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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밖에 모르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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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자기절로 하는 것(사람)이 천재다 댓글:  조회:2092  추천:0  2011-11-21
  오늘 천재에 대한 의론을 듣게 되였다. 듣는 과정에 생각나는것이 있었는데 다른 사람의 의론에 참여하고 싶지 않았다. 저만 아는것처럼 하는것 같아서 …   그 순간에 생각나는 말이 “자기절로 하는것이 천재다”였다. 생각나는대로 적어보기로 한다.   1. 천재에게는 노력하는 목표가 있다. 어느 사람에게나 다 자신의 우상이 있다. 그 우상과 같은 우수한 사람으로 되려는 꿈이 바로 그 노력하는 목표로 된다.   2. 천재에게는 방법이 있다. 사람이 사회에서 사느라면 여러가지 일을 동시에 마주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 경우에 천재는 그 일들의 중요성과 수요에 근거하여 조화롭게 순서를 맞추어 하나하나 해결해나간다.   3. 천재에게는 의지가 있다. 우리의 주위에는 학습보다 혹은 공작보다 우리의 주의력을 끄는 사물이 아주 많다. 례를 들면 여러가지 오락활동들(특히는컴퓨터유희)이 우리의 주의력을 분산시키는 경우가 많다. 천재는 자신의 해야 할일이 무엇이고 하지 말하야 하는 일이 무엇인가를 안다. 때문에 해야 할 일은 힘들어도 하고 하지 말아야 하는 일은 하고싶어도 참고견딘다. 천재의 의지는 곤난을 이겨내는데서도 나타난다. 어떤 일이든지 잘하려고 하면 곤난에 부딛치게 되고 많은 노력을 해야 하게 된다. 천재는 그러한 곤난을 자신의 의지에 대한 시련(혹은고험)으로 생각하고 달갑게 받아들인다.   천재에게는 이외에도 다음과 같은 품질이 있다.   4. 대담하다. 천재가 해야 하는 일중에 어떤 일은 일정한 위험성을 띠게 된다. 어떤 일은 위험한것 같지만 방법을 잘 생각하면 그리 위험하지 않은 일로 변할수 있다. 그래서 탐험정신이 있어야 한다고 한다. 이런 탐험정신은 아무런 준비도 없이 손을 대고 하려 하는 모험정신과는 다르다.   5. 독립적인 사고의식이 있다. 어떤 문제던지 다른 사람의 의견만 듣는것이 아니라 자신의 머리로 잘 생각해본다. 이렇게 하는 경우 어른들의 견해와 엇갈리는 경우도 있다. 그러니 독립적인 사고의식도 대담성과 일정한 련계가 있다. 대담하지 못한 사람은 독립적인 사고의식도 배양하기 힘들다.   6.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식이 있다. 이러한 의식때문에 강박증이 있는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한 의식이 있기때문에 어떠한 일을 하게 되면 끝을 보고야 만다. 다른 사람의 보기에는 어리석은 일을 하는것 같기도 하다.   7. 자각적으로 노력하는 의식이 있다. “최고는 아니여도 최선을 다한다”는 말이 여기에 어울린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쯤이 나지면 자신으로서 필요하다는 여러 방면의 지식을 모두 학습한다. 그래서 늘 박식(무엇이나다안다)하다는 말을 듣게 된다.   천재에게서 가장 중요한것은 자기절로 하는것이다. 다른 사람이 강박하지 않아도 하고 다른 사람이 휴식하라고 해도 그냥 한다. “휴식할줄 모르는 사람은 공작할줄 모르는 사람이다”는 말을 듣기도 한다. 그러나 내가 견디여낼수 있다고 생각하면 노력을 멈추지 않는다.   그래서 “자기절로 하는것이 천재”라고 하는것 같다. 2011年11月21日星期一  
7    따라하다 보면 ... 댓글:  조회:2094  추천:1  2009-12-28
따라하다 보면 따라하다 보면 나도 어느만큼은 할수 있다는 신심이 생긴다. 그래서 그런 좋은 체험때문에 다른 사람의 일을 경험이라고 받아들이기 좋아하게 된다. 그런데 다른 사람의 경험이라고 해서 다 맞는것이 아니다. 어떤 경우에는 구상대로 되지 않아도 그렇게 된것처럼 경험을 만들어놓는 경우가 있다. 그렇게 치장해놓으면 "미녀"가 된것처럼 보인다고 한다. 그것도 모르고 따라하면 다른 사람이 틀리게 한일도 그대로 따라하게 된다. 따라하다 보면 자체로 구상할수 없게 된다. 늘 다른 사람의 경험을 받아들이는데만 정력을 몰붓다보니 자신의 머리를 사용하여 구상하는 능력이 자연히 못해진다. 그리고 이제까지 의뢰해왔으니 그 의뢰심도 하루아침에 소실되는것이 아니다. 그래서 일이 생기면 또 그전처럼 잘하는 사람 혹은 책을 찾아보게 된다. 