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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밖에 모르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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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    귀신(鬼神)같은 인생(人生)외 몇편 댓글:  조회:2462  추천:2  2014-02-25
귀신(鬼神)같은 인생(人生) 매일같이 이상한 약물을 맞고 사느라니 자신의 정신상태도 파악되지 않는다. 지금 생각하는 것이 진정한 내 마음의 로출이 옳은지 아닌지 파악이 되지 않는다.  어느 하루 머리가 흐리멍텅하고 생각이 돌지 않아도, 어느 순간부터 가슴이 답답하고 심장이 쓰려도 … 그것이 자연스러운것이라고 접수해야 한다. 접수하지 않을수도 없다. 누구한테 말해도 쓸모가 없다. 그런 연유로 나는 이러한 인생은 귀신같다고 한다. 이러한 삶이 언제부터 시작되였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최소 30년은 되는것 같다. 기억을 더듬으면 그보다 더 길수도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래서 어느 하루 맑은 정신으로 사는것이 사치스러운 바램이였다. 그것이 10여년전부터 있은 생각이다. 전에는 독립적인 공간도 없었기에 자신이 이렇게 살고있다는 것마저 모르고 있었다. 그냥 자신의 신체가 허약한 탓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다르다. 마음속으로만은 자신이 어떤 환경에 처해있음을 확신하고있다. 한때는 이러한 삶을 결속지을 생각도 가져보았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내가 하려 하던 그 일을 할수 없다. 그 일이 바로 “내가 무엇때문에 이런 일을 당해야 하는가?”를 밝히는것이다. 그러니 아직은 때가 아니다. 이러한 사유를 머리속에서 몇번을 중복했을까? 나로서도 알수 없다. 오늘도 머리가 흐리멍텅하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 글을 쓰지도 않았을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면서도 후회는 없다. 해야 되는 일이면 해야 하고 부딪혀야 하는 일은 부딪혀야 한다. 오늘은 맞춤법도 잘 생각나지 않는다. 철자가 생겼는지도 모르겠다. 인터넷에서 찾아보고 그대로 수정하느라 하였다. 그리고 힘들어서 여기까지만 쓰려 한다. 내 인생의 또 한페지 기록이 끝난것이다. 아니 끝난것이 아니라 끝낸것이다. 남은 시간에는 일을 해야겠다. 2014년 2월 25일 9시 42분 착각속의 한자어 언젠가 조선어단어와 한자단어사이에 순서가 바뀌우는 경우가 있다는 말을 들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은 어원의 판단에 착오가 생긴것이였다. 즉 어원이 일어인 단어를 어원이 한어인 단어로 오해했던것이다. 한자어가 아닌것을 한자어로 착각했다고도 할수 있다. 이렇게 말하는데는 나로서의 이유가 있다. 직역을 할때에는 순서를 바꾸지 않는것이 습관이다. 이렇게 하면 원래의 어원과 쉽게 련관이 되고 뜻을 리해하는데도 쉽기 때문이다. 일어가 어원이 된 원인에 대해서는 나로서도 명확한 답안을 모른다. 발음문자밖에 없는 조선어 조선어는 발음문자이다. 영어는 서면문자외에 국제음표라는 발음문자가 있고 한어는 한자라는 서면문자외에 병음이라는 발음문자가 있지만 조선어는 서면문자가 없다. 아무리 고유어라 할지라도 문장의 전후를 보지 않고 하나의 단어만 써놓으면 그것이 무슨 뜻인지 확인할수 없다. 맞는것=진리? 내가 지금까지 견지해온가운데 한가지 남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맞는 일만 하기에 노력한것이다. 남에게는 강요하지 않았지만 자신은 그것을 견지하기에 노력을 해보았다. 그외의 다른것은 하나도 견지하지 못했다. “맞는 것은 견지하자”는 마음을 간직한것만도 다행인지 모른다. 고독 어느 날 저녁 홀로 컴퓨터앞에 앉아 드라마를 보고있느라니 전에는 없었던 고독함과 쓸쓸함이 온몸에 스며든다. 스며든다 하가보다는 이미 온몸에 차서 넘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오늘은 또 어떤 약물의 작용일까 하고 생각해보았다. 그리고 그 쓸쓸함 그 슬픔 들을 천천히 느껴보았다. 전처럼 인츰 방법을 대여 그런 기분을 없애버리고 싶지 않다. 그것이 내가 겪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기때문에 … 그리고 그러는 과정에 자신의 마음이 더 많이 자란다는 생각때문에 … 그 때의 나는 아프면서 자라고 있었다. 무엇인가 증명하는 과정 운명이라는 느낌이 늘 든다. 혹은 그것이 모두 나의 예감속에 있었던것이라는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피면하지 못했다. 어려서부터 알고있었던 그 일들을 자신의 인생을 대가로 증명해야 했던것이다. 내 인생의 보귀한 시간을 랑비하면서 … 그래서 그 운명속에서 자신의 배역을 잘 맡는것만이 내가 할수 있는 일이였던것이다. 전처럼 자신의 운명을 바꾸려는 부질없는 생각은 접어야 할것 같다. 하지만 접어지지도 않는다. 잘 살아보아야겠다. 내 힘이 닫는데까지 …
144    자기절로 하는 것(사람)이 천재다 댓글:  조회:2091  추천:0  2011-11-21
  오늘 천재에 대한 의론을 듣게 되였다. 듣는 과정에 생각나는것이 있었는데 다른 사람의 의론에 참여하고 싶지 않았다. 저만 아는것처럼 하는것 같아서 …   그 순간에 생각나는 말이 “자기절로 하는것이 천재다”였다. 생각나는대로 적어보기로 한다.   1. 천재에게는 노력하는 목표가 있다. 어느 사람에게나 다 자신의 우상이 있다. 그 우상과 같은 우수한 사람으로 되려는 꿈이 바로 그 노력하는 목표로 된다.   2. 천재에게는 방법이 있다. 사람이 사회에서 사느라면 여러가지 일을 동시에 마주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 경우에 천재는 그 일들의 중요성과 수요에 근거하여 조화롭게 순서를 맞추어 하나하나 해결해나간다.   3. 천재에게는 의지가 있다. 우리의 주위에는 학습보다 혹은 공작보다 우리의 주의력을 끄는 사물이 아주 많다. 례를 들면 여러가지 오락활동들(특히는컴퓨터유희)이 우리의 주의력을 분산시키는 경우가 많다. 천재는 자신의 해야 할일이 무엇이고 하지 말하야 하는 일이 무엇인가를 안다. 때문에 해야 할 일은 힘들어도 하고 하지 말아야 하는 일은 하고싶어도 참고견딘다. 천재의 의지는 곤난을 이겨내는데서도 나타난다. 어떤 일이든지 잘하려고 하면 곤난에 부딛치게 되고 많은 노력을 해야 하게 된다. 천재는 그러한 곤난을 자신의 의지에 대한 시련(혹은고험)으로 생각하고 달갑게 받아들인다.   천재에게는 이외에도 다음과 같은 품질이 있다.   4. 대담하다. 천재가 해야 하는 일중에 어떤 일은 일정한 위험성을 띠게 된다. 어떤 일은 위험한것 같지만 방법을 잘 생각하면 그리 위험하지 않은 일로 변할수 있다. 그래서 탐험정신이 있어야 한다고 한다. 이런 탐험정신은 아무런 준비도 없이 손을 대고 하려 하는 모험정신과는 다르다.   5. 독립적인 사고의식이 있다. 어떤 문제던지 다른 사람의 의견만 듣는것이 아니라 자신의 머리로 잘 생각해본다. 이렇게 하는 경우 어른들의 견해와 엇갈리는 경우도 있다. 그러니 독립적인 사고의식도 대담성과 일정한 련계가 있다. 대담하지 못한 사람은 독립적인 사고의식도 배양하기 힘들다.   6.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식이 있다. 이러한 의식때문에 강박증이 있는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한 의식이 있기때문에 어떠한 일을 하게 되면 끝을 보고야 만다. 다른 사람의 보기에는 어리석은 일을 하는것 같기도 하다.   7. 자각적으로 노력하는 의식이 있다. “최고는 아니여도 최선을 다한다”는 말이 여기에 어울린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쯤이 나지면 자신으로서 필요하다는 여러 방면의 지식을 모두 학습한다. 그래서 늘 박식(무엇이나다안다)하다는 말을 듣게 된다.   천재에게서 가장 중요한것은 자기절로 하는것이다. 다른 사람이 강박하지 않아도 하고 다른 사람이 휴식하라고 해도 그냥 한다. “휴식할줄 모르는 사람은 공작할줄 모르는 사람이다”는 말을 듣기도 한다. 그러나 내가 견디여낼수 있다고 생각하면 노력을 멈추지 않는다.   그래서 “자기절로 하는것이 천재”라고 하는것 같다. 2011年11月21日星期一  
