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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진중학교시절의 윤동주
윤동주의 친동생 윤일주교수의《나라사랑》23집(한국책)에 실린《윤동주의 생애》라는 글에 따르면《1932년에 윤동주는 명동에서 북쪽으로 30여리 떨어진 룡정(龍井)이라는 소도시에 와서 카나다 선교부가 설립한 은진(恩眞)중학교에 입학하였다. 그것을 계기로 우리는 농토와 집을 소작인에게 맡기고 룡정으로 이사하였다.》고 한다. 이와 같이 그는 1932년 4월에 윤동주가 은진중학교로 입학한것으로 기술하고있다.
그러나 윤동주보다 한살아래인 외사촌동생이자 명동소학교 동창생인 김정우씨는《동주의 약 30년이라는 짧은 인생을 나누어 보면 15살 늦가을에 명동촌을 떠나 룡정으로 이사간것을 기준으로…》라고 하고있어 1931년 늦가을로 명확하게 모를 박고있다.
윤일주교수는 1927년생으로서 1932년에라야 5살밖에 안되였고 김정우는 1918년생으로서 윤일주보다 9년 년상인것을 생각하면 김정우쪽의 기억이 더 신비성이 있다. 윤일주교수는《1931년이면 형이 대립자 소학교에 다니던 때였다.》는 생각때문에 그렇게 추정한 모양이다. 그러나 당시 윤동주의 큰 고모댁의 아들인 송몽규네는 그냥 명동에 남아있었다. 그래서 1932년에 송몽규가 윤동주와 함께 나란히 은진중학교에 입학했을 때 송몽규만은 룡정의 윤동주네 집으로 옮겨와서 살면서 같이 은진중학교에 다녔었다고 한다.
어쨌든 윤동주네 일가가 룡정으로 이주한것은 대변혁이였다. 우선 윤씨네 가문에서 가장이면서 윤동주의 할아버지인 윤하현을 본다면 그로서는 이 이주가 상실외에는 아무것도 아니였다. 평생 농부였고 그것도 성공한 독농가였던 그가 농토를 떠난것이다. 농부에게 농토가 없다는것은 선생에게 가르칠 학생이 없는것과 마찬가지인것이다.
윤동주의 아버지 윤영석은 그때 36세의 한창나이였다. 그는 새롭게 시작하는 도회지의 삶을 맞아 큰 변신을 시도했다. 그는 지식인이 도시에서 할만한 직업을 고르던 끝에 인쇄소를 차리려고 하였다.
사업중에서 문화사업이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모든 문화사업의 속성이란 그렇다. 밖에서 보기에는 문화쪽이 두드러져 보이지만 안에서 직접 해나가기에는 그저 말그대로 사업일뿐인것이다. 그런데 윤영석은 천성적으로 사업가가 못되는 선비형의 사람이였다. 아니나다를가 인쇄소사업이 실패했다. 윤영석은 평생 경제에서는 실패만 하는 창백한 인테리의 고달픈 삶을 살았다…
룡정으로 이주한후 변한것은 이러한 어른들의 생활만이 아니였다. 거주환경도 크게 변했다. 윤동주네가 이사온 룡정집은 룡정가 제2구 1동 36호로서 20평방메터 정도의 초가집이였다. 그러나 명동의 집은 어떠했던가? 터밭과 타작마당, 깊은 우물과 작은 과수원까지 달리고 지붕을 얹은 큰 대문이 있어 마을에서 제일 큰 기와집이였다. 그런 큰 집에서 한껏 넉넉하게 살다가 20평방메터 정도밖에 안되는 초가집으로 옮겨온것이다.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윤동주, 윤일주, 윤광주(룡정에 와서 낳았음) 3형제 거기에다 큰 고모의 아들인 송몽규까지 합류한 8명의 식구가 20평방메터의 초가집에서 옹색하게 생활하는 환경속에서 윤동주의 은진중학교시절이 시작되였다.
환경은 그렇게 여러 모로 좋지 않았지만 윤동주는 별로 영향을 받지 않았다. 그는 어린 나무처럼 한껏 뻗어갔다. 지금 남아있는 은진중학교 학생시절의 윤동주에 관한 증언들을 보면 그 모습이 풋풋하고 싱그럽다.
윤일주교수가 쓴《윤동주의 생애》에 있는 증언을 보자.
《은진중학교때의 그의 취미는 다방면이였다. 축구선수로 뛰기도 하고 밤에는 늦게까지 교내잡지를 꾸리느라고 등사글씨를 쓰기도 하였다. 기성복을 맵시있게 고쳐서 허리를 잘룩하게 한다든가 나팔바지를 만든다든지 하는 일은 어머니의 손을 빌지 않고 혼자서 재봉기에 앉아서 하기도 하였다.