결국 학습은 잘하나 자신의 창조성은 자연히 없어지게 되거나 약화된다. 아예 "나는 남보다 못하니 다른 사람의 경험을 학습하는것으로 족하다"라고 생각한다. 따라하다 보면 자신의 주견이 없어진다. 그냥 다른 사람이 한 그대로의 경험을 옴겨놓는것으로 만족하게 된다. 그러니 자신이 생각했던 일도 틀렸는가 하고 생각한다. 그러니 시간이 오래될수록 자신의 주견이 없어진다. 나중에는 아예 주견이 없는 사람으로 되는 경우도 있다. 자신의 생각한바를 그대로 표달하면 쟁론이 생기게 된다. 그래서 쟁론을 피하는 방법이 “자신의 주견을 감추고 다른 사람의 구상을 그냥 맞는다고 하는것”이라고 한다. 결국은 그 영명한 상급도 자신의 상상적인 세계에서 사는것으로 된다. 자신의 속히우는것도 모르고 말이다. 이제 따라하는 것만 하지 않고 자신의 구상도 펼치면 안될까? 2009년 12월 28일  
6    교수연구는 필요하다 댓글:  조회:1492  추천:0  2009-09-09
교수연구는 필요하다 “교수연구는 필요하다. 공작이 아무리 분망해도 연구를 하지 않으면 공작수준을 제고할수 없다. 때문에 아무리 분망한 공작가운데서도 교수연구를 해야 한다. ” 이상은 어느분한테서 들은적이 있는 교수연구의 필요성이다. 내가 보기에 교수연구의 필요성을 연구하려면 아래의 몇가지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본다. 첫째, 무엇때문에 교수연구를 해야 하는가? 교수연구를 하는 목적은 아래의 몇가지가 있다. 첫째, 교학수준을 제고할수 있다. 그러나 이 교학수준은 리론설명을 하는것과는 다르며 교학과정에서 부딪치는 구체적인 문제를 해결할수 있는데서 표현된다. 둘째, 교학효률을 높일수 있다. 교학효률을 높이면 학생들의 학습부담을 감소하는 직접적인 경로이다. 그러나 이것을 “교학효률을 높이면 학생들이 학습시간을 줄일수 있거나 적게 학습하여도 된다”로 리해하면 안된다. 셋째, 교원의 지명도를 높일수 있다. 리론설명을 잘하는 교원은 능력이 있다는 판단을 하는 사람이 있기때문이라고 보아야 할것이다. 적어도 유관학습을 중시하는것으로 보일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정보화시대에 이런 관점은 더 자세히 연구해보아야 할 결론이다. 교학리론연구는 잘하나 실천이 차한 사람들이 적지 않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할것이다. 둘째, 교수연구를 하면 어떤 리로운 점이 있는가? 교수연구를 하면 아래와 같은 리로운 점이 있다. 첫째, 리론수준을 제고할수 있다. 리론연구를 하면 어떤 문제를 해결할때에나 다 리론적사고를 하게 되고 그 리론적근거로부터 문제해결의 방법을 생각하게 되며 이로부터 간단하고 조폭한 방식을 피면할수 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신속하게 판단하고 결책을 해야 하는 경우가 있다. 돌발사건의 처리라고 해야 할것이다. 이런 경우에는 교원의 과단성과 지혜가 필요하다. 언제 리론을 연구할 시간이 있는가? 둘째, 사회의 신임을 얻을수 있다. 교원의 평소언어에서 리론성적인 구술이 있다면 그러한 교원은 학식이 있는 교원으로 평가받을것이다. 오랜시간 리론문제를 연구하지 않는 교원은 평소의 언어에서 그러한 말을 할수 없기때문이다. 그러나 말만 잘하면 좋은 교원인가? 리론수준과 실천수준은 다른 두가지 표준이다. 리론연구를 잘하는 사람이 실천가운데서 구체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셋째, 평가에서 좋은 점수을 얻을수 있다. 지금의 교원평가의 내용에는 교수연구와 관계되는 항목이 있고 점수도 적지 않다고 한다. 그러니 교원자신의 리익으로부터 출발하여 사고하더라도 교수연구를 해야 한다. 그러나 자신의 리익만 생각하는 교원이 학생의 리익을 고려할 시간이 있는지 모르겠다. 셋째, 교수연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교수연구를 하는 방식은 다음과 같다. 첫째, 리론학습을 해야 한다. 자신의 리론학습을 거치지 않고 인터넷에서 옴겨온것이라면 자신의 사유을 경과하지 않았기에 자연히 깊은 인상을 남기지 못할것이고 예상한 효과도 거두지 못한다. 이러한 교원을 보면 “어떻게 (할것인가)”는 문제는 잘 말하나 “어째서 (그렇게 해야 하는가”는 문제는 해답하지 못한다. 문제를 사고하는 방식이 직선형이고 유관되는 질문은 해답하지 못한다. 그냥 상급의 요구라고 한다. 둘째, 교학실천과 결부시켜야 한다. 리론이 실천을 떠나면 죽을 글을 읽는것으로 될것이며 이러한 리론은 금후의 교수실천에 도움이 되지 못하며 교원의 보귀한 시간을 랑비하는것으로만 될것이며 교원에게 불필요한 부담을 증가하는것으로 될것이다. 