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는 흔히 사상과 감정의 표현이라 한다.
엘리어트같은 경우는 사상과 감정의 정서적 등가물이라 하기도 했다.
단지 감정의 표현이라 하지 않고 이성이 주된 역할을 하는 사상을 동반시키는
까닭은 전술한 바대로 감정만으로 시가 성립될 수 없고 이성의 작용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역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동양시학에서 이성과 감정이라는 용어 대신 그것의 복합개념으로서
성정을 설정하고 시가 성정의 표현이라 한 말도 비로소 수긍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시의 대상은 단순한 외부세계의 존재나 현상을 가리키지 않고
외부세계의 자극, 즉 보고 듣고 경험하며 거기에 대한 반응으로 내부세계에서
일어나는 사상과 감정이 시의 대상이라 할 것이다.
이제까지 논의한 자극․반응․감정․정서․성정 등은 모두 인간의 심
리적 움직임이나 상태를 표현한다. 인간의 이러한 심리적 움직임과 시
인이 작품을 창작하는 과정에 대한 심리적 고찰은 문학연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영역이다. 이미 앞에서 외부세계의 자극으로 의식 내부
에서 일어나는 감정을 논의했지만, 감정을 시창작의 첫단계라고 하기는 어렵다.
예를 들어 꽃을 보고 아름답다거나 향기롭다는 감정을 느끼고
품지 않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그런 감정을 모티브로 해서는 작품으로
성공할 가능성이 대단히 희박하다. 누구나가 느낄 수 있는 지나치게 일
반적인 감정이기 때문이다. <국화 옆에서>의 시인 서정주는 국화를 보
면서 아름답다거나 향기롭다는 감정이 아닌 누님을 떠올렸다.
그 누님은 어떤 누님인가. 젊은 날의 그리움과 아쉬움들 때문에 가슴을 죄면서
멀고 먼 뒤안길을 돌아 이제는 그리움과 아쉬움의 젊음을 곰삭이고 거
울 앞에 서서 자기를 응시하고 있는 누님이다. 국화에서 그런 누님을
느끼고 동일시한 것은 범속한 감정이 아니다. 따라서 일반적인 감정과
특수하게 다른 이 감정은 구별되어야 마땅하다. 이를 일단 잠정적으로
영감이라 칭하고자 한다.
영감이 18세기 계몽주의주의 시대를 지나 19세기의 낡은 낭만주의 시
대 산물임에도 불구하고 다시 문제삼고 운위하는 이유는 자명하다. 이
는 플라톤 이래 오늘날까지 많은 사람들이 영감을 시창작과정의 첫단계
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이를 영적 계시, 영매론, 또는 전의
식이나 무의식으로부터의 분출이라는 주장이나 개념을 둘러싸고 많은
논란들이 있었지만 이들은 차치하고자 한다. 무엇보다도 영감을 시적
모티브로 인식하며 그 용어를 활용하기 때문이다.
또 그만큼 영감은 시 창작과정의 서두에서
핵심으로 기능하며 발상으로 시를 크게 좌우하기
때문이다. 가장 오래 전에 영감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이는 플라톤으로
보인다. 그는 시인에 대하여 매우 부정적이었지만 시인의 창작과정에
대하여 관심을 기울이고 최초로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그러면 플라톤
이 사용한 영감의 의미와 시창작과정에서의 영감의 기능에 관하여 살피
고자 한다.
시신Muse이 먼저 한 사람에게 영감을 불어 넣어주면 그 사
람에 다른 사람들이 매어 달려 영감을 나누어 받게 된다. …… 서
정시인이나 서사시인이나를 막론하고 모든 시인은 스스로의 기술
에 의하여 아름다운 시를 창작하는 것이 아니라 영감을 받고 접신
을 한 까닭에 그럴 수 있는 것이다. …… 서정시인 역시 아름다운
가락을 읊어낼 때 제 정신이 아니다. …… 영감을 받아 혼이 쏙
빠져버리고 이성의 힘이 다 새어나가기 전에는 창작이란 있을 수
없다. 시인은 기술적인 능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알 수 없는 신의
능력에 의해서 노래를 부르는 것이다.
