있는 녀성을 패션전시회에서인지 어느 간판광고에서 본 것 같았다.
“후에 알고보니 선생님네 광고회사의 모델 선희더구만요.”
연화의 말에 성호가 중얼거렸다.
“그 녀자는 원래 개방형 성격이니까. 라체화모델로 나설 수도 있지.”
연화는 라체화들에 매혹돼 눈길을 떼지 못하였다. 영호는 실눈을 크게 뜨면서 한껏 열변을 토하기 시작하였다.
“이건 지고무상의 예술품이요. 예술을 사랑하는 연화는 리해하리라 믿소. 세계를 들썽하는 명모델아가씨로 떠오르자면 예술을 위한 희생정신이 필요하오.”
연화는 쑥스러워 머리를 천천히 숙였다.
“이번엔 어떤 예술적인 구상을 했는가요? 시키는대로 할테니까요.”
용기를 얻은 영호는 대담히 자기 착상을 내놓았다.
“요즘 아주 엉뚱하고 멋들어진 착상을 했소. 제목은 ‘타오르는 청춘의 불길’이요. 어떻소?”
“우-와- 참 멋진데요.”
“연화는 청춘의 불길이 타오르는 아름다운 시절의 청춘 장미꽃이오. 이 주제를 예술적인 극치로 승화시키려면 실 한오리도 걸치지 않은 옥기둥 같은 처녀의 몸에 타오르는 불길을 그려 촬영하고 그걸 모델로 그림을 그려야 한단 말이요.”
“어마나!”
연화는 대듬 두손으로 빨갛게 상기된 얼굴을 가리였다.
“세계미스로 떠오르는 일이 어디 그리 쉬운가 하오? 예술을 위한 헌신정신이 필요하오.”
영호는 연화의 팔을 끼고 병풍 앞으로 걸어가면서 열변을 토했다.
“이전에 몇몇 처녀들이 바로 그 희생정신이 모자랐기에 세계 미인으로 거의 되려다가 중도랑패를 보았소.”
병풍 앞에 이르자 영호는 연화를 세워놓고 마주보면서 계속 세치 혀끝을 날름거리며 씨벌였다.
“연화, 큰 마음 먹소. 예술의 극치를 위해 희생할 때 됐소.”
연화는 머리를 다소곳이 숙이며 “그래도 어떻게?”하고 발끝으로 땅바닥을 허비였다.
이윽고 그녀는 머리를 천천히 들더니 용기를 내 “어떻게 하라는가요?” 하고 물었다.
“아, 아니, 이 조용한 화실에는 연화를 세계미스로 떠오르게 하려는 한 화가와 세계명모델로, 아니, 월드미스로 될 푸른 야망을 품은 연화 밖에 없단 말이요. 용기를 내오. 보수로 2천원을 줄게. 자, 옷을 한겹, 한겹 벗소.”
연화는 인차 옷을 벗지 않았다.
“한가지 약속해요. 이 사진과 라체화를 본 지방에 팔거나 걸어선 안돼요.”
“그럼, 그렇구말구. 남방이나 국외에 가지고 가서 세계명화전시회에 전시하려오.”
그제야 연화는 머리를 끄덕였다.
영호는 사기가 부쩍 올랐다.
“연화, 옷을 하나, 하나 벗소. 먼저 부동한 각도에서 촬영하겠소. 그 다음에 불타오르는 ‘청춘의 불길’을 그리겠소.”
연화는 큰 마음을 먹고 영호가 시키는대로 하얀 보를 편 네모상자 우에 서서 천천히 옷을 하나, 하나 벗으면서 멋진 포즈를 취하였다. 먼저 적삼을 벗고 하얀 우유빛 잔등을 내놓았다.
섬괌등이 번쩍!
짧은 치마를 벗자 탄탄하고 옥기둥 같은 우유빛허벅다리가 드러났다.
번쩍!
그녀가 부래지어까지 풀어 네모상자 아래에 스르르 흘려내렸다.
번쩍!
연화는 부끄러워 머리를 숙이면서 두손으로 가슴을 안고 돌아서지 않았다.
번쩍!
드디여 그녀는 용기를 내 팬티까지 천천히 벗었다. 순간 새하얀 옥기둥 같은 미녀의 라체가 황홀하게 나타났다. 영호는 넋을 잃고 촬영하는 것마저 잃고 멍해 그녀의 라체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영호는 적잖은 라체모델을 상대하여 인체화를 그려왔다. 하지만 연화의 몸처럼 예술적으로 잘 다듬어진 매혹적인 처녀의 라체는 처음 보았다.
그는 넋을 잃고 숨을 딱 죽인채 한참이나 실눈을 크게 뜨고 연화의 우유빛살결을 쳐다보고 또 보고 아래우로 훑어보고 또 보면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녀의 S라인곡선미가 발가우리한 불빛에 빛나고 있었다.
영호는 바늘이 떨어지는 소리마저 들릴 조용한 화실 안이 터지게 한숨을 후- 몰아쉬였다.
연화가 머리를 모로 돌려 뒤돌아보자 그제야 제정신이 든 영호는 번쩍, 번쩍 샷타를 눌렀다.
“연화, 돌아서서 두손을 머리우로 들어올려 맞잡고 허벅다리는 좀 모로 타오. 옳소. 참 매력적이요. 그대로 한 반시간쯤 서있어야 되겠소.”
뒤이어 영호는 비디오촬영기 샷타를 눌러놓고 연화한테 다가가 붓에 노란 칠과 빨간 칠을 묻혀서 하얀 우유빛허벅다리로부터 올리 세차게 타오르는 불길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연화는 부끄럽고 간지러워 허벅다리를 모아 배배 탈면서 두눈을 살풋이 내리감았다. 그러건 말건 영호는 매우 빠른 솜씨로 그녀의 옥 같은 몸에 활활 타오르는 뻘건 불길을 다 그려냈다.
영호는 청춘의 불길이 타오르는 그녀의 몸을 번쩍번쩍 촬영했다.
기실 그쯤 하면 모든 미술과 촬영은 끊난 셈이다. 그러나 영호는 아닌 보살을 떨었다.
“참, 미흡한데 많은데. 어떻게 빠리세계명화전시회에 내놓는단 말인가?”
머리를 절레절레 젓던 그는 붓을 쥐더니 다시 연화의 허벅다리와 가슴, 목에까지 색칠을 먹이는 척했다. 그러다가 영호는 불시에 연화한테 덮치더니 흰보를 편 네모상자 우에 깔아눕혔다…
한참 후에 영호는 두팔을 하늘공중에 높이 펼쳐들고 미친듯이 환성을 질렀다.
“세계명화 탄생! ‘불타오르는 청춘의 불길’이 이 세상에 고고성을 울렸다. 청춘의 불길 만세! 만세! 만만세!”
연화는 갑자기 당한 일에 줄 끊어진 구슬처럼 눈물을 줄줄 흘리며 구슬피 흐느끼며 옷을 주섬주섬 주어입었다.
그녀의 흐릿한 눈 앞에 벽에 걸린 라체화들이 희미하게 안겨왔다. 침대 우에 모로 누운 처녀, 물동이로 어깨 넘어 알몸에 물을 끼얹는 처녀, 쏘파에 마구 엎드린 라체처녀…
그녀들도 모두 이 화실에 와서 자기처럼 라체모델이 되고 “예술을 위해 헌신”하였으리라고 생각되자 저으기 격분했다.
이제 또 어떤 예쁜 처녀가 색마의 눈에 걸려들어 이 화실에서 자기처럼 라체모델이 되고 간음당할지 누가 알랴!
연화의 눈에는 영호가 더는 명화가 아니라 항상 가슴츠레한 실눈으로 음충하게 처녀들만 노려보는 색마로, 아니, 악마로 보였다.
연화는 영호가 주는 두툼한 돈뭉치를 활 뿌려던지고 정신없이 문을 박차고 부랴부랴 도망쳤다.
그녀는 숙사에 돌아오자 영호가 준 장미꽃병을 들어 땅바닥에 탕 며쳐 박산냈다. 그 빨간 장미꽃의 유혹을 생각만 해도 가증스러웠다.
여기까지 토설한 연화는 성호를 마주 바라보면서 중얼거렸다.
“선생님, 저의 원쑤를, 아니, 우리 처녀들의 원쑤를 갚아줄 수 없어요? 아직도 그 얼마나 많은 이쁜 처녀들이 인체화가의 허울을 쓴 색마의 빨간 장미꽃 함정에 빠져 한뉘 참회의 눈물을 흘릴지 어떻게 알아요? 하늘이나 알고 땅이나 알가요?”
성호는 연화의 말을 듣고 마음이 아팠다.
(가냘픈 그녀는 실련당하고 색마한테 정조를 유린까지 당하지 않았는가! 얼마나 고통스럽고 절망에 뻐졌겠는가!)
기실 연화는 실습하러 갔을 때 정희가 한달반 동안 밖에 배워주지 않은 녀학생이다. 무슨 일이 있으면 연화가 정희를 찾아가 말하는 것이 순리였다. 그런데 어떻게 돼 이렇게 됐던지 연화는 쩍하면 성호를 찾아와서 하소연하군 했다. 성호는 어쩐지 정희 몰래 만나는 것이 자연스럽지 못하고 심지어 불편한 감이 들었다. 그러나 연화는 성호가 어떻게 생각하던지 착한 성호를 자꾸 찾아왔다.
