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zoglo.net/blog/kim631217sjz 블로그홈 | 로그인
시지기-죽림
<< 4월 2025 >>
  12345
6789101112
13141516171819
20212223242526
27282930   

방문자

홈 > 文人 지구촌

전체 [ 2283 ]

803    詩는 시인의 눈에 비친 그림 댓글:  조회:3990  추천:0  2015-12-31
  하이퍼시의 항등성 배제 및            전경과 배경의 전환기법 관찰       -김해빈 시 중심으로                          이오장(시인)     1. 하이퍼시란 무엇인가   하이퍼시가 무엇이냐는 의문은 많은 시인으로부터 듣게 되는 일상적인 일이 되었다. 그만큼 하이퍼시가 시인들의 관심과 연구 대상이 되었다는 증거이며 시문학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는 것으로 새로운 시 연구에 있어 고무적인 현상이다. 이에 비하여 요즘 일부 젊은 시인들 주축으로 언어의 형식적인 서술과 비틀린 이미지의 조합으로 독자들이 외면하게 하는 부류가 있는데 바로 난해시파라고 불리는 시인들이다. 하이퍼시는 그러한 난해시 와는 확실한 거리가 있다. 그것은 하이퍼시가 탈관념의 사물과 상상의 이미지를 결합하여 새로운 이미지를 창출하는 것에 비하여 난해시는 관념과 허구를 결합하여 이미지의 이탈을 은연중 유도하기 때문이다. 최소한 이미지 이탈이 목적이 아니라 하더라도 거기서 발생한 상상은 독자들에게 아무런 의미를 부여하지 못하고 본질을 이탈해 언어의 폭력으로까지 번지기 때문이다.   하이퍼시를 처음 도입하고 하이퍼시의 새로운 연구에 적극적인 문덕수 시인은 하이퍼시를 한마디로 압축하여 설명한다. "하이퍼시는 탈관념의 사물과 상상의 이미지를 연결한 시다. 탈관념의 사물을 한 단위로 보고 상상의 이미지를 한 단위로 본다면 모든 하이퍼시는 A단위와 B단위의 두 단위의 구조를 이룬다. 결국, 하이퍼시는 A단위를 어떻게 만들고 B단위를 어떻게 만드느냐 하는 점으로 귀결되고 그 두 단위를 연결함으로써 완결된다." 즉 하이퍼시는 관념을 완전히 버리고 주위에 있는 모든 사물을 묘사하여 시를 쓰라는 것이다. 하지만 사물만을 가지고 시를 쓴다는 것은 실로 어려운 일이다. 여기에는 고도의 훈련이 필요하다. 사물에 대하여 새로운 상상으로 몰입되기에는 자신만이 가진 사물의 본질적 이해가 필요하다.   시는 시인의 눈에 비친 사물의 감정적 변화의 그림이다. 어떠한 대상이든 시인의 눈에는 사물에서 얻은 이미지를 연상하게 되며 그것을 문자로 표현하여 독자와 공유한다. 한마디로 사물에서 느낀 자신의 사상과 감정을 표현하고 그릴 줄 아는 게 시인이다. 그러나 모두가 똑같이 느끼고 표현하지 않는다. 같은 사물을 두고 여러 가지 방법을 찾게 되고 이미지의 연상을 다른 사물과 대비하여 자신만의 세계로 읽는 이의 감정을 끌어 모은다. 그것이 개개인의 능력이다. 여기서 하이퍼시에서 빠트리기 쉬운 감동의 여부가 결정되어 새롭고 진정한 하이퍼시가 완성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보고 어떻게 느껴야 독자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하이퍼시가 되는가, 시인과 독자가 같은 감동을 공유하게 되는 것은 과거와 현재가 다르지 않다. 그것은 시문학의 발전만큼 독자들도 발전하기 때문이다. 어떠한 시를 써도 그 순간은 자신이 감동하게 되고 완성을 이뤘을 때는 독자를 찾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이론에 맞는 하이퍼시를 쓰려면 많은 연구가 필요하고 수많은 시행착오가 있을 수밖에 없다.   2. 하이퍼와 항등성에 대하여   어떠한 대상을 보든 인간의 두뇌는 기하학적 원리를 따르지 않게 된다. 말하자면 시각정보를 해석하는 인간의 두뇌는 자신만이 가진 의심을 지우지 못하는 것이다. 눈과 대상의 거리가 두 배로 늘어나면 대상의 크기는 당연히 반으로 작아져야 한다. 그러나 사람의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100m 앞의 사물의 크기와100m 높이에서의 사물의 크기는 전혀 다르게 보이는 것이다. 물리적 거리는 같지만, 위에서 내려다 볼 때가 훨씬 작아 보인다. 수직으로는 기하학적 원리가 작동되지만, 수평으로 볼 때는 작동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항등성이라는 지각 심리학적 원리 때문이다. 항등성이란 주위의 환경이 바뀌어도 사물을 일정한 방식으로 계속 바라보는 것을 말한다. 둥근 접시를 옆에서 봐도 타원이 아니라 여전히 둥근 원으로 보이는 것도 마찬가지다. 변하는 상황과 관계없이 사물의 본질을 본다는 말이다. 철학에서 말하는 동일성의 심리학적 구성 원리다.   시를 쓴다는 것은 대상의 본질을 본다는 것이다. 사물의 본질을 모른다면 시의 구성이 되지 않고 사물과의 연결 고리가 끊어져 시의 목적을 잃게 된다. 그러나 하이퍼시에서는 사물의 본질을 보는 것이 아니라 모양을 있는 그대로 보고 그 모양에서 얻은 이미지를 그리는 것이다. 소나무를 봤을 때 소나무의 생태와 자연과의 동질을 보는 것이 아니라 화자의 눈으로 본 그대로의 모습을 그때의 상황과 연계하여 거기서 파생된 상상을 이어가는 것이 하이퍼시다. 시는 대상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하면 안 되는 줄 알았고 실제로 우리는 시를 그렇게 써왔다. 그러나 하이퍼시에서는 대상의 본질 보다는 보이는 사실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므로 멀리 떨어진 큰 고목이 작은 묘목으로 보일 수도 있는 허상도 그릴 수 있고, 위에서 보는 크기와 거리를 두고 보는 크기에 연연할 필요가 없다. 인간의 생활은 대부분 수평 공간에서 이뤄진다. 그러한 이유로 사람은 대부분 항등성을 잊고 산다. 시인도 마찬가지다. 시를 쓸 때 그러한 원리를 생각하지 않고 감동을 앞세워 본능적인 감각으로 씨를 쓰기 때문이다. 이것은 객관적이고 과학적 세계에 대한 강박 때문이기도 하다.   인간이 중요한 순간에 한쪽 눈을 감게 된 것은 원근법 때문이다. 3차원의 세계를 2차원의 평면에 정확히 재현하려는 시도에서 인간은 양쪽으로 보이는 세상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2차원의 평면에 3차원의 공간을 사실적으로 재현하는 원근법은 눈이 하나일 때만 가능했다. 렌즈가 하나인 카메라처럼 정확하게 객관적으로 세상을 봐야 한다는 생각에서 그러한 현상은 두드러졌다. 그것은 항등성과 같은 두뇌의 작용을 제거하고 눈을 두뇌로부터 단절시켜 기계적인 정보만을 얻겠다는 것이다.   객관적 세계와 본질적 세계가 다르다는 것은 시인들에서 먼저 나타났다. 서양의 인상파 화가들이 의도적으로 원근법을 파괴하기 전부터 시에서는 항등성 제로의 원근법 강박에서 벗어나 보이는 데로 느끼는 데로 시를 쓰게 된 것이다. 르네상스 이전부터 시의 주류는 본질적 세상의 이상을 그려나가 인류는 객관적 재현의 이데올로기를 벗어난 것이다. 그러나 현대의 사람들은 기계문명에 완전히 길들어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스마트폰. 컴퓨터 등의 화면 세상에 빠져 두 눈으로 확인한 것보다 카메라가 잡은 세상만을 믿고 산다. 본질의 통찰력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사물의 본질을 모르니 자신의 위치를 파악하지 못했다. 여기서부터 하이퍼시는 시작됐다. 사물의 본질을 파악하여 있는 그대로의 모습과 상상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본질을 무시하고 있는 모습 그대로의 그림 위에 새로운 상상을 결합하여 하나의 이미지를 창출하는 것이다. 카메라가 잡은 객관적 정확성에 인간의 사상과 감정을 담을 수 있는 세 번째의 눈, 다시 말해 본능적인 감성이 있어야 이미지의 연속성으로 하이퍼시가 이어지는 것이다.   3. 하이퍼시의 전경과 배경의 전환   시를 쓴다는 것은 창조적 행위다. 시인은 창조자로서의 요건을 갖췄을 때 비로소 진정한 시인이 된다. 창조적 사고에 대한 선구적 연구자인 월리스는 창조적인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어떠한 문제로부터 몸과 마음이 일시적으로 떨어져 있을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즉 시의 대상인 사물을 대했을 때 확연한 이미지가 이어지지 않는 것을 고민하지 말고 잠시 떨어져 다른 것을 상상하게 되면 불현듯 어떠한 상상이 떠오른다는 것이다. 상상의 존재란 자신이 속한 맥락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사물을 지각할 때 사물의 각 부분을 따로 인식하지 않고 하나의 통합된 형태 즉 게슈탈트(독일어로써 심리현상은 어떠한 요소의 가산적 총화로는 설명할 수 없고 전체성을 갖는 동시에 구조화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성질)로 파악한다. 이때 중요한 부분은 전경이 되고 나머지는 배경이 되는 것이다. 마치 사진을 찍어 인물만 뚜렷하게 나오게 하는 아웃포커싱과 같은 원리다. 시에서 이와 같은 전경과 배경의 관계가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사물의 어떤 부분이 관심의 초점이 되어 전경이 되면 나머지는 배경이 된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맥락이 바뀌면 전경이 배경이 되고 배경이 전경이 된다. 이렇게 게슈탈트의 끊임없는 형성과 해소, 이 과정이 사물의 서사 즉 이야기되는 것이고 새로운 이미지의 연결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묘미이며 진정한 하이퍼이다. 전경과 배경의 전환이 매끄럽지 못하여 배경으로 물러나야 할 전경을 바꾸지 못하고 고정된 존재만 바라본다면 하이퍼의 구성이 한정되게 되어 형성이 뒤엉켜버리는 데 있다. 여기서 하이퍼시에서 잃게 되는 감동의 여부가 결정되는 것이다.   하이퍼시의 전경과 배경을 전환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몇 가지를 든다면, 첫째. 기존의 고정 관념을 확실하게 버리는 것이다. 같은 하이퍼시에서도 똑같은 단어가 중복될 수 있는데 이것이 또 다른 관념이 되는 것이므로 유행 같은 언어의 유희에 빠져서는 안 된다. 둘째. 사물의 움직임과 동화된 주위 환경을 봐야 한다. 즉 새로운 사물을 찾아내어 그 움직임을 자신에게 맞춰야 한다. 다시 말하면 자신이 움직여 사물의 움직임을 찾아야 한다. 셋째. 관심을 바꾸는 것이다. 이제까지 몰랐던 사물에 흥미를 느끼고 새로운 사실을 깨치고 경험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스스로 게슈탈트 전환이 가능해야 창조적인 발상으로 하이퍼시를 쓸 수 있다.   4. 김해빈 시에서 나타난 하이퍼시의 관찰   하이퍼시가 새로운 시문학으로 자리 잡아 시단의 큰 방향을 일으킨 후로 많은 시인이 참여하여 하이퍼시에 대한 연구와 그 실현에 앞장서고 있다. 각자의 위치에서 자신의 성향에 맞는 새로운 이미지를 창출하기 위하여 그동안에 익혀왔던 사물의 모습을 다른 각도에서 보기 시작한 것이다. 적극적으로 참여한 시인들을 보면 문덕수 시인을 중심으로 심상운. 김규화. 조명제. 송시월. 안광태. 이춘하. 정연덕. 고종목. 이솔. 위상진. 김기덕. 이선. 김예태. 허순행. 김해빈 등 문단의 활동이 활발한 시인들이다. 나열된 이름에서 빠진 시인들도 상당수가 있어 새로운 시론으로 나타난 하이퍼시 운동이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가를 증명하고 있다. 이중 김해빈 시인의 작품을 중심으로 하이퍼시의 이론과 실제의 작품이 하이퍼답게 이해되고 부합되는 것에 대하여 관찰해보기로 한다.   김해빈은 초기 작품부터 전통 서정을 크게 벗어난 상태로 나타났다. 처음 작품집 "새에 갇히다"를 살펴본다면 그 제목부터 하이퍼 유형을 표출하고 있는데 이는 하이퍼 이론을 접하지 아니한 상태에서 자신의 안목과 상상을 은연중 습득한 것으로 보인다. 일반적으로 사람이 새에 갇힐 수는 없다. 그러나 김해빈은 스스로 새에 가두어 날개를 빌리고 새를 통하여 본 새로운 세상을 그린 것이다. 그 후의 작품집에서도 하이퍼적인 요소를 품고 있는 것이 곳곳에 보이는데 이는 원래의 시적 감성이 일반 서정에서 크게 벗어나는 감각을 타고난 듯하다.   시문학 5월호에 발표된 시를 살펴보기로 한다   비 그친 자운서원 잔디마당 위로 눈알 굴리는 잠자리 떼 뇌관 푼 핵폭탄 물고 몰려간다   유럽을 평정한 히틀러 독일공군이 영국 본토를 향해 도버해협 상공을 날고 있다 우중충한 날씨에 내려다보는 도시는 무표정하고 괴링의 출격명령에 날개를 편 전투기 노선을 이탈해 런던 제국전쟁박물관(Imperial War Museum), *블리츠(Blitz)체험관 상공을 낮게 날고 있다   잠시 멈추었던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전투기는 급하강한다   빗금으로 치닫는 빗줄기에 야금야금 저려오는 날개 나치는 영국 상륙을 포기하고 두 손을 들었다   아버지보다 위에 있는 율곡무덤도 오만원권 오천원권 지폐도 아닌, 기념관 빛바랜 초충도에 앉은 고추잠자리   헤드라인 ‘오늘이 우리의 승전일입니다(TODAY IS V.E. DAY!)’     *블리츠Blitz 체험관: 유대인 학살 기록관과 런던 대공습 당시 일반인들의 비참한 삶의 모습을 꾸며 놓은 곳                           이 작품은 하이퍼적인 이론에서 벗어나지 않은 전형적인 하이퍼를 보여주고 있다. 고추잠자리는 평화의 상징이며 한가롭고 아름다운 장면을 연출하는 자연의 개체이다. 누구나 비 그친 뒤에 잔디밭 상공을 바람 없이 날아다니는 고추잠자리를 대하면 내면에 감춰진 그 어떤 고민과 울화도 잊게 된다. 어린아이가 고추잠자리를 잡겠다고 뛰어다니는 모습에 함께 동조하지 않을 수 있을까. 한마디로 평화의 상징이라 아니할 수 없는 곤충이 고추잠자리다. 그러나 이러한 모습은 겉모양뿐이다. 잠자리의 생태를 보면 곤충 중에서도 상위급인 포식자이다. 잠자리 유충이 물속에서 자랄 때 장구벌레 등 작은 애벌레나 심지어 개구리의 올챙이까지 잡아먹으며 사는데 애벌레의 시기를 보내며 먹는 먹이의 수효가 몇 만 마리가 된다는 학계의 발표도 있다. 또한,땅 위에서 유충으로 지내는 명주잠자리는 일명 개미귀신이라 불리며 함정을 파 수많은 개미를 잡아먹는 포식자이다. 이것이 잠자리의 생태이며 본질이다. 사물의 본질을 보고 시를 구상하지 않고 사물의 현재 보습을 보고 시를 쓴 것이지만, 전투기와 히틀러를 잠자리에 대입시킨 것을 보면 김해빈은 사물의 본질까지 깊이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자운서원은 율곡 이이의 위패를 봉안한 사원이며 율곡의 가족묘를 조성한 곳이다. 알다시피 율곡 이이는 성리학자로 알려진 조선의 대표적인 유학자이다. 또한, 평화를 지키는 데는 힘이 있어야 한다며 10만 군병을 양성해야 한다고 주장한, 힘을 앞세운 평화주의자이기도 하다. 잠자리가 평화로운 모습을 보이는 데는 힘을 기르는 포식자의 시기가 있다는 것을 자운서원과 잠자리를 대비하여 나타낸 것으로 사물의 실체를 연결 인식하는 항등성을 벗어버리고 현재의 모습을 그대로 대비시킨다.   히틀러는 근대의 몇 안 되는 독재자의 대명사이다. 힘을 내세워 유럽과 전 세계를 점령할 목적으로 폭격기를 동원하여 이웃 나라를 폭격한다. 김해빈 시인의 상상은 사물의 현 상태에서 멈추지 않고 유럽까지 날아가 히틀러의 폭격기를 불러낸다. 도버해협을 날아가는 폭격기가 자운서원 앞마당을 날고 있는 잠자리가 된 것이다. 이것이 사물에서 파생된 새로운 이미지의 연결이다. 고추잠자리는 전경으로, 자운서원은 배경으로 나타나다가 폭격기의 등장으로 자운서원이 전경이 되고 잠자리는 배경으로 물러나는 전환의 기교와 이율곡의 사당과 가족이 배경이 되어 그려지다가 다시 고추잠자리가 전경이 되는 하이퍼적인 기법은 게슈탈트의 원리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자운서원의 유래와 형성. 잠자리의 생태와 실태, 히틀러의 폭격기와 폭탄의 파열음을 하나의 장면에 대비시켜 이미지의 연결을 이뤄낸 하이퍼의 퍼즐을 무리 없이 그려냈다. 사물의 과거가 현재의 평화를 만든 것이 아니라 현재 보이는 모습의 잠자리가 그대로의 움직임으로 평화를 만들어 모두가 승리한 승전 일을 만든 것으로 복합된 이미지가 하나의 이미지가 되어 하이퍼에서 빠지기 쉬운 감동까지 만든 것이다.     웃음보에 헛바람 들었는지 멸치같이 깡마른 남자가 귀에 이어폰을 끼고 시청 앞 건널목 횡간막 사이를 비집고 히죽히죽거리며 다가온다   가을걷이 끝날 무렵 볼썽사납게 조무라든 꽈리를 보았을까 소피 마려운 여자의 뒤태를 보았을까 2시간 전 언양불고기 먹고 ktx 타고 올라온 여자의 하프코트에 묻은 쇠똥 굴러가는 소리를 들은 게야   설익은 시에 짓눌려 내 흉강에 덧쌓인 말씨들이 폐를 짓누르고 있다는 것을 혹시 눈치챘는지 남자는 이내 뒤따라오던 스키니 차림에 킬힐 신은 여자의 꽁무니에 눈길 꽂힌다   거미줄 같은 거리를 기웃거리며 권력을 찾던 남자는 몇몇 조무래기들의 웃음과 교회 전도사로부터 받은 일회용 휴지를 주머니에 우겨넣고 도마뱀처럼 꼬리 자르고 건물 안 으로 들어 가버린다   성형외과에서 나온 얼굴 퉁퉁 부은 여자, 공터를 지나다 울타리 넘어온 축구공에 뒤 통수 맡고 미간을 찌푸리려 하자 완충지대 튤립나무에 앉았던 까치가 깔깔거리며 날아 간다   주유소 화장실에 뛰어든 여자의 스커트자락 놓지 못한 남자 여자의 핸드백 들고 휘파람 부는 듯 볼을 잔뜩 오므렸다 부풀리며 달착륙을 시도하고 있다   정지신호 무시한 채 응급처치하고 나오는 여자의 오줌보가 조무라 들자 주유하고 있던 남자의 자동차 바퀴에 짓눌린 꽈리 터질 듯 팽팽해진다                                                                                앞의 작품이 사물의 모양을 그려 새로운 이미지를 엮어낸데 비하여 이 작품은 사람의 감정을 사물화하여 전경과 배경의 전환을 적절히 이뤄낸 데 있다. 남녀의 생태적인 일상을 여러 각도의 방향에서 바라보고 남자의 히히낙낙 거리는 실태와 여자의 팽팽해진 감정을 하나의 구멍으로 빠져나가게 하여 긴박한 상황을 묘사하였다. 여기에는 남자를 전경으로 하고 그 뒤의 배경에는 여자의 감정이 언제나 받혀주는 형태로 사물의 표현보다 사람의 감정을 그려내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세상의 모든 남자는 세상의 모든 여자가 자신의 소유라고 믿고 사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후손 번식이라는 지대한 자연의 섭리가 남자들을 착각하게 하였을 것이다. 작품 속의 남자는 여자가 모르는 비밀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 혼자만 들을 수 있는 이어폰을 꽂고 누군가와 대화를 하며 키득거리는 모습을 여자는 뒤에서 살펴본다. 현시대의 새로운 모습일 수도 있다. 하지만 배경으로 있는 여자의 감정 기복은 폭발 직전이다. 그런데도 남자의 눈길은 또 다른 여자의 모습에 현혹되어 뒤따라가는 실태를 보인다. 이때의 모습을 바라보는 여자는 남자의 기본 욕망을 이해할 수 있을까. 권력과 금전을 얻기도 전에 섭리적 욕망만을 풀어내려는 남자는 여자의 표적이 된다. 대부분 여자는 표적의 남자를 향해 창을 던지는 게 아니라 다른 출구를 찾게 되고 그 출구로 성형외과를 들락거린다. 그것이 실패할지라도 후회하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하며 남자에 대한 분노를 그렇게 푸는 것이다. 여기에서 김해빈 시인의 고민은 시작이다. 남자와 여자의 생태적인 모습을 버리고 현실에 맞는 모습을 그려야 할지. 남자의 비뚤어진 욕망의 발산을 원칙적으로 그려야 할지를 고민한다. 그 결과로 달이라는 위성을 찾았다. 해결을 위하여 선물을 준비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땅을 찾아 원색적인 남자의 욕망을 잡은 것이다.   기흉은 결핵성 파괴 등의 원인으로 폐의 표면에 구멍이 생겨 흉막강 안에 공기 또는 가스가 찬 상태를 말하는 것으로 자꾸만 헛바람이 빠져나와 남들이 보기에는 실없이 웃는 모습으로 보이는 병이다. 김해빈의 기흉은 그러한 질병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현시대를 살아가는 평범한 남녀관계에서 시적 모티뷰를 찾아낸 것이지만 사물의 모습이나 움직임에서 이미지를 찾지 않고 사람의 감정과 행동을 사물화하여 원리적인 항등성을 배제하고 전경과 배경을 적절하게 전환하여 한 편의 하이퍼시를 완성하였다. 이것은 사물에서 찾은 이미지보다 쉽게 그려질 것 같아도 사람의 변화가 짐작하지 못할 이변의 연속인 것을 고려할 때 훨씬 더 어려운 작업이다.   마지막 연에서 "여자의 오줌보가 조무라 들자 주유하고 있던 남자의 자동차 바퀴에 짓눌린 꽈리 터질 듯 팽팽해진다"는 남녀의 생리적인 차이는 결국 하나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데 이는 남녀관계는 이율배반적으로 동등하다는 항변으로 보인다.     날카롭게 솟은 뿔 동그란 눈 지그시 감은 타르보사우루스 알을 낳는다 간척지 모래 위로 퍼져가는 억새를 스쳐온 바람이 알을 날름 삼켜버린다   화성, 개미섬 기슭 따라 풀잎까지 벌떡 일어서서 조이는 팽팽한 호흡 바위를 핥아대던 기다란 혀들이 용암에 젖은 이빨, 발톱, 눈빛들이 번뜩인다   알을 깨트리며 주먹을 휘두르던 주몽이 활을 만들고 당긴 시위를 놓는다 경주로를 이탈한 말의 울부짖음 벌판을 가르는 선이 무너져 뚜렷하게 찍히는 발자국 부러진 청동검 반쪽을 주몽이 알 속에 감춘다 뺏고 빼앗기는 칼 유리가 알 속에서 청동검을 찾는다 얼었던 송화강이 녹는다   철거덕 철컥 철거덕 철컥 고개 쳐들고 들판을 달리는 점박이 또다시 커다란 알을 쏟아낸다 논바닥에 뒹구는 알 사육장 소가 침 흘리며 되새김질한다   돌알을 품고 있던 메갈로사우루스 시화방조재를 바라보며 푸른 눈 껌벅거리고 삭아버린 티라노의 하얀 숨결 솟아오르는 공단 굴뚝 안킬로사우루스의 잿빛 눈물이 하수구를 따라 흘러내린다 고삐 묶인 폐선 허리께서 삐거덕삐거덕 막대뼈 조이는 소리 몸 사르며 찢어진 풍어 깃발마다 익룡 발가락 펄럭인다   산조, 칠면초, 갈대가 뒤덮인 갯벌 알을 낳은 타르보사우루스 위턱을 치켜들고 슬금슬금 바닷가 암벽 속으로 사라진다 억새의 손짓을 기억하는 코리아케라톱스 알이 입 쫙쫙 벌린다                               첫 번째 작품이 사물의 형태와 움직임을 그려 새로운 이미지의 연결을 이뤄낸 것이라면 두 번째의 작품은 사람의 심리 상태를 사물화하여 사물과 똑같은 상태로 전경과 배경을 전환하여 하이퍼적 완성도를 높인 것이다. 이와는 다르게 세 번째 작품인 코리아케라톱스는 과거와 현재를 합하여 미래로 이끌어나가는 새로운 기법을 보여주고 있는데 김해빈 시인의 시각과 감각이 사물과 사람의 연결된 상상의 고리를 한 차원 뛰어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코리아케라톱스는 5천만 년 전 이 땅을 지배했던 공룡의 이름이다. 시화간척지가 생긴 후에 드러난 갯벌 개발 중 우연히 발견된 공룡알 화석에서 그 이름을 얻은 우리의 토속 공룡으로 그 흔적을 다 찾지 못하여 아직도 발굴 중이다. 그곳에 가면 금방이라도 공룡들이 포효하며 뛰어나올 것 같은 환상에 쌓이고 알 화석을 마주한 순간은 누구나 과거의 자연 상태를 떠올리며 현실을 잊게 만드는 곳이다. 김해빈이 본 것은 누구나 똑같이 보는 사물이다. 각자의 상상과 현재 보이는 현실을 크게 벗어나지 않은 채 자신만의 상상으로 몰입되어 각종 공룡을 만난다. 그러나 김해빈이 본 것은 남과 확연히 다르다. 대부분의 사람은 알을 떠올리게 되면 그 크기를 재어보고 부화될 새끼의 크기와 성장한 크기를 상상한다. 김해빈은 초기 삼국시대의 전설인 주몽을 불렀다. 건국에 필요한 힘과 힘을 받쳐줄 각종 무기와 활, 불타는 듯한 눈빛을 공룡의 힘과 대비하여 나라를 세운 주몽의 활약을 그려냈다. 거기에 고구려의 건국신화를 떠올리고 주몽과 유리와의 관계를 설정하여 전경과 배경의 전환을 이뤄낸 것이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현실로 돌아와 농기구인 트랙터가 뱉어내는 하얀 덩이(소를 먹이려고 볏짚을 효소와 섞어 단단하게 굴리는 일종의 싸이로 방법)를 알과 전설에 혼합하여 인간이 자연과 싸워 만든 거대한 방조제를 향해 생태파괴의 폭력을 항의한다.   한 걸음 더 나가서 산조. 칠면초. 갈대가 뒤엉켜 펄럭이는 갯벌의 평화에서 쫓겨 가는 공룡의 마지막 장면으로 한 편의 희극과 같은 연출기법을 보여줘 하이퍼적시에서 빠트릴 수 있는 서정의 감동을 이끌어내었다. 항등성을 배제하고 사물의 모양과 움직임만으로 전경과 배경의 전환을 그려낸 것이다.     눈 쌓이는 모스크 앞에서 기도하는 무슬림들, 눈밭에 앉아 있는 낙타, 피라미드 앞 스핑크스는 미소를 잃었다. 사람들 호기심이 파라오의 역사를 뒤집어놓고 말았다   대립이 가득한 지붕을 하얗게 덮은 눈은 주도권 싸움에 뜨겁고 치열했던 여의도 십자가를 잠재울 수 있을까                                       압축된 삶은 의미가 없다며 하루하루를 느슨하게 흘려보내던 여자는 접시에 채소셀러드와 과일을 듬뿍 담아 테 이블 아래 주름진 의자에 앉는다   1월을 지나 2월이 오면 부슬부슬 내리는 비에 젖은 쭉정이도 제 몸 부풀리며 이벤트의 계절을 또 기다리겠지   12월 어느 날 베고니아 뷔페 시인의 접시 위에 퉁퉁 불어 튼 강남콩 한 알 덩그러니 남았다                                           위에 부분적으로 나열한 두 편의 시에서도 김해빈의 시는 시종일관 하이퍼적인 기법을 유지하며 시의 방향을 잡아 나간다. 폭설에서 100년 만에 이집트를 덮은 눈에 사막의 피라미드는 하얗게 덥히고 스핑크스가 미소를 잃은 상황에서 군중은 자유를 외치며 혁명가를 부른다. 개인의 염원이 하나로 뭉쳐 짓눌린 자유를 찾는 과정에 수많은 사람이 희생되고 되찾은 자유는 폭설에 갇혀 다른 고난을 불러내는 피의 역사, 한 송이의 눈이 뭉치면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를 보여주지만 웃음을 잃어버린 승리는 역사의 소용돌이를 다시 일으킨다. 이에 대비하여 우리의 의사당인 여의도를 등장시켜 대립과 설전이 난무한 상황을 꼬집고 그 옆에 위치한 높다란 십자가의 건물에서 일어난 분쟁을 종교적인 문제 즉 폭설로 불러낸 전환의 기법이다.   배부른 콩에서는 자유분방하고 욕망을 위해서라면 어떤 거리낌이 없는 행동을 보이는 남자와 여자를 대비시켜 인간의 추악함이 얼마나 높아야 무너질 수 있는지를 쭉정이 콩에 비유하였다. 완성된 인간은 없으나 완성으로 가는 과정이 얼마나 힘든지 모르는 남자와 여자가 군중들 앞에서 자신을 내세우려는 과욕에 대한 행동을 꼬집어 통통하게 영걸은 콩과 익지 않아 쭉정이가 된 콩으로 그려낸 기법은 김해빈의 특유한 하이퍼적 시의 기교다. 어느 작품에서든 사물과 사물의 연관을 찾아내고 사물의 움직임과 멈춰진 정서를 끄집어내는 김해빈의 하이퍼시에 대한 연구와 몰두는 앞으로 한 발짝 더 나갈 것이 분명하다. 이는 시의 실제가 이론을 앞질러 가기 때문이다.     5. 하이퍼시의 방향   시 자체가 원래 하이퍼라고 주장하는 시인도 있다. 일상의 용어에서 벗어나 그 위의 가상 현실을 그리는 것이기 때문에 시는 언제나 하이퍼적인 요소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이의 주장은 틀린 것이 아니다. 다만 거기에 머무르지 말고 한 걸음 더 나가 지금껏 사용한 관념과 묶인 상상을 벗어버리자는 하이퍼시 운동은 우리 시단에 새로운 활력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 하이퍼시는 헝클어진 실타래를 풀어내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사물에서 나온 가닥의 실을 한곳에 모아 하나의 실타래로 만드는 것이다. 이는 시를 쓰는 시인이라면 누구나 가능하다. 결코, 어려운 작업이 아니다. 사물을 볼 때 이미 머릿속에 박혀있는 고정된 환경과 형태를 벗어버리고 사물마다 가진 새로운 이미지를 찾아내어 하나의 특출한 이미지를 만들자는 것은 난해한 시를 쓰자는 것이 아니다. 문명의 발달에 맞춰 자연적인 정서에 기계적인 정서를 도입하고 발달에 따라 변해가는 인간의 정서도 바뀌어 가야 한다는 주장은 분명히 옳다. 하지만 하이퍼시에서 이미지의 연결을 위하여 여러 갈래의 사물이 등장하고 조합된 이미지가 매끄럽지 못하여 시적 감동이 적다는 지적을 극복할 필요가 있다. 이는 개개인이 극복하여 풀어내야 할 숙제다.    
802    詩의 징검다리는 어디?... 댓글:  조회:4269  추천:0  2015-12-31
     전문      이 시의 화자는 늦겨울 산행중에 대지가 혼곤한 잠속에서 새싹을 피우려 기지개켜는 듯한 초봄의 정경을 의식과 무의식간 상상으로 넘나들고 있다. 소재나 정서는 지극히 한국적이지만 기법은 매끄러운 언어구사와 하이퍼텍스트적 구성이다. 한국인이라면 깍궁놀이 하던 모성에의 추억과 그리움이 애잔할 것이다. 엄마가 사랑스런 갓난애와 눈을 맞추고 깜짝 숨었다 깍궁! 하고 다시 나타나면 까르르르~ 아이의 천진한 웃음이 폭발되는 전통적 사랑놀이요, 육아법이다. 엄마나 아이 둘다 실존재이지만 갓난애 입장에서는 깍궁하는 엄마는 현실이요, 잠시 안보이는 엄마는 부재의 가상현실이기에 느닷없는 재출현에 그토록 자지러질 것이다. 배낭을 벗고 양지에 앉은 화자 자신도 싹이 트려는 듯 몸이 근질근질하고, 산곡을 넘나드는 작은 새와 진달래, 철쭉과의 정겨운 수작이 새싹들의 겨울잠을 일깨우는 깍궁놀이로 들린다. 이 시의 연상 고리는 양지에 앉은 화자--계곡의 진달래, 철쭉-- 작은 새의 재재거림--어머니의 깍궁! ---새싹을 어르는 작은 새들의 깍궁! --이에 화답하는 진달래 철쭉들의 잉잉거림 등 엄마와 새들의 깍궁을 회상하는 리드미칼한 환청 하머니이다. 그리고 시상의 각 유니티들을 매끄럽게 하는 하이퍼링크로 ‘깍궁!’ ‘ 포르~포르르~’ ‘이~잉~잉’ 같은 의성어들이 유려한 테크닉을 보여주고 있다.     햇빛은 무색이다가도 단풍나무에 가 닿으면 단풍잎이 된다/ 노랑은 노랑금빛 빨강은 빨강금빛/ 갠지스강가에 쌓아놓은 나무더미에 빨간 불꽃을 당긴다/ 빨간 불꽃에 금빛 영 혼이 하루종일 번쩍이며 탄다/ 아무 말 없이 타는 시체 위로 허공에 고루 숨어 사는 햇 빛이/ 모조리 몰리어간다. 타다닥 탁탁 단풍무더기/ 햇빛은 단풍을 좋아해, 단풍에 닿자 마자 크게 웃어/ 마릴린 몬로는 입을 약간 벌리고 금빛 머리칼을 / 신사의 가슴에 올려 놓는다 < 신사는 금발을 좋아한다 >/포스터를 보는 18살 소녀도 크게 웃어/ 학교가 끝 나면 곧바로 동방극장엘 갔지 내친구와 몰래/ 웃음소리가 크게 퍼지고 먼 마을로 간 마 릴린 몬로가 /타는 단풍속으로 들어와 앉는다 , 햇빛이 심지를 돋운다 --- 김규화 < 햇빛과 단풍 > 전문      시문학 발행인이며 왕성한 창작으로 수 십 년의 시력을 지닌 김규화 시인이 뒤늦게 하이퍼시에 경도되면서 시적변신에 나서 주목되고 있다. 하이퍼텍스트시에 대한 김규화 시인의 인식은 시문학 4월호의 심상운-김규화의 대담 “하이퍼텍스트 지향의 동인지”에서 엿볼 수 있다. 위에 인용한 외에도 등에서 하이퍼텍스트시의 실험적 특성이 잘 나타나 있다. 인용 시에서는 햇빛과 단풍을 매개로 한 자유연상과 의식. 무의식의 가지치기, 청소년 시절 추억 등이 행간에 배어 있다. 시상전개의 각 유니트와 연상단락의 하이퍼링크적 징검다리로 동서양과 현재, 과거를 넘나들고 있다. '무색인 햇빛이 단풍잎이 되는 것을 시작으로 --노랑 빨강 금빛--갠지스강 나무더미-- 빨간 불꽃--금빛 영혼 --타는 시체--단풍무더기 --단풍에 웃는 햇빛으로 확산된다. 이어서 -- 마릴린 몬로의 금빛 머리칼----영화 포스터 보는 18살소녀--친구와 몰래 간 동방극장으로 증폭되고 --단풍속으로 돌아와 앉는 마릴린 몬로--심지 돋는 햇빛'으로 제자리를 찾는다. 여기서 하이퍼링크적 연결고리는 햇빛과 단풍의 교호작용을 통해 마치 끝말잇기 놀이하듯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이미지군이며, 이것이 매끄러운 시읽기와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고 있다. 독자로서는 이런 하이퍼시에서 의미나 결론을 애써 찾기보다는 파노라마 경관 감상하듯 화자의 자유분방한 공상과 의식의 흐름을 따라 즐기며 음미할 일이다.     그의 방 우측 벽에 걸려 있는 첫 번째 그림-검은 철제 의자위에 사람 대신 활활 불타 는 붉은 꽃 한 다발이 앉아있고, 그 밑엔 “ 죽은 뱀의 영혼은 발가숭이로 꿈틀거리며 꽃 밭의 환한 햇빛속으로 들어 갔을까? 라는 글이 붙어있다. 나는 그 글 밑에 ” 영하 10도 의 겨울 밤 시멘트 도로 바닥에 귤장수가 떨어 뜨리고 간 노란 색종이 같은 귤의 꿈을 보았느냐?고 쓴다. 그는 그밑에 “ 시인들은 밤마다 죽은 언어가 새로 태어나는 나라로 여행을 떠난다고? ”라고 또 쓴다. --2연 생략--   그때 그의 두 번째 그림 속에서 나온 파랑 공, 초록 공, 노랑 공, 빨강 공, 하양 공이 거실을 이리저리 굴러다니다 점점 부풀어 식탁이 되고 놀이터가 되고, 침대가 되고, 의 자가 되고, 남자 여자 어른 아이들과 들판을 통통통통 신나게 튀어가고, 마을 언 덕에 봄빛이 눈부신 한낮 하늘을 나는 마차가 되어 지붕 위를 둥둥 떠간다. 나는 찬란한 햇빛속에서 공이 터지는 환상에 전율한다. ---심상운 < 미완성의 시-- 그림 감상하기> 1연, 3연      심상운 시인은 최근 몇 년 논란의 초점이었던 탈관념시, 디지털시에 대한 명쾌한 해설과 이론적 배경을 제공함으로써 독자들의 이해를 촉구해 왔다. 그런 활동의 연장선상에서 시문학 4월호에서는 김규화 시인과의 ‘하이퍼텍스트 지향의 동인지’ 라는 대담을 통해 하이퍼시론을 피력하고 이를 토대로 창작과 동인활동을 시도함으로써 우리 현대시의 물꼬를 틀고자 노력하고 있다. 시문학 5월호에는 하이퍼시 특집으로 < 북한산의 레몬 향기> < 미완성의 시>도 선보이고 있다. 심시인이 수십년 동안 추구해온 토속적 서정과 이미지 위주의 모더니즘에서 벗어나 디지털리즘과 전자미디어의 하이퍼텍스트적 특성에 주목하고 동인 에콜로 변신을 시도하는 노력을 높이 살만하다.  인용한 에는 하이퍼시에 대한 그의 애착과 기법적인 특성이 나타나 있다. 하이퍼시가 방사성 자유연상, 공상적 의식의 흐름 따라가기이면서 말하기 보다는 보여주기에 치중한다는 점에서 ‘그림감상하기’라는 부제를 달고, 실험단계라 라는 제목을 붙이지 않았나 추측된다. 일반 독자입장에서는 난해하고 생경한 이 시에서 어떤 특정한 의미나 순서, 상식적 질서, 교훈을 찾으러 들지 않는다면 오히려 디지털적 하이퍼시의 특성을 따라 흥미 있게 읽을 수 있다. 추상화 감상의 요점이 그림 자체의 감흥을 중시하고 사실에 입각해 무엇을 그렸는지, 무슨 의미인지는 부차적인 사항인 것과 같다. 실제로 지금 이 시공간에도 미쳐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는 다차원적 상황들이 앞뒤 없이 다발적으로 일어나고 있고, 천지만물의 존재나 사건, 사물들이 불가측, 불연속적이어서 어찌 보면 뒤죽박죽이지만 나름대로 혼돈 속에 우주순행의 질서가 있는 것과 같다고나 할까.  이 시는 그의 방에 걸린 다섯 개의 그림 중 첫 번째 그림 감상을 시작으로 자유연상과 분방한 의식, 무의식의 흐름을 환상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시 첫 연의 골격은 첫 그림: 검은 철제의자위에 불타는 붉은 꽃다발--그 글 밑에 그와 내가 주고받는 컴퓨터 댓글 형식으로 -- “ 꽃밭의 햇빛 속으로 들어 간 죽은 뱀의 영혼” ”영하 10도의 겨울밤 시멘트 도로 위 귤의 꿈“ ” 죽은 언어가 새로 태어나는 나라로 시인의 여행“ 등 다소 난해한 글귀들이 화답한다.  다섯 개의 그림 감상도 차례대로가 아니라 1.3.5.4.2로 비순서적이며 세 번째 그림을 지나 다섯 번째 그림으로 가자 네 번째 그림에서 태평양의 물이 흘러내리고 동시 다발적으로 두 번째 그림에서 나온 색색공이 굴러다니다 식탁 , 놀이터, 침대, 의자가 되고, 남자, 여자, 아이들이 뛰고, 하늘을 나는 마차가 되어 지붕 위를 뜬다. 나는 찬란한 햇빛 속에서 공이 터지는 환상에 전율한다. 난해한 암호풀이 하듯 이게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골똘히 캐기보다는 디지털매체의 그림 감상이나 댓글달기처럼 비선형적, 비순조적으로 독자 나름대로 상상하거나 언어이전의 언어로 작자가 보여주는 대로 그저 따라가 볼 일이다. 이시에서의 하이퍼링크는 ·의식의 흐름을 매개로 시공간 순서없이 다발적으로 나타나고 사라지는 이미지의 집합적 덩이들이다.    이상에서 필자 나름의 독법으로 세시인의 하이퍼시를 읽었지만, 작가의 의도와 달리 추상화감상처럼 개개 독자들에 따라 천차만별인 시읽기의 무정부상태가 불가피 한듯하다. 이 점이 하이퍼시의 묘미라 할 수 있고, 살펴본 세 시인의 작품도 각기 개성이 보인다. 아직 실험단계라 확언할 수는 없지만 하이퍼링크에서도 오남구 시인은 매끄러운 언어구사를, 김규화 시인은 의식의 흐름과 링크의 완성도 여부를, 심상운 시인은 이미지 마디간의 집합적 결합을 중시하는 듯하다. 수용미학의 관점에서 살펴보면 시 텍스트 제공자인 시인과는 별도로 이를 수용하는 독자태도에 따라 한스 야우스의 ‘현실독자’, 리퍼테르의 ‘초독자’, 스탠리  피쉬의 ‘정통독자’, 조나단 컬러의 ‘이상적 독자’, 볼프강 이저의 ‘내포독자’, 움베르트 에코의 ‘모범독자’ 등으로 분류될 만큼 독자의 역할과 중요성이 부각된다. 독자는 작품의 주제나 내용뿐 아니라 형식과 이미지 등에서도 즐거움을 향유한다. 특히 오랫동안 전통을 답습해온 재래시의 진부함에 질린 독자에게는 첨단 디지털 시대에 부응하고, 미학적 제약을 벗어난 하이퍼텍스트시의 정서적 해방감과 자유분방함에 매력을 느낄 것이다.
801    詩의 생명력 /// 난해시에 대하여 ///난해시 사랑 댓글:  조회:4435  추천:0  2015-12-31
시의 생명력                                         ///유한근     많은 분들이 요즘의 시를 걱정한다. 한국현대시의 향방을 알 수 없다느니 혹은 난해하고 수필인지 시인지 알 수 없다느니 등의 염려를 흔히 듣게 된다. 이런 걱정을 하는 분은 정직한 분이다. 난해시를 보고 이해하는 척하지 않는, 시를 사랑하는 분이기 때문이다. 진솔하게 토로하건데, 30년 넘게 시 평론을 해온 나도 이해가 되지 않는 시들이 많다. 대충 짐작은 되지만, 그 시의 방향이나 의의(?) 즉 존재 이유를 가늠할 수 없는 시들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나는 그것들을 과감하게 버린다. 고등학교 학력으로 이해할 수 없는 시는 시라 아니라고 분노(?)하며 버린다. 그들은 눈 깜짝 하지 않겠지만. 과격하게 말하면 그것들은 쓰레기같은 시다. 한 편의 시는 독립된 존재물이다. 그 자체 유기적인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 시인으로부터 분리되어 나와 인쇄 형태로 존재할 때부터, 독자들에 의해 그 시는 생명력을 갖게 된다. 그 시를 단 한 명의 독자가 향유하더라도 그 시는 생명력을 갖는다. 그러나 우리 주위에 널려 있는 많은 시들은 죽어 있다. 사체가 되어 썩어가고 있다. 그것들은 태어날 때 생명을 담보로 한 치열한 정신으로 써지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시의 생명성이 어디에 있는지를 모르고 썼기 때문이다. 그것을 일별하고 그 가능지평을 탐색하기 위해 이 글을 쓴다. 21세기에 들어 한국시의 하나의 화두는 ‘신서정’ 또는 ‘다른 서정’이다. 그동안 서정담론은 시인의 자아와 세계의 동일화로부터 일탈한 시의 문법과 발화방식의 다양성에 대하여도 부단히 진행되어 왔다. 그러나 하나로 요약될 수는 없어도 변할 수 없는 하나의 사실은, 서정시는 자연 친화적 상상력으로 시작되고 자아 발견이나 일탈로 끝난다는 사실 그것이다. 이에 따라 우리는 서정시의 개념을 ‘인간의 사상이나 감정을 가장 짧게 표출하는 주관시’라고 규정한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사상은 시정시는 감정만 토로하는 것이 아니라, 사상까지도 서술되는 것이다는 것과 짧게 표출한다는 것. 여기에서 특히 우리는 ’표출‘이라는 언어에 주의해야 한다. 표출(表出)의 사전적 의미는 ‘겉으로 나타냄’이다. 표현이 인위적으로 만들어 겉으로 드러내는 것이라 할 때, 표출은 시인의 내면적 속에 있는 것들이 자연발생적으로 겉으로 드러나는 것을 말한다고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을 들어내게 하는 것은 상상력이다. 나라는 존재가 무엇인가 혹은 나라는 존재로 부터의 일탈이 무엇인지 알게 하는 힘은 상상력이며, 가장 적절한 문학 장르는 서정시이다. 서정민요시집(Lyrical Ballards)》을 펴낸 워즈워드 W. Wordsworth는 서정시를 “시는 강한 감정의 자생적인 분출이다. 시인은 일반적인 열정 속에서 생각하고 느”끼는 시로 정의한다. 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곧 상상력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서정시의 개념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주관시”라는 부분이다. 여기에서의 주관시라는 개념은 정서와 운율, 사상 등의 주관적이고 개별적인 시를 의미한다. 일상적인 자아나 경험적 자아가 아닌 서정적 자아(Das Lyriche ich)에 의해서 쓰여진 시를 의미한다. 서정적 자아는 시인의 내밀한 정서와 사상으로 보여지기 때문에 특별하다 개성적이다. 보편적인 것과는 달리 개별적이며 특수하다. 서정시의 대상은 오직 시인 자신 뿐이다. 주위에 있는 사물이나 사상을 자기화하는 표현 양식이나, 그와는 반대로 자기 자신을 사물화하여 표현하는 방법 등도 모두 그 대상은 자신 자신에 있다. 주체적인 대상은 오직 시인 자신이다. 그리고 그것은 시인의 특별한 상상력으로 가능해진다. 흄은 자연을 포함한 사물이 반드시 차이를 동반하는 것이 아니라고 해도, 그 사물이 변화된 것으로 나타나는 것은 그것을 응시하는 정신 때문이라도 말한다. 그리고 “서로 다른 나타남을 등록하면서 이를 수축시키거나 중첩시키는 것은 상상력의 역할”이라고 말한다. “상상력은 모든 이미지들을 수축이나 반복된 첨가로 의해 하나의 이미지에 담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자연물 중 한 사물을 반복적으로 관찰해도 그 차이가 나는 것은 응시된 정신 즉 상상력의 힘이라는 것이다. 사물에 대한 존재 인식을 자기화하여 정착하거나 일탈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시인 자신의 체험, 그 범주를 기조로 하여 상상력이 생겨나고 그로 인해 다른 사물과의 상응도 꾀한다. 그러다보니 카타르시스적인 쾌감만으로 자신을 위무하기 위해 시를 쓴다. 이러한 현상의 극단화로 인해 서정시의 종말을 보인 시인은 파울 첼란이다. 비의秘義적 서정시(Das hermetische Gedicht)라 통칭되는 첼란의 시는 전통적인 서정시의 개념에 상당히 부합되는 모티브들을 수용하고 있지만, 새로운 언어 결합에의 부단한 실패로 인해서 난해시로의 전락을 보임으로써 독자와의 거리를 좁히지 못한다. 이에 따라 우리는 기존의 서정시에 절망한다. 그리고 기존 서정시의 절망은 신서정시의 가능 지평을 만들어냈고, 그 지평의 연상상에 실험을 계속될 수밖에 없다. 실험은 멈출 수 없다. 어느 국면이나 위상에 머물러 있을 때 그 실험은 끝난다. 그래서 실험은 언제나 날이 서있고 첨단적이다. 그래서 80년대의 한국시는 실패했고 21세기 벽두에 간헐적으로 나타났던 실험시도 그 빛이 지속되지 못하고 있다. 80년대의 실험시는 신문이나 잡지의 기사 혹은 내용의 일부를 그대로 가져야 모자이크 혹은 퍼즐 맞추기 하여 쓰여 졌다. 그러나 21세기 후기 정보화시대 혹은 하이텍스트 시대에 들어 컴퓨터와 인터넷의 정보 속에서 새롭게 실험할 수 있는, 혹은 이 시대를 전면적으로 반영할 수 있는 실험시를 ‘하이퍼시’라고 할 때 이 시는 하이퍼시라 할 수 있을까? 하이퍼시(hyperpoetry)는 하이퍼텍스트적인 시를 의미한다. 하이퍼텍스트는 비선형, 비인과, 비고정, 탈중심, 탈관념, 다방향 등의 특성을 가진 디지털시대의 새로운 세계이다. 하이퍼링크(hyper link)와 쌍방향성이라는 컴퓨터의 특성을 결합한 특성을 지닌다. 이러한 특성을 현대시에 차용한 개념의 시가 하이퍼시라 할 수 있다. 이들의 시 문법은 하이퍼텍스트의 특성을 차용하여 기존의 문장 구조를 의도적으로 비틀어 의도적으로 통사적 맥락을 끊어 무의식적이든 의식적인 이미지와 의미 구조를 공유한다. 그러니까 그 이미지들은 시니피에보다는 시니피앙에 집중되어 언어적 트릭으로 나아간다. ‘하이퍼시’는 21세기의 현대시에 대한 새로운 지평을 모색하기 위한 하나의 시도이다. 부담스러운 모더니스트들의 이미지에 대한 압박으로부터의 일탈로 초월하려는 의지의 표상으로 나타난 다층적 의식 구조에서 나온 것으로 보이며, 또한 인터넷을 통한 신유목인적인 의식이 현실과 비현실을 뛰어넘는 이미지 창출로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는 어쩌면 디지털 영상에 대한 반영의식이기도 한다.(졸고 에서) 또 다른 국면에서 현대시는 두 가지 기능이나 역할이 하나로 합치는 하이브리드 (hybrid)시로 까지 전개된다. 디지털과 아나로그적 속성이 합친 시라기 보다는 문학 장르의 해체까지를 실험하는 시로 전개될 전망이다. 이를 전제사항으로 하고, 시의 생명력은 무엇인가라는 원론적 의혹을 갖고 그것을 탐색하자. 시가 지녀야 할 기본 요소는 네 가지다. 시어, 운율, 이미지, 구조이다. 이 네 가지 기본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어야만 비로소 ‘시’라는 존재물이 된다. 시에 생명력을 가지려면 ‘시어’가 기본 요소로 있어야 한다. 시어는 아어(雅語)일 필요는 없고 일상어로 족하다고 말한 사람은 워즈워드다. 그러나 일상적인 사전적인 의미와 시인의 주관적으로 상징하거나 은유하는 비유의 언어인 텐션(Tension)언어이어야 한다. 인텐션(intension, 내포)와 익스텐션(extension, 외연)이 합쳐진 긴장된 텐션의 언어이어야 한다. 그래서 시인은 어떤 작가보다도 언어에 대한 남 다른 인식이 필요하다. 주관적 감성과 상상을 표출해낼 새로운 인식의 언어를 가져야 한다. 그 다음의 시의 구성요소는 운율이다. 모든 예술은 음악의 상태를 지향한다고 말한 사람은 쇼펜하우어이다. 또 누군가는 “음악은 가장 직접적인 것이다. 인간을 엄습해서 그를 우둔한 일상성으로부터 탈피시켜 생의 원천으로 이끌어주는 그러한 음의 힘은 말로써 재현될 수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모든 시는 음악으로 지향한다는 가설이 옳다는 말인가? 그렇지는 않다. 다만 문학과 음악은 발라드댄스를 예술의 기원으로 볼 때, 그 명상성에서 기원을 같이 한다. 운율의 ‘숨’의 반복에 의해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에 생명력과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음을 환기하는 의미로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시는 운율을 띤 언어와 문자로 리듬, 가락, 음성 따위로 이루어진다. 음악도 자신의 사상과 감정을 표현하는데 있어 그 형성과 그 발전의 과정을 같이 해왔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영역의 독립성까지는 부정할 수는 없지만 그 유기적 연관성 또한 부정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내재율로 이미지의 반복이나 의미의 반복을 통해서 나타난다. 21세기는 영상의 시대이다. 이러한 시대에 살면서 시인은 영상 언어로 아닌 문자 언어로 대응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속에서 창작을 할 수 밖에는 없다. 문자 언어가 폐기처분될 수도 있다는 사실 인식을 극복하면서 시를 쓰게 된다. 이에 따라 서정시는 개인의 감정이나 사상에 조응하는 운율양식의 표출에 중요한 가치를 두며 언어의 형상, 그 자체의 음악적 효과를 중시한다. 이는 구태여 몰톤의 견해나 서정시의 원의까지 소급되어 설명하지 않아도 모두가 주지하는 바이다. 그러나 서정시는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개념적 특성 면에서 의혹을 받아왔다, 언어의 형상화로는 감성이나 사상의 표징을 분명하게 할 수 없다는 절망과 지적 갈증을 서정시로는 채울 수 없다는 자괴감이 그것이다. 이런 발생적인 서정시의 개념에 획기적인 변혁을 가한 시인은 말라르메이다. 그를 이어 상징주의자, 초현실주의자로 불리는 발레리, 보들레르, 랭보, 베르렌느 등에 의해서 서정시의 운동이 전개되었다. 이들의 서정시 미학은 단적으로 ‘형상성’에 있다. 삶의 공소함, 무기력, 절대고독과 절망, 비인간화와 무신론 등 등의 인간 말세적 체험에서 일탈할 수 있는 초월적인 국면을 그들은 ‘형상성’에서 찾았다. 그것은 주지주의자들처럼 객관적 상관물의 논리에 의해 비유, 반개성을 표방하나 이들의 내면에는 자신의 본체를 구명하려는 탐색의지를 엿보이게 된다. 그것은 이미지의 형상성을 통해서 발현된다. 시인이 차용하고 있는 독자와의 소통 방식은 어떤 표현구조인가? 시인은 자신의 내면의 세계를 그린다. 내면에 은밀하게 은폐되어 있는 영혼을 언어인식을 통해 탐색한다. 탐색의 도구를 언어로 하지만, 근본적인 그림은 이미지를 통해서 하게 된다. 그래서 시의 표현구조를 은유, 상징, 아이러니, 알레고리라는 방법을 차용한다. 그 방법 중 많이 쓰는 표현구조는 은유와 상징인데, 현대에 이르러서는 독자와의 소통 접근성을 확보하기 위해 그전에 차용했던 방식이 아닌 직설화법으로 하고 있는 것 그 표현 구조가 아이러니와 알레고리이다. 그 이유는 은유나 상징에 대한 절망감 때문이다. 이미 기존의 선배 시인들이 고차원적인 표현 구조를 실험해고 사용해왔기 때문에 그에 미치기도 어렵다는 절망감 때문이다. 현대의 젊은 시인들은 소크라테스적 아이러니(Socratic Irony)방법 보다는 언어적 아이러니 방식을 차용한다. 의도적으로 무지함을 가장하여 상대방을 점차 모순으로 빠져들게 하여 독자 스스로 무지를 깨닫게 하는 표현구조. 자신을 비아냥거리고 자조하여 은폐함으로써 무거움을 가볍게 하는 방법을 취한다. 구조적인 아이러니보다는 언어적 아이러니(verbal Irony)로 진의와는 반대되는 언어를 가장하면서 오히려 비난이나 부정적 의미를 신랄하게 나타내려고 언어 트릭을 사용하는 것이 그 특성이다. 또는 간헐적이기 하지만, 기지(機知wit)로 가벼운 풍자와 유머를 차용하기로 한다. 미국의 상당수 신비평가들은 아이러니를 문학적 가치를 판단하는 일반적인 기준척도로 사용했다. 앤드류 말벨은 아이러니를 어떤 한 가지 경험을 다루면서 ‘가능성이 있는 또 다른 경험’이 있다는 것을 인정함을 의미하는 ‘내적인 균형’이라고 말하고, I. A. 리처즈는 아이러니를 ‘대립물의 평균’이라고 정의한다. 그리고 아이러니 그 자체가 현실적인 시의 특징이 된다고도 말하고 있는 데 그의 견해는 일견 타당성이 있다. 시는 엄격한 행(Line)과 연(Stanza)과 유기적 구조로 이루어진다. 이 구조는 산문과는 달리 생리적이다. 생명력을 갖는다. 현대시는 이러한 시 구조의 유기성을 포기한다. 시 구조의 신비와 생명성을 유기하고 나름의 실험을 꾀하기 때문에 다양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행과 연의 유기적 구조를 폐기할 때 시의 장르적 특성을 사라지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 점을 간과하지 않을 때, 시는 서정시의 본래의 모습, 원형으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나는 그동안 기회 있을 때마다 동어반복적으로 서정시의 핵은 비가(悲歌)라는 사실을 환기해왔다. 그것이 19세기의 ‘슬픈 노래’가 아니라 이 세대에 맞는 현대인들에 맞는 비가여야 함을 역설했다. 비가가 인간을 가장 강하게 전율케 하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감동 없는 시대에 감동을 되찾아주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느 시대이든 어디에서든 감동을 원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인간으로서 살아있게 하는 생명력이기 때문이다.     \\\\\\\\\\\\\\\\\\\\\\\\\\\\\\\\\\\\\\\\\\\\\\\\\\\  난해시에 대해     난해시가 가진 장점이 있다면 그건 어떻게 해석해도 좋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 의미 때문에 평론가는 주로 난해시를 해석하곤 한다 뭘 어떻게 다루든 그건 시보다는 평론을 더 돋보이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난해시는 그 이름처럼 난해하다 난해한 사람이 쓰는 시가 난해 시일까? 하여튼 명료함보다는 그는 얽히고설킨 실타래 같은 길을 끌고 간다   처음엔 독자의 손을 잡고 가는 듯 하나 어느 순간 그는 사라져 버리고, 나(독자)는 덜렁 혼자 이상한 나라에 떨어지고 만다 그러나 찾지 못할 길은 아니어서, 그는 한 동안 이상한 세계에서 이상한 감정에 빠져 있다가, 겨우 詩의 밖으로 나온다   그러나 나는 이상하게 힘들다. 복잡한 감정에 나는 도대체 뭘 보았단 말인가. 보긴 보았으나 나는 말 더듬으로 밖에 설명할 수가 없다. 한 토막을 끌어내어 설명한들, 그것은 토막에 대한 장황한 설명일 뿐 설명하면 설명할수록 詩의 전제성에서 멀어져버린다.                                         ///전남용 \\\\\\\\\\\\\\\\\\\\\\\\\\\\\\\\\\\\\\\\\\   난해시 사랑                                                              복효근           난 난해시가 좋다   난해시는 쉬워서 좋다   처음만 읽어도 된다   처음은 건너뛰고 중간만 읽어도 한 구절만 읽어도   끝부분만 읽어도 된다   똑같이 난해하니까 느낌도 같으니까     난 난해시가 좋다   난해시를 좋아하는 사람을 좋아한다   그 사람도 나하고 같이 느낄 테니까   인상적인 한 구절만 언급하면 된다   더구나 지적으로 보이기까지 하니까   그런 시를 쓰는 시인은 많이 배웠겠다 싶다   그런 시를 언급할 정도면, 더구나   좋다 말할 정도면 고급독자이겠다 싶다     난 난해시가 좋다   독자가 어떻게 이해하든 독자의 몫이라고  존중해주니까   내 느낌 내 생각 다 옳다잖아   나도 그 정도는 시는 쓰겠다 싶어 나를 턱없이   자신감에 넘치게 하는 시   나도 시인이 될 수 있겠다 하고 용기를 갖게 하는 시   개성 있어 보이잖아   남 눈치 안 보고 얼마나 자유로운지   적당히 상대를 무시해 보이는, 그래서 있어 보이는 시   단숨에 두보도 미당도 뛰어넘어 보이는 시     난 난해시가 난해시인이 좋다   죽었다 깨나도 나는 갖지 못할 보석을 걸친 여인처럼   나는 못 가진 것을, 못하는 것을 갖고 하니까   나도 난해시를 써보고 싶다   그들처럼 주목 받고 싶다   평론가들이, 매우 지적인 평론가들이 좋아하는   그들이 나는 부럽다   그런 것도 못하는 치들을 내려다보며   어깨에 당당히 힘을 모으며 살아가는 그들이 부럽다 ​             [출처] 복효근 - 난해시 사랑 |작성자 goforest   [출처] 난해시에 대해|작성자 시용  
800    詩에서의 상징주의 댓글:  조회:4826  추천:0  2015-12-31
상징주의 [象徵主義, symbolisme]          "상징주의란 사상에 감각적 형태를 씌우는 것” 시인 장 모레아스(1886)    Jean Nicolas Arthur Rimbaud (20 October 1854 – 10 November 1891)     상징주의의 대표적 시인중의 하나인 랭보는 거칠고 의미심장하며 곳곳에 숨겨놓은 상징으로 버무린 은율적이며 실험적인 시를 많이 남겼습니다.   19세기말 부터 20세기 초반까지 15년 정도의 짧은 기간 동안 활동이 이루어졌던 시인 중심의 이 운동은 1890년에 프랑스에서 전성기를 구가 했습니다.   이성적이며 과학적 분석으로는 포착할수 없는 주관적인 정서를 시로 정착시킴을 목표로 했던 상징주의 詩. 랭보의 대표적 시 하나를 감상해보도록 하죠.               *  Voyelles  *     A noir, E blanc, I rouge, U vert, O bleu : voyelles,  Je dirai quelque jour vos naissances latentes :  A, noir corset velu des mouches clatantes  Qui bombinent autour des puanteurs cruelles,  Golfes d'ombre ; E, candeurs des vapeurs et des tentes,  Lances des glaciers fiers, rois blancs, frissons d'ombelles ;  I, pourpres, sang crach , rire des l vres belles  Dans la col re ou les ivresses p nitentes ;  U, cycles, vibrements divins des mers virides,  Paix des p tis sem s d'animaux, paix des rides  Que l'alchimie imprime aux grands fronts studieux ;  O, supr me Clairon plein des strideurs tranges,  Silences travers s des Mondes et des Anges ;  - O l'Om ga, rayon violet de Ses Yeux !     *  모음  * (Voyelles 해석)   검은 A, 흰 E, 붉은 I, 푸른 U, 파란 O: 모음들이여, 언젠가는 너희들의 보이지 않는 탄생을 말하리라 A, 지독한 악취 주위에서 윙윙거리는 터질 듯한 파리들의 검은 코르셋...     어둠의 만; E, 기선과 천막의 순백, 창 모양의 당당한 빙하들; 하얀 왕들, 산형화들의 살랑거림. I, 자주조개들, 토한 피, 분노나 회개의 도취경 속에서 웃는 아름다운 입술   U, 순환주기들, 초록 바다의 신성한 물결침 동물들이 흩어져 있는 방목장의 평화, 연글술사의 커다란 학구적인 이마에 새겨진 주름살의 평화   O, 이상한 금속성 소리로 가득찬 최후의 나팔, 여러 세계들과 천사들이 가로지는 침묵, 오!! 오메가여, 그녀 눈의 보랏빛 테두리여           19세기 후반 낭만주의 시인들이 주관적 정서를 시어로 표현하는데 애쓰는 가운데 일군의 화가들 역시 당시 대세를 이루고 있던 인상주의 그림들의 과학적이고 분석적이며 명징한 그림들에 대한 반동을  도모하고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요약 하자면 인상주의의 실증적인 표현에 대한 반항과 저항이었다고도 할수 있을 겁니다.   그들의 관심은  형상화 할수 없는 초자연적인 세계 그리고 내면에 응축 되어있던 관념과 자아를 상징적이며 우의적인 이미지를 통해 드러나게 하려 했던 겁니다.   즉 삶과 죽음 불안과 고통, 사랑과 성, 꿈과 환상등이 그들 상징주의 작가들의 주된 주제가 되었으며 주제 뿐만 아니라 그들이 사용하는 실재적이지 않은 색채와 묘사적이지 않은 넓은 색면의 사용과 분방한 필법도  상징주의 화가들의 중요한 무기였다고 할수 있습니다.       Paul Gauguin (1848-1903)  Where Do We Come From? What Are We? Where Are We Going?  1897   1891년 비평가 A.오리에는 회화에 대해 처음 상징주의라는 말을 썼고 고갱 등을 상징파로 보았습니다. 상징주의 작품의 선구적인 대표작으로 꼽히는 고갱의 그림인 "우리는 어디에서 왔고 무엇인가? 어디로 가는가?"라는 철학적 실존적인 제목의 이작품은 이후의 많은 상징주의 작가들이 나아갈 길을 예시해 주고 있었습니다.   얼핏 보면 여인들의 군상으로 보이는 이작품은 여인들을 통한 생명의 탄생과 기원 그리고 인간의 생노병사들을 파노라마와 같이 보여 주는 신비로운 분위기의 작품 구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상징주의자들이 표현 하려 했던 생과 사 불안과 고통, 사랑과 성 그리고 환상과 꿈등이 혼재 되어 있는 고갱의 이 그림을 정작 고갱 자신은 자신의 그림이 상징주의적인 것은 주제 때문이 아니며 화면의 형태와 색채의 음악적인 배치 때문이라고 하였던것은 주지해야 할 일이 분명 합니다.   즉 우리가  상징주의를 접하면서 주의해야할 부분은 작품의 주제에만 좁아 질수 있는 우리의 시선을 이들 작품들의 조형적 구성과 표현법에까지 확대해서 볼수 있어야 한다는 것일 겁니다.        오딜롱 르동 [Odilon Redon, 1840.4.20~1916.7.6] The Crying Spider, 1881.   내면세계를 여행하는 조용한 순례자 -  르동을 떠올릴때 마다 생각 나는 말입니다. 여러 종류의 미술서에서는 르동을 "보이지 않는것을 위한 보이는것의 논리"라는 길고 난해말로 설명 하긴 하지만..   그는 외로운 유년기를 보내며 병약하고 고독하며 내성적인 소년으로 성장헀습니다. 그러한 그의 성격은 작품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나 50세가 될때까지 주로 단색 계열의 판화 작업을 하면서 독자적이고 신비로우면서도 괴상하다고 할정도로 독특한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구축 하였습니다.   당시 화려한 인상주의 작품이 판을 치던 무렵 이러한 괴기스럽다고 할정도로 독창적인 작품을 한다는것은 평론가들이 그에게 순교자의 길을 걸었다고 할정도로 외롭고 고단한 작업의 길이 였음을 미루어 짐작해 볼수가 있을 겁니다.   일상적 현실의 외면과 환각적 시각의 추구는 그의 작업의 중요한 부분이었으며 이러한 상징적이며 이교도 적이고 환시적인 작품의 구성은 그를 상징주의 화가중 중요한 작가에 손 꼽히게 만들었습니다.   그의 이러한 작품 경향은 동시대의 작가군에게서도 찿아 보기 힘들 정도로 독특하고 선구적인 것이어서 이후의 달리를 비롯한 쉬르리얼리즘 작가(초현실주의) 들에게도 분명히 영향을 주었다고 볼수 있을 겁니다.     The Cyclops, 1914, Kroller-Muller Museum, Otterlo, The Netherlands   르동이 사망하기 2년전인 74세때 그려진 이 그림은 신화를 그 주제로 하고 있습니다. 화려한 채색을 보면 인상주의 화가들의 채도보다 높은듯 하고 자유로운 붓질은 표현주의 작가들의 작품을 보는듯 합니다.   하지만 르동 자신은 50세가 될때까지 흑백화만을 그렸습니다.  흑백의 화면만 50년간이나 그리던 작가가 채색을 할때 느끼는 감정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화창한 여름 오후 오랜 시간을 짙은 선그라스를 끼고 있다가 벗었을때 눈에 따갑게 물결치며 쏟아지는 가지각색의 색의 향연을 떠오르면 이해가 쉽게 될지도 모르겠군요.   흑백화를 그릴때 컬러라는 중요한 표현 무기를 포기한 대신 르동은 형태에 비중을 둘수 밖에 없었을 겁니다. 하지만 르동이 컬러라는 비장의 무기를 획득한 순간 그의 그림에서 형태성은 점점 무너지며 색채의 풍부한 감성을 그의 그림속에 녹여 내고 있습니다.   과연 이작가가 50세까지 무채색만 사용했었던 작가가 맞나?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의 그림은 50세 이후에 색채의 작렬이 빛을 발합니다. 색채와 함께 여전히 그의 그림에 녹아 들어있는 비현실적인 비유와 상징 또한 더욱 능숙해지고 깊어짐을 알수 잇습니다.          Gustav Klimt (July 14, 1862 – February 6, 1918)  A section of the Beethoven Frieze   클림트는 워낙 유명한 작가이고 잘 알려져 있기 때문에 가볍게 터치만 하고 지나가겟습니다. 얼마전 한국에서도 전시가 되었던(물론 해외 전시용 복제품 이었지만) 베토벤 프리즈 입니다. 그의 상징주의적 작품은 물뱀 시리즈가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La notte, 1889-1890 (Kunstmuseum Berna) 페르디낭 호들러 [Ferdinand Hodler, 1853.3.14~1918.5.20]      호들러의 작품은 자연주의와 구성이 견고히 조합된 양상을 보입니다. 가로선의 직렬적인 병렬의 반복을 통한 그의 경직된듯한 구도법은 흡사 이집트 미술의 견고성을 닮아 있는듯합니다. '병렬주의'라는 용어로도 불리우는 이러한 기법은 우리가 예전에 공부했었던 비쟌틴시대의 그림과 유사한 점들을 발견할수도 있죠.   그가 이러한 이집트, 비쟌틴적인 견고하고 경직된 병렬주의식 작업을 하는 이유는 아카데믹한 관점에서 결코 세련되지 못한 그의 작업 방식이 대부분의 미술이 지니는 난해함에 혼란스러워 하는 대중들에게 전달 됨으로서 현대사회의 그릇된 가티관에의해 억압된 근본적인 인간성의 회복을 위함이었습니다.   따라서 그의 작품을 어렵게 보거나 복잡하게 이해 하려는 것은 오히려 그의 작품의 진실성을 차단할 뿐입니다. 그저 보이는 대로 느끼는것. 그것이 바로 그의 작품의 핵심이라고 할수 있을 겁니다.   이러한 그의 작업은 마티스, 뭉크, 몬드리안등의 작품과 독일 표현주의, 소련의 온건한 사회주의 리얼리즘 계열에서 그 영향력을 찿아 볼수 있습니다.       Ferdinand Hodler - Die Lebensmüden 1892   호들러는 스위스 출신의 반인상주의 화가이며 풍부한 독창성으로 많은 화가와 화파들에게 영향을 주었습니다.  자신을 '단순한 회화에 저항하는 사상가’로 부르며 기존의 인상주의를 거부하고. 철학적 사상을 담은 작품을 창조하려 애썼습니다.   소목장이의 아들로 태어나 특별한 미술교육을 받은바 없지만 동시대의 작가 중에서 가장 독창성이 풍부하며 표현주의의 선구자로 불리어 지기도 합니다.   특히 그의 풍경화는 뛰어난 색조감으로 인상주의의 영향력하에 있지 못했던 중부 유럽의 많은 작가들에게 색채 충격을 전달하기에 충분했습니다.     Lake Geneva as seen from Chexbres, 1905, oil on canvas            La mort du fossoyeur ("The death of the gravedigger") by Carlos Schwabe is a visual compendium of symbolist motifs. Death and angels, pristine snow, and the dramatic poses of the characters all express symbolist longings for transfiguration "anywhere, out of the world."    카를로스 슈바베Carlos Schwabe (1877 - 1927)   그의 작품중 하나인 죽음과 천사 (무덤 파는이의 죽음). 노인은 평생 남의 무덤을 파는 일을 하던 사람 이었습니다. 이제 때가 되어 그에게도 죽음의 천사가 다가왔고 매혹적인 죽음의 천사는 이제 그의 목숨을 거두어 가려고 합니다. 인간의 삶은 결국 언젠가는 죽어 땅에 묻혀 마무리가 되고 그 누구도 피해갈수 없다는 상징을 담고 있는 슈바베의 그림입니다.   슈바베의 그림에는 요부들이 많이 등장 합니다. 하지만 평범치 않은 요부들(요부 자체가 평범치는 않겠지만) 즉 악마적이고 괴기 스러운 세기말적인 스타일의 퓨전 요부가 자주 등장 하는 겁니다.   또한 그의 장식성은 아르누보의 발달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Fernand Khnopff's The Caress   벨기에 출신의 페르낭 크노프(1858-1921)는 한마디로 일탈과 갈등 그리고 긴장과 마력의 작가라고 할수 잇습니다. 그에게는 5살 연상의 친누이를 모델로 한 그림들이 많은데 그녀는 크노프의 누이이자 연인이었습니다. 근친상간의 비난받아 마땅한 이러한 일탈은 그에게 평생 신비주의로의 회피와 긴장감을 주었을 것이라고 평론가들은 분석합니다.   위에 보이는 그의 작품 '애무' 는 스핑크스를 그린것 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크노프의 스핑크스는 원래 왕의 무덤을 지켜야할 본연의 임무를 망각한 19세기형 스핑크스라고 할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남자를 유혹 하는듯한 스핑크스는 크노프의 창작이 아니라 당시의 소설가이자 비평가였던 죠세핀 파라당의 저서 '스핑크스의 땅'(1900)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파라당은 그의 저서에서 -예술의 시작은 괴물로 부터 시작된다(중략) 그괴물은 사람의 머리, 여인의 유방, 사자의 신체를 지녔다. 즉, 생각하고, 정감 있으며, 본능적인것이 예술의 본질이다- 즉 예술의 개념을 형태화 한것이 스핑크스이다- 라고 예술의 개념을 주장 하였고 사실 이러한 주장에 대해 당시의 여러명의 화가들이 이러한 소재를 작품으로 시도 하기도 했었는데 크노프의 '애무'도 그러한 작품증의 하나라고 할수 있습니다.   위의 슈바베의 작품에 뒤지지 않는 요부성 스핑크스는 당시 19세기말의 남자들이 여성에 대해 지니고 있던 비도덕적이고 퇴폐적인 에로티시즘의 도착의 한종류일수도 있을 겁니다.   현재의 관습에서 볼때 당연히 도덕적으로 비난 받아 마땅한 작가의 태도이긴 하지만 우리는 그시대의 예술에 대한 태도를 엿볼수 있는 좋은 예가 되기도 합니다.   예술은 괴물로 부터 시작되고-사람의 머리, 여인의 유방, 사자의 신체와 같은것-사고와 정감,그리고 본능이 그들의 예술이었던 거라는것.       Hugo Simberg's The Wounded Angel. Hugo Simberg (24 June 1873, Hamina - 12 July 1917, htri)   위고 심버그는 핀란드의 대표적인 상징주의 화가입니다. 부상당한 천사가 상당히 불만 많은듯한 표정의 소년들에 의해 들것에 의지하여 어디론가 가고 있는 모습입니다.   얼핏보면 재미있는 그림이기도 하지만 그의 그림을 보고 있다보면 소년의 표정 만큼이나 우울해 집니다. 천사는 없다. 그리고 이제 더이상 사람들은 천사나 신을 믿지 않는다는 화가의 주장이 그림 전체에서 베어 나오기 때문 입니다.   과연 이들이 불과 100여년전만 해도 성당과 많은 건축물의 벽들을 천사와 전지전능 하다고 믿었던 예수의 그림으로 도배 하고 찬양하던 그 유럽인들이 맞는지 의아해 질 정도 입니다. 만약 심버그가 중세시대에 이런 그림을 그렸다면 그는 분명히 화형감 이었을 겁니다. 아니면 펄펄 끓는 기름솥에 들어가서 튀김이 되었던지..(제가 써 넣고도 좀 혐오 스럽네요,,죄송..식사는 하셨나요?)   이러한 그림들이 나오는 계기중의 하나는 조금 미안하지만 독일의 대 철학자 니체를 꼽을수 있을 겁니다. '신은 죽었다'고 주장한 니체의 실존주의 철학은 19세기 말의 유럽을 지배하고 있던 세기말적 사조의 한 부류라고도 할수 있습니다.   세기말사조 [世紀末思潮]는 프랑스에서부터 시작하여 1890년대의 유럽 각국에 퍼진 인간정신의 퇴폐적인 경향을 말합니다. 즉 당시의 회의주의, 유물주의, 염세주의, 찰나적 향락주의가 이러한 사조에 포함된다고 할수 있습니다.   현실세계를 환영으로 보고 진보, 사랑, 신앙등을 모두 허망한것이라고 규정하기도 하며 인간의 야수성을 강조하기도 하고 염세적이며 무관심적인 면을 보이기도 하고 특히 상징주의자들의 경우 예술 활동에 자신을 몰입 하면서 현실세계를 외면하는 태도를 보이기도 하였는데 이러한 사고의 흐름을 크게 세기말 사조라고 할수 있습니다.       Edvard Munch (12 December 1863 – 23 January 1944) Death of Marat I (1907)   뭉크는 여러명의 애인이 있었는데(절대 부럽지 않습니다)  1900년을 전후하여 툴라 라르센이라는 여성과 깊은 관계였습니다.  그녀는 부잣집 딸에다가 관능적인 '세기말적 여성' 즉 저주 받은 숙명의 여인이자 죄 깊은 여인의 전형이었다고 할수 있었습니다. 사진을 보면 오히려 그녀가 아깝다는 생각이 더 많이 듭니다만..   1902년 결혼을 원하는 라르센과의 격렬한 말다툼끝에 뭉크는 자신의 왼손을 쏘았고 결국 그는 평생 손가락 하나를 쓰지 못하였습니다. 그날 이후 뭉크는 여자에 대한 부정적인 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이러한 그의 관념은 그의 그림속에 그대로 스며들어있는것을 많은 작품을 통해 확인 할수 있습니다.   위의 '마라의 죽음'도 그러한 연장성 상에서 볼수 있는 작품 입니다. 뭉크는 이작품을 그리는데 9년이나 걸렸다고 고백한바 있는데 평생을 성과 사랑을 주제로 추구한 뭉크의 최후의 도달점은 바로 사랑과 죽음 또는 여자의 죄와 죽음 이었다고 할수 잇습니다.   이 그림에서 우리는 뭉크가 성과 사랑 그리고 여자에 대한 생각을 읽어 내릴수가 잇습니다. 그림속의 남자는 살해 당한것이 아니라 격렬한 섹스후의 피로 때문에 죽은 것입니다. 아마도 피를 토하고 죽은것 같은데(도대체 어떻게 하면 저렇게 죽을수가 있는 것인지,,흠) 침대 시트의 선홍색 피보다 더 무서운것은 여인의 표정 입니다.   남자의 시체를 옆에 두고 마치 임무를 완성한듯한 로보트같은 자세로 만면에 미소를 머금고 만족한듯한 표정으로 정면을 바라보는 여인. 그녀의 모델은 바로 툴라 라르센 이었습니다. 물론 죽은이는 뭉크 자신을 그려낸 것입니다.     Tulla larsen & Munch                                 Tulla larsen     Madonna. 1894-95. Oil on canvas. 36 x 28 in. Nasjonalgalleriet, Oslo.   뭉크에게 있어서 여자는 암살자이기도 하고 마리아이기도 했습니다. 물론 마리아도 또한 성모가 될수 있고 요부가 될수도 있다는 혐오감을 나타내곤 했지만. 그의 세기말적이고 지극히 개인적이며 환상적인 격렬한 표현법은 상징주의의 또다른 모습이기도 했습니다.