143    전통은 부담이 아니다 댓글:  조회:2005  추천:0  2010-11-01
    전통은 부담이 아니다. 그러나 전통을 부담으로 만드는 사람이 있다. 그런 전통가운데는 필요한 물질적소비가 따른다고 한다. 전통을 리용하여 시장을 활약시킨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그런 사람들에게서 전통은 미덕인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실질적인 리익을 가져다주는 기회인것이다. 그래서 전통이 아주 중요하다고 한다. 현실에는 법이나 제도로 해결할수 없는 문제들이 더러 있다. 그런 일들을 해결하는데는 전통적인 전통이 필요하다고 한다. 그래서 과거에는 류사한 사회적문제가 없었다고 한다. 가능할수도 없는 거짓말인것이다. "물에 빠진 사람은 지푸라기도도 쥔다"고 하는데 전통에 대한 과분한 의뢰가 그것을 말해주는것 같다. 경제학자나 사회학자나 문제를 해결한느 방법을 복구밖에 없다고 생각하는가? 물론 이는 나의 억측일뿐이다.     현실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다 자신의 부동한 생활활경 생활방식이 있다. 그러니 전통도 일정한 개변을 가져와야 하낟. 그것을 견지하는것만이 전통이 지속될수 있는 유일정확한 길이 아니다. 강제적인 요구로 하는것보다 좋은 결과로 인도하는것이 더 낳은것이다. 전통을 미신적인 고도에 까지 올려 절대적으로 해야 하는 일로 만들게 되면 전통은 부담으로 되는것이다.     전통을 계승하는데도 변증이 필요하다. 부동한 관점을 가진 사람들사이의 교류가 필요한것이다. 혹은 큰 면에서는 일치하나 각자의 부동한 환경에 적응된 부동한 형식의 존재방식이 있게끔 해야 한다. 이 면에서는 과거에도 그러하였다고 판단된다. 생활수준이 다르고 생활환경이 다른 사람들이 부동한 방식,표준으로 기념행사를 진행하였을것이다. 누구나 다 왕궁과 같은 표준으로는 하지 못했을것이다.     전통은 부담이 아니다. 그 원인은 다음과 같은 두가지이다.     전통은 부담이 아니다. 그러니 꼭 그대로 해야 한다는 규이 없다. 할수 있는 정도에서 자신의 성의를 표달하면 되는것이다. 절대적인 표준을 정하게 되면 일부 사람들에게는 부담으로 되는것이다. 민족전통의 견지보다 민족의 매개 성원의 발전이 더 중요한것이다.     전통은 부담이 아니다. 그것을 꼭 학교에서 학습하고 시험의 방식으로 머리에 기억해야 할 필요가 없다. 인터넷 등 통신기술이 발달한 지금에는 더욱 그러하다. 사회적인 직업요구 직업부담 등이 과중한 지금사회에서 전통은 사회발전을 저애하는 요소로 될수도 있다. 그러니 부담이 될수 없으며 부담으로 되여서도 안된다.     전통적인 방식에는 모두 일정한 도리가 있다. 그 도리를 캐는 과정이 전통에 대한 깊은 인식을 갖게 되는 과정으로 된다. 새로운 전통을 형성하는 데도 도움이 되는것이다.     전통은 교류해야만이 가치가 있다. 자신이 알고 있는 자료 하나로 자랑하고 그것을 모른다고 하여 다른 사람을 조소하는 그런 시대는 지난것 같다. 그것 하나를 더 안다고 하여 성의가 더 많다고 할수는 없다. 전통적인 방식이라면 그것을 전달하고 교류하여 더 많은 사람이 알고 접수하고 인정하게끔 하는것이 더욱 낫은 선택일것이다.     이제 또 전통이 어떠하니 그대로 해야 한다고 할것인가? 자신에게 알맞는 길을 개척하려면 전통도 개변해야 할것 같다. 그렇지 않는가? 2010년 11월1일 8시 45분 초고 완성,컵퓨터에 수입
142    따라하다 보면 ... 댓글:  조회:2094  추천:1  2009-12-28
따라하다 보면 따라하다 보면 나도 어느만큼은 할수 있다는 신심이 생긴다. 그래서 그런 좋은 체험때문에 다른 사람의 일을 경험이라고 받아들이기 좋아하게 된다. 그런데 다른 사람의 경험이라고 해서 다 맞는것이 아니다. 어떤 경우에는 구상대로 되지 않아도 그렇게 된것처럼 경험을 만들어놓는 경우가 있다. 그렇게 치장해놓으면 "미녀"가 된것처럼 보인다고 한다. 그것도 모르고 따라하면 다른 사람이 틀리게 한일도 그대로 따라하게 된다. 따라하다 보면 자체로 구상할수 없게 된다. 늘 다른 사람의 경험을 받아들이는데만 정력을 몰붓다보니 자신의 머리를 사용하여 구상하는 능력이 자연히 못해진다. 그리고 이제까지 의뢰해왔으니 그 의뢰심도 하루아침에 소실되는것이 아니다. 그래서 일이 생기면 또 그전처럼 잘하는 사람 혹은 책을 찾아보게 된다. 결국 학습은 잘하나 자신의 창조성은 자연히 없어지게 되거나 약화된다. 아예 "나는 남보다 못하니 다른 사람의 경험을 학습하는것으로 족하다"라고 생각한다. 따라하다 보면 자신의 주견이 없어진다. 그냥 다른 사람이 한 그대로의 경험을 옴겨놓는것으로 만족하게 된다. 그러니 자신이 생각했던 일도 틀렸는가 하고 생각한다. 그러니 시간이 오래될수록 자신의 주견이 없어진다. 나중에는 아예 주견이 없는 사람으로 되는 경우도 있다. 자신의 생각한바를 그대로 표달하면 쟁론이 생기게 된다. 그래서 쟁론을 피하는 방법이 “자신의 주견을 감추고 다른 사람의 구상을 그냥 맞는다고 하는것”이라고 한다. 결국은 그 영명한 상급도 자신의 상상적인 세계에서 사는것으로 된다. 자신의 속히우는것도 모르고 말이다. 이제 따라하는 것만 하지 않고 자신의 구상도 펼치면 안될까? 2009년 12월 28일  
141    글감을 부탁드립니다. 댓글:  조회:1606  추천:0  2009-11-26
글감을 부탁드립니다. 요즘 들어 글을 쓰는데 재미가 들었습니다. 그래서 가끔씩 인터넷에 글을 올립니다. 그냥 교육에 관한 글들을 위주로 하는데 글감이 문제로 되였습니다. 그냥 내가 생각하였던것을 쓰기만 하기보다 다른 사람이 생각했던 것들을 써주려고도 합니다. 저는 글을 쓰는것이 전직이 아닙니다. 따로 하는 공작도 있고 그런 리유로 어떤 비용도 받지 않습니다. 그리고 글감을 공개적으로 제공하는데 우려가 있는 경우 직접 제 메일주소에 가명으로 보내주면 됩니다. 하기 힘든 말 대신 해드리겠습니다. 하고싶은 말 제가 해드리겠습니다. 제가 원칙적인 문제에 민감하기에 틀린 글로 낼수 없고 책임은 다 제가 지기로 하기에 자신에 대한 책임감으로도 틀리는 일은 하지 않을것입니다. 물론 글감을 제공한 비용을 드릴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비용을 바라는 글감은 받지 않기로 합니다. 교육문제, 내가 생각하는 일, 내가 관심하는 일, 나의 관점, 등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있으면 제공해주시기 바랍니다. 학생이든 교원이든 학생가장이든 다 될수 있습니다. 글감을 받은 다음 빠른시간에 정리하여 인터넷에 내드리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2009년 11월 26일 17시 22분 조글로 블로그 주소 http://blog.zoglo.net/lienhao2007 한메일 주소 lienhao@hanmail.net 혹은 lienhao2004@hanmail.net
140    해도 안되는 경우가 있다. 댓글:  조회:2473  추천:0  2009-11-24
