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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사가 대중성이 없이 독서적인 향수를 느낄수 있어도 좋다...
2016년 11월 10일 22시 50분  조회:3821  추천:0  작성자: 죽림
작성자: 김은철
 김대현의 가사창작기법으로부터 본 당전 가사창작에 대한 소견
                          라주
 
  필자는 연변의 모든 예술장르중에서 가요가 수량적으로 제일 많이 창작된다고 본다
“연변음악”,”해란강여울소리”, “생활안내”.텔레비방송, 그리고 비공개간행물인 “민들레”,”미인송”등 잡지들에서는 모두 새로 창작되는 가요들을 대중들에게 선을 보이고있다. 
  연변음악은 연변조선족들과 산재지구에 있는 조선족들에게 정신문화생활에서 큰 역활을 해왔고 연변의 조선족의 존재와 독특한 문화를 전국 나아가서 세계에 널리 선을 보이는데 커다란 역할을 수행해왔다.  
  그런데 이 근년에는 창작되는 가요가 많지만 대중들에게 불리우는 가요는 극히 적다. 절대다수의 가요들은 태여나자마자 단 한번도 대중들의 입에 오르지 못하고 책속에 묻혀버리는 가련한 운명을 면치못하고있다.
  그렇다고 해서 필자는 책속에 묻혀있는 이런 가요들이 대중들에게 아무런 가치도 없는 무의미한 존재라고는 보지 않는다. 비록 불리우지는 못하지만 독자들이 훓어보는 순간 새별처럼 반짝이는 미적빛갈을 약간만이라도 발산하고있는 가사라면 독자들은 그 빛갈에서 독서적인 향수를 감수할수 있기때문이다. 그리고 책속에 뭍혀있는 노래라하더라도 그것은 연변음악의 발전에 필요한 자료로 영원히 남아있기때문이다. 그런만큼 이런 노래가사들의 질을 제고하는것은 현실적으로 중요한 과제라고 본다. 
  한마디로 말해서 필자의 주장은 불리우지 못하는 가사를 세상에 출생시켜도 대중들에게 독서적인 향수라도 선사할수있고 사료로 보관할수있는 그런 가사를 창작하자는것이다.
  유감스러운것은 그렇게 많이 창작되여 나오는 가사들에서 독서적인 향수를 느낄수 있는 가사가 많지 않다는것이다. 그것이 필자에게는 고민이 되여 나름대로 원인을 찾아보았는데 아래에 김대현의 가사 “청산의 나그네”를 분석하면서 당전 가사창작에 대한 소견을 피력하려 한다.
  우선 김대현이 쓴 가사 “청산의 나그네”를 보자.
 
       청산의 나그네
 
  청산을 밟으며 홀로 걸으며
  무엇이 신나서 휘파람 부느냐
  걸머진 배낭에도 코노래 흥얼흥얼
  산이 좋아 산을 찾는 청산의 나그네
  그리움 기다리는 청산을 찾아서
  오늘도 홀로걷는 청산의 나그네
 
  청산에 정이들어 깊이 정들어 
  외로움 달래며 다닌길 얼마냐
  새소리 꽃향기에 세월을 묶어놓고
  숲이 좋아 숲속에서 꿈꾸는 나그네
  창춘이 손짓하는 청산을 찾아서
  오늘도 홀로걷는 청산의 나그네
 