“연화, 정희를 보고 랭면을 먹으러 오라고 할가?”
“글쎄요.”
연화는 성호를 고운 눈길로 바라보더니 “이담 제가 엄선생님을 따로 찾아뵙죠. 오늘은 선생님과 할 말이 있는데요.”라고 했다.
성호는 머리를 끄덕였다. 그는 속으로 정희의 눈치 좀 보이지만 량심적으로 정희한테 미안한 일을 하지 않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연화는 성호를 데리고 자기가 든 손바닥만한 세집으로 갔다.
“혼자 여기 있잖소?”
“아니, 남동생과 함께 있어요. 우리 학교 다녀요.”
그제야 성호는 시름놓고 연화를 따라 구들에 올라갔다.
“앉으세요. 세집이 초라하죠?”
“아니, 오누이가 사는 정취가 아늑한거 같아 좋소.”
진짜 세집이 어찌나 너무 비좁은지 무용교원이 사는 집 같지 않았다. 가마목에는 커다란 솥 두개가 나란히 걸려있고 그 옆에 빤질빤질 윤기도는 배가 불룩한 물독이 놓여 있었다. 벽쪽에는 나란히 놓인 옷궤와 책궤 우에 이불 두채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그제야 성호는 오누이가 사는 집이라는 것을 확신하고 한숨을 홀가분하게 후~ 내쉬였다.
연화는 궤짝에서 사진첩을 꺼내 펼치더니 이것저것 찾다가 성호 앞에 내밀었다.
“남동생이예요.”
연화는 순 조선족녀성처럼 보통키였는데 그녀의 남동생은 키가 훤칠하였다.
“음. 사내답게 멋지구만.”
연화는 몇장 더 번지더니 사진 한장을 빼 성호 앞에 내밀었다. 훤칠하게 생긴 한 총각이 세 녀성과 나란히 서서 찍은 사진이였다. 그 속에는 연화도 끼여 있었다.
“배신자예요.”
“누군데?”
“절 배신한 동창생련인 말이예요.”
“오~”
성호가 머리를 끄덕이면서 그 총각을 유심히 들여다보니 코가 유별나게 커보였다. 딱 마치 양키 같았다.
“이 옆에 선 앤 내 발등을 밟은 계집애죠.”
“오~ 그 녀동창생 말이지?”
연화는 머리를 무겁게 끄덕였다.
그녀는 또 사진 한장을 내보였다.
“여기 또 나쁜 사람 한 놈이 있어요.”
“보기요.”
성호는 입귀에 미소라할가 비웃음이라고 할가 흘리면서 물끄러미 마주 보는 연화의 손에서 사진을 받아 보았다.
“아니, 이건 내 실습할 때 찍은 사진이 아니요.”
“그래요. 은희랑 영자랑 함께 찍은 사진이죠.”
연화는 사진 속의 성호를 가리키면서 종알거렸다.
“보세요, 이 히죽이 웃는 리선생님을. 선생님은 그때 저한테 뭐라고 했어요. ‘연화 같은 녀동생이 있었으면 얼마나 행복하겠소.’ 전 그때 그 말이 그렇게 생각되지 않았어요. 그 한마디 말이 소녀의 마음을 얼마나 울렁이고 설레이게 했는지 알아요? 마음 속에 얼마나 큰 상처를 남겼는지 알아요?”
“그 말이 어째서?”
성호는 억이 막힌듯 입을 함박만큼 벌리고 연화를 쏘아보았다.
연화는 종주먹으로 성호의 가슴을 톡 내지르며 계속 종알댔다.
“저의 마음 속에는 리선생님이 첫사랑으로 자리잡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선생님을 만나려고 무용을 배우러 간다해놓고 정희선생을 자꾸 찾아갔지요. 물론 알아요. 고중생인 제가 어찌 대학생인 정희 선생님과 비할바가 되겠어요? 정희 선생님을 제치고 리선생님을 차지한다는 건 하늘의 별따기일수도 있죠. 그러나 어쩐지 제 마음은 비길데없이 선생님한테로 끌려가고 따라갔어요.”
연화는 종주먹으로 성호의 가슴에 방망이질하다가 그의 가슴에 와락 안기면서 흐느껴 울었다.
“전 대학교에 가서도 선생님을 내내 잊지 못했어요. 그러다가 영호한테 당했고 또 동창생한테서도 배신당했어요. 전 어쩌면 좋아요? 정말 자살하고 싶어요.”
“에이, 바보 같은 소릴 작작 하오. 실련해서 죽으라면 이 세상에 살아남을 사람이 몇이겠소?”
성호는 연화의 잔등을 다독여주었다.
“연화, 힘내오. 죽을 용기가 있으면 왜 살아나갈 용기가 없단 말이요. 악착스레 살아나가노라면 꼭 연화 앞에 백마왕자가 나타날거요.”
이때 갑자기 문을 뚝 떼는 소리와 함께 키가 훤칠한 남학생이 들어왔다. 그는 나란히 앉아 사진첩을 펼쳐들고 보는 성호와 누나를 번갈아보더니 되나가려고 했다.
연화는 우쭐 일어나면서 “얘, 어디로 가니? 내 중학교때 리선생님이야. 인사해라.” 하고 말렸다.
“예~ 안녕하십니까?”
“연화 남동생이겠구만.”
“예. 경희라고 부릅니다. 많이 가르쳐주십시오.”
“고중 3학년인데요. 이제 명년이면 대학시험을 쳐야 해요.”
“오~”
성호는 머리를 끄덕이더니 우쭐 일어났다.
“장래 대학생동무 공부 바쁘겠는데. 이만 오늘 가겠소.”
“아니, 김선생님, 제 보자요. 할 말이 있는데요.”
연화는 방치를 찾아들더니 빨래를 꼴똑 담은 대야를 번쩍 들어 이더니 성호를 따라 나섰다.
“선생님이 다망한 건 알아요. 미안한데요. 절 좀 동무해주세요.”
연화는 무슨 일이 있는거 같았다. 세탁기가 없어 강변에 가서 빨래를 해야 하는 것도 있었지만 그저 어색한 장면을 피하려고 빨래대야를 이고 나선것 같았다.
“그러지.”
성호는 통쾌하게 대답해주었다.
그는 연화를 따라 달빛이 부서지는 강변으로 가노라니 십여년전에 둘째누나네 집으로 갔다가 영화를 따라 강변 빨래터로 가던 일이 이상하게 떠올랐다. 지금도 모기 종아리를 물던 빨래터에서 영화가 자기 종아리에 옷을 감아주던 일이 삼삼히 떠올라 서글프기만 했다.
(숱한 처녀애들과 사귀였지만 어느 한 처녀애한테서도 진짜 찡한 사랑을 해보지 못했어. 퐁퐁 솟는 샘 같은 사랑 말이야. 허허허.)
생각해보면 처녀애들과 한 허구픈 달밤들이 많기도 했다.
연화는 차거운 마가을 강물이 출렁이며 흐르는 강가에 가서 사위를 둘러보더니 납작한 빨래돌이 있는 곳에 다가갔다.
가을바람에 설레이는 갈대가 병풍처럼 둘러있어 바람과 행인을 막아주어 빨래하기는 안성맞춤한 빨래터였다. 갈대 사이로 가로등불빛이 잔잔히 비껴드는데 간혹 강뚝옆길로 헤드라이트가 갈대밭을 누비면서 쏜살같이 달려지나갔다.
연화가 멈춰서자 성호는 그녀의 머리 우에서 빨래대야를 받아 내리웠다.
“고마워요.”
연화는 머리 우에서 따발을 내리우더니 옷을 차디찬 강물에 훌훌 불궈 비눌을 쭉쭉 먹였다. 뒤이어 빨래를 납작한 돌에 개여 올려놓고 방치로 탁탁탁 쳐댔다.
“연화, 그 고운 손이 다 얼겠소. 내 언제 세탁기를 사줄게.”
“고마워요. 이젠 습관돼서 괜찮아요.”
“어떻게 손이 시려 씼겠소?”
“집엔 세탁기가 있는가요?”
“있소. 중풍에 맞은 아버지 똥 걸레를 세탁기 없어서야 어떻게 씼겠소?”
연화는 방치질을 멈추고 빨래를 돌에 대고 몇번 더 비비더니 강물에 훌훌 휑구어 대야에 담았다.
성호는 강물에 불군 빨래를 빨래돌 우에 올려놓고 방치질을 하는 연화의 가냘푼 잔등을 바라보노라니 한없이 가엽어 보였다.
(어쩜 20대 중반의 요 가냘픈 몸을 그렇게도 복잡한 비극이 충격했을가? 나쁜 놈들, 사내자식들이 정말 개새끼들이야.)
성호는 저도 몰래 방치질하는 연화의 잔등에 손이 올려놓더니 매만졌다.
순간 연화가 빨래방치질을 멈췄다.
“선생님, 리선생님은 저의 첫사랑이예요. 절 살려주세요.”
