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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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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3    중국 조선족 문단 "문화독립군"들 댓글:  조회:3517  추천:0  2016-11-11
자랑스러운 우리의 문화독립군 우상렬 연변대학 조문학부 교수   나는 독립군하면 총이나 들고 싸운 홍범도나 김좌진 쯤으로 생각했었다. 그러면서 홍범도나 김좌진을 우리 민족의 영웅으로 우러러 마지않았다. 그런데 퍼그나 오래 전의 얘기로 한국 양반의 고장-안동의 안동대학교의 양반 선비 안병렬 교수가 우리 과에 교환교수로 와서 한 얘기에 눈에 번쩍 띄었다, 우리 조선족의 글 쓰는 양반들이야말로 진짜 독립군-문화독립군이란다. 그래 우리말을 지키고 우리말로 창작을 하며 우리 얼을 지키는 일이 독립군이 아니란 말인가? 제2독립군, 문화독립군... 그럴 듯 했다. 나도 몰래 어깨가 올라가는 일이련다. 그렇다. 우리에게는 기라성 같은 문화독립군들이 있다. 나도 몰래 숙연히 머리가 숙여진다. 자, 그럼 문화독립군들의 행방을 좀 찾아가봅시다. 우리 같이 그들과 부둥켜 안아보고 그들의 체취를 느끼며 울고 웃어봅시다.    그런데 누구부터 만나보지요? 워낙 기라성 같은 많은 존재들이라! 아무래도 중국 조선족 문학의 정초자로서 쌍벽을 이루는 김창걸과 이욱부터 만나보는 것이 예의인줄로 압니다.      김창걸(1911―1991)은 일찍 위만주국시기부터 용정 장재촌, 명동촌을 무대로 문학창작을 진행했다. 그의 작품은 조선이주민들의 애환이 그대로 깃들어있다. 땅 없고 힘없고 돈 없고, 모든 것이 없는 서러움뿐이지만 그래도 삶의 희망을 잃지 않고 성실하고 끈질기게 살아가는 모습이 정겹다. 그의 대표작으로 꼽을 수 있는 단편소설「암야」를 보면 바로 가난이 청춘남녀들의 아름다운 사랑을 짓밟는 비극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비극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주인공 명손이는 결국 사랑하는 처녀 고분이를 데리고 ‘암야’를 헤치며 ‘광명’을 찾아 나아간다. 이 작품의 낭만성은 바로 여기에 있다. 이것은 그 어떤 역경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꿋꿋이 살아온 중국 조선족 이주先人들의 삶의 참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 것이다. 그리고 그의 작품「스트라이크」등은 당시 용정 시내 학교들에서의 학생들의 생활이 고스란히 잘 반영되어 있다. 김창걸의 이런 소설들은 그 자신의 삶의 체험의 문학이었다. 그래서 그 작품의 배경도 그가 실제로 살았던 장재촌이나 공부하고 활동했던 용정시가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장재촌은 윤동주의 고향으로 많이 알려진 명동촌과는 삼합으로 가는 길 하나 사이에 두고 비스듬히 동쪽으로 한 2리 상거해 있다. 장재촌은 스님의 신비한 위력에 결국 큰물에 ‘못 된 부자’ 집은 큰물에 잠기고 금기를 어긴 ‘착한 며느리’는 돌로 굳어지고 마는 비극적 색채가 없지 않아 있는 조선에서부터 지니고 내려온 ‘장자못 전설’이 면면히 흐르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마을은 당시 북간도 이주민들 사이 민간대통령으로 떠받들리기도 한 김약연이 조선반도 모양을 본 따 터를 잡았다 한다. 그만큼 민족적 정서가 강했던 곳이다. 당시 명동촌과 더불어 쌍벽을 이루었다. 김창걸은 바로 이런 분위기 속에서 민족적인 올곧은 정신을 키웠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일제가 창씨개명, 신사참배, 국책창작 등 여러 방면으로 압박을 가해오자 단연히「절필사」를 쓰고 붓을 꺾는다. 그에게는 워낙 게발라 맞추기 하고는 거리가 먼 민족적 자존이 있었던 것이다. 그는 추호도 일제에 영합하거나 아부하는 글을 쓰지 않았다. 그는 윤동주와 더불어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다. 이 면에서 실로 그는 정도부동하게 다다소소 ‘친일’의 냄새가 나는 글을 쓴 많은 동시기 다른 작가들의 추종을 불허한다. 가히 독보적인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바로 장재촌 북녘에 우뚝 솟아 있는 선바위임에 틀림없다. 그 어떤 비바람에도 끄떡없는 우리 연변의 누구나 다 아는 선바위-이 세상 둘도 없는 하늘이 내린 가장 훌륭한 김창걸기념비다. 그러나 이 하늘이 내린 기념비에만 내맡기는 것으로 우리는 성 차지 않는다. 그래서 별도로 우리 후배들의 예의를 차리는 차원에서 이 선바위 기슭에 다시 ‘김창걸선생문학비’를 세웠다. 광복 후 김창걸은 연변대학교가 서자 우리 조문학부의 교수로 부임한다. ‘글짓기’로부터 ‘문학사’에 이르기까지 그는 일종 ‘通才’적인 재간을 발휘한다. 그러면서 절필했던 붓을 갈고 닦는다. 그의 문학창작도 이제야 마음껏 꽃피는가 싶었다. 그런데 1950년대 중반부터 터진 반우파투쟁 된서리가 이 꽃을 미처 피지도 못하게 덮쳤다. 무슨 민족주의분자. 그러나 선생은 함경도 사나이의 뚝 밸 하나로 그 모진 정치풍파를 이겨냈다. 그러나 창작의 아까운 좋은 시절은 그만 속절없이 가버리고 말았다. 인생 무상과 허무로만 취급하기에는 너무 안타깝다 못해 억울하다. 나는 대학교에 다닐 때 영광스럽게도 김창걸 선생의 존안을 우러러 한두 번 보았다. 그때 선생은 이미 건강상태가 그리 좋지 않은 것 같고 지팡이에 많이 의지할 수밖에 없는 것 같았다. 사실 선생은 인생말년, 세상을 뜰 때까지 내내 병환에 계셨다.   이욱(1907-1984), 김창걸이 단편소설로 중국 조선족 문학을 정초지었다면 이욱은 시로 그런 작업을 했다. 이욱은 정초자답게 중국 조선족 문학에 있어서 ‘최초’의 몇 개를 독점한다. 일찍 1924년에 처녀작「생명의 례물」을『간도일보』에 발표하였으며 1947년 광복직후 최초로 개인시집『북두성』을 출판하였고 1956년에 북경에서 최초로 중국작가협회 정식 회원으로 되었으며 1957년에 최초로 북경 작가출판사에서 중문시집『장백산하』를 출판하였고 최초로『중국현대문학사』의 한 폐지를 장식하였다.「님 찾는 마음」(1930),「송년사」(1935),「금붕어」(1938) 등 광복 전 이욱의 서정시는 민족적 특성이 짙고 낭만주의색채가 진한 것으로 평가된다. 새 중국 성립 후 이욱은 연변대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으면서 많은 시를 쓴다.『고향사람들』(민족출판사 1957),『연변의 노래』(작가출판사 1957),『장백산하』(작가출판사 1959) 등 시집들을 출판했는데 사회주의 사실주의 경향으로 흘렀다.『고향사람들』은 중국 조선족 문학의 장르상의 특색을 나타내는 최초로 서사시로 된다. 이는 이욱 시창작의 고봉을 이루며 건국 후 중국 조선족시문학에 있어서는 하나의 이정표로 되는 성과적으로 꼽히고 있다. 이욱은 높은 수준의 한시도 능란하게 써서 사람들을 감복시켰다. 그는 일찍 어릴 때 조부의 슬하에서 ‘사서오경’과 절구를 배웠던 것이다. 이욱은 해방 전에 주로 절구를 썼으나 간혹 율시를 쓰기도 했다. 해방 후에는 대체로 詞를 썼다. 유고로 남긴 한시집『협중시사』에는 108수가 수록되어 있다. 그의 한시에 대해 중국 연변대 김동훈 교수는 ‘리욱선생은 우리 민족 한시문학의 마지막장을 휘황하게 장식한 자랑스러운 시인이다’로, 한국 숭실대 조규익 교수는 ‘그의 한시문학은 결코 중국문학의 아류거나 단순한 습작품이 아니라 중국 현대 상류문학에 속하는, 선명한 독자적 개성을 띤 하나의 정신적 재부이다’로 높게 평가하고 있다. 그의 시비는 두만강가 화룡현 로과향 호곡령 정상의 애나무숲속에 우뚝 세워져있다. 아마 이 시비는 중국 조선족 문인들 가운데 최초로 세워진 줄로 안다. 이 시비는 호곡령 아래로 흐르는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조선 무산시를 마주보고 있다. 시비에 새겨진「할아버지 마음」, 그것은 ‘칠순/할아버지/나무를 심으며/어린 손자를 보고/싱그레 웃는/그 마음/그 마음’은 그런 편안한 자연의 마음이다. 돌고 도는, 그러면서도 항상 새 희망이 넘치는 그런 자연의 순리대로 가는 마음은 초탈 경지의 할아버지의 편안한 마음이다. 1957년 무자비하고 삭막한 좌경바람이 부는 세월에 이렇게 편안한 시를 써냈다는 것이 참 기적처럼 생각된다.   김창걸과 이욱-두 중국 조선족문학의 정초자, 이들은 연변대학교의 성립과 더불어 우리 조문과에서 교편을 잡았다. 나에게는 일단 다른 것을 다 떠나 선배교수님이고 원로교수님이 시다. 그래서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 내 손은 떨린다. 사실 나뿐이 아니고 우리 과의 모든 교수님들은 이들로 하여 더 없는 영광을 느끼고 있다. 우리는 이들에 대한 존경심을 듬뿍 담아 두 분의 초상화를 학과 회의실 바른 벽에 정중히 모셔 놓았다. 오늘도 김창걸 선생은  바른 자세에 사나이 일언중천금의 꾹 다문 입을 한 채 우리를 지켜보고 계시며 이욱 선생은 오른 쪽 팔을 오른 쪽 턱 가장 자리에 고인 채 정답게 우리를 내려다보고 계신다. 사실 우리 학과 회의실에는 몸을 좀 비스듬히 튼 채 우리를 보고 환한 웃음을 하고 있는 또 한 분의 중국 조선족 문화독립군이 있다. 그 이름은 정판룡이렸다. 말을 꺼낸 김에 정판룡 프로필로 들어가자. 내 은사님이니깐 먼저 마음이 쏠리는 것을 어찌하랴.     정판룡(1931-2001), 나는 일단 그분의 총기에 꺼벅 죽고 만다. 중학교를 졸업할까 말까하고 고등학교를 훌쭉 뛰어넘어 16세의 최연소 나이에 연변대학교 1기생으로 입학한다. 어린 나이에 공부도 쟁쟁하게 잘 했단다. 그리고 수석으로 졸업해서 학교에 교수로 남고, 그것도 성차지 않아 중국 정부에서 조직한 구소련 국비유학시험에 쟁쟁한 경쟁자들을 제치고 당당하게 합격하여 모스크바대학에 유학을 간다. 중국의 전 총리를 맡았던 李鵬하고 동창생이 되었다. 사실 생긴 거는 '별로' 같은데 얼마나 공부를 잘 하고 똑똑했으면 문학 준박사 학위는 더 말할 것도 없고 당시 같은 중국 유학생으로 전형적인 중국남방미인 타입인 王愈 사모님까지 턱 차고 금의환향한다. 이런 젊은이를 두고 앞날이 탁 트인 전도유망한 젊은이라고 하리라! 중국 사회과학원 등등 북경의 일류의 모모한 기관에서 프러포즈를 한다. 그러나 그분이 선택한 곳은 결국 연변대학교였다. 그분 문학비 정면에 우리말로 새겨진『고향 떠나 50년』에서 절록한 '내 자신의 전도를 위해 동포들의 부름을 거절할 용기는 그때도 없었고 지금도 없다. 1960년 5월초 연길에 살구꽃, 배꼿이 필 무렵 나는 연변대학을 잘 꾸리 보려는 꿈을 안고 북경을 떠나 북으로 가는 렬차에 앉았다'를 보라. 나는 그분의 진정이 어린 이 대목을 읽을 때마다 코마루가 찡해나고 가슴이 아련히 젖어난다. 연변대학교는 내꺼, 누가 뭐라도 나는 연변대학교를 지킬꺼야 하는 사명감이 절로 살아난다. 그분은 러시아문학을 전공한 만큼 일단 학자로서 문학연구에서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외국문학뿐만 아니라 우리 조선족문학, 나아가서는 남북한 문학을 아울러 종횡무진으로 연구를 하고 평론을 하셨다. 사실 문학창작은 만년에 분망한 대학교 총장 보직을 그만두고 좀 한가해진 후 늦깍기로 시작했다. 그 주요 결실의 하나가『고향 떠나 50년』, 가장 자연스럽게 씌여진 글. 고향 떠나 50년의 숨 가쁜 인생살이가 가식 없이 소박하고 텁텁하게 엮어져 그 사람 그 식으로 감동을 준다. 우리가 이 감동에 흠뻑 젖어 있을 때 그분은 우리 곁을 떠나갔다. 그분의 제자들은 그분을 잃은 허탈감을 조금이나 달래고저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 그분이 한평생 몸 바쳐 온 연변대학교의 뒤 산으로 불리는 와룡산 양지바른 언덕에 2004년 서거 3주기에 기해 장방형 모양의 아담한 문학비를 세웠다.    채택룡(1913-1998년), 중국 조선족 아동문학의 개척자로 손꼽힌다. 일찍 카프시기, 위만주국시기부터 주옥같은 동요동시를 창작해왔다. 세상은 암흑했어도 그의 마음은 항상 갓난 아기들처럼 티끌 한 점 없이 깨끗했다. 그의 동요동시는 바로 그의 이 깨끗한 마음의 발로였으리라. 그런데 그의 이 깨끗한 마음으로 이 풍진세상을 살기에는 방어기제가 없어 너무 갸날펐다. 그래서 1950년 말 중국에서 반우파투쟁이 벌어질 때 연변에서 김학철과 같이 최초의 우파동지가 되기도 했으리라. 바로 이 우파가 되면서 우리의 천재적인 아동문학가는 인생이 완전히 망가지고 만다. 그래서 그의 작품도 우파되기 전까지로 한하고 만다. 이 안타까움을 달래고자 연변아동문학연구회를 비롯한 여러 단체들에서 중의를 모아 2004년 연길시인민공원 동쪽가녘에 펼친 책모양의 '채택룡시비'를 세웠다. 이 시비에 새겨진「병아리」를 감상하는 것으로 그에 대한 기념을 가름하려 한다.  삐악삐악 갓난 병아리  아장아장 걸음 익히나 요리조리 조약돌 넘어 깡충깡충 재주피우나 삐악삐악 갓난 병아리 땅을 쪼아 아빠 흉내내나 엄마등에 갸우뚱 올라 포득포득 재주를 넘나 '병아리'를 상징체로 귀여운 아이들의 커 가는 모습 그 자체를 감칠맛이 나게 잘도 그려냈다. 그것도 동심의 시각에 비쳐 하나로 녹아들게 함으로써 동요동시로는 일단 성공을 하고 있다.    김학철(1916~2001), 중국 조선족문학의 확립자, 정신적 대부-‘편안하게 살려거든 불의에 외면을 하라. 그러나 사람답게 살려거든 그에 도전하라’, 그의 임종 유언. 그는 어디까지나 사람답게 사는 길을 선택했다. 그래서 그는 이 풍진세상과 도전에 도전을 거듭했다. 일본제국주의, 독재, 사회의 부정부패... 이런 것들와의 가차 없는 투쟁과 비판이 그의 문학작품으로 승화되기도 했다.『격정시대』, 일본제국주의와 총 들고 싸운 조선의 건아들-조선의용군의 활약상을 보여주었다. 그래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번한 조선의용군의 영원한 기념탑을 세웠다.『20세기신화』, 감히 ‘임금님은 옷을 벗었다’고 말한 어린이 같은 희대의 사나이. 관본위, 관료주의 행태를 여지없이 풍자한 ‘인육병풍’을 비롯한 일련의 ‘투창과 비수’ 같은 잡문들... 적어도 우리 연변은 그의 잡문들로 해서 많이 정화된 듯하다. 그래서 우리는 그의 죽음으로 하여 얼마나 허전한 감을 느꼈는지 모른다. 그러던 차 뜻 있는 분들에 의해 자발적으로 ‘김학철문학연구회’가 발족되고 그의 기념비가 세워지면서 우리는 조금이나마 마음의 위안을 얻을 수 있었다. 사실 김학철에 관한 것은 ‘김학철문학연구회’의 사이트 에 들어가 보면 다 알 수 있다. 그러니 여기서는 다 약하도록 하고 그의 기념비 두 개만 소개하는 것으로 가름하도록 하자. ‘김학철문학비’, 도문시 장안진 경내 생태문화관광구로 유명한 龙佳美苑에 삼각형 모양으로 서 있다. 이 기념비는 우리 연변의 유명한 민족적 화백 필충국 선생이 전적으로 사재를 털어 세운 것이다.     ‘金學鐵抗日文學碑’, 중국 하북성 원씨현 호가장 마을 입구에 세워져 있다. 이 기념비는 최초로 한국의 실천문학사 김영현 사장의 구상과 발의 하에 중국과 한국의 여러 기관이나 뜻 있는 분들의 적극적인 지지 하에 추진되었다. 문학비제막식은 2005년 8월 5일 오전, 하북성 원씨현 흑수하향 호가장촌에서 국내외 인사들이 참가한 가운데 성황리에 열렸다.     그럼 왜서 이 호가장이냐하면 이 호가장은 바로 김학철을 비롯한 조선의용군 한개 분대가  1941년 12월 12일 새벽 일본군들과 격전을 벌이던 곳이다. 김학철은 이 격전에서 부상을 입고 의식을 잃는다.『격정시대』도 바로 여기서 끝난다. 그럴진대 이 태항산마루 역사적 현장에 金學鐵抗日文學碑를 세우는 것은 더 없이 뜻 깊은 일이다. 金學鐵抗日文學碑는 龙佳美苑의 김학철문학기념비와 마찬가지로 모를 많이 살려 김학철의 그 날카로운 작가적 정신을 잘 보여주고 있는 듯하여 좋았다. 金學鐵抗日文學碑와 나란히 역시 조선의용군 출신이고 이 태항산마루 항일전적지와 인연이 깊은 장편기행문『노마만리』를 쓴 김사량의 ‘金史良抗日文學碑’가 세워져 있기도 하다.    사실 김창걸, 이욱은 광복 전부터 줄곧 이 땅에서 창작을 하며 중국 조선족의 문학전통뿐만 아니라 광복 후에는 한국과도 다르고 조선과도 다른 중국 조선족 문학의 ‘향토’적 특색을 마련하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중국 조선족 문학전통을 논의할진대 우리는 두 젊은이-윤동주와 심련수(이들은 안타깝게도 광복 착 전 20대의 꽃 같은 나이에 희생되었다)를 잊을 수 없다. 사실 사람들은 잊지 않고 있다. 그래 윤동주 하면 우리 민족의 구성원치고 누가 모른단 말인가? 용정 명동의 윤동주생가, 용정 동산중앙묘지의 윤동주묘소... 그런데 심련수에 대해서는 ‘아직’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잘 모르는 분들이 있으리라. 워낙 심련수는 새 천년 벽두에야 이 세상에 알려졌으니 말이다. 심련수의 유고가 오지단지에 넣어져 세월의 풍파를 피해 장장 50여년이나 땅 밑에 파묻혀 보관되어 오다가 그의 동생 심호수에 의해 세상에 공개되었던 것이다. 심련수는 또 다른 하나의 혜성으로 떠올랐다. 가히 윤동주와 쌍벽을 이루며 우리 중국 조선족 문단 내지는 세계 한민족문학사에서 한 폐지를 장식하게 되었다. 이로부터 한국의 문학평론가 임헌영을 비롯한 뜻 있는 분들의 노력 하에 용정 실험소학교 캠퍼스에 심련수시비가 세워지기도 한다.    중국 조선족문학은 현재진행형이다. 문화독립군들은 오늘도 붓을 갈고 닦는다. 이 땅에 이 겨레가 있는 한 영원한 현재진행형이 될 것이다. 그럼 아직도 청춘의 정열로 주옥같은 시편을 토해내고 있는 원로시인 조용남의 기념비적 작품「반디불」과「비암산의 진달래」를 감상하는 것으로 이 글을 마무리하도록 하자.       반짝반짝 반디불       손벽 치면 온다야      파란 전등 켜고서      한들한들 온다야      반짝반짝 반디불      오다가도 간다야       얼른 쫓아 잡아라      불이 깜박 꺼졌네      반짝반짝 반디불       다시 전등 켰고나      살금살금 기여라      옳다 하나 잡혔다                       -「반디불」전문   이 동요는 2002년 8월에 연변대학 사범분원 캠퍼스에 건립된 ‘반디불비’ 정면에 새겨져 있다. ‘《반디불》은 지난 半世紀동안 우리 민족 어린이들속에 널리 愛唱되여 오면서 여러 世代어린이들의 童心世界에 밝고 따뜻한 꿈이 되어주었다.’-‘《반디불》碑建碑委員會’의 더 없이 높은 평가다. ‘반디불비’는 중국 조선족의 첫 동요비이다.     「비암산 진달래」(일명「봄이 오는 산」)를 감상해보자.   산, 산, 비암산 봄이 오는 산  봄눈 녹는 길목마다 피는 진달래 꽃가지 부는 바람 연분홍 바람  네 마음 내 마음에 꽃물이 드네 꽃술을 세여보자, 꽃말을 읽자 세저니벌 오십리에 밭갈이노래 산, 산, 비암산 꽃이 피는 산 꽃눈 트는 굽이마다 우는 솔쫑새  ―님아, 님아, 오시리 오시리잇고  일송정 추녀아래 꽃꿈이 곱네 꽃잎 따서 그리운 편지에 접어  룡정의 봄소식을 전하여주자    용정시정부에서는 2004년 봄에 한국 사람들에게「선구자의 노래」로 잘 알려진 용정 비암산 일송정의 관광지 조성 차원에서 이 시를 ‘일송정비’ 바로 옆에 자연석에 새겨놓았다. 진달래는 우리 연변의 ‘州花’로 중국 조선족의 상징이기도 하다. 비암산 일송정 주위에는 워낙 진달래가 곱게 피기도 한다. 그래서 시인은 ‘비암산 진달래를 통하여 력사와 자연을 아우르면서 아름다운 강산을 노래했고 꽃피는 봄으로 희망찬 새 력사시기의 도래를 노래했습니다.’-조용남 스스로의 고백.   이외에도 우리 중국 조서족의 문화독립군들은 많다. 이 짧은 한 편의 글로 다 엮기에는 너무 아름차다. 어떤 분들은 기념비 하나 없이 사라졌다. 그러나 그 소중한 한분 한분은 우리 민족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한 영원히 우리 마음속의 금자탑으로 빛나리라! 2008. 4. 17     파일 [ 7 ]       
1802    "은진"과 동주 댓글:  조회:3918  추천:0  2016-11-11
은진중학교시절의 윤동주   윤동주의 친동생 윤일주교수의《나라사랑》23집(한국책)에 실린《윤동주의 생애》라는 글에 따르면《1932년에 윤동주는 명동에서 북쪽으로 30여리 떨어진 룡정(龍井)이라는 소도시에 와서 카나다 선교부가 설립한 은진(恩眞)중학교에 입학하였다. 그것을 계기로 우리는 농토와 집을 소작인에게 맡기고 룡정으로 이사하였다.》고 한다. 이와 같이 그는 1932년 4월에 윤동주가 은진중학교로 입학한것으로 기술하고있다. 그러나 윤동주보다 한살아래인 외사촌동생이자 명동소학교 동창생인 김정우씨는《동주의 약 30년이라는 짧은 인생을 나누어 보면 15살 늦가을에 명동촌을 떠나 룡정으로 이사간것을 기준으로…》라고 하고있어 1931년 늦가을로 명확하게 모를 박고있다. 윤일주교수는 1927년생으로서 1932년에라야 5살밖에 안되였고 김정우는 1918년생으로서 윤일주보다 9년 년상인것을 생각하면 김정우쪽의 기억이 더 신비성이 있다. 윤일주교수는《1931년이면 형이 대립자 소학교에 다니던 때였다.》는 생각때문에 그렇게 추정한 모양이다. 그러나 당시 윤동주의 큰 고모댁의 아들인 송몽규네는 그냥 명동에 남아있었다. 그래서 1932년에 송몽규가 윤동주와 함께 나란히 은진중학교에 입학했을 때 송몽규만은 룡정의 윤동주네 집으로 옮겨와서 살면서 같이 은진중학교에 다녔었다고 한다. 어쨌든 윤동주네 일가가 룡정으로 이주한것은 대변혁이였다. 우선 윤씨네 가문에서 가장이면서 윤동주의 할아버지인 윤하현을 본다면 그로서는 이 이주가 상실외에는 아무것도 아니였다. 평생 농부였고 그것도 성공한 독농가였던 그가 농토를 떠난것이다. 농부에게 농토가 없다는것은 선생에게 가르칠 학생이 없는것과 마찬가지인것이다. 윤동주의 아버지 윤영석은 그때 36세의 한창나이였다. 그는 새롭게 시작하는 도회지의 삶을 맞아 큰 변신을 시도했다. 그는 지식인이 도시에서 할만한 직업을 고르던 끝에 인쇄소를 차리려고 하였다.  사업중에서 문화사업이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모든 문화사업의 속성이란 그렇다. 밖에서 보기에는 문화쪽이 두드러져 보이지만 안에서 직접 해나가기에는 그저 말그대로 사업일뿐인것이다. 그런데 윤영석은 천성적으로 사업가가 못되는 선비형의 사람이였다. 아니나다를가 인쇄소사업이 실패했다. 윤영석은 평생 경제에서는 실패만 하는 창백한 인테리의 고달픈 삶을 살았다… 룡정으로 이주한후 변한것은 이러한 어른들의 생활만이 아니였다. 거주환경도 크게 변했다. 윤동주네가 이사온 룡정집은 룡정가 제2구 1동 36호로서 20평방메터 정도의 초가집이였다. 그러나 명동의 집은 어떠했던가? 터밭과 타작마당, 깊은 우물과 작은 과수원까지 달리고 지붕을 얹은 큰 대문이 있어 마을에서 제일 큰 기와집이였다. 그런 큰 집에서 한껏 넉넉하게 살다가 20평방메터 정도밖에 안되는 초가집으로 옮겨온것이다.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윤동주, 윤일주, 윤광주(룡정에 와서 낳았음) 3형제 거기에다 큰 고모의 아들인 송몽규까지 합류한 8명의 식구가 20평방메터의 초가집에서 옹색하게 생활하는 환경속에서 윤동주의 은진중학교시절이 시작되였다. 환경은 그렇게 여러 모로 좋지 않았지만 윤동주는 별로 영향을 받지 않았다. 그는 어린 나무처럼 한껏 뻗어갔다. 지금 남아있는 은진중학교 학생시절의 윤동주에 관한 증언들을 보면 그 모습이 풋풋하고 싱그럽다. 윤일주교수가 쓴《윤동주의 생애》에 있는 증언을 보자. 《은진중학교때의 그의 취미는 다방면이였다. 축구선수로 뛰기도 하고 밤에는 늦게까지 교내잡지를 꾸리느라고 등사글씨를 쓰기도 하였다. 기성복을 맵시있게 고쳐서 허리를 잘룩하게 한다든가 나팔바지를 만든다든지 하는 일은 어머니의 손을 빌지 않고 혼자서 재봉기에 앉아서 하기도 하였다.  2학년때였던가? 교내웅변대회에서〈땀 한방울〉이라는 제목으로 1등을 한 일이 있어 상으로 탄 예수사진의 액자가 우리 집에 걸려있었다. 절구통우에 귤궤를 올려놓고 웅변련습을 하던 모습이 눈앞에 선하다. 그러나 그는 웅변조의 사람이 아니였고 대회의 평도 침착한 어조와 내용덕분이라는것이였다.  그후 그는 다시 웅변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는 수학도 잘하였다. 특히 기하를 잘하였다…》 증언을 따라가며 그의 모습을 눈앞에 그려보노라면 절로 미소가 흐른다. 축구선수인 문학소년, 그리고 옷차림에도 관심이 커서 손수 재봉질을 해서 옷을 맵시나게 고쳐입는 멋쟁이, 웅변대회에서 1등상을 수상한 경력에다가 문학소년치고는 의외로 수학마저 잘하고… 윤동주와 명동소학교와 은진중학교 또 숭실중학교 그리고 광명학원 중학부를 같이 다닌 오랜 친구 문익환목사는 《중앙월간》(1976년 4월)에 실린《하늘, 바람, 별의 詩人, 尹東柱》라는 글에서 윤동주의 바느질솜씨와 관련된 재미있는 추억을 가지고있다. 《동주는 재봉틀질을 참 잘했어요. 그래서 학교 축구선수들의 유니폼에 넘버를 다는것을 모두 동주가 집에 갖고 가서 제손으로 직접 박아왔었지.》 그의 모친이 뛰여난 바느질솜씨를 갖고있었던것이 그에게도 유전되였던 모양이다. 이것은 윤동주가 인물됨에 관한 중요한 정보가 되는 일화이다.《바느질솜씨가 좋다.》는것은 손재주도 물론 좋아야 하지만 그보다 더욱 미적감각이 뛰여나야 가능한 일이기때문이다. 그리고 그간 세상에 전해진 전형적인 그의 인상인《내성적, 소극적》이였다는 성격묘사를 뛰여넘는다.  1930년 초반에 남자가 직접 바느질을 한다는것은 거의 있을수 없는 일이였는데 윤동주는 그걸 드러내놓고 했던것이다. 필요할 때면 어떤것이든 적극적으로 나설수 있는 강한 잠재력이라고 할가? 의식성향이라고 할가? 문익환목사는《하늘, 바람, 별의 詩人, 尹東柱》라는 글에서 그들의 은진중학교 학창시절의 모습을 이렇게 증언한다. 《1932년 봄에 동주, 몽규와 나는 룡정 은진중학교에서 다시 만났다. 은진중학교는 한때 모윤숙(毛允淑)씨가 교편을 잡았던 명신녀학교와 한 언덕우에 자리잡고있었다. 그곳에는 또 카나다 선교부가 경영하는 제창병원이 있고 선교사들 집이 4채가 있었다. 이 언덕은 룡정동남쪽에 있는 언덕으로서 우리는 그 언덕을〈영국더기〉라고 불렀다. 그 지경은 만주국이 서기까지 치외법권지대여서 일본순경이나 중국관원들이 허락없이 들어갈수 없는 곳이였다.  우리는 거기에서 태극기를 휘두르며 애국가를 목청껏 부를수 있었다. 신나는 일이 아닐수 없었다. 학교행사때마다 심지어 급회를 할 때에도 우리는 애국가를 부르는것으로 시작하였다. 이 학교에서 우리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 분은 동양사와 국사 또 한문을 가르치시던 명의조(明義朝)라는 선생이였다. 그분은 도꾜 제국대학(東京帝國大學)에서 동양사를 전공하신 분인데 류학시절에 일본사람들에게 돈을 안주려고 전차를 타지 않았다던 분이다.  어느 방학때인가 룡정에서 고향인 평양으로 가는데 기차를 타지 않고 자전거로 갔다 오신 분으로서 보통으로 상상조차 할수 없는 괴벽하면서도 철저한 애국자였다. 그의 동양사와 국사강의는 정말 신나는것이였다. 그는 우리에게 국사를 동양사 더 나가서는 세계사와 관련속에서 볼수 있도록 눈을 열어주었고 조국광복을 먼 안목으로 내다볼수 있도록 깨우쳐주었다…》 그런데 여기에서《태극기, 애국가…》등을 은진중학교 교내풍경의 전부라고 생각하면 큰 착오가 된다. 한것은《은진중학교의 교과서는 전부 일어로 되여있었어요.》라는 문익환목사의 증언이 있었는데 그 시대의 모습이 제대로 드러났다. 그는 또 이렇게 말하였다. 《그런데 아주 재미있는것은 선생님들이 일어로 된 교과서를 펴들고는 그대로 우리 말로 죽죽 읽어갔다는 점이지. 물론 가르치기도 우리 말로 했고. 우리는 그렇게 교육을 받으면서 자란거요…》 이 말의 의미는 선생님들이《즉흥번역》을 하면서 강의를 했다는것이다. 이러한 은진중학교생활은 1935년에 들어서서 3학년을 수료한후 큰 변화를 일으켰다. 윤동주가 생전 처음으로 집을 떠나 평양숭실중학교에 공부하러 갔고 송몽규는 독립운동에 투신하느라고 관내로 들어갔다. 이런 변화들은 윤동주의 일생에서 아주 중요한 계기가 되였다. 그중에서 특히 송몽규의 독립운동투신경력이 후날 윤동주의 체포와 옥사에서 결정적인 원인으로 작용했다. 여기에서 한가지 주목할것은 송몽규는 1934년 12월에 시행된《동아일보》의 신춘문예작품집에 응모하여 콩트부문에 당선된것이다. 작품명은《숟가락》이였는데 1935년 1월 1일《동아일보》에 게재되여 지금도 남아있다.  송몽규는 당시 은진중학교 3학년 학생이였다. 이 일은 소학교때부터 문학소년이였던 송몽규자신에게 대단한 격려와 자극이 될만한 쾌거였다는 사실외에 같은 립장이였던 동료 윤동주에게도 그만 못지 않게 문학적자극이 되였던 계기였다는 점에서도 크게 주목할만한 일이였다.  윤동주가 송몽규를 두고《대기는 만성이다.》라는 말로 벼르더라는것은 바로 송몽규가 거둔 성공이 그 전제가 되여있는것이기때문이다. 그러나 윤동주문학연구라는 측면에서 이 일은 더욱 크게 조명될 가치가 있다.   윤동주는 자기가 쓴 작품날자를 일일이 명기하여 소중히 정리해둔 점에서 가장 대표적이고 모범적인 문인이다. 그것이 그의 인간과 작품을 연구하는데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가는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윤동주가 최초로 날자를 명기해서 기록한 작품은 1934년 12월 24일에 씌여진것으로《삶과 죽음》,《초 한대》,《래일은 없다》등 세 작품으로서 오늘날 찾아볼수 있는 최초의 작품으로 지적되고있다. 상당한 수준을 보이고있는 작품이다. 그런데 이 작품들이 1934년 12월 24일 하루동안에 다 씌여졌을수는 없다. 전에 썼던것을  다듬어 완성시킨것이 그 날자라고 보아야 할것이다. 그러면 그전의 작품들은 다 어떻게 되였는가? 윤동주의 습작기의 모든 작품들은 다 류실되고 없다. 그것은 그가 그때까지 작품정리와 보관에 뚜렷한 의식이나 집념을 갖고있지 않았다는 증거이다.  그리고 1934년 12월 24일이라는 날자와 송몽규의《신춘문예》당선작품이 신문에 게재된 1935년 1월 1일은 불과 일주일간격이다.  이것은 송몽규의《신춘문예》당선과 그의 작품이《동아일보》에 실려 널리 알려진것에 크게 자극된 윤동주가 문학에 새로운 각성과 각오를 하였음을 말해준다. 그리하여 그는 그보다 일주일전에 정리하여놓았던 3편의 시를 출발점으로 하여 그후 시를 지을 때마다 완성된 날자를 기록하여 정리하고 보관하는 일을 시작한것이다.  이렇게 새로운 문학적출발점이 된 3편의 시는 이렇다. 초 한대     초 한대—     내 방에 풍긴 향내를 맡는다.     광명의 제단이 무너지기전     나는 깨끗한 제물을 보았다.     염소의 갈비뼈같은 그의 몸     그리고도 그의 생명인 심지까지     백옥같은 눈물과 피를 흘려     불살라버린다.     그리고도 책상머리에 아롱거리며     선녀처럼 초불은 춤을 춘다.     매를 본 꿩이 도망하듯이     암흑이 창구멍으로 도망한     나의 방에 풍긴     제물의 위대한 향내를 맛보노라.                          1934년 12월 24일 삶과 죽음     삶은 오늘도 죽음의 서곡을 노래하였다.     이 노래가 언제나 끝나랴     세상사람은      뼈를 녹여내는듯한 삶의 노래에     춤을 춘다     사람들은 해가 넘어가기전     이 노래끝의 공포를 생각할 사이가 없다.     (나는 이것만을 알았다.     이 노래의 끝을 맛본 이들은      자기만 알고     다음 노래의 맛을 알려주지 아니하였다.)     하늘복판에 알새기듯이     이 노래를 부른자가 누구뇨     그리고 소낙비 그친 뒤 같이도      이 노래를 그친자가 누구뇨     죽고 뼈만 남은      죽음의 승리자 위인들!                        1934년 12월 24일 래일은 없다                —어린 마음의 물은         래일래일 하기에      물었더니     밤을 자고 동틀 때     래일이라고     새날을 찾던 나는      잠을 자고 돌아보니     그때는 래일이 아니라     오늘이더라     무리여!     래일은 없나니…                          1934년 12월 24일  
1801    "명동"과 동주 댓글:  조회:3535  추천:0  2016-11-11
명동소학교시절의 윤동주   윤동주는 1925년, 만 8살에 명동소학교에 입학하였다. 윤동주의 소학교 1학년때 동창생이자 외사촌동생이며 시인인 김정우(한국)씨는 나의《나라사랑》23집에 실린《윤동주의 소년시절》이라는 글에서 윤동주의 모습을 이렇게 썼다. 《동주랑 같이 학교에서 1학년때 국어공부를 한 이야기인데 당시 교과서는〈솟는 샘〉등사본이였다.〈가〉자에〈ㄱ(기윽)〉하면〈각〉하고〈가〉자에〈ㄴ(니은)〉하면〈간〉하여 천자문을 외우듯이 머리를 앞뒤로 저으며 랑랑한 목소리로 암송하던것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명동소학교시절은 윤동주의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라고 할수 있다. 윤동주의 28년 일생에서 꼭 절반인 14년을 명동에서 살았다는것외에도 그의 인격 및 시적감수성의 기본이 형성된 곳이기때문이다. 윤동주의 일생에서 명동시절처럼 아름답고 풍요한 시절은 없었다. 자연환경도 그렇겠지만 가정환경 그리고 시국의 상황까지도 그러했다. 명동의 자연환경은 시인 김정우씨의 글에 잘 묘사되였다. 《이 마을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있는 아늑한 큰 마을이다. 동, 북, 서쪽으로 원만한 호선형구릉이 병풍인양 마을뒤를 둘러있고 그 서북쪽에는 선바위라는 3형제바위가 창공에 우뚝 솟아 절경을 이루면서도 서북풍을 막아주고있다. 이 3형제바위는 명동사람들의 공원이기도 하다. 동쪽으로 뻗어오던 장백산맥이 오랑캐령인 오봉산과 칼바위산이란 날카로운 산들을 원점으로 하여 서남쪽으로 지맥이 이루어지면서 마을정면에는 고산준령이 첩첩이 뻗어 선바위를 스쳐간다. 봄이 오면 마을 야산에는 진달래, 개살구꽃, 산앵두꽃,  함박꽃, 나리꽃, 할미꽃, 방울꽃들이 시새여 피고 앞강가 우거진 버들방천에는 버들강아지가 만발하여 마을은 꽃과 향기속에 파묻힌 무릉도원이였다. 여름은 싱싱한 전원의 푸르름에 묻혀있고 가을은 원근 산야의 단풍과 무르익은 황금색 전답으로 황홀하였다. 겨울의 경치는 더욱 인상적이였다. 산야에는 나무의 앙상한 가지들이 삭풍에 울부짖고 은색 찬란한 설야엔 옥색 얼음판이 굽이굽이 뻗으며 선바위골로 빠지는 풍경은 실로 절경이였다. 폭설이 내리는 날엔 노루떼, 메돼지떼들이 먹이를 찾아 마을로 내려오고, 그런 날에는 온마을이 흥분의 도가니속에 들뜨군 했다. 박달나무팽이돌리기, 썰매타기, 스케트타기, 매를 가지고 꿩사냥하는것을 구경하러 따라다니기 등 명동촌의 겨울은 지울수 없는 추억들이였다… 동주의 집은 학교촌에 소속되여 있었으며 잘사는편이였다. 그 당시 벼농사를 하는 집이란 그 마을에서 몇호밖에 되지 않았는데 그중에 동주네 집도 끼워있었다. 그의 집은 학교촌입구의  첫집이였다. 가랑나무가 우거진 야산기슭에 교회당이 있고 그 교회당옆으로 두채의 집이 있는 앞집이였다. 그의 집은 정남향 큰 기와집으로 후면과 좌우에는 그리 크지 않은 과수원이 있고 뒤문으로 나가면 그의 시〈자화상〉에 영향이 되였다고 하는 물맛으로 유명한 수십길도 더 되는 깊은 우물이 있다. 우리는 동주랑 같이 과수원울타리로 되여있는 뽕나무에서 오디를 따먹고 물을 길어 입을 닦기도 했으며 그 우물속을 들여다보고 소리치며 그 메아리를 듣군 하였다…》 이런 자연환경속에서 자라고있던 윤동주의 어릴 때 학교생활은 어떠했을가? 윤동주의 소학교 4학년때 담임선생님이였던 한명준목사는 이렇게 회상했다. 《누가 조금만 꾸짖으면 금방 눈에 눈물이 핑 돌았지요. 친구가 싫은 소리를 해도 그랬고… 하하! 본래 재주가 있는 아이였어요. 공부도 잘하는 축이였고요. 그래도 어쩌다 문답을 할 때 대답이 막히면 금방 눈물이 핑 도는거예요… 동주 할아버지가 그 동네에서 제일 부자였어요. 밭이 많았거든요. 늘 말을 기르고있었고 나다닐 때 그걸 타고 다녔지요. 그리고 아들을 동경류학도 시켰었고…》 그러고 보면 명동소학교시절 윤동주의 모습이 선명하다.말을 타고 다니는 부자집로인의 장손으로서 마음이 여리고 공부를 잘하던 소년이였다.  명동소학교시절의 윤동주네 학급은 문학소년반이라고 할수 있었다. 김정우시인의 회상록을 펼쳐보면 이렇게 씌여져있다. 《명동소학교때 동주는 벌써 서울에서 소년, 소녀들을 위한 월간잡지를 구독했다. 동주에게는 고종사촌이며 동갑인 송몽규란 친구가 있었다. 그도 역시 문학소년이였다. 몽규는〈어린이〉라는 잡지를, 동주는〈아이생활〉이라는 잡지를 서울에서 부쳐다 읽었다. 동네아이들은 그들이 다 읽은후 빌려서 읽었다. 두 소년이 서울에서 월간잡지를 구독해 읽는다는것은 당시 벽촌에서 큰 일이 아닐수 없었으며 그것이 마을에 큰 영향을 주어〈삼천리〉같은 월간잡지가 청년들사이에 널리 보급되였다. 5학년이 되면서 동주와 몽규의 발기로 우리들도 월간잡지를 등사하여 발간할것을 결정하였다. 원고를 모아 편집을 끝내고 잡지명이 결정되지 아니하여 당시 우리의 담임선생이며 존경하는 한명준목사님을 찾아가서 자문을 청했더니 우리를 칭찬하시며〈새 명동〉이라 하면 좋을것이라 하여〈새 명동〉이라는 이름으로 몇호 발간하였다. 우리가 명동학교를 졸업할 때 우리 반이 문학소년반이여서 그랬는지 모르겠으나 학교에서는 졸업기념으로 우리에게 파인(巴人) 김동환의 시집〈국경의 밤〉을 나누어 주었다…》 윤동주는 1931년 3월 15일에 명동소학교를 졸업했다. 졸업동기는 14명, 졸업후 윤동주는 명동에서 동쪽으로 10여리 떨어진 대립자(大粒子)에 있는 중국사람이 꾸리는 소학교 6학년에 입학하였다. 졸업동기중에서 윤동주, 송몽규, 김정우 그리고 다른 동료 1명, 이렇게 모두 4명이 입학했는데 김정우가 도중에 퇴학하고 나머지 3명은 날마다 10리길을 걸어다니며 1년을 통학했다고 한다. =================   출생과 가계 윤동주의 고향 중국 길림성 룡정시 지신향 명동촌(당시에는 《만주국 간도성 화룡현 명동촌》이라고 했음)은 조선 함경북도 회령으로부터 두만강을 건너와 중국 룡정시의 삼합진을 지나 오랑캐령을 넘어 룡정으로 가는 길목에 있다. 회령에서 북으로 40리, 지신진소재지에서 7리, 북쪽의 룡정에서 남으로 30리 상거하고있다. 《명동(明东)》이란 동쪽에 있는《조선을 밝게 하자》는 의미로서 장재, 이호동, 동구, 룡암, 수남, 풍악, 중영상, 하촌, 성교촌, 교우촌 그리고 건너 서쪽의 대, 소사동 등 10여개 마을을 합친 총칭이다.     1881년, 청정부에서 연변에 대한 봉금령을 해체하게 되자 이를 전후로 조선의 이주민들이 이곳에 들어와 상술한 크고 작은 마을을 형성하고 당지의 중국인 지주 동한 3형제의 땅을 소작하고 살았었다. 1899년, 김약연을 중심으로 하는 전주 김씨가문 31명, 김하규를 중심으로 하는 김해 김씨가문 63명, 문병규를 중심으로 하는 문씨가문 40명, 남종구를 중심으로 하는 남씨가족 7명과 그 먼저 명동에 들어와서 동지주와 토지구매, 이사 등을 교섭하던 김항덕 등 142명이 하나의 집단을 형성하여 1899년 2월 18일, 조선 종성에서  두만강을 건너 자동촌을 거쳐 명동으로 이주하였다. 김약연은《맹자》에 정통하였고 김하규는《주역》에 정통하였고 한북학회의 함북도 지회장이였다. 남도천은 학문이 깊어 함경도에서 서울에 추천하였으나 벼슬을 거절하였다. 하여 사람들은 그의 본명《종구》라고 부르지 않고 남도천이라고 불렀는데 김약연의 은사였다. 그들은 모두 실학파들이였는데 벼슬길이 막혔다고 실망하지 않고 벼슬을 위해서가 아니라《글을 모르면 남에게 천시당한다.》,《아는것이 힘이다.》라고 하면서 량반귀족 못지 않게 학문을 닦았고 리론보다 실천을 귀중히 여겼다. 때문에 그들은 비록 유학을 배워도 손수 농사, 집짓기를 하면서 후대들을 공부와 로동이 결합된 인간으로 양성하기에 힘썼다.  또한 그들은 인민대중이 자기의 손으로 생존환경을 개선하고 경제를 발전시키도록 인도하면서 단결된 공동체의 힘으로《밝은 조선》을 건설할 인재를 육성하는데 모를 박았다. 즉 집단적으로 토지를 사들여 제일 좋은 10분의 1의 토지를 학교밭으로 내놓고 서당을 꾸리였다. 김약연은 장재촌에서 규암제서당을, 김하규는 대사촌에 소암제서당을, 남도천은 중영촌에 한함서재를 꾸리고 인재를 육성하면서 농사를 지었다.     이렇듯 1899년에 142명이 집단이주한후 그들을 핵심으로《새 조선인마을》이 뿌리를 내렸다. 윤동주네 파평 윤씨가문은 이민단이 명동에 들어간 이듬해인 1900년에 명동에다 땅을 사고 이주해 들어왔다. 조선 종성으로부터 1886년에 자동에 들어와 자리를 잡았다가 왜 명동으로 이사왔는지 그 리유는 확실치 않지만 이런 추측이 가능하다. 1900년에 중국 산동성으로부터《의화단사건》이 일어났는데 그 사건은 화북지방으로 퍼졌고 동쪽으로는 연변에까지 퍼졌다. 당시 연변에는 큰부채골, 삼원봉, 팔도구 등 세곳에 천주교성당이 있었는데 모두 의화단 단원들의 손에 의해 불탔다. 관군들의 토벌작전 역시 같이 진행되여 의화단을 쫓는 붉은 군복차림의 관병들이 총을 쏘며 명동에까지 나타났다고 한다. 《의화단사건》이 일어났을 때 명동사람들은 사태를 보아 여차하면 두만강을 건너 다시 조선으로 피신하려고 모두 두만강변인 자동으로 갔다고 한다. 그때 윤씨가문의 사람들이 명동사람들과 가까이 접촉했는데 그것이 이주의 계기로 되였을 확률이 크다. 자동의 많은 재산을 정리하여 명동으로 들어온 윤동주네는 명동에서 가장 잘사는 축에 속했다. 당시 명동으로 이주해온 윤씨네 인원은 모두 18명이였다. 윤동주의 증조부 윤재옥씨 내외와 이미 결혼하여 가정을 이룬 4명의 아들들의 가족과 친척 두 집이 합하여 그만한 규모를 이루었다. 윤동주의 개인사를 놓고 볼 때 윤씨가문의 명동으로의 이주를 하나의 운명적인 전기로 꼽게 된다. 이주해온 10년만에 윤영석이 명동처녀 김룡과 결혼하여 윤동주를 낳게 되기때문이다. 김룡은 이민단의 주역중의 한분인 김약연학자의 이복누이동생이였다. 김약연의 생모는 그 하나만을 낳은채 일찌기 별세하였다. 계모로 심씨가 들어와 3남 1녀의 소생을 두었다. 김룡은 외동딸이였다. 이민하기전에 김약연의 부친이 이미 별세하고 이모만 생존하였다. 김약연은 계모를 모시고 자기 내외와 아들 둘, 딸 하나 그리고 결혼한 남동생 내외와 미혼인 남동생 둘, 녀동생 하나로 이루어진 가족을 이끌고 두만강을 건넜던것이다. 이민 당시 김룡의 나이는 8살이였다. 후날 김룡은 도량이 넓고 인품과 재능이 있어 사람들의 칭찬을 받았다. 그녀는 명망이 있는 학자집안의 출신답게 처신 역시 조신했다. 윤하현(1875―1947년)장로의 아들 윤영석(1895―1965년)은 1910년에 김룡(1891년―1948년)과 결혼하였다. 김룡은 딸을 하나 잃은후 다시 아이를 낳지 못하다가 결혼한지 8년이 되는 해에 임신하였는데 그해 겨울 즉 1917년 12월 30일에 아주 준수하고도 건강한 사내아이를 낳았다. 윤씨댁의 장손이였다. 윤씨가문의 장손의 출생은 아주 큰 경사였다. 윤영석은 크게 기뻤다. 가문에서는 아기의 아명을《해환》이라고 지었다. 이 아이가 후날 조선민족시인이라는 큰 이름을 얻은 윤동주이다.  
1800    詩人은 삶이란 진액을 증류해서 뽑아내는 련금술사이다... 댓글:  조회:3245  추천:0  2016-11-11
삶을 증류하여 뽑아낸 시/노명순  향수를 만드는 것은 꽃의 영혼인 향기를 뽑아내는 일이다. 그러나 꽃들이 어찌 제 영혼을 쉽게 내주랴. 그래서 우선 꽃의 특성에 걸맞게 달래주어야 한다고 한다. 그런 다음, 꽃잎이 향기를 한껏 머금고 있는 시간을 맞추어 정갈하게 딴다. 적당히 말리고 찌고 끓이는 과정을 거쳐서 침지법· 냉침법 등의 여러 가지 방법으로 농축·정화·정류의 가느다란 냉각관을 통해 향기의 에센스를 한 방울 한 방울 받아낸 것이 곧 향수이다. 어쩌면 시를 쓰는 과정도 이와 같은 작업이 아닌가 싶다.  시인이 식물과 눈을 맞춰 오브제를 택한 다음, 언어의 재료들을 시작(詩作) 가마 속에 넣은 후 불길을 세게 또는 여리게 당겨가며 상상력과 이미지를 증류, 여과함으로써 비로소 한 편의 시가 형상화되는 이치나 같은 것이다. 다시 말해 시는 삶을 증류하여 뽑아낸 진액이다.  손끝이 열쇠라 했던가. 손끝이 닿는 대로 시작 가마에 불길을 당겨보자. 시의 진한 즙을 뽑기 위한 농축 과정이라고 할까.  < 농축>  향기의 건축물  수십 마리의 나비들이  희고 노란 날개를 팔랑대며 에워싸고 있다  현관문은 스치기만 해도 열린다  나비들을 제치고 잽싸게 치마폭같은 응접실을 지나①  대롱 모양의 긴 낭하를 지난다  취하여 미끄러지듯 계단을 타고 내려가②  수증기가 자욱한 지하실 비밀의 방 문고리를 잡아당기며  성급히 더듬이를 세우고 다가가 온몸을 부빈다  비밀의 방 한구석이 환해지며  수천 가지 빛깔이 흩어지며  붓꽃의 향기 수련 꽃다발 자스민 실측백나무  아니 막 물오른 처녀의 체취?③  단숨에 불을 붙여 불꽃은 훨훨 타고 있지만, 가슴도 끓지만 가마솥의 언어들만은 설익어 애매모호한 냄새가 풍기기 시작한다. 푹 뭉그러지기는 틀린 것 같다.  처음 가마솥에 넣은 재료는 채마밭에 가득 피어 있는 연보라빛 무우꽃이다. 꽃을 에워싼 나비를 제치고 들어간 화자가 향기의 건축물 속에 갇혀 허우적거리니 이야기의 방향이 어디로 진전이 되어 마지막 연의 전환을 가져올 것인가. 막막하다. 불길을 줄이고 여유를 가지고 정확한 향기의 건축물을 찾아야겠다.  불길을 꺼지지 않을 정도로만 아주 약하게 줄이고서 이럴 때의 비상 창고인 일기장을 펼친다. 9월 10일자의 일기에는 ‘향기의 건축물 속에 갇혀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로부터 시작하여 마지막엔 ‘쓰레기더미에서 뛰쳐나온 나팔꽃이 옆 전신주를 넝쿨로 휘감으며 향기의 고층 빌딩을 건축하고 있다’라고 씌어 있다.  동네 골목에 있는 전신주 아래에는 누가 아무렇게나 몰래 버린 쓰레기더미가 쌓여 있고 그 전신주를 타고 가등 꼭대기까지 얼키설키 넝쿨을 휘어감고 올라가 꽃을 피우는 나팔꽃이 있다. 나는 하도 신기해서 여름내 골목을 지날 때마다 화려한 꽃다발 기둥이 된 전신주 앞에서 발을 멈추고 한참을 바라보고는 했었다. 참으로 높이 쌓아올린 향기의 건축물이 아닌가. 오브제로서는 채마밭에 질펀하게 피어 있는 무우꽃보다 전신주를 타고 올라가는 나팔꽃이 형상과 내용을 활용하는 퍼스나로서는 제격인 것 같다. 자, 그러면 향기의 건축물인 전신주를 타고 올라가는 나팔꽃의 그 형상과 내용을 구체적으로 맨 첫연에 자연스럽게 펼쳐놓고 시작 가마의 불길을 올리고 뭉근하게 달여보자    향기의 건축물  사람들의 쓰레기더미 위로  어느 사이에 향기의 고층빌딩이 세워진 것일까?  보라빛 나팔꽃이 무릎이 까지고 손바닥에 피가 나도록  동네 골목의 전신주를 휘감으며 꼭대기 가등까지 올라가  수십 송이의 꽃을 피우며 향기를 건축하고 있었다  나비들이 희고 노란 날개를 팔랑대며 에워싸고 있다  향기의 현관문은 스치기만 해도 열린다  나비들을 제치고  나는 잽싸게 대롱 모양의 긴 낭하를 지난다  수증기가 자욱한 비밀의 방 문고리를 잡아당기며  성급히 더듬이를 세우고 바싹 온몸을 부빈다  한구석이 훤해지며  수천 가지 빛깔이 흩어지며……  악취나는 쓰레기더미에서도 발을 온전히 빼낼 수만 있다면  향기의 씨앗을 맺을 수 있음을 알았다  첫연에서 쓰레기더미 위 전신주를 향해 올라가는 나팔꽃을 오브제로 택함으로써 둘째 연에서의 상상력은 자연스럽게 오브제의 줄기를 타고 이파리를 피울 수가 있다. 마지막 연에서 나팔꽃 열매는 첫 연과의 연결고리를 가지며 ‘향기의 씨앗’이라는 앞의 내용들을 뒷받침해 주는 희망적인 상징으로 이행된 느낌이 든다. 이제 화덕의 불길을 잠재우고 재료가 폭삭 고아져 틀을 갖춘 내용물을 가마솥에서 쏟아내고 시의 에센스를 뽑기 위해 증류기 안에서 여러 번의 과정을 거친다. 정화, 정류의 차거운 퇴고의 냉각관을 통해 시의 진액을 한 방울 한 방울 받아보자.  초고의 네번째 행 ①을 삭제해 버린다. 시는 감추기 작전의 명수라는 매력을 가지고 있다. 향기의 건축물로 들어가는 길을 ‘치마폭’이라는 표현을 함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화자가 여인이라는 한계를 두어 상상력의 즐거움을 빼앗는 결과가 된다. 향기의 건축물은 남녀의 성애에 있어서도, 종교의 길 속에서도, 자연의 극치, 세상 만물 모든 우주 속에 산재해 있기 때문이다.  다섯째 행 ②부분은 없는 것이 나을 것 같아 지운다. 상상력의 긴박감을 끌어가야 할 시점에서 너무 말이 많아 늘어진 느낌이며 ‘취하여 미끄러지듯이’라는 표현이 신선한 시어로서 합당치 않기 때문이다.  초고의 마지막 연 ③도 삭제한다. 많은 꽃들의 향기 속에 헤매는 것이 너무 산만하다. 도대체 전환을 어느 방향으로 이끌어갈 지 막막하게 만드는 재료들이다. 시의 마무리는 전체적인 내용이나 흐름을 뒤바꾸어 놓을 수 있을 만큼 중요한 부분임을 명심해야 할 것을, 쓰레기더미에서 빠져나오는 나팔꽃은 가을바람이 불기 시작하자 꽃은 시들고 점점 수많은 씨앗이 맺어지기 시작한다. 이 시의 마무리 부분은 가을까지 한참 기다리고서야 완성된 작품이다.  시의 성취도를 얼마만큼 끌어올렸다고는 하지만 초고에서 퇴고까지 한 계절을 넘겨서야 시의 에센스 한 병을 겨우 받아낼 수 있다니, 그렇게 어렵게 받아낸 시의 향수답게 과연 이 시의 향기가 독자를 사로잡을 수 있을런지.  문만 열면 수많은 사물들의 눈빛이 내게 쏠린다. 눈이 부시다. 사물들에게서 놓치고 싶지 않은 순간들을 빼앗아 가슴에 깊이 각인해 둔다. 외부로부터 어떤 계기를 통한 정신적 혼돈의 소용돌이 속에서 감정의 재료들도 모아 둔다. 시의 진액을 뽑아내는 연금술사가 되기 위해서는 늘 사물을 꿰뚫어 볼 수 있는 날카로운 눈과, 예민한 코와, 고감도의 가슴, 부지런히 뛰는 손끝이 필요하다.  시는 삶을 증류해서 뽑아낸 진액이고 시인은 그 진액을 만들지 않고는 하루도 살 수 없기 때문이다. (노명순)  ◇89년 『월간문학』 등단. 시집 『살아 있는 것은 모두 따뜻하다』 [서천] ======================================================================     터미널 ― 이홍섭(1965∼ )   젊은 아버지는 어린 자식을 버스 앞에 세워놓고는 어디론가 사라지시곤 했다 강원도 하고도 벽지로 가는 버스는 하루 한 번뿐인데 아버지는 늘 버스가 시동을 걸 때쯤 나타나시곤 했다 늙으신 아버지를 모시고 서울대 병원으로 검진 받으러 가는 길 버스 앞에 아버지를 세워놓고는 어디 가시지 말라고, 꼭 이 자리에 서 계시라고 당부한다 커피 한 잔 마시고, 담배 한 대 피우고 벌써 버스에 오르셨겠지 하고 돌아왔는데 아버지는 그 자리에 꼭 서 계신다 어느새 이 짐승 같은 터미널에서 아버지가 가장 어리셨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터미널이 ‘여행’의 출발선이라면 좋겠다. 나를 더 멋진 곳으로 데려다줄 좋은 곳. 이런 터미널만 알고 있다면 당신은 환한 인생을 살아온 셈이다.      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살면서 알게 된다. 피곤하고 어두운 터미널과 쓸쓸하고 외로운 터미널 등을 배우게 된다. 이홍섭 시인의 시에도 또 다른 인생의 터미널이 등장한다. 그것은 바로 ‘어린 아버지의 터미널’이다.      시인의 고향은 강원도에 있다. 어린 시인은 가끔 아버지를 따라 타지에 나왔는데, 돌아갈 때는 버스를 놓칠까 여간 걱정이 아니었다. 기댈 곳은 아버지뿐인데, 아버지는 한참 자리를 비우곤 했다. 아버지가 안 오면 어쩌지, 버스가 떠나면 어쩌지, 나는 어쩌지, 이런 생각으로 어린 시인은 발을 동동 굴렀을 것이다.  다 자란 시인은 또다시 터미널에 오게 되었다. 예전에는 아버지를 따라 왔는데, 이제는 아들이 아픈 아버지를 모시고 왔다. 버스를 타기 전에 아들은 커피도 마셔야 했고 담배도 피워야 했다. 돌아와 보니, 아버지는 버스 앞에 꼼짝없이 서 있었다. 마치 버스와 아버지를 놓칠까봐 자리를 지키던 어린 자신처럼, 늙은 아버지는 미동도 없이 서 있었다. 아들이 안 오면 어쩌지, 버스를 놓치면 어쩌지, 나는 어쩌지, 이런 생각으로 힘없는 아버지는 맘을 졸였을 것이다.  자라 보니, 아버지는 완벽한 사람도 멋진 사람도 아니었다. 잘생기지도, 강하지도, 유명하지도 않았다. 대단한 아버지를 잃어가면서 우리는 소중한 아버지를 알게 된다. 아마도, 아버지는 자식에게 나이와 힘을 나누어 주느라 다시 어려졌는가 보다.