  필자가 처음 “생활안내”신문에서 이 가사를 보았을 때 창작기법이 여느 가사에 비하여 독특하다는 느낌에 오래도록 음미하며 손에서 놓지 못했다.
  우선 이 가사는 여느 가사들보다 달리 생활의 세부에서 제재를 찾았기에 새롭고 생신하다는 느낌이였다.
  개혁개방이후 작자들마다 수십년간 정치에 얽매였던 고루한 창작방법을 하루속히 버리고 자유롭게 작품을 써야한다고 주장하고있긴 하지만 실제상 창작되여 발표되는 가사들을 보면 아직도 많은 가사들이 낡은 틀에서 벗어 못나고있다. 정치선전을 위해 당과 수령을 노래하던 가사의 내용들이 지금은 연변이나 고향 혹은 부모님을 노래하는 경향으로 옮겨졌고 표현형식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다.
  사람들의 세부적인 생활에서 실감있게 다룬 가사들은 아직 퍽 부족한 상황이다. 그런데 김대현은 산을 사랑하는 한 나그네의 삶과 꿈을 짤막한 한수의 가사에 담아 비교적 완벽한 형상을 창조하여 독자들에게 보여주고있다.
  모아산 산길에 나가보면 배낭을 지고 등산하는 사람들을 어렵잖게 볼수있다. 작자는 바로 등산을 하는 이런 보통사람들의 형상으로부터 령감이 떠올라 “청산의 나그네”를 쓴것같다. 청산을 밟으며 휘파람을 불며 코노래도 흥얼흥얼거리는 나그네의 형상은 등산하는 즐거움과 유쾌한 심정을 잘 보여주고있다. 얼핏보면 가사에서 “홀로”란 단어가 “휘파람”이나 “흥얼흥얼”과 같은 단어들과 내용상 그리고 감정상 대립을 이루고 있지 않느냐는 의문도 들수있는데 문제는 “홀로”라는 단어를 어떻게 리해하느냐가 주요하다고 본다. 필자는 이 가사에서 “홀로”를 고독이나 외로운것으로 리해하지 않는다. 만약 작자가 가사의 주인공을 고독이나 외로운것으로 표현하려했다면 “휘파람”이나 “흥얼흥얼”과 같은 경쾌를 나타내는 단어들을 사용하지 않았을것이다. 따라서 필자는 “홀로”를 여럿중의 하나, 혹은 남먼저라는 뜻으로 리해한다. 등산하면 좋다고 말하는 사람은 많지만 직접 행동에 옮기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그러니 가사의 주인공 나그네는 자연속에서 삶을 남먼저 실천에 옮기며 체현하는 인물이다.
  총적으로 1절에서는 산을 찾는 나그네의 흥겨운 심정을 표현하고있다.
  2절의 가사를 보면 나그네의 삶과 꿈은 청산에 있다는것을 쓰고있다.
  인간이란 살다보면 괴로울 때도 외로울  때도 있는법이다. 나그네는 인생에서 겪는 외로움도 청산에서 달래고 흐르는 세월도 새소리와 꽃향기에 묶는다고 했는데 이는 청산에서 꿈을 가지고 영원히 살아가려는 나그네의 개성을 특징적으로 잘 보여주고있다. 청산보다 더 청신하고 아름다운 곳은 없다. 이런 곳이니 아픔도 외로움도 달랠수있는것이다.
  이 가사의 또 한가지 특점은 경물묘사에 치중하지 않고 나그네의 형상창조에 필묵을 쏟았다는것이다.
  적지 않은 여느 가사들을 보면 경물묘사에만 그치면서 그 경물속에서 활동하고있는 인물에 대해서는 홀시해 버리는 경향이 많다. 필자의 이 말은 경물묘사로만 엮어쓰면 가사창작이 안된다는 견해가 절때 아니다. 경물묘사를 위주로 하더라도 그 경물속에서 움직이는 인물들의 형상이 독자들의 심금에 안겨오면 가사의 품위가 한층 더 심화된다는 주장이다.
  김대현의 ‘청산의 나그네”를 보면 직접 경물을 묘사한 구절이 없다. 대신 청산의 경물을 묘사할수있는 적절한 단어 “새소리”,”꽃향기”,”숲”등 단어를 인물의 부각에 유기적으로 기교있게 결합시켰기에 청산의 경물이 자연적으로 인물형상과 함께 독자들의 심금에 보는듯이 안겨오는것이다. 여기에서 김대현의 숙련된 가사창작의 예술적기교를 진맥할수있는것이다.
  현실의 가사들을 보면 경물묘사와 인물형상이 유기적으로 결합되지 못한 현상들을 어렵지 않게 볼수있다.
  다음으로 이 가사의 결구는 조금도 보태거나 빼버릴것이 없이 간결하고도 엄밀하게 째이였고 가사로서의 음악적운률도 명확하다. 이는 가사형성의 가장 기본이 되는 요구로서 작자가 반복적인 사고와 수정과정을 거쳐야만이 이런 완미한 예술작품을 완성할수 있는것이다. 이는 가사창작을 식은죽먹기로 여기며 대수대수 써내는 예술품위가 낮은 작자들에게 훌륭한 귀감이 아닐수 없다.