799    극단적 미래파 詩는 사기... 댓글:  조회:4780  추천:0  2015-12-31
  “충분히 쉬운 표현으로 더 깊은 메시지 전달 가능…극단적 미래파 詩는 사기”   오세영 시인 나(오세영 시인)같이 50여 년 시를 쓴 사람조차 이해하기 힘든 극단적 미래파 시는 ‘사기’다. 시를 ‘인질’로 삼은 것이다. 예컨대 마누라가 도망쳤다고 해서 무단히 행인 납치소동을 벌이는 것처럼 난해하다. 그냥 주목을 끌어 자기를 내보이려는 행동이다. ‘사슴이 오늘 과수원에 갔습니다’ 혹은 ‘사슴 한 마리가 학교에 갔습니다’, 이 경우 사슴과 과수원, 나와 학교는 각각 등가성을 가진 단어들로 나를 사슴으로, 학교를 과수원으로 환치시킨 것이다. 이 문장은 비록 단어들을 등가성을 지닌 다른 단어들로 바꾸어 놓긴 했으나 아직 언어 질서를 완전히 무시하지는 않았다. 가령 ‘사슴, 하늘, 나무, 달린다’란 문장을 보자. 의미를 읽어내기가 어렵다. 등가성과 인접상이 배제된 언어들의 무분별한 공간적 나열밖에 없기 때문이다. 미래파 시는 마치 신을 배제한(혹은 타살한) 오늘의 물질문명이 결과적으로는 인간 그 자신조차 비인간화시키는 결과물로 보인다.  신사조에 사로잡혀 비록 난해시를 지향한다 하더라도 깨버려서는 안 되는 금기와 지켜야 할 원칙이 있다. 더 이상 언어의 본질을 훼손한 언어, 소통 불능의 난해한 언어를 지향해선 안 된다. 충분히 쉬운 표현으로 더 깊은 메시지를 전할 수 있다. 이춘호기자
798    난해함 대신 일상 파고드는 시쓰기... 댓글:  조회:4315  추천:0  2015-12-31
내년 한국 문단에 새로운 피를 수혈할 2016 한국일보 신춘문예의 심사가 완료됐다. 올해 응모자는 총 1,637명.   예년(1,792명)에 비해 다소 줄어든 수치다. 부문별로는 시 703명, 소설 335명, 희곡 116명, 동화 186명, 동시 297명이 원고를 보내왔다. 시 부문에서는 소위 ‘미래파’ 시가 사라진 것이 특징으로 꼽혔다. 미래파 시는 2000년대 초반 몇몇 젊은 시인들이 선보인 길고 난해한 시에 붙여진 이름으로, 신춘문예에서도 한 동안 이런 시들이 유행처럼 돌았었다. 한 심사위원은 “일상에서 느낀 감정을 명확하게 표현하려는 시가 압도적으로 많았던 반면 읽는 이를 헷갈리게 만드는 수수께끼 같은 시가 확실히 줄어 들었다”며 “미래파 시에 대한 피로도가 커지면서 시를 가르치는 사람이나 배우는 사람 모두 의식적으로 피한 게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세월호 참사 등 사회참여적인 시도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소설 부문에서는 희망 없는 미래에 대한 개인의 좌절이 지배적 정서로 자리 잡았다는 평가가 나왔다. 한 심사위원은 “전통적으로 정리해고, 정년퇴직 등 삶의 고달픔을 소재로 사회에 경종을 울리는 작품이 많았는데, 올해는 비판까지 나가지 못하고 개인적 상실감에서 주저 앉아 버리는 경향이 컸다”며 “사회 분위기가 비관적이라 개인이 거기 갇혀 버린 듯한 느낌”이라고 평했다. 평균 수명이 늘어나면서 노년의 삶을 소재로 한 작품이 크게 늘어난 것도 눈에 띈다. 다른 심사위원은 “치매나 50대 이후의 성생활을 다룬 작품이 상당수였다”며 “젊고 발랄한 문체로 쓰인 것도 많아 앞으로 비슷한 작품이 더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고 전망했다. 희곡 부문에서는 현 대학로 연극 흐름과 비슷하게 일상적 소재, 사소한 갈등에서 비롯된 다툼을 다룬 작품이 다수를 차지했다. 한 심사위원은 “사람에게 석고를 바르거나, 청년이 임신을 하는 등 극단적인 상황 설정이 많았다”며 “연극 소재로서는 눈에 띄지만 그런 극단적 상황이 왜 만들어졌는지를 인물간의 관계나 극적인 상황 전개로 풀어야 하는데 배우들의 대사만으로 풀어냈다는 점은 아쉽다”고 평가했다. 동화 부문 응모작에는 학업 스트레스를 다룬 작품이 많았다. 엄마, 선생님 등의 캐릭터가 상투적이고 갈등을 풀어가는 방식에서 기시감이 느껴지는 게 아쉬운 점으로 꼽혔다. 한 심사위원은 “현실주의적 상상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회고나 단순한 의인화로 어른 작가의 관념을 계몽하는 작품이 많이 보였다”며 “이는 동화작가로서 경계할 일”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작고 소외된 것들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잃지 않고 작품 속에 녹여내려고 하는 태도는 비단 어린이들뿐 아니라 어려운 시기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큰 위로가 될 거란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동시 부문은 신춘문예의 전형성에서 비껴난 작품이 많았으나 소재를 표현하는 방식에선 관습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한 심사위원은 “말을 아낄 줄 모르는 시가 많았고 한 사람이 제출한 시라도 작품 간 편차가 큰 경우가 많았다”며 “동시도 엄연한 시라는 점을 잊지 말고 언어를 갈고 닦는 연습을 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아울러 “동시를 쓸 때는 아이에게 동시를 베푸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아이가 돼서 동심을 담으려 노력해야 한다”는 당부도 더했다. 황수현기자 
797    삶속에서 게으름 피우며 詩라는 배에 타보라... 댓글:  조회:4175  추천:0  2015-12-31
황현산 교수는 "게으름도 피우고 사보타주(태업)도 하면서 생각할 수 있는 여유를 가져야 잘 사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한국 사회는 절망적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더 나은 삶을 꿈꾸며 다른 세계를 생각해요. 좋은 시는 이 막막한 삶에서 희망의 싹을 발견해 절망적인 현실 세계와 거룩하고 완결된 어떤 세계를 연결해줍니다.” 희망이 보이지 않는 답답한 현실에서 우리가 시를 읽어야 하는 이유는 뭘까. 문학평론가 황현산(70) 고려대 명예교수는 서울 동교동 CY시어터에서 열린 ‘우물에서 하늘 보기’(삼인 발행) 북콘서트에서 “현실 세계를 다른 세계와 연결시키는 데 있어서 시는 다른 어떤 장르보다 선두에 있다”며 이렇게 말했다. ‘우물에서 하늘 보기’는 황 교수가 지난해 1월부터 올해 2월까지 한국일보에 연재한 글 27편을 모은 책이다.   시에 관한 평론과 에세이 사이에 있는 이 글에서 황 교수는 이육사, 한용운, 서정주, 유치환, 김수영, 최승자, 보들레르 등의 시를 곱씹으며 현실을 들여다 본다. 그는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시에 친근감을 느끼고 또 어떻게 시를 써먹을 수 있을까 하는 고민에서 이 글들을 쓰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세상을 바꾸고 자신의 삶을 더욱 윤택하게 만드는 데 시를 어떻게 써먹을 수 있을지 함께 의논하기 위해 쓴 겁니다. 독자 여러분이 갖고 있는 소망을 덧붙여주시면 고맙겠습니다.” 황 교수는 독자와 이야기를 나누며 여러 차례 좋은 시의 역할에 대해 말했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언어가 인간과 사물을 연결해주듯 전혀 다른 두 세계를 이어주는 것이다. 그는 “아무리 쉬워 보이는 시도 그 안에 비밀을 감추고 있고 그 비밀 안에 또 비밀이 있다”며 “우리의 삶 속에도 감춰진 비밀이 있고 그것은 우리의 삶 속에도 희망이 있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삶 속에서 희망을 찾아내기 위해 필요한 것은 ‘생각’이다. 황 교수는 “한국사람은 일을 너무 많이 해서 불행해진다”며 “일하느라 생각할 틈도 없고 눈 앞의 일만 바라보며 늘 경쟁하는데 내가 왜 이렇게 난리를 치며 살아야 하는지 스스로 알려면 게으름도 피우고 해야 할 일을 뒤로 미루기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시인은 세상 사람들이 쓰는 언어로 세상에 없는 이미지를 이끌어낸다. 현실의 언어로 이상의 세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일제의 폭력과 독재의 억압 아래서 시인들은 불가능을 꿈꾼 몽상가였다. 황 교수는 “시는 비루하고 막막한 삶을 견뎌내는 구체적 현실을 직시하면서 절대적으로 아름다운 세계를 이야기한다”며 “비루한 현실 속에서 이상향을 보기 때문에 우리가 시에 감동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황 교수는 우리말에서는 “시의 언어가 이상적인 상태”라고 이야기했다. 머릿속에서는 한자 단어로 사고하고 입으로는 한글을 사용하며 학문은 영어로 하기 때문이다. 그는 “이 같은 괴리가 시적 언어가 자라는 토양”이라며 “세계인이 한국 시를 배우겠다고 할 날이 멀지 않았다”고 말했다. 시와 친숙해질 수 있는 방법은 뭘까. 황 교수가 제시한 방법은 간단하다. 시라는 사공이 안내하는 다른 세계로 건너가는 배에 올라타면 그만이다. “시는 이 세계를 다른 세계로 연결시키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이며 갖은 실험을 다 해왔습니다. 새로운 미디어를 통한 예술 장르가 새로 나타나고 있지만 시가 해보지 않은 실험이란 없습니다. 거기에 동참하기만 하면 됩니다. 어떻게든 다른 세계로 건너가겠다는 소망을 품으면 시가 친숙하게 다가올 것입니다.” 고경석기자
796    동시창작은 다양화되여야 한다 /// 창작은 모방인가? 댓글:  조회:4130  추천:0  2015-12-30
동시창작은 다양화되여야 한다 김만석   들어가는 말   동시는 생활 가운데서 받아 안은 남다른 느낌을 동심에 려과시켜 행과 련을 나누어 쓴 운문을 말한다 여기서 먼저 짚고 넘아가야 할 문제가 있다.   첫째, 조선에서는 가사(노래말)앞에 문학이라는 규정어를 덧붙여 이라고 하면서 가사를 아동시가의 한 형태로 보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가사는 동시의 한 형태라고 인정할수없다고 인정하는바이다.   둘째,문학적인 예술동요는 그 예술적 가치에 근거하여 동시에 망라시켜 연구하기로 한다.   셋째, 문학적인 예술동요에 곡을 붙이면 그것을 라고 일컬을수는 있지만 그 본질적인 속성은 문학의 한 형태라는 특징은 변함이 없게 된다 그러나 가사에서 곡을 떼면 그 가사는 문학적인 예술동요가 아니라 말그대로 가사로 될뿐이다 하기에 문학적인 예술동요와 가사는 차원이 다른 형태의 글임을 먼저 리해할 필요가 제기된다. 아동문학은 원래 대상성이 강한 문학이다 그런데 동시는 그 대상성이 더더욱 강한 문학의 한 형태로 된다.   대상에 따라 동시를 크게 나누면 유년동시,동년동시,소년동시로 나눌수가 있다 그것을 더 세분화하면 회화적 동시,화적인 동시,동화적인 상상동시(의인화동시),환상동시, 감각적인 이미지 동시,사색적인 철리동시,은유적인 상징동시 등 여러 가지로 나눌수가 있다 동시는 원래부터 이렇게 대양화된 문학의 한 형태이다.   그런데 1980년대부터 한국 동시단에서는 포스터모더니즘 표현기법을 동시창작에 받아들여 동시의 대상성을 도외시하고 난해동시경향으로 나간적이 있었다.   2000년대에 들어서서 중국 조선족 동시단에서는 은유적인 상징동시만을 동시라고 주장하는 동시 단일화경향이 나타나 동시창작을 오도한적이 있었다.   한국 동시인들은 동시의 본질을 리해하고 동시를 아이들과 접근시키며 난해시 경향을 극복하고 동시다양화를 주장하면서 풍만한성과를 올리였다.   중국 조선족 동시인들도 동시창작의 단일화경향을 배격하고 동시의 대상성에 토대하여 동시다양화를 주장하면서 풍만한 성과를 올리고있다.   다양화된 동시형태   동시는 당양화된 형태를 가지고 있다.   1,회화적인 동시   회화적인 동시란 시적대상을 동심적인 시각에서 회화적인 화폭으로 대상화하면서 짙은 시적인 정서를 안받침해주는 동시를 말한다.   원숭이   한국 문삼석   원숭이는 날 때부터 할아버지래   주름살 오골조골 할아버지래   시인은 원숭이의 주름살 하나를 집중 조명하면서 란 시적발견을 하여 한 주름살을 확대조명하면서 회화적 그림을 그려 해학적인 정서를 유발하여냈다.   병아리   중국 김선파   반짝반짝 금모래 콕 찍어먹고 삐악삐악 병아리 샛노란 금병아리   반짝반짝 은모래 톡 찍어먹고 뾰옥뾰옥 병아리 새하얀 은병아리   시인은 노란 병아리와 하얀 병아리를 동심적인 시각에서 어여쁘게 대상화하면서 아이들 눈앞에 깜찍한 그림을 그려 주어 사랑의 정서를 유발하여 주고있다.   이런 회화적인 동시는 유년기 아이들과 동년기 아이들이 즐기는 형태의 동시들이다.   2,화적인 동시   화적인 동시란 동심에 맞는 재미나는 이야기를 고도로 간추려 정서적으로 표현한 동시를 말한다.   아침밥 한국 정두리   옆집에 사는 내 친구 준이   아침밥 무얼 먹었는지 난 알아   현관 문틈으로 새여 나오는 냄새   너 칼치구이 먹었지!   여기서 시인은 친구 준이가 아침에 무엇을 먹었는가를 알아 맞히는 재미나는 이야기를 집약적으로 그리고 도약적으로 펼쳐 보였다.   눈물 한방울   중국 한석윤   으스름 달밤   엄마를 기다리던 아기가 하나   문설주에 기대여 살풋 잠들고   눈귀에 매달린 눈물 한방울   아기를 대신하여 엄마를 기다리고   시인은 아기가 엄마를 기다리다가 문설주에 기대여 잠든 이야기를 집약적으로 대상화하였다 그러면서 아기를 대신하여 엄마를 기다리는 눈물 한방울을 조명하면서 시적인 이미지를 창출하여냈다.   이런 화적인 동시를 쓸 때에는 고 한국 신현득선생은 이야기를 하였다.   하기에 화적인 동시를 쓸 때에는 이야기 전반 과정을 시시콜콜하게 피루면서 쓰면 절대 아니된다 그러면 동시가 지루하게 되고 깜직한 맛이 없어진다 하기에 이야기의 한순간을 집중 조명하면서 도약적인 서술을 하여야 한다 그리고 이야기 그 자체에 동심적인 서정이 어리여 있어야 한다.   이런 화적인 동시는 유년기 아이들과 동년기 아이들이 제일 즐기는 동시형태들이다.   3,동화적인 상상동시(의인화동시)   동화적인 상상 동시란 모든 사물과 동식물이 사람처럼 생각하고 말하게 하는 물활론적인 사유방식에 토대하여 쓴 동시를 말한다.   해바라기와 채송화   한국 문삼석   담 우에서 해바라기가 올망졸망 놀고있는 채송화 보고 -아유 귀여워라 몇 살이나 먹었을가? 하며 노랗게 웃으니까   담 아래 채송화가 하늘 덮고 있는 해바라기 보고 -와! 크다 백살도 넘었나봐! 하고 눈을 소곳 떴어요.   여기서 시인은 해바라기와 채송화를 인격화하고 그들더러 오묘한 대화를 하게 하였다 그것도 해바라기가 채송화를 보고 업신여기며 하는 오만스러운 태도와 채송화가 해바라기를 보고 놀라하는 채송화의 천진한 태도를 비교적으로 돋보여주어 아이들더러 그 뜻을 더듬어 보도록 꾀하고 있다.   봉투와 풀 한국 문삼석   -난 순이 마음 다 안다 말해 볼가? 봉투가 입을 벌리고 으스댔어요   -안돼 그건 비밀이야 풀이 봉투 입을 꽁 막아버렸어요   여기서 시인은 봉투와 풀을 인격화하여 서로 대화하면서 편지봉투에 풀을 붙이는 현상을 엉뚱한 이야기로 만들어내여 아이들에게 무척 흥미를 돋구어주었다 이런 동화적인 상상 동시는 유년기와 동년기 아이들이 제일 좋아하는 동시형태로 된다.   4,환상동시   환상동시란 아이들의 천성으로 되고있는 엉뚱한 환상을 노래한 동시를 말한다.   하늘   한국 손관세   옹달샘에 가라앉은 가을 하늘   쪽박으로 퍼마시면 쭉 입속으로 들어가는   맑고 푸른 가을 하늘   시인은 현실 생활에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사실을 환상세계에서 다루면서 쪽박으로 마시는 물을 맑고 푸른 가을 하늘이라고 하여 아이들더러 놀랄 정도의 매혹을 자아내고 있다.   양떼와 흰구름   중국 최문섭   푸르른 들판에 흰구름 흐르네 쉼없이 쉼없이 앞으로 흐르네 푸르른 들판이 하늘인줄 알고 흰구름 내려와서 노니는게지   파아란 하늘에 양떼가 떠가네 쉼없이 쉼없이 둥둥 떠가네 파아란 하늘이 풀밭인줄 알고 양들이 풀먹으러 올라간게지   시인은 환상을 도입하여 현실 가운데서의 양떼와 환상 가운데서의 흰구름을 넘나들면서 이른바 혼돈세계에서 양떼의 시적이미지를 발견한 시적주인공의 희열을 노래하고있다.   5,사색적인 철리동시   사색적인 철리동시란 시적대상을 보고 사색을 굴리면서 아이들의 정도에 맞는 그 어떤 철리적인 시적발견을 노래한 동시를 말한다.   먼길   한국 윤석중   아기가 잠드는걸 보고 가자고 아빠는 머리 맡에 앉아 계시고   아빠가 가시는걸 보고 가자고 아기는 말똥말똥 잠을 안자고   시인은 아기와 아빠지간의 애틋한 사랑을 묘사하면서 그 묘사속에 깃들어있는 시적내용을 사색하게 한다 도대체 시인은 무엇을 노래하고 있을가? 도리머리하면서 생각하던 아이들은 아빠와 아기 사이의 따뜻한 정을 노래했구나 하는것을 알아 맞히게 된다.   황소   중국 김수복   암탉은 꼬꼬댁 알 낳았다고 제 자랑   멍멍개도 멍멍멍 집 지킨다고 제 자랑   수레 끄는 황소만은 말없이 뚜벅뚜벅   시인은 제 자랑에 이골이 난 수탉과 멍멍개를 풍자하고 하고 수레 끄는 부지런한 황소의 모습을 독자들 눈앞에 선히 그려놓았다 그러면서 어린 독자들더러 그 뜻을 음미하도록 하고있다 시인은 좋은 일 하면서도 자랑할줄 모르는 황소의 겸손한 성미를 예술적으로 칭찬하고있는것이다.   이런 동시는 동년기와 소년기 아이들의 구미에 맞는 동시형태로 된다.   6,감각적인 이미지동시   감각적인 이미지 동시는 시적인 대상에 대하여 시각,청각,촉각,후각,미각적으로 대상화하면서 시적 이미지를 창조하는 동시를 말한다   시내물   중국 김철호   솔밭을 지날 때면 파랗게 파랗게   진달래산 지날 때면 빨갛게 빨갛게   마을앞 지날 때면 하얗게 하얗게   여기서 시인은 시적대상 시내물을 노래하고있다 그런데 시내물을 직접 노래한것이 아니라 시내물에 비낀 소나무,진달래,마을에 초점을 맞추고 수채화같은 시각적형상을 그려내면서 조선족의 심미특징에 맞게 조선족이 살고있는 생활환경을 미화하여 주고있다.   가을   한국 윤미현   토옥 튕기고 싶은   주욱 그어보고싶은   와와 웨쳐보고싶은   푸웅덩 뛰여보고싶은   머언 먼 가을 하늘   여기서 시인은 맑고 푸른 가을 하늘,투명하고 무형체인 가을 하늘을 바라보면서 감각적인 느낌을 발현한것이 이동시의 성공한 비결로 된다.   형체를 가진 유리알같은 하늘을 토옥 튕겨보고 싶고 종이 같은 하늘에 주욱 금을 그어보고 싶고 끝없는 공간을 향하여 와 소리 쳐보고 싶고 푸른 바다같은 하늘에 풍덩 뛰여들고 싶은 그런 느낌을 하나 하나 정리해 가면서 푸른 하늘의 이미지를 창출하여냈다.   산새 발자국   한국 방원조   얼마나 발이 시렸는지 눈밭을 콩콩 밟고갔구나   눈덮인 이 세상 어디서 얼음 박힌 그 작은 발을 녹이고 있는지   아픔이 아픔을 밟고 작디작은 발자국 산새 발자국     이 동시에서는 작은 산새에 대한 동정의 마음을 시적화폭으로 그려내면서 맨발로 눈밭을 밟고간 산새의 촉각적인 느낌을 최대한으로 확대조명하고 시적정서를 풍만하게 만들었다다.   감각적인 이미지동시는 시적대상에 대한 직서적인 서술이 아니라 형상적인 간추린 묘사를 통하여 감각적인 이미지를 창출한다는것이 그 특징으로 된다 하기에 이런 동시는 시적언어에서 시적 뜻을 직접 감지하는것이 아니라 그런 느낌을 토대로 한 시적형상에서 시적인 뜻을 사색 끝에 감지하게 되는것이다.   이런 감각적인 이미지 동시는 동년기와 소년기아이들이 다가서는 동시형태로 된다.   7,은유적인 상징동시   은유적인 상징동시는 전통적인 동시의 직서적인 표현방식을 반역하고 원관념 a를 보조관념b 로 표현하는 표현기법으로 쓴 동시를 말한다.   이때 원관념과 보조관념 사이의 상사성과 류사성이 있어야만 그 은유가 성립된다는 점에 주의를 돌려야 한다 그런데 그런 상사성과 류사성은 사물의 본질적인 속성에 의한것이 아니라 사물지간의 표상의 류사성에 의존한다는 점을 명기하여야 한다.   벚꽃   한국 선용   가지마다 날개를 파닥이는   나비 나비 흰나비   놀러 왔다가 돌아가지 않는 별 별 하얀 별   여기서 시인은 이라는 원관념을 보조관념 와 로 병치은유를 시도하여 시적이미지를 창출하였다 흔히 이런 은유적인 상징동시를 쓸 때 원관념이 보조관념으로 번져가면서 깡깡 마른 수학적공식으로 대입되기에 시의 서정성이 결여되는 경우가 많게 된다 이를테면 라고 은유만 시키고 말면 시의 서정성이 나타나지 못하게 된다.   그런데 시인은 로 썼다 그리고 유충록이이라고 썼는데 최**은 으로 썼다 다음 주소를 모르는 원인을 유충록은 로 비교적적 형상적으로 표현하였다면 최**은 고 간단히 설명하고 말았다 그 다음 편지를 자꾸 쓰는 까닭에 대하여서는 유충록은 고 하였고 최**은 라고 하였다 다른 점은 최**이 유충록의 쓴 의 제 4련을 빼 버린 것이다 유충록은 라고 하였다 작자는 여기에 방점을 찍고 자기의 주제를 심화시키려고 하였다 그런데 최**은 에서는 유충록이 노린 점에 신경을 쓴 것이 아니라 편지를 자꾸 쓰는 시적주인공의 내심세계에 방점 찍으면서 유충록의 제4련을 군더더기로 보았던 것이다 최**의 노린 주제에 의하면 이것은 필요가 없는 군더더기로 되는 것이다 이처럼 최**은 시적형상화에서 를 으로 , 을 으로,을 라고 하였다 (2) 과 2010년 4월에 연변 사이트에 누군가가 강순길과 최**의 동시를 비교하면서 의문점을 제기하였다 아기의 말 강순길 아기는 울음으로 말을 한다 기저귀가 젖어도 -응애 응애 배가 고파도 -응애 응애 몸이 아파도 -응애 응애 아기의 말은 엄마가 알아듣지 (1999) 아기 최** 배고파도 으-앙 오줌 싸도 으-앙 아기 울음소리 듣고 엄마가 달려 온다 아기는 울음으로 말한다 ( 2003) 강순길이 1999년에 쓴 동시과 그로부터 4년이 지난 2003년에 최**의 쓴 동시 또한 너무도 닮은 동시이다 두 사람 다 시적대상인 에서 아기들은 울음으로 말한다는 시적발견을 하고 있다 즉 똑 같은 시적 발견이라는 말이다 시적 형상화에서 보면 강순길은 아기의 울음소리를 라고 하였고 최**은 아기의 울음소리를 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강순길은 아기들이 ,, 운다고 한것을 최**은 아기가 , 운다고 하였다 강순길은 하고 전반 시를 마무리 하였는데 최**은 고 마무리하였다 (3)과 한국 손길봉이 2008년 2월 24일 에 이라는 동시를 발표하였다 호박넝쿨 손길봉 호박넝굴 끝에는 눈이 있지요 울바자를 보고서 찾아 가지요 호박넝굴 끝에는 손이 있지요 울타리를 붙잡고 올라 가지요 그런데 최*이 2010년 겨울호잡지 에 이라는 동시를 발표하였다 박넝쿨 최* 박넝쿨엔 눈이 있어요 울바자를 보면 살금살금 찾아 가지요 박넝쿨엔 손이 있지요 울바자를 찾아서 정답게 감겨 올라요 상기 2수의 동시를 보면 시적대상이 서로 다른 것 같다 손길봉은 로 하고 최*은 로 하였다 그러나 형식상에서 시적대상은 서로 다르지만 시적발견은 둘 다 과 에 이 있고 이 있다고 하였다 즉 시적발견이 완전히 같다는 말이다 시적형상화에서 보면 손길봉이 이라고 한 것을 최*은 로 하였다 그리고 손길봉이 눈이 있는 호박넝굴이 울바자를 보고서 한 것을 최*은 박넝쿨이 라고 하였다 나중에 손길봉이 손이 있는 호박넝굴이 한 것을 최*은 손이 있는 박넝쿨이 라고 하였다 (4) 와 김철호는 2002년 자기의 동시집에 동시를 발표하였다 나비 김철호 가지 없어도 노랗게 핀다 뿌리없어도 하얗게 핀다 황**는 2010년 아동문학학회에서 편집출판한 에 을 발표하였다 초불 황** 가지 잎 없어도 빨갛게 피는 꽃 여기서 김철호는 나비를 꽃으로 은유하여 오묘한 시적형상을 창조하였다 즉 가지 없어도 노랗게 핀 꽃이 노란 나비요 뿌리 없어도 하얗게 핀 꽃이 하얀 나비라는 것이다 그런데 황**는 바로 김철호의 이런 작시법을 그대로 에 대입하여 이른바의 동시을 써서 발표하였다. 창작에는 그 어떤 공식이 따로 없다 창작에 공식이 있으면 그 누구나 그런 공식에 대입하여 동시를 쓸수가 있지 않을가? 문제에 대한 분석 상술한 고찰에 근거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경우를 종합하여 낼수가 있다 첫째, 인 경우이다 완전모방작품이란 시적 발견이 같고 시적형상화가 같은 작품을 말한다 지어 제목도 같을 수가 있다 그런데 다행스러운 것은 우리조선족 아동문학문단에 아직 이런 완전모방작품이 나타나지 않은 그것이다 이런 완전모방은 너무나도 우둔한 짓이기에 아직까지 그 누구도 그런 엄두를 내지 못하고있는 것 같다 이런 완전모방작품은 완전히 남의 작품을 자기작품으로 발표하기 때문에 이란 작자는 이라고 방점 찍고 만천하에 공개하고 질타하여 마땅할줄로 알고 있다 둘째, 인 경우이다 준모방작품이란 시적발견이 같고 시적형상화에서 약간한 개조를 진행한 작품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남의 작품에서 단어 몇 개, 토 몇개를 바꾸어 놓고서는 눈감고 하는 식으로 자기의 작품이라고 넌지시 발표한 그런 작품을 말한다 우선 이런 작자들은 남의 시적발견을 자기가 발견한것처럼 들고 나온다 시적발견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모르는 이런 작자들은 남의 성과를 파렴치하게 슬쩍 후무려 가지고는 시뚝해서 으시대고 있다 다음 시적형상화에서 보면 그런 사람들은 남의 형상을 약간씩 뜯어 고치는 상투적수법을 사용하고 있다 물론 남의 작품을 고치기 때문에 원 작품보다 질적으로 나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존재한다 그러나 토 몇 개, 단어 몇 개를 고치고 어떻게 자기 작품이라고 떠버릴수 있단 말인가! 그 다음 인식론적 견지에서 보면 이런 작자들은 정보화시대라는것을 까맣게 잊고 무지막지한 우물안의 개구리가 되여 남의 잘된 작품을 자기 홀로만 보았으리라고 오판하고 이런 우둔하고 비렬한 장난을 하게 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런 작자들을 심리학적으로 분석하여 보면 발표욕에 미쳐 날뛰면서 자기를 얼리고 독자를 기편하려고 든다 결과 형식적으로는 남의 작품을 모방한 것 같지만 본질적으로는 남의 작품을 훔친 철두철미 인 것이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보면 완전모방보다는 더 교활한 작법이라는 것을 알아야할 것이다 셋째,경우이다 .우리는 동시를 학습하면서 수백수의 동시를 머리 속에 저장하고 있다 그런 저장된 동시들이 어떤 시적충동을 받는 경우 새롭게 조합되여 이른바 동시로 둔갑될 수가 있다 이것은 무의식적인 행동으로서 탓할것이 못된다 하지만 그렇게 쓴 동시가 남이 이미 발표한것이라면 작가적 량심으로 자기를 자제하고 발표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넷째, 인 경우이다 이미 성숙된 작가들이 동일한 시간에 서로 다른 장소에서 서로 비슷하거나 서로 같은 작품을 창작할 수가 있다 일찍 프랑스의 모파상과 로시아의 체호브는 같은 시간에 애완견을 둘러싼 비슷한 소설을 창작해냈던 것이다 이런 경우 누가 누구를 모방하였다고 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결론 상기 분석과 종합에 근거하면 우리 동시창작에서 나타난 엄중한 페단은 반드시 엄격히 검토하고 철저히 시정하여야 한다고 본다 우선 상기 거론된 관계 작가들은 자기의 작품이 우에 렬거한 어느 경우에 속하는가를 실사구시적으로 해명을 하여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하자면 창작실제를 존중하여야 할것이며 또한 가슴 아픈 분석과 객관적인 판단이 필요된다고 본다 다음 우리 독자들은 무턱대고 상기 관계작가를 비방하거나 모욕할것이 아니라 그들의 해명을 리해하고 존중해 주면서 그들의 창작태도를 바로 잡는데 따뜻한 충고를 주어야 할 것이다 만약 창작이 모방이라고 하면 상기정황은 모두다 아무런 문제로 될 수가 없을것이다 그러나 창작은 절대 모방이 아니라 개성적이고 량심적인 작가들의 심미적인 새로운 위대한 창조이기 때문에 상기문제는 엄중할수 밖에 없는 것이다 때문에 창작을 이라면서 그런 을 그 어떤 새로운 이요, 그 어떤 새로운 라고 하는 것은 창작을 모독하는 절대 용납할수가 없는 망설이라고 하여야 할 것이다 우리 모두 창작은 절대 모방이 아니라는 것을 명기하고 피타는 노력을 다 하여 남이 창작하지 않은 그런 나만의 작품을 창작하기 위하여 떨쳐나야 할 것이다.  
795    윤동주는 우선 동시인 댓글:  조회:4510  추천:1  2015-12-30
윤동주는 우선 동시인                                      ///김선파 연변동북아문학예술연구회에서는 2015년 2월 28일 제2회 윤동주문학상 시상식을 가지였다. 1917년 12월 30일 북간도 명동촌에서 태여나서 1945년 2월 16일에 세상을 하직한 윤동주는 우리가 마땅히 기념해야 할 위대한 시인이다. 오늘 진행한 윤동주 문학상 시상은 윤동주를 기념하는 가장 훌륭하고 뜻깊은 기념활동이라고 본다. 지금까지 연구재료에 의하면 윤동주의 첫 작품은 1934년에 쓴 ,,이다. 그 가운데서 동시 는 윤동주의 첫 동시로 지목된다 하여 윤동주는 동시창작으로부터 작품활동을 하였다고 떳떳이 자랑차게 말할 수가 있다. 그의 동시 창작은 다음과 같은 4개 단계로 나누어 고찰할 수가 있다. 첫째단계 1935년 평양숭실하교 3학년에 편입되면서부터 7개월간 윤동주는 활발한 동시창작을 하게 된다 그 사이에 다음과 같은 동시를 창작하였다. ,,,,, 등 6수다. 둘째 단계는 1936년 숭실학교가 페교되자 룡정 광명중학교 4학년에 편입되여 본격적인 동시창작 고봉기에 들어섰다. ,,,,,,,,,,,,,,,,등 17수다. 셋째단계는 1937년부터다 이 시기에 윤동주는 성인시로 과도하는 시기였다. 이때 쓴 동시로는 ,,,,,,,,,,등 11수인데 이 시기 윤동주가 쓴 성인시는 15수나 된다 이것은 이때로부터 윤동주가 성인시 시인으로 과도하고있음을 설명한다. 넷째단계는 1940년으로 윤동주동시창작의 저조기로 된다. 이 시기 창작한 동시는 ,등 2수가 있다. 이렇게 윤동주는 짧디짧은 8년간의 창작생활 가운데서 도합 116수(편)의 작품을 창작하였는데 그 가운데서 동시가 35수로 21.5%를 차지한다. 윤동주는 1930년대 후반기 박영종과 김영일이 주도한 한반도 동시혁신운동시기에 동시창작을 시작한 탐구적인 동시인이다. 그는 1930년대 중국조선족아동문학형성시기에 자유동시 개척자의 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는 프로경향의 작가들과도 다르고 순수문학작가들과는 달리 현실참여의식이 강한 동시인으로 자기의 반일의식을 예술적으로 표현한 진정한 동시인이기도 하다. 하기에 윤동주는 우선 동시인이고 그 다음 성인시 시인인것이다. 모두어 보면 윤동주는 중국조선족아동문학의 대표자의 한 사람일뿐만 아니라 전반 우리민족 아동문학의 대표자의 한 사람이며 또한 중국조선족 성인문학의 대표자일 뿐만 아니라 전반 우리민족 성인시의 대표자의 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윤동주는 우선 동시인이고 그 다음 성인시 시인이였다. 그런데 윤동주문학상은 우선 성인시이고 다음은 동시로 되고있다. 하여 지금까지 윤동주문학상은 우선 성인문학상이고 그 다음 아동문학상으로 되고있다. 다시말하면 이른바 동시상이라면서 아동문학가를 대접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리하여 제1회로부터 제2회까지의 윤동주문학상은 사실상 성인문학에로 일변도 되고 있다. 이것은 대단한 유감으로 되지 않을수가 없다. 윤동주는 우선 아동문학 동시인이 아니였던가! 이점을 감안하여 관계부분에서는 앞으로 윤동주 문학상 대상에 우리의 동시인들도 고려안에 넣어주기를 간곡히 부탁하는바이다. 우리 중국조선족 아동문학문단에는 한석윤,김득만,강순길,김철호,김학송,김성룡,림금산, 지영호,박송천...등 이름난 동시인들이 아주 많다. 나는 그들이 윤동주문학상 대상을 수상할 그날을 기다린다...  
794    중국조선족아동문학의 선구자 - 채택룡 댓글:  조회:4534  추천:0  2015-12-30
   중국조선족아동문학의 선구자 -채택룡     지난 2004년 6월 1일 연길공원에서 《채택룡시비》 제막식이 있었다. 그날 제막식에서 중국조선족아동문학평론가 김만석선생은 《채택룡은 우리 아동문학에서 동요, 동시, 동화, 아동소설을 제일 처음 개척한 에누리없는 중국조선족아동문학의 창시자이며 자격이 당당한 중국조선족아동문학의 선구자이다》고 높이 평가했다. 일찍 1920년대말부터 조선문단에 얼굴을 보이고 해방후와 건국후에는 로작가로 대두해 중국조선족아동문학의 성장과 발전에 마멸할수 없는 기여를 한 채택룡선생, 생전에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 레브 똘스또이의 명언을 즐겨 인용했던 그는 중국조선족아동문학 선구자의 한사람으로 되기에 정녕 손색이 없었다.   아동문학에 몸을 바쳐 70여성상   채택룡선생은 1913년 2월 6일 조선 함경북도 회령군의 한 빈한한 농가에서 태여났다. 1929년 회령공립공업학교를 졸업한 그는 1931년 도꾜 일본대학 예술과에서 고학하다가 경제난으로 중퇴했다. 1938년 12월 중국 동북으로 건너와 연길현 명륜소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1955년 연변고중에서 교편을 잡고 계시던때의 채택룡선생. 해방전에 동요동시를 위주로 100여편(수)의 아동문학작품을 발표했던 선생은 1932년 《3인동요집》을 출판하며 이름을 날렸다. 1945년 10월 혁명사업에 참가하여 1950년까지 《한민일보》, 《길림일보》, 《인민일보》, 《연변민보》, 《동북조선인민보》, 《연변일보》사에서 편집, 기자로 활약하면서 문학창작에 정진했다. 초창기(1951년) 《연변문예》( 전신) 편집으로, 연변고중(1952년) 교원으로 열심히 사업한 선생은 1956년 중국작가협회에 가입하면서 꾸준히 작가적 기량을 다져나갔다. 중국작가협회 연변분회 창작위원회 주임, 《아리랑》( 전신)잡지 편집비서를 력임하면서도 시종 붓끝을 쉬지 않았다. 1945년부터 1956년사이 종합집 《어깨동무》, 동요동시집 《나팔꽃》을 출판했고 이 시기에 창작한 가사 《베짜기노래》(1947년 창작. 허세록 작곡 방초선 노래)는 당시 중국조선족이 수상한 국가급상으로는 최고상이자 또한 최초로 전국군중가요 2등상(1954년)을 수상했다. 동요 《병아리》, 《나팔꽃》, 《사탕비 와요》, 《개구리》 등은 작곡가들에 의해 노래로 창작되여 어린이들속에서 널리 불리워졌다.   연변조선족자치주 제1, 2, 3기 인민대표대회 대표로도 활약하며 자치주건설에 지혜를 모았던 그는 1959년 억울하게도 우파모자를 쓰고 로동개조를 강요당했고 1964년에는 핍박에 의해 해외망명의 길에 올라야만 했다. 장장 19년이나 가족과 떨어져있던 선생은 1983년에야 정치명예를 회복받고 귀국했다. 이듬해(1984년) 동요동시집 《병아리》를 출간한데 이어 100여편(수)의 아동문학작품을 정력적으로 창작하며 새시대 중국조선족 어린이들의 생활을 생동하게 보여주던 선생은 애석하게도 1998년 10월 26일 86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1928년 처녀작 발표 카프문학에 동조   선생은 《문학창작의 첫걸음을 더듬어보며》라는 글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1920년대말 30년대초에 나는 문학창작의 첫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당시 조선에서 산생 발전한 신경향파문학과 카프문학은 소위 문학을 지향하는 우리 청소년들에게 음으로 양으로 적지않은 도움을 주었다. 먼바다 모진 풍랑속에서 헤매다가 발견한 등대마냥 진보적인 작가, 시인들이 추켜든 신경향파, 카프의 홰불을 따르던 애어린 문학애호가들속에 먼발치에서나마 나 자신도 고스란히 끼여든 셈이랄까…》 채택룡선생은 14세때인 1926년 6월부터 카프아동문학간행물인 《별나라》 잡지를 읽으면서 프로아동문학의 영향을 받아들였다. 1927년 동요 《어린동생》을 창작하여 1928년 신춘호 《별나라》에 발표한데 이어 그해 《별나라》에 또 동요 《개미》를 발표하며 본격적으로 문학활동을 시작했다.   신경향파문학과 카프문학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선생은 1938년 북간도로 이주하면서 리호남, 김조규, 천청송, 현경준, 리학성(리욱) 등 작가, 시인들과 접촉, 진일보 문학탐구활동을 전개했다. 해방후에는 김례삼, 윤정석 등 아동문학작가들과 손잡고 중국조선족아동문학의 화원을 꽃피우는데 모든 정력을 기울였다. 선생이 중국조선족의 제1대 작가로, 조선족아동문학의 정초자로 존경받는 리유이기도 하다.   중국조선족아동문학 대부분 쟝르의 개척자   김만석선생에 따르면 중국조선족아동문학은 1930년대에야 자기의 작가군체가 형성되였고 작품토대가 마련되였으며 발표원지가 해결되였다. 작가들로는 최서해, 윤극영, 리호남, 천청송, 안수길, 그리고 채택룡, 김례삼, 함형수, 리규화, 렴호렬 등이였고 1936년 연길교구장(敎区长) 백화동이 룡정에서 《카톨릭소년지》를 출간함으로써 중국조선족아동문학은 자기의 발표원지도 갖게 되였다. 이런 조건에 의해 형성된 중국조선족아동문학 초창기에 채택룡선생은 동요, 동시, 동화, 아동소설 쟝르 개척자로 나섰다.   당시 간도에 살고있던 우리글 아동문학작가들 중 제일 먼저 동요를 개척한 작가는 윤극영(1924)과 채택룡(1927년)선생이였다. 하지만 윤극영은 1947년에 조선으로 귀국했으므로 엄격한 의미에서 보면 중국조선족동요의 개척자는 채택룡선생이였다. 동시도 마찬가지였다. 1924년 최서해가 중국 간도에서 쓴 《시골소년이 부른 노래》가 첫작품으로 되지만 그는 그해 12월 서울로 들어갔다. 뒤를 이어 나온 동시가 바로 채택룡선생이 쓴 《사랑하는 누나여!》(1932년)라는 동시였다. 동화를 일찍 쓴 작가는 채택룡, 리호남 두분이였으나 리호남이 1938년에 동화 《딱소리》를 발표했다면 채택룡선생은 그보다 6년전인 1932년에 동화 《딱따구리》를 발표했었다. 아동소설을 쓴 작가들로는 채택룡, 리규화, 안수길, 렴호렬이였는데 리규화의 《가짜증서》와 안수길이 쓴 아동소설 《떡보》는 1940년대에 씌여졌고 렴호렬이 쓴 아동소설 《아름다운 미소》는 1940년 5월 26일까지 만선일보에 련재되였다. 반면에 채택룡선생이 《소년세계》에 발표한 아동소설 《삶의 빛》은 1932년부터 1934년 사이의 작품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러므로 아동소설 역시 채택룡선생이 개척한 것으로 볼수 있다고 김만석선생은 말한다.   가족과 생리별 장장 19년간 해외 망명   채택룡선생에게 있어서 해외 망명생활은 그의 인생과 가족에 있어서 가장 큰 아픔이기도 했다. 억울하게 《우파모자》를 쓰고(1959년) 모든 정치권리까지 박탈당하며(1962년) 중국작가협회 연변분회로부터 권고퇴직까지 당한(1963년) 선생은 부득불 해외 망명의 길에 오르는 수밖에 없었다(1964년). 채택룡선생의 아들 채영춘씨는 《아버님의 귀환》이란 글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점차 셈이 들면서 나는 아버님의 해외망명은 침묵을 위한 막부득이한 선택이였고 끈질기게 참고 견디기 위한 존엄의 표현이였음을 깨닫게 되었다… 이 모든 현실은 그 어떤 설전(舌战)으로 해명할 여건이 아니라 인내로써 극복해야 할 무거운 인생의 시련임을 깊이 감수하면서 내린 아버님의 선택이였음을 나는 뒤늦게 느끼게 된것이다. 아버님께서 이 같은 광란의 세월을 라는 신분으로 버텨낼수 있었겠는지가 의문이고 그러면 우리 이 가정은 어떤 참상을 당할지도 모를 끔찍한 일이 아닐수 없다… 》 한창 정열에 끓어넘칠 40대 중반, 창작의 권리도 생활의 권리도 모두 박탈당한 선생이 선택한 길은 망명이였다. 정치적 핍박으로 1964년 합법적 수속을 밟아 조선으로 출국했던 선생은 《문화대혁명》이 터지면서 가족과 생리별해야만 했다.   《카프》시기의 작가, 중국조선족 제1대 작가로서의 신분과 돈독한 인맥관계는 이국의 작가동맹, 신문사와 같은 문화기관에 들어갈수 있는 기회가 여러차례 주어졌지만 그때마다 단연히 사절했다. 신상을 걱정해 주변에서 관심어린 뜻도 보내왔지만 《홀아비》의 적막한 생을 끄덕없이 영위해나갔다. 그러던 1983년 선생은 드디여 정치명예를 회복받기에 이른다. 그리고 자식들과 지인들의 노력으로 중조 두나라 출입국관계부문의 허가절차를 밟아 드디여 정식으로 귀국의 길에 올랐다. 장장 19년만에 이루어진 중국조선족아동문학 선구자의 귀환이였다!   연길공원 동시동네에 세운 채택룡시비.   참고도서 및 자료:   1)채택룡문집-연변인민출판사 2)김만석-《채택룡선생의 아동문학활동과 그 문학사적의의에 대하여[1999년 《문학과 예술》 제2기])》 3)채영춘-《아버지의 귀환》[연변문학 2011년 제8기]   "길림신문" ==================================================================================== 동요 동시인 채택룡선생의 예술적공로  /// 김만석   2015년 12월 21일 08시 22분   채택룡선생의 전반 아동문학창작을 투시하여 보면 그래도 동요동시인이라고 자리매김하는 편이 더 과학적일것 같다. 채택룡선생은 1913년 2월 6일에 태여나서 1998년 10월 26일까지 85년간 이 세상에서 사시면서 만 71년간 창작활동을 하신 우리조선족의 자랑찬 아동문학작가이다. 채택룡선생은 생전에 필자와 많은 접촉이 있었다 필자는 북대신촌에서 산적이 있었댔는데 그때 채택룡선생은 농약공장 앞에서 사시였다. 필자는 일요일이면 채택룡선생을 찾아가서 우리 중국조선족아동문학이 걸어온 력사를 담론하고 나중에 어설프지만 아동문학사를 출판하여냈다. 그리고 채택룡선생의 창작활동을 정리하면서 채택룡선생의 분실한 원고들을 어떻게 복원할수없겠는가 토론도 하였다. 그리하여 동화 를 살려서 로 발표하였다 아동소설 은 필자한테 경개를 소개하여 주어 필자는 그것을 정리하여 필자의 에 인용하였다 하지만 채택룡선생은 그 보귀한 소설을 끝내는 복원하지 못하고 이 세상을 하직하고 말았다. 채택룡선생에 대하여 필자는 일찍 론문 와 에서 라고 평가한적이 있다 이런 평가는 과학적인 평가이며 또한 마땅한 평가라고 생각한다. 그 근거로는 1927년에 처녀작 동요 을 써서 그누구보다 먼저 1928년신춘호에 발표하였고 1932년동시 를 그누구보다 먼저 동시를 발표하였으며 1932년 동화를 그누구보다 먼저 동화를 발표하였고 1932년부터 1935년사이에 아동소설을 그누구보다 먼저 아동소설을 발표한것을 고증하고 내린 결론이였다. 오늘 필자는 주로 채택룡선생의 동요창작에서의 숨은 예술적 공로를 따져 보면서 채택룡선생에 대한 평가를 심화하려고 한다. 첫째,우리 조선말에서는 2음절 3음절의 규칙적인 반복에 의하여 운률이 생기게 된다. 그리하여 주로는 3.3조 ,4.4조.7.5조를 기본으로 하는 정형률이 있게 되었다. 그후 수많은 시인들의 창조적인 실천을 통하여 여러 가지 정형률을 창조하여냈다. 일찍 1920년대 이른바 7.5조라는 정형률이 나타났는데 이것은 일본의 정형률을 본딴것이라는 설이 있다. 그때 한반도에서는 7.5조 운률조성으로 동요창작에서 황금시기를 맞이하였다. 그 실례로 한정동의 와 리원수의 등이 있다 과 같은것이다. 그뒤를 이어 1930년대 조선의 박세영이 2음절과 3음절을 조립하여 이른바 6.6조 정형률을 개척하였다. 그 례로는 동요 이다 ,과 같은것이다. 1950년대 김례삼은 3음절과 4음절을 조합하여 이른바 7.7조 정형률을 창조하였다 그 실례로 인데 같은것이였다. 1927년 처녀작 을 창작한 우리의 채택룡선생은 1950년대 초기에 2음절과 3음절을 오묘하게 조합하여 이른바 우리 민족문단에서 처음으로 되는 4.5조 정형률을 창조하였다 그 례가 바로 이다. 삐악삐악 갓난병아리 아장아장 걸음익히나 요리조리 조약돌 넘어 깡충깡충 재주 피우나 이 동요는 명동요로 우리민족 동요에서 특이한 형식인 4.5조로 씌여졌다. 4.5조 정형률은 우리말의 아름다운 본딴말 가운데서 2음절로 된 본딴말을 두 번 반복하여 4음절군을 만들고 그다음 2음절과 3음절을 조합하여 5음절군을 만들어 통합한 형식이다. 이런 4.5조 정형률은 앞에 력동적인 본딴말로 도약적인 감을 자아내고 뒤에 예술적인 설명을 가하여 아이들의 리해를 도와주어 깜찍하면서도 률동감을 안겨준다. 이것은 채택룡선생이 창조한 정형률인바 그것은 채택룡선생에게 그 특허권이 있게 된다. 력사적으로 보면 1950년대 김례삼의 ,채택룡의 ,리행복의 ,조룡남의 과 같은 황금동요의 출현, 1980년대 최문섭선생이 동시창작에서 주장,1990년대 한석윤이 정형동시에서 자유동시로 이행한것.2000년대 김철호가 동심의 예술적 이미지화 등과 같은 시대적이고 돌파적인 성과작들의 출현은 우리의 동요동시창작을 도약적인 발전을 가져 오게 하였다. 1950년대 채택룡선생의 4.5조 정형률은 우리 민족 동요동시창작에서 새로운 개척이고 창조로 아동문학발전에서 획기적인 공로를 세운것으로 취급되여야 한다. 사실 우리 문학의 흐름 가운데서 이런 한가지 공헌을 한다는것이 얼마나 어려웁고 또 그런 공로를 세우는것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가는 력사가 평가하게 된다. 채택룡선생은 우리 민족 동요동시 운률조성에서 4.5조라는 특정된 정형률을 창조한 동시인으로 영원히 기록될것이다. 둘째,동요창작에서 상징동요를 개발한것은 채택룡선생의 공로라고 본다. 1920년대 말에 순수문학에서 주장하던 방영종의 자연송가동요, 현실의 고통과 슬픔을 그대로 표현한 방정환의 애상주의 동요, 계급의식을 직접 고취하던 박세영의 계급주의동요 등 3개 류파의 동요들이 류행되였다 이런 동요들은 작자의 리념이 기본상 표출화되는 경향을 보여 주었다. 이럴때 1928년 그런 동요와 질적으로 다른 동요가 나타났는바 그것이 바로 채택룡의 동요 였다. 장다리밭 꿀돼지 놀고먹는 놈 개미집에 뛰여 들어 쌀을 뺏다가 모여든 개미들게 물어뜯기여 뚱뚱배가 터지여 죽어버렸네 이 동요는 프로동요에 속하지만 상징적수법으로 썼다 그것은 당시 일본놈들의 삼엄한 검열제도가 있었기에 어떤 의미에서 보면 그런 검열에 통과하자는 그런 의도에서 출발한것도 있다고 본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것은 예술작품인 동요에 어떻게 상징성을 부여할것인가에 대한 채택룡선생의 예술적 추구에서 비롯된것이라고 하여야 하겠다. 이런 상징동요가 일제 김열에 걸리지 않은 원인이 바로 그 예술적인 상징수법에 있었다 채택룡선생은 지주를 꿀돼지로 비겨 가면서 그자들의 만행을 폭로하고 백성들의 뭉친힘에 의하여 그자들이 망하고 마는 통쾌한 결말을 예술적으로 보여줌으로써 백성들을 투쟁에로 불러 일으키는 전투적인 효과를 보았다 이 동요가 1920년대에 창작되였다는 그 시대적 배경이 이 동요의 가치를 한결 값지게 하고있다 셋째,채택룡선생은 주로 동요를 쓰면서 동요를 어떻게 혁신하여 볼것인가에 대하여 무진 애를 썼다 그리고 정형동시도 쓰면서도 동시창작을 혁신히여 보려고 한것도 그의 작품에서 자연스럽게 엿보인다. 그리하여 채택룡선생은 7.5조 운률조성을 기본으로 하면서 동요와 정형동시를 창작할 때 7.5조 2행 1련,7.5조 3행 1련 ...지어는7.5조 8행 1련.7.5조 10행 1련,7.5조 12행 1련동요 동시를 써보았다 이것은 동요동시창작을 혁신하여 보려는 그의 노력의 직접적인 표현으로 된다. 그러나 채택룡선생은 현대동시표현수법과 기교를 터득하지 못하고 일생동안 갖은 실험과 피타는 노력을 하다가 돌아가시였다 그러나 채택룡선생께서 우리 동요의 페단을 인식하고 자기동요에 대하여 불만족을 느끼고 어떻게하나 혁신하여 보려한 그 애타는 심정을 우리후대들은 오늘 충분히 리해하여야 하겠다. 우리의 동요동시는 1980년대까지 7.5조 4행1련의 정형동시가 판을 치면서 내려왔다. 1990년대에 이르러 한석윤이 7.5조의 각을 뜯다가 점차 자유동시로 전이하여 우리동시는 자유동시 시대로 되었다. 그리고 1980년대 말로부터 김현순 강효삼 림금산 김학송 김철호 등이 현대동시표현기법을 받아들여 우리동시는 질적변화를 가져오게 되였다. 1980년대까지 우리동시는 작자의 리념이 로골적으로 표출화되여 작품에서 작자의 주장을 두눈으로 뚜렷이 볼수가 있었다. 하여 작자의 정치적리념의 표출을 동시의 사회적 효과로 리해하였던것이다. 동시는 작자의 리념의 적라라한 표출을 용허하지않는다 작자의 리념은 우리의 두눈으로 볼수 없어야 한다. 동시는 아름다운 시적 형상속에 무르녹아 있는 시적이미지는 눈으로는 볼수있는것이 아니라 아리숭한 상상속에 꽃피게 하여야 한다 하여 작자의 리념은 사색과 음미속에서 저마끔 터득할수있게 하여야 만 한다. 동시의 서정성은 감탄사의 련발로 실현되여서는 아니된다 동시의 서정성은 시적이미지가 발산하는 자연스러운 정감의 분출로 되어야 한다. 2000년대 우리의 동시는 선배작가들의 창작경험과 창작교훈을 받아들이며 지금 바야흐로 변화 발전하는 단계에 있다. 우리는 채택룡선생을 기념하면서 일생동안 아이들을 사랑하고 일생동안 아동문학창작을 견지하는 그런 분투정신을 따라배워야 한다. 체호브의 단편소설에서 주인공 완까는 고 하였다 우리는 살아있는 순간까지 다시 말하면 죽는 그날까지 아동문학창작을 견지하여야 한다. 우리는 채택룡선생을 기념하면서 작가로서 자기에 대한 요구를 높이 제기하고 자기 창작에서 부족점을 느끼고 자기 창작에 불만을 품고 자기 창작을 부단히 혁신하려는 그런 혁신정신을 따라배워야 한다 그것은 오직 혁신만이 성공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일생동안 그 많은 작품을 창작하시고도 상장 한번 타보지 못한 채택룡선생에게 우리는 몇 년전에 조선민족아동문학작가들의 이름으로 , 우리조선민족 아이들의 이름으로 아니 더 나아가서 우리 중국조선족 전체의 이름으로 채택룡선생에게 시비를 공원동시동네에 높이 경립하여 주었다. 그 병아리는 영원히 삐약삐약 노래할것이고 그 병아리는 영원히 깡충깡충 춤출것이다. 채택룡선생은 저 세상에서 지금도 그런 병아리를 바라보시며 습관대로 허허허 즐거이 웃으실것이다. 2015.12.19. ========================================================== 채택룡선생의 처녀작 2015년 12월 28일 11시 17분   채택룡선생은 1927년에 처녀작 동요 을 창작하여 1928년 신춘호에 발표하였다. 그런데 지금도 우리는 그 원문을 모르고있다.   채택룡선생의 생전에 필자는 선생과 여러 차례 이야기를 나누고 그것을 문자로 써줄것을 부탁드리였다. 채택룡 선생은 친필로 그것도 정자로 또박또박 나한테 a4 용지로 11페지나 써주시였다 최근에 필자는 그 자료를 찾아 다시 보면서 선생의 처녀작 의 내용에 대하여 초보적으로 알수있게 되었다.   채택룡선생은 자기의 친필재료 제 6페지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동요   1928년 월간잡지 에는 나의 처녀작 이 게재발표되였다. 당시 나로서는 자기 이름 석자가 활자화되여 새상에 알려진데 대하여 무한한 긍지와 더 없는 자랑으로 여겼다. 참으로 우스운 일이기도 하였다.   동요 은 당시 땅마지기나 소작을 주고 농민들의 피땀을 여지없이 빨아먹고 배를 불리는 지주놈에 대하여 증오감을 그린것이 그 주요 주제사상이다.   땅은 매우 중요하며 땅을 다루는 농민들에게는 더없이 귀중한것이다. 이에 소작인들은 땅을 떼울가 두려워 심지어는 지주집에서 온통 빨래감까지 갖다가 빨아주고 그를 말리워 두 어깨가 물러나도록 다듬이질 해준다. 이런 가지가지의 어머니의 고통, 이 곤경을 다듬이돌 옆에서 쏘아보던 어린 동생은 대뜸 어머니의 손에서 다듬이질 방망이를 빠앗아 들었다. 마치도 그 방망이로 지주놈의 대갈통이라도 내리 까듯 힘껏 내리쳤다. 그런데 소리와 함께 그 다듬이 방망이가 다듬이돌에 맞아 튕겨올라 어린동생의 이마를 때렸다. 이에 방망이에 맞은 아픔보다도 격분에 더는 참을수 없어 어린동생은 엉엉 소리내여 울었다. 분이 머리끝까지 치민 어린동생은 다듬이돌 우에서 어머니의 책망도 아랑곳 하지 않고 온통 옷견지들을 냉큼 방바닥에 끌어내려놓고 맨발로 마구 짓밟아 놓는것이 그 내용의 전부인것이다.    동요 의 내용은 보는바와 같이 서사적 이야기로 되어있다. 지주네 빨래를 하여 다듬이질 하는 어머니,그런 고생을 하는 어머니를 바라보다가 방망이를 뺏는 어린동생, 그리고 방망이로 다듬이돌을 내리치다가 자기가 되려 방망이에 얻어맞는 어린동생, 지주네 빨래를 팽개치고 마구 짓밟는 어린동생...이런 서사적내용을 동요로 썼다고 하니 도대체 어떻게 썼을가 궁금하기만 하다,   그런 분노의 정서를 어떻게 썼을가? 정형률로 썼을가? 아니면 자유률로 썼을가? 력사적으로 고찰하여 보면 아마 정형률로 쓴것 같다. 그것은 작품의 장르를 동요로 빩혀놓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요 내용을 보면 화적동요형식(이야기식동요)을 갖추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다면 정형률로 어떻게 화적동요( 이야기식동요)를 썼을가?   추측은 언제나 과학연구에서 금물이다. 우리는 력사를 존중하여야 한다. 작자 본신이 복원 못한 그런 작품을 우리가 함부로 대하여서는 절대 아니된다.   이 동요는 채택룡선생이 14살 때 쓴것이다. 우리는 이 동요의 내용에서 채택룡선생이 나어린 14살 때의 계급적 의식수준을 능히 가늠해 볼수가 있다. 그것도 시적주인공을 어린애로 삼은 작자의 창작의도가 너무나도 돋보인다.   어른도 아닌 아이들까지 지주들의 착취에 분노를 느끼게 한 작자의 착안점이 기발하다. 다시 말하면 아이들마저 계급적으로 각성한 그런 시대에 대한 파악은 창작 초기로부터 프로문학경향을 지향하였다는것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채택룡선생이 어떤 형식에 그런 값진 내용을 담았는가는 아직 알수가 없다. 그것은 우리가 아직까지 그 원문을 보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채택룡선생이 필자에게 남긴 그 친필재료에 의하여 우리가 그 동요의 내용을 오늘 처음 알게 된것은 한낱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하지 않을수가 없다.   이 동요는 채택룡선생의 처녀작이자 우리 중국조선족아동문학에서의 첫 동요로 되며 더 나아가서 우리 조선족아동문학의 첫 작품으로 되는 그런 력사적 의의를 가지는 작품이다. 하기에 채택룡선생의 처녀작 동요 은 반드시 찾아내야 할 과제로 우리 앞에 제기되고있다.   앞으로 관계나라와 문학적인 련계를 강화하여 잡지를 구하여 가지고 우리의 채택룡선생의 처녀작 을 원문 그대로를 찾아내야만 한다.   이 과업은 오로지 우리 아동문학후계자들에게 의탁할수 밖에 없는 력사적 과업으로 남게 되었다.   /// 김만석 (아동문학가)              2015.12.28.
  SNS 공유 및 댓글 SNS 클릭 수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스토리 댓글 수0 달콤한 아이스크림의 역설 모든 건 덧없이 녹아내리니 유일한 황제는 아이스크림 황제다 (원문 The only emperor is the emperor of ice-cream) - 월리스 스티븐스(1879~1955), ‘아이스크림 황제’ 중에서 이 한 줄은 시 ‘아이스크림 황제(The Emperor of Ice-cream)’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도 필자가 오랫동안 매료됐던 구절이다. 미국 시를 한 차원 올려놨다는 월리스 스티븐스(Wallace Stevens)도 자신의 시 중에서 이 시를 가장 선호했다고 한다.      이 시의 정황, 부엌에선 아이스크림이 만들어지고, 침실엔 시체가 누워 있다. 죽은 여자는 자신이 화려하게 수놓았던 시트로 얼굴이 덮여 있으나 딱딱한 발이 시트 밖으로 삐져나온다. 그것이 얼마나 차갑고 무감각한지 보여주기 위해서란다. 우리 앞에 놓인 죽음은 그 무엇으로 가릴 수도, 장식될 수도 없다는 뜻일 것이다. 아이스크림은 달콤하나 순간 녹아버린다는 점에서 우리 삶과 닮아 있다. 얼음 디저트라는 점에서는 시체의 차가움을 은유한다. 시인은 달콤한 기쁨을 주다 덧없이 녹아내리는 아이스크림이야말로 절대적인 황제라 한다. 죽음 앞에서 모든 것은 덧없고 덧없다. 그중 최고로 덧없는 모습은 아이스크림의 거품이다. 뭉게구름 같은 그것이 덧없음의 황제 아이스크림 황제다. 이 허무주의적 진실을 이렇게 한 줄로 꿰뚫어 요약하다니, 이 구절이야말로 시의 엑스터시로서 우리를 녹아내리게 하는 아름다움 아닌가.    최정례 시인 DA 300   [전문] 아이스크림 황제                                  월리스 스티븐스                                         /최정례 졸역 여송연 굵게 마는 자를 불러라 근육질의 사내로, 그리고 그로 하여금 부엌의 컵에 욕정적인 응유를 휘젓게 하라 계집들은 늘 입던 옷 그대로 입고 빈둥거리게 하라 그리고 남자애들은 달지난 신문에 꽃을 싸서 가져오게 하라 실재로 하여금 최후의 모습이 되게 하라 유일한 황제는 아이스크림 황제다 유리 손잡이가 세 개나 떨어져 나간 전나무 경대에서 그녀가 한때 부채꼬리딱새를 수놓았던 그 시트를 꺼내라 그녀의 얼굴이 잘 덮이도록 펼쳐라 만약 굳어버린 발이 삐져나온다면, 그건 그녀가 얼마나 차가운지 얼마나 무감각한지 보이기 위한 거다 램프로 하여금 빛줄기를 첨부하게 하라 유일한 황제는 아이스크림 황제다 ==========================================   SNS 공유 및 댓글 SNS 클릭 수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스토리 댓글 수0 경청        - 김정수(1963~ )   누군가에 더러운 것 누군가에겐 일용할 양식 구르는 재주 없어도 굴리는 재주 있다고 DA 300   쇠똥구리 지나간 자리 길 하나 보인다 더러운 배설물이 쇠똥구리에게는 “일용할 양식”이다. 내게 없는 재주를 다른 사람이 갖고 있다. 세계는 이렇듯 배리(背理)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기압이 새를 공중에 뜨게 하고, 무거운 물체가 물 위에서 더 큰 부력을 얻는다. 그러니 큰 배가 덜 흔들리는 것이다. 가로막는 산이 있으니 산을 넘는다. 끝장났다고 생각할 때 새 날이 가깝다. 반대 극을 가진 자석이 쇠를 끌어당긴다. (어려운 말이지만)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바울). 배리의 담론을 경청할 때, “길 하나/ 보인다”.   [출처: 중앙일보] [나를 흔들 시 한 줄] 최정례 시인
 “요즘 詩는 난해하다 못해 어불성설… 기부입학하듯 등단하는 세태 우려” ‘문학과 지성’‘창작과 비평’ 지방작가 결코 기억하지 않아 코드 맞는 자기네끼리 연대 무상의 사회기여가 詩정신 원로끼리 賞나눠먹기 안돼 “가장 쉬운 단어로 가장 깊고 오묘한 세계를 그려낸게 좋은 시”라며 요즘 난해시에 중독된 젊은 시인들을 통렬하게 비판하는 도광의 시인.  도광의 시인(71). 광기와 열정의 접점에 서 있다. 1965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부문에서 가작으로 당선됐으며, 74~78년 김춘수·신동집·박양균 시인으로부터 ‘갑골길’이 3회 추천되면서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한다. 지금까지 딱 2권의 시집만 냈다. 괴팍한 성정의 그로부터 대구 시단의 발전을 위한 독설을 듣고 싶어서 대구시 달서구 도원동에 있는 그의 아파트를 찾았다. 서재가 없다. 그냥 안방 침대가 그의 책상이다. 창턱에 몸을 기대듯 침대에 앞가슴을 갖다대고 만년필을 굴린다. 좋은 시를 낚기 위한 배수진같다. 시상(詩想) 자국이 흐르는 500자 원고지 수백장이 침대 한 귀퉁이에 수북하게 쌓여 있다. 보내온 각종 문예지와 시집이 돌담처럼 침대를 감싸고 있다.  경남 마산고를 거쳐 71~96년 대구 대건고, 99년 효성여고에서 교직을 은퇴했다. 시인 서정윤, 이정하, 안도현, 소설가 박덕규, 문학평론가 하응백, 조선일보 최보식 기자, 시인 겸 소설가인 김완준 등이 모두 그의 제자다. 제자 덕을 봤다면 지금쯤 중앙 문단에서 큰 기침도 할 수 있었겠지만…. 가끔 속상하다. 서울 굵직한 문예지는 물론, 자신이 등단한 현대문학도 그를 외면한다. ‘지방 시인’이라서 그런가 싶어 슬그머니 부아가 치민다.   도광의 시인의 퇴고 흔적 ▨ 도광의 시인 일문일답 -황병승 시인 등 요즘 리딩그룹의 젊은 시인들의 시는 참 어렵다. 자기는 물론 독자도, 평론가조차 무슨 말인지 모른다.  “김소월의 ‘진달래꽃’부터 박목월과 서정주를 거쳐 김춘수까지 지난 세월 우리 시는 많은 변모와 발전을 거듭해왔다. 그런데 요즘 너무 난해하다 못해 어불성설(語不成說)이 되고마는 시가 많다. 시가 의미있는 것이 되려면 난해할지언정 어불성설이 되어서는 안된다. 폴 발레리의 ‘해변의 묘지’를 보자. 흰 돛단배들이 떠 있는 지중해를 비둘기들이 거닐고 있는 기와 지붕에 비유한 첫 행의 이미지는 얼마나 눈부실 만큼 정치한가. ‘저 오수(午睡)에 빛나는 수많은 기왓장들, 돛단배들이 먹을 것을 찾고 있는 조용한 지붕 밑을…’이와 같이 시가 난해해도 그 의미가 시의 보편성의 어느 언저리라도 닿아 있어야만 시의 보편성의 테두리를 넓혀준다. 시는 보편성이 희박하고 지나치게 특수성에만 치우치면 난해해지고 논리의 비약을 일으키기 쉽다. 시가 시다워야 하는데 시는 없고 언어의 특유한 옷자락만 현란하게 펄럭이고 있다. 순진한 아포리즘(Aphorism)이 화장을 하고 그럴듯한 시로 진열되고 있는 이 시대에 시다운 모습을 갖고 있는 시가 차츰 드물어져 가고 있는데 대해 안타까움을 느낀다.” -대구는 ‘대한민국 시 1번지’다. 이상화, 이장희, 김춘수, 신동집, 박목월, 유치환, 구상 등 한국 근대시의 출발은 물론, 70~80년대 한국 현대시의 골격을 이룬 유명 시인들도 약속이나 한 것처럼 대구에서 나왔다. 국내 시집 출판 사상 최고의 베스트셀러가 된 ‘홀로서기’의 서정윤 시인도 대구가 고향이며, 이성복~이하석~문인수는 현재 한국 시의 블랙홀 구실을 한다. 이밖에 젊은 나이에 김수영 문학상을 받은 장정일, 안도현도 대구를 모태로 시정신을 엮었다. 그런데도 대구의 시인은 대구발 시적 인프라를 구축하지 못하고 자꾸 서울의 아우라를 역이용하려는 것 같다. 서울 문단에 결재를 받아야 자기 문학이 완성되는 것처럼 부단히 서울을 오가는 지역 문인들이 자기만 유명해지고 후배들은 방치하고 있다. 대구시문학 발전에 걸림돌인 것 같다.  “한국 최고의 문예지로 불리는 ‘문학과 지성’ ‘창작과 비평’은 결코 지방 작가를 기억하지 않는다. 자기들과 코드가 맞는 사람들과 연대, 폐쇄적으로 운영을 한다. 특별한 몇몇을 빼고 일반 지방시인들은 죽어도 명함을 못 내민다. 세상 일이 원래 그런 것이지만 그럴수록 지방의 좋은 시인들은 간접적으로 소외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런데 걱정하지 말자. 그 소외감이 이를 더 악 물게 만들고 오히려 좋은 시를 낳게 하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 유명 문예지도 필요없다. 종국에는 좋은 시를 쓰는 사람만이 빛을 보게 된다. 시만 좋으면 중앙과 지방의 문턱이 없다.” -시인이 너무 많다. 덤핑시인이 양산되는 것 같다. “요즘 주변에 이런저런 문학잡지가 우후죽순 돋아나고 있다. 그 잡지를 통해 문학하는 건 좋지만 몇 가지가 염려스럽다. 한꺼번에 책을 많이 사주면 기부입학하듯 등단시켜준다. 나도 솔직히 얼마전까지 그런 흐름에 휩쓸린 적이 있다. 하지만 이젠 거리를 둔다. 심사평 등을 부탁해도 제대로 된 시가 아니면 거절한다. 등단이 목적인 사람들은 문협에 가입하고 나면 단번에 문인행세부터 하려고 거드름을 피운다. 특히 살만한 중년 여성들이 그런 경우가 많다. 멋진 모자를 쓰고, 좋은 차를 타고 폼을 잡는다. 사람이니 그럴 수 있는 거지만 알만한 시인들이 이를 따끔하게 지적하지 못하고 동조하며 오히려 그들에게 휘둘린다.” -문학상이 너무 많고 권위도 추락했다. 목숨걸고 시를 쓰는 전업시인에게 문학적인 배려가 없는 것 같다. “나이 많은 원로끼리 돌아가면서 문학상을 나눠먹어선 안된다. 상금도 제대로 안 주고 무늬만 문학상인 게 많은데 그건 주는 기관의 권위를 시인의 권위보다 더 앞세우려는 얄팍한 처사다. 그런 상은 수상자가 과감하게 거부해야 된다. 상도 상다워야 하고 거기에 상응하는 상금도 줘야 한다. 기립박수를 쳐주고 싶은 좋은 시인에게 돌아가야만 상이 권위를 갖게 된다.” -시정신을 정의하자면.  “시문학은 노력한 만큼 보상이 안 온다. 교사는 평생하면 연금도 나오고 나름 편안하게 살 수 있는 기반을 갖게 해준다. 나도 교사로 정년을 맞아 편하게 살아갈 수 있다. 그런데 시는 교직보다 몇 배나 더 공을 들이고 피땀을 흘려도 현실적 보답은 없다. 그게 없기 때문에 일반인들이 시인을 대우해주며, 죽으면 시비도 세워주는 것 아닌가. 시창작은 무상의 사회기여이며. 그게 시의 진정한 가치인지도 모른다.” 이춘호기자 
절실한 한마디                     김기택 시인       “요즘 ○○○씨는 왜 수업에 안 나오시나요?”  “모르셨어요? 그분 얼마 전에 돌아가셨어요.”  일반인을 위한 시창작 교실에서 강의할 때 있었던 일이다. 열심히 나와 공부하던 수강생이 병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단다. 칠순에 가까웠지만 그는 진지하게 강의를 듣고 시도 자주 써냈다. 시를 잘 쓴다고 할 수는 없지만 즐긴다는 것은 느낄 수 있었다. 강의실에 앉아 있을 때 심각한 병을 앓았을지 모른다. 이미 죽음을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시가 무엇이기에 죽음이 강제로 중단시킬 때까지 그렇게 열심히 배우고 쓰려고 했을까?  시를 공부하러 오는 사람들 중에는 머리가 희끗한 어른들이 적지 않다. 그들은 나보다 인생 경험이 많은 선배들이다. 자기 분야에서 만만치 않은 업적을 쌓고 자식들을 훌륭하게 키운 사람들이다. 한때는 문학에 대한 열정이 있었지만 가족과 일을 위해서 부득이 꿈을 접은 과거도 있다. 그러나 걸음마를 하듯이 새로운 언어를 익히기 위해 젊은 선생에게 무안한 지적을 받는 것을 즐겁게 감수하고 있다. 시를 쓰기에는 머리도 굳어버리고 언어를 다루는 순발력도 떨어졌지만 새로운 꿈을 위해 사소한 창피함을 무릅쓰고 있다.  과거 어느 때보다 배움을 통해 삶의 활력을 찾으려는 노년 인구는 많아졌다. 신춘문예에 도전하는 어른들도 꽤 있다. 한 사이버대학 문예창작과에는 일흔 살 안팎의 학생 몇 명이 입학했는데, 베트남전에 참전한 경험을 작품으로 남기기 위해서 또는 자신의 삶을 자서전으로 남기기 위해서 등 입학 동기가 다양했다고 한다. 노년의 문예창작 공부는 여가 선용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보다 가치 있는 삶을 찾으려는 절박한 선택일 수도 있다.  시 쓰기는 자신이 하고 싶은 진정한 말을 찾는 일이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하는 말은 대부분 헛말이다. 웃자고 하는 말, 인간관계를 부드럽게 하는 말, 습관적으로 나오는 말, 쓸모 있는 정보를 전달하기 위한 말이다. 꼭 필요한 한마디 말을 위해 열 마디, 백 마디의 윤활유를 쳐야 하는 경우는 허다하다. 그러나 그 말들은 사회와 세계를 굴러가게 하는 수단이지 개인이 내면에 지닌 간절한 욕망과는 별 관계가 없다.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에 따르면 인간의 말은 단어와 단어가 이어진 소리의 연속일 뿐이며 내면의 진정한 욕망과는 거의 닿지 못한다는 것이다. 무의식적인 진실은 말에 닿을 듯하면서도 미끄러져 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 말을 또 하고 또 하는 것 같다. 그래도 시는 내면의 갈구를 충족시켜줄 것 같은 한마디를 끊임없이 찾아 나선다. 시가 언어의 의미보다는 몸의 감각과 기억과 정서 같은 울림을 살리려고 애쓰는 것도 그런 까닭일 것이다.  안타깝게 삶을 마감한 노년의 학생은 좋은 시를 남기지는 못했다. 그러나 시를 쓰기 위해 애쓴 시간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진정성만 있다면 시를 쓰는 과정의 즐거움은 결과의 실패를 충분히 보상할 수 있다. 꼭 하고 싶은 절실한 한마디의 말을 끝내 찾지 못하더라도 그 가능성을 찾는 일의 흥분과 긴장은 삶의 괴로움을 조금이라도 상쇄할 만한 힘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김기택 시인
790    윌리엄 불레이크, /// 칼 크롤로브 시해설 댓글:  조회:6758  추천:0  2015-12-10
