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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룡 교수 시조 감상
지난 여름방학에 귀가한 후 예년처럼 김해룡 교수님 댁을 방문하여 은사님을 만나 뵐 수 있었다. 우선 여전하신 학자, 교수의 근엄한 표정과 장군 체격과 같은 건강한 모습에 감동되었다. 교수님께서는 나에게 최근 출간한 시조집 <불취옹영언선(不醉翁永言選)>(연변인민출판사, 2010)을 건네주시는 것이었다. 그 동안 독창적인 학술저서가 여러 권 출간될 때마다 탐독하군 하였는데 이번에는 은사님의 인생체험을 고스란히 담은 시조집에 접하게 되어 더없이 감격스러웠다. 사실 우리 대학들에서는 문학교수가 문학명작을 창작해도 성과로 인정해주지 않는 풍토가 있다. 그래서 많은 문학교수들은 아예 이 분야에 손을 대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하지만 은사님께서는 명실공이 문학교수답게 학술연구와 문학창작 두 분야에서 커다란 성취를 이루고 있다.
중경에 올 때 항공편 수화물이 허용중량을 초과할 정도로 많아 이것저것 선택하느라 고심했지만 김해룡 교수님의 시조집만은 소중히 짐에 넣어 소지하고 왔다. 개학 초여서 할 일이 쌓였지만 틈틈이 은사님의 시조를 감상하면서 힘을 얻곤 하였다.
오늘은 먼저 우리가 대학에 갓 입학한 해인 1978년에 은사님께서 쓰신 시조 두 수를 읽고 그 감수를 쓰기로 한다.
1. 등골이 땀에 절면야
석삼년 묵은 땅을 헐히야 다루랴만
사람이 속였기로 땅조차 속일손가
등골이 땀에 절면야 벌이 아니 꺼지랴
1978(시조집 5쪽)
2. 메부리 거꾸로
재도 높다 이르거니 메가 아니 높으랴만
먹은 맘 못다 버려 신들메를 고쳐 하니
어화라, 메부리 거꾸로 가는 물에 꽂혔네
1978(시조집 6쪽)
교수님께서 당시 어떤 감수로 이런 시조를 쓰셨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나는 이 시조를 읽자마자 그해에 있은 일들이 새삼스럽게 떠올랐다.
‘문화대혁명’이 종식되고 10여년 중단되었던 대합입시가 회복되자 제1기로 대학에 진학한 우리 조문학부 77학번 대학생들은 1978년 봄에 연변대학 교정에 들어서게 되었다. 그런데 ‘문화대혁명’의 여파로 대학 사정은 엉망이었다. 신입생을 학생 기숙사에 배정할 수 없어 우리는 학교 심장부와 다름없는 사무청사(主樓) 2층 북쪽 사무실 한 간에 잠시 들게 되었다. 그때 우리는 처음으로 담임교수이신 김해룡 교수님을 만나 뵙게 되었다. 겉보기에는 엄숙한 분이시었지만 아주 자상한 분이어서 우리들이 궁굼해 하는 문제들을 일일이 깨우쳐 주시었다.
그 해 3월 초 쓸쓸한 바람을 안고 우리는 연집 公社(향)의 편벽한 산골 황초구(荒草溝)에 자리 잡은 학교 농장에 이동되었다. 황초구는 이름 그대로 농민들이 살 곳이 아니라고 버리고 가서 쑥대밭이나 다름없는 골짝이었다. 십년 동안 농촌에서 배움의 기회를 잃은 우리는 목마른 사람이 물마시듯 학구열에 들끓었지만 눈앞의 정경에 한숨만 풀풀 쉬었다. 남녀학생 각기 25명이 큰 중국식 온돌방 한간에 들었는데 전기가 없어 밤에는 촛불을 켜고 책을 보았고 낮에는 농장에서 원시적인 농사법으로 농사일에 종사하였다. 찬 온돌을 덥히느라 불을 때면 온돌 틈에서 연기가 나와 언제 가스중독 사고가 날지 모를 일이었다. 밥 끓이고 세수할 물이 없어 우리는 중국식 멜대로 먼 거리에 있는 샘물을 길어 와야 했다. 그럴 때마다 은사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서투른 솜씨로 중국식 멜대로 물을 긷곤 하셨다. 집을 떠나 어려운 산골환경에서 우리들에게 글을 가르치시는 것만도 감격스러운데 손수 나서서 물을 긷는 모습은 우리들에게 큰 힘을 실어 주었다.
당시 교실도 형편없었다. 수업할 때면 유리도 없는 창문에 느닷없이 송아지가 철없는 아이처럼 머리를 들이밀고 이상한 손님이 왔다는 듯이 기웃거렸다. 그럴 때마다 교실에는 웃음이 터졌지만 마음속으로는 실로 씁쓸하기도 했다. 어느 한번은 비가 와서 지면보다 훨씬 높은 교실 문 앞이 미끄러워 키 작은 여학생들이 교실에 들어서기가 힘들었다. 이 때 장군 체격의 소유자이신 은사님께서 마당에 있는 큰 돌을 버쩍 들어 교실 문 앞에 정히 고여 놓는 것이었다. 이에 감동된 나는 비록 문학 센스가 둔감했지만 이른바 ‘시상’이 떠올라 일기책에 단시를 쓴 적이 있다. 내용은 대체로 후대 양성을 위해 은사님께서 어려운 환경 속에서 달갑게 주춧돌, 버팀목이 되어 주셨고 우리가 주춧돌 같은 그 분의 두 어깨를 딛고 교실에 들어가 학업에 정진한다는 것이었다. 지금 그 볼품없는 습작품이 어데 있는지를 아직 찾아보진 않았으나 한 단락의 역사를 담은 것이라 생각되어 여가를 타서 찾아보고 정리할 생각도 하고 있다.