해도 안되는 경우가 있다. 노력해도 안되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도 “하면 된다” 혹은 “할수 있다”만 강조한다. 사람마다 천부가 다르다. 그래서 어떤 일은 아무리 노력해도 안되는 수가 있다. 반대로 어떤 일은 노력을 안해도 그냥 해도 잘할수 가 있다. 이런것을 장끼 혹은 특장이라고 한다. 다른 사람이 따라하고 싶어도 할수 없는 것이다. 노력해도 쓸모가 없는 경우가 있다. 아무리 많이 알아도 써먹을수 없다. 자신이 하는 사업 혹은 공작과 아무런 련관도 없기때문이다. 결국 아무리 노력을 해도 긍정을 받지 못하고 상응한 대우도 받지 못한다. 다른 사람의 눈에는 헛수고만 하는 멍청이로 보인다. 사람마다 흥취가 다르다. 자신이 흥취를 가지는 지식을 학습해야 잘 배울수 있다. 하지만 승학을 위해선는 자신이 흥취를 가지지 않는 지식도 학습해야 한다. 흥취가 없으니 억지로 하게 되고 학습효률도 높을수 없다. 그런데도 "흥취가 없는 학과"를 "아주 재미있는 학과"라고 자아암시하면서 학습하는 사람도 있다. 하기 싫은 공부를 다른 사람의 강박에 의해 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학습하는 목적은 좋은 성적을 얻고 다른 사람보다 더 좋은 학교에 가는것이다. 다른 사람보다 낫은 앞날을 기대하며 하는 사람도 있다. 상등인이 되기 위한 필요한 고행이라고 리해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도 "하면 된다"만 강조한다. 그 목적이 교원평가제도와 관련이 되는지 모른다. 그런 경우에 교원이라도 자신의 량심에 꺼리끼는 그러나 자신의 리익에 도움이 되는 일 혹은 말을 한다. 승학시험에서 학생들의 성적이 높으면 긍정을 받을수 있도록 교원평가제도가 되여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어떤 경우 교원이 학생들을 동원하여 승학시험에 참가하지 않게 하거나 그 자격을 취소한다. 그러면 승학률도 높아진다. 좋은 학교 가고나면 자신이 큰 일을 했는가고 생각한다. 그래서 자신의 경험이라고 글을 쓰는 사람이 있다. 실은 어느 교원의 부탁으로 쓰는 경우가 있다. 그런 본보기가 있으면 누구나 다 그러한 인재로 배양할수 있는것처럼 생각한다. 혹은 어느 교원의 글을 자신의 글처럼 발표하는 사람도 있다. 이런 경험담을 본적도 들은적도 많다고 생각한다. 사람의 능력은 제한이 있다. 무엇이나 다 해내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도 지금의 중소학교 교육은 무엇이나 다 가르치고 무엇이나 다 시험친다. 그렇게 강박적인 교육을 한다. 그래서인지 대학으로 갈수 있는 사람은 흔히 고분고분 말을 듣는 그런 류형의 학생뿐이다. 아무리 개성이 강해도 승학제도라는 처마밑에서는 머리를 숙이지 않을수 없다. 머리는 깎아서라도 들어가야 한다. 그렇지 않는 경우 다른 선택은 직업학교이다. 한평생 학력이 낮은 사람(남보다 못한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 지금의 교육은 아직도 영재교육 혹은 정영교육이다. 학생에게 맞는 교육을 어떻게 하겠는가는 연구하지 않고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지식을 전수하겠는가만 연구한다. 그러니 아무리 론문을 많이 써도 그 글이 그 글이고 실천은 또 자신들의 나름대로 한다. 무엇이나 다 아는것은 인재가 아니라 백과사전이다. 사람의 능력으로는 무엇이나 다 준확하게 기억할 능력이 없다. 그것은 컴퓨터가 할일이다. 지금의 컴퓨터에는 아주 많은 지식을 저장할수 있다. 인터넷이 발전한 지금에는 더욱 그러하다. 인터넷에서 검색할수 있는 지식을 다 기억하느라 할 필요는 없지 않는가? 그래서 지금은 지식축적보다도 능력배양을 더 중시하는것이 아닌가? 교육을 하려면 모든 문제를 다 고려해야 한다. 그냥 하나만 알고 둘을 모르면 어떻게 진정한 교육을 할수 있는가? 그냥 아는것이 적어서 상급의 요구라면 그대로 하고 부동한 의견도 제기하지 못하는지 모른다. 주견이 없는 사람이 주견이 있는 학생을 배양할수 있는지 모른다. 교육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는 연구하지 않는다. 그냥 돈을 많이 주는 일을 골라한다. 승학시험을 고치지 않으면 교원의 평가제도를 고치지 않으면 교육도 고칠수 없다. 나처럼 그냥 학생배양만 중시하는 사람이 몇일까 하고 생각할때도 있다. 늘 밑지는것 때문에 어리석다는 말을 잘 듣는다. 그러니 사회의 가치관도 그러하다는 뜻일것이다. 해도 안되는 경우가 있다. 학생에게 맞는 교육을 하려면 승학제도부터 고쳐야 한다. 그런데 10몇년을 이렇게 말해도 아무런 소용도 없다. 그래도 “하면 된다”를 기억하며 그냥 해본다. 왜서일까? 2009년 11월 24일 3시 5분 하는척 하면서 안하는 사람도 있다. 그렇게 다른 사람의 말을 수집하여 그것을 구실로 삼아 협박을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나는 이제 아무것도 대수럽지 않다. 그들이 나를 물어도 독을 타는 사람은 내가 아닐것이다. 그렇게 되였으니 나는 그냥 당하고만 있는것이 아니다. 전에 원세개가 그렇게 혁명당을 물어먹었다고 한다. 력사가 다시 중복될수 없고 그렇게 되지도 않을것이다.
139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아래 외이로다. 댓글:  조회:1686  추천:0  2009-11-24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아래 외이로다. 고시조 한수가 있다. 태산이 높다하되 - 양사언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리 없건마는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 하더라 이는 양사언의 시조이다. 이 시조에서 “뫼”는 “외(岳)”의 오해라고 추측한다. 명확한 근거가 없기에 나의 추측이라고 밖에 할수 없다. 이렇게 추측하는데는 다음과 같은 두가지 근거가 있다. 첫째, 뫼, 메, 모, 묘 등은 모두 무덤의 방언이다. 전에 왕들의 무덤은 두텁게 봉토(封土)를 하였다. 그 봉토가 흔히 어지간한 산과 비슷하였다. 이런 대화가 있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한다. A: 저것이 무엇입니까? B: 그게 뫼다 A의 생각: 분명히 산인데 왜 뫼라고 할까? 그렇게 되여 A는 뫼는 산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오해하였다. 둘째, 글자체에서 “ㅇ”이 “ㅁ”과 비슷하게 보이는 글자체가 있다. 요즈음 글자체를 안장하여 사용하면서 발견한 문제이다. 이런 리유에 근거하여 나는 이 시조는 다음과 같다고 추측한다.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아래 외이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오를리 없건마는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외만 높다 하더라 한어로 다음과 같이 번역해보았다. 泰山高,天下岳; 攀不止(肯攀登),可登顶; 人不攀,叹岳高。 혹은 泰山虽高天下岳, 攀登不止可登顶, 人不攀登叹岳高。 2009년 11월 21일 15시 16분
138    엄마곁에 가고싶다 댓글:  조회:2107  추천:0  2009-11-19
엄마곁에 가고싶다 금년이 15년째다. 그런데 이젠 더 이렇게 충성심만 갖고 살고싶지 않다. 효성도 하고싶다. 전에 이런 말을 하였다고 기억된다. “나에게 제일 큰 재부는 부모가 모두 건강하다는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이 부모한테 어떻게 들렸고 또 어떻게 리해되였는지 모른다. 지금은 그 귀중한 재부를 절반이나 잃어버렸다. 작년 11월에 아버지가 돌아갔다. 년초까지도 “하지 말라는 일”을 그냥 하셨다. 몸이 불편하면서도 병원에는 가지 않았고 일상적인 약으로 응부만 하였다. … 지탱할수 없어 병원에 갔을때는 이미 간암말기였다. 그 진단서를 받은후 한달, 그렇게도 급하게 다른 세상으로 떠나갔다. 그해 년초 처음 몸이 불편할때 엄마한테서 전화가 왔었다. “니가 와서 권고했으면 한다”고 하였다. “병원에 가보라고 …” 그런데도 “평소 건강하던 아버지가 무슨 큰 병에 걸릴까” 하는 생각을 하고 가보지 않았다. 자신의 맡은바 공작을 잘하여 부모의 근심을 더는것이 … 아니 나라에 대한, 교육사업에 대한 충성을 다하느라고 그랬을것이다. 나는 지금도 당원은 아니다.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서는 량심으로 책임진다. 말하는 사람이 없어도 감독하는 사람이 없어도 자신의 직책을 다한다. 남모르는 노력을 얼마나 많이 하였는지 자신으로도 잘 모른다. 이제 나한테 남은건 엄마뿐이다. 그런데 60이 넘은 지금에도 젊은 시절처럼 일을 한다. 일거리를 보고는 참지 못하는 성격이여서 그런것 같다. 몇달에 한번씩, 볼때마다 몰라보게 변해가는 그 모습, 그냥 그렇게 보고싶지 않다. 그래서 이제는 그냥 옆에서 지켜주고싶다. 내 이 그닥 건실하지 못한 어깨로라도 엄마의 부담을 덜어주고싶다. 충동심이 불끈불끈 솟아난다. 학교를 필업하여 꼬박 15년, 그사이 한 일이면 나라에 대한 충성도 교육사업에 대한 충성도 비슷하게 한것 같다. 그러니 이제는 효성을 하고싶다. 엄마곁에 가고싶다. 그리고 이제부터라도 할수 있는 효성을 다하고 싶다. 2009년 11월 18일  15시 40분 초고완성 2009년 11월 19일 4시 52분 컴퓨터에 올림