옛 시인의 목소리    영국 랑만주의 시인 - 윌리엄 블레이크(1757~1827)   기쁨에 찬 젊은이여, 이리로 오라, 그리하여 열리는 아침을, 새로 태어난 진리의 이미지를 보라. 의심은 달아났고, 이성의 구름도 어두운 논쟁도 간계한 속임수도 달아났다. 어리석음이란 일종의 끊임없는 미로, 얽힌 뿌리들이 진리의 길을 어지럽힌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거기에 빠졌던가! DA 300 그들은 밤새 죽은 자들의 뼈 위에 걸려 넘어지고, 근심밖에 모른다고 느끼면서, 자신들이 인도를 받아야만 할 때, 다른 사람들을 이끌려고 한다. 영국 낭만주의 1세대 시인인 블레이크는 이 시에서 아마도 프랑스 대혁명의 환희를 노래하고 있는 듯하다. 모든 혁명은 아침으로 빛나지만, 늘 저녁을 맞이했다. 다만 다른 아침을 예비한다는 점에서 혁명은 “진리의 이미지”다. “논쟁”과 “속임수”와 “어리석음”의 “미로”를 뚫고 역사의 기차는 아주 천천히 달린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이론은 회색이고,푸르른것은 오직 저 생명의 나무이다.”(괴테)     윌리엄 블레이크 (1757 - 1827)       영국의 낭만주의 문학 시대를 연 시인. 14세부터 판화를 배웠고 문학서적을 탐독 시를 쓰기 시작하였다.       순수의 노래 , 경험의 노래는 어린이의 관점에서 쓴 문명 비판적 시들로서 오늘날까지 널리 읽히고 있다.     그는 창문 밖으로 천사를 보았다는 환상가였고 신비가였다.   종교적 명상이 담긴 천국과 지옥의 결혼, 밀튼, 예루살렘 등의 예언서들을 냈다.     그는 이성의 억압적 세력에 대항하는 사랑과 상상력의 싸움을 노래하였다.   작품집에 대부분 삽화를 그려 넣었는데 그 기법이 사실적이면서도 환상적인 소재였다.     그는 평가를 받지 못하다가 사후에야 인정받기 시작했고 오늘에는 가장 중요한 시인 중 한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다.           시     한 알의 모래 속에서 세계를 보며 한 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보라.   그대 손바닥 안에 무한을 쥐고 한 순간 속에 영원을 보라.       새장에 갇힌 한 마리 로빈새는 천국을 온통 분노케하며,   주인집 문 앞에 굶주림으로 쓰러진 개는 한 나라의 멸망을 예고한다.       쫓기는 토끼의 울음 소리는  우리의 머리를 찢는다. 종달새가 날개에 상처를 입으면 아기 천사는 노래를 멈추고....       모든 늑대와 사자의 울부짖음은 인간의 영혼을 지옥으로부터 건져 올린다.   여기저기를 헤매는 들사슴은 근심으로부터 인간의 영혼을 해방시켜준다.       학대받은 양은 전쟁을 낳지만, 그러나 그는 백정의 칼을 용서한다-- 그렇게 되는 것은 올바른 일이다.       인간은 기쁨과 비탄을 위해 태어났으며 우리가 이것을 올바르게 알 때,       우리는 세상을 안전하게 지나갈 수 있다. 기쁨과 비탄은 훌륭하게 직조되어   신성한 영혼에겐 안성맞춤의 옷, 모든 슬픔과 기쁨 밑으로는  비단으로 엮어진 기쁨이 흐른다.       아기는 강보 이상의 것, 이 모든 인간의 땅을 두루 통해서   도구는 만들어지고, 우리의 손은 태어나는 것임을 모든 농부는 잘 알고 있다.....   자신이 보는 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그대가 무엇을 하건, 그것을 결코 믿지 않을 것이다.   해와 달이 의심을 한다면 그들은 곧 사라져 버릴 것이다.         열정 속에 있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열정이 그대 속에 있는 것은 좋지 않다.   국가의 면허를 받은 매음부와 도박꾼은 바로 그 나라의 운명을 결정한다.     이 거리 저 거리에서 들려오는 창부의 흐느낌은 늙은 영국의 수의를 짤 것이다   -윌리엄 블레이크 (1757∼1827)         ---------------------------------------------------------------------- 시퍼런 급류                  /칼 크롤로브 시퍼런 급류, 이윽고 녹색빛이 눈을 뜬다. 하늘 거기 이른 봄맞이 노래하는 새들이 날고 있다. 음악적인 몸짓을 하는 빛이 한낮의 종달새 무리 속에서 떠돌고 있다. 어둠은 더 이상 낯설지 않다. 긴긴 밤의 등불들이 꺼져버렸다. 수양버들이 색깔의 비 속에서 그 슬픈, 노란 머리칼을 내리고 있다. 말言語들 문 뒤에서 술렁대다가 꾸며진 말들의 소박성, 창문에서 벽에서 은근한 빛으로 석회칠해진다. 모음들의 현실, 둘 혹은 세 음절로 된. 하늘의 수수께끼로부터 잘려지고 돌의 현관에서 잘려진. 피부 속의 번개로서 그 속에 바람이 부는 수염으로서 속삭이는 소리를 통해 나타나는 낯선 얼굴의 解讀. 허지만 이름들은 귀 속에서 다만 윙윙거림으로만 남는다. 마치 매미나 벌꿀처럼. 그러다가 다시 침묵으로 돌아간다. 모음들-공기 중에 보이지 않는 보잘것없는 벌레들, 재가 되어 떨어져 모과의 향기 되어 남는다. 세 개의 오렌지, 두 개의 레몬 세 개의 오렌지, 두 개의 레몬 : - 더 이상 숨은 평균율이 아니며, 대기에 사는 공식이다. 익은 과일들의 代數學이다! 빛은 호리병벌 속 색깔의 노란 대낮 속에 소리없이 모든 생물 둘레에 몰려 떠돈다. 메마른 꽃들은 똑같은 순간 메마른 바람 속에 쉬고 있다. 세 개의 오렌지, 두 개의 레몬 정적은 날개를 달고 온다. 느릅나무 冠을 통해 녹음이 정적을 흔든다. 행복한 배, 마도로스의 상쾌함. 그리고 하늘은 이제 가슴을 보고 눈감지 않는 눈 : 정확한 경이, 나뭇잎새 사이로 흔들린다. 세 개의 오렌지, 두 개의 레몬 : - 수학적인 황홀경, 가벼운 곳에서 쓰여진 한낮의 문서! 혀는 혀로서 침묵한다. 게다가 낡은 의미는 귀머거리처럼 꾸꾸 운다. 저녁의 상념 어둠 속에서 얼굴들 빛난다. 덩굴숲 뒤에 있는 등불. 복숭아의 뺨들이 밤의 그림자 속에서 행복하게 젖어든다. 펄펄 끓어오르던 한낮의 열기 식고 그 영상은 망막 위에서 쉰다. 다만 웅얼거리는 소리뿐, 그 영상은 곧 어두워질 푸른 자두나무에 매달려 있다. 창문을 통해 먼데서 오는 소리 비스듬히 들리고 바람결에 속삭인다. 대기의 고랑 틈에서 물고기처럼 저녁상념이 헤엄을 친다. -『현대대표시인선집』(중앙일보사, 1982)에서 칼 크롤로브『나를 위한 풍경』(청하, 1988) 나무밑의 식사 얼룩진 그림자 아래 앉아, 우유처럼 미지근한 공기가 불어온다. 요술처럼 원이 그려지고 더위는 물러갔다. 뱀처럼 쉭쉭 소리내는 낫에 부딪쳐 깜짝 놀라 튀는 돌 강렬한 녹색을 불붙듯 내뿜는 풀밭, 벗은 다리 위에 엉겅퀴의 가시 타오르는 카밀레꽃 사이로 맨발로 우리는 선회하며 라벤더와 제비꽃의 서늘한 그늘로 피했다. 풍뎅이 날개 속에 고요가 윙윙 소리내고 검은 단풍나무 울타리 쳐진 고요 풀먼지에 아픈 눈은 강렬한 햇빛 속에 떨린다 그리고 우리는 빵과 치즈를 자른다 흰 포도주가 턱밑으로 흐른다 우리는 용해된 자두술을 살 속 깊이 알게 된다 바구니 위로 손들이 오가고 단단한 입은 만족되었다 나른한 팔다리는 흔들리는 나뭇잎 속을 흘러간다 배 독이 섞인 바람, 해초나 썩어가는 상어의 독가스와 함께 배들은 소리없이 나아간다 바람이 달을 향해 지나가고 가끔 물고기들에게 침 같은 비를 뿌린다 꺼져가는 불빛 속에 웃음소리처럼 밤이 내리고 어둑 짙어지는 비, 뱃짐에서 나는 감초 향기, 땀흘리는 선판 위로 흔들리는 괴로운 감초의 운무, 개들이 짖는다 어둠 속에서 다가오는 발자국은 공포를 띄어 개들을 바보처럼 우롱한다 들보와 밧줄 사이로 구부러진 돛, 배 뒤로부터 저 위에서 한숨이 들려온다 허무로 짜여진 비탄 그리고 무거운 얼굴들, 배의 깃대는 이미 다른 곳을 향해 나아간다 럼 술병 옆의 자화상 이 몇 해 동안 허위에 찬 모습 술벼엥 비치는 찌그러진 얼굴, 잿빛 머리칼과 검은 이, 깊고 놀라운 술에 파묻혀 달을 그리며 밤에 기댄 모습! 아, 이것이 바로 나다 나의 목구멍을 태우는 향기로운 불을 나는 삼킨다 눈주위는 수상한 푸른 멍이 들고, 턱은 벌써 새로 자란 수염으로 그늘졌다 수염에는 먼지며 누런 설탕이 묻어 있다 나는 숨을 들이쉬며 쉬지 않고 달콤한 럼을 입안에서 씹는다 내가 생각했던 것들은 내 눈썹과 함께 자랐다 그리고 털로 덮인 악마의 발톱-허무가 나의 목을 휘게 하고 등을 구부러지게 만든다 허위에 찬 모습! 검은 술병이 행복의 배처럼 내 머리 위로 흘러간다 내 손 밖으로 자라나 내가 사로잡혀 있는 내 꿈의 그물을 빠져나가 낯선 열대의 하늘을 헤매이다가 흑인의 입술, 자마이가, 나의 머리 그리고 피안에 가까운 어지러운 소용돌이 속에 사라진다 적막한 해변         유심히 살펴보면 결국         도처에 난파선이 널려 있다         -페트로니우스 돛단배와, 수염으로 덮인 황금 같은 웃음소리들은 입에서 새어나오는 가쁜 숨처럼, 석회를 먼지로 부서뜨리는 담벼락의 그림자처럼 사라졌다 녹지 않는 검은 꿀처럼 비애는 남아 있고, 새똥처럼 젖어, 향기롭게 빛 속에 걸리고 뜨거운 벽돌 기둥 위에 가벼운 죽음으로 착색된다 카드놀이하는 선원들은 그들의 육체 속에 홀로 있고 담배연기가 그들의 풀어진 눈까풀 사이로 그들 속으로 스며든다 그들이 밤의 푸른 장막을 향해 던졌던 그들의 칼날은 솟구치는 영원의 날카로운 바람 속에서 무뎌졌다 강가의 야상곡 내 목소리의 재를 강물에 뿌리고 검은 그을음자국처럼 나는 그것을 따라 헤엄쳐간다 달의 커다란 입 속에 쉬익 소리내며 지나가는 크고 더러운 검은 비늘의 물고기들 아래의 그늘 정령의 소리에 휘날리고 역리로 휩싸인 침묵의 넓은 천이 내 위에 덮였다 밤의 폐허 속에 숨어 있다가 내 핏속에 불을 찌르는 모기소리 내가 달아나 버린 내 몸의 검은 색이 천갈좌가 되어 내게 별빛을 던진다 물 속에 떨며 서 있는 오렌지, 빛살처럼 부드럽게 흐르는 달 아래 흔들리고 있다 고요와 회색 바람으로 만들어진 달콤한 과일, 내 눈동자 안으로 빛이 되어 스며든다 부드러운 해초의 정원에서 쉬고 있던 녹색 수염의 밀물이 어느새 올라왔다 그리고 어둠에 익숙해진 내 눈은 부르는 소리로 가득찬 밤 속으로 기운다 물이 있는 풍경 물 속에 잠기는 뜨거운 담의 붉은 빛은 공기를 그의 불길로, 부드러운 빛으로 칠했다 포플라 그늘 아래서 검은 물고기인 나는 움츠리며 미나리 같은 입맞춤의 맛을 들이마신다 칠현금 같은 뿔이 달린 미노토루스, 더위의 황소는 머리를 앞으로 늘어뜨리고 푸른 도랑에서 목욕한다 그가 성이 나 머리를 석회암의 가벼운 살 속에 파묻듯이 나는 나의 주위를 부르겁게 감싸는 서늘함에 팔을 휘감는다 갈대숲 뒤에 빛나는 물의 라빈린트 바깥, 아리아드네의 실을 눈먼 테세우스가 붙드는 것이 보인다 소금에 젖은 그의 하얀 양털 같은 머리칼이 바삭바삭 소리내고, 물결이 바위에 부딪쳐 소리친다 그것은 오보에의 탄식과도 같았다 나의 머리 위에 살아 있는 은화, 빛나는 무성한 나뭇잎 나귀가 끄는 짐수레가 푸른 들판에 짧은 틈새를 만든다 마르지 않은 라커처럼 빛나는 새털구름의 반사, 그리고 나는 낮은 소리로 우는 바람의 낭적과 이야기를 나눈다 낯선 병사들이 있는 밤풍경 나란히 누워 밤에 잠들어 있는 그대들, 엉덩이를 박하 속에 눌러 누이고 짓이겨진 살비아의 향기 속에, 시간의 잎사귀 아래, 괴물 같은 공기의 흐름 속에, 담 밖에서 춤추는-황혼이 흘러가고 보이지 않게 호두껍질 속에 숨어 있는 어둠의 요정이 예리한 정적 속으로 몰입하고, 내 가슴의 풀잎에 고통이, 고뇌가 입을 다물고 그리고 하늘은 베틀을 짜 검은 색의 천을 휘감을 때 나뭇잎 속에서 웃음소리가 들린다 잿물에 타버린 병사들, 낯선, 납작한 기관총의 총구 冥府에서 잠자는 그대들, 목덜미엔 고요한 별 모래바람 속에 불타는 대기의 불, 그림자와 재로 된 길 위에, 달빛 아래 촘촘히, 그대들은 모여 있다 머리카락은 풀잎과 엉키고, 부드럽고 눈먼, 심연으로 흠뻑 젖고, 흑인처럼 부어오른 입술, 팔에는 낟알 같고, 사람을 취하게 하는 향기 같은 천상의 진리, 페르세포네의 사랑으로 따뜻하고 달콤한 꿈의 포옹에 묶여, 교살된 머리를 늘어뜨리고! 나뭇잎 속에서 웃음소리가 들린다 잿물에 타버린 병사들, 회색의, 납작한 기관총의 총구 이제 소리없이 깨어난 그대들, 수염에는 나비들, 천천히 바람 속에서 노래하며, 늑골 위로 벗어부친 셔츠, 행복한 얼굴 위로, 모든 천공의 별과 시간의 지도처럼 깊어가는 침묵이 덮는다 북소리와 나팔소리에 그대들이 힘겹게 숨쉬는 소리가 들린다 이제는 어느 총탄도 뚫을 수 없는 공유하는 대기 속에, 입안에 남아 있는 남자들의 밀가루의 씨앗인, 동쪽으로 흘러가는 푸른 화약가루의 낟알들을 씹으며, 나뭇잎 속에서 웃음소리가 들린다 잿물에 타버린 병사들, 머나먼, 납작한 기관총의 총구 남자들 우리들의 행동이란 결국 신랄한 공포로 온통 뒤섞인 꿈이 아니고 무엇인가 -안드레아스 스리피우스 그렇게 그들은 간다 목에 걸린 호탕한 웃음, 가지런한 치열과 잘 닦여진 잇몸을 보이며 튀어오르는 근육과, 엉덩이를 흔들며, 그들은 쉽게 침묵하고, 음흉하게 혈관을 타고 올라오는 탐욕스러운 입술을 한, 죽음의 바람 속에 소리없이 날아다니는 늙은 하이에나, 한 밤의 가죽을 뒤비어쓴 짐승을 잊어 버리고 석탄처럼 검은 험악한 눈 또는 삼월 하늘처럼 푸른 선량한 눈, 숨김없는 눈길로 그들은 씩씩하게 걸어간다 한낮의 햇빛의 긴 행렬 앞에, 행운의 태양 아래, 아무렇게나 어깨에 메고, 고요한 걸음걸이를 가볍게 하는 신식기관총이 이 시대의 빛속에 금속성의 잿빛으로 빛난다 형상없는 세계, 텅빈 막사 뒤에서의 잡담, 쟁취된 은신처에서 밤으로의 의식 없는 호흡 : 밤은 그들을 위해 가로등의 불꽃 타는 소리 t고에 다가오고 밤은 식사처럼 맛이 좋았다 구운 닭고기 포도주 쓰레기, 아무리 먹어도 배부르지 않지만 사람들은 그 식탁에서 일어난다 희망은 비수처럼 벌써 살 속 깊이 꽂혔으므로 사냥꾼과 양치는 사람들의 서정적인 풍경 뒤에 무기의 수풀이 숨어 있다 프롬의 섬광, 짖어진 콘돔, 방어하지 못하는 세계 위에서, 燐 속에서 폭발하는 불의 신의 위력 그러나 그 힘은 맑은 물처럼 끊임없는 찬양에 대한 약속을 하고 있다 거짓 철자들로 된 더듬거리는 찬양 가냘픈, 가벼운 새들이 심연을 벗어난다 그리고 죽음이 쓰디쓴 술잔이라는 것을 아무도 그들에게 증명하지 않는다 저편으로부터의 기울어진 빛 속에 어깨의 뼈마디를 짓누르는 삶과 삶 사이에 허무의 쟁기의 보습 그림자처럼 낄낄 웃는 귀신들의 기쁨에 둘러싸여 안정장치 풀린 권총처럼 그들은 신랄하게 확신에 차 있다 그렇게 그들은 간다 죽음의 배가 천천히 명부로 저어갈 때, 갈색 머리, 금발 머리카락을 귀뒤의 허공에 날리며 순찰꾼의 외침 뒤에 남는 허공처럼 그들 뒤에 있는 캄캄한 허공 젊지도 늙지도 않은 남자들, 웃음의 한가운데에서 비극의 가면으로 찢어지는 얼굴들 1950년 송시 슬픈 표제어는 이제는 충분하다 : 편안한 비유는 누런 빛으로 부서지는 가을 낙엽처럼 아무 의미없는 헛된 말 냉혹한 낱말은 마른 풀에 불을 당기는 것처럼 유령 같은 유행으로 입안에서 써서 닳고 닳아 결국 토비아스의 물고기보다도 놀랍지 않고, 또다시 송시라는 정신이 된다 그러나 존재의 태만한 폭력 앞에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교활하고 잡다하게 휴식하는 이외에 : 가벼운 신을 신고 우화의 인물 속으로 도망가거나 산 위에서 불어오는 휘감기는 바람의 입맞춤에 혼미한 채 재로 덮인 강 위에 천천히 표류하거나 열매으 공식 : 누가 그것을 그렇게 부르는가? 밤의 은빛 쟁반에 담아 날들의 소리나는 식탁 위에 펼쳐 놓은! 느낄 수 있고, 가깝고, 붙잡을 수 있는 나는 그 사이에 헛되이 사라지는 것들을 낱말들로 붙잡으려고 한다 섬세하게 고안해낸 숨쉬는 음절들과 떠오르는 반달 속의 미역감은 칠요성의 고리처럼 한 묶음의 생각들로 된 수학으로 그러나 요술의 이 이름들로는 아무것도 입증하지 못한다 구구대는 비둘기 -무의식처럼 들리는- 달콤한 소음들은 사라진다 나는 그것들이 낱말들로 된, 표식으로 된, 어떤 의미인 것처럼 꾸며대지만 그것은 누구에게도 이르지 못한다 그러므로 또다시 심연? -아니 심연이 아니다 오래 전부터의 유혹 그리고 풀베는 사람들의 한낮에 또는 갈대로 뒤덮인 밤에 그 앞에 걸려들고마는 다정한 덫, 노래하듯 휘감기는 시적인 함정, 확실하고 명쾌하게 내버려둘 수 있는, 정신 가운데에서 정신을 끌어낼 수 있는, 그리고 저주가 숨어드는 역사의 구름 속을 휘몰아쳐 지나가는, 환상의 기사, 시간을 인식할 수 있는 의식, 능력 나는 낱말의 윙윙 소리나는 사슬, 공허하게 울리는 쇠창살을 존재의 바닥 위에 남긴다         그것은 빛나고 쓰디쓰다 한국 悲歌 강가의 푸른 석회의 집들이여! 침몰하는 아름다운 배처럼 그대들이 허공 속으로 가라앉는 것을 나는 몬다 무릎까지 잠기는 침묵 속에 방금 그대들이 있었다 가시물고기의 솟구침에서 내가 다시 한 번 흙을 추측한다면  한낮의 땀냄새처럼, 팔월의 자갈돌과 나무들의 혼란으로 뒤덮인 접근은 약처럼 효험이 있었다 가상의 고향 : 나이팅게일과 바람 속의 귀뚜라미의 노란 날개로 주의깊게 만들어진 그리고 엄지손가락처럼 흰 하늘과 밤의 직물 속에 암의 맥관을 지닌 : 죽은 자들이 살찌는 한국의 비 속에 손풍금의 반복되는 울림, 오딧세우스 같은 그림자 한때 모두의 얼굴의 얼굴 위로 한 직선이 지나갔다 이제 그것은 우리의 꿈 없는 잠 속으로 석탄색으로 구부러져 들어간다 이 세상의 잠 속으로, 한국의 비 속으로, 사격의 암흑이 심장의 윤곽에 실체의 강렬한 냄새에, 더욱 깊이 처박힐 때, 눈동자, 약품을 잃어버릴 때의 숨김없는 공포의 눈길 진흙 속에, 풀밭 위에, 소녀들과 나귀들 사이에 누워 있는 이들, 죽은 병사들을 위하여 더 낮은 목소리로, 불타는 나뭇잎이 불 속에서 탄식하는 것처럼 아주 작게 나는 탄식한다 불 타고 있는 이 거대한 도화선, 이 緯度를 위하여, 야간보초들의 재가 된 이름없는 열매를 손에 들고 침묵 속으로 내민다 그 침묵으로부터 나는 달아난다 한때 그대들을 유혹했던 여자들은 편안히 주저앉고 그대들은 다시 한 번 눈썹을 찡긋 움직인다 가상의 고향! 그대들의 죔쇠는 더위에 또는 한국의 비에 알맞은 청동녹색의 열대를 고리로 채우고 그 비는 그대들을 돌보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흙만이 그대들의 이름을 아직 간직할 것이다 혹은 우리들, 아직 우리에게 남아 있는 한 움큼의 일들, 밤의 논쟁을 지닌 채, 우리가 비겁하게 잠들려고 누울 때 그대들을 뒤좇던 독초의 맛을 지닌 그대들의 입술이 움직이는 것을 우리는 본다 우리의 꿈 없는 잠에 의해 끝없이 작아지는, 우리의 꿈 없는 잠 속에 화석이 되는, 그대들 삶의 쓰디쓴 맛 평화를 위한 시 전쟁은 계속되고 있다 행복, 가느다란 성냥은 벌써 너의 두 눈 속에서 꺼져간다 포옹은 더욱 짧아지고 더욱 깊어진다 그리고 우리들의 호흡-이중의 밤의 소리-은 바닥에 흘린 술의 얼룩처럼 벌써 지워진다 너의 뺨 위에 오랫동안 새벽의 색바랜 그림자가 번민하는 운하 위에 걸린 적막한 달처럼 영원한 이별이 어려 있다 거듭 반복되는 이 어깨의 움츠림, 이 기다림 그리고 잠든 사람들 위로 일어나, 눈물을 씻는 바람에 귀 기울임, 애무의 바람 그리고 너, 결별의 바람, 결별이 침묵을 파묻기 전에 그 속에 옷처럼 주름 잡히는 목소리들, 종말없는 이별, 다시 한 번 신호등, 그리고 암흑, 흔들리는 촛불 아래 무기의 둔탁한 번득임 칼을 들고 하는 대화, 외마디 소리와 죽음의 냄새로 가득찬 막다른 길 위에서 백병전 장면이 서툴게 연출된다 죽음은 모든 사람에게 다르게 마련된다 불타는 여름 모기떼 속에, 이집트의 메뚜기떼, 좁은 선실에서 질식하거나, 제트기 폭음 아래 산화하거나 전쟁은 계속된다 나는 아직 한 순가, 너의 눈을, 피안에서 파괴되기 전에 망막 위에 가지고 있다 무상의 무게 앞에 그리고 준비하지 않은 죽음의 갑작스러운 뭐게 아래, 알 수 없는 하늘의 유령 같은 공포 아래, 죽음에서 소생시킴 앞에 이제는 아무 쓸모 없는 진정의 가벼운 그림들 천사의 그림자가 낯선 사람처럼 날아오르고 다시 가라앉았다 곧 허물어지는 환영 전쟁은 계속된다 -전쟁을 나는 느낀다 붉은 풀잎의 향기와 여자의 머리카락이 나부끼던 행복한 시절의 꿈, 그 꿈의 고요 속에서 숨쉴 때마다 움직이는 셔츠 아래 가슴의 마른 털처럼 그리고 나는 이 밤을 전쟁과 함께 보낸다 밤은 비수를 들고 일하고 내 핏속에 마녀를, 향락과 속죄를 쑤셔 넣는다 나는 떠도는 자들에게 손짓한다 벌써 영운으로 감싸인 눈이 패인, 느린 유령들에게 내게 덤벼 들라고 나는 그들에게 신호를 한다 그러나 그들은 망설인다 그들은 물러선다 그들은 내게 시간을 준다 나는 다시 한 번 목소리를 높인다 그것은 작은 속삭임이 되리라 어둠을 벗어나 겨우 새너아가는 바스락거림과도 같은 한 마디, 상어의 아가리에서 희미하게 흔들리는 희망, 평화, 방어하지 못하는 쓸모없는 풀잎, 환한 얼굴들에 떠오르는 아름다운 기쁨, 삶에 두텁게 짜여지는 아름다움의 직물, 낱말들 문 뒤에서, 창 밖으로, 그리고 벽을 향하여 말하여지는 지어낸 말들의 소박함은 오랜 빛으로 석회로 된다 하늘의 수수께끼에서 잘라낸 돌 속의 혈관에서 잘려 나온 둘 또는 세 음절로 된 낱말들의 사실성 : 살갗 밑에 번개를 지닌 수염 속에 바람을 감춘 낯선 얼굴들을 속삭이는 한 음으로 해독한다 그러나 이름들은 다만 매미나 꿀벌의 윙윙거림으로만 귀 속에 남아 있다가 다시 침묵으로 돌아간다 모음들- 공기 중의 보이지 않는 보잘것없는 벌레들, 재가 되어 떨어져 모과의 향기로 남는다 연가 1. 나는 어둠 속에서 너를 볼 수 있다 나는 어둠 속에서 너를 볼 수 있다 녹색의 굵은 호두를 검은색으로 불들이는 밤에 껍질을 벗긴 듯 말간 풍경 속에 물고기와 나뭇잎의 향기나는 풍경 속에 나는 어둠 속에서 너를 볼 수 있다 푸른 우유 속의 두 개의 머루 같은 너의 눈이 성냥불빛 속에 비찬다 느릅나무 그림자 속의 둥근 달은 부르럽게 비추이지 않는다 달은 낡고, 닳았고, 바람에 부숴져 모래시계처럼 우울하게 흘러내린다 나는 어둠 속에서 너를 볼 수 있다 그리고 나는 침묵의 철자들을 나열해 본다 바람 없는 추위 속에 매운 상치냄새를, 너의 입을, 그리고 아이스크림 한 조각처럼 녹아드는 새벽 여명 속에 사실적으로 되어가는 밤을 철자로 읽어 본다 나는 어둠 속에서 너를 볼 수 있다 2. 너는 가버리고.... 그리고 나는 방의 벽들을 사랑하게 되었다 벽 위에 너의 소년기의 얼굴을 그려 놓았기에, -엘제 라스카 쉴러 너는 갔다 너는 언제나 가버릴 것이다 날이 잿빛 비둘기들을 가슴에 안고 새벽 여명이 그 넓은 천을 우리 위에 펼칠 때 머리칼을 물들인 밤이 온다 밤은 복숭아씨의 냄새가 난다 달이 박하 향내나는 밭 그루터기에 서 있다 뱀장어가 자라고 있는 강 위에 이슬이 떨어진다 너는 갔다 엔찌안의 피리들의 푸른색은 검은색으로 변했다 뒤에 남은 것은 방과 모직치마 위의 코르드자켓의 푸른색, 호기심 어린 모기 같았던, 지금은 없는 눈길, 불안과 청동의 목으로 벽지를 바른 벽들 너는 갔다 그리고 나는 이 방의 벽들을 사랑한다 너의 어린아이 적의 얼굴로 칠해 놓은.... 3 왼쪽으로 누워도 오른쪽으로 누워도 마찬가지다 멜론을 토막토막 자르거나 컵 속의 물을 빛나게 하거나, 그 뒤에 흔들리는 공기처럼 하찮은 촛불의 아아함 네가 없는 밤에 오후에 창문 앞에 공작이, 그늘진 꽃다발처럼 내려 앉았다 여섯 시의 햇빛 속에 빛나는 머루 한 접시를 놓고 너는 숟가락을 들고 있었다 이제 나는 어둠을 견딘다 단단한 검은 먹으로 그려진 입안의 눈물의 맛과 꽃속의 매서운 바람을 지닌 네가 만들지 않은, 이 밤을 어둠으로 갈라진 기와 뒤에 매미는 조용해지고 나는 식탁 앞에서 고독의 향내를 맛보아야만 한다 침묵과 침묵 사이 네가 없는 밤에 왼쪽으로 눕든 오른쪽으로 눕든 마찬가지다 적막의 포옹 속에 팔목시계가 가볍게 시간을 재고 담배의 물부리가 재로 변하고.... 방금 전까지 내가 살고 있던 피안을 손가락으로 스쳐 본다 붉은 목도리도 갈색 구도도 없는 네가 없는 밤에 별빛 아래서 나는 너의 숨소리를 듣는다 4 너를 위해 나는 낮과 밤을 벽지 위에 모았다 옛날 그림들에 있는 것 같은 거리가 있는 풍경, 그 풍경 안에는 두 개의 오리나무 사이로 하늘이 졸졸 흐르고 붉은 열매의 향기가 난다 도시의 거리에서 나는 고요를 들었다 너를 위해 생각해낸 그 고요 속에 수풀 속에서 풀잎이 사각사각 소리내고 옥수수알이 터지고 시간의 돌이 오래된 샘물 속에 가라앉는다 나는 너를 위해 시간을 추방했다 쐐기풀 더미를 팔에 안은 마녀, 포플라 나무 뒤의 음흉한 얼굴, 시간은 전설의 오페라처럼 담 위의 비행기 그림자처럼 사라져갔다 너를 위해 나는 현재를 만들어냈다 순간의 심연 위로 어른거리는 정확한 알콜처럼 공기 속에미역 감는 살갗의 현재 도토리색의 목덜미의 현재, 육체의 단순한 선들의 현재 그리고 낮과 밤이 벽지 위에서 숨쉰다.... J. S를 위한 시 자정이 지난 첫시간에 12월의 기차역, 추위 속에 드러나는 너의 모습 엷은 색 외투, 머리 위에 덮인 수건 작별로 빛나는 얼굴 작별의 순간 나는 너를 다시 한번 만들어낸다 겨울의 차가운 공기 속에 부드러움과 행복에 대한 갈망으로 어둡고 사랑으로 고요한 목소리 나는 너를 다시 한번 만들어 본다 이제, 외투 깃을 올리고 장거리 열차의 창문을 열고 손을 흔드는, 다른 남자인 나와 함께 가기 위하여 너는 뒤에 남는다 몰아치는 잿빛 바람에 밀리며 포옹과 입맞춤과 너의 살갗의 냄새와 함께 뒤에 남는다 눈오는 밤에 검은색과 흰색의 체이스판이 너의 얼굴 위에 놓여 있다 그리고 나는 안다 네게 있는 그 어느 것도 내게 마련된 것이 아님을 마지막 밤 밤은 검고 희리라... -제드라 드 네르발 기다리지 마라! 밤은 검고 희리니, 눈썹을 그리려고 불에 그을린 코르크보다 더 검고, 열대의 천사들이 그 주위를 날던 일 드 프랑스에서 죽은 비르지니의 죽음보다 더 희리라 가로등 아래 비틀거리는 발자국으로 가득찬, 현관에 검은 입술로 가득찬, 부드럽게 공기에 의해 반복되는 입술 위에서 녹는 눈의 입술로 가득찬, 맞지 않는, 헛된 말로 가득찬, 검고 흰 밤 기다리지 마라 밤은 어릴 때 깨물던 분필 같고, 밤은 양초심지처럼 첫 번재 소각임에 흔들린다 검고 흰, 그리고 그 뒤의 너의 얼굴, 유리창에 기대어 눌린, 눈물의 작은 비, 자기를 떠나가는 남자아게 가슴을 보여주는 여자의 모습처럼 기다리지 마라! 바람 속에 늘어뜨린 머리칼과, 절망의 살균된 흰색과, 절대고요의 역청색으로 밤은 완전하리니 검고 흰... 그리고 별들이 총총히 비추어 주는 덤불처럼, 생각도 없는, 기억도 없는, 가벼운 한묶음인 나는 그 밤 속에 있다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 마지막 밤! 기하학의 장소 기하학의 장소 : 한 그루씩 서 있는 포플라, 플라타너스, 그리고 그 뒤의 공기, 경쾌한 카누를 타고 쏴아 소리나는 고요 속을 지나갈 수도 있을 거품으로 된 하늘 속에 고독한 自足, 밝고 순수한 선들 모든 것은 쉽게 파악할 수 있고 공식 같다 강물의 만곡, 나뭇잎 속에 도망가는 새들의 윤곽, 몽롱한 더위의 흔적, 입안 가득한 바람과 항구의 돛단배처럼 부드럽게 흔들리는 육체의 그림자를 꿰뚫는 푸른 번개에 대한 느낌 병사의 시 장군들은 승리하고 병사들은 전사한다 -일본의 격언 1 그대들은 물론 다만 연기와 물뿐이다, 사람들이 그대들은 너무 오랫동안 그 낡은 죽ㅇ므을 취급핟록 한다면 그리고 어제, 오늘, 내일, 죽음은 그대들을 너무 좋아했다 어깨 위의 경금속, 눈은 언제나 벌써 바로 다음 사람에게 조준되어 있고 합설물질로 된 팔과 목 의치 그리고 그대들과 꼭같은 그대들이 막사 밖으로 검은 천을 흔들 때 연기와 물처럼 기묘하게 달아나는 존재 2 이럴 수도 있다 : 권총이나 무기들을 분해할 수 있다 전쟁와 곂와 또는 가슴 위의 증명사진처럼 그대들은 아주 오래 전부터 천천히 그대들 앞에서 먼지가 되어 떨어지는 중립적 공기의 동작을 연습했다 방어라는 오래 전부터의 상상! 칼과 장미는 그대들의 손가락 사이로 미끄러져 나가 그대들보다 오래 살아 남을 것이다 정치적 1 안전 : 종이 위에 엄지손가락 지문, 그것은 맞는 말이고 모든 경찰서에서도 도움이 되리라! 벽을 쌓아 이랑을 고르면 밭은 불모지가 된다 신들의 무릎은 중요하지 않다 우연의 물리적 구조 정당의 강령은 그에 비해 이런 결백과 언제나 무관하다 누가 온통 나뭇잎으로 만들어진 우아한 속박, 씨르체의 머리카락에 대하여 이야기하는가? 꿈을 읽기보다 신분증명서 읽기가 더 쉬운 일 정치적 : 한때 소홀하게 다른 땅과 분리된 땅 밖으로 손 하나가 자라나온다 정치적 2 담요를 접고 램프를 꺼라 어둠의 거짓 감각마비는 잠과 같이 책임이 없다 담요를 접고 램프를 꺼라 밤은 호박처럼 모기를 숨기고 있다 너의 기억! 너의 양심! 담요를 접고 램프를 꺼라 국가는 철면피한 손님 모든 방어의 손짓에도 불구하고 그는 찾아온다 담요를 접고 램프를 꺼라 기록없는 시대는 여전히 시작되지도 않았다 담요를 접고 램프를 꺼라 벌써 발자국 소리가 너의 문에 다가온다 너는 자신을 증명할 수 있을까? 담요를 접고 램프를 꺼라 너의 시간은 아무튼 올테니 幻影 그녀의 얼굴은 강물의 은화처럼 가볍다 그것은 매우 멀리 있다 입술은 굳게 다물고 거리 위에 누워 있는 허공에 그녀의 얼굴을 보려면 그는 의자 위에 올라가야 한다 순간의 빛나는 천에 그는 사다리를 기대어 놓는다 그녀의 얼굴을 위하여 그는 검은 튤립을 한 송이 꺾었다 그러나 그가 모든 것을 어둡게 하는 검은 새에게로 올라갈 때, 꽃잎은 그의 손에서 떨어진다 떨어지면서 그는 얼굴 없는, 소리 없는 유령, 그가 죽은 후의 시간을 본다 인식 그는 한 쪽으로 자신이 움직이고 있는 십오 분을 힐끗 바라보았다 그리고 자신에게 향한 모든 눈초리를 즐긴다 그것은 얼마동안 잘 되어간다 그러나 그는 그 눈들이 자신을 꿰뚫기 시작하는 것을 알아챘다 모르타르 밖으로 나오는 시선들, 줄기가 긴 꽃잎 밖으로 나오는 시선들, 그리고 말없는 시간의 반쯤 감은 속눈썹 뒤의 시선들, 그는 그 시선들로부터 더 이상 자신을 숨길 수 없음을 안다 그가 갑자기 허공의 검은 자리들, 부드러운 변화를 인식할 때까지 그때 그는 눈 멀기 시작했다 매일 아침 아침은 신을 믿는다 푸른 물고기가 아침의 눈앞에서 흔들리고, 팔과 관절들의 그림자는 힘차다 노래 부르기 시작하는 비둘기를 고요가 덮친다 여자들은 밤 동안 혼자 누워 있던 침대를 정돈한다 어둠 속에서 타오르던 성냥개비는 버려진다 공기의 목이 빛난다 한순간 동안 모두 손을 그 위에 가만히 내려놓고 있고 싶어한다 거리에서 사람들은 그들의 신체에 나이가 들었음을 이야기한다 창문에서 한순간 누군가 창문 밖으로 빛을 쏟아낸다 공기의 장미꽃들이 피어나고 거리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이 눈을 위로 올린다 비둘기들이 그 빛의 모이를 주워먹는다 이 빛으로 소녀들은 아름다워지고 남자들은 다정해진다 그러나 그것을 그들에게 말하기도 전에 창문은 누군가에 의해 도로 닫혔다 목소리 그는 그녀의 목소리를 따라갔다 저녁이 물처럼 솟아올라 그의 두 눈에 넘쳐흘렀다 그러나 그는 그녀의 목소리를 따라갔다 밤은 방울새의 깃털처럼 가벼웠다 그는 밤을 그의 손바닥 위에 가늠하며 그녀의 목소리를 따라갔다 그녀가 죽은 깃털 아래 묻혀 있다는 것을 마침내 그가 알았을 때 그의 손가락들은 다시 한 번 그녀와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녀에게 지저귀는 새소리의 메아리를 들려 주었다 검은 숲 위로 얼굴처럼 사라지는 그 오랜 추억을 위하여 천 년 너의 얼굴 옆에서 나의 얼굴은 천 살이 된다 너의 두 눈을 위하여 내가 샀던 달리아는 천 년 전의 것이다 그렇게 오랫동안 기다려야 한다 자신의 입술을 다물고 다른 사람이 죽어가는 것을 보려면 너의 목덜미에 관해서라면 정감은 그렇게도 오래된 것이다 너의 목이 미역감는 푸른 물기 어린 대기 밤에 우리의 손은 나란히 누워 천 년 동안 잠잔다 누군가, 한 때 너의 이름이었던, 너의 이름을 부를 때까지, 그기고 그것이 나와 함께 늙어가려 하기 전에..... 초조 자신의 참을성을 충분히 오랫동안 시험해 보았다고 생각했을 때 그는 상상력의 도움으로 자기의 인생에 몇 가지 변화를 계획하고자 했다 그는 길가에 숨어 지나가는 사람들을 살펴보고 그들의 모습을 매우 도움이 되는 허공에다 그려보났다 이런 방법으로 해서 그는 한 소녀의 목덜미를, 그리고 대략 나이가 비슷한 한 여자의 생각지도 못했던 웃음을 소유하게 되었다 이 소유물들로 그는 아직 좀더 견딜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그는 다시 변화에 대한 충동이 일어나 다른 생각들을 품게 되었다 요새 그는 애인을 하나 만들어냈는데 그녀의 검은 머리카락이 그의 시간 사이로 흘러 내리고 있다 그러나 그녀는 언제나 슬퍼한다 그의 초조함이 다시 길거리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엿보고 싶어하는 것을 너무 오랫동안 -프리츠 우징거에게 너무 오랜 동안, 나의 오른손은 의무를 다해 왔다 며칠 전 나는 내 오른손을 머리를 뒤로 묶은 모르는 여자의 채소와 물고기를 담는 시장바구니에 넣어 주었다 나의 왼손은 내가 잠잘 때 내 얼굴 위에서 너무 오랜 동안 쉬고 있었다 어린아이의 풍선에 묶여 이제는 풍선 속의 바람이 나의 왼손을 잡고 있다 그리고 또 많은 다른 것들도 저녁에 옷을 벗듯이 나는 벗어버릴 것이다 마지막으로 모든 것을 주어버리고 났을 때 남는 그것을 위한 공기의 아늑함 전위선 끝에서 그를 찾으러 나는 이성을 보냈다 그가 전위선 끝에 서 있기 때문이었다 나이팅게일들을 그가 있는 곳으로 날려보냈다 그리고 그를 예감할 수 있는 쪽의 창문을 열어 놓았다 뒤쫓는 불빛과 함께 찾아나선 둥근 물 속에 나는 그의 이름을 적었다 나는 그의 길 앞에 여자의 조각들을 세워 놓고 그를 유혹한다 이따금 밤에 나는 그의 목소리를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그의 목소리를 반복하게 한다 그러나 그는 전위선 끝에 서 있는다 그의 고집 센 뮤즈는 그녀의 검은 머리카락을 그의 눈 위에 흘러내리게 했다 나는 그를 포기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단지 그녀가 그에게 내리는 즉결재판만을 생각하므로 그는 언제 죽을지 모른다.... 벽의 신화 여덟 살짜리 아이에 의해 또는 검은 시간의 손에 의해 그려진 벽의 신화 우리는 지나쳐 가며 우리들의 생각에게 인사한다 우리의 여자들이 구운 벽돌 속에 나타난다 벽 위의 우리들의 꿈은 우리보다 더 오래되었다 석회의 죽어가는 흰 빛은 표면에 우리의 꿈을 띄고 있다 우리는 지나간다 그리고 대개는 눈을 돌린다 등 뒤에서 벽에는 벌써 달과 개들에 의해 문신이 그려지고 있는데 시간은 변한다 읻제는 정든 기념비에 푸른색을 칠해 주는 이는 아무도 없다 금발머리를 쓰다듬던 손길도 밀짚모자도 잊혀졌다 지쳐 우는 새들을 어깨 위에 앉히고 공원을 거닐던 아이들은 이제 다 자라났다 시간은 변했다 시간은 이제 어린 손으로 어루만질 수 없다 가로등은 새 전구로 바뀌고 테니스 공은 허공에서 되돌아오지 않았다 노란 수영복은 나비처럼 죽어가고 그 모든 편지봉투들은 부드러운 먼지가 되어 흩어졌다 다만 이제 거리는 주머니 속에 차표를 지닌 이방인들로 가득 차 있다 산책 플라타너스 사이에 가구들을 밀어놓았다 산책하는 사람들이 앉을 수 있도록 의자 하나가 벌써 한 풍경을 이룬다 길가에는 석고의 흉상들이 오전의 퇴락을 지켜보고 있다 그래도 산책은 한동안 계속된다 모자들과, 커튼 뒤에서 엿보는 눈동자들 곧 피아니스트는 침묵할 것이다 그의 음악은 아스팔트 위에 푸른 동작으로 나타나는 한낮의 더위를 이기지 못한다 빛의 천사의 풍경 빛의 천사의 풍경 속에 나무마다 달이 자란다 사람들은 서로의 입에 손을 대고 칼에 찔려 죽은 어린 양의 눈을 감긴다 피흘림 없는 사랑은 푸른 날씨 속에 육체를 일광욕 시킨다 흑인소녀들은 그들의 검은색을 구름에게 선물한다 물고기들은 그들의 영혼을 강물에게 준다 강물은  빛나는 육체를 찾아 땅으로 올라간다 비오기 전 아스팔트 위에 분필로 그어놓은 선들이 비를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낮은 아직도 빛나는 어깨를 드러내고 있다 시간은 초록빛으로 이교도처럼 흘러간다 티불루스의 풀피치아가 몇 분 동안 단풍나무 길에 나타나고 여름날의 시간이 매미처럼 뜨거운 돌 위에 앉아 있다 팔 하나가 허공에 나타난다 그러자 공기는 구름으로 색이 변한다 첫 번째 물방울의 소리가 사방에서 나뭇잎의 기억들을 질식시킨다 오늘은 오늘 나는 너를 조용히 잠자러 가게 할 수 있다 나는 몇몇 남자들과 잠시 길거리에서 달을 바라보리라 우리의 눈 앞에서 달은 천천히 변하리라, 회오리바람이 다가오고 있으니 멀리서 첫 번째 죽은 자들을 차지하려고 싸우는 개들의 소리를 듣지 않을 수 있다면! 개들의 짖은 소리는 벌써 목 쉰 금속성을 띄고, 그것은 우리의 목소리에도 있을 것이다 내일,  불에 탄 얼굴들이 창문 밖에 내걸리고 물의 푸른 음절이 붉은 알파벳으로 부서져 떨어질 때 바다에서 선풍기는 절대로 끄면 안 되었다 무더운 시간 동안 배의 고양이는 빈 탄산수 물병 사이에서 잠잔다 모든 해안은 연기 속에 사라져 버렸다 하늘의 푸른 막이 늘어난다 그것은 잠옷을 입은 사람들이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기 전에 찢어질 것이다 약쑥을 바른 불에 탄 상처는 오늘도 낫지 않았다 우리보다 먼저 배를 떠난 사람들이 세워놓은 선장, 어젯밤에도 그의 얼굴이 나침반에 반사되었다 아무도 통지해 주지 않는 다가오는 태풍에 나침반의 바늘은 이미 무뎌졌다 황혼 황혼은 여성적인 존재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이 아이들에게 일찍이 그것을 두려워하도록 가르친다 황혼이 어깨를 드러내고 나타날 때 다른 이들은 손가락으로 그것을 가리킨다 물고기들이 황혼을 향해 강 밖으로 뛰어오른고 함정에 빠진 새들은 황혼이 다가올 때 다시 한 번 죽음으로부터 벗어나려고 몸부림친다 첫 번째 불빛이 황혼의 가슴 사이로 비추인다 황혼의 입은 오후의 바람을 잠재우지만 상점의 여점원들은 황혼의 눈 앞에서 길을 잃는다 검은 나뭇잎으로 뒤덮인 곳에서 둘은 밤을 기다린다 정오의 싸움 하늘에서 두 가시가 싸우고 있다 그들의 휘어진 칼이 푸르름 속에 엇갈린다 그 아래 풍경은 포플라 나무와 싸움을 지켜보고 있다 황금빛 수풀 속에서 내다보는 눈동자들 하나가 쓰러지기를 모두들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싸움은 계속된다 한 시의 빛이 두 시의 빛에 의해 꽃피는 숲속으로 밀려날 때까지 뜻밖에도 병사들과 말들은 햇빛 앞에 엎드린 그늘로 사라진다 정오는 지나갔다 꽃의 승리 그때 아이들에게 그들의 장난감이 싫증났다는 것이 떠올랐다 그들은 야생 수선화 다발을 잡아뽑았다 고양이들이 낯선 식물을 쫓아간다 순간들은 서로 구별된다 붉은 제라늄과 흰 제라늄이 구별되듯이 삶은 자기 확신을 잃어버렸다 그것은 개의 앞발의 상냥함과 같았다 브라우스 밑으로 기어가는 나뭇잎 속에 꽃은 이겼다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꽃다발을 또는 고목의 그림자를 선물했다 그리고 아름다움은 긴 속눈썹 뒤로 사라져 갔다 꽃을 바라보는 것은 가슴과 허리를 소용없게 만들었다 죽은 계절 너무도 고요하기 때문에 조상의 사진이 벽에서 떨어질 것 같았다 쪼개진 배 몇 개와 보룔레 술병이 정물 속에 합류했다 잉어와 죽어가는 파리의 시간이었다 오후는 무거운 눈까풀 아래에서 깜박였다 그러나 어제 여기에서 선원들의 명령을 주고받던 아이들의 돛단배가 떠 있는 연못가에서 심장의 소리를 한동안 들을 수 있었다 엊그제는 어쨌든 모든 것이 달랐었다 죽은 계절은 아직 엷은 풀잎의 냄새 속에 살아 있었다 이제는 바닥에 깨어진 그림들이 누군가 벽 밖으로 걸어나와 그 그림들을 웃으며 주워 올리기를 기다리고 있다 잠을 깨어나며 장미, 라는 말을 처음 하는가? 이전에는 나는 맞지 않는 이름을 불렀었다 내 손가락을 에워싸고 있는 시간은 무게가 없다 만일 내가 그것을 느낀다면 이미 늦은 것이리라 그러나 지금 날은 눈을 치켜뜨고 있다 밤은 눈까풀 뒤로 물러난다 잠 내가 잠자는 동안 한 아이가 손에 들고 있는 장난감이 녹슬고 호흡과 호흡 사이에서 사랑이 색깔을 바꾼다 문설주의 칼은 지나가는 사람에 의해 내 가슴 속에 꽂히기를 헛되이 기다린다 살인자들도 지금 모자 아래에서 꿈꾸고 있다 고요한 시간 잠자는 시간 눈에 띄지 않으려는 자들의 맥박소리가 들린다 말하여지지 않은 말들의 지혜가 늘어난다 이제 꽃들이 조심스럽게 피어난다 놀라 바라보는 눈들이 없으므로 숨어 기다리는 금붕어 자신이 관찰되고 있다고 생각한 금붕어는 다른 어항을 찾았다 거기에서 금붕어는 어제 죽은 정원사의 푸른 그늘을 좀더 잘 엿볼 수 있었다 죽은 자는 서서히, 생전에 그가 바라보던 나무들로 변하고 있었다 그리고 금붕어는 정원사의 손의 무덤 밖으로 피어나기 시작하는 꽃들을 부드러운 입술로 잡아당길 수 있는 그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방안의 바람 웃음소리와 문 닫히는 소리 속에 그는 방 안으로 들어온다 몸을 구부리지도 않고 그는 램프를 쓰러뜨린다 그리고 적의에 찬 형제들의 눈 속을 들여다본다 성냥불빛 속에서 그는 저녁인사도 하지 않는다 그는 조상들의 머리를 부서 버린다 그들의 흉상은 제비꽃다발과 함께 쓰레기 속에 던져진다 담배를 피우는 동안 그는 누군가의 어깨를 타고 벽을 따라 돌아다닌다 어둠 속에서 그를 붙드는 사람은 다음 날 아침 깨어나면 낯선 바람의 장미가 머리에 꽂혀 있을 것이다 역사 남자들이 광장으로 깃발을 들고 갔다 그때 수풀 속에서 반수신들이 뛰어나와 깃발을 밟아버렸다 그러면 역사는 시작될 수 있었다 우울한 국가들이 거리 모퉁이에 부서져 떨어졌다 연설가들은 불독을 준비해 놓았다 그리고 젊은 여자들은 용감한 자들을 위해 단장을 했다 그 신화 속의 바눗신들은 이미 오래 전에 사라져 버렸는데도 끊임없이 허공에서 목소리들이 다투었다 결국 남는 것은 목 위에 놓이는 손 배척지 이제 방금도 젖은 판자지붕으로부터 물이 흘러내렸다 말탄 목동의 무리들이 빗속에 모자를 꼭 잡고 모퉁이를 돌아갔다 그들 뒤에 구름먼지조차 일지 않았다 여기에서는 아직도 병든 짐승의 냄새가 난다 총소리의 메아리가 마굿간 벽에 환상처럼 잠든다 그러나 죽음 속에서는 어느 목소리도 변하지 않는다 마지막 수탉은  오래 전에 도살되었다 그의 머리 없는 그림자가 아직도 가끔 비틀거리며 맴을 돈다 호숫가에서 1 차가운 얼굴의 돌들을 낚아올리러 호수로 갈까 그리고 도망가는 사람들의 발자국을 향해 그 돌들을 던질까 호숫가는 가슴 속의 낚시바늘을 기억하기에 또는 죽은 송어들을 위해 꽃을 뿌리기에 좋지 않은가? 언덕에서 깜박이는 익사한 사람들의 눈을 찾으러 가자 그리고 푸른 물을 조금 이제 곧 물가에서 잠이 들 저녁에게 들고 가자 2 여기에서는 목마른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니? 난파된 배의 그림자 아래 누우면 혀는 다정한 광물질의 맛으로 젖어 있다 미풍이 살그머니 일어나 속삭일 입도 없는 고요의 흉상을 두 손으로 들고 온다 너희들을 닮은 모습이 머리도 없는 밀물에 떠내려갈 때까지 그렇게 오래도록 너희들은 쉬고 있다 3 우리들의 가슴 쉬에 그려 놓았던 닻을 씻어 버렸다 파도의 가슴이 목 위에까지 올라오는 적은 없으므로 우리는 웃었다 우리는 이제는 메기들의 선장이 아니다 단물이 한참 동안 발바닥에 남아 있었다 그리고 밤이 검은 새의 몸을 한 세이레네스처럼 왔다 로빈슨 1 몇 번이고 또 다시 나는 한 척의 배를 향하여 손을 뻗는다 맨손으로 배의 돛을 잡으려고 해 본다 처음에 나는 수평선 위로 떠오르는 배들을 모두 잡았었다 그렇게 나는 송어도 잡는다 그러나 계절풍은 나의 손가락을 눈여겨 보았다가 그것들을 손가락 사이로 미끄러져 달아나게 했다 혹은 노와 나침반을  부러뜨렸다 배들이란 부드럽게 다루어야 한다 그러므로 나는 그들을 이름으로 불러 주었다 그러면 그것들은 언제나 마치 나의 이름처럼 울렸다 이제 나는 다만 복종할 줄 모르는 몇 마디 낱말들과 어울려 살고 있을 뿐이다 2 나는 셈하기를 단념했다 차라리 손가락을 짠 바닷물 속에 하나씩 담그어 볼 뿐 벌레들이나 담배 잎사귀들은 지난 날 내가 허비했던 시간을 알지 못한다 나의 마지막 이웃이던 그 피리 불던 사람은 (언젠가 민요를 익살맞게 불러보기도 했지만) 바다에서 죽었다 내가 그 아래로 발을 뻗고 앉아 있는 책상 위로 가끔 한 줌의 햇빛이 비추인다 나는 이제 그 무엇에 대한 그리움도 가질 필요가 없다 3 어느 한 곳에서 의자 위에 아주 오랫동안 앉아 몸 속에 비가 오는지 또는 간 속에 아직 전갈이 움직이고 있는지 귀를 기울이는 이 습관 번개불을 세어보고 남아 있는 성냥개비도 모두 세어 놓았다 지칠 때까지 그리고 마지막 돛대 위의 깃발을 바다 속에 가라앉힐 때까지 일요일 피도 그을음도 없는 시간 일요일은 언제나 마른 꽃의 무덤으로부터 온다 일요일은 손 위에 자신의 과거를 들고 산책자들에게 브라보 라고 외친다 집안에는 목이 잘린 꽃들이 남아 있었다 사악한 눈길을 가진 시간! 파리와 함께 밀크 커피 속으로 빠지는 눈길 노란색의 커다란 문이 갑자기 열린다 천천히 배가 내리기 시작한다 죽어 잠들어 누워 있는 모두 위에 지나가는 여인에게 여자들의 거리로 초원은 너에게 라벤다를 들고 온다 강물은 거울을 바람에 기대어 세워 놓는다 그러나 너는 눈까풀을 꼭 감고 있다 그리고 실망한 지도는 네가 잊어버린 하늘 아래에 물고기와 포플라 나무를 펼친다 한 비행사가 네게 손을 흔든다 그의 무덤 밖으로 낡은 병의 밑바닥으로부터 포르투갈에서 수도사의 광야 수도사들의 죽음은 나무껍질을 뚫고 들어갔다 바람은 바다의 복수 잘 꾸며진 공기가 되어 바람은 잠자는 미모사나무 위에 앉는다 우울은 기나긴 사연을 가지고 있다 그 눈 위에 노래의 눈물이 솟는다 한 사랑의 시작 우선 아트로핀에 의해 커진 것 같은 눈동자 누가 푸른 샘물에 빠지는가? 누가 하늘을 덮는가? 누가 다른 손을 씻지 않는 손에 대해 말하는가? 그 다음 이와 혀의 근접 진실을 말하기는 쉽다 그 사이에 뻐꾹 하고 우는 새는 없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다가오는 것들 누가 꿈을 펼치는가? 누가 작은 글씨로 밤은 검은 어깨를 가졌다 라고 쓰는가? 이렇게 깊이 잠들었던 것이 언제였던가 차츰 사람들은 다시 배운다 샘물이 마른다는 것을 추위 얼어붙은 물고기 같은 추위 얼어붙은 바람 속에 얼어붙은 눈물 우군가의 어깨 위에 유리 한 조각 한 조각의 샘물 또는 실개천의 굽이 허공을 나르는 숯 소리없는 까마귀 유리 세공인들의 외침만이 거리에 남는다 하얀 하얀. 찢어진 식탁보. 누군가 그것을 흔든다 동풍의 하얀 손 누군가 말한다, 눈이 온다고 차츰 찢어진 공기가 추위에 눈을 뜨게 한다 눈은 묘사하기에 아름답다 시간은 하얀 편지 만큼 길어지고 녹을 때까지 서리와 사과 냄새가 난다 도메니코 스카를라티를 위한 비문 허공의 모자는 자기의 이름을 찾는 새, 또는 피아노 없이 지상에 남겨진 모든 이들에 대한 가벼운 목례 모자- 손가락이 슬퍼 움직이기를 잊었을 때 소나타를 거두어 들이던 하늘에 대한 기별 모자- 그것은 밝은 깃털 밖으로 잠시 지저귄다 그리고 너의 빛 속으로 천천히 사라진다 무엇인가 끝나고 무릎 위에 동화책을 하나 올려 놓아 물 속을 가르고 달려가는 것 말고 무엇이 있지? 무덤에서 무덤으로 가는 짧은 여로 지난날은 마치 풍경 같아 그 속에 곧 사라져가는 여인들 이제는 아무도 보려 하지 않는 그림책을 뒤적일 때 종말은 다가온다 유년시절 병 속의 촛불 유년시절 어둠의 심장이 목탄처럼 타고 있다 강목에서는 밤이 새도록 배들이 서로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꿈 하나가 천장에서 뱃머리장식처럼 나타났다 나뭇잎, 녹색의 엷은 베일 나는 배저강 위를 날아 헤매이다 뛰어오르는 회색 넙치에게 호소하던 갈매기였다 겨울에 1 신뢰할 수 있는 어둠 이제는 한 손이 다른 손을 더 쉽게 찾을 수 있는 것이 사실이다 추위의 눈 앞에서 불을 피운다 어제에 대한 기억은 내일의 이야기 단어들이 입안에서 얼어붙는다 언어는 입술 앞에서 연기처럼 죽는다 빛의 위기는 계속되고 서리는 노래하는 기계 그 음율은 멀리 들판까지 들린다 유리창 앞의 꽃에게 말해라 밖은 겨울이다 얼어붙은 강이 있는 풍경의 느낌은 관용이라고 할까 참된 삶은 흰색이고자 한다 다채로운 색깔의 어린이 놀이는 끝났다 걸어가는 동안 모든 것을 기억해 둬라 가는 길과 오는 길 사이에 눈이 내릴 것이니 거리에서 1 물구나무서기 내기를 하는 다리들이 허공에 기둥처럼 서 있다 손수건과 손으로 휘젓는 빛 속에 힘 있는 말들의 장소 시간계획 없는 사람들은 바람 속에 손가락을 내밀고 비 속에 그들의 영상을 다시 보게 되기를 기다린다 농사는 낡은 鋪道 사이의 풀처럼 죽어갔다 2 집안에서 펼쳐진 그림책 속안까지 회색, 사람들은 배를 타고 당황하여 말한다 아직도 비가 오네, 또는 나는 너무 큰 모자를 썼지 습관적으로 눈을 크게 뜨고 있다 사람들 틈에서 높은 바다에서 질식하여 죽을까 두려워하지 말아라 3 폭포의 소음 아무도 방해하지 않기 위하여 나는 발끝으로 먼지구름 속을 걸어간다 그렇게 해서 발걸음을 셀 필요도 없이 나는 멀리 간다 주먹을 쥐고 위협하는 이들은 새로 붙인 포스터의 냄새처럼 뒤에 남는다 종이 파는 사람은 벽의 찌푸린 얼굴이 바래기를  참을성 있게 기다린다 4 철자법에 맞지 않는 대로 한 지역을 말 타고, 자전거 타고 지나기 아침이 너무도 아름답기에 한 배우는 혼자 대사를 읊는다 창 밖으로 목소리와 동전들이 떨어진다 공기여, 아스팔트 위의 작은 누이여, 소음이 없는 저 높은 곳에 대한 그 많은 기억을 가지고 이리로 오라 나를 위한 풍경 1 그 속에 광물질과 형용사를 모을 것 나무 그림자들은 여러 가지로 묘사할 수 있다 한낮은 그 속에서 기하학적인 지느러미를 가진 물고기를 먹는다 나의 풍경은 바람처럼 배고프게 한다 팔이 긴 사람은 하늘을 만질 수 있으리라 지친 새들은 허공에서 잠을 잔다 습관적으로 색색가지 과일을 손에 들고 있다 기나긴 황혼의 전설 밤은 불탄다 : 쌓아 놓은 목탄 2 연기구름의 믿을 수 있는 아름다움 확신은 지평선에 메아리의 목소리를 가지고 있다 버들가지의 사분의 일 박자의 멜로디 : 일어나는 소음들은 나방이의 날갯짓처럼 사라진다 어제 유클리드가 정돈해 놓은 검은 올리브의 들판 나는 그 들판이 내 눈 앞에서 마른 빛 속에 어른거리게 한다 3 소금기어린 바닷가에 비치는 작은 배 젖은 장미으 냄새가 난다 : 죽음의 통고 푸른 들판을 가로질러 가기 : 들판의 침묵은 옮겨 놓을 수 없다 내 눈까풀 위의 풀잎 가루 나뭇잎이 떨어지는 낮의 부서질 것 같은 얼굴 조심스럽게 그 위로 몸을 굽힌다 스스로 죽어가는 장미꽃들은 지나간 날의 詩들의 향기를 지니고 있다 시간 시간, 그것은 주머니를 피로 적시는 것 열린 몸뚱이로부터 목숨이 흘러나온다 날들, 그리고 그 날들이 벌이는 사라져가는 사람들과의 고요한 거래 한 달은 그 다은 달에게 다가오는 것과는 아무 상관도 없이 모래 위에 자신의 모습을 그려 준다 아무리 좋은 날씨도 암을 변화시킬 수는 없다 정돈된 종이들을 해마다 불태운다 늙어감 1 손톱으로 햇수를  긁어낸다 선잠, 짧은 문장들로 된 꿈 환상을 덮어주던 포도주 상점에 대한 기억과 함께 검은 샹베르탱 (그의 영상이 병 속에 가라앉는다) 한 방안에서 죽어가는 알파벳과 함께 살아가기 내게서 언어를 빼앗아가는 낯선 입 그 낯선 입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참을성 있게 듣는다 2 채색된 감정처럼 변해가는 육체 지친 목소리가 허공에 실려 지나가 버린다 흩어지는 명확성 이전에 있었던 것에 대한 혼동된 견해 분명히 살았던 죽음에 대한 예는 많이 있다 언어의 덮이 놓여져 있다 나는 신중하게 그 근처에서 움직인다 3 먼지 쌓인 여행 사진들 어제 우리는 숨죽이고 그곳들을 편답했다 땀흘린 사랑의 엷은 흔적 사람들은 나의 집 안으로 격언들을 가지고 온다 그것들은 조용히 나의 보호 아래 살게 된다 쏟아지는 빛 속에 한 풍경의 전망에 대한 몇 가지 생각들 내 이마 앞에 불꺼진 촛불의 밤 4 잊혀진 불길 오랫동안 나는 몇 개의 단어를 쫓는다 단어들의 눈[雪]을 나는 입안에 모은다 단어들 속의 겨울이 커진다 하얀, 이를 수 없는 숫자를 가진 한 삶의 수학적 면 나중의 것과의 등식 고독한 이름자 혀 밑에 차갑게 남아 있다 5 눈 뒤의 램프는 다 타올라 꺼져 버리고 이것, 저것을 위해 경험은 충분하다 땅밑을 흐르는 물의 졸졸거림 귀 안에서 점점 희미해진다 낡은 회중시계에서 읽을 수 있는 지상의 시간 헤매이는 영혼은 손바닥 위에 멈춘다 눈으로 덮인 여전히 더 깊이 우리의 하얀 발자국은 잠든다 천천히 휘장이 녀려쳐진다 맥박은 손목에서 소리없이 뛴다 추위는 입앞에 서 있다 돌아보지 마라 아무도 우리 눈眼 위에 눈雪을 찾아내서는 안된다 확신하기 위하여 나는 내가 지금 있다는 것을 확신해보려고 한다 똑같은 순간에 내가 있다, 수염 없고, 입술 뒤에 창백한 잇몸과 바라보는 동안 사라지는 살갗과 머리카락이 아닌 다른 것을 너무 많이 볼까 두려워 반쯤 뜬 눈, 나는 여기 있다 나의 오른손은 호주머니 속에 넣지 못한다 나는 나의 오른손을 종이 위로 가져간다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쓰기 위하여 충분히 모든 것이 충분히 묘사되었다 어떻게 시작되었고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남은 것은 너무 많이 써서 닳아버린 풍경, 공감, 감동, 그것을 실행하는 사람에게는 너무 값비싼 조언 모든 것이 충분히 잘 알려져 있다 사람들이 종이로 잘라 벽에 붙여놓는 건전한 그림은 생기지 않는다 결점들은 특별한 장점으로 여겨진다 환상의 금이 길거리에 놓여 있다 사랑은 움켜잡을 수 있을 만큼 가까이에 있고 배경 없는 주위 모든 것을 제 때에  소유한 사람들에 의해 경계선이 표시된 지대를 사람들은 신중하게 올라간다 언제나 용감한 언제나 용감한 그 사나이는 확신에 찬 태도로 유명했는데 차츰 그는 그와 반대되는 것에서 즐거움을 찾기 시작했다 매일매일 어두워지는 것이라든가, 무도회장에서 발이 부러지는 것 따위의 불행한 일들을 허용했다 숲속에서 그는 진지한 시간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정원에서 그는 꽃을 그리워하게 되었다 그는 물질적인 것이 쌓이는 것을 경멸하고 격언대로 살았다 그는 생각에 잠긴 듯 턱을 굈다 마치 하고 물으려는 듯이 다감한 확신은 그에게서 사라졌다 그림자 1 가장 푸른 곳으로 소풍나갔던 지난 어느 날 아침의 행복감은 그렇게도 아름답고 헛되다 바깥 세상의 폐허는 천천히 무너지며 한쪽 구석에서 휘적이던 장난감들을 땅 속에 파묻는다 기나긴 그림자가 나의 두 손 위에 떨어진다 2 일찍이 사람들은 가장 좋은 옷을 입었다 영원의 얼굴은 선명하게 드러났고 지체없는 일, 소시민의 집에 열려진 창문으로 위안과 환상처럼 바람이 방을 스쳐 지나갔다 다가온 그것을 위하여 사람들은 급히 표현을 찾았다 그림자의 영역은 제한되어 있었다 3 이상한 사람처럼 낮의 햇빛에서 유리된 곳에 서 있기 그리고 정해진 기간을 괴로워하지 않고 그 어느 것에도 의무를지지 않기 육체란... 이제 진지한 문제가 아니다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가를 자신의 이야기로 바라볼 것 공포도 회귀도 없이 진실을 지닌 평화 속에 가고 오는 것은 집안에서만 마침내 입을 열고 눕게 될 시간의 흐름 1 흑판 위의 분필로 끄적거려 놓은 이름들 시간의 흐름의 통고 눈은 늙고 고요한 산화물, 가을을 바라본다 통풍 앓는 손가락으로 안개 속을 움켜쥔다 남겨진 물건들이 빗속에 썩는다 종이들, 옷들, 음식물의 표면은 곰팡이 슬고 참을성 있게 허락한다 느려진 호흡으로 시간이 빛 속에서 지니고 있던 특성을 이제는 알아볼 수 없게 된 그 어둠 속에서 2 잠자면서 이상한 언어를 말한다 죽음이 귀기울인다 유리창에 부딪치는 벌레들 소리 한동한 허튼 소리로 살며 갖가지 옷을 입은 자신을 관찰한다 매일매일의 일어나고 잠드는 재주 잡다한 소유물 더미가 이리저리 널려 있다 사람들은 지나가고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다 문을 열고, 여자들로 가득 찬 한 방을 지나간다 사람들은 언제나 똑같은 질문에 여러 가지 목소리로 대답한다 3 가구 사이를 산책하기 점점 나를 좁게 에워싸는 공간 속에서 나는 움직인다 더위 속에 視界는 사행선이 된다 과거처럼 떠오르는 호나상 지나가는 자동차가 내 옆에 먼지를 일으키는 동안 나는 내게 남겨진 것을 손으로 가리킨다 천천히 문장 속에 담긴 감정들이 사라져 간다 방의 벽이 껍질처럼 벗겨진다 나는 사물들이 그들의 이름을 그대로 갖고 있게 한다 4 마지막 문장의 여운 보답 없는 사랑 공기로 휩싸인 육체 모든 것은 사라진다 한 남자 옆에 한 여자의 움직임, 또는 겨울에도 푸른 나무들 사람들은 말없이 자기의 일을 한다 그림들은 설명으로 풀린다 내가 살고 있는 집은 더욱 추워진다 나는 계절을 묘사하기를 단념한다 자장가 이제 잠들어라 아니면 적어도 잠드는 척이라도 해라 우리들의 세상으 방은 너의 손목처럼 차갑고, 또는 무어라 달리 표현하든, 허리 아래로 겨울처럼 다가오는 추위 속에 맞닿은 살갗처럼 차갑고 이제 잠들어라 내가 너를 춥게 해 줄 테니 그것이 달리 사랑으로 느껴질 수도 있으리라 너의 손가락은 너의 겨드랑이 털 속에, 또는 이 차가운 노래 속 그 어디에 있든지 배가 있어야 할 곳 배는 물에 있거나 또는 가지런히 뻗어 있는 나무들 사이로 좌초하지 않고 떠오르는 판화로 벽에 걸리거나 물론 그것은 또한 해전에 대한 이야기가 씌어 있는 책에도 있을 수 있다 방안에서 낡은 전축에 귀 기울이며 종이봉지에서 과일을 꺼내 먹으며 키가 삐걱거리며 부러지는 것을 읽는다 간접적인 체험을 자기의 것으로 가다듬으며 어떻게 물 위에서도 역사가 이루어지고 있는가를 목격할 수 있음을 기뻐하며 다른 사람들의 활동력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며 나뭇잎 사이를 흘러가는 벽 위의 이 배처럼 모든 것이 행복한 날들로만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예감한다 누구나 자기 방식으로 우선 모든 것이 예전대로 있다 기억의 구조학 유년기는 맥아커피의 냄새가 났다 누구나 자기 방식으로 현실로부터 달아난다 그 시절 나의 산수공책은 제비 그림으로 가득 찼었다 사람들은 시계 속에 죽음이 앉아 있다고 말한다 나는 눈을 씻고 싶지 않았다 나는 내가 본 것을 기억해 두려고 했다 행복 갑자기 나는 혼자 말을 한다 어둠 속에서, 정말 아주 잘, 마치 방 안에 누군가가 있는 것처럼 문이 열리고 네가 나타난다 그것을 믿기에는 시간이 좀 걸린다 그것은 되풀이죄지 않는다 모든 것이 진정이라는 느낌을 가지며 천천히 나는 너를 실제로 본다 그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나는 거의 확신한다, 밤이 그렇게 시작된다고 어떤 이야기처럼 조용한 광경 지금 나의 감관은 어느 것도 증명할 수 없다 갑자기 나의 인생이 짧은 출현으로서의 이 행복을 지닌 새로운 사건으로 느껴진다 전혀 별다를 것도 없으나 그래도 내 마음에 드는 그 무엇인 이 짧은 출현 정말로 나와 단둘이서만 여러 가지에 대한 착각 속에, 작별하며, 내 옆에 누워, 밤새도록, 내가 알지 못하는 그 무엇에 대해 이야기하는 천국과 지옥 분필로 너는 땅 위에 이 쪽에는 천국 그리고 저 쪽에는 지옥이라고 써 놓았다 천국과 지옥 : 나는 너를 이쪽에서 또는 저쪽에서 사랑할 수 있다 무더운 여름날 길에서 하던 그 옛날의 놀이를 너는 다시 이 사이에서 혀끝으로 한다 천국과 지옥은 둘다 매우 중요하다 나는 그 어린애 같은 깡충거림을 바라본다 천국과 지옥은 멀다 네가 벌써 달아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을 나는 안다 네가 내 손 밑에서 빠져 달아나는 것을 나는 느낀다. 실재의 비실재화  ///칼 크롤로브 시해 해설 칼 크롤로브에게 세계는 자연이다. 그 자연은 감각적 풍요와 마술적 초월성이라는 표리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다정한 자연과 불가해한 자연은 서로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하나는 다른 하나에 의해 예기치 않게 습격을 당하기도 하고 서로 상호관계를 가지기도 하며 때로는 이미 하나로 섞여 있어 구별할 수 없는 일체이기도 하다.  먼저, 가시적 자연은 파악되었다기보다 사진으로 찍듯 모사模寫되고 있다. 그는 자연을 언어로 인화印畵한다.  마르지 않는 라커처럼 빛나는  새털구름의 반사,  그리고 나는 낮은 소리로 우는  바람의 낭적과 이야기를 나눈다.  -「물이 있는 풍경」  그의 시의 울림은 피리소리 같은 바람소리, 새의 지저귐 같은 시냇물 소리, 그리고 그 질감은 과도 같다.  타오르는 카밀레꽃 사이로  [······]  라벤더와 제비꽃의  [······]  단풍나무로 울타리쳐진 고요.  [······]  흔들리는 나뭇잎 속을 흘러간다.  -「나무 밑의 식사」  그의 세계는 기지나 반어 없는, 음악으로 가득 찬 공간이며 그의 시간은 계절이며 나날의, 또는 인간에 대한 걱정은 유보되고 있다. 거기에는 대비나 긴장이 없고 시작과 끝, 원인과 결과, 결정이나 책임이 없는, 다만 울림과 메아리만이 있고 사물의 근원이 저절로 드러나며 언어의 표현이 밀도와 자유를 동시에 갖는, 무게 없이 흔들리는 절대음악의 공간이다. 자연이 그렇게도 많은 풀잎과 잎사귀, 물고기, 빛, 공기를 가지고 있으므로 그의 모티브는 끊임없이 변주와 반복이 가능하다. 매번의 시는 아직 다 쓰지 않은 재료가 남아 있고 미완이며 계속을 요구하게 된다. 그러므로 그의 시적 모티브의 실현은 쉽게 사라져버리며 관념Idee으로 결정結晶되지 않는다. 후기로 갈수록 이 특징은 더욱 분명해지지만 크롤로브의 시는 확정된 결말이 아니며 잠정적이며 흰 여백을 가지고 있으며 투명하다.  한 편의 시는 시간의 흐름에서 벗어나 단자Monade처럼 완전히 폐쇄된, 따로 떼어낸 조형물이어야 한다는 벤Gottfried Benn의 이론에 대립하여 크롤로브가 기공氣孔이 있는 시, 숨을 쉬고, 잉태하며 계속 다시 낳는, 절節 사이로 바람이 드나들고 시간이 드나드는 시를 표명했을 때 그의 이 요청은 자신의 시의 특징을 더없이 잘 말해 준다. 그의 시는 실제로 날개가 달린, 바람을 실은 유기체처럼 가볍고 새처럼 날고 때로는 호흡하고 있다.  그러나 그 가벼움, 투명함은 어디에서 오는가?  누구를 위하여 쓰는가? 라는 질문에 크롤로브는 무엇을 위하여 쓰는가? 로 이렇게 대답하고 있다.   말하자면 그는 자신의 시를 세상의 모든 덧없이 사라지는 것들에게 헌정하고 있다. 그는 바람, 빛, 물, 공기, 나뭇잎, 새의 깃털 등을 분명하게 실재하는 것으로 파악해 보고자 시를 쓰는 것이다. 일견 목가적이며 쾌적한 휴식이었던 그의 풍경은 나와 자연 사이의 허무적 관계를 보여 주는 은유인 것이 드러난다. 흐르는 물처럼 순수하고 낭랑한 은유로 이해되었던 「적막한 해변」을 살펴보자. 본문에서는 역자가 번역의 한 방법으로 독일어 원문의 문법적 구조를 다소 바꾸어 놓았을 뿐만 아니라 낱말의 모음과 자음의 구조나 운율이 헝클어져 버렸지만 크롤로브의 원문은 아름답게 짜여져 있어 마치 노래가사와도 같이 울린다. 그러나 견고하게 틀에 짜여져 리듬,운율, 격格까지 맞춰진 이 시는 거듭 읽음에 따라 서술이 수상하게 여겨지기 시작한다. 노래처럼 박자가 맞던 문장들은 단순하고 우아하지 못하고 낮고 고요하다.  돛단배와  수염에 걸린 황금 같은  웃음소리는 사라졌다.  돛단배와 웃음소리는 사라졌다라는 첫 문장은 제목 「적막한 해변」에 부합된다. 그러나 는 곧 주문장의 나란히 걸린 두 개의 주어 중 하나에만 걸리는 관계문으로 단절되는데 이란 비유는 낯설다. 이란 비유는 웃음소리라는 청각적인 것을 시각적으로 설명했다. 독자는 두 가지를 어떻게 비유해야 할까 망설이게 된다. 그 다음의 이란 배와 웃음소리가 방금 사라진 것처럼 아직 공기 속에 남아 있는 느낌을 연상시킬 것이다. 그리고 이 은 다시 라는 말과 문법적으로 병렬되는데 숨이나 그림자는 바로 곧 사라지는, 나아가 허무한 것에 대한 오래된 은유가 아닌가. 세 번째 관계문은 를 설명하고 있다. 이것은 물리적으로 맞지 않으나 가쁜 숨, 그림자, 석회는 먼지로 된다는 세 가지 요소는 덧없음, 버려짐, 고독, 비애의 상관개념을 찾는 시인의 의도를 담고 있는 상징이다. 그때 고 시인은 토로한다. 그 비애는 검은 꿀 같고, 새똥 같고, 죽음 같다. 뜨거운 벽돌 위에 들러붙는 비애는 아마도 시인이 고통으로 불타는 뺨 위에(「뺨위에 붉은 연지를 바르는 여자처럼」) 죽을 지경으로 비애를 덧칠하고 있다는 뜻이 아닐까? 그러나 죽음은 왜 가? 그것은 꿈 또는 환각상태의 죽음을 뜻하는 것일까? 그때 카드놀이 하는 선원들이 나타난다. 적막한 해변을 바라보며 떠오르는 기억이다. 선원들의 실존 방식은 이것은 문득 성서적으로 들리기도 한다. 자기 자신에 육화Inkarnation된 존재, 그러나 그것은 성서와 무관하다. 유한한 시간 속에 있는, 살 속에 처박힌 존재에 대한 섬광 같은 통찰이다. 그들의 현실은 시인 속으로 스며들어가 표상과 상념은 허물어지고 실재의 상실은 끈적끈적한 비애를 남긴다. 이제 마지막 절은 비가Elegie처럼 된다.  그들이 밤의 푸른 장막을 향해  던졌던 그들의 칼은  솟구치는 영원의 날카로운  바람 속에서 무뎌졌다.  시인은 자신의 상상세계 속에 있다. 어느 선원도 칼을 에 던지지 않는다. 그가 보는 것은 상징이다. 칼은 밤과 영원을 부르는 상상의 칼이다. 그리고 영원이란 종교적 의미를 지니지 않고 다만 이름할 수 없는 비시간의 팽팽한 저항, 주위에 빈틈없이 들씌워진 밤을 뜻한다. 여기에서 보여지는 영원 앞에 유한한 인간의 증언의 몸짓은 유약하고 사소하며 그 인간은 무지하고 조야하다(「칼을 던지는 선원」). 크롤로브의 문체는 같은 시대의 형이상학적 시인들에 비해 지적이지 않고 철학적이지 않으며 학문적 주제에 사로잡혀 있지 않다. 그러나 그의 시는 감각의 확실성과 대담한 상상력으로 더욱 인상적이다.  적막한 해변의 풍경 뒤에는 파악할 수 없는 초월성Dämonie, 그리고 자신을 감추고 있는 시인의 비애가 있다. 다시 이 시의 구조를 살펴보면 음절들은 분리되어 있고 문장은 시작부터 굳어 있으며, 관계문으로 흩어져 산란한 문장구조는 긴장과 불화의 장을 구성하기 위한 것이었음으로 밝혀진다.  여기에 이제는 시대 체험이 합쳐져 전원시인에게는 기대하지 않았던 은유적 굴절이 시작되는 것을 따라가 보자.  내 가슴의 풀잎에 고통이,  고뇌가 입을 다물고  하늘은 검은 색의 천을 휘감을 때,  -「낯선 병사들의 밤풍경」  재로 덮인 강  [······] 갈대로 뒤덮인 밤에  숨어 있는 다정한 함정  -「1950년 송시」  시인이 서 있는 땅이 시대의 사건으로 흔들려 자연은 더 이상 영혼의 안전한 피난처가 못 되고 여름의 아름다운 대지는 과격한 절망으로 변한다. 이때에 그의 시에는 낮의 풍경은 없고 밤의 풍경만이 있다.  황혼이 흘러가고··· 어둠의 요정이··· 하늘은 검은 색의··· 고요한 별(「낯선 병사들이 있는 밤풍경」), 한밤의 가죽을 쓴 짐승··· 밤으로의 의식 없는 호흡··· 순찰꾼의 외침 뒤에 캄캄한 허공(「남자들」), 밤의 은빛 쟁반··· 갈대로 뒤덮인 밤(「1950년 송시」), 밤의 직물··· 사격의 암흑··· 야간보초의··· 밤의 논쟁··· 꿈 없는 잠(「한국 비가」), 암흑··· 나는 이 밤을··· 밤은 비수를 들고(「평화를 위한 시」)  땅은 목가적 겸양의 제한된 구역이 아니라 우주를 떠도는 별이며 인류의 비극이 벌어지고 있는 무대이며, 인 시간은 영원한 회귀의 무시간성이다.  낯선 대지 위의 모든 존재의 의문점은 비존재의 깊은 인식을 낳고 익명의 위험 앞에 자아는 비육체화Entlebung되어   안전한 유클리드적 공간(어제 유클리드가 정돈해 놓은 검은 올리브의 들판-「나를 위한 풍경」)에서 벗어난 존재 체험은 새로운 시형식과 문체를 필요로 한다. 짧은 문장과 변화화음적인 운율을 버리고 기다란 문장과 힘을 가진 비가로 변하며 속도감을 갖기도 한다. 문체는 추상성을 띄어 전원시인이 아닌 의식서정 시인에게서 나타남직한 표현 공식이 빈번히 나타난다. 의식, 존재, 실존, 시간, 역사, 허무 등의 단어들이 그것이다.  한국전쟁이라는 대상이 그의 흥미를 끈 것은 시민사회의 잠과 실존을 언어로 확인해 보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그는 그리고   이 빛과 맛의 가치는 최종적 본질의 최후의 특징이다. 이 본질적인 감관인상Sinneseindruck 빛나다와 쓰다라는 허무의 근거 없음 위에 비치는, 입김처럼 얇은 막과 같아 그의 허무 체험의 바로 이러한 본질이 그에게서, 다른 비가의 시인들에것 보이는 열정이나 정신적 확신을 찾아볼 수 없는 이유가 된다. 시대 체험이 깊은 애가적 우울과 전면적인 허무주의에 빠지게 했을 때에도 크롤로브는 종교, 철학 혹은 예언적인 열정이나 감동에 사로잡히지 않는 것이다.  크롤로브는 근본적으로 대지의 가설에 묶여 있다. 이 글의 처음에서 언급했듯이 크롤로브의 자연은 경험 내에 있으며 초월적이다. 그는 자연 경험을 초월하려 하나 그가 가는 곳은 초자연적인 진리안이 아니라 그것은 다시 자연이라고 불리우는 진리이다. 비가의 주제를 다룰 때에도 그는 풍경 묘사의 전원시적 표본을 버리지 않으며 여전히 섬세하고 우아한 언어 구조를 잃지 않는데 그 버리지 못하는 망설임에서도 그의 주제에 대한 미결정을 엿볼 수 있다.  크롤로브가 운율과 잘 세어진 연을 버리고 묶임 없이 비가적 흐름에 자신을 내맡기고 있을 때에도 전원시의 표본을 버리지 않는 것을 특히 뚜렷하게 볼 수 있는 것은 연가들이다.  인간의 같이 있음에서 흔들리는 현실감각을 떠받쳐 줄 새로운 이유를 만일 찾았다 해도 그는 사랑의 드라마를 언급하려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인간 사이의 운명적 긴장이 열기를 잃고 우울로 휘감겨 있을 뿐임을 독백한다. 이 연가들에는 처음부터 상대방이 부재한다. 상호관계의 대화Dialogue가 없다. 그저 있는 것 같은 뿐이다. 사랑의 긴장은 보편 세계에 대한 크롤로브의 정서 표현의 한 동기일 뿐이다.  너는 갔다. 엔찌안의 피리들의 푸른 색은 검은 색으로 변했다.  -「연가 2」  이 사랑의 시는 부분적으로 자연시의 변주로 보이기도 하다.  물들인 머리카락과 복숭아씨의 냄새를 가진 밤이 온다.  박하 향내나는 밭 그루터기에 달이 서 있다.  뱀장어가 자라고 있는 강 위에 이슬이 떨어진다.  -「연가 2」  여자 주인공은 전혀 타당성을 갖지 못하고 그녀의 모습은 구조나 조직이 해체되어 정물처럼 놓여 있는 옷조락이나 신체의 부분으로 재구성될 뿐이며 사랑하는 여자의 부재는 몇 개의 점을 이어놓은 별자리 표시처럼 된다.  뒤에 남은 것은 방과 모직치마 위에 코르드쟈켓의 푸른 색,  호기심 어린 모기 같았던, 지금은 없는 눈길.  -「연가 2」  크롤로브는 이 연가들에서 특히 아름답고 놀라운 환상적인 비유를 발견했다. 말하자면 은유적 간접성에서 비회화적인 표현에 의지한 것이 아니라 무한한 상상력으로 즉물적 상관개념들을 대비해 놓는 것이다. 그는 환영의 그림들을 예리한 사실적 초점으로 묘사한다.  오후에 창문 앞에 공작이,  그늘진 꽃다발처럼 내려앉았다.  여섯 시의 햇빛 속에  빛나는 머루 한 접시를 놓고  너는 숟가락을 들고 있었다.  -「연가 3」  또한 구체적인 것과 추상적인 것이 언어의 연금술에 의해 새로운, 틈없는 하나의 이미지로 집약된다.  벽들은 불안과 한 목의 청동으로 벽지를 발랐다.  -「연가 2」  크롤로브이 이 새로운 언어실험은 어디에서 왔을까?  독이 섞인 바람  [······] 배들은 소리없이 나아간다.  -「배」  위의 시에서 이미 랭보Arthur Rimbaud의 「술 취한 배」를 떠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대학에서 프랑스 문학을 공부했고 그 자신 프랑스와 스페인의 시인들의 작품을 독일어로 번역하기도 한 크롤로부의 시는 그들, 특히 초현실주의자들의 방법과 원리를 매우 특징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초현실주의자들의 언어적 성과는 비유의 매개체(···처럼)를 통하지 않고 은유를 직접적이고 마술적인 사실로 전환시킨 데 있다. 그들과 유사하게 크롤로브는 공기 같은 장미가 아니라 또는 나무가 타듯 이라고 말하며 시간이 기도 한다.  구체적인 것과 추상적인 것이 연결되고 현상과 개념이 무심하게 서로 흘러들어가 우리의 경험세계의 일반적 구별을 파괴하여 현실의 부분 속에서 비현실이 나타난다. 완전히 범주가 다른 두 대상물의 대비는 두 대상 간의 현존하는 비슷한 점의 발견이 아니라 존재하지 않는 유사성을 만들어내기 위한 것이다. 사물과 표상의 경계는 크롤로브의 은유 속에서 사라진다. 표상 자체가 사물이며 상징은 장식이나 수식어가 아니라 환상 속에서의 주어이며 상징 같아 보이는 것은 사실이며 실재한다.  언어 유희의 의미유추적 힘에 대한 크롤로브의 무한한 신뢰는 결코 은유에 주저하는 법 없이 이상한 것을 타당한 것으로 만들어, 우리의 순진한 의식의 구별이 통용되지 않는 연상을 계속해 간다. 구체적이지 않으면서도 감각적인 정감들이 서로 섞이기도 하고 비사실적이며 괴이한 사건, 사물이나 동물, 인간의 서로 연결지을 수 없는 관계들을 연관시킨다.  누군가 창문 밖으로  빛을 쏟아낸다.  공기의 장미꽃들이  피어난다.  -「창문에서의 한 순간」  이런 기이한 사건들은 후에 기이한 정물들에서 더욱 고조되는데   이제 이 정물, 고요는 여러 단계를 거쳐 지나온 크롤로브 시의 기본 주제가 된다. 고요 속에서 시인은 사물을 투시할 수 있고 비관습적 단어를 유도해 낸다. 즉 사물 자체를 비관습적으로 만들어 모든 묶임으로부터 해방시킨다. 이때 시인에게 필요한 것은 사물에 개입하지 않는 시각과 대상과의 사이의 신중한 거리이다. 왜냐하면 때문이다. 크롤로브는 이 거리감이 사실 그 자체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이 거리를 통해 순수 형태의 구조적 파악이 가능하고 시적 변화를 준비할 수 있다. 열매를 열매라 부르지 않고 이라 부르는 것은 대상을 다만 대상의 가능성에 놓아두기 위함이다. 사물 안으로 끼어들지 않는 냉담한 거리는 사물에서 무게를 거두어 대상은 대상 없음이 되며 수학적 본질과도 같은 질서와 추상적 순수만이 남는다.  가느다란 윤곽만이 남은 크롤로브의 시적 장면은 이제 풍경 그림이 아니다.  사람들은 말없이 자기의 일을 한다.  그림들은  설명으로 풀린다.  내가 살고 있는 집은  더욱 추워진다.  나는 계절을 묘사하기를  단념한다.  -「시간의 흐름」  자연 찬미자였던 클로로브는 고 말하깅 이른다. 그와 함께 넘치고 풍요로운 운문이 아닌 가늘고 정확히 절단된 시형식을 갖게 되고 운율의 달콤한 성향도 사라지고 문체도 짧아지고 축소되며 표현도 간결해진다.  그는 마치 유리창 뒤에서 바라보듯 참가하지 않고 어떤 기억으로 억눌리지도 않으며 의지로 인해 초조하지도 않으며 그의 서정성은 파토스pathos나 쌍티망sentiment이 되기 전에 반영refleion이나 반어Ironie로 남는다.  이것은 마치 회화에서 조소로 옮겨간 것 같다. 그의 시에는 색채가 아니라 밝기(명암)만이 남은 것이다. 이 지점에서 그는 초현실주의자들과 헤어진다. 초현실주의의 시에서처럼 언어가 암호로서 이미를 암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엷고 섬세한 언어는 독자 자신 속에서 동음으로 울릴 때에 비로소 명백해진다.  크롤로브는 될 수 있는 대로 간결하게 시를 쓰려 한다. . 부문장에 오래 정체해 있지도 않으며 문장 사이를 어떤 접속사로 연결하지도 않고 암시만 준다.  장미, 라는 말을 처음 하는가?  이전에는 나는  맞지 않는 이름을 불렀었다.  내 손가락을 에워싸고 있는  시간은  무게가 없다.  만일 내가 그것을 느낀다면  이미 늦은 것이리라.  그러나 지금 날은  눈을 치켜뜨고 있다.  밤은 눈꺼풀 뒤로  물러난다.  -「잠을 깨어나며」  이 시에는 다만 고요한 동작의 일관성 없는 표상을 건네 주는 문장의 단편, 연결 없는 배열만 있는데 그러나 그들을 하나로 만드는 시작, 전개, 그리고 끝이 있는 언어 진행을 우리는 볼 수 있다.  간결의 마지막 형태를 찾는 크롤로브의 문장은 끝내 동사 없이 축소되어, 그러나 완전한 문장을 능가하는 의미 함축을 가진 명사적 구조로 된다.  병 속의 촛불 :  유년시절  -「유년시절」  크롤로브는 유년기를 병 속의 촛불이다, 또는 같다 라고 말하지 않는다. 존재의 상대성에서 볼 때 언어의 사실성은 잠정적 개념이며 사물의 적절한 은유를 발견하는 것은 관습적인 연습이므로 그에게 언어는 주도권을 가지지 못한다. 사물이나 사실은 언어에 의해 의미 실현을 하는 것이 아니라 시의 힘에 의해 사물과 사실은 새로 창조되는 것이다. 고 크롤로브는 말하고 있다. 그의 시는 인간과 사물에 대한 작은 부름이다.  돌아보지 마라.  아무도 우리 눈 위에  눈을  찾아내서는 안 된다.  -「눈으로 덮인」  그리고 나면 남는 것은 고요다. 이 고요 속에서 우리는 대상과의 거리, 방념 그리고 명백에 이른다.  크롤로브가 시에서 일체의 인공성을 거두어 사물은 있을 때 이 유령 같은 유희에 인간은 어디에 있나? 어느 한 곳에서  의자 위에 아주 오랫동안 앉아  몸 속에 비가 오는지  또는 간 속에  아직 전갈이 움직이고 있는지  귀를 움직이는 이 습관.  번개불을 세어보고  남아 있는 성냥개비도  모두 세어 놓았다.  지칠 때까지.  그리고 마지막 돛대 위의 깃발을  바다 속에 가라앉힐 때까지.  -「로빈슨 3」  이제 그의 시에는 화자話者 Ich가 없다. 분사나 부정사 속에 주어가 숨어 있거나 또는 있다고 해도 일반명사 사람man, 누군가jemand이거나 정관사, 부정관사, 지시대명사 등으로 대표된다. 화자는 누구나일 수 있고 나와 누구는 공동의 익명 속에, 공동의 단편성 속에서 구별을 잃었다. 그리하여 그의 체험은 체험표본이 된다.  이 익명의 인간의 체험표본은 고독이다. 그는 더 이상 간결하고 더 이상 명백하게 표현할 수 없이 완벽한 무위의 자세에 놓여 있다.  내가 발을 뻗고 앉아 있는  책상 위로 가끔  한 줌의 햇빛이 비추인다.  [······]  성냥개비도 모두 세어 놓았다.  -「로빈슨 2, 3」  데포우Defoe의 로빈슨은 구조되어 다시 시민적 규범으로 돌아가지만 크롤로브의 로빈슨의 운명은 무엇일까?  는 가 그를 그 속에 남겨 놓은 고독으로부터 벗어나려 한다. 그리고 정원사가 변한 식물에서 정원사를 찾으려 함에 죽은 자와의 반어적이며 결실 없는 관계만이 가능할 뿐이다. 존재의 배경으로서의 밤은 항상 거기에 있는데 이 밤은 날의 시작에도 천천히 있다. 죽음은 아무도 극복하지 못한다. 세상의 아름다움이 잠시 더 남아 있는 동안 그저 바랄 뿐이다. 이로써 사라지는 삶의 시간이라는 테마는 더욱 강해진다. 모든 순간은 상실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크롤로브는 그의 오른손은 쓰기 위하여 있기 때문에.  나는 여기 있다.  나는 나의 오른손을  호주머니에 넣지 못한다.  나는 나의 오른손을 종이 위로 가져간다.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쓰기 위하여.  - 김현성 ( 칼 크롤로브 詩集『나를 위한 풍경』해설)   
789    詩를 <<쉽게>> 짖자... / 좋은 시를 쓰기 위한 자기 점검 댓글:  조회:4442  추천:0  2015-12-10
    시를 쉽게 지어야 하는 이유           시를 쉽게 지어야 하는 까닭                                                                         ///김재 황    모름지기 시(詩)는 쉽게 지어야 한다. 옛 시인들은, 자기 시의 초고를 촌부에게 보여주고 나서 그 뜻을 알겠다고 한 뒤에야 세상에 발표하였다고도 한다. 시도 소통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알기 쉬운 언어로 지어야 한다.  그런데 왜 시를 어렵게 짓는가? 이른바 ‘난해시’(難解詩)는 누가 무어라고 하든지 ‘권위적’인 발상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법률용어나 의학용어가 어려웠던 바와 마찬가지이다. 말하자면 ‘벌거벗은 임금님’의 우화를 생각하게 한다. 사실은 그게 아님을 알면서도 혹시 무식하다는 말을 들을까 하여 동조하게 된다. 시인에게 독자는 참으로 고마운 손님이다. 그런데 시를 왜 어렵게 지어서 그 고마운 독자를 시(詩) 안에서 헤매게 만드는가. 내용뿐만 아니라, 형식에서도 연과 행을 잘 나누어서 독자가 쉽게 읽을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게 시인의 어진 마음이다. 그렇지 아니한가!  중국 고전인 ‘논어’(論語)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자 불어괴력난신’(子 不語怪力亂神). 이는, ‘공자께서 믿어지지 않는 것이나 힘으로 하는 것이나 어지러운 것이나 이상야릇한 것 등을 말씀하지 않으셨다.’라는 뜻이다. 이 중에서 어지럽거나 이상야릇한 것이 ‘어려운 시’에 해당할 것 같다. 그런가 하면 공자님의 손자인 ‘자사’가 기술하였다고 알려진 ‘중용’(中庸)에는 공자님의 다음과 같은 말씀이 들어 있다. ‘색은행괴 후세유술언 오불위지의’(索隱行怪 後世有述焉 吾弗爲之矣) 이는, ‘숨어 있는 것을 들쑤셔 내고 이상야릇하게 굴면 죽은 다음에 이야깃거리가 될 만큼 알려질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리하지 않는다.’라는 뜻이다. 이를 보면, 그 옛적에도 난해하게 구는 사람이 있었던 모양이다.  시의 생명은 순수함에 있다. 모두 알고 있듯이, 시의 원류라면 ‘시경’(詩經)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논어에는 공자의 다음과 같은 말씀도 들어 있다. ‘시삼백 일언이폐지 왈사무사’(詩三百 一言以蔽之 曰思無邪). 이는, ‘(시경의) 시 삼백 편은 한 마디로 말해서 나타낸 생각에 바르지 아니함이 없다.’라는 뜻이다. 여기에서 ‘사’(邪)는 ‘고을에 간사한 무리들이 날뛰는 것’을 나타내는 글자이다. 난해시 안에는 ‘검은 음모’가 들어 있다. 순수하지 않다. 그러므로 ‘간사한 무리’나 좋아할 일이 분명하다.  화려한 꽃뿐만이 아니라 작고 볼품없는 꽃도 위대하다. 그러므로 잘 알려진 시(詩)뿐만 아니라 잘 알려지지 않은 시(詩)도 존중되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여기에 전제조건이 있다. 반드시 꽃이라면 진짜여야 하고 시라면 순수해야 한다.      동방문학 좋은 시를 쓰기 위한 자기 점검     윤성택        ◦ 톡특한 문체 ( ⇒ 내 시에 진정 독특한 그 무엇이 있는가 ) ◦ 원활한 이미지 전개 ( ⇒ 하나의 문제를 중심축(통일성)으로 이미지를 전개하였는가 ) ◦ 절실한 내용의 진실성 ( ⇒ 절실한 내용을 진실하게 이야기하고 있는가 ) ◦ 인식과 체험 중심 ( ⇒ 관념 대신 인식, 습관 대신 체험 중심 / 관념의 서술 지양 ) ◦ 정서와 인식의 조화 ( ⇒ 정서에 비해 의식이 너무 앞서지 않았는가 ) ◦ 시적 표현 ( ⇒ 산문(에세이)적인 분위기를 풍기지 않았는가 ) ◦ 시적 진실성 추구 ( ⇒ 재주를 경계한 채 하나의 진실을 의젓하게 이끌어가고 있는가 ) ◦ 선명한 주재의식 ( ⇒ 주재의식이 선명해야 거기에 걸맞는 표현상의 기교나 독자성이 나타남 ) ◦ 생략 + 상징어 + 은유법 = 좋은시 ( ⇒ 생략된 표현, 상징적인 언어, 은유법 = 좋은시 ) ◦ 적절한 묘사 ( ⇒ 시는 설명이 아니고 묘사임. 지나치게 설명적이지 않은가 ) ◦ 튼튼한 구조 ( ⇒ 표현 하나하나에 긴장관계를 유지하면 구조적으로 튼튼한 시가 형성됨 ) ◦ 관념어 남용 ( ⇒ 일상적인 관념어의 남용이 흠이 되지는 않는가 ) ◦ 소재의 승화 ․ 의미 확대 ( ⇒ 소재에 대한 승화(의미 확대)는 잘 되었는가 ) ◦ 상념 ․ 감상주의 ( ⇒ 포장된 상념, 자기 정서에 빠지지 않았는가 ) ◦ 군말 삭제 ( ⇒ 공연한 군말을 붙이지 않는가 ) ◦ 공적인 언어 승화 ( ⇒ 개인적인 체험을 공적인 언어구조로 승화시켰는가 ) ◦ 소재를 구체적이고 깊이 이해 ◦ 역동적 속도감 유지 ( ⇒ 알맞은 속도감, 역동적 이미지 처리 ) ◦ 무리한 비약 ․ 난해시 ( ⇒ 무리한 비약이 있거나 난해하지 않은가 ) ◦ 지나친 압축 ․ 생략 ( ⇒ 지나친 압축, 생략, 경한(가벼운) 시류는 없는가 ) ◦ 불필요한 표현 ( ⇒ 마음의 부피가 엷어 부질없는 포즈를 취하지는 않는가 ) ◦ 명료성 ( ⇒ 지나치게 서술하여 명료성이 부족하지 않은가 ) ◦ 불필요한 언어 ․ 한자 남용 ( ⇒ 불필요한 언어 반복과 한자 남용 지양 )             ◦ 나의 시에서 진정 독특한 그 무엇이 있는가? ◦ 하나의 문제를 중심축으로 통일성 있는 이미지를 전개하였는가? ◦ 절실한 내용을 진실성 있게 이야기하고 있는가? ◦ 관념의 서술 대신 구체적인 인식을, 습관 대신 체험을 중심으로 적었는가? ◦ 정서에 비해 인식이 너무 앞서가지 않았는가? ◦ 산문적인 분위기를 풍기지 않았는가?(시적 표현 중심) ◦ 재주를 경계한 채 하나의 시적 진실성을 의젓하게 추구하고 있는가? ◦ 선명한 주재의식으로 거기에 걸 맞는 표현과 독창성이 있는가? ◦ 생략된 표현, 상징적인 언어, 은유법을 잘 구사하였는가? ◦ 시는 설명이 아니고 묘사임. 지나치게 설명적이지 않은가? ◦ 표현 하나하나에 긴장관계를 유지하면 구조적으로 튼튼한 시가 됨. ◦ 일상적인 관념어 남용이 흠이 되지는 않는가? ◦ 소재를 잘 승화시켜서 의미를 부드럽게 확대하였는가? ◦ 허위로 포장된 상념, 자기 주관적 감사에 빠지지 않았는가? ◦ 공연한 군말을 붙이지 않는가? ◦ 개인적인 체험을 공적인 언어로 승화시켰는가? ◦ 소재를 구체적이고 깊이 이해하고 있는가 ? ◦ 알맞은 속도감을 유지하며 역동적으로 이미지를 처리하였는가? ◦ 무리한 비약, 너무 난해하지는 않은가? ◦ 지나친 압축, 생략, 경한(가벼운) 시류는 없는가? ◦ 불필요한 표현(포즈)을 취하고 있지는 않은가? ◦ 지나치게 서술하여 주재의 명료성이 부족하지 않은가? ◦ 불필요한 언어 반복, 한자 남용하지는 않은가?   ==================================================
788    로신과 한국 댓글:  조회:5261  추천:0  2015-12-05