온몸이 달아오른 연화는 성호한테 와락 안기더니 키스벼락을 안기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러지 마오. 난 유부남이요.”
“유부남이면 뭐래요? 절 동무해줄 수 없어요?’
“아니, 우린 사제간이요.”
“사제간이면 뭐래요?”
성호는 연화를 훌 밀어내고 우쭐 일어났다.
“아니, 난 연화를 이렇게 보지 않았는데. 대체 정신상의 공백을 메우려는 거요? 아니면 육체적인 기갈을 풀려는 거요?”
강물에서 뛰노는 금잔디들에 비낀 연화의 표정은 랭담했다. 초롱초롱한 쌍까풀눈은 정열과 그 어떤 갈망에 반짝이고 있지 않겠는가.
“뭘가요? 저도 모르겠어요. 죽고픈 생각 밖에 없어요.”
성호는 빨래터에서 조용히 연화한테 말했다.
“나한테 미련을 가지지 마오. 실련의 고통 속에서 구해주려고 할뿐 아무런 만족도 줄 수 없는 사람이요.”
“목석.”
“그래. 동정 밖에 없는 목석이지.”
“알았어요.”
“밤도 깊었는데 집으로 돌아가기요.”
“먼저 돌아가세요.”
연화는 빨래를 훌훌 물에 휭구어 빨래돌에 올려놓았다. 그러나 아무리 찾아도 빨래방치가 물에 떠내려가고 없었다.
연화는 빨래를 꽉꽉 짜서 대야에 훌훌 담았다. 성호는 대야를 번쩍 들어 안더니 제방뚝으로 씨엉씨엉 올라갔다.
제방뚝에 웬 청년이 서 있었다.
“누나!”
“왜 여기까지 나왔니?”
“밤중이 돼서 마중하려고?”
연화의 남동생이였다. 그는 성호의 손에서 대야를 받아들고 앞에서 걸었다.
성호는 제방뚝으로 올라오는 연화를 보고 “후에 바쁜 일이 있으면 부르오.”라고 할가하다가 그만두었다.
“잘 다녀가세요.”
연화는 한마디 남기고 남동생을 따라 희읍스럼한 달빛을 사뿐사뿐 밟으며 사라졌다.
성호는 집에 돌아와서도 연화의 비참한 모습과 그 절절한 목소리를 듣는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한편 놀라움을 금치도 못했다. 자기도 연화처럼 미묘한 빨간 장미꽃 함정에 빠질 번하지 않았는가고.
정희는 그때까지 이불을 펴놓고 침대에 누워 텔레비죤을 보면서 기다리고 있었다.
“요즘 무슨 일이 있는가요?”
“어? 아, 아니, 아무 일도 없어.”
정희는 그윽한 눈길로 바라보면서 “쉬면서 잡소릴 많이 하던데요.” 하고 말하였다.
그 말에 성호는 놀랐다.
“아니, 그럴 수가?”
“미치면 그래요? 꿈에도 그 녀자가 떠오르고 그 녀자의 손을 잡고 달리고 흥! 그 녀자를 끌어안고 키스를 하고 잡소리를 하고…”
“아니, 그것도 말이라고 하오?”
성호는 상을 찡그리면서 안해를 쏘아보았다.
정희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정색하며 따지고들었다.
“내가 당신의 가정배경을 나무랐는가요? 부모 병시중을 제대로 하지 못했는가요? 부모를 제대로 모시지 못하는가요?”
“아니, 당신은 나무랄데 없는 현처량모요.”
성호는 정희를 꼭 끌어안아주었다.
정희는 성호를 활 밀어놓고 모로 돌아누웠다.
“은영을 잊었는가 했더니. 원.”
정희는 눈물을 줄 끊어진 구슬처럼 주르르 흘렸다.
“똑똑히 기억해두세요. 내 첫사랑은 당신이예요. 교수네 곱게 기른 무남독녀인 내가 농민의 아들인 동무를 뭘 보고 사랑했나요? 돈이 있나요? 가정배경이 있는가요? 난 그저 당신의 성실하고 착한 마음과 변함없는 사랑을 바랄뿐이예요.”
“그래, 그래. 난 우리 사랑에 미안한 일을 한게 없소. 어제도 그랬고 오늘도 그랬고 장차도…”
그제야 정희는 돌아누우면서 성호를 꼭 끌어안았다.
“오늘 연화를 만났댔소. 실련당했는 모양이요.”
성호는 연화 얘기를 낱낱이 쭉 얘기해주었다.
“그게 해결책이 아니죠.”
“그럼 어떻게 할가?”
성호는 정희한테 모로 돌아누웠다.
정희는 성호의 얼굴을 두 손으로 맞잡고 속삭였다.
“동무가 어떻게 실련한 연화를 내내 친구를 해주면서 삶의 용기를 북돋아줄
수 있는가요? 근본해결책은 연화한테 알맞는 결혼대상을 소개해주는 거죠.”
“오~ 참 묘책이로군.”
성호는 이불 안에서 정희를 꽉 껴안고 뜨거운 뽀뽀를 뽁뽁뽁 해주었다.
59. 조강치처
초겨울이 다가오자 자오록한 연기가 맑은 하늘을 밀어내고 온 시내를 지지눌러 사람들을 갑갑하게 만들었다.
성호는 요즘 이모저모로 답답하고 쓸쓸했다.
아버지도 이젠 칠순을 넘긴데다가 중풍까지 맞아 농사일은 둘째이고 소사양조차 맡길 수 없었다.
그는 아버지와 토론하고 경만한테 밭을 맡기고 소와 집까지 몽땅 팔아 아버지 병치료에 쓰기로 했다.
경만은 손에 쥔 돈도 없으면서도 어벌주머니 크게 가시아버지 집을 사겠다고 나섰다.
(참 진퇴량난인데. 집을 판 돈이 있어야 택시를 사겠는데. 매형한테 팔잖고 남에게 팔면 인정머리 없다고 욕하겠지?)
성호는 고민 끝에 매형한테 외상으로 팔기로 했다.
성호가 고향 마을의 일을 다 처리하고 좀 숨을 돌릴가 할 때다.
뜻밖에도 넷째누나 봉금이 세집에서 군내를 먹고 쓰러졌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아니, 전날까지만 해도 펀펀하던 누나가…?)
성호는 황급히 정희를 불러 택시를 잡아 타고 YB병원으로 부랴부랴 달려갔다.
정희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였다.
“동문 마음이 착하고 동정심이 많아 흠이죠. 괜히 매형을 시내에 불러 와서 일을 만들었잖아요?”
“통통한 말을 작작 하오. 누나를 구해야지.”
“경상도 분들은 가시집을 따라가면 잘 안된다고 나무란다던데요…”
“무슨 군소리 그렇게 많소?”
정희는 혀를 홀랑 내밀었다.
그들이 병실에 들어가보니 봉금은 정신을 일은 채 코구멍에 산소호스를 꽂고 바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아니, 어떻게 된 일이요?”
송준은 미안해 서성거리면서 어물어물 대답했다.
“군내에 중독됐어. 엊저녁에 춥다고 문을 닫았지 뭐야. 새벽에 군내 난 걸 모르고 자다나니.”
성호는 뿌르퉁한 소리를 줴쳤다.
“매형은 펀펀하잖소?”
“병 보러 나가다나니 누나보다 좀 나은 모양이야. 그런데 너거(너네) 누난 집에서 가도 사람들 밥을 짓느라고 중독됐어.”
성호는 침대머리에 가 앉아 누나 손을 꼭 잡고 조용히 불렀다.
“누나, 누나!”
남동생의 부름소리에 봉금은 천천히 눈을 떴다. 뜨거운 눈물이 량볼을 타고 주르르 흘러 귀방울 밑으로 내려갔다.
성호는 누나 량볼의 눈물을 손으로 닦아주었다.
“힘내오. 이제 치료하면 나을 거요.”
정희는 간호원실에서 대야에 물을 퍼다 하얀 수건을 씼어가지고 시누이의 얼굴을 닦아드렸다.
봉금은 처녀시절에 맹장염에 걸려 대수술을 두번이나 하고 겨우 살아났었다. 그때 춘자는 대학공부도 팽개치고 봉금의 병시중을 하느라고 얼마나 고생했는지 모른다. 그녀는 봉금을 좀 마음씨 착한 총각한테 시집보내 마음고생을 시키지 않고 살게 하려고 소학교 동료교원 송준을 소개했다.
성호는 지금도 송준이 처음 자기 집에 넷째누나와 첫선을 보러 왔을 때 일이 생생히 떠올랐다.
초가을 어느 하루, 아홉살 밖에 안된 성호는 철주랑 함께 태평강에 가서 한창 반디로 물고기잡이를 하고 있었다.
“야~ 성호야!”
성호가 반디질하다가 머리를 들어보니 다섯째누나 홍자가 뛰여오면서 부르는 것이 아니겠는가.
“과수원에 가서 넷째누나를 데려오라.”
“어째?”
“넷째누나 약혼하자고.”
“오- 알았어.”
성호는 종주먹을 쥐고 천지꽃산 기슭에 있는 과수원으로 달려갔다.