137    양보하는것이 형이다. 댓글:  조회:1935  추천:0  2009-11-11
136    “근거가 없는 말은 헛소리다.” 댓글:  조회:1465  추천:0  2009-11-05
“근거가 없는 말은 헛소리다.” 전에 그런 말 들었다고 인상이 있다. 옛날(그전) 교수님들이 연구생의 론문을 심사하게 되면 늘 이런 말을 한다고 한다. “이게 근거가 뭐야?” 그래서 근거를 대지 못하면 “근거가 없는 말은 헛소리다” “나는 이런 글 하루에 몇십편이라도 쓸수 있다” “그래 내가 그 근거를 찾아주어야 하니?” 등 말들을 심심찮게 했다고 한다. 요즈음에는 쯤이 나지게 되니 조선문자의 력사에 대하여 찾아보기도 했다. 훈민정음은 력사가 너무 짧다. 그래서 “왜 조선족의 문명사가 이리도 짧을까?” 하고 한탄도 했다. 그러다 며칠전 인터넷에서 이런 내용을 보았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훈민정음은 가림토글자에 근거하여 만든것이고 가림토글자의 력사는 단군조선의 력사와 비슷하다.” 그걸 보니 자연 어깨가 올라간다. 헌데 이런 문제가 있다. 전에 중국력사학자가 한 평론을 본적이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일본사람들은 가짜사료(史料)를 만들어 력사를 외곡하고 한국사람들은 근거도 없이 상상으로 력사를 쓴다.” 이렇게 분석해볼때 전에 가림토글자가 있었다는것은 당연하나 어느때부터 있었는가는 아직 력사적근거가 부족하다는 말이 아닌가? 그러니 “근거가 있게 말하는 사람”의 말을 무선으로 믿어야겠다. 그것이 진리에 더 가까운 말이니까? 근거가 없는 말은 헛소리다. 그러니 그런말 근거도 찾아보지 않고 그래로 옴겨하면 “미치광이나 된것”이 아닌가? 한국이나 조선을 모국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다. 혹은 한국이나 조선을 “낳은 엄마”, 중국을 “기른 엄마”라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도 그 사람들의 말을 들을때 근거가 있는가 없는가를 판단해야겠다. 근거가 없는 말은 헛소리이니까… 2009년 11월 5일 수요일 9시 35분
135    동무가 아니라 동지다. 댓글:  조회:2146  추천:0  2009-11-04
동무가 아니라 동지다. 한자어에서 쓰는 동지(同志)를 동무라고 번역하고있다. 그러나 나는 이에 동감을 표시할수 없다. 그 리유는 다음과 같다. 조선어에서 쓰는 많은 단어는 한자어이다. 그렇게 한자어를 그대로 번역하여 쓰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지금의 한자어에서 그런 단어를 쓰지 않기에 그것이 조선어에만 있는 말 (고유어)라는 느낌을 준다. 례를 들면 촉매는 한자어로 (触媒)이다. 그 뜻인즉 “접촉하는 조건에서 작용을 할수 있는 매체”라는 뜻이다. 구실이라는 말이 있다. 한자어로는 (借口)라고 한다. 기실 전에는 (口实)라는 말이 있었다. 즉 “입과 관계되는 실제적인 것”이라는 말이 된다. 이런 각도로 출발하여 나는 “동무가 아니라 동지다”라는 결론을 내린다. 동무란 한자어에서 (同务)이다. 즉 “같은 일에 종사한다”는 뜻이다. 그러니 한자어에서 말하는 (同志)와는 완전히 다른 말이다. 동지에 대해서 모택동은 “(志同道合)하면 동지다” 라고 해석하였다. 즉 “뜻이 맞고 길이 같으면 동지”라는 뜻이다. 그러니 동무와 동지란 다른 말이다. 이제부터라도 동무라고 하지 말고 동지라고 불러라. 내가 그대들과 “뜻이 맞고 길이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되면 말이다. 나는 조문계를 필업한 사람도 아니고 전문연구도 한적이 없다. 그러니 믿지 않아도 괜찮다. 권위만 믿으면 그렇게 되는 법이니까... 누구를 원망할수도 없지 않냐? 2009년 11월 4일 9시 10분  
134    대찬인생 댓글:  조회:1559  추천:0  2009-11-02
대찬인생   박차고 태어나서 겁날게 뭐가있나 깨지고 박살나도 제대로 한판 붙어봐 딱한번 인생인데 기죽고 살지마라 가슴을 활짝펴고 멋있게 사는거야 세상만사 그런거지 가끔 꼬일때도 있지 소주한잔 걸치고 이렇게 소리쳐봐   한번죽지 두번죽냐 덤빌태면 모두 덤벼봐 깡으로 치자면 둘째가라면 섭섭해 한번뽑은 칼이라면 찔러야지 호박이라도 까지껏 어떠냐 목숨한번 걸어봐   대차게 살기위해 이땅에 태어났다 실패를 하더라도 뼈 빠지게 한번 살아봐 뛰는놈 머리위에 나는놈 있다지만 그런건 상관없어 오십보 백보니까 청춘이야 갔다지만 불같은 열정 없다지만 그렇다고 내인생 파김치 된건아냐   한번죽지 두번죽냐 덤빌테면 모두 덤벼봐 깡으로 치자면 둘째가라면 섭섭해 한번뽑은 칼이라면 찔러야지 호박이라도 까지껏 어떠냐 목숨한번 걸어봐 까지것 어떠냐 목숨한번 걸어봐~~
133    따라올 사람 따라할 사람 있니? 댓글:  조회:1949  추천:0  2009-11-01
따라올 사람 따라할 사람 있니? 지금까지의 인생을 신용으로 한다. 그리고 지금으로부터 그 신용을 기초로 이런 말을 한다. 그런데도 자신의 리익만 생각하지는 않는다. 언제부턴가는 누구와 손잡고 큰 일 하자는 마음을 접었다. 내 능력껏 어떤 일을 하려 할 뿐이다. 맹세 잘하는 사람 말 잘하는 사람 많이 보아왔다. 하지만 진정으로 일을 할만한 사람은 보지 못했다. 거래가 적어 그런지는 모른다. 그런 사람 만나려고 날마다 길거리에서 헤매여야 하니? 전에 이런 말을 한적이 있다. “나는 중국조선족의 일만 생각한다. 중국의 일도 세계의 일도 나는 생각할 시간이 없고 정력도 없다.” 그런데 요즘에는 이 생각을 조금 수정한다. 중국도 세계도 우리한테는 큰 환경이다. 큰 환경이 변화되면 우리도 영향을 받을 것이 아닌가? 그래서 지금부터 이 큰 환경문제도 조금은 생각해보기로 한다. 어릴때부터 이런 생각을 가져보았다. 어릴때 둔한 생각에는 깡패조직 비슷한것도 생각해보았다. 혹은 어떤 사람의 분석에는 그것이 지금 늘 말하는 공포조직이였는지도 모른다. 적어도 대학시절에는 어떤 큰 일을 할수 있는 조직쯤 꾸려볼까 생각했다. 그러나 잘 생각해보니 그렇게 큰일 하려 한다는 사람들의 지향이 맞지 않았다. 그래서 하려던 일 그냥 마음에만 두었다. 나는 말을 어떻게 하는가를 보지 않는다. 마음을 어떻게 쓰는가를 본다. 그래서 사람을 보아도 그 사람의 내심세계를 파악하기에 힘쓴다. 겉으로 어떻게 행동하고 어떻게 말하는것보다 어떤 목적으로 어떤 심산으로 이렇게 행동하고 말하였겠는가를 파악하려 한다. 그러니 다른 사람보다 생각하는것이 좀더 많다. 마음 나눌만한 사람 적다. 그런데도 마음 나누는척 하는 사람 적지 않다. 쉽게 말해서 잘 속히우는 그런 류형의 사람으로 오래동안 살았다. 내 말에서 구실 같은것을 잡았다고 생각하고 나한테 과분한 요구 협박에 접근하는 그런 말을 하는 사람도 더러 있었다. 그래서 겉으로는 웃고 떠들고 그래도 마음만은 고독하다. 나는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가진것도 그리 없고 아는것도 많지 못하다. 하나의 우점이 있다면 담이 큰것이다. 그리고 맞는것이면 따라한다. 그 맞는 도리를 진리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니 겁이 많은 사람은 따라올수도 따라할수도 없다. 나의 생각도 틀리는 곳이 많았다. 그래서 근간에는 많이 수정한다. 그러나 맞는것은 수정하지 않는다. 그러니 나도 이 사회에 적응되여 가고있는것이다. 저도 모르게 사회의 어떤 요구에 부합되는 사람으로 되려 하는것이다. 그래야 사회에서도 나를 받아줄것이 아닌가? 나는 언제든 이렇게 말한다. 나는 직업인이다. 그러니 내가 어떤 일을 하던 비슷한 보수만 받을수 있으면 된다. 내가 하는 일과 비슷한 일을 하는 사람에 비해 너무 큰 차이가 되는 보수를 받지 않으면 된다. 그러면 "그 보수을 받기 위해 하는 사람"처럼 죽기로 일을 한다. 그러니 내가 할수 있는 일은 많고 많다. 그러면서도 한때는 한가지 일밖에 모르는 사람인척 했다. 그렇게 숨죽이고 살았다. 그래서 죽었다는 말도 들었다. 사람은 살아서 숨쉬여도 마음은 죽었다고 … 이제 내가 남은 인생을 내 멋대로 살려 한다. 따라올 사람 따라할 사람 있니? 2009년 11월 1일 6시 46분 이제 어느때쯤 내가 가게 되면 이 글들도 어떤 기록이 될지 모른다. 그래서 내가 쓴 글은 모두 시간까지 준확하게 쓴다. 이것이 내가 화학전업을 배우며 인상이 깊은 일이였을것이다. 실험을 하면 결과가 정확하던 정확하지 않던 기록은 알심들여 잘해둔다. 그래야 금후 참고로 될수 있기 때문이다.