  루쉰과 한국 여러분 반갑습니다. 한국과 중국의 청년 학생 여러분, 그리고 노신 애독자 여러분과 이렇게 노신을 통해 만나게 되어 감회가 깊습니다.   저는 오늘 한국의 외교관으로서가 아니라 노신 애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여기에 나왔습니다.  저에게 주어진 제목이「노신과 한국」입니다만 저는 학자도 전문가도 아니기 때문에 그저「수이비엔(마음 내킨대로)」하게 이야기하겠습니다.  이야기가 옆 길로 나가더라도 그러려니 하고 들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노신은 널리 알려져 있지만 노신과 한국 또는 한국인과의 관계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것 같습니다. 노신 애독자들에게도 전문가들에게도 잘 알려지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중국에서 출판된 노신관계 서적들을 상당히 많이 떠들어 보았습니다만, 단 한 줄이라도 노신과 한국관계를 언급한 책을 찾아 보기 힘들엇습니다. 노신과 한국인은 무관계일까요?   노신의 작품을 세계에서 최초로 외국어로 번역한 외국인은 바로 한국인 이었습니다.  1927년 8월「東光」이란 조선어 잡지에 실린「광인일기가 그것입니다. 그 후 2개월이 지나서야 일본에서 최초로 노신의「고향」이 번역되어 나옵니다. 물론, 이보다 몇 년 앞서 노신의「쿵이지」가 베이징 거주 일본인을 대상으로 한 주간지에 일본어로 번역되어 나옵니다만, 그것은 노신의 동생인 周作人이 번역한 것입니다. 외국인으로서는 조선인에 의해 노신의 작품이 세계 최초로 번역 소개되었는 것은 당시 나라 잃은 조선인들이 세계의 어느 사람들보다도 노신에게서 희망과 길을 찾으려 했음을 말해줍니다.   요즈음은 중국에서나 한국에서나 노신을 즐겨 읽는 젊은이들이 거의 없습니다. 너무나 당연할 일입니다.  암울한 시대의 괴로운 이야기를 누가 즐기려 하겠습니까. 그래도 저는 여러분에게 노신의 대표작 몇 편과 약간의 잡문들을 읽어볼 것을 권유하고 싶습니다.  노신의 유명한 소설들 광인일기, 고향, 쿵이지, 아큐정전을 처음으로 펼쳐 본 사람들은 좀 놀랄지도 모르겠습니다. 너무 짧기 때문입니다.  아큐정전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고작 다섯장내외 정도 분량이니까요.  짧지만 여운은 길게 남고 뇌리에 오랫동안 남는 것이 노신의 작품이 아닌가 싶습니다.   제가 노신의 이름을 처음으로 접했던 것은 아마 중학교 아니면 고등학교 때였던 것 같습니다. 중국 현대문학의 개척자이고 대표작은 아큐정전이라는 것.  「물에 빠진 미친 개는 두들려 패라고 그가 말했다는 것 정도가 노신에 대한 전부였습니다. 아큐정전의 내용이 무엇인지 알 바 없었던 저는 그것이 아편전쟁 이야기가 아닐까 하고 추측해 보았던 기억이 지금도 희미하게 남아 있습니다.  노신 선생이 말했다는「물에 빠진 미친 개는 두들겨 패라」는 말도 당시 저에게는 좀 기괴하게 들렸습니다. 물론 여기서 개는 위선의 가면을 쓰고 민중을 속이고 지배하는 권력자, 위선적인 지식인 등을 상징하겠지만 그때는 그런 걸 알 수가 없었으니까요.   실제로 노신 선생이 싫어한 동물은 개가 아니라 고양이었다는 것을 알게된 것은 최근이었습니다. 좀 옆길이지만 그 이야기를 좀 나누겠습니다. 노신 선생이 고양이를 얼마나 싫어했든지, 한때 북경에서는 노신 선생이 고양이를 학대하는 소문이 사람들 사이에 퍼진 적이 있다고 합니다. 노신 선생은 그 소문에 퍽이나 시달린 나머지 그에 대한 변명을 긴 글로 써서 남깁니다.  제목은 잊어버렸지만 거기에는 재미있는 사연이 있습니다. 노신의 유년시절 이야기입니다. 어느날 뱀에 물려 숨이 할딱거리는 생쥐 한 마리를 노신이 구해 줍니다. 그 후 생쥐는 노신의 친구이자 가족이 됩니다.  학교 갔다 돌아오면 언제나 생쥐는 노신의 주변을 맴돕니다.  특히 밥을 먹고 나면 언제나 생쥐는 식탁 위에 올라가 흘린 음식 찌꺼기들을 깨끗이 청소해 줍니다.  어린 노신이 먹물을 갈아 글씨를 쓰고 나면 쪼르르 책상으로 생쥐가 올라와 남은 먹물을 깨끗이 먹어 치워 줍니다. 그런데 어느날 학교에서 집에 돌아와 보니 생쥐가 안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밥을 먹는데도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상심한 어린 노신을 보다 못해 보모 키다리 아줌마 阿長이 노신에게 동정어린 표정으로 조용히 말해줍니다.   「고양이가 생쥐를 먹어버렸다」   그때부터 노신의 가슴에 고양이에 대한 증오감이 깊히 자리잡습니다. 한번 각인된 그 증오감은, 나중에 노신이 사실은 생쥐를 죽인 것은 고양이가 아니었고 바로 그 키다리 보모였다는 진실을 알게된 뒤에까지도 지워지지 않습니다.  노신은 그래서 오랫동안 고양이만 보면 돌을 던졌다 합니다.   이야기가 좀 옆길로 가고 있습니다만, 간 김에 조금 더 가자면 노신이 아주   싫어한 곤충이 하나 있습니다.  모기 입니다.  벼룩이나 파리보다 모기를 특히 싫어한 노신의 이유가 재미있습니다.  피가 아까워서가 아닙니다. 모기의 장광설, 그 연설 때문입니다.   모기는 사람을 물기 전에 에엥하고 길게 소리를 내지 않습니까?  노신의 귀에는 그 소리가「왜 내가 당신의 피를 요구하는가」하는 이유를 길게 연설하는 소리로 들렸던 모양입니다. 빨아먹고 싶으면 그냥 조용히 빨아먹을 일이지 왜 그렇게 변명이 많고 장광설을 늘어놓느냐는 것이죠.  민중을 착취하고 속이는 지배자들은 항용 자신의 탐욕을 숨기기 위해 많은  이유와 논리를 만들어 떠들어대지 않습니까? 노신의 귀에는 모기의 에엥 소리가 그렇게 들렸던 모양입니다.   자, 이제 본론으로 돌아가야겠습니다. 아까 노신 작품의 번역 이야기를 꺼냈습니다만 일제시대때 조선의 여러 지식인, 지사들이 노신에 주목하고 공감했던 것은 노신이 그만큼 시대의 어둠과 절망속에서 지식인으로서 강렬한 메시지를 발신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노신은 자신을 문사라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은 싸우기 위해, 마비된 민중의 정신을 뜯어고치기 위해 문예를 택했을 뿐이라고 말합니다. 노신은 자신의 글을「비수와 투창」이라 하였습니다.  또한 자기 자신을 전사,투사로 묘사했으며 자기 몸에 난 상처를 자기 혀로 핥으며 황야를 헤메는 한 마리 하이에나에 비유하기도 하였습니다.   상처 입은 황야의 하이에나의 절규, 허위와 위선의 심장을 겨냥하는「비수와 투창」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들이 나라 잃은 조선의 지사들, 문인들에게 메아리쳤을 것입니다.   식민지 시대를 살았던 조선의 시인 김광균은「노신」이라는 시를 지어 이렇게 읋기도 하였습니다.   「魯迅」    詩를 믿고 어떻게 살아가나  서른 먹은 사내가 하나 잠을 못 잔다.  먼 - 氣笛 소리 처마를 스쳐가고  잠들은 아내와 어린 것의 베개 맡에  밤눈이 내려 쌓이나 보다.  無數한 손에 빰을 얻어맞으며  恒時 곤두박질해 온 생활의 노래  지나는 돌팔매에도 이제는 피곤하다  먹고 산다는 것.  너는 언제까지 날을 쫓아오느냐  등불을 켜고 일어나 앉는다.  담배를 피워 문다.  쓸쓸한 것이 五臟을 씻어 내린다.    魯迅이여!  이런 밤이면 그대가 생각난다  온- 세계가 눈물에 젖어 있는 밤  상해 胡馬路 어느 뒷골목에서  쓸쓸히 앉아 지키던 등불  등불이 나에게 속삭어린다.  여기 하나의 傷心한 사람이 있다.  여기 하나의 굳세게 살아온 인생이 있다.   한국의 식민지 시인이 절망의 시대에 중국의 위대한 작가 루쉰의 용기를 추모하여 스스로를 다짐하는 시입니다.   광인일기를 최초로 번역했던 柳樹人 이라는 분은 항일애국지사였습니다. 본명이 유석기인 그는 얼마나 노신을 좋아했던지 자신의 이름조차도 노신의 본명인 樹人을 따서 유수인 이라고 하였던 것 같습니다.   이름 이야기가 나오니까 생각납니다만 여러분 김염, 중국 발음으로 진이엔   쇠금에 불꽃염자 진이엔을 혹시 들어본 적 있습니까? 13억 중국인들이 '영화황제'로 기억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1932년 영화 전문지 [電聲]이 1년여에 걸쳐 인기투표를 한 결과 김염이 '가장 좋아하는 남자배우', '가장 잘 생긴 남자배우', '가장 친구가 되고싶은 남자배우'등 전분야에 걸쳐 1위를 차지,「영화황제」라는 칭호를 받게 된 것입니다. 그의 나이 24세 때입니다. 그가 한국인이었다는 것을 아는 한국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님 웨일즈는 '나는 그에게서 육체의 아름다움 너머에 깃든 정신의 아름다움을 보았다"고 말하였습니다.  본명이 김덕린인 그는 1910년 서울 출신입니다.  그의 아버지 김필순(金弼淳)은 세브란스 의대 1회 졸업생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의사였습니다. 1911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항일독립운동을 하다가 순국하였습니다.   김염은 그 당시 좌파 시나리오 작가인 田漢과 노신의 반봉건, 반억압 진보사상에 경도되어 있었습니다. 김염은 소년시절부터 노신의 사상에 깊은 감화를 받은 것 같습니다.  그가 10대  였을 때 장래 굉장한 영화배우가 되겠다는 꿈을 가집니다. 영화배우면 멋진 이름을 써야되지 않습니까.  소년 김염은 미리서 이름을 하나 지어 놓습니다. 노신을 존경했던 그는 노신에서 신을 따서 金迅이라고 지어 놓습니다.  그러나 영화배우의 꿈은 좀처럼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무작정 상하이에 오지만 그를 기다리는 것은 냉대와 가난이었습니다. 「상하이의 어느 골목 조그마한 음식점, 이미 몇 끼를 굶은 한 젊은이가 식사를 하고 돈이 없어서 섣달그믐까지도 돈을 갚지 못해 입고 있던 웃옷을 저당 잡혀 식대를 갚아야 하는」 생활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영화에 대한 열정은 더 강력하게 불꽃처럼 타올랐습니다. 그는 전에 지어 놓았던 金迅 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불꽃처럼 타오리라는 열망을 담아 불꽃 염으로 이름을 지었습니다.  그래서 김신이 될 뻔한 영화황제가 김염이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김염의 솔녀가 얼마전에 자신의 할아버지 이야기를 추적하여 쓴 「상하이 올드데이스」라는 책에 나온 내용입니다.   노신의 영향은 10대의 조선 소년의 가슴에까지 파고 들어갔음을 알 수 있습니다.  김염은 자신의 연기를 민중의 오락거리로 제공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영화에 나타나는 정신은 반봉건, 반억압, 반일정신이었다 합니다. 「大路」「壯志凌云」으로 대표되는 항일영화의 제작에 앞장섰던 김염을 통해, 중국인들은 외세를 배척하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려는 진보적인 젊은이의 모습을 발견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영화를 보고 따라 했으며, 청소년과 대학생들은 그의 동작과 말투까지 따라 했다고 합니다.  저는 며칠 전 김염의 미망인 친이여사를 만날 기회가 있었습니다. 여사는 노신의 미망인 쉬광핑 여사와 교류하면서 같이 활동하였다고 들려 주었습니다. 「상하이 올드데이스」는 내년쯤 중국어 번역본이 나올 예정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김염의 이야기를 통해서도 한 비판적 지식인의 선각자적 정신이 얼마나 깊고 넓게 공명되는 지를 알게 됩니다.   어떤 면으로 보면 김염은 한류의 원조라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중국사람들은 참 묘합니다.  제가 보기에는 중국인이 더 이쁜데 그들은 한국인이 더 예쁘다고 합니다.  요즈음 한류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저는 아무리 보아도 중국 배우나 탈렌트가 더 예쁩니다.  그런데 중국인들은 한류배우에 푹 빠져 있습니다. 중국인들이 일부러 짐짓,그러는지 왜 그러는지, 어떨땐 의심이 납니다.   김염이 영화계의 한류원조였다면 당시 음악계에서는 鄭律成이라는 음악가가 또한 한류원조였습니다.  나이든 중국인들은 그가 지은「연안송」을 다 안다고 합니다. 1990년 북경에서 개최된 아세안게임 개막식에서 울려 퍼진 노래「중국인민해방군가」를 지은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도 당시 나라 잃은 조선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이곳 상해에서 음악공부를 하였고 연안의 노신 예술학교에서 음악을 연마하고 가르쳤습니다. 그의 고향 전남 광주에서 오는 11.12일 제1회 정율성 국제음악제가 열린다고 합니다.   저는 김염과 정율성이 모두 노신과 관련되어 있다는 점에서도 흥미를 느끼지만 중국인의 포용성에 대하여 경이에 가까운 느낌을 받습니다. 어떻게  이민족의 배우를「영화황제」로서 받아들이며, 어떻게 이방인에게 자국의 군가를 짖게 하느냐는 것이지요.  아마 우리 한국에서였더라면 상상도 못할 일일 것입니다.  우리는 중국인의 이런 포용성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포용하는 자가 결국 크게 되고 승자가 되지 않겠습니까?  저는 중국이 땅 덩어리가 커서 큰 것이 아니고 중국인들의 이러한 포용성 때문에 크게 보입니다.     노신에 대한 묘사와 비유는 수 없이 많습니다. 그 중에서도 다음과 같은 표현은 아무리 보아도 일품입니다.   '메스를 손에 들고 만나는 사람마다 마취약도 사용하지 않고 그들의 환부를 도려내고 마는 기이한 의사'   딱 노신의 모습이 앞에 나타나지 않나요? 이것은 조선인으로서는 최초로 노신을 방문취재 했던 언론인 신언준의 묘사 입니다. 그가 노신을 인터뷰한 것은 1933년 5월이었습니다.  기사는 그로부터 1년 뒤인 1934년 4월 신동아에 라는 제목으로 발표되었습니다. 국민당정부의 要注意 인물로 반은 숨어살다시피 하고 있던 노신을 몰래 탐방하여 인터뷰한 노신방문기는 희귀한 자료에 속합니다.  그를 만나게 된 과정부터 그의 수입에 비해 검소하기 짝이 없는 생활상과 세계혁명이 완성되어야 약소 민족도 해방될 것이라는 노신의 육성을 전한 것은 상해 거주시기의 노신을 이해하는 데 간명하면서도 중요한 자료이기 때문입니다.   노신은 식민지 시대의 조선인 문학가들에게 특히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 예를 여기에서 다 열거할 수 없고 또 제가 자세히 알지도 못합니다. 단지, 노신과 관련해서 꼭 알아야 될 한 사람이 있습니다.  한국학생 여러분이 다 아는 이육사입니다. 「청포도」,「광야」의 시가 지금도 교과서에 나오죠? 그는 노신에게서  영혼의 감화를 받았고 노신을 찾아가 만났으며 노신이 죽자 장문의 추도사를 조선일보에 연재하였으며, 그리고 항일독립운동을 하다가 17차례나 옥고를 치른 끝에 북경의 일본 감옥에서 40세의 젊은 생을 슬쓸히 마감합니다. 그는 조선인으로서 항일 독립 운동을 하다가 최초로 옥사한 시인이기도 합니다. 이육사라는 이름은 대구형무소에서 옥살이할 때 죄수번호 264에서 음을 따온 것입니다 . 노신과 한국관계를 탐색하던 중 내가 다시 만나게 된 이육사는 고등학교 교과서에서 배웠던 청포도에 투영된 그런 서정시인만은 아니었습니다.  백마를 탄 채 세상을 내려다보는 그런 세속을 초월한 초인은 더욱 아니었습니다. 일제의 암흑 속에서 온 몸을 불살랐던 더 없이 순결하나 더 없이 뜨겁게 타올랐던 불꽃같은 영혼이었습니다.  시대의 어둠과 격량을 온 몸으로 부딛치며 고뇌하며 행동 했던 지식인의 표상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노신을 길잡이 삼은 것은 어쩜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가 노신을 찾아가 만난 것은 1932년 6월 국민당에 의해 암살 당한 혁명원로 양싱푸(楊杏佛)의 장례식에서였습니다. 노신이 죽기 3년전의 일입니다. 이육사는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1932년 6월초 어느 토요일 아침이었다.  식관에서 나온 나와 M은 네거리의 담배가게에서  조간신문을 사서 들고 근육신경이 떨리도록 굵은 활자를 한숨에 내려 읽은 것은 당시 중국과학원 부주석이요 민국역명의 원로이던 양행불(楊杏佛)이 남의사원(藍衣社員)에게 암살을 당하였다는 기사이였다. (중략) 그리고 그 뒤 3일이 지난 후 R씨와 내가 탄 자동차는 만국빈의사 앞에 다았다. 간단한 소향의 예가 끝나고 돌아설 때 젊은 두 여자의 수원과 함께 들어오는 송경령 여사의 일행과 같이 연회색 두루막에 검은「마괘아(馬掛兒)」을 입은 중년 늙은이 생화에 싸인 관을 붙들고 통곡을 하던 그를 나는 문득 노신인 것을 알았으며 옆에 섰던 R씨도 그가 노신이라고 말하고난 십분쯤 뒤에 R씨는 나를 노신에게 소개하여 주었다.  그때 노신은 R씨로부터 내가 조선 청년이란 것과 늘 한번 대면의 기회를 가지려고 했더란 말을 듣고 외국의 선배앞이며 처소가 처소인만치 다만 근신과 공손할 뿐인 나의 손을 다시한번 잡아줄 때는 그는 매우 익숙하고 친절한 친구이었다. 아! 그가 벌써 56세를 일기로 상해시 고탑 9호에서 영서하였다는 부보를 받을 때에 암연 한줄기 눈물을 지우니 어찌 조선의 한사람 후배로써 이붓을 잡는 나뿐이랴.」     자 이제 우리의 시선을 노신에게로 돌려봅시다.  조선 지식인들에게 이렇듯 큰 영향을 미쳤던 노신 자신은 조선을, 조선인을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노신의 글 속에는 조선이 어떻게 언급되어 있을까요? 노신의 글 어디에도 조선에 대한 언급은 없습니다.  고작, 한 두 마디가 전부이며, 그것도 조선에 대하여 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중국인에 대한 비판을 하면서 부차적으로 언급하고 있을 뿐입니다. 노신 자신이 번역한 어느책 서문에 이런 언급이 있을 뿐입니다.     이 글에서 조선을 언급한 것도 중국인을 비판하기 위한, 또는 계몽하기 위한 맥락에서  '조선'을 언급하였을 뿐입니다.  그런데 어떤 한국인 학자가 쓴 책을 보니까 이 대목을 인용하면서 그렇다면 노신은 일본의 조선침략을 정당한 것으로 보았을까 라며 스스로 곤혹스러운 의문을 제기한 것을 읽었습니다.  저는 그가 과민반응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항상 민족감정에 이르면 누구라도 병적인 과민반응을 보이는 것 같습니다.   노신의 조선과 조선인에 대한 태도랄까.  견해 같은 것이 어떠했는지는 그의 글에는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단지 노신과 이육사가 만났을 때 노신이 이육사를 친근하게 대한 정황을 통해 노신의 대조선 정서를 짐작해 볼 수 있을 뿐입니다.  또한 조선인으로서 그를 최초로 방문 취재했던 신언준과 나누었던 진지하고 솔직한 대화속에서 간접적으로 짐작해 볼 수 있겠습니다.   노신은 신언준과의 대화에서 조선의 문학계와 교류하고 싶다는 희망을 피력  합니다.  그러나 그 뒤에 아쉽게도 교류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만일 신언준이 노신의 바램대로 노신과 조선 문학계를 연결해 주었더라면 노신과 조선인간에는 의미있는 교류가 이루어졌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느껴집니다.   노신 선생이 상해에서 서거한지 약 10년후 한국은 해방을 맞았습니다.  그리고 그 뒤 1992년에 이르기까지 한국과 중국의 관계는 길고 긴 냉전, 동면상태를 거쳐야 했습니다. 모택동 주석이 찬양한 바 있었던 노신이 당시 한국에서 읽히지 않았던 것은 한국이 반공이데올로기에 결박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모택동 주석의 책이나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소지하고만 있어도 끌려가 조사를 당하고 고문을 당했던 시절이었으니까요.   저는 1952년생으로 한국전쟁중에 태어난 세대인데 잊지 못할 기억이 있습니다. 아마 초등학교 2-3학년때부터 였을 것입니다.  어느날 학교에 갔더니 모두 모여 놓고 뭘 강제로 외우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1961년 박정희 장군이 쿠테타를 일으켰는데 소위「혁명 公約」을 만들어 전국 국민학생들에게까지 외우게 한 것입니다.  날마다 그것을 선생님들과 함께 복창하며 외웠습니다. 지금은 다 잊어버렸지만 제1조는 기억이 뚜렷합니다. '반공을 國是의 제1義로 삼고…' 뭐 그렇게 시작합니다.  아무것도 모르고 날마다 외웠습니다.  반공이란 말은 공산주의를 반대한다는 거니까 알겠는데 국시라는 말은 생전 처음 들어본 말로 전혀 모르겠고 제1까지는 알겠는데 제1義 라는 말 같은 것은 무슨 뜻인지 통 몰랐습니다. 선생님들도 무조건 외우라고만 하지 무슨 뜻인지 안가르쳐 줍니다. 그래도 선생님을 따라 열정적으로 외웠습니다.  그때 노신선생이 그 모습을 보았더라면… 기가 막혔을 것입니다.   그러나 참 묘한 것은 그래도 일부 한국의 지식인에게 노신이 읽혔다는 사실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들은 유별난 아웃사이더들이었습니다.  문학을 업으로 하는 사람들을 제외하면 리영희, 박영복, 전우익 같은 진보적인 지식인들이 그런 아웃사이더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한국의 지식인, 청년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고 지금도 미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노신을 좋아했던 그들의 인생역정에 재미있는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뭘까요? 모두가 감옥에 갔다는 사실입니다.  죄명도 같았습니다. 좀 색깔이 붉다는 것이었지요.   노신의 비수와 같은 단문의 일부가 한국 일반에게 소개된 것은 리영희에 의해서였습니다. 리영희는 독학으로 습득한 중국어로 사전을 들쳐가며 노신을 읽었습니다. 리영희는 죽은 노신이 무덤속에서 소리쳐 자기를 불러 일으켰다고 말하곤 합니다. 그는 노신을 삶의 지표로 삼은 지식인이었습니다.  노신은 리영희를 통해 한국에서 부활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가 한국의 현대 지성사에서 어떤 위치를 점하고 있는지 잠깐 보겠습니다. 한 예로서 1999년 말 연세대학원신문이 20세기를 보내고 21세기를 맞는 특집으로 교수와 대학원생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실시하면서 '현재 우리 학계 전반에 큰 영향을 끼친' 학자와 저작을 국내와 외국으로 나누어 조사했는데 국외 학자로는 프로이드가 1위, 국내학자로는 리 영희가 1위로 나타났습니다.   리영희에 대한 일치된 의견은 '1970-80년대 한국 변혁 운동의 중심이었고, 폭압적인 시대 상황에 맞서 싸웠으며, 70년대 냉전주의적 사회분위기에 새로운 시각을 불어넣은 학자'라는 평가였습니다.   그의 글은 노신이 자기글을 비유했던 바로 비수와 투창 그것이었습니다. 그는 노신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여러 책에 수록된 노신에관한 글들에서 자주 언급하였지만 나의 글쓰는  정신이랄까, 마음가짐이랄까 하는 것은 바로 노신의 그것이에요.  글의 기법,문장미, 속에서 타는 분노를 억누르면서 때로는 정공법으로, 때로는 비유.은유.풍자.해학.익살로 상대방을 공격하는 세련된 문장 작법을 그에게서 많이 배웠지요.'   그의 글은 엄청난 파문을 일으켰고 그덕분에 그는 수차례 감옥을 가고 해직되고 고문당하고 모진 시련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가 감옥에서 고통과 절망과 씨름하고 있을 때 그의 정신을 버텨 준 것도 노신 이었습니다.   그는 '노신과 나'라를 글에서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젊은 시절의 누구나 그렇듯이 정신적·사상적 모색으로 고민하던 나는, 노신의 많은 저서를 읽으면서 '실천하는 지식인'의 삶에 감동했다.  단순히 지식을 상품으로 파는 것에 안주하는 교수나 기술자나 문예인이 아니라, 부정한 인위적·사회적 조건으로 말미암아 고난 받는 이웃과 고난을 바꾸어 보려는 지식인의 사회적 의무에 눈을 뜬 것이다.  그 소명감은 인간에 대한 사랑에서 싹튼 것임은 물론이다. 1950년대 말에 중국어 저서(작품)를 사전을 찾아가며 힘겹게 읽어가던 어느 날 가슴에 와 닿는 한 구절에 마주쳤다.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 가령 말일세, 강철로 된 방이 있다고 하자, 창문은 하나도 없고 여간해서 부술 수도 없는 거야.  안에는 많은 사람이 숨이 막힌 채 깊이 잠들어 있어.  오래잖아 괴로워하며 죽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혼수상태이기 때문에 죽음으로 이르는 과정에 놓여 있으면서도 죽음의 비애를 느끼지 못한다.  이때 자네가 큰 소리를 질러서, 그들 중에서 다소 의식이 또렷한 몇 사람을 깨워 일으킨다고 하자,  그러면 불행한 이 몇 사람에게 살아날 가망도 없는 임종의 고통만을 주게 될 것인데, 그래도 자네는 그들에게 미안하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그래도 몇 사람이 정신을 차린다면 그 쇠로 된 방을 부술 수 있는 희망이 전혀 없다고는 말할 수 없지 않은가?' 모든 면에서 군벌지배와 장개석 치하 중국을 방불케 했던 박정희 대통령 치하에서 고민하던 나는 이 구절을 읽는 순간 그 구절은 무덤에서 노신이 나에게 타이르는 소리같이 들렸다.  나는 눈을 뜨고 정신을 번쩍 차렸다.  나는 내가 할 일이 무엇인가를 깨달았다.  맹목적이고 광신적이며 비이성적인 극우, 반공주의에 마취되어 있는 사람들을 잠에서 깨어나게 하여 의식을 바로 잡아주는 일이 나의 삶의 전부가 되었다. 내가 몇 사람의 잠을 깨우고 몇 사람의 의식을 깨우쳤는지는 정확히는 알 수가 없다.  노신처럼 '역사'를 밀고 갈 능력이 없는 사람으로서는 한 '시대'와 함께 살아왔다는 것으로 만족한다.  30년전 나의 의식의 눈을 뜨게 해 준 노신에 대한 조그마한 답례를 한 셈이다.」     노신을 일러 많은 중국 사람들이 민족혼이라 하는 거 같습니다. 지금부터 69년전인 1936년 10.19일 노신이 서거했을 때 그의 유해 위에는 민족혼이라고 크게 쓴 銘旌이 덮힙니다. 북경의 노신 박물관 사이트르 열면 거기에도 크고 굵은 글씨로 써진 민족혼이라는 제목아래 노신이 설명되어 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이방의 한 노신 애독자로서 관위에 민족혼이라는 글자가 쓰인 사진을 볼 때 마치 노신 선생의 혼이 민족혼이라는 굴레속에 유폐되어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제가 이방인으로서 소통하는 노신은 어느 한곳에 딱 규정하여 넣기 힘든 그런 자유스러운 존재입니다.   노신 선생의 삶과 글, 사상을 일관되게 관통하고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의 노예화에 대한 분노어린 외침이 아닌가 싶습니다.  또한 그 외침은 물론 보편적 인간애에 굳건히 바탕하고 있음을 느낍니다.   그의 심안에 비친 중국의 역사는 황금빛 찬란한 역사가 아니라 노예의 역사  였습니다.  노예가 되고 싶어도 되지 못한 시대와 잠시 노예로 안정되었던 시대가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저는 이 글을 처음 대할 때 어리둥절하였습니다.  그리고 서서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노예화는 중국의 현상만이 아니고 바로 나의 문제이고 인류  역사의 문제임을 말입니다.   노신이 한국에 지금 나타난다면 우리에게서 노예가 아닌 자유인의 모습을 볼까요?  5살쯤이면 여러 학원으로 끌려 다니는 어린이의 모습에서 노예화의 모습을 볼지도 모릅니다.  끊임 없이 맹목적인 경쟁속에서 삶을 소진하고 있는 청소년들, 소비와 생산의 객체로 전락한 인간군상에서도 그는 노예의 모습을 볼지 모르겠습니다.   루쉰은 언제 읽어도 지금을 살고 있는 '나'에게 말을 거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는 값싼 희망을 팔지는 않습니다.   참, 묘합니다.  희망을 파는 사람의 목소리는 공허하게 들리는데 희망을 말하지 않는 노신의 저음속에서는 웬지 모를 희망이 느껴집니다.   노신은 그의 작품 [고향]의 말미에서 희망에 대하여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 나와 윤토사이는 마침내 이렇게 멀어지고 말았구나. 그러나 우리의 후대들은  여전히 한마음으로 이어져 있다. 나는 그들이 나를 닮지 않기를 바라며, 사람들 사이에 장벽이 생기지 않기를 바란다......... 그들에게는 마땅히 우리가 아직 겪어보지 못한 새로운 생활이 있어야 한다........ 희망이란 본래부터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는 것 아닌가. 그것은 마치 땅위의 길과도 같은 것이 아닐까.  사실은 길이란 본래부터 있는 것이 아니다. 다니는 사람들이 많아 지면서 차차 생긴 것이다.]   이렇듯 노신이 꿈꾸었던, 사람 사이에 장벽이 없고 나라 사이에도 장벽이 없는, 아직 겪어본 적이 없는 새로운 세상, 그것은 여전히 21세기 동아시아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꿈이기도 할 것입니다.   돌아보면 노신이 고뇌속에 살다간  지난 20세기는 야만이었습니다. 한 중 일  같은 또래의 젊은이들이 같은 전쟁터에서 만나 서로 총부리를 겨눠야만 했던, 그런 야만과 악몽은 이제 다시는  되풀이 되어서는 안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노신의 다음과 같은 말로 제 이야기를 끝마칠까 합니다.   「현재에 불만을 품은 자는 그러나 복고적이어서는 안된다. 왜냐면 우리 눈앞에 또한 갈 길이 있기 때문이다. 역사상 미증유의 제3의시대를 창조하는 일.  바로 이것이 오늘날 청년들의 사명이다.」   경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ecoindian (상하이 화동사대 강연고)      
787    천재시인 - 李白의 음주시 연구 /// 술과 시인 댓글:  조회:5619  추천:0  2015-12-05
  이백의 음주시 연구   려원                             초 록      세인들이 다 알다시피,당시(唐诗)는 중국의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특히 이백의 시작품들은 당시에서 한마디로 평판할 수 없는 확고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그의 걸작들은 현재 약900여수가 유전되고 있다. 이런 시 들은 이백의 평생의 포부와 미학사상을 표현하였으며 성당시기 사회 현실 과 정신 생활을 예술적으로 집중화하고 있다.    “성당지음”의 걸출한 대표로 되어 있는 그의 시작품들은 독특한 낭만 적 풍격으로 하여 천고절창이 되었고 무한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는다.그는 초당이래 시가 혁신의 역사적인 사명을 성공적으로 완성하였는데 중국 고전시가의 혁신과 중국고전문학의 발전에 크게 탁월한 공헌을 하였다.    이백의 시창작 풍격을 연구하는 것은 당조시기 시가의 기본면모를 이해 하는 데 도움이 될 수 뿐만 아니라 중국고대 시가들을 한걸음 더 이해할 수 있고 미래 시가의 발전을 위한 방향을 가일층 모색할 수 있다. 이백의 시가들은 이미지가 아주 많은데 본고는 이백의 음주시 중의 낭만주의와 호방표일한 풍격을 재조명하려 한다. 키워드: 이백 시풍격 음주시 호방표일 낭만주의   차 례 논문초록…………………………………………………………………………1~2 제1장  서론……………………………………………………………………4~5 제2장  본론……………………………………………………………………6~10 2.1이백의 생애…………………………………………………………………6~8 2.2대표적인 음주시의 분석…………………………………………………8~10 2.2.1 장진주(将进酒)의 분석 2.2.2 월하독조(月下独钓)의 분석 제3장 결론………………………………………………………………… 12~13 감사의 말………………………………………………………………………14 참고문헌………………………………………………………………………15                                        제1장 서 론       본 고는 이백의 생애와 그를 대표하는 음주시를 둘러싸고 이백의 창작 사상과 그의 문학관에 대해 재조명하고자 한다.   이백은 중국 시가사에서 대표적 시인이다. 흔히 당시를 중국 문학의 꽃으로 비유하는데 이백이야말로 당시 가운데 꽃이라 할 수 있는 시인이다. 또한 이백의 시는 다른 시인들과 비교할 수 없는 월등한 위치에 있으며 현전하는 이백의 시는 약 천 수에 달한다. 이백의 시는 당시에서 많은 부분을 차지함을 알 수 있다.    또한 이백은 천재시인이라 불린다. 그는 시를 지을 때 퇴고 없이 일필 휘지로 써 내려간다. 이백은 호방하며 자유로운 분위기의 시를 썼으며 자연과 인생을 노래하였다. 그리고 누구나 이백하면 음주 시를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이백의 시가들 중에서 많은 것이 정치서경시이다, 이것들은 시인의 비범 한 포부,분방한 격정, 호쾌한 기개를 충분히 표현하였을 뿐만 아니라 성당 (盛唐)시가 앙양되고 분발한 전형적인 음조를 집중으로 대표하였다. 이백 의 시가 제재는 아주 다양한데 7언절구,5언절구와 고체시등 있다. 이백은 술의 친구이어서 음주시는 대표적이고 유명하다.     이백은 성당문화 속에서 배출된 천재적 시인이어서 성당시가의 기(气)와 정이 이백의 시가들에서 남김없이 표현되고 있다. 그의 시가창작은 열정 으로 넘치고 있으며 기특한 상상의 세계를 펼쳐보이고 있다. 장쾌한 경치 도 있고 자연스러럽고 명쾌한 경지도 있어서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른다. 그래서 이백의 매력은 바로 성당의 매력이라는 말이 있다.    무엇보다도 주목되는 것은 이백의 강렬한 감정의 분출에 의해 과장된 비유,풍부한 상상 등 낭만주의 표현 기법과 신화전설을 능란하게 운용해서 호방한 기개, 앙양된 정조, 기특한 형상과 비범한 경지를 개척하고 있어서 강렬한 예술감화력을 발산한다. 게다가 생생하고 명랑하고 우미하고 청신 한 언어를 구사하였기에 아름답고 눈부시여 이목을 끌며 천고에 길이 이름 을 남기게 되었다.    본 고에서는 이백의 많은 작품중에서 음주시를 위주로 고찰하고 있다. 이백의 시의 제재는 어느 누구보다도 다양하지만, 그 주종을 이루고 있는 것은 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백은 직감적으로 술고래를 떠올리 게 된다. 그것은 이백은 시선인 동시에 주선이라는 두 이미지가 결부 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두부는 이백을 평하여 ‘술 한 말에 시 백 편(李白斗酒詩百篇)이라 하였다. 이렇듯 이백과 술은 떨어질 수 없는 관계이다. 따라서 이백시에서 음주시가 차지하는 영역은 초월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본 고에서는 이백의 생애와 작품에 대한 고찰을 통하여 이백의 음주시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2. 본 론   2.1 이백의 생애   술과 달의 시인 이백은 중국 성당기(盛唐期)의 시인이며 자 태백(太白). 호 청련거사(靑蓮居士)로 당대 가장 뛰어난 시인이자 중국 문학사상 굴원 을 잇는 두보(杜甫)와 함께 ‘이두(李杜)’로 병칭되는 중국 최대의 위대한 시인으로 ‘시선(詩仙)’ 이라고 불린다.(이백은 시선, 두보는 시성, 왕유는 시불이라고 한다. 그의 어머니가 꿈에서 태백성을 보고 출산했기 때문에 자를 태백이라 했다.)     그의 생애는 분명하지 못한 점이 많아, 생년을 비롯하여 상당한 부분이 추정에 의존하고 있다. 조상이 농서 성기(현재 감숙성 천수현 부근)사람, 조상이 수나라 말엽에 서역으로 흘러들어감, 이백은 중앙아시아 쇄엽에서 출생, 어릴 때 아버지를 따라 면주(지금의 사천 면양지방)에 거주하여서, 어릴 때부터 촉나라에서 수학,유람함. 25세 때에 혼자 몸으로 촉나라를 나와서 임협방도(의협을 신뢰하고 도리를 찾는것)와 교유간알(신분이 높은 사람과 사귀는 것)을 통해 벼슬의 고위직에 올라, "세상을 구제하고 백성 들을 평안하게 하는" 큰 뜻을 실현하기를 희망했다.     그는 동정, 금릉, 양주 등지를 유람했으며 수년후, 전 재상이었던 허어사 의 손녀와 결혼을 하여 안륙(지금의 호북 안륙)에 머물러 살았으며, 그리고 이곳을 중심으로 하여 양양,낙양,태원 등지를 유람했다. 후에 또한 공소   부등 "죽계육일"이라는 칭호를 가진 사람과 함께 동노에서 은거하였다.    천보 초기에 오균이라는 도사의 추천으로 임금의 부름에 장안으로 들어가, 한림으로 봉해졌다. 하지만 기득권 세력의 귀족들로 여러 차례 비방을 받아, 천보 34년 관직을 버리고 장안을 떠나와 개봉을 중심으로 제, 노, 회, 사, 강동사이 북으로는 유연 일대까지 왕래하였다.     안사의 난이 일어나자 이백은 노산에 은거하였으며 계속해서 국가와 백성의 운명을 면밀히 주시하였고 후에 영왕 인의 막부에 참가하게 되었다. 숙종 지덕 2년 영왕 인은 패배하고 이백은 연루되어 욕양에서 옥살이를 하게되고 이듬해 야랑으로 유배가는 도중에 사면을 받고 무창, 욕양, 의성 각지를 전전했다. 대종 보응 원년에 친척 아저씨인 당도(지금의 안휘성 당도현)현령인 이양빙의 집에서 병사했다.     그는 불운을 겪었고 복잡한 사상을 가진 천재적인 시인이며 또한 자객, 은사, 도인 등과 같은 기질을 지니기도 했다. 유가, 도가 그리고 협객 등 세 가지 사상을 몸소 실천했는데, ‘공성신퇴 (功成身退:공을 세운 후 물러 나자)’ 는 그의 일생을 지배한 주도적 사상이었다.     불우한 생애를 보내었으나 이백은 그의 천거로  43세 때 현종(玄宗)의 부름을 받아 장안[長安]에 들어가 환대를 받고, 한림공봉(翰林供奉)이 되었던 1, 2년이 그의 영광의 시기였다.   이백은 너무 기뻐 ‘남릉에서 애들과 이별하고 서울로 가노라 [남릉 별아 동입경]’라는 시에서 양천대소하면서 문을 차고 나가노라. 이 장부가 아무 렴 촌에 묻혀 살소냐? 라고 호기롭게 읊었다   도사(道士) 오균(吳筠)의 천거로 궁정에 들어간 그는 자신의 정치적 포부 의 실현을 기대하였으나, 한낱 궁정시인으로서 지위를 감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청평조사(淸平調詞)》 3수는 궁정시인으로서의 그가 현종· 양귀비의 모란 향연에서 지은 시이다. 이것으로 그의 시명(詩名)은 장안을 떨쳤으나, 그의 분방한 성격은 결국 궁정 분위기와는 맞지 않았다.    이백은 그를 ‘적선인(謫仙人)’이라 평한 하지장(賀知章) 등과 술에 빠져 ‘술 속의 팔선(八仙)’으로 불렸고, 방약무인한 태도 때문에 현종의 총신 고력사(高力士)의 미움을 받아 마침내 궁정을 쫓겨나 장안을 떠났다. 현종 의 마음에 들어 호탕하고 방탕한 생활을 3년간 지속하며 당시 권력가인 환관 고력사(高力士)에게 신을 벗기도록 하였으며, 현종의 애첩 양귀비 (楊貴妃)에게 벼루를 들고 서있게 했던 기인이다.      장안에서 보낸 3년의 정치 생활은 이백의 창작에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 그의 정치적 이상과 암울한 현실은 첨예한 갈등을 보였으며, 가슴 속에는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고통과 불만이 쌓였다. 분노는 훌륭한 시를 낳았고, 그래서 , 등의 시에는 옛 선인들에 대한 그리움을 담았으 며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고 걱정하는 마음으로 훌륭한 명작들을 써나갔다.    이백은 후세 사람들에게 9백여 편의 시를 남겼다. 이렇게 빛나는 작품 들은 그 일생의 마음 역정을 표현한 것으로, 성당(盛唐)시기 사회의 현실과 정신생활 모습의 예술적인 묘사이다. 이백은 일생동안 원대한 포부를 품고 한치의 속임도 없이 업적을 쌓으려는 바램을 표현했다. 어려서부터 협객 을 좋아해서 그에 대한 많은 시를 썼는데, 이 그중 대표작이다.     이백의 생애는 방랑으로 시작하여 방랑으로 끝났다. 청소년 시절에는 독서와 검술에 정진하고, 때로는 유협(遊俠)의 무리들과 어울리기도 하였다. 쓰촨성 각지의 산천을 유력(遊歷)하기도 하였으며, 민산(岷山)에 숨어 선술 (仙術)을 닦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의 방랑은 단순한 방랑이 아니고, 정신의 자유를 찾는 ‘대붕(大鵬)의 비상(飛翔)’이었다.     그의 본질은 세속을 높이 비상하는 대붕, 꿈과 정열에 사는 늠름한 로맨 티시스트에 있었다. 또한 술에 취하여 강물 속의 달을 잡으려다가 익사 하였다는 전설도 있다. 그에게도 현실 사회나 국가에 관한 강한 관심이 있고, 인생의 우수와 적막에 대한 절실한 응시가 있었다.    그러나 관심을 가지는 방식과 응시의 양태는 두보와는 크게 달랐다. 두보가 언제나 인간으로서 성실하게 살고 인간 속에 침잠하는 방향을 취한 데 대하여, 이백은 오히려 인간을 초월하고 인간의 자유를 비상하는 방향을 취하였다. 그는 인생의 고통이나 비수(悲愁)까지도 그것을 혼돈화 (混沌化)하여, 그 곳으로부터 비상하려 하였다. 술이 그 혼돈화와 비상의 실천수단이었던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이백의 시를 밑바닥에서 지탱하고 있는 것은 협기(俠氣)와 신선(神仙)과 술이다. 젊은 시절에는 협기가 많았고, 만년에는 신선이 보다 많은 관심의 대상이었으나, 술은 생애를 통하여 그의 문학과 철학의 원천이었다. 두보 의 시가 퇴고를 극하는 데 대하여, 이백의 시는 흘러나오는 말이 바로 시가 되는 시풍(詩風)이다. 두보의 오언율시(五言律詩)에 대하여, 악부 (樂府) 칠언절구(七言絶句)를 장기로 한다.  ‘성당(盛唐)의 기상을 대표하는 시인으로서의 이백은 한편으로 인간 시대 자기에 대한 커다란 기개·자부에 불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기개는 차츰 전제와 독재 아래의 부패·오탁의 현실에 젖어들어, 사는 기쁨에 정면으로 대하는 시인은 동시에 ‘만고(萬古)의 우수’를 언제나 마음 속에 품지 않을 수 없었다. 2.2 대표적인 음주시    이백이 술을 좋아하였다는 사실은 그를 주선이라고 불렸다는 사실에서 충분이 증명된다. 그의 벗 두보가 “이백은 술 한 되에 시를 백 편이나 쓴다”고 읊은 사실과 이백 자신이 “백년은 삼만 육천일, 하루에 삼백 잔의 술을 마시지 않으면 안된다”고 주장한 사실에서도 음주에 대한 보다 적극적인 태도를 짐작할 수 있다.    그의 음주는 삶의 충족을 위해 마신 것만은 아니였다. 영원한 것으로의 지향, 유한한 인생을 극복하기 위한 방편으로도 마셨다. 이백은 술을 마시 면 마음이 쾌활하고 호방해졌다. 취중에서도 이성을 잃지 않았고 도취 속에서도 각성된 감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술에 대한 시를 볼 때 잠꼬대 같은 부분이 보이지 않는 것은 결국 그 표현 속에 엄연한 객관화 정신이 있었으며 동시에 정확한 작시 기법이 있었기 때문이다.   2.2.1 “장진주(将进酒)” 君不見黃河之水天上來 그대 보지 않았는가 황하수가 하늘에서 내려와서 奔流到海不復回               기운차게 흘러 바다에 이르면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것을 君不見高堂明鏡悲白髮 그대 보지 않았는가 고당의 밝은 거울에 비친              백발의 슬픔을 朝如靑絲暮成雪 아침에 푸른 실 같은 머리 저녁에는 눈같이 되었다 人生得意須盡歡 인생이 뜻을 얻었을 때엔 모름지기 환락을 다해야 하며 莫使金樽空對月 황금 술단지 공연히 달빛 아래 버려두지 말아라 天生我材必有用 하늘이 나에게 재능을 주었으니 반드시 쓸데 있을 것이다. 千金散盡還復來 천금 다 써버려도 다시 손에 돌아올 날 있으리 烹羔宰牛且爲樂 양고기를 삶고 쇠고기를 저며서 술 잔치를 즐겨보자 會須一飮三百杯 모름지기 술은 한 번에 3백잔은 마셔야지 岑夫子         잠부자여 丹邱生         당구생이여 進酒君莫停        지금 곧 술을 권하여 하니 잔을 멈추지 말아요 與君歌一曲        그대 위해 한 곡조 시를 읊으리니 請君謂我傾耳聽 청컨대 그대는 나를 위해 귀 기울여주오 鏡鼓饌玉不足貴 아름다운 음악 맛 좋은 음식은 귀한 것이 못된다 但願長醉不用醒 다만 소원은 오래 취하여 깨지 말기를 古來聖賢皆寂寞 옛 성현들은 죽으면 그뿐 잊혀지지만 惟有飮者留其名 술 잘 마시는 사람만이 그 이름을 남겼다 陳王昔時宴平樂 옛날 진왕은 그의 평락관에서 주연을 베풀고 斗酒十千愁換謔 두주를 만금에 사서 마음껏 즐기고 노닥거렸다. 主人何爲言少錢 집주인인 내가 어찌 돈이 적다 말하겠는가 徑須沽取對君酌 모름지기 술을 사서 그대에게 권하겠노라 五花馬                 다섯가지 꽃 무늬의 말 千金衣                 천금의 모피 呼兒將出換美酒 아이 불러 끌어내어 맛 좋은 술과 바꾸어 與爾同銷萬古愁 그대와 더불어 만고의 우수를 쫓아 버리자       이 시에는 인생의 무상함을 개탄하고 술을 마셔야만 우수를 잊을 수 있다는 이백 특유의 술철학이 담겨있다. 황하가 분류하는 것 같은 웅대한 시, 자유분방, 종횡무진으로 구사한 화려한 시구에는 억제하기 어려운 인생의 비애가 넘쳐 흐른다.     이 시와 비교하여 이백의 음주시에서는 내용상 이질적인 면이 보이고 있 는데 예하여“조여청실막성설(朝如靑絲暮成雪)”에서‘아침에 푸른 실같은 머리 저녁에는 눈같이 되었다’라고 표현하고 《對酒》에서는 어제의 홍안 소년 오늘은 백발(昨日 失顔子 今日白髮催)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내용 상에 있어서도 대조를 보이고 있는 곳이 있는데 (莫使金樽空對月) 황금 술단지 공연히 달빛 아래 버려두지 말아라 하고 《把酒問月》에서는 바라 는 것은 노래 부르고 술 마실때 달빛이여 깊이 비쳐다오 금술독 속 (唯願當歌對酒時 月光長照金樽裏 ) 까지 라고 표현하고 있다.       달과 술은 서로 이질적인 소재임에도 불구하고 한 데 묶어서 다루어 보려는 의도는 그만큼 이백의 시의 특수성 때문이다. 한 편의 시 속에서 그는 달과 술을 동시에 소재로 활용하는 경우가 다른 시인에 비하여 많을 뿐만 아니라 이 계열의 시가 유명하다. 이백의 시에는 달과 술이 동시에 소재로 등장하는 경우를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심지어 시 제목에서도 이러한 현상 이 나타나고 있는데 月下獨酌등이 바로 그런한 예이다.   2.2.2                   달 아래에서 혼자 마시다     花問一壺酒 꽃나무 사이에 놓인 한 단지 술은 獨酌無相親 서로 친한 벗도 없이 혼자 마신다 擧杯邀明月 술잔을 들고 밝은 달 맞으니 對影成三人 내 그림자까지 모두 셋이 되었다 月旣不解飮 달은 이미 술 마실 줄 모르고 影徒隨我身 그림자는 부질없이 내 하는 대로 따른다 塹伴月將影 얼마 동안 달과 그림자를 벗으로 行樂須及春 행락은 오로지 봄이 가기 전에 즐기는 것 我歌月徘徊 내가 노래하니 달은 바장이고 我舞影凌亂 내가 춤추니 그림자 어지럽게 흔들린다 醒時同交歡 술이 깨어서는 함께 즐기고 醉後各分散 취한 뒤에는 제각기 흩어진다 氷結無情遊 길이 무정한 놀이를 그들과 맺어서 相期邈雲漢 아득한 은하수에서 만나기를 기약한다.       밝은 달 아래 꽃나무 사이에서 혼자 술잔을 기울이며 달과 그림자를 벗 삼아 마음이 내키는 대로 술을 마시며 즐기는 심경을 독특한 기법으로 노 래하고 있다. 전부 4수로 되어있는 이 시들은 각각 착상이 다르다.    중국문화는 장르중에 시는 역사적으로 주총을 이루었고 특히 당대에 있어서는 최성기를 이루었다. 당대에서도 성당이 당시의 절정기요 이 시대를 대표하는 시인은 이백이다. 이백은 진보적인 낭만주의 시인이었다. 그는 진보적인 낭만주의를 굴원 이래 높은 단계로 끌어올렸다. 그렇기 때문에 당조때 두보가 사실주의를 대표하는 하나의 경향을 이루어 기봉을 이루었다면 이백은 진보적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하나의 경향을 이루었다.     이백은 반평생을 떠돌아다니는 생활을 했는데 전국 수많은 명산과 대천을 다니며 조국의 자연을 찬미하는 많은 분량의 우수한 시들을 썼고, 시를 통해 자유를     사랑하고 해방을 갈망하는 심정을 표현했다. 이러한 작품 속에 기묘한 산천은 거스르고 머무르지 않으려는 그의 성격과 완벽 하게 맞아떨어졌다.     이백은 조국을 매우 사랑하고 백성을 보살폈으며 현실을 인식했던 위대한 시인이였으며, 전쟁과 같은 중요한 문제에 매우 관심이 많았다. 변방을 지키는 장수에게는 열정을 담아 보내는 노래를, 통치자들의 불쌍한 병사 들에 대한 무정한 채찍질을 담은 시들을 썼다. 이백은 또한 많은 악부시를 지어, 노동자들의 힘든 생활을 묘사하고 그들에 대한 관심과 동정을 표현 했다. 이백의 시는 ‘붓이 떨어져 비와 바람을 놀라게 하고 시가 되어 혼을 울리는’ 예술적 매력을 담고 있는데, 이것도 이백 시의 가장 뚜렷한 예술적 특징이기도 하다. 그의 시는 풍부한 자아실현의 주관적 정서의 색채가 매우 강하고, 감정표현에 있어 위세당당하고 일사천리한 기세를 담고 있다.     시는 항상 상상, 과장, 비유, 의인 등의 기법을 종합적으로 활용하여 신기하며 사람을 감동시키는 경지를 만들어냈는데, 이는 이백의 낭만주의 시가 사람들에게 자유분방함과 신선같이 뛰어난 운치를 주는 원인이다.     이백의 시는 이전 낭만주의 창작의 성과를 이어받아 반역사상과 호방한 풍격으로 성당시대의 낙관적이고 진보적인 창조정신 및 봉건질서에 만족 하지 못한 잠재된 역량을 반영하며, 낭만주의 표현영역을 넓히고 기법을 풍부하게 하는 동시에 상당한 수준까지 낭만주의와 현실주의의 결합을 실현시켰다. 이런 한 성과로 인해 그의 시는 굴원 이후 낭만주의 시가의 새로운 절정이 되었다. 이백은 당대 시가의 혁신에 대해서 뛰어난 공헌을 했다. 그는 진자앙 시가의 혁신적인 주장을 계승하여 이론과 실천에서 시가혁신의 최후 성공을 거두었다.                                                       3. 결 론       이백의 위대한 시편들은 성당시대의 상승발전하는 기백을 반영하였다. 이백의 시는 흘러나오는 말이 바로 시가 되는 시풍(詩風)이다. 그는 극대한 용기로써 기득권 세력에 대한 반항에 몰두하였고 세속적인 것에 대한 질책과 열려있는 밝은 정치를 하고자 이에 투쟁하였다. 이러한 완강한 투쟁정신과 자유해방의 열정에 대한 추구는 그의 시가에서 적극적인 낭만주의 정신의 핵심이었다.   ‘성당 (盛唐)의 기상을 대표하는 시인으로서의 이백은 한편으로 인간· 시대· 자기에 대한 커다란 기개·자부에 불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기개는 차츰 전제와 독재 아래의 부패· 오탁의 현실에 젖어들어, 사는 기쁨에 정면으로 대하는 시인은 동시에 ‘만고(萬古)의 우수’를 언제나 마음 속에 품지 않을 수 없었다.     그만큼 이백의 음주시에서는 짧은 일생에 천만고의 시름을 안고 있는 인생, 무엇으로 그 시름을 잊고 이 인생의 무상을 극복할수 있을가 술이 야말로 바로 그 시름을 녹여 없애는 것이며 선물이라는 대 전제하에 과연 이백다운 종횡무진의 낭만과 과장으로 호기로운 음주예찬을 펼쳐가는 작품이다. 취중인 만큼 과장도 호기도 백배로 부풀어 있는 가운데 또한 은근히 때를 얻지 못한 자신의 불우의 분한을 시종 그 밑바닥에 깔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백의 음주시에서는 자연과 인생은 하나의 사랑으로 귀의가 되어있다. 산천초목이며 일월신성이다. 그러한 중에서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달과 꽃과 새와 바람과 구름은 그의 술자리에 동참하여 항상 이백과 함께 하였다. 이백에게 있어서 자연은 적극적 능동의지와 감정을 가지고 있다.    오늘날의 시대에 있어서 이백의 음주시는 그저 단순한 작시하는 그러한 작품이라기 보다는 천인하일의 경지로 들어가는 입장에서 파악 될 수 있다고 보며 이러한 면에서 새로운 각도로 해석을 시도해 보아야 하며 이백의 음주시를 더욱 더 음미해보아야 한다.   감사의 말 논문집필 과정에서 최균선선생님의 사심없는 지도를 받아 순리롭게 완성 했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참고 문헌   1. 孫宗燮, 『李杜詩新評』, 정신세계사, 1996 2. 郭沫若, 『李百과 杜甫』, 까치, 1996 3. 張基槿, 『李太白評傳』, 乙西文化社, 1987 4. 金學主, 『中國文學史』, 新雅社, 1993 5. 丁範鎭, 『中國文學史』, 學硏社, 1993 6.《李白诗歌鉴赏集》,巴蜀书社 1998年2月 7. 《李白集》山西古籍出版社,2004年6月 8. 安旗:《李白全集编年注释(上、下)》巴蜀书社,2000年4月第1版 9. 王寅明著:《李白全传》长春出版社,2002年7月第一版 10. 霍松林、尚永亮:《李白诗歌鉴赏》,上海教育出版社,1989年 11.《李白诗》,人民文学出版社,2005年5月 12. 王步高:《唐诗鉴赏》,南京大学出版社,2006年7月 13.  박충룩저, 북경민족출판사, 2003년10월제1판 14. 이창룡, 『李百』, 건국대학교출판부, 1994     =======================================================   편집자   고전 시가와 현대시를 망라하여 술은 시의 중요한 핵심 소재로 다루어지고 변주되어 왔다. 술은 시인에게 시적 상상력을 자극하는 대상으로 혹은 현실과 이상의 괴리에서 오는 중압감을 풀어주는 매개인 동시에, 비극적인 현실이나 시대적 상황을 타파하고 시대를 통찰하는 매개로 등장하고 있다. 시인과 술 술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술이 제의의식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아처 텅(A. Tongue)에 의하면 술은 석기시대부터 제조되었으며, 최초의 술은 꿀로 빛은 하이드로멜(hydromel)이라는 발효주라고 추측되고 있다. 제의의식이 민중의 생활 속으로 확산하기 이전, 술은 종교의식을 관장하던 제사장들만의 전유물이었다. 제의의식에 받쳐지는 제물이 사람이었다가 동물로 대체되었고 이때 동물의 피는 신성함을 의미했다고 한다. 이후 동물의 피 대신 술로 대신하면서, 신에게 바쳐지는 술은 신에게 의탁하여 신의 힘으로 세상을 관장하는 기원을 담은 매개였기에 신성한 기운을 지닌 것으로 취급되어 왔다. 이와 같이 술은 조상과 신의 은덕에 예를 갖추어 보답하는 종교적 의미로 다루어져 왔고, 사회 공동체의 결속을 다지는 화해의 수단으로 부각되기도 하였다. 또한 인간의 일용할 양식으로, 때로 치료약으로 활용되면서 술은 인간의 삶에 다양한 역할과 기능으로 작용해왔다. 중요한 기호식품의 하나인 술은 그 어원도 주목을 요한다. 고유 우리말인 ‘술’은 예전부터 ‘수블’ 혹은 ‘수불’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우리 선조들은 술을 빚는 과정에서 누룩의 효모 때문에 거품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모양새를 물에 불이 붙은 것으로 보아 ‘수불’이라는 표현을 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 문헌에서는 술을 ‘수울’ ‘수을’로 기록하고 있으며, 학자들은 ‘수블→수울→수을→술’로 변화된 것으로 보고 있다. 문학 특히 시와 술은 깊은 연관성을 지닌다. 시에서 술은 중요한 소재로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성으로 지칭되는 이태백과 두보를 떠올릴 때도 시와 함께 연결되는 것이 바로 술이다. 이태백은 〈월하독작(月下獨酌)〉에서 “석 잔을 마시니 도를 통한 듯하고 한 말을 마시니 자연과 합치된다.(三杯通大道 一斗合自然)”라고 했으며, 〈장진주(將進酒)〉에서는 “양고기 삶고 소 잡아 즐기려 하나니 모름지기 한 번 술 마시면 삼백 잔은 마셔야지”라며 술 마시기의 즐거움을 노래하고 있다. 우리 시문학에서도 술은 단골 소재이다. 여러 시인의 작품에서 술은 다양하게 변주되어 왔다. 우리 술 문화를 살펴보면, 삼국시대가 우리 술의 발아기라고 한다면, 고려시대는 성장기, 조선시대는 전성기, 일제강점기는 쇠퇴기, 그리고 현대는 부흥기로 나눠볼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좀 더 세분화하면, 한국 술의 변천사는 7단계로 나누어 삼국시대 이전의 형성기, 삼국시대를 맹아기, 통일신라시대를 정착기, 고려시대를 개발기, 조선시대를 전성기, 일제강점기를 침몰기, 그리고 해방 후부터 근대를 표류기로 구분할 수 있다. 삼국시대의 술 빚기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지만, 일본의 《고사기》에 “응신천왕(應神天王), 270~312년) 때 백제의 수수보리라는 사람이 누룩을 사용하여 술을 빚는 신법을 일본에 전래하였다”는 기록에서, 삼국시대의 술 빚기 기술이 상당히 발달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술에 관련한 기록이 처음 발견되는 문헌은 이규보(李奎報)의 〈동명왕편〉에서 찾을 수 있다. 고구려 시조인 동명성왕(東明聖王) 건국담의 술에 얽힌 고사가 《고삼국사》에 인용되어 있다. 비단 자리를 눈부시도록 깔고 금 술잔에 향기로운 술을 차렸네. 세 처녀 스스로 거기 들어와 마주 앉아 술 마시고 크게 취했네. 위의 기록을 살펴보면, 비단 자리가 눈이 부시도록 깔린 곳에, 향기로운 술과 금 술잔이 준비된 곳에 세 처녀가 마주 앉아서 술에 취한 흥겨운 장면이 나타나고 있다. 이 세 처녀가 바로 하백의 세 딸인 유화, 훤화, 위화이다. 그리고 이들을 초청하여 술을 대접한 이는 해모수이다. 하백의 딸 유화, 훤화, 위화가 더위를 피해 압록강의 웅심연서 놀고 있는데, 천제의 아들 해모수가 세 처녀의 아름다움에 도취하여 신하를 시켜 가까이하려 했으나 그들이 응하지를 않았다. 뒤에 해모수는 신하의 조언을 구하여 웅장한 궁실을 지어 그들을 초청하였는데 초대에 응한 세 처녀가 술대접을 받고 만취한다. 해모수는 세 여자가 술에 취한 틈을 타서 방문을 막고 닫자 놀란 세 여인이 달아났는데, 그 중의 큰딸 유화가 해모수에 잡혀 궁전에서 잠을 자게 되고 해모수와 정이 들게 된다. 해모수는 유화와 함께 오룡거를 타고 수궁으로 가서 유하의 아버지인 하백을 만나러 가게 된다. 결국 하백과 해모수가 서로 동물로 변신하며 재주를 겨룬 끝에 승리한 해모수와 유화는 결혼에 성공한다. 하지만 유하의 아버지인 하백이 해모수가 자신의 딸을 버릴까 하는 걱정 끝에 술을 잔뜩 먹여 두 사람을 가죽 부대 속에 가두어 오룡거를 태워서 내보냈다. 오룡거가 궁중을 빠져나오기 전에 해모수는 이레 만에 술이 깨어 유화의 금비녀로 가죽 부대를 뚫고 나와 하늘로 올라갈 수 있었다. 이후 유화가 수궁으로 되돌아갔지만, 화가 난 하백이 유화에게 입술이 석 자나 되게 늘어지는 벌을 주어 결국 우발수라는 곳으로 쫓겨났다. 혼자가 된 유화는 해모수와 술에 얽힌 하룻밤의 인연으로 잉태하여 아이를 낳았는데 이가 바로 주몽이다. 이상이 이규보의 동명왕편에 나오는 고구려 건국 신화 속이 술 이야기이다. 고구려 주몽의 건국 신화에 기록된 고구려의 술 문화는 이후 통일신라 시대로 이어졌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헌강왕의 기록에서 드러나듯 일반인들이 체를 통해 막 거른 막걸리를 음용한 반면, 상류사회에서는 맑게 거른 술인 청주를 음용하는 일이 성행하였다고 한다. 이와 같이 《삼국사기》 《삼국유사》 《고려도경》 《제민요술》 등의 문헌의 술에 대한 기록으로 보아 우리 술의 역사는 삼국시대부터 술 문화가 이어져 내려옴을 알 수 있다.   《고려도경(高麗圖經)》과 이규보의 〈명일우작(明日又作)〉 고려시대에 들어서 송나라와 문화적 교류가 이루어지면서, 술 문화는 더욱 활발해졌다. 당시에 송나라 사신(국신사)으로 고려를 방문했던 서긍이 쓴 《고려도경(高麗圖經)》을 살펴보면 고려인의 술 문화를 엿볼 수 있다.     이백(李白)의 〈월하독작(月下獨酌)〉을 묘사한 그림. 《고려도경》은 고려 인종 원년(1123년 5월 8일)에 송나라 사신인 서긍(1091~1153년)이 국신사로 1개월 동안 고려 수도 개성에 머물면서 우리나라의 문물을 기록한 자료이다. “고려 초에 술은 미곡(米穀)으로 빚었는데 찹쌀 술이 없고 모두 멥쌀에 누룩을 넣어 술을 빚었다는 기록이 보이며, 이렇게 만들어진 술은 색깔이 짙어 쉽게 취하고 빨리 깬다 하였으며, 왕이 마시는 것을 양온(良醞)이라고 하는데 술을 질항아리에 넣어 황견으로 봉하여 저장하여 걸러서 맑은 술을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와 같이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를 거치면서 발아했던 술 문화가 고려시대에 이르러서 더욱 성행하여 술의 종류가 늘고 주조 기술법 또한 번창하였다. 그러나 이때까지도 소주에 대한 내용은 기록에 보이지 않는다. 소주가 고려에 유입된 것은, 고종 6년(高宗 6년, 1219년)이다. 이 시기에 원나라와 국교를 맺게 되고, 약 90여 년의 원나라 간섭기에 원의 음식문화 전래로 채식문화가 육식문화로 변모하게 되고 더불어 소주와 같은 증류주 문화가 유입된다. 이는 《고려사(高麗史)》 우왕(禑王) 원년(1375년)의 기록에서 소주 음용의 기원을 찾아볼 수 있다. “마침내 우리나라는 곡주 위주의 탁주류, 청주류, 증류주의 3대 주종문화(酒種文化)를 고려시대에 완결하는 한편 북방유목민족의 유주문화권(乳酒文化圈), 남방민족의 열대과실주문화권에서 화주(花酒, 과실주의 일종), 서역사회(西域社會)의 포도주문화권에서 포도주 등이 유입됨으로써 범세계적인 주류 문화권과 교류가 고려시대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한국 술의 개발기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술 문화의 배경 속에서 시인이며 정치가였던 고려의 이규보(1168~1241)는 술을 애용하고 술에 관한 시를 쓴 인물이다. 이규보는 시와 술과 거문고를 좋아하여 삼혹호(三惑好)라 스스로 호를 붙이기도 하였다. 이규보는 이미 15세 때 술의 맛을 통달할 정도로 애주가였다. 그의 술 사랑이 얼마나 지극했던지, 친상(親喪)을 당한 와중에도 술을 마셨고, 심지어 병석에 누워서도 술을 끊지 못했다고 한다. 또한 〈하루 동안 술을 마시지 않고 희롱 삼아 짓다〉라는 시에서 “일만 팔십 일 만에 오늘 다행히 술을 깼다”라는 내용을 통해 그의 음주벽을 알 수 있다. 그는 시 〈명일우작(明日又作)〉과 〈화유(花柳)〉를 통해서도 술 예찬론을 펼치고 있다. “하늘이 나로 하여금/ 술을 마시지 않게 하려면/ 꽃과 버들이 피지 말도록 하여라/ 화유가 꽃다울 때 마시지 못하면/ 봄은 나를 버릴지언정/ 나는 못 버리겠네”(이규보 〈화유花柳〉)라고 적고 있으며, “생강이나 계피를 섞어 말린 육포나, 절인 생선 담은 접시와 뜸 잘 들인 밥이 든 솥이나, 식혜 한 단지나 좋은 술 한 병을 스승에게 바쳐 속수의 의식을 행하려고 오는 사람이 있거든 너는 짖지 말라”(이규보 〈명반오문(命斑獒文)〉고 적고 있다. 病時猶味剛辭酒   병중에도 오히려 술을 사양 못하니 死日方知始放觴   죽는 날에 가서야 술잔을 놓으리라 醒在人間何有味   깨어서 살아간들 무슨 재미 있으랴 醉歸天上信爲良   취하여 죽는 것이 진실로 좋을씨고 — 이규보(李奎報) 〈명일우작(明日又作)〉 그의 술 예찬은 수필 〈사륜정기〉에서 절정을 이룬다. 시와 거문고와 술을 좋아하여 삼혹호라 붙인 자호와 어울리게, 이규보는 친구들과 함께 술을 마시며 풍류를 즐길 수 있는 정자를 만들려고 하였다. 사륜정이란 정자에 4개의 바퀴를 달아 수시로 장소를 옮겨가며 자연과 친구와 술을 벗 삼아 술과 시의 멋을 즐길 수 있는 이동식 정자인 셈이다. 잠시 〈사륜정기((四輪亭記)〉의 내용을 들여다보자. 여름에 손님과 함께 동산에다 자리를 깔고 누워서 자기도 하고 혹은 앉아서 술잔을 돌리며 바둑도 두고, 거문고도 타고 뜻에 맞는 대로 하다가 날이 저물면 피하니, 이것이 한가한 자의 즐거움이다. 그러나 햇볕을 피하여 그늘을 찾아 옮기느라 여러 번 그 자리를 바꾸게 되므로 그때마다 거문고, 책, 베개, 대자리, 술병, 바둑판이 사람을 따라 이리저리 옮겨지므로 잘못하면 떨어뜨리는 수가 있다. (중략) 바퀴를 넷으로 하고 정자를 그 위에 지었는데 정자의 사방이 6척이고 들보가 둘, 기둥이 넷, 대나무로 연목을 하고, 대자리를 그 위에 덮으니 이는 가벼움을 취한 것이다. — 이규보 〈사륜정기((四輪亭記)〉 중에서 이 정자의 면적은 모두 36평방척(平方尺)이며, 소위 이동식 정자로 정자 위에 거문고, 술 단지, 술병, 소반, 기명 바둑판 등을 갖추고 여섯 사람(거문고 타는 자, 노래하는 자, 詩僧, 바둑 두는 자 두 사람, 그리고 주인)이 앉게 되어 있다. 바퀴가 있어 하인들이 밀고 끌어서 경치 좋은 곳에 세워두고 즐기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쯤 되면 술과 친구를 좋아하고 자연을 벗하려는 풍류의 절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송강 정철의 〈장진주사(將進酒辭)〉 조선시대에 들어와 술 문화는 조선 초기와 후기에 다소 변화가 생긴다. 조선 초기에 지배층에 의해 음주문화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면 후기에는 일반인들에게도 술 문화가 확대되었다. 조선 후기에 들어 술 문화가 일반 서민층에게도 확대된 것은 농업기술의 발달과 쌀의 생산량 증대와 연관이 있다. 이러한 기반에 힘입어 원나라에서 유입된 증류주인 소주류 제조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탁주, 청주, 소주가 우리나라 술로 자리매김 되어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다.       특히, 중종(中宗, 1506~1544) 때 원(元)에서 유입된 소주가 널리 전파되었는데 후기에 들어와 농업기술의 발달로 증류주인 소주류가 일반인들도 즐겨 이용하여, 몽골이 일본 점령을 위해 만든 전초기지가 있던 안동, 개성과 제주가 오늘날에도 소주로 유명하다. 이러한 이유로 조선시대에 들어 고려시대와 비교하면 술의 제조법도 한층 활발해졌으며, 일반인들도 술을 즐겨 마실 수 있게 되었다. 이 외에도 《부녀필지(婦女必知)》의 음식총론(飮食總論)에서도 음식과 술의 관계를 소개하고 있으며, 《수운잡방(需雲雜方)》에는 막걸리, 맑은술, 소주, 절기주 등 특히 술의 종류와 술 빚는 법에 대한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고려시대에 시성으로 이규보가 있었다면, 조선에는 송강 정철이 있었다. 당쟁에 의한 좌천과 유배와 은둔 시절에 〈관동별곡〉 〈성산별곡〉 〈사미인곡〉 등의 걸작을 남긴 송강 정철 역시 대표작 〈장진주사(將進酒辭)〉란 권주시에서 술 예찬론을 펼치고 있다. 〈장진주사(將進酒辭)〉는 자연과 어울리며 술잔을 기울이는 풍류와 함께 생의 유한함과 당쟁으로 부귀와 명예의 허명과 생의 비애를 노래하고 있는 작품이다. 한 잔 먹세그려/ 또 한 잔 먹세그려/ 꽃을 꺽어 셈하며/ 무진 먹세그려/ 이 몸이 죽은 후면/ 지게 위에 거적을 덮어/ 졸라서 매어가나? …… 하물며 무덤 위에 원숭이들이 휘파람 불며 돌 때 가서야/ 뉘우친들 어찌할 것인가!       — 송강 〈장진주사(將進酒辭)〉 송강 정철의 권주시편을 감상하다 보면 옛 선비들의 은은하면서 여유 있는 기개와 풍류를 엿볼 수 있다. 송순의 〈면앙정가〉에도 술에 관련된 구절이 있다. “술이 익었거니 벗이야 없을소냐 (중략) 온 가지소리로 주흥(醉興)을 배야거니 근심이라 있으며 시름이야 붙었이랴”(송순 〈면앙정가〉) 조선의 술 문화는 시 이외에도 음식에 관련한 고서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술의 제조법에 관련한 대표적인 서적으로는 조선시대 후기인 1670년경에 쓰인 한글 전문 요리서인 《음식디미방》을 꼽을 수 있다. 《음식디미방》의 경우, 총 132조목 중 51조목이 술에 관한 것이다. 더불어 술 제조법을 책의 제일 앞에 기록한 것만 보아도 제사를 중시하던 조선시대의 문화를 알 수 있다. 《음식디미방》 이외에도 술에 관한 기록을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17세기 말엽의 《주방문(酒方文)》(1600년대 말엽)에는 12조목이, 《산림경제(山林經濟)》(1715년경)에는 61조목의 전통주 제법이 기록되어 있다. 빙허각 이씨(憑虛閣李氏, 1759~1824)의 《규합총서(閨閤叢書)》(1815년경),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1850년경) 등에도 술에 관한 기록이 나타난다. 이처럼 조선시대는 한국 술 문화의 전성기로 200여 종의 다양한 술이 생산되었고, 양조주(釀造酒)와 증류주는 물론 각종 약초를 가미한 약용주(藥用酒), 그리고 수차례 증류방법으로 제조된 홍로(紅露)와 감홍로(甘紅露)와 같은 고급술이 생산되었으며, 한국 술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다.” 일제의 주세법, 주세령과 전통 민속주 쇠퇴 그러나 일본이 우리나라를 점령하던 일제강점기에 들어 화려했던 우리의 전통 술 문화는 몰락하여 쇠퇴기로 전환된다. 조선시대에는 양조장이 12만 개나 있었으나, 조선 말기인 1883년에는 일본의 후쿠다(福田)가 부산에 일본식 청주공장을 세운다. 조선총독부는 주세법과 더불어 문화말살정책의 하나로 융희(隆熙) 3년(1909) 7월 ‘주세령’을 공포한다. 그리고 그 해 9월 주세령이 강제 집행되었는데, 일본은 보다 효율적으로 주세를 걷어 들이기 위하여 한국 술 제조를 탁주, 약주, 소주의 세 종류로 규격화하였다. 이러한 일제의 주세법과 주세령은 우리 전통주인 각 지역의 특산주(特産酒)와 가양주(家釀酒) 등의 민속주 제조를 불법으로 규정하여 사라지게 하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이후 한국의 주조계를 근본적으로 개선하기 위하여 몇 차례의 제도가 공포되었으나 일제강점기는 한국 술의 침몰기이며 이들 법안은 광복 후에도 그대로 사용되었다. 일제의 주세법과 주세령 이후 급속하게 우리의 민속 전통주들이 사라지게 되었고, 이 시기에 일본식 청주(淸酒), 맥주, 양주 등의 외국 술이 유입되었다. 해방 이후에도 상당기간 일본식 제도가 남아 있어 민간에서는 제사나 혼사나 회갑연 등을 치르기 위해 가정에서 술을 밀조하였으며 이러한 밀조가 곧 토속주의 맥을 살리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정부의 금지정책이 풀리면서 안동소주, 문배주 등의 증류식 소주와 각종 가양주가 제조되고 발전하게 되었다. 술 권하는 사회와 조지훈의 주도(酒道) 18단계   일제강점기의 조제 금지령과 1965년의 소주 금지령 등을 거치면서 희석식 소주가 유행하여 일반인들도 값싸게 소주를 마실 수 있게 되었다. 소주나 맥주는 주로 일반인들이 저렴하게 마실 수 있는 술이었으며,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동료나 문인들과 술자리를 갖는 시간은 삶의 여유를 의미하기도 했다. 소주나 맥주 등이 일반화하면서, 현대시에도 술과 관련된 작품이 많이 등장하였다. 1920~30년대에 식민지 시기의 김기림, 이상, 정지용 시인의 작품에서도 술에 관련된 내용을 많이 볼 수 있다. 더불어 1950년대 〈목마와 숙녀〉의 박인환을 비롯한 김수영, 신동엽, 박봉우, 김종삼, 서정주, 조지훈, 박목월, 천상병 등의 시인과 김관식, 정호승, 박정만, 김영승 시인 등 2000년대 이르기까지 술은 시인들의 작품에서 개성적으로 변주되어 오고 있다. 특히 1960~70년대에는 문단과 술, 특히 시인과 술은 무척이나 친밀한 단어였다. 60~70년대는 만취의 시대, 술 권하는 사회였다. 우선 술의 공급이 폭발적으로 증대되었다. 막걸리 양조장이 마을마다 널려 있었고, 희석식 소주는 텔레비전 메인 시간대 광고에 흘러넘쳤다. 농촌에서 되로, 공장에서 공단으로 수많은 근로자가 끼리끼리 어울리며 노동의 고통을 술로 잊었고, 개발독재에 저항하던 인사들 역시 그 좌절과 절망을 술로 달랬다. 80년대는 야간통행금지 해제에 따른 폭음의 시대, 밤의 문화의 시대였다. 성공한 쿠데타 시대는 수단과 방법을 묻지 않았다. 돈! 돈! 돈! 돈만 벌어라. 막걸리, 소주가 맥주로. 맥주가 어느새 코냑, 위스키로 바뀌었다. 당시에 문인들이 많이 출입했던 술집으로는 ‘은성’ ‘대머리집’ ‘낭만’ ‘흑산도’ 등이 있었다. 이 중 1970년대 종로 청진동에 있었던 ‘흑산도’란 술집 주인은 시인 권일송(1933~1995)이었다. 그의 시는 제목마저도 〈이 땅은 나를 술 마시게 한다〉(《이 땅은 나를 술 마시게 한다》 한빛사, 1966)라고 붙여 당시 시대상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술을 통해 토로하고 있다. 이 땅은 나를 술 마시게 한다/ 떠오르는 천년의 햇빛/ 지는 노을의 징검다리 위에서/ 독한 어둠을 불사르는/ 밋밋한 깃발이 있다/ 하나같이 열병을 앓는 사람들/ 포탄처럼 터지는 혁명의 석간 위엔/ 노상 술과 여자와 노래가 넘친다/ 이 땅은 나를 술 마시게 한다. — 권일송 〈이 땅은 나를 술 마시게 한다〉 또한 술에 얽힌 시인들의 주벽과 기행의 일화는 시보다 더 흥미로운 경우가 많다. 문인과 술에 관한 저서로는 1953년 서울신문사에서 간행된 수주 변영로의 《명정사십년(酩酊四十年)》과 1960년 신태양사(新太陽社)에서 발간한 무애 양주동의 《문주반생기(文酒半生記)》가 있다. 그리고 한국평론가협회 부회장을 지낸 신동한 선생이 1991년 해돋이에서 출간한 《문단주유기》가 있다. 술로써 세상에 싸움을 거는 시인들의 일화는 곧 세계에 대한 시인의 고민과 투쟁을 드러내는 하나의 은유라 할 수 있다. 시인들에게 술이란 곧 내면의 고통을 달래는 일이기 때문이다. 특히, 김종삼 시인의 술과 관련된 작품은 시를 읽는 독자를 고통스럽게 한다. 술에 중독된 시인의 글에서 서글픔과 가족의 애환이 절절하게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시전집에는 술에 관련한 작품이 약 20여 편이 있다. 손민달은 “김종삼의 시 세계에서 파편화된 현실은 ‘술’을 통해 오히려 비극화되었고 동일시된 타인과 교유하며 환상의 세계에서 원형의 복원을 꿈꾸”었다고 평했다. 김종삼은 시 〈장편〉에서 “쉬르레알리즘의 시를 쓰던/ 나의 형/ 宗文은 내가 여러 번 입원하였던 병원에서/ 심장경색증으로 몇 해 전에 죽었다./ (중략) / 아우는 스물두 살 때 결핵으로 죽었다/ 나는 그 때부터 술꾼이 되었다.”라며 술을 마시게 된 이유를 형의 죽음과 폐병으로 사망한 동생에 대한 슬픔에서 비롯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또한 산문에서도 “살아가노라면 어디서나 굴욕 따위를 맛볼 때가 있다. 화가 나서 마시고 어째서 마시고 했지만 한 마디로 절제를 못했다. 일종의 현실도피였다.”라고 고백하고 있다. 그는 이와 같이 비극적인 가족사와 경제적인 어려움 그리고 현실에 대한 비극적 정황 인식을 술로 달래었다. ‘술병’이 도지면 눈에 술밖에 보이는 게 없다. 아내는 환자가 밖에 나가지 못하게 돈은 물론 토큰까지 뺏어가지만 그는 무작정 나선다. 동네 가게에서 외상으로라도 술을 마셔야 했다. 그러나 미리 당부를 받은 가게 주인은 가라고 소리친다. 그는 쫓겨나듯 아내의 발길이 미치지 못한 윗동네 가게로 가서 무작정 소주를 딴다. ‘돈은 나중에’라고 말하게 되면 상대 쪽에선 당연히 욕설이 튀어 나왔다.  술을 마시기 시작하면 며칠 동안 계속 소주를 마시며 폭음을 하여, 결국 술 때문에 지병인 간경화증으로 죽음을 맞았다. 이러한 그의 비극적 삶의 면면이 몇 편의 시에 그려지고 있다. 빗방울이 제법 굵어진다 길바닥에 주저앉아 먼 산 너머 솟아오르는 나의 永園을 바라보다가 구멍가게에 기어들어가 소주 한 병을 도둑질했다 마누라한테 덜미를 잡혔다 주머니에 들어 있던 토큰 몇 개와 반쯤 남은 술병도 몰수당했다 비는 왕창 쏟아지고 몇 줄기 光彩와 함께 벼락이 친다 强打 連打 — 김종삼 〈극형〉 또 죽음의 발동이 걸렸다 술 먹으면 죽는다는 지병이 악화되었다 날짜 가는 줄 모르고 폭주를 계속 하다가 중환자실에 幽閉되었다 무시무시한 육신의 고통 속에서 허우적거린 다 고통스러워 한시바삐 죽기를 바랄 뿐이다. 희미한 전깃불도 자꾸만 고통스럽게 보이곤 했다 해괴한 팔자이다 또 죽지 않았다 뭔가 끄적거려 보았자 아무 이치도 없는  —김종삼 〈죽음을 향하여〉 위의 시를 보면 술 때문에 겪는 고초가 녹록지 않음을 알 수 있는데, 자신의 신상에 관련한 체험적 내용을 과감하게 시적 소재로 차용하는 시인의 솔직함이 더욱 시를 감동적으로 읽히게 한다. 술은 이처럼 시인에게 시적 상상력이나 기질적 우울을 달래주는 역할도 하지만, 반면에 사람을 폐인으로 만들어 일찍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경우도 많다. 김종삼 시인 이외에도 술에 관련한 일화를 꼽으라면 술성이라 불렸던 〈승무(僧舞)〉의 시인 조지훈을 빼놓을 수 없다. 조지훈의 술에 관한 일화와 사람에 대한 정이 넘치는 일화는 〈술은 인정이라〉는 수필을 통해서도 잘 알 수 있다. 수필에서 그는 술을 마시면서 생긴 에피소드를 소개하며, “술을 마시는 것이 아니라 인정을 마시고, 술에 취하는 것이 아니라 흥에 취하는 것이 오도(吾道)의 자랑이거니와 그 많은 인정 속에 술로 해서 잊지 못하는 인정가화(人情佳話) 두 가지를 지니고 있다.”라고 자신의 주도를 술회하고 있다. 또한 〈주객이 아니라는 성명〉에서 조지훈은 “나는 폭주 20년의 주력은 있지만 그동안 1만여 번의 술좌석에서 일어난 일을 거의 잊은 적이 없고 혼자서 술을 마신 적이 없다”고 했다. 또한 “다만 술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술 마신 흥취를 좋아하는 것이다”라며 애주가다운 면모를 보이고 있다. 조지훈 시인은 술에 대한 여러 가지 단계를 설명한 〈주도유단(酒道有段)〉에서 “음주에는 무릇 열여덟의 계단이 있다.”라고 했다. 더불어 “첫째, 술을 마신 연륜이 문제요, 둘째 같이 술을 마신 친구가 문제요, 셋째는 마신 기회가 문제며, 넷째 술을 마신 동기, 다섯째 술버릇, 이런 것을 종합해 보면 그 단(段)의 높이가 어떤 것인가를 알 수 있다.”라고 적고 있다.       조지훈 못지않게 잘 알려진 애주가로는 미당 서정주(徐廷柱)가 있다. 1990년대만 하여도 당시 문단에선 새해가 되면 선배 문인들에게 세배를 가는 풍습이 있었다. ‘소설가들은 동리 선생의 댁으로, 시인들은 미당 선생의 댁으로’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문단의 선후배 사이가 돈독했으며, 그런 자리에는 으레 술이 함께 하기 마련이었다. 미당은 특히 말년에 맥주를 좋아하였는데, 맥주 중에서도 카스라는 상표의 맥주를 좋아하였다고 한다. 이 때문에 제자들은 세배를 갈 때면 선생이 좋아하는 맥주를 들고 갔다고 한다. 그리고 미당은 제자나 후배 문인들을 위해 맥주뿐만 아니라 각종 술을 담아 후하게 대접했다고 한다. 미당은 술을 마시다 술이 떨어지면, 무릎 근처쯤에 놓아둔 목탁을 두드리거나 차임벨을 눌러 술을 내오게 했다고 한다. 1963년에 쓴 미당의 시 〈선운사 동구〉에도 술 이야기가 나온다. 〈선운사 동구〉는 1968년 출간된 제5시집 《동천》에 실린 작품으로, 선운사에 시비로 세워진 작품이기도 하다. 선운사 골째기로/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안했고/ 막걸리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 작년 것만 상기도 남었습니다/ 그것도 목이 쉬어 남었습니다. — 서정주 〈선운사 동구〉 이 시를 보면 능란하게 넘어가는 육자배기와 칼칼한 막걸리가 절로 떠오른다. 지금은 특산물인 풍천장어집이 즐비한 선운사 입구이지만, 예전에는 절 입구 삼거리에 막걸릿집이 하나 있었다. 일설에 의하면 어느 해 초가을, 미당이 아버지 장례식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가던 길에 선운사 버스정류장에서 우산도 없이 이슬비를 맞고 서 있다가 선운사 동구 주막집에 들어섰다. 비를 맞아 추운 몸에 뜨끈한 구들방과 잘 익은 신김치에 막걸리를 마셨는데, 마침 40대 중반의 주막집 여인이 있어 미당이 육자배기를 청하자 막걸릿집 주인 여자가 나직이 노래를 불렀다. 그런 일 있었던 이후 여주인이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아편에 의탁하다 끝내 아랫동네 감나무 밑에서 죽었다는 소식이 들렸다고 한다. 미당은 그 여인의 비극적인 삶을 전해 듣고 시를 지었다는 것이다.       천상병 시인(1930~1993). 술에 관한 에피소드가 있는 시인을 또 꼽으라면 천상병 시인을 들 수 있다. 천상병 시인은 1967년 동백림사건 연루와 전기고문, 그리고 살아 있는 시인으로는 처음으로 유고 시집이 출간된 독특한 이력을 지닌 시인이기도 하다. 1971년도 초 5개월여 동안 천 시인이 보이지 않고, 가깝게 지내던 주변 문단 지인들과 연락이 두절되자 천상병 시인이 죽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그가 죽었다는 소문에 이를 안타깝게 여긴 지인들이 애석해하며 시 원고를 모아 유고시집 《새》를 출간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알고 보니 술에 만취하여 쓰러진 천상병 시인이 행려병자로 오해받아 응암동의 서울 시립 정신병원에 입원했었던 사실이 밝혀졌다. 유고 시집이 출간된 후 천상병 시인이 예의 그 천진스러운 얼굴로 다시 술자리에 나타났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그는 죽어서까지 일화를 남기고 있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장례식장에서 몇백만 원의 조의금이 걷혔는데, 그들 가족에게는 큰돈이라 장모가 애써 숨긴다고 부엌의 아궁이에 숨겨 놓았는데, 이를 알지 못한 시인의 아내가 불쏘시개로 태워버렸다는 사연 역시 그를 더욱 기인처럼 만들고 있다. 술과 관련된 그의 일화 역시 독특하다. 그는 술 중에서도 특히 막걸리를 좋아했었는데, 전기고문으로 망가진 몸을 달래기 위해 매일 막걸리 두 되로 세 끼 식사를 대신했다고 한다. 인사동이나 종로 일대를 떠돌며 동료 문인들에게 돈을 꾸어 막걸리와 술과 담배를 사서 피웠다는 이야기도 유명하다. 그는 결혼 후에 경기도 의정부 장암동의 담장도 대문도 없는 허름한 집에서 살았다고 한다. 그는 아내 목순옥 여사에게 하루 이천 원의 용돈을 받으면 맥주 한 병과 담배 한 갑을 사는데, 그 일이 그의 삶에 커다란 행복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자신을 “세계에서 제일 행복한 사나이”라고 말하고 다녔다고 한다. 아래 두 편의 시는 천진무구한 천 시인의 삶과 순수함을 엿보게 한다. 아침 깨니/ 부실부실 가랑비 내린다/ 자는 마누라 지갑을 뒤져/ 백오십원 훔쳐/ 아침 해장으로 간다/ 막걸리 한 잔에 속을 지지면/ 어찌 이리도 기분이 좋으나! — 천상병 〈비오는 날〉 골목에서 골목으로/ 거기 조그만 주막집/ 할머니 한 잔 더 주세요./ 저녁 어스름은 가난한 시인의 보람인 것을……/ 흐리멍텅한 눈에 이 세상은 다만/ 순하디순하기 마련인가/ 할머니 한 잔 더 주세요./ 몽롱하다는 것은 장엄(莊嚴)하다./ 골목 어귀에서 서툰 걸음인 양/ 밤은 깊어가는데 할머니 등뒤에/ 고향의 뒷산이 솟고/ 그 산에는/ 철도 아닌 한겨울의 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는 것이다./ 그 산 너머/ 쓸쓸한 성황당 꼭대기,/ 그 꼭대기 위에서/ 함박눈을 맞으며, 아기들이 놀고 있다./ 아기들은 매우 즐거운 모양이다./ 한없이 즐거운 모양이다. — 천상병 〈주막(酒幕)〉 소주 수백 병을 마시고 수백 편의 시를 토한 박정만 시인 《시인세계》에서 2005년 봄호에 기획한 〈시인과 술〉에 기고한 장석주와 정규홍의 글에 따르면 “시인 박정만은 죽기 서너 달 전부터 곡기를 끊고 하루도 쉬지 않고 소주를 마셨다.”고 한다. 그가 한 달 동안 마신 소주병이 삼천 병에 달한다고 하여, 술병을 모아 마당에 줄지어 세워놓으니 그 풍경이 장관을 이루었다고도 한다. 이렇듯 그가 스무 해 동안 썼던 시보다 죽기 직전의 두세 달 동안 소주를 마시고 쏟아낸 수백 편의 시의 양이 더 많았다. 박정만은 시의 끝머리에 시를 쓴 날짜와 시간을 적어 넣었는데, 어떤 시들은 불과 일이 분의 간격을 두고 쓰였다고 한다. 이상으로 우리 시문학에 나타난 술을 살펴보았다. 술은 백약의 으뜸이면서 동시에 인간을 파멸시키며 일찍 죽음으로 몰아넣는 양면성을 지닌 음식으로, 술은 오랜 시간 동안 우리의 삶과 직접 연관되어 우리 삶 깊숙하게 밀착되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삼국시대를 거쳐 고려와 조선과 현재에 이르기까지 고전 시가와 현대시를 망라하여 술은 시의 중요한 핵심 소재로 다루어지고 변주되어 왔다. 술은 시인에게 시적 상상력을 자극하는 대상으로 혹은 현실과 이상의 괴리에서 오는 중압감을 풀어주는 매개인 동시에, 비극적인 현실이나 시대적 상황을 타파하고 시대를 통찰하는 매개로 등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시에 나타난 술의 역사를 살피는 일은 곧 술을 통해 세계와 몸으로 부딪치려는 시인의 눈과 펜에 가까이 다가가는 일이기도 하다. 이 서투른 글을 쓰면서 문득 대학가 주점 벽면에 거친 붓글씨로 휘갈긴 어느 시인의 시가 생각난다. “날씨야 아무리 네가 추워 봐라/ 내가 옷 사 입나/ 술사먹지” 가난하고 추웠을 시인은 아마도 배고픔과 추운 시절을 소박한 한 잔 술로 데웠음이 분명하리라.    서안나 / 시인. 1990년 《문학과 비평》으로 등단. 시집 《푸른 수첩을 찢다》 《플롯 속의 그녀들》 《립스틱 발달사》와 평론집 《현대시와 속도의 사유》가 있다. 한양대. 추계예대 출강.