1799    詩를 배우려는 초학자에게 보내는 편지 댓글:  조회:3529  추천:0  2016-11-11
시를 배우려는 초학자에게 2010년 04월 04일 작성자: 리문호   Jin 님; 시를 배우려는 열정이 좋아요, 십여편의 시를 보고 소견을 말해보려해요   (1), 시를 쓰려면 가장 기본적인 정신이 구비되여야 해요, 즉 시는 장난으로 쓰는것은 아니에요, 한수의 시를 써도 투신이에요.. 자기의 정신세계가 시적 정서나 느낌에 집중되는 노력이에요.  (2) 시적 기교와 묘한 언어는 시적 내용과 유기적으로 결합되여야해요, 그럼으로서 극치를 보여주어야해요, 즉 감동을 주어야해요. 내용이 없는 기교나 무리한 언어의 조합은 시로 인정할수 없어요 (3),쓰는 매수의 시가 다 성공적이라 생각하지 말아요.. 초학자로서 대부분은 습작이라 생각해요..열수의시에 한두편이 성공적이라 생각해요.. 하기에 쓰는 쪽쪽 다 발표하는것은 불가능해요. 기성 시인은 모두몇천편의 습작 원고가 있으며 그중 몇백편 밖에 발표하지 못하엿다 생각하면 될것이에요. 이 말은 시인이얼마나 많은  노력을 해야 하는가를 말하는것이에요. 원로 시인들도 무수한 노력이 필요하기에 초학자는더욱 그러하지요 (4), 누구나 다 좋은 시를 쓸수 있어요.. 문제는 시적 발견이에요. 자기만의 개성으로 쓰는 시와 다른 시인이 쓰지 못하는 시를 어떻게 발견하는가하는 문제에요..여기에는 로시인과 초학 시인과 공동히 가지는 공정성이에요. 그러기에 초학자도 로 시인보다 더 잘쓸수있어요. 무슨 이요 이요 하는 괴변에 압박감을 느끼지 말아요.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은 량심적으로 시인이라 말할수 없어요. 자기는 어떤 과정을 시인이 되였는가를  잊었나봐요 (5),시적 발견은 시인의 지식, 체험, 감수에서 나타나는 것이에요. 시인이 인문학적 바탕이 없으면 좋은 시적 발견이 있을수 없어요, 사물을 관찰하는데 인문학적인 안광이 있어야해요 (6),한수의 시가 발표되였을때 시인의 이름은 자기만의 것이 아니에요. 사회적인 것이에요. 그러기에 신중성이 필요해요. 즉 어떤 이미지의 특징적인 이름으로 사회에 나타나는가하는 문제에요. 독자들에게 그의시적 형상의 이름을 심어주는 것이지요.그러기에 시를 쓰는것은 장난이 아니에요 (7), 고금중외 책을 많이 보아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자기의 시적세계를 넓혀야해요,특히 명시는 반복 구독하고 연구해야해요, 모르고는 형상을 창조할수 없어요, 독서는 어떤 의미에서 시창작보다 백배의 노력이 더 수요되지요, 이것이 바로 자기의 개성을 수립하고 창작 바탕을 두텁게 다지는 일이에요. 바탕이 엷으면 시창작의 다산은 불가능하지요 (8), 사물에 대한 감수성은 시인의 발상에 불꽃을 튀겨주는 것이에요, 풍부한 감정이 없이 좋은 시를 쓸수없어요. 감정이란 생활에 대한 사랑에서 오는것이에요. 생활에 대한 사랑이 없으면 울고 웃고, 슬프고 기쁘고, 고민하고 염오하고, 서럽고 우울하고, 애상하고 그립고, 열렬하고 헌신적인 감정이 있을수 없어요,시인의 감수성은 이런 생활에서 축적되는것이에요. 생활을 사랑하는것은 자기 인생에대한 가치의 책임감에서 오는것이에요 (9), 시적 발상은 사물에대한 호기심에서 오는것이에요. 새로 보는 사물과 습관된 것을 새로 보는 호기심을 배양해요.. 모르게 스쳐지나간 사물에서 추억으로 시적 소재를 찾아요,우리 주위에는 모든 사물이 다시적 소재에요. 시간과 공간속엔 무수한 시적 소재가있어요. 상상력은 무한히 넓은 시적 무대를 열어가는것이에요. (10), 시인은 몸으로 감각하고 마음으로 감수해요, 여기에는 시적 자질이 있어야 해요, 물론 자질은 우에서말한 체험,지식, 감수의등 수양을 놓고 말해요, 시인은 쉽게 된다고 생각하지 말아요, 몇편의 시를 발표하고 시인이 되였다고 더욱 생각말아요, 장기적인 고군분투를 거치는 심혈이 필요해요, 지독하게 노력하는자 만이 이 계관을 따올수 있어요. (11), 시인에게 왜 시인이 되려했는냐 물으면 참 답복하기 힘들어요. 천부와 그리고 후천적 동기, 처한 생활환경이 그를 시인에 지향하게 되였거든요.. 시를 쓰는것은 자기의 마음을 수련하고 자기의 새로운 정신적, 감정적 세계를 풍부히하는 것이에요, 그리고 자기가 느낀 느낌과 정을 더 많은 독자와 공유하려는 욕구가 있는것이에요. 지금 시가 시회의 변두리에서 소외되는 정황하에서 시인이 계속 시를쓰는것은 시인 나름대로의 흥취가있기때문이에요, 지금 신세대가 시의 길로 가려하는 진취는 참 보귀한 것이에요. 시창작을 수련이라고 생각하면 고생도 달갑겠지요. 다른 사람이 없는 하나의 풍부한 정신생활이에요. 이상 두서없이 늘어 놓았어요. 시적 기초를 다지려면 많은 습작과 독서가  필요해요, 그것이 고독을 즐기고 이겨내는 과정이에요, 한국의 교분있는 여류시인 김금용 시인님은 이런 말을 했어요  여기에 시인의 철학이담겨있어요. 잘 음미하세요 저는 시를 지향하는 신세대는 고귀한 정신력을 가지고 있는 존경스런 이들이라 생각해요 항상 성원을보내고 싶습니다 꼭 시인이 되세요 /구름배.       \\\\\\\\\\\\\\\\\\\\\\\\\\\ (창작담) 시적 발견에 대한 견해 2010년 01월 02일  작성자: 리문호     xxx선생님  시를 쓰면서 시적 발견이란 말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무었이 시적 발견인가에 대하여 많은 평론가와시인들게서 아직 구체적으로 론술한 문장을 보지 못했습니다.이에 대하여 나의 창작 경험을 통해 간단히말해 보려고 합니다 시적 발견에 대한 정의를 어떻게 내리면 될까요. 시인들이 아직 발견하지  않았거나 취급하지 않은 시적 소재, 감정 정서, 언어와 경구, 철리성과 리치, 시상( 어떤 시적 계기에 나타 나는 령감이나  교감 혹은 상상력)등을 시적 발견이라 함이 어떨까요 ? 즉 이러한 제 방면의 류사성을 벗어나 발견된 시상. 개성적이고독특한 관찰력에 의한 시상을 시적발견이라 함이 적당할른지요 시적 발견은 광범한 의의 있다고 생각됩니다 (1)    소재에 대한 시적 발견 습관된 객관 사물이나 생소한 객관 사물에 대하여 다른 시인들이 다루지 않은 혹은 발견하지 못한 제재를 발견하여 시화한 것이라 생각됩니다. (2)    측면이나 단면에 대한 시적 발견  비록 많은 시인들이 다룬 소재이기는 하나 측면이나 단면에 대한 혹은 본질에대한 부동한 감지(오관의 감각차에 의한 새로운 시적 느낌)효과에 의하여 나타 나는 시적발견을 말합니다 (3)    어떤 사물에 대한 언어적 발견이나 경구(警句)적 발견 한수의 시에 언어적 발견이나 경구적 발견이 있으면 그 시는 독특한 맛을 냅니다 그것도 하나의 시적발견인것입니다 서정순 선생님의 에서 머리칼을 거머리로 상상. 거머리는 기억으로 상상등 깊이에로 들어 갔기에 시적 음미성을 더해주고 있습니다 그외에도 등 언어적 발견이 좋습니다 그 시의 결점은 약간 길어졌다는 점입니다 (4)    시인의 주관 자질에 의한 발견 매 시인의 지식, 체험, 느낌 등 3요소가 각이하며 인생관, 가치관, 세계관 등에 의하여 사물을 보는 괄찰 능력이 다름에 따라 감각도 다른데서 시적 발상도 다릅니다. 그러므로 시적 발견도 류사성을 벗어나 주관적이여야합니다 여기에 개성이 존재합니다. 개성적 시인이 되려면 자기의 독특한 자질에 의한시적 발견이 있어야합니다 (5)감정 정서의 시적 발견 로춘애 선생님의   등은 감정 정서의 시적 발견이라 말할수있습니다. 사랑에 대한 시를 많이 보았지만 이렇게 쓴 시는 처음 봅니다. 로처녀의 심리 정서를 아주 잘 시화하였지요.이런 시가바로 감정정서의 시적 발견이라 말합니다 감정정서의 시적 발견이란 다른 시인들이 느껴 보지못한 것을 시화 함으로서 새로운 시적 령지를 개척한것입니다. 물론 이는 사실(寫實)적일수도 있고 완전히 정서적일수도 있고 또한 경물을 도입하여감정을 의탁할수도 있습니다 (5)    우화(愚話)적 해학적 상상력에 의한 시적 발견 이러한 시적견은 풍자성을 띠기에 웃기면서 어떤 철학성이나 비판성을 부여하는 것입니다 (6)    동화적 상상력에 의한 시적발견 동화적 상상력에 의한 시적 발견이란 우리가 보고 관찰한 현상을 동화적으로 시화한것입니다, 그럼으로서 취미성.철리성을 부여하여 시를 독자들에게 밀착시켜 주는것입니다.즉 시인의 말하고저 하는 하는것을 독자들에게 쉽게 알아 들을수잇게 시화하는것입니다 (7)    환상적,몽환적 상상력에 의한 시적발견 시를 창작함에 있어서 사실주에 의거한다 하지만 이런 환상적인것을 완전히 배제할수없습니다.환상이 없으면 사회나 과학이 발전할수없지요.. 시도 이런 환상적 경지를 발견해야합니다 (8)    시인 자신의 시적 세계에 대한 시적 발견 시인은 많은 창작 실천과 지식 령역의 개척을 통해 또한 축적한 감정 정서를 통해 자기의 시적 세계를완성해야합니다 이것을 상상력의 풍부성이라 말하겠지요 여기에는 부단한 시적 발견을 통해 자기의시적 세계를 돌파해야하며 넓혀 나가야하지요 하기에 시창작이란 고달픈, 고군분투하는 자아 노력이지요 이상 생각나는 바를 대충 적었습니다 혹시 도움이 된다면 보람으로 느끼겠습니다 시를 쓰려면 고독을 즐길줄 알아야 해요 고독할때 시상속으로 들어가세요,시상속은 아름다운 곳이에요, 보통 사람은 가 닫지 못하는 곳이에요 여기에 시인의 행복이 있는거에요. 그의 진미는 나이가 들어 퇴직하였을 때 맛보게 되는것이예요, 자기의 로년을 위해 시를 계속 련마하고 쓰세요 나의 이말이 명언일수도 있어요 리문호 배     /////////////////////////////////////////////////////// 시에 대한 몇가지 단상(2) 리문호 요즘 계절 때문일까? 아니면 설을 쇠고 새해의 계획을 세우느라 바빠서일까? 료동문학 신작코너에 들리면 스산한감이 든다. 물론 시창작은 계절 환경의 영양을 받을 때가 많다.이전 좋은 시를 써내던 분들의 시가 보이지 않으니 좀 서운한 마음을 금할수 없다. 혹시 도움이 될가해서 생각 나는 바를 이전의 에 이어 적어 보려한다 토론 되여야할 문제이지 결코 긍정적인 답안이 아님을 명시하며 참고하기를 바라는 바이다  (1) 쓰면 쓸수록 어려워지는 것이 시창작이다. 그것은 대가나 초학자나 마찬가지다. 시를 알면 시 쓰기가 더욱 힘들어진다 이것은 시로 문학을 시작했다가 소설로 들어가는 원인중의 하나이기도하다. 그렇다고 해서 필을 놓으면 다시 들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2)바람벽도 문이라 생각하고 박차고 나가보라.그러면 돌파구가 생길 것이다 (3) 쓰는 쪽쪽 매수의 시가 좋은 시, 명시가 되기를 기대하지 말라.그러면 영원히 시를 쓰지 못할 것이다 (4)한 수의 시가 세상을 놀라게 하는 력량력이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 그런 시를 쓰겠다고 생각하면 시에대한 절망과 허무감 밖에 생기지 않아 시를 쓰지 못할 것이다 (5)시창작의 기본 바탕은 감정의 진실성에 있다 이것을 떠나면 창작 기교는 무용지물이다. (6) 명시란 알아 보기 쉬운 언어 쓴 시적 감각이 극치에 도달한 시들이다 (7) 시는 시대의 약동,민족의 맥박이 있는 소재를 많이 잡고 파고 들어야한다 전통 지향적인, 현대 지향적인, 미래 지향적인 시들중 어떤 시이간에 시대적 기호나 암호들이 많이 들어 있어야 살아 있는 시로 될 수 있다 (8) 시어와 행,련간에 무한이 넓은 시공과 상상이 담겨 있으면 좋은 시다 ((9) 시는 어떤 리론에 립각하거나 증명하기 위하여 쓰는 것이 아니다. 시인 본신(서정적 주인공)의 시적 감수성으로 쓰는 것이다 (10) 고독을 향수 할 줄알면 좋은 시들이 나올 것이다 (11) 시를 무슨 목적으로 쓰는가란 질문을 하는 사람은 시에 대하여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들이다 (12) 한수의 시가 꼭 사상성이나 철리성을 가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감성적인,정서적인 시도 좋은 시로 될 수있다 (13) 시는 심미성만 있는 것은 아니다. 취미성도 있다 (14) 시의 소재를 잡았을 때는 다각적인 면에서 가장 좋은 각도를 발굴하여 시를 써야한다 즉 시적 발견이라고 말한다 (15) 시에서의 경물은 의미와 정서를 담기 위함이다 (16)시를 씀에 대담성이 필요 하지만 투고함에도 대담성이 필요하다 수십수의 시를 투고하여 발표되지 않는다 해도 락심하지 말라.자기를 제고하는 좋은 기회로 될 것이다. 이런 끈질긴 사람은 시인으로 될 수 있지만 몇수의 시를 발표하고 더 제고 못하면 시인으로 될 수 없다  (17) 시창작엔 몇 십가지의 작시법이 있는데 주로 상징법, 의인법, 은유법, 풍자법, 비유법, 비교법, 과장법, 반문법, 생략법, 반복법, 등을 활용해야한다 이상은 새로운 발견도 없이 생각나는 대로 옳고 그른지도 모르고 적은 것이다 혹시 토론될 여지가 있다면 어떤 방식이든 토론되면 한다  료동문학
1798    詩란 의지와 령혼의 몸부림이다.../ 시의 흥취 10 댓글:  조회:3433  추천:0  2016-11-11
시인의 번뇌 2016년 04월 06일 작성자: 리문호 (시창작담)   시인의 번뇌                                  -로댕- 김 시인님; 나는 내가 왜 시인이 되였는지 지금에 와서 의심할 정도입니다. 그러면서 왜 시를 고집하며 모지름 쓰고 있는지 정신적 질환이 아닌가 의심니다. 처녀작을 발표한지 40년이 되여 오면서 온갓 풍운을 겪었지만 근 몇년 동안은 허탈감을 금치 못하고 있습니다. 제5 시집을 낼 시들이 있지만 더는 시집을 낼 의욕이 생기지 않아요. 내가 시인이라고 어디가서 떳떳이 자칭하기도 싫어요. 시인은 이 시대의 약자라고 생각해요, 누가 처다 보지도 않는데 머리를 치겨들고 돌아다니는 시인을 보면 한심할때가 많아요. 시인의 자존심은 극도로 추락했어요..왜서일까요 ? 사회적인 방면도 있지만 얼마간은 우리 시인들의 문제가 아닐까요 ? 더우기 우리 시인들이 우리 시단을 훼손시킨 결과가 아닐까요 ? 우리의 자존을 우리가 지켜 내지 못한 결과가 아닐까요? 심각히 반성하고 고민하고 몸부림치는 탐색으로 시의 정신을 구현하는 길을 모색하지 않으면 안될것 같아요. 물론 저도 많은 고민을 하지만 아직 까지는 이렇다할 결론과 출로가 없어요. 다만 아래의 담화를 통해 속 시원히 털어놓고 싶을 따름이에요.     (1) 김 시인님; 나는 심양서탑조선족서점에 들린적이 있어요. 심양에 가게되면 꼭 들려 어떤 새로운 책이 나왔는가 보군하지요. 또한 책꽂지에 꽃인 나의 시집도 들춰 보군합니다  서점 최경리게 드릴때는 하며 말입니다. 점원에게 몇권 팔렸느냐 물어보면 선생님 뿐만아니라 다른 시책과 소설들도 사가는 사람이 거이 없어요하고 대답하지요. 하긴 십년전에 보낸 시집도 아직 꽃혀 있으니 몇년전에 보낸책은 더 말할나위 없지요. 그때마다 나는 시인의 허무감을 슬프게 느끼면서 문학인의 소외를 한탄하게 됩니다. 얼마전 심양의 만융에 이사 오신 강효삼 시인이 술 좌석에서 이런말을 하더라고요.. 흑룡강 한 서점에 들려서 자기의 시집을 몇권 팔았느냐 물었더니 점원이 말하기를 딱 한권 팔았대요. 그것도 륙월에 개털 모자를 쓴 낯 모를 사람이 사갔대요. 그 말에 웃음보를 터트리긴 했지만 심각하게 생각 되더라고요. 혹시 우리 시인들도 개털모자를 쓰고 다니면서 개털 모자를 쓴 줄 모르는 사람이 아니가하는 허탈감이 들더라구요. 서점에서 나오면 길거리엔 가짜 악세사리를 길바닥에 펼쳐 놓고 파는 장사꾼이 보여요. 시는 실용적으로 말하면 그 가짜 악세사리보다도 못한 지경에 이르렀음이 안타깝더라고요. (2) 김 시인님; 서탑에 가면 노래방과 상가와 커피숍과 술집과 식당마다 사람들이 붐벼요. 지금은 . 물질 자극과 정신자극을 추구하는 때에요.. 감동이 필요 없는 때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시단은 감동이 없는 시가 너무 많아요.. 이것이 바로 객관과 주관에서 시가 개털모자를 쓴 신세가 되지 않았나 생각되지요. 즉 상품이 되지 못하는것은 상품시대에서 자연이 물러나는 것이에요. 시는 영원히 상품으로 될수없는 것이에요.. 자극만을 추구하고 감동을 받지 않으려는 사람과 감동을 주려는 시인과의 거리는 점점 멀어지고 있어요 (3) 김 시인님; 시인은 시인이란 동아리를 벗어나면 개뿔도 아니에요.. 얼마 안되는 시인들끼리 서로의 시를 보며 이렇쿵 저렇쿵 할뿐이에요..이 동아리를 벗어나서 시인이라면 누가 존경스런 분이라고 좌석 정중에 모십니까 ? 좌석 정중에는 언제나 로반이요 돈많은 부자요 하는 권세있는 간부요 하는 분들이 차지하지요. 시인은 그것을 알아야합니다.연변의 김혁작가님게서 동창 모임을 쓴 글을 본적이 있어요..다들 외국 에 가 돈을 얼마나 벌었고. 사업해서 얼마나 성공했고 하는 돈타령인데 글 쓰는 김혁선생님은 한구석에 할말없이 가만있었다는거예요. 김혁선생으로 말하면 문학에서 혁혁한 성적이 있는 분이 아닙니까 나는 시를 쓰면서 자비심이 많은 사람이에요.자비심이 많은 우울증 시인이에요..그러면서 시를 집념하는것이 이상하지 않습니까? 환갑 잔치나 결혼잔치에 가면 축의금을 주고 조용히 한구석에 앉아 못하는 술 들엇다 놨다 하다가 슬그머니 나와 버립니다. 시인의 인격은 길거리의 걸뱅이보다 좀 나을런지요. 고민입니다. (4) 김 시인님; 한번은 절친한 친구들과 함께 노래방에 간적이 있어요, 나도 못 마시는 술 한잔 마셨는지라 흥분하였지요, 그래서 자작시 한수를 읽었어요. 어떤 분은 자기들 말만 말이라고 듣지를 않는것이였서요. 다 읽고 나니 어떤분이 소귀에 칠현금을 타는것이라 하였어요. 그때 나의 흥분은 풍선처럼 푹하고 터져 버린것이에요 (5) 김 시인님; 시인은 사회적로 자유로워야해요. 심지어 가정에서도 자유로워야해요. 나의 생활환경은 매우 자유로운 편이에요. 딸은 상해에있고 아들은 일본에있고 안해는 한국에 있어요. 어떤 친구는 내가 매우 고독하겠다고 말하군해요. 그러나 나는 고독을 즐기고 있어요. 시인으로 고독을 즐기지 않으면 시를 쓸수가 없어요. 안해가 집에 오면 한수의 시도 나오지 않아요. 혼자면 자유자재인 셈이죠. 집안 청소도 깨끗이 하고 멀 먹고 싶으면 멀해 먹고 얼마나 좋습니까 나는 독립 생활능력이 강해요. 아마 군대에 같다 왔기 때문이라 생각해요. 남자라면 반드시 군대 같다 와야한다고 생각해요. 모든 동물들을 보면 숫컷이고 암컷이고 자기가 찾아 먹습니다 사람은 사회가 발전하면서 분공이 생겼다 하지만 먹을것은 분공함이 없이 같이해야합니다 밥 할줄 모르는 남편때문에 집을 떠나서 안절부절 못하는 안해들이 얼마나많습니까. 나는 한가지 악습이 있습니다 밤에자다가 새벽 두시면 일어나 시를 쓰던가 책을 두시간 보다가 아침 일곱시나 여덟시에 일어나지요 자다가도 무슨 령감이 떠오르면 써놓고 잡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령감을 잃어 버리군해요. 이전엔 공장에 몸 담고 있으면서 자유롭지 못했어요. 무슨 기술 공장장이요, 서기요 하면서 더 자유롭지 못 했지요 .50이 되면서 다 뿌리쳤습니다. 사회적으로도 자유로워 졌습니다. 그러나 내가 말하는 자유는 사회의 제한된 법위내에서의 자유입니다. 지금 시대는 문혁시대와 달리 창작도 많이 자유로워졌죠 (6) 김 시인님; 시인은 항상 자기의 아름다운 정신 세계와 추구가 있는것이에요. 이 정신세계는 항상 시대의 고도에 위치하고 있어 내려다 보면 현실은 언제나 불만스러운 것이에요.. 어떤 시인은 아예 현실을 떠나 자기의 정신세계만을 시상하고 있어요. 아마 이런 현상을 모더니즘 시라 하는것이라 생각되요. 어떤 시인은 현실을 정시하며 부조리에 시상을 하고 있어요 이것이 아마 비판적 사실주의라 생각되요. 이런 문학이 있길래 사회에 적극적인 작용을 하는것이예요. 전자는 도피라 한다면 후자는 참여예요. 소극적이라면 관조이고요. 나는 처음에는 사실주의 였지만 후는 도피시도 쓰군하거든요. 그러나 아직 사실주의가 주류예요 비판적 사실주의 시를 많이 쓰지만 정치 신경은 건드리지 않고 사회 체재도 건드리지 않아요. 모든 사회체재가 다 완벽하지 못한 결점과 웃점이 있거든요. 아마 공산주의에 간다해도 완벽하지 못할것이에요. 이것은 시인이 해결해야할 문제가 아니니까요. 젊은 시절엔 격정에 넘쳐 좋은 시 한수가 세계를 바꾸어 놓는다고 생각했어요. 알고 보니 그런것이 아니에요 공산주의가 실현될 수 있는것인지 공상적인것인지 나는 모르나 학교에서 배운대로 라면 나는 공산주의를 신앙합니다. 공산주의가 얼마나 좋습니까 ? 생산력이 고도로 발달되고 사회 재산이 어느 재벌들이 독차지 하고 있는것이 아니라 공유이고 매개인은 능력이 저능이건 고능이건 능력대로 일하고 수요만큼 분배 받는, 고도의 물질 문명과 정신 문명이 있는 그런 사회가 얼마나 좋습니까 ? 자본주의 사회나 사회주의 사회나 그런 요소들이 지금도 맹아 하고있는 것이 아닙니까? 자기의 재산을 복지 재단에 헌납하는 재벌이나 서민이 평생 모은 돈을 장학기금으로 내놓는 사례가 있지 않습니까. 레브 똘스또이도 자기 농장의 노예들을 해방시키고 평등 사회를 꿈꾸는 실험을 하지 않앗습니까 시인에께는 이런 공산주의 보다 더 아름다운 몽환적인 정신세계가 있을수 있습니다. 모든 물질에 령혼을 불어 넣는 그런 신비의 정신 세계말입니다 공상도 시상의 원천이 될수있는것으로 그것은 시인의 자유이니까요 그러기에 시인은 현실에 항상 불만족하지요 (7) 김 시인님; 몇달전에 만융에 와 사시는 강효삼 시인께서 전화가 왔서요. 이 출간 되였는데 미안해서 선생님께 드리지 못하겠다고., 왜냐 했더니 나의 시가 한수 밖에 수록하지 않았다는것이에요. 그래서 한 수라도 수록 되였으니 얼마나 감사하고 대단한 일이냐고 어서 가지러 가겠다고 하였어요 중국 백년 문학사에 한 수가 수록 되였다는것이 얼마나 영광스런 일입니까? 그래 무슨 시냐 했더니 라고 햇어요, 나의 시집 에서 리얼리즘시 과 은 김학송 시인님의 발견으로 에 수록 되였고 유미주의 시 가  최룡관 시인님에 의하여 발견된것이예요. 시인은 시를 써놓고 명시를 썼는지 일반시를 썼는지 모르는것이에요, 다 다른 시인들께서 발견되는 것이예요 (8) 김 시인님; 시인은 사상성이 있어야하며 현실과 사람의 마음을 간파하는 예리한 눈이 있어야해요. 사상이 없으면 현실을 깊이 파고들지 못하니까요 모든 현상엔 모두 시로 승화할수있는 시가 존재해요. 나의 시 등 모두 길가에서 찾은 시에요. 에서 시인은 정을 동냥하러 다니는 시인이라 했어요. 물질 자극의 시대에 인정의 삭막성을 비판한시에요. 는 정조와 정신세계가 무너짐을 절규했어요. 아마 내가 추구하는 정신 세계가 없다면 이런 현상을 시로 발견하지 못하였을 것이예요 시집 에서 석화 시인님께서 극구 찬양한 는 측은 지심을 시로 승화 시켰어요. 아무 시적 기교가 없고 무시되였지만 독자의 코를 시큼하게 하는 시에요 즉 감동이 있는 시에요 시인은 많은 책을 보아야해요, 을 보아 을 알며 을  보아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알아야해요. 을 보고 깜짝 놀랄만큼 중국 문화의 심원성을 느꼈어요.. 나는 퇴계 리황의 책을 아직 보지 못했어요 시인이라면 퇴계의  4단 7정을 알아야 고운 마음으로 시를 쓸수 있다고 생각해요 즉 ,, ,,이 없으면 감동을 주는 시를 쓰지 못하니까요..시인은 마음이 어지고 선비정신이 있어야해요.  물질 자극으로인해 이 네가지 지심이 여지없이 무너지고 있습니다,그래서 나는 애상시를 많이 쓰는 원인의 하나이기도 한것 같습니다 이 네가지 지심이 시인의 사상이자 마음으로 되여야 하니까요 (9) 김 시인님; 요즈음은 한국의 시 간물들을 보고 있어요 한국에서 어떤 시풍이 불면 연변에도 꼭 반응이 일어 나거든요. 한국에 시인들이 약 5000명이되지만 시간물을 운영하기 힘든 모양이에요 기본상 시인들이 시인의 독자이니까요 시를 발표하면 원고비는 주지 않고 5권 이상의 시간물을 사야해요, 그런데 요 이요 하는 쟁론이 가끔 보여요 이런것들이 때론 심기를 불편하게 해요. 시인들의 권위를 내세우는 현상이니까요.. 기실 시인에게는 권위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아요. 다만 이라던가 이라던가 하는 자격이 있을 뿐이고 존경이 있을 뿐이에요. 시를 씀에 있어서 좋은 시를 쓰는것은 원로나 초학자나 평등해야해요 초학자들도 좋은시, 명시를 쓸수있으니까요, 시인을 서렬하고 등급을 나누는 것은 시문학의 비애에요 (10) 김 시인님; 우리 중국 조선족 시단에서는 한때 리얼리즘 시와 모더니즘 시가 격돌이 있었어요 물론 한국에서 불어온 풍파겠지요.. 그런데 그의 치명적 약점은 서로 부정하는데서 비릇된것이에요..우리 시단이 발전하려면 공조가 필요해요. 창작 방법에서 서로의 장단점을 보완해야해요. 모더니즘 시를 주장하는 분들이 리얼리즘 시를 비자루로 깨끗이 쓸어 쓰레기통에 처넣어도 안되는 일이지요.. 그리고 리얼리즘 시를 쓰는분들도 모더니즘의 웃점을 접목 시켜야합나다. 문제는 어떻게 감동적인 시를 쓰는가, 어떻게 새로운 정서적 느낌이나 깨우치는 느낌을 주는가 하는문제에요, 을 보면 모더니즘 시와 리얼리즘 시가 감동을 주는 것이 많아요 또한 이 두개 창작 수법을 결합한 시들도 많아요.. 모더니즘시의 창작방법의 주요한 내용의 하나가 하는 수법이에요. 그런데 한다고 해서 언어가 까다롭고 읽기가 짜증나서는 안되지요. 어떤시는 언어의 도 잘못 리해하고 시를 써요.. 언어의 이나 언어의 주장은 모두 극단적인 것이에요. 그리고 내가 저급 독자가 되서인지 모르겠지만 시적 내용이 무었인지 모를시가 많아요. 그런데 시인이 독자를 > 하는 말을 시인들은 좀 안하면 좋겠습니다.을 보면 어느 계층의 사람들이 다 리해하고 접수할수있고 감동을 주는 시들입니다 (11) 김 시인님; 우리의 시와 시정신이 어느 바루 와 있는지 가늠하기가 힘듭니다. 시 정신이란 두가지 방면으로 나타나요. 어떤 태도와 마음으로 시를 쓰는가와 어떤 내용의 시를 쓰는가 하는것입니다. 시창작을 자기의 생명으로 여기는 시인과 심심풀이로 시를 쓰는 시인과 그의 시의 질이 틀리지요. 그리고 시의 정신이 다름에 따라 어떤 주제의 시를 쓰는가도 구별됩니다 나를 비릇해서 감동을 주지 못하는 시가 많아요. 지금 우리 시단에서는 시정신을 탐구하고 고양할때라 생각됩니다. 나는 시의 탈출구를 찾기위해 지금도 몸부림치고 있습니다 (12) 김 시인님; 시인은 자기의 정감세계를 세상에 산포하려는 욕망과 독자를 감동시키려는 욕망이 있어요, 이것이 시인의 존재 가치에요, 돈도 안되는 시집을 왜 자비로 냅니까 ? 나는 이 방면에 체험이 있어요 무순의 한 조선족 녀생이 성폭력을 당한 기사를 읽고 분노하여 에 시를 발표한적 있어요. 그런데 림금산 부총편집게서 전화를 걸어와 당시의 계광현 총편집게서 그 시를 보고 눈물을 흘렸다는거에요..이것이 바로 시인의 존재 가치이지요. 시인은 군중의 애달픔에 눈길을 돌려야해요 그들의 애달픔이 나의 애달픔이라 생각되거든요.. 밀항하다 죽은 민족의 슬픔을 달래기위여 쓴 , 가출한 안해를 증오하여 쓴 , 상해에서 농민공의 딸이 유치원이 부러워 란간밖에서 우두커니 바라보는 불쌍한 , 사치가 흐르는 상해와 어울리지 않게 길가에서 초라하게 앉아 강냉이를 씹어 먹는 로총각이 장가를 가지 못하는 애달픔을 노래한 . 상품경제의 기형적인 발전에 의하여 인정이 삭막해가는 등 이런 시들은 군중의 애달픔을 노래한 시로 감동이 있는시라 생각되요, 그리고 우리민족이 연해로 진출하여 격는 애달픔 , 고향의 집을 팔고 상해로 갓지만 다시 돌아오지 못한 신세가된 등 시인은 군중의 최하층을 관찰할줄 알아야해요,그래야 감동적인 시를 쓸수있어요. (13) 김 시인님; 나는 시창작에서 민족의 정체성을 주장해요. 이것은 민족의 정체성이 무너지데서 비릇된것이에요, 시인은 민족의 발자취를 더듬어 추종하며 구가해야해요, 우리 민족은 항일전쟁 해방전쟁을 통하여 무수한 피를 흘린 민족이에요. 그리고 무수한 황무지를 개간하여 나라에 공을 이룬 민족이에요, 우리 부모들의 감정정서를 리탈하면 좋은 시가 나오지 않지요, 개혁 개방 이후 외국 로무에서 외화를 중국에 벌어 들인 민족이에요. 그리고 한국 기업을 중국에 끌어들인 교량작용을 한 민족이에요, 이와 반면에 연해로 대성시로 진출하면서 문화가 무너지고 있어요. 시인은 바로 이런 격변기에 살고있어요. 이런 현상에서 시의 소재들을 발견해야해요 (14) 김 시인님; 한 시인이 몸부림치고 있음을 발견했어요. 바로 흑룡강에서 심양 만융에 와 사시는 강효삼 시인이에요. 만융은 민족 집거구역이지만 이방인으로 많은 고독을 느끼더라구요. 초라한 옷가짐, 몇년을 신었는지 가죽이 다 달아진 신, 키가 작고 여윈얼굴, 병에 시달려 굽은 허리, 정말 볼품이 없어요, 그와 만나 술좌석을 몇번했어요 그러나 시 정신은 강렬하게 살아 있었어요. 이전에는 생활이 가난해 원고비를 벌어 생계하려고 소설, 수필, 시를 마구 닥치는 대로 썼다는거에요, 이제는 시만 파고들어 가겠다 하더라구요. 아직 열정이 대단하시더라고요..그의 시를 보면 민족정신을 발굴하는 정서가 차분히 깔려 있어요. 우리 시인들은 역경에서 혼신을 문학에 이바지 하는 그의 정신을 따라배워야한다고 생각했어요. 이런것이 바로 시정신을 고양하는일이에요 (15) 김 시인님; 료녕시단의 현황은 어떠한가구요 ? 료녕은 약 30명의 시인 대오가 있어요 대부분 심양시조선족문학회(사단법인)의 산하에 활동하고 있어요. 이미 료녕시단의 판도가 구성된셈이에요. 나는 시분과 주임으로 많이 고민하고 있어요,어떻게 하면 시의 질과 량을 제고할까고, 우선 고무가 있어야해요. ,, 등 잡지에 료녕 시인특집이 나가군하지요, 이에 여러 편집 선생님들에게 감사를 드리려요, 그리고 회원작품집 이 15기 마다 시인들의 시가 실리지요. 압록강 부간에도 질 좋은 시들이 나가군합니다 우리 료녕시단은 현실과 생활에서 찾은 시소재들이 많아요, 감정이 진실하고 감동적인 시들이 많지요, 김창영, 김룡호, 박경남, 서정순, 김옥화, 박애자, 로춘애,류광순, 편도현, 김군등 성숙된 시인들과 현대파의 시 풍격을 가진 박경상, 정란등 시인들이 있지요 그리고 강효삼 시인이 오셔서 활력을 불어넣고 있습니다 우리는 산재지구로서 모든 시풍격을 포용합니다. 연변 시인들의 말을 빌으면 시 쓰기가 편하고 행복한 곳이지요. 앞으로 시적 정신을 발양하여 더 높은 단계로 진출하리라 생각됩니다 비록 활동 기금을 구하기  힘들지만 각자가 자비를 내서라도 활동을 해야지요. (16) 김 시인님; 평론계에 좀 말해도 될런지요.비록 평론계에 대하여 아는것이 없지만. 평론계에는 편파성와 편견성과 주관 취향성을 극복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평론가들이 높은 각도에 서면 공정성이 생기고 시각이 맞춰지는것라 생각됩니다. 그리고 민족의 문학을 발견하고 고양하데서 평론의 작용이 중요합니다. 작품이 몸이라하면 평론은 옷입니다,옷이 날개란 말이있지않습니까, 몸의 곡선미가 아름다우면 입는 옷도 그 곡선미를 잘 살려내 더 아름답게 단장할수 있지 않습니까. 몸이 절구통 같거나 메주덩이 같으면 아무리 잘 단장 시키려도 격에 맞지 않습니다. 러시아에서 위대한 뿌슈낀과 레브 똘스또이.체호브 등 작가들이 있었기에 위대한 평론가 벨렌쓰끼가 있는것이 아닙니까   우리 료녕 문단은 몸매가 곱지 않아서인지 평론계의 관심이 적은것 같습니다. 좀 덜 곱더라도 고운 옷을 입혀 주시면 그래도 나설만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료녕에는 평론가가 없습니다. 평론가 선생님들에게 부탁하오니 밉더라도 좀 관심해주십시요   (17) 김 시인님; 중국 조선족 시단에 개인적으로 존경하는 시인은 누구냐구요,? 존경하는 분은 많지요, 그중에도 리상각 선생님을 더 존경합니다. 그분은 나를 시와 을 맺게한 장본인 이니까요. 청년 시절 시창작에 불타 올랐을적에 그분이 나를 시단에 등단시켰습니다 그것이 70년대이지요. < 야, 너는 시가 안되니 걷어치워라>고 꽥 소리쳤다면 지금 이 신세가 안되였을지 모릅니다. 혹시 그랬다 말하더라도 꺼지지 않고 계속 시창작에 집념했을지도 모를 일이고요 여하튼 시인이 되겠다는 욕망으로 피가 끓었으니까요, 그 분의 뒤에 나의 시가 한수 실려 있더라고요, 8년전 연변 회의에 갔을적에 드린 헌시지요 그 분은 많은 시인을 시단에 등단 시켰지요.그리고 관심도 많이 하시고요. 제가  첫시집 를 출간하였을적에 이란 수필을 써서 ( 1999년 10호)에 발표해 나를 고무격려 해주었지요, 지금도 그 수필을 고이 간직하고 있으며 가끔 들여다보며 고무를 받고있습니다 (18) 김 시인님; 저는 소방대 참군 시절에 3층에서 추락하여 구사일생으로 살아 나온 사람입니다 그래서 인생의 가치에대하여 누구보다 깊이 느끼는 사람입니다, 시는 나의 생명과도 같아요,. 6개월을 병실에 누워서도 시를 썼어요. 지금 와서 보니 시가 뭐길래 ? 그러나 죽음에서 살아 나기 위한 안간힘으로 지금도 시를 씁니다. 그러기에 허탈감도 남보다 깊고 존재의 가치에 대한 추구도 남보다 강렬합니다. 이런 정신으로 저는 시를 계속 쓰리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김 시인님; 시를 론하자면 끝이 없습니다, 시인이라면 령혼과 의지의 몸부림이 있어야 합니다 시단이 이런 정신이 없으면 고립의 처지에 몰리게 됩니다, 애탄만 하지말고 노력해 봅시다. 심양시 소가툰 화원신촌 서재에서    2010년 3월 8일           ///////////////////////////////////////////////// 시를 쓰는 10가지 흥취(시창작 단상) 리문호   시를 쓰는 것은 시인의 정감과 정서의 심리적 현상이다. 물론 시인의 정감과 정서는 시인이 축적한 체험, 지식, 감각에서 오는것이 당연하다. 시인의 심리학을 연구하려면 지각과 감각, 형상 사유와 이미지, 사유와 언어, 운률과 정서, 정감과 의지, 체험과 기억,관념과 지향 등을 떠날수 없다. 시를 쓴다는 것은 이런 종합적 심리활동인 것이라 본다. 이런 리론을 체계적으로 연구하는 것은 리론적으로 깊은 작업으로서 리론에 종사하는 분이나 시인들이 연구해야할 과제이다.물론 이미 연구하고 있는 분들이 계시리라 생각된다. 나는 나의 시창작 경험에서 체득한 < 시를 쓰는 10가지 흥취>를 정리함으로서 시인 심리학을 연구하는데 혹시 참고적 재료가 될가하고 제공하는 바이며 시를 쓰는 초학자들에게 조금의 도움이 된다면 좋겠다. 통속적으로 말해서 시를 씀에 흥취가 없다면 시인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시를 쓰는 것은 다른 심리활동과 구별되는 심리 상태로서 사회의 직업이나 명령, 임무의 속박을 벗어난 자유형이나 자발적인 심리현상이다. 또한 시간과 공간에서 자유로워지는 미적 향수의 심리 현상이다. 이런 향수를 간단하게 로 귀결하여 본다. (1) 상상하는 흥취 시인은 상상하는 흥취가 있다. 몸은 비록 좁은 공간이나, 로동현장이나 술좌석이나 회의 실에나 혹은 커피점에 있지만 마음은 그 장소를 벗어나 대자연의 절경에나,누구와의 만남이나, 추억이나, 과거이나, 미래에나 혹은 동화나 신화속으로 가있다.정신부석학에서 단순이 말하는 이른바 이 부족한 류의 사람에 속하는 사람들인지도 모른다. 시인은 현실, 력사, 미래, 추억, 혹은 동화, 환상, 공상.잠재 의식, 등 무한한 상상이나 련상속에서 시상이 발견된다. 시인의 정감활동의 무대는 상상이다. 그 무대(시인의 시적 세계)가 얼마나 큰 가에 따라 상상의 깊이와 폭이 결정된다. 시인은 자기의 시적 세계가 있어야한다 이 시적 세계는 자기만의 독특한 사유방식, 개성, 표현 능력, 풍격, 정서 등으로 구성된다. 상상은 미의 정신활동이다. 누구나 아름다움을 상상하려 하지 추한것과 악한것을 상상하려 하지 않는다. 특히 시인은 상상 사유, 즉 형상 사유가 발달되였으며 형상 사유의 기본 요소는 언어와 운률이다. 어떤 시적발견이 나타날때 그것은 시로 나타난다. 즉 한수의 시가 머리속에 생긴 것이다. 혼자 고요히 상상하는 것은 아름다움에 잠기는 좋은 일이다.    (2) 고독의 향수를 즐기는 흥취 현대인은 고독을 즐길줄 모르는 것이 탈이다. 고독하면 안절부절한다. 심지어는 고독을 참지 못해 우울증을 가지게 된다. 많은 예술가와 연예인들은 고독에 취약해 우울증이 쉽게 나타나는데 원인의 하나는 고독과 허무이다. 무대에서 수천 사람들의 박수 갈채를 받다가 일단 막이 내리게 되면 고독이 밀려온다. 공허하고 허무해진다. 즉 고독이다.그들이 고독을 극복하려면 공명심과 허영심을 최소한 억제하는 심리적 자질을 가져야한다. 그러나 시인은 원초로 고독한 사람이며 고독에 습관된 사람이다.고독속에 사유를 하며 고독을 합리하게 즐길줄 안다. 시인에게 있어서 고독은 상상과 작시의 좋은 환경이다. 혼자 적막하고 외롭다고 생각될때 책을 본다. 시를 본다. 그리고 조용히 상상의 려행이나 시정의 려행을 한다. 그러면 새로운 시가 생각난다. 이것이 바로 심리를 자아 조절하는 고독을 즐기하며 향수하는 흥취이다.  다른 시인은 몰라도 나 만은  고독할때 시를 쓴다. (3) 자작시를 감상하는 흥취 자기가 쓴 시를, 특히 오래된 시를 가끔 읽어 보게 되는데 향수를 느끼군한다. 그 시를 쓸때의 감정 정서속에 잠기는 일은 즐겁다. 또한 부족점을 찾는일도 즐겁다. 시란 감정저서의 기록이며 자국이다.또한 인생행로의 자취이다. 자기의 시를 감상하는것은 감정과 상상의 기억에 대한 새로운 감수이다. 서안의 진시황릉을 밟는 향수, 무한의 황학루에 올라 장강을 굽어보는 향수, 황산에 올라 운해의 해돋이를 감상하는 향수, 백두산에서 천지를 내려다 보는 향수,력사의 유적지에서 수천년의 력사속으로 려행하는 향수, 어떤 시정에 잠기는 등등 자기의 시속으로 들어가는것은 한장한장의 사진을 보는것처럼 새로운 감수를 느낀다.그리고 이를 통해 자기의 시창작 개성을 다시 발견하고 발양한다. (4) 시를 쓰고 다듬는 흥취 시 초고를 써놓았지만 설 익은때가 많다. 꼭지가 떨어 지지않고 풋내 나는 때가 많다. 그러면 푹 익게 나둬야한다. 즉 상상의 사유를 익게하는 것이다. 몇일후, 혹은 몇년후 혹은 몇십년후에 다시 보면 그 시의 수개 가치가 나타난다. 시인의 사유속에는 무수한 시적 소재들을 축적하고 시로 완성 시켜야한다, 그러야만 다산 시인이 될수있다. 그러기에 생활경력이 풍부해야하며 부단히 관찰하고 모색하는 습관으로 시적 소재들을 발견해야한다. 모든 시가 다 발표되는 것은아니다. 반복의 수개가 있어야한다. 어떤 시는 수개하다 보면 원래의 감정정서와 완전히 달라질때가 있다. 변화됨이 초고보다 못해 졌다고 생각될 때는 다시 원초로 돌아가 다시 수개하게 된다.어떤 시는 즉흥으로 써 놓고 만족되여 급급히 발표하였지만 후회할때가 많다. 이것은 과정과 시간이 부족한 탓으로 잘 다듬지 않은 결과이다. 한수의 시는 진물이 나도록 잘익어야한다 반복 다듬는 과정을 거쳐 푹익어 극치의 향기가 날때의 향수. 이를 다듬는 재미라 하겠다. (5) 시적 발견에 흥분하는 흥취 시인에게 있어서 창의(創意)력은 중요하다.창의력은 부지런한 학습과 관찰과 사고에서 이루어진다. 시인에게 있어서 이 창의력을 발상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며 동등한 의미를 갖고있다고 보야겠다. 관찰과 사유를 통해 습관된 사물이나 반복되는 생활속에서 문뜩 새로운 시적 발견이 나타날때가 있다. 어떤 일에 몰입하다가 문뜩, 잠을 자다가도 문뜩 령감이 떠오른다. 이럴때는 적어 놓아야한다.게으르면 잊어 버리게 된다. 그때의 정서를 놓치고 만다. 시적 발견은 나만의 것이여야한다. 다른 시인의 시와 류사하면 시적 발견이라 말할수없다.시적 류사성이나 일반화,도식화,보편화는 작시의 실패이다.다른 시인이 발견하지 못한 나만의 발견이 나만의 시를 완성시킨다. 물론 나만의 풍격과 나만의 개성도 뒤따라야 한다.개성이란 시인의 몸에 배여있는 특성이다. 이런 특성은 장기적인 시창작 활동을 통해 수립되며 또한 발전하고 개변한다. 시적 발견도 시인의 개성을 떠날수없다 시인에게 있어서 시적발견 보다 흥분되는 일은 없다. 시인은 이런 흥분이 있기에 시를 쓰는 모양이다. (6) 대상을 위해 시를 쓰는 흥취  친구나, 동료나, 가족이나, 련인이나 그 어떤 대상의 마음을 이끌어 잡기 위하여 자기의 감정을 표백하거나 토로할때 시를 쓰는 흥취가 있다. 특히 애정시가 그런 경우이다. 애정시는 여러가지 감정 정서로 나타나는데 실련, 열련, 초련, 미련(迷戀), 추련(追戀) 등이 있다. 심지어 거리나 상가에서 스쳐간 전혀 모르는 대상을 위해 쓰는 시도있다. 중국 송나라 때의 시인 륙유는 평생 당완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으로 쓴 애상시로 유명하다. 그의 사랑시는 애상으로 나타난다. 이를 귀납한다면 현실적으로 실존하는 사랑에 립각한 시와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거나 실현할수 없는  리상적 사랑에 대해 쓰는 시가 있다. 사랑은 많은 시인들이 시인로  된 원동력의 하나이다.만약 한수의 시가 읽는 독자와 공명을 일으킨다면 기쁜 일이다. 기실 시는 혼자서 쓰지만 혼자서 감상하는 것은 시로서의 의미가 없는것이다. 자기의 감정을 세상에 퍼뜨리는 표현주의 문학이다. 하기에 독자를 사랑하는 것은 시인의 기본이다.여기서 이란 독자에 대한 시인의 감정의 진실성을 말하는것이다. 그러나 시인이 시를 쓰는 동기는 언제까지나 시인 본인의 감정 에너지의 발로이지 독자의 구미에 맞게 쓰려고하는 것은 아니다.사회구조가 복잡하고 독자층도 복잡한 만큼 어느 독자층의 공명을 일으키는가 하는 문제일 뿐이다. 시를 써 놓고< 이것도 시야 ? >란 말을 들으면 불쾌한것은 당연하다.  시는 언제나 객관 사물에 대한 주관 심리 활동인것이다. 추상시라도 기실 객관사물이 우리의 두되에 반영된 결과이다. 이 심리 활동이 잘 되고 못 됨은, 공명을 일으키건 안일으키건 하는것은 독자들의 판단에 달렸다. 한수의 시를 잘 썻다고 자기는 흥미진진해 하지만 독자의 랭대를 받을 때가있다. 하기에 우리 시는 어떠한 독자층을 공명할수있는가를 막론하고 숨결이 담겨있어야하며 살아 있는 시를 써야한다. 대상을 위해 쓰는 시는 반드시 순정이여야 한며 진정이여야 한다. 슬프드라도,기쁘더라도, 간절하더라도, 감정의 진실성이 있어야한다. 위선이나 가식이나 언어 장난의 시는 그 효과에 손색이 간다. 죽은 시는  독자가 없다. 옛날의 좋은 시가 지금도 애독되는 원인은 그들의 시가 수천년이 지난 지금에도 죽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수의 시를 대상이 애독하고 사랑할때 시인에게 즐거움이 있는것은 당연하며 시창작 욕구가 생기는 것도 당연하다. (7) 사물을 감수하는 흥취 시인도 모든 보편적 심리활동과 마찬가지로 지각과 감각으로 사물을 관찰하여 감수를 얻는다. 또한 정신 세계의 그 어떤 추상적 사고를 통해서도 감수를 얻는다. 그러나 추상적 사고도 객관의 활동에서 축적된 결과이다. 감수는 시적 발상의 기초이다. 인간의 사회활동속의 한 성원으로 감수를 할줄 모르는 둔감으로는 시인이 될수없다. 시인은 모든 사물과 마음을 교감하게 할수있는 특수한 사유의 교류방식이 있어야한다. 례를 들어 꽃을 대면하였을때 향기와 모양만을 감상할것이 아니라 음운을 감상해야하며 향, 빛, 색, 모양의 움직임 등에서 언어로 대화가 통해야한다 이것이 교감이다. 마음으로 사물과 이야기하는 것을 미적 향수를 얻는 시인에게 있는 특수한 능력이라 말해야할까. 흥미있는 것은 어느 대학의 저명한 교수 수묵화 화가는 학생들에게 미술을 가르킬때 학생들더러 시를 많이 읽으라고 강조한다. 즉 시정이 있어야 그림도 잘그릴수 있다는 것이다. 한폭의 수묵화가 시정이 없으면 죽은 그림이기 때문이다. 시의 매력은 사물과의 교감을 언어로 표현한 시정, 혹은 음운이라 말할수 있다.한폭의 그림을 감상하는 것은 시각적 감각을 언어적 감각으로 두뇌에 전환하여 감상하는것이요 한수의 시를 감상하는 것은 언어적 감각을 시각으로 두뇌에 전환시켜 감상하는것이다. 즉 언어는 인류 사유의 가장 중요한 공구이다. 시인이 사물과 교감함에서도 언어는 감정교류의 매체이다.언어가 풍부하면 교감도 풍부해진다. 한수의 시를 구상하거나 감상할때 기실은 묵독의 과정이다. 즉 시각적으로 글을 보지만 두뇌에 반영되어 혀로 반사 시킨다. 랑독은 없지만 언어들이 혀에 와 닫는다. 외냐하면 목젖과 혀에 언어의 기억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또한 시각, 청각, 미각, 피부등의 감각 기능을 자극한다. 한수의 시를 감상하는것은 종합적 감각 기능의 활동 과정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시인에게 있어서 사물을 감수한다는 것은 종합적 감각 기능의 언어적 활동이다고 생각된다.   (8) 운률과 감정이 률동하는 흥취  시는 운률의 문학이다. 언어를 조직함에 있어서 감정 정서의 률동과 유기적으로 배합되여야 한다. 쉬운 말로 말해서 언어 조직은 외재률이라 한다면 감정 정서의 흐름은 내재률이다. 언어로 감정정서를 어떻게 표현하는가는 시인의 수련과 리듬의 미적 관념과 밀접한 련관이 있다. 시인은 감정 정서의 흐름을 시적 언어로 잘 다듬어야 한다. 그러나 시인의 정감이 진실해야한다 시를 쓰면서 이런것에 류의 한다면 리듬에 감정을 실어 움직이는 미적 감수를 느낄수있다. (9) 마음과 언어가 통하는 흥취 시인에게 있어서 언어는 형상 사유의 기본 원소이다. 언어가 결핍하면 감수도 결핍해진다. 유람하면서 어떤 절경을 본 감수를 언어가 부족하면 하고 감탄할 뿐이지 표현해 낼수가 없다. 다만 시각적 기억으로 밖에 남지않는다. 그러나 언어가 풍부하면 시로 잘 묘사할수있다. 언어로 이미지를 그려 낼수있다. 시창작을 하면서 적당한 언어를 찾지 못해 고민할때가 많다. 수개란 기실 언어의 수개이며 감정 정서를 언어로 다듬는 수개이다. 알 맞는 언어를 찾지 못해 사전을 찾아 보아도 생각나지 않다가 문뜩 몇일이 지나 생각 날때가 있다. 기실 시인에게 있어서 언어가 중요한 것은 언어는 감정정서의 표기이기 때문이다. 언어의 수련은 시인에게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것이며 가장 간고한 것이며 경상적으로 탐구해야하는 것이다. 그것은 시인의 감정정서를 언어 외에 다른 어떤 수단으로는 표기할수 없기 때문이다. (10) 심리적 효과의 흥취 시를 쓰는것은 미적 향수이다. 직업과는 관련이 없이 각분야의 직업에서 시인들이 배출된다.그것은 자기의 정감을 시란 쟝르로 누구나 표현하고 전달할수있기 때문이다. 시를 쓰는것은 객관사물이 혼잡하게 반영된 심리를 추리고 정화하는 과정이다. 시를 쓰기를 몰입하면 다른 불미한 인상들이 담박해지거나 사라져 마음이 가벼워진다. 청정해진다, 밝아진다.아름다움속에 머물게 한다. 분노할때  시를 쓰면 마음이 후련해질것이고 슬플때  시를 쓰면 마음을 달랠것이고 우울할때  시를 쓰면 경물에 마음을 의탁할것이다 이것이 바로 심리적 효과의 반응이다. 이상 시를 쓰는 열가지 재미를 나의 경험에 근거하여 생각나는 대로 정리하여 보았다. 물론 아직 리론적으로 승화하지 않은 나 자신의 경험인것이라 생각된다. 시인이 되여 부자가 되려는 것은 망상이다. 그러나 시인은 가난하더라도 고생하더라도 마음에 넉넉한 여유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다. 자유롭게 살아가는 사람이다. 자유로운 심리활동에는 언제나 경쾌함, 건강함, 명쾌함, 진실함, 순수함,후련함이 뒤 따르는 것이다. 상상은 힘겨운 생활에서 평온을 찾고 희망을 구상하고 미를 그리며 시정에 머무는 정신생활 이기도 하다. 거기에는 아름다운 영상과 시인이 그리는 지향 펼쳐져 있다. 시인이 되는 것은 고군분투하는 일이지만 일반인이 감수할수 없는 정신적 행복이 있다.이런 의미에서 저명한 시인이 되는 목적 이기  보다는 누구나 다 시를 쓸수 있는 혹은 시를 감상할수있는 시대가 열리면 좋겠다           
1797    토템문화를 알아보다... 댓글:  조회:3688  추천:0  2016-11-11
[ 2016년 11월 10일 11시 41분 ]         호남(湖南)성 천주(郴州)시 북해(北湖)구 대형 동굴 식당,ㅡ “토템문화”와 조화세계            남영전 / 전 길림신문사 사장               전 장백산잡지사 사장     목차   1, 들어가는 말 2, 인류의 아프리카 기원설 3, 단군신화의 발상지 4, 토템은 씨족의 개념 5, 민족은 문화의 개념 6, 토템관념의 현실의의 7, 나오는 말           들어가는 말 필자의 짧은 글 《토템문화가 현대인류에게 주는 중요한 계시》가 2004년 10월부터 《문예보》, 《중국민족보》등 10여개 중국주류 간행물과 우리 말 간행물인 《문학과 예술》, 《도라지》와 한국의 문예지인 《문예시대》에 발표된 후 근간 몇 개월동안 우리 문단의 일부 지식인들이 이 글의 관련 내용에 대해 질의(質疑)가 있었다. 토템문화에 대한 관심과 흥취는 참으로 좋은 일이다. 본고는 상기의 짧은 글의 관련 내용에 대한 다소 상세한 담론이다.     인류의 아프리카 기원설   영국의 생물학자 다윈(達爾文)의 진화론이 발표된 후 인류의 기원과 이동에 관한 과제는 줄곧 국제과학연구계의 하나의 열점화제다. 현생 인류의 조상은 누구인가? 중국학계에는 두가지 주장이 있다. 하나는 아프리카 기원설이고 하나는 본토기원과 아프리카기원의 융합설이다. 융합설을 주장하는 인류학자의 증거는 주로 아래의 몇 가지다. 1929년 북경 주구점에서 발견된 50만년전의 북경원인 두개골은 아세아에서도 인류가 기원했다는 증거다. 1972년부터 하북 니하만(河北泥河灣)에서 구석기시기 인류유적 80여 개가 발굴되었는데 호두량유적(虎頭梁遺跡), 소장량유적(小長梁遺跡)은 몇 십만년, 심지어 200여 만년 전의 문화유적지로서 돌도끼, 돌망치 등 구석기(舊石器)가 출토되었다. 30여년의 연구로 전문가들은 이곳의 인류활동은 260만 년전부터였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것은 아프리카 대륙의 인류활동과 동일시기라고 한다. 그리고 역시 하북 울현(蔚縣)에서 300만 년 전의 석기를 발견했는데 이것은 아프리카에서 260만 년을 한계로 하는것에 대한 초월이라고 보고있다. 20세기 80년대 운남 원모지역에서 170만년 전의 원모인을 발굴할 때 석기도 함께 출토되여 학자들은 원모인을 “동방인”으로 이름을 지어주기에 이르렀다. 또한 중국에서 발견된 제 3빙천세기의 삼림고원(森林古猿), 녹풍고원(綠豊古猿), 상신원(上新猿), 강소성에서 발견된 4000만 년 전후의 고급 영장유화석 등은 아세아에서도 인류가 기원했다는 것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고 하였다. 2007년 4월 2일, 중국신화사통신은 중국과학원고척주동물 및 고인류연구소가 “중국인의 조상은 전부 아프리카에서 온 것만이 아니다”라는 연구 결과를 발표하였다. 보도에 따르면 최근 이 연구소는 북경 주구점 유적지 서남쪽 6Km 거리의 전원동(田園洞)인류화석의 연구를 완성했는데 전원동인의 특징은 절대다수의 현대형 인류와 일치하다는것이다. 이것은 곧 아프리카현대형인이 중국의 고로형인을 대체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한다고 하였다.① 현생 인류가 어디에서 왔는가? 이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곤혹에 빠지게 하는 난제다. 이 난제를 풀기 위하여 세계 각국의 과학가들은 여러 가지 추리와 논증을 내놓았다. 1991년 9월, 오스트랄리아와 이탈리아 국경지대의 알프스 산맥에서 미이라 한 구가 발견되었다. 방사선 년대측정 결과 약 5천년 전의 시체로 판명됐지만 누군가 남미의 미이라를 옮겨다 알프스의 눈밑에 묻은 것이라는 조작론이 끊이지 않았다. 1995년 영국 옥스퍼드대 연구진이 설인의 미트콘드리아 DNA를 분석한 결과 유럽인이 분명한 것으로 확인됐다. 그의 DNA는 현재의 유럽인과 거의 차이가 없었다. 연구진은 나아가 영국 남부지방의 경영 컨설틴트인 마리 모슬리라는 녀인이 설인의 후손이라는 사실도 밝혀냈다. 이런 결과들을 통해 DNA가 인류의 계보를 탐구하는 강력한 수단으로 떠오르자, 20세기 90년대 후로부터 인류학자와 분자생물학자들은 전세계 민족들의 DNA를 수집해 분석하기 시작했다. 보통의 DNA는 세대가 지남에 따라 부모의 것들이 섞여 복잡하게 변하지만, 미토콘드리아와 Y염색체의 일부 유전자는 거의 변하지 않는다. 미트콘드리아의 유전자는 어머니로부터, Y염색체는 아버지로부터만 물려받아 뒤섞임이 없기 때문이다. 단지 어쩌다 돌연변이가 일어나 하나 둘 정도가 변할 뿐이다. 또 여러 민족간의 DNA의 유사성을 살피면, 가까운 친척인지 먼 친척인지 하는 “근연관계”를 파악할 수 있다. 사촌은 아버지대에서 육촌은 할아버지대에서 갈려나오듯, DNA가 많이 다른 두 민족은 더 먼 옛날에 관계가 끊어진 것이다. 한발 더 나아가 전체 민족간에 이런 근연관계를 파악하면, 종내에는 현생인류가 언제쯤 공동조상으로부터 갈라져 나왔는지를 알 수 있다는게 진화인류학자들의 생각이다. 인류기원연구프로젝트 총지휘인 미국의 스펜서 월즈의 저서 《인류전사(人類前史)》(동방출판사, 2006년판)는인류의 유전인자 보고서이다. 그의 보고에 따르면 오늘날 세계 각지에 살고 있는 모든 인류는 하나의 공동한 조상을 갖고 있는데 바로 6만년 전 아프리카에 살던 한 남성이라는 것이다. 5만년 전 장시간에 걸려 가뭄과 기황이 지속되면서 그들 중 한무리가 고향을 떠나 모험적 이동을 시작, 수만년에 걸쳐 사람이 살만한 지구우의 거의 모든 것을 차지한다. 현재 지구상 모든 사람들은 지역에 따라 문화, 체형, 생김새, 피부색이 커다란 차이를 보이지만 과학연구결과는 85%의 유전인자변이는 전반 인류가 공유하고 있는 것이며 약 8%만이 인종획분의 증거로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서로 다른 인종의 차별은 8%에 그칠 뿐이라는 것이다. 인류는 공동한 생물속성을 가지고 있으며 인종에는 우렬의 구분이 없다는 것이다. 스펜서 월즈는 여러 나라 과학자들과 합동연구를 진행한 결과 화석으로 발견된 2백만년전의 오스트랄로피테구스나, 50만년 전의 북경인, 30만년 전의 네안데르탈인 등은 모두 아프리카에서 출발한 현생 인류가 도착하기전에 멸종됐음을 밝혀냈다. 고고학의 고증으로 보면 조선반도에는 60만년전부터 인류가 생활하고 있었다. 하지만 현생 인류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스펜서 월즈는 조선민족은 약 4만년전 중앙 아시아에서 동으로 이동해와 형성된 것으로 최첨단 DNA분석 결과를 통해 밝히고 있다. 아프리카에서 발원한 현생 인류가 중앙 아시아 일대에 옮겨와 살다가 3-4만년 전에 갈라진 원주민 가운데 서북쪽으로 이동한 일파가 유라시아인종이 됐고 등으로 몽골을 지나간 일파는 중국 북부, 한국 등에 퍼졌으며 또 한 일파는 남쪽으로 해서 중국 남부와 동남아로 퍼졌다는 것이다. 유전적으로 한국인은 북방한족과 가장 가깝고 다음으로 일본, 몽골, 남방 한족순으로 가깝다는 것이 한국단국대 생물학과 김욱교수의 견해다. 한국 카돌릭대학의 한훈교수가 한국인과 여러 민족을 대상으로 항원을 검사한 결과 한국인들은 일본인, 미르마인, 인도 동북부의 소수민족, 운남성주민, 화북 한족, 동북에 거주하는 주민들과 가장 가까운 것으로 실험결과가 확인되었다.(2004년 5월 11일자 한국 연합뉴스)  필자가 인류의 아프리카 기원설을 접하게 된 시기는 1989년 5월 캐나다와 미국을 방문할때였다. 미국에 거주하는 한 한인 작가의 수필에서 이 문제가 논의되여 신선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후 의도적으로 많은 자료들을 접했는데 한국에서 인류의 본토기원설을 주장하는 학자는 단 한사람도 없었으며 모두다 아프리카 기원설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 학계의 현실이었다. 중국학계에서는 미국, 영국, 호주, 인도네시아 등 외국 연구기구와 합작연구 결과 본토기원설로부터 아프리카 기원설을 수용하는 현상이 우세를 보이고 있다. 또한 일부 본토기원설을 주장했던 학자들도 아프리카 이민설을 배제하지 않고 본토인류기원과의 융합을 주장하는데 도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인류기원 연구에서 DNA의 측정방법은 현생인류는 아프리카, 아세아, 유럽, 미주 각 대륙에서 동시에 진화되었다는 상대이론(相對理論)을 흔들어 놓았고 아프리카 기원설을 수용하는것이 세계학계의 보편적인 추세다.     단군신화의 발상지 필자가 단군신화의 발상지가 돈황부근의 삼위산이란 말을 들게 된것은 지난 세기 90년대 초반 연변대학에서 개최된 한중문학심포지엄 때었다. 이번 심포지엄에 한국학자 10여 명이 참석했는데 한국 월간 문예사조사의 안수길선생이 한국측 주체발표자로 “동이족의 우월성”이란 논문을 발표했다. 그는 단군신화와 관련되는 내용을 풀이하면서 “동이의 조상은 막고골로 유명한 돈황에 있는 삼위산으로부터 시작됐다고 한다.” “지금 막고굴 어구 좌측 ‘막구굴박물관’이 있는 삼위산의 몇 백메터 지하에 관심을 가져야 할지도 모른다. 무엇인가 묻혀 있을 가망성은 있다”고 하였다.  단군신화의 발상지가 돈황의 삼위산? 나로서는 다소 어리둥절한 문제였다. 나의 상식으로는 단군신화의 발상지가 줄곧 조선반도였지 중국쪽으로는 생각조차 못한 일이였다.  1987년부터 1992년 세 번이나 조선을 방문하여 묘향산에 올라 단군굴의 전설을 들었기에 조선의 학자들은 단군신화발상지에 대해 어떠한 견해를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63년 2월, 조선과학원 출판사에서 출판 발행한 리지린선생의 저서 《고조선연구》에는 이렇게 씌어있다.-- 조선 《고기》에 의하면 단군의 출생지는 《삼위태백(三危太伯)》이다. 이 《삼위태백》은 한 개의 지명이 아니라 삼위와 태백의 두 개의 지명을 결부시킨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동국여지승람》의 저자는 삼위태백을 황해도 구월산으로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 설은 후세 사람들의 부회에 불과한 것이다. 우리는 《삼위》라는 지명을 우리 나라 지리 문헌들에서는 찾아 볼 수 없다. 태백산은 《삼국유사》에서 묘향산이라고 쓰고 있으나 이것은 후세의 부회된 명칭이며 고조선 국가형성시의 명칭이라고는 도저히 볼 수 없는 것이다. 요컨대 삼위와 태백은 별개의 지명인데 후세의 불도들이 이 양자를 억지로 결부시킨것에 불과하다.  《삼위》란 지명은 중국 고대문헌에서 볼 수 있는 유명한 산이다. 그러면 이 삼위산이 어디 있는 산인가? 고힐강교수는 《우공평》의 삼위산의 위치를 고증하여 다음과 같이 썼다. (三危山,左傳昭公九年杜預汽說, 이하 략, 필자)이에 의하면 고대의 《삼위산》은 오늘 중국의 서쪽 맨 끝에 있는 산이라는 것은 확실하나 오늘의 어느 산인가는 불명확하다. 일본의 어떤 사가는 삼위산을 알타이산으로 비정하고있다. 일본 사가의 설은 부정확하기는 하나 삼위산이 대체로 알타이산과 련결되는 현 중국 서북방의 산인 것은 틀림없다… 그러면 어찌하여 단군신화에 이러한 산이 관계되어 있는가? 이 문제를 고찰함에 있어서 우리는 단군신화의 가장 이른 기록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위서》에는 이 산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런데 《삼국유사》에 인용되어 있는 《고기》에 이 산명이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고기》의 편찬자들이 《삼위》(三危)를 고대 중국의 유명한 산임을 모르고 썼다고 보기는 곤난하다. 진술한 바와 같이 기원 1세기로 낙랑사람들이 《서경》을 통달했다는것이 확증되니 고조선인들이 《삼위》가 《서경》에 보이는 산명임을 알았을 것이 명백하다. 그렇다면 《고기》의 편자들이 어찌하여 그 먼곳에 있는 산 이름을 단군신화와 결부시켰는가? 이것은 《고기》편자들의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 사상의 표현이라고 지적할 근거는 없다. 그들은 단군을 고조선의 창건자로 인정한 것이며… 단군이 구체적 인물의 이름이 아닐진대 고조선족의 선조가 《삼위산》과 관련되고있었다는 것을 《고기》편자들이 인정했다고 볼수 있을것이다.... 단군신화에 《삼위산》이 관련되어 있는 사실은 주목하여야 할 문제로 남는다.② 45년 전에 조선의 학자 리지린선생이 단군신화의 발상지에 대해 이렇게 선명한 견해를 펴냈다는 것은 실로 그는 실사구시적이고 학문연구가 깊으며 양지가 있는 학자임을 말해준다. 돋보이는 학자가 아닐 수 없다.  리지린선생의 말마따나 단군신화에 《삼위산》이 관련되어있는 사실은 주목하여야 할 문제로 남았다. 이 몇 년간 한국의 학자들도 《삼위산》에 대해 관심을 돌리고 있다.  한국 효성여대 박은용교수는 30년전 일본 도꾜대 객원교수 시절 우여곡절 끝에 한자, 만족어, 몽골어, 아라미아어, 타밀어, 장족문자 등으로 된 청나라 건륭 28년(1763년)에 편찬된 지리서 《흠정서역동문지(欽定西域同文志)》를 입수했는데 이 고서에 “삼위”에 대한 기록을 인용하면서 “삼위산이 곧 천산이며 이를 백산이라고 한다고”하였다. 그는 “지금까지 ‘삼위태백(三危太伯)’이란 글귀에 대한 설득력 있는 설명을 하지 못했던게 우리 학계의 실정이다.”면서 “우리 학계가 민족의 기원 신화에 나오는 ‘삼위’란 글자가 태백을 수식하는 관용어인지 별도의 지명인지에 대한 학술적인 규명도 못하고 있다”며 “천산 일대의 위글족 등과 우리 민족은 인종적, 언어풍속학적으로 유사점도 많아 역사, 언어, 문화인류학계의 연구가 뒤따라야 할것”이라고 견해를 피력하였다.③  한국상고사학회 회장 율곤 이중재선생은《신시개천경(神市開天經)》(원저 神志赫德)을 입수해 공개했는데 관련 원문에 “下視三危太白,三危山名,非今外興安嶺也,又非今文化九月山也,乃今甘肅界敦煌縣所在地三危山也,本黎苗祖盤古初降之地是也”(아래를 내려다보니 삼위태백이 보였다. 삼위란 산의 이름, 지금의 흥안령이 아니고, 지금의 문화구월산도 아니며 지금의 감숙성 경계이다. 이곳은 돈황현에 있는 삼위산이다. 본려 묘족의 조상 반고가 처음 내려왔던 땅이다.)라고 적혀 있는 것을 지적하고 나서 “三苗 三危山의 관계에 대해서는 堯典,山海經,愚責,韓非子,管子,呂氏春秋,呂刑,繆鳳林 등 많은 사서에서 밝히고있다”면서 “삼위산은 동북아 전체를 놓고 중국의 서쪽 감숙성의 삼위산 한 곳 밖에 없”는 이상 “‘삼국유사’의 환웅에 대한 기록에서 삼위산을 언급한 것은 함부로 넘겨 버릴수 없는 앞으로 우리 민족의 근원을 찾는 일과 무관하지 않을 것으로 본다. 삼위산의 서북쪽엔 천산산맥이 있으며 우랄알타이 이족의 근거지로 인식되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율곤선생은 이 지역을 《삼국유사》에서 말한 태백산 일대라고 보고 있다.  단군신화의 발상지를 놓고 한국 학계는 구월산설, 태백산설(묘향산), 백악산설이 있고 감숙 돈황 삼위산설이 있다. 그리고 또 한가지 유의해야 할 점은 새로 발견된 문헌자료와 고고학자료도 조선반도를 벗어나 중국의 요동, 요서, 산동, 하북, 산서, 섬서 등 지로 부단히 확대되고 있는 추세다.  무엇 때문에 단군신화의 발상지가 이렇듯 범위가 넓어지고 복잡해지는가? 그 원인을 필자는 다음과 같이 귀납해보았다. 첫째, 단군신화 발상지에 관심을 가진 연구가들이 점점 더 많아지고 문헌자료와 고고학자료도 점점 더 확보되고 있음을 말해준다   둘째, 단군신화의 유전범위가 넓고 영향력이 크며 그 때의 여타 씨족, 부족과도 무관하지 않음을 말해준다. 셋째, “삼위태백”이 적혀 있는 일연의 《삼국유사》와 일연과 동시대인인 이승휴의 《제왕운기》의 내용과는 차이가 있기 때문에 학자들의 이해와 해설이 각기 달라졌다.  상기의 현상을 보면서 필자는 이런 생각을 해보았다.  신화는 설화(說話)로서 사람들의 입을 통해 유전되고 또 기록을 통해 문헌에 남긴다.  사람과 더불어 이동하는 신화는 세대의 바뀜, 시대의 변천, 환경의 지배로 변화를 가져오기 마련이다.  신화의 흐름은 역사의 흐름과 무관한 것이 아니다.  때문에 한 신화를 연구함에 있어서 그 신화의 탄생과 유전궤적을 통 털어 연구함이 타탕성을 가진다고 생각해 본다. 예를 들어 현존의 연구를 보면 단군굴이 있는 묘향산은 단군신화의 최후 정착지의 한곳일수 있다. 그런데 왜서 이곳을 단군신화의 최초의 발상지로 말하는가? 만약 틀렸다면 어디가 어떻게 틀렸는지 차분하게 연구하고 논의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토템은 씨족의 개념 토템이란 용어가 언제 나왔는가?  현재 학계에서 보편적 인정을 받는 것은 1791년 영국의 상인 요한랑그의 저서 《번역원 겸 상인인 한 인디안인의 항해와 여행》인데 이 저서에서 미주 인디안어의 방언인 totem(토템)이란 용어가 처음으로 등장했다고 한다. 하지만 중국학자 정원자는 1725년에 출판된 이탈리아 학자 비꼬(維柯)의 저서 《신과학》의 내용이 만약 주광잠(朱光潛)선생의 번역오차가 없다면 “토템”용어의 등장시간을 140여년 앞당길 수 있다고 하였다.④  토템의 정의는 무엇인가?  북미 인디안어의 방언 totem의 뜻은 “형제 자매 친척관계”다.  학계에서 토템에 대한 정의는 각이하다.  미국학자 모르간은 토템은 한 개 씨족의 표지 또는 도휘라 하였고 프레이저는 토템은 친척이며 조상이라 하였고 오지리학자 프로이드는 토템은 종족의 조상인 동시에 수호자라고 하였다. 토템의 정의, 혹은 토템의 내함 문제는 문화인류학, 종교학, 민족학, 민속학 등 학계의 뚜렷한 하나의 큰 과제다. 하지만 학자들이 토템에 대한 이해와 해설은 지금까지도 통일적인 정의를 내릴 수 없는 실정이다.  필자가 공부를 하면서 토템은 전사시기 인류최초의 우주관이고 전사시기 인류의 제일 고로한 원시종교형식이란 것을 인식하였다. 원시인들은 자신들과 더불어 사는 동물, 식물과 천체를 영물이고 신이라고 믿었다. 자신의 조상의 탄생은 어느 동물이나 식물, 혹은 천체와 관계가 있다고 여겼는데 이 관계가 있는 물체는 곧 그들의 토템물로 숭배를 했다. 이렇듯 원시인들은 지(知)적과 지(智)적이 아닌 영(靈)적인 사유방식이었다. 때문에 원시인들은 조상의 탄생과 관련이 있는 물체를 친척으로 생각했고 조상으로 모셨으며, 또한 영물이고 신인 그들(토템)이 후대들인 자신을 보호해준다고 믿었다. 씨족사회에 와서 이러한 토템은 또 씨족과 씨족을 구분하는 표지 혹은 도휘로 되었다. 이렇게 상기 토템에 관한 각가지 설을 종합해놓으면 상대적으로 완정한 토템의 정의 혹은 내포가 아닐가 싶다. “토템” 두 글자의 본질, 혹은 핵심은 “친척”이라고 필자는 보고 있다. 하여 “토템”을 “친척”으로 바꾸어 말해도 전혀 문제가 될것이 없으며 더 쉽게 마음에 와 닿을수 있을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토템의 산생시기는 언제인가? 지금까지 발굴된 고고학의 증거는 토템의 산생시기는 지인(智人)시대인 25-20만년전이란 것을 말해 준다. 실제로 토템 의식의 발생시기는 이 년대보다 훨씬 더 이른 40만년전일것으로 추정하지만 아직까지 고고학적 발견이 없다는 이유로 이 설을 부정하는 학자도 있다.⑤  이렇듯 까마아득한 옛날에 발생한 토템은 인류의 진화, 발전과정에서 하나의 자연실체였고 또 하나의 문화실체였다. 자연실체로 말하면 토템은 신비로운 영적 힘이고 문화실체로 말하면 토템은 인성을 담은 현실적인 힘이다. 인류의 발전과정에서 토템의 작용은 무엇인가? 필자는 나름대로 다음 세가지가 특별히 중요하다고 본다.  첫째, 토템은 인류문화의 시원이다.  원시인들은 토템숭배를 했기에 자신이 살고 있는 동굴이나 암벽에 토템형상을 그리거나 새겼고 자신의 몸에 문신(紋身)을 하였으며 도자기에 토템물을 그려 구웠다. 이것이 곧 인류 최초의 미술의 탄생이다.  원시인들은 또 자신들이 숭배하는 토템동물을 잡아 고기를 먹고 배고픔을 달래면서 그 동물의 가죽과 뼈를 모아 놓고 둘러서서 참회, 혹은 양해를 구하는 모임을 가졌는데 그런 참회의 뜻을 높고 낮은 말의 음조로 표현하다보니 노래가 되었고 토템물의 동작을 모방하다보니 춤(무용)이 되었다. 이것이 곧 인류최초의 노래와 춤의 탄생이다.  토템물의 가죽과 뼈를 놓고 원시인들이 참회의 모임을 가졌다는 것은 그들은 이미 참회를 할 줄 아는 사유를 가졌다는 것을 말하는데 이것은 곧 철학적 사유의 탄생을 의미하며 이런 모임은 곧 하나의 제의(祭儀)로서 원시 종교의 탄생이 아닐 수 없다.  이로 보아 예술, 철학, 종교의 탄생은 토템숭배를 그 기원으로 하는것이다. 그래서 토템숭배는 인류문화의 시원(始原)이라고 한다.  둘째, 토템은 씨족사회의 헌법이다.  씨족사회보다 20만년 좌우 더 일찌기 발생한 토템숭배는 원시공사(原始公社)단계를 거쳐 4만년 전인 씨족사회에 와서는 씨족사회 성원들의 행동의 지침이 되었다. 한 토템을 숭배하는 씨족은 가까운 친적관계를 가진 한 집안이기에 서로 서로 보살피며 살아야 한다. 자신들의 토템은 그들의 친척이고 조상이고 그들을 보호해주는 수호신이기에 살해하지 말고 존경하고 숭배하여야 하며 그들의 거주지에는 어떤 형식으로 표시를 해놓는다. 한 토템씨족은 한집안이기에 통혼은 금기시되었다. 다른 토템씨족과 혼인관계를 맺어야 한다. 이러한 규정과 금기는 실상 씨족사회의 헌법으로 그 위력이 대단하여 사회질서의 유지와 인류의 발전에 크나큰 기여를 하였다.  셋째, 토템은 성씨의 내원이다.  인류는 태어나자마자 성을 가진 것이 아니다. 원시 인류에게는 원래 성이란 부호가 없었다. 원시가족시대에 발생한 토템의 최후형태는 씨족사회를 형성하는 역할을 하였다. 가족토템의 간단없는 확장과 더불어 씨족사회가 형성되었고 나아가 토템의 분화(分化)를 가져왔다. 때문에 동일한 부족내부에 하나의 토템이 아니라 여러 개의 토템을 가지는 현상이 불가피하게 나타났다. 토템이 씨족의 표지가 되면서 씨족성원들은 토템과 관련되는 성을 가지게 되었다. 우리들이 잘 알고있는 동의족의 시조 복희(伏羲)는 성이 풍(風)씨다. 문일다선생의 《복희고(伏羲考)》에 의하면 고대 번자체의 바람“風”자와 벌레 “蟲”자는 원래 한글자였다. 벌레“蟲”자는 뱀을 말하는데 풍씨는 뱀의 소생이라고 한다. 실지로 복희가 풍씨인것은 그의 토템이 뱀인 것이다. 그리고 그는 또 우뢰신의 아들이라고 해서 우뢰도 그의 토템이 되여 그는 한쌍의 토템을 가진셈이다. ⑥ 부여(夫餘)는 역시 동이족의 한갈래로 소, 말, 돼지, 개, 닭, 양 등 육축을 토템으로 하였고 또한 토템을 관직의 칭호로 하였다. 그리고 흑룡강류역에 소호(少昊, 동이족)의 후예라고 불리우는 한무리는 개를 조상으로 모셔 구국(狗國)이란 나라가 생기기도 하였다.⑦현존사회에서 牛씨, 馬씨, 狗씨가 있고 鷄씨, 羊씨, 豬씨는 찾아볼수 없는데 이 鷄, 羊, 豬와 동일음인 姬, 楊, 朱 세개 성씨와 관련이 있지 않는가 하는 문제를 필자는 《부족문화와 선진문학》의 저자 이병해선생과 담론한적이 있었는데 그런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 그와 나의 똑같은 생각이었다. 황제(黃帝)는 토템이 곰이기에 그는 웅(熊)씨라고 불리웠다.  우리 민족성원과 토템은 어떤 관련이 있는가?  우리 민족도 씨족사회, 부족사회를 거쳐 지금의 조선민족으로 형성되였다. 토템이 씨족사회이전의 산생물이지만 씨족사회의 표지로 되었고 씨족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작용을 하였기에 우리 선조의 씨족, 부족사회에 토템이 없을수 없다.  문제는 씨족, 부족사회 때 매 개인의 숭배대상물이었던 토템이 민족이 형성되면서, 특히 사람들이 새로운 종교들 받아들이고 공업문명이 발달됨에 따라 토템숭배는 광채를 잃었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점점 아리숭한 옛날 이야기로 되었다는것이다.  물론 지금에 와서 4만년 전부터 흥성했던 토템숭배의 문화를 재현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고고학 발견, 고서의 기록, 신화전설은 우리가 선조들이 숭배했던 토템물을 얼마만이라도 찾을수 있는 단서를 제공해준다.  씨족, 부족사회 때 토템숭배가 얼마나 흥성했는가 하는 것은 민속학자 우병안선생의 저서 《중국민속학》에서 그 예를 찾을 수 있다. 호주에서 700개가 넘는 토템 표기를 발견했다. 한 부족내부의 각 씨족은 각기 부동한 토템표기를 가지고 있었다. 조사에 따르면 호주의 알란트(阿蘭特)부족과 놀리노(露裏惹)부족은 모두 442종의 토템을 가졌다.⑧ 상대적으로 과거가 잘 보존되어 있는 호주에서 한 부족내부에 이렇게 많은 토템물을 가졌다는 것은 우리에게 시사해주는 점이 적지 않다.  2만5천년전부터 현생 인류의 조상들이 조선반도로 이민왔다는 학자들의 견해에 따라 또 그 때 사람들은 틀림없이 씨족, 부족들의 성원이었기에 그들 각자의 토템물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고려 때 일연이 쓴 《삼국유사》가 조선민족의 최초의 고서라고 하니 유감이 아닐 수 없다. 선조들이 실제로 숭배했던 토템물은 그들의 몸과 함께 땅속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지금 우리가 능히 찾을 수 있는 것은 쌀에 뉘 찾기에 불과하다.  보통 조선민족은 동이족(씨족, 부족)의 후예라고 하는데 조선민족을 형성시킴에 있어서 동이족(씨족, 부족)이 주종을 이루었을수 있지만 여타 여러민족(씨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 필자의 견해다.  동이족(씨족, 부족)에 속하는 토템물은 어떤 것이 있는가? 이병해선생의 저서《부족문화와 선진문학》에 동이족(씨족, 부족)의 토템물이 거론되었다. 태양, 새, 뱀, 용, 여우, 닭, 개, 돼지, 양, 소, 말, 제비, 꿩, 봉황, 비둘기, 소리개, 뻐꾹새, 까치, 물고기, 수달, 사슴, 우뢰, 구름 등이 동이족(씨족, 부족)의 토템물이다. 그에 따르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곰이나 범은 동이족(씨족, 부족)의 토템물이 아니라 황제(黃帝)를 대표로 하는 서북 고대민족의 토템물이었다. 우리 민족의 조상탄생신화로 믿는 《단군신화》에 곰과 범이 등장한 것은 우리 민족의 조상도 황제를 대표로 하는 서북 고대민족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말해 준다. 이병해선생은 황제집단의 토템문화에 대해서는 선배학자들이 일찌기 연구를 시작했고 일정한 진전을 가져 왔지만 이 영역은 진일보 개척할 여지가 있고 허다한 문제는 다시 인식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우리 민족성원의 토템물을 연구할 때 반고(盤古)의 후예는 동이계통, 소호씨의 후예가 부여(夫餘), 고구려는 부여에서 나왔으며 은나라의 왕실이 동이족, 진시황도 동이족, 그리고 여진(女眞)족도 후기의 동이계성원임을 념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인류사는 우리 민족도 여타 민족과 같이 여러 부동한 씨족, 부족의 융합체라는 것을 말해준다. 때문에 우리 민족의 조상들이 수많은 토템물을 가질수밖에 없었음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지금에 와서 학자들이 토템문화에 관심을 돌리고 있는 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한국의 한국학중앙연구원 허흥식교수는 《단군신화와 동아시아 민족신화의 토템에서 범의 위상》이란 논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한국 고대신화의 토템은 범, 곰, 사슴, 고니 등 야생동물 뿐 아니라, 해와 달과 북극성 등 천체를 내포한 천신이 있고, 말과 소, 돼지 등 가축과 산천과 바위와 고목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생물과 무생물이 포함되었다. 이 가운데서 맹수인 곰과 범은 불교에 의해서도 소멸되지 않는 대표적인 토템이고, 그 가운데서 범은 곰보다 실제로 우세한 토템이었을 가능성이 크다.⑨  토템을 어떻게 찾는가? 선조들의 탄생신화는 우리가 토템을 찾는 근거로 된다. 토템물은 모체감응(母體感應), 입거(入居), 직접 선조들을 생육, 혹은 변한 동식물과 기타 객체 대상물이다. 그리고 선조들이 탄생할 때 필요한 전제조건, 혹은 도움이 되었던 물체도 토템과 무관하지 않다.  사례의 하나로 고주몽의 탄생신화가 전형적이다. 《위서》(魏書)의 기록에 의하면 주몽의 어머니 하백녀를 부여왕이 방안에 가두어 놓았다. 하루는 해빛이 하백녀의 몸을 비추었다. 그녀는 몸을 돌려 해빛을 피했지만 해의 그림자는 또 그녀를 따랐다. 그로하여 그녀는 곧 임신이 되었다. 그녀가 낳은 것은 알이었는데 크기가 다섯되나 되였다. 부여왕은 그것을 꺼리어 그 알을 개에게 던졌지만 개는 이 알을 먹지 않았다. 또 돼지에게 주었지만 돼지도 먹지 않았다. 또 길에 버렸지만 소와 말은 이 알을 피했다. 후에는 들판에 버렸는데 여러 새들이 날개로 이 알을 감싸주었다. 부여왕은 이 알을 쪼개려고 했지만 알은 쪼개지지를 않아 할 수 없이 이 알을 하백녀에게 돌려주었다. 하백녀는 이 알을 이불로 덮어 따뜻한 곳에 두었다. 한 남자애가 알에서 나왔다. 이 아이가 커서 고주몽으로 불리웠다.  고주몽의 탄생신화에서 보듯이 하백녀 류화는 해빛으로 인해 임신되였고 낳은 것이 알이었다. 여기에서 해빛(태양), 알(새)는 곧 고주몽의 토템이다. 그 시대 태양과 알은 다 둥글었기에 새와 태양을 다 동일시하였다. 그리고 이 신화에서 왜 개, 돼지, 소, 말 등 짐승들은 알을 해치지 않았고 여러 새들은 또 알을 보호해주었는가? 이들은 다 고주몽의 친척, 즉 토템이였기 때문이다.  다시 돌아와서 일연이 쓴 《삼국유사》의 단군신화를 간추려 보자. 환인의 서자 환웅이 무리 3000명을 거느리고 삼위 태백산정 신단수아래에 내렸다. 그는 풍백, 우사, 운사들로 하여금 인간세상의 360여 가지의 일을 주관하게 하였다. 한 동굴에 사는 곰과 범이 환웅이 내린 신단수 아래에 가서 사람되기를 빌었다. 곰은 수련을 거쳐 사람으로 되였지만 범은 금기를 지키지 못했기에 념원을 이루지 못했다. 사람으로 된 웅녀는 또 신단수 아래에서 애기 갖기를 기원했다. 천신 환웅이 사람으로 변신해 웅녀와 혼인을 하였다. 그들이 낳은 아들이 단군 왕검이다. 일연과 동시대인인 이승휴의 《제왕운기》의 단군신화는 환인을 상제(上帝)라 하였고 환웅을 단웅(檀雄) 단수신(檀樹神)이라고 했으나 왕검은 그저 檀君이라고 지칭했다.  학계에서는 단군신화에 나오는 곰을 보편적으로 우리 민족의 토템으로 인정한다. 필자는 신단수, 범, 그리고 풍맥, 우사, 운사도 토템과 무관하지 않다고 보고 있다. 단군 왕검의 탄생은 신단수와 깊은 인연이 있다. 환웅이 신단수 아래에 내렸고 곰이 신단수 아래에서 사람이 되기를 기원했으며 또 아기를 가지려고 빌었다. 그리고 이승휴의《제왕운기》에서 단수신(檀雄)의 아들을 단군(檀君)이라고도 함은 단군신화에서 신단수는 아버지 역할을 한 것이다. 곰과 범이 한 동굴에 살았다는 것은 곰토템씨족과 범토템씨족지간에 혼인관계가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단군 왕검의 할아버지는 상제(上帝)라고 하는 하늘신이다. 하늘신이란 무엇을 뜻하는가? 원시인들의 관념으로 하늘신이란 보이지 않고 감지할 수 없는 허무한 것이 아니다. 하늘신이란 해, 달, 별, 바람, 구름, 비, 우뢰 등 천체와 직결된 존재이다. 단군 왕검의 아버지가 천왕(天王)으로 불리우고 그가 풍백, 우사, 운사로 하여금 지상의 일을 주관하게 했다고 하는 것은 풍신, 우신, 운신 이 세 신과도 남이 아닌 한 집안임을 의미한다. 그래서 고대원시인들의 관념으로 바람, 비, 구름도 단군 왕검의 친척(토템)으로 보는 것은 부회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신라시조 박혁거세의 탄생신화, 왕비 알영의 탄생신화, 신라 석탈해왕의 탄생신화, 미추왕의 조상 김알지의 탄생신화, 고려시조 왕건의 조상에 관한 신화, 작제건의 안해에 관한 신화, 아달라 왕때 연오랑과 세오녀 부부에 관한 신화들은 우리가 역사인물들의 토템을 찾는 근거로 된다. 백제왕 견훤의 탄생은 지렁이와 관련이 있는데 지렁이는 곧 견훤의 토템인것이다.  매개 성씨의 시조탄생이나 어떤 특정 인물의 탄생을 두고 왕왕 신화전설이 류전돼 왔는데 이런 신화전설속에 해당 인물의 토템이 내포되어 있는것이다.  중국, 조선, 한국 등 동남아의 여러 민족은 지금도 사람이 태어난 해의 띠(屬)를 가지는 풍속을 유지하는데 12개의 띠(12生肖), 즉 쥐, 소, 범, 토끼, 용, 뱀, 말, 양, 원숭이, 닭, 개, 돼지는 모두 토템인 것이다.  중국 광주 해주구 관주가 륜두촌(廣州海珠區官州街侖頭村)에는 중화토템박물관과 중화성명박물관이 서서 관람객을 맞이하고 있다. 토템박물관에는 화하토템기원, 성씨토템, 가족토템, 띠(生肖)토템과 상표토템 천여건이 진렬되어 있다. 사람들의 호기심을 끄는 이 토템박물관에 전시된 토템자료는 우리 민족토템연구에 대해서도 큰 참고가치를 가지고있다.  한개 민족의 토템의 풍부함과 빈약함은 그 민족성원들이 가지고 있는 신화에 의해 결정된다. 일반적으로 풍부한 신화를 보존하고 있는 민족은 토템물도 풍부하지만 신화가 없는 민족은 토템물도 빈약한 것이다.  용과 봉황이 분명 우리민족에게도 속하는 토템물이지만 학자들은 왕왕 이것을 외면하고 있다. 하지만 민속전통으로 보면 우리민족은 용과 봉황에 대한 숭배는 대단하다. 남자들의 이름에 용자, 여자들의 이름에 봉자를 쓰는 빈도는 여타민족보다 높다. 주위를 돌아보면 남자는 김용, 박용, 이용, 용남, 성용, 명용, 복용, 억용, 운용, 금용, 용운 허다하며 여자는 봉자, 봉녀, 봉순, 봉선,봉옥, 봉화, 봉련 등 수두룩하다.  현, 당대에 와서 왕왕 한 개 민족에 한 개의 대표적인 토템을 내세우는 것은 토템이 가지고 있는 기발(旗幟)작용과 응집력 때문이다. 모든 국가들에 국기, 국가, 국회가 하나씩 있듯이 토템을 하나의 기치로 하기 위해서이다.  한개 민족의 형성과정을 보면 민족은 부동한 토템물을 가진 씨족, 부족의 집합체이다. 민족을 하나의 그릇으로 비유한다면 이 그릇 안에는 여러 씨족 부족 성원들이 담겨있다. 토템은 매개 씨족의 성원과 관계되는 물체로 개개인의 부호인 것이다. 때문에 토템은 어디까지나 씨족의 개념이지 민족의 개념이 아니다. 하지만 민족사회에 와서 우리가 민족토템을 운운하는 것은 민족이 형성된 다음 씨족 부족이 사라졌기에 그 민족에 속하는 각 부족, 씨족들의 토템을 통털어 말하는 것이다.     민족은 문화의 개념 이 세상에는 원래 민족이란 개념과 단어가 없었다.  민족이란 인류발전의 산생물이다.  인류사를 보면 원시공동체사회로부터 가족사회, 씨족사회와 부족사회가 나타났으며 또 여러 씨족, 부족들의 끊임없는 융합과정에서 공동한 지역, 공동한 경제생활, 공동한 언어, 공동한 심리소질 이 네 가지 요소가 상호 작용하여 하나하나의 민족을 산생시켰다.  민족은 단일혈통의 집합체가 아니라 여러 부동한 혈통의 집합체로서 민족의 본질은 공유한 문화다.  조선민족도 여타 민족과 마찬가지로 단일 혈통의 민족일 수 없다.  한국 건국대학 정치외교학과 신복용교수의 말을 들어보자.  “우리 민족은 어디서 왔으며 어떻게 형성되었을가? 정확하게 말한다면 우리 민족은 북방계와 남방계가 주류를 이루고 있고 그 밖의 소수민족으로서는 내침족(來侵族)과 귀화인의 네 종족으로 이뤄지고 있다.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 유전자를 따져보면 적어도 35개이상의 혈통으로 이뤄져 있다. 태초에 아프리카에서 인류가 태여난 이후 그들은 동이 트는 곳을 향해 한없이 이주를 하였다.”⑩  그러면 왜서 우리 민족을 하나의 혈통으로 보는 현상이 나타나는가? 한국 고려대학 정호영교수는 《민족공동체의 형성과 변화: 력사적, 이론적 접근》이란 논문에서 이렇게 서술했다. “중요한 것은 민족은 실제로 같은 혈통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렇다는 ‘믿음’을 공유하는 사람들의 집합”이라고 하였다. ⑪ “그렇다는 ‘믿음’”이란 문화의 범주에 속하는 것으로 생물학적인 근거는 아니라는 뜻이다.  민족을 혈통으로 논의하는 현상에 대해 신복용교수는 이런 비판을 하였다. “현대 민족주의에서 이미 혈통은 대체로 부인되고 있으며 역사적 운명의 공유와 일체감, 그리고 언어의 통질성을 민족의 본질로 삼는 것이 지금의 추세인 점에서 보면 혈통이 같거나 다름은 민족의 정체성을 훼손하는 이유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이제는 인순이도 할리도 주현미도 윤수일도 모두 우리가 보듬고 사는 세계화 시대인데 더 이상 내 피줄만을 따져서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⑫  민족을 문화의 개념으로 보는 것은 민족개념의 본질, 핵심을 꿰뚫은 논리이지만 만약 민족을 혈통으로 논의한다면 오히려 민족의 정체성확보에 불리한 페단이 생긴다.  필자가 1989년에 미국을 방문했을 때 충격적인 말을 들었다. 그 당시 미국 본토에는 120만이요, 130만이요 하는 한국 이민이 살고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한국인 이민 3세는 자신을 미국인이라고 생각하지 한국인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미국에는 우리 민족 학교가 없다. 이민 3세들이 받은 교육은 미국학교에서 받은 서양교육이고 그들 대부분은 우리 말을 모르는 후대들로 미국문화에 아주 푹 젖어 있다고 하였다. 한국인 이민 3세가 이러할진데 이들의 후대들은 어떠하겠는가? 후에 한국 방문시 또 이런 일이 있었다. 한 한국인 회사에 갔을 때 전형적인 한국인 생김새의 접대원 아가씨가 커피를 대접하면서 하는 한국말이 너무나 아름다웠다. 옆에 있는 친구가 필자를 보고 이 아가씨가 어느 민족이겠는가 하는 물음을 던져왔다. 실은 물음과 동시에 답안이 나온 것이다. 이 아가씨는 한국에서 대학을 나오고 석사과정까지 마친 한족 처녀였다. 만약 이 아가씨가 계속 한국인 직장에서 일하고 한국청년과 결혼한다면 그들의 후예는 물론, 지금 이 아가씨도 한국인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주위로부터 종종 이런 현상을 목격한다. 우리 민족 후대들이지만 유치원 때부터 한족들의 교육을 받았기에 우리 말을 전혀 모르고 심지어 민족풍속과 예절을 모르는 아이들이 많다. 그들 대부분은 한족들과 결혼한다. 그들의 후예를 어느 민족으로 보아야 하는가?  상기의 현상을 놓고 민족을 혈통으로 운운한다는 것은 이미 의의를 상실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은 우리들게 시사해주는 점이 있다. 실상 매개인의 민족신분은 자신이 어느 민족의 문화를 고수하는가 하는 문제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우리 민족의 후예라 할지라도 우리민족의 말을 못하고 풍속습관과 예의 범절 등 문화를 잃어 버린다면 그는 타민족이 되는것이고 타민족성원이지만 그가 우리민족문화를 받아들이고 고수한다면 그는 우리민족성원이 되는것이다. 그래서 민족성원은 고정불변하는것이 아니다.  글로벌시대라고 하는 현시대, 국제적인 인적교류가 날로 빈번해지는 현시대, 그리고 타민족과의 결혼, 국제 결혼이 점점 늘고있는 현시점, 한개 민족의 흥망성쇄는 혈통이 아니라 문화에 의해 결정되는것이다. 우리는 늘상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을 잘한다. “피”를 말함에 있어서 응당 “문화의 피”가 더 중요시 되어야 한다.  인류의 융합발전과 민족의 형상과정, 민족성원의 전이와 변화를 지켜보면서 필자는 《토템문화가 현대인류에 주는 중요한 계시》란 글에서 이런 결론을 내리지 않을수 없었다.  네속에 내가 있고 내속에 네가 있는것이 인류사이고 민족사다.  민족은 문화의 개념이지 혈통의 개념이 아니다.  민족은 혈통으로 구분되는것이 아니라 문화로 구분된다.  혈통으로 말하면 각 민족은 모두 형제다.     토템관념의 현실의의 토템관념은 인간과 자연지간의 혈연관계, 인간과 인간지간의 혈연관계를 확인하는 관념으로 인간과 자연, 인간과 인간지간의 조화를 이루는 관념이다.  민족전통문화의 정수는 바로 인간과 자연, 인간과 인간이 서로 조화를 이루는 천(天), 지(地), 인(人), 신(神) 합일의 사상이다.  하지만 인간이 새로운 문명을 창조할수록 인간은 민족전통문화와 점점 멀어지고 있다. 인성을 상실하고 자아를 잃고 있다.  현대인류에 있어서 상기의 두 가지 조화를 이룩하느냐 않느냐는 인류의 생사존망과 직결되는 중요하고도 시급한 문제다.  오늘 날, 공업문명과 과학기술이 고도로 발달함과 더불어 자연에 대한 인간의 파괴는 점점 더 심각해지고 있으며 따라서 인간의 생존환경이 갈수록 렬악해지고 있다. 그에 따른 인간의 도덕성상실은 인간지간의 “랭담”을 초래하여 인간의 삶의 안정성마저 위협하고있는 실정이다.  필자는 인류의 삶의 터전인 지구를 놓고 이런 생각을 해보았다. 지구도 살아 숨쉬고 희로애락이 있는 하나의 거대한 생명체이다. 지구는 지금 자신의 품속에 살고 있는 60억인구의 온갖 시달림을 받고 있다. 지구는 자신의 몸우에 수풀처럼 일떠선 무수한 콩크리트 건축물과 공장으로 인해 숨쉬기도 가쁘다. 몸속으로 파고드는 지하철, 지하축조물과 각종 광산의 개발로 기막힌 상처를 입고 있다. 또한 온몸에 들씌운 오염물로 만신창이 되었다. 지구는 앓고있고 신음하고 있고 몸부림 치고 있다. 그래서 무서운 광풍이 자주 오고 홍수가 자주 오고 지진이 자주 와서 무수한 사람들이 생명을 앗아가고있다. 사람들은 이것을 자연현상이라고 말할뿐 그 책임을 자신으로부터 찾지 않는다.  지구상에 살고 있는 60억 인구는 모두 지구란 이 거대한 어머니가 낳아키운 형제자매다. 하지만 국가가 다르고 민족이 다르고 인종이 다르고 종교가 다름을 이유로 각자의 리익과 목표를 위해 매일매시각 서로 각축전을 벌리고 있다. 현대전쟁에 있어서는 승자도 결국은 패자다. 한순간 승리자이지만 전쟁으로 인한 생태파괴와 패자의 반발과 복수가 가져다주는 악과는 패자의 손실과 다름없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쌍롱과 팔레스티나의 알라파트는 천년 전에 한 할아버지를 두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들은 두 개의 국가, 두개의 종교로 나누어지면서 서로 죽기내기로 싸웠다. 결과 그들 둘은 서로 다 크게 다치고 말았다. 만약 그들의 할아버지가 하늘에서 눈을 뜨고 천년후의 두 손자를 굽어본다면 그 감회가 어떠하겠는가?  인류의 삶의 터전인 이 지구는 무수한 비밀을 간직하고 있다. 생물 고고학가의 화석발견에 의하면 나이가 50억년인 이 지구에는 현생인류이전에도 수차례 인류의 발생과 멸망이 거듭되었다고 한다. 인구의 대폭팔, 생태균형의 파괴, 자원의 고갈, 핵전쟁은 인류멸망의 원인이 될수 있다. 몇백만년 혹은 몇천만년후, 지구상의 생존조건이 회복될 때 인류는 다시 태어나서 원시사회, 노예사회, 봉건사회 등 단계를 거쳐 또 고도의 문명사회로 진입하게 된다. ⑬  현생 인류가 지구에서 생존하려면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 계선, 인간지간의 관계 계선이 유일한 길일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과 자연이 조화적인 관계를 이루고 인간과 인간이 조화적 관계를 이루는 길만이 현생 인류의 살 길이다.  현대인들의 이러한 실정을 감안하여 서방철학가들은 문제해결의 희망을 토템관념회복에 걸면서 새로운 사회질서구축을 호소하고있다.     나오는 말 세계 최초의 토템문화연구는 1791년에 시작되었고 19세기 하반기부터 20세기 상반기까지 서방학계에서는 토템문화연구 열조가 일어났다. 중국에서 맨처음 토템문화를 연구한 사람은 엄복(厳複)선생이다. 1903년 그가 번역한 《사회통전(社會通詮)》이란 책에서 처음으로 “totem”을 “図騰”으로 번역한 후 “토템”이란 단어가 있게 되었다. 엄복선생 이후 곽말약, 문일다 등 학자들도 토템을 연구하였다. 하지만 중국에서의 토템연구는 그닥 활발하게 진행되지는 못했다. 근간에 《용토템》, 《곰토템》 등 연구저서들이 출판되고 신화학학술토론회를 가지는 등 일은 좋은 현상이다. 하지만 문제점도 없지 않다.  필자는  시공부를 하는 사람으로서 지난 세기 80년대 중반부터 토템문화에 눈길을 돌리기 시작했다. 나름대로 여러 가지 자료들을 찾아 읽으면서 이른 바 “토템문화”의 진수를 터득하기 위해 힘써 왔다.  안타까웠던 것은 지금까지도 우리 민족에게는 우리 민족의 토템문화를 론한 체계적인 전문저서가 없다는 것이다. 몇몇 학자들의 토템관련 론문이 간혹 눈에 띄이지만 체계적이고 계통적인 연구와는 거리가 멀다. 이러한 상황에서 필자는 타민족학자와 국외 학자들의 연구성과를 흡수하면서 나름대로 진위를 판단하고 우리 민족신화와 토템물에 접근하였다.  누군가 이런 말을 했다. 모종 의미에서 말한다면 한 이론의 생명력의 강약은 이 이론이 역사의 약점을 얼마나 극복했는가를 보는 것이고 또 무형중 후세 사람들이 초월하여 재구축할 수 있는 약점을 얼마나 묻어두었는가를 보는 것이다. 약점은 창조의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어차피 민족토템문화에 대한 연구는 학계의 중요한 과제가 아닐수 없다. 여러 학자들이 관심을 돌리면 연구는 활성화 될 것이다. 우리 학계에 토템문화연구붐이 일어날것을 희망하면서 졸문에 대한 기탄없는 비평을 기대한다. =============================================================== 1) 《신문화보》2007년 4월 3일.  2) 리지린 저 《고조선연구》조선과학원출판사, 1963년 2월, P119-121. 3) 2002년 3월 21일자 한국 대구 《매일신문》 4) 이원저 저《토템미학과 현대인류》,학림출판사, 1992년 3월 제1판, P27-28, P21-23. 5) 위와 같음.  6) 이병해 저 《부족문화와 선진문학》,고등교육출판사, 1995년 11월, 제1판, P87, P135.  7) 위와 같음.  8) 우병안 저《중국민속학》,료녕대학출판사, 1985년 8월 제1판, P263.  9) 허흥식 “단군신화와 동아시아 민족신화의 토템에서의 범의 위상”《만주 북방 민족의 요람》, 만주학회 제11차 학술대회 발표 논문집, 2005년 9월 2일, P70-76.  10) 신복용《한국인은 단일민족이 아니다》, 2001년 5월 8일자 료녕조선문보.  11) 정호영《민족공동체의 형성과 변화: 력사적, 이론적 접근》  12) 신복용《한국인은 단일민족이 아니다》  13) 곽패명 편저《풀리지 않은 인류의 수수께끼》(人類未解之謎), 길림문사출판사, 2004년 12월 P17-24.  --(태평무 주필, 민족출판사, 2008년 9월 출판)에서   
1796    가사창작할 때 <<아리랑>>을 람용하지 말자... 댓글:  조회:3803  추천:0  2016-11-10
작성자: 라주      가요창작에서 단어 “아리랑”의 사용에 대한 견해                            김문일     연변에서 창작되는 가요들을 보면 “아리랑”이란 단어가 많이 사용되고 있다.  가요에서 사용된 단어 “아리랑”이 어떤 뜻을 가지고 사용되였는지 아니면 순 조흥구(助兴句)로 사용되였는지 분명하지 않것들이 많다.   만일 “아리랑”이 어떤 뜻을 가지고 노래에서 사용되였다면 “아리랑”이란 단어에 내포된 함의가 구경 무엇인가를 알 필요가 있다고 본다. “아리랑”이 어떤 뜻을 가지고 어떻게 산생되였는지에 대해서 소개한 자료는 필자가 벌써부터 찾아보려고 여러면으 로 애를 썼으나 여직 찾지 못하고 있다.   내가 어렸을 때 서당에서 훈장을 지낸적있는 분께서 “아리랑”의 유래에 대한 이야기 를 들은적이 있는데 그 이야기를 곰곰히 생각해보면 “아리랑”의 산생에 대한 그분의 해석이 일정한 근거가 있다고 믿어진다. 그분의 말에 의하면 옛날에는 “아리랑”을 한자로”我离郎”이라고 썼다는것이였다. 글자의 뜻을 보면 랑군님과 리별한다는 뜻임을 인차 알수있다. 아들이 철도 들기전에 다 큰 처녀를 며느리로 맞아드렸던 봉건혼인제도는 “我离郎”과 같은 비극을 얼마든지 초래할수 있었던것이다.  그런데 그분은 “我离郎”을 왜놈들의 조선침략과 북방오라캐족들의 침입과 련계하여 해석하였다. 외래의 침략이 빈번했던 먼 옛날에는 늘 사내들이 싸움터에 달려나가야 했는데 나가면 살아올지가 막연했다. 그래서 “我离郎”이라는 노래가 생겨났다는것이였다. “나를 버리고 떠나는 님은 십리도 못가서 발병난다”는 가사의 뜻을 새겨보면 옛날에는 “我离郎”이라고 썻을수도 있었으리라고 생각된다.  그런데 지금은 “아리랑”을 한자로 “阿里朗”이라고 쓴다. 阿의 뜻은 여러가지인데 옛날에는 언덕이라는 뜻으로 많이 사용되였다. 里자는 밭田자와 흙土자로 이루어 졌는데 밭과 토지가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朗은 밝고 맑다는 뜻이다. 농경생활을 해온 우리 민족은 먼 옛날부터 누구나 밭과 토지가 있는 언덕 너머의 오붓한 마을에서  살아가는것이 꿈이였고 희망이였다. 비록 이런 꿈은 소박한 희망이였으나 그 꿈을 실현할 언덕을 넘기란 여간 힘들지 않았다. 그래서 희망을 품고 살아가는 우리 민족은  그 희망이 실현되지 않을 때면 속탄마음으로 아리랑을 불렀고 다시 새로운 희망을 품고 일떠설 때에도 희망이 실현되기를 기원하면서 이 아리랑을 불렀다. 이렇게 해석해 놓고 보면 “阿里朗”은  상징적으로 희망을 나타내고 있음이 분명하다. 지금 “아리랑”은 락(乐)과(福),그리고 어려움과 고(苦)등등의 변종으로 가요에 등장하여 사용되고 있다.   그런데 이 “아리랑”이 가요에서 어휘적의미가 없는 “아. 랄랄랄, 얼씨구, 에라…”등 등의 조흥구를 이루는 단어들과 혼돈되여 사용되는것은 우리 작사자들과 작곡자들이 연구되여야할 문제라고 본다.  2012년 3월에 출판한 연변음악 ‘민들레찬가”를 보면 “아리랑”이 3수의 노래에 사용되였는데 나타내는 의미는 부동하다.  먼저  “인생고개”를 보기로 하자  1절: 이 세상에 태여나서 가야하는 인생고개/ 아리아리 스리스리 내리막이 없는가/ 오르면 오를 수록 발걸음 무거워 지네/고개고개 인생고개 눈물젖는 아리랑 고개/ 아리아리 스리스리 가고 또 가네.  2절: 둘이 둘이 사랑맺어 함께가는 인생고개/ 아리 아리 행복찾아 가는데/ 인생의 사는 보람 무엇이냐 묻지를 말아/고개고개 인생고개 노을지는 인생고개/아리아리 스리스리 가고 또 가네  이 노래의 1절에서는 “아리랑”이 눈물로 보내야하는 인생의 행로를 말했음이 분명하다. 후렴에서 “아리아리 스리스리”는 눈물로 고달픈 인생을 살아가는 서정적주인공의 정서를 강조하는 조흥적역할을 수행하고있다. 2절에서는 “아리랑”이 어떤 뜻으로 사용되였는지가 분명하지 않고 뜻없는 인생을 말하고있는것 같다 그리고 조흥구로 사용되고 있다.  다음  “내 겨레아리랑”을 보자. 1절: 아리랑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어머니 손잡고 넘던 고개/자랑찬 영광을 안고 온 고개/내 겨레 아리랑 아라리요/동트는 고개로 넘어간다. 2절: 아리랑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노다지 찾아서 넘던 고개/ 아리랑 상모춤 흥겨운 고개/ 내 겨레 아리랑 아라리요./동트는 고개로 넘어 간다. 이 노래의 가사에서 사용된”아리랑”을 보면 “아리랑’이  어떤 뜻으로 씌였는지 갈피를 잡을수 없다, 1절에서 어머니 손잡고 넘던 고개를 자랑찬 영광을 안고 온 고개라고 했는데 이 말의 뜻이 전혀 리해가 되지 않는다. 고향을 떠나 살길을 찾아 어머니손잡고 넘던 고개를 눈물의 고개라고 하면 차라리 좋았을것 같은 느낌이다. 2절에서 노다지 찾아서 넘던 고개,아리랑 상모춤 흥겨운 고개라고 했는데 “아리랑”이 어떤 뜻으로 사용되였는지가 여전히 분명하지 않다. 그리고 이 부분은 후렴의 동트는 고개로 넘어가자는 구절과 내용상 어울리지 않고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 총적으로 이 가사에서 사용된 “아리랑”은 작사자가 “아리랑”의 함의를 모르고 방향없이 썼다는 느낌이다. 다음  “두망강 아리랑”을 보자  1절: 두망강 아리 아리랑 두만강 아리 아리랑/푸른 물이 출렁이는 력사의 강 두망강/몇천년을 흘렀어도 변함없는 두망강/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쪽배타고 타향살이 그옛날이 다 가서 /얼씨구나 절씨구나 두망강 아리랑/아라리가 났네 두망강/아리 아리랑 두망강 아리아리랑 2절: 두만강 아리 아리랑 두만강 아리 아리랑/두만강은 일천리라 친선의 강 두만강/중조나라 인민들이 살아가는 두만강/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두만강 아리랑 아라리요/참대떼목 화폭이라 뽀트달려 신나네/얼씨구나 절씨구나 두만강/ 아리랑아라리가 났네 두만강 /아리 아리랑 두만강 아리 아리랑. 이 가사에서는 “아리랑”이 일정한 뜻을 가지고 조흥구로 사용되면서도 두만강이 행복의 강, 락원의 강, 친선의 강 등등으로 상징되였다는것이 독자들에게 리해는 되고 있으나 가사의 기본내용과 적절하고도 유기적으로 결합되였다는 느낌은 주지못하고 있다. 가사에서 “아리랑”을 등장시킬 때에는 작사자가 자기가 쓰는 가사에서 “아리랑”이 어떤 상징적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를 독자들이 리해할수 있겠금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다. 왜냐하면 “아리랑”이 “얼씨구나, 랄랄랄, 에헤야,”등 순 조흥구를 이루는 단어들과는 달리 어휘적의미와 상징적의미를 가지고 있기때문이다. 의미가 있는이상 그 의미를 독자들에게 전달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상 내가 알고 있고 또 리해가 되는 ‘아리랑’의 유래와 한자의 뜻으로부터 연변음악 “민들레찬가”에 실린 노래 3수에 대한 나의 견해를 간단히 서술하였다. 작사자 여러 선생들께서 참고로 해주시기를 바란다.  