  마지막으로 이 가사에 사용된 단어사용이다.
  개혁개방후 수십년동안 줄곧 정치선전에 얽매여 쓰던 작사자들이 사상을 해방하고 자유로이 창작을 해야한다고 말은 하지만 필자가 보기에 아직도 많은 가사창작자들이 낡은 창작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본다.
  다수의 가사창작자들은 당과 수령을 노래하던 그 본때대로 지금은 연변이나 고향 혹은 부모를 노래하는 경향에 치우치고있다. 따라서 이런 노래들에는 진달래, 두만강, 아리랑, 장백산, 모아산, 등과 같은 단어들이 많이 사용되는데 특히 “아리랑”이란 단어는 연변을 노래하는 노래에 거의나 조흥구로 혹은 부적절한 상징적의미로 나타난다. 필자가 보기에 “아리랑”은 우리 민족이 걸어온 고난의 로정과 미래 등 폭넓은 범위에서 괴로움, 행복, 희망과 같은 상징적의미를 갖고있다. 어찌보면 “아리랑”은 우리 민족의 대명사라고도 할수있다.
  하여 필자는 “아리랑”이 잘못 쓰인 구체적인 가요들을 지적하면서 평론문장을 써서 “생활안내”신문에 발표한적이 있다. 필자는 다시 한번 당전 가사창작에서 “아리랑”이란 단어를 람용하지 말것을 건의 한다. 좋은 말도 세번이상하면 듣기싫다는 우리 말의 속담이 있는데 노래마다 늘 쓰는 단어를 약국의 감초처럼 써대니 역겨운 느낌만 든다
  그런데 김대현씨는 언어사용에서 가사의 수요로부터 가장 적절한 단어를 골라쓰기에 힘을 기울이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김대현씨의 가사들이 완전무결하다고는 보지 않는다. 어떤 구절은 그 의미가 대중들에게 파악하기 어렵게 보이는 곳도있다.
  례하면 “그리움 기다리는 청산을 찾아서”이다 
  여기서 “그리움”은 나그네가 청산을 그리워하는 “그리움”이다. 그러니 이 구절의 뜻은 청산이 나그네의 “그리움”을 기다린다는것이며 따라서 그런 창산을 찾아간다는 의미로 리해된다. 한마디로 말해서 “그리움”은 “나그네”의 대명사이다.
  만일 이 구절에서 직설적으로 “나”혹은 “나그네”를 등장시키면 “나를 기다리는 청산을 찾아서” 혹은 “나그네를 기다리는 청산을 찾아서”로 될것이다. 이렇게 되면 아래위 구절과 잘 어울리지 않고 가사의 3인칭에도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니 가사의 색채가 어색해짐을 피면할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나그네”가 아닌 다른 단어 “유람객”을 찾아 “유람객을 기다리는 청산을 찾아서”로 한다면 어찌 되겠는가? 필자가 보기에 작자가 표현하려는 대상이 “나그네”인만큼 “유람객”은 “나그네”와 거리가 먼 표현대상이기에 여전히 적절하지 않다고 본다.
  하여 작자는 “나그네”의 대명사인 “그리움”을 택함으로서 청산을 사랑하고 그리는 “나그네”의 감정색채를 더욱 짙게 표현하였다. 그리고 독자들에게 음미적인 새로운 색채를 보여주었는바 이런 기교는 일반 작자들과 달리보이는 독특한 언어예술기교라 하지 않을수 없다.
  그리고 이 가사에서 “홀로”라는 단어는 독자들에게 그 사용의 의미가 리해되기 어렵다.
  가사란 문장결구가 엄밀히 째이고 언어가 세련되여야 하는데 작자는 실지 수요로부터 부득불 이런 단어를 쓰지않을수 없었다는 느낌도 들고 또 단어사용의 기묘한 예술기법이라는 느낌도 든다. 아무튼 가사에서는 될수록 쉽게 리해되는 언어를 사용하자는것이 필자의 주장이다.
  다음 김대현씨의 가사창작에서 꼭 짚어 이야기하고픈것이 하나있다. 그것은 김대현씨가 문학예술창작을 보는 자세이다. 문학창작의 자세는 아주 주요한바 그것은 정치 속박에서 벗어나 문학예술작품을 창작하는가 아니면 정치의 머슴군으로서 문학예술작품을 창작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이 점은 김대현의 가사창작으로부터 어렵지 않게 그의 창작자세를 검증할수있다. 
  1981년에 창작한 가사 “또 한배미 넘어가세”를 보자.
  