786    남영전의 토템시 연구 댓글:  조회:5765  추천:0  2015-12-05
  남영전의 토템시 연구   김 관 웅 (연변대학 교수)   시인 남영전   목록:  1. 들어가는 말  2. 토템의 개념과 남영전선생의 이른바 《토템시》에서 표현된 이미지들  3. 남영전선생의 이른바 《토템시》들에 나타난 이미지들의 속성  4. 나오는 말          1. 들어가는 말    남영전선생은 자기만 시의 령토를 개척하고 자기만의 시세계를 구축하고 자기만의 창작개성을 확립하기 위하여 오래전부터 토템시를 들고 우리 시단에 나타났다. 이에 우리 중국조선족 평론가들만이 아니라 한족을 비롯한 기타 민족의 평론가들도 남영전 선생이 이룩한 창작성취에 대해 충분하게 긍정하여 주었는데 본인도 이에 대해서는 의견을 달리하지 않는다.    그런데 《토템시》라는 이 명칭에 대해 이의(異議)를 품고 있는 사람들도 적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작년 연변대학에 있었던 국제학술토론회에서는 바로 이 문제를 둘러싸고 열띤 쟁론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를 테면 남영전교수의 토템시의 개념과 명칭에 대해 임윤덕교수가 이의(異議)를 편데 대해 일부 사람들은 반론을 제기하여 갑론을박으로 쟁론을 했지만 쟁명을 한 쌍방은 공동한 인식에는 이르지는 못했다.    남영전 선생은 중국조선족시단의 비중 있는 시인으로서 중국조선족의 시문학발전사에 반드시 기록되여야 할 분이며 불원간에 이 문제가 중국조선족문학사 저술에서의 문제로 제기될 것임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남영전 선생의 이른바 토템시에 대한 정명(正名)은 반드시 조속히 진행되여야 한다. 남영전선생의 이른바 《토템시》의 명칭과 그 개념을 어떻게 정립하고 그 명칭을 어떻게 하는 것이 마땅한가? 필자도 이 문제에 대해 오래 동안 사고를 거듭해왔다. 이 글에서는 주로 남영전선생의 이른바 토템시라는 개념과 그 명칭에 대한 필자 개인의 견해를 피력하고자 한다.      2. 토템과 남영전선생의 이른바 《토템시》에서 표현된 이미지들    남영전선생의 이른바 《토템시》의 본질을 알자면 우선 토템에 대한 개념을 똑똑히 알고 넘어가야 한다. 세계에서 가장 권위성 있는 백과전서 《브리태니카》에서는 토템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다.    《토테미즘은 인간과 동식물 등 천연물 사이에 친연관계 혹은 신비한 관계가 있다고 믿는 신앙에 의해 형성된 복잡한 사상과 습속이다. 토템(totem)이라는 낱말은 오지브와어(아르강곤족 인디안인)의 오토테만(ototeman)에서 유래되였는데, 그 뜻은 형제자매사이의 혈친(血親)을 가리키는 것이다. 인류학가들의 사용법에 따르면 터테미즘이라는 이 단어는 최초에는 한 공동체와 토템의 관계만을 가리켰다. 동물이 한 사람과 관계를 가지고 있으면서 호우령(護佑靈), 친구 혹은 초자연적 힘의 원천으로 간주되지만 이런 것들은 토템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우연한 관계(례컨대 사람이 〈승냥이사람〉등으로 변형된다든가, 샤만의 몸에 동물의 령혼이 부착되여 동물의 초자연체를 가지게 되였다든가 등)도 토템이라고 할수 없다. 그러나 20세기 말에 이르러 〈개별적 토템〉이라는 이 낱말은 흔히 이러한 류형의 현상을 지칭하게 되였다. 뚜렷한 특점과 규정된 수량을 갖고 있는 씨족으로 획분되는 여러 씨족들은 각각 생명이 있거나 생명이 없는 하나의 종(種, 즉 토템)과 특수한 관계를 갖게 되는데, 이러한 씨족성원들은 일반적으로 자기의 성원으로서의 신분을 개변하지 못하며 동일한 지역의 주민들은 각각 부동한 토템씨족에 속하게 되였는바, 이러한 사회가 바로 토테미즘이 실행되는 사회이다. 토템은 무섭고 다루기 어려운 야수거나 식용식물 혹은 주요 식물인 경우가 많다. 토템은 흔히 원시적인 전설과 도덕규범과 련관성이 있으며 기본상에서는 반드시 기피하고 멀리해야 했다. 만일 접근하려면 반드시 엄격한 의식를 치러야했다. 한 토템공동체의 성원들의 신분은 세습되여 종신적이였으며 성원 자녀들 사이의 혈친으로 결합하거나 선택하여 통혼하거나 모두 특수한 규정이 있었다. 토템, 금기와 외혼제  이 삼자는 서로 혼합되여 뒤섞일 수밖에 없었다. 목전까지는 그 어느 사회도 완전히 토테미즘에 부합되는 리상적인 토템제도를 구비하고 있지는 못하지만 적지 않은 공동체는 많은토템제도의 특징들을 갖고 있다.》 《不列顚百科全書》, 17권, 154쪽, 〈圖騰制度〉, 中國大百科全書出版社, 1999년판.      여기에서 우리는 토템은 원시시대의 씨족들과 긴밀한 관계를 갖고 있었던 자연대상물 혹은 인공대상물임을 알 수 있다.    첫째, 토템은 그 종류는 아주 많다. 이를테면 오스트레일리아의 아란다족은 400종이 넘는 동식물을 토템으로 삼지만, 아프리카의 뇨로족이나 바히마족은 소만을 토템으로 삼는데, 각 씨족은 붉은 소, 젖소 등 소의 특정형이나 소 몸의 부분 즉 혀, 창자, 심장, 등을 토템으로 삼는다. 또 각 씨족이 한 토템 또는 여러 토템을 갖는 경우가 있다. 멜라네시아 에서는 각 씨족이 새, 나무, 포유동물, 물고기의 일종을 토템으로 삼는다. 동식물외에 해, 달, 구름, 눈, 비, 불, 물, 계절 등 자연물이나 자연현상도 토템이 된다.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물건을 토템으로 삼는 곳도 많다. 이를테면 인도 비엘족의 토템은 식물이 19종, 동물이 17종, 물건(단도, 깨진 병, 촌락, 가시 붙은 막대, 팔찌, 발고리, 빵조각 등)이다. 그 밖에 오스트레일리아 북동부에서는 잠, 설사, 구터, 성교, 여러 가지정신상태 등도 토템으로 삼는 례가 있다.    둘째, 토템은 원시단계에 처해있는 씨족공동체 등 인간공동체와 결부된다. 개인토템도 있지만 그것은 수호령이라고 하고 토템은 일반적으로 원시적 인간공동체로서의 씨족이나 부족 등과 관련된다.    셋째, 집단의 이름을 그 토템 이름으로 부르는 경우가 있다. 이를 테면 오지브와 족에는학, 곰, 담비, 메기, 아비(새의 일종) 등으로 부르는 다섯 개의 주요 씨족이 있다. 그러나 토템과는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 경우도 많다.    넷째, 집단토템의 경우 같은 토템을 가진 사람들은 흔히 결혼하지 않는데, 토템집단이 외혼단위가 된다.    다섯째, 흔히 토템과 인간 집단이 맺어진 유래가 담긴 신화를 가지는데 토템은 그 집단의 조상이라든가, 토템과 집단이 공통조상으로 친족관계를 가진다던가, 집단의 조상과 토템이 긴밀한 관계였다는 것 등이다.    여섯째, 토템과 집단의 강한 결부는 신앙과 의례에 의해 정서적, 신비적으로 나타난다.    일곱째, 자기의 토템을 표시하는 표지, 또는 도안이나 조각을 가지고 있는데, 이를테면 인디안 원시씨족이나 부족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토템폴(totem pole, 圖騰柱)이 그 대표적 사례이다.    그러면 조선민족에게도 토템이 있었을까? 대답은 긍정적이다. 남영전 선생은 긍정파일 뿐더러 조선민족의 42개의 토템을 詩化하였다. 남영전의 시집《원융(圓融)》에 수록된 순서대로 라렬하면 다음과 같다.    달, 곰, 단수, 학, 흙, 물, 사슴, 범, 백마, 숫사자, 황소, 양, 백조, 수리개, 뻐꾹새, 수탉, 까마귀, 까치, 거북, 고래, 개구리, 산, 불, 태양, 별, 구름, 번개, 비, 바다, 산호, 돌, 개, 돼지, 두꺼비, 흰 토끼, 제비, 나비, 대, 룡, 봉황새, 흰 비둘기 등이다.    상술한 《토템》은 대부분 조선민족의 신화, 전설, 민담 등에서 나타난 자연물인 것만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이런 것들을 토템이라고 단정하려면 많은 문헌자료나 고고학적인 자료를 동원하여 증명해야 한다. 신화, 전설, 민담 등에 나타나는 자연대상이나 자연현상이라고 해서 모두 토템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물론 조선민족도 원시시대의 씨족, 부족, 부족련맹 사회 등 원시공동체사회를 거쳐 왔던것만은 분명하며 필연적으로 수많은 토템들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민족은 적어도 2천여 년 전에 원시시대에서 문명사회로 들어선 민족이기에 2천여 년 전의 조선민족의 선민들이 신앙했던 토템들이 구경 어떤 것들이였겠는가에 대해서는 후세의 문헌자료거나 고고학적 발굴 자료에 의해서 추측하는 수밖에 없다.    흔히 토템과 인간 집단이 맺어진 유래가 담긴 신화를 가지는데 토템은 그 집단의 조상이라든가, 토템과 집단이 공통조상으로 친족관계를 가진다던가, 집단의 조상과 토템이 긴밀한 관계가 있다고 원시시대의 사람들은 인정했기에 문헌신화를 통해 조선민족의 선민들의 토템을 추축해낼 수 있다. 이를 테면 단군신화에서 나오는 곰과 범은 곰 토템씨족이나 부족 혹은 범 토템씨족이나 부족일 가능성이 아주 많다. 물론 이것을 확증할 자료는 크게 없으나, 특히 동북아세아와 시베리아 등지에 널리 분포되여 있는 곰 토템 숭배와 결부시켜 볼 때, 적어도 곰을 조선민족 력사 중의 어느 한 시기, 어느 한 부족의 토템으로 보아도 별로 무리는 없을 것이다. 옛 문헌들에 조선민족의 선민(先民)중의 한 갈래였던 예(濊)족이 범을 숭배했다는 기록도 있으니 범도 역시 조선민족 력사 중의 어느 한 시기, 어느 한  부족의 토템으로 보아도 별로 무리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고구려의 동명왕 전설에서 나오는 해나 백조나 신라의 박혁거세전설에서 나오는 닭이나 백마나 석탈해의 전설에서 나오는 까치나 가야국 수로왕 전설에서 나오는 거북 등도 토템일 가능이 있으나 확증할 수 있는 증거는 없다. 이를 테면 현존하고 있는 조선민족의 가장 오랜 문헌신화는 단군신화이다. 이 신화에는 다음과 같은 이미지들이 등장한다.    하늘을 표상하는 인격화된 천신(天神)-제석(帝釋), 제석(帝釋)의 아들 환인(桓因), 하백, 수사, 운사(雲師) 등 세 신(神)그리고 이 신들이 하늘에 내린 아사달이라는 산, 그 산꼭대기에 있는 신단수, 그 밑에서 살고 있는 곰과 범 등이다. 그러면 이상의 이미지들이 다 토템인가? 다 토템일 수도 있고 다 토템이 아닐 수도 있다. 우리는 여기서 곰을 포함한 이상의 이미지들이 다 토템일수 있는 가능성을 인정할 뿐이지 꼭 찍어서 단정할 수는 없다. 또 다 아니라고 가정할 수는 있지만 또 꼭 찍어서 다 아니라고 단정할 수 도 없다.    이런 론리는 김수로왕 전설에서도 통한다. 여기에 등장하는 여섯 부락의 부락장과 부락민들 그리고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다는 신, 그 신의 말대로 올랐다는 구지봉(龜旨峯), 신(神)을 맞이하느라고 불렀다는 《구지가(龜旨歌)》에서 나오는 거북,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여섯 상자에 담긴 알 등이다. 남영전 선생은 거북을 가야 여섯 부락의 토템 혹은 그중 어느 부락의 토템으로 추정한 것 같은데, 그럴 가능도 있고 그렇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 한마디로 토템이라고 확정할 아무런 근거도 없다. 오히려 후자의 가능성이 더 많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거북은 옛날 조선을 포함한 동북아세아 여러 원시부족들 사이에서 귀복점(龜卜占)을 칠 때 사용하는 도구로 사용되였지 꼭 토템이라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귀복점을 치면서 그 점괘를 거북의 껍데기에 부호를 새겨놓은 갑골문(甲骨文)으로부터 한자(漢字)가 생겨났다고 하지 않는가. 물론 조선족이나 중국한족을 비롯한 기타 소수민족의 선민 혹은 기타 세계 각지의 많은 민족들의 선민들이나 지금도 원시적 단계에 처해있는 원시씨족이나 부족들 중에 거북이 토템으로 숭앙을 받았거나 받고 있을 가능성도 절대 부정할수는 없다.    돼지도 마찬가지 상황이다. 돼지는 조선민족의 선민들이 천지신명에게 제사를 지낼 때 제사상에 꼭 올렸던 가장 중요한 제물로서 고구려 유리왕시대의 완도산성과 결부된 전설에 의하면 제물로 쓰려던 돼지가 도망쳐서 쫓아간 곳이 지금의 완도산성 터였고 그 돼지 인해 유리왕이 완도산성에 도읍을 옮기게 되였다고 전한다. 이와 류사한 전설은 고려궁성의 택지전설에서도 나타나는 것을 보아서는 돼지는 분명히 고대 조선민족의 신화나 전설 속에서 중요한 이미지로 등장하는 분명하다. 그렇다고 돼지가 꼭 고구려인들이나 고려인들의 토템이였다고 단정할 수 있는 근거는 없다.    숫사자, 양, 두꺼비, 매, 흰 비둘기, 흰 토끼, 고래 같은 동물이나 불, 구름, 비, 바다, 산호 등 자연대상이나 자연현상을 조선민족의 토템으로 보는 데는 무리가 더 있는 것 같다. 이를테면 흰 토끼나 두꺼비는 고구려시대의 우화 《거북과 토끼의 이야기》(일명 구토(龜兎)설화라고도 함)나 조선왕조시대의 《토끼전》,《두껍전》같은 소설에 등장하기는 해도 그것이 조선민족의 토템이였다고 증명할 만 한 자료는 없다. 주지하다시피 이 두 이야기는 모두 불경설화의 영향 하에 산생된 조선고대설화나 소설로서 자연생태적인 부동한 특점 때문에 불경(佛經)이야기 중의 동물주인공들이 바뀐데 불과하지 토끼, 두꺼비 이 두 동물이 토템이여서 우화나 소설의 주인공이 된 것은 아니며 문헌상에서도 토끼, 두꺼비 같은 동물이 일찍 토템이였다는 증거를 찾을 수 없다. 다. 숫사자, 양 같은 동물은 조선민족의 선민들이 일찍 삶을 영위했던 조선반도나 동부아세아의 자연생태의 특점으로 보아서 더욱조선민족선민들의 토템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이점에 대해 남영전선생도 많은 고민을 했음은 많은 사고를 거듭했음은 본인의 다음과  같은 술회에서 나타난다.    《나는 조선족시인으로 이전에는 토템문화에 대해 아는 것이 아주 적었다. 다만 조선민족의 토템물은 곰 하나뿐인가 여겼었다. 그러나 여려해 동안 조선민족 신화 등 상관 자료를 연구하고 탐구하는 가운데서 조선민족은 여러 부동한 토템씨족이나 가족이 장구한 력사과정에서 융합되여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게 되였다. 그러므로 력사의 각도에서 볼 때 토템은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였었을 것이다.》 남영전 《원융(圓融)》, 료녕민족출판사, 2003 년, 2쪽.      맞는 말이다. 조선민족의 장구한 력사과정에서 조선민족의 원시 선민들이 숭배했던 토템은 아주 많았을 것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어느 것은 토템이고 어느 것은 토템이 아니라고 오늘날에는 누구도 똑 부러지게 대답할 수 없는 실정이다. 그래서 남영전선생은 자기의 이른바 《토템시》들에 등장한 《토템》들을 조선민족에게만 속하는 토템이 아니라 중화민족의 토템물과 불가분리적인 혈연적관계가 있다고 인정하면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리고 있다.    《내가 쓴 이러한 토템시들은 조선민족에게 속할 뿐만 아니라 역시 중화민족에게 속하며 또한 세계 기타 민족에게 속한다.》 남영전《원융(圓融)》, 료녕민족출판사, 2003년, 2-3 쪽.      역시 일부는 맞는 말이다. 그것은 토템은 조선민족과 중화민족 그리고 세계의 기타 여러민족들과도 중복성, 공통성을 보일 가능성이 아주 많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조선민족의 건국신화들에서 보면 건국주(建國主)들은 대부분 자기를 《태양의 아들》이라고 자칭하였으니 태양은 조선민족의 토템이였을 가능성이 아주 많다. 그러나 이러한 태양숭배는 세계적으로 아주 광범위하게 분포되여 있다. 태양만이 아니라 달, 땅, 물, 산, 구름바람, 비, 자연대상이나 자연현상에서 추출된 토템만이 아니라 단수, 대, 풀, 꽃 등 식물토템이나 곰, 범, 말, 소, 양, 새, 개 등 동물 토템도 마찬가지로 세계적인 토템일 가능성이 십분 많다.    그러나 부동한 씨족이나 부족들이 동일한 토템을 선정하였다고 하더라도 그것에 부여한 의미, 즉 상징적 의미는 같거나 비슷한 경우도 있지만 다를 가능성이 더욱 많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이를테면 남영전 선생이 《개》에 대해 부여한 상징적 의미는 적어도 조선민족과 아주 가깝게 살아온 만족(滿族)에게서는 아주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승냥이에 대해 조선민족들은 흔히 나쁜 의미를 부여하고 있으나 원고(遠古)시대의 흉노족은 자기의 조상으로까지 생각하였다. 그리고 조선민족의 선민들은 곰을 시조모로 인정하기까지 하였으나 곰을 숭상하지 않는 부족들이나 민족들에서는 곰을 미련하고 우둔한 대상으로 폄하하였다. 지금도 조선민족은 아직도 곰이라면 우직하지만 사랑스럽게 생각하지만 중국의 한족들의 욕설에서 구웅(狗熊)이라면 아주 비겁하고 더러운 폄의(貶義)를 갖는다. 그러므로 구체적인 매 하나의 토템이 갖고 있는 상징적 의미에는 전 인류적인 보편성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더 많은 경우에는 민족적, 지역적 특수성이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토템의 상징적 의미는 부동한 력사발전단계에서 부동하게 나타나는 경우도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따라서 토템시에서의 의미부여가 민족을 초월하여 전 인류적인 공동성을 추구한다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토템은 문화부호로서 흔히 강렬한 민족성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남영전선생이 선택하여 시창작의 재료로 삼은 곰, 범, 백학, 닭, 황소, 제비, 개, 두꺼비, 거북, 룡, 흰 비둘기 등 동물들과 신단수, 대 같은 식물들, 그리고 태양, 달, 바다, 구름, 번개, 불, 물, 흙, 돌, 산호 등 자연대상들이 모두 조선민족의 토템이였다, 혹은 모두 아니였다고 증명할 방도가 없다. 그것은 영화나 드라마는 다시 재연될 수 있지만  력사는 다시 재연될 수 없는 법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토템인지 토템이 아닌지를 명징(明徵)하게 증명할 수 없는 대상들을 시적 소재로 한 42수의 시를 몽땅 토템시라고 하는 데는 무리가 따르기 마련이다. 토템과 비토템을 구분할 수 없는 상황하에서 주관적으로 토템이라고 단정하여 쓴 시들을 토템시라고 타이틀을 단다는 것은 과학성에 어긋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남영전선생의 토템시를 영물시(詠物詩)라고 인정한 임윤덕 교수의 견해는 일리가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전통 시문학에서의 영물시는 대개 하나의 자연물상(自然物象)을 이미지화 하는데, 이 점은 남영전의 토템시들에서도 마찬가지다. 영물시는 바로 이미지시이며 영물시 창작은 각종 물상들에 시인의 정감과 사상을 부여하는 이미지화 작업이다.      3. 남영전선생의 이른바 《토템시》들에 나타난 이미지들의 속성    그러면 남영전선생이 조선민족의 《토템》들을 시로 만든 이른바 《토템시》들에서의 이미지에는 어떤 상징적 의미들이 부여되여 있는가 살펴보기로 하자.    한국의 저명한 시론가 문덕수선생은 상징을 《개인(個人) 상징》, 《전래(傳來) 상징》《문화권(文化圈) 상징》, 《원형(原型) 상징》으로 네 가지로 분류하였다.    첫째, 《개인 상징》은 한편의 시작품에 있는 상징이나 또는 한 특정한 시인 시인에게 있어서 계속적으로 쓰이고 있는 상징 또는 사인 상징이다 문덕수 《시론》, 시문학사, 2002년 195쪽.  .  둘째, 《전래 상징》이란 시인이나 작가가 어떤 고전문헌에서 찾아 내여 창작활동에 차용한 상징이다. 문덕수 《시론》, 시문학사, 2002년 198쪽.    셋째, 《문화권 상징》이란 어떤 공동체나 종교 단체 혹은 기타 공동체에 속하는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통용되는 상징이다 문덕수 《시론》, 시문학사, 2002년 198쪽.  .  《원형상징》이란 《지역적으로 멀리 떨어져서 아무런 교류관계가 없어도 인류 전체나 대부분에게 어떤 보편적이고 공통적인 의미를 가진 이미지가 원형상징이다》 문덕수 《시론》, 시문학사, 2002년 200쪽.    문덕수선생의 이 이미지가 가지는 상징성의 네가지 류형에 관한 분류에 좇아 남영전선생의 이른바 《토템시》를 살펴볼 것 같으면 가장 많은 것이 《전래의 상징》,《문화권 상징》의 의미를 담고 있는 이미지들을 소재로 한 것이며 일부 《문화권(文化圈) 상징》의 의미를 담고 있는 것들이다. 물론 남영전의 《개인 상징》은 흔히《전래의 상징》이나《문화권 상징》속에 용해되여 있는 경우가 많다.    첫째, 《전래의 상징》의 의미를 담고 있는 이미지를 시적인 대상으로 삼은 것을 보기로 하자. 례컨대 《곰》,《신단수(神檀樹》,《사슴(鹿)》,《범》,《백마》,《백조》,《뻐꾸기》,《수탉》,《거북》,《개구리》,《흰 토끼》,《흰 비둘기》등 시들이 담고 있는 《전래의 상징》의 의미를 담고 있다 볼 수 있다. 특히 《곰》,《신단수(神檀樹》에서 보여 지는 상징적 의미는 기본상 조선민족의 시조로 불리는 단군을 기술한 일연의 《삼국유사》중에서 온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이 두 수의 시가 담고 있는 상징적 의미는 짙은 민족적 특색을 띠고 있다.    둘째, 《문화권 상징》의 의미를 담고 있는 이미지를 시적인 대상으로 삼은 것을 보기로하자. 이를테면 《황소》, 《까마귀》,《룡》등 을 그 실례로들 수 있다. 룡은 동아시아문화권에서 보편성을 띤 상징부호로서 그 의미도 비슷하다. 물론 조선민족의 신화나 전설,민담에서도 룡은 중요한 이미지로서 등장하기는 하지만 중국의 한족은 지금까지 자신들을 룡의 후손이라고 한다. 까마귀도 마찬가지인데, 신라의 고대설화에서 까마귀는 하늘의 뜻을 지상에 전달해 주는 령특한 새로 등장하고 고구려의 고분벽화에도 태양의 복판에 세발 달린 까마귀가 그려져 있는 것을 보아서 역시 천상계(天上界)의 메시지를 전달해주는 새임이 분명하다. 까마귀는 중국 동북부 만족(滿族)의 설화에서도 까마귀는 흉조가 아닌 길조로 등장한다.    셋째, 전 인류적인 《원형 상징》의 의미를 담고 있는 이미지를 시적인 대상으로 삼은 것을 보기로 하자. 이를테면《흙(土)》,《물(水》, 《태양》, 《구름》, 《별》등을 그 실례로 들 수 있다.    土爲孕育萬物負載萬物之神靈    土可松可硬  有形也無形  土以自身無邊無際之軀  以石爲骨  以水爲脉  于冥冥的天宇下  壘起床丘嶺與山脈  營造湖泊與大海  孕育生靈  孕育萬物  孕育一切人間之夢  孕育一切家園    對待生靈  對待萬物  土最沈黙  沈黙得沒有任何聲響  沈黙得只愿聽  -남영전《흙(土)》앞부분    모든 사물의 아래에 있는 땅과 흙은 그 위에 있는 모든 것을 생령을 낳아 기르고, 그 위에 있는 모든 것을 받쳐주고, 균형을 잡아주고 뿌리를 내린 식물은 뿌리를 만들어주고, 새는 공중에서 날게 해주고 대지에 닿은 자동차는 달리게 해준다. 그뿐만 아니라 몸이 쭈그러지면 그것을 받아들여 묻어주고 자연으로 돌아가게 한다. 그러므로 땅은 유기물이건 무기물이건, 그 우에 있는 모든 것을 존재하게 하는 근원적 에너지다. 그러면서도 흘과 대지는 한마디 말도 없이 루루 수십 억년 마냥 침묵으로 일관한다. 남영전의 죽음과 삶을 다 받들어주는 땅은 위대한 사랑을 가진 어머니인 대지라는 원형적 상징의 발견이요 창조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원형적 상징은 전 인류적이라고도 할 수 있다.  남영전의 《토(土)》과 똑 같은 땅과 흙이라는 이 원시적 이미지를 시적인 소재로 삼은 경우는 아주 많다. 이를테면 한국 황송문의 수필 《흙의 침묵》이나 조정권 시《땅의 고마움》역시 원시적 이미지를 소재로 하여 창작한 문학작품들이다.    숲속에 나무나 풀, 또는 징그러운 짐승  심지어는 공중의 새와 빌딩  자동차조차도  땅이 균형을 잡아주고 있다.  내가 달고 다니는 무거운 머리통이나  장딴지의 힘줄도 실은 땅이 단단하게 받쳐주고 있다.  땅이 인간의 사지에 균형을 만들어주고 있다는  이 평범한 사실을 나는 너무나도 오래 잊고 살았다.  내가 죽어 부끄러운 알몸과 쭈그러진 가죽과 상처자국이 드러날 때  그것들을 안 보이게 가려줄 저 땅의 고마움  - 조정권 《땅의 고마움》    흙과 대지라는 이 원시적 이미지와 늘 대응을 이루는 다른 한 원시적 이미지는 하늘이다. 땅과 하늘의 상호 련관, 상호 교감, 상호 작용을 소재로 한 시들속에는 연변의 녀류시인 천애옥은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대지가  하늘 품에  새로이 태여나다    축축한 이슬 향기로  선경(仙境)의  꿈을 열어    상사의  은하수를 건너  운우 속을 거닐다.    아프도록 눈부신  분홍빛  미소(微小)로 태여나다    대지가  하늘 품에  새로이 죽어가다    내리 쏟는  창살 끝에  나스스르르  녹아내려    슬프도록 아름다운  무아몽중  까만 재로  죽어가다  -천애옥 《도(道)》    서로 대응되고 서로 련관되고 상호 작용하는 하늘과 땅은 원시적 이미지속에서도 가장 중요한 아버지(혹은 남자)인 하늘, 어머니(혹은 녀자) 땅 그리고 양과 음의 결합으로 인한 생과 사, 죽음과 재생 등 보편적인 인간 상황에 대한 인간의 전형적인 반응의 집적(集積)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시를 집단 무의식속에서 형성된 원시적 이미지인 하늘과 대지의 상호 작용 속에서 지상의 생명계통의 생성과 사멸의 운동과정을 보여준 시라고 볼 수 있다. 모든 생명의 창조자인 아버지 하늘과 위대한 사랑을 가진 어머니 땅이라는 원시적 이미지의 발견이라고 할 수 있다. 천부지모(天父地母)의 관념은 원시적 이미지의 원형상징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으며 세계의 부동한 문화권에서도 동일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전 인류적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 시는 다중(多重)적 상징의미를 가졌으니 다른 뜻으로 해석할 가능성이 아주 많으나, 이는 본론과 관계가 별로 없으니 략한다.    남영전의 《물》도 민족이나 문화권을 초월하는 전 인류적인 원시적 이미지를 소재로 한 시로서 원형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보이다가도 안 보이고 크다가도 작은 신령    물은 어디라 없이 다 있어도  날개 없고 발이 없고  형색조차 없습니다.  없는 날개 가장 큰 날개이고  없는 발이 가장 큰 발입니다.  없는 형상 가장 자유로운 형상이고  없는 빛갈 가장 현란한 빛깔입니다.  대지 우에 모래밭에 크나큰 사막에  하늘 우에 산마루에 깊다란 협곡에  안개 되고 구름 되고  내 물 되고 강이 되고  호수 되고 바다 되고  뿌리에 줄기에 입속에  꽃과 열매에 파고들어  인간과 자연을 낳아 기르는  인간의 시원입니다.  만상의 시원입니다.  -남영전 《물》앞부분    남영전의 《물》은 흙과 대지와 함께 모든 생령의 시원이고 모든 것을 창조하는 《모든 생명 모든 령혼의 온갖 문을 여닫는 신령》이라는 이 원형상징의 의미를 담고 있는 시이다. 남영전의 시에서 《태양》역시 원시적 이미지인 태양을 소재로 하여 거기에다 문화권상징과 원형상징의 의미를 유기적으로 융합시켰다.    祖先的白色之門鑲在遙遠的太陽上    祖先的白色靈光  正悄悄捕捉黑色的鬼魅黑色的邪惡  祖先的白色溫馨  正緩緩融化重疊的雪山堆積的怨恨  祖先的白色慈祥  正輕輕撫摸可愛的子孫寂寞的心靈  于時于曠野于莽林  冥冥里复蘇暈厥的精靈  冥冥里誕生吉祥的部落  -남영전 《태양》앞부분    태양은 대지와 마찬가지로 원시적 이미지들중에서 가장 중요한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태양에 대한 숭배는 곧 광명에 대한 인류의 보편적인 갈망과 그로 인한 광명숭배와 통하는바 태양숭배는 범세계적 것이고 전 인류적인 것이다. 그러나 태양의 빛갈을 흰 빛으로 감지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조선민족의 특색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백색숭배는 고대 동이족(東夷族)의 보편적인 색상(色尙)심리임을 감안할 때 이 시는 조선민족의 전래상징의 의미도 포함되여 있지만 동시에 문화권상징과 원형상징의 의미를 동시에 내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원시적 이미지(primordial image)는 비교인류학이나 정신분석학이나 신화원형비평에서 원형(archetypes) 또는 원형 상징(archetypal sybols)이라고도 한다. 신화원형비평의 개척자 칼 융은 원시적 이미지(primordial image)라고 부르다가 나중에는 원형(archetypes)이라고 고쳐 불렀지만 필자는 이 글에서 계속 원시적 이미지(primordialimage)라는 용어를 사용하려고 한다. 중국에서는 칼 융의 원시적 이미지(primordial image)라는 용어를 원시의상(原始意象)이라고 번역하여 사용하고 있다. 카를 융의 견해를 중심으로 원시적 이미지(primordial image)의 특성을 좀더 살펴보기로 하자.    첫째, 원시적 이미지(primordial image)는 인류조상들의 장구한 반복적인 생활경험에서 형성된 원초적 이미지 또는 심리적 잔존물이다. 원시 조상들은 생활 속에서 여러 가지 경험을 반복하고, 그러한 반복으로 그 경험은 류형이된다. 그 류형이 갖는 원초적 이미지 또는 심리적 잔존물이 원형(archetypes, 한어에서는 原型이라고 번역했음)이 된다.    둘째, 원시적 이미지(primordial image), 즉 원형은 집단무의식 속의 실제적인 내용을 구성한다. 융은 프로이트의 개인무의식(personal unconscious) 외에 집단 무의식의 존재를 주장한다는 점에서 그의 정신분석학의 한 특성을 부여해 준다. 개인 무의식은 개인의 생활에서 잊혀지고 억눌리고 잠재의식으로 지각되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으나, 집단무의식은 개인의 생활을 초월한 보편적인 상황에 대한 전형적인 반응이 모여서 형성된 것이다. 즉 《집단 무의식은 력사적 시기, 혹은 사회적 혹은 종족적인 집단에 관계없이 원형 시대 이후, 초월적인 어떤 힘에 대한 공포와 위협, 그리고 갈등, 남녀 관계, 어린이들과 부모와의 관계, 애증, 생과 사, 명암의 원초적인 힘, 기타 등등과 같은 보편적인 인간상황에 대한 인간의 전형적인 반응의 집적(集積)이다.》    원시적 이미지는 이러한 집단무의식속에서 형성될 뿐만 아니라 집단무의식을 통해서 계승발전되는 것이다. 따라서 원형은 개인이나 어떤 집단 그리고 력사를 초월해서 존재하는 보편적인 원초적 심상이다.    셋째, 원형은 본능적이며 선험적인 이미지다. 융은 《원형 또는 원초적 이미지는 아마도 그 자체의 본능적 표상 혹은 본능의 자화상이라고 말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 본능은 개인의 특유한 본능이라기보다 집단적 무의식 속의 본능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원형은 집단적 무의식 속에 본래부터 천부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개인의경험이전부터 선재하는 것이고 개인의 삶과 죽음에 영향 받지 않는 것이다. 원형이 본능적이고 선험적인 존재라는 점에서 원형이 창조된 것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는 형이상학적 문제이다. 원형은 창조되지 않고 처음부터 영원한 이미지일 것이다. 하지만 원형의 계승은 새가 둥우리를 짓고, 뱀장어가 버뮤다 가는 길을 발견하며, 연어가 자기의 태여난 곳을 되돌아오는 길을 아는, 선천적 습관이 유전되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 유전되는 것이다.    넷째, 원형은 무의식 속에 잠재해 있어서 지각할 수 없는 것이고, 의식의 령역 속으로 들어와 지각될 수 있는 것도 있다. 지각될 수 있는 원형은 이미지나 관념으로서 신화, 꿈, 은유나 상징의 형태로 시에 표현되였을 때에 비로소 가능하다. 원시적 이미지(primordial image)란 원형 상징이다. 지역적으로 멀리 떨어져서 아무런 교류관계가 없어도 인류 전체나 대부분에게 어떤 보편적이고 공통적인 의미를 가진 이미지가 원형상징이다. 휠라이트는 원형상징으로 아버지인 하늘, 어머니인 대지 그리고 광명, 피, 상하, 바퀴축 등을 들고, 이것들을 자세히 설명했다. 이것들에 대한 반응과 사고가 다양하지만, 그러나 인간이 갖는 육체적 유사성, 심리적 구조가 갖는 유사성 때문에 보편적  공통성을 형성하게 된 것이다.    그러면 남영전선생의 이른바 《토템시》들에서 등장하는 이미지들은 어떤 이미지들인가를 종합적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남영전선생은 《나는 18년 동안 42수의 조선민족토템시들을 썼다》 남영전 《원융(圓融)》, 고 했는데, 이 이른바 《토템》이라고 하는 이미지들의 속성을 아래의 도표를 통해 살펴보기로 하자.    민족상징에 속하는 이미지  문화권상징에 속하는 이미지  원형상징에 속하는 이미지  곰  룡  흙  신단수  봉황  물  학  나비  태양  사슴  대  산  범  개  돌  백마  제비  구름  까마귀  황소  비  거북  양  별  까치  숫사자  번개  개구리  수리개  바다  백조  뻐꾹새  불  돼지  수탉        이상의 도표를 통해 남영전선생의 이른바 《토템시》들에서 민족상징에 속하는 이미지, 문화권상징에 속하는 이미지, 원형상징에 속하는 이미지 이 류형이 비슷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비록 민족상징에 속하는 이미지와 문화권상징에 속하는 이미지들은 원형상징에 속하는 카를 융의 정의한 원시적 이미지(primordial image)들이라고 할 수 없으나 많은 부분은 신화나 전설 같은 조선민족의 가장 오랜 문학장르들에서 나타났던 이미지들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런데 이 셋은 흔히 상호 고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서로 교차되고 서로 융합되여 있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해 남영전 선생은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나는 18년 동안의 시간을 들여 42수의 조선민족의 토템시를 썼는데, 그러는 중에서 조선민족의 토템물과 중화민족의 토템물은 불가분리적인 친근한 혈연관계를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또 세계 기타 민족의 토템물과도 혈연관계가 없는 것이 아님을 놀랍고도 기쁘게 발견할 수 있었다.》 남영전 《원융(圓融》, 료녕민족출판사, 2003년, 2쪽.      남영전선생의 이 말은 맞는 말이다. 그 원인은 조선민족의 형성도 단순히 현재의 조선반도와만 관련되여 있는 것이 아니라 동아시아의 넓은 지역과 관계되며 따라서 민족형성의 장구한 력사적 행정속에서 중화민족에 속하는 많은 민족들과 많은 인종적이고 문화적인 관계를 맺어왔기 때문일 것이다. 이를테면 룡(龍)이라는 이 중화민족의 상징적 이미지는 고조선의 단군신화에서는 등장하지 않지만 동명왕전설에서부터는 등장하며 삼국시기를 거쳐 조선시기에 걸쳐 조선민족의 많은 신화와 전설에서 나타나는 이는 문화적 교류로 인한 것이라고 사료된다. 또 다른 원인으로는 토템속에는 당연히 원시적 이미지가 포함되여 있기 마련이며, 그런 원시적 이미지들은 전 인류적인 공동성을 띠는 것이 때문일 것이다.    카를 융의 신화원형리론에 따르면 원시적 이미지(primordial image)라고 할 수 있는 것들로는 아마 해, 달, 흙, 물, 나무, 산 같은 것뿐이다. 이런 자연대상들은 민족을 초월해서 인간의 집단적 무의식속에 침전되여 있는 남아있는 원시적 이미지(primordial image)인지도 모른다. 물론 카를 융의 집단무의식에 바탕을 둔 신화원형리론도 불가험증(不可驗證)이라는 맹점을 안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카를 융의 리론은 그런대로 세계적인 인정을 받고 있는 실정을 부인해서도 안 된다.    카를 융의 리론에 따르면 원형(原型)은 《원고시대로부터 이미 존재해온 보편적 이미지》 주립원 주편 《당대 서방 문예리론》, 화동사범대학출판사, 1997년, 167쪽. 로서 인류의 최원시 단계에 형성된 것이다. 원형은 일종 《종족의 기억》으로서 보존되여 매개 개체로서의 인간들이 선천적으로 획득하게 된 이미지와 패턴이라는 것이다. 동상서,  167쪽.      《원형은 인류의 장기적인 심리 침전(沈澱)중에서 직접 감지되지 못하는 집단무의식이 드러난 것이다. 잠재적인 무의식이 창작과정에 진입하지만 그것들은 또 외부화(外化)해야 하는 까닭에 최초에는 〈원시적 이미지〉로 드러나게 되며 원고(遠古)시대에는 신화적 형상으로 표현되고 그 다음에는 부동한 시대에 예술을 통하여 무의식가운데서 살아나서 예술적 형상으로 전변되였다.》 동상서, 168쪽.      우에서 언급했지만 남영전 선생이 시적인 대상으로 삼은 것은 대부분 조선민족의 신화에서 추출한 이미지로서 똑 부러지게 몽땅 《원시적 이미지(primordial image)》라고 하기는어려우나 그것에 가까운 것이 아주 많다. 때문에 필자는 남영전선생의 시들을 대체적으로원시적 이미지(primordial image) 혹은 가장 원초적인 신화나 전설 같은 조선민족문화의 원형에서 추출한 이미지를 소재로 하여 나름대로의 의미를 부여하기 노력한 이미지시라고 본다.  이런 리유로 필자는 남영전선생의 근 20년간의 시적인 추구를 토템시라고 이름지어줄 것이 아니라 원형시 혹은 적지 않게 원시적 이미지를 소재로 한 시라고 부르면 더 합당하다고 생각한다.    총적으로 남영전의 시는 이미지시다. 그런데 남영전선생은 의식적으로 원시적 이미지를 선택하여 민족정신의 원형을 표현하기 위해 힘을 쓴 시인이라고 평가를 하고 싶다. 물론 남영전 선생이 선택한 42개의 이미지들이 모두 원시적 이미지라고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중 일부는 분명히 원시적 이미지리고 단정할 수 있다.      4. 결론    결론을 내린다면 남영전선생의 시는 이미지시다. 그런데 남영전선생은 동양 고대의 영물시나 서양 현대의 이미지즘시들과는 달리 의식적으로 조선민족의 신화전설이나 고전문헌에서 추출한, 카를 융의 정의한 원시적 이미지나 또는 가장 원초적인 이미지를 선택하여 조선민족정신의 원형(原型)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이미지시다.    물론 남영전 선생이 선택한 42개의 이미지들이 모두 카를 융의 정의한 원시적 이미지라고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중 일부는 분명히 원시적 이미지라고 단정할 수 있다. 중국에서는 또 룡 같은 문화권상징에 속하는 이미지도 원시적 이미지(原始意象)라고 부른 사람들이 많은 것을 감안하여 카를 융의 원시적 이미지의 외연을 좀 더 넓혀 편의적으로 남영전선생의 오히려 원시이미지(한어로는 原始意象詩)라고 하는 편이 더 합당할 것 같다. 이는적어도 토템시라고 하기 보다는 리론적 맹점이 더 적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원시이미지(한어로는 原始意象詩)라고 고친다고 하여 완전히 명(名)과 실(實)이 부합되는 것은 아님을 부언해 둔다.     
  문학유산   심련수 유작의 정리와 출판을 두고   권 철       중국조선족문학자료를 발굴하고 정리 , 출판하는 것은 겨레의 문화유산을 참답게 계승, 발양 하는데 있어서 자못 중요한 의의가 있는 사업이며 또한 본민족의 문학연구에 있어서도 가장 필수적이고 기초적인 작업이다. 다년래 중국조선족문학자료의 발굴과 정리사업은 우리 문학연구자들의 고심한 노력에 의하여 가시적인 성과들을 거두었다 . 그리고 근년에 이르러서는 일제 《암흑기》에 시단에 나섰던 우리의 시인 심련수의 유작을 발굴하여 해빛을 보게 하였는데 이는 중국조선족문학자료건설에서 이룩한 또 하나의 성과로 된다.   이번 발굴된 시인 심련수의 유작은 그 분량이 많고 그 보존상태가 완정하기로 특징적이다. 관계연구자의 소개에 따르면 발굴된 시인의 유작에는 《시 300여수 , 만필과 소설 7편 평론1편 ,기행문 1편,일기 300여편 ,편지 200여통》이 포괄되어있다.이제 이 발굴된 유작들은 다시 소생되여 우리 시단의 이목을 끌게 될것이며 중국조선족문학발전사에도 한페지를 장식하게  될것이다. 시인 심련수의 유작이 발굴되자 연변인민출판사에서는 그같이 경제적여건이 어려운 상황하에서도 자금을 조달하고 거기에 《한국중국조선족문화예술인후원회》의 도움까지 받아가면서 《20세기 중국조선족문학사료전집》 제1집으로 《심련수문학편》을 간행하였다.그러나 이 《심련수문학편》은 그토록 각광을 한몸에 안으며 출간되였지만 정리자들의 시인에 대한 불경과 주관의지의 개입으로하여 구경에는 시인 심련수를 여지없이 모독하고 그 유작을 마구 짓밟아 놓는 결과를 빚어내게 되었다.하여 이 《심련수문학편》은 문학사료집으로서의 신빙성을  잃었으며 또한 문학자료정리에서 그 류례를 볼수 없는 사례를  조성하기까지 하였다.   주지하는바와 같이 문학사료의 발굴과 정리,출판은 서로 유기적으로 련관되고있다.비록 발굴의 환절에서는 더없이 잘하였었어도 그 발굴한 원전을 제대로 정리하지 못한다면 곧 허황한 것으로 되고 말며,원전의 의의를 말살하는 결과를 빚어내게 된다.《심련수문학편》은 이를 단적으로 실증하여주고 있다. 우선 문학자료의 정리자는 무엇보다 먼저 원작자를 존중하고 원작에 충실하는 자세로 그 작업에 림하여야한다. 그런데 이번 심련수 유작 정리자들은 말로는 시인 심련수를 《문단에 솟아난 또 하나의 혜성》이며 《시인 윤동주와 쌍벽을 이룰수 있다》고까지 높이 추대하였으나 실제 작업에 들어가서는 시인 심련수를 시단에 갖 들어선 초학자보다도 못하게 여겼으며 그 유작을 마치도 소학생의 작문을 다루듯 마구 고쳐놓았다. 아래에 그 구체적 사례를 간추려 들어본다.   우선 《문학자료의 정리사업은 마땅히 충실한 기록과 신빙성있는 판본을 그 기초로하여 작품의 원래의 모양과 생동한 언어,서술방식,결구와 예술적풍격을 보지하기에 힘써야한다.》 이것은 문학자료정리에서 반드시 지켜야 할 기본적 원칙이며 요구이다.여기서 가장 본질적으로되는 것은 반드시 객관기록에 충실하여야하며 정리자의 주관의지가 개입되여서는 안된다는 것이다.그것은 정리자는 어디까지나 정리자이지 창작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련수 유작의 정리자들은 상기 기본적 원칙을 무시하고 시인의 유작에 기탄없이 손을 대였다.근간 필자가 시인의 유작(원전 복제본) 60여편을 얻어가지고 《심련수문학편》에 수록된 시와 대조하여 본데 의하면 그 원시들을  거개 다 자기 생각대로 첨삭증보하여 놓았었다.그중 시 《로인공동묘지》,《길》,《숲속에서 나는 음악소리》,《우정》,《폭상》,《행복》,《잊지 못할 그 눈》등은 어떻게 모질게 란도질을 하여놓았는지,실로 이럴수가 !하고 아연함을 금할수 없게 하였다. 이제 더 그 실상에 대한 서술을 략하고 그 진상의 실제를 보기위하여 우에서 례를 든 시편중에서 지면의 제한도 있고 하여,보다 짧게 씌여진 시 《로인공동묘지》와 《숲속에서 나는 음악소리》를 택하여 서로 대조하여 본다.   露人共同墓地 (유고)   하루빈 온 사람은 이곧을 와 본다니 바쓰에 몸을 싣고 墓地를 찾아갓오 入口에 많은 거지 머리숙겨 경예하더라   異域에 □인 무덤 외롤손 그靈이  파란과 싸호다가 죽은이 이 세상을  남은일 다 못하고 異域에 □ 어지다.                        1940년 5월 20일        로천공원묘지(露天共園墓地)(문집 300쪽)   하르빈사람들 이곳을 다 본다니  뻐스에 몸을 싣고 묘지를 찾아갔소  많은 거지 입구에서 머리숙여 경례했소.   이역에 묻힌 무덤 외롤선 그 령(靈)이 파란과 싸우다가 죽은이라오  가엾어라 남은일 다 못하고 이역에  묻히였구나           1940년 5월 20일    숲속에서 나는 음악소리(유고)   맑은 하늘 밑 욱은 숲속에서 들려오는 싱싱한 소리 무장야 한쪽에서 울고있는 꾀꼬리떼 네 울음은 울어도 웃는 소리요 틀림없는 天使들의 부름같이  넋을 찾어 헤매는 귀에 울려주더라.   10.1.5江古田武藏野音樂學校앞에서        숲속에서 나는 음악소리(문집176쪽)   맑은 하늘 밑 묵은 숲속에서 들려오는 심심한 소리 무장야 한쪽에서 들려오는  꾀꼬리 울음소리 네 울음은 울어도 웃음소리요 틀림없는 천사들의 웃음이라 넋을 찾아 헤매는 귀에 들려주려무나    소화 17년 10월 15일     강룡전무영(江龍田武永)에서   실로 유작을 정리한다는 이들이 이렇게까지 마구 손을 댈수 있는가! 이는 시인에 대한 더없는 불경과 무례를 단적으로 보여준 례증으로 된다. 다음 ,《심련수문학편》의 작품선록에서도 그들은 마구 주관의지를 개입하였었다.그들은 마음대로 ,거기에 하등의 주명도 없이 발굴한 유작중에서 시 60여편을 마구 빼버리었다.살펴보면 편폭의 제한을 받아 그런것도 아니다.그것은 《부록》150여쪽중에서 그 일부를 할애하면 발굴한 시작을 다 수록할수 있었기 때문이다.   작품선록에서도 주관의지가 개입되여서는 결코 안된다.그 유작을 넣고 싶으면 넣고 빼고 싶으면 빼버리는 소위를 절대 용허할수 없다. 그러면 그들은 선록시 어떤 시편을 골라 빼버렸는가? 필자가 그 시인의 유작원전을 다 소지하지 못한 상황하에서 빼버린 시를 다 렬거할수는 없다. 다만 그 중의  일부를 살펴본데 의하면 동흥중학 재학시절에 지은 시와 일본에 갖 이르렀을 때 읊조린 《리상의 나라》와 같은 시들이 빠져있다.이제 그 추려버린 례로 《리상의 나라》를 들어본다.   해돋는 아츰바다 맑고 깨끗한 섬땅 섬은 섬이나 섬아닌나라 맑은 내 흐른곧에 대숲이 있고 논 밭이있는 곧에 사람이 산다. 車中의 사람 車外의 自然 모다가 처음보다는 珍景 朝靄에 싸인데는 마을이 있고 마을있는데는 생기가 있다. 瀨戶海 고흔물에  松島가 띄여있고 白帆이 움직이는데는  하늘이 맑게 개였다. 自然도 그렇고 人力도 그렇다 人力이 빛나는곧에 理想鄕있나니                       沿線에 일하는 모든 哲士는   理想鄕을 建設하는  鬪士들이니 나도내려가 팔을 걷고 땅을 파고싶다.                         二月九日 車中에서   무슨 연유로 이런 시를 뺐을까. 일본을 理想의 나라라고 찬미하였다는데서일까? 이 시를 솎아버린 그 의도를 딱히는 알수는 없으나,정리자가 만일 이 시를 그 어떤 문제를 안고있는 시로 간주하였더라도 유작의 전모를 연구가들에게 제공하기 위하여서는 다 수록하여야하지 마음대로 빼버려서는 안된다. 만일 부득이 하여 그 작품을 추릴 경우 그 빼는 리유를 명백히 하는 주석을 가첨하였어야 할것이다.   그 다음,문학자료의 정리,출판작업은 한낱 엄숙하고도 세심한 작업이기에 정리자는 이에 충분한 주의를 돌리고 참답게 소임을 다하기에 진력하여야 한다. 그런데 이 《심련수문학편》의 정리자들은 아주 무책임한 태도로 정리작업에 림하다보니 그 유작을 깨끗하게 제대로 옮겨 놓지조차 못하였다.이를테면 문학사료는 반드시 그 원작에 좇아 그 표기거나 행,련 등을 원모대로 복원하여야 하였으나 그들은 임의로 현재 통용하는 표기법을 채용하였고,또한 정리중 그 루락과 오기는 너무 많아 그 정오표를 만들기도 힘들정도이다. 아래에 그 일반을 보기 위하여 《심련수문학편》을 보면서 대강 주어낸 오기 중의 일부분을 그 례로 들어본다.           이를 테면 《심련수문학편》에서는 《破響》을《破鄕》으로 《佩物》을 《敗物》로 (이는 시제를 오기한 례임),《逐神》을 《遂神》으로, 《貝殼》을 《具殼》으로 《大膽》을 《大瞻》으로 《淚腺》을 《漏腺》으로  《旅愁》을 《旅悉》으로 《祀願》을 《所願》으로  《銳利》를 《脫離》로 《塵境》을  《塵世》로 《暮巷》을 《暮蒼》으로 《玉璽》를 옥패로 《武藏野》를《무사시》로  적었다.     그리고 유작중의 방언 ,력사사실 , 난해한 언어나 사실등에 대하여도 주해를 다는 것은 정리작업에서 하여야 할 필수 사항의 하나다 .그런데 《심련수문학편》에서는 주해를 달아야 할 곳이 적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다 외면하여 버렸는데 이에서도 정리자들의 성심의 부족과 무책임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부록》에 넣은 《문단에 솟아난 또 하나의 혜성》은 시인 심련수와 그의 유작을 소개한 론문인데 이에서도 시인 심련수에 대한 불경과 더불어 그의 시작의 소개에서도 착실하지 못한 소위를 보아낼수 있다. 글세 이 글에서는 시인의 시 19수(시조 포함)를  인용하였는데 그중 17수에서 임의로 첨삭하였거나 ,소홀로하여 일부 단어를 루락,오기하고있다.좀치라도 시인을 존경하는 마음을 가졌고 그의 유작을 우리 겨레의 소중한 유산으로 간주하였다면 이런 착오는 피면할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부록》에 실린 글에서의 시인 심련수의 사인 (死因)에 대한 진술도 명석하지 못하다.론문 들에서는 《도보로 룡정으로 오던중 왕청현 춘향진에서 일본놈들에게 피살되였다.》(624쪽)라고 하였는가하면 다른 한편에서는 《광복전 집으로 돌아오던중 살해된다》라고 쓰고 있다.시인 심련수는 애석하게도 그렇게 고대하던 광복의 날을 눈앞에 두고 불행하게도 자기의 일생을 마감한다. 그런데 이 론문들에서는  그 구체적 사인에 대한 그 서술들이 서로 엇갈리고 있는바 마땅히 세밀한 조사를 거쳐 그 사인을 명백히 밝혔어야 하였다.   이상에서 언급한바와같이 오랫동안 파묻혀있던 시인 심련수의 유작을 보다 완정한 상태로 발굴해낸 것은 중국조선족문학자료건설에서 한낱 기여이나 그 정리작업의 한 고리마디에서 엄수하여야 할 객관성원칙을 무시하고 기탄없이 주관의지를 개입함으로써 시인 심련수와 그의 유작을 여지없이 모독하고 외곡하는 악과를 조성하였다.그리하여 출간된《심련수문학편》은 문학사료집으로서 가치를 상실하였을 뿐만아니라 일반 문학독물로도 제공할수 없는 악과를 조성하였다.   이에 우리들은 시인 심련수의 유작 정리작업에서 빚어낸 요류를 심각하게 인식하고 그 교훈을 참답게 흡취하여 우리의 문학자료건설의 수준을 높이기에 진력하여야 할것이다. 그리고 출간된 《심련수문학편》이 국내국제학술계와 사회에 끼친 영향을 홀시하지 말아야 한다.이미 시인 심련수와 그의 문학을 론한 글들이 적지 않게 나갔는데, 이 론문의 작자들은 기간 《심련수문학편》을 텍스트로 간주하고 그에 의지하여 연구한 성과물들을 내고있다.필자는 이미 간행한 《심련수문학편》이 학계와 사회에 끼친 악영향을 보다 빨리 제거하기 위하여서는 시인 심련수에 대한 경의를 지니고 무엇보다 먼저 그의 유작을 객관성원칙에 쫓아 참답게 기록한 신빙성있는 신간 《심련수문학편》을 하루 속히 출간하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밖에 이번 시인 심련수유작의 정리작업에서 요류를 빚어낸 그 칙임을 정리자에게 다 돌려서는 안된다.그것은 문학자료건설사업에서 출판도 한낱 중요한 고리마디가 되기 때문이다.이번 비록 출판사에서 《심련수문학편》의 출판을 위해 그같이 중시를 돌린 것은 그 의의가 크지만 인식과 준비사업이 따라가지 못하여, 가히 피면할수 있는 오류를 피면치 못하였음을 교훈으로 받아 들이어야 할 것이다. 끝으로 《20세기 중국조선족문학사료전집》편집위원회의 구성,감수조치의 강구 등 면에서 허점을 안고있음을 자인하여야 할것이다.이 밖에 어떻게 되어 《심련수문학편》을 제1집으로 내게 되었는가,사료전집 50권의 총적 편찬기획,《서문》에서 피력한 작가작품의 수록범위와 기준 등에 대하여도 필자나름의 이견을 갖고있는바 이에 대하여서는 일후 기회에 토론하기로하고 여기서는 이만 끝인다.                                                                                                                                                          2004년 2월   민족시인 심련수의 대표시 해설  - 일제 암흑기와 심련수 문학의 개요 -    이 재 호(시인 . 한국언어철학연구회장)          20세기 중국조선족 문학사료전집 제1권으로 심련수문학전집이 발간되었다는 것은  우리 문학사에 있어 일제 시대를 조명할수 있는 획기적인 자료라 할수 있을 것이다.  비록 뒤늦긴 했지만 국내에서도 주요 일간지와 방송 등에 소개된 암흑기의 시인 심련수는  한국문학사를 다시 정리하는데 있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1930년대 후반 중일전쟁을 기점으로 점점 가혹하기만 했던 일제의 폭압은 친일문학을 양산케 하는  계기가 되었고 이들 친일 문학은 문학이라 할수 없을만큼 질량적으로 함량미달이었다.      우리 국내와는 다르게 비교적 민족의식을 고취할 수 있었던 당시 간도지역에는 우리나라 학생들이 많을 수 밖에 없었다.  이곳에서 순수한 한글 문학 세대가 이루어졌다는 것은 우리 언어연구에 있어 새로운 조명을 받아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심련수는 재학중 문예반장이었다는 것이고 그 당시 중학생 신분으로 만선일보에 이러한 작품을 발표한다.        시 : 대지의 봄      봄을 잊은듯하던 이 땅에도/소생의 봄이 찾아오고/  녹음을 버린듯이 얼었던 강에도/얼음장 내리는 봄이 왔대요.  눈 위의 마른풀 뜯던/불쌍한 양의 무리/새 풀 먹을 즐거운 날/  멀지 않았네/넓은 황무지에단/신기루 궁을 짓고/  새로 오신 봄님 맞이/잔치놀이 한다옵네  옛 봄이 가신 곳/내 일 바빠 못 왔길레/  올해 오신 이 봄님은/ 누구더러 보라 할꼬     시 : 여창의 밤      길손이 잠못 이루는/이 한밤/  호창의 희미한 등불/더욱이나 서글퍼요  갈자리 튼 눈에는/뭇손의 여진이 절어 있고/  칼자리 난 목침에는/여수가 몇천번 베어졌댔나  지난 손 홧김에/ 애꿎이 태운 담배 꽁다리/  구석에 타고 있어/마음 더욱 설레인다  어두운 이 밤길에 달리는 여차/왈그럭 덜그럭/  호마의 발굽과 무거운 바퀴/이 마음 밟고 넘어 가누나        여기 이 시를 발표한 만선일보란 우리 민족의 서러운 역사가 스며있던 치욕의 기록이기도 하다.  이 신문은 원래 용정에서 나왔고 간도일보와 신경에서 나왔던 만몽일보를 합쳐 중국어와 한국어로 낸 신문이었다.  일제가 대륙침략의 교두보로 1907년 만주철도 주식회사를 설립, 1931년 만주사변을 유발 시키고 괴뢰 만주국을 세워 꼭두각시 부의를 황제로 삼아 길림성 장춘을 수도로 정해 신경이라 개칭한 것이다.  이때 일제는 식민통치를 위해 각 지역에 살고 있는 민족어로 된 신문을 일제 기관지로 내게 되는데 이것이 한글판 만선일보였다.  모든 실권을 일본놈이 잡았으며 신문사 고문에는 최남선, 편집국장은 소설가 염상섭,  사회 학예부장에 시인 박팔양 등이 몸담기도 했다.      후일 해방이 되고 작가 안수길,홍양명,이갑기,손소희 등 여러 문인들이 인연을 맺은 신문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우리 국내보다 이곳 문학이 더 왕성하고 자유로웠다 할수도 있다.  이것은 심련수문학이 발굴되지 않았다면 확인되지 못하였을 것이다.(자료:연세대학 도서관)  심련수의 조부 심대규는 강릉 일대 호남으로 술을 즐긴 의리파였다고 한다.  삼촌 심우택은 독립운동가로 이동휘 등과 함께 활동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심련수 아버지는 심운택이며 심련수시인의 남동생 심학수는 당시 흑롱강성 벌리현으로 가서  북한 김일성 이종사촌 항일투사 박관순과 친하면서 동서지간이 되었으며 큰 누나는 학생 때 글짓기 대회에서 항상 1등을 했으며 심련수시인 막내 동생 심해수는 해방 후 연변작가협회 회원으로 문학활동을 한 것도 밝혀졌다.  심련수가 동흥중학 재학시 여류작가 강경애의 남편 장하일이 동흥중학 교무주임이었다는 것도,  또 심련수시인과 가까웠다는 것도 확인이 되었다. 심련수의 일기는 1년분량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이 소중한 자료는 수학여행 일정과 당시 풍물을 담은 사료적 가치가 충분한 기행시 뿐 아니라  용정에서 도문-원산-금강산-서울-개성-평양-신의주-봉천-대련-신경-하얼빈-목단강 등을 돌아본  수학여행 일정 등 조국순례 대행진을 할 수 있는 민족애를 여실하게 보여 주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 가운데 윤동주는 무엇을 했느냐이다.  윤동주 동생 윤광주와 심련수 동생 심해수는 절친한 친구 사이였다.  자료에 따르면 윤동주 동생은 심해수에게 윤동주가 보고 읽었던 것 가운데 중요한 것이라  여겨지는 자료들을 전해 주었던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이 자료들 속에는 윤동주가 스스로 스크랩해서 만든 일제 당시 우리 국내주요 일간지에 실린  각종 문학기사와 저명한 문인들의 글이 비교적 깨끗한 상태로 보관되어 있었다.  윤동주 스스로가 부농의 아들이었기에 문학을 하는 가난한 심련수를 알고 있으면서도  고의적으로 멀리했다는 것이 자료에서도 나타나고 있음이다.      윤동주는 당시 용정 광명학원을 졸업하고 1938년 연희전문(현 연세대학)을 입학하여  1941년 졸업하면서 1942년 일본으로 가서 릿교대와 동지사대를 다녔다.  일본에서도 윤동주와 심련수는 만날 수 있었을 텐데 왜 이들은 단 한번도 만났다고 하는 기록이 없는지 필자로서는 그것이 참으로 궁금했던 것이다.        l. 심련수 시인을 중심으로        1936년 일본은 총독 미나미 지로를 앞세워 이라는 통치방침을 표방한다.    보다 철저한 우리 민족말살과 황민화 정책을 강행하는데 면 단위마다 신사 설치를 하게 하고 l937년부터는  신사참배와 황국신민의 서사 제창을 강요할 뿐 아니라 이듬해에는 국체명징, 내선일체, 인고단련의 강령에 따라 한국 학생의 황국신민화를 꾀하고 조선과 만주의 교육령을 개정, 학교의 명칭, 교육 내용을 일본 학교와 동일하게 했다.  우리말의 사용을 금지했으며 l939년, 창씨개명 제도를 실시 우리의 이름까지 일본식으로 고칠 것을 강요하면서 한국인들을 강제로 징용 전쟁터와 탄광 등지로 끌고 갔다.  l940년부터 일제는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 한국말 신문을 폐간시키고 조선어학회, 진단학회 등을 강제 해산시켜 민족문화의 말살을 꾀했다.      심련수 시인은 이러한 시기에 우리말 우리의 정신인 문학을 공부하기 위해 동흥중학을 2l살의 나이에 졸업하고 일본 유학길에 오른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발굴된 민족시인 심연수 선생의 작품들은 l939년부터 l943년까지 5년 동안의 미발표작들이 대부분을 이루고 있다.      일제는 l940년 국민총력조선연맹을 만들었고 국민정신총동원운동을 전개했으며 l94l년 3월, 사상범예방구금령을 공포, 언제라도 감금이 가능한 체체를 갖추였으며, l942년 학도동원체제, 국민근무체체 등 징용의 강제력을 비상수단화했다.  l943년과 l944년에는 징병제와 학병제를 실시, 대학생들도 강제 소집했던 것이다.  여기에서 필자는 심련수 선생이 l943년 일본 유학을 마치고 용정에 돌아오면서부터 일제의 학도병 강제소집을 피해 신안진으로 가  초등학교에서의 교원생활을 통해 반일사상을 학생들에게 고취한 사실과 이로 인해 두 번이나 유치장에 갇힌 것과, 일본 히로시마에 원폭이 투하된 사실을 알고 신안지에서 용정까지 걸어서 오던 중 l945년 8월8일 일본군에 의해 마침내 확인 사살된 근거가 학병제에 의한 것이라 주장하고 당시 일제강점기의 자료를 일본정부에 요청했으나 묵살된 바 있음을 밝히는 바이다.      따라서 필자는 l944년 일제가 아베 노부유키 총독으로 하여금 전쟁 지속을 위해 비협조적인 한국 지식인들에 대한 대규모의 가혹과 탄압과 검거에 이어 1945년부터 발견 즉시 확인사살을 명령한 바 있음을 문제로 제기하고자 한다.  이러한 문제의 제기는 l944년 8월 여자정신대 근로령과 l945년 애국반, 경방단 등의 조직적인 한국인 통제가 주 원인으로 일본의 군국주의 체제가 패망하기 전까지 계속된 만행임을 심연수 시인의 발굴 과정에서 밝혀냄으로 민족 시인의 자리매김을 재정립하고자 하는 데 있다.      2. 심련수 시문학의 특징        심련수 시인의 문학적 어휘력은 다시 연구되어야 할 것이긴 하지만 그 시적 주제는 민족정신을 일깨우는 선구자적 언어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이 시기에 흔히 나타나기 쉬운 무슨 애련이나 자연을 감상하는 감각적 시풍이 아니라 암울한 현실에서 문학혼을 불태울 삶의 결연한 사실주의적 경향이 시의 주조를 이룬다.      또한 강인하고 비타협적이며 생명력 넘치는 정의와 신념, 그리고 남성적 삶의 지조를 견지하는 서정적 자아의 지사의식과 주의시적(主意詩的) 기법이 모던하고 비장하다.  심련수 시인의 시적 특징 가운데 또 다른 현상은 약소 민족에 의한 현실적 고민을 문학을 통해 초월하는 진실과 자유와 생명력의 서정적 자아의지 극복이라 할 것이다.      이는 적극적 정서의 측면이 강렬한 만큼 선생의 시가 르포르타주한 기법을 보이고 있는 것으로 보아 심리적 리얼리즘을 시의 한 축으로 하고 있다는 것에서 문학을 통한 투쟁의 의미를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시적 언어의 리얼한 비유와 은유의 씀씀이가 모던하게 내면의 주제의식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심리적으로 한계의식에 의한 초월조건을 차용하는 것인데 아러한 정신적인 힘이나 시적 경향은 내적 관조보다는 능동적인 자기의 생각을 표출하는 데 중심적 가치를 부여하기 때문에 거창성과 모호성을 유발하기도 한다.        심련수 시인의 시적 자아가 비교적 직설적이며 작품이 생경하기도 하고 투박하기도 하지만 이것은 서정적 자아의 내면적 여과를 거치지 않은 것으로 그 예술성에 있어서는 감칠맛이 덜 하다는 것이 일반적인 시각이다. 그러나 시어의 선택과 배열, 배합을 보면 단순미와 함께 절대생활용 어미의 변용을 보편적인 일상용어로 다스려나가고 있다. 사물에 대한 내적 의지를 본질로 하는 순수함이나 긴요한 정직성과 그 독창적인 시작법은 시적 공감에 따른 윤리적 교훈뿐 아니라 고귀한 의지의 언어 경험을 감득하게 한다.        뿐만 아니라 심련수 시인의 문학적 특징 가운데 또 다른 경향이 있다면 그것은 문학을 통한 근대정신이라 할 휴머니즘의 시적 주제의식을 노래하고 있다는 것이다. 심련수 시인의 문학 밑바탕에 흐르고 있는 사상이나  그 의식구조가 인간 중심적 문제를 고민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이성적 존재자로서 자립해야 한다는 민족의 중심성을 실현코자 하는 시적 휴머니티가 돋보인다.      시대적 피지배 현상에 따른 합리적 휴머니스트로 민족 구성원의 역할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었음을 선생의 문학은 웅변한다.  그러므로 20세기 중국 조선족 문학사료전집에 수록된 선생의 시와 시조가 보고 읽는 이에 따라 다소 편차를 나타낼 수밖에 없는 것은 그 이유를 큰 관점에서 볼 때 심련수 문학의 초기시와 후기시의 영향 때문이리라.        또한 일본 유학 시기와 유학 후에 창작된 시편에서도 이러한 경향을 보이고 있는데 이것은 당시 중국에서 문학 공부를 하던 것과 일본대학 예술학원 창작과에서 공부한 문학의 정보 역량에 따른 차이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그러나 급격한 문학에의 변화는 일본에서 친구 이기형(생존) 선생과 함께 몽양 여운형 선생을 만나고 나서 심리적으로 충격을 받은 것이 주된 원인이라는 지적이 설득력을 갖는다.      심연수 시인의 지사적 열정이 때로는 강인한 신념에 의한 시적 체험으로 다소 엇갈리게 우리와 만날 수 있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그러나 민족의 독립을 위한 문학적 정의가 아름다운 것은 심연수 시인이 사후 50여 년이 지난 지금에야 발굴되어 우리들에게 그 책임을 되묻고 있다는 것이다.      3. 심련수 시인의 시적 언어        민족시인 심연수 선생은 시의 종결어미에 있어 남다른 언어 씀씀이를 보이고 있다.    들으라, 부르라, 보라 할꼬. 배였구나, 설레인다, 가누나, 가버린다, 주려무나, 스며든다, 찾더라오,   어찌한담, 왠일인고, 나이다, 주었소, 으리니, 오리다, 얻노라, 쉬다니, 소이다, 오지요, 자란다, 큰다, 굶어라, 네것이다, 로다, 납소, 소서, 는고, 세라, 으리라, 더이다, 졌구나, 일이냐, 맞노라, 스럽다, 것이다, 봐라, 하여라, 들이다, 었다, 알리라, 다녔다, 하구나, 였구나, 싶구나, 좋겠소, 하나니, 이냐, 하라, 한다, 간다, 썼다, 란다        이러한 언어의 씀씀이는 주의시적 의지의 시풍을 형성하는 데 있어 사용되는 시적 용어임을 알 수가 있다.  선구자적 언어의 배열을 몸에 익힌 듯한 이 종결어미의 사용은 심연수 시인의 시 도처에서 발견될 뿐만 아니라, 왜 이러한 주의시적 시관을 통해 역사적 격변과 충격을 시적 위안으로 삼았는지 그 심층을 살펴보는 것은 매우 흥미 있는 관조일 것이다.      시인은 그의 시적 대상으로 민족의 생활양식을 가장 먼저 꼽고 있다. 우리 민족이 늘 꿈꾸는 지평선이며, 대지며, 나무며, 들이며, 바다와 강, 그리고 아침과 낮과 밤이며, 새벽을 주제로 노래했다.  ‘나와 너’와 ‘우리들’과 ‘나그네’를 통해 민족의 동질성을 일깨우고자 하는 한편  ‘소년’을 시적 대상으로 하여 민족해방 의식을 고취하고 있다.        심련수 시인의 또 다른 시적 특징은 시의 직설적 표현 기법을 쓰고 있음이다. 이러한 모더니즘적 시풍이 주의시적 경향과 맞물리면서 나타나는 시어의 선택이란 목적시의 유형을 벗어나기 어려운데도 블구하고 서정성을 유지하는 것으로 보아 그 문학적 깊이를 느끼게 한다.      선생의 시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등을 내용으로 한 시적 언어 구성은 심연수 시인의 정신적 지조가 무엇인지를 알게 하는 데 있어 바로미터가 된다.      여기에서 필자는 l943년 당시 일제의 탄압과 우리 언어말살정책에 의한 검열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심연수 선생의 시 대부분이 직설적이며 주의시적(主意詩的)임으로 목숨을 건 시작 행위를 서슴치 않았던 이 위대한 민족시인을 일본이 몰랐다는 것은 이해 밖의 일이었다. 일제의 확인된 학살임이 분명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민족시인들에 대한 재검토가 있어야 한다. 필자의 심연수 시인에 대한 애착은 시인이 자신의 민족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생명의 위험으로부터 문학이라는 정신적인 무장으로 일본에 저항한 그 숭고함 때문이다.      4. 대표시의 감상과 이해    주의시적 표상과 끈질긴 서장적 자아        ..........이 재 호시인 선정 심련수 대표작............        소년아 봄은 오려니            봄은 가까이에 왔다  말랐던 풀에 새움이 돋으리니  너의 조상은 농부였다  너의 아버지도 농부였다  전지는 남의 것이 되었으나  씨앗은 너의 집에 있을 게다  가산은 팔렸으나  나무는 그대로 자라더라  저 밑의 대장간 집 멀리 떠나갔지만  끝 풍구는 그대로 놓여 있더구나  화덕에 숯 놓고 불씨 붙여  옛소리를 다시 내어 보아라  너의 집이 가난해도  그만한 불은 있을게다  서투른 대장장이의 땀방울이  무딘 연장을 들게 한다더라  너는 농부의 아들  대장의 아들은 아니래도…  겨울은 가고야 만다  계절은 순차를 명심하자  봄이 오면 해마다 생명의 환희가  생기로운 신비의 씨앗을 받더라        우리 민족에게 희망을 안겨준 시가 별로 없었던 시기에 와 같은 시를 쓸 수 있었다는 것은 눈물겹도록 감동적이다.      무엇보다 민족의 아픔을 온몸으로 불태운 청년 심련수 시인의 짧고 위대한 영혼이 문학을 통해 지조를 지킨 몇 안 되는 우리 민족의 저항 시인이었음도 그의 시 도처에서 밝혀지고 있다.  당시 대부분의 문학인들이 일제의 앞잡이 노릇을 하거나 목숨을 유지하기 위해 일제에 아부하지 않을 수 없는 길을 선택받아야    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문학을 일제로부터 저항의 탈출구로 삼았던 심련수 선생은 오히려 일본을 알기 위해 유학길에 오르고 이를 바탕으로 일제의 패망을 예언하는 한편, 선생의 수많은 유작 가운데 와 , , 등 이미 앞에서 열거한 시작들이 가장 극명하게 선생의 저항정신을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이 시는 제목에서 보듯이 소년과 봄을 주제로 하고 있으나 시구 풀이는 민족의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는 것을 리얼하게 암묵적 은유기법을 이용하여 명시하고 있다는 데 주목해야 할 것이다.  “봄은 가까이에 왔다(=일제로부터 민족 해방)”는 전제를 통해 “말랐던 풀에 새움이 돋”는다고 예견하는 자연의 이치를 시적 바탕에 내재하고 있으므로 그 이미지의 대상을 향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너의 조상은 농부”였고, “너의 아버지도 농부”라 말하는 시적 언어 속성에서 보듯이, 일제에 강점당한 우리 민족의 역사성을 비유할 뿐 아니라 농부가 뜻하는 경작의 형상화를 교훈조로 통찰케 한다.      제5행에 이르러 시인은 봄과 소년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은유하면서 직관을 차용한 극복의 의지를 선명하게 드러낸다.  농사를 지을 “전지(땅)는 남의 것(=일제에 빼앗김)이 되었으나 / 씨앗(=민족해방을 위한 국권 회복)은 / 너의 집에 있을”  것이라며 예언자적 저항성을 표현하고 있음이 실로 놀랍기만 하다.        이 시에서 백미를 장식하는 6행에서 16행까지의 시적 긴장감은 투사적 언어 씀씀이가 그 위대성을 발휘하고 있다.  “가산은 팔렸으나 / 나무는 그대로 자라더라”에서 가산과 나무의 역할 분담을 이중화시킨 것은 당시의 상황으로 보아  목숨을 내건 사건이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저 밑의 대장간 집 멀리 떠나 갔다"는 시적 진술은 선생 자신의 고백임이 분명하다고 하겠다. “끝 풍구는 그대로 놓여 있더구나(=민족의 구성원은 빼앗긴 땅에서 그대로 살고 있구나) / 화덕에 숯 놓고 불씨 붙여  옛소리를 다시 내어보아라(=여기에서 화덕과 숯의 역할은 우리 민족 고유의 정신뿐 아니라  3·l 독립 징신을 시적 내용의 화두로 삼았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 너의 집이 가난해도 / 그만한 불은 있을게다(=이 지사적 통찰력은 민족 해방의 깨달음을 염두에 둔 선생  특유의 시적 기법으로 다시 연구되어야 할 것이다) / 서툰 대장장이의 땀방울이 / 무딘 연장을 들게 한다더라  (=선생의 시적 정서와 의지적 언어관은 보편적 민족성을 획득하고 있다. 모국어에 담겨 있는 문학의 전통성을  선생께서 후세에까지 교감케 한 그 민족적 체취는 경건한 것이기도 하다) / 너는 농부의 아들 / … / 겨울은 가고야 만다  (= 일제 시대는 겨울과 같아서 패망할 것이다) / 계절의 순차를 명심하자 / 봄이 오면 해마다 생명의 환희가 / 생기로운 신비의 씨앗을 받더라 (=자연의 이치를 이 시 속에 도입한 선생의 내적 고백성은 역동성을 갖기에 더욱 선명하다. 선생의 내적 의지의 발현 또한 민족의 자아를 찾는 데 목숨 건 비장함을 동반하고 있다)  일제 강점기의 암울한 현실에서 비타협적이며 시적 생명의 의지를 민족애 하나로 견지하다 일본 헌병의 조준된 흉탄에 젊은 청춘을 버린 민족시인의 숭고한 시정신을 우리는 다시 찾아 기려야 할 일이다.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우리에게 잘못 알려진 민족시인들에 대한 새로운 조명이 있어야 할 것으로 전망한다.  심련수 시인이 이육사 선생과 이상화 시인과 같은 분들에 비해 한치도 손색이 없다는 것은 이 작품 이외에도 선생께서 남기신 수많은 유작들이 증명하고 있다.        고집        고집을 써라 끝까지  티끌만한 순종도 보이지 말고  타고난 엇장을 굽히지 말라  벽을 문이라고 우기고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우기고  소금이 쉬여 곰팡이 낀다고 뻗치라  우기고 뻗치다 꺾어지건 통쾌해도  뉘게다 굽석거리는 꼴은  보기 싫도록 역겨웁더라        이 시에서 말하고자 하는 선쟁의 의도는 절개와 같은 것이다.  일제의 수탈이 극심한 시대적 배경을 생각할 때 시 이 뜻하는 민족정신의 뚜렷한 목적이 근본적인 물음에 접근하고 있다.  선생은 이 시를 통해 “티끌만한 순종도 보이지 말” 것을 강변하면서, 우리의 “타고난 엇장(비분, 기개, 고집불통, 비타협)”과 같은 절개를 가질 것을 주문한다.  “벽을 문이라고 우기고(=절망을 희망이라 하고) /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우기고(=일제의 거짓말을 비유하고 있음)”에 유의해서 읽을 필요가 있다.        선생은 이라는 이 시에서 그 저항의 본질을 이렇게 표현했다.  “소금이 쉬여 곰팡이 낀다고 뻗치라” 즉 사랑이 썩어 냄새난다고 뻗치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뻗치다의 말뜻이 갖는 시적 의미는 위에서 말한 절개의 정신과 맥을 잇고 있다.    그러면서 차라리 꺾어질지라도 타협하거나 일제에 순종하지 말 것을 고집이라는 시를 통해 말하고자 한 것이다.  *뉘게다(누구에게) 굽석(굽신)거리는 꼴은 / 보기 싫도록 역겨웁더라” 하고 말할 수 있었다는 것은 일제 치하에서 죽음을 뜻하는 일이었다.      턴넬        길다란 턴넬  감캄한 굴 속  자연이 가진 신비를  뚫어놓은 미약한 힘  눈을 감고 걸어도  눈을 뜨고 찾아도  밟히우는 송장  바닥 가득 늘어자빠진 꼴  아, 빛이 없어 죽었나  그러나 또 무수한 생명이  레루를 베고 침목을 베고 누워  지나갈 바퀴를 기다리고 있음을  또 어찌하리  싸늘한 송장의 입김에서 들려오는  울부짖는 소리  우를 우러러도  아래를 굽어보아도  캄캄한 굴 속, 캄캄한 굴 속        시의 본성, 곧 시란 무엇인가? 시는 어떤 예술인가? 시는 어떤 언어인가?    시는 어떤 역사와 사회적 문화 현상인가? 시는 어떤 심혼의 소산인가?      이러한 질문들은 선생으로 하여금 일제의 흉탄에 돌아가시기까지 계속된 과제였을 터이다.  시가 당시의 현실 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는가를 알고 있었던 선생으로서는 민족문학을 위한 중대한 결심을 하게 된다.  1943년 일본예술대학을 졸업하고 돌아오던 해에 창작된 것으로 알려진 시 은 선생의 문학적 삶을 단적으로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으나,  이 시를 읽지 않으면 심연수 선생의 문학세계를 이해하는 데 걸림돌이 되겠기에 소개하고자 한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터넬과 선생의 시 터넬이 뜻하는 의미를 이해해야 할 것이다.    “길다란 턴넬(=일제의 오랜 억압) / 캄캄한 굴 속(=일제 식민 치하에서의 생활) / 자연이 가진 신비를 / 뚫어 놓은 미약한 힘(=일제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우리의 희망)       / 눈을 감고 걸어도 / 눈을 뜨고 걸어도 / 밟히우는 송장(=일제 식민 치하에서 죽어간 백성들의 시체) / 바닥 가득 늘어자빠진 꼴 / 아, 빛이 없어 죽었나 / 빛이 싫어 죽었나(=자포자기한 상태의 암울한 현실을 비유) / 그러나 또 무수한 생명이 / 레루(레일)를 베고 침목을 베고 누워 / 지나갈 바퀴를 기다리고 있음을 / 또 어찌하리”        일제는 그들의 야욕을 위해 철도를 건설했으나 철로에 놓인 침목의 수만큼이나 많은 우리의 백성들을 무참하게 학살했다는 것은  이 시는 확실한 증언처럼 증명하고 있음이다.        “싸늘한 송장의 입김에서 들려오는 / 울부짖는 소리”  선생께서 턴넬을 바라볼 때마다 일제가 학살한 우리 민족의 귀중한 목숨들과 그 영혼의 처절한 울음 소리를 귀에 쟁쟁 듣지 않았으랴. “우를 우러러도 / 아래를 굽어보아도 / 캄캄한 굴 속, 캄캄한 굴 속”      이 시의 자아의지가 턴넬이라는 제목에서 보여주고 있듯이 턴넬 속에 갇혀 있는 우리 민족의 현실을 적극적인 의지로 표현할 수 있었다는 데 그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선생의 문학은세계를 지성적으로 갈파하고 있음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봄의 뜻        읽고서 알았쇠다  님마음 알았쇠다  보고서 알았쇠다  님마음 알았쇠다  글자마다 살았고  구절마다 뛰더이다    ─ 원문(당시 사용되는 언어)      읽고서 알았습니다  님 마음 알았습니다  보고서 알았습니다  님 마음 알았습니다  글자마다 살았고  구절마다 뛰고 있습니다    ─ 수정(현재 사용되고 있는 언어)        이 시에서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것 즉, 봄을 뜻으로 풀이하고 있음에 유의해야 한다. 전체 6행의 시적 언어 의미가 ‘알았다’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봄을 읽고 알았다는 것은 님이라고 하는 마음을 말한다. 여기에서 님은 봄이 뜻하는 개화와 해방의 님인 것이다. 보다 더 의미심장한 싯구는 “글자마다 살”아 있다는 것과 그 “구절마다 마음이 뛰고 있”더라고 하는 내적 의미의 완결성이다.  봄의 뜻이 담고 있는 독창성은 개성이다. 이러한 개성이 보편성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시적 언어의 주제의식이 참신해야 한다. 따라서 심연수 시인의 문학적 이원성은 봄이라고 하는 의미를 뜻으로 파악하고 있는 데서 이 작품의 독창성과 함께 새로운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고 할 것이다.      비록 짧은 시이긴 하지만 작품의 완성도 또한 충족하고 있다. 봄의 뜻이 말하고자 하는 심미성, 대중성, 상징성이 시의 통일성을 이루고 있어서 살아 있는 정서를 경험케 한다.  따라서 원문과 수정된 시를 함께 싣는 것은 1940년대 당시에 사용된 우리말의 씀씀이를 이해하기 위한 것으로 참고되어야 한다는 뜻에서이다.      새벽        미명의 광야를  달리는 자 누구냐  동 터올 새벽을 기뻐 맞을 젊은이냐  짧아진 희대에 활활 붙는 불  새빨간 불길이 춤을 춘다  푹푹 우그러든 자국마다  땀이 고였고  대기를 몰입한 듯한 호흡의 율동  지심을 놀랠 만한 그 무보(武步)는  피 묻은 싸움의 여세(餘勞)의 연장  암흑을 익힌 개선장병아  분투의 앞에 굴복한 과거는  캄캄한 어둠 속에 쓰러졌다  승리자여,  만난을 극복한 투사여  오래지 않아 서광이  그의 얼굴을  그의 몸을 비치리니  속으로 웃어 마음에 간직하라  잡고 있는 횃불 아래  따라오는 무리의 갈 길을  가르쳐주라  해 돋는 동쪽 하늘가  넓고 넓은 그곳으로      심련수 시인의 일반적인 시들의 주제가 주의시적이라는 것은 그만큼 어두운 시대에 대한 고뇌와 자아 성찰이 비교적 쉽고 상징적 표현 속에 잘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시인의 회의와 번민, 처절한 고독 속에서의 희망을 잃지 않는 새벽을 꿈꾸는 자세는 예언자적 미명을 기다리고 있다.  지성의 면모를 보는 듯하지 않는가? 시대의 현실을 통찰하는 이 역사적 자아의 승화는 심연수 시인의 정신적 지향을 의미하기도 한다.      새벽이라는 이 시의 주제의식은 우리 민족의 해방에 대한 간절함을 비유와 은유기법을 이용해서 작품화했다.  시인의 시적 소재는 실제의 사건과 그 일어날 것에 대한 개연성과 필연성을 동시에 갖는다.   시가 역사보다 더 철학적일 뿐 아니라 더 중요한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보편성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보편성이란 우리 민족의 미명인 해방이라는    현실적인 명제가 내재되어 있으므로 이 가능성을 시인은 노래하고 있다.        “암흑을 익힌 개선장병아 / 분투의 앞에 굴복한 과거는 / 캄캄한 어둠 속에 쓰러졌다 / 승리자여, / 만난을 극복한 투사여”    오래지 않아 서광이 비칠 것이니, 이때 마음 속으로 웃고 그 섭리를 마음속에 간직하라고 시인은 말하고 있다.      필자의 견해는 심연수 시인의 시적 의지가 불가능을 가능한 것이라 말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싶은 것이다.  일어나지 않은 것의 가능성은 믿을 수 없지만 일어날 것에 대한 가능성이 있음을 필자는 믿고 있다.  심연수 시인의 시 은 민족의 숙원인 해방을 일어날 것에 대한 가능성의 새벽으로 본 것이라는  점에서 예지적인 시인의 통찰력을 놓이 평가하고 싶은 마음이다.      등불        존엄의 거룩한 등불이  문틈으로 새어 나오다가  한줄기 폭풍에 꺼져버렸습니다  그 옛날 조상께서  처음 켠 그 불이  그동안 한 번도 꺼짐이 없이  이 안을 밝혀 왔습니다.  그들은 그 빛을 보면서  옛일을 생각하였고  하고 싶은 말을 하였으며  하고 싶은 일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어둠 속에서  촛불을 켜는 이 있으니  또 다시 밝아질 때가  멀지 않았습니다.    그 등잔에는 기름도 많이 있고  심지도 퍽으나 기오니  다시 불만 켜진다면  이 집은 오래 오래 밝아질 것입니다.        이 시의 시적 언어의 특성은 함축적인 의미의 서정을 예언자적 목소리로 표출해내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서정적  자아는 민족의 역사적 숨결을 느끼게 한다.      등불을 일컬어 ‘존엄’이라는 언어를 사용할 수 있을 만큼 민족애의 이상을 노래하고 있다. ‘한줄기 폭풍’에 비유되는 일제치하를 시인은 집 안의 촛불이 꺼진 것으로 바라볼 만큼 비범하기까지 하다.  내면의 토로가 이러할 만큼 내적 의지의 시적 구현이 분노보다 저항보다 더 이상적이다.  배경지식 없이도 이 작품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따를 것 같지는 않다.      들불        임자 모를 불  거침없이 타는 천리 저쪽 녘  누가 놓은 블씨이기에  저토록 꺼짐 없이  밤하늘을 붉히느뇨  사정없이 타오르는  불길! 불길! 불길!  끌래야 끌 수 없는 위대한 작탄!    언제까지 이 들판에 살아 있을지  어두운 저녁 혼자 보는 들불  그 불똥이 이 가슴에 튀어오기를  삼가 경건히 머리 숙이고  말없이 숭엄히 바라보노라.        l945년 2월 16일, 이 날은 윤동주 시인이 옥사한 날이다.  1945년 8월 8일, 이 날은 심연수 시인이 학살된 날이다.  여기에서 윤동주와 심련수라는 두 시인 가운데 왜 윤동주 시인은 우리에게 알려졌으며 심연수 시인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가 이토록 뒤늦게 발굴되어야 했는지 그것이 궁금할 것이다.      그 이유는 간단명료하다. 윤동주 시인은 비록 고향이 중국 용정이라 하더라도 당시  서울 연희전문학교에서 공부하였고 심련수 시인은 고향이 강릉일지라도  중국 용정 동흥중학을 마치고 일본 유학에서 돌아왔기 때문에 일제가 패망한 후 심연수 시인을 알고 있는 문학인이나 연고자가 안타깝게도 서울에 없었던 까닭이다.    그러나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윤동주의 동생과 심련수의 동생은 서로 친구 사이였고 그렇다면 윤동주의 집안에서라도 심련수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왜 그랬을까? 무엇이 윤동주의 집안으로 하여금 심연수라는 시인의 이야기가 50년이란 세월 동안 묻혀 있도록 했을까? 시 을 감상하면서 이러한 의문들을 생각해보자.    지사적 시인의 면모가 잘 드러나 보이는 이 이라는 시에서 시인의 육성을 듣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는 것은 이 시가 지니고 있는 사상과 시적 호흡의 긴장감이다.  민족의 들불, 조국 해방을 위한 들불의 불길이 타오르고 있다는 위대한 작탄(炸彈)을 시인은 바라보고 있다.  그 불길을 가슴에 안고 삼가 경건히 머리 숙이고 숭엄하게 바라볼 줄 안다는 것은 이 시인만이 가질 수 있는 위대한 분노인 것이다.        