1795    개성이 없는 예술작품은 독자들의 호감을 살수 없다... 댓글:  조회:3268  추천:0  2016-11-10
작성자; 김은철 한동해시인의 가사창작에서             의상의 직설적표현과 상징적표현에 대하여               라주    한동해시인의 근작 가사들을 살펴보면 가사창작기법에 새로운 변화가 나타나고 있는것 같다. 이왕에는 주로 경물묘사에 작자의 의상(意想)을 직설적으로 토로하는 가사들이 많았으나 근래에는 경물묘사에 의상을 상징으로 토로하는 경향에로 전이하고 있는것 같다. 그 구체적인 실례로 얼마전에 연변텔레비죤매주일가로 방송된 “앞내가 버드나무”(리하수 작곡 임향숙 노래)를 실례로 들수있다. 우선 가사를 보자      앞내가 버드나무 눈이 녹은 내고향 앞내가에 버들개지 곱게 핀 버드나무야 아직은 푸른 잎새 피지 않아도 오는봄 반가워라 춤을 추누나 아, 앞내가 버드나무야 오는봄 반가워라 너울너울 춤을 추누나 봄물은 흘러흘러 멀리가도 고향땅에 뿌리박은 버드나무야 멀리떠난 철새들은 돌아오리라 새파란 꿈을 안고 춤을 추누나 아, 앞내가 버드나무야 새파란 꿈을 안고 너울너울 춤을 추누나 이 가사는 고향땅에 깊이 뿌리를 박고 봄을 맞는 버드나무의 형상을 의인화하여  애향의 짙은 감정과 아름다운 고향의 미래에 대한 동경을 노래하고있다. 1절에서는 주로 봄을 즐겨맞는 버드나무의 형상묘사를 통하여 고향의 아름다운 미래에 대한 동경을 보여주고있다. 따라서 이 가사에서의 “봄”은 고향의 아름다운 미래를 상징하고있다. 2절에서는 멀리 흘러가는 봄물과 고향에 뿌리박은 버드나무를 대조시켜 묘사했는데 버드나무의 애향정신을 강조하면서 돋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멀리 떠난 철새”는 잠시 고향을 떠난 사람들을 상징하고있다. 고향사람들을 철새에 비유한것은 그들이 고향을 떠난것이 영원함이 아님을 보여주는 동시에 그들에게도 애향의 감정이 담겨있음을 말해주고있다.  “새파란 꿈”은 고향의 미래를 상징하고있다. 총적으로 이 가사는 의인화와 상징적수법을 타당하게 사용하였기에 작자의 의상이 독자들의 심미에 공명을 일으키면서 독자들에게 예술적인 향수를 뿜어주고있다. 다음 직설적 표현방법으로 쓴 가사 “빨간 단풍잎”(리하수 작곡 김선희 노래)을 보자. 이 노래는 “행복연변노래콩클”에서 우수상을 받은 작품이다 빨간 단풍잎 내가 하냥 즐겨읽는 책갈피속에 곱게도 끼여있는 빨간 단풍잎 꿈을 안고 학원에서 공부할 때에 고향처녀 띄워보낸 빨간 단풍잎 아 세월이 흘러도 잊을수 없네 청춘시절 꽃펴주던 빨간 단풍잎 내 마음에 서리내려 허전할 때면 정열을 끓여주던 빨간 단풍잎 인생의 길 서로 달라 멀리 갔어도 그 순정이 그리워라 빨간 단풍잎 이 가사는 빨간 단풍잎을 매개로하여 이루어지지 못한 고향처녀와의 사랑을 애절한 심정에 담아 노래한 가사이다. 이 가사에서 사용한 “빨간 단풍잎”은 서정적주인공에 대한 고향처녀의 순정을 상징하며 “꿈”은 서정적주인공이 품은 리상,희망,지향을 상징하고있다. 그렇다고해서 이 가사도 상징적수법으로 썼다고 말할수 없다. 왜냐하면 전반 가사의 흐름이 상징적이 아니고 개별적단어만이 단어적인 상징적의미를 가지고 있기때문이다.  따라서 필자는 이 가사가 작자의 직설적인 서정토로로 씌여진 가사라고 본다. 이 가사에서 필자가 긍정하고 싶은것은 창작에서 한때 금지구역이였던 인간의 부당한 본질적인 사상감정실태를 진실하게 반영했다는점이다. 1절에서 단어 “하냥”은 후렴의 “세월이 흘러도”와 의미상 내재적 련관을 가지고 있으면서 이루어 지지 못한 고향처녀와의 사랑을 애절하게 노래하고있다. 2절에서 세월이 흘러도 잊지 못할 고향처녀와의 사랑이 이루어지지 못한 원인을  시인은 다음과 같이 밝히고있다. “인생의 길 서로 달라”란 구절이 있는데 여기서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의 원인을 직접 밝히고 있다. 그럼 왜서 인생의 길이 서로 달랐는가? 바로 서정적주인공 나는 학원에서 꿈을 안고 공부하고 있었기때문이다. 개혁개방전에는 성향차별이 아주 컸는바 도시와 농촌의 청년남녀들지간에 혼사가 이루어진다는것은 극히 희소한 일이였다. 작자는 바로 이점을 틀어쥐고 인생이 서로 달랐기에 고향처녀와의 사랑을 이루지 못했다는 애절함을 토로하고있다. 이 점은 독자들에게 순결한 사랑을 추구함에 있어서 부당한 느낌을 줄수도 있는데 현실적으로 보면 실재한 현상들이였고 인간의 심리에 내재하고 있는 인간행위의 본능인것이다. 문학이 정치와 도덕에 얽매여 있을 때에는 “단풍잎”과 같은 이루지 못한 이런 사랑을 두고 두고 잊지못하는것을 도덕을 벗어난 부당한 행위로 보았던것이다. 최저한도 이것은 현실의 안해에게는 배반적 행위요, 사회에 끼치는것은 독해로  보았던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보면 인간들의 생활에 이런 현상들이 실재해 있는것만은 사실이다. 하기에 문학적견지에서 본다면 쓰지 못할 리유가 없는것이다. 작자는 바로 이 점을 틀어쥐고 금지구역이라고 생각되는 틀에서 대담히 벗어나 이 가사를 쓴것같다. 여기에 바로 작자의 문학창작관점이 보이는바 필자 역시 이 점에 공감이 간다. 현실의 가사창작을 보면 생활의 어느 한 세절적인 측면을 틀어쥐고 쓴 가사들이 많지 못하다. 그런데 이 가사는 “단풍잎”이라는 구체적인 사물을 틀어쥐고 이루 지못한 사랑에 대한 애절한 정서를 조화시켰기에 독자들의 심미에 즉시적인 공명을 일으키고있다. 지금 가사창작자들은  대부분이 고향을 노래하는 가사나 부모님, 혹은 연변의 자랑을 노래하는 가사창작의 범위를 크게 벗어못나고 있는데 이는 우리 가사창작자들의 협소한 안광을 보여주며 정치와 도덕의 속박에서 아직도 완전히 벗어못났음을 그대로 보여주는것이다. 때문에 이런 가사들을 보면 류사성이 많기에 예술작품으로서의 개성이 결핍하다. 개성이 없는 예술작품이 어찌 관중들의 호감을 불러일으킬수있는가! 다음 생활속의 세부적인 사물, 사연, 현상등을 틀어쥐고 쓰는 경우가 많지 못하다. 대부분 큰 제목에 대중들의 공성으로 느껴지는 현상을 소재로하여 가사를 쓰기에 여전히 류사성이 많고 개성이 결핍하다. 때문에 독자들의 심미에 공명을 불러일으키지 못하고있다. 한마디로 생활의 맛이 풍기지 못하고 있다. 필자는 한동해시인의 이 두수의 가사는 생활의 맛이 풍기는 가사로서 가사창작의 기법을 놓고 보거나 가사의미의 건실(健实)을 놓고 보거나 당전 가사창작에서 귀감이 되지 않겠느냐는 관점이다. 그리고 이 두수의 가사 언어들을 보면 타당한 단어사용, 세련되고 간략한 짜임으로 하여 별로 흠잡을데가 없다. 총적으로 이 두수의 가사는 같지 않은 수법으로 씌여진 비교적 완미한 경지에 이른 가사들이라고 본다. 이 가사에서 서운하게 생각되는 점도 없지 않는바 례하면 첫수의 가사에서 “봄물은 흘러흘러 멀리 가도”에서 느껴지는 감수이다. 버드나무가 기다리는것이 봄인데 봄물은 멀리멀리 떠나가 버린다. “봄”이 상징적으로 고향의 아름다운 미래라고 할진대 봄물은 멀리멀리 떠나버린다면 시의를 나타내는 론리에 어울리지 않는다. 마땅히 봄물은 고향의 전야에 흘러든다라고하든지 아니면 봄물을 강물로 바꾸어 멀리멀리 떠나가 버린다라고 한다면 론리적으로 별모순이 없을것으로 볼수있지 않겠느냐는 견해다. 이상 한동해시인의 두수의 가사에 나타난 부동한 창작방법을 대비하면서 필자 나름대로의 견해를 피력했는바 앞으로 가사창작에서 약간의 참작이라도 되여주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이 평론문장은 2014년 제4기 "문화시대"에 실렸음
1794    가사창작도 예술품 제작이다... 댓글:  조회:3813  추천:0  2016-11-10
  가사의미의 상징적색채창조 기법에 대하여                                    김은철   지금 연변에는 많은 가사들이 창작되고 있다. 이런 가사들을 두루 살펴보면 대부분 그 의미가 직접전달의 단순한 창작기법에 의하여 씌여졌음을 어렵지 않게 보아낼수있다. 이는 우리 연변의 가사창작자들의 실태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바 현상태의 기법에서 한층 높은 차원의 기법으로 승화하지 않으면 연변가사의 질적제고는 운운할 여지가 없다고 본다. 그렇다고 하여 필자는 직접전달의 표현방법으로 쓰면 안된다는 주장이 아니다. 표현하려는 가사의 내용에 따라서 직설적으로 쓸수도 있고 상징,과장,추상 등 다종한 모든 방법으로 다 쓸수있다고  본다. 그런데 필자는 목전 가사를 쓰는 작자들중 직설적표현방법외에 다른 표현방법에 대하여 추구하고 연구를 깊이하는 창작자들이 많지 않다는 주장이다.    가사창작의 질적제고를 가져오려면 다방면의 요소들이 있겠으나 필자는 이 글에서 가사의미의 상징적창조에 대하여서만 불충분한 견해나마 피력하려고 한다.    독자들의 리해에 도움을 주고저 리상각 석화 두 시인의 개별적 가사들을 분석하면서 목전 가사창작과 결부하여 필자의 견해를 피력해 본다. .   먼저 리상각시인의 “두루미”를 보자.    깨끗한 압록강 모래섬가에 백설같은 두루미 하얀두루미  떼를지어 내려앉네 깃을 다듬네 아 두루미는 알지 못하네 제모습이 그 얼마나 아름다운지   뒤맵시 앞맵시 보아달라고 이다리 저다리 껑충거리네 마주섰다 돌아섰다 하는 그 모양 아 두루미는 알지 못하네 제모습이 그 얼마나 어여쁜지를   배손들 마음을 끈줄 알고서 어여쁜 제모습에 깜짝 놀랐나 두루미는 떼를 지어반공중에 떴네 아 두루미는 알지 못하네 하늘하늘 뜬 모양 더욱 아름답네     이 가사는 가창자들에게 쉽게 전달되는 일반 가사들의 의미보다 시적의미가 우세적으로 다분하여 가사의미의 상징적 파악에 다소 어려움을 주고있다.  가창자들에게 직감적으로 전달되는것은 두루미의 외적인 형상뿐이다. 가창시 가창자들은 두루미의 이 외적인 형상으로부터 그 상징적 의미를 련상하게 되는데 이때 가창자의 정서는 시적경지에 오르게 된다.    자칫하면 가창자들이 두루미의 형상감수에만 그쳐 이 노래를 부를수 있는데 이렇게 되면 가창의 보다 높은 차원의 질적보장에 영향을 끼치게 된다.    가창의 질적문제는 가창자의 선천적인 음성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것은 가창자의 감정세계이기 때문이다. 어떤 감정세계에서 가창하는가 하는것은 직접적으로 청중들 감상의 질적인 높낮이와 관계가 있다   리상각시인은 이 가사의 상징적 시적의미를 깨끗함과 그 깨끗함이 보여주는 미에 두고 있는것같다. 우선 아래에 매절의 의미를 분석해 보자.   1절에서 “깨끗한 압록강”, “백설같은 두루미” “하얀두루미” 등등은 깨끗함에 대한 시인의 추구를 표현하고있다. 깨끗함의 서정적주인공으로 두루미를 등장시킴으로써 두루미의 아름다움은 바로 깨끗함에 있다는것을 표현하고 있다.    2절에서는 두루미의 동적인 상태를 주로 묘사하고 있는데 두루미의 이 동적인 형상은  바로 깨끗함과 미에 대한 다듬질에서 창조되고있음을 표현하고있다. 즉 다듬질은 곧 깨끗함과 미를 창조하기 위한 로동임을 상징하고 있다.    3절에서는 두루미의 속성 즉 정결한 미의 속성은 겸손에 있다는것을 표현하고있다.  배손들이 두루미의 깨끗한 미에 찬양을 보내고있을 때 두루미는 깜작 놀라 반공중에 떠오른다. 하늘높이 떠오른 두루미를 보며 시인은 “하늘하늘 뜬 모양 더욱 아름답네.”라고 보다 승화된 차원의 서정에서 시적의미의 상징인 깨끗한 미를 강조하여 찬미하고있다.    후렴에서는 그토록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아름다움을 모르고있는 두루미의 형상을 의인화하여 묘사함으로써 시적의미의 상징인 깨끗한 미의 속성, 즉 겸손에 대하여 찬미하고 있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남보다 좀 뛰여난 재주를 가지고있는 사람들이 자고자대하면서 우쭐거리는 겸손치 못한 사람들을 흔히 보게 된다. 녀인들중에도 자신의 생김새가 여느 녀인들보다 좀 우월하다고 뽐내며 자고자대하는 현상들을 자주 보게 된다. 이런 녀인들은 생김새는 아릿다워도 아릿다움이 가지고 있는 속성 즉 겸손성이 결여되기에 속되게 보인다.    리상각시인의 이 가사는 속되게 보이는 아름다움과는 달리 아름다움이 지녀야할  겸손을 강조하여 찬미하고 있다. 이런 겸손은 가사의 후렴에서 돌출히 표현되고있다. “두루미는 알지 못하네”라는 구절은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아름다움을 뽐내지 않는 두루미의 겸손성을 형상적으로 표현하고 있는바 그 상징적의미는 바로 깨끗한 미의 겸손성이다.     리상각시인은 단순히 자연을 노래하기 위하여 이 가사를 쓴것이 아니다. 재간있는 작사자라면 자연경물의 형상을 통하여 꼭 쓰게되는것이 인간이다. 이런 인간은 직접적으로 자연경물과의 융합속에서 그려낼수도 있고 자연경물의 형상을 빌어 상징적으로 표현할수도있다.    이 가사에서는 인간을 “배손”이라는 단어로 객관적으로 등장시켰을뿐 두루미의 동적인형상과는 아무런 련계도 시키지 않았다. 따라서 이 가사의미의 상징적대상은 인간이다. 즉 깨끗한 미를 갖고있는 인간이다.   웬간한 시적감상능력을 가지고있는 가창자라면 어렵지 않게 상징적대상이 련상되여 머리에 떠올리게 될것이다. 혹자는 가창중 순결하고 아름다운 련인을 련상할수도 있고 또 혹자는 한복차림의 아릿다운 우리 민족의 녀인들을 련상할수도 있으리라. 필자는 이 가사가 순진하고 겸손하고 수줍고 깨끗한 조선족 녀인들을 상징했다고 본다.    이렇게 이 가사를 풀이하고 보니 간혹 개별적독자들은 이 가사의 풀이가 어렵게 느껴져 인상주의수법으로 쓴것이 아니냐 하는 의문을 가질수도 있을것이다. 그러나 이 가사는 인상주의 수법으로 쓴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인상주의는 작가의 주관적인 순수한 인상을 작품에 나타내는 예술상의 주의로서 사실주의와는 정 반대다. 그러나 사실주의는 작품에 개관적존재의식을 바탕으로 하고있다. 지난세기 80년대중기부터 우리 문단을 휩쓸던 몽롱시가 바로 인상주의창작방법으로 씌여진것이다 이런 시는 작자의 순수한 인상을 작품을 통하여 표현했기에 독자들은 공성을 띤 래해에 이르지 못한다.    그러나 “두루미”는 독자들의 공성을 띤 리해성을 가지고있다. 이렇게 말할수 있는것은 이 가사의미의 상징이 바로 깨끗한 미고 그 상징으로부터 련상되는것이 깨끗한 미를 가지고있는 인간이라는것이 독자들에게 공성을 띠고 추리되여 감수되기 때문이다.    연변의 가사세계를 훑어보면 개별적 작자들이 인상주의창작방법으로 가사를 쓰고있는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필자는 가사창작에 인상주의창작방법은 적절하지 않다고 본다. 지난세기 80년대중기부터 시작하여 사실주의창작방법을 시대에 뒤떨어졌다고 비난하면서 인상주의창작방법을 고취하던 때를 독자들은 기억하고있을것이다.    인상주의작품은 우선 독자들이 작품의 내용부터 리해할수 없게 쓰고있다. 그러니 그 내용으로부터 어떤 공성을 띤 상징물을 추리해 감수한다는것은 불가능하다. 이 인상주의가 한때 우리 문단에 재난성적인 돌개바람을 일으켰다. 지금도 그 여운이 남아있긴 하지만.   그때 어떤 평론가들은 인상주의를 우리 문단의 기치로 내세우면서 인상주의작품에대하여 높이 평가를 하고있었다. 속되게 말하면 이런 평론가들은 주글주글한 늙은이의 배가죽을 매만져주면서도 그 감각이 선녀의 배가죽을 매만진다는 느낌이라고 올리춰주는 안마사로 둔갑하고 있었던것이다.    인상주의문학이 번창하고 있을 때 우리의 문학지들은 많은 독자들을 잃었던것이다. 누가 읽어도 내용을 파악하지 못하는 그런 작품들에 애독을 가지고 있겠는가? 지금은 지어 작가협회기관지를 작가들마저 외면하는 정도로 돼버렸으니 문예잡지의 운명이란 얼마나 처참한 지경에 굴러떨어졌는가!(문학지가 이 지경에 이르게 된것을 인상파들에게만 미루는것이 아니다. 여러가지 원인이 있겠으나 인상주의도 그 중의 하나임을 강조하여 밝힐뿐이다.)   이런 창작방법을 개별적 작자들이 대중가요의 창작에 도입하고 있으니 필자로서는 동의가 가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필자는 인상주의창작방법을 반대하는것은 아니다. 인간들중에는 개별적으로 공성을 떠난 특수 현상,특수사물,특수행위에 흥취를 가지고있는 사람들이 있지 않는가, 례하면 동성련애가 그러하다. 인간에게 동성련애는 공성으로 존재하는것이 아니다. 공성은 이성련애다. 그런데도 변태적인 동성련애에 미치고 있는 사람들이 있고 또 그것의 합법화에 법적으로 보장하고 있는 나라까지 있는것이 현세계이다. 예술에도 인상주의예술을 즐기는 사람들이 있는한 허용하는것이 응당하다고 본다.   총적으로 리상각시인의 가사 “두루미”는 가사의미의 상징적창조에 있어서 귀감으로 되기에 손색없는 좋은 가사라고 본다.     다음 석화시인의 가사 “동그라미”를 보자.                      동그라미     아침에 뜨는 해 동그랗고   저녁네 솟는 달 동그랗네   정든님 얼굴이 동그랗고   정든님 사랑이 동그랗네     눈덩이 굴리면 동그랗고   새 생활 꽃피면 동그랗네   네맘 내맘 합치면 동그랗고   네힘 내힘 합치면 동그랗네      동글동글 동그라미   세상은 아마 동그란가봐     이 가사는 경쾌,명랑,활기가 담뿍 넘치는 한수의 우수한 가사이다. 이 가사는 우선  “동그라미”라는 형상적 어휘로 제목을 달았고 또 주제를 상징하여 표현하고있다.   일상 생활에서 어떤 형상을 보고 흐믓하게 느끼거나 혹은 어떤 일이 원만히 이루어졌을 때 대방의 물음에 손가락으로 원을 만들어 보이는 경우가 있다. 특히 서양사람들이 손가락으로 원을 만들어 보이는 경우가 많은데 이건 어떤 일의 진행이나 완공 혹은 어떤 일에 찬성,동의,해결등 만족된 기분을 나타날때 잘 쓰는 동작이다. 즉 ok라는 뜻이겠다. 아마 작사자는 이런 생활중에서 동그라미라는 령감이 떠올라 ok라는 대신 순 우리 말 단어 “동그라미”로 제목을 달아 이 가사를 쓴것같다.   이렇게 해석하고 보면 “동그라미”의 상징적의미는 “좋다”라는것임을 어렵지 않게 련상하게 된다.    1절의 대의는 해가 동그랗고 달이 동그랗다는 자연의 동그라미와 님의 얼굴 동그랗고 님의 사랑 동그랗다는 서정적주인공의 생의 동그라미를 순차적 합동적관계의 시구로 맞물리게 하여 자연이나 주인공의 삶이나 다 동그랗다는것을 표현하고있다. 즉 자연이나 인간의 삶이 다 좋다는것이겠다.   2절에서는 눈덩이를 굴리면 동그랗고 생활이 꽃피면 동그랗다는것으로 동그라미의 창조와 그 결실의 희열에 대해 썼고 마음을 합치고 힘을 합치면 동그람이라는것을 표현하고있다. 즉 마음과 힘을 합치여 눈덩이 굴리듯하면 우리의 생활은 더욱 좋아진다는것을 쓰고있다.   그리고 후렴에서는 시구에 동그라미를 반복하여 표현함으로써 세상이 좋다는 이 가사의 주제를 한층 더 집중시키고 승화시키고있다.   이제 이렇게 “동그라미”를 분석해 놓고 직설적표달방법에만 얽매여 써낸 가사들과 대비해 본다면 독자들은 그 예술적경지의 차를 어렵지 않게 감수하게 되리라고 본다. 이 가사에서 동그라미 대신 상징적의미 “좋다”를 직접 넣어 표현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두말할것 없이 그 효과가 엄청 다르다는것을 느끼게 된다. 그러니 가사창작자들은 상징적색채의 예술적창작기법에 대하여 깊이 연구하고 장악하여야 본인의 가사창작질을 높은 차원에로 끌어올릴수 있다고 본다.   목전 가사창작자들의 대오를 보면 대부분 로년들이다. 이 로년들중 문학창작에 풍부한 지식이나 경험을 가지고 있는 작자들은 수량상으로 많지 않다. 적지 않은 작자들이 퇴직휴양한 후부터 가사를 쓰기 시작했는데 써낸 가사들이 질적으로 문제가 되는 경우가 많다.    가사는 편폭이 짧고 그 구성이 간단하여 쓰기가 여느 문학장르에 비하여 쉬운것 같이 보인다. 그래서 적지 않은 사람들이 가사쓰기에 열을 올리고 있는것 같은데 가사란 가사를 보는 인상만으로 써서는 결코 질이 있는 가사를 출생시킨다는것은 퍽 어려운 일이라고 본다.   문학의 길에 들어서면서 필자의 스승이였던 고 리삼월선생께서는 “좋은 가사를 쓴다는것은 아주 어려운일이다. 나는 시쓰기보다도 가사쓰기가 더 힘들다.”라고 여러번 우리 초학자들에게 말씀한적이 있다.   리삼월선생은 중국조선족시단의 대표적시인의 한분이였다. 시쓰기보다 가사쓰기가 더 힘들다고 여기는 선생의 이 지적은 가사창조가 결코 쉬운일이 아니라는것을 말하고 있다.    그런데 어떤 작자들은 가사쓰기에 깊은 연구가 없이 가사에 대한 인상만 가지고 쓰고 있으니 어찌 우수한 가사를 창작해 낼수있겠는가!    가사창작은 예술품제작이다. 정교한 예술품에는 흑점하나 있어도 눈에 거슬린다.    이로서 가사의미의 상징적색채창조에 대한 필자의 미숙한 소견을 우리의 가사문단에 내놓는바다. 여러 작사들에게 조금이라도 가사창작에 도움이 된다면 더없이 기쁘겠다.        \\\\\\\\\\\\\\\\\\\\\\\\\ 우리 문단에는 건전한 문예비평이 있어야 한다                       라주 언제부터인가 필자는 문학평론가들이 작품의 질을 평하는것을 의사가 환자의 병을 진단하는것에 비유해 보는 습관이 생겼다. 사람들은 의사가 있기에 제때에 병을 치료하여 건강을 유지한다. 만일 의사의 량심이 고약하여 환자의 몸속에 암덩어리가 생긴것을 번연히 알면서도 아무 병도 없소, 참,건강하구만,라고 한다면 환자는 어떻게 될가? 환자는 곧 죽고 말것이다. 이런 의사가 현실적으로 존재한다면 이건 사람의 생명을 가지고 롱락하는 범죄행위여서 사람들을 공포속에 밀어넣을것이다. 그런데 문학작품의 질을 진단해내는 평론가들중에는 사람의 생명을 가지고 롱락질 을하는 의사들이 많지 않느냐하는 주장이다. 물론 수준문제로 작품의 질을 제대로 진단해 내지못하는 평론가들도 있겠지만 아무리 수준이 낮다해도 작품의 질이 너무 낮아 곰보얼굴보듯 환히 나타나는 흠집마저 못본듯이 외면할수 있을가! 지난해 자치주 60주년가요응모에서 우수작으로 뽑힌 가요들을 보면 질적으로 가사나 곡이 낮다는것이 곰보 얼굴보듯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관부문에서는 아예 입을 봉하고 있고 평론가들도 모두 외면하고 있다. 60만원을 내여 벌린 방대한 이번 응모활동에서 얻은 실적은 무엇이며 교훈은 무엇인가? 이번 행사를 두고 뒤에서는 벼라별 소문과 욕설이 많은데 왜 모두들 앞에서는 말한마디 찍소리 못하는가? 과연 귀감이 될만한 경험교훈마저 못내놓은 이번 응모활동에 대하여 뒤골목에서의 욕설속의 의론들이 사실이라면 이는 나라의 돈 60만원을 밑씻개휴지로 써버렸다는 범죄행위가 설계되는 이야기다. 그래도 지상을 통하여 말한마디 못하는 우리 문단의 문인들과 평론가들, 그리고 비평성을 띤 문장을 감히 지상에 낼 엄두도 못하는 편집들, 필자는 상전의 비위에 거슬릴가 두려워 맴돌이치는 노복처럼 보인다는 느낌을 숨김없이 털어놓는바다. 한개 문단에 문예비평이 없다는것은 한 동아리 사람들에게 병치료를 해줄 의사가 없다는것으로 비유할수있다. 만약 전염병이 휩쓸때 의사가 없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자칫 전염병이 그 동아리 사람들을 전멸시킬수도 있는것이다. 이렇다면 이건 실로 무서운 일인것이다. 우리 문단에는 지금 비리가 독판치고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리에 대하여 언급조차 못하고있는 실정이다. 이는 문단을 이끌고있는 일부 지도층 사람들의 독단적사업작품과도 관계가있다. 이런 사람들은 백화쟁명을 부르짖고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양대가리를 걸고 개고기를 파는 사람들인것이다. 이런 지도층 사람들로하여 문단에 민주가 없고 언론자유가 없고 문예비평마저 없다. 하여 저질작품들이 우수작품으로 뽑히는 실례들도 보편적현상으로 되여있다. 얼마전 우수작품으로 뽑힌 수필에서 필자는 이런 구절을 읽은바가있다.   “....세상이 아무리 어지러워도,시기와 질투, 편견과 오만, 심지어 전쟁과 학살이 기승을 부린다고 할지라도 여기, 우리 00단만은 그와는 상관없이 가장 순수하고 따뜻한 마음으로 서로서로 끈끈한 정을 나누며 아름다운 하모니를 이뤄갔으면 하는바람, 그리하여 00단을 누구나 들어오고 싶어하고 한번 들어오면 나갈 생각을 하지 않는 화합의 지상락원으로 만들어 갔으면 하는 강렬한 소망이 나의 가슴을 뜨겁게 달구었던것이다....” 독자들은 이구절을 읽어만 봐도 얼마나 한심한가를 느끼게 될것이다. 00단에 아무리 마음이 쏠리고 감정이 통한다고 해도 전쟁과 학살이 기승을 부리는것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00단만 잘되기를 바랄수 있는가! 어찌 이런 어마어마한 현상과 대비를 하면서 자그마한 00단을 그토록 높이 찬양할수 있는가!  이 글을 발표할때 편집이 보아내지 못한것도 문제지만 이 작품을 우수작품이라고 평의해 내놓은 평심들 행위가 더욱 증오를 불러일을킨다. 평심들이 한사람은 아닐텐데 모두다 똑 같은 한심한 근시들이여서 곰보자국얼굴을 보아내지 못했는가? 아니면 작품은 아예 심열도 하지 않고 작자만 보고 평의했는가? 우수작품으로 뽑힌 중에서 이런 저질작품은 얼마든지 골라낼수있는것이 우리 문단의 실정이다.  중국조선족문단은 그 뿌리를 중국조선족사회에 깊이 밖고서 중국조선족의 문화를 전국과 세계에 널리 선을 보여주면서 빛내여온 문화그룹이다. 이 그룹은 우수한 작가 음악가 미술가들을 많이 배양했으며 이런 예술가들은 우수한 작품들을 무수히 창작하여 중국조선족의 중국에서의 위상을 널리 선전하였고  그 생존과 발전에 커다란 공적을 쌓아왔다 중국조선족문단의 지난날 업적은 광휘롭다. 이 문단의 앞길은 더욱 빛나야 한다. 빛나는 문단이 되려면 이 문단에는 반듯이 문단의 병집을 진단하고 고칠수있는 의료진이 건전히 수립되여야 한다. 이 의료진의 사명은 곧 문예비평이다. 문예비평으로 우리 문단의 로선을 바로 잡아주어야 한다. 문예비평의 주도적핵심력량은 평론가들이다. 지금의 평론가들중에는 안마사들이 많다. 주글주글한 늙은이의 배가죽을 안마해주면서도 천하없는 미인의 배가죽같다고 하는 안마사들이 말이다.  평론가들이여, 안마사가 되지말자! 평론가들이여, 우리 문단의 고명한 의사가 되자! 편집들이여, 상전의 노복이 되지말고 대담히 비평문장을 실어주자! 모든 작가들이여, 자기작품의 흠집을 밝히는것을 인권공격으로 보지 말자. 밝혀진 흠집이 사실이라면 훌륭한 의사의 검진을 받았다고 감사를 드리자. 이것이 작가가 가져야할 수양이 아닐가!                                                    라주   * 00단ㅡ 지금 실재하고있는 어느 활동단체이다. 작품의 이름, 작자의 이름, 문학상이름과 구체적인 시간을 상세히 밝히고 싶지만 상세히 공개할 경우 작자와 그 주최단위 지도자들의 반응이 어떨지 몰라 기피한다. 비리가 흥성하고있는 현실에서 완전폭로를 한다는것은 지뢰를 밣는 일이 될수도 있는것이다. 독자들의 리해를 바란다.  
1793    가사가 대중성이 없이 독서적인 향수를 느낄수 있어도 좋다... 댓글:  조회:3854  추천:0  2016-11-10
작성자: 김은철  김대현의 가사창작기법으로부터 본 당전 가사창작에 대한 소견                           라주     필자는 연변의 모든 예술장르중에서 가요가 수량적으로 제일 많이 창작된다고 본다 “연변음악”,”해란강여울소리”, “생활안내”.텔레비방송, 그리고 비공개간행물인 “민들레”,”미인송”등 잡지들에서는 모두 새로 창작되는 가요들을 대중들에게 선을 보이고있다.    연변음악은 연변조선족들과 산재지구에 있는 조선족들에게 정신문화생활에서 큰 역활을 해왔고 연변의 조선족의 존재와 독특한 문화를 전국 나아가서 세계에 널리 선을 보이는데 커다란 역할을 수행해왔다.     그런데 이 근년에는 창작되는 가요가 많지만 대중들에게 불리우는 가요는 극히 적다. 절대다수의 가요들은 태여나자마자 단 한번도 대중들의 입에 오르지 못하고 책속에 묻혀버리는 가련한 운명을 면치못하고있다.   그렇다고 해서 필자는 책속에 묻혀있는 이런 가요들이 대중들에게 아무런 가치도 없는 무의미한 존재라고는 보지 않는다. 비록 불리우지는 못하지만 독자들이 훓어보는 순간 새별처럼 반짝이는 미적빛갈을 약간만이라도 발산하고있는 가사라면 독자들은 그 빛갈에서 독서적인 향수를 감수할수 있기때문이다. 그리고 책속에 뭍혀있는 노래라하더라도 그것은 연변음악의 발전에 필요한 자료로 영원히 남아있기때문이다. 그런만큼 이런 노래가사들의 질을 제고하는것은 현실적으로 중요한 과제라고 본다.    한마디로 말해서 필자의 주장은 불리우지 못하는 가사를 세상에 출생시켜도 대중들에게 독서적인 향수라도 선사할수있고 사료로 보관할수있는 그런 가사를 창작하자는것이다.   유감스러운것은 그렇게 많이 창작되여 나오는 가사들에서 독서적인 향수를 느낄수 있는 가사가 많지 않다는것이다. 그것이 필자에게는 고민이 되여 나름대로 원인을 찾아보았는데 아래에 김대현의 가사 “청산의 나그네”를 분석하면서 당전 가사창작에 대한 소견을 피력하려 한다.   우선 김대현이 쓴 가사 “청산의 나그네”를 보자.          청산의 나그네     청산을 밟으며 홀로 걸으며   무엇이 신나서 휘파람 부느냐   걸머진 배낭에도 코노래 흥얼흥얼   산이 좋아 산을 찾는 청산의 나그네   그리움 기다리는 청산을 찾아서   오늘도 홀로걷는 청산의 나그네     청산에 정이들어 깊이 정들어    외로움 달래며 다닌길 얼마냐   새소리 꽃향기에 세월을 묶어놓고   숲이 좋아 숲속에서 꿈꾸는 나그네   창춘이 손짓하는 청산을 찾아서   오늘도 홀로걷는 청산의 나그네     필자가 처음 “생활안내”신문에서 이 가사를 보았을 때 창작기법이 여느 가사에 비하여 독특하다는 느낌에 오래도록 음미하며 손에서 놓지 못했다.   우선 이 가사는 여느 가사들보다 달리 생활의 세부에서 제재를 찾았기에 새롭고 생신하다는 느낌이였다.   개혁개방이후 작자들마다 수십년간 정치에 얽매였던 고루한 창작방법을 하루속히 버리고 자유롭게 작품을 써야한다고 주장하고있긴 하지만 실제상 창작되여 발표되는 가사들을 보면 아직도 많은 가사들이 낡은 틀에서 벗어 못나고있다. 정치선전을 위해 당과 수령을 노래하던 가사의 내용들이 지금은 연변이나 고향 혹은 부모님을 노래하는 경향으로 옮겨졌고 표현형식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다.   사람들의 세부적인 생활에서 실감있게 다룬 가사들은 아직 퍽 부족한 상황이다. 그런데 김대현은 산을 사랑하는 한 나그네의 삶과 꿈을 짤막한 한수의 가사에 담아 비교적 완벽한 형상을 창조하여 독자들에게 보여주고있다.   모아산 산길에 나가보면 배낭을 지고 등산하는 사람들을 어렵잖게 볼수있다. 작자는 바로 등산을 하는 이런 보통사람들의 형상으로부터 령감이 떠올라 “청산의 나그네”를 쓴것같다. 청산을 밟으며 휘파람을 불며 코노래도 흥얼흥얼거리는 나그네의 형상은 등산하는 즐거움과 유쾌한 심정을 잘 보여주고있다. 얼핏보면 가사에서 “홀로”란 단어가 “휘파람”이나 “흥얼흥얼”과 같은 단어들과 내용상 그리고 감정상 대립을 이루고 있지 않느냐는 의문도 들수있는데 문제는 “홀로”라는 단어를 어떻게 리해하느냐가 주요하다고 본다. 필자는 이 가사에서 “홀로”를 고독이나 외로운것으로 리해하지 않는다. 만약 작자가 가사의 주인공을 고독이나 외로운것으로 표현하려했다면 “휘파람”이나 “흥얼흥얼”과 같은 경쾌를 나타내는 단어들을 사용하지 않았을것이다. 따라서 필자는 “홀로”를 여럿중의 하나, 혹은 남먼저라는 뜻으로 리해한다. 등산하면 좋다고 말하는 사람은 많지만 직접 행동에 옮기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그러니 가사의 주인공 나그네는 자연속에서 삶을 남먼저 실천에 옮기며 체현하는 인물이다.   총적으로 1절에서는 산을 찾는 나그네의 흥겨운 심정을 표현하고있다.   2절의 가사를 보면 나그네의 삶과 꿈은 청산에 있다는것을 쓰고있다.   인간이란 살다보면 괴로울 때도 외로울  때도 있는법이다. 나그네는 인생에서 겪는 외로움도 청산에서 달래고 흐르는 세월도 새소리와 꽃향기에 묶는다고 했는데 이는 청산에서 꿈을 가지고 영원히 살아가려는 나그네의 개성을 특징적으로 잘 보여주고있다. 청산보다 더 청신하고 아름다운 곳은 없다. 이런 곳이니 아픔도 외로움도 달랠수있는것이다.   이 가사의 또 한가지 특점은 경물묘사에 치중하지 않고 나그네의 형상창조에 필묵을 쏟았다는것이다.   적지 않은 여느 가사들을 보면 경물묘사에만 그치면서 그 경물속에서 활동하고있는 인물에 대해서는 홀시해 버리는 경향이 많다. 필자의 이 말은 경물묘사로만 엮어쓰면 가사창작이 안된다는 견해가 절때 아니다. 경물묘사를 위주로 하더라도 그 경물속에서 움직이는 인물들의 형상이 독자들의 심금에 안겨오면 가사의 품위가 한층 더 심화된다는 주장이다.   김대현의 ‘청산의 나그네”를 보면 직접 경물을 묘사한 구절이 없다. 대신 청산의 경물을 묘사할수있는 적절한 단어 “새소리”,”꽃향기”,”숲”등 단어를 인물의 부각에 유기적으로 기교있게 결합시켰기에 청산의 경물이 자연적으로 인물형상과 함께 독자들의 심금에 보는듯이 안겨오는것이다. 여기에서 김대현의 숙련된 가사창작의 예술적기교를 진맥할수있는것이다.   현실의 가사들을 보면 경물묘사와 인물형상이 유기적으로 결합되지 못한 현상들을 어렵지 않게 볼수있다.   다음으로 이 가사의 결구는 조금도 보태거나 빼버릴것이 없이 간결하고도 엄밀하게 째이였고 가사로서의 음악적운률도 명확하다. 이는 가사형성의 가장 기본이 되는 요구로서 작자가 반복적인 사고와 수정과정을 거쳐야만이 이런 완미한 예술작품을 완성할수 있는것이다. 이는 가사창작을 식은죽먹기로 여기며 대수대수 써내는 예술품위가 낮은 작자들에게 훌륭한 귀감이 아닐수 없다.   마지막으로 이 가사에 사용된 단어사용이다.   개혁개방후 수십년동안 줄곧 정치선전에 얽매여 쓰던 작사자들이 사상을 해방하고 자유로이 창작을 해야한다고 말은 하지만 필자가 보기에 아직도 많은 가사창작자들이 낡은 창작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본다.   다수의 가사창작자들은 당과 수령을 노래하던 그 본때대로 지금은 연변이나 고향 혹은 부모를 노래하는 경향에 치우치고있다. 따라서 이런 노래들에는 진달래, 두만강, 아리랑, 장백산, 모아산, 등과 같은 단어들이 많이 사용되는데 특히 “아리랑”이란 단어는 연변을 노래하는 노래에 거의나 조흥구로 혹은 부적절한 상징적의미로 나타난다. 필자가 보기에 “아리랑”은 우리 민족이 걸어온 고난의 로정과 미래 등 폭넓은 범위에서 괴로움, 행복, 희망과 같은 상징적의미를 갖고있다. 어찌보면 “아리랑”은 우리 민족의 대명사라고도 할수있다.   하여 필자는 “아리랑”이 잘못 쓰인 구체적인 가요들을 지적하면서 평론문장을 써서 “생활안내”신문에 발표한적이 있다. 필자는 다시 한번 당전 가사창작에서 “아리랑”이란 단어를 람용하지 말것을 건의 한다. 좋은 말도 세번이상하면 듣기싫다는 우리 말의 속담이 있는데 노래마다 늘 쓰는 단어를 약국의 감초처럼 써대니 역겨운 느낌만 든다   그런데 김대현씨는 언어사용에서 가사의 수요로부터 가장 적절한 단어를 골라쓰기에 힘을 기울이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김대현씨의 가사들이 완전무결하다고는 보지 않는다. 어떤 구절은 그 의미가 대중들에게 파악하기 어렵게 보이는 곳도있다.   례하면 “그리움 기다리는 청산을 찾아서”이다    여기서 “그리움”은 나그네가 청산을 그리워하는 “그리움”이다. 그러니 이 구절의 뜻은 청산이 나그네의 “그리움”을 기다린다는것이며 따라서 그런 창산을 찾아간다는 의미로 리해된다. 한마디로 말해서 “그리움”은 “나그네”의 대명사이다.   만일 이 구절에서 직설적으로 “나”혹은 “나그네”를 등장시키면 “나를 기다리는 청산을 찾아서” 혹은 “나그네를 기다리는 청산을 찾아서”로 될것이다. 이렇게 되면 아래위 구절과 잘 어울리지 않고 가사의 3인칭에도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니 가사의 색채가 어색해짐을 피면할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나그네”가 아닌 다른 단어 “유람객”을 찾아 “유람객을 기다리는 청산을 찾아서”로 한다면 어찌 되겠는가? 필자가 보기에 작자가 표현하려는 대상이 “나그네”인만큼 “유람객”은 “나그네”와 거리가 먼 표현대상이기에 여전히 적절하지 않다고 본다.   하여 작자는 “나그네”의 대명사인 “그리움”을 택함으로서 청산을 사랑하고 그리는 “나그네”의 감정색채를 더욱 짙게 표현하였다. 그리고 독자들에게 음미적인 새로운 색채를 보여주었는바 이런 기교는 일반 작자들과 달리보이는 독특한 언어예술기교라 하지 않을수 없다.   그리고 이 가사에서 “홀로”라는 단어는 독자들에게 그 사용의 의미가 리해되기 어렵다.   가사란 문장결구가 엄밀히 째이고 언어가 세련되여야 하는데 작자는 실지 수요로부터 부득불 이런 단어를 쓰지않을수 없었다는 느낌도 들고 또 단어사용의 기묘한 예술기법이라는 느낌도 든다. 아무튼 가사에서는 될수록 쉽게 리해되는 언어를 사용하자는것이 필자의 주장이다.   다음 김대현씨의 가사창작에서 꼭 짚어 이야기하고픈것이 하나있다. 그것은 김대현씨가 문학예술창작을 보는 자세이다. 문학창작의 자세는 아주 주요한바 그것은 정치 속박에서 벗어나 문학예술작품을 창작하는가 아니면 정치의 머슴군으로서 문학예술작품을 창작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이 점은 김대현의 가사창작으로부터 어렵지 않게 그의 창작자세를 검증할수있다.    1981년에 창작한 가사 “또 한배미 넘어가세”를 보자.                        또 한배미 넘어가세                              아침해 두둥실 동산에 걸어놓고                이앙기 몰아가니 신바람 절로나네               에헤야 상사나듸야 이 논판도 단숨이라               또 한배미 넘어가세               스리나 슬쩍 넘어가세                 앞벌도 들썽들썽 뒤벌도 들썽들썽               만석벌 그 어데나 더덩실 춤이로다               에헤야 상사나듸야 기계농사 멋이로다.               또 한배미 넘어가세                스리나 슬쩍 넘어가세                 오늘은 록파만경 래일은 금파만경               모내는 마음에도 금파도 넘실넘실               에헤야 상사듸야 노래싣고 기쁨싣고               또 한배미 넘어가세                스리나 슬쩍 넘어가세     1981년도라면 개혁개방의 종소리가 사람들의 정신세계를 갓 환기(换气)시키기 시작할 때이다. 비록 형세가 크게 변하는 시기라는것을 작가들마다 의식하고 있긴 했지만  작가들 저마다의 사상에는 여전히 문학이 정치를 위하여 복무해야한다는 고루한 관념이 드팀없이 깊은 뿌리를 밖고있었다. 그러니 가사창작에서는 당과 수령을 노래하는것이 변함없는 기본 주제였다.    그런데 김대현이 그때 쓴 이 가사를 보면 정치에 얽매여 썼다는것을 전혀 찾아볼수 없다.    1절에서는 기계로(이앙기)농사짓는 농군들이 신바람나 일손을 다그치는 전경, 2절에서는 기계로 농사짓는 흥겨운 일터와 농군들의 기쁨, 3절에서는 풍년의 희망을 안고 모내기를 하는 농군들의 형상을 그리고있다.    그리고 후렴은 일손을 다그치는 농군들의 일솜씨를 보여주는바 뜻이 없는 조흥구 “스리나”와 뜻있는 어휘”슬적”이 잘 배합되여 농군들의 날랜 일솜씨를 잘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그 당시에는 농군들을 “사원”이라고 불렀는데 3절까지 된 이 가사에서 “사원”이라는 단어를 찾아볼수없다. 그 당시 어떤 지방에서는 여전히 집체로 농사를 지었고 어떤 지방에서는 땅을 농민들에게 도급주어 농사를 짓게 하였다. 그렇다면 여전히 집체의 위력을 노래할수있었겠는데 작자는 인민공사나 생산소대와 같은 집체이름을 언급하지 않았다.    이는 작자가 일정한 원경을 내다보며 이 가사를 쓴것이라고 본다. 한수의 가사를 쓰는데도 가사의 생명을 고려하며 쓰는것- 이것 역시 대현씨의 가사창작기법중의 홀시할수없는 특점이라고 본다. 그러하기에 30여년이 지난 지금 이 가사를 보아도 여전히 시대에 떨어졌다는 느낌이 없다. 정치에 구속되지 않은 작품은 그 생명도 길다고 본다.   필자는 막언이 로벨문학상을 받은후 그의 소설들을 읽으면서 로벨문학상을 탄 원인이 어디에 있을가 하며 여러면으로 생각한바 있다. 막언이 로벨상을 받은데는 여러가지 우수한 원인들이 있겠으나 정치의 속박을 받지 않고 그 당시의 력사적사실들을 사실주의로 썼다는 점에 필자는 놀라운 감탄을 가지게 되였다.    문학이 정치를 위하여 복무해야한다고 부르짖던 그 시기에 정치의 속박을 벗어나 소설을 썼다는것도 놀라운 일이지만 그 시기에 그런 소설을 맡은 책임편집 또한 간단한 편집들이 아니라고 생각된다. 이건 막언이나 책임편집들이 벌써부터 문학과 정치의 관계에 대하여 명확한 관점을 가지고 실천에 옮기고 있었다는것을 말한다.    김대현씨 역시 일찍부터 정치와 문학의 명확한 관계를 명석하게 인식하고 짤막한 한수의 가사창작에도 그것을 체현하지 않았는가 하는 추측이다.    유감스럽지만 지금 창작되는 가사들을 보면 아직도 우리의 작자들이 정치와 문학의 관계에 대하여 명확하게 인식못하고 그 어딘가에 문학을 귀속시켜 작품을 쓰는 페단이 의연히 존재하고있다는 점이다. 지난날에는 정치를 위하여 썼는데 그 본새로 지금은 변상적으로 연변이나 고향, 또는 부모를 노래하는데 치우치고 있는것같다. 그리고 작자가 어떤 령감이 떠올라 쓴것이 아니라 어떤 의무감과 도리적인 각도에서 썼다는 느낌이다. 그러하기에 이런 가사들은 대부분 현실을 떠나 추상적으로 씌여지고있다.   례하면 고향에 대한 노래이다. 지금 조선족들은 한국으로 대도시로 대량 이동하고 있는 상황이다. 필자의 고향은 본래 150여호가 살던 오붓한 마을이 였는데 지금은 오지가지도 못하는 10여호만 있을뿐이다. 그나마 농사에 종사하는 호는 한호도 없다. 밭과 집은 거의나 타민족이 들어와 찾이하고 살고 마을의 거리에는 돼지,오리,게사니가 꽥꽥 소리치며 다니고 학생들이 뛰놀며 공부하던 학교는 양우리로 변했다. 고향을 보면 눈물이 날 지경으로 비참하다. 필자의 고향뿐아니라 조선족마을의 대부분이 거의 정도부동하게 이런상태가 아닌가.    그런데 고향을 노래하는 가사들은 일률로 살기좋은 곳으로 씌여졌다. 가사에 등장하는 인물의 형상도 고향을 잊지 않고 고향을 사랑하는것으로 부각되였다. 누구의 지시에 의하여 이렇게 쓰는건가? 아니면 작자들의 령감에 떠올라 이렇게 쓰는건가? 하여 필자는 이런 가사들이 어젯날 정치에 귀속되여 쓰던 그 본새대로 지금은 고향을 노래하는데 치우치고 있다고 우에서 이미 언급한바있다. 그것도 변상적이라하면서 말이다. 그토록 고향을 그리고 사랑한다면 왜서 그 많은 조선족들이 고향을 떠나 돌아오지 않는가? 이걸 조선족의 약점이라고 보아야 할지 아니면 지구촌시대에 필시로 경과해야할 장점으로 보아야 할지 필자로서는 어떤 결론을 내릴수 없다.    아무튼 현실을 떠난 추상적으로 씌여진 고향의 노래가사들을 보면 마음에 안겨오지 않는다. 차라리 해방전 우리 민족이 고향을 버리고 살길을 찾아 헤매던 시기에 작자들의 머리에 자연적으로 령감이 떠올라 썼던 “나그네의 설음”,”번지없는 주막”, “타향살이”와 같은 형식으로 가사를 쓴다면 오히려 독자들의 심금을 울려줄수있지 않을가 하는 관점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 시절의 가사들처럼 앞길이 막막한 그 본새에 따라 쓰자는것은 결코 아니다. 개혁개방후의 사회의 발전은 우리 민족에게도 희망을 주고 있지 않는가. 우리 민족의 장래는 우리 민족의 자체에 달렸다는것은 명백한 현실이다. 그러니 우리 작자들은 스스로 이 점을 각오하고 한수의 짤막한 가사라도 써야하지 않을가. 우에서 실례를 든 “아리랑”을 비롯한 몇개의 단어들에만 에돌면서 가사창작에 몰두한다면 감칠맛있는 가사를 쓴다는것은 퍼그나 어려울것 같다, 작사자들마다 보다 깊은 가사창작의 기법이 모색되여야 한다고 본다.   우에서 평한 “청산의 나그네”와 “또 한배미 넘어가세” 외에도 “당신은 향기로운 녀자”, “꿀도 풍년 정도 풍년”,”웃는 얼굴”, “장미의 밤’등 수십수의 우수한 가사작품들이 모두 생활의 세부적인 면에서 제재를 찾아 정치적속박을 받지 않고 쓴것들이다. 생활의 실감을 느끼지 못하는 추상적으로 쓴 가사들은 한수도 찾아볼수 없었다.   현실을 떠나 추상적으로 정치를 위해 가사를 쓰던 시기는 지나갔다. 그 시기로부터 가사를 쓰는데 숙련되고 세련된 기교를 장악했다고 자부하는 작자들이라 하더라도 창작에서는 부단히 자신의 기법을 깊이 검토하며 새로운 기교를 모색하지 않는다면은 연변의 가사는 그 앞길이 암담할뿐이라고 필자는 보고있다.   이상 김대현씨가 쓴 가사 “청산의 나그네”와 “또 한배미 넘어가세”를 중심으로 평하면서 당전 가사창작에서 나타나고있는 부분적 병집들을 끄집어 라렬했는데 작사자들의 창작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필자는 더없이 기쁘게 생각하겠다.         이 평론문장은 2013년 "문화시대"제5기에 실렸음
1792    시조짓기에서 3장6구는 완결된 뜻의 장(章)을 이루어야... 댓글:  조회:3773  추천:0  2016-11-10
시조짓기에서  3장6구의  참뜻을 살릴데에 대하여                                                            김은철     중국에서 사는 우리 조선족들은 조상들에게서 물려받은 모든 문화유산을 지금껏 타민족문화의 강력한 포위속에서도 소중히 여기며 계승발전시켜 왔다. 시조는 오로지 우리 민족에게만 있는 문학예술의 한 장르로서 역시 우리 민족의 귀중한 문화유산임에 틀림없다. 하기에 지금 연변에는 시조협회며 시조창단과 같은 문화단체들이 조직되여 활발하게 활동을 벌리고 있으며 그 성과도 주렁지다고 본다.   필자는 호황을 이루고있는 시조협회들과 시조창단들의 주렁진 성과들을 긍정하면서 필자나름대로 시조짓기에서 존재하는 일부현상에 대하여 미숙한 견해나마 피력해 보려 한다. 다 알다싶이 시조는 그 구성이3장6구(三章六句)이다. 여기서 시조창작자가 주의를 돌려야할것은 章의 의미이다. 章이란 완결된 내용을 나타내는 언어행위의 최소 단위이다. 章을 이루는 요소에는 두가지 문장성분이 있는데 그것인즉 주어와 술어이다. 그러나 실지 응용에서 주어가 생략되여 술어만 나타나는 경우도 있는데 역시 하나의 章으로 본다. 그러니 시조는 꼭 세개의 장으로 써야한다는것이다. 그런데 지금 시조창작자들이 지어내는 시조들을 보면 두개의 행이 합쳐 하나의 章을 이루는 경우가 많다. 이런 현상은 우수작품으로 평을 받은 시조에서도 나타나고 있는데 이는 시조창작자들이 문장지식이 결핍하여 생기는 현상으로서 근절하지 않으면 안될 문제라고 본다. 집을 짓는데는 기둥, 벽, 지붕 등 요소가 있는데 건축사가 어느 한 요소를 빠뜨렸다면 그 건축사가 지은 집이 무슨 꼬락서니가 되겠는가. 마찬가지로 시조를 짓는 사람이 章이 아닌 확대된 규정구나 수식구를 써놓고 그것을 章으로 간주한다면 그것 역시 웃음거리가 아닐가! 필자는 연변생태문화예술협회에서 꾸리는 “민들레”라는 내부잡지의 편집일을 맡아하고 있는데 소설,수필,시,가사,시조,평론,소품,가요,등 모든 장르의 작품들을 제한없이 취급하고있다. 그중 시조의 투고가 적지 않은데 창작자 대부분이 로년들이다. 로년에 와서 시조창작에 애호를 가지게 된 이런 작자들은 대부분이 시조의 겉인상으로부터 시조를 짓고있다. 시조가 3장6구로 되였다는것은 알고 있으나 그 의미를 깊이 파악하지 못하고 쓰기에 3행시를 써놓고 시조로 보는 실례가 많다. 아래에 “성숙”이라는 시조를 실례로 들어 설명해 보자.                      성숙         지난밤 이슬먹고 피여난 꽃이         귀엽다고 머리를 쓰다듬지 말라네         지금은 녀자라네요 그대앞에 핀 장미 이 시조에서 첫행을 보면 “지난밤 이슬먹고 피여난”은 확대된 규정어이고 주어는 꽃이다. 따라서 첫행은 초장을 이루지 못한다. 왜냐하면 문장이 아니고 술어가 없는 주어뿐이기 때문이다. 이 주어는 제 2행과 맞물려서야 하나의 장을 이룬다. 즉 제 2행은 제 1행의 술어인것이다. 이렇게 따지고 보면 실제상 1,2,행이 합쳐서 하나의 장 (章)을 이루었을뿐이다. 그러니 어찌 시조의 요구에 부합된다고 할수있겠는가. 오로지 3행시로밖에 볼수없다. 그러나 아래와 같이 고치는 경우 3행시가 아닌 시조로 보아야 한다.                      성숙         지난밤 이슬먹고 피여난 꽃인데         귀엽다고 강아지 쓰다듬듯 말아요         지금은 녀자라구요 그대앞에 핀 장미 이렇게 고치고 보면 초장은 주어 “나는”가 생략된 완전한 장(章)을 이루고있다. 즉 “나는 지난밤 이슬먹고 피여난 꽃이다.”는 뜻을 이루고있다. 중장은 주어 ”당신은”가 생략되여 문장을 이루고 있다. 즉 “당신은 귀엽다고 강아지 쓰다듬듯 말아요.”라는 완전한 뜻을 이루고있다. 아래에 다시 옛시조 한수를 들어 설명해 보자.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아래 뫼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리 없건만은 사람이 제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 하더라   이 시조를 보면 초행은 주술관계가 완전한 문장을 이루었다. 여기서 주어 “태산이”와 술어 “뫼로다”가 결합되여 태산이 높다하여도 하늘아래 뫼(산)라는 완결된 뜻을 나타내고있다. 중장에서는 생략된 주어 “사람들이”가 두개의 접속술어 “오르면”과 “없건만은”과 결합되여 “사람들이 오르면 못 오를리 없다.”는 완결된 뜻을 나타내는 장(章)을 이루고있다. 종장은 주어 “사람이”가 술어 ”제아니 오르고”와 종결술어 “ 하더라”와 결합되여 여전히 완결된 뜻을 나타내는 장(章)을 이루고있다. 옛시조들을 보면 규정구나 수식구가 거의 없이 3장을 이루고 있으며 매개 장은 두개의 句가 병렬이나 혹은종속으로 물려있는것이 특징이다. 이런 특점은 우리가 시조를 지을때 반드시 꼭 살려서 지어야 하는데 지금 시조를 짓는 작자들중에는 초장을 하나의 수식구로 만들어 놓고도 그것을 章으로 여기는 경우가 많다. 지어 3장이 되지 못하는 이런 시조들이 우수작품으로 평을 받은것들도 있는데 필자가 보기에는 덜된 시조라고 본다. 이런 시조들의 실례들은 꼭 집어서 말해야 옳다고 보아지나 필자는 현대시조의 창작기법에 대한 재료나 새로운 견해를 담은 리론을 본적이 없고 연구도 없다. 하기에 장을 이루지 못하는 수식구로 章을 대체하여 짓는 이런 시조들에 대하여 옳고그름을 지적할 처지가 못된다. 그러나 이런 시조들이 3장6구의 틀을 갖춘 시조라고 부를수 없는 견해만은 확고히 피력하는바다. 필자는 “민들레”잡지의 편집일을 하면서 이런 시조를 많이 접촉하였기에 출판된 시조들과 우수 시조들을 두루 살펴보고 시조로 볼수없는 3행시들이 시조의 너울을 빼앗아 쓰고있다는것을 발견하고 눈에 거슬려 이 글을 쓰는바다.   시조창작자들께서 필자의 이 문장을 보고 자신들의 견해를 피력해 줄것을 기대한다.  *    이 글은 2015년 "한국새소식" 제3기에 발표되였음
1791    詩作할 때 민족의 정서와 녹익은 가락을 집어 넣어라... 댓글:  조회:3800  추천:0  2016-11-10
우리의 맛과 멋으로 둥그러진 민속수라상   -김영건시인의 미니시집 을 들어보다   한영남         흔히들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 하고 세월 이기는 장사 없다고도 한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것은 분명 있다. 바로 우리만의 정서요 가락이 그중 하나이다.  며칠전 한국 KBS방송국  제작진은 독일에 날아가 독일에서 살고있는 교포들과 으로 한마당이 되는 자리를 마련한적이 있었다. 이제 세월이 많이 흘렀고 그래서 2세 3세들은 우리말을 할줄도 들을줄도 몰랐다. 하지만 무대우에서 아리랑선률이 흐르자 그들은 너나없이 눈물을 머금고 손과 손을 잡고서 을 함께 열창하고있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저것이야말로 우리 민족만이 느낄수 있는 우리만의 정서요 가락이 아닐가 생각해보았었다.  한소절만 들어도 금세 가슴이 먹먹해지는 아리랑, 도라지, 노들강변…들은 우리 민족이라면 그가 설사 음식습관이 바뀌고 패션문화가 바뀌고 생활습관이 바뀌였다 하더라도 언제 어디서라도 쉽게 공감대를 형성하게 마련이다. 그만큼 우리의 정서는 우리만이 느낄수 있는 피줄이요 골수속에 녹아있는 흐름이라 해야겠다.  같은 맥락에서 오늘 펼쳐보게 되는 김영건시인의 미니시집 은 순수 우리만의 고유한 맛과 멋으로 정성껏 차려낸 민속수라상이라 해도 대과는 없을것이다. 거기에서 막걸리향을 맡든 더덕구이냄새에 심취되든 그것은 전혀 독자들의 몫이 되겠다. 좋은 음식상을 마주하고 머뭇거린다는것은 음식에 대한 모독이 될것이다. 한가지씩 맛부터 보기로 하자.     우리에게 익숙한 맛 그 은은함에 젖어보다   깊은 수심 우물 박아 아리랑 대들보에 매달린 맛 황금 메주덩어리 줄레줄레 구성진 퉁소의 알알이 구멍마다 두만강 휘파람   -에서   백년된 팔간집을 스케치한 시이다. 천년을 떠올리게 하는 시이다. 우리 민족만의 정서가 오롯이 담겨있다. 서까래에 대들보에 메주덩어리들… 그속에 묻힌 의미는 우리 민족만이 알고있다. 하얀 창호지를 바른 우리의 회벽집을 떠올리면 금세라도 그 정주칸에서 흰 김이 무럭무럭 피여오를듯 싶고 그런 김속에는 어김없이 송골송골 땀방울 맺힌 어머니의 모습도 어른거릴듯 싶다. 그리고 웃방에서는 올방자를 틀고앉은채 벌써 탁배기들에 얼큰해진 우리네 아버지들이 혹시 손때묻은 퉁소라도 구성지게 불어줄지 누가 알랴. 모든것이 초로 계산되는 디지털시대에 사정없이 내몰린 요즘 사람들에게 나름대로의 기표로 아슴한 추억을 불러주는 시라 해야겠다. 그러나 그 추억들은 단순한 추억이 아니라 한 민족이 걸어온 력사를 잔잔한 시정으로 반추해보이거니와 엇모리나 휘모리와 같이 무척 아름다운 점과 선과 면이라는 립체적인 이미지로 한마당 민속잔치를 펼쳐보이고있다는데서 또한 이 시가 한결 돋보이고있다.   삭이고 익힌 다져넣은 겨레의 맛 바람과 어울려 발효된 력사 해살로 익은 장독대   - 일부   고루 잘 섞여서 화선지에 흠씬 스며드는 푸른 먹빛이 떠올려지지 않는가. 그리고 늠실늠실 피여오르는 묵향이 코끝을 간질이지 않는가. 요컨대 에서는 우리 민족이라면 느낄수 있는 이미지들을 각각의 원소들로 그 의미를 더해주면서 독자들을 신비로운 미적 본성에로 인도해주고있는 셈이다. 이러한 메타포들은 결국 시인의 시적세계 내지 사상의 경지를 집약적으로 보여주는데서 린색하지 않을뿐더러 너흘너흘 우리 가락과 우리 몸짓을 동원하면서 영원한 우리의 아리랑을 연주하고있는것이다. 그리고 김시인의 시들에서 독자들은 자못 신선한 미의 축제분위기를 느낄수 있을것이며 그속에서 따스한 위로와 다독거림을 획득할수도 있을것이다. 시인은 시 에서는 우리 민족의 력사를 떠올리고, 에서는 우리 조상들의 푸른 숨결을 느끼게 해주며, 과 , 에서는 흘러간 세월의 무늬를 어루만질수 있게 해준다. 여기서 우리는 시인를 잠시 밀어내고 오로지 시의 표정에만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각종 부드러운 낱말들을 알심들여 선택하고 그것을 다시 시어로 승화시키면서 시의 의미를 부각시킨 시들에서 물리적인 힘을 이기는 이 단단한 표정은 무엇이란 말인가. 일곱수의 시가 전부 비슷한 가락이여서 은은함 일색인듯 하지만 그 기저에 깔린 표정은 오히려 서리발친다고 해야 할것이다. 외유내강의 조선족녀성상에 다름아니다. 환언하면 그것은 시인의 시적사유폭이 그만큼 거창하고 높이 서서 커다란 사상의 덩어리를 흔들면서 작시한 까닭이리라. 지조와 절개를 위해 은장도를 소지하고 다녔던 서슬이 새파란 조선녀성을 떠올리거나 그 도포자락에는 손도 베인다고 했던 오골의 소유자인 선비의 모습을 떠올려보면 리해가 쉽게 될수 있을것이다. 그리고 이 또한 시인이 독자들에게 주고저 하는 메시지에 다름아닐것이다. 요컨대 김시인은 으로 우리 민족상을 그려보이면서 오늘날 날로 색바래지는 우리 민족의 모습들을 안타까워하고 그것을 전승하고 발전시켜가야 한다고 호소하고있는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멋 그 의미에 심취하다   상기 이라는 표제의 미니시집에 수록된 일곱수의 시들은 자칫 피상적으로 드러난 낱말들에 의해 아날로그적인 생각을 잠간 가지게 만들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시의 깊은 뜻을 아직 모르거나 외면했을 경우 내리게 되는 섣부른 판단이 될것이다. 일곱수의 시들은 일곱알의 옥구슬처럼 순수하면서도 맑은 소리를 내고있다. 시인의 정신세계의 깊이가 헤아려지는 순수함이요 맑음이다. 순결하다못해 파릿해보이기까지 하는 그의 시적 정신세계는 분명 어지럽고 혼탁한 현실세계와는 차원이 다른것이며 그런 와중에도 그는 이 사회의 미래를 걱정하는 마음에서 알뜰하게 민속수라상을 마련한것이다. 더럽고 치사하고 자아팽창으로 팽만한 현대인들에게 사뭇 아름다운 이미지로 결고운 아리랑 무늬를 펼쳐보이면서 그 정서를 걸러주기 위해 노력하는 시인의 깊은 마음이 헤아려지게 만드는 대목이라 해야겠다.   봉선화 하얀 순정 피워낸 세월 색동저고리 외태머리 삼베옷 자주고름 흰 코신 하얀 버선발   -에서   우리의 흑백가족사진은 분명 이러했다. 그러나 요즘은 어떤가? 요즘은 어른 아이 할것없이 이런 표정은 촌스럽다고 구닥다리라고 코를 싸쥘지도 모른다. 바로 우리의 정서와 우리의 가락이 희미해지는 리유이기도 하다. 그것을 시인은 가슴아파하는것이다.   피나무함지 노란 저고리 흰머리수건 하얀 버선 베옷에 검정치마 분홍저고리에 청색치마 붉은 댕기 외태머리 꽁꽁 동이고 귀밑머리 하얀 어머니와    - 일부   피나무골에서 가난하지만 행복하게 지냈던 전설을 떠올리고있다. 거기에는 가난했지만 차분히 쌓여지는 작은 사랑이 있었고 까만 옛말이 송알송알 맺혀있었으며 노랗게  쌓이는 행복의 소리가 또르르 또르르 깊어가는 가을밤하늘에 울려퍼지고있었다. 행복은 크고 거창하고 금빛 번쩍이는것이 아니라 작고 사소하고 조금은 가난한데서 더욱 진하게 느껴질수 있다는것을 요즘도 알만한 사람들은 알고있다. 그런 보편적인 정서를 시인은 자신만의 언어와 색갈로 수묵화를 그리듯 그려보이고있다. 시인의 설명은 일체 려과시킨채로. 그래서 독자들은 시를 보면서 굳이 시인의 해석이 없지만 시인이 바라던대로의 목적지를 향해 걸어갈수 밖에 없는것이다. 그것은 오로지 우리만의 색갈과 정서와 가락이기때문이다. 이처럼 시인은 자칫 현실생활에서 잊혀져가는 우리만의 정서와 멋을 다시한번 시로 정리해보이면서 이것을 지키고 전승하는것은 오롯이 우리들의 몫임을 호소하고있다. 그리고 상기의 일곱수의 시들을 보면 자연스럽게 우리들의 어린시절 내지 조상들의 모습까지를 떠올리게 되는것은 시인이 상기의 시들을 통해 독자들에게 보여주고저 했던 메시지에 다름아닐것이다.   오늘 우리는 김영건시인이 그만의 음색으로 열창한 을 들으며 민속잔치상을 마주하고 우리 민족의 향과 맛과 멋에 젖어보았다. 여기서 타이틀인 구색 아리랑을 한번 짚고넘어가야겠다.  구색은 아홉가지 색을 가리키기도 하고 여러가지 물건이나 요소들이 서로 어울리게 고루 갖추어진것을 이르기도 하는 말이다. 아홉 구란 무슨 말인가. 그것은 수의 의미에서 보면 가장 큰 수를 이르는 말이요 많고 풍요로운 의미로도 통한다. 또 구색을 갖추다에서처럼 여러가지를 두루 갖추고있음을 지칭하기도 한다. 구색 아리랑이라면 어떤 의미일가. 그것은 우리 민족의 대표곡으로 일컬어지는 아리랑을 두루 아우른다는 의미일것이고 아리랑으로 대변되는 우리 민속의 많은 부분들 역시 두루 아우른다는 의미가 될것이며 보다 많은 시인과 독자들이 이 마당에 함께 동참하여 우리 민족의 사라져가는 아쉬운것들을 같이 지키고 전승해가자는 메시지가 담겨있는것이다. 어쩌면 요즘따라 인공적이고 인위적으로 만들어내는 민속촌은 많아질지 모르지만 순수 우리만의 정서와 맛과 멋은 오히려 사라지고있는것은 아닌지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질 즈음 다행히 이런 시들에서 시인들의 각성한 모습을 볼수 있어서 고무적이고 우리 민족의 미래를 걱정하는 지성들이 전부 사라진건 아니라는데서 안도하게도 된다.  그리고 이것은 어느 한 시인만의 몫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몫이라는것을 다 같이 새겨볼 법이다. 멋진 시를 보여준 시인에게 박수를 보낸다. 2014년 1기 발표문    
1790    심련수, 27세의 짧은 생애에 근 250여편의 문학유고 남기다... 댓글:  조회:3960  추천:0  2016-11-10
시조로부터 본 심련수의 류랑의식을 두고 김성호      심련수는 27세라는 그 짧다란 생애에 근 250여편의 문학유고를 남겼다. 그중 시조가 모두 87편이 된다. 그의 시조는 다시 려행시조와 일반시조로 나누어 볼수 있는데 려행시조가 69편이고 나머지는 일반 시조이다. 그가 남긴 시조작품속에서 우리는 심련수의 류랑의식의 흔적을 얼마든지 찾아볼수 있다. 디아스포라적의식에 안받침된 그의 류랑의식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것은 바로 오늘의 중국조선족의식형성의 본질문제이다. 아래에 심련수의 시조작품의 구체적인 분석을 통해 이 문제를 짚어보려한다. 1.   시조란 한반도에 고유한 민족시가형태의 하나로서 단가, 또는 시절가라고도 불리여왔다. “시조는 향가의 3분단형식과 락구형식을 기본으로 하여” 3국시기에 발생한 정형시행태로서 대개 6구 3련으로 이루어졌으며 3.4조 혹은 4.4조 운률조직을 기본으로 하여 3련의 첫머리에 감탄사를 붙이는것이 특징이다.   이와 같이 시조는 단가로 불리울만큼 아주 짧은것이 특징인바 그만큼 시조는 우선 다른 한 속성으로의 간이(简易)성을 나타내고있다. 하지만 시조 역시 하나의 시형식의 쟝르인만큼 그저 6구의 말마디들을 세줄 세워놓아서 되는것은 절대 아니다. 시조도 엄연히 시적인 형태의 특징을 갖추어야 한다. 이리하여 시인들의 경우 그것이 짧다는 의미에서 다른 시형태에 비하여 간이성을 나타낼뿐이다.   심련수는 문학 지향인이였으며 그의 유작들을 보면 그는 당시의 유일한 조선문신문인 “만선일보”에 몇수의 시들을 이미 발표한적이 있을만큼 시인에 더 가까웠다. 시인 지망생인 심련수는 고교졸업을 앞두고 수학려행을 할 당시 그가 늘 써오던 일기를 접고 시조를 떠내는것으로써 일기를 대체한다. 1940년 5월 5일부터 5월 22일까지 18일동안 그는 “일만리 려정을 답파하고서”라는 제목으로 려행의 순서에 따라 시조작품을 써냈다. 먼저 “떠나는 길”이라 제목을 단 려행시조중의 첫 시조는 5월 5일 집을 떠나면서 자신이 이미 4년간 살아가면서 정을 붙인 고장의 자연과 작별인사를 하며 떠나는 작품이다. “해란아 갔다오마 반만리 먼길을 사년간 먹은 정도 적다곤 못하겠다 갈 길이 멀고머니 쉬여쉬여 가련다. 모아 뫼 꼭대기 우에 푸른빛 열벗으니 돌아올 그때에는 록음아 깊어라. 산과 물 다 구경하고 돌아와 비겨 볼게.” 심련수네집은 그 당시에 중국 길림성 연변내에 있는 룡정의 세전이벌의 가장 웃쪽에 자리하고있었는데 그 집의 뒤로는 해란강이 유유히 흐르고 거기서 머리를 들어 북쪽을 바라보면 바로 모아산이 굽어본다. 심련수는 중국조선족의 문화의 요람이라고 할수 있는 해란강에 어느덧 저도몰래 정이 든다. 그리하여 해란강과 대화하는 형식의 시조를 지었는데 그 대체적인 의미는 반만리 먼길을 수학려행을 떠나는데 너무 급히 아니고 “쉬여쉬여” 갔다가 올것이니 그 사이에 “푸른빛 열벗고”있는 모아산은 록음이 깊어질것이니까 강산을 구경하고 돌아와서 이 고장의 산과 물들과 비교하여 보겠다고 하는것이다. 강과 산이라는 이 대자연을 사랑하고 그리하여 자주 어디론가로 떠나기를 즐기는 심련수의 류랑적인 의식이 여기서도 얼마간 발로되고있다. 그날로 심련수는 일행과 함께 두만강역에 이른다. 아마 오후에 룡정을 떠났을것이고 또 국경을 드나들어야 하는 수속 등, 어쨌든 그들은 두만강역에서 하루밤 묵어가는데 여기서 또 하나의 시조가 나온다. “국경의 하로밤”이라는 이 시조에는 그가 밤을 지새우려는듯 잠 못 이루는 처지와 그 원인은 바로 우리 선조들이 살길 찾아 두만강을 건느거나 아니면 나라를 잃고 독립을 위해 싸우러 이 강을 건너면서 “울더냐 웃더냐 응”하고 묻는다. 심련수의 류랑의식속에는 바로 강렬한 민족의식이 잠재되여있었다는 점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류랑은 본인이 주동이 되여 나다니느냐 아니면 모종 원인의 핍박에 의해 나가느냐의 두 종류로 나눌수 있을것이다. 많은 경우 류량의 길에 나서는 사람들은 째지게 가난하여 더는 먹고입는 문제를 해결하기 힘들어 살아나가기 위하여 떠가거나 아니면 모종의 정치적원인의 박해로 고향을 떠나가야 하는 사람, 혹은 뜻하지 않은 범죄행위때문에 도망을 가야 하는 사람 등, 어쨌든 어쩔수 없는 선택을 하여 수동적으로 떠나는 사람들이 그 다수를 차지한다. 심련수는 부모를 따라 생계를 유지해 나가기 위하여 처음에 로씨아의 울라지보스토크의 연해지구에 갔다가 후에 중국의 흑룡강성 신안진으로 오며 나중에 길림성의 연변지구인 룡정시교에 정착하게 된다. 그는 가정을 따라 여러곳으로 이사하면서 떠돌았을뿐만아니라 그 자신도 만주벌을 돌아보거나 혹은 일본에 류학을 갔었고 돌아와서는 룡정에 왔다가 다시 흑룡강 녕안으로 가는 등 거의 일생을 류랑성이 강한 생활을 하게 된다. 수학려행을 떠난 그 이튿날인 5월 6일에는 동해에 이른다. 이튿날 5월 7일날 심련수 일행은 원산을 거쳐 온정리에까지 이동한다. 그 사이에 그는 시조 “원산부두에서”, “동해 북부선 차안에서”, “외금강역", “온정리”, “구만물상”, “온정리의 하로밤” 등 여섯수의 시조를 써낸다. 여기까지는 수학려행을 떠나고 주로 차에 앉아 이동하면서 밖을 내다보며 느낀바를 적었고 다시 온정리에서의 투숙상황을 시조로 표현하였다면 그 다음날인 5월 9일의 시조는 그 량이 많은것이 특징이면서 그가 써낸 14수의 시조는 주로 금강산을 유람한 과정과 그 느낌을 토로한다. 심련수는 여기서 그 경치로 유명한 옥류동, 비로봉, 구룡연 등에 대한 정취를 시조로 마음껏 토로한다. “물이 구슬같고 바위빛 비단같애/ 물이 흘으는 것 이 구슬로 뵈여진다”는 “옥류동 맑은 물에 두 손을 잠그고서/ 마음껏 량껏 마셔 물 배래도 채웠노라”고 옥류동을 노래하더니 물이 떨어져서 무지개가 서는, “세상에서 맑고도 흰” 구룡연은 “그림보다 나은것”이여서 이를 잠간만 보고 어찌 떠날수 있겠는가고 아쉬워한다. 그리고 비사문은 “극락 가는 길이 이같은가 하나이다”라고 표현하였고 비로봉에 대해서는 “말만 듣고 그리던” 비로봉에 오래있고싶다고 토로한다. 5월 10일에는 금강산에서 금강산 전철을 타고 서울로 온다. 이날의 시조는 금강산을 떠나서면서 지은 시조가 있고 금강산에서 전철을 탄다는 시조와 한강을 읊은 시조가 있으니 그날로 서울에 당도했다고 볼수 있다. 그 이튿날 본격적으로 서울을 구경하는데 이날 남긴 시조는 6수다. 그것들로는 “남대문”, “북악산”, “서울의 밤”, “경복궁”, “경회루”, “덕수궁” 등이다. 여기서 주목해볼만한 시조는 “서울의 밤”에서다. 그 전문은 다음과 같다. “서울서 밤을 자니 서울 밤 보곺어서/ 거리에 나서니까 서울 말씨/ 옷도 조선옷이요 말도 다 조선말이더라.// 거리엔 흰옷이 조선옷 흰빛이요/ 얼골은 조선 얼골 모습도 조선 모습/ 눈을 귀를 다 뜨고 듣고 보고 하엿쇠다.” 그때 심련수의 감상은 해외에서 나서 자랐거나 해외에서 오래동안 생활해온 사람이 처음 서울에 와서 느끼는 그런 감상과 아주 비슷했을것이다. 타민족들과 함께 어울려 살아가다가 순 우리 말을 하는 한민족뿐인 세상에 들어서게 되면 남달리 민족의식이 새로워지는것이다. 심련수는 바로 그런 새삼스러운 의식속에서 이를 재확인했을것이다. 이것은 바로 심련수의 류랑의식속에 뿌리를 내린 민족의식의 체현인것이다. 서울의 구경을 마치고는 그들은 잇따라 송도라 불리웠던 개성에 가서 선죽교를 돌아보면서 충신인 정몽주를 잠시 그리면서 “사람이 충신이야 못된다 치드래도/ 그이와 같은 뜻이야 못 가질것 무엇이냐/ 마음에 느낀바 있거든 실행해 보소이다”라고 읊는다. 개성에서 하루를 지내고 심련수 일행은 평양에 도착하게 된다. 이것이 5월 13일 일이다. 평양에 있는 동안에 심련수는 시조 6수를 남긴다. 그중 “대동강”이라는 시조가 그의 력사적인 민족의식을 토로하여 깊은 인상을 남긴다. 련시조로 된 이 시조는 아래와 같다. “단군의 오신 길에 물 흘러 이 강이 되니/ 강물이 고흔것은 더 말할것 없어라/ 주몽님 이곳에서 큰일을 하셨겠다.// 강가에 수양버들 실바람에 날라어서/ 강산을 찾아든 손 갈줄을 모르나니/ 어차피 이 하로도 저물도록 놀오보자// 작은 배 찾아가서 이 몸을 부탁콧/ 가만히 누어서 흐름에 맡겨두니/ 릉라도 맑은 기슭을 소리없이 지내더라.// 류경의 사나이가 꿈에 낫다 꿈에 죽음/ 남아야 이제는 너도 새일군 되어보렴.” 이렇게 대동강이며 을밀대 부벽루를 돌아보고 기자릉을 가보는 등 부지런히 돌아다니다가 5월 14일에는 청천강을 경과하면서 신의주를 지나 압록강에 이른다. 3. 시조는 짧음으로서의 그 간이성특징외에도 현장성의 특징도 갖고있다. 려행시조의 경우 그 현장성이 보다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심련수의 려행시조도 역시 례외는 아니다. 한곳에 머물지 않고 여러곳을 떠돌아다닌다는 점에서는 려행이나 류랑 및 부단한 이주는 비슷한 점이 있다. 이러한 부류에 속하는 사람들은 망향의식과 함께 민족의식이 상대적으로 강하지만 자신이 살고있는 고장은 영원히 살아야 할 곳이 아니라 어느 때고 또 떠나야 할 곳이라 여기에 참다운 주인의식이 결여된다. 시조의 현장성특징 덕분때문에 우리는 심련수의 려행시조를 따라 아주 명백하게 당시 그의 수학려행의 로정을 따라가 볼수 있는것이다. 한반도의 수학려행을 마친 심련수 일행은 그 시기에는 다른 한 나라였던 만주국까지 려행하게 된다. 일본침략자들은 20세기 30년대초에 중국에 전면적으로 침략의 마수를 뻗친다. 그들은 1931년에 심양에서 9.18사변을 조작해낸 이후, 청나라의 말대황제였던 부의를 부추켜 중국의 동북에다 괴뢰정권을 만들어낸다. 이 나라가 위만주국이다. 위만주국에는 지금의 료녕성, 흑룡강성, 길림성 3성이 포함되는데 심련수일행은 이 동북 3성에 대한 수학려행을 마저 끝낸다. 한반도에서 중국의 료동반도에 들어선 심련수는 5월 15일과 5월 16일에 “대련항시”, “려순”, “료동반도의 하로”, “황해”, “련경선 밤차” 등 다섯수의 시조를 남긴다. 그들은 대련 등지를 구경하고 대련-북경행 렬차를 타고 심양으로 이동을 하는중이였다. 심양에 와서 역시 이틀을 묵는데 이때 즉 만주땅에 들어서서 심련수의 시조창작은 량적으로 현저하게 줄어든다. 심양에 있는 사이에 그가 남긴 시조는 마찬가지로 아주 적어 모두 3수뿐이다. “봉천”, “북릉”과 “봉천성 우에서” 등이다. 심양의 려행을 마치고 심련수일행은 계속하여 신경(장춘)을 거쳐 할빈으로 가는데 신경의 시조는 한수가 있고 할빈에 가서는 4수의 시조를 남긴다. “할빈 역두에서”, “로천공원묘지”, “송화강”, “끼다야쓰카의 밤” 등인데 이 시조들의 특점은 바로 거개 련시조라는것이다. 그중 “끼다야쓰카의 밤”은 무려 12련이나 되게 길다. 5월 20일날 하루를 할빈에서 보내고나서 할빈을 떠나서 목단강으로 오는 기차에서 “빈완선 차중에서”라는 시조를 남기고 5월 21일 목단강에 들려 시조 “목단강”이라는 시조 한수를 짓고 목단강에서 룡정으로 나오는 차에서 5월 22일 “려행은 오늘이 끝이다”와 “수학려행을 마치고”, “낯익은 품속의 사랑”, “룡정 역두에서”라는 4수의 시조를 끝으로 수학려행의 전반 과정을 총결한다. 여기서 “려행은 오늘이 끝이다”는 시조는 2련으로 되여있는 간단한 시조인데 뒤돌아보니 “두줄기 쇳대뿐”인 기차레루가 생각나고 “산을 뚫고 지나서 반만리 얽어있다”로 개괄하고 마는데 이때 심련수는 마지막으로 수학려행을 마치면서 총화를 지을 생각을 따로 한것이라 짐작된다. 이리하여 그는 “수학려행을 마치고”라는 꽤나 긴 련시조를 짓는다. 여기서 심련수는 비단 수학려행만을 되돌아본것이 아니라 중학생시절의 4년을 총화한다. “4년간 서창에서 지쳐진 우리들이”로 시작되는 이 련시조에서 심련수는 “돌아서 보면은 온 길이 아득해라/ 생각해 보면은 기억이 몽롱해라/ 연기와 안개를 통해 보는 그림 같으다”고 하고는 수학려행을 통해 민족의 력사의식에 대해 언급하기도 하고 “전화는 뭇질렀다 모든 문화 다 뭇질러/ 사람도 죽엇고 문화도 죽어졌다면/ 그 싸움 후에는 다시 나지 않게 할것이다”며 안타까운 그 현실에 울분을 토하면서 “사람아 가소서 님이여 가소서/ 세월은 흘렀고 문물도 변했더이다/ 려로에 얽힌 꿈자시 송두리째 벗었도다” 하면서 이번의 수학려행에서 지난날 꿈꾸어오던 장래의 리상의 꿈이 깨졌다고 한탄을 하고 나중에 끝으로 장식없는 룡정의 품에 다시 돌아왔는데 여기서 “마음이 편한 곧에다 내 집을 짓고 싶쇠다”며 시조를 마무리한다. 4. 시조는 역시 시적쟝르의 일종으로 보는것이 마땅할것이다. 하기에 시조에는 반드시 시적인 요소가 다분해야 하며 시상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해야 할것이다. 그러면서 시조는 정형시형태를 이루면서 그리 길지 않게 된것은 시조가 세상에 금방 나올 때와 나와서 오래동안은 창으로 불러지면서 읊어지지는 않았을것이다. 하지만 심련수가 살아가던 그 세월에는 시조가 불려지는것보다 읊어져왔던것이라고 할수 있을것이다. 이리하여 심련수의 시조에는 련시조들이 적지 않고 명시조라고 이를 시조들은 별로 없어도 그 시조들을 통해 심련수가 적지 않은 곳을 려행하면서 떠돌아다닌 그 흔적들을 얼마든지 찾을수 있는것이다. 총 88편의 시조에서 69편이 수학려행을 할 시기 전문적으로 지은 시조라면 나머지 얼마 발견되지 않은 19편의 시조들을 살펴보면 거개가 산천경개를 읊거나 계절이나 기후, 아니면 어느 특정한 장소를 노래한것들이다. 시조 “벽공”에는 아래와 같은 구절이 있어서 다시 음미해보게 한다. “가거라 마음껏 뉘 아니 막으리니/ 류랑은 즐겁도다 구속 없어 좋을세라/ 사해의 그 우에는 가린것이 없으리라.” 이 시조에서 읊조리듯이 그 어떤 구속도 싫어하는 심련수에게는 류랑을 즐기는 의식이 아주 강하게 자리잡고있으며 그 류랑의식속에서 심련수의 일생은 거의 “류랑”으로 채워진다. 심련수는 마지막 순간을 맞이함도 객사를 하니 바로 1945년 8월 8일 해방을 일주일 앞두고 녕안에서 룡정으로 도보로 돌아오던중 왕청현 록도, 춘양 일대에서 관동군 소속의 위만주국 마희산부대(나중에 토비로 전락하며 후에 숙청됨) 병사의 무정한 총알을 받게 되는것이다. 심련수는 우리 중국조선족으로 놓고 말하면 제2세이다. 제1세대들도 극도의 가난 등 여러가지 원인으로 하여 류랑의식의 작용을 받아 두만강, 압록강을 건너왔다면 제2세대들로 역시 그 유전자속에 류랑의 의식을 싹틔워놓았을것이며 그들의 후대들인 우리도 역시 류랑의식의 지배속에 있다고 말할수 있겠다. 지금 중국조선족은 세계의 어느 나라에나 거의 다 가있는 실정이다. 디아스포라 즉 온 세계에 흩어진 유태인들이라는 의미에서 나온 디아스포라의식과도 련관되는 우리들의 류랑의식은 주인의식이 결여되여 확대재생산을 하려는 의도에 아주 린색하고 재산을 잘 모으려 하지 않으며 있으면 다 소비를 하는 등 경향의 페단이 존재하는가 하면 글로벌의식에서는 그 누구보다 앞장을 설수 있는 장점도 있다. 하여튼간에 우리는 심련수의 사상의식속에 잔존하던 그의 류랑의식에 대해 잘 총화하고 그와 같은 선배들이 남겨준 문화유산에서 훌륭한것은 계승 발전시키고 그릇된것은 삼가면서 금후의 글로벌시대를 보다 훌륭하게 맞아야 할것이다. 중국조선족의 현대의식속에도 그 영향을 미친 심련수의 류랑의식은 바로 글로벌의식과 일정한 관계가 있다고 할수 있을것이다.  