                    또 한배미 넘어가세
              
              아침해 두둥실 동산에 걸어놓고 
              이앙기 몰아가니 신바람 절로나네
              에헤야 상사나듸야 이 논판도 단숨이라
              또 한배미 넘어가세
              스리나 슬쩍 넘어가세
 
              앞벌도 들썽들썽 뒤벌도 들썽들썽
              만석벌 그 어데나 더덩실 춤이로다
              에헤야 상사나듸야 기계농사 멋이로다.
              또 한배미 넘어가세 
              스리나 슬쩍 넘어가세
 
              오늘은 록파만경 래일은 금파만경
              모내는 마음에도 금파도 넘실넘실
              에헤야 상사듸야 노래싣고 기쁨싣고
              또 한배미 넘어가세 
              스리나 슬쩍 넘어가세
 
  1981년도라면 개혁개방의 종소리가 사람들의 정신세계를 갓 환기(换气)시키기 시작할 때이다. 비록 형세가 크게 변하는 시기라는것을 작가들마다 의식하고 있긴 했지만  작가들 저마다의 사상에는 여전히 문학이 정치를 위하여 복무해야한다는 고루한 관념이 드팀없이 깊은 뿌리를 밖고있었다. 그러니 가사창작에서는 당과 수령을 노래하는것이 변함없는 기본 주제였다. 
  그런데 김대현이 그때 쓴 이 가사를 보면 정치에 얽매여 썼다는것을 전혀 찾아볼수 없다. 
  1절에서는 기계로(이앙기)농사짓는 농군들이 신바람나 일손을 다그치는 전경, 2절에서는 기계로 농사짓는 흥겨운 일터와 농군들의 기쁨, 3절에서는 풍년의 희망을 안고 모내기를 하는 농군들의 형상을 그리고있다. 
  그리고 후렴은 일손을 다그치는 농군들의 일솜씨를 보여주는바 뜻이 없는 조흥구 “스리나”와 뜻있는 어휘”슬적”이 잘 배합되여 농군들의 날랜 일솜씨를 잘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그 당시에는 농군들을 “사원”이라고 불렀는데 3절까지 된 이 가사에서 “사원”이라는 단어를 찾아볼수없다. 그 당시 어떤 지방에서는 여전히 집체로 농사를 지었고 어떤 지방에서는 땅을 농민들에게 도급주어 농사를 짓게 하였다. 그렇다면 여전히 집체의 위력을 노래할수있었겠는데 작자는 인민공사나 생산소대와 같은 집체이름을 언급하지 않았다. 
  이는 작자가 일정한 원경을 내다보며 이 가사를 쓴것이라고 본다. 한수의 가사를 쓰는데도 가사의 생명을 고려하며 쓰는것- 이것 역시 대현씨의 가사창작기법중의 홀시할수없는 특점이라고 본다. 그러하기에 30여년이 지난 지금 이 가사를 보아도 여전히 시대에 떨어졌다는 느낌이 없다. 정치에 구속되지 않은 작품은 그 생명도 길다고 본다.
  필자는 막언이 로벨문학상을 받은후 그의 소설들을 읽으면서 로벨문학상을 탄 원인이 어디에 있을가 하며 여러면으로 생각한바 있다. 막언이 로벨상을 받은데는 여러가지 우수한 원인들이 있겠으나 정치의 속박을 받지 않고 그 당시의 력사적사실들을 사실주의로 썼다는 점에 필자는 놀라운 감탄을 가지게 되였다. 
  문학이 정치를 위하여 복무해야한다고 부르짖던 그 시기에 정치의 속박을 벗어나 소설을 썼다는것도 놀라운 일이지만 그 시기에 그런 소설을 맡은 책임편집 또한 간단한 편집들이 아니라고 생각된다. 이건 막언이나 책임편집들이 벌써부터 문학과 정치의 관계에 대하여 명확한 관점을 가지고 실천에 옮기고 있었다는것을 말한다. 
  김대현씨 역시 일찍부터 정치와 문학의 명확한 관계를 명석하게 인식하고 짤막한 한수의 가사창작에도 그것을 체현하지 않았는가 하는 추측이다. 
  유감스럽지만 지금 창작되는 가사들을 보면 아직도 우리의 작자들이 정치와 문학의 관계에 대하여 명확하게 인식못하고 그 어딘가에 문학을 귀속시켜 작품을 쓰는 페단이 의연히 존재하고있다는 점이다. 지난날에는 정치를 위하여 썼는데 그 본새로 지금은 변상적으로 연변이나 고향, 또는 부모를 노래하는데 치우치고 있는것같다. 그리고 작자가 어떤 령감이 떠올라 쓴것이 아니라 어떤 의무감과 도리적인 각도에서 썼다는 느낌이다. 그러하기에 이런 가사들은 대부분 현실을 떠나 추상적으로 씌여지고있다.