784    중국 조선족 문학의 흐름과 전개과정 댓글:  조회:4618  추천:0  2015-12-05
  중국 조선족 문학의 흐름과 전개과정   조선족과 조선족문학의 일반     현 중국에는 약 200만에 달하는 조선족들이 거주하고 있으며, 그 중 성급 작가협회인 [연변작가협회]는 중국 정부공설의 작가협회로서 약 500여명 정도의 작가회원이 있다. 지금 중국에는 우리글로 출간되는  문학잡지가 3개 있으며, 이 외에 ‘흑룡강신문’, ‘연변일보’, ‘길림신문’, ‘료녕조선문보’ 등 신문들에도 문학부간을 가지고 있으며, 조선족출판사 3개와 연변대학출판사, 료령민족출판사, 중앙민족출판사들에서 조선족도서들을 출판하고 있으며, 흑룡강조선말방송국, 연변인민방송국, 연변TV방송국 등 방송사들에서도 조선족문학작품들을 취급하고 있으며, 흑룡강작가협회에는 조선족전문창작위원회를 두고 있으며, 이 외에 료녕성, 길림시, 청도시, 절강성 등 성, 시들에도 조선족문학인 단체들이 있다.   중국 조선족문학개념에 대한 몇 가지 의문   중국 조선족문학이라 함은 물론 한반도가 아닌 중국지역에서 진행되어온 조선족들의 문학을 말한다. 역시 조선족들이 중국에서 진행한 문학활동의 진실한 기록이기도 한 것이다.   우선 조선족문학의 시점을 어디에 두느냐는 아직도 정론이 나있지 않은 상황이다. 보편적으로 접수되고 있는 관점에 따른다면 조선족문학의 년대기를 대체로 19세기 말, 20세기 초 한반도의 한민족이 중국경내로 대거 천입한 시기, 즉 독립운동시기로부터 보고 있지만, 여기에는 의문점들이 적지 않다. 길림시의 기록에 따르면 1670년대부터 조선족들이 길림에 거주하고 있었다, 그러나 민족사의 연구나 조선족문학의 연구는 19세기 말 이전에는 거의 공백으로 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족문학의 시점을 어디다 두느냐 하는 것은 현 시점에서는 아직 의문부호로 던져두는 방법밖에 없다. 다음, 중국 조선족문학을 국적으로 구분할 것인가, 아니면 국경으로 구분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있다. 다시 말하면 구한 말, 중국에서 활동한 문학인들이 적지 않은 바, 이는 실학파 학자들까지 그 발자국을 추적할 수 있다. 단재 신채호라든가, 유린석, 그리고 그 외에도 많은 학자와 작가, 정치인들이 중국에서 활약했었다. 그러나 이들은 중국 국적을 가지고 있지 않았었다[신채호의 경우, 현 한국 국적도 없는 게 사실이다. 그러면 이를 우리의 문학에서 배제해야 할 것인지.] 하다면 이들의 문학창작활동이나 작품을 조선족문학에 귀속시킬 수 있느냐가 문제로 되고 있으며, 광복 전에는 중국에서 문학 활동을 했었지만 광복이 난 다음 한국이나 북한으로 이주한 작가들도 많다. 그러면 이 부분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역시 정론이 나있지 않은 상황이다. 국적에 따라 분류한다면 중국국적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들의 창작이나 문학활동은 조선족문학에 귀속시킬 수 없다. 세 번째로 조선족문학을 언어로 구분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중국에서 문학활동을 했던 많은 작가나 학자들은 한글뿐이 아닌 한문으로도 많은 창작을 해왔었다. 그러면 이들의 창작활동이나 작품을 중국문학에 귀속시키느냐, 한국문학에 귀속시키느냐, 아니면 조선족문학의 범주에 넣을 수 있느냐 하는 것 역시 아직도 공론이 나있지 않은 상황이다. 언어에 따라 분류한다면 한문으로 창작된 작품이나 한문문학활동은 조선족문학에 귀속시킬 수 없다. 네 번째로 조선족문학을 민족의 호칭으로 획분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사실상 조선족이라는 공식호칭은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되면서 얻어진 것이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되기 전, 많은 조선족들은 국적을 가지고 있지 않았거나, 혹은 중국국적, 혹은 한국국적을 가지고 있었다. 전에 중국에서는 조선족이나 한반도에서 이주해온 민족을 조선인, 한국인, 고려인, 지어 역사를 더 거슬러 올라간다면 신라인, 이렇게 부르기도 했다. 지금까지도 중국 불교 4대명산 중 하나인 보타산에는 신라초라는 섬이 있다. 따라서 거기에는 한국인들이 창작한 작품들도 적지 않게 기록되어 있다. 하다면 이 부분의 문학은 중국문학, 혹은 한국문학, 혹은 조선족문학에 귀속시켜야 하는지. 조선족이라는 공식호칭에 따라 분류한다면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되기 전 중국에서 진행된 문학 활동과 창작은 조선족문학에 귀속시킬 수 없는 것이다. 다섯 번째로 한반도역사시기에 따른 학자나 작가들의 중국에서의 문학활동을 조선족문학에 귀속시킬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멀리 신라시대, 왕자 김교각스님은 중국에서 불법을 구하면서 열반하실 때까지 많은 창작을 해왔으며, 또 그의 설교와 작품들은 중국인, 특히는 불교신앙인들에세 막대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으며 현, 중국불교계에서는 신라왕자 김교각스님을 불교의 지장왕보살로 인정하고 있을 뿐이 아니라, 현재까지 구화산에는 신라왕자 김교각스님의 육신보살이 보존되어 있다. 김교각스님뿐이 아니라 설총대사의 작품도 중국에 많이 유전되고 있다. 이 외에도 전당시[당나라 시대의 모든 시 총 집합시집]에는 수만 수에 달하는 고구려, 신라, 백제 문인들의 시가 수록되어 있으며, 5등회원이라는 불교고승대덕 행적실록에도 신라, 백제, 고구려와 고려의 수십 명 대사들의 작품이나 어록들이 수록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문학대가 최치원도 중국에서 문학창작을 했을 뿐이 아니라 적지 않은 작품들이 중국 고전들에 수록되어 있다. 하다면 이런 문학작품들이나 이들의 문학활동을 중국문학, 한국문학, 아니면 조선족문학, 어디에 귀속시켜야 할지가 문제이다. 그러나 이런 문제들에 대한 연구는 거의 공백 상태로 되어 있으며,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이나 학자들이 적은 관계로 아직 연구가 깊이 진행되고 있지 않은 상황이다. 이런 현실로 보았을 때, 현 중국조선족들의 문학을 어떻게 한 마디로 금을 긋기가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다. 이런 실정에서 오늘 필자 말씀 드리려고 하는 중국 조선족문학의 흐름과 전개과정은 대체로 현, 상식적으로 알려진 광복전후로 시작해서 중국에서 진행된 조선족문학창작활동을 기본으로 잡고 전개한다.   조선족문학발전의 연대 획분에 대한 견해   연대기로 획분했을 때 조선족문학은 대체로 1] 광복 전, 2] 광복부터 1967년 문화대혁명이 시작되기 전까지,  3] 1967년부터 1976년 문화대혁명기간,  4] 문화대혁명이 결속되어서부터 1992년 한중수교 이전까지, 5] 1992년 한중수교로부터 지금까지, 이렇게 대체로 5개의 큰 시기로 획분할 수 있다고 본다. 조선족문학이라 함은 중국에서 거주하고 있고, 또 중국국적을 가진 조선족들의 문학창작활동과 그 작품으로 중국현실 사회구조와 사회체제의 변화에 따를 수 밖에 없으며. 또 중국 국정에 따라 발전하고 변화되기 마련이다. 위에서 획분하다시피 중국조선족들의 문학의 발전과 시대적 맥락은 자연 중국의 현 상황에 따른 것이다.   1] 광복 전 문학 광복 전 문학은 대체로 한반도 문학과 연결되어 있고, 어떤 시각에서 보았을 때는 한국문학의 구성부분이라고 할 수 도 있었다. 대부분의 작가들은 한국과 중국을 드나들면서 창작활동을 했고, 또 발표매체들도 한국과 중국에 걸쳐 별로 구애를 받지 않고, 그때그때 편리에 따라 발표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시기의 문학은 잘 아시다시피 친일문학과 반일독립문학으로 구분할 수 있다고 본다. 윤동주와 강경애, 심연수를 비롯한 저항문학은 어려운 가운데서도 자체 나름대로의 왕성한 생명력을 과시했다. 이들은 대체로 중국, 일본과 한국을 두루 섭렵하면서 창작활동을 벌렸던 반면, 김창걸[대표작 암야]과 같은 작가들은 대부분의 창작활동을 중국에서 진행하면서 끈질긴 저항의 정신을 보였으며 김학철과 같은 항일투사들은 중국항일연군에서 창작활동을 해오다가 광복이 나면서 서울, 평양을 전전하며 창작을 해왔고, 나중에는 중국에 다시 들어와 문화대혁명이라는 어려운 고비까지 넘기면서 창작의 신화를 낳기도 했다. 이와 반면, 일부 친일경향의 작가들도 중국 동북지역에서 창작활동을 해왔었다. 최근 들어 좀은 화제가 되고 있는 친일경향의 안수길과 같은 작가들도 중국에서 많은 창작활동을 해왔으며,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항일투사로 추대 받다가 최근 들어 친일작가로 알려진 [선구자]노래의 작사, 작곡가들 역시 중국에서 왕성한 창작활동을 하기도 했다. 총체적으로 광복 전 조선족문학이란 한국문학의 전체적인 흐름을 따르면서 한국문학과 맥을 같이해오고, 한국문학의 한 구성부분으로 되어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2] 광복부터 1967년 문화대혁명이 시작되기 전까지,   광복으로부터 중화인민공화국 토지개혁까지 중국 조선족들의 문학은 대체로 일제의 압박에서 해방된 기쁨을 노래한 작품들로 주를 이루고 있으며 작가들 역시 광복 전부터 중국에서 창작활동을 해오다가 한국이나 북한으로 나가지 않은 작가들로 구성되었으며, 이들의 영향으로 성장한 청년작가들이었다. 이시기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되면서 50년대 초반까지 진행된 토지개혁으로 없고 굶주리던 사람들이 땅을 분배받고, 나라의 주인이 되어 사회주의 길로 나아가는 것을 가송한 작품들이었으며, 이시기 토지개혁이 한창인 가운데 6.25가 터지면서 ‘항미원조, 보가위국[미국에 대항하고 조선을 지원하며 나라와 집을 보위하자]’에 대한 내용들이 한시기 많은 자리를 차지하기도 했다. 그러나 대체로 중국공산당과 새중국의 창건, 노동과 건설, 인민공사와 공산주의에 대한 동경과 이상 등 내용이 위주로 문학활동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는 문화대혁명처럼 순 이데올로기의 지배에 따른 창작이 아니라, 나름대로 문학의 원리에 따른, 비교적 자유롭고 온화한 문학창작의 환경이 마련된 시기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시기의 청년/ 중견작가들인 김학철, 김철, 리욱, 김창걸, 이근전 등이 새 중국이 성립된 후 중국조선족문학을 이끌어 갔다고 할 수 있으며 중국 조선족문학의 기틀을 잡았다고 할 수도 있다.   3] 1967년부터 1976년 문화대혁명기간,    문화대혁명기간의 조선족문학을 어떻게 볼 것인가는 아직도 많은 이견들이 존재하고 있는 상황이다. 비교적 대표적인 관점들로는 상반되는 관점으로 하나는 문화대혁명기간의 문학은 [문학]이 아니라는 주장, 즉 문화대혁명시기의 문학들은 정치의 부산물로 몰락하면서 문학 구실을 하지 못했고, 또 예술성의 극한 저락으로 문학의 범주에 넣을 수 없다는 주장, 다른 하나는 어찌되었건 간에 문화대혁명시기도 나름대로 문학은 [문학]으로 존속했던 만큼 오늘의 시각으로 그때의 현상을 평가할 것이 아니라, 객관적인 입장에서 시대에 따른 평가를 해주어 여전히 문학의 범주에 넣고, 평가를 하자는 주장이다. 문화대혁명은 중국인들은 물론, 그 중에서도 지식인들에게 아물 수 없는 상처를 주었다. 창작의 자유가 없은 것이 아니라 틀에 넣은 [자유], 즉 오로지의 찬송과 비판, 투쟁과 사상교육, 즉 이데올로기에 얽매인 창작이었고, 정치운동의 도구라고 할 정도로 틀에 매워 있었다. 문화대혁명을 겪은 중국 조선족문인들 가운데서 문화대혁명과 당시 정치운동을 노래하는 작품을 쓰지 않은 작가는 거의 없다. 문화대혁명가운데 피해를 받은 문학인들이 대부분이지만, 나는 문화대혁명에 반기를 들었다고 떳떳이 가슴을 치며 외칠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중국조선족문학의 양심이라고 할 수 있는 김학철 옹 뿐이다. 그만큼 문학인들[원로문인들]을 포함해서 모두 문화대혁명에 종속된 창작을 했었던 경력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면서도 또 문화대혁명기간 비판투쟁과 개조를 받으면서 피해를 입지 않은 작가들은 또 거의 없는 게 문화대혁명기간 중국조선족문인들의 상황이었다. 고로, 많은 작가들은 문화대혁명기간의 작품들을 자기의 창작에서 배제하고 있으며, 문화대혁명기간의 창작과 문학 활동, 문학작품들에 대한 평가는 물론, 말까지 꺼내려고 하지 않는 것 역시 현 상황이다. 그러나 어쨌건 같, 어떤 형식으로, 어떤 도구로, 지어는 어떤 필요로 존재든지를 막론하고 문화대혁명기간 조선족사회에서 시가 존재했었고, 소설이나 산문[수필, 에세이]가 존재했던 것만은 사실이며 적지 않은 문인들은 문화대혁명기간 어떤 목적이었던 지를 막론하고 창작활동을 해왔고, 창작을 해왔던 것만은 사실이다. 그만큼 문화대혁명기간 문학작품들과 문학 활동이 존재했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문화대혁명기간, 현 조선족문단의 중견작가들이 배양되었던 것 역시 사실이며, 지금의 40대 후반부터 50대 초반까지는 모두 문화대혁명시기 문학창작을 시작했던 것이며, 문화대혁명시기 바로 문화대혁명결속 후의 조선족문단의 흥기를 위한 준비가 되었던 것이다. 그만큼 개인의 관점으로 보았을 때 문화대혁명시기 역시 조선족문학에서 배제할 수 없는 문학발전  한 단계로 보아야 할 것이다.   4] 문화대혁명이 결속되어서부터 1992년 한중수교 이전까지,   문화대혁명이 결속되면서 조선족문단 역시 중국전체 문단과 마찬가지로 문학창작의 새로운 발전 시대에 들어서게 되었다. “연변일보”, “흑룡강신문”, 료녕조선문보 등 신문사들에서 본격적인 문학원지가 생겨나게 되고, 연변작가협회기관지 “연변문학[천지]”의 부흥과 함께 많은 작가들이 다시 왕성한 창작력을 과시하기 시작했으며 시대와 공조하여 “도라지”, “장백산”, “북두성”, “갈매기” 등 문학지들이 대거 등장하기 시작했고, 흑룡강조선말방송국, 연변인민방송국 등 방송사들에서도 문학작품을 대거 발표하면서 작가대오를 양성하기 시작했다. 이시기는 주로 중국 문단의 주류를 따라 문화대혁명의 피해를 고소하는 “상처문학”, 우리는 누구인가 하는 문제를 가지고 뿌리를 발굴하는 “뿌리 찾기 문학” “현대시” 등 거창한 문학현상은 형성하지 못했지만 나름대로 과정은 다 겪었다. 이시기 바로 중국 조선족 현 문학의 중견들이 새로운 돌파와 파격적인 창작방법, 그리고 새로운 사상으로 안받침 된 작품들로 문단에 대거 등장했다. 이들은 원로작가들보다 이데올로기에 덜 구애되고 덜 집착했던 관계로 외려 원로작가들보다 문단에 더 활약하면서 조선족문단의 새로운 기틀을 마련하는데 중견역할을 했던 것이다. 이런 창작실천과 10년 문화대혁명동란을 겪으면서 문학의 사막을 지나온 사람들이 문학에 대한 갈구로 문단은 화려하게 장식되기 시작하면서 후기 조선족문학의 황금시기를 맞이하는 데 좋은 기틀을 마련하게 되었다.   5] 1992년 한중수교로부터 지금까지   한중수교는 중국조선족문단의 획기적인 사건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한중수교 전 중국조선족문단과 한국문학의 접촉은 민간적인 차원에서 약간한 접촉이 있었을 뿐이며, 조선족작가들 역시 어쩌다 구해볼 수 있는 한국도서들을 통해 한국문학을 조금씩이나마 엿볼 수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한중수교가 이루어지면서 조선족문단과 한국문학의 본격적인 교류는 물고를 트이기 시작했으며, 연변자치주를 중심으로, 또 연변을 통해 조선족들은 한국문학작품들을 대폭 접촉할 수 있게 되었고 따라서 조선족문단은 단일한 중국문단-전 소련-조선[북한]이라는 접촉방식에서 한국문학이라는 새로운 선을 하나 더 긋게 되었다. 한국작품들과 한국작가들은 중국조선족작가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으며, 또 상호의 교류로 조선족작가들은 문학과 문학창작의 새로운 세계를 접촉할 수 있게 되었다.   문학의 맥에 따른 변화와 양상   중국조선족문학은 중국문학의 바탕에 뿌리를 두고, 중국문학에서 주로 영양을 섭렵하면서 전 소련, 조선[북한]의 창작방식이나 문학이론을 많이 배워왔었다. 중국에서 문화대혁명이 끝나기 전, 외국문학은 주로 전 소련문학과 북한문학과 접촉을 했으며, 그만큼 그 양향을 많이 받았다. 그러나 문화대혁명이 끝나면서 개혁개방이 시작되고, 한중수교가 이루어지면서 중국 조선족문학은 더 다양한 문학과 접촉을 할 수 있게 되었으며, 단순히 중국도서들을 통해 외국문학이나 문학사조를 접촉하던 한계를 벗어나, 한국문학이나 한국도서들을 통해 우리글로 외국문학과 문학사조를 직접 접촉할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조선족문학은 고유의 틀에서 벗어나 창작형식과 방법, 그리고 발전모드 등 여러 면에서 다양한 선택을 할 수 잇게 되었으며, 개혁개방과 그에 따른 문학창작에서의 퍽 자유로운 환경과 함께 한중수교라는 이 천재일우의 기회를 맞으면서 새로운 도약을 하게 되었다.   조선족문학의 지역적 분포현황   중국 조선족작가들은 대체로 연변지역에 많이 집중되어 있으며, 국가공설의 조선족 작가협회도 연길에 있다. 다시 말하면 중국 전역의 조선족창작활동에 대한 관리와 조직, 양성을 연변자치주의 관계기관, 즉 연변작가협회에서 총괄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중국에 4개밖에 없는 조선족문학잡지가운데 “연변문학”만 연변지구에 있고, “도라지”잡지는 길림지구에, “장백산”잡지는 장춘시에, “송화강”은 할빈에 있으며, 중국에서 출판되는 우리글 신문이 모두 4개 되는데 그 중 “연변일보”만 연변에 있고, “흑룡강신문”은 할빈에, “길림신문”은 장춘에, “료령조선문보”는 심양에 있다. 우리글 출판사로 놓고 말하면 연변인민출판사, 동북조선족출판사, 연변대학출판사를 제외하고 나머지 3개는 산재지역, 즉 흑룡강조선족출판사는 목단강시에, 료령민족출판사는 심양에, 민족출판사[중앙]는 북경에 있다. 다시 말하면 작가와 기관은 연변에 있지만, 작품의 발표 지면은 산재지구에서 퍽 많이 있다는 말이 되며, 문학작품의 편집진은 산재지구에 퍽 많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현 공식으로 출판되고 있는 신문이나 잡지 밖에 비공식간행물로 출간되고 있는 내부간행물로 된 문학지들도 산재지구에 더 많은 것이다. 이를테면 통화지구, 절강성, 대련, 심양 등지의 조선족창작단체들에서도 자체 내무간물을 발행하고 있으며 그 발행부수와 편폭들도 적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 조선족문학의 한계와 전망 현 조선족문학은 자체의 한계에 와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우선은 창작대오의 한계, 중견작가들을 뒷받침 해주어야할 후진작가들이 결여, 다음은 독자대오의 축소, 도시와 외국진출, 그리고 신세대의 한문접촉은 거의 장애가 없는 것으로 우리말 잡지나 신문을 필수로 하지 않음으로 독자대오는 대폭 축소되고 있는 게 현실이며, 세 번째로 이론과 철학사상의 한계이다. 문학이 어느 정도 발전한 다음, 문학이론과 철학사상이 안받침 되지 않는다면 발전이 더디거나 발전할 수 없게 된다. 문화대혁명이 결속되고 개혁개방이 시작되면서 조선족문단은 활기를 띠면서 황금기를 맞이하다가 90년대 초반에 와서 주춤하게 되었다. 사상과 창작방법, 소재가 고갈되어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다행히 한중수교가 이루어지면서 조선족작가들은 문학 언어와 창작방법에서 새로운 길을 열수 있게 되었는데 이제 와서 한계에 와 닿은 것이다. 언어와 방법만으로는 되지 않는 시기에 접한 것이다. 이론과 철학사상의 결여로 새로운 돌파와 더 깊은 접수와 이해를 가져올 수 없기 때문이다. 한중 문화경제교류가 더 활발하고 심도있게 진행되면서 차후, 중국 조선족문단에 더 많은 한국문인들이 뛰어들 것으로 전망되면서 이들이 중국에 진출하여 조선족문단에서 활발한 문학활동을 하면서 조선족들이 중국문학을 이해하고 배우는데 새로운 사유방식과 방법을 제시해주리라 전망된다. 지금도 적지 않은 한국의 문인들과 지식인들이 중국에서 중국작가, 지식인들과 활발한 교류를 진행하면서 조선족작가들에서 새로운 영역을 제시해주고 있으며, 그 과정에 교량작용을 하는 조선족작가들은 이를 통해 또 새로운 도약의 토대를 마련할 수도 있는 것이다. 조선족문학이라고 함은 중국에 거주하는 조선족작가들이 중국이라는 땅덩어리에서 중국문화와 어울리면서 문학 활동과 창작활동을 하기 때문이다. 중국조선족문학이 중국의 문학을 떠난다거나 한국이나 북한문학을 떠난다면 조선족문학으로서의 존재가지가 없다. 그만큼 조선족문학은 중국조선족들이 중국이라는 나라에서 생활하면서 진행하는 문학창작활동이면서 기록이며, 또 조선족생존상태에 대한 문학적인 관조와 문학생존현상태인 것이다. 차후 조선족문학은 계속 중국문학과 한국문학의 과도적인 문학으로 자체의 생명력을 가질 것으로 전망된다.   ///... 2006.03.01    
783    중국 조선족 한글문학의 현황과 과제 댓글:  조회:5086  추천:0  2015-12-05
중국 조선족 한글문학의 현황과 과제 1. 조선족 문학의 성격과 시기 구분 및 일반 정황  2. 개혁,개방 후 조선족 한글문학의 현황  3. 80년대 말~90년대 후  4. 조선족 한글문학의 금후 과제  1. 조선족 문학의 성격과 시기 구분 및 일반 정황 1) 조선족문학의 성격 중국 조선족문학은 순후한 인간성과 인정미, 인도정신을 지닌 자율적인 동포문학의 한 갈래다. 이 문학은 정신 오염이 적은, 기백 넘치고 진지하며 불멸의 넋을 지닌 민족문학이다. 국가적으로는 중국 문학의 일부분에 속하며, 민족적으로는 조선민족 문학권에 속하는 특색있는 동포문학이다. 지금 이 지구에는 세 개의 우리 민족 문학 산맥이 있는데, 한국문학, 조선문학, 중국 조선족문학이 바로 그것이다. 기타 러시아나 일본, 미국의 동포문학 등은 여러 가지 여건으로 해 완전한 체계를 이루지 못하고 있는 문학으로 필자는 알고 있다. 중국 조선족문학 군체는 문학사가 평론가, 소설가, 시인, 수필가, 극작가로 구성되어 일정한 체계를 이룬, 2백만 인구에 5백50여명을 헤아리는 작가에 60여명의 중국작가협회 회원을 가진 온고한 문학 군체인 것이다. 2)문학 시기 구분 중국 조선족문학의 발전과정은 세 단계로 나눌 수 있다. 1930년까지는 삼천리 반도와 문화 혈맥을 같이한 이민문학의 단계로 되며, 1930년부터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창건될 때까지는 과도가 문학이다. 이 시기에 시인 윤동주 리욱 김조규 송철리 심련수, 소설가 강경애 김창걸 등 문인들이 출현하여 일제 통치가 가장 엄혹하던 때 민족의 넋을 지니고 작품창작으로 민족 문학사의 연연한 맥락을 이은 것이다.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이 창건된 후 본격적인 중국 조선족문학이 형성되었다. 특히 1976년 10월 이 결속된 후 조선족문학은 전례없는 대 번영기를 맞이했다. 3) 중국 조선족 문학 군체 -연길, -장춘, -길림, -연길, -할빈, -연길(아동문학) 등을 망라한 문학지와 (연변사회과학원 문학예술연구소 주관), (연변 문학예술계련합회 기관지>와 같은 문학예술 이론지를 가지고 있으며, 그리고 작가, 시린들은 우리글 신문들인 (연길), (장춘), (할빈), (심양) 등 신문 문예부간에도 작품들을 자유롭게 발표하고 있다. 중국 조선족 문단에서 이미 일정한 성과를 올렸거나 한창 활약하고 있는 작가들로는 소설에 김창걸, 김학철, 리원길, 림원춘, 류연산, 우광훈, 리근전, 최홍일, 정세봉, 박선석, 고신일, 류원무, 김근총, 윤림호, 김훈, 림승환, 김길련, 리혜선, 허련순, 김혁, 리선희, 방룡주, 윤일산, 권선자, 남주길, 박은, 리만호, 김순기, 김엽, 최현숙, 김동구, 김동규, 강효근, 김송죽, 김운룡, 한원국, 허봉남, 김영자, 조성희 등이 있고;   시에 리욱, 심련수, 김성휘, 리상각, 채택룡, 김철, 임효원, 김태갑, 조룡남, 박화, 남영전, 주선우, 서헌, 리삼월, 문창남, 설인, 송정환, 한춘, 김례삼, 김문회, 최형동, 황장석, 김응룡, 김정호, 최룡관, 최문섭, 정몽호, 김학천, 리성비, 리임원, 정철, 김학송, 한석윤, 강효삼, 김득만, 한창선, 한창희, 김동진, 김성우, 김욱, 김파, 리선호, 박설매, 석화, 김응준, 김동호, 리명재, 김충, 림금산, 최기자 등이 있고;   산문과 수필에 리성권, 김영금, 홍만호, 김양금, 리화숙, 김홍란, 양은희, 서영빈, 엄정자, 강정숙, 최순희, 김재국, 김문학 등이 있고;   극작가에 최정연, 황봉룡, 한원국, 리광수 등이 있고; 문학사가 정판룡, 허호일, 권철, 박충록, 김병민, 김관웅, 허휘훈, 채미화, 림휘 등이 있고;   평론에 조성일, 임범송, 전국권, 최삼룡, 김성호, 김호응, 김동훈, 현동언, 김만석, 김경훈, 장정일, 방룡남, 림연, 김룡운, 김운일, 김기형, 리광일, 조일남, 최용린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대부분 이론 저서나 작품집을 다수 갖고 있다.   2. 개혁 개방 후 조선족 한글문학의 현황 1) 사실주의문학 조류의 우세 새로운 역사시기(1976.10~)후 조선족 문학에는 시종 구김살없이 사실주의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것은 현실 생활을 변화 발전 속에서 본래 면모대로 그리고 있다.  1976년 10월 6일 가 거꾸러지고 ,1978년 12월에 북경에서 거행된 중공 제11차 3중 전원 회의는 정치영역에서 청명한 시대를 열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전반 문학예술영영에서도 획 시대적인 변혁을 일으켰다. 중국 조선족 문학도 역시 전례 없던 대 번영기를 맞이했다. 2) 의 암흑면에 대한 폭로와 비판 20세기 80년대 초 중반 시기는 시기인데, 가 빚어낸 죄악과 역사교훈을 문학화한 것이었다. 대표적인 것으로 단편소설 (리원길), (정세봉), 시로는 (김동진), (김성휘) 등을 들 수 있다. 이런 작품들에서는 악당들의 암흑면을 폭로하는데 치중했다. 3) 의 역사에 대한 이성적인 반성 앞에 든 은 사회의 암흑면을 폭로하는데 기울어졌다면, 은 역사에 대한 성찰과 반성을 통해 이지적으로 교훈을 총화를 하는 데로 기울어졌다. 즉 한때 광명에 대한 송가와 현행 정치에 대한 를 부르며 염가의 열광, 낭만에서 역사와 생활, 인간에 대한 이지적 사고가 심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대표적인 작품으로 소설 (정세봉), 시집 (조룡남) 등을 들 수 있다. 4) 개인 숭배사상에 대한 역사적 성찰을 통한 인간의 존엄과 인권의 확인 과거 한때 사회적으로 어느 한 정치가 개인을 우상화하고 신격화하여 의식, 무의식간에 민중 속에 무지몽매한 후과를 조성한 방 있다. 그러나 개혁 개방의 청명정치 시기의 도래는 국문이 열려 세계 문화 조류와 활성화한 대화를 촉구함으로써 조선족 작가들의 사상에 대 해방을 가져왔다. 이리하여 사회적인 의식의 변화와 각성을 문학화한 시 (한춘), 소설 (최홍일) 등 작품이 나왔다. 5) 사상해방에 바탕을 둔 다양한 현실생활의 반영  1978년 여름부터 중국 대륙에서 광범위하게 이란 대 변론이 벌어진 이후 80년대 중반까지 조선족의 사상의식에는 역사적인 변혁이 일어났다. 그리하여 시인들으니 시에서 목양녀가 아침 이슬을 밟으며 해가 솟는 동녘의 풀밭에서 총각을 향해 달려오는 정경을 감히 하고 노래할 수 있었다. 지난날에는 이란 말은 수령 한 사람에게만 붙이는 특수한 말이었다. 이러한 너그러운 사회 정치분위기 속에서 조선족작가들은 자유를 다시 찾고 문학예술과 학술에 대한 국가의 의 정책실시로 보호를 받으며 생활을 다양하게, 진실하게 반영하면서 자기 창작 재능을 펼칠 수 있게 되었다. 소설 (림원춘)는 조선족의 미풍양속 생활 풍속화를 그리면서 근면한 우리 민족 여성의 형상을 창조해 보여 을 받았으며, 서정시 (김성휘)에서는 시인 나름대로의 일상 진취적인 생활정서를 시화함으로써 독자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면서 식이나 정책 구호 따위를 시행으롤 반복하던 시기를 결속 짓고 시가 예술본체에 접근하기 시작했다. 말하자면 시에서 를 통해 자아표현을 다양하게 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같은 시기의 시 (리상각)도 탐사대원의 감정세계를 생활미 짙게 시화해 한때 센세이션을 일으킨 작품이다. 6) 개혁을 반영한 실화문학의 대두  중국 대륙에서 시장 경제 열풍이 일어난 후 조선족 사회에는 활약하는 기업인들이 많이 출현했는데, 작가들은 영갓상 처음으로 한글로 정치가 아닌 자기 민족기업인들의 업적, 개혁과 창업정신, 인간적인 품성을 작품화하여 광번한 독자에게서 환영을 받았다. 그 대표적인 작품으로 (리성권), (황장석), (김응룡) 등을 들 수 있다.  이런 조선족의 보통 기업인들을 구가한 실화문학 창작은 지난날의 정치 행정 명령식 창작사상-(작품에서 긍정인물을 돌출시키고 긍정인물 중에서 영웅인물을 돌출 시키며, 영웅인물 중에서 주요 영웅인물을 돌출 시킨다는 것)과 창작방식(영도자가 사상을 제기하고, 군중이 생활소재를 제공하고, 작가가 기술, 기교를 내놓는다)의 파멸을 선고하고 작가의 주체성을 세우는데 큰 역할을 했다. 7) 소설의 등장  이란 80년대 중기 중국 사회과학원 문학연구소 소장이며 문학이론가인 유재복이 내놓은 창작이론인데, 문학은 다양하고 풍부한 성격의 인물형상을 창조해야 한다는 것인데, 조선족문학계에 영향이 대단히 컸다. 그리하여 작가들은 인간 본면 그대로 복잡한 인물성격을 묘사할 수 있게 되었다. 사례로 사제지간의 애정도 소설에서 그릴 수 있는 것이다. 이는 한국문학에서는 문제로도 안 되는 것이지만 중국 사정은 거기와 다른 것이기에 제기했다. 8) 제1차 개인 작품집 출판 고조  청명한 정치분위기와 사상해방, 창작격정의 폭발, 국가의 출판비용 제공 등으로 해 무릇 일정한 수준 급의 작가들은 70년대 중반에서 80년대 중반까지 기간에 수많은 개인 작품집을 펴냈다.  장편소설(김학철), (리근전), (리원길), (김길련), (최국철); 단편소설집으로 (우광훈), (리동렬), (박선석), (고신일), (류원무), (김창걸); 전기에 (김학철), 장편서사시 (김성휘),; 서정시집으로 (리욱), (김성휘), (박화), (박화), (리상각), (최문섭), (석화) 등을 들 수 있다. 이밖에 특별히 지적해 둬야 할 것은 (1989년, 조성일 권철 등)와 12명의 평론가가 펴낸 종합 평론집 (1982)의 출판이다. 이 두 저서의 출판은 조선족문학평론계의 획기적인 형성과 성숙을 의미한다. 이 시기에 서방의 조이스, 카프카를 비롯한 작가들의 의식흐름소설과 추리소설의 영향을 받아 희미하지만 창작에서 의식흐름수법이 일부 시도되기도 하고, 무주제론이나 중간 인물론도 나왔다. 시에서는 김정호의 서정시 이 의식흐름수법을 일찍이 도입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시기엔 란 것이 출현했는데 그 실직은 시에서 상징과 은유 기법에 대한 착각으로 인해 일부 시인들이 사유가 난삽한 알고도 모를 난해 시를 썼으나 독자의 배격을 받고 그만두었다.   3. 80년대 말-90년대 후 새 경향 1) 회고록, 산문, 수필의 흥성과 개인 작품집 다량 출판  이 시기는 그 전 시기 문학사상의 대 해방과 창작의 번영을 거치고 전 단계 창작에 대한 반성을 하면서 상대적으로 작가들이 고민시기, 동면시기에 들어선 것이고, 김학철의 , 정판룡의 등 적잖은 회고록이 출판되였다. 그러면서 이 시기는 더욱 질적으로 제고된 작품창작을 지향한 시기인 것이다. 2) 제2차 개인 작품집의 대량 출판  20세기 80년대 초 중반 이후 제2차로 되는 개인 작춤집의 출판 붐이 일었다. 작가들은 개방시대가 열린 뒤 과거 억압당하던 심리상태에서 해방되어 10여년 창작실천을 거쳐 기량을 닦고 경험을 쌓은 다음 더욱 제고된 문학차원에서 앞장 다투어 개인 작품집 출판에 떨쳐나섰다.  그 대표적인 사례로 류연산의 장편 기행문 , 김학천 시집 (중문), , , 번역시집 (중문), (중문) 등 출판을 들 수 있다. 김학천은 한글 작품창작은 물론 또한 번역분야에서 독특한 기여를 하고 있다. 남영전 시인 역시 한글 작품창작과 중문 시 창작, 번역 등 영역에서 독특한 기여를 하고 있다.    4. 조선족 한글 문학의 금후 과제 조선족이 이 땅에 정착한 지도 백 50여 년이 된다. 한글 문학의 지속적인 발전을 위해서는 우리 앞에 놓인 금후 과제를 잘 알아야 한다. 1) 백여 년이래 조선족 한글문학의 회고와 정리 총화 사업  지난날에 대한 총화가 있어 그 성과와 부족 점을 제대로 파악함으로써만이 우리 문학은 더욱 높은 차원에서 21세기의 새로운 문학으로 도약 발전을 이룩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 연변인민출판사에서 수집 정리하여 펴내는 (해방 전후 포함)과 연변대학 언어문학연구소에서 출판하는 (해방 전)는 조선족 한글문학에 대한 총화의 중요한 절차 가운데 하나가 된다. 2) 중국문단으로 본격 진출  조선족 한글문학은 국가적으로는 중국 56개 민족으로 구성된 중국문학의 유기적인 한 부분이기에 우리 문학은 이 땅에 튼튼히 발을 붙여야 한다. 우리 문학을 중국 13억 국민의 마음속에 깊이 뿌리내리게 해야 한다. 그러자면 우리 우수한 한글문학작품들을 중국어로 번역하여 한족과 타민족 독자들이 읽도록 힘써야 한다.  연변작가협회가 출판하는 5권6책 등이 그 구체 절차가 된다. 작품집 출판은 물론 또한 우리는 정상적으로 우수 작품들을 제때에 중국어로 번역하여 대륙의 각 문학지에 발표하는 일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우리 문학세계의 공간을 넓혀야 한다.  중국문단으로 본격 진출하기 위해 1997년 4월 연변작가협회 김학천 주석이 협회를 대표하여 제기한 정품창작을 주체로 하고 평론과 번역을 두 날개로 하는 중국의 조선족문학을 번영 발전시키는 을 힘있게 펼쳐 나가야 한다. 이 전략은 조선족 한글문학역사에 대한 심각한 총화이며 새로운 단계를 떠밀어나가는 심원한 발전 전략이다. 3) 국제적 민족문학 교류  동일한 민족이지만 아직도 우리는 서로 각국간에 상대방의 문학을 잘 모르고 있는 실정이다. 그렇기 때문에 각 나라의 작가와 학자, 출판인간의 교류와 대화, 정보교류가 정상적으로 진행돼야 한다. 서로 알아야 문학의 발전을 가속화 할 수 있다. 4) 민족 통일 문학사 편찬  문학사가들은 민족문학 권 시각에서 우리 민족의 문학발전과정을 인위적이 아닌, 본래 면모 그대로 다시 투시하면서 통합적인 완정한 우리 민족문학사를 편찬해 내야 한다. 5) 민족문학 창작대오 건설  조선족 한글문단에서는 40~60세 작가가 중견이고, 40세 이하는 작가가 극히 적어 작가대오에 연령 단층현상을 보이고 있다. 우리 문학을 지속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지금부터 재능 있는 젊은 세대 작가를 의식적으로 발전 양성해야 한다. 6) 조선족 한글문학 창작에 대한 이론연구  에서 평론(이론연구)을 한 날개로 제기했다. 창작과 이론연구가 동보, 협동, 보완 관계를 이룰 때만이 우리 문학은 정상적인 발전을 이룩할 수 있다. 평론과 이론이 선도하지 않는 문학은 발전이 더디다. 지금은 작품 실제에서 이론을 발전하여 개괄하고, 자유시와 시조, 산문과 수필, 소설과 실화문학의 장르에 따른 본질적인 특성에 대한 깊이 있는 이론 탐구가 박절하다. 7) 조선족 대표작가 연구 윤동주, 리욱, 김창걸, 심련수, 김학철, 채택룡, 정판룡 등 중국 조선족 대표작가들에 대한 이론연구를 폭넓고도 심도있게 진행해야 한다. 이는 문학사 편찬에 큰 도움을 줄 것이다. 8) 번역 사업 대폭 강화  우리 한글작품을 중국 문단에 본격 진출시키기 위해서는 계획 있게 장원한 시각에서 번역가를 조직하여 정상적으로 번역 사업을 힘있게 떠밀고 나가야 할 것이다.  ///전국권 약력: 1940년 중국 화룡시 출생  연변대학 조문학부 조선언어문학과 졸업  연변작가협회 부주석, 중국작가협회 회원, 전국 고등학교 사회과학학보 연구회 상무 이사  저서, , , 외 다수     
782    중국 조선족의 文學地圖 다시 그려야 댓글:  조회:4724  추천:0  2015-12-05
  중국 조선족의 문학지도 다시 그려야 최삼룡 (평론가, 전 연변사회과학원문학예술연구소 소장)         1. 지금까지 중국조선족문학사가 3권 나온 줄 알고 있다. 그것들로는 조성일, 권철 주필, 조성일, 권철, 최삼룡, 김동훈 집필 《중국조선족문학사》(연변인민출판사, 1990년), 오상순 주필, 오상순, 김동훈, 최삼룡, 장춘식 집필《 중국조선족문학사》(민족출판사, 2005년), 권철, 김동훈 주필, 권철, 김동훈, 최삼룡, 김만석, 박충록, 리광일 집필《문학사》(민족출판사, 2006년)이다.     필자는 이 3권 문학사의 한 집필인으로서 줄곧 조선족문학사 집필에 관심의 눈길을 떼지 않고 있다.     최근에 중국사회과학원 문학예술연구소 소장 양의(楊義)연구원의  중국의 문학지도를 다시 그릴 데 대한《重繪中國文學地圖》등 논저들을 공부하면서 중국조선족의 문학지도에 대하여 심사숙고하게 되었다.       2. 지금까지 중국조선족문학사의 집필을 회고해보면 확실히 문학발전의 시공간에 대한 관조에서 시간의 흐름에 대하여서는 충분한 중시를 돌렸지만 공간문제에 대하여서는 상대적으로 홀시하였다.    예를 들면 이민초기, 항일투쟁시기, 사회주의건설시기 등  역사단계에 문학의 사상성, 류파 등을 연구하였지만 한 역사적 단계에서 지리적 차이에 따르는 문학의 여러 가지 상황에 대하여서는 충분한 주의를 돌리지 못하였다.   항일전쟁시기의 항일혁명가요도  확실히  동북의 항일군민들이 창조한 항일가요와 화북조선의용군의 항일가요는 서로 다른 특색을 보이고 있으며 위만주국시기 조선족들의 문학작품도 룡정을 중심으로 한 동만의 문학과 신경(지금의 장춘)을 중심으로 한 남만과 북만의 문학은 서로 다른 특색을 보이고 있지만 일정한 중시를 돌리지 못하였다.    1949년부터 1977년까지 즉 문화대혁명시기까지 포괄한 사회주의 혁명과 건설 시기는 비록 의식형태와 제도의 고도의 통제 밑에서 발전한 문학으로서 공간상에서 문학발전의 차이가 크게 나타나지 않는데다가 중국조선족문화상황의 특수성으로 연길을 중심으로 한 집거구(集居區)의 문학 외에 기타 장춘, 심양, 할빈 등 잡거구(雜居區)의 문학발전은 거의 제로에 가까운 상황이었다.    그러나 문화대혁명이 결속된 1976년으로부터 지금까지 중국조선족발전은 새로운 양상을 보이면서 발전하고 있다.    중국조선족문화의 중심으로 작용을 하던 연변밖에 장춘과 길림을 중심으로 한  길림성조선족문학과 하얼빈과 목단강을 중심으로 한 흑룡강성조선족문학과 심양을 중심으로 한 료녕성조선족문학이 예견하지 못했던 속도로 발전하고 있으며 북경 등 대도시와 청도 등 연해지구의 조선족문학이  발전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이밖에도 한국, 일본, 미국 등 나라에 진출한 중국조선족들의 문학도 생성되는 추세를 보여주고 있다.    지난날 사회주의 혁명과 건 설중에서 연변은 확실하게 중국조선족문학의 중심으로 부상 되였지만 새로운 역사시기의 새로운 상황에서 그 중심이 해체되기 시작하였으며 연변 밖의 조선족들이 거주하는 여러 지구에 이미 작자대오가 있고 문학잡지가 있고  독자군이 이루어지고 있는 새로운 국면이  조성되었다.     한마디로 말하면 개혁개방 후 중국조선족의 지리적 문학공간은 크게 확장되었는 바 오늘 중국조선족의 문학지도를 다시 그려야 할 과업이 우리 앞에 놓여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하여 중국조선족문학을 관심하는 모든 사람들은 마땅한 주의를 돌려야 하며 문학사를 연구하는 석학들이 충분한 중시를 돌려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3. 중국조선족문학지도를 다시 그려야 하게 되기까지의 중국조선족문학의 변화는 문학현상의 표면현상의 변화에 그치지 않는다. 이것은 중국조선족문학의 지리적 공간이 부단히 확대되는 문제이며 중국조선족문학발전의 에네지원이 변화되는 문제이며 중국조선족문화정신의 심도와 광도가 변화되는 문제이며 중국조선족문학의 방법이 다양화 되는 문제이다.    이제 누가 중국조선족문학을 연구하면서 연길의 연변인민출판사에에 출판하는 도서,《연변일보》,《연변문학》에만 의거할 수 없으며 반드시 하얼빈, 장춘, 길림, 심양 그리고 북경 등 대도시와 청도 등 연해지구의 조선족문학에 눈길을 돌려야 하며 더 나아가서 서울, 뉴욕, 도꾜 등 세계의 여러 나라 조선족문학에 눈길을 돌려야 할 것이다.    이제 누가 중국조선족문학을 연구하면서 20세기 상반엽 반일투쟁에서 생성, 발양된 혁명정신과 사회주의 혁명과 건설 중에서 형성된 민족의 생명저력만 고찰해서는 안 된다. 현대화 과정에서 중국조선족들의 농경문화가 어떻게 해체되고 어떻게 농민으로부터 도시시민으로 현대인으로 전변되는가에 대하여 연구하여야 하며 지구촌인으로 전변되는가에 대하여 연구하여야 할 것이다.    이제 누가 중국조선족문학을 연구하면서 반만년의 역사에서 형성되고 계승되어온 민족의 전통문화와 경전리론에 기초한 사실주의창작방법에만 의거하여서는 안 된다. 중화의 주체인 한족(漢族)의 문화를 참답게 공부하여야 하며 유럽과 미국 등 국가의 현대과학기술과 사회과학이론과 인문이론을 공부하여야 하며 또 사실주의 외에 모더니즘과 포스터모더니즘에 속하는 여러 가지 유파와 사조와 방법을  공부하여야 한다.    한마디로 말하면 중국조선족문학의 문학지도를 다시 그릴 준비를 하여야 하는 것이다.      4. 개혁개방 30년래 확실히 중국조선족문학은 거대한 변화를 치르며 발전하고 있다.    이런 변화는 우리의 옹군 생활의 변화에 따르는 아주 자연스럽고 필연적인 변화이다. 개혁개방 후 30년래 중국에서 정치카리스마의 해체와 의식형태신화의 소실, 당과 국가의 제반 제도와 방침정책의 조절과 여러 가지 좌적인 정책과 방침정책의 폐지는 우리나라 국민의  정치, 경제, 문화 제반 생활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오게 하였다.    여기서 인구의 대이동에 대하여서만 간단히 보기로 하자.    개혁개방 전에는 국가제도와 방침에 따라서 농민의 도시진출은 거의 불가능했으며 국민의 외국나들이는 전혀 불가능했다.    그러나 개혁개방 후 농촌의 호적제도는 아직까지도 철저히 해결된 것은 아니지만 상대적으로 인구유동에 대한 관리가 느슨해지면서 이러한 상황이 많이 개변되기 시작하였다.    농촌개혁의 성공과 아울러 농민들의 생활수준이 엄청 제고되고 이에 따라  농촌의 과잉노력이 도시에 진출이 가능하게 되였으며  개혁개방정책에 힘을 입어 국민의 외국나들이가 쉽게 되였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통계수자가 나올 수 있게 된 것이다.    개혁개방이래 하얼빈으로부터 대련까지 동북의 철도연선의 크고 작은 도시에 진출한 조선족농민이 40만이라고 하며 이밖에 북경 등 대도시에 진출한 조선족이 20만이 넘는다고 하며 산동반도에 진출한 조선족이 20만이 넘고 또 상해, 항주 등 연해 지구에 진출한 조선족이 10만이 넘는다고 한다. 이밖에 한국에 진출한 조선족이 20만, 러시아, 일본, 미국, 가나다 그리고 유럽 여러 나라에 진출한 조선족이 수만 명이 된다고 한다.    이 통계는 말 그대로 불완전한 통계이지만 하나의 문제를 설명하는데 200만을 헤아리는 중국조선족인구의  약 절반이 이미 농촌을 떠나고 고향을 떠났다는 이야기다.    이러한 인구의 대이동은 중국조선족의 문학지도를 다시 그리게 된 가장 근본적인 요인이 된다. 농민이 도시에 들어갔을 때 도시의 생활방식에 적응해야 할 것이고 소도시의 시민이 대도시에 들어갔을 때 대도시의 현대화수준을 거부할 수가 없는 것이고 중국사람이 다른 나라로 갔을 때 제도와 의식형태와 문화의 차이를 감수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한두 사람이 아니라 만, 십만, 백만을 헤아리는 사람들의 생활방식과 정신실존에 천지개벽의 변화가 생겼으니 어찌 그것이 문학작품에 표현되지 않겠는가.    중국조선족의 문학지도를 다시 그리게 된 원인을  인구의 대이동에서만 찾으면 불충분한바 문학발전의 에네지원의 주인소인 작가대오의 변화와 창조주체의 관념의 변화를 담론하여야 한다.    주지하다시피 1945년 8.15 항일전쟁이 승리한 후 중국의 조선족인구는 대이동을 하였는데 거의 절반이 혹은 북으로 혹은 남으로 모국을 찾아갔고 따라서 여기서 작품활동을 하던 많은 문인들이 모국으로 돌아갔다.    이리하여 중국조선족의 문학대오는 혁명부대에서 전업한 혁명문인들과 해방 전부터 작품활동을 해온 진보적문인 그리고 새롭게 붓을 든 문인들로 새롭게 조직되었다. 예를 들면 김학철, 정길운, 김창걸, 리욱, 채택룡, 최정연, 황봉룡, 임효원 등 문인들이다.    그런데 이러한 대오는 당의 전략부서에 의하여 건국전후에 전국 각지, 여러 부문으로부터 모두 연길의 문화기관이나 단체에 집중되었으며 그 결과로 중국조선족의 문화중심은 연길이라는 이미지가 부상되었던 것이다.    개혁개방전이 시작된 초기로부터 연변이  중국조선족문화의 중심이던 국면은 타개되기 시작하였다. 물론 이러한 조짐은 이미 문화대혁명 전에도 다소 나타나기 시작하였는데 이렇게 된 것은 건국 후 새 중국의 품에서 새로운 문인대오가 생성되고 성장되기 시작한 것과 직접 연계된다.    상대적으로 조선족인구가 비교적 많은 흑룡강성의 《흑룡강신문》과《송화강》잡지는 이미 문화대혁명 전에 발간되었다. 만약 신중국에서 배양한 대학생들을 비롯한 신문인들의 성장이 없었다면 이 신문과 잡지의 출간은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문화대혁명이 끝난 1976년경에 이르러 중국조선족의 문인대오는 완전히 새로운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는데 이때에 와서는 신중국에서 배양된 문인들이 이미 문화의 여러 분야에서 주력으로 성장되었으며 그런 인재들이 연길에만 집중되여 있던 국면이 완전히 타개되였다.     80년대에  연변지구외  장춘의 《북두성》잡지 (이미 폐간) 《길림신문》(창간초기에는 연길에서) 《장백산》잡지(창간초기는  통화에서》 길림의《도라지》잡지,  목단강의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이미 할빈으로 이주)와 《은하수》잡지(이미 폐간),  심양의 《료녕조선문보》와《새마을》잡지(이미 폐간),  신문, 잡지와 출판사가 창출되여 조선족의 문학발전에 공헌을 기여하게 된 것도 바로 새로 배양한 인재들이 없었더라면 불가능하였을 것이고 또 이런 문화기관의 창설은 연변이 조선족문화의 중심으로 작용하던 역사를 점차 종말 짓게 하였다.    한마디로 중국조선족의 문학지도를 다시 그리게 된 것은 문학대오의 성장에 따르는 필연적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5. 중국조선족문학의 지리적공간의 확장은 결코 문학의 표면현상의 변화가 아니다.    도시는 농촌과 다른 자연경관과  인문환경이 있으며 소도시는 대도시와 현대화수준이  다르며 집거구는 잡거구와 언어환경이 같지 않다. 외국은 중국과 통치제도와 주류의식형태가 틀린다. 이런 구별은 필연적으로  문학작품에  나타나기 마련이다.    어느 때부터인지  연변에 거주하는 작가들에 의하여 나온 작품과 연변외의 도시나 연해지구의 작가들에 의하여 나온 작품들이 차이가 보인다. 중국의 56개 민족 중 주체민족인 한족의 문학작품을 많이 수용하는 작가들이 창작한 작품과 한족의 문학작품을 많이 수용하지 않는 작가들에 의하여 창작된 작품들의 차이가 보인다. 한국에 자주 나들며 한국문학을 많이 공부하는 작가에 의하여 씌어진 작품과 한국에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작가에 의하여 씌여진 작품의 차이가 보인다.    요즘에는 미국의 뉴욕에 가서 신문기자로 일하면서 열띤 작품활동을 벌리는 류순호의 작품과 한국, 일본에 오래 체류한 김재국의 작품, 일본에 장기간 체류하면서 작품활동을 벌리는 김문학의 작품, 그리고 한국과 러시아의 생활체험이 두터운 장혜영의 작품이  제 나름의 특색으로 독자들 속에서 상당한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그리고 연해지구의 문학은 집거지구보다 상대적으로 중국의 주체민족인 한족문학의 영향을 더 많이 받으면서 아울러 중국에 진출한 한국의 기업인, 문화인들과의 조화 속에서 생성하고 발전하는 모습이 눈에 띄운다.    여기서 우리는  중국조선족문학의 지도를 다시 그리게 되는 것은 구경에 가서는 창조주체의 문학의식과 생활체험에 의하여 결정된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는데 잘 모르겠다.     6. 졸고를 마치면서 이런 생각을 하여본다.    만약 누가 1945년 8월에 중국조선족의 문학지도를 그렸다면 중국의 동북지도를 놓고 신경(지금의 장춘)과 연수와 통화와 녕안과 교하와 룡정과 연길과 조양천과 도문과 안도만 찾아놓으면 되었을 것이다. 신경에는 《만선일보》가 있었고  최남선, 박팔양, 황건이 있었고 연수에는 류치환, 통화에는 김영팔, 교하에는 박영준,  룡정에는 윤동주, 강경애, 안수길,  김창걸, 연길에는 리욱, 조양천에는 김조규, 도문에는 현경준, 함형수, 안도에는 천청송 등이 있었다.    만약 누가 1976년 10월초에 중국조선족의 문학지도를 그렸다면 세계지도도 필요없고 중국지도도 필요업고 연변지도만 놓고 연길만 찾으면 되었을 것이다. 김학철, 정길운, 리근전, 김창걸, 리욱, 최정연, 황봉룡, 채택룡, 김례삼 , 김철, 임효원 등이 모두 연길에서 살았다.    만약 누가 2013년 4월에 중국조선족지도를 그린다면 연변지도만 가지고 안 되며 동북지도만 가지고 안 되며 중국지도만 가지고도 안된다. 세계지도가 있어야 한다.    연길, 룡정, 훈춘, 길림, 장춘, 할빈, 목단강, 심양, 대련, 북경, 천진, 청도, 항주, 상해, 소주, 란주 등 국내 도시들 외에 서울, 평양, 도쿄, 뉴욕, 모스크바, 베를린 등 세계적인 도시들도 찾아야 할 것이다. 그 도시들에 누구의 이름을 써넣겠는가?    이 문제의 해답은 필자가 혼자 결정할 일이 아니다. 중국조선족문학지도를 다시 그리는 과정에 우리 문학을 관심하는 모든 석학이 힘을 합쳐 풀이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 최삼룡  중국 연변출생, 문학평론가, 원 연변사회과학원 문학예술연구소 소장, 1천여 편의 문학평론, 수필, 칼럼, 에세이 발표, 1999년 4월 정년퇴직한 뒤에도 ‘중국조선족문학사’ 편찬, ‘중국조선족문화사대계’  중 문학사(산문과 시) 집필에 참여, ‘해방전 친일문학자료집’ 편찬, 출간 2008년 ‘해방전 재만조선족친일문학선집’ 편찬, 출간, 2009년 한국문화관광부 우수학술도서상을 수상.  