과수원에서 봉금은 한창 사과배나무에 올라서서 주렁주렁 달린 배를 뜯고 있지 않겠는가.
성호는 가지가 휘가 주렁주렁 달린 누런 사과배 싱그런 향기를 맡으면서도 사과배를 먹을 새마저 없었다.
봉금은 버드나무가지로 엮은 광주리에 싱그러운 사과배를 무드기 담아 이고 성호를 앞세우고 집으로 돌아왔다.
성호가 집마당에 들어서니 춘자가 하얀 다리를 가둥거리는 애를 안고 마중했다.
“막내오라버니 왔구나.”
성호는 기뻐 싱글벙글거리면서
“얘는 누구요?” 하고 물었다.
“네 외조카 정춘이지.”
“정춘아, 야, 곱다. 어디 한번 안아보자.”
성호는 정춘을 안고 하얀 우유빛볼에 뽀뽀를 해주었다.
봉금이 사과배광주리를 이고 들어서자 송준은 기뻐 어쩔줄 모르며 우쭐 일어나 봉금의 머리 우에서 배광주리를 받아내리웠다.
봉금과 송준은 서로 마주 바라보며 좋아 어쩔줄 모르면서 생글방글, 싱글방글 웃었다. 기실 그들은 초면강산이 아니다.
봉금이 둘째언니네 집에 놀러 갔을 때 정춘을 업고 학교에 갔다가 운동장에서 애들과 뽈을 차는 송준을 본 적이 있었다. 그때 그들은 첫눈에 정이 들었다.
기실 봉금의 혼사말은 그리 쉽고 간단하게 끝나지 않았다.
봉금은 부모의 사랑을 무척 받았다. 말띠로 태여난 봉금은 태몽도 이상하게 말과 련관됐다. 태몽에 영옥이 생산대 회의를 갔다가 꽃을 단 하얀 말을 타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그달부터 태기가 있어 난 귀염둥이가 바로 봉금이라고 했다.
봉금은 다른 딸과는 달리 날 때부터 살색도 새하얗고 예쁘게 생겼다. 그래서 그랬던지 아버지 상진은 여섯이나 되는 딸 가운데서도 봉금을 제일 고와하면서 금이야 옥이야 하면서 키웠다.
아버지가 일하러 나갔다가도 돌아와 봉금을 보고 “반듯이 번져누워라!” 하고 소리치면 항상 마구 엎뎌 자다가도 희뜩 번져누우면서 서적을 썼다.
그때마다 상진은 봉금이 너무 고와서 하얀 얼굴을 매만져주군 하였다.
상진은 대수술을 두번이나 한 봉금을 좋은 신랑한테 시집보내려고 여기저기서 혼사말을 해도 어진간해선 줄곧 퇴자를 놓았다.
곽재령감이 황소 몇마리를 탄 씨름군총각을 혼사말을 했을 때다. 상진은 인차 친척을 통해 씨름군총각이 괴벽하고 술주정뱅이라는 것을 알아내고 퇴자를 놓았다.
상진은 문턱이 다슬게 찾아오는 혼사말을 다 물리쳤다. 그러나 춘자가 소개한 송준만은 달리 대했다.
송준은 길림시에서 중등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다. 키는 작아도 떡 벌어진 어깨, 말수 적은 성질이 상진의 마음에 좀 들었다…
봉금은 시집가서 아들딸 셋을 낳앟는데 큰애 길봉을 그만 물에 잃고 영희와 근봉을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듯이 애지중지 키웠다. 애들이 어찌나 공부를 잘했는지 딸애 영희는 남개대학에 가고 아들 근봉은 북경대학 의학원에 갔다.
애들의 뒤시중을 하느라고 봉금은 10여리 떨어진 탄광마을로 자전거를 타고 가서 올리막내리막을 밀고 돌아다니면서 떡장사와 남새장사를 하느라고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모른다.
봉금은 눈을 뜨자 오라버니 손을 꼭 잡고 울었다.
“오래비, 이 불효한 누나를 용서하오.”
“천만에 말. 누난 아버지가 제일 고와하는 효성스러운 딸인데.”
봉금은 남동생의 손을 꼭 잡고 뒤말을 이었다.
“그때 넌 딸도 부모를 봉양할 의무가 있다고 했지. 난 애들 뒤시중을 하기 애나서 아들이 부모를 모시지 어디 출가집 외인이 부모를 모시는 법이 있는가고 했지. 편지까지 써서 널 욕했지.”
그 글귀가 지금도 성호의 눈에 선했다.
“이제까지 난 자기 힘으로 애들을 키우면서 살았다. 너도 이젠 누나들한테 의거할 궁리를 하지 말고 자력갱생해서 부모를 모셔라.”
“중풍을 맞은 아버지가 병치료를 하려고 우리 집에 왔댔는데 제대로 모시지 못했어. 아버지 화나서 집으로 돌아가게 했다. 얼마나 불효냐? 이제 내 병이 나으면 꼭 부모를 모시는데 한몫 할테야. 으흐흑, 흑흑.”
그때 상진은 사위를 믿고 찾아갔는데 치료도 방정히 해주지 않아 노여움이 나서 지팽이를 짚고 집으로 돌아왔다.
심지어 송준은 성호를 조용히 불러놓고 다짐을 딴 적도 있었다.
“성호, 우린 애 둘의 뒤시중을 하다나니 살기 어렵소. 아버지를 우리 집에 왜 보냈소?’
송준은 말수가 적었지만 일단 말을 꺼내면 치명적으로 퍼부어댔다.
성호는 지금도 바위돌처럼 굳어진 송준의 철색얼굴을 보는 상 싶었다.
“기실 모든 조건이 우리보다 둘째누나네 썩 낫소. 월급쟁이 둘이나 있잖소? 정춘과 정일은 이젠 대학을 다 졸업했지. 널직한 벽돌집도 있지. 어째 둘째누나네 집에 데려가지 않소?”
그때 일을 생각하면 성호는 도리머리가 홰홰 돌아갔다. 그러나 그는 송준이나 봉금을 나무리지도 않고 도와주고 싶었다.
송준의 교원로임에 봉금의 벼농사와 떡장사에 의거해 두 대학생의 뒤시중은 엄청 모자랐다. 세간에서는 대학생 둘이면 빈곤호라고 하지 않는가.
성호는 어려운 형편을 몰라준 것이 송구스러웠다.
송준은 체육과와 생물과를 가르치면서 과외시간에 침구와 안마, 기공을 배워냈다. 그 밑천으로 교편을 버리고 YB시내에 들어와 의사질을 하려고 성호를 보고 연줄을 달아달라고 했다. 성호는 먼저 방학간에 헛일 삼아 시내에 들어와서 자기가 아는 개체골과병원에 가서 병을 보라고 했다. 골과병원의 원장은 성호가 광고를 하면서 알게 된 의사였다. 그 원장은 원래 광고의식이 없었다. 그런데 성호의 선전과 소개를 받고 방송광고와 간판광고를 했는데 환자가 눈에 뜨이게 많아졌다. 성호가 매형을 소개하자 그 원장은 인차 받아주었다.
송준은 안마침구과 간판을 달랑 내걸고 환자들의 병을 보기 시작했다.
골과병원 한 녀의사가 위염에 걸려 항상 쓴 물을 왝왝 토하며 위가 너무 아파 식사도 온전히 하지 못했다. 송준은 숱한 사람들 앞에서 녀의사를 진찰용 침대에 눕혀놓고 기공안마를 한 10여분 해줬는데 당장에서 위통증이 멎었다. 련 며칠 몇번 더 기공안마를 해줬더니 기적적으로 위병이 치료됐다. 그때부터 송준은 기공안마치료에 용하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송준이 요추간판탈출과 경추병, 견주염에 위병과 중풍까지 치료해 치료항목이 중첩됐다. 골과병원 원장은 자기 밥통을 건드리자 좋아하지 않는 눈치를 보였다.
핍박에 의해 량산에 오른다고 송준은 한 가도병원으로 옮겨가 병을 보게 됐다.
한번은 성호가 배구를 치다가 허리를 풀쳐 침대에 쓰러진채 대소변을 받아내야 했다. 그때도 이틀만에 침대에서 일어나게 치료한 적도 있었다. 그의 기공안마와 침구는 신통력이 있어 소문 듣고 숱한 환자가 모여들었다…
저녁에 기별을 받은 영희와 근봉이 병실로 달려와 산소호스를 코구멍에 꽂은 채 인사불성이 된 엄마의 목을 꼭 끌어안고 통곡쳤다.
“어머니, 일어나세요. 어머니!”
“어머니, 우리 왔어요. 얼른 일어나랑께(일어나라는데). 흑흑흑.”
영희가 어머니 품에서 천천히 머리를 들더니 우두커니 서 있는 아버지를 쌀쌀하게 쳐다보았다.
“아버지, 어떻게 돼 어머니 이 지경이 됐습니까?”
영희가 랭랭하게 묻자 송준은 목구멍으로 기여들어가는 소리로 겨우 우물거렸다.
“군내 먹었어.”
“잘 치료할게지. 뭔가요?”
근봉은 언성을 높였다.