특히 필기량과 필기장의 정연한 정도 등을 평가표준으로 하는 학습은 형식적인 면이 더 많다. 셋째, 교원의 마음속에는 언제나 학생이 있어야 한다. 교수연구는 종국적으로 학생을 위한 일이라고 한다. 그러면 교수연구는 우선 구체적인 학생을 분석해야 한다. 좋은 리론도 구체적인 학생실제와 결합되여야 하며 학생발전의 규률에 부합되여야 한다. 리론연구만 하고 학생을 연구하지 않는다면 결국은 “학생이 없는 선생”으로 된다. 눈에 학생이 있는것이 아니라 마음에 학생이 있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은 말을 하고싶다. 교수연구는 필요하다. 그러나 교수연구도 강박적인 수단으로 보급할수 없는 일이다. 평가를 하려면 표준이 있을것이고 그렇게 되면 대처하는 방법도 나지게 될것이다. 그리고 그 표준이 어느만큼 설득력이 있는지 누가 설명할수 있는가? 그렇다면 이것은 하기 위해 하는 맹목적인 실천이 아닌가? 2009년 9월 9일 0시 56분
5    정경교육을 생각해본다. 댓글:  조회:1700  추천:0  2008-12-28
정경교육을 생각해본다.     지금에 와서 여러가지 교학방식이 부단히 나오고 있다. 그런 교학방식이 나옴으로 하여 교육이 부단히 발전한다고 한다.     새로운 교육방식 혹은 교학방식의 작용은 아래의 몇가지에 있지 않는가 하고 생각한다.     첫째, 교원이 부단히 교학방법을 연구한다는 감을 준다. 특히 처음으로 새로운 교학방법 교육방법을 내놓았을때는 더욱 그러하다. 돈을 더 많이 받으려고만 하는 교원에 비해 이처럼 교학만 연구하는 교원은 참으로 적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둘째, 부단히 사고하고 연구하는 과정에 사생관계의 처리 등 문제를 더욱 합리하게 해결한다. 사생간의 신임관계 교원과 학부모사이의 신임관계가 더 잘 건립된다고 할수 있다. 그러할 정도로 새로운 연구를 하는 사람은 신용이 있어야 한다.     셋째, 그러한 교학방법의 연구가 합리하다고 하는 경우 다른 장애가 자연히 적어진다. 혹은 성적방면에서 큰 제고가 없어도 잘 되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한것이 필요하다는 원인으로 상급으로부터의 지지도 따라온다.     그러나 새로운 교학방법을 연구하려면 다음과 같은 조건들이 필요하다.     첫째는 일정한 승학방면의 보장이 있어야 한다. 승학방면에서 영향을 받지 말아야 그러한 교학연구에 참가하는 학생 학부모가 의견이 없다. 이런 연고로 어떤 곳에서는 새로운 교수연구에 참가하는 학생들에게는 점수를 더해주는 방식을 취한다고 한다. 실은 새로운 불공평점을 만들어내는것이다.     둘째는 연구시간이 일정하게 길다. 만약 일정한 시간에 리상적인 수준에 도달하지 못하면 교학연구에 참가하는 학생들이 영향을 받게 된다. 그래서 "학생이 실험품이냐?" 하고 반문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한때 남경시에서 소질교육연구를 하느라고 학생들에게 숙제도 포치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후에는 학생들이 대학교에 입학하지 못하고 좋은 대학에 입학하지 못하게 되니 학부모들의 의견이 너무 커서 다시 원래대로 회복하였다고 한다.     셋째는 련속성이 차하다. 새로운 교학방법이 다른 곳에서 경험적으로 접수할 가능성이 없다. 경험을 학습한다 하더라도 역시 같은 연구과정을 거쳐야 한다. 우점만 말하고 결점은 말하지 않았음으로 하여 경험을 학습한 곳에서도 마찬가지로 첫 실험학교와 같은 곤난에 부딪친다. 그렇게 선전할 때에는 우점만 말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자신의 성과로 만들려면 꼭 새로운 개념을 내와야 한다. 그런 원인으로 근년에 많은 새로운 교학방식이 나오기는 하지만 그 실질은 기본상에서 같다.     정경교육이라는 새로운 개념이 또 생겼다고 한다. 그러면 정경교육이란 무엇인가? 그 실질도 분석해보고 싶다.     정경교육이란 실제적인 사실과 비슷한 정경을 만들고 학생들로 하여금 자신이 직접 그러한 사실을 체험하는것 같은 느낌을 가지게 하는것이다. 그런 실제적인 체험속에서 배운 내용은 더 인상이 깊다고 한다.     전에 이런 말을 들은적이 있다. "배워주는것은 배워주지 않기 위해서이다." 그 뜻인즉 배워주는 목적은 학생들이 자체로 학습을 하는데 필요한 지식과 기능을 장악하여 학교를 떠난 뒤에도 자체로 자신의 지식과 기능을 제고할수 있도록 하는것이다. 그런 연고로 "학습방법을 배우는것이 진정한 학습이다."