  례하면 고향에 대한 노래이다. 지금 조선족들은 한국으로 대도시로 대량 이동하고 있는 상황이다. 필자의 고향은 본래 150여호가 살던 오붓한 마을이 였는데 지금은 오지가지도 못하는 10여호만 있을뿐이다. 그나마 농사에 종사하는 호는 한호도 없다. 밭과 집은 거의나 타민족이 들어와 찾이하고 살고 마을의 거리에는 돼지,오리,게사니가 꽥꽥 소리치며 다니고 학생들이 뛰놀며 공부하던 학교는 양우리로 변했다. 고향을 보면 눈물이 날 지경으로 비참하다. 필자의 고향뿐아니라 조선족마을의 대부분이 거의 정도부동하게 이런상태가 아닌가. 
  그런데 고향을 노래하는 가사들은 일률로 살기좋은 곳으로 씌여졌다. 가사에 등장하는 인물의 형상도 고향을 잊지 않고 고향을 사랑하는것으로 부각되였다. 누구의 지시에 의하여 이렇게 쓰는건가? 아니면 작자들의 령감에 떠올라 이렇게 쓰는건가? 하여 필자는 이런 가사들이 어젯날 정치에 귀속되여 쓰던 그 본새대로 지금은 고향을 노래하는데 치우치고 있다고 우에서 이미 언급한바있다. 그것도 변상적이라하면서 말이다. 그토록 고향을 그리고 사랑한다면 왜서 그 많은 조선족들이 고향을 떠나 돌아오지 않는가? 이걸 조선족의 약점이라고 보아야 할지 아니면 지구촌시대에 필시로 경과해야할 장점으로 보아야 할지 필자로서는 어떤 결론을 내릴수 없다. 
  아무튼 현실을 떠난 추상적으로 씌여진 고향의 노래가사들을 보면 마음에 안겨오지 않는다. 차라리 해방전 우리 민족이 고향을 버리고 살길을 찾아 헤매던 시기에 작자들의 머리에 자연적으로 령감이 떠올라 썼던 “나그네의 설음”,”번지없는 주막”, “타향살이”와 같은 형식으로 가사를 쓴다면 오히려 독자들의 심금을 울려줄수있지 않을가 하는 관점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 시절의 가사들처럼 앞길이 막막한 그 본새에 따라 쓰자는것은 결코 아니다. 개혁개방후의 사회의 발전은 우리 민족에게도 희망을 주고 있지 않는가. 우리 민족의 장래는 우리 민족의 자체에 달렸다는것은 명백한 현실이다. 그러니 우리 작자들은 스스로 이 점을 각오하고 한수의 짤막한 가사라도 써야하지 않을가. 우에서 실례를 든 “아리랑”을 비롯한 몇개의 단어들에만 에돌면서 가사창작에 몰두한다면 감칠맛있는 가사를 쓴다는것은 퍼그나 어려울것 같다, 작사자들마다 보다 깊은 가사창작의 기법이 모색되여야 한다고 본다. 
 우에서 평한 “청산의 나그네”와 “또 한배미 넘어가세” 외에도 “당신은 향기로운 녀자”, “꿀도 풍년 정도 풍년”,”웃는 얼굴”, “장미의 밤’등 수십수의 우수한 가사작품들이 모두 생활의 세부적인 면에서 제재를 찾아 정치적속박을 받지 않고 쓴것들이다. 생활의 실감을 느끼지 못하는 추상적으로 쓴 가사들은 한수도 찾아볼수 없었다.
  현실을 떠나 추상적으로 정치를 위해 가사를 쓰던 시기는 지나갔다. 그 시기로부터 가사를 쓰는데 숙련되고 세련된 기교를 장악했다고 자부하는 작자들이라 하더라도 창작에서는 부단히 자신의 기법을 깊이 검토하며 새로운 기교를 모색하지 않는다면은 연변의 가사는 그 앞길이 암담할뿐이라고 필자는 보고있다.
  이상 김대현씨가 쓴 가사 “청산의 나그네”와 “또 한배미 넘어가세”를 중심으로 평하면서 당전 가사창작에서 나타나고있는 부분적 병집들을 끄집어 라렬했는데 작사자들의 창작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필자는 더없이 기쁘게 생각하겠다.
 
     
이 평론문장은 2013년 "문화시대"제5기에 실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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