성호가 말렸다.
“얘들아, 너네 아버진 엄마를 구하려고 당날로 인차 택시에 싣고 병원에 왔댔어.”
영희와 근봉은 어머니 머리로부터 손과 발까지 살뜰히 주물러주며 효성을 해드렸다.
정성이 지극하면 돌 우에도 꽃이 핀다고 했던가. 아들딸들의 정성어린 마사지를 받던 봉금이 끝내 눈을 간신히 스르르 떴다.
“언, 언제 왔어? 콜록콜록.”
“어머니, 금방 왔어요. 좀 정신이 들어요?”
“그래, 난 너희들 불쌍해 죽을 수 없어.”
봉금은 머리를 들려다가 맥없이 떨어뜨렸다.
이윽고 그는 손을 들어 삿대질하더니 “날, 날 부축해 일으켜, 일으켜라.” 하고 띄염띄염 말하면서 일어나려고 안간힘을 다했다.
“예.”
애들이 부축해 일으키자 봉금은 간신히 침대머리에 기대 흐릿한 눈동자로 사위를 살폈다. 그는 남편과 남동생 그리고 올케와 아들딸을 한눈에 몽땅 담으려고 애를 쓰는 것 같았다.
그녀는 곁에 앉은 올케 손을 꼭 잡고 눈물을 줄줄 흘리며 말했다.
“올케, 아버지랑 잘 있소?”
“예. 근심말고 치료를 잘 하세요.”
“정말 고맙소. 올케, 우리 부모 모시느라고 얼마나 고생이 많소. 이번에도 올케 아니면 난, 난 죽을 번했소.”
“아니, 아주버니가 곁에서 고생했어요.”
정희가 손을 잡고 송준을 가리키자 봉금은 머리를 끄덕였다.
“20여년이나 함께 산 남편이야 응당 그래야지. 허나 올케가 병원에 입원수속을 하던 일 밖에 모르겠소.”
정희는 시누이 손을 잡고 말했다.
“의사 말하던데요. 군내는 후유증이 무섭대요. 처음 군내를 먹었을 때 잘 치료하지 않으면 후유증에 걸리면 치료방법이 없대요. 생명이 위험해진대요. 입원했을 때 잘 치료해야죠. 시누이 온 몸 혈액 속에는 아직도 군내 일산화탄소가 수태 남아 있어요. 산소호흡도 하고 점적주사도 계속 맞아야죠. 그래야 혈액 속 일산화탄소를 체외로 몽땅 배출시킬 수 있대요.”
송준의 귀에는 의사도 아닌 처남댁의 말이 곧이들릴리 만무했다. 결국 그는 그 말을 귀등으로 흘려보냈다.
“언제까지 입원해야 된다오?”
“둬달은 잘 치료해야 한대요.”
송준은 철색얼굴에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다 살아났구만. 그리 오래 병원에 누워 있어 뭘 한다오? 의사도 정신없는 소릴 하오.”
영희가 끼여들었다.
“아버지, 왜 그래요? 외숙모 아는 의사라는데요. 의사 말대로 한달이고 두달이고 입원해 있으면서 엄마 병 잘 치료해요.”
“알았다, 알아. 이제 집에 가서 기공안마를 해주면 병이 나을 거야. 나도 요새 날마나 병원 사무실에 나가 기공을 했더니 이렇게 펀펀하잖아. 내 기공안마를 믿어라.”
조금 화학을 배운 사람이라도 그만한 상식 쯤은 알 것이다. 기공안마로 어떻게 혈액 속의 일산화탄소를 체외로 밀어내 배출시킨단 말인가.
성호는 옆에서 듣다가 한마디 충고했다.
“매형, 세집도 바꾸오. 가보니 아직도 군내 나더구만. 이제 날이 흐리면 언제 또 군내 날지 모르잖소. 군내 빠지라고 천정의 종이를 뜯어 구멍을 내놓았소. 밤중에 군내만 나면 큰 일이요.”
그러나 송준은 곧이듣지도 않았다.
“세집은 두달 더 있어야 기한이 차는데 그때 가보지. 불시에 어데 가서 세집을 구하겠소. 초겨울에 이사한다는 것도 말이 아니고.”
“내 세집을 얻어볼게.”
근봉도 동의해나섰다.
“세집도 불을 때는 온돌방보다 난방설비가 있는 아빠트로 구하는게 맞아요. 돈보다 사람 목숨이 중하죠.”
송준은 건성으로 “응, 알았어. 근심하지 마.” 하고 대답했다.
며칠 후 상진의 생일이여서 자손들이 모이게 됐다.
46평방메터 밖에 안되는 성호네 집은 큰 잔치집 같았다. 형제 모두들 아버지와 어머니께 축수상을 차려드리고 한잔 얼근히 마시고 록음기를 틀어놓고 노래를 부르고 놀았다.
봉금은 자기 차례에 한국 노래 “가지 마오”를 목이 터지게 불렀다.
가지 마오 가지 마오
나를 두고 가지를 마오
이대로 영원토록
한 백년 살고파요
나를 두고 가지를 마오
봉금은 울먹거리며 노래를 부르다가 진짜 대성통곡쳤다.
춘자가 봉금의 손에서 마이크를 받아쥐며 “얘, 왜 우냐? 노래를 부르다가 왜 울어?” 하고 물었다.
봉금은 백지장같이 하얀 얼굴에 눈물을 즐벅이 흘리면서 손가락으로 송준을 가리켰다.
“저 나그네 날 버리고 한국으로 가겠다오. 날 버리고 갈 나그네를 생각하니 기막혀… 아이구, 난 혼자 어떻게 살아? 아이구…”
그녀는 멍해 앉아 있는 아버지와 어머니한테 다가가 손잡고 “미안해요. 생일에 울어서.” 하고 말하더니 송준을 손가락질하면서 또 통곡쳤다.
“저 나그네 가짜리혼을 하고 시내 다른 아낙네와 위장결혼해 한국으로 가겠다오. 가지 말라고 그렇게 애원해도 듣지 않습구마.”
그 놀라운 소리를 듣고 모두 송준을 쳐다보았다.
송준은 숨길 수 없었던지 마지 못해 자기 좋게 해석했다.
“애들 공부시키고 안해 병치료도 하자면 숱한 돈이 들어야죠. 위장결혼해 한국에 가서 기공안마와 침구로 돈을 벌자고 그랬어요. 가짜리혼인데 저럴 것까지야 있는가요?”
그러나 봉금은 단통 거절했다.
“가짜리혼이란게 어디 있어요? 리혼 도장을 뚝 찍으면 국가에서 인정하는 리혼이지. 가짜결혼식까지 올리고 간다고 하지 않았소? 생각만 해도 원통해 죽겠단 말이요. 그렇게 말려도 나보다 열살이나 젊은 그 아낙네한테 미쳤소. 진짜 미쳐.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엔 다른 년과 함께 큰상까지 받고 팔 끼고 한국에 가는 건 절대 볼 수 없소.”
송준은 자기한테 도리 있다고 떠들어댔다.
“돈 벌자고 방법없이 가짜결혼식을 올리는 거지. 진짜요? 내 아무리 돈에 미쳐도 20여년이나 살면서 아들딸까지 낳은 조강지처를 버리겠소? 지금 위장결혼을 하고 한국에 나가면 내 재간에 숱한 돈을 벌겠는데. 한달에 한 2, 3만원은 문제없다는데. 어째 사람을 그리 믿지 못하오. 진짜 의심병이요. 의심병!”
“듣기 싫소. 돈이 싫소. 그저 여기서 버는만큼 쓰면서 함께 살면 되오.”
봉금은 진짜 실성한 사람처럼 또 그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가지 마오 가지 마오
나를 두고 가지를 마오
…
그날 부모의 축수잔치는 봉금 부부가 울고불고 옥신각신 다투는 바람에 스산하게 끝났다.
송준은 우는 봉금을 두고 먼저 훌 일어나 집으로 가버렸다.
성호는 봉금한테 “그래 병원에서 계속 치료하오?” 하고 물었다.
봉금은 부모형제들 앞에서 모든 걸 숨기지 않고 다 털어놓았다.
“아니, 저 나그네 병원에서 출원하면 안된다는데 기어이 나를 끌고 집으로 가잖겠니? 요새 기공안마를 해주긴 하더라. 그 잡아치울 년이 자꾸 불러내서 제대로 안마해주지 않는다.”
“내 얻어준 세집으로 이사했소?”
성호의 관심어린 물음에 봉금은 도리머리를 가로 흔들었다.
“아니, 기한이 차지 않았다면서 바꾸지 않았어. 또 자기 한국에 가게 되면 그때 바꿔도 늦지 않다고 하더라. 이사를 한해에 몇번 하겠는가 하면서 이사할 예산조차 없다. 저 나그네 고집을 누가 당하니? 황소 열마리를 메워 끌어도 이기지 못해.”
성호는 땅이 꺼지게 한숨을 후~ 내쉬였다.
정희는 봉금의 손을 잡고 신신당부했다.
“꼭 병원에 가서 계속 치료해야 해요. 의사가 가스중독후유증에 걸리면 생명이 위험하다던데요. 그리고 밥 짓는 일도 그만두세오. 돈을 몇푼 번다고 중병환자가 치료하지 않고 밥을 지어요?”