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정경교육이 좋은 점이 많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정경교육이 학생들에게 부여하는 그 의뢰심리만은 틀린것이라고 생각한다. 학생들의 자립의식을 수립할 대신 그들의 의뢰심리를 더 한층 증가시켰다는데서는 긍정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 학교에서 정경이 있어 학습하였다면 집에 돌아간 뒤에 정경이 없으면 학생들이 학습할수 있을까? 그러면 학생들의 학습목적은 무엇인가? 그러한 정경속에서 노는것일까?     학교교육의 목적은 효률을 높이는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러한 방식으로 효률을 담론할수 있는가? 부동한 교학방식은 다 그 우점이 있다. 강수법도 우점이 있는데 그 우점이 바로 효률이 높은것이다. 짧은 시간에 많은 지식을 전달할수 있는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정경교육만 교수방법으로 될수 있는가?     이제 또 새로운 방법이 나올것이다. 그러나 그런 방법이 나온것으로 하여 교육에 존재하는 문제는 해결되는것이 아니다. 혹은 그런 문제는 연구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러면 이런 문제는 누가 연구해야 하는가?     2008년 12월 28일 9시 23분 
4    정보화시대에 맞는 교육은 댓글:  조회:1682  추천:0  2008-12-27
정보화시대에 맞는 교육은 정보화시대에 맞는 교육은 정보화시대의 우점을 충분히 리용해야 한다. 정보화시대에 들어선후 정보를 취득하는 경로는 전에 비해 다양하여졌고 취득하는 일도 아주 쉽게 되였다. 특히 인터넷이 보급되면서 인터넷을 통하여 얻은 정보는 책을 보고 찾는것보다 더 편리하고 신속해졌다. 이에 따라 일부 지식은 자신이 기억하지 않아도 되고 유관되는 책을 사지 않아도 될수 있게 되였다. 시대가 이렇게 좋아진것만큼 학생들의 학습도 상응하게 개변되여야 하지 않겠는가? 전에는 책도 적고 지식을 찾아볼수 있는 경로도 아주 적었기에 지식은 많은 경우 자신의 필기장에 적어야 하였고 자신의 머리에 장악해야만 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게 할 필요가 거의 없게 되였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학생들에게 이것도 기억 저것도 기억 이렇게 요구하지 않아도 될것 같다. 그렇다면 지금은 학생배양의 중점이 지식과 기능으로부터 능력배양에로 전변되여야 하지 않겠는가? 사람들의 보편적 수준이 많이 제고되였으므로 많은 지식과 기능은 주위사람들과의 교류를 통하여서도 학습할수 있다. 무엇이나 다 내가 알아야 하는것이 아니다. 정보화시대에는 정보화시대에 알맞는 학습내용과 학습방식을 취해야 한다. 우리 나라에서는 대학입시가 교육의 지휘봉이라고 한다. 교육을 개혁하고 학생의 학습을 개혁하려면 교육의 지휘봉--대학입시부터 개변해야 하지 않겠는가? 대학교에 여러가지 전업이 있는데 부동한 전업은 배양대상에 대한 부동한 지식요구가 있을것이다. 때문에 대학입시도 단순하게 문과와 리과로 나누는 방식을 고쳐 부동한 전업에 지망하는 학생이 그 방면으로 발전하는데 유리하게끔 대학입시과목을 설정하고 학습요구도 부동하게 하여야 한다. 단순하게 선발을 위해서 불필요한 부담까지 증가하는것은 인재배양에도 불리할것이다. 전에 이런 이야기를 하나 들은적이 있다. 목수 100명을 선발하는데 각종 재능을 비교를 거친후 아직도 200명이 남았다. 그때 시험관이 생각한 방법이 외국어시험을 치르는것이였다고 한다. 이 목수들을 모두 외국에 로무수출할 계획이라도 하였는지 모른다. 물론 이것은 우수개식의 이야기이지만 우리 학생들의 일부 학습은 이와 마찬가지로 단순히 선발을 위해 억지로 하는 경우도 있다. 한 사람으로 놓고 말하면 13살부터 19살까지의 시기가 무의식기억이 제일 잘 되는 황금시기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 나라인 경우 이 좋은 시기에 자신의 금후의 발전과 관계되는 능력을 배양할수 없고 대학입시를 위한 준비를 하여야 한다. 응시를 하지 않는 학생은 고등교육을 받을 기회조차 없기때문이다. 그러한 원인때문에 어떠한 학과에서는 그 학과지식방면에서 돌출한 학생을 모집할수 없게 된다. 즉 우수한 대학생을 배양하는데도 영향을 받게 된다. 자신의 흥취야 어떠하던 중학교시절에는 수학, 어문, 외국어를 중심으로 학습해야 한다. 게다가 필요도 없는 지식을 억지로라도 기억해야만 한다. 그러면 자신의 특장은 어디에 시간이 있어 배양할수 있는가? 정보화시대에는 학생부담을 경감해야 한다. 지금과 발전한 사회에서 단순한 지식적인 내용은 기억하지 않아도 된다. 