나중에 일부 여학생들이 물 탓으로 피부과민이 오고 가려워 죽겠다고 아우성치자 학급 지부서기 직책을 맡은 나는 마음이 무거워졌다. 십년을 잃어버린 우리가 대학에 입학하고도 그냥 이런 식으로 있다간 아무 것도 성취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반장 최문식과 손잡고 학교 지도부에 상황을 보고하고 이런 환경을 개변하기로 하였다. 그래서 먼저 최문식을 학교에 파견해 관련부처에 상황을 보고하게 했으나 반응이 없었다. 이에 내가 황초구에서 대자보 글을 써서 그 내용을 전화로 최문식에게 알려주고 학교 사무청사 안에 붙여놓게 하였다. 대자보를 본 학교 지도부에서는 학생담당 지도자(지금 국가 고위층에서 일하고 있음)를 파견하여 우리를 무마하게 하였으나 학습 환경 개선은 별로 효과가 없었다.
그러던 차에 우리는 학교에서 5.1절 기간에 연길 시내에 내려와 영화를 관람하게 하는 기회를 이용하여 학교 지도부에 학습 환경 개선을 위한 집단 청원에 나섰다. 그러자 교무처 간부들의 거센 저지와 이른바 ‘과격 행동’을 중지하라는 엄명을 받았는데 나와 최문식은 전체 동창생들을 위해 훗날에 어떤 처분을 받더라도 끝까지 견지하려고 결심했다. 동창들도 한결같이 모주석 석상 앞에서 앉아버티기를 하면서 보조를 맞추었다. 이에 감동된 나는 또 즉석에서 시조 한 수를 지어 높은 목소리로 읊어 사기를 북돋우었다. 도대체 학교 당국에서 어떤 처분이 내릴지 마음이 조마조마 하였지만 민심은 우리들에게 쏠린 것 같았다. 당시 조문학부 일 년 선배인 최홍일 씨(소설가)가 자기 학급 학생들을 동원해 옆에서 성원을 해주어 우리는 얼마간 마음이 든든해지기도 했다. 나중에 리희일 서기께서 아량 있게 우리의 요구를 전부 수용하였고 우리는 드디어 원하던 대로 정상적인 학습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와중에 김해룡 교수님께서는 정면에 나서서 태도를 표시하진 않았으나 우리 행동이 과격하다고 만류하지도 않으셨다. 사실 그분께서 조금이라도 난감한 기색을 보이셨다면 우리는 중도에서 투쟁을 그만 두었을지도 모른다. 25년 후에 동창모임이 있었는데 이미 작고하신 현룡순 교수님(당시 조문학부 학부장)께서 생각밖에도 이 일을 거론하시면서 ‘문화대혁명’ 이후 제1기로 대학입시를 거쳐 입학한 대학생들이 공부를 하겠다고 집단 청원을 하고 앉아버티기를 했는데 이 일은 아무런 잘못도 없다고 의미심장하게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이는 전임 학부장께서 처음으로 하신 공식적인 평가여서 나는 마음속으로 아주 홀가분하였다. 나는 이 말씀을 들으면서 당시 담임교수이신 김해룡 교수님께서도 학교 당국과 여론의 압력을 많이 받으셨겠지만 마음속으로는 학생 편에 서서 성원하셨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짧은 글에서 그때 일을 다 쓰기는 어려운데 앞으로 여가를 타서 장편회고록을 쓰든지, 아니면 소설 창작재능이 좀 생기면 이를 소재로 중편소설을 쓰려는 엉뚱한 생각도 해보곤 한다.
오늘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서남 파유(巴渝- 중경 지역을 가리키는 말) 땅에서 은사님께서 이 무렵에 쓰신 시조를 음미해보니 무척 감명이 깊어진다. 어쩐지 당시 학구열에 불타고 있었던 우리를 격려하시는 뜻이 내포된 것 같았다.
위의 첫째 시조에서 초장 “석삼년 묵은 땅을 헐히야 다루랴만”은 마치 ‘문화대혁명’ 10년 동란 속에서 허송세월한 우리들을 가리키는 듯하다. 중장 ‘사람이 속였기로 땅조차 속일손가’ 는 지도자의 실책과 야심가들의 횡포로 젊은이들이 황금시기를 놓치기는 했지만 아직 늦지는 않았다는 뜻 같다. 종장 ‘등골이 땀에 절면야 벌이 아니 꺼지랴’ 는 개혁개방시기에 어렵게 마련된 학습기회를 헛되이 하지 않고 열심히 공부하면 소원성취하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 일하는 인재로 클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라는 간곡한 부탁이 감지된다. 두 번째 시조도 이와 비슷한 시적 이미지를 내포하고 있어 우리 제자들에게 두고두고 음미할 수 있는 감칠맛을 안겨주고 있다. 아무튼 김해룡 교수님의 시조에서 읊조린 이런 명시구들은 예나 지금이나 우리들의 행동지침으로 될 것이다.
지금은 은사님의 시조를 학구적으로 깊이 연구를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기에 이 정도로 수필 형식을 빌려 간단히 감수를 발표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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