봉금은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말했다.
“에이유, 올케도 이렇게 관심하는데 저 나그네 근본 내 병치료는 념두에도 없소. 펀펀한데 점적주사를 맞을 필요없대. 저 나그네 한국에 가려고 변심했어. 세상에 어쩜 마음씨 착하던 나그네 한국바람에 저렇게 정신 나갔어? 한국에 가면 마가을 락엽처럼 널린 돈을 깍쟁이로 마구 끌어모은다더니? 진짜 돈에 미쳤어. 그 쌍년한테 미쳤어.”
춘자도 미심해 물었다.
“그 미친 녀자는 어떻게 만났다니?”
봉금은 원통해 가슴을 탕탕 치며 하소연했다.
“개쌍년이 처음에는 위병 치료하러 다녔소. 지금 보면 별로 우리 나그네를 꼬시려고 계속 찾아오지 않았는지 모르겠소.”
춘애도 욕설을 퍼부었다.
“그 쌍년은 나그네 없다니?”
“없대요.”
은숙은 이마살을 찡그렸다.
“그 개쌍년은 한국에 가지도 못해가지고 어떻게 위장결혼을 하면 한국에 간다고 네 나그네를 꾄다니?”
봉금은 형제들이 묻는 말에 눈물이 글썽해 대답했다.
“그년은 원 나그네와 리혼하고 한국 불구자와 위장결혼하고 한국에 건너갔다는가? 그런데 그만 한국 나그네가 밤에 자다가 급성 심장병으로 즉살했다오. 나그네 없이 떠돌다가 저 나그네와 눈이 맞지 않았는지 모르겠소.”
봉금은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훔치며 뒤말을 이었다.
“저 나그네 보통 한 환자를 40분씩 안마치료를 해주오. 그 개쌍년만 들어가면 한시간이고 두시간이고 나오지 않는단 말이요. 너무 수상해서 진찰실에 들어가면 잔등이 다 드러나게 웃통을 걷어올린 그년을 눕혀놓고 여기저기 주무른단 말이요.”
“헤이, 필경 거기서 사달이 생긴 거야.”
춘자가 끼여들었다.
“아니, 네보다 열살이나 젊은 새파란 녀자 몸을 날마다 한시간씩이나 주므르는게 50대 초반의 사내가 마음이 동하지 않을 수 있겠니? 목석이 아닌 이상 아래 그게 건들거리지 않겠니? 쯧쯧쯧.”
“글쎄 말이요. 그래서 병원 사무실에 가서 떡 앉아 구경하면 뭐라는지 아오?”
성숙이 눈을 치켜뜨며 물었다.
“뭐라 했기에?”
봉금은 눈물을 닦으면서 대꾸했다.
“내 자꾸 가서 앉아있으면 녀성환자들이 불편하다고 잘 오지 않는다고 하지 않겠니.”
봉금은 언니들을 둘러보며 억울해했다.
“내 무슨 귀신이요? 뭐요? 저 나그네 내 가스중독에 걸려도 잘 안마를 해주지 않다가도 그 개쌍년이 오기만 하면 두시간씩도 오랜 줄을 모르고 만지고 개지랄을 했다니까.”
성숙은 반감이 나했다.
“넷째언니, 그렇게 아저씨를 의심하면 안되오. 마음이 그렇게 비단 같은 아저씨가 아무리 정신이 나간들 조강지처를 옆에 두고 병을 보면서 뉘네 녀자를 다치겠소?”
춘자는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아니야, 사내들의 마음은 산꼭대기에 부어놓은 물과도 같아 사처로 흩어져 흘러. 젊은 녀자한테 반하면 조강지처고 뭐고 헌신짝 버리듯 할 수 있어. 봐라. 저 봉금이 이라는게 다 빠져 틀이를 해넣었지. 반평생 애들 셋이나 나서 키우면서 별의별 고생을 다 하면서 살아와서 40대 후반이지만 나이에 비해 퍽 늙었잖아. 환갑도 지난 할머니처럼 10년은 늙었어. 새것을 좋아하고 낡은것을 싫어하는게 남자들의 본성이야. 아무리 마음씨 착하던 송준이라고 해도 퍽 수상해. 믿을 수 없어. 말로는 위장결혼이라고 하지만 진짜 그 쌍년과 한국에 함께 가서 살면 그때 가서 어쩔수 있겠니?”
그 말에 봉금은 더 슬프게 울었다.
춘자는 봉금을 끌어안으면서 과단성있게 말했다.
“나그네를 가지 못하게 꼭 말려야 해.”
그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듣고만 있던 상진이 입을 열었다.
“너희들이 모여서 생사람을 뼈도 남기지 않고 다 널어대는구나. 송준을 의심해선 안돼. 그 사람도 살자고 그러지. 아무리 한국바람에 세상이 험악하다한들 조강지처를 진짜 버릴 송준이 아니야.”
어머니도 동을 달았다.
“그러잖구. 사위 여섯 가운데서 송준이 마음이야 제일 곱지비. 법이 없어도 살 사람이야.”
부모 말씀에 모두들 송준에 대한 말을 그만두었다.
봉금은 너무 울고 불고 해 맥이 진한 나머지 한쪽구석에 네각을 쭉 뻗어버리고 들어누웠다.
아버지 생일 축수잔치는 송준 때문에 그렇게 스산하게 막을 내리웠다.
봉금은 군내 나는 귀신굴 같은 세집으로 가기도 싫다면서 뒤방에 들어가 부모들과 나란히 누워 밤새도록 도란도란 이야기하다가 새벽에야 겨우 새우잠에 폭 빠졌다. 그런데 그날 밤이 봉금이 마지막으로 부모와 마지막 상봉일줄은 누가 알았겠는가.
한달 후에 큰 일이 났다. 병원에서 제때에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한 봉금은 글쎄 가스중독후유증에 걸려 혼수상태에 빠져 재차 입원했다.
송준은 입원치료를 질질 끌다가 봉금이 까무러쳐서야 마지 못해 택시를 불러 병원에 싣고 갔다. 그것이 송준이 부모형제의 마음에 못을 박은 대목이였다.
성호는 병실에 달려가 정신을 잃고 쓰러진 넷째누나를 보고 그간 광고와 택시업에 달아다니다나니 넷째누나 병치료에 등한하였던 죄송한 마음에 자기 가슴만 꽝꽝 쳤다.
그는 의사사무실에 가서 녀주임의사한테 “누나 병세 어떻습니까?”하고 물어보았다.
녀주임의사는 환자치료서류를 들춰보더니 한숨을 호~ 땅이 꺼지게 내쉬였다.
“원래 한달전에 처음 중독됐을 때 잘 치료해야 했습니다. 혈액 속의 일산화탄소를 제때에 분해시켜 체외로 배출시키지 못했기에 일산화탄소가 천천히 온 몸에 퍼져서 지금 생명이 위급하게 됐습니다.”
“이젠 호전될 희망이 없습니까? 주임선생님, 저의 누나를 살려주십시오. 예? 두손 모아 빕니다. 그 은공은 꼭 갚아드리겠습니다.”
성호는 사위를 둘러보다가 주임의사의 호주머니에 백원짜리 다섯장을 찔러넣어주려고 했다.
“이러지 마세요. 환자를 치료하는 건 우리 인도주의적 의무입니다.”
녀주임의사는 돈봉투를 손으로 밀어버렸다.
“최선을 다해 치료해봅시다. 이제 최후로 산소통치료를 해봅지요. 혹시 기적이 일어나겠는지요.”라고 했다.
성호는 의사의 분부대로 인사불성이 된 넷째누나를 등에 업고 3층 병실에서 계단을 한계단한계단 내려가 1층에 있는 산소호흡치료실로 내려갔다. 뒤에서 송준과 정희가 자꾸 처지는 봉금의 팔을 받들어 성호의 어깨에 올려놓아주었다.
성호는 자꾸 떨어져 자기 가슴 앞에서 거덜거리는 누나의 팔을 보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아, 정말 누나가 이 세상을 이렇게 떠나야만 하는가? 살아날수만 있다면 뭐든지 아끼지 않고 들이댈텐데. 치료시기를 놓치다니. 누나를 구할 약이 이 세상에 없단 말인가?)
녀주임의사와 간호원은 성호의 등에서 봉금을 안아내린후 커다랗고 투명한 유리산소통 안에 눕힌후 유리덮개를 닫았다. 뒤이어 산소가 쒹- 주입됐다.
한 반시간이 지난후 간호원이 유리산소통 안에서 봉금을 꺼내라고 하였다. 그때도 봉금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송준이 봉금을 업으려고 하자 뒤에서 은자가 새된 소리를 질렀다.
“그 더러운 손으로 우리 언니를 다치지 마오!”
은자는 성호를 돌아보았다.
“성호야, 누나를 업어라!”
송준이나 성호나 다 어색하게 됐다.
“다섯째누나, 매형과 그게 무슨 말이요?”
성호가 누나를 잔등에 업고 3층으로 올라왔다.