132    정전한 날이 휴식일이다. 댓글:  조회:1290  추천:0  2009-10-24
정전이 되면 휴식일이다. 이런 날에는 조용히 책도 보고 글도 쓸수 있다. 평일에는 찾고싶어도 찾을수 없는 좋은 날이다. 주말에도 전화만 오면 나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때문에 일을 못했다고 하지 않을까? 그러니 이런 날에 학습하지 않으면 언제 또 시간이 있는가? 그래서 정전이 되면 학습을 해야 한다. 평소 하지 못한 시간까지 보충하여 해야 한다.   학습내용은 많고 많다. 그러니 선택을 해야 한다. 버릴것은 버려야 한다. 그냥 요구로 하는 일도 거부한다. 그렇지 않고 지쳐죽는 부충이 될수는 없지 않는가?   오랜만에 든 필이다. 전에는 하루 한두편씩 썼으나 지금은 며칠에 한두번이다. 그래서 무엇을 쓸까 하고 생각도 해보았다. 그런데 생각나는것이 크게 없다. 그냥 지금의 기분을 적어본다.   오래전부터 그런 말 들어본적이 있다. 돈 있으면 좋은 옷 입으라고 ... 그래야 애들이 높이 본다 한다. 옷장사가 옷 팔리지 않으니 한 헛소리가 아닌지 모르겠다. 그러니 애들은 다 유치한가? 좋은 옷 입으면 옷이 빛을 내지 사람이 빛을 내니? 그렇게 겉모습만 보는 사람이 있으니 겉치례만 하는 사람도 있게 된다. 시장수요가 있어야 생산이 있게 된다는 도리이다. 겉치례 잘하는 사람 있어야 생산이 있게 되는 도리이다. 겉치례 잘하는 사람 있으면 그런걸 보기 좋아하는 사람도 만들어낸다. 상품을 팔려고 하니 그런 수요도 만들어내야 할것이 아닌가?   쓰다보니 또 쓸모없는것을 썼다. 그래서 남은 시간에는 학습을 하려 한다.   2009년 10월 22일   실은 오전까지도 오후 2시까지도 휴식을 못했다. 그래서 마지막에 온 사람보고 정전한 날에나 휴식을 하려 하는데 하고 하였다. 그말이 작용했는지 그뒤로는 찾아오는 사람 없었다. 책도 보고 졸기도 했다.  
131    잘 살려면 악을 써야 한다. 댓글:  조회:2024  추천:0  2009-10-18
잘 살려면 악(恶)을 써야 한다. 누구나 선량한 마음 착한 마음으로 살려 한다. 그러나 세상에는 다 좋은 사람뿐이 아니다. 선량한 사람 착한 사람을 밟고 살려는 사람들도 있다. 그래서 잘 살려면 악을 써야 한다. 나는 이 세상의 도리를 알만한 정도로 다 안다고 할수 있다. 그래도 그것을 모르는 사람처럼 살고싶었다. 다른 사람들처럼 희로애락을 감수하고 싶었던것이다. 그것을 이제 할수 없다는 것을 알았을때 이미 거의 40살에 접근하였다. 기실 어느때부터는 알면서도 행여 하는 마음으로 그것을 실현해보려 하였다. 결국 실패한것이다. 세상에는 그래도 선량한 사람 착한 사람이 대부분이다. 며칠전에 지갑을 잃어버렸을때 그것에 대한 감수가 깊었다. 일에 전념하다보니 지갑을 떨어뜨린것도 몰랐는데 주은 사람한테서 전화가 왔던것이다. 얼마나 고마운 일이였는지 모른다. 그냥 자신의 삶만 잘 살고 싶었다. 은거하고 싶은 마음도 가져보았다. 그러나 그렇게 할수 없는 리유가 있었다. 그 리유를 지금은 잘 알수 없다. 기억이 엉망이 되였으니 말이다. 그것이 남들과 같은 인생을 향수하고싶은 욕심이였을것이다. 출가한 사람의 말로 하면 속세의 어떤것을 버리지 못한것이다. 나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평범한 사람의 일원이다. 그러니 평범한 일생을 살고 싶은것이다. 신경이 잘못된 사람처럼 자신을 “남보다 월등한 사람, 남보다 우수한 사람, 잘나가는 사람”으로 자처하면서 살고싶지 않다. 그런데도 자기 마음대로 잘 살려는 노력을 하려 하니 장애를 만들고 막아서는 사람이 적지 않다. “너처럼 하찮은 인간이 나보다 잘되면 되는가” 하는 마음가짐인지 모른다. 그래서 그럴때마다 악을 썼다. 살인도 몇번은 시도했다. 그때의 기분에는 사는것보다 죽는것이 낫은 선택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였을것이다. 운수가 좋은 사람이여서 그런지 번마다 실패하였다. 그리고 그런 리유로 지금도 숨을 쉬고 있는것이다. 살인에 성공하면 사회에서도 용납을 받지 못할것이 뻔한 일이다. 그러나 금후에도 이런 경우에 부딪치면 악을 쓸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때면 자신도 자신을 억제하지 못한다. 그러니 이제 나를 건드리려면 목숨을 걸어라. 나는 그냥 “죽기로 하는” 사람이다. 일을 해도 그렇고 삶을 살아도 그렇다. 그냥 그렇게 힘들어서 사무실에서 끄떡끄떡 졸면서도 할일은 다한다. “최우는 아니여도 최선을 다 한다”. 한번 사는 인생 멋지게 살고 싶다. 그리고 뜻깊게 의의있게 보람있게 살고 싶다. 그러니 악을 쓰지 않을수 없다. 2009년 10월 18일 8시 9분  
130    집체신용과 개인신용의 관계 댓글:  조회:1598  추천:0  2009-09-25
집체신용과 개인신용의 관계 다른 사람의 신임을 받으려면 신용이 있어야 한다. 어떤 경우에 말하는 신용은 개인의 말로 서술한 신용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평가에서 나오는 신용을 말한다. 한 사람이 “신용이 있다”거나 “신용이 없다”는 그 자신의 말보다도 다른 사람의 평가가 더 중요하다. 어는 사람의 신용정도가 어떠한가는 그 주위의 다수 사람의 평가에서 나타난다. 집체신용은 일종 제도로 실현한다. 그 제도는 일정한 기록을 통하여 그 제도의 실시정황을 반영한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청가제도 등은 이러한 제도의 한가지이다. 이러한 제도의 실시는 그 집체내의 모든 성원이 다 같이 공동한 규률하에 공작을 책임적으로 사회의 신임을 받을수 있는 정도로 일을 하였다는것을 설명한다. 즉 집체적인 신용으로 개인적신용을 보충하는것이 된다. 개인신용은 개인적인 수양으로 실현한다. 어떤 경우 개인신용은 다른 사람의 감독범위를 벗어나는 경우가 있다. 즉 개인적으로 신용을 지키지 않고도 “신용있게 하였다”라고 말할수 있는것이다. 그러나 우에서 말한 청가제도 등 제도 역시 개인신용의 담보가 필요하다. 즉 유관공작을 맡아하는 사람의 개인신용이 필요하다. 만약 이런 사람이 사심이 있어 어느 사람에 대해서는 특수한 대우를 한다면 집체신용도 담보가 없게 된다. 규률앞에서는 누구나 다 평등하다. 그러나 이 문제를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 지금과 같이 효률을 따지는 사회에서 규률만 강조하는것도 합당하지 않다. 규률을 지키지 않는 사람이 있다 하여 규률을 자각적으로 지키는 사람도 규정에 따라 하라는것을 그 사람의 손발을 묶어놓는것과 같다. 그 사람이 어떻게 시름놓고 공작을 할수 있겠는가? 사회의 감독을 어떻게 리해해야 하는가? 사회에서 이러저러한 여론이 있다고 한다. 그러면 그 여론을 절대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가? 아니면 구체적으로 분석해야 하는가? “구체적인 문제는 구체적으로 분석해야 한다”는 말이 있는것 같다. 즉 한마디로 결론을 내리지 말고 그 일을 구체적으로 분석해야 한다. 말을 들을때 한 방면의 말만 듣지 말고 여러방면의 말을 다 들어보아야 한다. 