1789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댓글:  조회:3672  추천:0  2016-11-10
[수필]민족시인 윤동주님을 기리며 2009년 02월 16일 /김성호  기실 이 세상의 시인들뿐만아니라 모든 사람이 다 민족적이기에 흔히 어떤 문인에게 민족이라는 낱말을 덧붙이는 일은 부질없는 일로 된다.하지만 윤동주시인에게 굳이 민족시인이라는 이름을 달아주어야 직성이 풀리는것은 바로 그럴만한 리유가 있기때문이다.     인류는 태초부터 민족적인 발상을 해온것은 아니다. 원씨족사회를 거쳐 종족부락련맹 등 루루 수천만년의 과정을 거쳐 근대에 와서야  민족이라는 의식을 가지게 된다. 력사적으로 지리적으로 부동하게 민족문화를 창출해오는 과정에 먼 과거로부터 《다른 동네》를 정복하는 싸움은 있었으며 근현대에 이르러 독일의 노르만민족이 유태인을 탄압하고 일본민족이 조선민족을 없애려 한 이 력사는 인류문명사에서는 보기 드물게 고약한 짓들이였다.     일본제국주의가 수십년 조선반도(한반도)를 식민지로 만들고 나중에 민족동화를 강압적으로 꾀하면서 우리 민족을 탄압하고 유린하여 창씨개명을 강요하고 우리 민족언어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던 그 가장 암흑했던 시기에 나젊은 문학지망생이였던 윤동주는 다른 문자도 아닌 바로 우리의 언어문자로 주옥같은 시편들을 창작하고 그것을 고이 간직해왔던것이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 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윤동주시인의 이 《서시》한편만이라도 우리는 그의 시적재질에 대해 탄복하지 않을수 없을것이다. 백여년에 한번씩이나 나올수 있겠는가 할 정도로 높이 평가받는 이 명시는 세인이 공인하는바요, 그의 기타 시들은 시의 화단에 영원히 피여있을 꽃이 될 이 《서시》로 말하면 꽃잎으로 여겨져야 할것이다. 다른 말로 바꾼다면 이 《서시》의 진실을 지켜주는 시들이라 하겠다.     윤동주시인은 그의 주옥같은 시편들로 이미 조선반도(한반도)를 위주로 하는 동북아지역에 널리 알려져 있다. 그만큼 윤동주시인과 그의 시에 대한 연구는 오래동안 활발히 전개되여왔기에 여기서 새삼스레 더 언급하려 하지 않는다. 하지만 윤동주시인의 원주소를 되찾아야 할 문제에 대해서는 소홀히 할수 없는것이 우리들의 실정이라 하겠다.     윤동주시인은 바로 중국조선족문학의 선두주자이며 중국조선족시인이기도 한것이다. 우선 그가 태여나 태를 묻은 곳이 바로 연변의 룡정시 명동촌임을 지적해야 할것이다. 뿐만아니라 그는 유년기와 소년기를 바로 연변땅에서 지냈으며 지금도 그는 룡정시 교외의 동산 언덕에 묻혀 고이 잠들고 있는것이다.     문학사적인 견지에서 무엇보다 홀시하지 말아야 할것은 윤동주시인의 인적사항은 물론 시의 예술적경지에 들어가는데 있어서도 그의 시에서 보여지는 시어의 특징이거나 시어로 형상화된 화자의 개성속에 중국조선족문화의 냄새가 다분하다는 이 점이 간과되지 말아야 할것이다. 바로 이러한 점을 념두에 두어야 윤동주시인의 시들을 리해하는데 그 인식을 보다 높은 차원으로 올릴수 있을것이다.     윤동주시인은 이미 조선반도(한반도)라는 이 민족적인 테두리를 벗어나 광범하게 알려진 력사적인 명인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글로벌화가 다 되여가는 새 천년 새 세기에 윤동주시인을 중국조선족의 시인이라 뒤늦게 떠드는것은 어찌 보면 형세에 뒤떨어진 진부한 사고방식의 표현이 아닌가 여길수도 있겠지만 가장 민족적이고 가장 향토적인것이 가장 세계적이고 가장 현대적일수 있다고 본다면 우리는 떳떳하게 윤동주시인의 중국조선족문화에로의 새로운 뿌리찾기를 고집할수 있다고 본다.     윤동주시인의 시들에는 밤하늘의 정경과 함께 달이며 별, 그리고 바람이라는 시어가 아주 많다. 연변지역의 밤하늘, 특히는 가을의 밤하늘에서 뭇별들이 쏟아져내리는 듯한 그 야경을 보지 못하고서는 윤동주가 읊조린 하늘이요, 별들에 대해 리해하기 힘들것이다. 달과 바람에 대해서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겨울의 달밤은 그처럼 맑고 은은하며 동지섣달 휘몰아치는 삭풍의 매운맛은 에이는듯한데 이러한것들을 경험해보아야 달과 바람이라는 참뜻을 감지할수 있을것이다.     그런데 력사적인 원인과 기타 여러가지 여건때문에 중국조선족문단에서 지난날 윤동주시인에 대한 연구는 공백이나 다름없었다. 조선반도(한반도)거나 지어는 섬나라 일본에 있는 학자들이 윤동주시인과 그의 시에 대한 연구를 깊이 진행하여 연변땅에 와서 윤동주시인의 묘소를 찾을때에야 윤동주라는 이름을 처음 알아야 하는 실정이였다. 그것이 20세기 80년대의 일이 아니던가. 그때로부터 우리는 윤동주시인에 대해 인식하게 되고 그의 시를 읽게 되였으며 문학을 연구한다는 사람들도 중시를 돌리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윤동주시인에 대한 전부의 연구자료는 지금 모두 《수입품》에 의거하지 않으면 안된다. 지어 우리 중국조선족문단에는 중국내에서 자체로 출판한 윤동주시집이 아직까지 없다고 해야 할 사정이다. 이에 뒤늦게나마 그 허점을 미봉하려고 룡정에 있는 윤광수씨와 박용일씨가 윤동주시인의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 없기를》라는 제목의 시집을 펴내게 되니 그나마 다행이라 하겠다.     이를 계기로 우리의 민족시인 윤동주님에 대해 보다 투철하게 인식하면서 새 천년 새 세기에도 그의 시혼이 밝은 해살이 되여 온 누리를 비추게 하도록 하는 바람을 가져보도록 하자.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1788    일기책에 늘 단시를 적으라... 댓글:  조회:3565  추천:0  2016-11-10
김해룡 교수 시조 감상     지난 여름방학에 귀가한 후 예년처럼 김해룡 교수님 댁을 방문하여 은사님을 만나 뵐 수 있었다. 우선 여전하신 학자, 교수의 근엄한 표정과 장군 체격과 같은 건강한 모습에 감동되었다. 교수님께서는 나에게 최근 출간한 시조집 (연변인민출판사, 2010)을 건네주시는 것이었다. 그 동안 독창적인 학술저서가 여러 권 출간될 때마다 탐독하군 하였는데 이번에는 은사님의 인생체험을 고스란히 담은 시조집에 접하게 되어 더없이 감격스러웠다. 사실 우리 대학들에서는 문학교수가 문학명작을 창작해도 성과로 인정해주지 않는 풍토가 있다. 그래서 많은 문학교수들은 아예 이 분야에 손을 대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하지만  은사님께서는 명실공이 문학교수답게 학술연구와 문학창작 두 분야에서 커다란 성취를 이루고 있다.   중경에 올 때 항공편 수화물이 허용중량을 초과할 정도로 많아 이것저것 선택하느라 고심했지만 김해룡 교수님의 시조집만은 소중히 짐에 넣어 소지하고 왔다. 개학 초여서 할 일이 쌓였지만 틈틈이 은사님의 시조를 감상하면서 힘을 얻곤 하였다.  오늘은 먼저 우리가 대학에 갓 입학한 해인 1978년에 은사님께서 쓰신 시조 두 수를 읽고 그 감수를 쓰기로 한다.        1. 등골이 땀에 절면야   석삼년 묵은 땅을 헐히야 다루랴만 사람이 속였기로 땅조차 속일손가 등골이 땀에 절면야 벌이 아니 꺼지랴                 1978(시조집 5쪽)   2. 메부리 거꾸로   재도 높다 이르거니 메가 아니 높으랴만 먹은 맘 못다 버려 신들메를 고쳐 하니 어화라, 메부리 거꾸로 가는 물에 꽂혔네                  1978(시조집 6쪽)       교수님께서 당시 어떤 감수로 이런 시조를 쓰셨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나는 이 시조를 읽자마자 그해에 있은 일들이 새삼스럽게 떠올랐다.   ‘문화대혁명’이 종식되고 10여년 중단되었던 대합입시가 회복되자 제1기로 대학에 진학한 우리 조문학부 77학번 대학생들은 1978년 봄에 연변대학 교정에 들어서게 되었다. 그런데 ‘문화대혁명’의 여파로 대학 사정은 엉망이었다. 신입생을 학생 기숙사에 배정할 수 없어 우리는 학교 심장부와 다름없는 사무청사(主樓) 2층 북쪽 사무실 한 간에 잠시 들게 되었다. 그때 우리는 처음으로 담임교수이신 김해룡 교수님을 만나 뵙게 되었다. 겉보기에는 엄숙한 분이시었지만 아주 자상한 분이어서 우리들이 궁굼해 하는 문제들을 일일이 깨우쳐 주시었다.   그 해 3월 초 쓸쓸한 바람을 안고 우리는 연집 公社(향)의 편벽한 산골 황초구(荒草溝)에 자리 잡은 학교 농장에 이동되었다. 황초구는 이름 그대로 농민들이 살 곳이 아니라고 버리고 가서 쑥대밭이나 다름없는 골짝이었다. 십년 동안 농촌에서 배움의 기회를 잃은 우리는 목마른 사람이 물마시듯 학구열에 들끓었지만 눈앞의 정경에 한숨만 풀풀 쉬었다. 남녀학생 각기 25명이 큰 중국식 온돌방 한간에 들었는데 전기가 없어 밤에는 촛불을 켜고 책을 보았고 낮에는 농장에서 원시적인 농사법으로 농사일에 종사하였다. 찬 온돌을 덥히느라 불을 때면 온돌 틈에서 연기가 나와 언제 가스중독 사고가 날지 모를 일이었다. 밥 끓이고 세수할 물이 없어 우리는 중국식 멜대로 먼 거리에 있는 샘물을 길어 와야 했다. 그럴 때마다 은사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서투른 솜씨로 중국식 멜대로 물을 긷곤 하셨다. 집을 떠나 어려운 산골환경에서 우리들에게 글을 가르치시는 것만도 감격스러운데 손수 나서서 물을 긷는 모습은 우리들에게 큰 힘을 실어 주었다.   당시 교실도 형편없었다. 수업할 때면  유리도 없는 창문에 느닷없이 송아지가 철없는 아이처럼 머리를 들이밀고 이상한 손님이 왔다는 듯이 기웃거렸다. 그럴 때마다 교실에는 웃음이 터졌지만 마음속으로는 실로 씁쓸하기도 했다. 어느 한번은 비가 와서 지면보다 훨씬 높은 교실 문 앞이 미끄러워 키 작은 여학생들이 교실에 들어서기가 힘들었다. 이 때 장군 체격의 소유자이신 은사님께서 마당에 있는 큰 돌을 버쩍 들어 교실 문 앞에 정히 고여 놓는 것이었다. 이에 감동된 나는 비록 문학 센스가 둔감했지만 이른바 ‘시상’이 떠올라 일기책에 단시를 쓴 적이 있다. 내용은 대체로 후대 양성을 위해 은사님께서 어려운 환경 속에서 달갑게 주춧돌, 버팀목이 되어 주셨고 우리가 주춧돌 같은 그 분의 두 어깨를 딛고 교실에 들어가 학업에 정진한다는 것이었다. 지금 그 볼품없는 습작품이 어데 있는지를 아직 찾아보진 않았으나 한 단락의 역사를 담은 것이라 생각되어 여가를 타서 찾아보고 정리할 생각도 하고 있다.   나중에 일부 여학생들이 물 탓으로 피부과민이 오고 가려워 죽겠다고 아우성치자 학급 지부서기 직책을 맡은 나는 마음이 무거워졌다. 십년을 잃어버린 우리가 대학에 입학하고도 그냥 이런 식으로 있다간 아무 것도 성취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반장 최문식과 손잡고 학교 지도부에 상황을 보고하고 이런 환경을 개변하기로 하였다. 그래서 먼저 최문식을 학교에 파견해 관련부처에 상황을 보고하게 했으나 반응이 없었다. 이에 내가 황초구에서 대자보 글을 써서 그 내용을 전화로 최문식에게 알려주고 학교 사무청사 안에 붙여놓게 하였다. 대자보를 본 학교 지도부에서는 학생담당 지도자(지금 국가 고위층에서 일하고 있음)를 파견하여 우리를 무마하게 하였으나 학습 환경 개선은 별로 효과가 없었다.   그러던 차에 우리는 학교에서 5.1절 기간에 연길 시내에 내려와 영화를 관람하게 하는 기회를 이용하여 학교 지도부에 학습 환경 개선을 위한 집단 청원에 나섰다. 그러자 교무처 간부들의 거센 저지와 이른바 ‘과격 행동’을 중지하라는 엄명을 받았는데 나와 최문식은 전체 동창생들을 위해 훗날에 어떤 처분을 받더라도 끝까지 견지하려고 결심했다. 동창들도 한결같이 모주석 석상 앞에서 앉아버티기를 하면서 보조를 맞추었다. 이에 감동된 나는 또 즉석에서 시조 한 수를 지어 높은 목소리로 읊어 사기를 북돋우었다. 도대체 학교 당국에서 어떤 처분이 내릴지 마음이 조마조마 하였지만 민심은 우리들에게 쏠린 것 같았다. 당시 조문학부 일 년 선배인 최홍일 씨(소설가)가 자기 학급 학생들을 동원해 옆에서 성원을 해주어 우리는 얼마간 마음이 든든해지기도 했다. 나중에 리희일 서기께서 아량 있게 우리의 요구를 전부 수용하였고 우리는 드디어 원하던 대로 정상적인 학습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와중에 김해룡 교수님께서는 정면에 나서서 태도를 표시하진 않았으나 우리 행동이 과격하다고 만류하지도 않으셨다. 사실 그분께서 조금이라도 난감한 기색을 보이셨다면 우리는 중도에서 투쟁을 그만 두었을지도 모른다. 25년 후에 동창모임이 있었는데 이미 작고하신 현룡순 교수님(당시 조문학부 학부장)께서 생각밖에도 이 일을 거론하시면서 ‘문화대혁명’ 이후 제1기로 대학입시를 거쳐 입학한 대학생들이 공부를 하겠다고 집단 청원을 하고 앉아버티기를 했는데 이 일은 아무런 잘못도 없다고 의미심장하게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이는 전임 학부장께서 처음으로 하신 공식적인 평가여서 나는 마음속으로 아주 홀가분하였다. 나는 이 말씀을 들으면서 당시 담임교수이신 김해룡 교수님께서도 학교 당국과 여론의 압력을 많이 받으셨겠지만 마음속으로는 학생 편에 서서 성원하셨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짧은 글에서 그때 일을 다 쓰기는 어려운데 앞으로 여가를 타서 장편회고록을 쓰든지, 아니면 소설 창작재능이 좀 생기면 이를 소재로 중편소설을 쓰려는 엉뚱한 생각도 해보곤 한다.      오늘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서남 파유(巴渝- 중경 지역을 가리키는 말) 땅에서 은사님께서 이 무렵에 쓰신 시조를 음미해보니 무척 감명이 깊어진다. 어쩐지 당시 학구열에 불타고 있었던 우리를 격려하시는 뜻이 내포된 것 같았다.   위의 첫째 시조에서 초장 “석삼년 묵은 땅을 헐히야 다루랴만”은 마치 ‘문화대혁명’ 10년 동란 속에서 허송세월한 우리들을 가리키는 듯하다. 중장 ‘사람이 속였기로 땅조차 속일손가’ 는 지도자의 실책과 야심가들의 횡포로 젊은이들이 황금시기를 놓치기는 했지만 아직 늦지는 않았다는 뜻 같다. 종장 ‘등골이 땀에 절면야 벌이 아니 꺼지랴’ 는 개혁개방시기에 어렵게 마련된 학습기회를 헛되이 하지 않고 열심히 공부하면 소원성취하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 일하는 인재로 클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라는 간곡한 부탁이 감지된다. 두 번째 시조도 이와 비슷한 시적 이미지를 내포하고 있어 우리 제자들에게 두고두고 음미할 수 있는 감칠맛을 안겨주고 있다. 아무튼 김해룡 교수님의 시조에서 읊조린 이런 명시구들은 예나 지금이나 우리들의 행동지침으로 될 것이다.   지금은 은사님의 시조를 학구적으로 깊이 연구를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기에 이 정도로 수필 형식을 빌려 간단히 감수를 발표하는 바이다.                    
1787    詩는 그래도 탁마해야 제맛이 난다... 댓글:  조회:3490  추천:0  2016-11-10
[ 2016년 11월 11일 09시 44분 ]     러시아 시베리아 지역의 오비만 Nyda라는 마을에서 미스테리한 거대 눈덩이들이 발견, 가장 큰 눈덩이는 지름이 거의 1m가량으로,ㅡ   수정작품과 단번에 완성한 작품/정호정  나는 시를 어림으로 고친다. 무슨 이유로 어떻게 고친다는 이론이나 전문 용어는 잘 모른다. 그러므로 ‘나의 시 이렇게 고쳤다’고 하기보다는 ‘나의 시 이렇게 썼다’고 밝히는 것이 마땅할 것 같다. 시를 완성해 가는 길이라는 동질성에서 감히.  써 놓은 시에 수정을 가한 것과, 초점이 잘 맞아 단번에 완성할 수 있었던 작품 두 편을 예시하기로 한다.  1  ‘능견난사(能見難思)’라는 유기 응기(應器)를 보았다. ‘잘 살펴보고도 보통의 이치로는 추측할 수 없는 일’이라는 뜻을 가진 ‘능견난사’의 정보에 충실하기로 한다.  송광사 박물관 소장. 고려 후기. 전남 유형문화재 제19호. 구경 16.7cm, 높이 4.7cm. 두께 1mm. 송광사 구전에 의하면 금(金)나라의 장종황제의 황후가 쓰러져 기도할 때 보조국사(普照國師)가 사용했던 접시라 한다.  숙종조에 사찰을 중창하며 나라에 진상하였으며, 어떤 대장장이도 그대로 만들어내지 못함에 왕이 어필로 ‘能見難思’라 써 내린 것이 이름이 되었다 한다. 어필은 남아 있지 않다.  송광사 기록에는 500개, 1828년 충청도관찰사 홍석주의 기행문 「여천옹유산록」에서는 50개를 보았다 하나, 지금의 송광사에는 30개가 현존한다.  조계산을 넘어 선암사로 가고 있었다. ‘능견난사’는 내내 나를 따라오고 있었다. 날아갈 듯이 고운 살결에 나의 모습이 어려 있었다. 그것은 나의 별이며 나의 시였다. 조계산의 밤하늘에서 총총히 빛나던, 나의 유년의 별이 아니라, 살아오는 동안에 갈개다 찢긴, 상처자국들 그득한, 빛을 잃은 별이었다. 부득부득 태어나고 있는 나의 시집이 세상에 나와 어떤 수모를 당할지, 많은 좋은 시들 앞에서 얼마나 초라할지 모를 불쌍한 나의 시였다.  조계산을 넘으며①(초고분)  능견난사能見難思에서 너를 본다②  (너는 많이 일그러져 있다  능견난사는 송광사 박물관이 소장한  방짜유기접시  숙종때 사찰을 중창하며 진상한,  어떤 장인도 그대로 만들어내지 못해  왕이 어필로 써서 내렸다는 이름)  고운 살결에 가장자리를 가는 실금으로 말아올렸다③  (16.7cm의 구경이며 4.7cm의 높이, 1mm의 두께가  한결같다 차곡차곡 겹쳐진다)  겹쳐지는 놋쇠덩이를 주무른 망치의 힘을 본다④  스치며 날아앉는 얇은 사의,  스미는 물소리의,  깊이 가라앉은 하늘빛의,  유년의 냇가에 구르던 웃음소리의  춤,  춤의 흔적같은  너의 살결은 뭉쳐 있는가 하면 창이 나려 한다  돌산이 들판이 아무렇게나 널부러져 있다  (‘능견난사’에 비치는 나의 너)  돌각다리 길을 오르며 내릴 때  내 안에서 이는 물 소리 바람 소리,  갈대의 서걱임마저 나를 깨운다  (누구도 재현하지 못한 신기만이 사랑이 아니라고  잘 생기지 못한 너를 다독인다.)  (괄호는 수정에 필요한 것임.  ⑴ ①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지 못하는 제목을 버리고, 구전을 참작하여 ‘누군가 방짜유기접시를 능경난사라 했네’로 개작하였다.  ⑵ ②에서 ‘능견난사’를 ‘방짜유기접시’로 수정하였다.  ⑶ 구전이나 사실의 서술 또는 군더더기로 여겨지는 괄호 안의 부분을 모두 삭제하였다.  ⑷ ③과 ④의 순서를 바꾸어 놓았다.  누군가 방짜유기접시를 ‘能見難思’라 했네 (수정분)  방짜유기접시에서 너를 본다  겹쳐지는 놋쇠덩이를 주무른 망치의 힘을 본다  고운 살결에  가장자리를 가는 실금으로 말아올린  스치며 날아앉는 얇은 사의  스미는 물소리의  깊이 가라앉은 하늘빛의  유년의 냇가에 구르던 웃음소리의  춤  춤의 흔적같은  너의 살결은 뭉쳐 있는가 하면 창이 나려 한다  돌산이 들판이 아무렇게나 널부러져 있다  돌각다리 길을 오르며 내릴 때  내 안에서 이는 물소리 바람소리  갈대의 서걱임마저 나를 깨운다.  2  고산(孤山)의 세연지(洗然池)는 매우 아름답다. 굴뚝다리로 보(洑)를 삼은 계담(溪潭)으로 물이 소리 없이 스민다. 이리저리 늘어놓은 바위들을 돌며 ㄹ자의 물길을 따라 다시 회수담(回水潭)으로 흐른다. 나는 동산에 떠오르는 달이며, 춤추는 무희의 너울이 잠기는 물을 그려 보기로 하였다. 아무리 그려 보아도 세연지의 아름다움일 뿐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나는 세연지의 홍보원이 아니지 않은가.  문득 고요한 물에서 묵묵한 인종이 보였다. 할머니의 할머니로부터 이어온 아름다운, 그것은 바로 나와의 관계였다. 이 여인들의 인종이 고요하게 가라앉아서 모든 힘의 원천이 되고 있었다. 굴뚝다리에서 한바탕씩 갈등이 풀리고 있었다. 울리는 물소리를 즐기고 싶었을지, 물의 갈등을 풀어주고 싶었을지, 굴뚝다리를 놓은 고산의 의도를 내가 헤아릴 필요는 없었다. 나는 다만 물의 입장을 헤아리면 그만이었다.  창으로 넘나드는 자연은 늘 신선하다  고산은 흐르는 물에 굴뚝다리를 놓아 연못을 만들었습니다  물이 고개를 숙이며 돌틈으로 스며듭니다  숨을 죽입니다 발뒤꿈치를 듭니다 소리 없이  이리저리 늘어놓은 바위며 배롱나무섬을 돕니다  산에서 흐른 암반 위에서 물은 맑고 고요합니다  맑고 고요한 물의 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으신지요  큰 소리로 외치고 싶은, 서로 얼싸안고 싶은,  목놓아 울고 싶은, 위로받고 싶은,  살아 있음이며 반가움 서러움 고달픔들  두드리면 통통 소리가 납니다 속이 텅 비어 있습니다  암반 위에 양쪽으로 돌판을 세우고, 다시 돌판으로 덮은,  평소에는 건너다니는 다리가 되고, 물이 넘치면  폭포가 됩니다  물의 소리에 공명하는,  모두 다 내어준 이의 가슴입니다  때때로 차오른 나의 갈등이 풀리는 가슴으로 하여  계담의 물은 늘 아름답습니다.◑  ◇정호정 경기 안산 생. 98년 『문학과 창작』 신인상 당선. 시집 『프로스트의 샘』. ==================================================================================     선운사에서 ― 최영미(1961∼ )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 골고루 쳐다볼 틈 없이 님 한 번 생각할 틈 없이 아주 잠깐이더군 그대가 처음 내 속에 피어날 때처럼 잊는 것 또한 그렇게 순간이면 좋겠네 멀리서 웃는 그대여 산 넘어 가는 그대여 꽃이 지는 건 쉬워도 잊는 건 한참이더군 영영 한참이더군       장마가 찾아오면 견뎌야 한다. 한참 걸릴 수도 있다. 계속 습한 날씨에 잔뜩 짜증 서린 그대에게, 오늘은 더 긴 괴로움을 소개하고 싶다. 우리가 견뎌내야 할 장마의 ‘한참’은, 이 시의 ‘한참’ 앞에서 참 소소하게 느껴질지 모른다.      지금 이 시인은 한참을 넘어 ‘영영 한참’ 동안 어떤 아픔을 견뎌야 한다. 사실 시인이 작품에 내세운 것은 아픔보다 꽃이다. 그것도 선운사의 꽃, 동백꽃이다. 실제로는 한겨울 말고 4월 초에 핀다지만 이름에 ‘동(冬)’자가 들어가는 이 꽃은 분명 겨울꽃이다. 추위를 조롱하듯 진하게 피어나, 질 때는 목이 베어지듯 미련 없이 지는 탓에 얼마나 많은 예술가들이 이 꽃을 사랑했는지 모른다.  시인은 그냥 ‘꽃’이라고만 했지, 동백꽃이라고 쓰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목이 ‘선운사에서’이니까 여기서의 꽃은 자동으로 동백꽃이라고 읽힌다. 그런데 문제는 꽃이 아니라 나를 떠난 ‘그대’에게 있다. 꽃이 지듯 없어졌으면 싶은데, 그 사람을 향한 마음은 도통 지질 않는다. 잘라 버릴 수 없는 마음이 피어나 ‘영영 한참’ 사라지지 않는다니 이 이별의 고통은 속수무책이다. 참 난감한 일이다.  이 난감함 앞에서 장마의 짜증은 사소한 일이 된다. 마음의 동백꽃이 지지를 않는데 장마가 뭐 대수일까. 반대로, 내 님의 동백꽃이 만발한다면 날씨가 뭐 큰일일까.  
1786    세우는데는 석삼년, 허물어 버리는데는 "단 하루 아침" 댓글:  조회:3646  추천:0  2016-11-10
스스로 죽이기 ㅡ무너진 연변사회과학원 / 김룡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것이 새로운것을 세우는것이요 가장 쉬운것이 이미 세워진것을 무너뜨리는 일이라 하겠다. 이러한 난수이파(難樹易破)의 도리는 크고 작은 일 모두에 통한다.  하나의 층집을 짓는데 빠르면 1년, 길면 몇년이 걸리지만 그것을 허무는데는 불과 한달여, 과학이 고도로 발달된 요즘에는 폭발약해체법을 채용해 단지 눈깜할 사이에  거대한 고루대하(高樓大廈)를 단번에 허물어버린다. 각필하고 오늘은 십여년전에 사라져버린 연변사회과원을 아릿한 추억으로 떠올려본다. 중국에는 모두 30개의 민족자치주가 있는데 사회과학원이 있는 자치주는 유독 연변뿐이였다. 실로 자랑스럽고 영광스러운 일이다. 연변사회과학원을 일떠세우는데 적어도 4.5년의 시간이 걸렸다. 문화혁명이 결속된후 연변의 학자들이 북경을 4,5차례 드나들면서 연변사회과학원의 설립을  청원하였다.  성(省)의 아래에 있는 지구급의 자치주에 과학원을 세운다는것은 불가능한 일이였지만 중앙정부는 연변지구가 문화가 발달했다는 사정을 감안하여 그리고 그 간절한 소망에 감화되여 선례를 타파하고 특수한 우대정책을 베풀어 연변사회과학원의 성립을 비준하였다. 이 특수한 은혜와 배려에 대해 우리 조선족은 중앙정부에 향해 고두백배 (叩頭百拜) 사례하여야 할것이다. 연변사회과학원은 설립된후 민족문화를 발전시키기 위해 많은 일들을 하였다.  헌데 그 누가 알았으랴. 이러한 과학원이 십년도 되나마나하여 사라지리라고는. 알고보면 이 역시 스스로 빚어진것이였다. 연변사회과학원이 무너지기 직전 1,2년 사이에 내부에서 1.2등 보좌를 놓고 두파로 나뉘여 자리다툼이 심하였다.   이러하 상황을 보고 대노한 주정부에서는 2002년에 연변사회과학원을 해체해버렸다. 자체로 결정해서 해체를 했는지 아니면 중앙정부의 동의를 거쳐 해체했는지 똑똑한 내막은 모르겠으나 아무튼 연변사회과학원이 해체된것만은 사실이다. 이리하여 근 20년간 존속하던 연변사회과학원이 력사속에서 영영 사라고말았다. 이에 분개한 연변의 지성인들이 연변사회과학원의 부활을 위해 수많은 활동을 벌렸으나 이미 엎지른 물이요 행차뒤의 나발이라 별무도리였다. 지금 5층짜리 건물만 외롭게 남아 지난 력사를 아프게 추억하고있다. 해체의 원인을 캐보면 손금보듯 환하다. 첫째는 민족과 나라를 생각하지 않고 권력에 혈안이 되여 암투를 일삼은 원 과학원 지도층의 더러운 소행때문이다. 그들이 화근을 빚어낸 죄의 장본인이다. 다음으로는 해체의 결단을 너무 조급히 내린것이다. 웬간하면 능력이 있는 새 지도부를 물색하여 어렵게 세운 과학원을 유지하는데로 나아가야 했건만 무슨 영문인지 너무 급급히 해체를 했다는 생각이 든다. 상술한 요인이 작동하여 연변사회과학원을 무너뜨리는 “폭파약”이 돼버렸다. 한번 무너뜨린것을 새로 세운다는것은 천만 불가능하다. 그리고 지금 아무리 목청을 높혀 말한다해도 소잃고 외양간고치기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서 큰 교훈을 섭취해야 한다. 다시는 자기에게 차례진 귀중한것을 소중히 여기지 않고 쉽게 팽개쳐버리는 불미스럽고 부끄러운 일이 발생하지 말아야 한다.  
1785    노루 친 막대기를 석삼년, 아니 30년 더 넘어 우려먹다... 댓글:  조회:3929  추천:0  2016-11-10
만져주기 긁어주기가 흠   / 김룡운 1995년도 문단대문을 노크하다말고 머리를 잠시 뒤로 돌려보면 대체적으로 큰 말썽거리가 없이 조용하고 잠잠하게 살아왔다는것이 우리 보선족문단가족의 상황이다. 그런데 너무 조용하고 잔잔하다는 그 자체가 곧 평범무이함을 의미하고 선행의식, 초탈의식, 갱신의식의 결여를 의미하고 궁극적으로는 물의를 일으킬만한 작품(명작도 좋고 시비거리문 제작품도 좋다)들이 별반 없었음을 의미한다. 어느 편집부에선가 1등을 줄만한 작품이 없어 빈 자리로 남겼다는 이야기도 들은적 있지만 사실 지난해 조선족문단에는 괄목할만한 작품, 격절탄상할만한 작품이 별로없었다. 문단기후가 너무 순후하여 빼여난 작가와 작품을 낳지 못했는지 빼여난 작가와 작품이 없어 문단기후가 순후해졌는지 생각할수록 아리숭하지만 아무튼 그 주요책임을 평론계가 안아야 할것 같다. 공명정대하고 엄숙하면서도 뜨거움이 흐르는 평론이나 너른 마당쓸기나 반지르르한 겉치레가 아닌 구체작품에 정식호적을 붙이고(절대 림시호적이 아니다) 그 내면세계를 알뜰히 파헤친 평론, 한마디로 선도적역할을 하는 평론이 적었기때문이라고 제멋대로 생각해본다. 우리 평론이 좀 더 성실한 태도로 적극적이고 책임적인 자세로 나왔더라면 혹시 우리가 그저 그러루하다고 보고 무심히 스쳐지나왔던 작품들중에서 시비거리가 될만한 색다른 작품을 찾아냈을지도 모른다. 또 가령 그런 새 맛이 나는 작품이 있었다 할 때 론단에 올려놓고 열을 올렸더라면 사방에서 과 을 느껴 문단이 지금보다는 훨씬 활기를 띠였을지도 모른다. 그저 만져주고 긁어주면서 편안히 잠재워주는것이 우리 흠이다. 그러니 추물도 푸물인지 모르고 난쟁이도 난쟁인줄 모르고 미인도 미인인줄 모른다. 이것은 좋은 징후가 아니다. 정상적인 현상이 아니라 비정상적인 현상이다. 이것은 어제에 대한 만족의 일종 다른 모슴에지나지 않으면 현유를 부정하고 더 높은 문학봉우리를 점령할만한 용기가 없다늗데 대한 스스로의 투항에 다름아니며 명철보신의 대명사에 다름아니다. 포식의 만족감과 무조건적인 슨응에 매달리기보다는 항시 배고품을 느껴야 할것이고 모험을 동반한 엉뚱한 행위가 있어야 할것이고 그 대가를 선뜻이 치를만한 여유작작한 용기와 담략이 있어야 할것이라고 제 구미에 맞게 생각해본다. 이것이 곧 문단이 쳄체에서 벗어나는 길이 아닐가. 춘하추동이 선명한 속에서 일취월장하는 길이 아닐가, 진정으로 정상의 길에 들어서는 길이 아닐가. 그런데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이 지난해의 묻능을 두고 얼마간 안위를 얻을수 있는것은 다행히도 문단의 고요한 호수에서 생생한 파문 몇쪼각을 주어들 수 있기 때문이다. 8월에 박화시인이 에 김성휘시비(詩碑(락성과 관련해 란 글을 실어 처음으로 파문을 일으켰다. 글의 골짜는 한 시인이 詩碑를 세우는데 도대체 무슨 是非가 그리도 많으냐 하는것이였다. 이에 화답해 전국권 평론가도 (에 대한 是非 )라는 글을 써 두 번째 파문을 일으켰다. 그 골짜는 우리 문단에 문인상경, 문인우애의 분위기가 형성되였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는것이였다. 이어 감학철선생이 라는 글을 써 를 30년 우려먹는 현상이 비단 [관계벼슬마당 ]이나 [관리사회]에만 있는게 아니라 우리 문단에도 역시 나타나고있다면서 세 번째 파문을 만들었다. 이리하여 잠잠하던 침묵의 귀퉁이가 조금 열리게 되었고 문단은 약간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상술한 분들이 문단에다 생기를 불어넣어준것이야말로 얼마난 반가운 일인가. 이분들의 글들은 각이 선명하고 날이 예리하여 문단에다 적지 않게 충격을 주었다. 그런데 곰곰히 따지고보면 여기에도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가 전혀 없는것은 아니다. 세분의 글들은 평론으로서는 흠잡을나위없이 훌륭하지만 문단도덕에만 차중하여 열을 올리고 구체적인 작품에 대하여는 시야비야를 외면해버렸기에 작가와 작품을 키우는 작업에 큰 도음을 줄수는 없었다. 문단의 기후와 문단의 도덕에 대해 운운하는것도 확실히 필요한것이고 앞으로도 언제나 있어야겠지만 지금 우리에게 선차적으로 절실히 요구되는것은 구체적인 작품에 대한 성실하고 랭정한 해중고 이로부터 기대되는 유망한 작가, 빼여진 작품들의 속출이지 이러저러한 여론에 대한 해명은 부차적인것 같다. 문단기후와 문단도덕에 지나치게 기울어지는 경우 까딱하면 불필요한 배척이 생기고 불화의 씨가 심어지는 등 평론의 붓끝이 엉뚱한 곩으로 향해질수 있다는것도 념두에 두어야 할것이다.  
1784    중국 조선족 문학사에서 첫 "단행본아동작가론" 해빛 보다... 댓글:  조회:3571  추천:0  2016-11-10
한석윤론ㅡ출간                                                               / 김룡운    ...연변교육출판사에 의해 한석윤론 가 출간되였다. 원래는 3년전에 기획된것이였지만 본인이 “나보다 더 훌륭한  분들이 많은데 어떻게 나의 작품론이 먼저 나갈수 있냐”며 극구 사양하는 바람에 오늘에야 비로소 모습을 보이게 되였다.  『6월을 위한 5월의 노래』는 중국조선족아동작가를 다룬 첫 단행본작가론이라는데서 중국조선족문학사에 커다란 획을 긋게 될것이다. 본서는 제1부 작품론-『연필끝에 아롱진 칠색의 세계』, 제2부 인간론-『몸으로 그려내는 동심의 나라』,제3부 『한석윤작품선』으로 엮어졌다. 27편의 문학평론과9편의 인간론으로 꾸며진 한석윤론을 읽노라면 우리는 동시인으로서의 한석윤, 인간으로서의 한석윤, 아동교육가,사회활동가로서의 한석윤을 일목료연하게 알수 있게 될것이다. 한석윤 선생의  좌우명은 “후대를 길러가는 길에 은행나무처럼 깨끗이 살고 초불처럼 몸과 마음 다해 가리 ”이다. 그는 이 좌우명을 인생의 락으로, 분투목표로 삼고 오늘까지 동시창작과 어린이들을 위한 힘겹고도 아름찬 고행의 길을 걸어왔다. 제1부에서는 한석윤선생이 동시창작에서 이룩한 혁혁한 성과를 집중조명였다. 비록 늦깎이로 동시창작에 몰입하였지만 1980년대초에 김득만, 최문섭 등과 함께 동시혁명의 홰불을 높이 추켜들고 동시혁명에 투신하면서 중국조선족동시문학창작의 세 지평을 열었다. 그는 동시는 우선 시로 되여야 한다는 슬로건을 내걸고 동시에서의 이미지창출에 혼신을 쏟아부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동시에서 이미지를 추구한다는 주장은 황당하고 불가능한것으로 치부되여 반발도 적지 않았지만 자기의 주장을 굽히지 않고 과감하게 실천으로 증명하여 사람들을 감복시켰다. 결과 늦깎이로 동시창작에 뛰여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주 짧은 시간내에 알찬 현대동시들을 륙속 창작하여 동시단을 경악케 했으며 일약 동시단의 선두자로, 거목으로 급부상하였다. 한속윤선생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 등 11권의 동시집을 펴냈고 그 보상으로 선후하여 , , , , 등 굵직굵직한 상들을 받아안았다. 제2부에서는 아동교육가, 사회활동가로서의 한석윤선생의 업적을 소개하였다. 한석윤선생은 어린이신문사업에 획기적인 기여를 하였다. 한석윤선생의 피타는 노력으로 가 로 승격하는 쾌거를 이룩하였으며  그후 그 기세를 타고 중국소년아동간행물협회로부터 일류신문으로, 국가신문출판총서로부터 우수신문으로, 길림성신문출판국으로부터 성1급신문으로 평정되였다. 한석윤선생은 청소년문화사업에서도 커다란 업적을 쌓았다. 1982년에 우리 말, 우리 글을 빛내기 위해 행사를 11회 조직하였고  1987년에 창조형인재를 길러내기 위해 를 발기하고 행사룰 12회조직하였다. 1993년에 청소년들에게 시대적전형을 수립해주기 위해 를 발기하고 행사를 10회  조직하였으며 1994년에 『신동컵수학경연대회 』를 발기하고 한국과 교류하여 학생들을 국제수학경색대회에 출전시켰다. 1998년에 어린이들의 가슴속에 사랑의 씨앗을 심어주기 위해 『사랑의 일기쓰기공모전』을 발기하고 행사를 10회 조직하였으며1998년에  『중국조선족장학금상』을 제정하고 불우한 청소년들을 8차 지원하였다. 한석윤선생은,  2003년에 퇴직한 후에도 조선족청소년사업을 위해 불후의 업적을 창출하였다. 자기돈 4만원을 기초로 『연변조선족자치주  청소년문화진흥회』를 발족하고 법인대표를 맡았는데 오늘에 이르기까지 력사에 기록될만한 수많은 일들을 해냈다.  2006년에 어려움속에서 씩씩하게 자라는 청소년들을   격려하기 위해 『초록장학상』을 제정하고 14회에 걸쳐 장학금을 전달하였으며 2007년에 아동문인들이 훌륭한 아동문학작품을 쓰도록 격려하기 위해 『윤정식아동문학상』을 성립하였다. 2008년에 조선족청소년들속에 독서열기를 불러일으키기 위해 연변조선족독서사와 함께 『엄마랑 함께 하는 독후감쓰기대회』를 발기하고 5회 조직하였으며 그해에 또  사랑의 동시가 아기들 가슴속에 가 닿도록 하기 위해 『엄마랑 함께 하는 동시랑송대회』를 발기하고 두차례 개최하였다. 역시 같은  해에 조선족유명동시인들을 기리고 민족혼을 고양하기 위해 동시동네를 마련하고 동시비를 세웠는데 지금까지 5개의 동시비를 완성하였다. 2009년에는 중한문화교류를 추진하기 위하여 연길, 도문, 안도에서  『시민들과 한께 하는 시화전을 』 두차례 열었으며 2011년에 동시동네에 윤동주시비를 세우고  윤동주포럼을 조직하였고 2012년에  자치주성립60주년을  맞으며 진달래광장에다  『자치주성립경국의 노래』기념비를 세웠다. 이 기념비 축성에 한석윤선생은 자기의 사재 만원을 희사하였다. 제3부분에는 한석윤선생의 대표동시 30수와 한편의 수필, 두편의 칼럼, 두편의 평론이 실려 있어 금후 한석윤의 작품을 감상하고 연구하는데  큰 도움이 될것이다. 한석윤론 는 한권의 책이라기보다는 한석윤선생이 일생이  고스란히  담겨진  인생총화요, 인생찬가이다. 아동작가치고 어느 누가 어린이들을 사랑하지 않으련만 어린이들에 대한 한석윤선생의 사랑은 너무나 깊고 넓고 진지하여 실로 모두가 감탄을 금치 못하고있다. “아이들이 좋아 아이들과 함께 웃고 울고 아이들이 귀여워서 함께 뛰놀고 노래 부르며 살아온 20년, 그 시시각각은 정말 너무나 행복한 순간들이였다. ”그렇다. 한석윤선생은 일생을 바로 이렇게 살아왔다. 한석윤 선생에게 있어서 어린이는 자신의 삶의 전부요, 행복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기에 또 이 세상에서  가장 큰 부자이기도 하다. 미래보도 더 큰 재산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한것윤선생의 지나온 발자국을 돌이켜보면 실로 우리 어린애들과 우리 민족을 위해 너무나 많은  일을 하여 감탄과 고마음을 금할수 없다.   어떻에 한 사람이 평생에 이토록 많은 일을 할수 있을가. 그 까닭이 무엇일가.  사랑, 사랑이다. 어린이들에 대한 무한한 사랑과 민족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다. 그 사랑이 꽃으로 피여 한것윤선생의 삶은 언제나  싱그럽고 향기롭다. 로목개화심불로(老木開畵心不老)란 말이 있다. 아마도 한것윤선생을 두고 한 말인것  같다. 나이가 70이지만 마음속에 항상 사랑의 꽃이 피고있으니 한석윤선생은 늙지 않았다.  일년4계절 꽃을 피우고있는 큰 나무, 언제 어디서나 황금열매를 주렁주렁 달고있는 큰 나무,  그리하여 영원히 늙지 않고 어린애로   살고있는 큰나무,이것이 한것윤선생이다. 한석윤론 『6월을 위한 5월의 노래』가 우리 민족의 문학고(文學庫)에 소중한 보배로 소장되리라는 것을 믿어의심치 않는다.    
1783    詩人은 시시비비, 진진허허의 대문을 여는 도인이다... 댓글:  조회:4160  추천:0  2016-11-10
우리 시단의 怪事,奇事 ,庆事 / 김룡운    박운호의 시집를 두고   창의성과 초월성으로 살펴보는 우리 시단의 그라프   시인 박운호가 2000년1월에 첫시집 을 내놓은지 꼭 10년만에 두번째시집 를 내놓았다. 이 시집은  오래간만에 우리 조선족시단에 던진 어벌큰 도전장으로 주목된다. 시집의 표제를 풀이하면 죽었던 혼이 환생하여 꿈에서 본 일들을 적는다는 뜻이다.  시인은  꿈에서 한번 죽은후 이 세상의 희노애락과  시시비비,진진허허를 자세히 관찰하고 드디어 깨도의 대문을 노크한다. 시인은 꿈꾸는 동안  육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고통스러운 수련의 과정을 겪으면서 인생감오와 시적감오를 얻으며 종당엔 홍진세계의 먼지를 툭툭 털어버리고 나름대로의 열반의 경지에 도달한다. 의 탄생은 우리들에게  우리  시단의 모습을 새로이 성찰하게 하는 기회를 만들어주었다. 왜냐하면 는 오래동안 고요하고 잠잠하던 우리 시단에 충격을 준 례사롭지 않는 시집이기때문이다. 우리 시단은 해방후 몇차례의 진통과 탈피의 행로를 밟으면서 오늘까지 걸어왔다. 사실 알고보면 중국조선족시단은 시의 혁신과 창의성, 혁명성에서  전통이 있다. 일찍 일제시기 만주에  만주조선인 문학이라는것이  있었다.   1936년7월 부터 8월 사이에   리상이 에 라는 쉐르일리즘 시를 련재하여  한때 큰 센세인숀을 일으켰다. 리상의 오감도는 고정관념에 반기를 든 파격적인 이단으로 문단의 공격을 받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상은 전위적인 시인으로  높이 평가되었다. 허나 현실보다 너무 앞선 이상의 시는 반역으로 이단으로 몰려 9호까지 내고 발표를 단념할수밖에 없었다. 리상의 영향을 받아 당시  시현실동인으로 활약하던 함형수, 이수성,김북원, 신동철 등이 1939년과 1940년도에 에 ,,, 등 파격적인 초현실주의와 다다이즘시들을 발표하였다. 이것이 중국에서의 조선족시의 첫 혁명이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1945년부터 1980년까지 중국조선족시단에는 력사의 원인으로 하여 이렇다고 할만한 새로운 시혁신운동이 없이 줄곧 사회주의사실주의시가 통치적지위에 있었다. 그러다가 개혁개방의 훈풍이 불어서야 비로소 우리에게도 시가혁명의 기회가 오게 되었다. 1980년대초에 한춘시인이 현대파시의 기치를 추켜들었고 거기에 호응하여 김정호가 상징주의 시 을 발표화여 40년간 잠자던 시단에 한차례폭풍이 일기 시작했다. 이어 시혁명 비슷한 창작이 이어가기 시작하여 90년대초에 김혁이 22수를 실험하였고  조광명이 불교시를 선보였으며 김파가 립체시를 들고 나오고 최룡관이 이미지시론을 들고 나오고 남영전이 1980년대 중기부터 토템시의 기치를  추켜들었다. 그러나 이들 대부분은  새로운 리론 창조가 아니라 서방기성리론에 대한 선양작업과 답습에 그치고말았다. 오래동안 사실주의시만 보아오던 그들이 갑자기 어느날 서방현대리론을 접촉하게 되자 마치도 콜롬보스가 신대륙을 발견했를때처럼  격동하고 흥분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였다.  콜롬보스가 지브랄타르해협의 한섬에 도착했을 때 그 섬에는  “세상은 여기에서 끝난다”는 패말이 꽃혀있었는데 콜롬보스는 그 패말을 뽑아버리고 대신 “세상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는 패쪽을 세웠다. 우리의 대다수 실험시들은 콜롬보스와 같은 전위성, 창조성, 모험성의 경지에는 이르지 못하고 다만 “세상은 여기서 끝난다”는 패말앞에서 흥분하는데 그치고말았다. 그것을 본것만 해도 너무나 경의롭고 신선했던것이다. 더 자세히 말하면 우리의 시혁명은 서방현대문학리론이 이미 만들어놓은 기성품을 선양하고 옯겨오는   작업, 그것에 다름아니였다. 그러나 설령 이렇다 할지라도 우리문학사에 남겨놓는 공적은  거대하다. 가령 그들의 시혁신운동이 없었더라면  침체되고 고갈되고 진부하던 시단에 활역소가 생길수 없었을것이며 다원화창작과 백화반발의 경상이 나타날수 없었을것이며  시의 개성이나 시의  질의 향상 등을 운운할수 없었을것이다. 오늘 우리 시는 비약적인 발전을 하고있는데 이는 모두 시혁신운동과 시혁명운동의 결과물이다. 이들 혁신파들중에서 가장 떳떳하게 나의것으로 인정받은 것이 남영전의 토템시이다. 남영전은 조선족시단은 물론 전 중국시단에서 처음으로 토템시리론을 제기하고 체계화하고 완선화시킨 시인이다. 그는 또 자기의 리론을 립증하는 54수의 토테시를 중문으로 창작하여  전반 중국시단을 놀래웠으며 이른바 중국에서의 남영전의 문화현상이라고 하는 거대한 문화현상을 만들어내게 되였다. 21세기에 들어와서 시단의 분위기가 오래동안 잠잠하다가 박운호의 출현으로 다시금 새로운 화제거라가 생겨나게 되였다. 즉 가로세로보기 시가 탄생하여 물의을 일으키고있다.   인생은가고오고 생활은고독만이 은은히 오다담는 가고오는해식고 고독다해뜸뜸해 오만담식뜸들인 고이는 고해인가     ㅡ«만가»(시인과 성녀와 대화 )   위의 시는 가로 읽으나 새로 읽으나 똑 같다. 첫행 첫글자에서 시작하여 가로 읽으면 로 되고 첫행 첫글자로부터 내리 읽어도   인 생 은 가 고 오 고   로 된다. 두번째 행에서 첫글자로부터 가로 읽으면 < 생활은고독만이 >로 되고 내리 읽어도   생 활 은 고 독 만 이     로 된다. 모든것이 이와 같다. 마방진에서 가로 보나 세로 보나 똑같은 것과 같은 도리이다. 지금 박운호의 가로세로 시읽기를 두고  우리 조선족문단에 시비가 엇갈리는 찬반의 론조가 있는것 같은데 무척 좋는 현상이라고 보아진다. 박운호시인이 만들고있는것은 루빅큐브식시로서 그 발상이 기상천외이고 아주 어벌이 크고 모험적인 창작이라고 할수 있다.  루빅큐브식은 일명 마방진(魔方陈) 혹은 (魔方)마방이라고도 하는데 그 어원은 영어의 magicspuare에서 온것이다. 마방진의 형식은 1에서 n2까지 정수를 n형 n렬의 정사각형모양으로 라렬하여 가로 세로 대각선의 합이 전부 같아지도록 한것이다. 박운호시인이   우리의 훈민정음을 가지고 립체적인 마방을 고안해냈다는것이야말로 실로 칭찬을 받을만한 장거라고 할만하다. 우리 민족언어는 자모결합의 문자로서 한자처럼 글자 하나가 나하 내지 몇개의 뜻을 안고있는 글자가 많지 않다. 상형문자이고 뜻글자인 한자를 리용하여 마방진시를 만들기는 그렇게 어려운  작업은 아니다. 그러나 기타 게르만어, 라틴어,슬바브어, 아랍어 등 자모문자를 가지고 루빅큐브식시를 쓴다는것은 거의 불가능한일이다.  우리 글도 자모음절결함의 문자이지만 천,지,인의 결합으로 만들어진 우리글의 우수성으로 하여 마방진시가 가능하다. 오늘 박운호시인이 그 가능성을 가능성이 아닌 현실로 바꾸어놓았다. 이것이 바로 초월의식이요 전위의식이요, 창조의식이다.  박운호시인은 사각형의 소우주를 만들어놓고 그 안에 들어가서 념주를 세고 좌선(坐禪)을 하고 목탁을 두드리면서 나름대로의 인생감오를 읊조리고있다. 그리고 그것은 글자유희가 아니고 수련을 동반한 고행이기에 더욱 돋보인다. 말하자면 단순히 가로세로 글을 읽는 무의미한 놀이가 아니라 철리와 사색을 전제로   시혁신과 시혁명을 꾀하고있다. 박운호의 시가 이제껏 창출된  조선족의 시 중에서 동양적숨결이 가장 다분하다는것도 특징의 하나라 되고있다.   2.인생에 대한 깊은 성찰과 거듭나기    는 , ,,, , 등 모두 6개부분으로 구성되여있다. 이들중에서 시적으로 가장 성공하고있는 부분은 와 과 이며 시혁신에서 크게 괄목하만한것은 이다. 와 ,는 개성이 뚜렷하고 심오하고 철리적이고 함축성이 다분하다. 그외 민족의 우환의식을 다룬 와 시조를 다룬 은 어딘가 평범무의한 인상을 준다.  는  분단으로 인한 민족의 아픔과 설음이 진하게 내비치고있으나 어지간히 시재가 있는 시인이라면 누구나 쓸수 있는 그런 시들로서 여지껏 민족의 애환을 노래한 시들을 릉가하지 못했다는  느낌을 주기에 별도로 다루지 않았다. 시조인  은 현대판  이라고 할수 있다. 이 부분에서는 친구의 도리, 삶의 참자세 등을 주로 쓰고있는데 인생에 주는 계시가 적지 않다. 헌데 형식탐구에서 새로운 노림이 없어 아쉽다. 모든 시조가 단순하고 단일한 평시조의 옷을 입고 있어 신선한 맛이 나지 않는다. 좀 파격적인 형식으로  현대시조를 썼다면 좋았겠다는  생각을 해보았고 그런 연유로 이 글에서 시조도 살핌을 하지 않았다. 이  부분에서는 와 ,   중에서 일부 시들을 선택하여   옅은 소견을 피력코저 한다. 박운호의 시들을 일별하면 담담한 어조속에  고행의 흔적이 력력하며 그리고 그 고행은 인생에 대한 성찰과 거듭나기로 일관되여있다. 시인은 크게 떠들지 않으면서 세상을 말하고 자신을 말한다. 는 시인이 이 세상을 랭철하게 관조하고 그 느낌을 쓴것이다.  인간의 거듭나기는 고통없이는 불가능하다. 시인은 거듭나기 위해 한번 죽었다가 부활한다.   꿈속 떠돌던 마을어귀 숨죽은듯 고요한 내 무덤앞에는 자그마한 반듯한 비돌이 나지막히 세워져있었다 묵묵히 장사를 치르고 망종을 하면서 굳이 사람 사는 내막을 조금씩알게 되였다 …….. 사람은 한번 죽어보아야 사는 진상이 어렴풋이 짚이였다   ㅡ -   한다는것이 바로 인생에 대한 성찰이며 는것이 바로 거듭나기의 시작이다. 그러되 박운호의 시들은 기본상 불교를 핵심으로 동양사상에 뿌리내리고있다. “동양사상은 가치를 외부에 두지 않는다. 동양학의 인간주의는 인간을 배타적인 존재로 상정하거나 인간을 우주의 중심에 두는 인본주의가 아니다. 인간은  어디까지나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의 하나이며 그 자체가 어떤 질서나 장(場)의 일부분이면서 동시에 전체이다. 그리고 인성의 고양을 궁극적인 가치로 인정하는 경우에도 인간을 관계로서의 맥락에서 파악함으로써 개인주의의 좁은 틀을 벗어나고있다.”(신영복,[강의] 54쪽) 박운호의 시들은 인간관계의 맥락에서 세상을 관조하며 자신을 수련하고있다.   하늘을 우러르면서 하늘을 속이고 다소나마 알듯하면 부모를 속이고 나름대로 저도몰래 친구를 속이고 괜한걸 가지고 부부간에 속이고 아래도 속이고 우로 속이고   『하계단상』일부   한번 저승에 갔다가 인간세상에 돌아온 후  시인의 눈에 비친 인간세상의 한 모퉁이이다. 속임과 속히움이 반복되는 인간세상, 이런 나쁜 근성을 고칠 처방은 없을가. “어쩌면 속아사는게 더 편할수도 있지 않는가/더러는 모르는것이 오히려 부처니까 말이다” 이것이 처방이다. 다음 시인은 의 병인을 밝힌다. “모든 음페된 절차속에는  질서가 있었고/모든 엄연한 사실은 감추어진 결과이다” 음페된 질서를 무너뜨리고 감추어진 사실을 까밝아놓는것이 세상을 강건하게하는 방법이다. 시인은 이 세상의 온갖 비리와  부정에 대해서도 날카롭게 지적하고있다.   지금 세상은 미상불 등불이 휘황하여 밤도 낮같아 가까스로 신변엔 모든것이 마법같은존재 까닭모를 징조는  떠도는 스캔들뿐 고조된 변형, 고조된 갈등 고조된 고민 고조된 불양   『스캔들』일부분    이 세상을 직시하면 수많은 추문들이 란무한다. 겉보기에는 화려하지만 그 안에서 갖가지 추문들이 활보한다. 시인은 마법과 같은 스캔들이 살판치는 현실을 두고 서글프게 넉두리한다. “등불은 지금 고조로 난연하고/덩덩한 이 밤은 저조로 짙어간다”     시인은  인성의 자유에 대해서도 깊이 성찰하고있다. 시인은 제 나름대로 제 생긴대로 자유롭게 사는것도 재미라는것을 발견한다. 기지와 해학성분이 약간 가미된 『재미있는 세상』은  철리성이 다분하며 장자의 소요유(逍遙遊)의 사상을 떠올리게 한다. 장자의 『변무(辯拇)』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그렇기때문에 오리의 다리가 비록 짧다고 하더라도 늘여주면 우환이 되고 학의 다리가 비록 길다고 하더라도 자르면 아픔이 된다.”장자는 길다고 그것을 여분으로 여기지 않고 짧다고 그것을 부족하다고 여기지 않는것이 자연이며 자유이며 도의세계라고 주장한다. 『재미있는 세상』은 장자의 사상이 어지간히 녹아있는듯 하다. 시인은 『재미있는 세상』에서 이렇게 읊조린다.   내가 재미있다고 남이 재미있는것은 아니다      내 재미로 남의 재미를 재지 말고  남의 재미대로 꼭 부러워할것까진 없을것 같으니 재미있는 세상에서 한껏 재미를 느끼며 재미있게 사는것이 재미가  아니겠는가   『재미있잇는 세상』 성찰과 거듭나기에서 극치를 이루는것이 『불당에 들어』와 『심성정곡』과 『관음당에 들려 향을 스르다』인것 같다.  시이은 새로운 인간으로 탈바끔하기 위하여 불당에 들어가서 친견한다.     번뇌도 고통도 없는 경지에 도달하고 탄식도 회포도 없는 선경에 닿으려면 거치른 마음에 가득하게 들어있는 거치장한 집착을 버려야 한다고 느꼈을때 불당에는 향내가 저으기 진동하고 불상은 다정하게 미소를 짓고있다   『불당에 들어』   거듭나기란 결국은 참삶에 위배되는 모든 비정한 것들을 버리는것을 의미한다. 그러할 때 인간은 이 세상의 축복을 받고 모든 사람의 찬양을 받는다. 시에 언급되는 와 는 바로 축복과 찬양 그것에 다름아니다.    『관음당에 들려 향을 스르다』도 우의 시와 맥락을 같이 하는 시이다.   모처럼 마음을 비운 거기가 바로 오매불방 그리던 심령읭 정토이고 모처럼 비워진 거기가 바로 억조창생 극치가 왕생하는 극락정터가 아니가싶었다 영생토록 비우면 비울수록 거기가 바로 령혼이 환생하는 드넓은 왕국이고 령과 혼이 깃든 거기가 바로 왕국이 들어앉을 명당지인가싶었다   -『관음당에  들려 향을 사르며』 우에서도 말했지만 인간에게 불리한 모든 나쁜것들을 버려야만 비로소 극락정토에 이를수 있고 심령의 왕국에 도달할수 있다.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비움의 철학이다. 시적주인공은 비움의 철학을 실현한다. 그래서 축복을 받아 “향연은 언제 보나 모락모락 피여나고/ 향내는 늘쌍 코앞에서 향긋하게 맴돈다” 마지막으로  『심성정곡』을 살펴보자.   무언한 자연속에  넉넉히 안겨 무명이 없고 망집도 망탄도 없는 무심한 심성을 무념으로 정화하면 무료한 집탈은 가뭇없이 사라지고 무아경에 도취하여 신신이 되는듯 무상한 느낌속에   한번쯤 부처가 된다   -『심성정곡』 표제를 풀이하면 마음을 바르고 깨끗하게 하는 노래라는  뜻이다. 망집,망탄, 집탈이 인간을 해치는 잡물들로서 이런것들을 없애면  무아경에 도취하고 한번쯤 부처가 된다. 부처는 모든 깨끗하고 위대하고 거룩한 이름의 상징이며 인간이 도달해야 할 최고경지이다.  박운호는 이 세상을 깊이 통찰하면서 새로운 인간으로 거듭나는 작업에 혼신을 다하는 시인이다.       2.소우주에서 들려오는 은은한 목탁소리 오랜 세월  파란만장한 인생의 고개길을 톺아오르던 시인이 마침내 오도의 대문에 들어서서 자신만의 소우주를 만들어놓고  경건한 자세로 좌선을 하고 념불을 하고있다. 시인은 자기 특유의 집을 짓는다. 건축모양은 마방진식이고 사용한 재료는 대부분 불문에서 가져온것이다. 시인은 불학을 포함해 공자, 맹자, 장자, 묵자 등 동양철학에 대해 깊은 조예를 갖고있다. 가령 동양철학에 대한 연박한  학식이 없었더라면 불교적,유가적냄사가 물씬 풍기는   마방진식의 시를 창출할수 없었을것이다. 보건대 시인은 가로세로세를 쓴느데 엄청난 대가를 치룬것 같다. 박운호시인은 무려 16수의 마방진시를 창작하였다. 이 세상에 없는 을 짓자니 얼마나 어려웠겠는가. 한채를 짓자해도 지난하고 아름찬 작업인데 무려16채나 지었으니 실로 놀라지 않을수  없다. 우리가 박운호시인의 마방시를 주목하지 않을수 없는 리유는 시인이 만들어놓은 괴상하고 경이로운 소우주가 결코 심심풀이로 장난삼아 지은 집이 아니라는 점이며 절에서 들려오는 목탁소리가 무심히 들려오는 소리가 아니라는 점이다. 시인은 자기가 안주하고있는 절간을 인생도리를 낳는 요람으로 만들고있으며 하나하나의 목탁소리에다 인간세상을 따스하게 어루만지는 철리적이면서도 유정한 말씀들을 얹어주고있다. 또 하나 주목할것은 시인이 소우주안에 앉아서 대화를 나누는 대상들이 말짱 이라는 점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 시인이 동양적사상과 동양적철학에 시핵심을 두고있음을 보아낼수 있다. 사실상 가로세로보기시  이외의 기타 대부분의 시들에서도 동양철학의 숨결을 다분히느낄수 있다. 동양철학에서 가장 중요한것이 인성이다. “인간주의적 관점에서 규정하는 인성이란 한 개인이 맺고잇는 여러층위의 인간관계에 의해 구성된다. 인성은 개인이 자기의 개채속에 쌓아놓은 어떤 능력 즉 배타적으로 자신을 높혀나가는 어떤능력을 의미하는것이 아니다. 인성이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의해 이루어지는것이다. 에 덕불고필유린(德不孤,必有邻) 이라는 구절이 있다. “덕은 외롭지 않다. 반드시 이웃이 있다”는 뜻이다. 덕성이 곧 인성이다. 인간이란 존재를 인간관계라는 관계성의 실체로 보는 견해이다. 그래서 동양적가치는 어떤 추상적인 가치나 초월적존재에서 구하는것이 아니라 인간이 맺고있는 관계속에서 구하는 그런 구조이다.”(신영복,[강의],41쪽) 여기에 비추어보면 박운호의 시핵심이 동양철학의 인성고양에  뿌리내리고있음을 어렵지 않게 보아낼수 있다. 마방진시들을 보면 모두 , 즉 인간관계로 되여있다. 례하면 , , 등등. 한마디로 인성에 초점을 두고있다. 례문과 마주앉아본다.   천성   -시인과 수녀의 대화   안빈락도성한삶   빈한막심한생엔 락막한자과도견 도심자는시심마 성한과시행이지 한생도심이자성 삶엔견마지성을   위의 시를 전통시 형식으로 고치면 아래와 같다.     安貧樂道 성한 삶 貧寒莫甚한 생엔 樂莫한자 果盜見   道甚者는 是甚麽 聖汗과  施行이지   한생 道心이 資性 삶엔 犬馬之誠을       이 시를 풀이하면 대략 아래와 같다.   가난을 즐겁게 여기며 이룩한 삶이요 극빈으로 구차하게 살아온 삶이라  실패한 자는 수행을 착실하게 못했기때문 불문에 들어선자는 마땅히 항상 깊히 사고하며 언제나 땀으로 시행할지어다 참다운 도심이 인간을 만들거늘 자기의 삶에 견마지성을 다해야 하리   이 시는 인간으로 되는 도리를 이야기하고있다. 자신을 항상 돌이켜보고 자기   삶에 충성하라고 귀띰한다.     도의 - -시인과 승녀의 대화   지덕은감여령고 덕성은여실수행 은은한종지론가 감여종성자은한 여실지자심감계 령수론은감계시 고행가한계시록   이 시를 전통시로 옮기면 아래와 같다.     지덕(智德)은 감여령고(堪輿 靈告) 덕행(德行)은 여실수행(如实修行)   은은한 종지(種智)론가 감여(堪輿) 종성(終成) 자은(自隠)한      여실지자심( 如實知自心 ) 감계 (鍳 戒 ) …. 령수론( 靈遂 ) 은감( 殷鍳)계시 고행( 苦行 )가한 계시록( 启示录 )   이 시의 내용을 풀이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지와 덕은 하늘이 내리는것이요 덕성은 참다운 수행끝에 이루어지는것이노라. 부처님이 지혜로우매 하늘과 땅이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나니 자신을 참답게 알면 교훈이 될것이로다. 하(夏)나라의 멸망의 력사를  깊이 통찰하고 스스로 고행을 행할지라. 이것이 곧 인생을 살아가는 계시록이니라. 이 시는 자신을 참답게 알면 실수가 없으므로 평소에 수련을 게을리 하지 말라는 내용으로 읽을수 있다..     귀속 -시인과 식차마니의 대화     꽃이이제그유정한옛삶후회없이지네 이젠제법저금은에적이회심어르던맘 이제곷은말없이피다말없이진다해도 제법은광을기리고나없이도진느거야 그저말을속에품지오이제질해거름속 유감없기에꽃으고스락갈때가든타네 정은이리품은듯이품인데시현한네맘 한에피고지고이젠성해가든히그넋은 옛적다나오스품성속여도넌피다지지 삶이말없이락인하여향가고다시지자 후회없이제갈데가도가지고가지않는 회심이도질때시든넌고고히지새는꽃 없어진지해가현히피다가지려는꽃의 이르다는거든한그다지지새는귀의소 지던해거름타네넋지지않는꽃의섭리 네맘도야속네맘은지자는꽃의소리네       이 시를 전통형식으로 고치면 아래와 같다.     꽃이 이제  그 유정한 옛 삶 버리고 후회없이 지네 이젠 제법 저 금은에 적이 회심(會心) 어르던 맘 이제 꽃은 말없이 피다 말없이 진다 해도 제법 은광(恩光)을 기리고 나 없이도 지는거야   그저 말을 속에 품지요 이제 질 해걸은 유감 없기에 꽃은 고스락 갈 때 가는거라네 시현(示顯)한 네 맘 한에 피고지고 이젠 성해 가든이 그 넋은   옛적 다나오스(Danaos) 품성 속여도 넌 피다 지지 삶이 말없이 락인(烙印)해 여향(餘香) 가고 다시 지자 후회없이 제 갈데 가도 가지고  가지 않는 회심이 도질 때 시든 넌 고고히 지새는 꽃   없어 진지(振摯)해 가현(假顯)히 피다가 지려는 꽃의 이르다는 거든한 그 다시 지새는 귀의소(歸依所) 지던 해거름 타네 넋 지지않는 꽃의 섭리 네 맘도 야속해 맘은 지자는 꽃의 소리에       동양의 미덕중에서 남을 위해 무수히 좋은 일을 하였으되 스스로를 나타내지 않는것이 가장 향기롭고 가장 값나가는 미덕이다. 이 시에서는 바로 유정한 삶을 살았지만 후회없이 지는 꽃을 통해 즉 비록 사라졌으되 결코 사라지지 않은 꽃의 섭리를 통해 불현(不顯)의 미덕을 칭송하고있다.  이제까지 살펴보았지만 박운호의 가로세로보기시는 마치 리상의 처럼 난해하여 제대로 해독을 하자면 품이 많이 들고 숨이 차다. 그  까닭은 첫째 정연한 마방진틀에 치중하다보니 띄여쓰기가 무시되였기때문이고 둘째 일반인들에게는 생경한 불교용어가 허다히 사용되였기때문이고 다음으로는 문법규정에 어긋나는 토가 사용되였기때문이다. 그외 틀짜기에 신경을 쓰다보니 행과 행사이에서의 의미련결이 불확실한 점도 적지 않다. 이런 제반 리유로 하여 박운호의 실험시 가로세로보기시는 시해독에서 정력을 많이 허비해야 하는  약점을 드러내고있다.  많은 품을 들여야 대략적인 의미는 파악이 가능하다. 문학을 연구하는 평자들도 이러할진대 일반 문인들이나 백성들이야 더 말할것이 있겠는가.  필자의 일가견이지만 시인은 이쯤에서 발걸음을 멈추는것이 좋을듯 하다. 왜냐하면 이러한 난해한 형식의 시는 시의 대중성과 보편성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으며 따라서 대중의 호응이나 찬양을 받을 확률이 대단히 적기 때문이다. 물론 금후 시인이 난해성을 피면하고 대중성과 보편성을 획득하는 전제하에서 마방진시를 계속 쓰겠다면 그것은 별문제로서 필자의 권고는 근근히 로파심에 불과할것이다. 이러한 문제점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는 하나의 귀중한 시혁신이고 시혁명임에는  틀림없다. 그 누구도 시도하지 못했던 특별한 형식에다 동양철학을 다져넣었다는 점에서 우리 시단에 색다른 의미를  부여하고있다. 문학사적으로 볼 때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      오래간만에 우리 시단에 괴상하고도 신기한 선물을 안겨준 는 우리 시단의 경사이다.    의 출간에 진심으로 되는 축하를 보낸다.