인사불성이 된 채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봉금을 병실 침대에 도로 눕히는 성호와 은자의 볼에는 눈물이 즐벅했다. 그러나 송준은 죄지은 바보처럼 멍청히 침대 옆에 서서 구경했다.
그때 괘씸하게도 한 서른살 푼한 녀인이 병실 문어귀에 나타나 송준한테 눈짓했다.
성호가 피뜩 보니 그녀는 놀랍게도 광고회사에서 사라졌던 선희 같았다. 그러나 선희는 병실 구석에 있는 성호를 발견하지 못하고 송준한테만 눈길이 갔다.
송준은 멍해 서 있다가 선희가 나타나자 정신을 벌떡 차리면서 복도로 씽드르 달려나갔다.
선희는 가스중독에 쓰러진 녀인이 바로 성호의 넷째누나 봉금이라는 것도 몰랐다. 더우기 송준은 호랑이 같은 성호의 매형이라는 것도 잊고 이때까지 날치고 있었다.
성호는 둘의 꼬락서니가 눈꼴사나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저 계집애 어떻게 매형을 알았지? 혹시 매형과 좋아한다는 그 녀성이 아닐가? 네년의 정체를 어데다 감춘단 말인가? 한 단위 송철과 바람피우다가 단위에서 쫓겨나 로씨야로 로무송출을 가지 않았던가? 뭐 위장결혼하고 한국에 시집갔는데 남편이 죽었다고? 위장결혼으로 매형을 꾀여 한국에 데리고 가서 돈벌이나무로 써먹으려고?)
송준도 선희가 성호의 옛 동료였다는 것을 전혀 몰랐다.
성호가 뒤문으로 해 복도 굽인돌이에 숨어서 볼라니 송준과 선희는 아주 딱 붙어서서 쑤근거렸다.
“병세 어떤가요?”
“오래잖아.”
“빨리 서두르세요.”
“글쎄, 헌데 죽어가는 안해를 병실에 두고 한국 출국수속을 한다는 건 말이 안돼.”
그 말을 귀동냥해 듣고 성호는 내심으로 머리를 끄덕였다.
(그래도 아직 량심은 좀 남아 있구만. 네 놈이 조강지처를 버리고 잘 될 거 같애. 하늘이 용서하지 않을 거야.)
선희의 말은 더 고약했다.
“그 녀잔 이젠 죽은 목숨이예요. 빨리 민정국에 가서 결혼등록을 해야 이 달 안으로 출국수속을 하죠.”
“장례를 지낸 후에 수속해도 늦지 않소. 왜 재촉해? 급히 먹는 떡이 목에 걸려.”
“야, 답답해. 당신 한국 가서 팔자 고치겠어요? 도대체 어쩔 건데요?”
“알았어. 내 알아서 꼼꼼히 챙길게.”
선희는 뭐라고 지껄이더니 오른손을 들어 송준의 볼을 꼬집어놓고 돌아섰다.
“잘 가!”
송준은 손을 들어 흔들며 희죽거렸다.
(누나한테는 항상 겨울 청개구리처럼 무뚝뚝하고 길가 개살구처럼 텁텁하더니. 흥, 언제부터 저렇게 해사하고 싹싹하게 번졌는가? 퉤! 더러운 년놈들, 꼬락서니 더러워서. 원.)
성호는 가까스로 격분을 억누르며 다른 층계로 뛰여내려가 1층 대층에서 선희와 딱 마주쳤다.
“아니?!”
선희는 소스라칠듯이 놀랐다. 그러나 그녀는 배우마냥 천천히 침착성과 랭정성을 회복하더니 걀죽한 얼굴을 간사한 미소로 칠했다.
“아, 정말 오래간만이구만요. 점심 사줄래요?”
성호도 능청스럽게 연기했다.
“그럴 겨를 없소. 로씨야에 갔다더니 돈 많이 벌었겠구만.”
선희는 머리를 좀 수깃하다가 번쩍 쳐들었다.
“오~ 난 로씨야에 간 적도 없는데요. 그간 한국에 갔댔어요. 세계 명미스모델콩쿠르가 있어서 갔댔는데요. 진짜 세계미스들이 다 모인 굉장한 대회였죠. 전 이젠 세계무대에 진출하게 됐어요. 여기 산골무대가 너무너무 비좁아요.”
성호는 속으로 메스꺼우면서도 짐짓 “어떻게 돼 여기 왔소?” 하고 속뽑이를 해보았다.
선희는 배우 못잖게 아닌 보살을 잘 떨었다.
“위 아파 유명한 의사 있다고 해서 치료받고 가는 중이예요.”
성호는 눈을 뚝 부릅뜨고 거짓말을 불어대는 선희를 쏘아보았다.
“더러운 갈보년, 모르는 거 같아? 전문 남의 발등 밟고 남의 가정 깨는 량심없는 쌍년! 간에 가 붙고 염통에 가 붙는 요사한 여우! 웃음 팔고 미모 팔고 몸까지 파는 더러운 갈보년!”
성호는 콱 쏴주려다가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간신히 꿀꺽 삼켜버렸다.
(어디 두고 보자. 네년이 량심까지 팔고 싸다니는데 얼마나 잘되는가? 하늘이 굽어보고 있어. 퉤!)
선희도 성호의 눈치를 챘는지 “그럼 이만 가겠어요.” 하고 자리를 떠나버렸다.
성호는 총총히 병원 대청을 떠나가는 철면피한 선희의 잔등에 쓴 침을 “퉤!” 뱉었다.
영희와 근봉은 온밤 어머니를 붙안고 울면서 사지를 주므르면서 마지막 효성을 다했다. 그러나 오누이의 효성이 담긴 념원과는 달리 봉금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오누이는 다시는 어머니 자애로운 모성애가 담긴 부름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됐다. 어머니 봉금은 다시는 사랑스러운 아들딸과 부모형제를 볼 수 없었고 그들의 애탄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춘자와 성숙이, 그리고 은자와 은숙이, 성호 부부간은 봉금의 옆을 떠나지 않고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친혈육이 마지막숨을 거두는 것을 지켰다.
형제들과 아들딸 모든 친혈육의 슬픈 피눈물을 보지도 못하였는가? 봉금은 긴 한숨을 길게 몰아쉬더니 호흡을 멈추었다. 봉금은 아쉽게도 49세를 일기로 심장의 고동을 서서히 멈추었다.
“어머니!”
“어머니! 일어나세요-”
영희와 근봉은 어머니 품 속에 엎드려 대성통곡쳤다.
춘자와 은숙은 영희와 근봉을 봉금의 품에서 떼내려고 말렸다.
“어머니!”
영희와 근봉은 이모네를 마구 뿌리치고 사체실에 들어내가려는 어머니를 놓아주지 않고 붙들고 어린애처럼 엉엉 울었다.
봉금은 애들을 대학공부시키겠다고 세상떠나기 며칠 전까지도 가도판사처 직원들의 점심밥을 지었다.
성호는 한편생 고생해온 누나가 불쌍해 뜨거운 눈물을 훔쳤다.
형제들은 새파란 나이에 저세상으로 떠나간 봉금이 불쌍해 피눈물을 흘리며 흐느꼈다.
은자는 영희와 근봉을 물러나게 한 후 손수 지은 한복을 상시옷으로 봉금에게 갈아입혔다.
“야, 살았을 때 이렇게 곱게 입혔더라면 얼마나 좋았겠소.”
송준은 그때까지 멍해 서 있다가 “이젠 들어내가지 뭐.” 하고 나가더니 담가를 들이댔다.
성호와 송준은 봉금을 들어 담가에 내려놓았다. 성호는 그때까지도 시체가 식지 않아 따뜻한 누나 얼굴을 매만지면서 섧게 울었다.
“우리 숱한 형제들이 누나를 하나 구해내지 못하다니? 형제 많아서 무슨 소용있소? 누나, 우릴 욕하오. 속시원히~ 어~허허, 헉헉헉.”
성호는 휘청거리면서 일어나 송준과 함께 누나를 들어 아래층에 있는 사체실로 내려갔다.
형제들이 문짝이 다 떨어져나간 헐망하고 싸늘한 사체실을 지키다가 잠시 자리를 뜬 틈에 송준이 마지막으로 봉금한테 엎드려 뭐라고 중얼중얼 넉두리를 했다.
성호는 아마 이제야 송준은 안해한테 죄송해 용서를 빌리라고 좋게 생각했다.
(누나가 사망한 마당에 매형까지 괴롭혀 뭘 하겠는가? 사람은 량심이 배긴 것만큼 살게 놔두자.)
비보를 들은 영옥은 사체실에 들어서면서 두 손으로 무릎을 탁 쳤다.
“야, 세상에 이게 무슨 일이냐? 봉금이 죽다니? 이 에미를 두고 네가 먼저 가다니?”
백발이 성성한 어머니는 밭고랑 같은 주름살에 쓰라린 눈물을 흘리면서 딸의 싸늘한 얼굴을 쓰다듬었다.
자녀들은 모두 피눈물을 흘렸다. 영희와 근봉은 그때에야 백발이 성성한 외할머니가 딸이 죽어나가는 것을 볼 때의 비통이 무엇인가를 알게 되였다. 그들은 외할머니와 함께 어머니 시체를 번갈아 쓰다듬으면서 슬프게 엉엉 울었다.