그리고 어떤 문제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시간 지점 인물 사건의 경과 등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아야 한다. 이런 일을 다하려면 확실히 힘들다. 그렇다고 맞는지 틀리는지도 모르는 말때문에 다른 사람의 공작을 간섭하는것은 합당하지 않다. 례를 들어 이런 경우가 있다. 어떤 사람의 제보에 의하면 “어느 사람은 공작시간(출근시간)에 거리에서 돌아다닌다”는 제보가 있다. 그러면 그 제보를 받은후 구체적으로 “어느 시간에 누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였는가” 하는 문제를 확인해야 한다. 필요한 경우 그 제보한 사람의 정보를 보류해야 한다. 무턱대고 어느 사람을 무함하는 경우도 있기때문이다. 그 일을 하는데 “시간이 많이 든다거나” “일이 너무 많아 할수 없다”거나 하는 리유로 단순하게 문제를 처리하면 다른 사람의 공작을 방애하거나 지어는 공작을 제한하게 된다. 규률을 지킨다 하여 필요한 공작도 하지 않고 반공실에만 앉아있을수는 없지 않는가? 집체신용과 개인신용의 관계는 더 복잡할수 있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글을 맺으려 한다.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강요할수 없다. 그러나 나는 맞는 길을 알고 그것을 선택한 이상 끝까지 그대로 하려 한다. 2009년 10월 18일 7시 14분
129    자신의 직업을 생각해본다. 댓글:  조회:1881  추천:0  2009-09-17
자신의 직업을 생각해본다. 내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하여 생각해본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이러한 일을 잘할수 있고 합리하고 합당한 방식으로 할수 있겠는가도 생각해본다. 나의 언어를 연구하는 사람이 적지 않은것 같다. 혹은 그 말에서 허물을 찾아내려고 애를 쓰는 사람이 적지 않다. 그렇다고 한마디 말도 하지 않을수는 없다.… 우선 내가 종사하는 직업에 대하여 생각하던 일들을 적어본다. 교원은 학생을 관심하고 사랑해야 한다. 이것은 교원과 학생사이 (사생관계)의 한개 방면이다. 다른 한 방면에서 교원은 또 많은 학생가운데서 우수한 학생을 구분하고 선발해야 한다. 그러므로 교원은 공정한 마음가짐이 있어야 한다. 어느 학생은 특수한 학생이라고 생각하면 틀리는것이다. 혹은 학습을 잘한다거나 혹은 부모가 간부라거나 혹은 가정조건이 우월하다거나 하는 원인으로 특수한 대우를 해주어서는 안된다. 잠시는 말하는 학생이 없더라도 교원의 량심으로부터 출발해서라도 이렇게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교원의 리익은 학생의 발전과 밀접히 관계된다. 근년의 "학생이 교원을 평가"하는 제도하에서 교원의 리익은 학생의 성적과 밀접히 련계된다. 그러나 교원은 학생과 리익집단식의 관계를 형성해서는 안된다. 그 원인은 교원은 합격된 인재를 배양해야 하는 책임을 지니고있기때문이다. 이런 각도에서 교원은 표준도달정도를 판단하는 경우 사회에 대해 책임지는 각도에서 사실대로 판단하고 말해야 한다. 감독하는 사람이 없다거나 문의하는 사람이 없다는 리유로 혹은 그렇게 해야 학교에 유리하다는 등 원인으로 하여 그 표준을 개변하거나 취소하거나 응부해서는 안된다. 교원의 공작은 아주 번잡하다. 그 종류도 적지 않을뿐만아니라 량도 만만치 않다. 그래서 늘 그 많은 공작중에서 선택성적으로 해야 하는 경우가 있다. 물론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하는지 잘 모른다. 하지만 나는 공작에서 중요한 일은 더 중시하여 하고 주요한 공작과 련계가 없거나 형식적인 면이 많은 공작은 거부하는 경우가 있다. 이로 인하여 쟁론도 있었다. 교원은 학생에게 시범이 될수 있게 행동을 해야 한다. 하지만 교원은 학생이 아니다. 교원에게는 교원으로서의 공작이 따로 있다. 그러므로 교원에게 학생이 하는 모든 일을 같이 하라고 하는 요구는 합당하지 않다. 만약 교원에게도 학생을 대하는 방식을 사용한다면 그것은 교원에 대한 존중이 아닐것이다. 누군가 “뼈가 있는 문학인이 되는것은 힘든 일이다”라고 말한적이 있다. 지금의 사회에서 “뼈가 있는 교원”이 되는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상급의 요구라고 하여 합리하지 않아도 그대로 하고 정확하지 않아도 견지하려 하는 사람들도 있기때문이다. 혹은 일부 사회의 특권층의 압력때문에 일부 정확하지 못한 일들을 하는 사람도 있다. 그래서 “뼈가 있는 교원”이 되려면 수시로 이러저러한 압력을 받아낼 준비를 해야 한다. 보이지 않는 어떤 보복을 당하여도 방법이 없다. 수중의 권리를 믿고 혹은 자신이 더 우월하다는 느낌으로 무턱대고 시비거리를 만드는 사람도 더러 있다. 교원의 직업은 그리 쉽지 않다고 생각한다. 특히 교원의 책임을 다하려면 각종 저애도 극복하고 여러 방면에서 오는 압력도 막아내야 한다. 그래도 쉽게 하려 하거나 리익이 더 많이 생기는 방법을 택하고 싶지 않다. 량심적으로 교원의 직책을 다하고싶을뿐이다. 2009년 9월 18일 18시 48분
128    어떠한 과당교수만이 효과가 있는가? 댓글:  조회:1465  추천:0  2009-09-12
어떠한 과당교수만이 효과가 있는가? 어떠한 과당교수만이 의의가 있고 효익이 있는가? 유관 전문가는 "과당교수의 평가는 근근히 학생들의 학습질량과 효과에만 착안하지 말아야 하고 더우기는 근근히 학생들의 학업평가시험의 점수만 관심하지 말아야 하며 응당 교원이 효과적인 학습활동의 환경과 분위기를 창설하는 공작을 어떻게 하였는가를 관심하여야 하고 교원이 학습자의 학습활동에 대한 지도와 방조가 확실하게 효과적인가를 보아야 한다"고 여긴다. 1, 어떠한 교원만이 “좋은 교원”인가? (1) 학습에 능숙하고 학생에 대한 연구를 중시해야 한다. 좋은 교원은 학습을 잘하고 학생에 대한 연구를 중시한다. 주동적인 학습과정에서 적극적으로 선진적인 교육문화를 흡수하고 인입할수 있으며 실천중에서 학생의 심신특점과 인지규률 및 심리수요를 주의하여 연구하고 마음속에 학생이 있으며 학생의 각도로부터 문제를 분석하고 학생들의 흥분점을 잘 찾아낼수 있으며 이에 근거하여 효과적인 교학방식을 사용하며 좋은 교학효과를 취득한다. (2) 과당에 열정이 풍부하며 과당후의 반성을 참답게 한다. 관찰한데 의하면 좋은 교원은 모두 과당에 열정이 풍부하며 언어가 익살스럽고 재미가 있으며 사유가 활약적이고 심각하며 형식이 새롭고 감화력이 있으며 학생과 교원이 쉽게 사상상에서의 공감과 심리의 유쾌함이 산생되고 교원의 열정은 학생을 감화시킨다. 과당후에 교학에서의 득실을 잘 반성하고 교학방안을 수개하는데서 과정의식을 나타낸다. (3) 교학이 민주적이고 학생을 관심하고 사랑하며 책략이 있고 조세(造势)할줄 안다. 