1782    詩人이라 하여 모두가 詩人인것은 아니다... 댓글:  조회:3625  추천:0  2016-11-10
모천회귀(母川回归)ㅡ 혼으로 울리는 은은한 가락 ㅡ 김학송의 최근시를 보면서                             김몽   김학송은 시인이다.    바야흐로 몸이 무르녹고있다. 살구꽃이 연분홍 미소를 흩날리고 민들레가 파란 노래를 부르고 종달새가 하늘가에 춘향(春香)을 수놓고 아지랑이가 요염한 자태로 만물을 현혹한다.  이런 유정한 봄날, 나는 지금 김학송의 최근시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걸어간다. 이야기속에서 향내가 묻어난다. 그것은 김학송의 시가 과연 시이며 김학송은 과연 시인이기때문이다. 시라고 하여 모두가 시인것은 아니며 시인이라는 패쪽을 달고있다고 하여 모두가 시인인것은 아니다. 시향이 묻어나는 시라야 시라고 할수 있으며 그러한 시다운  시를 써야 비로소 시인이라고 할수 있다. 김학송은 우리 시단에서 명망있는 시인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사람의 숲에는 사람이 없다», «고향에는 고향이 없다»를 미롯하여 무려 20여권의 시집을 산출하여 량적으로 가장 많은 시집을 펴낸 시인이며 «해외 동포상»,  «준마상 »등 굵직한 상을 받은 시인이며 많으 평자들로부터 호평을 받아온 시인이다.     황금찬은 “김학송의 시는 읽을수록 정이 가는 점이 있다. 그것은 그의 시세계가 지극히 인간적이라는 점이다. 생명을 절대시하고 우주를 시인의 가슴에 품어주는 높은 시상을 갖고있으며 고도의 상징적기법으로 조용히 구름이 장미를  빚듯이 빚어내고있다.”고 말했고 신동욱은 “평범한 체험속에서 근원적인 님을 탐구하는 감격적인 서정을 보여주었는바 시적감수력이 뛰여나며 서정시편의 질감높은 기량을 느꼈다. 상업주의가 넘치는 시대에 가치의 안정성과 정체성의 인식방식으로 님을 탐구하는 서정시인의 령혼이야말로 고귀한 별임을 새삼 깨닫게 된다.”고 했고 임헌영은 “김학송의 시는 이제 연변의 울타리를 벗어나 한국의 독자에게도 익숙하게 다가서게 된다. 그것은 주제와 소재의 기법에서 충분히 오늘의 한국시에 새로운 충격을 줄수 있기때문이다.”고 평가했다.  물론 평론가들의 말이 모든것을 결정하는것이 아니며  그것이 한 시인의 가치척도를 가름하는 기준으로 되는것은 아니다. 그러나 여러 평자들로부터 이만큼한 평가를 받는 시인이라면 적어도 자격이 있는 시인라는 점만은 부인할수 없다.   엎딘김에 절이라고 이 기회에 우리 시단을 살펴보면 중국조선족시단이라는 이 시동네에 시인협회에 가입하여 시인이라는 칭호를 달고다니는 사람이 몇백명이 되지만 진정으로 시인라고고 할만한 명실상부한 시인은 크게 잡아도 몇십명밖에 되지 않는다. 까딱하면 시인들한테   를 맞을 소리같지만 필자의 생각이 이러하니 를  맞더라도 할말은 해야겠다.  우리의 시동네에 말썽이 꽤나 많아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자기가 진짜 시인이고 다른 사람들은 시인이 아니라고 말한다. 앞에서는 사뭇 겸손한체 점잖은체 하지만 뒤에서는 서로 흉보기가 일쑤다. 그리하여 바람직한 문인상경( 文人相敬)의 풍조 대신 유감스럽게도 응당 멀리 하여야 할  문인상경(文人相轻)의 페단이 형성되고있다. 과연 어떤 시가 좋은 시고 어떤 시가 나쁜 시일가.     필자는 이에 답으로 간단히 아래와 같이 분류를 해본다. 첫째,읽기 쉬우면서도 시인  시. 둘째,  읽기 쉬운데 시가 아닌 시  셋째, 읽기 어려운데 시인  시.  넷째. 읽기 어려우면서 시가 아닌 시.        손오공이 여불애의 손아귀를 벗어나지 못하듯 모든 시는 이 네가지 부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것이 필자의 견해이다. 상술한 네가지 부류중에서 첫번째와 세번째가 쓰기가 가장 어렵고 두번째와 네번째가 쓰기가 가장 쉽다.  지금 우리에게는 첫번째 부류와 세번째 부류의 시들이 적고 반면에 두번째 부류와 네번째 부류의 시들이 많다. 너무 알기 쉬워 벌거벗은 시들이 적지 않고 모더니즘이나 초현실주의시 같은 경우, 세계를 망각한 자의식이 잡음이 많고 너무 두터운 옷을 입어 아무리 하여도 그 속을 전혀 들여다 볼수 없는 시, 시인 자신도 명확히 설명하지 못하는 지나치게 시이비한 시들이 적지 않다. 이런 시들은 대중들로부터 소외를 당한다.  미국의한 평론가는 “오늘의 시는 이민선의 3등선실에 탄 가난뱅이처럼 보인다”고 말했는데 도리가 전혀 없는 말은 아닌것 같다. 시인의 가치하락에서 시인도 자유롭지 못한바 자신을 돌이켜 보아야 할것이다. 시인이 자기 위상을 높이자면 오로지 좋은 시를 쓰는  방법밖에 없다.   좋은 시가 되자면 알기 쉽든 알기 어렵든간에 결국엔 시 밑바닥에 삶에 도움이 되는, 또는  귀중한 어떤 계시를 주는 묵직한 철리가 웅크리고있어야 한다. 그러지 못하다면 독자는 시를 외면할것이며 시는 독자가 없는 울타리안에서 저희들끼리 좋다고 떠들썩할것이다.   평범한 일상에서 삶에 유익하고 도움이 되는 것들을 시로 육화하는 작업이 시인이 해야 할 일이며 현상의 배후에 있는 시대의 혈색과 호흡에 대한 깊이 있는 천착의 유무를 묻는것이 시인의 옳바른 자세이며 이런 자세하에서만이 좋은 시가 탄생한다. 그리고 자격이 있는 시인이 되자면 타인의 마음에도 깃들줄 아는 존재로 되여야 한다. 세계, 내적존재로서의 세상 사람들의 체취를 끊임없이 자아화 함으로써, 그리하여 더더욱 자기 자신을 고양하거나 지양함으로써 인간의 내면에 신성한 기운이 움크게 하야야 한다. 삶과 세계의 깊이와 넓이를 진정으로 헤아릴줄 알 때만이 누구 아닌 바로 그 시인으로 영생할수 있다. 김소월이나 윤동주, 정지용 등을 비롯한 많은 명시인들이  영원히 사라지지 않고 시인으로 살아있는 까닭은 한두가지가 아니지만 주요하게는 다름아닌 그들의 시가 “인간의 내면에 신성한 기운을 움크게 하는 힘”을 갖고있고 “삶과 세계의 깊이와 넓이를 진정으로 헤아릴줄 ”알기때문이다.   필자는 김학송을 알기 쉬운 표현으로 상당히  무거운 시를 쓰는 시인으로 보고있다.  최근의 그의 시들을 보면 대개  민족성에 뿌리를 내리고 인생과 세상을 깊이 있게 투사하고있으며 그 와중에 시의 무늬가 수놓아진다.   모색이  이우는 버드나무강변에서 한줄기 우환을 깔고앉아 로인은 퉁소를 분다 마을을 향해 한곡조 강물을 향하여 한곡조 배부른, 할일 없는 소들을 바라보며 또 한곡조 아리랑, 도라지, 양산도  신나는 가락에 어깨를 들썩인다 로인은 분다 저무는 황혼의 비애를 분다 먼저간 이들이 채 못부른 노래 그리고 수천년 이 민족의 가슴에 자리잡은 깊은 한과 고독을 분다   ㅡ«퉁소와 로인» 전문   시를 읊어보면 힘든 낱말이 기본상 없다. 하지만 뇌리에 박혀드는  사연은 결코 적지 않다.  퉁소소리의 울림에서 우리는 우리 민족의 안고있는 비희고락의 력사와 현재가 애환의 가락에 앉아 흔들거리며 춤을 추고있는 정경을 보게 된다. 퉁소의 주인인 은  우환을 반석처럼 깔고앉아 불고  과 를 불로 마지막에는 < 이 민족의 가슴에 자리잡은 깊은 한과 고독을 분다> 시적주인공인 은 민족의 대변이이자 민족의 혼이다. 시인이 노래하고있는것은 민족의 오늘과  수쳔년의 력사를 아우르는  민족의 아픔이다. 고뇌와 비애속에서 빚어지는 령혼의 직조( 织造)가 곧 살아서 퍼덕이는 혼의 울림, 시로 탄생하며 아울러 김학송은 시인으로 된다.     모천회귀 ㅡ혼으로 울리는 은은한 가락   김학송의 시를 보면서 문득 모천회귀를 떠올리는 까닭은 김학송의 시가 존재의 시원(始源)을 찾는 언어의 본능을 시의 근원을 찾으려는 시인의 인간적욕망으로 정화시키고있기때문이며 최후의 목적지 내지 정착지가 고향(어머니,민족)이기때문이다.  시원은 시인마다 제마끔 달라 모두에게 그 특유의 시원이 있다. 시원을 찾는 과정이 곧 시가 만들어지는 과정이다. 어떤 시인들에게는 시원을 찾아가는 길이 쉽지만 어떤 시인들에게는 대단히 고달프고  때론 비장하면서도 성스럽기도 하다. 诗자를 보면 말씀 言자와 절  寺자로 구성되여있다. 절(寺) 은 성당(圣堂)을 의미하며 석가모니, 하느님 등 지고무상의 성스러운 존재를 상징한다. 이렇듯 시란 성스러운 존재와의 대화(言)이므로  결국 시도 성스럽게 되니 않을수 없는것이다. 그리고   성스러움을 빚어내자면  구도자(求道者)와 같은  인내와 고뇌와 아픔을 감내하지 않을수 없다.     김학송의 많은 시들이  시원을 고향, 어머니 내지 민족의 뿌리에 두고있다. 연어는 태여난 강이나 하천으로 돌아가는 모천회귀본능( 母川回归本能)을 갖고있다. 강이나 하천에서 태여난 연어는 바다에 나가 성어가 된다. 성어가 된 9개월 뒤 산란기가 되면 자기가 태여난 강으로 거슬러 올라가 산란하고 최후를 마친다. 강으로 올라가는 과정에 수많은 위험이 도사리고있어 치렬한 박투를 하면서 목슴을 내걸고 처절한 행군을 계속한다. 그만큼 고향이라는것은 무서울 정도의 마력적인 힘을 갖고있는것이다. 중국성구에 락엽귀근( 落叶归根)이라는 말과   토끼는 죽을 때 제굴에 가서 죽고 여우는 죽을 때 자기가 살던 언덕을 바라본다(兔走旧窟,狐死首丘)는 속담이 이 있다.   식물이나 짐승마저 고향에 대한 사랑이 이렇듯 사무치거늘 하물며 인간이야 더 말해 무엇하랴.   하기에 고금중외를 막론하고 고향을 주제로 다룬 작품이 많으며 우리 조선족시단에도 고향을 쓴 시들이 수두룩하다. 고향은 흔히 민족이라는 개념과 동일시되여 쓰이는 경우가 많다. 김학송도 고향주제를 많이 다루고있는 시인들중의 한 사람이다. 그러되 그는 누구보다도 뜨겁고 치렬할만큼 고향애착이 집요하다. 하기에 그의 시는 그만큼  민족정서, 고향정서, 노스탤지어정서가 농후하다. 이는 그의 의식적인 시추구에서 비롯된것이다. 시인의 고백이 그의 시원이 어디에 있는가를 잘 말해주고있다. “민족의 정체성과 잃어버린 고향을 찾아나선 정신궤적을 두루 다루었다. 어디에서 살든 나는 조선족이다. 이것이 자랑스럽다. 다시 태여나도 나는 조선사람으로 살고싶다.” 김학송의 이러한 진실한 고백이 이번에 에 발표된 시들에서  명백히 드러나고있다. 고향과 민족에 뿌리 내린 그의 시의 정신을 완벽하게 알아보기 위해 먼저 최근에 발표한 시집 «고향에는 고향이 없다» 중에서 한수를   골라본다.   바람이 희다 바람이 달다 바람이 맛있다 바람이 길다 바람이 둥글다 바람이 깊다    김치냄새가 난다 청국장냄새가 난다 막걸리냄새가 난다   바람이 삼배저고리 같다 바람이 행주치마 같다 바람이 두루마기 같다   바람이 퉁소를 분다 바람이 묵장구 틴다 바람이 가야금 탄다 바람이 둘래춤 추며 강강수월래를 부른다   옛성터에 부는 바람은 늙어도 늙지 않는 뿌리 깊은 바람이다   ㅡ«옛성터에서 5» 전문   이 시는 우리 민족에 대한 대찬가이다. 이 시의 내용의 깊이와 넓이에 앞서 우선 말짱 고유어로 된 시어가 주목된다. 전편시에 한자 한마디도 끼우지 않았다. 그래서 이 시는 민족어의 고유성과 지킴이라는 이 한가지에서도 큰 점수를  따고있다. 은 우리 민족의 상징이다. 을 통해 민족의 형상, 민족의 특징, 민족의 영원성,창창한 미래까지 현시한 시인의 자태가 돋보인다. 1련에서는 , ,로 우리 민족의  깨끗히고 아름다운  마음씨를,   2련에서는 , , 로 우리 민족의 유구한 력사와 단결심을, 3련에서는 , ,로 우리 민족의 음식문화의 특색을, 4련에서는 , , 로 우리 민족의 복장특색을,   5련에서는 , , , 로 춤과노래를 즐기는 우리 민족의  기질을 노래부르고있으며 마지막 련에서는 “옛성터에 부는 바람은/늙어도 늙지 않는/뿌리 깊은 바람이다”고 하면서 민족의 영원한 창성과 번영발전을 기원하고있다. 한수의 짧은 시에 알기 쉬운 표현으로 민족의 모든것을 일목료연하게 다져놓고있는데 시 전편에 민족정서의 가락이 은은히 울리고있어 사뭇 정겹다. 11수의 시에서 고향애착이 가장 선명한것이 이다. 우에서 간단히 살펴보았지만 이 시는 고향의 령락과 피페에서 비롯된 시인의 안타까운 심정과  이로부터 인기된 암울한 정서를 읊은것인데 범용한 서정시의 얼개를 뛰여넘고있다는데서 주목된다. 이미 우에서 간단히 언급했기에 구체적인 살핌을 하지 않는다. 모천회귀성은 모성회귀성과 통하고 모성회귀성은 또 고향회귀성과 민족회귀성으로 통하기도 한다. «어떤 귀향>이 그러한 경우이다.   16년전에 객지에서 떠돌던 사나이는 머리 허연 로인이 되였네 떠날 대는 호기롭게 검은 머리 흔들며 사라졌지만 병든 로구 간신히 이끌고 동구앞에 찬바라 휘몰고 나타난 모습은 그젯날의 그 사람이 아니라네 얼니 냇물에 절을 올리고  늙은 당수목에 머리를 조아려도 그때 그 시절은 돌아오지 않고 이 모든걸 헤아려주는 향풍(乡风)만이 너른 품으로 해일처럼 무너지는 육신 안아주네   ㅡ«어떤 귀향» 전문  은 고향의 품일수도 있고 어머니의 품일수도 있고 민족의 품일수도 있다. 16년전에 건장한 몸으로 고향을 떠났던 사나이가  백발이 되여 고향으로 돌아온다. 객지에 돈벌이를 나갔다가 망한것이 분명하다. 하기에 시인은 이라고 묘사한다. 또한 망함의 강도를 강조하기 위해 이라고 말한다. 떠돌이인생에서 망그러진 육체, 해일처럼 무너지는 육체, 하지만 향풍은 그를 밀어내지 않고 받아들인다.  모든걸 헤아려주는 향풍(乡风)은 한마디 원망도 꾸지람도 없이 그 을 따스하게 안아준다. 은 어머니의 품으로 볼수도 있고 고향의 품으로 볼수도 있고 민족공동체의 품으로 볼수도 있다. 연어가 알밴 배를 터트리려는 욕망에서 고행을 찾아가듯 시인 역시 생명의 노래를 부르기 위해 시의 근원을 탐색한다. 결국 시인은 가장 믿을만 하고 가장 너그럽고 가장 따사로운 곳이 고향이라는것을 알게 된다. 이러한 인식은 시 에 이르러 가장 극명하게 나타난다.   고향에는 가장 순정한 향음(乡音)이 있고 가장 편한 휴식이 있다 고향에는 가장 따스한 온기가 있고 가장 애절한 눈물이 있다 고향에는 늙을수록 아름다운 인생이 있고 부를수록 새로운 노래가 있다 고향에는 나의 실패마저 안아주는 손길과 나의 흠결마저 곱게 바라보는 눈동자가 있다   ㅡ«고향에는» 전문   이 시는 «어떤 귀향»에 비해 울리는 빛갈이 맑고 흔들리는 가락이 따사롭다. 세상(고향)과 만나는 시인의 력사인식은 유충의 기억을 잊어버리는 완전변태의 방식이 아니라 기억에 푹 젖어 기억을 고스란히 간직하는 그런 인식이다. 김학송은 도시에 오기전의 도문의 한 시골에서 흙냄새와 소동냄새를 맡으며 농촌과 인연을 맺었다. 아마도 그러한 삶의 력사가 시인의 뇌리에 깊게 각인되고 발효되여있다가 저도몰래 시라는 젖으로 흘러나오은것 같다. 시인의 고향은   모든 소중한것들이 다  있는 유정한 보금자리이며  어머니의 다스한 품이다. 거기에는 , , , , , 심지어  . 고향은 아름다움이고 인정이고 따스함이고  노래이고 춤이고 사랑이고 너그러움이이다. 모천회귀로서의 김학송의 시는 고향을 찬미하는 맑진 목소리도 있지만 많은 경우 울림이 회색적인데 그것은 민족의 우환의식에서 비롯된것이다. 에서도 그러한 침울한 숨결이 들린다. 개혁개방후 국문이 열리면서  많은 조선족들이  연해지구로 해외로 돈벌이 나갔다. 그 와중에  돈은 벌었지만 많은 페단과 비극도 초래되였다. 떠나고싶어 떠난것이 아니고 보내고싶어 보낸것이 아니다. 돈이 없어, 핍박에 못이겨 떠나고 보낸것이다.   기차는 산해관을 지나 남으로  남으로 달린다 기차의 속도로 달리는 마음은 뒤켠에 고향을 부려놓고 앞으로만 앞으로만 나아간다 친지들의 부름소리가 따라오지만 앞개울을 넘지 못하고 산에 막혀 돌아간다 깊이를 알수 없는 호수가 나그네의 꿈을 삼켜버리고 가도가도 생소한 풍경만이 구름너머에 마을이 있다고 알려준다 갈것들이 다 가버린 부락에선 올것들이 오지 못해 울고있다   ㅡ«나그네는 구름 되여» 전문   살아 생생한, 오늘의 조선족  농촌마을의 축도가 아닐가. 언제부턴가 연길역전과 연길공황은 눈물과 웃음으로 반죽된 조선족들의 리별과 만남의 현장으로 되여버렸다. 우의 시는 그 현장속에서 눈물쪽에 렌즈를 돌리고있다.  시에 등장하는 나그네는  돈이라는 꿈을 위해 에 뛰여든다. 떠나가는 나그네의 등뒤에서  “친지들의 부름소리가 따라오지만/앞개울을 넘지 못하고 산에 막혀 돌아온다”. 은 떠남을 유발한,  떠나지 않으면 아니될 , 떠남을 핍박하는 현실상항이다. 즉 가난에서 탈출하려는,물질적욕구를 만족하려는 갈증이다. 하여 을 넘어 뛰여든 사람이 어찌 한둘이랴. 결국 “갈것들이 다 가버린 동네에서/올것들이 오지 못해 울고있다” «정거장소나무»는 고향의 스산함과 쓸슬함을 고독과 외로움의 무늬로 수놓고있는 시다. 은 현실부재로서의 고향이고  고향을 지키고자 하는 고향의 혼이며 은 고향의 혼을 달래주는 민족의 혼이다. 이 시는 고향은 사라진것 같지만 결국은 미구에 재생할것이며 영원히 소실되지 않을것이라는 메시지를 던져주고있다. 그 리유는 장수를 의미하는 가 고향을 지키고있기때문이며 민족의 얼인 이 때문이다. 우리는 를 민족의 자긍과 민족의 정기를 일깨워주고 불어놓어준다는 뜻으로 해석할수 있다. 김학송은 때론 다른 방식으로, 시골을 신비화 하는 방식으로 고향에 대한 긍지와 애착을 표현하기도 한다. 에서 시인은 사고 , 산다고 말하며 있기때문에 수천년동안 향촌의 맥이 끊기지 않고 이어왔다고 말한다. 는 것은 가능하게 민족을 민족으로 남게 하는 모든 귀중한것들을 지칭하는것이라고 보아진다. 하기에 시인은 시골의 달빛마저도 사랑스럽고 귀중하여 고 독백한다. 참 정답고 재미있는 시구다. 김학송은 고향과 민족을 아끼고 사랑하기때문에 민족이 민족으로 남지 못하고 동화될까바 걱정하기도 한다. 가 그러하다. 민족의 동화를예방하고 민족성을 고수하려는 시인의 의도는 가상하나 표현이 직설적이여서 재미가 슬하다. 필자는 이 시를 라고 본다. 그래도 건질만한 시구가  하나 있다. 총체적으로 모천회귀과정에서 은은한 령혼의 가락으로 울리고 있는 김학송의 시는 고향과 민족의 뿌리에 파고들어 민족의 혈색과 호흡에 대해 사명감 높은 투시와  천착을 하고있으며 민족의 체취를 자아화하는 작업을 통해  인간의 내면에 신성한 기운을 움트게 하며 삶의 깊이와 넓이를 진정으로 헤아리려고 하고있다. 김학송시인이 이후에도 더 시인다운 시인이 되여 더 시다운 시를 쓰기를 기대해본다.   2014년 연길에서 씀    
1781    늦둥이 시인 하이퍼시집 낳다... 댓글:  조회:4374  추천:0  2016-11-10
[ 2016년 11월 10일 03시 29분 ]   [ 2016년 11월 10일 03시 29분 ]     30메터 깊이의 우물에 빠진 아이(6살)를 구하기 위해 80대의 굴삭기가 출동.   =중국 호남성 리현(Lixian) 지역에서ㅡ ============================================ 불가사의, 그속에서 숨쉬는 생명시학   ㅡ방산옥의 하이퍼시집 «련꽃에 달의 집을 짓다»를  평함                                   김몽                        1. 방산옥시인이 하이퍼시집 «련꽃에 달의 집을 짓다»를 출산했다. 우리 조선족시단에서 방순애의 하이퍼시집 «시간은 원이 되여» 다음으로 내놓은 두번째 하이퍼시집이다. 45년간 록색생식의학연구에 몰입하면서 수많은 아가들을 선물하였고 건강한 삶, 행복한 짝을 지어주었던 의학자가 이번에는 그 자신이 문학과 미친듯이 짝짓기를 하여 예쁘고도 포동포동한 아기,하이퍼시집을 낳았으니  실로 경하할만한 일이다. 오늘 필자는 69세가 되여 늦둥이를 출산한 산모를 경하하려고 이 자리에 앉았다. 시집을 읽으면서 감탄과 경이로움도 함께 읽었다. 중국어로 «中华妇女临床医学研究»,«中华实用临床医学防治研究»,«健康你我她»를 내놓고 우리 글로 «성을 알면 삶이 아릅답다»와 그리고 60만자에 달하는 «삶과 짝»을 저술한 의학자가 불과 2,3년 사이에 동시집 «바람도 빼똘빼똘»을 만들고 200여수의 하이퍼시를 창작했으니말이다. 그중에서 92수를 골라 묶은것이 «련꽃에 달의 집을 짓다»이다. 시집은 제목 «련꽃에 달의 집을 짓다»가 매력적이고 유혹적이여서 시 냄새가 물씬 풍긴다. 시인은 책머리글에서 최룡관선생님을 알게 되여 세심하고 열정적인 지도를 받았다고 말하고있다. 이 세상에서 인연이라고 하는것이  자못 중요하다. 베토벤이 나폴레옹을 만나 교향곡 제5번이 탄생했고   그리스도를 핍박하던 사울이 로상에서 예수를 만나 결국 오늘과 같은 기독교가 있게 되였다. 우리 중국 조선족의 문학의 경우 중국문학권의 영향도 무시할수 없지만 주로는 개혁개방으로 국문이 열린 덕분에 한국문학과 인연이 맺어져  서방현대파문학리론을 접수하여 오늘의 중국조선족현대파문학이 세워지게 되였다. 하이퍼시 경우도 마찬가지다. 디지털문학의 거센 물결에 적응하기 위해 미국, 프랑스, 독일 등 서방 나라들에서 하이퍼텍스트문학이 시작된지 오래다. 한국은 서구와 인연이 맺어져 십년 뒤늦게야 하이퍼시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아직  본격적인 하이퍼텍스트문학으로 자리 잡지 못하고 한창 실험단계에 있으며 론쟁도 많이 진행되는것으로 알고있다. 우리 문학은 이번에도 한국과 인연이 닿아 하이퍼시를 알게 되였고 지금 일부 시인들이 하이퍼시에 경도하는 바람이 일고있다. 최룡관시인을 주축으로 하이퍼시 동아리가 형성되였고 대련에서는 김파시인이 디지털시와 하이퍼시에 몰입하고있다. «련꽃에 달의 집을 짓다»를 읽으면서 생각이 깊었고 고민도 두터웠다. 비평문학은 시를 읽는 독자들에게 감상괴 리해,해석과 가치판단을 통해 삶을 대하는 눈과 마음을 넓혀주는 동시에 보이지 않는 길을 만들어 자신만의 새로운 삶을 걸어가도록 구도하고 그 자신이 순례자로서 걸어가는 삶의 길을 찾기에 다름 아니다. 무릇 시를 비평하는 사람은 독자의 눈과 귀를 가져야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시인의 마음과 손의 감각을 감지하여야 한다. 아니, 어쩌면 비평가란 그 어느쪽에도 속할수 없는 경계선상에 서있는 경계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희려 그런 리유로  해서 그런 경계인이야말로 가장 첨예하게 시를 읽는 일과 시를 쓰는 일의 본질에 대해 끊임없는 대화와 소통을 감행하지 않으면 안된다. 방산옥 시인의 시집을 읽으면서 곤혹스러웠던것은 하이퍼시의 특성때문이였다.하이퍼시의 특성을 간단하게 개괄하면 탈관념, 초월과 건너뜀의 기법,시간경계의 무시, 다선구조, 무한한 공간 등등이다. 이런  특성들이 또 언어의 폭력조합과 어울려져  난해성 내지 불가사이성이 가중된다. 매 수의 시를 정확하게 읽어내기가 쉽지 않다는 얘기다. 최룡관선생은 “련꽃에 달의 집을 짓다”의  서평  «새로운 천지에서 타오르는 시의 불길»에서 다만 새로운 시 령역의 개척과  이미지폭력조합만 건드렸을뿐 구체적인 시해설은 한수도 하지 않았다.  사실 하이퍼시를 일목료연하게, 깨끗하게 해석하고 분석한다는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문제는 난해성이다. 문학의 한 류파인 포스터구조주의와 포스터모더니즘은 신비를 추구하고 사이비를 제창한다. 이들은 “불가사이한것이 언제나 아름답고 아름다운것은 언제나 불가사이하다고 주장한다.”하이퍼시의 초월과 건너뜀의 기법은 이들의 리론과 많이 닮아있다. 결국 하이퍼시와 대화한다는것은 불가사이한 물체와 대화하는것과 다르지 않다. 따라서 하이퍼시에는 유일정확한 답이 있을수 없다. 명확한 풀이를 할수 있다면 그것은 아마 하이퍼시가 아닐것이다. 이런 리유에서 하이퍼시를 일목료연하게 해석한다는것 그 자체가 불가능하고 무의미한것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필자는 하이퍼시와 대화를 나누기로 하였다. 첫째는 비평가의 사명감이였고 둘째는 해석의 열쇠를 찾아보려고 미궁에서 헤매는것이 비록 피곤하고 고단한 일일지라도   바로 거기에 또 시 읽기의 다른  한 재미가 있기때문이였다.                   2. 방산옥시인은 소재발굴에서 새로운 령역을  개척하고있어 주목을 끈다. 그의 대부분의 시들이 주역과 의학소재를 다루고있다. 최근년에 우리 시단에    새로운 소재를 탐구하는 시인들이  나타나  시단에 활력소를  가미해주고있다.  광주의 박운호시인이 주역을 기본 핵으로 하여 미묘하고 신비한 마방진시를 쓰고있고 미국에 있는 홍군식시인이 순 불교를 소재로 130수의 시를 만들어 «원묘»라는 표제로 세상에 내놓을 준비를 하고있다. 그 본인은 불교시라고 하는데 내가 보건대 소재는 불교이지만 형식은 하이퍼시라고 본다. 그러나 아직까지 의학을 소재로 시를 쓴는  시인은 방산옥 한사람뿐인것 같다. «련꽃에 달의 집을 짓다»는 시적상상력의 기본 바탕을 이루고있는 주역적사유와 의학적사유가 시의 내면공간을 확장하고 심화시키는 견인력으로 작용하고있다는 점에서 서정시의 독자적특수성과 의미를 지닌다.  그리고 그러한 특수성으로 하여 방산옥의 시는 남들과는 다른 개성적인 얼굴을 가지게 된다. 방산옥의 시를 여러가지 시각으로 바라볼수 있겠으나 본고에서는 음양결합을 바탕으로, 주로 생명시학에 시각초점을 두고 살펴보았다. 방산옥의 시가 여러가지 내용을 포괄하고있지만 생명 또는 섹스에  관한 내용이 가장 비중있게, 가장 빈번히 다루어지고있다. 표제들만 보아도 그것이 립증된다. “삼월이 분만한다”, “옥문”,“안개의 젖통을 스친다”, “짝사랑”, “자궁은 랭장저장고”, “송이버섯의 결혼” 등등. 그래서  필자는 시평의 표제를 «불가사이, 그 속에서 숨쉬는 생명시학이라고 달았다. 방산옥의 시에서 수많은 생명들이 탄생하고 활발하게 숨쉬면서 푸덕이는것은 시인의 직업과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시인 방산옥은 저명한 산부인과 의사인줄로 알고있다. 그는 특히 성박사로 소문이 나있다. 그는 “성을 알면 삶이 아름답다”, “삶과 짝ㅡ생식과 전신건강”등 저서를 출간한 사람이다. 하기에  시인은 알게  모르게  자각적이든 비자각적이든 생명례찬과 신비, 혹은 생명의 탄생과 부활, 성의 신성함을 시의 핵으로 다루고있는것 같다. 모든 생명의 탄생은 음과 양의 결합을 전제로 한다. «고물주를 수송합니다»가 전형적인 례로 된다. 시에서 남성의 생식기 남근은 «물구나무», «호랑이심장으로 만든 기차»로 은유되여 그 거대한 힘이 과시되고 있고 녀성의 생식기 질은 «불아궁이»,«동굴»로 은유되여  남근을  정복할수 있는 더 큰 힘으로 묘사되고있다.   남근이 «물구나무» 나 “호랑이처럼 힘이 세지만 녀성의 힘이 더 세여 그 “연장이”“불아궁이”에 들어가자  “그슬러 검정버섯이 ”된다. 성교를   해학으로 풀어낸 시라고 볼수 있겠다.     구들목에 앉았던 고양이 병아리소리에 연장이 부풀어납니다 질이라고 쑥 들어간 연장은 불아궁이에  그슬러 검정버섯이 되였습니다 ……중략 호랑이 심장으로 기차 만들고 위장으로 기차길을 닦았습니다 기차는 음낭역을 떠나 질역으로 고물주를 수송합니다   ㅡ«고물주를 수송합니다» 일부  “고물주”라는 단어는 사전에도 없는 말이다. 필자는 “고물주”를 남성의 “정자”(精子) 가 아닐가고 생각한다. “기차가 음낭역을 떠나 질역으로/고물주를 수송”했기에 이로부터 수많은   생명이 탄생하거나 부활하여 방산옥의 시들은 생명의 약동으로 부풀어오른다.   집안에서 나는 응아 소리에 태양의 빨간 청각, 파란 미각, 투명한 시각들이 창문을 깨고 날아들어옵니다   ㅡ«버들과 련꽃형제» 일부   새 생명의 탄생에 대한 시인의 무한한 환희가 시줄에 앉아 춤을 추고있다. 얼마나 기뻤으면, 얼마나 급했으면 “태양”이 아기를 보려고 창문을 깨고 들어왔겠는가. “빨간 청각,파란 미각,투명한 시각”이라는 언어조합이 전반 시에 감미롭고도 싱싱한 숨결을 부어놓고있다. «산문을 열다»는 굉장한 상상의 힘을 빌어 만물을 창조하는 대자연의   신비무궁함을 시화하고있다.   새들은 향기를 부채질하여 친구들을 부르고 꽃들은 구름을 펼쳐 새아침 목청을 그린다   목동의 초막에서는 천문가가 아침 정적을 울리는 첫울음을 터뜨리고 심산의 근육수축으로  양수가 터진다   천년송에 머리박으며 울부짓는 바람은 사지를 무겁게 끌고다녀도 정에 취한 청산은 건(乾)도 손(選)도리(离)도… 모두들 품어준다   ㅡ«산문을 열다» 일부    대자연으로서의 산은 하나의 거대한 어머니의 자궁이 된다. 그 자궁이 수축하여 양수가 터지자 삼라만상, 안개, 나무잎,아침이슬,꽃, 목동, 구름 등이 태여나 세상은 생명의 숨결로 굼실거린다. 이 시의 구조상의 특징은 결과와 원인이 전도된데 있다.원인이 마지막 련에 누어있고  결과가 앞부분에 서있다. 필자는 산문을 열다를 “자궁을 열다”로 리해하고있다. 어머니로서의 산은 단지 수많은 아기들을 낳을뿐 아니라 보호하고 따스하게 품어주는것도 있지 않고있다. 천년송에 머리 박으며 울부짖는 바람은 사지를 무겁게 끌고 다녀도 정에 취한 청산은 건(乾),손(選)도 리(离)도… 모두들 품어준다 이 시에서 돋보이는 이미지결합은 “목청을 그리다”이다. 시인이 화가가 되여 소리를 그리고있는것이다.  이상은 주역적사유속에서 만들어지고있는 생명을 소재로 한 시들의 일부였다.우에서도 말했지만 방산옥의 시에는 주역적사유 못지 않게 의학적사유로 만들어진 시들도 적지 않다. «초경»은 인체의 생리변화로 새로운것의 탄생을 례찬한 시라고 본다.   제비 한마리 치마폭을 감싼다 제비 새끼가 첫 고고성을 울리며 얼굴을 뾰족히 내민다   우물가 수양버들에서 회색강아지들이 먹거리 찾아 우물에 뛰든다 어두운 밤하늘에서 달님은 별아가들을 업고 앞마당에 내린다   자고 일어난  소녀의 침대머리에 장미꽃이 피여난다 어두운 협곡을 뚫고 13년만에 답은 선물   ㅡ«초경» 전문 초경을 장미꽃에 비기고 그것이 “어두운 협곡을 뚫고/ 13년만에 찾아온 선물”이라는 표현은 칭찬을 받을만한 시구다. 시인은 초경이라는 자연의 섭리를 장미꽃향기로 승화시키고있다. 더욱 눈박아 보아야 할것은 인간과 자연의 화합하고 인간과 자연이 동격을 이룬다는 점이다.  시인은 갓 태여난 제비새끼와 버들개지, 별아가, 초경을 맞은 소녀 등을 한줄에 세워놓고 함께 탄생을 축하해주고있다. 우리는 «용광로에 빠진다»에서 생명의 과정을 묘사한  새로운  신선한 시를 만나게 된다.   코가 바람을 잘근잘근 씹어삼킨다 인후바위를 비비며 호수들은 계곡을 가득 채우고 갑문을 연다   동그란 바람호수들이 낭떨어지로 미끌어떨어지며 붉게 달아오르는 용광로에 빠진다   심장펌프가 물을 퍼낸다 물은 도랑을 따라 전야를 적시며 점점 검푸른 옷을 입는다   강물은 새길 찾아 돌아오며 검푸른 옷을 벗고 붉은 옷으로 갈아입는다   붉은 옷과 푸른 옷은 뱅글뱅글 옷만 갈아입다가 동년의 꿈을 꾸며 잠든다   ㅡ“용광로에 빠진다” 전문   제1련은 코로부터 호흡을 하여 산소가 페에 들어가는 현상을 말하고 2련은 산소가 심장에 이름을 말한다. 시인은 심장의 박동을 “심장펌프가  물을 퍼낸다”에 견주고있으며 수많은 모세혈관이 온 몸에  펴지는 현상을  «물은 도랑을 따라 전야를 적신다”고 묘사하고있다.   동맥을 “붉은 옷”으로, 정맥을 “푸른 옷”으로, 그리고 동맥과 정맥의 순환현상을 “붉은 옷과 푸른 옷은 /뱅글뱅글 옷만 돌려입다가/동년의 꿈을 꾸며 잔다”라고 노래부르고있다. 생명의 과정을 의학적도리로 설명했으나 이미지가 생신하고 선명하기에 읽으면 재미가 돋아난다. 이외도 의학적사유로 생명의 탄생과 환희를 읊조린 시들이 아주 많다. 례하면 “언덕에서 목을 쭉 빼든 민들레가/노란 꽃망울진 유방과 속삭일 때마다/젖무덤에서 한잎한잎 꽃잎이 피여난다” «처방전1» ,“침들을 한줌 쥔 손바닥은/침모내기에 구슬따 흘린다/ 땀방울은 파란 잔디밭을 키우고/벼꽃을 만발시킨다”«침모내기»,“올챙이들이 갤갤/새들이 짹짹/산에서 목탁이 딱딱딱/계곡에 노래를 심습니다”«옥문». 방산옥시인은 신선한 이미지창출에서도 재기를 보인다. “빨간 청각 파란 미각,투명한 시각”,“우뢰가 우주의 귀뺌을 치다”,“글자가 삐뚤삐뚤 길을 닦고/길은 모양을 조각하며 소리를 낳는다”주문의 마디마디가 /푸른 잎에서 쫑쫑 뛰여내린다”. “우주핸들”,“침모내기”.이런 잘 구사된 이미지조합들은 시를 시로 만드는데서 관건적인 구실을 하고있다. 방산옥시인이 열심스레 탁마해낸 이미지에 대해 할말이 퍼그나 있으나 편폭을 고려하여  더이상 론의하지 않기로 한다.                   3.     오늘 이 자리를 빌어 하이퍼시에 대한 필자의 견해를 간단히 피력하고자 한다.  우리 시단에서  하이퍼시를 두고 엇갈리는 견해들이 상충하고 있어 약간의 조률과 해석이  필요하기때문이다. 하이퍼시에 너무 매료된 어떤 사람들은 하이퍼시가 가장 우수한 시고 여타의 시들은 시가 아니거나 한층 낮은 수준의 시라고 하고 반대로  하이퍼시에 반감을 갖는   사람들은 하이퍼시는 인간과 세상을 등진 무의미한 동화적장난이라고 폄한다. 필자는 하이퍼시는 시대가 낳은 문학사조의 하나라고 본다. 그러나 하이퍼시가 최고의 시형식이라고 보지는 않는다. 하이퍼시는 그로서의    강점과 단점을 모두 갖고있다. 그러므로 강점은 배우고 단점은 삼가해야  한다는 립장이다. 언젠가 김철호시인이 자기가 하이퍼시를 공부하는것은   하이퍼시를 쓰기 위함보다는 자기의 시를 더 풍부히 하기 위한데 있다고 했는데 필자는 이러한 자세가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모든 문학사조는 모두 저마다의 강단점이 있으므로 서로가 대방의 장점을 취하고 단점을 걸러내여 자신을 더 충실히 하는것이이 참다운 문인이 걸어가야 할 정도라고 생각한다.  공생공존(共生共存),  호경호존(互敬互爱)의  정신은 문학에서도 받아들여야 한다. 자기와 견해가 같지 않다고 하여 무조건 대방을 비방하거나 폄하는 일은 부디 삼가해야 한다. 지금도 세계적으로  데가주망과 앙가주망을 두고 끊임없이 론의가 계속되고있는데 그것을 화두에 올려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다 아다싶히  간단하게 정의하면  데가주망은 절대적자유,자기해방, 현실도피 등을 의미하고 앙가주망은 현실과 어떤 인연이나 관계를 맺는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참여와 통하기도 한다. 시문학에서는 순수시와 참여시로 구분된다. 사르르트의 앙가주망개념이 가장 대표적이다. “작가기능은 아무도  이 세계를 모를수 없게 만들고, 아무도 이 세상에 나서서 [나는 세상에 책임이 없다]고  말할수 없도록 만드는데 있다. 그리고 일단 언어의 세계에 끼이는 이상 작가는 말할줄 모른느척 할수는 절대로 없는것이다. 의미의 세계속으로 들어가면 누구도 거기에서 벗어날 길이 없는것이다.”(사르르트[문학이란 무엇인가]) 문학은 두가지 일을 동시에 수행한다. 다시말해서 문학은 문학을 위해서도 존재하고 사회를 위해서도 존재한다. 괴테는 “시는 남자가 세계에 하는 키스이다. 그러나 빈 키스에서는 아이가 생기지 않는다”고 갈파한바 있다. 아내가 아니라 연인에게 하는 키스는 단순히 애정의 표현일뿐이여서 연인은 아내처럼 아이를 낳거나 생활계획과 같은 목표를 세우지 않아도 된다. 괴테의 말은 서정시의 무목적성 즉 순수성을 지적한 말이다. 에드리 앨렌포도 “시는 시이고 그외의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명제를 내놓았는데 역시 같은 맥락에 선다. 그러나 시는 이들이 말하는것처럼 단순한 감성의 표출로 끝날수는 없다. 시는 모종 의미에서 사회와 력사, 사상과 인식의 거울이 되여야 하다. 그렇다고 하여 시가 정치의 노예가 되야야 한다는것은 아니다. 순수와 참여, 시의 이러한 량면적속성에  주목하여 토마스 엘리엣은 “사상을 한다발 장미의 향기로 표현하라”는 주문을 내세운바 있다. 사상을 전하되 아름다운 장미의 향훈으로 감싸라는 뜻이다. 사상을 사상으로 전하면 그것은 시가 아니라 정치나 철학으로 될것이다. 어떤 사상도 예술의 옷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플라늘레르 역시 시에서 사상을 과일의 영양소처럼 숨겨놓으라고 권고하고있다. 사과의 아름다운 향기와 맛에 끌려 한줌 베어먹는 순간, 사과의 영양소도 함께 흡수되는것이다. 지금 우리 시단의 경우 순수와 참여(여기서 말하는 참여는 세상과의 교류와 인연에서 비롯되는 감정의 일체, 비희고락, 분노, 사랑 등을 모두 아우른다)의 대립이  상충상태로 존재하고있다. 그중 제일 많이 의론되고있는것이 하이퍼시이다. 필자의 소견으로는 순수와 참여의 대립을 넘어서 이 둘을 변증법적으로 아우르는 소통과 화홥의 지형도를 국축해야할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지나치게 드러나는 시도 스스로를 점검하고 현실과 너무나나 동떨어진 시도 재고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사료된다. 하이퍼시는 초월과 건너뜀의 기교를 통해 절대적자유와 무변의 공간을 제공하고 사유의 비약을 도모하며 생신한 이미지창출을 꾀하고있다는 강점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무의미를 뜻하는 랭혹한 탈관념과 지나친 언어폭력조합은 커다란 난해의 미궁을 만들어 세상과 독자와의 고립이거나 소외, 단절의 위험이 초래될수 있을것이다.  독자가 외면하는 시집을 찍은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하이퍼시가 안고있는 가장 큰 위험은 까딱하면 문자유희나 장난 그 자체에  머무르고만다는데 있다.  시가 아무리 순수를 겨냥한다 해도 시인이 세상밖이나 진공상태에서 살수는 없는 이상 현실과 교감하는 어느정도의 삶의 숨결은 있어야 한다는것이 필자의 소견이다. 오늘 필자가 례문에 올린 방산옥의 시들은 정도부동하게  관념이 슴배여있는 숨쉬는 시들이였다. 례문에 올리지 않은 시들중에서도 «오염된 부르하통하»,«어둠이 산문을 삼킨다» 등 시들은  현대문명이 가져다준 자연의 파괴,지구온난화로 인한 생태계의 파괴를 고발한  시들이였다. 그리고 김파시인이 장백산집지에 발표한 디지털하이퍼시에도 «안개 낀 미로»를 비롯하여 옅은 관념의 옷을 걸친 시들이 몇수 보였다. 이러한 사례들은 하이퍼시에도 어느정도의 관념을 집어넣을수 있다는 도리를 립증해주고있다. 필자가 절대적인  탈관념에  손을 들어주지 못하는 까닭은 우리가 부딪치고있는 현실상황때문이다. 멀리로는 서아프리카에 무서운 전염병인 에블라 바이러스가 발생하여 수천명이 죽어가고있으며 그것이 미국과 구라파까지 확산하여  온 세계가 공포에 떨고있다. 중동에서는 전쟁과 폭란으로 수많은 인생이 살륙되고있어 세상은 말그대로 아수라장이다. 시인들이 이런 현실을 모르는척 할수 있겠는가. 가까이로는 중국의 고위급간부들이 수십억, 수백원의 나라돈을 탐오하여 백성들의 원성이 사무친다. 문인들이 이런 현싱에 눈 감은채 그냥   음풍영월만 할수 있겠는가. 더 가까이로는 한반도가 매일 갈등으로 으르릉거리고 있으며 중국조선족은 해외진출로 부를 창조하였지만 그 대가로 교육위기, 가정파탄 등 위기도 함께 겪고있다.  이런것도 우리가 그냥 못본척 할수 있겠는가. 더 더 가까운 례를 들어 나의 누이나 어머니나 딸이 괴한에게 강간당할 때 그 광경을 보면서도 그 곁에서 그냥 수수께끼같은 시를 읊을수 있겠는가. 그렇다고 하여 결코 구호식이나 탄원식의 정치시를 쓰라는것은 아니다. 엘리옷의 말처럼 사상을 예술적으로 장미의 향기처럼 전해야 한다는 뜻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하이퍼시에서도 일정한 정도의 관념이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필자는 하이퍼시를 연구하고 하이퍼시를 쓰고있는 한국의 최진연시인의 말에  큰 공감을 갖고있다. “하이퍼시에서 일체의 관념을 배제한다면 문학의 량대가치인 유희성만 남고 관념에 의한 공리성은 전혀 무시될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최소한의 관념이라도,심상운의 표현을 빌자면  “지장수같은 관념 ”을 쓰려고 한다. 대상에 대한 감각과 인식의 인지단계를 벗어나지 않는 범위내에서 엷고 투명한 정도의 관념을 함유하게 함으로써 시적가치를 높이는것이 더 좋으리라고 생각해서이다.”(최진연 [하이퍼시의 리해]) 하이퍼시가 엷고 투명한 정도의 관념을 함유한다면 세상과의 화합도 이루어지고 따라서 독자층확보도 가능해질것이라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언어의 폭력조합에 대해서 몇마디 덪붙히려고 한다. 신비평에서는 언어의 폭력조합을 아이러니견제와 균형이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하는데 적당한  견제와 균형은 시 앙금을 증강시키고 사색의 심도와 광도를 확대하여 시의 품위를 높이지만 지나치면 미궁에 빠지게 된다. 일반적인 시도 읽이지 않는 시대인데  하물며 수수께끼같은 시야 더 말할나뉘가 있겠는가. 독자층의 외면은 너무나 당연할것이다. 그러므로  언어의 폭력조합을 지나치게 강조하는것은 무리라고 생각한다. 무릇 세상일이란 모두 적당하면 좋다. 과하면 탈이 생긴다. 하이퍼시는 21세기에 군림한   문학의 한 사조로서   당당하게 자리를 차지할 권리가 있다. 탈관념과 언어의 조합에서 조금 더 유연하고 양보하는 자세를 보인다면   하이퍼시가 많은 사람들의 긍정을 받을거이며 미래가 양양하고 창창할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이퍼시의 존재가치와 이후의 운명은 어느 한두사람의 판단에 의해서가 아니라 력사에 의해 증명될것이다. 하이퍼시의   밝은  미래를 기대해본다. 마지막으로  방산옥  시인의 시집출간에 다시한번 뜨거운 축하를 보낸다. 금후 더 훌륭하고 예쁘고 멋진 하이퍼시를 낳기를 충심으로 기원한다.     2014년 10월 18일 연길에서   방산옥의 시집 “련꽃에 달의 집을 짓다”세미나에서 발표한 론문      
1780    중국 조선족 문단 생태문학을 알아보다... 댓글:  조회:3739  추천:0  2016-11-10
생태문학에 대한 사고  / 김만석         들어가는 말   최근에 우리 문단에서 생태문학을 거론하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좋은 일이라고 본다.     생태문학을 론하자면 그리스시대의 신화에로 거슬러 올라가야 하며 또한 독일의 랑만주의문학을 거쳐 2차 세계대전 후의 독일의 생태문학을 둘러 보아야 한다. 그러니 생태문학은 그 근원은 오랜 력사를 가지고있다.    하지만 생태문학이라고 일컬은 것은 2차대전 후 독일에서부터 시작되였으니 그 력사가 오래다고는 볼수가 없지만 또 그렇대서 최근에 나타난 문학형태는 아니라고 하여야 하겠다.    2008년 8월 대만에서 열리는 국제아동문학대회의 주제가 생태문학으로 결정되였다 이것은  생태문학이 세계아동문학의 최고형태라는 말은 결코 아니라고 본다.    몇 년전 일본에서 열린 국제 아동문학대회의 주제는 이였다. 그렇다면 국제아동문학대회가 제정한 그림이야기책이 세계 최고급아동문학이란 말인가? 이것은 당시까지 홀시되고있은 그림이야기의 위치를 높여주고 전 세계 아동문학의  주의를 환기시키기 위한 목적에서 제기된것이였다.    이번에 대만 국제아동문학대회에서 상태문학을 자기의 주제로 내세운것은 당면 생태환경의 파괴에 주의를 환기시키기 위한데 그 목적이 있지 결코 국제아동문학을 생태문학에 일변도 시키자는것은 아니라는것을 알아야 하겠다 .   필자는 생태문학에 대한 학습을 통하여 생태문학이 산생될수 있는 조건,그리고 생태문학의 존재의거,생태문학의 특징,생태문학창작실제 등을 따져보고 이 글을 쓰게 되었다 .               생태문학형성의 조건   첫째,지구의 생태환경의 파괴는 생태문학의 산생의 기초로 된다.    지구의 자연은 지난 200년간 인간에 의하여 계속 파괴되여 재생불능의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하여 지금은 북국과 남극 그리고 히말리아산의 만년설이 녹아내리기 시작하고 아프리카 들소들이 대이동이 일어나고 중국 남방에 폭설피해가 초래되는 등 지구온난화시대에 접어 들고있다. 하여 최근 100년동안 지구의 온도는 1.5도 상승되였다.    이런 자연 환경에서 생활하고있는 량심있는 학자들은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일찍부터 학술연구를 진행하였다 그리하여 생태학,생태사회학,생태철학,생태륜리학,생태문학 등 여러 가지 학술분야를 개척하게 되었다.    생태학자들은 환경위기의 대표적인 원인을 으로 인식하고있다 즉 기술기초주의,과도한 인간중심주의,성시 위주의 상업주의라는것이다.    환경위기를 극복하는 방법은 우리인간의 자연중심주의,미학적예술적리상에 대한 강조,가치중심적 인식,관조적 감상과 내면적 체험을 중시하는 가치관으로의 전환에 두고있다.    이 모든 것은 생태파괴에 직면한  인간들의  위기감에서 비롯된 것으로 그 기초는 생태환경의 파괴에 있다.    둘째, 생태철학의 발전은 생태문학형성의  리론적 의거를 제공하여 주었다 .    생태학의 발전에 힘을 입어 생태철학이 새로운 발전을 가져오게 되었다. 그것은 자연과 인간관계에 대한 새로운 인식에서 표현된다.    인간은 오랜 시간 동안 자연을 자신에 종속된 것으로 여기였다. 그런데 오늘 와서 자연 그 자체를 인정하여 주자는 결론을 얻어냈다. 즉 인간 자신의 리익을 자제하면서 타자(자연)의 리익을 위한 실천행동을 하여야 한다는것이다.    이렇게 하자면 인간의 본성이 근본적으로 개조될 때만 가능한것이므로 인간내면으로부터 근본적인 실천적 자각이 필요하다는것이다 .   이런 생태적 실천은 인간의 바람직한 행동으로 되는데 이것은 륜리학적 차원의 문제로 된다. 을 주장한 한스.요나스는 자연에 대한 과거의 물활론적 경이심을 재현함으로써 현대인의 생태학적 실천을 이끌자고 하였다 .   지난날 자연은 인간의 능력을 초월하는 절대적 힘을 지닌 존재였으므로 인간은 자연에 굴복하였다. 하여 자연은 강자였고 ,인간은 약자였다 그러므로 오늘은 자연 강자존재를 인정하는것이 바람직하다는것이다.    하여 생태철학은 인간과 자연의 관계 인식에서 새로운 변화를 요구하고있다.     셋째, 생태학과 문학의 접점에서 빚어진 생태문학이다.    세계적으로 자연을 되살리려고 하는 환경운동이 활발하게 벌어짐에 따라 문학에서 이를 반영하고저 하는 움직임이 나타나게 되었다.    하여 환경문제를 다룬 문학작품이 많이 배출되면서 이른바 생태문학이라는 새로운 장르가 형성되였다.    기존의 생태학과 문학이 만나는 접점을 통하여 날로 훼손되기만 할뿐 복구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 생태계와 우리 인류공존을 위한 새로운 대안프로그램으로서의 상태문학이 출현된것이다.                     생태문학과 그에 대한 인식  생태문학이란 말 그대로 생태학과 문학이 결합된것이다. 다시 말하면 생태학적인 제재를 문학적으로 표현한 문학이라는것이다 .   하기에 생태문학은 생태학의 인식을 바탕으로 생태문제를 성찰하고 비판하며 나아가 새로운 생태사회를 꿈꾸는 문학이라고 할수가있다.    한국 학자 임도한은 생태문학을 문학고유의 감수성으로 아름답고 따뜻한 생태사회를 보여주어 인류에게 그것을 존중하고 꿈꾸게 하는 새로운 대안프로그램으로 인정하였다. 그는 라고 결론 내리였다.    그런데 생태문학에서 가장 주요한 제재문제를 어떻게 볼것인가가 론쟁거리로 되고있다 .   여기서 말하는 생태문학의 가장 중요한 조건인 생태학적인 인식을 너무 엄격한 기준으로 보지 말고 폭넓은 개념으로 리해하는것이 중요하다고 학자들은 인식하고있다.    다시 말하면 생태학적 인식의 유무에 집착하지 말고 비록 생태학적 인식이 옅은 수준이거나 그다지 드러나지 않더라도 그것이 생태계문제를 다루거나 생태학적 인식을 일깨우는 작용이라면 그런 작품을 생태문학으로 보자는것이다.    여기서 생태계현상을 다룰 때 정반 두 개면으로 볼수가 있다 .   그 하나는 생태계의 원시적 형태를 그대로 표현하는 방법도 생태계를 보호하자는 인류의 념원을 간접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볼수가있다는 그것이다 .   한국 문삼석이 쓴 동시 을 그 일례로 들수가 있다.       하도        맑아서       가재가 나와서       하늘 구경합니다      하도       맑아서      햇볕도 들어가       모래알을 셉니다     여기서 오염되지 않는 원시적인 자연형태 이미지를 그려주면서 독자들에게 오염을 방지하여야 한다는 자각을 불러 일으키고있다 .   김성문이 쓴 동시 는 파괴된 자연 현실을 그대로 고발한 동시이다 .      썩뚝       짤린       나무 밑둥에      콱       박힌       도끼 한자루      자루 끝에       난딱 앉은       까치 한 마리      까악       까악       처량한 울음소리...   이 동시에서는 직접 파괴된 자연현상을 그대로 표현하면서 사람더러 자연을 파괴하지 말아야 한다는 자각을 하게끔 자극을 주고있다.    때문에 정면으로든 반면으로든 상태문학은 작품의 제재의 성격에 의하여 결정되는것이다 하기에 생태문학으로서의 다른 그 어떤 형식은 따로 없다는것을 명기할바이다 .    마치 중국에서 이른바 이라는 장르를 만들어 낸것과 같다.  이른바 이란  과학적인 내용을 문학적으로 표현한 문학이라는것이다. 여기에 그 어떤 따로운 형식이 없이 기존 문학의 장르형식을 따오면서 그 내용에 따라 과학시,과학동화,과학이야기,과학환상소설등으로 나눈데 불과하다 .   하기에 생태문학도 생태학적 제재를 기존문학형태로 표현한것이지 결코 생태문학으로서의 개성적인 형태는 따로 없다고 해야 하겠다 .                한국 상태문학의 발전상황  한국에서는 일찍부터  이른바 상태문학창작은 두루 있었지만 1990년대에 이르러서야 생태문학에 대한 연구가 시작되였다. 처음에는 생명문학,환경문학,록색문학,자연문학이라고 두루 일컬으다가 나중에 상태문학이라고 하게 되었다 .   한국 생태문학은 주로 시적형태를 취한것이 많았다. 하여 그걸 생태시라고 불렀다.    예술은 정서적인 감동을 통하여 한 인간의 내면적 자각을 유도할 수가 있다. 생태학적 자각의 계기를 제공하여주고 이 시대가 필요로한  생태학적 전망을 제시할수 있다는 점에서 생태시는 특별한 의의를 가지게 되였던것이다 .   한국 생태시의 창작과정을 보면 대체로 다음과 같은 발전과정을 보여 주고있다 .   첫째, 환경오염현상을 고발하는 생태시 단계에서는 생태적 위기의 현상을 총적 이미지로 재현하였다.    둘째, 이런 오염을 야기시킨 근본적인 원인이라 할수있는 현대문명과 서구의 근대적 패러다임을 비판한 생태시 단계였다.    셋째, 독자의 생태학적 자각을 유도하는 생태시에서는 시적주인공의 목소리를 높이는 대신 문학적인 감동을 통하여 독자의 다양한 생태학적 자각을 이끌어 내는 방향으로 나아간 단계였다 .   생태시의 창작 출발점은 환경오염의 피해를 깊이 인식하는데 있다. 하여 환경오염의 피해를 지적하고 고발하는 태도는 생태시의 초기 특징으로 되었다.    이런 환경위기에 대한 독자의 경각성을 일깨워준것이  생태시의 예술적 효과로 되었는바 그것은  독자의 생태학적 자각을 유도하는 것으로 되었다 .   독자의 생태학적 자각을 유도하는 작품에서는 시적주인공이 자신의 생태학적인 인식을 표명하기보다는 자신의 생태학적 자각을 가능케한 경험을 재현함으로써 자연스럽고 우회적으로  독자의 자각을 유도할 수가 있는것이다 .   재현된 생태학적 계기에서 얻은 감동이 또 하나의 생태학적 자각을 이끌수 있다면 작품의 생태학적 의의가 더 충분하여 진다 .   여기서 마땅한 주의를 돌릴 문제는 생태문학의 제재가 생태학적 문제라고 하여서 제재 일변도로 넘어가면서 문학의 예술성을 도외시하여서는 절대 안된다는 점이다 .                       나가는 말  우에서 볼수 있는바 생태문학은 2차대전후부터 이 세상에 있었으나 그에 대한 연구는 최근에 와서야 시작되였다는것을 알수가 있다 .   생태문학은 문학의 한 형태이지만 그 어떤 따로운 격식을 가진 특별한 문학이 아니라 제재가 생태학적이라는데 그 특징이 있다는것이다 .   우리의 문학에도 환경오염을 반영한 작품이 동시와 동화 및 소설에서 이미 오래전부터 나타났다. 이를 테면 전복록의 동화 ,김미란의 동화 ,김선파의 동시,김일량의 소설 와 같은 것이였다.    그러나 그에 대한 우리 문단의 중시가 부족했던것만은 사실이였다. 특히 아동문학은 명랑한 문학이라면서 환경오염에 대한  고발과 비판을 꺼리였던것 또한 사실이였다.  하여 오늘 우리 문단에서 생태문학에 대하여 론하는것은 일정한 정도로는 필요하다고 본다 .    그러나 생태문학이 우리아동문학의 전부가 아니고 생태문학만이 세계문학의 최고봉은 아니라는 이점을 명기하여야 한다 .   그렇지 않고 생태문학만 문학이라고 작가들을 생태문학 한 곬으로 몰고 가면 그것은 우리의 아동문학을 오도된 길로 이끄는 후과를 빚어 낼것이다. 이에 대하여 마땅한 주의를 돌리는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                             2008.2.15.  
1779    참된 문학은 머물러있는 문학, 가짜문학은 흘러가는 문학 댓글:  조회:3884  추천:0  2016-11-10
평론        살아있는 시, 그리고 머물러있는 시  ㅡ 김학송의 기행조시에 붙혀                                         김몽 김학송의 기행조시를 읽으면서 쇼펜하우의 말을  떠올리게 된다. “어느 시대에나 문학에는 두가지 형태가 있다. 이 두 형태는 아무런 관계없이 각기 나란히 존재한다. 하나는 참된 문학이고 다른 하나는 가짜문학이다. 참된 문학은 영원히 지속하는 문학이다. 그것은 학문을 위해 또는 시를 위해 사는 사람들에 의해 영위되고 조용히 엄숙히 걸어간다. 가짜문학을 흘러가는 문학이라고 부르고  참된문학을 머물러있는 문학이라고 부른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참된문학을 살아있는 문학이라고 할수 있고 가짜문학을 죽은 문학이라고  할수 있다. 시의 경우 많은 시들이 세상에 태여나지만 태여나자마자 요절하여 화장터로 향하는  시들이 수두룩하다. 이 말인즉 비록 시라는 이름을 띠고 세상에 나왔지만 겨우 한번 정도 읽히우거나 혹은 한번도 읽히우지 못한채  휴지통에 들어간다는 얘기다.   하다면 어떤 시들을 일컬어 살아있는 시라고 할수 있겠는가. 생각컨대 그러한 시들이란 바로 오래오래 사람들의 가슴속에 남아있으면서  찬연한 원광을 뿜기는 시들일것이다. 례하면 김소월의 «진달래»나 윤동주의 «서시» 같은 시들말이다. 시의 밑바닥으로부터 삶을 응시하고 가드듬게 하고 휘우뚱거리는 몸체를 곧게 세우게 하는 장중한 목탁소리가 은은히 흘러나오는 시, 그리하여 마침내는 인생에 관한 어떤 계시거나 법열을 줏게 하는 시, 이런 시야말로 과시 살아 숨 쉬는  시, 흘러가지 않고  가슴속에 머물러있는 시가 아닐가. 생명이 있는 시로 되자면 시의 외곽만 하려해서는 안되는바 그 외곽안에 인간의 말씀과 인간의 냄새와 인간의 숨결이 있어야 한다. 인생의 비희고락을 다독여주며 존조리 이야기하는 목소리가 들려야 하고 무언가를 시사해주는 은근하고도 묵직한 성성(圣声)이 들려야 한다. 채 여물지 못한 어설픈 생각과 경박스런 감성으로 속된 감각을 아무데나 사정하는 시, 값싼 자아위안거리 시,그리고  자아과대망상증에 걸려 횡설수설하는 시들은 결국은 요절의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 졸평에서는 최근에 창작한 김학송의 기행조시를 살핌의 대상으로 삼았다. 김학송의 시들은 단지 풍물기행시로서  망막에 안겨드는 경물들을 손쉽게 즉흥적으로 노래하는것이 아니라  바다밑까지 깊숙히 하강하여 인간의 근원적인 고독과 허무,사랑과 슬픔을 개성적인 호흡과 맥박으로 형상해 가려는 제스처가 보인다는데서  주목을 끌었다. 김학송의 기행조시들을 보면 거개가 시의 숨소리가 들리고 말소리가 들리고 움직이는 모습이 보이는것 같다. 즉 생명이 각인되고 확실시 되는것 같다.   산자락에  웅크린 삶들은 멀리 도회지를 바라보다가 날이 어두워 돌아선다 고독을 지팽이 삼아 산을 넘는 꿈들 꿈은 산처럼 깊어가고 야윈 노을이 그림자를 등에 지고 산을 넘는다   ㅡ«꿈은 산처럼 깊어가고» 일부   시인이 기차에서 바라보는 황혼 무렵의 시골모습인데 어쩐지 추연한 감정을 자아낸다. 시인의 마음은 시골의 황혼과 교감하고있으며 시골의 경관과 교감하고있으며 시골사람들의 마음과 교감하고있다. 그리고 여기에서 잔잔한 시적전률이 생겨난다. 시인은 황혼무렵의 시골모습에서 창백하고 야윈 시골사람들의 소박한 꿈을 보아내고 감상에 갈마든다. “웅크린 삶”, “고독을 지팽이 삼아”, “야윈 노을” 등등의 회색빛이 짙은 시어들이 자연스럽게 시골삶의 하모니로 울리면서 여윈 삶을 살찌우려고 아글타글하는 시골사람들의 내면세계를 핍진하게 그려내고있다. 산처럼 깊어가는 시골사람들의 꿈이 과연 현실로 될것인가. 그것은 숙제로 남는다. “야윈 노을이 그림자를 등에 지고 /산을 넘는 ” 순간,  우리의 마음에도 정감의 황혼이 깃을 펴면서 사색의 호수에 잠기게 된다. 김학송시인은 북대하유람차 23수의 기행조시를 썼는데 필자가 그중에서 8수를 선정하여 화두에 올렸다. 기행조시 대부분이 바다를 소재로 하고있다. 시인은 광대무변한 바다에 사색의 낚시를 드리우고 펄떡거리는 싱싱한 시들을 낚아올리고있다. 그러되 그 모양새는 각각이다. 바다는 하나의 단순이미지가 아니라 다양한 이미지로  둔갑하면서 여러개의 이야기를 들려주고있다. “눈물의 바다”에서의 바다는 “고열에 몸을 떨며 눈부신 절망 부르짖는 바다”이며  “죽음의 예감으로” 쓰러졌다가 일어서는 바다”이며 “내 마지막 녀인의 치마자락이 /찢어지며 펄럭이는  바다”이다. 한마디로 어떤 옥죄임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는 바다이며 무엇인가 새롭게 태여나려고 광란의 춤을 추는 바다이다. 이 시에서 가장 인상깊은 시구가 “내 마지막 녀인의 치마자락이/찢어지며 펄럭인다”이다. 이것은 화려한 절망이다. 사랑의 실패와 사랑의 성공  모두를 아우르는 예쁘면서도 숨가쁜 절망이다. “내 마지막 녀인”이 구경 무엇을 의미하는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것은 파도가 표효하는 순간에 벌어지는  짜릿한 파괴의 감각이며 그 감각이 빚어내는 별미에 있는것이다.이 시는 이렇듯 생생히 살아 숨쉬는 시라는 좋은 평가를 받을만 하면서도 한편 간결미의 소홀이라는 지적에서도 자유로와질수 없는것 같다. 서두의 3행과 결말의 두행은 어쩐지  군더더기로 보이는바 차라리  다 없애고 “가시 돋힌 강물들이 바다의 살속에 곤두박힌다/천만갈래 검은 손이 바다의 목을 옥죄인다/고열에 몸을 떨며 눈부신 절망을 울부짖는 바다/죽음의 예감으로 바다는 /쓰러지며 일어선다/ 내 마지막 녀인의 치마자락이/찢어지며 펄럭인다”로 하였다면 함축성이 획득되고 더 미끈하게 되지 않았을가고 생각한다. 물론 필자의 일가견이다. “파도의 언어”에서는 파도가 시인이 되여 수줍고 웅굴진 목소리를 시를 읊는 가관이 벌어진다. 시의 뜻은 수수억년 다져온 속내를 담은것이기에 너무나 깊고 너무나 무거워 파도가 쓰는 시는 그 기상이 “깊어진만큼 더 높이 치솟는다” «파도»가 사용하고있는 시어는 “하늘의 언어”이다. “하늘의 언어”란 도대체 무엇일가. 아마도 그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순결하고 가장 성스럽고 가장 아름답고 가장 힘있는 인어일것이다. 그것은 또 추호도 가공하지 않은, 추호도 오염되지 않은 대자연의 최고의 록색의 언어일수도 있을것이다. 이런 거창하고 위대한 언어앞에서 인간은 너무나 왜소하고  인간이 쓰고있는 시는 너무나 무기력할것이다. 하기에 바다를 마주한 시인은 커다란 외경심을 갖고   너의 앞에서 시인의 언어는 너무나 초라하고 부끄럽구나   하고 고백하고있다. 시 “파도의 언어”는 파도가 수수억년 다져온 우주의 력사를 “하늘의 언어”를 대신해 신비무궁한 시를 쓰고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것이 깔끔한 형상의 옷을 입고 우리와 이야기를 나누고있다는 점에서 살아있는 시로,  우리의 내면에 머무는 시로 된다. 김학송시인은 북대하유람에서 수확이 적지  않았는바 파도에서 하늘의언어를 발견할뿐  아니라 나무에서도 하늘의 언어를 발견하고 제 멋에 취해 무등 즐거워 한다. 시인은 대자연속에서 섬광처럼 번쩍이는 시어를 본다. 시인의 발견한 «나무의 언어에»는 온도가 있고 표정이 있고 바람의 매듭이 숨어있다. 더더욱 가관인것은 «나무의 언어»에는  희한하게도 “달빛으로 발효된 눈물이 고여있다”.  “달빛으로 발효된 눈물”, 세상에 이보다 더 예쁘고 더 숭엄하고 더 구슬프고 더 귀중한 눈물이 또 어디에 있으랴. “달빛으로 발효된 눈물 ”에는 너무나 많은 애틋한 사연이 깔려있고 너무나 많은 고운 비밀이 숨겨져있다. 그 사연,그 비밀을 나름대로 해석하고 즐기는것이 곧 시읽기의 재미일것이다. 시 «나무의 언어»는 대자연의 언어에 찬사를 하는 한편 인간의 삶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제스처를 보내고있다. 인간은 살아가는 동안 고뇌거나 고통에 빠질수도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생의 가치를 획득하고 생의 희열을 맛보게 된다. 그 까닭은 “언제나 가장 아름다운 소리로 젊어있는” “나무의 언어”,“하늘의 언어»가 항시 인간세상과 대화하고있기때문이다. 바다는 언제나 고요하고 유순하고 얌전한것만은 아니다. 때론 “악마”로 둔갑하여 세상을 소란시키고 재앙을 낳는다. 시 «악마»는 폭풍우가 휘물아치는 바다를 묘사하고있다. 천길만길 솟구치며 표효하는 파도가 검은 상복을 입고 큰칼을 휘두르며 해변의 노래를 찍어넘기고 어선의 꿈을 베어버리며 사람과 선박을 닥치는대로 집어삼킨다. 시인은 거역할수 없는 대자연의  무서운 힘을 묘사하고있다. 이 시에서 눈박아볼것이 있으니 그것이 곧 능청맞은 해학이다. 처참한 전쟁을 방불케 하는 «악마»의 무서운 행패를 이야기 하다가  느닺없이 슬그머니 “드디어 계절을 놓쳐버린 /지각한 내 사랑도 삼켜버린다”를 끼워놓음으로써 팽팽하던 분위기를 역전시키며 순간에 해학미를 얻고있다. “드디어 계절을 놓쳐버린 /지각한 내 사랑도 삼켜버린다”라는 이 구절이 이 시를 산 시로 만드는데서 커다란 구실을 하고있다는 점을 특히 강조하고싶다. 우에서 김학송의 기행조시에서 바다가 여러가지 이미지로 작동한다고 말했거니와 «바다일기»에 와서 바다는 또 다른 형태의 모습으로 우리앞에 나타난다. «바다일기»에서는 바다가 «우물»이 되기도 하고 바다의 변형으로 된 «시»가 하늘이 되기도 하고 «내»가 시의 품에 안기기도 한다.   마실수록 갈증나는 저 우물 시의 하늘속에 내가 안긴다 흘러가고 흘러오며 눈물짓는 바다여 “랑도사”에 목메여 너울치는 바다여 파도는 해변에   남겨진  무수한 발자국을 지우지만 지울수 없는건 시의  해살우에 남아있는 따사로운 령혼의 발자취로다   ㅡ«바다일기» 전문    바다는 거창함과 무궁함의 극치이지만 인간의 욕망은 그보다 더 커서 광활한 바다가 다만  “마실수록 갈증나는 저 우물”에 불과하다. 시인은 “시의 하늘속”에 안기고 싶어한다. “시의 하늘속”이란 인간과 우주의 모든것을 갖고있는 무궁무진한 신비의 세계이다. 그 신비의 세계에서 영원히살고싶은것이  인간의 본능적인 욕구이다. 하기에 시인은 “시의 하늘속에 내가 안긴다”고 말한다. 자연과 인간의 포옹이며 인간과 시의 포옹이다. 그 과정에 자연스럽게 짝짓기가 이루어져 아름다운 시가 태여난다. 이 시는  또 추억의 영원성 내지 시의 영원한  생명력도 제시되고있다. 파도가 해변가에 남겨진 무수한 발자국을 지울수 있지만 “시의 해살우에  남아있는/ 따사로운 령혼의 발자취만은 지울수 없다” 상상해보라. 해살우에 오렷이 서서 우리를 바라보며 곱게 미소 짓고잇는 시의 모습을!  아름다운 시는 영원히 살아있다. «남대하»는 눈물을 감추고 속으로 울고있는 바다의 이야기를 묘사하고있다. 바다가 울고있는 까닭은 “모래알보다 더 많은 사연들이 /머물다가 떠나”갔기때문이며 “옛 꿈을 철썩이던 돛배와 목선이” 호객하다가 지쳐서 잠들었기때문이며 “해물행상객의 조각난 흥정이/안타까운 바위로 굳어진 곳”이기때문이다. 아무튼 불만족스러운 기억들이 많기때문이다. 그리하여 “오늘밤에도 바다는 /젖은 날개를 감추며 /울고있다” 시인은 «남대하»에 서러움에 젖은 옛 사연들이  많이 있었음을 증명하기 위해 목격자인 «돛배”와 “목선”, “임자없는 바람”과 “달빛”을 증인으로 내세운다. 결국 종당엔 “남대하는 슬프다”라는 [판결]이 내려지게 된다. «북대하의 여름»은 아름다운 꿈을 보듬어주는 살틀한 애무와 세상을 따스하게 만드는 시의 울림으로 유표하다. «북대하의 여름»은 시원한 샘물이 되여 “물의 혀로 너럭암반에/만고의 시편 새기며//갈한 청춘들을 불러/현실의옷 벗게 하며//다심하고 살틀한 손으로/객손들의 마음의 비상 풀어주며//낮이면 사향가를 밤이면 자장가를푸른 목소리로 소근거리며//예고없이 피고 지는 물꽃처럼 땀에 젖은 중국의 무더위를 녹이며//북대하의 여름은 슬그니/우리 모두의 꿈속으로 걸어온다”  «북대하의 여름»을 읽노라면 유정하고 다정한 녀인의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김학송은 다산시인임에 틀림없다. 그는 5월 22일부터 5월30일,8일사이에  사이에 무려 23수의 시를 만들었다. 그리고 다수가 시의 기품을 갖춘 괜찮은 시들이다. 화두에 올린 8수의 시들은 기본상 살아 숨쉬는 시들이며 우리의 가슴에 머물며 우리와 이야기를 나눌수 있는 시들이다.  우리 시인들은 지금 새로운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한 시점에 와있다. 21세기의 문명적지각변동 앞에서 우리 시인들은 개인적자아의 탐색과 더불어 인류공동체의 운명에 대하여 더욱 깊은 관심을 기울려야 한다. 새로운 출구전략을 세우자면 겸허한 자기점검과 더불어 치렬한 자기갱신의 의지를 가다듬어야 할것이다. 그래야만 영원히 살아있는 시,영원히 사람들의 가슴에 머물수  있는 시를 창출해낼수 있을것이다.      