례를 들면 력사지식같은 것은 기억하지 않아도 된다. 이러한 지식은 얼마든지 인터넷을 통하여 찾아볼수 있다. 일부 공식이나 상수 같은 것은 기억하지 않아도 된다. 이러한 내용도 유관되는 참고서적 혹은 인터넷을 통하여 다 찾아볼수 있다. 이렇게 찾은 지식은 단순하게 기억한 내용보다 더 상세하고 더 준확할것이 아닌가? 선발을 하기 위해서 이런 불필요한 내용도 기억해야 하는가?  그뿐만이 아니다. 지금과 같이 지식이 폭발식으로 증가되는 시기에는 무엇이나 아는 사람이 있을수 없다. 그런 만큼 우리는 대학졸업생이라 하여 무엇이나 다 알아야 한다고 요구하여서는 안된다. 지금과 같은 시대에서는 새로 나온 지식이라 하더라도 다 배워낼수 없다고 한다. 인터넷에서 이런 기사를 본적이 있다. 한해에 발표되는 화학방면을 론문을 한 사람이 다 보려면 하루 24시간씩 보아도 8년이 걸린다고 한다. 보는데만 그렇게 많은 시간이 걸리는데 그것을 리해하고 분석하고 검증하려면 또 얼마만한 시간이 걸리겠는가?  정보화시대에는 사람과 사람사이의 합작과 교류가 더욱더 필요하다. 선발을 하기 위해 감별을 하기 위해 사람과 사람사이의 합작과 교류를 부정한다면 분공합작은 언제 실현하겠는가? 이러한 환경에서 사람사이의 신임관계가 존재할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어떤 사람은 정보망을 말하면 인터넷만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의 주위에는 세가지 정보망이 있다. 그것은 천망(天网), 지망(地网), 인망(人网)이다. 그것들은 하늘에 떠있는 위성을 리용한 라지오텔레비죤계통, 땅에 있는 통신케블을 리용한 인터넷, 그리고 인사조직관계로 이루어진 사람들의 관계망 등이다. 이런 원인으로 하여 한번의 학습으로 모든 지식을 다 학습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공작을 할수 없고 어떤 직업에 종사할수 없는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공평 공정한 선발을 보장하는 전제하에서 학생들의 부담--학습과목과 학습내용을 학생의 발전에 필요한 내용으로 최소한 줄여야 할것이 아닌가? 그리고 학습하는 내용이 상식적이 내용이라면 꼭 기억할 필요는 없는것이다. 그렇다면 무엇때문에 시험을 치러야 하는가?  정보화시대에는 시대에 맞는 학습방법을 취해야 할것이다.  2008년 12월 26일 19시 05분   
3    태양과 친근해지고 싶다. 댓글:  조회:1691  추천:0  2008-12-26
태양과 친근해지고 싶다. 해빛의 좋은 점은 아주 많다고 한다. 해빛을 쪼이면 사람의 몸에 비타민 D가 생성되는데 리롭다고 한다. 그 비타민D의 작용이 칼슘흡수를 촉진하는것이다. 키를 크게 하는데 그리고 뼈를 든든하게 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한다. 근간에 양광체육(阳光体育)이라는것을 한다. 그 뜻인즉 하루에 얼마만큼한 시간을 학생들에게 주어 그들로 하여금 해빛아래에서 활동하게 하고 그 가운데서 해빛의 좋은점을 향수하게 한다는것이다. 해빛을 쪼이면 몸에 있는 많은 세균 특히는 병균을 죽일수 있다고 한다. 그러니 하루에 얼마만큼씩 해빛을 쪼이면 면비로 살균소독을 하는것과 같다고 할수 있는것이다. 그러면 병에 걸리는 경우도 적어지고 신체소질도 제고된다고 한다. 병원에 적게 가면 돈도 절약될것이다. 병에 적게 걸려야 생활의 아름다움도 진정으로 느낄수 있고 진정으로 생활을 향수할수도 있는것이다. 요즈음 들은 말에 의하면 이런 좋은 일도 기중복습이거나 기말복습을 할때에는 취소한다고 한다. 유감이 아닐수 없다. 학교의 근본적인 임무는 학생들에게 생존기능을 전수하는것이다. 생존도 제대로 하지 못하면 어찌 발전을 고려할 가능성이 있는가? 생존기능의 가장 근본적인것이 건강을 유지하는것이라고 생각한다. 건강마저 보장할수 없으면 어찌 생존을 고려할수 있는가? 그래서 “학생이 안경을 걸면 선생이 미안하다”고 한다. 그 좋은 학습방법을 전수하지 못해서 학생이 힘들게 학습하였다는 증명으로 되기때문이다. 혹은 합당하지 못한 학습임무를 제기하였기에 학생이 필요없는 노력을 더 하였다는 것으로도 되기때문이다. 보도에 의하면 일부 지방의 소학교학생들의 가방이 군인들이 사용하는 총보다도 더 무겁다고 한다. 학생들의 부담을 경감하는 근본적인 목적은 학생들의 건강을 위해서란다. 그러나 학생들의 자각성이 결핍하여 활동시간을 주면 그냥 다른 일만 하다고 한다. 그러면 학생들에게 건강한 활동방식을 배워주는것도 필요하지 않을까? 그렇게 다른 일을 한다고 하여 다시 교실에 가두어놓고 학습을 시키면 학생의 부담을 경감한다는것은 그냥 빈말로 된느 것이 아닐까? 그러니 금후에는 체육활동과를 다른 과목으로 대체하지 않는것이 옳다고 본다. 