2학년때였던가? 교내웅변대회에서〈땀 한방울〉이라는 제목으로 1등을 한 일이 있어 상으로 탄 예수사진의 액자가 우리 집에 걸려있었다. 절구통우에 귤궤를 올려놓고 웅변련습을 하던 모습이 눈앞에 선하다. 그러나 그는 웅변조의 사람이 아니였고 대회의 평도 침착한 어조와 내용덕분이라는것이였다.
그후 그는 다시 웅변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는 수학도 잘하였다. 특히 기하를 잘하였다…》
증언을 따라가며 그의 모습을 눈앞에 그려보노라면 절로 미소가 흐른다. 축구선수인 문학소년, 그리고 옷차림에도 관심이 커서 손수 재봉질을 해서 옷을 맵시나게 고쳐입는 멋쟁이, 웅변대회에서 1등상을 수상한 경력에다가 문학소년치고는 의외로 수학마저 잘하고…
윤동주와 명동소학교와 은진중학교 또 숭실중학교 그리고 광명학원 중학부를 같이 다닌 오랜 친구 문익환목사는 《중앙월간》(1976년 4월)에 실린《하늘, 바람, 별의 詩人, 尹東柱》라는 글에서 윤동주의 바느질솜씨와 관련된 재미있는 추억을 가지고있다.
《동주는 재봉틀질을 참 잘했어요. 그래서 학교 축구선수들의 유니폼에 넘버를 다는것을 모두 동주가 집에 갖고 가서 제손으로 직접 박아왔었지.》
그의 모친이 뛰여난 바느질솜씨를 갖고있었던것이 그에게도 유전되였던 모양이다. 이것은 윤동주가 인물됨에 관한 중요한 정보가 되는 일화이다.《바느질솜씨가 좋다.》는것은 손재주도 물론 좋아야 하지만 그보다 더욱 미적감각이 뛰여나야 가능한 일이기때문이다. 그리고 그간 세상에 전해진 전형적인 그의 인상인《내성적, 소극적》이였다는 성격묘사를 뛰여넘는다.
1930년 초반에 남자가 직접 바느질을 한다는것은 거의 있을수 없는 일이였는데 윤동주는 그걸 드러내놓고 했던것이다. 필요할 때면 어떤것이든 적극적으로 나설수 있는 강한 잠재력이라고 할가? 의식성향이라고 할가?
문익환목사는《하늘, 바람, 별의 詩人, 尹東柱》라는 글에서 그들의 은진중학교 학창시절의 모습을 이렇게 증언한다.
《1932년 봄에 동주, 몽규와 나는 룡정 은진중학교에서 다시 만났다. 은진중학교는 한때 모윤숙(毛允淑)씨가 교편을 잡았던 명신녀학교와 한 언덕우에 자리잡고있었다. 그곳에는 또 카나다 선교부가 경영하는 제창병원이 있고 선교사들 집이 4채가 있었다. 이 언덕은 룡정동남쪽에 있는 언덕으로서 우리는 그 언덕을〈영국더기〉라고 불렀다. 그 지경은 만주국이 서기까지 치외법권지대여서 일본순경이나 중국관원들이 허락없이 들어갈수 없는 곳이였다.
우리는 거기에서 태극기를 휘두르며 애국가를 목청껏 부를수 있었다. 신나는 일이 아닐수 없었다. 학교행사때마다 심지어 급회를 할 때에도 우리는 애국가를 부르는것으로 시작하였다.
이 학교에서 우리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 분은 동양사와 국사 또 한문을 가르치시던 명의조(明義朝)라는 선생이였다. 그분은 도꾜 제국대학(東京帝國大學)에서 동양사를 전공하신 분인데 류학시절에 일본사람들에게 돈을 안주려고 전차를 타지 않았다던 분이다.
어느 방학때인가 룡정에서 고향인 평양으로 가는데 기차를 타지 않고 자전거로 갔다 오신 분으로서 보통으로 상상조차 할수 없는 괴벽하면서도 철저한 애국자였다. 그의 동양사와 국사강의는 정말 신나는것이였다. 그는 우리에게 국사를 동양사 더 나가서는 세계사와 관련속에서 볼수 있도록 눈을 열어주었고 조국광복을 먼 안목으로 내다볼수 있도록 깨우쳐주었다…》
그런데 여기에서《태극기, 애국가…》등을 은진중학교 교내풍경의 전부라고 생각하면 큰 착오가 된다. 한것은《은진중학교의 교과서는 전부 일어로 되여있었어요.》라는 문익환목사의 증언이 있었는데 그 시대의 모습이 제대로 드러났다. 그는 또 이렇게 말하였다.