좋은 교원의 최대특점은 교학이 민주적이고 학생을 관심하고 사랑하지 억압하지 않으며 교수책략이 있고 조세할줄 알며 학생들의 사상심처(思想深处)의 다툼을 잘 내걸고 이로부터 학생들로 하여금 주동적으로 학습하게 하고 유쾌하게 배우게 하며 수월하게 배우게 한다. 2, 어떠한 과당교수만이 한절의 “좋은 과당교수”인가? 구경 어떠한 과당교수야말로 “좋은 과당교수”인가? “부동한 각도로부터 볼때 가능하게 부동한 답안이 있을수 있다”고 말할수 있다. 그러나 구체적인 과당교수실천은 응당 아래의 특점을 구비해야 한다. (1) 마땅히 “실혜과(实惠课)”여야 한다. 과당은 학생들의 구지, 진취, 성장의 주요진지이고 학생들의 많은 시간은 모두 과당에서 지낸다. 우리는 심지어 과당학습은 학생들의 청소년시기에 제일 주요한 생활과 생명방식이라고 말할수 있다. 그러므로 어떠한 과정을 어떻게 개혁하던지 한절의 좋은 과당교수는 우선 학생들로 하여금 실제적혜택을 얻게 하는 과당교수여야 하며 마땅히 학생들의 각 방면이 모두 일정한 발전을 가져오게끔 촉진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과당교수에서 “좋은 과당교수”는 응당 학생들이 수확이 있게 하여야 하는데 혹은 지식기능을 획득하거나 규률방법을 장악하거나 교류체험을 증진시키거나 사유를 확장시키거나 정감심령을 촉동시키거나 해야 하며 심지어 인격을 끌어올리고 인생관, 세계관을 개변시켜야 한다. 총적으로 좋은 과당교수는 우선 응당 “효과가 있는 교수”여야 하며 심지어 “효과가 높은 교수”로 되여야 하며 좋은 과당교수는 응당 “실혜과”여야 한다. (2) 마땅히 “과학과(科学课)”여야 한다. “좋은 과당교수”라면 꼭 사생의 심금을 촉동하는 정채로운 곳이 있고 꼭 교육교수규률에 부합되며 꼭 학생의 인지규률과 심지발전특점에 부합되며 꼭 학생정황, 반급정황, 학교정황 심지어 국정에 부합된다. 총적으로 “좋은 과당”의 본질은 응당 과학과이며 과당효과가 그리 완미하지 않은 과당교수에 대하여 우리는 “그 교수행위의 배후에는 꼭 리념 심지어 리론방면의 심층차의 원인이 있고 꼭 ‘정경’과 상반되고 “도리”에 부합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고 긍정적으로 말할수 있다. (3) 응당 “특색과”여야 한다. 사람은 모두 개성이 있는데 성격, 습관, 경험, 교양 등 방면의 부동함으로 하여 교원과 학생(—이러한 과당교수에서의 사람)도 모두 살아숨쉬는 개성이 있는 사람이다. 동시에 학생정황과 반급정황이 부동함으로 하여 각 반급도 모두 자기의 우세와 특점이 있는데 이로 인하여 “좋은 과당”은 응당 실제정황과 결부한 과당이며 응당 반급정황과 결부한 과당이고 학교정황과 결부한 과당이며 학생정황과 결부한 과당이다. 다시말하면 “좋은 과당”은 또 응당 사생과 학교, 반급의 개성과 우세를 뚜렷하게 나타내는 과당교수여야 하며 응당 “특색과”여야 한다. 특색이 있는 과당교수는 응당 “인정”에 부합되고 “천리”를 따르는 “좋은 과당”이여야 한다고 말할수 있으며 응당 교원, 학생, 교재, 환경 4자가 과학적이고 유기적으로 융합되고 통일된 “좋은 과당교수”이다. (4) 응당 “창신과”여야 한다. 새로운 교수개혁의 리론과 실천배경하에서 “좋은 과당”은 응당 “창신과”여야 한다. 교원은 부단히 새로운것을 추구하고 진보를 추구해야 하며 부단히 자신에게서 좋은것은 발양하고 나쁜것은 버려야 하고 이로부터 부단히 자아완선, 자아초월하며 부단히 실험과 탐색을 하여 교수예술을 제고하고 교수질량을 제고하고 교학행위를 개진하고 전업화발전을 촉진해야 한다. 학습에는 끝이 없으며 교수에도 역시 끝이 없으므로 사생은 응당 과당과 함께 성장해야 한다. 당연하게 좋은 과당교수는 동태적이고 형성적인 특점을 가지고있어야 하며 “좋은 과당”은 우에서 서술한 네개방면의 간단한 조합인것이 아니며 평소의 과당교수는 모두 우의 네가지가 조합된 정품과로 될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목표를 정하고 부단히 학습하고 부단히 반성하고 적극적으로 진취하고 집착하게 추가하여 교수의 어느 한 방면을 극치에까지 발위하고 “네가지 과당(특점)”의 어느 한가지 특질을 가지고있으면 응당 “좋은 과당”이라고 하여야 한다. 3, 과당교수의 기본특점 (1) 과당교수는 영원히 “실”, “신”, “활” 세글자를 추구해야 한다. 과당교수에서 “실”은 곧바로 교원의 상과는 실제적이고 겉치례를 하지 않고 형식이 내용을 희석하게 하지 않으며 한절의 시간을 통하여 진정 학생들로 하여금 배운것이 있고 배양된것이 있게 하여야 한다. 과당교수의 “신”은 곧바로 교원들로 하여금 낡은 틀에 묶이우지 않고 형식으로부터 내용에 이르기까지 창의가 있어야 하며 새로운 지식정보를 인입하는데 주의해야 하며 학생들로 하여금 “보고 듣는것이 다 신선하다”는 느낌을 갖게 하며 학습하는것에 흥취를 갖게 해야 한다. 과당교수의 “활”은 곧바로 과당교수는 영원히 동태적으로 형성되는 과당이여야 하며 교원은 학정에 근거하여 령활하게 교수실시의 책략과 방법을 조절하여야만 진정한 학정에 적응할수 있다. “활”은 교원이 교수지혜가 있을것을 요구하며 련계할줄 알고 넓힐줄 알며 변통할줄 아는것을 요구한다. (2) 과당교수는 따라할수 있는 기본모식이 있다. 새로운 교수혁이 어느절차에까지 진행되던지 또는 그의 형성성을 강조하든지 우리는 과당교수는 따라할수 있는 기본모식이 있다는것을 견지한다. 그 기본모식을 연구하면 과당교수의 운행규률을 보아내는데 유리하다. 우리는 “문제인입—자아탐구—계발과 의문해답—시탐련습—평가와 반성—학습과 소결”은 과당교수에 꼭 있어야 하는 기본모식이라는것을 발견하였다. 문제의 인입은 정경을 설정하고 흥취를 불러일으키며 학생의 학습동기를 유발한다. 자습탐구는 학생의 감지를 풍부히 하고 학습습관을 배양하고 의난문제를 발견하는데 있는다. 계발과 의문해답은 사생간의 교류, 대화에 있는데 사유가 충돌하고 의문을 해석한다. 탐구와 련습은 준확하게 지식을 장악하고 공고히 하며 기능을 형성한다. 평가와 반성은 학생들에게 적시적으로 측평을 진행하는것을 통하여 학생들로 하여금 학습효과를 효과적으로 평가하게 하고 지식의 내부화를 감수하게 한다. 학습과 소결은 기억한 지식을 정리하고 전체 절의 학습에 대하여 전반적인 국면으로부터 파악하고 사상방법을 건구한다. (3) 과당교학은 교원, 학생, 교재간의 3중대화이다. 가르치는것은 배우는것을 위해 복무하는데 어떻게 하면 3중대화에서 좋은 학생의 학습을 잘 복무해야 하는가? 유일한 사상은 가르치는것과 배우는것의 제일 좋은 결합점을 찾는것이다. 교원은 학생들이 학습을 잘하게 할수 있는 책략을 연구해야 하고 학생은 빠른 시간에 교원의 영향과 방조하에서 지식을 장악할것과 학습목표에 도달할것을 희망하며 그들의 결합점은 가르치는것과 배우는것을 한곳에 통일시킨 교학설계방안 특히는 학습교안에 있다. (4) 과당교학은 일종 라선식으로 상승하는 구조이다. 학생의 학습은 “알고 익숙히 알고 장악하는“ 세가지 층자를 뛰여넘어야 하고 교원의 가르침은 “인도하고 훈련하고 계발하는” 세개 절차를 경과해야 한다. 학생의 학습은 모르는데로부터 아는것을 배워야 하고 아는데로부터 익숙하게 일정한 량의 련습을 해야 하는데 익숙한데로부터 장악하는것은 감수가 필요하다. 교원은 그와 대응하게 학생의 학습을 인도해야 하는데 좋은 습관을 양성하고 훈련을 가강하고 강화와 측험과 평가를 통하여 사유를 계발하고 련계를 넓히여 전이능력을 형성해야 한다. (5) 과당교수는 반드시 학생의 수요를 관심해야 한다. 과당교수는 일체 노력을 하는데 그 목적은 모두 학생의 자존심을 보호하고 학생의 자신심과 자신심을 배양하고 학습흥취를 배양하고 량호한 학습습관을 양성하며 건전한 인격을 형성하는것이다. (6) 과당교학은 교원의 심리가 건강할것을 요구한다. 오직 존중, 리해, 관용, 신임 등 심리조절기술이 자기의 과당교수에 사용한 교원만이 한명의 성공한 교원이며 행복한 교원이라고 할수 있다. 희망을 과당에 지니고가면 존중을 과당교수에 갖고갈수 있다. 희망을 과당에 지니고가면 미소를 띠고 과당에 들어가야 한다. 2009년 9월 15일