781    중국 력사상 가장 영향력이 컸던 詩 10首 / 초현실주의 대하여 댓글:  조회:4534  추천:0  2015-12-04
중국 력사상 영향력이 가장 컸던 10 수의 시       第一首;李白的《静夜思》 床前明月光,疑是地上霜。 举头望明月,低头思故乡。   우물가의 밝은 달빛은 땅우에 내린 서리런가. 머리들어 달을 보고는 머리숙여 고향 그리네.     第二首;孟郊的《游子吟》 慈母手中线,游子身上衣。 临行密密缝,意恐迟迟归。 谁言寸草心,报得三春晖。   자애로운 어머니손 떨리는 바느질로 먼길가는 아들한테 전포지어 입혔네. 출발을 앞두고도 빼곡빼곡 깁는것은 혹여나 갔다가 너무늦게 돌아올가봐. 한 포기 풀과 같은 자식의 마음으로 석달봄날 모정에 보답할수 있으리까?     第三首;白居易的《赋得古原草送别》 离离原上草,一岁一枯荣。 野火烧不尽,春风吹又生。  … …   들판에 자라나는 파릇파릇 풀잎들 해마다 시들었다 해마다 푸르다네. 들판에 타는불에 탄다한들 다타랴 봄바람 불어오면 또다시 소생하리.      第四首;曹植的《七步诗》 煮豆燃豆萁,豆在釜中泣。 本是同根生,相煎何太急?   콩을 콩깍지로 삶으니 콩은 솥에서 슬피운다 워낙 한뿌리에서 자랐건만 어찌하여 이리도 모질게 구느냐?     第五首;王之涣的《登鹳雀楼》 白日依山尽,黄河入海流。 欲穷千里目,更上一层楼。   밝은해 서산에 넘어가고 황하는 바다로 흘러드네. 천리를 내다보고 싶다면 한층더 올라서야 하리라.     第六首;乐府诗《长歌行》 青青园中葵,朝露待日晞。 阳春布德泽,万物生光辉。 常恐秋节至,焜黄华叶衰。 百川东到海,何时复西归? 少壮不努力,老大徒伤悲。   푸르른 채마전원 파초잎 우에서 아침이슬 해가뜨니 사라 집니다.   양춘가절 베푸는 혜택을 입어서 만물은 생기얻어 빛갈이 곱다만.   해마다 소슬소슬 가을철 오면은 잎사귀 누렇게 말라 떨어집니다.   동해로 흘러간 천만갈래 저강물 언제면 서쪽으로 되돌아 올손가?   일찍 젊어서 노력하지 않고보면 장차 늙어서 헛되히 슬퍼하리다.     第七首;《诗经》第一首《关雎》 关关雎鸠,在河之洲。 窈窕淑女,君子好逑。 参差荇菜,左右流之。 窈窕淑女,寤寐求之。 求之不得,寤寐思服。 悠哉悠哉,辗转反侧。 参差荇菜,左右采之。 窈窕淑女,琴瑟友之。 参差荇菜,左右毛之。 窈窕淑女,钟鼓乐之。   원앙새 한쌍 걀걀걀 강숲에서 노래부르네 아름다운 요조숙녀야 너는 나의 천생배필.   오쫄오쫄 물미나리 이리저리 도망 가는데 아름다운 요조숙녀야 자나 깨나 보고싶다.   보고싶어도 볼수없어 자나 깨나 너의생각 이밤도 지루하다 엎치락 덮치락 못자겠다.   오쫄오쫄 물미나리 이리저리 뜯어 넣자야 아름다운 요조숙녀야 비파치며 친해 보자.   오쫄오쫄 물미나리 여기저기 쟁여 넣자야 아름다운 요조숙녀야 종고치며 즐겨 보자.     第八首;于谦的《石灰吟》   千锤万凿出深山, 烈火焚烧若等闲。  粉骨碎身全不怕, 要留清白在人间。    천만번 캐고깨여 심산에서 끌어내여 세찬불로 태워도 예사로운 일이여라.   이몸이 가루돼도 두려울것 무엇이냐 오로지 청백함을 이세상에 남기리라.     第九首;王勃的《送杜少府之任蜀州》 城阙辅三秦,风烟望五津。 与君离别意,同是宦游人。 海内存知己,天涯若比邻。 无为在岐路,儿女共沾巾。   삼진에 둘러싸인 장안성 올라서니 연기속 저멀리 다섯 나루터 보이네.   정작 그대와 갈라지자고 하니까 우리 모두가 떠도는 신세였구려.   사해내에 지기가 있다면 천애지각 이웃과 같노라.   인젠 저앞에 갈림길도  나졌으니 공연히 녀인처럼 눈물찍지 맙시다.      第十首;李绅的《悯农》 锄禾日当午,汗滴禾下土。 谁知盘中餐,粒粒皆辛苦。   땡볓을 무릅쓰고 기음 매노라니 땀방울 곡식밭을 흠뻑 적시누나. 그누가 알리오 그릇에 담긴 이 음식들 알알이 모두가 땀방울로 바꿔 온 것을.     초현실주의에 대하여  -초현실주의인 쉬르리얼리즘(surrealism)는 제1차 세계 대전 직후인 1919년부터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직후까지 약 20년간 프랑스를 중심으로 일어난 전위적 문학, 예술 운동입니다.  -1917년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가 그의 부조리극 을 '초현실주의'극이라 한 것에서 유래되었으며, 1924년 이 운동을 주도한 앙드레 브르통이 을 발표하면서 비로소 명칭이 보편화되었다. 브르통은 에서 초현실주의를 "예상치 못한 수많은 의미를 만들어내는 순수한 심리적 자동작용의 무의식적 탐험"으로 정의 내리며, '자동 기술법'이라는 시의 창작 방법론을 제창하였다. 브르통의 발표 다음해인 1925년 11월 파리에서 이러한 미학(美學)과 기법으로 창작된 작품들을 전시한 최초의 초현실주의전(展)이 열려 회화에서도 초현실주의 운동이 본격화되었다. 출품 작가들은 스페인의 후앙 미로, 독일의 파울 클레, 미국의 맨 레이, 이탈리아의 조르지오 키리코, 프랑스의 앙드레 마송과 피에르 루아, 독일에서 프랑스로 국적을 바꾼 막스 에른스트, 스페인에서 프랑스로 국적을 바꾼 파블로 피카소 등이었다. 주요 작가로는 살바도르 달리, 후앙 미로, 마그리트, 데 키리코 등이 있으며 샤갈 또한 이 운동의 선두주자로 언급된다. -다다이즘에서 출발한 초현실주의는 근본적으로 경험의 경계를 넘어서려고 애썼으며 현실을 본능적이고 잠재적인 꿈의 경험과 융합시켜서 논리적이며 실재하는 현실, 그 자체를 바라보는 시각을 확장시켜 절대적이고 초월적인 현실에 도달하려 했다. 초현실주의 작가들은 무의식 영역에 속하는 id의 발견에 큰 관심을 가지고 이것을 화면에 표현해 보려고 시도하였다. Sper-ego 즉 이성적 억압에 눌린 본능에의 욕구-예를 들어 성 욕구-를 여러 가지 상징물 달걀, 못을 통해 나타내려고 하였다. 또한 자유 연상법을 예술창작에 적용해 '자동 기술'이라는 창작 기법을 창안하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달리, 에른스트 등이 미국으로 건너감으로써 이 운동의 흐름이 계속되었지만 미술운동의 주도권은 상실되었고, 이 영향하에 미국에서 추상표현주의 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780    한국 문단의 <<4대 비극>> /// <락서> 시모음 댓글:  조회:4928  추천:1  2015-12-03
        12월 23일 오전 7시 23분경, 광동성 보녕(普宁)현에서 아주 끔찍한 사고가 일어났다. 석탄을 가득 실은 대형트럭과 녀학생 두명이 타고있는 오토바이가 부딪히였다. 대형트럭은 차체가 옆으로 넘어지면서 석탄이 모두 쏟아졌다.그중 한명의 녀학생은 재빨리 피해 사고를 면했지만 다른 한명의 녀학생은 그들이 타고가던 오토바이와 함께 그대로 트럭에 깔려버렸다. 사고발생지는 국도 린근이고 또 발생시간대는  등교고봉기였기에 수많은 학생들이 자전거와 오토바이를 타고 이곳을 지나게 되여 교통상황이 한동안 마비되였다. 처음으로 남극에 착륙한 려객기 [ 2015년 12월 03일 09시 53분 ]          영국《데일리메일》12월1일 보도, 2015년 지난주 목요일(11월26일)  아이슬랜드(冰岛) 항공회사Loftleidir의 보잉757 려객기가 처음으로 남극 련합 숙영지에 착륙, 이는 항공 력사상 한 획을 그을만한 일.     남극 련합 숙영지의 활주로는 모두 얼음, 눈이 내린후 쌓인 두터운 얼음층으로 화물용 비행기와 군사용비행기만 취재를 왔었다고한다. 이번 려객기의 성공적 착륙은 남극려행을 계획하고 있는 모든 려행객들에게 더 많은 기회와 가능성을 주고있다고 한다. ===========================================================   [ 2015년 12월 25일 08시 16분 ]     터키 이스탄불(伊斯坦布尔) 아타튀르크(阿塔蒂尔克)공항에서... 여름에는 이열치열, 겨울에는 이랭치랭 [ 2015년 12월 03일 08시 15분 ]     겨울수영은 북방사람들 겨울  즐기는 또 하나의 방법. 령하 15도의 날씨에도 장춘시민들 이랭치랭. ============================================================== 대형트럭 전복과 함께 목숨 잃은 녀학생 [ 2015년 12월 25일 08시 54분 ]     2015년 12월 23일 오전 7시 23분경, 광동성 보녕(普宁)현에서 아주 끔찍한 사고가 일어났다. 석탄을 가득 실은 대형트럭과 녀학생 두명이 타고있는 오토바이가 부딪히였다. 대형트럭은 차체가 옆으로 넘어지면서 석탄이 모두 쏟아졌다.그중 한명의 녀학생은 재빨리 피해 사고를 면했지만(화면을 찬찬히 눈여겨 보라... 그 녀학생이 사고를 모면하는 장면을... 참, 아주아주 미미묘묘한데ㅠ. 불행중 천만다행. 몇억 몇조분에 1中 기적의 기적으로, 똑마치 드라마르를 찍듯이 살아 일어나는 모습을 ... 후ㅠ... ) 다른 한명의 녀학생은 그들이 타고가던 오토바이와 함께 그대로 트럭에 깔려버렸다. (참, 다른 한명의 녀학생이 그 트럭에 깔리는 장면은 또 너무나도 끔찍한 장면이구ㅠ... ㅉ ㅉ ㅉ...) 사고발생지는 국도 린근이고 또 발생시간대는  등교고봉기, 수많은 학생들이 자전거와 오토바이를 타고 이곳을 지나게 되여 있는 교통상황이 아주 나쁜 사각지대임. (해당부문에서 하루 빨리 교통안전지대로 잘 정비정리 해주기만을...)  =================================================================================                           2015년 12월 04일 10시 57분        한국 문단의 4대 비극                       이승하/ 시인   제자 중에 '문예진흥원 창작지원금'이란 것을 받은 이가 있어 시집 출간을 알선하게 되었다. 유명 출판사의 사장님께 편지를 드렸으나 몇 주가 지나도록 아무런 연락이 없어 전화를 해보았다. 이런 말을 들려주는 것이 아닌가.    "시내 대형 서점 몇 군데를 제외하고는 서점마다 시집은 판매대 자체를 없애버렸습니다. 시집 코너가 다 사라진 지금 이 상태에서 시집을 출간하는 것은 바보짓이지요. 요즘 저희는 아동물 출간에 전력하고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닌게아니라 그 출판사에서는 다른 이름을 2개 더 등록하여 실용서와 아동물 출간에 전력을 다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 출판사를 인수한 사장님은 처음 몇 년 동안 시집과 시 평론집 출간에 열을 올렸으나 재미를 못 보았는지 어느새 '팔리는 책' 출간을 통해 생존을 모색하기에 이른 것이다. 시와 시 비평을 겸하고 있는 나로서는 모골이 송연해지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었다. 서점에서 시집 판매대 자체가 다 사라져버렸다니. 이것이 현실이라면 나는 도대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시집을 다년간 출간해온,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출판사에서 시집 출간 종수를 확 줄인 것도 어느덧 5, 6년이 되었다. 문학과지성사·문학동네·문학세계사·민음사·세계사·시와시학사·실천문학사·창비 같은 출판사에서 시집 출간 종수를 줄인 것은 시장의 논리를 따른 것일 터인데, 무슨 대안이 없는 것일까. 시집이 도무지 안 팔린다고 이런 출판사에서는 울상을 짓고 있지만 이른바 '베스트셀러 시집'은 불황을 모르니 도대체 어떻게 된 노릇일까. 지금 이 글을 읽고 여러분 가운데 류시화·서정윤·용혜원·원태연·이정하·이해인 같은 시인의 시집이 몇 판을 찍었는지 아신다면 눈이 휘둥그레질 것이다. 어마어마한 판매고를 자랑하고 있다. 수십 쇄를 넘어 100쇄 넘긴 것이 수두룩하다. 이들이 내는 시집은 예외가 없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것도 놀랍다. 1. 시인에게는 문제가 없는가      시인의 수가 많은 것이 문제가 될 수는 없다. 그런데 문예지의 폭발적인 증가로 말미암아 해마다 엄청나게 많은 수의 시인이 배출되고 있는 것은 문제이다. 기본기를 충분히 닦고서 시인이 되지 않고 창작실기지도를 하는 사숙에 1, 2년 다니고서 시인이 되려고 애를 쓰고, 어떤 경로를 통해서든 시인이 된다. 너도나도 쉽게 시인이 되다 보니 고급독자층이 무너지고 아마추어 수준의 시인들이 시인 행세를 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이 땅 시인들의 쓸데없는 난해함은 시집 독자의 외면을 사게 된 주범이 아닐까. 시인 자신도 뜻을 알고 썼을까 하는 시들이 문예지마다 넘쳐난다. 독자에게 무엇을 말해주고자 시를 쓰는 것이 아니라 독백에 가까운, 자기 고백적인, 혹은 유아독존적·자가당착적인 시들이 난무하고 있다. 그래서 시집 판매의 주고객이라는 청소년층과 대학생층, 그리고 직장여성층은 정통문학권 출판사에서 내는 시집을 읽는 것을 '마침내' 포기한 것이 아닐까.  시의 다른 이름이 운문인데 이 땅의 시들이 산문화로 치닫고 있고, 한편으로는 너무 길어진 것도 한 원인일 수 있다. 같은 산문시라도 정진규 같은 분의 시에는 내재율이 있어 겉모습만 산문일 뿐 엄밀히 말해 운문이요 시이다. 그런데 요즈음 많은 시인들이 운율을 버리고 산문을 취하고 있다. (베스트셀러 시집의 특징 중 하나는 산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설사 외양은 운문 같을지라도 여러 행 계속 이어진 문장이라 산문과 진배없는 시들도 많다. 기성시인들의 시가 이렇다 보니 백일장에 오는 고등학생들조차 태반이 시를 산문조로 쓰고 있다. 그래서 줄글로 쓰지 말고 행과 연을 적절히 나눠 운문형식으로 써달라고 따로 당부를 하고 있는 실정이다. 2. 문예지에는 문제가 없는가 웬만한 문학단체마다, 지방 대도시마다 문예지 안 내는 곳이 없어 이제 문예지는 춘추전국의 시대로 돌입하였다. 국민 총수와 문인 총수에 비겨 이렇게 많은 문학잡지가 출간되는 나라가 세계에 또 있을까? 문예지의 수가 많다 보니 거기 실리는 작품들의 수준에 참으로 문제가 많다. 또한 세력 확보를 위해 신인을 뽑지 않을 수 없으니, 충분한 습작기를 거치지 않은 사람들이 신인상을 받으며 시단에 나온다. 예전 같으면 시인 지망생으로서 꾸준히 시집을 사보며 절차탁마 습작을 하고 있을 사람들이 시인이 되었으므로 남의 시를 감상하며 연구하지 않고 자신의 시를 발표하고 있다. 정직한 문예지라면 '신인상 수상작 없음'이라는 사고를 낼 줄 알아야 한다.  어떤 문예지는 신인을 내보내면서 책 구입을 강요하여 문제가 된 적도 있는데, 재정상태가 열악한 일부 문예지의 횡포일 테니 이 자리에서는 거론하지 않겠다. 수준이 영 안 되는 기성시인의 작품을 되돌려보내는 횡포는 부려도 좋을 것이다. 그런 것을 문예지 제작의 방침으로 삼는 문예지가 있으면 좋겠다. 또한 안면을 배제하고 공정한 시각으로 시인을 선별하여 작품을 청탁하고, 엄정한 신인 배출과 문학상 시상으로 이미지를 잘 가꾸는 문예지가 좀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어차피 문예지가 잘 팔리지 않는 상황에서야 정직성을 내세우지 않는다면 무엇 하러 문예지를 만든단 말인가.    문예지의 또 다른 문제점은 논점이 없거나 논쟁이 없다는 것이다. 월간 {현대문학}이 한때 '죽비소리'라는 코너를 마련해 화제작이나 유명 문인의 신작에 대해 죽비를 내려친 적이 있었다. 그런데 반박의 목소리를 두려워해 익명으로 글을 올림으로써 근본적인 한계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무렵에 "문예지에서 읽을 만한 글은 {현대문학}의 '죽비소리'밖에 없어"라는 말을 여러 사람한테서 들었다. 그만큼 우리 문단에서는 '사심 없는 비판'이 없다는 말일 것이다. 문학적 경향이나 이념이 다른 사람이 한 자리에 모여 대담을 가지면 좋은 방안이 나올 수도 있을 텐데……. 지나친 욕심일까? 오래 전 {문예중앙}에서는 김정환과 이인성의 대담을 실었는데, 대단히 신선한 느낌을 받았었다. 아직도 상호 존중을 전제로 한 두 분의 화려한(?) 설전이 잊혀지지 않는다. 3. 문학평론가에게는 문제가 없는가      나 자신 간간이 비평류의 글을 쓰고 있기에 자기 얼굴에 침 뱉기이겠지만 문학평론가들도 반성해야 할 부분이 있다. 문학평론가들은 대개 다소간의 권력을 지니고 있다. 가령 어느 문예지에서 특집으로 '90년대를 대표하는 시인 10인의 시 세계'란 것을 마련했고, 어느 문학평론가가 그 일에 관여했다면 그는 분명히 권력을 행사한 것이다. 그의 권력은 신인 등용과 문학상 심사에 관여하면서도 나타나지만 작품 청탁을 하거나 특집을 정하는 일, 시집 출간을 결정짓거나 각종 평문을 쓸 때도 나타난다.   첫 번째 문제는 '식구 의식'에 대한 것이다. 내가 활동의 무대로 삼고 있는 문예지 혹은 문학단체의 일원이 아니면 작품을 읽지도 않고 논하지도 않는 문학평론가들이 있다. 달리 말해 '우리 식구'이면 작품의 수준에 대해 양심적으로 논하지 않고, 대개의 경우 칭찬을 일삼는다. 해설이나 서평은 애당초 한계를 지닌 글이라서 그렇다 치더라도 사사건건 우리 식구만을 감싸고도는 비평적 행위가 만연해 있다. 그래서 '주례비평'이니 '골목비평'이니 하는 욕을 먹고 있지 않은지.   두 번째 문제는 권력을 가진 문학평론가들이 사실상 두려움이 많다는 것이다. 특히 대학에 몸담고 있는 나 같은 사람이 겁이 많다. 그 한 예가 유명 문인의 태작에 대해 비판을 하면 불이익을 당할까봐 아예 입을 봉하고 있는 것이다. 몇 개월 전, 장석주 씨가 김춘수의 시에 대해 비판하는 글을 쓴 것을 읽었는데 솔직히 큰 감동을 받았다. 재야에 있는 분이어서 그런 용기를 발휘한 것일까, 오랜만에 가슴이 다 후련해지는 글을 읽었다. 그 글은 이렇게 끝난다.   시와 삶은 따로 가지 않는다. 그것은 한 뿌리에서 갈라져 나온 두 가지이다. 김춘수의 백일몽에서 나온 이미지들이 머금고 있는 의미들은 심약함, 패배주의, 소외, 존재의 고독, 불안, 자기분열이다. 김춘수는 자신의 뜻없는 말놀이들의 시들을 두고 '무의미 시'라고 명명하지만, 그것은 타자와의 소통이 차단된 자의식에 갇혀버린 자의 자기분열과 심약함을 드러내는 기표에 지나지 않는다.    김춘수의 언어들은 실재의 세계로부터 끝없이 도피하는 언어, 그 내부로부터 의미를 지워감으로써 현실에 대해 아무 책임도 지지 않는 상상적 유희로 환원해버리는 비본래적인 언롱(言弄)의 세계이다. 그런 까닭에 나는 김춘수의 시에서 아무런 감동도 받지 못하며, 그를 이미지 조형술의 천재, 혹은 수사의 달인이라고 부를 수는 있을지언정 감히 큰 시인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언롱의 한계와 파탄], {시경}(2004. 상반기)에서   와병중이신 시인에게는 외람된 말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이 글을 읽고 내심 '옳은 말씀이로고' 라며 쾌재를 불렀다. 대가일지라도 명작만을 쓸 수는 없다. 대가이기에 양지만을 골라서 걸어온 문인이 있다면 작품의 음영을 따지는 문학평론가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한국문학은 발전할 수 있다. 장석주 씨 같은 용기 있는 평론가가 이 땅에는 불행히도 많지 않다.   젊은 문학평론가 최현식 씨는 계간 {파라 21} 여름호에 발표한 [질문의 실종과 포에지의 응고]라는 글에서 한국 현대 시단에서 각광받고 있는 최승호·안도현·김용택·고재종의 최근 시들을 '현실을 회피하는 신비주의'라는 측면에서 비판적으로 검토했다. 이 글을 시인 당사자가 읽었다면 기분이 나빴겠지만 일리 있는 지적이라고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을 것이다. 최현식의 말마따나 "시인의 시적 직관과 통찰이 상투화·범속화되고" 있는 이 때, 그것을 지적하는 용기 있는 발언은 시인이 정신을 차리는 데 일조하리라고 나는 믿는다.   세 번째 문제는 두 번째 문제의 연장선상에 있으면서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문예지 혹은 출판사라는 더욱 큰 권력에 대한 두려움을 문학평론가가 갖고 있지 않은가 하는 점이다. 자기 목소리를 낼 줄 아는 문학평론가가 많이 나와야 한다. 기댈 언덕, 혹은 비빌 언덕에 대해 너무 골똘히 생각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유명 출판사에서 문학평론집을 못 냈다고 하여 누가 그를 멸시하는가? 천하를 호령하던 조연현의 평론을 지금 이 시대에 누가 읽고 있단 말인가. 문학평론가가 권력을 두려워하거나 권력에 아첨하면 상갓집의 개만도 못한 존재가 된다. 4. 독자에게는 문제가 없는가   앞에서도 말했지만 고급독자나 문학애호가들이 튼튼한 층을 이루고 있지 않고 너나없이 시인이며 소설가, 수필가가 되어 글을 쓰고 있다. 스스로 글을 쓰려고 들지 남의 글을 읽으려 하지 않는다. 읽고 연구하고 공부하지 않고 잽싸게 쓴 글로 재빨리 인정받으려 한다.    독자들은 또한 아픔과 슬픔의 세계를 굳이 외면하고 기쁨과 즐거움의 세계를 찾으려 든다. 딱딱하면 배격하고 심각하면 외면한다. 시건 소설이건 베스트셀러의 경우, 인생과 인간에 대한 깊은 통찰은 찾아보기 어려우며, 짧은 즐거움과 위안을 제공한다. 혹은 최루성을 띠기도 한다. 독자층이 있기는 있되 PC통신문학과 환타지소설에 열광한다. 좋은 작품을 좋다고 하고 나쁜 작품을 싫다고 하는 양식 있는 독자층이 없다면 정통문학의 앞날을 결코 밝을 수 없다.    대학로에 가서 놀란 것이 있다. 장식품이며 선물용 물건을 파는 가게가 곳곳에 눈에 뜨이고 액세서리를 파는 행상도 즐비한데 서점은 도무지 눈에 안 뜨인다는 것이었다. 그런 가게마다 사람들이 빼곡한데 어느 한 서점에 갔더니 사람이 한두 명만 있었다. 독자는 어디로 갔는가? 독자는 다 사라져버렸는가?   한국 문단의 4대 비극을 더 이상 보게 되지 않기를 갈망하지만……. 나는 시인이면서 문예지 편집에 관여하고 있고, 문학평론 유의 글도 간간이 쓰고 있고, 또한 문학 독자이기도 하다. 이 모든 비극적 진단에서 나만은 그렇지 않다고, 나만은 독야청청하다고 변명하고 싶지 않다. 이 모든 것을 껴안고서 좀더 나은 문단 풍토, 문학 풍토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싶을 뿐이다.       == 낙서 ==  하얀 종이 위에  아무런 느낌도 없이  써 내려간  꾸불꾸불한 글씨  거울에 비친 내 모습  드러내 듯  백지 위에 끝없이  풀어놓는다.  희미하게 보이던  그 모습도  한 올처럼 점점  또렷하게 보이고  나에겐  하나의 작품인 것을  타인은 '낙서'라고 한다. (이제민·시인, 충북 보은 출생)           == 낙서 == 담벼락 같은 세상에  누가 아무렇게나 갈겨 쓴  글 같은 것들  너를 좋아한다거나 사랑한다는  말 대신에  제멋대로 그려 놓은  기호나 부호 같은 것들  아무도 해석할 수 없게 써 놓은  암호 같은 것들  눈앞에  저렇게 가득히 서 있는 것들  나무 빼곡하게 들어선 숲 같은 것들  물 가득 흐르는 강 같은 것들  그 위로 날아가는 새들  그 속으로 헤엄치는 물고기들  지상에 누가 함부로 풀어놓은 것들  예고도 없이 흩날리는 눈발 같은  갑자기 쏟아지는 소나기 같은  뜨고 지는 일월(日月)이나  변함없는 천지(天地) 같은 것들  지울 수 없게  아로새긴 *연비(聯臂) 같은 것들  두 다리로 걸어가는 것들  네 다리로 달려가는 것들  대지를 돌아다니며 낙서하는 것들  동굴 같은 세상에  너를 갖고 싶다고 원한다는  말 대신에  손으로 발로 마음으로  그려 놓은 무늬 같은 것들 (김종제·교사 시인, 강원도 출생) *연비(聯臂): 사랑하는 남녀끼리 몸의 은밀한 부분에 하는 문신            == 낙서 철학으로 살자 ==  세상을 쉽게 풀면서 살자.  우리가 함께 공존해야 한다면  어려운 이야기는 피하면서 살자.  세상은 바람 속에 있고  바람 속엔 내가 있다.  완행열차의 삶으로 흐르며 살자.  부담 없는 낙서 같은 존재가 되자.  나는 세상을 쉽게 살고 싶다. (박렬·시인, 충남 부여 출생)           == 취중 낙서 ==  소주 한잔  앞에 놓고  북어 한 마리  세상 분풀이하듯  두들겨  신문지 위에 펼쳐 놓고  창 틈으로  새어드는 달빛 벗하여  거칠은 내 인생도  한잔  역겨운 세상살이도  한잔  그리운 옛사랑도  한잔  취하여  허전한 마음에 또  한잔  뉘라서  인간의 귀천을  말할 것인가  세상은 온통  뒤죽박죽인 것을  비집고 들어설 자리 없어  밀리고 밀려온  지구 한 귀퉁이  달빛 벗하여  소주 한잔이 있고  취하여  풍성한 내  세상이 있는  취중에서  하늘은 돈짝 만큼으로  내 머리 위에 있누나 (김근이·시인, 어부 시인)              == 작은 엽서·3 - 겨울 낙서 ==  그대 떠난 지 이미 오래거니  그래도 살다보면 그대 얼굴 보고 싶어  죽음처럼 지쳐 돌아오는 가난한 겨울 저녁  바람 부는 거리 한 모퉁이에 잠깐씩 멈춰 서서  무수히 발가락 끝으로 끄적거려보는  그대의 얼굴과 이름  언제까지나 지울 수 없는 한 가닥  내게 그리움이었네, 사랑이었네  그대 떠난 지 이미 오래거니 (김선태·시인, 1960-) == 사랑의 낙서 ==  너의 맑은 눈빛을 보면  난 왠지 자신이 없어  투명한 목소리는 가끔씩  나를 꿈꾸게도 하지  다정한 미소에 눈물나는,  아마도 이것이  사랑인가 봐. (이풀잎·시인, 광주 출생)         == 하늘 낙서장 ==  푸른 밤하늘에  "사랑한다"  썼다가  구름이 슬쩍 지워 주기에  다시,  "영원히 사랑한다"  쓰려는데  달님이 두 귀 쫑긋 세우고  눈 흘겨 쏘아보더라  깜짝 놀라  손가락만 잘근,  깨물어 버렸다. (구경애·시인, 1961-)           == 어느 죄수의 낙서 ==  누가 내게 고삐 매었소  몸부림 한 번 쳐봤을 뿐인데 그물에 갇혀 비린내 나는  물고기가 되고 말았소  가난한 쇠딱지 떼어내지 못한 죄의 칼 벗지 못하여  숨 한 번 크게 쉬어본 적 있었던가  쇠창살 녹이고도 남을 끓어오르는 외침  내 말 좀 들어보소  발자국마다 천년저주 밟히고  붉은 이름 석자가 꿈길 달려가는 밤마다  푸른 옷 입은 내 모습 낯설기만 해  깊어만가는 수렁에 흉터투성이 몸 던지곤 합니다  누가 내게 고삐 매었소  나는 짐승이 아니란 말이요  나는 짐승이 아니란 말이요 (최봄샘·시인)           == 낙서 == 아직 징역살이 고달프다거나 지루하단 생각할 겨를이 없네 문을 나서면 어김없이 다가서는 죽음 세면을 하거나 운동을 하거나 혹은 면회를 가거나 고무신 끌고 나서는 길이란 길은 모두 죽음으로 열려 있으니 기막힌 일일세 죽어 무덤에 갇히는 것이 아니라 관 속 같은 독방에 누워 매일같이 죽고 매일같이 살아나 죽음과 마주앉는 연습을 해야 하는 나의 일과란 허나 벗이여 죽음은 대할수록 낯설고 청춘은 자꾸 죽음과 돌아앉으려 하는데 스물세 살짜리 젊음에게 도대체 조국은 무엇이고 죽음은 무엇이고 사랑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대답해 주렴 살아 있음의 안부보다 죽음을 향해 던지는 이 절박한 질문에 대답해 주렴 조국은 우리들 가슴에 찍힌 붉은 수번이고 죽음은 밧줄에 걸려 있는 캄캄한 어둠이고 사랑은 또 무엇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것을 부르며 서슴없이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이라고 여기 이 관속에 누군가 새겨놓은 피 묻은 낙서보다 더욱 아름다운 말로 내가 내 조국을 내가 내 죽음을 내가 내 사랑을 마침내 노래하게 해다오 (문부식·사회운동가, 1959-)        
779    중국 조선족 시단의 奇花異石 - 한춘詩論 댓글:  조회:5041  추천:0  2015-11-21
[ 2015년 11월 26일 08시 37분 ]   ================================================================= 우리 시단의 기화이석(奇花異石)-한춘시론 윤윤진(길림대학교수, 문학평론가)
778    詩碑의 喜悲쌍곡선 댓글:  조회:4868  추천:0  2015-11-13
  ‘시비공원(詩碑公園) 유감’ 살아있는 시인 시비는 세우지 않는게 불문율 문예부흥 예산은 좋은 작품 쓰는데 지원해야 [특별기고] 김원길 (시인·지례창작예술촌장)     김원길(시인, 지례창작예술촌장)    안동에 시비가 여럿 세워지고 있다. 5년 전(2010년) 안동 예총에서 기획하여 안동예술의 전당 뒤 벚꽃 길에 우리 고장 출신 시인들의 시비를 1년에 하나씩 세우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문학의 거리를 만든다는 취지이다. 예산은 예총이 안동시로부터 받아서 안동문협이 주관하여 시인을 선정하고 공사를 시행하고 예산을 집행하여 왔다.  선정 기준은 안동출신 현대시인 중에 작고한 분을 우선하며 생존한 분이라도 문학적 성과를 자타가 인정하는 분을 안동문협이 추천하여 결정하여 왔다. 첫 해엔 이육사, 둘째 해엔 권정생, 셋째 해엔 김종길, 그리고 한 해 건너 올 해엔 유안진의 시비가 세워질 예정이다. 이육사와 권정생은 작고한 분이고 김종길과 유안진은 생존한 분이지만 문학적 업적과 나이로 보아 자격에 이론이 없었다.  원래 시비는 시인이 살아 있을 때 세우지 않는 게 불문율이었다. 생존한 사람의 묘비를 세우지 않듯이 당사자가 살아있을 경우엔 본인이 원하든 않든 간에 금석(金石)에 그 어떠한 것도 새겨선 안 되는 것이 상식이었다. 왜냐하면 지은이가 나중에 그 글을 고치고 싶어도 금석에 새겨진 이상 다시 고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모 시인은 그의 시를 빗돌에 새기기 직전에 틀리게 쓴 걸 발견하고 가까스로 고쳤던 것이다. 만약 그가 그걸 고치지 못한 채 빗돌을 세웠더라면 영원히 비난을 면할래야 면할 수가 없을 것이었다. 책에 실린 글, 시화전에 낸 글, 도자기에 쓴 글은 그나마 없애거나 고칠 수가 있다. 그러나 금석에 새긴 글을 지우거나 고치는 일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 하나 그들이 나이가 많다하나 앞으로 남은 생애 동안 어떤 삶을 살게 될지 죽기 전엔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만에 하나 그 시인이 노년에 불미스런 일로 세상에 비난을 살 일을 한다면 그의 시비는 쳐다보기도 싫은 애물단지가 되고 그 시비를 세운 사람도 책임을 지게 될 것이니 말이다.  작품이 우수하여 자타가 흡족해하는 경우가 아닌 이상, 본인도 만인이 쳐다보는 자리에 어줍지 못한 시비를 세워 놓고 부끄러워서 어떻게 그 거리를 지나다닐 것인가?  그런데 언제부턴가 개인이 스스로 자기의 시비를 세우고 있음을 본다. ‘언제부턴가’라는 말은 시비를 세운 자가 문인들 몰래 슬그머니 시비를 세웠기 때문이다. 누구는 자기 고향 마을 입구에, 누구는 자기 직장의 화단에 세운 것이 뒤늦게 알려져 비난이 비등했다. 왜냐하면 거기 새겨져 있는 시가 전혀 말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그 시에 감동하여 베끼거나 사진을 찍어 가는 정도라면 누가 뭐라 하겠는가? 왜 돈 들여 시비를 세워 놓고 남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구설에 오르내려야 하나?  유명해지고 싶으면 사랑 받고 존경 받을 일을 해야지 빗돌 세우기를 먼저 한다고 대단한 인물이 되는 게 절대 아니다. 특히 안동은 예로부터 나 잘난 척하지 않기로 이름난 곳이 아닌가?  전라도에 가면 시비공원이라는 게 있다. 지역 출신 시인들을 생사불문하고 총망라해서 갖가지 모양의 돌과 글씨로 시비를 세워 두고 관광객에게 구경 시키고자 지자체가 조성한 공원이다. 나는 가끔 전라도엘 가면 가람이나 석정이나 미당의 시비를 보러 가긴 했어도 시비공원에는 가볼 마음이 나지 않았다. 거긴 아직 설익은 작품들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유명 시인의 시비가 있다면 관심 있는 사람들이 찾아 갈 것은 당연하다. 그러니 이런 사업이 성공하려면 일단 거기 새겨진 시가 좋아야하고 그 시인이 존경 받는 인사여야 한다. 그러자면 당연히 다수의 호응이 있어야하고 엄격한 심사규정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당국은 유명하지 않은 시인의 시비도 예산이 있다고 해서 꼭 세워야 하나? 작품이 좋지 않아서 사람들이 외면할 게 뻔한 작품도 시민의 세금으로 빗돌에 새겨서 세워야하나? 시민의 세금으로 시비를 세우는 것이니 시의회의 동의 여부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문학의 성공은 좋은 작품, 불후의 명작을 남기는 데 있는 것이지 시비가 서 있느냐 아니냐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는 걸 깨달아야할 것이다. 문인의 약력을 보라. 몇 년도에 무슨 책, 무슨 작품을 썼는가는 기록 되어도 그의 시비가 세워져 있고 없고는 약력에 올린 걸 보지 못했다. 문학의 성공여부는 작가가 죽고 최소한 50년 후에 후인들이 그의 작품을 기리느냐 않느냐에 맡겨 놓아야한다. 만약 후인들이 선배의 시비를 세우고자 할 때 그가 생전에 손수 자기 시비를 세운 사람이라면 무엇하러 또 세워 줄 것인가?  우리 선배 문인들이 가장 경계한 것은 매문과 매명이었다. 돈을 받고 유력자를 미화하여 자서전 써 주는 것, 글은 안 쓰고 감투만 좇아 날밤을 새우는 것들을 경계하였던 것이다. 글은 뒷전이고 문학단체의 장이 되고자하는 사람, 작품 한 편 안 쓰면서 문예지를 발행하여 신인을 모집하여 예비문인을 상대로 책장사하는 사람도 있지 않는가! 그런 자들은 거개가 돈도 벌고 이름도 날렸지만 작품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우리들 시인이 참으로 중시해야할 것은 시집의 출판이어야 한다. 8백만 원으로 한 편의 시를 돌에 새기기보다 죽기 전에 그만한 돈으로 시 전집을 내는 게 중요하다. 변변한 작품 하나 없는 사람이 자기 시비를 세우려고 안달하는 꼴은 목불인견이다. 시인이 훌륭하면 후인들이 그를 기려서 언젠가 세워 주게 마련 아닌가!        △김원길(시인,지례창작예술촌장) 지방자치단체는 시집 출판보다 시비공원을 만드는 게 전시효과가 있을 거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문인을 이용해 관광객을 불러들이기 위한 사업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보다 진정한 문예부흥 정책은 그 예산으로 문인이 좋은 작품을 쓰고, 죽기 전에 전집을 낼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세속적 허영으로 말미암아 이름을 외려 망치는, 타락의 빌미를 주지 말아야 한다.  당국이 문인들의 동의 없이 자기 판단으로 수준 미달의 작품으로 시비공원을 만들면 돈이 있는 시인은 자비로 자기 시비를 여기저기 세워 시민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할 것이 뻔하다. 당국은 도시미관을 위해 이의 난립을 방지하는 조례를 만들고 꼴불견의 빗돌을 철거하는 예산을 세워야 한다. ===================================================== “시단서 방향 제시해야” ... ...커버스토리 ‘시비에 시비 걸다’.  지난 두 주간 기자의 휴대폰은 모처럼 ‘진통’을 앓았다. 격려성 전화부터 항의성 전화까지 다양한 반응이 밀어닥쳤다. ‘시비를 너무 부정적으로만 보는 것 같다’ ‘특정 시인을 너무 겨냥했다’ ‘시가 안 되면 시비만 세우면 되겠네요’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우리 시단의 고질적 병폐를 지역 언론에서 시의적절하게 잘 지적했다’ 등이다.  박해수 시인이 가장 먼저 전화를 걸어왔다. 커버스토리 35면 메인 기사 표제에 자신의 이름이 거명됐고, 마치 자신이 시비난립의 장본인인 것처럼 보도됐는데 명예훼손이란 생각을 지울 수 없다면서 강한 불만을 나타내기도 했다.  전국적 인지도를 가진 정 모 시인은 자신도 생존 시인의 시비에 반대하는 입장이지만 이번 기사에서는 자신이 마치 문단권력에 서 있고, 정치권으로부터 러브콜을 받고 있는 것으로 보도된 것은 신중하지 못한 처사라고 항의 e메일을 보내왔다.  소설가 한승원씨가 자신의 고향인 전남 장흥군에 무려 30기의 시비를 세운 것과 ‘섬진강’이란 시로 유명한 김용택 시인까지 섬진강변에 10기의 시비를 세운 걸 보고 모두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일부 시인은 이와 관련해 “그런 시비는 정식 시비라기보다는 문학적 조형물에 불과한데 그것까지 세우지 말라고 하는 건 뭣하다”는 반응도 보였다.  청송 출신의 정 모 시조시인의 시비와 관련해 ‘너무 서둘렀다’는 반응이 지배적이었다. 한 시인은 “한때 진보문학운동을 했던 그의 아들이 적극 부친의 생존 시비 건립을 만류하는 게 올바른 처사였다”면서 안타까워하기도 했다. 이설주 시인의 추모시비와 관련해 모 시인은 “달서구 월광수변공원의 시비까지는 이해해도 최근 금호강변 시비 건립 추진은 다소 무리가 있다”고 지적했다. 특히 평화뉴스의 모 기자는 “이젠 고발성 기사만으로는 시인들이 반성을 하지 않으니 차리리 생존시인 시비건립 반대 추진위원회를 만들고 난 뒤 특정 지역의 유명 생존 시인의 시비 철거 퍼포먼스라도 벌여야 할 것 같다”고 문자메시지를 보내왔다. 현재 지역 시단은 이 문제 때문에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다. 특히 도동시비동산은 조형미뿐만 아니라 선정 기준에 문제가 많기 때문에 지역 시단이 적극 나서서 제대로 된 방향제시를 해야 한다는 여론이다.  생각 같아선 희비쌍곡선을 긋는 다양한 시인의 반응을 실명으로 그대로 공개하고 싶었다. 얼마나 많은 시인이 시비에 반감을 갖고 있는가를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대구예총·대구문인협회·대구시인협회에선 공식 반응을 자제하고 있다. 도동시비동산도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는데 역시 관계자의 반응이 없다.  부디 지역 문단이 시비에 대해 전향적인 인식 전환이 있었으면 좋겠다. 시비 건립에 대한 원칙과 기준 제정에 지역 시인들이 앞장섰으면 하는 바람도 있다...  /이춘호기자
777    詩人共和國, 碑共和國 댓글:  조회:4679  추천:0  2015-11-13
김소월, 이상화, 이육사, 한용운, 윤동주, 정지용, 이상, 백석, 김수영, 박인환, 서정주, 조지훈, 유치환, 박목월, 박두진, 신동집, 구상, 김춘수…. 대시인(大詩人)은 오랫동안 대한민국에선 ‘국부(國父)적 존재’로 추앙받았다. 국어수업시간에 배웠던 국민적 애송시는 시인을 특별한 존재로 만들어 주었다.  나름의 위상을 가진 시인은 자기 고향을 대표하는 존재로 대접받았다. 전국적 인지도를 갖게 되면 ‘계관시인’으로 인정돼 예술원 종신회원이 되는 등 초특급 예우도 받았다.  사후에는 작고시인 시비건립추진위를 결성, 죽은 시인을 기렸다. 이후 문학관 건립은 물론 문학상도 제정했다. 이걸 본 시민은 시인을 한없이 부러워했다. 시인은 당연히 그렇게 해도 되는 줄로만 알았다. 시인이 시민을 압도하던 시절이었다. 그렇게 해서 1948년 국내 최초의 근대 시비가 죽순문학회 주도로 대구 달성공원에 세워진다. 바로 민족시인 이상화를 위한 시비였다. 하지만 그 시절에는 시비 건립에 엄격한 잣대와 기준이 있었다. ‘아무리 유명해도 살아 있을 때는 시비를 세워선 안 된다’ ‘작고시인 시비도 일정한 세월이 지난 뒤 정말 세울 만한 가치가 있고 지역민과의 공감이 되는 시인으로만 국한해야 한다’는 불문율이었다. 그토록 엄격하게 세워지는 시비는 결코 졸속일 수 없었다. 대표시와 그 시를 적을 서예가, 시를 돌에 새길 조각가가 삼위일체가 돼 돌에 생명을 불어넣었다. 시도 감동이지만 시비도 감동이었다.  그 시절 시인에겐 최소한의 지조와 염치 같은 게 있었다. 시인이 되기도 힘들었다. 아무나 될 수도 없었다. 검증된 자질이 요구됐다. 신춘문예와 추천 등을 통하지 않으면 시인이 되기 힘들었다. 일제강점기~광복~6·25전쟁~3·15부정선거~군부독재 치하, 시인은 시대정신과 동고동락했다. 시집에 만족하지, 감히 생전에 시비를 세운다는 발상을 할 수가 없었다. 특히 선비들은 생전의 비석을 하나의 ‘수치’로 여겼다.  74년 5월19일 이례적인 일이 벌어졌다. 국내 생존 시인으로는 처음으로 미당 서정주 시비가 전남 고창 선운사 입구에 세워진 것이다. ‘선운사 동구’란 시를 새긴 것인데, 고창 라이온스클럽이 주도했다. 조금의 시비가 일었지만 미당이었기에 가능했다. 그 시비는 본격적 시비라기보다 선운사 분위기와 어울리는 조형물로 간주됐다. 하지만 생존 시인도 시비를 세울 수 있다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30여년 우리 문단은 작고 문인 시비 세우기에 주력했다.  2000년대로 접어들면서 세상은 달라졌다.  시비는 만인의 몫이 아니라 ‘누구의 몫’으로 권위가 추락했다. 예전에는 지사적 시인의 시대였지만 이젠 유명한 시인의 세상이 도래했다. 신문과 방송을 타고 굵직한 문학상을 받으면 단번에 1급시인이 된다. 김용택·안도현·정호승 같은 시인은 시단의 ‘특급엔터테이너’로 등극했다. 곧 문단파워를 누리고 정치권으로부터 러브콜도 받는다. 지자체도 유명 시인이 필요했다. 시를 관광상품으로 활용하기 위해 이정표 같은 시비를 곳곳에 세운 것이다.  스토리텔링거리가 있는 유명 산·강·바다, 심지어 간이역까지 시비가 전주처럼 세워졌다. 전남 해남 땅끝마을 같은 데는 상징성 때문에 여러 유명 시인이 시비를 경쟁적으로 세워댔다. 심지어 시비 건립으로 사업을 하는 단체도 생겨났다. 김천시는 미당문학상을 받아 일약 스타가 된 문태준 시인을 위해 시인의 ‘생가 가는 길’이란 교통표지판까지 설치했다. 생존 시인의 시비 건립 문제 이상으로 고민해야 될 사안도 있다. ‘무조건 세워주자’ 식으로 치닫고 있는 작고문인 시비 건립 건이다.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기준과 원칙 없이 진행되고 있다. 시집을 여러 권 내고 이런저런 문학상을 받거나 문학단체에서 한 자리를 차지했다는 이유만으로 작고하자마자 서둘러 추모비를 세워준다. 사회적 영향력을 가진 유족과 문인단체 관계자가 간청하면 지자체는 시비 건립용 공공부지를 슬그머니 내놓는다. 시인들 사이에 유명하면 그만이지 시민과의 공감대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대한민국은 바야흐로 ‘시인공화국’. 시인 수가 1만3천명에 육박했다. 대구시에만 1천여명의 시인이 북적대고 있다. 시인 되는 길도 어렵지 않다. 상당수 문예지는 시인을 상품처럼 찍어내기도 한다. 시비가 워낙 흔해지다 보니 유명 트로트 가수들도 앞다퉈 노래비를 세우고 있다. 우리 강산이 ‘비공화국(碑共和國)’으로 변하고 있다.  유명한 시는 돌에 새기고 위대한 시는 인간의 맘에 새겨야 한다. 돌은 1천년 가지만 인간의 맘은 영원한 탓이다. 퇴계 이황은 별세하기 나흘 전인 1570년 음력 12월4일, 병세가 위독해지자 조카 영(寗)을 불러서 이같이 당부한다. “조정에서 예장(禮葬)을 하려고 하거든 사양하라. 비석을 세우지 말고, 단지 조그마한 돌에다 앞면에는 ‘퇴도 만은 진성이공지묘(退陶 晩隱 眞城李公之墓)’라고만 새기고, 뒷면에는 향리(鄕里)와 세계(世系), 지행(志行), 출처(出處)를 간단히 쓰고, 내가 초를 잡아둔 명(銘)을 쓰도록 하라.” 당시 퇴계는 종1품 정승의 지위에 있었으므로 사후에는 예조에서 도감을 설치해 예를 갖춰 장례를 치르는 것이 당연시되었다. 그런데도 퇴계는 유언으로 이를 굳이 사양했다. 그리고 단지 4언(言) 24구(句)의 자명(自銘)으로 자신의 일생을 정리했다. 퇴계가 특별히 스스로 묘비명을 쓴 것은 제자나 다른 사람이 쓸 경우엔 실상을 지나치게 미화한 나머지 장황하게 쓸까 염려되었기 때문이었다. /이춘호기자                                         보령탐방 - 개화예술공원 시비들의 행진       이곳 개화예술공원에는 대한민국 생존 문학가들의 육필시비가 세워진 곳으로 유명하다. 아마도 이런 시비가 세상에 또 있을까 싶을 만큼 새로운 아이디어로 만들어진 시비들이다. 생존 작가의 육필로 쓴 시를 이 고장에서 생산되는 질 좋은 오석에 새겨서 전시를 한 것이다.  시비가 많은 것만도 다른 예술공원과 다른 점이라 할 만한데, 더구나 그 시비가 각자 자신이 쓴 글씨를 그대로 새긴 육필이라는 사실은 더욱 이채로울 것인데, 이 시비가 모두 오석에 새긴 것들이고, 이 고장에서 산출되는 오석이라는 것이 더욱 특별한 것이다. 여기 시비에는 현재 우리나라에서 가장 존경 받는 유명 시인들이 총 망라되었으며, 지금도 꾸준히 자신의 작품을 남기기 위한 시인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난초 서정주   하늘이 하도나 고요하시니 난초는 궁금해 꽃을 피는 거라]   서정주시인의 글인데, 육필로 쓰여진 시비는 아주 깔끔하면서도 우리가 평소 느끼지 못하던, 체온까지 느껴지는 그런 시비가 되었다.   [조국 김남조   누구나 배우지 않고 사랑할 줄 아는 그의 나라   불붙는 숯불 밑에 엎드려도 좋아라. 역사에서 가장 슬픈 삼일만세 만세 만세 이적지 핏속에 우리는 우리의 대한]  얼마나 보고 싶고 알고 싶은 시인들인가? 그런데 이분들의 글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육필을 만나는 것이다. 스스로 쓰신 글씨. 어쩜 원고지에 직접 쓰셨을만한 그 글씨로 말이다. 이렇게 각자의 글씨로 손수 쓴 시비는 얼마나 가치이고, 얼마나 보배로운가?더더구나 이렇게 귀중한 자료가 될 만한 귀한 시비가 이미 100여 편이 넘는다니 전국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귀중한 자료 전시장이 되는 셈이다. 앞으로 더 많은 시인이 참가하고 더 많은 시비들이 만들어져서 세계에서 가장 많은 시비가 있는 시비비림이 되기를 바라면서 시간에 쫓겨 문학기행을 하면서도 시비들을 다 돌아보지 못하고 돌아서야 하는 심점이 약간은 미안한 마음이 앞선다.  
한때 전주시에서는 ‘아트 시티-Art city’라는 주제 아래 다양한 예술도시 가꾸기 정책을 전개하였다. 그 일환으로 시내버스 승강장마다 지역 시인들의 작품을 시화로 제작-게시하여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시를 감상할 기회를 제공하였다. 많은 시민들이 활용하는 공적 공간을 상업주의적이고 정책 중심의 홍보에서 벗어나 예술의 색깔을 입히려는 시도는 시인들은 물론 다수의 시민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었다. 그러나 그 뒤 시화 관리에 소홀하고 시들해져 어느 곳은 아예 찢겨 나가고, 어느 곳은 시화 위에 불법 무단 광고물이 덮여 흉측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장소를 가리지 않고 온 도시를 광고전단으로 도배하는 광고업자들의 불법행위도 문제지만, 일단 게시한 다음 지속적으로 관리하지 않고 무신경하게 방치한 행정도 문제다. 하루빨리 시내버스 승강장에 게시된 시화가 예술도시의 면모에 누가 되지 않도록 재정비를 서둘러야 하겠다. 서울 지하철역 안전방호 유리창에도 시가 게시되어 있다. 이곳의 시는 서울 출신만이 아니라 전국 시인들의 작품으로 서울이 서울만의 도시가 아니라 한 나라의 수도요 중심도시임을 과시하는 점은 바람직하다. 어쩌다 서울 나들이에 지하철역을 들를 때는 먼저 시를 찾아서 읽으며 지하철을 기다리는 무료를 달래곤 한다. 맑은 유리창에 새겨진 한 편의 시는 도심의 피로에 찌든 승객들에게 짧으나마 위로가 되기에 충분하다. 서울 지하철역 공사는 도시에 예술을 입히는 방법을 아주 간편하면서도 효과 있게 전개하는 셈이다. 시의 내용에서 받는 감동도 감동이지만, 낯설고 길 설은 대도시의 공간에서 만나는 한 편의 시는 여행객이 당하는 마음의 갈증을 달래주기에 충분하다. 돈이 되는 상업광고물의 현란한 색채의 혼란 속에서, 돈이 되지 않는 시가 무색의 유리창에 하얀 페인트로 새겨져 있다. 결코, 시의 무채색이 광고의 화려함에 지지 않는다. 이 시를 읽다 보면 잠깐이나마 맑은 기운이 정신에 삼투하는 느낌은 필자만의 것이 아닐 것이 때문이다. 전남 장성군에 소재한 장성호 주변에 이 있다. 공원 면적이나 작품 수준과 규모로 보아 결코 손색이 없다. 여기에 비치된 시 작품들은 시대와 지역과 국경을 초월한 명작들의 집대성이다. 더구나 그냥 시만 새겨둔 것이 아니라 현대 조각가들이 시를 형상화한 조각 작품을 곁들여 그 아치가 범상치 않다. 명시는 조각 작품으로 인하여 그 시향을 더욱 짙게 하고, 조각 작품은 시를 바탕으로 빼어난 조형미를 과시하고 있어서 하는 말이다.  모든 예술은 ‘심미적 정신력을 고양하려는’ 목적을 지니고 있다. 조형예술인 조각이 언어예술인 시의 정신을 형상함으로써 그 조형성에 피를 돌게 했다면, 언어에 의존해야 하는 시가 조각의 몸을 빌어서 그 추상성에 몸을 얻은 형국이다. 정신의 시가 몸의 조각을 만나 심미적 정신력을 고양하는 데 상생의 예술혼-예술미를 발휘하는 셈이다. 이 시비공원을 돌아보면서 먼저 엄청난 비용에도 기초단체에서 이루어낸 성과라는 점에서 놀랐고, 또 하나는 이처럼 아름답고 의미 있는 시비-조각 작품들이 보다 많은 시민들이 왕래하는 도심에 자리하고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아쉬움이었다. 이를 추진하려는 지자체나 시민들이 발상을 전환하지 않고서는 이루어지기 어려울 것이다. 몇 년 전, 우리 고장 어느 원로 시인의 시비를 시인이 거주하는 지역의 공원에 세우려다 실패한 적이 있다. 문인들이 자체적으로 시비건립위원회를 구성하고, 십시일반 성금을 거두어 기금까지 마련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하고 시에 시비 세울 공간을 요청했다. 그러나 시행정당국은 의회의 제지를 빌미로 미루기만 하고, 의회는 또 명확하지도 않은 시민들의 여론을 방패 삼아 시비 건립을 저지하였다. 차일피일 미루다가 결국은 거두어진 성금을 되돌려주어야 했으며, 그 원로 시인은 그런 참담한 실정을 목격하다 곧 명운을 달리하였다. 혈세의 알뜰한 집행도 필요하고, 시민들의 여론도 중요하다. 그런 장애를 뚫고 예술도시로 가꾸어가기 위해 버스승강장에 시화를 게시하고, 지하철역에 시를 게시하며, 우람하고 아름다운 시비공원을 대규모로 조성하는 것도 좋다.  그러나 그보다 더 시급한 일은 문화-예술의 진흥을 상업적 이해타산의 수준으로 끌어내리는 사고의 천박성을 청산하는 일이 우선이다. 정신문화의 못자리인 시문학-시인의 작품을 가장 번화한 도심에 시비(詩碑)로 세워도 시비(是非)를 걸지 않는 시민정신만이 한 도시를 사람다운 품격을 갖춘 예술의 도시로 거듭나게 할 수 있다. 이동희 ================================================ 詩를 고발하다... "요즘 난해시 난발... 어불성설... 등단도 문제" ‘문학과 지성’‘창작과 비평’ 지방작가 결코 기억하지 않아 코드 맞는 자기네끼리 연대 무상의 사회기여가 詩정신 원로끼리 賞 나눠먹기 안돼   “가장 쉬운 단어로 가장 깊고 오묘한 세계를 그려낸게 좋은 시”라며 요즘 난해시에 중독된 젊은 시인들을 통렬하게 비판하는 도광의 시인.  도광의 시인(71). 광기와 열정의 접점에 서 있다. 1965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부문에서 가작으로 당선됐으며, 74~78년 김춘수·신동집·박양균 시인으로부터 ‘갑골길’이 3회 추천되면서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한다. 지금까지 딱 2권의 시집만 냈다. 괴팍한 성정의 그로부터 대구 시단의 발전을 위한 독설을 듣고 싶어서 대구시 달서구 도원동에 있는 그의 아파트를 찾았다. 서재가 없다. 그냥 안방 침대가 그의 책상이다. 창턱에 몸을 기대듯 침대에 앞가슴을 갖다대고 만년필을 굴린다. 좋은 시를 낚기 위한 배수진같다. 시상(詩想) 자국이 흐르는 500자 원고지 수백장이 침대 한 귀퉁이에 수북하게 쌓여 있다. 보내온 각종 문예지와 시집이 돌담처럼 침대를 감싸고 있다.  경남 마산고를 거쳐 71~96년 대구 대건고, 99년 효성여고에서 교직을 은퇴했다. 시인 서정윤, 이정하, 안도현, 소설가 박덕규, 문학평론가 하응백, 조선일보 최보식 기자, 시인 겸 소설가인 김완준 등이 모두 그의 제자다. 제자 덕을 봤다면 지금쯤 중앙 문단에서 큰 기침도 할 수 있었겠지만…. 가끔 속상하다. 서울 굵직한 문예지는 물론, 자신이 등단한 현대문학도 그를 외면한다. ‘지방 시인’이라서 그런가 싶어 슬그머니 부아가 치민다.   도광의 시인의 퇴고 흔적 ▨ 도광의 시인 일문일답 -황병승 시인 등 요즘 리딩그룹의 젊은 시인들의 시는 참 어렵다. 자기는 물론 독자도, 평론가조차 무슨 말인지 모른다.  “김소월의 ‘진달래꽃’부터 박목월과 서정주를 거쳐 김춘수까지 지난 세월 우리 시는 많은 변모와 발전을 거듭해왔다. 그런데 요즘 너무 난해하다 못해 어불성설(語不成說)이 되고마는 시가 많다. 시가 의미있는 것이 되려면 난해할지언정 어불성설이 되어서는 안된다. 폴 발레리의 ‘해변의 묘지’를 보자. 흰 돛단배들이 떠 있는 지중해를 비둘기들이 거닐고 있는 기와 지붕에 비유한 첫 행의 이미지는 얼마나 눈부실 만큼 정치한가. ‘저 오수(午睡)에 빛나는 수많은 기왓장들, 돛단배들이 먹을 것을 찾고 있는 조용한 지붕 밑을…’이와 같이 시가 난해해도 그 의미가 시의 보편성의 어느 언저리라도 닿아 있어야만 시의 보편성의 테두리를 넓혀준다. 시는 보편성이 희박하고 지나치게 특수성에만 치우치면 난해해지고 논리의 비약을 일으키기 쉽다. 시가 시다워야 하는데 시는 없고 언어의 특유한 옷자락만 현란하게 펄럭이고 있다. 순진한 아포리즘(Aphorism)이 화장을 하고 그럴듯한 시로 진열되고 있는 이 시대에 시다운 모습을 갖고 있는 시가 차츰 드물어져 가고 있는데 대해 안타까움을 느낀다.” -대구는 ‘대한민국 시 1번지’다. 이상화, 이장희, 김춘수, 신동집, 박목월, 유치환, 구상 등 한국 근대시의 출발은 물론, 70~80년대 한국 현대시의 골격을 이룬 유명 시인들도 약속이나 한 것처럼 대구에서 나왔다. 국내 시집 출판 사상 최고의 베스트셀러가 된 ‘홀로서기’의 서정윤 시인도 대구가 고향이며, 이성복~이하석~문인수는 현재 한국 시의 블랙홀 구실을 한다. 이밖에 젊은 나이에 김수영 문학상을 받은 장정일, 안도현도 대구를 모태로 시정신을 엮었다. 그런데도 대구의 시인은 대구발 시적 인프라를 구축하지 못하고 자꾸 서울의 아우라를 역이용하려는 것 같다. 서울 문단에 결재를 받아야 자기 문학이 완성되는 것처럼 부단히 서울을 오가는 지역 문인들이 자기만 유명해지고 후배들은 방치하고 있다. 대구시문학 발전에 걸림돌인 것 같다.  “한국 최고의 문예지로 불리는 ‘문학과 지성’ ‘창작과 비평’은 결코 지방 작가를 기억하지 않는다. 자기들과 코드가 맞는 사람들과 연대, 폐쇄적으로 운영을 한다. 특별한 몇몇을 빼고 일반 지방시인들은 죽어도 명함을 못 내민다. 세상 일이 원래 그런 것이지만 그럴수록 지방의 좋은 시인들은 간접적으로 소외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런데 걱정하지 말자. 그 소외감이 이를 더 악 물게 만들고 오히려 좋은 시를 낳게 하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 유명 문예지도 필요없다. 종국에는 좋은 시를 쓰는 사람만이 빛을 보게 된다. 시만 좋으면 중앙과 지방의 문턱이 없다.” -시인이 너무 많다. 덤핑시인이 양산되는 것 같다. “요즘 주변에 이런저런 문학잡지가 우후죽순 돋아나고 있다. 그 잡지를 통해 문학하는 건 좋지만 몇 가지가 염려스럽다. 한꺼번에 책을 많이 사주면 기부입학하듯 등단시켜준다. 나도 솔직히 얼마전까지 그런 흐름에 휩쓸린 적이 있다. 하지만 이젠 거리를 둔다. 심사평 등을 부탁해도 제대로 된 시가 아니면 거절한다. 등단이 목적인 사람들은 문협에 가입하고 나면 단번에 문인행세부터 하려고 거드름을 피운다. 특히 살만한 중년 여성들이 그런 경우가 많다. 멋진 모자를 쓰고, 좋은 차를 타고 폼을 잡는다. 사람이니 그럴 수 있는 거지만 알만한 시인들이 이를 따끔하게 지적하지 못하고 동조하며 오히려 그들에게 휘둘린다.” -문학상이 너무 많고 권위도 추락했다. 목숨걸고 시를 쓰는 전업시인에게 문학적인 배려가 없는 것 같다. “나이 많은 원로끼리 돌아가면서 문학상을 나눠먹어선 안된다. 상금도 제대로 안 주고 무늬만 문학상인 게 많은데 그건 주는 기관의 권위를 시인의 권위보다 더 앞세우려는 얄팍한 처사다. 그런 상은 수상자가 과감하게 거부해야 된다. 상도 상다워야 하고 거기에 상응하는 상금도 줘야 한다. 기립박수를 쳐주고 싶은 좋은 시인에게 돌아가야만 상이 권위를 갖게 된다.” -시정신을 정의하자면.  “시문학은 노력한 만큼 보상이 안 온다. 교사는 평생하면 연금도 나오고 나름 편안하게 살 수 있는 기반을 갖게 해준다. 나도 교사로 정년을 맞아 편하게 살아갈 수 있다. 그런데 시는 교직보다 몇 배나 더 공을 들이고 피땀을 흘려도 현실적 보답은 없다. 그게 없기 때문에 일반인들이 시인을 대우해주며, 죽으면 시비도 세워주는 것 아닌가. 시창작은 무상의 사회기여이며. 그게 시의 진정한 가치인지도 모른다.” 이춘호기자  
775    詩碑 是非 ㅡ 세상보기 댓글:  조회:4827  추천:1  2015-11-13
        세상보기--                    詩碑 是非                                          /金 鶴  삼천리 금수강산이라던 우리 나라 산의 면적이 자꾸 좁아지고 있다. 도로를 내느라고, 아파트를 짓느라고, 러브호텔이나 가든을 만드느라고, 주차장을 넓히느라고 산이 깎인다. 여름 장마철이면 해마다 전국 방방곡곡에서 홍수 때문에 많은 사람이 죽고, 재산을 잃어도 그때뿐 또 산은 망가진다.  자동차를 타고 포장도로를 달리노라면 자주 눈에 띄는 게 묘지(墓地)다. 개인묘지, 가족묘지가 대부분이다. 돌보는 후손이 없는지 폐허처럼 방치된 무덤이 있는가 하면, 축대와 둘레석. 상석. 망주석. 비석 등 왕릉 못지 않게 잘 가꿔진 묘지도 흔히 눈에 띈다. 그런 묘지일수록 자리를 넓게 차지하여 산을 훼손시키고 있다. 날이 가고 달이 갈수록 묘지는 불어나고 산은 깊은 상처를 입는다. 장묘제도(葬墓制度)가 확 바뀌지 않는 한, 해가 거듭될수록 산의 면적은 줄어들 수밖에 없고, 아름다운 산은 갈수록 상처를 입게 될 것이 분명하다.  공중에서 내려다 본 산의 모습은 참으로 볼썽 사납다. 1950년대 부스럼을 앓던 시골 초등학생들의 머리통처럼 흉물스럽다. 그런데도 출세를 하거나 돈 많은 부자들은 조상의 묘지를 가꾸노라 돈을 물쓰듯한다. 자기 돈으로 자기 조상의 묘소를 잘 가꾸는 일을 탓할 일은 아니다. 효도를 으뜸의 덕목으로 여기는 유교문화의 잔재가 21세기 지식정보화 사회까지 전승되어 온 것을 어쩌겠는가? 참으로 딱한 일이다.  산은 인간에게 산소를 제공해 주는 소중한 자연이다. 산은 각종 동식물의 보금자리이기도 하다. 우리의 장묘제도가 완전히 바뀌기도 전에 또 다른 걱정거리가 등장하고 있다. 여기 저기에 '문학비(文學碑)'와 '시비(詩碑)'들이 기하급수적으로 세워지고 있기 때문이다. 대개 이들의 비는 경치 좋은 산자락이나 도시의 공원에 세워지기 마련이다. 문인이 세상을 뜬 뒤 그 문학적 공적을 기리는 후배들이 십시일반(十匙一飯)으로 모금을 하여 문학비를 세우는 것이 통례였다. 그러나 경제적인 여유가 생기면서 살아있는 문인이 자기 돈으로 자신의 문학비를 세우는 경우가 늘고 있다. 청렴결백하고 자존심이 강한 문인들이 어쩌다 이렇게 선비정신을 버리고 세속화되었는지 부끄러운 일이다. 내세울만한 공적도 없고, 벼슬도 한 적이 없는 조상의 묘지에 덩그렇게 비석을 세운 졸부들의 행태와 무엇이 다를까?  춘향골 남원의 광한루 누각 뒤에는 30여 기의 비석이 줄지어 세워져 있다. 조선시대 암행어사, 전라감사, 남원부사의 선정비(善政碑)와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들이다. 어떤 비문은 오랜 세월 비바람에 씻겨져 글자를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 지금은 비록 그런대로 글자를 알아 볼 수 있는 비석도 언젠가는 마모되어 버리고 말 것임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여기에서 모름지기 진짜 교훈을 얻어야 하리라 믿는다.  문학비 하나 세우는 데 수천만 원의 돈을 썼다는 실화(實話)를 들은 적이 있다. 지하도나 기차역에서 밥조차 제대로 먹지 못하고 가족과 헤어져 노숙하는 사람들이 있는 이 어려운 나라에서 비석 세우는 일이 그렇게 필요한 것일까 한 번쯤 되새겨 볼일이려니 싶다. 행여 이 문학비 건립이 더 이상 유행하지 않았으면 한다.  모두가 자연 훼손이다. 문학비를 세우기 위하여 냇가나 산에서 캐낸 자연석을 옮겨다 사용하는 일도 그렇고, 오석(烏石)에다 글을 새겨 세우는 일도 자연보호와는 거리가 먼일이다. 조상의 묘지를 가꾸려고 석재를 마구 사용하는 일이나 오십보백보(五十步百步)가 아닌가?    숲길 문학의 전망과            시비 또는 육필문학비의 보존가치                                                           장사현(시인, 수필가, 문학평론가)                                                  ▣ 숲길 문학의 전망 ◎ 한국의 문학비 현황    전국에 있는 문학비가 모두 몇 곳에 몇 기(基)가 세워져 있을까? 일일이 세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많은 문학비를 누가, 어떤 이유에서 세웠는지 일목요연하게 알 수도 없다. 많은 사람들이 문학비를 만들려고만 했지,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관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필자는 영남지역의 통합문예지인 계간《영남문학》을 발행하고 있다. 그 사업의 일환으로 영남지역 문인들의 흔적을 남기기 위하여 ‘영남문학 문학공원’을 조성하려고 준비 중이다. 하여, 문학공원 부지 2만평을 확보하였으며 이곳 ‘개화예술공원’과 ‘시와 숲길 공원’을 견학하였다. 그러한 과정에서 전국의 문학비 현황을 파악하는 가운데 김구림 시인 저 『한국의 문학비를 찾아서』(1995. 12. 1 문학아카데미)와 최근 죽순문학회가 엮은 『한국의 문학비』(2011. 12. 25 북랜드) 등 자료를 검토하였다. 또한 문학기행을 통하여 견문한 자료 등을 토대로 논고(論考)를 정리하였다. 전국적으로 산재되어 있는 문학비는 정확한 통계는 아니지만 2013년 현재 1,100여 기가 세워져 있다.    1. 공원별 현황    1) 보령 개화예술공원        전국 최대, 세계 최대의 조각공원이다. 55,000여 평 규모에 조성된 조각상, 시비 등 250(육필 230기)여 기가 세워져있다. 그 경내에는 연못과 조형미술관, 허브랜드 등 장엄한 관광명소로 되어있다.   이곳에는 여말선초(麗末鮮初)의 삼은(三隱: 포은, 목은, 야은)의 한시를 비롯하여 숙종대왕 어필과 김유신, 이황, 류성룡, 한석봉, 허난설헌, 황진이, 윤선도, 추사 김정희 등 옛 명사의 필체 및 한시가 새겨져있다.   또한 현대문학의 주요 문인으로 윤동주, 한용운, 이육사 등 작고 문인과 고은, 황금찬, 성기조 등 현존 시인의 문학비가 있어 한국문학사와 문화사를 다 볼 수 있는 ‘한국문화사사전’이 펼쳐져있다.       2) 시와 숲길 공원        이곳 주산에 있는 ‘시와 숲길 공원’은 소나무 숲길 공원이다. 주변 보령댐과 20리 벚꽃길을 비롯하여 인근에 무창포 모세의 기적과 같은 바다를 배경으로 용이한 지형지물을 안고 있다.   여기에는 ‘한국현대문학 100주년 기념탑’과 ‘항일민족시인추모분향단’이 설치되어 있으며 30리 둘레길을 조성하고 있다. 항일민족시인 등 작고문인과 현역 시인들의 문학비 250(육필 50기)여 기가 있다.   특히 ‘한국현대문학 100주년 기념탑’의 경우는 훗날 국보(國寶)감이 되리라 기대한다. 2008년 11월 1일 (사)국제펜클럽한국본부와 (사)한국육필문예보존회에서 추진하고 보령시에서 후원한 이 탑은 육당 최남선이 문예지 《소년》에 발표한 「해에서 소년에게」를 한국현대문학의 기점으로 삼아 100주년이 되는 해에 건립한 것이다. 이 탑에는 일제강점기, 6․25 한국전쟁, 산업화과정, 민주화과정, 21세기 정보화시대에 이르기까지 우리 근, 현대사가 집대성되어있다.   이러한 민족정기와 문사들의 혼이 서려있는 탑을 시작으로 소나무 숲길 30리의 둘레길이 완성되면 이곳은 한국문학사의 사전이요 국민정서함양에 더할 나위 없는 문화예술 공간이 될 것이다.       3) 강릉 경포대호반시비공원        강릉 저동 소재 경포호반에는 박인환, 심연수, 정순응의 시비 등 11기     4) 강릉 한시공원        경포대 주차장 옆 산길에 구사맹, 손순, 김세필을 비롯한 11기     5) 강릉 허난설헌공원        경포대 뒤편에 있는 허난설헌 공원에는 허씨 일가의 문학비 5기     6) 만해마을 시비공원        인제군 소재 백담사 경내에는 한용운, 김시습, 오세영 등 6기     7) 서울 어린이대공원        능동에 있는 어린이대공원에는 김동인, 방정환의 흉상을 비롯하여 4기     8) 제주 서귀포칠십리시공원        서귀포 서흥동에는 구상, 김춘수, 박재삼, 이생진 등 15기     9) 제주 현대미술관시비        제주 한경면에 한용운, 조지훈, 성기조 시비 등 5기     10) 지리산 지안재시비공원         경남 함양 오도재에 김일손, 김종직, 신숙주 등의 10기     11) 부산 용두산공원         부산 광복동에 유치환, 박태문, 홍두표 등 9기     12) 부산 어린이대공원         부산 초읍에 조지훈, 신동엽, 천상병 등 6기     13) 마산 산호공원         창원 합포구에 이은상, 천상병 등 9기     14) 광주 사직공원         광주 사동에 이순신, 김덕령, 윤선도 등 8기     15) 구례 시의 동산         김광균, 김소월, 문덕수 등 21기     16) 전북 덕진공원         전주 덕진에 신석정 등 4기     17) 김천 직지문화공원         김천 대항에 김수영, 노천명, 서정주 등 18기     18) 대구 도동시비공원         대구 도동 측백나무 숲 인근에 고은, 도광의, 구석본 등 20기     19) 대구 두류공원인물동산         두류공원에 백기만, 이상화, 이장희, 이인성, 현진건 등 5기     20) 대구 육필시비공원 시인의 길         동구 도학동에 김수영, 김용택, 김지하, 박노해, 안도현 등 17기     21) 대구 중리공원         중리동에 정철, 김소월, 김영랑, 박목월, 서정주 등 5기     22) 단양 소금정공원         단양읍에 권섭, 김경자, 신동문 등 10기     23) 한용운 생가 민족시비공원         홍성군 결성면에 신동엽, 김광섭, 심훈 등 18기     24) 옥천 대청호반 장계관광단지 테마시비공원         옥천 군북에 정지용, 오세영, 오탁번 등 12기가 있다.     2. 작가별 낱개 시비 현황     1) 현대문학 이전의 문사 등       - 권벌 (조선 중종 때 문신) 경북 봉화 석천정사 길목에 시비1기       - 권섭 (조선 후기 문신) 단양, 제천 등 시비 3기       - 김굉필 (조선 중기 문신) 대구 도동서원 부근에 시비1기       - 김병연 (김삿갓, 조선 말기 시인) 영월 등 시비 5기       - 김시습 (조선 초기 문신) 청주, 인제, 서울 등 시비 3기       - 최치원 (통일신라 말기 학자) 부산, 합천, 함양 등 시비4기       - 박인로 (조선 중기 무신, 시인) 영천, 포항, 부산 등 5기       - 서거정 (조선 전기 문신) 서울에 시비3기       - 송순 (조선 중기 문신) 광주, 담양, 강릉 등 시비 4기       - 송시열 (조선 후기 문신) 완도에 시비1기       - 숙종대왕 (조선 19대 임금) 강릉, 보령 등 2기       - 신득청 (여말선초 학자) 영덕에 시비1기       - 신사임당 (조선 중기 예술가) 평창, 강릉, 대구, 보령 등 4기       - 영조대왕 (조선 21대 임금) 사직동에 시비1기       - 왕방연 (조선 세조 때 문신) 영월에 시비1기       - 윤선도 (조선 중기 학자) 서울, 보령, 광주, 완도 등 시비5기       - 이달 (조선 중기 시인) 원주, 홍성 등 시비2기       - 이매창 (조선 중기 여류시인) 남원, 부안에 시비2기       - 이숭인 (고려 후기 학자) 성주에 시비1기       - 이조년 (고려 말기 문신) 성주, 달성에 시비2기       - 이현보 (조선 중기 문신) 안동 도산에 시비2기       - 이황 (조선 중기 대학자) 안동 도산에 시비2기       - 정몽주 (고려 말기 학자) 서울, 용인, 영천, 보령, 대구 등 시비5기       - 정조대왕 (조선22대 임금) 강릉에 시비1기       - 정철 (조선 초기 문신) 서울, 고양, 원주, 진천, 대구 등에 시비5기       - 최경창 (조선 중기 문신) 파주, 영암에 시비2기       - 홍랑 (조선 전기 기생) 파주에 시비1기       - 황진이 (조선 중기 기생) 파주, 보령에 시비2기가 있다.       2) 현대문학 주요 문인들의 문학비       - 구상 시인 시비는 여의도 나루터 앞을 비롯하여 개화예술공원 등 6곳       - 김광균 시비는 서울 대학로, 구례 화엄사 등 4곳       - 김달진 시인은 진해, 홍성 등 2곳       - 김동리 소설가는 경주, 보령 등 2곳       - 김소운 수필가는 부산 쌈지공원       - 김소월 시비는 왕십리 역, 대구 유가사, 홍성 등 9곳       - 김영랑 시인은 강진 생가를 비롯하여 광주, 서울, 보령 등 6곳       - 김유정 소설가는 춘천 일원에 4기       - 김춘수 시인은 통영, 보령, 대구 등 7곳       - 노천명 시비는 김천, 고양 등 4곳       - 박경리 소설가는 통영, 원주 등 2곳       - 박두진 시비는 김천, 보령, 옥천 등 7곳       - 박목월 시비는 서울, 경주, 보령 등 16곳       - 박재삼 시비는 사천, 보령, 김천 등 5곳       - 방정환 아동문학가는 서울에 2곳       - 서정주 시비는 고창, 보령, 대구 등 9곳       - 설창수 시비는 진주에 2기       - 심훈 시비는 당진과 홍성에 2기       - 유치환 시비는 거제, 보령, 통영, 부산 등 9곳       - 윤동주 시비는 연세대, 부산, 대구, 보령 등 8곳       - 이상화 시비는 서울, 대구, 보령 등 7곳       - 이영도 시비는 청도, 부산 등 3곳       - 이원수 아동문학가는 서울, 마산, 보령 등 6곳       - 이육사 시비는 안동, 김천, 홍성, 보령 등 4곳       - 이은상 시비는 마산, 부산, 태안 등 4곳       - 정지용 시비는 옥천, 서울, 제주 등 9곳       - 조병화 시인은 바르셀로나, 서울, 보령 등 5곳       - 조지훈 시비는 영양, 대구, 서울, 보령 등 10곳       - 천상병 시비는 서울, 대구, 마산, 보령 등 6곳       - 한용운 시비는 인제, 홍성, 서울, 보령 등 12곳       - 그 외 고정희, 구석봉, 권태웅, 권정생, 김기림, 김동인, 김상옥, 김성도, 김억, 김윤식, 김현승, 민태원, 박곤걸, 박양균, 박용래, 박용철, 박인환, 백기만, 백석, 백신애, 변영로, 신동엽, 신석정, 심연수, 오영수, 오일도, 윤곤강, 이달, 이병기, 이상, 이생진, 이설주, 이성선, 이영순, 이윤수, 이호우, 이효석, 이장희, 이태준, 이형기, 이효상, 전상렬, 정상구, 정한모, 제해만, 주요한, 채만식, 한흑구. 현진건, 홍사용 등의 문학비가 연고지를 중심으로 산재해 있다.            3) 현존문인들의 문학비        여러 가지 사정상 생략    ◎ 생존 작가의 문학비와 개관이정(蓋棺而定)에 관한 문제     비(碑)를 사전적 의미로 보면 ① 어떤 사람의 공적이나 은혜를 기리기 위하여 돌이나 쇠붙이, 나무 따위에 그 내용을 새기어 세워 놓은 물건. ② 무덤 앞에 죽은 사람을 기릴 목적으로 세우는 비석. 죽은 사람의 신분, 성명, 행적, 자손 관계, 나고 죽은 때 등을 새긴다. 로 되어있다.   문단에 영향을 끼친 공덕이 있는 작고문인에 대한 문학비 건립은 당연시되고 있다. 그러나 문학성이나 문단에 미친 공덕이 없는 문인의 문학비 건립은 항시 문제시되어왔다. 더구나 자화자찬을 하거나 경제력이 있어 자기과시를 하는 문학비는 공해(公害)라는 비난까지 받고 있다.   이러한 문제에 대하여 문단에 기여한 공덕과 문학성에 대한 경계가 모호하다. 개관이정(蓋棺而定)이라는 말이 있듯이 생존 작가에 대한 문학비 건립은 신중을 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관 뚜껑을 덮기 전에는 평가를 할 수 없다는 옛말이 그르지 않기 때문이다.   ◎ 정곡 이양우 선생의 치적(治績)    정곡 선생이 이룬 과업은 지대한 공적(公的)이며 문학단체를 이끌어오면서 이룬 성과이므로 치적(治績)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개화예술공원과 시와 숲길공원은 세계적으로 가장 큰 규모의 문학 동산이다. 전국에 세워진 문학비가 1,100여 기라고 볼 때 정곡 선생이 세운 문학비가 무려 500여 기나 된다. 그 중에 육필문학비가 280기나 되니 엄청난 업적을 남긴 것이다. 자연경관의 지형지물을 여하히 활용하였으며 조경 또한 친환경적이다. 이곳은 대국민 정서함양과 휴식공간으로써 성공한 사례로 볼 수 있다.   ◎ 향후 대책과 숲길 문학의 전망    문학공원은 환경을 먼저 생각하여야 한다. 묘지 또는 납골당 같은 혐오스런 분위기가 되어서는 안 된다. 대구에 있는 ‘도동시비공원’의 경우는 작은 절집 앞에 조밀하게 세워진 시비는 섬뜩한 느낌이 든다. 우연히 들러본 일부 사람들은 무서워서 얼른 빠져나왔다고 한다. 문학공원은 특정 종교적인 색채가 짙게 풍기면 좋지 않다. 종교나 계층, 연령층을 모두 아우를 수 있는 대중적인 분위기가 되어야 한다.   문학공원은 여유 있게 산책하는 휴식공간으로 힐링이 되는 곳이어야 한다. 또한 정서함양에 도움이 되어야하며 문단사와 문학사, 나아가 시대를 조명할 수 있는 문화사(文化史)가 되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숲길 문학의 전망은 고무적이다.     ▣ 시비 또는 육필문학비의 보존가치 ◎ 문학비의 중요성     고대로부터 있어온 비(碑)는 역사의 자료이며 그 시대 문화사를 알 수 있는 사료다. 광개토태왕비(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碑)는 우리민족 역사상 최고의 정복군주임을 증명하고 있으며 처용의 ‘향가비’와 진흥왕 순수비(北漢山新羅眞興王巡狩碑)등을 통하여 우리민족의 문화와 역사를 알 수 있다.   문학비는 작가의 문학세계와 문학정신이 서예가와 석공의 손길을 거쳐, 새로운 예술적 가치를 창출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활자화된 문헌보다 더 값지다.   ◎ 육필문학비의 보존 가치    육필(肉筆)문학비는 컴퓨터 서체(書體)가 아닌 그 작가의 서체를 보존하는 것이다. 서체를 통하여 시대성을 알 수 있고 그 작가의 성품, 그리고 개성이 잘 드러나므로 예술적 가치가 더욱 크다.   이상과 같이 문학비의 현황과 장․단점을 살펴보았다. 지금은 지식기반 경제시대가 아니고 창의성기반 경제시대이다. 유네스코가 지정한 문학창의도시(에든버러, 멜버른, 아이오와시티, 더블린, 레이카비크)가 경제의 꽃을 피우고 있다. 전국에 산재되어 있는 문학공원은 그 도시의 경제브랜드가 되고 있다. 육필문학비야말로 우수한 경제브랜드가 될 수 있으며 영원히 보존할 수 있는 문화예술의 보고(寶庫)다.            