잠시 학습성적이 내려간것 같아도 그것만은 움직이지 않는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이것이야말로 학생의 장래를 진정으로 관심하는 태도라 하겠다. 전에 하루 반시간씩 해빛을 쪼인적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 원인을 돌이켜보면 처음 공작에 참가하였을때 창문가에 앉아 공작한 경력이 있었기때문이다. 그 1년 시간에는 신체도 건강했고 병에 걸린 차수도 아주 적었다는 인상이 있었다. 하루 반시간씩 해빛을 쪼이니 그냥 감기에 걸리는 차수라도 줄어드는것이였다. 그리고 매일매일 유쾌한 심정도 유지할수 있었다. 그뒤로 일이 많아지자 해빛을 쪼이지 못했고 그 원인으로 병에 시달린 적도 있었다. 그래서 한번 감기에 몇백원 돈을 쓴적도 있었다. 그래서 지금도 시간이 있으면 해볕을 쪼인다. 그렇게 하면 공작효률도 제고되는것을 감촉할수 있다. 신체가 건강하면 사유도 령활해진다. 지력도 상응하게 제고된다고 한다. 그러니 그 해빛을 “돈을 들이지 않았기에 쓸모가 없다”고 보지 말아야 할것 같다. 물론 일부 사람들이 말한것처럼 과도하게 해빛을 쪼이면 피부병에 걸릴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적당하게 과학적으로 안배하고 또 상응한 대응조치도 준비한다면 “이런 문제는 문제가 아니다”라고 할수 있다.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강요할수 없다. 그러나 나는 태양과 친근해지고 싶다. 2008년 9월 20일 3시 20분
2    교육의 연구는 무엇을 해야 옳은가? 댓글:  조회:1869  추천:0  2008-12-25
교육의 연구는 무엇을 연구해야 하는가? 교육을 하는 사람은 진정한 문제를 연구하지 않는다. 그냥 그 연구하여도 큰 필요성을 느낄수 없는 교수방법이나 연구한다. 틀려도 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기때문이 아닐까? 교육에는 선발이 있다. 그리고 그 선발에 대응하려면 경쟁이 있게 된다. 그러나 늘 경쟁만 말하면 불리한 면이 많다고 생각하는것 같다. 그래서인지 어떻게 경쟁에서 이기겠는가는 연구하지 않고 어떻게 하면 능력을 제고하겠는가만 연구한다. 그러나 능력을 제고시키면 어느만큼 제고시킬수 있는가? 능력을 제고시켰다고 해도 누구나 대학교에는 가지 못할것이다. 지금의 6:4이든 장래의 4:6이든 일부 사람들의 사유방식에 의하여 초중학생은 상응한 비례로 보통고중과 직업학교에 가게 된다. 보통고중에 가려면 최저한 앞 60%에 들어야 하는것이다. 그래야 최소한 고중에 입학할 가능성이 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대학에 갈수 있는가는 명이라고 한다. 어떤 사람은 그 뒤의 퍼센트속에 속했으니 노력하여도 쓸모없다는 뜻인것 같다. 고중에 입학할수 있는가는 어떤 표준이 있을것이다. 그러면 그 표준은 상대적인 표준이여야 하는가 아니면 절대적인 표준이 되여야 하는가? 상대적인 표준이라면 일정한 범위내에서 사람들에게 등급을 가른것과 같다. 즉 성적이 우수한 일부 학생은 보통고중에 입학할수 있고 성적이 차한 일부 학생은 직업고중에만 입학할수 있다. 그 표준이 절대적인 표준이라면 노력을 통하여 모든 학생이 다 보통고중에 입학할수 있는 기회가 있게 된다. 자신의 노력을 통하여 표준에만 도달하면 되는것이 아닌가? 고중입학의 표준은 해마다 변한다고 한다. 그러면 그 표준은 어떻게 정해지는가? 어떤 사람의 말에 의하면 입학시험성적이 나온뒤 그 성적에 따라 표준을 정한다고 한다. 즉 그 표준의 변화로 60% 혹은 40%의 학생이 일반고중에 갈수 있을 정도로 정하는지 모른다. 그것이 진정한것이라면 어떤 학생은 노력하여도 쓸모가 없게 된다. 어차피 그60% 혹은 40%의 범위에 들수 없을것이니 노력하여 학습할 필요가 있을까? 사람은 누구나 평등하다고 한다. 그런데 왜 퍼센트수로 사람과 사람사이의 불평등을 조성하는가? 교육의 공평은 제일 큰 공평이라고 한다. 이러한 비례로 학생들의 입학자격을 인위적으로 취소하는것은 교육의 불공평이 아닌지 모르겠다. 어떤 사람은 태여날때부터 공인으로 되여야 한다고 정해졌는가? 전에는 교육자원이 결핍하여 선발의 방식으로 일부분 사람들만 고중에 가고 대학에 갈수 있었다고 한다. 교육조건이 우월해질수록 좋은 교육을 받는 학생수를 늘여야 하겠는데 금후에는 보통고중의 비례를 더 작게 한다고 하니 이것이 사회발전의 수요와 부합된다고 할수 있는가? 전에는 공업화시대라고 하였다. 그에 대응하게 그때의 교육도 "표준제품"을 생산하는것이였다. 그러므로 배양하는 학생은 일정한 지식과 기능을 장악한 표준에 부합되는 "교육제품"이였다. 지금은 정보화시대라고 한다. 