상진은 제일 고와하던 넷째딸 봉금의 비보에 입귀를 씰룩거리며 락루하였다.
“아니, 오래 사니 세상에 보지 못할거 다 보는구나. 이 애비 먼저 봉금이 죽다니. 세상에~”
이튿날 봉금의 시체는 형제자매들과 아들딸의 옹위를 받으면서 운구차에 실려 화장실에 갔다.
형제들과 아들딸은 친인을 보내기 너무 아쉽고 비통해 서로 붙안고 화장실을 눈물바다로 만들었다. 친인들의 통곡소리 속에서 봉금은 한가닥의 하얀 연기로 돼 하늘로 서서히 타래쳐올라갔다.
형제들의 가슴을 더 아프게 원통스러운 일이 벌어졌다. 봉금의 새하얀 골회가 채발에 담겨 나왔을 때 송준은 골회함에 담지도 않고 뭇뼈다귀가 널린 쓰레기무지에 훌 쏟아버렸다.
그 일을 보고 성호는 내내 마음에 두고 납득이 되지 않았다.
“어쩜 나그네란 자식이 그럴 수 있어? 필경 함께 20여년을 살아온 안해 골회를 거두지도 않고 쓰레기무지에 쏟아버린단 말인가?”
성호나 형제들은 모두 송준이 그렇게 처사할줄 몰랐다. 예전에 가시집 부모형제들은 그를 세상에서 법이 없어도 살 착한 사람이라고 했다. 그러나 지내보니 세상에서 육친도 모르는 제일 독한 사람이라는 것을 새삼스레 느끼게 됐다.
성호는 속으로 마음 아프게 되뇌이며 울었다.
“우리 부모형제들이 송준을 그저 옛날 착하고 소박한 사람으로 본 것이 잘못이야. 그는 시내에 들어와 완전히 변했어. 갈보년 선희한테 미쳐버렸어. 그런 송준을 믿고 누나 가스중독치료를 맡긴게 우리 잘못이지. 설마 송준이 아들딸을 두고 조강지처를 버리겠는가고 믿은게 잘못이지.”
성호는 후회막급이였다. 만약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넷째누나 봉금을 살릴 수만 있다면 후회로 만리장성이라도 쌓을 수 있으련만.
성호는 세상에서 법이 없어도 살 마음씨 고운 누나를 잃은 것으로 하여 가슴이 미여지는 것만 같았다. 칼로 살을 여며내는 것 같아 가슴을 쾅쾅 치며 통탄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누나를 보러 세집에 찾아갔을 때까지만 해도 누나는 남동생의 눈에 든 티를 씃어주겠다고 모지름을 쓰지 않았던가. 벌써 마비가 오기 시작해 말을 잘 듣지 않고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눈까풀을 번지고 혀로 티를 핥아내지 않았던가. 막내동생을 그렇게 사랑하던 누나는 이젠 영영 눈을 감고 남동생의 애탄 부름소리를 듣지도 못하고 저 세상 하늘나라에 날아올라가 고요히 누워 있다. 아니, 한줌의 재가루로 되여 하늘나라로 후루루 날려가고 말았다. 하늘도 운다, 땅도 얼어붙었다. 새들도 눈물겨워 지저귀고 눈송이들이 비통으로 부서지며 비틀비틀 몸부림친다.
저 송준을 보라. 조강지처 장례날에 숱한 상객들이 찾아와 위문하는데 혼자 가도판사처 마당에서 당구를 떵떵 치지 않겠는가.
(못된 인간, 너도 인피를 쓴 사람이냐? 그래, 이젠 시름놓았겠구나. 홀가분한 마음으로 선희란 갈보년과 결혼해서 한국으로 가서 돈을 벌 수 있겠구나.)
성호는 속이 더욱 비길데 없이 울컥했다. 밸 같으면 년놈들을 단매에 쳐눕히고 싶었다. 으스러지게 틀어쥔 무쇠주먹이 윙윙 울고 있었다.
(죽은 누나 불쌍하지. 누난 그래도 저런 인간을 믿고 여지껏 충성을 바치면서 살아오지 않았던가. 어린 나이에 젊은 엄마 잃고 한쪽날개 끊어진 오누이조카들이 불쌍해. 애들이 엄마 잃고 얼마나 놀랐을가? 얼마나 마음이 아프고 슬프겠는가? 아, 쟤들의 앞날이 큰 걱정구나.)
형제들은 모두 뒤에서 송준을 세상에 둘도 없는 독종이라고 욕했다.
“쳇, 나쁜 놈, 량심 어긴 놈!”
“조강지처 버리고 갈보년을 끼고 한국에 가면 잘 되는가 보라지.”
초겨울이 되자 성호의 꿈에 봉금이 자꾸 나타났다.
꿈에 화장터 부근 쓰레기무지에 자꾸 나타나 성호를 보고 추워서 못살겠다면서 손잡고 자기 자는 데를 가보자고 했다. 그가 누나를 따라 토성밑의 개구멍 같은 구멍으로 쓰레기무지가 있는 토성 안으로 기여들어가려고 했다. 그런데 누나는 토성 밑의 개구멍으로 들어가 쓰레기무지로 갔지만 성호는 좁은 개구멍에 몸이 걸려 들어가지도 못하고 버둑거렸다. 다행히 둘째누나 춘자가 성호를 잡아당겨서야 그 구멍에서 간신히 빠져나왔다.
성호는 맨날 그런 악몽을 꾸다가 깨난 적이 한두번이 아니였다.
(누나는 세상 떠서도 자기를 허허벌판 쓰레기무지에 버린 나그네를 원망해 남동생을 찾아오는구나. 초겨울이 돌아오니 허허 벌판에서 추운 모양이지.)
성호는 내내 속에 걸려 악몽에 시달리군 했다.
“안되겠어. 허허벌판에 버려진 누나 너무 불쌍해.”
성호는 안해 정회와도 말하지 않고 가만히 삽과 주머니를 들고택시를 잡아타고 화장터로 달려갔다.
준식은 웬 영문인지 몰라 자꾸 매형의 눈치를 살폈다.
성호는 묵묵히 앉아가다가 화장터 입구에 이르자 택시에서 내렸다.
“먼저 가라.”
성호는 처남을 보내놓고 혼자 화장터 쓰레기장에 가서 그날 송준이 누나 뼈를 버리고 간 후 슬그머니 파묻어둔 하얀 뼈를 몇개 주어담았다.
드디여 그는 무릎을 꿇고 하늘에 대고 대성통곡치며 빌었다.
“하느님이여, 우리 누나를 못된 독종놈이 허허벌판에 버린 죄를 용서해주옵소서. 오늘 누나의 뼈와 혼을 담아 편안한 곳에 모시려고 하오니 도와주옵소서~”
뒤이어 그는 주머니에 담은 하얀 뼈를 매만지면서 눈물을 줄줄 흘리며 누나한테 속삭이듯 말했다.
“누나, 이제 편안한 고향 땅에 모시겠으니 나와 함께 가기요.”
그는 누나의 뼈를 담은 주머니를 둘러메고 화장터에서 내려왔다.
그는 택시를 잡아타고 곧추 고향마을 천지꽃산 기슭으로 달려갔다. 거기에는 조부모와 큰형님의 산소가 모셔져 있었다.
그는 산소 앞에 꿇어엎뎌 중얼거렸다.
“조상님들, 오늘 허허벌판에서 헤매던 누나의 혼과 뼈나마 조상들의 산소 옆에 모시려고 하오니 부디 잘 보우해 주옵소서. 못난 손자는 차마 누나 혼과 뼈를 허허벌판에 버린 송준한테 맡길 수 없소이다. 출가집 외인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저는 누나를 죽어도 본가집 귀신으로 만들고 싶나이다.”
말을 마치자 그는 할아버지 산소 옆에 구덩이를 파고 누나의 뼈를 잘 파묻어놓 놓았다.
그는 누나의 봉분에 절을 꾸벅꾸벅 하고 중얼거렸다.
“누나, 이젠 조상의 품 속으로 돌아왔으니까 절대 춥지 않을 거요. 이젠 편안히 잠드오.”
그는 산을 내려오다가 애기 봉분마냥 너무나도 자그마하고 초라한 누나의 무덤을 되돌아보고 속으로 피눈물을 흘렸다. 고씨네 집에 시집가서 애 셋이나 낳으면서 한평생 고생한 누나의 비극적운명이 피눈물나게 비통하고 아리기만 했다.
일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그만 상진은 딸의 사망에 너무 비통해 재풍에 걸려 쓰러지지 않았겠는가.
(야, 금방 누나를 잃었는데 또 아버지마저…)
재앙에 또 재앙이 세찬 파도처럼 덮쳐오고 있었다.
기구한 운명을 가진 성호는 이 난관을 어떻게 뚫고 나가야 하는가?
땅과 묻고 하늘에 물어봐도 대답이 없다. 다만 내가의 앙상한 버드나무들과 백양나무들만이 몸부림치며 윙-윙- 외롭고 구슬프게 울부짖을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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