774    是非의 나라, 詩碑의 나라 댓글:  조회:5536  추천:0  2015-11-13
  시비 是非의 나라, 詩碑의 나라   茶山은 목민심서 束吏에서 목민의 책무를 맡은 자가 송덕비나 선정비를 살아 생전에 세우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였다. 물론 민중의 자발적 의사에 따라 떠난 이의 행적을 기리는 것이야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제법 큰 고을 한 모퉁이에 말라 비틀어진 대나무처럼 서 있는 비석들을 바라볼 때마다 오늘날 힘깨나 쓰는 위정자들의 자화자찬을 보는 것 같아 쓸쓸하기 그지 없다. 나라를 걱정한다는 사람들이 얄팍한 술수를 부리고 이편 저편 갈라서서 호객을 하며 是非를 논하는 이 백가쟁명의 시대에 또 하나의 시비거리가 있으니 걱정 아닌 걱정이 든다.   어느 날 부터인가 우리 주변에 詩碑가 늘어나고 있다. 이미 유명을 달리한 시인들의 시를 기리며 後人들이 세운 시비야 말할 필요가 없으나 문단의 어른이라고 하는 분들부터 이제 시단에 발을 들인 신인에 이르기까지 이곳 저곳에 자신의 시비를 세우고 자랑꺼리로 삼는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비싼 돌을 캐내어 다듬고 아무리 좋은 글씨로 새겨 넣은들 만고에 남을 명문장을 가려 읽고 마음에 간직하는 수준 높은 독자의 눈을 속일 수는 없을 것이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긴다”는 말은 틀림이 없으나 자신의 이름을 남긴다는 것이 다시 말해 자신을 기억해주는 사람, 자신의 언행이 훌륭함을 인정해 주는 이들이 없이는 불가능함은 쉽게 알 수 있는 일이다.   구재기 시인은 인생의 선배요, 문단의 선배일 뿐만 아니라 멀다고는 할 수 없는 인척이기도 하다. 교단에서 은퇴한 시인은 생가를 산애재라 이름 짓고 화초를 가꾸는 일에 열중하고 있다. 나는 그런 유유자적을 부러움 반 시샘 반으로 바라보고 있었는데 시비를 하나 둘 세우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럼 그렇지!   그는 30개의 시비를 세우f고자 했는데 이제 28개를 만들었다고 했다. 그러나 오해하지 말자. 산애재에는 그의 시를 새긴 시비는 하나도 없다. 자신이 좋아하는 시인들의 시를 자비를 들여 자신의 마음 속에 들여놓는 일을 구재기 시인은 하고 있는 것이다. 어림잡아 몇 천 만원은 내놓아야할 그 일을 그는 몇 년 동안 뚝딱하고 해 놓았다. 詩歷 40 년에 가까운 시인이 스스로 아끼고 자랑하고 싶은 시가 어찌 없겠는가?   나는 그에게서 愼獨의 경지를 본다. ================================         한국의 대표적인 현대시 작품을 돌(자연석)에 새겨서 모두 한 자리에 모아놓은 이 새로 조성되었다. 대구시 동구 도학동, 팔공산 자락에 위치한 이 육필공원은 신라시대의 고찰이었던 대구 팔공산 북지장사 입구에 세워져 있다. 북지장사는 대구시 동구의 백안삼거리에서 팔공산 동화사쪽 방향으로 틀어서 약 2km 지점에 그 입구가 있다. 그 입구로 틀자마자 바로 육필공원이 그 장엄하고 웅대한 모습을 드러낸다.  지난 20여 년 동안 자연석 수집에 특별한 취미와 집념을 가지면서 현재까지 2300점 가량의 크고 작은 자연석을 전시해놓은 "돌, 그리고"의 운영자(채희복)는 남다른 문학애호가이자, 시를 특별히 아끼고 사랑하는 독자이다. 그는 평소 자신이 즐겨 읽던 시작품을 중심으로 학계와 문단에 두루 폭넓게 자문을 거쳐서 드디어 25점의 시작품을 선정하여 자연석에 새긴 육필공원을 완성하기에 이르렀다.  지금까지 한국 대표시인들의 육필작품을 한 자리에 집중적으로 모아놓은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라고 한다...     아래의 사진은 입구에 세워진 표지석입니다. "시인의 길"이란 이름이 인상적입니다. '시인을 만날 수 있는 곳', 혹은 '시인이 걸어가야 할 길' 등의 여러 가지 뜻을 함축하는 듯합니다.     ▲ 한국현대시 육필공원 표지석(시인의 길)     다음은 한국 현대시 초창기의 매우 중요한 인물이자 승려시인이었던 만해 한용운 대선사의 친필입니다. "마저절위(磨杵絶葦)"라고 쓴 글씨와 그 굵은 획이 우리의 가슴을 서늘하게 합니다. 이 네 글자의 뜻은 이렇습니다. 공부에 워낙 몰두하다 보니까 절굿공이가 다 닳아서 바늘이 되었고, 책을 묶은 가죽끈이 다 닳아서 책이 모두 떨어져 버렸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모든 일에 힘써 노력하는 삶의 자세를 일러주는 글귀입니다.     ▲ 만해 한용운 시인의 육필     다음은 대구 출생의 1920년대 대표적인 민족저항시인이었던 이상화 시인의 육필 작품 "입니다. 이 작품은 식민지 시대를 고통스럽게 살아가던 우리 민족의 아픔과 절망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 이상화 시인의 육필시비     다음은 역시 대구가 배출한 1920년대의 대표시인 고월 이장희가 남긴 유일한 육필입니다. 이라고 썼는데요. '넓고 커다란 연못'이란 뜻인데, 이는 마음 씀씀이가 너그럽고 온유한 인품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장희 시인은 불우한 청년시절을 보내다가 그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요정시인이었지요. 세상을 떠나기 전 홀로 빈방에서 금붕어만 줄곧 그렸다고 합니다.         ▲ 고월 이장희 시인의 육필     다음은 평북 정주에서 태어난 한1930년대 한국의 대표적인 시인 백석의 시 입니다. 백석이 남긴 육필이 없으므로 그의 시집 (1936)에 수록된 활자 형태를 그대로 옮겼다고 합니다. 백석의 시정신을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시작품이 이 아닌가 합니다. 현재 한국에서 맨 처음으로 세워진 백석의 하나 뿐인 시비라고 합니다.     ▲ 한국에서 최초로 세워진 백석 시비     다음은 대구 출생의 시인 이설주의 작품 입니다. 이설주는 1930년대에 데뷔하여 1960년대까지 대구 지역에서 주로 활동했던 시인입니다. 일제강점기와 해방시기에 발표한 그의 시는 꽤 저항적이고 현실저항적 요소를 지니고 있습니다. 해방 이후에는 대구에서 서점을 운영하며 시를 쓰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 이설주 시인의 육필시비       다음은 비운에 요절한 민족시인 윤동주의 육필 시작품 입니다. 따뜻한 봄 햇살이 그대로 가슴 속에 스며드는 듯 아름답고 포근한 작품입니다. 흔히 윤동주의 친필은 가 많이 알려져 있는데, 이 시비에 새겨진 작품은 더욱 정감이 느껴지며, 마치 윤동주의 애잔한 얼굴 표정을 대한 듯한 착각이 들 정도입니다.     ▲ 윤동주 시인의 육필시비       다음은 한국의 1950년대를 대표하는 김수영 시인의 작품 의 한 대목입니다. 이 시는 꽤 긴 시작품인데, 여기서는 그의 치열한 삶과 정신을 드러내는 일부만 옮겼다고 합니다. 힘들고 고단한 시대를 혼자서 외롭게 버티며 살아갔던 김수영 시인의 불꽃같은 정신을 그의 육필에서 느끼게 합니다.     ▲ 김수영 시인의 육필시비     다음은 순수시와 무의미시론으로 작품을 쓰면서 일생을 살아간 경남 통영 출생의 시인 김춘수의 육필시 입니다. 이라는 그의 대표작은 전국의 많은 문학애호가들의 심금을 울려주고 있습니다. 초창기에는 아름답고 순수한 의미시를 쓰다가 후반기에는 율격과 리듬감각만 살아있는 무의미시로 돌아섰습니다. 이 작품도 무의미시 스타일을 보여주는 경향을 나타내 보입니다.     ▲ 김춘수 시인의 육필시비       다음 작품은 고은 시인의 이란 작품입니다. "노래 하며 놀다가/ 노래하며 가네" 이번 육필공원 조성을 위해 특별히 써서 원고를 보내주었다고 합니다. 전북 옥구 출생의 고은 시인은 원래 모더니즘으로 출발했으나 1970년대 이후 저항적 민족시를 쓰는 시인으로 바뀌었고, 민주화 운동에 헌신하여 많은 작품과 활동을 펼쳤습니다. 최근 노벨문학상 최종후보로 여러 해째 거론이 되고 있습니다.     ▲  고은 시인의 육필시비     다음은 충북 충주 출생의 시인 신경림의 육필 시작품 입니다. 이 작품은 신경림 시인의 등단 작품으로 고등학교 국어 교재에도 수록되어 있습니다. 등단 직후 한국문단의 혼미하고 지리멸렬한 모습에 절망하여 10여년 이상 절필하다가 시집 로 화려한 부활에 성공했습니다. 문학의 민주화를 위한 많은 노력과 헌신을 이룩했습니다.     ▲ 신경림 시인의 육필시비     다음은 경북 안동 출생의 여성 시인 유안진의 작품 의 육필입니다. 1960년대에 등단하여  한국의 전통적 여성상의 내밀한 세계를 파고 들었으며, 묵묵한 희생으로 일생을 살아온 한국적 모성상을 그려내는 일에 성공을 거둔 시인입니다.           ▲ 유안진 시인의 육필시비     다음은 1970년대를 대표하는 저항시인이었던 김지하 시인의 육필 작품입니다. 시집 에 수록된 그의 작품 의 한 대목에서 가려뽑았다고 합니다. 크고 성큼성큼한 그의 필치에서 우뚝하고 대담한 김지하 시인의 시정신과 독특한 분위기를 여실히 느끼게 합니다. 김지하 시인은 부조리하고 모순적인 현실에 대한 비판적 작품에서부터 환경오염에 저항하고 이를 극복하는 방안을 문학작품으로 이룩하고자 하는 시도를 나타내 보이고 있습니다.     ▲ 김지하 시인의 육필시비     1970년대를 대표하는 시인 중 한 사람인 정희성 시인의 육필 작품 입니다. 선비적 충모와 지사적 필치로 강개한 어조의 시작품을 줄기차게 써온 정희성 시인은 일찍이 로 우리들에게 잘 알려져 있습니다. 현재는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장으로 활동 중입니다.     ▲  정희성 시인의 육필시비     다음은 전남 구례 출생의 시인 이시영의 육필 입니다. 시집 을 통하여 문단에 뚜렷한 개성을 부각시켰던 이시영 시인은 짧고 선명한 필치로 현실과 역사와 삶의 주변을 따스한 정감이 느껴지는 시각으로 재현하는 일에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특히 흘러간 추억의 아름다움과 눈물겨움을 담아내는 일에 뛰어났다는 평을 받고 있습니다.      ▲ 이시영 시인의 육필시비     다음은 정호승 시인의 육필 작품 입니다. 많은 독자층을 거느리고 있는 정호승 시인의 작품과 그 특징은 평범한 삶의 주변 사물들을 사랑과 눈물의 아름다움으로 다시 태어나도록 만드는 위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시인이 직접 쓴 육필은 그 시인의 가치관과 습관, 성격 따위를 그대로 솔직하게 드러나게 해주는 중요한 단서라 할 수 있습니다.     ▲ 정호승 시인의 육필시비       다음은 1973년 동아일보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한 경북 김천 출생의 시인 이동순의 작품 전문입니다. 추운 겨울 동안 세상을 장악하고 있던 얼음이 따뜻한 봄이 되면서 점차 녹아 사라지는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얼음은 마침내 마지막 말을 비장하게 남기고 높은 산꼭대기에서 어디론가 자취를 감추어버립니다.     ▲ 이동순 시인의 육필시비     다음은 대구에서 활동 중인 이태수 시인의 작품 육필입니다. 현대문학지를 통해 등단했고, 문학과지성사에서 여러 권의 시집을 발간한 바 있는 이태수 시인은 과거 자유시 동인으로 할동했으며, 현재는 대구매일신문 논설주간으로 활동 중입니다.     ▲ 이태수 시인의 육필시비       다음은 경북 의성 출생의 시인 하종오의 육필 작품 의 육필입니다. 라는 시집으로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시인입니다. 현실저항적 의식이 담긴 작품을 주로 쓰다가 생명력이 듬뿍 느껴지는 시적 지향을 담아내는 스타일로 지속적 노력을 펼치고 있는 중입니다.     ▲ 하종오 시인의 육필시비     다음은 전북 순창에서 초등학교 교사로 활동 중인 김용택 시인의 작품 의 육필입니다. 김용택 시인은 초등학교 분교에서 주로 활동하면서 낙후한 시골의 삶과 주변 농민들의 처연한 가슴 속을 시작품으로 그려서 담아내는 일에 성공한 시인입니다. 대표적 시집으로는 등이 있습니다.     ▲ 김용택 시인의 육필시비       다음은 강원도 속초에서 활동 중인 이상국 시인의 육필 작품 의 육필입니다. 이상국 시인은 한반도의 동해안 북부지역 주민들의 삶과 역사적 시간을 잘 그려내 보여줍니다. 특히 설악산 자락에서 대를 이어 살아온 지역민들의 아픔과 눈물을 훌륭히 육화시켰다는 평을 받고 있습니다. 이 시는 때가 되어 북으로 떠나가는 철새 부자의 대화를 기록한 재미있는 작품으로 삶에 대한 직관력과 낙관성이 돋보입니다.     ▲ 이상국 시인의 육필시비       다음은 경남 진해 출생의 시인 정일근의 육필 작품 입니다. 정일근 시인은 우리 민족이 살아온 삶의 과정을 그 특유의 역사적 감각과 생활정서를 적절히 배합하여 독특한 서정으로  승화시키는 일에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중등학교 국어교재에도 정일근 시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지요.     ▲ 정일근 시인의 육필시비       다음은 얼굴없는 노동자 시인으로 알려졌던 박노해 시인의 육필 작품 입니다. 박노해 시인은 인천 부평의 대우자동차 공장의 노동자로 근무하면서 노동현장의 열악한 조건과 부조리한 사회의 모순을 치열하게 고발하는 작품을 썼습니다. 이후 투옥되었다가 풀려난 바 있습니다. 시집으론 등이 있습니다.     ▲ 박노해 시인의 육필시비       다음은 안도현 시인의 육필 입니다. 워낙 널리 알려진 글귀라 돌에 새겨놓은 짧은 시작품의 전문이 웅변적 반향으로 우리들에게 다가옵니다. 경북 예천 출생으로 대구에서 성장한 안도현 시인은 현재 전라북도의 우석대 문창과 교수로 활동 중입니다. 어른을 위한 동화 등으로 큰 인기를 얻었습니다.     ▲  안도현 시인의 육필시비      
773    詩碑의 是非 댓글:  조회:4670  추천:0  2015-11-13
  시비詩碑의 시비是非             ​ ​목필균 ​ ​ 먼 산빛을 친구 삼아 도봉산에 오르면 천축사 가는 길은 열려있다.   젊은 까치소리에 눈웃음 치고 이름 모를 풀꽃에도 손길을 주며 한 걸음 한 걸음 산길을 걸으면 노래하듯 흘러내리는 맑은 물소리가 오히려 내 갈 길을 재촉하니 재미있다.   도봉산을 품어 안은 천축사의 끝없는 도량을 향해 일상의 상념들을 날려 보내면 근심은 바람 되어 맴돌다 사라진다. 티끌 같은 몸뚱이에 자리 잡은 바위만한 욕심덩이가 얼마나 허무한 것인지 되돌아보는 시간. 천축사 가는 길은 언제나 감사한 마음으로 충만하다. - 전문 -   이 詩는 천축사 주지 원타 스님께서 신도 강정화님의 도움으로 도봉산 입구에 시비詩碑로 세워진 시이다. 1997년 12월 세워진 것인데 동료 시인에 의해 내가 안 것은 다음 해 3월이었다. 세상은 뜻하지 않은 일들이 매복되어 있어서 인생을 굴곡 있게 전개시키는 것인가 보다. 매복된 일들이 좋은 일이건 나쁜 일이건 예측하지 못했던 일들로 인해 상심하고 기뻐하는 일들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는 이 시비詩碑로 인해 처음에는 기쁨으로 놀랐지만 기쁨은 잠시였고, 그 다음은 가슴에 부끄러운 가시로 남아있다.   7년 전인가 보다. 마흔 두 살이 되어서야 늦깎이로 문단에 얼굴을 내밀게 된 내게 뜻밖의 소식이 날아든 것은 시비가 세워진 일이다. 내 자신도 전혀 알 수 없는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산을 좋아하는 우이시낭송회의 어느 시인이 흥분한 목소리로 목필균 시인의 커다란 시비가 도봉산 입구에 세워져 있다고 시낭송 차례에 알려 주었다. 순간 나는 내 귀를 의심하였다. 마침 그 자리엔 당시의 도봉구청장이었던 유천수님이 와 계셨다. 시비가 세워졌다는 엄청난 소식에 당혹해하는 내게 그분은 문화홍보과장을 보내 해명을 해 주셨다. 제1회 도봉산축제 때 우이시인들이 초청을 받아 시낭송을 한 적이 있었다. 그 때 이 시를 원고로 보내고 시낭송을 했다.구청장은 그 시가 마음에 들어 천축사 주지스님이셨던 원타 스님께 시비로 세울 것을 의논하셨다고 한다. 원타 스님은 병마에 시달린 몸과 마음의 번뇌를 씻으려고 가끔씩 천축사를 찾던 나를 잘 알고 계셨다. 더구나 스님께서 발행하시던 ‘천축지’에도 발표했던 그 시에 대해서도 이미 알고 계셨으므로 도봉구청장의 제안을 쾌히 받아들였다고 한다. 도봉구청에서는 지금은 주차장이 되어버린 입구에 시비를 세울 자리를 마련해 주기로 했고 천축사에서는 시비를 세우는 일체의 경비를 책임지기로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왜 나와 관련된 일이 진행되고 있는데도 전혀 몰랐을까? 당시 천축사 주지 원타 스님은 매우 진취적인 젊은 스님이었다. 스님은 창동역 근처에 포교원을 마련하시고 중생제도에 적극 나선 때였다. 포교원 개원 초창기라 시비 건립에 정신적 여유가 없었을 때인데, 길게 걸릴 거라고 생각했던 시비 건립은 강정화 불자님의 단독보시로 빨리 진척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막상 시비가 세워진 시점에 스님은 급작스레 부산 부암사로 떠나시게 되었고 나 또한 일상에 쫓겨 천축사를 찾지 않았으므로 내 시비가 세워진 것을 모를 수밖에 없었다.   결국 나는 놀라움, 기쁨, 민망함으로 범벅이 된 심정으로 시비를 확인하게 되었고 시인 친구들 몇 명이 축하의 자리를 조촐하게 마련하기도 했다. 그러나 정신을 차리고 냉정하게 돌아보니 세상에 이렇게 민망한 일이 어디 있을까? 문단에 얼굴도 제대로 내밀지 못한 내 이름 석 자와 졸시가 거대한 돌덩이에 박혀 도봉산 입구에 버젓이 서 있다는 것을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기라성 같은 원로시인님들께는 민망하여 뵐 수도 없는 일이었다. 결국 나는 시비를 확인하고 며칠도 못 되어서 친척들에게까지도 함구하기에 이르렀다.   아직도 난 친정 식구들에게까지 이 사실을 알리지 않고 있다. 문단에 들어와서 유일하게 몸담고 있는 우이시 어른들은 물론 동료시인들께도 이 시비에 대한 이야기는 내 입으로 올려보지 않았다. 그렇게 조심스럽게 지내온 4년이 지나서야 먼저 우이시 회장님께서 공식적인 행사 때 언급을 해 주셨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 시비가 그리 영광스럽지는 못하다. 지금 쓴다면 좀 더 깊이 있는 시를 쓰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도 있기 때문이다.   “목필균, 그 건방진 놈, 아니 돈이 얼마나 많기에 자기 돈으로 시비를 세워!!!” 하며 시비是非를 거는 사람도 실제로 있었다. 이름이 남자 같고 무명이었기에 받은 오해이며 너무나 거대한 돌에 새겨진 것이 화근이었지만 난들 어떻게 할 것인가? 늘 민망해 하는 나를 평소에 아껴주시던 박희진 시인님께서 어느 날 이렇게 위로의 말씀을 해 주셨다. “그 시비에 적힌 목 시인의 시는 평범한 작품일지 모르지만 일반인들에게 던져주신 메시지가 큽니다. 그래서 그 시비는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그 말씀에 오랫동안 민망함에 쳐진 어깨를 일으켜 세웠다. 도봉산 입구에 오가는 많은 사람들에게 난 소박한 불심을 전해주는 일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너무나 어려운 때 위로받았던 천축사 가는 길에 대한 순수한 마음을 쓴 시가 시비에 걸리지 않기를 바라며 나도 이젠 이 민망함에서 벗어나고 싶다. [출처] 시비詩碑의 시비是非|작성자 목필균
772    시를 지을 때 비법은? / 시와 련애하는 법 댓글:  조회:5187  추천:0  2015-11-11
[ 2015년 11월 26일 08시 41분 ]   [ 2015년 11월 26일 08시 41분 ]   2015년 11월 25일 광동 불산(佛山)시 광명고속도로, 산 오리를 가득 실은 화물차량이 달리던도중 갑자기 연소되면서 차량에 실은 2000여마리의 오리가 "오리구이"로 순식간에 변해버렸다.그 중 으로 살아남은 오리는 몇십마리일뿐(천만 다행!!!... 저 오리들을 잘 키워야 되겠는데... 그 누가 잡아 먹으면?!... ㅉ ㅉ...) 현장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였으며 차마 눈 뜨고는 볼수없었다고 한다. ========================================================= 안녕하세요^^   시는 내마음 내생각을 글로 노래하듯이 표현하면 됩니다.   시를 지을 때 필요한 것은,-   우선 책을 많이 읽어서 다양한 표현 어휘력을 키우는게 좋구요, 다른 분들의 시를 많이 읽어봄으로써 시에 대한 운율이라던가 표현법을 익히는데 도움이 됩니다. 그리고 남들과는 조금 다른 시선으로 세상과 사물을 보며 생각을 가지는게 좋습니다. 중요한것은 자기 생각에 솔직히 글로 표현하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 총 획득 메   답변추천해요0 시를 어떻게 쓸 것인가?   1) 한 작품에 많은 사연을 담지 말것. 한 편의 시가 전달하는 메시지는, 정서든 이미지든 하나여야 하고, 다른 모티프들은 그것이 뿜는 자장(磁場) 안에 들어 있어야 한다. 이때 시는 통일성을 얻는다.   2) 비유와 상징을 아낄 것. 비유는 아낄 수 있는 데까지 아껴야 오롯한 품위를 갖는다. 상징은 시인이 조립하는 것이 아니라 시의 숨결에서 우러나오는 것이어야 한다.   3) 긴 시를 경계할 것. 시의 참된 맛은 행간에 있다. 행간에는 침묵의 언어와 정서의 긴장이 깃들여 있다. 긴 시는 행간을 매립하는 위험을 안고 있다.   4) 시상을 풀어가는 수단으로써, 분명하게 몸으로 감촉할 수 있는 것들을 사용할 것. 불투명한 관념이나 감정을 시 비슷한 문법으로 채색하는 일이 없도록 주의할 것   5) 정서의 결을 잘 다듬을 것. 몇 번의 침전과정을 거친 그리움이라면 슬픔 따위가 개운하게 세척된 상태라야 한다. 물기가 없이 잘 마른 상태라면 더욱 좋다.   6) 구문이 거추장스러운 것, 관형구나 부사구가 무거운 것은 금기다. 줄기가 가지를 지탱하기 어렵다. 관형어나 부사어가 상쾌하게 오려진 문장은 조촐하고 산뜻하다.   7) 시로 삶의 각성이나 잠언적인 의도를 노출시키지 말것. 시는 철학이 아니라 미학이다.   [시안] 2002년 봄호에 실린 글을 축약해둔다. 시를 쓰면서 자칫 지나치기 쉬운 일들을 찬찬하게 지적해주었다. 두고 읽을 만 하다.   다음은
771    선생은 詩 읊기를 좋아하지 않습니까... 댓글:  조회:5214  추천:0  2015-11-11
[ 2015년 11월 26일 08시 36분   조회:266 ]     하남성 정주 북교 류장(北郊 刘庄) 공공뻐스역에서... ========================================== 선생은 시 읊기를 좋아하지 않습니까                             / 옥소 권섭   선생이 아침에 빗 씻을 때 천 번 빗질하여 기운 상쾌할 때 두 눈 맑고 밝고 마음은 씻은 듯 선생은 시 읊기를 좋아하지 않습니까?   선생이 평소 글 읽을 때 여러 책 다 읽어 뜻 흡족할 때 향 한 줄기 피우고 꼿꼿이 앉으니 선생은 시 읊기를 좋아하지 않습니까?   선생이 저물녘 편안히 있을 때 편안히 가하며 글 외우고 읽을 때 고요한 가운데 천 번 휘두르고 만 번 요동치니 선생은 시 읊기를 좋아하지 않습니까?   선생이 초야에 이불을 펼 때 다리 펴고 몸 편해 마음도 평안할 때 어찌 또한 생각할 일이 전혀 없겠는가 선생은 시 읊기를 좋아하지 않습니까?   선생이 한밤중 한창 꿈속에 있을 때 혼이 이미 표표하여 한만할 때 한 기운 허령하여 일에서 느낌이 있으니 선생은 시 읊기를 좋아하지 않습니까?   선생이 깊은 밤 잠에서 헤매일 때 하나같이 처음 열리던 혼돈 같을 때 이 세상이 어떻게 되는지 알지를 못하니 선생은 시 읊기를 좋아하지 않습니까?   선생이 맑은 새벽 잠에서 깰 때 처마 밖에서 닭이 꼬끼오 울 때 이는 어떤 기틀이 반복되는 것이니 선생은 시 읊기를 좋아하지 않습니까?   선생은 시 읊기를 좋아하지 않습니까? 선생이 일이 없지 않을 때 아침저녁으로 쉼 없이 늙어지고 죽음에 이르리니 선생은 시 읊기를 좋아하지 않습니까?   선생이 신발 안창을 끼고 각건을 쓸 때 빗줄기 하나 풀섭에 떨어질 때 온갖 꽃 다 피어나고 사방에서 구름 일어나니 선생은 시 읊기를 좋아하지 않습니까?   선생이 앉았다 누었다 더위를 식히고 있을 때 나무와 풀과 가마에 비가 쏟아질 때 벼락 치고 우레 울리며 천 번의 번개가 생기니 선생은 시 읊기를 좋아하지 않습니까?   선생의 뜻과 기운이 바르고 맑을 때 환한 달 높이 걸려 달빛이 쏟아질 때 국화는 노랗게 되고 단풍잎은 붉게 물드니 선생은 시 읊기를 좋아하지 않습니까?   선생이 흙집에서 화로를 안고 있을 때 얇은 이불 매운 추위에 눈발 어지러이 날릴 때 성한 기운은 땅 속에 잠겨 있으니 선생은 시 읊기를 좋아하지 않습니까?   선생은 시 읊기를 좋아하지 않습니까? 고요히 네 계절이 변하여 갈 때 사람은 또한 그렇지 않아 하나의 이치로 같으니 선생은 시 읊기를 좋아하지 않습니까?   * 조선시대의 문인 옥소 권섭 선생은 안동 권씨 화천군파 문중에서 1671년(현종 12년)에 출생하여 1759년(영조 35년) 향년 89세로 사망했다.   당시 치열했던 예송(禮訟)논쟁은 8년이란 세월동안 서로 대립하면서 남인은 청남과 탁남으로,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분당되었다.   권섭 선생은 당시 원자책봉문제로 서로 대립했던 건저(建儲)와 기사환국정국에서 백부인 수암 권상하의 스승인 송시열과 외가 친척인 김수항이 정읍과 진도에서 사약을 받는 정치적 소용돌이속에서 정치에 환멸을 느끼고 관직에 나가지 아니하였다.     권섭 선생은 청풍 황강과 제천 문암동을 오가며 많은 작품을 쓰셨다. 친필문집 50여권 속에 2,000편이 넘는 한시,  75수의 국문시조, 2편의 국문가사 ·, 1편의 국문소설 , 그 밖에 80점이 넘는 그림을 남겼다.   [출처] 선생은 시 읊기를 좋아하지 않습니까 / 옥소 권섭|작성자 정태식  
770    고로, 난 시인이 아니다! 댓글:  조회:5540  추천:0  2015-11-09
[ 2015년 11월 15일 10시 33분   조회:1621 ]     귀볼, 배꼽, 입술 등 신체 일부에 구멍을 내 장신구로 치장하는 피어싱. ===================================================   고로,       난 시인이 아니다!               /햇살     시가 시다! 시든 꽃이 시다! 시시한 것이 시다! 시원한 바람이 시다! 시끌벅적한 세상이 시다! 시시껄렁한 인간사가 시다! 시방 촛불 밝힌 광장이 시다! 시시각각 쏟아지는 정보가 시다! 시도 때도 없이 그리운 그대가 시다!     시인이 시인이다! 시민이 위대한 시인이다! 시장을 찾는 이가 시인이다! 시골길을 걷는 이가 시인이다! 시치미 떼지 않는 이가 시인이다! 시대의 물결을 타는 이가 시인이다!  시시비비를 가릴 줄 아는 이가 시인이다! 시의 적절한 언어를 내놓는 이가 시인이다! 시냇물에 그릇된 생각을 씻는 이가 시인이다!     
769    하늘 저 켠을 공연스레 볼 뻔하였다... 시는 시적인것. 댓글:  조회:4661  추천:0  2015-11-06
[ 2015년 11월 30일 09시 29분 ]     샬럿공주 ====================================================== 시가 시일 수 있는 존재성 시를 최초로 접한 때를 누구나 기억해 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어느 누구에게도 시는 한두 편 감동으로 살아남아 있다. 그 시가 어떤 시인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하지만 시가 어떠하기에 인간의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는가하는 것은 지금 우리에게는 중요하다. 나는 "좋은 시"와 "나쁜 시"를 가리는 것을 반기지 않는다. 그러나 시로써 느낌을 주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경우는 다르다. 시적인 것으로 우리가 꼽는 것으로는 관습적으로 "리듬"과 "비유" 같은 것이 있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기에 시는 "탄생"하고 나면 "존재"로 그 생명을 이어가는 것 같다. 시는 시인을 어머니로 하여 태어난다. 그 어머니는 산고(産苦)를 치르며 시를 완성하는 것이다.  물론 퇴고(推敲)의 과정을 거친다. 짧게는 작품을 발표할 때까지이지만 그 후에도 작품을 거듭하여 손질을 계속하는 경우도 왕왕 보게 된다. 이 경우 애벌레가 허물을 벗어야 그 모습을 바꿀 수 있는 것과 같다. 그런데 우리는 아무리 고치를 틀고 완전한 성체(成體)를 내놓아도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결과물을 비켜 나가는 경우를 자주 본다. 아마도 이것은 무정란(無精卵)에서 생명을 잉태할 수 없는 이치와 같기 때문일 것이다. 시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시적인 것은 유정란(有精卵)과 같아서 만약 그것을 엄격히 지키지 않는다면 그 결과가 시가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인은 시적인 것을 연마하고 그것을 잉태하여 시를 탄생하여야 한다. 나는 그러한 시로 아래의 두 작품을 좋은 시로 고를 수 있었다. 1) 어느 집 굴뚝이 풀어놓았을까  소매 놓친 연기 등성일 감고 맴돌지만 살얼음이 잠근 무논 속의 산 마을 건널 수 없어 이쯤에서 스치며 지나가는데 아궁이 앞에는 누가 앉았나 저녁도 이슥해져야 한 시루 어둠을 익혀내는지 흰 머리구름 층층엔 온통 팥 빛 노을  하루종일 밖에서 노느라 끼니때조차 까먹은 배고픈 아이들 대문 안으로 거둬들이시는 큰엄마 거기 계시는가 철새들까지 줄지어 그쪽 숲으로 날아가고 있다 -김명인, 전문  2) 밤사이 폭설이 내려서 소나무 가지가 찢어지는 소리 폭설이 끊임없이 아무 소리 없이 피가 새듯 내려서 오래 묵은 소나무 가지가 찢어져 꺾이는 소리, 비명을 치며 꺾이는 소리, 한도 없이 부드러웁게 어둠 한 켠을 갉으며 눈을 내려서 시내도 집도 인정도 가리지 않고 비닐 하우스도 꽃집도 바다도 길도 가리지 않고 아주 조그만 눈송이들이 내려서 소나무가 가지에도 앉아 부드러움이 저렇게 무겁게 쌓여서 부드러움이 저렇게 천근 만근이 되어 소나무 가지를 으깨듯 찢는 소리를 무엇이든 한번쯤 견디어본 사람이라면 미간에 골이 질, 창자를 휘돌아치는 저 소리를 내 생애의 골자기마다에는 두어야겠다 ... 사랑이 찢기기 전에 꿈꾸고 사랑에 찢기기 전에 꿈으로 달라고 찢기기 전에 숨는 굴뚝새가 되어서 속삭임들을 듣는다 이 사랑의 방법을 나는 이제야 눈치채고 이제야 혼자 웃는다 눈은 무릎을, 허리를 차오르고 있다 눈은 가슴께에 차오른다 한없이 눈은, 소리도 없이 눈은 겨울보다도 더 많이 내려 쌓인다 오, 사랑이란 저러한 대적의 이력서다 -장석남, 중에서 위의 시들은 우선 시적 시공간(視空間)이 제목에서 "산 아래", "폭설"과 같이 설정되어 있다. 그러나 시인의 상상력은 시간 여행을 통해 시를 숙성시키고 있다. 1)에서 "집 굴뚝"에서 나온 "연기"가 "산 마을"에 피어오름을 계절을 배경("살얼음이 잠근 무논 속")으로 선명하게 묘사하고 있다. "소매 놓친 연기"는 시인의 추억과 직접 관련이 있다. 시인은 연기를 따라 역이동하여 "전통적 일상"을 포착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시의 내용은 현재 시골 마을의 모습이라기보다 시인의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는 어릴 적의 상념(想念)일 수도 있다. "아궁이 앞에" "큰엄마"가 아이들을 기다리며 저녁밥을 짓고 있는 풍경이 고옵게 떠올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때 자연과 인간이 한 모습으로 그려져 있는 것이 돋보인다. "노을" 속에 "철새들"까지 그 풍경 속에 그려져 있어서 그렇다. 2)에서 "폭설"이 "소나무"에 내렸다. 자연 현상을 관망하는 시인의 상상력은 소나무 가지가 꺾이는 "소리"에 주목해서 그 소리를 "내 생애의 골짜기마다에는 두어야겠다"에까지 미치고 있다. 여기에서 시인의 내면의 풍경과 일치시킨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래서 시인은 "사랑"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시인은 "부드럽고 아름다운 사랑이 소리도 없이 깊어서/나와 이웃과 나라가 모두, 인류가/사랑 아래 덮인다"고 말한다. 이 대목에서 폭설의 소리는 "사랑의 속삭임"으로 변환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시인은 계속해서 "이 사랑의 방법을 나는 이제야 눈치채고/이제야 혼자 웃는다"고 한다. 결론적으로 눈은 "겨울보다도 더 많이 내려 쌓"이는데, 사랑도 "저러한 대적의 이력서"라는 것이다.  그러면 위의 시들이 우리에게 시적으로 다가오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내가 생각하기에 "풍경"과 "마음"의 조화이다. 여기서 풍경은 이미지일 수도 있고, 말 그대로 화폭과도 같이 보여주는 서경(敍景)적 묘사일 수도 있다. 1)에서 멋들어진 비유 이미지를 사용해서 시인의 유년시절의 기억 한편을 풍경으로 보여주고 있다. 2)에서 "폭설"이라는 자연의 풍경과 "사랑"이란 내면의 풍경을 합치시켜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단지 인상적인 풍경만으로는 부족하다. 시인은 1)에서 비유적 시어를 통하여, 2)에서 정서의 고양을 통한 목소리로 독자에게 가깝게 다가서고 있다. 이때 독자는 시인의 마음과 교감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순간 시가 탄생의 울음을 독자에게 들려준다. 시인의 충만(充滿)한 시정(詩情)이 독자의 마음까지 채울 수 있는 까닭이 바로 이 때문이다.  이번에는 왜 시를 쓰는지의 본질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작품들을 살펴보기로 한다. 시는 분명 새로운 "발견" 혹은 "깨달음"의 순간적 기록이다. 그러나 그 때의 충동이 때로 후회로 이어지기도 한다. 아래의 시들은 작품으로 남아 있지만 그것이 말하고 있는 내용이 충분히 시적이지 못한 경우이다.  3) 너로 하여 세상을 밀고 가던 때 있었다 너를 의탁하여 가파른 벼랑 위에 나를 세우고, 아찔 아찔 그 어질머리에 기대 있을 때 있었다 너를 따라가던 때 너를 업고 가던 때도 있었다 너 이놈, 술 -김 00, 전문  4) 오늘따라 나팔꽃이 줄 지어 핀 마당 수돗가에 수건을 걸치고 나와 이 닦고 목 안 저 속까지 양치질을 하고서 늘 하던대로 물 한 대야 받아놓고 세수를 했던 것인데 그만 모가지를 올려 씻다가 하는 저 켠까지 보고 말았다 이때 담장을 튕겨져나온 보랏빛 나팔꽃 한 개가 내 눈을 가렸기 망정이지 하늘 저 켠을 공연스레 볼 뻔하였다 -신00, 전문  위의 시는 한 순간의 감회를 시로 발전시킨 작품들이다. 3)에서 "너"는 "술"이고 저자는 술에 대한 애증을 한꺼번에 쏟아내려 한 것 같다. 그러나 이 작품은 내용과 형식면에서 시적 단계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우선 내용면에서 술로 "의탁"하는 상황이 전제되어 있지 못해 독자의 공감을 받기 힘들다. 형식면에서도 시어를 어느 한 구절 구사하지 못했고 시적 구성도 전혀 고려되어 있지 못하다. 따라서 시라기보다 "메모"나 "낙서"로 떨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4)에서 우선 제목이 "일진"인데 시의 내용과 일치를 보이지 못한다. 시인은 "나팔꽃 한 개가 내 눈을 가렸기 망정이지"라고 유감을 표한다. 그러나 "하늘 저 켠"이 어떻단 말인가? 오히려 "보랏빛 나팔꽃"이 가져다 주는 아침의 신선함이 화자의 "세수"하는 무심한 태도로 죽어버렸다. "한 개""망정이지""공연스레"와 같은 시어들도 내용상 어색한 표현들이다. 무엇보다도 전체적인 "시적 상황"이 독자들로 하여금 어리둥절하게 할 뿐이다. 시인이 "어거지" 진술로 독자의 시선을 끌려하나 독자는 그저 버거워 묵묵할 뿐이다. 마지막으로 이번 시를 살펴보면서 문득 느껴지는 감상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좋은 시를 선정할 때 그 작가의 잘 된 작품을 제대로 골라 소개하는 것은 중요하다. 만약 그렇지 못할 때 그 작가는 좋지 못한 이미지를 남길 수 있다. 아울러 시가 유행을 타서도 안 될 것이다. 오늘날 유행하는 "산문시"들은 정말 시적인 것인가? 의문을 던지게 한다. 물론 잘 된 산문시들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산문과의 차이를 전혀 느낄 수 없기에 하는 말이다. 현대시가 낭만주의 시와 다르게 시인의 개성에 어느 부분 지적으로 제한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시가 시답지 못할 때 그것은 분명 시인의 책임을 피해갈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나는 시가 시적인 것을 찾아 다시 회귀(回歸)할 것을 간절히 호소하고 싶다.
768    사랑 詩 10수 / 가슴으로 하는 詩 댓글:  조회:4662  추천:0  2015-11-06
  YES24에서 3,000여명의 투표로 선정 된  예쁜 우리말로 쓰인 사랑詩 10수...     10위. 황지우 '너를 기다리는 동안' 中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아주 먼 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9위. 도종환 '옥수수 밭 옆에 당신을 묻고' 中   견우직녀도 이 날만은 만나게 하는 칠석날 나는 당신을 땅에 묻고 돌아오네 안개꽃 몇 송이 함께 묻고 돌아오네 살아 평생 당신께 옷 한 벌 못 해주고 당신 죽어 처음으로 베옷 한 벌 해 입혔네       8위. 안도현 '그대에게 가고 싶다' 中   진정 내가 그대를 생각하는 만큼 새날이 밝아오고 진정 내가 그대 가까이 다가서는 만큼 이 세상이 아름다워질 수 있다면 그리하여 마침내 그대와 내가 하나되어 우리라고 이름 부를 수 있는 그날이 온다면 봄이 올 때까지는 저 들에 쌓인 눈이 우리를 덮어줄 따스한 이불이라는 것도 나는 잊지 않으리       7위. 서정주 '연꽃 만나러 가는 바람같이'   섭섭하게 그러나 아주 섭섭치는 말고 좀 섭섭한 듯만하게   이별이게 그러나 아주 영 이별은 말고 어디 내생에서라도 다시 만나기로 하는 이별이게   연꽃 만나러 가는 바람이 아니라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엊그제 만나고 가는 바람이 아니라 한두 철전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6위. 김남조 '그대 있음에' 中   그대의 근심 있는 곳에 나를 불러 손잡게 하라 큰 기쁨과 조용한 갈망이 그대 있음에 내 마음에 자라거늘       5위. 신경림 '가난한 사랑 노래'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너와 헤어져 돌아오는 눈 쌓인 골목길에 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데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4위. '황동규, 즐거운 편지' 中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 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3위. 유치환 '행복' 中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2위. 한용운 '사랑하는 까닭' 中   내가 당신을 기루어하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미소만을 사랑하지마는  당신은 나의 눈물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1위. 김소월 '먼 훗날'   먼 후일 당신이 찾으시면 그때에 내 말이 "잊었노라"   당신이 속으로 나무라면 "무척 그리다가 잊었노라"   그래도 당신이 나무라면 "믿기지 않아서 잊었노라"   오늘도 어제도 아니 잊고 먼 후일 그때에 잊었노라       가슴으로 하는 시 미당 서정주의 은 『한국의 현대시』(일지사, 1969)에 실려있다. 이 글은 모두 네 편의 小題로 다시 나누어 그의 시론을 개진하고 있다. 먼저 "머리로 하는 시와 가슴으로 하는 시"는 제목이 시사하는 바대로 작금의 "머리"로만 "간편"하게 문학하려는 태도를 경계하는 글이다. 반면 전통적인 관례의 시정신은 반드시 "가슴"의 감동이라는 통과의례를 거쳤다.  서정주는 "시의 지성"과 "일반 이론의 지성"이 다르다고 구분한다. 즉, 후자가 "순리적 개념을 두뇌로써 선택하고 결합"해 왔던데 대해, 전자는 "머리로만 머무는 게 아니라 가슴의 감동을 거쳐 독자에게 감동줄 수 있는 것으로 전달"한 데 있다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시의 지성은 "가슴의 감동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맛볼 수 없는 생, 그것의 매력"을 의미이해만 전하면 되는 것이 아니고, 발레리가 "순수시론"에서 말하고 있듯이 시의 감동전달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다음은 "매력과 절제 사이"인데, 이 글에서는 "시인의 소식과 절제가 바로 시의 원천"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고도한 정서의 형성은 언제나 감정과 욕망에 대한 지성의 좋은 절제를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단정을 내린다.  "불교적 상상과 은유"는 쉬르리얼리스트가 보여 온 새 풍토, 즉 "인간의 잠재 의식의 층을 침잔하여 뒤지다가 상상의 빛나는 신천지를 개척하고 거기 맞춰 전무한 은유의 새 풍토를 빚어 낸 사실"들도 불교문학에 비할 바가 못된다는 내용이다. "시어와 그 위치"는 "시의 언어조직에 있어서의 가장 큰 효과는 이런 단어의 선택이나 숙어의 선택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한 편의 대시상 속의 여러 소시상들을 그에 적중하는 말들에 맞춰서 담아 가지고 그걸 어떻게 효과적으로 조화 있게 배치해 짜내느냐" 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사담 몇 가지"에서는 영 거짓말 없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침묵"을 적극적으로 고려할 수밖에 없다는 경험담을 토하고 있다.  이상의 내용은 단편적이어서 미당의 시론에 근접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한다. 그러나 다행히도 미당의『시문학원론』(정음사, 1975)에는 역시 이라는 그의 시론이 비교적 구체적으로 진술되어 있다. 물론 그 사항은 上記의 내용과 중복되는 것이기는 하나 전후 맥락을 통한 서정주 시론의 요체를 더듬기에는 충분하다. 그 중 "시의 상상과 감동", "시의 지성", "시의 체험"은 서정주의 대표적 시론으로 꼽을 만하다.  "시의 상상과 감동"은 크게 보아 시의 정의, 시의 지성, 이미지, 언어, 지성시 비판, 참여시 비판 등을 언급하고 있다.  첫째, 서정주는 시는 "상상의 세계"이고, 철학은 "사유의 세계"로 정의한다.  둘째, 그는 시의 지성을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눈다. 하나는 "지성이 빗어내는 바의 내용" 자체이고, 다른 하나는 "감정에 대한 견제의 직능자"로서의 지성이다. 전자의 보기로는 "기지", 후자의 보기로는 "중용"이나 "절제" 같은 개념이다.  셋째, 그는 시와 철학이 다른 점은 전자가 "구체적 이미지"의 세계임에 반해 후자는 "추상적 개념"의 세계라는 것이다. 시가 감동을 주는 것은 그것이 상상의 세계요, 그 상상이 이미지로 구현되기 때문이다.  넷째, 그에 의하면 시의 언어란 개념의 전달이 아니라 이미지의 제시를 목표로 한다.  다섯째, 그는 우리 현대시를 지배하는 두 가지 경향인 지성의 시와 현실 참여의 시를 비판한다. 그가 이른바 모더니즘 그러니까 지성의 시를 비판하는 근거로는 이런 시가, 이 땅의 경우에는 "상상의 비약적 무력"을 빌리지 않고 그야말로 순수지성, 바꿔 말하면 철학적 지성을 그대로 옮겨 놓는다는 사실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서정주는 감정과 지성의 공서라는 논리를 제시한다. 즉, 지성의 시에 감정이 공존하는 이유는 , 그에 의하면 발레리가 말하듯이 시는 의미전달의 언어가 아니라 감동전달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시의 지성"은 한마디로 지성의 시, 즉 모더니즘 시에 대한 비판이다.  첫째로 그는 우리의 주지시가 실패한 원인으로 지성인식의 오류를 들고 있다. 죽, 우리의 주지시는 지성을 감성과 대립시켜 인식하는 오류를 저지른다. 그는 이것을 감성 포기의 태도라고 부른다. 둘째로 주지시가 실패한 원인으로는 감정의 고도화에 실패한 점이 지적된다. 물론 감정의 고도화란 감정의 절제를 의미한다.  마지막으로 그는 우리의 주지시가 실패한 원인을 지적하고, 그 대안으로 이른바 "동양정신" 혹은 "동양의 시심"을 강조한다. 한마디로 동양의 전통적 지도정신은, 그에 의하면, "주지적으로 지성을 편중한다든지, 주정적으로 감성을 더 중시한다든지 하는 일이 없이, 말하자면 그 좋은 종합체로서 마음이라는 것"으로 경영되어 왔다. 여기서 "마음"이란 곧 시의 경우 "시심"과 통한다. 종합하면 시심이란 지성과 감성이 통합된 경지를 뜻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과격한 감정이나 박정은 동양의 삶에서 금기시 된다고 주장한다.  "시의 체험"은 문학적 전통에 있어서 "메너리즘의 타개"에 관한 글이다. 시적 체득이란 백퍼센트의 감동과 백퍼센트의 앎이 합해진 상태를 말한다. "서정시"(Lyric)는 원래 "감정과 사상을 표현하는 비교적 짧은 형식의 시"란 뜻인데도 日人의 잘못된 소개로 "감정을 말하는 시"로 협소화 되어 받아졌다. 그러므로 원래 가졌던 "감정과 지성을 위한 전기능"을 회복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767    "온몸시론" 댓글:  조회:4466  추천:0  2015-11-06
[ 2015년 11월 26일 08시 50분 ]   [ 2015년 11월 26일 08시 50분 ]   [ 2015년 11월 26일 08시 50분 ]   [ 2015년 11월 26일 08시 50분 ]         [ 2015년 11월 26일 08시 50분  ]     발칸(巴尔干)지역 여러 나라들이 난민제한정책을 강화함에 따라 대량의 난민들이 마케도니아(马其顿)와 그리스 국경에 발이 묶이게 되는 상황을 초래. 난민들의 단식투쟁은 그들이 입국제한정책에 대한 불만.  일부 난민들은 바느실로 서로의 입을 꿰매주는 등 단식투쟁으로 입국제한정책에 항의. 난민의 고초... ===========   시힘,            그 자유의 모험 김수영의 시는 전기의 모더니즘, 후기의 참여시로 양분된다. 그의 시는 30년대에 전개된 모더니즘과는 다른 50년대 우리시의 새로운 모더니즘의 경향을 따른다. 그러나 1960년 4·19를 계기로 그의 시는 이른바 참여시의 특성을 보여주고, 참여시의 효용성을 강조하는 시론을 발표한다. 그의 시와 시론이 60년대 순수/참여의 논쟁의 중심에 있었다. 여기서 다루게 될 는 1968년 4월 부산에서 펜클럽이 주최한 문학 세미나에서 "시에 있어서의 형식과 내용"이라는 주제로 그의 생각을 펴고, 그 후 다시 지면에 발표한 것이다. 김수영이 이 시론에서 강조하는 것을 대별하면, 시를 쓴다는 것과 시를 논한다는 것, 산문의 의미와 모험, 참여시의 효용성, 자유와 사랑의 개념 등 네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먼저 서두에서 김수영은 시에 대한 그의 사유가 아직도 명확한 것이 못되고, 그러한 모호성은 무한대의 혼돈에의 접근을 위한 도구로서 유용한 것이기 때문에 조금도 부끄러울 것이 없다는 말로서 이 글을 시작하고 있다. 이 "모호성"의 옹호가 시의 존재의 규명을 불가능하게 하는 동시에 시의 신비를 풀려고 하는 노력을 배가하게 하는 것이 된다. 이러한 나의 모호성은 시작을 위한 나의 정신구조의 상부 중에서 가장 첨단의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고, 이것이 없이는 무한대의 혼돈에의 접근을 위한 유일한 도구를 상실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249) 시인은 시를 쓰는 사람이므로 시작상 "명철의 개진"이 그리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또한 시인이 시를 논할 때에도 시를 쓰듯이 논해야 한다고 한다.  다음으로 김수영은 시를 쓰고 논한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시에 있어서의 형식과 내용의 문제와 연관하여 사고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시를 쓴다는 것(즉 노래)은 시의 "형식"으로서의 "예술성"과, 시를 논한다는 것은 시의 "내용"으로서의 "현실성"과 동의어가 된다. 즉, 는 것이 "시의 형식"을 대표하고, 는 것이 "시의 내용"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그러면 시를 "쓴다"는 것은 무엇인가? 김수영의 말을 들어보자. 시작은 로 하는 것이고, 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으로 하는 것이다. 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온몸으로 동시에 밀고 나가는 것이다. (250) 위에서 "동시에"는 "무엇을"의 대답에 해당된다. 김수영에 의하면 이러한 온몸에 의한 온몸의 이행이 "사랑"이라는 것이 되고, 이것이 바로 시의 형식이라는 것이다. 반면 시를 "논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김수영은 비평이나 시론을 쓴다는 것은 "의미"이고 "모험"의 과정이라고 말한다. 시에 있어서의 모험이란 말은 세계의 개폐, 하이데거가 말한 의 반대되는 말이다. 엘리오트의 문맥 속에서는 그것은 의미 대 음악으로 되어있다. 그리고 엘리오트도 그의 온전하고 주밀한 논문 "시의 음악"의 끝머리에서 라는 말로 의 토를 달고 있다. 나의 시론이나 시평이 전부가 모험이라는 말은 아니지만, 나는 그것들을 통해서 상당한 부분에서 모험의 의미를 연습해보았다. 이러한 탐구의 결과로, 나는 시단의 일부의 사람들로부터 참여시의 옹호자라는 달갑지않은, 분에 넘치는 호칭을 받고 있다. (250) 김수영은 산문이란, 세계의 개진으로 이 말은 사랑의 유보로서의 의 매력만큼 매력적이라고 한다. 또한 시의 본질은 이러한 개진과 은폐의, 세계와 대지의 양극의 긴장 위에 서있다는 것이다. 이 말은 시에 있어서의 내용과 형식의 관계를 생각할 때, 내용과 형식이 등치의 관계가 된다. 즉, 형식과 내용이 분리되어서 생각되어져서는 안되므로, 내용이 반 형식이 반과 같은 도식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술성의 편에서는 하나의 시작품이 자기의 전부이고, 산문의 편, 즉 현실성의 편에서도 하나의 작품은 자기의 전부이다. 그리고 이러한 모호성(긴장, 모험)의 탐색은 급기야는 참여시의 효용성을 주장하는 데로 모아지고 있다.  시의 예술성은 무의식적이다. 이는 시의 기교라는 것을 의식할 때는 진정한 기교가 못되기 때문에 그렇다. 그렇지만 김수영은 시에 있어서의 산문의 확대작업을 통하여 내용면에서 완전한 자유를 누리고 있다고 실토하고 있다. 여기서 는 말은 사실은 의 말이 아니라, 이 하는 혼잣말이라는 주장을 덧붙인다. 은 언제나 밖에다 대고 는 말을 계속해서 지껄여야 하는데, 그러다보면 "시의 기적"이 와서 진정한 민족의 역사의 기점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김수영은 참여시의 효용성을 주창하고 있는 것이다.  시가 시로서의 "충격"을 주기 위해서는 "자유의 서술"로 그쳐서는 안되고 "자유의 이행"으로 나아가야 한다. 김수영에 있어 "모험은, 자유의 서술도 자유의 주장도 아닌 자유의 이행이다". 이를 위해서는 전후좌우의 설명과 같은 지루한 장광설이 필요 없다. 바로 "당신의 얼굴에 침을 뱉는 일"과 같은 용기가 있어야 한다. 정치적 자유를 인정하지 않는 사회에서는 개인의 자유도 인정하지 않듯이, 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에서는 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김수영은 자유와 사랑의 동의어로 "혼란"이 허용되어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그는 문화의 본질을 근원으로 발효시키는 이러한 "누룩의 역할"을 하는 것이 진정한 시의 임무라고 다음과 같이 힘주어 말한다. 시는 온몸으로, 바로 온몸을 밀고 나가는 것이다. 그것은 그림자를 의식하지 않는다. 그림자에조차도 의지하지 않는다. 시의 형식은 내용에 의지하지 않고 그 내용은 형식에 의지하지 않는다. 시는 그림자에조차도 의지하지 않는다. 시는 문화를 염두에 두지 않고, 민족을 염두에 두지 않고, 인류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그것은 문화와 민족과 인류에 공헌하고 평화에 공헌한다. 바로 구처럼 형식은 내용이 되고, 내용이 형식이 된다. 시는 온몸으로, 바로 온몸을 밀고 나가는 것이다. (254)  김수영의 "온몸시론"의 이행은 그의 말을 빌면 "자유의 과잉을, 혼돈"을 시작하는 것이 된다. 사실 시인의 존재는 "모기소리보다 더 작은 목소리"를 내는데 불과하다. 만약 시인이 "아무도 하지 않은 말"을 낼 수만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시인의 소명을 다하게 되는 것이다. 비록 현재의 상황이 정체되어 있다하더라도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정신을 잊지 않는다면 반드시 그 상황도 달라지게 될 것이 틀림없다. 실제로 우리는 역사의 굴절 속에서도 힘차게 추동 되어왔던 "민족시" 혹은 "민중시"의 기억을 갖고 있다. 그렇다면 시(혹은 시인)는 과연 어떠해야 하는가? 다시 원점에 서서 지금 우리의 조건을 짚어봐야 겠다. (...)
766    시는 언어를 통한 언어 파괴의 자화상이다...?! 댓글:  조회:4839  추천:0  2015-11-06
[ 2015년 11월 09일 08시 12분   조회:1733 ]     100년전 중국은 청나라 시기. 자희태후가 붕괴, 부의(溥儀)가 등극했을 때.  1861년 물리학자 제임스클럭 맥스웰 세계에서 최초로 컬러를 재현하는 카메라를 발명, 1909년Albert Kahn은 이 카메라로 그때의 중국을 기록하기 시작. 이는 최초로 중국을 채색으로 재현한 사진으로서 매우 소중한 력사자료임. ======================================================= 시적 언어 "문학의 본질" 혹은 "문학성"은 언어 표현의 "내용"에서보다는 언어의 "기능"에서 찾아내야 한다. 우리는 상식으로 문학의 본질이 "허구적인 상상"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고 알고 있다. 그러나 한 언어가 문학적으로 쓰였는냐 혹은 그렇지 않느냐 하는 것은 그 언어의 "외연적 의미" 혹은 "내포적 의미"가 어떻게 집중적으로 쓰였느냐에 의해 결정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이 때 전자는 논리적 의미로서 "객관성"을 갖는 의미이고, 후자는 "주관성"을 벗어날 수 없는 의미이다. 따라서 하나의 언어가 외연적 의미로서 쓰이면 쓰일수록 그것은 "과학적"인 것, "미학적"인 것에 가까워지고 그 언어가 내포적인 것으로서 쓰이면 쓰일수록 "문학적"인 것, "시적"인 것에 가까워진다고 볼 수 있다.  모든 문학의 이상은 시이므로 우리는 "시적인 것"에 매혹 당한다. 하지만 시는 시 아닌 언어 표현과 다를 바 없다. "시적인 것", 즉 "시성"은 언어의 내포적 의미의 기능이 최대한도로 살려졌을 때 생기는 언어의 상태를 말한다. 그러므로 시성도 언어의 내포적 의미를 분석하고 밝힘으로써 확실해질 것이다.  하이데거가 "언어는 존재의 거소"라고 말했듯이 언어 이전의 "인식"이나 "의미"가 불가능하다. 주체로서의 의식과 그 객체로서의 대상과의 논리적 거리는 인식의 핵심적 구조인데, 바로 이 인식의 거리에 의해서 의미가 가능해진다. 이 "거리"는 다름 아닌 "언어"인 것이며, 이 언어를 매개로 해서 주체로서의 의식과 객체로서의 대상이 구별되고, 이런 구별이 이른바 인식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언어를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은 오직 인간에게만 부여되어 있다.  언어는 인간에게 두 가지 상반된 역할을 수행한다. 하나는, 인간이 사물의 관계를 고찰하고 그것을 지배하는 원칙이나 법칙을 찾아내서 보다 더 효율적으로 사물을 지배할 수 있게 된 것은, 다름 아니라 인간이 사물을 "상징화", 즉 "의미화"함으로써 그것을 공간이나 시간을 초월한 논리의 세계 속에서 다룰 수 있기 때문에 누리는 축복이다. 다른 하나는, 언어를 창조함으로써 인간이 자연에 "소외"된, 즉 자연과 거리를 갖게 되어 구체적 존재인 자연 속에서가 아니라 추상적 세계인 의미의 세계에 살게 된 사실이 인간의 "불안"의 근본적 원인이라면, 인간이 궁극적으로 동경하고 모색하는 열반의 극락세계란 바로 언어로부터 해방된, 즉 의미의 세계에서 실체의 세계로 귀의한 상태를 의미함에 지나지 않는다는 숙명이다. 그렇다면 언어가 없는 자연의 상태에 귀의하려는 것이 언어를 가짐으로써 소외된 모든 인간의 자연스러운 바램일 것이다. 그런데 인간의 언어로부터 해방하는 시도가 시적인 활동, 즉 시작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제부터 그 이유를 찾아 나설 것이다.  시적 언어는 근본적으로 역설적인 언어이자 비정상적인 "비틀린 언어"이다. 이러한 특성은 산문과 시에 있어서 언어가 어떻게 다른 기능을 하고 있는가를 살펴보면 보다 더 명확해진다. 먼저 형식상으로 보아서 산문의 본질은 개념과 개념을 논리에 따라 일선적으로 이어 나간다. 그러나 시는 어떤 개념을 전개하는 데 목적이 있지 않고, 논리를 어기면서 까지도 이미지를 구성 혹은 종합하여 전체적인 새로운 하나의 뜻을 발전시키려 한다. 다음으로 언어가 차지하는 기능상으로 보아도 가장 보편적이고 근본적인 언어의 형식인 산문과 달리 시가 언어를 통한 언어의 소거작업임을 알 수 있다. 시인은 이미 있는 언어를 매개로 해서 그것을 재조직함으로써 새로운 언어를 만들고자 한다. 즉, 산문가에게 언어는 언어 자신 아닌 딴 목적을 수행하기 위한 수단 또는 방편이지만, 시인에게는 그가 구성하는 언어 자체가 바로 목적이 된다.  버언쇼와 바슐라아르는 시의 발생 원인을 자연과의 완전한 하나가 되려는 노력이나 시도로서 동일하게 설명한다. 이를 시에 적용하면, 시는 사고되기 이전의 피부로 느낀 가장 원초적이며 직접적인 체험을 표현코자, 즉 의미코자 하는 것이 된다. 이러한 표현을 시인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인식하고 무의식적으로 표현한다. 그러므로 시인은 언어로부터 해방되어 언어 없이 경험이나 경험의 대상을 표현코자 하는 인간인 것이다. 바슐라아르에 의하면, 시인은 개념으로 생각하고 이미지로 느낀다. 이것은 시적 이미지는 언어의 발생이라는 것과 같은데, 어찌 보면 시인은 언어 없이 사고할 수 있다고도 말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시인의 임무는 깊은 인간존재구조에 대한 형이상학적인 진리의 계시로 나타난다. 따라서 시는 추상화 이전의 유기체로서의 완전한 존재에 대한 인간 본연의 향수로 기능한다. 중요한 것은 시가 나타내 보이는 그러한 존재는 그 존재 자체를 나타내는 것이라기보다는 그 존재에 대한 시인의 반응에 더 가깝다는 점이다. 이러한 사실은 지식과 느낌의 차이에서 더욱 확실하게 구분된다. 지식은 의식 대상에 있는 그대로의 객관적 형태 혹은 공동체적 양상을 가리킨다. 그러나 느낌은 그 본질상 공동체적인 개념이 아니라 개별적인, 따라서 주관적인 개념이다. 따라서 시는 한 대상이란 존재에 대한 서술은 객관적인 그 존재의 묘사라기보다는 그 대상에 대한 그 시인 개인이 특수한 태도 혹은 반응에 가깝다.  또 한가지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은 한 시의 시로서의 척도는 바로 시인이 인식하는 "기이적 보편성" 혹은 "보편적 특수성"에 의해 결정되며, 그것은 다름아니라 시인의 독창성과 일치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한 개인의 한 대상으로서의 존재에 대한 반응이나 태도가 순전히 감각에 그치지 않고 시로서 지향되려면 반드시 그 반응이나 태도가 어느 정도 타자와 공통으로 나누어 가질 수 있는 상통성, 즉 보편성을 갖추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시인이 보는 한 대상이라는 존재에 대한 묘사는 다소 그 존재에 대한 인식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 내용을 정리하면 시는 언어로 표현되어야 하는 운명을 갖고 있기 때문에 최소한으로는 객관 인식적 표현이 될 수밖에 없지만, 사실상 시의 목적은 그러한 객관적 인식을 표현하려고 하기는커녕 그러한 것을 파괴하고 또 그러한 것으로부터 해방되려는 데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시는 언어를 통해서 언어를 파괴하고 존재와 일치하는 언어 표현이다.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시적인 요소는 모든 형식을 벗어나 초월함으로써만 갖출 수 있다. 
765    참된 령혼이 시인을 만든다... 댓글:  조회:4821  추천:0  2015-11-06
서양문학(西洋文學)의 흐름 -현대문학(現代文學)         20세기 현대문학 모더니즘 인류역사에서 20세기 전반기는 제 12차 세계대전의 참혹한 인명살상과 엄청난 문명파괴 앞에 인류는 한결같이 고뇌했다. 이런 격동 속에서 문학도 심하게 동요할 수밖에 없었다. 제1차 대전 기간 동안 문학가들은 인간성에 절망하여 침목하는 가운데 젊은 세대는 반역과 부정을 외치며 열심히 새로운 길을 추구했다. 이런 상황에서 표현주의^5.23^미래파^5.23^다다이즘^5.23^초현실주의^5.23^인상주의^5.23^이미지즘 등이 발생하고, 제2차 대전 후에는 실존주의가 풍미했다. 20세기 전반기의 이러한 모든 움직임을 모더니즘(modemism, 영미에서 주로 사용, 독일의 전위주의와 유사)이라 부르는데, 이는 19세기 사실주의^5.23^ 자연주의 유물론적 세계관을 벗어나려는 20세기 전반기 문학운동의 총칭이다. 뒤에 나오는 포스트 모더니즘을 이해하기 위해서도 모더니즘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우선 모던이라는 용어 자체가 전통적 가치와 그 표현기법을 거부하는 경향을 띤다. 또한 객체보다는 주체, 외적 경험보다는 내적 경험, 집단의식보다는 개인의식을,의식보다는 무의식을 강조한다. 이 때문에 프로이트와 융의 심리학이 모더니즘의 한 맹아가 된다. 모더니즘의 대표적인 작가로는 우선 에즈라 파운드^5.23^루이스^5.23^로렌스^5.23^엘리어트 등을 들 수 있다. 에서 로렌스는 대량학살에만 골몰하고 있는 현대문명의 원인을 산업화가 인간정신에 미친 영향에서 찾고자 했다. 그리고 전래의 소설계통을 배격하고 노동자 계급의 생활을 그린 자전적인 소설 에서 그는 신화와 상징에 주목하면서 개인과 집단의 재탄생이 인간적 노력과 정열에 의해 이루어질 수 있다는 희망을 유지한다. 해박한 고전지식과 뛰어난 지성의 소유자인 엘리어트는 (1922)에서 현대문명의 질곡을 정신적 공허감과 삶의 소외에서 추적했다. 로렌스와 마찬가지로 엘리어트는 종래의 시전통을 배격하고 신화와 상징에 주목했다. 그러나 자기극복에 의해서 개인과 집단의 재탄생이 가능하다고 주장한 점에서 로렌스와 다른 견해를 표명했다. 로렌스와 엘리어트와는 달리 파운드와 루이스는 극단적인 정치적 입장을 표명했다. 두 사람은 민주주의를 위선적인 것으로 격하시키면서 경제적이념적 조작이 현대사회의 결정적 요소라고 주장했다. 파운드의 야심적이긴 하나 매우 난해한 와 루이스의 는 그들의 대표작이다. 의 작가 헤르만 헤세는 정신적 방황과 혼미를 거듭하면서도 주옥같이 아름다운 시와 글을 썼다. 자전적 소설 에서 소년시절의 즐거움과 슬픔, 희망과 절망을 절실하게 묘사하면서 학생들의 창조적 개성이 엄격한 교육제도 아래서 희생되는 비극을 감동적으로 그려냈다. 한편 1차대전 직후인 1920년대의 문학사조는 냉소주의와 비극적 운명에 대한 비관론이 지배적이었다. 의 대표적 작가인 헤밍웨이는 에서 전쟁의 어리석음과 야비함을 표현했다. 포크너는 에서 미국 남부 콤슨 가의 붕괴를 조이스의 의식의 흐름의 영향을 받아 그 특유의 기법으로 그렸다. 우울한 로맨티시즘과 부와 권력에 대한 강한 관심을 보인 피츠제럴드의 도 이 시기의 작품이다. 그리고 독일의 토마스 만은 에서 인간의 삶 속에 내재하는 죽음과 인간의 존재 등 형이상학적인 문제를 깊이 파헤쳤다. 세계문학사에 을 새겨넣은 대표적 모더니스트인 조이스는 자전적인 소설 에서 새로운 소설기법을 사용하여 주인공의 인생에 대한 도약과 그의 예술세계 창조를 향한 웅비를 잘 표현했고, 정신분석학의 깊은 영향을 받아 라는 작품을 남기기도 했다. 프랑스의 프루스트는 15년 동안 병실에서 를 완성했는데,여기서 그는 모든 것을 파괴하는 시간과 그것을 극복하려는 예술적 창조의 고뇌와 환희를 묘사했다. 베토벤을 흠모했고, 여성의 인류애적인 사랑에서 구원의 빛을 보여주었던 의 작가 로맹 롤랑은 에서 인간의 사랑이 인간들 사이의 불행을 제거하는 최상의 길임을 알면서도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용의주도하게 묘사했다. 프라하의 유대인 카프카는 에서 문이 굳게 단혀 있는 성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헤매는 주인공 K를 통해 단순히 차별받는 유대인의 현실을 묘사하는 데 그치지 않고 대중사회 속에서 철저하게 소외되어가는 인간존재의 암울함을 고발했다. 1930년대에 이르러 현대문학은 새 국면에 들어섰다. 경제적인 대공황은 문학의 방법과 목적을 재검토하도록 했다. 경제적 붕괴와 파시즘과 전쟁의 위협 속에서 문인들은 창작활동을 통해 무엇인가 적극적인 의미를 발견하고자 했다. 사회고발적인 성격을 띤 문학은 스타인벡의 에서 나타나는데, 여기서 그는 현대사회 속에서 역경으로 내몰리는 빈곤한 농부들의 모습을 묘사했다. 헤밍웨이는 에서 많은 사람들의 대의명분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는 것이 개인의 의미와 존엄을 찾는 것임을 강하게 시사했다. 펄벅의 , 미첼 여사의  등도 이 시기의 작품에 속한다. 1940년대에는 실존주의적 경향도 가세했다. 노벨 문학상을 거부했던 마지막 휴머니스트 사르트르가 쓴 (1938)는 형이상학적 소설로,사르트르 초기 실존주의의 단초를 보여주었다. 2차대전 후의 혼란하고 무질서한 정신적 풍토 위에 이라는 새로운 가치관을 제시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기초로 사회정의를 실현하려 했던 카뮈의 대표작 는 페스트가 상징하는 악과 억압에 대해 인간의 집단적 반항을 묘사하는 과정에서 인간간의 연대감이 증대되고, 상호간의 공감만이 인류평화에 도달하게 할 수 있다는 카뮈의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분명하게 담고 있다. 이 시기에 러시아의 파스테르나크는 러시아의 몰락해가는 인텔리의 비극을 그린 를 써서 에 필적하는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러시아의 반체제작가 솔제니친도 (1962) 등을 써서 노벨상을 수상했다. 독일의 귄터 그라스는 (1959)에서 세 살 때 키 그대로라는 특이한 주인공의 눈을 통하여 20세기 전반기의 독일 소시민 계층의 몰락과정과 나치의 과거를 극복하지 못한 전후 서독사회를 형상화했다. 한편 위와 같은 모더니즘은 반지성적이고, 서양세계를 지배해왔던 이성이나 도덕보다는 정열과 의지를 더 중시했다. 그러나 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던 모더니즘도 점차 대학강단이나 도서관 또는 미술관과 같은 제도권으로 흡수됨으로써 이제 저항문화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채, 오히려 제도권 문화로 탈바꿈했다. 그리하여 리얼리즘은 물론 모더니즘에 대해서 불만을 가졌던 작가와 예술가들은 전자매체가 압도하는 후기 산업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새로운 예술의 가능성을 탐색하고 있었다. 더이상 편협하고 폐쇄적인 모더니즘의 한계 안에서 안주할 수는 없었다. 이같은 분위기 속에서 미국을 중심으로 포스트 모더니즘(건축분야에서 처음 사용)의 기운이 태동했다.   포스트 모더니즘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20세기 후반은 인류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도 다원화되고 상대화된 가치관이 팽배해 있는 시기다. 또한 이 시대는 엄청난 물질적 풍요와 비참한 기근이 동시에 존재하며 심각한 환경파괴, 주체의 급속한 해체,그리고 문화의 상품화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다. 이러한 독특한 시대상황은 이 시대를 관통하는 통일된 문화전통이나 예술사조를 언급하는 것조차 불가능하게 만들어버린다. 그런 와중에서 1960년대 들어 구조주의와 포스트 모더니즘(post modemism)이 등장한다. 구조주의는 프랑스에서 1960년대 초 실존주의의 뒤를 이어 나타난 현대사상의 한 조류로 그 범위는 매우 넓어서 철학^5.23^문학^5.23^민족학^5.23^정신분석학 등 다방면에 걸친다. 이 사상의 특징은 인간과 자연에 나타나는 표면적인 현상보다 그 배후에 있는 심측정인 구조를 밝혀내어 보편적인 법칙을 발견하고 이 법칙을 근거로 다양한 현상을 파악하려 한다. 그러나 문학에 있어 구조주의는 창작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순수문학 이론상의 사조이기 때문에 다른 문예사조와는 달리 구조주의 계열에 속하는 소설^5.23^ 시 등의 문학작품이나 작가는 존재하지 않는다. 한편 후기 산업사회의 문명에 대한 위기의식과 이성 중심주의에 대한 반발로 태동한 포스트 모더니즘은 절대성보다는 상대성을,일원론보다는 다원론을, 독단주의보다는 관용주의를 그 속성으로 한다. 그러나 포스트 모더니즘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포스느 모더니즘과 모더니즘과의 관계에 대한 두 가지 관점, 즉 과 을 이해해야 한다. 은 포스트 모더니즘을 모더니즘의 계승^5.23 발전형태로 보고, 모더니즘이나 낭만주의와 동일선상에 놓고 있다. 반면 은 포스트 모더니즘을 모더니즘에 대한 단절과 반작용으로 파악하고 있는 견해로, 모더니즘이나 낭만주의와는 새로운 문학사조를 이해한다. 그러나 이러한 상반된 견해들로부터 두 가지 입장을 동시에 수용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포스트 모더니즘이 모더니즘에 대한 비판적 반작용일 뿐 아니라, 동시에 모더니즘의 논리적 계승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포스트 모더니즘을 자세히 관찰해보면 모더니즘의 기본입장을 거의 그대로 받아들여 극단적인 형태로 발전시키는 한편, 다른 측면에서는 모더니즘과 상충되는 입장을 보이기도 한다. 이들 상호간의 공통점은 전통과의 단절, 불확정성 본절과 파편화, 반리얼리즘, 전위적 실험성, 역사와 문화에 대한 재검토 등을 들 수 있고, 상호간의 차이점은 이데올로기적인 대립의 종식, 자아와 주관성에 대한 새로운 입장, 합리주의와 상대성에 대한 새로운 자각,주변지역의 중심화 임의성과 우연성, 장르의 확산과 탈 장르화 등을 들 수 있다.   이상에서 볼 수 있듯이 포스트 모더니즘은 모더니즘에 뿌리를 둔 문학 조류이면서,동시에 그에 대한 비판적 반작용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의 대표적인 포스트 모더니즘 작품을 들면 윌리엄 비로스의 ,노머스 핀천의 , 존 바드의 등이 있다. 이상으로 서양문학사를 거대한 흐름 속에서 조망해보았으나, 현재 이 순간에도 문학의 양상과 내용에 대한 다각적인 논의와 실험을 계속되고 있다. (몽테뉴)          
764    이미지즘과 한국詩 댓글:  조회:4715  추천:0  2015-11-06
이미지즘과 한국시 가. 이미지즘은 1909년부터 1917년까지에 이르는 영미의 젊은 시인들의 새로운 시 운동이다. 언어와 시의 기교에 혁신을 부르짖고 나선 이미지스트들은 분명 현대시의 선구자들이다. 이미지스트들은 인습화되어 낡아빠진 언어와 기교로 진부한 주제에 관심을 쏟던 동시대의 조오지왕조 시인들과는 달리, 시인의 감정을 정확히 전달할 수 있는 언어에 관심을 집중했던 것이다. 이 새로운 시 운동의 모체가 된 것은 T. E. 흄의 "반낭만주의 사상"과, 에즈라 파운드의 중세문학(희랍문학과 라틴문학)과 동양시(중국문학[이백]과 일본문학[하이쿠])에서 영향을 받은 "고전주의(혹은 상고주의) 시론"이다. 그리고, 거기에 "프랑스의 상징파 시 운동의 영향"도 간과할 수 없다. 이미지스트들의 출발은 1909년 런던에서 흄과 파운드를 중심으로 한 청년시인들의 모임에서 비롯하였다. 이미지즘에 관하여 철저한 연구를 한 코프만의 설에 의하면, 이미지즘의 이론은 흄에게서 나왔고, 그 이론을 널리 보급시키고 그들을 "이미지스트"(Les Imagistes)라고 불러서 계속 그들에게 관심을 갖고 그 방향으로 발전시킨 공로는 파운드에게 있다고 한다. 미국에서 발간된 『시』(Poetry, a Magazine of Verse)를 비롯 『에고이스트』(Egoist) 등을 통하여 산발적으로 발표된 이미지스트들의 시가 한 권의 사화집에 집대성된 것은 1914년 『이마지스트』(Des Imagistes)에서였고, 다시 1915년에는 『수명의 이미지스트 시인들』(Some Imagists Poets)이라는 이름으로 로월에 의하여 발간되었다. 이들 사화집에 실린 이미지스트들을 보면, 오올딩턴, 두우리틀, 파운드, 플린트, 로월, J. G. 플레처 등이 주요 멤버이고, 조이스나 D. H. 로렌스의 이름도 들어 있다.  이들 이미지스트들은 실제 시에서보다는 오히려 그들이 내세운 슬로우건이 현대시의 방향을 설정했다는 점에서 매우 이채롭다. 그러므로 이미지즘의 의의는 기교의 문제가 아니라 시의 본질과 기능에 대한 태도에서 찾아야 한다. 이들의 슬로우건으로 가장 대표적인 것이 로월의 "6항의 원칙"이다. 이 이론은 흄의 철학에서 나왔고, 파운드의 호응으로써 굳어진 것으로 약술하면 다음과 같다.  1. 일상적 언어를 쓰되 반드시 정확한 언어를 쓸 것. 2. 새로운 감정의 표현으로서 새로운 리듬을 창조할 것. 3. 제재의 선택에 절대 자유를 허용할 것. 4. 한 이미지를 표현할 것(그래서 이미지스트라는 이름이 붙는다). 5. 시는 견실하고 분명해야 할 것이지, 흐리고 불분명해서는 안 된다. 6. 끝으로, 우리는 모든 집중이 시의 근본이라고 믿는다. 나. 먼저 흄은 그의 유명한 저서『사색』에서 반낭만주의, 반휴머니즘, 반자연주의의 입장에서 이미지즘 시 운동을 체계있는 이론으로 전개한다. 그는 시의 대목표를 "정확, 정밀, 명확"이라 설정하고, 이라는 작품에서 살필 수 있듯이 "고담하고 정확한 이미지" 위주의 시를 섰다. 하지만 시각적 이미지를 중시한 그의 시는 "간단한 풍경의 스케치" 같은 인상을 줄 뿐, 내면적으로 깊은 감동을 주지 못한다.  이미지스트라는 말은 파운드가 지어낸 말로 image라는 말에서 온 것이다. image라는 말은, 번역하면 心像 혹은 映像이라는 뜻이므로 정신적인 인상에서 느껴지는 그림(mental picture) 같은 것이 된다. 따라서 imagism은 寫像主義라고도 번역한다. 이미지즘의 시인들이 주장하는 시는 심상의 명확을 중요한 골자로 한다. 이미지는 詩想의 한 단위가 되는 것이다. 또한 심상은 심리학과 문학 연구에 관련되는 논제가 된다. 심리학에서 볼 때 심상은 반드시 시각적인 것은 아니라도 과거의 감각적이거나 자각적인 경험에서 오는 심적인 재현, 즉 기억을 말하는 것이다. 이미지즘의 시인들은 시의 특수한 것을 정확하게 표현하여야 하며, 막연한 보편적인 것을 취급하여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이미지즘의 시인들이 "심상의 명확성"을 대단히 중요시하였지만, 이론상 또 실제상의 이 운동의 지도자인 파운드는 심상을 회화적인 표상으로서가 아니고 "즉각적인 知와 精의 복합"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규정하였다. 즉 "상이한 직관의 합일"이라고 하였다. 그러면 에 나오는 파운드의 이미지에 대한 정의를 읽어보기로 하자. 는 일순간에 지적이고 정서적인 복합체를 나타내는 것이다. ... 그러한 를 순간적으로 드러냄은 갑작스러운 해방의 식, 시간적 한계와 공간적 한계로부터의 해방 의식, 그리고 우리가 가장 위대한 예술작품 앞에서 경험하는 갑작스런 성장 의식을 고취시킨다.  많은 양의 작품들을 내놓은 것보다 일생에 걸쳐 하나의 이미지를 제시하는 것이 낫다. (『시의 이해』p. 138에서 인용) 또한 "시의 용어"에 관해 계속 이어지는 그의 글을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불필요한 말 형용사 따위를 쓰지 말 것. ... 추상적인 말을 두려워 할 것. ... 오늘 전문가가 싫어한 것은 일반 독자들은 내일이면 싫어 할 것이다. ... 시의 기교가 음악의 기교보다 더 단순하다고 생각하지 말 것. ... 할 수 있는 한 많은 훌륭한 예술가들의 영향을 받을 것. ... 장식적인 말을 사용하지 말든지 그렇지 않으면 훌륭한 장식적인 말들을 사용할 것. (앞의 책, p. 139 참조) 위의 내용에서 알 수 있듯이 파운드가 이미지즘을 지도한 시의 원리는, 첫째 주관적이든 객관적이든 사물을 직접 다루어야 한다는 것이고, 둘째 표현에 도움이 안 되는 말은 절대 쓰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사물을 직접 다룬다"는 것은 시는 이미지로써 표현해야 한다는 것이고, "표현에 도움이 되지 않는 말"이란 시 전체에 유기적 작용을 하지 않는 장식적 표현을 말하는 것이다. 시가 이미지로써, 그것도 기능적 이미지로써 표현됐을 때 그것은 좋은 산문만큼 간결하고 정확해진다고 한다. 그는 "객관성"과 "정확성"을 가장 강조한 시인이다. 시에 상투적 표현, 인습화된 언어, 판에 박힌 문구를 쓰면 시인 자신의 감정이나 의미가 정확히 표현될 수 없고, 자기가 말하려는 것을 똑바로 쳐다보고 쓸 때만 비로소 정확성이 기해진다고 생각한 것이다.  다. 파운드는 현대시의 발전을 위하여 『에고이스트』지를 이미지스트의 동인지로 하였고, 『소평론』(Little Review) 『시와 시론』(Poetry) 『폭풍』(Blast) 등의 전위적 문학잡지의 편집에 관계하여 새로운 시인들을 세상에 소개하였다. 1922년에는 T. S. 엘리어트의 『황무지』의 초고를 읽고 약간 수정하여 출판케 한 것은 잘 알려져 있는 일이다. 엘리어트는 그 헌사에서 "나보다 더 위대한 시장에게"라고 하여 파운드를 예찬하였다. 1917년에는 그의 장시 『시편』(Cantos)을 『시와 시론』에 발표하기 시작하여 죽을 때까지 거의 50여 년 동안 117장을 썼다. 이것은 단순한 시가 아니라 시를 초월한 인간 역사에 전개되는 모습으로 조이스의 『피네간의 철야제』와 비견되는 작품이라 한다. 종전후 파운드는 파시스트에 동조한 그의 행적이 말썽이 돼 "반역죄"로 재판을 받게 되었으나 정신이상자란 판정으로 성엘리자배드병원에 위탁되었다. 이 무렵 쓴 『피사의 칸토스』(74-84)가 볼링켄 상을 수상한 사실이 또한 인구에 회자되기도 했다.  "근대시의 순교자"라 지칭되는 파운드의 이미지는 그가 이미지를 지적, 정서적 복합체로 본 점, 장식적이 아닌 기능적인 이미지를 강조한 점, 의미가 충만한 이미지를 주장한 점 등으로 보아, 흔히 이미지스트의 시에서 보는 것과 같은 속이 텅 빈 "머리속의 그림"에 불과한 이미지와는 다른 폭과 깊이를 지니고 있다. 그 점에서 그는 분명히 형이상학파 시의 이미지를 주장한 것으로서, 엘리어트의 이론으로 설명하면 그는 "감각화된 사상"으로서의 이미지를 주장한 것이다. 1910년대 초기에 그렇게 관심을 집중하여 지도 육성한 이미지즘 운동에서 그가 손을 뗀 것(1914년)도, 실은 그 이미지즘의 주장과 같은 소박한 부르짖음만으로는 큰 성과를 거둘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그의 시는 대체로 이미지스트로서의 선명한 시각적 이미지의 간결하고 정확한 언어가 주된 특징이 되어 있다. 파운드의 寫像파시인으로서의 역량을 충분히 보여주는 시로서는 단연 을 들 수 있다. 우선 시인 자신의 말부터 들어 보기로 한다.  3년 전에 나는 파리의 라 꽁꼬르드에서 지하철에서 내려 갑자기 한 아름다운 얼굴, 그리고 또 다른 얼굴, 그리고 또 다른 얼굴, 그리고 한 아름다운 어린아이의 얼굴, 그리고 또 다른 아름다운 부인을 보고서, 그 날 종일 그 인상받은 것을 나타낼 말을 찾고자 애썼지만, 그 돌연한 감정만큼 가치 있고 아름다운 말을 찾을 수 없었다. ... 나는 30행의 시 한 편을 썼지만 그것을 찢어 버린 것은 그것이 소위 "강열도 제 2위"의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6개월 후에 그 반 정도 길이의 시를 썼고, 1년 후에 다음과 같은 글귀를 지었다. 군중들 사이에서 홀연히 나타난 이 얼굴들, 축축한 검은 가지의 꽃잎들. 우리가 어떤 사상의 파격 속으로 흘러 들어가지 않고서는 그것이 무의미하리라고 생각한다. 이런 종류의 시에서는 외부적 객관적인 것이 내적 주관적인 것으로 변하거나 그 속으로 투사되는 정확한 순간을 기록하고자 하는 것이다. 는 단 2행 짜리 소품이지만, 한 순간의 인상의 단면을 매우 선명하게 나타낸 이미지즘의 표본 같은 시이다. 이 시에는 하등의 사상도 생의 의미도 감상도 들어 있지 않다. 그야말로 한 개의 이미지뿐이다. 사상파시인들은 이와 같이 시인의 주관적 사상이 배제된 정확하고 선명한 객관에 충실한 그림을 그려 내는 것을 시의 임무로 생각하였다.  이번에는 "4월"을 소재로 한 초서, 파운드 그리고 엘리오트의 시를 비교해보기로 한다. 4월의 감미로운 소나기가/ 3월의 가뭄을 속속들이 꿰뚫고/ 꽃을 피게 하는 습기로/ 온세상 나뭇가지의 힘줄을 적시어 주면/ 서녘바람 또한 달콤한 입김을 ... -초오서 의 전체 서시 중에서 요정들의 흩어진 사지들// 세 명의 요정들이 다가와/ 나를 찢어 끌어갔다,/ 올리브나무 가지들이 벗겨져/ 땅위에 누워 있는 곳으로.// 투명한 안개 아래 창백한 시선들. -파운드 전문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기억과 욕망을 뒤섞으며,/ 봄비로 잠든 뿌리를 뒤흔든다./ 차라라 겨울은 우리를 따뜻하게 했었다./ 망각의 눈으로 대지를 덮고, / 마른 구근으로 가냘픈 생명을 키웠으니./ -엘리오트 의 첫구절  초오서의 처음에 나오는 기쁨과 재생의 4월은 시인의 주관적인 서정의 세계를 노래한 시이다. 그러나 파운드의 시는 "요정들의 사지들"에서와 같이 오비디우스의 『변신』Ⅲ, 723-724에서의 번안된 인용과 "투명한 안개 아래 창백한 시신들"에서 볼 수 있는 감정을 배제한 이미지의 제시를 통한 객관적 묘사를 하고 있다. 엘리오트의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란 말은 이러한 주·객관의 변증법의 단계를 거쳐 나온 표현임을 알 수 있다. 그 뜻에서도 봄과 희망과 재생의 계절인 봄이 현대를 상징하는 황무지의 주민들에겐 오히려 고통스럽다는 말인데, 단순한 표현이라기보다는 초오서와 파운드의 相衝된 내용이 가져다주는 충격을 해소하기 위해 새롭게 해석한 측면이 강하다. 현실 또는 현재에 대한 예술가로서의 그의 좌절과 환멸은 그의 명시 (1920)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시는 모두 18편의 시가 제1부와 제2부로 나누어져 구성되어 있다. 제1부는 1919년에 쓰여진 13편의 시로 되어 있고, 제2부는 1920에 쓰여진 5편의 시로 되어 있는데, 제1부의 화자는 파운드 자신이며 제2부의 화자는 모벌리라고 하는 파운드가 만들어 낸 시인으로, 이와 같이 파운드와 모벌리는 동일 인물이 아닌 것으로 알려져 있다. 모벌리는 사실 파운드가 극복하려고 하는 유미주의적 시인의 화신으로 묘사되고 있으며, 따라서 파운드 자신의 한계점과 약점을 경고해 주고 있는 역할을 맡고 있다고 할 수 있다.  3년 동안 그의 시대와는 멀리 떨어져 그는 시라는 죽은 예술을 소생시키려 애썼네. 낡은 감각의 [장엄]을 유지하기 위해. 처음부터가 잘못이었지- 아니야. 그가 태어난 곳이 반쯤은 야만적인 나라 시대에 뒤떨어진 건 그럴 수밖에 도토리 알에서 백합꽃을 피우려 굳게 마음먹은  캐퍼뉴스. 아니 가짜 미끼에 걸려드는 숭어. - 제1부에서  위의 인용 첫 행에서의 "3년"은 아마도 그의 이미지즘 시 운동이 막을 내리고 이 시를 쓸 때까지의 기간을 뜻하는 것 같다. 그 다음 행에 나오는 "죽은 (시)예술"은 그 자신의 시세계에 대한 자만과 동시에 새로운 감각의 시에 대한 끊임없는 열망을 보여주는 시어이다. 이 시의 중요성은 파운드가 이 작품 제1부의 제목으로 "스스로의 무덤을 선택하는 에즈라 파운드의 송시"라고 쓴 것에서 시사하듯이 이 시가 시인으로서 그의 역할("도토리 알에서 백합꽃을 피우려 굳게 마음먹은")에 대해 "자기정의"를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파운드의 문명관과 세계관은 그의 대표작 『칸토스』에 잘 구현되어 있다. 이 작품은 1017년에 시작되어 거의 일생 동안 집필된 시들의 모음으로 되어 있는데, 인류문명의 붕괴과정을 세 시대-고대, 르네상스시대, 그리고 현대에 걸쳐 추적한 파운드의 필생의 대작이다. 그러므로 마치 조이스의 『피네간의 철야제』처럼 역사, 인류학, 신화, 그리고 고대의 기호, 상형문자 등으로 가득 차 있어서 주석과 해석을 필요로 하는 난해성과 현학성을 그 특징으로 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이 작품집을 통해 한시와 한자 문화에 대해 지속적이고도 진지한 관심을 보였다는 점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파운드의 이미지즘의 시론은 그가 특히 취미를 붙여 연구한 한자와 한시에 영향받은 바 크다. 상형문자로서의 한자는 "나무"와 "산" 같은 객관적인 물건이 직접 취급되어, 거기서 글 쓴 사람의 주관적인 설명이 없이 그 물건들의 의미가 암시되어 있다. 파운드는 그렇게 객관적이고 간결란 표현에 매혹되어 그 한자로 쓰여진 한시의 영역을 시도하기도 한다. 파운드는 이미지즘 운동이 한창이었던 1915년 페놀로사가 일본에서 한문 공부를 하며 남긴 한시 초역본을 근간으로 하여 『한시편』(Cathay, 1915)이라는 색다른 시집을 세상에 내놓았다. 물론 이러한 작업들에서 오류가 적지 않은 것으로 밝혀지고 있으나 이 과정에서 한시가 갖는 소위 "은유의 그림"(picture of metaphor)의 멋과 선명한 시각적 이미지, 그리고 고도로 긴축된 언어의 묘미 등을 충분히 살려내 그의 詩才가 발휘된 것으로 인정받고 있다. 이백의 시에서 보는 바와 같은 두드러진 시각적 요소와 상징성에서 파운드는 선명하고 간결하고 고담한 새로운 시의 전형을 찾았던 것이다.  1. 정규웅 역주 『지하철 정거장에서』민음사 2. 김재근 『이미지즘 연구』정음사 김재근 역편『이미지즘 시인선』정음사  3. 전홍실 편역『에즈러 파운드-시와 산문선』한신 문화사 『전통과 실험의 파운드 초기시들』한신 문화사  4. 이일환 역주 『칸토스』문학과지성사  라. 한국 근대시에서 모더니즘, 이미지즘, 주지주의 등이 혼용되기도 하고 구별해서 쓰이기도 한다. 김윤식은 "모더니즘시 운동양상"이란 글에서 "한국의 모더니즘시 운동이란 1930년대 중반에 크게 신장한 시단의 경향이며, 그 시론상의 거점은 이미지즘이라 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김윤식은 이미지즘과 모더니즘을 협의에서는 등식으로 보려고 하나, 영문학에서는 이를 구별하는 것이 지배적인 경향이다. 모더니즘의 시론적 거점을 이미지즘이라고만 보는 데에는 문제점이 있다고 보는 문덕수는 다음과 같이 보고 있다. 이미지즘과 모더니즘을 합해서 모더니즘이라고 부른다면 별문제이나, 이 둘을 명백하게 구별하는 입장에서 보면, 한국의 모더니즘도 이미지즘과 모더니즘 또는 주지주의로 구별하는 것이 사실을 명확하게 한다. 곧, 정지용과 김광균 및 김기림을 합해서 모더니스트로 일괄할 수 있으나, 정지용과 김광균을 이미지즘으로, 김기림을 모더니즘 또는 주지주의로 구별해 보는 것이 이들의 특질을 명백히 할 수 있다. 정지용과 김광균은 다 같이 주지적, 객관적 태도, 시각적 이미지, 사물시(physical poetry) 등을 중시하나, 그들에게서는 파운드의 관념형상방법(ideogrammic method), 엘리어트의 전통과 역사의식, 형이상학파시의 방법 등을 발견할 수 없다.  김기림은 이들이 가진 이미지즘의 요소에서 한 걸음 더 전진하고 있다.-『한국모더니즘시연구』 문덕수의 上記 연구는, 그러나 오세영에 의해 당장 반박을 받는다. 그들은 김기림의 모더니즘(모더니티)의 위상을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를 두고 다소 입장을 달리 한다. 오세영은 김기림이 모더니즘을 로맨티시즘의 부정으로부터 출발했다고 말한 것(『시론』, p. 74) 은 모더니즘에 대한 그의 입장 즉 모더니즘=이미지즘과 네오클래식(주지주의)이라는 공식을 확인해주는 증거가 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영미의 이미지즘과 네오클래식을 제외할 때 오늘의 서구 모더니즘은 일반적으로 신낭만주의라 보는 것이 공통된 견해이기 때문이다. 또한 김기림이 모더니즘의 본질을 낡은 센티멘탈로맨티시즘의 거부와 함께 "말의 가치 발견"에서 찾는 것이 바로 그 같은 내용을 확증하는 단서로 제시되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간단하게 여기서 끝나지 않고 있다. 우리가 정지용·김광균 등을 30년대 이미지스트라 한 것은 서구 모더니즘의 제경향을 우리 모더니스트들을 분류시킬 때 이들이 다른 어느 유파보다도 이미지스트에 가깝다는 뜻이지 그들이 영미 모더니스트와 일치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렇기에 이미지즘의 이미지가 꼭 시각성 만을 강조하지 않았으나 이것을 어떻게 보느냐의 차이에 따라 "이냐/ 아니냐"의 범주를 가르는 분기점으로 작용하는 편향은 올바른 태도가 될 수 없다. 더다구나 이미지즘이 프랑스 상징주의의 영향을 받았음을 상기해 볼 때 그 양상은 더 복잡해지지 않을 수 없다. 우리의 근대시가 바로 프랑스의 상징주의의 유입으로 크게 자극 받았음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정지용 연구"는 바로 그와 같은 난맥을 초래하고 있다. 30년대 모더니즘의 특성을 그에게서 찾으려는 연구는 연구자의 성향에 따라 상이한 결과를 낳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이미지즘의 원리를 적용하여 정지용 연구를 할 때 "시각성"이 주안점이 된 정지용의 초기시와 "산수시"인 후기시의 경계 설정이 관건이 되고 있다. 초기부터 일관되게 이미지즘적인 방법에 의한 창작이 이루어졌다고 보는 일군과 후기시에 가서야 비로소 제대로 된 이미지즘 시 창작이 이루어진다는 또 다른 일군의 논쟁이 서로 물러섬이 없이 팽팽하다. 뿐만 아니라 아예 정지용은 상징주의적인 시어의 구사에 머물렀을 뿐 엄밀한 의미에서 이미지즘과 무관하다고 보는 일각의 목소리도 점차 그 힘을 얻어가고 있는 느낌이다. 아무튼 필자의 생각으로는 이러한 연구 성과를 토대로 정지용의 신비가 더더욱 확대 재생산되어질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2004. 3/24) 1. 장경렬 "이미지즘의 원리와 의 시론",『작가세계』1999년 겨울  2. 송욱 『시힉평전』일호각 3. 사나다 히로코『최초의 모더니스트 정지용』역락 4. 김용지 외 『모더니즘 연구』자유세계 5. 오세영 『20세기한국시연구』새문사  6. 문덕수 『한국모더니즘시연구』시문학사 
‹처음  이전 33 34 35 36 37 38 39 40 41 42 43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