1778    중국 조선족 시조문학을 파헤쳐보다... 댓글:  조회:4041  추천:0  2016-11-10
중국조선족시조문학연구 김경훈 1. 들어가는 말  시조는 고려시대에 발생하여 지금에 이르기까지 오래동안 그 맥을 면면히 이어오는 우리 민족 고유의 정형시이다. 비록 시조가 스스로 갖고있는 일정한 틀이라는 한계를 보이고있지만 우리의 체험과 정감을 시적으로 담아내기에는 무리가 없는 쟝르이다. 시조의 발전상황을 돌이켜볼 때 그러한 정형은 오히려 기타 시쟝르와 비교되는 특징적인 형식미가 되며 다양한 실험을 통해 오늘날 지속적으로 창작되고있는 시조문학은 현실의 복잡한 상황까지 적절히 표현해줄수 있는 우리 민족만의 고유한 시가형식이 되고있다.   중국조선족의 경우, 시조는 한때 한국에서와 마찬가지로 새로운 현실을 제때에 반영할수 없는 낡은것으로 인정되여 소외된 쟝르였고 특히 “문화대혁명”이라는 폭풍속에서 여지없이 매몰되였던 안타까운 과거지사도 안고있다. 하지만 지금 시조문학은 연변시조시사를 주축으로 꾸준한 창작을 거쳐 적지 않은 시인들이 관심하고 애용하는 중요한 시형식의 하나로 자리잡고있다. 중국의 조선족시조시인들의 창작은 오랜 기간에 걸쳐 이루어져왔으나 특히 1993년 10월에 “연변시조시사”가 성립되고1) 1994년에 100여년의 이민사에서 처음으로 되는 시조선집인 《중국조선족시조선집》(민족출판사)이 출판되면서 본격적인 출발을 알리게 된다. 몇몇 시조인들의 공동작품집은 물론 그동안 개인시조집도 많이 나온걸로 알고있으나2) 본 론문은 시간상의 리유로 그중 《중국조선족시조선집》(민족출판사, 1994. 5. 이하 시조선집으로 략칭함), 《에밀레종소리》(리상각시조집, 국학자료원, 2000. 7. 이하 종소리로 략칭함), 《다시 만나도 그리운 사람》(연변시조사 편, 료녕민족출판사, 2002. 5. 이하 사람으로 략칭함), 《시조마을》(연변시조시사 편, 도서출판 모리슨, 2004. 10.), 《유혹》(리상각시조집, 문학사계사, 2005. 10.) 등 새세기에 출판된 작품을 중심으로 한 텍스트만을 연구대상으로 한정한다.  2. 주제의식  조선족의 시조작품을 주제의식으로 고찰할 경우 대체로 교훈적인 내용과 현실비판의식, 자연친화와 사랑 등의 내용 으로 나눌수가 있다.  1) 교훈  가는 길 천리란들 산에 걸려 딩굴가만  돌차고 딩군이는 없지 아니하나니  아서라 작은 일 작다 말고 산과 같이 할것이다  ―김해룡, 길, 시조선집3) 오래전부터 시조의 중요한 주제였던 교훈의 목소리가 지속적으로 들려오고있다. 머나먼 인생려로에 부지런한 노력만이 목적지에 다다를수 있는 유일한 힘임을 역설하고있는것이다.  흐린 날 개인 날을  먼저 아는 령물이요 작은 힘 합하여서  큰일하는 미물이라 칭찬이 하도 많으니  땅속으로 숨는다  ―리상각, 개미, 에밀레종소리 부지런한 천성에 칭찬마저 거절하니 그런 개미만도 못한 사람이 하도 많은 오늘이 민망할 지경이다. 동식물을 소재로 한 시조는 이처럼 대개의 경우 격언적이거나 교훈적인 주제를 다루면서 경험자 또는 앞세대로서 후세대에 대한 가르침이 주된 내용이 되고있다. 그런데 관습화된 세상의 리치를 뒤바꾸어놓음으로써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는 시적인 관찰력을 선보인 작품이 눈에 뜨여서 이채로왔다.  뉘라서 모난 돌이 정 맞는다 하였느냐  끊고 찍고 째기 좋고 주추돌에 제격이다  모없이 둥근 돌이야 버릴수 밖에 있으랴.  ―김해룡, 모난 돌, 사람 한편 다음 작품은 또 다른 이채로움을 갖고있었다.  인(人)자에 금 그으면  큰일 할 대(大)자인데  점 하나 잘못 치면  속이 빈 개 견(犬)자요 더구나   왕님이 개짓하면  미칠 광(狂)자 된다우  ―리창인, 글자풀이, 시조마을 작은 획 하나, 점 하나의 차이가 전혀 다른 뜻의 글자를 만들어내듯이 사람의 됨됨이도 작은 실수 하나로 기로에 빠질수 있음을 경계하고있다. 재치있는 글자풀이는 결국 인생풀이로 이어지고있고 특히 그것이 당국자의 덕성에 련결이 되고있음으로 해서 고전적인 교훈의 내용이면서 현실적으로 계시하는바가 크다 하겠다.   물론 그러한 삶의 실수 하나하나가 쌓여서 잘못이 아닌 습관으로 굳어질 경우 어떤 우를 빚어낼수도 있는데 아래의 작품은 바로 이 점을 사정없이 꼬집어내고있다. 바다로 쉬임없이 흐르는 시내물아  밑바닥 저 돌을 탓하지 말아라  돌돌돌 청아한 소리 그때문이 아니냐 교훈적인 주제는 조선족시조작품에서 주요한 갈래로 작용한다. 이것은 그 뿌리를 고대의 시조전통에 두고있을뿐더러 현대까지 이어져오는 시조에 대한 관념에서 비롯되기도 한다. 즉 시조의 중요한 기능중 하나가 사회교화적인 공능에 있다고 판단하기때문이다. 하지만 교훈적인 주제일지라도 격언식의 고답적인 표현에서 벗어나 좀더 유연하고 상징적인 시적발언으로 되여야 할것이다. 2) 현실비판 현실에 대한 비판은 고향의식과 민족의식으로 다시 세분해 살펴볼수 있다.  오나가나 가난에 울고우는 추억은  자나깨나 못 버릴 못 박힌 버릇이라  버리고 떠난 고향 못 버릴건 추억인가 하노라  ―김철, 못 버릴 추억, 시조선집 작품을 지은이는 일찍 고향을 떠난 시인으로 시조에 고향에 대한 향수나 추억이 소재로 많이 등장하고있다. 고향을 떠나 찾아간 곳에 비해 고향은 항상 가난하기만 하고 그래서 죄스럽기까지 한(“익지 못한 자식의 떫은 그 효성/어머님 영상인가 휘여진 감나무/어허야 죄로운 내 마음에 그늘이 지는구려”―고향의 감나무, 시조선집) 그 마음은 뿌리에 대한 잎새의 아픈 추억의 속삭임일것이다. 고향의식은 과거 이주민의 아픈 추억의 력사가 점철됨으로써 더욱 짙은 력사적의미를 바탕으로 삼고있다.  사이섬 어스름밤 초막에 홀로 누워  씨다리끼 앞에 놓고 긴 한숨 쉬는적에  어디서 아리랑노래 나의 애를 끊는고  ―김태갑, 북간도 마음, 시조선집 사이섬 즉 지금의 연변지역에 들어와 농토를 개척하면서 고국을 그리는 초기 이주민들의 애환이 낡은 장농속의 색바랜 흑백사진처럼 가슴 저리게 전해오고있다.   어머님 등에 업혀 만리길 떠나서  파란 많은 인생의 가시덤불 헤쳤나니  가슴에 노상 울렸네 에밀레종소리 에밀레종소리 속시원히 들어볼가  조약돌 들었다가 슬그머니 놓았어라  불쌍한 어머님생각 눈물눈물 솟아라  ―리상각, 에밀레종소리, 시조선집 에밀레종의 슬픈 사연을 배경으로 고국을 떠나 이국타향에 정착하고 살면서 겪었을 온갖 고생을 작은 조약돌로조차도 차마 울리지 못하는 미세한 움직임을 통해 표현함으로써 오래 되였지만 깊고깊은 상처의 곬을 이룬 아픈 과거에 대한 회억을 잘 살려내고있다. 환도산 옛성터를 설음겨워 돌아보니  깨여진 기와장이 통곡같이 널렸구나  저 길손 누구시길래 주저앉아 우시오?  ―조룡남, 환도산성, 시조선집 조상의 옛터를 더듬으며 그들의 자취가 조각난 기와장처럼 여기저기에서 통곡의 파편으로 들려올 때 주저앉은 어느 길손의 울음이 범상하게 들릴리가 만무하다. 세월을 마주서서  코날 세운 오돌참이 치마폭  여며쥐고  용케도 달려왔소 동트는   새벽나루에  하아얀 쪽배 한쌍.  ―김동진, 코신, 사람 자존과 자강을 잃지 않고 살아온 이곳의 조선족녀성들의 굳센 모습을 형상화한 작품이라 할수 있다. 코신에서 치마폭으로, 나아가 쪽배로 형태적인 륜곽이 커가면서 의미의 폭도 증폭되여 어느 개인의 소유물에서 민족의 중요한 구성원의 이미지로 탈바꿈하는데 이 시조의 상상력의 묘미가 깃들어있다. 한편, 코신 자체가 우리 민족 녀성의 전통적인 모습을 상징하기도 한다는 의미에서 그러한 상상은 출발점이자 종점이기도 한 원형의 구성을 보이기도 한다.                                                         치마폭                코신        녀성        쪽배                            새벽   표에서 볼수 있듯이 모진 수난을 겪으며 “용케도 달려온” 코신 즉 그 주인공은 “동트는/새벽나루”를 배경으로 하고있음으로 해서 희망찬 출발을 앞두고있는 쪽배로, 한층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하고있음이 드러난다.  고향의식은 결국 민족의식에로 이어지고 민족의식을 통해 고향에 대한 근원적인 감각은 더욱 고조가 될수 밖에 없다. 동강난 반도가 비에 젖어 우는고나  무참히 잘리운 네 아픔을 보느니  차라리 이 내 허리를 잘라냄이 어떠냐  ―김철, 동강난 지도앞에서, 시조선집 이 작품은 국토의 “허리”와 사람의 “허리”를 의미적으로 련결시킴으로써 민족의 분단이 피부뿐만아니라 뼈속까지 아픔으로 전해오고있음을 상징적이면서도 리얼하게 표현하고있다.  힘장수 낳아 키운  백두산 울 어매여 새 천년 세월에도  장수 많이 낳으시되 형제간 칼부림하는  장수만은 낳지 마소  ―최혜숙, 백두산 울 어매여, 시조마을  더 이상 동족상잔하지 않는, “개 잡은 포수처럼/ 으시대는” “살인자”(리상각, 옛말, 시조집 《유혹》)가 아니라 평화의 보호신으로서, 상징으로서의 장수만을 바라고있는 이 작품에서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민족의 통일을 간절히 바라는 시인의 마음이 잘 드러나있다.   현실에 대한 비판의식과 민족의식의 경우 좋은 작품들이 적지 않았으나 개혁개방이후, 조선족지역사회에서 민족공동체의 해체와 같은 심각한 위기상황이 시조에 적극적으로 반영되지 못하고있음4)은 가장 민족적인 시가형식이라는 시조의 특성을 감안할 때 아쉬움을 자아내였다.  3) 자연친화 처마끝 고드름이 볕쪼임 하는 사이  창문가 종자접시 무늬진 애기벼싹  파아란 하늘 한끝을 몸에 살짝 감았네 봄물결 푸른 자취 어딘들 없으리오  민들레 하얀 꿈을 키우는 저 보슬비  촉촉히 젖은 새봄이 꽃대문을 열었네  ―김동진, 농가의 봄, 시조선집 이 시인의 시조는 대체로 농촌을 배경으로 토속적이면서도 순수한 자연과 인간의 모습을 담고있다. 사물에 생명을 부여하여 의인화함으로써 좀더 가까운 거리에서 자연에 대한 친근한 감각을 강조한다는 특징이 있다. 봄바람은 산에산에 초록빛을 물고 왔소  갈바람은 산에산에 단풍을 안아갔소  하지만 산은 끄떡없이 제 생각만 한다오  ―김응룡, 산, 시조선집 계절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산의 마음은 나름대로의 곬으로 흐르고있을뿐이라는, 지극히 평범하면서도 엄숙한 자연의 섭리를 말해주면서 그러한 산을 닮고저 하는 화자의 바람을 드러내고있어서 다른 한편으로 자연친화적인 발상까지 내재하고있다.  노고지리 노래 맞춰 아지랑이 춤추는 들  어린 손녀 손목 잡고 들나물 캐러 왔네  겨울만 숨쉬던 가슴 봄을 씹고말고저  ―리해산, 봄, 시조선집 봄을 맞은 들에 겨우내 갑갑했던 가슴이 트인다. 새도 노래하고 어린 손녀가 등장하면서 생명의 시작 혹은 재생의 의미는 한층 시적인 분위기에 의해 아지랑이처럼 춤추며 안겨오는데 들나물을 맛보듯이 봄을 씹는다는 표현은 이 시조의 그러한 정취를 결미에 고도로 압축한 셈이 된다. 내 품에 안길듯이  소리치며 달려온다 저 혼자 돌따서서  살같이 물러간다 아쉽다  언제면 영원토록  너를 붙잡아둘가  ―리상각, 파도, 에밀레종소리 동적인 파도의 모습과 그 파도를 내재함으로써 일체감을 꾀하는 정적인 화자의 마음 또는 생각이 시적인 장력으로 탄성있는 주제적분위기를 연출하고있다. 벽계수 흐름소리  뭇새가 우짖는다 물밑의 조약돌이  소리내여 웃는가 돌돌돌 구울러가는  물빛으로 살고싶다  ―리상각, 벽계수, 에밀레종소리 앞의 경우와 달리 생의 힘찬 률동에 발맞추어 나아가려는 삶의 자세를 동적으로 잘 엿보이고있는 작품이다. 이러한 자연에로의 동참의식은 다른 한 작품 “꽃과 물과 더불어”에서 “춤추는 물”, “홀로 웃는 꽃”과 함께 하고저 하는 희망사항에서 또 나타나고있다.  문학 특히 시가가 자연을 통해 인간의 세계를 지속적으로 새롭게 인식해왔다면 우리 시조에서의 자연친화 또는 자연합일의 주제는 광의적인 의미의 생태문학의 범주에 속할것이고 그 발전을 위해 일정한 기여를 한 셈이다.  4) 사랑 그리고 기타 사랑은 조선족시조작품에서 많은 비중은 아니지만 진지하게 론의된 시적내용이였다. 이 부분에서는 이러한 사랑의 소재와 함께 시조창작의 기교적인 부분도 함께 살필것이다. 사랑한다 말 한마디 주고받진 않았지만  날따라 남다른 정 짙어가던 그 눈길  손 한번 못 잡아보고 놓쳐버린 아쉬움  ―정철, 첫사랑, 시조선집 “말 한마디 주고받지 않았다”는 점과 “손 한번 못 잡아보”았다는 점이 사랑에서 순수함의 상징이라고 할수 있는 첫사랑의 의미를 강조하고있는듯하다. 더불어 순진무구하다 못해 바보들의짓과 같은 첫사랑에 대해 아쉬움을 표함으로써 그러한 첫사랑에 대한 안타까움의 도를 더해주고있다.   상상력의 묘미는 단순하면서도 순간적인 시적상상에 의해 돋보일 때도 있었다. 더구나 그것이 이곳 풍토에 걸맞게 대륙적인 기세를 배경으로 했을 경우, 특징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기 충분한것이 된다. 직녀야 짜는 천이 아직도 모자라냐  칠월칠석 상봉마다 까치 은혜 미안타  은하에 천다리 놓는 날이면 생리별이 없겠지?  ―리해산, 은하교, 사람 조용히 앉았으면  가슴이 설레여라 단둘이 마주서면  어찌할바 몰라라 눈으로 주고받는 정  더욱 할 말 많아라  ―리상각, 정, 유혹 말 없는 둘사이에 부끄러우면서도 눈으로 모든걸 말할수 있다는건 순수하면서도 진실한 마음가짐이 되지 않으면 안된다. 더우기 서구적인 사랑의 제스츄어들이 람발하고있는 현실에서 그러한 고풍스런 정을 나누고있는 두 사람의 모습은 시인이 얼마나 더없이 순수한 애정을 추구하는지를 말해주고도 남음이 있다.   순수와 진실에 대한 추구는 애정뿐만아니라 인간성에 대한 추구에서도 잘 나타나고있다. 일견 남성적이면서도 의지 분명한 목소리는 시인나름의 삶에 대한 자세로 보아도 무방할것이다.5) 광풍이 몰아친다  가던 길 돌아설가 폭우가 쏟아진다  머리를 움츠릴가 사나이 한번 먹은 마음  벼락 쳐도 나간다  ―리상각, 사나이 마음, 유혹 가슴은 나의 하늘  해가 뜨면 푸르다 구름 끼면 어둡고  달이 뜨면 그립다 이따금 우뢰가 울고   소나기 쏟아진다  ―리상각, 가슴, 유혹 가슴이 하늘이라 함은 일단 거창하고 기세가 도도한 대륙적인 상상력에 힘입은 시적비약으로 보인다. 그 가슴이 하늘과 동일한것이 됨으로 인해 해와 달을 품어 희망과 그리움을 갖게 되고 우뢰와 소나기를 쏟아냄으로써 가슴깊이 묻었던 한과 설음들을 토해내기도 한다. 곧 하늘은 인간세상뿐만아니라 자연과 우주의 섭리를 비추고 전해주는 그릇이자 거울의 기능을 동시에 하는 력사적이고도 현실적인 복합물이 된다. 그렇다면 이러한 가슴을 품고있는 적지 않은 시조시인들은 어떤 모습들을 하고있을가?   시조를 쓰는이면  다 늙었다 보지 말자  내 나라 반만년이 나이가 적지 않듯  오라서 늙었다 하면 해달별은 어쩔고 그릇이 옛것이되  음식이야 쉬였으랴  김치맛은 시원하고 숭늉맛은 구수한데  그릇이 다르기로서니 그 맛마저 다르랴  ―김동호, 낮과 밤, 시조마을 이곳 시조시인들이 시조라고 하는 민족고유의 쟝르에 대해 얼마나 깊은 애착을 갖고있는지를 소박한 비유로 잘 표현한 보기라고 하겠다. 민족의 과거가 소박하다 못해 가난하기까지 했던것을 되새긴다면 그리고 민족의 고유의 문화적인 전통을 남달리 사랑하고 있는 힘껏 보존하려고 애쓰고있는 이곳에서의 조선족시인들의 시조에 대한 사랑은 어쩌면 본연의 모습의 재현이기도 할것이다.   사랑을 주제로 한 시조의 경우, 앞의 부분적인 주제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적지 않게 격언이나 교훈적인 목소리로 포장되여있어서 따분해진 느낌의 작품들도 있었다. 또 시적형식미의 측면에서 시인마다의 개성이 엿보일수 있도록 하는 노력이 지속적으로 요구된다 하겠다.  3. 나오는 말  우리 민족만의 시쟝르인 시조는 우리의 감정표현에 가장 잘 어울리는 시이다. 거기에는 우리의 민족정서가 듬뿍 담겨있으며 우리만의 목소리가 울려나오고있다.  세계화의 급물살이 갈수록 더해가고있는 현실에서 우리의 전통문화에 대한 인식은 어떠한것이여야 하는지를 우리는 시조 하나만 놓고서도 여러모로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우선 시조가 현대 자유시와 마찬가지의 대접을 받도록 관념이 갱신되여야 하며 시조를 쓰는 년령층이 가능한 한 평균적인 분포를 이루도록 노력해야 할것이다. 시조를 쓰는 사람은 물론이거니와 일반독자들도 시조의 묘미를 제대로 알도록 방법을 강구해야 할것이다. 물론 이러자면 시조가 갖고있는 외형에서 내용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사항을 현대인의 정감에 맞추면서도 자체의 내적인 발전의 법칙을 따르는 전제를 시조인들은 잊지 말아야 할것이다.   우리의 시조창작에서 주제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더욱 날카로우면서도 예술적인 목소리를 잃지 않은 의식표현이 있어야 할것이다. 과거로부터 내려오던 관망적이고 도피적인 시각이 극복되고 보다 과학적이고 형이상학적인 방법이 시도될 때 우리 시조창작은 괄목할만한 비약이 이루어질것이다. 주해: 1) 고문에 정판룡, 설인, 임효원, 류성규(한국), 명예사장에 리상각, 사장에 허룡구 등. 《별 많은 하늘 아래》, 리상각문집, 료녕민족출판사, 1996. 11. 36~37쪽 참고.  2) 최근의 통계로는 김동진, 윤태호, 리창인, 정철, 김경석, 김욱, 리상각, 김학송, 정호원, 리근영, 최혜숙, 김해룡, 허룡구, 김응준 등의 시조작품집이 나온걸로 알고있다.  3) 인용되는 례문은 원문의 표기원칙을 따랐다. 그리고 원문끝에 작자, 작품, 작품집의 순으로 출처를 밝혔다.   4) 이 점은 이 론문에서 연구대상으로 삼은 텍스트에만 한정된 관점이다.  5) 리상각시인의 시조는 구성상 비교적 간단한 형식을 취하고있는데 이는 그의 시조창작의 기본경향에서 비롯된것이다. 리상각 《문학은 꿈이다》, 한국학술정보, 2007. 2. 127쪽 참고.  2008년 7월호
1777    리상각 / 김관웅 / 조성일 / 허동식 댓글:  조회:4021  추천:0  2016-11-10
리상각 시백의 창작경향의 변화양상을 론함 김관웅 연변대학 교수 목차  1. 들어가는 말  2. 향토적 서정시와 정치적 리념에 립각한 송가의 창작시기(1950년대 중반 - 1980년대 초반)   3. 자연, 인간 례찬의 랑만주의적 창작경향의 시기(1980년대 초반 -1990년대 중반까지)   4.  시적 풍격의 변화시기와 사실주의적 경향의 대두시기 (1990년대 중반-현재까지)    5. 마무리는 말 --------------------------------------------------  1. 들어가는 말   리상각 선생님은 중국조선족시단의 원로시인이다. 리상각 선생임은 현대자유시, 가사, 시조뿐만 아니라 수필, 민간문학수집정리, 문학편집, 문학신인 양성 등 여러 면에서 중국조선족의 문학발전을 위하여 한평생 자신의 정열을 불태우고 필생의 노력을 경주한 분이다. 리상각 선생님은 1980년 처녀시집 《샘물이 흐른다》로부터 시작하여 근간시집 《뼈다귀》와 수필집《그대는 달》에 이르기까지 지난 28년 동안에 30권에 달하는 시문집을 출간한 것으로 알고 있다.   특히 근년에 들어서서 리상각 선생님은 고희를 넘기셨지만 여전히 로익장을 과시하면서 많은 시집, 수필집들을 정력적으로 쏟아내고 있다. 2006년 한국학술정보에서 펴낸《리상각시전집》전부 5권을 비롯하여 2000년에 펴낸 시조집 《에밀레종》, 2007년에 펴낸 풍자시집《뼈다귀》, 2005년 한국 신성출판사에서 펴낸 미니인생수필《가난이 사람을 가르친다》, 2008년에 펴낸 수필집《그대는 달》등 이루다 헤아릴 수 없습니다. 사모님이 병환에 계시고 선생님 자신의 건강도 여의치 않은 상황 하에서도 이처럼 부지런히 필경을 하시고 이렇게 많은 시문집들을 펴내셨다는 점은 젊은 우리들을 놀라게 한다.   나는 리상각 선생의 저선시집 《달빛이 내린다》의 시평에서 선생임의 총체적인 창작경향을 “땅을 딛고 하늘을 우러른 시인” 이라고 평가한 적 있다.즉 리상각 선생님의 시 창작을 비롯한 전반 문학창작에는 고전주의, 랑만주의, 사실주의 그리고 일부 현대주의로서의 상징주의적 요소도 혼재해 있다. 현실을 관심할 뿐만 아니라 리상도 포기하지 않는다. 이런 창작경향 혹은 시학주장을 《동정호를 지나며》(1983년)에서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백 식 랑만주의와 두보 식의 사실주의를 겸비하기 위해 노력한 시인이라고 할수 있다. 이 글에서 필자는 리상각 선생의 창작경향을 다음과 같이 평가한바 있는데 이 평가는 리상각 선생님의 전반 창작에도 두루 적용된다고 생각한다.   본론문은 리상각 시백의 반세기에 달하는 문학창작의 궤적을 스케치 식으로 그리면서 주로는 그 장작경향의 변화양상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한다.  2. 향토적 서정시와 정치적 리념에 립각한 송가의 창작시기(1950년대중반 - 1980년대초반)   인간은 환경의 동물이다. 특히 정치적인 속박이 강하던 시기에 많은 작가나 시인들은 그 시대의 시대적인 정신이나 세류를 따르지 않을 수 없다, 리상각 시인도 마찬가지이다.   이 시기에 리상각 시백은 많은 향토서정시와 애정시 그리고 당시의 정치적 리념에 립각한 송가들을 창작했다.  , , , , , , , , , , ,  등 인데, 가 습작기의 애정시의 특성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다. 맑은 냇물은 깨끗한 강바닥을  쉼 없이 가는데 무더운 여름철 냇가에서  꽃 같은 처녀 빨래를 하네 방치소리 찰딱찰딱  산으로 마을로 찰딱찰딱  비누거품은 분주히 흩어지고  처녀의 얼굴 냇물에 어리네 그러나 처녀는 모른다네  시원스레 내려치는 방치소리  총각의 마음을 건드리는 줄  찰딱 소리 총각을 애태우는 줄      - 리상각 전문   이런 시들은 시적 정서의 단순성, 서정의 직설성, 창작기법의 단순성 등 습작기의 특성을 면치 못하고 있다.   당과 수령을 노래하고 사회주의를 노래하는  송시들은 리상각 시백만이 아니라 당시의 대부분 시인들의 단골제재였다. 리상각 시백의 경우에 이 바로 이러한 송시의 한 전형이다. 모아산 푸른 고개 꽃피는 고개 주 총리 다녀가신  행복의 고개 넘어갈 적 넘어올 적 그 은정 못 잊어 과원도 이 마음도 한없이 설레이네 신풍벌 넓은 벌은 기름진 들판 주 총리 다녀가신 기쁨의 들판 푸른 하늘 저 끝까지 금물결 넘치니 오늘도 그이 말씀 귀전에 울려오네 산에도 그이 사랑 주렁진 열매 들에도 그이 은정 황금의 파도 살기 좋은 이 강산에 낙원을 꽃피워  천만년 그이 유지 길이길이 빛내가리         - 리상각 전문   현실생활에 뿌리를 내리고 인민대중의 정신세계와 밀착된 진실한 감정과 서정은 시의 생명이다, 그러나 이 시기의 많은 송가들은 허위적인 랑만주의로 진실한 감정의 다각적인 표현을 대신하였다. 리상각 은 한 시인이 그 시대를 초월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그 단적인 실례이다.     3. 자연, 인간 례찬의 랑만주의적 창작경향의 시기(1980년대 초반 - 1990년대 중반까지)   조성일선생의 지적하신 것처럼 “리상각선생은 1950년대 중반에 문단에 데뷔하여 문화대혁명시기까지는 다른 시인들과 마찬가지로 주로 그 시대의 풍조에 따라 정치리념적인 ‘송가’창작에 집착했다.”1)그러다가 개혁개방의 력사시기에 들어서서는 아름다운 산수자연을 노래하고 향토정서와 인정미를 노래하는 서정시의 창작에로 전향하여 많은 수작들을 창작하였다. 노래말이기는 하지만 이 시기의 리상각 선생의 자연향토적 랑만주의적 풍격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라고 할 수 있다. 이 노랫말은 아름다운 선율의 날개를 달고 중국조선족사회에 널리 전파되였다.  깨끗한 압록강 모래섬 가에  백설 같은 두루미 하얀 두루미  떼지어 내려앉네 깃을 다듬네  맑은 물에 흰 몸을 씻고 또 씻네 뒤맵시 앞맵시 보아달라고  이 다리 저 다리 껑충거리며  마주섰다 돌아섰다 하는 그 모양  오고가는 배손들의 흥을 돋구네    개혁개방 이후의 리상각 선생님의 시 창작경향에 대해 한국의 황송문 교수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이상각 시인의 경우, 그는 사실주의를 중시하지만, 그의 시는 본래 사실주의와는 거리가 있다. 그는 미적이며 조화적인 시세계를 중요시한다. 추악하고 불쾌한 부분을 세밀하게 묘사하는 사실주의 문학과는 판이한 성격의 시세계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러시아 사실주의에 있어서 벨린스키의 지론에 접근되어 있으면서도 이미지를 중시하는 전경화(前景化)라든지, 객관사물에  주관적 정서를 투사하는 방식을 보면 랑만주의의 요소도 있어서 전통적인 시적요소에 현대적 요소도 가미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2)        나는 리상각 선생의 저선시집 《달빛이 내린다》의 시평에서 선생임의 총체적인 창작경향을 “땅을 딛고 하늘을 우러른 시인” 이라고 평가한 적 있다.즉 리상각 선생님의 시 창작을 비롯한 전반 문학창작에는 고전주의, 랑만주의, 사실주의 그리고 일부 현대주의로서의 상징주의적 요소도 혼재해 있다. 현실을 관심할 뿐만 아니라 리상도 포기하지 않는다. 이런 창작경향 혹은 시학주장을 《동정호를 지나며》(1983년)에서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 시기 리상각 시인은  주관적으로는 이백 식 랑만주의와 두보 식의 사실주의를 겸비하기 위해 노력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필자의 소견에 의하면 개혁개방 초기로부터 지난세기 90년대 중반이전까지 리상각 선생의 창작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요소는 향초인정적인 요소가 다분한 랑만주의적 경향이 주도적 지위를 차지했다고 인정한다. 리상각 선생의 전반 시창작과 수필창작에서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고전주의와 랑만주의적 요소로서 그 일생의 창작을 관통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고향에 대한 향수, 부모에 대한 그리움, 님에 대한 사랑을 토로하거나 전원풍경과 자연산수나 그리고 토속적인 민속민풍을 노래한 향토정서가 짙은 랑만주의적 시나 수필이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이런 시나 수필들에서는 미사려구나 현란한 기교를 일부러 배제해버리기나 한 듯 일상의 입말 같은 꾸밈없는 시어로 자기가 사랑하는 대상들을 노래하고 있다. 필자는 리상각 시인의 이러한 질박한 향토적인 랑만주의적 성향에 대해 다음과 같이 표현한 적 있다.    “성장을 하고 번화가에서 활보하는 도시녀성의 세련성과 화려함도 인정해야 하지만 치마고름을 입에 물고 입만 방긋하는 시골녀인의 수집음과 질박함도 아름다움도 인정해야 할 것이다. 리상각 선생님의 시조나, 시나 수필에서 느낄 수 있는 미는 바로 후자하고 생각한다.”   이런 랑만주의적 경향의 시나 수필들에서 나타는 감정표현의 방식은 흔히 직설적이다. 이를테면 서정단시 , , 같은 작품들에 서 잘 보여 진다. 그렇다고 이런 랑만주의 시문들이 다 무기교인 것은 아니다. 같은 시에서는 안해라는 낱말에 “집안의 해”라는 창조적인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그 단순성과 명료성 속에서  재미나는 시어의 창조 및 참신한 의미부여를 함으로써 상큼함 맛으로 독자들에게 다가오게 한다. 우리 집안의 해  당신을 나는 안해라고 부른다  당신이 내 곁에 있으면  집안이 환해진다. 당신이 훌쩍 떠나면 집안이 캄캄해진다    - 리상각   이와 같은 시적 주제는 수필집 《그대는 달》에서 더욱 확장되고 부연되고 있다. 이 수필집은 한국 황송문 교수님의 말을 빌린다면 “아내에게 바치는 사랑의 노래”이다. 리상각 선생님에게 있어서 김세영 사모님은 단테에게 있어서의 베아트리체 같은 녀성이고, 페드라르카에 있어서 로라 같은 녀성이다. 리상각 시나 수필에서 김세영 사모님은 현실적인 안해이면서도 구원(久遠)의 여성상이고 또한 리상 중의 여상상이다. 그래서 리상각 선생님은 1행시 에서 “내 안해는 모나리자보다 더 이쁘다”고 했던 것이다.   랑만주의문학에서의 직설적인 감정표현을 반대한다고 하여 서정시에서 감정을 추방하는 것은 말도 안 된다. 서정시의 핵은 영원히 감정(情)이다. 감정표현을 떠난 서정시는 서정시가 아니다. 서정시에서 상징성 회화성을 강조하는 것은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을 강조하다나머지 감정표현을 포기해서는 절대 안 된다. 서정시에서 상징성 회화성은 정감표현의 수단으로 되어야 하지 목적으로 되어서는 안 된다.   이런 의미에서 리상각 선생님의 랑만주의적 성향을 띤 시작들은 자기 나름대로의 심미적 가치를 갖고 있는 것이다.   4. 시적 풍격의 변화와 사실주의적 경향의 대두시기 (1990년대 중반 -현재까지)   1990년대 중반 이후 리상각 시백의 리상각 선생의 시적풍격에는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우선은 시적인 소재와 주제 면에서 선행시기의 시들보다 넓고 깊어졌다. 이 시기에 들어와서 리상각 시백은 인생을 관조하고 반성하는 시적인 주제들을 많이 다루었다. 이런 시들에서는 청빈을 고수하는 안빈락도의 선비정신의 향기가 풍기고 현실의 불의와 부조리에 대한 비판, 풍자가 넘친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이런 시들은 90년대 중반이전의 향토적인 랑만주의적 경향의 시들과는 달리 시의 형식 및 기교 측면에서도 보다 높은 원숙(圓熟)함을 보여주고 있다. 말하자면 가급적이면 직설적인 표현을 지양하고 이미지를 통해 상징적으로 시적인 주제를 표현하고자 객관사물에 자신의 사상과 정서를 부여하려는 의식적인 노력이 력연히 드러난다. 랑만주의적인 감정의 여과 없는 직설에서 탈피하여 가급적이면 이미지화를 통해 자신의 사상이나 감정을 암시적으로 간접적으로 표현하려는 시도가 도처에서 보인다. 그의 (1997)에서 이 점을 잘 보아낼 수 있다. 한 자리만 지키고 있어도  제가 할 일은 다 한다  한 마디 말이 없어도 두려워하는 자 있다 허름한 옷을 입을 걸치고도  추위와 배고픔을 모른다 밤낮 외롭게 지내지만  욕심도 불평도 없다 팔 벌린 채 먼산 바라보며 세상을 우습게 안다      - 리상각 전문   명리를 위해 촐랑거리고 분주히 설치는 소인배들이 득실거리는 인간속세를 랭철하게 바라보면서 자기의 “살아가는 법”을 직설이아니라 논이나 밭에 서있는 허수아비라는 이 객관사물을 빌어서 표현한 수작이다. 부동의 침묵의 미학에 남루함과 기아를 초탈하는 안빈락도(安貧樂道)의 청빈사상 및 독립오세(獨立傲世)의 도고한 삶의 자세를 상징적 수법으로 보여준 작품이다. 부귀공명을 탐하는 현실속의 속인들을 우숩게 아는 처사(處士)의 풍모를 허수아비라는 이 이미지를 빌어서 표현한 점은 리상각 시백의 대단한 시적안목에 의해 만들어진 이미지의 “낯설게 하기”의 한 성공적인 사례가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시상(詩想)은 만고풍상을 겪고 난 후의 초탈에서 오는 깨달음에서 연유하는 것이며 아울러 시인의 시 창작에서의 보다 높은 예술적 경지에로의 승화이다. (1997), (2001), (2003), (2004),  (2002) 등 시작들은 시적 발상, 시적주제나 시적 표현 등 여러 면에서 와 일맥상통한 수작이다. 이 중에서 (1997)만 보기로 하자. 높이높이 쌓아올리다  스스로 마구 무너뜨린다  죽기내기로 주먹을 쥐고 달리다  기슭에 부딪쳐 부서진다  목이 터져라 웨치다  자기소리를 삼켜버린다  날개를 저었으나 날지 못하고  접었다 폈다 하다 팽개치고 푸른 기발을 날리다 찢어버리고 주먹을 휘두르다 쓰러지고 칼날을 세웠으나 베지 못하고 달리다가 다시는 돌아서지 못 한다  달리는 것 같지만 제 자리를 못 떠난다  소리소리 외친 뒤 끝에 남은 게 뭐든가  내 삶의 파도여 가련한 발자취여  오늘도 만들고 마스고 솟구치다 무너진다               - 리상각 전문  이 시는 파도라는 이미지를 집중적으로 부각하다가 마지막에는 류추련상을 동원하여 자신의 인생과 관련지어 놓는다. 인생의 쓴맛 단맛 다 본 뒤의 일종 달관의 경지나 자신의 일생에 대한 진실한 반성과 참회의 경지에 오르지 못한 사람은 이런 고차원의 시를 쓸 수 없는 것이다.   이 시기 리상각 시백의 문학창작에는 랑만주의적 성향이 여전히 존재하지만 현실을 관심하고 현실에 참여하고 현실을 비판하는 사실주의적이고 참여문학적 성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시작한다.   리상각 선생의 현실참여적인 경향은  근년에 펴낸 풍자시집 《뼈다귀》에서 가장 잘 나타났다. 이점에 대해 조성일 선생님은 시인으로서의 리상각의  창작궤적을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그는 문단에 데뷔하여 문화대혁명까지는 주요하게 리념적인 송가 창출에 집착하다가 개혁개방의 새로운 력사 시기에 진입하여서부터는 자연과의 친화력, 향토정서와 인정미가 흘러넘치는 서정시의 창작에로 전향하여 큰 성과를 올렸다면 최근 몇 년 동안에는 시의 필봉을 풍자에 돌려 현실의 부조리와 삶의 모순을 비판의 도마 위에 올려놓음으로써 우리 시단에 시와 삶, 시와 현실의 간격을 허용치 않는 풍자시의 장을 열어놓았다.”    는 우리당의 력사에 있었던 반민생단투쟁과 문화대혁명에서의 좌경로선의 피해를 직설적 수법으로 반영하고 있고, 에서는 마음대로 력사를 자기의 리익에 좇아 왜곡하고 뜯어고치는 기이한 사회현상을 반어적인 수업으로 비꼬고 있고, 은 상징적인 수법으로 현실의 암흑과 부조리와 비리와 맞서 싸우면서 광명을 지향하는 서정적 자아의 격정을 표현하고 있다. 우주의 지붕을  화려하게 장식하더니 높푸른 하늘을 죄다 걷어간다 급급히 지평선너머로  꺼져가는 일몰 마지막으로 가물거리는  작은 초불 하나  캄캄한 세상을 훔쳐보다가  락조는 사라지고 초불은 꺼지고  해는 천만길 어둠속으로  미끄러져내려간다  절망도 한순간  공포도 한순간  평화의 고요한 밤은 다가온다  달콤한 꿈자리 사랑의 밤은 온다 아름다운 어둠을 두고 몸부림치며 사라져간 일몰 오늘의 일몰은 다시 오지 않는다 빨갛게 타던  그 작은 초불 하나만 내 가슴안에 들어와 나를 괴롭힌다 눈부신 새 하늘 탄생을 위하여  아 피를 토하며 우는  밤새 한 마리    - 리상각   이 시에서는 현실사회 속에 존재하는 암흑면을 일몰후의 “캄캄한 세상”에 비기면서 비록 가냘프기는 하지만  “가물거리면서 빨갛게 타는 작은 초불”처럼 어둠 속을 밝히고, 새 하늘의 탄생을 위하여 “피를 토해 우는 밤새 한 마리”로 되려는 시인의 심경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처럼 치렬한 현실인식을 갖고 있는 리상각 선생은 사회의 페단과 현실의 비리와 부조리에 비폭로, 비판, 풍자의 화살을 날리고 있다. 이에 대해 조성일 선생은 이 점에 대해 이미 전면적인 분석을 하였다.   “이 시집에 수록된 풍자시들의 주제적 성향을 유심히 살펴보면 여러 가지 양상을 보여주고 있지만 그중 주요한 것들만을 간추려내면 혼탁한 세상에 칼질하기, 위정자들에게 물 먹이기, 도덕적으로 추락된 인간들을 비꼬기, 사랑의 기만허울을 발가벗겨 창피주기 등이라고 할 수 있다……이를 테면 , , , , , , 등이 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시편들은 ‘안팎으로 썩어간 마음들이 어린애 기저귀조차 오염’시키는 어지러운 세상, 그리고 사나운 야수와 온갖 세균, 독종들이 횡행하는 세상에 우의개세(寓意慨世)의 정서를 쏟아내면서 그것들을 쓸어 눕히고 전멸시킬 가 도래하고 ‘대살 같은 비’가 내리고 ‘어둠을 사르는 번개’가 치라고 대성질호하고 있다.   ”1)   확실히 리상각 시인은 이러한 경향은 탈현실, 탈정치, 탈이데올로기, 비공리, 탐미주주의적인 시학관을 갖고 있는 사람들과는 판이하다. 최룡관씨는 최근 10년 가까운 동안에 이른바 “시 실험”이나 “시 혁명”을 부지런히 호소하다가 요즘에는 자신의 탐미주의적인 시학관을 공개적이고도 아주 명료하게 내놓았는데. 아래의 인용문에서 그 일단을 보아낼 수 있다.  “시는 의미를 전달하여 누구를 교육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를 그려 사람들에게 보여주려는 것이라고 믿고 있다. 정말 좋은 시는 민족의 한계, 국경의 한계, 당파의 한계를 받지 않는 인류적인 것이라고 믿고 있다. 문학의 시대와 정치시대는 다르므로 시는 어떠한 이데올로기에도 얽매이지 말아야 한다고 믿고 있다. 시는 인생을 파고드는 일이며 자연의 섭리를 파고드는 일이 아니라고 믿는다. 시는 현실에서 오지만 시에 나타나는 이미지는 현실의 중복도 복사도 아닌 비현실적인 것이며 현실을 초월한 환성적인 것이라고 믿는다. 시의 핵심은 변형인데 변형을 떠난 시는  3류의 시로는 될 수 있지만 결코 차원 높은 시로는 될 수 없다고 믿는다. 시의 목적은 시일뿐이다. 시인이 시외의 다른 목적을 가질 때는 시가 타락하는 때라고 믿는다…”2)   최룡관 씨의 이런 탐미주의적인 시학관의 잣대로 재면 이러한 현실관심, 현실참여, 현실 비판의 리상각 선생님의 시들은 “3류의 시”로밖에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필자의 소견으로는 리상각 선생님의 시는 현실관심, 현실참여, 현실 비판의 사실주의적 정신이 넘치는 시들이 적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작품들에는 오늘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일종 보편적인 정서를 체현하고 있는 것이다.    리상각 선생의 이러한 사실주의적 성향을 띤 시작들은 자연스럽게 사실주의의 가장 근본적인 진실성을 갖고 있는 것이다. 진실성에는 원래부터 두 가지 경향이 있다. 하나는 착한 것에 대한 가송이고 다른 하나는 악한 것에 대한 폭로와 비판이다. 리상각의 근작시집 《뼈다귀》에서는 이러한 두 가지 경향이 병존하고 있다. 특히 악에 대한 증오로부터 발원되는 악에 대한 폭로와 비판, 풍자, 조소의 시편들이 적지 않다. 가송과 폭로는 결코 절대적으로 충돌되고 조화를 이룰 수 없는 량극이 아니다. 리상각 선생의 근년의 문학창작에서는 이 량자가 조화롭게 공존하고 있다. 이 점에 대해 리상각 선생님은 다음과 같이 자신의 생각을 피력하였다.   “인간은 모든 사물에 대하여 다 감정을 갖게 된다. 그러므로 서정으로 시를 쓰는 시인은 모든 사물을 다 시로 쓸 수 있다. 좋은 것도 나쁜 것도 가릴 것 없다.”3)   지금 우리 시단에서 상당히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문제는 현실 탈리의  탐미주의적인 경향이다. 리상각 시인의 사실주의적인 창작경향은 우리시단의 이러한 현실 탈리의 병을 치유하는데 있어서 량약(良藥)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5. 마무리는 말   첫 번 단계(1950년대 중반 - 1980년대 초반)와 두 번째 단계(1980년대 초반- 1990년대 중반)에서의 리상각 시백의 시적 정서는 단순하고 소박하고 류창하고 아름답다. 때 묻지 않은 천을 하늘에 내건 듯하다. 오염되지 않은 원색적인 시어는 초가지붕에 내려앉은 첫눈처럼 포근하고 정갈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시가 일반적으로 깊이가 모자라고 창작기법이 너무 단순하다. 한마디로 향토적인 랑만주의적인 성향이 그 주조(主潮)를 이루고 있다.   리상각 시백의 창작에서의 세 번째 단계(1990년대 중반 -지금)는 시인으로서의 우화등선(羽化登仙)의 단계라고 할 수 있다. 이 시기에 이르러서 리상각 시백은 구각(舊殼)에서 탈피하여 한 마리의 화려한 호랑나비로 변신하여 시의 하늘에서 자유롭게 날아예기 시작하였다. 이리하여 정감을 여과없이 직설적으로 드러내던 랑만주의적인 정서표현에서 탈피하여 시적인 대상물을 찾아서 자신의 사상과 정감을 간접적으로 암시하는 상징적 수법을 보편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하고 시의 이미지화 작업에 의식적인 노력을 경주했다. 그러면서도 단순한 이미지화가 아닌 사상과 정감의 표현을 동시에 지극히 중시하였다. 이시기에 이르러서 리상각 시백은 시 창작에서 이미지화를 하면서도 괴상한 이미지 조합이나 폭력적 이미지조합을 하는 초현실주의적 표현수법은 배우지 않았다. 가급적이면 하나의 이미지를 집중적으로 부각하여 그 속에 자신의 사상과 감정을  용해시켜 넣었다. 동시에 난삽한 시어가 아니라 명징한 시어를 구사하기에 노력했다. 알기 쉽게 쓰면서도 객관대상을 시화하는 능력이 조금은 례사롭지 않음을 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리상각 시백의 이시기의 이미지 시들은 영미의 이미지스트들의 이미지 시와 아주 비슷한 감을 주지만 또 그보다 사상 감정 표현의 심도는 더욱 깊다.   창작의 우렬을 가리는 기본 기준이 독창성이라는 - 남의 냄새가 아니 나는- 잣대로 재여 보면 반세기 남짓한 동안 정직한 인품과 시 정신으로 확연한 자기만의 시의 화전(火田)을 일궈낸 리상각 시백의 개성적인 로고는 우리 시인들의 구이 아닐 수 없다.   인생의 종점은 누구나 례외가 없이 죽음이다. 이런 의미에서 리상각 시인의 말처럼 인생은 허무라고 할 수는 있다. 그러나 리상각 시백은 시의 바다에서 출렁이는 파도처럼 “만들고 마스고 솟구치고 무너지고” 다시 “솟구치고 마스고  만들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연변의 향토에 굳건히 두발을 딛고 서서 하늘을 우러러 아름다운 노래를 힘차게 부를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2008년 3월 12일 연길에서 ================================== 리상각의 시를 론함                                 /조성일 리상각씨는 20세기 50년대 중반 조선족문단에 데뷔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장장 반세기를 주름잡으면서 자기의 삶을 시창작에 걸고 줄기차게 필경(笔耕)을 하고있다.  흘러간 세월에 리상각은 무시로 덮쳐드는 정치적풍파와 인생살이의 갖가지 어려움이 밀려드는 상황속에서도 빼여난 예술적기량과 각고의 노력에 기대여 20여권의 시집(장편서사시집, 서정시집, 시조집, 풍자시집 등)을 출간함으로써 조선족시문학발전에 큰 기여를 하였다. 따라서 그는 조선족시단의 앞자리에 좌단(左袒)하고있는 거보적인 서정시인이며 시조시인이며 풍자시인이다.   시인 리상각씨의 창작년보를 훑어보면 서정시, 서사시, 풍자시, 시조 창작 등이 우리의 눈길을 끌고있다. 그는 문단에 데뷔하여 “문화대혁명”시기까지는 주요하게 리념적인 “송가”창출에 집착하다가 개혁, 개방의 새로운 력사시기에 진입하여서부터는 시에 대한 새로운 자각과 깨달음을 바탕으로 하여 시의 소재, 주제, 표현기법 및 기타 형식의 새로운 변주를 시도하는 대담한 창조적실험을 진행하였다. 그는 새로운 력사시기에 진입하여 인간사랑, 자연례찬, 현실참여 등과 직결되는 서정시, 시조창작에서 가시적인 성과를 떠올렸으며 최근 몇년동안에는 시의 필봉을 풍자에 돌려 현실의 부조리와 삶의 모순을 비판의 도마우에 올려놓음으로써 우리 조선족시단에 시와 삶, 시와 현실의 간격을 허용치 않는 풍자시의 장을 열었다. 실로 그는 풍자시로 시의 령역의 개방이라는 또 다른 하나의 의미를 표출하였고 조선족시단에 저항세계의 신선한 풍경을 구축하였다. 오늘 이 자리를 빌어 필자는 주로 그의 시창작에 나타난 특징에 대해서 필자나름대로의 생각을 굴려보려 한다.  1. 인간미 추구와 초월적인 인격지향  리상각은 자기의 미학주장을 다음과 같이 피력했다.  “나는 고희에 이르러서야 이런 생각이 깊어졌다. 물론 시인은 인간미를 찬송하는것이 창작의 기본이다. 사랑과 인정과 꿈의 세계를 찬미하며 창조하는것이 시라고 주장하여왔다. 시는 인생의 희로애락을 그대로 그려주는 예술이지만 그 속에 숨쉬는 인생의 꿈과 환상과 신념을 보여주는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것이 바로 인생에 대한 시의 지향성이다. 희망이 없는 인생은 죽은 인생이고 지향성이 없는 시는 생명력이 없다.”  리상각은  인간미를 찬송하는것이 창작의 기본이며 사랑과 인정과 꿈의 세계를 찬미하며 창조하는것이 시라고 인정하고있다.  인간미에 대한 추구는 인정세계와 고향사람들을 다룬 시, 친지와 이웃들을 다룬 시, 남녀간의 사랑을 다룬 시, 허위적이고 파행적인 삶을 비판, 풍자한 시들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난다. 그 저변에서 울리는것은 인간의 아름다움과 깨끗한 삶에 대한 지향, 님의 상실, 고향상실, 민족의 비극으로 인한 향수와 한, 불의에 대한 도전이다. 특히 뜨겁고도 끈끈한 정을 기반으로 한 그의 사랑시는 사랑의 기쁨, 짝사랑의 외로움, 리별의 안타까움과 그리움, 실련의 아픔 등 다양한 양상을 보여주고있지만 그의 사랑시조에서 주조(主调)를 이루는것은  뜨거운 련모의 정과 애절한 그리움이라 생각된다. 이런 련모의 정과 그리움은 매우 깨끗하고 밝으며 순결한 지향점을 갖고있는것이 특징적이다.  시인의 이런 인간사랑과 인간미의 추구는 초월적인 인격리상을 자기의 시를 떠올리는 에너지로 삼고있다.  그의 시에는 하늘, 별과 같은 천체이미지, 다시 말하면 원격(远隔)이미지가 많은데 그는 삶의 근원적이면서도 존재론적인 의미를 되새기면서 속세와 멀리한 격고(格高), 경고(境高)의 탈속세계를 지향하고있는것이다. 이런 지향은 초월적인 인격리상이라 할수 있다. 삶의 문제를 도외시하거나 현실에 등을 돌린 비력사적랑만주의세계관의 반영이 아니라 현실의 부정적인 면을 초극하려는 상징성을 갖고있는것이다. 그리고 또 죽음을 가까이에서 바라보면서도 평온한 심태를 갖고있는 그의 달관의 경지를 넘볼수 있기도 하다.   가진것 하나 없는/ 한줄기 외길/ 아침해살 안고 떠나 어느덧 서산노을// 하늘끝 닿으면/ 하얀 쪽배 갈아타고/ 은하수 건너서/ 별바다 들어서리                                                                ―서시 “일엽편주”에서   티없이 깨끗한 하늘빛/ 조심조심 밝고 가노라니/ 어느덧 천국의 구름밭으로/ 들어섰나보다 나는/ 별들이 까르르 웃는 소리 듣는다                                                                                                     ―“눈 내리는 밤”에서  이런 지향은 “침묵”에서도 나타나고있다.  “산이여”/ 나는 산을 불렀다// “산이여”/ 산도 산을 부른다// 마주쳐오는 소리/ 나는 산으로 다가섰다// 입을 다물고/ 산이 나를 외면한다// 할 말이 너무 많아/ 침묵인가 산이여// 이제부터 나도/ 산이 되리라  이 시에서 산은 은둔이나 침잠의 처소로서가 아니라 탈속과 불변성, 강인, 인고, 앙망(仰望)의 정상이미지로 천체이미지와 궤를 같이하고있다. 서정적자아는 바로 이런 산과 일체가 되여 대화, 교감하고있다. 이 시를 읽노라니 부지중 리태백의 “홀로 경정산을 마주보면서(独坐敬亭山)”이라는 시가 련상되였다.   뭇새들은 하늘높이 날아가버리고/ 외로운 구름은 홀로 하늘에서 노니네// 서로 마주보아도 싫지 않은이/ 애오라지 자내 경정산뿐인가 하노라(众鸟高飞尽, 孤云独去闲. 相看两不厌, 只有敬亭山)  리상각시백의 “침묵”과 리태백의 “홀로 경정산을 마주보면서” 이 두수의 시는 비록 시제는 달라도 그 교묘한 솜씨는 똑같음을 발견할수 있다. 즉 두 시인은 모두 자신의 정감을 시적인 대상인 산에 이입하였다. 그리하여 시적대상인 산과 시적자아인 나는 동일성을 이루었으며 바로 그리하여 나는 바로 산이고 산은 바로 나로 되여있는것이다. 바로 이러하였기에 산은 친구처럼 친절하고 정취가 있는 인격체로 되여 시적자아와 서로 교감하고 대화를 나눌수 있게 되였던것이다. 리상각씨의 “침묵”은 김관웅교수가 지적하다싶이 물아일체(物我一体)의 경지에 오른 시이며 따라서 “동양적인 천인합일(天人合一)의 경지에 이르고 동양적인 신운(神韵)이 있는 수작이다.”  이런 시는 초탈적인 경지에 이르지 못하고는 나오기 어려운 시이다. 리상각의 시는 바로 이러한 초월적인 립장에 서서 여유만만한 태도로 이 세상의 모든 부조리와 악을 굽어보면서 쓴것이라고 할수 있다. 필자는 리상각시백의 이러한 초월적인 인격리상이 곧 그의 시를 떠올린 에너지라고 생각해본다.   2. 자연의 생명성과 아름다움에 대한 례찬  .그의 시문학에서 우리에게 싱그럽게 안겨오는것은 자연관계시이다. 그는 자연을 객관적상관물로 하여 자연과 인간의 친화력과 교감을 떠올리면서 우리 삶의 가장 근원적이고 원초적인 의미를 지닌 생명성에 대한 감각적쾌감과 자연의 아름다움, 순결성을 찬미하는것이 특징적이다.  그의 시에는 자연의 아름다움과 순결함과 싱그러움에 대한 감각적쾌감과 삶에 대한 강한 의지와 열망이 투사되여있다. 실로 그의 자연시에서는 풍경과 물상이 거의다 생명성으로 충일되여 자연과 시적“자아”가 상호 확산적교감을 보여주고있다.  적지 않은 경우 그의 시에서 자연물들은 흥겨운 분위기를 보이고 시적“자아”는 법열의 상태에 있다. 그의 이런 시들을 시적“자아”와 자연과의 극복할수 없는 “존재론적거리”를 전제로 한것이 아니라 량자의 친화력에 뿌리를 내리고있다. 따라서 그의 자연시에는 비극적정조가 거의 없는것이 특정적이다.  3. 풍자와 해학을 통한 사회비판   리상각시문학의 주제풍향에서 또 하나 이채를 보여주고있는것은 풍자와 해학을 통한 인륜도덕과 사회의 그릇된 풍조에 대한 비판이다. 리상각시백은 바로 옛 지성들의 올곧은 뜻을 귀감으로 하여 생각처럼 단순하지 않는 어지롭고 복잡한 세상, 어디서나 볼수 있는 추하고 고약한 현상에 비분강개(悲憤慷慨)를 참지 못해 비판적지성으로 나타나 풍자적메타포를 동원한 저항시편―풍자시 창출의 급물살을 일궈냈던것이다.  시집 《뼈다귀》에 수록된 풍자시들의 주제풍향을 유심히 살펴보면 여러가지 양상을 보여주고있지만 그중 주요한것들만을 간추려내면 혼탁한 세상에 칼질하기, 위정자들에게 물먹이기, 도덕적으로 추락된 인간들을 비꼬기, 사랑의 부재를 발가벗겨 창피주기 등이라 할수 있다.   버려진 뼈다귀를/ 제꺽 물고/ 흘끔거리며 간다// 흘끔거릴수록/ 빼앗자고/ 달려드는자 있다// 고기 한점도 없는데/ 무얼 바라고 이악스레/ 물고 뜯을가?// 뼈다귀 하나때문에/ 으르렁소리만/ 높아간다                                                 ―“뼈다귀”전문                                                                                                                 -        이 시를 읽으니 “니전투구(泥田斗狗)”라는 성구가 생각난다. 이 성구는 진흙밭에서 개들이 벌리는 서로 물고 뜯는 싸움을 빌어 인간사회에서의 사람들사이에서의 명쟁암투(明爭暗斗)를 일컫는 말이다. 시인은 고기 한점  붙어있지 않는 뼈다귀를 객관적상관물로 하여 현실에 존재하는 서로 물고 뜯고 으르렁대는 “니전투구”의 현상을 풍자적과장과 예리화의 수법으로 희화화(戏画化)하고있다. 이 시에서 아무렇게나 내뱉는듯한 시인의 목소리는 뜻밖에 짙은 공명대를 형성하고있는것이다. 특히나 구성의 단단한 끝맺음과 상징성은 깊은 여운을 남기고있다. 이 시는 매섭고도 활달한 시선, 강인한 언어, 뛰여난 류추능력, 기발한 위트, 예리한 과장, 상징화가 종합적으로 멋지게 배합된 수작으로서 독자로 하여금 웃음을 금치 못하게 하면서도 슬프고 섬찍하게 한다. 그의 이런 빼여난 시적작업은 높은 경지에 이른 시인의 솜씨를 엿볼수 있게 한다.   한자리만 지키고있어도/ 제가 할 일은 다한다// 한마디 말이 없어도/ 두려워하는자 있다// 허름한 옷을 걸치고도 추위와 배고픔을 모른다// 밤낮 외롭게 지내지만/ 욕심도 불평도 없다/ 두팔 벌린채 먼산 바라보며 세상을 우습게 안다                                   ―“허수아비”전문  이 시는 부귀공명이라는 이 “화택(火宅)”속에서 살아가는 권세나 재물때문에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 하는 속세의 소인배들을 직설이 아니라 허수아비란 객관적상관물을 빌어 우의적(寓意的)으로 풍자, 조소한 또 하나의 수작이다. 이 시에 대해 김관웅교수는 다음과 같이 멋지게 평가하고있는데 필자도 동감이다.  부동과 침묵의 미학에 람루와 기아를 초탈하는 안빈락도(安貧乐道)의 청빈사상 및 독립오세(独立傲世)의 도고한 삶의 자세가 보이는 작품이다. 부귀공명을 탐내는 현실의 속인들을 우습게 아는 처사(处士)의 풍모를 허수아비라는 이미지를 빌어 표현한 점은 리상각시인의 대단한 시적안목에 의해 만들어진 이미지의 낯설기화의 한 성공의 사례가 아닐수 없다. 이러한 의식의 흐름은 만고풍상을 겪고난후의 초탈에서 오는 깨달음에서 연유하는것이며 아울러 시인의 시창작에서의 보다 높은 예술적경지에로의 승화이다.  4. 그의 시어와 표현기법상의 특징  리상각시백은 언어적감수성이 예민하고 언어의 내포적의미를 재치있게 활용할줄 아는 장인(匠人)으로 안겨온다. 그의 시어는 평이하면서도 투명한 언어감각과 지적인 세련을 거느리고있으며 물흐르듯 활달하고 자연스럽다. 그의 언어에는 현란함이 없으며 굉장한 수식도 없다. 그의 언어의 평이성, 소박성과 지적세련성은 구체적현실에 대한 그의 깊이있는 성찰을 통해 얻어진것이다. 하기에 거기에는 경험의 진실성이 온전하게 자리잡고있는것이다. 또한 그의 최근 몇년간의 적지 않은 시들 특히 시집 《뼈다귀》는 리상각시백이 “서문”에서 고백하다싶이  “역설과 반어와 야유로 씌여진 아이로니시집”으로서  전통적인 예술기법의 계승과 더불어 현대시의 마력인 이미지, 상징, 역설, 아이로니 등 기법들을 시의 구성뿐만아니라 부분적인 언어표현에서도 자유분방하게 능란하게 활용함으로써 시의 예술적력도(力度)를 높여주고있다. 그런데 여기서 강조하고픈것은 모더니즘의 표현기법을 대담하게 차용하고있지만 시의 서정성과 운률을 살리고있으며 지어는 민요의 운률까지 돋보이게 하고있는것이 특징적이다. 그의 시에서 시를 전개시켜나가는 언어진술의 톤 자체가 싱싱하고 통쾌한 기개를 뻤셀遲막館?새로운 시적호흡에 적지 않은 성공을 보여주고있으며 다양한 언어의 춤은 탄력적인 공감대를 마련해주고있다. 이밖에도 그는 일상적인 비어(卑語)나 속어(俗語)를 과감하게 시에 도입시키는 새로움을 보여주고있다.      5. 그의 시풍  리상각씨는 결코 절망의 시인이 아니라 희망의 시인이요, 그의 시학은 희망의 시학이라 일컬을수 있다. 그의 시를 읽으면서 우리가 현실세계를 부정한다거나 떠나고싶은 생각을 갖기보다 현실세계중의 그릇된것들을 초극하고 더욱 아름다운 세상을 마련하고싶은 생각에 물젖게 된다. 그의 시풍은 밝고 깨끗하며 향토적정서가 짙으며 섬세하고도 서정적이며 명랑하고 락천적이다. 그의 시는 사실주의, 랑만주의, 현대주의 등의 복합에 의한 변이적인 자기나름의 민족시로서 랑만적인 색채가 짙다.   “리상각시인은 깨끗하게 시를 쓰는 서정시인이다. 그의 시조도 마치 시조풍으로 쓴 서정시 같아서 정서적으로 느낌이 매우 좋다. 꽃바람 맞는듯한 상쾌함, 조약돌을 굴리는듯한 석수간의 깨끗함, 하얀 눈속에서 첫 련인을 만나는듯한 정다움, 이런것들이 하나의 복합체로 독자를 매혹시킨다.”(김철)  6. 희망사항  하지만 일부 시들에서는 내용적인 측면에서 볼 때 인간 내심의 고민과 고통, 한을 존재론적시각에서 파고 들어감이 부족한것 같으며 예술적인 견지에서 볼 때 묘사대상이 욕망에 가리워지고 감정에 휩싸여 묘사대상과 주체 사이의 심리적거리가 부족하며 감지한 사실을 형상화하기보다 론리화함으로써 추상화에 떨어지고 벌거벗은 육성이 직설적으로 울리고있다. 이런것들은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생각된다.   리상각은 시집 《뼈다귀》의 “서시―일엽편주”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있다.       높낮은 파도길에/ 작은 갈잎 하나/ 떴다 가라앉았다/ 그네를 뛰며 간다// 외로운 꿈새/ 누구를 바라고/ 아슬한 물고개/ 넘어넘어 왔더냐       이 시가 말해주다싶이 리상각씨는 “일엽편주”가 되여 홀로 외로움을 씹으며 세월의 격랑에 휘말려 부침(浮沈)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리상각은 서정시인, 시조시인일뿐만아니라 훌륭한 풍자시인으로 자리를 굳히였다.  시인 리상각씨는 70 고개에 치닫고있다. 하지만 그에게서는 젊음의 생기가 분출하고있는바 이 경우 시조집 《에밀레종소리》의 머리시조중의 마지막 몇대목을 새겨보는것은 무익한 일이 아닐것이다.  한걸음 한걸음  해솟는 산에 오르듯  하루 또 하루 엮어갈  황홀한 새 천년은  어쩌면 신비론 세상이리  기분이 둥둥 뜬다  필자는 리상각시인이 여생에 우의 시조에서 보여준 그런 젊음의 정서적흥분속에서 작은 그릇에 우주를 담고 읊을수록 맛이 나고 만방에 향기로운 우리 민족의 시의 꽃송이를 더욱 알뜰히 가꾸어나가길 바라마지않는다.     2008년 5월호=================== 리상각시인의 시 에 대한 나름의 시평 2009년 03월 26일 14시 13분                                  작성자: 허동식      리상각시인의 가 최초에 시로 씌여졌는지 아니면 가사로 씌여졌는지는 잘 모르지만은 내가 흥이 날 때는 부르고싶은 노래이다. 또 아름다운 시로 느껴지는 시편이다.  에서 한  구절을 따오면서 나름의 감상을 적어본다.   백설같은 두루미 하얀 두루미 떼를 지어 내려앉네 깃을 다듬네   두루미는 알지 못하네 그 모습이 그 얼마나 아름다운지 1      백설같은 두루미 하얀 두루미/떼를 지어 내려앉네 /깃을 다듬네  이 부분은 거의 질박할 정도의 시어로  를 묘사형으로 구성된 서술형 그림으로 그려놓았다. 서술형 그림이란 말이 존재하는지는 잘 모르지만 련환화라든가 환등으로 표현되는 그림을 서술형 그림이라 칭할수 있다면, 하늘에 날아예는 하얀 두루미들--하나 둘 또는 일거에 백사장에 내려앉는 두루미들--부리로 깃을 다듬는 두루미들 이런 순서로 두루미가 형상화되였고 그림화되였다.   2   백설같은 두루미 하얀 두루미/떼를 지어 내려앉네 /깃을 다듬네 이상 순서적인 그림화된 이 부분은 또 두루미의 動性을 靜성적으로 옮기어 적은 부분이다. 두루미의 동적인 이동과정과 행위과정을 하나하나 구분하여 그 순서대로 정적으로 다루었다. 정적으로 다루었지만 정속에는 동이 흐르고 그 와중에 동과 정이 잘도 조화된 생명감(어떤 생명도 자연적으로는 동과 정의 연합체이다)이 넘치는 부분이다. 3      두루미는 알지 못하네/ 그 모습이 그 얼마나 아름다운지 이 부분은 옛날 중학교 어문교과서에서 말하는 소위 주제사상개괄이라 할수도 있겟지만은 나는 두루미의 내심적인 안온과 靜性을 동적(심리활동)표현으로 마무리지었다 함이 더 적절하다고 생각된다.  물론 문자언어의 제한성으로(조선문은 표음문자로서 중구어처럼 一字로  天機를 다루기가 힘듬도 사실이다) 蜻蜓点水식 또는 완전은페식 경지는 찾아보기 힘들지만  나는 표상으로 보여지는 두루미의 靜성에 내재하는 동적원동력을 잘 표현한 시구라고 생각된다. 4  시인의 원초의 의도는 잘 모르지만 , 독자로서 나는 는 조선족의 심미리상과 사회리상이 조화스럽게 기록된  시편이라 생각된다.  조선족이 먼 옛날부터 두루미를 즐김은 흰색으로 표현되는 人性의 순진성과 고요하게 표현되는 삶의 우아함을 지향함이 전통으로 되여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 이런 문화전통에는 유학의 심미리상과 사회리상이 내재한다. < 두루미>에 나타나는 흰빛의 고요한 韻과  그림으로 펼쳐지는 舞는 우리의 재래적 심미리상의 절창이며 는 자연스럽고 화목하고 조화된 사회리상의 시적재현으로 보여진다. 5  또  에는 자민족에 대한 자평과 무조건적인 무한대의 민족애 그리고 긍지감이 많이도 담기여 있다.  
1776    중국 조선족 록의 왕 - 최건도 음유시인 아니다?... 옳다...! 댓글:  조회:3707  추천:0  2016-11-10
한 시대의 비가, 최건의〈한 쪼각의 붉은 천> 김 관 웅     차례: 1.       최건의〈한 쪼각의 붉은 천〉의 텍스트 소개 2.〈한 쪼각의  붉은 천〉의 상징적의미 3.〈한 쪼각의  붉은 천〉과 “문화대혁명”의 상호 텍스트성 4.  최건의 〈한쪼각의 붉은 천〉을 둘러싼 찬반 량론의 대립 5.  최건의 락음악이 우리들에게 주는 계시   ----------------------------------------------------------------------------------------------       1.    최건의〈한 쪼각의 붉은 천〉의 텍스트 소개   최건(崔健)의 락음악(摇滚) 창작을 크게 전후(前后) 두 단계로 나누어 볼수있다. 첫번째 단계는 주로 1986년에 창작된 〈내가 모르는것 아니다(不是我不明白)〉,〈새 장정길에서의 락(新长征路上的摇滚)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자(从头再来)〉,〈더는 덮어감추지 않으련다(不再掩饰)〉,〈탈출(出走)〉 , 〈빈털털이(一无所有)〉등이다. 이 단계의 주요한 특점은 정신 대동란시대의 곤혹, 방황, 배회, 사색 및 자유에 대한 갈망과 추구를 표현하였다. 두번째 단계는 1990년 이후인데 이 시기에는 보다 높은 예술 수준으로 중국인들이 극좌정치로선의 통치하에서 겪었던 경력과 운명을 보여주었는데, 이 시기의 대표작은〈한 쪼각의 붉은 천(一块红布)〉이다. 그 가사 원문과 조선어역문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那天是你用一块红布      그날 당신은 한 쪼각의 붉은 천으로 蒙住我双眼也蒙住了天    내 두 눈을 감싸주었고 하늘도 가려놓았네 你问我看见了什么        당신이 나를 보고 무얼 보았는가 물었을 때 我说我看见了幸福        난 행복을 보았다고 대답했었지 这个感觉真让我舒服      그 감각은 정말로 나의 마음 편안케 하여 它让我忘掉我没地儿住    내가 살곳이 없는것도 잊게 했지 你问我还要去何方        당신이 또 어디로 가겠는가 나한테 물었을 때 我说要上你的路          나는 당신이 가는 길로 따라가겠다고 대답했네. 看不见你也看不见路      당신도 보이지 않았고 길도 보이지 않는데 我的手也被你攥住        나의 손은 당신의 손에 굳게 잡혀 있었네 你问我在想什么          당신은 내가 무얼 생각하는가 나한테 물었를 때 我说我要你做主          나는 당신은 나의 주인이 돼주어야 한다고 대답했네 我感觉你不是铁          내 느낌에 당신은 무쇠덩이가 아니였지만 却像铁一样强和烈        무쇠처럼 강하고 뜨거웠네 我感觉你身上有血        내가 당신의 몸에 피가 흐르고 있음을 느꼈음은 因为你的手是热呼呼      당신의 손이 뜨거웠기 때문이였네 我感觉这不是荒野        난  그곳은 거치른 들판이 아니라고 느꼈고 却看不见这地已经干裂    그 땅덩어리가 말라서 갈라져있음을 발견하지 못했네 我感觉我要喝点水        난 목이 말라 물을 마시고 싶었지만 可你用吻将我的嘴堵住    당신은 키스로 나의 입을 막아버렸네 我不能走我也不能哭      내가 더 갈수도 없고 울수도 없었음은 因为我身体已经枯干      내 몸은 이미 말라버렸기 때문이였지. 我要永远这样陪伴着你    내가 영원히 그대로 당신을 그냥 따르려 했음은 因为我最知道你的痛苦    당신의 고통을 내가 가장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였네.   이 가사에서 시적화자 “나”는 “당신”에 의해 두 눈이 붉은천에 의해 가려진 채로 행복감에 젖어서 “당신”이 끌고가는 대로 따라간다. “나”는 “당신”이 영원히 “나”의 주인으로, 상전으로 되여주기를 진심으로 바라면서 목이 말라서 물을 먹자고 해도 “당신”이 키스로 “나”의 입을 막아버리는 바람에 온몸이 다 말라서 빈사상태에 이르지만 “나”는 “당신”의 고통을 가장 잘 알고 있기에 영원히 “당신”을 모시고 따르겠다고 한다. 이 가사의 겉에 드러난 표면적인 의미는 이처럼 명백하고 단순하다. 그러나 〈빈털털이〉와 마찬가지로 이 〈한쪼각의 붉은 천〉은 세상에 나타난 후에 즉각 광범한 공명을 일으킴과 동시에 치렬한 반대를 받았다. 그것은 찬양파나 반대파 모두 마치나 약속이나 한듯이 이 가사가 갖고있는 상징적의미를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해석하였기 때문이다. 물론 그 해석의 방향이 정반대이기는 하였지만 말이다.    2.〈한쪼각의 붉은 천〉의 상징적의미   그 자체로 다른것을 대표하는 사물이나 현상 일체를 상징이라고 한다면 이 가사는 수사학적 의미에서 국부적인 상징이 아니라 작품 전체가 하나의  상징체계를 이룬다. 즉 가사중의 “한 쪼각의 붉은 천”, “거치른 들판”, “나”,”당신”,  “물”이나 “당신은 키스로 나의 입을 막아버렸네”와 같은 개별적인 심상이나 시행만 상징성을 갖고 있는것이 아니라 가사 전체, 즉 텍스트 전체가 상징성을 갖고있다는 말이다. 어느 때부라고 꼭 찍어 말하기는 어려우나 “붉은 색”은 중국에서 결코 일종 색채의 의미만 갖고있은것은 아니였다. 많은 경우에 “붉은 색”은 신앙이나 리상이나 추구를 상징하였는바 “홍색 중국” , “동방홍”, “오성 붉은기”, “홍보서(红宝书)”, “붉은 색의 바다(红色海洋)”, “붉디붉은 붉은 태양이신 모주석”……이 모든것은 온통 “붉은 색”으로서 “붉은 색”은 희망을 상징하고, 혁명을 상징하고, 행복을 상징했다. 그러나 중국인민의 정치생활과 정신생활에서 “붉은 색”의 범람으로 인하여 생겨난 홍색환각은 생명의 나무의 초록색이나 바다나 하늘의 푸른색이나 수확계절의 황금색이나 빙설세계의 흰색 등 다른 색깔에 대한 감응력이 쇠퇴하게 되였고 심지어 공포감까지 생겨나게 되였으며, “붉은 색” 자체의 진위(真伪) 및 그 다양성에 대한 분별능력마저 잃게 되였다. 특히 “붉은 색”이 범람하는 이런 와중에서 림표, 4인방 같은 정치간상배들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서 팔아먹은 것은 홍색상표를 붙인 저질품이나 짝퉁들이였다.  비록 이들이 가짜산품을 만들어내는 재주가 뛰여났으나 “문화대혁명”중에 나타났던 홍색 대범람은 홍색캡슐속에 넣은 정치독약과 정치몽혼약의 대범람이였다. 이런 정치독약이나 정치몽혼약을 달갑게 받아먹은 수많은 중국인들은 이 “홍색의 바다”에서 처음에는 “행복을 보았고”, “정말로 마음 편안 감각”을 갖게 되였다. 수천수억의 중국인들은 손에 붉은 모주석어록책을 받쳐들고 붉은 태양을 우러러 “모주석 만세 만만세”를 목이 터지라고 부르고 뜨거운 눈물을 좔좔  흘리면서 “살곳이 없는것도 잊은채” “모주석이 이끄는 길”로 천방지축 따라나섰다. 하늘과 땅이 온통 붉은 색으로만 도배되여 그만 그 청일색의 붉은 빛깔로 하여 현운증을 일으켜 까무라칠번 했지만 그 때는 이미 “나의 손은 당신의 손에 굳게 잡혀 있”었던 터라 도망칠래야 도망칠수 없었고 또한 도망칠 엄두도 내지 못했다. “당신이 내가 무얼 생각하는가 나한테 물었를 때/나는 당신은 나의 주인이 돼주어야 한다고 대답”한다. 당시 이른바 “민주(民主)”란 무었이였던가? 바로 혁명의 수령이 인민의 주인으로 되여주는것이였다. 혁명의 수령이 인민들의 주인으로 되여 주지 않으면 인민들은 바람에 나붓기는 여린 풀처럼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어디로 가야 할지 도무지 방향을 잡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그런 “민주”였다. 문화대혁명 당시 전국에 널리 퍼졌던 〈큰 바다에서의 항행은 조타수에 의지하네(大海航行靠舵手)〉라는 노래가 이 점을 여실하게 보여준다.   大海航行靠舵手          큰 바다에서의 항행은 조타수에 의지하고 万物成长靠太阳          만물이 자라남은 태양의 덕분이네 雨露滋润禾苗壮          비와 이슬이 적셔주어 곡식들이 자라고 干革命靠的是毛泽东思想。혁명은 모택동사상에 의지해야 하네. 鱼儿离不开水呀,        고기는 물을 떠나 살수 없고 瓜儿离不开秧。          호박은 넌출을 떠나 열릴수 없네 革命群众离不开共产党,  혁명군중은 공산당을 떠날수 없고  毛泽东思想是不落的太阳。모택동사상은 지지 않는 태양이라네.   그런데 갑자기 그 조타수가 사라져서 보이지 않고 태양도 서산으로 기울어지려고 하고 비가 내리지 않는데 어찌 이슬이 맺히겠는가? 그래서 “나”는 마른 목을 추기려고 물을 좀 먹으려고 했으나 “당신”은 혁명적인 키스로 “나”의 입을 막아버린다. 어떻게 하랴? 기진맥진한 사람들은 분분히 “물”을 찾으려 산지사방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미국, 카나다 후에는 서독, 호주, 그 다음에는 일본, 벨지크……그러나 “나”는 떠나려고 하지도 않고 울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것은 이미 “나”의 몸이 말라서 비틀어졌고,  “나”는 “당신”의 고통을 가장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였다. 이러한 “노예근성”, “복종심리”, “짝사랑 콤플렉스”는 중국인, 특히는 지식인들의 수천년 동안 내려오면서 형성되였던 비극성격이였다. 력사가 지식인들을 거듭 짓밟고 우롱하였으나 그들은 언제나 묵묵히 참고 견디여왔다. 력사가 그들에게 조금만 사과를 해도 그들은 눈물코물 흘리면서 감지덕지해 했다. 최건의 〈한쪼각의 붉은 천〉은 이러한 중국 지식인들의 인격의 비극을 가장 준확하게 그려냈으며, 동시에 “붉은 천”이라는 이 상징부호를 동원하여 수억의 인민들이 눈먼 망아지처럼 워낭소리 듣고 따라가듯이 혁명수령을 그릇된 로선을 맹종하여 전 중국이 온통 혁명과 계급투쟁의 아수라장으로 되였던 한 단락의 력사의 내함에 대한 전반 중국인들의 비장한 심리체험을 반영하였다. 최건의〈한쪼각의 붉은 천〉이르러서 중국의 상흔음악은 사상예술상에서 고봉에 오르게 되였으며, 이 노래는 가장 심각한 한 시대의 비가(悲歌)라고 평가 받고 있다. 최건의〈빈털털이〉와 〈한쪼각의 붉은 천〉은 일종 문화 력량으로서 음악이 사회에 끼치는 영향이 미술, 영화, 희곡, 무용 심지어 문학마저 추월해 버렸음을 표징한다.   3.〈한 쪼각의  붉은 천〉과 “문화대혁명”의 상호 텍스트성   탈구조주의리론중의 하나의 중요한 리론범주가 바로 “상호 텍스트성(intertextuality)”이다.  문학텍스트는 하나의 독립적이고 페쇄적인 계통이 아니라 다른 계통과 밀접란 상호 련관성을 갖고있다는 주장이 “상호 텍스트성” 리론이다. 하나의 문학적텍스트라는 기호체계를 문화라는 큰 기호체계속의 제자리에 가져다 놓으면 개별 문학작품을 사회의 문화와 떼여놓고 다루던 형식주의나 구조주의의 한계를 벗어나 그것의 사회문화적의미화의 과정을 보다 전면적이고도 준확하게 파악할수 있다. 최건의 〈한 쪼각의 붉은 천〉이 갖고있는 상징적의미를 보다 전면적으로 그리고 준확하게 파악하려고 하면 반드시 중국에서 혁명수령의 개인권위, 혁명수령에 대한 개인숭배가 극에 달하였던 문화대혁명의 실상과 이 가사 사이에 존재하고 있는  “상호 텍스트성”에 대해 알아야만 한다. 중국력사는 물론이고 세계력사에서도 그 유례를 찾아볼수 없는 “문화대혁명”의 발발은 모택동의 개인의 주장, 개인의 의지와 직접적련관성이 있다. 모택동은 중국인민을 령도하여 중국을 도탄속에서 구원한 중국인민의 대구성인것만은 분명하다. 그러나 모택동 같은 절세의 위인도 중국의 수천년의 봉건전통의 관성속에서는 자유로운 존재가 아니였다. 특히 수깁년의 혁명전쟁 가운데서 점차 수립되여온 모택동의 절대적인 권위는 점차 당내에서 모택동의 일언당(一言堂)으로 나타나게 되였으며, 이는 봉건사회의 제왕의 권위와 별다른것이 없게 되였다. 주지하다시피 민주주의의 지고한 원칙은 “공화(共和)”의 원칙으로서 이는 혁명수령의 절대적권위와는 수화상극이다. 1966년 8월, 모택동은 중화민족을 심중한 재난속에 빠뜨려넣은 이른바 “문화대혁명”을 발동하였다. 비록 우리들이 지금 돌이켜보면 황당하기 그지없었던 대소란이였진만 광범한 중국인민, 특히는 당년의 청년세대들은 추호의 거짓도 없는 진실한 신앙을 갖고 이 동란속에 주동적으로 뛰여들었다는 점이다. 문화대혁명이 일어나자 마치도 하늘의 수많은 행성들이 태양을 따라 돌듯이, 마치도 지상의 수천만 송이의 해바라기들이 태양을 따르듯이 중국의 수천만의 홍위병들은 붉은 홍위병완장을 두루고 붉디붉은 붉은 태양 모택동, 붉은 사령 모택동을 따라나섰던것이다. “문화대혁명”의 주력군이였던 수천수백만의 홍위병들은 얼마나 경건하고 유치하였던가. 모택동이 한번 명령만 내리면 그들은 피를 흘리고 목이 날아날지언정 자기의 청춘과 정열을 모조리 “문화대혁명”의 제단우에 바칠 각오를 갖고있었다. 중국의 청년들은 너무나도 천진하고 너무나도 불쌍했다. 그것은 그들의 이런한 경건함과 뜨거운 정열은 지극히 우매하고 비인간적인 천방야담식의 활극들이 중국땅에서 비일비재로 벌어지게 하였기 때문이다. 아래에서 작가 량효성(梁晓生)의 회억록 《한 홍위병의 자백》중의 한단락을 인용하기로 한다.   “모주석이 명령만 내리면 우리들은 오대양에 뛰여들어가 자라를 잡고, 구천에 날아올라 룡을 잡으며 전 세계의 제국주의, 수정주의, 반동파들을 향해 최후의 돌격전을 벌릴 각오를 갖고있었다. 빠리를 산산쪼각 내고, 뉴욕을 짓밟아 버리고, 런던을 해방하고 모스크바를 광복시키며, 크레물린궁의 붉은기를 빼앗아 북경으로 가져다가 천안문성루우에 꼽으려고 했다. 그리고 레닌의 수정관을 빼앗아 북경으로 옮겨와 천안문광장에다 모시려고 생각했다. 우리들의 뜨거운 피로 새로운 세계를 붉게붉게 물들이려고 생각했다. ……”   지금의 시점에서 본다면 이는 순전히 잠꼬대 같은 소리이고 미치광이의 과대망상증이지만 이는 확실히 그때 수천만 나젊은 홍위병들의 공동한 리상이였다. 당시 홍위병들은 마치도 몽혼약을 먹은 사이비종교의 신도들처럼 리성을 잃고 날뛰였다. 그들은 문화대혁명을 하지 않으면 중국은 필연코 붉은 색깔이 변하고 천백만의 사람들의 머리가 땅바닥에 나뒹굴게 되며, 세계의 3분의 2의 로동대중들은 지옥속에서 살고 있기에 자기들이 해방시켜야만 한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중국의 홍위병들은 처음에는 문화대혁명의 도구로 되였다가 종당에는 문화대혁명의 희생품으로 전락하였다. 수많은 홍위병들이 학업을 전페하고 무단적인 투쟁에서 붉은 피를 흘리면서 목숨을 잃었고, 종당에는 시골로 변강으로 쫓겨가게 되였다. 중국의 수천만 홍위병 세대는 10년이란 귀중한 청춘의 세월을 문화대혁명이란 이 제단우에 제물로 고스란히 바치고 말았다. 중국의 봉건전통의 뿌리에서 뻗어나온 전제주의, 몽매주의, 개인미신, 종법사상 등은 중국인들의 뿌리 깊은 맹종, 노예근성, 복종심리, 유치함과 결합하여 “문화대혁명”이라는 이 전대미문의 10년 동란을 불러왔던것이다. 절대적권위를 갖고 있는 혁명수령이 친히 발동하고 그 혁명수령을 무조건적으로 따랐던 수천만의 중국인들이 합작하여 만들어낸 대재난이고 일장 악몽이였다. 최건의 〈한쪼각의 붉은 천〉에서 서정적자아인 “나”는 혁명수령을 맹종하였던 수천만 중국인들의 상징적형상이고, “당신”은 혁명수령의 상징적인 형상이라고 해석해도 대과(大过)는 없을 것이다. 한마디로 개괄한다면 “문화대혁명은 결론적으로 말하면 수령의 제왕사상과 공화(共和)원칙의 겨룸이였고 수령의 절대적권위와 당의 민주력량간의 겨룸이였다. 그런데 전자가 승리하고 후자가 패했다.”[①] 최건의〈한쪼각의 붉은 천〉은 문화대혁명이라는 이 한 시대의 비극을 가장 심도 있게 표현한 가사이다.   4.      최건의 〈한쪼각의 붉은 천〉을 둘러싼 찬반 량론의 대립   최건의〈한쪼각의 붉은 천〉은 창작된 후에 전국적으로 강렬한 반향을 일으켰다. 우선 문화대혁명을 겪었거나 겪지 않은 젊은 세대들은 이 노래를 소리 높혀 긍정하였다.   “나는 오랜 지식청년이다. 처음 최건의 〈한쪼각의 붉은 천〉을 들었을 때 깊이 감동되였다. 솔직하 말한다면 붉은 색은 우리 같은 당년의 지식청년들에게 있어서 그 감수가 너무나도 깊다. 붉은 색은 당시 우리들의 신념과 리상의 상징이였다. 문화대혁명 당시 무력충돌이 일어났는데, 나의 제일 친한 동학이 자기 홍위병조직의 붉은 기발을 지키기 위해 대방이 내리치는 칼에 십여곳이나 찔려 선혈이 랑자하였다. 그가 흘린 피도 붉은 색이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얼마나 미욱한지 모르겠다. 그뒤로 나는 붉은 색만 보면 온몸이 불편해졌고 구역질이 났다. 그래서 나는 붉은 색을 보지 않으려고 우리 집안의 모든 문과 창문을 모두 흰 페인트로 칠했다. 붉은 색은 일장 악몽이였다. 〈한쪼각의 붉은 천〉은 정말 잘 썼다. 심도가 있다. 삼십도 안된 그가 어떻게 이런 심도있는 작품을 창작했는지 정말 불가사의하다. 나는 최건의〈한쪼각의 붉은 천〉과 〈빈털털이〉는 그의 작품들중에서 가장 력사 심도가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②]   ............................................................................................................................ [1] 梁晓生 《凝视九七》,经济日报出版社,1997年,제 265페지. [1] 赵健伟 《崔健在一无所有中呐喊 - 中国摇滚备忘录》, 北京师范大学出版社, 1992년, 제263페지. “나는 대학생이다. 문화대혁명 시기에 나는 짜개바지를 입고있었으니 그 시대의 사정을 모른다. 그러나 필경은 우리와 아주 가까운 어제날의 일이므로 우리들 역시 그 력사의 그림자의 영향에서 벗어날수 없다. 내가 최건의 〈한쪼각의 붉은 천〉을 처음 들었을 때 우선은 그 비극적인 풍격에 감동을 크게 받았다. 〈빈털털이〉와 마찬가지로 이 노래에도 일종 비장미가 흘러넘친다. 이런 비극적 미가 갖고있는 힘은 〈우리의 생활을 꿀보다 달콤하네〉같은 스스로를 기만하는 노래만 들어오던 우리들에게 너무나도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최건의〈한쪼각의 붉은 천〉과 〈빈털털이〉는 그 비할바 없이 진솔한 마음의 소리와 비장한 힘으로 단꺼번에 우리들의 심금을 크게 울렸다.”[③]   중국에서는 그 누구도 최건의 락음악을 홍보해 주지 않았으며, 각종 행정수단으로 강박적으로 들으라고는 더욱 하지 않았다. 최건은 중국 대륙에서 유일하게 관변측의 전파매체를 타지 않고 대성한 가수이다. 이 자체는 일종 문화반역정신의 상징으로서의 최건의  락음악은 진정으로 인민대중의 사랑을 받으면서 성장하여 왔음을 보여준다. 최건의 락음악은 우리들에게 시대와 동보적으로 전진하고 인민대중과 운명을 같이 하면서 인민대중에게 사상내용이 심각하고 예술성이 높은 작품을 선물해야만 인민대중의 사랑을 받게 된다는 점을 알려주고 있다. 물론 최건의 〈한쪼각의 붉은 천〉은 일부 좌적사상을 갖고있는 사람들로부터 “자산계급자유화”의 산물이라는 비판과 부정을 받기도 했다. 이를테면 1990년 6월 26일, 중국의 한 저명한 로시인은 중국문화계의 최고장관의 신분으로 최건의 〈한쪼각의 붉은 천〉의 가사를 거론하면서 “자산계급 자유화”라고 부정하기도 했다.[④] 이에 대해 최건은 조금도 숙어들지 않고 자기를 변호하였다. ....................................................................................... [1] 동상서 제263페지. [1] 동상서, 제264페지를 참조하라. “저의 부친은 공산당원이고 저의 모친은 공청단원입니다. 그리고 저는 어려서부터 사회주의환경속에서 자랐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그 무슨 자산계급으로 될 가능성이 없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자유를 추구하려는 념원이 있는것만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자유는 종래로 인류사회가 추구하는 종극적임 목적중의 하나가 아닙니까.” [⑤]    “저는 중국문화속에 마땅히 이런 개념을 심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매개 사람들은 모두 위대하다는 개념 말입니다. 그리하여 사람들마다 자기는 독립적존재로서의 의의를 갖고 있고 그러한 기능이 있는 사람이라는 자각을 갖도록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언제나 복종하려고만 하는 그런 사람이 되여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복종은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 자신을 질식시켜 죽이고 자기가 날로 왜소해지게 할 따름입니다. 이렇게 되면 필연적으로 자기의 창조력을 압살하게 됩니다. 한 사회가 진보할수 있는 원인은 매개 사람들이 모두 자기의 창조력과 위대한 일면으로 그 사회를 부각시키고 만들어가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저의 락음악이 다른 사람들을 도와 자기를 발견하고 자기를 인식하는 면에서 일정한 기여가 있기를 희망하고 있습니다.”[⑥]   최건은 이처럼 개성이 뚜렷하고 자시의 소신을 속이는 법이 없이 당당하게 주장하여 왔다. 최건의 락음악의 선률과 가사에는 모두 이러한 개성의식이 뚜렷하게 표현되여 있는것이다. 최건은 최근 몇년동안은 영화제작에 정열을 쏟고있다. 《북경잡종(北京杂种)》(1993), 《나의 형제자매(我的兄弟姐妹)》(2004), 《태양은 여전히 솟아오른다(太阳照常升起)》(2006)에는 배우로 출연했고, 《처녀막 재생 년대(修复处女膜年代)》(2006), 《성도여, 나는 너를 사랑해(成都我爱你)》下集(2009),《푸른 뼉다귀(蓝色的骨头)》(2010)등에서는 감독을 담당했다. 우리들은 최건의 영화창작에서도 락음악의 창작에서처럼 큰 성취를 쌓아올리기를 기대해 마지 않는다.   5.      최건의 락음악이 우리들에게 주는 계시   최건의 이른바 “요우꾼(摇滚)”은 20세기 50년대 중반 이후부터 미국에서 류행한 대중통속음악의 일종인 락(rock)의 영향하에서 생겨난것이다. ............................................ [1] 동상서, 제11페지. [1] 동상서 제272페지. 주지하다시피 락은 미국의 당대 통속음악으로서 어쩌면 가장 선명한 포스트 모던적인 예술양식이라고 할수 있다. 그러므로 최건은 당시 중국에서는 가장 전위적인 예술가라고 평가할수 있다.  그러나 최건은 단순히 미국의 락음악의 이 형식을 중국에 이식(移植)하는데만 머물지 않고 락이란 이 양식에 중국 1980년대의 시대적정서를 접목시킴으로써 그 시대를 살았던 중국인들의 마음의 목소리를 대변할수 있게 하였다. 바로 이런 까닭에 그의 락음악은 전 중국을 열광시킬수 있었던것이다. 바로 이런 까닭에 최건의 락음악을 극력 반대하는 사람들도, 극력 지지, 성원하는 사람들도 모두 사회적측면에서, 정치적측면에서 그의 락음악의 상징적의미를 파악하고 해석하였다. 이는 최건의 락음악은 결코 “예술을 위한 예술”이 아니라 “사회를 위한 예술”,  ”시대를 위한 예술”,  “인간을 위한 예술” 그리고 최건 본인이 극력 부인했음에도 불구하고 객관적으로는 정치적요소가 다분한 예술이였음을 알수 있다. 설사 최건이 본인이 자기의 락음악의 정치적경향성에 대해 극구 부인했다고 해도 수용미학의 각도에서 볼 때 수용자들은 필연적으로 최건의 락음악에 자기의 주관적인 정감과 생각을 가미하게 되는 법이다. 수용미학의 각도에서 볼때 최건의 락음악이 국내국제적으로 일대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키게 된것은 커다란 적인 영향은 확실히 국내외에서의  최건의 락음악의 영향은 그 정치적영향이 음악적영향보다 더 컸던것만은 분명하다. 이는 결코 나쁜 일만은 아니다. 그것은 락음악 역시 일종 정신적인것으로서 정신적인것에는 필연적으로 정치 혹은 신앙적요소가 가미하게 되기 때문이다. 전 중국을 진동시켰던 최건의 락음악과 사회, 시대, 인간, 정치와 밀접한 련관성을 생각할 때마다 필자는 자연스럽게  몇년전에 모더니즘을 표방하는 우리 문단의 개별적인 사람들이 탈정치, 탈사회, 탈시대, 탈민족의 탐미주의적인 문학주장을 머리속에 떠올리게 된다. 사실 서양의 모더니즘문예운동에는 형식주의적인 실험적요소들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기는 했지만 결코 탈정치, 탈사회, 탈시대, 탈민족적인 탐미주의의 단일구조로 이루진것은 결코 아니였다. 이를테면 표현주의소설가 카프카의 많은 작품은 근현대문명이 인간에게 가져다준 소외를 가장 중요한 주제로 다루어왔고, 실존주의철학가이며 문학가인 사르트르의 많은 작품들 역시 자본주의문명사회의 부조리와 황당성 그리고 이러한 부조리와 황당한 사회속에서 자기의 본질을 선택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인간들의 고통과 곤혹을 보여주었으므로 “예술을 위한 예술”을 표방한 탐미주의와는 인연이 없다. 우리문단에 최근 년간에 나타난 탐미주의문학경향은 결코 자신의 독창적인 창조는 아니며 백여년전의 서구에 나타났던 탐미주의의 힘 빠진 메아리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자신들은 스스로 대단한것처럼, 아주 새롭고 신선한 것으로 착각하지만 전반 인류문학예술의 발전사의 맥락에서 본다면 아무런 20세기 말 21세기에도 연장되고 있는 중국조선족문단에서의 이른바 “탐미주의”나 “모더니즘”이나 “실험문학”들은 별로 신선한 감도 주지 못한다. 마치도 해마다 봄이 되면 어김없이 다시 찾아오는 “낯익은 제비들이 돌아온것(似曾相似燕归来)”을 다시 보는 느낌이다.  탐미주의는 19세기 후반 프랑스와 영국에서 한때 류행했던 문예사조로서 문학예술은 그 스스로를 위하여 있는것이므로 도덕적, 정치적, 민족적, 사회적 그리고 기타의 비예술적표준에 의하여 판단수 없다는것이 근본 립장이였다. 문학예술의 독립성을 강조한 면에 있어서, 문학예술을  문학예술 이외의 다른 분야의 속박에서 해방시켜주려고 하였다는 측면에서 탐미주의는 나름대로의 존재의 리유와 일정한 합리성을 갖고있다고 할수도 있다. 그러나 무엇이든 일정한 도를 넘으면 모두 자기의 합리성을 상실해 버리게 된다. 탐미주의가 도를 넘어서 문학예술과 모든 기타 분야와의 련관성을 완전히 부인하면서 문학과 예술이 현실생활의 모습이나냄새를 멀리하면 할수록, 현시대 인간들의 희노애락과 담을 높게 쌓으면 쌓을수록 더 순수하고 아름다워진다고 주장할 경우에는 자기의 존재의 합리성을 잃어버리게 된다. 왜냐하면 문학예술은 창작자와 수용자 사이의 일종 대화이고 일종 심령의 소통이고 정감의 교류와 공명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남에게 보이지 않는것을 전제로 하는 “일기 쓰기”나 자기 침실안에서 창문을 꽁꽁 닫아놓고 자오자락(自娱自乐)을 목적으로 하는 “노래 부르기”와는 달리 무릇 대중매체에다 발표를 전제로 하는 문학예술행위는 본질적으로 개인적행위가 아니라 사회적행위이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 문학이 준엄한 격변기에 처한 우리민족의 어려운 실존상황을 외면하고 오로지 탐미주의적인 언어실험이나 이미지조합이나 유치한 환상세계에서만 소요하게 된다면 그런 문학예술은 조만간에 사람들로부터 외면을 당하게 될것이다. 그것은 문화는 민족의 혈맥이고, 인민대중들의 정신적고향이며, 문학예술은 민족정신의 홰불이기 때문이다. 결코 단순히 개인적취미와 개인적기호에 좇아 영위되는 언어실험이나 상아탑속에서의 순개인적인 상상이나 몽환속에서의 잠꼬대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1980년대 중반이후 최건의 락음악이 한동안 전 중국의 수많은 청중들을 열광케 한 이 사실은 우리들에게 문학예술은 그 시대와 그 시대의 인간들의 희노애락을 외면해서는 절대 안 된다는것을 알려주고 있다.                                  2011년 12월 13일 연길 자택에서  