《그런데 아주 재미있는것은 선생님들이 일어로 된 교과서를 펴들고는 그대로 우리 말로 죽죽 읽어갔다는 점이지. 물론 가르치기도 우리 말로 했고. 우리는 그렇게 교육을 받으면서 자란거요…》
이 말의 의미는 선생님들이《즉흥번역》을 하면서 강의를 했다는것이다. 이러한 은진중학교생활은 1935년에 들어서서 3학년을 수료한후 큰 변화를 일으켰다. 윤동주가 생전 처음으로 집을 떠나 평양숭실중학교에 공부하러 갔고 송몽규는 독립운동에 투신하느라고 관내로 들어갔다. 이런 변화들은 윤동주의 일생에서 아주 중요한 계기가 되였다. 그중에서 특히 송몽규의 독립운동투신경력이 후날 윤동주의 체포와 옥사에서 결정적인 원인으로 작용했다.
여기에서 한가지 주목할것은 송몽규는 1934년 12월에 시행된《동아일보》의 신춘문예작품집에 응모하여 콩트부문에 당선된것이다. 작품명은《숟가락》이였는데 1935년 1월 1일《동아일보》에 게재되여 지금도 남아있다.
송몽규는 당시 은진중학교 3학년 학생이였다. 이 일은 소학교때부터 문학소년이였던 송몽규자신에게 대단한 격려와 자극이 될만한 쾌거였다는 사실외에 같은 립장이였던 동료 윤동주에게도 그만 못지 않게 문학적자극이 되였던 계기였다는 점에서도 크게 주목할만한 일이였다.
윤동주가 송몽규를 두고《대기는 만성이다.》라는 말로 벼르더라는것은 바로 송몽규가 거둔 성공이 그 전제가 되여있는것이기때문이다. 그러나 윤동주문학연구라는 측면에서 이 일은 더욱 크게 조명될 가치가 있다.
윤동주는 자기가 쓴 작품날자를 일일이 명기하여 소중히 정리해둔 점에서 가장 대표적이고 모범적인 문인이다. 그것이 그의 인간과 작품을 연구하는데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가는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윤동주가 최초로 날자를 명기해서 기록한 작품은 1934년 12월 24일에 씌여진것으로《삶과 죽음》,《초 한대》,《래일은 없다》등 세 작품으로서 오늘날 찾아볼수 있는 최초의 작품으로 지적되고있다. 상당한 수준을 보이고있는 작품이다. 그런데 이 작품들이 1934년 12월 24일 하루동안에 다 씌여졌을수는 없다. 전에 썼던것을 다듬어 완성시킨것이 그 날자라고 보아야 할것이다.
그러면 그전의 작품들은 다 어떻게 되였는가? 윤동주의 습작기의 모든 작품들은 다 류실되고 없다. 그것은 그가 그때까지 작품정리와 보관에 뚜렷한 의식이나 집념을 갖고있지 않았다는 증거이다.
그리고 1934년 12월 24일이라는 날자와 송몽규의《신춘문예》당선작품이 신문에 게재된 1935년 1월 1일은 불과 일주일간격이다.
이것은 송몽규의《신춘문예》당선과 그의 작품이《동아일보》에 실려 널리 알려진것에 크게 자극된 윤동주가 문학에 새로운 각성과 각오를 하였음을 말해준다. 그리하여 그는 그보다 일주일전에 정리하여놓았던 3편의 시를 출발점으로 하여 그후 시를 지을 때마다 완성된 날자를 기록하여 정리하고 보관하는 일을 시작한것이다.
이렇게 새로운 문학적출발점이 된 3편의 시는 이렇다.
초 한대
초 한대—
내 방에 풍긴 향내를 맡는다.
광명의 제단이 무너지기전
나는 깨끗한 제물을 보았다.
염소의 갈비뼈같은 그의 몸
그리고도 그의 생명인 심지까지
백옥같은 눈물과 피를 흘려
불살라버린다.
그리고도 책상머리에 아롱거리며
선녀처럼 초불은 춤을 춘다.
매를 본 꿩이 도망하듯이
암흑이 창구멍으로 도망한
나의 방에 풍긴
제물의 위대한 향내를 맛보노라.
1934년 12월 24일
삶과 죽음
삶은 오늘도 죽음의 서곡을 노래하였다.
이 노래가 언제나 끝나랴
세상사람은
뼈를 녹여내는듯한 삶의 노래에
춤을 춘다
사람들은 해가 넘어가기전
이 노래끝의 공포를 생각할 사이가 없다.
(나는 이것만을 알았다.
이 노래의 끝을 맛본 이들은
자기만 알고
다음 노래의 맛을 알려주지 아니하였다.)
하늘복판에 알새기듯이
이 노래를 부른자가 누구뇨
그리고 소낙비 그친 뒤 같이도
이 노래를 그친자가 누구뇨
죽고 뼈만 남은
죽음의 승리자 위인들!
1934년 12월 24일
래일은 없다
—어린 마음의 물은
래일래일 하기에
물었더니
밤을 자고 동틀 때
래일이라고
새날을 찾던 나는
잠을 자고 돌아보니
그때는 래일이 아니라
오늘이더라
무리여!
래일은 없나니…
1934년 12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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