공화국에서 시인 추방론을 주장하기도 할 만큼 시인에게 비판적 태도
를 견지했던 그는 이처럼 시인의 창작과정에 관심을 가졌으며 처음으로
영감을 언급하기도 했다. 인용부에서 확인할 수 있는 바와 같이 플라톤
은 창작이라는 행위에 대하여 철저한 영감설을 주장하는 동시에 시창작
과정에서 이성의 기능을 강력하게 부정하고 있다. 시는 이성의 작용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짧은 진술 속에서는 시인에 대한 부정적
측면도 엿볼 수 있다. 시인을 비하시키는 까닭은 그가 이상적으로 그리
고 있는 절대진리의 세계 지향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보다 더 주목해야 할 것은 시인이 시작(始作) 단계부터 영감을 받아
야, 즉 신이 영감을 불어넣어주어야 시를 쓸 수 있다는 것이다.
역으로 영감을 받지 못하거나 접신되지 못하면 시창작은 단 한 구절도 할 수
없다는 주장이다. 짧은 인용 속에 영감에 대한 정의는 보이지 않으나
플라톤이 인식하고 있던 영감은 시를 창작하고 노래할 수 있도록 시인
에게 불어넣어준 알 수 없는 신의 능력(정신 작용)이라 정리할 수 있
다. 그리고 보다 뚜렷하게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시창작과정과 영감, 그
속에서 영감의 기능이다.
봄밤에도 귀뚜리가 우는 것일까.
봄밤, 그러나 우리 집 부엌에선
귀뚜리처럼 우는 벌레가 있다.
너무 일찍 왔거나 너무 늦게 왔거나
아무튼 제철은 아닌데도 스스럼없이
목청껏 우는 벌레.
생명은 누구도 어쩌지 못한다.
그저 열심히 열심히 울고
또 열심히 열심히 사는 당당한 긍지,
아아 하늘 같다.
하늘의 뜻이다.
봄밤 자정에 하늘까지 울린다.
귀를 기울여라.
태고의 원시림을 마구 흔드는
메아리 쩡쩡,
메아리 쩡쩡
서울 도심의 숲 솟은 고층가
그것은 원시에서 현대까지를
열심히 당당하게 혼자서도 운다.
목청껏 하늘의 뜻을
아아 하늘만큼 크게 운다.
‘봄밤의 귀뚜리’는 뭔가 어색한 제목이다. 기왕 어색한 김에, 겨울이 되어 ‘봄밤의 귀뚜리’를 생각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이 시의 핵심은 봄밤에도, 귀뚜리에도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귀뚜라미는 예쁘지 않다. 특이하지도 귀하지도 않다. 그렇지만 몸집에 비해 목청이 참 크고 좋다. 그래서인지 귀뚜라미 울음소리에 빚진 노래나 시가 제법 많이 있다. 심지어 이 작품의 시인은 당장 그 앞에 무릎이라도 꿇을 태세다. 꿇을 만도 하다. 생명으로서의 신호를 저렇게도 잘 뽑아내고 있으니 말이다.
시인은 살아있음 자체를 힘차게 주장하는 것이 하늘의 뜻이구나, 감탄한다. 딱히 이유가 있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생명 그 자체가 바로 긍지라는 말이다. 그런데 당연한 이 말이 요즘 들어 더욱 특별하게 느껴진다. 이 시에 의하면 살아있는 것은 스스로 권위를 갖는다. 하물며 귀뚜라미도 생명의 긍지를 지지하며 운다는데 반대로 현대인들은 살 이유를 찾아야만 살 수 있다. 봄밤의 귀뚜리만 당당할까. 겨울에든 여름에든, 생명은 다 존엄하다. 오늘날 하늘의 뜻이 지상의 뜻에 지지 말기를 바라며 이 시를 음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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