1775    윤동주의 시는 현실적 모순의 내면적인 목소리이다... 댓글:  조회:4091  추천:0  2016-11-10
  윤동주 시의 디아스포라적 정서 ―백석, 이용악과 더불어   김경훈   1. 들어가는 말   해방 전의 문학사에서 유이민(流移民)의 삶의 정서를 다룬 작품은 적지 않다. 그 중에서도 시문학의 경우, 단연 윤동주를 대표적인 시인으로 들 수 있는데 이는 그의 작품의 시적 내용은 물론 표현의 수법에 이르기까지 유이민의 삶의 애환과 목소리를 잘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본고는 윤동주의 시를 중심으로 디아스포라적 정서를 잘 담아낸 백석, 이용악의 작품도 동시에 살펴봄으로써 이들 세 시인의 작품의 공통한 양상을 찾아보고, 각자의 개성적인 특성을 아우름으로써 이 시기 시문학사의 중요한 흐름의 한 갈래인 주변적 삶의 정서에 대해 보다 객관적으로 파악하고자 한다. 이러한 연구 시각은 암흑기를 전후한 민족문학사의 풍성하면서도 과학적인 서술에 의미 있는 작업으로 될 것으로 기대한다. 아래에 이들 세 시인의 작품에서의 디아스포라적 정서에 대하여 주로 공간적인 측면과 심리적인 정서로 양분하여 분석하고자 한다.   2. 유이민의 삶의 공간   1) 고향 상실   윤동주와 백석, 이용악의 시 작품은 대부분 유이민의 삶의 모습을 그리고 있고, 그것은 우선 그러한 삶의 근간이 되고 있는 고향에 대한 상실감에서 비롯되고 있다. 그런데 윤동주의 경우에는 대부분의 경우 내면적인 목소리로 그러한 현실적 모순을 조용히, 그러나 절실하게 보여주고자 한 점에서 특징적이다.   태양을 사모하는 아이들아 별을 사랑하는 아이들아   밤이 어두었는데 눈 감고 가거라   가진바 씨앗을 뿌리면서 가거라   발뿌리에 돌이 채이거든 감었든 눈을 와짝 떠라   ―눈 감고 간다   태양과 별을 사모하는 아이들은 어두운 밤인데 씨앗을 갖고 한 알, 두 알 뿌리면서 태양이 솟는 새벽까지 길을 걷는다. 밤이 어두웠지만 그렇다고 눈을 크게 뜨고 걷는 것이 아니고 아예 눈을 감고 길을 가야 한다. 이리저리 살피면서 조심스레 간다고 해서 당금 도착할 것도 아니므로 《발뿌리에 돌이 채이거든》 그때 《감었든 눈을 와짝 떠》도 늦지 않다고 한다. 즉, 기나긴 터널과 같은 현실적 어둠 속에서 분명한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 오래된 인내는 오히려 목표 달성을 위해서는 가장 필수적이고 현명한 대책일지도 모른다는 도리를 귀띔해 주고 있는 셈이다.   잃어버렸습니다. 무얼 어디다 잃었는지 몰라 두 손이 주머니를 더듬어 길게 나아갑니다   돌과 돌과 돌이 끝없이 연달어 길은 돌담을 끼고 갑니다   담은 쇠문을 굳게 닫어 길우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길은 아침에서 저녁으로 저녁에서 아침으로 통했습니다   돌담을 더듬어 눈물 짓다 쳐다보면 하늘은 부끄럽게 푸릅니다   풀 한포기 없는 이 길을 걷는 것은 담 저쪽에 내가 남어있는 까닭이고,   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길   윤동주의 시에서 《밤》은 시적 공간을 특징짓는 중요한 요인의 하나이다. 《밤》이 갖는 상징적인 의미의 층위를 둘러볼 때, 그것은 현실적인 상황의 암울함뿐만 아니라 그러한 배경에 휩싸인 화자의 어두운 심경을 함께 드러냄으로써 동질적 의미의 이중 구조를 취한다고 할 수 있다. 한편, 《밤》은 모든 구체적인 사물의 윤곽을 희석시키거나 소실시킴으로써 사라짐 내지 소멸의 상징성을 띠기도 한다. 그렇다면 그러한 밤에 퇴색되거나 함몰되지 않고 그를 극복하는 방법은 밤을 의식하지 않고 그것이 지나기를 침착하게 기다리는 끈기 있는 자세일 것이다. 그러므로 《눈 감고 간다》는 것은 어둠(밤)에는 어둠(눈 감다)으로 대처한다는 부정의 부정의 변증적인 사고방식을 엿보이는 것으로, 부정적인 대상으로서의 《밤》을 긍정적인 미래에의 도달을 위한 필요악으로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하기는 그러한 미래에의 도달은 여러 가지 힘든 과정이 수행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따라서 《길》은 그러한 과정의 고난을 좀 더 구체적으로 역설하고 있다. 시 《눈 감고 간다》에서도 그러하지만 《길》도 《밤》과 마찬가지로 수평적 공간에서 중요한 몫을 하는 요인이다. 다만, 《밤》은 《눈 감고 간다》에서 힘들고 기나긴 여정을 뜻한다면 《길》은 낮과 밤이 점철되는 오랜 시간적 흐름을 함께 상징하고 있음으로 해서 전반 인생의 여정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즉, 단계적인 상황과 전체적인 상황으로 갈라 볼 수 있는 것이 된다. 전체적인 상황인 만큼 《길》에서는 보다 구체적인 대상들이 시화되어 있다. 무언가 잃어버려 안타까워하는 화자와, 돌담을 끼고 끝없이 뻗은 길과, 쇠문을 굳게 닫은 담, 아침에서 저녁까지, 그리고 저녁에서 다시 아침까지 이어지기만 한 길, 담 저쪽에 남아있는 《나》 등이 그러한 시적 대상이 된다. 《길》은 《풀 한보기 없》고 내가 가는 길에는 돌담이 항상 긴 그림자를 드리워 우중충한 느낌을 준다. 또 담을 경계로 《나》는 분열된 모습으로 쪼개어져 있고, 이들을 굽어보는 하늘은 괜스레 부끄럽기만 하다. 요는, 밤과 낮이 교차된 공간에서 화자를 괴롭히는 대상들은 오히려 그 모습이 분명해짐으로써 현실적인 장애나 모순이 더욱 분명해졌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그러한 대상들은 보다 심층적인 의미에서 유이민의 후세로서 여직 현지 혹은 타국에 적응하지 못한 화자의 내면적인 깊은 고민과 우수를 보여주는 기능을 한다.   山턱 원두막은 비었나 불빛이 외롭다 헝겊 심지에 아주까리 기름의 쪼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잠자려 조을던 무너진 城터 반딧불이 난다 파란 魂들 같다 어데서 말 있는 듯이 크다란 산새 한 마리 어두운 골짜기로 난다    헐리다 남은 城門이 한울빛같이 훤하다 날이 밝으면 또 메기수염의 늙은이가 청배를 팔러 올 것이다   ―定州城, 조선일보, 1935.8.31   이 작품은 백석의 등단작이자 그의 초기시 세계를 확연히 보여 주는 작품이다. 그가 태어난 고향인 평안북도 정주를 그린 바로 그 ‘정주성’은 그러나 성문이 헐려져 그 일부만이 남아 있는 퇴락한 성으로 다가온다. 폐허가 된 성의 밤풍경들은 ‘헝겊 심지에 아주까리 기름의 쪼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라는 청각적 묘사와, ‘반딧불이 난다 파란 혼들 같다’와 ‘어데서 말 있는 듯이 크다란 산새 한 마리 어두운 골짝이로 난다’와 같은 시각적 묘사로 인하여 한층 을씨년스런 감을 더해갈 뿐이다. 이와 같은 정물 묘사는 시의 마감 부분인 ‘날이 밝으면 또 메기 수염의 늙은이가 청배를 팔러 올 것이다’라는 판단에 이르러 그 침울한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키는 동시에 더 이상 정물 묘사이기를 거부하고 정주성, 나아가 조선 땅 전체에 피폐를 가져다준 식민지의 암흑상을 떠올리기까지 한다. 이 작품은 이처럼 외세에 의한 민족의 역사의 허무함을 표출하면서 시인의 이후의 창작에서 유이민의 방황과 고민을 지속적으로 그릴 것이라는 암시를 하고 있는 셈이 된다. 한편, 다음 작품은 상기의 작품의 정물적인 관찰에서 인간의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 가까이 다가가 그 심층을 들여다보고자 한 노력이 돋보인다.   여승은 합장하고 절을 했다. 가지취의 내음새가 났다. 쓸쓸한 낯이 옛날같이 늙었다. 나는 佛經처럼 서러워졌다.   平安道의 어느 山 깊은 금점판 나는 파리한 여인에게서 옥수수를 샀다. 여인은 나어린 딸아이를 때리며 가을밤같이 차게 울었다.   섶벌같이 나아간 지아비 기다려 十年이 갔다. 지아비는 돌아오지 않고 어린 딸은 도라지꽃이 좋아 돌무덤으로 갔다.   산꿩도 섧게 울은 슬픈 날이 있었다. 산절의 마당귀에 여인의 머리오리가 눈물 방울과 같이 떨어진 날이 있었다.   ―女僧, 시집 사슴, 1936   작품은 한 여승의 비극적인 삶을 통해 일제에 의해 파괴된 가족 공동체의 운명을 집중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섶벌같이 나아간 지아비’를 찾아 ‘금점판’을 떠돌다가 결국 어린 딸마저 잃고 여승이 되어 버린 한 여인의 비참한 일생은 그 개인의 비극만이 아닌 식민지 조선 민중들의 비극이 된다. 이는 다른 한 작품인 에서 ‘우리 할아버지가 어미 아비 없는 서러운 아이로 불쌍한 이도 몽둥발이가 된 슬픈 역사’를 말해줌으로써 더 잘 알아볼 수 있는 점이다. 그렇다면 백석이 그려내고 있는 식민지 조선 땅이란 험상하게 헐린 밤하늘의 성곽이나 산산조각이 난 여승의 가족처럼 더 이상 한 곳에 버티고 살기 힘든 공간 다름이 아니다. 여기서 시인은 자연스레 유이민의 삶을 선택하게 되고 그러한 삶의 공간으로 끊임없이 이동하게 되는 것이다.   차디찬 아침인데 묘향산행 승합자동차는 텅하니 비어서 나이 어린 계집아이 하나가 오른다. 옛말속같이 진진초록 새 저고리를 입고 손잔등이 밭고랑처럼 몹시도 터졌다. 계집아이는 慈城으로 간다고 하는데 자성은 예서 삼백오십 리 묘향산 백오십 리 묘향산 어디메서 삼촌이 산다고 한다. 새하얗게 얼은 자동차 유리창 밖에  내지인 駐在所長 같은 어른과 어린아이 둘이 내임을 낸다. 계집아이는 운다, 느끼며 운다. 텅 비인 차 안 한구석에서 어느 한 사람도 눈을 씻는다. 계집아이는 몇 해고 내지인 주재소장 집에서 밥을 짓고 걸레를 치고 아이보개를 하면서 이렇게 추운 아침에도 손이 꽁꽁 얼어서 찬물에 걸레를 쳤을 것이다.   ―八院- 西行詩抄 3,  조선일보, 1939.11.10      이 작품은 4편의 중 세 번째 작품으로 ‘나이 어린 계집아이’의 비참한 모습을 그리고 있어 앞에서 예로 든 과 맥락을 같이 한다. 어린 나이에 집을 떠나 ‘내지인 주재소장’의 집에서 고통스러운 식모살이를 하면서 손등이 얼어 터지고 밥 짓고 걸레질을 하는 아이, 삼촌이 살고 있다는 ‘자성’이라는 먼 곳을 찾아 가는 어린 계집아이는 곧 가족 공동체가 파괴되어 버리고 방황하는 유이민의 삶의 모습을 대표적으로 드러낸다. 물론 이 시는 화자가 이처럼 식민지 현실의 모순을 깊이 인식하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극복하려는 굳은 의지는 보여주지 않는다. 모순의 현실을 객관적으로 제시할 뿐인 것이다. 이것은 백석의 시가 유년의 체험과 그에 대한 강렬한 향수에 보다 집착을 보이는 과거지향성격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이용악의 경우에도 유이민의 비극적 삶은 무엇보다 고향에의 상실감에 대한 독특한 시적 정서를 통해 아프게 전해지고 있다.   북쪽은 고향 그 북쪽은 여인(女人)이 팔려간 나라 머언 산맥(山脈)에 바람이 얼어붙을 때 다시 풀릴 때 시름 많은 북쪽 하늘에 마음은 눈감을 줄 모른다   ―北쪽, 시집 분수령, 1937   이 시는 앞에서 보아온 백석의 이나 과 비슷한 주제를 다룬 작품이다. 자신의 고향이 위치한 ‘북쪽’은 ‘여인이 팔려간 나라’이고 시름이 가득한 나라로서 도저히 마음을 안정시킬 수가 없는 공간이 된다. 비극적 상황 그 자체로서의 이러한 고향의 이미지는 다른 한 작품 에서 ‘날로 밤으로/왕거미 줄치기에 분주한 집/마을서 흉집이라고 꺼리는 낡은 집/이 집에 살았다는 백성들은/대대손손에 물려줄/은동곳도 산호관자도 갖지 못했니라’라는 표현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결국 정처 없는 유이민의 방황이 시작되고 그러한 삶의 공간에서 비극적 상황은 더욱 악화될 수밖에 없게 된다.   우리집도 아니고 일가집도 아닌 집 고향은 더욱 아닌 곳에서 아버지의 침상(寢床) 없는 최후(最後)의 밤은 풀버렛소리 가득 차 있었다.   노령(露領)을 다니면서까지 애써 자래운 아들과 딸에게 한 마디 남겨 두는 말도 없었고 아무을만(灣)의 파선도 설룽한 니코리스크의 밤도 완전히 잊으셨다 목침을 반듯이 벤 채   다시 뜨시잖는 두 눈에 피지 못한 꿈의 꽃봉오리가 깔앉고 얼음장에 누우신 듯 손발은 식어갈 뿐 입술은 심장의 영원한 정지(停止)를 가르쳤다. 때늦은 의원(醫員)이 아모 말 없이 돌아간 뒤 이웃 늙은이 손으로 눈빛 미명은 고요히 낯을 덮었다   우리는 머리맡에 엎디어 있는 대로의 울음을 다아 울었고 아버지의 침상 없는 최후의 밤은 풀버렛소리 가득 차 있었다.   ―풀버렛소리 가득 차 있었다, 시집 분수령, 1937   이 시는 러시아를 넘나들며 상인으로 삶을 꾸려가고자 했던 한 조선인 아버지의 비참한 최후를 주된 내용으로 하고 있다. 시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금을 얻기 위해 소금을 싣고 러시아 영토를 넘나들며 장사를 하였던 사실을 되새길 때, 그리고 그가 10세도 안 되어 아버지를 여의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 작품은 어느 누구의 작품보다 체험적인 감동이 진하게 안겨온다. 그런데 아버지가 ‘우리집도 아니고 / 일가집도 아닌 집 / 고향은 더욱 아닌 곳’ 에서  ‘침상 없는 최후’를 맞이했다는 점은 곧 당대 유이민의 비극적인 삶과 운명을 대표하는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사례는 이라는 다음 작품에서도 은유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부분이다.   ― 긴 세월을 오랑캐와의 싸움에 살았다는 우리는 머언 조상들이 너를  불러 ‘오랑캐꽃’이라 했으니 어찌 보면 너의 뒷모양이 머리채를 드리운 오랑캐의 뒷머리와도 같은 까닭이라 전한다. ―   아낙도 우두머리도 돌볼 새 없이 갔단다. 도래샘도 띠집도 버리고 강건너로 쫓겨갔단다. 고려 장군님 무지무지 쳐들어와 오랑캐는 가랑잎처럼 굴러갔단다.   구름이 모여 골짝 골짝을 구름이 흘러 백 년이 몇백 년이 뒤를 이어 흘러갔나.   너는 오랑캐의 피 한 방울 받지 않았건만 오랑캐꽃 너는 돌가마도 털메투리도 모르는 오랑캐꽃 두 팔로 햇빛을 막아 줄게 울어 보렴 목놓아 울어나 보렴 오랑캐꽃.   ―인문평론, 1939.10   작품은 일제의 수탈로 말미암아 오랑캐 땅으로 쫓겨난 유이민들의 비극적 삶을 ‘오랑캐꽃’이라는 자연물을 통해 상징적으로 잘 그려내고 있다. 즉 오랑캐의 피 한 방울 받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꽃의 형태가 오랑캐의 머리 모양을 닮았다는 외형적인 유사성 때문에 오랑캐꽃이라 불리는 사연과 함께, 일제의 가혹한 탄압으로 인해 그 옛날의 오랑캐나 다를 바 없는 비참한 신세로 전락해 버린 민족의 처지를 동일시함으로써 꽃송이 하나에서 민족의 비극적인 현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마감 연에서 ‘울어 보렴 목놓아 울어나 보렴’이라는 부분에 와서 폭발되고 말 때, 우리는 디아스포라로서의 존재의 궁극에 대한 허무감마저 느낄 수 있을 것이다.   2) 유년적인 평화   윤동주의 작품에서는 특히 동시를 중심으로 유년적인 평화에 대한 그리움은 아주 짙게 배여나오고 있다.   눈우에서 개가 꽃를 그리며 뛰오   ―개   모두 해야 13자밖에 안 되는 시지만 독자들에게 주는 미감은 매우 충만되어 있다. 우선 개와 꽃의 관습적인 ‘대립관계’를 조화롭고 필연적이기까지 한 것(꽃을 그리다)으로 만듦으로써 ‘꽃’에 상대한 ‘개’의 부정적 이미지를 변용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꽃이 아름답다거나 개가 곱다는 설은 성립될 수 있다. 그러나 꽃과 개가 직결되는 긍정적인 형용은 여간한 상상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시에서는 개가 꽃을 그림으로써 꽃의 아름다움과 개의 ‘아름다움’이 같은 미감을 산생할 수 있는 동질의 것으로 되어 버렸다. 여기서 당시 배경과 시인의 경력을 좀 더 살피기만 하면 화자 밖의 것(개-꽃)에 대한 그러한 동경과 찬미 속에 다른 시적 분위기가 내재해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시를 쓴 해, 시인은 자신이 다니던 평양숭실학교 폐교(3월), 고종 송몽규의 구금, 문초(일제경찰에 의해 4~8월), 부친의 포목상경영의 어려움 등 여러 가지 불운에 접하였다. 이러한 배경적 요인을 감안할 때 이 시에서 흐르는 평화와 아름다움 뒤에는 개인적 또는 사회적인 고뇌가 잠재하고 있었을 것이다. 달리 말하여 개의 행동에서 아름다움(꽃)을 발견할 수 있은 데는 시인의 예리한 혜안과 함께 내적인 고뇌를 자연과에의 동경, 합일로써 잊으려 했던 시인의 또 다른 시적 기법이 작용한다 하겠다. 다른 방면 동시에 부상되는 아름다움을 자연에 대한 시적 기분의 평화로움과 풍요함 및 작시자세의 경쾌함은 인간적으로 아름다운 양심과 신조를 지녔고 시인으로서 진실과 선량, 미에 충실했으며 사회인으로서 세상을 밝게 맞을 수 있는 내세에의 드팀없는 확신을 갖고 있었던 윤동주의 시관 중 밝고 명랑한 부분을 내비치는 것이 된다.   산골짜기 오막살이 낮은 굴뚝엔 몽기몽기 웨인연기 대낮에 솟나 감자를 굽는 게지 총각애들이 깜박깜박 검은 눈이 모여 앉아서 입술에 까맣게 숯을 바르고 옛이야기 한 커리에 감자 하나씩. 산골작이 오막살이 낮은 굴뚝엔 살랑살랑 솟아나네 감자 굽는 내 -
1774    "내 령혼이 내 말 속으로 들어간다"... 댓글:  조회:3956  추천:0  2016-11-09
중국 장애인 예술단(中国残疾人艺术团) ㅡ‘천수관음(千手觀音)’공연... 고통의 바닥/이창화  연도는 없고 2월 25일이라 쓴 메모장에서 ‘내 영혼이 내 말 속으로 들어간다’라는 문장을 발견하고 나는 어떤 충격을 받는다. 물론 그 문장은 내가 쓴 것은 아니다. 소설 「좁은 문」의 주인공이 한 말이다.  그 당시의 노트에서는 이런 말들이 맴돈다.  꽃이 말을 한다  나를 잊지 마세요  잊지 마세요라는 말을 잊는다  꽃은 나를 잊고  나는 잊은 것을 잊는다  그리고 지난 3월 아직 부활하지 않은 예수를 생각하는 기간 동안, 고통 속에 예수를 벽에 걸고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하는 상념에 빠져 들었다. 인간의 고통의 한계는 과연 어디까지일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시를 고통으로 여기든 즐거움으로 여기든 시는 쉬운 과정을 밟아 태어나지는 않는다. 2월과 3월 그리고 아직 4월의 중턱쯤 나는 고통의 바닥을 느꼈다고 감히 생각했고 그 느낌을 표현하고 싶었던 것 같다.  들판에 쓰러진 허수아비  ‘내 영혼이 내 말 속으로 들어간다’  좁은 문만 남기고 성문을 닫은 바람의 성  그는 너무 오래 바람의 성 밖에 있었다  그는 이제 그의 말이 없어져 평화롭다  까맣게 타들어간 가슴 밑 하얀 배  아무것도 없이 황폐한 거기  마른 나무 한 그루에 매달린 눈동자  사랑도 타인에게서만 느끼는  육신이 없는  예수 까마귀  나는 예수 까마귀라는 말을 놓치지 않으려 했다.  그리고 내가 놓지 않고 꼭 쥐고 있었던 어떤 사랑의 고리들을 떠올렸다. 다시 쓰기 시작했다.  예수 까마귀  나는 찌를 놓지 않는 물고기다  가보지 않은 곳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그를 놓아주지 않는다  때를 놓친 두려움 때문에 세상의 찌를 놓지 않는  나는 그에게는 아주 낯선 물고기이다  ‘내 영혼이 내 말 속으로 들어간다’  내가 뱉은 말들이 내 뒤를 따라와 나를 밀어내  나는 그로부터 너무 멀리 와 있다 이제  저 좁은 문으로 들어갈 시간이다  나는 너무 오래 바람 속에 살았다  까맣게 타들어간 들판에  바람이 낸 하얀 길 곁  마른 나무 한 가지에 매달려  사랑도 타인에게서만 느끼는  육신이 없는  예수 까마귀가 나를 바라본다  그와 나 서로 말을 잊은 지 오래 되었으니  때를 잊은 건 아주 잘 한 일이다  모든 것의 때는 없다  찌를 놓아도 좋다는 신호다  문이 스르르 열렸다는 신호다  예수의 고상을 보며 그가 내 영혼을 관리하고 있다고 느끼면 때로 나는 자유롭지 못한 인간이 아닌가 하고 의심이 가기도 한다. 그렇다고 내가 그의 율법에 맞게 아주 올바르게만 살아왔다는 뜻은 아니다. 내 영혼이 연약하여 그의 도움 없이는 살 수 없다는 생각이 들 때 나는 그런 나를 못마땅하게 여길 정도로 불손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  그럴 때 나에게 다가오는 시련은 가장 낮은 곳에서 자신을 겸허하게 더 낮춰야만 나의 진실을 볼 수 있고 그래야만 그가 내게 손을 뻗치고 있는 것이 보이는 것이다. 까맣게 타들어간 그의 가슴이 저 들판처럼 넓다는 것을 느끼고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의지했던 것처럼 나도 그 하나에 불과한 아주 미미한 존재라는 것을 느낄 때 나는 비로소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어딘가 잘못 들어선 것같으면 길을 버리고 또 잘못인 것같으면 고치고 정작 어떤 게 최선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기에, 또 아주 최초의 생각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은 또 너무도 진리로 가는 지름길이기도 하다는 것이 요즈음 모든 시행착오 경험에서 얻은 교훈이기에 대충 이 정도에서 무엇인가를 전달할 수 있다고 믿어 보았다.  그에게로만 집중시키는 단순 구조보다는 나와 그 사이에 관계를 만들어, 시를 보는(읽는) 데 좀 편안해지도록 재구성해 보았다. 영혼의 세계를 시로 표현하고 싶었던 욕심 때문에 너무나 힘들었던 게 결국 종교와 관계되는 것같은 감을 주는 건 바람직하지 않지만 나에게 있어 예수에 대한 친밀감은 이상하게도 종교적이라기보다는 고뇌의 인간으로 보였던 것이다. (이창화)  쭑90년 『문학과 의식』 신인상 등단. 시집 『유리에게』가 있다   =============================================================================   저녁눈 ―박용래(1925∼1980)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말집 호롱불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조랑말 발굽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여물 써는 소리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변두리 빈터만 다니며 붐비다      눈을 좋아하면 어린이, 눈을 싫어하면 어른이라는 말이 있다. 그런데 이 시는 예외다. 박용래의 ‘저녁눈’을 읽으면 어른들도 눈이 오기를 기다리게 된다. 눈이 오지 않을 때 읽으면 마음에 눈이 오는 듯하고, 눈이 올 때 읽으면 내리는 눈을 음미할 수 있다. 얼핏 보면 단순하고 밋밋해 보인다. 길이도 참 짧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붐비다’라는 구절이 약간씩 변용되면서 총 네 번 반복된다. 반복되고는 끝이다. 그런데 이 반복과 약간의 변화가 범상치 않다.     반복되는 구절은 힘이 매우 세서 읽는 이를 번쩍 들어서는 ‘늦은 저녁의 눈발’ 아래 세워 놓는다. 처음에는 ‘와, 눈이 오는구나’ 생각하다가 이내 눈, 눈, 눈들을 자세히 바라보게 된다. 눈은 어느 곳에나 공평하게 내리는데 유독 잘 보이는 부분이 있다. 먼저, 호롱불 밑에는 빛을 받은 덕에 눈발들이 더욱 잘 보인다. 그 옆에 매여 있는 조랑말로 시선을 옮겼는데 발굽보다 눈발이 먼저 보인다. 여물 써는 소리는 저녁, 호롱불, 마구간의 정취를 더욱 진하게 만든다. 걸음을 더 옮겼더니 변두리의 공터가 나왔다. 여기야말로 눈발을 보기 가장 좋은 곳이다. 빈터를 가득 채우듯이 눈발은 바람과 함께 이쪽저쪽 휘저어가면서 빠르게 떨어진다. 천천히 펑펑 내리는 함박눈이라면 “붐비다”라는 표현이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물기가 많아 빨리 떨어지는 눈, 바람을 타고 몰아치는 눈이어야 ‘바쁜 눈’이 될 수 있다. 그 눈을 맞으면 어깨는 더 빨리 젖을 것이다. 스미는 물기를 느끼며 시인은 오래도록 눈을 바라보고 있다. 이 시는 더할 곳도 없고 뺄 곳도 없는 명작으로 알려져 있다. 1969년에 발표되었을 당시에 탁월함을 인정받아 제1회 현대시학상을 받기도 했다. 소설가 이문구가 선배 박용래 시인을 회상하는 글에서 가장 먼저 외웠던 작품도 바로 이 작품이다. 필요 없는 것을 탈탈 털어냈는데 남은 것이 이토록 아름답다. 많은 것, 복잡한 것이 항상 좋은 것은 아니다.     
1773    詩는 감각과 정신을 제거한 무아에서 령감을 얻어 詩作해야... 댓글:  조회:3468  추천:0  2016-11-09
[ 2016년 11월 09일 01시 28분 ]     절강(浙江)성 선거(仙居)현 신선거(神仙居) 풍경구는 세계 최대 규모의 화산 유문암(流紋巖) 지형으로 풍부한 경관이 집중. 관음암, 여래상, 영객산신(迎客山神), 장군암, 수미인(睡美人), 십일설비폭(十一泄飛瀑, 폭포) 등 100여 개의 볼거리,  [ 2016년 11월 09일 01시 28분 ]     절강(浙江)성 선거(仙居)현 신선거(神仙居) 풍경구ㅡ  2016년 11월 09일 01시 28분 ]     @@ 절강(浙江)성 선거(仙居)현 신선거(神仙居) 풍경구   [ 2016년 11월 09일 01시 28분 ]   ===절강(浙江)성 선거(仙居)현 신선거(神仙居) 풍경구 시상의 포착과 영감-2  시인이란 그 자신의 감각을 잃어버리고 정신도 그 내부에서  잃어버려 무아적인 상태가 될 때 영감을 받아 비로소 시작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확인할 수 있는 바와 같이 플라톤은 영감을 받는 것을 시창작과  정의 첫단계로 인식하고 있으며, 영감은 시인으로 하여금 시를 쓰게 하  는 원동력으로 기능한다는 주장이다. 그리고 시작 과정의 처음부터 전  과정에 걸쳐 영감을 떠나 시를 창작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뮤즈  또는 신의 능력이나 계시와 같이 외부에서 오는 어떤 힘으로 영감을 상  정하고 그 외부적인 힘에 의해 수동적으로 작품을 창작해야 한다는 입  장은 현대에 이르러서도 나타난다. 대표적인 예는 스테판체프나 긴즈버  그의 견해를 들 수 있다.  전통적으로 시적 영감은 창조의 필수 전제조건인 바, 그것은 신비로  운 것, 완전히는 알 수 없는 것으로 여겨져 왔다. 개념 규정을 어떻  게 하고 그 연원을 어디로 하든 영감은 외부세계와 접촉하고 심리세계  에서 일어나는 반응으로서 감정과 달리 발전 변형된 감정이며 창조 과  정의 초석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누구나 수긍할 수 있도록 객관적으로  해명하기는 대단히 어렵기 때문에 ‘신’을 끌어들이고 신비롭다거나 알  수 없는 능력으로 치부되어 왔다.  그 연장선에서 부르스터 기셀린의  기술은 주목할 만하다. 많은 예술가들의 창조활동에 대한 수기와 기록들  을 수집하고 분석하여 설득력을 확보하고 있는 부르스터 기셀린을 인용  한 이상섭은 최초에는 무형하고 혼돈스럽고 무질서한 어떤 세력에의 충  동을 질서 있게 형상화하는 작업이 곧 창조라고 했다. 무형하고 혼돈  스럽고 무질서한 세계는 곧 눈앞의 현실이며 그 편린들이 복합된 우리  들의 심리세계이기도 하다.  이 세계에 어떤 충동으로 인하여 질서를 부여하고  형상화하는 작업이 곧 창작과정이다. 창작과정과 관련하여 이상  섭은 ‘충동’이란 용어를 그대로 인용하고 있지만, 이는 첫단계에서 중요  한 기능을 하는 영감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대체로 창조는 어떤  막연한 혼란된 흥분, 일종의 동경, 접근해 오는 해결에 대한 일종의 육  감, 또는 전언어적 예감에서 시작된다는 기셀린의 주장이 이를 뒷받침한다.  여기서 ‘접근해 오는 해결에 대한 일종의 육감’ 또는 ‘전언어적  예감’이라 칭했지만 이제까지 잠정적으로 명명했던 영감과 내용이 동일  하다. 단지 표현과 어휘가 다를 뿐이다. 또 이와 대동소이한 견해를 지  닌 영국 시인 스티븐 스펜더는 비유적 표현을 쓰고 있다. 즉 낱말의 소  나기로 응결되어야 할 희미한 관념의 구름이라 하는데, 이러한 구름  은 이성적인 노력이나 의지로 피워 올릴 수 없으며 소나기로 쏟아지게  할 수도 없다는 주장이다.  이때의 의지란 일반적인 의미에서 계획을 짜고  그것을 실현시키기 위해 일정한 규범에 자신의 행위를 종속시키는  능력을 말한다. 시인의 자발적인 정신작용이거나 능력에 의해서 시를  창작하는 것을 부정하고 외부로부터 오는 알 수 없는 힘―논자마다 그  명칭이나 표현을 달리하고 있지만 영감이라는 개념으로부터 멀지 않  은―에 의해 시인은 시를 창작한다는 주장은 플라톤 이래 현대까지 꾸  준하게 제기되어 왔다.  영감을 외부에서 오는 알 수 없는 힘으로 인식한 사람들이 있기도 하  지만 이와 상대적으로 인간의 내부로부터 흘러나온다고 주장한 사람들  도 있었다. 장 콕토는 영감을 인간이 실제 체험했던 여러 가지 경험적  인 요소가 한 순간에 어떤 창조의 힘으로 나타나는 것19)이라 말한 바  있다. 또 막스 에른스트는 최면 상태의 무의식적인 표현으로 보았고, 르  네 위그도 무의식의 어떤 것으로 설명했다.  무의식의 발견으로 문학의 여러 가지 문제를  새롭게 해석하는 경지를 개척하게 되는데 이와 같  은 견해는 심리학의 도움이 적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사실 명칭과  표현, 그 연원에 대한 주장을 달리하고 있지만, 또 영감이 내부에서 발  생하든 아니면 외부로부터 들어오든 간에 명쾌하게 설명하기 어려운  ‘영감을 받고 접신을 한’ 것과도 같은 심리적 상황은 분명히 존재한다.  예측할 수 없는 순간의 심리적 상황, 그 체험은 시인들이 일반적으로  겪는 현상이기 때문에 부정하기 어렵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시창작 과  정에서 시인들은 외부세계의 자극으로 일어난 일차적 감정과 변별되는  이 특수한 감정을 시의 핵심으로 삼는다. 이는 시구절로 발전하며, 시의  한 행, 하나의 연으로 확대 심화된다. 나아가 이를 중심으로 시는 구조화된다.  무의지의 상태와 의지 상태는 서로 대립을 보이고 후자가 전자를 통  제하는 경우가 자주 생기곤 한다. 그래서 의지를 완전히 제거하고 무의  지만을 활용하려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찰스 길던의 지적처럼 분별력  (judgment) 없이는 상상력(fancy)이 야생적으로 날뛰고 궤도에서 벗어  난다. 비록 신고전주의 시대 미학에 입각한 견해이긴 하나 과도한 감  정과 상상력의 과잉을 선도할 규제는 분명 필요한 요소임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예술창작은 확실히 무의식․무의지와 필연적 관련을 갖고 있  으나 또한 확실히 그것은 의식․의지의 세계를 향한 현명한 발언이기  때문이다. 창조적 질서를 알아볼 수 있게 형성하는 데는 의지․ 무의  지의 배타적 대립이 아니라 그 둘의 보다 높은 차원에서의 화합이 필요  한 것이다.  무의식의 발견으로 문학연구에 신기원을 이룬 프로이트는 인간의 정  신세계를 자아․초자아․무의식으로 구분하여 고찰했다. 허버트 리드는  프로이트와 융의 심리학을 창작과정 연구에 적용하기도 했는데, 그 이  론에 기초하여 예술현상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예술작품은 정  신의 각 영역과 관련을 맺고 있다. 예술은 그 에너지와 부조리성  (irrationality)과 그 신비한 능력을 무의식으로부터 얻는다.  무의식이야 말로 소위 영감의 근원으로 간주할 수 있다.  예술작품은 자아에 의해서  그 형식적 종합과 통일이 주어진다.” 단적으로 말해서 자아는 무의식의  무질서한 분출물을 질서 있게 종합하는 일을 하고 초자아는 거기에 도  덕적․사회적 방향을 결정해준다는 것이다. 무의식은 정신의 심층부  에 있는 에너지의 원천으로 자아와 초자아의 통제를 받는다. 무질서하  고 의식적으로 통제하기 어려운 정신작용에 질서와 통일성을 부여하는  기능을 자아가 수행하는 것이다.  이는 무의식과 자아, 그리고 초자아와  의 관계와 기능에 관한 기술인 동시에 영감을 외부세계로부터 오는 알  수 없는 능력으로 보았던 것과는 달리 인간의 내부 심리세계에서 비롯  되었다는 주장이다.  현대 심리학의 영향으로 보아야겠지만 조지훈이나 김춘수도 영감의  근원을 무의식에서 찾는다.  지훈은 영감이 무의식의 경이에서 비롯된  다고 기술하고 있으며, 김춘수도 영감은 그러니까 잠재의식의 세계로  부터 온다. 이것이 바로 시를 낳게 하는 발상의 동기가 된다고 기술  하고 있는 것이다. 비록 사용하는 어휘와 표현이 다르지만 시의 원동력  으로 작용하는 영감의 근원은 동일하다. 과거 플라톤 시대나 낭만주의  시대와 달리 현대에 이르러 영감의 출처는 외부 세계로부터 온다는 인  식이 불식되었다. 곧 영감의 근원을 인간의 내면 심리세계에서 찾는 현  상이 지배적이다.  ===================================================================       갈등 ―김광림(1929∼) 빚 탄로가 난 아내를 데불고 고속버스 온천으로 간다 십팔 년 만에 새삼 돌아보는 아내 수척한 강산이여 그동안 내 자식들을 등꽃처럼 매달아 놓고 배배 꼬인 줄기 까칠한 아내여  헤어지자고 나선 마음 위에 덩굴처럼 얽혀드는 아내의 손발 싸늘한 인연이여 허탕을 치면 바라보라고 하늘이 저기 걸려 있다     그대 이 세상에 왜 왔지 ―빚 갚으러 부부의 인연이란 하늘이 정해준 것이라지만 그 하늘이 원망스러운 때도 있다. 맺어진 부부의 연에는 악연도 있고, 좋은 연이라고 해도 항상 좋은 일만 있는 것도 아니다. 이 시에 등장하는 부부가 바로 부부의 인연을 한탄하는, 그런 복잡한 사정에 놓여 있다.     아내는 빚을 졌고, 남편에게 숨겼다. 숨겼다기보다는 가슴이 두근거려 말을 못했겠지 싶다. 혼자 감당해 보려고 애도 썼을 것이다. 그런데 남편이 알게 되었다. 그리고 아내와 함께 온천으로 갔다. 아이러니한 결정이 아닐 수 없다. 남편 입장에서 볼 때 아내는 원망스러운 사람이다. 그래서 헤어질 마음으로 마지막 여행을 나섰는데 온천이라니. 온천은 아내와의 심리적 갈등을, 아내의 육체에 남아 있는 세월의 흔적으로 바꾸어 주는 장소이다. 여행지에서 낯설게 재발견한 아내의 몸은 자식들을 등꽃처럼 낳아준 등나무였고 끊을 수 없는 칡이었다. 남편은 ‘갈등’으로서의 아내가 자신이 진 빚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아내와 함께 빚을 갚아 나가기로 결심한다. 당신도 나도 빚을 갚는 것이 인생이라는 마지막 말에 진한 감동이 전해져 온다.   
1772    작문선생님들께 보내는 편지; 시에 젖은 아이들은 아름답다... 댓글:  조회:4262  추천:0  2016-11-07
      [도서관 활용수업] 시에 젖은 아이들은 아름답다 - ➋ 시집 읽기, 나만의 시와 시구 찾기, 두레시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 「풀꽃/나태주」 “차렷! ‘풀꽃’ 시작~” 시작 종이 울려 퍼지자 도서관에 미리 올라와 두레별로 자리를 찾아 앉은 아이들은 국어부장의 신호에 따라 한목소리로 시를 읊는다. 스스로 한 송이 풀꽃이 되어 아니, 양지바른 운동장가 모데기로 피어나 한꺼번에 작은 꽃망울을 터트리는 풀꽃들이 되어, 몸을 흔들어대며 시 인사를 나눈다. 시 수업을 열며 아이들과 함께하는 도서관 활용수업의 첫 시간은 아이들에게 다양한 시집을 안겨주고 오롯이 함께 읽는 일이다. 춘천 시내 학교로 발령받아 나오기 전, 홍천군의 시골학교에서는 아예 일주일에 한 번은 두 시간 연강수업으로 시간표를 짜서 도서관수업으로 활용하곤 했다. 잔잔한 음악과 함께 두 시간 동안 아이들은 시집에 푹 빠져서 간간이 웃음을 터트리며, 눈시울이 살포시 붉어지기도 하며 저마다의 감상에 젖어 시 읽기에 빠져들곤 했다. 선별된 시집들을 다양하게 갖춰야 작년부터는 사서도우미 선생님이 전담인력으로 배치되면서 도서관을 지켜주시는 덕분에 그나마 도움을 받을 수 있어서 다행스럽기도 했다. 수업이 시작되기 전 책상 위에는 다양한 시집들이 미리 준비되어 있다. 『국어시간에 시읽기 1,2,3』 『국어교과서 작품읽기 중1 시, 중2 시』『재미로 읽는 시』 『내 무거운 책가방』 『난 빨강』 『선생님과 함께 읽는 우리 시 100』 『청소년, 시와 대화하다』 『국어선생님의 시 배달』 등. 그리고 서가의 앞쪽에는 시 수업을 위해 특별히 배려하여 배가 위치를 이동시킨 시인들의 단행본 시집들을 열람하기 좋은 위치에 미리 정리를 해두었다. 자칫 아이들에게 개인적으로 시집을 준비시키는 경우 서점가에 무더기로 전시되어 공허하고 비현실적인 사랑, 이별, 눈물 따위의 얄팍한 감상성만으로 청소년들의 건강한 정서와 세계관을 오도하는 시집류를 들고 오는 경우가 있는데,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도 도서관엔 선별된 시집들을 갖출 필요가 있다. 시 수업을 위해 아이들의 책상 위에 특별히 준비해주는 시집들은 여러 권으로 넉넉하게 구비하는데, 상황에 따라서는 두레별로 같은 시집을 읽고 생각과 느낌을 나누는 효과도 있다. 교과서 시 외에는 제대로 시집을 접해보지 않은 중학생들에게는 한 시인의 단행본 시집보다 여러 시인들의 다양한 작품을 엮은 시집 읽기가 더욱 흥미와 관심을 끌었다. 각자 책상 위에 준비된 시집을 한 권씩 선택하여 한 시간 이상 집중하여 읽도록 하면 아이들은 도서관의 가장 편안한 자신만의 공간을 찾아 자리를 잡는다. 햇살이 드는 창가에, 푹신한 소파에, 혹은 구석진서가에 등을 기대고 앉아 저마다의 상상의 세계로 빠져든다. 잠시 소란하던 아이들의 마음에 조용한 음악이 흐르고, 시가 흐르고, 그냥 그대로의 따사로운 분위기가 스며들 때, 아이들의 모습은 정말 아름답다. 굳이 도서관 활용수업이라는 거창한 구호가 아니더라도 단 한 순간만이라도 아이들의 자유로운 영혼이 아늑하게 쉴 수 있는 곳이 라면 도서관은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존재 의미가 있지 않은가. 나를 사로잡은 시가 네 마음에도 새겨지길 자유롭게 시집 읽기가 끝나면 본격적인 탐구활동에 들어간다. 한 시간 동안 읽은 시집에서 가장 인상 깊게 읽은 ‘나만의 시 10편 뽑기’이다. 준비한 활동지를 나눠주고 시 제목과 시인을 쓰고, 옆에는 간략하게 뽑은 이유, 인상적인 이유를 함께 정리하도록 했다. 시집에 따라 주제별로 분류된 경우는 각 주제에서 한 편씩 뽑도록 권장한다. 더불어 ‘내 마음을 울린 시구’를 찾아 별도로 정리한다. 시구 모음은 예쁜 색상지에 또박또박 옮겨 사서도우미 선생님께 제출하면 방과 후에 간단히 코팅한 후 책갈피를 만들어 간직하게도 하고, 특별히 좋은 시구들은 컴퓨터로 인쇄한 후 여유 있게 코팅하여 도서관에서 책을 대출하는 아이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때로는 1층부터 도서관에 이르는 계단의 굽이마다에, 교실과 화장실의 눈에 띄는 공간마다에 산뜻한 색상지에 멋스럽게 인쇄하여 전시하기도 했다. 그저 무심히 지나치는 순간에도 누군가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시구가 또 다른 아이의 마음속에 새겨지길 바라면서…. 학급시 정하고 함께 낭송하는 즐거움 ‘나만의 시 10편 뽑기’ 개인별 탐구활동이 끝나면 2차 활동지와 함께 각자 선정한 열 편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시 세 편을 선정하도록 하고, 세 편 중에서 다시 최종 ‘나만의 낭송시’ 한 편을 정하도록 한다. 이어서 5~6명이 한 두레를 이루는 두레활동으로 각자가 최종적으로 뽑은 시를 서로 소개하고 토의하여 두레시 세 편을 뽑도록 한다. 그리고 두레원이 함께 낭송할 두레시 한 편을 마지막으로 뽑으면 된다. 두레별 토의활동이 정리되면 분위기를 새롭게 하고 두레별로 뽑은 시를 소개하는 시간을 갖는다. 두레원 모두가 함께 일어나 시를 낭송하도록 하고 나머지 두레원들은 시를 감상하며 마음속으로 학급시를 정해보도록 한다. 때때로 아이들은 무작정 자기 두레의 시를 뽑는 경향이 있으므로 자기 두레시를 제외한 다른 두레시에 의견을 표시하도록 하여 세 편을 뽑고, 다시 최종 한 편을 토의하여 학급시가 정해진다. 학급시는 학급원들이 시시때때로 함께 낭송하며 자연스럽게 학급의 애송시가 되고 나아가 암송시가 된다. 국어시간은 물론 조·종례 때도 함께 낭송하다보면 저절로 암송하게 되어 시암송 대회까지 준비하게 된다. 음미해봐… 왜 이 시가 네 가슴에 와 닿았는지 시집 읽기를 바탕으로 하여 탐구활동으로 펼친 개인별-두레별-학급시까지 정하고 나면, 2단계 활동으로 가장 인상적인 ‘나만의 애송시’를 골라 다음 시간에 이어질 시낭송회 및 비평회를 준비하며 활동지에 정리하도록 한다. ◆ ‘나만의 애송시’ 한 편을 선택한다. ◆ 천천히 생각하고 음미하면서 시 전문을 또박또박 옮겨 쓴다. ◆ 왜 이 시가 자신의 가슴에 와 닿았는가. ◆ 시의 화자는 지금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가. ◆ 현재 시의 화자의 마음 상태는 어떠할 것으로 짐작되는가. ◆ 나의 지난 시절에 시적 화자와 비슷한 경험은 없었는가. ◆ 이 시에서 잘 되었거나 독특하다고 생각하는 표현이나 생각을 찾아보라. ◆ 이 시에 아쉬움이 있다면 무엇인가. 탐구 및 토의 활동으로 정리한 활동지는 간단히 확인 도장을 찍어준다. 각자 파일철에 보관하도록 하고 시비평회를 위한 활동지는 좀 더 보완한 후, 선택한 시를 소리 내어 다섯 번 이상 낭송해보고, 가능하면 자료를 보지 않고 말할 정도로 연습할 수 있도록 격려한다. 특별히 낭송할시에 어울리는 배경음악을 개인적으로 준비하는 경우는 미리 음악파일을 제출하여 도서관 컴퓨터에 저장해 두도록 한다. “얘들아, 다음 시간은 시낭송과 시비평 시간이야. 서로 감상을 나누는 시간이니 성심껏 준비하렴.” 2학년 아이들이 학급시로 정한 시를 한목소리로 읊어대며 도서관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선다. 우리나라 꽃들에겐 설운 이름 너무 많다 이를테면 코딱지꽃 앉은뱅이 좁쌀밥꽃 건드리면 끊어질 듯 바람불면 쓰러질 듯 아, 그러나 그것들 일제히 피어나면 우리는 그 날을 새봄이라 믿는다. - 「우리나라 꽃들에겐/김명수」  
1771    詩는 삶의 구석구석에 숨어 있다... 댓글:  조회:3987  추천:0  2016-11-07
5만명이 함께 광장무를...기네스세계기록 경신 [ 2016년 11월 09일 08시 58분 ]     11월, 7일 오전, 천진, 북경, 상해, 무한, 제남(濟南) 등 14개 도시의 부동한 곳에서 50085명이 함께 광장무를 추면서 최대 규모 라인댄스의 기네스세계기록을 세웠다.   보르헤스, 문학을 말하다 This Craft of Verse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박거용 옮김, 르네상스                우리는 시를 향해 나아가고, 삶을 향해 나아갑니다. 그리고 삶이란, 제가 확신하건대 시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시는 낯설지 않으며, 앞으로 우리가 보겠지만 구석에 숨어 있습니다. 시는 어느 순간에 우리에게 튀어나올 것입니다. (11쪽)      예술의 세계에서 '그것을 아는 것'과 '그것을 행하는 것'은 종종 전혀 다른 궤도를 돌기도 한다. 시를 쓰는 것과 시를 아는 것, 그림을 그리는 것과 그림을 아는 것, ... ... 이 둘은 서로 연관되어 있지만, 때로 다른 세계를 지칭한다. 그래서 어떤 예술가들은 자신이 위대한 작품을 쓰거나 그리고 있음을 알지 못한 채 죽기도 한다. 현대에 있어서는 아르튀르 랭보나 반 고흐가 대표적인 경우일 것이다.    우리가 안다고 할 때는 그것을 행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고 여기지만, 예술의 세계에서는 안다는 것은 그것을 못한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문학 전공자인 나에게는 작품을 내 기준으로 선별하기 시작했을 때, 거의 습작을 포기하게 되었다. 이런 사람들은 꽤 많아서, 이들의 공통점은 형편없는 작품이나 만들어내면서 작가라며 으스대는 이들을 역겨워하는 이름없는 아웃사이더가 되며 진정한 작가들의 충실한 지지자가 된다.     루이스 호르헤 보르헤스. 이 이름 앞에 무슨 말을 더 덧붙일 것인가. 20세기 후반의 가장 위대한 시인이자 소설가였던 그는, 시력을 완전히 잃어버린 1967년과 68년에 하버드대학교에서 여섯 차례의 문학 강의를 진행한다. 녹음테잎으로만 있던 이 강의자료가 십 여년 전 발견되고, 보르헤스의 육성 강의를 그대로 글로 옮겼고, 얼마 뒤 이 책이 나온다. 그 때 2000년이었다.   그 자신 스스로 위대한 작가였던 보르헤스는 문학의 전통(역사) 앞에서 한없이 고개 숙이며 그것의 참 의미에 대해 소곤거린다. 위대한 문학 작품들의 지지자가 되며, 그 작품이 어떻게 존재하고 읽히는가에 대해 설명한다. 어쩌면 어떤 것이 진정한 문학인가를 알아차리는 순간, 더 깊이 문학 속으로 들어가야만 했다. 그것이 무척 어렵고 힘겨운 일이라고 할 지라도 말이다. 그리고 보르헤스는 자신의 문학 너머 거대하기만 문학의 역사 속으로 여행을 떠난다.    보르헤스는 하버드대학에서의 그 여섯번 강의를 통해, '시라는 수수께끼', '은유', '이야기하기', '번역', '사고와 시', '한 시인의 신조'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는 이 때 이미 볼 수 없었기 때문에, 생각나는대로 기억하는대로 강연했다. 보이지 않는 청중들을 위해서. 그런데 이 책을 읽는 동안, 그는 이 원고를 어떻게 준비했을까, 이 강의를 들었던 사람들은 얼마나 행복했을까 하는 생각에 잠기고 만다. 보르헤스, 그는 작가이기 이전에 진정한 작가들의 지지자였으며, 성실한 독자였고, 호기심 가득찬 눈으로 도서관 서가 사이를 배회하던 소년이었다.    보르헤스는 이 짧았던 강연을 통해 놀랍도록 우아하고 아름다운 시의 세계로 우리를 안내한다. 소설이 아니라 서정시와 서사시의 세계로. 보르헤스는 정작 소설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지만, 이 강연에서 그는 시인의 면모를 드러냄과 동시에 문학의 저 세계로 우리를 이끌고 여행을 떠난다. 소설이 등장하지 않았다고 서운해하지 말기를. 그는 위대한 이야기꾼들과 저 서사시의 전통에 대해서 이야기하니까.       With ships the sea was sprinkled far and nigh,  Like stars in heaven  - Wordsworth    (바다에는 배들이 멀리 또 가까이 뿌려져 있네,  하늘의 별처럼)      대학 시절, 아니 이제까지 내가 들었던 그 어느 문학 수업도 보르헤스의 이 강연록보다 아름답지 못했다. 그 많던 작가들의 수업이나 강연을 들었으나, 그들 대부분 시들을 암송하여 들려주지 못했다(암송했던 이는 두 분 있었는데, 한 분은 시인이며, 한 분은 내 예술사선생님이셨다). 더구나 시 행간 사이에 숨겨진 의미를 고대에서부터 끄집어내어 지금으로 가지고 오는 이도 없었다. 이런 수업을 들을 기회가 없었다는 학생의 비극이다.(하긴 이런 수업을 할 수 있는 이 보르헤스 말고 누가 있으랴)     She walks in beauty, like the night    바이런 저 싯구는 그 자체로 아름답다. 번역하지 않아도. 보르헤스는 서로 다른 언어를 오가며, 시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한다. 어떤 시어들이 가지는 아름다움은 특정 언어에서 더욱 부각된다고.    대학을 졸업한 후 듣게 된 수업에서 예술사 선생님께서 바이런의 싯구를 강의 중간에 암송하셨을 때, 그 아름다움을 미처 몰랐다. 실은 대학 시절 다양한 언어를 오가며 위대한 문학의 가치와 아름다움을 배울 수 있어야만 했다. 그러기엔 내가 너무 지적으로 무능했고 내가 다녔던 대학과 그 대학 교수들 대부분은 위대한 문학을 가르치기에 적당하지 못했다.    보르헤스의 이 책을 문학과 시에 대해 궁금한 모든 이들에게 추천한다. 그리고 철부지 비평가들과 문학을 사랑하지 않는 학자들에게 놀아난 '문학의 위기'가 보르헤스의 저 짧은 책 안에서 어떻게 무너지는가를 깨닫게 될 것이다. 이 세상에 사랑이 사라지지 않듯 시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왜냐면 시는 사랑이니까.                     
1770    그는 그람이라는 칼을 집어 두 사람 사이에 놓았다... 댓글:  조회:4131  추천:0  2016-11-07
보르헤스와 성(性)의 문제 송 병 선 1. 들어가는 말      보르헤스의 무덤에 새워진 묘비에는 흥미로운 비문이 적혀 있다. 이 비문을 새긴 사람은 아르헨티나의 에두아르도 론가토(Eduardo Longato)로 알려져 있는데, 이 글은 북구의 고대 언어와 보르헤스의 문학을 아는 극소수의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묘비에 적힌 시구는 13세기 노르웨이 사가(saga)인 폴숭가 사가의 27장에서 인용한 “Hann tekr sverthit Gram ok/leggr i methal theira bert”라는 글이다. 이것은 “그는 그람이라는 칼을 집어 두 사람 사이에 놓았다”라는 뜻이다. 보르헤스는 이 글을 『모래의 책』에 수록된 「울리카」의 헌사(獻辭)로 사용하는데, 이 시구는 주인공 지구르트가 브륀힐트와 사흘 밤 동안 침대를 함께 쓰던 대목을 지칭한다. 지구르트는 브륀힐트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두 사람 사이에 칼을 놓는다. 그리고 이 시구 아래에는 “울리카에서 하비에르 오타롤라까지”라는 말이 새겨져 있는데, 이 이름들 역시 「울리카」에 나온다. 그들은 보르헤스 작품 속에서 유일한 러브스토리의 주인공들이다.       유명 인사의 비문에는 그의 대표적인 말이나 그의 사상을 함축할 수 있는 글귀가 새겨지는 법이다. 그런데 보르헤스의 비문에는 왜 이런 글이 새겨져 있을까? 흔히 유명 문인들은 그들의 문학과 더불어 극적인 삶으로 인해 후세에게 감동을 주거나 영향을 끼친다. 그러나 보르헤스란 이름을 떠올릴 때, 우리는 그의 격정적인 삶을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문학성만을 떠올린다. 특히 모든 문인들의 관심사인 남녀간의 사랑의 문제는 보르헤스 작품을 연구할 때 논외의 대상이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실제로 보르헤스의 문학은 관념론이나 형이상학적 측면, 혹은 포스트모더니즘에서 관심을 보이는 미로나 진리의 상대성 혹은 카오스의 개념과 같은 것들만이 관심을 많이 끌었을 뿐, 남녀의 사랑에 존재하기 마련인 에로스의 문제는 관심에서 제외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이런 이유로 보르헤스는 지적인 작가로만 치부된다.       그런데 보르헤스가 남긴 수많은 명언들 중에서 왜 자신의 사랑 체험을 고백한 유일한 작품이라는 「울리카」의 글귀만이 비문을 장식하고 있는 것일까?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사실 폴숭가 사가에 적힌 말은 두 남녀가 에로스의 유혹을 이김으로써 남들과 차별화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울리카에서 하비에르 오타롤라까지”라는 말은 그가 에로스의 유혹에 굴복하여, 사랑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를 깨닫는다는 것을 함축하고 있다. 흔히 보통 사람들은 젊었을 때 사랑을 꿈꾸거나 갈망하다가 노년이 되면 관조의 입장을 취하는 법이다. 그렇다면 보르헤스는 「울리카」와 같은 후기 작품을 쓸 때서야 비로소 성(性)에 눈을 뜬 것인가?      보르헤스의 전기를 쓴 마리아 에스테르 바스케스(María Esther Vázquez)에 의하면, 그의 사랑 편력은 보통은 아니었다. 그는 문학 모임에서 만난 많은 여자들을 사랑했다. 특히 왈리 센너(Wally Zenner), 하이디 랑쥐(Haydée Lange), 실비나 불리히(Silvina Bullrich), 엠마 리소 플라테로(Emma Risso Platero), 에스텔라 칸토(Estela Canto), 피피나 디엘(Pipina Diehl), 수사나 봄발(Susana Bombal) 등과 사랑에 빠졌다(Vázquez 170). 이것은 현실 속의 보르헤스가 남녀간의 사랑에 관심이 없었던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즉, 그도 보통 사람과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대표 작품들 속에는 성(性)의 문제가 드러나지 않다가 갑자기 후기 작품에 드러나는 이유는 무엇이며, 그것은 과연 그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이 글에서는 바로 성(性)이 그의 작품에 어떻게 나타나는가의 문제뿐만 아니라, 그것이 그의 글쓰기와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2. 목적에서 수단으로: 초기 작품 속에서의 에로스       에로스의 추구는 인간의 기본적인 관심사이다. 그러나 보르헤스의 작품 속에서는 흔하게 등장하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런 것이 집중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이지, 산발적으로는 많은 작품 속에서 나타난다. 특히 초기 시에서는 남녀간의 육체적인 만남이 주요 주제중의 하나로 다루어지고 있다. 이런 것은 그의 작품을 대단히 지적이며 형이상학적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독자들에게는 상당한 충격으로 다가올 수 있다.      보르헤스의 첫 번째 시집인『부에노스아이레스의 열정』은 에로스에 관한 보르헤스의 초기 태도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는 여러 시를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것들 중에서 그 어느 것도 열정적으로 성을 찬양하지는 않는다. 단지 슬픈 과거의 기억이나 현재의 열정을 단편적으로 보여주고 있을 따름이다. 「기념비」(Trofeo)에서 시인은 과거의 사랑했던 여인에 관해 말한다. 나는 영원한 하루동안 당신의 아름다움을 지켜본 관객이었네 (47)      C. G. 에게 받친다는「토요일」(Sábados)에서 보르헤스는 다시 한 여인을 두고 “당신 육체의 찬란한 흰빛”이라고 회상한다. 그러면서 그녀에 대한 생각이 바뀐 것이 놀랍다는 듯이 이렇게 말한다. 당신 어제는 단지 아름다웠을 뿐인데, 오늘은 나의 모든 사랑이 되었네 (46)      그러나 로버트 리마에 따르면, 에로티즘에 대한 젊은 시인의 태도를 가장 확실하게 보여주는 것은 「불길」(Llamarada)이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열정』초판에 수록되었다가 후에 삭제된 이 시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눈을 감은 채 육신의 절정에 빠져들고 싶은 바램으로 우리는 얽히고 설킨 육체의 고난으로 빠져들고 (Lima 408)      이 시구는 성의 희열을 발견하기 직전의 상태를 보여준다. 이제 시인은 관음적인 기쁨에서 만족하지 않고 한 여인의 육체를 소유한 연인으로 발전한다. 그러나 육체적 사랑은 허무한 것이 되고 만다. 웃음과 마찬가지로 그것은 순간적으로 왔다가 사라지며, 단지 우리의 눈먼 욕망만을 남겨둔다. 시인은 이런 육체적 사랑 속에서 환멸을 느낀다.       비극의 주인공처럼 시인은 감각적 능력을 지녀야 한다. 그러나 보르헤스는 성행위의 나쁜 점만을 인식할 뿐, 그런 사랑이 얼마나 큰 비밀을 지니고 있는지는 발견하지 못한다. 보르헤스가 육체적 사랑에 대해 불만족스럽게 여긴다는 사실은 그가 앞으로 사랑에 관해 가질 태도를 결정하는 주요인이 된다. 이것은 특히 『정면의 달』(Luna de enfrente)에 수록된 「사랑의 예감」(Amorosa anticipación)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시인은 사랑을 나눈 후 잠이 든 여자의 무력한 모습을 보며 이렇게 그녀의 귀에 속삭인다. 아직도 신비스럽고 말이 없는,  소녀 같은 당신의 몸 ........ 나의 품안에서 잠을 이루지 못하는 당신의 꿈을 바라보는 것처럼... (59)      그는 잠이라는 은유를 통해 이미 지나간 사랑의 행위를 떠올린다. 그러면서 “꿈의 사죄(赦罪)로 다시금 기적처럼 처녀가 된”(59)이라고 지적하면서, 사랑의 환희가 제공하는 순간적인 현실을 뛰어넘어, 보다 고차원적인 것으로 나아간다. 그는 전율하는 사랑의 행위가 썰물처럼 빠져나간 모습을 다른 각도로 조명하면서 다음과 같이 애매하게 말한다. 아무말 없이 당신의 마지막 해안을 바라보리 그러면 하느님이 당신을 보듯이 사랑도 없이, 나도 없이 시간의 허구에서 벗어난 그대를 다시 처음으로 바라볼 수 있으리 (59)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시인 보르헤스가 육체적 사랑 뒤에는 무력한 여자의 몸만이 남는다는 것을 깨닫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보르헤스는 육체의 한계를 넘어 지적인 수준으로 나아가는 것이 시인의 임무라고 인식하게 된다. 다시 말하면, 순간적인 육체의 열정이나 쾌락을 버리고, 관조적 상태로 나아가는 것이다. 「사랑의 예감」의 끝부분에서 보르헤스는 사랑을 예찬하지만, 에피쿠로스적인 관능적 쾌락보다는 플라톤적인 관념론적 즐거움이 지배적이다.      이후 보르헤스는 육체적 사랑을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사용하게 된다. 우리 자신을 육체의 환희 속에 빠지게 하려는 젊은 날의 욕구는 너무나 인간적인 것이지만, 그런 행동은 보르헤스의 작품 속에서 중단되고, 그것은 관조적 상태로 대치된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에로티시즘은 차별화 되고 지성화되며 추상화된다. 즉, 이후에 씌어진 보르헤스의 작품 속에서 관능적인 요소들은 형이상학적 목적을 향한 수단으로 탈바꿈하는 것이다.      사랑의 순간적인 쾌락에 만족하지 않는 보르헤스의 입장은 특히 「베일에 가린 거울」(Los espejos velados)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1927년경 나는 그늘진 여자를 알았다. 처음으로 알게된 것은 전화를 통해서였다. 훌리아는 이름도 얼굴도 없이 목소리로 나에게 다가왔던 것이다. 그런 다음 해가 질 무렵 거리 모퉁이에서 보았다. 그녀는 놀랄 정도로 큰 눈과, 검고 반지르한 머리칼과 늘씬한 몸매를 지니고 있었다. (786)      여기에서 훌리아의 육체에 대한 묘사는 매우 간략하고 객관적이며, 따라서 보르헤스가 관능적인 것을 넘어서서 형이상학적인 목적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부분에서 유일하게 감정적인 것은 ‘놀랄 정도로’라는 단어뿐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녀의 눈이 생소할 정도로 크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쓰였을 뿐이다. 그리고 나머지 특성은 그녀에 대해 작가가 어떻게 느꼈는지를 보여주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화자는 훌리아의 냉담함에도 불구하고 그녀에게 매력을 느낀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오후에, 그리고 몇 번은 밤에 우리는 동네를 함께 걸어다녔다”(786). 그러나 이 매력을 잘못 해석해서는 안 된다. 그들의 빈번한 만남은 성적인 호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 둘 사이에는 사랑도 없었고, 사랑을 꿈꾸지도 않았다. 나는 그녀 안에서 어떤 열렬한 것을 느꼈지만, 그것은 성적인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나는 성적인 것을 두려워했다.(786)      여기에서 “두려워했다”는 객관적이고 외부적인 관찰자의 태도와는 전혀 틀린 내적인 감정 상태를 보여준다. 훌리아는 관능적인 존재일 뿐만 아니라 난해한 존재로 공포감을 스며들게 하면서 매력을 풍기는 존재이다. 이런 딜레마 속에서 화자는 성관계의 가능성을 배제하지만, 결국 훌리아의 매력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그리고 육체적 사랑에 대한 그들의 동의는 형이상학적 의미를 지닌 관계로 발전하게 된다. 이렇게 에로티시즘은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된다. 3.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에로스:『픽션들』부터 『브로디의 보고서』까지       에로티시즘에 대한 보르헤스의 냉정한 태도는 그의 단편 작품에서도 계속된다. 대표작으로 꼽히는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테르티우스」에서 화자인 보르헤스는 거울과 성교를 혐오스런 것으로 언급한 친구 비오이 카사레스의 말을 떠올린다. 그들은 이 말의 출처를 찾기 위해 백과 사전을 뒤지지만 결국 찾지 못한다. 그러나 다음날 비오이 카사레스는 전화를 걸어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고 말한다. 그노시스파의 어느 사람은 눈에 보이는 우주란 환영(幻影)이거나 보다 정확하게 말해서 궤변이라고 생각했다. 거울과 부성(父性)은 혐오스런 것이다. 그것은 가시적인 우주를 증가시키고 번식시키기 때문이다. (432)      여기에서는 성교란 말이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부성이란 말을 통해 그가 암묵적으로 그런 것을 비난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비오이가 처음에 떠올린 말이 부성이 아니라 성교였던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 기인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보르헤스는 에로티시즘에 반대 입장을 취하고 있었기에, 부성에 내포된 성교가 역겨운 것임을 작품을 통해 전파시키려고 했다고 생각될 수도 있다. 하지만 보르헤스는 부성 자체보다도 쾌락과 번식만을 추구하는 이기적인 성행위를 비난하고 있다고 이해하는 것이 옳을 듯하다.       또한 「원형의 폐허」에서도 독신자인 이교도 사제는 성행위 없이 부성을 획득하는데 성공한다. 즉, 육체적 행위가 아닌 정신적 행위를 통해 새로운 생명을 창조한다. 이렇게 「원형의 폐허」는 역설적으로 일반적인 믿음과 달리 생식은 교접 없이도 이루어진다는 것을 가정하고 있다. 따라서 부성은 성교가 수단으로서 제거될 때에는 바람직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보르헤스는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테르티우스」에서 말한 그노시스트의 의견을 부정하지 않는다. 정신적 생식이란 엄청난 노력을 기울이는 극소수의 사람만 얻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보르헤스는 성(性)에서 희열과 생식의 기쁨을 제거 한 후, 그것을 비성(非性)적인 기능으로 탈바꿈시킨다. 이 개념의 하나는 바로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테르티우스」에서 나타난다. 여기에서 화자는 “성교라는 환희의 순간에 모든 사람은 동일한 사람이다”(438)라고 설명한다. 이렇게 그는 개인적인 느낌을 통해 전체를 동일하게 파악한다. 객체와 전체가 동일하다는 개념은 「전체와 무」(Everything and Nothing)에서 강조된다. 셰익스피어는 “자기가 찾고 있는 것이 인류의 태초의 의식에 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6월의 기나긴 낮잠을 자는 동안 앤 헤서웨이가 시작한 것을 포기하고”(803) 만다. 그리고 “... 런던의 술집이나 여자집에서 자기 육체의 운명을 수행하는 동안”(803)이라는 문구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육체를 이용해 자아를 찾으려고 한다.「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테르티우스」에서 전체의 동일성은 성을 통해 순간적으로만 경험되며, 따라서 진정한 동일성이 상정하는 불변성의 조건을 만족시키지는 못한다. 셰익스피어는 무한하게 인간에게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을 찾고 있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육체관계는 동일성 이상의 것을 제공하지 못한다. 그것은 ‘불변성’이란 형이상학적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만 사용되기 때문에 환멸적인 것이 되고 만다.      성교를 비성(非性)적인 목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엠마 순스」에서 가시적으로 드러난다. 이 작품은 여자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보르헤스의 몇 개 안되는 작품 중의 하나이다. 그녀는 아버지의 죽음에 관해 생각하면서, 자기 아버지를 모함하여 자신의 죄를 덮어버린 횡령자 아론 로웬달에게 복수할 생각을 한다. 아론 로웬달의 모함으로 인해 순스는 브라질로 도망쳐야 했으며, 그곳에서 더러워진 자기의 이름이 깨끗해질 수 없음을 알자, 절망한 나머지 자살을 했던 것이다. 엠마는 아버지의 자살을 야기한 원인으로 로웬달을 지목한다. 그녀는 밤새 잠을 설치면서 어떻게 해야 자기와 자기 아버지의 적을 죽일 수 있는지 궁리한다. 엠마의 소망은 전통적인 방법인 살인으로는 충족되지 않는 것이었다. 그녀는 자기 아버지의 죽음을 복수하고, 자기가 살인범으로 구속되지 않은 채 자기의 목숨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한다. 이런 엠마의 목적을 만족시킬 수 있는 것은 단 한가지밖에 없었다.      아침이 되자 그녀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녀는 횡령자를 죽일 것이지만, 로웬달이 자기 아버지의 이름을 욕되게 했듯이, 그의 이름에 오점을 남기기로 한다. 그녀의 계획은 간단했다. 즉, 공장 노동자들의 파업에 대한 정보를 제공한다는 명분으로 로웬달을 방문해서, 그가 죽어야 할 이유를 설명한 다음에 죽여버리고 나서, 그가 자기를 강간하려는 순간 정당방위 차원에서 죽였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엠마는 “4월이면 그녀는 만 열 아홉 살이 될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남자들에 관해 거의 병적일 정도의 두려움”(565)을 느끼고 있었다. 이유가 밝혀지지 않은 이런 공포증에도 불구하고, 엠마는 자기 계획을 실행에 옮긴다. 그날 저녁 출항할 배는 그녀의 계획에 알맞은 남자를 제공해 주기에 충분했다. 이 선원은 후에 자기가 그날 그녀를 소유했다고 증언할 수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두서너 개의 바에 들어가서 일상적인 것들, 그러니까 다른 여자들이 손장난하는 것을 보았다. 마침내 그녀는 노르취채르난 호의 승무원들과 마주치게 되었다. 그들 중 아주 젊은 한 사람에게서 그녀는 어떤 애정 같은 것을 느꼈다. 그래서 그녀는 순순한 공포심이 약해지지 않도록 다른 남자를 선택했다. (566)      상스럽고 거친 선원은 미로와 같은 복도와 계단 통해 그녀를 침실로 인도한다. 그곳에서 엠마는 처음으로 고통스런 성교를 하게 된다. 그녀는 자기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저질렀던 끔찍스런 일을 이제는 이 선원이 자기에게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별 놀라움 없이 그렇게 생각하고는 그 즉시 흥분 속으로 도피했다..... 혼자 남아있게 되었을 때, 엠마는 즉시 눈을 뜨지 않았다...... 공포심이 그녀의 육체가 느끼는 슬픔과 역겨움 속으로 사라졌다. 역겨움이 슬픔이 그녀를 칭칭 동여매고 있었지만, 엠마는 천천히 일어나 옷을 입기 시작했다. (566)      그녀가 순결을 받친 것은 쾌락이나 번식을 위해서가 아니라, 선원과 엠마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도구였다. “엠마가 그에게 사랑의 도구인 것처럼, 그는 엠마에게 도구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의 쾌락을 위해 봉사하고 있었고, 그는 그녀의 정의를 위해 봉사하고 있는 것이었다” (566)      엠마가 자기의 순결을 로웬달에게 주었다면, 그녀가 마음먹었던 목적을 이룰 수 없었을 것이다. 반면에 그녀의 공포심은 두말할 나위 없이 그런 상황에서 더욱 커졌을 것이고, 그녀는 영원히 그를 자기를 강간한 사람으로 기억할 것이었다. 엠마가 원한 것은 로웬달을 제거하는 것이었지, 자기가 구상한 계획과 어긋나게 그를 영원한 존재로 만드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익명의 스칸디나비아 선원은 그녀의 계획을 위해 필요한 역할을 수행했던 것이다. 엠마는 그를 찾았고, 그의 성욕을 비성(非性)적인 목적을 위해 사용했으며, 그의 목적이 이루어지자 잊혀질 수 있는 존재가 되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그와의 성교는 목적을 위한 수단이었다. 선원은 엠마에게 전혀 중요한 존재가 아니었다.      이런 준비 작업이 끝나자, 엠마는 자기의 계획을 본격적으로 진행한다. 그녀는 몇 시간 후 로웬달의 사무실에 도착하여, 두려움에 질린 것처럼 위장한다. 그러자 로웬달은 마지못해 그녀를 위해 물 컵을 찾으러 나가고, 그녀는 그의 책상 속에 숨겨져 있던 권총을 꺼낸다. 그가 돌아오자 그녀는 주저 없이 두 번이나 권총을 발사한다. 아론 로웬달 앞에서 엠마 순스는 자기 아버지의 복수를 하는 것도 급하지만, 그 사람 때문에 받은 치욕을 벌하는 것이 더욱 급하다고 느꼈다. 그녀는 일일이 그를 모욕한 후에, 그를 죽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567)      그러나 로웬달이 죽지 않고 계속해서 욕을 퍼붓자 엠마는 그의 입을 잠재우기 위해 세 번째로 총을 쏜다. 엠마는 자기의 희생자가 죽은 이유를 알았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녀는 피에는 피로 대하라는 함무라비 법전에 의거해 총을 쏘았다. 이렇게 그녀가 처녀를 잃으면서 흘린 피는 그녀가 로웬달에게 흘리게 만든 피를 속죄하는 성격을 띠고 있었다.      이렇게 로웬달을 처형하자, 엠마는 용의주도하고 냉정하게 범죄를 저지른 현장을 정리하고, 시체의 웃옷 단추를 풀었으며, 피가 튄 코안경을 빼서 서류철 위에 놓는다. 그렇게 해서 그녀가 미리 준비한 가상의 스토리를 확인할 수 있도록 만든다. 그리고 전화로 경찰서에서 전화를 걸어 이렇게 설명한다. “믿을 수 없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로웬달 씨는 파업을 핑계삼아 나를 오라고 해서... 나를 겁탈했고, 그래서 나는 그를 죽였습니다.”(568) 살인을 저지르기 얼마 전에 순결을 잃어버린 그녀의 육체는 그녀의 말이 사실임을 증명하는 최후의 증거로 사용된다. 그리고 보르헤스가 이 작품의 말미에 적고 있듯이, 그녀의 말투는 사실이었고, 그녀의 증오와 치욕도 사실이었다. 남자의 잔인한 성적 탈취로 여자가 누명을 쓴 여자의 이미지는 이미 우리를 감동시키기에 충분하다. 그래서 그녀의 말은 모든 사람이 쉽게 수용한다. 엠마는 “성적(性的) 정의”라는 것을 통해 비성적인 목적을 달성한다. 에로티시즘은 그녀의 아버지와 그녀가 감당해야 했던 치욕을 복수하기 위해 사용된다.      이런 주제는 『브로디의 보고서』에 실린 첫 번째 작품인 「침입자」에서도 나타난다. 이 작품에서 말하는 ‘침입자’란 훌리아나를 뜻한다. 두 형제들은 모든 재산을 공동으로 소유하면서 끈끈한 형제관계를 유지하던 중, 형인 크리스티안이 정부(情婦)이자 애인인 훌리아나를 데려온다. 그러자 이웃들은 두 형제들이 카인과 아벨처럼 끝맺을 것이라면서 생각한다. 그러나 훌리아나의 요기(妖氣)가 그들의 평화에 위협적인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크리스티안은 자기 동생 에두아르도가 그녀에게 반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자기의 재산을 동생과 함께 소유하기로 결정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여기에 훌리아나와 함께 있도록 해. 그리고 원한다면, 저 애를 사용해도 좋아”(1026) 여기에서 여자는 황소처럼 물건에 불과할 뿐이다. 두 형제는 그녀의 욕망과 감정은 철저히 무시한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형제애였다. 그러나 두 사람은 훌리아나를 사랑하고 있었고, 그녀를 공동으로 소유하면서 질투를 느끼면서 자주 말다툼을 벌이게 된다. 그날 밤부터 그들은 훌리아나를 함께 소유했다... 그런 협정은 몇 주 동안은 아주 잘 이루어졌다... 거칠고 힘든 변두리에서 남자들은 여자가 자기 생애에 중요하다는 생각을 말하지도 않았고, 또한 다른 사람들도 입에 올리지 않았다. 그것은 여자에 대한 욕망과 소유욕을 넘어선 것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사랑에 빠져 있었다. 어떤 식으로든 이것이 바로 그들을 창피하게 느끼도록 만든 것이었다.(1026)      형제애를 되찾기 위해 형제들은 훌리아나를 창녀 집에 팔아버리고, 몸값으로 받은 돈을 함께 나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정기적으로 창녀 집에 들러 훌리아나와 사랑을 나눈다. 그들은 각자 상대방이 비밀리에 이런 행위를 하고 있음을 알게 되자, 다시 훌리아나를 사서 이전의 계약대로 행한다. 그러나 여자를 공동 소유한다는 것은 다시 형제애를 불편하게 만든다. 그래서 그녀의 성적 침입이 두 사람간의 사이를 깨뜨리지 못하게 하기 위해, 크리스티안은 훌리아나를 죽인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자신 속에 내재한 성적 ‘악마’와 맞서 싸운 것이었다. 그는 성적인 관계보다 형제애를 택한다. 보르헤스에게 이런 선택은 당연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성관계보다 형제의 관계가 더욱 중요했기 때문이다.      이 형제들도 이런 사실을 인정한다. “그들은 거의 울먹이며 서로를 껴안았다. 이제 그들은 또 다른 유대관계에 의해 하나가 되었던 것이다. 즉 두 사람 모두 쓸쓸히 희생당한 여인과 그 여인을 잊어야만 하는 의무를 지고 있었던 것이다.”(1028) 따라서 육체적인 사랑은 폭력을 통해 형제애에 굴복하고 만다. 살인을 통해 성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은 성교를 중요치 않게 여기는 보르헤스의 관점을 엿보게 해 준다. 즉, 성교란 인간의 열등한 속성을 지니고 있으며, 따라서 이것은 보다 상위적인 것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만 작용하는 것이다. 이렇게 이 작품은 형제 관계를 재확인하면서 끝을 맺는다.       여기에서 다루어진 작품뿐만 아니라 「브로디의 보고서」「결투」「로센도 후아레스의 이야기」등에서도 보르헤스는 이성간의 육체 관계를 다룬다. 그러나 그의 작품에서는 동성연애나 비정상적이고 잔인한 성교 등은 눈에 띄지 않는다. 사실 보르헤스는 사회적으로 비정상적인 성관계라고 일컫는 것들을 모두 피하지만,『부에노스아이레스의 열정』에서『브로디의 보고서』에 이르기까지 ‘정상적인 성관계’를 다양하게 보여준다. 그러나 그는 성교라는 육욕의 짐승을 죽인 것이 아니라, 그것을 부속물로 사용하여 보다 고차원적인 목적을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4. 『모래의 책』: 에로스를 통한 시간과 공간의 극복      『모래의 책』에 수록된 「울리카」와 「의회」는 에로스가 보다 고차원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는 이전의 작품들과는 확연히 다른 면을 띠고 있다. 「울리카」는 콜롬비아의 로스 안데스 대학교 교수인 나이 지긋한 중년의 남자가 영국을 돌아다니던 중에 우연히 만난 노르웨이의 여자와 만나 짧은 사랑을 나누는 이야기이다. 한편『모래의 책』에서 가장 긴 작품인 「의회」는 비밀 조직에 관한 이야기를 서술하면서 가장 중요한 모티브로 사랑의 에피소드를 다루고 있다. 이 두 작품은 이전의 보르헤스 작품 세계와는 달리 사랑의 감상적(感傷的)인 면과 남녀간의 성관계를 매우 긍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울리카」에서 화자인 하비에르 오타롤라는 조용하고 신비스런 울리카를 만나자 자기가 사랑에 빠지게 될 것을 즉각적으로 예감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내 옆에 또 다른 사람이 있기를 원치 않았을 것이다”(Libro 27) 그녀 역시 그에게 관심이 있는 것 같았다. 이런 것은 “나이가 지긋하게 먹은 독신 남자에게 자청해서 주겠다는 여자의 사랑은 기대치 않은 선물과 진배없다” (Libro 28)라는 말에서 쉽게 간파될 수 있다. 하비에르 오타롤라는 지난날의 잃어버린 사랑을 회상하면서, 그녀가 어떤 조건을 붙이더라도 받아들이겠다고 마음먹는다. 그들은 서로를 지구르트와 브륀힐트라고 부른다. 이 작품은 헌사로 “그는 그람이라는 칼을 집어 두 사람 사이에 놓았다”라는 말을 하고 있지만, 그들은 그날 밤 절대로 따로 자지 않는다. 