그러면 정보화시대에 알맞는 학생을 배양해야 할것이 아닌가? 근래에 사람을 근본으로 하는 정신을 강조한다. 그에 따라 교육에서도 학생을 근본으로 하여야 한다고 한다. 교육에서 학생을 근본으로 한다면 학생의 발전수요와 발전특점을 우선으로 하고 그에 맞게 교육을 개혁하는것이 합당하지 않는가? 지금은 학생들의 부담이 너무 크다고 한다. 그러면 방법을 대여 학생들의 부담을 경감해야 할것이 아닌가? 그냥 그것은 나의 직무범위가 아니다거나 나의 능력으로 해결할수 없다고 하면 이러한 문제는 누가 연구해야 옳은가? 부담을 경감한다는 명의하에 학습심도를 낮추었지만 현대사회의 수요라는 리유하에 또 다른 과목의 학습을 증가한다. 이렇게 하면 학생들의 부담이 증가되는가 아니면 경감되는가?  학과의 난도를 낮추었기에 그전에 비하여 어떤 학과에서는 능력이 돌출할 학생이 적어진다. 선발할때에는 그냥 총점만 보기에 점수가 많은 학과를 우선으로 학습한것이기때문일것이다. 그러면 이런 학과로 말하면 학생들의 능력이 제고되였는가 아니면 약화되였는가?  학과의 어떠한 기능은 고중 지어 초중시기부터 중점적으로 배양해야 한다. 그런데 지금의 교육체계하에서 초중 지어 고중까지도 승학에 관계되는 학과를 학습해야 하지 어느 방면을 능력을 충분히 제고할수 없다. 이것이 지금까지도 돌출한 인재(노벨상획득자)가 나타나지 못하는 원인으로 되는지 모른다. 무엇이나 다 아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초중계단의 학생들의 열몇과목을 모두 학습해야 한다. 이러한 학과설치를 하는 그분들은 진정으로 이런 열몇과목을 다 알고 이런 방면에서 전면적으로 발전하였을까? 이런 질문을 하고싶은때가 적지 않다.  만약 어느 방면의 지식이나 다 학습할수 없다면 학생이 사회생활에 참가하는데 필요한 지식구조는 어떠해야 하는가? 누구나 다 같은 기초지식을 장악해야 하는가? 아니면 자신의 수요에 근거하여 합리한 지식구조를 건립해야 하는가? 일부 과목을 십여년을 학습하였어도 큰 쓸모가 없다. 혹은 공작에 참가하여 여러해가 지났어도 한번도 사용하지 않는다. 이런 학과도 꼭 학습해야 한다고 할수 있는가? 학습을 하려면 거기에 따라 예습, 복습 등을 하여야 한다. 하지만 숙제량을 감소하는 등 조치하에서 학생들이 자체로 집에서 책을 보는 시간은 점점 줄어들고있다. 시간에 들은 내용만으로 학습하니 학습질이 내려갈것은 당연한것이다. 그냥 과당효률을 제고하는것으로 예습, 복습 등을 대체할수 있는가? 교육은 무엇을 연구해야 하는가? 늘 "어떻게 학생의 주의력을 집중시키고 어떻게 학생의 흥취를 배양하고 어떻게 학생이 피동적으로라도 하게끔 강요하고 필요하지도 않은 지식들을 선발의 필요로 하여 학습하게 하"는 이런 것만 연구해야 하는가? 2008년 12월 25일 15시 19분
1    교육은 솔직한 사람의 사업이다. 댓글:  조회:1953  추천:0  2008-12-22
교육은 솔직한 사람의 사업이다. “교육은 솔직한 사람의 사업이리고 한다.” 인터넷에서 이런 말을 본적이 있다. 그 뜻인즉 솔직한 사람만이 학생을 솔직한 사람으로 배양할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생각하는 한마디 말이 있는데 그 말이 바로 "말로 전달하는것보다 행동으로 시범하는것이 낫다."(身教胜过言传)였다. 그러니 교육을 하는 사람은 우선 솔직한 사람이여야 한다. 빈곤한 국가에서 교육을 발전시키려 하니 어느 학생이나 다 대학교에 보내 좋은 교육을 받게 할수 없다. 그러니 선발시험을 통하여 상대적으로 우수한 학생을 고등학교에 진학시키고 그들을 인재로 배양해야 하는것이다. 그러니 선발은 피면할수 없는것이다. 관건은 어떤 사람을 선발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 있는것이다. 한때는 그 선발의 표준이 출신이였다. 나는 "출신이 빈농이면  사상품성이 우수하다는 판단이 있었기때문"이라고  리해한다. 이러한 사람들이 우수한 교육을 받고 권리를 장악하면 모든 일을 대다수 사람들에게 유리하게끔 처리할수 있다고 여겼을것이다. 그래서 한때는 대학입시시험을 치지 않고 그냥 추천하여 보내는 방식을 취하였다. 그후 이러한 방식이 불합리하다는 판단이 생겼을것이다. 공평하지 못하다는것이다. 사람의 사상품성은 출신 하나에만 의하여 정해지는것이 아니라 교육을 받는것과 관계된다는 판단을 하였기때문인것 같다. 그것은 낡은 사회에서 신분제도를 정한것과 다를리 없는것이다. 귀한 가족에서 태여났다고 귀한 신분을 가지는 그러한 신분제도를 실시하던 등급사회로 돌아간것과 같은것이다. 그래서 공평한 선발기회를 주기로 한것 같다. 그것이 대학입시이다. 대학입시를 통하여 성적이 우수한자를 선발하는것이다. 그리하여 한때 눌리웠던 사람들의 적극성이 최대한도로 발휘되였다고 한다. 