127    교수연구는 필요하다 댓글:  조회:1492  추천:0  2009-09-09
교수연구는 필요하다 “교수연구는 필요하다. 공작이 아무리 분망해도 연구를 하지 않으면 공작수준을 제고할수 없다. 때문에 아무리 분망한 공작가운데서도 교수연구를 해야 한다. ” 이상은 어느분한테서 들은적이 있는 교수연구의 필요성이다. 내가 보기에 교수연구의 필요성을 연구하려면 아래의 몇가지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본다. 첫째, 무엇때문에 교수연구를 해야 하는가? 교수연구를 하는 목적은 아래의 몇가지가 있다. 첫째, 교학수준을 제고할수 있다. 그러나 이 교학수준은 리론설명을 하는것과는 다르며 교학과정에서 부딪치는 구체적인 문제를 해결할수 있는데서 표현된다. 둘째, 교학효률을 높일수 있다. 교학효률을 높이면 학생들의 학습부담을 감소하는 직접적인 경로이다. 그러나 이것을 “교학효률을 높이면 학생들이 학습시간을 줄일수 있거나 적게 학습하여도 된다”로 리해하면 안된다. 셋째, 교원의 지명도를 높일수 있다. 리론설명을 잘하는 교원은 능력이 있다는 판단을 하는 사람이 있기때문이라고 보아야 할것이다. 적어도 유관학습을 중시하는것으로 보일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정보화시대에 이런 관점은 더 자세히 연구해보아야 할 결론이다. 교학리론연구는 잘하나 실천이 차한 사람들이 적지 않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할것이다. 둘째, 교수연구를 하면 어떤 리로운 점이 있는가? 교수연구를 하면 아래와 같은 리로운 점이 있다. 첫째, 리론수준을 제고할수 있다. 리론연구를 하면 어떤 문제를 해결할때에나 다 리론적사고를 하게 되고 그 리론적근거로부터 문제해결의 방법을 생각하게 되며 이로부터 간단하고 조폭한 방식을 피면할수 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신속하게 판단하고 결책을 해야 하는 경우가 있다. 돌발사건의 처리라고 해야 할것이다. 이런 경우에는 교원의 과단성과 지혜가 필요하다. 언제 리론을 연구할 시간이 있는가? 둘째, 사회의 신임을 얻을수 있다. 교원의 평소언어에서 리론성적인 구술이 있다면 그러한 교원은 학식이 있는 교원으로 평가받을것이다. 오랜시간 리론문제를 연구하지 않는 교원은 평소의 언어에서 그러한 말을 할수 없기때문이다. 그러나 말만 잘하면 좋은 교원인가? 리론수준과 실천수준은 다른 두가지 표준이다. 리론연구를 잘하는 사람이 실천가운데서 구체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셋째, 평가에서 좋은 점수을 얻을수 있다. 지금의 교원평가의 내용에는 교수연구와 관계되는 항목이 있고 점수도 적지 않다고 한다. 그러니 교원자신의 리익으로부터 출발하여 사고하더라도 교수연구를 해야 한다. 그러나 자신의 리익만 생각하는 교원이 학생의 리익을 고려할 시간이 있는지 모르겠다. 셋째, 교수연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교수연구를 하는 방식은 다음과 같다. 첫째, 리론학습을 해야 한다. 자신의 리론학습을 거치지 않고 인터넷에서 옴겨온것이라면 자신의 사유을 경과하지 않았기에 자연히 깊은 인상을 남기지 못할것이고 예상한 효과도 거두지 못한다. 이러한 교원을 보면 “어떻게 (할것인가)”는 문제는 잘 말하나 “어째서 (그렇게 해야 하는가”는 문제는 해답하지 못한다. 문제를 사고하는 방식이 직선형이고 유관되는 질문은 해답하지 못한다. 그냥 상급의 요구라고 한다. 둘째, 교학실천과 결부시켜야 한다. 리론이 실천을 떠나면 죽을 글을 읽는것으로 될것이며 이러한 리론은 금후의 교수실천에 도움이 되지 못하며 교원의 보귀한 시간을 랑비하는것으로만 될것이며 교원에게 불필요한 부담을 증가하는것으로 될것이다. 특히 필기량과 필기장의 정연한 정도 등을 평가표준으로 하는 학습은 형식적인 면이 더 많다. 셋째, 교원의 마음속에는 언제나 학생이 있어야 한다. 교수연구는 종국적으로 학생을 위한 일이라고 한다. 그러면 교수연구는 우선 구체적인 학생을 분석해야 한다. 좋은 리론도 구체적인 학생실제와 결합되여야 하며 학생발전의 규률에 부합되여야 한다. 리론연구만 하고 학생을 연구하지 않는다면 결국은 “학생이 없는 선생”으로 된다. 눈에 학생이 있는것이 아니라 마음에 학생이 있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은 말을 하고싶다. 교수연구는 필요하다. 그러나 교수연구도 강박적인 수단으로 보급할수 없는 일이다. 평가를 하려면 표준이 있을것이고 그렇게 되면 대처하는 방법도 나지게 될것이다. 그리고 그 표준이 어느만큼 설득력이 있는지 누가 설명할수 있는가? 그렇다면 이것은 하기 위해 하는 맹목적인 실천이 아닌가? 2009년 9월 9일 0시 56분
126    누구한테나 도움이 될수 있는 사람 댓글:  조회:2026  추천:0  2009-09-06
누구한테나 도움이 될수 있는 사람 어떤 사람은 그 누구한테나 다 도움이 될수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런 사람을 익조에 비유한다. 나도 그런 사람이 되고싶다. 다른 사람에게 신임감이 있는 사람이 되고싶다. 어떤 일을 하나 성실한 태도로 정직하게 일을 하고싶다. 다른 사람의 시름을 하나 덜어주는것도 도움을 주는것과 같은것이다. 언제나 유익한 일만 하고싶다. 그 유익한 일로 하여 다른 사람이 조금이나마 안위를 느낄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한다. 받은것보다 주는것이 더 많은 사람으로 되고싶다. 혹은 받은것보다 창조한것이 더 많은 사람으로 되고싶다. 그러면 사회적재부의 루적을 위해 조그마한 공헌이라도 한것이 된다. 쟁론을 적게 하고 일을 많이 하고싶다. 자신의 제한된 시간은 유용한 일을 하는데만 쓰고싶다. 그래야 언제쯤 자신의 지난일을 돌이켜보게 될때 “나의 모든 시간은 사회적부를 창조하는데 유용하게 사용하였다.”라고 할수 있을것이다. “일부 사람을 위해서는 다른 일부 사람을 해치게 된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나는 누구에게나 다 도움이 될수 있는 사람으로 되고싶다. 2009년 9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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