보르헤스는 이 대목을 이렇게 묘사한다. “어둠 속으로 백년만에 처음으로 사랑이 흘러들었고, 나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울리카의 이미지를 갖게 되었다”(Libro 31)      여기에서 보르헤스가 “울리카의 이미지를 갖게 되었다”라는 말은 두 사람이 성교를 통해 하나가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이것은 성교의 완성으로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초월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즉, 총체적인 경험이 성취되었으며, 말하는 주체 , 즉 경험한 순간과 그것을 말로 적는 순간의 차이가 없다는 것을 암시한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보스헤스의 글쓰기에서 주요 핵심은 경험의 순간과 글쓰기 순간의 커다란 간격을 인식하면서, 언어의 한계를 지적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울리카의 이미지를 갖게 되었다는 사실은 에로스의 문제가 그의 글쓰기 양식에도 변화를 가져옴을 뜻한다. 이런 면은 「의회」에서 보다 명확하게 드러난다.       「의회」에서 화자인 알레한드로 페리와 그녀의 새 애인 베아트리스의 사랑의 에피소드의 핵심은 바로 청혼을 하는 화자에 대한 그녀의 대답에 있다. 그녀는 프리섹스의 신봉자로서 “아무에게도 구속되길 원치 않았다”(Libro 55). 그러자 그는 즉시 시적인 황홀감의 격류 속에서 이렇게 말한다. 오! 밤이여, 오! 당신과 함께 보내는 따뜻한 어둠이여, 오! 숨겨진 강물처럼 어둠을 흘러 다니는 사랑이여, 오! 한 사람이 두 사람 되는 환희의 순간이여, 오! 너무 순결하고 순진한 환희여! 오! 우리 두 사람이 함께 되고, 함께 꿈속으로 빠져드는 결합은 행복하나이다, 오! 새벽의 여명이여, 나는 그녀를 지켜보고 있나이다 (Libro 55)      얼마 후, 그들은 지난겨울에 만났던 대영 박물관에서 작별을 고한다. 그리고 “편지를 기다리는 고통을 피하기 위해”(Libro 56) 그는 자기의 주소를 그녀에게 남기지 않는다. 비록 오랜 시간이 지나지만, 그들의 성적 결합은 단 하나의 환희의 순간이자, 단 하나의 밤이며, 단 하나의 여명이자, 단 하나의 꿈으로 상징화된다.      그런데「의회」의 마지막 부분에서 우리는 「알레프」와 유사한 장면을 발견하게 된다. 「알레프」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모든 언어는 상징들의 알파벳이며, 그 알파벳의 사용은 나와 대화를 하는 상대편들이 공유하는 과거라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런데 허우적거리는 이런 마음으로 어떻게 무한한 알레프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할 수 있을까? 신비주의자들은 상징에 의존했다. 가령 신성성을 뜻하기 위해 어느 페르시아 사람은 어찌 보면 모든 새를 대표하는 어느 새에 관해 말한다..... 아마 신들도 내가 이와 유사한 표현법을 발견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는 않을 것이다.(624-625)      「의회」에서도 이와 유사한 것이 베아트리스와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끝나면서 등장한다. 페리는 비밀 의회의 다른 회원과 함께 공유했던 경험에 대한 기억을 새기려고 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말이란 함께 공유된 기억을 필요로 하는 상징이다... 신비주의자들은 장미 한 송이, 한 번의 키스, 그리고 모든 새들을 의미하는 새 한 마리, 모든 별들과 태양을 상징하는 태양 한 개, 포도주면, 정원이나 성교와 같은 것을 떠올릴 것이다. 이런 메타포는 길고 길었던 환희의 밤을 이야기하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우리는 그날 밤이 끝나고 서광이 밝아올 무렵, 피곤했지만 행복에 젖어있었다...... 나는 수년 동안에 걸쳐 그날 밤의 맛을 찾아보려고 애썼다. 언젠가 나는 음악이나 사랑, 혹은 불확실한 기억 속에서 그날 밤의 기억을 되살렸다고 믿는다.. 그러나 되돌아오지 않았다. 단 한번 어느 날 새벽 꿈속에서 찾아왔을 뿐이다.(Libro 61-62)      표현할 수 없는 경험을 언어로 표현해야 한다는 문제는 이 두 작품에서 유사하게 제시되어 있지만, 경험의 내용과 본질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알레프의 신비적인 모습은 고독하고 차가우며 축소될 수 없는 것으로 그려져 있다. 따라서 여기에는 화자만이 느낀 충만한 순간을 회상하면서 그것을 언어로 설명하는 것이 어렵다는 사실이 지배적이다. 이것은 경험이 말로 표현할 수 없으며, 그 도구는 불완전하지만, 타인에게 설명을 하기 위해서는 이미 우리가 쓰고 있는 매체를 사용해야만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게 보르헤스는 자기의 경험을 문학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우리에게 접근하며, 거기에서 우리는 보르헤스와의 ‘공유된 기억’을 끌어낼 수 있다.       반면에「의회」에 표현된 환희의 밤에 있어서, 페리가 음악과 사랑을 통해 필사적으로 되찾으려고 추구했던 경험은 단지 꿈에서만 회복된다. 이것은 일상적 의미의 신비적인 것도 아니며 성적인 것도 아니다. 그의 마지막 경험, 즉 “내 평생에 단 한번 있었던 그 믿지 못할 사건”(47)으로 인식된 것은 추상적인 철학적 관념의 법규였으며, 그것은 “모든 세상”의 모든 것을 포함하고자 하는 비밀조직이었다. 그러나 이런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자, 세계 의회는 해체되며, “진정한 의회”는 아무런 목적도 없는 자연스럽고 본질적인 유기체임을 깨닫는다. “그 비밀스런 사건에 관해 유일하게 알고 있는 파수꾼”(Libro 37)으로써 페리는 약속을 깨뜨리고 그들의 이야기를 서술한다. 그러면서 베아트리스와 함께 보낸 밤을 회상하며 그녀의 이미지를 떠올리려고 한다. 페리는 베아트리스가 한 남자만을 사랑할 것을 거부한 베아트리스의 경험을 통해 공동의 경험이 개인의 관념을 능가한다는 사실을 배우게 된다. 이렇게 이 작품 전체에 울려 퍼지고 있는 아이러니는 바로 ‘의회’란 말의 의미는 ‘성적 결합’이라는 효과를 자아내고 있는 것이다.  5. 끝나는 말      보르헤스의 작품 속에 나타난 에로티시즘은 보르헤스의 태도가 초기부터 순수했던 것이 아니라 작품 전체를 통해 극적인 변화를 겪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 변화는 성관계가 목적이 되었다가,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되며, 후에는 진정한 성의 의미를 파악하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보르헤스의 대표작이라고 일컬어지는 『픽션들』과 『알레프』를 보면, 성적 열정은 무언가 모자라는 열등한 것이며, 심지어는 환멸적으로 보이기조차 한다. 이런 작품들 속에서 보르헤스의 글쓰기는 에로티시즘에 대한 새로운 태도를 반영한다. 즉 성교를 비성적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면서, 에로티시즘의 의미를 전복시키려고 노력한다. 그는 사랑을 찬양하지만, 육체적 열정이 보여주는 순간적이고 일회적인 측면에 분개한다. 그는 성관계가 보다 고차원적인 것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엠마 순스」에서 수단은 합리화된다. 그것은 바로 아버지에 대한 사랑과 정의에 대한 사랑이 주인공이 성관계를 갖게 만들기 때문이다. 반면에 「침입자」에서는 형제애를 간직하고 고양하는 것이 형의 마음속에 최고의 것으로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후기 작품인 『모래의 책』에서는 이런 태도가 다시 변화를 겪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성을 통해 그 동안 지녔던 추상적이고 철학적인 관념의 세계를 탈피하면서, 자신이 추구하던 형이상학적이고 언어적인 문제들의 해결책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는 이런 사실을 자연스럽고 본능적인 성을 통해서 깨닫게 된다. 이렇게 보르헤스는 늙은 나이에「울리카」와 「의회」라는 작품 속에서 마침내 성경험을 통해 그의 문학관념을 재점검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       흔히들 보르헤스의 후기 작품은 『픽션들』과 『알레프』의 반복으로 여겨진다. 그래서 많은 보르헤스 연구가들은 상대적으로 덜 관심을 보인다. 물론 그의 작품 세계를 포스트모더니즘에서 관심을 보이는 개념을 중심으로 살펴본다면, 위의 지적이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성’의 관점에서 살펴본다면, 그의 전 작품 속에서 항상 동일하게 사용되어 온 것이 아니라, 부단하게 발전되어 왔으며, 그것이 그의 문학관에도 많은 영향을 끼쳐왔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중남미문학기행8.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열기'  잠결에 어디선가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굉음이 들려와 눈을 뜬다.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새벽 3시. 그 요란한 소리는 규칙적으로 들려오고 잠에서 깨어나도 의식은 선명하지 않다. 두꺼운 커튼을 제치고 창문을 열어보니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가로는 주황색 나트륨등에 반사돼 번쩍거린다. 비에 젖은 가로 위로 섬광이 스치고 천둥소리가 요란하다. 사실 천둥소리에 고마워해야 했다. 악몽을 꾼 것이다.  꿈속에서 일어난 어처구니없는 절망적인 상황에 하도 기가 막혀 꿈속에서도 이건 꿈이려니 생각하고 두눈을 질끈 감은 채 도리질을 쳤더니 굉음 속에 다른 세상이 펼쳐진 것이다. 잠에서 깨어났지만 멀고 먼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있다는 현실이 실감나지 않는다. 이 또한 꿈이 아닐까. 다시 두눈을 질끈 감고 도리질을 치면 서울의 안방이 나오지 않을까. 눈 한번 꼭 감고 숨을 참으면 이승에서의 기나긴 삶조차 꿈이 되지 않을까.  현실과 환상 사이의 경계을 붙들고 20세기 세계문학의 흐름을 바꾸어 놓은 보르헤스의 혼이 덧씌운 것일지도 모른다. 그가 그토록 사랑했던 부에노스 아이레스이고 보면, 그의 영혼은 저승으로 떠나지 않고 이 어두운 새벽 거리를 배회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거리들은/ 어느덧 내 영혼의 중심으로 들어왔다네/ 분주함과 황망함에 넌덜머리나는/ 격정의 거리들이 아니라/ 나무와 석양으로 온화해진/ 아라발의 감미로운 거리,/ (……)/ 이런 모든 거리들은 영혼을 탐하는 이들에겐/ 행복의 약속이라네./ (…)/ 깃발처럼 거리가/ 사방으로 펼쳐지네/ 우뚝 솟은 내 시에서/ 그 깃발이 하늘을 펄럭이기를."('거리'에서)  보르헤스의 첫 시집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열기'는 그가 날마다 몇시간씩 산책을 했던 도시를 열정적으로 찬양하는 시편들이 수록돼 있다. 유럽의 이민자들이 대서양을 건너가 라플라타강 유역에 건설한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역사와 현주소를 나름의 애정을 곡진하게 담아 표현한 것이다.  그는 일천한 역사의 이 도시에 영웅적인 신화의 빛깔을 덧칠하고 싶어했다. 그가 수많은 시집들을 펴냈지만 정작 한국의 독자들에게는 시보다는 소설로, 그의 문학이론으로 더 많이 알려진 사람이다. 그의 대표적인 소설 '픽션들'과 '알렙'은 그를 세계적인 문호로 자리매김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작품들이기도 하다.  짧은 단편 '알렙'의 서두는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콘스티투시온 광장(제헌광장) 철탑광고판 이야기로 시작된다. 애인이 죽고 난 뒤 제헌광장 철탑광고판에 걸려 있던 블론드 담배필터의 광고가 어딘지 모르게 바뀌었다는 사실을 발견한 주인공은 '끊임없고 광활한 우주'가 이미 그녀에게서 떠났으며, 세상은 그녀가 없어도 무한히 변화할 것임을 서글프게 깨닫는다.  악몽의 기억에서 헤어나 대낮인데도 여전히 어두운 부에노스 아이레스 거리를 돌아다니다가 당도한 제헌광장의 철탑광고판은 안드레아니(ANDREANI) 우편회사 광고로 바뀌어 있었다. 현실은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부정형의 그 무엇인 것이다. 그러나 보르헤스는 2∼3㎝의 작은 구멍 '알렙'을 설정해 그 구멍을 통해서 모든 우주의 공간이 전혀 축소되지 않은, 무한한 사물을 동시에 총체적으로 볼 수 있는 환상을 제공한다.  이처럼 동시에 모든 것이 훼손되지 않은 채 완벽하게 한 점에 존재하는 환상은 마르케스에게도 영향을 미쳐 그의 위대한 작품 '백년 동안의 고독' 마지막 설정에 힌트를 주기도 했다.  국회의사당에서 대통령궁까지 이어진 Ƌ월 대로'를 걷는다. 이 대로는 항의집회 때의 단골 거리이기도 하고, 국가적인 행사가 있을 때 차량을 통제하고 기념식을 여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마침 컬럼버스데이를 맞아 대로 위에는 남미의 국기들이 펄럭이고 여기저기 노점상들과 구경나온 시민들로 가득하다. 지방 각지에서 올라온 이들이 자신들의 민속의상을 입고 퍼레이드를 준비하느라 여념이 없다. 이 대로는 군사정권 시절에 어디론가 끌려가 실종된 수만명의 행방불명자 유가족들이 단골 집회장소로 이용하는 곳이기도 하다. 보르헤스는 정치적으로는 보수주의자였고, 페론 정권에 비판적이었던 이유로 도서관장 직에서 해임되기도 했다.  보르헤스가 근무했던 시립도서관으로 간다. 시립도서관은 이미 이전됐고 그 자리에는 한때 보르헤스가 수장으로 있었던 아르헨티나작가협회가 들어서 있다. 그곳에서 만난 작가협회 도서관장 알베르토 킨타나(40)씨는 정작 보르헤스에 대해서는 특별한 호감을 표시하지 않았다. 그는 아직까지도 보르헤스의 영향을 받아 환상적인 경향의 작품들이 생산되기는 하지만 요즘 크게 두드러지는 것은 군사정권 시절의 아픔을 묘사하는 작품들이라는 얘기다. 실제인물을 소재로 소설보다 더 실감나는 다큐멘터리 형식의 작품들도 인기가 높다고 전한다.  진보와 보수의 잣대로 보르헤스를 평가하는 일은 무의미할 지도 모른다. 보르헤스는 "우리는 광적인 민족주의자, 광적인 반유대주의자, 광적인 공산주의자가 될 수는 있지만 광적인 보수주의자가 될 수는 없다"며 "보수주의자가 된다는 것은 인내와 체념을 요구하기 때문"이라는 묘한 논리로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설명하기도 했다. 이러한 입장 때문이었는지는 모르되 그는 이웃 국가 칠레의 독재자 피노체트가 주는 상을 덥석 받아 야유를 받기도 했다.  시내 중심가의 보르헤스 생가 자리에는 25년간 보르헤스를 연구해 온 사업가 알렉산드로 바카로(48)씨가 지난해 보르헤스 탄생 100주년을 맞아 사재를 털어 마련한 박물관이 있다. 보르헤스 증조부에 관한 자료에서부터 편지 책 사진들을 한자리에 모아놓은 곳으로 보르헤스의 체취를 느끼기에 충분한 곳이다.  국립도서관장에 임명되자마자 보르헤스는 애석하게도 눈이 멀어버렸다. 깨알같은 보르헤스의 글씨들을 보면 그가 애초부터 시력이 약했다는 사실이 실감난다. 그는 거대한 장서더미 속에서 맹인으로 인생의 후반부를 보내며 "책과 밤을 동시에 주신  신의 경이로운 아이러니, 그 오묘함"을 찬양하며 "신은 빛을 여읜 눈을 이 장서 도시의 주인으로 만들었다"고 노래했다.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역사가 가장 오래됐다는 5월 대로변의 카페 토로토니. 다시 밤이 되자 오래된 카페의 작은 무대는 탱고를 추는 남녀들로 열기가 뜨겁다. 관능적이고 격렬한 춤에 맞추어 반도네온의 애조띤 음색의 연주가 분위기를 돋운다. 이 도시 못지 않게 탱고를 사랑했던 보르헤스는 탱고의 가사를 직접 짓기도 했다. 환상과 현실 사이의 오묘한 실체를 찾아 '맹목'(盲目)의 허공을 부유하다 간 보르헤스. 그의 영혼도 이제는 그 모호한 실타래를 풀어헤치고 무대 위의 고혹적인 여자와 함께 안식을 얻고 있을까.  출전: 세계일보 2000년 12월 21일
1768    詩는 말을 넘어서 상징과 음악성속에 존재한다... 댓글:  조회:5559  추천:0  2016-11-07
    보르르헤스의 말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시인     1899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태어났다. 생전 그는『부에노스아이레스의 열기』『심문』『정면의 달』등의 시집,『불한당들의 세계사』『픽션들』『알레프』등의 소설집, 『영원의 역사』 등의 에세이집을 발표했다.   이 작품들은 세계의 주요 언어로 번역되었다. 그의 단편소설은 종종 박식한 에세이처럼 읽히고 에세이는 시처럼, 시는 짧은 이야기처럼 읽힌다. 보르헤스는 시와 산문의 구분이 무의미하다고 주장, 몇몇 시집에 산문을 포함하기도 했다. 실제와 상상이 뒤섞인 그의 작품들은 문학 / 철학사에 혜안을 제공했고 자크 데리다, 미셸 푸코, 움베르토 에코 등 걸출한 옹호자들을 낳았다.   1937년 부에노스아이레스 시립도서관에서 사서 경력을 시작했으나 페론을 비판하여 해고당했고, 페론정권이 무너진 뒤 아르헨티나 국립도서관 관장으로 취임했다. 1955년부터 조금씩 시력을 잃었는데, 그해는 앵글로 색슨어와 고대 노르드어를 공부하기 시작한 해로 이러한 정황들이 작품에, 특히 시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1961년에 국제출판인협회가 수여하는 포멘터(Formentor)상을 사뮈엘 베케트와 공동 수상했고,1971년에는 예루살렘상을, 1980년에는 스페인 국왕이 직접 수여하는 세르반테스상을 수상했다. 영국 여왕으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기도 했는데, 이로써 가장 친한 친구이자 존경하는 기사인 알론소 키하노와 동지가 되었다. 컬럼비아대학교, 옥스퍼드대학교, 파리대학교로부터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6년 6월, 여든여섯에 스위스 제네바에서 사망했다.       윌리스 반스톤(Willis Barnstone) 인디아나 대학 교수  '보르헤스의 말'을 엮은이. 인디아나대학교 비교문학 교수이자 시인, 철학자. 미국 구겐하임재단 연구원을 지냈으며, 저서로 숨겨진 성서』『하느님의 시The Poems of Jesus Christ』 등이 있다. 말년의 보르헤스와 많은 시간을 함께하며 문학, 철학, 정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서창렬 번역자 연세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했다. 옮긴 책으로 『축복받은 집』『저지대』 『엄마가 날 죽였고, 아빠가 날 먹었네.』『토미노커』『이곳이 아니라면 어디라도』『제3의 바이러스』『암스테르담』『촘스키』『벡터』『쇼잉 오프』 『마틴과 존』 『구원』 등이 있다.     책 소개     “보르헤스의 생각이 기록으로 남아 있다는 게 우리에게는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작가 보르헤스가 말년에 나눈 대화를 묶은 책이다. 애초 이 책을 소개할 수 있을까 걱정하기 시작했는데,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과연 이 책을 소개해도 되는 걸까 싶은 의구심에 사로잡혀 여전히 빠져나오지 못했다. 그의 작품이 “미로와 수수께끼로 가득하고, 심지어 짓궃은 속임수도 있다”는 평을 듣듯, 그가 “이 세상의 많은 것들에 늘 당황하고 깜짝 놀”라듯, 그의 말을 읽고 듣는 독자도 마땅한 출구를 찾지 못해 당황하기 십상이다. “보르헤스를 읽는다는 것은 모든 방향으로 뚫려 있는 정신을 만난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문학평론가 황현산의 설명을 들으면, 내가 느낀 의구심과 독자가 마주할 당황스러운 상황이 조금은 이해가 되지만, 피식 웃고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내가 왜 그러는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상황을 달갑게 여길 이는 많지 않을 게다. 보르헤스의 마법(이렇게밖에 표현하지 못하겠다.)은 여기에서 시작되는데, 골치 아프고 멀미가 나야 할 상황인데도 다음 이야기가 계속 궁금하고 이전 이야기가 쉼 없이 떠오른다. 이렇게 소개하는 게 (만약 그런 게 있다면) 이 책의 핵심에 가 닿았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지만, 어쩐지 보르헤스라는 구체적인 사람을 알게 되었다는 느낌이 든다면, 나만의 착각 혹은 얼치기 독자의 거짓말일까.     아르헨티나의 시인이자 소설가, 평론가로 세계 문학사와 지성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노년의 목소리를 담은 기록으로 1976년과 1980년에 한 인터뷰 열한 개를 모은 책이다. 시력을 잃어가던 시기에 대한 담담한 회고뿐 아니라 말년에 이른 보르헤스의 문학, 창작, 죽음에 대한 견해까지 담고 있다.   그는 인터뷰마다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조지프 러디어드 키플링, 에드거 앨런 포, 월트 휘트먼,에밀리 디킨슨에 대한 애정을 숨김없이 드러냈다. 그러면서 유아론과 영지주의에 대한 비판도 서슴지 않았는데, 이 과정에서 보르헤스는 자신의 말이 하나의 주장으로 굳어질까 염려하여 ‘오늘은 그래요’ 라는 식으로 대화를 마무리 짓곤 했다.   “아, 그럴지도 몰라요. 오늘은 영지주의자, 내일은 불가지론자이면 어때요? 다 똑같은 거예요.” 이런 식의 불분명한 태도는 그의 작품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모호성, 사실과 허구 사이의 틈새라는 우주적 수수께끼를 연상시킨다.     목차 ; 서문 / 후기 / 옮긴이의 말 / 보르헤스 작품 목록 / 찾아보기   비밀의 섬 / 내가 잠에서 깰 때 / 그건 여름날의 더딘 땅거미처럼 왔어요 / 나는 그저 타고난 대로의 나를 나타내지요 / 군중은 환상 / 그러나 나는 꿈을 더 선호해요 / 작가는 자신의 작품을 기다리고 있어요 / 시간은 본질적인 수수께끼 / 나는 늘 낙원을 도서관으로 생각했어요 / 악몽, 꿈의 호랑이 / 나는 항상 거울을 두려워했어요     책속으로   우리는 승리를 얻을 수도 있고 재앙을 겪을 수도 있지만, 그 두 가지 허깨비를 똑같이 취급해야 해요. -104쪽 책은 상상력의 연장이고 기억의 연장이에요. 책은 아마도 우리가 과거에 대해 알고 있는 유일한 것일 거예요. -122쪽 우리에게 금지된 것은 없어요. 그걸 하는 것은, 적어도 시도해보는 것은 우리에게 달려 있답니다. -155쪽 작가는 순수한 자세로 써야 해요.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생각하지 않아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자기가 하고 있는 게 자신의 시가 아닌 거예요. -170쪽 난 미학이라는 게 없어요. 나는 단지 시와 이야기를 ‘쓸 수 있을 뿐’이에요. -181쪽 시는 말을 넘어서 존재한다고 생각해요. 말은 단지 상징일 뿐이니까요. 시는 말의 음악성 속에 존재하는 거예요. -183쪽 궁극적으로 우정이 사랑보다 중요할 거예요. 어쩌면 사랑의 진정한 기능은, 사랑의 의무는 우정이 되는 것인지도 모르죠. 그렇지 않으면 사랑은 도중에 끝나버릴 테니까요. -186쪽 난 의무적인 독서는 잘못된 거라고 생각해요. 의무적인 독서보다는 차라리 의무적인 사랑이나 의무적인 행복에 대해 얘기하는 게 나을 거예요. 우리는 즐거움을 위해 책을 읽어야 해요. -212쪽 나는 시를 매우 사적이고 중요한 경험이라고 생각한답니다. 물론 그걸 느낄 수도 있고 못 느낄 수도 있죠. 만약 느낀다면, 그걸 설명할 필요는 없어요. -274쪽 나는 이 문제를 풀기 위해 계속 노력할 거예요. 나의 모든 시도가 쓸데없으리란 것을 알지만, 기쁨은 해답이 아니라 수수께끼에 있으니까요. -303쪽     서평   눈먼 보르헤스에게 말은 유일한 소통 방식 말하기는 글쓰기 못지않게 내밀한 언어 형식   1980년에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는 여든의 나이로 대담을 위해 뉴욕, 시카고, 보스턴을 여행했다.수많은 청중들 앞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군중이라는 것은 환상이에요.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아요. 나는 여러분에게 개인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당시 눈이 먼 보르헤스에게 ‘말’은 유일한 소통 방식이었다.   그에게 말하기는 글쓰기 못지않게 내밀한 언어 형식이자 세상과의 통로로 자리하고 있었다. 이를 본 시인이자 철학자 윌리스 반스톤은 다음과 같이 생각했다. “예전의 사상가와 철학자들은 생각이움직이는 것이어서 파도 위의 잉크와 마찬가지로 고정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에게 남겨진 현자들의 기록은 대부분 그 시대에 우연히 그들의 말을 받아 적고 기록하게 된 익명의 사람들에게서 나온 것이다.” 실제로 반스톤은 보르헤스와 나눈 대화에서 여전히 반짝이는 사유와 정신을 발견했고, 이를 하나의 작품처럼 남겨두고자 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의 말을 받아 적던 플라톤을 자처하며 직접『보르헤스의 말』을 엮었다.   그의 말마따나 “보르헤스의 생각이 기록으로 남아 있다는 게 우리에게는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보르헤스의 말』은 그가 1976년과 1980년에 한 인터뷰 열한 개를 모은 책이다. 시력을 잃어가던 시기에 대한 담담한 회고뿐 아니라 말년에 이른 보르헤스의 문학, 창작, 죽음에 대한 견해까지 담고 있다. 그는 인터뷰마다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조지프 러디어드 키플링, 에드거 앨런 포, 월트 휘트먼, 에밀리 디킨슨에 대한 애정을 숨김없이 드러냈다. 그러면서 유아론과 영지주의에 대한 비판도 서슴지 않았는데, 이 과정에서 보르헤스는 자신의 말이 하나의 주장으로 굳어질까 염려하여 ‘오늘은 그래요’ 라는 식으로 대화를 마무리 짓곤 했다.   “아, 그럴지도 몰라요. 오늘은 영지주의자, 내일은 불가지론자이면 어때요? 다 똑같은 거예요.” 이런 식의 불분명한 태도는 그의 작품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모호성, 사실과 허구 사이의 틈새라는 우주적 수수께끼를 연상시킨다.     세계 시민적인 사고와 개방성 언어를 통해 아름다움을 모색한 보르헤스   보르헤스는 1899년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태어났다. 그는 영국 출신 할머니와 가정교사의 영향으로 모국어인 스페인어보다 영어를 먼저 배웠다. 이러한 유년기는 그에게 언어에 대한 개방성과 세계 시민적인 사고를 갖게 하는 바탕이 되었다.   나는 두 할머니 중 한 분과 얘기할 땐 어떤 특정한 방식으로 말해야 하고, 다른 분과 얘기할 땐 또 다른 방식으로 말해야 한다는 걸 알았어요. 그 두 가지 방식을 스페인어와 영어라고 부른다는 걸 알게 되었죠. 그건 자연스러운 것이었어요. -244쪽   보르헤스는 고대영어, 라틴어,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독일어 등도 꾸준히 공부했다. 이러한 노력으로 언어 간의 유의미한 차이뿐 아니라 개별적인 음악성에도 심취했다.   앵글로색슨인들은 로마(Rome)를 로마버그(Romaburgh)라고 불렀어요. 우린 그 두 단어에 흠뻑 빠졌지요. 그리고 『앵글로색슨 연대기』에서 아름다운 문장을 발견했어요. “줄리어스 시저는 브리튼섬을 찾은 최초의 로마인이었다.”라는 문장이었어요. 그런데 그 문장을 고대영어로 읽으면 더 멋진울림이 있답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있는 페루라는 거리를 달리며 소리쳤어요. “이울리우스 세카세르…….” 사람들이 우리를 쳐다봤지만 우린 개의치 않았어요. 아름다움을 발견했으니까요! -197쪽   보르헤스는 언어를 통해 아름다움을 발견하고자 했다. 여기서 그가 쏟은 노력은 자신이 쓴 작품들의근원을 찾으려는 노력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 보르헤스는 언어를 통해 예술을 탐구했던 학자이고,자신을 그대로 반영한 작품들을 꾸준히 써낸 작가이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말년에 얻은 언어학적,문학적 통찰은 아이러니였다. 좌절 속에서도 지켜야 할, 생의 의지였다.   반스톤 / 당신은 마음 상태나 감정이나 지성에 관한 한 단어를 찾고 있나요? 당신이 이 세상을 뜨기 전에? 만약을 가정해서 드리는 질문이에요? 찾고자 하는 건 무엇인가요?   보르헤스 / 참 단어를 발견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걸 찾지 않는 거예요. 우리는 현재의 순간을 살아야 해요. 그러면 나중에 그 단어들이 우리에게 주어질 수도 있어요. 안 주어질 수도 있고요. 우리는시행착오를 통해 계속 앞으로 나아가야 해요. 우리는 실수를 저질러야 하고, 실수를 이겨내야 합니다. 그건 평생 해야 하는 일이지요. -188쪽     “기쁨은 해답이 아니라 수수께끼에 있으니까요” 죽음을 앞둔 문학가가 남긴 질문들과 답   『보르헤스의 말』은 눈멀고 나이든 문학가가 죽음을 앞두고 어떤 심정이었는지를 가감 없이 보여준다.   나는 몸과 영혼, 모두 완전히 죽고 싶어요. 그리고 잊히고 싶어요. -92쪽   고통스럽게 삶을 유지해온 보르헤스에게 죽음은 “희망이 가득한 것”이었다. 그는 삶을 악몽처럼 견뎌왔기에 죽음을 매 순간 도래하는 어떤 것으로 받아들이기도 했다.   난 사람이 늘 죽는다고 생각해요. 우리가 단순히 뭔가를 기계적으로 반복하고 있을 때 우리는 뭔가를 느끼지 않고 뭔가를 발견하지 않아요. 그 순간 우리는 죽은 것이에요. 물론 삶은 어느 순간에나돌아올 수 있어요. -38쪽   인터뷰 속에서 보르헤스는 수없이 자살을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의 말마따나 삶도 죽음처럼 매 순간 돌아오는 것이었기에, 그는 자신에게 남아 있는 삶을 긍정할 수밖에 없었다. 후 보르헤스는 글쓰기가 아닌 말하기를 통해 언어를, 아름다움을 탐구해나갔다. 말은 시력을 잃은 그에게 불가피한 선택이었지만 새로운 돌파구로써 작용하기도 했다.   직접적이고 내밀한 소통 방식이라는 점에서 글과 비슷하되 전혀 다른 매체였기에, 그가 삶을 대하는태도마저도 바꾸어놓았다. 그러므로 『보르헤스의 말』은 20세기 사상계에 큰 영향을 끼친 대기가남긴, 독특하면서도 유일한 형식의 ‘작품’일지 모른다.   나는 이 문제를 풀기 위해 계속 노력할 거예요. 나의 모든 시도가 쓸데없으리란 것을 알지만, 기쁨은 해답이 아니라 수수께끼에 있으니까요. -303쪽 .   . 황현산 문학평론가   보르헤스를 읽는다는 것은 모든 방향으로 뚫려 있는 정신을 만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보르헤스 본인은 정신이 늘 메말라 있었다고 말한다. 뚫려 있는 길의 끝까지 갔다는 말이 되겠다. 대화록인 이 책에서 그는 그 뚫린 길을 어떻게 만났고, 또 그 길에서 무엇을 만나고 무엇을 만들었는지 가볍고도 명석한 언어로 말한다.   그가 시력을 잃고 모든 글을 구술해서 쓰던 시절에 이루어진 이 대화는 구어가 문어의 논리성을 확보하고 문어가 구어의 구체성을 다시 회복하는 신기한 문체의 한 기적을 보여준다. 어느 페이지를 열어도 재미있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읽으면 더 재미있다.       ============================================= 포스트모더니즘과 후기구조주의 철학의 시조로 추앙되는 남미문학의 거장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JorgeLuis Borges.1899∼1986). 그는 생의 후반을 암흑 속에서 보내며 어둠을 질료로 환상의 세계를 구축한 20세기의 거장이었다. 그는 1955년 그토록 바라던 아르헨티나 국립도서관장에 임명됐을 때 서서히 약화되던 시력마저 완전 히 상실하고말았다. 그러나 그는 좌절하지 않고 「신은 빛을 여읜 눈 을/이 장서도시의주인으로 만들었다」며 「책과 밤을 동시에 주신/신의 경이로운 아이러니」를 시로 읊었다. 어린시절부터 과도하게 책을 본데 다 유전적인 이유까지 겹쳐생의 후반 30여년을 어둠 속에서 살아야 했던 그는 눈으로 볼 수 있는 세계를 잃은 대신 오히려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지워버린 금세기 세계문학의 독특한 금자탑을 쌓은 것이다. 마르케스나 에코,푸코,데리다 같은 이들의 정신적 스승으로 추앙됐던 보르헤스는 90년대 들어 국내에서도 열광적인 신도들을 거느리며 「보르헤스붐」을 조성하기에 이르렀다.  . 1935년 단편 「불한당 들의 세계사」를 발표하면서 소설가로 활동하기 시작했고 그의 단편 「픽 션들」과 「알레프」는 유럽과 미국의 문학과 비평계에 커다란 영향을 끼 쳤다. 「픽션들」 속에 삽입된 「바벨의 도서관」「바빌로니아의 복권」 은 소설의 죽음을 외치는 금세기말의 문학세계에 새로운 가능성을 제공한 대표적 작품들로 손꼽힌다. ////////////////////////////////////////////////////////////////// 보르헤스: 내 삶은 실수의 백과사전이었어요. 실수의 박물관이었지요. 반스톤 : 프로스트의 시구를 빌려서 물어볼게요. 숲 속에 난 길 중에서 우린 어떤 길을 선택해야 하나요? 살면서 당신이 잘못된 길을 선택했을 때, 그 결과로 나타난 재앙이나 행운에 대해 말씀해주시겠습니까? 보르헤스 : 내가 쓴 잘못된 책들을 말하는 거예요? 반스톤 : 네. 그리고 당신이 사랑했던 잘못된 인연, 당신이 보낸 잘못된 나날에 대해서도. 보르헤스 : 알겠어요. 하지만 그것들에 대해 내가 뭘 어떻게 할 수 있겠어요? 잘못된 인연, 잘못된 행동, 잘못된 환경과 같은 그 모든 것들이 시인에게는 도구랍니다. 시인은 그 모든 것을 자신에게 주어진 것으로 생각해야 해요. 불행조차도 말이예요. 불행, 패배, 굴욕, 실패, 이런 게 다 우리의 도구인 것이죠. 행복할 때는 뭔가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 같지 않아요. 행복은 그 자체가 목표이니까요. 그러나 우리에겐 실수가 주어지고 악몽이 주어지죠. 거의 밤마다 말이예요. 우리의 과제는 그것들을 시로 녹여내는 겁니다. 만약 내가 진정한 시인이라면 나는 내 인생의 모든 순간이 시적이라고 느낄 것이며, 주무르고 빚어서 형상을 만들어내야 하는 일종의 점토라고 느낄 거예요. 그러니 내 실수에 대해 사과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군요. 매우 복잡한 인과관계의 사슬에 의해서,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끝이 없는 결과와 원인 - 원인에서 시작되지 않을 수도 있어요 - 의 사슬에 의해서 그런 실수들이 나에게 주어졌어요. 내가 그것들을 시로 바꿀 수 있도록 말이예요. ///////////////////////////////////===///////////////////////     보르헤스의 말 작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윌리스 반스톤 출판 마음산책 발매 2015.08.25.     ​ 내가 보르헤스의 작품을 읽지 못했던 건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 어마어마한 깊이의 지성을 받아들일 엄두가 나지 않았다. 보르헤스를 본격적으로 만나보기 전 이 책을 먼저 집어 들었다. ​ 보르헤스가 1976년과 1980년에 한 인터뷰 11개를 모은 이 책을 통해서 문학과 언어, 독서 등에 관한 그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이제는 보르헤스의 작품을 읽어볼 용기가 조금은 생겼다.   여러 인터뷰 내용 중에서도 특히 내 눈을 잡아끈 것은 악몽의 독특한 맛과 문학적 유용성이었는데, 이것이 보르헤스의 작품을 이해하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을 될 것 같다.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에드거 앨런 포, 월트 휘트먼에 대한 개인적 관심 혹은 호기심이 커진 것도 이 책을 통해 얻은 즐거움 중 하나다.       나는 나 자신을 현대 작가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난 19세기 작가예요. 나의 새로움은 19세기의 새로움이지요. 나 자신을 초현실주의나 다다이즘, 이미지즘, 또 다른 존경받는 바보 같은 문예사조들과 시대를 함께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렇지 않나요? 나는 문학을 19세기와 20세기 초반의 관점에서 생각해요. 버나드 쇼, 헨리 제임스의 애독자거든요. (84쪽) ​ 잘못된 인연, 잘못된 행동, 잘못된 환경과 같은 그 모든 것들이 시인에게는 도구랍니다. 시인은 그 모든 것을 자신에게 주어진 것으로 생각해야 해요. 불행조차도 말이에요. 불행, 패배, 굴욕, 실패, 이런 게 다 우리의 도구인 것이죠. 행복할 때는 뭔가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 같지 않아요. 행복은 그 자체가 목표이니까요. 그러나 우리에겐 실수가 주어지고 악몽이 주어지죠. 거의 밤마다 말이에요.우리의 과제는 그것들을 시로 녹여내는 겁니다. 만약 내가 진정한 시인이라면 나는 내 인생의 모든 순간이 시적이라고 느낄 것이며,주무르고 빚어서 형상을 만들어내야 하는 일종의 점토라고 느낄 거예요. 그러니 내 실수에 대해 사과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군요. 매우 복잡한 인과관계의 사슬에 의해서,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끝이 없는 결과와 원인-원인에서 시작되지 않을 수도 있어요-의 사슬에 의해서 그런 실수들이 나에게 주어졌어요. 내가 그것들을 시로 바꿀 수 있도록 말이에요. (23쪽)   우리가 불행한 감정에 빠지는 경우는 아주 흔해요. 그러나 불행의 감정은 악몽의 느낌, 섬뜩하고 괴기한 느낌이 아니에요. 이런 느낌은 악몽 자체에 의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에요. 악몽에는 특유한 공포가 있어요. 악몽에는, 꿈의 호랑이에는 말이에요. 그것은 깨어 있을 때 생활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과 아무 관계가 없답니다. 그 공포는 지옥의 맛보기일지도 몰라요. 나는 물론 지옥을 믿지 않아요. 하지만 악몽에는 매우 이상한 게 있는데, 그걸 알아차린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 같아요. 나는 꿈에 관한 책을 많이 읽었지요.해블록 엘리스의 책을 예로 들 수 있겠군요. 하지만 그런 책들 어디에서도 악몽의 섬뜩하고 매우 이상한 맛에 대한 언급은 찾지 못했어요. 그렇지만 분명 그런 게 있고, 우리가 아는 한 그건 선물일 수 있어요. 나는 악몽에서 소설의 플롯을 얻곤 했지요. 난 악몽을 아주 잘 알아요. 그걸 자주 꾸는데, 늘 똑같은 패턴을 따르죠. 미로의 악몽을 꾸곤 한답니다. (283쪽)   우리의 손은 긴 시간 뒤에 만났어요. 그렇게 더없이 좋은 일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온 과거가 필요했다는 걸 나는 깨달았어요. 어떤 일이 일어날 때, 그 일은 심오하고 불가해한 과거에 의해 형성되어온 거예요. 인과관계의 사슬에 의해서 말이에요. 물론 제1원인이라는 것은 없어요. 모든 원인은 또 다른 것의 결과예요. 모든 것들은 가지를 쳐서 무한히 뻗어나가지요. 이건 추상적인 생각일 수 있어요. 하지만 이게 진실이라고 느꼈어요. (117쪽) ​   리드: 아버지는 당신과 얘기할 때 전혀 스페인어를 쓰지 않았나요? 보르헤스: 아니요, 썼죠. 물론 아버지는 영어와 스페인어를 모두 사용하셨어요. 그러나 나는 두 할머니 중 한 분과 얘기할 땐 어떤 특정한 방식으로 말해야 하고, 다른 분과 얘기할 땐 또 다른 방식으로 말해야 한다는 걸 알았어요. 그 두 가지 방식을 스페인어와 영어라고 부른다는 걸 나중에 알게 되었죠. 그건 자연스러운 것이었어요. 리드: 당신은 그걸 서로 다른 말하기 방식으로 생각했을 뿐이군요. 보르헤스: 서로 다른 두 사람에 대한 서로 다른 말하기 방식이요. 리드: 그러니까 그 언어들은 자체적인 성질과 관련이 있는 것 이상으로 사람과 관련이 있다는 말씀이네요. 보르헤스: 네. 아이는 자신이 무슨 언어로 말하고 있는지 알지 못해요. 당신이 아이에게 넌 중국어로 말하고 있어, 라고 하면 아이는 당신 말을 믿어요. 리드: 아이는 알 필요가 없으니까요. 보르헤스: 그래요. 아이에게는 어떤 상황이 주어질 뿐이죠. (244~245쪽)   아이들은 그저 즐거워서 책을 읽는 거랍니다. 내가 허용하는 유일한 책 읽기 방식이 그거예요. 책 읽기를 행복의 한 형태로, 기쁨의 한 형태로 생각해야 하는 거예요. 난 의무적인 독서는 잘못된 거라고 생각해요. 의무적인 독서보다는 차라리 의무적인 사랑이나 의무적인 행복에 대해 얘기하는 게 나을 거예요. 우리는 즐거움을 위해 책을 읽어야 해요. 나는 약 20년 동안 영문학을 가르쳤는데, 늘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했어요. “책이 지루하면 내려놓으세요. 그건 당신을 위해 쓰인 책이 아니니까요. 하지만 읽고 있는 책에 빠져드는 걸 느낀다면 계속 읽으세요.” 의무적인 독서는 미신 같은 거예요. (211~212쪽)   [출처] 보르헤스의 말 2|작성자 티르따 야뜨리      
1767    최고의 작품은 최대의 상상에서 생긴다... 미국 포우 댓글:  조회:4275  추천:0  2016-11-07
  *에드가 앨런 포우(Edgar Allen Poe / 1809 ~1849 ) 미국의 천재적 작가이며 위대한 문학 이론가이다. 그는 시인 소설가 비평가를 겸했으며 시와 소설의 이론을 개척한 천재라고 할 수 있다. 그는 고흐 못지않은 무지와 편견에 둘러싸여 파란 많은 생애를 보냈으며 그런 고통을 통해 독창적인 창작을 하고 그 영향을 후세에 널리 퍼지게 한 역사적 작가이다. 그는 생전에 미국의 문화적 풍토에서는 인정받지 못하고 오히려 프랑스에서 많은 인정을 받았던 작가이다. 1800년은 당시 신생독립국이던 미합중국 정부의 수도가 워싱턴으로 옮겨간 해로서 이때의 미국 인구는 불과 500만이었다. 그가 태어나기 9년 전의 일이었다. 포우를 수용하기에는 미국의 문학적 풍토가 그를 감당하기 어려웠던 것이다.(미국 단편소설의 시조로 꼽히는 포우가 활동하던 시기의 미국 작가들은 N.호손으로 세일럼 세관에서 일하며 시종 인류와 죄의 문제에 골몰하였다. 그는 『주홍글씨』(1850) 같은 장편으로 청교도식의 깔끔하고 어두운 비극적 가락을 미국 문학의 흐름 속에 엮어 넣었다. 같은 비극적 의식 속에서 세계를 내다본 H . 멜빌의 웅장하고 뜻 깊은 장편소설 《백경(白鯨)》(51)은 그가 죽은 후 1920년에 이르러 미국 독자들이 비극적 의식에 눈뜨게 된 무렵에야 그 진가를 평가받게 되었다. 포우는 보들레르 발레리 스테판 말라르메의 추앙을 받았으며 랭보의 상징시, 스티븐슨의 해적소설과 줄 베르느의 SF와 코넌 도일 모리스 르블랑 아가사 크리스티 S.S.반 다인 등의 추리소설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사실상 추리소설이란 장르의 원조는 에드가 앨런 포이다.) 포우는 독창적인 작가로서 미의 창조와 '예술을 위한 예술(유미주의)'을 지향한 작가로서 낭만주의 또는 상징주의 시인으로서 추리소설의 개척자로서 현대 문학에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Edgar Allan Poe - 검은 고양이(The Black Cat:1843) ★ 해설 '최고의 작품은 최대의 상상에서 생긴다'이것이 작가로서 포의 생애의 표어였다. 보들레는 "고통과 싸우며 칼날 같은 날카로움으로 대상에 접근하는 그의 작품의 남성도 포 자신이요. 병들었으나 빛이 있고 모든 소리가 음악처럼 울리는 작품의 여성 또한 포 자신이다"라고 말했다. 포는 철두 철미한 개인주의자였다. 그는 시대에 무관심했다. 외적 상황이 아닌 오직 자기 자신의 내적 요구에 충실하며 순수한 아름다움을 추구하며 영혼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포는 시인으로서 아름다움의 창조를 시의 생명이라고 하였으며 "갈가마귀", "헬렌에게" 등 죽음 및 우수를 테마로 하는 극히 음악적인 서정시를 지었다. 단편 작가로서는 철저하게 단일적 효과를 노려 '그로테스크 하고 아라베스크 한 이야기'에서와 같은 불유쾌 공포 우울 등의 정서를 표현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비평가로서는 "호손론", "시의 원리" 등에서 단편 소설의 이론을 수립하였고 시를 사회적인 효용으로부터 해방시키는 순수시론을 주장했다. 시대 및 환경에서 이탈되어 사상성이 빈곤하다는 비난에도 불구하고 포와 같은 날카로운 분석적 두뇌로 오직 미의 세계만을 추구한 문학자도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한 가지 덧붙일 것은 그가 근대의 과학적 탐정 소설의 시조라는 점이다. 그의 치밀한 추리나 해석은 보통 두뇌의 작가로서는 도저히 미칠 수 없는 수준이었다. ★ 작가 약전 포는 1809년 미국 보스턴에서 출생하였다. 부모는 가난한 순회 연극단의 배우였으며 3형제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어릴 때 부모를 여의고 부유한 상인의 손에 의해 길러졌다. 소년 시절에는 양부를 따라 영국에 가서 살기도 하였다. 후에 미국에 귀국하여 버지니아 대학에 다녔다. 젊어서 배운 술과 도박 때문에 양부와 이별하고 자립해야 할 형편에서 저널리즘에 관계하기 시작했다. 1836년에는 버지니아 클렘이라는 13세의 어린 소녀와 결혼했으나 절망과 방탕으로 인한 빈곤한 생활에서 헤어나지 못했으며 건강도 좋지 않았다. 직업을 전전하는 동안에도 꾸준하게 시집과 단편집을 내어 인정을 받았으나 1849년 10월에 술집에서 폭음으로 인사 불성이 되어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끝내 숨을 거두었다. 짧고 불행한 생애였지만 그의 작가적 활동은 실로 놀랄 만한 것이었다. 세계 3대 단편 작가로 미국의 포 프랑스의 모파상 러시아의 체호프를 꼽을 수 있다.   Edgar Allan Poe   미국 문학만이 아니고 세계 문학사상 그 유래를 볼 수 없는 천재적 작가이며 위대한 문학이론가. 시인,소설가, 비평가를 겸하고, 시와 소설의 이론을 개척한 천재. 파란 많은 생애를 통해 독창적인 창작을 하고, 미의 창조와 예술을 위한 예술을 지향한 작가로서, 낭만주의 기인 또는 상징주의 시인으로써, 추리소설의 개척자로써 그 영향을 널리 세계에 펼친 역사적 작가이다.                                             그의 저술과 생애에서 우리는 낭만주의의 몇몇 극단적 면모를 보게 된다. 그는 시를 음악으로 간주함에 있어 그의 모든 미국 선구자들은 능가하고 있다. 그는 우울함에 있어 묘지 시인들에 견줄만하며, 또 심지어 그는 모든 시적 소재 중 아름다운 여인의 죽음이야말로 가장 시적이라고 선언한 바 있다. 그의 공포주의는 단순한 황폐한 성곽과 피에 굶주린 흡혈귀 그리고 처형당한 여주인공 등의 퇴적물이 아니라, 어두운 정신세계에 대한 심리적 조명이었다. 그는 초자연적인 미를 갈망하였으며, 또 멀고 외진 것을 구라파와 아라비아를 넘어 하는 끝가지 끌고 갔다. 분명히 그는 그에게는 아무런 보상도 기대할 수 없는 어떤 세계로부터의 탈출을 갈망하고 있는 고독한 낭만주의자에게 꼭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 생애 1809년 1월 19일 보스턴에서 배우인 모친 엘리자베스 아널드 포와 역시 배우인 부            친 데이비드 포 2세 사이에서 출생 1810년 부친 사망.  1811년 모친이 사망하여 리치먼드의  담배수출업자인 John Alan의 양자가 됨.             Edgar Allan Poe라고  명명됨. 정식 입적된 적은 없음. 1815년 양부모를 따라 영국으로 이주. 1820년까지 스코틀랜드, 잉글랜드 등지에서             초등교육을 받음. 1820년 미국에 다시 돌아옴 1822년 시를 쓰기 시작.             사후에 '지옥의 영혼을 소생시켜라(Rise Infernal Spirits)'발견. 1823년 학우의 모친 스태나드(Jane S. Stanard)부인을 연모.            (1831년에 '헬렌에게'써서 바침). 1826년 2월 University of Virginia에 입학. 어학과 고전 공부.             학자금 부족으로 시작한 도박으로 큰 빚을 짐.    1827년 3월 양부와의 불화로 가출. 5월에 Edgar A. Perry라는 가명으로 군 입대.            11월부터 Charleston항의 Sullivan섬에서 근무.  첫 시집 출판, 이 시집 가운데 몇 편은 첫 애인 로이스터에 관한 것. 1829년 볼티모어에서 두번째 시집(Al Aaraaf, Tamerlane, and Minor Poems) 출판 1830년 7월 육군사관학교(West Point)에 입학. 10월 양부 재혼으로 앨런가와 절연. 1831년 고의적인 군무태만과 명령불복종으로 군법회의에서 퇴교처분 당함.             숙모 클렘 모녀와  볼티모어에서 함께 삶.            세 번째 시집 출판.            키츠, 셸리, 콜리지의 영향을 받은 몇  편의 걸작 수록. 1833년 단편가             볼티모어 위클리 현상에 응모하여 당선됨.  1835년 리치먼드의 편집인으로 일함.  1836년 숙모 클렘의 딸인 14세의 버지니아와 결혼.  1839년 에 관계,  1841년 발표.  1842년 등 발표.  1843년 대표적 단편 가운데 하나인 을             에 발표, 상금 백달러를 받으면서 명성을 크게 떨침.  1844년 6년간의 필라델피아 생활을 청산하고 뉴욕으로 돌아와              편집에 관계  1845년 의 에 대표시 를 발표,             문제 시인으로 적극적으로 각광을 받는 한편, 등 단편을             수록한 단편집 를 출판.                 편집인.  1847년 아내 버지니아가 폐결핵으로 병사.  1848년 유레카 (Eureka)' 출간. 휘트먼 여사와 약혼.             '시의 원리 (The Poetic Principle)' 강연, 시 '헬렌에게 (To Helen)' ,             '수수께끼(An Enigma)', 에세이 '운문의 기본 (The Rationale of Verse)'  1849년 죽은 아내 버지니아를 그리며 쓴 등 발표.             이 해 미망인이 된 첫 애인 쉘턴과 약혼하기로 결정.             숙모 클렘을 약혼식에 초청하기 위해 여행하던 중 볼티모어에서 술에             만취돼 의식불명인 채 거리에 쓰러짐. 병원에 옮겨졌으나 정신착란             증세를 보이면서 10월 7일 사망.             볼티모어에 있는 웨스트민스터 장로교회 묘지에 묻힘.   ◎ 포우의 작품 세계 ※ Poe의 시적 수법 ※ ① 길고 우렁찬 목소리(room→apartment, chamber     huge→gigantic) ② 두음법과 의성어를 많이 사용(western-wall, minute hand-made) ③ 분위기에 적절한 단어 사용(covered→enshrouded, buried→entombed, corner→hiche) ④ repetition(반복)의 수법을 통한 음악성 ☞ Poe's literary criticism He wanted to help develop a national literature for the young country and felt that  intelligent criticism was the key. He hated bad books and bad writing. His criticisms  were usually accurate. But, as James Russell Lowell complained, they also had "the   coldness of mathematical demonstrations".             # 작품 - The principle of poetry, The philosophy of composition ※ Poe's literary creed ① the aim of art is pleasure, not truth ② a poem or story must be short and unified ③ poetry should be rhythmical creation of a higher beauty and elevated soul ④ the prose tale should have a single effect. This effect may be horror, terror or passion ⑤ The story must begin with the first sentence have no loosen and move toward an     inevitable conclusion  1. 그의 시 세계의 주조를 이루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한마디로 말하면 그것은 음악적인 순수서정시로 표현되는 암울한 시 미의 세계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음악적'이라는 것과 '암울하다'는 표현이다. 그의 시가 대체로 암울한 분위기라는 것은 그의 비극적이며 파멸적인 생애를 더듬어 올라가면 이해가 충분해진다. 다만 '암울하다'는 것이 단순히 암울함에서 그치지 않고 포의 독특한 아름다움이 적절히 조화되고 있음은 포우 만이 지닌 특수한 재능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가령 포가 의도한 바 시에 있어서의 음악성은 음악이 갖는 리듬의 효과에다 미술이 갖는 색조의 효과가 가미된다. 그리고 물론 이러한 것들은 반드시 아름다움이 전제된다. 포 시의 주된 테마를 이루고 있는 것이 죽음, 우수 따위인 점을 감안할 때 이와 같은 음악적 리듬과 미술적 색조의 아름다운 조화는 시에 있어서의 반복이 널리 쓰여질수록 더욱 충분한 진가를 발휘한다.   시의 원리는 자기 시의 방법의 해설로서 아름다움에 대한 감동의 긴장은 그 지속에 한도가 있으므로, 시는 짧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또 당시의 '교훈시'에 대하여, '시적 목적은 지성이나 도덕으로부터 해방되어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데 있으며, 시란 천상의 아름다움을 구하여 거기에 도달하는 노력'이라고말하고 있다. 2. 열 여덟 살 때 익명으로 첫 시집 ,태멀레인 및 기타의 시>(1827)를 출간했다. 표제의 시는 아시아 정복왕 태멀레인이 죽음에 임하여 야망의 공허감을 고백하는 이야기시다. 연소한 시인의 비범한 재능을 보여 주는 작품으로서 바이런의 영향이 엿보인다. 이밖에 10편의 시를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이 시집은 세상에서 인정받지 못했다. 스무 살 때인 1829년 군에서 제대하고, 제2시집 를 출간했다. 이 시집에는 표제인 장편시 2편과 12편의 짧은 시를 싣고 있다.   그 후 세 번째 시집인 (1831)을 출간했는데 이미 발표된 시에 여러 편의 시를 추가하여 모두 11편을 수록하고 있다. 이 시집에 등이 수록되어 있다. 24세 때인 1833년에는 현상소설에 응모하여 단편 가 당선되어 50달러의 상금을 받기도 했다. 1839년에 출간된 은 미와 환상이 엮어내는 공포의 이야기를 주내용으로 한 25편의 단편 소설집이다. 이 작품집에는 등의 걸작이 포함되어 있다. 1845년에는 12편의 단편이 수록된 이 출간되었다.
1766    가장 오랜전 <<령감>>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者 - 플라톤...?...! 댓글:  조회:3772  추천:0  2016-11-07
시상의 포착과 영감  시는 흔히 사상과 감정의 표현이라 한다.  엘리어트같은 경우는 사상과 감정의 정서적 등가물이라 하기도 했다.  단지 감정의 표현이라 하지 않고 이성이 주된 역할을 하는 사상을 동반시키는  까닭은 전술한 바대로 감정만으로 시가 성립될 수 없고 이성의 작용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역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동양시학에서 이성과 감정이라는 용어 대신 그것의 복합개념으로서  성정을 설정하고 시가 성정의 표현이라 한 말도 비로소 수긍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시의 대상은 단순한 외부세계의 존재나 현상을 가리키지 않고  외부세계의 자극, 즉 보고 듣고 경험하며 거기에 대한 반응으로 내부세계에서  일어나는 사상과 감정이 시의 대상이라 할 것이다.  이제까지 논의한 자극․반응․감정․정서․성정 등은 모두 인간의 심  리적 움직임이나 상태를 표현한다. 인간의 이러한 심리적 움직임과 시  인이 작품을 창작하는 과정에 대한 심리적 고찰은 문학연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영역이다. 이미 앞에서 외부세계의 자극으로 의식 내부  에서 일어나는 감정을 논의했지만, 감정을 시창작의 첫단계라고 하기는 어렵다.  예를 들어 꽃을 보고 아름답다거나 향기롭다는 감정을 느끼고  품지 않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그런 감정을 모티브로 해서는 작품으로  성공할 가능성이 대단히 희박하다. 누구나가 느낄 수 있는 지나치게 일  반적인 감정이기 때문이다. 의 시인 서정주는 국화를 보  면서 아름답다거나 향기롭다는 감정이 아닌 누님을 떠올렸다.  그 누님은 어떤 누님인가. 젊은 날의 그리움과 아쉬움들 때문에 가슴을 죄면서  멀고 먼 뒤안길을 돌아 이제는 그리움과 아쉬움의 젊음을 곰삭이고 거  울 앞에 서서 자기를 응시하고 있는 누님이다. 국화에서 그런 누님을  느끼고 동일시한 것은 범속한 감정이 아니다. 따라서 일반적인 감정과  특수하게 다른 이 감정은 구별되어야 마땅하다. 이를 일단 잠정적으로  영감이라 칭하고자 한다.  영감이 18세기 계몽주의주의 시대를 지나 19세기의 낡은 낭만주의 시  대 산물임에도 불구하고 다시 문제삼고 운위하는 이유는 자명하다. 이  는 플라톤 이래 오늘날까지 많은 사람들이 영감을 시창작과정의 첫단계  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이를 영적 계시, 영매론, 또는 전의  식이나 무의식으로부터의 분출이라는 주장이나 개념을 둘러싸고 많은  논란들이 있었지만 이들은 차치하고자 한다. 무엇보다도 영감을 시적  모티브로 인식하며 그 용어를 활용하기 때문이다.  또 그만큼 영감은 시 창작과정의 서두에서  핵심으로 기능하며 발상으로 시를 크게 좌우하기  때문이다. 가장 오래 전에 영감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이는 플라톤으로  보인다. 그는 시인에 대하여 매우 부정적이었지만 시인의 창작과정에  대하여 관심을 기울이고 최초로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그러면 플라톤  이 사용한 영감의 의미와 시창작과정에서의 영감의 기능에 관하여 살피  고자 한다.  시신Muse이 먼저 한 사람에게 영감을 불어 넣어주면 그 사  람에 다른 사람들이 매어 달려 영감을 나누어 받게 된다. …… 서  정시인이나 서사시인이나를 막론하고 모든 시인은 스스로의 기술  에 의하여 아름다운 시를 창작하는 것이 아니라 영감을 받고 접신  을 한 까닭에 그럴 수 있는 것이다. …… 서정시인 역시 아름다운  가락을 읊어낼 때 제 정신이 아니다. …… 영감을 받아 혼이 쏙  빠져버리고 이성의 힘이 다 새어나가기 전에는 창작이란 있을 수  없다. 시인은 기술적인 능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알 수 없는 신의  능력에 의해서 노래를 부르는 것이다.  공화국에서 시인 추방론을 주장하기도 할 만큼 시인에게 비판적 태도  를 견지했던 그는 이처럼 시인의 창작과정에 관심을 가졌으며 처음으로  영감을 언급하기도 했다. 인용부에서 확인할 수 있는 바와 같이 플라톤  은 창작이라는 행위에 대하여 철저한 영감설을 주장하는 동시에 시창작  과정에서 이성의 기능을 강력하게 부정하고 있다. 시는 이성의 작용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짧은 진술 속에서는 시인에 대한 부정적  측면도 엿볼 수 있다. 시인을 비하시키는 까닭은 그가 이상적으로 그리  고 있는 절대진리의 세계 지향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보다 더 주목해야 할 것은 시인이 시작(始作) 단계부터 영감을 받아  야, 즉 신이 영감을 불어넣어주어야 시를 쓸 수 있다는 것이다.  역으로 영감을 받지 못하거나 접신되지 못하면 시창작은 단 한 구절도 할 수  없다는 주장이다. 짧은 인용 속에 영감에 대한 정의는 보이지 않으나  플라톤이 인식하고 있던 영감은 시를 창작하고 노래할 수 있도록 시인  에게 불어넣어준 알 수 없는 신의 능력(정신 작용)이라 정리할 수 있  다. 그리고 보다 뚜렷하게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시창작과정과 영감, 그  속에서 영감의 기능이다.  =============================================================     봄밤의 귀뚜리 ―이형기(1933∼2005)     봄밤에도 귀뚜리가 우는 것일까. 봄밤, 그러나 우리 집 부엌에선 귀뚜리처럼 우는 벌레가 있다. 너무 일찍 왔거나 너무 늦게 왔거나 아무튼 제철은 아닌데도 스스럼없이 목청껏 우는 벌레. 생명은 누구도 어쩌지 못한다. 그저 열심히 열심히 울고 또 열심히 열심히 사는 당당한 긍지, 아아 하늘 같다. 하늘의 뜻이다. 봄밤 자정에 하늘까지 울린다. 귀를 기울여라. 태고의 원시림을 마구 흔드는 메아리 쩡쩡, 메아리 쩡쩡 서울 도심의 숲 솟은 고층가 그것은 원시에서 현대까지를 열심히 당당하게 혼자서도 운다. 목청껏 하늘의 뜻을 아아 하늘만큼 크게 운다.  ‘봄밤의 귀뚜리’는 뭔가 어색한 제목이다. 기왕 어색한 김에, 겨울이 되어 ‘봄밤의 귀뚜리’를 생각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이 시의 핵심은 봄밤에도, 귀뚜리에도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귀뚜라미는 예쁘지 않다. 특이하지도 귀하지도 않다. 그렇지만 몸집에 비해 목청이 참 크고 좋다. 그래서인지 귀뚜라미 울음소리에 빚진 노래나 시가 제법 많이 있다. 심지어 이 작품의 시인은 당장 그 앞에 무릎이라도 꿇을 태세다. 꿇을 만도 하다. 생명으로서의 신호를 저렇게도 잘 뽑아내고 있으니 말이다. 시인은 살아있음 자체를 힘차게 주장하는 것이 하늘의 뜻이구나, 감탄한다. 딱히 이유가 있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생명 그 자체가 바로 긍지라는 말이다. 그런데 당연한 이 말이 요즘 들어 더욱 특별하게 느껴진다. 이 시에 의하면 살아있는 것은 스스로 권위를 갖는다. 하물며 귀뚜라미도 생명의 긍지를 지지하며 운다는데 반대로 현대인들은 살 이유를 찾아야만 살 수 있다. 봄밤의 귀뚜리만 당당할까. 겨울에든 여름에든, 생명은 다 존엄하다. 오늘날 하늘의 뜻이 지상의 뜻에 지지 말기를 바라며 이 시를 음미할 수 있다. 
1765    중국 당나라 녀류시인 - 설도 댓글:  조회:4002  추천:0  2016-11-07
‘마음을 함께 한 님과는 맺어지지 못한 채, 공연히 풀매듭만 짓고 있네요(不結同心人, 空結同心草).’ -설도(薛濤)의 『봄날의 소망(春望詞)』                                우리나라 사람들이 많이 부르는 가곡 중 ‘동심초(同心草)’라는 노래가 있다. 모두 알다시피 가사는 다음과 같다.  ‘꽃잎은 하염없이 바람에 지고, 만날 날은 아득타, 기약이 없네. 무어라 맘과 맘은 맺지 못하고, 한갓되이 풀잎만 맺으려는고, 한갓되이 풀잎만 맺으려는고.’  ◆ 안서 김억의 동심초 가사, 1200년 전 중국 설도 작품  그동안 믿고 마음을 주고받은 임과 일이 잘 안 풀릴 때 혼자만 애타하면서 그 마음을 주변의 소소한 사물에 의탁하여 푸는 심정을 가장 잘 표현한 노래가 아닐까 생각한다.  이 가곡은 당나라 때 지금의 쓰촨(四川) 성 청두(成都)에 살던 여류시인 설도(薛濤)가 지은 5언 절구 『봄날의 소망(春望詞)』 제3수를 현대시인인 안서(岸曙) 김억(金億)이 번역하고 김성태가 작곡한 노래다. 우선 시 4수 전체를 소개해 보기로 한다.  봄날의 소망(春望詞)  花開不同賞, 꽃이 피어도 같이 즐길 이 없고  花落不同悲. 꽃이 져도 함께 슬퍼할 이 없네.  欲問相思處, 묻고 싶어라. 그리운 님 계신 곳  花開花落時. 꽃 피고 꽃 지는 시절에.  攬草結同心, 풀 뜯어 같은 마음 매듭을 지어  將以遺知音. 임에게 보내려 마음먹다가  春愁正斷絶, 사무친 그리움 잦아들 때에  春鳥復哀吟. 봄새들이 다시 애달피 우네.  風花日將老, 꽃잎은 바람에 나날이 시들어 가고  佳期猶渺渺. 만날 기약 아직 아득하기만 한데  不結同心人, 마음을 함께 한 님과는 맺어지지 못한 채  空結同心草. 공연히 풀매듭만 짓고 있네요.  那堪花滿枝, 어찌하나, 가지가지 피어난 저 꽃  翻作兩相思. 괴로워라, 서로 서로 그리움 되어  玉箸垂朝鏡, 아침 거울에 눈물이 떨어지는데  春風知不知. 봄바람은 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주석] ▶欲問, 묻고자 하다, 알고 싶다.  ▶相思, 그리워하다. 그리운 님, 相思處는 그리운 님이 계신 곳.  ▶攬, 잡아매다, 손에 쥐다.  ▶將以, 장차 그로써.  ▶遺, 주다, 보내다.  ▶春愁, 봄의 근심, 이성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  ▶佳期, 좋은 기약, 만날 날.  ▶結同心人, 마음을 함께한 님과 맺어지다.  ▶堪, 할 만하다. 견디다, 감당하다.  ▶玉箸, 옥으로 만든 젓가락처럼 흘러내리는 눈물, 눈물.  청두(成都) 왕장러우(望江樓) 공원에 있는 설도 좌상(坐像) 이 시를 지은 설도(768-832)는 자가 홍도(洪度)로 본래 지금의 시안(西安)에 해당하는 장안(長安) 사람이다. 아버지 설운(薛鄖)은 조정의 관료로 있었는데 학식이 연박(淵博·넓고 깊음)하여 어렸을 때부터 설도에게 글을 읽히고 시문을 짓게 하였다. 설도의 미래 운명과 관련하여 유명한 일화가 전해진다. 즉 부녀가 집 정원에 앉아 오동나무를 바라보고 있다가 아버지가 먼저 한 구 읊었다.  ‘마당에 있는 오랜 오동나무 한 그루, 줄기가 구름 속까지 치솟았구나(庭除一古桐, 聳干入雲中).’  그러자 설도가 대구를 달았는데 이러하였다.  ‘가지는 남과 북에서 오는 새를 맞고, 잎은 오가는 바람을 보내는구나(枝迎南北鳥, 葉送往來風).’  부친은 이 대구를 듣고 그 재주를 기뻐하면서도 이 시구가 딸의 ‘동서남북으로 오가는 손님들을 맞고 보내는’ 운명이 예견되는 것 같아서 걱정을 했다고 한다.  ◆부친 폄적 뒤 별세…악기(樂妓)의 운명으로  얼마 후 부친이 권력자의 비위를 거슬러 쓰촨 청두로 폄적(貶謫·벼슬을 떨어뜨리고 귀양 보냄)하게 되자 온 가족이 함께 이사를 왔는데 또 몇 년 되지 않아 설도 나이 14세에 아버지가 풍토병에 걸려 죽게 된다. 16세 되던 해 모친을 봉양하고 가사를 꾸리기 위해 음률을 잘 이해하고 언사(言辭)를 지혜롭게 풀며, 시부(詩賦)에 뛰어난 능력으로 인하여 예견된 운명처럼 설도는 결국 악기(樂妓: 노래를 부르는 고급 기생, 수청은 들지 않아도 되었다고 한다)로 적(籍)을 올리는 길을 선택하게 된다. 그의 뛰어난 시적 재능은 785년 사천절도사로 온 위고(韋臯)의 눈에 들어 공문을 작성하고 장서를 관장하는 교서(校書)라는 벼슬자리를 추천받게 되고 사람들로부터 많은 중시를 받게 된다. 그는 평생 위고 이래 총 11명의 절도사로부터 불려 다니며 많은 시문을 짓게 된다. 설도는 곧 시단에 널리 이름이 나 백거이(白居易), 원진(元稹), 두목(杜牧) 등 당시 명망 있던 시인들과 많은 시적 교류를 했다. 현재도 원진 및 백거이와 주고받은 많은 창화시(唱和詩)가 남아 있다. 설도는 느낀 바 있어 나중에 돈을 내고 악기의 적에서 탈퇴하여 자유롭게 살게 된다.  ◆ 백거이 원진 두목 등 당대 최고 시인들과 교류  설도 41세 때 시작된 10세 이상 아래인 원진과의 늦사랑이 천고에 전해지고 있다. 원진은 설도와 많은 연정의 시를 주고받는데, 그녀를 한나라 때 사마상여(司馬相如)와 짝을 이룬 탁문군(卓文君)에 비유하기도 했다.  (좌) 원진이 설도에게 써준 연애 시와 설도가 시를 쓰고 있는 모습. (우) 설도가 설도전(薛濤箋·시를 적는 붉은색 종이)을 만드는 모습. ◆ 사마상여와 탁문군의 별난 사랑  만년에 설도는 청두 서쪽 완화계(浣花溪) 시냇가에 살며 음시루(吟詩樓)를 짓고 시를 읊으며 지냈다. 당시 쓰촨 지방에는 종이문화가 발전하였는데, 설도는 시를 운치 있게 주고받을 수 있도록 소나무 꽃무늬를 새겨 넣은 붉고 고운 색종이를 직접 제작하여 시인들과 시를 주고받으니 그것이 당시 유명해져 ‘설도전(薛濤箋)’으로 불리웠다. 원진은 쓰촨으로 발령이 났을 때, 한때 설도와 깊은 정을 나누었지만 다른 지역으로 발령이 나자 떠나가고 만다. 원진의 여성 편력과 풍류 끼에 대해 소문을 듣지만, 설도는 일편단심 원진을 기다리니 헤어진 지 10년이 지나서도 원진을 사모하는 시를 남길 정도였다. 결국 맺지 못할 사랑이라는 것을 깨닫고 만년에는 대나무밭 속에서 검은 색 여도사복을 입고 수도하는 자세로 살다가 세상을 뜬다.    출처 :한국예술가곡연주회
1764    중국 유명한 시인들을 알아보기 댓글:  조회:3809  추천:0  2016-11-07
//   굴원   고양 임금님의 후예, 내 아버지는 백용이라 한다. 호랑이의 해, 호랑이의 달, 호랑의 날에 나는 세상에 태어났다.   고대 중국의 가장 위대한 시인으로 잘 알려져 있죠. 그의 시는 위로는 전설과 역사, 아래로는 천문과 지리를 넘나들며 이소는 낭만적이면서도 특이한 비유와 풍부한 상상력, 진지하면서도 웅위로운 기백이 어우러진 뛰어난 작품으로 유명하구요. 굴원의 시가 후대의 형식에 준 영향이야 이루 말할것도 없고, 더구나 그 사회에 대한 비판의식은 후대 시인들의 사상에 큰 역할을 했죠. 초사(楚辭)의 시조이자 시인들의 뿌리라고도 할 수 있을듯 합니다.     조식   콩을 삶기 위하여 콩대를 태우나니 콩이 가마 속에서 소리 없이 우노라 본디 한 뿌리에서 같이 태어났거늘 서로 괴롭히기가 어찌 이리 심한고   진사왕(陳思王)이라고 불리는 조식은 조조의 아들로 유명한데, 이 조식은 시에 대단한 재능이 있어 여러 뛰어난 작품을을 많이 만들어 냈습니다. 무엇보다 문학사적으로 그 영향력이 지대한것은 당시 현실과 비교적 분리되었던 시의 오언시의 영역을 아버지 조조 등과 함께 서정적인 영역으로 만들었다는 점입니다. 조조와 조식을 비롯한 이들은 당대의 세력가였고, 그들과 함께 어울리던 인물들도 당대 문학적 중심을 이루는 인물들이었기에 이러한 형식은 자연스럽게 대세가 되서 후대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아래 언급하는 사령운은 조식을 일컫어 "천하에 시에 대한 재능이 1말이라면, 조식은 그 중 8두를 차지할것이다."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도연명   이미 지난 일은 탓해야 소용 없음을 깨달았다. 앞으로 바른 길을 쫓는 것이 옳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인생길을 잘못 들어 헤맨 것은 사실이나, 아직은 그리 멀지 않았다. 이제는 깨달아 바른 길을 찾았고, 지난날의 벼슬살이가 그릇된 것이었음을 알았다. 배는 흔들흔들 가볍게 흔들리고 바람은 한들한들 옷깃을 스쳐가네   동진 시대 말기의 시인인 도연명의 삶은 소박했고, 동진과 남조 시대 오랫동안 내려져왔던 귀족들의 사치스러운 문학이 아니라 민간에서부터 느껴지는 인간에 대한 따뜻함과 사랑이 부담스럽게 않게 느껴집니다. 기교를 부리지 않은 담백함 때문에 도연명의 생전에는 무시와 깔보임을 당하였지만, 당나라 이후 도연명에 대한 재평가가 벌어지면서 그는 육조 시대 최고의 시인으로 명성을 떨쳤습니다. '귀거래사'는 제가 가장 좋아하는 시 중에 하나입니다.     사령운   물속에 잠겨있는 구룡은 숨어있는 자세가 아름답고 높이나는 기러기는 맑고 고운 소리를 멀리까지 보내준다. 기러기처럼 구름위로 높이올라 화를 피할 수 없음이 유감스럽다 도덕적 수양을 강화하지만 지력이 부족하여 이룰 수 없으며 벼슬을 버리고 농사를 지으려 체력으로 감당할 수가 없다 봉록을 추구하여 멀리 떨어진 해변에 와서 임무를 수행하다가 병상에 누워서 바짝마른 수림을 바라본다.   남북조 시대의 시인으로 시의 대상을 자연의 아름다움으로 삼은 산수시인이라는것에 의미가 있는 인물입니다. 아름다운 언어와는 달리 그는 권력욕이 있었고, 또 그것이 충족되지 않아 늘 타오르는 분노를 가슴속에 지니고 있었습니다. 결국 추방과 피살로 끝나버린 그의 삶에서 대단히 아름답고 화려한 시는 일종의 정치적 좌절을 자연으로 풀어보려는 의도가 있지 않았는가 하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너무 아름다움에 치중해 내용이 없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지만, 아직까지 제대로 시의 주제가 아니었던 자연을 시의 주제로 삼았다는 점에서 문학사에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백   꽃나무 아래에서 술을 놓고 앉아 아무도 없이 홀로 마시고 있네 잔을 들고 밝은 달에게 권했더니 그림자까지 이제 셋이 되었다네   이른바 검선(劍仙), 그리고 시선(詩仙)이라고 불리는 이백, 이태백은 중국이 나은 가장 뛰어난 천재중에 한사람입니다. 당나라 현종때의 시인인 그의 삶은 많은 부분이 실제와 환상으로 덧칠되어 있는데, 평생동안 거의 한곳에 정착하는 일 없이 떠돌다녔고 언제는 도교에 심취하여 산에서 지내다가도, 언제는 칼을 들고 협기에 가득차서 싸움을 벌이는 일생이었습니다. 술 좋아하는 친구들과 함께 '음주 팔선인'이라고 무리를 지어 다니고, 황제가 가장 총애하는 환관 앞에서 신발을 던져 보이며 자기에게 신겨보라고 하는등 그의 인생은 거칠것이 없었습니다. 이백은 항상 시를 쓰면 깊게 생각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곧바로 만들어냈으며, 그가 말하는것이 곧바로 시가 되는 시풍이었습니다. 이백이 평생동안 가장 사랑했던건 저 하늘 위에 달이었고, 일생을 두고 같이 한 친구는 바로 술이었습니다. 이태백의 삶에 짙게 배여있는 도교적 삶의 방식에도 불구하여 그의 호방한 인생은 유불선을 넘나들며 많은 사람에게 사랑을 받았습니다. 윌 듀란트 같은 사람들은 이태백을 '중국의 존 키츠'에 비유하기도 했습니다.     두보   손 뒤집어 구름 만들고 다시 엎어 비로 만드니 분분한 세상을 어찌 모름지기 헤하리랴 보지 못했는가, 관중과 포숙의 가난한 때의 그 사귐을 이러한 도리를 지금 사람들은 흙 버리듯 하는구나   시성(詩聖)이라고 까지 존경받는 두보는 중국인들에겐 오히려 이태백보다도 존경받는 시인입니다. 아서 웨일리는"중국의 문학을 다루는 사람들은 이백을 가장 위대하다 말하길 꺼리지 않는다. 허나 중국인들은 언제나 그 명예를 두보에게 돌린다." 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일생은 불운으로 점칠되어 있었는데, 어린시절부터 시를 잘 쓰기로 유명했지만 과거에는 급제하지 못했고, 세상을 방랑하며 이태백같은 이를 친구로 삼아 지냈으나 안사의 난이 일어나 모든것이 엉망이 되었고 관직에는 올랐으나 길게 가지 못하고 좌천당하여 벼슬을 버려야 했습니다. 다시 사는 지역에 대기근이 들어 모든 사람들이 고통스럽게 죽어갔는데, 두보의 시에서는 이러한 전쟁과 참혹함이 절절하게 들어납니다. 그러나 그런 절망 속에서도 그는 인간에 대한 위대한 성실과 거기서 나온 감동을 잃지 않고 무수한 자연 가운데 지금까지 알아내지 못했던 새로움으로 비와 꽃, 산과 달을 노래했습니다. 한유 - 백거이 - 소동파 등 위대한 시인들 가운데 두보를 칭송하지 않은 이가 없었으며 그의 시는 중국은 물론 국내에까지 엄청난 영향을 미쳐 일종의 교재와 같은 수준으로 쓰였습니다. 이태백이 한번에 시를 내려서 외운다면 두보는 수십, 수백번에 걸쳐 하나의 작품을 꼼꼼하게 다듬은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삼국시대 두예의 후손으로 임진왜란이 끝나고 망명한 명나라 장군 두사충 때문에 그의 후예는 한국에도 남아있다고 합니다.       백거이   하늘에선 날개를 짝지어 날아가는 비익조가 되게 해주소서 땅에선 두 뿌리 한 나무로 엉긴 연리지가 되자고 언약했지요   역시 당나라의 시인이자 소년 시절부터 천재라고 이름이 났던 백거이는 두보와는 달리 관직에서 오래 생활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역시 지방으로 좌천되었는데 그때의 심정을 고스란히 시로 노래했습니다. 백거이의 대표적인 시는 장한가와 비파행으로 이 시들에서는 인간 세상을 넘나들는 깊은 낭만적인 색채가 가득합니다. 더구나 그는 시를 어렵게 쓰지 않았고, 농촌의 소박한 사람들과 이야기하길 즐겼으며 그들이 이해하지 못하면 시를 다시 고치는것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신분에 상관없이 백거이의 시를 불렀고, 노래를 파는 기녀와 지긋한 사람들 모두 장한가를 즐겨 불렀습니다. 당나라 헌종은 이런 시를 써서 백거이의 시를 말했습니다 "어린 동자도 장한가를 읊을 수 있고, 호족의 아이들도 비파행을 가창할 수 있도다."       한유   눈부시게 피어 오월 석류꽃 가지 사이로 수줍게 맺힌 아기 열매들 마차도 다니지 않아 적적한 고을에 붉은 꽃봉오리들 떨어져 내리네 푸른 이끼 위로 역시 당나라의 시인인 한유는 고문 운동의 창시자로, 이 산문의 문체 개혁이 있은 뒤 고문은 송나라 이후 중국 산문의 표준이 되었습니다. 소동파는 ‘문장으로는 지난 8대(동한東漢, 위魏, 진晉, 송宋, 제齊, 양梁, 진陳, 수隋)를 다시 일으켜 세운 분' 이라고 칭송했는데, 그는 시인으로서도 뛰어났습니다. 다만 너무 지나치게 난하해고 산문과도 같다는 비난도 있습니다.     이하   검은 구름이 성을 눌러 성이 무너지려 하고 갑옷의 광채가 해를 향하니 금비늘이 열리는 듯 가을 빛 속에 뿔피리 소리 가득하고 국경 요새의 연지는 밤에 보랏빛으로 엉켜있다.     한유는 어느날 어떤 시를 보고 깜짝 놀라 시를 지인 사람을 수소문 했는데, 찾아보니 7살 밖에 안되는 어린 아이였습니다. 한유는 반신반의해 그를 시험해 봤지만 아이는 즉석에서 대단한 시를 지어 한유를 놀라게 했습니다. 그 아이가 바로 이하로, 이하는 20살이 안되어 명성을 크게 날려 시귀(詩鬼)라고 까지 불리게 됩니다. 허나 그는 관직과는 인연이 멀었는데, 이하의 아버지 이름은 '진'숙이라 아들은 '진'자와 관련된 일을 피해야 하기에 음이 같은 '진'사 시험을 볼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말도 안되는 소리였지만 이는 이하를 시기하는 무리들의 소행이었습니다. 한유는 어처구니가 없어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아버지 이름이 '진'숙이라 '진'사 시험을 못본다면, 아버지 이름이 인(仁)이면 아들은 사람 노릇(人)을 하지 말라는 것인가?"   이하는 결국 9품관에 머물며 얼마 못가 죽고 맙니다.         소식   아득하구나, 나의 그리움이여 하늘 끝 미인을 기다리네 손님 중 퉁소를 부르는 이 있어 노래에 기대어 화답한다   그 소리가 구슬픈 듯, 기쁜듯, 사모하는 듯, 노래하는 듯, 원망하는 듯, 남은 소리는 간드러지고 실처럼 끊어지지 않네   그윽한 골짜기서 교룡은 춤을 추고 외로운 배의 과부가 울겠네 소동파가 슬피 놀라 옷깃을 바로잡고 무릎을 세우며 앉았다   소동파, 소식은 두말할것 없는 북송 제일의 시인으로, 김부식, 허균, 그 뒤 수많은 사람들이 존경해 마지 않던 대시인입니다. 허나 그는 왕안석의 신법파와 사마광의 구법파의 분쟁에 얽혀 성공적이지 못한 정치 인생을 벌였는데 그는 신법의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신법파의 독선은 미워했고 이 탓에 중앙정부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신법파가 제거되고 난 뒤에는 다시 조정으로 돌아왔으나, 이번에는 신법파를 지나치게 제거하는 구법파에 진저리를 냈고 정통 주자학자들과 대립을 벌이며 비난을 받았습니다. 다시 신법파가 즉위하자 그는 오지 중의 오지 해남도로 귀향을 떠났고, 다시 휘종이 즉위하며 사면을 받자 상경하던 중 병을 얻어 사망했습니다. 그가 죽자 백성들은 울었고, 학생들은 수업을 때려치고 추모를 했으며, 기생들은 울다가 지쳐 자살하였다고 합니다.   소동파는 고려를 매우 미워했던것으로 유명한데, 고려를 비난하며 고려에 송나라의 서책을 수출하는것도 반대했습니다. 고려 사신이 입국할때마다 송나라 백성들이 고통을 당하고, 기밀이 고려를 통해 거란으로 들어갈 염려가 있다는 것등등이 이유 였다고 합니다.     시인 이은상은 "나는 불행히도 동파에게 멸시받던 고려인의 자손이기 때문에, 내 가슴에 끓는 피가 그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거늘, 어찌 우리 중에 우리 조상을 욕하던 소동파의 글을 부채에 적고 병풍에 붙이고서 자족하는 이가 있단 말인가?" 라며 소동파의 시를 찢어버렸다는데, 이 이은상 시인은 친일파 의혹과 이승만 정권의 독재에 한몫헀다는 의혹으로 여러차례 쟁점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보면 아이러니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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