이것이 우리의 일부 선배 그리고 우리 시대에까지 연속된 그 끝없는 공작열정에서 보아낼수 있는것이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누가 말하지 않아도 그냥 잘하려고만 하고 누구한테도 뒤떨어지려고도 하지 않는 그런 마음가짐이 생긴것이다. 그러나 그 대학입시는 이제 결함이 많다는것이 점차 나타나고 있다. 그래서 그 결함을 응시교육이라고 하였다. 즉 시험점수를 더 많이 얻기 위해 하는 교육이라는것이다. 그래서 그런 교육을 받은 사람이 많은 결함을 가지게 된다고 한다. 그러면 대학입시를 다시 취소해야 하는가? 많은 사람들은 대합입시는 취소해서는 안되며 대학입시는 그래도 지금까지 제일 공평하고 공정한 선발방식이라고 여기고있다. 그러면 문제는 선발내용에 있는것이다. 선발을 통하여 우수한 사람을 선발하여 어느 한 방면의 우수한 인재로 배양하려고 하였으니 선발의 내용은 그 인재의 배양방향 혹은 발전방향과 일치되여야 하는것이다. 그렇게 하자면 선발내용을 발전과 유관되는 내용으로 고쳐야 한다. 례를 들어 예술방면으로 발전할 학생은 예술방면의 능력의 비교를 통하여 우수한자를 선발해야 하고 체육방면으로 발전할 학생은 체육방면의 능력의 비교를 통하여 선발해야 하며 수리화방면으로 발전할 학생은 수리화방면의 능력의 비교를 통하여 선발해야 하는것이다. 그래야 진정으로 인재를 선발했다고 할수 있는것이다. 나의 경력으로 보아도 응시교육을 하였다 하여 응시하는것만 고려하지 않았다. 그에 비해 그냥 교학만 하고 필요한 귀납 정리 같은것을 하지 않아 자신으로 그러한 것을 귀납하고 정리하였던것으로 기억된다. 교학방식의 개변은 어떠한 방면에서 과당시간에서의 리해를 깊이 하는것 같지만 다른 한 방면으로 보면 그렇게 쉽게 리해하였기에 학생들의 에습 복습등 중요한 학습절차를 생략한것 같다. 그리고 학습내용이 너무 많기에 어느것을 하고 어느것을 하지 않겠는가? 내가 발전하려는 방면이 어느 방면이 아니라고 해도 대학입시를 위해서는 그 방면의 지식을 더 많이 보아야 하니 어떻게 자신의 예술이거나 체육방면의 특장을 배양할 시간이 있겠는가?  그러니 고쳐야 할것은 교육방법이 아니라 선발내용과 교육내용이다. 이것을 교육을 하는 사람의 솔직한 말이라고 해야 할것이다. 이러한 말을 하지 않고 어떤 교학방식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척 말하는 것은 솔직한 사람의 처사라고 할수 없는것이다. 그리고 언제든 선발이 있는만큼 어느 과목의 시험을 치지 않는다 하여 능력이 차한 사람이 선발된 가능성이 없을것이고 선발의 경쟁이 없어지지도 않을것이다. 선발을 통하여 우수한자를 선발한다고 하였으니 확실하게 우수한자가 선발되여야 할것이 아닌가? 하나의 자대를 더 사용하면 한 부류의 인재가 더 생긴다고 한다. 그러면 대학선발도 유일한 하나의 자대만 사용하면 틀리는것이다. 어느 방면의 인재를 선발하려면 거기에 맞는 자대를 사용해야 한다. 체육인재를 선발하려면 체유인재에 맞는 자대를 사용해야 하고 예술인제를 배양하려면 에술인재에 맞는 자대를 사용해야 하고 수리화인재를 배양하려면 수리화인재에 맞는 자대를 사용해야 하며 정치사상공작인재를 배양하려면 정치사상공작인재에 맞는 자대를 사용해야 한다. 그렇게 하여도 경쟁이 있을것은 물론이고 우수한 자만이 대학에 입학할수 있을것이다. 진정으로 어느 한 방면의 능력이 돌출한 사람이 그 방면의 인재로 될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는것이다. 교육을 잘 하려면 사회 가정 학교의 배합이 필요하다. 그런데 교육리론이 점점 더 복잡해지고 교육전용개념이 새롭게 나지는 바람에 이제는 교육에 종사하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교육을 리해할수 없는 정도로 되였다. 그러니 교육에 대한 사회 가정의 감독 혹은 협조가 점점 못해지게 되는 것이다. 결국 교육은 저도 모르게 자신을 고립시키는 길로 오르게 되였다. 가정 사회의 협조가 힘들어짐으로 하여 교육의 난도도 점점 커지는것이다. 그러나 교육자체만 발전하면 교육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수 있다고 한다. 그런 거짓말을 언제까지 할것인가? 공자의 말을 생각하게 된다. 자신이 바르면 학생이 그대로 따라할것이고 자신이 바르지 못하면 시켜도 하지 않을것이다. (己身正,不令而行;己身不正,虽令不从。) 교육을 하는 사람이 우선 솔직해야 한다. 그래서 교육은 솔직한 사람의 사업이라고 한다.     2008년 12월 22일 8시 4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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